요한일서(04 /29 / 2024 - 05-18-2024 )



악마의 맷돌(Satanic Mills)

사회의 구성은 인간을 인간답게 세워가는 것이다.
그런데 시장경제구조는 인간을 경제와 시장에 의하여 그 가치를 돈으로 매수해 버린다.
이러한 세상을 일컬어 "악마의 맷돌(새터닛 밀스)"이라고 한다.

1. 칼 폴라니의 관점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의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홍기빈 옮김, 책세상)을 읽었다.

폴라니는 1940년대에 쓴 글들을 통해, 19세기 말 시장이 정치적으로 규제를 받는 상태에서 아예 정치적인 규제에서 벗어나 자기 조정을 바탕으로 한 시장이 생겨난 것이 인류의 재앙이 시작된 것으로 본다.
자기 조정 시장이 생겨나 사회를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으로 제도적으로 분리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렇게 해서 분리된 경제 영역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경제활동의 일부에 지나지 않던 시장이 경제활동 전반을 지배 ‧ 규정하는 것으로 격상되고, 무수히 많은 시장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총체적 시장을 형성하게 되고, 그런 가운데 모든 사회적인 가치의 생산을 판매와 구매에 적합한 형태로 바꾸게 됨으로써 상품이 될 수 없는 노동 ‧ 토지 ‧ 화폐마저 상품으로 만들어 인간 삶 자체를 근본에서부터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다.

폴라니는 노동을 제반 인간 활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하고, 토지는 자연 전체를 일컫는 다른 이름일 뿐이며, 화폐는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기 때문에 본질상 상품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현실의 시장에서 노동 ‧ 토지 ‧ 화폐가 상품으로 묘사되고 실제로 거래되는데, 실은 이 세 가지 상품은 전적으로 허구적인 상품이라는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시장이 자기 조정의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품 허구의 체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셈이다.
그 이후 사회는 상품 허구가 사회 전체와 관련하여 결정적인 조직 원리를 제공하고, 그 조직 원리가 사회의 거의 모든 제도에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쳐 시장 메커니즘이 현실 세계에서 상품 허구의 원칙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폴라니는 이러한 자기 조정의 시장에 내재된 재난에 맞서 사회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폴라니는 19세기가 끝날 무렵 보통선거가 보편화됨으로써 노동 계급이 국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도 그 일환으로 본다.
그래서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한쪽에서는 정부와 국가를 권력 거점으로 만들고, 다른 쪽에서는 경제와 산업을 권력의 거점으로 만듦으로써 권력을 둘러싸고서 사회 자체가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2. 21세기 악마의 맷돌의 위기

폴라니는 상품 허구의 원칙에 입각한 자기 조정 시장을 그 속에 모든 인간의 삶과 가치를 집어넣어 분쇄해 버리는 ‘악마의 맷돌’이라고 말한다.

21세기로 접어든 이후, 오늘날 전 세계는 ‘세계화’, ‘신자유주의’, ‘탈규제’, ‘자유무역’ 등을 내세운 가운데 폴라니가 말하는 ‘악마의 맷돌’을 인터넷을 통한 전 세계 동일 실시간이라는 어처구니를 통해 훨씬 더 높은 속도로 돌리고 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21세기 ‘악마의 맷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자가 엔진을 달아 현기증 나게 돌아가고 있다.
어느 누구도 책임질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경제를 담당하는 ‘영웅적인’ 주체로서의 개인은 물론이고, 개별 기업이나 국민국가나 정부마저 이 ‘악마의 맷돌’ 속에서 갈아엎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된 악마의 맷돌’이라 할 수밖에 없는 21세기 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목도하면서 전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1930년대에 진행된 파시즘과 전쟁이 그 귀결로서 저절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에 이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더블 딥의 가능성에 대한 공포는 ‘악마의 맷돌’이 크게 삐거덕거리면서 전체가 와해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이다. 폴라니에 따르면, 자기 조정 시장을 통해 경제 영역이 정치 영역과 분리되면서 동시에 경제 영역이 정치 영역을 장악하게 된다는 것이고, 이는 시장이 사회 전체를 좌지우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악마의 맷돌’이 갑자기 멈추면서 와해된다는 것은 세계 전체의 사회적 삶의 영역 전체가 위기를 맞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대적인 공포, 마치 일본의 원전 폭파와 같은 직접적인 공포를 훨씬 능가하는 대대적인 공포가 세계 전체를 휘감고 있는 것이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2008년의 위기에 이어 계속되어 온 경기부양책으로도 그다지 큰 효과가 없자 이번 9월 9일에 또 4천500억 달러에 달하는 경기부양책을 발표했다. 이는 자기 조정 시장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허구인가를 여실히 드러낼 뿐만 아니라, 한번 속도를 내기 시작한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악마의 맷돌’이 계속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어떻게 정치를 비롯한 사회의 전 영역이 동원될 수밖에 없는가를 확연하게 드러낸다.

3. 악마의 맷돌 속 한반도

문제는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이 ‘세계화 된 악마의 맷돌’이 묘하게도 우리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거센 파찰음을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내외적으로 이 파찰음은 분명 한반도의 위기를 예고하고 있다.

국내의 정치에서 ‘복지’가 사회정치적인 이슈로 정확하게 자리매김 된다는 것이 과연 더 이상 자기 조정 시장에만 삶을 맡겨놓을 수 없다고 하는 근본적인 성찰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조선일보에서 연재하는 ‘자본주의 4.0’처럼 자기 조정 시장의 ‘악마의 맷돌’이 크게 삐걱거리는 것에 대한 기계적인 수리에 의한 것인지를 지금으로서는 그 귀결을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세계 전반적인 추세를 볼 때, 후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자기 조정 시장은 이미 마치 절대적인 존재인 양 자리를 잡고 있어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만큼이나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역시 ‘절대적인 진리’인 양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이 ‘복지 이슈화’의 기회를 자기 조정 시장의 ‘악마의 맷돌’에 저항하는 강력한 장치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야 한다. 그래야만 ‘시장으로부터의 인간 삶의 해방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우리가 ‘시장으로부터의 인간 삶의 해방구’를 확대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최근 한진중공업 사태 해결을 위한 국회 청문회에서 여실히 확인했다. 이 청문회에서 특히 조남호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비인격적인 기계성을 통해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세계화된 악마의 맷돌’이 얼마나 강고하고 무서운가를, 그 ‘악마의 맷돌’이 돌아가는 데 노동에 관련된 법률들이 얼마나 크게 기여하고 있는가를, 그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사라지고 없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제 스스로 돌아가는 ‘악마의 맷돌’에 삶을 의존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복지 이슈화’를 어떻게든 인간 삶의 해방구를 마련하는 쪽으로 끌고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복지 이슈화’를 정확하게 이런 방향으로 끌고 가기에는 주변 상황이 너무 힘겹게 돌아가고 있다. ‘한미 FTA의 국회 비준’에 대한 찬반의 논의 틀이 ‘절대적 존재인 악마의 맷돌’을 근본적으로 문제로 삼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찬성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과 중국 중 누가 이 ‘악마의 맷돌’의 어처구니를 장악할 것인가를 놓고서 대대적인 신경전을 벌이는 가운데, 한반도 내의 남북의 분단 문제가 이명박 정권 들어 크게 교착됨으로써 미중 간의 어처구니 장악 신경전을 위한 일종의 돌쩌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또한 일본은 묘하게도 한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 등에 대해 영토 분쟁을 계속 재생산해 내고 있다. 그런 가운데 평화헌법 9조를 어떻게든 폐지 내지는 대폭 개정하는 쪽으로 여론을 몰아가고 있다. 이 역시 동아시아 권역에서의 자기 조정 시장을 둘러싼 주도권 투쟁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군사력을 내세운 영토적인 제국주의에서 경제력을 내세운 순수 시장적인 제국주의로 바뀌었다고는 하나, 그래서 법적 ‧ 형식적으로는 제국주의적 대외관계를 벗어났다고는 하나, 실질에 있어서는 자국의 경제 영역의 확대를 위해 여전히 정치군사력에 입각한 무력경쟁이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해서, 특히 한반도의 남북을 중심으로 심심찮게 격발되고 있는 것이다.

4.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모든 대내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무슨 마술적인 해법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가장 중요한 원칙은 철저히 상식에 입각한 ‘이상 아닌 이상’을 모든 정책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시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경제 성장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활동하기 위해 경제 성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격을 갖추는 것은 즉 인격을 갖추는 것은 의식주의 욕구를 더 많이 더 과시적으로 경쟁적으로 충족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적일 수밖에 없는 의식주의 욕구를 넘어서서 장구한 세월을 통해 인류가 남겨놓은 사회문화적 ‧ 인문예술적인 가치들을 함께 향유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유토피아 즉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 비록 억압된 형태로건 하나 이미 늘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 하버마스(Ürgen Habermas, 1929- )의 개념을 빌려 말하면, 이는 생활세계를 사회적 삶의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고, 폴라니의 개념을 빌려 말하면, 이는 전인격적인 사회를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버마스의 관점을 소개하기로 한다. 하버마스는 폴라니의 위 글보다 약 40년 뒤 80년대에 쓴 『의사소통행위이론: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을 위하여』(장춘익 옮김, 나남)에서 나름의 사회역사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하버마스는 흔히 말하는 넓은 의미의 사회를 체계이자 동시에 생활세계로 파악한다. 그러면서 하버마스는 체계에 해당되는 것으로 시장과 국가를 들고, 시장은 화폐를 매체로 해서 작동하고 국가는 권력을 매체로 해서 작동한다고 말한다. 그런 반면, 생활세계를 상호이해에 입각한 의사소통적인 것으로 보면서 그 상징적인 구조들로 비축된 지식으로서의 문화, 소속과 연대를 가능케 하는 질서인 사회 그리고 언어와 행위 능력을 갖춘 인간성 등 세 가지를 든다. 중요한 것은 하버마스가 제시하는 체계와 생활세계의 관계이다. 시장과 국가라고 하는 체계가 그것들이 생겨날 수 있는 바탕인 생활세계를 식민화한다는 것이 요체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생활세계를 화폐와 권력을 매체로 작동하도록 함으로써 진정한 상호이해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공의 장을 파괴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폴라니가 시장과 국가를 대립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단계에서 글을 썼다면, 하버마스는 시장의 자본을 중심으로 국가가 결합된 역사적인 단계에서 글을 썼다고 할 수 있다. 체계가 생활세계를 식민화한다는 것은 폴라니가 자기 조정 시장이 ‘악마의 맷돌’이 되어 일체의 인간 삶을 갈아엎어 상품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을 더욱 철학적인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하버마스가 국가기관들이 폴라니가 말한 ‘악마의 맷돌’을 돌리는 데 대거 동원된다는 것을 더욱 심각하게 표현함으로써 폴라니에 비해 더 비관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할 것이다. 폴라니는 인간의 사회적 삶이 결코 ‘악마의 맷돌’ 속으로 순응적으로 완전히 포섭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보고, 그것에 저항하는 계급적인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국가와 정부에 대한 계급적인 장악 여부에 따라 나름의 해방 가능성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볼 때, 그동안 국내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근대화 극복에 관한 사회이론이라든가 이와 맞물려 있으면서 동아시아의 연대와 평화를 추구하는 동아시아론이 갖는 함의는 크다 할 것이다. 다만, 동아시아론이 동아시아 중심의 자기 조정 시장이라고 하는 ‘악마의 맷돌’을 전제로 한 것일 경우에는 연대도 평화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말하자면, 지역주의에 의거한 블럭화라고 하는 세계화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분명히 ‘세계화 된 악마의 맷돌’이 결정적인 위기에 처할 때,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과 그에 따른 전쟁이 예고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 대대적인 재난을 피하기 위한 국가적인 정책을 도모하는 데 국내외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를 위한 강정 마을의 투쟁은 분명히 한미일 연합의 ‘악마의 맷돌’을 강화하기 위한 군사전략에 대한 투쟁이다. 이에 대한 투쟁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 철저히 억압되는 광경을 보면서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우려를 금치 못하는 까닭이 결코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에 우리는 이미 시작된 내년의 선거 국면을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정말이지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왜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국내외적으로 어떤 근본적인 정책들을 마련해 실천해야 하는가를 잘 느끼고 알고 있는 지혜롭고 탁월한 지도자, ‘악마의 맷돌’을 더 잘 돌리고자 하는 국회위원과 대통령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악마의 맷돌’이 낳는 재난을 벗어나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고 평화를 위한 연대, 연대를 통한 공감의 모듬살이를 구축해 내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국회위원과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는 것이다.









블레이크와 폴라니의 ‘악마의 맷돌’

       1791           wikipediaorg

일러스터 새뮤얼 윌슨 포레스가 그린 '앨비언 방앗간 화재'(1791). 그림에 묘사된 악마들은 물론 인간을 도와 불을 끄려는 중일 것이다. wikipedia.org

2012 런던올림픽 개막식을 연출한 영화감독 대니 보일(Danny Boyle)은 2,700만파운드(약 480억원)를 들인 3시간짜리 행사의 얼개를 산업혁명기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의 시상(詩想)에서 차용했다.
중세적 이상을 지키고자 계몽의 이성에 한껏 저항한 듯 여겨지는 저 화가 겸 시인은 몽환적ㆍ예언적 메시지를 풍부한 이미지의 언어 속에 부려 넣는 데 능하다는 평을 듣는다.
대니 보일이 주목한 건 블레이크가 글과 삽화를 그려 출간한 서사시 ‘밀턴’ 서문의 ‘아득한 옛날 저들의 발길은(And did those feet in ancient times)’이란 시였다.

거기서 블레이크는 아득한 옛날 예수가 거닐었다는 잉글랜드의 ‘푸르고 복된 땅(green and pleasant Land)’과 러다이트 운동(기계 파괴 운동)의 표적이자 산업혁명의 부정적 상징이던 ‘악마의 맷돌(Satanic Mills)’을 대비시켰다.
대니 보일은 개막식 1부에서 잉글랜드의 복된 과거를, 2부에서 산업혁명으로 파괴된 자연과 훼손된 인간성을, 3부에서 저 모두를 극복한 복지 번영의 영국을 그렸다. 물론 3부는 ‘예언가’ 대니 보일의 축원이었다.

‘악마의 맷돌(방앗간)’은 블레이크가 12세이던 1769년, 그가 살던 런던 서더크 인근에 문을 연 ‘앨비언 방앗간(Albion Flour Mills)’에서 유래했다.
증기기관의 아버지 제임스 와트가 제분 기술자와 함께 세운 그 방앗간은 엄청난 생산력으로 영세 업소들을 압도했으나 2년여 만에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도산했다.
당시 그 업소는 경쟁업자들 사이에서 악마의 방앗간으로 통했다.

‘악마의 맷돌’의 상징에 생명을 불어넣은 건 헝가리 출신의 경제사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4.23)였다.
그는 1944년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결코 상품화할 수 없고 역사적으로 상품이었던 적도 없는, 자연과 인간과 화폐를 상품화한 시장자유주의 메커니즘을 ‘악마의 맷돌’에 비유했다.
그는 자유주의적 개인이나 신자유주의의 시장이 아닌 공생적 가치의 주체인 ‘사회’가 중심이 돼 거대한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악마의 맷돌’은, ‘앨비엇 방앗간’ 화재처럼, 모든 것을 갈고 스스로도 가루가 돼야 멈추는 것일지 모른다.





05-18-2024(토) 요한일서 5:13-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망에 이르는 죄(16절)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성경은 죄의 결과는 분명하게 죽음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를 해결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고 합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일까요?
사망에 이르는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말합니다.

요한일서를 기록하던 그 시대에 교회와 신앙을 흔들었던 신앙은 "영지주의"라는 것이었습니다.
영지주의란 플라톤의 철학 사상 이원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데아 즉 영은 선하지만 물체 즉 사람의 육체는 악하다고 하는 사상에서 사람의 육체가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요한일서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첫째는 가현설(假現說. Docetism)

그리스어로 "보이다"라는 뜻인 '도케오'(δοκέω)가 어원으로 예수의 몸은 환상일뿐이라는 영지주의 교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인간의 몸을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은 혈과 육의 사람이 아니라면서 예수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교리를 주장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고 고난 받은 것은 환상이며 그가 죽고 부활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상을 말합니다.

둘째는 적그리스도(敵그리스도. Antichrist)

예수 그리스도를 적대시하는 대상을 뜻하며, 특정한 시대의 특정 인물이나 단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시공간에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선포한 복음을 적대하는 존재를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을 말하며 거짓 그리스도, 가짜 그리스도, 반그리스도 등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사상이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죄를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
둘째는 사망에 이르는 죄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위해서는 기도하여 돌이킬 수 있도록 깨우쳐야 합니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서는 아무리 간구하고 매달려도 돌이키지 않으므로 기도할 이유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죄악된 인간의 완고함 때문에 잘못된 교리와 사상에 붙잡혀 마치 내가 붙잡은 것이 진리인 줄 알고 그것에 몰두하는 사람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죄를 한마디로 "성령 훼방 죄"라고 합니다(마 12:31. 막 3:29).
사도 바울은 이러한 죄에 유혹된 심령을 "양심에 화인 맞은 것"으로 거짓말 하는 자들 이라고 합니다(딤전 4:2).

다양한 신학사상과 이론들이 사람들을 어지럽히고 흔들고 있는 시대에 정신 차리고 진리편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는 올바른 믿음의 길을 선택하여 마지막까지 승리하는 거룩한 주의 백성의 반열에 세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하며 부탁합니다.

내 주를 가까이 가게 함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가 되심을 부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적그리스도" 또는 "배교(背敎)"를 의미합니다.

반면에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는 유혹에 넘어갔으나 다시 돌이켜 주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는 죄를 말합니다.
이러한 죄를 위하여는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와 이르지 않는 죄

요한 사도는 죄를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사망에 이르는 죄
둘째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서는 구하라고 하지 않았지만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에 대해서는 구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의 내용은 무엇일까?
구하라 하지 않는다는 것과 구하라는 것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하지 말라는 이유는 아무리 간구하여도 구할 수 없는 죄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죄를 "성령 훼방죄"라고 합니다(마 12:31. 막 3:29)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눅 9:25)


  

하나님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다.
그 생명을 구하기 위해 독생자를 사람으로 이 땅에 보내셨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며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 구하려고 하셨다. 하나님은 한 생명을 구하는 일을 너무나도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이신데,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서는 구하려고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어떤 죄이기에 그럴까?

먼저 그 죄는 요한 사도가 언급한 바와 같이 형제 곧 신자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형제가 아니라면 다르게 말하자면 애초부터 신자가 아니라면 두 종류의 죄를 말할 이유가 없다. 그냥 사망인 상태일 뿐이다.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모두 신자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는 타락을 말씀하였다(히 6:6).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하였다. 이전에 한 번 비췸을 받았다. 단순히 복음을 들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전적으로 부패한 사람은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내용이다. 단순히 복음을 듣고는 불가능한 하나님의 은택들이다. 하나님의 은혜 곧 그 마음을 열어 귀에 들린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누리게 된 은택들이다.

그러한 은택들을 체험하고도 타락한 경우는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의 역사를 펼치시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몇 가지의 경우를 언급하고 있다.

첫째로 배교이다.

배교는 그 당시의 관점에서는 순교와 대비되는 것이다. 신자로 살다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을 맞는다. 죽느냐 사느냐의 순간이다. 그 당시의 유대교와 로마가 신자를 핍박하면서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저버리고 계속적으로 이 땅에서 살겠느냐 아니면 예수님을 믿고 이 땅에서의 삶을 끝내겠느냐는 것이다.

성경은 그런 경우에 믿음을 지키라고 요구한다. 죽도록 충성하라(계 2:10)는 것이다. 이는 죽을지언정 믿음을 지키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해서 죽는다면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다(계 2:10)이다. 곧 순교하고서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된다.

만약 그 순간에 믿음을 저버린다면 곧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을 저버린다면 이 땅에서의 생명은 지속된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된다. 이 땅에서 사는 길을 모색하여 일단 죽는 것을 피한 후에 다시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니시다. 배교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물론 애초에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할 수도 있다. 이 경우는 적그리스도라고 하지 않는다. 그냥 불신자였을 뿐이다. 적그리스도는 복음을 받아들였다가 어떤 이유로든지 바뀐 경우에 해당되는 표현이다. 그 당시에는 어떤 영지주의자들이 그랬다. 영지주의자는 일단 신자이다. 복음을 받아들인 신자이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독생자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담고 있다. 그것을 받아들였다가 어떤 이유로든지 그것을 부인하게 된 것이다.

셋째는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도 중대한 결정적인 죄를 범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서 있었던 음행이 여기에 해당된다.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고 그것을 성도들에게 알린 것이다. 바울 사도는 주 예수의 능력으로 사탄에게 내주었다고 하였다.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고전 5:5). 여기에서 육신과 영은 한 존재의 서로 다른 두 영역을 뜻하지 않는다. 육신은 그 죄를 범한 사람 전체이고 영은 주 예수님과 합한 사람들(고전 6:17) 곧 고린도 교회이다. 헬라어는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몸을 뜻하는 소마가 아니라 타락하거나 하나님의 뜻과 멀리 떨어진 어린 사람을 가리키는 사륵스를 사용하였다.

이어지는 내용과 같이 고린도 교회가 그를 내쫓는 것 곧 출교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몸에서 한 지체를 끊어 내는 것이다. 몸에서 끊어진 지체는 사망이다. 다시 접합할 수가 없다. 그를 멸하신 것이다. 그 지체를 끊은 몸은 그 지체의 악한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묵거나 악의에 찬 누룩이 없는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세움을 입을 수 있다(고전 5:8). 그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되는 것이다.

이 구절은 무조건적인 견인의 근거 구절로 사용되고 있다. 육신과 영을 한 존재의 두 부분으로 이해하고 영은 구원을 얻는다고 읽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본문을 잘못 읽었다. 정반대이다. 조건적인 견인의 근거 구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한번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였다면 조건 없이 영원한 구원을 반드시 받는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성경과 칼뱅 사이에서 선택하여야 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는 칼뱅을 선택할 의사가 없다. 반면에 칼뱅을 선택하는 이들이 많다. 성경적인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같이 잘못 읽었다. 견인에 대한 구절이 아닌데 견인의 근거로 제시하거나 그 구절의 문맥에 담긴 예수님을 주님을 받아들이는 믿음 다르게는 순종이라는 조건을 읽지 못하였던 것이다.

성경의 구원론은 400여 년 이상 양쪽으로 갈리어서 싸워야 할 만큼 복잡하거나 난해하지 않다.
아주 쉽고 명쾌하며 단순하다.

성경은 명백하게 사망에 이르는 죄를 말씀하고 있다.
다시는 회복이 없는 죄이다.
불신자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불신자는 처음부터 그냥 쭉 사망이기 때문이다.
신자에게만 해당된다.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의 역사를 행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자도 그를 구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그러한 죄를 범한 이후에 스스로 돌이킨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돌이킴으로 보지 않으신다.
회복이 이루어지는 돌이킴으로 보지 않으신다.
사망에 이르는 죄는 그것으로 끝이다.
영원한 멸망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



하나님도 용서 안 되는 죄(요한일서 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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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우리는 여러가지 죄를 지으며 산다. 그런데 크게 두 종류의 죄가 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고,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사하시고, 구원해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도 용서가 안 되는 죄가 있다.

그러니까, 죄를 지어도 결국 용서 받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고,

어떤 죄는 결국 영원한 사망(지옥)으로 떨어지고 마는 죄가 있다는 말씀이다.

캐톨릭 전통에서는 2가지로 분류한다.

[Venial Sin] 가벼운 경죄(輕罪) 와[ Motal Sin] 무거운 중죄(重罪)

다시 말하면, 작은 소죄(小罪) 와 큰 대죄(大罪) 있다.

사람은 누구나 지을 수 있는 일반적인 죄가 있고,

그러나, 절대로 지어서는 안 되는 중죄가 있다.

(16절)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 구하라.

즉 기도해 주라는 말이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서는 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사망에 이르는 죄는 무엇이고,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는 무엇인가?

캘리포니아의 그레이스 채플의 존 맥아더 목사님은 해석하기를 :

본문의 사망신체적인 죽음 (physical Death)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잘못된 해석이다.

왜냐하면,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사망은 신체적인 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1서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신체적인 사망이 아니다.

이것은 영적인 영원한 사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죄는 영원한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고,

어떤 영원한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

그 죄는 용서 받을 수 없고, 사망에서 구원 받을 수 없다.

그럼, 그 죄가 무엇인가?

(마 12:31-3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함을 받지 못하는 [성령 훼방죄]이다.

말로 예수님을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지만,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

영원히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하는 죄가 있다.

예수님을 잘 모를 때에는, 말로 거역했지만, 나중에 깨닫고 회개하면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았으면서도 예수님을 거역하면, 한번 밖에 없는 내 인생에

찾아 오시고,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였으니 생명에

이르게 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12장의 문맥에서 성령을 훼방한 죄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면서도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이것은 귀신의 왕,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낸 것이라고 말한

유대지도자들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성령 훼방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라는 근거가 무엇인가?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죄들을 짓는다.

그러나 회개하면 모든 죄를 도말하고 용서해 주시며, 의롭다고 까지 해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의 의(義),

완전한 구원의 은혜선물로 주실 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도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희생하기까지 완벽하게 이루어 놓으신

그 구원의 선물을 거부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생은 참으로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또 다시 오셔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것이 아니다.

[Once for All] [단번에 전부, 한번에 영원히] 이루어 놓으셨다.

(히 10:10)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롬 6: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히 9:12)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부활을 통해서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의 구을 받아들이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이것을 끝까지 완고하게 거절한 그런 사람에게는

다시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훼방죄[이고, [하나님도 용서가 안 되는 죄로],

결국 사망에 이르는 죄가 되는 것이다.

다음 성경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세요.

(히 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를 짓는 것인가?
살인 강도... 등등의 죄와 비교할 수 없다.

은혜의 복음을 거절한 사람은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의 사망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사망이요, 지옥 형벌을 말하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수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 죽음을 당하고 있다.

그래도 예수 믿고 죽은 사람들은 그 영혼이 구원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

영생의 세계로 들어갔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그러나 죄 사함 받지 못하고 죽은 인생들은 지금 어디로 떨어져 있을까?

(요한계시록 21:8)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모든 죄가 인간을 사망으로 이끌어간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를 지으면 어떤 죄이든지, 그 사람을 사망으로 이끌어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성육신하여 오셔서

우리의 모든 를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사

완전한 구원을 성취해 놓으시고, 찾아오셔서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릴 때,

겸손히 마음의 문을 열고, 은혜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된다.

얼마나 내 편에서는 간단한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끝까지 거부하고 안 믿겠다고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죄이며,

이 죄는 용서 받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는 죄가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여러 가지 죄를 짓고 살아간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롬 3: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나, 인간이 구원 받지 못하는 것은 단 한가지 죄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죄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안 믿기 때문에 지옥가는 것이다.

(요 16:8-9) (성령님)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그 죄, 예수님을 거절하고 믿지 않는 죄는 그 영혼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께로 돌이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씻어 주시고,

구원과 영생을 주셔서 우리의 영혼과 생명을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 주신다.(요 5:24)

(예화) 집 안에 아버지와 두 아들이 있다.

둘째 아들은 망나니로서 말도 잘 안듣고, 밖에 나가 나쁜 짓도 많이 한다.

그래도 회개만 하면 아버지는 다 용서해 주신다.

그런데, 큰 아들은 착실하고, 공부도 잘 한다. 전교에서 1등 한다. 운동도 잘한다.

이웃 사람들이 칭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들은 아버지아버지로 부르지 않는다.

아저씨라고 한다. 끝까지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아들의 죄는 용서가 가능하나, 큰 아들의 태도는 아버지를 버리는 가장 큰 죄가 된다.

아버지 편에서 도무지 용서가 안 되는 죄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는 죄가 사망에 이르는 죄가 되는 것이다.

(결 론)

사람마다 를 짓고 산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고,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다.

하나님도 용서가 안되는 죄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렸다.

[성령 훼방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이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믿도록 역사하는데, 끝까지 훼방하고 거부하면 구원의 길이 없다.

이것이 성령 훼방죄이다.

이것은 하나님도 용서가 안되는 죄가 된다.

이제, 사망에 이르는 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성령 훼방죄, 예수님을 거부하는 죄,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를 짓지 말고,

하나님이 완벽하게 이루어 놓으신 완전한 구원의 선물 받아들이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말씀 따라, 생명의 길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아 멘) ​




사망에 이르는 죄는 무엇인가?

요한일서 5장 16절은 신약 성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중 하나입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이 구절에 대한 모든 해석 중에 이 구절에 관한 모든 질문에 답하는 해석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은 도아마 사도행전 5장 1-10절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일어난 일과 비교될 때 가장 잘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참조, 고전 11:30). "사망에 이르는 죄"는 고의적이고 연속적이며 회개하지 않는 죄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을 거룩으로 부르셨습니다(벧전 1:16). 하나님은 그들이 죄를 지을 때 그들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우리는 구원을 잃거나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된다는 의미로 우리의 죄에 대해 형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징계를 받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히 12:6).

요한일서 5장 16절은 신자가 회개하지 않고 계속 범죄할 때 하나님이 더 이상 허락하지 않으시는 시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시점에 이르면 하나님은 완고하게 죄를 짓는 신자의 생명을 거두기로 결정하실 수 있습니다.
"사망"은 육체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고의적으로 그분에게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제거함으로써 그분의 교회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사망으로 인도하는 죄"와 "사망으로 인도하지 않는 죄"를 구별합니다.
교회의 모든 죄는 동일하게 처리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모든 죄가 "사망으로 인도하는 죄"의 수준까지 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5장 1-10절과 고린도전서 11장 28-32절을 보면, 하나님이 죄인의 육신의 삶을 취하심으로써 교회에서 고의적이고 계획적으로 진행된 죄를 다루십니다. 이것은 아마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5장 5절에서 말한 "육신의 멸망"이 의미했던 바일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가 죄를 짓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죄를 짓는 신자의 생명에 대해 하나님이 그 생명을 거두기로 결정하시는 때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고집 센 사람을 위한 기도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고 의로우십니다. 그분은 마침내 우리를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엡 5:27) 만드실 것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을 징계하십니다. 주여! 우리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우리 마음이 강퍅하여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옵소서.


사망에 이르는 죄,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신다는 말씀에 이어서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고 하고 있다. 이 말씀을 잘 생각해보면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참으로 성경은 앞뒤가 잘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사도 요한의 말씀하시는 바가 이렇게도 같다는 것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서 보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형제가 사망에 이르는 죄 구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구하는 것이 기도인지 다시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 사도의 말씀 중에 사람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고 그렇지 않고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 구하라고 하고 사망에 이르는 죄 범하는 것에 대하여는 구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이 있다면, 요한 사도가 요한일서를 기록하면서 보여준 디테일이 여기서는 좀 약하다는 점이다. 아주 상세하게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하여 설명해 온 것에 비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사항에 대하여 상세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 좀 의아하긴 하다.

(사실 이러한 말씀은 신학적 고찰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학이 없으면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형제>이다. 사람이 사망에 이르는 죄에 빠지고 그렇지 않고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그럴 때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하여 요한 사도가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형제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아버지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 무엇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고 정체성이라는 것을 고백한 사람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서로에게 형제가 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이 있고, 사회적으로 또한 나라의 법이나 회사의 규칙과 같은 것에 명시된 죄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 죄는 모든 것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그 안에 있으면 아무리 세상의 법을 잘 지키고 법 없이 살 사람이라 여겨져도 죄인이다. 그것은 멋있는 차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해적 사회에서 아무리 법을 잘 지켜도 나라에 투항하지 않은 상태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은 어떤 범죄들을 보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형제라 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어떤 죄 범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상실되지 않은 상태에서 범하는 어떤 범죄에 대하여는 하나님께 간구하라는 의미이다. 이는 형제라 할 수 있는 정체성이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사망에 이르는 죄는 형제라는 범주를 벗어나는 상태에 있는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누구하나 예외 없이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그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인가 싶겠지만,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형제라고 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가 그것을 버리고 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있던 사람이 이를 버리고 이를 부인하는 것이 바로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에 앞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이렇듯 용서 받지 못하는 죄와 같이 그것에 절대로 빠지면 안 되는 자리에 대하여 성경이 말씀을 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로 가야할지 염려만 하는 자리에서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유의 대표가 어쩌면 <예정론>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예정했다면 다 된 것이지 사람이 할 것이 있냐 하는 생각과 같은 것이다.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했다면 이미 종친 것인데 더 이상 세상 선하게 살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생각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좀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예정론이라는 것이 자신이 예정되었는지 아닌지를 가늠하라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삶을 살게 된 사람이 자신의 여정을 돌아볼 때 하나님께 그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는 고백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간구도 체휼도 없는 사람이 '나는 예정되었을까?' 고민하는 것이 예정론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모든 경륜은 모든 사람, 오고 가는 모든 역사 속의 어떤 사람이라도 다 하나님께서 허투루 지은 사람이 없고, 어떤 생명이라도 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지은 사람이기에 모든 사람은 다 예정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이것을 부정하겠는가?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을 믿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예정되었는지 아닌지를 고민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을 따라 맘대로 사는 것이다. 이런 것을 예정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있다. 그 경륜 안에 들어 간 사람은 돌아보면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예정하심 안에 있었다고 말하고 고백하고 예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망에 이르는 죄, 사함 받지 못하는 죄, 성령을 훼방하는 죄도 사망에 이르지 않는 삶, 죄 사함 받고 구원 받은 삶, 성령의 감동으로 사는 삶 안에서 보면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지, 그렇게 살아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고민일 뿐이다.

그런 것을 잘 알 수 있는 비유가 바로 달란트 비유라 할 수 있다. 주인이 어떤 사람이라 스스로 규정한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예정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예정론을 논하고, 죄 사함을 받지 못했는데 사함 받지 못하는 죄를 고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것을 알고 이 사도 요한의 말씀을 보면 이해가 될 수 있다. 또 이것을 디테일하게 설명하지 않은 것 역시 알 수 있다. 생명이 있고, 형제라 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 굳이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구하는 것인지도 알고, 형제가 무엇인지 안다면 어떤 것이 사망에 이르는 것인지 아닌지를 본능처럼 안다는 것이다. 그것을 굳이 설명하자면, 형제라 할 수 있는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고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버렸느냐?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의 정체성에 관해서 말이다.

죄와 사함에 관해서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면 모든 죄를 사하신다는 대 전제가 기본이다. 다시 말해서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는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굳이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면 이것을 알고도 여기서 떠나는 것 그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을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맛본 사람은 그것을 버리지 않는다. 개로 태어난 강아지가 세월 보내면서 고양이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서 그것을 버리고 스스로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데 그것이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의 주가 되시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래서 이어 나오는 5장 18절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안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곧 형제라 할 수 있는 사람들,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영생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범죄치 않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해 보지 않고 어떤 것이 사망에 이르는 죄인지, 예정된 것이 무엇인지 궁리하는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그것을 스스로 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망에 이르는 죄와 그렇지 않은 죄는 머리로 연구하고 신학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인지를 연구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믿고 그 뜻 안에 순종한 사람은 사망에 이르지도 않고 자신이 예정되었다는 것도 알고, 또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인지도 알고, 무엇을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지도 알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도 아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05-17-2024(금) 요한일서 5:9-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증거(9절)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We accept man's testimony, but God's testimony is greater because it is the testimony of God, which he has given about his Son.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8).


증거(證據)라는 한자의 의미는 "어떤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말합니다.
'증거'의 훈(訓)은 "증거 증(證)' "근거 거(㨿)"
영어 성경에서는 "testimony"라고 번역합니다.

창조주이시며 절대자가 되신 하나님이 증거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생들은 눈으로 보는 것을 좋아하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미 드러난 증거이기에 나는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내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째는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거하시겠습니까?
탈무드의 이야기 중에 어느 랍비를 찾아와서 "만일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내게 보여주신다면 나는 하나님을 믿겠다"고 큰 소리를 치는 젊은이에게 랍비는 그 젊은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맑은 하늘에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을 가리키며 "저 태양을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랍비님, 저렇게 밝고 빛난 태양을 어떻게 눈을 뜨고 볼 수 있습니까" 하고 말할 때 랍비는 젊은이에게 "하나님이 만드신 저 태양도 두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보겠다고 하느냐" 하며 젊은이의 교만을 깨우쳤다고 합니다.

내가 믿을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이 왜 믿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증거

2천년 전에 이스라엘 땅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그 예수님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런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보셨습니까?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했으면서도 예수님을 믿습니까?
증거에는 직접 증거와 간접 증거가 있습니다.
내가 직접 경험하거나 깨닫지 못한 것을 나보다 먼저 경험하고 깨달은 사람들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나 보다 더 많은 배움과 경험과 세상을 살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면 왜 나는 믿을 수 없을까요?
그것은 나의 어리석음 이거나 아니면 나의 무지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주장이 될 뿐입니다.

역사적으로 나 보다 월등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의 가르침에 따라 순종하였다는 증거를 생각한다면 믿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나도 믿는다는 고백이 가능합니다.

셋째는 성령님의 능력

성경은 성령이 마치 바람과 같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서 어디로 가는지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성령께서도 바람과 같이 운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경험한 이야기는 사람들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따라서 주관적인 이야기 보다는 객관적인 이야기가 더 유익하다고 하겠습니다.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나타났던 수 많은 사례들보다 나와 같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한국 땅에 호랑이가 있다와 없다는 증명한다면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호랑이가 없다!
호랑이가 있다!
호랑이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한국 땅 전체를 확인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호랑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호랑이 발자국, 호랑이 털, 호랑이 똥만 있어도 얼마든지 증명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있다와 없다를 논증할 때에 있다는 것이 훨씬 더 쉽다고 하겠습니다.

만일 아직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면 나 보다 먼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왜 나는 믿지 못하는가 그 원인을 나에게서 찾아내는 생각의 전환과 지혜를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뵈어도








성경에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을 진리를 전하는 중요한 요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증거는 법정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단서가 됩니다.
증거는 진실과 거짓을 판결하는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의 불타는 가시떨기 나무에서 부르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면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신 증거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애굽에 돌아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다시 시내산으로 돌아와 그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막의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언약궤를 증거궤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언약궤는 그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증거궤에는 세 가지의 물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계명이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이 맺은 언약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십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약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은 십계명과 율법에 순종하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고라 자손이 모세와 아론에 대항하여 반역했을 때에, 하나님이 세우신 영적인 지도자가 누구인지를 아론의 지팡이를 통하여 증거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대표들의 지팡이를 하나님의 성소에 두자 그 다음날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론을 영적 지도자로 인정하고 순종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가 든 항아리였습니다. 만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40년간 광야에서 양식을 공급하신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증거물이 언약궤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증거궤라고 부르셨습니다.

십계명은 두 돌판에 하나님이 직접 기록하신 말씀입니다. 십계명은 두 돌판에 기록되었습니다. 십계명이 두 돌판에 기록된 이유는 언약의 증거를 위해서 였습니다. 고대 시대에 두 나라가 언약을 맺으면 문서를 두 개 기록하여 쌍방이 증거로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이 언약을 맺으면서 하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두 개의 돌판에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두 돌판을 성막의 언약궤에 넣어 보관했습니다. 두 돌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이 언약의 증거였습니다.

구약에서 증거를 중요시 한 이유는 신명기 말씀에 “...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신 19:15)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증거에 대하여 나누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6-8).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그 만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에 절대적인 반석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어떻께 알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셋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물과 피로 임하신 자라고 했습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6-8). 예수 그리스도가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물로 임하신 것은 요단강에서 침례 받으실 때에 하나님이 증거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 올라 오시자 성령이 임하시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하나님께서는 침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거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물로 증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하여 두 번째로 증거한 것은 피라고 했습니다. 피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피흘려 죽으실 때에 하나님의 증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고, 땅이 진도하는 지진이 일어나고 바위가 터졌습니다. 그리고 무덤이 열려 성도가 부활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하나님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로마의 백부장과 예수님을 지키던 군사들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물과 피로 임하신 예수님을 증거한 배경이 있습니다. 당시의 이단인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침례를 받을 때에 예수님에게 임한 후에 예수를 통하여 사역을 하시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전에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떠나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을 부인하는 이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셨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덤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40일이 지난 후에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인 가르침은 역사적으로 이단들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리로 인하여 재림 예수들이 세상에 많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신천지입니다. 그들의 교리는 예수님에게서 떠난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이만희에게 임하여 이 시대의 목자라고 하는 거짓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이만희 씨는 예수님의 자리를 차지하여 영혼들을 미혹하고 지옥으로 인도하는 적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야라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을 속박할 구원의 교리는 이만희 씨를 통하여 해결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한 것은 물과 피가 있으며, 성령이십니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7-8). 성령은 진리이시기에 우리는 성령의 증거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서 보내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서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성령은 우리를 진리되신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며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요 16:13-14).

우리에게 끊임없이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게 하시며 그 분 안에서 자라가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심을 증거하십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5-16). 성령은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십니다. 성령의 내적 증거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거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성령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우리가 말씀을 듣고 마음에 기쁨이 있는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주시는 내적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예배드리거나 교제하면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성령님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하나되게 하시는 역사로 서로를 향하여 은혜가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은 물과 피, 그리고 성령이십니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8). 성령과 물과 피의 증거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 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2.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요일 5:9).

사도 요한은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통하여 사실의 여부를 확증하는데,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증거는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에 관하여 증거를 했다면 그 증거가 참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을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증거하는 것으로 제시하신 것이 바로 침례 요한의 증거였습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며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요 5:32).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는 예수님이 하시는 역사가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라”(요 5:36). 즉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신 기적들이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증거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친히 주님을 위하여 증거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요 5:37). 아버지께서 주님을 위하여 친히 증거하신 것은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실 때와 변화산 상에서 변화되실 때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한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증거는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증거는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입니다. “ ...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9, 11-12).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증거는 아들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분명한 것은 구원의 길이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사람에게 침례 받을 때에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떠나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구주이심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하나님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셨다고 증거하십니다. 우리가 아들이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다면 자신에게 영생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요일 5:10).

하나님으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증거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아들이심을 보여주신 증거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침례 받을 때에 증거를 주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셔서 그 분의 사역을 통하여 증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셔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아들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증거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자기 안에 증거가 있듯이, 외적으로도 증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되는 증거에 대하여 요한1서에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의를 행합니다.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새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면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의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불의를 미워하고 의로운 삶을 향하여 새로운 여정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서로를 사랑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랑이시듯이, 하나님과 같이 우리는 사랑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셋째,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우리는 죄를 습관적으로 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하나님의 의로우시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습관적으로 범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삶의 변화는 소중한 출생 증명서입니다. 우리는 말로는 믿는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말의 진실성은 삶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에 등록한 증서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백을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을 보십니다. 우리의 진실된 믿음에서 진실된 열매가 영생의 증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 비전의 사람 블로그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5가지 증거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이를 이제는 인간의 학문과 지식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를들어 과학자들은 과학 이론에 창조주가 존재함을 가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창조주의 부재를 증명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과학적인 사실의 타당한 결론이 창조주 이어야 함을 인정합니다. 많은 분들이 관념적으로 하나님이 어디있냐고 반문하지만, 창조주의 존재를 부정하는 순간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을 자동적으로 믿어야 하는 어려움에 놓이게 됨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에 대해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증거 1 – 우주의 미세 조정

지난 50년동안 과학자들은 하나 하나씩 발견되는 사실들에 의해 충격을 받았는데, 그것은 우주의 물리 상수가 아주 조금이라도 지금과 달랐다면, 우주에 생명 특히 콩 이상의 크기의 생명체는 발생할 수 없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주의 물리 상수는 우주를 구조를 결정하는 변하지 않는 수 인데, 이가 아주 조금이라도 지금과 달랐다면 우주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거나, 생명이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보겠습니다. 우주 상수(cosmological constant)는 진공의 에너지 밀도를 나타내는 값인데, 이 상수가 10-120 만큼 더 작았다면 우주는 팽창을 멈추고 다시 수축했을 것이고, 그만큼 더 컸다면 우주는 너무 빨리 팽창해서 별이 만들어 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주가 없거나 별이 없다면 당연히 생명의 발생은 불가능 했겠죠.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강한 핵력 상수의 편차가 10-31 만큼 더 높았다면 수소가 만들어질수 없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더 약했다면 수소외에 다른 원소들은 만들어 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생명체에는 수소가 반드시 필요하기에 수소가 없다면 생명이 발생 할 수 없고, 또 수소만 있다 해도 당연히 생명이 발생 할 수 없었겠죠.

이런 놀라운 미세 조정을 부정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BGV Theorem으로 유명한 Alexander Vilenkin 박사는 미세 조정이 당연히 사실이며 이에 대한 논쟁은 없다고 얘기 합니다. 또 아래에 링크 할 Why some scientist embrace the multiverse?(왜 어떤 과학자들은 다중 우주를 주장하는가?) 라는 기사에서는 컨퍼런스에 참가한 30여명의 저명한 과학자와 수학자들을 인터뷰하며, 그 중 우주의 미세 조정을 부정하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음을 확인합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기 싫어하는 과학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객관적으로 어떠한 설명이 가능한지 알 수 있습니다.

위에 얘기한 Alexander Vilenkin, 노벨상 수상자인 Steven Weinberg, 유명한 이론 물리학자 Leonard Susskins 등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미세 조정에 대한 설명은 사실상, 창조주가 존재하거나 무한한 수의 다중 우주가 있어서 그 중 우연히 우리가 생명체가 존재 가능한 우주에 살게 되었다는 두가지 가능성만이 있음을 제시 합니다.

리차드 도킨스가 노벨상 수상자인 스티븐 와인버그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우주의 미세 조정을 받아들이는 것을 상당히 불편해 하고 거북하다(disturbing)라는 표현까지 쓰면서도 그는 창조주가 미세 조정에 대한 유이한 설명임을 얘기해야만 했습니다.




창조주 혹은 다중 우주….

인간이 과학적으로 창조주를 관측한 적은 당연히 없습니다. 그리고 관측할 능력도 안됩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인간은 무한한 다중우주를 관측한 적이 없습니다. 또 마찬가지로 관측할 능력도 안됩니다.

그렇기에 과학은 미세 조정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뿐 그 원인에 대해서는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제 부터는 믿음과 논리 추론이 추가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미세 조정에 대한 결론이 창조주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는 창조주가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또 일어났기 때문 입니다.

증거 2 최초 생명의 발생

우리는 미세 조정된 우주를 통해 이 세상은 무한한 다중 우주를 통해 생긴 우연의 산물이거나 창조주의 미세한 조정의 산물이다라는 무신론 과학자들의 결론에 동의를 하고 과연 무엇이 더 합리적인 생각인지를 하나하나 따져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하나의 통계학적으로 불가능한 우연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것은 최초 생명의 발생 입니다.

우유로 잘 알려진 파스퇴르의 연구로 우리는 생명은 생명에게서만 나온다과학적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단 한번도 무생물에서 생명이 나온 것을 관찰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우주가 창조주 없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면 최초 생명은 어떻게 발생한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과학자들은 아직도 그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인간이 갖고 있는 지식으로는 최초 생명 이 발생 하는 것은 미세 조정 우주보다 훨씬 더 불가능 하기 때문입니다.

단백질 하나가 우연히 만들어 지기 위해서는 20가지의 아미노산이 100~수백개의 적절한 조합을 일으켜야 하는데 엄청난 경우의 수에 비해 단백질을 만드는 조합은 굉장히 적습니다.  게다가 그 조합은 적합한 모양을 구성해야 비로소 단백질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데, 그 확률 또한 아주 낮습니다.

Doug Axe 박사는 150개 아미노산이 연결되어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조합에 대한 확률을 연구하고 계산한 결과 대략 10-77 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거기에 아미노산 사이에 펩타이드 본드로 연결되지 않거나 L형 아미노산이 아닌 D형 아미노산이 하나라도 연결된다면 단백질이 되지 않고 붕괴가 됩니다. 150개 (실제는 149개)가 모두 펩타이드 본드 그리고 L 형 아미노산일 확률은 2-150 혹은 10-45 입니다. 즉 아미노산 150개가 우연히 합성되어 단백질이 될 확률은 10-166 정도 밖에 안되는 것이죠.

많은 무신론자들이 존경하는 과학자 칼 세이건은 아미노산 100개가 연결되는 단백질 하나가 우연히 만들어 만들어 질 가능성을 10-130으로 계산 했습니다. 만약 그런 단백질이 수백개가 필요하다면 최초 생명은 확률적으로 대략 10-40,000 정도가 됩니다.

      -   이는 단지 확률적으로만 불가능 한게 아닙니다. 저명한 진화론자 Michael Ruse는 한 토론에서 자기의 눈으로 볼때 아주 단순한 세포 하나 역시도 디자인 된 것 처럼 보인다고 고백합니다. 다만 그는 이런 구조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알 수 없으니 포기하지 말고 창조주가 아닌 다른 원인을 통한 발생의 가능성을 알아보자고 주장할 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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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생명의 복잡성 그리고 정교함은 누군가가 설계를 통해 만들었음을 나타내지 우연히 생겨났음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이를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창조주를 인정하기 싫은 인간의 죄성이 발현되는 것일 뿐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창조주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왜 과학적인 증거들은 알라가 아닌, 제우스가 아닌, 비슈뉴가 아닌 성경의 하나님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증거 3 과학이 발견한 아담과 이브

1987년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구 팀은 전 세계에 다양한 민족 여성의 DNA를 채취해 조사했고, 그 결과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여성에게서만 유전 되는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한 결과 다양한 민족의 모든 여성이 한 조상의 후손이라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이와 마찬가지로 남자에게만 유전이 되는 Y 염색체를 조사한 결과 이 세상의 모든 남성 역시 한명의 공통 조상을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를 성경의 이름을 따서 미토콘드리아 이브, 그리고 Y 염색체 아담이라고 명명합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이 둘을 성경의 아담 그리고 이브과 연결시키기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둘이 있었던 연대를 10만~20만년 전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이 두 사람은 전혀 만난적이 없으며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었지만, 오직 이 두사람의 자손만 남고 나머지 사람들의 자손은 모두 멸절했다는 다소 황당한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다면 정말 이들이 10만~20만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었을까요? 어떻게 이런 계산이 나오게 된 것일까요?

그들은 자신의 진화론적 시간을 바탕으로(인간과 침팬지의 서열차이에 진화의 시기를 적용)  미토콘드리아 DNA에 약 600세대 마다 돌연변이가 하나씩 발생할 것이라고 가정 했습니다. 이에는 어떠한 과학적 실험이나 관찰이 없는 순수한 가정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직접 인간 사이의 변이를 연구 합니다. 그들은 327세대를 나타내는 134개 가족에서 357명의 MtDNA를 조사했을때, 그들은 40세대에 한개 정도의 돌연변이가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Nature Genetics에 보고 되었죠. 즉 돌연변이는 진화론자들의 예상보다 15배나 빨리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를 단순 적용시키면 아담과 이브는 6,000년에서 10,000년 사이에 있었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또 2008년에 있었던 연구에 따르면 평균적으로 21.6개 뉴클레오티드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음을 밝혔습니다. 이는 수십만년을 가정했던 진화론자들에게는 놀라울 정도로 작은 숫자이며 공통 조상이 20만년보다 훨씬 더 가까이 살았다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Ann Gibbons라는 진화론자는 자신의 논문 Calibrating the Mitochondrial Clock 에서 이렇게 씁니다.

“원인이 무엇이던 진화론자들은 빠른 변이 속도의 영향에 대해서 걱정을 한다. 예를들어 10~20만년전에 아프리카에서 살았다고 여겨지는 미토콘드리아 이브를 새로운 시계를 사용하면 6,000년 전쯤 살았다고 계산되어지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게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략…  하지만 변이 속도에 대한 연구 몇개로 모두가 진화 역사를 다시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빠른 변이는 기껏해야 몇백년 정도 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옥스포드 대학의 유전학자 Martin Richards는 “아무것도 아닌일에 소란 떨고 있다.”고 말한다.

 DNA    -

과학은 공통조상이 6,000년 전 사람이라고 결론 내리지만 과학자들은 과학적 결론 대신 자신들의 관념을 선택합니다. (그림을 누르시면 논문 원문 링크가 되어 있습니다.)

과학은 우리의 공통 조상이 6,000년전쯤 사람이라고 가리킵니다. 이는 성경에서 얘기하는 연대와 거의 비슷하게 일치 합니다. 만약 진화론자들의 주장이 맞다면, 약 3,500년전 성경의 저자는 어떻게 공통 조상의 존재를 예측했으며, 그 시기는 왜 6,000년 전 쯤이라고 쓰여졌을까요? 이것이 단순한 우연일까요?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증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증거 4 – 정확한 하나님의 예언 성취 – 70 이레

성경에는 다양한 형태와 장르의 글들이 있지만,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예언의 성취 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전지 전능함과 성경의 정확성을 드러내는 가장 확실한 증거인것 같습니다. 특히 성경은 예수님께서 직접 “나에 대해 쓰여졌다. (요한복음 5:39 & 요한 복음 5:46)” 라고 하신것 처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에 대한 책 입니다. 성경에는 아주 많은 예언이 구체적으로 성취 되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예언을 소개해 드리기 원합니다.

다니엘서에 있는 70이레 예언은 예수님이 언제 이 세상의 왕, 메시아로 드러나시고 또 죽음을 당하게 되는지에 대한 예언 입니다.

아래에  이해하기 쉽게 만화로 그려진 설명에 대한 링크를 아래에 드리고자 합니다. 저의 글이 지겨우시면 재밋게 그려진 만화로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서 9장은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을 발견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놓고 다니엘이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다니엘이 기도 할때에 천사가 와서 다니엘에게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합니다. 그것은 24절부터 있는 하나님이 이세상의 70 이레를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레는 7년입니다. 즉 이 세상이 앞으로 70×7년 즉 490년이 남았다는 것입니다.그런데 490년을 세개로나눕니다. 49년(7이레)과 434년(62이레) 즉 69이레와 장차 있을 한 이레… 즉 언제인지 모르지만 세월이 한참 지난 후의 마지막 한 이레 (7년) 입니다.

그런데 이 70 이레의 시작을 언제로 얘기했냐면, 예루살렘을 다시 건설하라는 명령이 있을때부터 하나님이 세우시는 지도자(메시야-즉 예수님을 가르킵니다.)가 올때까지 69이레가 지날것인데, 그때에 하나님이 세우시는 지도자가 죽임을 당할것이다. (26절)

오늘 이 날자 계산을 하기를 원합니다. 정리하면 이 당시에는 예루살렘이 파괴 되고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 있던 때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다시 복원하라는 명령이 있은후 483년에 메시야가 죽을것이다.. 라는 내용입니다.
우선 예수님이 언제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AD30~33년중의 한 해이고, 누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AD32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유월절에 즉 니산월 14일날 돌아가셨습니다.

성경에 예루살렘을 다시 재건하라는 내용이 네번 정도 나오는데, 세번은 예루살렘에 성전 즉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곳을 재건하라는 명령이었고, 오직 한 군데만 예루살렘 도시를 재건 하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이십 년 니산 월 에 일어난 일입니다. 왕이 포도주를 달라고 해서 나는 포도주를 가져다가 왕께 드렸습니다. 전과 달리 슬픔에 가득 찬 나의 모습을 보고…. 왕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그대가 여행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소? 언제쯤 돌아올 수 있겠소?” 왕은 나를 기꺼이 보내 주려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말씀드렸습니다. <느헤미야 2:1,2:6>

느헤미야 2장에 보면 아닥사스다왕  20년 “니산”월에 일어난 일이라고 1절에 설명하면서  6절 왕이느헤미야에게 성을 재건하라고 명령을 합니다. 이 때가 역사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BC 445년 혹은 BC 444년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기록에 날자가 없이 달만 적혀져 있을때는 그 달의 1일인 경우가 많기에 니산월 1일이라고 가정하겠습니다.

이때 이후 483년이면 메시야는 왕으로 선포되고, 죽임을 당해야 맞습니다. 
70  -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은 1년이 365일이지만 지금의 달력은 저 때 보다 한참 나중인  4세기 쯤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1년을 360일로 계산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첫번째 책인 창세기에도 한달을 30일로 잡아서 계산했 고,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도 한달을 30일로 잡아서 계산을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한달을 30일로계산합니다.

어떤 분들은 윤달을 계산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만약 윤달을 넣어야 한다면 3년반을 42개월 그리고 1260일로 얘기한 요한계시록의 경우 윤달이 중간에 들어가야 하는 기간이므로 43개월로 얘기를 하거나 1260일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의 한달은 30일 1년은 360일 입니다.

483년x 360일은 173,880일 입니다. 즉 BC 445년 니산월에서 173,880일이 지나면 지금 우리의 달력으로 어느날일지 계산해 봤으면좋겠습니다. 1년은 거의 정확하게 365.2477일 입니다. 대충 365.25일이라고 잡죠.
그러면성경의 483년은 우리의 달력으로 약 476.057년 입니다. 0.057년은 날로 계산하면 365.25x.057=약 20일~21일 이정도입니다.

BC445+476년+20일=AD32년입니다. (31년이아닌이유는 AD 0년은 없기때문에)
그리고 20일정도 추가된다면 똑같은 니산월일 가능성이 높죠.

저는 이 70 이레 예언이 하루도 다르지 않고 정확하게 일어났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니산월이라고 달까지 정확하게 표기한 것으로 봐서 이 정도라면 하나님의 역사가 아주 정확하게 일어 났을거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날자까지 정확하지 않더라도 다니엘서에서 메시아가 죽어야 한다고 예언한 시간에 예수님 외에, 자신이 메시야라고 주장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상식적으로 이 70 이레 예언은 우연히 발생했다고 하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없다면 어떻게 이 예언이 성취가 될수 있었을까요?

증거 5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역사성 입니다. 세상에 많은 성경학자들이 있지만, 그 중에는 기독교인이 아닌 성경 학자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성경이 역사서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성경 “학자”가 되지도 않았겠지요.

오히려 그들은 성경이 다른 어떤 역사서 보다 사본이 잘 보존되어 있고, 원본에 가까운 책임을 인정합니다. 단지 그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일들을 그대로 보지 않을 뿐 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해서 역사로 인정하는 5가지 팩트들이 있습니다.

첫번째 의문 : 성경이 사실이 아니라면 왜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이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했다고 기록했을까?


성경에서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으로 나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제자들이 가장 치를 떨었을 예수님을 잡아 죽인 바로 그 기관이죠.

이건 마치, 일제 시대에 고종 황제의 시신을 갖고 있는 일본 황실에 조선 사람은 두려워서 차마 시신을 달라고 하지 못하는데, 일본 순사가 와서 시신을 달라고 요청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로마의 반역자로써 처형을 당한 것입니다. 장사 지내도록 그 시신을 달라는 것은 “나도 반역자요!” 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자신의 목숨을 건 행위죠.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독립 투사같은 영웅적인 행동 입니다. 그런 행동을 예수님의 11제자가 아닌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 했다는 것은 성경을 기록한 제자들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며, 당시 가장 않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단체 사람이 했다고 지어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사실 성경 기록이 거짓이라면 왜 신뢰를 받을수 없는 여자들의 목격을 기록했는가?

지금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당시에 유대 사회에서 여자의 위치는 굉장히 낮았습니다. 유대 역사학자인 요세푸스에 따르면 여자들은 법정에서 증인으로 참여하는 것 조차도 허용 받지 못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이 지어낸 얘기였다면, 그리고 그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믿게 하고 싶었다면, 왜 성경의 저자들은 그 것을 발견한 것이 여자들이라고 했을까요? 당시의 문화에 비추어 당시 사람들에게는 여자들의 증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신빙성이 없는 얘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세번째 사실 : 다양한 장소와 각기 다른 상황에서 여러 개인들과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부활 하여 나타났습니다.

사실상 모든 역사 학자들은 다음 증거들을 통해 이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인정합니다.

1)  사도 바울이 얘기한 예수님을 본 증언자들의 이름들은 그 일이 실제로 일어 났음을 보증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묻히셨다가 구약의 약속대로 3일 후에 살아나셔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시고,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그 후에 한번에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셨으며 그 사람들 중에는 이미 죽은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다고 얘기 합니다. 또 예수님을 믿지 않던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에게, 또 자신에게도 나타났다고 증언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울이란 이름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 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바울은 사도들과 친분을 갖게 되었고, 그들 모두의 증언을 듣고 기록한 고린도서가 신화처럼 무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나타나신 얘기들은 여러개의 독립적인 증언들을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얘기는 누가와 바울이, 12 제자에게 나타난 얘기는 누가와 요한과 바울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또 여자 제자들에게 나타난 얘기는 마태와 요한에 의해 증언 되었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대해 부정적인 독일의 신약 성서 비평가 Gerd Ludemann 마저도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확실하다고 봐야 한다!” 라고 결론 지었습니다.

네번째 사실 :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이 갖고 있던 부활에 대한 믿음과 다른 예수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1)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처한 상황을 생각해 보면, 제자들은 하나님이라고 믿던 예수님이 죽었을 때, 그들은 절망했을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이 갖고 있던 믿음은 현재의 이스라엘 민족이 갖고 있는 메시아 상과 같았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전에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신을 가장 높은 자리에 앉혀달라고 부탁을 했었고, 다른 제자들은 그것을 놓고 다투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승천하기 직전에도 제자들은 이스라엘을 회복 하실 때가 지금이냐고 물어봅니다. 그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당시의 로마보다도 더 강한 나라로 만들어 줄 사람이었지, 십자가에서 로마의 반역자로써 죽음을 당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2)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사후 세계관은 이 세상에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사람이 살아나 부활하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는 성경에 분명히 드러나는데요.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장면에서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나사로가 다시 살아 날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이렇게 대답 합니다.

“마르다가 그분께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할 때에 그가 다시 일어날 줄 내가 아나이다, 하매” <요한복음 11: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갑자기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시켰다고 믿기 시작 하고 그들의 목숨까지 내놓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사랑을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사랑하는 자식이 죽었다고 해서, 미쳐 갖고 그 자식이 부활했다고 믿는 부모를 보신적이 있습니까? 혹은 아내나 여자 친구, 혹은 남자 친구나 남편이 죽었다고 해서 갑자기 미쳐 가지고 부활했다고 믿는 사람을 보신적이 있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예수님을 믿지 않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려던 사도 바울까지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고, 당시에 살고 있던 수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믿음 때문에 목숨을 바칩니다.

Emory 대학의 신약학자 Luke Johnson은 “무언가 엄청나게 강력한 변화를 일으키는 사건이 있어야만 초대 기독교 당시 있었던 움직임을 일으킬 수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다섯번째 사실 : 1세기 기독교의 폭발적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예수님에 대한 반응은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예수님은 공식적인 로마 반역자 이며,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23>

당시 유대인의 개념상 로마를 정복하지 못하고 이스라엘을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만들어 주지 못했다면 메시아가 아니며, 나무에 달렸다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당시의 유대인들 그리고 심지어 이방인들까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했을까요?

당시 예수님을 죽인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핍박했으며, 전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역사학자들은 말 그대로 기독교의 폭발적인 부흥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왜 심지어는 이방인들 까지도 자기들과 상관없는 아주 작은 유대라는 나라에서 반역자로 처형당한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을까요?

저명한 신약학자 N.T Wright 역시 “예수님이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하지 않았다면, 초기 기독교의 부흥을 설명할 수 없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부흥은 불가능 했다는 것이죠.

자 그렇다면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기적입니다.

하지만 제가 제시한 다섯가지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팩트들은 기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역사학자 Bart Ehrman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는 위에 제시된 다섯 가지 팩트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만, 단지 부활은 기적이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동안 역사학자들이 내놓은 모든 자연적인 시나리오는 역사적인지 여부를 검증하는 기준에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가설만 검증 기준을 통과 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이 내놓은 자연적인 가설들 예를들면, 음모론 가설, 죽음을 가장했다는 가설, 헛것을 봤다는 가설 등은 학문적으로 사실로 여겨지지 않았고, 예수를 믿지 않는 성경학자 Bart Ehrman 박사 역시 그 중 어떠한 가설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고 단지 기절했다가, 인도로 갔다던지, 다른 곳으로 갔다는 식의 가설을 신뢰합니다.

그런 가설은 흥미롭고 부활이라는 기적보다는 그럴듯 하게 들릴수 있을지 모르지만, 객관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 입니다.

우선 예수의 죄명은 로마에 대한 반란입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를 제패한 규율이 엄격한 군대였고, 사형수가 죽지 않았을 때는 담당 병사가 대신 죽어야 하는 규율이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죽지 않은것이 발견되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죽음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내용을 확인해 줍니다.

예수 님께 이르러서는 그분께서 이미 죽은 것을 보고 그분의 다리를 꺾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군사들 가운데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니 즉시로 거기서 피와 물이 나오더라. 그것을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의 증언은 참되니라. <요한복음 19:33~35a>

원래 로마 군인들은 죄수가 죽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반드시 다리 뼈를 꺾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자신이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하며 예수님의 다리는 꺾지 않았고, 다만 옆구리를 찌르니 물과 피가 나왔다고 증언 합니다.

이는 법의학적으로도 정확한데, 심장이 파열 되었을때, 24시간 이전에 파열된 심장에서는 피가 흐르고 심장 주위에 피가 고이는 주머니가 생기며 혈청이 가라 앉으면서 액체가 생겨 그 주위를 찌르면 많은 양의 물이 나온 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예수님이 죽지 않았다는 가설은 역사 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관한 이야기

믿음이란 한자는 "믿을 신(信)"
신자를 파자하면 "사람 인(人. 亻)"과 "말씀 언(言)"
대부분의 성도들이 성경 몇 구절을 암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도록 하려면 암송이 아니라 말씀을 움직이는 능력이 따라야 합니다.
말씀을 움직이는 능력은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가복음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믿음이란 말씀을 움직이는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 믿음의 그릇

어떤 군목이 최전방에서 군목 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벌통을 쳐서 꿀을 땄습니다. 아주 좋은 꿀을 따서 부대에 있는 모든 군인들에게 광고를 하여 누구든지 빈그릇을 가지고 와서 꿀을 타가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군인은 박카스 병을 가지고 와서 꿀을 받아갔고, 어떤 군인은 링게르병을 가지고 왔고, 또 어떤 이는 스페아 깡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군목은 군인들이 가지고 온 빈병에 다 꿀을 가득히 넣어 주었습니다. 박카스병은 박카스병만큼, 링게르병은 링게르병만큼, 스페아통은 스페아통만큼 꿀을 부어 주었
습니다. 그후 항의 전화가 걸려오기를 공평하지 않게 나누어주었다는 것이었습니 다. 그랬더니 군목이 대답하기를 "누가 박카스병을 가지고 오라고 했소? 나는 빈 그릇을 가져오라고 했고 그 빈 그릇대로 채워 줬을 뿐이오."하는 것이었습니다.

 
● 깨어 믿음 위에 굳게 서라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外飾)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 벧전 2:1,2.
시기와 비방은 서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하는 것입니다. 시기와 비방을 할 때, 사람들은 문제가 되는 그 사건만을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주변 것들을 긁어 모아 어찌 되었든 무조건 상대방을 제압하려고 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조금 섭섭한 일을 했다고 해 보십시오. "그래, 그 사람 눈 좀 봐. 냉정하다 못해 독기가 서려 있쟎아."하고 애매한 눈까지 들먹여 그 사람을 눌러 버리려고 합니다. 며느리가 미우면 발 뒤축이 달걀 같다고 나무라는 식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가 갑자기 형편없는 사람으로 전락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가 낮은 사람으로 전락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낮은 사람으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조심하십시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강건하게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십시오. "주님, 저희로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비방하고, 판단함으로써
스스로 파멸해가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 믿음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

기업을 경영하는 이들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기쁨에서 내세의 소망을 품고 사 는 그 날까지 열심히 일해야 하겠다는 사상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수단으로 하여 쉽게 돈을 벌겠다는 엉뚱한 생각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이용하여 돈을 벌겠다는 상업적인 발상에서 신앙을 약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구속의 복음을 전하는 기독교를 복이나 받게 하는 물질의 종교로 인식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러므로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부자 되는 종교로 인식하게 만들어 버려 기독교를 구속의 종교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게 하였다.


● 기도와 믿음 -마틴 루터

종교개혁 당시 강력한 원수들이 온 힘을 합하여 개혁파의 신앙을 뒤집어 엎으려고 하고 무수한 칼날이 칼집에서 뽑혀지려고 할때 루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사단은 분노를 나타내고 있다. 경건치 않은 승려들은 공모하고 있으며, 우리는 전쟁의 위협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과 기도로써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라고 사람들을 권할 것이다. 그리하면 원수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정복되어 잠잠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급한 것은 기도이다. 이 싸움에 사용되어야 할 무기는 오직 성령의 검뿐이다." 온 세계를 동요시킨 위대한 종교개혁의 큰 능력은 밀실의 기도에서 나왔다. 아우크스부르크의 투쟁의 기간 동안에도 루터는 적어도 하루에 세시간 기도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것도, 연구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을 그렇게 하였다.


● 믿음의 기도는 병든자를 구원

가끔 자동차 안에 열쇠를 놓아둔 채 문을 잠갔다가,후에 문을 열기 위해 고생한 경험이 있다.아무리 고급 승용차라 할지라도 그 열쇠가 없다면,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고,운전을 할 수도 없고,원하는 곳에 갈 수도 없다.

지글러라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그의 저서에서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정직한 사람,원만한 인격을 가진 사람,성실한 사람,신념이 넘쳐 있는 사람,충성된 사람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런 성공의 공통점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길은 믿음의 기도 밖에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복의 근원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는 열쇠를 주었다.
삶의 놀라운 열쇠를 긍정적으로 사용한다면,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복을 얻을 수 있다.
우리 모두 기도하는 시간을 우선 순위를 삼고 생활하자.“믿음의 기도는 병든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약 5:15)”

● 믿음의 기도는 실패가 없다 / 조지프 스크리븐(죄짐 맡은 우리 구주)

아일랜드의 한 청년이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사랑하는 약혼녀가 익사하는 아픔을 당했다.
그는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절망의 늪에 빠졌다.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이 청년은 아픔의 장소를 피하여 캐나다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 안주하기도 전에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중병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죽고 싶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한꺼번에 자기를 향하여 토네이도처럼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 청년은 힘없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흐느끼며 부르짖었다.
“예수님!어머니의 병을 고쳐주세요. 응답해주세요. 평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고 결단의 기도를 드렸다.
그 순간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와 평화가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다.
이때 떠오른 영감은 뒤에 “시험 걱정 모든 괴로움없는 사람 누군가.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드려 아뢰세”(찬송가 487장)라는 유명한 찬송가가 됐다.

그는 고향에 전화해서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그는 중병을 앓던 어머니가 거짓말처럼 완전히 치료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이 청년이 바로 조지프 스크리븐이다.
스크리븐이 울부짖으며 드린 기도는 어머니를 살려내는 기적을 일으켰다.
이처럼 기도에는 실패가 없다.
우리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는 말씀을 믿고 기도해야 하겠다.

● 믿음과 기다림

존은 열 살 되던 해 크리스마스에 할머니로부터 우표 앨범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다가 왔지만 우표앨범은 오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런데다 놀러온 친구들은 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구경하길 원했다. 존은 선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것은 할머니에게 받은 우표 앨범...이 건..."
"존, 아직 할머니에게서 우표 앨범이 오지 않았는데, 왜 그런 말을 했니?"
존은 이상한 얼굴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나에게 우표 앨범을 주신다고 하셨으니 받은 것과 같아요."
존의 어머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믿음을 방해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개월이 지났으나 할머니에게는 여전히 아무 연락이 없었다.
존의 어머니는 왜 할머니가 우표 앨범을 보내지 않는지 마음에 강한 의심을 가지고 아들에게도 이렇게 떠봤다.
"존! 할머니께서는 너에게 약속한 것을 잊으셨나보다."
"엄마, 결코 그렇지 않아요. 할머니께서 잊어버리시다니요."
존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존의 어머니는 아들의 신뢰에 찬 얼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엄마, 할머니께 앨범 고맙다고 하는 편지를 보내면 어떨까요?"
"그래, 그거 참 좋은 생각이구나. 자, 한번 써 볼까?"
존의 어머니는 이렇게 용기를 주었다. 순식간에 편지를 쓴 후 우체통에 넣었다. 존은 할머니를 믿으며 휘파람을 불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 후 며칠 안되어 답장이 날아왔다.
"존에게... 존! 할머니는 너에게 우표 앨범을 사 준다고 한 약속을 잊은 게 아니란다. 너의 마음에 드는 앨범을 구하려고 찾아보았으나 좀처럼 없더구나. 그래서 나는 뉴욕에 주문편지를 보냈단다.
그런데 뉴욕에서 보내온 앨범은 크리스마스가 지나서 도착한 데다 너무 좋지가 않아서 다른 것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구나. 그래서 여기 3달러를 보내니까 네가 마음에 드는 것을 그곳에서 사가지렴. 할머니로부터."
편지를 읽은 존의 얼굴은 승리의 기쁨으로 가득 찼다.
"엄마, 제가 말한 대로지요?"
존은 할머니와의 약속을 결코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 그가 믿고 기다리는 동안 할머니는 노력하고 있었다.

● 고난을 회피하지 않는 믿음

성 구 " 가라사대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막 14:36)
마틴 루터 킹 Jr. 목사님의 자서전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킹 목사님이 '몽고메리 버스 스트라이크'를 주도하고 계실 때 많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테러와 폭파 협박에 시달리셨다. 그들의 테러와 폭파 협박은 너무나 거칠고 험하여서 우직한 킹 목사님도 두려움에 옴짝달싹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목사님이 공포에 사로잡혀서 '이제는 이 일에서 손을 떼어야 하겠다.'라는 생각이 들 때였다. 그 순간 기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는 기도했다. 그의 기도는 간절한 기도였다. 지금 혼자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난에 처해 있다는 것을 주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그때 머릿속에서 조용히 확신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 " 마틴 루터, 정의를 위해서 일어서라. 평등을 위해 일어서라. 진리를 위해서 일어서라. 보라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결코 너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 싸움을 계속하라. " 는 목소리를 들은 마틴 루터 킹 Jr. 목사님에게 고난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의연히 이길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고 한다.


● 부부의 믿음

한 농부가 부인의 동의를 얻어 더 좋은 말과 바꾸려고 키우던 말을 끌고 시장으로 나갔다.가는 도중에 살진 암소에게 마
음을 빼앗겨 말과 바꾸었다.또 길을 가다가 그 암소를 양과 바꾸었고,조금 더 가다가 양을 거위와 바꾸었으며 또 그 거위
를 붉은 벼슬을 가진 수탉과 바꾸었고 마지막으로 수탉을 썩은 사과 한 자루와 바꾸었다.
날이 저물어 여관방에서 만난 귀족 두 사람이 농부의 사연을 듣고는 “집에 돌아가면 부인이 화가 나서 당신을 받아들이
지 않을 것이오”라고 말했다.그러나 농부는 “참 잘했다고 할 것이오”라고 반박했다.그러자 귀족은 만약 그렇다면 자기
가 가진 금화를 몽땅 주겠다고 했다.
이튿날 집에서 그간의 사연을 들은 농부의 아내는“그러잖아도 식초를 만들기 위해 썩은 사과가 필요했는데 참 잘되었군
요”라고 말했다.결국 농부는 내기에 이겨 부자가 되었다.
부부관계에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은 배우자의 능력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배우자를 존중하는 것임을 일깨워주는 안데르센
의 동화다.


● 배울 것은 믿음과 낙천적 사고방식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5:7)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목사님 당신은 낙천적 사고방식을 외치십니다. 당신은 믿음만 가지면 산도 움직일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나의 산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예수 님께서 잘못 말씀하신 건가요?"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야 합니다. 특히 믿음과 낙천적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세상에 문제 없는 자가 없다. 그러므로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하는 것이 중 요하다.

나는 바울 사도의 말씀을 명심하고 문제들을 처리하고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 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니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나는 인내를 가지고 있다. 인내의 복음을 믿는 나는 인내로 많은 일을 처리할 것을 확신한다.


● 한 사람의 믿음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80세 생일 잔치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소감을 말했습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나는 허황된 계획을 꾸민 적도 있었고, 실현 불가능한 꿈을 가진 때도 있었소. 그러나 아내는 한 번도 불평을 하지도, 의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나를 믿어주었답니다.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렇게 나를 믿어준 아내의 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가장 큰 기쁨이지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를 믿어주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든든한 일입니다.
당신을 언제나 믿어주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그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 감사는 믿음의 척도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니므이 뜻이니라](살전5:18) 기독교의 신앙은 '감사'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사란 다름 아닌 "창조와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응답"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알고 감사하는데 바로 이 감사가 예배의 동기이다. 구약성서에서 감사라는 말은 동사 [야다](감사를 드리다)와 명사[토데](감사를 드림)로 표현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쓰이고 있는 이 [야댜]와 [토데]는 "마음의 샘줄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마음에서 샘줄기가 흐른다는 말이다. 그리고 신약성서에서는 [유카리스테오스](감사한 마음을 가지다. 감사를 드리다),
[카리스](감사)라는 말이 명사로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감사라는 말은 또 영어로는 THANKS인데 이 말은 "생각한다"란 뜻을 지닌 THINK에서 나온 말이다. 다시 말해서 감사는 깊이 생각하는 것으로 인생을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저절로 나오는 행동인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어떻게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지를 보면 바로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감사의 표현은 구약과 신약이 조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주로 구약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역사적 관점에서의 감사가 그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 신약은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구속사적 관점에서의 감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먼저 구약성서에서의 감사는 모든 시편마다 언급되고 있으며,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주제가 되고 있다. 이처럼 '감사 드림'은 이스라엘의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민족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잇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민족은 감사함으로 성전에 들어갔으며, 예배를 드릴 때에도 감사의 노래를 불었으며, 서원을 드리는 제사를 올리면서도 감사를 하였다. 또한 그들은 감사를 번제 대응으로 하였으며, 야훼의 제단 앞에서 행하는 "재판"에도 감사드림이 따랐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다름 아닌 야훼의 이름에 감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스라엘민족의 감사는 바로 신앙에서 온 것이었다. 이스라엘민족은 야훼가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을 지키는데 신실하게 언제난 감사를 표했다.이러한 감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신들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약의 감사는 신약에서는 조금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역사적 관점에서의 감사가 구약에서의 감사였다면 신약의 감사는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구속적 감사가 그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신약에 보면 생전에 예수를 안 사람들은 예수가 행한 일과 그의 인격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예수를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그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이루어진 것에 대하여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도래하는 왕국에 참여할 것에 대하여 ◇복음을 전하게 된 데 대하여 ◇특별한 영적인 은사에 대하여 ◇ 육적인 음식에 대하여 ◇ 세상데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에 대하여 ◇신앙의 전파에 대하여 ◇ 형제들의 사랑과 신앙에 대하여 ◇하나니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감사했다.

사도바울은 성도들에게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역설했다. 바울이 감사생활을 강조한 것은 감사가 믿음을 온전케하기 때문이다. 감사는 은혜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은예에 감사하게 될 때 교인들은 더욱 더 그 은혜안에서 귿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감사는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며 우리의 미래를 확실하게 해준다. 감사는 또다른 감사의 역사를 경험케 하며 이러한 계속적인 감사는 우리의 영혼을 살찌누게 한다. 우리들이 가진 것 중에서 아무것도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면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의 감사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이밖에도 일반적인 생활에서의 감사(살전5:18)가 있는데 이 감사야말로 긍정적인 신앙생활의 원동령이다. 말세의 특징 중 하나는 감사가 없다는 것이다.

● 절망 속에서도 가질 수 있는 믿음의 기도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분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로다(시55:22).
기도를 계속하면 당신은 계속 어떤 것을 추구하여 달성시키는 능력도 얻게 된다.
나는 세계 2차 대전 때 한 유대인이 독일의 지하실 벽에 새긴 이 말을 좋아한다.
"햇볕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태양을 믿는다. 비록 느끼진 못하더라도 나는 사랑을 믿는다. 비록 잠잠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이것은 기도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믿음이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했다.


● 성장하는 믿음을 소유하자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 5:12.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 6:11,12.
“...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 는 이것이니라”-요 4:34.

봄이 되면 농촌에서는 못자리를 만들어 볍씨를 뿌립니다. 볍씨는 일정 기간 동안 못자리에서 잘 자랍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자라면 더이상 자라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못자리가 좁기 때문입니다. 그때쯤되면 농부들은 못자리 에서 모를 뽑아 큰 논에 이양을 합니다. 그렇게 하면 모는 무럭무럭 자라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내놓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신앙의 초보 단계에 있을 때는 목사나 선생의 양육을 받으며 자랍니다. 그러나 일정 기간 동안 양육을 받았으면 모내기를 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을 모내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편안한 것만 너무 좋아한 나머지 늘 피양육자 노
릇만 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신앙은 대체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양육을 받았으면 피양육자의 단계에서 벗어나 교사로, 직분 맡은 자로 봉사함으로써 성장해야 합니다. “주님, 저희로 젖먹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의 단계에만 머물러 있지 말게
하옵시고, 성장하는 믿음을 소유하게 하시옵소서.”


● 믿음의 승리
나폴레옹이 유럽을 침공했을 때 휘하 군대가 오스트리아의 국경 도시인 펠드리히를 포위했다. 펠드리히 시는 비상의회를 소집하고 사태를 논의했다. 미리 항복하자는 의견이 나오자 한 사제가 일어나 말했다. “우리의 힘을 의지한다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부활절인 오늘의 예정대로 교회 종을 치고 예배를 드립시다. 그리고 나머지 문제는 모두 하나님께 맡겨버립시다”
그 사제의 말에 시의회 의원들은 모두 찬성하였고 펠드리히 시에는 우렁찬 종소리가 울리고 기쁨에 찬 찬송소리가 퍼져나갔다. 이 소리를 들은 프랑스군 진영에서는 오스트리아의 구원병이 온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하여 군대를 돌려 다른 곳으로 퇴각하였다. 펠드리히 시민들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막강한 나폴레옹의 군대를 맞아 승리할 수 있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은 이런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낸다. 당신은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 믿음으로 감사하는 참된 삶
염려와 근심은 믿음없는 행위이며 소유욕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은 염려하는 자들에게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염려는 세상일의 특징이며 이방인들이나 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염려하는 자들에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들꽃을 가리키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화려한 영화를 대표하는 솔로몬도 들꽃의 아름다움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들꽃도 아름답게 입히시는 하나님이 들꽃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을 입히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염려와 근심이 아닌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나 헛된 망상이 아니라 내 의지와 욕심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과 원칙에 충실한 삶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후에 광야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도 많이 경험합니다. 그래서 광야길은 힘들 때나 형통할 때나 믿음의 행진이어야 했습니다.
모세를 따라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고픔 때문에 모두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그들은 애굽에서 먹던 떡과 고기를 생각하며 불평했습니다.백성들이 원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출 16:3)고 약속하셨습니다.약속대로 하나님은 저녁에는 메추라기,아침에는 만나를 공급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양식을 주시는 두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필요에 따라 거두도록 하셨습니다.처음에는 많이 거둔 자도 적게 거둔 자도 있었지만 부족함이 없이 각자 먹을 만큼만 거두었습니다. 둘째는 거둔 양식을 다음날 아침까지 두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탐욕에 빠진 자들이 약속을 어기고 다음날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나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적은 것으로도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실 것을 믿고 욕심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상을 만들었습니다. 금송아지상은 눈에 보이는 것,물질의 풍요를 갈망하는 상징입니다. 또한 가나안의 우상인 바알을 섬길 수 없도록 하나님이 엄히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바알은 가나안의 우상으로 풍요를 상징하는 곡물의 신이었습니다.
황금만능주의에 빠진 자는 믿음으로 살거나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세상이 감사없이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소유욕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소유하는 것이 많아지면 교만하기 쉽고 자기를 채우면 채울수록 염려가 많아집니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으면 자기 주변을 가볍게 그리고 단순하게 하십시오. 빈틈이 좀 있어야 여유가 있습니다. 성도는 소유욕에서 생기는 염려와 근심을 버리고 믿음으로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 교육의 바탕은 믿음이다
조선조 영조(英祖)때 이재라는 이름난 학자가 있었다. 이재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컸다. 어머니는 이재가 12살 되던 해 시동생인 당대의 정치가 이만성에게 데리고 가 올바르게 키워줄 것을 부탁했다. 며칠 후 이만성은 "공부를 안 해 매를 들어 때렸는데 그만 죽었다"라고 말했다. 이재의 어머니는 슬퍼하면서도 "가르치다 그런 걸 어떡합니까. 괜찮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만성은 "사실은 죽지 않았고 나를 얼마나 믿고 맡기나 보려고 했다."고 하며 이재를 열심히 키워 대학자가 되게 했던 것이다.

● 두려움의 안경과 믿음의 안경
중세기 종교개혁가 루터의 이야기다. 그의 학창시절에 독일 고학생들은 노래를 잘하면 남의 집 창문 밖에서 노래를 부르고 돈을 받아 학비를 마련하곤 했다. 물론 노래가 너무 엉망일 경우나 창문 안 주인의 성품이 곱지 못하면 무안을 당하고 빈손으로 쫓겨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한번은 루터가 어느 부잣집 창문 아래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체격이 크고 무섭게 생긴 사나이가 창문을 척 열고 바라보더니 냅다 뛰어나오는 것이었다. 루터는 그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자기 노랫소리가 듣기 싫어 주먹질이라도 할 줄 알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나이는 계속 쫓아왔다. 결국 발이 빠르지 못한 루터는 붙잡혔는데, 공포에 벌벌 떨고 있는 루터에게 그 사람은 돈 뭉치를 내밀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루터에게 장학금을 주려는 따뜻한 마음의 자선가였다. 루터는 그때를 회고하길, '나는 목소리가 별로 좋지 않다.' 라는 열등의식 속에서 노래를 하다 보니 그 사나이가 뛰어나오는 것도 자기를 해치기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루터는 "두려움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만사가 다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고, 믿음이라는 안경으로 갈아 끼면 세상이 다 감사하고 좋게 보이며,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 고 했다.
사실이다. 환경도 중요하지만 그 환경을 어떤 안경을 쓰고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다르고, 그 해석에 따라서 행복이 달라진다.
미국의 한 신발회사에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두 명의 사원을 시장조사차 보냈다. 그때 한 사원은 보고하기를 "이곳은 모든 사람이 신발을 신지 않으므로 판매 불가능" 하다는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다른 한 사원은 "이곳은 아직 아무도 신을 신지 않았으므로 판매가능 무진장"이라는 보고를 띄웠다. 전자의 불가능 사원은 평생을 말단 사원으로 마쳤지만, 후자의 무진장 사원은 그 신발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이것은 능력의 차이라기보다는 가치관의 차이이다.

● 시련과 믿음의 성취
본문: 단 3:13-18

아이들의 성장과정에 있어서 여러 가지 병고, 즉 감기에 걸리기도 하고 홍역을 앓기도 하면서 자라는 것과 같이 신자들의 신앙이 성장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시련과 장애물들이 있어서 이것들과 싸워서 이겨야 믿음이 점점 자라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용사가 되고 큰 일도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간에 기도원에 갔었는데 그 곳에 계신 전도사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어떤 사람이 큰 목적을 가지고 산 속에 들어가 며칠 동안 울부짖으며 기도하다 소나무를 뿌리채 뽑아냈는데 그 후 응답이 왔다는 간증을 하니까 그 말을 들은 어느 사람이 자기도 문제가 있는데 산에 가서 소나무를 하나 뽑아야겠다면서 산에 올라가서 과히 어렵지 않게 뽑을 수 있는 소나무를 붙잡고 그날 밤 끙끙대다 하나 뽑고서 내려와 하는 말이 "나도 소나무를 뽑았는데 응답이 오지 않는데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믿음은 "믿습니다"하고 고성(高聲) 기도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믿음의 성취는 몇 개의 고비를 넘겨야 응답을 받게 됩니다.

● 행함이 없는 믿음
성경: 약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설원이라는 중국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우는 맹수지만 의심이 많아서 머뭇 머뭇하여 실천하는 일이 적은데 , 그렇다면 벌이나 반딧불이 독을 쏘는 것만 못하다"
이 말은 헛된 이론만 숭상하고 실상이 없는 것은 시원치 않는 사상과 말로 실행한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줄줄 외우고 형편에 따라 잘도 인용하면서 실제 행동을 보면 한심한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여우는 조그마한 벌 한 마리 만큼도 대접을 받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오늘도 행함 있는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산을 옮긴 믿음

미국 알라스카의 스티브라는 청년이 처음 교회에 나갔다. 그날 목사는 마태복음 17장 20절의 말씀을 본문으로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 길 수 있다는 내용의 설교를 했다. 그의 집 뒷산에는 겨울이면 눈사태가 나서 골치를 앓고 있던차, 그 설교를 들은 스티브는 눈이 확 뜨였다.
그는 자기가 그런 일을 해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그 믿음을 얻기 위하여 기도를 시작했다. 이 소식이 설교를 한 그 목사의 귀에 들어갔다.
목사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서 설교는 했으나 아직까지 산을 옮겼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스티브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요, 그리고는 낙심할 것이 뻔한 일이므로 그 목사는 그의 뒷처리를 좀 잘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스티브의 기도는 열흘이 가도 스므날이 가도 후퇴하지 않았다.
목사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40일째 되던 날 스티브는 벙글벙글 웃으며 목사실로 들어와서 하는 말이 "목사님, 20세기는 산을 번쩍 들어서 옮기는 것이 아니라 기계로 옮기시더군요"라고 하고는 새로 생긴 고속도로에 흙이 필요하다고 하며 큰 트럭들이 와서 그 흙을 계속 실어간 산이 거의 다 없어져 가는 것을 보고 왔다고 했다.


● 믿음의 선언

1812년 3월 12일, 인도의 세람포르에서 화제가 발생했다. 윌리암 케리와 그의 동료들이 수 년에 걸쳐 갖은 고생을 감수하여 번역한 책들이 삽시간에 연기 속에 사라져 버렸다.
성경 번역을 위한 원고들의 손실은 막대한 것이었다.
새로 주조된 타이프와 중국 금속타자기가 전손(전손)되었다.
애를 써서 편집한 원고, 문법책, 사전들이 사라져 버렸다.
이 때의 손실에 대해 케리는 이렇게 썼다.
`인쇄기 외에는 아무것도 건져 내지 못했다.
이것은 너무 큰 타격이어서 앞으로 오랫동안 성경을 인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12개월 동안 열심히 일한다 해도 회복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재산, 원고 등의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상황은 쉽게 극복되기 어려울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원고의 손실에는 거의 모든 인도 성경과 카나레스 신약 성경과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한 2권의 구약 성경과 많은 페이지의 벵갈어 사전과 테루구 문법책 전부와 푼자비 대부분과 산스크리어트어 고급사  전부와 그의 언어 사업의 걸작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와 그의 동역자들에게는 믿음의 선언이 뒤따랐다.
`틀림없이 하나님께서는 이 좋지 않은 일을 통해서 우리의 이익을 증진시 키실 것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서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났다.`
그 재해는 영국 그리스도인들의 귀를 열었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들은 그 사업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를 보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이와 같이 파멸은 선교열에 불타 는 친구들을 증가시키는 횃불인 것이 입증되었다.`


● 소망과 믿음의 승리

약 100년 전 애굽에서 3천년 된 고분을 발굴했는데 미이라가 나왔고 그 옆에 곷병이 하나 있었다.
이 꽃병을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는데 사람의 실수로 떨어뜨려 깼다.
꽃병이 깨지자 바닥에 몇 개의 완두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너무 오래되어 겉이 쭈글쭈글했고 차돌처럼 딱딱했다.
전문가들이 연구 검토한 후 땅에 심었더니 30일 후 새파란 싹이 돋아났다.
3천년간 침묵을 지킨 생명이 잠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고 그 믿음에는 분명히 소망이 있다.
이 소망은 믿음만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분명히 이뤄지고 만다.

그러기에 세계 제 2차대던째 독일 콜론의 지하실에는 "나는 태양이 빛을 발하지 않을 때도 그 태양을 믿으며,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해도 믿으며,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도 그를 믿는다"라고 쓴 글이 있었는데 이것은 분명히 어떤 전쟁 포로가 장차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조국으로 무사히 돌아갈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글일 것이다.


● 두려움의 안경과 믿음의 안경

중세기 종교개혁가 루터의 이야기다.
그의 학창시절에 독일 고학생들은 노래를 잘하면 남의 집 창문 밖에서 노래를 부르고 돈을 받아 학비를 마련하곤 했다.
물론 노래가 너무 엉망일 경우나 창문 안 주인의 성품이 곱지 못하면 무안을 당하고 빈손으로 쫓겨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한번은 루터가 어느 부잣집 창문 아래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체격이 크고 무섭게 생긴 사나이가 창문을 척 열고 바라보더니 냅다 뛰어나오는 것이었다.
루터는 그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자기 노랫소리가 듣기 싫어 주먹질이라도 할 줄 알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나이는 계속 쫓아왔다.
결국 발이 빠르지 못한 루터는 붙잡혔는데, 공포에 벌벌 떨고 있는 루터에게 그 사람은 돈 뭉치를 내밀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루터에게 장학금을 주려는 따뜻한 마음의 자선가였다.
루터는 그때를 회고하길, '나는 목소리가 별로 좋지 않다.' 라는 열등의식 속에서 노래를 하다 보니 그 사나이가 뛰어나오는 것도 자기를 해치기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루터는 "두려움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만사가 다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고, 믿음이라는 안경으로 갈아 끼면 세상이 다 감사하고 좋게 보이며,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 고 했다.
사실이다. 환경도 중요하지만 그 환경을 어떤 안경을 쓰고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다르고, 그 해석에 따라서 행복이 달라진다.

미국의 한 신발회사에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두 명의 사원을 시장조사차 보냈다.
그때 한 사원은 보고하기를 "이곳은 모든 사람이 신발을 신지 않으므로 판매 불가능" 하다는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다른 한 사원은 "이곳은 아직 아무도 신을 신지 않았으므로 판매가능 무진장"이라는 보고를 띄웠다.
전자의 불가능 사원은 평생을 말단 사원으로 마쳤지만, 후자의 무진장 사원은 그 신발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이것은 능력의 차이라기보다는 가치관의 차이이다.


● 믿음으로 얻는 구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어떤회사에서 물만 부으면 되는 케익용 가루를 시판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측에서는 그 제품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으나 기대 이하로 그 제품의 인기도는 너무나 저조했습니다. 이에 고심을 하기 시작한 회사측은 수많은 여론조사 끝에 드디어 그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그것은 케익을 만드는 방법이 너무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사측에서는 부랴부랴 제품의 내용물을 바꾸어 물과 계란을 넣으면 되는 케익용 가루를 만들어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그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구원 문제와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건 너무 쉬우므로 그것에 선행을 곁들여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우리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저희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주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 믿음의 모본
성경: 엡6:4 * 찬송: 305장, 492장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어느 목사님이 길을 가다가 그 근처에 사는 교인댁 한 곳이 생각났습니다. 그 목사님은 내가 여기까지 왔으니 그 댁을 심방하고 가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예고도 없이 목사님의 방문을 받으니 심방 받는 집에서는 반갑게 목사님을 맞이했습니다.
목사님은 자리에 앉아 말했습니다. "생각나는 성경 구절이 있어서 한 말씀드리고 가겠습니다. 성경책을 좀 가져오십시오" 그때에 그 교인은 생각했습니다. '이 기회에 우리 가정이 예수님을 얼마나 잘 믿고 있는지 목사님께 보여 드려야지.' 그래서 아이를 불러 말했습니다. "얘, 너 안방에 가서 엄마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책을 가져다주겠니?" 목사님 들으시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꼬마가 쏜살같이 달려가서 들고 나오는 책은 성경이 아니라 백화점 물품 구입 목록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그 가정의 신앙정도는 그 가정의 어린아이 말과 행동에서 밝혀집니다. 자녀교육의 첫 번째 법칙은 가르치는 교훈이나 개념보다는 본보기에 훨씬 많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됨됨이가 그들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우세합니다. 자녀들은 아주 작은 것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정보원"이라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우리가 실천함으로써 가르쳐야 됩니다.
자녀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원하시면 기도하는 모본을 보이고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순종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싶으시면 부모가 먼저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부모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모습처럼 자녀에게 아름다운 가르침은 없습니다. 따라서 부모로서의 나의 모습이 자녀에게 과연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지 돌아보고 믿음의 모본을 보입시다. 자식은 부모의 행위를 그대로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신6:1-9)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가정이 주님을 섬기며 주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며,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 믿음의 분량대로 섬김
본문: 로마서 12:1∼8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절)

영국의 스펄전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메트로폴리탄 타버나클(교회)이 있습니다. 100년전만 해도 세계 최대의 교회, 최고수준의 회중, 최고의 건물, 몇 세기에 한번 날까 말까하는 설교자를 갖추었던 그 교회가 1세기도 가기 전에 얼마나 초라하게 몰락했는지 모릅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까요? 런던도 바뀌고 사람들도 바뀌었지만 교회만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변화는 인격의 변화입니다. 또한 이 변화는 삶이 뒤따르는 변화입니다. 인격과 삶의 변화를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변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변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마음에 인격적으로 모신 사람이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고전3:16)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변화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변화입니다. 생활이 따라주는 인격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틀을 마련하지도 않은 채 무엇을 하려고 하는 데에 교회의 교회됨을 상실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나 어떤 신앙인은 직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직분이란 하나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지 그 직분이 계급의식을 갖거나 차별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한국교회가 이 세대를 본받지 않아야 할 것들 하나가 바로 계급입니다. 교회는 계급사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서로 섬기는 곳이요,서로 높여주는 곳이요, 서로 세워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것을 망각하고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정신과 그릇됨을 알아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가 무엇입니까? 다양성이 인정되는 교회를 말합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직분을 가지고 섬기는 분들이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첫째,타성에 빠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야 합니다. 옛것을 우려먹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둘째, 내가 섬기는 교회에 희망과 환희 그리고 영적인 감동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늘 처음 만났던 그 감격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셋째, 겉늙음으로 인하여 안일과 자기 만족에 도취되지 않는 것입니다.
잔칫집에서 잔치를 벌이다 보면 접시 하나 깨지고 밥그릇하나 깨지는 것은 보통입니다. 그것을 깨지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이 잔치가 아니라 그릇이 깨져도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 잔칫집입니다. 정말 신실하게 섬긴 이는 실수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밤잠 못 자고 애태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실수가 유익한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에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듣고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언제나 하나님을 찾고 부를 수 있다면 돌파구는 반드시 나타납니다.
* 기도: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 저에게 주신 사명을 성실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섬기게 하옵소서 아무도 모르는 자리라 해도 감사함으로써 섬기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노력인가 믿음인가

어느 날 화이트 부인에게 한 손님이 찾아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화 중에 화이트 부인은 “저는 확실히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화이트 부인이 구원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손님은 “부인은 화이트 부인이 되려고 노력하십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녀는 “아니요, 제가 화이트 부인인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이나 화이트씨의 부인이셨습니까?”라고 손님이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손에 있는 결혼 반지를 만지며 “이 반지를 끼었을 때부터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손님은 구원도 그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노력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 믿음은 손해보며 사는 것 입니다.

미국의 선교사 중에  제임스 엘리어트라고 하는 선교사가 있었다.
그분은 학교를 졸업하고 뜻을 같이 하는 네 명의 친구와 함께 남미 에콰도르 인디안 부족이 사는 마을로 선교를 위하여 떠나게 된다.
그러나 저들은 그곳에서 선교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창을 든 인디안들의 공격을 받아 현장에서 모두 순교 하고 말았다.
그런데 선교사들은 정글의 맹수로부터 자신들을 보호 하기 위하여 허리에 총을 차고 다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인디안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그 총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창에 맞아 순교의 피를 흘렸다.
만일 저들이 정당방위였다고는 하지만  '자기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총을 꺼내어 인디안들을 죽였다' 라고 하면 그곳에 선교의 뿌리는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저들은 그것을 생각하고 총이 있었지만 총을 쓰지 않고 창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1950년대초에 있었던 이 사건은 미국 기독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한 기독교 잡지사 기자가 그 엘리어트 선교사 부인에게 찾아가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분노하며 선교사 부인을 위로하기 시작 했다.
그때, 선교사의 부인은 그 기자에게 이렇게 대답을 한다.
"말씀을 삼가하여 주십시요. 비극이라니요. 제 남편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그곳에 갔습니다."
그리고 엘리어트 부인은 남편이 대학 다닐때에 썼던 큐티 노트 한 부분을 공개했다.
그 글은 미국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주었다.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결국 붙들고 있을수 없는 그것을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을 위하여 바칠수 있는 사람이 있다.
날 구원 하신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내 삶을 결산하기 위해 이 부족한 모습 그대로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나를 부르신 소명 앞에 부족한 대로 최선을 다하겠다. 놓쳐서는 안될 그것을 위하여 결코 끝까지 붙들고 있을수 없는 그것을 바치겠다. 젊음은 지나가는 것이다. 명성도 자기만족과 쾌락도 그리고 물질도 결국은 붙들고 있을수가 없다. 그리고 버리고 포기하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오! 하나님 오래 살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주의 뜻을 이루는 일에 제 삶이 쓰임 받기를 소원합니다. 주여! 나를 불태워 주소서."

● 행함이 없는 믿음은…

6·25 때 아이젠하워 장군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부산의 유엔군 참전용사들의 묘소를 참배할 계획이었다. 미군 당국은 당황했다. 말이 묘소이지 황량한 벌판이었기 때문이다. 때는 늦겨울이어서 잔디를 구할 수도 없었다. 그 당시 현대상사의 정주영 사장이 그 소식을 듣고는 미8군 당국자를 찾아가 자신이 묘지에 풀이 나게 할 테니까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급한 나머지 그에게 실비의 3배를 주기로 하고 계약을 체결했다.
그 길로 정주영 사장은 그 주위의 보리밭을 모두 사들였다. 때마침 보리싹이 새파랗게 솟아오르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파내어 묘지를 입혔다. 예정한 날 아이젠하워 장군은 유엔군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갔다. 묘지마다 새파란 싹이 덮여 있었으니까 보기에는 좋았을 것이다.그러나 사흘 뒤 묘지는 누렇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보리에 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결국은 그 영혼이 메말라 버릴 수밖에 없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자.


● 마음으로 믿는 믿음- 순종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구원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하신 일을 믿는다는 것은 머리와 마음으로 그리고 삶 전체로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지 워싱턴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라는 것과 그의 전기에 나오는 모든 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를 믿거나 의지하지 않아도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은 머리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 것을 포함합니다.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당신이 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가운데 거하기 위해 그분을 의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당신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용납될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하여 해주신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구원해달라고 그분께 기도로 부르짖는 것을 의미합니다(롬 10:13). 당신이 부르짖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는 마음 때문이라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주장하더라도 그리스도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순종하고자 하는 새로운 태도가 없다면, 그는 구원받을 만한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입니다.


● 임마누엘의 믿음과 순종
본문: 여호수아1:1-9
위대한 선교사 리빙스턴이 16년동안 아프리카에서 험한 세월을 보내고 자깐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그는 27번째로 열병을 앓아 몸이 몹시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또한 사자에게 물린 한쪽 팔은 힘없이 몸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글래스고 대학생들 앞에서 설교하면서 감동적인 간증을 했습니다.
"힘이 들고 고독한 선교사 생활 가운데서 저를 지탱해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이었습니다."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간 그는 몇 년 후 치덤보라는 작은 마을에 임시로 마련된 오두막에서 새벽 4시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듯한 자세로 주님이 기다리시는 영광의 나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임마누엘의 약속을 지켜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면서 그가 그처럼 영웅적인 삶을 살며 사역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바로 임마누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을 믿으면 그 믿음 자체가 엄청난 생의 에너지를 갖게 합니다.


● 소망과 믿음의 승리
약 100년 전 애굽에서 3천년 된 고분을 발굴했는데 미이라가 나왔고 그 옆에 곷병이 하나 있었다. 이 꽃병을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는데 사람의 실수로 떨어뜨려 깼다. 꽃병이 깨지자 바닥에 몇 개의 완두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너무 오래되어 겉이 쭈글쭈글했고 차돌처럼 딱딱했다. 전문가들이 연구 검토한 후 땅에 심었더니 30일 후 새파란 싹이 돋아났다. 3천년간 침묵을 지킨 생명이 잠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고 그 믿음에는 분명히 소망이 있다. 이 소망은 믿음만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분명히 이뤄지고 만다.
그러기에 세계 제 2차대던째 독일 콜론의 지하실에는 "나는 태양이 빛을 발하지 않을 때도 그 태양을 믿으며,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해도 믿으며,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도 그를 믿는다"라고 쓴 글이 있었는데 이것은 분명히 어떤 전쟁 포로가 장차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조국으로 무사히 돌아갈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글일 것이다.


 ● 믿음의 삶으로 부르신다
지난 몇 년간 나는 그네 타기 곡예를 즐겨 보았다. 당시 89세이시던 아버지가 이곳(데이브레이크)에 방문하시면서부터 나는 서커스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아버지와 난 서커스 구경을 가기로 결정했고, 그날 저녁 우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그네 타기 곡예사 다섯 명이 진행하는 서커스를 보았다. 세 명은 ‘나는’ 역이었고, 두 명은 ‘잡는’ 역이었다. 한마디로 공중 무도회였다! ‘나는’ 사람들은 공중으로 치솟았다. ‘잡는’ 이의 강한 손에 붙들리기 전에는 모든 것이 아슬아슬했다.
공연 때마다 나는 곡예사들의 용기에 끊임없이 감탄한다. 곡예사들은 잡아 주는 이의 든든한 손에 자기 손이 빨려 들면서 비행이 끝나리라는 것을 믿는다. 자신이 붙잡고 있던 튼튼한 그네를 놓아야 반대편 그네까지 우아한 반원을 그리며 날 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상대방이 나를 잡으려면 일단 놓아야 한다. 이렇게 기꺼이 내려놓으려는 자세로 사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직면한 최대의 도전 중 하나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명성이든 우리는 수많은 영역에서 어떻게든 움켜쥐려 한다. 내게 필요한 것을 내 손으로 움켜쥐어야 한다는 신념은 인간이 고난을 겪는 커다란 원천 중 하나다. 그러나 소유와 계획과 사람을 내려놓으면, 비록 모험이 따를지라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자유의 삶에 들어설 수 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기꺼이 내려놓는 자세로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는 또 하나의 스텝은 지금 가진 것을 움켜쥐지 않는 것이다. 안심할 수 있는 안전 지대를 확보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나 다른 이의 삶을 스스로 안무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따르고 싶고 사랑하는 하나님께 다 내어 드리는 것이다.


● 소망과 믿음의 승리
약 100년 전 애굽에서 3천년 된 고분을 발굴했는데 미이라가 나왔고 그 옆에 꽃병이 하나 있었다. 이 꽃병을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는데 사람의 실수로다. 꽃병이 깨지자 바닥에 몇 개의 완두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너무 오래되어 겉이 쭈글쯔글했고 차돌처럼 딱딱했다. 전문가들 이 연구 검토한 후 땅에 심었더니 30일 후 새파란 싹이 돋아났다. 3천년간 묵을 지킨 생명이 집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고 그 믿음에는 분명히 소망이 있다. 이 소망은 믿음만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분명히 이뤄지고 만다. 그러기에 세계 제 2차대전 때 독일 콜론의 지하실에는 `나는 태양이 빛을 발하지 않을 때도 그 태양을 믿으며,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해도 믿으며,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도 그를 믿는다.`라고 쓴 글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버리지 않고 인내하고 기다리면 하나님은 이뤄주실 것이다. 히뉴원굴 기자는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며 휘장안에 들어간다`(히6:19)고 하였다.


● 믿음의사랑
리챠드 범브랜드 목사가 약 30명의 크리스챤들과 함께 루마니아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김옥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감옥 속으로 밀 쳐 던져졌는데,침침한 감방 속에서 그 사람이 누구인가 알아지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감방 속의 모든 크리스챤들은 곧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던 비밀경찰의 대위였다. 그가 왜 감옥에 들어 왔는지 너무나 의아해 하는 크리스챤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 얼마 전에,열 두 살 된 소년이 자기를 면회 왔다고 하여 사무실로 들여 보내라고 했다. 수줍어하며 자기의 사무실에 들어 오는 소년의 품에는 아름다운 꽃다발이 한 아름 안겨져 있었다.
소년은 입을 열어서 말했다.`대위님,당신이 우리 엄마와 아빠를 체포해 가신 분이에요. 오늘은 우리 엄마의 생일이예요. 나는 엄마의 생일이면 꼭 꽃다발을 사서 엄마에게 선물하고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려 왔어요. 그런데 금년에는 당신이 우리 부모님을 체포해 갔기 때문에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는 꽃을 선물할 수 없게 되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크리스챤이기 때문에 나에게 늘 가르쳐 주시기를, 원수도 사랑해야 하고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나에게는 지금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이 꽃으로 대위님의 애기들의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어서 가지고 왔어요. 이 꽃다발을 대위님 부인에게 전달해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대위는 그 소년의 꽃다발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소년을 부둥켜 안고 눈물로 울었다고 한다.
그 후로 그의 마음에는 양심의 가책과 회개가 왔고 남은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 믿음으로 사랑
믿음과 기도는 새의 두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바퀴처럼 서로 의존적이다. 따라서 믿음과 기도의 밀도와 열도는 항상 정비례한다. 믿음이 식어지면 기도도 식고 기도가 뜨거우면 믿음도 뜨겁다. 또한 믿음과 기도는 근육과 같아서 쓰면 쓸수록 강해지나 쓰지 않으면 무위해진다.
한편 믿음과 기도는 성도의 생산과 창조의 도구이기도 하다. 믿음과 기도의 펌프로 지하의 무진장한 하나님의 유전에서 능력과 지혜를 퍼내야 하겠다.
재정도 퍼내고 사랑도 퍼내자. 두가지 개념을 주목하라. 1.명령과 2.약속이다. 성서는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약속이 있다.(요일 5:14)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 뜻 행할 것을 기도하면 반드시 주신다는 믿음으로 사랑의 생산자가 되자.


● 믿음 속의 사랑
스위스의 어느 심리 학자가 많은 임상 케이스를 기록한 가운데 30여 세가 되도록 사람을 전혀 믿을 수 없고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고아 출신인데 어떤 사람이든지 의심을 가지고 대합니다. 그 말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한 번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너무나 심한 천대와 학대와 사기를 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결혼을 했는데 그 부인의 고민은 자기가 사랑한다는 진정을 남편이 믿어 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3-4년이 걸려서야 비로소 자기의 진실과 사랑을 그의 마음속에 깨우쳐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과 자기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선 사람을 믿지 아니하면 사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둘에다 둘을 더하면 넷이라는 자명의 진리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고 무한하시고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에 대하여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신앙적인 인식입니다.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히 11:2)


 ● 믿음
믿음은 두 가지 요소,
 즉 믿는 것과 신뢰하는 것으로 이루져 있습니다.
 당신은 은행이 당신을 위해 당신의 돈을 보관할 수 있다고 믿지만 당신의 돈을 은행에 맡길 때까지는 은행에 대한 믿음을 행사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기차가 당신을 어떤 곳에 태워다 줄 수 있다고 믿지만 당신이 기차를 타고 그것이 당신을 목적지에 데려다 줄 것을 신뢰할 때에만 기차에 대한 믿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에게는 그의 모든 전투 때마다 그를 따라다닌 좋은 의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의사를 질투한 어떤 사람이 그를 없애 버리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에게 의사가 어느 날 아침 알렉산더 대왕의 컵에 독약을 넣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이 그 의사를 당장 처형시킬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침 식사 때 알렉산더 대왕은 그 편지를 모인 사람들에게 읽어 주고 자기가 의사를 믿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컵을 집어 그 안에 든 것을 마셨습니다.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의사를 믿고 그 의사를 신뢰하였습니다.
 복음은 그처럼 단순합니다. 성경이 예수님에 관해서 말하는 모든 것을 믿는 사람은 그의 영혼과 영원한 행복을 걸고 예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 믿음
 캐나다에 '성(聖) 앤"이라는 아일랜드의 성자가 살았습니다. 소녀였을 때, 그녀는 대단히 잔인한 주인 부부 아래에서 매우 빈약한 급료를 받으며 일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소녀에게 일 마일이나 떨어진 가파른 언덕에서 물을 길어오게 했습니다. 한때는 근방에 샘이 있었으며 지금은 메말랐으나 여러 해 동안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그녀는 아주 피곤해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읽었습니다. “내가 골짜기 가운데 샘들을, 솟게 하리라. 마른 땅에서 물이 솟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소송을 일으키라.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이 말씀은 앤을 감동시켰으며 그녀는 주님 앞에 탄원을 했습니다. 물이 그들에게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가파른 언덕을 물을 지고 나르는 일이 그녀에게 얼마나 고된지를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리고는 누워서 잠들었습니다. 그녀는 마음의 기도를 탄원했고 그녀의 확실한 증거를 보였던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그녀가 물통을 가지고 샘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그녀는“샘에 물 길러갑니다”라고 대꾸했습니다.“그건 말랐는데”라고 그 사람이 놀라서 대꾸했습니다. 그러나 앤은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를 믿었는지 누구에게 가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샘 속에는 팔십 삼 피트나 되는 깊고 맑은 찬 물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같은 방법으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십니다. 탄원을 하십시오. 확실한 증거를 보이십시오. 그런 후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역사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 믿음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무 중요한 사건이 아니라는 의식을 주는 마귀의 미소 루이스는 유명한 [악마의 편지]라는 책을 통해서 마음밭 비유를 가장 탁월하게 설명했습니다.
 어떤 영국의 노신사가 어느 날 대영제국의 도서실을 찾아갑니다. 그 노신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도서실에 들르는 그의 습관적인 태도로 그날도 도서관에 들어갔습니다. 여러 가지 책 중에서 손에 쥐어진 책이 신앙에 관한 책이었고, 이 책을 읽어 보다가 노신사의 마음 속에는 갑자기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분은 어떤 분일까? 나는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노신사에게 그 순간 악마가 찾아옵니다. 악마는 그의 마음 속에 이렇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점심 시간이야, 뭘 그렇게 생각해.” 그 순간 그는 잠시 전 마음 속에서 생각하려고 했던 하나님에 관한 의식을 누르고 식탁으로 갑니다.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또 다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마음 속에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일까?” “나는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가?” 이 때에 악마는 그 마음 속에 다시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 악마에게 감동을 받은 노신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밥 먹는데 뭘 골치 아프게 생각을 하나. 우선 식사를 끝내고 보자.” 식사를 끝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생각이 어렴풋이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노신사는 사단의 역사를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거 뭐. 있을 수 있는 생각이지. 오늘은 너무 바빠. 집에 가서 할 일이 많아.”
 그는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탑니다. 버스 좌석에 앉자 신문을 읽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런 자극도, 아무런 변화도 경험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때, 루이스는 이런 인상 깊은 그림을 그립니다. 마치 자신에게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고 버스를 타고 가는 이 노신사 뒤에서 악마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고 말합니다.
 
● 믿음과 두려움
 시 56:3; 사 12:2; 눅 8:50; 막 5:36
  한 스코틀랜드인 신자가 친구에게 말했다.
 "여보게, 나는 오늘 읽은 말씀 중에서 아주 훌륭한 교훈을 발견했다네.""오, 그래? 그럼 내게도 그것을 들려주게."
 "그래, 읽어 주지."
 말을 건넨 친구는 의기양양하게 그가 발견한 성구를 읽기 시작했다.
 "그 말씀은 바로 시편 56:3이라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친구도 동의하면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참 훌륭한 말씀이군 . 그런데 말야, 나도 오늘 아주 훌륭한 교훈을 발견했지. 자네가 발견한 것보다도 더 훌륭한 의미가 있는 말씀이라네. 자, 이사야 12:2을 보게나. 그 곳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네.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자, 어떤가?" (MOODY MONTHLY)
 
 ● 믿음과 순종
 심상 15:22; 딛 1:6; 롬 1:5; 느 9:34
 멕시코에 있는 쿠이케텍 인디언과 체르탈 인디언의 방언에는 `믿는다'라는 말과 `순종한다'라는 말을 구분하지 않는다. 한 단어에 두 의미가포함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을 안 초기 선교사들은 미개한 인종의 언어라서 언어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언어는 불완전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그들은 두 단어를 구별하려는 문명인들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사실 그들 언어의 불완전성은 문명인들에게 깊은 생각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두 말이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믿으면 순종하게 되지 않습니까? 순종한다는 것은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만문한다. 그들의 생각은 옳다. 오히려 문명인들이 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뻔뻔스러운 존재, 즉 외식자(외식자)로 우리 자신을 만들고 있다. 오히려 쿠이케텍 인디언과 체르탈 인디언이 비록 미개한 민족이라 하더라도 문명인들보다 진리에더 접근해 있다. 적어도 그들은 문명인들이 빠져 있는 종교적 자가분열증에는 걸려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문명인들처럼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도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불열신앙은 갖지 않은 것이다.
 
 ● 믿음과 의심
  어느 교회 사모님이 몸이 허약해서 늘 근심이었다. 병원에 검진을 하고 의사의 진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인 목사인들 편할 리가 있겠는가?
 말씀보고 기도하고 안정 부절 못했다. 불안해하는 아내에게 하나님 말씀에 두려하지 말라 주께서 붙들어 주신다고 전해 주었다. 그러나 당사자는 불안을 감출길 없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그 다음날 결과를 알아보려고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 의사가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상입니다."그러자 사모의 얼굴에 화기가 돌고 얼굴이 밝아 졌다. 다음주 설교 시간에 남편이 강단에서 사람이 의사의 과학적인 토대로 한 말에 대해서는 금방 쉽게 받아 드려진다. 그러나 성경을 보고 기도한 목사의 말, 아니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더디 믿는다고 꼬집었다. 그렇다 사람의 믿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연약하다. 목사도 기도하지 않고 말씀 보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그날 진단을 하던 날 사모님이 먼저 병원에 가고 목사님이 병원에 뒤 따라 갔는데 시간이 남고 해서 혈압을 쟀는데 평상시 혈압보다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목사가 말로는 하나님께서 붙드신다고 아내에게 위로했지만 목사 역시 불안했던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믿음이 강한 것이 아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몸부림치다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을 주시리라."...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4:40)
 
 ● 믿음앞에 능치 않음은 없다
링컨은 게티스버그의 결정적인 전투전야에 매우 침착했고 자신에 차 있엇다.
 그의 이런 모습은 장교들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었다.
 "국가의 장래가 불투명한 기로의 시간, 어떻게 이처럼 담대하고 평온하실 수 있습니까?"
 장교들이 링컨에게 물었다. 링컨은 신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난 지금까지 하나님께 기도하며 국가의 장래를 맡겼소. 그분은 국가가 보전되리라는 것과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내게 주셨다오."

 ● 믿음에는 노력이 포함되지 않는다
 행 27:25; 요 20:27; 막 16:14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너력하는 것에 의하여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오늘 일어난 일을 내게 말햇다고 하자. 나는 그를 향하여 "나는 당신이 말한 것을 믿으려고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이 진실하다고 생각하면 그의 말 역시 진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그를 성실치 못한 사람으로 생각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믿는다는 사실 중에는 `노력한다'는 요소는 조금도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만 구원이 있다."라고 선포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거나, 혹은 믿지 않아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거나 하는 둘 중의 한쪽을 선택해야 된다.(C. H. 스퍼전)
 
 ● 믿음으로
  1973년 2월. 그때는 버스 사역이 대단하던 시기였는데 그때 나는 버지니아 주의 린치버그에서 열린 교역자 회의에 참가했었다. 제리 포웰 목사의 버스 사역에 대한 간증을 통해 그 자리에 모인 우리 5천 명은 버스 사역에 대한 꿈을 갖도록 도전받았다. 나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존. 너는 1년이면 네가 처음 왔을 때의 교인 수만큼을 이 버스 사역을 통해 더 얻을 수 있을거다.” 당시 우리 교회 평균 교인 수는 418명이었다. 그런데 나는 버스 한 대조차도 없었다. 나는 나의 숙소로 돌아와 누우면서 말했다. “하나님. 정말로 제가 버스 사역을 하길 원하십니까.” 포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내일은 여러분에게 카드를 나눠드릴 겁니다. 여러분은 1년 내에 버스로 사역하고 싶은 신입 교인의 숫자와 여러분의 이름을 적어 제출하십시오. 그러면 저희는 앞으로 가져다가 여러분에게 읽어드릴 겁니다.” 나는 생각했다. “아냐. 말도 안돼. 온 세계에서 온 5,000명의 사람들 앞에서 이것을 발표하겠다고.” 나는 밤새 씨름했다 그 다음날 나는 그 카드를 받아들고는 418이라고 기록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나는 카드를 제출 했고 그것은 5,000명 앞에서 읽혀졌다. 나는 “내 생애 최대의 실수를 저질렀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연고로 나에게는 전도의 동기가 주어졌다. 포웰 목사는 우리 교회 임원회에 편지를 보내서 나의 목표를 알렸고. 나는 이 계획이 임원회에 상정되기도 전에 버스 구입을 위한 기금 마련을 시작해야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1년의 기한 내에. 글자 그대로 그날로부터 딱 1년 만에 우리는 버스 사역으로 438명을 얻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나가서 꿈을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에게 도전이 되는 것들은 감싸안고 앞에 놓여질 난관을 그려보라. 그리고 부정적이 아닌 적극적인 태도로 대응하는 연습을 하라. 그래서 그 도전들로부터 발견하는 법을 터득하도록 하라.

 ● 믿음으로냐, 두려움으로냐
 대하 20:20; 막 4:40; 약 1:3
  청년들이 보트를 타고 물가의 휘어져 굽은 곳을 건너자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였다. 그런데 도중에서 풍랑이 심해지자 보트가 몹시 흔들렸다. 그러나 청년들은 침착하고 힘차게 노를 저음으로써 보트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들은 도리어 풍랑과 싸운 것을 통쾌하게 여기며 즐겼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한 소녀만은 예외였다. 그녀는 물결이 보트를 휩쓸때마다 놀라 떨며 부르짖었다.
 어쨌든 그녀도 배와 함께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단지 차이점이있다면 한편은 걱정과 공포로 여행했고, 다른 한편은 신념과 용기로 여행을 즐겼다는 것이다. (린드벅)
 
 ● 믿음은 생명을 지켜주는 빛
 어느 날 영국의계관시인인 테니슨이 친구와 같이 후원을 거닐며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친구는 테니슨에게 물었다.
 "자네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나?"
 테니슨은 말없이 한참 걷다가 가장 아름다운 꽃앞에 와서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여보게, 나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이 꽃과 저 태양의 관계와 같다네. 이 꽃은 태양의 빛과 열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4:7)

 ● 믿음은자라난다
  나는 1947년에 처음 내가 이 사역을 시작했을 때보다는 지금이 더 많은 믿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믿음 자체의 성질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1947년에는 적은 믿음이었던 것일 따름입니다. 그것은 둘 다 적은 믿음이며. 단지 지금은 약간 더 커진 상태의 적은 믿음일 뿐입니다. 그러나 두 종류가 모두 풀어놓아지기를 기다리는. 내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내가 어떤 일을 성취하였을 때마다. 나는 내가 좀더 많은 믿음을 풀어놓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내가 또다시 물 위를 걸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금광 탐색자가 귀한 광물을 아주 조금밖에 발견하지 못했던 것 이상으로 당신이 적은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에 대해 낙심하지 마십시오. 금탐색자는 아주 적은 금부스러기라도 나온 곳에는 그보다 더 많은 양의 금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그는 그것으로 인해 계속 금을 채굴하는 것입니다. 폭풍우가 당신과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계속하여 내리칠 때.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계속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줄까요. 그것은 당신이 가진 적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의 아주 작고도 작은 조그만 부분입니다. 그것은 당신 안에 그보다 더 많은 것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적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는 단지 적은 믿음을 가지고서 그처럼 엄청난 일을 했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맙시다. 그리고 그 믿음조차도 의심과 섞여 있었던 믿음이란 사실을. 이처럼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것을 받으셔서 그것으로써 이적을 행하시는 아주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 믿음의 격려
 윈스턴 처칠 수상은 후배들과 수행원들을 잘 격려해 주는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한 번은 자기의 후배 중 국회의원이 된 사람 하나가 국회에서 처녀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하는 연설이라 얼마나 두렵고 떨리겠읍니까. 그래서 말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처칠은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쪽지를 건네주었습니다. 연설 도중에 이 사람이 메모를 받았습니다. 그 메모의 맨 밑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너는 해낼 것이다. 처칠.”
 이 격려로 그는 용기 백배하여. 연설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가 있었습니다. 믿을 만한 한 사람의 격려가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주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 만물을 손에 쥐고 계신.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의 삶이 형통하지 않겠읍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내 음성을 들어라.
 그리고 내 음성에 순종하라.”
 만약 이런 말씀이 나에게 들려와 내가 그 길을 걸어갈 수가 있다면..
 우리의 눈이 열려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우리의 귀가 열려 지금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말씀을 지키기만 하면 인생은 황무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황무지를 가나안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황무지와 계곡이 도사리고 있는 험준한 땅 속에 젖과 꿀이 흘러내리는 기적을 창조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믿음의교훈
  어린이들은 아주 작은 일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예를 들어, 스미쓰씨 가정의 잭키는 사랑하는 개가 갑자기 죽어버려 몹시 슬퍼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잭키를 위로하였다. “잭키야. 네 마음이 어떨지 잘 안다. 그렇지만 이걸 기억해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다 아시고 보살피고 계신다는 걸. 성경에서 이렇게 말했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 개에 관한 일도 알고 계시지 않겠니? 잭키야. 주님께서는 어떤 목적없이는 결코 아무것도 우리에게서 빼앗아가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대신 더 좋은 것을 주실 때가 참 많단다.” 이틀 후 친구가 조그만 콜리종 강아지를 가져다 주었을 때, 잭키는 믿음의 교훈을 얻게 되었다. 잭키는 언제나 콜리종 개를 가지고 싶어했지만 아버지에게는 그 개를 사줄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제 잭키는 아버지가 설명해 준 바로 그대로, 주님께서 그 강아지를 자기에게 보내주신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어린이들은 '때'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전쟁, 폭동, 휴전위반, 불신앙과 그외 수많은 일들은 그들에게 극심한 당황을 가져다 주게 된다. 그들은 이 모든 문제들이 어떻게 여러 시대를 거쳐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되어 왔는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혼란에 사로잡히게 된다. 부모가 세상의 일들을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에 비추어 해석해 주는 가정에서 자라난 어린이는 훨씬 더 평화로울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된다.

 ● 믿음의 그릇
  어떤 군목이 최전방에서 군목 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벌통을 쳐서 꿀을 땄습니다.
 아주 좋은 꿀을 따서 부대에 있는 모든 군인들에게 광고를 하여 누구든지 빈그릇을 가지고 와서 꿀을 타가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군인은 박카스 병을 가지고 와서 꿀을 받아갔고, 어떤 군인은 링게르병을 가지고 왔고, 또 어떤 이는 스페아 깡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군목은 군인들이 가지고 온 빈병에 다 꿀을 가득히 넣어 주었습니다. 박카스병은 박카스병만큼, 링게르병은 링게르병만큼, 스페아통은 스페아통만큼 꿀을 부어 주었습니다. 그후 항의 전화가 걸려오기를 공평하지 않게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군목이 대답하기를 "누가 박카스병을 가지고 오라고 했소? 나는 빈 그릇을 가져 오라고 했고 그 빈그릇대로 채워 줬을 뿐이오."하는 것이었습니다.

● 믿음의 기도
  중요한 수술로 어머니가 3주 동안 병원에 입원하셨던 적이 있었읍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나는 아버지의 눈물을 생전 처음으로 목격했읍니다. 아버지는 내게 말씀하셨읍니다. "네 어머니가 죽어가고 있다. 몇 시간을 주기로 크게 위급한 상태가 반복되고 있단다. 심장의 박동이 멈춘 적도 있었다고 하더라. 의사 선생님은 네 어머니가 얼마 더 살지 못할 거라고 하는 구나. 청천벽력같은 소리였읍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읍니다. 그 이튿날 아침, 마치 내 기분을 말해 주고 있기나 하듯,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읍니다. 나는 속으로 흐느끼며 길을 걸었읍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럴 수는 없어요. 제발 우리 엄마가 죽지 않게 해 주세요. 내게는 엄마가 있어야 돼요. 아빠에게도 엄마가 있어야 돼요. 우리는 모두 다 엄마를 필요로 해요... 나는 주님께서 엄마를 고쳐 주실는지 정말로 알고 싶어요. 엄마를 살려 주실지 제게 말씀 좀 해주시겠어요? 제발 어떻게 해서든지 제게 좀 보여 주세요. 주님!" 이렇게 나는 간절히 기도했읍니다. 이렇게 기도해 놓고서 나는 난처해졌읍니다. 어떤 방법으로 보여 달라고 한다지? 하는 머리 위에 시커멓게 몰려 있는 구름을 쳐다보면서 얼결에 "주님, 엄마를 낫게 해주실 것이라면 지금 저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치도록 해주세요"라고 말했읍니다. 거의 순간적으로, 구름이 갈라지면서 햇빛이 쏟아져 내렸읍니다. 곧이어 틈은 다시 메꿔져 버렸읍니다. 그렇지만 나는 알았읍니다. 사흘 후 우리 형제들이 거실의 낡은 청색 카펫트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드리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읍니다. 아빠의 기뻐하시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 왔읍니다. "위험한 순간은 지나갔다. 엄마는 곧 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내가 어찌 의심할 수 있었겠읍니까?

● 믿음의 기도
 어떤 가련한 과부는 많은 액수의 요금 청구서를 받아들고 큰 낙담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녀가 요금을 이미 다 치뤘는데도 청구서가 다시 날아왔던 것입니다. 그녀는 이미 치룬 영수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요금을 다시 지불해야 되지 않을까 두려워 했습니다. 그녀가 가진 돈은 자기 남편의 장례비로 거의 다 써버렸기 때문에 그녀는 영수증을 찾게 해달라고 주님께 특별히 기도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수금원이 그 과부의 집을 방문하여. 만일 그녀가 며칠 안으로 요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법정에 고소하겠다고 윽박질렀습니다. 바로 그 때 나비 한 마리가 열린 창문으로 날아 들어왔습니다. 이걸 본 그녀의 어린 아들은 그것을 잡아 학습 과제물에 보탤 욕심으로 그것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이 그것을 잡으려 하자 나비는 소파의 등 위에 내려 앉았다가 그 뒤로 기어들어가 버렸습니다. 소년은 그 무거운 가구를 혼자 옮길 수 없었기 때문에 수금원에게 자기를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들이 가구를 밀어제끼자 종이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것을 집어든 과부의 눈은 기쁨과 흥분으로 동그랗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영수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간절한 믿음의 기도를 존귀케 하셨던 것입니다.

● 믿음의 깊이
 블론딘이라는 유명한 곡예사가 세계 최대의 폭포인 나이애가라에 쇠줄을 매달고 그 줄위를 자전거로 건너가는 묘기를 선보였다. 수천명의 관중들은 환호했다. 블론딘은 "이번에는 아이를 업고 줄을 타겠소. 내가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관중들은 "할 수 있소"라고 외쳤다.
 그러나 블론딘이 "여러분의 자녀중 일곱살 미만의 아이를 올려보내 주십시오"라고 말하자 관중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막상 "인생을 맡기라"고 하면 침묵하는 것이 현대인의 나약한 모습이다.

● 믿음의 나락
  코끼리를 산채로 잡는 사냥법입니다. 먼저 코끼리를 정글로부터 유인하여 미리 만들어 놓은 우리에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코끼리의 발목에 든든한 쇠사슬을 매어 놓고 한 끝은 튼튼하고 굵은 나무기둥에 묶어 놓습니다. 그후 우리를 치우면 야생의 코끼리는 정글로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러나 발목에 묶인 쇠사슬 때문에 몇발작 걷다가는 저지를 당합니다. 처음에 코끼리는 쇠사슬로부터 놓여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며 있는 힘을 다 동원해 보지만 계속 실패를 하게 되고 결국엔 체념하며 비록 코끼리가 끊고 도망갈 수 있을 정도의 기둥과 줄에 묶어놔도 조금만 줄이 팽팽해지면 힘쓰기를 포기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대로 줄을 잡아당겨 코끼리를 훈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체념은 소망을 포기하는 행동이며 믿음을 저버리는 행동입니다. 처음의 고통이나 고난이 비록 견디기 어려울지라도 믿음과 소망을 갖고 기다리며 노력하면 결국에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믿음의 모본
  저는 “아이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간첩”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날 귀찮은 손님이 찾아와서 “주인 양반 계십니까?”하고 묻습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아침에 일찍 나가셨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 광경을 아이가 봤습니다. 그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어, 저럴 때 저렇게 거짓말을 하시는구나.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데도 안 계시다고 하는구나. 거짓말을 해도 되는구나.' 그래서 거짓말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전화로 옆집 부인 흉을 봅니다. “우리 옆집 새댁은 어른을 봐도 인사는 커녕 본 척도 안해요.” 아이가 옆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그 말을 들었습니다. '아, 전화로는 저렇게 남을 흉보는 것이구나.' 부모의 사소한 행동을 모두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에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려주면 아이는 '아니 어떻게 된 일이지? 아빠, 엄마는 안 그러시면서 흉보는 것이 사랑하는 건가 뭐'라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들이 자녀 앞에서 위선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그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저 아무 소리 안 하고 가만히 있으니까 모른다고 생각되겠지만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아이들은 똑똑합니다. 아주 작은 것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칠 때 첫째는 우리가 실천함으로써 가르쳐야 됩니다. 아이들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원하시면 기도하는 모본을 보이십시오. 아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순종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싶으시면 당신이 먼저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많은 아버지들은 “교회 가서 손해볼 것 없으니까 애들이나 데리고 가. 나는 안갈래”합니다. 그것이 무슨 본입니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본을 보임으로써 가르쳐야 됩니다.

● 믿음의 모험
  얼마 전 워싱톤에 있는 조폐공사에 한 관광팀이 도착하여 녹인 주물을 동전의 모형에 부어넣는 과정을 견학하였다. 직
 공은 한 남자에게 이렇게 제의하였다. "선생님, 당신이 손을 물에 대고 있으면 제가 이 주물을 붓겠읍니다. 그래도 손
 이 화상을 안입게 되지요. 한 번 시험해 보실까요?" 그랬더니 "천만예요, 그러나 당신 말은 그대로 믿겠읍니다"라고 그
 남자는 대답하였다. 그 때 그의 아내가 왔으므로 직공은 그녀에게 같은 제의를 했다. "네, 좋아요"라고 그녀는 선뜻 동의하였다. 실험이 안전하게 끝나자 그 직공은 남편되는 사람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저를 믿는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사모님은 저를 신뢰하셨답니다." 아내는 직공의 말과 기술을 믿고 대담하게 모험을 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신실함에 모든 것을 걸었었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 믿음은 어디로 인도되는지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희생제물로 준비했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이 이삭을 원하시며 '어떻게'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이루실 것인지를 몰랐다. 모험적인 그의 믿음이 그로 하여금 신실한 자의 아비가 되게 하였다.

 ● 믿음의 비교
  5월달에 우리 나라에 들어온 둘로스라고 하는 선교선이 있습니다. 350명의 선교사들을 태우고 세계 곳곳을 누비면서 선교를 하는 배입니다. 작년 8월10일 토요일에 텝리핀 잠보앙가라고 하는 곳에 선교사들이 내려서 전도집회를 했습니다. 그때 회교도인 젊은이가 나타나서 수류탄을 던져서 선교사 두 명이 즉사하고 32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죽은 선교사는 스웨덴 출신인 18세의 소피아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19세의 카렌이란 아가씨인데 뉴질랜드에서 왔습니다. 꽃다운 젊은이들이 죽은 것입니다. 자기 자녀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들은 배에다 전보를 쳤습니다. 뭐라고 쳤는지 아쁠니까? “우리는 이 비참한 일에 잘 대처하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복음 전하는 일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그 내용을 직접 읽었습니다. 부모님들이 어떻게 이처럼 대범할 수 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비교한 것입니다. 자기 딸이 죽은 것하고 장차 주님께서 약속한 영광하고 비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 딸이 피지 못하고 꺾였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당한 것이니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의 비교를 한 것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딸을 잃은 슬픔을 가누기 어려웠겠지만 이 슬픔은 장차 주님께서 나타나실때 주실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기 때문에 “더 복음을 열심히 전하시오”하고 격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믿음의 선물
주여 제게 믿음을 주소서
매일 매일의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평온한 마음을 주시고
주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손을 붙잡아 주소서
모든 것 가운데서
당신을 찾을 수 있는 고요한 마음을 주소서
주께서 원하시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순전한 영혼을 주소서
미래는 주께서 주신 선물
주의 사랑을 믿기에
두려움 없이 그 앞으로 나아갑니다
-영국 시인 J.옥스남의 '믿음'-


● 믿음의 연단
  뮬러의 기도로 운영하는 사업이 외관상으로 화려한 것 같으나 실은 믿음의 연단 속에서 맺어진 결실이었다. 어떤 때는 육 년을 연달아 극한 믿음의 시련을 견뎌야만 했다. 한 번은 아이들에게 아침끼니를 이어주어야겠는데 양식이 떨어져 버렸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굶는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뮬러는 아이들 전부를 빈 식탁 둘레에다 않혀놓고 감사기도를 드렸다. "오늘도 아침 식사를 주시니 감사 합니다. 아멘."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떴으나 식탁 위엔 빵조각 하나 얹혀져 있지 않았다. 그 때였다. 대문을 요란스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힘겹게 들어서는 사람은 빵이며 고기를 잔뜩 바구니에 담아가지고 가까스로 들어오는 이웃 음식점 사람이었다. "어젯밤까지 손님을 다 치르고도 남은 것들을 주체할 데가 없어 고아원으로 끌고 온 것이다"고 했다. "믿음을 강하게 하는 유일한 길은 믿음의 연단뿐이다."는 것은 뮬러가 늘 즐겨 쓰는 말이었다. 믿음의 연단이 아니고는 참 믿음, 거짓 믿음을 분간할 수 없다. 믿음이 참 믿음으로 나타나기는 연단을 통해서 뿐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마음을 연단 하신다. 연단 뒤에 오는 축복은 너무나 광명스럽고 놀라워서 말을 못 한다.

● 믿음의 열매
 1955년 미국에서 흑인가수로는 처음 메트로폴리탄에 출연, 영감있는 노래로 관중을 사로잡은 여가수가 있었다.
 마리아 앤더슨. 그녀의 대표적인 곡은 '그 누가 나의 괴로움 알며'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인종과 피부에 대한 편견과 차별로 불행한 날을 보냈다. 그러나 기독신앙은 모든 고난을 이기고 더욱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게 했다.
 "내 괴로움을 아무도 모르나 오직 주님은 아신다."
 그녀는 이런 고백을 하며 현실을 극복했다. 주님이 내 괴로움을 아신다면 무엇이 두려우랴.

● 믿음의 열매
 1811년 영국의 바드게이트라는 한 지방, 조그만 빵집에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 주위 사람들은 이 소년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19세기 사람들로부터 '위대한 의학자'라는 칭송을 받은 인물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제임스 심프슨.
 현대의학의 시금석이 된 마취제를 발견한 주인공이다.
 그는 앞날을 예비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힘든 현실을 극복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늘 그와 함께하신 것이다.

● 믿음의 위력
 오래 전 평안북도 정주에 살던 가난한 농부가 열병을 앓앗다. 이웃에 살던 크리스천이 이 사람에게 신앙을 가지라며 전도했다.
 '나 같은 사람이 예수를 믿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며 완강히 거부했던 농부는 나중에 외국인 선교사의 방문을 받고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날 이 농부의 열병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진짜 '유익한 일'이 후세에 나타났다.
 이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복음 안에서 성장, 1946년 지금의 연세대 초대 총장이 된 것이다. 백낙준 박사 이야기다.

● 믿음의 응답
 두려움이 많은 세상이다. 불행이나 고통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불쑥 우리에게 찾아와 삶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러나 「영원한 약속」인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편55:22).외국에서는 이런 글귀가 적힌 액자를 현관 입구에 걸어놓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불안이 노크할 때 믿음으로 응답하며 나아가면 아무 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 믿음의 잔
  믿음은 두 가지 요소, 즉 믿는 것과 신뢰하는 것으로 이루져 있습니다. 당신은 은행이 당신을 위해 당신의 돈을 보관할 수 있다고 믿지만 당신의 돈을 은행에 맡길 때까지는 은행에 대한 믿음을 행사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기차가 당신을 어떤 곳에 태워다 줄 수 있다고 믿지만 당신이 기차를 타고 그것이 당신을 목적지에 데려다 줄 것을 신뢰할 때에만 기차에 대한 믿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에게는 그의 모든 전투 때마다. 그를 따라다닌 좋은 의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의사를 질투한 어떤 사람이 그를 없애 버리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에게 의사가 어느 날 아침 알렉산더 대왕의 컵에 독약을 넣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이 그 의사를 당장 처형시킬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침 식사 때 알렉산더 대왕은 그 편지를 모인 사람들에게 읽어 주고 자기가 의사를 믿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컵을 집어 그 안에 든 것을 마셨습니다.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의사를 믿고 그 의사를 신뢰하였습니다. 복음은 그처럼 단순합니다. 성경이 예수님에 관해서 말하는 모든 것을 믿는 사람은 그의 영혼과 영원한 행복을 걸고 예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 믿음의 전도는 영원하다
 스펄전(1834-1892)은 널리 알려진 영국의 대중전도자.
 어느 날 스펄전이 택시를 탔을 때 기사가 "손님. 아주 오래 전에 손님을 모신 적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 기억하지 못해 미안하군요."
 스펄전의 말에 기사는 주머니에서 빛바랜 신약성경을 꺼내며 정중히 말했다.
 "10여년 전이었으니 기억하시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요. 그때 손님께서 이 조그마한 성경을 주시며 읽어보라고 하셨지요. 저는 이 성경을 읽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다시 태어나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 믿음의 축복
 이스라엘 우화.
 창조주께서 처음 새들에게 날개를 주셨을 때 새들은 그것이 '창공을 나는 특혜'인 줄 모르고 "뭐 이런 것을 달아주셔서 다니기 불편하게 만드셨습니까?"라고 불평했다.
 "그것은 날개다. 힘껏 펼쳐 보아라."
 창조주께서 말씀하셨지만 새들은 불평만 하고 날개를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 용감한 독수리가 높은 곳에 올라가 힘껏 날개를 펼쳤다.
 이렇게 최초의 비상은 섭리에 따른 믿음에서 이루어졌다. '고통의 짐'을 '은혜의 날개'로 믿고 감사하는 사람이 복을 얻는다.


● 믿음의 행보
  한 세균학 검사실에서 3백여 종류의 우유 견본 검사 의뢰가 들어왔는데 조수가 교수에게 일이 벅차겠다고 걱정했더니 그가 하는 말이 “한 번에 하나씩만 하면 벅차지 않아”라고 말했다. 이 평범한 말 가운데서 우리는 인생의 중요한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산더미 같은 일생의 과제를 한꺼번에 처리하려고 하다가 부담이 되어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시작이 반이라고 생각하고 해보면 쉽게 풀리는 것을 기억하고 꾸준히 끝까지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오게 된다. 하루 한 시간씩 집중적으로 성경을 일생 동안 공부하면 신학자가 될 수 있고 하루에 한 사람 전도하면 최대의 전도자가 될 수 있다. 거북이처럼 걸어가야 한다. 신앙은 인내이기 때문이다. 욥은 졸지에 재산을 잃고 자녀도 건강도 그리고 아내도 잃고 친구의 공격을 받았지만 믿음의 행보를 결코 중단하지 않았다. 하루하루를 정성껏 살면 후 일에 보람을 지닐 수 있다. “보라! 난 이겨냈노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한 번이라도 패배가 싫으면 아예 시합을 말아야 되듯 고통과 패배가 없는 삶을 원한다면 차라리 삶을 포기해야 한다. 주검은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고통, 패배, 고난, 슬픔이라는 감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지금 탕자를 찾고 계신다. 머리에 과학의 모자를 쓰고 허리에 이성의 칼을 차고 등에는 재물의 배낭을 메고 손에는 쾌락의 지팡이를 짚고 사는 현대의 탕자를 부르고 있다. 하루에 한 발자국만 주님 앞으로 나아가자.

● 믿음이 슬픔을 덜어준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의 나는 절친한 친구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나의 동료 목사인 그는 방금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발지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사망 통지서를 받은 터였다. 그 아들도 목사가 되기로 결정되어 있었고 충분한 성직자의 자질을 지닌 청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느꼈다. 그와 내가 침묵 속에서 함께 앉아 있을 때 그는 차분하고 사랑스럽게 아들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 했다. "나는 한탄하거나 하나님께 반항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내 아들은 가 버렸다오. 언젠가는 그 애를 다시 만날 수가 있겠지요. 한 가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제 그 아이가 여기 없기 때문에, 내 몫의 목사직뿐만 아니라 아들 몫까지 두 몫의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할 작정입니다." 그는 이 불가피한 사건을 용기있게 받아들였으며 그를 좌절시키는 힘과 싸워서 승리한 것이다. 우리가 슬픔을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가 지닌 믿음의 크기에 따라 그 슬픔을 유발하는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셈이다.
 [존 수더랜드 보낼]


● 믿음이 지켜지는 좋은 세상

터키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옛날 왕이 민정시찰을 나갔을 때 한 가난한 여인이 왕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제가 잠든 사이 도둑이 들어와 물건을 훔쳐 달아났습니다"라고 말했다.
"물건을 생각하면 잠들지 말았어야지. 어찌 잠들었는가?"
왕이 묻자 여인은 "저는 폐하를 믿고 편히 잠들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늘 깨어 백성을 보살펴 주시리리라 생각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이 '믿음의 여인'에게 큰 상을 내렸다.
하나님을 이처럼 믿고, 서로가 서로를 이처럼 믿는다면 '좋은 세상'이 될 텐데….

● 믿음이라는 줄

한 소년이 연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연이 너무 높이 올라가는 바람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은 타래에 묶인 실이 곧바로 서 있는 것을 보고 연이 바로 머리 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소년을 쳐다보며 "연이 어디 있는지 안 보이는구나. 너는 아니?"라고 물었다.
소년이 대답했다. "그럼요. 이 줄을 잡아보세요. 팽팽하잖아요. 연은 보이지 않지만 제 머리 위쪽에서 푸른 하늘을 날고 있어요. 줄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지요."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지키시고 복 내려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분명히 안다. 우리의 '연줄'은 믿음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 믿음 있고 사랑 없는 것이

바리새교인이란 반드시 위선자는 아니었다.
모범적 바리새인이란 믿음 있고, 사랑없는 자였다.
그들은 말했다.
하나님을 믿으라, 그러면 구원될 것이다 라고.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러면 구원되리라고.
예수님과 바리새인과의 충돌은 사랑과 믿음과의 충돌이었다.
보다 좁은 믿음이, 보다 넓은 사랑의 우선권을 인정할 수 없어 이것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양자가 한가지로 하나님께 쓰이려했다.
바리새인은 믿음으로써, 예수님은 사랑으로써 그러므로 저 신성한 비극이 있었던 것이다.

● 믿음 표

어떤 교우가 꿈에 새 예루살렘성에 가 보게 되었읍니다.
높은 시온산 꼭대기는 새 예루살렘성을 잘 지었는데 금강석과 홍보석과  가지 각색 보석으로 아름답게 장식한 성이었읍니다.
“내가 정말 새 예루살렘성에 가까이 왔구나.”
한 걸음 두 걸음 점점 올라가 보니 큰 문이 있는데 계시록에 기록한 대로 큰 진주 하나로 된 문이었읍니다.
“야. 내가 새 예루살렘성에 왔구나” 생각하고 문을 두드렸읍니다.
두드리자마자 문이 곧 열리더니 베드로가 척 내다봅니다.
“저는 아무 교회에서 온 아무개올시다.”
그러니 베드로가 묻습니다.
“이 성에 들어오려면 믿음표가 있어야 하는데. 믿음표 가지가 왔느냐.”
이 분이 “네. 가져왔읍니다”하며 안주머니를 만져 보니 믿음표가 없어졌단 말입니다.
옆 주머니를 보니 거기도 없단 말입니다.
아무리 뒤져도 믿음표는 없었읍니다.
”있는 줄 알았는데 없어졌읍니다.”
그러자 장사꾼이었던 이 분은 사정을 해보았읍니다.
“나에게는 믿음표가 없지만 아무 교회에 십년 이상을 다니고 했는데 좀 들어갈 수 없읍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그것은 안되네. 아무리 오래 다녀야 쓸데 있나 믿음표가 있어야지.”
“그런게 아니올시다. 사실은 제가 그 교회에서 장로 일을 십여 년이나 봤읍니다. 그래도 좀 들어갈 수 없읍니까.”
베드로 사도가 하는 말이 “아니. 장로 십여년이나 믿음 없이 했으면 말썽꾸러기였겠구먼. 그게 무슨 쓸데가 있어”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갔읍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질이 급한 분입니다.
문을 꽝 닫는 소리에 깨 보니 꿈이더랍니다.
그것이 꿈이었기에 다행이지 꿈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읍니까.







05-16-2024(목) 요한일서 5:4-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상을 이기는 자(5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Who is it that overcomes the world? Only he who believes that Jesus is the Son of God.


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For everyone born of God overcomes the world.
This is the victory that has overcome the world, even our faith.


아들의 믿음인가?
아니면 종의 믿음인가?
아들의 믿음은 은혜와 축복
종의 믿음은 억지로 하는 것이다.

요한 웨슬리의 간증
"내가 회심을 하고 중생을 체험하기 전에도 선교사였으며 예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예수를 열심으로 믿었고 온갖 교회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들의 믿음이
아니요 종의 믿음을 가졌었습니다. 종의 믿음은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아들의 믿음은
은혜요, 축복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듣는 메세지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도 동일하게 선포합니다.
사도 요한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동일하게 선포하셨습니다(요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세상을 이긴다는 말씀이 바르게 적용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짓과 부정이 세상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말씀이 세상을 이기지 못한 때에 위로가 될 수 있지만 삶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각각 흩어질 제자들을 보면서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잘못되었을까요?
이제 출발한 연약한 믿음의 공동체들에게 요한서신을 마감하면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선언이 잘못된 것일까요?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께로서 난 그 믿음으로 세상을 이겼다는 선포에 대한 의심이라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이런 선포에 대한 의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가진 믿음에 대해서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복음이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싸움도 하기 전에 먼저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의심이 우리를 지배하면 우리의 신앙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사단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믿음으로 승리하셨는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들은 싸움도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의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의심을 걷어내고 나를 위하여 먼저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승리하셨던 예수님만 바라보며 그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승리할 것을 굳게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주님께서 이기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 따라가며









의심을 물리칠 수 있는 강한 믿음의 근거가 무엇일까요?



가열갛

이런 이유로 인해 종종 우리들이 이단들의 접근에 대해, 그들의 확신 있는 질문과 선포에 대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결국에는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의심을 깨뜨리고 다시금 담대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확신 있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아니 우리에게 주어진 다섯 가지 분명한 확신을 반복해서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다섯 가지 확신은 무엇입니까? 특별히 13절부터 20절까지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13절).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구주(메시야)로 영접한 순간 우리에게 영생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첫 번째 확신은 늘 우리에게 제기되는 두 가지 질문을 상기 시킵니다.  첫째는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라는 질문과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 속에는 우리가 구원받았어도 구원 자체와 또한 구원 받은 사실에 대해서 많이 의심하고 있음을 내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외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구원과 구원의 확신은 의심할 수 없이 분명한 하나님의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말씀에 의지하여 구원에 대해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제기되는 질문은 영생에 관한 것입니다. 영생은 영어로 eternal life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질적인 문제와 양적인 문제가 대두됩니다. ‘영생을 얻는다’, ‘영생 안에 산다’라는 말은 결코 변하지 않는 최고의, 최상의 조건 속에서 저희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된다라는 말을 의미합니다. 육신으로서 우리의 인생의 항해가 끝나고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다시금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함께 눈물도 슬픔도 그리고 고통도 없는 그런 영원한 삶을 저희가 누리게 될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런 소망을 가지고 초대교회 사람들이 살았고, 우리 모두도 이런 소망 가운데 믿음으로 살아가시길 소원합니다.

두 번째 확신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특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4장 16절 말씀처럼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간 우리에게 특권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4-15절에서 그 특권을 확신시켜 줍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 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말은 우리를 아신다는 말이며, 우리의 구하는 것을 주신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의를 구하고 그것이 우리의 정욕을 위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구하는 간절한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방법과 때를 따라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서 볼 단어가 하나 있는데 ‘담대함’이란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함,  의심과 불안에 떨지 않고 자신 있게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당당함을 표현한 말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저 응답해 감사하고 안들어 주시면 안들어 주시는 대로 체념하는 믿음이 아니라 담대함으로 이 특권을 누리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세번째 확신은 죄가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없다라는 사실입니다(18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로 못하느니라.” 이 말씀은 앞서 있는 3장 6-10절 말씀을 다시 한번 상기시킵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반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예수 믿는 우리들을 가르킵니다. 악한 영이, 사탄의 권세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지키시기에 우리가 범죄할 수 없고, 영원히 그것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가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었노라고 담대히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죄의 유혹의 손길을 과감히 뿌리칠 수 있는 확신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네번째 확신은 우리는 누가 우리를 다스리고 있으며, 누가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19절 말씀을 보면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이 말씀은 우리의 소속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려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하다’라는 말은 사탄이 도무지 침범할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안에서 평안을 누릴 때 보면 보이는 환경은 그러할 수 없지만, 그 평안과 기쁨과 감사는 도무지 다른 것이 침노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편견과 눈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며, 우리가 그에게 속했기에 하나님의 식과 방법을 고집하는 중요하지, 더 이상 세상의 가치관이 우리를 좌지우지 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다섯번째 확신으로 넘어갑니다. 우리에게 주신 다섯번째 확신은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위대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20절) 사실 13절부터 20절까지 계속해서 나오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안다’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보면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의 확신까지는 모두 ‘오이다’라는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직관적으로, 본능적으로 깨닫게 된다라는 단어입니다. 믿음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해서 있는 그대로 직관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것이 우리 안에 확신을 심어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20절에 쓰인 ‘안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그노스코’입니다. 경험적, 습득적 지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품들을 보다 더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 우리를 향한 끊을 수 없는 사랑과 자비를 가지신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 마음 속 깊이 각인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명령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4-5)

사도 요한은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확신들에 대해 재차 강조하면서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고 9-1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권면을 초대교회 공동체에게 던집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21절). 얼핏 보면 불쑥 튀어 나온 말이고, 편지의 맺음말로 보기에 다소 엉뚱한 것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앞의 다섯 가지 확신의 가장 기초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가진 믿음은 결국 우리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를 질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믿음의 내용이 분명할 때 그것은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이야기하면서 우리 안에 잘못된 믿음의 대상들(이것들이 우상이지요)을 담고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없고, 오히려 세상에 져서 괴롭고 왜곡된 삶을 살게 된다라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마지막으로 준 권면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담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되 우리의 모습과 형편과 처지가 제각각 다르지만 우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담는다면 우리가 세상의 편견과 자존심 싸움에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귀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고 그 믿음이 결국은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자로 살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망하여 자녀들 때문에 행상을 해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다시금 그전의 부의 노예가 아닌 믿음의 자유인으로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이 증폭되어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인생 가운데 펼쳐지도록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혹 우리의 믿음을 연약하게 하는 우상들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숨긴채 우리 안에 계속 담고 있지 않습니까? 혹 그것이 사라질까 두려워하고 의심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난 예수 그리스도를 담는 믿음 안에서 이런 우상들로부터 자유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함으로 믿음이 우리 가운데 역사해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간섭을 경험해서 아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05-15-2024(수) 요한일서 5: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계명들을 지키는 것(3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This is love for God: to obey his commands. And his commands are not burdensome,

계명 -
계명(誡命) - 경계할 계, 목숨 명 / 종교(宗敎)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條件)

엔토래(ĕntŏlē) ἐντολή, ῆς, ἡ 스트롱번호 1785

1. 계명. 2. 요 11:57. 3. 눅 23:56
발음 [ ĕntŏlē ]
어원 / 178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계명, 명령.
 a. [사람의] 요 11:57.
 b. [하나님의] 눅  23:56, 롬 7:8, 고전 14: 37, 엡 6:2, 딤전 6:14, 벧후 2:21.

계명(마 5:19, 막 7:8, 눅 1:6), 명(눅 15:29), 명령(막 10:5, 요 11:57, 딤전 6:14), 명하신 것 (벧후 3:2), 말씀(마 15:6).


계명(미츠와) = 도덕법(Moral Law)
​- 구약에 기록된 내용
- 십계명
- 계명 = 하지말라 365개(1년) / 하라 248개(뼈, 장기의 수)

율례(호크) = 종교법(Religious Law)
​ - 구약에 기록된, 십계명을 받기 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내용
- 성막, 제사, 절기 등

법도(미쉬파트) = 사회법(Social Law)
 - 법 실천을 위한 세부적인 적용(십계명 중 인간 사이의)



율법 = 계명 + 율례 + 법도
 - 미쉬나(약 AD 200년 경 구전 율법 정리 집대성)
 - 미쉬나(=반복) = 6분류(농경법, 절기법, 여자에 관한 법, 손해에 관한 법, 성물(聖物)에 관한 법, 정결 의식법)
 - 탈무드 = 미쉬나의 주석
 - 탈무드 = 예루살렘 탈무드(단순 간결) + 바벨론 탈무드(섬세, 지루한 편집) 
 - 미드라쉬 = 율법 해석서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운동 경기로 비유합니다(육상 딤후 2:5. 씨름 엡 6:12).
때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 씨름과 흡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이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 권세자와 통치자 그리고 마귀와 귀신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 육신의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철저하게 공격을 시도합니다.
그 싸움 즉 영적 씨름의 결과는 때로는 이길 때도 있지만 질 때도 있습니다.
만약 영적 싸움에서 실패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그 원인을 계명대로 싸움터에 나가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반드시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기는 자(니케. nike)를 위한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은 승리할 때 받을 상을 먼저 생각하며 힘든 과정과 어려움을 참고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신다(계 2:7)
에베소교회를 향한 약속입니다.

둘째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계 2:11)
서머나교회를 향한 약속입니다.

셋째는 감추었던 만나와 흰돌을 주십니다(계 2:17)
버가모교회를 향한 약속입니다.

넷째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십니다(계 2:26)
두아디라교회를 향한 약속입니다.

다섯째는 흰옷을 입으며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될 것입니다(계 3:5)
사데교회를 향한 약속입니다.

여섯째는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십니다(계 3:12)
빌라델비아교회를 향한 약속입니다.

일곱째는 하나님 보좌에 함께 앉게합니다(계 3:21)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약속입니다.

모든 교회가 영적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 할 것을 약속을 통하여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매일의 영적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유지하고 회복할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라고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믿는 자”의 ‘믿다’ 라는 동사 시제는 현재형으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믿는 행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에서 ‘나다’ 라는 동사 시제는 완료형으로 이미 과거 어느 한 시점에 시작되어 계속해서 그 결과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태어나게 하신 자,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따라 거듭난 자는 그 결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계속해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선행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역시 그렇습니다.
자기 노력과 열심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곧 하나님이 낳은 것입니다(요 3:8).
‘원하는 자,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라고 하셨습니다(롬 9:16;. 요 1:13).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다는 것입니다(약 1:18).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본문에서도 요한은 맹목적으로 믿는 믿음을 말하지 않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을 말했다(1, 5절). 예수님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모두 다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누구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반드시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기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믿는다. 스스로 혹은 남이 만든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으로 계시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승리하는 이유는 그들이 믿음으로 연합한, 그래서 영원히 사귐을 갖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셔서 반드시 그들을 이기기 때문이다(요일 4:4).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셨고(요 16:33), 바울은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라고 확신했다(롬 16:20).

그리스도인은 싸움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다. 계시록 20장과 21장을 보면 마귀와 그 수하들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져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게 될 것이고(계 20:10), 사망과 음부, 마귀와 세상을 좇던 자들(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 역시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계 20:14-15).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친밀한 사귐 곧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인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7).

그러므로 당신의 믿음을 계속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두라. 지고 있다고 느껴질 때, 도저히 이기는 게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때, 우리 힘이 아니라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 것을 확신하라(롬 8:37).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다(고전 15:57). 지는 것처럼 느껴져도 절대 지지하는 팀을 바꾸지 말라. 결국엔 하나님 편이 승리하게 되어 있다. 풍성한 은혜로 당신을 하나님 자녀로 태어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셔서 영생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이 당신이 끝까지 믿고 따를 분이다.

2. 이기는 자는 사랑하는 자다(1-3)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참된 믿음, 산 믿음은 그에 따른 ‘행함’을 맺는다(약 2:26).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예수께 믿음을 둔 자가 이기는 자이고, 그 믿음이 참되면 당연히 그에 따른 열매가 나타난다. 성경은 그 모든 행함을 요약하여 ‘사랑’이라 부른다.

1-3절까지 사랑은 두 가지 대상을 향해 나타나는데, 먼저 성도를 향한 사랑이다(수평).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1절). 3절에선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주목한다(수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3절). 2절에선 형제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서로 별개의 행함이 아니라 단단히 결합된 행함이라는 걸 보여준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2절).

여기서도 논리적인 순서를 바꾸면 안 된다. 앞서 우리의 믿음(신앙)이 새로운 출생을 가져오고 그 결과 승리를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와 진리로 낳으시고 그 결과 하나님께 둔 믿음을 지속적으로 갖게 하신다고 배웠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랑이 승리를 가져오는 게 아니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참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열매다. 하나님과 성도를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사랑이 없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맺어진 관계가 사랑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사랑은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과 더불어 맺고 있는 영생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느끼게 해준다. 이로써 우리는 승리하는 자라는 걸 계속해서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요한은 처음부터 이를 분명히 한다.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1절). 우리를 은혜와 진리로 낳으신 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누구나(“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 곧 형제, 자매를 사랑한다. 베드로는 이를 가리켜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벧전 1:22). 영적으로 태어난 자는 영적인 형제, 자매를 거짓 없이 사랑하게 된다(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

요한은 그래서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말했다(3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형제자매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고 또 주시기 때문이다(빌 4:13).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쉬운 일인가? 무겁지 않은 명령인가? 

실제로 느끼기엔 그렇지 않을 수 있어도, 몇 가지 면에서 확실히 그렇다. 첫째, 유대인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 만든 여러 가지 규칙과 전통은 사람을 옭아매고 결국 아무도 완벽하게 순종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 지옥 자식이 되게 하지만(마 23:15),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형제자매 사랑은 이미 온전히 율법을 이루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법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법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는 법이다(갈 5:1). 그래서 훨씬 가볍다.

둘째, 우리가 성도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진실로 사랑하기 때문이다(마 11:30).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성도를 기쁨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은 사랑과 순종을 별개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한다’ 말하면서 불순종하는 자를 악한 자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셨고(요 14:21),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셨다(요 14:15). 본문에서 요한도 아멘으로 화답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3절).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우리는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다(2절).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 말씀에 순종하라. 그래서 사랑하기 쉬운 형제자매, 어려운 형제자매 모두를 뜨겁게 사랑하라(벧전 1:22; 4:8). 그러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뜨겁게 사랑하실 것이다. 성부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거처를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다(요 14:23). 무슨 말인가? 우리가 하나님과 영생의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더욱 분명히 알게 하신다는 말이다. 이로써 우리는 마귀와 세상과 하나님을 미워하는 모든 자가 불못에 던져질 때, 하나님과 함께 이기는 자가 될 것을 확신할 수 있다.

3. 적용

앞에서 다룬 믿음 그리고 사랑이 우리가 승리한다는 소망을 보게 한다. 그러면 실제 삶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허락하신 믿음과 시작하신 사랑을 자라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기는 자답게 살 수 있을까?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에서 이기는 법을 이렇게 제시했다.

절제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 목표 없이 달리지 않고, 허공을 향해 공격하지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규모 없고 무절제한 삶, 게으른 삶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상 적으로 성공한 자도 자기 일에 집중하느라 남들 다 알고 남들 다 하는 일을 과감히 버리고 관심 두지 않고 자기 일에 몰두한다.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는 이들도 그러는데 썩지 아니할 것을 얻는 우리는 얼마나 더 절제해야겠는가? 모든 뉴스, TV 프로그램, 유튜브, 화제의 인물, 정치 경제적 이슈, 돈 많이 쉽게 버는 법, 예뻐지고 잘생겨지는 법 등을 알 필요는 없다.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켜라.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더욱 알아가는 일, 그래서 하나님 자녀를 사랑하는 일에 집중하라.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라.

기도하라. J. C. 라일은 기도를 가리켜 믿음의 호흡이라고 말했다. 우리 믿음이 숨을 쉬려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오직 하나님께 있는데,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신뢰하며 아뢰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 믿음이 점점 연약해지고 거의 없는 것처럼 희미하게 될 것이 뻔하다. 그런 믿음으로 마귀와 세상을 대적하며 산다면 우리는 이기는 자가 아니라 평생 패배자처럼 힘없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존 오웬은 이렇게 말했다. “목사가 성공적인 설교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으면서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그 자신의 심령 속에 비밀스러운 무신론을 간직하고 강화하는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그런 설교는 다른 사람들의 삶 가운데 거룩을 불러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성도가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으면서 이기는 자로 살려는 것은 그 자신의 심령 속에 비밀스러운 무신론을 간직하고 강화하는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원에 이르는 열매가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어떤 면에서 코로나 사태는 우리에게 더 많은 절제와 더 많은 기도를 요구한다. 더 많이 절제하여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키우는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허락하신 믿음과 사랑을 기도와 절제로 더욱더 굳건하게 만들어 승리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우리가 적은 무리, 힘없는 패배자처럼 여겨질지라도, 결국엔 영원한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아들과 딸로 승리의 보좌에 함께 앉아 다스리며 영생을 풍성히 누리게 되길, 이기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




계명

한자: 誡命, 영어: Commandment, Command(KJV, NASB, NIV)

하나님의 선민(選民)에게 지키라고 준 명령

계명의 종류

하나님의 계명
모세 율법

모세
를 통해 출애굽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언약의 말씀을 두 돌 판에 기록하여 주셨다(출 19:5~6, 출 34:28).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계명을 지켰을 때와 지키지 않았을 때의 결과인 과 저주를 미리 말씀하여 주셨다(신 28장).
솔로몬왕 때 온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좇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명 곧 언약을 어겼다(왕상 11:9~11, 호 6:7).

1.1.2.

자유 율법(새 계명)

사람의 계명(장로의 유전)



가장 큰 계명



가장 큰 계명 (또는 대계명)은 신약 마태오 22:35–40, 마르코 12:28–34, 루카 10:25-28에서 예수가 인용한 두 계명 중 첫째를 설명하기 위해 쓰이는 이름이다.

마르코에서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리스어 신약은 예수가 둘째 계명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를 언급하기 전에,[1]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답했다고 기록한다.[2] 대부분의 기독교 교파는 이 두 계명이 올바른 기독교인 생활 양식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3]

신약 설명

마태오의 복음서

그들 중 한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마르코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에는 셰마가 포함되어 있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와서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께서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 가는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첫째 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또 둘째 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루카의 복음서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의 복음서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시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신다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다. 아니, 이제 곧 주실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이제 잠시뿐이다. 내가 가면 너희는 나를 찾아다닐 것이다. 일찍이 유다인들에게 말한 대로 이제 너희에게도 말하거니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구약 언급

레위기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마라. 이웃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벗는다. 동족에게 앙심을 품어 원수를 갚지 마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 나는 주님이다.

신명기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주님이시다. 주님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주님을 사랑하여라.



사랑의 A, B, C, D, E, F, G

Accept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상대방을 고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존 그레이 박사는 "결혼이란 화성인인 남자와 금성인인 여자가 지구에서 만나 함께 지구인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Believe
믿는 것.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된 가정이 행복합니다.
의심하면서 한 지붕 아래 산다면 마치 어느 영화제목처럼 '적과의 동침'과 다름 없습니다.

Care
돌보는 것
사랑한다면 상대방을 책임지고 돌보아야 합니다.
'돌봄'은 곧 관심입니다.
기쁘고 행복할 때보다 어렵고 힘들 때에 돌보는 것이 더욱 값진 것입니다.

Desire
기대하는 것. 요구하는 것
소망을 갖고 꿈을 갖는 일입니다.
서로가 잘되기를 위하여 함께 달려가는 것입니다.
앞으로 크게 될 것을 기대하고 소원하는 것입니다.

Erase
지워버리는 것
상대방의 허물은 빨리 잊어야 합니다.
약점을 덮어주어야 합니다.
자꾸 들추어 내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Forgive
용서하는 것
과거의 실수와 잘못을 용납해주는 것입니다.
용서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Give
주는 것
주고받는 것이 사랑입니다만 더 큰 기쁨을 주는 사랑은 받는 것보다 줄 때입니다.



05-14-2024(화) 요한일서 4:17-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온전한 사랑(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There is no fear in love. But perfect love drives out fear, because fear has to do with punishment. The one who fears is not made perfect in love.

온전한 사랑(Perfect in love)
온전한이란 헬라 단어는 "헤 텔레이아 아가페(η τελεια αγαπη)" 라고 하며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 온전한 사랑(the perfect love)"이라고 하겠습니다.

온전한(텔레이오스. tĕlĕiŏs) τέλειος, α, ον 스트롱번호 5046

1. 목적을 달성한.  2. 히브리서 9:11. 3. 로마서 12:2
발음 [ tĕlĕiŏs ]
어원 / 5056에서 유래

온전한(마 5:48, 고전13:10, 약1:4), 장성한 (고전14:20, 히5:14). [부] 온전히(빌3:15, 약1:4).

(이야기) 어느 스님과 냉수 한 사발 및 사과 한 개
사랑으로 주는 것은 버릴 것이 없다!
스님의 질문 /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는가?
기독교에는 용서가 있다.
불교에는 용서가 없다.

(이야기) 어느 자매의 이야기
언니가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어야 한다.


온전한 사랑의 결과를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과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첫째는 기쁨의 충만을 위하여(joy complete)(1: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둘째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you will not sin)(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셋째는 영생을 위하여(you have eternal life)(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온전한 사랑을 회복하면 세 가지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세 가지 결과를 위한 질문에 대한 나의 신앙을 바르게 검증해 보시기 바랍니다.
 
매일의 생활이 즐겁습니까? (예, 아니오)

일상의 삶에서 죄를 범하지 않습니까? (예, 아니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셨습니까? (예, 아니오)

세 가지 질문에 모두 긍정적인 고백이 가능하다면 온전한 사랑을 유지하고 실천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만일 부정적인 대답이 하나라도 있다면 좀 더 실천적인 믿음과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결혼예식을 진행할 때 주례자는 신랑과 신부에게 사랑의 약속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모든 신랑과 신부가 예라고 대답하면서도 살아가면 '예'가 '아니오'로 변질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온전한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온전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 온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 의해서 찾아볼 수 있는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징표를 보여줄 수 있는 은총의 하루가 열려지기를 기도합니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

'두려움'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보스'는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의미한다(행 9:31; 롬 3:18; 고후 5:11; 7:1; 엡 5:21).
그러나 본절에서의 '포보스'는 앞절의 담대함의 반대 개념으로 노예가 갖는 두려움을 가리킨다(요 19:38; 20:19; 롬 8:15).
이러한 '포보스'는 사랑과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면 앞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전혀 두려움이 없이 담대해질 수 있다.
비록 죄는 두려움을 유발시킬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사랑을 소유한 자들에게 사랑은 담대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

본문은 사랑과 두려움이 공존할 수 없는 이유이다.
'형벌'에 대해서 혹자는 마지막 날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정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며(Schnackenburg), 혹자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방해하는 고통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Bultmann).

이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Haas, Marshall).
즉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사랑 안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상호간의 내주와 사랑의 관계를 유지시켜 나가게 되며 그 결과 마지막 날에 죄로 인한 정죄함에서 오는 두려움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갖는 담대함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사랑은 공존할 수 없는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

개역성경에는 반의 접속사인 '데'(*,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헬라어 본문의 '데'는 본문이 17절 상반절의 내용, 즉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하나님의 사랑'을 역으로 진술한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로 인하여 사랑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졌다(Westcott, Law).
그러기에 믿음과 사랑 그리고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었다.
이와 반대로 만약 누구든지 담대함이 없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지 못하였으며 그 사랑의 실체를 온전히 성취하지 못한 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의 특징

​성경이 기록된 목적이 있지요?
요한일서가 기록된 목적을 세 부분에 걸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요한일서를 얼마나 많이 읽으셨는지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듣고, 얼마나 많은 요한일서에 관한 성경공부를 했든지 그것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지금 현재 요한일서가 기록되어지는 목적을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뿐만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의도와 하나님의 목표가 있지요?
그것이 과연 나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여러분이 늘 확인해야 되는 기준이 돼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어지기를 원해요.
여러분 지금 자신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기쁨으로 충만합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요한일서를 잘 공부한 거예요.
믿은 겁니다.
요한일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받은 것이에요.

1:4절에 우리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씀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라.

교제의 결과이지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성령의 하나님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 안에 세 분이 하나 되는 교제가 가능해요. 그 하나님의 교제 안으로 초청하신 것이 성도들을 향한 그 교제이지요? 성령 하나님께서 계시니까 가능한 것이에요. 성도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니까 가능한 것이에요. 우리는 말씀의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이 기쁨이 충만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바로 죄 때문인데 요한일서가 기록된 두 번째 목적은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요한일서가 기록이 되어 있어요.

여러분 지금 마음의 상태가 하나님 앞에 담대합니까?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간구할 그런 준비가 되어있어요? 아니면은 필요하기는 필요한데 그 제목을 하나 아뢰기에는 무엇인가 좀 해결해야 될 것이 있는 것처럼 그런 부분이 있습니까? 그 부분을 요한일서 2:1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로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그 삶을 가능하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것이지요.

또 하나의 목적은 우리 안에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할 목적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일서 5:13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씀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며 또한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도록 하려 함이라. 오늘 본문 말씀은 온전한 사랑에 대해서 다시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다섯 장에 불과한 요한일서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46번 기록되는 것으로 보아서 요한일서에 해당되는 주제는 사랑임에 틀림이 없지요?
문제의 해결책도 사랑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온전한 사랑이에요. 사람 마음 안에 발견된 적도 없고 또 세상의 제도 가운데 존재하지도 않는 그런 사랑이에요.

그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이에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볼 수는 있어요. 그 하나님의 사랑이 보여진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어요.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에요.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안다라고 시인할 수 있어요. 그건 경험이에요. 100% 경험입니다. 경험되어지지 못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의 마음을 미혹시켜버려요.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언가 되는 줄로 그렇게 아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의 특징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담대합니다(17절)

17절 따져보십시오. "이렇게 우리의 사랑이 온전해졌나니, 이는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라. 이는 그분이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되지요?
그래 구원받은 사실과 그 사실을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됩니다.
그 구원의 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에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사랑이 무엇인가?
여러분이 하나님 입장이라고 한다면, 어떤 사람이 가장 사랑스러운 그런 사람이겠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마귀는 많은 무기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첫 번째 제시했고 가장 강력한 무기는 하나님에 말씀에 의심하게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그 의심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을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을 가장 귀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는 그분이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니라(요한일서 4:17).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어요.
보내주신 목적은 죄로만 이루어진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고, 저주를 면할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죄인들의 자리에 대신 서게 하신 것이지요. 그 목적으로 보내주신 거예요.

​그 거룩하신 분이 가장 가증스러운 죄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으신 것이지요.
그분은 죽으셨고, 성경의 예언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이 어떠셨다고요?
그러 하셨어요. 그분이 그러하신 분이에요. 그런데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는데, 그분과 같이 될 것이라는 것이에요.

​이렇게 우리의 사랑이 온전해졌나니, 이는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라.
이는 그분이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요한일서 4:17) 이 사실에 의심하지 않고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담대해요. 세상에 아무리 위협하고 공갈로 협박으로 세상 풍조로 그렇게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든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겐 결코 그 두려움의 영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분은, 어떻게 그분처럼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아들의 형상과 일치시키는 겁니다. 로마서 8:29절에서 그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예정하셨으니 이는 그를 많은 형제 가운데서 첫 태생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은 보장돼 있습니다. 고정된 진리의 말씀이에요. 예수 그리스도 아들의 형상과 일치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아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고요.

요한일서 1:4절에 기록된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과 말씀으로 교제가 가능하지요? 그래 우리가 기뻐하는 거예요. 아들의 형상과 일치된다라고 하는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가운데 놓고 여러분은 지금 현재의 상황들을 그 옆에 비교해 보아요. 돈 문제가 걸려 있겠지요? 건강 문제가 걸려 있겠지요? 여러 가지 갈등의 문제가 걸려 있겠지요? 불확실한 미래가 걸려 있겠지요? 어떤 문제가 비교의 대상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충만하지 채워지지 않고 거기에 두려움이 있고 염려가 있고 그렇다고 그러면 못 믿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못 믿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못 믿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거예요.

아! 하나님의 사랑 고린도전서 13장에 있지요? 그 정도는 안다고요. 그러나 그것으로는 아무 역할도 못해요. 왜냐하면 인생의 살의 문제는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앞으로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게 하셨는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했다고 요한일서 3:1절에서 기록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나니, 이는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 2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그가 나타나시면이라고 하는 것은 거듭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해가 동쪽에 떠서 서쪽에 질 것이에요, 내일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에요. 그것보다도 절대적으로 더 확실하고 분명한 사건이에요. 무엇이라고요? 그가 나타나시면. 반드시 나타나실 것이라고요. 왜 그렇습니까? 그분께서 태양을 창조하셨잖아요? 동쪽에서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어요. 어느 날은, 어느 날은 안 떠오르겠지요? 베드로후서 3장에 의하면.

요한일서 3장에 의하면. 2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 3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지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이 정결하신 것처럼 자신을 정결케 하느니라. 그분이 그러하세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요. 그분이 어떠하시다고요? 하나님의 아들이에요.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거에요.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왕들 가운데 왕이시지요? 만왕의 왕이시라고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고백하는 대제사장이요 두 가지 직책을 갖고 있으세요. 그래 그분이 왕이시라고요. 그분이 대제사장이에요. 우리는 어떻지요? 그분이 그러하심과도 같이 우리도 그러하는 거예요. 그 사실을 믿는 사람은 담대하다고요.

하나님 그의 아버지를 위하여 우리를 왕들과 제사장들로 삼으신 그분께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요한계시록 1장 6절 말씀이에요. 그분이 왕인 것처럼, 제사장인 것처럼 우리도 왕과 제사장이 될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주의 천사였지요? 부활 때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천사들처럼 될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약속의 말씀이니까 그가 천사잖아요? 그래 우리도 천사들처럼 된다고요. 부활 때에는 그들은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태복음 22:30절 말씀이지요.

일단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고 한다면, 사람은 중간에 마치지 못할 수 있어요. 변경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세요.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고 한다고 한다면, 끝나지 않은 채, 일을 마치지는 결코 않으실 거예요. 약속의 말씀이지요. 우리가 이것을 아노니, 확신하노니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 (빌립보서 4:6) 그래 이 부분을 놓고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름을 거셨어요. 하나님은 신실하시다고요. 한 번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성취하는 것입니다.

화평의 하나님 바로 그분께서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책망할 것이 없게 보존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노라.(살전5:23)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성도들의 온 영과 혼과 몸을 책망할 것이 없이 보존하실 거예요. 그 시점은 언제이지요? 그리스도 심판석을 지나면 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점과 흠 다 주름진 것 다 바로잡혀지지요? 당부의 말씀은 뭐예요? 대비하라 이거예요. 준비하라. 근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실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거예요. 24너희를 부르시는 분은 신실하시니 그가 또한 이것을 행하시리라. 이것이 뭐예요? 약속의 말씀이라고요. 영과 혼과 몸 책망할 것이 없이 보존하실 것이라고요. 쉬운 말로 집으로 데리가시겠다 그 말입니다. 반드시 집으로 데려가서 자신의 아들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 담대한 사람이지요? 이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은 고백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고백할 수 있지요? 요한일서에서 두 번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 사실을 믿지 못하면 어떻게 돼요? 입으로만 고백하는 거예요. 우리의 염원은 무엇이지요? 우리의 사랑도 온전해졌으면 좋겠어요. 초신자 때에는 극히 최소한의 믿음만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겨자씨 한 알 만 해요. 믿음만 그렇게 작은 것이 아니라 사랑도 그렇게 작아요. 그러나 점점 더 성장하겠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잘 배운 결과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에 장성한 분량에까지 잘 자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에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한 사람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의를 값없는 선물로 우리가 받은 것이지요. 그것을 의심하지만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리스도인은 담대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경험해야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접하지요? 언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지요? 완전히 의탁할 때예요. 헌신이 그래서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 거리감이 없이 완전히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거예요. 그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두려움을 극복합니다. 18절 보십시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내느니라. 이는 두려움에는 고통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지 못하였느니라.

이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두려움이 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두려움이 있어요. 이것을 잘 분별해야 되겠지요.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됩니다. 마땅히 두려워해야 되는 대상을 반드시 두려워하고 무서워해야 돼요.

코로나 바이러스, 코로나19라고 부르나요, 그것 때문에 온 세상이 휩싸여져 버렸지요? 이것은 잠깐 보여주는 그림이에요. 대화난때에는 어떻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주체가 돼서 전염병을 확산시키잖아요. 어떻게 감당을 할까요? 그 사실을 우리가 미리 아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두렵다고요. 무섭지요. 개인도 그렇고 조직도 그렇고 국가를 포함해서 전 세계가 다 휩싸여졌습니다. 경제생활에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고, 문화생활에 제한을 받는 사치이지요, 지금. 극장을 못 가느니 뭐 무슨 공연을 못하느니 사치라고요.

그리스도인에게 심각한 것은 모임에 방해를 받는 것이에요. 현실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이 부분들은 매우 어려운 부분이지요. 어째든지 간에 이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을 경우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마음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넣어주신 것들로 가득 채워져야 됨에도 불구하고 마귀가 틈을 노리고 비집고 들어올 가능성이 있는 것이에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이 이방 민족들과 전쟁을 벌였지요? 조카를 구해오기 까지는 했어요. 그런데 그 이후에 문제가 이제 현실적인 문제로 하나씩 하나씩 계산해보니까 밤에 잠이 안 와요.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아 정말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 나라들을 대상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그때에 말씀하신 것이 창세기 15:1절에서 무서워 말라, 두려워 말라 말씀하신 거예요. 하나님을 제시한 것이 방패라고 말씀하셨다고요. 어떤 무기로도 온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방패가 되시는 거예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을 때에 아브라함은 가장 안전합니다. 그러나 반신반의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돼요? 믿음이 입증되지 못하겠지요?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이 지상의 사역을 하면서 두려워 말라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두려워 말라 말씀하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삶이 다 망가져버려요. 공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생각나는 것은 두려움과 무서움과 염려뿐이에요. 거기에 집착된 하루하루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결코 아닌 것이지요?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무기를 두 가지라고 합니다.
첫째는 의심
둘째는 두려움

의심은 강력한 파괴력이 있습니다.
그에 못지않게 두려움을 주었을 때 위축됩니다.
거의 무한대의 능력이 있다하더라도요 그것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거예요.
믿음으로 행해야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이든 믿음으로 행할 수 없어요.
보는 것으로만 걸어갈 뿐입니다.
그 결과 주를 바라보지 않아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삶이 그리스도인인데 바라보지 않아요.
무엇만 바라보는 거예요.
경제 상황만 바라본다고요.
제일 먼저 안전에 대한 두려움이 있겠지요?
병에 걸리지나 않을까?
사람은 세 끼를 먹어야 사는 빵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니까 빵이 보장되지 않으면 두렵다고요.
노후대책에 대해 사람들이 그렇게 무서워하는 것은요, 별거 아닐지 몰라요.
먹고사는 문제가. 지금 현재 보면 그래요.
그러나 그 먹고사는 문제가 앞으로 계속 보장이 될 수 있느냐? 그건 다른 문제에요.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잘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이 저금하지요?
그거 잘하는 겁니다. 해야 돼요. 대비를 해야 되지요. 그러나 그 한계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섭리적인 영역까지도 침범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셔야 되는 그런 부분까지도 염려로 가져와 버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자신의 믿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것인가? 원점으로 돌아가지요?
하나님의 존재하시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요. 생태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요 마태복음 6장에 의하면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통치 역역 가운데 벗어나는 새가 없어요. 다 보장해 주신다고요.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이겠는가? 그렇게 물어보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온통 두려움에 휩싸이는 거예요. 오늘은 어떻게 버텼을지 모르지만, 내일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라고 말하며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6:31)

염려가 언제 될 때가 있는가 하면 의식주가 목적이 될 때예요. 수단으로만 자리 잡혀야 돼요. 수단으로.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될 때 염려하게 되는 것이지요? 의식주가 삶의 목적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그것을 얻기 위해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수단 방법 안 가리는 거예요. 삶의 우선순위가 망가질 수밖에 없겠지요? 급하다고요. 그 사람의 삶이 안정이 안돼요. 그냥 급해버린 거예요. 조금 괜찮은 거 같다 하더라도 조금만 위기 상황이 오면 다 무너져버리는 거예요. 그 부분을 하나님께서 염려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 그분의 의, 그것이 해결책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사람은 영적 존재에요. 물질로만 이루어진 몸이 목적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부차적으로 채워주시는 영역에 있어서는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해야 되는 일은 뭐예요? 최선을 다해서 땀을 흘리면 돼요. 땀만 흘리면 된다고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의 구하는 것들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알려지게 하라. (빌 4:6) 그런데요, 가장 부지런해야 되는 영역이 실상은 기도입니다. 말씀은 어떻게 그럭저럭 읽을 줄 몰라요. 부지런하지 않으면요 기도생활이 없어요. 여러분 개인의 삶을 한번잘 살펴보세요. 나는 정말 하나님 앞에서 게으른 사람인가? 부지런한 사람인가? 기도 하나만 측정하면 돼요.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이 있다면 목자는 목자니까 기도해야 되는 것이 있고요, 가장은 가장이니까 기도해야 될 것이 있고, 어머니는 어머니니까 기도해야 될 것이 있다고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니까 기도해야 될 것이 있다고요. 그 목적을 위해서 지상의 생명을 계속 하루하루 연장시켜줄 뿐이라고요.

그런데 게으름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거 다 까먹어 버린다고요. 뭐 생존이 목적이 되어버려요. 바로 마귀는 그것을 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빌립보서 4:6절에서 마땅히 간구해야 될 것 그것을 다 알려드리고 하나님 앞에 알려지게 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영광 가운데서 그의 풍요함을 따라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 빌립보서 4:19절 말씀이지요? 이거는 거듭거듭 계속 확인해야 되는 말씀의 본질이에요.

나에게 뭐가 필요하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제일 먼저 본문에 나와있는 것처럼 영생이고요, 그 영생을 가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내가 이런 것들을 씀은 그렇지요? 너희가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요한일서 5:13)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라면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얼마나 많은 박해가 있을 것이에요? 얼마나 많은 고난이 있을 것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지혜가 있어야 돼요. 지혜가 있어야 뚫고 나가지요. 지혜가 있어야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삶을 살아 나가지요. 그래 지혜대로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그 어려운 여건들, 고난의 연속들, 하나님의 위로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하나님의 위로가 있어야 된다고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지 못하면 사람에게 달려가는 거예요.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고 사람에게 위로받으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필요에요. 그리스도인에게 정말로 가장 필요한 필요에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넘치도록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그 가장 기본적인 그 사람의 필요들이 갖춰진 상태에서 오늘 하루도 열심히 공부하는 거예요. 열심히 일하는 거예요. 열심히 건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잘 살다가 죽으면 하늘나라 가는 것이라고요. 주님께서 오시면 들림 받아 올라가는 것이에요.

바로 이 고난에 대한 두려움, 그때에 성경에서는 절대적으로 해결책으로 기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난받으면 두렵잖아요? 무섭잖아요? 너희 가운데 고난받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야고보서 5:13) 기도가 응답이 되었어요. 즐겁잖아요. 그러면 찬양하면 돼요. 하나님을 높여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어떤 기도를 하지요? 제일 먼저 이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에요. 심지어 그 기도도 안 하는 사람도 있다고요. 그러면 그 부분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고난이 닥치면요 구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를 해야 돼요.

그러나 육신은 너무나 끈질기게 그 사람을 억압하고 자신의 몸으로 해보려고 한다고요. 그러다 안되면 다른 사람 찾아가는 거예요. 돈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 그 사람 찾아간다고요. 그래도 하다 하다 안되니까 제일 마지막에 이제 하나님 찾는 거예요. 초신자때는 다 그래요. 초신자가 그 기간 동안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좋지 않다고요. 고난받으면 기도해야 돼요. 고난에서 구해주시도록 기도를 해야 되는 것이에요. 많은 부분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요? 그래 감사한 거예요.

그러나 그 닥친 고난이 길게 길어질 때가 있습니다. 두 가지 기도를 더해야 돼요. 하나는 이 고난이 유익이 되도록 기도해야 돼요. 반드시 고난이 유익이 돼요. 구원받지 않은 자들에게 이 고난을 허락하신 것은 목적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빨리 구원받으라는 겁니다.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거예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이 주어지는 것은 다양해요. 하나님의 목적이 아주 다양하다고요. 결론은 욥의 고백처럼 금처럼 나오는 것입니다. 순수 100%의 금으로 연단되어서 잘 나오는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나 사람마다 다 달라요. 또 같은 동일인이라 하더라도 각각 겪는 고난에 경험들이 다 다르겠지요? 그러나 반드시 유익이 돼요. 어떻게 고난은 지나갔는데 아주 씁쓰름한 쓴 뿌리가 남았다고요. 사람에 대해서든지, 하나님에 대해서든지. 자신에 대해 원망하고 자학하고 절대로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에요. 소중한 하나님의 훈련의 기간을 망쳐버리는 거예요.

또 하나는 예수님의 기도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돼요. 기도라는 것은 그 정의가요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기도는 그것이라고요.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 그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 초신자때는 마찬가지로 어때요? 반대로 하지요? 내 뜻을 기필코 관철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든지 간에, 이 뜻을 이루어 주십시오. 그 기도도 거의 다 들어주시지요. 거의 다 들어주신다고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충만에 이르기는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에게 No라고 하는 응답을 주신 것처럼, 겟세만의 동산에서 예수님께 No라고 하는 응답을 주신 것처럼 세 번씩이나 간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응답을 주시는 거예요. 예수님의 경우에 있어서나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나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요. 왜? 하나님의 뜻을 알았잖아요. 그럼 기도는 끝난 거예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지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시도를 못해요.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 실패를 극복하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가능한 거예요.

본문에서 말한 것처럼 심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져 있지요. 경험하는 것은 죽음밖에 없기 때문에 죽음을 대단히 두려워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구원받은 사람 제외하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제외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본질은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 내느니라. 이때의 두려움이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에요. 이는 두려움에는 고통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지 못하느니라.(요한일서 5:18)

하나님께서 주신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두려움을 반드시 잘 배워야 되지요. 지금 구원받아서 하늘나라로 가고 있는 중인데, 그 가운데서 이 두려움을 배우지 못한다고 한다면,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통증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또 연구하는 그런 의사가 글을 썼어요. 제목이 동전의 양면인 통증. 동전의 양면 통증. 거의 대부분은 통증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을 하지요. 유전적인 병이 있는데 선천성 무통각증이에요. 감각을 못 느껴요. 어떤 일이 일어나지요? 겨울철에 난로에다가 손을 대도 통증을 못 느끼니까, 만약에 밤에 자다가 그렇게 되면 손 다 태워버리고 자신의 손을, 그 정도 통증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통증은 반드시 느껴져야 돼요. 그래서 이 뇌 속에서 유전적변이를 확인해서 감각을 전달하는 이 신경세포가 이상이 생겨버린 거예요. 신경세포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지요. 환자에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환자라고요. 치료를 해야 되겠지요? 치료방법은 무엇이겠어요. 통증을 느끼게 해줘야 돼요.

수는 통증을 느끼는 사람에 비해서 이 무통각증을 지닌 사람은 수가 현저히 적겠지요? 그러나 영적으로는 정 반대에요. 정반대라고요, 정반대. 영적인 무통각증,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거의 거기에 다 빠져버렸다고요. 성장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에요. 정말로 무서워해야 될 것이 성장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것처럼 내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내가 없는 지금도 더욱더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빌립보서 2:12)

구원받은 이후에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성화의 구원이에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지요. 이제 의롭게 되어지는 구원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단번에 영원히 다 이루어졌지요? 들림 받아 올라갈 그때까지 몸에 구속의 구원은 이루어질 것이에요. 남은 구원은 무엇이에요? 영이 계속 자라는 것입니다. 성화의 거룩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목적이라고요, 구원이라고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도 않고 존귀히 여기지도 않는, 인간의 본성 가운데서 의롭게 됨이라고 하는 그거 하나만 받으면은 다 되었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다음부터는 내 멋대로 살란다. 그래 산 믿음을 거부해버리고 종교를 취해버리니까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디 있다고요? 통증을 못 느껴요. 무서움이라고 하는 통증을 느껴야 되는데 느끼지를 못하는 것이에요.

여러분도 한번 적용시켜보세요. 여러분 가운데 가장 인생의 삶 가운데 본질적인 것이 성장을 방해하는 그 요소들이 내 삶에 침범한 거예요? 그렇게 여러분이 동의한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가장 안전한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안전한 안전장치 가운데 하나가 두려움이에요. 그리스도인은 쓰임 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야 돼요.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얼마만큼 버려질 것에 대해서, 쓰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강력하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왜 자신의 몸을 그렇게 억제한다고 그랬죠? 들림 받아 올라갈 그때까지 계속 절제의 성령의 열매를 왜 그렇게 간구했겠어요? 쓰임 받지 못하면은 비참하다고요. 그것을 두려워한 것이에요. 무서워한 것이에요.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두려워했지요? 고린도후서 5:9절 이후에서 모든 사람은 반듯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설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실을 계시 받은 바울은 본인 포함에서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 가운데서 말하고 있는 것이에요. 구원받은 이후에 왜 그리스도인이 신중하게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건전한 두려움이 그 원인이 되어지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에요.

본문 말씀과 관련되서 왜 형제를 실족시키면 안 돼요? 형제 사랑과 관련돼서 왜 형제를 실족시키면 안 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그대로 다루고 있는 로마서 14장에서 경고하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것은 반드시 판단 받을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 우리가 추구해야 되는 목표가 되어지기도 합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첫 번째로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그 사람의 특징, 마지막 세 번째로 이기적인 삶을 살지 않습니다.
19절 보십시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순서가 중요하지요?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어요.
그런데 그분의 사랑은요 사랑할만한 대상이기 때문에, 무슨 근거가 있기 때문에 사랑한 거가 아니라 이해가 안 돼요. 전혀 아름다운 것도 없고, 의가 단 한 군데도 발견되는 것도 없고, 사랑 자체이신 분이에요.
의 자체이신 분이세요.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대상을 사랑하신 것이에요.
대가를 전혀 바라지도 않으세요.
사람은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물론 그 순수한 동기에서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답례를 표하면 마음이 흐뭇하고 그러잖아요? 안 그런가요?
그 정도가 아니라 또 사람은 답례를 바란다고요. 하나님은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20절에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라.
눈으로 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우리가 그분께 받은 계명이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하느니라.
가장 비참한 대상일지 모르지만요, 그래 가장 비참한 대상이니끼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죄와 허물 가운데서 죽어있는 사람인데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 지내게 하라. 다 죽어버렸다고요. 다만 몸만 살아있을 뿐이지, 생물학적으로만 살아있을 뿐이지 그 영이 죽어버렸어요. 아무런 가치가 없어요.

그런데 일단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돼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이 되어지게 되면요, 그 존재보다 더 가치 있는 대상은 없어요. 그런 관계를 어디서 찾아볼 수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닿기 전에는 완전히 쓰레기라고요. 태워버릴 쓰레기에 불과하다고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들어왔을 때에는 가장 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에요. 그리스도안의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아들과 똑같이 대우해 주잖아요?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 자체만으로 놓고 보았을 때는 죄로만 이루어진 죄의 몸인데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발견되잖아요. 예수 그리스도처럼 똑같이 대우해 주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본문은 교리적으로 적용해 볼 때에 본문에서 나오는 형제는 유대인 형제이지요? 마태복음 25장에 나와있는 것처럼 대환란 때에 이 형제를 사랑해야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반드시 형제 사랑이라는 행위가 있어야 구원이 유지가 되는 것이지요. 요한일서에서 많이 나오지요? 특히 요한일서 3장 10절이라든지 14절 이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이 발견이 안되면 사망에 이르러요, 구원을 잃어버린다고요.

영적인 적용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안의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 제대로 사랑하는 거 아니다 언급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 명제를 놓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자신을 평가해 보세요.
여러분 자신은 사랑을 주는 사람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사랑을 받는 사람에 가깝습니까?
단 하나라도 나는 우리 가정에서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고, 어떤 사람에게도 그렇고 나는 사랑을 받아야 되는 사람이다.
그럼 하나님 사랑 모르는 거예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은 충분하게 받았어요.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은 나누어 주는 일밖에 없어요.
반드시 그 위치를 찾아야 돼요.

​그러지 않으면요 이 교회는 섭섭 마귀가 인수해버려요.
목사도 예외 아니에요.
아! 그렇게 성도들을 위해 헌신했는데 알아주지도 않는다고, 그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으로 해서부터 어떤 특정한 사건만 터지면 그것이 폭로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성도들 말할 것도 없어요.
내가 어떻게 교회에 헌신하고, 어떻게 교회 일에 가담하고 했는데!
처음에는 특권으로 알고 시작했잖아요?
아닌가요? 가르치는 일, 특권이고 가장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하실 수 없는 특권이라고요.
그러다가 이 형제 사랑에 대한 영적인 적용을 잘못했을 때에 제대로 하나님 사랑하는 거 아니에요. 이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 이기적인 삶을 살지 않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대로 살아갈 거예요. 섬김을 받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셨어요.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는데 자신의 생명까지도 주셨어요. 그분이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따라가는 제자에요. 선생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고자 하는 그런 제자가 어디 있겠냐고 반문하시지요? 주인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고자 하는 종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하시지요? 거기에 내가 100% 동의할 수 있다면은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담대한 사람이어야 되겠지요?
그리스도인은 바로 무서움을 극복한 사람이에요.
두려움의 영에 속박되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리스도인은 이기적인 삶에서 탈피한 사람이지요.
하나만 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면 돼요.
우리의 기도 제목이에요.
오늘 기도하시기 전에, 기도 제목으로 기도하시기 전에 제일 먼저 우리 하나님 말씀 살펴보았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욱더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그 대상과 관계하는 데서 어려운 것은 제가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제게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그 사랑 안에는 용서도 포함되어 있고, 회복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도 포함되어 있고, 또 짐을 나누어지고자 하는 동역의 마음도 있고, 다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저희 그런 것이 없습니다.
저는 반드시 그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십시오. 풍성히 채워주십시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구한다고 하면, 그것은 성경적인 간구가 되겠지요?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기뻐 받아들일 수 있는 기도이니만큼 또 그렇게 여러분들 기도하시고, 또 준비해 온 기도의 제목들 기도하시는 기도 모임 시간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미워하는 자에게

네 원수를 친구처럼 사랑하라 그러면 너는 하나님의 친구가 될 것이다.
네게 무관하고 낯선 사람 일지라도 사랑하라 그러면 하나님 가까이에 있게 될 것이다.
네마음에 끌리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고 네마음에 받아들이라 하나님께서 너를 영접하실 것이다.
너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네게 넘치도록 부어 주실 것이다.
너를 용납하지 않는 사람을 초청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게 하는 영광문을 넓게 여실 것이다.

미움이 부른 비극

미국의 극작가 테네시 윌리암스의 희곡 [올훼]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여기에 '레이디'와 '제이브'라는 주인공이 나타납니다.
레이디라는 여자 주인공의 아버지는 양조장과 큰 과수원을 경영해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거대한 저택에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며 살아가던 어느 날 한 난폭한 젊은이가 과수원에 불을 질러 집도 불에 타고, 레이디의 아버지도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세월이 흘러 레이디는 한 젊은 청년을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오붓한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남편 제이브가 과수원에 불을 지르고 아버지를 죽인 살해범이란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남편에 대한 적개심과 보복심이 생겨 제이브를 고통스럽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중 제이브가 불치의 병에 걸려서 앓아 눕게 되었습니다.
매일 신음하며 고통스러워하는데 레이디는 남편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조금도 돌봐주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둡니다.
아파서 고통스럽게 괴로움을 당하면서 그대로 죽어가기를 기다립니다.
잔인한 아내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기의 아버지를 죽인 저 남자, 어떻게 해서든지 고통스럽게 죽여야 한다는 보복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적개심에 찬 아내의 모습에서 남편 제이브는 결국 권총으로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넓은 세계 속에 살도록 만들어주지만, 분노, 적개심, 시기, 다툼은 전체보다는 한 부분에, 적은 곳에 자기를 놓게 합니다.

용서와 사랑의 세계는 넓은 곳이지만 분노와 적개심은 좁디 좁은 세계밖엔 안됩니다. 전체보다 부분에, 넓은 곳보다 좁은 곳에 집착하게 되면 결국은 마귀의 유혹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마이어 목사의 시기심

찰스 해던 스퍼전 (Charles Haddon Spurgeon, 1834년 6월 19일 ~ 1892년 1월 31일 )
캠벨 몰간Campbell G. Morgan(1863. 12. 9-)

챨스 스펄젼 목사님과 켐벧 몰간 목사님, 그리고 마이어 목사님
이 세분 목사님은 모두 기독교 교회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분들이시다.
그런데 스펄젼목사님과 켐벧몰간 목사님이 인도하는 교회가 큰 부흥을 이룰 때 마이어 목사님이 이런 고백을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기도를 드리는데 그 자신이 스펄젼 목사님과 켐벧 목사님을 시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회개하여 시기심을 없애려고 아무리 노력하여도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질투는 감당할 수 없었다.

마이어 목사님은 "주님! 시기를 없애고 평화의 영을 갖게 해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지만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마이어 목사님께서 이 시기의 마음을 극복할 수있었을까?
그는 기도의 방법을 바꾸었던 것이다.

주님! 스펄전 목사님과 캠벧 목사님의 교회를 부흥시켜 주시고 축복 해주세요”라고 기도 드린후 참 평화를 경험했다.
프레더릭 마이어 (F. B. Meyer)

마이어 목사님, 찰스 스펄젼 목사님, 캠벨 몰간 목사님


프레데릭 마이어 목사
'비국교도의 대주교'라 불린 목사.
1847년 영국에서 태어나 브라이튼 칼리지를 거쳐 런던 대학을 졸업했다. 경건주의 노선을 따라 케즈윅 부흥회에 자주 참석해 설교와 강연을 진행했다. 1870년 초 미국 복음주의 부흥을 이끌던 드와이트 무디를 만나 영국의 여러 강연, 교회, 사역을 소개해 주었고 무디 역시 그를 미국으로 초대하면서 북미 사역에 참여했다. 이를 계기로 무디와 마이어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남아프리카, 아시아, 북미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고 주로 성경의 인물 중심으로 주석을 작성하여 75권이 넘는 책을 썼다. 1918년에는 7명의 성직자와 함께 그리스도의 재림이 멀지 않다는 런던 선언문에 서명하기도 했다. 80세의 나이에도 목회를 활발히 하며 미국으로 향할 만큼 열심히 했다. 1929년 82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세 분의 유명한 목사님
19세기 말 영국의 런던에는 세 분의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프레데릭 마이어 목사님, 뉴파크 스트리트 교회의 찰스 스펄젼 목사님,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캠벨 몰간 목사님이셨습니다. 이들 세 분의 목사님들은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각자가 섬기고 있는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분들 가운데서 교회의 교세면에서나 영향력이 조금은 뒤지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교회의 프레데릭 마이어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이어 목사님의 마음 속에 열등의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스펄젼 목사님만큼 설교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몰간 목사님처럼 카리스마적으로 권위있는 목회도 못하는구나."

이러한 생각이 그의 마음 속에 생기면서 그는 다른 두 분의 목사님에 대해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강단에서 사랑을 외치는 설교자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그러면서 그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그러다가도 누군가가 옆에서 스펄젼 목사님이나 몰간 목사님에 대해서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의 마음이 다시금 불편해 지고는 했습니다. 그는 아무리 시기심을 떨쳐버리려고 애를 써도 자기 힘으로는 그 문제를 풀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되겠습니다. 제 마음에서 불일 듯 일어나는 시기심을 없애주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그는 간절히 기도를 드리던 가운데, 그의 마음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너는 어떻게 기껏해야 시기를 없애는 것으로 만족을 삼으려고 하느냐? 그 두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줄 수는 없다는 말이냐? 그들과 그들이 섬기는 교회가 잘 되도록 축복하는 기도를 해 줄 수는 없단 말이냐?"

마이어 목사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다른 두 분 목사님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무조건 무릎을 꿇고, 그들이 섬기는 교회를 위해서 축복하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때때로 공식석상에서, 심지어는 자신의 교회에서 대표기도를 할 때도 이렇게 기도할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스펄젼 목사님과 몰간 목사님의 목회사역에 큰 복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목회하시는 두 교회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크게 부흥할 수 있도록 채워주시옵소서. 그래서 그 교회들이 넘치도록 채워지고 나서 남은 사람들이 있거든 우리 교회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마음에 자유함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 뒤부터 이 세 분의 목사님은 친구처럼 아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들은 함께 힘을 합쳐서 런던의 복음화를 위해 애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 교회 모두를 크게 복 주셨습니다. 세 교회 모두가 아주 크게 성장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마이어 목사님에게 글을 쓰는 좋은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는 좋은 책을 많이 저술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쓴 책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혀지고 있습니다.

알렉산더의 분노

알렉산더 대왕은 "나는 더이상 정복할 땅이 없다"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혀를 다스리지 못함으로 큰 불행을 겪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자란 막연한 친구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클레토스라는 그의 친구는 알렉산더 대제의 휘하에서 장군으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은 이 친구가 술에 취해 알렉산더의 많은 군졸들 앞에서 대제를 모욕하는 발언을 하였습니다.
순간적으로 알렉산더는 옆에 있던 병사의 창을 빼앗아서 클레토스에게 던졌습니다.
물론 죽이려고 시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 그 창은 자기의 친구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알렉산더는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그 후회로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다 옆의 사람들의 만류로 실패했다는 일화가 전해옵니다.

그는 전 세계를 정복했지만 자기의 분노를 다스리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다툼을 없애는 방법

하루는 헤라클레스가 길을 가다 괴물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헤라클레스는 그 괴물을 두들겨 쓰러뜨린 후 다시 길을 떠났다.
그런데 조금 후 3~4배 더 커진 괴물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는 더 센 힘으로 괴물을 때려 눕혔는데 이번에는 더 커진 괴물이 나타났다.
때리면 때릴수록 더 커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자 헤라클레스는 아테네를 찾아갔다.
그때 아테네는 말했다.
“그 괴물의 이름은 「시기, 질투」인데 때릴게 아니라 못본 척 놔두면 저절로 작아져 힘을 못 쓴다네”

질투의 두 얼굴

희랍어의 질투(ζηλοs)는 성경에서 두가지 뜻으로 사용된다.
하나는 질투의 뜻이고 다른 하나는 열심의 뜻이다.
이 말을 어근으로 해서 나온 영어가 jealous (질투)와 zeolous (열심)이다.

고린도후서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낸다고 말하는데 영어 성경은 하나님의 질투를 가지고 열심을 낸다고 번역하였다.

질투는 인간이 세상에 탄생되면서부터 가지는 인간성이다.
질투라는 뿌리는 천사적인 사랑과 열심으로 발전되기도 하고, 악마적인 미움과 파괴로 발전되기도 한다.

질투가 가지는 두 개의 얼굴은 천사와 악마의 얼굴이다. 질투는 가정을 파괴하고 직장생활을 누더기로 만들고 교회를 파괴하기도 한다. 질투만큼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도구도 드물다. 이런 질투의 악마적인 얼굴을 천사의 얼굴로 바꾸는 예술이 인생의 행복과 보람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 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에 젤로스가 사용되었다.

2. 고후 7:10-11,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근심에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다. 간절하고 때로는 격분하고 두려워도하며 사모하고 열성을 기울이는 정열과 진실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젤로스이다.

3. 고후 11:1-3, 내가 하나님의 젤로스를 가지고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서 신랑이신 예수에게 중매하려고 열심을 내고 있다고 했다.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성경에 많이 나오고 있다.

ζηλός, ου, ὁ, ζηλός, ους, τό 스트롱번호 2205

1. 열심.   2. κατὰ ζ : 열심에 관한한
발음 [ zē- lŏs ]
어원  / 2204에서 유래

1. [좋은 의미로] 열심, 열정, 고후 9:2.

  • a.
    κατὰ ζ.: 열심에 관한한, 빌3:6.
  • b.
    ζ. θεοῦ: 하나님을 향한 열심, 롬10:2.
  • c.
    ζ. τοῦ οἴκου σου: 당신의 집에 대한 열심, 요2:17등, 고후7:7, 히10:27등.
2.  [나쁜 의미로] 시기, 질투, 롬13:13, 고전3:3, 고후12:20, 갈5:20,
πλησθῆναι ζή- λου: 시기로 가득 차게 되다, 행5:17, 13:45.

열심(요 2:17, 롬 10:2, 빌 3:6), 시기(행 5:17, 롬 13:13, 고전 3:3, 고후 12:20).

거짓의 가면을 벗어라

프리드의 글을 보면 영국의 마까르네 경이 군대의 명예직으로 있을 때의일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이따금씩 자기는 아직 한번도 벼슬을 하려고 청탁해 본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주는 벼슬도 싫다고 거절하였노라고 하면서, "세상의 누구에게도 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편한대로 사는 것보다 더 편한 일은 없다."고 말하곤 하였는데, 이 말이 돌고 돌아급기야는 왕의 뒤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왕은 그 말이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인가를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서 하루는 마까르네 경을 따로 불러 놓고는 그에게 은근히 스페인 말을 할 줄 아냐고 물어 보았다.
이때에 마까르네 경은 대답하기를 "네, 아직은 할 줄 모르지만 폐하께서 필요하시다면 즉시라도 배워 가지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왕은, "경이 스페인 어를 배우고 나면 좋은 일이 있을것일세!" 하고 한마디 던졌다.

마까르네 경은 이 단순한 대답 한마디에 왕께서 자기를 어떤 중대한 외교 사절로 뽑으려는 줄로 지레 짐작하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스페인어를 공부했다.
그리고는 석달이 지난 뒤 왕을 찾아 뵙고는 이제는 스페인어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노라고 보고 드리고는 기대에 찬 얼굴로 왕을 바라보았다.

이때에 왕은 대답하기를, "그러면 그대에게 일을 한가지 줄 터이니 스페인 원어로 되어 있는 이 글을 한번 읽어보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만이 존경받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네“

요화(妖花)  - 요사할 요, 꽃 화

어떤 임금이 백성의 마음을 시험해 보려고 백성들에게 꽃씨를 나누어주면서 화분에 심어 잘 가꾸어 제일 꼿을 예쁘게 피우게 한 사람에게 상을 많이 주고 그대신 꽃을 도무지 못 피게 한 사람에게 벌을 주겠다고 했다.
그 꽃이 다 피일 때 쯤 되어서 모두 그 화분을 가지고 길가에 나와 진열해 놓고 임금님이 마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기로 했다.
다 진열된 후 임금이 지나가면서 보니까 모두 훌륭하게 꽃이 피어 있었다.
그 중 어느 소년이 꽃 없는 화분을 들고 나와서 그대로 그 옆에서서 눈물을 흘리며 서 있는데 임금님은 예쁘게 피어있는 꽃들은 다 눈을 찡끄리며 보더니 이 꽃 없는 화분을 보고 기쁜 얼굴로 그 소년을 불러 칭찬하여 큰 상을 주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꽃씨를 받아 심었으나 나지 않음으로 벌 받을까 두려워 또는 상을 타려고 부정하게도 다른 꽃씨를 심었던 것이나 이 한 소년은 나지 않는 것을 정직하게 꽃 없는 화분 그대로를 가져왔던 것이다.
많은 화분에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들은 요화(妖花) 즉 부정을 통한 요사스러운 꽃들이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

우리나라 근대사에 있어서 큰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그는 간이 중학교 2학년을 중퇴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이 나라의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성학교를 세웠는데 '죽을지라도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이 대성학교의 교훈이었다.
도산 선생은 예배당을 세워 전도사 일까지 했다.
그는 "우리 백성이 다 손에 성경을 쥐는 날에는 우리나라가 바로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형무소에서 나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 "우리 백성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면 살고 서로 물고 찢으면 망합니다." 라고 말했다.

05-13-2024(월) 요한일서 4:7-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은 사랑이시라(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And so we know and rely on the love God has for us. God is love. Whoever lives in love lives in God, and God in him.


하나님의 본성(The Nature of God)과 하나님의 속성들(The attributes of God)

하나님의 본성(本性)이란 무엇인가? 

'본성(nature)'은 '하나님 존재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특성'을 말합니다.
영과 사랑과 빛입니다.

신약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고(요 4:24), 사랑이시고(요일 4:8), 빛이시다(요일 1:5). 

1.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 ㅡ 하나님의 인격의 본성
2.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ㅡ 하나님의 본질의 본성
3. 하나님은 빛이시다(요일 1:5) ㅡ 하나님의 표현의 본성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표현들은 은유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다.
서술적인 의미로 쓰였다. 
이런 표현들은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고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본성에 있어서 영과 사랑과 빛이시다. 영은 하나님의 인격의 본성을 나타내고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의 본질을 나타내며, 빛은 하나님의 표현의 본성을 나타낸다. 사랑과 빛은 모두 생명이신 하나님과 관계있는데, 그 생명은 그 영에 속한 것이다(롬 8:2). 하나님, 영, 생명은 사실상 하나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영은 생명이다. 그러한 생명 안에 사랑과 빛이 있다. 이 신성한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 그것은 은혜가 되며 이 신성한 빛이 우리에게 비췰 때 그것은 진리가 된다.

하나님의 속성이란 무엇인가?

'속성(attribute)'은 하나님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특성을 말합니다.
좀더 말하면 38가지 이상의 특별하고 다양한 특징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물감 팔렛트 아시죠?
기본 색에서 다양한 색을 만들 수 있지않습니까?
그것이 속성(attribute)입니다.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 네 가지ㅡ 빛, 의, 거룩, 사랑

1. 빛 ㅡ 하나님의 표현
2. 의 ㅡ 하나님의 외적인 행동이나 방법
3. 거룩 ㅡ 하나님께로 분별됨과 하나님 자신으로 적셔짐
4. 사랑 ㅡ 하나님의 본성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긍휼 

속성(屬性) - 단어의 의미

1. 속(屬) 의 의미 : '하나님의 속성' 할 때 '속'은 '하나님께 속한 다양한 특징들'을 말한다. 
여기 '속'은 '무리 속, 속할 속'자이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다양한 특성들을 총합하여 말한 것'이다.  

屬 무리 속, 이을 촉  : 
1. 무리(모여서 뭉친 한 동아리) 
2. 동아리(같은 뜻을 가지고 모여서 한패를 이룬 무리) 
3. 벼슬아치 
4. 혈족(血族) 
5. 붙다 
6. 부착하다(附着ㆍ付着--) 
7. 거느리다 
8. 복종하다(服從--)
9. 수행하다(遂行--)

2. '속성(attribute)'은 하나님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특성을 말합니다.
좀더 말하면 38가지 이상의 특별하고 다양한 특징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물감 팔렛트 아시죠? 기본 색에서 다양한 색을 만들 수 있지않습니까? 그것이 속성 attribute입니다.  하나님께는 속성을 가지고 계시고 이것은 신성하고 풍성하다. 신성하고 풍성한 속성들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3. 신성한 속성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속성은  네 가지 '사랑, 빛, 거룩함, 의'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빛과 거룩함과 의와 같은 그분의 풍성하고 다양한 속성들에 있어서 넘치신다. 하나님의 속성들은 사람 예수님을 통해 살아 나타났고,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사람 예수님의 미덕들이 되었다.

4.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들 - 38 가지 속성

⓵ 생명(엡 4:18, 창 2:8-9, 행 11:18, 요 3:16, 요 1:4, 10:10, 11:35, 14:16, 요일 1:2, 5:12) 조에 zoe
⓶ 사랑(요 3:16, 딤전 1:15, 요일 4:10, 엡 2:4) 아가페 agape
⓷ 빛(계 21:23, 사 30:26, 계 22:5, 계 21:11, 18, 요일 1:5-7)
⓸ 풍성(롬 2:4, 엡 2:4, 1:7, 2:7, 3:16, 롬 9:23, 롬 11:33)
⑤ 충만(골 1:19, 골 2:9, 엡 3:19, 엡 1:23, 요 1:16)
⑥ 거룩(계 4:8, 사 6:3, 히 12:10, 벧전 1:15, 16, 히 12:9-10, 계 21:2, 10)
⑦ 의(義, 계 15:13, 롬 1:16-17, 요일 1:9-10, 행 10:43, 롬 3:21, 시 89:14)
⑧ 지혜(롬 16:27, 엠 3:10, 고전 1:30)
⑨ 총명(엡 1:8)
⑩ 신실하심(고전 1:9, 요일 1:9, 고전 10:13, 살전 5:23-24)
⑪ 진실하심(롬 3:7, 15:8)
⑫ 단순하심(고후 1:12, 고후 11:3)
⑬ 성실하심(고후 1:12)
⑭ 선하심(눅 18:18)
⑮ 긍휼(롬 9:15-16, 롬 11:32, 눅 15:20-24, 히 4:16, 엡 2:4) 엘레오스 eleos
⑯ 불쌍히 여기심(연민, 롬 9:15, 고후 1:3) 오이크티르모르스 oiktirmos
⑰ 은혜(엡 2:7, 8, 요 1:16-17, 고후 12:9, 벧전 4:10, 5:10)
⑱ 평강(롬 16:20, 빌 4:7, 요 16:33, 살전 5:23, 엡 1:2)
⑲ 기쁨(롬 15:13)
⑳ 소망(롬 15:13) 
㉑ 위로(안위, 롬 15:5, 고후 1:3, 4)
㉒ 인자하심(롬 2:4, 롬 11:22, 엠 2:7, 딛 3:4-5)
㉓ 용납하심(관용, 롬 2:4)
㉔ 오래 참으심(롬 2:4)
㉕ 오래 견딤(롬 15:5)
㉖ 질투(고후 11:2)
㉗ 엄위하심(롬 11:22)
㉘ 공평하심(행 10:34, 롬 2:11, 엡 6:9)
㉙ 죽지 아니함, 불멸, 아타나시아 athanasia(딤전 6:16)
㉚ 불변하심(약 1:17, 히 6:17)
㉛ 영광(행 7:2, 55, 창 12:1, 4, 벧전 1:3, 5:10, 딤후 2:10, 롬 8:21, 히 2:10, 요 1:1, 14, 롬 3:23, 고전 2:7, 살전 2:12, 히 2:10, 롬 8:17, 30, 롬 9:23, 계 21:11)
㉜ 존귀(계 4:9, 5:13)
㉝ 위엄(유 25)
㉞ 주권(롬 9:20, 21, 19, 딤후 2:20-21, 롬 9:22-24)
㉟ 권위(유 25, 눅 12:5)
㊱ 능력(고전 1:24, 엡 1:19, 행 2:24, 엠 1:20-21) 
㊲ 힘(엡 1:19, 계 5:12), 이스쿠오스 ischuos 
㊳ 강력(엡 1:19, 계 1:6, 5:13, 유 25, 딤전 6:16) 크라토스 krotos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속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단일성, 무한성, 영성, 영원성, 불변성, 주권성, 전지성, 전능성, 편재성, 사랑 등으로 소개됩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속성과 도저히 고유할 수 없는 속성으로 분류합니다.
사랑이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속성이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서로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선교사며 번역가였던 위클리 도우거 멜란드 부부가 브라질의 인디언 마을로 이주했을때의 일입니다.
당시 원주민들은 말투가 거칠고 공격적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배타적인가 알아보니 이들 부부가 오기 전에 다른 백인들이 와서 마을 사람들을 핍박하고 약탈하고 집에 불을 놓고 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멜란드 부부는 더욱 열심히 인디언들의 말을 익히며 의술과 다른 여러 가지 수단으로 원주민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도우거가 상처가 나서 피가 엉켜붙은 한 원주민 소년의 발을 씻겨 주다가 자신을 보고 원주민들끼리 주고받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디언의 발을 씻어준 백인에 대해 들어본적이 있는가?
분명히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날부터 도우거가 인디언 집에 갈때면 인디언들은 그가 온다는 말 대신에 “우리에게 보낸 하나님의 사람이 오신다.
저분은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사랑안에서 인디언들은 비로소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다같은 백인이지만 약탈하고 방화하고 억압하는 백인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해주는 백인, 그들 속에 하나님을 찾아볼수 있는 백인이 된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랑 속에서 인디언들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큰 변화의 체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평안과 행복을 누릴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곳에 하나님이 와 계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보기 원합니다.
환상으로나 꿈으로라도 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형상으로는 볼수 없으되 하나님의 실상인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배울수 있습니다.
사랑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지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분류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분류

속성

정의

성경구절

단일성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신 6:4

무한성

하나님은 제한도 종료도 없으시다.

왕상 8:27,

행 17:24

영원성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끝이 없으시다.

창 21:33,

시 90:2

영성

하나님은 보이시지도 나눠질 수도 없다.

요 1:18,

딤전 1:17

불변성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불변하시다.

말 3:6,

약 1:17

주권성

하나님은 어느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 최고의 통치자이시다.

엡 1:21

전지성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시 147:4-5,

마 11:21

전능성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신다.

마 19:26,

계 19:6

편재성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

시 139:7-12,

렘 23:23-24

사랑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을 베푸신다.

엡 2:4-5,

요 4:8

유복성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신 7:7-8

정의성

하나님은 편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로우시다.

행 10:34-35

은혜성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때를 따라 은혜를 입히신다.

출 34:6,

딛 2:11

 

 

하나님의 속성 도표

하나님의 속성 도표

능력

전지, 전능, 무한성, 불변성, 주권성, 완전성, 무오성, 단일성, 초월성, 단순성, 영성, 생명성, 내재성, 불가시성

도덕

사랑, 정의성, 자비, 유복성, 거룩성, 진실성, 거룩, 공평, 성, 선, 자비, 은혜, 인내, 신뢰성, 도덕적 존재

시공간

영원성, 자존성, 편재성, 무한성

 

믿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자로서 마땅히 알아야도 하겠지만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아서 그 분의 인격과 성품 즉, 그 분의 속성을 닮아야 만이 장차 우리가 갈 신령세계에서 닮은 그 양에 따른 그 나라의 누림과 영광과 존귀가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에 있어서 신학자들이 분류하기를 자연적 속성과 도덕적 속성, 또는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 또는 본원적 속성과 파생적 속성, 또는 적극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 또는 자동적 속성과 타동적 속성, 그런가 하면 특별히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본성을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으로 분류를 하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에는.

1. 무한하심 : 성경은 하나님의 무한성, 즉 하나님의 본성이 무한하심을 가르쳐줍니다.
2. 영이심 : 성경이 강조하는 또 다른 하나님의 본성은 그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3. 인격이심 : 하나님의 인격성. 하나님은 마음 지성 의지 이성 개별성 자의식 자기결정 등을 가지신 분입니다.
4. 통일체이심 :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의 통일체라는 사실도 가르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본성에서 나온 속성을 다음과 같이 분류합니다.(로이드존스 목사)
비공유적 속성(인격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도덕적 속성)으로 크게 분류하는데 이것을 분류한 것을 보면.

1. 비공유적(인격적) 속성.

① 영원성과 불변성: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십니다. 그분은 영원하십니다.
② 편재성: 하나님은 모든 곳에 존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③ 전지하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하나님의 지식은 언제나 절대적인 지식입니다.
④ 전능하심: 하나님은 모든 능력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⑤ 완전하심: 성경은 하나님의 철저하고 절대적인 완전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탁월함의 총합입니다.
⑥ 영광: 이것은 성경에서 그 분의 위대하심, 그 분의 광휘, 그분의 엄위하심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2. 공유적(도덕적) 속성.

① 거룩하심 : 우리는 거의 대부분 거룩함을 소극적 의미로 다루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거룩함의 의미가 하나님께서 죄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계시며 관계가 없으시다는 의미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거룩함에는 적극적 의미도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이고 완벽한 순결입니다.
② 의로우심, 공의로우심 : 의는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 가운데 나타내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사법적 거룩하심입니다. 공의에 의해 하나님은 그의 율법을 어기고 죄를 범한 죄인들에게 형벌을 내리십니다. 또 하나의 다른 정의는 하나님의 의는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라는 것입니다.
③ 선하심과 사랑: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모든 피조물을 관대하고 친절하게 다루도록 하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롬11:22)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이 자신을 다른 존재에게 영원토록 전달하도록 만드는 속성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 스스로가 자신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밝힙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이십니다.
은혜는 자비는 인내와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④ 신실하심 : 이 속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의와 공의 안에 포함되며, 하나님의 불변성의 개념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이 당신이 안전하게 기댈 수 있는 분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분이 부르신 모든 사람들을 악한 자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셔서 그들 안에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들을 강하게 하시고 굳게 하시리라는 사실을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분류인데, 기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분류는 이와 대등소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김석준목사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속성 전체를 인격성이라 하고, 이 인격성에는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이 있는데, 인격성이라 하면 그의 활동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활동성 이전에 마치 인간에 비하면 내적 정신적 느낌을 말하는 것이니 이 신의 인격성이란 인간의 지식으로 혹은 용어로 형언키 어려운 생존적 활동적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1. 비공유적 속성에는
① 자존성 ② 영원성 ③ 완전성 ④ 단일성으로 이 속성은 인간은 가질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2. 공유적인 속성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을 때 가질 수 있는 속성으로 여기에는 크게
(1) 지혜지식성 (2) 도덕성 (3) 능력성으로 분류하고.

이것을 다시,

(1) 지혜지식성은 ①지식성 ② 지혜성으로 분류합니다. 이것을 조직신학에서는 속성이라고 말합니다.

(2) 도덕성은 ①선 ② 사랑 ③ 거룩 ④ 진실로 분류합니다. 이 도덕성은 신적인 도덕인데 신 자신이 자신을 규제하는 도덕이 아닌 근원적 발생적 신 자체적 도덕성으로 이 도덕성은 상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신의 이 도덕성은 자기를 위한 자위적 자애적 도덕이 아니고 상대적 도덕입니다.

(3) 능력성은 ①의 ② 주권으로 분류합니다. 이 신의 능력은 완전적 능력으로 이 완전적 능력은 수동적 능력이 아니고 자체적 능동적 능력입니다.

 

이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을 세밀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비공유적 속성.


(1) 자존성: 신은 자존자가 되어야 하는 고로 자존성이라는 용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유출물이거나 발생물이 아니고 자존자인고로 자존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영원성: 자존자이신 이 하나님은 영원성을 가졌으니 과거적 영원, 미래적 영원입니다. 이 영원성이라는 말은 그의 존재만이 영원이라는 말이 아니고 속성적 존재적 영원을 말합니다.

(3) 완전성: 완전성이라는 말은 지혜 지식 인격성의 성질적 완전을 말합니다. 학자들 중에는 완전성 대신에 무한성 불변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변성에는 모순성이 있습니다. 완전성이 가장 적절한 용어입니다. 이 완전성 속에 절대성이 들어있습니다.

(4) 단일성: 단일성이라는 말은 흔히 사용하지 않는 용어입니다. 완전성은 필연코 단일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로 이 단일성을 부인하거나 무식하면 하나님을 이해치 못하게 되니 하나님을 바로 알 길이 없고 구원과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신의 속성 중에 중요한 것이 이 단일성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과 직접 관계가 됩니다. 고로 이 단일성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구원은 잘못됩니다. 실은 우리의 구원이라는 이 구원이 이 단일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속성에서 단일성을 제하면 우리의 구원은 바른 구원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곧 통일성을 이룹니다.(엡1:10)

 

이상의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지 다른 어떤 존재도 이 속성이 없고 가질 수가 없습니다.

 

2. 공유적인 속성.


공유적인 속성이란 하나님 외의 피조물들도 가질 수 있는, 혹 가지고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공유적인 신의 속성을 가진 하나님을 신학적 용어로는 인격적 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신이신고로 물질적 고정적 형체를 가진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용어는 계시목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1) 지식성: 과거와 현재를 아는 것을 지식성이라고 합니다. 즉 과거의 어떤 존재성이나 사건성에 대하여 아는 것을 지식성이라고 말합니다. 신은 완전한 지식성의 분이신데 완전한 지식성은 완전한 인격성이란 말입니다. 완전한 지식성이란 과거와 현재를 절대 정확하게 아심을 말합니다.

 

(2) 지혜성: 지혜성은 미래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예정도 계획도 설계도 이 지혜지식성에서 나옵니다. 지혜지식성이란 앞으로 어떻게 되어질 미래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 것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물질계에서의 성장을 보고 천국에서의 누림을 압니다. 농부가 가을추수를 내다보고 종자를 뿌리는 것은 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완전한 지혜성이란 완전한 인격성이란 말인데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완전 정확하게 아심을 말합니다.

 

(3) 선성: 일반적으로 선이란 남에게 유익을 입혀준다는 말인데, 이 속성은 단순히 남에게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자타가 다 유익이 되는 선입니다. 갑에게는 유익이 되고 을에게는 손해가 되면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참 선은 그 사건과 관련성이 있는 존재는 다 선이라고 말합니다. 이 선은 자기가 자기를 유익 되게 하는 어떤 사건이 있을 때 그 사건이 상대와 관련 없는 자기의 단독적 관련적 사건일 경우 자기가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선이요, 이 사건이 他에게 미쳐서 他에게 관련됐을 때에 자타가 유익이 되는 선입니다.

 

어떤 사역을 자타에게 유익을 줄 목적으로 했더라도 천국에 들어가서 그것이 자타에게 유익과 행복이 아니면 선이 아닌 것입니다. 최종적 영원적 결과적인 목적이 아닐 때는 선이 아닙니다. 영원히 유익하고 행복한 것이 선입니다. 선성이란 영원히 행복하고 즐겁게 해주는 성질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인격성에서 선성이라고 말합니다.

 

(4) 애성(愛性): 이 애성은 선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애성은 선행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성이 충만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수동적 동화적인 사랑이 아닌 내발적 발생적 사랑입니다.

 

한국어로는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지만 원어로는 아가페 스톨게 필레아 애로스 등으로 각각 표현합니다. 사랑이라는 이 용어는 인간이 쓰는 용어로 번역하기가 빈약합니다. 과거분사 현재 진행형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이라는 의사가 이 애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구원의 발작 선택 예정 진행 방편 결과가 사랑이십니다. 예정도 사랑으로, 진행도 사랑으로, 도성인신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한 것 모두는 사랑의 발작에서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가 되는 것입니다.

 

(5) 성성(聖性): 하나님의 성성은 외래적 평가적 상대적 성성이 아니고 당신 자체로서 구별함을 받은 자체적 능력적 성성입니다. 하기오스: 자체적 절대적 영원적인 거룩입니다.

 

거룩이란 말은 구별이란 말인데 동사로 구별한다는 말보다는 명사형으로 구별이라는 말입니다. 또 존재적으로 구별되었다 라기 보다도 자체가 구별성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구별성을 가진다는 말은 다른 어떤 존재가 소유할 수 있는 그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객관적 혹 피동적 수동적 구별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누가 구별해놓은 것이 아니고 자체적으로 구별되어 있는 구별된 존재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 도덕성은 일반적인 도덕성과 구별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고 어떤 인간이, 어떤 능력자가 하나님을 혹은 하나님의 성품을 혹은 도덕성을 혼잡 혼돈을 시킨다 해도 혼돈도 혼잡도 될 수 없는 자체적 완전 구별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구별성은 인간의 용어로는 정확히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거룩은 자체적 구별인고로 혼잡 혼돈 시킬지라도 혼잡 혼돈되지 않고, 지옥 같은 죄악의 소굴에서도 그것이 감염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거룩을 입혀 당신과 같은 거룩한 자로 만들어 거룩한 곳에서 살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6) 진실성: 이 진실성은 자체적 능력성을 가진 것, 독단적인 가치성을 가진 것, 자체적 가치성을 가진 것입니다. 진리가 활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주님은 자체적으로 진리시요 우리에게 대하심도 진실이십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참이라는 말입니다. 이 참이라는 말은 절대 정확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시대의 어떤 존재도 여기에 맞지 않는 것은 전부가 부족이요 비뚤어진 것입니다. 성질적으로 진실이 아닌 것은 이질이요 전부가 죄라는 말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정확에 절대성을 가진 말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존재적으로 사건적으로 성질적으로 능력적으로 진실이란 말이니 영원히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진(眞)이다. 참이다’ 하는 절대 정확의 표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영원히 절대 표준입니다. 성질적으로 성분적으로 성격적으로 분량적으로 이 진실성이 아닌 것은 기쁨도 향락도 명예도 영광도 사랑도 행복도 부요도 모두는 자기에게 앙화요 고통이요 불행이요 눈물이요 심판거리입니다.

 

(7) 의성(義性): 이 의성은 완전적 의, 생명적 의성입니다. 의적인 능력이란 말은 하나님의 성품적 의성이 아닌 모든 의는 그 어떤 의도 하나님의 의를 능가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의 의와 동등 동질인 의도 없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모든 의라고 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본성적인 본질적인 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의와 합치되는 의는 없습니다. 모든 의라고 하는 그 의는 하나님의 의 앞에는 전부가 정죄를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모든 존재가 의라고 해도 그 의라고 하는 것을 정죄하는 주권성을 말합니다. 의라고 인정을 해 줄 수 있는 그 주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의는 절대적인 의인고로 이 의가 아닌 모든 의는 이 하나님의 의 앞에 전부가 악으로 정죄를 받게 됩니다.

 

(8) 주권성: 이 주권성은 절대적인 주권성입니다. 이 신의 능력은 주권적 자체적 능동적 능력이니 이 주권성은 그 무엇에게도 그 어떤 존재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 능력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능력을 침해치 않고 외계의 그 무엇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 주권적 능력입니다. 이런 주권적 능력인고로 당신은 외계의 그 어떤 의사에게 제재를 받지 않고 당신 자체와 다른 어떤 의사에게도 침해를 받음이 없습니다.

 

이상이 김석준목사님이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볼 때 주의할 사항.

 

하나님의 속성을 생각할 때 그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따로 분리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그 모든 속성을 전부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속성을 다른 속성과 대치시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자비를 대조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면서 언제나, 그리고 동시에 자비로우십니다.

 

이것을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찌하든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아서 그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덧입기 위해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이런 저런 분류를 하는 것이지만 이는 어떻게 분류를 하건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역적인 면에서 볼 때는 비록 어느 한 면의 속성이 두드러져 보이거나 혹은 각 속성이 각각의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동시에 한 활동을 하는 것을 부정하는 듯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유한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아무리 잘 분류를 한다고 해도 우리의 제한된 지성과 제한된 이해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쭈그러뜨려 놓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 때문이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알아서 그 하나님의 속성을 좀 더 많이 닮아보겠다는 뜻에서 이론이나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분류를 한다고 할지라도 분명히 할 것은 하나님은 이 모든 속성 안에 다른 모든 속성을 전체로, 그리고 동시에 소유하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분의 공의와 대립시키는 것은 크나큰 비극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언제나 공의롭고 의롭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균형의 완전성을 우리의 사고에도 항상 유지해야만 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배울 때 단순히 지식충전에 머물거나 이론이나 학문에 그치지 않고 그분의 속성을 믿는 내가 배운 바대로 정신과 사상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김석준목사님이 분류한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가 성화구원을 이루는데 있어서 실질적으로 실천 실행에 도움이 되는 가장 유익한 분류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1)



■본문 롬11:36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은 인간과 유사한 인격적인 면을 가지고 계시면서 동시에 인간과 전혀 다른 무한한 면을 가지고 계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으로서 가지고 계신 특성을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이성적 탐구에 의한 합리적 방법이나 경험적 방법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계시된 말씀을 통해서만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통하여 그분을 더욱 깊이 알 수 있습니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의 속성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인간과 유사한 면이 전혀 없는 비공유적 속성과 인간 속에서도 비슷한 특성을 찾을 수 있는 공유적 속성으로 나눕니다. 이번 과에서는 하나님의 비공유적인 속성에 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자존(自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분,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가 외부의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며(출 3:14), 그 독립성에 의해 모든 행위를 스스로 행하심으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의존하게 만드는 속성입니다. 천지는모두 없어지나 하나님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사라지지 않으며, 하나님을 믿는 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분에게  기대는 모든 존재는 영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2. 불변(不變)하신 하나님



인간은 변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시간의 예속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시간 안에 있는 모든 존재는 모두 변합니다. 인간과 피조물은 생성, 발전, 쇠퇴, 소멸의 운명을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존재나 목적, 약속 그리고 완전성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영원히 동일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불변하시므로 하나님의 뜻도 영원하며, 하나님의 말씀도 영원하고 불변합니다.



시 102:26-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하나님의 불변하심에 대한 12대 증거]



1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출3:15)
2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풂(신5:10)
3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는정확히 성취됨 (왕상8:56)
4 태초부터 영원까지 영원토록 하나님이심 (시90:2)
5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름(시103:17)
6 태초부터 영원까지 우주의 주권자이심 (사41:4)
7 택하신 백성을 영원토록 변함 없이 선대하심(애3:31-33)
8 한번 맺으신 언약은 결코 변개치 않으심 (단9:4)
9 한번 행하신 일은 결코 후회하시지 않음 (롬11:29)
10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불변하심(히13:8)
11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음 (벧후3:8)
12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분 (계1:8)


3. 전능(全能)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의 전능성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범위에 있어서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하는 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을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감당하며 품어주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하나님의 전능성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있어서 영원토록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 하는 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사랑한 대상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세상이 뒤집어지고, 세상의 끝이 올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4. 무한(無限)하신 하나님



무한성은 외부의 어떤 요소로부터도 전혀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가리킵니다. 무한성에는 세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본질적 무한성 : 절대자로서의 무한한 완전성을 보여주는 이 속성은 하나님이 무궁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시 145: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2) 시간적무한성: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시간적 제한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께서 가지신 영원성(eternity)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시간을 현재, 과거, 미래로 파악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현재로 소유하십니다.



시 90: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공간적 무한성: 하나님께서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으심으로 모든 공간의 각 부분에 임재하심을 가리키며

또한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공간에 계심을 편재성이라고 합니다.




시 139:7-10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 능력의 특징]


1 모든것이 가능함 (마19:26)
2 지극히 큼 (시79:11)
3 매우 강력함 (시89:13)
4 지극히 영광스러움(사63:12)
5 영원하여 소멸치 않음(사26:4)
6 주권적임 (롬9:21)
7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음 (롬15:11)
8 도저히 측량할 수 없음(욥5:9)
9 모든 능력의 근원임(시62:11)
10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없음 (합3:6)
11 대적할 자가 없음 (욥11:10)
12 탁월함 (신32:39)




하나님의 속성(성품)(2)

 
■본문 벧후1:4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창 1:27).
그러기에 하나님과 유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공유적 속성’ 또는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며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1. 사랑이신 하나님



1)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성품을 의미합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위하여 자신의 존재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가장 선명한 묘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는 묘사입니다.



요일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2)하나님의 사랑의 최대의 극치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사건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피조물의 운명을 자신과 동일시 하시며, 피조물을 가슴에 품으셔서 대신에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갚으셨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기에 또한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된 것은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 때문만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변화된 것은 기적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매우 더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더딘 것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3. 은혜로우신 하나님



은혜는 아무런 보상 없이 베푸시는 혜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로 인해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으나 구원의 대상이 된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을 가리킵니다. 성도에게 주어지는구원이나 영적 행복은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결과입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신인 동성론적 표현들]
1. 좋아하심(창1:31)

2. 휴식하심(창2:2-3)

3. 근심하심(창6:6)

4. 후회하심(창6:7)

5. 기억하심(창9:16)

6. 살피심(창18:21)

7. 진노하심(출22:24)

8. 질투하심(출24:14)

9. 싫어하심(잠6:16)

10. 미워하심(신16:22)

11. 염려하심(신32:27)

12. 선한 싸움을 하심 (신33:27)

13. 아심(왕상8:39)

14. 웃으심(시2:4)

15. 주무심(시44:23)

16. 슬퍼하심(시78:40)

17. 보복하심(렘51:56)

18. 뜻을 돌이키심 (욘3:10)

19. 원수를 갚으심 (롬12:19)

20. 사랑하심(계3:19)





4. 거룩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함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카도쉬’는 ‘분리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거룩성은 하나님의 가장 하나님다운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한 분으로 지칭되며, 성부, 성자 성령으로 불립니다. 하나님은 다른 존재와 구별되어 존재하십니다.



계 4:8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2)거룩함이란 하나님의 이름일 뿐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성도(聖徒), 곧 거룩한 무리라고 부릅니다. 사도신경에서 교회는 거룩한 공회라고 불리며,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은 성일(聖⽇)이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며 운명입니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엡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5. 의로우신 하나님



성경에서 ‘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체데크 ’는 ‘기준에 부합함’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하나님 의 의로움이란 하나님이 불의를 행하지 않으며 죄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내적인 거룩함에 합당한 성품을 갖고 계시는데, 이를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 율법, 사망에 반대가 되는 분으로서 의로우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적대적인 세력으로부터 분리됩니다.



신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


【마무리】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인간에게 자신의 영광을 부어주시고 자신을 찬양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최고의 기쁨이며 의무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생각과 마음속에 모시며, 하나님의 성품이 자신의 존재 속에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동화되어 그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 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 성품에 동화되는 것은 모든 성도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공로 없는데도 행복을 베풀어 주실 때에는 그것은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범 했음에도 행복을 베풀어 주실 때에 그것은 ‘자비’이다. 하나님께서 분노하게 하는 반역을 참으 실 때에는 그것은 ‘오래 참으심 ’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이행하실 때에는 그것은 ‘진리 ’이다. 하나님께서 고통당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길 때에는 그것은 ‘긍휼’이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때에는 그것은 ‘후대’이다.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를 도와주실 때에는 그것은 ‘의’이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실 때에는 그것은 ‘자비’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선하심이라는 한 가지 이름으로 통합되어진다.    -E.스탠리 존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무슨 뜻인가?

성경이 사랑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살펴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의 본질이심을 여러 방법으로 묘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고전 13:4-8a ).
이것이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서술이며,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요일 4:8), 이 서술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려줍니다.

사랑(하나님)은 자신을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은 그분의 사랑에 응하여 나아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다정함을 보입니다.
사랑(예수님)은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두루 행합니다.
사랑(예수님)은 남들이 가진 것을 탐하지 않고, 불평 없이 겸손한 삶을 삽니다. 사랑(예수님)은 육체 가운데 거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누구든지 압도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나님)은 복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에게 복종을 요구하지 않으셨지만, 예수께서는 기꺼이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께 복종하셨습니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 14:31). 사랑(예수님)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였으며, 지금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고의 표현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5장 8절은 똑같은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로부터 하나님의 가장 큰 바람은 우리가 그분의 영원한 집, 천국에서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값을 치름으로써 그 길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그분의 뜻에 따라 택하셨습니다. 사랑은 용서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그분의 위격과 성품의 핵심적인 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거룩하심, 의로우심, 공의로우심, 심지어 그분의 진노와도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 의롭고 옳듯이, 그분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사랑의 완벽한 본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자신들의 개인적 구세주 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요 1:12; 요일 3:1, 23-24).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9~10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보내주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신을 연구하고, 섬긴다고 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똑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참 신자이고, 참 자녀입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과 5절에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거듭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첫 번째로 태어나는 것이고,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두 번째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 딸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거듭남, 중생이라고 합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거듭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누구나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증거가 나타납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자랄수록 부모를 점점 닮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점점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받을수록 성품이 변하고, 사랑이 많아집니다. 교회에 다니지만 거듭나지 못한 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릅니다. 맛은 직접 경험해 보아야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또 사랑할 줄 모릅니다. 이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0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변화가 일어나는데, 불의한 짓을 하던 사람이 하지 않게 되고, 형제를 사랑할 줄 모르던 사람이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거듭났다는 증거, 진짜 예수쟁이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날에는 교회에 다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사랑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은혜를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누구나 은혜를 받으면 영안이 밝아지고, 영안이 밝아지면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영적으로 어두우면 보이는 것이 없지만,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성령의 밝은 빛으로 인해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행하시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들은 감사의 눈물을 흘립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창세기 1장, 2장만 보아도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가득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 만물을 만드신 후에 사람을 만드시고 이 모든 것을 사람에게 주시면서 정복하고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사람을 위해 만드신 것입니다! . 도대체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시기에 이 어마어마한 우주와 만물을 다 만들어 주셨는지,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합니다. 잠언 3장 11~12절에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 잘 믿으시고 신앙생활을 똑바로 하시기 바랍니다. 적당히 살면 좋을 것 같지만, 생각 밖의 어려움을 당합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절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편하게 살고 싶고, 행복하게 살고 싶거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죄악의 맛이 좋은 것 같지만 조금 지나면 그것이 독약이고, 고통을 몇 배로 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악가 파바로티와 함께 3대 테너 가수 중 한 사람이었던 호세 카레라스는 41세 때 오페라 <라 보엠>을 공연하다가 졸도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병원에 가서 백혈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고, 그 고통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구약시대의 히스기야처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제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시켜 주시면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히스기야의 하나님은 호세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기적처럼 병이 나아서 1년 반 만에 다시 무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의 노래는 과거와 달랐고, 그의 노래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기쁨과 감격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는 청중들 앞에서 “질병도 축복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간증했습니다. 

그는 질병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두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겠! 다.’라는 것과 ‘자기 자신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입 전부를 바쳐서 백혈병을 연구하는 재단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은혜 받은 사람들은 환란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과 목숨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3장 10절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이고,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키라고 말씀하신 모든 계명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10장 12~13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잔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고, 행복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어떻게 하면 우리를 행복하게 할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것이 곧 우리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집, 좋은 차, 높은 지위와 명예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절대로 이 세상의 것에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것은 우리에게 잠시 기쁨을 줍니다. 그러나 행복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사랑하며 살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면 행복이 따라옵니다. 우리 가정에 사랑이 넘칠 때 행복해집니다. 우리 교회, 우리 사회, 이 세상에 사랑이 넘칠 때 우리가 행복해집니다. 이상적인 사회는 사랑이 넘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행복한 세상으로 만드는 길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로 아는 것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은 다릅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로는 알지만 체험적으로 아는 사람은 적습니다. 왜 그럴까요? 중요한 이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계명대로 살지 않고, 계명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21절에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이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사랑의 열매가 없어서입니다. 마음속으로는 사랑할지 모르지만 행함이 없는 것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이 생각만 하면 뭐합니까? 실제로 물을 주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돌봐야 열매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랑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이것입니다. 머리로는 사랑해야 된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행함이 없습니다. 옆의 사람이 굶고 있어도 ‘아이고, 안됐다, 안됐다, 사랑하는 아무개가 굶고 있구나.’ 하고만 있습니다. 실제로 사랑한다면 무엇이라도 갖다 주어야 하는데, 행함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는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고 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며 받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알게 되고,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근본적인 이유는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 사랑으로 충만해지기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만이 아니라 행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교회는 사랑으로 충만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 이하에 보면 예루살렘교회가 성령 충만하니까 얼마나 사랑이 많은지, 성도들이 함께 모여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아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32절에 보면 누구도 자기 재산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모두 나누어주고 함께 쓰면서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부지간이나 형제지간에도 내 것이라고 싸우는데 예루살렘교회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천국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하면 이렇게 사랑이 충만한 것입니다. 갈라디아교회도 사랑이 충만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3~15절에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 嗤?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눈병이 있었다고도 하고, 간질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두들겨 맞고,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다 보니 온 몸이 형편없게 된 것입니다. 그 볼품없는 모습을 믿음이 어린 사람이 보면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거지 같고 중환자 같고 은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은 업신여기지 않고 그리스도와 같이 섬겨주었다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눈이라도 빼어 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이렇게 사랑이 충만한 것입니다.

서울 강북에 수유리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는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 계시는데, 목회를 아주 잘하셔서 부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열심히 목회를 하시던 중에 쓰러지셨는데, 5년이 넘도록 병원에서 식물인간으로 지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더 이상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교인들 중에 시험에 들어 안 나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고, 정말 사랑하니까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전 교인이 기도하며 목사님을 극진히 간호하자, 성도들의 사랑이 담긴 기도가 하늘 보좌를 움직여서 목사님이 일어나셨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다시 하시니 교회가 더 부흥되었고, 몇 년 전에는 성전을 크게 지어 하나님 앞에 헌당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한 교회는 사랑이 충만합니다. 

미국 오렌지카운티에서 목회하는 친구 목사님이 계시는데, 이분은 몸이 약해서 새벽기도에도 잘 못 나오십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정재훈 장로님이라는 분은 새벽 4시만 되면 다른 장로님들을 불러서 함께 교회를 위해, 목사님을 위해 날마다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이 목사님이 중풍에 걸려 은퇴하시고, 다른 목사님을 모셨습니다. 
그러나 정재훈 장로님은 일주일 동안 먹은 음식 중에 제일 맛있었던 것을 가지고 주일 아침에 이 목사님을 찾아가서 아침 식사를 수년간 함께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장로님을 얼마나 축복하셨는지 큰 회사의 사장이 되게 하셨고, 또한 이 분이 우주선을 발사할 때 폭발하지 않게 하는 중요한 장치를 개발하게 하셔서 미국 대통령과 비밀회의를 하고, 전 세계에서 이 장치를 주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장로님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새벽마다 기도하고, 곳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간증하며 다니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교회에서 하나님을 위해 순교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랑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십자가로 통해 나타나신 사랑
사랑의 생각, 말, 행동 실천해야

선교사며 번역가였던 위클리 도우거 멜란드 부부가 브라질의 인디언 마을로 이주했을때의 일입니다.
당시 원주민들은 말투가 거칠고 공격적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배타적인가 알아보니 이들 부부가 오기 전에 다른 백인들이 와서 마을 사람들을 핍박하고 약탈하고 집에 불을 놓고 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멜란드 부부는 더욱 열심히 인디언들의 말을 익히며 의술과 다른 여러 가지 수단으로 원주민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도우거가 상처가 나서 피가 엉켜붙은 한 원주민 소년의 발을 씻겨 주다가 자신을 보고 원주민들끼리 주고받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디언의 발을 씻어준 백인에 대해 들어본적이 있는가?
분명히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날부터 도우거가 인디언 집에 갈때면 인디언들은 그가 온다는 말 대신에 “우리에게 보낸 하나님의 사람이 오신다.
저분은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사랑안에서 인디언들은 비로소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다같은 백인이지만 약탈하고 방화하고 억압하는 백인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해주는 백인, 그들 속에 하나님을 찾아볼수 있는 백인이 된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랑 속에서 인디언들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큰 변화의 체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평안과 행복을 누릴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곳에 하나님이 와 계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보기 원합니다.
환상으로나 꿈으로라도 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형상으로는 볼수 없으되 하나님의 실상인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배울수 있습니다.
사랑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지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모습은 사랑

사랑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7절로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속성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모신 사람마다 사랑을 하게 되고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사람은 사랑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샘물이 있으면 바깥으로 그 샘이 흘러 넘쳐 나오듯이 사랑이 있으면 사랑이 밖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랑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의 어머니로 불리우던 테레사 수녀는 1910년 건축업자이며 시의원인 아버지 슬하에서 태어나 18세에 수녀가 되었습니다. 이듬해 캘거타로 건너가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나중에 그 고등학교 교장 선생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몸이 허약했던 그녀는 결핵에 걸려 히말리야 산에서 요양을 한후에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을 섬기며 일생을 보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도 돈으로 5루피를 들고 인도 캘거타의 빈민굴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테레사 수녀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데려다가 돌보았습니다.그 공로를 인정받아 1979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때 그녀는 수상축하연을 열지 않고 대신 그 비용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쓴다는 조건으로 수상식에 모습을 들어냈습니다. 그녀가 실천한 사랑의 삶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사랑이신지라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밀림의 성자라고 불리는 알버츠 슈바이처 박사는 1875년 목사님 가정에서 태어나 풍족한 어린시절을 보내고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한 후 목사로 대학교수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로 바하 음악에 심취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29살 때 그는 우연히 기숙사 책상위에 놓인 잡지를 통해 아프리카인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보고 마음이 극히 아팠습니다. “우리는 구라파에서 이렇게 문명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아프리카 사람들은 저렇게 비참한 삶을 살고 있으니 불공평하기 짝이없다. 내가 가서 도와 주겠다”라고 고백하며 사명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후 슈바이처는 의학을 공부하고 1913년에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덥고 독사와 악어가 들끓기로 유명한 랑바레네라는 곳에 병원을 설립하여 주민들을 치료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했습니다. 하루는 한 부인이 그를 찾와서 “저는 정말 이해할수 없어요. 훌륭한 의사요, 위대한 학자인 당신같은 사람이 왜 여기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슈바이처 박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저는 말로써 감동시킬 만한 말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아무리 열심히 설교를 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러나 사랑을 베푸는 동안 저는 하나님을 바로 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곳에 와서 의술을 통해서 환자를 치료해 주므로 사랑을 베풀고 그 사랑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도록 전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1952년 그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많은 기자들이 그를 취재하기 위하여 그가 탄 기차에 올랐습니다. 특등실에 가서 보니 슈바이처가 없었습니다. 1등칸과  2등칸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나해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탄다는 3등칸에 갔더니 슈바이처 박사가 그곳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청진기를 대고 진찰과 치료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기자들이 놀라서 “박사님! 상을 받으러 가는 이때에 가시면서까지 왜 이런 고생을 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슈바이처는 “나는 내가 즐길 곳을 찾아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찾아다니며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이 사람들은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나는 이 천민들이 타는 기차칸에서 저들을 돕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은 그의 삶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볼수 있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가까이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 하나님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가슴 속에 머무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통해서 천지와 만물을 지으셨고 우리 인생들을 돌보시고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아 줄 때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사랑이 역사하는 그곳에 언제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2.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참모습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사람으로 오셔서 사랑을 실천하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9절로 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우리의 죄와 더러움, 병, 저주, 죽음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시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통해 나타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더러움을 몸소 짊어지시고 병을 감당하시고 저주를 당하시고 죽음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한없는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매달린 형상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곳에서 강물처럼 넘침을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에 처한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우리의 모든 죄의 부채를 청산하시고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의 역사를 볼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 끝까지 매달리게 한 사실이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함을 말씀합니다. 요한일서 3장 1절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고 말씁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인 아키발드 디 하트는 용서란 나를 해친 사람에게 내가 원수 갚을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원수를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그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3장 34절에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히 그를 못박고 조롱하는 사람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수갚는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주님의 그 끝없는 사랑에 우리는 감격하지 아니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미워하고 싶은 충동을 받을때가 있습니다. 원수가 잘못되는 것과, 원수가 심판 받기를 원하며, 원수가 불행을 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나의 부족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 용서할 수 있는 아량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용서 안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용서해 주셨는데 나는 용서받고 남을 용서 안한다면 주님의 용서가 어떻게 내 생애 속에 효과를 발생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믿는 사람은 용서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우리 예수믿는 사람의 운명입니다. 내가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다.

거울이 햇빛을 받으면 반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반사 안하는 거울은 거울이 아닙니다. 그처럼 예수믿는 사람은 주님께 용서를 받았으므로 용서를 베풀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간에 서로 용서하라고 오늘날도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므로 그리스도의 용서를 마음 속에 받아 누릴수가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

요한일서 4장 11절로 1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고 말씀하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오시면 사랑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허물을 덮어주고 사하여 주시는 속성이 있습니다. 시편 103편 13절에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야훼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허물을 덮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잠언 10장 12절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미워하는 사람은 자꾸 발가벗기고 다투고 논쟁을 겁니다. 그러나 사랑은 허물을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 8절에도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장점을 보시고 사랑해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와서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자꾸 이웃을 못살게 굴고 이웃의 약점을 들춰내고 허물을 들춰내면서도 본인에게는 “나는 잘믿는 사람이다. 내가 제일이다”라고 하는 사람은 착각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으로 이웃을 감싸고 사랑하고 덮어주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자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확대경을 하나 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확대경은 두가지 역할을 합니다. 멀리 적게 보이게 하는 것과 아주 가까이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과 단점은 멀리 보십니다. 장점은 크게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이었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응답해주시고, 한없는 은혜를 쏟아부어주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확대경을 들고서 내 장점만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장점을 보시고 사랑 해주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묶여 사는 것 원치 않습니다. 죄의 종이 되지 않기를 원하고 세상과 마귀의 종이 되지 않기를 원하고 병에 묶여서 평생을 고통속에서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가난과 저주에 묶여서 종살이 하기를 원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속성은 심신을 치료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이름은 야훼 라파다. 나는 치료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는데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하신 그의 사역의 3분의 2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유언으로 남긴 말씀을 보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치료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스페인 바로셀로나 출신의 호세 까레라스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전세계가 알아주는 삼대 성악가 중 한사람입니다. 그런데 은빛 테너라고 불리우는 그는 한때 불치의 병을 앓았던 적이 있습니다. 성악가로서 명성이 최고조에 달했던 1987년 그의 나이 41살 되던 해에 오페라 라보엠의 주인공을 맡아서 한참 연습하다가 쓰러졌는데 병원에 실려가서 조사해 보니까 치명적인 백혈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의사는 고개를 흔들면서 살 가능성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꼼짝없이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자 그는 문득 성경을 기억해냈습니다. 그동안 성경은 읽지도 아니하고 그저 의무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들었지만 고통가운데 처하게 되니까 구약의 하나님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세상 의사들이 포기하고 이제는 치료를 받지 못한다고 할 때 하나님이 ‘나는 너의 의사’라고 말하니 능치 못함이 없는 하나님께 소망이 있다고 그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제 생명을 조금만 더 연장시켜 주시면 남은 생애는 이제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을 의지하여 투병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머리카락과 손톱과 발톱이 떨어져 나가는 와중에도 그는 찬송과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찬송하고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골수이식 수술과 힘든 화학치료도 믿음으로 잘 견뎌내어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백혈병에서 나음을 입었습니다. 까레라스는 자신이 다시 살게 된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이 새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감사하고 전재산을 팔아 바르셀로나에 호세 까레라스 백혈병 재단을 세워서 미국과 독일 스위스 등지에도 지사를 두어 백혈병 환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고 그들에게 치료의 은총을 베푸는 선한일을 했습니다. 비로소 까레라스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게 된것입니다.

지금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때로는 질병도 은혜가 될 때가 있습니다. 나는 백혈병과의 싸움을 통해 나보다 남을 생각할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단순히 노래만 부르지 않습니다. 나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있을 동안에 하나님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축하하고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심신을 치료하실뿐 아니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속성은 또한 용기와 희망과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낙심하는 자에게 용기를 주고 절망한 자에게 희망을 주고 그리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실패한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공이시며, 복이시고, 하나님은 은혜이신데 하나님께 나가서 복을 안받으면 누구에게 복을 받겠습니까? 우리가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살면 당당히 하나님께 복을 구하고 복을 받을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야훼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앙을 주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주고 평안을 주는 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용기요, 희망이요, 복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을지라도 용기와 희망을 주시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속성은 영생천국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우리가 시간 저 건너편 영혼으로 이 제한된 공간 저 건너편 무한으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살다가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바울선생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결코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이 우리 속에 들어와야 우리가 비로소 삶을 행복하게 누릴 수 있고 평안을 가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움은 우리하고 다릅니다. 미움은 마귀의 속성이기 때문에 미움이 들어오면 우리 마음에 불안과 공포, 좌절과 절망이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미움이 가져오는 파괴의 행동이란 얼마나 무섭습니까? 미움은 마귀의 형상이요,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이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은 반드시 그속에 사랑이 넘쳐나고 사랑안에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이상 미움은 물러가고 사랑이 들어온 것을 감사합니다. 미움의 어두운 밤이 사라지고 사랑의 태양이 떠오른 것을 감사합니다. 사랑의 생각을 하고 사랑의 말을 하고 사랑의 행동을 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시고 사랑 안에서 참 평안과 행복과 만족을 누리고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05-11-2024(토) 요한일서 4: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6절)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과 미혹의 을 이로써 아느니라.
We are from God, and whoever knows God listens to us; but whoever is not from God does not listen to us. This is how we recognize the Spirit of truth and the spirit of falsehood.

진리의 영(the Spirit of truth)과 미혹의 영(the Spirit of falsehood)
토 프뉴마 테스 알레데이아스 카이 토 프뉴마 테스 플라네스
το πνευμα της αληθειας και το πνευμα της πλανης

진리(225) 알레데이아(alēthĕia) ἀλήθεια, ας, ἡ 스트롱번호 225

1. 진실성.   2. 진실. ψεῦδος.  3. 일반적 진리
발음 [ alēthĕia ]
어원  / 227에서 유래

참(마 22:16), 사실(막 5:33), 진리(요 1:14, 4:24, 롬 2:2), 실상(요 16:7), 과연(행 4:27), 참 됨(행 26:25), 진실하심(롬 15:8),
[동] 진실 하다(롬 15:8), 참되다(롬 3:7).


미혹(4106) 플라내(planē)  πλάνη, ης, ἡ 스트롱번호 4106

1. 4108의 여성형 : 배회.  2. 잘못.  3. 미혹
발음 [ planē ]

유혹(마 27:64, 엡 4:14), 간사(살전 2:3), 미혹(살후 2:11, 벧후 3:17, 요일 4:6), 어그러짐 (유 1:11), 그릇됨(롬 1:27).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

요한은 4절까지 '너희'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수신자들만을 지칭하였으나 본절에서는 인칭 대명사 '우리'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에 대해 혹자는 사도들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Stott, Brooke) 사도들을 포함한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Barker, Haas, Schnackenburg).
왜냐하면 이미 수신자들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언급하였기 때문이다(4절).
사도들을 포함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으며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그의 영향력 하에 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

본문은 '하나님을 아는 자'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 '우리의 말을 듣고'와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를 대조시키고 있다.
'아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스콘'은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가르친 거짓 교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얻는 지식을 가리킨다.
더욱이 본절의 '아는'은 현재 시상으로 그 지식이 지속적이며 성장하는 것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한편 '우리의 말'은 사도들이 선포한 그리스도의 복음, 즉 처음부터 있었던 말씀을 가리킨다(2:7, 24; 3:11; 요이1:5,9).
거짓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가르침을 주장하는 바와 같이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을 부인하고 순종하지 아니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소속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

'진리의 영'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요 14:17; 15:26; 16:13, Marshall, Stott).
2. 혹자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Dodd, Haas).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며 의미상으로 별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의 지배 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사도들을 포함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는 것에 대해서 진술해 온 것으로 보아 후자가 보다 적합한 듯하다.
한편 '미혹의 영'은 '진리의 영'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이것 역시 사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사단의 지배 하에서 거짓 가르침을 전하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구별하는 기준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청종하는 여부에 달려있다.

오늘날 교회 밖은 물론이고, 교회내에도 미혹의 영이 만연한 가운데 있습니다.
미혹의 영이라는 것은 악한 영, 사단의 영을 말합니다.
특별히 미혹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단이 마지막 때에 사람들과 더불어 교인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미혹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현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4).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마지막 때에 사단은 뉴에이지영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과 교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뉴에이지의 영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던 시대가 50년대 말이나 60년대 초에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가 시작되면서 사단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뉴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입니다.

“새로운 시대(New Age)” 라는 말이 뭔가 새로운 좋은 시대를 의미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단이 마지막 때에 교회와 교인들을 미혹하게 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뉴에이지 운동은 영지주의(Gnosticism)와도 깊은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명상은 뉴에이지적인 영성훈련입니다.
이 명상은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것이지만, 명상은 말씀은 전혀 없는 미혹의 영이 주관합니다.

음악과 찬양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뉴에이지 찬양을 들어보면 그 가사에 ‘예수님’이나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가사 자체가 건전해 보이지만 경배의 대상이 되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빠진 노래는 찬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You raise me up”이라고 하는 노래입니다.
교회에서 이 노래를 찬양이라고 생각해서 많이 부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노래를 작곡한 Secret Garden 밴드와 작사한 Brendan Graham이 크리스챤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위키 백과사전에도 이 노래는 장르가 ‘뉴에이지 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사와 곡조가 좋으니 찬양처럼 부릅니다.
이런 전형적인 뉴에이지 찬양이 교회에 많이 보급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힐송 찬양이라고 하겠습니다.

심지어 뉴에이지 스포츠라고 하여 요가를 통한 심신 단련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가는 인도의 이방신을 부르는 접신 행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뉴에이지에서 많이 쓰는 단어가 사랑과 평화, 화합 이런 것들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뉴에이지의 사상은
“feel goodness”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한 내가 좋은 것을 행하는 것),
“moral relativism” (상대적 윤리),
“pluralism” (다원주의}이고 또한
“Humanism” (인본주의)입니다.
이 모든 것이 모두 반성경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사상입니다.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지친고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고 참 평안으로 이끌어준다는 명목하게 이러한 운동을 적극 장려하며 심지어 교회 프로그램으로 사용하는 교회들이 증가하는 추세라고 합니다.

진리의 영은 오직 하나뿐 입니다.
진리의 말씀과 더불어 거룩한 성령의 지배를 받아 거짓된 가르침과 길에서 벗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뉴에이지 사상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다원주의에 해당하는 WCC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인본주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교회의 특징은 설교도 사람중심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이 인본주의에서 기복신앙과 번영신앙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달라스의 조엘 오스틴 목사가 대표적인 번영 설교자입니다.
그러나 조엘 목사외에도 대형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뉴에이지 목사들의 설교 말씀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그런 사람 중심의 설교를 합니다.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사전에 찾아보면 뉴에이지 운동은 “1970년 80년대에 주로 신비주의 이단이나 형이상학적인 종교단체들 사이에서 일어난 운동”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New Age)” 라는 말이 뭔가 새로운 좋은 시대를 의미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단이 마지막 때에 교회와 교인들을 미혹하게 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영지주의(Gnosticism)와도 많은 연관이 되어있는 뉴에이지는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침투하고 있습니다.
뉴에이지는 우리가 접하는 문화에 침투해서 뉴에이지적인 문화에 빠지게 합니다.
또한 교회에 침투해서 뉴에이지적인 교회로 변질되어 가게 합니다.
현재 많은 교인들과 교회들이 뉴에이지에 감염되어있습니다.

예를 들면 명상은 뉴에이지적인 영성훈련입니다.
이 명상은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은 하나님 말씀과 함께 하는 것이지만, 명상은 말씀은 전혀 없는 미혹의 영이 주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어떤 유명한 목사의 영성훈련에 다녀온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영성훈련에서는 성경을 가지고 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명상만 하라고 했다.’
잘못된 전형적인 뉴에이지 영성훈련입니다. 이런 영성훈련은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음악과 찬양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뉴에이지 찬양을 들어보면 그 가사에 ‘예수님’이나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빠져있습니다.
가사 자체가 건전해 보이지만,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님이 빠진 노래는 찬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You raise me up”이라고 하는 노래입니다.
교회에서 이 노래를 찬양이라고 생각해서 많이 부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노래를 작곡한 Secret Garden밴드와 작사한 Brendan Graham이 크리스챤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위키 백과사전에도 이 노래는 장르가 ‘뉴에이지 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사와 곡조가 좋으니 찬양처럼 부릅니다.
이런 전형적인 뉴에이지 찬양이 교회에 많이 보급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힐송 찬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요즘 일부 CCM 노래들은 그냥 들으면 가요인지 찬양인지 분간이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뉴에이지 스포츠가 있습니다.
요가가 그렇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건강을 위해서 요가를 합니다.
심지어 이곳에 있는 어떤 미국교회는 요가가 아예 교회의 프로그램에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가는 인도의 이방신을 부르는 접신 행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뉴에이지에서 많이 쓰는 단어가 사랑과 평화, 화합 이런 것들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뉴에이지의 사상은 “feel goodness”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한 내가 좋은것을 행하는 것), “moral relativism” (상대적 윤리), “pluralism” (다원주의}이고 또한 “Humanism” (인본주의)입니다. 이 모든 것이 모두 반성경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뉴에이지 사상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다원주의에 해당하는 WCC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인본주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교회의 특징은 설교도 사람중심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이 인본주의에서 기복신앙과 번영신앙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달라스의 조엘 오스틴 목사가 대표적인 번영 설교자입니다.
그러나 조엘 목사외에도 대형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뉴에이지 목사들의 설교 말씀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그런 사람 중심의 설교를 합니다.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또한 동성애를 옹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성경의 말씀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윤리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동성애를 지지하면 상대적으로 교회도 그것을 받아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공산주의(사회주의)를 용납하게 됩니다.
왜냐면 교회는 모든 이념을 다 수용해서 평화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사단의 전략입니다.
좌파(사회주의)의 이념은 유물론에 입각한 반 성경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적그리스도적인 사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 평화가 아니고 사랑이 아니라고하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는 마지막 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교인들의 귀만 즐겁게 하는 말씀을 전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딤후 4:3-4)
또한 마지막 때에 동성애나 혼합주의와 같은 배도의 일들이 일어날 것이니 미혹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살후 2:3)

교회가 사회주의를 용납하고, 동성애를 옹호하고, WCC와 같은 혼합주의에 가담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단이 ‘New Age’ 즉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서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에 뉴에이지의 영을 아무도 모르게 살며시 침투시켰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은 한가지입니다.
‘New World Order(새로운 세계질서)’를 세우고 모든 인류가 사단 루시퍼를 섬기기 위한 새로운 세계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New World Order(새 세계질서)’라는 단어가 1980년대 말부터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도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사단이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지 ‘새 세계질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설명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분명한 것은 사회주의도, 동성애와 WCC도 루시퍼를 섬기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사단은 뿔달린 무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온순한 양과 같이 때로는 평화의 사자같이 우리를 미혹하고 교회에 침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과 평화와 화합을 내세우는 뉴에이지영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후 11:14-15)
사단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사단의 일군들도 의의 일군으로 가장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가짜가 진짜같고 진짜가 가짜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가운데 깨어서 분별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평화와 화합을 주장한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사회주의(공산주의)도 동성애자들도 혼합주의자들도 모두 사랑과 평화와 화합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뉴에이지영, 즉 사단의 영이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과 평화와 화합은 오직 한분이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진리되신 말씀안에 있을 때만 참 사랑과 평화와 화합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 가운데 바로 서있어야지만 우리가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뉴에이지영)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라나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요일 4:6)

<하인츠 프레히터>라고 하는 독일계 미국인이 있습니다.
그는 접시닦이 출신으로서 억만장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원래 전기와 수도도 없는 독일의 시골벽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하루 14시간씩 일하면서 열심히 돈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자동차 정비소를 개업했는데, 그 때에 자동차 천장에 여닫을 수 있는 ‘선 루프’를 개발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36개나 되는 회사를 소유하는 거부가 된 것입니다.
그는 22개의 언론사도 소유하고 있었으며, 여러 개의 호텔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섬 하나를 통째로 사서 초호화 저택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처럼, 부러울 것이 하나 없는 그가 자살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이유란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소유하게 된다 할지라도, 참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아무리 좋은 집에서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으며, 또한 아무리 많은 쾌락을 즐기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만으로 체울 수 있는 마음의 공허는 메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인츠 프레히터>가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 한마디만 남겨놓고 자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즉 이 말은 세상에서 웰빙의 삶을 찾았지만 찾지 못하여 이 세상과 이별한다는 것이지요/

사도 요한이 지금 이 서신을 쓴 목적이 1:4절에서 말하듯이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이 기쁨은 진정한 웰빙,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의 진정한 웰빙의 삶 즉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삶은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빛 가운데 거하는 삶에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의 특징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의 삶의 특징은 빛 가운데 거하는 깨끗한 삶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삶에 이런 증거가 없다면 자신의 신앙의 삶을 점검을 해 보아야 합니다.
진리의 영은 우리를 빛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미혹의 영은 우리를 세상으로 인도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진리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삶인지 아니면 미혹의 영에 속하지 아니했는지,
나의 신앙의 삶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사도 요한이 요1서에서 가장 강조하는 말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의 특징 즉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실천을 말하려고 하면서
왜? 영을 다 믿지 말라고 합니까?
1. 사도 요한은 왜 영을 다 믿지 말라고 합니까?(1절)
신앙생활과 또는 목회에 어려운 점 가운데 하나가
은혜와 진리가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요1:14절에 보면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는 은혜와 진리가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이게 잘 되지를 않습니다.
지금 사도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7절 이하 말씀에서 보듯이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 즉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강조하다 보면 진리 면이 약해질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강조하다 보면 사랑이 약해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 장로교는 진리와 전통을 강조하다 보니 사랑의 실천이 약합니다.
사도 요한이 2:18절에서
[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러다 보니 진리가 약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바로 세우고 사랑을 강조하기 위하여
[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 고 합니다.
이것은 에베소 지역 교회가
사도 요한의 경계에 따라 이단의 침투를 막다 보니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계2:2-4절에서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
에베소 교회가 이단들의 침투를 막은 것은 잘한 일인데
그러나 보니 사랑이 식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그 반대로 사랑을 강조하기 전에 <3>
거짓 영들을 잘 분별해야 할 것을 먼저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사랑과 진리가 균형을 이뤄야 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으로 우리가 영들을 시험하느냐? 하면
2. 내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무엇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까?(2절)
내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을 먼저 확신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확신합니까?
무엇으로? 내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증거가 뭡니까?
2절에 [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
즉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을 믿는 자는
바로 하나님께 속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요한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예수님의 인성을 믿지 않고
가현설 - 즉 눈에 보이는 예수님은 영체이지 육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가현설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반박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첫째로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태어나시기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신 사실을 인정하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선재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거의 대개의 경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영들은 그리스도의 선재를 부인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의 존재에 있어서,
있었느냐 아니냐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심으로 존재하신 분이라면
그 분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죄인이 죄인의 죄를 대속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을 말하는 것으로
그가 곧 하나님으로 존재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만약 이런 사실이, 사실이 아니라면 진리는 설자리가 없어지며
우리의 구원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된 영, 사탄의 역사는
이같이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을 극력 부인하는 것으로 일관하는 것입니다. 모든 이단의 교리는 이 비진리의 토대 위에 세워집니다. <4>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구주이심을 믿습니까?
그럼 나는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합니다.
그럼 우리를 미혹하는 영을 어떻게 시험해 볼 수 있는가?
3.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하는 첫 번째 시험은 무엇입니까?(3절)
3절 [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요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
적그리스도의 영은 예수를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아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변화 받고 나면 우리는 자칫 영적 주관화 경향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이라고 하면 다 믿으려고 하고
그것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그렇지 않는지도 살펴보지도 않고
무조건 수용하여 잘못된 신앙적 모습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는 영적인 기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항상 말씀이 세운 기준을 중심으로
자신의 영적인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에 아무리 기적을 일으키고 놀라운 일을 눈을 보게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것은
그 모든 일이 예수님을 시인함으로 일어나는 일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분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도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결코 영적 감상주의에 빠져서 기적이나 신비를
모든 영적인 기준으로 삼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자신들도 영적인 일을 말할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며
그분으로 인하여 행하는 것인지를 분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교리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히 민감합니다만
생활 속에 파고들어오는 마귀의 유혹은 잘 물리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가 잘못되어지면 신앙의 삶이 삐뚤어지지만
삶이 잘못되어도 교리가 변질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어느 여집사가 쇼핑하러 갔다가 멋진 옷을 보았는데 가격이 엄청나게 비쌉니다.<5>
사고 싶은 욕망을 도저히 꺾을 수 없어서
카드로 그 드레스를 사서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저녁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남편에게 그 멋진 드레스를 보여 주었습니다. 남편은 드레스 값이 얼마라는 것을 듣고는 질려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 당신, 도데체 이렇게 비싼 옷을 어떻게 살 수 있냐? ]
[ 마귀가 나를 유혹하는데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어요. ]
[ 그러면 당신이 그처럼 열심히 읽는 성경 말씀대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는 하지? ]
[ 내가 왜 그렇게 하지 않았겠어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쳤더니
내 뒤에서 다시 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겠어요?
'뒤에서 보아도 그 옷을 입고 있는 당신은 너무나 아름답소!' ]
우리는 교회 안에서는 또는 성경을 놓고는 아멘!도 잘하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뒤에서 들려오는 마귀의 말에 더 솔깃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반복되면 나중에는 자신을 합리화 시키고
그리고 하나님 말씀마저 자기에게 맞추어 버립니다.

사단이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을 죄짓게 만들 때,
예수 믿는 사람을 유혹할 때에 쓰는 방법이 네 가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바로 다윗 이미지를 가지고 나옵니다.
다윗 왕을 봐라,
그렇게 범죄했지만 회개한 다음에 훌륭한 왕이 되지 않았느냐,
그러니 지금 죄 짓다가 때가 되면 회개하면 된다고 유혹한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모세의 이미지입니다.
모세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지만 그에게도 혈기가 있었다.
모세를 보아라,
그는 사람을 쳐 죽이기도 했고, 십계명을 깨뜨리기도 했고,
사람들 앞에서 반석을 땅땅 내리치기도 했던 혈기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도 위대한 사람이었지 않느냐,
네가 혈기 좀 부렸기로서니 그것 가지고 뭘, 괜찮다고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세째는, 베드로의 이미지를 가지고 나옵니다.
베드로를 보아라,
그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만 잤다,
예수님을 세번이나 모른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는 성령 받은 다음에 큰 일을 하지 않았느냐,
지금을 잘 때이니 푹 쉬어라.
나중에 기도해서 성령받으면 된다- 이래가면서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무서운 유혹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바울 이미지입니다.
바울의 메시지를 들어보라, <6>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행위는 상관이 없다, 마음대로 살아라, 이미 구원을 받아놓은 것이다,
나는 구원받기로 이미 예정된 사람이니까
거꾸로 가건 말건 천당 가기로 정해졌다. 걱정 말아라 - 이렇게 유혹을 합니다. 이런 유혹을 통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타락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가지고 자기변명으로 미혹하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을 실천적 무신론자라고 합니다.
신앙고백은 하지만 삶에는 하나님도 없고 예수님의 말씀도 없는 교인
바로 실천적 무신론자들입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지 아니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우리를 미혹하고 있다는 것 꼭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더군다나 우리를 실천적 무신론자로 몰고 가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미혹의 영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습니까?
4. 하나님께 속한 자의 신앙의 승리는 어디로부터 옵니까?(4절)
하나님께 속한 영적 성도의 특징은
그들의 삶이 세상에 매이지 않고 세상을 이깁니다.
4절 [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
어떻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신 주님을 의지할 때 이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보다 크신 분 - 어떤 분이십니까?
공중 권세를 잡고 세상을 좌우하는 사탄의 권세를 깨뜨려 놓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세상 부귀와 명예보다 크신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귀담아 들어시기 바랍니다.
[ 마귀는 인간을 악마로 만드는데
돈보다 더 성능이 좋은 무기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돈은 그 성능 이 얼마나 뛰어난지 사람들 앞에 이것을 흔들기만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정신을 못 차리고 빠져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든지 다 통하는 전천후의 무기라서
한 번도 손질을 하거나 개량해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이라는 무서 운 독약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
우리가 언제 신앙생활에 철이 들어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느냐? 하면
마귀가 무기로 내 세우는 돈 보다 더 크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에 <7>
눈이 뜨여질 때입니다.
여기에 눈이 뜨여지지 못하면 마귀의 유혹에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되어 살아갑니다.
하지만 거짓된 영에 사로잡힌 자들은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이 듣기에 좋은 말을 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영에 속한 바른 믿음의 성도가 되기 위하여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따라 행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창14: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돌아오니
멜기세덱 왕이 나와서 영접할 때에
아브라함이 전리품에서 십분의 일을 바치며 하는 말이
[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라 ] 합니다.
다윗이 성전건축 준비를 다 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대상29:11-12절에
[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게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다.
부과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
모든 것이 주에 손에 있을 만큼 크신 분
바로 내가 믿는 하나님이요 나의 주님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을 의지하여 세상에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무엇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속한 자와 세상에 속한 자는 다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세상을 이깁니다.
그것은 그 안에 계신 주님이 세상에 있는 이(마귀) 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러한 승리의 확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사탄이 등장한 후로 미혹의 영이 나타났습니다.
사탄과 그의 사자들이 천국에서 쫓겨난 후,  이들은 인간이 거주하는 이 세상에 그들의 있을 자리를 펴고 인간을 대상으로 미혹하는 영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의 미혹의 첫 대상은 아담과 하와였습니다.
그 후 미혹의 영은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계속적으로 인간들을 미혹해 왔으며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여 진리에서 떠나게 합니다.
미혹의 영은 사탄의 영으로 이 영을 유혹의 영, 혹은 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미혹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고  자기의 말을 따르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미혹이란 말은 그럴듯하게 속여서 가짜를 진짜처럼 속여 그것을 믿게 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 영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습은 진리의 영 인양 자기 존재를 위장합니다. 혹은 천사 인양 외모로 가장합니다. 우리가 이 같은 미혹의 영의 역사에 대처하지 않으면 그들의 미혹을 받기 쉽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
1) 깨어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기도가 약해지면 마귀가 그 틈을 타는 것입니다. 마13장에 있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사람들이 잠 잘 때 악한 자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렸다고 하셨습니다.
잠잔다는 말은 기도하지 않는 생활을 말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 할 수 있는 방법을 6절에서
[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 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 고 합니다.
요한이 이곳에서 '우리의 말을 듣는다'는 말은 당시 교회에 보낸 사도들이 서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며 나아가 교회의 법을 말합니다.
근래에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기도하는 종들이나 특별한 사명을 받은 종들에게 주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신비주의 신앙에 빠진 사람들로 이들의 결국을 살펴보면 이단으로 흐르거나 잘못된 신앙으로 빠져들어 결국 자기 영혼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1:8에서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고 경고했습니다.

몇 해 전 이탈리아 한 수녀가 카메라로 예수님을 찍어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안나 알리라는 수녀가 자기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 내가 모습을 보이지 않음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내가 모습을 보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
이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확실한 것을 쥐어 주기 위해 예수님이 실물과 다름없는 사진을 찍어 증거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사진을 찍었다고 말하는 안나 알리 수녀는 무려 예수님을 이백 회 정도 만나 뵈옵고 또한 그때마다 예수님이 친히 주신 말씀을 받아 적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이 <성스러운 호소>라는 제목을 달고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친히 예수님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 내 말은 인쇄되어지고 읽혀질 것이며 그것을 읽는 이들에게 나는 ‘특별한 은총’을 내리겠다. ]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으로는 부족하다. 라고 감히 이 책이 선언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특별한 은총’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오히려 성경보다 더 가치가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단들은 저들의 신비체험이나 기적체험을 성경보다 더 우선적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은 성경이 우선이고 나아가 교회의 법도가 우선임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는 교회의 질서를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미혹의 영에 미혹되면 성경 말씀도 교회의 권면도 듣지 아니하고 독선적인 신앙적 아집에서 나오지를 않습니다.
6절에 [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말을 듣고 ] 합니다.
성경과 교회의 지도를 받는 신앙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영을 다 믿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세상에서 승리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그리고 성경 말씀과 교회의 법도를 따르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화) 조선인 '거지 대장'과 결혼한 日관료 딸…목포 울린 위대한 사랑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일제 강점기였다.
버려진 고아들을 보살피는 조선인 ‘거지 대장’과 조선총독부 일본인 관료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결혼했다.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 답이 전남 목포의 공생원(共生園)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주최로 지난달 22~24일 전남 일대의 기독교 근대 문화유산 답사를 갔다.
전남 영광과 신안, 목포를 거쳐 순천과 여수를 찾아가는 순례였다.
그중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목포의 공생원이었다.
거기에는 계급과 민족, 그리고 국가를 넘어서는 사랑이 있었다.

거지 대장과 총독부 관료의 외동딸

윤치호(1909~?)는 14세에 소년가장이 됐다.
정규 교육도 받지 못했다.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피어선기념성경학원(현 평택대학교)을 마쳤다.
1927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목포 양동교회 전도사가 됐다.

이듬해였다.
길을 가던 그는 고아들을 보았다.
다리 밑에서 기거하며 굶주리는 떠돌이 고아들 일곱 명이었다.
19세의 윤치호는 고아들을 데리고 유달산 자락으로 갔다.
유달산은 돌산이라 당시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그날부터 윤치호는 고아들을 거두어 먹이고 입히고 재우기 시작했다.
식량이 없을 때는 직접 동냥까지 했다.

갈수록 찾아오는 고아들이 늘었다.
윤치호는 ‘더불어 사는 곳’이라는 뜻을 담아 ‘공생원’을 세웠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거지 대장”이라고 불렀다.
공생원의 고아는 100명까지 늘었다.
아이들에게는 교육과 선생이 필요했다.

마침 목포 정명여고의 일본인 음악 선생이 공생원에 와서 도와주었다.
그녀의 이름은 다우치 지즈코(윤학자).
기독교인이었다.
함께 일하던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남자는 고아들의 대부이자 ‘거지 대장’이었고, 여자는 조선총독부 일본인 관료의 무남독녀.
누가 봐도 건널 수 없는 다리였다.

결혼 의사를 밝히자 지즈코의 어머니는 이렇게 답했다.
“결혼은 나라와 나라가 하는 게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하는 거야.
하늘나라에선 일본인도 조선인도 구별이 없다.
모두가 형제, 자매이지.” 그렇게 둘은 결혼했다.

한교총 이철(감리교 감독) 공동대표회장은 “지금도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1%밖에 안 된다.
당시에는 더 적었다.
지즈코 여사의 가문이 기독교 집안이었다.
남편 윤치호와 고아들을 향한 숭고한 열정의 바탕에는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고아들, 인민재판에서 아버지 구해

1945년 8월 해방이 됐다.
일본인 여성과 결혼한 윤치호는 친일파로 몰리는 봉변을 당했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구해주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은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갔다.
다우치 지즈코는 조선에 남았다.
윤치호와 지즈코는 2남 2녀를 두었다.
공생원의 고아들과 똑같이 입히고 먹였다.

5년 후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부모 잃은 전쟁고아가 급증했다.
공생원의 고아는 500명을 훌쩍 넘어섰다.
목포에도 인민군이 들어왔다.
군인ㆍ경찰 가족과 목사ㆍ전도사는 마을 공터에서 인민재판을 받았다.
윤치호 전도사도 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때 500명의 고아가 찾아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아우성쳤다.
마을 사람들도 한목소리였다.

인민군은 그를 살려주었다.
대신 그 지역의 인민위원장을 강제로 맡겼다.
몇 달 뒤에 국군이 들어왔다.
인민위원장을 맡았다는 이유로 윤치호는 ‘빨갱이’로 몰렸다.
옥고를 치르는 등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밑거름

1951년 윤치호는 공생원 고아들에게 줄 식량을 구하려고 전남 도청으로 갔다가 행방불명됐다.
남편이 실종됐지만 지즈코 여사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공생원 고아들을 자식처럼 계속 돌보았다.

1960년이었다.
어머니가 편찮다는 소식에 지즈코 여사는 15년 만에 일본을 찾았다.
당시 일본 공영방송 NHK에서 모녀의 극적인 상봉을 방영했다.
그 방송을 보고서 일본에 여러 후원회가 생겼다.
덕분에 공생원은 남녀 고아들을 중고등학교에도 보낼 수 있었다.
60년대에는 공생원 바깥에서도 중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이가 많지 않았다.

1968년 다우치 지즈코 여사가 소천하자 목포시는 첫 시민장으로 치렀다.
당시 목포시 인구는 17만 명, 그중 3만 명이 목포역에 마련된 영결식장을 찾았다.

다우치 지즈코 여사는 1968년에 세상을 떠났다.
병석의 무의식 상태에서 일본어로 “우메보시(일본식 매실장아찌)가 먹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 NHK에서 2000년에 방영됐다.
이걸 본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직접 공생원에 전화해 “너무 고맙다.
내가 한국에 가면 꼭 들르겠다”며 매실나무 20그루를 보냈다.

공생원 이연 상임부회장은 “김대중 대통령 때 한일관계를 회복하며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했다.
김 대통령도 목포 공생원을 무척 아꼈고, 오부치 총리는 매실나무까지 보냈다.
두 정상 간 만남에서도 공생원이 주된 대화 소재였다”고 설명했다.

총신대 허은철 교수(역사교육과)는 “지금껏 공생원을 거쳐 간 고아가 3000명이 넘는다.
거지 대장 윤치호와 지즈코 여사가 함께 일군 공생원은 한일 관계의 미래지향적 모델을 제시한다”며 “여기에는 민족과 국경을 넘어서는 인류애가 있다”고 강조했다.

▣ 행함과 진실로

어느 목사님이 신장기능이 약화되어 건강한 사람의 신장을 이식해야 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주일 날 임시로 강단을 맡아 설교를 하게 된 유명한 목사님이 전후사정을 설명한 후 아무래도 교인들 가운데서 신장기증자가 나와야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고통받는 주님의 종을 위해서 신장을 기증할 뜻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표하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손을 들기 시작하더니 거기 모인 천여 명이 거의 다 손을 들었습니다.
그날 설교를 맡은 목사님은 감격하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이처럼 주의 종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데 놀랐습니다.
그러나 신장은 한 사람 것이면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 사람을 지적하는 것은 덕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오리털 하나를 꺼내 입으로 분 후, 이 오리털이 머리 위에 내려앉는 사람을 신장기증자로 선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뜻을 기다리며 조용히 기도하며 기다립시다.”

드디어 오리털이 강단을 떠나 회중석으로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오리털이 가까이 날아오면 사방에서 ‘주여, 할렐루야, 아멘’ 소리가 입바람에 섞여 나오고 그와 동시에 오리털은 다른 곳으로 날아갑니다. 오리털은 누구 머리 위에도 내려앉지 못했답니다.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맙시다.

▣ 행위 있는 믿음(누가복음10: 30-37)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야고보서에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온전케 함이라. 영혼 없는 믿음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너희가 선을 행할 줄 알고도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불교와 같이 산 속에서 명상하고 앉아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내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셔서 내 감정의 의식구조, 행동 등 내 전체가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프랭클린'이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일하는 농부는 앉아있는 신사보다 존귀하다"고 하였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말하기를 "최대의 행운은 자신의 전 능력을 들여서 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가나안 농군 학교에서 불교의 승려가 보름동안 훈련을 받게되었다고 합니다. 교육을 받은 후 이 승려는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그는 앉아만 있는 부처를 부수고 호미를 들고 서있는 부처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행위의 종교입니다. 서양 격언에 "나태는 신자의 무덤이다"고 하였습니다. 즉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죄를 행하는 것입니다.

* 기도: 행함이 있는 신앙생활만이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사오니 믿음으로 행하게 하옵소서.

▣ 행함이 없는 믿음(야고보서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설원이라는 중국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우는 맹수지만 의심이 많아서 머뭇 머뭇하여 실천하는 일이 적은데 , 그렇다면 벌이나 반딧불이 독을 쏘는 것만 못하다"

이 말은 헛된 이론만 숭상하고 실상이 없는 것은 시원치 않은 사상과 말로 실행한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줄줄 외우고 형편에 따라 잘도 인용하면서 실제 행동을 보면 한심한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여우는 조그마한 벌 한 마리 만큼도 대접을 받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 행함이 없는 믿음

경상도 시골에서 목회를 하시던 한 목사님이 서울에 있는 교회의 초대를 받아 설교를 하게 되었다.
소박하면서도 진실한 설교는 성도들에게 많은 은혜를 주었다.
예배가 끝날 때 설교를 하신 목사님이 축도를 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함께 하심이 설교맨치로 살라꼬 다짐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항상 함께 하실찌어다.”

웃음으로만 넘기고 지나가기에는 너무나 가슴에 와닿는 축도다.
오늘 이 시대의 문제는 무엇인가? 말씀이 없어서인가?
그렇지 않다. 말씀의 홍수 속에 살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못함이 문제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많지만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자가 적기 때문이다.
화려함과 요란함은 있지만 한 알의 밀알처럼 희생하는 자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야고보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고 했다.

▣ 더 좋은 아내가 되어야죠

어느 힌두교도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남편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러한 사실을 안 선교사는 그 여인에게 남편이 화를 낼 때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글쎄요, 저는 남편을 위해 더 좋은 음식을 만들고, 남편이 불평할 때 면 마루를 더 깨끗이 닦고, 남편이 퉁명스럽게 말하면 더욱더 부드럽게 대답하지요.
선교사님, 저는 제가 크리스천이 된 후로 더 훌륭한 아내와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을 남편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 방 청소하는 것만 보아도

예수를 진실하게 믿는 여종이 있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여종의 주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여종의 어떤 행실을 보고 진실된 신앙인임을 아십니까?"

이 말을 듣고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아이가 방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만 보아도 그녀가 진실한 신앙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딤전 4:2, 벧전 1:15, 2:12)

▣ 그리스도인 사공의 노

두 신사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들은 믿음과 행함에 관해 서로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논쟁을 했다.
한 사람은 선한 행위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며, 오직 믿음만이 모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그와는 다른 반대 의견을 주장하였다.
그들이 서로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자 조용히 그들의 주장을 듣고 있던 지각 있는 그리스도인 사공이 그의 견해를 말하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좋다는 허락을 받은 사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지금 두 개의 노를 손으로 잡고 있습니다.
내 오른손에 쥐고 있는 노를 '믿음'이라고 부르고 내 왼손에 쥐고 있는 노를 '행함'이라고 합시다.

신사분들, 잘 지켜보십시오.
나는 믿음의 노만을 젓습니다.
보십시오! 이 배는 그 자리에서 빙빙 돌기만 하고 앞으로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지요.
이번에는 행함이라는 노만 저어 보지요.
결과는 마찬가지지요.
잘 보십시오! 두 노를 함께 젓겠습니다.
배는 쑥쑥 앞으로 나아가 몇 분 후면 우리가 내리고자 하는 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행함이 없는 믿음, 또 믿음이 없는 행함.
그 어느 것 하나도 충분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제 변변찮은 견해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있을 때, 우리는 분명히 영원한 안식의 천국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열매가 매달리기 전에 꽃이 피는 것처럼 선한 행함이 있기 전에 믿음이 있다.
믿음은 행함의 아버지고, 자녀인 행함은 그 아버지를 닮을 것이다.
시계의 내부 부속이 제아무리 잘 조립되어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또한 숫자판과 바늘만 있는 것으로도 역시 충분하지 못하다.
내부 부속이 시계 바늘을 움직이게 해야 한다. 행함은 손의 움직임을 단속해야 한다.

▣ 행함이 없는 한국교회

지난 한주간 필자는 국민일보의 "역경의 열매"에 나오는 보드만여사의 이야기 때문에 깊은 감동에 젖어서 지냈다.
35년간 다섯 명의 한국인 자녀를 입양하여 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중의 하나는 심장병을 앓는 아이였고 또 하나는 뇌성마비에 간질의 장애를 가진 소녀여서 25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밥 먹는 것과 화장실 가는 것을 돌보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입버릇처럼 한국교회의 기적적인 성장과 세계선교를 위한 한국의 사명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나라를 마지막 제사장 나라라고 자랑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가. 지금 한국의 크리스천가정에 뇌성마비소녀를 입양해 달라고 공문을 보낸다면 과연 몇 가정에서 그것에 동의할 것인가?
가수가 무대 위에서 테이프를 틀어놓고 입만 벙긋벙긋 하는 것을 립싱크(lip sync)라고 한다.
주로 격렬한 춤을 추는 댄스그룹가수들이 립싱크를 사용하는데 외국에서 립싱크는 관객을 우롱하는 용서받지 못할 사기행위로 간주되고 있다.
더구나 요즈음 컴퓨터 녹음기술로 잘된 부분만 짜집기를 하고 음색과 음정까지도 다듬어서 완성해 낸 한 개의 테이프를 공연 때마다 틀어놓고 입만 벙긋거리는 불공정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강대국의 압제와 전쟁의 고난을 기도로 극복해 가면서 성장해 왔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 가보아도 한국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지금에 와서 한국교회는 말로만 사랑하는 립싱크의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생각이 든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마지막시대의 제사장 나라보다는 오히려 선한 사마리아인의 나라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실 것임에 틀림없다.

▣ 행함이 있는 믿음

아테네의 한 극장에서 국경일을 기념하는 연극이 공연되고 있었습니다.
한 노인이 좀 늦게 극장 안으로 들어섰는데, 초만원이라 앉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 때 두리번거리고 서 있는 노인을 본 아테네인들은 "저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여기저기서 수군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누구 한 사람 자기 자리를 양보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노인은 천천히 외국인석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스파르타인들이 벌떡 일어나 서로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이때 노인이 말했습니다.

"아테네인도 선(善)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타인은 그 선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입니다."

어린아이의 행동을 보면, 그 아이의 품성이 어떤지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행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성경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아무리 "주여, 믿습니다. 할렐루야!"하고 외쳐도, 정작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엉터리 믿음입니다. 구원받고 나서 삶 가운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인 것입니다.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자기의 품행의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잠 20:11)

▣ 아는 것과 행하는 것(야고보서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인간이 많은 것을 발명했지만 땅을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땅을 창조하셨으며 더 이상의 땅은 생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분만이 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오직 분배와 사용방법의 권리를 갖고 계십니다.”
2002년 세상을 떠난 대천덕 신부의 말입니다.
돌아가신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대 신부가 만든 영성 공동체 예수원과 함께 대 신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는 자기가 한 말대로 실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한국을 방문한 대 신부는 성공회신학대의 전신인 성미가엘신학원을 설립합니다.
이후에 영적인 공동체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강원도 태백시에 예수원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코이노니아를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100% 공급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그는 선교에 전혀 후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대 신부의 코이노니아 신학에 영향 받아서 이후부터 믿는 사람들의 성향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개인생활의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누며 한 지체로서 인정하고 행동하는 차원으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70이 넘는 나이에도 자신이 세운 원칙대로 기도와 일을 번갈아 가며 하고 하루에 세 번은 반드시 예배를 드렸던 대 신부는 말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본을 보이던 하나님 나라의 개척자였습니다.

‘사상과 말이 일치하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야말로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이다.’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의 하는 행동으로 주님을 전하십시오.

주님! 말보다 행실로 주님을 드러내게 하소서.
묵상 : 하루에 한 가지씩 선행을 정하고 실행하십시오.

▣ 바늘 없는 시계

어떤 사람이 친구 집에서 큰 벽시계를 구경했다.
삼 대째 내려오는 가보라면서 친구는 그 시계의 내력을 설명해 주었다.
조부께서 75년간 그 시계 소리를 들으면서 주무시고 일어나셨으며, 부친께서 75년을 더 사용했고 자신도 그 시계를 보고 학교에 다녔다면서 정확해서 믿을 만한 시계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데 벽시계에는 바늘이 빠지고 없었다.
태엽을 감아주니 똑딱거리는 소리는 나는데 바늘이 없으니 시간을 알려주지 못했다.
금으로 만들었으면 무슨 소용이 있고, 은으로 만들었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래 되었으면 어떻고 과거에 잘 맞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금이 몇 시인가를 알려주지 못하는 벽시계!

바늘 없는 벽시계는 믿음 없는 그리스도인과 비슷하다.
똑딱거리기는 하면서 시간은 못 알리는 벽시계는 주장만 하고 믿음을 못 보여주는 사람과 흡사하다.
아무리 가문이 수대에 걸쳐 예수를 믿었어도 보여줄 수 없는 믿음은 소용이 없다.
얼마나 아는지, 얼마나 멋있는지가 중요치 않다.
믿음이 내 삶 가운데 나타나야 하는 게 중요하다.

▣ 행함을 통해 받는 축복

부산에서 목회할 때 교회에서 급식소를 운영했습니다.
구걸하러 교회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루는 진탕 술을 마시고 교회에 와서 온갖 행패를 부리는 걸인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경찰을 불러 끌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끌려 나가면서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하는 이야기가 "교회에 와서 도와 달라는 사람을 경찰을 불러 끌어내다니, 이게 교회냐?"라는 것입니다.
그 소리에 나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 후 앞으로는 그런 사람들이 찾아오면 어떻게든 돕기로 했습니다.
배가 고파서 오면 밥을 해 주고, 약이 없어서 오면 약을 사 주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매일 200명이 넘는 사람이 급식소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교인 수만큼의 걸인이 매일 아침밥을 먹으러 교회 마당을 밟은 셈입니다.
그런데 그 후 교회가 복을 받기 시작했고, 성도들이 복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IMF 시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 주변에 필요한 땅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재정의 복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곰곰히 생각하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급식소에서 밥을 먹고 나가는 사람들마다 연방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바로 그 말을 하나님이 갚아 주셨다고 나는 믿습니다.
교회가 베푼 대접에 갚을 능력이 없는 그들이 품은 감사를 하나님이 다 들으시고 대신 갚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하고 받는 축복입니다.

▣ 행함, 실천에 관한 성경 말씀

0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0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계 22:5)

0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요일 1:7)

0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0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0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2:14)`

0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며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 지어다(시 37:3)

0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잠 20:7)

▣ 행함, 실천에 관한 금언

0 약속을 쉽게 하지 않는 자는 그 실행에서는 가장 충실하다.

0 자기 인생의 의미를 알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들의 맹목이 부자연스럽다면 신을 사랑하면서도 제멋대로 나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맹목은 한층 더 무서운 것이다.(파스칼)

0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0 너도 행하고 나도 행하고 우리도 다 행하자(안창호)

0 많은 일을 성취하는 비결은 우선 즉시 한 가지 일에 착수하는 것이다.(리차드 세실)

0 사람은 일하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명상하고 느끼고 또 꿈만 꾸기 위한 것이다.(토마스 칼라일)

0 인생은 짧은 날이다. 그러나 일하는 날이다.(모아)

0 정복에 필요한 것은 첫째도 단행, 둘째도 단행, 셋째도 단행뿐이다.(돌튼)

0 기독교는 먼저 입증되고, 다음에 실천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병행해야 한다.(일링워드)

0 우리에게 말은 필요치 않다. 국가의 건설은 결코 입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노력과 실천을 하는 것뿐이다.(벤구리온)

0 1파운드의 원리보다는 비록 1온스일지라도 실행이 낫다<말보다 실천>(영,미 속담)

0 늦어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독일 격언) 0 실행은 교훈보다 낫다(영, 미 속담)

0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행동을 말한다.(스펄전)


05-10-2024(금) 요한일서 3:13-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행함과 진실함으로(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Dear children, let us not love with words or tongue but with actions and in truth.

행함(2041) 에르곤( ĕrgŏn)  ἔργον, ου, ὁ 스트롱번호 2041

1. 행위.   2. 히 4:3, 4, 10.  3. 표시. 
발음 [ ĕrgŏn ]

행실(마 5:16, 딤전5:10, 벧후2:8), 행위(마11:2, 요3:19, 롬2:15), 일(마26:10, 눅24:19, 롬13:12), 사무(막13:34), 역사(요5:36), 소행(행5:38), 사업(롬14:20, 계2:19), 공적(고전3:13,14), 실천함(약1:25), 이룸(약1:4), 지음(히1:10), 행함(롬2:6).

진실함(225) 알래데이아(alēthĕia) ἀλήθεια, ας, ἡ
스트롱번호 225

1. 진실성.  2. 진실. ψεῦδος.  3. 일반적 진리
발음 [ alēthĕia ]
어원 / 227에서 유래
참(마22:16), 사실(막5:33), 진리(요1:14, 4:24, 롬2:2), 실상(요16:7), 과연(행4:27), 참 됨(행26:25), 진실하심(롬15:8), [동] 진실 하다(롬15:8), 참되다(롬3:7).

▣ 그리스도인 사공의 노

두 신사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들은 믿음과 행함에 관해 서로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논쟁을 했다.
한 사람은 선한 행위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며, 오직 믿음만이 모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그와는 다른 반대 의견을 주장하였다.
그들이 서로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자 조용히 그들의 주장을 듣고 있던 지각 있는 그리스도인 사공이 그의 견해를 말하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좋다는 허락을 받은 사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지금 두 개의 노를 손으로 잡고 있습니다.
내 오른손에 쥐고 있는 노를 '믿음'이라고 부르고 내 왼손에 쥐고 있는 노를 '행함'이라고 합시다.

신사분들, 잘 지켜보십시오.
나는 믿음의 노만을 젓습니다.
보십시오! 이 배는 그 자리에서 빙빙 돌기만 하고 앞으로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지요.
이번에는 행함이라는 노만 저어 보지요.
결과는 마찬가지지요.
잘 보십시오! 두 노를 함께 젓겠습니다.
배는 쑥쑥 앞으로 나아가 몇 분 후면 우리가 내리고자 하는 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행함이 없는 믿음, 또 믿음이 없는 행함.
그 어느 것 하나도 충분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제 변변찮은 견해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있을 때, 우리는 분명히 영원한 안식의 천국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열매가 매달리기 전에 꽃이 피는 것처럼 선한 행함이 있기 전에 믿음이 있다.
믿음은 행함의 아버지고, 자녀인 행함은 그 아버지를 닮을 것이다.
시계의 내부 부속이 제아무리 잘 조립되어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또한 숫자판과 바늘만 있는 것으로도 역시 충분하지 못하다.
내부 부속이 시계 바늘을 움직이게 해야 한다. 행함은 손의 움직임을 단속해야 한다.

행함과 진실함이란 입으로만 사랑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때로는 물질을 사용하면서 사랑을 표현하고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은 그의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하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로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이 땅에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도리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를 사랑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형제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주의 계명을 지키는 사랑의 은혜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사랑은 믿음의 확신을 갖게 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요일 1:19).


둘째는 사랑은 기도의 응답을 받게 합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셋째는 사랑은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합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핵가족 시대에서 이제는 독립세대 즉 나 홀로 세대로 급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은 오직 나 혼자만 즐겁고 편하고 행복하기를 소망합니다.
이웃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졌습니다.
이러한 세대를 향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먼저 형제를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보살펴야 한다고 외칩니다.

굶주린 육체는 먹을 것만 있으면 만족합니다.
그러나 굶주린 사랑은 먹을 것만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사랑의 말과 행실과 진실함을 요구합니다.
오늘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전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살피는 일에 보람을 찾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오래 전에 한 주일에 1불 절약 운동을 시작하고 그 돈을 모아 이웃 사랑의 현장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그것마저 멈추고 말았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다시 시작하여 무너진 사랑의 현장탑을 다시 쌓아야 하겠습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주의 계명을 지킴으로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

1. 주의 계명이 무엇인가?(23)

1)“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십계명의 중심도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계명을 지킬 능력이 없어 심판 아래 있는 것이다. 이제 예수를 믿어 새롭게 된 자로서 주의 사랑으로 주의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2)어떻게 사랑하라는 것인가? 먼저 형제의 궁핍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없다고 하였다. 자신이 가진 부가 자신의 자랑거리로 여기고 형제를 외면한다면 진정 사랑이 그 마음에 없다.

3)오히려 진정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면 말로만 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한다. 야고보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하였다. 사도 바울은 원수라도 주리면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하였다. 하물며 주께서 사랑하는 형제를 어찌 외면하겠는가? 가장 미천한 자라도 주의 형제를 도와주면 주를 도우는 것이 된다. 행할 때라도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 마음에 진실함을 담아야 한다. 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한다.

2.이 계명을 지키는 자는 어떤 은혜를 받게 되는가?

1)주님 앞에 담대함을 얻게 된다.(19-21) 진정 주 앞에 담대함을 얻을 자가 누구인가? 우리 마음도 우리 안에 죄를 알고 책망할 것이 있는데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이 모르실 리가 없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우리 안에 죄를 씻어 주셨기에 우리는 주를 의지하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된다. 주를 사랑함이 주 앞에 담대함을 얻게 된다. 마지막 날 주의 백 보좌 심판 앞에서도 우리는 주의 의의 옷을 입고 주 앞에 나아가니 두려움이 없이 담대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2)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그에게서 얻게 된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그 앞에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자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를 사랑하여 그가 구하는 것을 아끼지 아니하신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아버지 사랑 안에 거한 예수님이 이제 우리가 주의 계명에 순종할 때 주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된다. 아들이 구하는 것을 아버지가 거절하지 않으신다.

.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거하시는 우리 주님이심을 날마다 고백하게 된다. 이런 큰 사랑을 우리 마음에 깊이 인식하게 되는 것은 그 계명을 실재로 행할 때 우리 마음에 깊이 깨닫게 된다. 이것은 구원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셨다! 이것은 얼마나 큰 복인가. 주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 있게 된 것을 알게 된다3)


우리의 삶은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심든지 거두게 하십니다. 농부가 봄에 벼를 심으면 가을에 벼이삭을 추수하여 열매를 얻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심은 것에 대하여 그 열매를 얻게 하십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과 이기적인 사람 중에 누구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갈까요? 당연히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베푼 사랑으로 인하여 사랑과 존경을 받고 마음에도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사랑이 많은 가정과 다툼이 많은 가정 중에 어느 가정이 더욱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누릴까요? 여러분이 질문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사랑이 많은 가정이 더욱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고 답변할 것입니다. 사랑이 많은 교회와 냉담한 교회 중에서 여러분은 어느 교회가 더욱 기쁨이 넘치는 교회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여러분은 당연히 사랑이 많은 교회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고 가족이 행복하며 교회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에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1. 사랑은 우리의 믿음에 확신을 가져다 줍니다(19-20).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요일 1:19).

이 세상에서 참된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어 태어난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우리가 사랑하면 구원받은 것의 증거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사랑하지 않는자는 사망에 거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에 그는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요일 3:19). 우리가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게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게 합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형제를 남들보다 더욱 사랑하는 것은 부모님을 통하여 피를 나눈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은 같은 가족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주 안에서의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진리에 속한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구원의 확신을 가져다 주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굳세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지만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곤 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할 때에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자신의 마음에 거리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요일 3:20).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지 못하면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책망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에게 사랑하지 못한 것을 일깨워줍니다.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더욱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셔서 우리의 마음과 행실까지 모두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선한 양심이 우리를 책망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도록 인도합니다.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하여 일깨워주십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진리에 속한 줄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 앞에서 구원의 확신으로 담대히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여 마음에 책망할 일이 있지만, 그때 우리의 선한 양심이 일깨울 때에 회개하고 다시 형제 사랑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디모데후서는 “...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9)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속한 백성을 아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믿고 구원받은 자는 불의에서 떠나기를 원하십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불의한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2. 사랑은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게 합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우리가 마음에 책망할 일이 있었지만 우리가 순종하여 형제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책망할 것이 없게 되고 담대함을 얻게 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요일 3:21).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담대함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을 응답받게 하는 은혜를 얻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순종하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는 비결은 우리의 순종에 있습니다. 그리고 순종의 열쇠는 사랑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 분이 주신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아갑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얻게 하는 비결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기 위하여 지켜야 할 계명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 3:23). 주님께서 주신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로서 온 세상의 구주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우리는 주님이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행함과 진실함에 있다고 했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행하는 것의 반대는 말하는 것이고, 진실함의 반대는 혀로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면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약 2:15-16)라고 했습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것은 필요를 보고도 말로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함으로 사랑하는 것은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기도해 줄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단지 말 이상으로 희생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혀로 사랑하는 것은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의 반대입니다. 혀로 사랑하는 것은 신실하지 않는 모습이지만, 진실되게 사랑하는 것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말과 혀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그 분의 생명을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행함과 진실된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는 담대함을 얻게 합니다.

3.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합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주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최고의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 계명은 이웃을 자신의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23절에서 주님의 계명을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인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 3:23). 우리의 바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바른 교리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주 안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주 안에 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영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신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삶에 대하여 주님은 포도 나무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구원받은 자는 주님과 연합하여 새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우리의 삶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포도 나무와 가지가 하나이듯이, 주님과 우리는 연합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지고 포도 나무에 붙어 있으면 이 가지는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그러나 가지고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그 가지는 말라지고 농부가 불에 던져 사르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은 주님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의 비결은 우리가 계명을 지킴으로 그 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순종함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줄을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은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내적으로 증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성령은 우리에게 평안과 확신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서로 미워하면 성령이 근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명에 불순종하여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분열하거나 다투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근심하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지를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형제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잘 지켜야 합니다.








05-09-2024(목) 요한일서 3:1-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자녀(1절)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How great is the love the Father has lavished on us, that we should be called children of God! And that is what we are! The reason the world does not know us is that it did not know him.

하나님의 자녀(children of God)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하여 어떠한 사랑을 베풀어주셔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랑을 알고 확신하는 자녀는 주를 향한 소망을 갖습니다(3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주를 향한 소망은 죄를 떠난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를 없이하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합니다.

첫째는 선을 행하라(신명기 32: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 또한 거룩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거룩함이란 외면적으로는 죄를 멀리하는 생활이며 내면적으로는 거룩한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그 이름을 믿으라(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씨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씨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의 가르침은 아버지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셨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성령의 증거를 받으라(로마서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예수를 알고 따르던 제자 베드로는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할 때는 예수님과 함께 죽을 것이라고 다짐하였으나 곧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한 후에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후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그의 생명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굳센 믿음의 사람이 되어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고 부른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오늘이란 하루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오직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은총의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2. [호세아 1: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3. [누가복음 20:36]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4.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5. [요한복음 11:52]
또 그 민족만 위할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6. [로마서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7. [로마서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8. [로마서 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요한1서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10. [요한1서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11. [요한1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2. [요한1서 5: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풍족함이 문제이다

호주는 사계절 모두가
온화한 기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름(12월~2월)에는
우리나라 초여름 정도 되며
겨울(6월~8월)의 경우도
우리나라의 가을 정도여서
사계절 모두
꽃이 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초창기 호주를
처음 밟은 유럽인들은
호주 땅을
양봉으로 성공할 수 있는
천혜의 땅이라 믿고
벌통을 유럽으로부터
 옮겨 왔다고 합니다.

첫 1년간
이주해 온 벌들은
유럽에서 거둘 수 있는
몇 배의 벌꿀을 생산해 냈습니다.
그러나
그 이듬해부터는
웬일인지 벌들이
꿀을 따러 나가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처럼
활발하게 움직이기보다는
벌 통속에서 놀기만 할 뿐
벌꿀의 생산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1년 내내 피어 있는
꽃이 널려 있는데
굳이 힘써가며
꿀 수집을 위해 일을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게 풍족할 때
게으름을 피우다가
부족할 때 힘겨워하는
어리석음은 경계해야 합니다.

항상 자만하지 말고
경계를 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의 성과에 만족하고
미루고 있는 일들이
훗날 우리에게
위험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오늘의 명언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과유불급(過猶不及)
– 논어 선진 편





예수 그리스도의 적(요일 2:18-29)

이미 우리가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만, 요한일서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려 할 때 혹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가지려 할 때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사단의 공격이 있습니다.

이 적그리스도를 경계하고 대처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제, 우리와 성도 사이의 교제는 자연히 단절되고 성도 사이에는 분열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루고 있는 요한일서 2장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요한은 적그리스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신앙의 성숙의 정도에 따라서 자녀들, 아이들, 청년들, 혹은 아비들이란 말로 나누어 표현했던 사실을 보았습니다.
여기 오늘 주신 말씀에서도 “아이들아”하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청년들의 문제는 세상과의 문제지만, 아이들의 문제는 적그리스도와의 싸움에서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자마자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이 첫 번째로 직면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과제는 올바른 신앙을 분별하고 진리의 말씀 위에 신앙을 견고하게 세우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인 어린아이들의 특징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에베소서 4장 14절 말씀을 보세요.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며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요동하기 쉽고, 잘 흔들리기 쉽기 때문에 꼬임에 넘어가기를 잘 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유괴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어린애들은 낯선 사람이라도 친절하게 대해주고 좋아하는 것을 주면 그 사람에게 끌립니다. 어른이 되면 낯선 사람이 친절하게 대하면 오히려 경계하게 되고 상식 밖에 지나친 행동을 하면 아예 멀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유혹을 당하기 쉽고, 마음이 흔들리기 쉽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이들이 요동하지 않고 견고하게 설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성경 기자들은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시간 아직도 내 신앙이 어린아이의 신앙이라고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여 내 신앙을 진리의 터전 위에 견고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의 1장과 2장에 세 가지 대조가 나오는데 1장 1절에서 2장 6절까지는 빛과 어두움에 대한 대조가 나옵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말씀은 어두운 데 거하지 말고 빛 가운데 행하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2장 7절에서 17절까지는 사랑과 미움을 대조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워해야 할 것, 버려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사랑 가운데 행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생각하게 되는 요한일서 2장 18-29절에는 진리와 거짓에 대한 대조가 나옵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적그리스도의 유혹에 현혹되지 말고, 잘못된 가르침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말고, 진리 가운데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질문 앞에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빛과 사랑으로만 끝나는 것이 왠지 석연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진리 가운데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없는 빛, 사랑만을 강조하는 신앙은 자칫하면 신앙이 아닌 거짓된 인본주의로 인도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혹은 감상적인 도덕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이 빛과 사랑은 진리의 기초 위에 세워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여기서 진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병원에 입원한 환자를 간호사가 정성과 사랑으로 간호해 드린다고 합시다. 환자는 간호사의 치밀한 간호와 돌봄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호사가 극약을 의약으로 잘못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갖다 환자에게 드렸습니다. 환자는 간호사가 가져온 약을 정성스럽게 받아 먹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신앙 생활도 그렇습니다. 진리에 서서 적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공격이 어떻게 주어지는지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목회자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시편 23편 5절에 보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셨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여름에 목자가 양들을 이끌고 높은 산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그 길이 거칠고 험하고 위험합니다. 문자 그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습니다. 그런데 힘들지만 목자를 따라 고지를 향해 올라가면 거기에는 상을 차려 놓은 것처럼 공해 없는 푸른 초장이 펼쳐져 있습니다. 고지를 올라오느라고 피곤하던 것이 가시고 시원한 바람에 흐르던 땀이 식게 됩니다. 양들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더구나 그 아름다운 풀밭에는 일찍이 보지 못한 아름다운 꽃이 피는 아주 먹음직스러운 풀이 여기저기 있어서 양들의 시선을 끕니다. 그런데, 목자는 양들이 가까이 가기 전에 그 먹음직스러운 풀들을 다 뽑아 버립니다. 이유를 모르는 양들은 투덜거립니다. 불평합니다.
그러나 목자에게는 그렇게 하는 뜻이 있습니다. 양들이 보기에 먹음직스러운 풀을 먹으면 온몸이 스름스름 마비가 되어 결국 죽고 맙니다. 보기에 먹음직하고 꽃이 아름답지만 그 풀은 독초입니다. 목자는 독초를 알기 때문에 양들을 위해서 뽑아버리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오늘도 여기저기 있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 적그리스도의 역사를 막아 하나님의 양무리인 성도들을 독초에서 건져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 2장 18절을 보세요.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이 말씀에 두 가지 개념이 나타납니다. “마지막 때”라는 말과 “적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마지막 때”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은 언제부터 마지막 때라고 합니까?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부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긴 시간 같지만 영원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안목에서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장에 보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부분, 여러 모양으로 인간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여 오셨던 그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세워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역사 속에 찾아오신 그때부터 역사는 완성기를 향하여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이 마지막이 무르익어 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표현대로 지금은 마지막 중에도 마지막, 그래서 말세지말(末世之末)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그 마지막을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그때를 말씀하지 않았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에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긴박한 의식 속에서 그들의 신앙을 재촉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놀라운 부흥을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그때 성도들에게 재림의 때를 솔직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가령 하나님께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상상해 보세요. “얘들아, 1998년 몇월 몇일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라고 말씀하셨다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주님께서는 그때를 영광스런 하나님의 비밀로 붙여두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종말론적인 긴장을 가지고 살기를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늘밤에 오실 수도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마지막 때임을 강조하면서 바로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역사를 통해서 태초부터 활동해 왔지만 가장 맹렬한 활동은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진짜가 있으면 반드시 가짜가 생깁니다. 수많은 가짜 종말론과 재림의 예언과 심지어 재림의 날짜들을 예언하던 사람들에 의해서 성경의 영광스런 종말론이 많이 격하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예 종말론을 포기하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가짜 종말론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종말론에 관한 굳은 신앙을 가져야만 합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가짜가 많습니까? 가짜가 많기 때문에 진짜가 없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가짜가 많은 것은 진짜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에 관한 분명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어두움의 세력은 이 사실을 교묘하게 모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어두움은 자기를 포기하기 전에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적그리스도라는 말의 “적”이란 말은 영어로 “anti”인데, 이 말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 대신 그리스도를 가장하고 온 자”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며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영으로서, 한마디로 사단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사단의 도구로 쓰여지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종말에 관한 많은 책자들이 나도는데 거기에 보면 한 명의 적그리스도를 특별히 강조합니다. 그것은 특별히 말세에 등장할 한 결정적인 적그리스도로서 그 적그리스도가 유럽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성경을 보는 것은 건전한 해석 방법은 아닙니다. 성경은 유일한 적그리스도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적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사단에 의해서 사단의 도구로 쓰여지고 있는 진리를 왜곡하는 수많은 거짓 교사들을 총괄적으로 적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적그리스도가 누구며, 어디 있으며, 몇 년도에 태어났다고 말하면서 특정한 시대에 성경을 뜯어 맞추려고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해석입니다. 이런 해석은 삼가야 할 뿐더러 사실 귀담아 들을 것이 못됩니다.

교회사를 통해 보면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오류를 저질러 왔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살던 시대가 마지막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을 핍박하던 네로 황제를 결정적인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666이란 숫자를 뜯어 맞추기 위해서 광분했습니다.
중세에는 교황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뜯어 맞추다가 부합되면 그 교황을 가리켜서 적그리스도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히틀러가 한참 교회를 박해할 때 히틀러를 666이란 숫자에 맞추어 그가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666이란 숫자를 가지고 그러한 실수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건 하나가 생기면 그것으로 해석을 끄집어내는데 이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고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이 적그리스도를 가르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면 적그리스도가 누군가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그렇게까지 의견이 분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적그리스도가 활동하는 그 특색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와의 교제를 거부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8-19절을 보세요.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속에 파고들어 올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가만히 들어왔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은연중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잘못된 신학, 잘못된 사상, 잘못된 교리의 영향력을 확산시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가운데 끼어 있을 수는 있지만 우리 중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들 자신이 불편하고, 견딜 수 없고, 언젠가는 그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19절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저희와 우리를 구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근본 진리의 문제가 아닌 이상 성도의 교제를 끊으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이고 성경적인 연합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계속 깨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그가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려고 하는지 그 사실로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적그리스도는 참된 성경의 교리를 부인합니다.
본문 20-25절을 같이 보세요.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성경 교리 중에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 지엽적인 문제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의견을 달리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확실히 말한 어떤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사람들은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땅위에 있는 모든 교회의 모든 교리가 똑같이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으로 영감되었기 때문에 오류 없이 기록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받아들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근본 교리에 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가령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기독교 교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기독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와 그리스도는 누구신지에 관해서 대답을 달리 하는 사람은 사단에게 속한 적그리스도의 영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를 삼는 교리는 두 가지입니다. “그리스도론”과 “신론”입니다.
본문 22절에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그가 적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데 이의가 없어야 됩니다.

우리는 기독교가 체험적인 종교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 이전에 계시의 종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체험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체험이 곧 기독교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 위에서, 말씀이 허락한 범주 안에서, 말씀이 승인하는 체험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만을 적합한 체험으로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교리에 대해서는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교리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몸이 이렇게 버티고 서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뼈가 있기 때문입니다. 뼈가 없으면 몸은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리는 우리 몸의 뼈와 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미국의 부흥사 중에 죠지 휫필드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한번은 그가 어떤 교인을 만나서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때 그 교인이 “저는 교회가 믿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당신의 교회는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네, 우리 교회는 제가 믿는 것을 믿지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휫필드는 “그러면 당신은 둘 다 믿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네, 우리는 둘 다 똑같은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이 정말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깊이 가져야 합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강력하게 부인하던 이단인 그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철저한 이원론에 입각해서 영혼과 육체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영혼과 육체는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전인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주님의 성육신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인 기독론을 왜곡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교리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본문 2장 20절과 27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20절).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절)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령을 기름 부으셨다고 말씀했는데, ‘기름 붓는다’는 말은 그 당시에 방을 밝히는 등잔에 기름을 붓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등 안에 기름을 넣고 불을 붙이면 환하게 비칩니다. 이 빛 앞에 모든 것이 밝아집니다. 우리 안에 찾아오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진리를 조명합니다. 성령이 누구를 조명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4장 26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이 우리 마음에 부으신 바가 되면 모든 것이 밝아집니다. 확실해집니다. 주님을 밝히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증거할 것입니다.

셋째로, 적그리스도는 성도를 미혹합니다.
이단이 누구를 찾아다닙니까? 모든 적그리스도의 영들이 역사하는 공통된 특성 중의 하나는 예수 믿는 사람을 찾고 성도를 미혹케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전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누가 찾아와서 신앙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면 떠나라고 말하세요. 그 시간을 아껴서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하라고 도전하세요.
적그리스도의 영은 불신자들보다 성도를 미혹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요한은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특색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미혹하는 영”이라는 말은 바른 진리에 있던 사람을 탈선시키는 영이란 말입니다. 신앙의 궤도를 걷고 있는데 이 신앙의 궤도에서 탈선시키려고 하는 것이 바로 사단의 사역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지 아니하고 승리할 수가 있습니까?

우선 성령의 가르침에 거해야 합니다.
27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고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적그리스도에게 빠지는 사람을 보면 대개 인간의 가르침에 너무 호기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신기한 소리 때문에 망합니다. 진리를 가르쳐 주는 최대의 교사는 성령님 자신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께서는 우리를 잘 깨닫게 하기 위해서 교회 안에 은사를 주어서 어떤 직임을 가진 사람을 세우신비다. 신앙의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가르침의 은사를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27절 마지막 부분에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했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라는 것은 주님과 지속적인 교제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진리 안에, 그리고 진리의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끝으로, 주님 안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인격과 삶을 지녀야 합니다. 적그리스도가 우리를 유혹하려 하다가도 우리의 삶을 보고 할 말이 없도록, 주님과 교제하는 삶이 만족하고 풍성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만족이 없고 답답함을 해결할 길을 찾고 있는 사람을 적그리스도가 유혹합니다. 신앙 생활에 행복하고 만족한 사람은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만족과 행복이 없는 사람이 여기에, 아니면 저기에 행복이 있을까 기웃거리다가 유혹의 손길이 미치게 되면 그만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주 안에 항상 거하는 생활을 해서, 원수들이 택한 자라도 미혹하려고 하는 이 혼돈된 상황 속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05-08-2024(수) 요한일서 2:18-2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 안에 거하라(27절)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As for you, the anointing you received from him remains in you, and you do not need anyone to teach you. But as his anointing teaches you about all things and as that anointing is real, not counterfeit--just as it has taught you, remain in him.

오늘의 시대를 "마지막 때"라고 합니다.
마지막은 하늘로 올라가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심판의 주로 오실 때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두 가지 종말을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개인의 종말 즉 죽음입니다.
둘째는 역사의 종말 즉 심판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성경은 마지막 시대의 특징을 "사랑이 식어가는 시대" 라고 하며 동시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시대"라고 합니다.
요한일서에서 적그리스도는 예수께서 육체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를 기록하던 시대는 "영지주의" 사상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은 거룩고 육은 부정한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부정하던 시대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종교다원화주의가 사람들을 자극합니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목표는 동일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영지주의 시대에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하셨습니까?
오직 주 안에 거하라고 합니다.

주 안에 거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며, 빛이시며,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믿음의 사람들은 빛의 자녀로 서로 사랑하며 믿음의 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특징은 거짓말과 교활함과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고 따라가려면 항상 주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 안에 거하면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첫째는 주님 안에 거함은 영원한 생명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 안에 거함은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주님께서 의로우신 것을 아는 만큼 의롭게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거짓이 없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되 먼저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안에는 미워할 사람이 없습니다.
일하는 사람 안에는 불평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것은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곧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주님이 오신다면 영접할 준비가 다 되셨습니까?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십시오! 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오늘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이렇게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말씀 안에 거하자!
성령 안에 거하자!
주님 안에 거하자!

내 주여 뜻대로


5월 8일 어버이 날에

엄마는 절대로 널 떠나지 않을 거야

1970년 1월,
당뇨병을 앓고 있던
17세의 '에드워다 오바라(Edwarda O'Bara)'는
감기를 앓던 중에 먹은
당뇨병 치료 약이 혈류에
녹아들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에드워다는
즉시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고
병원 침대에 누워
점점 의식을 잃어갔습니다.
신장 기능이 상실되고
심장박동도 멈췄다가
다시 뛰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뇌에 손상을 입어
안타깝게도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찾아올 불행을 의식했는지
에드워다는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는 속에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엄마, 정말 떠나지 않을 거지?"

"그럼, 엄마는 네 곁을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그것이 모녀가 나눈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의사는 에드워다가
6개월을 넘기기 힘들 거라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지만,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고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엄마는 종기나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두 시간마다
딸의 몸을 뒤집어 주었습니다.
네 시간마다
딸의 혈액을 채취해 혈당을 체크하고
인슐린을 주사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12번에 걸쳐
음식을 튜브로 주입해 주고
대소변을 처리해야 했으며
한 번에 2시간 이상 잠들지 못하고
쪽잠을 자며 딸을 돌봤습니다.

무려 38년 동안
어머니는 식물인간이 된 딸을
그렇게 돌보며 약속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너무도 무정했습니다.
에드워다를 38년 동안 쉬지 않고
지키던 엄마는
몸이 늙어 쇠약해졌고,
2008년 팔순을 넘긴 엄마는
딸 곁에서 손을 꼭 잡은 채
에드워다의 여동생 콜린에게
언니를 부탁한 후 숨을 거뒀습니다.

영원히 네 곁에 있겠다는
엄마의 약속은
이렇게 동생 콜린에게 이어졌습니다.

콜린은 직업을 그만두고
엄마의 약속을 이어받아
언니를 지극 정성으로 돌봤고,
에드워다는 그 후 4년을 더 살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 모든 엄마는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얇게 입어도 춥지 않으며,
잠자지 않아도 졸리지 않습니다.
엄마니까요......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은
세상 어느 것보다
가장 완전하며, 가히 희생적이고
영원하고 숭고합니다.

* 오늘의 명언
신은 곳곳에 가 있을 수 없으므로
어머니들을 만들었다.
– 탈무드



말세 성도의 신앙

1. 적그리스도와 많은 적그리스도들
2. 너희는 기름부음을 받았다
3. 주 안에 거하라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제자가 사도 요한이다.
제자들 중에 가장 오래 살았던 제자도 사도 요한이다.
종말의 계시를 종합적으로 받았던 제자도 사도 요한이다.
요한복음, 요한 1, 2, 3,서 , 그리고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분이다.
우리가 상고하고 있는 이 서신에고 종말의 경고가 많이 기록돼 있다.

1. 적그리스도와 많은 적그리스도들

이 사도 요한이 지난 시간에는 우리들에게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기 때문이라 했다. 또 지나가는 것과 주님을 함께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라 했다. 그래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하지 말라고 했다. 한 마디로 요약을 한다면 주님만 사랑하라는 말이다. 이제 말세지말에 세상이 어지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18절에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분명히 전재되어야 할 사건이다. 그것도 재림 바로 직전에 있을 사건이다. 그럼 적그리스도와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났다고 함은 바로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증거가 되는 셈이다. 우리는 요즘 밤 시간에 적그리스도에 관하여 함께 연구하고 있다. 상세한 것은 밤 시간에 말씀을 드리겠다. 오늘은 적그리스도의 속성만을 살펴보겠다.

19절에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적그리스도의 속성

첫째로 우리에게서 나간 자들이라고 했다. 이 말은 적그리스도는 특별하게 별나서 오는 게 아니다. 다 우리에게서 출발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마치 문선명 집단인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 엘리야 제단 등등... 이런 이단의 무리들이 다 많은 적그리스도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다 처음에는 우리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에게 속한 자는 아니었다. 19절을 자세히 보면 이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이 처음에는 우리들과 함께 있기는 있었으나 우리들에게 속한 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가룟 유다 같은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예수와 또 제자들과 한 Member 였다. 그러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장 본인이다. 저들은 우리에게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나간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는 거짓말하는 자들이다. 22절에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 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거짓말을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거짓말이 하도 묘하게 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가려내기 어렵다.

요일 1:10절에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 1:6절엔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거짓말하는 자들에게 속지 않아야 하겠다. 그리고 나도 남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겠다. 남들도 나를 믿어주는 그런 사람 또 주님께서 인정해 주는 성도가 되자!

2. 너희는 기름 부음을 받았다.

20절 "너희는 거룩한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오늘 본문은 우리 모두는 다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함은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다 함께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 말을 줄여서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에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순간 성령의 사람이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을 하시는 분은 이미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20절 하반절에 성령의 사람은 모든 것을 안다고 했다. 성령의 사람은 영분별의 능력이 있다는 말씀이다. 성령의 사람은 또 진리를 안다고 했다. 진리는 에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21절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아니함이라" 우리 모두는 한 서령으로 한 진리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제 옆 사람을 돌아보시라. 그리고 교회 전체를 둘러보시라. 느껴지는가? 나와 한 영의 사람임을 나와 한 사랑의 사람임을 나와 한 지리의 사람임을 나와 한 몸임을 느껴지는가? 만약에 이것이 느껴지지 못한다면 어느 편엔가 하자가 있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상대가 잘못되지 않았으면 내가 잘못되었다는 증거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 지리를 아는 사람이다. 성경의 참 지식을 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신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우리를 속이는 자들이다. 우리를 미혹하는 무리들이다. 우리로 하여금 실패의 길을 가게 만드는 자들이다.

정말 여러분들은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는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교인들이 교회는 왔다 갔다 하는 역사는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경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또 세상의 학식이나 상식이나 경험 같은 것이 남들보다 뒤처지면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을 하면서도 신기하고 이상한 것은 성경을 남들만큼 알지 못하는 사실에 대하여는 아무런 가책을 못 느끼고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러고도 정말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말씀을 배워야 한다.

말씀을 사랑해야 한다.

모태신앙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교회 다닌 지 20년 30년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경을 깊이 아는 일이다.

말씀 깊숙이 파묻혀 사는 길이 중요한 것이다.

3. 주 안에 거하라!

사도 요한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아주 간단 명료하게 고백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영(靈)이시다
둘째는 하나님은 빛이시다
셋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넷째는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따라서 주 안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안에 거하려면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며 성령께서 내 안에 내주해야 합니다.

둘째는 빛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거하려면 어두움이 없어야 합니다.
어두움을 대표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따라서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셋째는 사랑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사랑안에 거하려면 먼저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다른 무엇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생명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생명안에 거하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삶을 위하여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27절)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먼저 기름 부음을 받으라고 합니다.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적그리스도들과 싸워 이기려면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하고 또 말씀이 되시는 주 안에 거해야 합니다.

24절이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며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주 안에 거한다는 말은 처음에 들은 말씀 안에 거하는 일이다. 처음에 들은 말씀 위에 다른 어떤 것을 가지고 와서 속삭이는 것은 거의 거짓이기 쉽다.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이기 쉽다. 처음에 붙잡은 진리 위에 굳게 서야 한다. 처음에 들은 말씀을 굳게 잡아야 한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때가 바로 마지막 때이다.
많은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이 날뛰고 있다.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라도 미혹케 하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덤비고 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자가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이다.
거짓말하는 자들이다.
미혹케 하는 자들이다.
교활한 자들이다.

창세기 3:1, 2절에 아담과 하와를 미혹했던 뱀의 이름이 나하쉬인데 그 뜻은 교활하다는 뜻이다.

28-29절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면 어떤 유익이 있는가?

첫째는 주님 안에 거함은 영원한 생명 안에 거함이라 했다(25)
둘째는 주님 안에 거함은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셋째는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설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는 주님께서 의로우신 것을 아는 만큼 의롭게 살라는 것이다.

의를 행하는 자는 주안에 거하는 증거라고 하셨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거짓이 없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이 온전히 실행된다.
사랑하는 사람 안에는 미워할 사람이 없다.
일하는 사람 안에는 불평할 시간이 없다.
그것은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제 곧 오실 때가 다 되었다.
지금 주님이 오신다면 영접할 준비가 다 되어 있는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십시오! 할 수 있는가?
지금 살고 있는 생활에서 자신이 있는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는가?

말씀 안에 거하자!
성령 안에 거하자!
주님 안에 거하자!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 2장에서 편지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아비들, 청년들, 어린아이들” 세 분류로 나누었습니다. 교인이라도 영적인 성숙함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적으로 아비입니까? 청년입니까? 어린 아이입니까? 다른 사람의 믿음도 지켜줄 만한 사람이면 아비일 것이고, 자기 믿음 하나 지킬 정도면 청년일 것이고, 자신의 믿음 조차 지키지 못할 정도로 흔들흔들하면 어린 아이일 것입니다. 자녀들 믿음보다 못한 부모도 있습니다. 그저 부끄러워할 문제가 아닙니다.

제 목회 여정 중 마음 아픈 기억 하나가 있습니다. 교육목사로 섬길 때, 대학부의 회장을 지냈던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형제는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생각할수록 감격스럽습니다. 그런데 또 한 형제를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그 형제는 장로 아들로 서울대학교에 다니던 형제입니다. 참 착실했던 형제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제가 부산에 부임한 지 얼마 후, 그가 대학가에 유행하던 모 신흥종교에 넘어 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듣고 한동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형제가 구원받은 것은 당연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받느냐 하는 단계라고만 여겼지, 복음에 분명이 서 있는지, 아닌지 확인보아야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고,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게 회개했습니다. 그 청년에게 미안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어린이 여러분”이라고 부르며 말씀했습니다. 미혹은 영적으로 어린이들에게 더욱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학원복음화협의회 헌신예배 후, 한 대학교수님이 말씀했습니다. “대학에 합격했다고 무조건 좋아하지 말고, 기도와 말씀훈련을 잘 시켜서 보내세요. 대학이 영적으로 무서운 곳입니다.”대학만 보내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청년이 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새가족에게 일대일 말씀 양육을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겪은 어려움 중에 핍박보다 더 무서웠던 것이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의 미혹이었습니다.

요일 2:18 어린이 여러분,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적대자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이, 지금 그리스도의 적대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그리스도의 적대자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들도 그리스도인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교회를 혼란케 하다가 결국 교회를 분열시키고 큰 상처를 주고 떠났습니다.

19절 그들이 우리에게서 갔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었더라면, 그들은 우리와 함께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들은 모두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22절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의 적대자입니다.

기가막힌 일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교인인데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이지만 여전히 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는지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교회를 깨뜨리려고 침투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의 역사가 더 심해졌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만 다니는 신앙생활에 머무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1992년 10월 시한부 종말론이 극성일 때, 믿지 않을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주님의 계시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정말 혼란스러웠습니다. 그후 종말론에 대하여 정말 많이 공부하였습니다.

종말론에 대하여 인터넷에서 배우면 안됩니다. 제대로 공부해야 합니다.

아직도 예수님이 왜 그리스도인지 정확히 고백할 수 없는 사람, 전할 수 없는 사람은 배워야 합니다. 일대일 양육을 받고 제자훈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복음학교도 추천해 드립니다.

다른 것이 여러분의 마음을 차지하기 전에 먼저 복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한번은 대학생인 한 자매를 상담한 적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한때 대학 캠퍼스에서 대단한 세력을 확장시키던 JMS(정명석) 이단집단에 속했던 자매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면서 너무나 안타까왔던 것은 이무리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쳐도 자신이 처음 들었던 이단의 메시지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녀 안에 악한 자가 들어 앉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 자매가 복음을 먼저 알고 그들의 메시지를 들으면 영을 분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모른 채 이단을 받았기에 마음이 사로잡힌 것입니다. 누가 먼저 그 마음의 주인이 되느냐? 하는 것은 참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입으로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만으로 분별하려고 하면 오판하게 됩니다. 입으로 주님을 시인하면서 삶으로는 부인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딛 1: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부산에서 청년 연합집회 강사를 선정할 때, 세 분을 추천받았습니다. 한 목사님께서 제안하셨습니다. 그 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면서도 불법을 행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이요 주님이요 왕이라는 말인데 어떻게 불법을 행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삶으로는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 욕심을 부리고 거짓말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들도 그렇습니다.

요일 2:11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고, 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도 교회를 분열시키는 이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이 교회에서 분열시키고 나간 자들이었다고 했습니다. 교회를 분열하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고전 12: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이처럼 미혹하는 영을 조심해야 하지만 두려워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감당할 시험 밖에는 주시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가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에겐 어떤 마귀의 미혹이 있을지라도 능히 이길 힘이 있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과 우리 안에 임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바른 지식을 갖게 해 주십니다.

20절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 부으심을 받아,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기름부으심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님이 임하셨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됩니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27절 여러분으로 말하자면, 그가 기름 부어 주신 것이 여러분 속에 머물러 있으니, 여러분은 아무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을 맏은 사람은 누구의 가르침도 받지 않는 독불장군, 외고집장이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위에 진리를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혼자만 남은 때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도 있고 목회자도 성도들도 함께 있지만, 혼자 남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 가족들 사이에서 혼자 예수님을 믿는 경우와 같습니다. 불신 직장인들 사이에 홀로 주님과 동행하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이단들이 미혹들이 횡행할 때도 있습니다.

다 미혹에 빠질 때, 그 때 어떻게 할 것입니까? 여전히 마음에 주님이 계시니, 주님이 친히 가르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5절) 그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6절) 대답했을 때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7절)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사람의 판단으로 알 수 없었지만 성령님께서 알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바른 지식만 알게 해 주실 뿐 아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바른 신앙고백을 하였던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예수님 그리마옵소서.’ 하고 가로막았습니다. 그 때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절) 하시는 예수님의 엄청난 책망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바른 지식을 가졌지만 아직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귀의 미혹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명심할 일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만으로는 결코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사람 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의 미혹을 받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바로 그 허점, 알기는 하지만 실제 살지 못하는 모순을 파고 들어 미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주님 안에 거하는 삶,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충만하여 마귀의 미혹 앞에서 당당히 승리할 수 있습니까?

사도 요한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반복하여 권합니다.

27절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28절 그러므로 자녀 된 이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다는 말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며 친밀히 동행하며, 온전히 복종하는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었습니까? 자신은 압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주인은 누구였습니까?

두바이 한인교회 신철범목사님께서 집회 중에 하신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집중하여 바라보면 바라보는 대상이 우리 눈동자에 비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목하는 사람이 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주님의 눈동자에는 그 사람이 보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동자에는 주님이 보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바이 한인교회 집회에 참석한 성도들의 간절함을 보았습니다. 무슬림 나라인 중동에서 선교사로 성도로 사는 이들, 그들은 주님을 향한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느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북한의 성도들의 주님을 향한 갈망은 더욱 클 것입니다. 예배 한번 마음껏 드릴 수 있어도 기도 한번 큰 소리로 드릴 수 있어도 소원이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우리도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이제 성찬식을 하겠습니다. 성찬식은 가장 거룩한 주님과의 사귐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주님과 거룩한 사귐을 갖는 사람이며, 어떤 미혹이 와도 핍박이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28절 ...그렇게 해야 그가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가 오실 때에 그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외경인 마카비2서에 보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황제의 박해 때, 일곱 형제 순교하는 기사가 나오는데, 로마 관리들이 마지막 남은 막내 아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어머니를 보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막내 아들에게“이 학살자를 두려워 말아라.
그리고 네 형들의 기개를 보여 줘라.
내가 하나님의 자비로 너를 네 형들과 함께 되찾을 수 있도록 죽음을 받아 들이라.”고 말함으로 어머니와 막내 아들 마저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이 어머니와 일곱 아들이 어떻게 이런 믿음과 소망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함께 하시는 주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찬을 받으면서 주님을 향하여 마음을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마음의 주요 왕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거한다(abide. meno)는 것의 의미(요한복음 15:1-8)

μένω 스트롱번호 3306

1. 남아있다 2. 기다리다.
발음 [ mĕnō ]

머물다(마 10:11, 요 1:32, 행 21:8, 딤후 4:20), 유하다(막 6:10, 눅 24:29), 거하다(눅 8:27, 요 8:35, 요일 2:27), 계시다(요 1:38, 2:12, 히7:24), 머물러 있다(요3:36), 붙어있다(요15:4), 두다(요19:31, 행5:4), 붙다(행27:41), 지내다(고전7:8,40), 영존하다(히12:27), 계속하다(히13:1).

예수님의 참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배경을 알아두는 게 좋다.
첫째, 이 설교는 고별 설교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 제자들에게 남긴 유언과도 같은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들을 때는 좀 더 진지하게 들을 필요가 있다.
포도농장의 로맨틱한 분위기가 아니라, 임종을 앞둔 부모님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비장하면서도 슬프면서도 감사한 분위기다.

둘째, 이 포도나무의 비유는 이사야의 말씀과 엮어서 이해해야 한다.
이사야 5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해서 다음과 같음 말씀을 선포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이사야 5:1-2)

예수님이 본인을 가리켜 ‘참포도나무’라고 했을 때, 이것이 바로 이사야서에 나오는 ‘극상품 포도나무’를 뜻한다.
‘극상품’이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알레씨노스’는 ‘신뢰할 만한’, ‘온전한’의 뜻을 가지고 있다. 즉, 극상품은 ‘눈이 부실 정도로 붉은 종류의 포도’를 일컫는 말로, ‘매우 가치 있는’이라는 뜻이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되었던,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바로 그 포도나무다. 이 두 가지, 참포도나무 비유는 예수님의 고별 설교이고, 이사야의 말씀과 연관해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수의 사건 이후, 기독교의 복음이 지중해 지역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것은 가까운 지역이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말씀 자체에 대한 이해의 배경이 되는 문화적 유사성도 한 몫 했다. 예수님의 참포도나무 비유도 그렇다. 포도재배가 주요 농업이 아닌 지역에 사는 자들은 포도재배의 중요성을 별로 알지 못한다. 포도재배가 정말 중요했던 지중해 지역의 나라들은 그것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참포도나무 비유가 마음에 깊이 와 닿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포도재배가 얼마나 지중해 지역 주민들의 삶에 중요하면, 포도재배를 주관하는 신이 있었겠는가. 그 신의 이름은 디오니소스 또는 바쿠스로 불린다.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 비극은 포도주 재배를 마치고 국가적 수준에서 포도재배를 관장하는 디오니소스 신을 위한 축제에서 상연했던 연극이다. 국가 최고의 축제인 이 축제를 비극(연극)으로 빛낸 이는 그 당시 최고의 영예를 안았고,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만큼, 그들의 삶은 포도 재배와 깊은 연관을 지녔다. 오죽하면, 알렉산더 대왕이나 로마제국이 점령한 나라는 ‘포도를 재배할 수 있는 나라’에 국한되었을까. 그 당시 땅끝은 단순히 어떤 지형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포도를 재배할 수 있는 한계선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포도 재배가 되지 않는 땅은 땅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참포도나무 비유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그 지역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예수가 극상품의 포도를 생산하는 포도나무라니! 이건 아주 귀가 쫑긋한 비유다. 극상품의 포도를 맺는다는 것은 삶의 풍요와 기쁨과 연결된다. 극상품의 포도는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었고, 극상품의 포도로 만든 포도주는 맛이 좋았다. 지금도 극상품의 포도로 만든 포도주는 매우 고가에 팔린다. 이처럼, 극상품의 포도는 풍요와 기쁨을 상징한다.


사실, 인간이 바라는 것은 굉장히 단순하다. 풍요와 기쁨이다. 가난과 절망을 바라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인간은 누구나 풍요와 기쁨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은 풍요와 기쁨보다 가난과 절망이 많다. 훨씬 많다. 풍요와 기쁨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 말하지 않는다. 극도의 물질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생득적으로 안다. 물질적 풍요와 기쁨은 참 좋은 것이지만, 풍요와 기쁨은 그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풍요와 기쁨은 매우 총체적인 것이다.


실제적으로, 미국의 어느 기관에서 물질적 풍요가 주는 만족을 조사한 적이 있다. 조사 결과, 연봉 7만 5천불 이상 버는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가 주는 만족에서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결과를 얻었다. 그러니까, 연봉 7만 5천불 버는 사람이나 연봉 20만불 버는 사람이나, 연봉 100만불 버는 사람이나, 물질적 풍요에 대한 만족도가 비슷했다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번다고 그에 비례해서 삶의 만족도가 높은 것은 아니다. 적당히 벌면 된다. 하지만, 7만 5천불 이하를 버는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가 주는 만족도에서 그 이상을 버는 사람들과 많은 차이를 보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물질적 풍요가 어느 정도 채워지지 않으면 불행을 느끼는 세상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풍요와 기쁨을 얻기 위해서 노력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삶의 풍요와 기쁨을 위한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보려고 비즈니스에 뛰어는 것도 그렇고, 직장을 다니는 것도 그렇고, 결혼도 그렇고, 또는 독신으로 사는 것도 그렇고, 자식을 낳는 것도 그렇고, 또는 자식을 낳지 않는 것도 그렇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는 노력도 그렇고, 또는 대학에 가지 않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도둑질도 풍요와 기쁨을 지향한다. 그런데, 삶의 풍요와 기쁨을 얻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풍요와 기쁨을 위해서 살았는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가난과 절망이다. 이것이 인간 실존이 맞닥뜨리는 현실이다.

예수님이 인간 현실을 응시하면서 본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풍요와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지만 결국 가난과 절망을 경험하고 마는 인간들의 불쌍한 현실이다. 그런 상황을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도 표현했다. “목자 없는 양.” 양도 풍요와 기쁨을 꿈꾼다. 그래서 양은 푸른 초장을 찾고 쉴 만한 물가를 찾는다. 그런데, 양은 눈이 어두워 푸른 초장을 찾기 힘들고, 쉴 만한 물가를 찾기 쉽지 않다. 목자가 데려다 주어야만 한다. 혹, 목자가 이끄는 양무리에서 벗어나 다른 데로 갈라치면, 이리나 늑대에게 잡아 먹히기 일쑤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풍요와 기쁨을 꿈꾼다. 그래서 세상으로 나간다. 그런데, 우리를 인도하겠다는 삯꾼 목자들은 우리 더러 이렇게 다그친다. 풍요와 기쁨을 꿈꾸면, “부를 추구하라고, 권력을 추구하라고, 예뻐지라고, 명성을 얻으라고, 경건해지라고,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라고, 명예로워지라고, 올바르게 살라고 우리를 다그친다.”(교회를 찾아서, 54쪽). 우리는 이러한 유혹들에 빠져, 이것이 풍요와 기쁨을 가져다주는 길인 양, 우리는 그 길을 열심히 걸어간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서, 이미 시간을 다 쓰고, 이미 인생을 다 쓰고 나서 깨닫는다. 그 길의 끝에는 풍요와 기쁨이 없었다는 것을!

아무리 남의 등을 쳐먹고 살던 인간도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말을 할 때는 ‘진실’을 말하는 법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풍요와 기쁨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그러면 그들 중에 “부를 추구하라고, 권력을 추구하라고, 예뻐지라고, 명성을 얻으라고, 경건해지라고,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라고, 명예로워지라고, 올바르게 살라고” 다그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여기, 죽음을 앞둔 한 사람이 풍요와 기쁨이 넘치는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말하고 있다. 그 사람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는 사람, 우리 인간 뿐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제 2위격,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풍요와 기쁨이 넘치는 인생을 살고 싶는가? 그렇다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내 안에 거하라!” 이는 우리가 평소에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풍요와 기쁨을 위해서 참으로 많은 것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는 풍요와 기쁨을 위해서 행하는 그 많은 일들을 통해서 풍요와 기쁨을 얻지 못하고, 가난과 절망을 얻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하는 그 헛된 일들을 전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 헛된 일들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죽음을 앞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귀에 들린다면, 풍요와 기쁨을 얻고 싶거든, 하던 일을 멈추고, “내 안에 거하라!”는 이 말씀에 마음이 요동쳐야 한다.

왜 우리는 ‘그 안에’ 거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그는 참포도나무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극상품의 포도를 재배하려면 참포도나무가 필요하다. 참포도나무의 가지는 극상품을 얻을 수 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거하면, 가지인 우리는 극상품을 얻는다. 극상품 포도, 풍요와 기쁨을 가져다주는 바로 그것! 같은 포도여도, 참포도나무인 그리스도 안에 거해서 얻는 포도와, 그냥 포도나무에서 얻는 포도는 그 질이 다르다. 같은 돈을 벌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기에 거하며 버는 돈과, 그냥 버는 돈은 그 질이 다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서 포도열매를 얻고 있는가? 내가 지금 삶에 얻고 있는 포도열매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거해서 얻는 포도열매인가, 아니면, 그냥 포도열매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길 것이다.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무슨 방법을 통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거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참포도나무의 가지로서 그 안에 거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고려야 할 것은 교회론이다. 현대 기독교인에게 가장 약한 부분이 교회론이다. 교회에 대한 이해력 수준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이는 근대 자본주의의 영향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복음이 아니라 자본(돈)에 휩쓸리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근대 자본주의의 최대 목표는 인간을 고립된 개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고립된 개인으로 만드는 이유는 그 고립된 개인이 바로 노동자가 되고 동시에 소비자가 되기 때문이다. 노동력과 소비력을 동시에 갖춘 근대인,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게 교회론의 약화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노동력과 소비력을 갖춘 고립된 개인은 교회를 고립된 개인의 연합 정도로 생각하게 만든다. 고립된 개인의 연합으로서의 교회는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헤쳐 모일 수 있다. 다른 말로 해서, 교회를 개인의 필요와 의지에 따라서 얼마든지 나가고 들어올 수 있는, 하나의 회사 같은 조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를 그러한 식으로 말한 적이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은 유기체적으로 이어져 있다. 팔이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심장이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리가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팔이 몸에 붙어 있기 싫다고 스스로 떼고 나가지 않는다. 심장도, 다리도 마찬가지다.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지인 우리가 ‘거한다’라는 것은 반드시 교회론적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거한다’라는 말을 심리적인 것으로만 조그맣게 생각하고 만다. ‘거한다’는 것은 매우 구체적인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심리적 동의가 아니다. 믿음은 삶 전체, 몸과 마음과 영혼 모두가 그에게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거한다’는 것은 매우 육신적인 것이다.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지로서 ‘거한다’는 뜻을 매우 피상적으로만 생각하고 말 것이다.


‘거한다’는 것의 의미를 좀 더 깊이 파악하기 위해서 레이첼 에반스의 저서 <교회를 찾아서 Searching for Sunday>에서 도움을 얻어보고자 한다.
이 책은 교회의 성사(sacraments / 성례전)에 맞춰 쓰인 책이다.
그 이유는 레이첼 에반스가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된 계기가 바로 성사(성례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성례전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실제였다.
그래서 레이첼은 성사(성례전)을 다음과 같이 아주 쉽게 풀이하고 있다.

교회는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고 말한다(세례).
교회는 우리가 망가진 존재라고 말한다(고백/고해성사).
교회는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성품/직분).
교회는 우리를 먹인다(성찬).
교회는 우리를 환대한다(견진/confirmation).
교회는 우리에게 치유의 기름을 붓는다(도유).
교회는 우리를 하나 되게 한다(혼인).
(교회를 찾아서, 26-27쪽)

특별히, 세례와 성찬 이외의 성례전은 한국 개신교인들에게는 낯설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성례전’이라고 이름을 더 이상 붙이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의 신앙생활은 일곱가지의 성례전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세례를 받는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한다. 우리는 직분을 받는다. 우리는 성찬을 받는다. 우리는 우리가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정체성)을 다시 확인한다. 우리는 아픈 이들을 심방한다. 우리는 결혼(사랑)을 한다. 이러한 성례전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우리가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은혜이다.

우리는 삶의 풍요와 기쁨을 원한다. 정말 그런가? 그렇다. 우리는 삶의 풍요와 기쁨을 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지로서 거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참된 풍요와 기쁨을 가져다 준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해서, 다음과 같은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하여, 참여하는 것이다.

ㅡ 우리는 사랑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사랑해야 한다. (세례).

ㅡ 우리는 우리가 망가진 존재라고 말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용서 받는다. (고백/고해성사).

ㅡ 우리는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의 직분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직분을 잘 수행하고 있는가. (성품/직분).

ㅡ 우리는 먹여 주시는 주님 안에서 늘 배부르다. 우리는 먹고사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주님께 맡겨 놓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한다. (성찬).

ㅡ 우리는 환대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도 환대한다. 누구든. (견진/confirmation).

ㅡ 우리는 치유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픈 이들을 돌본다. (도유).

ㅡ 우리는 하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서로 배려하며 아껴주고 사랑하며 산다. (혼인).

우리는 풍요와 기쁨을 원한다. 그러나, 무엇이 풍요와 기쁨을 주는지 알지 못해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 우리의 인생을 허비한다. 여기, 우리에게 참된 풍요와 기쁨을 주는 길이 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지로서 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거한다는 것의 의미’를 배웠다. ‘거한다’는 것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실제적인 삶의 문제이다. 그것은,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과의 실제적인 관계 안에 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풍요와 기쁨을 누리기 원한다면, 교회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면 좋겠다. 교회는 우리의 풍요와 기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거한다”라는 말은 “살다”, “머무르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살다”,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다”라는 뜻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로마서 8:1; 고린도후서 5:16), 영원한 관계에 굳게 붙들려 있다고 묘사됩니다(요한복음 10:28-29).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소수에게만 허용된 특별한 차원의 기독교적 경험이라기보다는 모든 참 신자들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과 거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차이와 같습니다.

요한일서 2:5-6이 그리스도 안에 거함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 안에 거함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동일시됩니다(2절과 3절).
2장 뒷부분에서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영생의 약속을 받은 것과 동일한 것으로 여깁니다(24절과 25절).

성경에서 “안에 거함,” “안에 머무름,”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모두 같은 것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바로 구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라는 말은 피상적으로 대충 아는 것이 아니라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5:4-7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포도나무와 연합한 가지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해야만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구원이 주는 그리스도와의 생명 있는 연합이 없다면 생명도 풍성함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의 다른 구절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몸과 머리의 관계에 비유합니다(골로새서 1:18). 또 다른 필수적인 연합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복음 15:6의 경고(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않는 가지는 버려지고 불살라질 것)를 크리스천들이 언제나 구원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이들은 구원을 받아도 “거하고 있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런 경우에 우리는 버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거함”이 구원과 개별적인 개념일 때만 성립됩니다. 마치 “거함”이 우리가 구원 이후에 반드시 얻어야 하는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상태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구원을 주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은혜라고 분명히 말합니다(갈라디아서 3:2-3). 또한 가지가 어쩌다 포도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하면, 즉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하면, 다른 분명한 성경 구절의 내용은 모순이 됩니다(요한복음 10:27-30 참고).

참 포도나무의 비유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편이 가장 좋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참 포도나무이십니다. 그 안에 “거하는” 가지들은 참된 구원을 받고 구원자와 참되고 생명력 있는 관계를 누리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시든 가지들은 구원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척 하지만 나무에서 아무런 생명도 얻지 못하는 위선자들입니다. 결국 위선자들은 예수님께 제대로 접붙여진 게 아니라 그냥 걸쳐져 있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베드로와 유다도 잠시 동안은 그리스도 곁에서 서로 비슷한 행보를 보였지만 결국 베드로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었고, 유다는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시든 가지의 원리를 이렇게 다시 말합니다: “그들[당시 그리스도를 반대하던 이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구원의 증거 중 하나는 인내, 즉 그리스도 안에 계속해서 거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계속해서 동행할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26 참고). 즉,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거나”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그들 안에서 이루실 것이며(빌립보서 1:6)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요한복음 15:5). 떨어져 나가는 자들,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자들, 그 안에 거하지 못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구원받는 믿음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의 증거 중 하나는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증거들(구원받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구원받았다는 증거) 중에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요한복음 15:10; 요한일서 3:24);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요한일서 2:6); 습관적 죄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것(요한일서 3:6); 삶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요한일서 4:13).









05-07-2024(화) 요한일서 2:15-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상을 좇아 온 것(16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For everything in the world--the cravings of sinful man, the lust of his eyes and the boasting of what he has and does--comes not from the Father but from the world.

요한일서에서는 "세상" 이란 단어가 20회 사용됩니다.
구절 수로는 17구절입니다.

이때 세상이란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반대편에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대적하는 곳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세력들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러므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말씀을 기독교 경건주의의 대헌장(Magna Carta)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 사랑'과 '세상 사랑'을 날카롭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 사람 속에 하나님 사랑이 없다고 단정합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랑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랑은 세 가지,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요약됩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모든 인간을 사로잡은 세 가지 근본적인 욕심들, 즉 '성'(sex)과 '돈'(money)과 '권력'(power)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정욕(성)과 안목의 정욕(돈)과 이생의 자랑(권력)을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는 하나님 사랑이 없다고 단정합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제 10권 후반부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 육신의 정욕(情慾)을 시각의 유혹(誘惑)

사람의 감각(感覺)은 시각(視覺)과 촉각(觸覺)과 미각(味覺), 후각(嗅覺), 청각(聽覺)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쾌감을 주는 것을 접촉하고 만지기 좋아합니다.
촉감의 유혹이지요.

그 다음에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 얻는 미각의 유혹이 있습니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서 아무도 먹는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성욕은 단 번에 끊을 수 있지만 미각은 끊을 수 없습니다.
음식 먹는 길을 포기하는 것은 곧바로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적당량의
음식물만 섭취하면 되는데 문제는 그 식탐이라는 것이 우리를 괴롭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은 뷔페 식당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그냥 생명과 건강만 유지하자고 한다면 적당량만
먹으면 되는데 우리는 이것저것 욕심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하여 식탐이 건강을 위한다는 생각을 앞서 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거스틴은 만일 어떤 사람이 식탐을 버리고 자기의 생명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한계선을 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결코 그렇게 못한다고 솔직히 고백합니다.   
어거스틴 같은 성자가 그 정도니 우리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다음에 후각의 유혹은 아마 5각 중에서 가장 미약한 유혹일 것입니다.
꽃향기나 향수의 유혹을 우리는 쉽게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꽃향기나 향수 냄새를 맞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각의 유혹은 대단합니다.
우리는 어떤 노랫소리에 빨려 들어가면 때로 정신을 잃습니다.
서울서 부산 가는 고속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하는 서너 시간 동안
차안에 유행가를 내내 틀어 놓을 경우, 그 가사와 멜로디가
우리 기억 속에 녹음이 되어서 오랫동안 우리를 따라붙습니다.
그밖에도 우리를 유혹하는 소리를 들으면 쉽게 뿌리치지 못하고
끌려갈 때도 있기에 청각의 유혹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아마 가장 강렬한 유혹은 시각에서부터 온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야한 장면을 보았을 때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이 혼란스럽게 됩니다.
음란 만화나 동영상은 너무도 강렬해서 우리의 마음을 쉽게 교란시킵니다.

오늘 이 세상은 우리의 시신경을 사로잡는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동인천같이 조용한 곳에서 살다가 남대문 시장 같은 곳에 가면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상품 저런 상품, 이렇게 생긴 사람, 저렇게 생긴 사람, 우리의 시신경을
빼앗는 것이 수천 수만 가지이니 우리의 마음도 더불어 복잡해집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눈의 즐거움을 위하여 수 없는 물건들과 영화와 예술품들을 만들어냅니다.
또한 아름다워지기 위하여 외모를 꾸미는 일에도 엄청난 시간과 물질을 투자합니다.
그러나 대개는 우리 생활에 정말 필요한 경우는 얼마 되지 않고,
더더군다나 경건 생활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거리, 시각의 쾌락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둘째, 안목(眼目)의 정욕을 호기심(好奇心)의 유혹

육신의 정욕이 우리 육체의 감각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 육체가 감각을 통하여 어떤 경험을 얻으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학문과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을
끝없이 유혹하는 호기심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쾌락은 보기 좋고, 듣기 좋고, 냄새 좋고, 맛 좋고, 부드러워 만지기
좋은 것을 추구하지만, 호기심은 새로운 경험을 얻으려고 합니다.
호기심은 주로 눈을 통해서 얻어지므로 '안목의 정욕'이라고 부릅니다.

호기심과 관련해서 어거스틴은 시체를 예로 듭니다.
만신창이가 된 시체가 있다고 가정할 때 그 소름 끼치는
시체를 보고 쾌감을 느낄 사람은 정신병자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집요한 호기심 때문에 고개를 돌리며
괴로워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어코 그 시체를 보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대해서
그토록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다 호기심 때문입니다.
아무개 연예인이 결혼했더라, 이혼했더라, 무슨 일이 일어났더라 인터넷을
뒤지고 TV를 쳐다보고 하는 것이 다 그 호기심의 유혹 때문입니다.

길을 지나다가 누가 다투기라도 하면 그냥 빨리 지나가야 하는데
어느새 내 신경과 마음은 호기심 때문에 그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아, 호기심이란 얼마나 이겨내기 어려운 안목의 정욕인지요!

셋째, 이생의 자랑을 교만(驕慢)의 유혹과 칭찬(稱讚)의 유혹

이생의 자랑은 마음이 부풀어올라 자꾸만 뻐기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교만의 유혹입니다.
깊은 성찰 없이 우리 마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으로 부풀어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칭찬 받고자 하는 유혹은 아무도 뿌리칠 수 없는 최고의 유혹입니다.
칭찬은 돌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사람들이 "잘했다, 잘했다!"하고 칭찬해주기를 바랍니다.
어거스틴은 육체의 쾌락, 즉 육신의 정욕과, 호기심, 즉 안목의 정욕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데, 이 칭찬 받고자 하는 유혹은 도무지 제어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문제는 내가 잘못을 저지르고 진리 위에 서지도 못한 채
칭찬을 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정직하고 의롭게 살면서 비난을 받는 것이 거짓과 불의 속에 살면서
칭찬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칭찬을 받을 때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것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이웃에게도 선익이 되고 내 양심도 즐거워하는 칭찬일 때에는
그 이웃의 칭찬이 양약이 될 수 있지만, 그 반대 경우의 칭찬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결국 파멸의 구렁텅이로 내모는 아첨이요 독일뿐입니다.

당신의 사랑의 무게는?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영원히 시들지 않지만,
세상으로부터 온 것은 금방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본문 17절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옳습니다.
육신의 정욕, 촉각과 미각과 후각과 청각과 시각의
유혹에서 생기는 쾌락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안목의 정욕, 호기심의 유혹도 알고 나면 별 것 아닙니다.
이생의 자랑, 명예와 권력으로 자랑하는 교만도 오래 못 갑니다.
남들에게 듣는 수없이 많은 칭찬도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이지요.

어거스틴은 사랑은 무게라고 했습니다.
물체는 자기의 무게 때문에 제 자리를 찾아갑니다.
돌을 던지면 밑으로, 불은 위를 향하여, 물 속에 부은 기름은
물 위로 떠오르고, 기름 위에 부은 물은 기름 밑으로 가라앉습니다.
모두 다 제 무게로 인해 제 자리를 찾아가기 때문이지요.
그것들이 제 자리를 이탈하면 불안정해지고 제 자리에 다시 돌아가면 안정을 찾게 됩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어거스틴은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무게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든지 간에 사랑의 무게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사랑의 무게는 무엇입니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아니면 이생의 자랑?

아침에 있다가 금방 사라지고 말 것에 사랑의 무게를 두지 맙시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하나님을 향하여 가장 큰사랑의 무게를 두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무게 중심이 자연 하나님을 향하여 기울어집니다.

버지니아 공과대학의 총격 사건을 계기로 오늘
여러분의 사랑의 무게가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05-06-2024(월) 요한일서 2:12-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흉악한 자를 이기는 믿음(14절)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I write to you, fathers, because you have known him who is from the beginning. I write to you, young men, because you are strong, and the word of God lives in you, and you have overcome the evil one.

예로부터 아이들, 청년들, 아비들을 신앙 성장의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Augustinus).

아이들의 신앙은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활동에 의해서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다(기노스코)는 동사는 철저한 경험에 의해서 체험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어린 아이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은 본능적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청년들의 신앙은 흉악한 자를 이기는 것입니다.

청년들은 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서 강하게 활동하여 흉악한 자를 이기는 것입니다.
흉악한 자(포네로스)


아비들의 신앙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 흉악한 자(포네로스) πονηρός, ά, όν 스트롱번호 4190

1. 허약한.  2. 아픈.  3. 나쁜
발음 [ pŏnērŏs ]
어원 / 4192의 파생어에서 유래

󰃨 자녀들아...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

본문은 1, 2절과 1:9을 반영한다.
'죄사함'은 구약성경에서 새 언약에 속한 자들에게 주어진 축복이다(렘 31:34; 겔 36:22-25).
신약성경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행하신 예수의 이름과 연관되어 나타난다(마 1;21; 행 4;12; 10:43; 딛 2:14).
여기서 '이름'은 그 이름의 소유자의 인격을 비롯한 모든 것을 나타낸다(Smalley).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본문은 죄사함이 그리스도께서 화목 제물이 되심으로(1, 2절) 그의 이름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시사한다(Stott). 한편 '사함을 얻음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온타이'(*)는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수신자들이 처음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죄사함을 경험하였음을 시사한다.

󰃨 아비들아...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

'태초부터 계신 이'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Bruce, Dodd).
이 들에 의하면 본문은 시대에 상관 없이 전혀 변함이 없으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2. 하나님과 성육신 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malley).
3.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Barker, Westcott, Brooke).
이들에 의하면 본문은 선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다음절의 '아이들을' 향한 말씀에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Barker).
요한은 '태초부터 계신 이', 즉 선재하신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당시에 팽배해 있던 이단 교리에 대해 공격하고 있다.
당시 이단자들은 하나님의 선재하신 말씀, 즉 로고스가 나사렛 예수 안에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요한은 이러한 거짓 교리가 흔하던 수신자 공동체에서 '태초부터 계신 이'로서의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이단 교리의 거짓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앎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노카테'(*)는 현재 완료 시상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개종할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이단자들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선재하신 말씀이셨음을 알았고 그 앎이 현재까지 지속되어 신앙이 성숙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 청년들아...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 '악한 자'의 헬라어 '톤 포네론'(*)은 남성 명사이다.
이는 사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악을 인격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 사단은 빛과는 상관이 없으며 어둠의 세계를 조종하고 통제한다(14절; 3:12; 5:18, 19; 요 17;15; 엡 6:16; 살후 3:3).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빛 가운데 거한다고 주장하면서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들은 스스로 빛 가운데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며 사실상은 어두운 가운데 행하여 사단의 조종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이기었음이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네니케카테'(*)도 현재 완료 시상으로 과거에 성취한 승리가 지속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종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승리를 통해서 승리하였으며(눅 10:18; 골 2:15; 계20:2), 그 승리를 근거로 현재도 지속적으로 사단과의 영적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지속적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악을 향해 저항하고 투쟁하는 삶을 산다(Stott, Smalley).

󰃨 아이들아...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

12절에서는 '테크니아'(*, '자녀들아')로 부르고 있는 반면에 본절에서는 '파이디아'(*, '아이들아')로 부르고 있다.
'테크니아'와 '파이디아'는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엄밀하게 구별하면 '테크니아'는 부모와 유아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아이가 약하여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을 더 강조하는 반면에 '파이디아'는 아이의 미숙에 초점을 맞추어 교육과 지도가 필요함을 나타낸다(Westcott, Stott).
한편 '아버지를 알았음이요'에는 13절의 아비들을 향한 말씀인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재 완료 시상이 사용되어 아이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하여 죄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12절) 개종할 때부터 지도자 아래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해 배워 알고 있음을 나타낸다(Barker).

󰃨 청년들아...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본문은 13절과 병행된다. '강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스퀴로이'(*)는 육체의 강함보다는 영적인 강건함을 의미한다(엡 6:10;계 18:8). 청년들아 영적으로 강건해서 악한 자, 곧 마귀의 대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실체로서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영적으로 강건케 하여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악한 자에 대한 승리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한다(Smalley).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본절에서 17절까지는 '세상'이란 단어가 6번 등장한다. 여기서 나타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에 의해 통제를 받는 체제를 가리킨다(4:3-5;5:19;요 16:11, Barker, Stott). 이러한 세상은 본질상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한다(요 15:18, 19;17:25). 한편 본문의 '사랑'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기호'나 '매력'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Bultmann). 그러나 사실상 사랑과 매력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기호나 매력'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이기에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그것의 방향과 동기가 문제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욕구나 매력, 사랑은 빛 가운데 거하는 자로서 타인에 대해 올바르고 창조적인 방향과 동기를 지닌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사랑은 옳지 못하고 이기적인 방향과 동기를 지니게 된다(Smalley).

󰃨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 본문은 요한이 수신자 공동체에서 세사을 사랑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을 세상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투 파트로스'(*)에서 속격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목적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이 견해에 따르면 세상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공존할 수 없도록 만든다. (2) 혹자는 주격으로 보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주장한다(Houlden). 이 견해에 따르면 세상을 사랑할 경우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람 안에 거할 수 없다. 두 가지 견해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이다.

성장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육체가 자라지 않는 것은 안타까워하면서 영적 생명이 성장하지 않는 것은 안타까워하지 않는다면 모순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은 성장해야합니다. 성경 곳곳에서 영적 성장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며 범사에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해 함께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맡은 분량대로 기능하는 가운데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가운데 스스로를 세워 갑니다”(엡 4:15~16).
“도리어 우리 주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 안에서 성장해 가십시오. 영광이 이제와 영원토록 그분께 있기를 빕니다”(벧후 3:18).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성장해야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데까지 자라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도록 성장하도록 역사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 많이 생길까요.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편안한 삶, 더 안락한 삶, 더 쉬운 삶을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고통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고, 연단하는 것은 새가 나는 훈련을 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 연단하고,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면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서 나를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신다’고 생각해야합니다.

영적 성장의 지표

영적 성장은 측정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 되었다고 영성이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성장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교회생활이 익숙해졌다고 그것이 곧 영적 성장에 이로운 것은 아닙니다.
외적인 활동이 많고, 봉사를 많이 하는 것이 영적 성장의 지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많은 성경지식과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영적 성장을 이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영적 성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으로 나타나야합니다.
그것이 지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성도들이 영적 성장을 이뤄가고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영적 성장을 계속 이뤄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영적 성장을 이뤄가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평가 기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는 것은 강조 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시제의 변화가 있습니다.
12절과 13절은 현재 시제입니다.
반면에 14절은 과거 시제입니다.

매우 중요한 것을 강조할 때 방금 전에 사용한 것을 과거형으로 바꿈으로 한 번 더 강조하는 것입니다.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합니다.
그리고 알았음이요, 이기었음이라는 과거형을 사용함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성도가 경험해야 될 세 가지 영적성장

세 가지 호칭이 나옵니다.
12절에 자녀들, 13절에 아버지와 청년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호칭은 육체적인 나이와 영적 성장의 단계를 보여줍니다.

초대교회 어거스틴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호칭을 자녀의 신앙 수준, 아버지의 신앙수준, 청년의 신앙수준으로 영적 성장의 단계로 해석했습니다.
이 호칭은 모든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여’라는 호칭이 특정 단계에 있는 성도들만 호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은 모든 성도들을 일컬을 때 ‘자녀들이여’ 라는 했습니다.
노년의 사도 요한은 모든 성도들을 자녀들처럼 여겼습니다.
자녀들이 나오고, 아버지들이 나오고, 청년들이 나오는 순서는 구약성경에도 있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 내가 모든 사람 위에 내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 아들들과 딸들이 예언할 것이고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게 될 것이다”(요엘 2:28).

여기서도 아들과 딸들이 나오고, 늙은이가 나오고, 젊은이가 나옵니다.
아들과 딸들은 자녀들이고, 늙은이들은 연세가 많은 분이고, 그 다음이 청년들입니다. 자녀들은 예언하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을 경험하는 모습을 호칭을 통해 표현한 것입니다.
이 호칭이 구약에도 등장하는 것을 보면 모든 성도들이 동일하게 경험해야 될 세 가지 영적성장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호칭의 변화에는 분명 영적 성장의 단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고 죄 사함을 경험하는 단계가 있고, 아버지를 깊이 알아가는 단계가 있습니다.
이 단계는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은 죄 사함의 은혜를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성장해야 될 세 가지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역을 연령별, 호칭별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로써의 영적 성장

우리가 영적 성장을 이뤄야 할 세 가지 영역이 무엇일까요. 첫째 자녀로써의 영적 성장입니다. 12절과 14절 초반부를 읽겠습니다.
“자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의 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됐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이 아버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12, 14절).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영적 성숙을 이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받는 가장 큰 축복은 죄 사함입니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도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부모의 품입니다. 때로 자녀들은 잘못을 해도 부모 앞에서 당당합니다. 그 당당함이 어디에서 나올까요. 용서에 대한 기대에서 나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들의 죄를 용서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옵니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고, 그의 죄를 용서해주는 아버지가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써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순간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죄 사함의 교리를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 얻는 지식으로 여긴다면 그때부터 영적 성숙이 멈춥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날마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는 은혜를 누려야 하는 죄인들입니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았으면 그때부터 의인이라고 가르치는 구원파의 교리는 잘못된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음으로써 의롭게 된 것이지 죄가 없어서 의인이 아닙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히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죄가 득실거린다는 것을 날마다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로써 죄를 용서받는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 바로 영적 성장입니다. 영적 성장을 이루고 있는지를 측정해보려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누리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 영적 성장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로써의 영적 성장

둘째, 아버지로써의 영적 성장입니다. 13절 후반부와 14절 중간부를 읽겠습니다.
“아버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이 태초부터 계시는 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이 태초부터 계시는 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13~14절).
아버지로써의 영적 성장은 육체의 나이와 믿음의 나이를 병행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아도 영적 수준이 어린이에 머무는 사람이 있고, 젊지만 영적 아버지로 성장한 사람도 있습니다. 요셉은 다른 형제들보다 아버지의 사랑을 더 받았습니다.
창세기 37장 3절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가 느지막이 태어난 아들이기 때문에 더 사랑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되어 있는데 스펄전 목사는 그것을 올바른 번역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 나온 내용을 직역하면 ‘원로들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원로(장로)는 ‘자켄’인데 자켄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는 형용사가 많지 않습니다. 형용사적인 표현을 강조하기 위해서 명사를 씁니다. 예를 들면 ‘당신은 정의의 아들’이라고 쓰면 그것은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명사로 형용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원로들의 아들’이라는 것은 ‘원로 같은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지혜와 성숙함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여러 아들 중에 가장 늦게 태어난 아들은 베냐민입니다. 요셉이 느지막이 태어난 아들이라서 더 사랑했다면 요셉보다 베냐민을 더 사랑해야 하지 않습니까. 요셉은 아비의 마음을 가진 자녀였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영적 성숙은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깨닫고,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자신도 기뻐하고,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곧 자신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영혼을 품고, 인내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자녀들이 아비의 마음을 아는 자녀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선생들은 많은데 아비는 많지 않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고 가르치는 선생들은 많은데 한 영혼을 사랑과 인내로 양육하는 영적 아비들이 적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선생은 많은데 아비가 부족합니다. 아비가 많은 시대의 교회는 한 영혼을 책임지고, 양육하기 때문에 사생아가 없습니다. 버려진 자녀가 없습니다. 모두가 돌봄을 받으면서 건강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선생이 많고 아비가 없는 곳에는 옳고 그름을 따집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영혼은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계십니다. 태초부터 계시는 분을 안다면 태초부터 지금까지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법칙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습니다. 예견할 수 있습니다. 올바르게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는 영적 성장을 이룬 것입니다.
 

청년으로써 영적 성장 

셋째, 청년으로써 영적 성장입니다. 13절 후반부와 14절 후반부를 읽겠습니다.
“청년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쓴 것은 여러분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며 여러분이 그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13~14절).
청년들은 힘이 세고 강합니다. 육체의 강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강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청년의 때에 육체의 강함은 오히려 죄를 범하기 쉽니다. 넘치는 에너지가 과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이 실수가 많고, 잘못 행하는 것은 에너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삼손의 강함입니다. 삼손은 힘이 세고, 근육이 많고, 에너지가 많았기 때문에 타락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강함은 은혜 안에서의 강함입니다. 약함 속에서의 강함입니다. 육체의 연약함 속에서, 환경의 열악함 속에서, 고난 속에서 경험하는 강함입니다. 육체의 강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는 강함입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은혜 속에서 강하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오뚝이 같다는 것입니다. 오뚝이는 넘어져도 바로 일어납니다. 쓰러져도 바로 일어납니다. 은혜가 회복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이 강함은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강함입니다. 여호수아 1장에 “강하고 담대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육체적인 강함이 아닙니다. 이 강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고, 순종하는 강함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거할 때 악한 자를 이깁니다. 우리가 악한 자를 이기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장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주어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해야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말씀이 내면화되어야 합니다. 위기 때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평상시에 말씀의 지배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면화된 말씀이 위기 순간에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할 때 악한 자를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죄 사함을 받는 은총을 날마다 누리십시오.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태초부터 계신 아버지의 역사하심과 섭리, 계획과 뜻을 깨닫는 아버지로 성숙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함으로 악한 자를 능히 이기는 청년으로 성장하십시오. 영적인 어린아이에서 벗어나 죄를 이기고, 악한 자를 이기는 영적 성장을 이루십시오.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신승리(精神勝利) Spiritual Victory. Mental Gymnastics
본인에게 불리하거나 나쁜 상황을 좋은 상황이라고 왜곡하여 정신적 자기 위안을 하는 행위로, 실상은 자신의 망상으로만 이기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자기합리화가 있으며 정신승리는 일종의 은어라고 하겠다.

예를 들면 아큐정전에 등장하는 주인공 아큐는 성격이 거의 찌질이에 가까운 인물인데, 길을 가다가 무뢰배를 만나 그들에게 폭행을 당해도 "저 녀석들은 내 아들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들에게 찍힌 것뿐이다" 라며 정신적 승리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자신 역시도 자기보다 약하거나 힘없는 사람 또는 비구니 등을 때리고 비웃는 전형적인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에게 무자비한 모습을 보인다.

세상에서는 패배자처럼 살아가면서도 나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하며 마치 자기 자신을 승화시키는 생각으로 자기를 위로하는 것도 일종의 정신승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때 고지론이란 말이 등장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높은 자리로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자가 되고, 세상에 높은 자리에 오르고, 유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게 그분들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드릴 것이라고 말입니다. 확실히 그런 것도 같습니다. 기독교 연예인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비와이라는 가수가 요즘 아주 독보적입니다. 시상식에서 요한복음을 암송하고 아주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그 가수가 클럽에서 공영한 영상이 유튜브나 이런데 올라오면 그 밑에 댓글들이 참 재미있습니다. 클럽을 기도원으로 바꾸어 버리는 가수라는 댓글이 참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높은 자리에 기독교인들이 참 많이 올랐습니다. 돌이켜 보면 대한민국 대통령 열두명의 대통령 중에 3명이 교회 장로님들입니다. 또, 13명 중 7명이 개신교인 4명이거나 천주교인 3명입니다. 13명 중 7명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최근에 장로를 위시하여 대통령님 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지금은 감옥에 계시죠. 원래도 전과가 많으신 분이신데 대통령 자리에 계시면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교회 장로라는 걸 전면에 내세웠고 자신이 다니던 교회 사람들을 청와대 요직에 앉히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범죄를 일으키니 교회의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 큰 문제는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사건 사고를 치면 교회 장로님들이 너무 많습니다. 목사님들도 뉴스에 자주 오르내려서 도리어 사고치고 유명해지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냥 대충 기억나는 것만 봐도 우리 교단에서 총무까지하셨던 분은 가스총을 들지 않나 칼부림을 하질 않나. 또, 초대형교회들은 세습을 하면서 유명해집니다. 얼마 전에는 우리 교단인데 모교회는 제자훈련을 하면서 상상할 수도 없는 짓거릴 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 왠지 작아지고 패배감에 젖어듭니다. 그러니 저는 제가 왠지 정신승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런 제 정신승리를 마치 확정이라도 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한 번 다같이 12-14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2절: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3절: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절: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에게 반복적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이 세 그룹 중에 청년들에게 주는 말씀에 가장 강조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청년들에게 주는 권면이 계속 마지막에 나오고 청년들에게 주는 권면에서 앞의 내용을 풍부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당당하게 악한 자와 흉악한 자를 이겼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때 당시 상황이 그랬을까요? 요한일서는 대강 1세기 후반에 써졌을 텐데 그때 로마는 무너져 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1%나 됐을까요? 소수자들이 이겼다고 하는 꼴이 앞서 제가 말한 정신승리가 아닐까요?

그렇지만 조금 인내심을 갖고 요한의 말을 계속 들어봅시다. 그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요한일서 1장 1-4절을 보면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계속해서 요한이 강조하는 사귐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시기에 사귈 수 있는 것이죠. 그 아들과의 사귐을 통해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제 믿음의 문제로 넘어옵니다. 과연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고 합니다. 태초부터 일하신 지금까지 일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태초부터 시작된 삼위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의 악한 자의 지배를 깨뜨리고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말했다면 요한은 말씀 안에서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분과 사귐으로 이어져 내려온다면 우리 역시도 승리자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믿으십니까? 교회사에서 내려오는 큰 가르침이 있습니다. 도나투스 논쟁입니다. 로마의 박해가 거의 끝나갈 무렵 교회를 배교했던 사람을 로마의 주교로 세웁니다. 사람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순교자들이 있었거든요. 당연히 순교의 거룩한 행위가 절대적으로 강조되어 가던 시기였습니다. ‘거룩함은 어디에 있는가’가 이 논쟁의 핵심이었습니다. 인간이 순교라는 위대한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거룩함은 거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외친 게 바로 어거스틴이었습니다. 순교를 통해 흐르던 기존의 신학 흐름을 완전히 뒤바군 것입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기독교인들의 몰지각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교회의 거룩함이 끝이 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교회를 통해서 대규모 감염이 일어나는 지금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거룩함은 목사와 장로, 집사나 성도들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에게나 혹 이단에게 세례를 받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용인하는 이유는 그것을 행한 자들에게 권위를 두는 게 아니라 그 고백. 그러니깐 삼위일체 하나님께 한 그 고백에 권위를 둡니다. 인간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하나도 흠집낼 수 없습니다.

그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교회의 많은 연약함에 이제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합니다. 그들의 행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셨던 것과 일하심에 집중합시다. 우리도 그분의 이름을 알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가에 집중하십니다. 그것을 믿으십니까? 교회가 이제 큰 분기점을 맞아 급격히 내리막길을 가더라도 우리가 집중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가 사귐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 거기에 집중을 합시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이 담대한 선언을 기억합시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을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12절.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 자녀들아(5040) 테크니온(tĕkniŏn)  τεκνί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5040

1. 5043의 단축형 : 작은 아이.  2. 어린 아이. 3. 요 13:33.  4. 요일 2:12. 28. 3:7
발음 [ tĕkniŏn ]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작은 자(요 13:33), 자녀(갈 4:19, 요일 2:1, 4:4).


13절.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아비들아(3962) 파테르(patēr) πατήρ, πατρός, ὁ 스트롱번호 3962

1. 아버지.  2. 조상
발음 [ patēr ]
아버지(마 2:22, 눅 1:59, 요 5:17, 행 16:3, 살전 1:1), 조상(마 3:9, 눅 1:32, 고전 10:1), 열조 (히 3:9, 8:9), 부모(히 11:23).


* 청년들아(3495) 네아니코스( nĕaniskŏs) νεανίσκος

14절.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청년(네아니스코스.  nĕaniskŏs) νεανίσκ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495

1. 청년.  2. 종
발음 [ nĕaniskŏs ]
어원 / 3493와 동일어에서 유래

1. 청년, 젊은이, 마 19:20, 막 14:51, 눅 7:14, 행 2:17.
2.  종, 행 5:10.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청년(마 19:20, 막 14:51, 요일 2:13), 젊은이 (행 2:17).





율법, 율례, 규례, 법도, 계명의 차이

정확한 정의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준을 정한다면 다음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계명(誡命, commandments) : 기초가 되는 율법
율례(律例, statutes) : 율법의 세부 사항
규례(規例, ordinances) : 심판이 포함된 율례



율법(律法, law)

출애굽기 24: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The LORD said to Moses, "Come up to me on the mountain and stay here, and I will give you the tablets of stone, with the law and commands I have written for their instruction."

율례(律例, statutes)

출애굽기 21:1
네가 백성 앞에 세울 율례는 이러하니라.
These are the laws you are to set before them:
KJV. Now these are the judgments which thou shalt set before them.

규례(規例, ordinances)
출애굽기 13:10
연년이 기한에 이르러 이 규례를 지킬찌니라.
You must keep this ordinance at the appointed time year after year.

법도(法道, laws)
민수기 15:6
너희나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나 한 법도, 한 규례니라.
The same laws and regulations will apply both to you and to the alien living among you.'


계명(誡命, commandments)
출애굽기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but showing love to a thousand {generations} of those who love me and keep my commandments.

계명, 율례, 법도, 규례의 차이

구약은 하나님의 율법(law)과 율례(statutes)와 규례(ordinances)에 관해 자주 말한다.

십계명은 기초가 되는 율법이다.
이 계명들은 완전치 않기 때문에 율례들이 보충한다.
이 때문에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계명들 다음에 출애굽기 21장-23장까지는 십계명의 세부사항들과 이 계명들을 보충하는 많은 율례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율례에는 심판이 들어 있지 않다.
일단 심판을 율례에 추가하면 그 율례는 규례가 된다.

예를 들어 십계명중 하나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관련된다(출 20:8-11).
이 계명을 보충하는 율례들은 안식일에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에 관해 몇가지 세부적인 사항을 제공한다.
어떤 율례는 여행에 관해서(행 1:12), 어떤 것은 요리에 관해서 말한다(출 35:3). 이러한 율례는 심판을 추가하지 않으면 규례가 되지 않는다.

나중에 보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죽이라고 한다(출 31:14-15).
이것은 계명이나 율례가 아니고 심판이 들어있는 규례이다.
그러므로 계명은 기초가 되는 율법이고, 율법의 세부 사항은 율례이며, 심판이 들어있는 율례는 규례인것이다.

계명 : 기초가 되는 율법 - 도덕법(道德法) / 하라, 하지말라
율례 : 율법의 세부 사항 - 종교법(宗敎法) / 제사법
규례 : 심판이 포함된 율례 - 사회법(社會法) / 법도. 사람이 서로 지켜야 할 관계법

이스라엘의 법체계는 성경의 법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의 법체계는 도덕법과 종교법과 사회법으로 구분한다.
  
1. 계명(도덕법)

<명령하다>는 의미로 "하라"와 "하지 말라"는 금령으로 구성된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
–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관계 속에서 지켜야할 법인데 사실 법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명령으로 반드시 지켜야할 명령이다.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2. 율례(종교법) 

<자르다>는 의미로 규례(제사법)를 뜻한다.

성막, 제사, 절기 등에 관련된 법규들을 말한다.
율례를 통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배울 수 있다.
  
3. 법도(사회법) 

<다스리스다>, <재판하다>의 의미. 인간 상호간의 지켜야 할 관계법이다.
법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배울 수 있다.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모두 포함해서 율법(토라)라고 하고 법을 더 넓게 말하면 성경전체,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말한다.
  
이런 모든 법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거룩함을 지킬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친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법과 상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준다.

[ 라이프 성경사전 ]

율례 [律例, regulation] :

기본 의미는 ‘선포(선고)하다’, ‘규정하다’, ‘심판하다’, ‘다스리다.’ 율법이 정한 규례 혹은 사례. 법도(法度, 수 24:25). 재판의 판별 기준이 되는 법령, 법규, 성문법(출 21:1). ‘하나님의 법도’를 뜻하는 동시에 ‘사회적 규범’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시 94:20).

법도 [法道, laws] :

법률과 제도. (생활상의) 예법이나 제도. 성경에서는 특히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치시고 교훈하신 선민(選民)의 도덕 원칙’을 뜻한다. 협의적으로는 십계명이나 모세 오경 같은 특별 명령만을 뜻하기도 한다.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판결(판단)하다’는 뜻인데, ‘규례와 법도’(the decrees and laws)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레 26:46; 신 4:1, 5; 5:1; 7:11; 26:6; 33:10). → ‘법규’를 보라.

법규 [法規, laws] :

개역개정에서 추가된 단어.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재판(판단)하다’, ‘다스리다’는 뜻의 ‘솨파트’에서 유래한 말로서, ‘재판’(판결), ‘법령’, ‘법도’, ‘공의’ 등을 뜻한다. 즉 의로우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규범으로서의 법과 그 법이 정한 규례를 말한다(출 21:1, 31). 개역한글판에서는 ‘율례’(律例)로 묘사했다.

계명 [誡命, commandment] :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이 위임하신 사명. 마땅히 행하도록 위탁받은 명령이나 책무. 구약성경에서는 ‘율법과 십계명’을 가리켰으나 신약성경에서는 보다 광범위하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에게 주신 모든 명령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계명의 근본 정신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 22:35-40; 막 12:28-34; 요일 3:22). → ‘율법’을 보라.

율법 [律法, law] 

‘던지다’, ‘(물을) 뿌리다’는 뜻의 ‘야라’에서 유래한 말로, 지시, 교훈, 법령, 계명, 법, 관습이라는 의미를 지닌다(민 15:16; 시 19:8). 또 헬라어 ‘노모스’는 ‘분배...

규례 [規例, decree, rule] :

ordinance(영어). 일정한 규칙.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명령하신 법률이나 규범(신 4:1, 5; 14:5). 가장 많이 사용된 히브리어는 ‘미쉬파트’인데, ‘심판하다’, ‘다스리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하나님이 인생들을 다스리시는 거룩한 법, 계명, 법도,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지키고 따라야 할 절대적인 규칙과 예법을 가리키는 법정 용어다(대상 24:19). 하나님은 이 거룩한 기준에 따라서 형벌과 상급을 내리신다. 한편, 헬라어로는 ‘카논’인데, ‘갈대’를 뜻하는 ‘카네’에서 파생된 말로 척도, 기준, 자를 가리킨다. 이는 당시 곧은 갈대를 자(尺)로 사용한 고대 풍습에서 유래되었다(갈 6:16).

율법, 정의 ,규례, 율례, 명령, 계명, 길, 법도 개념들


공의, 정의 : 미쉬팟 Mishphat -

 םשףט'ם      복수mishphatim םשפט 

심판, 정의의 판단, 재판, 사법정의, 정의의 심판

Judgment, Justice,  사사기는 이 샤팥(재판하다)에서 나온 쇼파팀 (재판관들)의 번역임

홐 Hok,복수 Hukimחק'ם חק        

   Statutes, Ordinances 규례, 율례, 응식

하나님이 처방해준 처방전, 하나님이 주신 그 처방대로 준행한 사람에게 당연히 돌아가는 응식(레 8:29, 10:13, 15 등에서 종전 개역한글에서는 응식으로 번역했는데  개역개정에서는 소득, 몫 등으로 번역)

레위기 6장 11, 15절 또한 응식으로 번역됨이 더 정확하다고 분별됩니다. 즉 레위자손들은 성막 봉사로 당연히 그 받을 응식을 갖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규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응식을 당연히 공급하신다는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צדק 의 체뎈 Righteousness (Justice – 창 18:19) 

 멜기세덱은 원래 멜렉키체덱을 그리스어 표기법으로 쓴 것임

이 의는 죄에 대한 개념으로 죄를 사함받았을 때, 속죄되었을 때 의가 나타나므로 대개 속죄, 대속과 관련되고 노아의 경우 당대의 의인이었다는 말에서도 사용됨(창 6:9)

םצוות   םצוה  계명, 명령, 미츠바 ( 한글 성경 미스바) 복수 : 미츠보트

명령하다는 뜻의 차바에서 나온 명사형이므로 명령 혹은 계명으로 번역되는 것이 순리로 보임.

דרק 길

출애급기 18장20절

그들에게 율례(후킴)와 법도(토라)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데렉)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 ( 개역개정)

신명기 26장 17절

네가 오늘 여호와가 네 하나님이라고 선언(보증)하였나니, 그분의 길들로 행하며 그분의 규례(율례= 훜킴)들과 그분의 계명들(미츠봇트)과 그분의 의의 판단들(미쉬파팀)을 지키며 그분의 음성(콜)을 청종하는 것이라.

하나님의 명령과 의의 판단들을 좇는 삶은 레일위를 달리는 것과 같은데 기차가 그 레일에서 벗어난 경우에는 그 기차를 기중기로 들어올려 다시 레일 위에 올려 놓아야 달릴 수 있습니다. 이일은 오직 성령님께서만 행하실 수 있습니다.

율법 (토라) = תורה    : 율법, 법도

1)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합쳐서 말할 때 토라, 율법이라 말함

2)  신약적으로는 로마서 8장 2절의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지, 어떤 법칙이나 무슨 법을 말할 때도 이 토라를 의미한 것임

3)  토라는 크게 네가지로 나뉘어진다고 분별합니다.

가)성전제사법 – 동물희생과 코르반을 드리는 행사에 관한 법 :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완벽하게 완성되고 대체되었으며 각 신자들은 십자가 희생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코르반을 드리는 행사를 매일 행하고 있습니다.

나)의식법 – 옷을 어떻게 입으라, 음식은 무엇을 먹지 말라, 몸을 깨끗이 목욕하라 뿐만아니라 성전시대에 관련된 법들, 할례, 안식일을 여기에 포함하여 지켜야 할지는 해석상의 차이로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안식후 첫날 예배를 보여주는 한편(행 20:7, 고전 16:2),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존귀하신 태양의 날에 모이도록 강요된 (서기 321년 3월7일부터) 역사적 배경도 있으며 이 둘이 겹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의식법은 성전제사가 대체 폐해졌으므로, 그에 수반되는 법으로서 폐해졌다고 보는 견해와 여전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롬 14:1-5은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 형사법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 이러한 형사법들은 그리스도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에 그대로 수용되었고 강화되었습니다

라)도덕법

탐내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 이 모든 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 그리스도의 법안에 수용, 포용되었고 강화되었습니다.

만일 어떤 성경이 율법이 폐해졌다고 가르친다면 그 번역은 잘못된 것입니다. 율법은 폐해진 것이 아니라 완성(플레로), 성취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15, 갈 5:4, 2:16 절, 롬 13:9 등은 많이 오해되고 있는 구절들 중의 하나입니다. 율법 중에서 동물희생들은 십자가로 완벽히 이루어졌습니다.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은 율법 이상의 명령들을 준행합니다.성령을 좇아 행하면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롬 13:9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지키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하는 계명을 안지켜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 등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여전히 율법은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어휘들의 공부를 마치기 전에 꼭 살펴볼 말씀이 신약에 있습니다.

마태 12장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연기나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의의 심판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하리니     ( 정의가 승리에 이르도록 인도하기까지)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는 미쉬파팀임은 분명합니다. 즉 정의의 심판이 승리로 종결되어 하나님의 사법정의가 실현되고, 사탄 마귀와 그 추종자들이 심판을 받으며, 의의 사역자들과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보상받는 정의가 실현되는 그날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수고하시고 자기 목숨을 바쳐 인생들의 죄를 담당하신다는 것과 상한 갈대를꺾지 아니하시고 인생들을 돌보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그 단어들이 갖는 어의를 중심으로만 설명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시간이 많이 허락될 때 좀 더 정리하여 각 개념과 내용들을 분석하여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아래 몇구절 킹제임스 성경 구절들을 뽑아서 예로 들어봅니다.

창세기 18장 19절

19 왜냐하면 나는 그가 그의 자손과 그 이후의 그의 집을 명하여 여호와의 길을 지키도록 하여 정의(=의, 츠다카)와 의의 판단(정의, 사법정의, 미쉬팟트)을 행하여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바를 그에게 가져다 주도록 할 줄을 알기 때문이라.

Lv 6:11, 15 Gn 47:22 레위기 6:11, 15, 창 47:22

응식의 예들, 제사장들이 마땅히 받을 응식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창 47:22에서는 이집트의 태양신 제사장들도 마땅히 공급되는 응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명기 26:17
Thou hast avouched the LORD this day to be thy God, and to walk in his ways, and to keep his statutes(규례-후킴), and his commandments(계명 = 미츠보트), and his judgments( 사법정의 정의의 판단=미쉬파팀), and to hearken unto his voice(음성=콜)

Leviticus 25:18
Wherefore ye shall do my statutes(율례), and keep my judgments(의의 판단들), and do them; and ye shall dwell in the land in safety.

Deuteronomy 5:31
But as for thee, stand thou here by me, and I will speak unto thee all the commandments, and the statutes(규례), and the judgments(정의 심판), which thou shalt teach them, that they may do them in the land which I give them to possess it

Deuteronomy 26:16
This day the LORD thy God hath commanded thee to do these statutes(규례) and judgments(의의 판단): thou shalt therefore keep and do them with all thine heart, and with all thy soul.
Deuteronomy 26:15-17 (in Context) Deuteronomy 26 (Whole Chapter)

Deuteronomy 26:17
Thou hast avouched the LORD this day to be thy God, and to walk in his ways, and to keep his statutes, and his commandments, and his judgments, and to hearken unto his voice

Deuteronomy 30:16
In that I command thee this day to love the LORD thy God, to walk in his ways, and to keep his commandments and his statutes and his judgments, that thou mayest live and multiply: and the LORD thy God shall bless thee in the land whither thou goest to possess it.

Deuteronomy 32:4
He is the Rock, his work is perfect: for all his ways are judgment: a God of truth and without iniquity, just and right is he.


새 계명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일서 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요한일서 2: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요한이서 1: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옛 계명

요한일서 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옛 계명의 근거는 죄를 지었을 경우 죄를 지은 사람을 대신하여 희생 제물이 속죄의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그러나 새 계명의 근거는 죄를 지었을 경우 죄를 지은 사람을 대신하여 희생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물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계명을 실천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간접적인 속죄 방법에서 직접적인 속죄 방법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새 계명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방법을 한 단어로 설명한다면 "단번에" 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서 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ἐφάπαξ 스트롱번호 2178

1. 한번에. 2. 한번에 다
발음 [ ĕphapax ]
어원  / 1909와 530에서 유래

뜻풀이부

1. 한번에, 단번에, 고전 15:6(일시에).
2. 한번에 다, 롬 6:10, 히 7:27, 9:12, 10:10.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단번에(롬 6:10, 히 7:27, 10:10), 일시에(고전 15:6).


히브리서 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6.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7. [히브리서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ἅπαξ 스트롱번호530
1.

한 번

2.

히9:7.

3.

ἔτι ἄ.: 한 번 더

발음 [ hapax ]
어원
537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뜻풀이부

  • 1.
    한 번[실제적인 수개념으로 쓰이는 경우], 고후11:25, 히9:26,27,28.
    • a.
      [소유격이 수반되는 경우] 히9:7.
    • b.
      ἔτι ἄ.: 한 번 더, 마지막으로, 히12:26,27.
    • c.
      ἅ. καὶ δίς: 반복하여, 되풀이하여.
  • 2.
    한꺼번에, 단번에, 히10:2, 유1:3, 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한 번(고후11:25, 살전2:18, 히6:4), 일(히9:7), 단번(히9:26, 벧전3:18, 유1:3).




8. [히브리서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9. [히브리서 10: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10.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 [유다서 1:3]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성경에서 유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단어인 "법도" "율례" "율법" "계명"들 사이에 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어떤 차이 때문에 문맥에 따라 각각 다르게 번역이 되어 쓰이는 것일까?

창세기 26:5에서 이러한 용어들이 한꺼번에 등장한다.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because Abraham obeyed me and kept my requirements, my commands, my decrees and my laws.

원어로 보더라도 법과 준수사항, 규칙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들은 다양하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대략 아래 네 가지 정도라고 밝혔다.

법과 준수사항, 규칙 등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미츠바, 미쉬파트, 후카(호크), 토라 등 다양하다.
특히 "율례와 법도"라는 표현이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런데 이것들은 어떤 차이를 지닌 법 용어들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들의 의미론적 범주를 명확히 구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 동안 많은 학자들이 정확한 개념적 구분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이 단어들이 다르면서도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 단어들이 그냥 동의어로 교차적으로 사용되는 사례들이 숱하게 많다.

영어 번역어로 옮길 때도 전혀 합의된 규칙 자체가 없다.
실제로 "세 단어가 각각 문맥에 따라 commandment, rule, statute, law, regulation, decree, ordinance, code, act, 등등 너무나 다양하게 번역된다.

법을 가리키는 이 영 단어들이 영어권에서 특정 범주의 법을 가리키기 위해 특화되어 사용되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 경계선들은 정확하지 않다"며 "영어 원주민들도 헷갈려한다."

그러면서 "히브리어 단어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렇다.
베스터만과는 약간 다른 견해다.
하지만 역시 정확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1. 호크(후크) / 율례 : 사회적, 제도적 규범(전통과 관행이 제도화된 것)
2. 미쉬파트 / 법도 : 법률적 규범(법정에서의 판결과 판결 기준)
3. 미츠바 / 계명 : 지도자나 권위자에 의한 법령, 명령
4. 토라 / 율법 : 위의 모든 법령과 가르침, 교훈을 총괄하는 단어

미츠바(계명)는 '명령하다, 지시하다'를 뜻하는 동사 차바에서 온 단어로 "하나님이 명령하신 십계명은 대부분의 경우 미츠바(복수 미츠보트)로 지칭된다.
그러나 다른 여러 율법들도 역시 매우 빈번하게 미츠바로 지칭되며, 그 외에 율법들은 후카(호크), 미슈파트 등으로도 지칭된다.

보통 호크, 미쉬파트, 미츠바가 세 단어가 나란히 등장하거나 혹은 두 단어가 병행되어 등장하는데(율례와 법도, 계명), 대부분 별다른 이유는 없이 문학적 의도로 중복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십계명은 기초가 되는 율법이다.
이 계명들은 율례들이 보충한다.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계명들 다음에 출애굽기 21장-23장까지는 십계명의 세부사항들과 이 계명들을 보충하는 많은 율례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율례에는 심판이 들어 있지 않다.
일단 심판을 율례에 추가하면 그 율례는 규례가 된다.
예를 들어 십계명중 하나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관련된다(출 20:8-11).
이 계명을 보충하는 율레들은 안식일에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에 관해 몇가지 세부적인 사항을 제공한다.
어떤 율례는 여행에 관해서(행 1:12), 어떤 것은 요리에 관해서 말한다(출 35:3).
이러한 율례는 심판을 추가하지 않으면 규례가 되지 않는다.

나중에 보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죽이라고 한다(출 31:14-15).
이것은 계명이나 율례가 아니고 심판이 들어있는 규례이다.

그러므로 계명은 기초가 되는 율법이고, 율법의 세부 사항은 율례이며, 심판이 들어있는 율례는 규례인것이다.
우리나라 법 체계에서 법, 시행령, 시행규칙 등과 같은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계명과 율례와 법도에 대하여]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법체계와 성경의 법체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법체계는 성경의 법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의 법체계는 도덕법과 종교법과 사회법으로 구분한다.

1. 계명(도덕법)  - <명령하다>는 의미로 "하라"와 "하지 말라"는 금령으로 구성된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 –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관계 속에서 지켜야할 법인데 사실 법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명령으로 반드시 지켜야할 명령이다.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2. 율례(종교법) – <자르다>는 의미로 규례(제사법)를 뜻한다. 성막, 제사, 절기 등에 관련된 법규들을 말한다. 율례를 통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배울 수 있다.

3. 법도(사회법) – 다스리스다, 재판하다의 의미.  인간 상호간의 지켜야 할 관계법이다. 법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배울 수 있다.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모두 포함해서 율법(토라)라고 하고 법을 더 넓게 말하면 성경전체,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말한다.

이런 모든 법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거룩함을 지킬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친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법과 상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준다.

[ 라이프 성경사전 ]

율례 [律例, regulation] : 기본 의미는 ‘선포(선고)하다’, ‘규정하다’, ‘심판하다’, ‘다스리다.’ 율법이 정한 규례 혹은 사례. 법도(法度, 수 24:25). 재판의 판별 기준이 되는 법령, 법규, 성문법(출 21:1). ‘하나님의 법도’를 뜻하는 동시에 ‘사회적 규범’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시 94:20).

법도 [法道, laws] : 법률과 제도. (생활상의) 예법이나 제도. 성경에서는 특히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치시고 교훈하신 선민(選民)의 도덕 원칙’을 뜻한다. 협의적으로는 십계명이나 모세 오경 같은 특별 명령만을 뜻하기도 한다.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판결(판단)하다’는 뜻인데, ‘규례와 법도’(the decrees and laws)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레 26:46; 신 4:1, 5; 5:1; 7:11; 26:6; 33:10). → ‘법규’를 보라.

법규 [法規, laws] : 개역개정에서 추가된 단어.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재판(판단)하다’, ‘다스리다’는 뜻의 ‘솨파트’에서 유래한 말로서, ‘재판’(판결), ‘법령’, ‘법도’, ‘공의’ 등을 뜻한다. 즉 의로우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규범으로서의 법과 그 법이 정한 규례를 말한다(출 21:1, 31). 개역한글판에서는 ‘율례’(律例)로 묘사했다.

계명 [誡命, commandment] :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이 위임하신 사명. 마땅히 행하도록 위탁받은 명령이나 책무. 구약성경에서는 ‘율법과 십계명’을 가리켰으나 신약성경에서는 보다 광범위하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에게 주신 모든 명령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계명의 근본 정신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 22:35-40; 막 12:28-34; 요일 3:22). → ‘율법’을 보라.

율법 [律法, law]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95685&cid=50762&categoryId=51387

규례 [規例, decree, rule] : ordinance(영어). 일정한 규칙.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명령하신 법률이나 규범(신 4:1, 5; 14:5). 가장 많이 사용된 히브리어는 ‘미쉬파트’인데, ‘심판하다’, ‘다스리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하나님이 인생들을 다스리시는 거룩한 법, 계명, 법도,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지키고 따라야 할 절대적인 규칙과 예법을 가리키는 법정 용어다(대상 24:19). 하나님은 이 거룩한 기준에 따라서 형벌과 상급을 내리신다. 한편, 헬라어로는 ‘카논’인데, ‘갈대’를 뜻하는 ‘카네’에서 파생된 말로 척도, 기준, 자를 가리킨다. 이는 당시 곧은 갈대를 자(尺)로 사용한 고대 풍습에서 유래되었다(갈 6:16).​





05-04-2024(토) 요한일서 2:7-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새 계명과 옛 계명(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Dear friends, I am not writing you a new command but an old one, which you have had since the beginning. This old command is the message you have heard.

새 계명(엔톨렌 카이넨)

2537


1125


옛 계명(헤 엔톨레 헤 팔라리아)

3588

1785

3588

3820



󰃨 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요한이 수신자들을 부를 때 즐겨 사용하는 호칭으로 새로은 단락이 시작될 때 자주 나타난다.
요한은 이 호칭을 사용하여 두 가지를 암시하고 있다.
(1) 하나님 안에 내주하여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삶에는 사랑이 드러나야 함을 암시한다.
(2)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고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증거로 사랑을 제시함으로써 도덕폐기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공격하고자 한다.

󰃨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

요한은 상호 보완적인 본문의 두 개의 절을 이용해서 이제부터 언급할 '사랑의 계명'이 수신자들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라 잘 알려진 계명임을 밝히고 있다. 즉 '새 계명...이 아니라'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은 동일한 내용을 가리킨다. 여기서 '처음부터 가진'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롬 2:14;13:8-10) 동시에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사하는 자들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엡 5:2;약 2:8;벧전 2:17).

󰃨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

본문에서 '계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헤 안토레'(*)는 단수이다. '엔통레'가 단수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옛 계명이 의미하는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완성한 계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십계명을 하나의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고 계신다(마 22:37-39). 한편 '들은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사테'(*)는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는 사랑의 계명이 이미 선포되었으며 수신자들이 사랑의 계명에 대해 과거에 들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사랑의 계명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요 13:34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임을 암시한다. 요한의 수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부터 예수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이며 따라서 사랑의 계명은 수신자들에게 결코 생소하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부터 알고 있었던 익숙한 계명이었다.


새 계명과 옛 계명(new command and old one)
옛 계명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주셨던 계명을 말합니다.
새 계명이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계명입니다.

옛 계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레위기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새 계명은 옛 계명과 다른 것이 아니라 이미 너희가 들었던 것으로 강조하려고 "다시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쓴다"고 하셨습니다.
이전에 언급한 내용을 반복해서 다른 관점에서 그의미를 설명하거나 강조하려고 "다시"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이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려면 하나님의 속성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영이시라
둘째는 하나님은 빛이시라
셋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따라서 계명을 지키려면 먼저 영이 되신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영은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빛 가운데 머물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은 가장 가까운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출박합니다.

오늘도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ㅋ크게



②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③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1:5)(요 1:5; 엡 5:8): 옛 계명은 알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사랑의 빛이 비침.





옛 계명은 들은 바 말씀
새 계명은 참 빛이 비추인 것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숙제로 주어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계명에 대해 이러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서 계명의 의미와 존재 이유에 대해 무지한 채로 계명을 실천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며 믿음으로 사는 것인 줄 착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명, 즉 말씀을 실천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계명이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실천하여 지켜낼 수 있는 약한 것이 아님을 말씀드리고자 함입니다.
이는 계명의 의미를 더욱 크게 부각시키고자 함이지 계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님을 아셨으면 합니다.

흔히 지금을 은혜 시대라고 말합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는 시대라는 것이지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구약은 율법 시대로 말하기도 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율법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변함없이 동일합니다. 다만 신약에는 은혜의 본질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은혜를 확증하셨고 구약에는 다만 은혜의 예표가 주어진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재의 신앙을 보면 교리는 은혜이면서도 실제 삶은 계명에 매어있는 것을 많이 봅니다. 즉 은혜로 시작한 신앙이 결국 실천, 행함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자기 신앙을 자기 행함을 기준으로 확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행함을 부지런히 한 사람은 자기 신앙에 안심을 하지만 행함에 게을렀던 사람은 결국 낙심하기도 하고 자기 신앙에 대해 큰 의심만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는 것은 아주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라면 예수님의 행하심과 같은 행함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보고 그대로 흉내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행하심은 우리가 흉내 낸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다고 해서 새벽 기도가 만들어 졌고, 40일 금식 기도하셨다고 해서 그것을 본받기 위해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진심으로 예수님을 본받는 것은 기도하신 예수님의 심정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기도라는 겉 행위를 그대로 따라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본 받는 것이 아님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는 무슨 뜻입니까?

7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사도 요한이 쓰고 있는 계명은 새로운 내용의 계명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이미 예전에 들었던 계명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용이 다를 바 없이 동일하다면 굳이 새 계명, 옛 계명으로 구분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알아야 계명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7절과는 다른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는 말씀을 보면 7절에서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새 계명을 쓴다고 말하는 것이 이상한 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들었던 옛 계명이지만 다시 새 계명을 쓴다는 내용을 종합해보면 계명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 본질상 뭔가 새롭기 때문에 새 계명을 쓴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시간에 중요한 것은 새 계명과 옛 계명의 차이와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것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3:34절에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옛 계명과 다른 새 계명입니까?

레위기 19;18절을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내용의 계명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계명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미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말씀하시면서 새 계명이라고 언급하신 것은 무슨 이유겠습니까?

우선 구약에서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과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그 의도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은 소위 인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님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기껏해야 내 마음이 가는 사람에 대해 친절을 베풀고 조금 도와주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거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과연 인간의 힘으로 이러한 사랑이 가능할까요?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의도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계명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옛 계명과 새 계명의 다른 점은 계명의 내용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에 있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계명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 내가 살아있는데 그런 나의 모습으로 어떻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인 됨과 악함과 불순종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서는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보여지는 열매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새 계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6절의 말씀처럼 주님이 행하신 것처럼 신자가 행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자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4-5절을 보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후螁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처럼 신자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스스로 절감하셔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계명을 지키라는 말을 하는 것도 신자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지킬 수 있는 자를 향해서 지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신자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 때문임니다.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새로운 피조물이란 사람이 달라진 것을 뜻하지 않는 것입니다. 담배를 피던 사람이 담배를 끊고, 술을 끊고 하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이 아니란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그리스도안에 거함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주어진 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대부분은 행함을 믿음의 증거물로 말합니다. 행함이 있으면 믿음이 있는 것,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라는 기준을 제시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어떻게든 행함으로 나아가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말하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가 말하는 사랑의 수준은 기껏해야 서로 싸우지 않고 친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어려운 자가 있으면 조금 나누어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물질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사랑으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분이 사랑을 행한 대로 사랑을 행하며 살 수 있습니까? 이웃을 위해서 여러분 자신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분명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을 할 수 없으니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행할 수 없는 것이 사랑임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상식과 다른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서 사랑의 의미를 발견할 때 여러분은 이웃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 여러분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무능함을 가슴 깊이 절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낮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안다면 여러분은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에 행함이 있어야 한다거나, 믿음이 있다면 행함이 있어야 한다거나, 은혜를 받았다면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따위의 가르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십시오. 십자가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옛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된 새 사람은 다만 그리스도의 은혜로 삽니다.

새 계명'이라는 용어는 성경에 4번 나오는데 모두 요한 사도가 사용하고 있다.(요한복음 1회, 요한일서 2회, 요한이서 1회)
새 계명이라고 하면 그냥 생각해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 새 계명이 이전부터 있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요일 2:7-8)

사실 새 계명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서 하신 말씀에 처음 나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서 새로운 계명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요한 사도는 새 계명은 예전부터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말씀과 다른 말씀을 하는 것인가?

언뜻 위의 두 말씀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을 주셨다고 하고, 그 말씀을 들었던 제자 요한 사도는 새 계명은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모순되어 보이지만 사실 이는 같은 말씀이다.

예수님과 사도 요한이 말씀하고 있는 이 새 계명이 새로운 계명이 되는 것은 이전부터 전해온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 안에서 새롭게 보이고 그 말씀의 의미가 전혀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달력의 시간, 곧 객관적인 크로노스적인 시간의 개념 안에서 예수님이 오신 시점을 기준으로 이전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옛 계명이고,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 이후를 새 계명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간편하게 생각할 것은 아니다.

새로운 계명, 곧 새 계명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실 그 때부터 있는 하나님의 의가 한 사람 안에서 전혀 새로운 말씀과 계명이 되었을 때 태초부터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새롭게 열리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새로운 계명이 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 5:17)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옛 계명이고 그 이후에 주신 말씀은 새 계명이라고 하거나, 구약은 옛 계명이고 신약은 새 계명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 일서에서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가진 예 계명이라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하나님의 목적과 의가 사람과 같은 육신을 가진 몸으로 오셔서 예수님 오시기 전에 주신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표현하고 계시하신 것을 완전하게 하신 분이시기에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자기 안에 열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이 새로운 계명이 된다는 것을 요한 사도가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옛 계명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②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새 계명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다시”: 이전에 언급한 내용을 반복해 다른 관점에서 그 의미를 설명하거나 강조할 때 사용하는 말

이 옛 계명은 동시에 새 계명이기도 합니다.(깊이와 넓이가 한층 더 깊고 넓어져 승화된 의미)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②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③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1:5)(요 1:5; 엡 5:8): 옛 계명은 알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사랑의 빛이 비침.










대언자(代言者)란 대신 말하여 주는 사람이란 한문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언자가 되셨기 때문에 기도할 때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예수님께서 대언자가 되셨기 때문에 심판의 날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인을 위하여 변호해 주실 것입니다.

시편 9:4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시편 43:1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예수님께서 대언자가 되셨기 때문에 항상 우리 곁에서 함께 하십니다.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영이신 하나님은 육체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게 하신다.
요한복음 15:26



요한복음 14: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출애굽 때 하나님은 모세의 대언자로 아론을 세워 애굽 왕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출애굽기 7:1-2

초림 때 구약의 예언대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언자 곧 보혜사이셨다
요한일서 2:1

예수님은 재림 때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언자 곧 다른 보혜사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다
요한복음 14:16

요한복음 14:26

요한복음 15:26

요한계시록 22:16






출애굽기 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찌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 여기서 신(*, 엘로힘)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는 바로에 대한 모세의 우월성을 한마디로 압축한 말이다. 비록 땅에서의 바로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지만, 하늘에 속한 권세를 소유한 모세는 오히려 그에게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 바로를 가볍게 압도하며 호령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이러한 일 배후에는 모세를 강하게 하시고, 모세를 그 어떤 권위보다 탁월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내재해 있음은 물론이다(3:14). 한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神)이라 표현하기도 하였다(요 10:35).

󰃨 대언자 (*, 나비) - '영감에 의해 말하다'란 뜻의 '나바'에서 온 말로 '예언자'를 가리킨다(KJV, RSV, prophet). 여기서는 모세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선포하고 그 뜻을 풀어 설명해 주는 '대변인'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공동번역, 대변자; Living Bible, spokesman). 출애굽은 하나님의 주권적 단독 사역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인간의 협력이 결코 무시되지는 않았다.

נָבִיא 스트롱번호 5030

1. 선지자.  2. 선지자의 직분을 하도록 뽑힌 자들.
3. בְּנֵי הנְּבִאִים

발음 [ nâbîyʼ ]

어원 / 아람어
구약 성경 / 315회 사용
선지자(창 20:7, 신 18:22, 왕상 18:4), 대언자(출 7:1), 예언자(렘 28:9), 예언(단 9:24), 예언하는 자(겔 13:2,3)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대언자’란 “대신 말하여 주는 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으며, 무슨 말을 할 수도 없으나 인간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간구하는 것을 말하여 주심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언자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마지막으로 대언자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란 말을 사용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요 15:16).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대언자'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자'(summoned, called to one's side, especially called to one's aid)를 의미하며 '위로자 또는 옹호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성령(보혜사)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요 14:16, 26; 15:26; 16:7)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요한복음 14:16)

*영어성경에서는, 대변자, 중재자, 변호사를 뜻하는 'advocate'로 번역한 역사가 많다(간혹 Counselor나 friend로 번역하기도 했다).

we have an advocate with the Father—Jesus, the Messiah, one who is righteous.

• 예수님과 성령의 중보사역의 차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중보하심을 시사한다. 이와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과 본절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행 16:7;롬 8:9;빌 1:19), 요 14:16에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되어 있어 예수께서 '파라클레토스'이심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중보하시는 분이시며 '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 존전에서 그리스도인의 죄를 중보하신다.

• 예수님의 대언자가 되실 수 있는 자격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예수님께서 의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재자가 되실 수 있다.

헬라어 '예순 크리스톤 디카이온'( Ἰησοῦς Χριστός δίκαιος)은 문자적으로 '의로운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디카이온'(δίκαιος)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존전에서 중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셔서 흠이 없고 깨끗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다. 예수의 이러한 의로움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게 되며 그것을 근거로 하나가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롭지 못한 모습을 깨끗하게 하신다(롬 3:26).

"오늘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결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셔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의롭다고 인정하기 위해서입니다."(로마서 3:26)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부정하던 예수의 인간되심을 강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이심을 나타내어 죄인들을 중보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드러낸다.

• 보혜사 성령님

성령은 우리를 위하여 도고하여 주시는 대언자이시다(롬 8:26). 그 뿐 아니라, "보혜사"란 말을 위로자란의미도 가진다. 그가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음과 마찬가지의 힘과 평안과 기쁨과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실 그의 역사를 가리킨다. 여기 약속된 보혜사의 오심은, 오순절 임하실 성력을 가리킨다. 그가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하셨으니,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단 한 번 있을 것이지만, 그 역사의 영구할 것이 알려진다(마 28:20). 예수님은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라 하셨다(요 14:17).


소문자와 복수 prophet(s) 단어, 여성명사 합쳐서 450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문자 Prophet 단어는 단 4구절, 대문자 Seer 단어는 단 1구절, 소문자와 복수 seer(s) 단어는 26 구절이 있습니다.
prophet 이라는 단어가 쓰인, 450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대언자(代言者) : 대신 말하는 사람
선지자(先知者) : 미리 아는 사람
선견자(先見者) : 미리 보는 사람
예언자(豫言者) : 미리 말하는 사람


모세

예수님

1

유대인

유대인

2

모세를 세우기 전까지 400년 정도의 노예 생활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400년 정도의 침묵 기간

3

시내산에서 40일 금식할 때,

사탄의 시험(금송아지 사건)이 있었음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고,

사탄의 시험이 있으셨음

4

아기때 또래 아이들의 떼죽음이 있었음

아기때 또래 아이들의 떼죽음이 있었음

5

이적을 일으킴

이적을 일으키심

6

유월절에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뿌림

유월절에 직접 어린양이 되셔서 피흘려 죽으심

7

하나님과 직접 대화한 후 얼굴이 환하게 변함

부활 하시어 완전한 몸으로 변하심, 빛이 나심

8

이집트 왕가의 삶을 내려 놓음

하늘의 왕좌를 내려 놓으심

9

맛나와 메추라기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임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심

10

율법을 받아서 알려줌

성령님을 보내 주심

11

율법의 시작

율법의 마침

12

가나안땅 정탐을 위해 12명을 보냄

12명의 제자를 세상에 보내심









출애굽기 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찌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05-03-2024(금) 요한일서 2: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대언자(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My dear children, I write this to you so that you will not sin. But if anybody does sin, we have one who speaks to the Father in our defense--Jesus Christ, the Righteous One.

대언자(代言者)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래토스" 라고 합니다.
'파라클래토스'를 "보혜사(요 14:16, 26, 16:7)" 또는 "대언자(요일 2:1)"라고 합니다.

대언자는 마치 법정에서 판결을 받기 전에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하여 변호하는 변호사의 역할과 비슷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을 때 대언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죄인을 위하여 변호해주실 것입니다.

'죄를 범하면'이란 헬라어 '하마르테'는 문법적으로 부정과거 시상입니다.
부정과거시상이란 범죄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된 행위들'을 말합니다.
한편 '대언자'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위로자 또는 옹호자'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요 14:16, 26. 15:26. 16:7).
그러나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중보하신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과 본절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행 16:7. 롬 8:9. 빌 1:19)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는 '또 다른 보혜사' 라고 하여 예수께서 '파라클레토스'가 되심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중보하시는 분이시며 '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죄를 위하여 중보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는 하늘 보좌에서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오늘도 대언자가 되신 보혜사의 도움을 받아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계명을 지키는 일에 성공하기를 다짐합시다.
그리고 하루의 일을 마치고 조용히 대언자의 음성을 들으며 새 날을 꿈꾸는 소망의 삶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파라클래토스(paraklētŏs)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일2:1. 3. 요14:16,26
발음 [ paraklētŏs ]
어원  /  3870에서 유래

* 3870. παρακαλέω 스트롱번호3870
1. ~곁에서 부르다.  2. 행 28:20.  3. 청하다
발음 [ parakalĕō ]

위로받다(마 2:18, 5:4, 고후 13:11), 간구하다(마 8:5, 눅 8:31, 몬 1:10), 빌다(마 18:32), 구하다(마 26:53, 막 5:10, 눅 7:4), 권하다(눅 3:18, 행 11:23, 빌 4:2), 청하다(행 8:31, 13:42, 28:14), 간청하다(행 9:38), 권면하다(행 15:32, 고전 4:13, 살전 2:11), 위로하다(행 16:40, 고후 7:6, 엡 6:22), 여쭈다(행 24:4), 원하다(히 13:19), 위로하다(롬 12:8), 위안받다(골 2:2).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보혜사(保惠師, parakletos. παράκλητος)
라틴어 파라클래투스(paracletus)
영어 파라클래테(paraclete)
대언자, 변호사, 중재자, 협조자, 대변자라는 뜻이며, 그리스어 파라클레토스의 한자 의역(어)로 번역되었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예수가 또 다른 보혜사를 언급하며 처음 등장했다.

성경 번역판마다 사용하고 있는 용어에 다소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한글성경의 개역한글판표준새번역판에서는 보혜사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번역판에서는 협조자로, 가톨릭성경판에서는 보호자로 번역하고 있다. 영문성경의 킹제임스판YLT에서는 Comforter ("위로자")로, NIVRSV에서는 Counselor ("상담자" 또는 "고문")로, NRSV에서는 Advocate ("변호사")로, NASB에서는 Helper ("돕는 자")로 번역하고 있다.

보통명사이기에 성경에서 약속하신 보혜사(대언자, 변호사, 중재자, 협조자, 대변자)의 사명을 하는 존재를 이와 같이 부를 수 있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은 초림 당시, 예수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하는 말로 16절에 "다른 보혜사"라는 낱말이 나오며 17절에서 이를 "진리의 영"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 두 가지는 "다른 보혜사"를 주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초림 당시의 보혜사는 육신이 있는(사람) 예수 자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는 점과 예수님의 기도로 오게되는 다른 보혜사는 "영"이라는 사실이다.

초림 당시 예수가 보혜사라는 점은 〈요한1서〉 2장 1절에서 사도요한이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남긴 말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예수를 대언자,곧 보혜사라고도 하였다. (개역한글판 난하주 참고)

요한복음 14장18절(하)에서도 예수는 자신이 다시 돌아온다고(I will come to you)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자신이 성령으로 올 것이라는 것을 뜻하고 있고, 요한복음 14장26절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But the Comforter, which is the Holy Ghost)이란 표현을 보아도 보혜사는 곧 "성령"(the Comforter, the Holy Ghost)이란 걸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요한복음 16장7절과 8절에서 "내(그리스도)가 그(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는데"라는 표현이 있는데 곧 그리스도가 보혜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것, 즉 보혜사로 다시 오는 성령은 요한복음 20장22절에서 그리스도가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으로 최종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주로 이단의 교주들이 본인을 보혜사라고 칭하곤 했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 (아래의 판본들은 시대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개역한글 (1961년)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공동번역 (1977년, 신약은 1971년)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표준새번역 (1993년)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분을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안다. 그것은 그분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개역개정 (1998년)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가톨릭성경 (2005년)
1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 화목제물(힐라스모스. hilasmŏs) ἱλασμός, οῦ, ὁ 스트롱번호 2434

1. 속죄. 2. 속죄를 위한 제물
발음 [ hilasmŏs ]

화목제물(요일 2:2, 4:10).


죄(하마르티아. hamartia)  ἁμαρτία, ίας, ἡ 스트롱번호 266

1. 죄.  2. 고후 11:7.  3. 요 9:41
발음 [ hamartia ]
어원 / 264에서 유래
죄(요 8:21, 롬 5:20), 불법(살후 2:3), 죄악(히 11:25).


󰃨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하마르티온'(*)은 복수형이다.
이는 범죄의 행위들을 가리킨다.
한편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의로우신'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으로서 '화목 제물'임을 제시한다.

'화목 제물'로 번역된 헬라어 '힐라스모스'(*)는 제의적인 용어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속죄'(expiation)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Dodd).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속죄를 위한 제사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속죄의 근원이 된다.

2. '달램'(propitiation)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ill).
이 해석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속죄를 위한 희생 제사의 대상이 되셔서 희생 제사를 받으신다.

이 두가지 해석은 서로 배타적이라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Barker, Smalley, Stott, Law).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희생 제사를 제정하심으로 속죄의 길을 여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 제사를 제정하심으로 속죄의 길을 여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 제사를 받으셨다(레 16:34).

또한 신약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고 믿음으로 예수 안에 거하는 자들을 의럽다고 선언하신다(롬 3:21-26).

즉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셔서 속죄의 수단을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을 통하여 원수되었던 인간과 자신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다.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속죄 사역은 그리스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 세계를 위한 것이다.
여기서 '온'으로 번역된 헬라어 '홀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가 인류 전체에서 미친 것임을 시사한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구주가 되신다(요 3:16;4:42).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

'나의 자녀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니아 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을 수신자들을 향한 요한의 자비롭고 따뜻한 사랑을 암시한다((Stott, Smalley).
한편 '이것을'이 가리키는 것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1:6-10을 가리킨다.
2. 1장 전체를 가리킨다.
3.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
가능한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영원한 생명을 보고 듣고 만지며 계속적으로 사귐이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치 말아야한다. 왜냐하면 죄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과의 사귐을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당시 영지주의자 들처럼 사귐이나 사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게 하기 때문이다((Barker).
요한은 본문에서 본서 전체의 기록 목적이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유지하며 단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임을 제시한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

'죄를 범하면'이 헬라어 '하마르테'(*)는 상반절의 '하마르테테'(*, '죄를 범치')와 마찬가지로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는 범죄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된 행위들'을 나타낸다. 한편 '대언자'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위로자 또는 옹호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요 14:16, 26;15:26;16:7)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중보하심을 시사한다. 이와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과 본절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행 16:7;롬 8:9;빌 1:19), 요 14:16에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되어 있어 예수께서 '파라클레토스'이심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중보하시는 분이시며 '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 존전에서 그리스도인의 죄를 중보하신다(Stott).

󰃨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예순 크리스톤 디카이온'(*)은 문자적으로 '의로운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디카이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존전에서 주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셔서 흠이 없고 깨끗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다. 예수의 이러한 의로움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게 되며 그것을 근거로 하나가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롭지 못한 모습을 깨끗하게 하신다(롬 3:26, Smalley).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부정하던 예수의 인간되심을 강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이심을 나타내어 죄인들을 중보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드러낸다.


“나의 자녀들아” (테크니아 무)!

이렇게 부르는 것은 사도 요한의 마음이 이 서신을 받는 성도들을 향해 얼마나 사랑과 애착이 큰지를 보여주는 진실한 표현입니다.

저도 제 손주를 보면 “나의 자녀들아”라는 말이 어떤 감정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없이 사랑하는 그런 마음이 있으니, 이런 감정을 가지고 그들을 부르는 것 같습니다.  

비슷한 표현이 다른 여러 곳에도 있고 요한일서에도 더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감정을 알지 못하면 성경을 읽을 때 매우 어색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 주 예수께서 (테크니아)라는 말을 제자들에게 사용하시는데 이는 이런 깊은 사랑의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

33 작은 자들아 (테크니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0-31, 34-35)

자기 생명을 이제 곧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바치실 텐데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기에 이런 표현을 하셨겠습니까? 자기 피 값으로 사신 제자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아기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엄마는 자기 아기가 병에 들어 죽을 고비를 지나게 되면 진심으로 그 아기 대신에 죽더라도 아기가 살아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물며 예수께서 그런 마음을 이미 갖고 계시니 자기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그 제자들이 바로 여러분이 아닙니까? 예수께서 여러분을 향해 부르십니다.

“작은 자들아!”

“아,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내 자녀들아”

바울도 그러한 심정을 갖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부릅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갈 4:19).  

바울이 해산하는 수고라고 말하고 있으니 “나의 자녀들”은 내 생명을 다 주어서라도 바르게 세워보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런 자녀들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이 서신을 받는 자들을 향해 이러한 사랑을 반복적으로 표현합니다.

자녀들아 이제 아들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요일 3:7).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심지어 요한일서의 마무리도 이 표현으로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 5:21).

아무튼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나의 자녀들아”라고 하며 깊은 사랑 가운데 간곡한 부탁을 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 편지를 너희에게 쓴 이유는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요한은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쓰지 않았습니다.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서신을 썼다고 말합니다. 즉,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할 이유와 또한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원칙을 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요한일서는 요한이 거의 죽음에 가까운 때에 쓴 것입니다. 밧모 섬으로 유배를 당하기 전에 보낸 서신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인류의 역사를 담은 웅장한 서신이라면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의 유언과도 같은 내용을 담은 서신입니다. 그런데 그 유언과 같은 사도 요한의 글이 목적한 바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사도 요한이 마지막 유언처럼 남긴 이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가장 깊은 마음 속에 품고 명심해야 하는 말씀 중 하나는 “아, 어떻게든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구나. 절대로 죄를 범하지 않도록 요한의 가르침을 꼭 붙들어야겠다”라는 것입니다.

한편, 사도 요한은 우리의 본문 바로 앞에서 신자라도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 1:8-10)

즉, 우리는 죄성을 지닌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또한 범죄한 후에 죄책이 들 때마다 죄를 자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약속에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죄를 사하여 주시고 또한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여 주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깨끗하게 하여 주신다는 것은 우리의 양심과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주셔서 다시 의로운 삶을 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를 쓴 것은 “나의 자녀들아 너희가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지만, 그러나 죄를 범하게 되면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새언약의 대제사장 되시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죄를 범하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지는 않지만 당장 하나님과의 사귐이 단절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단절되면 우리는 곧바로 마귀와 죄에게 종노릇 하는 상태로 전락합니다.
이때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인한 죄 사함 및 죄 씻음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양심 때문에 자책 및 우울증에 빠져 어둠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양심의 고함소리를 묵살하면서 위선자의 삶을 살면서 죄의 노예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양심이 화인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신자라도 죄성 때문에 이런 상태에 떨어지는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면서 그럴 경우 어떻게 마귀와 죄에게 종노릇하는 상태에서 다시 나올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이때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죄와 마귀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오직 회개와 믿음으로 빠져 나올 수 있습니다.
물론 회개와 믿음 그 자체가 나를 구출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 주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은 약속에 따라 죄와 마귀의 손아귀로부터 우리를 구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책이 사라지고 성령으로 인해 죄 씻음을 확신하게 되면서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새로운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우리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는 사도 요한이 말합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여기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진실로 의로우신 예수님께 의롭다고 선언하신 사실에 기인합니다.
즉, 우리 죄인이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과는 달리 우리 주 예수님은 평생 주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지켰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분의 완전한 순종으로 인하여 실제로 의로우신 분이라고 하나님께 인정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롬 2:13).

“그리스도의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로우니 …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7-8).

십자가의 죽음까지 마다하고 평생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에 대해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 인정하시고 영화롭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8-11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런데 그렇게 완전한 의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로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죄를 범하여도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우리가 범한 죄 문제가 해결되고 신속히 하나님과 사귐을 회복하게 되면서 새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여기서 개역개정이 ‘대언자’라고 번역한 원어는 (파라클레톤)입니다.
원형으로는 (파라클레토스)인데 그 헬라 원어의 뜻은 “나를 돕기 위해 곁에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법적으로 증거를 가지고 나를 변호하는 분, 옹호하는 분이라는 뜻이고, 일반적인 의미로는 상담자, 돕는 자, 보호하는 자, 위로자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놀랍게도 이 동일한 단어를 성령께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6-18).

여기서 또 다른 보혜사가 성령이신데 원어로 (알론 파라클레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 자신도 보혜사이신데, 또 다른 보혜사를 이 땅에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내가 너희를 고와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으로 주의 백성들에게 돌아오셨습니다.
이는 그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적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우편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하십니다.
무엇보다 본문에서 ‘대언자’로 번역된 ‘보혜사’의 역할을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분의 영을 보내셨으니 그 영은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또 다른 보혜사”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십니다.

지금 ‘대언자’는 우리가 범한 죄 문제를 해결하는 관점에서 언급된 칭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의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언자로서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으로 서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자기의 생명으로 치른 영원한 속죄를 근거로 하여 우리의 죄악들을 하나님께서 사하여 주실 것을 변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러한 보혜사 또는 대언자 역할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사실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 역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이 땅에서 중보의 역할을 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하여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 성령을 따라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우리 주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이렇게 말씀하신 주 예수께서는 지금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얼마나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한없이 끝까지 용서해 주십니다. 자신의 속죄를 근거로 주의 죄사함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와 새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신자의 죄악을 아들의 속죄를 근거로 하여 얼마든지 용서해 주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가 흘러나와서 우리의 죄를 한량없이 사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시기 바랍니다.”
믿는 도리가 무엇입니까? 믿음의 원칙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마련해 주신 복음의 원칙을 의지하여 우리가 행여 어떤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당장 돌이켜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사귐을 다시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맺은 언약이기 때문에 기계적, 또는 악용하는 자세로 복음의 원칙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악용하는 자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치 못할 것입니다. 즉, “아, 많은 죄를 짓고도 보혜사되시는 대제사장에게 나아가면 죄사함과 죄 씻음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더욱 많은 죄를 짓자”라는 논리를 펴는 악한 심보는 복음의 은혜를 더럽히는 간교한 사탄적 마음인 것입니다.

이런 논리와 자세를 가진 자들이 바울에게도 도전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강력하고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4-15).

우리는 이와 같은 식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를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내가 지은 죄악에 대해 나의 죄성으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진 진실한 신자라면 지은 죄로 인해 너무 오래 낙심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즉, 지은 죄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 자살하거나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아파하며 자신을 환멸하되, 하나님의 새언약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심지어 주의 징계를 받는 상태라도 계속 회개하며 더욱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2절에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역할을 선포합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면 그분의 화목 제물 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한편, 여기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을 원어로 보면 (톤 하마루티온)이라 하여 복수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아니라 ‘죄악들’로 번역되어야 마땅합니다. 즉, 우리 신자들이 짓는 죄악들에 대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보혜사 또는 대언자로서 우리의 죄악의 문제를 친히 해결해 주시는데 그 근거는 자기 자신이 화목 제물이 되신 희생양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화목제물은 원어로 (힐라스모스)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속량의 효력은 대언자의 역할과 함께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얼마든지 화목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그런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무한한 화목의 효력을 가진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을 통일 시키는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신자가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에게 나아가면 대제사장이시며 또한 영원한 희생제물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신자의 범죄가 완전하게 해결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안의 있는 옛사람에게 져서 비록 범죄할지라도,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귐이 서먹해지더라도 내 안의 옛사람이 주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인정하면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면 내가 지은 죄악들에 대해 철저하게 사함 받고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범죄한 상태에 있을 때 우리에게서 나는 향기는 하나님께 더러운 죄의 냄새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죄악의 냄새가 제거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수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우리의 제사장 되시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에게 가서 죄 사함과 죄 씻음을 받고 오라고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화목제물입니다. 살아있는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오직 그 제물과 제사장의 역할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가 만족되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범죄하였더라도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죄 사함과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과 다시 사귐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를 누가 하셨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무한하신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많은 죄악을 범하고 자신을 혐오하는 가운데 빨리 새롭게 일어나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힘차게 달리기를 바란다면 우리의 화목제물이시며 영원한 대언자이신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은 죄악의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주 예수께 나아가 마음을 새롭게 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한편, 십자가의 속량을 치르신 화목제물이며 동시에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계신 부활하여 영원히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님을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환상 가운데 “일찍이 죽임 당하신 어린 양”으로 보았습니다.

[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9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계 5:6-10)

그러므로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슬픔 가운데 있더라도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자는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도리어 죄 사함과 죄 씻음으로 인한 평강과 감사와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한 신자들이여! 당장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의 소망과 기쁨과 평강의 반석이십니다.

[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30)

그리고 무한하게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된 자들은 그들이 어떤 죄악을 범하였더라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중보 기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결코 버림 받는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3-35, 37-39)

이와 같은 화목 제물 되시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제 3절부터 6절은, 이러한 참 사랑이 보장된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죄 씻음을 받은 상태에서 하늘 아버지와 사귐을 갖게 되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게 된다고 말합니다. 지금 죄 사함과 죄 씻음을 받은 상태에 있으니 우리의 마음은 평강하며 감사와 기쁨 가운데 있습니다. 바로 이때 우리는 계속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주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되는 것으로써 우리는 계속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 편지를 쓴 목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즉,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 같이 그리스도를 아는 너희도 주의 사랑 안에서 주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한편, 3절의 말씀을 원어로 보면 “그를 안다”라는 말이 완료형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즉, 그를 알아온 상태로서 이는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고 성령으로 거듭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미 과거에 예수님과 언약을 맺은 소위 하나님의 참된 자녀요 그리스도의 참 제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바로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 마음 속의 깊은 의도를 알려주는 표현법으로써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언제나 주의 계명들을 지키려는 의도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요 주의 제자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1절부터 보면 우리는 비록 죄인들이라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죄를 범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을 수 밖에 없지만 그럴 경우 참 신자들에게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범죄를 합법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분이 있는데 바로 우리의 화목제물이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아온 사람은 주의 계명들을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완전히 모든 계명들을 항상 지키는 경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경우는 참 신자라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의 계명을 지키지 못할 경우 그 사실에 대해 아파하면서 회개하고 대언자이신 의로우신 예수께 나아와 죄 사함과 죄 씻음을 받는다면, 그리고 그 후 다시 주의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나아간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한, 또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에 있는 한, 그는 주의 계명들을 지키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러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에서는 신자는 그의 계명을 지키도록 되어 있기에, 만일 그리스도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선포합니다.

한편, 4-5절에서는 거짓말하는 가짜 신자를 드러내고 진짜 신자를 구별해 냅니다. 다같이 4-5절을 읽겠습니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여기서 보면 그를 “아노라”고 할 때 원어는 (에그노카)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을 알아왔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은 참 신자라는 뜻입니다. 이에 NLT 성경은 완료형으로 된 “아노라”를 “belong to”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 속하였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나는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은 참 신자라고 말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는 뜻입니다. 즉, 가짜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짜 신자를 분간하는 가장 중요한 표현은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인데 원어로 (테레온)이라고 하여 분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주의 계명들을 늘 지키지 않는 자라는 뜻이고, 주의 계명들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는 뜻이며, 그 계명들을 진지하게 지킬 의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하신 명령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런 자들은 사실 그리스도를 감사하지 않는 자이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 제물 및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에 대해 바른 인식과 감사와 충성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에 마음이 가 있는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가짜 신자입니다.

하지만 참 신자들은 비록 내 안의 죄성으로 인해 죄를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지은 죄로 인해 가슴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대언자이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즉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량을 치르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신 대제사장이 되신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분을 더욱 의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귐의 상태에서 다시 주의 계명들을 지키려고 온 마음과 뜻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의 계명들을 하나씩 더 많이 더 오래 지켜나가는 성장을 보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인 것을 확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바르게 안다는 것은 점점 더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연합함으로 더욱 주의 계명들을 온전히 지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이 이 서신을 쓴 의도처럼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사람 안에서 온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진행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를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주와 연합한 상태에서 주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그대로 우리도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완성이니 비록 이 땅에서 완전하게 성취되지는 못할 지라도 우리의 삶과 성품에서 사랑이 계속 무르익으면서 사랑의 결실들을 맺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요한일서 2장 1절에서 6절을 통해 참 신자의 가장 중요한 현상은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사람 즉,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 안에서 온전하게 되는 것”임을 발견합니다. 또는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된 사람은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인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여기서 “온전하게 되었다”라는 번역의 원어를 보면 (텔레이오우)라는 완료형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뜻은 “완성되다, 성취되다, 실행하다. 성공적으로 마치다. 이루어지다”라는 뜻입니다. 즉,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졌다, 완성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완전하며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에 현재든, 과거든, 미래든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비록 죄를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주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주를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지키면 이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즉, 우리 안에서 말씀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지키는 깊이와 시간이 많아진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더 우리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이러한 주의 사랑의 성취가 우리에게 나타나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주변과 세상과 역사에 빛과 소금의 영향력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열매라는 개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때 열매는 성장하는 과정에 있기에 추수로 따 먹을 수 있는 열매라기보다 다만 분명하게 성장하며 변화하는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복음과 관련해서 “자라게 하는지라”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머리를 붙드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 2:19).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10).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5-1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 4:30-32).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막 4:26-28).

히브리서 6장 7-9절은 우리의 본문에 대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자라나면서 보여주는 열매들이 그 사람의 정체입니다. 참으로 그 사람에게서 자라나는 열매에 의해 그가 주 예수님께 속한 자인지 아닌 자인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만일 인생의 세월을 보내면서 계속 죄악과 관련하여 악화되면서 결국 쓴 열매를 맺는 신자라면, 그러면서도 무엇보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가룟 유다와 같은 가짜 신자인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처음에는 여러 죄악이 드러나며 엉성하고 투박한 성품이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선한 열매가 자라나고 결국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그 사람은 참 신자인 것입니다.

[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히 6:7-9)

이러한 변화는 우리 주 예수님께도 있었습니다.

[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진행형입니다)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주의 사랑이 그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히 5:8-10)

그러므로 남은 삶은 더욱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욱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살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계속 변화하여 자라나기 바랍니다.

[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1-14)

그리고 주의 추수 때에 우리가 맺어 놓은 열매의 풍성함에 따라 영원한 영광이 결정 날 것입니다. 즉, 내 안의 성품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았는지, 또한 세상을 향해 얼마나 선한 영향을 끼치고 얼마나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켰는지에 따라 영원한 영광이 결정 날 것입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계 22:14).

그러나 그리스도를 모르는 거짓 신자들과 불신자들은 그들이 지은 죄악의 분량에 따라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

7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살후 1:7-10)

그러므로 주 하나님을 경외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를 경외한다면 주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계명을 지킬 수 없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더욱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살아계신 우리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살고자 할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죄사함을 받고 죄씻음을 받으면서 새롭게 일어나서 또 달려갈 것입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시 97:10-11).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말씀을 늘 묵상하며 마음에 새기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따라 행하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행여 마음에 가책이 생기는 실수나 범죄나 사건들이 있으면 신속히 하늘에 계신 우리의 보혜사 예수 그리스도, 즉 우리의 영원한 속량이시며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죽임 당하신 어린양 우리 주 살아계신 그리스도께 나아와 죄사함과 죄씼음을 받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사귐을 갖는 상태를 유지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더욱 주의 계명을 지키고자 온 마음을 다하기 바랍니다.
주의 말씀의 성취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즉, 범죄하지 않는 것은 다름 아닌 율법의 완성으로서 사랑의 성취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이 귀한 사도 요한의 말씀으로 더욱 세월이 지날수록 그리스도의 온전한 형상까지 자라나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성취되는 참된 신자의 삶이 이어지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개(悔改) : 뉘우칠 회. 고칠 개

1. 잘못을 뉘우치고 고침.

2. 신앙생활(信仰生活)로 들어가는 데 필요(必要)한 요건(要件)의 하나. 살아온 삶이 잘못되었음을 자각(自覺)하여 죄인(罪人)임을 반성(反省)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뜻을 세워 새로운 생활(生活)로 들어가는 일을 이른다

뉘우칠 회
1. 뉘우치다 2. 스스로 꾸짖다 3. 한이 맺히다
부수 忄  (심방변, 3획)
총획 10획

고칠 개
1. 고치다 2. 고쳐지다 3. 바꾸다
부수 攵  (등글월문2, 4획)
총획 7획

회개(悔改)

1. 잘못을 뉘우치고 고침.
2. 신앙생활(信仰生活)로 들어가는 데 필요(必要)한 요건(要件)의 하나.
    살아온 삶이 잘못되었음을 자각(自覺)하여 죄인(罪人)임을 반성(反省)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뜻을 세워 새로운 생활(生活)로 들어
    가는 일을 이른다.

회개지심(悔改之心)

1. 회개(悔改)하려는 마음.

종불회개(終不悔改)

1. 끝내 회개(悔改)하지 않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귐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은 어두움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너무나 밝은 완전한 빛이 되시는데 그 빛 되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서 그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다 들어내어 놓고 교제를 하라는 것입니다.

또 만일 하나님과 사귄다고 하면서 즉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어두운 가운데서 행한다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거나 진리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시는 것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서 행하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10절 말씀에도 반복해서 말씀을 하시기를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는 다 죄가 있는데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도 속이고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진리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죄인들을 보고 시커멓게 죄로 물든 사람들을 보고 빛 가운데로 나오라고 하고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귀라고 하니까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지저분한 모습으로 빛 가운데로 챙피해서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추하고 더러운 모습으로 어떻게 밝은 빛 가운데로 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있습니까
모든 죄악을 보실 수 있는 밝은 빛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과 사귀시면서 동행하시면서 사실 자신이 있습니까

거기에 대한 해답이 9절 말씀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방법을 오늘 본문에 말씀을 하시기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빛 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1.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본문 9절 말씀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을 하면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독특하신 치료방법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죄의 처리에 대한 하나님의 독특하신 방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법정에서는 죄를 자백하면 큰일입니다.
죄를 자백하면 그것이 증거가 되어서 꼼짝없이 정죄함을 받고 그 죄에 대한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잡혀 가면 고문을 해서라도 자백을 받아 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서 벌을 주시기 위해서 죄를 자백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죄를 자백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국법을 어기는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벌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숨기고 사는 것보다는 자백을 하고 벌을 받는 것이 평생을 숨어서 고생하는 것 보다 나을지도 모릅니다.
죄를 짓고 도망 다니면 참으로 더 괴롭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를 자백하면 거기에 대해서 문책을 하시거나 벌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용서를 해 주시기 위해서 자백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니까 얼른 자백을 하면 마음도 편하고 용서도 받고 떳떳하고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자백하기를 싫어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도 싫어합니다.
속에서는 그 죄가 곪아 가고 있지만 겉으로는 깨끗한척하고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치료방법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용서하시기 위해서 하시는 최대한의 관용의 조치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만일 네가 네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은 빼고 설교를 듣습니다.
아 저건 김 집사님한테 하는 소리구나 아 저건 이 집사님한테 하는 소리구나 라고 생각하고 정작 자기 자신은 거기 해당이 되지 않는 사람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나 설교를 들을 때나 남의 이야기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성경말씀은 과거의 사람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을 사는 바로 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으면서 아직도 남에게만 적용을 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의 기초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접니다라고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서신을 기록한 사도 요한같은 사람은 우리들에게 비하면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배운 사람이고 특별한 은혜도 많이 받은 사람이고 신앙에 관해서라면 큰소리를 칠만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말을 하기를 너희들 너희 죄를 고백해라 그러면 용서 받는다라고 하지 않고 나를 포함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를 다 깨끗하게 용서를 하신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서 있는 목사를 비롯해서 장로나 권사나 집사나 모든 사람들이 날마다 죄를 자백할 때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자백을 해야 합니다.

자백을 하려면 먼저 죄가 무엇인지 자기가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수많은 죄를 짓고도 뭐가 죄인지 내가 그 죄를 짓고 있는지조차 모른다면 무엇을 자백하겠습니까

겉모습만 가지고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겉으로 나타난 모습만 가지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내가 더 나아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죄가 없어 떳떳해라고 생각을 해 버리면 죄를 자백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만히 자기 모습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추한 죄인인가를 깨달을 때까지 자기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아직 뭘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도 인간도 예수님도 신앙도 모르는 왕초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자백하는 것입니다.
자백을 하기 위해서 죄를 발견하고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백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로만 그렇게 인정을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자신이 정말로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는 진실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핑계를 먼저 댑니다.
죄를 짓게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어쩔 수 없었다거나 사실은 더 잘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변명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이 핑계를 대지 않고 자인을 했다고 하면 용서를 받을 기회가 주어졌을 것입니다.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먹었느냐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셨을 때 얼른 아이쿠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놈의 욕심이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한번만 용서를 해 달라고 빌었으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용서를 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죄를 짓고도 핑계를 댑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여자가 주는 바람에 그만 먹었습니다.
왜 여자를 만들어서 먹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죄를 짓고 핑계를 대는 것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아이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주일날 교회에 못 왔습니다.
잠을 못자서 피곤해 가지고 교회를 못 왔습니다.
어째서 뭐는 못합니다 
싫어서 안 합니다.
핑계없는 무덤은 없다고 들어보면 다 그럴듯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이유들을 대고 변명을 하고 핑계를 대는 한 용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실컷 하고도 그런 핑계들 때문에 용서 받지 못하고 상을 받지 못하면 억울합니다.

또 자백을 하는 것은 죄에 대해서 가슴 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이런 완전하지 못한 타락한 육체를 가지고 사는 한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정말로 통회하고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육체를 붙잡고 안타까워하면 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깊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죄를 핑계대지 말고 변명하지 말고 인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애통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를 자백할 때 깨끗하게 완전히 사하여 주시고 더 큰 은혜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2.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본문 9절 말씀에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죄를 자백하면 용서해 주신다고 해 놓고 다 자백하면 야 이놈아 네거 그렇게 흉악한 놈인 줄 몰랐다 어느 정도라야 용서를 하지 그렇게 큰 죄를 지었으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라고 하시면 큰일입니다.

또 어떤 조건을 붙여서 좋다 용서를 해 줄 터이니 앞으로 내 말 잘 듣고 내 시킨 대로만 해라 만약 내가 하는 말 잘 안 들으면 그 때는 죄를 묻겠다라고 하시면 큰일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런 일들이 다반사입니다.
죄를 시인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해 놓고서 그것 약점으로 잡고 별별 것 다 요구하고 결국 더 나쁘게 해 버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절대 나만 알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해 놓고 천지에 다 이야기하고 다니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잘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중 앞에서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죄를 시인하고 자백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신부 앞에서 자백을 해야 용서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악한 신부들은 고해성사를 한 그것을 빌미로 잡고 공갈협박을 한다는 설도 있습니다. 

사람 앞에서 죄를 자백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만 은밀하게 말씀을 드리면 됩니다.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 아시지만 우리가 인정하는가를 보시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들과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달리 미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절대로 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말을 바꾸시거나 약속을 어기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미쁘다"라는 말은 우리 나라 말에서 "믿음성이 있다"라는 말입니다.
믿을 만 하다는 것입니다.
헬라어에서도 이 말은 믿을 만 하고, 충실하고, 신실하고, 의지가 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믿을 만 하신 분이십니다.
거짓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이 약속의 말씀에 대해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죄를 자백하면 용서해 주시겠다는 그 약속이 믿을 만 한 진실된 약속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의롭다"라는 말은 정확하다 공의롭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정확하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뭘 하다가도 어 잘못됐네 그러면 그만입니다.
내가 착각을 했어 그게 아니야 미안해 그러면 그만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은 정확하지 않은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몇 일 전에 텔레비전을 보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의학상식들 중에 잘못 된 것들이 많다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텔레비전을 보면 눈이 나빠진다고 다 그렇게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텔레비전 본다고 눈 나빠지는 것 아니라고 합니다.
유전이나 영양관계로 나빠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획을 세우시고 약속을 하시고 실행을 하시는 일은 조금도 오차가 없다는 것입니다.
잘못됐다 미안해 다시 하자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미쁘고 의로우신 그 주님께서 하신 약속은 틀림이 없다는 것을 아시고 주님께 모든 죄들을 안심하고 자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3.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말은 탕감하여 준다는 말입니다.
죄지은 것이나 빚진 것을 탕감해 주고 허물을 제거해 주고 책임을 해제시켜 주신다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모든 허물들을 제거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신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죄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용서를 해 주시는 것 보니까 죄라는 것이 그리 심각하지는 않는가 보구나 라고 생각을 하십니다.

또 간단하게 용서를 받을 길이 있다고 하니까 쉽게 죄를 지으려는 마음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지 죄가 심각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우리를 사망으로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하는 아주 지독한 것입니다.
쉽게 용서를 받게 해 주신다고 해서 죄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죄를 고백함으로 용서를 쉽게 받지만 용서를 해 주시는 하나님 편에서는 결코 쉽게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그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대신 죽게 해 주시면서 우리의 죄값 치르시고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시기 바랍니다.
미쁘시고 의로우신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해서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참된 기쁨의 삶을 살게 해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05-02-2024(목) 요한일서 1:8-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죄를 자백하면(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

죄를 자백하면(If we confess our sins)

호모로게오( hŏmŏlŏgĕō) ὁμολογέω스트롱번호 3670

1. 약속하다.  2. 동의하다. 3. 고백하다.
발음 [ hŏmŏlŏgĕō ]
어원 / 미완료 ὡμολόγουν, 미래 ὁμολο- γήσω, 제1부정과거 ὡμολόγησα, 3674의 어간과 3056에서 유래

말하다(마 7:23, 요 9:22), 시인하다(마 10:32, 딛 1:16, 요일 4:2), 고백하다(행 24:14), 증언하다(딤전 6:12, 히 11:13, 13:15), 자백하다(요일 1:9), 드러나게 말하다(요 12:42), 약속하다(마 14:7).

시인하라 - 나는 죄인입니다.

(예) 독사가 겨울 잠을 자고 나온 후에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사람을 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독사가 아니다.
       독을 내 뿜지 않아도 독사로 존재하므로 독사가 분명한 것처럼 내가 죄악 중에 태어난 죄인이므로 갓난 아기도 죄인일 수밖에 없다. |

말하라 - 나는 죄를 지었다

(예) 죄를 지은 후에 입을 다물고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고 죄를 짓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다만 드러나지 않은 것 뿐이다.


* 3674

ὁμοῦ 스트롱번호3674

1. 함께. 2. 동시에
발음 [ hŏmŏu ]


* 3056

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3056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발음 [ lŏgŏs ]
어원  / 3004에서 유래

미쁘시고(4103)

πιστός, ἡ, όν 스트롱번호4103
1. 믿을 만한.  2. 마 25:21. 3. 고 전1:9
발음 [ pistŏs ]
어원 / 3082에서 유래

충성된(마 24:45, 딤전 1:12, 계 1:5), 충성하는(마 25:21, 계 2:10), 진실한(눅 12:42, 엡 6:21), 미쁜(행 13:34, 고후 1:18, 살후 3:3), 믿는(행 16:1, 고후 6:15, 딤전 4:3), 신실한(엡 1:1, 골 1:9, 히 3:2, 벧전 5:12, 계 22:6). [명] 충신(계 19:11), 충성(고전 4:2), 믿음(요 20:27, 딤전4:12), 신자(행 10:45).

의로우사(1342)  δίκαιος, αία, ον 스트롱번호 1342

1. 올바른.  2. 법대로 사는. 3. 눅 1:6
발음 [ dikaiŏs ]
어원 / 1349에서 유래

의로운(마 1:19), 옳은(마 23:28, 27:19), 무죄한(마 27:24), 마땅한(빌 1:7), 공의로운(살후 1:5), [명] 의로운 자(마 5:45), 의인(마 9:13, 10:41, 벧전 3:12), 공의(요 7:24), 의(골 4:1).



자백한다는 헬라어 동사 호모레고는 "같은(호모)" "말을 한다(레고)"는 두 단어거 합성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같은 말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범죄자가 자기의 죄를 자백할 때 분명하게 자기가 지은 죄를 하나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범죄자가 검사 앞에서 자기가 말한 것을 번복하여 재판정에서 자기가 한 말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가중 처벌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든 죄를 아뢸 때에 내가 알고 있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잊어버렸던 죄들과 더불어 생각나는 모든 죄를 말하는 것을 자백한다(호모레고)라고 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죄를 자백할 때 어떤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첫째는 용서의 은혜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와서 자기의 죄를 자백하면 거룩하신 주님은 모든 죄를 깨끗하에 용서하십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한 여인은 죄 많은 인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과 만나 대화하면서 그분이 선지자요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게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 고백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백하는 진실한 말입니다.

주님은 여인에게 “네 말이 참되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사랑이 담긴 용서의 말씀입니다. 진실을 고백하는 여인을 주님은 이미 용서하신 것입니다.
용서받은 여인은 기뻐하며 사마리아 성으로 달려가 “와보라 여기 내가 만난 그분 메시야를 보라”고 외쳤습니다.

용서 받은 자의 기쁨은 부끄러움을 이기게 합니다. 그 어떤 수모와 멸시와 천대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인은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치유와 회복의 은혜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은 손 마른 자를 일어서게 했습니다. 그리고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손 마른 자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부끄러운 마른 손을 회중들 앞에서 높이 들었습니다. 그때에 그의 마른 손이 펴지며 고침을 받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안식일에 그것도 회당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예수님에게는 물론이고 손 마른 자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어려움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손을 든다는 것도 용기 있는 행동이었지만 더 큰 용기는 안식일에 고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손 마른 자의 이와 같은 행동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시인하는 용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 앞에 자신의 부끄러운 것을 드러내는 그 용기는 치유의 기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셋째는 변화와 갱신의 은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성난 사자와 같이 여인을 향하여 돌을 던지려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난 군중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말씀에 사람들은 찔림을 받고 그 여인을 떠나갔습니다. 간신히 죽음의 고비를 넘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여인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당부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여인에게 회개를 넘어서 변화와 갱신을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의 기폭제가 된 것은 회개였습니다.
사람들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며 은혜를 받았을 때 마음의 찔림을 받았습니다.
지난 날 지었던 모든 죄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회개하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은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찾아가 죄의 용서를 구하고 물질적인 손해를 배상해 주었습니다.
부흥회를 마치고 난 다음 날은 평양 시내가 더욱 분주해졌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들이 서로 죄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찾아 나섰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좇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2,10-11)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고 인정하셨던 믿음의 사람이 다윗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을 보시고 그를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을 부어주셨습니다. 구약의 가장 뛰어난 믿음의 사람 다윗, 그러나 그도 연약한 인간이었으며 죄의 유혹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그가 홀로 궁에서 지내고 있을 때 다윗의 눈에 아리따운 여인의 아름다운 몸이 들어 왔습니다. 여인의 목욕하는 모습을 바라 본 다윗은 욕정이 불타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자신의 침실로 불러드렸습니다. 다윗은 간음하지 말라는 것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 7계명과 제10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늘 죄의 유혹이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아무리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도 죄의 유혹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기도실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그 기도방을 지나가던 사람은 깜짝 놀랐습니다.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계속 똑 같은 기도가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자 어거스틴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아파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행위의 범죄만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의 범죄를 행하고 있습니다.

목회자에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돈과 여자라는 말씀을 하신 선배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두 가지를 초월하면 좋은 목회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가장 큰 시험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제가 목회해보니까 그 두 가지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끊임없는 유혹과 시험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훌륭한 신앙의 사람 다윗도 넘어졌습니다.
더군다나 죄가 탄로 나는 것이 두려워 더욱 큰 죄를 범했습니다.
자기의 충복이었던 우리아를 전쟁터로 내 몰아 죽게 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임에 틀림없습니다.
간음하고, 살인하고 모든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였고 살인하며 쾌락의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저는 사울왕의 죄와 다윗왕의 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여전히 다윗왕의 죄가 더욱 크다고 여겨집니다.
간음하고 살인하고 행위로서 계명을 명백히 어긴 죄가 다윗의 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사울을 하나님이 버리셨습니다.
오히려 더 명백한 죄를 지은 다윗은 용서하시고 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분명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느냐 아니면 죄를 부인하고 회개치 아니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죄를 지적하시며 사무엘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죄를 시인하지 않았으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이 범죄 하였을 때에도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는 분이시므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때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발에 무릎을 꿇고 죄를 시인하며 용서를 구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본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사랑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본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분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숨기고 회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회개하는 자를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00)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1서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00)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00)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어떤 사람을 위하여 있은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를 위하여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기에 독생자를 보내서 죄와 사망에서 나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기꺼이 십자가의 고난과 피를 흘리심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님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시기에 또한 끝없이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죄를 시인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이미 용서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눅15장에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친히 하신 예화의 말씀입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챙겨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는 순간부터 아버지는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던 작은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먼 길에 오는 남루한 거지가 아들인 것을 아시고 달려가 끌어 안고 입을 맞추며 기뻐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이미 우리가 지은 모든 죄까지도 용서하시기로 결심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죄를 깨닫고 스스로 죄인임을 자백하는 것이 필요하며 죄인임을 시인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죄를 자백하면”
자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백하는 순간 자기의 모든 좋았던 이미지는 땅에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심한 책망과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도 있습니다.
그 두려움이 너무 커서 자백하지 못하고 감추고 깊은 고뇌와 아픔을 속으로 삭이며 사는지도 모릅니다.

자백하는 것,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시인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성령이 도우시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나를 감동하시고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의 모든 죄를 자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의 역사가 회개였다면 그들의 회개를 가능케 한 힘은 성령이셨습니다. 그들이 은혜 가운데 성령을 받고 감동되었을 때 자기들의 죄가 생각났고 아팠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추었던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내주하시고 감동하시는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어두운 죄의 마음속에 밝은 빛으로 임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죄인임을 깨닫고 죄를 자백하고 시인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함께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죄를 자백하고 난 후에는 엄청난 은혜가 그 사람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은혜는 한 개인에게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은혜가 임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모두가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 죄를 자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첫 번째 은혜는 용서

무한한 용서를 받습니다.

다윗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다윗이 죄를 시인하고 자백함으로 하나님은 그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사울이 용서받지 못한 이유는 그 죄가 더 큰 것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용서받은 자의 기쁨을 아십니까? 용서받은 자의 기쁨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한 여인은 죄 많은 인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과 만나 대화하면서 그분이 선지자요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게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 고백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백하는 진실한 말입니다.

주님은 여인에게 “네 말이 참되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사랑이 담긴 용서의 말씀입니다. 진실을 고백하는 여인을 주님은 이미 용서하신 것입니다.
용서받은 여인은 기뻐하며 사마리아 성으로 달려가 “와보라 여기 내가 만난 그분 메시야를 보라”고 외쳤습니다.

용서 받은 자의 기쁨은 부끄러움을 이기게 합니다. 그 어떤 수모와 멸시와 천대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인은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도 어렸을 적에는 일반 소년들처럼 평범한 아이로 자랐습니다.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놀다가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구워 파는 양고기가 어찌나 먹고 싶었던지 궁리 끝에 집에 돌아와서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몰래 아버지의 침실로 들어가서 장롱을 뒤져 동전 몇 푼을 꺼내들고 상점으로 달려가 고기 몇 점을 사먹었습니다. 그것이 너무 맛이 있어서 단번에 먹어 치우기는 하였지만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온 그는 잠자리에 누웠으나 마음에 걸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한동안 이불 속에서 뜬눈으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는 고통스럽게 밤을 지새우기보다 차라리 벌을 받을지언정 정직하게 고백하는 편이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늦은 밤에 아버지께 찾아가 직접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서 작은 종이 조각에 몇 줄을 적어서 그 것을 돌돌 말아 가지고 아버지의 침실문 열쇠구멍에 끼워 넣고 돌아오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이튿날 새벽이 밝았습니다.
그는 잠에서 깨자 어쩐지 아버지가 노한 모습으로 달려오실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급히 아버지의 침실 쪽으로 향해 갔습니다.
가서 보니 열쇠구멍에 꽂혔던 종이 조각은 없어지고 그 구멍을 통해 방안을 살피니 아버지께서 그 종이 조각을 읽으시며 눈물을 닦으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때 그는 더 오래 지체할 수가 없어서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의 잘못을 정직하게 고백하였고 아버지는 그를 꼭 껴안아 뜨거운 사랑을 표시하였다고 합니다.
후에 그는 성인이 되어 이때의 경험을 회고하면서 아버지의 용서하여 주시는 얼굴을 보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신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술회하였습니다.

죄를 자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는 용서입니다. 무한한 용서는 그를 감동과 기쁨의 삶으로 변화시켜주는 것입니다.

2. 죄를 자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 은혜는 치유와 회복

마가3장에는 손 마른 자를 치유해주시는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은 손 마른 자를 일어서게 했습니다. 그리고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손 마른 자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부끄러운 마른 손을 회중들 앞에서 높이 들었습니다. 그때에 그의 마른 손이 펴지며 고침을 받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안식일에 그것도 회당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예수님에게는 물론이고 손 마른 자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어려움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손을 든다는 것도 용기 있는 행동이었지만 더 큰 용기는 안식일에 고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손 마른 자의 이와 같은 행동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시인하는 용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 앞에 자신의 부끄러운 것을 드러내는 그 용기는 치유의 기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자기의 죄를 자백하며 아버지께로 돌아와서 고백합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나이다. 나를 아들이라 생각지 마시고 품꾼의 하나로 써주시옵소서.”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위해 살진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금가락지를 그 손에 끼워주셨습니다. 죽었던 내 아들이 돌아왔으니 함께 즐거워하자고 사람들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다시 귀한 아들의 자리에 앉게 해주었습니다. 아들은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다시 아들의 자리로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죄를 자백하면 주는 미쁘시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3. 죄를 자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세 번째 은혜는 변화와 갱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성난 사자와 같이 여인을 향하여 돌을 던지려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난 군중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말씀에 사람들은 찔림을 받고 그 여인을 떠나갔습니다. 간신히 죽음의 고비를 넘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여인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당부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여인에게 회개를 넘어서 변화와 갱신을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회개는 갱신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입술로만 고백하는 정도의 회개라면 진정한 회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회개는 갱신이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회개가 갱신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회개는 변화이어야 하고 갱신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새로워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바람, 새 역사를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이 놀라운 부흥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회개운동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회개가 갱신의 삶으로 변화되었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부흥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사람들은 우리가 어찌할꼬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회개의 합당한 갱신의 삶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변화하였습니다. 이타적인 사람으로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만 고집하지 않고 모두를 위한 것으로 헌신하였습니다.
그들의 갱신은 자기를 넘어서서 서로 물건을 통용하며 함께 떡을 떼며 교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 속한 사람들 중에는 한사람도 궁핍한 사람이 없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19장에는 회개를 넘어 갱신을 이룬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죄를 범했습니다. 특히 남의 물건을 토색하며 갈취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데 힘썼습니다. 사람들을 돈으로 보고 형제도 배반하며 민족도 배반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자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회개하였습니다.
눈물로 사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까지 다른 사람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다면 4배나 값겠노라고 결단했습니다. 착취하므로 축적했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는 회개를 넘어 갱신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된 것입니다. 그가 바로 여리고의 세리장이었던 삭게오입니다.

해비타트운동이라 불리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이 있습니다.
밀러드 풀러는 이 운동을 전세계적으로 이끌고 있는 국제 해비타트 설립자입니다. 그가 20대 백만장자에서 30대 자원봉사자로 일생일대의 변신을 하게 된 것은 `더 이상 돈만을 최고로 아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아내의 결별선언이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새로운 삶의 비전에 눈을 뜬 그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사회단체에 기부하며 무주택자와 극빈자를 위해 집을 짓는 봉사활동에 뛰어듭니다. 지금까지 의약^교육^식량으로 사회활동을 하는 단체는 많았지만 막대한 비용과 인력 등의 부담으로 집을 짓는 활동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 운동으로 600여개 도시에서 집을 지었으며 밀러드 풀러는 최근 국내에 발간된 `망치의 신학'이라는 책에서 집짓기까지의 역사와 감동적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돈만 알았던 수전노에서 사회봉사자로의 변화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을 넘어서 어떻게 갱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용서입니다. 그리고 용서받은 자의 기쁨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받습니다. 회개는 기적을 시작하는 출발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삶의 변화와 갱신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새로운 삶으로 이러져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갱신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도 용서받은 자의 기쁨과 치유와 회복 갱신의 삶이 실현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죄를 자백해야 죄가 사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이 말씀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회개할 때, 죄를 자백할 때 우리 죄가 씻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씻는 능력은 예수님의 피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지, 자백한다고 죄가 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요한일서 1장 9절만 읽지 말고 7절을 읽어야 합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예수의 피가 우리 죄를 씻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9절의 자백은 무엇을 말합니까?
‘나는 죄 안 지었어’라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속죄의 원칙을 알아야 합니다.
그 원칙이 레위기 4장의 속죄제사에 나와 있습니다.

“만일 평민의 하나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레 4:27~28)

속죄제사를 드릴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은 죄를 지어야 하고, 다음에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죄를 지어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속죄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만일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한 것은 내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이 속죄제사를 드릴 자격이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죄 지은 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죄인이 아니라면 속죄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죄를 깨달은 사람은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옵니다.
그리고 염소의 머리에 안수합니다.
안수하면 죄가 염소에게 건너갑니다.
그 뒤에 염소를 죽여서 제사장이 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릅니다.
번제단 뿔에 피를 바르는 이유는, 거기에 우리 죄가 기록되어 있다고 예레미야 17장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렘 17:1)


성경에는 피를 발라서 죄의 기록을 지운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죄악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히 10:16~17)


이처럼 우리가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죄인인 것을 알아야 하고,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백’이 죄를 씻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예수님의 피’가 씻습니다.
만일 자백함으로 죄가 씻어진다면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지 않아도 됩니다.
자백이라는 것은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 죄를 씻는 것은 아닙니다.
죄가 사해지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서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자백한 뒤 그 죄가 사해진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씻기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는 사람만이 그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나는 죄가 없다고 하면 그는 예수님이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자백은 죄 사함 받을 자격을 갖추는, 죄 사함 받는 과정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우리 죄를 씻는 것은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
나의 어떤 노력으로 죄를 씻지 못합니다.
우리 노력으로 죄를 씻는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죄를 사하는 방법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33년 동안 계시다가 마지막에 세상 죄를 지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말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의 말대로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의 벌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죄를 기억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를 못 씻은 피를 믿지 말고 우리 죄를 씻으신 예수님의 피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15가지 놀라운 속성: 그 의미와 중요성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와 같은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그분에 대해 참된 것입니다. 제한된 존재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완전히 이해하는 동시에,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알리시며, 말씀과 창조물을 통해 자신에 관해 계시하신 내용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경이로운 창조주께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

하나님은 우리가 알거나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나 그 누구와도 다릅니다. 그는 독특하고 독특하며 비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단순한 말로 그분을 묘사하는 것조차도 그분이 누구신지 포착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말로는 우리의 거룩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묘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부분적으로라도) 알 수 있는 속성을 갖고 계시며,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수단으로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15가지 속성 목록을 따랐습니다. 일부는 신학자들이 “비공유적”(하나님만이 소유하신 특성)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다른 일부는 “전달 가능”(하나님과 우리 모두가 소유하지만 오직 그분만이 완벽하게 소유하시는 특성)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15가지 속성과 그 의미 및 중요성입니다.

1.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 그분은 기원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신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 골로새서 1:17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풍부하시도다. 그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 시편 147:5

하나님이 자존하신다는 사실, 즉 그분은 아무것도 없이 창조되었으며 언제나 영원히 존재하셨다는 사실은 아마도 신자가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 속에서 무한한 하나님의 본성을 붙잡는 것은 강물을 붙잡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토저는 하나님의 무한성의 혼란스럽고 혼란스러운 속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우리 너머에 계시는 분, 우리의 모든 범주 밖에 존재하는 분, 이름 때문에 무시되지 않으실 분, 우리 이성의 한계 앞에 나타나지 않으실 분, 우리의 호기심 많은 질문에 굴복하지 않으실 분을 인정하려면 다음과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보다 더 많은 겸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리 수준으로 낮추거나 적어도 우리가 그분을 관리할 수 있는 수준으로 생각함으로써 체면을 세웁니다.”

Christian.com에 실린 기사에서 에이드리언 로저스 박사는 하느님의 자존에 관해 이렇게 썼습니다. “성서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약 6800번이나 사용됩니다. 이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개인적인 언약의 이름이다.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주 하나님(Lord God)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이름의 어원은 '자존함', 즉 결코 존재하지 않았으나 항상 존재하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물었을 때, “바로가 나를 보낸 사람이 누구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나는 바로 나다(I AM THAT I AM)”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또는 야훼 는 유대인 서기관들에게 가장 신성한 이름이며 많은 사람들은 그 이름을 발음조차 하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다른 이름을 사용합니다.”


2. 하나님은 불변하시다 - 그분은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


“나 주는 변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 야곱의 자손은 멸망하지 아니하리라.” 말라기 3:6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속성은 창세 전부터 영원까지 동일합니다. 그의 성격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는 결코 "더 좋아지거나" "더 나빠지지" 않습니다. 그의 계획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자들에게 놀라운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샘 스톰즈(Sam Storms)는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본성에 대한 좋은 소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이 모든 것이 매우 간단하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은 신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확고한 신뢰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변하지 않으실 것이며 실제로 변하실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목적은 실패하지 않으며, 그분의 약속은 난공불락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불변하시므로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도 우리를 사랑에서 끊을 수 없 느니라그리스도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므로 천사나 귀신이나 현재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세상에서 갈라놓을 수 없느니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롬 8:35-39 )!”


3. 하나님은 자급자족하십니다 – no needs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느니라.” – 요한복음 5:26

제한된 인간으로서 우리는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남겨진 엄청난 욕구를 갖고 있으며, 그 결과 죽음을 초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셨습니다. 팀 템플(Tim Temple)이  것처럼 , “하나님은 그 자신의 존재 안에서 완벽하게 완전하십니다.”

Reformation21.org의 블로그 게시물에서 스콧 스웨인은 하나님의 자급자족은 그가 “그 자신 안에서 무한한 부와 지혜와 선하심과 능력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창 17:1; 요한  복음 5:26 ;  엡) 3:16 ). 그분은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완전한 지식과 사랑 안에서 이 측량할 수 없는 부를 소유하셨기 때문에(마 11:25-27; 요한 17:24-26 ), 하나님은 "복이 있으신" 혹은 "행복하신" 하나님이십니다(딤전 1:11). ; 6:15).” 

하나님은 자급자족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분께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끝없는 선하심과 평화 와 긍휼과 은혜의 샘이 마르는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 에베소서 3:20 )


4.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 almight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입의 기운으로 별들의 군대가 이루었느니라.” – 시편 33:6

“당신은 하나님의 신비를 헤아릴 수 있습니까? 전능자의 한계를 조사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늘보다 높으니 네가 무엇을 하리요? 그것은 아래 깊은 것보다 더 깊으니 네가 무엇을 알 수 있겠느냐? 그 크기는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와서 여러분을 감옥에 가두고 재판을 열면 누가 그에게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그는 속이는 자들을 아신다. 그가 악을 보아도 깨닫지 아니하느냐?” – 욥기 11:7-11

전능함(omnipotent)은 무한한 힘을 갖는다는 뜻입니다(옴니 = 모든 것, 유력 = 강력함). 하나님은 자신의 노력 없이도 자신이 뜻하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고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본성과 모순되거나 반대되는 어떤 일도 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 진술에서 “그분의 뜻은 무엇이든”이라는 부분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6장 18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행하신 것은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론 무어(Ron Moore)는 그의 신앙 서적  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 “하나님의 전능하신 속성은 하나님이 그분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이 무엇인가를 계획하시면 그것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일을 목적하시면 그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무엇도 그분의 계획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어떤 일을 하려고 손을 펴시면 누구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전능함은 두 개의 라틴어 단어에서 유래합니다. 옴니(Omni)는  "모든 것"을 의미하고  포텐스(potens)는 "강력하다"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결정은 항상 그분의 성품과 일치하며, 그분은 자신이 결정하신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 성경은 하나님이 강하고 능하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시편 24:8 ). 그분이 성취하시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창 18:14 ; 예레미야 32:17 , 27; 누가복음 1:37 ). 종종 하나님은 모든 능력과 권위를 소유하신 분으로 묘사하면서 "전능자"라고 불립니다  고린도후서 6:18 ; 요한계시록 1:8 ). 사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  에베소서 3:20 )라고 말합니다.  

“그런 능력이 무섭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그분의 무한한 능력에 따라 무엇이든 하실 수 있지만 그분 자신과 일치하는 일만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거짓말을 하실 수도 없고, 죄를 용납하실 수도 없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구원하실 수도 없습니다.” – 존 맥아더


5.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 그는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다


“이전 일, 오래 전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나는 종말을 처음부터, 옛적부터, 앞으로 있을 일을 알게 하느니라. 내가 이르노니 내 뜻이 설 것이라 내가 나의 뜻을 다 이루리라” - 이사야 46:9-10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이는 그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뜻이다. 데비 맥다니엘(Debbie McDaniel)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그분은 동시에 어디에나 계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결코 자거나 졸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매일 매 순간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길을 아시고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지구상에서 그분이 보시고 아시지 않는 곳은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Tozer는 하나님의 전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하나님은 자신을 완벽하게 아시며 모든 것의 근원이자 저자이시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것을 즉각적으로 그리고 과거의 어느 시점에든 우주 어디에나 존재했거나 존재할 수 있었던 모든 것에 관한 모든 가능한 지식 항목을 포함하는 충만한 완전함으로 아십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겪고 있는 모든 일과 내일 겪게 될 모든 일을 그분이 알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묵상할 때, 특히 그분의 다른 속성인 선함과 사랑 에 비추어 묵상할 때 , 매우 심각한 일부터 어리석고 평범한 일까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더 쉬워집니다.


6. 신은 편재한다 - 그는 항상 어디에나 있다


“내가 당신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갈 수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당신의 면전에서 어디로 도망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하늘 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고 내가 음부(히브리어: Sheol)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에는 주께서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편 139:7-1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이 있는 하나님이요 먼데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사람이 은밀한 곳에 숨어서 나에게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느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나는 하늘과 땅을 채우지 아니하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예레미야 23:23-24

편재한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곳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장소에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그 장소에 있는 것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Ligonier.org 웹사이트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는 물질적인 물질과 전혀 다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 “그는 오감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차원과 완전히 구별되는 차원에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의 충만한 임재는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내가 당신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갈까요? 아니면 내가 당신 앞에서 어디로 도망해야 합니까? 내가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아침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편 기자는 시편 137편 에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선포합니다 .

이는 외로움과 깊은 슬픔에 시달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위로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항상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우리 생각보다 더 가까이” 계시다고 토저는 썼습니다.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지식은 우리 삶의 험난한 바다를 잠잠하게 하고 우리 영혼에 평화를 말해줍니다.”


7. 하나님은 지혜로우십니다 – 그분은 완전하고 변함없는 지혜로 가득하십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측량할 수 없도다!” – 로마서 11:33

지혜는 단순한 머리 지식과 지능 그 이상입니다.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은 모든 사실을 이해하고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마음과 영혼과 정신을 기술과 능력과 함께 사용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만큼 지혜롭게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한결같이 지혜로우시며, 완벽하게 지혜로우십니다. Tozer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무엇보다도 지혜는 완벽한 목적을 고안하고 가장 완벽한 수단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는 능력입니다. 처음부터 끝이 보이기 때문에 추측하거나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혜는 모든 것에 초점을 맞추고 각각이 모든 것과 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고, 따라서 예정된 목표를 향해 흠잡을 데 없는 정확성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이런 지혜를 볼 때, 우리의 제한되고 유한한 지혜가 하나님의 무한하고 무한한 지혜와 얼마나 비교되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사람이 깊이 생각하는 데 얼마나 위안이 되고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이 이보다 더 지혜로우실 수 없다는 사실은 그분이 항상 우리 삶에서 가장 지혜로운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삶을 위해 우리가 세울 수 있는 어떤 계획도 그분이 이미 세우시고 우리를 위해 실행하고 계신 계획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분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기 때문에 모든 일을 가능한 최선의 방법으로 해결하신다는 것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8.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 그분은 무한하고 변함없이 진실하시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느니라” - 신명기 7:9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디모데후서 2:13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분리되고 고립된 특성이 아니라 그분의 완전한 존재 전체의 상호 연결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신실하심은 그분의 불변성, 즉 그분이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떠나서 이해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으시므로 항상 신실하시다는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그분의 이러한 속성들이 함께 작용하는 것을 봅니다. 그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가 결코 신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AW Pink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그분의 약속의 말씀은 확실합니다. 당신의 백성과의 모든 관계에서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 사람은 안전하게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그분을 헛되이 신뢰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귀중한 진리가 성경의 거의 모든 곳에서 표현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백성은 신실함이 신성한 성품의 필수적인 부분임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에 대한 우리의 확신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하고 변함없이 신실하시다는 사실은 그분이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으시며, 하기로 작정한 것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며, 결코 마음을 바꾸시거나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신실하심은 그분의 사랑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일을 행하여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바울의 말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분의 계획이 얼마나 신실한지 항상 이해하거나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제한된 이해력과 유한한 생각에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버림받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자녀들이 고통을 당하고 상처를 입고 죽도록 허용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순간에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을 기억함으로써 위로 를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려운 시기를 겪을 때에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신실하시고 선하시며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고 지혜로우신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분을 신실하게 신뢰하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느니라. 이제 나는 부분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온전히 알려졌던 것처럼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12


9. 하나님은 선하시다 – 그분은 무한하고 변함없이 친절하시며 선의가 가득하신 분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 – 시편 34:8

토저(Tozer)에 따르면,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을 친절하고 온화하며 자비로우며 사람들을 향하여 선한 뜻이 가득하게 하십니다. 그분은 마음이 부드럽고 동정심이 빠르며, 모든 도덕적 존재에 대한 그분의 확고한 태도는 개방적이고 솔직하며 우호적입니다. 그분은 본성상 축복을 베푸시는 경향이 있으시며 그분의 백성의 행복을 거룩한 기쁨으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다른 속성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불변성과 무한한 본성 안에 존재하므로, 하나님은 변함없이 항상 선하십니다. 그분의 자비는 그분의 선하심에서 흘러나옵니다. “우리에 대한 그분의 선하심에서 우리는 그분이 그분의 백성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선하시려는 목적을 갖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Ligonier.com ).

하나님의 다른 완전한 속성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일이 잘 진행될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증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삶이 급락할 때, 그때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합니다.

시편 기자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 시편 34편 )라고 썼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라고 권유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Desiring God의 작가인 앤드류 윌슨(Andrew Wilson)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라는 주제에 관한 자신의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의 장소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단언합니다. 19절에서 그는 “의인은 고난이 많다”고 주목할 만한 선언을 합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신 선하신 하나님이 계시더라도 선한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의 핵심은 다음 문구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것에서 그를 구원하시느니라.” 악한 일이 일어나도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정죄를 받지 아니하리라”(34:22).


10.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 그분은 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무한히, 불변적으로 옳고 완전하시다


"반석이시여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길이 다 의로우시도다 신실하시고 불의가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 듀엣 32:4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가 단순히 공정한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분이 항상 모든 사람에게 의롭고 선한 일을 행하신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라도, 그분이 악하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지옥으로 선고하시는 것 역시 옳고 선합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질문은, 그렇다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우리 각자에게는 그리스도가 없듯이!). 토저는 우리가 기독교의 칭의와 구원 교리를 통해 답을 찾을 수 있음을 상기시켜줌으로써 이에 답합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해 공의는 침해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실 때 만족됩니다.”

하나님의 다른 속성인 선하심, 자비, 사랑 , 은혜에 비추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불경건한 자들을 처벌하기에는 너무 친절하다고 잘못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무한하고 변함없는 정의의 현실을 무디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으로 죄에 대한 정의를 내리시거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에서의 영원한 진노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수많은 인류 중에서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그들 중 일부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나머지는 무엇을 얻나요? 그들은 정의를 얻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비를 받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정의를 얻습니다. 누구도 불의를 당하지 않습니다.” - RC Sproul


11.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 그분은 무한하고 변함없이 자비로우시며 친절하시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느니라.” 그러므로 원하는 사람이나 실행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고, 오직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 로마서 9:15-16

위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자비는 그분의 공의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분은 무한히, 변함없이, 변함없이 자비로우십니다. 즉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친절하십니다. 그는 지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동정심이 많습니다. 그분의 자비는 우리에게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Spurgeon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실로 모든 참된 자비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것은 과분한 자비입니다. 왜냐하면 마땅한 자비는 단지 정의를 잘못 부르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구원의 자비를 받을 권리가 없었습니다. 반역자가 즉시 영원한 불에 던져질 운명에 처해졌다면, 그는 마땅히 그 운명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노에서 구원을 받았다면 오직 주권적인 사랑 만이 원인을 찾았을 것입니다. 죄인 자신에게는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자비가 없다면 우리는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불순종한 마음 때문에 우리는 죽어 마땅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죄의 삯은 사망이니라 .” 그러나 자비 때문에 우리는 마땅한 것을 얻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토저는 하나님의 자비에 관해 이렇게 썼습니다. “심판은 도덕적 불평등에 맞서는 하나님의 정의인 것처럼, 자비는 인간의 고통과 죄책에 맞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세상에 죄가 없고, 고통과 눈물이 없다면, 하나님은 무한한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자비는 창조된 우주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그분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도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자비를 찬양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인간의 비참함과 죄입니다.”


12.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 하나님은 무한히 죄인을 용서하시는 경향이 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 시편 145:8

자비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저주)을 얻는 것이 아니라면, 은혜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자비는 인간의 비참함과 죄악에 맞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듯이, 은혜는 인간의 빚과 허물을 향한 그분의 선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 공로를 부여하시고 이전에 있었던 곳에는 빚이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은 그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가 영원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분의 은혜는 우리가 얻거나 잃지 않는 것입니다(“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 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 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 그분의 은혜는 또한 주권적입니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주고”( 출 33:19 ).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 이야기할 때, 신학자들은 종종 하나님의 일반 은혜와 구원의 은혜를 구별합니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의 작가 패트릭 마비로그(Patrick Mabilog)는 차이점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그분의 일반은총은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모든 사람이 생명과 공급, 풍요의 축복을 누리는 이유입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은 '그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시느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인류가 일반은총의 혜택을 받는 반면, 그리스도를 믿고 믿는다고 공언하는 사람들만이 구원의 은혜를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며, 우리는 그분을 위해 살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13. 하나님은 사랑하신다 – 하나님은 무한히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 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안다 .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요한일서 4:7-8

사랑. RC Sproul은 자신의 저서 God's Love 에서 “현실을 설명하기 전에 비틀거리는”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 
모든 속성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다른 속성에 비추어 볼 때에만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고 주권적이며 불변하고 무한합니다.

Tozer는 이렇게 썼습니다.
“자유로우신 하나님의 이상하고 아름다운 기이함은 그분이 자신의 마음을 감정적으로 인간과 동일시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자급자족하시므로 우리의 사랑을 원하시며 그것을 얻으실 때까지 만족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자유롭기 때문에 그분의 마음을 우리에게 영원히 묶어 두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활동적이어서 우리를 그분께로 이끄십니다.
그의 사랑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는 어떤 막연한 의미에서 인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을 사랑합니다. 
그분은 당신과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14.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 그분은 무한하고 변함없이 완전하시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이시로다” – 요한계시록 4:8

거룩하다는 말은 신성하다, 구별되다, 존경받다, 신성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말도 우리 하나님의 경이로운 거룩함을 묘사하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하나님의 모든 속성 중에서 거룩함은 그분을 가장 독특하게 묘사하는 것이며 실제로는 그분의 다른 모든 속성의 요약입니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그분의 분리됨, 그분의 다름, 그분이 다른 어떤 존재와도 다르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완전하고 무한한 완전함을 나타냅니다.
거룩함은 다른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그분이 끝없이, 항상 완전하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그분의 기준도 완벽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48
 절에서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거룩한 표준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토저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요구하는 바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관심은 우주의 도덕적 건강, 즉 거룩함이므로, 이것에 반대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그분의 영원한 불쾌하심 아래 있습니다.
그분의 창조물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것을 파괴하려는 모든 것을 파괴하셔야 합니다.
그분은 죄악을 진압하고 돌이킬 수 없는 도덕적 붕괴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일어나실 때 진노하셨다고 합니다.
세계 역사상 모든 진노의 심판은 보존을 위한 거룩한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진노 , 피조물의 건강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타락하고 파괴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가 쏟아지는 것을 결코 경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의 죄값이 지불되었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여겨졌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실 때 그리스도의 완전한 거룩함을 보십니다.
오직 이것만이 우리가 눈부시게 순결하고 완전하며 거룩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서기를 바랄 수 있는 이유입니다.

15. 하나님은 영광스럽습니다 – 그분은 무한히 아름답고 위대하십니다


“그분의 광채는 햇빛과 같습니다. 그분의 손에는 광선이 비치고 그분의 능력이 숨겨져 있습니다.” - 하박국 3:4

존 파이퍼(John Piper)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다양한 완전성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위대함입니다. 무한한 아름다움, 그리고 나는 그분의 성품과 가치와 속성의 표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분의 모든 완전함과 위대함은 보이는 대로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양하다는 말을 사용한다.”

Ligonier.org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생각할 때 눈부신 빛의 이미지가 종종 우리 마음에 떠오릅니다. 성경은 종종 우리가 지상에서 경험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밝게 빛나는 빛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하기 때문에 그것은 확실히 적절합니다 .”

물론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다른 속성들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영원하고, 무한하며, 변함없이 영광스럽습니다. 그의 광채와 아름다움은 그의 존재와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나옵니다. 이사야 43장 7절은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존재와 목적은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예비하신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인간은 다른 것에서 영광을 찾으려 하거나, 자신을 영광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할 때, 우리는 자신을 낮추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유일한 분에게 시선을 돌릴 것을 결심해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

해리 할로(Harry Harlow)의 원숭이 애착 실험, 모성애 관련 연구, 모유 수유와 모아 애착

교육학에는 '하아로우의 실험'이라는 이론이 있다. 심리학자인 하아로우교수가 이런 실험을 했다. 젖을 먹는 아기 원숭이들 앞에 엄마 원숭이 대신 두 개의 인형을 만들어 놓았다. 두 개의 인형 중 하나는 철사로 엄마 원숭이처럼 만들어 그 철사로 만든 인형 원숭이의 가슴에 우유 병을 넣어 두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엄마 원숭이를 만들어 우유를 빨아먹을 수 있도록 가슴에 우유 병을 넣어 두었다. 그리고 나서 아기 원숭이들이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았다. 첫날에는 아기원숭이들이 두 인형 속에 있는 우유를 모두 빨아먹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는 철사로 만든 인형에게는 가지 않고 천으로 만든 인형에게만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만든 엄마 원숭이 인형의 우유를 아기 원숭이들이 먹었다. 이러한 실험에서 보듯이 동물들도 부드럽고 온유한 것을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관계도 그렇다. 날카롭고 딱딱하고 매정한 사람보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을 서로 찾는다. 같은 재능, 같은 기술,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사회에서 원하는 사람은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에게 친구가 있고, 이웃이 있기 마련이다. 온유한 마음이 있는 곳에 훈훈한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건전한 사회생활이 있는 것이다. 온유한 마음은 팔 복중에 하나이다. 온유함으로 사람을 대하게 되면 경직된 관계도 부드러워 지고 서로에 대한 신뢰감도 깊어져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사랑이 충만해지며 화평을 이루게 될 것이다



5월은 왜 ‘가정의 달’이 됐을까?

  • 5월, 따뜻해진 날씨와 함께 가정의 달이 돌아왔다. 가정의 달은 ‘세계 가정의 날’의 영향을 받아 제정됐다. 세계 가정의 날은 1989년 국제연합(UN)이 가정의 역할과 책임의 중요성에 대해 정부와 민간의 인식을 제고하기 위한 날로, 지난 1994년을 ‘세계 가정의 해’로 설정하고 매년 5월 15일을 가정의 날로 지정했다.

    우리나라 또한 지난 2004년 2월 ‘건강가정기본법’에 따라 세계 가정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공식 지정했다. 정부는 매년 이를 기념하는 기념식을 진행하며, 보건복지부와 한국건강가족실천운동본부를 비롯한 관련 민간단체도 공동으로 다양한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큰 영향력을 미치고,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곳으로 손꼽히는 ‘가정’. 가정의 달이라는 이름답게, 5월은 특히나 온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기 좋은 기념일로 가득하다.


  • ◇ 5일 어린이날

    5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어린이날’일 것이다. 주인공인 어린이들은 물론, 달콤한 휴일을 맞은 성인들과 부모에게도 어린이날은 마음이 들뜨는 날이다.

    어린이날은 어린이들이 올바르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도록 하고, 어린이에 대한 애호 사상을 앙양하기 위해 지정한 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어린이 인권 운동가 소파 방정환이 1922년 5월 제정했다.

    어린이날은 5월 중 가장 많은 행사와 축제가 열리는 날이기도 하다. 온 가족이 모여 웃고 떠들 수 있는 축제가 한 달 내내 가득하다.


  • ◇ 8일 어버이날

    떠들썩한 어린이날을 보내자마자 다가오는 것, 바로 어버이날이다. 어버이날은 어버이의 은혜에 감사하고, 어른과 노인을 공경하는 전통적 미덕을 기리는 날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1956년부터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지정해 경로효친의 행사를 진행해왔다. 행사 과정에서 ‘아버지의 날’이 거론되면서 1973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어버이날’로 변경 지정됐다.

    어버이날에는 가정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며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전국 지자체에서는 경로주간 등 어버이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어 지역의 어른들께 공경을 표하기도 한다.


  • ◇ 15일 스승의 날

    세계 가정의 날과 같은 날짜에 기념하는 스승의 날은 교권존중과 스승 공경의 사회적 풍토를 조성해 교원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하기 위해 지정됐다, 1958년 5월 8일, 청소년 적십자 단원들이 세계적십자의 날을 맞아 퇴직한 교사들을 위문한 데서 시작됐으며, 이후 1963년 5월 24일 ‘은사의 날’과 1964년 5월 26일 ‘스승의 날’을 거쳐 왔다.

    5월 15일은 세종대왕의 탄신일이다. 세종대왕은 즉위 34년간 백성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특히, 한글을 창제하며 교육적으로 큰 업적을 세웠다. 이에 지난 1965년, 이러한 세종대왕의 탄신일을 기억하기 위해 스승의 날을 5월 15일로 변경했다.

    스승의 날은 전 국민의 가슴 속에 영원한 스승으로 남은 세종대왕처럼, 이 땅의 교사들이 훌륭한 스승으로서 학생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자리 잡을 수 있기를 염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 ◇ 21일 부부의 날

    부부의 날은 비교적 최근에 지정된 날이다. 지난 2003년, 민간단체인 부부의 날 위원회가 제출한 ‘부부의 날 국가 기념일 제정을 위한 청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결의되면서 2007년에 법정기념일로 제정됐다. 

    부부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화목한 가정을 일구기 위해 기념하는 날인 부부의 날은 핵가족시대 가정의 핵심인 ‘부부’가 화목해야 청소년 문제, 고령화 문제 등 각종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가정의 달인 5월에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의미를 담아 매년 5월 21일을 부부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도입 이야기)

5월의 첫 날을 맞이하는 새벽에
독일이 낳은 시인 괴테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는 끼울 구멍이 없어진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시작이 중요하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가리켜 이성의 동물, 지혜로운 동물이라 합니다.
그 지혜 중에 가장 중요한 지혜는 새 출발의 지혜입니다.
시작이 가장 중요하듯이 첫발 짝을 내딛는 마음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노자는 "천리 길도 발 밑 한 발짝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습니다.
"길을 잘못 들면 아무리 잘 뛰어도 소용이 없다."는 격언도 있습니다.

하루 계획은 아침에 있고, 한 해의 계획은 봄에 있고, 인생이 계획은 청소년 시절에 있다고들 말합니다.
그만큼 시작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05-01-2024(수) 요한일서 1:5-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은 빛이시라(God is light)(5절)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This is the message we have heard from him and declare to you: God is light; in him there is no darkness at all.

빛(포스.  phōs)  φῶς, φωτός, τό 스트롱번호  5457

1. 빛.  2. 마 17:2. 3. 빛을 내는 물건
발음 [ phōs ]
어원 / φάω ‘반짝이다’에서 유래

빛(마 4:16, 눅 8:16, 딤전 6:16), 불(막 14: 54), 불빛(눅 22:56), 등불(요 5:35, 행 16:29), 광채 (행 12:7), 광명(고후 11:14)

어둠(스코토스. skŏtŏs)  σκότος, ους, τό 스트롱번호 4655

1. 어둠.  2. 알려지지 않은 상태를 나타냄.  3. 종교적 도덕적 암흑
발음 [ skŏtŏs ]
어원  / 4639의 어간에서 유래

흑암(마 4:16, 골 1:13, 유 1:13), 어둠(행 26:18, 벧후 2:17, 마 6:23, 고후 4:6, 요일 1:6).

* 4639.  σκιά, ᾶς, ἡ 스트롱번호 4639

1. 그림자.  2. 예표
발음 [ skia ]

1. 그림자, 그늘, 행 5:15.
2. 그림자, 예표, 전조, 히 8:5.

그늘(마 4:16, 막 4:32, 눅 1:79), 그림자(행 5:15, 골 2:17, 히 10:1).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분이 아니신지를 알려줍니다.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부정확하기 마련입니다(욥 42:7).
한편으로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된다는 말도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단순화된 생각입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실패하면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거짓 신들을 세우고, 쫓으며, 숭배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출 20:3-5).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 관하여 스스로 드러내기로 하신 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혹은 특징 중 한 가지는 ‘빛’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에 관한 정보를 스스로 드러내신다는 의미입니다(사 60:19; 약 1:17).

이사야 60:19
다시는 가 네 이 되지 아니하며 도 네게 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야고보서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에 관한 지식을 계시해 오셨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히 4:1).
창조, 성경 그리고 말씀이 되신 육신(예수 그리스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의 일부이며(창 1:1; 시 24:1),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봅시다. 인간은 나머지 피조물들보다 위에 있으며 그것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습니다(창 1:26-28). 하나님의 창조는 타락으로 인해 손상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창 3:17-18; 롬 1:19-20). 하나님의 창조하심의 광대함, 복잡함, 아름다움 그리고 질서를 깊이 살펴보면 하나님께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중 몇 가지를 살펴보는 것도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아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 이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엘로힘 (Elohim) - 강한 자, 신성 한 자 (창 1:1)
아도나이 (Adonai) - 주(主),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주인을 가리킴 (출 4:10, 13)
엘 엘리온 (El Elyon) - 지극히 높으신 자, 가장 강한 자 (창 14:20)
엘 로이 (El Roi) - 만물을 감찰하는 자 (창 16:13)
엘 샤다이 (El Shaddai) - 전능하신 하나님 (창 17:1)
엘 올람 (El Olam) - 영원하신 하나님 (사 40:28)
야훼 (Yahweh) - 주 하나님 “스스로 있는 자”,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출 3:13, 14)

‘하나님은 영원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 없으시고 항상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불멸하시며 무한하십니다(신 33:27; 시 90:2; 딤전 1:17). ‘하나님은 불변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말 3:6; 민 23:19; 시 102:26, 27). 하나님은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행하신 일과 그분의 존재에 있어 하나님과 대등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필적할 수 있는 것은 없고 그분은 완벽하십니다(삼하 7:22; 시 86:8; 사 40:25; 마 5:48). 하나님은 불가해하고 측량할 수 없으며 헤아릴 수 없는 분이십니다. 누군가가 그분에 대해 완전히 알아내거나 그분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사 40:28; 시 145:3; 롬 11:33, 34).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신 32:4; 시 18:30).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하심은 그분의 성품과 항상 일치합니다(계 19:6; 렘 32:17, 27). 하나님이 편재하신다는 것은 그분이 어디에나 존재하신다는 의미이지 하나님이 곧 우주 만물이라는 뜻은 아닙니다(시 139:7-13; 렘 23:23). 하나님은 전지하시기에 과거, 현재, 미래를 아시고 심지어 매 순간 우리가 하는 생각까지도 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에 그분의 판단은 언제나 공정합니다(시 139:1-5; 잠 5:21).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 분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으며 그분만이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필요와 갈망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예배와 헌신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신 6:4). 하나님은 의로우시기에 우리의 잘못을 간과하거나 그냥 지나칠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정의로우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셔야 했던 것입니다(출 9:27; 마 27:45-46; 롬 3:21-26).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은 그분이 최고의 자리에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이 힘을 합쳐도 그분의 목적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시 93:1; 95:3; 렘 23:20).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요 1:18; 4:24).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일체 속에 삼위(세 위격)이시고 삼위는 같은 본질이며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합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그분은 부패하시지 않으시며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시 117:2; 삼상 15:29).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도덕적인 부패에서 분리되셨으며 그것을 대적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악을 보시며 그것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로 묘사됩니다(사 6:3; 합 1:13; 출 3:2, 4-5; 히 12:29).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그분의 은혜는 선하심, 친절하심, 인자하심과 그분의 사랑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분의 얼굴로부터 우리를 막을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을 인격적으로 알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출 34:6; 시 31:19; 벧전 1:3; 요 3:16, 17:3).

하나님은 무한하신 존재이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질문에 충분히 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지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온 마음을 다해 계속 하나님을 찾기를 기원합니다(렘 29:13).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 '

소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앙겔리아'(*)는 신약 성경에서 본절에만 사용된 것으로 2, 3절에서 언급된 사도들이 선포한 생명의 말씀을 가리킨다.
요한은 이 소식에 대해 '저에게서 듣고'라고 표현함으로 생명의 말씀이 역사적인 예수의 생과 가르침 가운데 들려진 복음임을 강조한다(Smalley).

이 소식의 내용이요 주제는 바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빛'은 진리와 의로움울 상징하는 것으로(시 27:1; 36:9; 119:130; 사 5:20; 미 7:8b; 말 4:2).
하나님은 영이시고(요 4:24), 사랑이시라(요일 4:8)는 표현과 함께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낸다.
요한은 자주 '빛과 어둠'을 대조시켜서(요 1:4; 8:12; 9:5; 12:35, 36) 하나님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 거하는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본성에 합당한 생활, 즉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을 살도록 도덕적인 요청을 하고 있다(6,8,10절; 2:4,6,9;눅16:8; 요 8:12; 엡 5:8-14, Houlden, Wilder, Barker).


시편 76:4에서는 하나님에 관해 “주는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요한일서 1:5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비유입니다.

잠언 4장 18절에서는 의를 “돋는 햇살”이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2장 15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늘에서 빛나는 “순전하고 흠 없는” 별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빛을 착한 행실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16)

하나님이 빛이라는 말씀은 어둠과 자연스럽게 대조를 이룹니다.
빛이 의와 선을 말한다면, 어둠은 악과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불빛 하나가 아니라 빛 자체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본질입니다(요일 4:8).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숨김이 없으시며, 온전히 거룩하시고, 어떤 죄도 없으시며, 죄악도 없으시며, 불의도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빛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있으며 빛 가운데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빛 가운데 걸어가는 사람들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며”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벧후 1:4).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의 아들도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12).

“따른다”는 것은 진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거룩하게 성장하고 믿음 안에서 성숙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벧후 3:18 참조).

하나님은 빛이시며 믿는 자들은 그 빛을 세상으로 반사하여 어둠에 갇혀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밝은 곳을 향하여 나갈 수 있는 믿음의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

하나님은 물리적인 빛의 창조자이시며 또 우리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영적인 빛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빛은 어둠 속에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며 그 모습 그대로 보여줍니다.
빛 가운데 걷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이해하며, 의롭게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잘못을 포함하여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어둠에 대해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 모든 어둠에 빛을 비추시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만히 앉아 다른 사람들이 죄의 어둠에 빠져 있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어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될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은 어둠을 쫓아내고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나누어야 합니다(사 9:2; 합 2:14; 요 1:9).
복음의 빛을 세상에 전할 때 우리는 사람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것들을 드러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빛은 어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것입니다(요 3:20).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참 빛”이십니다(요 1:9).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신 우리는 죄로 어두워진 세상에 그분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증거할 때 우리의 목적은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예수님을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행 26:18).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요한일서 1:6에서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라고 말합니다.
또 5절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불빛 하나가 아니라 빛 자체라고 말하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빛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본질입니다(요일 4:8).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숨김이 없으시며, 온전히 거룩하시고, 어떤 죄도 없으시며, 죄악도 없으시며, 불의도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빛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있으며 빛 가운데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며”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벧후 1:4).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의 아들도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12).
“따른다”는 것은 진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거룩하게 성장하고 믿음 안에서 성숙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벧후 3:18 참조).

하나님은 빛이시며 믿는 자들에게 그분의 빛을 비추어 그들이 매일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만들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
하나님은 물리적인 빛의 창조자이시며 또 우리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영적인 빛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빛은 어둠 속에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며 그 모습 그대로 보여줍니다.
빛 가운데 걷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이해하며, 의롭게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잘못을 포함하여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어둠에 대해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 모든 어둠에 빛을 비추시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만히 앉아 다른 사람들이 죄의 어둠에 빠져 있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어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될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은 어둠을 쫓아내고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나누어야 합니다(사 9:2; 합 2:14; 요 1:9).
복음의 빛을 세상에 전할 때 우리는 사람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것들을 드러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빛은 어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것입니다 (요 3:20).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참 빛”이십니다(요 1:9).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신 우리는 죄로 어두워진 세상에 그분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증거할 때 우리의 목적은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예수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행 26:18).





나타내신바 된지라(1:2)
-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을 "나타나게 하시고 보여주심으로 알게 하신다."

파네로오(phanĕrŏō) φανερόω 스트롱번호 5319

1. 나타나다.  2. 알게 하다. 3. 보여주다
발음 [ phanĕrŏō ]
어원 / 미래 φανερώσω, 제1부정과거 ἐφα- νέρωσα, 완료 πεφανέρωκα, 완료수동태 πε φανέρωμ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ἐφανερώθην, 미래수동태 φανερωθή- σομαι, 5318에서 유래

롬 1:19, 고전 4:5, 고후 2:14, 엡 5:13, 딤전 3:16, 벧전 5:4.

로마서 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린도후서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에베소서 5: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이니라.

디모데전서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베드로전서 5: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을 얻으리라.


* 드러내다(막 4:22), 나타나다(막 16:12, 요 21:14, 엡 5:13), 나타내다(요 2:11, 고전 4:5, 요일 1:2), 보이다(롬 1:19, 계 3:18), 알려지다(고후 5:11).


본절은 일종의 삽입어구로 앞절의 내용을 확대시킨 것이다.
헬라어 본절 처음에 나타나는 접소사 '카이'(그리고)는 이어지는 3, 4절을 소개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으며, 본서 내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 방법이다(2:27; 3:19-24, Smalley).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

'생명'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헤 조에'()는 1절에서처럼 예수 자신의 존재와 그의 복음을 가리킨다(Westcott).
한편 '나타내신 바'는 예수의 지상 사역을 의미한다.
즉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 상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이 역사적으로 예수 안에서 계시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시지 않는한 인간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Stott, Smalley).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고 너희에게 전하노니. -

본문은 세동사, 즉 '보았고'(3708), '증거하고'(3140), '전하노니'(518)를 통하여 경험의 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C Smalley).
'보았고'의 헬라어 '헤오라카멘'(*)은 그 진의와 중요성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살펴본다'는 의미로서 요한의 개인적 경험을 시사하며,
'증거하여'는 요한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개인적으로 전할 뿐만 아니라 사도로서 공적으로 선포하였음을 나타낸다(Law, Brooke).


'보았고'(3708) 호라오(hŏraō )   ὁράω 스트롱번호 3708

1. 보다.  2. 마 28:7.  3. 눅 1:22
발음 [ hŏraō ]
보이다(마 8:4), 알리다(마 9:30), 주의하다(마 16:6), 보다(눅 1:22, 요 1:18, 고전 9:1).



'증거하고'(3140) 마투레오(martürĕō)  μαρτυρέω 스트롱번호 3140

1. 증언하다.  2. 입증하다.  3. 유리하게 증언하다
발음 [ martürĕō ]
어원 / 미완료 ἐμαρτύρουν, 미래 μαρτυ- ρήσω, 제1부정과거 ἐμαρτύρησα, 완료 μεμαρτύρηκα, 수동태: 미완료 ἐμα- ρτυρούμην, 완료 μεμαρτύρημαι, 제1부정과거 ἐμαρτυρήθην, 3144에서 유래
증명하다(마 23:31), 증언하다(눅 4:22, 요일 1:2), 경계하다(살전 2:12), 칭찬하다(행 10:22).


'전하노니'(518) 아팡겔로(apanggĕllō)  ἀπαγγέλλω 스트롱번호 518

1. 보고하다.  2. 마 2:8.  3. 마28:11
발음 [ apanggĕllō ]
어원  / 미완료 ἀπήγγελλον, 미래 ἀπαγ- γελῶ, 제1부정과거 ἀπηγγέλην, 제2부정과거수동태 ἀπήγγειλα, 575와 32의 어간에서 유래

고하다(마 2:8, 막 6:30, 행 23:16), 알게 하다(마 12:18, 28:8), 이르다(눅 8:36, 9:36, 요 20:18), 전하다(행 12:17, 15:27, 26:20, 요일 1:3), 전파하다(고전 14:25), 선포하다(히 2:12), 말하다(행 11:13), 할 말(행 23:16,17).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

헬라어 본문에는 바로 앞에 '영원한 생명'(텐 조엔 텐 아이오니온)이 자리잡고 있어서 본절 처음에 나타난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와 같은 의미의 반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보다 발전된 표현으로 '생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부각시키고 동시에 생명의 결정적인 근원으로 '아버지와 함께'를 제시한다(Smalley).
이러한 사실로 보아 '영원한 생명'은 생명의 길이가 영원함을 뜻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생명이 갖고 있는 신적인 성격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Barker, Wilder).


성공적인 삶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나 자신의 노력만 가지고서는 안된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어려운 환경과 여건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힘이 아닌 다른 힘이 필요한 것이다.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원래 귀족 출신으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았으나 늘 죄에 대한 공포와 불안한 마음으로 늘 괴로움을 겪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적한 시골길을 가던 중 농부를 만났는데, 그 얼굴에는 유난히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그는 농부에게 가서 평화스런 삶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언제나 내 마음은 기쁠 뿐이다”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그 날부터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그는 하나님을 만나 과거의 불안과 공포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바로 사는 길이다” 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04-30-2024(화) 요한일서 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생명의 말씀(The Word of life)(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at and our hands have touched--this we proclaim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요한일서는 1장부터 5장까지 구성된 매우 짧은 내용입니다(105궞ㄹ).
그렇지만 성경의 핵심적인 내용을 가장 빠른 시간에 살펴볼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한번씩 요한일서 전체를 정독(精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의 묵상을 위한 주제가 되는 말씀을 집중적으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의 묵상을 위한 주제는 "생명의 말씀(The Word of life)"입니다.

들은바(191) 아쿠오(akŏuō)  ἀκούω 스트롱번호 191

1. 듣다. 2. 마 10:14
발음 [ akŏuō ]

듣다(마 2:3, 눅 4:28). 들리다(계 12:10).

'보았고'(3708) 호라오(hŏraō )   ὁράω 스트롱번호 3708

1. 보다.  2. 마 28:7.  3. 눅 1:22
발음 [ hŏraō ]
보이다(마 8:4), 알리다(마 9:30), 주의하다(마 16:6), 보다(눅 1:22, 요 1:18, 고전 9:1).

* 보다(블래포.  blĕpō) βλέπω 스트롱번호  991

1. 보다.  2. 들보. 3. 큰 건물들
발음 [ blĕpō ]

[기본형] 미래 βλέψω, 제1부정과거 ἔβλεψω
관련 성경
보다(마 5:28, 눅 6:41, 요 1:29), 보게 되다 (마 12:22), 뵙다(마 18:10), 주의하다(마 24:4, 막 8:15, 눅 21:18), 삼가다(막 4:24, 눅 8:18), 보이다(막 8:23), 조심하다(막 13:9, 고전 8:9), 돌아보다(눅 9:62), (눈이)밝아지다(요 9:7).

보다 (to look on) : 호라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18)

'보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호라오'는  깨달아 안다는 의미에서 '눈으로 보다, 마음으로 보다,  인지하다, 알다, 경험하다, 주의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어에는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여러 개가 있다.

'그냥 응시하다,  보여지다' 라는 '옵타노마이'
단지 기계적이고 수동적이거나 우연한 응시를 표현하는 '겉을 보고 깨닫다,  지식을 갖다, 확신하다, 발견하다, 보다, 알다'라는 '에이도' ('우상'이라는 '에이돌론'에서 유래되었으며,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형태, 외모를 보고 확신해 버리면 우상이 되어 버린다)가 있다.

좀 더 진지하게 본다는 의미에서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보고 배우다, 방문하다'라는 뜻을 가진 '데아오마이'
크게 뜬 눈으로,  현저한 어느 것을 향한 것처럼 자발적인 관찰이라는 의미에서 '경험으로 알다, 마음의 눈으로 보다, 이해하다, 생각하다'라는 뜻을 가진  '블레포'가 있다.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들을 정리하면,
단지 응시하는(옵타노마이) 단계에서 그대로 보고 판단해 버리는(에이도) 단계로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보아(데아오마이) 경험과 마음으로 아는(블레포)  단계를 통하여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는(호라오) 것이다.

성경은 원래부터 항상 하나님을  본(호라오)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그러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호라오)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청결하고 흠 없는(카타로스) 자는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으로만 청결하고 흠없게 될 수 있다(요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You are already clean because of the word I have spoken to you. 

선악의 주체가 된  '나'의 말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섬김을 받는 자가 비로소 하나님을  '호라오'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호라오)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다(에이도)(요 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Come," he replied, "and you will see." So they went and saw where he was staying, and spent that day with him. It was about the tenth hour.

εἴδω 스트롱번호 1492

1. 보다.  2. ㉠ 별을 보다. 3. 눅 7:22
발음 [ ĕidō ]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보려고(에이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보이는(옵타노마이) 만물을 통하여 말씀을 보는(호라오)자가 하늘 백성인 성도이며, 바로 그가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는(호라오)자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며  그리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가 된다(갈 2:20). 

영원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영생을 보는(호라오)자인 것이다(요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Whoever believes in the Son has eternal life, but whoever rejects the Son will not see life, for God's wrath remains on him.



* 자세히 보고(2300) 데아오마이( thĕaŏmai)  θεάομαι 스트롱번호 2300

1. 보다.  2. 마 11:7
발음 [ thĕaŏmai ]

보이다(마 6:1, 막 16:11), 보다(마 11:7, 눅 5 27, 요일 1:11), 쳐다보다(행 1:11).



* 만진바라(5584) 프셀라파오(psēlaphaō) ψηλαφάω 스트롱번호 5584

1. 만져보다.  2. 다치다. 3. 손을 대다
발음 [ psēlapha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ψηλάφησα, 5567의 어간에서 유래

만져보다, 다치다, 손을 대다, 더듬다, 눅 24:39, 행 17:27, 히 12:18.

만져보다(눅24:39), 더듬다(행17:27), 만지다(히12:18, 요일1:1).






'증거하고'(3140) 마투레오(martürĕō)  μαρτυρέω 스트롱번호 3140

1. 증언하다.  2. 입증하다.  3. 유리하게 증언하다
발음 [ martürĕō ]
어원 / 미완료 ἐμαρτύρουν, 미래 μαρτυ- ρήσω, 제1부정과거 ἐμαρτύρησα, 완료 μεμαρτύρηκα, 수동태: 미완료 ἐμα- ρτυρούμην, 완료 μεμαρτύρημαι, 제1부정과거 ἐμαρτυρήθην, 3144에서 유래
증명하다(마 23:31), 증언하다(눅 4:22, 요일 1:2), 경계하다(살전 2:12), 칭찬하다(행 10:22).


'전하노니'(518) 아팡겔로(apanggĕllō)  ἀπαγγέλλω 스트롱번호 518

1. 보고하다.  2. 마 2:8.  3. 마28:11
발음 [ apanggĕllō ]
어원  / 미완료 ἀπήγγελλον, 미래 ἀπαγ- γελῶ, 제1부정과거 ἀπηγγέλην, 제2부정과거수동태 ἀπήγγειλα, 575와 32의 어간에서 유래

고하다(마 2:8, 막 6:30, 행 23:16), 알게 하다(마 12:18, 28:8), 이르다(눅 8:36, 9:36, 요 20:18), 전하다(행 12:17, 15:27, 26:20, 요일 1:3), 전파하다(고전 14:25), 선포하다(히 2:12), 말하다(행 11:13), 할 말(행 23:16,17).



생명의 말씀을 헬라어 성경에서는 "투 로구 테스 조에스(ου λογου της ζωης)" 라고 합니다.


로고스 /  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056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발음 [ lŏgŏs ]
어원 / 3004에서 유래



조에 /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1. 생명.
2. 죽음(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

헬라어 본문상 본절은 주절이 문장의 맨 끝에 오는 일종의 도치문으로 네 개의 관계절, 즉 '태초부터 있던 것', '우리가 들었던 것', '우리가 눈으로 보았던 것', '우리가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것'이 '생명의 말씀'을 수식하고 있다.

요한은 이러한 매우 복잡한 표현을 통하여 자신의 격렬한 감정을 적절히 언어화시키고 있다(Barker).
본문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Stott, Smalley, Westcott, Dodd).

첫째로, 영원하시고 인격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현을 의미한다.
즉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요 1:1).

둘째로, 복음을 의미한다. '생명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에스'(*)는 '말씀의 내용'(행 5:20; 빌 2:16)을 의미하기도 하고, '생명을 얻게 하는 것'(요 8:12; 6:35, 48:4:10, 11; 계 21:6; 22:1)을 가리킨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는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에 대한 본질적인 선포이기 때문이다(Smalley, Houlden, Westcott, Marshall).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은 만들어졌고 사람은 그 세상에서 내가 태어난 날부터 시작하여 죽는 날까지만 세상이라는 공간과 시간에 갇혀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제한된 시간과 공간안에만 머물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적은 생명의 말씀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므로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만 머물지 말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영원한 세계로 사람들을 초대하셨습니다.

생명의 말씀이 되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는 초대장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한국에 이디오피아 황제가 초청을 받아 방문하였을 때 당시 대통령이 주관하는 영빈관 만찬회에 초청장을 가지고 온 관계자를 통하여 초청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초청장의 내용에는 만찬회에 참석하기 위한 예복과 시간과 장소 그리고 앉아야 할 좌석 번호가 분명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세상 나라의 대통령이 초청을 할 때도 이와 같은 격식을 갖추어야 한다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어떤 절차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절차가 무엇일까요?
초청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초청장은 그 나라의 주인되시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권리를 위임받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발송된 초청장입니다.

우리들을 초청하신 그 분을 "생명의 말씀" 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영원한 생명을 나타내 주셨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1:2)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어떻게 생명을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까?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육신의 모양을 갖고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생명을 갖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유지해야 할까요?

요한일서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십계명과 율법의 613개의 조항을 두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라

이러한 사랑의 시작을 요한일서에서는 먼저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하라고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더구나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하고 깨우치셨습니다.

오늘 이 하루가 형제를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확신하는 복된 하루 생활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주님 앞에















04-29-2024(월) 요한일서 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태초(太初. In the beginning)(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at and our hands have touched--this we proclaim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우리 말에서 '태초(太初)"라는 단어는 "가장 처음"이라는 뜻으로 "시간의 시작" 즉 "시초(始初)"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태초(太初. In the beginning)' 라는 단어가 사용된 세 개의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때 사용된 '태초'는 하늘(天)과 땅(地)을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형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간(時間)을 만드셨습니다(太初, 始初).
하나님께서 공간(空間)을 만드셨습니다(天地).

둘째는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때 사용된 '태초'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은 만물의 시작이 있기 전부터 말씀으로 존재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말씀으로 존재하신 하나님은 시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존재하는 영원(永遠)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영원자(永遠自)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셋째는 요한일서 1장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때 사용된 '태초'는 만물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만드셨으며 그 말씀이 곧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이신 "예수님"으로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나타내신 것은 시간과 공간속에서 제한된 삶을 살아야 하는 인생들에게 시간과 공간속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영원한 삶을 얻게 될 것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승혁목사는 1949년 10월 16일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죽는 그 날까지 나라는 존재는 정해진 시간과 공간속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과 공간속에 살면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난다면 시간과 공간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원한 세계에 들어갔기 때문에 영생을 얻었다고 합니다.
만일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믿지 않는다면 내가 살아서 머문 그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생명의 말씀을 이 세상에 사람의 모양으로 보내셨습니다.
그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내가 태어나서 죽는 시간까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을 확신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신약 성경 요한일서의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하루에 한 번씩 요한일서의 말씀을 읽으시고 매일의 주제가 되는 묵상의 주제가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일은 "생명의 말씀"에 대하여 소개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생명의 말씀'은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며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존재하려는 목적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나는 전혀 상관없이 내가 태어난 후에 이 세상이 먼저 있었으며 그곳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신학적 사상 또는 신앙을 "선재성(先在性. preexistence)" 또는 "영원성(永遠性. eternity)"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과 요한일서 1장 1절의 '태초'는 만물의 시작을 알려주는 "말씀"으로 '그 말씀'에 의해서 만물이 있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 1절과 요한일서 1장 1절의 '태초'는 만물의 시작보다 먼저 존재하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말합니다.
또한 성경의 가르침은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구약에서는 "말씀" 즉 "다바르(dâbâr. דָּבָר)" 라고 하며 신약에서는 "로고스( lŏgŏs. λόγος)"라고 합니다.

로고스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려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요 1:14).

"말씀이(로고스) 육신이(사르크스)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스케노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로고스( lŏgŏs. λόγος)"는 우주의 근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다바르(dâbâr. דָּבָר)" דָּבָר 스트롱번호 1697

1. 말.  2. 복수로 쓰인 경우. 3. 약속
발음 [ dâbâr ]
어원 / 1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442회 사용

언어(창 11:1, 시 19:3, 잠 29:20), 말씀(창 15:1, 민 11:24), 일(창18:14, 출18:18), 말(창24:52, 출35:1, 신4:2), 명령(창44:2, 삼상15:11,13), 물건(출22:9), 대답(잠27:11), 사건(민25:18, 신19:15), 계명(신4:13), 규례(신15:2), 판결(신17:11), 뜻(신17:10), 직무(신24:5), 까닭(수5:4, 왕상9:15), 의견(삿20:7), 염려(삼상10:2),구변(삼상16:18), 이유(삼상17:29), 소식(삼하15:28), 식양(왕상6:38), 소문(왕상10:6),행위(왕상10:6, 16:20), 사적(事蹟)(왕상11:41,14:29), 행적(왕상14:19, 대하12:15), 지략(志略)(왕상14:29, 16:14), 독(왕하4:41), 불의(왕하17:9), 양(왕하25:30), 유언(대상23:27), 반(대상27:1), 글(대상29:29), 소행(느5:9), 생각(겔38:10), 한 마디(렘38:14), 조서(에1:19), 일기(에2:23), 소리(욥26:14, 시22:1), 용맹(욥41:12), 병(病)(시41:8), 목적(시64:5), 영광(시79:9), 표적(시105:27), 노래(시137:3),사물의 이치(전8:1), 불행(전8:5), 예언(렘28:6), 편지(렘29:1), 영(단9:25), 말미암다(창20:11, 신4:21), 조금(렘38:5), [동] 응하다 (겔12:23), 말씀하다(말1:1), 대하다(출8:12), 대답하다(민20:8, 삼하24:13), 이르다(창41:28, 왕상18:31), 상종하다(삿18:28), 상심하다(삼하13:33), 청하다(삼하14:15), 구하다(삼하14:22), 모의하다(왕상1:7), 허락하다(대하1:9), 무엇이든지(삿19:19), 구별하다(느12:47), 자세히(삼상3:18), 어찌(삼상11:12).



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056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발음 [ lŏgŏs ]
어원 / 3004에서 유래

로고스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말(마 5:37, 눅 1:20, 행 2:22), 말씀(마 8:8, 막 4:15, 행 6:2, 11:19, 14:25, 살전 1:6), 소리(눅 3:4), 소문(눅 7:17, 행 11:22), 이야기(눅24:17), 글(행 1:1), 언변(고전 1:5), 모양(골 2: 23), 일(행 15:6, 18:15, 19:40), 고발(행 19: 38), 전도(골 4:3), 결산(마 18:23, 25:19), 전파(막 1: 45), 말씀(막 2:2, 요 2:22, 행 20:35), 직고(벧전 4:5), 예언(벧후 1:19), 이유(마 5:32, 벧전 3:15).

보다 먼저 선재하는 "말씀(로고스)"을 말합니다.


우리 말에서 ‘태초’(太初)라는 단어는 ‘가장 처음’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만물이 시작하는 처음으로 시간적으로 처음 시작을 말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 1절과 요한일서 1장 1절에서의 '태초'는 시간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시작을 알려주며 동시에 시작을 할 수 있는 "말씀" 즉 "로고스"가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 1절과 요한일서 1장 1절에서의 '태초'는 "영원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로고스의 선재성(先在性)" 또는 "로고스의 영원성(永遠性)"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모든 만물이 존재하는 것은 우연(偶然)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로고스,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내가 존재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내가 태어난 후에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우주만물도 우연하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

본문은 9절에 서술한 성육신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육신'(사르크스)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 4:13).
따라서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보였으나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수난도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은 '육신'이라는 한 단어로 여지없이 붕괴시킨다.

한편 '사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 '소마'와는 다른 뉘앙스로 쓰였다.
즉 '사르크스'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이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롬 1:3,4).
즉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 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고전 1:24-31; 고후 10:4).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는 결코 부합 될 수 없다(롬 9:8).
그러나 이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 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으며(고후 5:21), 단지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히 4:15).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성육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보여준다. (1) 피곤(4:6) (2) 갈증(4:7) (3) 하나님께 의존(5:19) (4) 슬퍼 눈물을 흘리심(11:35) (5) 분노하심(11:38) (6) 갈등(12:27) (7) 수난과 죽으심(18, 19장) 등.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우리 가운데'(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천막을 치다'란 뜻의 동사 '스케노오'(*)의 부정과거 능동태인 '에스케노센'(*)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실증한다. 따라서 본절은 마1:18-2:23과 죽 2:1-20의 성육신 기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다. 한편 '에스케노센'이란 표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 장면과 본문의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해 준다.(1)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임시적으로' 이 땅에 계셨음을 가리킴. (2)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방랑할 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정해진 곳이 바로 '장막'이었으며, 특히 요한이 곧이어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영광과 장막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40:34이하). (3)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예수에 의해 확연히 밝혀졌음을 보여줌.

󰃨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보니'에 해당하는 헬랑어는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 뜻의 '데아오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놀라운 상태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아마도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변모*Transfiguration, 마 17:2-8;막 9:2-8;눅 9:28-36)에 대한 회상을 기초로 하여 사용한 용어인 것 같다. 그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를 저희 자선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라는 간구를 연상테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부활은 그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고전 2:7;벧전 5:4).

󰃨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즉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이 본문에서도 '...같이', '...만큼'이란 뜻을 지닌 부사 '호스'(*)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생자'(공동번역, '외아들')라고 번역된 '모노게누스'(*)는 '모노스'(*, '유일한')와 '게노스'(*, '종류', '혈족')의 합성어로서 누가 복음과 히브리서에서 '외아들'(눅 7:12;9:38;히 11:17) 또는 '외동딸'(눅 8:42)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3:16, 18;요일 4:9),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12절 주석 참조)중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3:17;갈3:26)이며,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1절 주석 참조;3:18;5:18;10:30;17:5, 24)이며, (3)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14:9;빌 2:6, 7)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부 학자들은 1:1-3절의 내용을 무시하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요일5:18의 내용을 증거로 하여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타내기위해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요일 5:18 주석 참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은혜와 진리'(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삼하 2:6).
사도 요한은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등질적(等質的)임을 묘사한 후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셨음을 시사한다(10:30).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한편 '가득차서 넘치는'이란 뜻의 헬라어 서술적 형용사 '플레레스'는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 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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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첫째 편지

요한의 첫째 편지(공동번역), 요한의 첫째 서간(천주교 성경), 요한 1서(표준새번역한글개역판)
첫 번째 요한서신이며, 네 번째 공동서신이다.
전통적으로 요한의 복음서와 나머지 요한 서신들과 함께 사도 요한의 저작으로 인정된다.
본 서신은 에페소에서 서기 95-110년경에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1]
예수가 "육으로" 왔다는 것을 부정하는 가현설을 반박하기 위해 쓰여졌으며, 기독교인들이 참된 교사를 분별하는 방법으로 윤리, 성육신의 인정, 사랑을 제시하고 있다.[1]

내용

본 서신의 주제는 하느님을 사랑하며 동행하는 것이다.[2][3]
저자는 독자들이 하느님과의 친교가 참된것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험을 기술하며, 영적 거듭남의 증거가 삶속에서 의를 실천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4]
또한 본 서는 악으로 가득차 사탄의 영향 아래 놓여있는 "세상"과, 이러한 세상으로부터 구분된 "하느님의 자녀"를 구분하고 있다.[5]

개괄

  • 1장 : 머리말 : 생명의 말씀, 빛 속에서 살아감 (2장으로 이어짐.)
  • 2장 : 빛 속에서 살아감, 사랑의 계명 준수, 그리스도인과 세상, 세상의 정의, 의로움의 실천 (3장으로 이어짐.)
  • 3장 : 의로움의 실천, 사랑의 실천
  • 4장 : 영의 식별, 사랑과 믿음
  • 5장 : 사랑의 뿌리인 믿음, 삼위일체의 정의, 영생의 정의와 구원의 영원한 보장 맺음말 : 영원한 생명

스타일

본 서신은 다른 서신들과는 다르게, 서신서 서두부와 종결부가 포함되어있지 않다.[6]
또한 본 서신은 문장구조의 다양성 없이 아주 간단한 스타일로 작성되었으며,[6]
접속사를 자주 생략(asyndeton)하였다.[7]
생각이 선형적으로 전개되는 바오로 서신과는 다르게, 요한의 생각은 고리모양으로 움직이며 천천히 전개된다.[5]
이는 히브리 시가와 비슷하나, 대구의 두 번째 구절이 첫번째와 같은 의미를 갖는 히브리 시가와는 달리 본 서신에서는 첫 번째 구절에 살을 붙여가며 여러번 반복하여 재현부를 구성해나간다.[8]
정리하자면, 본 서신은 종교적 권고(paraenetic)의 스타일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권고는 "개인적인 간청, 옳고 그른것/참과 거짓의 대조, 수사적 질문의 사용" 등으로 대표된다.[6]

일부 학자들은 본 서신이 전통적인 2행 연구(parallel couplets) 선집에 대한 요한의 주석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에른스트 폰 돕쉬츠(Ernst von Dobschütz)와 루돌프 불트만이 처음으로 주장한 이 이론은 현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아모스 윌더(Amos Wilder)는 "최소한, 본 서신에서 시적 구조나 논리 구조에서 저자의 것과 구분되는 구절들이 꽤 많이, 종종 이어져서 나온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9]

저작성

본 서신의 저작성은 전통적으로 노년기의 사도 요한에 의해 에페소에서 쓰여진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10] 본 서신의 내용, 언어, 그리고 논리 전개 방식은 요한복음, 요한 2서, 요한 3서와 상당한 유사점이 있는데, 세 서신을 동일한 저자가 작성했다는 증거가 된다.[1] 19세기 말의 성서학자 에른스트 드윗 버튼(Ernst DeWitt Burton)은 요한 1서와 요한복음이 같은 저자에 의해 쓰여졌다는 데에는 "합리적인 의심"이 있을 수 없다고 기술했고,[11] 아모스 윌더(Amos Wilder)는 이에 더해 "초기 기독교 전통과 현대 학자들의 대다수가 이 저작들의 저자가, 비록 사도 요한으로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같은 사람이라는데 동의해왔다"고 말했다.[2] 이와 같은 주류 시각은 스위스의 종교 개혁자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에 의해 대표되는데, 그는 "사랑을 받던" 사도의 생애를 정리하면서, 요한 1서를 두고 "가장 순수한 복음"이라고 칭했다.[12]

그러나 다른 현대 신학자들은 본 서신의 이와 같은 위치에 도전하고 있다. 비록 세 서신의 저자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에 거의 대부분의 학자가 동의한다 하더라도, 하인리히 율리우스 홀츠만(Heinrich Julius Holtzmann)과 C. H. 다드와 같은 학자들은 본 서신과 요한복음이 서로 다른 저자에 의해 쓰여졌을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2] 이와 같은 시각에는 최소 두가지 요지가 있다. 첫째는 본 서신에서 문장의 서두에서 종종 지시 대명사를 사용한 뒤, 접속사나 불변화사(particle) 후에 앞에서 사용한 지시대명사의 정의나 설명문을 배치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이와 같은 스킬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6] 둘째로는, 본 서신의 저자가 "복음으로 알려지지 않은것들에 대해서 다양한 수사적 표현으로 조건문을 사용"한다는 것이다.[13]

목적


네번째 복음서는 예수가 아버지에 의해 보내진 창세 이전부터 존재했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요한 공동체 외부인들과 유대인들로부터 도전받는 상황에 놓여있다고 스스로 말한다. 요한 1,2,3서는 "요한 공동체 내부의 분열을 기술"하고 있다.[14]

저자는 본 서신을 청자들로 하여금 기쁨이 "충만"(1:4)하고, "죄를 범하지 않"고(2:1), "서로 사랑해야" 하며(3:11), "하느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음(5:13)을 알게 하기 위해 본 서신을 썼다. 따라서 우리는 본 서신을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일반적인 목적과, 저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시험을 제공하는 특수한 목적으로 나눌 수 있다.[15] 저자는 그가 관리하는 교회에 영향을 미친 이단 교사들에 대해 걱정하는 것처럼 보인다.[10] 이들은 한때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으나 이단적 가르침을 전한 적그리스도(2:18-19)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이 교사들은 예수가 육신 없이 영으로만(4:2) 이 땅에 왔고, 따라서 그의 죽음은 인류의 죄에 대한 진정한 속죄가 되지 못한다(1:7)는 가현설을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10] 요한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간성을 부정하는 케린투스라고도 불리는 원시 영지주의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인다.[출처 필요]

저자의 목적(1:1-4)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청자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됨의 의미로, (1) 그리스도에 대해선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그의 속량하심(1:7-9; 2:2,25; 3:5; 4:9,10,14; 5:11-13,20)과 그의 변호를(2:1; 5:6,7) 받고, (2) 사람에 대해선 성스러움(1:6; 2:15,16,29; 3:10,12), 복종(2:3; 3:6,24; 5:2,3,18), 순결함(3:3,18), 믿음(3:23; 4:3; 5:5), 그리고 사랑(2:4,7,8; 3:11,14,16; 4:7,8,12,19-21; 5:1)을 제시하고 있다.

요한복음이 불신자들에게 쓰여진 반면에, 본 서신은 신자(5:13)들에게 쓰여졌다.[15] 본 서신에서 구약성경과 유대적 표현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청자는 유대인보다는 이방인으로 보인다.[10] 본 서신은 아마도 지역의 교회들을 순회하는 선교사를 통해 전달되었을 것이며, 요한의 사도성과 장로됨을 고려했을 때 회중들에게 큰 소리로 읽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16]

요한의 콤마

4세기 라틴어 번역본에 첨가된 삼위일체에 대한 구절은, 중세시대를 거치며 본문에 자연스럽게 추가되었는데, 이를 요한의 콤마라고 한다.[17]
15세기 이전의 어떠한 헬라어 사본에도 등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는 그의 1522년 신약성서 판본에 본 구절을 첨가해 출판하였다.[18]
그의 판본을 번역한 성경들 중에는 킹 제임스 성경(1611)도 있는데,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첨가된 구절을 이탤릭체로 표기하였다.

7For there are three that beare record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 8And there are three that beare witnesse in earth, the Spirit, and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se three agree in one.

18세기부터 본문비평에 의거해 만들어진 번역본들은 위 구절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각주로서 포함하고 있다.

  1. 각주


  2. Harris, Stephen L., Understanding the Bible (Palo Alto: Mayfield, 1985) "1 John," p. 355–356

  3. Wilder, p. 214

  4. Barbour, p. 346

  5. Barbour, p. 348

  6. Burton, Ernest DeWitt (1896). “The Epistles of John”. 《The Biblical World》 7 (5): 366–369. JSTOR 3140373.

  7. Wilder, Amos (1957). 〈Introduction to the First, Second, and Third Epistles of John〉. Harmon, Nolan. 《The Interpreter's Bible》 12. Abingdon Press. 211쪽.

  8. Barbour, J. H. (1896). “The Structure of the First Epistle of Saint John”. 《The Biblical World》 9 (5): 341–348. JSTOR 3140289.

  9. Barbour, p. 342

  10. Wilder, p. 212

  11. Burton, p. 367

  12. Burton, p. 366

  13. Johannes Oecolampadius, Sermons on the First Epistle of John (A Handbook for the Christian Life) (1523; ET 2017), p. 59.

  14. Dodd, C. H. (April 1937). “The first epistle of John and the Fourth Gospel”. 《Bulletin of the John Rylands Library》 21 (1): 129–156. doi:10.7227/bjrl.21.1.5.

  15. The New Jerome Biblical Commentary, Edited by Raymond E. Brown, S.S., Union Theological Seminary, New York; NY, William J. Dalton, S. J.; Roland E. Murphy, O. Carm. (emeritus) The Divinity School, Duke University, Durham, NC; [The Johannine Epistles, Pheme Perkins], with a foreword by His Eminence Carlo Maria Cardinal Martini, S.J.; Prentice Hall, Englewood Cliffs, New Jersey, 1990

  16. Barbour, p. 341

  17. Wilder, p. 210

  18. Houghton, H. A. G. (2016). 《The Latin New Testament: a guide to its early history, texts, and manuscript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78–179쪽. doi:10.1093/acprof:oso/9780198744733.001.0001. ISBN 978-0-19-874473-3.

  19. McDonald, Grantley (2017). 〈The Johannine Comma from Erasmus to Westminster〉. Dirk van Miert, Henk J. M. Nellen, Piet Steenbakkers, Jetze Touber (eds.). 《Scriptural authority and biblical criticism in the Dutch Golden Age: God's word questioned》 1.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61–72쪽. doi:10.1093/oso/9780198806837.003.0003. ISBN 978-0-19-8806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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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중 ‘태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은 로고스의 신격을 논함에 있어서 먼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εν αρχη ην ο λογος και ο λογος ην προς τον θεον και θεος ην ο λογος. en arche en ho Logos) 라고 말한다.

이 분절에서의 강조점은 로고스가 계셨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로고스가 태초에 계셨다는 데 있다.

로고스의 선재성(先在性) 또는 영원성(永遠性)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먼저 ‘태초’의 의미에 대한 고찰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태초’(太初)라는 말은 우리말의 문자 그대로는 ‘가장 처음’이라는 뜻이나, 결코 시간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영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말은 칠십인 역본(LXX) 창1:1에서도 요한복음1:1의 arche 를 쓰고 있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같지 않다. 즉 창1:1에서는 천지 창조의 기사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시기를 ‘태초’라고 하여 시간 개념을 나타내고 있는데 대하여 요1:1에서는 천지창조 이전까지의 영원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요1:1의 arche (아르케, 태초)는 aion (아이온, 영원) 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말하는 태초는 사실 태초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불트만은 이것을 단순히 ‘선재성’(先在性, pre-existence)으로 나타내지 아니하고 ‘선사성’(Vorgeschitiliche) 즉 영어의 pre-historical existence 로 표현하나, 로고스의 존재성에서의 그 개념은 오히려 영어의 atemporal (無時性) 또는 nontemporal 또는 비시성(非時性)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리스도의 선재에 있어서 그는 지음을 받지 않으셨으며(agnnetos = ingenerate), 그는 무시간적(無時間的, timeless)이며, 불가시적(不可視的, invisible)이며, 무형적(無形的, impalpable)이며, 무감각적(無感覺的, impassible)인 분이었으나 우리를 위하여 시간 안에 들어오셔서 가시적(可視的)이고 유형적(有形的)이고 감각적인 분이 되셨다.

요1:1의 ‘태초’에 대한 원어를 보면 창1:1의 히브리어 bereshith 나, 그 헬라어 번역인 70인 역본의 두 arche 나 신약 요1:1의 arche 나 모두 문자적으로는 시간적인 개념으로 ‘처음에’를 뜻하는 점에 똑 같다. 그러나 그 어휘가 요1:1에서는 창1:1과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그 차별성을 나타내고자 하는 시도에서 해석적인 번역을 시도한 것이 몇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중국어역 성경 중 소위 ‘구어역’(1962년 홍콩성경공회 ‘神版’)에서는 창1:1의 ebreshith 를 요1:1의 ‘太初’와는 달리 ‘起初’ 로 하고 있다. 이것은 요1:1의 로고스의 영원성=무시간성(無時間性)과 항1:1의 창조 역사(役事)의 시간성을 구별하고자 한 시도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1:1의 ‘太初’에 ‘초’(初) 자가 있는 한 창1:1의 ‘起初’와 근본적으로 다른 영원성을 나타내지 못 한다. 중국어역 성경 문리역본(1854년 역)에서는 요1:1과 요일1:1의 ‘태초’를 ‘元始’로 번역하고, 창1:1에서는 ‘太初’로 번역하고 있어, ‘元始’가 ‘太初’보다 이전임을 나타내고 있으나, 이 ‘元始’의 ‘始,’자에도 ‘始作’이라는 시간적인 개념이 들어가 있으므로 로고스의 영원성을 나타내는 데는 충분하지 못 하다. 또 ‘初’ 즉 ‘처음’이라는 말도 그 자체가 벌써 시간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거기에 ‘太’(‘가장’ 또는 ‘아주 크게’라는 뜻)라는 한정사가 붙을지라도 그 개념을 변경시키지 못 한다. 왜냐하면 ‘처음’이나 ‘크다’라는 개념은 거기에 아무리 그 정도가 큰 것이라고 할지라도 유한성(有限性)의 범주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영어의 ‘in the beginning,’ 독일어의 ‘Am Anfang,’ Au commencement,’ 일어의 ‘はじめに’(한자 표기로는 ‘始’ 또는 ‘太初’) 등 모두에서 같다. 우리말 성경에서 요1:1을 보면, 개역(1938년), 새번역 신약전서(1967년), 표준새번역(1993년), 개역 개정판(1998년) 등에서는 다 ‘태초에’라 하고 있으나, 예수셩교젼셔(1887년, 로스 역 신약전서)에서는 ‘처음에,’ 공동번역(1971년)에서는 ‘한 처음에,’ 천주교 200주년 기념성경(1992년)에서는 ‘맨 처음’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 196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쉬운 번역 또는 풀이역의 경향이 일어나, 여러 나라에서 그러한 번역을 볼 수 있다. 예컨대, 1966년의 ‘Good News For Modern Man'(소위 Today's English Version; 후의 Good News Bible) 초판에서는 "From the very beginning" 로, 제2판에서는 “Before the world was created”로 번역하였고, 독일어 번역 'Die Gute Nachricht'(1971년)에서는 “Am Anfang, bevor die Welt geschaffen”(처음,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으로 번역되어 있고, 香港聖經公會 발행의 現代中文譯本(1975년)에서는 ‘宇宙被造以前’으로, 當代聖經(1985년)에서는 ‘萬有之先’으로 번역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현대인의 성경(1985년)에서는 ‘우주가 존재하기 전에’ 등 거의 같은 뜻으로 풀이역을 하고 있다.



태초에(太初)


1.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잠언 8: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3. [이사야 41: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4.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5.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6. [요한복음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7. [히브리서 1: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창 1:1 (Genesis 1:1)

[개역성경]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히브리어]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영어 KJV]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영어ASV]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요 1:1 (John 1:1)

[개역성경]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헬라원어]  εν αρχη ην ο λογος και ο λογος ην προς τον θεον και θεος ην ο λογος
[영어 KJV]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영어 NIV]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영어 ASV]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요일 I:1 (John 1:1)

[개역성경]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헬라원어] ο ην απ αρχης ο ακηκοαμεν ο εωρακαμεν τοις οφθαλμοις ημων ο εθεασαμεθα και αι χειρες ημων εψηλαφησαν περι του λογου της ζωης
[영어 KJV]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upon, and our hands have handled, of the Word of life;
[영어 NIV]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at and our hands have touched--this we proclaim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영어 ASV]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that which we have heard, that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that which we beheld, and our hands handled,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창세기 1:1에 있는 “태초”라는 용어는 히브리 원어로 בְּרֵאשִׁית(베레쉬트)인데, 이것을 헬라어 ἐν ἁρχᾖ(엔 아르케)로 번역했고(LXX), 거의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는 in the beginning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용어를 한국어로는 동일하게 “태초에”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 “태초”(ἐν ἁρχή)라는 말은 요한복음 저자의 서신인 요한일서에는 앞프 아르케(απ αρχης)'"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영어성경에서는 from the beginning로 번역되었는데, 우리말로 “태초부터”입니다.

창세기의 “태초”와 요한복음, 요한일서의 태초의 의미는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태초”라는 말(용어) 자체가 시간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창세기나 요한복음, 요한일서에서 말하고자하는 목표와 그 접근방식이 다른 것뿐입니다.

창세기의 목표의 초점은 창조(creation)에 관한 것
요한복음의 목표의 초점은 그리스도의 구속(redemption)에 관한 것

문제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어원학적인 접근(etymological approach)과 신학적인 접근(theological approach)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철학적인 접근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1. 어원학적 접근 (Etymological Approach)

(1) 전술한 바와 같이 창세기의 “태초”와 요한복음, 요한일서의 “태초”는 그 용어에 있어서 다른 단어들과 달리 별로 다양하게 사용되지 않고, 거의 대부분 모든 것들(시간, 장소, 질서, 계급 등)의 시작(beginning)과 첫째(the first), 우두머리(head), 주권(sovereignty), 권세(power), 원리(principle) 등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모든 것의 첫째, 처음 곧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2) 이렇게 본다면, “태초”는 모든 것 즉 만물(피조물)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학자들 간에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창세기의 태초에 관하여는 이견(異見)이 없이 “시간”의 시작으로 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태초”에 관하여는 시간의 시작으로 보지 않고, “영원”과 관련시켜, 시간 이전, 영원의 아득한 어느 순간(momentum)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몇 가지 이유에서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1) 첫째로, 원어에 있어서 tyviareB(베레쉬트)나 ἐν ἁρχή(엔 아르케)는 분명히 시간의 시작의 한 지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tyviareB(베레쉬트)는 전치사 eB(베, in)와 명사인 tyviare(레쉬트, beginning)의 합성어입니다. 여기에서 tyviare(레쉬트)는 영어 beginning(시초), former state(이전 상태), former times(전번), 그 종류의 첫째로서 시간에 관련해서는 first fruit(초실), first born(장자)의 뜻으로, 위계(dignity)에 관련해서는 the first(첫째), chief(우두머리)등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헬라어의 ἐν ἁρχή(엔 아르케)도 전치사 ἐν(엔, in)과 ἁρχή(아르케, beginning)로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ἁρχή(아르케)는 a beginning(시초), origin(기원), first cause(제1의 원인)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영원”은 헬라어로 αἰών(아이온)으로, 신학적인 의미로 존재의 기간(period of existence)을 말할 때, 시간의 길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life(생명), life time(생명시간), life itself(생명자체)로 영원성(eternity)을 의미합니다. 질적인 의미라는 뜻입니다. 고로 “태초”는 영원의 어느 한 지점(a point of eternity)이 아니라 “시간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2) 영원과 시간의 개념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영원은 시간의 끝없는 연속이 아닙니다. 시간은 시작(알파)과 끝(오메가)이 있지만, 영원이란 그 본질부터가 다릅니다. 본질상 시간의 무한한 연속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초시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시간과 영원을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했기 때문에 영원을 시간의 연속으로 보고 구속을 논하다가 결국 구원사학파(Heilgeschichte School)로 낙인찍혔습니다. 영원은 시간의 연속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생명”(life) 곧 “영생”(eternal life)을 의미합니다.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무시간”(timelessness)을 의미하는데, 이 표현도 완벽하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원"(αἰών, 아이온)이란 시간을 제외시킨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것,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간을 초월한 “생명” 곧 “영생”(eternal life)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3) 어원학적으로 “태초”는 시간의 시작, 시간의 시작점이지, 영원의 어느 한 지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영원의 본질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영원과 시간은 본질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말하자면, 시간은 인간에게도 관련이 되어 있는 것이지만, 영원은 하나님에게 관련된 말입니다. 물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있으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始終)을 사람으로는 측량할 수 없다(전 3:11)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시간의 존재인 인간의 탈을 벗고 중생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부활의 몸”이 되어야만 합니다.

2. 신학적 접근 (Theological Approach)

(1) 신학적으로 “태초”는 창세기나 요한복음에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태초”가 시간의 시작점인 것과 같이 요한복음에서의 “태초”도 시간의 시작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화육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화육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던 예수님의 근본을 설명하기 위하여 선재하신 그리스도(preexistent Christ)라는 의미에서 로고스(λογός)를 논하고 있습니다. 이 로고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적 존재에, 그리고 레이마(ῥῆμα, rJhvmato" Cristou)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적 존재에 적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현재적 실존뿐만 아니라, 시간 전, 즉 창세전에 선재하신 영원 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모세와 요한의 “태초”에 대한 목표(goal)와 접근방법(the method of approach)이 차별화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창조(주)에, 요한은 구속(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 물론, 출발점은 동일합니다. 곧 그 출발점이 “태초”인데, 이 태초의 의미는 모세(창세기)에게 있어서나 요한(요한복음)에게 있어서 다른 지점이 아니라 동일한 지점으로서의 출발점(starting point)으로 “시간의 시작점”을 의미합니다.

(3) 그러나 그 목표(goal)에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는 출발점으로서의 “태초”로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요한은 출발점으로서의 “태초”로 “그리스도의 구속”에 목표를 두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같은 출발점(starting point)에서 모세는 “천지창조”를 논하고, 요한은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를 논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4) 좀 더 신학적 논리로 말하자면, 모세는 “태초”에 관하여, 창조론적으로 접근하는 반면에, 요한은 구속론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동일한 의미로서의 출발점인 “태초”를 서로 다른 접근방법을 사용하여, 모세는 그 지점(태초)에서 천지창조의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진행하여 “창조역사”를 말하고 있고, 요한은 그 지점(태초)에서 시작하여, 영원 전에도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유추하여 그 분이 바로 선재하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여 그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속하시려고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구속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태초로부터 영원 전에도 계시고, 육신이 되어 현재 우리 가운데에도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5) 다시 말하면, 모세는 “태초”가 아닌 영원의 세계에 스스로 계신 분(I AM THAT I AM, 출 3:14)으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yhila)께서 영원, 즉 창세전에 신의 회의(Divine Council)에서 내적교통(intra-communication)을 통하여, 가지고 계셨던 창조의 컨셉(concept)을 의논하시고, 이 프로젝트(project)를 가지고 창조를 시작하신 시점이 바로 “태초”인데, 이 태초마저도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속한 것입니다. 이 “태초”가 창조세계와 구속세계의 출발점이 됩니다.

요 1:1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신 시점이 시간의 시작인 태초에 비로소 계셨다는 뜻입니까? 그러나 “계셨다”(ἦν)는 단어는 미완료형(imperfect)의 부정과거로, 자존의 영구성, 영원성을 나타내는 말로, 영원 전뿐만 아니라, 그때로부터, 태초라는 시간의 시점에 계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의 시작인 태초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태초가 창조되기 전에서부터 계신 분으로, 창조의 시점인 “태초” 바로 그 때에 계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존재론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계시론적 차원에서 개진하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미 전제하고 있는 말씀과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언급할 필요가 없고, 계시론적 차원에서 언급하는데, 이것이 성경계시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계심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고 그의 나타내심, 즉 하나님의 계시의 차원에서 다루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 “태초”라는 시간적 시점에서 창조운동이 시작되었고, 구속운동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이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간으로서의 “하나님의 시간” (God's time)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시간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시점, 즉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ce)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태초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출발점이 되는데,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이 시간적 시점에서 창조만을 내다보며 하나님의 구속사건의 근원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구속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근본과 그의 구속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시점이 하나님의 창조운동과 구속운동을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starting point)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지점이 영원 가운데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며, 시간과 공간에 들어오신 그리스도의 본질(근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빌 2:6).

(6) 다음으로 요한일서의 태초도 역시 동일한 “창조의 시점”으로 생명의 말씀의 현존하신 시점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뿐만 아니라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ce)로 계신 분으로 과거에도 계시고, 현재에도 계시고, 앞으로 오실 자이신 그리스도(계 1:8)를 증거 하기 위한 요한의 논법입니다. 요 1:1~2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했는데, 말씀이 계신 동일한 시점에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고 하셨고, 그 때가 곧 “태초”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창세전에 계시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창세전 영원히 계신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과 함께 계셔서 그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시점이 곧 창세기의 태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재하신 하나님과 말씀과 그리스도가 만물을 창조하신 그 시점이 태초로, 바로 그 때에 하나님과 말씀과 그리스도가 함께 계셨고, 모든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으로부터, 그리스도로부터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요 1:3).

이 문제를 좀 더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요한일서 1장 1절 본문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이 말씀은 창세전에 있던 생명의 말씀(선재하신 그리스도)이 창조 시, 즉 태초부터(창조하신 그리스도) 계셨고, 재창조시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성육하신 그리스도)로 이 모두가 동일하신 그리스도로,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으로서의 그리스도(계 1:4, 8)를 증거 하기 위한 요한의 논법입니다. 여기서 특히 창조 시인 태초부터, 즉 역사 속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본문에서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 사실, 선재하신 그리스도(preexisting Christ)가 아니라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성육하셔서 나타나신 그리스도가 복음을 전하시고 몸소 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결 론 (Conclusion)

(1) 창세기의 “태초”나 요한복음, 요한일서의 “태초” 역시 시간의 시작점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태초라는 말 자체가 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에서 그리스도의 선재성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면, “태초에”(έν ajrch)이거나 “태초부터”(ajp! ajrch'")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pro; to;n kovsmon) 말씀이 계셨다거나 “창세전에”(pro; to;n kovsmon)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어야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에서는 창조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구속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태초에”(έν ajrch)와 “태초부터”(ajp! ajrch'")라고 언급한 것입니다.(cf. 요 17:5, 24; 엡 1:4; 마 13:35, 24:21, 25:34; 눅 11:50; 요 9:32; 롬 1:20; 엡 1:4; 벧전 1:20; 계 13:8).

(2) 창세기에서 모세는 “태초”라는 시점에서 천지창조의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고,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같은 “태초”라는 시점에서 삼위일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근본을 바라보며, 그 근본으로부터 성육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의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또한 요한일서의 “태초부터”(ajp! ajrch'") 있는 생명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계신 분으로, 우리가 처음부터(구약과 신약시대) “들은 바요,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해서 성육하신 성자의 신성(divinity)과 인성(humanity)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3) 모세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창조론에, 요한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구원론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같은 시점인 “태초”이지만, 모세는 그 태초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요한은 그 태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세계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다시 쉽게 설명하자면, 모세는 태초에서 창조세계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고, 요한은 태초에서 말씀(λογός)이신 하나님(!yhila)으로 선재하셨던 그리스도로부터 성육하신 구속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방향, 즉 양면의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 신학적인 전문용어로 “절대성의 태초”(Absolute Beginning)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태초와 요한의 태초는 동일한 것으로 전개방향과 목표가 다를 뿐입니다.

(4) 결론적으로, 모세가 사용한 창세기의 태초와 요한이 사용한 요한복음의 태초는 같은 시점으로 “시간의 시작”(the beginning of time)입니다. 단지 그들이 의도하고 있는 목표(goal)와 전개하는 방향이 다를 뿐입니다. 모세의 목표의 초점은 창조(creation)에, 요한의 목표의 초점은 구속(redemption/salvation)에 있기 때문에, 접근방법과 진행방향이 다를 뿐입니다.

태초에 관한 도표해설

<태초>

[창세기]

(영원) 창세전 .................................... ⇢ 창조 .......................⇢ 창세후 역사 (종말)
창세전에 계신 하나님이 ................ ⇢ 태초에 창세에 계셔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 (종말)

[요한복음]

(영원) 창세전 ⇠그리스도(선재) .................... ⇢ 구속 그리스도(화육) ⇢ 예수 ............ ⇢ (종말)
창세전에 계신 그리스도가 ............... ⇢ 태초에
(창세에)도 계심 창세전 영원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 ⇢ 말씀이 계속해서 존재해 오시며 바로
계시니라 창세, 즉 태초에 계셨다는 뜻
(선재의 X가 창조 시에도 계심)
...................... ⇢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그리스도
계셨으니 (창세전에) 께서
................ ⇢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곧 하나님이시라는 뜻
(요 1:1)
.................................................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요 1:14) (성육신) (신약시대)

<>[요한일서]

(영원) 창세전 ⇠ ................말씀/그리스도 구속 그리스도(화육)⇢ 예수 ⇢............ (종말)
창세전의 생명의 말씀 ............... ⇢ 태초부터
창세부터 ...........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 1:1) (성육하신 그리스도)




요한일서(ⅠJohn)

Ⅰ. 배경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의 저자는 요한복음의 저자와 같은 사람이다.
요한이 노인이 된 후 90∼91년경 에베소에서 기록 하였다.
이 서신에는 구약의 인용문이 한 곳도 없다.

Ⅱ. 내용과 주요 사상

이 때는 교회와 회당이 완전히 분리 되었고 믿음과 행위의 논쟁도 끝난 때이다.
그러나 이때 거짓 교훈들이 들어 왔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상으로서 나중에는 “가현설”이란 이단으로 발전 되었다.
그리고 죽은 분은 인간인 예수 이었고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 고난에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서신의 목적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는 것
둘째는 교회에 침투해 온 거짓 교회를 타파시키기 위한 것

이 서신에는 “빛”(1:7, 2:9, 10)과 “사랑”(2:5, 7, 10, 15. 3:1, 2, 10, 11, 14, 16, 17, 18, 21, 23. 4:1, 7, 8, 9, 10, 11, 12, 16, 17, 18, 19, 29, 21. 5:1, 2, 3) 이란 두 단어가 두드러진다.


Ⅲ. 개요

서론 1:1∼4

 1.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친분을 선언함 1:1∼3

 2. 편지를 쓰는 목적 1:3

 (1)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북돋우기 위하여 1:3 하단

 (2) 기쁨이 충만케 하기 위하여 1:4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귐을 위한 요구사항들 1:5∼10

 1. 빛 가운데 행하라 1:5∼7

 2. 죄를 자백하라 1:8∼10


무죄한 생애에 대한 권면 2:1∼28

 1. 대언자이시며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신 그리스도 2:1, 2

 2. 그의 행하시는 대로 행함 2:3∼6

 3. 새 계명 2:7∼11

 4. 영적 자녀들에 대한 개인적 호소 2:12∼28

  (1) 쓰는 이유 2:12∼14

  (2)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2:15∼17

  (3) 적그리스도들과 그들의 이단을 경계하라 2:18∼26

  (4) 그의 오심을 위해 준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2:27, 28

 하나님의 아들들과 마귀의 자녀들과의 대조 2:29∼3:24

 1. 하나님의 아들들의 의 2:29∼3:7
 2.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함 3:8, 9 
 3.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마귀에게 속함 3:10∼18
 4.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구원을 확증하심 3:19∼24

 진리와 사랑과 믿음은 사귐에 필수적임 4:1∼5:12

 1. 진리의 영과 오류의 영 4:1∼6
 2.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함 4:7∼21
 3. 믿음은 승리와 생명을 가져옴 5:1∼12


Ⅵ. 결론 5:13∼21

1. 목적의 재천명 5:13
2. 무죄에 대한 권고 5:14∼17
3.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알라는 마지막 격려 5:18∼21 

요한일서는 2세기에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 그릇된 영지주의에 독자들이 직면해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영지주의는 종교 철학으로서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주장했습니다(이원론의 영향으로 오직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고 주장). 이 둘 사이의 긴장에 대한 해결책은 “영지(gnosis)” 또는 “지식”인데, 사람은 이 지식을 통해 세속적인 자리에서 영적인 자리로 올라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영지주의적인 복음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두 가지 그릇된 이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첫째는 가현설(Docetism)인데 사람 예수는 단지 유령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케린투스설(Cerinthianism) 예수님은 두 인격을 지닌 존재로서 때로는 인간으로, 때로는 신으로 활동한다는 이론입니다.

요한일서의 핵심 목적은 믿음의 내용에 경계를 정하고 신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핵심 구절 :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요한일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핵심 용어는 “지식”으로,
관련 어휘와 함께 요한일서에서 적어도 13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요약 : 

거짓 영적 교사들은 초대 교회에서 큰 문제였습니다.
신자들이 참조할 수 있는 완성된 신약 성서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많은 교회들은 자신의 생각을 가르치고 스스로 지도자인 척하는 사람들에게 먹잇감이 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 편지를 통해 몇 가지 중요한 문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에 관한 부분을 바르게 알렸습니다.

요한 서신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기초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 서신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을 정직하게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참된 신자입니까?
요한은 우리가 자신들의 행동을 보고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만일 언제나 헐뜯고 싸운다면, 또는 이기적인 자세로 서로를 돌보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무심코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완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실, 요한은 신앙이 우리의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행한 우리의 잘못을 시인하고 죄책을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잘못을 고치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또 다른 중요한 부분입니다.

연결 : 

죄와 관련해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 중 하나는 요한일서 2장 16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요한은 죄와 관련하여 성경 전체에서 가장 처음에 있었던 온 세상을 뒤흔드는 가장 끔찍한 유혹의 세 가지 측면을 묘사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For everything in the world--the cravings of sinful man, the lust of his eyes and the boasting of what he has and does--comes not from the Father but from the world.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한 처음 죄는 창세기 3장 6절에서 발견되는 동일한 세 가지 유혹에 의해 무너진 결과였습니다.
즉, 육신의 정욕(먹음직도 함), 안목의 정욕(보암직도 함), 그리고 이생의 자랑(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움) 입니다.

적용 : 

요한일서는 사랑과 기쁨의 책입니다.
이 서신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 및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교제를 설명합니다.
이 서신은 일시적이고 덧없는 행복과 진정한 기쁨을 구분 지으면서 어떻게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만일 우리가 요한이 기록한 이 말씀을 취하여 우리의 일상생활에 적용한다면, 우리가 갈망하는 참된 사랑, 헌신, 친교와 기쁨이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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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1:1
태초
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태초부터 있는. -

이것은 1:1과 병행된 표현으로 생명의 말씀이 영원 전에 선재하였음을 암시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하나로 영원전부터 선재하셨으며(요 10:30; 13:3)
복음이 하나님께 속하여 태초부터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Smalley, Barker).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 헬라어 본문상 본절은 주절이 문장의 맨 끝에 오는 일종의 도치문으로 네 개의 관계절,
즉 '태초부터 있던 것', '우리가 들었던 것', '우리가 눈으로 보았던 것', '우리가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것'이 '생명의 말씀'을 수식하고 있다.

요한은 이러한 매우 복잡한 표현을 통하여 자신의 격렬한 감정을 적절히 언어화시키고 있다(Barker).
본문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Stott, Smalley, Westcott, Dodd).

첫째로, 영원하시고 인격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현을 의미한다.
즉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요 1:1).

둘째로, 복음을 의미한다.
'생명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에스'(*)는 '말씀의 내용'(행 5:20; 빌 2:16)을 의미하기도 하고, '생명을 얻게 하는 것'(요 8:12; 6:35, 48:4:10, 11; 계 21:6; 22:1)을 가리킨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는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에 대한 본질적인 선포이기 때문이다(Smalley, Houlden, Westcott, Marshall).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

'
들은 바요'(*, 아케코아멘)와 '본 바요'(*, 헤오라카멘)는 완료시제이다.
이것은 생명의 말씀이 예수 안에서 마침내 실현되었으며 그것을 사도들이 예수께서 설교하셨을 때 듣고, 예수께서 사역하셨을 때 눈으로 보고 확인하였음을 의미한다(히 1:1, 2).
이 '듣고'와 '본'은 요한복음에서 '믿음'과 연결된다(요 10:27; 20:29).
한편 '만진 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살라페산'(*)은 부정과거 시제로 과거 한때 직접 만져서 느낀 것을 가리킨다.
요한은 이러한 관계절, 즉 '들은 바요'. '본 바요', '만진 바라'는 표현을 통해서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역사 속에 현현하신 하나님을 드러내셨으며 그의 사역과 설교를 통해 자신 안에 실현될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강조한다(Stott, Smalley).

1: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본절은 일종의 삽입어구로 앞절의 내용을 확대시킨 것이다. 헬라어 본절 처음에 나타나는 접소사 '카이'(*, 그리고)는 이어지는 3, 4절을 소개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으며, 본서 내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 방법이다(2:27; 3:19-24, Smalley).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 '생명'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헤 조에'(*)는 1절에서처럼 예수 자신의 존재와 그의 복음을 가리킨다(Westcott). 한편 '나타내신 바'는 예수위 지상 사역을 의미한다. 즉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산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이 역사적으로 예수 안에서 계시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시지 않는한 인간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Stott, Smalley).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고 너희에게 전하노니. - 본문은 세동사, 즉 '보았고', '증거하고', '전하노니'를 통하여 경험의 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CSmalley). '보았고'의 헬라어 '헤오라카멘'(*)은 그 진의와 중요성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살펴본다'는 의미로서 요한의 개인적 경험을 시사하며, '증거하여'는 요한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개인적으로 전할 뿐만 아니라 사도로서 공적으로 선포하였음을 나타낸다(Law, Brooke).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 헬라어 본문에는 바로 앞에 '영원한 생명'(*, 텐 조엔 텐 아이오니온)이 자리잡고 있어서 본절 처음에 나타난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와 같은 의미의 반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보다 발전된 표현으로 '생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부각시키고 동시에 생명의 결정적인 근원으로 '아버지와 함께'를 제시한다(Smalley). 이러한 사실로 보아 '영원한 생명'은 생명의 길이가 영원함을 뜻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생명이 갖고 있는 신적인 성격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Barker, Wil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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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장  / 생명의 말씀이 나타나시다

1.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말씀에 관하여 말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처음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자세히 살펴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2. 하나님께서 이 생명을 보여 주셔서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생명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증언합니다.
그리고 이 영원한 생명을 널리 알리려 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알리는 까닭은, 여러분이 우리와 사귐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귐입니다.
4. 우리는 우리의 기쁨을 완전하게 하려고 이 편지를 써 보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

5.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들은 소식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이 소식을 전합니다.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진리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7. 하나님께서 빛 속에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이 씻어 줍니다.
8. 만일 우리에게 아무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9. 하나님은 약속한 것을 꼭 지키시는 분이며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잘못을 깨끗이 씻어 주실 것입니다.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 그리스도는 우리를 도우시는 분

1.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여러분이 죄짓지 않게 하려고 이 글을 씁니다.
그러나 혹 어떤 사람이 죄를 짓더라도, 우리에게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분은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시려고 몸소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그렇게 되셨습니다.
3.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음을 압니다.
4.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안다.” 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 속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5.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완성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 하나님 안에서 산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다
7.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내가 새 계명을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옛 계명을 써 보냅니다.
이 옛 계명은 여러분이 이미 들은 말씀입니다.
8.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이 계명을 새 계명으로 써 보냅니다.
이 계명이 참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여러분의 삶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둠이 물러나기 시작하였고, 참 빛이 벌써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9. 누구든지 빛 속에 산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여전히 어둠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10.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살고 있으며, 그 사람 속에는 그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11. 그러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12.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그리스도를 통해 여러분의 죄가 용서되었기 때문입니다.
13. 세상의 아버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세상 처음부터 계셨던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젊은이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그 악한 자를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14. 세상의 어린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이미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된 여러분 내가 이 글을 여러분에게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계셨던 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굳건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있어 그 악한 자를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워 줄 것들을 원하는 것,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원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들을 자랑거리로 삼는 것,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오는 것입니다.
17. 이 세상은 곧 사라집니다.
세상이 낳은 욕망도 세상과 더불어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그리스도의 적을 따르지 마라

18. 사랑하는 내 자녀들이여, 지금이 마지막 시간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적이 오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대로 벌써 많은 그리스도의 적이 와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시간이라는 것을 압니다.
19. 그리스도의 적들은 우리에게서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우리에게 속했던 자들이 아닙니다.
만일 그들이 정말로 우리에게 속했더라면, 그들은 우리와 함께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떠났다는 사실이, 그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우리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20. 그러나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 부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21. 내가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여러분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진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며, 또 진리에서는 결코 거짓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22.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적이요, 아버지도 아들도 부인하는 자입니다.
23. 누구든지 아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버지를 모시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들을 인정하는 사람은 아버지 또한 모시는 사람입니다.
24. 여러분은 처음부터 배운 것을 여러분 속에 간직하십시오.
여러분이 처음부터 배운 그것이 여러분 안에서 살고 있으면, 여러분도 아들과 아버지 안에서 살 것입니다.
25.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 곧 영원한 삶입니다.
26. 내가 여러분을 속이려 하는 자들에 관해서 지금까지 썼습니다.
27. 그러나 여러분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부어 주신 성령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니, 여러분에게는 가르쳐 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모든 것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진실하셔서 거짓말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그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28.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이여,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우리가 자신을 갖게 되고, 다시 오시는 그분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29.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다면,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것도 알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고 부르셨겠습니까!
우리는 정말로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직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면 우리도 그분과 같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때 그분의 참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러한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같이 자기를 순결하게 지킵니다.
4. 죄를 짓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반항합니다.
죄는 곧 법에 반항하는 것입니다.
5.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는 죄가 없습니다.
6. 그러므로 그분 안에 있는 사람은 계속하여 죄를 짓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죄를 짓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보지도 못하고 그분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7.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이여,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롭습니다.
8. 죄를 짓는 사람은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하여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오신 까닭은 악마의 일을 쳐부수려는 것이었습니다.
9.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아무도 계속하여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계속하여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10.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누가 악마의 자녀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옳은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

11.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어 온 계명입니다.
12. 우리는 가인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악마에게 속했기 때문에 동생을 죽였습니다.
그가 왜 동생을 죽였습니까?
그가 한 일은 악한데,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13.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미워하는 것에 놀라지 마십시오.
14.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도 죽음 가운데 머물러 있습니다.
15.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살인자는 그 누구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16.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참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17. 살림살이가 넉넉한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가 어렵게 사는 형제를 보고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18.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나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사랑하고 진심으로 사랑합시다.
19. 우리는 이렇게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0. 그리고 우리가 비록 마음에 찔림을 받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2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마음에 찔림 받을 일이 없을 때 자신 있게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22.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23. 하나님의 계명은 바로 이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어야 한다는 것과,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4.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살며,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 사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1.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모두 믿지는 마십시오.
그들이 정말로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시험해 보십시오.
2.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은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 라고 고백하는 예언자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입니다.
3. 그러나 예수께 대하여 이렇게 말하지 않는 예언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습니다.
그 예언자는 그리스도의 적의 영을 가진 자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적이 세상에 오리라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이미 지금 여기에 와 있습니다.
4.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이여,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이 거짓 예언자들을 이겨 냈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분은 세상에 와 있는 자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5. 그들은 세상에 속하기 때문에 세속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6.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속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은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어떤 사람이 진리의 성령을 가졌는지 거짓의 영을 가졌는지 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근원이시다
7.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8. 누구든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나님은 하나뿐인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아들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10. 이제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시려고 당신의 아들을 희생 제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13. 하나님은 당신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고 있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하고 있습니다.
15. 누구든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사시고 그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삽니다.
16.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품으신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의지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누구든지 사랑 안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살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사십니다.
17.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됩니다.
이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분과 같이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날에 우리는 자신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서 완성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19.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20.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고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나 자매를 미워하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으로 보는 형제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21.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계명입니다.


요한일서 5장  /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이기다

1. 누구든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된 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아버지의 자녀도 사랑합니다.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면, 이것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가 지키기에 너무 힘든 것이 아닙니다.
4. 누구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 때문입니다.
5. 그러니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로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그 사람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6. 물과 피로 우리에게 오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물로만 오신 것이 아니라, 물과 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7. 예수에 대하여 증언하는 이가 셋 있습니다.
8. 곧 성령과, 그분이 받으신 세례의 물과, 그분이 당하신 죽음의 피입니다.
이 셋의 증언이 한가지로 똑같습니다.
9. 우리는 사람의 증언도 받아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증언은 훨씬 믿을 만한 증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아들에 관하여 해 주신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 증언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듭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에 관하여 해 주신 증언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11.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에 관하여 하신 증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과, 그 생명이 그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모신 사람은 이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고, 그 아들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13.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청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15.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우리가 청한 것은 이미 모두 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16. 어떤 형제가 죄짓는 것을 보거든 그 형제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 형제의 지은 죄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그 형제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가 있습니다.
이런 죄를 지은 형제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17. 의롭지 못한 일은 모두 죄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죄가 다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습니다.
18. 누구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들은 계속하여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 사람을 지켜 주시니, 악마가 그를 해치지 못합니다.
19.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과 온 세상은 악마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0.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것과, 우리로 하여금 참되신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고 그분이 우리에게 이해력을 주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참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21. 나의 어린 자녀들이여, 거짓 신들을 멀리하십시오.

































































































이다니엘 / 이화선


04-11-2024(목)

2008년 2 월달에  찾아온 스트록으로 인해 왼쪽 팔과 다리에 마비가 와 있는 환자입니다.
미국의 제도와 복지가 잘되어 있어서 혜택을 받고 살게 되어서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중년(52살)에  찾아온 장애로 인해 서서히 외부와의 움직임이 많이 줄었고 (특히 코로나시대때) 타인이 집에 방문하는것도 어려운 시절을 지내다 보니 가족 돌봄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지요.

 집에서 자연스러운 모습에서  가족의 케어를 받게 된  상태가 저에게는  꼭 필요한 지원임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가족돌봄의 프로그램은 저와 같은 중도 장애인뿐만 아니라  장애인에게는 꼭 필요한 제도라 생각 합니다.

오른쪽 손가락은 움직여서  한자한자 텃치해서 글을 쓰며 멜을 드립니다.
가족 돌봄의 혜택을 계속 받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

구글 번역 /

This patient is paralyzed in his left arm and leg due to a stroke that occurred in February 2008.
I always live with a grateful heart because I get to live in the United States and benefit from the good systems and welfare systems in the United States.
Due to a disability that came to me in middle age (52 years old), my movement with the outside world gradually decreased a lot and it was difficult for others to visit my home (especially during the COVID-19 era), so I am so fortunate and grateful to be able to enjoy the benefits of family care.
I would like to tell you that being able to receive care from my family in a natural way at home is the support I need.
I believe that the family care program is a necessary system not only for people with severe disabilities like me, but also for people with disabilities.
I move my right finger and touch each character to write a message.
Please ensure that they continue to receive the benefits of family care.


파파고 번역

This patient has been paralyzed in his left arm and leg due to Stroke, which came to him in February 2008.
The system and welfare of the United States are well established, so I am always grateful to live with benefits.

Due to the disability that came to middle age (52), my movement with the outside world gradually decreased (especially during the COVID-19 era), and I'm so fortunate and grateful that I can enjoy family care benefits because I had a difficult time for others to visit my home

I want to tell you that the state of being cared for by my family in a natural way at home is a necessary support for me.
I think the family care program is an essential system for people with disabilities as well as people with disabilities like me.

The right finger moves and gives you a mel while writing Chinese characters.
Please allow me to continue to benefit from family care.

찾아오다
  • 1.(방문하다) visit, look sb up, (informal) drop by[around], (informal) drop in (on)
  • 2.(맡기거나 잃어버린 것을) pick up
  • 3.(계절·시기·사건 등이) come, (주로 좋지 않은 시기가) set in
  • 1.(신체) arm
  • 2.(비유적)
이월[二月]
  • 1.February ((abb.) Feb.)
다리
  • 1.(사람·동물 등의) leg, (오징어·낙지 등의) tentacle(s)
  • 2.(가구·안경 등의) leg, (안경의) temple bow
  • 3.(비유적)
마비[痲痺·麻痺]
  • 1.(신체의) [명사] paralysis, numbness, [동사] be paralyzed; (추위 등으로) be[go, get] numb
  • 2.(교통·업무 등의) [명사] paralysis, [동사] be paralyzed
  • 3.(도덕성·판단력 등의) [명사] paralysis, [동사] be paralyzed
왼쪽
  • 1.the left, one's left
인하다[因―]
  • 1.be caused by, arise from, result from, be due to
되다
  • 1.(새로운 신분·지위 등을 갖다) be, become
  • 2.(다른 것으로 변하다) turn[change] (in)to, (발전하다) develop into
  • 3.(때·시기 등에 이르다) be, come, become; (나이가) reach, (formal) attain; (경과하다) pass
제도[制度]
  • 1.(조직적인) system, (관습적인) institution
오다
  • 1.(어떤 장소로) come; (나타나다) turn up, show up; (방문하다) visit
  • 2.(학교·군대·회사 등에)
  • 3.(소식·연락·편지 등이) come
미국[美國]
  • 1.the United States (of America), the US, the USA, America, (S) the States
[八]
  • 1.(여덟)eight
혜택[惠澤]
  • 1.benefit
  • 1.always, all the time, the whole time
복지[福祉]
  • 1.welfare
있다
  • 1.(어떤 장소에) be; (건물 등이) stand, be located (in/at), be situated; (도시 등이) lie
  • 2.(시설·장치 등이) have; (시설이) be equipped with, be provided with
  • 3.(존재하다) be, exist; (발견되다) be found
다리
  • 1.(교량) bridge
  • 2.(비유적) bridge, go-between
제도[製圖]
  • 1.draft, drafting, drawing, draw
잘되다
  • 1.(일이 바라던 대로 되다) go well[right]; (좋은 결과가 나오다) come[turn, work] out well
  • 2.(장사·사업 등이 흥하다) prosper, thrive, flourish, go well[fine, smoothly]
  • 3.(성공하다) succeed, go well[fine, smoothly]




paralyze[pǽrəlàiz]
  • 1.마비시키다
  • 2.무력[무능]하게 만들다, 쓸모없게 만들다, 무효가 되게 하다
have미국∙영국[həv; əv 강형 hæv]
  • 1.(물적 소유[소지]의 뜻으로) 가지고 있다
  • 2.<…을> 가지고 있다, 소유하다
  • 3.<…을> (몸에 지녀) 가지고 있다, 몸에 지니고 있다 ((about, on, with, around))(cf. HAVE on)
  • 4.재산이 있다, 돈을 가지고 있다
  • 5.[pl.; 보통 the ~] 유산자(有産者), 가진 자; (자원·핵 등의) 보유국, 가진 나라
  • 6.[영·구어] 사기, 협잡; 놀리는 가벼운 농담
and미국∙영국[ənd; ən 또한 n 특히 /t/와 /d/ 다음에서 강형 ænd]
  • 1.[문법상 같은 성질의 어·구·절을 대등히 연결하여] …와 …, 및, 그리고
  • 2.[between … and …로] …와 …(와의 사이에)
  • 3.[both … and …로] (…도) …도
patient미국∙영국[ˈpeɪʃnt]
  • 1.인내심[참을성] 있는, 끈기 있는, 느긋한 ((with)); 참을 수 있는 ((of, with))
  • 2.끈기 있게 일하는, 근면한; <연구 등이> 지속적인
  • 3.환자, 병자
  • 4.어떤 행위를 당하는 것[사람], 수동자(受動者)(opp. agent)
left미국∙영국[left]
  • 1.왼쪽의, 왼편의
  • 2.[보통 L~]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좌익의, 좌파의
  • 3.왼쪽에, 왼편에, 좌측에
  • 4.[the ~, one’s ~] 좌(左), 좌측, 왼쪽, 왼편
  • 5.[보통 the L~] [정치] 좌익, 좌파 (세력), 좌파 정당 (의원), 혁신파, 급진당; 의장석 좌측의 의원들
arm미국∙영국[ɑ́ːrm]
  • 1.팔; (동물의) 앞발, 앞다리
  • 2.팔처럼 생긴 것; (나무의) 큰 가지, (옆으로 내민) 가로대; 닻가지, 지렛대; (옷의) 소매; (의자의) 팔걸이; (배의) 활대; (안경의) 테; (강의) 지류; (바다 등의) 만(灣)
  • 3.팔을 끼고 동반하다, <사람의> 팔을 잡아 데리고 가다
well미국∙영국[wél]
  • 1.만족스럽게, 잘, 훌륭하게, 더할 나위 없이; 바르게, 선량하게(opp. ill, badly)
  • 2.능숙하게, 솜씨 있게, 잘
  • 3.[P] 건강하여, 튼튼하여 ((이 의미로는 최상급을 쓰는 일이 드묾; ⇒ healthy [유의어/] ))
  • 4.[비교 없음] 건강한
  • 5.[놀람·의심·망설임 등을 나타내어] 이런, 저런, 어마, 뭐라고, 글쎄
  • 6.[안심·체념·양보 등을 나타내어] 아이고, 후유; 에라; 과연; 그래, 글쎄; 원 참
unite미국∙영국[juˈnaɪt]
  • 1.결합하다, 합치다, 통합하다, 일체가 되게 하다, 합병하다 ((to, with))
  • 2.결혼시키다, (정신적으로) 결합하다
  • 3.하나[일체]가 되다, 합일[합체]하다, 결합하다 ((with))
  • 4.<사람·국가 등이> (…에 대해) 동맹[연합]하다 ((against)); 제휴[일치]하다, 통합[단결]하다
the미국∙영국[ðə; ði 강형 ðiː]
  • 1.[앞서 나온 명사, 또는 문맥상 전후 관계로 보아 가리키는 것이 정해진 가산명사에 붙여]
  • 2.[앞서 나온 명사, 또는 문맥상 전후 관계로 보아 가리키는 것이 정해진 불가산명사에 붙여]
  • 3.[한정 어구가 따르는 가산 또는 불가산명사에 붙여]
  • 4.[형용사·부사의 비교급 앞에 붙여] 그만큼, 도리어 더
  • 5.[상관적으로 형용사·부사의 비교급 앞에 붙여 비례적 관계를 나타내어] …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system미국∙영국[ˈsɪstəm]
  • 1.(통일된) 체계, 조직, 계(系); (통신·수송 등의) 조직망, 시스템; 통일성
  • 2.[the ~] (지배) 체제
  • 3.(학문·사상의) 체계, 학설, 가설
left미국∙영국[léft]
  • 1.LEAVE의 과거·과거분사
state미국∙영국[steɪt]
  • 1.[sing.] 상태, 형세, 형편, 사정
  • 2.[보통 a ~] (정신적인) 상태; [구어] 긴장[흥분] 상태, 신경과민 상태; [고어] (병의) 위기, 고비
  • 3.[법] (공식으로) 진술하다, 표명하다, (분명히) 말하다; 확언[언명]하다
  • 4.<문제·사실 등을> (문서로) 명확히 제시하다, …라는 것을 나타내다
  • 5.국가의, 국사에 관한; 정부의
  • 6.[S~] 주의, 주립의, 주가 관리하는
welfare[│welfer]
  • 1.복지, 복리, 번영, 행복
  • 2.복지 사업, 후생 사업[시설]; [미] 사회 복지, 생활 보호([영] social security); [the ~] [주로 영·구어] 정부 복지[후생] 기관
  • 3.복지 시설의, 복지 원조를 받는
arm미국∙영국[ɑ́ːrm]
  • 1.[보통 pl.] 무기, 병기, 화기 (=weapon)
  • 2.[pl.] 군사, 전쟁, 전투, 투쟁; 병역, 군인의 직
  • 3.전쟁 상태로 들어가다, 전투 준비를 하다 ((against)); 무장하다
  • 4.(…에) 태세를 갖추다 ((against))
  • 5.무장시키다, <배를> 장갑하다 ((with)); <호신용 무기 등을> 몸에 지니다
  • 6.<무기 등에 …을> 장비하다 ((with))
well미국∙영국[wél]
  • 1.우물, (유전 등의) 정(井)
  • 2.샘, 광천,[pl.] 광천[온천]지
  • 3.솟아 나오다, 내뿜다, 분출하다, 넘쳐 나오다 ((out, forth, up))
  • 4.솟아 나오게 하다, 분출하다
establish미국∙영국[ɪˈstæblɪʃ]
  • 1.<국가·학교·기업 등을> 설립하다, 개설[창립]하다; <관계 등을> 성립시키다, 수립하다 (=found)
  • 2.<제도·법률 등을> 제정하다
  • 3.<사람을> (장소·직위·직업에) 취임[종사]시키다, 앉히다(install), 자리 잡게 하다, 안정시키다 (→established)
unite미국∙영국[júːnait]
  • 1.[영국사] 유나이트 금화 ((James 1세·Charles 1세 시대에 발행된 금화, = 20 shillings))







02-26-2024(월)

다니엘의 생년월일은 1983년 9월 2일입니다.
어려서부터 발육이 늦는다고 생각하였으나  늦어도 너무 늦는 것같아 서울에 올라가서 검진한 결과 갑상선 호르몬이 문제라고 하여 그 계통의 약을 복용하려고 시도하면 약을 모두 토해버려 약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서울 성모병원 진단).

취학 년령이 되어(8세) 입학통지서를 받았으나 도저히 정상 입학이 불가능하여 울구준 보건소에서 발급하는 취학을 1년 연장하고 계속 발육 상태를 지켜보았지요.

그러나 1년 후에도 정상이 아니라 서울 삼육재단에서 운영하는 삼육재활학교에 입학하려고 준비하였는데 다니엘은 그 학교에 갈 수 없다고 완강하게 반대하여 결국은 목회지를 울산에서(온산제일교회) 서울 숭실중고등학교내에 설립된 숭실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다니엘의 병명을 정확하게 알 수 없어서 원인을 찾으려고 하던 중 마침 세브란스병원에 뉴욕에서 세브란스병원으로 근무지를 옮긴 "고창준박사"를 만나서 진단한 결과 처음으로 다니엘의 병명을 알게 되었습니다(쟈베트).

고창준박사의 소견으로는 선천적인 장애로 태어났기 때문에 뉴욕으로 가면 이러한 아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게 되었습니다.

결국 다니엘은 신사국민학교에 입학하였고 마침 일반국민학교에 장애인 학급이 운영되어 그 학교를 졸업하고 상신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상신중학교에 입학한 후 중학교 내에 장애인 학급이 있기에 그 학급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마침 뉴욕에 거주하는 어머님 김은신권사님으로부터 자녀초청을 받았는데 이주허가를 받아 전가족이 뉴욕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뉴욕에 도착한 후에 다니엘이 다시 뇌파 검사를 받았는데 이때 담당 미국 의사의 진단은 "댄디 워커"라고 합니다(2001년).

다니엘이 이미 중학교를 마쳤기 때문에 뉴욕에서 고등학교에 입학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언어 문제로 우리가 원하는 학교에 입학하기가 어려워 이주민 학생들을 위한 Language School을 찾아 맨하튼에 있는 Liberty High School에 입학을 하고 1년을 수학했습니다.
더 이상 다닐 수 없는 이유는 나이가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할 나이가 되어 더 이상 고등학교에서 공부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퀸즈 장애인 센터에서 장애인으로 등록하고 장애인 연금을 받으라고 제안하였으나 다니엘은 장애인 연금을 받지 않겠다고 본인이 사인을 하지 않아 결국에는 그 센터에서 진행하는 훈련 과정과 취업 알선 프로그램에서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무엇인가 기회를 찾기 위하여 브롱스에 위치한 직업 훈련학교를 찾아가 면접을 하던 날 마침 눈이 많이 내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고 그 직업훈련학교에는 유색 인종 학생들이 많아 다니엘이 적응하기 어렵다고 하여 그 학교에 다니는 것도 어렵게 되었지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결국 이제는 40세라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무슨 원인인지를 알려고 2023년 뇌파검사 및 뇌 MRI 촬영을 마쳤습니다.
뇌신경외과 전문의사의 소견은 선천적 장애로 인하여 수술하는 것은 어렵다는 소견을 들었습니다.

2024년에도 다시 중국인 뇌신경외과 전문의사로부터 동일한 진찰 및 과정을 거쳐 의학적인 방법은 없다고 하는 의견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다니엘은 더욱 힘들어 하며 뇌 수술을 받고 싶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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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1-2024(수)

이다니엘 가족 단톡방

커뮤니티 > CST 체험 > 뇌수종과 댄디 워커 증후군(Dandy-Walker) - http://www.cstkorea.com/bbs/board.php?bo_table=EXPERIENCE_BOARD&wr_id=318&page=9

뇌수종과 댄디 워커 증후군(Dandy-Walker)


댄디 워커(Dandy-Walker)증후군이라 수술을 받은 후 합병증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질문드립니다.
댄디 워커 증후군일때에는 어떻게 치료를 하면 좋을까요?

답변⇒

댄디-워커 증후군이란
- 제 4뇌실에 낭종이 발생되거나
- 소뇌의 이상 발육으로 인해 4뇌실의 배출구가 막혀서, 뇌수종이 발생되는 증후를 말합니다.
문제는 왜 제 4뇌실에 낭종이 발생되고 소뇌의 조직 변성이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뇌수종을 유발하는 조직의 변성은 대부분 팽창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즉, 쉽게 조직이 붓는다는 것입니다.
왜 조직이 붓는가 하는 것을 살펴 보아야 하는데 인체 조직은 열에 의한 자극을 받게 되면 붓거나 팽창하게 됩니다.
일 예로 고열 감기로 인해 편도가 붓는 것을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열에 의한 자극으로 인해 임파선이나 혈관이 팽창하게 되면 그 영향으로 인해 조직이 팽창되게 됩니다.
팽창하는 과정에서 물이 차는 조직은 낭종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제 4뇌실의 낭종도 역시 열에 의한 염증 반응의 결과라는 것이죠..
소뇌나 기타 뇌조직의 변성도 열 자극에 의한 경우가 많습니다.
열 자극이 어느 쪽으로 작용했느냐에 따라서 수도관이 막히기도 하고 지주막에 낭종이나 종양이 발생되기도 하고 뇌실에 유두종이 발생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댄디-워커 증후군으로 인한 뇌수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우선 열자극에 대한 반응이 남아 있느냐를 살펴야 합니다.
대개 뇌에 가해지는 열은 인체 상부에서 발생되는 경우가 많고, 열감기나 감염 등에 의해서 주로 발생됩니다.
특히 겨울철 감기등은 심각한 후유증을 초래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열성 음식, 자극적인 음식, 약물 부작용, 심한 스트레스 등에 의해서도 열이 발생될 수 있습니다.
현재 상태에서 열반응이 있다면 우선 열을 내려주어야 합니다.
열을 내려주기 위해서는 열발생의 원인을 파악해서 조치해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치료 역시 허약한 상태의 개선위주로 조치하게 됩니다.
그 다음 열반응이 감소된 상태라면 조직의 변성이 남아 있는 경우입니다.
조직의 변성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허약한 상태가 없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또한, 열자극을 받고 난 다음 정상적인 기혈의 흐름이 확보되고 있는가를 진단해야 합니다.

만성적인 상태라면, 열에 대한 자극을 제거하고 허약한 상태를 보강하면서 현재 막혀 있는 기혈의 흐름을 소통시켜 주면 뇌수종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수술 후에 합병증이 나타나고 있다면 어떠한 합병증으로 고통받고 있는지 파악해서 조치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항상 원인 치료에 주력하여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뇌수종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댄디 워커(Dandy-Walker)증후군이라 수술을 받은 후

합병증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질문드립니다.

댄디 워커 증후군일때에는 어떻게 치료를 하면 좋을까요?

 

답변⇒

댄디-워커 증후군이란

     - 제 4뇌실에 낭종이 발생되거나 ,

    - 소뇌의 이상 발육으로 인해 4뇌실의 배출구가 막혀서 ,

뇌수종이 발생되는 증후를 말합니다.

 

문제는 왜 제 4뇌실에 낭종이 발생되고 소뇌의 조직 변성이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뇌수종을 유발하는 조직의 변성은 대부분 팽창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즉, 쉽게 조직이 붓는다는 것입니다.

 

왜 조직이 붓는가 하는 것을 살펴 보아야 하는데

인체 조직은 열에 의한 자극을 받게 되면 붓거나 팽창하게 됩니다.

일 예로 고열 감기로 인해 편도가 붓는 것을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열에 의한 자극으로 인해 임파선이나 혈관이 팽창하게 되면

그 영향으로 인해 조직이 팽창되게 됩니다.

팽창하는 과정에서 물이 차는 조직은 낭종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제 4뇌실의 낭종도 역시 열에 의한 염증 반응의 결과라는 것이죠..

소뇌나 기타 뇌조직의 변성도 열 자극에 의한 경우가 많습니다.

 

열 자극이 어느 쪽으로 작용했느냐에 따라서 수도관이 막히기도 하고

지주막에 낭종이나 종양이 발생되기도 하고 뇌실에 유두종이 발생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댄디-워커 증후군으로 인한 뇌수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우선 열자극에 대한 반응이 남아 있느냐를 살펴야 합니다.

 

대개 뇌에 가해지는 열은 인체 상부에서 발생되는 경우가 많고,

열감기나 감염 등에 의해서 주로 발생됩니다.

특히 겨울철 감기등은 심각한 후유증을 초래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열성 음식, 자극적인 음식, 약물 부작용, 심한 스트레스

등에 의해서도 열이 발생될 수 있습니다.

 

현재 상태에서 열반응이 있다면 우선 열을 내려주어야 합니다.

열을 내려주기 위해서는 열발생의 원인을 파악해서 조치해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치료 역시 허약한 상태의 개선위주로 조치하게 됩니다.

 

그 다음 열반응이 감소된 상태라면 조직의 변성이 남아 있는 경우입니다.

조직의 변성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허약한 상태가 없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또한, 열자극을 받고 난 다음 정상적인 기혈의 흐름이 확보되고 있는가를

진단해야 합니다.

만성적인 상태라면, 열에 대한 자극을 제거하고 허약한 상태를 보강하면서

현재 막혀 있는 기혈의 흐름을 소통시켜 주면 뇌수종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수술 후에 합병증이 나타나고 있다면

어떠한 합병증으로 고통받고 있는지 파악해서 조치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항상 원인 치료에 주력하여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뇌수종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뇌하수체종양클리닉 | 삼성서울병원 - http://www.samsunghospital.com/dept/medical/diseaseSub01.do?CONT_SRC_ID=09a4727a8000f20c&CONT_SRC=CMS&CONT_ID=3451&cPage=1&CONT_CLS_CD=001020001015&DP_CODE=PA&MENU_ID=003007&TAB=DIS_CATE&CONT_CLS_CD=001020001015


[유전성 질환] 댄디워커증후군

관련진료과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질환명 : [한글명] 댄디워커증후군 [영문명] Dandy-Walker syndrome

정의

댄디-워커 증후군은 제 4뇌실의 출구가 부분적 또는 완전히 막혀 있기 때문에 뇌척수액의 흐름이 차단되어 제4뇌실의 확장 및 소뇌 발달 부전을 보이는 선천적 기형 질환입니다. 또한 소뇌 발달이 잘 되어 있지 않아 운동 능력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원인

유전적인 요인이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나 아직 뚜렷한 원인은 규명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단일유전자 질환이나 상염색체 열성질환, 성염색체 우성질환 또는 염색체 이상과 관련이 있는데, 이중 가장 흔한 것이 삼염색체증(Trisomy)입니다. 태생기에 풍진, 거대세포바이러스, 톡소플라스마 감염과 같은 감염증, 쿠마딘, 비타민 A와 같은 약물, 알코올에 노출과도 관련이 있다고 보고되었습니다

증상

● 영아
수두증의 임상 증상과 비슷하며 후두부가 돌출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정수리 부분의 대천문이 볼록 튀어나와 있고 뇌압 상승 시 의식수준이 저하되고, 구토가 유발됩니다. 점진적으로 발생할 경우에는 지능장애나 성장 장애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운동발달 지연, 간질, 대두증(macrocephaly), 짜증, 구토, 안구진탕증(nystagmus) 등을 보이기도 하며 안면 기형, 중추신경계 기형 등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 어린이
수두증의 증상은 없을 수도 있으나 소뇌 기능 부전이 뚜렷합니다. 근육긴장저하, 운동실조증(ataxia)과 함께 정신지체를 보입니다.

진단/검사

임신 초기에는 태아 초음파 검사를 통해 소뇌 발달 여부, 뇌실 확장, 큰 머리 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생후에는 머리 엑스레이 촬영, 컴퓨터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MRI) 검사가 진단에 이용됩니다.

치료

댄디-워커 증후군의 치료는 나타나는 증상 위주로 치료하게 됩니다. 간질을 예방하기 위해 적절한 약물 치료나 자극원을 제거한 환경을 제공하여 줍니다. 수두증 치료를 위해서는 뇌실-복막 단락술이나 낭종-복막 단락술 등의 션트 수술을 시행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운동 장애, 근육 강직, 보행 장애 등을 예방하기 위해 물리치료나 작업치료와 같은 재활치료를 시행합니다.

경과/합병증

댄디-워커 증후군의 경과에 대해 정확히 규명된 보고는 없으나 산전 진단에 실패했을 때는 생후 1년 내에 80~85%에서 수두증의 증상이 나타납니다. 전체 사망률은 12~50%로 보고되어 있지만 산전 진단되어 시행된 치료적 유산을 포함하면 그보다 훨씬 높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치료 전에 신경학적 결손 증상이 뚜렷이 있었던 경우에는 예후가 좋지 않으나 신경학적 결손 증상이 적은 환자에서는 다른 발달 기형을 어느 정도 동반하고 있는지에 따라 예후가 달라집니다.


02-20-2024(화)
김인순권사

(이승혁 목사님의 가정기도)

1,사무엘을 위한 믿음으로 준비된 배우자,눈(익상편)의 치유
2,다니엘의 선천적 질고의 은혜 깨달음(선천적 장애로 인하여 모든 장기가 노후됨,특히 간 기능 수치가 점점 떨어지고 있음)
3,안화선 사모님의 건강(뇌졸증 휴유증으로 왼쪽 마비)
4,이승혁 목사님(온라인 목회현장 확장되도록)
5,김은심 권사님(95세,노후의 평강한 삶)
6,주거문제(한국 & 뉴욕 문제 ??)

~~2022/2/24,기도시작하며


02-19-2024(월)

다니엘이 가족 단톡방에 올린 내용

댄디-워커 증후군 수술 후 치료 : 네이버 블로그 - https://m.blog.naver.com/brain8275/221787381904
https://m.blog.naver.com/brain8275/221787381904

구은숙
 적절한 치료방법이 발견  되기를 기도합니다



물뇌증 - 코메디닷컴 - https://kormedi.com/1279104/%EB%AC%BC%EB%87%8C%EC%A6%9D-%EC%9E%90%EC%84%B8%ED%9E%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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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뇌증 - 코메디닷컴

코메디닷컴 관리자
정의

물뇌증은 태아 500명당 1명꼴로발생합니다. 원인은 매우 다양하며, 발병 양상도 환자마다다릅니다. 물뇌증은 뇌척수액이 뇌 안에 있는 뇌실(뇌척수액을담는 그릇 같은 곳)에 이상 축적됨으로써 발생합니다. 치료는신경외과 의사가 시행하는 션트(단락술)라는 수술에 의해 대부분이뤄집니다.

션트는 뇌나 척수에서 뇌척수액을 다른 곳으로 흐를 수 있게 하는 물길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션트수술이 물뇌증을 완치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매우 드문경우를 제외하곤 물뇌증은 평생질환이며, 이런 이유로 합병증은 언제고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합니다. 또한 합병증이 진단되지 않거나 치료되지 않으면 심각한 신경학적 손상, 심지어 사망에까지 이르게 되기 때문에 합병증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하며 조그만 변화에도 주의 깊게살펴야 됩니다.

우리의 몸은 하루에 약 500ml의 뇌척수액을 생성해 지속적으로흡수된 양만큼 채워지게 됩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뇌척수액의 생성과 흡수에 균형이 이뤄져 있지만 물뇌증이있으면 이런 균형이 깨져서 나타납니다. 이런 균형을 깨는 상황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순환로의 폐쇄가가장 흔한 원인이 될 것입니다.

순환로의 막힘은 뇌종양, 물혹,상처 반흔, 감염 등이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뇌척수액은계속해서 만들어지므로 이의 통로가 막힌다면 마치 강물이 댐의 윗부분에 고이는 것처럼 막힌 부분의 위에서 뇌척수액도 고여 있게 됩니다. 결국 고인 뇌척수액이 어느 정도의 양이 늘어나게 되면 뇌실이 커지게 되고 머리 안의 압력이 올라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을 물뇌증이라고 합니다.

원인

여러 종류의 의학적 문제들이 물뇌증이란 병을 일으키게 합니다. 많은아이에게 있어 태어날 때의 문제로 이 병을 일으킵니다. 이를 선천성 물뇌증이라고 합니다. 거의 모든 선천성 물뇌증은 유전적 요소와 환경적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서 발생합니다.

물뇌증의 증상이 아주 늦게 어른이 되어서 나타난다고 해도 출생 시의 문제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면 선천성물뇌증이라고 봅니다. 이와는 달리 출생 후에 두부 손상이나 뇌막염, 뇌종양등에 의해 물뇌증이 생겼다면 이를 후천성 물뇌증이라고 합니다. 부모는 아이들의 물뇌증 발생이나 예방을할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자신을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 수도관 폐색(협착)

선천성 물뇌증의 가장 흔한 원인이 되는 질환이 수도관 폐색 또는 협착입니다 수도관은 제 3뇌실과 제4 뇌실을 연결하는 좁고 긴 통로입니다. 수도관 폐색은 선천적으로 좁거나 막혀 있든지 감염, 출혈, 종양에 의해 수도관이 좁아졌거나 막힘으로써 발생합니다. 뇌척수액의통로가 막힘으로써 상부에 뇌척수액이 고여 물뇌증이 발생합니다.

▪ 이분 척추

이분 척추는 열려진 척추란 의미로 척수와 주변 구조인 척추 뼈가 선천적으로 막히지 않아 앓은 병을 말합니다. 발생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이분 척추 환자가아놀드 키아리 2형 증후군으로 발전되며, 약 80%에서 물뇌증을 동반합니다. 그 원인은 아놀드 키아리 2형 증후군은 소뇌의 일부와 제4 뇌실이 머리뼈의 가장 아랫부분 구멍을통해 밑으로 빠지는 병변을 나타내기 때문에 제4 뇌실에서 뇌척수액의 통로가 막힘으로써 발생합니다. 이분 척추의 대표적인 질환은 척수 수막류입니다. 출생할 때부터 허리또는 등 부위에 돌출된 혹을 보이는 병입니다.

▪ 뇌실 내 출혈

뇌실 내 출혈은 미숙아에게 잘 발생하며, 후천성 물뇌증의 원인이됩니다. 이는 뇌실에 분포하는 작은 혈관이 터져서 발생합니다. 터져나온 혈액이 뇌척수액 통로를 막거나 상처를 남기고 뇌척수액이 흡수되는 지주막융모에 끼어들어 흡수를 하지 못하게 해 물뇌증을 발생하게 합니다. 드물게 뇌혈관 기형이나 뇌실 근처에 있는 뇌종양의 출혈에 의해서도 발생합니다.

▪ 뇌막염

뇌와 척수를 싸고 있는 막에 염증이 생긴 것입니다. 박테리아감염에의해 주로 발생하며, 드물게 바이러스 감염에 의해서도 발생합니다. 이런염증 반흔이 뇌척수액의 통로가 되는 섬세한 지주막하 공간에 생겨 뇌척수액의 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게 되어 물뇌증이 생깁니다. 한국에서는 결핵성 뇌막염 후에 합병증으로 많이 발견됩니다.

▪ 머리 손상

머리 손상이 있으면 뇌 조직, 신경, 혈관 등을 다치게 됩니다. 혈관이 다쳐서 혈액이 유출돼 뇌척수액의통로에 끼어서 막거나 혈액의 염증세포들이 새어 나와 역시 통로에 반흔을 남기게 되면 물뇌증이 발생합니다.

▪ 뇌종양

소아 환자의 뇌종양은 주로 뇌의 아랫부분(후두덮개구멍 또는 소뇌)에 생깁니다. 종양이 자라면서 이 부위에 있는 제4 뇌실을 누르거나 이곳으로 자라나게 되면 뇌척수액의 순환을 막게 됩니다. 다른부위의 뇌종양도 마찬가지로 종양의 성장에 의해 뇌척수액의 순환로를 막음으로써 물뇌증이 발생합니다.

▪ 거미막낭종(물혹)

뇌의 어느 부위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선천성 물혹입니다. 소아환자에게서는 뇌종양과 비슷하게 뇌의 아랫부분(후두덮개구멍)과제3 뇌실 근처에 잘 생깁니다. 거미막낭종(지주막낭종)은 뇌척수액을 함유하며 지주막에 의해 싸여 있으며, 뇌실이나 지주막하 공간과도 통하기도 합니다. 이런 물혹이 뇌척수액순환로를 누르거나 막게 되면 역시 물뇌증이 발생합니다.

▪ 댄디워커 증후군(Dandy-Walker Syndrome)

댄디워커 증후군에서 제4 뇌실의 출구가 부분적 또는 완전히 막혀있기 때문에 제4 뇌실은 확장돼 있으며, 소뇌의 일부분도발달하지 않습니다. 또한 댄디워커 증후군은 뇌의 다른 일부의 발달도 잘 이뤄지지 않으며, 수도관의 폐색도 잘 발생합니다. 이런 이유로 물뇌증이 생기며, 측뇌실과 제4 뇌실에 각각 동시에 션트 수술을 할 때도 있습니다.

증상

비정상적으로 아기의 머리 크기가 커집니다. 앞숫구멍(대천문)이 부풀어 오르거나 팽팽해지기도 하고, 두피는 얇아지고 반짝거리기도 합니다. 두피 정맥은 부자연스럽게 커져있기도 합니다. 증상은 구토, 졸음, 보채기, 아기 눈동자가 아래쪽으로 떨어져 있는 현상, 발작 등입니다. 걸음마 시기에도 봉합선이 완전히 닫히지 않았기 때문에비정상적으로 큰 머리를 보입니다.

걸음마 시기 후기나 소년기에는 봉합선이 이미 닫혀 있기 때문에 머리 크기가 커지는 증상보다 뇌실이 커짐으로써발생하는 머리뼈안(두개강) 내압 항진 증세를 나타냅니다. 두통, 오심(구역질), 구토와 물체가 두 개로 보이거나 흐릿하게 보이는 증상들입니다. 또균형을 잘 못 잡거나 걷거나 말하는 것이 늦는다거나 하는 발육 지연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유아들과 마찬가지로 소년들도 정상에 비해 많이 보채고 쉽게 피곤해하는 증상과 발작을 보이기도 합니다. 성격 변화, 주의 집중력 저하, 기억력감퇴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이든 아이들은 쉽게 잠에서 깨지 못하거나 계속 자는 증상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진단

▪ 초음파

고주파 음파를 이용해 머리 안 구조의 윤곽을 알 수 있는 의학적 기계입니다. 이것은 짧은 시간에 고통 없이 간단히 검사할 수 있습니다. 유아의뼈가 없는 앞숫구멍에 이 기계를 대서 뇌실의 영상을 얻을 수 있어 물뇌증의 진단과 추적 관찰이 가능한 진단 장비입니다. 음파는 머리뼈를 뚫을 수 없기 때문에 앞숫구멍이 닫힌 어린이에게는 머리뼈의 결손이 없는 한 사용할 수 없습니다.

▪ 컴퓨터단층촬영(CT)

CT는 안전하고 믿을만하며, 통증없이 물뇌증 진단과 치료에 도움을 주는 진단 장비입니다. 이 장비는 엑스레이(X-ray)가 몸을 뚫고 들어가 몸 내부의 구조를 컴퓨터에 의해 영상으로 보여 줍니다.

▪ 자기공명영상(MRI) 촬영

CT와 마찬가지로 몸의 내부 구조를 볼 수 있는 진단 장비입니다. 그러나 CT와는 달리 엑스레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매우 강력한 자기장을 이용해 몸 안의 여러 신호를 영상으로 나타내게 합니다. MRI 역시 통증은 없으며, 매우 안전합니다.

치료

오늘날 물뇌증 치료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수술적 치료는 환자의 뇌척수액 순환계에 션트라는 유연한 튜브를집어넣는 것입니다.
션트 튜브는 직경이 2mm 정도이고, 부드럽고 유연한 성질을 갖는 플라스틱(주로 실라스틱)으로 만들어지며, 우리 몸과 잘 융화됩니다.

일반적으로 션트 수술은 시간이 짧고 복잡하지 않습니다.
수술이끝나면 다시 상처 부위를 소독한 후 회복실로 가게 됩니다.
이곳에서 마취과 의사와 신경외과 의사가 완전히회복될 때까지 환자를 관찰합니다.
상처 부위가 붉게 보이거나 손대면 아파하고 약간 붓는 것은 수술 후일주일간 지속될 수 있습니다.

수술 뒤 2~3일 동안 미열이 있는 것은 정상이지만 고열이 있으면원인을 찾아 교정해 줘야 합니다.
션트 수술은 대부분 그리 아프지 않습니다.
수술 후 별 이상이 없으면 환아는 1주일에서 10일 뒤에 퇴원합니다.
션트 수술을 하고 나면 환아의 뇌실 크기는줄어듭니다.
유아를 제외하고 션트튜브는 피부 밑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유아기 때 물뇌증 때문에 커진 머리는 자라면서 나이에 맞는 정상 크기로 돌아옵니다.

물뇌증이 대부분 션트 수술에 의해 잘 조절되지만 약 2-40%까지기능을 안 하는 때가 있습니다.
션트의 기능 부전은 뇌실에서 뇌척수액을 충분히 배액시키지 못하는 것을의미합니다.
션트가 막히는 것과 감염이 가장 흔한 원인입니다. 대부분의션트 기능 부전은 수술 후 6개월에서 1년 내에 재수술을필요로 합니다.

-------------- 안화선 응답

대니야~
영상 잘보았다네^^
어쩜 이렇게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지 참잘했네  내가 이렇게 좋은데 아들은  이 영상을 찾은 순간 얼마나 좋았을까?
영상을 찾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네

물로 찬 뇌에 대니가 촛점이 맞혀진게 아닌가해서  처음 진단하신 고창준 뇌전문  박사님의 말을 바르게 전달할때인가 싶네
말씀인즉
쇠뇌형성이  조금 않되었는데  이유는 모른다고 소뇌가 태어나기 전부터 조금 안만들어진상태이다.사진상으로 검게 되어져 찍혔으니 물로 된것인지~ 머리를 갸우뚱 하시기에

내가 그럼 어떻게 해야되냐고 했더니
의사로 할 수 있는것은 없다고   하시면서
물이라고 해도 그 물을 어떻게 할 수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몸 에 스며들게 하시던지 의사로서는 형성된 뇌 상태에 대해서는 바꿀 수 없다고 해서
이날까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 했던것이거든~
머리에,뇌 상태에 촛점을 맞추면 괴롭고 아프게,소리가 나는게 느껴질거네 대니가 듣는 기능이 아주 예민하기때문에 그 예민함을 내 몸 상태에 촛점 두지 말고  성경 말씀에 귀와 눈을 관심을 둔다면 아마 아픈것도 ,소리들리는것도,없어질것이라고 알게 된다네

오늘 하루 주안에서 화이팅 하자~💕



http://www.kimjongin.net/medi_info/medi_info_dis_v.asp?conts_num=703&type=0&index1=&index2=&page=16&sw=&code=0&MenuNumber=3&PageNumber=3&SubPageNumber=0


천안 김종인소아과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2분


1. 정의

뇌와 척수를 감싸고 흐르는 뇌척수액이 선천성이나 후천성의 이유로 너무 많은 양이 있어서 정체되어 뇌실이 커지고 뇌압이 높아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2. 증상

두개골의 봉합선이 닫히기 전인 2세 이전의 소아에서는 머리둘레가 비정상적으로 커지고 봉합이 넓어지며 큰숨구멍(대천문)이 커지고 큰숨구멍 부분을 두드리면 깨진 항아리 소리가 납니다. 또한 머리 피부에 있는 정맥이 두드러지게 보이며, 이마는 얼굴보다 돌출되고 눈동자가 아래로 쳐진 모습을 보입니다. 뇌압이 높아서 뇌가 위축되어 팔다리가 뻣뻣해지고 운동정신발달이 늦어지기도 합니다. 진행이 빠르면 아이가 토하거나 머리가 아프거나 자꾸 자려는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2세 이후의 소아에서는 두통, 구토, 자꾸 자려는 증상 외에도 수두증을 일으킨 원인질환에 따라서 신경증상이 주로 나타납니다. 수두증으로 인하여 측뇌실이 커지면 다리가 뻣뻣해지기도 합니다.


3. 원인,병태 생리

수두증이 생기는 원인에 따라 분류해보면, 뇌속의 뇌실 안에서 막혀서 수두증이 생기는 경우(비교통성 수두증)와 뇌 바깥인 지주막하 공간에서 뇌척수액의 흡수가 안되어 생기는 경우(교통성 수두증), 그리고 뇌척수액 자체가 너무 많이 생겨서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교통성 수두증은 뇌속의 뇌척수액이 흐르는 길이 막히는 경우에 생기는 것으로 도수관 협착과 교세포 증식, 아놀드-키아리 이상, 댄디-워커 증후군, 갈렌씨 정맥 이상, 뇌척수액이 흐르는 길에 생긴 뇌종양에 의해서 생깁니다.
교통성 수두증은 지주막(뇌를 싸고 있는 막중의 하나)의 아래에 있는 공간인 지주막하 공간에서 뇌척수액이 제대로 흡수가 되지 않아서 생기는 것으로 두개 내 출혈, 세균성이나 육아종성 수막염(뇌를 싸고 있는 막의 염증)의 후유증으로 생깁니다.
뇌척수액이 과도하게 많이 생기는 경우는 맥락총유두종(뇌척수액을 만드는 맥락막총의 이상) 때문에 생기지만 아주 드뭅니다.


4. 진단

우선 의사의 신체검진을 받고 그 다음에 검사를 해서 진단하게 됩니다. 단순 두개골 X선 검사, 암실에서의 투광 시험, 때로는 초음파검사가 도움이 됩니다.
CT/MRI검사가 수두증 및 그 원인 질환에 대한 가장 정확한 검사입니다. 뇌척수액의 순환을 알기 위해서 때때로 특수한 약품을 이용한 검사를 할수도 있습니다.


5. 경과,예후

일반적으로 영아(생후 1개월에서 생후 1년)의 진행성 수두증을 치료하지 않으면 1년 이내에 50%, 10년 이내에 75%가 사망하지만, 수술을 하는 경우에는 90%가 생존하며 생존자의 2/3이 정상 혹은 정상에 가까운 지능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각각의 경우에서 지능 및 신경학적 예후는 수두증의 원인, 심한 정도, 동반된 기형 유무 등의 여러 조건에 의해 달라진다고 합니다.


6. 치료

종양이나 낭종에 의한 수두증인 경우는 가능한 수술로 뇌척수액이 흐르는 길을 확보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뇌척수액의 흐름을 우회 시키는 션트(SHUNT )수술을 하게 됩니다. 션트수술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제한적인 경우에 일시적 치료로 반복적인 척수 천자, 뇌척수액 생성을 억제하는 acetazolamide투여가 이용됩니다.


7. 이럴땐 의사에게

아이의 머리둘레가 과도하게 크거나 증상에서 언급한 것이 있으면 병원으로 오십시오.


02-17-2024(토)

목사님 다니엘 때문에 생각이 많으시죠.
좋은 글을 다니엘 형제에게 주고 싶지만 어떻게 써야 할 지 몰라 그냥 기도만 하고 있습니다.
혹시 왜 검은질 잘 설명 해주고 그것을 이기게 하시면 다니엘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않을까요?
저에 오지랖 이었습니다.
제 조카도 아내도 앞에 보내면서 깨닫은 것이 알고 살면 더 오래 견딜 수 있다는 겁니다.
아내가 3개월 판정 받았으나 1년 6개월을 더 살다 갔습니다.
모든 병에는 본인의 의지력과 기도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의지할 때 이적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오지랖은 여기까지 저녁 119 기도 시간에 뵙겠습니다.

이름 : 이다니엘. 1983년 9월 2일. 별자리 : 처녀자리. 혈액형 : B형. 댄디워커 증후군
근데 의사는 이렇게 말한 다음 물이 찾는지 검께 변했는지 보호자 한데만 말해요 물론 나는 애기때라서 모른다치고  예로들어 위가 막힌 상대로 Mri 사진 찍으면 막힌 상대로 나와요 위는 막히면 골든타임 지나면 죽는데 뇌는 골든타임 지나면 안 죽는다 그래서 뇌는 수술 할수있다. 전쟁전에 태어난 사람은 질병은 결액 밖에는 없다 결액은 몸에서 일어나는 병이고 전쟁후에는 뇌에서 일어나는 병이다 옛날에는 트라우마가 있으면 뇌 수술 받을수 없게 할수있다 나라를 위한 일인데 왜 뇌수술 못밖에 하는 것인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본인보다 더 잘아시니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매달리며 모든걸  다 말씀  드리고  기도하며 인도하심을 기다립니다




세브란스 병원 고창준박사의 진찰 결과

다니엘의 병명을 그동안 갑상선 호르몬의 이상 질환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창준박사는 선천적인 신드롬 즉 쟈베드 신드롬(Jarbet Syndrom)이라고 한다.
쟈베크 신드롬이란 태어날 때부터 작은 뇌의 일부가 형성되지 않은 것으로 사람마다 증세가 다르다고 한다.
다니엘의 경우 지능지수는 대략 45-55 수준이다.
이러한 지능지수는 보통 영리한 개의 지능지수가 45-55라고 하므로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글을 익힐 수 없다고 하였다.

가족(家族. 집 가, 겨레 족)이란 주로 부부(夫婦)를 중심(中心)으로 한, 친족(親族) 관계(關係)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集團).
또는 그 구성원(構成員). 혼인(婚姻), 혈연(血緣), 입양(入養) 등으로 이루어진다.

가족을 식구(食口. 밥 식, 입 구)라고 한다.
식구란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
또는 한 조직(組織)에 속하여 함께 일하는 사람을 비유적(比喩的)으로 이르는 말.

따라서 가족이란 식사 때마다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니엘은 언제부터인지 혼자사 음식을 자기 방에서 인터넷 방송을 보며 음식을 먹고 있다.
심지어 교회 예배 후 식탁의 교제 시간에도 혼자서 따로 떨어져서 음식을 먹는다.
이러한 모습에서 이미 가족으로부터 이탈된 느낌이다.
먼저 가족으로 식구로 함께 식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07-12-2024(월)
김화자목사님에게 보낸 카톡

뉴욕으로 이주할 때
다니엘의 선천적인 장애
"쟈베트 신드롬 증후군"
(작은 뇌가 완전히 형성되지
않아 발생하는 다양한 현상)
예를 들면 언어, 보행, 인지 능력 등
그나마 이제까지 잘 따르던
다니엘이 갑자가
뇌 수술을 받고 싶다고 하여
한국인 뇌신경외과 의사
중극인 뇌신경외과 의사
두 사람에게 진료를 받았지요.
결과는 여전히 동일합니다.
다니엘이 어려서는
자신이 어려서 몰랐다고 하지만
2000년 이주 후 곧장 미국인 의사에게
검진 결과 한국과 동일한 결과를
받았기에 집중적으로
언어 능력과 인지 능력에 주력하여
이제는 혼자서도 마트에서
장을 볼 수 있고
목적지를 향하여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기적같은
삶을 살아가지만
다니엘은 그것도 만족스럽제 않아
뇌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담당 의사들은 이러한 것은
뇌 수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현 상태에서 바람직한 방향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진단 결과를
이야기 하여도 듣지 않아
그러면 한국으로 나가겠느냐?
하고 물으면
한국에 나가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할 수 없는 영역은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할 수 있으므로
믿고 맡기고 기도하여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가르치고
깨우치고 있습니다.
목회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선천적 장애를 갖고 태어난
다니엘을 사회구성원으로
바르게 세워가는 것이
더 힘들고 어렵지요.
지금까지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며
예전에 받았던 분명한 계시가
다니엘에게도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모두에게 주님의 평강을
위로부터 내려오는 참 평화가
세빛선교회 및
모든 입주자들에게
가득하게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목사님께서  미국에 가신것도 다니엘때문이었음을 알고 있읍니다. 그리고 몇년전부터 다니엘이 한국에 오기를 원한다고 하여 저도 이것 저것 기도하며 알아보았지만 마땅히 한국에 나와서 생활할때 미국보다 더욱 적합할까 하고 생각할때 그렇지 모쌀것이란 판단때문에 저도 적극적으로 권유할수 없었음이 확실하였읍니다. 실은 저희 세비짜매회서 컴퓨터나 아이티  문제등에 관한 직원이 필요하긴 하지만 아직은 기본적인 대책도 마련되진 못한 상황이라 제 의견을 피력하지 모한  상황이면서 늘 다니엘에 대한 생각만은 어떻게 진전되어 가는지 의문 상황이었읍니다. 결국 오늘 내용을 보니 한국에 나와서 의학적으로 수술을 받고싶은 뜻이 있었군요. 어찌되었던 지금은 생활하는데 많은 진전이 있고 학습능력도 터득하였다니 기쁩니다만 좀더 발전할수 있는 희망을 가져보는 것은 인지상정인데 거기에 적합한 의사를 소개받고 만날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차으로 힘든 일이지요. 이제 내용은 확실히 알았고 또한 현제의  그곳의  정리해 가는 형편까지 알았으니 저희들도 기도하며  기회닿는대로 알아보겠읍니다. 무엇보다 가정목회  그중에서도 장애를 가진 자녀를 가진 부모의 심정이 얼마나 어렵고 힘드시겠어요. 그 어려운 중에서도 많은 고난을 통과하며 여기까지  믿으으로 승리하며 살아오신 목사님을 존경하며  또한 존경합니다. 저희들도 계속 중보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성령님의  나타나심과 기적을 기도하겠읍니다. 주님의  은혜 함께 하시옵소서. 아멘!!

02-08-2024(목)

다니엘아!
유투브 동영상을 보며
하루종일 시간을 즐기는 것도
좋은 시간이겠지
그러나
이제부터는 시간을 쪼개어
말씀위로 던지면 - 믿음
찬송위로 던지면 - 평화
예수님위로 던지면 - 기도
시간을 던져 보면 좋을텐데.....

하나님
머리가 어지럽고 흔들려요
잠을 편하게 잘 수 없어요
의사는 수술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선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지요
아직 형성되지 않은
내 몸의 모든 부분들을
온전하게 만져주세요.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실한 증거를 자랑하게 하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새번역 시편 37:5


02-05-2024(월)

이다니엘
뇌 수술 받아야 하는 이유. /

1.위가 막힌 상태로 몇십년 후에 사진 찍으면 나 뇌 사진과 똑같습니다
2. 물이 찾는지 검께 변했는지 몰라서 의심 스럽고
3. 눈동자도 힘들고

이다니엘

쟈패드 신드롬 영어는 댄디워커 증후군

근데 의사는 이렇게 말한 다음 물이 찾는지 검께 변했는지 보호자 한데만 말해요 물론 나는 애기때라서 모른다치고 누가 알까요.
예로들어 위가 막힌 상대로 Mri 사진 찍으면 나 처럼 똑같이 나와요.
전쟁후 몇십년 후에 태어나도 당연히 안좋게 나와요 수술은 꼭 필요해요.
옛날에는 전쟁 왜 했을까요. 본인만 좋을라고... 입장 바꿔서 생각 해봐요.

구은숙권사
보호자랑 같이  듣지 않아요? 성인 인데...

이다니엘
내가 애기때라서..

구은숙권사
지금은 아버지와같이 다니잖아요??

의사의 소견도 같이 듣지요?

의사의 소견 그 이상은 하나님 소관이랍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문의 합시다

안화선사모
아들의 고통의 소리를 문자화 시켜서 교회란에 올리게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목사님이 세분이심에 감사 합니다
함께 기도로 중보 하게 하심입니다.

황목사님께서는 몸으로  마음으로,말로기도하심을 알게 하시고(과자와부침해서 함께 먹으라고 가지고 오심에 놀랐고 다니엘을 보셨죠~)
이 목사님과 아빠 목사님은  말로 마음읋 기도하심을  알게하십니다.

그리고 온 교회가 함께 하심을 알게 하시니 감사 감사 할 뿐입니다.

아들이 고통을 나눌 수 있도록 알리게 된것이 성장했고,성숙해 졌음이라 알기에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으로  또한 감사하고요

구원하시는 주를 바라보며
주께 몸으로 예배하는 예배자의 삶을소망합니다(로마서12:1~2)

이하루도 주님안에서  화이팅 하십시다~💕

이호승목사
힘내세요. 
우리에겐 하나님이 계십니다.
확신 할 수있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소망과 기쁨이 되시는 예수님께로 인도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겁니다.
다니엘이 힘내고 이 고통을 이길 수 있도록 힘써 기도해봅니다.

소중함을 잊지 말자

프랑스 작가이자
조종사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는
사막 한가운데에 불시착한 조종사가
행성 B612호에 사는 어린 왕자를 만나
왕자가 살던 행성의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를
집필하기 전 소설 속 주인공과
비슷한 일화를 겪었습니다.

실제로 비행기 조종사였던 그는
1935년 비행 도중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했습니다.
당시에는 통신 장비가 열악했기에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 한복판 조난사고는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침이 마르고 숨쉬기가 버거운 데다
목구멍까지 쓰라린 사막에서
5일 만에 지나가던
베두인 상인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생존에 필요한 절대 요소들이
결핍된 사막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했던
기자들은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서
당신을 살아남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가족입니다.
가족을 생각하며 최악의 상황을
버텼습니다."

늘 곁에 있어서 쉽게 생각했지만
소중한 사람과 보내는 시간을
얼마나 가졌는지요?
너무 가까이에 있어 소중함을 모르고,
너무 사랑해서
표현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언제나 함께여서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지 않는가요?

* 오늘의 명언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자
– 생텍쥐페리

02-07-2024(수)

다니엘아!
얼마나 힘들면
교회 단체방에
너의 마음을 글로 올렸을까?
아버지로서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왜냐하면
다니엘 때문에 미국을 선택했고
미국에서도 별다른 방법을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은
일반적인 질병이 아니라
선천적인 특수 장애라는 것이지
그 병명을
한국에서는 쟈베트 신드롬
미국에서는 댄디 워커
그런데 이런 병명이 수도 없이
다른 명칭으로 불려지는 것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먼저 찾아낸 사람의 이름으로
병명을 부르기 때문이란다.
세상에서 사람도 의사도 과학도 수술도
할 수 없는 일은 누가 해야 할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 뿐이지....
이제는 마음과 생각을 추스리고
정말 하나님께 전심으로 맡기고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먼저 구체적으로 다니엘의 몸에
나타나는 현상을 정확하고 자세하게
표현한다면
그것을 기도하는 것이다.
모든 가족들과 더불어
교인들이 함께 기도하며
다니엘의 고통과 아픔을
사랑과 믿음으로 나누면 얼마나 좋을까?
다니엘 힘을 내자!
다니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응답 받기를
기대하며..............

주님은 나의 고난을 돌아보시며
내 영혼의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
새번역 시편 31:7b

주님,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나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울다 지쳐, 내 눈이 시력조차 잃었습니다.
내 몸과 마음도 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나는 슬픔으로 힘이 소진되었습니다.
햇수가 탄식 속에서 흘러갔습니다.
근력은 고통 속에서 말라 버렸고,
뼈마저 녹아 버렸습니다.
새변역 시편 31:9-10



인생의 주소

젊을 적 식탁에는
꽃병이 놓이더니

늙은 날 식탁에는
약병만 줄을 선다.

아! 인생

고작 꽃병과
약병 그 사이인 것을...


어느 이른 아침,
커피 가게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내 앞에
남루한 옷을 입은
비쩍마른 한 여인이
커피 한 잔의
값을 치루기 위해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세고 있자
계산대에 있던 직원이 말했다.

“저기 있는
빵도 하나 가져 가세요.”

여인이 잠시 멈칫하자,
직원은 다시 큰소리로 말했다.

“제가 사는 거에요.
오늘이 제 생일이거든요!
좋은 하루 되세요.”

그 여인은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빵 하나를 들고 나갔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내가
그 남자 직원에게 말했다.

“생일 날 그 여인을 위해
빵을 사 주다니 멋집니다!
생일을 축하해요!”

계산대의 직원이
고맙다는 시늉으로
어깨를 으쓱하자,

그 옆에서 일하고 있던
다른 직원이 말했다.

“가난한 사람이 오는 날은
언제든 이 친구의 생일이에요.
하하하“

그러면서
내가 말을 이을려고 하자
계산대의 직원이 말했다.

“저는 그저 그 분이
먹을 것을 살만한 충분한
돈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워서..”

나는 커피를 들고 나오면서
잔돈은 필요 없다며 말했다.

“그것은 당신 거예요.“

“손님, 하지만
이건 너무 많은데요?"

그 때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오늘은 제 생일이에요.”

우리 모두
매일매일이 생일인 것처럼,
넉넉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멋진 날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인생은
꽃병과 약병 사이인 만큼
길지 않습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덕(德)을 쌓아 갑시다.

덕을 쌓는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2024 사순절 119 온라인 기도회 - 출애굽기(10 /20 / 2022 -) (02-14-2024 / 03-30-2024)



2024 사순절 119 온라인 기도회(02-14-2024) / (03-30-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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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40일 / 03- 30-2024(토)
출애굽기 40:1-
언약궤(1절)
찬송 /  장(  )


40장


1-15 성박의 건설과 각 기구의 위치와 그 성별 및 제사장의 성별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
16-33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을 세우고, 여러 기구를 각각 그 위치에 두다.
34-38 성막 위에 구름이 덮이고, 성막 안에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하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9일 / 03- 29-2024(금)
출애굽기 39:1-
언약궤(1절)
찬송 /  장(  )



39장


1-31 제사장의 성의의 제조.
32-43 성막의 완성과 모세의 검열 및 축복.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8일 / 03- 28-2024(목)
출애굽기 37:1-29
번제단(1절)
찬송 /  209장(주의 말씀 받은 그날)

38장
     1-7. 제단과 그 부속품의 제작
        8. 세수통(물두멍)의 제작
  9-20. 뜰의 포장과 기둥 및 문장의 제작
21-31. 금·은·동의 헌물의 분량과 그 용도


창세기 45:6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요한복음 4:18
내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번제단(燔祭壇)의 필수품(必需品)

1. 불(火) - 보혜사 성령

레위기 9: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성령은 어떻게 불과 같은가요?

성경은 하나님을 “소멸하는 불” (히브리서 12:29).
불이 자주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불에 붙은 떨기나무(출애굽기 3:2), 쉐키나의 영광(출애굽기 14:19; 민수기 9:14-15), 에스겔의 환상 (에스겔 1:4)이 그 예입니다.
많은 경우, 불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의 수단이었고(민수기 11:1, 3; 열왕기하 1:10, 12), 또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사사기 13:20; 열왕기상 18:38).

불은 구약성경 제사에서 중요했습니다.
번제 제단 위의 불은 하나님께서 직접 피우신(레위기 9:24) 신성한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제단 위에 피워진 당신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킬 임무를 맡기셨고 (레위기 6:13), 다른 근원에서 피워진 불은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레위기 10:1-2).

신약성경에서 제단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으로 그려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은사로 단장한 “산 제물” (로마서 12:1)로 드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신약성경의 맨 처음 부분에서, 성령은 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 (마태복음 3장)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성령이 초대 교회에 내주하시는 사역을 시작했을 때,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모습으로 나타나 각 사람 위에 임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 순간,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 했습니다(사도행전 2:3-4).

불은 성령이 하시는 일의 경이로운 묘사입니다. 성령은 적어도 다음 세 가지 방식으로 불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열정, 그리고 하나님의 순결을 가능하게 합니다. 성령은 믿는 자들의 마음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로마서 8:9). 구약성경의 하나님께서는 성막 위를 불로 덮으심으로 (민수기 9:14-15) 당신의 존재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 불 같은 존재는 그들에게 빛과 길을 제공하였습니다 (민수기 9:17-23). 신약성경의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서 “장막 집”, “하나님의 성전”인 (고린도후서 5:1; 6:16) 우리들의 몸에 거하심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시고, 위로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열정을 부어주십니다. 길을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고 난 뒤, 서로에게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누가복음 24:32)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후,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식지 않는 열정을 가지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4:31).

성령은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순결이 가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고 (디도서 2:14),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인이십니다 (고린도전서 6:11; 데살로니가 후서 2:13; 베드로전서 1:2). 은세공인이 불을 사용해 찌꺼기를 제거하여 고가의 은을 추출하듯이, 하나님은 성령을 사용해 우리의 죄를 제거하십니다 (시편 66:10; 잠언 17:3). 하나님의 불은 우리를 씻어주시고, 정결케 하십니다.


2. 피(血) - 용서(죄 사함)

히브리서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3. 뿔(角)
- 구원(생명 보호)

시편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성경에서 뿔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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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뿔이 나 있는 '모세 조각상'(미켈란젤로 작, 1515년).

일반적으로 뿔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힘을 가진 자를 상징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예부터 황소 뿔에 기름을 담아 그 기름을 왕이나 예언자, 사제에게 붓는 의식이 있었다.
이것은 기름 부음을 받는 자에게 하느님의 힘을 실어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 네 모서리 장식으로 뿔이 달려 있었다.


성경에서도 뿔에 관한 언급이 많이 등장한다.

구약성경에서 들소의 뿔은 하느님의 힘, 우리를 지켜주는 표징으로 왕이 백성을 보호하거나 원수를 물리치는 상징으로 종종 사용됐다.

"그는 맏이로 난 소, 그에게 영예가 있어라. 그의 뿔은 들소의 뿔. 그 뿔로 민족들을 땅 끝까지 모두 들이받으리라. 에프라임의 수만 명이 그러하고 므나쎄의 수천 명이 그러하리라"(신명 33:17).


뿔을 든다는 것은 힘과 기쁨과 건강과 우월함을 나타낸다.

"주님이신 그분께 맞서는 자들은 깨어진다.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천둥으로 호령하신다"(사무엘상 2:10).

뿔은 힘의 상징, 특히 왕적인 힘의 상징이 된다.
따라서 뿔을 베는 것은 그 사람의 힘이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압의 뿔이 잘리고 그의 팔이 부러졌다. 주님의 말씀이다"(예레미야 48:25).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모세 상을 보면 모세에게 뿔이 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중세 교회의 모세에 대한 그림을 보면, 머리에 뿔이 난 모세를 그리거나 조각한 것이 많다.
모세 머리에 뿔이 나도록 조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그 원인이 라틴어 성경의 번역 오류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어 흥미롭다.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증언판 두 개를 들고 내려왔다.
그런데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쳐다보니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려워서 모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출애굽기 34:9-35).
이때 모세의 빛나는 얼굴 상태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얼굴 살결이 빛나다'와 '뿔이 나다'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때문에 예로니모 성인은 구약성경 라틴어 역본인 '불가타'에서 이 대목을 그의 얼굴에 뿔이 돋은 것이라고 번역했다.
미켈란젤로는 이 성경 구절에 근거해 모세상을 조각했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후대 주석가들은 이 번역이 본래 의미와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 '모세 얼굴이 빛이 났는데 그 형태가 뿔 모양이었다'라고 해석하게 됐다고 한다.
하느님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고 하느님 영광이 모세 위에 머물렀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도 하느님의 어린양, 곧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을 상징하는 일곱 뿔을 갖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요한계시록 5:6).
성경에서 뿔은 하느님의 능력과 도움, 승리의 영광을 상징하고 있다.

사무엘하 3:4
네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열왕기상 1:5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인을 예비하니.

열왕기상 1:50-51
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 잡으니.
혹이 솔로몬에게 고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솔로몬왕을 두려워하여 지금 제단 뿔을 잡고 말하기를 솔로몬왕이 오늘날 칼로 자기 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기를 원한다 하나이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7일 / 03- 27-2024(수)
출애굽기 37:1-29
언약궤(1절)
찬송 /  장(  )


언약궤는 지금 어디에 있나?

역대하 5:7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본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 개 아래라.

성경에서 언약궤의 이동과 그 위치에 대한 마지막 말씀이다.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만들어진 언약궤가 솔로몬 왕이 만든 성전에 자리 잡는 이야기를 끝으로 언약궤의 이야기는 더 이상 성경에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면 '현재 그 언약궤는 어디에 있을까?'하는 질문을 갖게 된다.
솔로몬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무너졌을 때 언약궤는 어떻게 되었을까?
언약궤가 지금 어디에 있을까에 대한 답은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솔로몬 성전이 무너질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던 예레미야 선지자가 언약궤를 어디엔가에 잘 감춰 놓았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장소는 현 예루살렘 황금돔 밑이다.

성전이 있던 자리에 이스람교도들이 황금 돔을 세워 놓았는데 그 밑에 언약궤가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눈에 거슬려도 황금 돔을 깨부수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언약궤가 상할까 해서.

두 번째 장소는 로마 베드로 성당 밑이다.

자기들의 정통성을 강조하 기 위한 가톨릭의 주장이다.

세 번째 장소는 에디오피아의 어느 성당이다.

몇 년 전에 에디오피아에 있는 한 성당 신부가 보관 중인 언약궤를 공개하겠다고 신문 기자 인터뷰를 요청해서 소동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결국 인터뷰는 무산되고 말았지만 예레미야 선지자가 에디오피아로 갖고 갔을 것이라는 전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와 같이 언약궤가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이 엮어 있는 것은 아마도 예레미야 3장 16절에 "...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라는 말씀 때문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숨겼다고 본다.

외경 마카비 2서 2:7-8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언약궤와 분향단을 이스라엘의 회복의 날에 대비하여 감추어 놓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장소는 그 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채 남겨져 있을 것이다.

지팡이와 만나는 증거판 앞에 두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언약궤 속에 두 돌 판과 같이 넣었다(히 9:4).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두 돌 판만 남아 있었다(대하 5:10).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지 않으신다는 교훈을 주는 사건이다.
그러나 진정한 언약궤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계 11:19)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시편 110:10)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의 특징    

1. 지혜로운 사람(1, 8절) - 솔로몬

2. 총명한 사람(1절) - 아비가일
3. 자원하는 사람(3절) - 다윗

지혜를 구한 솔로몬(열왕기상 3:1-15)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야보고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여러분 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지혜로운 사람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솔로몬 왕을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로운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왕위에 올랐습니다. 나이가 많아야 20세였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아버지처럼 잘 할 수 있을까?’ ‘이 많은 백성들을 어떻게 잘 다스릴 수 있을까?’하는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반대세력을 제거하였습니다.
먼저 2장 13절~25절에 보면 왕위에 오르려 했던 아도니야를 제거하였습니다.
아도니야가 살려고 밧세바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보호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밧세바는 이 이야기를 솔로몬에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나를 세워 내 부친 다윗의 위에 오르게 하시고 허락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오늘날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왕상 2:23-24)
결국 25절에 말씀을 보면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반역에 동참하였던 아비야달과 요압을 제거하였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유언대로 아버지 다윗에게 모멸감을 주었던 시므이도 제거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2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3장에서는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립니다.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왕상 3:4)

여러분 일천번제가 쉽습니까?
2년을 하고도 270일 동안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매일 매일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솔로몬의 일천번제에 도전을 받고 일천번제헌금을 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헌금을 합니다. 그 액수를 다 다르지만 어떤 분들은 매일 매일 천원을 봉투에 넣어 헌금하고 어떤 분들은 매일매일 5,000원을 헌금하고, 어떤 분들은 매일 매일 만원을 봉투에 넣어서 헌금을 합니다. 그래서 혹시 빼먹을 수 있으니까 아예 번호를 1,000번까지 써서 놓고 헌금을 하는 모습을 저는 보았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30일 작정하고 매일 기도회를 가졌지만 30일 동안 기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때로 아플 때도 있고, 갑자기 바쁜 일이 생기기도 하고, 하다보면 체력이 따라주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천번제를 드린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여러분 헌금하는 것은 그래도 조금은 쉽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별히 번제를 드린다는 것은 정말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매일 송아지를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송아지의 각을 뜨고, 율법대로 버릴 것은 버리고 태울 것은 태워야 합니다. 정말 손이 많이 가고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물론 제사장들이 준비했겠지요? 그런데 솔로몬이 이 모든 것에 주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생각하면서 우리도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겠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작정하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가졌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저는 교만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께 작정하고 사는데 무슨 날을 정해서 작정을 하고 기도할 필요가 있겠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연약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작정하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없이 게으름을 피우기가 쉽습니다. 한없이 뒤로 미루면서 열심을 품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표를 정해 놓고/ 시간을 정해 놓고/ 날짜를 정해 놓고/ 그 목표를 향하여 힘을 쏟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십시오. 정말 될 수 있으면 시간을 작정하고/ 날짜를 정하고 작정하여 기도해 보십시오. 가능하다면 기도하면서 여러분도 일천번제를 드리십시오.
분명히 우리의 신앙의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천번제를 드릴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릴 수 있는 근거도 여호와를 사랑하고 부친의 법도대로 행하기를 힘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왕상 3:3)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면 천일이 하루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하루가 천년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낫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과 연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라헬을 얻기 위해서 삼촌 라반과 계약을 하였습니다. “7년 동안 일하면 라헬을 주리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7년을 봉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라헬과 연애함으로 인하여 그 칠년을 수일같이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일천번제를 드리는 것도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면 교회를 위해서 늘 봉사하고 헌신하여도 그것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이요. 감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일주일을 작정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정기도 시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꽉 차 있을 때 너무나 즐거운 시간, 기쁜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혹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매 말랐다면 이 시간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헌신이 감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보시고 하나님이 감동하셨습니다. 그래서 꿈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내게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이 6절부터 대답합니다.
(왕상 3:6)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왕상 3: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왕상 3:8)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왕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결론적으로 무엇을 구했습니까? 지혜를 구했습니다.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로운 마음을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10절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왕상 3:10)
솔로몬은 주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기도하여도 주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 기도를 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주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위하여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왕상 3:11)

그렇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았습니다.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기만을 위한 정욕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님은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
그렇습니다. 주님의 맞는 기도는 자기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나님의 맞는 기도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가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중보하고
연약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며 힘쓰는 것입니다.
우선순위가 바로 주님의 일에 있는 것이 바로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옛날의 성도들의 마음에는 좀 더 주의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집안일을 해도 먼저 예배시간을 피해서 하고
약속을 해도 하나님의 일을 먼저 할 수 있도록 약속을 정하고
재정이 생겨도 하나님께 먼저 받칠 것을 생각하고
정말 복 받는 사람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남는 시간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먼저 내가 쓸 것부터 챙기고 다음에 하나님 것을 생각합니다.
먼저 내 볼일 이 우선순위로 되어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일을 보는 것이 순서가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넘버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넘버 투입니다.

여러분 솔로몬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감동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보너스를 주셨습니다.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왕상 3:13-14)

그렇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가 되고 하나님이 감동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시는 것뿐 아니라 보너스로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존귀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솔로몬에게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여러분 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시는 것뿐 아니라 그 외에 것도 보너스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작정하십시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기를 작정하십시오. 그리하면 주님 우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내게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발과 아비가일이 주는 교훈(사무엘상 25:23~38)

사무엘상 25:2~3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

마온에서 5리정도 떨어진 갈멜이라는 곳에 다윗이 육백 명의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고 훗날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능멸하고 거역하여 불순종했고 오히려 자기를 추켜세워서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신 아말렉과의 전쟁을 자기 전술과 전략으로 이긴 것처럼 자기 이름으로 공덕비를 세우기도 하고 하나님이 철저히 금하셨음에도 아말렉 사람들의 가축들을 골짜기에 자기 몫으로 숨기기도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세움 받고 쓰임 받는다고 다 된 것이 아니라 교만하게 됨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공덕을 치하하고 자기이름으로 행세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부득이 그를 버리시기도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와같은 사울을 이미 버리시기로 작정하시고 이스라엘 왕의 후계자로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다윗은 늘 성령충만하여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인이었습니다. 또한 맡겨진 양떼를 돌봄에 있어서도 맹수들과 싸우면서까지 목자의 사명을 다해 돌보았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목숨보다 귀한 것으로 여겨 신앙인격적 사명을 성공적으로 감당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의 믿음을 맘에 들어 하셨습니다.

이런 다윗을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세우시기 위하여 그에게 망명생활의 훈련을 시키시는 과정입니다.

무용(武勇)에 뛰어난 600명의 용사들이 다윗왕조를 세우기 위하여 훈련하고 있었던 곳이 갈멜이었습니다.

다윗은 근처에서 양과 염소를 돌보고 있던 나발의 목자들을 당시 강도들이 들끓었기 때문에 그의 군사들로 하여금 해치지 못하게 지시하고 더불어 목동과 양떼까지 보호하여 지키게끔 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나발의 양털 깎는 날이 되어 갈멜에서 양털을 깎고 있었습니다. 유목민들에게는 양털 깎는 날이 수입이 생기는 소망적인 날이라 큰 잔치를 베풀고 지나가는 나그네까지도 넉넉히 대접함으로 그 즐거움에 참여하도록 하여 인심을 후히 쓰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고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로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삼상 25:5~8)”고 그의 부하 열 명을 나발에게로 보냈습니다.

그러자 나발은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삼상25:10~11)”고 합니다. 그는 빈정대며 주인에게서 떠나 반란을 시도하여 갈라져나가 문제를 일으키는 놈들이 있다고 다윗을 빗대어 욕을 한 것입니다.

나발의 미련함은, 첫째로 하나님이 성령을 충만케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쓰실 사람인 다윗을 몰라본 것입니다. 둘째로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가축들을 자기의 소유물로 생각하여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이 모든 것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밝히고 계십니다. 나발의 세 번째 미련함은 시대를 분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게 될 것인지에 대한 분별이 전혀 없었습니다.

나발의 이런 미련함에 빈손으로 돌아온 다윗의 부하들을 보고 다윗은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는 사백 명 가량은 칼을 차게 하고 그들을 죽이러 올라가고 이백 명은 그 소유물 곁에 남겨 두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동도 실수였습니다. 자신이 그들의 목동과 가축을 돌보아준 것에 대한 응당한 댓가로 생각한 다윗은 나발이 자기를 모욕하고 무시했다고 생각하여 감정적으로 대처한 것입니다.

로마서 12:19~20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하셨습니다.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그의 종으로부터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사자들을 보내었거늘 주인이 그들을 수욕하였나이다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상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을 알아 생각하실지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이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삼상25:14~17)”고 보고를 받습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서둘러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 준비한 양 다섯과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을 취하여 나귀들에게 싣고 다윗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나발을 향해 가고 있는 다윗을 만난 아비가일은 본문의 내용과 같이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자신의 남편 나발이 너무나 서운하게 대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러 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쓰실 계획을 압니다. 곧 왕이 되실텐데 왕좌에 오르시게 되면 이런 미련한 사람 때문에 피 흘리는 죄를 지었다는 것이 평생에 지울 수 없는 왕의 허물이 될까봐 이처럼 사정하고 비오니 미련한 자들을 죽일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런 피흘림을 막는 것이 아니겠습니까”하고 다윗에게 하나님을 인식시키는 말을 합니다.

이에 다윗은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두지 아니하였으리라(삼상25:32~34)”합니다. 그리고는 그 음식을 받고 그녀의 말을 듣고 그 청을 허락했다고 말을 합니다.

아비가일이 그 남편 나발에게로 가보니 왕의 잔치같은 잔치를 하며 술에 크게 취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을 바로 말하지 않고 다음날까지 기다려 술이 깬 후에 말을 해줍니다.

신앙적인 지혜는 반드시 해야 할 말도 상황과 때를 분별하고 상대를 잘 알아 상대가 영적인 유익함으로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신앙인격으로 슬기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 남편 나발이 다음날 아침, 술이 깨어 일어났을 때 전날에 있었던 일을 설명합니다. 아비가일의 말을 다 들은 그는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어 열흘 후에 죽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나발의 어리석음을 통한 아비가일의 신앙지혜를 본받으라고 여러분들에게 유익한 교훈으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이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에게 대적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아비가일은 그 남편이 죽은 후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거역하다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이상 회개할 소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면 나발과 같이 없애버리십니다.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살기를 힘쓰는 사람은 예수님과 영원한 영적신부가 되도록 예수님의 짝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한 교회의 목자인 목사들은 오로지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선한 목자가 되어 그 교회에 속한 양 떼가 모두 하늘나라 가도록 하기 위하여 진액을 다하여 애쓰고 있다면 이런 목자의 뜻을 따라 함께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다윗(사무엘하 5:1-25)


●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예수님 빼고 다윗만큼 많은 분량에 걸쳐 일생이 자세하게 소개된 인물도 없다.
그만큼 성경에서, 또 기독교 신앙에서 다윗은 중요한 인물이다.
다윗은 어떤 인물인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도 어느정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윗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알고 있다. 여러분도

다윗에 대해서는 한마디씩 할 수 있을 것이다.

일개 목동이었으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되었던 극적인 인물이요, 예수님의 조상이요, 성실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우며,

위대한 시인이요 음악가요 골리앗을 넘어뜨린 최고의 용맹스런 장수요,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실수도 저질렀던, 참으로 다양한 재능과 인간미와 신앙을

겸비했던 인물!

이 한시간에 다윗에 대해 말하기란 사실 무리일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은

다윗의 일생을 초기, 중기, 말기로 나누어서, 평소 여러분들이 성경 이야기를

통해 잘 알고 있는 부분 몇가지를 신앙적으로 재해석하도록 하겠다.

‘다윗’은 아브라함의 14대 손이며, 유다지파 이새의 여덟째 막내아들로, 그

이름은 히브리 말로 ‘사랑받는 자, 사랑스러운 자’라는 뜻이다. 그의 이름대로

다윗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다. 유대땅 베들

레헴에서 태어났으며, 일개 목자에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되기까지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은혜로 장식되어 있다.

● 다윗이 등장할 당시 이스라엘은 사울을 초대 왕으로 세워 왕정을 수립하게

되었고, 백성들이 여망하는 바 외적의 압제로부터 막 벗어나는 시기에 있었다.

그러나 사울이 비록 왕이라는 직책을 수행하긴 하였지만, 정치적.군사적 입장

에서 볼 때 여전히 불안정하였다. 그는 이전의 사사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주변의 국가들이 강력한 왕정국가를 형성하고, 막강한 군대와 병기들을

갖추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국력을 신장시킬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세워 신본주의적 왕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다윗은 앞선 다른 신앙의 위인들과 달리 조금 일찍 70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평생 전쟁터에서 많은 고생을 해서인지 수명이 짧았다. 다윗의 70 생애는, 20세 이전의 초기와, 약 20세 경 골리앗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의 장수로 등장하여, 30세에 왕위에 즉위하고 주변의 모든 이방민족을 정복했던 30년간의 중기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면서부터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고 70에 죽기까지 20년간의 말기로 구분할 수 있다.

● 초기

다윗은 베들레헴이라는 시골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들판에서 양떼들과 생활하면서 자랐고, 그래서인지 몸집은 크지 않았지만 기운도 세고 침착하며 기지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다윗은 양을 치다가 사자와 곰을 만났지만 그들을 쳐죽이고 양과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던 용맹스러운 청년이었다. 나이에 비해 다윗은 책임감이 투철했고 생각이나 마음가짐은 어른스러웠다.

다윗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사울 대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는 기름을 붓기 위해 이새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사울왕이 알게되면 이것은 반역으로서 사무엘은 물론 이새의 집안까지 죽임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무엘은 우연히 베들레헴에 방문한 것처럼 하여 화목제사를 드리면서 이새의 가족, 즉 아들들도 초청하였다. 이때 이새는 여덟명의 아들 가운데 일곱 아들을 사무엘 앞에 세웠다. 다윗은 아직 20세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어린 목동에게로 향해 있었다. 사무엘의 예상을 뒤엎고 이새의 막내 아들 다윗이 미래의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이때부터 다윗은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어른들의 제사에 참석할 수도 없었던 어린 다윗이었지만, 이미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

다윗의 모친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부정확하고 미흡하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다윗왕의 위치로 볼 때 이것은 예외이다. 성경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다윗의 어머니는 이방 암몬 사람과 관계가 있는 여인 같다. 즉 다윗은 이방 여자에게서 태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하고 다윗은 외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형들에게 눌려 살면서 들판에서 양을 쳤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볼 때, 다윗은 결코 좋은 환경 속에서 자란 인물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들어 쓰시기 전에 반드시 준비시키시고 연단을 하신다. 쇠를 강하게 하기 위해 불로 달구고 물로 식히듯이. 다윗은 어려서부터 형들에게 눌려 집안에서 귀여움받고 지내지를 못하고 베들레헴 들판을 뛰어다녀야만 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당시에도 목자는 가장 비천한 직업이었다. 집에서 잠자지 못하고 들판에서 밤새워 양떼를 지켜야 하는 일은, 요즘으로 치면 3D 업종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고난의 목장이 어린 다윗에게는 그대로 교실이요 도장이요 또 예배당이기도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자연의 배움터에서 그를 가르치고 그와 교제하면서 은혜를 베푸셨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목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 다윗이 집안에서 고이 자랐다면 어찌 이런 시가 탄생할 수 있었겠는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8).” 밤을 새며 양떼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쏟아지는 별빛을 바라보지 못한 사람이 어찌 이런 시를 지을 수 있었겠는가?

다윗은 힘들고 지친 고난의 현장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을 마음껏 맛보았고, 여호와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있는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이 고달프고 힘이 드는가? 밤이 깊을수록 별빛은 더욱 빛나게 마련이다. 다윗처럼 여러분도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아가게 될 때, 오늘의 힘든 처지가 오히려 여러분을 더욱 빛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 주실줄로 믿는다.

● 중기

여호와의 신에 감동한 다윗은 더욱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게 되었고 드디어 이스라엘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기 전, 이미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수금을 잘타고 용기와 구변이 준수한 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여호와의 신이 떠나고 악신이 든 사울을 치료하기 위해 다윗이 추천된다. 이에 다윗은 사울왕을 곁에서 보좌하는 사람이 되어, 사울왕이 악신으로 인해 괴로워할 때 수금을 타서 사울을 상쾌하게 하였고, 사울의 총애를 받게 되어 왕의 병기드는 자가 되었다. 즉 사울왕의 최측근 비서가 된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블레셋 사람들이 골리앗을 앞세워 침범해 왔다. 당시 다윗은 베들레헴 집과 사울왕을 오가면서 그 아비의 양을 쳤는데, 한번은 아비 이새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간 형들에게 음식을 전하기 위해 전장으로 오게 되었다. 이때도 다윗이 징집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면, 아직 20세가 되지 않은 모양이다. 전장에 당도한 다윗은 적장 골리앗이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능멸하는 것을 듣게 되었고, 여호와의 영에 감동된 다윗은,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사울왕을 설득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 골리앗을 넘어뜨린다.

이날의 승리 후 다윗은 사울의 장수가 되어 가는곳마다 승리를 거두게 된다. 다윗의 명성은 금새 전국에 퍼져나갔다. 그런데, 사울왕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렇게 노래한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신하가 군주를 능가하여 백성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다윗의 극심한 고난은 시작되었다.

사울은 여러번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 다윗은 산속으로 들판으로 도망쳐 다녀야만 했다. 당시의 자기 신세를 다윗은, ‘죽은 개나 벼룩’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다윗은 결코 사울왕을 미워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라고 한다면, 다윗은 참으로 위대한 사랑의 소유자였다. 하나님은 결코 그를 적의 손에 넘겨주시지 않았다. 그의 생명은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여’ 있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은 환난을 받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떨 땐 더 큰 환난 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보호 아래 연단을 받아 믿음이 깊어지는 사람이다.

다윗은 30세에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으로 즉위하기까지 10년 가까이 유리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미친사람처럼 침을 흘리며 목숨을 구걸해야할 때도 있었다. 그 동안의 싸움이 얼마나 괴로웠는지는 수많은 시편에서 다윗은 자신의 심정으로 토로하고 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어 주소서.’ 이러한 극심한 역경과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그릇은 완성되는 것이다.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선을 행하고자 열심을 다하는 성도의 앞길에도 때로는 고난과 역경의 장벽들이 계속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역경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이 예비되어 있음을 믿고 의지하며, 선을 행하되 낙심치 말고 끝까지 인내하자. 절대 서두르지 말고 조급해하지 말자. 하나님이 세우시는 때를 기다리라. 그리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며, 복되고 존귀한 자리에 앉게 하실 것이다.

● 말기

다윗은 먼저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 되었다. 그 기간은 7년 반이었다. 그리고 사울왕의 사촌 아브넬의 반역 사건으로 다윗이 유다와 이스라엘 전국의 왕이 되었다. 이리하여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33년 동안 전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통치 하에서 날로 융성해 갔다.

이런 다윗에게 실패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성공하여 이름을 널리 떨친 후의 일이었다. 사울에게 쫓겨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고난을 받을 때 그의 영혼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사방이 평정되어 왕위가 견고해지자, 그는 방심하기 시작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암몬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승리는 이미 다윗의 수중에 들어와 있었다. 그래서 나이든 다윗은 요압을 보내어 이스라엘 전군을 지휘하게 하고 자기는 왕궁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왕궁에서 평안히 낮잠을 자고 저녁 때가 다되어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처럼 안일한 장소 - 그곳이야말로 성도에게 위태로운 곳이다. 다윗은 여기서 실패하고 말았다.

충성스런 부하 우리야가 왕을 위해 전쟁에 나가 있을 때 그 아내를 범한다는 것은 얼마나 파렴치한 행위인가? 게다가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야를 전사하게 했다. 그리하여 다윗은 한꺼번에 간음죄와 모살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물론 이 일로 다윗이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일로 다윗의 가정은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참에 빠지고 만다. 왕자들간의 싸움, 가장 아꼈던 아들 압살롬의 반란, 다윗은 환갑을 넘은 나이에 맨발로 예루살렘성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다윗의 두 번째 실수는 인구조사의 실시였다.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 지시대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인구 조사를 하여 군대를 뽑고 세금도 거두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아니었으나, 높고 영화로운 권세가 다윗으로 하여금 교만으로 눈이 가려진 모양이다.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 7만 명이 전염병에 걸려 죽어갔다. 지도자들이 정말 정신 차리고 잘해야 한다. 지도자의 잘못된 선택 하나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게 되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윗의 최대 강점은, 금방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사람은 실수하거나 넘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의 영적 성향이 더 중요하다. 다윗도 엄청난 죄를 범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회개하는 사람이었다. 시편에는 측은할 만큼 뜨겁고 간절한 다윗의 회개기도가 나타나 있다. 다윗은 회개를 통해 바로 자신을 회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실수할 때마다 자신을 바로 일으키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 다윗은 시인으로서, 가인(歌人)으로서, 군인으로서, 정치가로서, 신앙인으로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실 메시야의 조상으로서, 또한 그 모형으로서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다윗은 자기가 왕이 되고 이스라엘의 국위가 높아진 원인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임을 끊임없이 고백하며, 감사드리며 살았던 겸손한 사람이었다. 

실로 이 땅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 있겠는가? 하지만 그 은혜를 깨닫고 살아가는 자는 심히 적다. 믿음의 백성들도 마찬가지다. 삶의 걸음걸음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늘 실감하며, 감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한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5일 / 03- 25-2024(월)
출애굽기 35:1-35
행하게 하신 말씀(1절)
찬송 / 279장(주의 말씀 듣고서)

디럭스 바이블 출애굽기 35장

거룩한 장소(공간)
거룩한 시간(안식일)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20장, 35장)
* 성

1-3 안식일에 관한 모세의 교훈
4-19 성막을 위해 헌물 할 것과 그에 필요한 기구들을 제조할 것을 명하다.
20-29 백성들이 즐겨 여러가지의 헌물을 하다.
30-35 공인에 대한 모세의 훈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출애굽기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 십계명을 주셨을 때 명령하신 것


출애굽기 31:13-16

- 성막을 완성한 후에 말씀하신 것으로 장차 성막에 하나님의 임재를 원한다면 반드시 안식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이 됨이니라 그 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4일 / 03- 23-2024(토)
출애굽기 34:1-35
모세의 얼굴(30절)
찬송 / 495장(내 영혼이 은총 입어)

    1-4. 모세가 다시 등산하다.
    5-9.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선포하시다.
10-17. 하나님의 약속과 경계
18-27. 안식일과 삼대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 및 첫 새끼의 대속
28-35. 모세의 하산과 변모

광채(7160) 카란(qâran)  קָרַן   

1. 빛나다.  2. 히필형 : 뿔이 나다
발음 [ qâran ]
구약 성경  /  4회 사용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광채가 나나
- 이것은 성물과 접촉하는 것이 거룩해진다(29:37; 30:29)는 원리와 일맥 상통한다.
즉 모세는 다른 모든 것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하나님과의 교제에만 집중했는데 그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 혹은 거룩함이 자연스레 모세에게도 나타난 것이다.
즉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모세가 성화(聖化)되어진 것이다.
이외에도 성경에는 얼굴에 나는 광채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이 몇 군데 있다(마 13:43; 17:2; 행 6:15; 7:20).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 원문에 가깝도록 직역하면, '보라! 빛나는 얼굴의 피부가 되었도다'란 뜻으로 모세의 빛나는 얼굴의 광채를 보고 놀라워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생생히 묘사되었다.

두려워하더니
- 앞절의 '광채가 나다'에 해당하는 원어 '카란'은 '뿔이나다'는 뜻도 있다.
아마 모세의 얼굴에서 나는 광채는 뿔과 같은 모양으로 빛났던 것같고 이때문에 사람들은 더 두려워 했던 것 같다.
따라서 라틴어 벌겟역(Vulgate)은 이를 '뿔이 났다'로 번역했고, 이에 따로 모세를 묘사한 얼굴에 뿔이 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적용이다.
한편 후일 사도 바울은 이 모세 얼굴의 광채를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새언약의 영광스러운 광채로 승화시켰다(고후 3:7-18).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3일 / 03- 22-2024(금)
출애굽기 33:1-23
그 반석 위에 서라(21절)
찬송 / 539장(이 몸의 소망 무엔가)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Then the LORD said, "There is a place near me where you may stand on a rock.

    1-6. 동행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슬픈 고시와 이스라엘 자손의 근심 및 겸기(회개).
  7-11. 회막에 들어간 모세.
12-17. 모세의 간구와 하나님께서 동행하시겠다는 언약의 갱신.
18-23.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한 모세의 기도와 그 응답.

반석
- 본래 의미는 '절벽'이며 일반적 의미는 '바위'인데 상징적으로 '피난처'를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모세를 '반석'에 두겠다는 것은 상징적으로는 피난처에 숨기시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편 성경에서 '반석'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는데(신 32:15;삼상 2:2시 89:26),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보호하는 피난처이자 구원하는 능력이심을 나타낸다.

서다(나찹. 5324)
נָצַב 스트롱번호5324

1.

두다

2.

니팔형 נִצַּב

3.

놓다

발음 [ nâtsab ]
구약 성경
19회 사용
반석(6697. 추르)

צוּר 스트롱번호6697
1.

2.

바위

3.

가장자리

발음 [ tsûwr ]
어원
6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74회 사용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을 때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모세가 죽은 줄 알고 성급하게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시내 산에서 내려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는 화가 나서 내려오다가 첫 번째 돌 판을 우상을 섬기고 있는 자들에게 던져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첫 번째 돌 판이 깨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금송아지 우상을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리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금송아지 사건 때문에 같은 동족이 죽게 됩니다.
이때에 모세의 편에 섰던 사람들이 레위지파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우상을 섬겼던 자들을 죽였습니다.
이들이 죽인 사람이 삼천 명 정도가 됩니다.
이때에 레위 자손들이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복을 받게 됩니다.
이 정도로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일 때문에 하나님은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같이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에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풀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급하다 하더라도 금송아지와 같은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우뚝 서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출애굽기 33: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하나님의 응답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네가 말하는 이 일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같이 올라가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름도 안다는 것입니다.

‘너를 앎이니라’ (י דע야다 3045 와우접속사. 동사, 칼, 미완료, 공성, 1인칭, 단수. 남성, 2인칭, 단수)
동침하다, 알다, 익숙하다, 기억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아는데 이름으로도 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개념에 서로 동침하는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신랑과 신부가 서로 결혼하여 익숙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항상 어디에 있는지 기억하게 되고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가 이런 관계입니다.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말에 즉시로 대답하셔서 너의 이름도 알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도 계속해서 내가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너의 이름을 잊지 않고 내 마음에 새겼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와우접속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미리 정하셨으니’ (προοριζω 프로오리조 4309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 단수, 3인칭) 예정하다, 미리 정하다, 예정을 입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προ 프로 4253) ~전에, 앞에, 라는 뜻과 (οριζω 호리조 3724) 결정하다, 정하다, 선포되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구원받을 자로 선택하셨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공로가 필요 없이 믿음도 필요 없이 예정하셔서 구원시키기로 결정을 내리시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선택받은 것은 나의 공로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잘 믿을 것을 아시고 예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이것이 선택받은 자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창세전에 나의 이름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직설법과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창세전에 나의 이름을 아셨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사실이 있습니다. 또한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 땅에 왔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고 믿게 하셔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출33: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베푸느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 모든 선한 것을’ (טוב투브 2898 명사, 남성, 단수. 공성, 1인칭, 단수)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선한 것, 이라는 뜻이며 어근은 (טוב토브 2895) 좋았다, 선히 여기다, 기뻐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시겠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과 기뻐하는 것을 지나가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1:17-18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여주신 선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은혜와 진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원래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선한 것에서 단수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어 줄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출33: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을 보면 살 수가 없습니다.

‘내 얼굴을’ (פנים파님 6440 명사, 남성, 복수. 공성, 1인칭, 단수) 얼굴, 진설병, 용모, 라는 뜻이며 어근은 (פנה파나 6437) 권고하다, 돌아보다, 살피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볼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복수형을 쓴 것은 하나님의 얼굴이 많아서 복수형을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영광의 광채가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복수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가 없어서 하나님은 진설병으로 주셨던 것입니다.

출39:36 상과 그 모든 기구와 진설병과

성막에서 떡상 위에 놓여진 진설병이 (לחם הפנים레헴 하파님)입니다. 이것을 번역하면 그 얼굴의 떡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의 떡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떡을 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죄인들은 이 떡을 먹어야 만이 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생명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요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원죄가 사라지고 생명의 떡을 먹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서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죄를 예수님께 담당시키셔서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가 있는 것입니다.

출33: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반석 위에’ (צור추르 6697) 바위, 반석, 이라는 뜻이며 (צור추르 6696) 함께 묶다, 압박하다, 괴롭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반석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반석입니다. 바로 고난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십자가에서 고통의 압박을 받으시게 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고통과 괴로움의 압박을 받으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셔야 만이 선택받은 죄인들과 하나님을 함께 묶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10:4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료를 뒤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 반석은 신령한 음료가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입니다. 생수가 나와서 뜨거운 광야에서 마실 수가 있습니다. 이 반석도 (צור추르)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반석을 준비하여 주시고 그 위에 서라고 한 것입니다.

‘서라’ (נצב나차브 5324 동사, 닢알, 완료, 남성, 2인칭, 단수) 두다, 자리 잡다, 정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반석 위에 세워주셨습니다. 주님의 자리에 올려주셔서 생명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서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정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닢알 단순 수동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자리는 죄인인 인간 스스로 올라갈 수 없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올려주셔야 가능합니다. 인간의 의지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세워지면 하나님이 내려오게 하지 않는 한 절대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번 구원받은 백성들은 절대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반석 위에 서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출33:22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반석 위에 세워주시니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반석 틈에 두고 하나님이 지나갈 때에 주님의 손으로 모세를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반석 틈에’ (נקרה네카라 5366) 갈라진 틈, 구멍, 이라는 뜻이며 어근은 (נקר나카르 5365) 구멍을 뚫다, 찌르다, 파내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석 틈에 두시겠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셔서 옆구리에 창을 맞으시고 피를 쏟아주셨습니다. 주님은 몸에 채찍 자국으로 구멍이 뚫리듯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온몸이 찢기시면서 살 조각이 파내어지는 고통을 당하신 분입니다. 이 반석 틈에 죄인들을 숨겨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요19: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시고 피와 물을 쏟아내어 주셨습니다. 죄인을 위한 대속의 피를 운명하신 후에도 쏟아주신 것입니다.

‘옆구리’ (צד차드 6654) 옆, 측면, 이라는 뜻이며 어근은 (צדד차다드) 외면하다, ~의 쪽으로 돌리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옆구리에 창을 찔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택받은 자들이 원죄에 빠져 하나님을 몰라보고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바라보면서 그쪽으로 눈을 돌리고 우상을 섬겼던 죄 때문에 예수님은 옆구리에 창을 찔리셔서 내가 우상을 섬겼던 죄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원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모세도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 은혜 가운데 세워주시고 손으로 덮어주신 것입니다.

출33: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반석 틈에 세워주시고 지나가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손으로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을 거두어 주시게 됩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등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등을’ (אחור아호르 268 명사, 남성, 복수. 공성, 1인칭, 단수) 뒤쪽으로, 뒤에, 라는 뜻이며 어근은 (אחר아하르 309) 뒤에 남다, 머물러 있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의 등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얼굴에 나오는 영광은 볼 수가 없지만 뒤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호하심을 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등에서 나오는 후광의 보호하심도 얼굴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강력합니다.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등을 보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요14:8-9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빌립은 예수님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등만 보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서 있어야 만이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반석 위에 세우지 않으시고 창세전에 선택한 백성들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의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세워졌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등만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율법에 빠져있다면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가 사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얼굴을 보여주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어떠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안으로 들어와서 은혜가 충만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게 되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반석 위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주님만을 섬기면서 독생자의 은혜와 진리를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2일 / 03- 21-2024(목)
출애굽기 32:1-35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32절)
찬송 / 514장(누가 주를 따라)

1-6.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상 아래서는 민중이 금송아지를 만들다(백성의 배신).
7-14. 산상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첫째 중보기도)
15-20. 모세의 하산과 분노
21-24. 모세의 힐문과 아론의 변명
25-29. 죄에 대한 모세의 조처
30-35. 모세의 두번째 기도(둘째 중보기도)


주의 기록하신 책
- 이 말이 성경 다른 곳에서는 '생명책'으로도 표현되었다(시 56:8; 69:28; 139:16; 단 12:1; 빌 4:3; 계 3:5; 13:8; 17:8; 20:12).
이것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 준다.
시민 명부에 자신의 이름이 등재된 자들만이 그 지방의 주민 또는 그 나라의 국민으로 인정되며 아울러 시민권이 보장되었던 당시의 풍습에서 따온 이 '생명책'이라는 말은 신약에서는 보다 영적인 의미를 지닌 개념으로 나타난다(빌 4:3; 계 3:5).
곧 이 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 모세의 이 기도는 신약 시대 자기 동족 유대인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던 바울의 기도와 유사하다(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책임을 회피했던 아론과 달리 모세는 이처럼 자기 민족을 위해 생명까지 내놓을 만큼 투철한 책임 의식과 동포를 사랑하는 정신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Bengel).
실로 모세나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천국의 기쁨과 지옥의 고통을 잘 아는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적인 생명까지 걸고서 그토록 간절히 중보 기도 드리는 이유는 죄중에 죽어갈 저 무지하고 불쌍한 뭇 영혼들에 대한 '사랑'때문이었다.
즉 불쌍한 영혼들에 대한 불타는 사랑이 지옥의 그 고통스런 불꽃(눅 16:24)까지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랑의 힘은 크고 위대하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그 치욕스런 십자가를 흔쾌히 지신 것도 '오직 사랑'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저 죽어가는 뭇 영혼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책임이 있는 우리들도 이같은 사랑의 마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고전 4:1, 2).

내 이름을 지우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지 3개월쯤 지나 시내 광야에 도착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40일간 있었습니다.
시내산은 한라산(1,947.06m)보다는 높습니다.(대략 343.94m)
해발 2291m입니다.
그 기간 동안 산 아래의 백성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백성들은 금 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하며 거기에 절하고, 화목제까지 바쳤습니다.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이 사태를 산상에서 다 지켜보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여러분은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걸 섬길 수 있습니까? 

백성들이 바친 금붙이로 아론이 만든 형상은 송아지 모양의 애굽의 아피스입니다.
황소의 신 '아피스(Apis)'
사람의 생산을 돕고 곡물의 생산을 도와 잘 살게 해준다는 아피스 신상입니다.
아무리 모세가 한 달 이상 자리를 비웠다 해도 이것은 너무한 처신입니다.
백성들은 애굽 땅에 임한 10가지 재앙을 목격한 사람들이고, 홍해를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했고, 반석에서 나온 생수를 먹었고, 어제만 해도 메추라기를 먹었고, 당일 아침에는 만나를 먹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한자성어 '배은망덕(背恩忘德)'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인간관계 속에서 은혜를 입고도 마음이 변하는 상황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이처럼 남의 도움이나 은혜를 잊고 배신하는 것을 한마디로 표현한 단어가 바로 배은망덕입니다.
한자로 살펴보면, 背는 등을 뜻하며 배반하다는 뜻도 가지고 있고, 恩은 은혜를 의미합니다. 忘은 잊다라는 뜻이고, 德은 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들 한자가 조합되어 '배은망덕'이라는 성어가 완성되는데요, 이는 남에게 입은 은덕을 잊고 배반하는 것을 말합니다.
배은망덕이란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와, 이를 피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보려 합니다.

배은망덕(背恩忘德) 이란?

유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례나 전래동화와 같은 구체적인 이야기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배은망덕이라는 행동이 인간 세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를 간결하게 표현한 성어로 전해져 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인간 사회에서 배은망덕이란 행위는 종종 목격되었으며, 이러한 행위는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배은망덕이라는 행동은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행위로 여겨지고 있으며, 가족, 친구, 동료와 같은 인간관계에서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배은망덕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남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갚아야 함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인간관계의 소중함과 신뢰를 쌓아가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은망덕을 피하고자 한다면, 남에게 받은 도움이나 은혜를 잊지 않고 갚아야 하며, 인간관계에서의 도덕적 가치를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자풀이

  • 背 : 등 배, 배반할 배 
  • 恩 : 은혜 은 
  • 忘 : 잊을 망 
  • 德 : 클 덕, 덕 덕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는 단어는 남에게 받은 은혜를 잊고 배신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가치인 은덕을 인정하고 갚아야 함을 강조하며, 이를 잊어버리고 배신하는 것은 큰 죄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실생활 예시

  1. 그의 배은망덕한 행동에 사람들은 큰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2. 한 번의 배은망덕으로 오랜 친구와의 관계가 망가졌다.
  3. 그녀는 어머니의 큰 은혜를 잊고 배은망덕한 행동을 했습니다.
  4. 정부의 배은망덕한 정책에 시민들의 분노가 치솟았다.
  5. 이런 배은망덕한 행위를 저지른 사람에게 용서할 수 없어요.
  6. 그는 기업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하여 경쟁사로 넘어갔다.
  7. 군주의 배은망덕한 행동으로 세력이 무너졌다. (옛날 사례)
  8. 소설 《춘향전》에서 병렬차관의 배은망덕한 행동이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가져왔다. (소설 출처: 춘향전, 작자 미상)
  9. 시인 정지용의 시 《무진기》에서 "허무하게 배은망덕한 세월아"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시 출처: 무진기, 정지용)
  10. 고려시대 문헌 《경기록》에는 배은망덕한 자에게 벌을 내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문헌 출처: 경기록, 고려시대)

그런데 문제는 이 사건을 황당해하는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인가입니다.
우리는 금송아지를 섬기지 않습니까?
이 시대 최고의 신은 금송아지, 맘몬입니다.
물신숭배주의가 여전히 이 시대의 최고의 우상입니다.
우리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욕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섬겨도 나가서는 금송아지 앞에 절하는 광신도가 우리입니다.
신자나 비신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하나님만 섬기면서 여기까지 왔습니까?
아니면 아피스에게 절하며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본문 25절을 보면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 절하며 방자했다고 합니다.
원어의 의미는 벌거벗었다는 뜻입니다.
물신숭배는 벌거벗는 문화와 함께 갑니다.
우리는 쾌락주의 문화의 홍수 속에 삽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황금만능주의, 물신숭배주의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여호수아와 함께 40일 만에 내려온 모세가 백성들의 진풍경을 보고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양손에 든 십계명을 내던집니다.

19절입니다.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모세는 하나님이 직접 써주신 십계명 돌판을 던져 깨뜨립니다.
민수기를 보면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모세가 이토록 흥분해서 십계명 돌판을 내던졌을 정도였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니라”

이것은 우상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자 아피스가 무력하고 거짓된 신이라는 사실을 백성 스스로 확인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세의 금송아지 사건 처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1절 이하입니다.
“[21]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당신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당신이 그들을 큰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
[22] 아론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23]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24]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여기서 왜 모세가 아론을 심문하고 추궁합니까?
시내산에 올라가기 전에 아론에게 백성들의 치리를 맡겼기 때문입니다.
아론이 대답합니다.
22절 하반절입니다.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자신의 잘못이나 지도력의 한계를 시인한 게 아니라 백성들의 악함을 탓하고 있습니다. 지도자는 이러면 안 됩니다. 자기 책임이라고 해야 합니다. 아론은 자기 책임을 회피하려고 과장하고 거짓말도 합니다. 24절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불에 금을 던졌더니 거기서 송아지가 나옵니까? 32장 4절입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이렇게 엄청난 사건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지도자인 아론의 책임이라고 하고, 아론은 백성들이 협박했기에 그들 책임이라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사회는 반드시 망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 책임적 주체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반드시 자기 선택에 책임을 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결단과 선택에 대해 책임을 물으십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주님이 어느 날 회당에서 한 손이 불구가 된 장애인을 고치셨습니다.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의료행위를 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안식일 법을 범한 겁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무슨 생각으로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치셨을까요? 마가복음은 그 사건이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게 된 최초의 동기라고 합니다. 주님은 그 책임을 홀로 지겠다는 듯이 숨어서 그런 일을 하지 않고 백일하에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장애인 한 사람을 고쳐주시면서도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각오를 하신 겁니다. 이 일로 책임을 지고 죽어야 한다면 죽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론과 백성들은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현 시대도 마찬가집니다. 

하지만 모세를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가 엎드립니다.
31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백성들의 물신숭배, 아론 같은 공직자들의 무책임까지 모두 자기가 짊어지고 비상한 각오로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32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역할입니다.
남의 허물과 죄악을 내가 대신 짊어지고 모세처럼 화해의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내 가정, 내 교회, 내 사회, 내 나라, 내 민족의 허물을 대신 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사죄를 빌고 구원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비장함을 보십시오.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달라고 합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지금은 나라와 사회, 민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모세처럼, 심판에 직면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하나님과 밀당하며 끝까지 기도한 아브라함처럼, 자신이 저주를 받는 한이 있어도 내 민족은 구원받기를 원한 바울처럼 우리도 맘모니즘이 창궐하는 이 시대를 위해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큰 은혜를 베푸사 이 시대와 나라를 구원해 주실 줄 믿습니다.


"쓴 뿌리"란 무엇인가?

쓰다는 표현은 보통 분노 및 원한 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12:15에서 과연 그런 뜻으로 쓰인 것일까요?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첫째, "쓴 뿌리"는 (나무 토막처럼) 뿌리가 쓰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뿌리가 식물로 자라난 후 쓴 열매를 맺는다는 뜻일까요?

둘째, 히브리서 12:15의 쓰다는 것은 곪아 터진 분노를 의미할까요?
아니면 독이 있고 더러운 것을 의미할까요?

셋째, "쓴 뿌리"라는 이미지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마지막 질문부터 시작해 봅시다.
이는 신명기 29:18에서 유래하는 표현입니다.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역자주: 영어성경을 번역하면 "독 있고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너희 중에 생(기지 않게 하라)” 이 말씀의 배경은 앞선 두 개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도 도움이 됩니다.

뿌리 자체가 쓰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 쓴 열매는 독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쓴 열매는 어쩌면 곪아 터진 분노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치명적인 쓴 열매가 나오도록 하는 뿌리가 무엇인가?
신명기 29장의 그 다음 절은 놀랍지만 히브리서의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답변을 줍니다.
18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독초와 쑥(쓴 열매)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기지 않게 하라).” 그 후 19절은 이 뿌리를 정의하면서 시작합니다.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그렇다면 쓴 열매를 맺게 하는 뿌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원한 평안에 대해 그릇된 관점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안전하지 않은데 안전함을 느낍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 마음이 완악할지라도 내게는 평안[=구원]이 있으리라”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언약의 백성 중에 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건너짚는 사람들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과거의 몇몇 영적 체험 때문에 혹은 현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안에서 어울리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신앙고백자들 말입니다.

히브리서의 목적은 이렇게 자신의 안전을 추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치료하여, 믿음과 거룩함 안에서의 성실한 견인을 일구어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적어도 네 번에 걸쳐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고 마음이 완고하게 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감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분깃이 없는 자라는 것을 입증하지 않도록 날마다 믿음의 싸움에 열심을 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2:3, 3:12,14, 6:4-7, 10:23-29).

히브리서 12:15의 쓴 뿌리라는 용어의 문맥을 보아도 그러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12:14-15).
이는 거룩함을 가볍게 여기거나 더 많은 은혜를 남용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쓴 뿌리는 믿음의 싸움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깨어 경계하는 삶 없이도 구원이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처럼 여기도록 교회 안에서 권장하는 사람들 혹은 그러한 교리를 말합니다.
그러한 사람이나 교리는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더럽히며, 자신의 유업을 아무렇게나 대하여 결국 회개하지 못하고 생명을 얻지 못했던 에서처럼 되게 이끕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1일 / 03- 20-2024(수)
출애굽기 31:1-18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13절)
찬송 / 383장(환난과 핍박 중에도)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안식일은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하는 날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신약의 그리스도인은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
안식일은 “구약”의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율법”이기 때문이다.
“안식일”(Sabbath)이라 하면 한 주의 맨 끝 날인 토요일을 말한다.
(소위 “주일” 즉 일요일은 신약에서 “주(week)의 첫날”로 불린다.)
많은 이들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십계명”에 들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십계명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인, 간음, 도둑질, 탐심 등에 대한 계명들은 우리들이 지키기에 무방할 뿐 아니라 지켜야 하는 것들이다(그러나 구원받기 위해서 지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십계명은 유대인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방인이요 그리스도인인 우리와는 무관한 안식일에 관한 계명이 들어 있는 것이다.

안식일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성경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단지 교회에 나가고 일을 하지 않으며 방탕하게 보내지 않는 것이 이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절대로” 일을 해서는 안됐고 불도 지필 수 없었으며 이를 어길 시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그것이 너희에게 거룩함이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누구라도 그 혼이 자기 백성 가운데서 끊어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주께 거룩히 쉬는 안식일이니, 안식일날에 일하는 자는 누구라도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31:14-15)

"육 일 동안은 일하되, 일곱째 날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니, 주께 쉬는 안식일이라. 이날에 일하는 자는 누구라도 죽일지니라. 너희는 안식일 날에 너희의 온 처소에서 불을 피우지 말지니라."(출 35:2-3)

이를 어겼던 어떤 사람은 실제로 돌에 맞아 죽었다(민 15:32-36).

오늘날 안식일을 어겼다고 해서 사람을 돌로 치면 어떻게 되는가?
당연히 살인죄로 감옥에 갈 것이다.
그러나 신정통치국가였던 이스라엘에서는 율법에 따라 안식일을 어긴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유대인도 아니면서 안식일을 지키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안식교인들이다.
그러나 왜 유독 안식일만을 지키는가?
안식일을 지키려는 사람은 구약의 온 율법을 지킬 의무가 있는 사람이다.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고, 수염을 기르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며, 양을 잡아 희생 제사를 드리는 등... 자기 마음대로 편한 것만 골라서 지켜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들은 율법을 다 지키지도 않으면서 안식일을 지킨다며 토요일에 교회에 모인다.
(이들은 처음에는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것이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요 저주를 받는 것이라고 가르쳤으나 지금은 그 교리를 바꾸었다.) 안식일을 어기는 사람을 사형에 처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이들은 자기들이 지킬 필요도 없는 안식일을 그나마 제대로 지키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표적”(sign)으로 주어진 것이지 이방인에게 주어진 명령이 아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너는 또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들을 참으로 지킬지니 이는 그것이 너희 대대에 걸쳐 나와 너희 사이에 표적임이라. 이로써 내가 너희를 거룩케 하는 주임을 너희로 알게 하려는 것이라."(출 31:13, 겔 20:20을 볼 것).

출애굽기 31: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에스겔 20:20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리라 하였노라.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으로 판단 받지 않는다.

골로새서 2:16
"그러므로 음식으로나 마시는 것으로나 거룩한 날이나 새 달이나 안식일들에 관해서는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안식일을 포함해서)을 십자가에서 못 박아 없애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한 손으로 쓴 법령을 지워 버리고 또 그것을 그의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셨으며"(골 2:14). 그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상관없이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한 것으로 모든 자와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치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그러나 구약의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되었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었다.

한편 한국 교회들은 안식일의 개념을 “주일”로 바꾸어 “주일성수”라는 것을 교리로 만들어 가르친다.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에 와서는 부활의 주일로 바뀌었기 때문에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도 하지 말고 매매 행위도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소위 “주일”(사실 일요일은 성경에서 한 번도 “주일” 또는 “주의 날”이라는 말로 불리지 않았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쏟아 부어지는 심판의 날을 가리키는 말이다.)이 아무리 비슷하게 보이더라도 둘을 동일선상에 놓으려 하면 혼동만 야기될 뿐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 날은 사도들과 제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빵을 떼며 교제한 날이었기 때문에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날을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처럼 지켜야 한다는 명령은 성경 어디에도 없으며,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날이 거룩한 날인 것이다.

일요일에 교회에서 예배도 드리지 말고 흥청망청 보내도 된다거나, 일주일 내내 하나님은 거의 잊어버리고 생업에만 매달려 살았는데 일요일에도 똑같이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요일에 교회에 가고, 돈을 쓰지 않으며,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주일성수” 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구약의 율법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안식일에 대해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혼동에 빠지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이단들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복의 길4-주일을 주일답게 지키는 것입니다. / 출 20:8-11, 눅 13:14-16

** 들어가는 말

출애굽기 20:8-11,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3:14-16,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복의 길 네 번째는 주일성수(主日成遂), 즉 주일을 주일답게 지키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해 온 사람이라면 이 말은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어릴 때부터 주일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듣고 보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20년 이상 목회를 해 온 지금까지도 주일이면 긴장이 되고 나를 한 번 더 돌아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일은 단어의 뜻 그대로 ‘주인의 날’이며 ‘거룩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어떻게 지내야 되는가?’라는 물음은 지금도 매 주일마다 나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주일에 대하여 마음을 쓰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됨의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1:13절에서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고 하시고, 에스겔 20:12절에서는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고 하십니다. 안식일(安息日)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 사이의 표징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구약시대의 안식일이 신약시대에서 주일로 바뀐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성경에서 정확하게 그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이루시고 새 언약을 주신 것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로마서 10: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하시며, 누가복음 22:20절에서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는 십자가의 죽음과 영원한 하나님 자녀의 소망을 주시기 위한 부활로서 새 언약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새 언약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에 예배와 성만찬을 행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7절입니다. “그 주간의 첫 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nbsp;&nbsp;주간의 첫 날은 지금의 일요일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없어지고 주일이 새롭게 생긴 것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이루시고 마침이 되셨다는 것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 속에 그 의미를 다 포함시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인 사랑의 법이 모든 율법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들어봅시다. 마태복음 22:37-4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리고 요한복음 13:34-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옛 언약인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일 역시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일을 주일답게 지키는 길을 살펴봅시다.

출애굽기 본문 말씀은 십계명 중에서 네 번째 계명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십계명은 율법의 기본법입니다.
십계명은 권면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이며 규범입니다.
이 말씀에서 안식일의 의미와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가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고 이 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므로 너희도 쉬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출애굽기 31:14-15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성경에는 안식일에 일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실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5:32-36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류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으로 끌어 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니라.”

누가복음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행하신 기적 사건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즉 예배 때였습니다.
그곳에는 귀신들려서 허리가 꼬부라져서 18년 동안이나 고생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을 보신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시다가 그 여인을 불러서 안수하셔서 고쳐주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회당장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께 대단히 화가 났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하여 안식일의 법을 어겼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도리어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화를 내시며 유대인들의 외식적인 신앙을 드러내시면서 나무라셨습니다.
그들은 소나 나귀 등 자신들이 기르는 가축들을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물을 먹이려고 끌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짐승들을 죽지 않게 하려고 안식일에도 끌고 다녀 불법을 행하면서, 사람이 사탄에게 놓임을 받는 치유를 불법이라 한다고 호통을 치신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안식을 정하신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법만을 고집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어떻게 주일을 주일답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주일(主日)은 ‘주님의 날’이며, 성일(聖日)이라고 합니다. 즉 주일은 하나님의 날이며 거룩하게 구별된 날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바쳐진 날’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 날 중에서 여섯 날을 사람들이 자신의 생업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 하루를 ‘하나님의 날’로 거룩하게 구별하시면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예배하며 선한 일을 행하는 날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섯 날도 모자라서 마지막 하루까지도 ‘자신의 날’로 만들어버립니다. 성경에는 안식일에 대한 말씀이 끊임없이 나옵니다. 이는 사람들이 안식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에도 많은 교인들이 주일 낮 예배 혹은 저녁만 참석하면 그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인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주일 예배만 참석 하고는 자기 마음대로 갈 곳 가고, 만날 사람 다 만나고, 영업하고 사업하고 즐기는 일에 나머지 시간들을 다 사용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배시간을 한 시간으로 엄숙하게 지켜달라고 요구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이후 시간에 약속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일성수(主日成遂)라는 말은 일요일 하루를 주님의 날로 온전히 바치는 것을 뜻합니다. 구약시대의 안식일은 온 종일 제의식과 화목제의 음식을 나누는 교제의 시간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사람과의 교제의 시간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도 주일은 말씀을 듣고 찬양하는 기쁨의 예배와 성만찬의 친교의 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날을 바르게 지켜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사야 58:13-14절을 봅시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날을 바르게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하물며 죄악으로 죽은 나를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를 주신 주님을 어떻게 경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일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생명으로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의 영원한 소망을 위하여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주님의 날입니다. 마태복음 12:8절에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온 마음을 다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여왕(女王)’이라고 표현하며, 여왕을 맞이할 때와 같이 준비된 마음을 가지고 안식일을 맞이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해가 지는 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달력에는 금요일 해가 지는 시간을 기록해 두는데, 해가 지는 시간에서 18분을 앞 당겨서 기록합니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시계가 늦어져서 안식일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안식일이 시작 되는 사이렌을 울려서 모든 안식일 준비를 다 끝내고 시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라는 여왕을 맞이하기 위해서 주부들은 집안 청소를 합니다. 즉 주일 맞이 대청소를 하고, 미리 시장을 보고, 안식일에 먹을 음식을 다 준비해 둡니다. 식탁에는 꽃도 꽂아서 여왕을 맞이하듯이 준비를 하고 아름다운 초 두 개를 준비해서 켭니다. 두 초는 본문 8절의 “기억하라”는 말과 “지키라”는 이 두 가지를 기억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기 전에 구제함에 구제헌금을 넣습니다. 남자는 흰 셔츠를 입고 여자는 흰 블라우스를 입고 안식일을 맞이합니다. 안식일이 시작되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합니다.

여러분의 주일을 이런 마음으로 지켜보십시오. 주일은 거룩한 날, 즐거운 날, 존귀한 날이라고 하며, 하나님께 진정한 마음으로 기뻐하고 감사함으로 예배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날에 가족이 잘 준비된 식탁을 마주하고 음식을 나누며 기뻐하십시오. 느헤미야 8:10절입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교회에서 음식을 준비하여 성도들이 함께 즐겁게 나누며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이며 능력이 됩니다. 그리고 혹 시간이 있으면 삶에 지친 사람들을 격려하며, 병든 자를 위로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사랑을 나누는 일을 하십시오. 로마서 12:6-9절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이는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서 섬기고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은사는 무엇입니까? 지금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지 않고 묵혀두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받은 책망을 받게 됩니다. 마 25:30절입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특히 하나님께서 주일에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사야 58:13-14절을 현대어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안식일을 나의 거룩한 날로 지켜라! 안식일에도 너희의 용건에 따라서 여행을 하거나 무슨 일을 함으로써 나의 거룩한 날을 너희의 날로 쓰지 말아라. 안식일에는 너희가 다니고 싶은 곳으로 다니지도 말고 너희가 원하는 일도 하지 말고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지도 말아라! 오직 그날을 기쁜 날로 여기며 나 여호와의 거룩한 날로만 지켜라! 그러면 내가 직접 너희에게 참된 기쁨을 주겠다. 그리고 너희의 모든 장애물을 내가 세상에서 제거하여 주겠다. 그래서 내가 너희 조상 야곱에게 준 땅의 열매를 너희가 먹고 살 수 있도록 하겠다.\' 여호와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다.” 주일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여행을 할 경우, 특별한 사정에 의한 일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아십니다. 여기서 금하는 것은 자신의 사사로운 마음으로 행하는 경우를 뜻합니다. 그리고 주일에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무엇을 사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주일에는 말도 쓸데없는 잡담이나 험담 등 함부로 말하는 것까지도 금합니다. 서로 세워주는 말,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 간증과 감사의 말 등. 하나님 앞에서 덕이 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자녀의 복을 내리십니다.

미국의 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테일러(Zachary Taylor)는 헌법에 따라서 1949년 3월 4일 주일에 대통령 취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테일러는 그 날에 취임하기를 거절했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못되었으면 못되었지 주일까지 범해가면서 대통령이 될 생각은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적인 행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했지만 테일러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일 12시부터 월요일 12시까지 24시간, 하루 동안의 임시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당시 상원의원장이었던 ‘데이빗 라임스 엘치슨’을 1일 임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엘치슨은 토요일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가서 24시간 동안 잠자리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는 주일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높이며 주일을 주일답게 지키면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릴 것이라.”고 하시며, “내가 너를 땅에서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시며, “내가 너를 세상의 어느 민족보다 높이리라.”고 하십니다.

주일을 잘 지키는 법

주일이면 습관을 따라 교회에 다녀오는 것이 크리스천으로서 당연한 일로 여기고 의무에 사로 잡혀 발걸음만 예배당에 뜰을 밟을 때가 많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교회에 다녀왔지만 진정 생각해 보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찬송 몇 곡과 얼마 안 되는 시간에 기도를 드리고 적은 헌금을 드리며 설교를 듣고 돌아와서는 주일을 지키는 성도의 의무를 다 한 것처럼 착각에 빠질 때가 많다.

이것이 주일 지키는 자의 모습인가도 생각을 해보지만 역시 동의하가 어려운 부분이 나에게 있다.
성도라면 누구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휴식을 취할 수도 있고 교회의 각종 봉사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다른 사람을 도우며 주일을 보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일을 잘 지켰느냐고 한다면 이 역시 만족함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나로서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일까?
주일 성수란 말은 세상의 일을 접어두고 하나님께 나가 주님과 온전히 하루를 보내면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찬송하며 교제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분의 말씀을 잘 들고 주신 말씀이 내 삶에 적용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충분한 사랑의 교제가 필요하다.
한 주간 동안 어려움을 겪은 이, 혹은 소외된 이가 없는가, 등 주님이 허락하신 믿음의 가족들을 매주 돌보기 위한 정보의 창고가 교회여야 한다.
내게 주께서 명하신 사랑해야 할 이가 누구이며 어떻게 그를 섬겨야 할지를 알고 실천하는 것이 주일을 지키는 기본이 된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경험하는 일이야 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므로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은 예배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에 실천하는 것이 주일을 잘 지키는 방법이라 생각된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자(이사야 58:13~14)

신자와 불신자를 분별하는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주일날 성경찬송가를 들고 예배당에 가는 사람은 신자입니다. 
성숙한 성도와 미성숙한 성도를 분멸하는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주일날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하여 예배를 잘 드린다면 그 사람은 성숙한 성도의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주일은 우리의 날이 아니고 하나님의 날임을 깨닫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이 곧 신약시대에 지키는 주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이 안식일을 철저히 지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주전 165년경 마카비 형제들에 의해 잠깐 동안 독립국가의 모습을 보이다가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 후 1948년에 다시 이스라엘나라를 세우기까지 약 2000년 동안 세계를 방황하며 나라 없는 온갖 서러움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 오랜 세월동안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었겠습니까? 

많은 연구가들은 안식일 준수가 그 비결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몇 가정이 있든지 반드시 회당을 세웁니다. 
그 회당에서 안식일을 구별하여 그 날은 지킵니다. 
이날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웁니다.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칩니다. 
회당, 안식일, 율법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그 결과 그 들은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2000여년이 지난 후에도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의 날입니다. 
주일 예배가 우리의 믿음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주일 예배가 우리의 영혼과 육신의 건강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주일 예배가 우리의 인생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은 축복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의 지혜입니다. 

이 복된 안식일에 대해 시편 84:10~12에 말씀하기를“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안식일은 어떤 날입니까?

1.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입니다.

출애굽기 20:9~10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육일은 사람의 날이지만 제 칠일 즉 주일은 날을 만드신 하나님의 날로 정하셨습니다. 

2.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쉬신 날입니다.

출애굽기 20:11에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이란 하나님께서 6일 동안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후 쉬신 날, 일곱째 날을 말합니다. 
창세기 2:1~3에“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 안식일을 잘 지키도록 10계명에 기록하셨습니다. 
구약시대의 안식일이 신약시대인 오늘날의 주일입니다. 
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날을 말합니다. 
이날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타락하여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신 날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인간 재창조를 완성하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날을 주의 날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안식일이나 신약의 주일은 의미가 같습니다. 

3. 안식일은 십계명중 제 4계명입니다.

출애굽기 20:8에“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십계명가운데 4계명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4.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신 날입니다.

출애굽기 20:11에“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축복하신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 날을 거룩하게 지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 누리라는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은 이날을 소홀히 여기거나 다른 날과 똑같이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미국 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 장군은 헌법에 의거 1849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해야 하는데 그날이 주일이라 취임을 거부하여 에치슨 상원 의장이 24시간 대통령 임무를 대신했습니다. 대통령 취임식보다 우선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정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에스겔서 20:12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하시고자 주일을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에 행해지는 엄숙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이날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된 특권이며 표증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깨닫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깨달아 하나님을 잘 섬길 때에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는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가난하게 혼자 살던 허만이라는 여든 아홉 살 된 노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청직원이 그 노인의 유품을 정리하고자 노인이 살던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집은 거지의 집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온통 넝마와 부서진 가구들로 가득했습니다. 
시청직원이 짐을 하나하나 챙기는 중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넝마 속에 파묻혀 있던 다섯 개의 바이올린을 찾아낸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바이올린 제작의 대가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만들고 그가 직접 사인한 것들이었습니다. 
그 값은 당시의 돈으로 수십만 달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노인은 그것을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알고 그렇게 쓰레기 속에 던져놓고 가난하게만 살았던 것입니다. 

바이올린의 가치를 아는 것도 이러한데 하물며 생명의 근원,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잘 섬기는 사람의 축복에 대해 요한삼서 1:2에“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하셨습니다. 

2. 하늘나라를 바라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골로새서 2:16~17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장래에 있을 일 즉 하늘나라의 그림자로 주일을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안식이 있음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안식일 즉 주일을 정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며, 하늘나라를 위해 준비하도록 하기 위해 안식일 즉 주일을 정하신 것입니다.

3. 사람을 위해 있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가복음 2:27에“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니...)”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기계와 달리 쉬지 않고는 일할 수 없기에 적절한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 검증을 걸쳐 일과 휴식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효율적인 생산성을 유지하는 기간이 7일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한 예를 통해 하나님의 섬세하신 섭리를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 무신론 혁명 당시 주일 예배를 막기 위해 일주일을 10일로 바꾼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산업의 생산량이 40%로 감소했습니다. 러시아 혁명 때 레닌이 일주일을 8일로 늘려 일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생산량이 30%로 감소해서 일주일을 다시 6일로 줄였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생산량이 30%로 감소되었습니다. 레닌도 어쩔 수 없이 일주일을 7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일주일의 7일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소중한 삶의 리듬이 무너진다면 개인의 건강이나 땅의 축복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로 정하신 것은 우리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위한 방법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1. 발을 금해 오락을 행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인 이사야 58:13에“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빼앗는 사사로운 언행을 삼가하면서 이날을 존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2. 개인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말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20:9~11에“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하셨습니다. 

느헤미야 10:31에는“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화나 식물을 가져다가 팔려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사지 않겠고”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 약속된 축복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본문인 이사야서 58:14에“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하셨습니다. 

미술가이며 시인인 제임스 스메탄이라는 사람은 몹시 가난 하게 살았습니다. 
그에게 “당신은 왜 교회에 나갑니까? 하고 묻자 “축복을 받으려고 나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무슨 축복입니까?”하고 묻자 “분노와 경멸, 그리고 냉대를 갖게 하는 유혹이 사라지고 기쁨과 만족이 가득 차게 되고 하나님의 섭리에 만족하게 되 는 것이지요. 
어둡고 복잡한 생각으로 꽉 차서 교회에 가면 평안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돌아오지요. 
모든 근심은 사라지고 내가 구원받은 기쁨과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이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르신 주님 앞에 나오는 날이 곧 주일 예배 시간입니다. 
주일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이날에 하나님께로부터 영적인 신령한 은혜가 임합니다.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는 사람에게 내리시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낙심한 사람에게는 소망을 주십니다. 염려와 금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넘치는 평화가 있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삶의 지혜도 주십니다. 그리하여 험한 세상을 이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2. 땅의 높은 곳에 올려주십니다. 

본문인 이사야서 58:14에“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더 알기 쉽게 이렇게 번역 한다면“너는 당당히 올라갈 것이며, 눈에 띄게 나타날 것이며, 너의 이웃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눈여겨 볼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영화 “불의 전차”는 에릭 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제8회 올림픽 경기가 파리에서 열렸을 때, 100m선수 중 가장 좋은 기록을 가진 금메달 유망주이자 믿음 좋은 스코틀랜드 청년 “에력 리들”이 경기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런데 경기 일정이 주일로 잡혀 있는 것을 보고 이 신실한 청년은 경기를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러자 국민들은 조국을 배반한 자, 위선자, 옹졸한 신앙인 등으로 말하면서 분노하고, 있는 대로 폭언을 하고 비난을 했습니다. 
에릭 리들은 주일을 범하면서 까지 금메달을 향하여 뛸 마음은 없다며 거절하고는 주일에 교회에 나가서 온종일 경건하게 하나남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 목요일에 400m 경기가 있었는데 그 경기에 나갈 선수에게 문제가 생겨서 에릭 리들이 대신 나가게 되었습니다. 
100m 선수가 400m에 나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기에서 에릭 리들은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기자들이 어떻게 100m 경주자로서 400m를 뛸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100m 는 내 힘으로 뛰었고, 나머지 300m는 하나님의 힘으로 뛰었습니다. 
100m 경주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섬겼더니, 나머지 길은 주님께서 인도해주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일예배를 소중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주일 예배에 성공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주일은“하나님의 날”입니다. 주일을 성실히 지키는 사람을 사랑하셔서 높은 곳에 올리셔서 존귀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3.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하셨습니다. 

본문인 이사야서 58:14에“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하셨습니다.“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는 것은 야곱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성취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야곱은 단신으로 고향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20년 후 거부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야곱의 업이란, 풍성한 물질과 자녀의 축복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정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세상의 모든 축복과 자녀의 축복과 내세의 축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축복이 안식일 즉 주일을 잘 지키며,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는 것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五. 안식일을 어겼을 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 얻는 것이 없습니다(헛수고가 됨).
출애굽기 16:25~30에 말씀하시기를“모세가 가로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그것을 들에서 얻지 못하리라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일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제 칠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 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제 육일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제 칠일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그러므로 백성이 제 칠일에 안식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육신의 양식을 주시는 날이 아니라, 영의 양식을 주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을 더럽히는 것이 됩니다.
에스겔 22:26에“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3. 패망하게 됩니다.
예레미야 17:27에 말씀하시기를“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케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주일을 범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의 생각을 더 중하게 여기는 불순종이기 때문입니다. 

4. 돌로 쳐 죽이라 하셨습니다.
민수기 15:32~36에 기록하시기를“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 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날인 안식일 즉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축복의 길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종교적 엘리트들이 바쁘다는 것 때문에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을 소홀히 한다면 그는 도덕적으로 진흙탕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주일예배의 의미와 가치를 깨달은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예배를 더 없이 소중히 여긴다. 영국의 명재상이었던 글래드스턴은“나에게는 예배석이 대영제국의 수상석보다 더 존귀하다.”고 말했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내 영혼이 잘되는 길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길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 누리는 길입니다. 
주일예배의 승리자가 신앙생활의 승리자이며, 신앙생활의 승리자가 곧 인생의 승리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성경에는 시간을 가리키는 두 가지 단어가 있다.
하나는 크로노스로 물리적, 객관적인 시간을 의미하며, 또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로 의미와 내용이 있는 질적 시간을 의미한다"

인생이란 것은 모두에게 크로노스의 시간이 주어지지만, 어김없이 지나가는 이 시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같은 시간이지만 허비하는 시간이 있는가 하면 썩어지지 않는 영원한 것에 투자하는 시간이 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 번째 강령"이라며 "즉, 세상의 크로노스 시대를 살지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카이로스의 영원한 삶을 살아가고 회복할 것인가에 대해 우리에게 세 가지 의미를 전달한다"고 했다.

그는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삶의 첫 번째는 예배하는 삶, 삶의 안식,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며 "시대가 변하여 주일에 일하시는 분들이 많다. 직장 관계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을 하나님 앞에 지키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는 하나님이 내 삶에 가장 최우선이라는 중요한 고백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주일은 세상의 모든 시끄러웠던 삶의 소리를 뒤로하고 하나님께 시야를 고정시키는 시간이며, 나의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시간이며,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시간이며, 무엇보다 나의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라며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무엇을 '기억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수동적인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새기라'는 뜻이다. 즉, 습관적인 억지로의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지키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때로 우리는 전쟁터와 같은 치열한 삶이 계속 끝나지 않고 지속될 때가 많다. 우리에게는 영과 육의 쉼, 특별히 우리의 심령 한복판에 있는 영의 쉼이 필요한 것"이라며 "기계처럼 일을 하다가는 우리가 망가지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실 때 쉼을 일부러 보여 주신 것이다. 여기서 쉼은 단순히 놀고먹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있어야 한다.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님이라면 우리가 안식을 하는 목적은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분의 기쁨과 상급을 보장한다"며 "많은 것을 가졌지만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 이유는 영원한 안식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의 참된 목적은 어떤 일을 금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며,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섬기는데 있다"고 했다.

주일을 시간적으로 율법적으로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기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느헤미야 공동체 행동 강령 두 번째는 이웃을 돕는 삶으로, 땅의 안식, 칠년마다 안식하는 것이다.

영적인 의미에서 '희년'은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완전한 자녀가 되는 것을 뜻한다"며 "구속(redemption)은 '되 무른다, 다시 찾는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말은, 원래 하나님의 소유였던 우리를 마귀에게 빼앗겼다가 다시 찾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우리를 되돌려 받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7년에 한 번씩 쉬는 안식년이나 50년째의 희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그 은혜를 나도 이웃에게 베푸는 시간을 의미한다"며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의 시간 속에서 잘못된 부분들을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도 마찬가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누린 만큼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이웃을 섬기기를 원하신다. 안식일과 안식년에는 그런 의미가 있다"고 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시간 속에 사는 삶

영혼의 안식,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것도 회복되지 않은 상황 가운데 느헤미야 10장 31절에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모든 허물의 빚을 탕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별히 "학생들을 격려하기 원한다. 청소년들이 하는 공부,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시간들이 때로 어른들의 압력과 사회적인 시스템으로 인해 힘들고 포기하고 싶고, 의미 없이 느껴져도 하나님이 현지 나에게 직분과 시간을 맡겨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최선을 다해 스쳐 지나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억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거룩한 주일처럼 거룩한 매일을 위하여!


안식일 준수 명령

1. 안식일을 지키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주신 계시 가운데 마지막으로 안식일에 관한 명령을 부연해서 강조하셨습니다.
이 명령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을 계속해서 섬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창세기 2:2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나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출애굽기 16:23부터 입니다.
안식일 규례는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의 내용이 되었는데, 이것은 안식일이 하나님 앞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은 언약의 증표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안식일을 언약으로 지켜야 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율례를 지키면 살고 지키지 않으면 죽는 문제였습니다.

a. 안식일 준수 명령(이사야  56:2)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하는 사람,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

b. 안식일의 목적(신명기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2. 엿새와 제칠일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준수를 명령하시면서 그날 일하는 자는 생명이 끊어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의 의미는 엿새 동안의 수고를 통해서 제칠일에 안식하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십계명에 언급한 바대로 6일 간의 창조 사역 후의 하나님의 휴식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 사역, 즉 하나님은 온 인류와 만유의 창조주시라는 사실과 그들은 단지 그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케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엿새 동안 수고한 그들에게 육체적 휴식을 주시려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안식일은 또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는 표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준수는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에게 구별된 백성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 됩니다.

a. 엿새의 사역(창세기 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이니라.

b. 칠일에 쉼(히브리서 4:4)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2절. 훌. '존귀한, 고위함'이란 뜻의 이름.
유다 지파 갈렙의 후손으로 아말렉 전투 시 모세의 팔을 들어 올린 자.

브사렐. '하나님의 보호 속에 있는자'란 뜻의 이름. 성전 장식들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다른 기능인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6절. 오홀리압. 원어로 '아버지가 내 장막이다'라는 뜻.
성막 건축의 사명을 지녔다. 세워. 문자적 의미는 '그에게 주어서'로 브사렐을 돕는 자로서 오홀리압이 세워졌음을 가리킨다.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 잘 숙련된 기술공을 의미한다. 특별한 기술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그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13절. 나의 안식일.
이스라엘 장인들에 대한 안식일의 엄수 명령은 하나님 스스로가 안식일의 제정자이심을 나타낸다.
표징. '표시, 증거'란 뜻의 <twOa:오트>는 이스라엘의 안식일 준수를 지칭.

14절. 더럽히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다.
원어 <ll'j;:할랄>은 '어기다, 모독하다'라는 뜻. 죽일지며. 문자적으로 정확한 뜻은 '반드시 죽일지니라'. 사형은 이스라엘의 위기 의식에 따른 안식일 준수의 철저한 시행을 나타낸다. 생명이 끊쳐지리라. 이는 육체적인 죽음 뿐 만이 아닌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15절. 큰 안식일.
문자적으로 '안식의 안식 일'을 뜻하는 <@/tB;v' tB'v':솨바트 솨바톤>은 철저히 쉬어야 함을 의미한다.

17절. 창조하고. '일하다'라는 뜻의 <hc;[;:아사>는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일' 그 자체를 의미. 제칠일에 쉬어. 하나님 자신의 안식은 인간은 안식일 준수의 근거가 된다.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을 의인화시킨 표현으로, 창조 사역 후 휴식하시면서 창조물을 보고 흡족해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원어<vp'n::나파쉬>는 '숨을 쉬었다'는 문자적 의미.

18절. 증거판 둘. 시내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다. 친히 쓰신 것이더라. 하나님 귄능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날 말씀은 성막 설계에 관한 말씀이 끝나고 그 설계대로 일을 진행할 사역자에 관한 말씀입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어떤 사람이며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가가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관한 말씀이 또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출 20:8~11절에서 안식일 계명을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한, 23:10~13절에서도 안식일과 안식년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만나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간접적으로 안식일 준수를 가르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안식일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막을 만드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안식일은 지켜져야 한다는 의미가 표면적으로 드러납니다.

브살렐(1~5절)

항상 새로운 말씀이 시작될 때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그럽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의 출처라는 의미입니다. 이 모든 규례들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사람을 지명하십니다.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그럽니다. '훌'은 이스라엘이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 아론과 함께 모세의 팔을 들어 올려 이스라엘이 승리케 하는데 기여한 사람입니다(17:10). 그리고 그는 모세가 시내 산에 계명을 받으러 올라갔을 때 아론과 함께 백성들을 다스렸던 사람이기도 합니다(24:14). '우리'는 3인의 동명이인(왕상 4:19; 슥 10:24)이 존재합니다. 여기서는 성막 건축자 브살렐의 부친입니다. '브살렐'은 성막 건축을 지휘 감독한 유다 지파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브살렐을 소개하면서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브살렐이 하는 일이 큰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의 마지막 장까지 브살렐의 이름이 여러 번 기록되고 있습니다. 특히 출 37:1절에는 법궤를 만든 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브살렐의 족보는 브살렐에 관한 말씀이 분명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불렀다고 합니다. 여기서 '지명하다'(nominate)란 말은 여럿 가운데서 가려 뽑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지명받는 자의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이보다도 그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택이 더 중요함을 말해줍니다. 즉 누구를 택하여 쓰시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브살렐을 콕 찝어서 지명하여 부르시고 성막 건축의 거룩한 사역을 맡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봉사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신'은 곧 성령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2. 6절). 그다음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에 매임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혜와 총명과 여러 가지 재주는 하나님의 은사이면서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 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선물인 갖가지 재능들을 사모하는 마음과 아울러 끊임없는 자기 계발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뒤에 이어지는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라는 말에서 드러납니다. 쉬운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설계를 잘하고 또 금과 은과 놋으로 그 설계대로 만들 수 있는 재능을 그에게 주리니”

그러니까 브살렐을 택하신 하나님께서 브살렐 자신의 개인적인 인격과 능력을 무시하고 단지 그를 기계적인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브살렐의 개인적 인격과 능력을 존중하셔서 그의 능력이 극대화되도록 일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제사장직뿐만 아니라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신을 충만케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직업의 귀천이 없을 뿐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신이 함께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먼저입니다. 이 부르심은 브살렐이 가진 재능과 모든 것을 고려하신 부르심입니다. 성막의 모든 기물들을 만드는 공교한 일꾼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렇게 부르신 후에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하십니다. 즉 감당할 힘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럴 때 그의 재능은 꽃피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성막의 모든 물건들 증거궤 속죄소, 회막의 모든 지구, 떡상, 등잔대, 분향단, 번제단, 물두멍 제사장 의복을 하나님의 설계대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만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성막을 만드는 사람도 소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 삶의 자리는 모두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오홀리압(6절)

6절에서는 브살렐을 돕는 동역자로 오홀리압을 임명하고 있습니다.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우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단'은 야곱과 그의 아내 라헬의 몸종이었던 빌하 사이에서 태어난 야곱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습니다(창 30:1~6). 그리고 단의 후손들은 '길의 뱀'과 같이 교활하며, '첩경의 독사'같이 호전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창 49:17). 또한, 이들은 '사자의 새끼'(신 33:22)로도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들의 성격은 전투적이요 공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지파적인 배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오흘리압을 부르셔서 성막 건축에 쓰일 휘장을 비롯한 각종 직물 제작을 담당케 하신 것은(38:23), 하나님은 외모를 보는 인간과는 달리 오직 중심을 보시는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를 택하시지 않고(고전 1:26) 당신의 사역에 꼭 필요한 자들을 적재적소에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세워라는 말은 본래 '주다'(give)는 뜻입니다. 또한, 이 말은 '그에게'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이토'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두 단어를 직역하면 '그에게 주어서'가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브살렐에게 오흘리압을 조력자로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성경은 이러한 의미를 살려 '그와 함께 일하게 하며'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라고 할 때 지혜로운에 해당하는 '하캄'은 '숙련된'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란 '특별한 재능이 있는 모든 자' 혹은 '숙련된 기술이 있는 모든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막은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지혜로운 사람들, 재능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부르셔서 감당하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세는 모세의 일를 아론은 아론의 일을 그리고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그들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각양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대로 각자 삶의 자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최선을 다해 맡겨주신 일들을 감당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보겠습니다.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12~17절)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안식일에 관해서는 만나를 주시면서(16:21~30) 또 십계명(20:8~11)에서 이미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언급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단 저는 안식일 준수가 모든 신앙생활의 핵심이기 때문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그침의 원리가 지켜지지 않으면 예배도 등한히 되게 되고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안식일 준수는 탐욕을 그치고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는 성도의 가장 중요한 원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여기서는 성막 제작이라는 막중한 사역을 진행한다고 할지라도 안식일 만큼은 거룩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핑계로 안식일 계명을 어기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에게 엄중한 경고가 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주목할 말씀은“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날을 도적질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식일은 동시에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데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막 3:27). 이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통하여 인간에게 육체의 노동으로부터 귀중한 휴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휴식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나그네 등 인간뿐 아니라 소나 나귀 등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휴식의 적용 범위가 하나님의 모든 피조 세계에 공히 적용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그럽니다. 여기서 표징은 '오트'라는 말입니다. '신호'(sign)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몇 가지 표징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무지개와 할례와 안식일이 있습니다. 이 세 표징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① 무지개는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임하는 구원에 대한 표징입니다(창 9:13). ② 할례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임을 나타내는 언약의 표징입니다(창 17:10, 11). 그러나 이 언약의 표징은 예수의 오심으로 폐하여 졌으며, 육신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가 중요시 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롬 2:28, 29). 그리고 마지막 안식일은 거룩함과 복 주심의 표징입니다. 창 2:2, 3절에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사람에게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안식일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고통받던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2:23; 3:7, 9) 이들을 이끌어 내어(신 4:20)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신 이유는(3:8; 15:17)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친히 '지명하여 부르신' 선민(選民)이요(사 43:1), 성민(堅民)으로 불린 것도 이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신 4:39, 40)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준수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여기는 만나를 통한 40년의 훈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안식일 준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중요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우리는 14절에서 안식일 계명이 강화되는 과정을 봅니다.

14절입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그럽니다. 여기서 가장 핵심은 더럽힌다는 말입니다. '더럽히다'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상처를 입히다'. '욕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 말은 '약속을 어기다'(break promise)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RSV는 이 단어를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신성을 더럽히는'(profane)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란 곧 세속적인 생활과 관련된 일체의 일들로 인해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하나님의 신성을 더럽히는 자를 일컫습니다. 그러니까 고의적으로 안식일을 어기고 더럽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을 죽이라고 말씀합니다. 더구나 이 말은 같은 의미 동사를 두 번 반복해서 사용한 강조형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직역하면 '반드시 죽여라'가 됩니다. 이러한 안식일을 어긴 자의 처벌 규정은 안식일을 더럽힌 죄가 우상 숭배의 죄만큼 중죄(重罪)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죽이라는 말씀은 신 8:19. 20; 17:2~5절에서 반복됩니다. 더 나아가 생명이 끊쳐지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육체적인 생명의 끊어짐 뿐만 아니라, 영적인 생명의 단절,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안식일 준수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장 강력한 표징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원리를 강조하십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지만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또 여호와께 거룩한 날, 즉 구별된 날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큰 안식일이라는 말은 철저하게 안식하는 날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솨바트 솨바톤'은 '안식의 안식일'(the stabbath of rest, KJV)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17절에서 다시 창조 안식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너희도 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쉴줄 알아야 합니다. 그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이라고까지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에게 그만큼 유익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언약을 삼으라고 하십니다. 신약에서도 이 정신은 주일로 계승되어 계속해서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17절에 ‘왜냐하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셨기 때문에 인간들도 안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① 하나님의 엿새 동안의 창조에 대한 기념의 성격과, ⓶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감사의 성격이 그것입니다. 오늘날의 주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에 대한 감사의 성격을 가지는 것은 이러한 안식일의 참 의미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쉬었다는 말씀에 있습니다. 쉬었다는 말 히브리어 '나파쉬'는 원래 '숨', '호흡'이라는 말입니다. 동사형으로 '숨을 쉬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안식일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재충전의 의미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RSV는 이를 '기운을 회복하셨다'(refreshed)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처럼 쉼을 필요로 하는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들에게 쉼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계명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욕망에 제동을 걸어줄 안전장치가 안식일 준수이며 그치고 주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새로운 충전을 통해 건강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온전히 그치고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안식일에 담아놓은 귀하고 소중한 진리입니다.

십계명 두 돌판을 주심

마지막 18절은 십계명이 기록된(20:3~7절) 두 개의 들판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시는 장면입니다. 즉 하나님은 약속대로(24:12) 이미 선포하신 계명(신 5:1~21)을 두 개의 돌판에 친히 써서 모세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이로써 율법 중심의 시대가 그 막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증거판 위에 기록된 십계명은 모든 율법의 핵심이자 본질로서. 단순한 율법의 차원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표면적으로 볼 때는 율법이지만, 그 내면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십계명의 돌판을 주신다는 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가 임박했음을 말해줍니다. 즉 40일이 지나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산 아래에서는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애굽의 음란한 춤을 추며 하나님을 섬긴다고 난리를 피우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묵상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감당해야 하는 성막의 모든 것들을 만드는 일도 소중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과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며 그것이 표징이라고 도전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치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꼭 기억할 일입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1일 / 03- 20-2024(수)
출애굽기 31:1-18
브살렐(유다 지파)과 오홀리압(단지파)(1, 6절)
찬송 / 383장(환난과 핍박 중에도)


내가 유다 지파 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See, I have chosen Bezalel son of Uri, the son of Hur, of the tribe of Judah,

내가 또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
Moreover, I have appointed Oholiab son of Ahisamach, of the tribe of Dan, to help him. Also I have given skill to all the craftsmen to make everything I have commanded you:


  뜻 : 아비의 장막
오홀리압(Oholiab)



가장 큰 은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어느새 6월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해마다 6월이 오면 가슴에 새겨진 아픈 기억으로 속앓이를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동족끼리 벌인 전쟁, 그리고 계속되고 있는 분단 상황이 빚어낸 아픔과 상처가 좀처럼 아물지 않습니다. 6월 10일은 민주화 항쟁 역사에서 기념할만한 날입니다. 온 국민의 힘으로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꾼 날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내내 제 마음이 머문 곳은 시리아의 북부 도시 훌라(Houla)입니다. 지난 25일에 벌어진 학살극으로 인해 수십 명의 어린이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무차별적인 폭격이 아니라 의도적인 살해였기에 충격은 더욱 컸습니다. 학살을 저지른 이들은 이슬람 시아파 소수 종파인 알라위파의 폭력단체인 ‘샤비하Shabiha’에 속한 이들이었다고 합니다. ‘유령’을 뜻하는 아랍어에서 유래한 샤비하는 자기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그 여린 생명들을 무참히 학살했던 것입니다. 수니파 무슬림들의 보복이 예고되고 있기에 그 땅에서는 더 큰 학살의 악순환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무저갱이 열린 것 같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그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며, 다시금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나치의 학살에서 살아남아 평생을 그 잔학한 시대에 대한 증언자로 살았던 프리모 레비의 말대로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지식의 총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사람다운 삶에 대한 의식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을 휩쓸고 있는 탐욕과 광기에 맞서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삶으로 증언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대정신에 맞서는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 세상의 권세자들은 우리 속에 끊임없는 불만족을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를 지배하려 합니다. 그들은 인간이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 속에서 사고하는 이들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세상 질서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좁은 문을 통하지 않고는 영생에 이를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일찍이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엡6:12)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의 전략이 뭔지 아십니까? 그들은 우리에게서 공동체를 빼앗아갑니다. 함께 나누고 돌보고 섬기는 이들은 악한 영의 주술에 넘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을 느끼는 사람, 그리고 기꺼이 누군가를 돌보려고 하는 사람의 내면에는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든든함이 찾아듭니다.

• 교회의 근본
현대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돈’이라는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 자포자기한 사람들에게 제2이사야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합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기대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 소식은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사40:9c)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사52:7c).

아름다운 소식이란 무엇입니까? 바벨론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제 아무리 막강하게 보여도 세우기도 하고 허물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은 일견 든든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사십니까? 오늘의 교회가 무기력증에 빠진 것은 바벨론에 동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결국 하나님의 몸이 되는 데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입니다만 저는 오승윤 화백의 전시회를 보며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오방색(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을 뜻하는 청백적흑황색)을 가장 잘 활용한 화가로 알려진 그는 한국 인상주의 회화의 대가인 오지호 화백의 아들입니다. 그 전시회에 걸린 그림은 모두 ‘산 그림’이었는데, 화가가 100개의 산에 오르며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그림을 보면서 제가 좀 놀란 것이 있습니다. 초기의 그림은 봄․여름․가을․겨울에 따라 변화하는 산 빛과 형태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후기로 갈수록 화가는 산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골격을 그렸습니다. 어쩌면 그는 계절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어떤 핵심을 그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그림에 빗대 말하자면 교회도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판단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세월이 가도 상황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본질을 붙들고 있는가 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살아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죽어가는 것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교회의 중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살려는 결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려는 열린 태도야말로 교회가 한순간도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입니다.

교회는 중심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는 서른 개의 바퀴살이 바퀴통 하나에 모이되 바로 거기가 비어 있어서 수레를 쓸 수 있다(11장)고 했습니다. 서른 개가 하나의 중심에 모인다는 것이 우선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곳이 비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각각 자기로 가득 차 있다면 교회라는 수레는 구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겠다는 이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다름 아닌 ‘자기 부인’이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빈 데 없이 내 이익, 내 견해, 내 계획으로 꽉 차 있으면 하나님의 뜻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지고, 이웃과의 평화도 불가능한 법입니다.

• 성막 짓기
일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저는 출애굽 공동체가 함께 지었던 성막이야말로 아름다운 교회의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을 압제의 땅인 애굽에서 이끌어내셨고, 시내산에서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당신의 법을 일방적으로 부과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동의를 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맺으면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백성의 정체성은 핏줄이나 지역에 뿌리를 둔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함께 이루어가야 할 미래의 비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비전이라는 말은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비전은 미래의 청사진입니다. 지향해야 할 비전이 없다면 삶은 무기력하거나 권태로울 것입니다. 문제는 비전은 아름답지만 그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만만치 않다는 사실입니다. 역사가 아주 조금 진보하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헌신과 희생이 있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세상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사람들은 끈질기게 요구하지 않는 한 자기들의 기득권을 조금도 내놓지 않습니다. 비전은 현실의 장벽에 가로막혀 퇴색되기 일쑤입니다. 그렇기에 자꾸만 새롭게 상기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비전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과 지속적으로 만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 성막을 만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현존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상징물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억압과 착취와 비인간화의 땅인 애굽을 떠나 자유와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새로운 세상을 향하고 있음을 일깨우는 상징물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바로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에 동참하는 백성임을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성막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재를 헌납했습니다. 강요 때문에 마지못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의지로 창조적인 일에 동참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봉헌한 헌물이 너무 많아서 ‘이제는 그만 가져오라’고 부탁해야 할 정도였다고 말합니다. 자기 것을 내주면서도 기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자유인의 긍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물건만 봉헌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시간과 재능까지도 바쳤습니다.

몇 해 전 여수에 신앙집회를 인도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의 안내를 받아 교회를 둘러보며 참 놀랐습니다.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놀랐던 것은 그 교회를 짓는데 온 교인들이 몸으로 동참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남편들이 일 나가고 아이들도 학교에 가고 나면 아내들은 도시락을 싸들고 교회에 와서 온갖 허드렛일을 다 했습니다. 저녁이 되면 퇴근한 남성 교우들이 찾아와 늦도록 함께 일을 했다고 합니다. 요즘도 이런 교회가 있나 싶었습니다. 그 땀 흘림의 과정을 통해 교인들은 하나가 되었고, 주님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기술, 하나님의 선물
성막을 짓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입니다. 그들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아주 솜씨 좋은 장인匠人들입니다. 어쩌면 출애굽 이전에도 비슷한 일을 하던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서 기자는 그들의 그 숙련된 솜씨를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도 말합니다. 하나님은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신 후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가득하게 하시고,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온갖 기술을 갖추게 하셨습니다.”(31) 그는 아이디어가 넘치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머릿속 생각을 작품으로 만드는 일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습니다.

오홀리압에게도 동일한 은사를 주셨는데, 특히 그에게는 ‘남을 가르치는 능력도 주셨다’고 합니다. 그는 재능 있는 사람들을 선발하여 성막과 기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을 전수해주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창조적인 일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면서 그들은 이전의 노동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기쁨과 감사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깐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재능이 하나님의 영의 충만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러 차례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잠깐 그리스적 사고와 히브리적 사고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아주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는 아레테aretē입니다. 주로 인간의 탁월함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따라서 삶의 모든 분야에서 적용됩니다. 건강의 아레테, 아름다움의 아레테, 운동 능력의 아레테, 기술의 아레테를 성취하는 것이 그리스인들의 이상이었습니다. 기술 혹은 예술을 뜻하는 테크네technē라는 단어도 매우 중요한 데, 이 단어는 신의 활동에 대비되는 인간의 활동을 뜻하는 말입니다. 테크네를 가진 사람은 인간적 자부심을 가질 만합니다. 그는 빼어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아레테 혹은 테크네가 인간의 탁월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입장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인간 자신에게서 유래한 탁월함이라면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우월감을 가져도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도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의 다양성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은사를 주신 까닭은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쓰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12:7). 그는 은사를 자랑하는 성도들에게 “아무도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십시오.”(고전10:24)라고 단호하게 요구합니다.

요즘 들어 많은 사람들이 재능 기부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을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활용하려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교인들이 자신의 재능을 우리 신앙공동체는 물론이고 사회의 성숙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브살렐 오홀리압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오늘 우리가 다소라도 잘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나누고 섬기는 일에 열중하다 보면 ‘돈’의 지배력은 약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에 중독되었던 이들이 깨어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자각할 뿐만 아니라, 그런 세상을 이루기 위해 기쁘게 헌신하는 이들이 나오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 때 삶의 외로움은 극복되지 않습니다. 이웃을 위해 자기를 바치며 살 때 외로움과 두려움은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 아름다운 사귐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이 한 주간 동안 살아가면서 일상의 모든 순간에 주님이 요구하시는 바를 기쁘게 수행하십시오. 세상 도처에서 평화의 일꾼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땀 흘려 씨를 뿌리고, 목숨을 바치기도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언제나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 길을 거치지 않고는 부활의 기쁨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더디더라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따라 한 걸음씩 내딛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성령에 충만한 자 브살렐과 오홀리압”(출 31:1-11)

르호봇
9~11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출애굽기 히브리어 설교 중에서 성령에 충만한 자 브살렐과 오홀리압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명령하시고 어떻게 지을 것인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막을 짓는 일꾼의 지도자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지명하여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성막을 짓게 됩니다.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은 교회를 통해서 예배를 드림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처럼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아 봉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광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렀을 때에 모세는 시내 산에 오르게 됩니다. 시내 산에서 40일 동안 하나님과 교제를 하면서 십계명의 율법을 받고 하나님이 죄인들을 만나서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성막의 식양을 받게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율법만 주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게 됩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용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막은 죄지은 백성들이 제물을 가지고 와서 용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용서가 없지만 복음은 용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짓는데 중요한 인물을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오늘 그 사람이 바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성막을 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없었다면 성막을 짓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완전한 성전을 지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이 세상의 죄인들은 한 명도 죄 사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통해서 성막을 짓게 되고 이 사람들을 통해 성막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진리가 무엇입니까?

첫째, 유다지파 출신의 사람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2절 레에 카라티 베솀 베찰엘 벤 우리 벤 후르 레마테 예후다

출 31:2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께서는 유다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유다 지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된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육적인 메시아가 유다지파를 통하여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보라’라는 단어는 (라아 7200 VQMMYS 동사 칼 명령법 남성 2인칭 단수) 보다, 감찰하다, 결정하다, 즐겁다, 준비하다, 라는 뜻입니다. 번역본에는 없지만 원문에는 ‘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지파의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면서 먼저 보라고 주목시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브살렐을 감찰하여 보았고 이 사람을 보면 기쁘고 즐거우며 이미 하나님께서 준비한 사람으로 성막을 지을 수 있는 자로 이미 하나님의 마음에 결정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직접 명령하시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주목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막을 지을 자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브살렐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브살렐을 선택한 이유를 주목하여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라는 단어는 (우리 221) 우리,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אור(오르 215) 빛나다, 영화롭다, 광채 나다, 불사르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브살렐은 우리의 아들입니다. 우리의 아들로서 선택받은 브살렐은 성막을 지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이며 자신의 몸을 불살라 아버지의 뜻을 이룰 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브살렐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죄인들의 흑암을 빛으로 물러가게 하는 자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브살렐이 유다지파의 우리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브살렐의 이름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을 발견해 보겠습니다.

‘브살렐’이라는 단어는 (베찰엘 1212) 브살렐,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אל(엘 410) 하나님, 이라는 뜻과 צל(첼 6738) 보호자, 그늘, 이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이 단어가 צלל(찰랄 6751) 그늘지다, 어두워가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우리가 브살렐의 이름을 종합하여 보면 ‘하나님의 보호자’라는 사람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죄악 가운데 어둠에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빛을 전파하여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이 사람이 성막을 짓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지명되어 부름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는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이 어둠에 있을 때에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4절 엔 아우토 조에 엔 카이 헤 조에 엔 토 포스 톤 안드로폰 

5절 카이 토 포스 엔 테 스코티아 파이네이 카이 헤 스코티아 아우토 우 카텔라벤

요 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임했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기 전에는 모든 세상이 어둠에 있었고 죽음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브살렐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빛으로 성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육신은 유다 지파의 뿌리를 통하여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브살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지파의 혈통을 통하여 오신 육신을 부인한다면 이것은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감정이 있었습니다. 아프면 아파하셨고 괴로우면 괴로움을 표출하셨습니다. 이것이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영을 브살렐에게 충만하게 채워주셨다는 것입니다.

3절 바아말레 오토 루아흐 엘로힘 베호크마 우비트부나 우베다아트 우베콜 멜라카

출 31:3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하나님은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를 주셨습니다.

‘충만하게’라는 단어는 (말레 4390 CW.VPICXS 와우접속사 동사 피엘 미완료 공성 1인칭 단수) 가득하게 하다, 충만하다, 헌신하다, 만족하게 하다, 거룩하게 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브살렐에게 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채워주시고 있습니다. 이 충만은 부족함이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합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브살렐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님이 임하니 성막을 짓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삶을 브살렐이 사니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고 만족스럽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신 후에 즉시로 성령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성령님이 브살렐에게 임하게 하셨습니다. 피엘 강조능동을 사용했다는 것은 이 충만은 받기 싫어도 받을 수밖에 없는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임하게 된 충만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절대 받을 수 없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브살렐이 받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성령님의 충만함이 임할 때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성막을 짓는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브살렐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도 세례 요한의 세례를 통하여 성령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 카이 유데오스 아나바이논 아포 투 휘다토스 에이덴 스키조메누스 투스 우라누스 카이 토 프뉴마 호세이 페리스테란 카타바이논 에프 아우톤

11절 카이 포네 에게네토 에크 톤 우라논 쉬 에이 호 휘오스 무 호 아가페토스 엔 호 유도케사

막 1:10-11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에게 임하였습니다. 성령님의 충만함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늘에서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사생애의 기간은 끝나고 공생애의 기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브살렐도 자신의 사생애 기간이 있었지만 하나님께 지명을 받아 성막을 짓게 되고 하나님의 성령의 영이 임하게 됨으로 공생애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브살렐은 사생애에서 공생애로 들어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유다 지파의 요셉의 아들로 살다가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을 것은 브살렐은 성막의 기초를 놓는 작업을 했던 인물입니다.

4절 라헤쇼브 마하솨보트 라아쇼트 바자하브 우바케세프 우바네호쎄트

5절 우바하로쎄트 에벤 레말로트 우바하로쎄트 에츠 라아쇼트 베콜 멜라카

출 31:4-5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라

브살렐은 성막을 짓는 전반적인 책임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막의 기초를 놓게 됩니다.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였고 보석을 깎았으며 나무를 새기는 기술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금과 은과 놋은 성막의 기본 재료들입니다. 이것을 다루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금과 은과 놋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성막의 기초를 놓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인성으로 구원의 기초를 놓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4절 호스테 아델포이 무 카이 휘메이스 에다나토데테 토 노모 디아 투 소마토스 투 크리스투 에이스 토 게네스다이 휘마스 헤테로 토 에크 네크론 에게르덴티 히나 카르포포레소멘 토 데오

롬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른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율법에서 살아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몸이 없었다면 우리는 죄악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기초한 자가 바로 브살렐입니다. 주님의 몸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선택받은 죄인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셋째, 단 지파 오홀리압을 선택한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6절 바아니 힌네 나타티 이토 에트 오홀리아브 벤 아히사마크 레마테 단 우베레브 콜 하캄 레브 나타티 호크마 베아슈 에트 콜 아쎄르 치비티카

출 31:6 내가 또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

하나님께서는 왜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웠는지를 영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오홀리압을 세운 것은 브살렐을 도와주라고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지을 수 있도록 협력자로 세운 것입니다.

‘단’이라는 단어는 (단 1835) 단,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דין(딘 1777) 심판하다, 억울함을 풀다, 심판을 내리다, 공정하게 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 중에 단 지파는 심판하는 지파였습니다. 이 지파에서 오홀리압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기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들을 풀어주고 공정하게 심판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셔서 구원받은 백성들은 데리러 오시고 심판받을 자들은 공정하게 심문하여 재판하시는 분이 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오홀리압의 이름을 통하여 영적으로 깨달아 보겠습니다.

‘오홀리압’이라는 단어는 (오홀리아브 171) 오홀리압,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אב(아브 1) 아버지, 라는 뜻과 אהל(오헬 168) 장막, 성막, 성전, 이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이 단어는 אהל(아할 166) 장막을 세우다, 밝다, 빛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오홀리압은 ‘아버지의 장막’이라는 의미를 가진 인물입니다. 무너진 아버지의 장막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장막에서 밝게 빛이 비추어져 구원받은 백성들이 몰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우신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0일 / 03- 19-2024(화)
출애굽기 30:1-38
분향단(1절)
찬송 / 467장(내게로 와서 쉬어라)

분향단, 기도를 상징하는 분향의 제단,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

1 너는 분향할 제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
2길이가 한 규빗, 너비가 한 규빗으로 네모가 반듯하게 하고 높이는 두 규빗으로 하며 그 뿔을 그것과 이어지게 하고
3제단 상면과 전후 좌우 면과 뿔을 순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 테를 두를지며
4금 테 아래 양쪽에 금 고리 둘을 만들되 곧 그 양쪽에 만들지니 이는 제단을 메는 채를 꿸 곳이며
5그 채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고
6그 제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7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지며
8또 저녁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9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
10
아론이 일 년에 한 번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 년에 한 번씩 대대로 속죄할지니라. 이 제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니라.

분향단(焚香壇, the altar of incense)은 향을 사르는 제단으로 지성소로 향하는 휘장 앞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길이와 넓이가 각각 1규빗(약 50cm)이며 높이는 2규빗(100cm)의 크기로 싯딤나무로 만들었고 금을 입혔습니다.
번제단처럼 네 귀퉁이에 뿔을 만들었고 운반을 위해 금고리와 멜 수 있도록 채를 만들어 모두 금을 입혔습니다.
향단에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대로 제조된 거룩한 향들만 피울 수 있었고 이른 아침과 저녁때 등잔대의 불을 정리할 때 향을 살랐습니다.
명칭이 ‘분향하는 제단’이라고는 하나 번제나 소제, 전제 등 제사는 드리지 못하며 오직 향만 사르도록 규정되었습니다.

1. 분향단은 기도를 상징합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고 해석하여야 합니다.
상징적이나 영적인 부분들을 해석하는 원칙도 마찬가집니다.
앞선 글에도 언급했듯이 요한계시록의 환상들에는 성막이나 성전의 각종 기구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그 기구들이 가진 영적 의미들을 더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요한의 환상 중에 24장로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5: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요한계시록 8: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구약에 있었던 그림자와 요한이 본 환상들의 전체적인 부분들을 일치시키는 것은 무리지만 최소한 ‘향’이 의미하는 바가 ‘기도’라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향을 태울 때 발생하는 향연(香煙)은 우리의 기도가 이 향연처럼 위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기도가 분향처럼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시편 141:2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분향단의 위치를 규정하실 때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이라고 지정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금등대에 대해서는 ‘떡상의 맞은 편’이라고 하셨듯이 분향단을 ‘속죄소 맞은 편’이라고 하신 것은 분향단이 속죄와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또 번제단처럼 분향단에도 사방으로 네 뿔을 만들었는데 여기는 일 년에 한번 속죄제의 피로 속죄합니다.
아마도 이날이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속죄일(大贖罪日, Yom Kippur, 7월 10일)일 것입니다.
레위기 16:13에는 그날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분향단에 있는 향로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향연으로 속죄소를 가리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레위기 16:13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할 것이며”

정리하자면 분향단은 언약궤의 속죄소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과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가는 길이라는 것도 이 향단의 위치에서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기도란 자신이 필요한 것을 구하는 기복적인 차원을 넘어 하나님과 나누는 깊은 교제이며 자신을 산제물로 드리는 헌신이기도 합니다. 기도처럼 하나님께 실제적으로 가장 가까이 나가는 길은 없습니다.

분향에 사용되는 향에 대한 규정

출애굽기 37:29에서 “거룩한 관유와 향품으로 정결한 향을 만들었으되 향을 만드는 법대로 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향품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조법을 따라 만들어야 했으며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관련 명령은 이것은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동일한 제조법으로 자신을 위해서나 사람을 위해서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가져다가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같은 분량으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네가 여호와를 위하여 만들 향은 거룩한 것이니 너희를 위하여는 그 방법대로 만들지 말라. 냄새를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모든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출 30:34-38)

1) 향의 원료

향의 원료는 ‘소합향’, 나감향‘, ’풍자향‘, 유향’ 등 네 가지입니다.

먼저 소합향(蘇合香, stacte)은 ‘스며 나오다, 방울되어 떨어지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나타프(נָטָף)’에서 나온 말인데 단풍나무와 비슷한 소합향나무가 햇빛을 받으면 송진처럼 진액이 흘러나와 방울처럼 맺하는데 그것을 채취한 것이 소합향입니다.

대부분의 향 재료가 식물에서 얻어지는데 특별히 나감향(onycha)은 홍해나 지중해에서 서식하는 향조개(aromatic shell)의 껍질을 빻아서 가루를 내어 만든 향입니다. 이 가루는 특히 불로 태울 때 진한 향을 발합니다.

풍자향(galbanum)은 인도나 페르시아 등지에서 자라는 페룰라 갈바니플루아(Ferula galbaniflua)라는 다년생 식물에서 추출한 진액으로 만들어졌는데 향이 자극적라서 불쾌하기도 하나 다른 향과 배합되면 향기를 오래 지속시켜 준다는 특성이 있고 해충을 막고 방부제 역할도 했습니다.

이 세 가지 향료를 유향(乳香, frankincense)에 섞습니다. 유향은 아라비아 사막에 서식하는 유향나무에 상처를 입혀서 채취한 진액으로 쓴맛이 나지만 대단히 상쾌한 꽃향기를 발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재료들은 진정한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잘 말해 줍니다. 뜨거운 태양빛을 받아 진액이 스며 나와 방울이 맺히는 소합향처럼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강렬한 은혜 아래 우리 안에서 자발적으로 스며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개의 껍질을 잘게 부수듯 우리의 육신의 자아가 깨어지고 그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 향연이 되어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입니다. 단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삶의 필요만을 구하는 기도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고 지극히 자아적인 것입니다. 나의 자아와 육체의 욕망은 죽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구하는 것이 바로 껍질의 부서짐입니다.

풍자향은 칼로 베임을 당한 곳에서 나오는 진액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더욱 향기를 발하는 향료가 되게 합니다. 고난 속에서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다윗의 시편에서 하나님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시 50:15). 고난 속에 부르짖는 기도는 방부제처럼 우리 영혼을 타락의 죄악에서 지켜 줍니다. 고난은 쓰지만 향의 효과는 큽니다. 이 세 가지 향 재료는 유향과 섞여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합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향기 나게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교제의 삶은 하나님 앞과 세상 속에서 향기를 발합니다.

향 제조에 첨가되는 또 하나의 재료는 소금입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지만 영적인 면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언약을 나타냅니다. 레위기 2:13에서는 소제를 드릴 때 ‘언약의 소금’을 반드시 포함시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민수기 18:19에서 레위인에게와 역대하 13:5에서 다윗과 맺은 언약을 ‘소금언약’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2) 금지사항과 의미

향과 관련된 금지명령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분향단에 하나님의 방식대로 만든 향 외에 다른 향을 절대 사르지 말라는 것과 또 하나는 앞서도 보았듯이 이러한 제조과정으로 만들어진 향은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향재료들은 인반적인 것들이라서 그것을 가지고 사람이 임의로 삶에 필요한 향품을 만들어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겠으나 다만 거룩한 향을 만드는 동일한 방식으로 제조하여 사람이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집니다.

‘거룩한 것’이란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해야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개별적인 향 재료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르는 제조의 방식이 거룩한 것입니다. 상징이나 그림자란 영적이거나 앞으로 다가올 어떤 실체를 보여 주는 것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말씀하신 대로 해야만 합니다. 분향단의 향은 성도들의 기도와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라는 실체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령하신 방식대로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동일한 제조법으로 사람을 위하여 만들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기도는 오직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기도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고 인간이 만든 우상도 역시 우리의 기도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께만 이 분향과 기도가 드려져야 합니다.

3. 분향단은 기도의 사람이신 예수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병자를 고치시거나 말씀을 가르치시는 사역과 함께 가장 많이 하신 일은 기도였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막 6:4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 5:16)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한다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이란 지존자이고 전능자이며 주권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란 존재는 기도하는 분이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입장으로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의 모범이 되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삶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사는 것이 합당한가를 본보기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가 사역을 하지 않는 시간은 거의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또 그의 기도는 구원받고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중보 사역은 육신을 입으셨을 때부터 부활하여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으로 중보하시는 시점까지, 그리고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넘어지지 않도록 중보기도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사도들을 세울 때 밤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 6:12-13)

요한복음 17장 전체에는 제자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죽으심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는 자신을 핍박하고 조롱하며 능욕하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중보기도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자기를 부인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합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그 때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흘러나왔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마치 진액이 나무에서 방울처럼 스며 나오는 소합향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는 나감향처럼 깨어지고 부서졌습니다. 풍자향처럼 채찍맞고 가시관 쓰이고 창에 찔리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생명을 내어놓으신 그의 기도는 향기로운 향연이 되어 보좌로 올라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전히 중보자로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예수님은 부활 후 살려주시는 영(성령)으로, 다른 형태의 보혜사로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4. 분향단의 뿔

앞서 번제단에 대해 나눌 때 네 뿔이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구원의 뿔이라고 한 것을 보았습니다. 분향단에 있는 네 뿔도 역시 동일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초월적 권능을 우리 삶의 현장에 나타나게 하는 능력의 통로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면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막 9:29).

분향단은 속죄소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중보는 구원과 절대적으로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중보의 힘으로 연약함 가운데서 우리가 굳게 설 수 있고 또 성도들이 하는 진정한 기도는 믿음 안에 든든히 서 있게 하고 죄악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베드로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 분향단의 불에 대한 중요한 명령

레위기 10장에는 대단히 당황스러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가 성소에서 분향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 10:1)

그들이 죽임을 당한 이유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불이란 무엇일까요? 레위기 16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록상으로 보면 이는 대속죄일에 대한 규정으로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언급되지만 이미 성막을 만드는 모든 과정에 모세가 세부적인 사항들을 자세히 가르쳤던 내용일 것입니다.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레 16:12)

분향단에 사용되는 불은 번제단에서 가져오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번제단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향을 사른 것으로 보입니다.

성막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있어서도 향로에 향을 사를 때는 번제단에서 가져온 불을 사용했습니다.

민수기의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광야에서 고라의 반역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매우 진노하셔서 반역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심판하시자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민 16:41).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온 백성에게까지 진노하셔서 전염병으로 그들을 치십니다, 이때 모세는 아론에게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에서 불을 담아 향을 피우고 회중들에게 가서 속죄하라고 다급하게 말합니다.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피워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작되었음이니라”(민 16:46)

아론이 모세의 말대로 하자 염병이 그칩니다. 향로에 향을 사를 때는 반드시 제단에서 불을 가져와야 합니다. 속죄 사역과 기도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것으로 영적 실체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번제단은 우리 죄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그림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속죄 사역을 이루신 복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모든 간구의 바탕에는 복음의 진리와 영혼 구원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면 다른 복음이고 다른 불입니다. 그 복음이의 진리가 바탕되지 않는 기도의 제단은 다른 불로 향을 사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구하는 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로움이 되는 복음 진리를 바탕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위한 모든 중보의 사역은 복음과 영혼 구원이 중심이 되고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국가의 안위와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그 바탕에는 복음과 영혼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1-4)

소위 성령 사역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 원칙을 망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역의 성격상 특히 기도하는 일에 많은 비중을 두지만 그 기도와 사역이 복음이나 영혼 구원과는 거리가 먼 ‘능력의 나타남’ 자체를 추구하거나 ‘성공과 축복과 번영’이라는 기복 신앙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 역시 번제단에서 가져온 불이 아닌 다른 불로 향을 사르는 것과 같습니다.

불은 반드시 번제단에서 가져온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와 간구와 추구하는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복음에서 가져온 것이라야 합니다.

분향단은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기도를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기도 생활의 모범입니다.

6. 분향은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지며 또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출 30:7-8)

번제단에 제사가 끊이지 않으며 떡상에 떡이 항상 진설되어야 하고 등잔대에 불이 항상 켜 있어야 하며 분향단에도 아침 저녁으로 끊이지 않고 향을 살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중보 사역은 다 마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도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눅 18:1)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 12:12)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6-17)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9일 / 03- 18-2024(월)
출애굽기 29:1-46
제사장 직분(1절)
찬송 / 341장(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제사장의 성별식

1. 물로 씻고 제사장 옷을 입음

준비물 / 젊은 수소 1, 수양 2, 무교병, 과자, 무교 전병
과정 / 물로 씻김, 제사장 의복, 머리에 기름 부음

하나님은 모세에게 젊은 수소 하나와 숫양 둘, 무교병과 과자와 무교 전병을 가져오고 성막 뜰로 들어와 거기서 아론과 그 아들들을 만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먼저 물로 씻겨야 했고 대제사장의 옷을 아론에게 입혀야 하는 것입니다.
아론은 그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아야 했습니다.
특별한 임무를 받으면서 기름부음 받는 직분은 제사장 이외에 선지자, 왕을 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아론의 아들들은 기름부음을 받진 않았지만 속옷과 때를 포함하는 제사장의 복장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a. 무교병(레 2:4)
b. 물로 씻음(히 10:22)

2. 속죄제

아론은 먼저 수송아지로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이라는 특별한 직분을 맡은 사람일지라도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죄에 속해 있음을 기억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때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하는 것은 동일시를 뜻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그들 대신해서 죽은 짐승과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죄인 됨과 피로 씻음의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매년 대속죄일을 통해서 제사장들은 씻음을 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를 대표하는 자들의 허물을 그냥 넘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주셨습니다.
피의 일부는 번제단 뿔에 발랐고, 나머지는 단 밑에 쏟았습니다.

a. 안수(레 8:14)
b. 속죄제(출 30:10)

3. 번제와 화제

숫양 둘 중 하나로 드리는 두 번째 제사는 번제로 드려야 했습니다.
예배자와 제사장들이 먹는 제사와는 달리 번제는 제단 위에서 전부를 태워야 했습니다.
번제는 또한 제사장으로 위임받는 사람이 자기 전체를 다 드려 그 직무에 임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른 숫양으로는 세 번째 희생을 드려야 합니다.
그 피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오른쪽 귀뿌리와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발라야 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정결하고 성별되었다는 표시가 됩니다.
귀뿌리의 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의 성별을 상징하며, 엄지 손가락의 피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의 거룩성을 묘사하고 엄지 발가락의 피는 하나님을 섬길 때에 조심스럽게 걸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숫양의 피는 단 주위에 그리고 관유와 함께 제사장들과 그들의 옷에 뿌려야 했습니다.

a. 숫양(창 22:13)
b. 번제(민 29:13)

4. 요제

세 번째 제사는 화목제의 범주에 속했으며, 위임제에 맞게 조금 수정되었습니다.
화목제의 본질은 제물의 일부를 경배자가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화목되고 따라서 하나님께 가납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이 제사의 일부는 '요제'로서 그 제물이 하나님께 속했음을 강조하는 의식 행위였습니다.
요제를 드린 다음에는 대개 하나님의 대표자들인 제사장들이 그 제물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졌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이 드린 첫번째 제물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숫양의 가슴은 요제로서 아론과 그 아들들이 먹어야 할 몫입니다.
누군가가 화목제를 드릴 때 그 짐승의 가슴과 넓적다리는 항상 제사장들의 몫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칠 일 동안의 성별식에서 아론의 대제사장의 성의는 그를 계승한 아들에게 주어지고 다음 세대까지 계속 전달 계승되어야 했습니다.
또한 회막 문에서 먹어야 할 위임식 숫양의 먹는 부분에 대해서 지시하고 이 경우 숫양과 떡은 매우 거룩한 성질의 식사로서 남은 것은 모두 태웠습니다.
제사장 위임식은 칠 일 동안 행하며 매일 속죄제로 수송아지 하나를 드렸습니다.
칠 일 동안 단은 거룩한 섬김을 위해 제사를 통하여 속죄되고 성별되어야 했습니다.

a. 위임식(레 8:28)
b. 요제(민 5:25)

매일 드려야 하는 번제

1.  소제와 전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번 소제(밀가루와 기름)와 전제(포도주)와 함께 어린 양 두 마리를 드려야 했습니다. 매일의 제물에는 백성들의 일상적인 식사의 요소들, 즉 고기와 밀가루와 기름과 포도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매일의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였습니다.

a. 어린 양(겔 46:13)
b. 소제(레 2:7)

2. 매일 번제의 중요성

이 마지막 구절은 이스라엘의 일상 생활에서 매일의 번제가 갖는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거기서 만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하나님과의 교제는 죄를 위해 흘린 피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매일 두 차례의 이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이나 일반 백성은 자신의 궁핍과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a. 속죄의 피(히 9:22)
b. 하나님과의 교제(시 16:8)

결론 /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을 기름부으셔서 성막에서의 섬기는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제사장들은 성별 예배를 통해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갔고 자신의 삶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사장들이 성별되어 여호와를 섬길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며 그들은 그분이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8일 / 03- 16-2024(토)
출애굽기 28:1-43
거룩한 옷(2절)
찬송 / 92장(어둠의 권세)




제단 뿔

레위기 4:25

제사장은 그 속죄 희생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번제단 밑에 쏟고.

레위기 4:30
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단 밑에 쏟고.

레위기 4:34
제사장은 그 속죄제 희생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전부를 단 밑에 쏟고.

열왕기상 1:50-51
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 잡으니.
혹이 솔로몬에게 고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솔로몬왕을 두려워하여 지금 제단 뿔을 잡고 말하기를 솔로몬왕이 오늘날 칼로 자기 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기를 원한다 하나이다.

시편 118:27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우리에게 비취셨으니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찌어다.



What Does Brass Represent in the Bible?


Introduction

Brass is mentioned numerous times throughout the Bible, both in the Old and New Testaments.
But what exactly does this metal represent symbolically and spiritually?
In this comprehensive blog post, we will explore the significance and meaning of brass in the Scriptures.

Key Takeaways:

  • Brass is associated with strength, durability, and judgment in the Bible
    성경에서 황동은 힘, 내구성, 심판(판단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 It was commonly used for altars, lavers, pillars, and musical instruments in the Tabernacle and Temple
  • Brass often represented the judgment of God against sin
  • The brazen serpent foreshadowed Christ’s crucifixion
  • Brass also symbolized the feet of Jesus and his triumph over evil
What does brass represent in the bible

Table of Contents

Properties of Brass in the Ancient World

In ancient times, brass was an alloy of copper and zinc that was known for its strength and brightness. The Hebrew word translated as “brass” or “bronze” is nechosheth, which comes from a root word meaning “to glisten” or “shining.” This reflects how brass would gleam in the sun’s rays.

Brass was harder and more durable than pure copper. It maintained a sharp edge and was resistant to corrosion. For these reasons, brass was used to make weapons, armor, coins, mirrors, hinges, and works of art in biblical times.

The Thera Sea in Solomon’s Temple measured 10 cubits across and 30 cubits around, with a depth of 5 cubits. It rested on 12 oxen made of brass (1 Kings 7:23-26 NKJV). This huge laver could hold thousands of gallons of water for the priests to wash themselves. The brass gave it strength to remain intact.

The Bible first mentions brass when Cain’s descendant Tubal-Cain became “an instructor of every craftsman in brass and iron” (Genesis 4:22 NKJV). The Canaanites and Philistines were also skilled metal workers in brass and iron when the Israelites entered the Promised Land (Joshua 22:8, 1 Samuel 13:19-20 NKJV).

These pagan groups probably produced brass idols and false gods. But God intended for the Israelites to use brass to construct holy things for His Tabernacle and Temple.

Brass Representing Strength and Judgment

The symbolism of brass in Scripture seems connected to its characteristics of hardness, firmness, and brightness. Brass often represents strength, durability, and the judgment of God against sin.

When King Nebuchadnezzar saw a mysterious figure in the fiery furnace, its feet were like “burnished bronze” (Daniel 10:6 NKJV). Here, brass conveys supernatural strength and a divine nature.

Similarly, when the Apostle John saw the risen Christ in Revelation, his feet “were like fine brass, as if refined in a furnace” (Revelation 1:15 NKJV). The brightness and burnished nature of Christ’s feet depict his holy judgment against the wicked.

His feet of brass will trample all evil underfoot. As a strong metal, brass was appropriately used in scales, chains, and shackles to convey military conquest, imprisonment, and judgment (2 Kings 25:7, Psalm 149:8 NKJV).

The Bible says God judges sin with “justice like the great deep” and righteousness like “the strong mountains” (Psalm 36:6 NKJV). So it is fitting that when God commanded Moses to build the Tabernacle, he was to construct the altar of burnt offering from acacia wood overlaid with brass (Exodus 27:1-2 NKJV).

The acacia wood speaks of Jesus’ humanity, while the brass conveys the strength and fiery judgment of God against sin at the cross.

Brass Objects in the Tabernacle and Temple

In the construction of the Tabernacle and later the Temple, brass was heavily utilized for altars, lavers, pillars, and musical instruments. God provided Bezalel and Oholiab with the skills to craft beautiful objects from brass and other metals (Exodus 31:2-6 NKJV). Let’s survey some of the key furnishings made of brass.

The Brazen Altar – This outer altar of burnt offering was 7.5 feet square and 4.5 feet high, overlaid with brass. It was the first object encountered when entering the Tabernacle, pointing to Christ’s sacrifice (Exodus 38:1-2 NKJV).

The Brazen Laver – The priests washed their hands and feet at this brass basin before proceeding further, picturing purification from sin through Christ’s blood (Exodus 30:17-21 NKJV).

The Pillars of Brass – Two towering 27-foot brass pillars named Jachin and Boaz stood on the porch of Solomon’s Temple (1 Kings 7:15-22 NKJV). These majestic columns represented the strength of God.

Brass Musical Instruments – Many instruments like cymbals, harps, and trumpets were made of gleaming polished brass (1 Chronicles 15:19, Daniel 3:7 NKJV). They were used to praise God.

The Brazen Sea – This colossal brass basin held water for priestly cleansing in the Temple (1 Kings 7:23-26 NKJV). It foreshadowed the living water of Christ.

The Brass Serpent – When venomous serpents bit the Israelites, God told Moses to make a brass snake and lift it up on a pole. All who gazed upon it lived (Numbers 21:4-9 NKJV).

Brass objects in God’s Tabernacle and Temple symbolized His glory, strength, purity, and salvation. They ultimately pointed to Jesus Christ.

The Brazen Serpent as a Foreshadow of Christ

One of the most significant brass objects was the brazen serpent that God instructed Moses to lift up on a pole to deliver the people from snakebites (Numbers 21:4-9 NKJV). Anyone who looked to the brass serpent lived, even though serpents represent sin and judgment. Jesus told Nicodemus:

“And as Moses lifted up the serpent in the wilderness, even so must the Son of Man be lifted up,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4-15 NKJV)

Here, Jesus indicated the brass serpent pointed to Himself being lifted up on the cross for our salvation. Just as those who looked to the brass snake were healed, so too, those who look to Christ on the cross are saved from the “venom” of sin and its judgment.

The serpent represented the sin Christ took upon Himself, while the brass depicted the judgment He bore in our place. What an amazing foreshadow!

The Bible says “Christ has redeemed us from the curse of the law, having become a curse for us (for it is written, ‘Cursed is everyone who hangs on a tree’)” (Galatians 3:13 NKJV).

The brass serpent hanging on a wooden pole was a vivid object lesson of Jesus taking our curse on the “tree” of Calvary to redeem us. The serpent and brass together beautifully illustrate God’s plan of salvation.

Jesus’ Feet of Burnished Brass

We previously saw how the risen Christ’s blazing feet of brass in Revelation point to His divine judgment (Revelation 1:15 NKJV). But this brass imagery also occurs in another prophetic vision.

The prophet Daniel saw a glorious man with “his legs like the gleam of burnished bronze” (Daniel 10:6 NKJV). Here, the brilliant bronze likely depicts Jesus’ triumph over all evil powers through His death and resurrection.

Daniel’s vision occurred while the Jews were in Babylonian captivity due to the sins of their nation. But God showed Daniel the future victory of the Messiah, with feet and legs of judgment to tread down all His enemies.

The Apostle Paul possibly had this image in mind when he wrote of Christ’s triumph over demonic rulers and authorities at the cross, “having disarmed principalities and powers, He made a public spectacle of them, triumphing over them” (Colossians 2:15 NKJV).

So the gleaming bronze legs and feet seen by Daniel and John point to Christ victoriously crushing satanic foes underfoot by His sacrificial death and glorious resurrection. What amazing brass symbolism showing Jesus’ definitive defeat of evil!

Brass Pictures Spiritual Lessons for Believers

For the early Christians under Roman rule, the imagery of brass in the Bible provided encouragement and instruction.

Since the emperors ruled with an iron fist, casting Christians to lions in the brass-barred Colosseum, the believers found hope in Revelation’s vision of Jesus’ brass feet judging this cruel empire while standing on the golden sands of heaven (Revelation 1:15). His flaming feet assured them of Rome’s eventual collapse.

Paul told the Corinthian church that he and the apostles endured many dangers so that “the life of Jesus also may be manifested in our body” (2 Corinthians 4:8-11 NKJV).

Their physical afflictions refined and “polished” their character like burnished brass to reveal the resurrection life of Christ. Suffering allowed God’s strength and glory to shine through their weakness.

For modern believers, the durability of brass in the Tabernacle’s laver and altar can picture how standing firm on Christ enables us to persevere through trials.

Like Job who endured loss and pain, we “shall come forth as gold” and shine brighter for Jesus (Job 23:10 NKJV). The spiritual lessons mediated through brass point us to the risen Savior.

Conclusion

In summary, brass in Scripture clearly signifies Jesus’ strength to redeem us, judge evil, and defeat satanic powers through His death and resurrection. He is the fulfillment of the brass furnishings, altar, serpent, and symbolic feet.

May this metal remind us of the durability, purity, and triumph of our Lord. Let’s trust in His proven strength to uphold us by faith in all troubles and persecution until He returns. Our Savior with “feet like fine brass” can trample every foe. We will walk in victory with our God.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7일 / 03- 15-2024(금)
출애굽기 27:1-21
단을 만들라(1절)
찬송 / 361장(주의 주실 화평)

단(4196)

מִזְבֵּחַ 스트롱번호4196

1.

제단

2.

출30:27

3.

28

발음 [ mizbêach ]
어원
2076에서 유래
구약 성경
400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제단, 출30:27,28, 39:39, 레1:9,13,15,왕상7:48, 대하29:22.

번제(

עֹלָה 스트롱번호5930

1.

제단 위에 드려진 것

2.

상승

발음 [ ʽôlâh ]
구약 성경
9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여성 제단 위에 드려진 것, 번제, 창22:3,6,레1:4
  • 2.
    명사, 여성 상승, 계단, 겔40:26




성막의 뜰에 들어서서 성막을 만나기 전에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놋으로 만든 번제단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은 성막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가장 큰 성구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번제단으로 하나님이 지시하신 희생제물을 가지고 나아갔고 매일 아침마다 바쳐진 희생제물은 이 번제단에서 태워져 그 연기는 하늘을 향하여 올랐고 하나님은 그 희생제물의 연기를 흠향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이 성막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 번제단이었습니다.

그러면 번제단의 재료는 무엇으로 되어졌는가를 생각해보겠습니다(1절).

“너는 조각목으로 길이가 다섯 규빗 너비가 다섯 규빗의 제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높이는 삼 규빗으로 하고”

약 2미터 50센티미터의 정사각형 모양에다 높이는 1미터 50미터의 큰 박스와 같은 모양을 하도록 만들되 그 재료는 아카시아나무인 조각목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겉은 놋으로 싸도록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놋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금은 영광은은 속전구속을 그렇다면 놋은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심판주로 오시는 재림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계 1:15절입니다.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재림주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발을 보니 단련한 빛난 주석 즉 놋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원망과 불평하는 죄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셔서 장막 안에 이스라엘백성들을 물어 독이 퍼진 백성들로 죽게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모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백성들의 완악함을 회개하였고 이 불뱀으로부터 구원하여 달라고 울부짖어 기도하게 될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뱀의 모양처럼 구리뱀을 만들어서 높은 장대에 매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불뱀에 물린 사람들은 누구든지 나와서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보는 순간 낫게 하셨습니다.
놋뱀은 이스라엘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께 범죄한 이스라엘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백성들은 놋뱀을 바라보면 누구든지 낫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자신들이 거하는 천막에서 억지로라도 나와서 놋뱀을 바라본 자는 정말 말씀대로 죽어가던 데서 나음을 얻고 온전해 지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구리 뱀은 무엇의 그림자입니까?
사단에 물려 영원히 죄 가운데서 사망을 당하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그 구리 뱀은 십자가에 사단의 저주를 자신의 몸에 짊어지시고 자신의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구리 뱀은 누구 대신 심판을 당하신 것입니까?
죄인인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백성들을 대신 하여 심판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놋은 바로 심판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백성들은 심판에서 생명을 얻는 은혜를 받았듯이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위해 저주와 심판을 동시에 받으심으로 이를 믿는 우리가 심판에서 생명으로 바뀌어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놋의 시작은 창세기 4:22절에서 나타납니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는 놋의 출발이 바로 가인의 후손을 통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사사기 16:21절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무엇입니까? 삼손이 무엇에 묶였습니까?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는 놋줄에 묶였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범죄하여 하나님께 득죄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을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 넘기시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하25:7절입니다. “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

삼상 17:5절에 “골리앗은 머리에 놋투구를 썼고 놋갑옷을 입었고 다리에는 놋각반을 쳤고 어깨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다”
블레셋 장수 골리앗은 무엇으로 몸을 감쌌다는 것입니까? 저주와 심판으로 반면에 사울임금은 삼상17:38절에 다윗에게 무엇을 씌워줍니까?
놋 투구
그랬을 때 다윗은 놋 투구를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 싸우려고 물매만 준비하고 나갔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심판과 저주의 상징인 놋으로 둘러싼 골리앗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을 의미합니다.
여기다 무엇을 입혔습니까?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는 놋으로 입혔습니다.
놋은 붉습니다.
저주와 심판을 당하시고 한없이 흘리신 보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번제단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
말할 것도 없다 예수께서 택하신  인류의 죄를 지시고 죽으신 갈보리 언덕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제일 먼저 발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저주와 심판을 대신 당하셨다.

하나님은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무리 하나님의 독생자라 할지라도 백성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백성의 죄를 짊어지셨다면 심판을 받으셔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에서 무엇을 봅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서 그룹들인 천사들이 모셔 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가 외친 것이 무엇입니까?

이사야 6:5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 왕을 뵈었음이로다.”

왜요? 하나님 계신 것은 너무나 거룩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천사들이 서로 노래하기를 이사야 6:3에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그러니 어떤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 대신 저주와 심판을 받게 하시고 우리로 의롭게 하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담대함으로 나갈 수 있게 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깨끗게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조순하고 얌전한 생활입니까?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히브리서 9:14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하나님은 여기서 만나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9:42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예수 십자가 밑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 주시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6일 / 03- 14-2024(목)
출애굽기 26:1-37
성막을 만들라(1절)
찬송 / 65장(생명의 빛 주 예수여)

26장    
      1-6. 성막을 위한 앙장 열폭
    7-13. 성막을 덮는 막(염소 털)
       14. 성막을 덮는 막(수양 가죽, 해달 가죽)
 15-25. 조각목 널판, 은받침
  26-30. 조각목 띠
  31-33. 구별하기 위한 장
  34-35. 지성소의 기구의 위치
  36-37. 문장과 기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막을 만들라(출애굽기 26:1)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 놓아 만들찌니.
"Make the tabernacle with ten curtains of finely twisted linen and blue, purple and scarlet yarn, with cherubim worked into them by a skilled craftsman.

성막(4908) 미쉬칸(mishkan) מִשְׁכָּן    

1. 거주  2. 욥 18:21. 3. 굴
발음 [ mishkan ]

어원 / 793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39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거주, 주택, 거처, 거주지.
 a. 명사, 남성 [사람] 욥18:21, 시87:2.
 b. 명사, 남성 [동물] 굴, 동굴, 욥39:6.
 c. 명사, 남성 [하나님] 성전, 시46:5(4), 84:2(1),132:5
2. 명사, 남성 천막, 장막, 성막, 성소, 아1:8.
 a. 명사, 남성 이스라엘의 성막, 출25:9, 26:1이하, 40:9이하.
 b. 명사, 남성 증거막, 출38:21, 민1:50,53, 10:11.
 c. 명사, 남성 성막의 휘장, 출39:32, 40:2,6,29.

출애굽기 25장은 성소를 만들되 그 안에서 사용하는 세 가지 기구 즉 궤(언약궤)와 떡상과 등대(메노라)에 대하여 계시하셨습니다.
성소를 만들라고 하신 것은 이제까지는 족장 중심의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났으나 성소를 세운 후부터는 민족 공동체가 모두 하나님을 만나야 하므로 하나님 중심의 거룩한 백성과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위한 하나님의 임재를 항상 볼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6장에서는 성막을 만들라고 합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 중에 함께 계시며 그들을 만나시고, 인도하시며, 돌보시고, 지키시는 분임을 증거해 주는 증거 장막이라고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죄인들을 위해 속죄와 정결함과 거룩함의 은혜를 베푸시는 은총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막은 새 언약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과 영원한 영광에 관한 청사진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성막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해야 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요 5:39).
따라서 성막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살펴야 합니다.
모든 내용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또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고증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성막이 말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더 확실하게 찾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어느 누구도 그 속에 담긴 영적 의미를 완벽하게 다 찾아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상징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해석이 100% 성경적이라고 감히 주장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현재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무려 3천 년 전의 구조물을 오로지 성경 기록과 문헌들만으로 추적해 가는 작업이기 때문에 정확도에서 있어서 당연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의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한계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해한 것은 하나님이 계시해 놓으신 전체 내용의 10분의 1이라도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이 정도의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성막을 통해 얻는 은혜는 너무도 깊고 크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성막의 상징성에 대해 큰 틀에서 종합적인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성막의 공간들이나 재료들, 그리고 색상, 모양, 크기, 수량 등이 모두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 중요한 영적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작 과정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대로, 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했습니다.

성막은 만유 위에 계시는 창조자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셔서 어떻게 세상에 내려오셨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첫째로 정리한 소주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사시며 사역하시다가 최종적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 영광스런 보좌에 다시 오르셨습니다. 그 길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대표자인 대제사장이 되어 앞서 가신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앞서 가신 길’로 정리했습니다. 그다음은 그 예수께서 가신 길을 따라 우리가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나아갈 새롭고 산 길, 영생의 길’이라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성막의 덮개에 숨겨진 네 가지 비밀들(The Four Mysteries hidden in the Coverings of The Tabernacle)


성막의 덮개에 숨겨진 네 가지 비밀들과 의미 #. 1
- 첫번째 덮개로 만든 가늘게 꼰 베실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1)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 놓아 만들지니, 매 폭의 장은 이십팔 규빗, 광은 사 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하고, 그 앙장 다섯 폭을 서로 연하며 다른 다섯 폭도 서로 연하고, 그 앙장의 연락할 말폭 가에 청색 고를 만들며 다른 연락할 말폭 가에도 그와 같이 하고, 앙장 말폭 가에 고 오십을 달며 다른 앙장 말폭 가에도 고 오십을 달고 그 고들을 서로 대하게 하고, 금 갈고리 오십을 만들고 그 갈고리로 앙장을 연합하여 한 성막을 이룰지며,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앙장을 (2)염소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지며, 각 폭의 장은 삼십 규빗, 광은 사 규빗으로 열한 폭의 장단을 같게 하고, 그 앙장 다섯 폭을 서로 연하며 또 여섯 폭을 서로 연하고 그 여섯째 폭 절반은 성막 전면에 접어 드리우고, 앙장을 연락할 말폭 가에 고 오십을 달며 다른 연락할 말폭 가에도 고 오십을 달고, 놋 갈고리 오십을 만들고 그 갈고리로 그 고를 꿰어 연합하여 한막이 되게 하고, 그 막 곧 앙장의 나머지 그 반폭은 성막 뒤에 드리우고, 막 곧 앙장의 길이의 남은 것은 이편에 한 규빗, 저편에 한 규빗씩 성막 좌우 양편에 덮어 드리우고, (3)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4)해달의 가죽으로 그 웃덮개를 만들지니라.” (출 26:1-14)

성막의 덮개들(The Coverings of the Tabernacle)

성막의 덮개를 살펴봅시다.
성막의 덮개는 “네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그에게 세부적인 사항을 지시하셨습니다.

첫 번째 덮개는 성막의 보드판과 안쪽에 있는 기구를 덮고 있어서 “성막 안쪽에서만” 첫 번째 덮개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덮개는 땅 바닥까지 성막의 판, 곧 성소와 지성소를 덮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덮개는 청색, 자색, 그리고 홍색실과 가늘게 짠 베실로 짜여있고, 아름다운 천사들의 형상이 그 덮개에 수놓아져 있습니다.

 

첫 번째 덮개는 서로에게 붙어있는 두 개의 중요한 커튼 세트(sets)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은 서로에게 다섯 개의 더 작은 커튼형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중요한 커튼을 각각 연결하기 위해, 청색실로 된 50개의 고리가 커튼의 끝부분에 각각 연결되는데 사용됩니다.
금 걸쇠(잠금쇠)는 두 개의 커튼 세트를 하나의 큰 덮개로 만드는데 청색실의 고리에 사용됩니다.

성막의 첫 번째 덮개는 두 개의 더 넓은 커튼으로 연결된 열 개의 커튼으로 만들어집니다.
그 길이는 28큐빗(1큐빗-45cm)이고, 그러니까 오늘날 환산법에 의하면 길이가 12.6m이고, 각 커튼의 너비는 4큐빗, 즉 1.8m입니다.

다섯 개의 더 작은 커튼은 우선 두 개의 커튼 세트를 만드는데 연결이 되고, 이 세트는 각각 50개의 고리로 된 청색실과 50개의 금 걸쇠로 붙입니다. 이것은 성막의 첫 번째 덮개가 어떻게 완성되는지 우리에게 세세히 보여줍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성소와 지성소를 덮는 덮개가 세 개 더 있습니다.
즉, “염소 털로 된 덮개”와 “숫양에 붉은색으로 물든 가죽 덮개”와 “해달로 된 덮개”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성막의 첫 번째 덮개는 “청색, 자주색, 홍색실과 가늘게 짠 베실”로 사람 손으로 만든 인공적 천사들의 모양으로 된 커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성막의 첫 번째 덮개에 사용된 “청색실”은 예수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기 위해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받았던 세례를 의미하고 뜻합니다.

곧 예수님은 세례를 통해 세상의 모든 죄의 짐을 지시고,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의의 세계를 당신의 십자가로 활짝 연 것입니다(마 3:15). 세상의 모든 죄를 예수님만이 당신의 세례를 통해 해결할 수 있기에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 세례가 이제 우리에게 영광스런 구원의 표시가 되었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벧전 3:21-22)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영생으로 부활하심으로 세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주님의 의와 사랑으로 하나 된 연합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 된 거룩한 연합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된 영광의 연합을 십자가의 세례를 통해 이룬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5-17)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짚고 가겠습니다.
가늘게 짠 베실 커튼에 수놓아진 천사가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첫째는 하늘나라의 아름다움입니다.
둘째는 하늘세계를 수호하는 보호의 상징입니다.
즉 “죄인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셋째는 하나님의 처소를 보호하는 거룩의 상징입니다.
넷째는 천국의 모형을 나타내며 그곳에 천사들로 충만하고, 그들로 아름답게 수놓아진 천국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또한 천국에서 하나님을 에워싸고 천국 보좌의 영광과 거룩을 그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천사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1-3)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막은 이 땅의 것이 아닌 하늘나라의 모형이라고 신약시대 예수의 사도들이 성경곳곳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덮개, 즉 성소와 지성소를 덮고 있는 수놓아진 천사들과 네 가지 색깔의 아름다움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예수님이 친히 우리의 죄를 지신 십자가의 영광과 은혜와 주님의 나라와 그 아름다움과 영광과 찬란한 거룩한 광채로 다가오는지요?

거룩과 의로움이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당신에게도 거룩과 의로움으로 성령 안에서 충만하길 원합니다.
또한 천국의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당신의 심령과 영혼에 충만하길 원합니다.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합하여 십자가에 내가 죽고(세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고 경험되는 복된 하루이길 원합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행 3:14-15)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성막의 덮개에 숨겨진 네 가지 비밀들과 의미 #. 2
- 염소털로 만든 두번째 덮개

성막의 두 번째 덮개는 염소털로 만듭니다(출26:7). 그 길이는 첫 번째 덮개보다 90cm나 차이가 나고 더 깁니다. 두 번째 덮개는 길이가 13.5m, 너비가 1.8m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덮개는 11개의 커튼으로 되어 있는데, 두 개의 커튼 세트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중 하나의 세트는 다섯 개로 또 다른 하나의 세트는 여섯 개의 커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두 세트는 놋걸쇠(잠금쇠)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출 26:7)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앙장을 염소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지며

염소털로 만들어진 성막의 두 번째 덮개는 예수님이 당신의 십자가로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의로 우리를 온전하고 거룩하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로 오셔서 30세가 되었을 때, 주님은 스스로 자원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세상의 죄를 주님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를 자기 십자가에 가져가서, 우리의 손에 못 박혀 처형과 죽음을 당하시고, 우리를 위한 단 번의 영원한 죄를 자기 피로 용서하시고, 자기백성에게 영원한 주님과 구원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막 위에 덮여 있는 염소털의 흰 덮개, 곧 두 번째 덮개는 속죄염소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세례와 피로써 우리를 죄 없는 깨끗한 자로 만드심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 제물을 위하여 수염소 둘과 번제물을 위하여 수양 하나를 취할지니라. (레 16:5)

또 그 두 염소를 취하여 회막문 여호와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레 16:7-10)

 

 

말씀을 정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위한 하나님께 번제물이요 우리에게는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는 영원한 영광이 되셨고, 우리에게는 영원한 평강과 화평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길과 생명과 진리가 되셔서, 하나님께 영광과 영생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당신과 저는 주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의 길이 되심을 믿고 신뢰하며 소망하는지요? 주님 자신을 우리 자신보다 영원토록 사랑하며 살고픈 마음의 소원이 일어나는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를 영원한 구원의 반석과 영생의 소망과 영광의 주님으로 온 맘과 몸을 다해 섬기며 진리의 성령 안에서 이 땅을 사시길 바랍니다. 주님 안에 축복하며 사랑합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성막의 덮개에 숨겨진 네 가지 비밀들과 의미 #.3
- 붉은 색으로 물든 숫양가죽의 세번째 덮개


성막의 세 번째 덮개를 위해 사용된 재료는 붉은 색으로 물들인 숫양가죽입니다.
이것은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지시고 세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의 백성의 죄를 위한 희생적 제물이 된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세상의 모든 죄를 위한 죽음의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구속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안에서 구원과 새창조질서의 회복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밖에 없는 독자였습니다.
이 아들의 이름이 이삭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난 아들입니다.
즉 땅이 아닌 하늘나라에 속한 아들이란 것입니다.
그러니까 땅에서 만들어 낼 수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하늘세계에서만 창조할 수 있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별안간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받치라(잡으라)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에서 하나님께서 이런 엄청난 살인행각을 벌이려 할까요?
하나님이 할 일이 없으셔서, 너무 심심하셔서 이런 무모한 행동을 아브라함에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장차 온 인류의 메시야로 오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나타내고자 먼저 우리를 대표해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선물로 허락하신 이삭을 통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신 생명의 주님을 보여주고자 아브라함을 먼저 찾아가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약속의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모리산까지 독자 이삭을 데려가 번제물로 하나님께 받치려합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향해 칼을 빼어 내리치려는 순간 아브라함의 마음에 교차된 것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교차된 것이 또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그 마음을...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향한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압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명하십니다. 하나 뿐인 아들 이삭을 향해 빼든 칼을 다시 칼집에 꽂아 넣으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됐다!”
“이제 네 독자 이삭을 통해 네게 모든 것을 다 보여주었다!”
“이제 됐다!”
그런 후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주위를 살펴본즉 한 숫양이 덤불에 자신의 뿔이 걸려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 숫양을 독자 이삭을 대신할 희생제물로 예비해 두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 22:13)

“여호와이레!”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위해 친히 모든 것을 예비하시리니!

(The LORD will provide. 여호와이레)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 22:14)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을 위해 친히 한 독생자를 영원전에 예비해 두셨습니다.
그 독생자는 하나님께는 하나 밖에 없는 당신의 꿈이요 소망이요 영광이요 사랑이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독생자께서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찾아 오신 것입니다.​

이 분이 저와 당신이 믿고 신뢰하고 있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에서 살이 갈기갈기 찢기시고 창에 찔려 피를 쏟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예비하시고 준비하신 독생자 예수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여러분은 무엇을 소망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기대하며 이 땅에 살고 있습니까?
그 소망과 기대가 주 예수님이십니까?
아니면 다른 그 무엇입니까?

성막 세 번째 덮개 천이 숫양의 피로 물든 것을 기억하시며 오늘을 십자가에 나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만이 죄인에게 복음이십니다. 주 예수 안에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냐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고전 10:16)



성막의 덮개에 숨겨진 네 가지 비밀들과 의미 #. 4
- 해달의 가죽으로 만든 네번째 덮개


 

성막의 네 번째 덮개는 해달의 가죽으로 만들어집니다.
해달은 구약성경 히브리어로 “타카쉬”로 포유류의 번역된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몇 가지 다른 포유류로 번역되는데, 가령 “바다소(해우)”(NIV), “물개”(ASV), “고운염소”(NLT), 그리고 “알락돌고래”(NASB) 등입니다.

우리는 이 포유류가 무엇인지 정확히 입증할 수 없습니다.
성경 언어학자들은 “타카쉬” 란 단어의 기원이 아마도 외래어 어원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경우는, “타카쉬” 란 포유류는 그 가죽이 성막의 네 번째 덮개를 만드는데 사용됩니다.
그리고 이 덮개는 아름답거나 매혹적이지 못한 재질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해달 가죽의 네 번째 덮개는 예수께서 사람의 죄로 인한 추하고 더러운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심을 암시합니다.
게다가 주님은 자신의 얼굴이 흠모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해달의 가죽 덮개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오래 전 구약시대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인 사람의 비천한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성령으로 태어나신 것은 우리가 죽음의 날까지 죄로 인한 수치스러운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영생으로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추하고 흉측한 모습의 예수를 십자가에 죽임으로 거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담의 후손으로 보십니다.
죄로 인해 망가진 해달의 가죽 덮개처럼 흠모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보십니다.
이 모든 것은 첫 사람 아담의 죄로 인한 결과입니다.
이 죄의 흉측한 모습을 메시야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반면교사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모습을 자신의 모습이 아닌 타인의 모습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틈만 나면 타인을 해하고 자기 유익만을 구하는 죄를 짓기를 좋아합니다.
더럽고 추한 해달가죽의 모습처럼, 우리는 출생부터 죽음까지 자신의 배만 채우는데 관심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사람의 육체를 입으시고 십자가에 고통을 대신 당해야만 하는 실질적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죄의 본질과 본성의 심각성을 실제적으로 아는 자만 메시야를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한 자는 자신의 죄에 무지하고, 죄로 인한 영원한 사망과 영원한 심판을 믿지 않는 자들은 죄로부터 용서와 사면을 받을 자격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향하여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합니다(시 49: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 49:20)

창세기 1장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담의 죄 안에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스스로 영접지 못합니다.
오직 죄인을 향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믿지 않는 자들은 십자가를 통한 죄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멸망할 짐승처럼 파멸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한 가지 계획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모든 사람이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감찰해보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한 개인에게만 국한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둠과 죄의 미혹 아래 그리고 마귀의 권세아래 속박당하여 살기에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게다가 사람은 자신이 이 땅을 살면서 죄를 지은 적이 없고, 다른 사람보다 더 낫고 더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삽니다.
인간이 얼마나 우둔하고 어리석은 자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교만과 자기기만으로 가득 차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2)

우리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실제적으로 발견하는 차이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비교를 통해 얼마나 실제적으로 타인보다 더 낫고 더 못한 것입니까?
우리는 늘 자신의 이기적인 관심과 탐심을 먼저 앞세우며 이웃과 타인을 괴롭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과 죄로 타락한 마음입니까?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0)

우리가 일평생 살면서 하나님을 얼마나 수많은 죄로 대적하며 사는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사람을 당신의 형상과 영광스럽게 소중히 창조하셨음에도, 인간은 아담 안에 자신의 죄로 인해 그 아름다운 형상이 파괴되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이 불행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죄로 타락한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죄로 인한 제한적인 존재이기에 자신을 위한 미래도 완벽하게 준비할 수도 없습니다. 특별히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고 영이 죄로 인해 죽어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원한 파멸과 죽음을 피할 다른 길과 선택이 없음에도 생명의 주님께 나아올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성경은 “본능으로 행하는 이성 없는 짐승”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 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유1:10)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성막의 네 번째 덮개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로부터 구원하신 방식을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즉 메시야가 인간의 더러운 죄의 몸을 그대로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세상의 죄를 친히 자원하여 스스로 지시고, 죄의 형벌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자기 백성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십자가의 피의 능력으로 구원함과 영생으로 부활하심을 말씀해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구원의 은혜와 십자가의 용서는 메시야를 자신의 주님으로 믿는 자에게만 이루어지고 성취됩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에 선택한 자녀에게 이 구원의 소식과 죄 사함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중 누가 선택한 하나님의 자녀인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믿어지기 전까지 누구도 모릅니다.

우리는 성막을 덮는 네 가지 종류의 덮개의 사용된 재료를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희미하게 성령으로 발견하고  드러낸 것을 믿고 신뢰하는 하나님의 자녀요, 영광스런 성도요, 왕 같은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세례 받으심과 십자가를 지심과 단 번에 영원히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심을 믿는 하나님의 친백성입니다. 그러나 해달의 가죽 덮개와 같이 흠모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주님의 모습과 형상을 모르고 또한 믿지 않는 자들이 우리 주변에 대부분의 사람입니다. ​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혈과 육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 곧 그리스도의 복음인 십자가와 은혜의 방식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성령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예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모습을 입으시고 그리스도로 오시기 전,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의 모습”을 예언의 말씀으로 기록합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사 53:1)

하나님의 메시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시며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에 사람은 그 모습을 보고 메시야를 멸시하고 조롱하고 싫어했고, 그로부터 자신의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당하는 현장에서 욕을 하며 증오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 때문에 십자가에 고통과 채찍에 맞았음에도, 우리는 오히려 그를 향해 침 뱉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과 주님으로 여기지 않았던 우리였습니다. 모든 만물이 주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주님에 의해서 만물이 움직이는데도 우리는 진리와 은혜가 충만한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조롱과 조소와 침 뱉음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저주의 십자가로 향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잃어버린 택한 한 영혼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신의 피로 영원히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우리가 저주하고 멸시한 그 십자가로 스스로 자원하여 자신의 하늘 영광과 권세를 모두 포기하시고 그 죽음의 길로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 27:42)

세상에서는 가장 추하고 가장 아름답지 못하고 가장 흠모할 만한 것이 없어도, 예수는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거룩하고 가장 은혜로우시고 가장 기쁨이 되시고 가장 큰 소망이 되시고 가장 큰 사랑이시고 영생이신 그리스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저 자신과 당신에게 질문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많이 버림받고 가장 싫어버린 바 된 그 예수를 당신의 영원한 생명의 주님으로, 영광의 왕으로, 구원의 하나님으로서 모시고 있습니까?” 주 예수가 없는 인생의 삶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가장 추하고 가장 악하고 가장 더러운 것임을 당신은 알고 계십니까?

십자가에 나의 죄 때문에 죽임 당하심으로 나에게 천국을 영원한 상속의 기업으로 선물하신 예수를 당신의 영원한 영광과 기쁨과 은혜의 찬송과 감사의 제목이 되며, 또한 주님과 늘 사모하고 교제하고 사랑하고 동행하는 것이 당신에게 가장 복되고 영광스럽고 축복된 삶임을 알고 계십니까?

당신을 향한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과 사랑이 진리의 성령으로 믿어지고 경험되길 원합니다!

당신의 죄로 타락한 지혜와 이성과 지식과 경험으로 예수를 바라보지 않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버리기까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사랑하신 부활과 영광의 주님을 만나길 바랍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요 12:16-17)


묵상 가이드 /  ABC 묵상법

1. A : A Title(제목을 정하라)
2. B :Best Sentence(요절을 찾으라)
3. C :Challenge(도전을 주는 말씀)
4. 적용을 찾으라


첫 번째 앙장(26:1~6)
본문은 지성소와 성소를 덮을 수 있는 ‘성막 덮개’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성막 덮개는 두 개의 앙장과 그 앙장을 덮을 두 개의 덮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본문은 첫 번째 앙장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앙장’이란 성막의 천장에 치는 휘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앙장은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만들도록 했습니다. 앙장은 모두 열 폭으로 다섯 폭씩 서로 이어서 만들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앙장에는 ‘그룹’을 새기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그 그룹들을 만들 때 “공교히 수놓아 만들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교히 만들라는 말은 열심히 고안하고 연구하여 정성껏 수를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성을 담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의 한 부분에서조차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두 번째 앙장과 덮개(26:7~14)
두 번째 앙장은 첫 번째 앙장과는 달리 염소털로 만들도록 했습니다. 염소털은 방습과 보온 효과가 뛰어나 고대 근동에서 천막을 만들 때 많이 사용하던 재료입니다. 이것으로 첫 번째 앙장을 덮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염소털로 만든 앙장은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만든 앙장보다 한 폭이 더 많았습니다. 이것은 첫 번째 앙장을 완전히 덮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붉은 물을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덮개를 만들라고 합니다. 이것은 두 번째 앙장을 덮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달의 가죽으로 덮개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결국 성막 덮개는 그룹을 수놓아 만든 앙장, 염소털로 만든 앙장, 숫양의 가죽으로 만든 덮개, 해달의 가죽으로 만든 덮개 등 이렇게 네 겹으로 이루어져 성소와 지성소를 덮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소와 지성소를 외부와 완전히 차단했을 뿐만 아니라 강렬한 태양으로부터 성막 내부의 모든 성물들을 보호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공동체 속에서 내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나는 나의 삶을 가꾸어 가시는 하나님의 준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주님, 주님의 일에 드리는 마음과 정성이 직장 일에 쏟는 마음 같지 못했음을 고백하오니 용서하소서. 이제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겸손히 쓰임받기 원하오니 ‘공교하게’ 주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시고, 지극히 작은 일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도록 도와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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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5일 / 03- 13-2024(수)
출애굽기 25:1-40
식양을 따라(9절)

찬송 / 65장(생명의 빛 주 예수여)


성막의 모든 구조와 기물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다.
성막의 모든 구조물을 보면서 우리가 구속사 관점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성막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해야 한다.
출애굽기의 성막에 대한 부분은 가장 길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곳이다.

25:10-22 / 법궤 : 
재료 : 조각목(싯딤나무) - 예수님의 인성을 상징,
          정금 - 신성을 상징
크기 : 길이가 2규빗 반(약 1.25m) 너비와 높이는 각각 1규빗 반(약 75cm)
구조 : 속죄소(법궤의 뚜껑), 두그룹 천사, 증거판(공의), 만나(신령한 양식), 아론의 싹이난 지팡이(인도, 보호)
이제 성소를 지나서 지성소를 들어가게 되는데 휘장을 지나면 법궤를 보게 된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이 지성소에 속죄제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게 된다.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은 법궤 위 시은소(속죄소)에 피를 쏟게 된다.
법궤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각각 다른 의미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으므로 별도로 취급해야 한다.
간단히 그 세 부분을 언급하면 법궤 위에 속죄소가 있고
그 속죄소 위에는 두 그룹이 날개를 펴고 있다.
법궤는 네모지게 만든 상자와 같은 것으로 길이가 2규빗 반(약 1.25m) 너비와 높이는 각각 1규빗 반(약 75cm)이다.
이 궤 역시 각목으로 만들어서 안팎에 순금으로 입혔다.

위의 모서리는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 넷을 만들어 그 네 발에 달아서 양편에 두 고리를 두고 채를 만들어 끼었다.
그 궤 안에는 만나 항아리와 십계명의 두 돌비를 넣어 두었는데, 그 두 돌비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친히 기록하여 주신 것으로 ‘언약의 말씀’, ‘언약의 비석’이라고도 한다.
그 후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넣어 두었다.

이 법궤의 순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하는데 카일(Keil)은 법궤의 내외를 순금으로 씌운 것은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여호와의 신성(神性)을 뜻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법궤의 조각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순금은 그의 신성을 의미한다.
법궤 안에 있는 십계명 돌비는 하나님의 지존하신 공의를, 만나는 신령한 양식을, 아론의 지팡이는 주님의 인도와 보호를 의미한다. 즉 십계명은 공의의 성부 하나님을 만나는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성자 하나님을 아론의 지팡이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나타낸다.

속죄소(시은소)

법궤의 두 번째 부분인 속죄소는 <카포레트>인데 이는 동사 <카파르>에서 온 것으로 근본 뜻은 ‘덮는다’이다.
즉 우리의 죄를 덮어 주는 용서와 자비의 장소를 의미한다.
이 속죄소는 순금으로 만들며 길이가 2규빗 반(약 1.25m), 너비가 1규빗 반(약 75cm)으로 순금으로 된 덮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심판의 보좌로서 그 밑에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에 의해서 죄인들을 심판하시고 벌하시게 된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1년이 한번 희생 제사의 피를 가지고 이 하나님의 보좌 위에 뿌림으로서 이 심판의 은혜의 보좌로 바뀌게 된다.
즉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에 대한 대가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피로서 만족되어짐을 나타낸다.

두 그룹

속죄소의 두 끝에는 순금으로 만든 두 그룹을 세웠는데 한 그룹은 이 쪽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연하여 있으며 이 두 그룹은 두 날개를 펴서 속죄소를 덮게 하였고 얼굴은 속죄소를 내려다보게 되어 있다. 그룹의 형상은 사람의 얼굴, 사자, 송아지 그리고 독수리 형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참조, 겔 1:6; 계 4:7-8). 여기서의 그룹은 사람의 형상이며 그들은 천사의 한 부류로서(참조, 창 3:24), 하나님의 보내신 대사로서 하나님을 대리한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성도들이 천사를 보았을 때 하나님처럼 경배하고 우대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참조, 삼하 22:11; 시 18:10). 그러므로 그들이 속죄소 위에 있는 것은 그곳이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나타내며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은 그곳에 뿌려지는 속죄의 피를 경탄한 듯 보고 있음을 나타낸다.

25:23-30 / 떡상 : 길이가 2규빗(약 1m), 높이가 1규빗 반(약 75cm), 너비가 1규빗(50cm)

제사장이 성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편에 떡상이 있는데 이 떡상은 일명 진설병 상이라고도 한다. 이 상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졌는데 길이가 2규빗(약 1m), 높이가 1규빗 반(약 75cm), 너비가 1규빗(50cm)정도이며 안과 밖을 순금으로 쌌다. 그 위에 차려지는 떡은 고운 밀가루로 만든 것으로 매 안식일마다 새 것으로 갈아 놓았다. 이 떡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었는데 누룩과 꿀을 넣지 않고 소금과 기름을 넣어서 만들었다. 떡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따라서 12개를 놓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받은 양무리들의 영혼의 양식임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으로 말씀하셨다.

지금도 제사장 된 성도들의 영혼의 양육자로서 매 성일마다 예배를 통해서 새로운 양식을 공급해 주고 계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다 주님을 떠나가고 말았다. 이때 베드로에게 ‘너도 가려느냐?’고 주님이 물으시자 ‘영생의 말씀이 있으니 우리가 뉘께 가오리까?’라고 함으로써 주님 자신이 그 생명의 떡이심을 베드로는 고백했다. 이 떡은 누룩 없는 신령하고 순수한 생명의 참 떡이시며 진리의 떡이시다. 이 떡에 기름과 소금이 첨가되었는데 기름은 성령을 의미하며 소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상징한다(참조 히 13:8).

25:31-40 / 등대

재료 : 정금

등대는 정금으로 만들었는데 밑판에 줄기가 세워져 있고 그 줄기에는 여섯 개의 가지가 있었다. 각 가지 끝에는 잔과 꽃, 꽃받침이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꽃의 형상은 살구꽃이었다. 가운데 1개 줄기를 중심으로 양쪽에 3개의 가지가 있었다. 이 등대의 빛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꺼지지 않게 켜 놓아야 하는데 이는 어두울 동안은 계속 빛을 발해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등불 켜는 일을 맡은 것으로 추측되며, 사무엘 3장에서는 사무엘이 이일을 맡았던 것 같다(참조, 삼상 3:1-9). 등대의 꽃받침 위에 올려놓는 등잔도 역시 순금으로 만들었으며 일곱 개의 등불이 모두 동시에 켜지게 되면 매우 밝은 빛을 내게 된다.

이 등대는 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의미하는데 주님은 친히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으며(참조, 요 1:4-5) 등잔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감람유(올리브유)로 가득 채우게 되는데 스가랴 4장 2절에 의하면 순금 등대 좌우에 두 감람나무가 서서 그 등에 기름을 공급하여 주어서 불이 힘 있게 타게 했다. 이것은 주의 몸 된 교회가 성도들에게 은혜의 기름을 공급하여 주어서 성도들로 세상에 및을 발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참조, 마 5:14; 엡 5:8).

향단

재료 : 조각목, 싯딤나무
크기 : 길이와 너비 모두 1규빗(약 50cm)으로 네모가 반듯하며, 높이는 2규빗(약 1m)

향단은 조각목으로 만들되 길이와 너비 모두 1규빗(약 50cm)으로 네모가 반듯하며, 높이는 2규빗(약 1m)이었다.
이것도 역시 금으로 안팎을 쌌으며 그 향단 위와 전후좌우에 금테 무늬를 놓았고, 그 위에 네 뿔을 금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고리 네 개를 만들어 향단 양편에 붙여서 채를 꿰게 하였다. 또한 향단에는 관유와 향품을 드렸다.
그 향품을 제조하는 법은 출 30장 22절, 25절에 의하면 유질 몰약 50세겔, 그 반수의 향기로운 창포 250세겔, 계피 500세겔과 감람기름 한 힌(hin: 3.67ℓ)을 취하여 섞여서 만들었다. 아론의 자손은 그 향품을 아침마다 그 향단위에 사르되 등불을 점검할 때와 저녁에 등불을 켤 때 향품을 사르게 했다.

그러나 이 향단은 다른 향이나 다른 불 즉 번제단의 불 이외는 사용치 못했다. 이 향단은 기도의 제단으로 요한계시록 8장 3절 이하에 보면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께 항상 드려져야 하는 향불인 것이다. 진실과 성심으로 제단에서 드리는 기도는 향단에서 향을 분향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것은 향단의 불을 꺼뜨리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하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식양을 따라(출애굽기 25: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Make this tabernacle and all its furnishings exactly like the pattern I will show you.

식양(8403) 타브니트() תַּבְנִית 스트롱번호8403

1. 건물.   2. 견본. 3. 사물의 모양
발음 [ tabnîyth ]
어원  /  1129에서 유래
구약 성경
20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여성 건물, 건축양식, 시144:12
  • 2.
    명사, 여성 견본, 모범, 출25:9,40, 왕하16:10.
  • 3.

    명사, 여성 사물의 모양, 형상, 신4:16-18, 겔8:3, 8:10, 10:8.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 성막과 그에 관계된 모든 기구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지 결코 인간이 계획하거나 고안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히 8:2).
즉 성막의 신적 기원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히브리서 8:1-2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식양(타브니트)
- '견본' 또는 '모형' 으로 번역 될 수 있는 말로서 어떠한 실체의 그림자와 같은 청사진이나 모델 하우스 등을 가리킨다.
사실 구약 시대의 성막 제도는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인 것이다(히 8:5).
따라서 모형과 그림자인 구약 시대의 성막 제도는 참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이었다(요 2:21; 히 8:13 ; 계 21 :22).

히브리서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8:13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







성소(4720) 미크다쉬

מִקְדָּשׁ 스트롱번호4720

1.

거룩한 것

2.

성지

3.

이스라엘의 성막

발음 [ miqdâsh ]
어원
어미활용 מִקְדְּשׁוֹ ,מִקְדָּשׁוֹ 민18:29,6942에서 유래
구약 성경
73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남성 거룩한 것, 봉헌된 것, 성스러운 것, 성물, 민18:29
  • 2.
    명사, 남성 성지, 성소.
    • a.
      명사, 남성 이스라엘의 성막, 출25:8, 레12:4,21:12, 민10:21, 18:1.
    • b.
      명사, 남성 성전, 대상22:19, 대하29:21.
  • 3.
    명사, 남성 수용소, 보호소, 피난처, 도피처, 은신처, 사8:14, 겔11:16.


󰃨 내가... 거할 성소 - '거한다'는 뜻의 히브리어 '쇠칸'(*)은 '숙박'이라는 개념을 가지며 동시에 '휴식한다'는 뜻의 '쇠카브'(*)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성소에 머무르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하며 그들을 돌봐 주겠다는 의미이다. 그 속성상 무소 부재(無所 不在)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떠한 특정 장소에만 머물러 계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은 성경이 재차 강조하고 있는 바이다(왕상 8:27;대하2:6;사66:1;렘23:24;행7:48;17:24). 한편 성소란 말은 '성막'(26:36), '회막'(29:42), '증거의 장막'(17:7) 등으로도 표현되는데, 한 곳에 고정된 집이 아니라 이동할 수 있는 텐트였다. 따라서 이처럼 이동하는 성소에 하나님이 거하시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계시며, 인간을 앞서 인도하시겠다는 표현임을 분명알 수 있다(민9:17-23;신1:33). 그러나 솔로몬은 성전 건축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성전에만 계신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하나님은 제한하고, 성전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여 나중에는 성전 숭배 사상까지 생겨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집에 거하시지 않음을 선포했고(사 66:1, 2), 스데반도 이를 강조했으며(행 7:48-50), 예수께서도 예배의 참된 요소는 예배드리는 '장소'가 아닌 예배드리는 자의 '신령과 진정' 임을 분명히 가르치셨다(요 4:21-24). 이처럼 하나님은 특정 장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성전된 신자 안에 거하신다(고전 3:16;6:19;고후 6:16;엡 2:21).

󰃨 그들을 시켜 ... 짖되 - 예물을 바친 사람들이 또한 건축의 당사자가 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마음과 물질과 육체적 노력이 분리되지 않고 온전히 '당신을 위해' 하나가 되는 진정한 헌신을 원하신다.

성소

유일한 구원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막에 들어가면, 먼저 번제단을 만난다.
이곳에서 우리는 주님께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죄를 용서받게되며, 다음으로 우리는 물두멍에서 더러워진 우리의 몸과 마음 영혼을 씻고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성소에는 세 개의 성물이 놓여 있었다.
이것은 성도의 신앙생활과 예배생활이 어떠해야 함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것들이다.
성소에는 떡상과 등대와 분향단이 있다.

1. 떡상

떡(진설병)상은 이것은 법궤와 마찬가지로 금으로 도금되었으며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이상의 규격은 길이 91.2cm, 넓이 45.6cm, 높이 68.4cm였다.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떡을 하나님께 진설해 바치는 기구이다. 그런데 구약 시대 이스라엘은 오늘날의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를 예표하므로 진설병을 바치고 있는 상은 오늘날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떠받드는 중보자적 역할을 담당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롬 8:34)을 예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떡상의 사면 테두리는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둘렀다(출 25:25). RSV는 '턱'을 '틀'(frame)로, 공동 번역은 '가름장'으로 각기 번역하고 있는데 곧 떡상의 사면 테두리에 붙은 보강재(補强材)를 가리킨다. 이것은 상위의 떡이 지면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보조 장치로서 그 크기는'손바닥 넓이 곧 7.6cm 가량이었다.

“상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찌니라”(출 25:30).

• 진설병 : 직역하면 '얼굴의 떡', '면전에 놓인 떡'이란 뜻으로 곧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떡을 가리킨다. 제사장들은 매 안식일마다 떡상에 이러한 진설병을 두 줄로 6개씩 12개를 늘어놓아야 했는데(레 24:8), 이는 이스라엘 12지파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거두게 될 노동의 결과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은 이 떡이 당신 앞에 항상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잎에서 나오는 말씀(레마의 말씀)으로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떡이 이스라엘의 수고로 얻어진 노동의 결과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노력을 들여 말씀을 먹는 일을 해야함을 가리킨다(성경읽기, 듣기, 공부, 암송, 묵상, 나눔 등). 만나는 하늘로서 내려왔기에 그냥 새벽에 나가서 줍기만하면 되지만 떡은 차원이 달랐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2. 등대

“그가 또 정금으로 등대를 만들되 그것을 쳐서 만들었으니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이 그것과 한 덩이로 되었고”(출 37:17).

"등대"는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을 알게 하는 빛이 되어야 할 성도를 상징한다. 등대는 떡상 반대편에 놓여 있는 것인데, 밤낮 계속적으로 불을 켜 놓도록 되어 있었다(27:21; 레 24:3). 성도들도 세상에서 빛의 생활을 함에 있어서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마5:14-16 ; 엡 5:8-9). 성소 안은 낮에는 출입구를 통하여 빛이 들어와 밝았지만 밤에는 어두웠다. 따라서 제사장은 매일 밤에 불을켜고 아침에는 불을 껐다. 잔'(bowl)은 등잔(37절)과는 다른 것으로 일종의 악세서리인데 살구꽃 형상을 하고 있다(33절).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위하여는 꽃받침이 있게 하였으되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였고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였고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였으니”(출 37:21).

여섯 가지가 그 곁에서 나왔으니 - 기본 축을 이루는 중앙의 줄기에서부터 좌우로 각 3개씩 뻗은 6개의 가지를 가리킨다. 따라서 줄기까지 합하면 7개의 가지가 되는데, 여기서 '7'이란 수는 등대가 완전한 빛을 발하는 것을 뜻하는 상징수로 볼 수 있다.

“줄기와 연하여” - 예수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요 15:5,6)를 연상시켜 주는 대목이다. 즉 이것은 가지가 줄기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연합 관계를 보여 주는데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우리들도 생명의 근원과 모든 능력의 중심되시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말한다. 성도가 세상에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참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살구꽃 형상" - 살구꽃의 문자적인 기본의미는 ‘(잠자지 않고) 밤을 새우다’, ‘경성하다’라는 의미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 꽃은 부활과 희망, 각성과 보호를 상징하는 꽃으로서 널리 사랑받고 있었다. 우리의 신앙을 경계하고 그 영혼을 각성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둥대에서 발하는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된 사역을 상징한다. 따라서 살구꽃으로 등대를 장식한 점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참 희망이 될 뿐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자가 되심을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등대를....쳐서 만들었으니" - 속죄소를 만들듯이 금덩어리를 망치로 쳐서 늘여 등대의 기본 형태를 다듬어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7절). 그런데 왜 어렵게 망치로 쳐서 만들게 하였는가? 불속에 들어가 불순물이 걸러지고 망치로 두들겨 맞아 더욱 단단해지면서 등대의 모양으로 다듬어진다. 성도가 세상에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과정(연단과 시험)을 거쳐야 참된 빛을 발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3.
분향단

“너는 분향할 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 장이 일 규빗, 광이 일 규빗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고는 이 규빗으로 하며 그 뿔을 그것과 연하게 하고”(출 30:1-2).

• 분향단: 직역하면 '향(케토레트)을 태우는 곳(미크타르)인 단(미즈 베아호)'이다. 분향단은 향을 사르기 때문에 일명 '향단'으로 불리우기도 하고(10절:대상6:49), 금으로 만들어졌다고해서 '금단'으로 불리우기도 했다(39:38;민4:11). 크기는 가로, 세로 각 45.6cm에 높이 912cm정도였으며 위치는 성소의 중앙, 지성소 맞은 편에 놓여졌다.

번제단 뿔(27:2)이 실제적인 용도와 더불어(시118:27) 상징적으로 사용 (29:12;레8:15;9:9;16:18;왕상1:50;2:28;시18:112:9)된 것처럼, 분향단 뿔 역시 번제단과 동일한 상징적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설치된 것 같다.

"단...정금으로 싸고", 분향단은 땅바닥에 닿는 아래 바닥을 제외하고는 전부 금으로 싸야 했다. 이처럼 분향단뿐 아니라 성막의 주요 기구를 모두 정금으로 도금한 이유는 금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 때문인 것 같다(25:11,24,31,38; 26:29), 즉 금은 그 아름다움에 있어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며, 그 변하지 않는 속성에 있어 하나님의 언약의 불변성을 나타내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 분향단은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휘장(26: 33) 바로 앞쪽 성소 부분에 분향단에 두었다. 따라서 분향단은 성소의 여러 기구 중 속죄소에 가장 가까이 놓여지게 된다. 여기서 속죄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처소이고(25: 22), 분향단 위에서 타오르는 향은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와 기도를 상징한다(계5:8).그러므로 분향단이 속죄소에 가장 가까이 위치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가장 가까이에 계셔 항상 그 기도를 들어 주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도 기도로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음을 말해준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계 8: 3-4).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며”(출 30: 7).

한편 분향은 매 아침마다 해야만 했다. 이 시간은 등불을 끄는 시간과 일치한다. 따라서 해가 돋을때 제사장은 등불을 끄는 일(27:20,21)과 향을 피우는 일. 이 두 가지 일을 함으로써 하루를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 "향기로운 향을...사르되",
성막에서는 늘 희생 제사가 이어졌기 때문에 고기태우는 냄새와 피 냄새 등으로 가득찼을 것이다(레1-6장). 따라서 이런 냄새를 제거하거나 중화시키기 위해서도 향가로운 향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축된다. 특히 제단 주변에는 피를 뿌리기 때문에(29: 12,16,20) 더욱 이러한 향이 필요했을 것이다. 등불을 정리할 때 - 어기서 '정리하다'로 번역된 '야타브'는'좋게 만들다', '잘되게 하다', '단장하다'는 뜻이 있으며 '기쁘게 하다'는 의미도 갖는다. 성소의 등불은 아침에 끄도록 되어 있는데(27:21; 레24:3; 삼상3:3)등불을 끄는 행위를 이처럼 '단장하는' 행위로 표현한 것은 그것이 심지를 다듬고 기름을 보충하는 간검(看檢) 행위이기 때문이다(27:21).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 8).


하나님이 보인 식양대로(출애굽기 25:8-9, 골로새서 1:15-17)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창세전에 작정하신 것을 미리 알리시고(고전 2: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그가 보여주신 식양대로 지은 집에 거하시는 분이다(히 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신앙은 그를 믿음이요,  신앙생활은 그의 지시하신 대로 준행하는 생활이니(창 12:1-10)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질 때까지라(갈 4:9).

마치 건축이 당국이 허가한 설계도대로 치수, 모양, 자재, 색깔, 배선, 배관, 조경 등  수많은 검사를 통과하며 진행되고 준공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창조에 식양(pattern)이 있는바(창 1:3-31)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 그대로 되어지고 ~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심이요(창 1:27),
생령(아담)을 지으시되 오실 자의 표상(pattern)으로라(롬 5:14).
세상 모든 문화, 문명에도 창작이란 없고 있던 것의 재생뿐이다.

하나님의 명대로 행하여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에게(출 12:28)
광야에 이르러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셨으니(출 25:8-9)
호렙산에서 보여주신 식양대로라(출 26:30).
모세는 그 같이 역사를 필했고(출 36:8-40:33),
다윗은 성신이 그려주신 식양을 솔로몬에게 주었고(대상 28:11-19),
솔로몬은 7년에 걸쳐 그 설계, 식양대로 전을 필하였다(왕상 6:38).

이스라엘이 받은 계명은 아무 형상도 만들어 절하지 못하도록 금하였으나(출 20:4-5)
지성소와 성소에는 그룹(천사)의 형상을 새기게 하였다(출 6:29).

예슈아께서 성전을 헐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심은 성전 된 자기 육체의 죽음과 부활로(요 2:19-10)
여호와 이름이 아닌 예슈아 이름으로(요 5:43)
유일하게 허락한 천사의 형상을 헐고 창조자의 형상을 보여주려 하심이었으니(골 3:6)
그는 태초부터 하나님 안에 계신 말씀(요 1:1-3),
곧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골 3:15)
육신으로 오신 바 된(요 1:14)
하나님의 본체, 본체의 형상이심이다(빌 2:6, 히 1:5).

그가 죽으실 때
천사 문양이 있는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며(마 27:51)
다 이루었다 하셨으니(요 19:30)
① 아버지 계명대로 이루시고(요 10:18)
그 피로 모형이 아닌 참성소를 정결케 하심(히 9:23).
② 하늘성소를 더럽힌 마귀를 심판하심(겔 28:12-18, 요일 3:8).
③ 첫 아담의 죄 대신 마지막 아담이 죽으심이다(고전 15:22).

그는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부활승천하시고(고전 15:49)
영생을 믿는 자의 마음에(딤전1:4)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주셨으니(고후 1:22)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재연하게 하심이라.

예슈아 이름으로 침례 받은 자는(마 28:19)
선한 일에 본이 되려(롬 8:29)
예슈아 그리스도의 말씀에 절대복종하고,
무소유를 고집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도 고립도 고난도 죽음도 피하지 아니하니
‘하나님의 식양 =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패턴 = 죽음과 부활’
‘침례 = 죄와 함께 죽고 의로 부활함’이요(롬 6:3-7),
하늘에 가서 주를 모시고 살 그의 집이 되려 함이다(히 3:6).

오! 주여,
나, 과연 몇 % 그리스도인인지?
짝퉁 그리스도인이 아닌지?
분, 악의, 훼방, 부끄러운 말, 거짓말을 버리고
아들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하게 하옵소서.
죽어 하늘문이 열리는 진품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아멘.





출애굽기 성막 성경공부
성막의 구조와 성전 변천사

출애굽기 성막 성경공부는 우리에게 중요하다.
성막의 모든 구조와 기물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다.
성막의 모든 구조물을 보면서 우리가 구속사 관점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성막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해야 한다.

출애굽기의 성막에 대한 부분은 가장 길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곳이다.
출애굽기 25장에서 40장 끝까지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재료와 그 구조물, 기구 그리고 거기서 행해지는 의식에 대해서 놀랄 만큼 상세한 사항까지 세밀하게 묘사하셨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고 지상에 인간이 살 수 있는 여건을 만드시는 데에 성경의 2장 분량을 소비한 것에 비해 성막에 10장이 소요된 것은 이 말씀 속에 내포된 영적 교훈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친히 지시하신 성막의 구조와 모형을 한낱 지난날의 의식, 곧 사라진 지 오래 된, 이제는 무가치한 유대인의 관습과 풍속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은 슬픈 사실이다.
성막의 모든 구조와 모형 속에 숨어 있는 구속의, 복음의 원초적 의미를 연구하는 일은 모든 성도들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성막의 모든 구조와 기구들을 순서별로 연구하며 그 영적 의미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성막의 어의

성막에 대한 구체적인 것을 다루기 전에 먼저 성막을 뜻하는 어의를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에는 성막을 뜻하는 용어들이 적지 않게 쓰였는데 구약의 어법과 신약의 어법은 약간 차이점이 있기에 하나하나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오헬>

성막에 대해서 가장 일반적으로 쓰인 용어인데 이것은 ‘천막’을 뜻하는 말로서 140회 이상이나 사용되었다.
이 말이 출 26:9에서는 성막의 전면에 있는 휘장을 의미하였고
27:21에서는 회중에 모이는 성막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정관사와 함께 쓰여서 성막을 나타내는데 문자적인 의미는 ‘덮는 것'(Covering)을 뜻한다.

<미쉬칸>

이 말은 ‘거주지’나 ‘거처’를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 백성들에게 나타내시는 장소로서, 또는 그들과 함께 하는 장로로서 성막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의 어근은 ‘거하다'(to dwell)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
이 <미쉬칸>은 출 25:9을 비롯하여 약 100회 정도 사용되는데 장막을 표현하는 말로서는 <오헬>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이 두 단어의 의미상의 차이에 대해서는 출 26:7에서 볼 수 있는데 원문은 <레오헬 알 하미쉬칸>으로 흠정역(King James Version)에서는 ‘Covering upon the tabernacle’로 개역 표준역 (Revised Standard Version)은 ‘a tent over the tabernacle’로 개역 표준역(Revised Standard Version)은 ‘a tent over the tabernacle’로 번역했다.

한글 개역판에서는 ‘그 성막을 덮는 막’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이 두 단어의 의미상의 차이를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즉 미쉬칸은 하나님의 거처로서 성막 전체를 의미 할 때가 많고 오헬은 성막의 지붕 덮개를 나타내는 말로서 성막 자체를 의미하는데 쓰여졌다.

기타 용어들

<쏙>은 시 76:2에 <쇽>은 암 2:6에 각각 기록되어 있는데 덮여 있는 밀실을 뜻한다.
또한 <씰쿠트>와 <셐카>도 암 5:26에 기록되어 있는데 역시 덮여 있는 은밀한 처소로서의 장막을 의미한다.

신약의 용어들

신약에서 성막은 처소(dwelling place)란 의미의 <스케네>, <스케오스>, <스케노마>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들은 구약의 <미쉬칸>과 <오헬>을 번역한 것들이다. 즉 구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에서 사용한 것들이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이 두 단어에 대한 구분 없이 <스케네> 또는 <스케노마>를 사용했는데 이는 신약에서는 구약에서와 같이 성막의 구조와 형식에 중점을 두지 않고 그 의미 또는 실체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곧 성막 그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명시하고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성막의 건립상, 구조상으로 그 적용어를 사용했고 신약에서는 성막의 대표적 용어를 택하여 성막의 구조와 단어의 의미에 구애 됨이 없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2. 성막의 구조

성막은 그 구조가 사람의 고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 재료에서부터 건조 방법까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에 의해 되어졌기 때문에 성막 그 자체로 이미 중요하고 교훈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로 성막은 하나님께서 그의 처소를 두신 하늘의 모형을 보여 주고 있는 실례
둘째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보여 주고 있으며,
셋째로 신자들이 예수님과 교제하는 장소로 교회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셨다.
그러므로 성막의 모든 기구들과 구조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성막을 건조한 사람들

성막의 구조 자체를 다루기 전에 그 구조를 만든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막의 모든 구조와 재료에 대해서 뿐 아니라 만들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지정하셨기 때문이다. 출 36장에 보면 성막을 건조할 사람들을 지정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름이 지정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한다.

① 이름이 지정된 사람들

출 35장에 성막을 건조한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하나는 ‘브살렐’로 그 이름의 뜻은 ‘주의 그늘에서’이다. 이 사람은 유다 지파의 ‘훌’의 손자이며 ‘우리’의 아들이다. 또 다른 사람은 ‘오홀리압'(나의 하나님 아버지의 장막)으로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이다(참조 출 35:34). 이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들로서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부어 주셔서 성막에 필요한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하셨으며 이들은 여호와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여 일을 했다.

성경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같이 하셨고 재능과 기술을 겸비했으며, 순종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다 그들이 성령에 충만함을 입어 얻게 된 능력들인데 성령께서는 지혜와 재능과 모략의 신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귀한 성품과 자격을 구비한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하나님의 참된 일꾼과 도구로서 그의 뜻을 좇아 거룩한 성막의 건조 사업을 이룩하게 되었다.

②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출 36:2을 보면 위의 두 사람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성막 건조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이외의 많은 기능공들로서 출 35:35, 36:4, 8 등에서 그들에 대한 간단한 언급을 보게 된다. 그들은 조각하는 일과 공교로운 일과 수 놓는 일과 짜는 일 등 여러 가지 일들을 한 사람들이다. 비록 이들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으나 성막 건조에 참여하여 크게 협조하고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왜 이들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것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하나님과 모세로부터 공식적으로 임명받았기 때문이나 그들은 자원하여 협조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성막의 모든 것을 설계하고 감독하며 지도한 자들이나 그들은 그 감독과 지도를 받아서 일한 자들로서 각 분야에서 자기의 재능대로 헌신 봉사한 기능공들이었다(참조 출 36:8-39:43).

성막의 모형

오늘날 성막의 영적인 중요성에 대한 무지가 만연하고 있는 것은 모형론(Typology)에 대한 관심 부족으로 인한 것이다. 성막은 이미 신약의 모든 복음의 진수를 간직한 신약에 대한 주석과도 같다. 이 점에서 성막의 모든 구조와 모형에 대한 설명과 그 영적 의미까지도 다루고자 한다.


① 바깥마당

성막 전체의 모형에 대한 기록은 출 26:1-27:2에 나오는데 그 기록에 의하면 성막의 크기는 길이가 45m, 너비 22.5m, 높이가 2.25m의 직사각형인데 이동할 수 있는 조립식 구조로 되어 있다. 성막의 울타리 동쪽 끝에는 성막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이 문에 들어가기 전 외부의 마당을 바깥 마당이라 한다.

이 넓은 마당은 ‘이방인의 뜰’로도 부르는데 매우 넓은 공간이다. 즉 성막을 둘러싸고 있는 전 지역이 이 이방인의 뜰이 된다. ‘이방인의 뜰’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곳까지는 이방인들이 성막에 접근할 수 있으나 성막 안으로는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방인이란 하나님의 선민이 아닌 죄인들을 지칭하는데 우상숭배, 살인, 간음, 도적질 등 여러 가지 불의와 악행을 행하는 자들을 나타내며 그들이 있는 이 바깥 마당은 죄악의 장소를 의미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을 나타내는데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대상이 된다.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이 세상에는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에 죽을 수밖에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과 긍휼 가운데서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도록 부르셨다. 곧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이요,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 부르심을 입은 이 무리들은 이 바깥 마당에서 성막의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있게 되었다.

② 문

성막에는 출입문이 있는데 이 문에는 기둥과 그 기둥의 밑받침이 있으며 4색실로 곧 청색, 자색, 홍색, 금색과 가는 베실로 아름답게 수놓은 휘장이 드리워져 있다. 이 문의 폭은 약 10m가량 되는데 이는 너무 넓은 문이다. 이 문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그는 친히 자신을 양이 우리로 들어가는 문으로 말씀하셨다. 이 문으로만이 성막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다른 데로 들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인 것이다(참조, 요 10:1) 그러므로 이 문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시금석이 된다.

이 문의 휘장이 4색으로 된 것은 우리 구조의 인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4복음이 표현하는 왕과 종, 인자,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그러나 이 문은 항상 열려 있지는 않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기간이 끝나면 곧 닫히게 되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의 문이 닫혔듯이, 이 문도 닫히게 된다. 이때 문 밖에 있느냐 문 안에 있느냐에 따라 영원한 생명과 심판으로 분류된다.

③ 담과 안마당

성막은 네 개의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남쪽과 북편의 담이 45m이면, 각각 20개의 조각목을 세우고 그 밑에 놋받침을 받치고 그 기둥에 머리를 씌운 후 은으로 만든 갈고리와 가름대로 이어서 세마포로 드리워서 만들었다. 그 바깥 휘장의 높이는 2.5m인데 세마포는 청색, 자색, 홍색과 가는 베실로 수를 놓아 짠 휘장으로 높이가 2.5m가량 되었다. 서편 담은 길이가 25m이며 기둥이 10개 있었는데 서편과 동편의 길이는 같으나 동편 담에는 출입문이 있었다. 이 담은 안마당과 바깥마당을 구별하고,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인을 구별하며,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였다.

또한 이 담은 성도의 육신을 가리키는데(참조, 고후 5:1; 벧전 1:13-14) 성도의 육신인 이 장막 속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게 된다. 이 담 안의 마당은 ‘안마당’으로 불리는데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다. 즉 이 안마당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이 들어와서 하나님 아버지와 영적 교제를 나누는 교회를 뜻한다. 성도들은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영적 교제를 하게 되었다(참조, 엡 2:20-22).

④ 성소와 지성소의 덮는 막

이 덮는 막은 안마당 안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를 같이 덮어 주는 막으로서 4중으로 되어 있다. 첫 번 덮막은 가는 베실로 짠 고운 막으로 성막 내부에서 보이게 되는데 금색, 자색, 청색 그리고 가늘게 꼰 베실로 아름답게 수가 놓아져 있다. 또한 이 천에는 성막으로 들어와 예배하는 자들을 내려다보는 천사의 모습과 함께 수놓아져 있다. 두 번째 막은 염소 털로 만든 것으로 그 크기는 44X30 규빗의 크기로 첫 번째 덮막보다 조금 더 크게 되어 있다. 이것은 ‘성막 위의 천막’으로 불리는데 아래 있는 앙장들을 보호하고 동시에 주위에 있는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하는 안전장치와 같은 것이다.

세 번째로 붉게 염색된 수양의 가죽이 덮여 있는데 이 가죽은 제사의 제물로 쓰인 양의 가죽으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헌신을 의미한다. 붉게 염색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를 뜻한다. 맨 윗덮개는 수달의 가죽으로 외부 표면에서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 가죽은 햇빛의 자극에 강하고 잘 썩지 않는 것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도 아름답거나 매력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외적으로는 초라하시고 볼품이 없으셨으나 그 내면적으로는 완전하고 고귀한 성품을 지니시고 이 세상 풍조나 죄악에 물들지 않으심을 보여 준다.

⑤ 성소

이상에서 말한 4중 덮개 밑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게 되는데 성소에는 3개의 성막 기구가 있다. 곧 떡상과 향단과 등대이다. 제사장들은 이 성소에서 매일 등대의 불을 점검하고, 향단에 향불을 피우며, 떡상의 떡을 1주일에 한 번씩, 특별히 안식일에 12덩어리의 새로운 떡으로 갈아놓고 6가지 제사를 드렸다. 이 성소는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제사장들이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곳이다. 이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목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즉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우리 주님을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⑥ 지성소

성소를 지나서 휘장 뒤에는 지성소가 있다. 이 지성소에는 법궤가 속죄소 또는 시은소가 있고 그 위에는 두 그룹이 있다. 이 곳은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짐승의 피를 가지고 온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들어가게 되어 있다(참조, 출 30:10; 레 16:18; 23:27). 이 지성소는 휘장으로 가려 있는데 이는 함부로 하나님의 존전에 나갈 수 없음을 가리킨다. 이 지성소는 하나님이 계신 곳 즉 천국을 뜻하며 이 곳은 아무도 나갈 수 없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임을 나타낸다. 일 년에 한 번 이곳에 들어가는 대제사장도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자신과 회중의 죄를 위해 매년마다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갔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짐승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 하나님께 단번에 나아가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참조, 히 9:25).

⑦ 안 휘장

이 안 휘장은 앞에서 말한 성막의 첫 덮개와 같이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만든 것으로 그 위에 그룹의 모습을 수놓아 만들었다. 이것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어서 두 곳을 구별하는 역할을 했다. 이 휘장은 막힌 담으로 인류가 처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 한 이후로 갈라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이다. 에덴동산 이후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화염검으로 막으셨고, 노아의 홍수 때도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간 후 하나님이 친히 방주의 문을 닫으심으로 세상 사람들과 노아의 식구 사이를 구분하셨다. 이제 이 지성소와 성소도 휘장으로 막으셔서 죄인들의 접근을 막으신 것이다.

휘장이 의미하는 것은 첫째로는 위에서 말한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며 둘째는 둘 사이의 교제의 단절을 뜻한다. 휘장 자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휘장이 수놓아진 천사가 이 역할을 하는데 이것이 그들의 사명인 것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하나님가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이 무너져 버리게 되었다(참조, 마 27:5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사업으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가로 놓였던 죄악의 담이 무너짐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 제물로서 중보자가 되어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잃었던 화목, 즉 교제의 상실을 회복하셨다. 제2의 아담이 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회복된 것이다.

3) 성막의 기구들

성막에는 8개의 기구들이 있게 되는데 이것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곧 외향적인 면과 내향적인 면인데 외향적인 면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는 것이며 내향적인 면은 그 기구들이 가지는 영적 의미를 통한 인간의 구속적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두 면에 근거하여 성막의 기구들과 그 영적 의미를 알아보겠다.

① 놋제단(번제단)

놋단을 히브리어로 <미즈베하>라 하는데 ‘제물’ 또는 ‘희생’의 뜻이 있으며 ‘죽인다, 희생한다’는 뜻을 가진다. 이 단은 조각목(아카시아나무)으로 만들어져 그 위에 놋으로 싼 것으로 그 길이와 너비는 모두 5규빗(2.5m)이다. 단 위 네 모퉁이에는 각각 뿔이 나와 있으며 단 네 면 가운데는 제물을 받치는 그물망이 있다. 그리고 단 높이 중앙에 고리 넷을 이편과 저편에 둘씩 달아서 금을 입힌 막대기로 꿸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단을 이동할 때 어깨에 메고 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단은 번제단이라고도 하는데 ‘번제’라는 말은 ‘올라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번제단에서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열납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 같은 희생 제단은 인간의 범죄 이후로 생겼는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 하였을 때 그들의 수치를 가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짐승을 죽여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던 사실에서 시작되어 아벨의 제사에서 짐승이 드려졌고, 홍수 이후에는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짐승을 죽여 드리는 희생 제사의 단을 쌓았었다. 또한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명령으로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다가 수풀 사이에 걸려 있는 수양을 드렸고 그 외에 이스라엘의 족장들도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려왔다.


그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희생 제사를 자신의 몸으로 완전하게 드릴 때까지 이스라엘은 이 희생 제사를 짐승으로 드려왔다. 이 번제단은 죄의 결과로 당하는 형벌을 나타내는 것으로 제물이 죄를 대신 쓰고서 그 형벌을 받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놋제단에 제물을 가져 첫째는 먼저 죄를 자각하고 둘째는 양을 제단으로 끌고 가서, 셋째는 그 위에 안수하여 죄를 전가시키고 넷째는 죽여서 단위에 얹고 다섯째는 피를 제사장이 단 사면에 바르고 여섯째는 그 제물을 태우는 순서를 거치게 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 희생을 나타내는 것으로 제단의 네 뿔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의 머리, 양손, 다리에서 흘리신 피로 십자가의 네 귀퉁이에 뿌리셨으며 친히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존전, 지성소로 나아가심을 뜻한다.

② 물두멍

물두멍은 번제단 다음에 위치한 것으로 성소에 들어가는 길에 두 번째로 놓여 있다. 이것은 전체가 놋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물을 가득 담아서 성소에 출입하는 제사장이나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이 제사 전후에 손과 발을 씻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이곳에서 수족을 씻지 않고 출입하는 자는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는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자신의 허물과 범죄, 실수를 살피고 회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물두멍의 물은 거울로도 사용되었는데 제사장은 그곳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아서 더러운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했다. 이는 성령의 감화에 따라서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신앙 양심으로 어긋난 허물과 범죄를 비추어 보고 주님의 보혈로 정결케 함을 뜻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로마 병정이 찌른 창으로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흘리신 것은 그의 피로 우리를 대속하신 후에 그 물로서 정결케 씻어 주심을 뜻하는 것으로 곧 성막의 물두멍의 본래 의미이다. 출애굽 시 유월절 양을 잡아서 문설주에 피를 바른 것이 번제단의 의미를 가진다면 홍해 바다를 지나는 것은 곧 물두멍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순서적으로 먼저는 대속의 피, 그리고 정결케 하는 물의 순서가 된다. 성경에서 이 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유되기도 하였다. 에베소서 15장 26절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15장 3절에서는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하셨다.

③ 떡상

제사장이 성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편에 떡상이 있는데 이 떡상은 일명 진설병 상이라고도 한다. 이 상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졌는데 길이가 2규빗(약 1m), 높이가 1규빗 반(약 75cm), 너비가 1규빗(50cm)정도이며 안과 밖을 순금으로 쌌다. 그 위에 차려지는 떡은 고운 밀가루로 만든 것으로 매 안식일마다 새 것으로 갈아 놓았다. 이 떡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었는데 누룩과 꿀을 넣지 않고 소금과 기름을 넣어서 만들었다. 떡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따라서 12개를 놓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받은 양무리들의 영혼의 양식임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으로 말씀하셨다.

지금도 제사장 된 성도들의 영혼의 양육자로서 매 성일마다 예배를 통해서 새로운 양식을 공급해 주고 계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다 주님을 떠나가고 말았다. 이때 베드로에게 ‘너도 가려느냐?’고 주님이 물으시자 ‘영생의 말씀이 있으니 우리가 뉘께 가오리까?’라고 함으로써 주님 자신이 그 생명의 떡이심을 베드로는 고백했다. 이 떡은 누룩 없는 신령하고 순수한 생명의 참 떡이시며 진리의 떡이시다. 이 떡에 기름과 소금이 첨가되었는데 기름은 성령을 의미하며 소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상징한다(참조 히 13:8).

④ 등대

등대는 정금으로 만들었는데 밑판에 줄기가 세워져 있고 그 줄기에는 여섯 개의 가지가 있었다. 각 가지 끝에는 잔과 꽃, 꽃받침이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꽃의 형상은 살구꽃이었다. 가운데 1개 줄기를 중심으로 양쪽에 3개의 가지가 있었다. 이 등대의 빛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꺼지지 않게 켜 놓아야 하는데 이는 어두울 동안은 계속 빛을 발해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등불 켜는 일을 맡은 것으로 추측되며, 사무엘 3장에서는 사무엘이 이일을 맡았던 것 같다(참조, 삼상 3:1-9). 등대의 꽃받침 위에 올려놓는 등잔도 역시 순금으로 만들었으며 일곱 개의 등불이 모두 동시에 켜지게 되면 매우 밝은 빛을 내게 된다.

이 등대는 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의미하는데 주님은 친히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으며(참조, 요 1:4-5) 등잔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감람유(올리브유)로 가득 채우게 되는데 스가랴 4장 2절에 의하면 순금 등대 좌우에 두 감람나무가 서서 그 등에 기름을 공급하여 주어서 불이 힘 있게 타게 했다. 이것은 주의 몸 된 교회가 성도들에게 은혜의 기름을 공급하여 주어서 성도들로 세상에 및을 발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참조, 마 5:14; 엡 5:8).

⑤ 향단

향단은 조각목으로 만들되 길이와 너비 모두 1규빗(약 50cm)으로 네모가 반듯하며, 높이는 2규빗(약 1m)이었다. 이것도 역시 금으로 안팎을 쌌으며 그 향단 위와 전후좌우에 금테 무늬를 놓았고, 그 위에 네 뿔을 금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고리 네 개를 만들어 향단 양편에 붙여서 채를 꿰게 하였다. 또한 향단에는 관유와 향품을 드렸다. 그 향품을 제조하는 법은 출 30장 22절, 25절에 의하면 유질 몰약 50세겔, 그 반수의 향기로운 창포 250세겔, 계피 500세겔과 감람기름 한 힌(hin: 3.67ℓ)을 취하여 섞여서 만들었다. 아론의 자손은 그 향품을 아침마다 그 향단위에 사르되 등불을 점검할 때와 저녁에 등불을 켤 때 향품을 사르게 했다.

그러나 이 향단은 다른 향이나 다른 불 즉 번제단의 불 이외는 사용치 못했다. 이 향단은 기도의 제단으로 요한계시록 8장 3절 이하에 보면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께 항상 드려져야 하는 향불인 것이다. 진실과 성심으로 제단에서 드리는 기도는 향단에서 향을 분향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것은 향단의 불을 꺼뜨리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하였다.

⑥ 법궤

이제 성소를 지나서 지성소를 들어가게 되는데 휘장을 지나면 법궤를 보게 된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이 지성소에 속죄제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게 된다.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은 법궤 위 시은소(속죄소)에 피를 쏟게 된다. 법궤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각각 다른 의미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으므로 별도로 취급해야 한다. 간단히 그 세 부분을 언급하면 법궤 위에 속죄소가 있고 그 속죄소 위에는 두 그룹이 날개를 펴고 있다. 법궤는 네모지게 만든 상자와 같은 것으로 길이가 2규빗 반(약 1.25m) 너비와 높이는 각각 1규빗 반(약 75cm)이다. 이 궤 역시 각목으로 만들어서 안팎에 순금으로 입혔다.

위의 모서리는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 넷을 만들어 그 네 발에 달아서 양편에 두 고리를 두고 채를 만들어 끼었다. 그 궤 안에는 만나 항아리와 십계명의 두 돌비를 넣어 두었는데, 그 두 돌비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친히 기록하여 주신 것으로 ‘언약의 말씀’, ‘언약의 비석’이라고도 한다. 그 후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넣어 두었다.

이 법궤의 순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하는데 카일(Keil)은 법궤의 내외를 순금으로 씌운 것은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여호와의 신성(神性)을 뜻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법궤의 조각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순금은 그의 신성을 의미한다. 법궤 안에 있는 십계명 돌비는 하나님의 지존하신 공의를, 만나는 신령한 양식을, 아론의 지팡이는 주님의 인도와 보호를 의미한다. 즉 십계명은 공의의 성부 하나님을 만나는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성자 하나님을 아론의 지팡이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나타낸다.

⑦ 속죄소(시은소)

법궤의 두 번째 부분인 속죄소는 <카포레트>인데 이는 동사 <카파르>에서 온 것으로 근본 뜻은 ‘덮는다’이다. 즉 우리의 죄를 덮어 주는 용서와 자비의 장소를 의미한다. 이 속죄소는 순금으로 만들며 길이가 2규빗 반(약 1.25m), 너비가 1규빗 반(약 75cm)으로 순금으로 된 덮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심판의 보좌로서 그 밑에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에 의해서 죄인들을 심판하시고 벌하시게 된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1년이 한번 희생 제사의 피를 가지고 이 하나님의 보좌 위에 뿌림으로서 이 심판의 은혜의 보좌로 바뀌게 된다. 즉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에 대한 대가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피로서 만족되어짐을 나타낸다.

⑧ 두 그룹

속죄소의 두 끝에는 순금으로 만든 두 그룹을 세웠는데 한 그룹은 이 쪽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연하여 있으며 이 두 그룹은 두 날개를 펴서 속죄소를 덮게 하였고 얼굴은 속죄소를 내려다보게 되어 있다. 그룹의 형상은 사람의 얼굴, 사자, 송아지 그리고 독수리 형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참조, 겔 1:6; 계 4:7-8). 여기서의 그룹은 사람의 형상이며 그들은 천사의 한 부류로서(참조, 창 3:24), 하나님의 보내신 대사로서 하나님을 대리한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성도들이 천사를 보았을 때 하나님처럼 경배하고 우대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참조, 삼하 22:11; 시 18:10). 그러므로 그들이 속죄소 위에 있는 것은 그곳이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나타내며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은 그곳에 뿌려지는 속죄의 피를 경탄한 듯 보고 있음을 나타낸다.

3. 대제사장과 그 의상

이제까지는 성막의 모형과 기구들에 대해서 다루었었다. 즉 성막의 모형과 기구들이 그리스도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가를 살펴보았는데 이제는 그 성막에서 봉사하는 대제사장과 그의 의상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 의미에 대해서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1) 대제사장

광야에서의 대제사장은 아론이었는데 그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아론이 가지고 있던 대제사장의 사역을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수행하셨던 것이다. 아론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들은 단번에 완전하게 제사장의 임무를 마치신 것이다(참조, 히 7:11). 대제사장이 입는 거룩한 제의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귀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 옷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로 짜여졌다(참조, 출 28:5, 6, 15, 33).

이때의 푸른색은 하늘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늘에 속한 자의 신분을 나타내며 자색은 존귀함을 나타내는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존귀와 영광을 나타낸다. 진홍색은 피의 색깔로 사랑과 희생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희생하심을 상징한다. 아론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제사장들은 신약시대의 성도들을 의미한다. 대제사장의 옷은 제사장들과는 구별되는데 그 옷의 구조와 의미에 대해서는 대제사장의 의상에서 다루고자 한다.

2) 대제사장의 의상

① 속옷

속옷은 가는 베실로 짜서 만든 옷이다. 이 속옷에는 띠가 있어서 한 번 입으면 벗겨지거나 자리가 움직이는 일이 없게 되어 있는데, 이 띠는 속옷을 입게 되면 꼭 매어야 했다. 이 옷의 특징은 통으로 짠 것이며 반드시 속옷을 입은 후에야 겉옷을 입어야 했다. 이 겉옷은 대제사장뿐만 아니라 제사장까지도 입게 되어 있었다. 이 속옷은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으로 우리의 죄를 가리고 칭의를 얻게 해 주는 것을 말한다(참조, 렘 23:6, 16). 여기에 매는 띠는 진리의 띠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를 나타낸다.

구속사 맥 1189 출애굽기

② 겉옷

에봇 받침은 겉옷이다. 이 겉옷은 푸른색의 옷인데 두 어깨 사이에 머리가 들어갈 구멍을 내고 그 주위에 갑옷 깃을 짜서 찢어지지 않게 하고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청색, 자색, 홍색실로 석류를 수 놓고 옷 가장자리를 따라서 석류 무늬 다음에 금방울을 계속 돌아가며 달게 되어 있다. 이 겉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직을 표현하며 존귀와 영화를 나타낸다. 옷단의 방울은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석류는 그 말씀대로 충실한 결실을 보여 준다. 이 겉옷이 성도에게 적용될 때는 의와 영광의 옷으로(참조, 사 61:10), 장차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며, 세상을 심판하며 영광을 누릴 것을 의미한다(참조, 계 5:10; 20:4, 6).

③ 에봇

에봇은 겉옷 위에 입는 것으로 모양이 긴 앞치마처럼 생겼는데 대제사장의 어깨에 걸치게 되어있다. 또한 에봇에는 매는 띠가 있어서 대제사장의 허리에 단단히 맬 수가 있었다. 그 띠는 금실,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잘 조화 있게 짠 아름다운 띠이다. 이 에봇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서 세운 지상의 교회가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깨에 달려 있는 것을 나타낸다. 어깨는 힘, 능력을 상징하는데 곧 우리 주님의 힘과 능력으로 교회가 지탱되고 유지됨을 나타낸다. 주님은 선한 목자와 같이 친히 그 어깨에 잃은 양과 같은 죄인들을 메고 오시는 것이다(눅 15:5).

④ 흉패

에봇 위에는 12보석으로 장식된 흉패가 있는데 대제사장의 가슴 부분에 위치함으로 흉패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에봇이 교회를 의미한다면 흉패는 그 교회의 구성원을 나타낸다.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가슴에 붙어 있는 지체이며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의 몸을 기꺼이 대속 제물로 주시기까지 하셨다. 이 흉패는 각 줄에 3개씩 도합 12개의 보석을 가지고 있는데 그 보석들은 그림에서와 같다. 이 흉패는 금사슬에 매여 대제사장의 어깨에 있는 호마노로 만든 두 견대에 고정되어 있다.

아랫부분은 대제사장의 허리띠에 매게 된다. 어깨의 두 호마노의 두 견대에는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참조, 출애굽기 도표7). 이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12지파에게 예고된 약속을 따라 나시고 이 땅 위에 계시는 동안 12사도를 택하여 믿음으로 접 붙게 하심을 나타낸다. 즉 12보석은 예수님의 12사도를 나타내며 견대에 12지파의 이름이 있는 것은 이 견대의 고리에 12보석이 매달려 있듯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12사도가 계승함을 나타낸다.

⑤ 우림과 둠밈

대제사장의 가슴속에 있는 흉패는 주머니처럼 위에서 물건을 집어넣을 수 있게 되어 있는데 마치 지갑처럼 생긴 것이다. 이 속에 우림과 둠밈을 집어넣는데 <우림>은 ‘빛들’이라는 뜻이며 <둠밈>은 ‘완전함’이란 뜻이다.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고, 선악과 길흉의 원인과 결과를 알기 원할 때 이 두 패를 내어 봄으로 깨달았다고 한다. 이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성도들이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 그 해결을 위해서 기도하면 주님이 응답해 주심을 나타낸다. 또 이것은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우림과 둠밈 같은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심을 의미한다.

⑥ 성관

성관은 대제사장의 머리에 쓰는 모자로서 대제사장의 직분과 그 직분의 영광과 존귀를 나타낸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며(참조, 슥 3:1), 영광과 존귀를 입은 자로서 그 관을 쓰는 것이다.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히브리서 2장 9절에 의하면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했다. 즉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실 때 수치와 고난의 가시관을 쓰셨으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하나님 앞에서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셨다.

⑦ 금패

금패는 대제사장의 성관에 붙이는 패로서 여기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란 글이 쓰여 있으며 청색 끈에 매어 성관 앞에 달게 되었다. 이것은 첫째로 ‘모든 일에 조심하여 하나님을 섬기라’는 경고이며 둘째로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성별된 자임을 명심하여야 함을 주지시키는 표시이다. 그러므로 기름부음 받은 자와 선지자를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참조, 대상 16:22). 왜냐하면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대리자와 하나님이 쓰는 자이며 하나님이 친히 처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성별하여 성령의 기름을 부어 세운 유일하고 영원한 하나님께 성결 된 대제사장이시며 만사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신 분이셨다.

4. 성막의 역사적 변천

성막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한마디로 성막의 역사 곧 성전의 역사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성전의 파괴와 함께 이스라엘의 정치적 멸망이 있었고 성전의 재건과 함께 이스라엘의 부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막의 구조와 그 의미 못지않게 성막의 변천 과정을 다루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본 장에서는 이스라엘 성막의 변천 과정을 연대순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시내산에서의 성막

이는 최초의 성막으로 출 40:2, 17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한 후 제2년 1월 1일에 시내 산 밑에서 성막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얼마나 오랜 시일을 성막 건조에 보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 초기 장막은 그 후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 40년을 보내는 동안 이스라엘의 진행과 함께 수 차례 이동되었다. 성막 위에 여호와의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곧 성막을 분해해서 성막과 그것에 속한 부속품들과 기구들을 정리하여 레위인들의 어깨에 메고 진행케 했다. 레위인들은 각각 그들이 맡을 부분이 정해져 있어서 각자가 그들이 책임지는 성막의 부품들을 메고 출발했다(참조, 민 3:31-32; 4:15). 이때까지의 성막의 구조나 모형은 앞서 다른 성막의 구조와 동일한 것으로 가나안 정착 전까지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2) 가나안 정착 이후의 성막

40년의 방황을 끝내고 마침내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진입했다. 그들도 그곳에서 먼저 성막을 안치할 장소를 찾게 되었는데 그 장소는 사람이 살지 않고, 묘지로 더럽혀지지 않은 곳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여리고 근처 길갈이라는 곳을 임시 장소로서 선정하였다가 마침내 에브라임 영지에 있는 실로로 정하여 이곳에 성막을 두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성막의 기구와 구조는 변동이 없이 그대로 보존되었으나 그 후로 성막이 분해되고 여러 곳에 제단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레위 자손들이 여러 곳으로 분산되었기 때문이었다(참조, 삿 17:12). 벧엘에는 언약궤가 이동하게 되었고 실로에는 성막이 있었다(참조, 삿 20:27).

3) 실로의 멸망

언제 어떻게 실로에 성막이 서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곳에 성막과 언약궤와 제사장직과 제사와 분향이 있었다. 사무엘상은 실로의 성막과 당시의 제사장 엘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블레셋의 침략으로 법궤를 빼앗긴 것을 말해 준다. 이 일로 인해서 실로 자체는 블레셋 사람들의 장중에 들어갔음을 성경 여러 곳에서 암시하고 있다(참조, 렘 7:12). 그런데 성막 자체까지 다 약탈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에 ‘놉’에서 다시 언약궤와 성막이 한 곳으로 모이게 되었다.

4) 비지역적 예배

실로의 패망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지역적이고 공간적인 신앙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가견적인 유형 신앙에서 불가견적인 정신과 영적인 신앙으로 돌아가 인위적인 신본주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그 증거로서 대제사장직의 성격 상실을 들 수 있다. 사무엘은 레위 지파가 아닌데도 대제사장과 사사로서의 역할을 겸하여 행하였다. 법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이스라엘에 돌려져서 벧세메스에 잠깐 머물렀다가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서 약 20년간 있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벧엘, 미스바, 라마, 길갈 등을 순회하며 예배의식과 행정적인 문제를 처리했는데 이는 성막이 비지역화된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어서 다윗 왕 때에는 완연한 현상이 되어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지역을 초월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셨다.

5) 놉과 기브온의 성막

놉은 여부스에서 북쪽으로 6km 떨어진 곳으로서 시온보다 90m나 높은 산시였다. 어떻게 해서 이곳에 성막이 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는 대제사장과 85명의 제사장이 거할 수 있었고, 에봇과 진설병을 놓는 상이 있었다. 이곳에서 사울 왕이 모든 제사장을 죽일 때 아비아달 하나만이 다윗에게 피하여 있었다. 그 후에 사울 왕은 성막을 기브온으로 옮긴 것 같다. 이 기브온은 여부스에서 10km, 벧엘에서 11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6) 기브온과 예루살렘의 성막

다윗은 왕이 된 후에 군사 삼만여 명과 함께 바알레 유다 즉 기럇여아림에 가서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와서 다윗 성에 친 장막에 두었다. 그리고 그곳에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이렇게 해서 기브온과 예루살렘 두 곳에 성막이 있게 되었는데 기브온에는 제단이 있는 성막이 있었고 예루살렘에는 법궤가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 법궤와 제단이 성전의 수축으로 한 곳에 모이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기브온의 성막이 주로 제사에 이용되었으나 성전 건축과 함께 흩어져 있던 성막의 기구들이 모아져 한곳에 두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막은 가나안 입주 후 200년 뒤부터 그 존재가 사라지게 되고 성전이 대신하게 된다. 이때부터 모세의 성막 기구들은 사라지거나 변형되었다. 역대하 4장 19절에 보면 솔로몬이 기구를 만들어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원 성막의 기구들이 분실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여러 가지 재난과 환난으로 많은 부분이 분실되었다. 처음에 법궤에는 두 돌비와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었으나 후에 성전에 법궤를 안치할 때는 두 돌비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참조, 왕상 8:9; 대하 5:2-10).

7) 성전의 수난과 변천

성막이 성전의 건축과 함께 사라지고 성전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이 성전 역시도 수차례 파괴되고 재건되는 과정을 통해서 유지되다가 결국 예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A.D. 70년에 로마 군인들에 의해 헤롯 성전이 파괴됨으로서 성전의 역사는 끝을 맺는다.

① 솔로몬 성전

다윗의 뜻을 이어서 그의 아들 솔로몬이 그의 통치 제4년에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B.C. 967). 이 성전의 전장은 60규빗(30m), 너비는 20규빗(10m), 높이가 30규빗(15m)으로 성전의 기구들은 성막에서 옮겨온 법궤와 함께 새로이 만들어 두었다. 이 성전은 솔로몬 이후 분열 왕국 시대로부터 시드기야 때까지 존속하다가 B.C. 586년에 갈대아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성전도 함께 소화되고 그 기물들은 바벨론으로 이전되었다. 그 후 380년 동안 성전은 복구되지 못했는데 이는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된 것이다(참조, 렘 25:3).

② 스룹바벨 성전

B.C. 539년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면서 그는 일찍이 바벨론에 잡혀온 포로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회유 정책을 폈다. 이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돌아온 지 2년째 되던 해에 세스바살의 지휘 아래 성전의 기초를 놓았다(참조, 스 5:16). 이것이 스룹바벨과 그의 건축자들에 의하여 많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다리오 왕 제6년 B.C. 515년에 끝내게 되었다. 이 성전에서 일한 제사장의 반열이 정해지고 유월절이 지켜지게 됨으로서 구약성경의 역사는 끝을 맺게 된다. 그 후 이 성전은 구약 중간사의 기간을 걸치면서 수 차례의 파괴와 복구의 수난을 걸치다가 B.C. 20년에 헤롯의 재건 공사로 이 성전의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③ 헤롯 성전

스룹바벨의 성전은 요새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헤롯에게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는 성전의 크기가 포로시대 이전의 성전 즉 솔로몬 성전보다 높이가 60규빗이나 모자란다는 이유를 들어서(참조, 대하 3:4) 성전을 재건하려고 했는데 실제적 이유는 그 재건을 통해서 자신의 이름을 영구히 기념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이 성전은 46년에 걸쳐 완공되었으나(참조, 요 2:20) 예수께서 예언하셨던 대로 A.D. 70년 로마의 티토(Titus)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그때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주님의 말씀(참조, 눅 21:20-21)을 기억한 사람들은 성밖으로 도피하여 난을 면할 수 있었다.

이로서 시내산에서 시작한 성막은 여러 과정을 거쳐서 결국 성막의 완전한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완성과 함께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제 성막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 성막에서 행해지던 동물을 잡아 드리는 희생 제사도, 대제사장도 사라졌다. 다만 유대교를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원 상태로 복귀시키려하나 이 일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들 속에도 의견이 구구하다. 그렇다면 성막의 존재와 그 의미는 이제 시대의 변천과 함께 소멸된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지금도 성막의 모든 구조와 모형이 주는 의미는 살아 움직인다. 다만 우리 주님께서 행하신 단 한 번으로 그 모든 성막에서의 의식들이 마지막 심판날까지 지속되게 하심으로 더 이상의 동일한 의식이 필요 없을 뿐이다. 이제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는 이 성막이 각자의 몸에 해당되어 주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다(참조, 고전 3:16).

돌에 새겨 있던 돌비가 이제는 우리 맘에 새겨진 언약으로 바뀌었고(참조, 렘 31:31-33)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서 뿌리던 속죄의 피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뿌려졌으며 이제는 모든 성도가 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을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게 되는 것이다(참조, 벧전 2:9). 이제 제물은 우리 자신의 몸으로서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지고 있는 것이다(참조, 롬 12:1). 그러므로 성막이 가졌던 모든 영적 의미는 지금도 적용되나 그 실제적인 것들은 완전한 수행으로 재차 재현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면 이제는 사라진 구약의 성전과 현대의 교회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오늘날의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주님이 명하신 성례전이 시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구약의 성전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구약과 같은 장소적인 개념으로서가 아닌 우리 주님을 머리로 해서 한 몸 된 지체가 서로 교제하는 표식으로서 공동체의 개념을 강조한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4일 / 03- 12-2024(화)
출애굽기 24:1-18
찬송 / 171장( 비둘기 같이 온유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언약의 피(출애굽기 24:8)

모세가 그 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니라.


첫째, 언약의 피

고린도전서 11장 25절에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옛날 부족들은 피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두 부족의 족장이 그들의 팔을 칼로 베고 그 피를 잔에 담아 함께 마셨습니다.
이 피의 언약을 통해 두 부족은 형제 부족이 되어 서로 의리를 지키면서 상부상조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대표하고 인간을 대표하여 피를 흘리시고 새로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치고 피곤할 때, 그리고 마귀에게 공격을 당할 때, 성령님께서 오셔서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죄 사함의 피(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케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만일 우리들이 스스로 죄값을 갚아야 한다면 한 사람도 구원함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우리는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와 절망과 저주와 죽음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피로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셋째, 칭의의 피(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롬 5:9)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의롭다고 인정도 받았습니다.
의로움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이요, 마귀의 참소를 받지 않는 보증이 됩니다.
우리는 이제 죄인이 아니라 의인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로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게 하고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기 때문에 보배로운 것입니다.
이 보배로운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우리들은 이제 마귀의 공격이나 참소를 받을지라도 담대히 맞서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 성화의 피(히브리서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3장 12절에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무엇이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듣는 것, 손으로 만지는 것, 모두 죄로 가득한 것들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욕을 없애고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다섯째, 하나님과 가깝게 하는 피(에베소서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로 가까와졌느니라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죄짓고 살다가 하나님께 돌아와 “아버지”라고 부르면 기도도 잘 나오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구만리장천에 계신 것 같이 느껴집니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피를 찬송하고 그 피를 의지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통로가 되어 우리를 하나님과 가깝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고 나오기만 하면 그 피를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여섯째, 화평의 피(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뿐만 아니라 부부 사이, 자식과 부모 사이의 관계를 화평케 하는 화목제가 됩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으나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거룩케 하였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으나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과 가깝게 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만물 가운데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피를 의지하면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게 됩니다.

일곱째, 기도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기도할 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예수님의 피를 의지합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의인의 피는 땅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4)
예수님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우리를 위해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기도가 잘 안될 때에는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의 입술을 사로잡아 기도할 수 있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여덟째, 생명의 피(요한복음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고 말씀하셨습니다.
식물이 생명의 근원인 물을 빨아올리지 못하면 말라 죽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도 겉으로는 돈과 명예와 권세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생기를 잃어버리고 시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시면 넘치는 생명감과 소망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아홉째, 승리의 피(요한계시록 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면 사회생활에서 성공할 뿐 아니라 결함이 있는 성품도 좋은 새로운 성품으로 변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셔서 하나님 앞에 드리셨고, 또한 하나님의 예비하신 복을 그의 피로 사셔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값비싼 피입니다.
그러므로 그 피의 값으로 산 우리들은 절대로 값싼 인생이 아닙니다.

리는 예수님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성경의 중심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피의 의미를 모르고서는 성경을 안다고 할 수 없고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으며 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 교회가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은 피를 말하면서도 피가 중심이 아니며 관심 또한 피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히브리서 9:18-22절을 다시 보면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떤 말을 하면 되겠습니까? ‘이 말씀을 열심히 지키며 사세요’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책과 백성에게 피를 뿌렸다는 것입니다. 계명을 말한 후에 그 계명이 기록되어 있는 책과 백성에게 피를 뿌린다는 것, 이 의미를 깨닫는 것이 피의 의미를 아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24:7절을 보면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고 말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그대로 준행하겠습니다’라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스런 반응이 아니겠습니까? 백성이 이런 반응을 보이면 모세는 어떻게 나와야 할 것 같습니까?

교회에서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칩니다. 말씀을 들을 교인들이 말씀에 감동이 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열심히 지켜 행하겠습니다’라고 외친다면 목사는 어떤 마음이 될까요? 말씀을 지켜 행하겠다는 교인들의 반응에 감동하면서 무척 고무된 마음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 말씀에 은혜를 받으셨군요. 감사합니다. 그대들이 진정 믿음이 있는 분들입니다’ 뭐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 피를 뿌린 것입니다. 언약서에 피를 뿌린 것은 없지만 본문과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다짐하는 백성들에게 피를 뿌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한 모세가 행한 이것은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앞서 예로 든 것처럼 목사의 설교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교인들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모세처럼 피를 뿌리는 것이 될까요?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피를 뿌린 것이 죄사함을 의미하는 것이 전부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할 이유가 없이 피만 뿌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왕 피로써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굳이 말씀을 낭독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피로써 죄사함을 얻었으니 죄사함을 받은 신자답게 살기 위해서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 얻은 자들이 구원 얻은 자답게 살게 하기 위해 내려진 하나의 생활 지침서가 되는 것입니까?

먼저 간과하기 쉬운 것 중 하나는 피가 죽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피에서 자기 구원만을 보려고 하지만 사실 피는 죽음을 담고 있습니다. 나의 죽음을 대신한 죽음이 있음을 외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백성들에게 피를 뿌리는 것은 단순히 ‘너희는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너희는 죽은 자다’는 의미가 강하다고 봐야 합니다.

죽은 자라는 것은 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할 능력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할 수 있는 자질이 없습니다. 이것이 피 뿌림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모세가 책에도 피를 뿌린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죽은 존재임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피로 인해서 자신이 죽은 존재임을 알게 될 때, 그리고 피 흘리신 주님을 바라볼 때 그는 피로써 죄사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언약의 피’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언약은 이스라엘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취하실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독생자의 피를 흘리시면서 까지 언약을 기어코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언약의 피 앞에서 우리의 실천 의지를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실천 의지까지 몽땅 무너져야 하는 것이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16-17절을 보면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신의 죽음 이후의 일을 미리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은 후에 그가 살았을 때의 권위를 그대로 지닌 채 그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는 그 효력이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더욱 견고하게 되어 그 효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으시면서 예수님의 일을 우리에게 맡겼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말씀이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보다 더욱 견고하게 되어 그 효력을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의 효력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늘에 계시는 지금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왕성한 활동과 그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신자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이러한 우리를 보게 하고 예수님의 활동만을 의지하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여전히 살아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심을 선포하게 합니다. 이것이 언약의 피를 믿는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지켜 실천하겠다’고 나서는 신자가 있을 때 그들에게 피를 뿌리는 것은 ‘인간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생명이며 말씀이 살아서 활동하고 계심을 외치는 것이 목사입니다.







절기(하그)

חָג 스트롱번호2282

1.

축제

2.

희생 제물

발음 [ châg ]
어원
2287에서 유래
구약 성경
62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남성 축제, 절기, 출10:9, 12:14, 신16:10, 대하5:3
  • 2.
    명사, 남성 희생 제물, 출23:18, 시118:27, 말2:3.

מוֹעֵד 스트롱번호4150

1.

정한 때.

2.

시간의 한 점

3.

시간의 공간

발음 [ môwʽêd ]
어원
3259에서 유래
구약 성경
223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남성 정한 때.
    • a.
      명사, 남성 시간의 한 점, 창17:21, 레23:2,4,37,44, 삼상13:8,11, 삼하20:5,24:15, 시75:3(2), 1:4, 2:6, 렘8:7, 단8:19, 11 :27,35, 호9:5, 12:10.합2:3.
    • b.
      명사, 남성 시간의 공간, 창1:14, 단12:7
  • 2.
    명사, 남성 회중, 민16:2, 욥30:23, 사14:13, 33:20.
  • 3.
    명사, 남성 집회 장소, 수8:14, 시74:8, 애2:6.
  • 4.
    명사, 남성 신호, 삿20:38.

חָגַג 스트롱번호2287

1.

선회하다

2.

춤을 추다

3.

절기를 지키다.

발음 [ châgag ]
구약 성경
16회 사용

뜻풀이부

I.
원형 선회하다, 돌다
  • 1.
    원형 춤을 추다, 삼상30:16
  • 2.
    원형 절기를 지키다.
    • a.
      원형 [어지럽게 뛰논다는 뜻], 출5:1, 레23:41.
    • b.
      원형 [공적인 모임으로서] 시42:5(4).
  • 3.
    원형 비틀거리다, 현기증이 나다[술 취한 자에 대해 사용], 시107:27.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3일 / 03- 11-2024(월)
출애굽기 23:1-33
찬송 / 337장(인애하신 구세주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절기를 지키라(출애굽기 23:14)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찌니라.

구약의 3대 절기와 ‘수장절(收藏節)’의 참 의미

3대 절기

성경의 절기(출 5:1)는 여호와가 그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날로 ‘제사(예배, 롬 12:1)드리기 위해 정해진 날’을 말한다.

성경에 나타난 절기로는
▲매주 드려진 절기로 안식일(출 20:8)
▲매달 지켜진 절기로 월삭(민 28:14)
▲매년 드려진 절기로 유월절(혹은 무교절), 초막절(혹은 맥추절, 칠칠절), 초실절, 수장절(혹은 장막절, 초막절), 나팔절(레 23:23~26), 속죄일(레 16:29~34), 부림절, 수전절이 있다.

그 가운데 ‘3대 절기’라고 하면 ‘유월절, 초막절, 수장절’이 이에 해당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년 7회의 절기를 드렸지만 여호와는 특별히 이스라엘의 남자들에게 1년 3차에 걸쳐 절기를 지키도록 명했기 때문이다(출 23:14~19).
이 3대 절기만큼은 유대인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반드시 연 3차씩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드려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된 신앙의 자세를 갖추지 않고 외형적으로 절기만 지키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사 1:12~15).

7 20190325-28  30







3대 절기의 의미

이제 구체적으로 3대 절기 속에 감추어진 참 의미를 되새겨 보자.

먼저 날짜를 보면 유월절은 1월 14일(출 12:2,6),
초막절은 7월 15일(레 23:34),
수장절은 9월 24일(학 2:18, 20)이다.
이스라엘의 추수는 일 년에 크게 나누어 봄에는 보리와 밀, 가을에는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나무 열매 등을 수확한다고 한다.
여기서 가을의 수장절을 초막절(신 16:16, 대하 8:13)이라고도 하는 이유는 ‘초막절’의 의미에 추수, 곧 수장(收藏)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 여름의 초막절을 ‘처음 거둔다’는 의미의 초실절(初實節), ‘보리를 추수한다’는 의미의 맥추절(麥秋節, 출 34:22)이라고도 한다.
초막절의 다른 이름인 ‘칠칠절’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았던 오순절(레 23:16)의 바로 전날을 가리킨다.

칠칠은 ‘7×7=49일’을 말하며 오순(五旬)은 ‘다섯 오, 열흘 순(旬)’이니 숫자 오십을 뜻하는 것이다.
다음에서 설명할 초막(성전)의 영적 의미와 관련해 볼 때 말씀으로 지어져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성전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었을 때 거룩한 영, 성령이 임할 수 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초막의 영적인 의미는 우리 육체를 풀이나 꽃(사 40:7, 벧전 1:24)으로 비유하신 것으로 볼 때 우리 몸 된 성전이 풀로 된 장막, 즉 초막(草幕)이 된다. 초림 때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께서 거하실 초막의 실체로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요 2:21, 요 1:32). 그리고 변화산 상에서 베드로가 고백했듯이 그 당시 율법에서 벗어나 예수님과 하나 되어 진리의 말씀으로 지어진 제자들이 또한 진정한 하나님의 초막이요 성전이었다(마 17:4).

3대 절기의 개혁된 의미

진정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곳은 육적인 초막이 아니라(행 17:24) 거룩한 말씀으로 지어진 우리 육체인 성전(고전 3:9, 16, 6:19)인 것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400년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고 감사드리는 절기이다. 애굽 전역에 장자 심판이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으로 흠 없는 어린 양(출 12:1~12)을 잡아 고기는 구워먹고 피는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 재앙에서 건짐을 받은 것에서 유래된 절기다.

구약 율법의 유월절 어린 양은 모형과 그림자(히 10:1)로 참 실체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초림의 예수 그리스도(고전 5:7)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육적인 어린 양을 잡았던 모세 때의 유월절을 기념하지 않고 이제는 죄와 사망 가운데 빠진 인류를 위해 희생 양으로 오신 예수님(요 1:29)의 피와 살 같은 말씀(요 6:51-55) 안에서 성만찬식의 떡과 포도주로 2천년 동안 기념해오고 있다.

또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또 다른 유월절 양식을 먹게 해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기록하고 있다(눅 22:14~20). 

수장절(收藏節)에서 ‘수장(收藏)’의 사전적 의미는 ‘열매를 거두어 곳간에 저장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열매는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의 말씀과 같이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성도’, 즉 첫 열매, 장자들(히 12:23), 시온산에서 새 노래를 부르는 14만 4천(계 7장, 계 14:1, 3)을 의미한다.

이들은 예수님의 피로 사서 나라와 제사장(계 5:9~10)이 될 자들이며 이들이 12지파에 각 지파 일만 이천씩 모여 14만 4000명을 이루게 된다. 12지파가 완성된 후 흰 옷 입은 큰 무리들이 몰려오게 되는데 이들이 예수님의 피로 씻어 그 옷이 희게 된,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계 7:14)이다.

‘피로 씻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셔서 죄를 사함 받았다는 뜻이며 이로써 예수님의 피의 효력이 마지막 계시록 때가 되어 비로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곳간에 저장한다’고 할 때 곳간은 천국을 의미한다. 그 곳간은 육이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마 6:10) 하나님의 나라(계 21:1~2)이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씨(눅 8:11로) 거듭난 천국(마 13:24)의 아들들(마 13:38), 즉,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름 받는 시온산(계 14:1)이다.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해 시온으로 데려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로부터 지식과 명철로 양육(렘 3:14~15)받는다는 그 시온이다. 그 곳에서 이들은 새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예언이 이루어진 실상(요 14:29)을 그 예언의 말씀을 통해 증거하게 되는 것이다.

산 제사 즉, 영적 예배

예레미야는 세 가지 중요한 예언을 했는데 그 중에 첫째가 새 일, 둘째 두 가지 씨 뿌릴 것, 셋째 새 언약 세울 것을 예언했다.
여기서 두 가지 씨마태복음 13장 24~25절의 예수님이 제 밭(자기 밭)에 뿌리시는 좋은 씨와 원수, 즉 마귀가 뿌리는 가라지이다.

예수님의 제 밭, 즉 예수교 세상(마 13:38)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각각 하나님의 말씀과 사단의 말에 의해 자라게 되고 그 가운데 가라지는 단에 묶여 버림을 받게 되고 알곡은 곳간에 데려가게 되는 것(마 24:40~41)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절에 ‘도적같이 추수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재림 때 영으로 오셔서 초림 때 씨 뿌리셨던 그 밭(교회)에서 추수를 하시는데 주인이면서도 도적과 같은 입장이 되시는 이유는 사단의 방해 가운데 참 신앙인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초림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오늘날도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마 23:13)”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깨어있으라(마 24:42, 살전 5:6)’고 하셨는데 참 신앙을 하려고 노력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게 되고 그 말씀의 길(요 14:6)을 따라 진리의 말씀이 있는 곳(계 15:5)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또 예수님께서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눅22:14~20, 마 26:26~29)’이라고 하시면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아버지 나라가 임할 때까지 먹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포도나무(요15:1)이시니 예수님의 피와 살, 즉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재림, 계시록 때 먹는다는 것이다.

즉, 마지막 때 약속의 목자를 통해 열리는 계시의 말씀을 먹고 마음에 새겨서 새 언약을 지켜야만 죄 사함(히 8:10~13)받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수장절 감사 예배’는 수장절을 맞아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첫 열매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은하는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산 제사, 즉 영적 예배를 뜻한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듯이 추수한 곡물이나 과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사람의 몸과 마음과 뜻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또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4:35~36)”라고 말씀과 같이 복음을 전하여 말씀으로 맺어진 열매를 천국 창고인 성전으로 인도하는 전도 즉, 영적 추수를 실천하는 것이 수장절의 진정한 의미이다.

성경 속의 절기는 사람으로 비롯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절기이며 히브리서 4장에서도 사도 바울은 분명히 “그의 안식에 들어갈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아직 남아있다”고 기록했다.

성경 속의 절기가 단지 유대인에게만 한정되어 지키라는 절기가 아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지켜야 할 절기로 남아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구약 절기의 이면 속에 감춰진 온전한 의미를 모른 채 구습에 젖어 지켜 왔던 유대인들의 절기는 무의미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초림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신앙의 목적인 구원과 영생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시대를 거울삼고 ‘성경적 절기의 참 의미’를 깨달아 그에 합당하게 드리는 절기(감사 예배)가 거룩한 산 제사인 영적 예배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참 절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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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8545) 테무라(emûwrâh) תְּמוּרָה    

1. 교환하다.  2. 교환.  3. 교환된 물건 : 레 27:10
발음 [ temûwrâh ]
어원 / 417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회 사용
뜻풀이부

I. 명사, 여성 교환하다.
 1. 명사, 여성 교환, 매매, 물물 교환, 룻 4:7, 욥 15:31.
   a. 명사, 여성 [주]교환된 물건 : 레 27:10, 33, 욥 28:17
 2. 명사, 여성 배상, 보상, 보수 징벌, 보응, 욥 15:31, 20:18.

1-15절은 배상에 관한 법
16-31절은 도덕에 관한 법에 대하여 말씀

1. 도둑질에 따른 배상 (1~4절)

하나님께서 정하신 손해 배상은 상당히 엄격합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해서 도살하거나 팔면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으라’(1)고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끼친 만큼만 배상하도록 하는데, 도둑질 한 경우에는 다섯 배나 네 배로 갚아야 하고, 만약에 배상할 능력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둑질한 것을 배상하라’(3)고 엄격하게 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둑질한 짐승이 살아서 그의 손에 아직 있으면 ‘같은 종류의 짐승으로 갑절을 배상하도록’(4)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생계형 도둑이 아니라 이스라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소와 양 그리고 나귀와 같은 짐승을 도둑질한 경우에 대한 말씀입니다. 소는 농경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권에서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소는 힘든 농사일과 각종 짐 부리는 일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도 하면서, 소의 각종 부산물은 주요 식량자원이자 원자재로 생활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양도 많은 문화권에서 인간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경제적 동물의 이용 외에도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역할을 맡아 왔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생활에서 양은 중요한 희생동물임과 동시에 소유한 양의 수가 재산을 뜻했고, 털과 가죽과 고기는 이스라엘 가정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짐승입니다. 따라서 이처럼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 경제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나 양 그리고 나귀와 같은 짐승을 도둑질하는 것에 대해서 무거운 배상을 하게 한 것은 이웃의 재산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최근 청소년 범죄 연령이 낮아지고 잔혹성이 커지다보니 촉법소년 연령을 낮추거나 폐지하자는 의견을 둘러싸고 찬반 논쟁이 있습니다. 찬성 측에서는 청소년들이 촉법소년이라는 법을 악용하고, 낮은 처벌 수위로 재범률이 높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아직 미성숙한 단계의 청소년에게 교화의 기회가 제공되어야 하고, 꼭 처벌만이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대한민국헌법 제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처럼 법은 힘 있는 사람에게는 거미줄이고, 없는 사람에게는 오랏줄입니다. ‘사기’를 쓴 사마천(司馬遷)도 ‘바늘을 훔친 자는 주륙을 당하고,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는 말로 고무줄 같은 법집행을 개탄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배상제도의 특징은 다른 사람의 큰 재산을 도둑질한 자는 작은 재산을 도둑질한 사람보다 더 무거운 책임이 요구된다는 점입니다.

본문에는 남의 것을 훔치려는 도둑과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는 주인 사이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2-3a 도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은 후에는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둑이 한밤중에 남의 집에 침입했다가 죽게 되더라도 그 도둑을 죽인 집 주인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전기가 없기에 침입자를 알아보려고 불을 켜다가 주인이 먼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주인이 그를 죽여도 정당방위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식별이 가능한 해가 뜬 후라면 도둑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고, 그를 벌하도록 재판장에게 데려가게 하셨습니다. 이 규정은 한밤중에 도둑이 들어 놀란 사람과 대낮에 들어온 도둑 모두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2. 타인의 밭이나 곡식 등에 대한 배상 (5~6절)

(5) 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짐승을 먹이다가 자기의 짐승을 놓아 남의 밭에서 먹게 하면 자기 밭의 가장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할지니라

가축을 풀어놓아 남의 밭이나 포도원에 들어가 먹게 하면, 즉 남의 밭이나 포도원을 훼손하면 가축의 소유자는 자기 밭의 제일 좋은 산출물과 포도원에서 최상품의 포도나 포도나무로 배상해야 합니다. 타인의 재물을 그만큼 소중히 여기라는 의미입니다. 요즘 길을 다니다보면 길바닥이나 심지어는 도로에 내동댕이쳐있는 전동킥보드를 심심치 않게 목격합니다. 무슨 심보일까요? 자기 것이라면 절대로 저렇게 하지 않을 것인데 말입니다. 내 것이 소중하면 남의 것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예전에 교외에 있는 조그마한 찜질방을 갔는데, 월요일 낮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한 무리가 들어왔는데 그분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목회자들이 월례회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샤워를 하려고 샤워실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샤워실 곳곳에 수건과 대야가 지저분하게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분명 제 앞에서 들어간 일행은 목회자들이었는데 말입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나중에 주인이라도 보면 어쩔까 싶어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수건을 다 수거해서 수거함에 넣고, 대야도 정돈하고 나왔습니다.

(6) 불이 나서 가시나무에 댕겨 낟가리나 거두지 못한 곡식이나 밭을 태우면 불 놓은 자가 반드시 배상할지니라

농사철이 시작되면 땅 속에서 월동하는 해충의 방제를 위해 논.밭두렁이 태우기나 잡풀 소각 등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한 화재가 빈번해지자, 산림인접지역에서는 논두렁 태우기를 금지하고 있고, 부득이하게 논.밭두렁 소각이 필요할 때는 시군 산림담당부서의 허가를 받아 공동 소각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가시덤불은 불에 타기 쉽습니다. 따라서 자칫하면 이웃의 재산에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여하한 목적으로 들판에 불을 놓는 경우 주의할 것을 당부함과 동시에 남의 곡식이나 밭을 불태우는 결과를 초래했다면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3. 위탁 물품이나 짐승에 대한 배상과 소유권 분쟁 시의 배상 (7~13절)

7절과 8절은 위탁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람이 돈이나 물품을 이웃에게 맡겼는데, 그 이웃집에서 도둑맞았는데 그 도둑이 잡히면 그 도둑질한 자는 갑절로 배상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도둑이 잡히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위탁받은 사람은 위탁물을 잘 보관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위탁물을 잃어버리거나 도둑을 맞았다면 손실을 갚든지, 재판장(또는 하나님)에게 가서 자신이 잘못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받도록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재판장으로부터 잘못이 없다고 인정받으면 물품을 위탁한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을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9절은 어떤 잃어버린 물건에 대하여 서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소유권 분쟁이 생길 경우, 그 소유권을 주장하는 쌍방은 재판장(또는 하나님)에게 가서 재판을 받아야 하고, 재판장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상대편에게 갑절을 배상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10-11절에서는 나귀, 소 그리고 양과 같은 짐승을 이웃에게 맡겼는데 맡긴 짐승이 죽거나 다치거나 아무도 안 볼 때 끌려갔다면, 맡은 자는 그 이웃의 것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여호와께 맹세하면, 맡긴 자는 그대로 믿어야 하고, 맡은 자는 배상하지 않아도 됩니다(10~11절). 그러나 도둑맞았다면 맡은 자는 맡긴 자에게 배상해야 합니다(12절). 그리고 만일 맡은 짐승들이 사나운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면, 그것을 가져다가 증거로 내놓으면 그 찢긴 것에 대해서는 배상하지 않아도 됩니다(13절).

4. 빌려온 짐승에 대한 배상 (14~15절)

이웃에게서 빌려온 짐승이 다치거나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빌려온 짐승의 주인이 없을 때, 다치거나 죽었다면 반드시 배상해야 합니다(14). 그런데 그 짐승의 주인이 함께 있을 때 다치거나 죽었다면 배상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사용료를 내기로 하고 빌려온 짐승이 다치거나 죽었다면 배상하지 않아도 됩니다(15).

이상에서 배상에 대한 규정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중요한 점은 타인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반드시 배상하도록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배상하되 경우에 따라서 두 배, 네 배, 다섯 배로 배상하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도둑과 같이 나쁜 의도를 갖고 타인에게 피해를 입혔는데 배상할 능력이 없으면 몸을 팔아서라도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의도치 않게 피해를 주었다 할지라도 타인의 것은 자신의 것만큼 소중하기 때문에 배상하되 그보다 더 좋은 것으로 배상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남의 물건을 위탁받았으면 마치 자기 것처럼 책임감을 갖고 지켜야 하며, 만약 위탁한 것에 문제가 발생했다면 맡은 사람은 배상하거나, 책임이 없음을 재판장에게 가서 판결 받아야 하며, 맡은 사람이 자신의 무죄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맡긴 사람을 더 이상 그를 의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계명과 함께 언약서를 주신 이유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해, 즉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자유는 나 한 사람만의 자유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배상에 대한 법이 의도하는 바는 공동체 전체의 화합과 평화입니다. 내 것이 소중한 만큼 이웃의 것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서로가 서로를 믿고 신뢰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의 선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철저한 고백이자 공동체 전체를 위한 온전한 내려놓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한 것도 대단한데, 그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로 갚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은 남을 속여서 부를 축적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자기 관할 구역의 세금을 미리 로마 제국에 선납하고 자기 마음대로 더 거두어서 부를 축적했습니다. 즉 그는 부당하게 부를 축적했습니다. 따라서 재산의 절반은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남은 절반으로 네 배의 배상을 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재산을 공동체를 위해 완전히 포기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재물을 바라보던 그는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는 율법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게 됩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동족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세리 삭개오가 아니라, 존경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삭개오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삭개오와 같이 율법 안에서 자유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웃의 것을 소중히 여기며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갈 것을 결단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배상에 대한 법에 대해 살펴보면서 내 것만 소중히 여겼던 완악한 우리의 실상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본 삭개오는 내 것이 소중한 만큼 이웃의 것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의하게 모은 재산 모두를 공동체를 위해 내려놓았습니다.
이웃의 것을 탐하지 않게 도와주시고 삭개오와 같이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봄으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으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2.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둑질한 것을 배상하라는 말씀을 오늘 날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3. 자기 밭의 가장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하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4. 하나님께서 배상에 대한 법을 주신 근본적인 이유는?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키라고 하는 법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문 16절부터 17절은 성도덕과 올바른 신앙법에 대해, 18절부터 20절은 이방 풍습에 대한 법에 대해, 21절부터 27절은 이스라엘 백성 중 약자에 대한 법에 대해, 28절부터 31절은 하나님에 대한 법입니다.

성도덕과 올바른 신앙(16-17절)

(16-17) 사람이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납폐금을 주고 아내로 삼을 것이요 만일 처녀의 아버지가 딸을 그에게 주기를 거절하면 그는 처녀에게 납폐금으로 돈을 낼지니라

만약 공동체 내에서 약혼하지 않은 여자를 꾀어 동침하였을 경우에는 납폐금을 주고 아내를 삼아야 합니다. 납폐금이란 혼인 때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 예물이나 돈을 의미하고, 성적인 결합은 상대방과 하나가 됨을 뜻하기에 약혼하지 않은 여자의 삶을 책임지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의 아버지가 결혼을 거절하게 되면 납폐금은 지급해야 했습니다. 납폐금을 얼마 지급했는지 정확히 언급이 되어 있지 않지만 신명기 22장 29절에 근거하여 은 오셉 세겔을 주었을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이방 풍습에 관한 법(18-20절)

이어 이방 풍습에 대한 세 가지 명령이 나타납니다.

(18-20)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이 세 가지 명령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위협하는 이방인들의 풍습에 관한 것입니다. 18절에 나오는 ‘무당’은 마법사, 요술사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여성형이므로 ‘신접한 여인’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무당에 대해서는 살려두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점술은 고대근동 사회에서 흔히 행해졌던 종교 행위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무당들을 찾아 다니며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 간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음을 당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은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들과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에게는 돕는 배필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배필로 하와를 보내 주셨습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의 창조 섭리는 부부로 맺어진 남녀의 성적인 결합과 이로 인한 자손의 번성함입니다. 그러나 이런 창조 섭리를 벗어나는 부끄러운 행위 즉, 짐승과 교합하는 사람은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하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멸하게 된다는 것은 단지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멸이라는 개념은 생명을 포함해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까지도 함께 파괴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안에 스며들어 있던 이방 풍습과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를 강하게 하십니다.

21절부터 27절은 이스라엘 백성 중 약자에 대한 법에 대해 설명합니다.

공동체 중 약자에 관한 법(21-27절)

(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출애굽기 12장 37-38절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수많은 잡족’도 함께 출애굽했다고 증언합니다. 이들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지만 그들도 함께 광야생활을 했고, 가나안 땅에 이르러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본문에서도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고 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나그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애굽에서 나그네 생활을 했기에 그들의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나그네들을 학대하지 않고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기억하는 동시에 나그네였던 자신들의 정체성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회적 약자인 과부나 고아에 대해서도 해롭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들은 사회에서 가장 천대를 받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이기에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을 학대하지 않고 오히려 섬겨야 합니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 중 이들의 인권을 지속적으로 짓밟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을 벌하시고, 고아와 과부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경고를 더하십니다. 이어서 공동체의 채무관계에 대한 법이 이어집니다.

(25-27)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공동체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었을 경우 채권자처럼 하지 말고, 이자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당시 고대 근동지방의 이자는 곡식에 대해서 33.3퍼센트에 달했고, 은을 빌릴 경우에 20~25퍼센트인 것을 감안하면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인애와 사랑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전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심지어 담보로 가지고 있던 물건도 해가 지기 전에 돌려줄 정도로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서로를 향한 사랑이 흘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따라 가는 삶이 아니라 사랑을 따라 가는 삶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과 고아, 과부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으며 지금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 있는 우리들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의 시선은 어디를 향해야 하겠습니까? 더 많은 것을 얻고자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는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소외된 모두에게 손을 내밀어서 세상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교회 내에서만 사랑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그 사랑이 전해지도록 주님의 통로 역할을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법(28-31절)

28절부터 31절은 하나님에 관한 법에 대하여 열거합니다.

(28)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28절에 재판장의 원어는 ‘엘로힘’입니다. 이 단어는 통상적으로 하나님을 지칭하기에 본문에서 나오는 ‘재판장’으로 해석하기 보다 ‘하나님’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에 대한 모독과 백성의 지도자들에 대한 저주를 금하는 내용으로 보아야 합니다. 본문을 다른 성경 번역본에서는 ‘재판장’이 아니라 대부분 ‘하나님’으로 번역합니다. 또한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섬겨야 하는 대상임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제물 드림에 대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29-30) 너는 네가 추수한 것과 네가 짜낸 즙을 바치기를 더디하지 말지며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네 소와 양도 그와 같이 하되 이레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여드레 만에 내게 줄지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 위해 예물을 드릴 때는 먼저 지체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지체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물질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는 고린도후서 9장 7절과 같이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원하여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곡물에 대해서는 처음 추수한 것을 드리고, 짐승에 대해서는 칠일 동안에는 어미의 젖을 먹게 하고, 여덟째 날에 하나님께 바치게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주어야 한다는 말은 이방 종교에서처럼 사람을 제단에 바치는 인신공양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 13장 13절 대속의 개념으로 모든 탄생을 대표하는 장자를 받으시는 대신 레위인을 대속물로 받아 하나님의 소유로 삼고, 성소를 관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에 대해 언급하며 마무리 됩니다.

(31)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것을 개에게 던질지니라

앞서 말한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법에 대한 결과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거룩은 무엇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까?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의 모습으로는 그 사람의 거룩함을 볼 수 없습니다. 매일같이 먹는 음식이야 말로 거룩한 삶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기에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 즉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아야 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먹는 행위조차 거룩해야 한다면 우리의 일상이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거룩한 성도의 삶을 보이시겠습니까? 그것은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가 될 때에 비로소 삶에서도 거룩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실 때 우리가 하는 언행과 먹고 마시는 그 모든 것이 주님 안에서 거룩함을 이루어야 함을 기억하며, 주님과 동행하시는 날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 도
하나님, 우리가 주님이 주신 법들을 지키며 살아가는 목적이 율법적인 삶이 아니라 거룩한 주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것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삶 속에서 주님의 거룩한 자녀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세상의 논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기를 소망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는 신앙을 위협하는 이방인들의 풍습을 금하셨습니다. 혹시 나의 삶에 신앙과 별개로 이방인들의 풍습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2. 하나님은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원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바라보아야 하는 주변에 소외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살펴보고 무엇으로 섬겨야 하는지 묵상해 봅시다.
3.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지체없이 드려야 합니다. 나의 삶에 주님께 드려야 하는데, 지체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4. 거룩의 삶은 일상입니다. 오늘 하루 일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고 실천합시다.


속죄론(속죄론)

Ⅰ. Anselm(11세기 스콜라 신학의 아버지)이전의 속죄론

1. 이레네우스(Irenaeus of Lyon. 115- )의 속죄론

총괄갱신설 (Racapitulation Theology)을 주장하였다.

아담이 범죄 하므로 온 인류가 초대된 저주에 임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가 순종하므로 온 인류가 총괄적으로 갱신되게 되었다. 아담 이전에 에덴동산이 있었듯이 둘째 아담이 총괄되고 난 후에는 지상 천년왕국이 있다. Irenaeus는 예수님이 온 인류의 죄를 다 속죄하셨다는 이야기인지, 애매한 주장을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고, 사람을 해방시켰다고도 하였다.

총괄갱신설은 이론이 뚜렷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가리켜 Esoteric(무언가 비밀스러운, 비교(秘敎)적인, 비밀 종교적인)한 속죄설이라 한다.

2. 오리게네스(Origen of Alexandria 185-.)와 그레고리(Gergory of Nyssa,320-.)의 속죄론

이 두 사람은 속전신학(Ransom Theology)을 주장했는데, 이것을 속전설 또는 속상설이라고 한다

▶ Origen의 이론

그리스도의 속죄는 사단에게 지불한 속전이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미끼를 삼키고 신성의 낚시에 걸려들었다. 그래서 지옥에 있는 영혼까지 사단의 권세에서 자유 함을 받았다.  만인구원설을 주장한 것이 되고.  나중에는 사단, 귀신까지도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였다.  공개적인 Exoteric 이론이다.

▶ Gergory of Nyssa의 주장

   사단이 기만 당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속상설은 사단 기만설이다.

   ⑴ 기만자가 기만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⑵ 사단도 기만당하므로 유익을 얻었다. 사단도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3. 아우구스틴과 그레고리(Gregory 540-)Ⅰ세의 속죄론

   이 두 사람은 형벌 대속설을 주장하였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스스로 죄와 죽음의 지배아래 떨어졌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갚으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는 속죄의 죽음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형벌 대속설을 주장한 것이다.

▶ GregoryⅠ세는 칼빈과 비슷한 형벌 대속설을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인간이 죄 없는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통해 진노를 면하고 죄의 부채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후대의 칼빈이 주장한 형벌 대속설과 같은 맥락인 것을 보게 된다.

Ⅱ. 안셂(Anselm)에서 종교개혁까지의 속죄론

1. Anselm(1033~1109)의 속죄론

그는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나”(Cur Deus Homer?)란 저서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 속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속죄론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 이의 속죄론을 만족설(Satisfaction Theology)=상거래설 이라고 한다.

   ⑴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계약아래 있었으나, 인간은 범죄하고 하나님 영광을 도둑질 또는 더럽혔다.

        따라서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은 회복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속죄는 절대 필요한 것이라 하여  속죄 절대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⑵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길은 형법적으로 형벌을 부과하던지 아니면 민법적으로 손해배상을 해야만 한다.

   ⑶ 인간은 배상할 능력이 없으므로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셔서 무죄하신 분이 자원해서

       수난을 받으심으로 하나님께 무한한 영광을 돌리셨다.

       그리스도는 수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손해배상을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를 민법적 속죄 배상으로 본 것이다.

  ⑷ 이 업적은 성례전을 통해 죄인들에게 이전된다.  성례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손해배상의 업적이 이전된다.  

       Satisfaction Theology란 하나님이 손해배상을 다 받으시고 만족하신 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 거래설 이라고도 한다

           ◉ Anselm의 이론에 대한 평가

① 속죄의 객관성과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공헌이다.

②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대리적 죽음이라는 개념이 약하다.

    대리적(Vicarious) 개념이 약하고 단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성부의 영광을 위해 자발적으로 받쳐진 성물로 보았다.  

    입다가 자기 딸을 받친 것같이 그렇게 보았다.

③ 그리스도의 공로가 인간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신앙에 대한 설명이 없다. 성례전적인 요소만 강조했다.  

    그리스도의 공로가 믿음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성례전적으로 전달된다고 본 것이다.

④ 그리스도의 죽으심만 강조했고, 삶에도 구속적인 측면이 있는 것을 부인했다.

    종교 개혁가들은 그리스도의 죄 없는 삶을 굉장히 중요시 했던 것이다.

⑤ 공법과 사법 가운데 양자 택일하는 것은 아니다. 개혁가들은 둘 다 보았으며, 주로 공법 쪽으로 보았던 것이다.

2. 아벨라드(Peter Abelard, 프,1079-1142)의 속죄론

도덕감화설(Moral unifluence theology)을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는데 죄인의 고난을 체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영향을 주어서 회개로 이끈다는 도덕 감화설이다

◉ 아벨라드 속죄론의 문제점.

   ① 속죄의 동기로 사랑만 강조되었지 공의는 무시되었다.

   ② 속죄의 객관성이 무시되고 주관적인 화해만 강조되었다.

   ③ 예수님을 감화주시는 도덕 교사로 전락시켰다.

3. 롬발드(Peter Lombard)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7-1274)의 속죄론

 안셀름과 아벨라드의 주장을 혼합한 혼합적 속죄관이다.

  (1) 속죄는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속죄의 필요성을 부인하였다, 하나님은 배상없이도 죄를 용서하실 수 있었다.

  (2) 그러나 하나님은 배상을 요구하는 길을 택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도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나 위대한 사랑의 표시였다.

       삶과 죽으심으로 충분한   배상이 되었고 인간은 성례전을 통해 이 업적을 전가 받았다.

  (3) 아퀴나스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네 가지 측면에서 죄인의 구원을 가져왔다고 한다.

     ① 죄인들에게 구원의 축복을 받게 하는 공로    
     ②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충분히 만족한 대속     
     ③ 하나님이 기뻐하신 자원적 희생     
     ④ 죄인들을 노예와 형벌에서 구속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4. 던스 스코터스(Duns Scotus, 1255-1308)의 속죄론

  던스는 인정론(Acceptilation Theory)이라는 속죄론을 주장하였다.

(1) 프란체스코 소속으로 실제론과 유명론의 다리를 놓은 사람으로서 속죄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으나

    ‘하나님의 전횡적 의지’에 의해 결정되었다.

     죄에 대한 배상은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 배상자가 꼭 그리스도일 필요는 없다.  천사일 수도 있다.

(2) 그리스도의 공로는 유한한 인성의 공로이므로 죄의 부채에 미치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즐겨 받으시고 인정해 주셨다는 것

Ⅲ. 종교개혁기의 속죄론

1. Anselm과 개혁가들의 속죄론 비교

⑴ 속죄의 필요성 :

    Anselm ― 절대 필요성을 주장. 하나님 것 훔치고 배상해야 한다는 개념.

   개혁가 ― 필요하기는 한데 상대적 필요성을 주장.

⑵ 죄의 개념∶

    Anselm ― 하나님의 영광 침해요, 손해의 배상을 동반한다.

    개혁가 ― 하나님의 율법 위반으로, 형벌을 동반한다.

⑶ 속죄의 개념

    Anselm ― 속죄란 민법적으로 파악하여 하나님의 영광 회복을 위한 손해배상으로 보았다.

    개혁가 ― 공의를 만족시키는 형법적으로 파악하여,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희생적 형벌이었다.

                  형벌대속설(Penal Substitution)

⑷ 그리스도의 사역

     Anselm ― 그리스도의 죽으심만 강조하였다.

     개혁가 ― 그리스도의 속죄는  능동적으로 죄 없는 삶을 사셨다.수동적으로 죄 있는 자처럼 죽으셨다.

⑸ 그리스도의 공로가 전가되는 방법

     Anselm ― 성례전적 이전을 강조 ― 성례전을 통하여 이전된다는 주장.

     개혁가 ― 믿음에 의해 죄는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義는 죄인에게 전가된다.

2. 소키너스파(Sociniem)의 속죄론

모범설 (Example Theory)을 주장하였다, 대속적인 속죄 개념을 전면 부인했고 속죄 필요성을 부인했다. 그리스도는 삶과 죽음을 통해 믿음과 순종의 모범   을 보이셨을 뿐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 사함과 화  목의 기초로 결합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3. 그로티우스(Hugo Grotius)의 속죄론

Hugo Grotius는 항론파의 알미니안 주의자로서 화란에서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1621년 파리로 도망갔다.

1617년 「the Satisfaction of Christ」(그리스도의 관점) 라는 책에서 율법 위반에 대한 형벌은 엄격히 집행되지 않는다고 했고, 고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거룩한 불쾌감을 표현하신 것이다. 꼭 안 죽어도 되는데  율법이 꼭 그렇게 실행되지 않는데, 그리스도가 죽으신 이유는 하나님이 죄에 대한 거룩한 불쾌감을 나타내신 것이다. 따라서 우주적 통치 방법으로 사용하신 것이다. 즉 율법 위반을 방지한다는 의미에서 우주적 통치의 수단으로 그리스도를 사용하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일벌백계(一罰百戒)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통치설(Goverment Theory=정치적 속죄설)이라 한다.

   ◉ 이 주장의 문제점

① 속죄의 절대적 필요성을 부인했다는 점이다.

② 속죄는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형벌 대속이 아니라,

    미래 죄 방지를 위한 모범일 뿐이라 하여  속죄의 가치를 떨어뜨린 점이다.

4. 아르미니안(Arminian)주의 속죄론

(1) 그리스도의 속죄는 완전한 공의의 완전한 대속물로 볼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형벌을 가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완전한 대속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적 형벌이 아니라 자선의 대속이라고 하였다.

(2) 그리스도의 속죄 대상은 모든 사람이나(일반 속죄설), 그 효과적인 적용은 궁극적으로 죄인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 
알미니안 주의자는 속죄의 범위를 확대했고 속죄의 효력은 엄청나게 약화시켰다.
그러나 도르트 대회에서는 이들의 보편적 속죄설의 잘못을 지적하고, 제한 속죄설을 채택하였다.

5. 사우머르(Saumur)파의 속죄론

이들은 도르트회의 엄격한 칼빈주의를 부드럽게 하고 동시에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잘못을 피하려 절충설(Amyraldus, Placaeus)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가설적 만인 구원설을 주장했다, 하나님의 제 1작정과 제 2작정이 있다고 말하였다..

▶제 1 작정 ―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모든 사람 위해 죽게 하셨다.(일반속    죄설)

▶제 2 작정 ― 추가적 작정으로서 그대로 두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므로 은    혜를 베푸실 대상을 선택하셨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한 것을 보나 부자연스러운 것을 면할 수 없다.

Ⅳ. 종교개혁 이후의 속죄론

1. 스코틀랜드(Scotland)의 Marrow(정수,알맹이)논쟁(1717~1722)

Marrow 논쟁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서 일어난 논쟁이다.

▶ Scotland 역사∶

1560년 John Knox가 장로교를 국교로 하였다.

1603년 James Ⅰ세와 Charles Ⅰ세가 Willam Load라는 대주교를 통하여 James Ⅰ세 때부터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한 왕이 통치를 한다. 그러나 행정적으로 한 나라가 된 것은 아니었다. 한 나라가 된 것은 1703년의 일이다. Charles Ⅰ세가 스코틀랜드에 감독정치를 강요하였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이제까지 장로 정치를 해왔는데 감독정치를 강요하니까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영국의 의회 청교도들과 연합하여, ‘거룩한 연맹’을 맺는다. 이 사람들을 언약주의자(Covenanters)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 사람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다.

1689년 William Mary가 공동으로 장로정체를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17세기 한 세기동안 너무 심한 율법 주의적 장로교였다.

18세기 초 Moderate파(Calvin주의도 완화하고, 신앙생활도 완화하는 파)가 스코틀랜드에서 득세하게 되었다. 득세를 하게 되자 이들은 자꾸 신학적인 변질을 하게 된다. 자꾸 변질을 하게 되자 정통적인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Free Church를 만들게 되었다. 1843년 Thomas Chalmers를 중심으로 Free Church로 분리하게 된 것이다.

▶ Marrow 논쟁 :

18세기초에 Moderate파와 Moderate파에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의 문제로 일어난 사건이다. 18세기 초에 두 가지 파가 나타났다.

⑴ 신 율법주의(Neo-Nomianism = Moderates)의 속죄론

 18세기 초 Scotland 국가교회가 주도하던 파로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가능케 했고, 인간에게 먼저 회개와 믿음을 요구하셨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 것이 아니고,  회개와 믿음(신앙과 회개=회심 ― 이것을 신율법이라 하였다)으로 되는 것이라 하였다.  신 율법에 순종한 의가 칭의의 근거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이름만 바꾼 Arminianism 이었다.

⑵ 머로우(Marrow Men)파 의 속죄론

 1647년 Edward Fish가 「Marrow of Modern Pivinity」(현대 신학의 정수)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신 율법주의를 비판하자, 이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을 Marrow Men이라고 불렀다. 18세기에 이를 따르는Marrow Men 중에는 James Hog , Thomas Boston등이 있었다.Marrow Men의 주장은 칼빈주의와 비슷하면서 Saumur주의와 비슷했다.

① 그리스도는 택함 받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며 선택적 사랑 (Electing love)을 강조하였다.

② Giving love를 강조하고,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죽음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즉각적 신뢰를 하게 되면 그리스도와 합일이 되고 그리스도와 합일이 오면, 그 다음에 선행을 행할 능력이

   오고, 죄를 버릴 능력이 온다는 것이다.  칼빈주의와 비슷한데, Saumur가 섞인 완화된 칼빈주의다.

   Marrow Men은 Moderates를 율법주의자라고 부르고, Moderates는 Marrow Men을 율법 폐기론자라고 불렀다.

   1720년 Scotland의 Neo-Nomianism(=Moderates)들은 Marrow Men을 율법폐기론 자라 하여 정죄 하였다.

2. 실라이마허(Schleiermacher)의 속죄론

    실라이마허는 신비설(Mystical Theory)을 주장했다

▶ Schleiermacher의 주장

대속 교리를 완전 부인하고 그리스도는 죄성을 소유한 인간이나 성령의 감화로 죄성이 범죄로 나타나지 않도록 보호를 받았다. 그리스도의 활동은 창조적인 것이어서 심령을 감화시키며, 생명을 주는 영의 위대한 힘이며, 그는 자발적인 순종과 죽음을 통해 인간에게 심오한 주관적 변화를 일으켜서 인간의 “신 의식성”을 높인다고 하였다.

                              예수    보통인간

인간---신 망각성      0%       100%

           신 의식성      100%     0%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은 보통 인간에게 “신 의식성”을 높이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신비설이라 한다.

▶ 신비설은 도덕 감화설과 공통점 및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가지고 있다.

      공통점 ― 영향을 미쳐서 변화를 초래한다는 것.

      차이점 ― 도덕 감화설은 도덕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인데, 신비설은 잠재 의식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 Schleiermacher는 현대 신학에 영향을 크게 주었다. 그는 현대 조직신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 조직신학은 Schleiermacher 이후로 객관성을 상실하고 주관화되었다. 그래서 학자마다 제각기 주장하는 것이 다른 것을 보게된다.  Schleiermacher가 영향은 크게 미쳤으나 좋은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고 엄청나게 악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3. 리츨 (Ritschl)의 속죄론

리츨의 견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실과 그 가능성을 부정하고, 화목은 완전히 하나님에 대한 죄인의 태도의 변화에서 생겨진다고 하였다.

▶ Ritschl의 개념은 타원에 두 개의 중심이 있듯이, 하나는 그리스도의 속죄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완전히 윤리적인 나라이면서, 현세적인 나라이다. 영적인 나라가 아니다. 이 공동체를 위해서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죄란 공동체에 대한 반역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속죄라는 것은 이 공동체 안에서 승리하는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속죄라고 주장하였다.

▶ 속죄는 일차적으로 공동체에 관련되는 것이고, 이차적으로 그 공동체에 속한 개인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속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창설하셨고, 그리스도의 속죄는 공동체 안에서 순종, 신뢰, 세상 향한 승리 의식을 일으키는 것이다.

Ritschl을 따르는 사람은 공동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Ritschl의 속죄론은 개인의 형벌 대속과는 무관한 것을 보게된다.

4. 미국 후기 뉴잉글랜드파(New England Theology)의 속죄론

Joseph Bellamy, Samuel Hopking은 Timothy Dwight의 제자들인데 Yale 大에서 1820년에 큰 부흥(제 2차 대각성운동)을 일으켰던 사람들이다. Timothy Dwight의 외할아버지 Jonathan Edward 때에는 철저한 칼빈주의 였다. 그러나 Timothy Dwight 때에 와서는 약간 수정 칼빈주의(Modifier Calvinism)로 수정 되었다.  이후 Joseph Bellamy 때에 와서는 완전히 알미니안주의로 빠졌다. 조금 지나서 Yale 大에서 Horace Bushnell이 나오게 됐는데. 그는 완전히 자유주의자(Liberalism)가 되었다. 이것을 가리켜 New England Theology라고 한다.

Joseph Bellamy,와 Samuel Hopking의 속죄론은 통치설과 간접 전가설을 따랐으나  Horace Bushnell은 “인간이 왜 죄인이냐?”며 인간의 죄성을 점점 부인하고 인간은 착한 존재라 하고, 그러므로 인간은 양육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착한 인간을 잘 길러주면 착한 인간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속죄론은 도덕 감화설이었다. 그의 저서 ‘대리적 희생「Christian Nerture Vicarious Sacrifice」'에서 도덕 감화설을 취하였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셔야 한다는 관념을 거절하고,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 되어 사랑과 순종의 새 정신을 보이는 것만이 유일한 요구 조건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그의 모든 거룩과 고난받으신 사랑으로서 하나님을 계시하셨으니 이것이 속죄라고 하였다.

▶ 유화(宥和 Propitiatiation)설

신의 진노를 달랜다는 것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달래진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속죄의 한 단면 가운데에는 Propitiatiation이라는 단면이 있다. (레온 모리스가 Propitiatiation 개념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썼는데 그는 성경의 속죄 가운데에는 Propitiatiation 개념이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하였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2일 / 03- 09-2024(토)
출애굽기 22:1-31
찬송 / 장(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배상하라(출애굽기 22:1)

갚을찌니라.
배상

3절.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적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7919) 배상할 것이(369)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 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4376)

7919. 사칼(
sâkal)  שָׂכַל  

1. 바라보다
2. 신중하다
3. 피엘형 : 창48:14.
발음 [ sâkal ]
구약 성경  / 61회 사용

369. 아인( ’ayin)  אַיִן     

1. 무.  2. ~아니다.  3. ~ 없는
발음 [ ’ayin ]
어원  /  연계형 אֵין, ‘존재하지 않다’는 어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무, 공허, 진공, 사 40:23] :
구약 성경  /  787회 사용
4376.  마카르(mâkar) מָכַר   
1. 팔다.   2. 약혼시키다.  3. 민족을 팔다
발음 [ mâkar ]
구약 성경  / 80회 사용


해 돋은 후
- 가택 침입자를 죽였을 경우, 야간과 달리 주간에 살인죄가 성립되는 이유는 밝을 때에는 이웃의 도움이나 기타 방법으로 그를 사로잡거나 내쫓음으로써 살인만은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정당 방어의 차원을 넘어 과잉 방어의 경우에는 주인이 그 책임을 지도록 규정하고 있는 본 규례는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인권이 부정되어지는 것을 금하고 있는 모세 율법의 탁월성을 잘 보여준다<레 25장 강해, 모세의 율법과 고대의 법전들>.

몸을 팔아... 배상할 것이요
- 이처럼 모세 율법이 도둑질에 대하여 엄격한 형벌을 가하고 있는 목적은 사람들에게 큰 경고를 주어 도둑질을 금하게 하려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 이후 타락한 인간에게 주신 명령은 땀흘려 일한 대가로 얻은 소득을 가지고 생활하라는 것이었다(창 3:19).
그런데 도둑질은 이에 역행하여 자신은 땀흘림이 없이 타인이 수고한 대가를 가로채려는 패역 행위이다.
따라서 성경은 이러한 도둑질에 대하여 수차 엄격한 금지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신 23:24; 엡 4:28; 벧전 4:15).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1일 / 03- 08-2024(금)
출애굽기 21:1-36
찬송 / 349장(나 주의 도움 받고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귀를 뚫을 것이라(출애굽기 21:6)

재판장(*, 엘로힘)
- 이는 본래 지존자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명칭이다(창 24:3;수 2:11. 그러므로 70인역은 이를 '하나님의 판단'으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추측컨대 이는 공개된 장소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엄숙히 판단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귀를 뚫을 것이라
- 고대 근동의 관습으로 이것은 완전한 예속(隸屬)과 순종을 나타내는 의식이었던 것같다(Knobel). 왜냐하면 고대 근동인들에게 있어서 귀는 '예속의 기관'이었으니 귀를 뚫린다는 것은 곧 '자유의 상실'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후일 칼타고인들은 종의 표식으로 종의 귀에 귀걸이를 매달았다고 한다(J. P. Lange). 한편 키케르(Cicero, B. C. 106-43)는 그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리비아 노예에게 '네 귀를 충분히 뚫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다.

십계명과 613가지 규례

하나님의 교회 성도들인 우리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하여 자녀를 낳습니다.
자녀를 낳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법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은 종에 대한 법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남종을 향한 5조이고, 7~11절은 여종을 향한 5조입니다.
종들은 6년간은 의무적으로 종살이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7년 째 되는 해에는 무조건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인과 살다보니 주인이 너무나 좋고, 나가서 자유인으로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주인의 종으로 사는 것이 더 좋다는 결심이 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처리하는 법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송곳으로 귀를 뚫은 종은 어떤 종입니까?
이 시대 스스로 자진하여 귀를 뚫은 종은 어떤 그리스도인입니까?

첫째, 종신토록 상전을 섬기기로 자원함(영원한 하나님의 종) 6절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

다른 사람의 종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종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에는 종이 되는 경우를 몇 가지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1. 빚을 갚지 못해서 종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레 25:39).
2. 도적질한 것을 배상할 능력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한 것을 배상하라고 하십니다(출 22:3).

그런데 이런 저런 이유로 종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6년만 참고 종살이 하면 7년째 되는 해에는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 종의 노동 연한을 ‘6년’으로 정한 기준은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6일간 일하시고 제 7일에 쉬셨다는 데 있습니다.

제7년에 자유함을 얻은 종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함을 획득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
것은 우리가 지금 죄의 종으로 살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언젠가는 자유함을 주실 것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그런데 6년을 종으로 살고도 “나는 내 주인이 너무 좋고 내 처자가 좋아서 이 집을 떠나지 않겠다” 라고 결단하면 주인은 그를 재판장에게 데리고 갑니다.

재판장은 그 종의 의사를 확인하고 문설주에 종의 귀를 대게 합니다.
그리고 송곳으로 귀를 뚫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종이 되었다’ 라는 표시입니다.

자원하여 귀를 뚫은 종은 어떤 종입니까?
그는 종신토록 상전을 섬기기로 자원한 종인데, 이것은 영원히 하나님의 종으로 살기를 자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한번 구멍 뚫은 것은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사용하십니다. 

미국의 어느 주일학교 예배 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헌금 시간이 되었습니다.
모든 아이가 헌금을 하는데 한 아이만 헌금은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앉아 있었습니다.
담임 교사가 아이를 따로 불러 사정을 물어보았더니 아이는 집이 너무 가난하여 헌금할 돈이 없어 대신 그 시간에 기도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일화

선생님은 무슨 기도를 하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하나님께 내 몸과 생명과 내 일생을 바치겠다고 기도드려요.”
그 말에 감동한 선생님은 아이를 격려하고 나서 약간의 돈을 주면서, ‘잔돈으로 바꿔 매주일 1달러씩 헌금하라’고 말했습니다.

몇 주일이 지나자 매주 꼬박 꼬박 헌금을 하던 소년이 더 이상 헌금을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다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잔돈으로 바꿔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헌금을 했는데, 사먹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어요.
사먹으면 죄를 지을 것 같고... 그래서 지난 주일에 몽땅 바치고 이제는 다시 기도만 하기로 했어요."

어려서부터 이렇게 성실하게 기도하던 소년이 바로 1884년 부활절에 당시 미국인들에게 불모지나 다름 없던 조선 땅에 건너온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님입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먼 오지인 한국에 와서 평생을 귀에 구멍 뚫은 종으로 자신의 삶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여러분은 귀에 구멍 뚫은 종입니까?
여러분은 종신토록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하셨습니까?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가장 귀한 자유까지 포기하고 자원하여 영원한 주님의 종이 되기로 헌신하셨습니까?

프랑스 군대의 최고의 명사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군인 봉급을 절약하여 조그마하고 아담한 집을 샀습니다.
그 집은 담쟁이 덩굴이 우거지고 각종 꽃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집이었습니다.
그가 은퇴하여 평화롭게 이 집에서 살 수 있을 때를 손꼽아 기다리던 그 무렵 보불전쟁이 발발했고, 독일군이 이 조그만 마을을 점령하여 그의 집을 병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어느 날 이 명사수인 병사는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의 대포 곁에 서 있었습니다.
그 때 그를 지휘하는 장군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자네, 저기 저 시골집이 보이나?”
병사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작은 집을 장군이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집에 독일군이 들어가 있네. 잘 겨냥하여 일격에 날려버리기를 바라네,” 장군이 말했습니다.
명령에 복종한 이 병사는 그가 가진 기량을 다하여 장군이 지적한 집을 겨냥했습니다.
무서운 굉음이 터지면서 그 아름다운 집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잘 했군,” 하며 장군이 병사를 돌아다 보았을 때, 병사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자네 왜 그러나? 무슨 일이야?”
그러자 충성스러운 병사는 대답했습니다. “장군님, 제 집입니다.”
이 병사는 그가 사랑하는 조국을 위하여 그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기꺼이 버렸습니다.

우리도 십자가에 피흘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의 가장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자원하여 귀에 구멍 뚫어 영원한 하나님의 종이 되는 엄숙한 결단의 순간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상전을 사랑하니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자유를 포기한 종) 5절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 

누구든지 잠시라도 종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부득이 종이 될 뿐입니다.
그런데 6년만 참고 주인을 섬기면 이제 자유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자원하여 귀 뚫은 종은 6년 만에 주어진 자유를 스스로 거절하고 영원한 종이 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6년 종은 임시 종이요 귀 뚫은 종은 영원한 종입니다.
이 사람은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자유를 스스로 포기한 것을 가리킵니다.

귀를 뚫은 것은 자신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자유를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아낌없이 포기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사실 7년째의 종의 해방은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은 주인의 신앙적인 행위에 기인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6년간의 종 생활을 마친 자에게 신분상의 자유만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자립의 기틀까지 마련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해방되는 종들이 빈손으로 출발하게 되면 분명히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또다시 빚을 지고 종이 되는 생활을 반복할 것이기 때문에 그를 6년 간 부렸던 주인으로 하여금 얼마의 물질을 주어 보내도록 배려를 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15:12-14
“···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영원히 주인의 종으로 살겠다고 자원하는 종의 마음을 보십시오.
귀에 구멍 뚫은 종, 상전을 사랑하여 자유인이 되기를 포기한 종 --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사역을 맡기십니다. 

링컨이 어느날 시장을 걷고 있었습니다.
노예시장이었습니다. 한 가족을 진열하여 놓고 흥정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이 뿔뿔이 헤어져 따로따로 팔려가는 현장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여종이 필요하다고 그 가정의 예쁜 딸을 사가려고 하니까 딸이 안 떨어지겠다고 부등켜 안고 몸부림치면서 막 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링컨은 이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다가가서, 그 종의 가정 식구를 모두 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의 몸값은 내가 다 지불하였네. 그대들은 이제 자유네.” 그때 그들은 말했습니다.
“주인님, 우리는 주인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리고 주인님의 영원한 종이 되겠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스스로 거절하고 자원하여 종이 되기로 선택한 종이 ‘귀에 구멍 뚫은 종’입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의 자유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필요한 시간을 쓰는 사람, 내가 가진 물질을 다 쓸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하고 자원하여 주님께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리는 사람, 내 몸의 편함을 누리기를 거부하고 주님의 일을 위해 몸을 불사르기를 자원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귀에 구멍 뚫은 종입니다.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 C. T. 스터드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수석을 달리는 우수한 학생이었을 뿐 아니라 아주 탁월한 크리켓 선수였습니다.
그는 크리켓으로 영국 전체 시합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보장된 출세의 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캠퍼스 집회에 참여했다가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가겠노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열정 때문에 그는 부와 명예를 모두 버리고 선교사가 되는 훈련을 마치고 중국 땅으로 갔습니다.

중국에서 10여 년을 섬긴 후에 그의 육신은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쇠약해졌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와 투병 생활을 하던 중 그는 다시 아프리카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제정신이 아닌 결정이라며 그를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스터드가 남긴 말은 모든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깊은 의미를 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날 위해, 날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 바치는 희생은 그 어떤 것도 지나친 희생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우리의 헌신은 그 이하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헌신은 그 이하로 만족해서도 안 되고 만족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자원하여 귀에 구멍 뚫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자원하여 귀에 구멍 뚫은 종입니까?
주님을 사랑하여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주께 헌신하기로 작정하셨습니까?

3. 귀를 뚫은 귀를 부끄러워하지 않음(종의 직분을 자랑스러워하는 종) 5절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 

아무리 종이라도 귀에 구멍을 뚫지 않으면 종의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귀에 구멍을 뚫으면 평생 종이라는 표시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종은 자원하여 귀에 구멍을 뚫은 것이라 이 흔적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종이라고 깔보는지 모르지만 본인은 조금도 숨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귀에 구멍 뚫은 종은 종의 직분을 자랑스러워하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성경 인물 중 종의 직분을 그리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사람으로 사도 바울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가 쓴 서신서의 초두에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종 됨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빌립보서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디도서 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

바울 사도는 자신의 종 됨을 자랑스러워하며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전도하다가 매를 맞았고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복음으로 인해 받은 많은 상처와 고통의 자국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그의 자랑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이 흔적을 ‘예수님의 흔적’이라 하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몸에는 바울처럼 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흔적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신학, 철학, 음악, 의학 등 4개의 박사학위 소지자인데 하나의 밀알이 되는 사명으로 아프리카 오지에서 흑인들을 위해 일평생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아프리카에 온 방문객이 그의 헌신을 보며 “당신 같은 사람이 꼭 이렇게 고생스럽게 살아야 합니까?” 라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슈바이처는 “나를 동정적으로 보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손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아십니까?” 라고 했다고 합니다.

성 프랜시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흔적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정말 몸에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이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프란시스는 아무에게도 이 비밀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그에게 난 못자국, 창자국, 채찍자국을 그의 옷을 빨래하던 여인만이 알았습니다.
빨아도 빨아도 자꾸만 피가 흘렀다고 합니다.
프란시스는 온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던 주님의 참 종이었습니다.

귀에 구멍 뚫은 종은 사람들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그 표를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당당하게 살아간 종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주님의 종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탈북자인 <이순옥> 여사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호주를 비롯한 곳곳에서 북한의 참상을 증언했습니다.
그 분은 북한의 감옥과 교화소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던 분입니다.
그 증언이 책으로 엮어져 나왔는데, 그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교화소 안에는 용광로 시설이 있는 작업장이 있는데, 그 곳에서는 무기 생산에 필요한 것들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 곳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하게 됩니다.

옷도 거의 입지 않고 고무로 된 치마만 걸친 수백 명의 사람들을 보게 되었는데, 멀리서 보니 그들은 머리가 둘 달린 괴물 같이 보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가까이 가 보니 고문을 당해 머리에 혹이 하나씩 달려 있었고, 척추가 내려앉아 꼽추처럼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혹독한 형벌을 당했으면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그곳의 간수들은 그들을 <하늘을 믿는 미친놈들>이라고 욕을 했다고 합니다.

하늘을 믿는 이 사람들은 누굴까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간수들은 징을 박아 만든 구두로 그들을 밟고 짓이기곤 했습니다.
그들은 피투성이가 되고 뼈가 부러져 나갔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서도 그들은 <주여, 주여>하면서 찬송을 부르고 있었고, 그 얼굴에는 고통이 보이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얻어맞다가 죽으면 시뻘건 쇳물을 갖다 부어 숯처럼 만들었는데, 공장 안에 살타는 냄새가 진동했다고 합니다.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북녘 땅에서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주님의 종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지하교회 성도들이 계십니다.
남한의 교회는 북한 인권의 개선을 위해, 그리고 북한 성도들의 신앙의 자유를 위해 연합하여 움직여야 하는 절체절명의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들은 왜 그런 고생을 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나요?
천국에 가 봤습니까?
그들로 하여금 끝까지 버티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비록 천국에 가 보지 않았지만 성경책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천국을 믿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과 고난을 오히려 천국 가는 보증수표로 생각하고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의 종 됨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피 값을 지불하고 사셨다는 말입니다.
그 흔적이 복음이 되어 여러분의 영혼에 새겨져 있습니다.
지금 나는 자원하여 귀에 구멍 뚫은 사람들로 부름받아 나와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제 영원한 하나님의 종이요,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주님의 종 됨을 자랑스러워하는 종이어야 합니다. 

이제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자기가 가기 원하는 곳으로 마음껏 달려가시겠습니까?
아니면 힘들고 어렵지만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로 기도하며 걸어가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에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고, 여러분의 육체에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며, 여러분의 시간에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고, 여러분의 물질에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는 참된 헌신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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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싱(Piercing)

요사이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피어싱(piercing)이 상당히 유행을 합니다.
피어싱이란 몸의 각 부위에 구멍을 뚫어 고리들을 끼우는 것을 말하는데 예를 들자면 귀, 입술, 눈꺼풀, 코, 혀, 배꼽 등등 어느 부위든지 뚫어서 고리를 끼우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 피어싱이란 게 마시면 마실수록 계속 더 마시고 싶은 콜라처럼 살을 뚫으면 뚫을수록 계속 뚫고 싶은 욕구를 일으키게 한다고 합니다.

대개 피어싱을 하는 사람들은 뚫는 순간은 만족을 느끼나 다 채워지지 못한 다음 욕구를 위해 뚫을만한 또 다른 부위를 찾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까지는 잘 하지 않지만 귀걸이는 대개 하는 편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도 귀걸이는 웬만하면 한 번쯤은 해 보셨지 않습니까?
그러나 귀걸이의 유래를 바로 알고 하는 사람은 별로 드문 것 같습니다.
귀걸이가 어떻게 유행되었느냐고요?

오늘의 말씀이 설명을 해 주고 있는데 즉 한 가정의 종(노예)이 그 주인이 좋아서 그 주인을 영원히 섬기기 위한 종의 표시로서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서는 율법을 따라 종에게는 두 종류가 있는데 일시적인 종과 귀를 뚫은 영원한 종입니다.
귀를 안 뚫은 종은 평생 종노릇하는 사람이 아니라 6년 동안만 주인에게 속하여 있다가 그 기간이 지나면 본래의 자유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즉 안식년이 되면 주인도 그 종을 놓아주어야 하고 그 종도 자유롭게 나갈 수 있으나 대신 혼자 주인의 집에 들어왔으면 혼자 나가면 됩니다.

가령 장가를 들어서 왔으면 아내와 함께 나가게 되나 만일 그 아내가 주인이 돈을 주고 사와서 그 종에게 아내로 준 상태라면 아내는 물론 그 낳은 자식도 주인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정의 종(노예)이 그 주인이 좋아서 그 주인을 영원히 섬기기를 원한다면 그 종이 자원하여 영원한 종이 되는 표시로서 귀를 뚫는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06절).
그러면 이때부터 그 종은 종이지만 행복하고 즐거움이 있는 생활을 누리게 되는데 저는 바로 귀를 뚫은 행복한 종에 대하여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노예가 되었습니까?


1. 전쟁에서 붙잡힌 사람을 노예로 삼는 경우입니다(민 31:09; 왕하 05:02).
이것은 전쟁에서 가능한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오기 위해서와 적군이라도 생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생긴 법입니다.

2. 너무 가난해서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을 노예로 파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노예로 팔아 주인의 보살핌 속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게 되는 피치 못할 사정인 것이지요.

3. 자녀를 양육할 수 없어서 노예로 파는 경우입니다(출 12:02, 07; 레 25:39).
물론 이것도 주로 가난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종이란 얼마나 불행한 신분입니까?
자유는 고사하고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 인간성을 부인 당해야만 하는 불행한 존재입니다.

옛날 종의 비참 성에 관한 기록을 보면 종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으며 주인의 허락 없이는 결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오직 주인이 짝지어 주는 대로만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결혼하여 잘 사는데도 주인이 이혼하라면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이혼도 해야 했는데 그만큼 주인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주인은 마음대로 종들을 희롱할 수 있었고, 종들은 주인의 갖은 학대와 힘든 노역에도 불평 한마디 못하고 절대적인 복종을 해야 했으니 주인의 권세는 대단했고 동시에 종이 된다는 것은 비극 중에 비극이었습니다.

노예제도가 가장 성황하던 로마 제국 당시에는 종들이 무려 육천만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최대의 행운은 종으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최고의 행복은 종의 생활을 하던 자가 종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전해지는 유대인 남자들의 기도문 중에 의하면 남자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다음 세 가지의 감사 기도를 했다고 하죠.

1.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2.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3. 종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간 부정과도 다름없는 노예제도를 언약 백성 가운데 율법으로서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 2절의 의미를 잘 살펴보면 히브리인의 종의 제도가 한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즉 그 기간이 6년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요.

히브리 종은 육년간 고용된 계약 노동자로서 종이 그 기간이 지나 자유함을 얻을 때는 더 이상의 값을 지불하지 않고 무조건 자유민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주변 상황으로 볼 때 파격적인 것으로서 노예제도의 근본 정신이 사랑과 자비에 있음을 신명기 15:12~14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15:12-14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 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이렇게 보면 종이 실제로 고난의 종살이를 하는 것은 계산적으로 하자면 얼마가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삼년은 자신의 몸값이나 부채의 반환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고, 그리고 한 이년간은 그 동안 먹고 산 것에 대한 값으로 여기고, 한 일년은 나아갈 때 얻는 물품 값이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요?

이처럼 당시 히브리인들의 종에 대한 규례는 다른 여러 종에 비해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규례는 종의 규례가 아니라 물질적으로 어렵게 된 사람을 돕는 규례라는 주장을 할 정도였습니다.
물질이 없어 부채를 지거나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을 데려다가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살만큼 준비시켜 내 보내는 제도가 바로 히브리 종의 제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50년째가 되는 희년이오면 그때는 노예가 된 그 사람을 놓아주는 것은 물론이고 빚으로 잡혔던 농토까지도 전부 되돌려주어야 했습니다.

자원하는 영원한 종 

같은 유대인들끼리 종을 삼았을지라도 칠년 째 되는 안식년에는 반드시 자유인으로 신분 환원을 시켜 주어야 함이 법입니다.
그러나 종 된 사람이 특수한 사정이 있어서 주인을 위해 평생 종이 되겠다고 하면 재판장의 허락을 받아 송곳으로 그 귀를 뚫어 영원한 종이 되는 의식을 가집니다. (5-6절)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

재판장(엘로힘) : 이는 본래 지존자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명칭인데(창 24:3; 수 02:11) 70인 역은 이를 하나님의 판단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 추측컨대 이는 공개된 장소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엄숙히 판단 받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귀를 뚫을 것이라 : 고대 근동의 관습으로 이것은 완전한 예속(隸屬)과 순종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Knobel).
왜냐하면 고대 근동인들에게 있어서 귀는 예속의 기관으로서 귀를 뚫린다는 것은 곧 자유의 상실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귀를 뚫은 종은 아내나 자식들 때문에 주인을 떠날 수가 없는 그야말로 자원하는 종으로서 이 사람은 평생토록 그 주인을 섬깁니다.
해방될 날이 없지요. 해방이라면 그 종이 죽는 날이 아니겠습니까?
혹 이 종이 마음이 바뀌어 주인의 집에서 나가려고 할 때 주인이 재판장에게 이 사람은 귀를 뚫은 종입니다 라고 말 한 마디만 하면 재판장은 그를 떠나지 못하도록 법적인 제재를 가하는데 귀를 뚫었던 흔적이 그를 평생 종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귀를 뚫은 종은 빚 때문이 아니라 주인의 고마움과 사랑 때문에 자발적으로 노예가 된 자로서 그에게는 안식년을 맞아 서 귀를 뚫기 전 주인을 계속 섬기거나 떠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상전과 자신의 처자를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 자유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으니 이제부터 그는 비천한 노예가 아니라 진정 사랑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자유를 허락한 그 주인이 너무 고맙고 좋아서 자유를 포기하는 종이 주인님! 제가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유하는 것보다 주인의 집에서 영원히 종으로 사는 것을 원한다면 그 종을 어떤 종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유의 종 다른 말로 말하면 사랑의 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주인은 그날부터 그 종을 예전처럼 부리지 않고 마치 자기 아들처럼 대하게 됩니다

자원해서 된 종, 사랑의 종, 자유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이 종이 짊어지고 다니는 종의 멍에는 결코 무거운 멍에가 아님을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도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한다면, 그리고 충성한다면 얼마나 그 신앙이 값어치가 있겠습니까?

가령 아내가 여보,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요 내가 평생 당신을 섬기겠어요 라고 자진해서 고백한다면 이것은 진짜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섬긴다면 그 멍에는 결코 무겁지 않을 것이며 그 대상이 주인이든 남편이든 아내든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주님의 종이라는 말을 아주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까? 이 말은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수직적 명령계통으로 인정하겠다는 말이며 성도간에는 모든 일을 섬기는 자세로 살겠다는 의사표시입니다.

나는 어떠한 종이며 어떠한 생활을 하여야 합니까?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절에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던 바울이 13절에서는 왜 또 다시 종노릇을 하라고 명하고 있는지를 신중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먼저 무엇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까? 죄에서 자유, 사단의 지배에서의 자유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자유의 삶, 구원의 삶을 살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자유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를 얻었으므로 이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기회를 삼아 타락과 방종의 기회, 다시 사단에게 지배를 받는 자리에 떨어지는 일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13절의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는 경고의 말 속에는 그 자유로 주님 안에서 서로 종노릇하며 살아가라는 적극적인 추진력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귀를 뚫은 종은 스스로 종노릇을 하는 사람 아닙니까? 자원하는 종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주님을 향하여, 성도를 향하여 귀를 뚫은 종이 되어야지요. 기쁨으로 종노릇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종노릇을 하여야 합니다.

참 자유를 주신 분, 우리에게 참된 죄사함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신 우리 주님의 종노릇을 하여야 합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불행한 처지의 노예처럼 부리려고 종이 되라, 종노릇하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주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면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은 저의 주인이십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주님의 종만이 아니라 서로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13 ....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수직적인 관계의 종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의 종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길 뿐만 아니라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섬겨야 하고 그들의 종이 되기를 자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피차에 서로 복종할 수 있고, 피차에 종노릇 할 수 있다면, 우리들의 인간 관계는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풍요롭고, 얼마나 아름다워지겠습니까?

목사가 성도들을 섬기고, 성도들이 목사를 섬기는 관계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교회는 얼마나 사랑이 넘치겠습니까?
아내가 남편을 섬기고 남편이 아내를 섬겨 피차에 복종한다면 그 부부의 삶이 얼마나 보기 좋겠습니까?
아우가 형을 섬기고 형이 아우를 섬기는 가정, 경영주가 노동자를 섬기고 노동자가 경영인을 섬기는 직장은 얼마나 생산성이 높겠습니까?

인간 관계가 파괴되는 이유는 교제의 근본 동기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심지어 서로 잡아먹으려고까지 하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면 자연히 서로를 섬길 수 있고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 종노릇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주님의 종노릇을 해야 하고 주님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주님이 사랑하는 내 남편, 내 아내, 내 이웃들을 섬기는 종노릇을 해야 합니다.

자원하여서 귀에 구멍을 뚫었던 종들처럼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종으로서의 자세를 가져야 됩니다.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세대 서로 종노릇을 하지 못하는 이 세대는 서로 잡아먹으려고 하며 다르게 표현하면 서로 시기 질투하여 이용하고 착취하려 하는 비극의 세대입니다.

분명히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사랑의 종노릇을 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종이라는 단어 얼마나 비천한 단어입니까? 인간이면서 인간의 대접을 받지 못한 체 살아가는 비참한 처지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종이란 단어를 가장 영광스러운 단어로 바꾸어 놓았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종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6- 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제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D. L. 무디는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할 때 그가 얼마나 많은 종을 거느리고 살았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종노릇을 했느냐 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지배했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겼느냐 입니다.

종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 이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성도 여러분께서 이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진정으로 이웃을 섬기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로부터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종이 되셨다면 우리가 종이 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종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종이 세상으로 나갈 자유를 포기하고 주인의 종이 되고자 귀를 뚫겠다는 것은 상전의 은혜에 감사하여 그 상전을 잘 섬기고 가정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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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히브리 노예에 대한 율법 규정 중 일부분입니다.
노예에는 전쟁 노예 히브리 노예 두 종류가 있습니다.
전쟁 노예는 전쟁 중에 사로잡힌 포로 출신으로 노예가 된 이방인들입니다.
반면 히브리 노예는 동족 중에서 노예가 된 사람입니다.
히브리인이 노예가 된 이유는 주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 타인에게 손해를 끼쳤는데 이를 배상할 돈이 없는 경우, 몸으로 때우기 위해서 노예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노예가 육년 동안을 섬긴 후 제 칠년에는 자유를 주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에도 본문과 같은 규정이 있는데 약간 다릅니다.

"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신명기 15:13,14)

보낼 때 공수로 보내지 말고 후히 주어 보내라는 부분이 신명기에는 추가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자유한 종이 이후에 먹고 살 밑천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빈 손으로 나가게 되면 경제적 기반이 없어서 또 다시 다른 집 노예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6년을 섬기고 제 칠년에 자유를 주었을까요?
이는 7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안식년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규례는 7년을 일곱번 보낸 49년을 지낸 후 50년마다 돌아 오는 희년 규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희년에는 노예 해방 뿐 아니라 노예가 되기 전에 저당 잡혔던 농토까지 돌려 주는 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을 자비의 법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 제도는 경제적으로 파산난 사람을 일거리를 주고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입혀 주고, 보낼 때는 자립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준비시켜 보내 주는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이스라엘 버전의 빈민 구제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는 일시적인 노예 신분은 있었지만, 사실상 노예 제도는 없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법을 가진 민족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게 한 번 노예는 영원한 노예였습니다.
자신은 물론이고 처자식까지 노예 신분은 세습되었습니다.
어떤 주인이 노예를 딱 육 년만 부려 먹고 퇴직금까지 두둑이 챙겨서 자유를 주겠습니까?
육년을 일하면 기업체로 치면 과장 직급으로서 가장 일을 잘 하고 열심히 할 때입니다.
종을 풀어 주려고 할 때 주인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실제로 예레미야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이 규례를 잘 지키지 않는 주인들이 있어서 하나님께 심한 책망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인들이 종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지 않자, 이제 하나님께서는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대신 자유를 주어 그 주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규례를 이처럼 중요시 여기실까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보통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되는 특별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이용하고 착취하는 일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절대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서로에게 남이 아닙니다. 그들은 한 아버지 아래 있는 형제요 자매들이기 때문에 영원토록 종 삼는 일이 없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규례에서 정말 특별한 것은 스스로 해방되기를 거부하는 종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5절에 보면 첫째는 주인을 너무 사랑해서 둘째는 처자를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 계속 종이 되길 소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종살이 도중 결혼한 처자는 주인에게 소유권이 있어 함께 데리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선택은 전적으로 본인의 자유에 속했습니다. 처자를 사랑해서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은 그럭저럭 쉽게 수긍이 갑니다. 그런데 주인을 사랑해서 자유를 뿌리치고 스스로 종이 되기를 원한다니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러면 이런 선택을 받은 그 주인은 어떤 주인일까요? 그 주인은 분명 인자하고 자비로운 주인일 것입니다. 그는 공의롭고 만사를 공평하게 다루는 주인일 것입니다. 그 주인은 노예를 노예를 여기지 않고 친 자식처럼 친 형제처럼 아끼는 주인일 것입니다.


성경에는 본래 자유하지만 스스로 종이 된 사례들이 여럿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은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아무 누구에게도 빚을 지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이 되어야 할 의무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종이 되신 이유도 역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사랑하는 아버지 성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성부의 뜻을 이루시고자 스스로 종이 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종이 이렇게 영원히 종이 되길 원하는 경우 재판장에게 가서 문에 귀를 대고 송곳으로 귀를 뚫도록 했습니다. 오늘날은 누가 귀를 뚫습니까? 주로 자매들이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귀를 뚫습니다. 또 피어싱이라는 이상야릇한 취미가 있어서 귀 뿐만 아니라 코, 배꼽, 심지어 혓바닥까지 뚫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귀를 뚫는다는 것은 치장이나 취미가 아니라 영원한 예속을 상징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군대에서 "말뚝 박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말뚝을 박는다는 것은 군대에 장기 복무 지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군에서 다른 건 강요하지만, 장기 복무 선택만큼은 본인의 자유에 맡깁니다. 다들 말뚝 박기를 극도로 싫어 합니다. 군에서 가장 심한 저주가 ‘너 말뚝 박아라’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은 그 중에 군대가 좋다고 장기 복무를 신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기 복무를 지원하기 전과 후는 군인이란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신분에 있어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지원 전에는 의무 복무 군인이었지만, 지원 후에는 자원하여 복무하는 군인 즉 직업 군인이 됩니다. 귀를 뚫기 전이나 후나 종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귀를 뚫은 후에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이 됩니다. 의무에 의한 종이 아니라 자원하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 가운데 스스로 속박되기를 결정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원하는 종의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주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래도 아내와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유와 퇴직금도 다 버리고 스스로 종이 됩니다. 사랑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사랑은 그 소중한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은 종이 되기를 기뻐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의무에 의한 종은 6년이라는 의무 복무 기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종은 종신토록 그 상전을 즐거이 기쁨으로 섬기게 됩니다.

두번째로 사도 바울이 생각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 장에서 자신을 종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김남준 목사님이란 분도 항상 싸인을 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노예 김 남준’이라고 서명을 하십니다.
우리는 과거 죄의 빚을 진 자였습니다.
이 빚을 도저히 갚을 수 없어 인생이 파산했습니다.
빚을 갚기는 커녕 날마다 그 채무가 점점 더 늘어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나를 값 주고 사셨습니다.
내 대신 댓가를 지불하시고 빚을 청산해 주셨습니다.
그 댓가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어린 양의 보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피로 우리를 죄의 종 노릇하던데서, 사단의 종 노릇 하던데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또한 우리는 율법과 양심의 의무 아래서 짓눌리던 자들이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율법의 의무 아래서 신음하며 짓눌려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율법의 의를 우리를 대신해서 모두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의를 우리의 것으로 전가시켜 주셔서 우리도 율법 앞에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율법으로부터도 해방되어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죄와 율법로부터 자유케 하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왜 늘 자신을 종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제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 귀 뚫은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을 사랑하고 처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귀 뚫은 종이 된 것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종이 되기를 자청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 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랑 때문에 자원하여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자원하여 종이 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귀를 뚫습니까? 갈라디아서 5장 24절은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송곳으로 귀를 뚫듯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죄악된 성품 곧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 다음으로 종신토록, 영원히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헌신하는 종이 됩니다.

여러분 귀를 한 번 만져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코를 한 번 만져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 분은 어디에 구멍이 뚫려 있습니까? 귀 뚫은 종도 있지만 코 뚫은 종도 있습니다. 코 뚫은 종은 코에 코뚜레가 끼여서 주인에게 질질 끌려가는 종입니다. 코 뚫은 종은 가기는 가되 오만가지 인상을 찌푸리며 억지로 끌려 갑니다. 코 뚫은 종은 주인이 고삐를 당기기 전까지는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달란트 비유에 보면 이런 코 뚫은 종이 나옵니다. 달란트 비유는 첫째 종은 주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이 종은 말합니다. "주님은 나에게 너무 많은 부담과 의무를 지우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이 종을 악한 종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가 악한 종일까요? 이는 그가 주인을 욕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굳은 사람도 아니고 심지 않은데서 거두는 그런 가혹한 사람도 아닙니다. 이 주인은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종은 달란트를 묻어 두는 바람에 결국 주인을 악랄하고 나쁜 사람으로 몰아간 셈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인상을 박박 쓰면서 질질 끌려가는 신앙 생활을 하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저 사람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가혹한 존재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또 그렇게 질질 끌려가며 신앙 생활하는 본인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얼마 전에 러시아 김 에스더 선교사님이 오셨을 때 저에게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니 아직도 기타 들고 찬양을 인도하세요? 나이가 몇인데..."
그런데 찬양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찬양을 통해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는 것이 즐겁고, 찬양 중에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때문에 기쁘게 찬송합니다.
이렇게 메시지를 준비해서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기도하면서 자꾸만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싶고 자꾸만 더 하나님께 기대고 싶습니다.
이제 보니 코에 뚫려 있던 구멍이 어느새 귀 쪽으로 옮겨져 버린 것 같습니다.
도대체 저에게 무슨 일이 있어났던 것일까요?
원인은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 저는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압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 제 영혼에 빛을 비추어서 하나님은 참으로 어떤 분이신지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제가 만난 하나님은 좋은 분이십니다.
이 좋다는 말 속에 온갖 귀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들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이렇게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며 공의로우시면서 능력이 크시고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귀를 뚫어서라도 영원히 그 곁에 함께 있고 싶은 분이십니다.
사람을 돕다 보면 과거 저와 같이 코 뚫은 종처럼 질질 끌려가는 신앙 생활을 하는 분들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너무 안타까워서 속으로 눈물이 흐를 때가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이신데... 참 좋으신 하나님인데 ..."
그리고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우리 속에 새 영을 창조하시어 좋으신 하나님을 알게 도와 주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심령을 우리 모두 속에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코를 뚫어 질질 끌고 가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유 가운데 사랑으로 스스로 속박되어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주를 섬기길 원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이미 우리 속에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새 본성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선물을 받고 즐거이 주님을 따르는 귀 뚫은 종들입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0일 / 03- 07-2024(목)
출애굽기 20:1-26
찬송 /266장(왕의 명령 전달할 사자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십계명(출애굽기 20:2)


십계명(十誡命, .עֲשֶׂרֶת הַדִּבְּרוֹת‬,  Decalogus)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중시하는 계명이자 모세 율법의 핵심이다.
모세 율법은 출애굽기 20:1-23:33의 ‘계약서’
신명기 1장-29장의 ‘신명기 법전’
핵심은 출애굽기 20:1-17, 신명기 5:6-21에 해당하는 열 가지 계명이라고 하겠다.

십계명이란 용어는 히브리어 "아쉐레트 하드바리임"(열 가지 말씀들)에서 유래한 것으로, 출애굽기 34:28, 신명기 4:13, 10: 4에서 언급된다.

출애굽기 34: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 사십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Moses was there with the LORD forty days and forty nights without eating bread or drinking water. And he wrote on the tablets the words of the covenant--the Ten Commandments.

십계(the Ten Commandments)

신명기 4:13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He declared to you his covenant, the Ten Commandments, which he commanded you to follow and then wrote them on two stone tablets.

신명기 10:4
여호와께서 그 총회날에 산 위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The LORD wrote on these tablets what he had written before, the Ten Commandments he had proclaimed to you on the mountain, out of the fire, on the day of the assembly. And the LORD gave them to me.

십계명을 소개하는 출애굽기/탈출기 20장 1절에는 “이 모든 말씀”으로 나오고, 신명기 5장 5절에는 “주님(야훼)의 말씀”으로 나온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히브리 사본과 사마리아 오경, 70인역(Septuagint, LXX), 타르굼, 불가타(Vulgata, 새 라틴말 성경) 등에 근거하여 이를 말씀들, 즉 복수로 수정할 것을 BHS 비형 각주는 제안하고 있다.

십계명은 70인역에서 모두 목적격으로 나타나는데, 출애굽기/탈출기 34장 28절과 신명기 10장 4절은 '투스 데카 로구스'로, 신명기 4장 13절은 '타데카 레마타'로 번역되고 있다.
모두 "열 가지 말씀들"로 번역이 된다.
이 계명들은 출애굽기/탈출기 20장 3-17절과 신명기 5장 6-21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 두 본문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점들이 있지만, 그 순서와 일반적인 내용은 본질상 동일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십계명이 주어진 방법

십계명은 두가지 방법으로 주어졌는 데, 하나는 하나님의 선언이었고, 다른 하나는 두 개의 돌판에 새겨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천둥소리와 번개와 트럼펫의 소리가 널리 펴졌으며, 사람들에게 경외와 존경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였다.

예레미야 31:33에는 사람의 마음 속에 새겨진 것은 언약이며 이것은 사람의 마음도 돌판처럼 딱딱하여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이 새길 수 있으며, 이것은 율법의 영원함을 드러내는 언약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뒤 50일만에 주어졌으며, 그들의 행동규범으로 주어졌다.


개신교 및 유대교에서 사용하는 십계명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3. 주(야훼)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5.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해서는 안 된다.
    (간음하지 말라.)
  8.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하지 말라.)
  9.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0.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지 말라.)


쉽게 외우는 십계명

1.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일. 일절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지니라.
이. 이상한 우상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

3.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지니라.
삼. 삼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사. 사적인 일 핑계 말고 안식일을 지키라.
사. 사업일 하루 쉬고 안식일을 지키라.
죽을 사. 죽어도 안식일은 지키고 죽어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오. 오늘도 내일도 부모님을 공경하라.
오. 오마이 파파 마마

6. 살인하지 말지니라.

육. 육신을 살인하지 말라

육. 육혈포로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지니라.

칠. 칠칠치 못하게 간음하지 말라.

칠. 칠배로 저주받을라 간음하지 말라.

8.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팔. 팔로 도둑질하지 말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구. 구차한 말로 거짓증거 하지 말라.

10.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십. 십 원이라도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9일 / 03- 06(수)
출애굽기 19:1-25
찬송 / 357장(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사장 나라(출애굽기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제사장 - pontiff.  (라틴어) pontificem.

언약(言約) : 신뢰가 중심이다 / covenant
- 말씀 언, 맺을 약

(예) 노아의 언약 - 무지개
       모세의 언약 - 계명(이스라엘 공동체)
      다윗의 언약 - 나단 선지자(다윗의 가문)

계약(契約) : 이익이 중심이다 / contract
- 맺을 계, 맺을 약


제사장 나라

모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이집트)에서 고역과 학대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3개월 만에 시내산에 도착하여 그 아래 장막을 쳤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했습니다.

4절에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새는 새끼를 옮길 때 입으로 물어 옮깁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새끼를 등에 업어서 옮깁니다.
새끼를 등에 없어서 높이 올랐다가 새끼를 떨어뜨리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 등에 업어서 올라가기를 반복합니다.
그것은 새끼에게 나는 훈련을 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런 훈련이 반복될 때 새끼들은 두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독수리는 새끼를 안전하게 다루어 추락하지 않게 하며 스스로 날 수 있도록 성장시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했다는 것은 두려운 상황이 연속되는 가운데서도 안전하게 보호하고 인도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8-14장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역과 학대를 당할 때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갈라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고 애굽 추병들을 수장시켰습니다.
신광야에 이르렀을 때 먹을 것이 없어 아우성이었으나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려 풍성이 먹게 했습니다.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마실 물이 없어 아우성이었으나 반석에서 물을 내어 풍족히 마시게 했습니다.
르비딤에서 아말렉 족속이 쳐들어왔을 때 그들과 싸워 이기게 해 주시고 그들을 완전히 진멸하게 해 주었습니다.
심히 두렵고 무서운 상황에서 하나님이 안전하게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거치면서 나일 강물이 피로 변한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애굽의 군대가 홍해 바다에 몰사한 사건까지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을 심판하신 그 놀라운 사건들을 생생히 두 눈으로 목도하였다.
이제 하나님은 율법을 베풀기 전, 그 구원 사건을 상기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시키고 있는 것이다(사 43:3-7).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 사랑의 팔로 당신의 백성을 보호, 인도하시는 크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말이다(Keil).
이러한 표현은 신명기 32:10, 11, 12에 보다 자세히 나와 있으니 그 곳을 참조하라.

마치 독수리가...새끼를 받으며
- 어미 독수리는 새끼들을 날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둥지에서 새끼들을 떨어뜨려 날게 한다.
그런 후 주위에서 조심스럽게 지켜보다가 새끼들이 힘에 부쳐 떨어질 때는 재빨리 그 강한 날개로 받쳐 결코 새끼들이 해(害)를 당하지 않게 한다.
이런 방법을 반복함으로써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독수리답게 강하고 튼튼하게 키운다.
모세는 바로 이러한 사실에 비유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답게 양육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사랑과 공의로 훈련시키셨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출 19:4).

그 보금자리를...너풀거리며
- 새끼들이 보금자리에서 졸고 있을 때 깨워 날게 하려고 어미 독수리가 그 둥우리를 어지럽게 휘젖는 것을 가리킨다(Knobel, MatthewHenry).

새번역 성경
출애굽기 19:1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초하룻날, 바로 그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

폰티펙스(pontifex)는 교량을 의미하는 '폰스'(pons), '폰트'(pont-)와 '무언가를 만들다, 이루다를 뜻하는 '파케레'(facere)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인도하신 언약적 목적을 제시했습니다.
5-6절에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소유'는 일반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 밖에 없는 매우 값진 아주 귀중한 보석을 의미합니다.
모든 족속 가운데 가장 귀히 여기는 족속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는 하나님과 모든 나라 사이의 중재 역할을 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했을 때 그들 대신 제사를 드려 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의 은혜를 입게 하는 직책으로서,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모든 나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하는 중보역할을 하게 하는 위치에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를 70인역에서는 'βασιλειον ιερατευμα' (왕같은 제사장직)로 번역했는데, 이는 왕처럼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서 중보역할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 번영하여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올라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나라에 계시되고 모든 나라가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거룩한 백성'은 이스라엘이 단순히 경제적 군사적 우위에 있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영적으로 구별된 생활을 하므로 모든 백성이 흠모할만한 영성이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열방 백성이 사모할 만한 독특한 영적 가치(καρισμα)가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장 귀한 존재로 삼는다는 것, 열방 백성이 존중할만한 영적 가치가 있게 하는 동시에 군사와 경제에 있어서도 부강하게 한다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 모든 나라가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중보 위치에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구원하고 안전하게 인도하신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언약을 지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 주신다는 언약적 목적을 제시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에 따른 언약적 요구를 하셨습니다.
5절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고 했습니다.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계를 주관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왕같은 제사장 위치에 오를 수 있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격적인 하나님이기 때문에 언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그리해 주실 만한 인격적인 반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안식일을 지키고... 조건이기도 하지만 마땅한 반응을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사장 나라 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구원하여 인도했으니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하나님이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할 언약적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세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그런 목적으로 가지셨습니다.
그 목적 때문에 반드시 잘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 어떤 외부의 대상이나 환경이나 상황이 그 목적을 헛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할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그에 합당한 반응을 해야 합니다.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19:21. 신칙(申飭)하라
- 거듭 신, 신칙할 칙
- 단단히 타일러 경계함

새번역. 공동번역  / 단단히 일러두어라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려가서 백성에게, 나 주를 보려고 경계선을 넘어 들어오다가 많은 사람이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단단히 일러 두어라.

현대인 / 경고하여라
그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려가서 백성들에게 나를 보려고 경계선을 뚫고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하여라. 그러다가는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것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 19:4-5)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은 베드로를 통하여 교회인 우리들에게 주신 정체성과 동일하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보물 ‘세굴라’로 삼으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케 하기 위함이었다. 사명과 이어지지 않은 은혜와 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라는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들도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갖고 있다. 그런 사명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곧 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은 모든 백성이 제사장으로서 직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에는 아론의 후손들로 이어지는 특별한 제사장 제도가 따로 있었다. 그들은 성전제사 업무를 전적으로 책임 맡은 특수 계층이었다. 그러므로 제사장 나라라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적문직으로서의 제사장 직능이기보다는 존재적 의미 곧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명감을 갖고 살아야하는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제사장 나라 사명을 이해하려면 제사장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제사장을 히브리어로는 ‘코헨’이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세우다’ ‘정착시키다’ 등을 의미하는 동사 ‘쿤’에서 파생된 것으로, ‘서있는 사람’ 곧 ‘봉사하거나 돕는 사람’을 가리킨다. 히브리적 관점에서 ‘서 있다’는 것은 봉사하는 자세를 말한다. 제사장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하며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제사장을 ‘봉사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사 61:6)

제사장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중간 매개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제사장의 사역은 두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

(1) 하나는.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속죄의 재물과 중보기도를 드리는 일이다. 구약시대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을 상대하지 않고 백성 대표로 제사장을 가까이 나오게 하셨다. 제사장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물과 기도를 바치게 하신 것이다.

(2)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과 축복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일이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과 기도를 드릴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민수기 6:24-26에서 볼 수 있듯이, 제사장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는 일이다.

다른 민족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이스라엘의 제사장 나라 사명은 아브라함의 부름에서 이미 예고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주신 약속은, 아브람에게 복을 주어 그의 이름이 창대케 될 것이며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 아브라함의 받은 복으로 말미암아 다른 민족들도 함께 복을 받게 된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로 확대가 되었으며, 그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서 우리들이 해야 할 기본적이면서도 우선해야 할 일은 중보기도이다. 중보기도는 자신을 넘어서서 남을 위한 관심과 배려의 기도이다. 중보기도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응답이 보장되어 있다(약 4:3). 그러면서 중보기도는 자신을 넘어서는 기도이기에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 지는 새로운 경험을 갖게 한다. 우리들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면 성숙한 만큼 더 많이 볼 수 있게 되고, 많이 본 만큼 더욱 기도하게 되는 거룩한 순환이 이루어진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하나님의 뜻은 제사장 나라로서 우리들이 정체성을 회복한 아름다운 모습일 수 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8일 / 03- 05(화)
출애굽기 18:1-27
찬송 / 279장(주 하나님의 사랑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제 내가 알았도다(출애굽기 18:11)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히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Now I know that the LORD is greater than all other gods, for he did this to those who had treated Israel arrogantly.

이제 내가 알았도다
-
'이제'란 말의 히브리어는 '아타'로서 '지금에야', '방금에야'란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현재를 시점으로해서 과거와 미래의 인생관이 전적으로 변화되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내가 알았도다'란 말은 히브리어의 '야다에티'로서 '내가 깨달았다. ' 또는 '내가 알아차렸다'라는 의미의 현재형 동사이다.
이것은 과거에는 몰랐던 사실을 이제 비로소 분명히 깨닫고 있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 이드로는 여기서 다른 모든 이방신, 즉 자기가 섬기던 신을 포함하여 애굽의 모든 여러 신들이나 다른 부족들의 신들보다 여호와의 능력이 더 위대함을 증거하였다.
그런데 이 표현을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즉 다신교(多神敎) 사상의 표현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단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함을 다른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들과 비교하여 수사학적으로 강조한 것 뿐이다.
즉 이것은 홍해 바다에서 구원받은 후 이스라엘이 올렸던 찬양이나(15:11), 시편의 노래 가운데 자주 나타나는(시 136:2, 3) 표현과 같은 것이다.


남아공 올리버 판사의 고백

그는 직장을 잃었지만 그 순간 그의 영혼을 찾았다

엘런 페이튼(Alan Paton)이 “당신의 땅은 아름답다(Ah, But your Land is beautiful)”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 속에서 올리버 판사의 그 섬김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흑백 차별이 심한 나라였습니다.
흑백 차별이 한참 심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최대 도시 요하네스버그에 흑인 교회인 성시온 교회에서 고난주간에 목요일 날 성찬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세족식에 참여할 3명의 신자를 선정하였습니다.
그런데 2명의 발을 씻겨줄 사람은 정하였는데 한 명을 결정하지 못했고 결국 저명한 백인 판사를 초청했습니다.

'쟌 크리스티안 올리버(Jan Christiaan Oliver)' 라고 하는 판사입니다.
이분은 대법원장 서리직을 수행하고 있었고 차기의 유력한 대법원장 후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예배 순서 가운데 세족식이 있었어요.
누구나 자기가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는 행사입니다.
예수님이 성만찬 하시고 세족식 하신 것처럼, 발을 씻어주신 것처럼 그날 예배 순서에 세족식이 있었습니다.
사실 올리버 판사는 그 순서가 있는지 모르고 참석을 했어요.
그 예배에 참석하는 것조차도 백인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부터 한 사람, 한 사람 나와서 발을 씻기 시작하는데 올리버 판사 순서가 되었을 때 슬그머니 뒤로 일어나 나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앞으로 나와서 한 흑인 여인 앞에 대야를 놓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흑인 여인은 그 판사님 집에서 30년 동안 종으로 일하고 있는 마르다 포투인(Martha Fortuin) 이라고 하는 여종이었습니다.
마르다 포투인은 30년 동안 올리버 판사의 집에서 그의 아들과 딸들을 돌보았고, 그들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런데 그 흑인 여종 앞에 판사가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종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리고는 마르다의 양발에 입을 맞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보던 그 여종도 울고, 판사도 울고 갑자기 온 예배당 안이 숙연해졌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백인 사회에서 크게 이를 문제 삼았고, 결국 판사직을 박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장 직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담임목사님이 너무나 죄송했어요.
자기 교회 초청했다가 판사직을 잃게 되니까 사과하려고 그의 집에 찾아갔습니다.
그때 올리버 판사가 말합니다.

“성 목요일에 당신의 교회에서 행한 예식에 참여한 일은 나에게 판사로서 한 어떤 중요한 일들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더 이상 그것에 대하여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판사 직도, 사회의 다른 지위도 무덤에 갈 때는 먼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먼지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감사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 이 이야기를 기록한 저자 엘런 페이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그의 직장을 잃었지만, 그 순간 그는 그의 영혼을 찾았다.”
올리버 판사는 백인 우월주의가 지배하는사회에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차기 대법관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는 사회의 윤리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





병행구조(parallel structure)
출애굽기 18장과 창세기 14-15장의 경우

모세를 방문한 이드로

내용개요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은 서서히 민족 공동체로 형성되어 갔다.
본장에서는 이드로의 방문을 계기로 모세가 이스라엘 공동체를 운영해 나갈 최초의 행정 조직을 세우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의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출애굽 한 모세를 찾아왔다.
하나님의 사명자로 부름받아 공식 생애를 살고 있던 모세에게 뒤늦게 그 처자들이 나타난 것이다(1-12절).
이튿날 백성들의 송사를 혼자 처리하는 모세의 모습을 보고, 백성 중에 재덕이 겸비한 자를 뽑아 모세를 대신해 행정 업무를 담당시키도록 권고하였다. 이에 모세는 이드로의 말대로 각 지위대로 행정을 담당할 자를 세웠다(13-27절).

모세의 장인 이드로(호밥, 사사기 4:11. 르우엘, 출애굽기 2:18)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 근방에 머물렀을 때 모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동반해서 모세를 찾아왔습니다.
이드로는 모세로부터 하나님께서 애굽인에게 하신 일들을 듣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이튿날 모세의 재판 광경을 본 이드로는 겸손한 자세로 모세에게 재덕이 겸전한 자를 세워 업무를 분담할 것을 조언하자 모세는 이를 받아들입니다.

영적교훈

모세는 백성들의 송사를 처리하기 위하여 혼자서 하루 종일 수고하였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개인적으로 모세의 기력을 쇠하게 하고 백성들로서는 송사가 지연되는 불편을 겪게 하였다.
마침내 행정관을 세움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전체 공동체가 더 원만히 움직여 나가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도 혼자의 힘이 아니라, 성도들이 서로 힘을 합쳐 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교훈해 주고 있다.
모든 일을 혼자 행하려는 것은 오히려 지치고 낙심케 하기 쉽고, 성도들의 공통된 영적 발전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일은 모든 성도들이 함께 섬김으로 주 안에서 성숙된 성도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고린도전서 13:9~12)

신학의 한 분야 가운데 ‘변증학’이라는 유신론증의 과목이 있습니다.
이 과목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 과목의 내용 가운데 보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는 것입니다.

어떤 섬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섬에 새가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섬에서 새의 발자국을 하나만 발견하면 됩니다.
그러나 새가 살았던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섬을 샅샅이 뒤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명이 훨씬 쉽다는 것입니다.

섬에서 발자국 하나만 발견하면 “야, 정말 새가 살았구나”라고 탄성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하나만 발견하면 “이제야 내가 알았도다”라고 탄성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숲 속에서 동물 발자국을 찾고, 섬에서 새 발자국을 찾아 뒤쫓으려면 어떻게 합니까?
집중과 침묵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발자국을 찾고, 일상의 모든 사건에서 하나님의 손자국을 발견한다면 우리의 삶은 무한히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발자국, 손자국을 발견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극적인 동기가 필요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이제 내가 알았도다”라고 탄성과 감동이 우러나게 될 것입니다.

조각가 로댕은 “나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다시 발견했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있던 것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재발견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해 아래 새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발견하는 동기가 필요하며 중요합니다.

요즘에는 재창조, 제2의 건국, 재 창립 등의 용어를 많이 씁니다.
이런 것들은 이미 있던 것들을 새로운 자세, 새로운 비전,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의지를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에도 이런 새로운 의지가 필요한 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왕이 죽은 후에 이사야 6:5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잘 알고 있던 하나님을 다시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탕자는 집을 나간 다음에 있던 돈을 다 허비하고 돌아와서 비로소 아버지를 새롭게 만납니다.
같은 집이었고, 같은 가족이었고, 같은 아버지였지만 새롭게 느끼며 맞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가 닭이 울 때까지 자신의 하는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닭이 울자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이제야 알았습니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순절의 성령 충만을 경험한 다음에 비로소 “이제야 주님의 뜻을 알았습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드로는 이방인입니다.
그렇지만 여호와 종교의 제사장이었습니다.
모세
를 권하여 사법제도를 창설할만큼 통솔력이 비범한 미디안의 추장이었습니다.
사위인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행적을 보았습니다.
그 때 이드로는 “이제 내가 알았도다”라고 탄성을 지릅니다.

여러분, 이드로가 이 말을 할 때의 감격을 느끼십니까?
흥분과, 감동과, 기쁨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드로의 모습을 보십니까?
우리도 이드로와 같이 하나님의 행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다시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발견한 고백입니다(11절)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이드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듣고 하나님의 크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합니다.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재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우주적 힘’, ‘제일 원인’, ‘부동의 동자’ 등의 말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어떤 말로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왜 창세기를 기록했을까요? 창세기는 그들의 역사인데 왜 창조 기사를 역사에 썼을까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다른 신들은 다 헛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위대하시고 크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란 말입니다.

일본의 어느 목사님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러 갔습니다. 폭포를 보고 너무 좋아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함께 구경하고 있던 캐나다 목사님이 보니 누군지는 모르지만 키가 자그마한 일본인이 너무 좋아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좋아하십니까?” “우리 아버지가 만든 건데 너무 좋지 않습니까?” 캐나다목사님은 놀라서 당신이 누구 길래 아버지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일본인은 자신을 일본의 목사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캐나다 목사님은 아무 것도 물어보지 않고 일본인 목사님께 다음 주일에 자신의 교회에서 설교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캐나다 목사님은 주일 예배 시간에 일본인 목사님을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이 일본에서 오신 목사님은 제가 처음 만났습니다. 제가 잘 모르지만 이분은 나이아가라 폭포의 주인의 아들입니다”.

자연 만물과 우주의 신비, 이 모든 것을 보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크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 있습니다. 우리의 낮음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천문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태양계가 있는 이 은하계 안에는 별이 일천억 개나 있습니다. 또 이런 은하계가 일천억 개가 있습니다. 이 우주의 별의 수는 10의 25승이나 됩니다. 별들과 별들의 거리는 수백, 수천광년씩 됩니다. 무한한 공간과 영원한 시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심, 크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표현하려면 말이 적절치 않을 정도입니다.

요즘은 공해가 심하여 하늘의 별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밤에도 하늘이 흐립니다. 이런 흐린 하늘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잊고 삽니다. 별이 보이는 맑은 하늘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기 쉽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작업장입니다. 하늘은 그분의 이력서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고 싶습니까? 그 분의 집을 방문해 보세요. 주소는 하늘시 별마을 10억번지입니다.

자연뿐만 아니라 인생에게도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사람의 머리카락을 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대머리의 좋은 점들이 많이 있답니다. 우선 죄가 적답니다. “머리털보다도 더 많던 내 죄가”라고 하는데 머리털이 많은 사람이 죄가 많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힘을 덜어드린답니다. 머리카락도 헤아리시는데 셀 게 별로 없으니까 하나님이 편하시답니다.

시편 95:3에는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라고 합니다. 시편 145: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가리키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다 모아놓으면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찬송도 그렇습니다. “크신 주께 영광 돌리세”,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 등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찬양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찬송가에도 위대하심을 나타내는 찬송이 많이 있습니다.

1900년대 초 하이네라는 러시아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카바디아 산골 마을에서 엄청난 뇌우를 만나 하룻밤을 피신합니다. 이 때 뇌성을 들으면서 노랫말을 만듭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온 우주 가운데 녹아 있습니다. 어디에나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님의 손을 벗어나 도망하다가 벧엘에서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합니다. 창세기 28:16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자기 혼자 도망하고, 자기 혼자 고통당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이제야 내가 알았도다”는 경험입니다.

칼빈대학교의 학장이었던 코넬리우스 플랜팅거 2세는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전하는 설교자는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선하신 분이며 동시에 이해하기 어렵고 낯선 분임을 강조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영적인 건강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설교자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고 강조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다시 발견한 자는 하나님께 제사합니다(12절)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제사합니다. 희생을 드리고 예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하나님의 새롭게 발견하고 “이제야 알았도다”라고 한 그들은 즉각적으로 번제물과 희생제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말합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높이는 행위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입니다. 예배하는 일이었습니다.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던 이드로는 참 제사의 대상은 야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제사를 드리는 것은 감동적이었을 것입니다.

이드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이방종교의 제사장이 아니라 야훼 종교의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라고 합니다. 찬송과 위대하심을 선포합니다. 찬송과 영광, 이 모든 것이 제사입니다. 예배입니다. 아름다운 산천을 볼 때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라고 찬송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제사입니다.

아브라함은 제사의 명수였습니다. 어디 가든지 먼저 제사를 드립니다. 이사하여 짐을 풀기 전에 제사를 드립니다.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장사였다고 합니다. 한번은 저녁 해가 질 때에 아브라함이 들판에 나왔는데 지는 해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태양을 보고 넙죽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는 해는 금방 산너머로 사라지지 않습니까? 일어나 보니 태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털고 일어나면서 “내가 섬기는 신은 영원히 지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태양을 숭배하지 않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일본의 스스끼라는 학자는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된 다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800만의 신에서 유일한 한분의 신으로 돌아왔다”. 많은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은총입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인 것을 아는 것이 축복입니다.

니콜라스 헤르만이라고 하는 로랜스형제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란 책에서
“첫째,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그 분을 본래의 마땅한 자세로 예배하는 것을 뜻한다.
둘째,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그 분을 그분으로, 우리를 우리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셋째,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과는 완전히 반대란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우리의 약함과 낮음을 인정하는 예배가 되게 하기를 바랍니다.


인종차별의 악명이 높던 남아공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당시에는 흑인과 백인은 따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 시온교회(Holy Church of Zion)’라는 흑인교회가 있었습니다.
고난주간을 맞아 성만찬에 앞서 세족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주일에 흑인교회에 올리버라는 백인 대법원장이 혼자 이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세족식 때에 마르다라는 흑인 여성에게 다가가서 무릎을 꿇고 정성을 다해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교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놀라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백인 대법원장이 흑인의 발을 씻긴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사실이었습니다.
발을 다 씻긴 올리버는 “여러분, 이 사람은 내 집의 노예입니다.
한평생 우리 집 아이들의 발을 수백 번 더 씻겼습니다.
그 때마다 내 마음이 늘 괴로웠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발을 씻어준 이 사람의 발을 내가 씻겨 주어야 내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아서 이렇게 한 것뿐입니다”.

올리버 대법원장은 이 일로 대법원장직에서 파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제야말로 참으로 하나님께 찬양할 자유로운 그리스도인 되었다”고 하며 기뻐하며 감사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제대로 믿게 되었다”,
“이제 참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3:12에는 바울이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우리 온전히 알 때가 옵니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우리가 새롭게 하나님을 아는 감격과 탄성이 우러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위대하고, 크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아는 감격 속에 날마다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사는 매일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7일 / 03- 04(월)
출애굽기 17:1-16
찬송 / 390장(십자가 군병들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반석을 치라(출애굽기 17: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I will stand there before you by the rock at Horeb. Strike the rock, and water will come out of it for the people to drink." So Moses did this in the sight of the elders of Israel.

반석(6697) 추르(tsûwr) צוּר   

1. 돌.  2. 바위.  3. 가장자리
발음 [ tsûwr ]

어원 / 6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4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돌, 둥근 돌, 욥 22:24, 사 8:14
2. 명사, 남성  바위, 욥 18:4, 24:8, [은유적으로 하나님께 사용되어] 이스라엘의 피난처, 신 32:37, 시 18:3(2), 32(31), 47(46), 사 30:29, [한 나라의 설립자에 적용되어] 사 51:1, [복수로] 욥 28:10.
3. 명사, 남성 가장자리, 시 89:44(43), 칼날, 수 5:2, 3.
4. 명사, 남성  형태, 시 49:15(14).

치라(5221) 나카(nâkâh)  נָכָה   

1. 치다.  2. 니팔형 : 매맞은.  3. 피엘형 : 피엘형 부정사로 언급된 말 נַכֶּה
발음 [ nâkâh ]
구약 성경 / 504회 사용

호렙 산
- 시내 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해발 2, 291m의 '예벨 무사'(Jebel Musa, 모세의 산)인 것으로 추정된다.
성경에서는 흔히 '시내산'으로도 불리운다(19:11, 18; 24:16; 레 26:46).
한편, 호렙 산과 시내 산과의 관계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은 3:1 주석을 참조하라.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 이 기적 사건은 만나 사건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 사역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즉 후일 바울은 물을 '신령한 음료'로, 반석을 '신령한 반석'으로 해석함으로써(고전 10:4) 당시 사막의 갈증으로 인해 목말라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렙 산 반석의 물이 생수가 되었듯이, 오늘날 사막과 같은 삶의 터전에서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숱한 사람들의 영원한 생명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교훈했던 것이다(요 4:14; 7:37; 계 22:7; 사 55:1).
특히 반석이 모세에 의해 때림을 당함으로 물을 낸 것은 예수께서 친히 저주를 받아 사람들로부터 매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인간 구원 사역을 이루신 것을 예표한다(사 53:4, 5; 요 19:1-3, 17-9).
같은 견지에서, 레온 우드(Leon Wood) 박사도 본 사건 속에서 영적인 의미를 발견했는데, 곧 그는 모세가 반석을 쳐 물을 낸 이 사건은 장차 갈보리 산에서 그리스도께서 매를 맞아 피를 흘림으로써 그 보혈로써 만 백성을 영적 갈증에서 구원하신 사건을 상징한다고 보았다(A Survey of Israel's History).
특히 반석을 통해 흘러 나온 물의 양을 가리켜 시편 기자는 '강'(나하르)이라고 표현했는데(시 105:41), 이때 이 '강'과 같은 단어이다(창 2:10).
한편 '반석을 쳐서'는 더 있는데, 곧 민수기 20:2-13에 나오는 사건이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6일 / 03- 02(토)
출애굽기 16:1-31
찬송 / 73장(내 눈을 들어 두루 살피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만나와 메추라기(출애굽기 16:13, 31)

13.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31.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고도 희고 맛은 섞은 과자 같았더라.

(질문)
1. 메추라기를 얼마동안 먹었는가?
- 한 달(1개월) 민수기 11:20

2. 만나는 얼마동안 먹었는가?
- 40년 동안. 여호수아 5:12
- 만나를 담은 항아리 출애굽기 16:33, 여호와 앞에 두어 대대로 간수하라

메추라기(7958) 셀라우(selâv)  שְׂלַו    

1. 메뚜기.  2. 복수 ׃ שַׂלִוִים 민 11:32.
발음 [ selâv ]
어원  / 795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메뚜기, 민 11:32, 시 105:40.
  a. 명사 [주]복수 ׃שַׂלִוִים 민 11:32.

메추라기
- 짧은 날개와 작고 둥근 머리, 그리고 통통한 몸집을 가진 꿩 아과(亞科)의 철새이다(민 11:31).
이 메추라기는 팔레스틴을 중심하여 봄에는 아프리카에서 떼를 지어 북쪽으로 나아왔다가 가을쯤 되면 아라비아와 시리아 쪽으로 옮겨가 겨울에는 다시금 아프리카로 돌아간다(Schubert, Knobel)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이러한 계절풍을 타고 이동하는 메추라기 떼들을 마치 비 같이 이스라엘 진에 떨어지게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한편이 메추라기는 40년간 내렸던 만나(35절)와는 달리 1개월 동안만 내려 졌다(민 11:21).

만나(4478) 만( mân)  מָן     

1. 달콤하고 맛있는 과자.   2. 만나.  3. 민 11:7
발음 [ mân ]
어원  / 4100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5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달콤하고 맛있는 과자, 만나, 민 11:7, 9, 출 16:31이하, 민 11:6.

* 만나는 여호와께서 주어 먹게 하신 양식(15절)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 양식(3899)  레헴(lechem)  לֶחֶם 스트롱번호3899

1. 음식.   2. 레 3:11. 3. 레 21:8
발음 [ lechem ]
어원 / [여] 389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97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음식, 양식.
 a. 명사, 남성 [사람과 짐승의] 레 3:11, 욥 20:14, 시 41:10(9), 102:5(4).
 b. 명사, 남성 [하나님의 희생 제물에 대해 사용] 레 21:8,17, 렘 11:19

2. 명사, 남성 빵, 떡, 진설병, 출 25:30, 35:13, 39:36.
3. 명사, 남성 밀, 곡물, 곡식, 사 28:28.

이것이 무엇이냐
- 이 말의 히브리어는 '만 후'(*)로서 '만나'(Manna)라는 명칭은 바로 이 단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
즉 '무엇이냐'(What)라는 뜻의 히브리어 '만'을 70인역이 헬라어로 '만나'라고 번역한 데서 그 명칭이 유래하였다( Wycliffe).

여호와께서...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 성경에서 말하는 만나에 대하여 시나이 반도 내륙 지방의 유목민들은 '만'이라 불리우는 연지벌레에서 나오는 분비물이 바로 이 '만나'인 것으로 주장한다.
반면에 일부 아랍인들은 위성류(tamarisk)에서 나오는 진액이 굳어 흰색을 띤 것이 '만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몇몇 학자들 역시 이 만나를 시내 반도 부근에서 자생하는 식물액(液)으로 이해하여 기적적 만나의 공급을 의심한다(Seetzen, Burckhardt, Ritter).
하지만 이러한 주장과 달리 분명 만나는 하나님께서 초자연적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급하신 하늘의 양식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사실은 만나가
1. 40년동안 백성들이 행진하는 곳마다 사철 구분없이 주어졌으며
2. 일정한 시간, 제한된 장소에서만 200만 명의 인구에 부족함 없이 충족하게 주어지고 안식일 전날은 평일의 2배가 내려졌다는 점 등에서 분명히 입증된다.

깟씨
- 미나리과에 속하는 '고수풀'(coriander)의 씨를 가리킨다.
이 씨는 회백색에 직경 3mm 정도 되는데 소화제나 향료 또는 조미료로 쓰인다(민 11:7).

이스라엘은 메추라기와 만나로 생존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단지 생존문제의 해결을 위해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신 것일까요?
그런 것이라면 한 사람이 거둘 분량을 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분량을 정하지 않고 마음껏 거두어서 먹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16절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처럼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시면서 한 사람에 한 오멜이라는 분량을 정하십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고 말합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생각해 보면 세상의 이치와는 맞지 않습니다.
많이 거두면 그만큼 더 남아야 하고 적게 거두면 그만큼 부족한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남보다 더 많이 거두고 많이 남기기 위해 피나는 경쟁을 합니다.
그리고 그 또한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이 거두어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두어도 부족함이 없다면 많이 거두었다 적게 거두었다는 것이 의미가 없게 됩니다.
많이 거둔 것이 부와 자랑이 되지 못하고 적게 거두었다 해도 비천과 불만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그들이 살았던 기존의 세상, 애굽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신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생존을 위해 한 일이 또 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19, 20절)는 말씀처럼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고 더러는 아침까지 둔 것입니다.

날마다 아침이면 지면에 만나가 있을 것인데 왜 남겨두었을까요?
그것은 내일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있는 만나가 내일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있는 만나가 내일은 없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장 내일에 대한 불안감이 있게 됩니다.
만나가 없으면 당장 생존에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생존을 위해 아침까지 남겨둔 것이라면 결국 이스라엘은 만나를 생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으로만 여겼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성향의 인간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가나안 땅은 기존에 존재하던 가나안 민족의 삶의 방식 그대로 유지될 것입니다.
많이 거두기 위해 경쟁할 것이고, 많이 거둔 것이 힘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적게 거둔 사람은 힘없는 약자가 되는 세상의 속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애굽의 삶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을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는 균등입니다.
이러한 균등으로 나타나는 세계는 인간의 힘으로 거둔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은 그 은혜조차 받을 수 없는 존재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망을 들으시고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시는 이유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메추라기와 만나는 이스라엘의 열심과는 무관합니다.
이스라엘이 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지면에 있었던 것이고 그것을 거두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오멜씩 거두면서 자신들의 노력과는 무관한 은혜임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알지 못한 양식을 주신 이유입니다.

고린도후서 8:14-15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헌금의 문제로 연결하여 말합니다.
헌금을 단순히 교회에 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많이 거두었든 적게 거두었든 그것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세상의 이치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시각, 새로운 세계입니다.

세상은 많이 거둔 자를 적게 거둔 자보다 더 가치 있게 대우합니다.
실력이 있기에 많이 거두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이 거둔 자는 많이 헌금할 수 있습니다.
적게 거둔 자는 상대적으로 적게 헌금하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가 헌금을 많고 적음의 시각으로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에서 균등은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두었다는 것 또한 무시되면서 많이 헌금한 사람이 대접받는 지옥의 현장이 될 뿐입니다.
많이 거둔 것이 자랑이 될 수 없고 적게 거둔 것이 불만이 될 수 없는 균등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균등의 세계는 소유가 균등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소유가 균등해 질 수는 없습니다.
균등은 십자가로 가능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안다면 그리스도의 피를 가장 존귀한 생명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얻은 자라면 세상에서 거두는 것의 많고 적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균등입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의 차등이 없고 따라서 헌금 액수의 많고 적음에 따른 차등도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로 인한 균등이며 성령으로 새롭게 된 신자의 세계인 것입니다.
생명을 얻었고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된 것이야 말로 참된 부요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땅의 것의 많고 적음은 그야말로 의미 없는 것으로 추락해 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일을 불안 해 하면서 거둔 것을 아침까지 둡니다.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믿지 못하고 내가 거둔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게 하신 하나님이 내일을 살게 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오늘도 내일도 많이 거둘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활의 생명에 참여한 신자는 천하를 얻은 것보다 귀한 것을 가진 부요한 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많이 거두어도 남은 것이 없고 적게 거두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만 귀할 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을 소망하며 균등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만나와 메추라기에 대한 첫 언급은 출애굽기 16장에서 시작된다.
이스라엘 회중은 광야에서 굶어 죽겠다며 그들을 인도해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사실 이 원망은 모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먹을 것을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줄 것이다. 저녁에는 먹을 고기를 주고, 아침에는 배불리 먹을 빵을 줄 것이다. 그러면 너희가 나를 인정할 것이다.”(16:4, 8, 12)

뒤이어 출16:13절에 처음으로 ‘메추라기’(Quail)가 먼저 등장한다.
[그날 저녁에 메추라기가 날아와서 진 친 곳을 뒤덮었고, 다음 날 아침에는 진 친 곳 둘레에 안개가 자욱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메추라기가 내려왔다.
그런데 백성이 그 메추라기를 잡았는지, 먹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만나’(Manna)가 처음 등장한다.
[안개가 걷히고 나니, 이럴 수가, 광야 지면에, 마치 땅 위의 서리처럼 보이는, 가는 싸라기 같은 것이 덮여 있는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 자손이 그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서로 "이게 무엇이냐?" 하고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입니다.”]

여기에서 ‘이게 무엇이냐?’라는 단어가 ‘만 후’이고 여기에서 ‘만나’라는 말이 파생되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본문은 16장이 14절부터 36절로 끝낱때까지 ‘만나’를 어떻게 먹는지에 대한 규칙을 설명한다.
언제 어떻게 얼마나 자주 만나를 먹을 것인가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메추라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
메추라기를 어떻게 먹을지, 언제 먹을지에 대한 설명도 없으며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배고픈 백성이 갑자기 내려온 메추라기를 당연히 먹었는데 다만 기록이 되어있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좀 더 관련 근거가 필요하다.
앞서 말했듯이, 출애굽사건은 유대교와 기독교 배경에서 대단히 중요한 이슈였기 때문에, 신구약 저자들은 그때의 사건을 자주 인용했다.

메추라기

1. [출애굽기 16: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2. [민수기 11:31]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 곁 이편 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3. [민수기 11:32]
백성이 일어나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진 사면에 펴 두었더라

4. [사무엘상 26:20]
그런즉 청컨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곳에서 이제 나의 피로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5. [시편 105:40]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로 오게 하시며 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


다음은 성경에서 ‘만나’에 대한 언급을 찾아서 모아보았다.

출애굽기16:31, 35
이스라엘 사람은 그것을 만나라고 하였다. 그것은 고수 씨처럼 하얗고, 그 맛은 꿀 섞은 과자와 같다. 이스라엘 자손은 정착지에 이를 때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를 때까지 만나를 먹었다.

민수기11:9
밤이 되어 진에 이슬이 내릴 때면, 만나도 그 위에 내리곤 하였다.

신명기 8:3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 5:12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날부터 만나가 그쳐서, 이스라엘 자손은 더 이상 만나를 얻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 해에 가나안 땅에서 나는 것을 먹었다.

느헤미야 9:15, 20
굶주릴까봐 하늘에서 먹거리를 내려 주시고, (생략) 그들의 입에 만나가 끊이지 않게 하시며, 목말라 할 때에 물을 주셨습니다.

시편 78:24, 25
만나를 비처럼 내리시어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으니, 사람이 천사의 음식을 먹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풍족할 만큼 내려 주셨다.

요한복음 6:31
'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서, 그들에게 먹게 하셨다' 한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히브리서 9:4
거기에는 금으로 만든 분향제단과 온통 금으로 입힌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생략) 돌판이 들어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17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감추어 둔 만나를 주겠고, 흰 돌도 주겠다.

위와 같이, 단순히 키워드 검색만 해봐도 신구약을 통틀어 ‘만나’는 약 20회 정도 인용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 어떤 저자도 ‘만나와 메추라기’라는 표현을 쓴 적은 없다.
쓰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만나’라고만 표현했을 뿐이다.
이에 비해, 메추라기가 등장하는 본문은 성경 전체에서 딱 3번뿐이다.
그 중 첫 번째는 위에서 설명한 출애굽기 16장의 첫 등장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번을 찾아보자.

메추라기가 등장하는 두 번째 본문은 민수기 11장이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섞여 살던 무리가 먹을 것 때문에 탐욕을 품으니, 이스라엘 자손들도 또다시 울며 불평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이집트에서 생선을 공짜로 먹던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그 밖에도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에 선한데,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입맛마저 떨어졌다.” (11:4-6)]

이 본문을 보면 위의 출애굽기 16장에서 그들은 메추라기를 먹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이제 '만나만 먹는 것이 지겨우니' 제발 고기를 달라고 원성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백성의 불평을 들은 모세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심지어 ‘한 달 내내, 냄새만 맡아도 먹기 싫을 때까지, 줄곧 그것을 먹게 될 것이다.’(20절)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신다.
왜냐하면, 그 백성의 불평에 대단히 노하셨기 때문이다.(10절)
그리고 실제로 메추라기 기적이 일어난다.
[주님께서 바람을 일으키셨다. 주님께서 바다 쪽에서 메추라기를 몰아, 진을 빙 둘러 이쪽으로 하룻길 될 만한 지역에 떨어뜨리시어, 땅 위로 두 자쯤 쌓이게 하셨다. 백성이 일어나 바로 그날 온종일, 그리고 밤새도록, 그리고 그 이튿날도 온종일 메추라기를 모았는데, 적게 모은 사람도 열 호멜은 모았다. 그들은 그것들을 진 주변에 널어 놓았다. (민 11:31-32)]

그토록 고기를 원하던 그들은 드디어 메추라기를 먹게 되었다.
아니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길래 이 긴 글을 적었는가?
그 이유는 이어지는 다음 절에 나온다.

[고기가 아직 그들의 이 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주님께서 백성에게 크게 진노하셨다. 주님께서는 백성을 극심한 재앙으로 치셨다. 바로 그곳을, 사람들은 기브롯 핫다아와(탐욕의 무덤)라 불렀다. 탐욕에 사로잡힌 백성을 거기에 묻었기 때문이다. (민 11:33-34)]

그렇다. 메추라기를 먹은 백성은, 행복하고 맛있게 냠냠 쩝쩝한 게 아니라, 먹고 죽었다. 심지어 ‘고기가 아직 그들의 이 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그들의 불평과 원망에 대한 대가였던 것이다.
그들은 극심한 재앙 때문에 죽고 말았다.
그들이 메추라기를 먹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재앙을 받은 이후에 다시 메추라기를 내려주셨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
여호수아서에서 출애굽이 끝난 후 가나안에 도착하자 이제는 '만나'가 멈추었다고만 말한다.(수 5:12)

성경에서 메추라기를 언급한 마지막 세 번째 본문은 시편 78편 27-29절이다.
사실 이 본문은 민수기 11장의 내용으로 지은 시편이다.
"고기를 먼지처럼 내려 주시고, 나는 새를 바다의 모래처럼 쏟아 주셨다. 새들은 진 한가운데로 떨어지면서, 그들이 사는 곳에 두루 떨어지니, 그들이 마음껏 먹고 배불렀다.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넉넉히 주셨다."

비록 '메추라기'라는 단어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만나와 함께 '하늘의 새'를 내려주셔서 먹었다는 점에서 민수기 본문의 메추라기로 간주할 수 있다.
그들은 분명 메추라기를 먹긴 먹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30-31절의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먹을 것이 아직도 입 속에 있는데도, 그들은 더 먹으려는 욕망을 버리지 않았다. 마침내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노하셨다. 살진 사람들을 죽게 하시며,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을 거꾸러뜨리셨다.]

결국 이 시편은 민수기 11장에서의 사건을 그대로 요약한 것이며, 결말은 동일하다.

메추라기를 먹은 백성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욕망에 진노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메추라기를 먹었던 사건은 결코 ‘긍정적인 예화’로 사용될 수 없었던 것이고, 신구약 모든 저자들도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표현할 때 ‘메추라기’를 언급하지 않고, ‘만나’만 언급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나’와 ‘메추라기’는 함께 사용하기 상당히 민망한 단어의 조합이며, ‘만나와 메추라기’라는 제목으로 간증을 해서는 더더욱 안되겠다는 결론을 내려본다.

만나와 메추라기의 역사를 보여준 신 광야

신 광야는 엘림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가기 전에 지나간 지역이다.

출애굽기 16: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신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 씬’으로, 가데스 바네야가 있는 미드바르 친 광야와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경에서는 둘 다 똑같이 ‘신 광야’로 표현되어 혼동을 주고 있다.

친 광야는 에돔 옆에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 지역의 남쪽에 있는 광야를 말하며, 신 광야는 시내 산에 가기 전에 통과한 광야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여정 때 지나간 광야는 에담 광야, 수르 광야, 씬 광야, 시내 광야, 바란 광야, 친 광야가 있다.
신 광야는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으며, 이스라엘 자손이 르비딤에 도착하기 전에 있었던 곳이다(출 17:1).
신 광야는 광범위한 지역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명칭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신 광야의 정확한 위치는 추정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오늘날 와디 타이베에서 동쪽으로 이르는 산악 도로를 통과하여 시나이 반도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있는 황량한 구릉 지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이곳에 도착하는 데 꼭 1개월이 소요되었다.
따라서 아무리 많은 양식을 가지고 나왔다 할지라도 이 때쯤 거의 떨어진 상태였을 것이다.
양식이 떨어지자 그들은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원망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께서 면하게 하신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이 없는 자들은 항상 과거지향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과거에만 집착하는 것은 불신앙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곳이 바로 신 광야이다.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은 정말 인내를 요구하는 고난의 길이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만드는 좋은 약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지렛대의 구실을 한다.

고난에 능숙한 사람은 그만큼 자기 부족을 절실히 깨닫게 되며,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내적 의지가 강해진다.
그러나 때로 고난은 우리들을 좌절의 함정으로 이끄는 모티브가 된다.
신 광야에서 양식이 떨어졌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은 우리들에게 많은 점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 인간들의 나약하고 간교한 심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난 중에 있는 자가 고난을 인내하지 못할 때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는 악한 사단의 세력에 동조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신 광야에서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해결해주는 만나와 메추라기의 역사가 있었던 곳이 바로 신 광야이다.

메추라기는 히브리어로 셀라우라고 하는데 꿩과에 속하는 새로서, 몸 길이는 약 18cm 정도이며 털은 다갈색이고 흑색의 반점이 있다.
이 메추라기는 작은 철새로서 3-4월경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이동하는데, 시내 반도와 팔레스틴은 그 통로가 된다.
이 새는 날개가 짧으므로 계절풍을 이용하여 대군의 떼를 이루어 날아 이동한다.
이 지역을 통과하는 메추라기는 살이 쪄 둔중하므로, 시내 반도 및 애굽에서는 손으로 메추라기를 잡을 수가 있다.
그리고 9월에는 반대로 대군을 이루어 북에서 남쪽으로 이동한다.
특히 가을 메추라기는 별미로 알려져 있다.
이 새는 둥지를 지면에 만들고 평균 16개의 알을 낳아 키우는데, 알은 식용으로 쓰인다.
다윗왕은 사울 왕에게 쫓기는 자신을 메추라기에 비유하기도 하였다(삼상 26:20).

그리고 히브리어 셀라우는 비만을 뜻한다.
신 광야에서 음식물이 부족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 원망하고 있을 때 하늘로부터 비같이 내린 양식이 만나라고 한다(출 16:4).
그런데 실제로 시나이 반도의 건조 지대에서는 만나와 비슷한 음식이 존재하고 있다.
위성류 나무에 기생하는 깍지벌레가 있는데 ‘만’은 이 곤충의 분비물을 가르키는 말이라고 한다.
6월이 되면 깍지벌레는 탄수화물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위성류 나무의 수액을 빨아, 일부는 애벌레에게 주고 나머지는 가지 위에 방울 모양으로 뱉어 놓는다.
이 분비물은 건조한 기후 탓에 물기가 빠져 금방 결정체가 되어 땅에 떨어지는데, 매우 달고 쫀득쫀득하여 먹을 수가 있다. 성경에서는 만나가 고수풀씨 같이 희었고 맛은 벌꿀과자 같았다고 하였다(출 16:31). 고수풀은 미나리과에 속하는 일년생 식물로 1-3mm 크기의 씨는 옅은 회색이다. 실제 만나는 흰색, 갈색, 노르스름한 색(민 11:8) 등 다양하다. 그리고 만나 성분을 화학적으로 분석해 본 결과 펙틴을 지닌 세 가지 기본 당으로 짜여 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는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인 만나를 서로 많이 거두겠다고 욕심 부리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어느 한 개인에게 축적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는 곳이 신 광야이며, 적게 거둔 자나 많이 거둔 자나 자신이 만족할 만큼의 일용한 양식이 되었다는 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다음날까지 남겨 놓은 자의 만나를 썩게 하심으로, 내일의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은 단호하게 배척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산업 사회에서 풍족한 물질문명을 향유하고 있지만, 함께 나누어 먹어야 할 양식을 독식하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이 사회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내일의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함께 더불어 사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곳이, 바로 만나와 메추라기의 역사를 보여준 신 광야다.






만나와 메추라기의 비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오랜 기간 동안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사막에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만나 때문이었다.
하늘에서 쏟아진 하얀 서리 같은 것을 보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서로 “이것이 무엇이냐?” 라고 물었다.
만나는 아랍말로 “이것이 무엇이냐?”를 뜻한다.
그것은 고수(미나리과의 1년생 초본)씨앗 같이 하얗고 맛은 벌꿀과자 같았다. 

만나는 사막에서 자라는 관목 잎사귀에 연지벌레가 붙어서 만들어내는 이슬 모양의 형성물이다.
우리나라에서 연지곤지 할 때 연지가 연지벌레 말린 것이다.
입술과 뺨에 바르는 빨간색 연지를 이마에 바르면 곤지가 된다.
딸기맛 우유나 빨간 립스틱에 들어가는 코치닐추출색소가 바로 연지벌레에서 채취한 것이다.

만나는 연지벌레의 침을 통해 나오는 분비물에서부터 생성되어 나뭇잎에 맺혔다가 땅바닥에 떨어지는데 밤이 되어 기온이 떨어지면 딱딱하게 굳는다.
그래서 아침에 나가면 그걸 수확해서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녹는 온도가 낮기 때문에 햇빛이 나면 다 녹아버려서 햇빛이 나기 전에 거둬들여야 했다. 

만나는 맛이 달콤해서 지금도 먹을거리가 부족한 토착 유목민들은 그것을 인스턴트 먹을거리로 이용한다.
모세는 원래 미디안 광야에서 이미 40년 동안 양을 치면서 살았기 때문에 만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배고파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이거 어떻게 해결하지?” 고민하다가 불현 듯 만나를 기억해냈을 것이다.
그걸 여호와께서 주신 양식이라고 백성들에게 말해주고 그들은 그렇게 믿고 먹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은 참 간사하다.
하나님이 만나 외에 다른 것을 주지 않고 40일이 지나자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보내주시기로 하였다.
실제로 메추라기는 이 지역을 지나 아프리카로의 긴 여정을 하였고, 긴 여정 끝에 지친 메추라기들이 땅에 떨어졌을 거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은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동하는 철새의 통로이고, 겨울철에 팔레스타인을 통해서 이집트로 이동한다.
즉 일 년에 두 차례 보통 메추라기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때에 지났던 지역을 통과한다.
이런 철새의 이동은 고대인들에게는 분명히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19세기에는 철새의 대량포획이 일어났으며 20세기에 들어서도 수년 동안 메추라기는 이집트의 주요 수출품의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1920년경에 이르러서는 그 번식률이 극히 떨어져 메추라기의 이동이 중단되었다. 

민수기 11:33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불평하는 죄를 저지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벌을 받는데, 이를 오염된 메추라기를 먹고 식중독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메추라기는 크리스마스로즈와 사리풀 등을 먹는데, 이 풀에는 독성이 있다.
결국 이 독성이 농축되어 있는 새를 먹을 경우 사람에게도 해가 될 수 있다.
바로 만나에 대해 불평을 했던 사람들은 이런 메추라기를 먹고 죽었을 것으로 본다.

메추라기는 꿩과의 철새로, 유럽 전 지역과 아시아 서쪽에서 주로 번식한다.
원래 야생조였으나 일본에서 최초로 식용 및 채란용으로 가금화되었다.
알과 고기는 모두 식용 혹은 약용으로 이용되는데, 동물성 식품이면서도 알칼리성 식품이고, 비타민 A와 단백질이 풍부하고 기름기가 적어 다른 동물성 식품에 비해 저칼로리 식품으로 특히 다이어트와 강장효과가 탁월하다.

우리는 고기보다는 알에 익숙하다.
메추리알은 일반 계란처럼 그냥 쪄서 먹거나 생으로 먹는데, 달걀보다 비타민 B1, B12가 훨씬 많이 들어있으며, 인과 철 등이 더욱 풍부하다.
단백질도 계란에 비해 많이 들어있고, 아미노산 조성은 계란과 비슷하나 글루탐산이 메추리알에 더 많다.
메추리알은 산후에 먹으면 회복이 빠르며, 허약체질 혹은 소모성 질환을 앓고 난 뒤에 보양으로도 좋은 음식이다. 

메추라기 고기는 맛도 좋고, 스태미나 식품으로 유명하다.
메추라기 고기가 비타민 B군이 많아 에너지 대사와 성호르몬 기능을 조절하여 성적욕구증대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본초강목에 따르면 메추라기는 체내 모든 장기의 기능을 보강하고 근골을 굳건히 하며 상식하면 겨울에는 추위를 이기게 하고 여름에는 더위를 이기게 한다.
동의보감을 보면 메추라기 고기는 ‘순육’이라고 하는데 “순육은 오장을 보강하고 힘줄과 뼈를 튼튼히 한다”라고 하였다.

한 오멜(16절) : 한 오멜은 약 2.3리터입니다.

● 묵상 :

하나님께서 날마다 그들을 먹이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같은 은혜를 내리십니다.

날마다 우리를 먹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합시다.

2) 만나는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는 하나님의 은혜(16~18절)

  하나님께서는 1인당 한 오멜씩 식구수대로 가져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대로 하였더니 어떤 사람은 많이 가져가고, 어떤 사람은 적게 가져갔습니다. 그것을 식구수대로 나누었더니 많이 가져간 자도 남지 않았고, 적게 가져간 자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았다는 것은 사람이 배불리 먹는데 충분한 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충족감을 느낄 만큼 충분히 배부르게 먹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40년간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게 만나를 주신 하나님은,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 묵상 :

이렇게 40년간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게 만나를 주신 하나님은,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십니다.

3) 만나는 나눔을 훈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만나를 식구수대로 가져가게 하신 후에 식구들과 함께 나누어 먹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져간 것을 식구수대로 나누었더니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만나를 나 혼자만의 것으로 따로 챙겨둘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40년간 반복하심으로 하나님의 주신 것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누는 것을 ‘체데카(의)’라고 말합니다.

● 묵상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나누는 삶을 실천하십시오.

말씀을 배운 이들은 말씀을 나누고, 물질을 가진 이들은 물질을 나누고,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이들은 자신이 가진 지식이나 기술을 나누십시오.

하나님께서 더 풍성한 것을 채우십니다.

4) 만나는 안식일을 지키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5절)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마다 만나를 내리셨으나, 제 7일에는 만나를 내리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제 6일에 이틀 치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다른 날에는 만나를 남기고 보관하면 다음 날 아침에 그 만나에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지만, 안식일에는 전날의 싱싱함이 그대로 보전되어 안식일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40년 동안 매 안식일마다 만나를 내리시지 않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5) 만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 만나를 진영의 지면에 내리셨으니 그들은 그저 그릇을 들고 장막을 나가서 만나를 퍼오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만나를 먹는데 있어서 몇 가지 규칙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리시는 이 규칙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훈련시키셨습니다.

그 규칙은

① 각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만 거두라는 것,

② 거둔 것을 식구수대로 골고루 나누어주라는 것,

③ 다음 날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것,

④ 제 6일에는 이틀 치를 거두어 안식일을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필요한 만큼만 거두라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훈련하게 하기 위함이고, 식구들끼리 골고루 나누어 먹으라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나누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또 다음 날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나누지 않고 쌓아두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과 탐욕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 6일째에는 이틀 치를 거두게 하셔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을 훈련하셨습니다.

● 묵상 : 이스라엘은 40년 동안이나 이런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만나를 통해서 매일, 또는 매주 반복적으로 행하는 일들 속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 있음을 훈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매주 주일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그리고 매주 반복적으로 행하는 봉사와 섬김에 충성합니다.


● 묵상 :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걱정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공연히 걱정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일을 주께 맡겨 믿음 있는 자가 되십시오.

* 기도제목

1. 우리 입에서 불평이 사라지게 하시고, 늘 감사가 가득한 입이 되게 하옵소서.
2. 끝없이 채우려는 저주받은 욕심과 탐욕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3. 날마다 육의 양식을 먹듯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여 영의 양식을 섭취하게 하옵소서.
4.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항상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않게 하셔서 육신의 것을 얻으려는 일로 영의 자리를 잃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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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5일 / 03- 01(금)
출애굽기 15:1-27
찬송 / 229장(주 예수 다스리시니 )

신유(神癒)  하나님 신, 병 나을 유
- 신의 힘으로 병이 낫는 일
- 신앙 요법의 하나

치유(治癒) 다스릴 치, 병나을 유
- 치료하여 병을 낫게 하는 일

신유(信癒) 믿을 신, 병나을 유
- 믿음으로 병을 고치는 것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치료하는 여호와(출애굽기 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He said, "If you listen carefully to the voice of the LORD your God and do what is right in his eyes, if you pay attention to his commands and keep all his decrees, I will not bring on you any of the diseases I brought on the Egyptians, for I am the LORD, who heals you."

치료하는 여호와(I am the LORd who heals you.)
여호와 로파(יְהוָה רֹפְאֶךָ)

치료하다(7495) 라파 [ râphâʼ ]  רָפָא   

1. 수선하다.   2. 고치다. 3. 신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발음 [ râphâʼ ]
구약 성경 / 67회 사용

너희가... 규례를 지키면
- 이 구절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며 순종에의 촉구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의 언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법도와 율례'는 그의 백성에게 '계명과 규례'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는 그의 백성들에게 의(義)의 행위를 요구한다.
즉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육신적 편안함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정하신 법을 따라 사는 의로운 사람을 요구하신 것이다. 질병으로부터의 보호 약속에 앞서 요구하신 이 요구는 곧 오늘 우리의 신앙의 표준이기도 하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 문자적으로 '여호와', 와 '너희의 치료자'란 동격의 단어가 합성을 이뤄 만들어진 것으로, 직역하면 '나 여호와는 너희의 치료자'가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절대자이신 동시에 우리의 모든 질병과 아픔을 치료해 주시는 친근한 분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치료하는'의 히브리어 '라파'는 '의사' 또는 '의원'을 가리킨다.
곧 우리의 의원되시는 여호와는 실로 모든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실 뿐만 아니라, 죽음과 죄 등 인생의 모든 문제점까지도 깨끗이 해결해 주시는 진정한 우리의 치료자이시다(마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청종하고(8085) 솨마 [ shâmaʽ ]  שָׁמַע  
 

1. 듣다.   2. 창 3:10.  3. 창 37:17
발음 [ shâmaʽ ]
구약 성경  / 1159회 사용


행하며(6213) 아사[ ʽâsâh ] עָשָׂה
스트롱번호6213

1. 노동하다.  2. 만들다.  3. 생산하다
발음 [ ʽâsâh ]
구약 성경 / 2627회 사용


기울이며(238) 아잔 [ ’âzan ]   אָזַן  스트롱번호 238

1. 날카롭다.  2.  명확하다.  3. 히필형 : הֶאֱזִין
발음 / [ ’âzan ]
구약 성경 / 2회 사용


지키면(8104) 발음 [ shâmar ]  שָׁמַר   


1. 지키다.  2. 동산을 지키다.  3. 창 30:31.
발음 [ shâmar ]
구약 성경  / 411회 사용

한 나무를... 던지매 물이 달아 졌더라
- 혹자는 시내 반도 부근에 자생하는 어떤 나무의 열매, 예를 들면 '구르쿠드'(Ghurkud)란 나무의 열매가 쓴 물을 달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Burckhardt).
그러나 비록 나무 자체에 물을 맑게 하는 어떤 성분이 소량 함유되어 있는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효력이 갈증에 목이 탄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충족히 먹게끔 하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 나무는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의 도구로 사용됐을 뿐이다.
왕하 2:19-22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영적으로 이 나무는 만국을 치료하며 죽은 것을 소생시키는 하늘 나라의 생명 나무를 예표한다(계 22:2).





엘림
- '상수리 나무' 또는 '참나무'란 뜻으로 수에즈 동남쪽 약 100Km, 마라 남쪽 10여Km 지점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오늘날의 '와디 구룬델'(Wadi Ghurundel)인 듯하다(West-minster Historical Atlas to the Bibble).
당시 '엘림'은 비가 자주 왔고 개울과 샘이 상당히 많았다.
특히 이곳은 물샘 12개와 종려 70주가 있었는데, 이는 완전수인 12와 70(7x10)이 상징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완전한 휴식처와 안식처를 의미했다(Keil).
그리고 몇몇 학자는 물샘 12개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종려 70주는 이스라엘 70장로를 각각 위한 것이고, 또한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Kurtz, Baumgarten).
따라서 이곳은 우연히 이스라엘이 도달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섭리하심에 따라 인도된 곳이라 본다.
한편 출애굽 후 이곳까지의 여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애굽 고센 땅 라암셋(12:37)->숙곳(12:37)->에담(13:20)->바알스본(14:2)->홍해(14:22)->수르 광야(15:22)->말(15:23)->엘림(15:27)이다.


찬송하리니(5115) 나바 [ nâvâh ]  נָוָה

1. 앉다.  2. 단정하다. 3.  히필형 : 돋보이게 하다
발음 [ nâvâh ]

구약 성경  / 2회 사용

뜻풀이부
1. 원형  앉다, 쉬다, 합 2:5
2. 원형 단정하다, 어울리다.
 a. 원형 히필형 : 돋보이게 하다[찬양으로], 축하하다, 출 15:2.


노래하리니(2176) 지마라트 [ zimrâth ]   זִמְרָת

1. 노래.   2. 찬양의 대상.  3. 노래 제목
발음 [ zimrâth ]
어원  / 216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회 사용

뜻풀이부
1.명사, 여성 노래, 찬양의 대상, 노래 제목, 시  118:14, 사 12:2.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은 "신유(神癒)"라고 합니다.
'신유'라는 한자어는 "귀신 신(神), 병나을 유(癒)"
"Faith Healing" 이란 신앙요법 또는 신앙으로 치유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 나무를... 던지매 물이 달아 졌더라
- 혹자는 시내 반도 부근에 자생하는 어떤 나무의 열매, 예를 들면 '구르쿠드'(Ghurkud)란 나무의 열매가 쓴 물을 달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Burckhardt).
그러나 비록 나무 자체에 물을 맑게 하는 어떤 성분이 소량 함유되어 있는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효력이 갈증에 목이 탄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충족히 먹게끔 하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 나무는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의 도구로 사용됐을 뿐이다.
왕하 2:19-22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영적으로 이 나무는 만국을 치료하며 죽은 것을 소생시키는 하늘 나라의 생명 나무를 예표한다(계 22:2).

한 나무(6086) 에츠[ ʽêts ] עֵץ

1. 나무.  2. 숲. 3. 나무로 만든 우상
발음 [ ʽêts ]
어원 / 복수 עֵצִים, 연계형 עֲצֵי, 609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29회 사용

한 나무를... 던지매 물이 달아 졌더라
- 혹자는 시내 반도 부근에 자생하는 어떤 나무의 열매, 예를 들면 '구르쿠드'(Ghurkud)란 나무의 열매가 쓴 물을 달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Burckhardt).
그러나 비록 나무 자체에 물을 맑게 하는 어떤 성분이 소량 함유되어 있는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효력이 갈증에 목이 탄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충족히 먹게끔 하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 나무는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의 도구로 사용됐을 뿐이다.

열왕기하 2:19-22 
그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엘리사가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찌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엘리사의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날에 이르렀더라 .

한편 영적으로 이 나무는 만국을 치료하며 죽은 것을 소생시키는 하늘 나라의 생명 나무를 예표한다(요한계시록 22:2).

요한계시록 22:1-2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신유는 성경적 근거와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유는 지금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은혜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신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종말의 메시아이심을 증명해 주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성도들이 이미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신유의 은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 지으심의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해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후에도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본래 목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사명은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타락한 후에 임하게 된 육신의 질병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하나님을 찾게 되는 중대한 이유가 되었으며, 구원을 얻은 후에는 더욱 온전히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는 성화의 방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를 건넌 직후의 상황입니다.
홍해를 건넘으로써 이스라엘 자손은 세례를 받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나 그 전에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광야는 물이 없는 곳이요 양식을 얻을 수 없는 아무 것도 없는 메마른 황무지입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광야로 인도하셨을까요?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된 자들이 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연합한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광야 40년의 여정 동안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목이 말라 죽은 자들은 없었습니다.
양식이 없어서 굶어 죽은 자들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필요한 물과 양식을 공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그 모든 일을 감당하시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셨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자손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얼마나 온전히 믿느냐에 따라 좌우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광야 40년의 기간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연합하기 위한, 생명을 담보로 한 훈련의 기간이었고 시험의 기간이었습니다.

그 훈련과 시험의 첫 과정이 마라에서 있었습니다.
마라는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물을 얻기 위해 도착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라의 물은 쓴 물이어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낙심과 절망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가면 좋은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쓴 물만 있었습니다.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입에서는 모세를 향한 거친 원망의 말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을 주실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으며 그 나무를 물에 던졌을 때 마실 수 없었던 쓴물이 마실 수 있는 물로 변화되었습니ㅏㄷ.
이 사건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 15:2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애굽 사람에게 임한 모든 질병은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니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사람처럼 불순종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 연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쓴 물이 변하여 단물이 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여정 동안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불신앙을 치료하셔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연합하는 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은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신유의 은혜를 단순히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신유의 은혜는 언제나 영혼의 잘됨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나의 영과 혼과 육이 온전히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병 고침의 은사들"이라면서 복수를 사용한 것은 여러 가지 병들을 고치는 은사들을 말함을 알 수 있다.
먼저 병 고침의 은사들의 정의를 보면 다음 과 같다.

병 고침의 은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어떤 사람들에게 주신 능력인데,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뜻대로 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 사람을 통하여 질병을 고치시고 건강을 회복한다(C. Peter Wagner).

이 은사들은 질병이나 연약함을 초자연적으로 치유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사람을 통해서 나타난다(David Pytches).

이 은사들은 이 은사를 가진 사람이 안수, 기도, 명령 또는 이것들을 종합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의 육체적인 질병을 초자연적으로 고치는 능력을 말한다(Bobby Clinton).

1. 병 고침의 은사자들만 병을 고치는가?

- 병 고침의 은사들을 등한시하는 많은 보수교회에서도 야보고서 5장을 근거로 병자를 위해 기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약 5:14).
이렇게 하는 기도는 병 고치는 은사로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장로들(목사들)이 가진 영적 권세로 하는 기도이다.
물론 그렇다고 교회의 장로나 목사들만 병자를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은 아니다.
병 고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모든 신자들, 곧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이기도하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 . .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18).
그리고 병 고침의 은사들을 통해서(고전 12:9) 행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많은 종류의 병을, 더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잘 고침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극단적인 경우는 드물지만 아직도 신유만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일반적인 은혜의 산물인 의학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조심해야할 일이다.

어느 병원의 실험에 의하면, 한쪽 병자들은 약만 투입하고 다른 쪽 병자들은 약과 기도를 병행한 결과,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한 쪽의 병자들이 통증도 훨씬 적고 훨씬 빨리 회복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 기도와 의학을 병행하는 것이 좋다.
또한 기도를 통해 병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을 했더라도 의사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 좋다.
(미국 신유 사역자는 의사들을 대동한다.)

어떤 분들은 "목사님이 낫는다고 하니 병원에 가지말까요?"라고 질문도 한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하지만 은사자는 가급적 대상자에게 의사에게 가서 확인해보라는 것이 좋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으므로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는 극단에 치우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 성경이 말하는 치유들

- 성경은 치유라는 말을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성경에서 치유와 관련된 단어들을 찾아보면*세라퓨오: 주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육체적인 병을 치유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마 4:23; 8:7, 16 등).

* 이아오마이 : 육신적인 병은 물론(마 15:28), 마음이나 영적인 병은 물론 축사로 치유하는 것을 말한다(마 13:15; 눅 4:18; 요 12:40; 행 10:38; 히 12:3; 벧전 2:24; 약 5:16 등).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은사는 통상적으로 말하는 병 고침은 물론 귀신 쫓는 은사도 포함된다고 주장한다(마 15:28; 행 10:38).

ἰάομαι 스트롱번호2390

1.

고치다

2.

눅5:17

3.

회복하다

발음 [ iaŏmai ]




1.
고치다, 치료하다.
  • a.
    [문자적으로] 눅5:17, 6:19, 요4:47, 행9:34, 10:38등, [수동] 마8:8, 15:28, 눅7:7, 8:47, 요5:13, 약5:16등.
  • b.

    [상징적으로] [여러 종류의 병으로부터 온전하게 됨] 회복하다, 마13:15, 요12:40, 행28:27.


* 소조 : 구원하다(마 1:21; 18:11), 위험에서 건져내다(마 8:25; 14:30), 치유하다 또는 온전하게 하다(막 5:23; 6:56), 귀신 들린 자가 깨끗함을 받다(눅 8:36)에서 사용되었다.

σώζώ 스트롱번호4982

1.

구원하다

2.

구하다

3.

구출하다

발음 [ sōzō ]
어원
미래 σώσω, 제1부정과거 ἔσωσα, 완료 σέσωκα, 미완료수동태 ἐσῳζόμην, 현재 완료수동태 3인칭단수 σέῳσται, 완료수동분사 σεσῳσμένος,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σώθην, 미래 수동태 σω- θήσομαι, 기본형 σῶς ‘안전’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구원하다, 해 받지 않게 하다, 보전하다, 구출하다.
  • 2.
    [자연적인 위험이나 피해에서 구출하거나 그것을 당하지 않는 것]
    • a.
      [죽음에서] 구하다, 마14:30, 막15:30, 눅23:35.
    • b.
      [위험에서] 구출하다, 요12:27, 히5:7.
    • c.
      [병에서] 구하다, 놓아주다, 마9:21, 22, 막5:23,28,34, 6:56, 눅8:48, 17:19, 18:42, 행4:9, 14:9, 약5:15.
    • d.
      지키다, 보존하다.
    • e.
      [수동] 번창하다, 낫다, 건강해지다.
  • 3.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다, [영원한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다.
    • a.
      구원하시다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요12:47, 고전1:21, 딤후1:9, 히7:25.
    • b.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이] 눅7:50, 약1:21, 2:14, 벧전3:21.
    • c.
      [수동] 구원을 얻다, 마10:22, 막10: 26, 요5:34, 행2:21.
  • 4.
    [어떤 구절은 1,2에 다 속한다] 막8:35, 눅9:24, 롬9:27, 고전3:15.





* 라파 : 구약에서 사용된 것으로 원상태로 회복하다(창 20:17; 시 6:2; 렘 17:14).
사람의 병(출 15:26; 왕하 2:22), 나라의 죄악이 치유 받다(대하 7:14; 호 6:1; 렘 3:17).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에서 사용된다.

רָפָא 스트롱번호7495

1.

수선하다

2.

고치다

3.

신32:39

발음 [ râphâʼ ]
구약 성경
67회 사용

뜻풀이부

  • 1.
    원형 수선하다
  • 2.
    원형 고치다, 치료하다, 욥5:18, 사19:22,전3:3, [분사로] 의사, 창50:2, 대하16:12.
    • a.
      원형 치료하다 [하나님께 사용되어], 신32:39, 대하7:14, 시30:3(2), 호7:1, 11:3.
    • b.
      원형 용서하다, 대하30:20, 렘3:22, 호14:5(4).
    • c.
      원형 위로하다, 욥13:4.
    • d.
      원형 니팔형
    • e.
      원형 수선되다, 고쳐지다, 렘19:11
    • f.
      원형 치료되다, 레13:37, 신28:27, 왕하2:22, 사53:5.
    • g.
      원형 피엘형
    • h.
      원형 고치다, 수리하다, 왕상18:30
    • i.
      원형 치료하다, 왕하2:21, 렘6:14, 겔34:4,[은유적으로] 위로하다, 렘8:11.
    • j.
      원형 치료되게 하다, 출21:19.







- 이상 단어를 통해서 본 바와 같이 성경은 치유라는 말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치유는 5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영적 치유(spiritual healing)

죄인이 구원 받아 영혼이 치유 받는 것을 말한다(마 1:21; 13:15;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서 하였나이다."(시 41:4).


둘째, 육신 치유(physical healing)

몸의 질병이 치유 받는 것을 말한다.(마 4:23; 고전 12:9; 약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셋째, 심령 치유 또는 내적 치유(emotional healing, inner healing)

사람의 마음이 치유 받는 것을 말한다.(사 61:1-3; 눅 4:18-19; 마 12:20).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사 61:1-3), 육체의 질병의 70%가 마음의 질병에서 기인하는 심인성 질병임을 감안할 때 내적 치유는 육체의 치유 못지않게 중요하다.


넷째, 축사 또는 축귀(deliverance)

귀신을 쫓는 것을 말한다.(막 16:17; 눅 10:19; 행 10:38) 축사도 치유 사역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막 16:17).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신유의 은사라고 할 때는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 것으로 국한해서 이해하기도 한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영혼의 질병을 고치는 것(구원), 마음을 병을 고치는 것(내적 치유), 귀신 쫓는 것은 다른 단어나 개념으로도 소개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죽은 자를 살림

성경에는 죽은 자를 살린 기록이 가끔 나온다.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린 엘리야(왕상 17:22), 직원의 죽은

을 살리시고(마 9:18-24),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요 11:43-44), 죽은 도르가를 살린 베드로(행 9:36-40), 졸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게를 살린 바울의 경우(행 20:9-10)를 들 수 있다. 현대의 경우, 영국의 능력 사역자인 스미스 위글워쓰는 그의 집회에 오랫동안 참석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죽은 자를 최소 10명 이상은 살렸다고 하며, 인도네시아에 임한 부흥기간 중, 죽은 사람의 시신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찬양을 드렸을 때 그 사람이 살아났다고 증언한다.


3. 질병의 원인들

사람들이 병들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첫째, 원죄로 인한 연약함

죄를 지은 인간은 영, 혼, 육이 타락하여 기능이 약화되고 부실해졌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질병이나 연약함에 걸리지 않는 사람을 거의 없다.

둘째, 본인의 죄와 허물들

본인의 죄와 허물들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 징계를 받을 경우이다.
구스 여인과 결혼한 모세를 비방한 미리암은 7일 동안 문둥병에 걸렸다(민 12:1-16).
40년 광야생활을 보면 불뱀 사건 등 심판과 징계를 받는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를 하여 왕의 위세를 뽐낸 것으로 인해 이스라엘 전역에 온역이 내려 7만 명이나 죽었다.
세상의 온갖 죄악 가운데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질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지은 모든 죄를 회개하면 자신도 모르게 질병이 낫는다.

셋째, 마귀의 공격

마귀가 모든 질병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마귀가 질병을 주는 경우도 많다.
이스라엘의 어떤 여인은 사단에게 매여 18년 동안이나 허리가 꼬부라져 있었는데 예수님의 안수로 치유받았다(눅 11:13).

넷째, 마음의 상처

오늘날 질병의 70%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생긴다고 한다.
그러므로 치유사역자는 육체적인 치유는 물론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내적 치유에도 통달해 있어야 한다.
허리병, 관절염 등은 스트레스와 관계있고, 마음속에 증오심을 회개한 사람의 경우 관절염등이 나은 사례는 드문 일이 아니다.

다섯째, 자신의 부주의

생활 습관이 체계적이고 규칙적이지 못한 경우, 운동을 게을리 하는 경우, 음식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 질병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이때는 자신의 식생활, 일정 및 운동량을 조절하여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여섯째, 조상의 죄

조상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죄악을 저질렀을 때 그 자손은 그 죄악의 열매를 먹어 질병에 걸리는 경우도 있다.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

"이 모든 저주가(각종 질병을 포함하는 여러 가지 재앙들)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적과 감계가 되리라"(신 28:46).
유전병도 이런 원인 때문에 생기는 것들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가계 치유를 통해 그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한다.

일곱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날 때부터 병약자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1-3).

세계적 교회성장 학자인 피터 와그너는 전 세계적으로 오순절교단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주요 요인은 신유의 은사 덕분이라고 분석한다.(오랄 로버트, 케네스 헤긴, 조용기, 라인하르트 본케, 베니힌 목사 등은 오순절 교단 소속이다.)
그는 오순절주의자들도 할 수 있다면 성경을 철저하게 믿는 보수주의자들이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런 저런 신학적인 편견에서 벗어나서 믿음으로 마음 문을 열고 행하면 주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에 있는 무수한 약속은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풍성하게 역사한다.
승리와 패배의 차이는 항상 그 믿음에 달려 있다.
믿음으로 은사를 간구할 때 성령께서 병 고침의 은사들을 주신다.
많은 사람들은 혹시 내가 기도하여 병이 낫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한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가 아니다.
병을 낫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님을 반드시 자각해야 한다.
존 윔버 목사는 신유 기도를 일년 내내했으나 한 사람도 고침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끊임없이 믿음을 사용하여 말씀에 따라서 기도한 결과 일년 후부터 고침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나타나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유의 종이 되었다.














어떤 여자가 자기의 삶을 마치고 사후 세계로 가기 위해서 스탁스 위버라는 강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그 여자는 웨론이라는 요정을 만납니다.
요정은 그 여인에 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대는 이 강을 건너가기 전에 리틀스 계곡의 샘물을 마시고 가겠는가?" 여인은 물었습니다.
"내가 그 샘물을 마셔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자 요정은 "만약 그대가 리틀스의 샘물을 마시면 세상을 모두 망각하고 이 강을 건널 수가 있다"고 말했습니 다.
그러자 여인은 "나에게 그 샘물을 주십시오. 나는 이 세상에서의 고통을 다 잊고 싶습니다"
"허나 여인이여, 그대는 동시에 모든 기쁨도 잊을 것이요"
"허지만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실패를 망각하고 싶습니다."
요정이 다시 말하기를 "여인이여 하지만 동시에 그대는 성공도 잊을 것이요"
여인이 다시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상처를 잊고 싶습니다"
"여인이여, 하지만 그대는 동시에 사랑도 잊을 것이요"
한참을 생각하던 여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 샘물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이 여인은 마지막 인생 순례의 정점에서 기쁨은 고통을 동반하고, 성공은 실패를 수반하며, 사랑은 상처를 동반한 다는 진리를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옛날 헬라 때부터 내려오는 이비커스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비커스 는 주전 5세기경에 산 사람입니다.
그는 그 당시 유명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비커스가 고린도에서 가까운 시골로 여행을 갔다가 어느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지고 있던 것 다 빼앗긴 것은 말할 것 없고 매를 수없이 맞아 그만 죽게 되었습니다.
이비커스는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나 억울하게 매맞아 죽으면서 그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학을 보고 "너 학은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매맞아 죽는 것을 보지 않느냐. 나 는 이렇게 죽지만 이 다음에 네가 내 원수를 좀 갚아 다오"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비커스가 죽으면서 하는 말을 강도는 다 들었습니다.
그처럼 유명한 시인 이비커스가 행방불명이 되니까 사람들은 그의 행방을 확인하려 애썼지 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달이 지나도 모르다가 나중에 어느 산골짜기에서 그가 입고 있던 옷을 보고 그가 강도에게 맞아 죽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강도를 잡을 길이 없었습니다.
완전범죄였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고린도시의 노천극장에서 연극 공연이 있어서 많은 사람이 모여 연극 관람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 연히 학 몇 마리가 공중에서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은 구경하는 사람의 머리에 거의 닿을 정도로 낮게 날았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앉아 있던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벌떡 일어나면서 "아, 이비커스의 학이 나한테 원수 갚으러 오는구나"라고 소리쳤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져서 붙잡아서 알아보았더니, 바로 그 사람이 유명한 시인 이비커스를 몇 달 전에 산골짜기에서 죽인 강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강도가 왜 그런 소리를 질렀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연극 구경하는데 학이 머리 위로 날아가면 어떻습니까?
그저 '학이 날아가는가보다'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강도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죄가 그 사람의 양심 속에 서 그 사람의 죄를 찾아내서 그 사람의 양심 속에서 그 사람이 범한 무서운 죄를 만나게 한 것입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4일 / 02- 29(목)
출애굽기 14:1-31
찬송 / 장(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구원을 보라(출애굽기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Moses answered the people, "Do not be afraid. Stand firm and you will see the deliverance the LORD will bring you today. The Egyptians you see today you will never see again.

크리스천 작가였던 유명한 마크 트웨인은 이런 재미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Samuel Langhorne Clemens, 1835. 11. 30 ~ 1910. 4. 21)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
주요 작품으로는 미시시피 강 유역을 배경으로 개구쟁이 소년인 톰 소여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그린 동화 "톰소여의 모험"이 있다.

“나는 고양이를 한 우리 안에 넣어 보았다.
뜻밖에도 그들은 내 기대를 뛰어넘어서 잘 지내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이번에는 돼지 염소를 한 우리 안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들은 약간의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마침내 그들도 더불어 잘 어울릴 수가 있었다.
나는 이번에는 장로교인 감리교인침례교인을 한 우리 안에 함께 있도록 했다.
그런데 그들은 결코 잘 지낼 수가 없었다.”


하늘과 땅과 이웃을 이어 주는 나무

핀란드에 한 왕이 있었다. 
왕은 나라를 잘 다스렸으므로 백성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왕에게는 커다란 근심이 있었다.
그것은 자기의 뒤를 이을 왕자가 없고 공주만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공주의 신랑을 뽑아 대를 잇게 할 생각으로 왕은전국에 사윗감을 구한다는 방을 붙였다.
드디어 공주의 신랑을 뽑는  날이 되자 전국에서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몰려왔다.
첫번째  시험은 말타기와 활쏘기였다.
이 시험에서 20명 정도의 건장한 젊은이가 뽑히게 되었다.
두번째 시험은 지혜의 시험이었다.
왕은 문제를 냈다.
"높은 하늘과 땅을 잇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는 나무를 구해오너라. 기간은 100일을 주겠다." 
그러자 20명의 젊은이들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려면 우선 키가커야 하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려면 나뭇가지 또한  길어야 할텐데....'라고 생각하며 제작기 길을 떠났다.
그 20명 중에는 수녀원에서  고아로 자란 존 페로라는 청년이 있었다.
페로 역시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가장 커다란나무를 구하려다가 찾지 못하고 수녀원 성당에 들어가 기도했다.
현명한 왕이  되어 세상의 불쌍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하여 일할수 있게 해달라고 오랜 시간 기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려던페로는갑자기 무슨 생각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 때 나무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나무십자가다!" 
그 후 페로는 핀란드를 잘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찬송가 38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

* 막다른 길에 선 이스라엘 (1-12)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발길을 일반적으로 알려진 길이 아닌 네비게이션에 조차 나와 있지 않은 생소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즉 고센에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가려면 북동쪽으로 올라가야 하지만, 하나님은 정반대로 이스라엘을 남동쪽으로 내려가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출 13:17)” 우려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장소가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입니다(2).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바다에 막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홍해 바닷가에 이스라엘의 장막을 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이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에는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게 하셨다가(13:20), 그들의 발길을 “돌이켜”(2) 이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본문과 같은 내용의 민 33:7은 “에담에서 발행하여 바알스본 앞 비하히롯으로 돌아가서 믹돌 앞에 진쳤고” 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막다른 장소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로 하여금 배수진을 치게 해서, 죽기 살기로 애굽과 전투를 하라는 뜻인가요?
이스라엘은 아직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바로와 그가 이끄는 애굽 군대가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10b-12)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자유냐? 빵이냐? 빵은 인간의 육체적 굶주림 뿐 아니라 물질적 욕망의 상징입니다.
빵과 자유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이 있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했습니까?
그들은 무엇보다도 인간다운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소망대로 자유인이 된 그들에게 죽음이라는 공포가 밀려오자,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노예로 사는 편이 좋다면서 빵을 추구합니다.

광야에서 40일간 금식을 마치신 예수님께 마귀가 도발한 첫 번째 시험은 돌로 하여금 빵이 되게 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며(마 4:4),
사람의 욕망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빵을 택했습니다.
빵을 택한 그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출애굽한 수백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물도 먹을 것도 제대로 없는 광야로 간다는 것은 마치 자살행위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로 들어갔고, 역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막다른 홍해 바닷가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막다른 홍해로 인도하신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4, 18)

본문에서의 애굽 사람은 문자 그대로 애굽 백성 만을 한정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시 최대 강대국인 애굽은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온 세상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도 포함되고, 출애굽 여정 중에 거치는 모든 나라와 가나안은 물론 온 세상을 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세상이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줄 알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4.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그들이 이스라엘을 쫓아 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한 상태로 두신다’는 의미라고 일전에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얼마든지 돌이키실 수 있음에도 그를 완악한 상태로 두신다는 것처럼 무서운 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이 막다른 홍해 바닷가에 도달했다는 소식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마음이 완악해졌습니다.
마지막 10번째 재앙, 즉 장자와 첫 번째 태생의 죽음이라는 재앙 앞에서 망연자실해있던 그들은 복수심에 전 병력을 소집합니다.

5-7.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본문에서 병거는 말이 이끄는 전차로 오늘 날의 탱크와도 같습니다.
평지에서 탱크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선발된 병거만 600대였고, 그밖에도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했고 모든 지휘관들도 참여했으니, 애굽 군대의 규모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합니다.
600대 이상의 전차와 마병과 보병대가 뒤따르는 소리는 아마 지축이 흔들릴 정도 였을 것입니다. 점점 더 가까이 들리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흙먼지를 날리며 다가오는 애굽 군대의 위용 앞에서 막다른 홍해 해변에 장막을 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비백산할 만 합니다.

모세의 믿음 (13-14)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앞으로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아직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는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다’, ‘완악해진 바로가 온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뒤쫓아올 것이다’,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겠다‘ 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로와 그 군대를 어떻게 물리쳐주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백성들에게 뭐라 말했습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 본 애굽 군사를 앞으로 영원히 보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실 것이니 너희는 잠자코 구경만 하면 된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모세는 애굽이라는 구렁텅이 속에서 고통받던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믿음의 순도는 99%가 아니라 100% 여야 합니다.
99.9% 믿음도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역사해주실 것인지 몰랐음에도 하나님께서 무시무시한 바로의 군대를 물리쳐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바로 이 같은 순도 100%의 믿음을 통해 세상에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15-20)

15-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해주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앞으로 가게해라’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위로 내밀어라’
‘그러면 바다가 갈라질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갈라진 바다 가운데 마른 땅을 밟고 건너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해서, 애굽 병사가 너희 뒤를 따라 갈라진 바다로 들어갈 것이다.’

혹시 자연 현상 앞에서 경외심을 갖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스위스의 라우터브루넨라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은 트뤼멜바흐 폭포로 유명합니다.
트뤼멜바흐는 ‘드럼같은 소리를 내는 물’이라는 뜻입니다.
10단으로 이루어진 계단형 폭포로 높이가 140m에 달합니다.
동굴을 들어가면서부터 들리는 물소리가 폭포에 가까워지면서는 그야말로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커집니다.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며 쏟아지는 폭포를 바라보면서 ‘찬송가 79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불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넘실대는 바다가 갈라져서 양쪽으로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있는 물 절벽이 펼쳐있는 경이로운 모습을 보게 된다면 사람들은 경외심에 감히 갈라진 바다에 쉽사리 발을 디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완악하게 하셔서, 이스라엘 뒤를 따라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내일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복수심에 눈이 먼 바로와 그 병사들은 초자연적인 엄청난 현상 앞에서도 신에 대한 경외심은 없었고, 그들은 이스라엘의 뒤를 쫒아갔습니다.

모세에게 앞으로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목전까지 다가온 애굽과 이스라엘 사이에 경계를 치셨습니다.
앞서 가던 구름 기둥을 애굽 진 쪽으로 뒤로 물러서게 하셔서(19) 애굽 진영 쪽을 구름과 흑암으로 가두어서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쪽으로 오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20a).
반면 이스라엘 진영은 밤을 환히 밝히셔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준비를 하게 하셨습니다(20b).

이스라엘을 막다른 곳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은 애굽은 물론 온 세상과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확실히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은 홍해 사건을 통해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확실히 알아야 할 제일 우선의 대상은 이스라엘입니다. 내일 살펴보겠지만, 눈앞에서 펼쳐진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종 모세를 믿게 됩니다(31). 코로나 팬데믹은 신앙인과 비신앙인 모두를 힘들게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하셨을까?를 오늘 본문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제일 먼저는 신앙인인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당이 아닌 온라인을 통해 예배를 드리는 사상 초유의 경험을 해보았습니다. 주일예배를, 구역모임을, 성경공부를 현장이 아닌 온라인을 통해 하면서 대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서로 마주보며 말씀을 배우고, 신앙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깨달았습니다. 또 현장 예배를 드리지 못하면서 하나님과 일대일 관계로 홀로 서게 되는 유익도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해제되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어제 교육관을 방문해서 보니 그동안 휑했던 예배 현장에 어린 아이들로 가득함에 참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을 어제 주일 설교 말씀으로 해석하면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애굽과 같이 완악한 세상은 하나님을 절대 믿지 않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일수록 우리가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이 땅에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누구에게나 어려운 상황이 다가옵니다.
어려운 상황을 애굽과 같이 완악한 세상의 시선이 아닌 모세와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완악한 세상을 향하신 주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순도 100%의 믿음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소망하오니, 주님 연약한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전쟁이라는 막다른 길에 선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주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완악한 러시아 위정자들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이스라엘을 막다른 바닷가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3. 4절 하나님의 말씀과 13-14절 모세의 말에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4. 내 인생에서 막다른 길에 처했던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앞으로 막다른 길에 처한다면 어떻게 극복하시겠습니까?


성경 안에서 출애굽 사건은 중요한 사건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절대 잊지 말아야할 사건이었다.
그래서 이후의 구약 성경을 읽다보면 출애굽 사건이 종종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이 사건이 예수님에 대한 예표임을 밝히기도 했고 출애굽 자체가 영적 구원의 의미를 보여주는 좋은 모형이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출애굽기 14장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고 그래서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말씀을 기록한 성령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이 말씀의 배경과 상황을 통해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안에 등장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교훈을 얻기를 원한다.

 

여기까지의 상황

이 사건의 배경은 수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온 세상에 복을 주시기로 결정하셨던 창세기 12장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언약을 주셨고 그가 믿음으로 화답하기를 기다리셨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것을 약속하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화답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시며 공식적인 언약을 체결하신다. 그리고 그 때 그의 자손들이 이방에서 400년을 객으로, 노예로 고통 중에 살다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 이방 나라를 심판하시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구원해 낼 것을 약속하셨다.

결국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의 때에 엄청난 가뭄으로 인해서 야곱은 애굽(이집트)로 내려가게 되고 그곳에 그와 모든 가족들이 정착을 하게 된다. 물론 그 전에 하나님은 요셉을 먼저 그곳에 보내셔서 그들이 정착할 수 있는 준비를 해 두셨다. 그리고 창세기의 끝에서 요셉은 죽으면서 아브라함께 하나님께서 하셨던 약속을 그 형제들에게 상기시켰다.

창 50:24-25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단순히 약속의 땅에 묻히고 싶었던 것이 요셉의 바람이었다면 그는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 야곱의 경우는 그렇게 해달라고 유언을 했고 그의 아들들은 야곱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를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장사하였다. 요셉도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의 형들, 그리고 모든 자손들이 기억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굳이 자신의 해골을 메고 올라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후 많은 시간이 지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이방의 객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노예가 되어 이방 왕을 섬기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번성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들은 애굽이라는 당시의 강대국 안에 거주하면서 비록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생육하고 번성하고 강하게 성장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되었다.

출 2:23-25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 그리고 요셉이 말했던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아보실 때”가 되었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신다(출 3장).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알리시면서 그 자손들을 “애굽에 있는 내 백성”(출 3:7)이라고 부르시며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 내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실 계획을 밝히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이 계획에 애굽의 대항과 그로 인한 심판도 포함되어 있음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강한 손으로 애굽을 치실 것으로 그 모든 일을 통해 이스라엘의 여호와가 참 신, 참 하나님이심을 알리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가지고 계신 계획이었고 출애굽기에 와서 하나님은 그것을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시며 약속하시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허무맹랑할 것이다. 사실 애굽 왕 바로가 이 말을 듣고 처음에 보인 반응도 그랬다.

출 5: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당대 세계의 강대국이었던 애굽 왕의 입장에서 자신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민족을 그냥 보내달라는 모세의 말은 기가 찼을 것이다. 니가 뭔데, 니가 말하는 여호와라는 신이 뭔데 내가 그렇게 해야되느냐라고 바로는 반응했다. 그 여호와를 나는 모르니 그가 하는 말도 난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바로의 이 말은 틀린게 없다.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이 후에 이어지는 모든 출애굽 사건의 목적은 사람들도 하여금 여호와를 알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여호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었다.

출 6: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이스라엘]가 알지라

출 7:5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출 7:17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바로]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출 8:10 그가 이르되 내일이니라 모세가 이르되 왕의 말씀대로 하여 왕에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니

출 8:22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바로]가 알게 될 것이라

출 9:14-16 [14]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바로]가 알게 하리라 [15] 내가 손을 펴서 돌림병으로 너와 네 백성을 쳤더라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 [16]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출 10:1-2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2]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모세, 이스라엘, 그 자손]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결국 이 모든 재앙과 사건을 통하여 바로와 당시의 애굽인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는 결국 이스라엘에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출 12:31)고 말하게 된다. 여호와를 모르니 보낼 수 없다고 말하던 그가 이제는 여호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고 출애굽을 하게 되었고, 그들은 이제 요셉의 유언에 따라 언약이 성취되었음을 상징하는 그의 유골을 가지고 낮에는 구름 기둥을 따라 이동하고 밤에는 불 기둥 아래 쉬며 약속의 땅을 향해 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쩌면 조금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모든 일들때문에 약간 얼떨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들도 정말 하나님을 알고 진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 뒤에서 살펴보자.

상황은 다 끝난 것 같았다. 바로는 백기를 들었고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사람들에게서 많은 물품(금, 은, 패물, 옷 등)을 취하여 나왔다. 이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변수가 생긴다. 바로가 마음을 바꾼 것이다.

출 14:5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시간이 좀 지났다. 그러자 생각이 바뀌었다. 재앙은 끝났고 지금 자신들이 큰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잘 부려먹던 노예들을 다 그냥 내보내다니. 우리가 무슨 생각을 했던거지! 그래도 상식적으로 그 동안의 일들을 생각하면 사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그들의 굳은 마음은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길을 돌이킨 것(14:2)을 보면서 그들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들의 신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여호와는 광야에서는 힘을 못쓰는 그런 신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바로는 그들이 내보낸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잡아오기 위해 추격대를 보낸다.

출 14:6-7, 9 [6]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7]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8] … [9]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

가장 빠르고 강력한 애굽의 최정예 부대가 이스라엘을 추격해 왔다. 바로 전만 해도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영화로 치면 치열한 전쟁이 끝나고 에필로그로 잔잔한 음악이 이어지면서 평온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이어질 그런 상황이었다. 소설로 치면 발단, 전개, 절정을 지나 이제는 결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하나님의 오래된 약속이 눈 앞에 현실로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그 때, 그들의 눈 앞에 그들이 절대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바로의 군대가 나타난 것이다.

출 14: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

끝인 줄 알았는데 끝나게 생긴 것이다. 결말인 줄 알았는데 절망이었다.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스라엘은 숫자가 많았지만 그냥 숫자만 많았다. 그들은 군대가 아니었다. 바로의 군대가 끌고온 병거는 지금으로 치면 탱크다.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은 보병과 민간인 앞에 탱크 부대가 나타난 상황이다.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들과 싸울 수 없다. 이길 수 없다. 그럼 도망할 수는 있을까? 그것도 불가능하다. 그들은 바닷가에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두려움과 원망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반응을 보라.

출 14: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상황을 보면 이 정도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이 상황에서 두렵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어지는 이들의 말을 보면 이들은 단순히 두려운 마음을 가진 정도가 아니라 두려움이 이들을 삼켜버린 것을 알 수 있다.

출 14: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이들은 지금의 상황에서 죽음의 두려움, 공포를 느끼고 있다. 지금 여기서 절대로 살아서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차라리 죽을거면 그냥 애굽에서 살던대로 살다가 나이 들어 죽으면 되는데, 이렇게 광야까지 나와서 비참하게 죽어야할 이유가 어디있냐고 모세에게 따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전에 그들이 모세에게 했던 말을 상기시킨다.

출 14: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우리가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느냐. 누가 종살이에서 구해달라고 했느냐. 5장에 보면 모세가 처음 바로를 만나고 나서 그들은 오히려 더 학대를 당했고 그로 인해 모세와 아론에게 그들은 하나님께서 너희를 판단하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아마 그때 이들은 이런 식을 말을 했었을 것이다.

사실 이들은 이후에도 힘든 일을 만날 때 마다 종종 이런 식의 과거미화를 하며 왜 애굽에서 우리를 구해냈느냐는 식의 불평과 원망을 한다. 먹을 것이 없으니까 애굽에서는 자신들이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었다고 말하고 떡을 배불리 먹었다고 한다(16:3). 물이 없을 때에도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목말라 죽게 하느냐고 원망한다(17:3). 가나안의 정탐꾼들이 돌아왔을 때도 이들은 애굽에서 죽는게 나았다고 말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며 폭동을 일으켰다(민 14장).

결국 이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현재의 평안, 안전, 만족, 기쁨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기대하고 모세를 따라 나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깨뜨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나의 적이고 내가 벗어나야할 상황이었다. 나에게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하는 ‘악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어려움보다 차라리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지금의 이 상황, 애굽의 군대가 그들의 눈 앞에 다시 나타난 이 상황은 그들에게는 일어나지 말아야할 일이었을까? 조금 있다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자.

뜻밖의 상황, 예상 못한 상황, 내가 원하지 않았던 상황, 흔히 고난, 시련, 어려움이라고 부르는 이런 모든 상황들을 우리는 이렇게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고난은 나에게 좋지 않다고 단정짓고 따라서 단순히 거기서 벗어나는 것을 그 순간 최우선의 목표로 삼는다.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그런 상황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원인을 찾아 책임을 묻는다. 어떤 경우는 끊임없는 자책에 빠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어떤 환경, 다른 사람을 그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낸다. 때로는 그 대상이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도 하고 하나님이기도 하다.

바다를 뒤로 하고 애굽의 군대를 마주한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이렇게 하고 있다. 그들은 애굽의 군대를 마주하자 심히 두려워했다. 8절 끝에 보면 그들이 나올 때는 담대하게 나왔다. 그때는 그들이 승리를 경험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두려워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부르짖은 내용이 무엇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올바른 믿음의 고백은 아니었을 것이다. 절박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하늘을 찾듯 그들은 하나님을 찾았을 것이다. 아마 그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섞여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인 모세에게 했던 말을 보면, 그들은 모세에게 지금 고난의 모든 책임을 물으며 원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다.

13장까지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에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들은 단지 두려워하고 원망할 뿐이었다. 이 사건 전까지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그 놀라운 일들의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다. 그리고 믿는 것이었다. 이들에게는 아직 그런 믿음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백성들의 원망을 듣고 있었던 모세는 달랐다.

 

모세의 믿음의 확신

자신을 향해 원망을 쏟아내는 백성들에게 모세는 이렇게 답한다.

출 14:13-14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 부르셨을 때 모세는 정말 연약해 보였다. 뭐 저렇게까지 못하겠다고 하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모세는 전혀 다르다.

그는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어쩔줄 몰라하는 자들에게 가만히 서라고 한다. 애굽의 강력한 군대를 보고 죽음을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오히려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도전한다. 다시 보지 않을 줄 알았지만 다시 너희 눈 앞에 나타난 이 애굽 사람들을 이제는 정말 영원히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확신한다. 너희가 경험할 것은 너희의 죽음이 아니라 너희를 두렵게 하는 이 군대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너희가 싸울 필요가 없다고 단언한다. 하나님께서 싸우실 것이고 너희가 해야할 일은 가만히 있는 것, 두려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모세는 왜 이렇게 말했을까? 그저 지도자로서 백성들이 힘을 내서 싸울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은 아니다. 오히려 모세는 그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싸우실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싸우신다는 확신은 어디에서 왔을까?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그가 경험한 것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후로 하나님은 그 뜻을 빠짐없이 이루셨고 모세는 그 모든 역사의 산증인이 되었다. 하지만 더욱 분명한 확신의 근거가 있다. 그것은 경험이 아니라 말씀이다.

출 14:1-4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3]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 [4]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하나님은 이 일이 있기 전 모든 것을 말씀해 주셨다. 어떤 일이 어떤 목적으로 벌어질 것인지를 말씀해 주셨다. 이스라엘이 길을 돌이켜 바닷가에 진을 치면 바로는 그들이 광야에 갇혔다고 생각하고 쫓아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와 그의 군대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얻으실 것이고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을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이 목적은 출애굽 과정에서 계속해서 반복되었던 것이고 이제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모세에게 하셨고 모세는 백성들에게 전달하였다. 그래서 온 무리는 “그대로” 행하여 바닷가에 진을 쳤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바로는 군대를 보내 이스라엘 자손을 추격하게 했고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은 그 군대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처음에 우리가 살펴봤던 상황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바로의 군대가 보이는 순간 이들이 보였어야 할 반응은 두려움과 원망이 아닌 확신과 기쁨이어야 했다. 오히려 반대로 바로의 군대가 보이지 않았다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인지 의심했어야 했다. 바로의 군대가 보였기 때문에 이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시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선포되기를 기대할 수 있었다.

좀 전에 했었던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자. 이 일은 그들에게 일어나면 안되는 일이었는가? 괜한 고난이었을까? 이것은 단순히 그들에게 고통만 가져오는 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하는 일이었는가? 아니다. 그들에게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이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뜻을 세우시고 목적을 가지고 계획하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와 같이 반응하는 것이 맞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계속해서 행하실지를 기대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가 옳다는 것을 다시 확신시켜 주신다.

출 14:15-18 [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17]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18]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1-4절에서 하셨던 말씀과 같지만 더욱 구체화되었다. 하나님은 이제 어떻게 바로의 군대를 통하여 영광을 얻으실 것인지도 밝히신다.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할 것이고 애굽 사람들은 그들을 따라 들어가 그곳에서 멸망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이 증명될 것이다.

특히 성경이 반복해서 바로의 병거와 마병을 강조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11번, 4, 6, 7, 9, 17, 18, 23, 24, 25, 26, 28절).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드러내고 하나님께서 더욱 큰 영광을 얻으시게, 사람들이 살아계신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의 병거와 마병이다. 그들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들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더욱 강하신 능력의 하나님으로 찬양을 받으실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의 병거와 마병을 보았을 때, 그 강력함을 보았을 때, 그들은 두려워하고 원망할 이유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순간 두려움을 느낄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에 사로잡혀 어쩔줄 몰라하고 원망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이 자신의 안위와 평안, 만족, 기쁨을 최우선에 두지 않았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알았다면, 오히려 그들은 눈 앞에 보이는 시련 가운데 안심하며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이다.

 

결론

성경의 많은 이야기가 그렇듯 결론은 참 간결하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되었다. 이스라엘은 마른 땅으로 바다를 건넜고 애굽 군대는 그들을 따라 들어 갔다가 멸망한다. 참으로 어리석고 완악한 마음이다. 그동안 그렇게 당했었고 지금도 바다가 그렇게 갈라지는 것을 보면 정말 안되겠구나하고 도망할 법도 한데 그들은 바다 가운데까지 뛰어들었다. 결국 그들은 그 안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하여 싸우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도망하려 했지만 결국 멸망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병거로 무장한 애굽 군대를 보고 두려워했지만 결국 그들이 마지막에 본 것은 그들의 죽음이었다(30절).

이 사건의 결론으로 모세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출 14: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큰 능력을 보고 경험하자 그분을 믿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한 마음으로 15장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그 노래의 주제는 11절부터 기록되어 있다.

출 15:11-15 [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12]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13]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4] 여러 나라가 듣고 떨며 블레셋 주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15]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출 15:18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이것이 출애굽 사건의 결론이다. 사람들은 많은 신을 섬기지만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다. 모든 신은 사람이 만들었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신 참 신이시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시며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하나님만이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신다.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 애굽의 왕이든, 그의 군대든, 바다든 마찬가지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든 믿음이 없는 사람이든 하나님의 주권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도전 /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게 되었던 세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애굽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 그리고 모세다.
오늘날도 우리는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경험해도 애굽 사람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능력을 보여주셨고 살아계심을 나타내셨다. 그들도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았다. 하나님을 겸손히 의지하고 따르지 않았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출애굽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다시 애굽으로 데리고 오려 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받았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통해, 환경을 통해 계속해서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편에 서라고 하시는데 거절한다. 만약 지금 그런 상태에 있다면, 성령께서 출애굽기 14장을 통하여 하는 말씀에 귀기울이기를 바란다. 지금은 은혜의 때이지만 언젠가 끝난다. 그 때가 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길,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야 한다. 늦기 전에 그렇게 해야 한다.








가나안 7족속의 의미

적을 알고 우리 자신의 권세를 알면 적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된다.
이것은 영적인 싸움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영적 대적들인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그 일곱 족속들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그들을 물리치는 능력을 가져야 하겠다.


1. 헷 족속(Hittites) - 공포, 두려움

공포와 두려움을 뜻한다.
악몽, 우울증, 거짓, 속이는 것 등으로 영적 두려움 가운데 고통 속에서 살도록 하는 것이다.
헷 족속은 B.C. 1600-1700년 사이 족장 시대부터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가지 그곳에 거주한 종족 중에서도 매우 큰 민족이었다. 광야와 레바논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온 땅이 헷 족속의 영토로 불리웠을 정도다.
또 헷 족속은 히타이트족속들을 말하는데 BC10세기에 일어난 강력한 철기문명을 가지고 지역의 두려움이 대상이 된 족속이다.

2. 기르가스 족속(Girgashites) - 진흙탕, 혼돈 무질서

진흙탕을 의미하며 혼돈과 무질서로 해석할 수 있다.
기르가스 족속은 우리의 삶에 진흙탕 같이 앞길을 볼 수 없도록 혼돈하고 공허함을 주고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모르게 얽히게 한다.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 중에 우선순위를 놓치게 만든다.
성경은 에서를 가르켜 ‘망령된 자’라고 지칭했다.
에서는 장자권의 진가를 모르고 야곱에게 팔았다. 이러한 기르가스의 영을 물리치고 지혜와 분별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3. 아모리 족속(Amorites) - 산중 사람, 교만, 교육(지식, 학문)

산중 사람이라는 뜻으로 교만 또는 교육(지식, 학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Amorite라는 단어는 ‘자랑하다’, ‘불룩 내밀다’, ‘산을 오르는 자’, ‘교만하게 행동하다’, ‘마음에 교만을 품다’ 라는 뜻인데 이 단어의 모든 정의들은 다 함께 인본주의적인 자세를 기본적으로 취하고 있다.
아모리 족속은 교육의 산을 말하는 것이다.
인본주의는 우주적인 인간의 가치와 지식을 최우선시 하는 윤리 철학이다. 이것은 이성주의에 의해서 강화된다.

4. 가나안 족속(Canaanites) - 낮은 땅, 저주

낮은 땅이라는 뜻으로 낮은 자존감, 경제, 저주(가난과 실패)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나안 족속은 가나안 땅에 거하는 일곱 족속 전체를 통칭하는 말인 동시에 가나안의 7족속 중 한 족속인 가나안 족속을 뜻하기도 하는 말이다.
그들은 주로 무역에 종사했기에 고대 세계에서 가나안이라고 하면 곧 ‘상인’을 의미하는 말과도 같았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착 이후 그들에게 점차적으로 흡수됐다.
가나안 족속은 ‘저주’라는 뜻도 있다(창 9:25).

5. 브리스 족속(Perizzites) - 시골 사람, 신경질, 미움, 광활한 평야, 전쟁터

시골사람이라는 뜻으로 신경질, 미움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난 무식하다고 하면서 비신앙적인 사람이 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해서 부르심을 받은 무리가 되지 못하게 하고 게으르게 하고 멀리 볼 수 없게 해서 약한 자립심과 존재감을 갖고 있다. 또 브리스는 ‘광할한 평야, 전쟁터’라는 의미도 있는데 혈기와 짜증, 신경질이 미움을 일으킨다.

6. 히위 족속(Hivites)

마음에 속한 축제(예술, 음악, 스포츠, 패션, 오락) 등으로 신념과 이념으로 하나님이 어디있느냐면서 기만하고 땅의 것을 즐기게 하는 향략과 쾌락주의로 빠지게 한다.
구체적으로 예술, 음악, 스포츠, 오락 등 사람들이 세상에서 즐기며 깊게 빠지게 되는 모든 것을 뜻하고 있다.

7. 여브스 족속(Jebusites) - 짓밟다, 억압(증오, 원망, 불평)

짓밟다는 뜻으로 억압(증오, 원망, 불평) 그리고 의료계로 해석할 수 있다.
밟히다 혹은 타작마당 등의 뜻을 가진 여부스는 다윗 왕 때 엄청난 전염병 재앙이 임했던 곳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자리가 바로 여부스 족속의 오르난의 타작마당이다.
죄사함을 받고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은혜와 긍휼을 느꼈지만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부정하고 온전히 주님께 순종하면서 말슴과 기도로 장성함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올바른 마음의 성전을 건축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상 가나안 7족 같은 우리 안의 구습과 욕망을 우리는 타파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여기서 말하는 가나안 7족이란 한마디로 인간의 죄성을 가르킨다. 7족은 요단을 건너간 이들의 영적 쟁투라는 점에서 우리 기존 신앙인들이 해결해야할 인간 죄성의 쓴 뿌리다. 가나안 7족은 수십년간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성도의 고질적인 죄성으로 이것을 내쫓는 일에 잇어 그 주체는 하나님이 되셔야 한다. 

팔레스타인 지도

 

왕의 대로

'왕의 대로'라고 부르는 길 역시 고대 이스라엘에서 중요한 도로였습니다.
'왕의 대로'란 말은 (민 20:17)과 (민 21:22)에 기록된 표현입니다.

(민 20:17)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우리로 당신의 땅을 통과하게 하소서. 우리가 밭으로나 포도원으로나 통과하지 아니하고, 우물물도 공히 마시지 아니하고, 우리가 '왕의 대로'로만 통과하고, 당신의 지경에서 나가기까지 좌편으로나 우편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리이다....".

 "이 이름은 왕이 다니는 특별한 길이라기 보다는 '주된 길'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길이 다른 길에 비해 빈번하게 사용된 주도로라는 말입니다.
왕의 대로는 지리적으로 다메섹을 기점으로 해서 아라비아 사막의 경계선에 가까운 트랜스 요르단 고원의 동쪽 가장자리의 길하레셋과 페트라를 지나고, 남북으로 달려 아카바 만의 에일랏에 이르는 국제 간선도로 입니다.
이 길은 사막의 경계 부근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에 대상들이 많이 이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국제 교역에 있어서 남 아라비아 국가들의 값진 향료를 수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 이 길은 이스라엘 왕국시대에 남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의 교역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현대에 대한 정의들
   철학자들은 현대를 가리켜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를테면  획스터는 현대를 '혼란의 시대'라고,
   소로킨은 '위기의 시대'로,
   오든은 '불안의 시대'로,
   알렉산더는 '불합리의 시대'로,
   괴슬러는 '갈망의 시대'로,
   드러커는 '단절의 시대'로,
   갤브레이드는 '불확실성의 시대'로 표현한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3일 / 02- 28(수)
출애굽기 13:1-22
찬송 / 221장(나 가난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애굽기 13:5)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땅 곧 네게 주시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바 젖과 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시거든 너는 이 에 이 예식을 지켜.
When the LORD brings you into the land of the Canaanites, Hittites, Amorites, Hivites and Jebusites--the land he swore to your forefathers to give you, a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you are to observe this ceremony in this month:

13:1-2. 초태생은 여호와께 바치라
(애굽에서 장자와 생축의 처음 난 것에 대한 재앙을 잊지 말라는 교훈)

13:3-10. 무교병을 먹으라

13:11-16. 초태생을 바치라
(수컷은 여호와의 몫, 손의 기호와 미간의 표를 삼으라)
13:17-20. 애급에서 탈출(숙곳에서 에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인도하심)
13:21-22.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a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

한글개역성경 인터넷에서 검색한 결과 구약에서만 19회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4, 레위기 1, 신명기 6, 여호수아 1, 예레미야 2, 에스겔 2

《 출3:8, 33:3, 레 20:24, 민 13:27, 14:8, 16:13, 16:14, 신 6:3, 11:9, 26:9, 26:15, 27:3, 31:20, 수 5:6, 렘 11:5, 32:22, 겔 20:6, 20:15》

성경을 읽으면 ‘좋은 땅’을 설명하는 것임은 알겠는데 왜 하필이면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는지 궁금한 것도 사실입니다. 어느 땅이고 간에 길바닥에 젖이 흐르고 꿀이 흐르는 땅은 현실적으로 없고 이스라엘 역사에도 나오지 않으니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곱의 때에 기근을 피하여 애굽에 내려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센’ 이라는 땅에서 목축을 주로 하며 살았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애굽은 비옥한 나일 강 주변으로 해서 농업이 발달 했습니다. 따라서 애굽에 이주하러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100% 목축만 하지는 않고 농사도 지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등장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농사의 여러 일’을 엄하게 시킨 것으로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출1:14)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축도 하고 농사의 여러 일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축과 농업을 하는 이들에게는 목축을 할 수 있는 드넓은 푸른 목초지와 농사지을 수 있는 자기 소유의 땅을 갖는 것이 환상적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소명을 주실 때 바로 이러한 땅을 주시겠다고 설명을 하십니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지방의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8)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땅을 준다고 하니까 또, 바로왕의 박해도 있고 하니까 그들이 모세를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라고 할 때, 문자 그대로 그 땅에는 젖과 꿀이 땅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땅일까요?

  '젖'은 우유를 생산할 수 있는 양과 염소를 먹일 수 있는 풍성한 초장을 의미하고 또한 성경에서 꿀은 벌꿀 자체를 의미하는 곳은 몇 군데 안 되고(삼손의 이야기 삿 14:8, 요나단 이야기 삼상 14:27, 잠언의 경고 잠 25:16 등에서는 문자 그대로 꿀을 의미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의  ‘꿀’은 “대추야자 꿀과 같이 단 여름 과실을 생산하는 과실 수” 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많이 쓰입니다.<同旨, 그 말씀, 2008.8. p169>

 따라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젖으로 대표되는 목축업과 꿀로 대표되는 농업 - 종 되었던 집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싶고 소망하고 꿈꾸었던 - 을 모두 할 수 있는 풍성한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에스겔서 20장 6절은 이를 부연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내가 내 손을 들어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그들을 위하여 찾아두었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겔 20:6)

 따라서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감추어 두었다가 찾아주신 땅이요, 모든 땅 중의 가장 아름다운 땅(겔 20:6)입니다.
또한 그 땅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땅(민 35:34)이요, 시내와 분천과 샘이 있는 땅(신 8:7)이요, 광대한 땅(출 3:8)이요,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신 11:11-12)입니다.

 그러면 신약시대에 우리에게 적용할 가나안 땅은 어디일까요? 평강과 감사와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예수 안에서의 삶이 곧 현재 우리의 가나안 땅이 될 것입니다. 그 땅은 신자만이 찾아 누리는 땅이요, 모든 만족 중에서 가장 최고의 만족을 누리는 아름다운 삶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가나안 부족을 쫒아 내야 했듯이 우리들도 끊임없이 내 속에서 올라오는 육신의 일들을 쫒아내며 살아야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이 천국의 상징이라는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천국의 상징이라면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싸움을 할리가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문화와 싸워야 했고 가나안 종교와 싸워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나와야 했으며, '하나님'을 배우고 알기 위해 '광야'를 지나야 했으며, 마지막으로 '가나안 족속'과는 싸워서 정복해야 했습니다. 그동안 가나안 땅을 지배하고 있던 세력은 블레셋 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안식을 얻고 누리려면 필연적으로 블레셋과 싸워서 이겨야 했습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해도, 세상으로부터 구분되었다고 해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여전히 '세상' 입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하나님 나라와는 정반대 되는 가치관, 문화, 종교, 세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 문화, 종교하고 싸워 자신을 주 안에서 지켜야 합니다. 또한 끊임없이 올라오는 육신의 정욕과도 싸워야 합니다. 세상의 문화, 가치관, 종교와 육신의 본성은 가나안의 여섯 족속처럼 끊임없이 신자를 공격해 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성령을 받아 거듭났다고 해서 신앙생활이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기 위한 싸움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신자들은 이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고 불신자들은 이 싸움이 아예 없는 사람들입니다.  

 요컨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만사형통, 승승장구하는 땅이 아니며 고통과 질고가 없는 땅이 아닙니다. '산과 골짜기가 있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신11:11)이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이 요구되는 땅이며, 그래서 날마다 하늘(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땅이며, 유혹하는 세상과 자신에게 있는 정욕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싸워야 하는 땅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물리적으로 그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아니고, 토양이 매우 기름져서 농사짓기 아주 좋은 땅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시고, 간섭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소개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무조건 세상 복을 받고 고통도 없고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誤算)이며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 됩니다.  

  신자들은 오직 '세상의 복'을 받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을 닮기 위해 말씀을 가지고 기도로 날마다 십자가를 지며, 육체의 정욕과 세상의 유혹과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지금 가나안 땅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김으로 승리의 기쁨이 늘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의미(신명기 11:8-12)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대부분의 신자들, 아니 많은 목회자들마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젖과 꿀이란 당시로선 일용하는 필수 식품이 아니라 기호 식품 중에서도 상당히 고급스런 식품의 대명사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아주 풍요로운 땅으로 쉽게 단정짓고는 예수를 믿고 나면 이전보다 생활 형편이 훨씬 나아지는 축복을 받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아주 잘못된 해석이자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의 본질과는 거리가 멉니다.

많이 생산된다는 의미로 "흐른다"라고 표현했듯이 가나안 땅의 주산물은 물론 젖과 꿀입니다만 땅 자체가 풍요롭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젖과 꿀이 주산품이라는 것은 목축과 양봉이 주산업이라는 의미인데 곡물을 심을 수없는 아주 척박한 땅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아리조나 사막 지역에 가보면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보호 구역이 곳곳에 있는데 너무 덥고 메마른 모래 땅이라 염소와 꿀벌을 치고 토산품을 만들어 파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바로 그런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 흐르다(2100) 주브(zûwb)  זוּב    

1. 흐르다.   2. 시 78:20.  레 15:25.
발음 [ zûwb ]
구약 성경  / 41회 사용

[젖과 꿀, 풍부함을 뜻함] 출 3:8, 13:5, 33:3, 레 20:24, 민 13:27, 14:8, 16:14

-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땅이 풍요롭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젖을 생산할 수 있고 양봉만 할 수 있는 척박한 땅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흐른다(주브.
zûwb.  זוּב)'라는 동사는 "생산된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그 정의를 어떻게 내리고 있습니까?
"파종한 후에 채소 밭에 발로 물대기"를 할 수 있는 애굽 땅과 비교했습니다.
수차(水車)를 발로 저어 물을 댈 수 있는 비옥한 평지라 채소나 곡물을 심기만 하면 풍족하게 수확할 수 있는 곳입니다.
반면에 가나안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라고 합니다.
우선 채소와 곡물을 심을만한 평지가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간혹 내리는 비가 대지를 적실 정도가 안 됩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일용할 주 식품인 곡물과 채소를 경작할만한 여건이 전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젖과 꿀을 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기호 식품은 양으로 따지면 조금만 생산해도 사실은 아주 많은 양이 됩니다.
기호식품이란 주 식품에 첨가해서 아주 적은 양을 섭취하는 것이고 또 매일 젖과 꿀만 먹고 살 수는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쌀 수십만 톤과  꿀 1 톤이 먹일 수있는 사람 수를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나아가 당시의 경제적 형편과 식생활 습관을 감안하면 젖과 꿀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최고급 식품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흐르는"이란 표현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도저히 사람이 살 데가 못되는 땅이 가나안입니다.

신자가 관심을 쏟아야 할 부분은 "왜 그런 척박한 땅을 하나님은 오히려 축복의 땅이라고 약속하셨고 또 그 크고도 수많은 희생들을 거쳐서야 인도하셨는가?" 입니다.

애굽의 종살이 사백년과 가데스 바네야와 광야에서의 온갖 반역으로 인해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죽었지 않습니까?
그 중에 모세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 해답을 본문이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歲初-신년초)부터 세말(歲末-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척박하여 산물이 희귀한 땅이라 오히려 하나님이 일년 365일 한 시도 떠나지 않고 항상 지켜 보호해 주시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땅을 당신의 백성에게 권고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여건이 풍족한 곳이 아니라 정반대의 땅으로 당신의 자녀들이 들어가 살기를 하나님은 원한다는 것입니다.
또 바로 그러하기에 세상 수단에 절대 의지하지 않고 오직 당신의 계명대로만 살아라고 합니다.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선정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백성으로 선정한 이유와 완전히 동일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

신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해주는 백성들의 모습도 동일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한 마디로 신자가 되었다는 것, 믿음으로 산다는 의미는 주위 여건이 어떠하든 삶의 세밀한 구석부터 전 인생을 걸기까지 오직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에 의존하여 산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절대로 돈의 많고 적음이나, 사람들의 칭찬이나 멸시와, 환경의 풍족함이나 궁핍함에 굴복하지 않고 사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신 8:3).

또 그렇게 살면 젖과 꿀은 커녕 마실  물마저 없는 광야에서 무려 40년을 방황해도 주리거나 갈하지 않고 의복이 헤어지지 않으며 발이 부릍지 않게 해줄 하나님이 세초부터 세말까지 항상 우리를 지켜봐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참 정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막상 가나안 땅에 들어가선 젖과 꿀을 싫컷 맛보았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젖과 꿀과는 거리가 멀어져 버렸습니다.
어쩌면 40년간 방황하던 광야가 오히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지금 당신은 발로 물 대는 애굽 땅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의 탐심을 좇아 살고 있습니까?(골 3:5)
진정한 젖과 꿀을 사모하기에 땅이 물을 흡수하는 험한 산과 골짜기에서 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손을 잡고 따라 가고 있습니까?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광야에서 본 가나안

신명기가 기록된 느보산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면,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보이지 않는다.
가나안 동편이 광야이기에 이스라엘이 차지한 길르앗과 골란보다 결코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성경에서는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할까?
그동안 걸었던 광야보다 가나안이 상대적으로 더 기름지다는 뜻일 수 있다.
요단 동편에서 볼 때 가나안은 서쪽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서풍으로 이슬을 공급받는다.
이슬은 밤마다 땅을 촉촉이 적시며, 겨울에는 농사가, 여름에는 목축이 가능한 땅으로 만든다.
겨울, 우기에 지중해 구름이 가나안산지에 부딪혀 내리는 비는 서쪽으로 흐르며 숲을 만들어 계단식 농법을 사용한 풍요로운 농사를 짓게 한다. 동쪽으로 흩뿌리고 지나가는 비는 유다광야에 초지를 형성해, 겨울에는 푸른 풀을 공급하고, 여름에는 건초로 목축을 하게 한다.

목축과 과일 농사에 적합한 땅
‘젖이 흐르는 땅’이라는 말은 가나안이 목축에 적합한 땅이라는 의미다.
가나안은 건조한 날씨에 적당한 수의 양 떼를 키울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젖을 얻기 적절하다.

또한 ‘꿀이 흐르는 땅’이란 골짜기에 숨은 샘 곁에서 자라는 과실수의 열매를 말한다.
가나안의 여름은 가혹할 만큼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다.
그런데 겨울에 내린 물을 품는 석회암층은 여름에 샘물을 꾸준히 공급해, 골짜기든 산지에 시내와 샘이 흐르게 하며(신 8:7), 과실수에 수분을 공급해 따가운 햇볕에 과일의 당도를 최고로 높인다.

신명기 8장에 나오는 7대 식물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이 과일이며, 대추야자 열매다말(Tamar)을 의미한다(신 8:8).
이스라엘의 포도, 무화과, 대추야자는 세계 최고의 당도를 자랑한다.
즉, 농업적으로 봤을 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은 적당한 목축에 적합한 땅이요, 당도 높은 과일 농사에도 적합한 땅이다.
그래서인지 현대 이스라엘의 주력 산업도 농업이다.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는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기후나 주변 상황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만 살 수 있는 땅이다.
왜냐하면 항시 흐르는 요단강이 있지만 낮은 곳에 있어 사용할 수가 없고, 농사를 지으려면 비가 내려야 한다.
서쪽으로는 베니게와 블레셋, 동쪽으로는 아람, 암몬, 모압, 에돔, 심지어 광야의 미디안과 아말렉이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노리고, 추수기만 되면 침략해 왔다.

또한 거대 문명이 위치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가 이집트로 가려고 쳐들어왔고, 이집트도 북진 정책을 쓸 때는 가나안을 교두보로 삼았다.
전쟁이 많고, 사망의 그늘진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려면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말씀에 순종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기근과 강대국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은 곡물을 심을 수 없는 척박한 땅,
그러나 건조한 날씨에 양떼를 키울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젖을 얻기 적절했다.
또 골짜기에 숨은 샘 곁에서 자라는 과실수는 단맛이 강하다.
지금도 이 지역의 포도, 무화과, 대추야자는 당도가 높다.
비록 농사는 못짓지만 하나님이 일년 365일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켜 보호해 주시는 땅이라고도 해석된다.

가나안은 시나이 반도와 아나폴리아 사이에 있는 해안 지역을 가리키는 옛지명으로 오늘날 레반트 지역에 속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북부, 시리아 일부 지역이다.

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이 요즘 ‘피와 살이 튀는 전장’이 되었다.

가자 분쟁의 불씨는 1948년 신생국 이스라엘과 아랍연합의 1차 중동전쟁이 시작이다.
이 전쟁으로 서안지구는 요르단 차지가 됐고 가자는 이집트 수중에 떨어졌다.
이스라엘은 1967년 3차 중동전쟁(6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1993년 오슬로협정으로 반환, 팔레스타인 자치구), 시나이반도(1982년 평화협정으로 이집트 반환), 골란고원 등을 전리품으로 챙긴 후 이스라엘 정착촌을 만들기 시작했다.

3차 중동전쟁에서 아랍연합군(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이 모두 이스라엘에 패한 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구의 국경선은 더욱 견고해졌다.
강한 지도자가 없는 팔레스타인인들은 난민 신세로 떨어졌다.

1987년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이 시작되었으나 2006년 총선이후 가자는 강경파 하마스가 지배하고 서안(West Bank)지구는 온건파 파타가 통치하는 이중권력 상태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서방(미국, 유럽, 이스라엘)대 이슬람문화권(아랍 및 페르시아계, 파키스탄)의 군사적 대립의 근원이자 테러 분쟁 핵심지라 할 수 있다.

지난 7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 본토를 기습폭격, 민간인을 학살하고 인질을 납치하자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전면봉쇄하고 대규모 보복공습을 했다.
이스라엘측에서 보면 팔레스타인은 갓난아기와 여성들까지 잔인하게 죽이는 테러리스트이고 팔레스타인측에서 보면 땅과 종교적 상징을 빼앗아가는 점령자이다.

중동의 전쟁은 전세계에도 영향을 미쳐 각국마다 이스라엘 지지와 팔레스타인 지지로 분열되고 있다.
가장 많은 유대인이 사는 뉴욕도 긴장하고 있다.
8일 타임스 스퀘어에서 이스라엘 지지시위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지지시위가 맞서며 경찰이 출동했었다.
지난 10일부터 유대교 회랑과 이슬람교 사원 인근에 대한 순찰도 강화되었다.

기원전 1,800년 경에 헤브론에 살았다고 알려진 아브라함(아랍어로 이브라힘)은 아랍과 유대 민족의 시조이다.
이스라엘민족은 아브라함의 첫째 부인 사라의 아들 이삭의 후손, 아랍민족은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샬롬(shanlom)’은 안녕하세요, 잘가세요라는 일반적 인사로 평화, 평강, 평안을 의미한다.
팔레스타인 인사말로 ‘샬람, 알레이 쿰’은 ‘당신의 평화를 빈다’이다.
샬롬과 샬람은 비슷한 발음으로 모두 ‘평화’ 라는 뜻이다.
그런데 입으로는 ‘평화’를 외치면서 한 형제의 후손들이 죽으라고 싸우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극우도 아니고 극좌도 아니고 중도의 목소리이다.
한쪽으로 치우친 목소리는 권력욕으로밖에 볼 수가 없다.
더 이상은 ‘피가 피를 부르는’ 확전은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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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 12 일 / 02- 27(화)
출애굽기 12:1-51
찬송 / 장(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유월절(출애굽기 12: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찌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This is how you are to eat it: with your cloak tucked into your belt, your sandals on your feet and your staff in your hand. Eat it in haste; it is the LORD's Passover.

유월절(逾越節)이란 한자는 "넘을 유(逾), 넘을 월(越), 마디 절(節)"
영어로는 "Pass Over" 라고 합니다.
유월절은 히브리민족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으로 시작을 말합니다.

유월절(페사흐) [ peçach ]  פֶּסַח 스트롱번호 6453

1. 형벌과 재난으로부터의 면제.  2. 유월절의 어린 양. 3. 유월절
발음 [ peçach ]
어원 / 6452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9회 사용

뜻풀이부
1. 고유명사, 남성 형벌과 재난으로부터의 면제
 a. 고유명사, 남성 유월절의 어린 양[백성들의 죄를 면하기 위하여 바쳐지는 희생 제물], 출 12:48, 12:21, 27, 대하 30:15, 17, 35:1,6,  민9:4, 대하 30:18
 b. 고유명사, 남성 유월절[니산월의 제14일 : 무교절의 7일 이후에 곧바로 이어지는 날], 레 23:5.

12:1-13, 유월절 지침
12:14-20, 무교절 지침
 누룩이 없는 빵(누룩은 부정한 것, 죄악을 상징)
12:21-28, 유월절 지침(현관문 문설주에 피를 바르라)

27.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12:29-30, 멸하는 자(죽음의 천사)
12:31-36, 은금의복을 준비
12:37-51, 이집트를 떠나는 이스라엘
  42절 이하 이방인, 일군들이 유월절 지키는 규례, 양고기의 뼈를 꺾지 말라





허리에 띠를 띠고... 급히 먹으라
-
마치 출정하는 군인들의 그것처럼 긴장이 감도는 지시이다. 사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 출애굽하라는 명령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만반의 여행 준비를 갖추고 모든 행동을 재빨리 시행해야 했다. 실로 이 지시는 430년간 기다렸던 출애굽이 이제 목전에 다가왔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여기서 '급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파존'은 '도망하다'는 뜻의 '히파드'에서 온 말로서 도망치듯 서두르는 것을 뜻한다.
한편 하나님께서 이렇게 급히 먹도록 하신 이유는 그들이 당시 그토록 급하게 구출된 것이 오직 주의 은총 때문이었음을 후손들에게 두고 두고 알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 지금까지 지시한 모든 내용은 이스라엘의 구속자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특별히 제정하신 유월절이었다.
따라서 너희는 경건한 마음으로 이 식사에 임하라는 뜻이다.
한편 여기서 '유월절'(페사흐)이란 문자적으로 '넘어간다'(Passover)는 뜻으로서, 즉 여호와께서 애굽을 심판하시던 날 밤, 죽음의 천사가 피 묻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은 그냥 지나쳐 넘어간 사건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면서 부터 준행해야 할 이 유월절은 이스라엘인과 애굽인(이방인) 사이를 구별하여 축복과 저주, 생명과 죽음의 대조적인 일을 행하신 여호와의 구원 행위를 기념하는 절기인 동시에,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이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레위기 서론, 히브리 절기와 축제>. 또한 이는 오순절, 장막절과 함께 이스라엘 3대 절기 중 하나이다.





사전적인 의미는 "이스라엘 민족(民族)이 이집트에서 탈출(脫出)한 일을 기념(紀念ㆍ記念)하는 유대교(Judea敎)의 축제일(祝祭日).
하늘의 천사(天使)가 밤중에 이집트의 각 집의 맏아들을 죽일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에는 어린양(羊)의 피를 문설주(門楔柱)에 발랐기 때문에 그대로 지나가서 재앙(災殃)을 받지 않은 일을 기념(紀念ㆍ記念)한 데서 유래(由來)한다."고 합니다.

유월절의 교훈은 어린 양의 피를 히브리 백성들의 집 문설주에 바르고 초태생의 죽음이란 재앙을 넘어간 후에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섭리를 깨닫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새해는 한해의 새로운 시작인 것처럼 유월절은 히브리 민족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가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고 넘어가는 그날이 우리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삶을 새롭게 하시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새롭게 시작되시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왜면하고 살아오셨나요?

아직도 보혈을 통해서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시고 계시다면 주의 성령이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보혈에 의해서 바뀐 인생은 더이상 내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이상 죄가 지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바라보는 시선과 행동은 모두 예수님의 그 십자가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매일의 삶이 여호와의 유월절과 같은 새로운 출발을 경험하는 은혜가 넘쳐나시기를 기도합니다.

내 주의 보혈은














The Lords Passover (여호와의 유월절)

지극히 높은 주님의 나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세상의 신을 벗고서 주 보좌 앞에 엎드리리

내 주를 향한 사랑과 그 신뢰가 사그러져갈 때
하늘로부터 이곳에 장막이 덮이네

이곳을 덮으소서
이곳을 비추소서
내 안에 무너졌던 모든 소망 다 회복하리니

이곳을 지나소서
이곳을 만지소서
내 안에 죽어가는 모든 예배 다 살아나리라

The Lords Passover (여호와의 유월절)

In to the highest place of all
In to the most holy place I come
Taking off my worldly shoes
I fall before throne just as I am
When all of my love for me and all of my for you are dying
Down to this very plave Oh Lord, Comes heaven's Ta ber na cle
Cover me with Your blood Changer me with Your blood
All of my broken hopes in me will be restored in my God
Pass by me Oh my Lord Lay your hands Oh my Lord
All of my dying worship for
You will be revived in my God


여호와의 유월절


이 재앙은 출애굽의 10가지 재앙중에 마지막 재앙이자 가장 큰 재앙 그리고 가장 중요한 생명을 누가 손에 쥐고 있는가 심판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 혼은 구원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 보여주기도 합니다.
Exodus 12:29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왕의 장자부터 - 가축의 처음 난 것 이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유추해볼 수 있어요.
하나님의 눈에는 그 강대한 바로의 장자도 귀족들의 장자도 서민들의 장자도 가축의 처음 난 것도 높낮이가 없습니다. 그사람이 착하든지 나쁘든지 천하든지 귀하든지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재앙 아래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을 통해 여호와의 사자는 집을 넘어갔나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두어서 하나님의 재앙에서 넘어갈 수 있었어요.
유월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이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를 구분할때 보는 단 한가지는 그 사람의 성품도 아니였고요 그사람의 생김세도 그사람이 어떤 신을 섬기는지도 아니었어요.
단 한가지를 봤습니다. 바로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러져 있었는가 아닌가
이게 중요합니다.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가 아닌가
그럼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나요?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성품 때문에 우리의 행동 때문에 우리의 지위 때문에 우리의 힘 때문에 우리의 돈 때문에 우리에게 닥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단 한가지 어린양의 피로 우리가 살아가는지 그것 하나만을 중요하게 여기시고 그것으로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그런 여러분들께 이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나요?
그럼 우리에게 어린양의 피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누구의 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 대답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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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는 유월절의 어린양되시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피를 통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몇주간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배웠어요.
이런 배움은 결국 우리가 왜 예수님이 필요한가 에 대해서 배우기 위해 선제적으로 배워야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죠 우리가 우리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다면 말이죠
예수님의 희생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심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죄인이 아니면 우리를 구원할 분이 왜 필요하겠나요
예수님의 이야기가 왜 복음인가 왜 복된 소식인가 이 이 이해의 바탕은 우리들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였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의 가르침 만으로 우리의 죄가 고백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이 여러분의 귀를 여시고 여러분의 눈을 여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주님의 복음은 그리스도인이 듣고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시는 것 자체가 하나의 특권 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깨닫는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이해가 되시나요?
이 사랑은 간단한게 아닙니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도 모두에게 당연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라고 고백되어 나오는 그 탄식과 부르짖음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요
그 회개를 들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이 일들은 단순히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질서를 질서로 만드는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 입니다.
하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복음이 되는 이유는 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께 용서받고 구원받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이 백성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바로 심판을 확정짓는 마지막 한방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 마저 죽였다’는 사건으로 들어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여 독생자까지 내어 주셨지만 인간은 그 마저도 거부하고 하나님의 아들까지 죽이게 된 겁니다.
이제 그 어떤 사람도 이 죄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이전에는 변명거리가 있었어요 율법을 잘 지켰다고 변명하였고 좋은 사람으로 살아갔다고 변명하였고 하나님을 잘 섬겼다고 변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사건이 딱 세워지고 나서부터는 더이상 변명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을 잘 믿는다는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앞장 섰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힘섰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호산나 호산나 다윗에 자손이라고 부르던 민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자고 동의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 죄에서 더이상 도망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절망적인 그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반대로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제 여호와의 진노와 심판이 남아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성령을 통해 믿게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님의 흘리신 보혈을 통해 살아납니다.
그 차이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걸 가르는 거에요.
유월절의 교훈은 여기 있습니다. 새해는 한해의 새로운 시작이듯이 유월절은 민족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가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고 넘어가는 그날이 우리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하시려고 하십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새롭게 시작되시기를 원하고 바라시나요? 아니면 십자가를 왜면한체 살고 계신가요.
여러분 아직도 보혈을 통해서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시고 계시다면 주의 성령이 여러분을 변화시키고 여러분을 새롭게 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직도 십자가의 그 사랑을 믿지 못하고 계시다면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바꾸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보혈에 의해서 바뀐 인생은 더이상 내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이상 죄가 나오지 못한다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바라보는 시선이 행동이 일들이 이제 모두 예수님의 그 십자가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유월절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의 백성들을 넘어간 날이라고 배웠습니다. 또 그 백성들을 구분하는 방법이 행위도 신분도 성품도 아닌 오직 어린양의 피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의 피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의 보혈의 피라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오직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사람 하나님의 백성임을 다시한번 배웠습니다.
여러분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예수님의 그 희생을 감사의 마음으로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한주간도 믿음의 눈을 들어 그 십자가를 붙잡고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또 시작되는 한주간을 오직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 11 일 / 02- 26(월)
출애굽기 11:1-10
찬송 / 192장(양원히 죽게 될 내 영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 가지 재앙(출애굽기 1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가지 재앙을 바로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보낼찌라 그가 너희를 보낼 때에는 여기서 정녕 다 쫓아 내리니.
Now the LORD had said to Moses, "I will bring one more plague on Pharaoh and on Egypt. After that, he will let you go from here, and when he does, he will drive you out completely.

이제까지 애급 땅에 내려진 재앙은 아홉 가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하여 재앙을 한 번 더 내려야 애굽의 왕과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고 히브리 백성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될까요?
이러한 과정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없습니다.

애굽에 대한 마지막 재앙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재앙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재앙인 장자의 죽음에 대한 재앙은, 애굽의 왕궁에서부터 일반백성들에게 이르기까지의 기초를 흔드는 재앙입니다. 장자는 그 집안의 기둥이며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집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찬송 : 새찬송가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성경 : 출애굽기 11장 1절-10절
설교 : 세상이 위대하게 보는 성도
우리 마음 속에는 두려워 하는 존재가 하나씩 이상은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지금은 괜찮지만 결혼하기 전까지는 주사 바늘을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래서 동네 병원에서 주사 바늘 쇼크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이유를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가느다란 주사 바늘이 너무나도 공포스러웠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두려워하는 것 혹은 두려운 존재가 있습니까?
지금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들로 인하여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있습니다. 계속되는 재앙들은 애굽 사람들의 삶을 바꿔 놓았고 거의 멸망 직전까지 간 상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하여,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두려운 일이 생길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집안의 힘의 근원이 되는 "장자" 즉 "상속자"가 죽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애굽 왕 바로의 장자로부터 집에서 키우는 가축의 첫째까지 하나도 예외 없이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애굽 사람들은 공포를 넘어서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백성은 은혜를



חֵן 스트롱번호2580

1. 자비.   2. 품위. 3. 탄원
발음 [ chên ]

어원 / 260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9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자비, 호의, 선의, 창6:8, 19:19,32:6(5), 33:8, 30:27, 47:29, 50:4, 출3:21, 11:3, 12:36, 전9:11
2. 명사, 남성 품위, 아름다움, 우아함, 잠22:11, 31:30, 전10:12.
3. 명사, 남성 탄원, 기원, 기도, 슥12:10.​

모세가 위대하게 보이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인 모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더 이상 애굽의 왕 바로가 두려운 존재나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 애굽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대변하는 모세가 두려운 존재요 위대한 존재로 보였습니다.
출애굽기 11:3,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위대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가돌"(גדל)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크기나 숫자, 효과 등에 있어서 "매우 큰" 것을 의미합니다. 혹은 명성이 있거나 많은 물질을 가진 것처럼 부유해 보이거나 높은 위치에 올라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모세는 가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미디안에서 양을 치던 모세가 애굽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높은 지위도 많은 재산도 대단한 명성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신하들과 백성들에게는 모세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처럼 위대하게 보였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왜 모세가 애굽 사람들의 눈에 두려운 존재, 모든 것을 다 가진 위대한 존재로 보였을까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애굽 왕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입'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모세의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여겨졌던 바로는 무능력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세는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되었습니다. 지금껏 아홉 개의 재앙 모두 모세가 말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장 두려운 열 번째 재앙에 대해 경고하였으니, 곧 모세의 말대로 될 것이라고 애굽 사람들은 생각하였습니다. 모세의 뒤에는 하나님이 계셨기에, 애굽 사람들은 모세를 두려워하고 위대하게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베드로와 함께 하실 때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과 함께 하실 때 있었던 놀라운 일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9장의 요셉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형들이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던 사람이며, 흘러 흘러 애굽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나이도 어린데 노예가 된 요셉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였겠습니까? 하지만 요셉은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인정 받아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이후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간수장이 요셉에게 모든 사무를 맡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9장 3절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형통케 하셨음을 보디발이 보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창세기 39장 2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셔서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예의 신분, 죄수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는 상황이 역전됨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 5장의 초대교회의 모습을 기억해 봅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거짓말을 하였지만, 베드로는 성령께서 말씀하심을 듣고서, 책망을 합니다. 이 사건으로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믿지 않는 자들까지 베드로와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 하였다라고 사도행전 5장 11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능력의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며,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위대하게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11:7. 구별하는

פָּלָה 스트롱번호 6395

1. 분리하다.  2. 니팔형 : 분리되다.  3. 히필형
발음 [ pâlâh ]
구약 성경 / 7회 사용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지만 다시 주님의 이름으로 각자의 처소에서 온라인으로 만날 수 있게 하시고 기도하는 은혜를 누리게 하시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으며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내 힘이나 노력이 아닌, 오직 주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에 오늘 우리의 하루는 형통할 것이며, 위대한 능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보며 모든 것을 다 가진 위대한 사람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약하지만 강한 용사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오늘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오늘도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연약한 나와 함께 하시며 인도하여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주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때, 세상의 유혹과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음을 믿습니다.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세상에 나타내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 하나님은 처음부터 무서운 재앙으로 단번에 바로를 굴복시키지 않고 10번째의 재앙까지 힘들게 끌고 오셨을까요?
살면서 계속되는 수많은 문제를 이겨낼 수 있도록 참고 인내하는 능력과 권세를 키워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실상 참고 인내하는 능력은 최고의 능력입니다.
왜 하나님은 충성스러운 사도 바울의 질병을 고쳐주시지 않았습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약할 때 더 강해진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사람은 아무 문제가 없으면 하나님께 더 감사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사람이 더 감사를 안 합니다.
사람은 감사할 것이 많으면 더 감사를 모릅니다.
대개 보면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감사합니다.
헌금도 부자들은 잘 하지 않습니다.
봉사도 시간이 많은 사람이 봉사하지 않고 대개 바쁜 사람들이 봉사합니다.
믿음생활도 고난과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잘 믿고 결국 큰일을 합니다.

때로 고난도 겪어보아야 건강에 대한 고마움, 축복에 대한 고마움, 부모와 교회와 이웃에 대한 고마움을 알게 됩니다.
기독교는 고난의 역사입니다.
성도도 고난 중에 참고 인내하는 훈련을 이겨내야 진짜 훌륭한 성도가 됩니다.
고난에는 뜻이 있습니다.
그 고난을 잘 활용하면 좋은 것이 남지만 물질과 명예와 인기가 찾아오면 대개 믿음을 비롯해서 더 좋은 것을 뺏깁니다.

사람들은 잘 입고, 잘 먹고,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상 돈이 많을수록 걱정도 많고, 고민도 많고, 해도 많고, 나쁜 것도 많아집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문제를 오히려 감사하며 인내하십시오. 자녀들이 고생 없이 자라야 큰일을 할 것 같지만 사실상 그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녀가 고생할 때 너무 불쌍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 때문에 오히려 사람이 되고, 인물이 되고, 좋은 교인이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기를 때 강하게 기르려고 어려운 난관도 계속 지나게 하십니다.
이제 고난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난을 주는 사람에게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보면 고난을 주는 사람은 오히려 천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좋은 사람 만들려고 그를 보낸 것입니다. 그처럼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을 마귀가 아닌 천사로 보시고 그 천사와도 잘 지내십시오. 참된 능력은 잘살고, 힘 있고,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잘 참아내는 것입니다.





1. 애굽왕 바로가 아홉 가지의 재앙을 당하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한 가지 재앙만 더 애굽에 내리게 되면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내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1절).

이 말씀은 지금까지 애굽에 내린 아홉 가지의 재앙들이 모두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졌음과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내려지면 바로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임을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셨음을 시사해 줍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이미 아시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일들을 미리 정하시고, 또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역사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세상 역사는 어느 뛰어난 영웅적 인물이나 우연한 사건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역사 속에서는 선하신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많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원래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던 것으로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이루는 한 과정일 뿐입니다.
성도는 바로 이러한 역사의 주체자로서의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이 있을 때, 어떤 고난과 역경이 온다 할지라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를 바라보며 인내할 수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와의 힘들고 지루한 싸움에서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사명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심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서 모든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2. 그리고 “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2절).

물론, 이것은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금 패물을 순순히 내어줄 것을 전제한 말씀이었습니다.
실제로 애굽 사람들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은금 패물을 다 내어줍니다.
애굽 사람들이 그렇게 준 이유는 재앙의 원인이 된 이스라엘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속히 내보내기 위함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창세기 15:16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지키신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에게서 은금 패물을 취함으로 그동안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며 착취당한 것에 대하여 일순간에 보상받게 된 것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면서 착취당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수고를 다 기억하고 계셨다가 그들이 출애굽 할 때에 애굽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고를 다 보상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수고를 다 갚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므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조금도 실망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수고와 고통을 다 기억하시고 언젠가는 다 갚아 주심으로 그 모든 수고와 고통을 잊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창 41:51).

특히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마지막 때에 친히 성도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하늘 영광으로 덧입혀 주심으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흘린 눈물과 수고를 완전히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계 21:4).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수고를 하고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다 갚아 주실 것을 믿으며 끝까지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애굽왕 바로의 장자로부터 천한 일을 하는 여종의 장자까지, 그리고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5절).

이것은 생명이 있는 존재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나님의 장자 재앙으로부터 피할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임을 시사해 줍니다.
애굽인들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권력이 있는 자나 권력이 없는 자나, 지식이 있는 자나 지식이 없는 자나 누구나, 그들에게 속한 모든 가축들까지도 다 하나님의 장자 재앙으로부터 피할 수 없었습니다(12:29.30).

고대 세계에서 장자는 한 가정을 대표하는 자였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애굽에 임한 장자 재앙은 모든 애굽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애굽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6-7절).

여기서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말은 ‘개도 짖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개는 주변에 어떤 일이 발생하면 민감하게 반응하며 짖어대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가 짖지 않는다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거주하는 곳에는 이전과 다름없이 지극히 평안했음을 시사해 줍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애굽인들의 거주지에는 모든 가정의 장자가 죽어감으로 대 혼란과 통곡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이스라엘의 진영에서는 개도 짖지 않았으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가 얼마나 완벽한 것이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 요한계시록에는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 때에도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완벽하게 보호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계 9:4, 13:8, 16:15).

사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마지막 때에 이 세상에 임할 각종 재앙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과연 우리가 그러한 심판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요 3:18).

여러분, 마지막 심판 때의 심판 주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 안에 거하는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벽하게 보호받은 것과 같이 장차 하나님의 최후 심판으로 말미암아 불의한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 그날에도 완벽하게 보호를 받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애굽 왕 바로는 아홉 가지의 재앙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장자 재앙이라는 무서운 심판의 경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장자 재앙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끝내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마침내는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하는 심판의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심판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 대하여 분명한 최후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심판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악된 마음을 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구원하시되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며,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는 심판하여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애굽 왕 바로는 그 마음이 강퍅해서 아홉 번이나 되는 경고를 받고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전도해야 할 사람들도 이와 같음을 알고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금패물을 주신 것을 통해 우리의 모든 수고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시니 감사하옵나이다.
어떤 경우에도 믿음 잃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시내산 언약

시내산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후 시내 광야에 도착하여 머무르는 동안, 모세를 중보자로 하여 하나님께서 십계명과 여러 율례를 주시면서 맺은 언약입니다(출 24:1-8).
모세는 시내산 아래에서 단을 쌓고, 희생의 피 반(半)을 뿌린 후, 시내산에서 받은 말씀을 기록한 ‘언약서’(the book of the covenant)를 백성 앞에서 낭독하여 들려주었습니다(출 24:4-7).
이에 백성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遵行)하리이다”라고 서원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백성에게 피를 뿌리면서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라고 선포함으로, 마침내 시내산 언약이 체결되었습니다(출 24:7-8).

시내산 언약은 출애굽 초기에 광야 1세대와 맺은 언약이었습니다.
이 언약은 출애굽 말기에 41번째로 진을 친 모압 평지에서(신 29장) 광야 2세대에게 다시 확증되었습니다(일명 ‘모압 평지 언약’).
시내산 언약은 아브라함과 횃불 언약을 맺은 이후 계속되어 온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갱신하여,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 ‘언약 백성’으로 삼으신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언약입니다.

1. ‘나라’를 대상으로 한 언약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지 45일째 되던 날에 시내 광야에 도착하여 진 친 다음(출 19:1-2),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 시내산에서 부르실 때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출 19: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언약의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가 한 사람에서 시작되어 한 가족을 중심으로 진행되다가 이제는 한 국가(백성 전체)를 중심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특히 시내산 언약을 체결할 때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기둥을 세운 것은, 언약의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임을 보여 줍니다(출 24:4).

1) 이스라엘은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구원 받은 백성입니다.

시내산 언약의 핵심을 담고 있는 십계명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2)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체결하기에 앞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강조함으로, 이스라엘의 과거가 비참한 노예에 불과했음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해 주실 때, 이스라엘은 그에 합당한 수고도 없었고 의로움도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참고-신 7:7, 9:4-6).
출애굽은 참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은혜 그 자체였습니다(참고-겔 16:1-14).

우리도 죄와 사망의 권에 아래 영원한 사망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였지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비로소 영원한 생명을 허락받고(요일 2:25), 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양자의 자격을 부여 받았습니다(롬 8:15, 갈 4:6).
이는 자격을 따지지 않고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엡 2:4-8).

2)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성취되어 세워진 큰 나라입니다.

시내산 언약은 출애굽기 2:24을 볼 때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심으로 맺어진 언약입니다(출 6:5).
출애굽 역사는 우연한 사건이 아니요, 이스라엘의 노력에 의한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언약의 성취였던 것입니다(신 9:5).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셨던 말씀대로 “큰 민족”(창 12:2)이 되었습니다(출 1:7, 9).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대로 “강대한 나라”(창 18:18)가 되었습니다(출 1:9).
더 이상 나약한 노예 민족이 아니라 ‘항오를 이루며 행진하는 여호와의 군대’ 곧 당당한 정복자로 성장한 것입니다(출 12:41, 13:18, 민 33:1).

2. 하나님께서 직접 전 백성에게 음성으로 들려 주신 언약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서 전 백성에게 직접 선포하신 언약입니다(출 20:1-19, 신 5:4, 23-24).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백성이 없었고, 또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생존한 국민은 없었습니다(참고-출 20:19, 신 5:25, 18:16, 히 12:18-20).
이러한 언약은 인류의 역사가 있어 온 이래로 한 번도 없었던 최초의 언약이었습니다(신 4:8, 32-33, 시 147:19-20).

3. 기록으로 구체화된 최초의 언약

시내산 언약의 뚜렷한 특징은 처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기록으로 구체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십계명은 두 돌판에 새겨졌습니다(출 31:18). 하나님께서 친수로 기록하셨다고 한 것은(신 9:10) 그만큼 하나님께서 시내산 언약을 귀하고 소중하게 생각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증거의 두 돌판을 하나님께 받아 내려올 때 산 아래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숭배하였습니다(출 32:1-6). 이에 모세는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서 깨뜨렸고(출 32:19), 방자한 백성 가운데 삼천 명 가량을 도륙한 후에(출 32:25-28), 모세는 다시 시내산으로 올라가 40일 중보기도를 올렸고, 산 밑으로 내려와 회막에서 또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후 모세가 깎아서 시내산으로 가지고 올라간 돌판에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다시 친수로 기록해 주셨습니다(출 34:1, 28).


하나님께서는 또 여러 가지 율례를 주셨습니다(출 20:22-23:33). 이는 모세에 의해 기록되었는데(출 24:4, 7), 하나님의 언약이 언약서에 기록되었을 뿐 아니라, 그 분량이 많은 것도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큰 은혜입니다(참고-호 8:12). 하나님의 언약이 돌판에 새겨지고 언약서에 기록되었다 함은, 그 언약이 만대까지 영원히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참고-사 30:1-8).

4. 언약의 땅에서 지킬 실천적 언약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땅에 대한 약속이 구체화되는 것은, 이제 가나안 입성이 임박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언약을 체결하기 전 하나님께서는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23:20, 30).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언약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1) 약속의 땅
가나안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통해서 약속된 땅입니다(창 12:7, 13:14-17, 15:7, 18-21, 17:8). 가나안 땅이 ‘열조에게 언약을 주신 땅’이라는 사실은, 신구약 성경에서 각 시대마다 거듭거듭 기록되었습니다. 가나안 입성이 임박한 상왕에서 받은 시내산 언약은 실제 가나안 땅에 관련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내산 언약 가운데 출애굽기 23:10-33에서는 그 땅에서 지킬 안식년과 안식일(10-13절), 3대 절기(14-19절), 그리고 그 땅을 정복하는 규례(20-33절)를 매우 구체적으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한편, 신명기에는 하나님께서 시내산 언약을 통해 주신 십계명을 비롯한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반드시 지키고 행해야 되는 것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신 4:1, 5, 13-14, 5:31, 6:1). 그 복된 언약의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면, 모든 일에 풍요롭고 형통하도록 축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신 6:18-19, 7:12-14, 8:1, 9:1, 11:9 등). 그러나 불순종하는 자는 약속의 땅에서 풍요로운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망각하고 말씀에 불순종하여 이방 사람과 결혼하거나 우상 숭배에 빠지면 그들을 토해 버리는 땅이기 때문입니다(레 18:24-28, 20:22).

2) 왕벌을 통한 땅의 정복(하나님의 주권 역사)
약속의 땅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땅입니다(출 29:45-46). 특히 광야와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이었던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함께하신다’는 외적인 표였습니다(출 25:22, 29:42-43).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지키면 그 땅의 정복은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것입니다(출 34:11, 레 25:18, 신 7:1, 8:1). 가나안 땅 정복은 결코 칼이나 활로 한 것이 아니라, 시내산 언약에서 약속해 주신 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왕벌을 통해 이루어 주셨습니다(참고-신 7:20, 수 24:12). 특히 가나안 7족속 중에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세 족속(히위, 가나안, 헷)을 멸할 때, 왕벌을 보내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출 23:28). 왕벌은 떼를 지어 날아다니면서 침을 쏘아 한 방에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공포의 벌입니다. 그 왕벌을 보내셔서 적들 가운데 문을 잠그고 숨어서 남아 있는 자까지 쫓아 들어가서 기어이 다 죽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신 7:20-24). 신명기에는 왕벌의 역사로 아모리 왕 시혼, 바산 왕 옥을 패배시킨 일이 자주 언급되었습니다(신 1:4, 2:26-35, 4:46-47, 29:7, 31:4).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방법을 동원하여 주권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약속의 하나님은 언제든지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시는 미쁘신 분입니다(고후 1:18, 20, 히 10:23, 11:11). ‘미쁘시다’ 함은, 믿음직하고 결코 꾸밈이나 거짓이 없다는 의미이며(신 7:9, 사 49:7), 이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살전 5:24, 살후 3:3, 딤후 2:13, 요일 1:9). 하나님의 미쁘심은 영원히 폐할 수 없습니다(롬 3:3). 하나님의 미쁘심이야말로 우리의 참된 소망입니다.




출애굽 열가지 재앙에 담긴 신학적 의미

출애굽기는 말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한 이야기로, 열가지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 나오는데 있어서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만약에 이 열가지 재앙이 없었다면, 애굽의 바로가 바로 국가 노동력의 원천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도록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열 재앙은 출애굽에 있어서 아주 필수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열가지 재앙에 담겨 있는 신학적 의미가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열가지 재앙에 담긴 신학적 의미]

1. 열가지 재앙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의 신들을 벌하신 사건이다.

열가지 재앙에 등장하는 생물들은 하나같이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이었습니다. 

민수기 33:4,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 벌을 주셨더라.

  애굽의 신들에 대한 심판을 위해 재앙 내려졌음을 알 수 있다. 이전까지 애굽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몰랐지만, 열가지 재앙을 겪으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믿었던 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목격하면서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보다 우월한 신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2.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데 목적이 있었다. 

  열가지 재앙은 마술도 아니고, 자연재해도 아니고, 사람들이 따라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이적이다. 이 일을 보면서 애굽 사라들도 하나님을 알아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알아갔을 것이다. 그러니까, 열가지 재앙은 하나님 스스로가 나타내 보이신 신존재 증명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열가지 재앙이다. 출애굽기 7장 5절은 열가지 재앙에 대해서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3.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 애굽을 향하여 내린 재앙이기 때문에, 열가지 재앙이 애굽을 향하여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학습하게 되었을 것이다. 열가지 재앙은 분명 애굽의 바로와 애굽을 향한 재앙이지만,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신 사건이다. 바로와 애굽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참 신으로 여겨야 그들을 놓아 줄 수 있듯이 이스라엘도 비록 노예였지만 생활의 기반을 모두 버려두고 광야로 나가기 위해서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모세 만 믿고 따라 나서기에는 무리수로 여겼을 것이다.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광야로 나가라' 하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 의미에서 어쩌면 지금 애굽 사람들보다 하나님께서 참 신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은 이스라엘에게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지금의 열가지 재앙의 중요한 효과는 애굽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지식은 가지고 있었지만, 430년 동안 애굽에서 살면서 조상으로부터 들은 하나님이 전부였겠지만, 열 가지 재앙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이스라엘은 확신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믿음의 확신이 있었기에 출애굽 여정을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4.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보여주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재앙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열가지 재앙을 보여주시면서 한결같이 하신 말씀은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것이니라." 이다. 열가지 재앙 내내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은 내 백성임을 선포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열가지 재앙은 구별이라는 의미 또한 있다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바로야 이 백성은 네것이 아니다. 내 백성이다. 보내라~" 그러므로,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지극한 사랑을 볼 수 있다. 

5. 열가지 재앙은 구원의 의미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복음 자체는 모두가 믿거나, 모두 믿지 않고 누구는 믿고, 누구는 믿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심판적  의미가 있다. 마찬가지로 열가지 재앙이 일어나는 애굽에서도 누구는 구원을 받고, 누구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러기에 열가지 재앙에는 구원의 의미가 있다할 수 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로 지킨다.

  첫번째 재앙은 나일강물을 피로 바꾸신 이적이다. 공교롭게도 마지막 재앙인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한 재앙에서도 피가 등장한다. 장자들을 살해하실 때,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집의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게 한다. 그러면 죽음의 사자가 어린양의 피가 발린 집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죽음이 넘어가고 피가 발라지지 않은 집에서는 재앙이 임하게 된다. 그러기에 열가지 재앙은 구원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단지 애굽에서 탈출한 사건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은 사건으로, 이 예표는 신약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열가지 재앙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열가지 재앙이 끔찍한 사건이고, 없어야 할 사건을오만 받을 것이 아니라 사실은 대단히 심오한 구원과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이 담겨 있는 열 가지 재앙을 살펴볼 것이다. 

  출애굽기 7:16,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였으나 이제까지 네가 듣지 아니하도다

이 재앙의 목적은 분명하다.
애굽의 바로와 애굽 사람들이 나일강을 숭배하듯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 이것이 첫번째 재앙의 목적이다.
단순히 이 재앙은 애굽을 초토화 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 백성으로 하여금 나를 섬기게 하는 것에 있다.

10가지 재앙이 미래에 닥칠 대환란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야곱의 대환란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전에 파라오에게 겪었던 것처럼 혹독한 압박과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사 60:14,렘 30:5-8).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의 음성을 귀를 기울이실 것입니다(렘 31:18-20).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압제자들에게 ‘그들을 가게 하라’ 명하실 것입니다(사 43: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할 것이요, 남쪽에게 이르기를, 붙잡아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데려오고 내 딸들을 땅 끝에서 데려오라, 하리니](사 43:6).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주셨듯이 모세와 엘리야라는 두 증인을 주실 것입니다(계 11:3-6).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하여 이적을 일으켰듯이 대환란 때의 적그리스도와 거짓 대언자들은 이적을 일으켜서 온 세상을 미혹할 것입니다(계 13:13-15).

1. 하나님은 세상에 전무후무한 강한 재앙의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렘 25:15-16).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내게 이같이 이르시되, / 너는 /  내 손에서 이 격노의 포도즙 잔을 가져다가 내가 너를 보내어 / 경고한/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 그들이 마시고 움직이며 미치리니 이는 내가 그들 가운데 칼을 보내었음이니라, 하시기에](렘 25:15-16).

2.  하나님은 이 재앙의 심판 가운데 자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실 것입니다(계7:4, 12:6, 14-16).

3. 물은 다시 피로 변할 것입니다(계 8:8, 16:4, 5).

4.사탄의 개구리들이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계 16:13).

5. 메뚜기의 역병이 다시 보내질 것입니다(계 9:2-11).

6. 하나님은 다시 종기를 보내십니다(계 16:2).

7. 끔찍한 우박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입니다(계 8:7).
   흑암이 세상을 덮칠 것입니다(계 16:10).

8. 파라오가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듯이 악인들 역시 회개하지 않고 더욱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입니다(계 9:20-21).

9.이집트의 장자들이 모두 죽었듯이 대환란 때 역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계 9:15).

10.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듯이 대환란을 통과해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슥 14:3, 4; 롬 11:26).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역사는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종말로 달려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역사를 통해 교훈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전에 일어난 일들은 훈계하기 위하여 본보기로 기록된 것입니다.

[이제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그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기 위함이며 또 그것들이 기록된 것은 세상의 끝을 만난 우리를 훈계하기 위함이니라.](고전10:11)

애굽 10대 재앙의 분석적 연구

애굽 10대 재앙(The Ten Plagues on Egypt)은 그 각각의 하나씩도 참으로 놀라운 초자연적 이적(異蹟)들이었다. 하물며 이런 놀라운 이적들이 한 주체에 의하여, 그리고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여 10회나 연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애굽 10대 재앙은 하나님의 백성과 그 적(敵)들이 명확히 구분된 상태에서 그 적들을 향해 이적적 재앙이 폭발적으로 연속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의 승리와 해방을 가져온 일대 사건으로서 구약에 기록된 가장 역동적 기사의 하나이다. 

또한 애굽 10대 재앙은 애굽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끔찍한 재앙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감격적 해방과 구출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최종 결과 애굽인에게는 죽음과 몰락이 닥쳐왔으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승리와 자유의 쟁취 및 새 역사의 출발이 비롯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구약 선민으로서 시내 산에서 선민 언약을 체결하고 선민으로서의 역사를 본격 태동시킨 것도 이 애굽 10대 재앙으로 이루어진 영광의 탈출인 출애굽(Exodus)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실로 애굽 10대 재앙은 선민 역사의 본격적 태동을 위한 대전주곡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태동된 선민의 역사는 신약 시대에 이르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계 만민 중에 세워진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로 확장되었다. 

그 결과 애굽 10대 재앙은 단순히 과거의 놀라운 이적 시리즈(Miracle Series)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악의 무리를 멸하시고 택한 백성을 초월적 능력을 가지고 강한 팔로 구출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의지를 실증하는 살아있는 역사인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애굽 10대 재앙은 그 세부 내용을 다음과 같은 몇몇 새로운 각도에서 분석해 볼 때 더욱 오묘한 그 실체와 거기에 담긴 깊은 의미가 새삼스럽게 드러난다. 이에 애굽 10대 재앙의 실체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다음 세 가지 주요 관점별로 시도해 보기로 한다. 

1. 애굽 10대 재앙의 구조 분석 

가. 10대 재앙의 기본 구조 설명 

아래에서 보듯이 애굽 10대 재앙은 먼저 크게는 하나님이 간접적으로 행하신 첫번째부터 아홉번째까지의 재앙과 하나님이 유일하게 직접적으로 행하신 마지막 열번째 장자 재앙으로 나뉘어진다. 그런데 매우 흥미있는 사실로서 첫번째에서 아홉번째까지의 간접 재앙들은 다음과 같은 내적 규칙성 내지 통일성에 의하여 다시금 순서대로 각각 세 개씩을 한 그룹(Group)내지 하나의 사이클(Cycle)로 하는 세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진다. 

먼저 각 그룹의 첫번째 재앙들 그러니까 제 1 피 재앙, 제 4 파리 재앙, 제 7 우박 재앙들은 모두 다 아침에(In the Morning) 그 재앙이 예고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다음으로 각 그룹의 두 번째 재앙들 그러니까 제 2 개구리 재앙, 제 5 악질 재앙, 제 8 메뚜기 재앙들은 모두가 모세가 바로의 왕궁(To the Palace)으로 들어가서 경고한 다음에 일어났다. 각 그룹의 첫번째 재앙들에 대한 경고가 인간의 모든 활동이 시작되는 시점인 아침에 주어졌고 그리고 각 그룹의 두번째 재앙들의 경고는 인간 권력의 중심 공간인 바로의 왕궁에서 주어진 것은 결국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가 시간과 공간의 모든 요소를 망라하여 그 주요 포인트마다 거듭 주어졌 음을 의미한다. 끝으로 각 그룹의 세번째 재앙들 즉 제 3 이 재앙, 제 6 독종 재앙, 제 9 흑암 재앙 등은 각 그룹의 첫째 둘째 재앙들이 일단 먼저 예고된 후에 일어난 것과 달리 모두 다 아무런 사전 예고 없이(Without Warning) 일어났다. 이것은 때로 인간에게는 사전 경고없이 하나님의 징계와 징벌이 임할 수 있는 두려운 현실을 반영한다.

 

나. 10대 재앙의 3X3+1 구조의 의미 

이렇게 분석해 볼 때 우리는 애굽 10대 재앙이 단순히 열 번이라는 많은 회수에 걸쳐 일어났거나 또는 어찌해서 계속 진행하다 보니까 열 번에 달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과 의도 아래 매우 섬세한 의미를 가진 완벽한 구조로 진행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애굽 10대 재앙은 일면 각각 정확한 규칙성 내지 통일성에 의하여 세 재앙씩을 한 그룹 내지 한 사이클로 하는 재앙이 세 번 반복되는 구조의 간접적 재앙이 있은 후 단 한 번의 직접적 재앙으로 10대 재앙 전체가 최종 종결되는 체제 내지 구조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애굽 10대 재앙은 보다 세부적으로는 3x3의 간접적 재앙과 단 1회의 직접적 재앙으로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10’ 이라는 숫자는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필요한 모든 구성 요소를 완비(完備)한 숫자를 의미했다. 따라서 애굽에 내려진 재앙의 총수가 ‘10’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학대하는 원수들에게 모든 재앙을 다 내리셨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분석하였듯이 애굽 10대 재앙은 그 총수가 ‘10’이라는 전반적 사실보다 그 총 10개의 재앙을 이루는 세부 구조에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성경에서 ‘3’은 충만(充滿)올 상징하는 숫자였다. 따라서 애굽에 내린 간접적 재앙은 이처럼 충만을 의미하는 3개씩의 재앙을 묶은 한 그룹의 재앙이 그 역시 충만을 의미하는 3회에 걸쳐서 반복된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직접적 재앙은 단 1회였으며 이것으로 모든 재앙 전체가 종결되었다. 이같은 애굽 10대 재앙의 구조는 한마디로 애굽 왕 바로와 그의 신하들에게 참으로 완전히 충만한 사전 경고성 재앙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순복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단 1회에 모든 것을 종결하셨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즉 하나님은 단 1회에 그들을 완전 굴복시킬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자발적 순종의 기회를 참으로 충만히 주시고자 먼저 3x3의 간접적 재앙을 진행시키셨다. 그러나 끝내 그들이 거부하자 하나님은 단 1회의 직접적 재앙을 통하여 마침내 애굽인들을 굴복시키시고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실현시키셨다. 하나님은 절대 초월자이심으로 그가 직접 시행하시는 일은 이처럼 그의 뜻한 바대로 단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애굽인들을 향한 심판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종말까지 모든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기본 패턴(Pattern)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종들과 우주 만물을 통하여 모든 죄인들에게 거듭하여 경고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신다. 특히 세상 끝날에는 그 역시 일련의 재앙들을 통하여 최종적 경고를 주실 것이다. 그러나 끝내 회개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마침내 단 1회의 대종말(大終末)을 통하여 역사 전체나 각 개인을 최종 심판하실 것이다. 

다. 기타 관련 사항과 그 의의 

한편 다시 한번 애굽 10대 재앙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도 추가로 발견된다. 먼저 세번째 이 재앙에서부터는 앞서의 첫째, 둘째의 피 재앙이나 개구리 재앙들과 달리 애굽의 술객(Magicians)들은 도저히 모방할 수 없었다. 이것은 사단과 그를 따르는 자들도 비록 보통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잠시 인간을 현혹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능력과 비교할 때에는 그 한계가 너무나 분명함을 보여 준다. 

또한 네번째 파리 재앙부터는 그 재앙이 이스라엘인들을 제외하고 오직 애굽인들에게만 임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 만물을 어느 정도까지는 동일한 원리로 다스리시나 근본적으로는 구원 얻을 자와 저주 받을 자로 엄격히 구분하여 다스리심을 보여 준다. 

끝으로 셋째 그룹에 속하는 일곱번째에서 아홉번째까지의 재앙에서는 하나님이 매 경우마다 왜 바로와 그 백성을 즉각 멸망시켜서 단번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시지 않고 굳이 번거롭게 거듭하여 많은 재앙을 내리시는 것인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는 분명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으로 행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요청을 거부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을 더욱 억누름으로써 결국 사단(Satan)의 화신(化身)으로 등장한 바로에게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똑똑히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둘째는 하나님의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즉 그 당대는 물론이고 훗날 애굽 10대 재앙에 대한 역사를 전해 들은 오고 오는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듣고 더욱 확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따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본문에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보다 궁극적인 전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에 바로를 향한 하나님의 점진적 정벌과 이를 통한 이스라엘의 출애굽 성취의 과정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매우 긴 장구한 역사적 과정에 걸쳐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오묘한 예표이기도 하다. 

2. 애굽 10대 재앙과 애굽 우상들과의 관계 

애굽 10대 재앙은 표면적으로는 자연의 각종 이상 현상을 통한 재앙의 반복 내지 열거로 보인다. 그러나 이면적으로는 10대 재앙 각각은 수다한 자연 현상의 배후에 그 각각의 현상을 주도하는 신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섬겼던 애굽인들이 신으로 간주한 각종 우상(偶像)들을 역으로 애굽인들을 향한 심판의 도구 내지 애굽인들과 함께 심판을 받을 대상으로 전락시킨 것이었다. 즉 애굽 10대 재앙은 일차적으로는 이적적 자연 현상을 통한 재앙들이었다. 동시에 보다 근본적으로는 애굽인들이 섬기던 우상 전반에 대한 징벌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신으로서 하나님께서 거짓 우상들을 이기심은 물론 그 거짓 신들을 믿는 백성은 벌하시고 당신의 백성은 구출해 주실 능력과 사랑이 있으심을 실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많은 이들의 일반적 생각과 달리 비록 마지막 열번째 재앙이 마침내 인간의 죽음을 초래한 것으로 가장 엄중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애굽 10대 재앙은 엄밀하게는 뒤로 갈수록 그 양상이 혹독해지는 소위 점층적 양상을 보이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처음 피 재앙과 아홉 번째의 흑암 및 열 번째의 장자 재앙이 대략 수미 쌍관식의 소위 양괄식 구조를 보이는 가운데 두 번째에서 여덟 번째 재앙까지는 거의 동일 수준의 재앙이 계속 열거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첫번째 피 재앙은 애굽인들의 농경과 식수 둥 실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나일강(the River Nile)과 나일강의 신 하피(Hapi)를 치신 것이었다. 그리고 아홉번째 흑암 재앙은 최후의 재앙을 예고하는 동시에 애굽인들이 국가적 차원에서 가장 주요시하였던 태양신 라(Ra)를 무력하게 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열번째 장자 재앙은 이집트인 전반은 물론 바로의 가장 직접적 수 호신으로 여겨진 생명의 신이요 이집트 최고의 신인 오시리스(Osiris)를 치신 것이었다. 반면에 두 번째에서 여덟 번째까지는 상호 신적 위계(位階)에 있어서나 이집트인들의 선호도에 있어서 그 다지 차이가 없는 여러 신들과 그들이 각각 관장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여러 자연 현상을 통한 동일 수준의 재앙의 연속이었다. 

이처럼 그 관련 우상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의 애굽 10대 재앙의 전개는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을 멸하시되 그들 모두를 남김없이 다 멸하실 것을 시사하고 있다 하겠다. 

 

3. 애굽 10대 재앙 과정에 대한 바로의 자세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던 애굽 왕 바로를 향한 하나님의 징벌은 단 한번으로 종결되지 않고 10번에 걸쳐서 반복되었다. 이것은 역으로는 그만큼 바로에게 자발적 순복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비록 바로가 처음에는 몰랐다 해도 10번의 재앙이 전개 되어 가는 과정에서 지금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을 요구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Jehovah the God)이 절대 초월자로서 유일한 신적 존재이시라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애굽의 왕으로서의 자신의 정권 안정과 애굽의 국익 수호라는 세속적 이해 타산에만 집착하여 계속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심지어는 각 재앙이 극에 달했을 때에는 모세에게 빌거나 타협안을 제시하다가도 그 재앙이 사라지면 곧바로 말을 바꾸거나 식언(食言)하는 등 일국의 왕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간교와 추태까지 부리고 있다. 한마디로 애굽 10대 재앙에 임하는 바로의 자세는 아집과 기만으로 축약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바로는 끝내 하나님으로부터 장자 재앙의 징벌까지 당하였으며 최후의 장자 재앙을 당한 후에는 참담한 패배자로서 도리어 이스라엘에게 출애굽할 것을 애걸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은 이후의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생활 40년과 가나안 정복까지의 전체적 과정에서 볼 때에는 대략 각 성도가 사단과 이 세상의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일단 성도(聖徒)의 지위(地位)를 얻는 것에 비교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출애굽 사건을 하나님과 바로의 투쟁이란 관점에서만 본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도를 억누르고 있는 사단과 그의 무리들로부터 성도를 구출하여 성도의 구원을 마침내 실현시키시는 사건의 예표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出埈及)을 그토록 집요하고도 악착같이 거부한 바로의 행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거부하는 사단과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의 영원한 행태를 예표한다 하겠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이같은 바로의 실로 끈질기고도 파렴치한 행태를 요약해 보면서 이를 우리 시대에 적용시켜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상 공중 권세 잡은 사단(엡 2:2)의 사주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거부와 멸시의 실체를 직시하여야 한다. 그리고 끝내 바로가 단 1회의 하나님의 직접적 개입으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이 실현되었었듯이, 사단의 세력은 필히 몰락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최후 승리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天國)이 영구히 실현될 것도 분명히 깨달아 현실의 일시적 현상에 연연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말세(末世)에는 극심한 환난과 사단과 그를 따르는 거짓 선지자들의 최후의 만행이 극성할 것이 구체적으로 예언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사단의 만행이 극에 달할수록 오히려 출애굽 당시의 이 바로의 행태가 주는 교훈을 깨닫고 더욱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바로 나 자신이 이 바로와 같이 사단에 속한 자의 하나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하다가 멸망 당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애굽 10대 재앙에 임하는 바로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우리 모두 앞에 뚜렷이 남아 있는 살아 있는 상징(Symbol)인 것이다.






바로가 재앙만 풀어 주면 보내 주겠다고 하다가 재앙이 끝나면 약속을 어기고 보내 주지 않는 식으로 속인 경우에는 제 2,4,7,8 재앙 때이먀, 바로가 부분적 타협안을 제시한 경우는 제 4,8,9 재앙 때이다.

출처 ; 옥스퍼드 주석 

http://atsnu.org/_chboard/bbs/board.php?bo_table=m5_1&wr_id=243929&page=24



2024 사순절(02 / 14 - 03 / 30)  119 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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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가지 재앙의 내용

첫 번째 재앙 : 피(7:14-25)

여호와는 바로가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재앙들을 내리기로 결정하였고, 그 첫째 재앙이 바로 애굽의 젖이며, 신으로 숭배되는 나일 강이었던 것이다.

첫째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신으로 믿고 있는 것이 모두 헛된 것이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시며 전능한 창조주이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첫째 재앙은 눈에 보이는 모든 물을 피로 바뀌게 함으로써 생명의 근원인 물이 죽음의 상징인 피로 바뀌었음을 애굽 사람들이 보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
왜냐하면 애굽 사람들에게 ‘생명(물) ’을 ‘죽음(피) ’로 만드시는 분이 여호와이심을 보여줌으로써 여호와 하나님만이 생명을 좌우하시는 유일한 창조주이심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재앙은 무려 일주일동안 애굽 사람들이 그토록 자랑하던 나일 강을 죽음과 고통의 장소로 바뀌게 했다.[3]

두 번째 재앙 : 개구리(8:1-15)

나일 강에 살고 있던 개구리는 ‘문나 모지리카’(학명 Moonna Mozirica) 라는 학명을 가진 개구리이다.
애굽인들은 나일 강이 범람했다 감해지는 때에 보이는 개구리가 애굽 땅을 기름지게 한다고 여겨서 신성시했다.
인간의 몸에 개구리의 머리를 가진 여신 헤케트를 풍요와 다산의 신이며, 나일 강에 장마를 가져다 주는 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개구리들의 이른 침투로 인해서 왕은 오염된 음식을 먹게 되었고, 이것은 곧 건강에 해를 입게 되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만이 아니라 그의 신하들도 마찬가지고, 애굽 백성들도 마찬가지다.
즉 애굽 사람들 전체가 오염된 음식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걸 보면 개구리들이 애굽 온 땅에 가득하게 된 것은 애굽의 ‘땅’이 오염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결국에는 애굽 땅 자체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황폐하게 변한다는 ‘총체인 오염’을 의미한다.[3]

세 번째 재앙 : 이(8:16-19)

세 번째 재앙에서부터는 애굽 주술사들이 그들의 패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이 재앙이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고백하며 바로를 설득한다.
세 번째 재앙은 아무런 경고가 없었던 재앙 중 하나이다.
이 재앙은 땅으로부터 시작된 재앙으로 땅의 신 ‘게브’와 연관된다.
애굽인들은 밭을 갈 때마다 대지의 신 게브에게 감사를 드렸는데, 이들에게 흙은 생명과 풍요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이 생명으로 여기는 흙을 통해 애굽인들에게 괴로움과 죽음을 내린다.
또한 애굽의 ‘땅’을 황폐화 시키시고, 동시에 땅의 신 게브와의 영적인 전쟁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애굽인들에게 알게 하였다.[3]

네 번째 재앙 : 파리(8:20-32)

이전의 첫째 재앙부터 셋째 재앙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포함되었는데 넷째 재앙부터는 여호와가 이스라엘인과 애굽인들 사이를 구분지으셨다.
이를 통해 여호와가 애굽땅을 관장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네 번째 재앙과 관련된 애굽의 신은 ‘케프리’이며, 풍뎅이의 모습을 하고 있고 하루 일정을 관리하는 신으로 숭배되고 있다.
네 번째 재앙은 두 번째, 세 번째 재앙과 한 세트를 이루는데, 네 번째 재앙인 파리는 물과 땅에 연관된 것이고 이 세 재앙은 여호와가 물과 땅과 공기를 지배하는 분이심을 드러내심과 동시에 애굽의 물과 땅과 공기가 파괴되고 있음을 상징하기도 한다.[3]

다섯 번째 재앙 : 가축 돌림병(9:1-7)

다섯 번째 재앙도 애굽인과 이스라엘 백성을 구분하신다.
애굽의 가축들만 심한 돌림병에 걸리게 된다.
또한 가축의 죽음을 통해 지금까지는 창조된 것들을 통해서 애굽을 심판하였지만 이번 재앙은 창조된 것을 ‘죽이는 일’로 심판을 진행하여 ‘죽음 모티브’가 시작된다.
본문에 나오는 ‘여호와의 손’이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능력을 말할 때 쓰이는 특별한 단어이다.
그리고 이것은 돌림병이 여호와의 능력으로 일어난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다섯 번째 재앙을 통해 심판한 애굽의 신들 하토르, 아피스 등이 있다.[3]

생축 (미크네)
- 이는 각종의 가축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원래 '미크네'란 '소유', '재산'이란 의미를 가진 것으로서 가축들이 곧 고대인들의 재산 명세서에서 가장 큰비중을 차지했음을 암시한다.
한편 '생축'이란 말과 더불어 제시된 '말'은 주로 전쟁용으로 사용된 듯하며, '나귀'는 단거리 수송용 또는 경작에, '약대'는 장거리 수송용에 각각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러한 생축들에의 피해는 애굽인의 군사, 경제, 교통에 치명타를 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심한 악질(데베르 카베드 메오드)

- '악질'(데베르)은 일종의 무서운 전염병을 뜻하는데, 여기에 '매우'(메오드), '심한'(카베드)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여 이 악질의 정도가 대단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악질이 얼마나심했는지는 애굽의 모든 생축이 죽을 정도였다는 사실을 통해 여실히 알 수 있다(6절). 따라서 이전까지의 재앙은 단순히 사람 또는 짐승을 일시적으로 괴롭히는 것으로 끝났지만, 이 다섯번째 재앙부터는 생명과 직결된 문제로서 훨씬 재앙의 정도가 심화되었다. 동시에 이 악질 재앙은 나일 강물이 피로 변한 첫번째 재앙(7:17-25)과 더불어 애굽의 각종 우상 신들에 대한 직접적인 심판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생축들은 각종 형태로 형상화되어 애굽인들의 경배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애굽 우상 종교의 희생 제물용으로도 쓰여졌기 때문이다<32:1-6 강해, 애굽의 종교>. 동시에 이 재앙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의 생사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계심을 분명히 보여준다.

여섯 번째 재앙 : 악성 종기(9:8-12)

여섯 번째 재앙은 세 번째 재앙처럼 아무런 경고 없이 애굽을 강타하여 어떤 경고에도 반응하지 않는 바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처음으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재앙이다.
바로왕 앞에 날려진 재는 벽돌을 굽던 풀무에서 끄집어낸 재일 것이며 이것은 여호와의 백성이 당한 고난의 증거로 볼 수 있다.
특별히 눈여겨 볼 것은 주술사들도 바로와 그의 신하들도 악성 종기로 고통을 받아 여호와 앞에서 점점 애굽의 통치권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섯째 재앙을 통해 심판한 애굽의 신은 임호테프이다.[3]


일곱 번째 재앙 : 우박(9:13-35)

대기와 공중에 관련된 재앙.
우박 재앙은 인간 생명을 대규모로 위협하는 첫번째 재앙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우박으로 인한 보리와 삼의 파손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짚을 구해다 벽돌을 만들라고 했던 바로의 요구에 대한 보복, 대기의 신 와 농업의 신 이시스, 습기의 신 테프누트를 겨냥한 것이다.
여호와의 ‘구별’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던 고센 땅에는 전혀 피해가 없었다.
생명과 관련된 재앙으로 ‘경고’를 통해서 피할 방법을 알려주였다.[3]

중한

- 원 의미는 '무거운', '격렬한', '고통스런'이란 뜻으로서 우박의 엄청난 무게와 크기 및 그것이 미치는 극심한 피해를 예감케 한다.

우박(바라드)

- 동사 '춥다'에서 유래된 말로, 돌처럼 단단한 얼음알갱이를 가리킨다.
이것은 종종 천둥과 함께 가축 떼가 들에 방목되는 시기인 겨울과 이른 봄(12-4월)사이에 내리곤 하여 곡물들에 큰 피해를 주어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우박이 단순히 자연 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 재앙의 도구가 되어 사람과 짐승의 생명까지 해치는 애굽 역사이래 전무 후무한 무서운 심판이 되었다.
이때로부터 우박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벌의 표와 심판의 도구로 자주 쓰이게 되었다(수 10:11; 학 2:17; 계 8:7; 16:21).

여덟 번째 재앙 : 메뚜기(10:1-20)

농경 지역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재해 중에 하나이다.
왜냐하면 모든 곡식을 순식간에 파괴해버리는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이 결과로 심각한 기근을 초래했다.
땅의 신에 대한 영적 전쟁으로 내려진 재앙이다.
메뚜기로부터 땅의 소산을 지켜주는 땅의 신에 대한 무능함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위대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애굽의 신들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았을 때, 애굽의 신앙은 산산히 무너지고 말았다.[3]

아홉 번째 재앙 : 흑암(10:21-29) 

이 재앙은 여호와가 ‘세상에서 가장 해가 잘 드는 나라’ 위에 내린 것이다.
‘태양의 집’ 을 의미하는 헬리오폴리스라 불리는 도시는 태양숭배의 중심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흑암 재앙은 애굽인들의 최고의 신인 태양신 를 그들로부터 빼앗고 여호와만이 신 중의 신임을 증명하는 재앙이었다.
3일동안 재앙이 일어났다.[3]

열 번째 재앙 : 장자의 죽음(12:29-30)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장자와 처음 난 짐승들을 특별하게 생각했다.
땅에서 처음 난 것과 가축의 처음 난 것처럼 여인의 몸에서의 맏아들도 여호와가 준 첫 선물로 여겨졌고, 이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여호와께 돌려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애굽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신성시 되고 귀하게 여겨졌던 바로의 장자와 애굽의 모든 장자, 그리고 처음 난 것들을 죽이는 재앙이 바로 장자의 죽음 재앙이었다.
이 재앙은 다산의 신인 오시리스 와 생명의 신인 이시스에 대한 재앙이다.
바로는 태양신의 현신이며, 바로의 장자는 청년의 육체를 입은 호루스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 신의 현신에 한 열 번째 재앙은 바로의 왕위 계승자를 없애는 재앙이었다.
그런 장자의 죽음을 통해 여호와의 완전한 승리가 나타나게 되었고, 이 재앙 이후에 바로는 패배를 인정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인정하게 된다.[3]

신학적 의의

여호와는 애굽에서의 영적인 전쟁을 통해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드러내심으로 애굽인들 뿐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을 지켜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까지 그들의 조상들이 말하던 여호와가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심으로써 ‘영적 전쟁’의 목적을 분명히 하였다.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는 분명한 목적 아래 벌어진 여호와와 애굽 신들의 전쟁 가운데, 여호와는 애굽의 모든 신들에 대해서 승리를 나타내였지만 성경에서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재앙의 원인은 바로의 완악함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출 5:2).
바로는 여호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애굽 백성들과 함께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불신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는 애굽의 신들과의 전쟁을 통한 승리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나타내신 것이다.
세 번째 재앙에서는 애굽의 주술사들이 여호와의 권능을 고백했고,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을 통해 바로의 신하들은 여호와의 재앙을 두려워해 종들과 가축들을 집으로 들임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를 통해 바로는 여호와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고,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을 통해 모든 애굽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권능’을 인정하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출애굽기에서 나타난 10가지 재앙에 대해서 그 재앙이 어떤 ‘애굽 신’을 가리키는 것이며, 여호와의 완전한 승리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았다. 출애굽기에서 나타나는 애굽의 10가지 재앙은 애굽을 향한 단순한 재앙이 아닌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는 목적 아래에서 수 많은 애굽 신들을 대면하여 누가 참된 신이며, 참된 신이라 말하는 여호와 자신이 누구인지를 온 천하에 드러내신 ‘영적 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3]

각주

  1. Greifenhagen, F.V. (2000). 〈Plagues of Egypt〉. Freedman, David Noel; Myers, Allen C. 《Eerdmans Dictionary of the Bible》. Amsterdam University Press. 1062쪽. ISBN 9789053565032.
  2. Tigay, Jeffrey H. (2004). 〈Exodus〉. Berlin, Adele; Brettler, Marc Zvi. 《The Jewish Study Bible》. Oxford University Press.
  3. 이동: 가나경열 (2015). “출애굽의 10가지 재앙을 통해 바라보는 여호와와 신들의 전쟁”.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제10일 / 02-24-2024(토)
출애굽기 10장(10:1-29)
메뚜기, 흑암 재앙(4절, 21절)


1862년 2월 링컨 대통령의 아들 윌리가 죽은 지 얼마 못되어 다른 아들 데드가 심각한 병에 걸렸다.
병원을 찾은 링컨은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내 생애에 가장 큰 어려움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옆에서 그 말을 들은 간호사가 자신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미망인이라고 밝히며, 그러한 시련 후에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링컨은 간호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죠?”
그러자 그녀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가능합니다.”
링컨은 진지하게 물었다.
“처음 불행이 닥쳤을 때도 완전히 복종했나요?”
간호사는 온화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요. 하지만 불행이 닥칠수록 신뢰를 가지게 되었고 완전히 복종할 수 있었어요.”
며칠 후 그녀를 다시 찾아온 링컨은 간호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때 참 고마웠습니다. 이제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재앙으로 빨리 깨닫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깨닫는 것이 느립니다.






출애굽기 10장 - 메뚜기와 흑암 재앙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신 이유는

첫째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심을 애굽 온 땅에 보이기 위함이었다.
둘째는 이러하신 하나님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절).

특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모든 역사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손들에게 전하기를 원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영원토록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놀라운 일들은 훗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게 되는 근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였을 때에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동기를 제공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자녀들에게 전할 때 그 자녀들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되며, 혹 떠날지라도 그 말씀을 기억하는 날에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그 자녀들에게 전하는 것은 부모된 성도들이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의무일 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가치있는 일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남겨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혹 재산을 남겨 준다면 그들은 게으름에 빠질 수 있습니다.
혹 지식을 더하여 준다면 교만하게 될 수 있습니다.
혹 기술을 가르친다면 일평생 먹고 사는 데는 유익하겠지만 그것 역시도 그의 삶을 완전히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역사를 전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리가 전하여 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자가 된다면 그는 일평생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살아갈 것이며,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후에는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토록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외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할 만큼”(빌 3:8)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의 역사를 가르치기를 더욱 귀하게 여기므로 우리의 자녀들에게 영원한 삶의 열쇠를 남겨주는 부모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한 번 전달합니다(3절)

그런데 이 명령은 이미 7차례에 걸쳐서 반복되었으나 바로에 의하여 계속 거절되었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해서 거절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께 한번쯤 ‘이 말씀을 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라든가 아니면 ‘다른 명령을 주십시오’ 라고 말씀드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몇 번이든 간에, 그것이 바로에게 거부되든 수용되든 간에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세에게 맡겨진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사명을 맡은 자는 그 결과에 관계없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는 곳까지 가고, 행하라고 하는 것을 행하고, 멈추라고 하는 순간 멈추면 되는 것입니다.
일의 결과를 예측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에스겔 3장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경고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해야 할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경고하시기를 만약 악인에게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는데도 그가 범죄하여 죽는다면 에스겔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겠지만 만약 에스겔이 하나님의 경고를 전달하지 않아서 그가 범죄하여 죽는다면 그 책임을 에스겔에게 묻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명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만 충실하면 됩니다.
그 결과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자가 행한 일의 결과가 나쁘기 때문에 그를 책망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지 않았기에 책망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을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전하기도 전에 미리 포기부터 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듣지 않을 거라고’, ‘괜히 창피만 당할 거라고’ 스스로 결과를 예측하면서 이웃을 향하여 한 마디의 말씀도 전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오늘 이 모세와 아론을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를 통해 새 생명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메뚜기 재앙으로 멸망의 위기에 처한 애굽 왕 바로는 급히 모세와 아론을 불러 자신이 여호와 앞에 득죄하였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구하여 재앙을 떠나게 해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합니다(16-17절).

이는 10절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데리고 애굽에서 나가려고 하는 것을 악하다고 비난하던 바로가 도리어 자신의 악함을 스스로 시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고백은 9장의 본문에서 보신 것과 같이 마음 중심에서 나온 진실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는 현실의 감당할 수 없는 큰 고통 앞에서 그 고통을 면할 속셈으로 자기 잘못을 거짓으로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의 순간에 이르면 신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임시방편이지 참된 믿음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도 그러한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평안할 때에는 하나님을 찾지도,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다가 고난만 찾아오면 하나님을 찾으며 구원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물론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단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만 하나님을 찾는다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은 바로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자신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헌신된 마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 본문의 바로와 같은 처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임하였다(22절).

이 흑암은 당시 애굽에서 최고의 신으로 숭배받던 태양신 ‘라’에 대한 심판으로 이 태양신 역시 한낱 우상에 불과함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그들의 그릇된 신앙에 대한 마지막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만일 바로가 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이 재앙을 대했더라면 그는 분명히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체없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 땅에서 내보냄으로써 마지막 재앙, 곧 장자 재앙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감지할 만한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모세에게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엄포를 놓음으로써 장자 재앙을 더욱 재촉할 뿐이었습니다.

오늘 이러한 바로왕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바로와 별 반 다름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겸손으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기적을 허락하시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돌이키시려는 것과 우리들의 간증을 통해 우리 자손들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저희들도 모세처럼 주신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하시되, 자녀들에게 썩어질 재물이 아니라 영원한 신앙의 유산을 남겨주는 지혜로운 부모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제9일 / 02-23-2024(금)
출애굽기 9장(9:1-35)
악질, 독종, 우박 재앙(3절, 9절, 18절)

5재앙 - 악질
6재앙 - 독종
7재앙 - 우박


계속되는 재앙으로 인하여 바로는 깨닫는 것처럼 반응하였으나 재앙이 멈추면 다시 완악해지는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완악(完惡) : 완전할 완, 악할 악
 -
성질(性質)이 모지락스럽고 악독(惡毒)함.


완강(頑強) : 완고할 완, 강할 강
 - 태도(態度)가 완고(頑固)하고 의지(意志)가 굳셈.

강퍅(剛愎) : 굳셀 강, 강퍅할 퍅
 - 성미(性味)가 깐깐하고 고집(固執)이 셈.

내 백성을 보내라


출애굽기 5: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출애굽기 7:16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였으나 이제까지 네가 듣지 아니하도다.

출애굽기 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8:2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로 나오리니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9: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9: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바로 앞에 서서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10:3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치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말씀을 두려워하는 사람과 멸시하는 사람(잠언 13:13)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룬다는 말은 성경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순종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다는 말은 말씀을 순종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신명기 28장축복의 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의 장이지만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저주의 장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좋은 분이시지만 그 반면에 조금도 자비가 없으신 저주도 내리시는 엄위하신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축복을 주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성경에서 어느 곳을 찾아보거나 동일하며 변개할 수 없는 하나의 법칙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가만히 살펴보면 그 사람의 생활에서 정확한 진단이 나옵니다.
그 진단에서 나온 정확한 원인은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음 두 가지 말씀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명기 28:15-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더 자세하고 두려운 내용이 신명기 28:58-67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신명기 28:58-67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 60절 → 67절’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언제나 우리들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그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자기 생애에 잡아끌어 드리지만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스스로 자기 가정과 사업에 이끌어 들여 패망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렸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패망하는 경우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 일에 대하여 ‘기왕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시고 너희로 번성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던 것같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던 사람이 그 순종을 버리면 하나님께서 순종했을 때 축복을 주셨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멸하시기를 기뻐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고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재앙을 받는다는 사실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바울이 증거 하는 이 한 사람으로 인한 불순종은 아담의 경우를 의미하며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은 온 인류의 비극을 가져 왔다는 사실을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은 축복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가져왔으며 의를 가져 왔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고 사망을 유업으로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지만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인하여 그 안에서 의인이 되었고 생명을 유업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지난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가고 있을 때, 한 사람의 불순종한 죄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서운 해독을 끼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점령하거든 그곳에서 탈취한 물건 중, 하나님께 바칠 물건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성안에 있는 은금과 강철로 만든 기구들은 다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인솔 아래 여리고성을 정복하여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정복할 목표는 산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아이라고 하는 적은 성이었습니다.
정탐꾼을 보내어 살펴보았더니 보고하기를 ‘아이성은 여리고성에 비하면 아주 적은 성이라 많은 군대를 올려 보낼 필요가 없고 약 2,3천 명 정도의 병력만 보내면 문제없이 점령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호수아는 약 3천명의 군사들을 그 성에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 군병들이 아이성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도망쳐 왔습니다.
이 때 여호수와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옷을 찢고 티끌을 무릅쓰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그들이 이 전쟁에서 참패한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중 한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성물을 도적질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성 사람들에게 참패한 원인이 이 한 사람의 죄로 인한 것이었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아간이란 자가 여리고성에서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 세겔과 50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몰래 숨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아간을 어떻게 처치했습니까?
아간을 잡고 그가 훔친 물건들과 그의 가족들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아골 골짜기란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하니 하나님의 진노가 풀려 아이성을 다시 공격케 하시어 승리를 거두게 하신 것입니다.
그 집의 한 사람의 불순종은 때로는 온 가정의 불행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한 사람의 순종으로 온 가정이 놀라운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죄악 중에도 가장 하나님을 노엽게 하고 용서를 받지 못할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불순종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3:36절 말씀에서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18절 말씀을 보면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단체나 국가는 결국에는 망합니다. 지금 일본이란 나라가 번창하는 것처럼 보이고 세계 경제를 주름 잡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우상 숭배의 길에서 돌이키고 지난날 한국 교회를 핍박하고 많은 하나님의 종들의 피를 흘린 일을 회개치 않으면 그들은 반드시 멸망 할 것이며 이 땅에 임할 인류의 무서운 환난 중에서 후회하고 땅을 치며 통곡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위정자들도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모르고 하나님을 떠난 생활을 하며 돈을 축재하려고 부정한 일을 저지르며 오늘의 국가적 위기를 초래한 사실을 철저히 회개치 않으면 얼마 안가 정말로 패가망신하고 영영히 구제 받을 길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리고 세계 역사를 돌이켜 볼 때도 어느 나라건 어느 민족이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 그를 존중히 여김으로 그를 위대하게 하고 그 나라를 번창케 하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했을 때 그가 누구이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며 하나님을 순종하므로 복을 받는 나라와 민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

한편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계명이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말씀을 두려워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1) 자기 생애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는 생활을 말합니다.

욥이란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일정한 음식보다 더 귀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욥23:11-12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는 영적 음식입니다. 음식을 멀리하는 자는 굶어 죽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는 자는 영의 주림으로 그의 생명이 죽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의 맛이 그의 입에 꿀보다 더 하다고 했습니다. 시119:103절 말씀을 보면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하니이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순종의 생활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에는 축복의 열매가 따르고 언약한 말씀대로 이루어짐으로 즐거움과 기쁨이 따르게 됨으로 그 말씀의 맛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맛인즉 무엇보다 더 달아요? ( ). 그러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말씀이 달기는 고사하고 그렇게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이 따르지 않으니 그의 생활에 말씀의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의 신앙생활이란 즐거운 것이 아니라 괴로운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긴다는 말은 말씀을 따라 그의 생활을 삼가는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스승입니다. 우리 인생의 참된 길의 안내자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따라 자신의 생활을 절제하며 삼가지 않으면 그는 결국 믿음에서 떠나게 되고 그의 인생길에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긴다는 말은 자신의 인생을 그 말씀에 의지하는 생애를 말합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지 아니합니다. 인간의 지식을 따라 처신하지 않습니다. 자기 지혜나 자기 지식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 살아갑니다. 자기 상식이나 경험이나 사람들의 권고를 따라 말씀에서 떠나거나 벗어나는 일을 결코 하지 아니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의지하며 그곳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사나 이적을 믿고 결코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을 때, ‘내가 어제 밤에 그곳에도 여러 번 그물을 던졌지만 잡지 못했습니다’고 말하면서 의심하지 아니했습니다. ‘내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고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물이 찢어지는 많은 고기가 그 그물에 잡힌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고 이치적으로는 합리성이 없지만 그러나 주님이 하신 말씀이니 내가 오직 그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겠습니다고 고백하는 믿음의 자세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비결입니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약속한 상은 영생으로 갚으시는 생명의 상입니다.
하늘에서 받는 면류관의 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상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에도 그 마음의 소원대로 성취되는 축복의 상입니다. 이 모든 상을 준비하시고 누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며 순종하는가 찾으시는 것입니다.

같은 교회에서 같은 신앙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어떤 사람은 상을 얻는 길로 다니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미련스럽게도 패망을 이루는 길로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생의 성공은 한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생활이 그 길입니다. 이 생활은 곧 순종을 말합니다. 이 생활에는 상이 따릅니다. 이 세상의 상으로서의 축복은 말할 것도 없고 하늘의 놀라운 상이 높이 쌓인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더욱더욱 순종의 생활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명기 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명기 28: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애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요한계시록 11:8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유다서 1:8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숫자 0과 10의 의미는무엇일까?

조동욱(충북도립대학 교수)

통상 수(數)는 총 세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가 많고 적음과 같은 양(量)을 나타내며 이를 기수라 한다.
영어로는 one, two 등으로 표기한다.

둘째는 1층, 2층처럼 순서를 나타내며 이를 서수라 한다.
영어로는 first, second 등으로 표기한다.

셋째는 주민등록증 번호처럼 기호의 역할을 한다.

사실 우리가 통상 사용하는 아라비아 숫자는 원래 인도에서 만든 것이다.
이것이 아라비아 상인에 의해 아라비아 숫자로 그 명칭이 바뀌었으니 인도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가슴 칠 일이 아닌가 싶다.

또 아라비아 숫자가 1, 2, 3 등과 같이 표기 된 것은 메사포타미아 등은 점토판에 숫자를 그은 것이어서 작성한 숫자가 변형이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인도는 모래에 수를 표기했고 그 결과 만일 바람이라도 불면 작성한 수에 대한 구분이 어려워져 수를 1, 2, 3 등과 같이 표기했다.

그리고 인도에서 무(無)의 개념으로 '0' 이란 숫자를 만들어 냈다.
'0'이란 없다는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0'을 다른 숫자의 뒤나 중간에 붙임으로 인류는 엄청나게 큰 수를 만들어 내게 된다.
1뒤에 0을 3개를 붙이면 천(千)이 되고, 4개를 붙이면 만(萬)이 된다.
1과 2 사이에 0을 2개를 넣으면 1002가 된다.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의 '0'이 사실은 엄청나게 큰 수를 표기하는 도구가 되어 수의 혁명을 가져 오게 된다.

또 숫자 10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을까?
10은 모든 계산의 기본이 되는 수이고 법, 질서, 지배를 상징하는 수라고도 하고 또 창조와 완성을 나타내는 수로 쓰인다.
또한 10은 귀신을 쫓는 수이기도 하다.
그 결과 로마에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임으로써 최대 악귀를 쫓아냈다고 생각한 것이고 예수님 입장에서는 구원의 완성이란 의미로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다.

또한 10은 창조를 뜻하기 때문에 우리가 욕이라고 생각하는 십새끼란 원래 창조란 뜻인 것이다.
새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도 10달간 어머니 뱃속에 있어야 하고 또 어머니의 십XX을 통해 새 생명이 창조되어 나온다.
우리가 욕이라고 생각하는 단어가 얼마나 소중한가.


1~10까지 숫자의 의미

1

1은 원초의 통일, 태초의 시작, 창조자, 주동자, 모든 가능성의 총합, 본질, 중심, 나눌 수 없는 불가분의 것, 배아(胚牙), 고립을 나타낸다. 또한 융기, 상승을 나타낸다.


중국 양(陽), 남성, 하늘, 길(吉)을 뜻한다.

기독교 하나님 아버지, 신성을 뜻한다.

유태교 1은 아도나이를 나타낸다. 또한 숨겨진 지식(카발라에서는 세피로스의 케텔)을 뜻한다.

이슬람교 통일로서의 신, 절대자, 모든 것을 자족할 수 있는 존재를 뜻한다.

피타고라스 학파 영(靈), 만물의 기원으로서의 신, 본질, 모나드를 의미한다.

도교 도(道)는 1을 낳고, 1은 2를 낳고, 2는 3을 낳고, 3은 만물을 낳는다.

2

2는 이원성, 둘의 교체, 차이, 갈등, 의존,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정적인 상태, 뿌리박음, 변하여 균형을 유지함, 안정, 반영, 대극, 인간의 이원성과 욕망을 나타낸다. 이원성으로서 현현되는 것은 모두 서로 대립되는 쌍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1는 점(点)을, 2는 길이를 나탄내다. 2는 1에서 출발한 최초의 숫자며 따라서 최초의 선(善)에서 일탈이라는 의미의 죄를 상징한다. 또한 순간적으로 타락하기 위숨을 나타낸다. 동시에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두마리의 동물은 배가된 힘을 나타낸다.


연금술 2는 태양과 달, 왕과 왕비, 유황과 수은 등 대립물을 나타낸다. 따라서 처음에는 대립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융합되는 남녀추니로서의 통일이다.
불교 2는 윤회의 이원성, 남과 여, 이론과 실천, 지혜와 방법을 나타낸다. 또한 서로 도와 길을 찾고 걷는 맹인과 절름발이를 뜻한다.
중국 2는 음(陰), 여성, 뭍(지상), 흉(凶)을 뜻한다.
기독교 신성과 인간성을 겸비한 예수를 뜻한다.
유태교 생명력을 의미하고, 카발라에서는 지혜와 자기 인식을 뜻한다.
힌두교 이원성, 샥타와 샥티를 뜻한다.
이슬람교 영(靈)을 뜻한다.
플라톤주의 플라톤에 의하면 2는 뜻이 없는 수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3의 요소를 도입하는 관계를 함의(含意)하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 학파 2는 한 쌍, 즉 2분된 지상적 존재를 나타낸다.
도교 괘(卦)는 음과 양 두 가지 결정요소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2는 중심이 없기 때문에 음에 속하는 약한 숫자다.


3

 

3은 다수, 창조력, 성장, 이원성을 극복한 전진운동, 표현, 통합을 뜻한다. 3은 모든이라는 말이 붙을 수 있는 최초의 숫자이며 처음과 중간과 끝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전체를 나타내는 숫자다. 3의 힘은 보편적이며 하늘, 땅, 바다로 이루어지는 세계의 3중성을 나타낸다. 또한 인간의 육체·혼·영, 탄생·삶·죽음, 처음·중간·끝, 과거·현재·미래, 달의 세 가지 상(초승달, 반달, 보름달)을 나타낸다. 3은 천계의 숫자이며, 4가 육체를 나타내는 데 비해 3은 영혼을 상징한다. 3은 4와 합쳐져 7이라는 성스러운 숫자가 된다. 또 3과 4를 곱하면 12가 되는데, 그것은 황도십이궁, 일년 열두 달을 의미한다. 3은 1과 2를 더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2와 1로 나누어질 수 있다. 도교에서 3은 평형을 성립시키는 중심점을 가지기 때문에 강한 숫자다. 3에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성(아버지, 어머니, 아들)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가족에게도 반영된다. 또한 3에는 중첩효과라는 권위가 있다. 즉 한 번이나 두 번은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지만 세 번이 되면 확실성과 강한 힘을 지닌다. 예를 들면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 3배 위대한 주(主), 3배 행복한 섬 등이 그것이다. 민화에서는 3이라는 숫자가 자주 등장한다. 3번의 소원, 3번의 시련, 3인의 왕자, 왕비, 마녀, 또는 운명의 세 여신, 3인의 요정을 뜻한다. 이중 둘은 착한 요정, 나머지 하나는 악한 요정인 경우가 많다. 3은 다수를 의미하는데 많은 숫자, 군집, 만세삼창을 나타낸다. 또한 성취를 상징하기도 한다. 신들과 영적 존재의 삼위일체의 예는 무수히 많다. 삼위일체의 달의 여신이나 삼면의 여신은 특시 셈족, 그리스, 켈트, 게르만 등의 종교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하나의 신격을 가진 세 개의 상(相), 힘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3을 나타내는 상징으로는 제일 먼저 삼각형이 있다. 3개의 원 또는 삼각형이 일부 중첩되어 있는 도형은 삼위일체로서의 3개의 인격의 불가분의 통일을 보여주는 것이다. 삼각형 외에 3을 나타내는 상징으로는 삼지창, 붓꽃, 세개의 잎, 3중 벼락, 괘상 등이 있다. 달에 속하는 동물들은 다리가 세 개인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달의 세 가지 모양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달에 3마리의 토끼 또는 세 사람의 인간이 살고 있다고 전해진다.


아프리카 아샨티 족 달의 여신은 셋인데 그중 둘은 흑인, 하나는 백인이다.
연금술 황, 수은, 소금의 세 성분으로 이것들은 각기 영, 혼, 육체를 나타낸다.
고대 서아시아 삼위일체의 신이 많다. 카르타고에서는 달을 뜻하는 '태모신'이 3개의 상징적인 기둥으로 묘사되었다.
아라비아   이슬람교 이전에 마나트는 3인의 성처녀(알-이타브, 알-우자, 알-마나트)로 나타내지는 삼위일체의 여신이다.1) 이 여신의 상징은 돌기둥, 돌, 기둥 또는 꼭대기에 비둘기를 장식한 기둥이다.
1) 이타브는 타이프 근교의 계곡에 있는 흰 돌에 사는 처녀신, 우자는 메카 근교의 계곡 아카시아 나무에 살고, 마나트는 메카와 메디나 사이의 쿠다이드에서 제사지내는 검은 돌에 산다.
불교 3은 삼보(三寶) 즉 불교를 구성하는 세 가지 기본 요소인 부처, 부처의 가르침, 승려를 나타낸다.
켈트 브리지트 여신은 세 가지 모습을 가진다. 켈트에는 지복의 세 여인 외에 무수한 3인조 신들이 있다. 이 신들은 같은 신의 세 가지 다른 모습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다. 켈트의 전통문화에서 3은 특히 중요한 숫자다.
중국 3은 성스러움, 길(吉)한 숫자, 가장 작은 홀수이다. 달에 사는 두꺼비 혹은 태양에 사는 새는 다리가 세 개다.
기독교 3은 삼위일체, 혼, 인간과 교회의 영육간의 결합, 삼인의 동방박사가 신, 왕, 희생으로서의 예수에게 바치는 세 가지 선물(유향, 황금, 몰약), 변용된 예수의 세 가지 모습, 예수가 받은 세 차례의 유혹, 베드로의 세 차례에 걸친 부인, 골고다 언덕의 세 개의 십자가,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기까지의 날 수, 부활한 예수가 세 번 출현함, 엠마오의 순례자, 사도들에게 출현, 3인의 마리아, 신앙·희망·은총으로 이야기되는 신을 향한 세 가지 덕목을 뜻한다.
이집트 그리스·로마 시대에 토트 신은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로 불렸다.
그리스, 로마 3은 숙명, 운명으로서 세 가지 모습을 가진 하나의 신 모이라이(라케시스, 클로토, 아트로포스)를 나타낸다. 헤카테(Hecate) 여신도 삼위일체다. 복수의 여신으로 나타나는 에리니에스(Erinyes, 알렉토, 타시포네, 메가이라)들과 메두사로 알려진 괴물 고르곤의 세 자매들(Gorgon, 스테노, 에우리알레, 메두사)도 하나이자 셋인 모습이다. 또한 아름다움과 우아함의 세 여신 카리테스들(Caritas, 아글라이아, 에우프로시네, 탈레이아), 미의 세 여신들(graces), 3인의 세이렌(Seiren), 식물의 성장을 주관하고 자연과 사회의 질서를 상징하는 세 명의 여신 호라이들(Horae, 에우노미아, 디케, 에이레네 또는 탈로, 아우크소, 카르포), 헤스페리데스의 정원을 지키는 세 명의 여신들(아이글레, 아리티아. 헤스펠라레투사 또는 아이글레, 아레투사, 헤스페리아), 태어날 때부터 백발을 하고 나온 그라이아이(Graeae, 팜프레도, 에니오, 데이노)도 있다. 지옥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Cerberos)는 머리가 셋이고 스킬라(Scylla)에게는 거대한 꼬리가 세 개, 키마이라(Chimaera)는 머리와 몸, 꼬리가 세 가지 다른 동물(사자, 산양, 뱀)의 모습이었다. 3,4 그리고 두 숫자의 합인 7은 3가지의 세계와 4대 원소를 주관하는 여왕으로서의 여신 아프로디테/베누스(Aphrodite/Venus)의 성스러운 숫자다. 오르페우스(Orpheus) 교의 상징체계는 존재, 생명, 지성이라는 3대 요소를 가진다.
유태교 3은 무한의 빛, 성화(聖化)된 지성, 카발라에서 3은 세피로스의 비나(지성)을 나타내며 남·녀, 통합적 지성의 삼위일체를 나타낸다.
헤르메스 사상 지고의 힘힘으로서의 신 즉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를 의미한다.
힌두교 트리무르티(trimurti,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를 의미한다. 이는 창조·지속·파괴와 시작·유지·종결의 세 가지 힘을 나타낸다. 이외에도 삼신일체의 신은 많다. 달의 전차는 바퀴가 세 개 달려 있다.
잉카 태양신에는 아버지 태양(아포인테이), 자식 태양(첼리인테이), 형제 태양(인테이카오키)의 세 가지 모습이 있었고 이들은 삼신일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 세 가지 신기(神器)에는 거울(八咫鏡), 검(天叢雲劍), 옥(八坂瓊曲玉)이 포함되며 각기 진리·용기·연민의 뜻을 가진다.
마오리 족 창조신인 큰영은 태양, 달, 대지의 삼위일체 신이다. 또한 자연의 신 즉 과거·현재·미래의 신이기도 하다. 3은 세워진 세 개의 손가락으로 상징되는 정신·인격·체격이다.
피타고라스 학파 3은 완성을 나타낸다.
북유럽, 게르만 숙명은 세 명의 노른(마니, 니, 니시), 즉 운명의 세 여신을 통해서 나타난다. 세 자매는 순서대로 보름달, 초승달, 반달을 상징한다. 게르만 신화에서는 달이 숙명을 나타내며, 달의 여신 홀다는 두 자매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룬다. 달에 사는 토끼는 다리가 셋이다. 천둥신 토르(Thor)는 때로 머리가 셋 달린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삼각 소용돌이 무늬 또는 삼각 호 장식은 오딘/보탄(Odin/Wotan)의 상징이다. 또한 3은 행운의 숫자다. 뭐든 좋은 것은 3이다.
슬라브 달의 신은 머리가 세 개다.
도교 삼재는 천, 지, 인을 가리킨다. 3은 모든 것을 둘로 나누면 중심이 남는 최초의 강한 숫자다.
3은 양. 길함을 뜻하며 다수를 상징한다.

4
 
최초의 입체는 4에서 비롯된다. 4는 현현의 공간적 구조 또는 질서, 동적인 원에 대립하는 정적인 상태를 상징한다. 4는 완전성, 전체성, 완성, 연대, 대지, 질서, 합리성, 측정, 상대성, 정의를 상징한다. 4에서 비롯되는 것으로는 4가지 기본 방위, 사계절, 4개의 바람, 정사각형의 4변, 십자가의 4개의 팔, 낙원에 있는 4개의 강, 지옥에 있는 4개의 강, 네 개의 성산(聖山), 낮과 밤의 네 구분, 달의 4현(弦), 4복음서 기록자 등이 있다. 서구에서는 세계가 4대 원소(동양에서는 5행)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성스러운 사위일체는 삼위일체와 대조적이다. 구약성서에서는 4가 상징적인 숫자였고 낙원의 중심에서 네 방향을 향해서 십자형으로 흘러나가는 4개의 강(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지상 세계의 4개 지방 등 보편적인 상징이었다. 사위일체는 정사각형이나 십자가 뿐 아니라 4개의 잎 형상으로도 묘사된다.

아메리카 인디언 4는 네 개의 기본방위, 4가지 바람 등 가장 자주 사용되는 숫자이며 십자, 만(卍) 등의 형태로 묘사된다. 의식이나 의례에서는 같은 동작이 네 번 반복된다.
고대 서아시아 바람의 네 신은 동사남북의 네 방위와 동일시되었다.
불교 생명의 나무 담바에는 큰 가지가 4개 있고, 뿌리에서는 낙원의 4개의 성스러운 강이 흘러나온다. 이것들은 자무량심(慈無量心), 비무량심(悲無量心), 희무량심(喜無量心), 사무량심(捨無量心)의 4무량심1)을 나타낸다. 중국 불교에서는 4가지 기본 방위에 사천왕(四天王)2), 즉 동에는 옥반지와 창을 들고 있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에는 비파를 지닌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에는 혼돈과 지진, 암흑의 우산을 들고 있는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에는 채찍, 표범가죽으로 만든 자루, 용, 진주를 가지고 있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자리잡고 있다.
1) 자무량심은 안락을 베풀려는 마음, 비무량심은 다른 사람의 고난을 덜어주려는 마음, 희무량심은 중생이 기쁨을 얻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 사무량심은 다른 사람에 대한 원한을 버리고 모두 평등하게 대하려는 마음이다.
2) 한국에서는 동쪽에 옥반지와 검을 지닌 지국천왕, 남쪽에 용을 들고 있는 증장천왕, 서쪽에 탑을 들고 있는 광목천왕, 북쪽에 비파를 지닌 다문천왕이 있다.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의 목조 사천왕 참조.
중국 4는 정사각형으로 상징되는 대지의 숫자다. 불사의 강은 모두 네 개다.1) 4는 짝수이며 음(陰)의 숫자다.
1) 사독(四瀆): 신앙의 대상이 된 4대강. 양쯔(揚子), 지수이(濟水), 황허(黃河), 화이허(淮水).
기독교 4는 육체의 숫자, 3은 영혼의 숫자다. 낙원에서 흘러나오는 4개의 강, 4복음서, 4복음서 기록자, 4명의 대천사(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우리엘), 4악마(사탄, 바알제붑, 벨리아르, 몰록), 4대 교부(성 암브로시우스, 성 히에로니뭇,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그레고리우스), 4대 에언자(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4덕(신중, 용기, 절제, 정의), 하나인 영기에서 불어오는 4개의 바람, 계시록의 4기사, 4복음서 기록자의 형상을 뜻한다.
이집트 4는 시간과 태양의 운행을 이해하는 성스러운 숫자다. 4개의 기둥이 하늘의 궁륭을 떠받치고 있다. 사체(死體)의 네 부분(간장, 폐, 내장, 위)이 담겨 있는 4개의 카노푸스의 단지를 지키는 수호자는 4가지 기본 방위와 연관되는 호루스(Horus)의 네 자식들이다.
그노시스 주의 바벨로(태모신)의 4를 뜻한다.
그리스 4는 헤르메스 신의 숫자다.
유태교 4는 측정, 은혜, 지성을 나타낸다. 카발리즘에서 4는 세피로스의 헤세트(은총)를 나타내며, 카발라의 4세계(유출 세계, 창조 세계, 형성 세계, 활동 세계), 공간의 4방위, 토라의 4가지 위계를 나타내는 숫자다.
헤르메스 사상 헤르메스 사상에서 4는 사위일체의 신(누스, 로고스, 누스 데미우르고스, 안트로포스)을 나타낸다.
힌두교 전체성, 충실, 완성을 의미하며, 창조주인 브라흐마는 4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힌둑 사원은 정사각형의 4변을 기초로 건축되며 질서와 완결성을 상징한다. 4개의 물질전개원리, 인간의 사지, 4자연계(동물, 식물, 광물, 정신), 4유가를 뜻한다. 4는 주사위에서 가장 이길 승산이 많은 숫자(서양에서는 7)이다. 4개의 카스트, 둘씩 대립하는 4개의 쌍이 있다.
이슬람교 원질을 나타내는 4가지 요소는 원리(창조주), 보편적 지성, 보편 영혼, 제1질료다. 이것은 카발리즘의 4세계에 대응하는 것이다. 또한 4인의 천사, 4개의 죽음의 집이다.
마야 천둥번개를 타고 지상계의 기본방위로 나타나는 챠크스 신이 있다. 또한 바카브 신과 4인이 교대로 1년의 1/4씩 지상계를 통치한다.
피타고라스 학파 완성, 조화로운 균형, 정의, 대지를 뜻한다. 4는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서약의 숫자다. 4와 10는 신을 뜻하며 테트라크티스(tetraktys, 1+2+3+4=10)의 성수(聖數)다.
북유럽 신들의 세계 아스가르트(Asgard)에는 젖이 흐르는 4개의 강이 있다.
게르만 4인의 난장이가 세계를 떠받치고 있다.
도교 하늘을 지키는 네 사람의 수호신은 옥으로 만든 탑을 들고 있는 이(李), 검(劍)을 들고 있는 마(馬), 두 자루의 검을 들고 있는 조(趙), 못이 박혀 있는 곤봉을 들고 있는 온(溫)이다. 4종류의 영적인 짐승으로 된 4신과 4령이 있다. 4신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이며, 순서대로 4가지 기본방위(동서남북)를 나타낸다. 4령은 기린, 봉황, 거북, 용이다.


5

 

5는 소우주로서의 인간을 나타낸다. 사지를 뻗어 오각형의 별 모양을 한 사람을 나타내는 숫자다. 오각형 별에는 끝나는 점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별과 마찬가지로 완전성과 힘의 상징이다. 5는 n제곱을 했을 때 마지막 숫자가 항상 5로 끝나기 때문에 순환수라고 불린다. 오각형 별은 원처럼 전체를 상징한다. 5는 중심과 기본방위를 나타내는 4점을 합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각형 별 모양은 4대 원소라는 힘을 만들어낸 중심적 창조주인 신성을 나타낸다. 5는 여성, 짝수인인 2와 남성, 홀수인 3의 결합으로서 성혼의 숫자다. 또한 5는 명상, 종교, 섭리, 다재, 오감을 나타낸다. 다섯잎 꽃, 다섯 개의 끝을 가진 잎은 소우주를 나타낸다. 별포는 펜타그램과 마찬가지로 통합된 인격을 나타내며 별표의 곡지점이 위쪽을 향하고 있을 때에는 요술과 검은 마법을 뜻한다. 사람의 다섯 손가락은 최초의 계산기 구실을 했다.

연금술 다섯잎 꽃과 오각형 모양의 별은 제5원소를 나타낸다.
불교 심장에는 네 가지 방향이 있고, 중심과 합해서 5라는 숫자가 되어 보편성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네 개의 섬에 둘러싸인 성산(聖山)도 보편성의 상징이다.1) 다섯의 선정불(禪定佛)2)이 있다.
1) 수미산(須彌山)은 동의 승신주(勝身洲), 서의 섬부주(贍部洲), 남의 우화주(牛貨洲), 북의 구로주(俱盧洲)의 네 대륙에 둘러싸여 있다.
2) 1. 대일여래(大日如來, 광휘의 뜻)는 법륜(法輪)과 중심과 흰색으로 상징된다. 2. 아축여래(阿축如來, 부동의 뜻)는 금강, 동쪽, 청색으로 상징된다. 3. 보생여래(寶生如來, 보탄(寶誕)의 뜻)는 보석과 남쪽, 황색에 의해서 상징된다. 4.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무량광(無量光)의 뜻)는 연(蓮)과 서쪽, 적색에 의해서 상징된다, 5 불공성취여래(不空成就如來, 아주 확실한 성공의 뜻)는 검(劍)과 북쪽, 녹색으로 상징된다.
중국 오행(五行)1), 오기(五氣)2), 오운(五運)3), 오성(五星)4), 오악(五嶽)5), 오곡(五穀)6), 오색(五色), 오미(五味)7), 오독(五毒)8), 오진(五塵)9), 오덕(五德)10), 오복(五福)11), 오상(五常)12), 오륜(五倫)13)을 뜻한다.
1)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2) 추위(寒), 더위(暑), 가뭄(燥), 습함(濕), 바람(風)
3) 오행의 운행
4) 목성(歲星), 화성(熒惑星), 금성(太白星), 수성(辰星), 토성(鎭星)
5) 태산(泰山), 형산(衡山), 화산(華山), 항산(恒山), 숭산(嵩山)
6) 중국에서는 참깨, 보리, 피, 쌀, 콩(또는 참깨, 보리, 피, 수수, 콩)을 오곡이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쌀, 보리, 콩, 조, 기장을 오곡이라 한다.
7) 신맛, 쓴맛, 짠맛, 매운맛, 단맛
8) 뱀, 두꺼비, 지네, 전갈, 도마뱀의 독
9)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다섯 가지 욕망. 물질(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촉감(觸)의 오욕
10) 온화, 양순, 공손, 검소, 겸양
11) 장수, 부유, 무병식재, 도덕을 즐기는 것, 천수를 누리는 것(또는 자손이 많은 것)
12) 어짐(仁), 의리(義), 예절(禮), 지혜(智), 신뢰(信)의 다섯 가지 덕
13) 부자유친(父子有親), 장유유서(長幼有序),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붕우유신(朋友有信)
기독교 5는 타락 후의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다. 오감(五感), 십자가의 다섯 개의 점, 십자가 형을 받은 예수의 몸에 난 다섯 개의 상처(두 손, 두 발, 허리), 5천 사람을 먹인 물고기, 모세 오경1)의 숫자다.
1) 창세기, 출애급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집트 나일강에 있는 다섯 마리 악어의 숫자다.

그리스, 로마 사랑과 화합을 나타내는 혼례의 숫자다. 5는 비너스(금성)의 숫자며, 비너스는 5년을 주기로 완성된다. 빛의 신으로서의 아폴론/아폴로는 전능, 전지, 편재, 영원, 통일의 5가지 상징물을 가지고 잇다.

유태교 5는 강함과 엄격, 근원지의 상징이다. 카발에서 5는 세피로스의 게브라(엄격함)를 의미한다.

힌두교 세계는 다섯 가지 요인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오대(五大, 조악하고 큰 다섯 원소), 오유(五唯, 미세 원소), 다섯 가지 원색, 오감, 시바 신의 다섯 가지 얼굴이다. 비슈누(Vishnu) 신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10가지(5의 2배) 권화1)가 있다.

1) 마즈야(물고기), 쿠르마(거북), 바라하(멧돼지), 누리싱하(사람사자), 바마나(난쟁이), 파라슈라마(도끼를 가진 라마), 라마, 크리슈나, 석가세존, 칼키
이슬람교 실행해야 할 다섯 가지 의무인 오주(五柱)1), 신의 다섯 가지 재림2), 다섯 가지 기본 교리3), 다섯 가지 활동, 하루 다섯 차례4)의 예배를 나타낸다.

1) 신앙 고백, 예배, 단식, 희사, 순례
2) 물질세계, 이미지와 상징의 세계, 영의 세계, 신의 이름과 속성의 차원, 신의 본질의 차원
3) 무아타지라파는 1. 신의 유일성, 2. 신의 공정함, 3. 내세에 대한 약속과 위협, 4. 중간적인 위치, 5. 윤리적 명령이고, 시아파는 1. 신의 유일성, 2. 신의 공정함, 3.예언자직, 4. 사도직, 5. 이맘직
4) 새벽, 정오, 오후, 일몰, 밤
파르시 교 파르시 교와 만다 교의 의식에서 5는 매우 중요한 숫자다. 그것은 성스러운 빛의 윤일이 5일이라는 사실과 결부된다.

피타고라스 학파 5는 성혼, 즉 하늘(3)과 대지(2)의 결혼을 나타낸다. 빛, 빛의 신 아폴론과 그의 다섯 가지 특성을 가리킨다.


6

6은 평형, 조화를 상징한다. 6은 1에서 10까지의 범위 안에서 완전수(1+2=3=6)다. 필론에 따르면 모든 수의 중심으로서 가장 생산적이다. 6은 서로 반대되는 대극(對極)의 통일을 상징하는데, 자웅 두 개의 삼각형이 합쳐져 남녀추니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때 꼭지점이 위를 향하고 있는 삼각형은 남자와 불, 하늘을 나타내고, 역삼각형은 여자, 물, 대지를 나타낸다. 또한 6은 사랑, 건강, 아름다움, 기회, 행운을 의미한다. 서양에서는 주사위에서 6이 다른 숫자를 누르는 가장 강한 숫자다. 태양의 바퀴에는 6개의 빛줄기가 있다. 교차하는 두 개의 삼각형 즉 솔로몬의 봉인이라고 불리는 6개의 꼭지점을 가진 별은 완전한 균형을 상징한다.


고대 서아시아 창조에 소요되는 6일간을 뜻한다.

중국 우주는 6이라는 숫자에 의거한다. 4가지 기본 방위와 하늘(위)과 땅(아래)이 6가지 방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여섯 가지 감각1)이 있다. 밤낮의 깊이는 각기 여섯으로 구분된다.

1)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육감으로서의 마음
기독교 6은 완전, 완성, 우주 창조에 필요한 6일간을 나타낸다.

유태교 창조에 필요한 6일간, 명상, 지성을 나타낸다. 카발라에서 6은 창조, 세피로스의 디후엘레트(아름다움)의 상징이다.

피타고라스 학파 기회, 행운을 뜻한다.


7

7은 대우주를 나타내는 숫자다. 완전, 전체성의 뜻이다. 3은 하늘과 혼을, 4는 대지와 육체를 나타내기 때문에, 7은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의 덧없음을 모두 포함하는 제일 작은 숫자다. 7은 완성, 보증, 무사, 안식, 풍부, 재통합, 종합 등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고 처녀성과 '태모'를 나타내는 숫자다. 7과 연관되는 것으로는 우주의 7단계, 일곱 개의 하늘, 일곱층의 지옥, 7개의 행성과 그 행성이 나타내는 금속들(달은 은, 수성은 수은, 금성은 동, 태양은 금, 화성은 철, 목성은 주석, 토성은 납)이 있다. 우주의 일곱 개의 원, 태양의 일곱가지 광선, 인간의 일곱시기, 지혜의 일곱기둥, 일곱가지 무지개색, 1주일의 일곱 요일, 7음계, 세계의 7대 불가사의1) 등이다. 태양의 제7의 광선은 인간이 현세에서 내세로 가는 길이다. 단식과 회개는 7일간 행한다. 고대 유태인 철학자 필론에 따르면 어떤 수도 7제곱을 하면 제곱과 세제곱 모두를 포함하므로 7은 매우 중요한 숫자다.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용은 인도, 페르시아, 동아시아, 켈트, 지중해의 신화에 등장한다.


1) 이집트의 피라밋,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터키 에베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그리스 로도스 섬의 거인청동상, 이라크 바빌론의 공중정원, 허티 할리카르나소스의 무덤, 그리스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
연금술 작업에서 7개의 금속이 관계된다.

고대 서아시아 월령의 일곱 가지 구분과 1주일의 일곱 요일이다. 달이여! 그대는 뿔 모양의 빛으로 6일을 정하고 7일째에는 반쪽의 관으로 빛난다. 이런 의미에서 음력 일곱째 날은 태양에 대립하는 어둠과 불길을 상징하며 일곱째 날에 어떤일을 시작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그 날이 안식일이 되었다. 대지에는 일곱 개의 지역이 있다. 지구라트의 일곱 행성들로 상징되는 일곱 개의 하늘이다. 생명의 나무의 일곱가지에는 각기 일곱 개의 잎이 달려 있다. 지옥의 일곱 개의 문, 티아마트 여신의 일곱 악령과 그 여신을 죽인 일곱 개의 바람, 7가지 색, 일곱개의 인장, 일곱 기둥의 운명의 신을 나타낸다.

점성술 큰곰자리의 일곱 개의 별은 1년 중 어느 때라도 볼 수 있다는 면에서 불멸이다. 플레이아데스, 일곱 개의 큰 행성, 태양의 일곱 가지 광선을 뜻한다.

불교 7은 상승의 숫자, 지고천(至高天)으로 올라가 중심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는 숫자다. 부처의 칠각(七覺, 일반적으로 팔상)은 시공을 초월하는 칠천(七天)1)을 넘어가는 것을 상징한다. 자바 섬에 있는 보루부두르 불교사원의 7층 건축물은 성산이자 우주축을 상징한다. 정상은 초월적인 북쪽을, 정상에 오르는 것은 부처의 영역에 도달했음을 상징한다.

1) 야마천(夜摩天), 도사다천(覩史多天), 낙변화천(樂變化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범중천(梵衆天), 대범천(大梵天)
기독교 신은 천지창조를 나타내는 6개의 광선의 한가운데 있는 일곱번째 광선으로 상징된다. 7과 관계되는 것으로는 7가지 성사1), 성령의 일곱가지 선물2), 7덕3), 일곱가지 큰 죄4), 연옥에 있는 일곱 층으로 된 산5), 중세의 자유 7과6), 행성을 포함하고 있는 일곱 개의 투명구체, 7대 예언자7), 지상에 관계하는 일곱 대천사8), 예수에 의해서 추방된 일곱 악마, 7일간의 단식과 회개, 성모 마리아의 일곱 가지 기쁨9)과 슬픔10), 기독교 국가의 7대 영웅11), 초대 교회의 일곱가지 충고다. 또한 천지창조의 6일이 지난 후 일곱째 날은 안식일이다. '구약성서'에서 7이라는 숫자는 바알람의 일곱 개의 제단, 제물로 바친 일곱 마리 수소와 숫양, 일곱 개의 양각 나팔,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돎, 나아만이 요단 강에서 목욕한 횟수, 또한 삼손은 푸른 칡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이라고 말했다. 엘리사에 의해 깨어난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를 했다. 노아의 방주는 7개월 만에 육지에 도달했다.

1) 성세, 견진, 성체, 고백, 병자, 신품, 혼인
2) 지혜, 총명, 지식, 의지, 영리, 효애, 경외
3) 3가지는 신에 대한 덕이고, 4가지는 기본 도덕
4) 교만, 탐욕, 색욕, 질시, 폭식, 분노, 나태
5) 일곱 가지 큰 죄를 하나씩 씻어내는 곳
6) 문법, 논리학, 수사학, 기하학, 산술, 천문학, 음악
7) 4대 예언자에 요나, 요엘, 자카리아 포함
8) 4대 천사에 카무엘, 요피엘, 쟈디엘 포함
9) 수태고지, 엘리사벳의 내방, 예수의 강탄, 동방박사 3인의 내방, 잃었던 예수의 발견, 부활, 승천
10) 시누온의 예언, 이집트로의 피난, 예수를 잃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뭇사람에게 전시된 예수의 시신,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매장
11) 영국의 성 게오르기우스/조지, 스코틀랜드의 성 안델레, 웨일즈의 성 다비드, 아일랜드의 성 파트리키우스, 스페인의 콤포스테라의 성 야곱, 프랑스의 성 도니, 이탈리아와 파트와의 성 안토니우스
이집트 운명의 여신으로서의 일곱 명의 하토르(Hathor)와 마아트(Maat)가 있었으며, 이 여신의 여사제들은 7개의 항아리를 가지고 있었다. 라(Ra) 신의 일곱 딸은 7벌의 내의에 일곱 개의 매듭을 만들었다. 라 신의 일곱 마리 매들은 칠현인을 나타낸다. 라의 호아소와 함께 있는 일곱 마리의 암소는 풍요를 나타낸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이집트 신화 해석에서는 명계에 일곱 가족이 있고 21개의 문이 있다. 7은 오시리스(Osiris) 신의 성수(聖數)다.

그리스, 로마 7은 7현의 리라를 가진 아폴론/아폴로 신의 수이며 아테나/미네르바 여신, 군신 아레스/마르스의 수이기도 하다. 목신 판(Pan)은 일곱 개의 갈대로 만든 갈대 피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에는 일곱 명의 현인1)이 있다.

1) 로도스 섬의 클레오불롯, 코린토의 정치가 페리안드로스, 레스보스의 정치가 피타코스, 그리스의 격언가 비아스,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 스파르타의 정치가 케일론, 아테네의 정치가 솔론
유태교 신비의 지혜를 뜻한다. 유태의 1년에는 일곱 번의 큰 제삿일1)이 있다. 메노라(Menorah)라는 가지가 일곱인 촛대가 있다. 솔로몬의 신전을 건축하는 데 7년이 걸렸다. 지혜의 일곱 기둥2)의 뜻이다.

1) 신년제(로슈 하샤나), 속죄의 날(욤 피르르), 초막절 축제(수코프), 궁결제(하누카), 프림 제, 과월제(페사하), 칠주제(샤보트)
2) 카발리즘에서 세피로스의 네시아하(영원)의 뜻이다.
힌두교 브라흐마의 칠보, 대홍수 이전의 일곱 신과 홍수에서 구원된 일곱 현자를 나타낸다.

이슬람교 7은 가장 작은 완전수, 일곱 개의 하늘, 일곱 가지 기후, 일곱 대륙과 바다, 일곱 색, 7인의 예언자1), 일곱 가지 활동력, 혼의 일곱 가지 상태2)를 뜻한다. 순례에서 가파 신전을 일곱 바퀴 도는 까닭은 알라가 가진 일곱 가지 속성을 상징한다. 순례에서 가파 신전을 일곱 바퀴 도는 까닭은 알라가 가진 일곱 가지 속성3)을 상징한다.

1) 아담, 누흐(노아), 이브라힘(아브라힘), 무사(모세), 다우드(다윗), 이사(예수), 무하마드
2) 명령을 내려 악으로 유도하는 혼, 비난하고 비판하는 혼, 영감을 받는 혼, 평온한 혼, 만족하는 혼, 기뻐하는 혼, 완전한 혼
3) 생명, 지식, 의지, 능력, 청력, 시력, 언어
일본 칠복신(七福神)1)을 상징한다.

1) 대흑(大黑), 혜비수(惠比須), 비사문(毘沙門), 변천(辯天), 포대(布袋), 복록수(福祿壽), 수로인(壽老人)
마법 주문으로 옭아매기 위해서 끈에 일곱 개의 매듭을 만든다. 주문은 일곱 번 반복한다.

미트라교 미트라스 신전에는 일곱 개의 가로대를 가진 사다리가 있는데, 그것들은 밀의의 이니시에이션의 일곱 계단을 상징한다.

피타고라스 학파 3은 하늘, 4는 대지를 뜻하며 7은 이승의 신, 완성을 나타낸다.


8

영적인 의미에서 8은 신참자가 이니시에이션의 일곱 단계 칠천계(七天界)를 통과해서 도달하는 최종지점을 상징한다. 따라서 8은 낙원의 회복, 재생, 부활, 지복, 완전한 리듬의 상징이다. 신의 은총에 의해서 인간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제8일째다. 단식과 참회의 7일간이 끝난 8일째는 풍요와 신생의 날이다. 7+1이라는 의미에서 8은 옥타브를 나타내는 숫자, 재출발을 상징한다. 8은 8개의 꼭지점을 가진 정육면체와 결부되기 때문에 입체성을 상징한다. 동서남북의 4가지 기본 방위에 각각의 중간 방위를 다하면 8개의 방위가 되며, 바람에도 8가지 종류가 있다. 8은 서로 반대되는 두 개의 쌍을 나타낸다. 정팔각형은 정육면체에서 원으로서의 변형의 시작을 나타낸다.


고대 서아시아 일설에 의하면 네보 신의 마법의 숫자다.

불교 8은 완성상태, 모든 가능성을 나타내며 불족석(佛足石)의 팔길상인(八吉祥印)이다.

중국 8은 전체, 모든 가능성의 현현, 행운의 상징이다. 팔괘(八卦)는 양(陽)을 나타내는 효(爻)가 세 개씩 다양하게 결합해서 8개의 조합으로 나타난 도형이다. 이들 8개의 조합은 대개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때 원주는 시간과 공간(및 그 속에서의 생성 유전)을 상징한다. 인간에게는 여덟 가지 기쁨이 있다.

기독교 신생, 재생의 듯이다. 성수반은 대개 다시 태어남의 상징으로 8각형이다. 여덟가지 행복을 뜻한다.

이집트 신 토트의 성수(聖數)다.

유태교 8은 완벽한 지혜, 광휘, 세피로스의 호드(권위), 요드 헤 바브 헤(YHVH, 야훼)의 숫자, 주(主)의 숫자다. 솔로몬 신전은 8일째 되는 날 깨끗이 청소되었다.

헤르메스 사상 8은 헤르메스 신학에는 수와 기하학의 발명자인 주신 토트/헤르메스와 그 밑의 여덟 명의 신1)이 있다.

1) 눈, 네네트(심연), 후후, 후후트(무한), 쿠쿠, 쿠쿠트(암흑), 아멘, 아메네트(불가시성, 공기)
힌두교 8*8는 지상에 현현된 천계의 질서를 상징한다. 사원과 '만다라'의 형태는 8*8의 상징을 토대로 건축되었다. 세계 8대 지역, 8개의 태양, 하루의 시간을 8등분함, 8개의 '차크라'가 있다.

이슬람교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왕관은 8명의 천사가 떠받치고 있다. 이것은 공간의 8구분에 대응하는 것이다. 아라비아 어의 철자의 여덟 가지 구분1)에도 대응한다.

1) 순(脣) 문자, 치경(齒莖) 문자, 치찰(齒擦) 문자, 설단(舌端) 문자, 구각(口角) 문자, 경구개(硬口蓋) 문자, 구개수(口蓋垂) 문자, 연구개(軟口蓋) 문자
일본 8은 수가 많은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 주의 플라톤에 의하면 빛나는 하늘의 기둥을 중심으로 동심원상으로 색색가지 여덟 개의 천구가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 8은 연대, 안정을 나타낸다.

도교 8은 현현된 모든 가능성을 나타낸다. 현상계의 여러 가지 힘은 팔괘로 상징된다. 팔선 또는 불멸을 뜻한다.


9

9는 강력한 숫자인 3의 거듭제곱(3x3)이고 3조의 3배다. 9는 완성, 성취, 달성, 처음과 끝, 전체를 의미하며 천계와 천사의 숫자다. (9천계, 9천사의 위계) 또한 지상낙원을 나타낸다. 9는 불후의 숫자다. 또한 9는 원주를 나타내는 숫자다. 원주는 90도 단위로 4등분되며 원주 전체는 360도이기 때문이다. 9는 2개의 삼각형이 조합된 모양으로 상징되며, 남과 여, 물과 불, 산과 동굴과 같은 대립원리를 상징한다.


불교 9는 지고의 영적인 힘을 상징하며 구천(九天)1)의 의미가 있다.

1)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생각된 아홉 개의 천체. 일천(日天), 월천(月天), 수성천(水星天), 화성천(火星天), 목성천(木星天), 금성천(金星天), 토성천(土星天), 항성천(恒星天), 종동천(宗動天)
불교 8은 완성상태, 모든 가능성을 나타내며 불족석(佛足石)의 팔길상인(八吉祥印)이다.

켈트 켈트의 전통문화에서 9는 매우 중요한 의미르르 가진다. 8가지 방위와 중심점을 더한 숫자로 9는 중심을 상징한다. 삼중의 여신에서 삼중이란 3의 세제곱을 의미한다. 9인의 켈트 처녀, 9개의 흰 돌로 브리지트 여신의 시중을 드는 아홉처녀를 나타낸다. 9는 벨테인 불의 축제와 연관된다. 의식에서 9명씩 9번 총 81명이 참가한다.

중국 모든 숫자 중에서 3x3은 가장 길(吉)한 숫자이며, 9는 하늘의 힘을 나타낸다. 9는 명당에서처럼 8가지 방위와 아홉번째 점으로서의 중심을 나타낸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한 구법(九法)1), 구관(九官)2)을 뜻한다. 정전법(井田法)에서는 토지를 우물 정자 모양으로 아홉 구획으로 분할했다. 이때 중심에 있는 토지는 아홉번째 토지로서 최고 지배자인 상제에게 바쳤고 신의 토지라고 했다. 이 토지는 공전(公田)이라고도 불렀는데 그것은 천자가 천제의 대리인이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다. 풍수에서도 지관이 용혈(龍穴)을 찾으면 그 구멍 앞에 있는 공간(명당)을 9분할한다.

1) 주나라 무왕에게 기자가 답했던 아홉가지 큰 법. 오행, 오사(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懲), 오복(五福)
2) 고대의 관제에 따른 아홉 명의 대신. 사공(司空), 황직(皇稷, 농경), 사도(司徒, 교육), 사(士, 형벌), 공공(共工, 공업), 우(虞, 산림), 질종(秩宗, 제사), 전악(典樂, 음악), 납언(納言)을 뜻한다.
기독교 기독교의 상징체계에서 9는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천사에는 3계급씩 3조, 즉 아홉 위계가 있다. 하늘에는 아홉 천구, 지옥에는 아홉 환도(還道)가 있다.

이집트 이집트에는 아홉 신1)이 있다.

1) 헬리오폴리스의 아홉 신에는 아톤(Aton, Ra), 슈, 테프누트, 게브, 누트, 오시리스, 이시스, 세트, 네프티스가 있다.
그리스, 로마 아홉 신, 후에는 9명의 뮤즈를 나타내는 숫자다.

유태교 9는 순수지성을 나타낸다. 9는 그 배수로 다시 9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진리를 뜻한다. 카발라에서 9는 10단계의 세피로스에서 아홉번째인 '이에소드(토대)'를 상징한다.

힌두교 불의 신 아그니의 성수다. 9의 제곱은 81개의 사각형으로 이루어지는 만다라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우주를 형성하고, 우주를 포함한다.

마야 명계는 9층으로 나뉘어 있고 각 층을 다스리는 명계의 주인이 배치되어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 9는 다른 모든 숫자가 그 속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순환하는 것으로 숫자의 한계를 나타낸다.

북유럽 오딘 신은 인간을 위해서 지혜의 비밀을 손에 넣으려고 아홉 낮, 아홉 밤 동안 '이그드라질'에 매달려 있었다. 북유럽의 페르세포네라고 불리는 눈(雪)의 여신 스켈디는 1년 중 3개월은 산 속에서, 9개월은 니오르드(항해, 교역의 신)의 바다에서 산다. 북유럽과 게르만의 상징체계에서 9는 성수(聖數)다.

10

10은 우주를 타나태는 수, 창조의 패러다임이자, 모든 수를 포함한다.
따라서 모든 사물과 모든 가능성을 상징한다.
10는 모든 계산의 기본이 되는 숫자, 10진법의 전환점이 되는 숫자다.
10은 모든 것을 포함하며, 법, 질서, 지배를 상징한다.

테트라크티스(tetraktys) 형(1+2+3+4=10)은 신성(神性)을 상징한다.
이 경우 1은 점, 2는 선, 3은 면, 4는 공간을 나타낸다.
10은 완전수로 1로의 회귀를 상징한다.
10은 양 손의 열 손가락을 기초로 나온 숫자이며, 완성, 모든 계산의 기본을 나타낸다.
또한 보다 높은 범주의 완전성으로서 백(百)과 천(千)은 힌두교 우주론의 토대가 되는 숫자다.
또한 중국에서 만(萬)은 셀 수 없이 많음을 의미하고, 현현 세계 전체를 뜻한다.
10은 여행의 완성을 나타내며 기원으로의 회귀를 뜻한다.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는 9년간 방랑을 하고 10년째에 고국으로 돌아갔다.
트로이는 9년간 포위를 견디다가 10년째에 함락되었다.
10은 원주를 둘러싸는 9와 중심을 나타내는 1의 합으로 나오는 숫자로 완전성의 상징이다.
우주축으로서의 1과 그 주위를 돌며, 춤추는 9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서아시아 봄 축제에서 10일째에는 신상들을 모두 등장시켜 행렬을 지어 축하한다.
중국 10은 한자로는 종횡의 길이가 모두 같은 '십(十)'으로 나타낸다.
이것은 음과 양이라고 불리는 두 방향을 향하고 있는 자신을 상징한다.
통설로는 동서를 뜻하는 ㅡ와 남북을 뜻하는 |이 모두 갖추어져 완전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십간(十干)에 12지를 배합해 모두 60가지 조합으로 연월일을 표시한다.

기독교 10은 모세의 십계를 나타내는 숫자다.
10개의 등불, 10인의 처녀, 10탈란트 등의 비유에 나오는 숫자다.
신에게 바치는 1/10세(십일조)다.

그노시스 주의 충일의 세계, 이이온의 로고스(말씀)와 조에(命)에서 다시 10개의 아이온이 나왔다.

유태교 카발리즘에서 10은 '영원세계'인 요드(히브리어 알파벳의 열번째 문자), 신(神)(요드 헤 바브 헤, YHVH)이라는 단어의 첫번째 문자에 대응하는 숫자이며, 눈부신 지성, 신의 지원, 십계, 세피로스의 말후트(국왕), 신의 10개의 이름을 뜻한다.

또한 카발라에서 10은 절대무에서 흘러나오는 세피로스의 수다.
세피로스는 대개 생명의 나무에 의해서 상징되는데, 열 개 중의 첫번째 것이 모나드, 즉 다른 압홉 개의 '제1원인'이다.
또한 나머지 아홉 개의 세피로스는 각기 남, 녀, 그리고 둘을 통일시키는 지성의 삼위일체의 3가지로 구성된다.

열번째의 아도니(adoni)는 통일성으로서의 신비적 회귀를 상징한다.
솔로몬 신전에는 10개의 커다란 사제 목욕용 대야, 10개의 식탁, 10개의 촛대가 있다.
계약의 궤 앞에는 10명의 레위 인 사제가 있다.

힌두교 10보다 큰 범주들, 즉 백(百)과 천(千)은 힌두교 우주론의 기반을 이룬다.

이슬람교 이슬람법에서 10분의 1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피타고라스 학파 10은 모나드를 나타낸다.
10은 완전의 상징이다.

로마 로마 숫자에서 10은 X(완전한 숫자)로 완성의 상징이다.

 




제7일 / 02-21-2024(수)
출애굽기 7장(7:1-25)
강퍅한 바로의 마음(3절)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마는.






제6일 / 02-20-2024(화)
출애굽기 6장(6:1-30)
강한 손(1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 내리라.
Then the LORD said to Moses, "Now you will see what I will do to Pharaoh: Because of my mighty hand he will let them go; because of my mighty hand he will drive them out of his country."

강한 손(베야드 하자카)  בְיָד חֲזָקָה

손(야드) 3027  יָד 

1. 사람의 손. 2. 전치사와 함께 쓰이는 경우.
발음 [ yâd ]
구약 성경 / 1617회 사용
강한(하자크) 2389  חָזָק  

1. 완고한.  2. 강한
발음 [ châzâq ]
어원 / 238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6회 사용

이제 - 히브리어 '아타'(*)는 곧 '장'이란 뜻도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이 말 속에는 큰 격려의 뜻이 들어 있다. 즉 모세의 불평은 하나님께서 약속 이행을 지체하신다는 점을 골자로 하였거니와, 이에 대해 하나님 즉시 당신의 권능을 나타내시겠다는 결의를 표하신 것이다.

강한 손을 더하므로 - 여기서 '강한 손'이란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하는 신인 동형동성론(Anthropomorphism)적 표현이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크게 나타내시겠다는 뜻이다. 한편 이처럼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대상과 연결시켜 간결하고 평이하게 표현하는 것은 히브리 문학의 주요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동일한 말('강한 손을 더하므로')을 중첩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명확성과 불변함을 나타내는 강조법적 기교이다. 󰃨 보내리라(*, 솰라흐) - '포기하다', '내던지다'는 의미로서 여기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마지못해 가게 내버려둔다는 뜻이다.

쫓아내리라(*, 가라쉬) - '축출하다', '추방하다' 로서 전술(前述)한 '솰라흐'보다 훨씬 강한 의미를 지닌다. 즉 이 말은 자의로 추방한다는 의미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내어준다는 의미가 강하다. 즉 이는 여호와의 이적적 징벌로 말미암아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도리어 쫓아내듯 황급하게 내어보내는 상황에 처하게 될것임을 예시한 말이다(12:33).






제5일 / 02-19-2024(월)
출애굽기 5장(5:1-23)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22절)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Moses returned to the LORD and said, "O Lord, why have you brought trouble upon this people? Is this why you sent me?

광야(미드바르) מִדְבָּר 스트롱번호 4057

1. 목초지.  2. 불모지. 3. 아라비아 사막
발음 [ midbâr ]

어원  / 1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71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목초지[사막이 아니라 가축을 먹이기에 적당한], 시65:13(12), 사42:11, 렘23: 10, 욜1:19, 2:22
2. 명사, 남성
 a. 명사, 남성 불모지, 사막, 사32:15, 35:1, 50:2, 렘4:11, 욜2:3, 4:19(3:19).
 b. 명사, 남성 [관사와 함께 쓰이면] 아라비아 사막, 창14:6, 16:7, 출3:1, 13:18, 신11:24.
 c. 명사, 남성 [은유로] 사막, 사14:17, 렘2:31, 호2:5(3).
3. 명사, 남성 시적으로, דִּבֶּר ‘말하다’에서 유래: 입, 아4:3.

말씀(다바르) דָּבָר 스트롱번호 1697

1. 말.  2. 복수로 쓰인 경우. 3. 약속
발음 [ dâbâr ]
어원  / 1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442회 사용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출애굽기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 백성(출애굽기 3: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 백성(출애굽기 5: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내 백성(출애굽기 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사람이 한 번 낙심하기 시작하면, 심각한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빠지기 쉽습니다.
아무 것도 하기가 싫고 의욕도 생기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우리 인생에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모세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고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으로 온 모세는, 지금 자신에게 벌어지는 예상치 못한 일들로 괴로워하며 낙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곤란함과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겪게 되는 곤란함이나 어려움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내 안에 있는 불신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모세

벽돌 굽는 일이 더욱 힘들어지고 지금까지 해 왔던 일상 생활이 무너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백성들의 원망을 들은 모세는 낙담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출애굽기 5:22,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소리에 모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어찌하여"라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억지로 보내시고는 이제 이토록 곤란한 상황에 빠뜨리셨다며 하나님께 절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모세에게는 이같은 상황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약속을 확인시키시는 하나님

원망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구원을 다시 말씀하여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즉흥적으로 하신 일이 아니라, 이미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지켜 나가는 과정임을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이루어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6: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약속은 결코 변함이 없으며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마음이 괴롭고 무거우며 원망을 쏟아 내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스라엘을 약속하신 땅으로 이끌어 가실 것이라고 재확인시켜 주십니다.

더욱 낙심하는 모세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고 모세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지만 현실의 무게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믿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모세는 또다시 낙심하고 원망합니다.

출애굽기 6:12,
모세가 여호와 앞에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데, 애굽 왕 바로가 자신의 말을 들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입술은 무능하며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나약한 입술이라고 말합니다.
더 이상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좌절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나 자신이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낙담하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틀렸거나 하나님이 무능해서가 아닙니다.
모세는 여전히 자기 자신의 생각과 자만심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낙담하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5장 23절에서 "주의 이름"으로 바로에게 말씀을 전했다고 말하지만, 바로가 보인 행동으로 낙심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전했다면, 주께서 그 다음에 행하실 일들을 조용히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모세의 낙심과 원망은, 자신의 말을 바로가 거부했다고 생각했기에 보이는 반응이었습니다.

6장 12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이라고 말합니다.
모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신의 말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자만심이 문제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구일 뿐, 구원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판단하고 해석하고 내가 한 일인 것처럼 쉽게 교만해 하거나 혹은 쉽게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입의 말과 같이 착각하는 교만은 우리를 쉽게 지치게 만들 뿐입니다.
하나님보다 성령님보다 앞서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으로부터 구원 받았으며 약속의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나 자신이 함부로 판단하고 쉽게 절망해 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도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시며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내안에는 여전히 자만심과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교묘하게 이용하려 하며, 하나님의 것을 내 것처럼 착각합니다.
연약한 나를 용서하여 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여, 시험과 절망 속에서도 믿음으로 극복해 나가게 도와 주옵소서. ​

기도제목

1. 겸손히 하나님만을 붙들고 의지하게 하소서.
2. 우리 가정이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소서.
3. 우리 가족의 건강을 지켜 주시고, 각자의 꿈과 비전을 이루어 주소서.

사람이 말하는 것은 2∼3년이면 배우지만
듣는 것을 배우기까지는 80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경청은 평생의 학습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듣는 방식에는 네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판단하며 듣는 것,
질문하며 듣는 것,
조언하며 듣는 것,
감정 이입하며 듣는 것.

한자 '들을 청(聽)'은
여러 단어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풀이해 보면
'듣는 것이 왕처럼 중요하고
열 개의 눈으로 보듯
상대방에게 집중해
상대와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인생에서 경청이 어려운 이유는
집중과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의견을
잘 경청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입니다.

우리는 '들어 달라고 떼쓰는 삶'보다
'들어주기를 힘쓰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존중해 준다면,
행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자연의 섭리이긴 하나 사람에게
입이 하나고 귀가 둘인 것은
말하기보다 듣는 것에 더 노력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경청의 태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찬사 가운데 하나이다.
– 카네기

내 백성을 보내라(출애굽기 5:1) Let my people go!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이니라 하셨나이다.
Afterward Moses and Aaron went to Pharaoh and said, "This is what the LORD, the God of Israel, says: 'Let my people go, so that they may hold a festival to me in the desert.' "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 이주한지 430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호칭하시면서 그들을 보내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셉의 요청으로 애굽으로 이주할 때 애굽은 그들에 대해 대단히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 왕이 새롭게 즉위하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은 학대를 당하게 되었고 고는 압제로 말미암아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잃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잃어버렸으며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예배를 회복시키기 위해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라고 요청하신 이유(1)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1)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시려는 목적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라고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나가서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목적
모세는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야 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광야에서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9:1)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즉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즉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의 사역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다음과 같이 지시하셨습니다.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출3:18, 참고. 출5:3,8,17, 8:8,25,26,27,28,29, 10:25) 즉 모세는 바로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순종의 여부는 바로에게 달린 것입니다.

예배의 삶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절기를 지키기 위한 것이요. 하나님을 섬기기기 위한 것이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한 것이요.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성도들을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요.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예배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목적은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모슬렘신자들은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하루 다섯 번 드리는 예배시간이 되면 모든 것을 덮어두고 먼저 예배를 드립니다. 모슬렘 국가에서는 기도시간이 되면 심지어 백화점까지도 영업을 중단하고 문을 닫으며, 관공서도 업무를 중단합니다.
리비아 반군들은 가다피 군과 싸우면서도 예배시간이 되면 전쟁터에서도, 사막에서 엎드려 예배를 드립니다. 폼페이(Pompey)가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 안식일을 이용하여 공격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에는 전쟁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유대전쟁사 1권 146). 또한 그리스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안식일을 이용하여 유대인들을 공격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그들의 병영까지 쳐들어오는 적군을 방어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고스란히 붙잡혀 화형을 당하였습니다(유대교대사 12권 17). 유대인들은 목숨을 걸고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지켰으며, 예배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43:21, 사43:25) 또한 시편기자도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시4:3)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신 목적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지 않으려는 이유(2-9)

바로가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습니다(2,3).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2)라고 하였습니다. 즉 그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 당시 세계는 민족이나 지역마다 각기 그들을 지키는 신이 있다고 생각한 범신론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혹 여호와라는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애굽의 강력한 신과 비교할 때 노예 민족의 신이 얼마나 강하겠느냐는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요18:38)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바로나 빌라도의 대답은 자신의 무지와 교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수치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는 단호하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2)라고 하였습니다.
바로가 말한 대로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주 예수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고 하신 분은 누구인가?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3).
1. 모세는 바로에게 말하기를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다고 하였습니다(3). 히브리인은 이스라엘 백성을 총칭하는 호칭입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은 히브리인의 생존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나셨다”는 “우리에게 찾아오셨다”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당한 고통을 보았으며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노예가 되어 날마다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출3:7-9)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의 세상에서의 고통을 아십니다. 성도들의 세상에서의 수고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기도하는 부르짖음을 듣고 알고 계십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요청하기를 하나님께서 찾아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3.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는 것을 거절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활용한 노동력 때문이었습니다(4-9). 당시 이스라엘은 장정만 60만 이상이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막강한 노동력을 활용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였습니다. 국고성(國庫城, Store cities)은 나라의 변방에 설치하여 유사시에 병기나 군량미를 신속하게 지원할 수 있도록 비축해 두는 창고를 말합니다.
바로는 이런 노동력을 빼앗길 수 없었다. 순수하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들은 바로는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라고 다그쳤습니다. 즉 “일이나 하라. 왜 잔재주를 부리느냐”라고 책망하였던 것입니다. 바로는 그 날에 백성의 간역자들(看役者, 감독들)과 패장들(牌張, 기록원들)에게 명령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노동을 더욱 힘들게 밀어붙였습니다(6). 벽돌은 전에 만들던 숫자대로 만들되 벽돌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짚은 공급을 중단하는 것이었습니다(7). 짚이나 왕겨를 넣어 벽돌을 만들어야 내구성이 강한 벽돌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벽돌 만들기도 힘에 부치는데 이제는 벽돌에 들어가는 짚을 주워 다가 벽돌을 만든다면 더더욱 힘들게 되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당시 만들어진 비돔성을 발굴했는데, 제일 아래에는 짚이 섞여 건축되었으며, 중간부분은 곡초의 뿌리나 풀뿌리가 섞여 있었고, 제일 윗부분은 아무 것도 섞지 않는 벽돌로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애굽 왕 바로가 강압정책을 사용한 이유
1. 애굽 왕 바로가 이런 조취를 취해 더욱 가중된 압제정책을 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8). 이스라엘 백성이 게으르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생각과 요구를 한다는 것입니다. “게으르므로”는 “느슨하게 하다, 맥이 빠지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가서 더구나 사흘 길이나 나가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요구한 것은 한가하기 때문에 즉 군기가 빠졌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2. 그러므로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백성의 노동을 더욱 무겁게 하므로 그런 요구를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무겁게”는 “더 많이 지우다”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감당할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선 초과상태를 의미합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욱 가중한 노동을 시켜 그들이 모세와 아론의 거짓말을 듣고 요동하지 않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3. 세상은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내세워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세상일에 푹 빠져 하나님 일에 마음을 쓰지 못하게 하십니다. 피곤하고 지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 못하게 만듭니다.
4.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할당량을 더욱 가중시키므로 이스라엘 백성들끼리 불화를 일으키도록 조장하였습니다(17-21).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21)라고 불평하였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의 선동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이 더욱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그 책임을 모세와 아론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간혹 기도했는데도, 헌신했는데도 오히려 어려움만 가중되고 있다고 하소연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세상에서 지혜롭게 사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를 애굽 왕 바로는 깨닫지 못하므로 결국 바로는 많은 것을 잃고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지 못하고 작은 고난 때문에 불평합니다. 성도들도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지 못할 때 낙심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게 될 때에는 많은 기회를 일어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은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갖은 방법으로 매이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얽은 줄이나 구속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받으실 예배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1970년대 한국에서 간 연구로 가장 이름을 날렸던 김정룡 박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의 별명이 간정룡 박사였습니다. 특히 간염 연구에 혼신의 힘을 다해서 드디어 간염 백신을 개발하였습니다. 상품화시키려고 보건사회부에 모든 자료를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보사부에서는 된다 안된다 연락이 계속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981년에 프랑스와 미국에서 간염 백신이 개발되어서 시판되기 시작했습니다. 김정룡 박사님은 그 때 다시 보사부를 찾아 가서 왜 당신이 개발한 백신을 아직 승인을 안 해줘서 프랑스와 미국에게 빼앗기게 했냐고 문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담당자가 대답하는 말이,

“기준이 없어서 허가를 내 줄수 없었습니다.”

미국은 FDA(식품의 약국)에서 승인이 되어서 이번에 코로나 백신이 출시되었는데, FDA가 승인할수 있었던 것은 기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어느 인문학 강의에서 듣게 되었는데 강사인 서강대 최진석 교수님이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선진국과 중진국의 차이는 바로 기준을 만드느냐 못 만드느냐에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곧 중진국의 특징은 기준을 생산하는 나라가 아니고 만들어진 기준을 수용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기준을 생산하는 나라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은데 생산하는 나라가 될 때 선진국이 된다고 설파하셨습니다. 저도 깊게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어서 속히 우리 조국 한국도 백신을 만들뿐만 아니라 백신 승인을 위한 기준까지 만드는 나라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한편 조국을 위해서 이런 기도를 드리는 우리들을 향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실까요? 포스트 팬데믹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본문 말씀을 통해 살펴 보고자 합니다. 출5: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떨기나무에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서 민족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은 후 바로에게 떨면서 하고 있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떨면서 말하고 있다고 제가 생각하는 이유는, 이 당시는 지금 보다 훨씬 전 세계가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각 지역마다 지역의 신이 있다고 모두가 믿고 있었던 때입니다. 애굽이 강한 것은 애굽의 신이 강해서 였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애굽의 신이 온 세상의 기준을 생산해 내는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이를 모르고 있을리가 없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하나님께 들은 것을 그냥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바로가 답합니다. 2절,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예상대로입니다. 바로는 여호와를 경멸하듯 대꾸합니다. 한편 모세는 하나님께 죄송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바로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말하는 것을 들으며 좀 찔끔했을지 모릅니다. 이에 모세는 어떻게 대답할까요? 3절,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 대신에 ‘히브리인의 하나님’으로 말을 조금 바꿉니다. 여기서 ‘히브리’의 뜻을 살펴 보면, ‘히브리’는 ‘건너 온 자’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가나안으로 왔을 때 아브라함을 히브리인으로 이미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온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봅니다. 곧 건너 온 나그네들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건너 온 자들이니 건너 가서 자기들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함을 바로에게 아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은 전염병에 다 죽을 거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생명을 좀 연장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팬데믹 기간 우리들의 모습을 좀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난 1년 넘게 생명을 연장해 달라는 많은 바램 가운데 지나지 않았습니까?

어떤 때는 한심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때문에 꼼짝 못하고 사람을 만나도 만나는 것이 아니고….

이처럼 모세는 비록 하나님의 명령으로 바로 앞에 왔지만 간이 콩알만 해져서 바로에게 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1년 넘게 늘 간이 콩알만 해지는 경험을 했듯이 말입니다.

이에 바로의 반응은, 그 다음 귀절들을 보면, 전처럼 같은 숫자의 벽돌을 만들게 하지만 물자도 알아서 구하면서 전처럼 똑 같은 숫자의 벽돌을 만들라고 합니다.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인 격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백성의 원망이 누구에게 오겠습니까?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이에 모세와 아론은 그 원망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22절,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모세는 자기는 할 일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했다가 잘 안 되니 ‘히브리인의 하나님’ 곧 ‘건너 온 자들의 하나님’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비굴하게 할 것은 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바로의 진노요 이스라엘의 원망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하늘은 이스라엘인들의 원망으로 가득채워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지난 기간 온 세계가 팬데믹으로 인한 인간들의 두려움으로 가득채워졌듯이…. 제 생각에는 지금 전 세계를 덮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숫자 보다 인간들이 뿜어낸 두려움의 바이러스 숫자가 더 많을 것 같습니다.

하여튼 이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6:1,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모세는 분통이 터져 있는데 하나님은 아주 calm하십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의 원망도 들으셨는지 안 들으셨는지 몰라 볼 정도입니다.

도리어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가 어쩔수 없이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쫓아낼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 쫓아내겠습니까? 자기들 보다 더 강함을 체험하게 될 것을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자기들이 기준의 생산자였는데, 진짜 기준의 생산자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보낼수 밖에 없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놀라운 계획을 가지시고 바로에게 가서 말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을 기준의 생산자가 되게 하겠노라.”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400년전에 야곱과 그 자녀들을 강대국 애굽으로 보내신 이유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여금 애굽 보다 강한 기준의 생산자가 되게 하시려는 계획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종살이를 거쳤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오늘 팬데믹을 허락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사실 우리도 작년 1년여간 얼마나 안절부절하였습니까?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원망하신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calm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팬데믹의 공포 가운데 있던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을 기준의 생산자가 되게 하겠노라.”

곧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출애굽하라” 말씀하시지만 오늘 저희들에게는 “출팬데믹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기준의 생산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그러면 이러한 진정한 출팬데믹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삶을 통해 해답을 찾을수 있다고 봅니다. 사실 왜 하나님께서 백성을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절기를 지키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 지키는 절기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시간상 다시 설명해 드리지 못합니다. 공통점은 모두 예수님을 향하게 하는 절기입니다. 특히 유월절이 그렇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에게 10번째 재앙을 내리는 날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지킵니다. 이 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민족의 집은 죽음의 천사가 뛰어 넘었기에 유월 곧 pass over했다고 해서 유월절 Passover가 절기가 된 것이 아닙니까?

곧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 민족은 바로 Passover를 경험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애굽은 힘과 지식으로 기준의 생산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 민족 내지 나라가 필요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한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 민족과 나라는 400년의 애굽 종살이의 훈련기간을 마친 후 유월절을 경험한 민족과 나라임을 알려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팬데믹 가운데 있는 우리를 세우시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오늘날 유월절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작년도 팬데믹 기간 중에 청년들을 중심으로 꽃소리 핫라인이 개설되어서 많은 분들에게 큰 위로와 즐거움을 안겨다 주었었습니다. 그 중 부자지간의 재미있는 대화 코너가 있었는데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라면은 무슨 라면일까요?

유준이가 좋아하는 치즈라면? 치즈두개 넣은 것? 아니요..

그럼, 아빠가 좋아하는 랍스터 다리 넣은 해물라면? 그건 엄마가 오늘 먹었는데..

그럼 무엇일까요?

정답은.. 주님과 함께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유월절을 경험한 가정에서 나뉘어지는 대화입니다. 팬데믹 가운데서도 ‘주님과 함께 라면’ 때로는 삶속에 갈팡질팡할 때 ‘주님이시라면.’

사실 그동안 코로나 백신으로 많이 안정이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맞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출팬데믹이 완성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백신이 필요합니다. 이 백신은 ‘라면’백신입니다. ‘주님과 함께 라면,’ ‘주님이시라면.’

하나님께서는 “주님과 함께 라면” 노래를 부르며 담대히 절기를 지키는 참된 기준의 생산자들로 하여금 새 역사를 이루시고 계십니다. 이 위대한 시간에 우리를 부르시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출팬데믹 하라.”

사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기준의 생산자가 되게 하시려고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를 향하여 하늘로부터 돌진하여 내려 오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래도 백신을 개발한 카리코 박사처럼 뭔가 준비가 되어 있어야지 우리처럼 준비가 안 된 자들을 부르실까요?’

1900년경 평안도 정주 땅에 백사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일하러 가는데 보니까 선교사님이 교회를 짓는데 흙으로 벽돌을 구워가지고 교회를 짓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렇게 짓다가는 금방이라도 비가 오면 다 무너지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에 감동이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있는 땅을 팔아서 교회를 짓도록 헌금으로 바쳤습니다.

선교사님이 볼 때 감사하면서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바치고 나면 나중에 무얼 먹고 살겠는지…? 그래서 선교사님은 백사겸을 데려다가 교회 사찰집사를 시키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찰집사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아주 총명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시켰습니다. 바로 연희 전문학교와 세브란스 병원이 합해서 연세대학교가 될 때 초대 총장이 된 백낙준 박사입니다.

사실 백낙준 박사님은 연세대 초대총장뿐 아니라 문교부 장관, 참의원, 국무총리 서리 등 여러 분야에서 크게 활동을 하였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백낙준 박사님처럼 기준의 생산자가 되자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기준의 생산자는 바로 백낙준 박사님의 아버님이셨습니다. 유월절을 경험한 분은 바로 백사겸 아버님인 것입니다.

물론 백낙준 박사님은 후에 얼마 동안 한국의 기준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기준의 생산자는 그의 아버님 백사겸 집사님이셨습니다.

누구나 백낙준 박사처럼 될수는 없습니다. 연세대 총장은 한 사람이면 족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기준의 생산자가 될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유월절을 경험하는 자는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떤 환경에도 주님을 사모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를 향하여 코로나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돌진해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교우 여러분,

팬데믹 끝자락에서 “주님과 함께 라면,” “주님이시라면” 노래를 부르며 출팬데믹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오늘 기준의 생산자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씀을 드렸는데 그러고 보니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바하가 생각이 나네요. 음악의 기준을 만들어내셨기에 그렇게 불려지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바하가 세상을 떠난지 50년이 지나서 포르켈이라는 저자가 바하의 전기를 저술했습니다. 이런 표현을 했다고 합니다.

“조국이여, 그를 자랑스러워 해라. 그에 어울리는 나라가 되라.”

바하가 독일의 국격의 기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하는 독일의 국격의 기준만 된 것이 아닙니다. NASA에서 1977년도에 Voyager I이라는 우주선을 우주에 띄웠는데 2025년까지 우주를 탐험한다고 합니다. 이 우주선에 7개의 classical music을 보냈는데 그 중 바하의 음악이 3개 들어 있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바하의 3가지 음악을 보낸 이유는 ‘바로 이것이 이 땅에 사는 자들의 기준이다’ 보여주기 위해서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기준이 필요해서 팬데믹을 보내신 것이 아닐까요? 팬데믹 끝자락에서 유월절 어린 양을 바라보는 자들로 인해 온인류를 위한 새로운 기준의 생산자들을 세우시기 위함이 아니셨을까요?

그러므로 팬데믹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새로운 기준의 생산자들이 만들어지는 역사의 기로점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이 축복은 누구에게나 다 열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자랑스러워 하십시다. 그리고 기쁨으로 유월절 어린 양을 바라 보십시다. 유월절 절기를 삶의 광야에서 지키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내 백성을 내보내라’의 이중적 의미

‘내 백성을 내보내라’는 출애굽기 전반부의 핵심 주제이며 엑소더스의 출발이다.
이 명령은 대상에 따라 단계 별로 몇 차례 반복된다.

야웨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면서 그에게 맡길 임무를 고지한다(출 3:10; 8:1, 20).
나중에는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방면(discharge)을 직접 요구하는 대목에서 언급되었다(출 5:1; 9:1; 10:3).
본문에서 ‘샬라흐’는 피엘 동사로 활용된 점을 기억해야한다.
피엘은 타동사로서 목적어를 취하며 그 본래적인 의미를 강조하게 된다.
더구나 하나님이 주어다.
그러므로 샬라흐는 ‘이집트에서 내보내는’ 공간의 이동만을 명령한 것으로 보면 곤란하다.
여기에 특정한 사명을 읽어야한다.
단순히 ‘보내다’라기보다 ‘파송하다’는 뜻이 더 적절하다.

명사형 쉘라흐는 미사일이나 치명적 상처를 주는 무기를 가리킨다.
물론 성경에 미사일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칼’이나 ‘병기’로 번역되어(욥 33:18; 대하 23:10; 욜 2:8; 느 4:11,17)
‘방패’와 함께 쓰인다(대하 32:5).
주로 후대에 쓰인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뿌리, 싹, 가지 등을 ‘내다, 자라다, 뻗다’ 등으로 표현할 때도 있고(렘 17:8), 비유적으로 열매를 맺는다는 뜻으로도 쓰인다(아 4:13). 샬라흐의 용법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밖으로) ‘빼내다’는 행위에 앞서 우선시되는 목적이 감지된다.
즉 아브라함을 염려하여 롯을 ‘내보내거나’(창 19:29), 완악한 백성의 ‘내버려두거나’(시 81:12), 충격을 주는 행위를 통하여 얻고자하는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내 백성을 내보내라’는 목적은 무엇일까?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경우는 각각 다르다.
이집트가 그 명령을 어긴다면 병기가 되어 돌아갈 것이며, 이스라엘이 순종한다면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인’이 되고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곧바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라’는 구문이 뒤따르고 있다.
샬라흐 동사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광야로 내보낸다는 것과 아울러 하나님 예배라는 두 가지 목적을 염두에 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의도한 출애굽의 목적이 겉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탈출과 해방이지만 안으로는 하나님 예배와 경외에 있다고 봐야한다.

출애굽기는 전체가 이야기로 구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야기, 법, 그리고 예배 의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출애굽기의 구성을 위와 같이 설명하면 다소 의아해한다.
지금까지 출애굽기가 이집트 탈출을 중심으로 기적적인 사건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출애굽기 1-19장까지 서사의 핵심이 출애굽 사건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40장까지 계속해서 출애굽 사건이라는 한 주제와 사건으로 단순화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알다시피 출애굽기에는 계약을 통한 율법의 수여(출 19:1-24:14)와 성막의 건설이라는 굵직한 사건이 뒤따르기 때문이다(출 24:15ff).

출애굽기에서 본문의 ‘내 백성을 내보내라’는 이야기와 예배를 묶어주는 연결 구문이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와 담판하는 출애굽 서사의 절정에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칫 조상들이 겪었던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흐를 수 있는 지점에서 하나님 예배에 대한 강조를 장치해둔 것이다.
하긴 바로를 처음 설득할 때부터 야웨 제사를 위해 사흘 길을 허락하라고 요청한 바 있고 그 뒤로도 두 차례 더 언급되었다(출 3:18; 5:3; 8:27).
그러나 완악한 바로는 장자의 희생을 겪은 후에 자신의 입으로 야웨를 섬기라며 이스라엘을 내보낸다(출 10:7,11,24 등을 보라).

내 백성을 내보내라!
이스라엘의 해방과 하나님 예배는 모세가 홀로 감내하기에 힘든 중대한 사명이다.
그러니 모세는 자신의 능력을 탓하며 거듭 거절한 것이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조력자를 보내거나 이적을 통하여 모세를 설득하며 독려한다.
맥락이 다르지만 이사야는 하나님이 누구를 보낼까 하는 질문에 ‘나를 보내소서’라고 화답한다.
여기에 소명을 받은 이의 결연한 의지와 끝까지 완수하려는 책임감이 묻어난다.
결국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막중한 두 가지 사명을 수행한다(출 12:31).

내 백성을 보내라




드디어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장면입니다.
이는 바로에게는 폭탄적인 선언이었을 입니다.
달리 말하면 선전포고(宣戰布告)인 셈입니다.
이에 대해 바로가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인가?
그리고 이 폭탄적인 선언은 어떤 결과를 몰고 올 것인가?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에게 어떻게 나올 것이며, 결국 모세는 하나님께 무엇이라 불평하게 되는가?
이것이 6장에서 관찰하게 될 과제입니다. 이를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5) 여호와가 누구관대 보내겠느냐
둘째 단원(6-21)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셋째 단원(22-23)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첫째 단원(1-5) 여호와가 누구관대 보내겠느냐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2).

모세가 바로 앞에 들어가서 대언(代言)한 말은 일관되게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기리라”(7:16, 8:1, 20, 9:1, 13, 10:3)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1. 바로가 노예로 부리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과,
2. 그러므로 그들을 보내라는 것과,
3.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가 아니라 나를 섬기리라 하십니다.

이에 대한 바로의 반응은,

1. 여호와가 누구관대,
2.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3.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바로의 반응입니다.
바로의 입장에서야 “이제 나라에 이 백성이 많거늘 너희가 그들로 역사를 쉬게 하는도다”(5) 한 대로 많은 노동력을 잃고싶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싸움은 “여호와가 누구인가”를 알게 하는(7:5, 17, 8:10, 22)데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열 가지 재앙들은 다름 아닌 여호와가 누구인가를 알리기 위한 자기 계시였던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재차 말합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3). 이는 3:18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출애굽에 대한 분명한 목적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구원의 목적은 해방만 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나라건설에 있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흘 길쯤 광야에” 가려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인도하시려는 것인데 이것은 거짓말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3:12) 하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의 1차 목적지는 가나안이 아니라 시내산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첫 언약”(히 9:18)을 체결해야만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워주신 언약에 의해서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어음을 갖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 약속이 시내산에서 언약으로 체결(24:7-8)이 된 것입니다.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3:12) 하셨는데 그들은 출애굽 한 후에 시내산에 1년을 머물면서 정성을 다하여 성막을 만들므로 실제로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란 말속에는 이런 의도가 함의되어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육적 출애굽 때에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시내산”에 가서 짐승의 피로 뿌림(24:8)을 받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림자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영적 출애굽 때는 시내산이 아니라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하신 갈보리 산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뿌림(벧전 1:2)을 받아야함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단원(6-21)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그 사람들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9).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기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결과는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평안을 준 것이 아니라 더욱 무거운 고역과 수고를 가져다 주게 되었습니다. 바로는 간역자들과 패장들에게 명합니다.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 소용의 짚을 전과 같이 주지말고 그들로 스스로 줍게 하라 또 그들의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로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자 하나니 그 사람들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6-9)고 명합니다. 그러므로 고역이 배나 가중되게 된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할당된 벽돌 수효를 채우지 못하게 되자 “바로의 간역자들이 자기들의 세운바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을 때리는”(14) 박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이점은 복음전도자들도 경험하게 되는 바입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해줌으로 인하여 그가 시련과 핍박을 당하게 되는 것을 목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사람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복음>을 듣지 않게” 하려는 사탄의 궤계인 것입니다.

이는 의외(意外)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바입니다.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의 가기를 허락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3:19-20)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패장들은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21)고 원망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리려하시는데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손 대대로 대물림을 하고 있는 노예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결의도 몸부림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로마서에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롬 5:6) 한 연약함입니다. 그들은 자력으로는 물론 하나님께서 구출해 내시려는 데도 일어설 힘조차 없을 만큼 연약한 상태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할 불신자들의 영적인 상태이기도 합니다.

셋째 단원(22-23)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22).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23)고 불평합니다.
모세의 불평이나 백성들의 원망하는 그 마음은 이해할 만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나 오늘 우리들에게 중요한 오해가 있다는 점입니다.
“구원”을 만사형통이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쯤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오해입니다.

그리하여 시내산 기슭에서 황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기도 하고, 내려주시는 만나를 매일 같이 먹으면서도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민 11:5-6) 하고 어처구니없는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광야생활이 고생스러워지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민 20:5) 하고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애굽에서 구출해 낸 것을 도리어 원망하였던 것입니다.

아닙니다.
영혼구원운동은 “피 흘리기까지”(히 12:4) 싸워야 하는 영적 전투인 것입니다.
이를 알았기에 바울 사도는 제자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할 것이라”(행 14:22)고 미리 말해주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7-58)고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형제에게는 이 각오가 되어있습니까?


모세의 소명과 사명(출애굽기 3:1-12)

열정으로는 부족하다(민족적 감정)

모세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민족을 위해 뭔가 해보려다가 우발적으로 살인자가 되고, 무조건 도망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집트에 멀리 도망치다 보니, 미디안 땅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우연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광야로 나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  예비해 주신 여자 십보라를 만나 결혼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아들을 낳자, 광야 생활의 외로움을 달래주신 것에 감사해서 “게르솜”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어언 세월이 약 40년 흘렀으며, 모세의 나이도 80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낮아질 대로 낮아졌고, 이집트의 화려한 추억도 다 잊혀져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 즉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는 자기 민족을 향해 주신 마음(비전)으로 인해 불이 붙어 있었습니다. 꺼지지 않고 타올랐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젼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입니다. 오히려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일찍 아침밥을 먹고 미디안 제사장인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몰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날 따라 모세는 양떼를 좀 멀리 몰고  가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서쪽으로 즉 이집트 방향으로 몰아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모세는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떨기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 없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더 자세히 보려고 다가서고 있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먼저 보시고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는 대답했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계속해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는 하나님을 뵈옵기 두려워 하여 얼굴을 가렸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중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민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본문 출3:7-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이 말씀은 모세의 소명과 사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소명과 사명은 비슷한 말 같이 보이지만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명은 부르심입니다. 영어로 하면 calling입니다. 사명은 mission입니다. 소명이 먼저고, 사명은 그 다음입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불러서 그 다음에 사명을 주십니다.  출3:4-5절이 소명에 해당하고, 출3:7-10절이 사명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부르실 때에, 두 가지 목적으로 부르십니다.

(1)    첫째 목적은 구원과 성화를 위해 부르십니다.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을 부르실 때는 먼저 구원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자녀 삼으시기 위해 부르십니다. 관계로 부르십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 구원으로의 부르심에 대해 잘 설명하였습니다.

엡1:3-5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3-5)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사 때가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불러주셨는데, 무엇이 되게 하시려고 불렀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즉 구원으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으로, 즉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성화를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 부르십니다.

롬8:28-30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살아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여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계속해서 성령으로 함께 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의 첫 번째 목적입니다.

(2)    하나님의 소명의 두번째 목적은 특별한 사명을 주시기 위해 부르시는 것입니다. 즉 사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이것은 마치 대통령이 대사를 불러서 사명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종들은 이 두 번째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모세도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실 때, 분명하게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라고 두 번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중차대한 사명을 맡기시려고 그를 두 번 부르신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에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발에서 신을 벗는 일이었습니다. 사명은 그 다음에 받았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장소가 더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곳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거룩한 곳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을 벗으라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모세가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기 전에 모세가 벗어야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모세가 결단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것을 결단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회개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회개는 방향 전환입니다.

-          모세는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주 하나님의 뜻에 따를 것에 대한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권리(주권)를 포기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겠다는 것입니다.

-          주님께서 ‘가라’하시면 가고, ‘서라’ 하시면 ‘서겠습니다’라는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이제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이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신발을 벗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자기 중심적으로 살았다면 그런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일입니다. 이전에 내가 주인으로서 살았다면, 내 맘대로 다녔다면,  이제 진짜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신을 벗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눅9:23) 이전의 익숙한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전의 방식, 이전의 가치관, 이전의 전통 같은 옷들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처절한 싸움”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히12:4)

모세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자신이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에는 반드시 사명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를 부르셔서,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신 주님은 이제 모세에게 새로운 사명(mission)을 주셨습니다.

모세의 사명은 분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 사명은 결코 모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분명한 사명을 주시길 기뻐하십니다.

모세의 사명은 본문 출3:7-10절 사이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집트에 가서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사명)을 주시기 전에, 이집트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고통받는 백성에 대해 누구보다도 마음 아파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개의 동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계십니다.

출3:7절 보세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하시며 세 개의 동사를 통해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          보고

-          듣고

-          알고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고통을 겪을 때, 그 광경을 다 보시는 분이십니다. 신음 소리를 다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상황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가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이 무엇인가요? ‘고난 자체보다 하나님께서 과연 내 사정을 아실까?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계실까? ‘와 같은 생각과 느낌이 들 때 가장 힘듭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백성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의 고통을 보시며,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든 상황을 이미 다 알고 계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며칠 전 큐티 책 <오늘의 양식>에 보면,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할머니가 교회 현관에서 두 개의 사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부룬디에서 찍은 딸의 사진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린 손자의 사진입니다.  딸이 없고 아기만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그 사진을 설명하면서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제 딸이 손자를 낳다가 그만 생명을 잃었습니다.”(오늘의 양식, 3월3일)

옆에 있던 한 아주머니가 그 할머니의 얼굴을 감싸 주면서, 역시 눈물을 흘리며 “그 마음을 제가 압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얼굴을 감싸주며 “그 마음을 압니다”라고 하였던 분도 몇 달 전에 아들을 세상에서 떠나보냈던 분이었던 것입니다.

고통 중에 있을 때, 같은 고통을 겪어본 분이나,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분의 위로가 큰 힘이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가장 힘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위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겪는 모든 고난을 다 겪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3:16,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일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셨고, 그 독생자는 십자가에서 가장 처절한 고통을 겪으시며 죽으셨던 것입니다. 세상에 아들이 십자가에 죽는 고통을 지켜보아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하신 구세주, 유일하신 중보자가 되신 것은 세상 어디에도 예수님과 같이 자신을 내어주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15절을 보세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인간의 사정을 알고만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곤경에서 구원해 주시길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건져내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불러서 이집트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민족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합니다.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요즘에 얼마나 답답합니까? 과연 언제까지 우리 민족이 둘로 분단되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어야 하는가?

저는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통일을 허락하실 지 모르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사정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가장 잘 알고 계시며, 누구보다도 마음 아파하신다는 것입니다. 북한 동포들의 고통, 신음 소리, 학대받는 것을 주님은 다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시고,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그들을 해방시키실 것이며, 우리 민족을 하나로 만들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출애굽기를 묵상하면서, 출애굽의 이야기는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정치적 압제, 경제적 가난, 질병과 같은 문제들로터 해방시켜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죄로 인해 바로의 압제처럼 죄와 사탄의 노예로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표현하지 못해도 이 죄로 인한 고통, 부르짖음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심각한 것은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며, 인간을 영원한 불행으로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요,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 성만찬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이 은혜를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속 출애굽기를 공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집트로부터의 탈출 이야기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이야기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나이나 조건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이 80이면 벌써 은퇴할 나이이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충분히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모세를 보세요. 아브라함을 보세요.(75세) 갈렙을 보세요.(85세)

하나님의 종에게 무슨 일을 맡길 것인가, 언제 그 일을 하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종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입니다. 목자되신 주님께서 하라는 일을 맡아서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누가 모세를 불렀습니까?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무슨 일을 맡기셨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하는 일에 부름받았습니다. 그 일을 이루실 분은 누구십니까? 모세의 힘과 지혜로 가능한 일이었나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모세를 동참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이끄시는 분입니다. 당신의 때에 당신의 종을 불러서 그 일에 동참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은 은혜요 축복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여 지도자로 쓰임받은 것은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게 될 때 결코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민족의 지도자(리더)로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에 부름받은 것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오랫동안 양떼를 돌보면서 지도자로 부름받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배웠을 것입니다.

여러분, 리더와 리더가 아닌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리더는 자리나 직책 그 이상입니다. 자리나 직책이 있어도 리더가 아닌 경우가 있고, 자리나 직책과 상관없이 리더로 쓰임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리더는 멀리 보고 큰 그림을 보고, 리더가 아닌 사람은 근시안적입니다.

리더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붙잡고 살지만, 리더가 아닌 사람은 사리사욕을 챙깁니다.

영적 리더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최우선 순위가 되지만, 리더가 아닌 사람은 늘 분주합니다.

리더는 사람(영혼)을 중시하고 관계적이지만, 리더가 아닌 사람은 관계를 소홀히 여기고 사람을 이용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리더는 목자가 양을 인도하듯이 솔선수범하지만 리더가 아닌 사람은 거짓과 위선을 일삼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누구를 불러 쓰실까요??

하나님은 시대적 요청이 있을 때, 준비된 사람, 열정이 있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을 불러 쓰십니다. 열정이 곧 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이 대한 열정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동족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어떻게 해서든 돕기를 원했습니다.  비록 젊은 모세가 한 번 실패하였지만, 그 열정만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때가 되어 준비된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서 당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1960년대 미국에서 흑백 갈등이 한참일 때에, 하나님은 흑인 목사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를 불러서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고통받는 흑인들에 대한 뜨거운 가슴이 있었으며, 폭력적인 방법이 아닌 기도와 비폭력 운동을 통해 흑인들의 인권을 세우는데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을 그에게 맡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꿈을 주셨고, 그 꿈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불러서 함께 일하시길 기뻐하십니다. 각 시대마다 필요한 종들을 불러쓰셨습니다. 마음에 비전도 주시고, 열정도 주시고, 지혜와 능력을 주시면서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겐 어떤 비전을 주셨나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계신가요?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여러분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젊은 모세는 스스로 리더가 되고 싶었지만 아직 준비가 안되었었습니다. 인간적인 야망, 수단을 사용하여 뜻을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땐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광야에서 많은 세월 동안 양떼를 돌보면서 리더가 된다는 것이 의욕만 앞선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철저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 힘으로 안되며,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출3:11절을 보세요. 젊었을 때의 모세와 얼마나 다른 반응을 보였나요?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자신감이나 자만심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초야에 묻혀 40년이상 양떼를 돌보면서 낮아질대로 낮아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모세를 들어 쓰셨던 것입니다.

출3:12절에서, 하나님은 “걱정하지 말라, 내가 할 것이다, 네가 아니라 내가 이루겠다”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사명을 주셨으며, 그 사명을 이루게 하시기 위해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보다 더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 각자에게 주시고 싶으신 말씀이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너를 도와주리라” 하는 말씀인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을 분명하게 깨닫고,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붙잡고 나가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모세를 불러 쓰신 주님께서 이 시대에 저와 여러분을 불러서 쓰실 것을 믿습니다. 아직까지 자신의 사명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오늘부터라도 하나님께 물으셔서 자신의 사명을 꼭 발견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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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일 / 02-17-2024(토)
출애굽기 4장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2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Then the LORD said to him, "What is that in your hand?" "A staff," he replied.

4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을 내밀어 잡으니 그 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17절. 너는 이 지팡이를 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찌니라.

20절.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에 잡았더라.

지팡이(4294) 마테(maṭṭeh)  מַטֶּה   

1. 나뭇가지.  2. 회초리.  3. 규(圭. 홀 규)
발음 [ maṭṭeh ]
어원 / 518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51회 사용

1. 명사, 남성 나뭇가지, 가지, 잔가지, 가는 가지,분파, 지류, 겔 19:11이하

그 가지들은 견강하여 권세 잡은 자의 홀이 될만한데 그 하나의 키가 굵은 가지 가운데서 높았으며 많은 가지 가운데서 뛰어나서 보이다가

2. 명사, 남성 회초리, 막대, 지팡이, 장대, 출 4:2, 4, 17, 레 26:26, 민 20:9, 시 105:16, 겔 4:16, 5:16, 14:13.

 a. 명사, 남성 [주]
 b. 명사, 남성 규[왕의], 시 110:2.
 c. 명사, 남성 창[군인의], 삼상 14:27, 합 3:9, 14.
 d. 명사, 남성  회초리, 사 9:4, 10:5, 24, 겔 7:10.
3. 명사, 남성 종족, 지파, 분파[이스라엘 지파에 대해서만 사용], 민 1:49, 수 13:29, 왕상 8:1.

민수기 1:49
레위 지파만은 너는 계수치 말며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계수 중에 넣지 말고.

여호수아 13:29
모세므낫세 반 지파에게 주었으되 므낫세 자손의 반 지파에게 그 가족대로 주었으니.

열왕기상 8:1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성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두목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 자기에게로 소집하니

출애굽기에서 "지팡이" 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 수는 "21구절"
출애굽기 40장, 1213구절


4:2, 4, 17, 20. / 7:9, 10, 12, 15, 17, 19, 20  /  8:5, 16, 17  / 9:23  / 10:13  /  12:11  /  14:16  /  17:5, 9  / 21:19


4:9.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하수를 조금 취하여다가 육지에 부으라 네가 취한 하수가 육지에서 가 되리라.

하수(2975) 예오르(yeʽôr) יְאֹר

1. 강.  2. 창 41:4 이하.  3. 단 12:5
발음 [ yeʽôr ]
어원 / 애굽어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5회 사용

피(1818) 담(dâm)  דָּם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
발음 [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60회 사용

피(담) - '잘라내다', '멸망하다'란 의미의 동사 '다맘'에서 온 말로 피를 흘리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
특히 본절에서 피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닥칠 파멸을 예고하는 것이다.

דָּמָם 스트롱번호1826

1. 침묵하다. 2. 놀라다. 3. 출 15:16.
발음 [ dâmam ]
구약 성경 / 30회 사용

모세에게 주신 세 가지 표징

1. 하나님을 향한 불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모세는 두려워하고 염려합니다.
바알 앞에 서기를 두려워 했고, 장로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까봐 염려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친히 모세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데없는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백성들이 듣지 않으면 어쩌나 염려하고 있는 것이지요.

두려움과 염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 두려움과 염려는 설 자리를 잃고 맙니다.
두려움과 염려는 또한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하실 능력이 있으시고, 그 능력을 우리를 위해 사용해주실만한 사랑이 있으신 분임을 인정하면 두려움과 염려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도 능력도 하찮게 보기에 두려움과 염려에 휩싸이고 마는 것입니다.

2. 무시하는 자를 향한 존중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는 모세를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하고 배려해줍니다.
모세에게 일일히 설득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모세를 위해 세 가지의 표징을 주십니다.

첫째 표징은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가 다시 지팡이가 되는 표징이고,
둘째 표징은 손에 나병이 생겼다가 다시 온전해지는 표징이며,
셋째 표징은 물이 피가 되는 표징입니다.

앞의 두 가지 표징은 모세에게 직접 보여주셨고, 마지막 한 가지 표징은 애굽으로 가서 행하게 될 것입니다.
세 가지의 표징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모세의 믿음을 위한 것이며, 또한 장로들과 백성들의 믿음을 위한 것입니다.

기적은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일어나는 사건을 말합니다.
기적 중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하기 위해 주어지는 기적을 표징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것은 기적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고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고작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불러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애굽 사람과 가나안 사람 전체를 지팡이로 만들어 버린 후, 가나안에서 살게 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게 하시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철저히 무시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기사와 이적을 베푸시면서까지 그 백성을 설득하고, 만져주며, 확신시키는 작업을 공들여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3. 지팡이와 뱀의 표징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라 명하십니다.
지팡이를 던지자 지팡이는 곧 뱀이 되었습니다.
뱀은 애굽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바로가 쓰는 관에는 늘 뱀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모세는 뱀을 보고 놀라서 피합니다.
이는 모세가 바로를 두려워하여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을 그대로 형상화 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 명하십니다.
뱀에게서 피했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뱀을 잡습니다.
그러자 뱀은 즉시 지팡이로 변합니다.
뱀을 잡을 때에는 꼬리가 아닌 머리를 잡아야 합니다.
꼬리를 잡으면 즉각 물릴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게 하라 말하는 것은 마치 뱀의 꼬리를 잡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물릴 것이 뻔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명령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결과는 달라집니다.
뱀과 같은 바로는 지팡이와 같이 되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물 수 있는 능력을 전적으로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맨 처음 바로를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모세는 결국 순종하여 바로를 대적하게 될 것이며,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가나안으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뱀 앞에 서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뱀은 성도를 향해 그 어떠한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마른 막대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절대 불가능하다 생각되는 일, 두려워서 도무지 발걸음을 뗄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가라시면 발을 떼야 합니다.
그래야 뱀은 지팡이가 됩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뱀은 우리를 물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하여 발을 내딛기만 하면 뱀의 꼬리를 잡을지라도 뱀은 우리를 물지 못하고 그저 막대기처럼 될 것입니다.

4. 나병에 걸린 손의 표징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손을 품에 넣으라 명하십니다.
손을 품에 넣었다 빼자 손은 곧장 나병에 걸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병에 걸린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말씀하십니다.
손을 품에 넣었다 빼자 이번에는 나병에 걸렸던 손이 말끔히 회복이 되어 있었습니다.

나병은 불치병으로서 하나님의 저주로 여겨졌습니다.
이는 애굽에서 노예 생활의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비참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나병의 특징 중 하나는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간 애굽에서 사는 동안 애굽의 죄악된 풍습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살이의 고통에는 고통스러워 부르짖었지만, 그들이 영적인 처지에는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백성들의 모습을 그려내기에 나병만한 비유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고통과 이스라엘의 죄악을 끝내시겠다는 의지를 이 표징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나병 환자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마귀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고통 가운데 살았어야 했고, 죄를 지으면서도 죄가 죄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모든 고통과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인간은 나병에 걸린 것과도 같은 처지를 벗어나 온전한 회복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5. 물이 피로 바뀌는 표징

사람들은 참 완악합니다.
첫째 표징만 보여줘도 믿어야 하지만, 둘째 표징을 필요로 합니다.
둘째 표징까지 보여주면 다 믿을 것 같지만, 그래도 믿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셋째 표징이 필요합니다.
당장 모세만 해도 둘째 표징을 보여주고 셋째 표징을 말씀해주시는데도 여전히 못 가겠다고 징징거리는 모습이 다음 절에 등장을 합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셋째 표징까지 보여 주십니다.
셋째 표징은 나일 강물을 떠다가 땅에 부으면 피가 될 것이라는 표징이었습니다.

나일강은 애굽의 젖줄로서 나일강 자체가 애굽을 상징합니다.
사실 나일강이라 번역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나일이라 되어 있지 않습니다.
히브리어로는 그저 강물을 뜻하는 단어인 ‘예오르’로 되어 있습니다.
이를 애굽에서는 ‘하피’라고 불렀습니다.
나일이라는 이름은 후에 헬라인들이 Neilos라고 부른데에서 유래했습니다.
헬라어 역본인 70인역 성경에서는 이 강물의 이름이 당연히 나일강으로 되어 있겠지요.
우리말 성경은 헬라어 역본을 따른 것입니다.
출애굽기가 기록될 당시에는 이 강물은 나일이 아닌 하피로 불렸습니다.
하피는 또한 강물을 주관하는 신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나일강을 신성시 여겼습니다.
신이 내려와 거니는 강물로 여겨졌으며, 하늘 바다의 일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일강도 나일강을 주관하는 신도 결코 신성하지 않습니다.
신성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이 피가 되는 것을 강의 신이 막을 수 있을까요?
막을 수 없다면 그 신은 존재하지 않는 가짜 신입니다.
물이 피가 되는 이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참신이 함께 해주는 길이므로 담대히 가라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 표징은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성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스라엘의 영아들을 하수에 던졌습니다.
나일강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피가 흐릅니다.
그 피로 애굽왕은 자신의 풍요를 얻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피값을 애굽에게 물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나일강은 애굽의 풍요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애굽에는 풍요 대신 피의 심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물을 애굽땅에 쏟을 때에 피가 되는 모습을 그러한 메시지를 형상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표징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였던 애굽에게는 심판의 메시지가 되고, 압제하에서 억울한 피를 흘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억울함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원통함을 신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그 피의 능력으로 사단의 권세를 끝장내셨고, 우리의 고통과 죄를 씻어내셨으며, 우리의 모든 원통함을 신원하실 길을 내셨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힘입니다.

모세의 지팡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지팡이)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출 4:3-4)

왜 하나님께서는 하필 '뱀'으로 만드셨을까?
하나님의 권능을 더 강력하게 보일 다른 이적도 있을 텐데 말이다.
성경이 그 이유를 딱 집어서 말하지는 않는다.
이어지는 구절은 이에 대한 약간의 힌트를 제공한다.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출 4:5)

하나님께서는 지팡이를 뱀으로 만드신 뒤, 꼬리를 잡아 다시 지팡이로 만드셨다.
그 다음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 나타난 줄 믿게 하려 한다고 말씀하셨다.
문맥을 고려하면, 이 기적은 '창세기', 그중에서도 족장들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창세기와 '지팡이', '뱀'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족장들을 상징하는 지팡이

모세가 홧김에 애굽인을 죽였고, 이로 인해 광야에 숨어 살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광야에서 모세의 삶을 믿음의 행위로 간주한다(히 11:24-26).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는 공주 아들이라는 왕족의 신분을 포기했고, 광야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유목 생활을 했다.
유목 생활은 그 신분이 '정착민'이 아닌 '나그네'임을 잘 나타낸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백성들을 인도하실 그때를 광야에서 기다리는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

한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국고성 건축으로 농업과 벽돌 제조에 수십 년간 종사했다(cf. 출 1장).
그들은 조상의 직업인 목축업과 무관한 후손이 되어버린 상태이다.
이런 백성들 앞에 모세가 목자의 지팡이를 들고 나타난다.
이는 상당히 유의미하다.
모세는 족장들을 떠올리는 목자의 지팡이를 들고, 백성들이 애굽의 '정착민'이 아니라 (족장들이 기다렸던) 약속의 땅으로 떠나야 할 '나그네'임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뱀에 대한 권능을 나타내는 지팡이

모세의 지팡이가 '목자'만을 상징했다면, 창세기 족장들을 상기시키는 추억의 물건 정도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지팡이는 이를 넘어 ‘지팡이-뱀-지팡이’의 기적, 곧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냈다.
뱀은 창세기에서 에덴동산의 사탄을 연상시키는 동물이다.
하와를 속여서 아담과 함께 동산에 쫓겨나도록 만든 근원적 대적(악)이었다.
따라서 지팡이에서 변한 뱀이 동산의 그 뱀을 상징한다면, ‘지팡이-뱀-지팡이’의 변화는 대적(사탄)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막강한 권능을 나타낸다.

애굽인들은 뱀을 지혜와 치유의 원천으로 숭배했기 때문에, 뱀은 애굽 권력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지팡이를 뱀으로 바꾸고 다시 뱀으로 바꿈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신들과 사탄에 대한 그 권위를 보여주셨다.
이 상징은 모세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 Ryken and Hughes, Exodus: Saved for God’s Glory, (Wheaton, IL: Crossway Books, 2005), 109.

이것(뱀의 꼬리를 잡는 것)은 모세의 지팡이가 여호와의 권능을 상징했다는 개념의 시작이며, 이는 모세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지팡이를 하나님의 왕좌의 상징으로 이를 지탱하는 것으로 끝나는 개념이다.
- Stuart, Exodus,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2006), 129

'지팡이'와 '재앙'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바로 왕을 찾아갔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라고 말했지만 바로 왕은 듣지 않았다.
심지어 지팡이가 뱀이 되고, 모세의 뱀이 마술사의 뱀들까지 모조리 삼켰어도 고집은 여전했다(출 7:13).
그래서 이후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능, 곧 재앙을 일으키는 도구로 계속해서 사용된다.
사르나(Nahum M. Sarna)는 이 재앙들에 세 쌍씩 세 주기가 있음을 제안한다.
이를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재앙 “백성을 보내라!” 시간(Time) 모세(아론)의 행동
첫째 주기 O “아침에” 지팡이-물
(출 7:19; 8:5)
개구리 O x
X x 지팡이-땅
(8:17)
둘째 주기 파리 O “아침에” 여호와-구별
(8:23; 9:4)
전염병 O x
악성 종기 X x 손-하늘
(9;10)
셋째 주기 우박 O “아침에” 지팡이(손)-하늘
(9:23; 10:13; 22)
메뚜기 O x
어둠 X x

레이하르트(Peter J. Leithart)는 세 주기(series)가 각각 '물-땅-하늘'의 구조를 띤다고 주장한다.
물론 성경에서 이 구분이 뚜렷한 건 아니다.
하지만 전반적인 흐름상 그의(혹은 아론의) 지팡이는 '물-땅-하늘' 순으로 각 영역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낸다.

'지팡이'와 '광야'

모세의 지팡이는 유월절 이후로 광야에서도 같은 용도로 계속 사용된다. 광야 생활에서의 용례는 다음과 같다.  

사건 광야에서 지팡이의 용례
홍해 사건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14:16,)
므리바 사건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그 반석을 치라(17:5-6,)
아멜렉과의 전투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17:9, 12, 하늘)

광야의 사건들과 애굽 재앙들을 지팡이 중심으로 추적해보면, 항상 ‘물-땅-하늘’에 사용된다.
이런 지팡이의 용례는 구약의 삼층 구조 세계관과도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출애굽기에서 삼층 구조의 세계관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계명에서 잘 나타난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4-5)

세계에 대한 삼층 구조로서의 이해는 '노아의 방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노아에게 방주를 삼층으로 짓도록 하셨으며, 이는 세계의 구조에 대한 반영이다.
따라서 모세의 지팡이가 애굽에서 “물-땅-하늘”에 휘둘려졌고, 각 영역(층)에 재앙이 내려졌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애굽이라는 '바로의 집', 곧 “바로의 세계' 전체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
광야에서 지팡이가 '물-땅-하늘'에 휘둘려졌음도 역시 같은 의미를 갖는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애굽 전체를 심판하셨고, 광야에서도 자기 백성을 위해 “물-땅-하늘”, 곧 세상 전체에서 권능을 행사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팡이가 물, 땅, 하늘에 휘둘려지며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남을 볼 때, 반드시 깨달아야 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실 뿐 아니라, 온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는 만유의 주권자이심을 말이다!

예배를 위한 지팡이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예배할) 것이니라” (출 7:16; 8:1; 8:20; 9:1; 9:13; 10:3)

하나님께서는 왜 모세의 지팡이로 이러한 (물-땅-하늘에 임하는) 우주적 재앙을 내리셨을까?
출애굽기에서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시내 산'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무엇을 목표로 삼는가?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에게 말씀하셨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예배할 것이니라.”
한글성경(개역개정)은 “섬기다”로 번역했지만, 이 단어는 “예배하다”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그분 자신을 예배할 수 있도록 보내라고 재앙을 내릴 때마다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사실 출애굽의 목적을 무조건 가나안 땅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일차적 목적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섬기는) 것이다.

지팡이 사용의 목적도 마찬가지이다.
지팡이를 통해 나타난 권능들은 단순히 애굽을 심판하고 광야에 물을 내거나 아말렉을 멸망시키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그 지팡이는 궁극적으로하나님의 백성을 여호와의 산, 곧 시내 산으로 인도하여,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예배자로 구별하여 부르셨고, 그 부르심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모세의 지팡이로 물리치셨다.
설령 그것이 “물-땅-하늘”, 곧 세계 전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예배자를 반드시 불러모으신다.


오늘도 하나님의 지팡이(마테. מטה)를 들고 계십니까?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찌니라”(출 4:17)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 20:11)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출 17:9)

<지팡이>를 히브리어로 <마테 - מטה>라고 합니다.
“내뻗다, 늘어나다”의 뜻으로 이스라엘 지파를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그 지팡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지팡이>에 담긴 의미가 <기도>를 뜻합니다.
“내뻗다”를 뜻하는 지팡이는 <내 >손으로 닿을 수 없는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서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중보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 지팡이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린 지팡이를 <엘로힘 אלהים 맛테 -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합니다.

<지팡이>를 헬라어로 <랍도스-ῥάβδος>라고 합니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홀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과 능력, 권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 지팡이를 손에 쥘 때 이길 수 있습니다. 그 지팡이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릴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 지팡이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중보 기도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흘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권능의 이름을 높여 올려 드릴 때, 하늘 보좌의 능력이 이 땅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의 모든 영화를 던지시고 이 땅에 하늘 보좌를 연결하는 지팡이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높이 들리셨습니다.
그 이름의 지팡이를 오늘도 부활의 능력으로 주셨습니다.
그 이름을 부르짖는 곳마다 <엘로힘 אלהים 맛테 -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셔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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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일(재의 수요일) 02-14-2024 pm 9:00
성경 / 출애굽기 1장

주제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출 1:17)
- 십브라와 부아처럼 살아보자(출 1:15)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Shipbrah. 아름다움)라 하는 자와 부아(Puah. 화려함. 입)라 하는 자에게 일러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출애굽기 기자는 출애굽기를 쓰면서 출애굽기 1:1에서 두 단어를 사용하므로 출애굽기의 성격을 말할려고 합니다.
그 첫 단어가 "이름"이라는 단어이며, 두번째 단어가 "애굽에 들어온(came to Egypt)"이라는 단어 입니다.
들어왔으니까 언젠가는 나가야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를 "탈출기(Exdus)"라고 하고, 또 다른 이름은 "이름의 책( the Book of Names)"라고도 말합니다.
그것은 히브리어 문장으로 “이것들이 이름들이다”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1:1.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Now these are the names of the children of Israel who came to Egypt; each man and his household came with Jacob:"

​이름의 책 출애굽기에서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말하기 위함 입니다.

그것은 창세기와 연결되는 이야기 입니다.
창세기가 인류의 탄생의 역사를 말한다고 하면,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나라의 탄생을 말하는 책입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이름이 나옵니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이름 외에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11절에 나오는 "바로" 왕이고, 그 다음이 15절에 나오는 "십브라"와 "부아" 입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를 영적으로 풀어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창세기의 환란을 피해서 애굽으로 들어왔지만, 그곳에는 바로라는 마귀가 도사리고 있다가 그들을 노예로 삼았다" 그런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그 마귀에게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삽브라"와 "부아"라는 사람이 있어, 이 사람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어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2:10에 가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탄생하게 됩니다.

​성경기자는 모세가 출생하는 장면에서 모세의 부모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구해준 애굽 공주 이름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십브라와 부아의 이름은 나옵니다.
그만큼 그들의 이름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이름의 책인 출애굽기에서 사람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에 신중합니다.

​"이름"이 중요합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역사이며 인격이며 얼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사람의 이름을 들으면 위선 세 가지를 떠올립니다.
그 사람의 얼굴, 그 사람의 연세, 그 사람의 직책입니다.

​첫째, 바로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던 사람들

​1:15-16 /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이 구절은 1절에 말하고자 하는 "이름(Name)”이 바로 여기에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기자는 왜 이들 이름을 맨 먼저 언급했을까요?
출애굽기라는 이름의 책에서 이 두 사람을 제일 먼저 언급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들이 존경받을만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탄생시킨 산파들 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들을 얼마나 존경했을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모세도 없었고 이스라엘도 없어졌을 것입니다.

​십브라는 "아름다움"이라는 의미이고, 부아는 "화려함"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 사람들은 히브리 산파들입니다.
생명의 탄생을 돕는 사람들 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소위 말하는 아무 힘이 없는 사람들(powerless poeple) 이었습니다.
힘이 없는 사람은 비굴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힘 있는 사람 앞에서 기가 꽉 죽어 할 말도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더 힘 있는 분 more powerful person"을 두려워 했습니다.
우리도 그렀습니다.
우리는 힘있는 자보다 더 힘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But the midwives feared God, and did not do as the king of Egypt commanded them, but saved the male children alive."

​이 구절을 보면, 십브라와 부아는 가치관이 분명하고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그들이 바로의 지엄한 명령을 거역하면 처형당할 수 있니다.
바로는 그 당시 사람들이 "살아있는 신"으로 떠받드는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바로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바로가 명령을 내린 후에 태어나는 히브리 남자 아이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은 죽은 목숨들이라는 점에서 “호모 사케르(Homo Sacer)”입니다.

'호모 사케르'라는 말은 "희생제물로 바칠 수는 없지만 죽여도 상관없는 생명"을 말합니다.
'그들이 태어나는 것은 그야말로 “사형수 입장”(Dead Man Walking)을 안고 태어나는 것 입니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

'호모 사케르(Homo sacer)' 라는 말이 있다.
* 사케르(sacer) : 신성한

고대 그리스에서 쓰던 말인데,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이 다시 사용하면서 유명해졌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를 이렇게 정의한다.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생명(vita uccidibile e insacrificabile)
- <호모 사케르>,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 새물결, 45쪽


희생물로 바칠 수 없다는 건 제사에 쓰일 수 없다는 것, 즉 신성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죽일 수는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살해한 자에 대한 사면'이 가능하다.
호모 사케르 살해에 대해 면책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신성한 권리를 받았거나 스스로 신성하다고 여기는 소수의 기득권 집단이었다.
이들은 일반 대중에게 호모 사케르에 대한 살해를 허락하거나 부추기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장애인이나 나환자들은 부정한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노예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인류 역사에서 오래된 호모 사케르였다.
그래서 주인은 자신이 소유한 노예의 팔다리를 자르고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다.

이는 현대가 되어서도 형태가 바뀌었을 뿐 소수자에 대한 혐오감이나 약자에 대한 무관심으로 표현된다.
앞서 말한 피렌체의 노부부는 물론이고 한국에도 많은 어르신들이 급속히 발달하는 기술 문명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을 그냥 문명에 대한 부적응자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또 다른 호모 사케르를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원하는 음식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현대 문명의 호모 사케르가 되어 버렸다.

기득권의 무기 - 호모 사케르화(化)

과거 무고한 여성들이 마녀로 몰려 대중들에게 던져졌다.
이는 종교 권력의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해 '마녀'라는 호모 사케르를 만들어 낸 것이다.
대중들이 마녀 사냥에 열을 올리는 만큼 종교 권력은 강화되었고 견제는 약화되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역사는 대중들의 자각과 연대에 의해 발전해 왔다.
그래서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고 대중이 연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또 다른 호모 사케르를 계속해서 만들어 냈다.

한국 사회에서는 보도연맹, 빨갱이로 낙인찍힌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국민이되 국민이 아니었다.
그리고 성소수자, 장애인을 비롯해 수많은 사회적 약자가 혐오의 대상이 되어 왔다.
대중이 호모 사케르 사냥에 열중할수록 어떤 이들은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최근 한국에서 본 대표적인 호모 사케르라고 한다면 전직 법무부 장관과 그 가족이 떠오른다. 
백번 양보해서 공직자 당사자는 그렇다고 쳐도 공직과 관련 없는 한 젊은 여성의 사생활을 낱낱이 드러내는 방식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잔인했다.
언론들은 늦은 밤에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고, 민감한 개인정보인 학생생활기록부까지 공개했다.
당시 온 국민이 그 여성의 내신 등급과 영어 성적을 알게 되었다.

공격하는 자들은 그것이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 공직자와 가족을 호모 사케르화(化)하여 대중 앞에 내던진 것이다.
호모 사케르, 즉 부정한 존재이기 때문에 짓밟고 죽여도 괜찮으니 마음껏 돌을 던지라고 대중들을 부추기는 것이다.
기득권이 그들의 권력에 대한 위협요인을 제거하는 오래된 방법이다.

그런데 얼마 전, 한 신문사 사장의 자녀 특혜 채용이 드러났다.
이는 앞서 말한 전직 장관과 유사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정말 거짓말처럼 조용하다.
분노에 차 공정과 정의를 외치며 대중들에게 조리돌림을 부추기던 이들은 모두 침묵한다.
음식 배달원을 둘러싸고 메뉴가 뭐였냐고 폭포수같이 질문을 던지던 이들이 지금은 어떤 것도 묻지 않는다.
누구를 호모 사케르로 만들 건지 정하고, 또 만들 수 있는 이들이 이 사회의 진짜 권력자들이다.

르네상스, 인간, 그리고 우리...

호모 사케르는 정치 사회뿐 아니라 기술과 자본의 발전 어느 곳에나 스며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류의 삶을 발전시킨다고 하지만 정작 노인들이 햄버거 조차 마음대로 주문하지 못하게 하는 기술의 발전 방향이 정말 옳은지 생각해야 한다.
컨베이어 벨트와 스크린 도어에 끼여 스러져간 젊은 죽음에 대해 과연 자본과 사회구조는 책임이 없는지 물어봐야 한다.
사회 진출의 기회조차 제대로 잡기 어려운 젊은이들이 정말 아픈 만큼 어른이 되는 게 맞는지 살펴봐야 한다.
하늘과 맞닿은 곳에 올라가 삼복더위를 버티며 농성하는 사람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 

우리의 무관심이 계속된다면 호모 사케르가 되어 대중 앞에 내던져지는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와 내 가족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혐오보다 연대가 필요하다.

피렌체와 르네상스를 얘기하다가 너무 멀리 와버린 느낌이 든다.
피렌체는 인간 본성의 재발견이라는 르네상스의 발현지이다.
그리고 코로나 시국이 지나가면 수많은 이들이 그 아름다움을 다시 찾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르네상스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건축물과 예술품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라고 믿는다.
그래서 햄버거 주문을 위해 헤매던 피렌체의 노부부가 계속 기억에 남을 것 같다.


*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 ​

둘째, 자기 사명을 목숨 걸고 실천한 사람

​1:18-19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18.  So the king of Egypt called for the midwives and said to them, “Why have you done this thing, and saved the male children alive?”
19. And the midwives said to Pharaoh, “Because the Hebrew women are not like the Egyptian women; for they are lively and give birth before the midwives come to them.”

​그러나 그들은 바로가 내리는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알았습니다.
그들은 지혜로운 변명으로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고 위기를 넘기고 목숨을 건진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은 정말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아이들을 살렸던 것입니다.

​바로는 막강한 권력을 갖고 사람들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인물압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깊이 묵상해보면 바로가 진정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이런 명령을 내린 것 입니다.
진정 강한 것은 산파들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졌고(20절), 산파들은 흥왕했습니다(21절).

​바로가 두려워하는 까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하지 않았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번성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좋은 일이지만, 바로에게는 위협적인 일이었습니다.
이삭이 농사를 지어서 백배 결실을 얻었을 때, 이것은 이삭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위협적이었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을 내칩니다.
그런데 바로는 동일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내보내지 않기 위해서 애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번성하는 것, 그리고 그들을 애굽에서 내보내는 것, 둘 다 바로에게는 감당할 수 없이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살리는 일과 죽이는 일 중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본연의 임무인 살리는 일을 선택합니다.
그들이 아이들을 죽인다면, 그들은 더 이상 산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은 그들에게 큰 축복으로 주어집니다.

​1:20-21.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20. Therefore God dealt well with the midwives, and the people multiplied and grew very mighty.
21. And so it was, because the midwives feared God, that He provided households for them.

셋째, 십브라와 부아를 통해서 모세가 태어났다

​바른 생각과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이 살고,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태어나게 됩니다.
놀라운 일 입니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사람을 요구하고 찾습니다.
오늘 우리는 십브라와 부아와 같은 사람으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바른 생각과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이 생명을 살립니다.
역사는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른 생각, 바른 믿음을 가지고 죽음을 각오하고 그것을 지킨다면, 우리가 나라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립니다. 우리를 통해 내일의 지도자 모세가 태어납니다.

​1:22.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So Pharaoh commanded all his people, saying, “Every son who is born you shall cast into the river, and every daughter you shall save alive.”

​"나일 강"과 관련이 있는 모세가 탄생하게 됩니다.
출 2:10에 가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탄생하게 됩니다.
"모세" 라는 이름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 이름의 뜻은 "물에서 건지다"라는 말입니다.

​십브라와 부아, 진정 위대한 여인들입니다.
이름 그대로 아름답고 화려합니다.
그들 때문에 이스라엘이 살고, 이스라엘 지도자 모세가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 백성들은 번성하고 강하게 되었고, 그 후손들은 흥왕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기도

1. 이다니엘 뇌 수술을 받고 싶다
2. 역사의 흐름을 진단하라(자유민주주의 : 조선인민민주주의)


모세의 가족


모세의 가족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와 모세의 생애를 조명해본다.

모세의 부모, 아므람과 요게벳

<모세의 부모>, 러시아의 화가 이삭 아스크나지(Isaak Asknaziy) 作.

모세의 부모는 야곱의 아들 레위의 후손들로, 아버지는 아므람(Amram), 어머니는 요게벳(Jochebed)이다(출애굽기 2:1). 아므람과 요게벳은 아론과 미리암, 모세를 낳았다. 성경은 아므람이 아버지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했다고 전하면서 아므람은 고핫(그핫)의 아들이며 요게벳은 레위의 딸이라고 설명한다(출애굽기 6:18~20, 민수기 26:58~59).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이 실제 고핫의 아들이고,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레위의 딸이라면 연대적인 측면에서 오류가 발생한다.

고핫은 야곱의 손자이자 레위의 아들이고 레위는 야곱의 아들로, 고핫과 레위는 야곱과 함께 요셉이 이집트 총리로 재임하던 시절에 이집트로 이주했고,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때는 그로부터 약 400년이 흐른 후다(창세기 46:8~11, 출애굽기 12:40~41). 400년 동안 야곱–레위–고핫–아므람–모세 5대만 이어졌을 리 만무하다.

영어성경에서 Son으로, 한글성경에서 아들로 번역되기도 한 히브리어 בֵּן(ben)은 아들뿐 아니라 자손, 후손, 후예, 족속 등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개역한글 성경의 민수기 26장 58절 “고핫은 아므람을 낳았으며”라는 부분을 NIV 영어성경에는 “Kohath was the forefather of Amram”, 고핫은 아므람의 조상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다시 말해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은 고핫의 아들이 아닌 후손인 것이다. 59절에는 요게벳에 대해 소개하며 ‘a descendant of Levi’, 즉 레위의 후손으로 기술하고 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도 실제 레위의 딸이 아니라 후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세의 양모, 이집트 공주

<모세의 발견>, 영국의 화가 로렌스 알마타데마(Sir Lawrence Alma-Tadema) 作.

모세는 어릴 적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 파라오의 딸이자 공주에게 입양되었다. 모세가 태어날 당시 이집트 파라오는 점점 강성해지는 이스라엘 민족(히브리인)을 두려워하여 이집트에서 태어난 모든 히브리인의 사내아이는 다 죽이라고 명했다. 그로 인해 모세는 죽을 운명이었으나 어머니 요게벳이 아이를 숨겨 석 달 동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아이를 숨길 수 없게 되자 요게벳은 갈대 상자를 구해 역청과 송진을 칠한 후 아이를 담아 강가의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다. 때마침 목욕하러 나온 파라오의 딸이 아이를 발견하였고, 요게벳의 딸 미리암의 기지로 요게벳이 유모로서 친아들 모세를 키우게 된다.

모세가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 이집트 공주에게 인도되었고, 공주는 그를 양아들로 삼고 ‘모세’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집트 통치자 파라오의 딸이자 공주가 모세의 양어머니가 된 것인데, 그녀에 대해서는 성경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집트 공주를 통해 모세는 이집트 왕실에서 왕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모세의 형, 아론

<파라오 앞에 나아간 모세와 아론>, 프랑스의 화가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 作.

모세의 형 아론(Aaron)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불렀을 때 혀가 둔했던 모세의 대변인이 되어주었다(출애굽기 4:10~16). 아론은 모세가 파라오를 찾아갔을 때도 동행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와 광야 생활하는 40년간 모세를 도와 그들을 지도했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을 치를 때는 훌과 함께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세의 팔을 지지하여 붙들어주어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했다.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산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은 아론에게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아론은 백성들로부터 금을 모아 금송아지를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하나님께서 직접 새겨주신 십계명 돌판을 들고 내려오던 모세는 금송아지 주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백성들을 보고 대노하여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버렸다.

성막이 완성된 후 아론은 레위 지파로서 최초의 대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제사를 올리는 직분을 수행했다. 가데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그들을 비방했을 때 아론은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아 가나안에 들어갈 특권을 잃었다. 이후 호르산에서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에게 대제사장직을 물려준 후 죽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

미리암(Miriam)은 모세의 누이로서, 어머니 요게벳이 모세를 살리기 위해 갈대 상자에 담아 강가에 놓아두었을 때 함께했다. 미리암은 아기 모세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다가 파라오의 딸이 갈대 상자 속 아기를 발견하자 그녀에게 다가가 유모로 자신의 어머니 요게벳을 소개해주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구약성경 미가서는 미리암에 대해 모세, 아론과 함께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한 지도자로 설명하고 있다(미가 6:4). 미리암은 이집트를 나와 홍해를 건넌 후 이스라엘 여인들을 지휘하며 뛰어난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선지자 미리암의 노래>, 이탈리아의 화가 루카 조르다노(Luca Giordano) 作.

광야 생활 동안 모세가 구스 출신의 이방인을 아내로 얻은 일로 미리암은 아론과 함께 모세를 비난했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지자를 비난한 죄로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다.
미리암의 이러한 행위는 모세의 권위에 대항하는 질투심에서 기인한 것이었다(민수기 12:1).
모세가 하나님께 미리암을 고쳐달라고 간곡하게 원하여 칠일 동안 진 밖으로 격리되었다. 미리암은 광야 생활이 끝나는 정월에 가데스에서 죽었다(민수기 20:1).

모세의 장인, 이드로(르우엘)

이드로(Jethro)는 모세의 장인이다.
르우엘(Reuel)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모세가 이집트 왕자 시절에 이집트 감독관을 죽인 일로 파라오의 눈을 피해 미디안으로 도피했을 때, 그곳의 제사장이었던 이드로의 딸들을 우연히 도와주었다.
그 일을 계기로 이드로는 모세와 자신의 딸 십보라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주선했다.

모세가 이드로를 도와 양들을 돌보던 중 시내산(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장인 이드로에게 이집트로 돌아가 형제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오겠다는 요청을 했을 때, 이드로는 흔쾌히 승낙했다.

이후 이드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출애굽 사건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부근에 머물고 있을 때, 딸 십보라와 손자들을 데리고 그곳을 방문했다.

<모세에게 조언하는 이드로>, 네덜란드의 화가 얀 헤르츠 판 브론코르스트(Jan Gerritsz van Bronckhorst) 作.

이드로는 당시 모세가 혼자서 하루 종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재판을 맡아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모세에게 혼자 감당하기에는 힘들고 벅찬 일이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위주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워 대신 송사를 재판하게 하라고 조언했다. 모세는 이드로의 말을 받아들여 유능한 사람을 뽑아 어려운 사건은 직접 재판하고 작은 사건들은 그들이 재판하게 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

모세의 아내 십보라(Zipporah)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이다.
십보라는 아버지 이드로의 주선으로 모세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이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집트로 돌아가라고 명하셨을 때, 십보라는 모세를 따라 두 아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떠났다.

성경은 당시 여행길에서 발생했던 불가사의한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이집트로 향하던 중 숙소에 머물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
그러자 십보라가 부싯돌 칼을 가지고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입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제야 비로소 모세를 살려주셨다.

십보라가 모세를 가리켜 ‘피(Blood) 남편’이라고 한 이유는 할례 때문이었다.
할례는 아브라함 때부터 이어져온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언약의 표징으로, 구약시대 이스라엘 남자들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반드시 행해야 할 중요한 율례였다(창세기 17:10~14).

<모세의 아들의 할례>, 네덜란드의 화가 코르넬리스 호스테인(Cornelis Holsteyn) 作.

모세의 아들들, 게르솜과 엘리에셀

모세는 아내 십보라 사이에서 두 명의 아들 게르솜(Gershom)과 엘리에셀(Eliezer)을 낳았다.
게르솜은 모세의 장자로 ‘나그네 됨’, ‘객’이라는 뜻이다.
모세가 ”낯선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며 지은 것이고, 엘레에셀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도우셔서 파라오의 칼에서 나를 구원하였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다.

모세의 가족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태어나기도 전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 사단은 파라오를 통해 모세를 죽이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어머니 요게벳과 누이 미리암을 통해 모세를 파라오의 궁전으로 피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택하셨으나 모세가 언변의 부족함을 핑계하자 그 형 아론을 대변인으로 세우시고 함께 이스라엘을 통솔하게 하셨다.
그리고 누이 미리암을 통해 선지자를 비난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한편, 모세가 백성들의 사사로운 재판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보고 장인 이드로를 통해 모세의 일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를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언약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레위 지파 출신인 모세의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셀은 훗날 다윗 시대 하나님의 전에서 봉사하는 레위 자손들의 선조가 되었다(역대상 23:14~24).
모세의 큰아들 게르솜의 자손은 다윗성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일 때 언약궤를 메는 일을 담당했다(역대상 15:1~15).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과 어머니 요게벳에 대하여(출애굽기 6:14-20)

14 그들의 조상을 따라 집의 어른은 이러하니라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은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니 이들은 르우벤의 족장이요
15 시므온의 아들들은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소할과 가나안 여인의 아들 사울이니 이들은 시므온의 가족이요
16 레위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들의 족보대로 이러하니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요 레위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17 게르손의 아들들은 그들의 가족대로 립니와 시므이요
18 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고핫의 나이는 백삼십삼 세였으며
19 므라리의 아들들은 마흘리와 무시니 이들은 그들의 족보대로 레위의 족장이요
20 아므람은 그들의 아버지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 아므람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쓰실 때 중요한 연대표를 알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셨다.
바로 위 내용 역시 엄청난 배려이다.

출애굽기 12:40- 41
40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41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도라


이 사건은 야곱과 함께 70명의 가족이 애굽으로 건너와서 모세와 함께 출애굽하는 때까지의 기간을 정하여 준 것이다. 이러한 분명한 시간적인 기둥 때문에 우리는 성경의 연대를 계속 확인해 나갈 수 있다.
위 출애굽기 6장 본문은 레위 지파가 어떻게 모세와 아론으로 이어지는지 보여주는 내용이다. 이를 소개하기 위해 12지파 중에 첫째 둘째 셋째를 소개한 후에 셋째에서 아론과 모세를 끄집어낸다.
문장 구조는 르우벤의 가족, 시므온의 가족, 그리고 레위의 가족이 소개된다.
레위의 가족으로는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가 있다. 레위는 137세에 죽는다.
게르손의 아들들은 립니와 시므이요
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다. 고핫은 130세에 죽는다.
그리고 므라리의 아들들로 마흘리와 무시가 있고, 그들은 족보대로 레위의 가족이다.
16 레위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들의 족보대로 이러하니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요 레위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17 게르손의 아들들은 그들의 가족대로 립니와 시므이요
18 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고핫의 나이는 백삼십삼 세였으며
19 므라리의 아들들은 마흘리와 무시니 이들은 그들의 족보대로 레위의 족장이요
이렇게 세 족장의 가족에 대한 소개가 끝난 후에 모세와 아론으로 건너 뛴다.
그 사이에는 얼마나 긴 기간이 있는지 우리가 계산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모세의 아버지 이름은 아므람이요, 어머니는 요게벳이다.
그러나 요게벳은 아므람의 고모이다. 따라서 근친 상간이라 할 수 있다.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은 137세까지 살았다.
이때 아므람은 고핫의 아들 아므람과 다른 아므람이다. 동명이인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고핫의 아들 아므람은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과 이어진다. 이 동명이인의 아므람 사이에는 구속사에 기록할 만한 특이한 인물이 없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20 아므람은 그들의 아버지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 아므람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문제는 민수기 26장 59절인데,
“아므람의 처의 이름은 요게벳이니 레위의 딸이요 애굽에서 레위에게서 난 자라 그가 아므람에게서 아론과 모세와 그의 누이 미리암을 낳았고”
이 내용은 레위의 친딸이 요게벳이라는 뜻이 아니라 레위의 후손으로서의 요게벳이고, 애굽에서 태어난 여인으로서 레위 지파에 속한 자임을 의미한다.
New Living Translation 은 이러한 의미로 제대로 번역하였다.
NLT Numbers 26:59 and Amram's wife was named Jochebed. She also was a descendant of Levi, born among the Levites in the land of Egypt. Amram and Jochebed became the parents of Aaron, Moses, and their sister, Miriam.
그러므로 가장 안전한 해석은 동명 이인의 두 아므람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는 출애굽기 1장 1절에서 모세의 출생에 대한 묘사이다.
[
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더라,
](출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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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일 / 02-15-2024
출애굽기 2장



​출애굽기 2:24-25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그 고통 소리(5009)
네아크(neʼâqâh)  נְאָקָה 스트롱번호 5009

1. 부르짖음.  2. 복수 연계형. 
발음 [ neʼâqâh )
어원 / 500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회 사용

권념(眷念)(3045)  야다(yâdaʽיָדַע
1. 보다.  2. 지각하다. 3. 삿13:21
발음 [ yâdaʽ ]
구약 성경 / 940회 사용

부르짖다(2199) 자아크(zâʽaq)  זָעַק

1. 소리 지르다.  2. 니팔형 : 소집하다. 3. 히필형
발음 [ zâʽaq ]
구약 성경 / 71회 사용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2:23-25, 3:7-10

계 7:13에 ‘큰 환난에서 나오는 흰 옷 입은 무리들’이 있는데 바로 여러분들이 큰 환난에서 나오는 흰 옷 입은 무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난과 환난의 길을 걷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로마니아 교회로 하여금 고난과 환난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고난과 환난은 버림과 저주의 표시가 아니라 사랑과 은혜의 표시이며 훈련의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쓸모없는 진흙 덩이를 가지고 쓸모 있는 질그릇을 만드시는데 하나님께서 질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긴 세월을 보내셨습니다.

한국교회가 범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인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도 따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의 고통 소리도 들으셨고 야곱의 아내 레아의 괴로움도 권념하셨고 엘가나의 아내 한나의 고통 소리도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편은 이렇기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시 118:5).
하나님은 우리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권념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시고 그 소리를 들으시고 내려와서 그들을 건져내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아침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도록 섭리하셨다.

고통은 어떤 때는 우리의 죄 값으로 주어지고 어떤 때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는 방편으로 주어집니다. 고통이 죄 값으로 주어지는 때에도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는 방편이 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오래 전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13,14).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창22: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가서 바다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되었고 그리고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가 일어나서 크게 번성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학대하고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출1:8-11). 결국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의 학대에 못 이겨 하나님을 향해서 고통 소리를 내며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출2:23).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한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까운 원인으로는 바로의 악함 때문에 그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궁극적인 원인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섭리 때문에 고통을 당했습니다. 현실적인 원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정착하는 동안 애굽의 문화와 문명을 좋아하고 그들의 우상을 따른 죄 값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고통을 주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죄 값일 수도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이루는 방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고통을 당하지 않은 개인이나 민족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이룬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수르와 애굽에 노예로 잡혀가서 70여년 동안 고통을 당하게 하셨는데 바로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게 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고통은 저주로 끝 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축복으로 바뀌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들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119:71).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1:12). 강변의 새벽 성도들도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지난 일년 동안 저희 가족들을 슬픔과 아픔 중에 위로하시고 힘 주시면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금요일 새벽에 드린 감사입니다. “고통의 순간들에 함께 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넘치는 생명력으로 끝없는 사랑으로 사랑의 나무가 자라게 하여주신 하나님 감사 드립니다.” 토요일 새벽에 드린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난과 고통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인류 구원의 사역을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통 중에 부르짖게 하셨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출 2:23).
부르짖으며 고통 소리를 내는 것은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부르짖을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은혜와 사랑입니다.
어린 아기가 울지 못하면 큰 일입니다.
병든 자가 아픔을 느끼지도 못하고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면 큰 일입니다.
부르짖음은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지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해서 부르짖으라고 분부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우리들을 향해서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고통 중에서 부르짖는 부르짖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사모함이 있고 자기를 향한 진정한 겸손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통 중에서 부르짖으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모하면서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리에서 부르짖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이성봉 목사님이 부흥 집회 때마다 읽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 116:1,2).

박윤선 목사님이 자주 읽으시던 말씀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김치선 목사님이 항상 읽으시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해서 고통 중에서 고통 소리를 내면서 부르짖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소리도 들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출 6:5).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찌라”(출 22:23).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출 22:27).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시 81:7).
하나님은 하나님의 분부를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가던 요나의 부르짖음도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 2:1,2).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통곡하며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우리들을 향하여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우리들의 부르짖는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 보이시는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반드시 하여야 할 최소한의 책임과 의무는 고통 소리를 내면서 부르짖는 일입니다.
부르짖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부르짖을 수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부르짖을 수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 소리를 듣고 내려와서 저들을 구원하셨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려 하노라”(출 3:7,8).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 소리를 들으셨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너게 하셨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 가장 뚜렷한 사건은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로 구름으로 바람으로 소리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까이 내려오셨습니다.
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직접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성육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14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라는 사실을 누누이 지적하셨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8, 39).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51).
하나님은 “하늘 영광 떠나서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이십니다.
우리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였고 우리들을 구원의 도구들로 삼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과 시내산 사건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성육의 사건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고 우리들을 구원의 도구들로 삼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역사는 반복되고 계속되면서 발전합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인류 역사의 모형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히브리 노예들의 고통의 역사도 반복되고 그들의 부르짖음도 반복되고 출애굽의 구원의 역사도 반복됩니다.
그러면서 인류의 역사는 천국의 완성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들이나 우리 민족이나 세계에 고난과 고통을 주십니다.
우리들이 모두 이 세상이 낙관적으로 발전하기를 소망하지만 이 세상은 그렇게 낙관적으로 발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가 이를수록 큰 환난이 더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마 25:21).
사도 바울은 마지막 때가 이를수록 고통하는 때가 임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딤후 3:1).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큰 환난과 고통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보다 순수하게 만들고 우리들을 보다 겸손하게 만들고 우리들로 하여금 보다 간절하게 주님을 사모하게 만들고 그리고 우리들을 구원의 도구들로 만드는 훈련의 방편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여야 할 것은 우리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고통 소리를 내면서 부르짖을 것 뿐입니다. 소경이 고통 중에서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부르짖은 것처럼 우리들도 부르짖으면 됩니다.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9:27).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고통 중에서 예수님께 부르짖은 것처럼 우리들도 부르짖으면 됩니다. “한 사람이 소리 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나이다”(눅9:38).

우리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에게로 내려와서 우리를 고통에서 건지시고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 보이시는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제가 고통 중에 있던 저의 아들 철원이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 보였던 것과 비슷하다고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바라보아야 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은 이스라엘 나라의 땅도 아니고 북미 대륙의 미국 땅도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바라보아야 할 땅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의 그림자인 벧엘 곧 하나님의 집입니다.

고통 중에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신음 중에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주님을 바라보시면서 고통 소리와 신음 소리를 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도 육체의 고통 중에서 주님을 향해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소유하고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천국을 소유하시고 천국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뜰과 주의 집에 거하는 즐거움과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고통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표현(anthropomorphism)이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람처럼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노하심, 하나님의 기뻐하심 등이 이런 유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사람처럼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어떤 몸을 생각해 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그들과의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권념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행위가 신인동형론적 표현입니다.

모세를 죽이려던 왕이 죽었습니다.
왕이 죽은 후에 애굽에 거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고통은 더욱 심해집니다.
그 왕이 죽으면 끝날 줄 알았는데 끝나기는커녕 고역이 더 심해진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첩첩산중입니다.
원래 악은 절대 쇠하지 않습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심해집니다.

바울은 말세에 대한 증언 가운데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라고 합니다(딤후 3:13).
이런 모든 정황의 변화에서 우리는 모세의 소명의 배경을 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끝까지 연단하십니다.
불로 쇠를 연단할 때 조금 뜨겁다고 끄집어내면 아무 것도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연단이 될 때까지 두고 보십니다.
못들은 척 하십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때가 찰 때까지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의 힘 아래서 고역을 당합니다.
때가 찰 때까지는 하나님이 그냥 두고 보시기만 합니다.

첫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 

'부르짖다'는 말은 히브리말의 자아크라는 말입니다.
막다른 상황에서 부딪쳐 외치는 절규에 가까운 외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르짖으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하나님은 부르짖을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왠지 아십니까?
연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역을 인하여 부르짖었다는 것은 이 전에는 부르짖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비로소 우상적 외도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돌아오는데 40년이 걸렸다.
왜 이전에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말이 없습니까?
조금 힘들 때는 자기 힘으로 극복하고 참아보려고 애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인전할 때에 겸손해지고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렘 33: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출 22:23)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에게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들어주심에 대해 간증합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우리 소리를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이다"(민 20:16).

사사기는 온통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습니다. 그들은 이방 왕에게 고통을 당합니다. 그들의 회개하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다시 용서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이런 하나님과 백성들의 숨바꼭질이 계속됩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항상 고통의 대상이었습니다.
블레셋이 그들을 괴롭힐 때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구원하십니다. 사무엘상 7:8에도 이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시편에는 "저희가 주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라는 말씀이 수없이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입니다. 또 하나님은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여호와의 귀에 들립니다(약 5:4).

   지금도 억울한 울음소리, 고통 당하는 신음을 하나님은 다 들으십니다. 우리의 고통 당하는 자의 소리, 억울한 울음소리, 눌린 자의 신음소리에 대하여 민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소리에 유난히 귀가 밝으십니다.

둘째,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들으시고'란 말은 솨마입니다. 이 말은 '주의 깊게 경청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신음의 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계십니다. 백성들의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 것입니다. 세상에는 상달되지 않는 소리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다가 마는 소리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소리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테레사 수녀의 '아름다운 선물'이란 책에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다른 이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침묵 안에서 그분은 우리를 들으십니다. 침묵 안에서 그분은 우리 영혼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침묵 안에서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특혜를 지닙니다"라고 합니다.

   경주(race)라는 말은 헬라어 아곤(agon)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에서 고통(agony)이라는 단어가 생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달리기는 가벼운 조깅이 아니라 녹초가 되도록 힘들며 때로는 심한 고통이 따르는 경주입니다.

   고난은 힘들어 보이지만 유익한 것입니다. 시편 119:71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합니다. 고난 당하는 것만큼 유익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젊을 때 고생은 사서라도 합니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한센병환자는 신체적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 병의 특수한 비극입니다. 사실상 한센병환자의 신체적 기형은 그들이 고통 느끼지 못하기 때문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내(patience)라는 말은 '고통 당하다'는 뜻인 'patior'라는 고어에서 나왔다. 인내를 배운다는 것은 어떤 고생에도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헨리 나우웬이 말했습니다.

   긍휼이란 헬라어의 스프랭크니조마이(splanchnizomai)에서 나온 말입니다. 의학에서 내장학(splanchnology)이란 이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의 고통을 창자로부터 그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계십니다.

   옛날 진나라의 환공이 삼협을 배타고 갔습니다. 그의 하인 한 사람이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데리고 배를 탔습니다. 이 원숭이 새끼의 어미는 이를 알고 뱃길을 따라 백리길을 울부짖으며 뒤쫓아 왔다고 합니다. 그 어미 원숭이는 끝내 뱃전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배를 갈라보았더니 창자가 갈기갈기 찢어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고통을 아버지 하나님은 단장의 아픔으로 보고 듣고 동참하고 계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백성을 권념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언약에 따라 은혜를 베푸시고, 그 언약을 충실히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십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8).

이삭에게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창 26:24).

야곱에게 언약을 세우십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 28:13).

언약은 베리트란 단어입니다.
'자르다' 또는 '먹는다'는 뜻입니다.
언약을 세울 때 희생동물을 잘라 두 줄로 두고 그 사이를 언약자가 지나가는데서 유래된 말입니다.
언약을 어기면 짐승처럼 자름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언약은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와 더불어 맺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언약은 파기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의 언약은 새 언약에서 완성됩니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만찬 때에 "너희를 위한 언약의 피"라고 하신 것입니다.

언약을 기억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지만 사람들은 잊어버립니다.
노아시대 홍수가 끝나고 하나님은 사람과 언약을 맺고 그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창 9:15).
하나님은 애굽에서 신음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출 6:5).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십니다(시 106:45).
그리고 사람들은 언약을 잊기 쉽기 때문에 잊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열왕기하 17:38에는 "또 내가 너희와 세운 언약을 잊지 말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잊고 사는 백성을 싫어하십니다.
언약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언약을 기억하시고 권념하셨습니다.
권념이란 야다라는 말로서 '알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이미 깊이 알고 계신 것입니다. 루터는 하나님이 그들을 용납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는 시대입니다(God for us).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는 때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시대입니다(God with us).
그리고 성령시대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시대입니다(God in us).
하나님은 백성들의 신음을 아시고 고통하는 백성들을 위하십니다. 

폴 브랜드 박사(Dr. Paul Brand)는 한센병에 대한 권위자로 상당히 이름난 사람입니다.
그는 루이지애나 주의 카빌(Carvill)에 있는 한센병환자 재활원의 원장으로, 다음과 같은 체험으로 놀란 일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출장 차 미국을 떠나 브랜드 박사는 영국에 갔습니다.
그는 영국의 몇 군데에서 일을 본 후에 여러 시간의 기차여행 끝에 런던에 도착했습니다.
그 날 밤 그는 호텔에서 잠자리에 들려고 신발을 벗고 양말 한 짝을 벗었는데, 발뒤꿈치에 아무런 감각이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런 일이 별것 아니겠으나, 인도에서 수많은 한센병환자를 수술한 경험이 있는 세계적인 권위의 한센병전문가에게는 순간적으로 심각한 의심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는 기계적으로 일어나서 핀을 찾았습니다.
자리에 앉은 브랜드 박사는 핀으로 발의 복숭아 뼈 밑부분을 찔렀습니다.
그런데 감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핀을 더 깊이 찔렀습니다.
이제 찔린 부분에서는 피가 솟아났지만 그래도 감각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한센병에 감염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 밤이 새도록 브랜드 박사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센병환자로 살아가야 할 자기의 두려운 인생을 머리에 그려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버림받은 자기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의료진으로부터 백안시되는 입장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렇게 고통의 밤이 지나고 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아침과 같은 희망이 이제 자기 인생에는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핀으로 어제 찔렀던 복숭아 뼈 밑 부분을 꼭 눌러서 쑤셨습니다.
순간 그는 기절할 듯이 아파서 고함을 쳤습니다.
그 아픔, 그 고통은 정말로 축복이었습니다.
그제서야 그가 깨달은 것은, 어제 장시간의 기차 여행으로 앉아 있는 동안에, 신경의 한 부분이 눌려서 발이 마비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후로 브랜드 박사는 실수로 손가락을 칼에 베었을 때도 그 고통에 감사를 했다고 합니다.
발을 잘못 디뎌서 발목이 아파 펄쩍펄쩍 뛰면서도 그 아픔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버섯을 잘못 먹고 온 몸을 뒤틀면서 토하는 심한 고통을 당할 때도, 그는 "하나님, 나의 고통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지금 어떤 고통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외면하시고 듣지 않으시는 듯 보입니까?
하나님은 듣고 계십니다.
내가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고통을 당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시고 권념하시는 이유가 됩니다.
우리의 크고 작은 고통들이 하나님이 들으시고 만나는 교량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통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고통은 감사의 조건입니다.
고통은 축복의 가면입니다.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יָדַע 스트롱번호 3045

1. 보다.  2. 지각하다. 3. 사사기 13:21
발음 [ yâdaʽ ]
구약 성경 / 940회 사용


고통이 올 때 대처하는 세 가지 반응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인생에 대하여 말하기를

“인생 자체가 고통이다.
많이 먹어라.
그래도 불행할 것이요.
먹지 말아라.
그래도 불행할 것이요.
결혼을 하여라.
그래도 불행할 것이요.
결혼을 하지 말아라.
그래도 불행할 것이다.
오래 산 사람보다 짧게 산 사람이 행복하고,
짧게 산 사람보다 낳아서 금방 죽은 사람이 행복하고,
금방 죽은 사람보다는 낳지 않은 사람이 행복하다.” 라고 하였습니다.

영국에 유명한 무덤이 있습니다.

그 무덤앞의 비석에는 “최대의 행복 자” 라는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어느 순례자가 어떤 사람이기에 최대의 행복자였는가 궁금하여 파보았더니 빈무덤이였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최대의 행복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살이에는 고통과 한숨이 그칠 날이 없는 것입니다.
고대광실 높고 넓은 집에 사는 사람에게도 근심과 고통이 있습니다.
사글세 방에서 가난과 싸우며 사는 사람에게도 고통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2층집 창문에서 젊은 여인이 밖을 내려다보며 리어카에 검은 연탄을 싣고 가는 젊은 부부를 보면서. “우리 부부도 저들처럼 건강하고 화목했으면 좋겠다.”라고 부러워 하고 리어카에 연탄을 싣고 배달하던 가난한 젊은 여인은 “나는 어제 저렇게 좋은 집에서 이렇게 고된 일을 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아가는가.” 하고 부러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시련과 고통의 역경을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역경이 닥치고 고통이 오면 대개는 세가지 반응을 나타나는 사람들로 나뉘게 된다고 합니다.

1. 냉소적인 태도
인간은 별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회의적인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 체념하는 태도
인간은 그저 그런 존재이니 먹고 마시고 되는대로 살아가자는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면 자포자기 하고 허무주의 속에 빠져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3.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태도
고통과 역경을 당해도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자세로 대처해 나가서 끝내는 승리하게 되는 위대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꼭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위대한 믿음을 소유했으며 승리자가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여인의 책상 위에 여러개의 누에고치가 놓여있었다.
그 누에고치 가운데 이미 누에나방이 나온 고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고치도 있었다.

그런데 이 누에고치들를 보고 있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누에나방이 나온 고치에는 신기할 정도로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 여인은 그 작은 고치의 구멍을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작은 구멍으로 저런 큰 누에나방이 나올 수 있을까?' 하고 화두가 걸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그 작은 구멍으로는 도저히 누에나방이 나올 수가 없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한 마리의 누에나방이 작은 구멍을 만들어 나오고 있었다.
구멍이 너무 작아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은데 누에나방은 긴 시간을 통해 갖은 몸부림을 치며 용케도 나오고 있었다.

여인은 누에나방이 작은 구멍을 통해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것을 지켜보다가 왠지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누에나방이 세상에 편하게 나오도록 도와주기 위해 가위로 누에고치의 구멍을 크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다른 누에나방은 날개가 찢기는 등 갖은 고통을 당하며 누에고치에서 겨우 빠져나오는데 반해, 가위로 크게 구멍을 내준 고치에서 나온 나방은 아무런 상처 없이 쉽게 나와 아름다운 날개를 펄럭였다.

이를 보고 여인은 자기가 한 일을 스스로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잠시 뒤에 벌어진 상황은 전혀 다른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작은 구멍을 통해 힘들게 비집고 겨우 세상으로 나온 나방은 한 마리 한 마리씩 날개를 치며 공중으로 훨훨 날아오르는데, 가위로 구멍을 뚫어준 고치에서 쉽게 나온 나방은 날개를 푸드득거리다가 날지 못하고 그만 비실비실 책상위를 돌더니 지쳐서 잠잠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 과정을 끝까지 지켜본 여인은 누에나방은 작은 구멍으로 나오며 애쓰는 동안 힘이 길러지고 물기가 알맞게 골라 마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날게 되지만, 그 과정을 겪지 않고 나온 나방은 순간적으로 편하게 나오긴 했지만 나를수가 없다는 이치를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이 내용은 카프만 부인이 쓴 「광야의 샘」이라는 책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
고통의 깊이는 진실의 깊이로 향하는 유일한 문이다.

어느 부자집의 가정부로 살아가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부자는 항상 웃으며 걱정이 없는 생활을 즐기고 있지만
독실한 가정부는 늘 경제적인 어려움, 자녀들의 건강, 사건과 사고가 그 주위에서 끊이지 않았지요.
하루는 주인 부자의 부인이 가정부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나는 예수를 믿지 않아도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모든 일이 순조롭고 좋은데
왜 너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렇게 근심 걱정 사건 사고가 떠나지 않느냐?
그러자 가정부가 이렇게 되묻습니다.
만일 사냥군이 사냥을 하는데 산토끼 두 마리를 쫓고 있는데 한 마리를 총에 맞아 죽었고
또 다른 한마리는 다리에 총을 맞고 도망을 치고 있다면 어느 토끼를 쫓아갈까요?
그러자 부인은 그야 당연히 다리를 다친 토끼를 쫓아가야지.....
바로 그겁니다.
죽은 영은 마귀가 시험하려고 달려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영은 마귀가 잡아 먹으려고 늘 쫓아다닙니다.

죽은 자는 건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는 계속 쫓아다닙니다.


첫째, 죄로 인한 고난 - 회개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 고난의 해결 방법은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입니다.

둘째, 마귀의 유혹에 의한 고난 - 말씀과 기도 

마귀는 때로는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들을 억압하고 고통과 두려움 가운데 두어서 믿음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고로 내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마귀가 주는 고통이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연단에 의한 고난 - 인내 

이 연단의 과정을 통하여 더 큰 믿음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더욱 큰 일군을 삼으려는 하나님의 어떤 계획이 있어서 연단의 과정으로 임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넷째, 어리석은 판단과 실수로 인한 고난 - 반성과 회개 

이 모든 고난의 해결 방법은 모두가 한 가지 즉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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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일 / 02-17-2024(토)
출애굽기 3장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

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셨을까?

성경에는 두 명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출애굽의 영웅 모세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가나안 정복 장군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4-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수 5:15)

하나님께서 모세를 쓰시고자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로 부르셨으면 무협지 소설처럼 그에게 능력을 주시고 절세의 비법을 전수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은 이러시지 않고 도리어 모세에게 있는 신발부터 벗으라고 합니다.

또 여호수아는 여리고성 전투를 앞두고 있는 중차대한 시점인데 그에게 군사전략이라든가 무기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에게도 신부터 벗으라고 하십니다. 

신(shoes, 靴) - 이중적 의미

역사적으로 중근동에서는 종(노예)들은 신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발의 유무는 신분의 표식이기도 하였습니다.
신발을 신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신발은 또한 신분의 등급을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신발에 대하여 일견, 서로 상충되어 보이는 듯한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제자들 보고 신을 가지지 말라고 하시고 마가복음에서는 신만 가지라고 하십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쫒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 이니라”(마 10:7-10)

반면, 마가복음 6장에는 신을 신으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막 6:7-9)

즉, 마태복음에서는 ‘신을 가지지 말라’ 라고 하고 있고, 마가복음에서는 ‘신만 신고’ 라고 하고 있습니다.
한글성경은 서로 다른 원어를 같은 단어로 번역해 놓은데 서 생기는 어려움입니다.

먼저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신’(靴)은 ‘휘포데아’ 로서 고급신발을 의미하고,
마가복음에서 말하는 ‘신’(靴)은 ‘오늘날의 ‘샌들’의 유래가 된 ‘산달리온’ 즉, 샌들을 의미 합니다.
그러므로 신발종류가 당시도 다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일명 돌아온 ‘탕자의 비유’(원래는 ‘은혜의 아버지’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지만)에서도 둘째 아들이 돌아오지 종처럼 신발 없이 살아온 아들에게 신발을 먼저 신겨주고 있습니다.
즉, 자기 아들은 종이 아니며 자유자라 이겁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 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1-24)

이와 같이 신발은 ‘신분’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을 벗는다’고 하는 것은 일정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정복이후 땅을 지파별로 분배했고, 땅은 사거나 팔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 없이 부모가 죽으면 기업으로 분배받은 땅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방법이 신명기 25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신 25:5-10)

그리고 이 신명기서 말씀에 대한 실증적인 예가 룻기에 나옵니다.
룻기에 나오는 보아스는 이방 여인 룻을 긍휼히 여겨서 그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룻과 결혼하는 사람은 나오미의 밭을 사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유산으로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했습니다.
결국 내 돈을 들여 밭을 사지만 내 것이 되지 않는 것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것을 안 보아스가 성읍장로들을 초청하고 이것을 논의에 붙이자 제 1순위로 기업무를 책임이 있는 사람이 처음에는 무르려 하다가 자신에게 물질적으로 손해만 되니까 결국 포기하고 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1순위로 기업무를 책임이 있는 사람이 신을 벗는 장면이 나옵니다.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룻 4:1-8)

따라서 이스라엘에서 신을 벗는 다는 것
첫째, 종의 표시
둘째, 책임을 전가
자유자가 아니요 종이라는 표시인 동시에 신을 벗는다는 것은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표시이었습니다.
신명기에는 ‘신 벗기운자의 집’이라고 불려지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고 ‘침 뱉음’을 당하기도 한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경우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압제에서 끌어내어 가나안 땅으로 끌고 가야 하는 사명을 받고 있고, 여호수아는 철옹의 성 여리고를 함락시켜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쉽지 않은 사역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이들 보고 신을 벗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무협소설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쳐 주듯, 두 사람에게 무한한 능력을 부어 주고, 탁월한 참모들을 붙여주고, 기가 막힌 작전을 주셔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발바닥을 보호해 주는 신부터 벗으라고 하니 이상한 것입니다.
여호수아 같은 경우에는 여리고성 함락작전을 구상하느라고 머리가 복잡하고 잠도 잘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할 때 한 천사가 칼을 들고 나타나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에서 자란 후에 사십이 되었을 때(행 7:23), 애굽사람 하나가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 한명을 치는 것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이 일이 발각되어 졸지에 살인자로 지명수배 되는 바람에 미디안 광야까지 국제적으로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처가살이와 양떼 치는 일을 장장 사십년을 하였습니다. 
한 인생에 있어서 사십년은 결코 적은 세월이 아닙니다.
모세로서는 참 이해가 안 가는 시련이고 참기 힘든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가 80살이 되었을 때, 이제는 늙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여길 나이에 하나님께서 호렙산 떨기나무 꺼지지 않는 불 가운데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끄집어내라" 하신 것입니다.

이때, 모세는 할 말이 참 많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40년 전에 제가 민족을 돌아보려고 할 때는 가만히 계시다가 이제 다 늙은 나이인데, 더구나 국제적 지명수배자요, 처가살이 하는, 배경도 군사도 없는 나에게 이 일을 맡기십니까?”
“일을 맡기시려면 힘 좋은 젊을 때 하시지 왜 지금 하십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3, 4장에는 모세가 하지 못하겠다고 변명하는 모습이 구절구절 나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보낸 모세의 40년은 한(恨)많은 세월이고, 자신에게 분통터지는 나날이었으며, 자신의 덧없는 인생을 바라보며 ‘내 인생이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를 수도 없이 자조(自嘲)하며 속절없이 보낸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어찌 이러실 수가 있단 말인가? 를 수도 없이 되뇐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을 다 소진할 때 까지 기다리고 계셨으며 ‘모세의 열심과 열정’을 다 태워 없애버리도록 40년을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긍휼과 애통은 꺼지지 않는 불이 되어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이 되어 계속 타오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은 네 능력과 네 실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나의 종이 되어 순종하기만 하면 되고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은 네 책임도 아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내가 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신을 벗으라” 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힘을 이용해서, 이 세상에서 무엇을 이루려고 합니다.
소위 ‘일’을 하려 합니다.
그것이 본분이고 충성인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말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일과 업적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적인 변화입니다.
"하나님을 100% 신뢰하고 그 분에게 항복하며 그분을 따를 수 있는" 본질적인 내면의 변화를 원하십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환경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본질이 변하는 것은 원하지 않고 위대한 일을 하려고 하다보니 많은 신자들이 끊임없이 신앙의 영웅을 동경합니다.
스스로 신앙의 영웅이 되고 싶어 합니다.
성경을 볼 때에도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영웅적인 인물을 봅니다.

​기독신앙의 핵심은 우리로 말미암아서는 하나님에게 속한 거룩한 영역들이 눈곱만큼도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것으로 존재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세의 힘으로는 이스라엘을 돌 볼(행 7:23)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는데 40년이 걸렸던 것입니다.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이리하여 신을 벗은 모세가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꺼내는 귀한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모세의 경건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이었고 은혜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소명을 받을 때 여러차례 못하겠다고 발을 빼려 했고(출 3:11, 출 4:1, 출 4:10, 출 4:13), 애굽 땅으로 갈 때도 장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려 간다고 하지 못하고 "애굽에 있는 형제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가겠다"(출 4:18) 고 둘러댈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적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기 위하여 애굽에 열가지 재앙을 퍼 붓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게 됩니다.

그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다다랐을 때에, 앞에는 홍해이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옵니다.
그러자 열가지 재앙을 목격하고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열심을 이해하지 못한(믿음이 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모세에게 원망하며 대듭니다.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 14:10-12)

그러자 하나님을 알고 경험한 모세는 이렇게 담대히 말을 합니다.
자기가 믿는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실리가 없다 이겁니다.
하나님을 100% 신뢰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하나님을 아직 잘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 모세는 그 신앙의 모습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까? 환경은 동일한데 반응은 다릅니다. 이것이 믿음의 차이입니다.

오늘날도 한 가족 중에서, 또는 한 교회 구성원 중에서 똑 같은 문제와 고난 앞에서 반응이 서로 다른 것은 이러한 믿음의 차이에서 비롯 됩니다. 한 부류는 두려워하고 원망하고 한 부류는 하나님을 신뢰 합니다. 귀하는 어느 쪽입니까?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출 24:13, 출 33:11, 민 11:28)이 되어 모세의 사역을 옆에서 쭉 - 지켜 본 인물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하나님의 종 모세가 죽고 난 뒤 가나안 정복이라는 바톤을 이어받았을 때 얼마나 두렵고 떨렸겠습니까?
이때의 여호수아의 심경을 여호수아 1장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몇 차례 담대하라고 하신 말씀을 통하여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을 목도하면서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가까이 오기는 했지만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방법을 구상하느라 머리가 복잡했을 것입니다.
이 때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 들고 여호수아 앞에 나타나서 신을 벗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온 천사의 말의 뜻은 “여리고 성을 함락 시키는 일은 네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는 네가 그 성을 함락시키겠다는 책임을 내려놓아라!”,
“이 싸움은 네 힘으로 되는 싸움도, 네가 노력해서 되는 싸움이 아니라 내 싸움이다” 하는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즉, 여기서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오신 분은 단순히 여호수아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오신 정도가 아니라 직접 군대 사령관이 되어서 친히 싸우겠다는 의미입니다.
나중에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여호수아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이라고는 입 다물고 성을 돈 것 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아주 위험한 생각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래도 얼마만큼은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항상 신앙의 실패는 여기서 출발합니다.

이러한 결과, 어떤 생각들을 하는가 하면, 우리 교회에 좀 더 사회적으로 이름이 있고 돈도 많고, 사회 경제적으로 능력 있는 사람이 오면 교회가 더 좋고, 더 유명해지고,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치고 시끄럽지 않고 다툼이 없는 교회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모이면 시끄럽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인생의 많은 경우에 홍해 같은 문제 앞에서, 혹은 여리고성과 같은 캄캄한 일 앞에서 넋을 잃고 있기도 하고 코가 석자나 빠져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하나님은 내 인생을 나보고 책임지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 인생 하나도 책임질 수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다시는 거짓말 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돌아서면 금방 거짓말하는 존재들이고, 오늘 무엇을 결심했다가 내일 하루도 지키지 못하는 인생들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의 해 주심을 믿는 것, 이것이 좋은 믿음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나를 신뢰하는 것은 좋은 믿음이 아닙니다. 나의 열심과 열정은 믿음이 아닙니다. 교회 열심히 다닌다고 믿음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헌금과 봉사를 많이 한다고 믿음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자기를 불태우는 거짓 믿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창수(漲水)가 나면 무너짐이 심할 것입니다.

사람에게 감사가 없는 것은 주어진 환경이 자기 수준에 못 미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체념과 갈등과 내려놓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형편 없는 나락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리하여 자기가 누구인지를 발견한 사람들은, 지위와 학벌과 재물로 인해서 대단한 존재로 여겼던 자신이 깊은 수렁으로 인하여 형편없는 존재임을 안 사람들은 모든 것이 감사하게 됩니다. 건강한 사람보다 중병에 걸린 사람에게 감사가 더 많은 이유입니다.

신발을 벗으라고 하신 것은 종으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은 하나님의 모든 것, 하나님의 충만한 것으로 채우고, 내 것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것입니다.
자식과 아버지의 관계는 전적인 사랑과 믿음의 관계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하기에 모든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분(롬8:32)이시며, 자식은 그 아버지를 신뢰 하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것이 본질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를 신뢰하는 어린아이는 적어도 끼니때가 되면 육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굶기지 않을 것을 압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와 같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홍해 같은 문제 앞에서, 여리고 성과 같은 큰 일 앞에서 모세와 같고 여호수아와 같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우리의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면, 우리 앞에 수많은 어려움이 닥쳐도 놀랄 일이 없으며(롬5:8), 잘 되는 일 앞에서 자랑하거나 교만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신발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거운 짐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안 사람은 벗을 것이고 아직 잘 모르는 사람은 못 벗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스스로를 소진하는 세월, 용쓰는 세월을 - 40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세월을 -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



나이에 따른 호칭
- 해제,지학,약관,이립,불혹,지천명,이순,고희,팔순,졸수,백수

♠ 해제(孩提) : (2∼3세) 어린 아이(兒提)
♠ 지학(志學) (15세) : 15세가 되어야 학문에 뜻을 둔다는 뜻
♠ 약관(弱冠) (20세) : 남자는 스무살에 관례(冠禮)를 치루어 성인이 된다는 뜻
♠ 이립(而立) (30세) : 서른살쯤에 가정과 사회에 모든 기반을 닦는다는 뜻
♠ 불혹(不惑) (40세) : 공자가40세가 되어서야 세상일에 미혹함이 없었다고 한데서 나온 말
♠ 지천명(知天命) (50세) : 쉰살에 드디어 천명을 알게 된다는 뜻
♠ 이순, 육순(耳順, 六旬) 60세) : 이순은 논어에서 나온 말로 나이 예순에는 생각하는 모든 것이 원만하여 무슨 일이든 들으면 곧 이해가 된다는 뜻이다. 60세 때의 생신인 육순(六旬)이란 열(旬)이 여섯(六)이란 말이고, 육십갑자(干支六甲)를 모두 누리는 마지막 나이
♠ 환갑, 회갑(還甲, 回甲) (61세) : 61세 때의 생신으로 60갑자를 다 지내고 다시 낳은 해의 간지가 돌아왔다는 의미
♠ 진갑(陳·進甲) 62세) : 62세 때의 생신으로 다시 60갑자가 펼쳐져 진행한다는 의미
♠ 미수(美壽) : (66세) : 66세 때의 생신이다. 현대 직장의 거개가 만 65세를 정년으로 하기 때문에 66세는 모든 사회활동이 성취되어 은퇴하는 나이이면서도 아직은 여력이 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나이이므로 `美壽'라 하고, `美'자는 六十六을 뒤집어 쓰고 바로 쓴 자이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
♠ 고희·칠순·종심(古稀·七旬·從心)(70세) : 70세 때의 생신이다. 두보(杜甫)의 곡강(曲江) 시에?「술 빚은 보통 가는 곳마다 있으니 결국 인생은 기껏 살아 본들 70세는 옛날로부터 드물다.(酒債尋常行處有하니 人生七十古來稀라.) 란 승구 중 고(古)자와 희(稀) 자만을 써서 ‘고희(古稀)’란 단어를 만들어 70세로 대신 쓴 것이다.?또한 뜻대로 행하 여도 도(道)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한데서 종심이라 하였다.
♠ 희수(喜壽) (77세) : 77세 때의 생신이다. 오래 살아 기쁘다는 뜻. 희(喜)자를 약자로 쓰면 七十七이 되는 데서 유래
♠ 팔순·산수(八旬·傘壽) (80세) : 80세 때의 생신이다. 산(傘)자의 약자가 팔(八)을 위에 쓰고 십(十)을 밑에 쓰는 것에서 유래
♠ 미수(米壽) (88세) : 88세 때의 생신이다. 미(米)자를 풀면 팔십팔(八十八)이 되는 것에서 유래
♠ 졸수(卒壽) (90세) : 90세 때의 생신이다. 졸(卒)의 속자(俗字)가 아홉구(九)자 밑에 열십(十)자를 사용하는데서 유래
♠ 백수(白壽) (99세) : 99세 때의 생신이다. 백(百, 100)에서 일(一)을 빼면(99세) 즉, 백자(白字)가 됨 
♠ 천수(天壽) : 병없이 늙어서 죽음을 맞이하면 하늘이 내려 준 나이를 다 살았다는 뜻으로 천수라 한다.

공자(孔子)는 일찍이<논어(論語)>“위정(爲政)”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섰으며, 마흔 살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 살에 귀가 순했고,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
이 글은 공자가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고 학문의 심화된 과정을 술회한 것이다.

공자의 이 말로부터, 15세를 지학(志學), 30세를 이립(而立), 40세를 불혹(不惑), 50세를 지천명(知天命), 60세를 이순(耳順), 70세를 종심
(從心)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적어도 공자가 살던 시대에 있어, 나이 마흔은 미혹됨이 없어 부동(不動)의 위상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흔히 20세를 약관(弱冠), 60세를 환갑(還甲), 70세를 고희(古稀),
77세를 희수(希壽), 88세를 미수(未壽)라고 한다.

15세는 지우학 공부할 시기를 정립한다하여
20세는 약관 뜻읏세운다
30세는 이립 뜻을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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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을 세우니라(출애굽기 40:17)

출애굽기 25:8-9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성막이란?

4908. 성막(聖幕)(미쉬칸. mishkan) <מִשְׁכָּן>

1.  거주,  2. 굴,  3. 욥기 18:21(집)

발음 / 미쉬칸(mishkan)

어원 / 79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장막(출 25:9, 레 15:31, 대하 1:5), 성막(출 26:1, 민 3:26, 대상 23:26), 휘장(출 26:35), 회막(출 39:32, 민 3:7, 대상 6:32),
집(욥 18:21), 거처(시 49:11, 78:28, 사 32:18, 렘 9:19), 처소(시 132:5, 사 22:16, 겔 37:27).
[동] 계시다(시 26:8), 살다(욥 21:28).
구약 성경 / 139회 사용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으로 내려오셔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머무르실 수 있는 거룩한 장소를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성소의 각 구조의 모양과 규격, 재료와 만드는 방법까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알려주시며 친히 임재의 공간을 계획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성막입니다.

출애굽기 25-31장 : 성막 설계도
출애굽기 35-40장 : 성막 제작


성막은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직접 임재하시는 공간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하나님을 만나고 제사(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곳입니다.

성막은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이 되는 공간이었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성막 주변에 지파별로 자리를 잡고 생활하던 이스라엘 민족은 구름이 성막 위에 떠오를 때 구름의 인도를 따라 이동했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떠오르는 날까지 머물렀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 : 출애굽기 40:34-38

히브리서 8: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성막은 하나님께서 직접 계획하신 거룩한 장소였기 때문에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하나님의 모형이자 그림자였으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시기 위해 사용하신 도구였습니다.

성막의 구조와 명칭

성막은 동쪽 성막문-뜰 : 번제단, 물두멍-성소-휘장-지성소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상징하는 가늘게 꼰 베실 즉  흰색의 높은 세마포 휘장이 성막의 사면을 감쌌습니다.

1. 성막문

성막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10m 길이의 큰 문(막)입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문은 단 하나여서 누구나 반드시 이 문을 거쳐야 했습니다.
성막의 문이 하나인 이유는 성막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허락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10m의 길이나 되는 큰 성막문의 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면 누구라도 하나님께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성막문의 구조 / 출애굽기 27:16-17

2. 번제단

성막의 문을 지나면 성막 앞쪽으로 넓은 뜰이 나옵니다.
뜰의 앞쪽에는 번제단이 있었는데, 번제단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동물을 악한 인간의 죄를 대신하는 희생 제물로 태우는 곳이었습니다. 번제단에 바칠 수 있는 동물은 수송아지, 염소, 양, 비둘기였고, 번제단의 불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셔서 제사장은 이 불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번제단을 통해 희생 제물을 받으신 이유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희생양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번제단의 구조 / 출애굽기 27:1-8
 

물두멍

번제단 뒤에는 물이 가득 차 있는 물두멍을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이 성막에 들어가기 전과 번제단에 제물을 바치기 전 반드시 물두멍의 물로 손과 발을 씻어야 죽음을 면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는 행위는 인간에게 남아있는 죄를 거룩한 물로 씻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정결한 상태로 만드는 것을 나타내며, 인간의 죄를 씻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보혈을 상징합니다.

물두멍의 구조 / 출애굽기 30:18-20

성소

번제단과 물두멍이 놓인 뜰을 지나면 성소와 지성소로 이루어진 성막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막의 천장에는 베 실과 색실로 만든 휘장 위에 염소 털로 만든 휘장을 얹고, 그 위에 붉게 물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만든 막을 얹고, 그 위에 다시 해달의 가죽으로 만든 막을 얹었습니다.

성소에서는 지성소로 들어가기 전 정결한 예식을 치렀습니다.
성소의 오른편에는 떡상을 놓아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진설병을 항상 놓아두도록 했고, 왼쪽에는 등잔대를 두어 등잔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성소 앞쪽에는 분향단이 놓였는데 제사장은 아침, 저녁으로 향을 피웠고 향 역시 꺼지지 않도록 관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 금으로 만들어진 성소 안의 기명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고자 하셨는데, 떡상 위의 떡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등잔불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분향단은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성소의 구조 / 출애굽기 25:23-40

휘장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가림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성소와 성소를 휘장으로 나누게 하시고, 지성소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셨습니다.
인간은 죄 많은 속성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목격할 경우에는 즉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하시기 위해 지성소를 가리는 휘장을 두게 하셨습니다.

휘장의 구조 / 출애굽기 26:31-33

지성소

지성소는 히브리말로 ‘거룩함 중의 거룩함, 최고의 거룩한 곳’이라는 뜻으로 언약궤만이 놓여있는 길이, 너비, 높이가 똑같은 여섯 평 정도의 작은 방으로, 바깥에서 보이지 않도록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계명이 적힌 돌판을 담은 금궤입니다.
이 언약궤 위에는 순금으로 만든 속죄소가 덮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는 곳이라는 뜻의 속죄소(贖罪所)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리라는 뜻에서 시은좌(施恩座)라고도 부르는데, 이 속죄소에 하나님께서 직접 임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성소, 속죄소에 임재하실 때 성막 위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세워졌습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정결하게 씻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룩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죄를 대속할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속죄소에 대속 제물의 피를 덧발랐는데 이는 대속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루어진 대속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지성소의 구조 / 출애굽기 25:10-22
대속의 보혈 / 히브리서 9:22

구약시대에 만들어진 성막은 놀랍게도 성막의 모든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면서 하셨던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리라는 약속을 시작으로,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리라는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시키시려고 계획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3511


출애굽기를 마치면서 성막의 평면도를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동쪽 문으로 들어오면 바로 앞에 번제단을 볼 것입니다.
번제단은 조각나무(싯딤나무)로 만든 후에 그 안과 밖을 놋으로 덮어 씌웁니다.
놋이 금보다 열에 강하기 때문에 놋으로 씌웠다고 합니다.

번제단은 장이 5규빗, 광이 5규빗, 고가 3규빗

번제단을 지나면 물두멍을 볼 것입니다.
물두멍은 놋으로 만듭니다.
성막의 기구들은 크기가 소개되었지만 물두멍은 그 크기가 소개되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물두멍은 제사장의 손과 발을 씻는 것으로 죄와 더러움을 씻는 것에는 무한하다는 상징이라고 합니다.

물두멍을 지나면 바로 앞에 성소의 휘장을 만납니다.
성소의 휘장은 청색, 자색, 홍생, 가를게 꼰 베실로 짠 휘장으로 다른 무늬가 없습니다.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에는 같은 재료로 휘장을 짜고 그 위헤 그룹들의 형상을 수놓아야 합니다.

성소의 휘장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에 떡상, 왼편에 금등대와 바로 앞에 분향단이 있습니다.
번제단의 뿔에는 족장을 위한 속죄의 피를 발랐지만 분향단의 뿔에는 제사장과 온 회장을 위한 속죄의 피를 발랐습니다.
분향단은 족각목으로 만든 후에 그 안과 밖을 금으로 씌웠습니다.
떡상은 조각나무로 만든 후에 정금으로 씌웠습니다.

금등대는 금 1달란트로 만들었습니다.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을 지나면 언약궤를 만날 것입니다.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만든 후에 그 안과 밖을 금으로 씌웠습니다.
언약궤의 뚜껑을 속죄소라고 하여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모든 회중들의 피를 뿌려 용서를 받았습니다.

영광() :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진 후에 그 모든 것을 덮으면 작은 불이 일어나며 그 불이 빛이 되려고 작은 것일지라도 움직이지 않고 온전하게 감당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불 화(火) + 불 화(火) + 덮을 멱(冖) + 나무 목(木) / 열  십(十) + 사람 인(人)
 작을 소(小) + 우뚝할 올(兀) 

  • 1. 우뚝하다, (높고 위가)평평하다(平平--)
  • 2. 발뒤꿈치를 베다
  • 3. 움직이지 않다
  • 4. 민둥민둥하다
  • 5. 머리가 벗어지다, 민둥산이 되다
  • 6. 위태롭다(危殆--)
  • 7. 무지하다(無知--)
  • 8. 움직이지 않는 모양
  • 9. 무지(無知)한 모양
  • 10. 위태(危殆)로운 모양, 안정(安定)되지 않은 모양
    위태(危殆)로운 모양, 안정(安定)되지 않은 모양

영광(카보드. 3519) <כָּבוֹד>

1. 무거움,  2. 영광,  3. 사무엘상 4:21

발음 / 카보드(kâbôwd)

어원 / 351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재물(창 31:1), 영화(창 45:13, 삼상 6:5, 시 8:5), 영광(창 49:6, 출 33:18, 대하 1:11, 에 5:11), 존귀(잠 15:33),
귀(貴)(대상 29:12, 잠 3:16), 존영(잠 11:16), 영예(잠 25:2, 29:23), 위력(사 8:7),심령(시 108:1).
구약 성경 / 199회 사용

단(壇) - 성막(聖幕) - 성전(聖殿) - 교회(敎會) - 사람의 몸(肉體) 


성막(聖幕)은 하나님을 섬기는 이동식 성전(聖殿)


성막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시고 출애굽 시키실 때에, 광야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한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게 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에게 모든 식양(式樣)을 보여 주시고 그대로 만들게 한 이동식 성전(聖殿)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몇 대를 걸쳐, 430년 동안 기나긴 세월을 살아 왔기 때문에, 애굽의 종교와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다.

한 예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받을 때, 모세가 오래 동안 내려오지 않자 자신들을 인도한 신을 만들라고 아론에게 졸라대어,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서 번제(燔祭)와 화목제(和睦祭)를 드리고 즐거워했던 신앙이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聖幕)은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게 하고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지시하시고 만들게 한 것이다.

출애굽기 25장 8절 이하에 말씀에서“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서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帳幕)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고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막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함께 계신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짓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막(聖幕)의 재료와 기구 또 구조와 모양 그리고 제사법(祭祀法) 하나 하나에는 신비한 영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성막에 대하여 배우고 연구하므로 영적 성장을 가져 올 수 있다.

성막론(聖幕論)을 배우다 보면, 신론(神論), 교회론(敎會論), 내세론(來世論), 인간론(人間論) 등과 신앙생활의 참된 방법을 터득하게 되고, 말씀 위에 굳건히 선 신앙을 가지게 될 것이다.

영적으로 혼탁한 이 시대에 살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바른 신앙을 제시해 줄 것이다.





성령의 변화된 사람들의 특징(요한복음 14:16-17)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후 오십일이 지난뒤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께서 임재하심에 하늘로부터 바람같은 소리가 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것이 각 사람의 머리위에 임하더니 그곳에 함께 하였던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된 후로 주님의 복음은 불같이 전세계를향하여 퍼지기 시작하여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성령님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증이 되셨고 대리자가 되셧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게 해주셨습니다.
인간의 학문이나 명상이나 수양이나 혹은 교양이나 극기나 수도를 통해서는 주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영접할 수도 없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옛사람이 십자가에 잘려 온전히 죽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될 때 바로 그 죽음에서부터 생명은 비롯되어 부활이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2천년전에 오신 역사적인 예수를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아니라 성령과 함께 이 부활의 생을 시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우리의 죄를 청산하여 사망과 죄의 노예의 상태에서 완전히 자유하여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거하사 주님과 더불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참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오늘날 같이 문명이 발달하여 최첨단의 시대에 그 어느때보다 물질의풍요로움속에서 정신적 빈곤을 겪고 있으며 도덕과 윤리는 황폐해져서로가 서로를 찢고 죽이고 미워하는 절망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가난한자에게 복된 소식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자에게 다시 보게하며 눌린자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눅 4:18).

우리는 믿음으로 거듭나서 성령이 충만하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나면 우리의 인생전체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생각이 달라지고말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집니다. 또한 우리의 삶이 놀라울 정도로변화됩니다.

요 5:2-9에 나오는 베데스다못은 천사가 내려와 물이 동할때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이든지 고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베데스다못은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물이 동할때만 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도 성령이 함께 하실 때 가치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사회도 개인도 성령이 함께 할때, 성령에 사로잡힐 때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에 사로 잡힐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끊임없이 이어지고있습니다.
이제 성령에 사로잡혀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의 특징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를 바로 알고 증거하는 삶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고난을 보고 주님을 바로 알지 못했기에 주님을 떠날려고했으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님과 장래 일을 바로 알게 되자 (요 16:13) 그들은 생명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퍄할 수 있었음이니라 성령을 모시면 우리는 주님을 바로 알게 되어 담대해집니다.

둘째, 복음을 위하여 협력하는 인간관계를 유지

초대교회 성령의 충만함 속에 성도들끼지 유무상통할 수 있었고 서로서로위해 기도해 주고 사랑하며 축복을 빌수가 있었습니다.
미움대신사랑을, 자기중심보다는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하고, 나를 자랑하는 교만대신 주님을 내세우는 겸손을(에 36:26) 가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십니다.

셋째, 천국 소망을 위한 삶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은 강한 소망을 가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로잡혀 쓰임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아주 강력한 소망을갖고 환경의 어려움이나 고난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전진했습니다. 소망은 인생에게 강력한 힘을 공급해 줍니다.
성경에 보면 요셉도 모세도 강력한 소망을 가졌기에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삶의 보람도 성공도 없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이원하시는 목표가 있습니다.
강력한 소망으로 전진하십시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넷째, 거룩한 고집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은 항상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거룩한고집이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진행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쓰임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긍정적인 무리속에서 더 강력한 긍정적인사람을 쓰십니다.

이사야 26:3에 보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으로 지키신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사람은 거룩한 고집으로 매사에 긍정적인 태도로써 하나님의 도구로 택함을 입어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여 모여들여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과 주님의 사랑을 힙입어 변화의 삶을 살아 빛의 자녀로써 사명을 감당하시는 성도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이름을 축원합니다.



천년왕국이란 요한계시록 20장 1~6절에서 특별히 언급된 그리스도의 천년통치를 가리킨다.
이것은 대개 구약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왕국과 같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천년왕국에 관한 주요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

세대주의 전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

전천년설(前千年說)이란,
천년왕국을 주의 재림 후에 있을 문자적 천년왕국으로 보는 견해인데,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 전천년설이 있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이란 천년왕국을 유대인들의 천년왕국, 즉 구약적 성격의 천년왕국으로 본다.
이 견해는 이사야(사 65:20, 25)와 에스겔(겔 40-48장; 45:17; 46:3, 13) 등의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들이 천년왕국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되며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고 짐승 제사들과 절기들이 회복된다고 본다.

역사적 전천년설(Historical Premillinnialism)

역사적 전천년설은, 주의 재림 후 천년왕국이 있다고 보는 점에서는 세대주의 전천년설과 같으나, 천년왕국을 신약적 성격의 나라로 보는 점에서 세대주의적 견해와 다르다.
이것은 초대교회에 저스틴,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등의 교부들이 가졌던 견해이었으므로 ‘역사적 전천년설‘이라고 부른다.
근대에 벵겔, 고데, 랑게, 알포드, 엘리콧, 잔 등 성경주석가들이 이 견해를 취하였다.

후천년설(後千年說, Postmillennialism)

후천년설이란,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이 신약 교회 시대 후기(後期)에 있을 기독교 황금시대를 가리키며 그 후에 주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것은 촬스 핫지, 윌리암 쉐드, 로버트 댑니, 벤자민 워필드 등 유력한 장로교 신학자들이 가졌던 견해이었다.

무천년설(無千年說, Amillennialism)

무천년설이란, 요한계시록 20장에 언급된 천년왕국이 문자적으로 ‘천년’ 동안의 지상 왕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단지 신약 교회 시대에 대한 상징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것은 초대교회 때에 어거스틴, 종교개혁시대에 루터와 칼빈, 그리고 근대에 와서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루이스 벌코프 등이 가졌던 견해이다.

믿음 안에 있는가?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가를 똑바로 알려면, 우리 자신을 시험해보아야 합니다.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첫째, 하나님을 똑바로 압니다.

하나님을 100% 다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믿음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본문 골로새서 1장 10절에 보면,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하나님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공부한다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 설명을 듣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사람에게 계시를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기로 택하신 사람에게 계시하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은 모두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에게도 죄가 있습니다. 죄가 있는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모두 대속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이 모두 하나님을 알고 믿음으로 구원 받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에게 계시하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요한일서 2장 2~4절에 보면,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자기 멋대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1. 태초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지(無所不知)하십니다.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속을 꿰뚫어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정직해야 합니다.

창세기 4장 9~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장래에 일어날 일을 선지자들에게 말씀해주셔서 선지자들로 하여금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장차 일어날 일을 말씀하신 것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틀린 적이 없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지하시고 전능하십니다. 신실하십니다. 완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집니다.

이사야 40장 6~8절에 보면,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람은 풀과 같습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천지는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全知)하실 뿐 아니라, 전능하십니다.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십니다. 사람이 보기에 100% 불가능해 보이고 소망이 없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가능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였을 때, 이삭을 낳았습니다. 90세의 할머니가 어떻게 아이를 낳습니까. 사라의 몸은 죽은 것과 같았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100%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나님께는 100%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고 신실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2.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흥망성쇠를 주장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백부장의 하인이 중풍병에 걸렸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와서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마 8:6)”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마 8: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백부장은 예수님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 8:8~9)”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고 말씀하셨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다는 것과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신 것을 믿었습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3. 사랑이 많으십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라면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까워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서로서로 사랑하며 삽니다. 요한일서 4장 7~13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18절에 보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진실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22~24절에 보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대로 행하며 살면, 무엇을 구하든 다 받으며 삽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예레미야 29장 10~1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죄를 범하니 망하여 포로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그런데 70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잘못하여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망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려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으신 분이십니다. 은혜를 받을수록 이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 받은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2장에 보면,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등장합니다. 사무엘상 2장 12절에 보면,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행실이 나빴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셨던 때, 대제사장과 장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것과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이들이 알았더라면,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전에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을 때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주여 누구시니이까(행 9:5)”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는 순간,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사람이 예수님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믿습니다.

로마서 4장 17~22절에 보면,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7~19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잘 통과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찾아와 하나님께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상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문제가 반드시 해결됩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도합니다. 계속 기도합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기만 해도 응답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딱 한 번 기도했는데도 응답해주십니다.
하루 종일 몸부림치며 기도한 적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셨습니다. 이틀 동안 기도해서 응답 받은 적도 있고, 1주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여 응답 받은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10년 만에 응답 받은 적도 있습니다. 반드시 응답해주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10년 동안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늦게 응답하셔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계속 기도하면 보너스로 주어지는 축복이 많습니다. 계속 기도하는 동안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손해가 아닙니다.

셋째,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5장 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첫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무엇을 하든 자신을 생각합니다.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합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하나님의 뜻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요한일서 5장 14~15절에 보면,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몸부림치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응답 받은 대로 행하면 간증거리가 많습니다. 감사한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거룩하게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소원을 가지고 삽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소원을 가지기만 해도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생각만 해도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삽니다.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살면서 고난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원수까지도 사랑하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5장 44~4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2장 14절에 보면,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그를 축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저절로 전도됩니다. 감동 받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6장 14~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2장 18절에 보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 보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고 썼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가 우리 자신을 시험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가를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물론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자신이 믿음 안에 있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알고 체험하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이 평생의 축복이 될 줄 믿습니다. 들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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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레브. lêb) 3820. לֵב

출애굽기 35:5, 10, 21, 22, 25, 29

관련 성경 / 마음(창 6:5, 삼상 4:13, 시 61:2), 심중(신 29:19, 에 7:5), 숨(출 8:15), 콧김(출 15:8), 가슴(출 28:29), 감동(출 35:34), 간담(수14:8), 결심,생각(삿 5:15, 시 33:11), 진심(삿 16:17), 기력(삿 19:5), 관념(삼상 4:20), 인심(삼하 15:13), 심장(삼하 18:14, 시 38:10), 염통(왕하 9: 24, 시 45:5), 한마음(대상 12:38, 시 83:5), 성심(대상 29:9), 전심(대하 17:6, 시 119:10, 겔 44:5), 뜻(대하 24:4), 충심(시 34:18), 총명(욥12:24), 지혜(욥36:5, 잠10:8, 전1:17), 지식(잠10:21), 의사(잠18:2), 생각(잠24:32), 명철(전7:7), 지각(렘5:21), 굳센 자(암2:16). [동] 말하다(창 42:28), 간곡하다(창 50:21), 낙심하다(민 32:7),염려하다(삼상 9:20), 개의하다(삼상 25:25),낙담하다(삼상 17:32, 겔21:15), 근심하다(삼하 7:27, 애 3:33), 상심하다(삼하 13:33), 깨닫다(왕상 8:47), 감동시키다(대하 30:12), 위로하다(대하 30:22), 주의하다(욥 1:8, 전 7:2), 담대하다(시 27:14), 살피다(시 48:13), 무지하다(잠 6:32), 간교하다(잠 7:10), 착심하다(잠 23:12), 진술하다(사 41:22), 기억하다(사 46:8), 낙심하다(렘 4:9).
[부] 다정하게(삿 19:3), 뜻대로(삼하 7:21, 대상 17:19), 담대히(렘 30:21).
구약 성경 / 599회 사용

마음이란 무엇인가요?

마음은 국어사전적 정의로는 “생각, 의식 또는 정신”, “감정이나 기분”, “의지나 결심” 등으로 표현한다(우리말 큰사전).
헬라어로는 καρδια(카르디아)라고 하는데 그 뜻은 “정신, 사고, 감각, 중심부, 또는 지성, 감정이나 충동이나 애정이나 욕망의 자리로서 마음”을 정의한다.

마음이라고 번역되는 헬라어는 대략 10종류가 된다.
대표적으로 헬라어의 Ψυχη(프쉬케)가 마음을 뜻하는 용어라 할 수 있는데 그 뜻은 “정신, 영혼, 혼, 마음, 내적 생명, 마음 속 깊은 존재”를 의미한다.

마음에 대한 연구는 심리학에서 다루기도 하지만, 분명히 신학적 주제이다.
심리학(心理學)이라는 용어는 마음(心)의 이치(理)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영어로 “psychology”라고 하는데 이는 헬라어의 “Ψυχνη”를 영어로 음역한 psyche에서 온 말이다.
물론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 혼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나 그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혼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마음의 장소

마음이 있는 곳은 도대체 어디인가?
머리인가? 가슴 어디인가? 심장이 마음인가?
주일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율동을 가르치면서 “우리의 마음….”이라고 할 때 항상 가슴에 두 손을 얹어 표현한다.
머리를 가리켜 마음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교사들이 학생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심장 뛰는 것 외에는 느낌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마음이라고 생각해 왔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양심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또 골치 아픈 일을 만난 사람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면서 “요즘 마음이 아파서 괴롭다!”고 말하는 것은 왠지 어색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과연 우리의 마음은 어디인가?
의사들이 방사선 사진(X-Ray)을 촬영하고, 인간을 해부해 보아도 마음은 발견할 수 없다.
심장은 마음을 상징하는 장기일 뿐, 마음 자체는 아니다.
이는 심장 속에 생각하는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긴장, 불안, 공포 등을 느끼게 되면 뇌가 지각하여 호흡이 가빠지고 혈류량이 많아지거나 빨라지고, 혈압이 상승하고, 심박 항진이 감지될 뿐이다.
그러므로 의학적으로 마음은 심장이 아니라, 뇌일 것이다.

따라서 마음의 병은 뇌 그리고 뇌의 활동인 정신의 병이다.
마음이 우리 몸의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로 논란이 있었던 로마시대의 의사 갤런(Galen 130~200 A.D.)은 플라톤(Platon)이 주장한 가슴이라는 설을 뒤엎고 그야말로 해부학적으로 뇌라는 것을 주장한 사람이었다.

마음의 영역

신학에서 인간의 구성 요소에 대하여는 논란이 많이 있다.
즉, 영혼과 육으로 구성되었다는 이분론과 영, 혼, 육으로 구성되었다는 삼분론이 서로 대립되어 있으며 양자는 모두 견고한 성경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영혼이든, 혼이든 이 안에 역시 지(지성), 정(감정), 의(의지)의 기능이 있다고 보는 데는 이견이 없다.
즉 이것들을 일컬어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지성

어른은 공경해야 할 대상으로 학습하여 공격하지 않고 공경하는 것을 학습하게 된다.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것과 성령에 대한 것도 우선은 지적인 활동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이다.
지식을 통과해서 영으로 나아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것과 복음이 오직 지식에만 머무르게 될 때는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성을 수립할 수 없게 된다.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은 지성이 새롭게 됨을 포함한다.
그렇다고 하여 있지도 않은 새로운 지식의 마술적 형성이 아니라 사상과 지성이 성경적으로 건전하게 되려는 성향을 의미한다.
지성은 지혜와 지식 그리고 추리와 사고의 영역으로서 이것이 부족할 때 인간은 어리석게 되고 둔하게 된다.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였다(렘 17:9).
그 이유는 죄로 인해 인간의 모든 부분에 타락을 초래하여 지성도 함께 손상을 입게 되었고 오류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인지 능력도 흐려지고 자기 왜곡(self-distortion)이 나타나 자신을 정확하게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분명하게 인지하거나 이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에 대해서는 더욱 알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14:1)고 분석했다. 그처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갖지 못하게 되며 또한 지성의 타락은 선악을 명확히 분별하지 못하게 되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되며 지성과 창의성은 잘못된 상상력으로 발전하게 되어 그 마음의 생각이 하나님의 의도와는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성령으로 인하여 마음이 깨끗하게 되면 지성의 변화가 초래되는데 이로 인하여 행복을 인식하게 된다. 즉 재산, 명예, 연령, 학식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어 삶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새로운 인생관의 형성, 그리고 환경을 초월하는 감사가 나타나게 된다. 이 같은 인지의 변화는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그로 인해 마음의 평안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감정

감정은 인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느끼는 기능으로서 이것의 타락은 감정의 왜곡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의심뿐만 아니라 부정적 감정을 초래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정적인 요소가 강해서 슬픈 것을 보면 눈물이 나오고, 감동을 받고, 아울러 감정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인간의 죄와 타락은 다른 영역에서보다 감정의 변화로부터 비롯된다. 일반적으로 마음의 병이라고 하며 정서 장애라고 할 수 있는 우울, 불안, 공포, 강박, 망상 등을 신경정신증(psycho-neurosis)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감정의 장애이다. 감정의 병리적 현상은 자기애, 자기비하 및 학대, 열등, 불만, 죄책, 의심, 억압, 반항, 거부, 충동, 변덕, 과민, 고집 또는 냉소 등의 상태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들은 결국 마음의 내적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하여 심리적으로 암울한 생활을 하도록 한다.

성경에 따르면 감정과 관련하여 마음은 근심(시 13, 잠 12:25)하기도 하며, 두려움을 느끼고(요 14:27), 아프기도 하며(욥 7:11), 상처를 입기도 한다(잠 25:20)고 기록하고 있으며, 마음이 약한 자들도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살전5:14). 또한 마음이 둔하게 되고(사 6:10), 경화증과 같이 감정이 딱딱하게 굳어지기도 한다(출 4:21). 뿐만 아니라 마음에는 기쁨을 느끼게도 된다고 했다(시 4:7). 잠언 4장 23절에서는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고 했다. 내 마음속에 아무 생각이나 들어오도록 허용한다는 것은 내 마음을 창녀촌으로,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것과 같다. 우리는 아무 생각이나 해서 마음을 더럽혀서는 안되고, 신앙적인 순결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의지

이것은 인간의 의지적인 면을 말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해서는 안될 것을 알고 자제하는 것이 이 영역이다. 신앙은 감정과 지식의 동의를 거쳐 의지적 결단을 통해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본다면 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원죄와 자범죄(또는 고범죄)가 있는데 자범죄는 자신이 죄를 짓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서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술에 취해보고자 하는 의지, 성폭행을 하고자 하는 의지, 다른 사람의 물건을 허락 없이 내 소유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함으로써 내게 이익이 돌아오도록 하는 의지 이런 것들은 항상 자신의 의지로 범하는 것인데 의지가 타락되면 감정과 지식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불일치적 행동이 나타나는 문제가 된다.

의지는 행동 이전에 갖게 되는 마음의 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의지는 독립적이며 자유로운 실체(free entity)가 아니라 지식과 감정에 종속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의지가 지성과 감성에 따르지 않게 되면 그것은 일종의 분열 현상으로서 질환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적 변화는 지성과 감성의 동의와 변화 다음에 오는 2차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성결된 신자는 지성과 감성의 성결을 통해 결국 혼의 의지적 변화를 경험하게 되어 죄의 유혹에 대해서 강한 의지적 거부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의지의 나약 및 박약은 자제력 상실과 맥을 함께 하는 개념으로서 이것은 곧 죄의 노출을 의미한다. 죄의 유혹이 있을 때에 자신의 의지가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수용하게 되면서부터 죄가 발생된다.

사람은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라 어떤 영적인 힘을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도록 할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들이는 것과 세상의 영을 받아들이는 것을 대비시키고 있다(고전 2:12). 성령으로 인해서 인간의 나약한 의지가 강해지며 악한 영의 점령상태에서 벗어나게 될 뿐만 아니라 장차 의지의 나약으로 인해서 발생되는 유혹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죄를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의지의 성결이 요청된다. 결국 죄라는 것은 지성의 왜곡, 감정의 불안정, 의지의 박약 등의 혼적 작용을 통해 영의 문제가 야기되는 것이다. 성령은 인간의 심리에 역사하셔서 인간의 마음 상태가 깨끗해지도록 하신다. 결국 마음이 성결하게 됨으로써 지성, 감성, 의지의 변화를 겪게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르게 느끼고, 올바르게 사고하며, 올바르게 행동하게 된다.

마음의 변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변화를 받는다는 용어는 헬라어의 μεταμορφουσθε(메타모르푸스데)
이 말은 μεταμορφομαι(메타모르포마이)에서 비롯된 말로서 “형태의 변화를 받는 것(be changed in form)”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외형적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구조적 변화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변화( μεταμορφομαι)는 마태복음 17장 2절, 마가복음 9장 2절에서도 사용되는데 “예수께서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누가는 이 말을 “용모가 변화되고”(눅 9:29)라고 표현했다.

즉 얼굴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아니라, 똑같은 얼굴이면서 인식하기에 똑같은 것이 아닌 상태를 뜻한다.
이처럼 성령에 의해 마음도 변화될 수 있는데 이는 “사고 방식”의 변화로서 이는 동일한 사람이지만 충동과 유혹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는 더 이상 과거의 그 마음이 아닌 상태로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지식, 감정, 의지, 상상, 동기, 야망 등에 대해서 거룩한 생각과 관련을 맺는 것을 진정한 변화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같은 심리구조의 변화는 그리스도와 성경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아담스(Jay E. Adams)는 에베소서 4장 24절의 변화를 성경적 사고로의 변화에 두었는데 그것은 25절 이하의 내용과 연관을 맺고 있다고 전제하고 도적질하는 사람이 도적질하지 않는 변화가 아니라 도적질이 변하여 선을 행할 때 진정한 마음의 변화로 이해했다. 욕하던 사람은 다시는 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욕하던 입이 변하여 선한 것을 말할 때 비로소 마음의 변화로 보았다. 이와 같이 잘못된 행동의 변화는 성경적 사고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며 목회상담의 목표도 여기에 두어야 한다.

빌립보서 4장 7절에는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분명히 마음을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분은 우리의 육신만 지으신 것이 아니라, 영혼과 마음을 지으셨기 때문이다(시 33:15).

성경은 마음을 거의 1,000번 정도 언급합니다.
본질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마음이란 우리의 감정과 욕구가 거하는 영적인 부분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살펴 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감정과 욕구를 가지고 계시므로, 또한 “마음”도 갖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음을 밝혀둡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에, 우리도 마음을 가집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사도행전 13:22).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알고 따르는 지도자들과 함께, 당신의 백성을 축복하십니다(사무엘상 2:35, 예레미야 3:15).

사람의 마음은 천성적으로 악하고, 신뢰할 수 없고, 부정직합니다.

예레미야 17:9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타락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감정, 그리고 욕구는 죄에 의해 부패되었습니다 – 게다가 우리는 이 문제가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 깨닫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을 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비밀을 아[십니다]” (시편 44:21, 고린도전서 14:25).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아[셨고],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24-25).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아시므로 정당하게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예레미야 17:10).

마가복음 7:21-23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타락 상태를 지적하셨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외적인 것이 아닌, 내적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마음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는 오직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일어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릅니다]” (로마서 10:10).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우리 안에 새로운 마음을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시편 51:10, 에스겔 36:26).
하나님께서는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겠다고]” (이사야 57:15)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마음을 창조하시는 역사는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고(시편 17:3, 신명기 8:2)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개념, 새로운 지혜, 그리고 새로운 욕구를 채우시는 일을 수반합니다(느헤미야 7:5, 열왕기상 10:24, 고린도후서 8:16).

마음은 우리 존재의 중심부이며,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을 강조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3).



심리학(psychology)의 어원인 ‘psyche’는 마음·정신, ‘logos’는 지식·연구를 뜻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Spirit)과 혼(Soul)과 몸(Body)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에서 인간을 영-혼-육의 삼중 구조로 나누었다. 여기서 혼에 해당하는 헬라어 푸쉬케(ψυχὴ)가 영어로 마음(Psyche)이다. 심리학에서는 혼이란 용어 대신 '마음(Mind)' 혹은 '정신'(Soul)이라고 한다.
  
의식 (The Conscious)
 
우리가 알거나 느낄 수 있는 모든 경험과 감각은 의식이다. 마음은 극히 일부분만이 의식의 범위 안에 포함된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빙산으로 비유한다. 수면 위에 있는 부분은 의식, 수면 밑의 있는 부분을 무의식이라고 한다.
 
융은 “무의식을 바다에 비유한다면 의식은 그 가운데 있는 자그마한 섬과 같다"고 했다. 의식의 중심부에는 ‘자아’(Ego)가 있다. 나의 생각, 나의 지각, 나의 느낌으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우리는 의식, 또는 자아의식이라 한다. 자아의식은 '유전과 환경'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발생된다.
 
융은 자아(Ego)와 자기(Self)를 구분하였다. "자아(Ego)는 의식의 중심이고, 자기(Self)는 의식과 무의식의 중심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성숙하면 할수록 Ego가 아닌 Self가 마음을 지배한다.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하지 못하고 충돌하면 '분열된 인간'이 된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같이.
 
개인 무의식 (The Personal Unconscious)
 
‘무의식’이란 글자 그대로 ‘의식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의식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는 마음의 세계는 모두 무의식이다. 자기가 하고도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는 것'은 모두 무의식의 결과이다.
 
융은 프로이트와는 다르게 무의식을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으로 구분하였다. 개인 무의식은 자아(Ego)에 의해 인정되지 않는 경험들은 소멸되지 않고 무의식에 저장된다. 개인 무의식은 의식적인 개성화나 기능과 조화되지 않은 모든 정신적 활동과 내용을 받아들이는 장소이다. 너무 약하기 때문에 의식에 도달할 수 없거나 또는 의식에 머물러 있지 않은 경험은 모두 개인 무의식에 저장된다. 개인 무의식의 여러 내용은 필요할 때에는 언제나 쉽게 의식에 접근할 수 있다.
 
집단 무의식 (The Collective Unconscious)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은 융이 제창한 분석심리학(Analytical Psychology)의 중심개념이며, 인간의 무의식의 심층에 존재하는 개인의 경험을 넘은 선천적 구조 영역이다. 이를 '보편적 무의식'이라고도 부른다. 개인 무의식보다 더 아래에 위치한 하부구조이다.
 
집단 무의식은 개인 무의식과 달리 개인적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일류에게 공통적으로 유전되어온 '집단 무의식'이 마음의 심층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융은 집단 무의식 속에 있는 것을 '원형'(Archetype)이라고 하였다. 이 단어는 '시작·원리' 등의 의미를 가진 'arche'와 '각인'이란 뜻의 'type'의 합성어이다. 고고학이란 단어인 ‘Archaeology’도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개인 무의식이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반면, 집단 무의식 초개인적이며 객관적이다. 집단 무의식은 유전되지만 개인 무의식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뱀을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왜 그럴까? 한 번도 뱀을 본 적 없는 아이들까지도 말이다. 자기도 알지 못하는 '집단 무의식' 때문에 그렇다. 물론 예외도 있다.
 
땅꾼은 뱀을 보면 ‘심봤다’
‘유레카’, ‘할렐루야!’


성령으로 성도되자


성령은 인격체로서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분이시다. 성령은 헬라어로 '프뉴마'(Pneuma)이다.구약성경의 '루아흐'(Ruach)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프뉴마'의 단어 자체를 직역하면 ‘영'이다. ‘영'이란 ‘숨 혹은 기운'(breath)이나 ‘바람'(wind)이라는 뜻으로 성령과 관련되어 사용된다. 영어로 번역할 때는 다른 영과 구분하기 위하여 Spirit이란 첫 자를 대문자로 표기하거나, The를 앞에 붙인다.
 
신약성경에 성령은 140번은 다른 단어와의 연결 없이 독립적으로 '프뉴마'만 사용되고 있고, '거룩한 영'(pneuma hagion)이란 표현은 92회, '하나님의 영'이란 표현은 18회이다. 이외에도 여호와의 영, 그리스도의 영(롬8:9), 보혜사(요14:26), 예수의 영(행16:7), 성결의 영(롬1:4) 등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성령으로 성도(Saints in and with Holy Spirit)
 
인간은 죄인이기에 스스로 구원할 수가 없고, 스스로 성결해 질 수도 없다.  오직 예수를 믿어 '성령세례'로 구원받고, '성결의 영'(롬 1:4)인 '성령충만'으로 성결해 질 수가 있다. 그래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을 '성도'라고 한다.
 
로마서 8:9절에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가 나와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교회 잘 다니고, 헌금 많이 하고, 봉사 열심히 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영'이 있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우리를 성전이라고 했다.(고전 3:16, 6:19절)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할 자가 없다"고 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결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삶의 증거로는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갈 5:22-23)

성령으로 예배(Worship in and with Holy Spirit)
 
예배란? 거듭난 영으로, 성령의 도움을 받아, 영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4장 24절의 개역성경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번역했으나, 개역개정 성경에는 '영과 진리'로 고쳤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 드리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릴지니라' 이곳에 두 번의 ‘프뉴마'가 나온다.
 
첫째 프뉴마는 '하나님의 영'이고, 둘째 프뉴마는 거듭난 '인간의 영'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죽은 영이 아닌 산영 즉 거듭난 영으로만 가능하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식을 지키는 사람도 있다. 예배는 영으로 드리는 것이고, 예식은 혼과 육으로 지키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신앙생활하고, 예식을 지키는 사람은 종교생활을 한다.



성령으로 기도(Prayer in and with Holy Spirit)
 
기도란? 하나님 아버지에게,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켜 내 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어 하나님 편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26-27절은 기도와 관련된 성령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셔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돕는다고 했다.
 
요한복음에는 성령을 ‘보혜사'라고 했다. 보혜사란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로 'Helper, Counselor, Advocator, Comforter' 등으로 번역된다. 특별히 Advocator는 법정용어로 피고인을 대신하여 말해주는 '변호사'를 뜻한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 대신하여 간구해 주신다.
 
요한일서 2장 1절에 아버지 앞에 계신 그리스도는 '파라클레토스'로서 하늘의 법정에서 죄를 범한 성도를 대변해 주는 변호인으로 등장한다. 우리가 기도에 응답 받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구하지 않았기에 때문이고, 둘째 자신의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했기 때문이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약 2:2b-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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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물(禮物)(거제, 요제) 7311. 테루마(terûwmâh) תְּרוּמָה

출애굽기 35:20-29

1. 헌납,  2. 요제

발음 / 테루마(terûwmâh)
어원 / 731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제물(출 25:2, 삼하 1:21), 요제물(출 29:27), 성물(레 22:12, 민 5:9), 예물(출 36:3, 신 12:17, 겔 20:40), 거제(민 15:19, 신 12:6, 느 10:39), 거제물(민 18:8, 느 12:44), 뇌물(잠 29:4), 봉헌물(말 3:8).
구약 성경 / 76회 사용

* 7311. רוּם 
1. 높다,  2. 거만한,  3. 과시하다

발음 / 룸(rûwm)
관련 성경 / 교만하다(신8:14, 17:20, 호13:6), 높아지다(삼상2:1, 시89:16, 단11:12), 높다(신12:2, 시99:2, 겔17:22), 올라가다(겔10:16,17), 오르다(창7:17, 겔10:4), 높이다(출15:2, 삼하22:27,시99:9), 자랑하다(시13:2), 드리다(레22:26, 민31:52, 시27:6), 들리다(시112:9, 미5:9), 진흥하다(잠11:11), 돋우다(사49:11, 57:14), 장대하다(신1:28, 9:2), 크다(민33:3, 신2:10), 일어나다(시113:4, 107:25, 느9:5), 양육하다(사1:2, 23:4), 들다(왕상11:27, 시37:34), 일으키다(시9:13), 소리지르다(욥38:34), 이르다(민18:26), 주다(대상25:5, 대하30:24), 부르다(창39:18, 스3:12), 내밀다(출14:16, 왕하6:7), 가지다(수4:5), 날리다(사58:1), 행하다(겔45:9), 세우다(창31:45), 놀리다(창41:44), 놓다(삼상9:24), 줍다(왕하2:13), 교만하다(시66:7), 영달하다(잠3:35), 나타내다(잠14:29), 이끌다(호11:4). [명] 높음(신32:27, 욥22:12, 시78:69), 높임(시21:13, 46:10),교만자(사2:12), 위(삼하22:49, 시18:48, 호11:7). [부] 높이(시27:5, 잠30:13, 사26:11).
구약 성경 / 166회 사용
제물(祭物)

제물(祭物)


בַח 2077 [zebach]
  • 1. 남성형 명사 희생, 제사, 제물.
  • 2. 남성형 명사 살륙, 도살된 동물의 육체, 제사, 창31:54, 겔39:17, 잠17:1
  • 3.  남성형 명사 [속죄나 성체의 의도를 지님] 출10:25, 레3:1, 4:10, 17:8, 민15:5.
מִנְחָה 4503 [minchâh]
  • 1. 여성형 명사 제물, 희생물, 희생 제물, 소제물, 창4:3,4,5, 레2:1,4,5,6, 6:7(14)이하, 7:9.
  • 2. 여성형 명사 선물, 예물, 기증품, 창32:14(13), 19(18),21, 43 : 11,15,25,26
  • 3. 여성형 명사 헌물, 공물, 조공, 세금, 삼하8:2,6, 왕하17:4, 시72:10.
תְּרוּמָה 8641 [terûwmâh]
  • 1. 여성형 명사 헌납, 제물, 선물, 출25:2,3, 30:13,14,레7:32, 22:12, 신12:11,17, 삼하1:21,잠29:4
  • 2. 여성형 명사 요제[비교 תְּנוּפָה], 출29:27, 레7:34.
אַזְכָּרָה 234 [’azkârâh]
  • 1. 여성형 명사 제물.
  • 2. 여성형 명사 기념물[추억이 담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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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과 주일

주일성수,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하는 제4계명은 우리가 계속 준수해야 할 창조 규례(creation ordinance)이며, 도덕법(moral law)에 기초한 하나님의 제도입니다.
안식일 성수는 하나님께서 친히 선포하신 법령이며, 친히 세우신 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계명은 폐기(종료, 무효화,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토요 안식일이 신약의 주일 안식일로 날짜가 변경되었습니다.
구약의 토요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된 안식의 실체에 대한 그림자요 예표인 여러 가지 의식들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6:26-30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일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니 제 칠일에 백성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 하려느냐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을 줌으로 제 육일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제 칠일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그러므로 백성이 제 칠일에 안식하니라”

안식일은 이후 시내산에서 율법으로 제도화 되었다(출 20:8~11).
그 정신과 내용은 창시기 2장 2절 3절에 “여호와께서 안식하시니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인간에게도 안식하게 하신 것이다.

“안식일은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이 부분은 신자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킴’에 대하여 가리킨다.
그 지키는 방법을 세 가지로 말씀하셨다.

“거룩히 지킴”(8절)
이것은 그날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이다.

“엿새 동안은 힘써 ••••, 일함”(9절)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자가 다른 날에 곧 육일 동안 성실히 일을 함으로써 안식일 성수에도 지장이 없게 된다.
또한 노동의 성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잠 5:6~11).

“그날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여기 ‘일’은 히브리 원어로 ‘멜라카니’인데, 육체의 생활을 위하는 영업과 같은 것들을 말한다.

מְלָאכָה  439.9

1. 봉사,  2.  부여된 일,  3. 장인의 일

발음 / 멜라카(melâʼkâh)

어원 / 4397과 같은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일(창 2:2, 출 12:16, 레 23:31), 짐승(창 33:14), 물품(출 22:7), 재주(출 31:3), 예물(출 36:6), 재료(출 36:7), 건축(출 38:24), 역사(출40:33, 왕상5:16, 느4:11), 무엇(레11:32), 노동(레23: 7, 민28:18), 공사(왕상7:14,22, 대상28:21), 목수(대상22:15), 사무(대상29:6, 에9:3), 감독자(대하24:12), 직무(느13:10), 행사(시73:28),제조(겔15:4,5), 생업(욘1:8), 지음(출35:21),씀(레7:24), 일꾼(대하34:10). [동] 만들다(레13:48), 수종들다(대하13:10).
구약 성경 / 166회 사용
* 4397. מַלְאָךְ 

1. 보내진 자,  2. 하나님의 사자,  3. 천사

발음 / 말라크(malʼâk)
어원 / ‘대리로 파견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자(使者)(창16:7, 삿2:1, 시34:7), 천사(창19:1, 삼하24:16, 대하32:21), 왕(삼하11:1), 사신(사14:32, 33:7), 파견자(나2:13).
구약 성경 / 212회 사용

그날은 육체를 위하지 않고 영적 생활을 위하는 날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위주 해야 된다.
이 부분(8~11절)은 인생으로서 안식할 이유를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일을 엿새 동안에 마치시고 제 칠 일에 안식하사 그 날을 복 되게 하신 까닭이다(11절).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 주님의 날(主日, The Lord's Day)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날짜를 변경시킨 것이 아닙니다.
신약 교회가 마음대로 제정한 날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으로 사도들과 초대 교회를 인도하셔서 구약 안식일이 가리키는 실체인 영원한 천국의 안식을 주일 안식일을 통해 발견하며 누릴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주일 성수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많은 제안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 탈무드에는 안식일에 할 수 없는 일이 1,500여 가지나 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인정받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율법주의적 안식일 준수는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신약 시대 주일 성수는 이런 정신과 태도로 지켜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주일에 해서는 안될 일들과, 주일에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알고 있어야 주일을 거룩히 지킬 수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장 8항은 주일 성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을 위하여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하나니,
(1)그들은 마음을 준비하고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데 지장이 없도록 일반적 사업을 미리 정돈해 놓고,
(2)세상 사업과 오락에 관한 말과 생각과 행위를 일체 중단하고 안식할 것이며,
(3)그 날의 모든 시간은 공 예배와 사적 예배를 위하여, 또는 부득이한 일과 자비 시행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주일 성수의 정신과 방법에 관해 성경과 신조(교리)와 교회 역사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주일 성수는 지키는 방법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이 무거운 짐으로 느낀다면 주일 성수의 정신과 태도가 잘못된 것입니다.
주일은 참으로 즐겁고 복된 날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성수의 방법이 어떤 것이든 간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으로 즐거워하고 성도의 경건(영성)과 덕성이 함양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로 모든 염려와 무거운 짐에서 놓여나는 평안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일들을 하고 싶고 놀러가고 싶은 데 마지못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을 참으로 즐겁고 복된 날로 알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날이 되어야 주일을 점점 더 특별한 날로 복된 날로 잘 지킬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그 날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 즉 주일 성수를 왜,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해서 바르게 알고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날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쉬신 날이며 복을 주셔서 거룩하게 하신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쉬신 것은 엿새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는 일로 피곤하셨기 때문에 쉬셨다는 말은 아닙니다(사 40:28-29).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도 엿새 동안 창조하신 만물을 보존하고 다스리는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쉬셨다는 것은 창조하시는 일을 마치신 후에 창조하신 만물을 보시고 만족해 하셨으며 좋아하셨다는 뜻입니다.
일곱째 날을 하나님의 하신 일을 인해 즐거워하는 복된 날로 구별하셨습니다.

이 안식일은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일을 하신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6일이 다 귀한 날이요 좋은 날이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의 결과를 보시고 심히 좋아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일을 마치고 쉬신 일곱째 날은 특별히 즐겁고 복된 날로 구별하시고 친히 안식하셨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한 날로 복되고 즐거운 날로 지키게 한 것은 창조 직후에 정하신 규례입니다.
이것을 창조 안식 또는 창조 규례라고 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이 십계명을 내려 주실 때에 제4계명으로 주셨지마는 이 계명은 창조시에 주어진 창조 규례인 것입니다(출 20:8-11).

사람이 범죄한 후,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아 이 땅위에서 수고로이 일하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수고로운 삶을 사는 인생에게 쉼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안식일 제도가 수고로이 일하는 인간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제정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 안식일이 제정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휴식은 참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단순히 휴식만을 위해서 안식일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게 하신 것은 엿새 동안 하던 일을 그치고 안식일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와 교제하며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와 보존의 은혜와 영원한 복락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게 해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도록 하기 위해 안식일을 구별해 주셨습니다.

주일은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한 후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을 얻어 누리려면, 누구든지 구원의 복음을 듣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를 주(主)와 구주(救主)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의(義)와 영원한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참된 평안과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참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려면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야 참된 안식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일하지 않고 하루 종일 쉬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없는 안식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성육신과 대속의 죽음과 부활 승천으로 성취하시고 약속하신 구속의 은혜를 알고 믿는 자들만이 안식일을 즐겁고 복된 날로 지킬 수 있습니다.

제4계명에서 거룩히 지키라고 요구하는 안식일은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까지는 제 칠일이었으나, 그 이후로는 매주 첫 날이 되어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며, 신약 성경에서 ‘주의 날’(주일)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대요리문답 제116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피조물이 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와 구속의 은혜를 인해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양과 영광을 삼위일체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 날에 창조와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 앞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하늘의 영원무궁한 안식을 앞당겨 맛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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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과 꿀이 흐르는 땅(the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

구약 성경에서 19회 사용(한글 개역 성경 인터넷 검색 결과 / 다국어 성경  사이트 참조)
출애굽기 4회(3:8, 17, 13:5, 33:3)
신명기 6회, 레위기 1회, 민수기 1회, 여호수아 1회, 예레미야 2회, 에스겔 2회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문자적 의미는 우유를 많이 얻을 수 있는 소와 양을 키울 수 있는 푸른 초장과 샘물이 풍성한 곳과 꿀을 얻을 수 있는 다양한 꽃이 사철 피어있는 자연적 조건이 충족된 곳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땅을 말합니다.
자연적인 조건을 충분히 갖추지 않았지만 광야에서도 물을 마시게 하시고 먹을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누릴 수 있는 땅을 말합니다.

적용 / 미국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의식주 문제를 한국보다 더 잘 해결하기 위한 축복받은 기회의 땅이었기 때문인가?)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보다 더 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약속의 땅이며 가나안 땅이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한인교회 구성원들은 기회의 땅을 찾아 미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인교회가 문제가 많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의식주 문제를 위한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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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聖幕)과 회막(會幕)

성막이란 용어가 구약에서 82회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출애굽기에서만 52회 사용됩니다.

출애굽기 40:34-35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회막이란 용어가 구약에서 146회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출애굽기에서만 37회 사용됩니다.

성막이 완성된 후에 모세는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회막이 언제 세워졌을까요?

출애굽기 33:7-11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모세
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모세
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문에 서서 경배하며.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처으으로 회막이란 용어가 사용된 곳은
출애굽기 27:21
아론과 그 아들들로 회막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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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백성(암, עַם), 모세의 백성(암메카,  ) 목이 곧은 백성(암키세,   ) 

주의 백성(5971) עַם 

1. 백성,  2. 민족,  3. 복수형    עַמִּים 신명기 28:10

  • 1.  백성, 출 15:13, 신 4:20, 7:6, 32:36.
  • 2.  [주]복수형עַמִּים : 신 28:10, 시 33:10, 사 8:9.
  • 3. 민족, 족속, 지파, 창 19:4, 49:10, 레 19:16, 21:1,4, 신 32:8, 33:3,19, 삿 5:18, 시 18:28(27), 47:2(1),10(9), 사 3:13, 호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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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2022(월) (출애굽기 40:17, 성막을 세우니라) 

출애굽기 40장  / 성막의 완성과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한 성막 

출애굽기 40장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이 세워지고 여호와의 영광(하나님의 임재)이 성막에 충만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드디어 출애굽기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1-15 성막의 건설과 각 기구의 위치와 그 성별 및 제사장의 성별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
16-33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을 세우고, 여러 기구를 각각 그 위치에 두다.
34-38 성막 위에 구름이 덮이고, 성막 안에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하다.


출애굽기 39:32-43절에서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의 모든 기구들을 만들어서 모세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이제 성막을 세우고, 기구들을 제 자리에 넣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성도의 삶.

출애굽기의 마지막 장인 40장은 성막의 봉헌과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가득하게 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대미를 장식합니다. 때는 둘째 해 첫째 달 초하루이니, 애굽에서 나온지 1년이 되는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성막을 세울 것을 명하십니다(2).

1~16절은 성막을 세우라는 하나님의 명령,
17~33절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성막을 세우는 내용

하나님은 순서를 지시하시는데,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순서로 성막을 세우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지성소의 증거궤, 휘장(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는), 성소의 기구들, 다시 휘장(성소 문으로서의 휘장), 성막 뜰의 번제단과 물두멍, 끝으로 뜰 주위 포장과 문의 순서입니다.

모든 기구는 관유를 발라 거룩하게 구별되었고, 아론과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기 위해 모세가 물로 씻기고 거룩한 옷을 입히고 기름을 부어 거룩히 구별합니다.
모세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언약 백성의 삶은 철저하게 이렇게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성막이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완공되자 구름이 회막을 덮었고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상징하는 쉐키나 구름입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영광이 그 안에 충만하게 나타났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고, 그 영광을 흘깃 볼 수 있었으며, 하나님과 친구처럼 이야기했던 모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임하자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결코 인간이나 어떤 피조물이라도 근접할 수 없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이것이 하나님의 본질인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시대에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모세마저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고 가까이 할 수 없었던 성막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이로부터 1400년 후 육신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계시되고 나타나게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신자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삶이며, 그 영광과 은혜를 알기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훗날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하게 보게 될 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신자는 각자의 자리에서 거룩하게 구별되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 옛날엔 성막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림자인 성막이 아니라 성막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릅니다.
그 영광을 경험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선 자로서, 날마다 거룩하게 구별된 인생을 살게 하시며, 우리의 삶의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애굽기 40:1-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세우고, 성막 기구들을 제자리에 들여놓고 모든 기구에 관유를 발라 성막 기구들을 거룩하게 하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라고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 곧 회막을 세워라. 거기에 증거궤를 들여놓고, 휘장(지성소휘장)을 쳐서, 그 궤를 가려라. 또 너는 떡상을 가져다가 격식대로 차려 놓고, 등잔대를 가져다가 그 위에 등잔불을 올려놓아라. 또 금 분향단을 증거궤 앞에 놓고, 성막 어귀에 휘장(성소 희장)을 달아라.

번제단은 성막, 곧 회막 어귀 앞에 가져다 놓아라. 회막과 제단 사이에는 물두멍을 놓고, 거기에 물을 채워라. 회막 주위로 울타리를 만들고, 거기에 휘장을 치고, 동쪽 울타리에다 낸 정문에는 막을 드리워라.

너는 관유(예식용 기름)를 가져다가, 성막과 거기에 딸린 모든 것에 발라서, 성막과 그 모든 기구를 거룩하게 하여라. 그러면 그것이 거룩하게 될 것이다. 너는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제단을 거룩하게 하여라. 그러면 제단이 가장 거룩하게 될 것이다. 너는 물두멍과 그 밑받침에 기름을 발라, 그것들을 거룩하게 하여라.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회막 어귀로 데려다가, 목욕을 하게 하여라. 그리고 너는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게 하고,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제사장으로서 나를 섬기게 하여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혀라. 그리고 네가 그들의 아버지에게 기름을 부은 것과 같이,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기는 제사장이 될 것이다. 그들은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대대로 영원히 제사장직을 맡게 된다.”


출애굽기 40:16-33a,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세가 성막을 세우고 모든 기구들을 제 자리에 들여 놓았다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애굽에서 나온 지 1년 만인 제 2년 1월 1일에 성막(전체)을 세웠습니다.
모세는 받침들을 놓고, 널판들을 맞추어 세우고, 그 띠를 띠우고, 기둥을 세워, 성막(성소와 지성소 부분)을 완성하였습니다.
또 성막 위에 막을 펴고, 그 위에 덮개(4중으로)를 덮었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증거판을 가져다가 증거궤 안에 넣고, 그 궤에 채를 꿰고, 궤 위에 속죄소를 덮었습니다.
궤를 성막(지성소) 안에 들여놓고, 휘장을 쳐서 증거궤를 막았습니다.

회막(성소와 지성소 부분) 안, 성막의 북쪽 면, 휘장(지성소 휘장) 바깥에 떡(진설병)상을 들여놓았습니다.
상 위에는 하나님께 바치는 빵(진설병)을 차려 놓았습니다.
회막 안의 떡상 맞은쪽, 성막의 남쪽 면에 등잔대를 놓고, 주 앞에 등잔을 올려놓았습니다.
금향단을 회막 안, 휘장 안(지성소 휘장 앞)에 들여놓고,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피웠습니다.

또 동쪽의 성막 문에 막(휘장)을 달고, 성막, 곧 회막 문 앞에 번제단을 놓고, 그 위에 번제물과 곡식제물을 바쳤습니다.
회막(성소와 지성소 부분)과 번제단 사이에 물두멍을 놓고, 거기에 씻을 물을 채웠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그 물로 손과 발을 씻었는데, 회막에 들어갈 때와 단에 가까이 갈 때에 그렇게 씻었습니다.

울타리를 만들어서 성막과 번제단을 둘러싸고, 동쪽 울타리에다가 낸 정문에는 막을 달아 가렸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모든 일을 마쳤습니다.
 



성막 세우기 끝


모세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성막을 세운 이야기 안에 반복해서 계속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40:19, 21, 23, 25, 27, 29, 32절에 7번씩이나 반복해서 나오는 문장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일을 다 마쳤습니다.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세계역사에 모세와 같은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위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수백 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탈출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세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마쳤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40:33b-38, 
성막이 완성된 후,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임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모든 일을 다 마쳤습니다. 그 때에 구름이 회막을 덮고, 주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습니다. 모세는, 회막에 구름이 머물고, 주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으므로, 거기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구름이 성막에서 걷히면, 진을 거두어 가지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걷히지 않으면, 걷힐 때까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길을 가는 동안에, 낮에는 주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구름 가운데 불이 있어서, 이스라엘 온 자손의 눈 앞을 밝혀 주었습니다.


성막 완성 후 하나님의 영광 충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향해 행진할 때,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로 함께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40년 동안 그것을 늘 보고 지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걸으면서 밤에는 불이 함께 하고, 낮에는 구름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매일 경험했다는 것으로 출애굽기를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과 불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약 성경에서 종종 구름과 불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각적으로 표현할 때, 구름과 불로 표현합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임재)이 구름과 불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 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출애굽기 24:15-18)


출애굽기를 마무리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과 불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밤이나 낮이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낮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가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거기서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마무리는 이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머물러 있으면 그냥 머물러 있었습니다. 밤에도 행진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불이 구름 가운데 있어서 그것을 바라보고 움직였습니다.

구름과 불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실제입니다.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을 향해 걸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실제, 하나님의 임재 -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 - 는 구름과 불이었습니다. 구름과 불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잖은 위로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도 사람인지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가끔은 눈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는 게 믿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격언들이 몇 개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 일견이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
“To see is to believe!”
"눈으로 봐야 믿을 수 있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우리는 대화 중에 ‘보다’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전혀 못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를 들겠다고 해도 되는데, 습관적으로 예를 들어보겠다고 말하는 저 자신을 봅니다.

먹어 봅시다! – 먹읍시다’ 하면 되는데...
입어 봐도 되나요? – 입어도 되나요?’ 하면 되는데...
만나 보고 싶다! – 만나고 싶다! 하면 되는데...
만져 보자, 가 보자, 물어보자, 해 보자. 걸어 보자, 뛰어 보자, 살아 보자 등등


구름과 불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의미였습니다. 하나님의 실제를 눈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구름이 눈에 보이고, 불이 내 눈 앞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고 안심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실제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름과 불입니까? 무지개입니까? 천둥과 번개입니까?

출애굽기 전체 40장 중에서 10장 이상이 성막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두 번에 걸쳐 성막 이야기를 출애굽기에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막을 이스라엘 백성들 한 가운데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텐트를 치고 살아가는 그 한 가운데 성막을 세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만들기 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해서 모세를 만났습니다. 어디서 모세를 만났습니까? 시내산에서 모세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위에서 모세를 불러 따로 만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텐트를 치고 생활하는 삶의 현장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과 같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려고 그들이 살고 있던 곳이면 어디나 한 가운데 성막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정말 감사한 일인데요,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게 하신 성막이 중요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꼭 그것에 눈에 보여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지만 우리가 믿습니다. 그건 보고 믿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성막이나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이 우리 눈에 보여야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나요? 거룩하게 장식된 교회 건물에 들어가야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나요? 잘 갖춰진 예배시간에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미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고,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살아서 움직이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교회(건물)에 와서, 정해진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더 귀한 예배는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삶(생활예배)입니다.

출애굽기를 마무리하는 이 시간, 이 찬양 가사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우리는 주의 움직이는 교회
이 곳은 주님을 위한 자리
내가 기도하는 모든 땅 위에서
하나님 예배 받을 그 날을 고대하네

나의 노래로 주님의 성전을 지으리 높임을 받으소서
이스라엘의 찬송 중 거하신 주님은 거룩하십니다
두 손 들어 주님의 보좌를 만들고 온 맘 다해 경배하라
그룹 날개 사이에 임하신 것처럼 내 위에 임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이 곳에 섰으니 이 땅을 치유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주를 높이리다
열방들아 주님을 송축할지어다 그 발아래 입 맞추라
영원한 통치자 주 예수 그리스도 그는 위대하신 왕


묵상을 위한 질문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집(성전/교회)입니까? 구름과 불입니까? 무지개입니까? 천둥과 번개입니까?


출애굽기 다음에 바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여호수아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레위기와 민수기, 신명기 - 나와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지루한 제사와 율법 이야기 - 가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너고, 매일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놀라운 기적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리타분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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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2022(토) (출애굽기 39:1) 거룩한 옷을 만들었더라

출애굽기 39장  /


1-31 제사장의 성의의 제조.
32-43 성막의 완성과 모세의 검열 및 축복.

제사장 의복과 성막 준공[출 39장]

 

[내용개요]

 출25장부터 나타나는 성막 건축이 이제 마무리되고 있다. 본장에서는 성막과 모든 기구의 완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기술자들은 성막과 그 기구를 완성한 후에 마지막으로 제사장의 옷을 하나님의 명하신 방법에 따라 제작하였다(1-31절). 이들의 아름답고 화려한 의복은 하나님의 영광의 은혜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 모든 성막 건축을 완성한 그들은 모세 앞으로 제작물을 가져 왔다. 그것을 본 모세는 그 동안 성막 건축에 힘쓴 사람들에게 축복하였다(32-43절).



[강  해]

 본장에서는 28장을 근거로 하여 제사장의 의복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많은 부분이 반복되어 기록된 것을 보게 되는데, 그러한 내용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일이 차지하는 신성하고 엄숙한 성격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본장은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에 철저히 순종하였다는 사실을 여러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1. 제사장의 복장


1) 에봇

제사장의 옷에는 에봇과 흉패와 에봇 받침 긴 옷과 잡다한 옷들과 새긴 관이 포함 되어 있습니다. 또한 본장에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우림과 둠밈이 있습니다. 에봇은 조끼 모양의 옷으로 대제사장의 복장 중 앞가슴 쪽을 가리는 것과 등을 가리는 두 조각의 천으로 되어 있습니다. 에봇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견대를 만들었는데 견대는 에봇 두 조각을 연결하는 양쪽 어깨 끈을 일컫는 것입니다. 에봇 위에는 에봇을 매는 띠를 에봇과 같은 모양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에봇에 붙여 짰습니다. 그들은 또한 호마노를 깎아 금테에 물려 인을 새김같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을 그것에 새겨 에봇 견대에 달아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 보석을 삼았습니다.

a. 제사장의 의복(레8:7)

b. 에봇(삼상30:7)


2) 흉패

흉패의 모형은 가로 세로가 한 뼘씩 되는 정방형으로 열두 개의 보석이 세 개씩 네 줄로 박혀 있습니다. 흉패는 공교히 짜여졌고, 에봇과 같은 모양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흉패에 물린 보석에도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 곧 그들의 이름대로 열두 이름을 인을 새김같이, 열두 지파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그리고 보석을 박은 흉패에는 금 사슬 두 개, 금테 둘, 금 고리 여섯을 부착했습니다. 그리고는 청색 끈으로 흉패를 에봇에 단단히 잡아맸습니다.

a. 흉패의 상징(엡6:14)

b. 열두 지파(창49:28)


3) 에봇 받침 긴 옷

에봇 받침 긴 옷은 출28:4에서 겉옷으로 표현되는 두루마기처럼 생긴 긴 청색 옷 입니다. 이 에봇 받침 긴 옷은 모두 청색으로 짰습니다. 옷의 두 어깨 사이에는 구멍을 내고 그 구멍 주위에 깃을 짜서 찢어지지 않게 하고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실로 그 옷 가장자리에 석류를 수놓았습니다. 또한 정금으로 방울을 만들어 옷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석류 사이 사이에 달았습니다. 이 또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한 대로 하였습니다.

a. 석류(학2:19)

b. 방울(슥14:20)


4) 납다한 옷들과 새긴 관

그들은 또한 가는 베로 아론과 그 아들들의 속옷을 짓고 세마포로 두건을 짓고 세마포로 빛난 판을 짓고 가는 베실로 짜서 세마포 고의들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가는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띠를 만들었습니다. 제사장의 예복 중에 두건은 보자기 같은 것으로 싸여진 것을 뜻합니다. 관은 제사당의 의복을 가리키는 특수한 용어였습니다. 대제사장의 복장과 구별되는 것은 대제사장은 에봇, 흥패, 금 패를 더 착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 정금으로 거룩한 패를 만들고 인을 새김같이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인을 새기고 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전면에 달았습니다.

a. 속옷(겔44:18)

b. 관의 상징(슥3:5)



2. 성막의 완성


1) 모든 역사를 마침

이스라엘 자손은 성막의 모든 역사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한 대로 다 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모든 성막의 기물들을 모세에게로 가져 왔습니다. 곧 막과 그 모든 기구와 갈고리들과 널판들과 그 띠들과 기둥들과 받침들이었습니다. 또한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 덮개와 해달의 가죽 덮개와 가리우는 장과 증거궤와 그 채들과 속죄소와 상과 그 모든 기구와 진설병과 정금 등대와 그 잔과 벌여 놓은 등잔과 그 모든 기구와 등유들이었습니다. 이어서 금 단과 관유와 향기로운 향과 장막문장과 놋 단과 놋 그물과 그 채들과 그 모든 기구, 그리고 물두멍과 그 받침과 뜰의 포장들과 그 기둥들과 그 받침들과 뜰문의 장과 그 줄들과 그 말뚝들과 회막의 소용 곧 성막의 모든 기구와 마지막으로 성소에서 섬기기 위한 정교한 옷, 곧 제사 직분을 행할 때에 입는 제사장 아론의 옷과 그 아들들의 옷이었습니다.

a. 거룩한 것들(사35:8)

b. 완성된 사역(요17:4)


2) 모세의 축복

이 모든 것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한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여 필한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이를 보고 매우 만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수고한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성막 건축에 관한 기사(참조, 출36-출39)와 모세에게 전에 내려졌던 지시(참조, 출25-출30) 사이에 정확한 일치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산에서 모세에게 보여진 모형에 일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장인들은 이 모형에 따라 성막의 모든 부분들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a.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식양(민8:4)

b. 사람의 축복(수22:6)



결론

본장에서는 제사장의 옷을 만드는 것을 다루는 부분에서 무려 일곱 번이나 모세의 순종을 말합니다. 출40장에서도 같은 수의 순종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완전수가 두 번이나 나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즉 철저한 순종을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름다울 정도로 하나님을 향한 헌신으로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감격과 만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단어해설]

2절. 에봇. 조끼 모앙의 옷. 대제사장이 제일 겉에 입는 옷이다.

3절. 금을 얇게 쳐서 오려서. 옷감을 짜는 데 탄력성이 있는 금실은 얇게 두들겨 실처럼 가늘게 만든 것이다.

4절. 견대. 양 어깨에 두르는 띠로서 에봇을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멜빵.

5절. 에봇을 매는 띠. 에봇을 몸에 밀착시키는 데 필요한 허리 둘레에 매는 띠.

8절. 흉패. 우림과 둠밈을 넣어 두는 주머니로 에봇 앞가슴에 달렸으며, '판결 흉패'로도 불린다.

22절. 에봇 받침 긴 옷. 두루마기와 같은 것으로 흉패와 에봇 밑에 받쳐 입는 긴 겉옷.

25절. 금 방울. 방울 소리는 대제사장이 살아 있음을 확인시키는 표식이다.

27절. 속옷. 고의 위에 입는 옷으로 발목에 올 정도로 긴 옷.

28절. 두건. '싸여진 것'을 뜻하는 <tp,n<x]mi:미츠네페트>는 일종의 터어번과 비슷함.

37절. 벌여 놓은. 문자적으로 '정돈해 놓은'.

38절. 금단. 금향단으로 분향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


 

[신학주제]

 제사장 복장을 강조함. 출애굽기는 그 분량과 세밀함에 의해 몇 가지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즉 출애굽 사건과 시내 산 언약, 그리고 성막이다. 그중 에서도 분량이나 세밀함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이 성막이다. 성막에 관한 기록은 거의 출애굽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제사장의 의복에 관한 기록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제사장의 의복이 강조되는 것은 제사장이 갖는 임무가 성막의 본질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성막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임재는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기초로 한다. 즉 그들이 과거의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맡길 때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임무를 띤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회복 하고 유지하는 결정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제사장이 제사 때 입는 의복이 매우 강조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영적교훈]

 마침내 성막이 완성되었고 그 동안 성막 건축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모세는 축복을 하였다. 그들이 성막 건축을 하는 동안에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모든 고난을 감수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을 이루어 내어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본장은 이처럼 끝까지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자가 축복받을 것임을 교훈해 주고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현재의 고난이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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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2-2022(금) (출애굽기 38:1) 번제단을 만들었으니  

출애굽기 38장  / 번제단, 물두멍, 성막의 뜰(울타리)


1-7 제단과 그 부속품의 제작
8 세수통(물두멍)의 제작
9-20 뜰의 포장과 기둥 및 문장의 제작
21-31 금·은·동의 헌물의 분량과 그 용도

출애굽기 38장은 성막 기구 제작(3) - 번제단, 물두멍, 성막의 뜰(울타리)을 만들었다는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38:1-7절은 이미 출애굽기 27:1-8절에서 설명한 번제단을 만든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동물을 희생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동물을 희생 제사로 드려서 죄 용서를 받아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동물을 잡아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곳이 번제단입니다. 번제는 히브리어로 ‘올라’로, ‘올라간다’는 뜻이고, 단은 ‘미즈베아’로 ‘죽이다’는 뜻입니다.

번제단도 조각목(아카시아 나무)으로 만듭니다. 다른 기구와 차이점은 금으로 싸지 않고 놋으로 감싼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금보다 놋이 불에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금은 1,065도에 녹고, 놋은 1,085도에 녹는다고 합니다.

번제단은 가로 5규빗(2.5미터), 세로 5규빗(2.5미터), 높이가 1규빗반(75센티) 정도의 정사각형이며 4개의 뿔이 있고 가운데는 그물망이 있습니다. 놋 고리 한쪽에 2개씩 네 개가 붙어 있고, 멜 채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으로 쌉니다. 번제단에는 몇 가지 보조기구들이 있는데, 재 담는 통, 부삽, 대야, 고기 갈고리, 불 옮기는 그릇이며 다 놋으로 만듭니다.



번제단은 희생제물을 바치는 곳입니다. 번제단은 죄를 용서받는 자리,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장소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는 일반인들이 못 들어갑니다.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입니다. 물두멍도 성소에 들어가서 섬기는 제사장들이 손과 발을 씻는 곳입니다.

따라서 번제단이 유일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나 나아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 피였습니다(히 9:22). 구약제사는 동물의 피를 흘림으로 죄를 용서받는 제사였습니다. 신약의 제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제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번제단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동물의 피가 필요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뒤틀린 조각목을 놋이 감싸주어 용서와 은혜의 번제단이 된 것처럼 연약하고 무지한 우리 인생을 보혈로 덮어주심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삶(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8:8절은 출애굽기 30:17-21절에서 설명한 물두멍을 만든 이야기입니다.

이름이 이상하지만, 물두멍은 우리 말로 하면 큰 대야입니다. 성소와 번제단 사이에 있는데,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물을 담아둡니다. 안 씻으면 죽습니다.


물두멍


중요한 사실은 물두멍의 재료입니다. 회막문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의 놋 거울로 만듭니다. 왜 하필이면 놋 거울일까요? 물두멍은 다른 성막 기구와 다르게 크기와 무게가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물두멍을 여인들의 놋 거울로 만든 이유는 거울의 용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여인들은 자기의 모습을 살피고 단정하게 하려고 거울을 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들도 물두멍에서 깨끗하게 씻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 반드시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물두멍은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제사장들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제사장은 반드시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물두멍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막 기구들과 달리 물두멍의 크기와 무게, 모양이 나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그 크기를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무게와 크기, 그 깊이를 우리는 감히 잴 수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어떤 말로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두멍(a bronze basin)은 특별한 규격과 사이즈가 없습니다.
물두멍의 재료는 동(놋)으로 만들었습니다.
물두멍 곧 놋대야는 손과 발을 씻는 것을 목적으로 물을 담아 놓는 성막의 기구입니다.
제사장 아론을 비롯한 유대 제사장들은 성막을 봉사하는 동안 자신들의 손과 발을 지속적으로 씻어야 함을 하나님께 지시 받습니다.

​물두멍의 위치는 거룩한 성소의 출입문과 희생제물을 드리는 번제단 사이에 둡니다.
물두멍이 사용되는 기능과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물두멍은 번제단에 희생제물을 드린 후에 손과 발을 씻습니다.

​그 날 모세의 지시에 따라 임명된 제사장은 바깥 성막 뜰의 문으로 들어갈 때, 번제단을 마주보게 되는데, 그곳에서 다른 이스라엘 백성처럼 자신을 위해 희생제물을 드립니다.
그런 후 번제단 건너편에 있는 곳에서, 그는 하나님을 향한 더 많은 섬김을 위해 자신을 물두멍(놋대야)에서 손과 발을 씻음으로 제사장으로서 준비를 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물두멍에서 자신을 정결케 함으로 번제단과 거룩한 성소에서 섬김과 봉사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번제단은 항상 제사장을 위한 첫 번째 섬김으로 요구되어 집니다.
그러니까 희생제물을 통해 죄사함 받고 구원에 동참한 자녀만이 하나님의 성막의 일을 섬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물과 피의 방식으로 당신 자신을 가까이할 수 있었습니다.       

​2. 물두멍은 거룩한 성소로 출입하기 전에 문 앞에 둡니다.

​거룩한 성소의 문 안에는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기구들이 있습니다.
어느 제사장도 정결치 못한 자취와 흔적으로 감히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라" 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제사장들에게 요구되는 사항입니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3. 물두멍은 거룩한 성소를 떠나기 전에 제사장의 손과 발을 씻어야 하는 곳입니다.

성소 바깥뜰은 모두 청동(놋)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성소 안은 모두 정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친히 거하시는 거룩한 성소와 성소 바깥뜰을 구분짓는 재료의 상징입니다.
이에 제사장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거룩한 성소에서 나와 다시 일상적인 제사장의 업무를 할 때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어야 합니다.

​땅은 아담의 죄로 인해 저주 받았기에 제사장이 접촉하는 모든 것은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음으로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려주심으로 그 저주가 영생의 복이 된 것입니다.      

번제단은 예수의 죽음을 가리키고, 물두멍은 예수의 생명을 나타냅니다.
피는 생명을 취하는 것이고 물은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물두멍의 물은 우리에게 오셔서 영원한 생명을 은혜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의 말씀의 능력 때문에 깨끗하다고 말하며, 당신의 진리의 사랑을 통해 얻게 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영원한 생명을 죄인에게 가져다 준다고 말씀합니다.

구약시대 때, 제사장이 하나님의 임재의 거룩한 성소 안으로 들어와 맡겨진 사역이 끝난 후 다시 바깥뜰로 나갈 때마다 그의 손과 발을 물두멍에서 씻어야 하듯, 우리도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 세상의 더러움과 우리 자신의 우상과 죄로부터 씻겨져야 합니다.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가 예수께 나아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주님에게 질문할 때,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히브리어의 뜻은 - 위로부터 태어나는) 거듭나지 아니하면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은 우리가 보는 물리적 보이는 세상에 목숨을 지탱할 생명을 가져다 주는 반면에, 영적 생수(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영적 생명을 가져다 줍니다. 예수께서 우물가에서 한 여자, 곧 사마리아 여자를 만날 때, 주님은 그녀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은 서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영혼이 목마르거든 나에게로 와서 마시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성전 바닥에 실로암의 우물(히브리어 - 보냄을 받음)로부터 물을 붓는 장막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 

(요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장차 하나님이 구약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 약속하신바, 장차 당신의 백성에게 하늘나라의 보좌로부터 실제적인 영원한 생명수의 물을 부으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 

(겔 36:25-27)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 36: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구약 에스겔서 말씀 외에도 성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엡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엡 5:27) 자기(그리스도 예수, 성도의 영원한 남편과 신랑)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15:3-4)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딛 3:5-7)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영적출생)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딛 3:7) 우리로 저(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히 10:21-22)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그리스도)이 계시매 (히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요 7:38-39) 나(예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요 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성막기구 중 물두멍에 담긴 내용을 정리합니다. 당신에게 물두멍에서 살펴본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까? 제사장이 성막의 일을 하면서 발과 손을 정결하게 씻어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 아셨습니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예수께서 유대인 지도자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마음에 되새겨 보셨습니까?

 

번제단에서 자신의 죄를 위해 희생제물을 드렸던 제사장이 자신의 손과 발을 물두멍에 씻어야만 하는 이유를 이제 생각해보셨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공로로 거룩한 제사장들이 된 여러분은 번제단에서부터 시작하여 물두멍을 통과하면서 성소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모두 주님의 공로와 용서와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을 당신의 영원한 아버지로 섬길 수 있음을 아셨습니까?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는 어제와 오늘만의 주님이 아니십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주님이시요 영광의 왕이시요 천국과 지옥을 통제하고 통치하시는 당신의 예수이십니다. 그 분 안에 당신이 있고, 그분이 당신 안에 주님과 왕으로 계십니다. 오늘 그 주님에게 당신의 신분과 정체성이 누구이며 무엇인지 성령으로 질문을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께서도 당신에게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해주실 것입니다.

 

(요 8:2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출애굽기 38:9-20
출애굽기 27:9-19절에서 설명한 성막의 뜰(울타리)을 만든 이야기입니다.

성막의 울타리를 세마포로 만드는데, 가로가 100규빗(45m), 세로가 50규빗(22.5m) 울타리의 높이가 5규빗(2.25m)입니다.


성막 뜰


울타리를 만드는데, 60개의 기둥이 필요합니다. 모두 놋으로 만듭니다. 동쪽과 서쪽에 10개씩 남쪽과 북쪽에 20개씩 놋 기둥을 세웁니다. 그 기둥들을 잘 고정시키기 위해 갈고리와 가름대를 은으로 만듭니다. 성막 울타리는 성막 뜰과 성소, 지성소를 보호해야 합니다. 울타리를 칠 때, 동쪽에 문을 만드는 10m만 제외하고 모두 하얀 세마포로 두릅니다.

동쪽에만 있는 문은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진 휘장입니다. 거기도 기둥이 넷 필요하고 받침대도 네 개 필요합니다. 누구나 성막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넓고 큰 문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집, 성막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막 울타리 동쪽에 있는 문은 우리에게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요한복음 14:6).

번제단을 만들 때도 놋을 사용했고, 물두멍도 성막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이 사용하던 놋거울로 만들었습니다. 성막의 울타리를 만들 때 역시 놋으로 기둥을 만들고 받침대도 만듭니다. 성막을 만들 때 금이 사용되는 것만큼이나 놋도 많이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느보산 모세 기념교회 놋뱀


놋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요한복음 3:14,15절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당신을 소개하시면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한 마디 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은 이야기가 민수기 21장에 나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어서 불순종으로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렸습니다. 불평과 원망으로 인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하자,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고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놋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뒤틀린 조각목을 놋이 감싸주어 용서와 은혜의 번제단이 되지 않았습니까? 성막의 뜰을 든든히 지탱해주는 놋 기둥 역시 우리 인생을 든든히 붙들어 주시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할렐루야!


출애굽기 38:21-23절은 성막 건축 책임자 세 명의 업무 분담 내용입니다.

책임자
업무
이다말
아론의 아들
성막 곧 증거막을 위하여 레위 사람이 쓴
재료의 항목을 모세의 명령대로 계산함
브살렐
유다 지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만듦
오홀리압
단 지파
브살렐을 도와서 함께 일함, 고안하고, 조각하며,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 실로 수를 놓음


출애굽기 38:24-31
성소 건축 비용과 어디에 얼마를 지출했는지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1. 성소 건축비로 든 금, 곧 흔들어 바친 금 - 성소 세겔로 29달란트 730세겔

2. 인구 조사 대상이 된 회중이 바친 은 - 성소의 세겔로 100달란트 1,775세겔

스무 살이 넘어서, 인구 조사의 대상이 된 사람이 모두 603,550명이므로, 한 사람당 성소 세겔로 반 세겔, 곧 한 베가씩 낸 것입니다. 성소 건축을 위해 회중이 낸 은은 ‘생명의 속전’입니다. 출애굽기 30:11-16절에서 생명의 속전에 대해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를 세어 인구를 조사할 때에, 그들은 각자 자기 목숨 값으로 속전을 주께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구를 조사할 때에, 그들에게 재앙이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1년에 한 번 반 세겔의 생명의 속전을 내야 합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 반 세겔을 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낸 생명의 속전은 회막을 수리하고 유지하는 비용으로 씁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숨 값을 대신하여 그들을 기억하여서 지켜 주십니다.  

은 100달란트로 성소 받침과 휘장 문의 기둥 받침을 100개를 부어 만들었습니다. 받침 한 개에 한 달란트가 들었습니다. 1,775세겔을 들여서, 기둥의 갈고리와 기둥 머리의 덮개와 기둥의 고리를 만들었습니다.


3. 성소 건축을 위해 드린 놋 - 70달란트 2,400세겔

회막 문 기둥받침과 놋 제단과 놋 그물과 제단의 모든 기구를 만들었고, 뜰 주위의 기둥받침과 그 휘장 문의 기둥받침과 성막의 모든 말뚝과 뜰 사면의 모든 말뚝을 만들었습니다.

@ 성전 건축 비용 한 눈에 보기
성소 세겔로 29달란트 730세겔
성소의 세겔로 100달란트 1,775세겔
70달란트 2,400세겔


묵상을 위한 질문

번제단과 물두멍을 놋으로 만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막 기구를 만드는데 놋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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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2022(목) (출애굽기 37:1) 궤를 만들었으니 

출애굽기 37장  / 언약궤, 떡상, 등잔대, 분향단



출애굽기 36-38장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중심으로 성막의 기구들을 만드는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36-38장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성막 기구들이 또 한 번 나옵니다. 출애굽기 25장부터 30장까지 나오는 성막 기구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성막 기구들이고, 출애굽기 36-38장에 나오는 성막 기구들은 성막 건축 책임자인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셔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성막 기구들을 만든 이야기입니다.


1-5 언약궤(법궤)의 제작
6-9 속죄소와 그룹의 제작
10-16 상과 그 부속품의 제작
17-24 등대와 그 부속품의 제작
25-28 향단과 그 부속품의 제작
29 거룩한 관유와 거룩한 향 제조법




출애굽기 37:1-9절은 출애굽기 25:10-22절에서 설명한 증거궤와 증거궤의 뚜껑인 속죄소(贖罪所를 만들었다는 내용입니다.

증거궤언약궤 또는 법궤라고 부릅니다. 증거궤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안과 밖을 쌉니다. 길이가 2규빗 반, 너비가 1규빗 반, 높이가 1규빗 반입니다(1규빗 45-50cm).


증거궤(언약궤 또는 법궤)


금고리 4개를 정금으로 만들고 양쪽에 둘씩 답니다. 멜 채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쌓고, 고리에 항상 꿰어 둡니다. 단 상단 부분에 금테를 두릅니다. 증거궤 윗부분(뚜껑)은 속죄소입니다. 증거궤 안에 십계명 돌 판이 들어있습니다.

증거궤는 어디에 있을까요? 성막 안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증거궤는 지성소에 있는 유일한 성물(거룩한 물건)입니다. 언약궤 또는 법궤라고 부릅니다. 증거궤 안에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 판, 만나 항아리(출 16:34)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민수기 17장)가 있습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증거궤보다 길이가 길면 증거궤 앞에 보관했을 지도 모릅니다.

증거궤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쌉니다. 성막에 사용하는 대부분의 기구들이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쌉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만든 것을 놋으로 쌉니다. 물두멍은 놋 거울로 만듭니다. 조각목은 조각 난 나무토막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아카시아 나무를 말합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을 때, 백향목과 감람나무를 사용했습니다. 솔로몬은 부자였기 때문에 가장 좋은 나무로 성전을 건축했습니다(왕상 6:14-36). 성막을 세울 때, 대부분의 기구들을 조각목(아카시아 나무)을 사용한 이유는 광야에 제일 흔한 나무가 조각목이었기 때문입니다.

조각목은 보통 땔감으로 사용하던 나무입니다. 가시가 나 있고, 뒤틀려 있습니다. 너무 단단해서 건축 재료로 사용하기가 힘든 나무입니다. 조각목은 마치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나무입니다. 그런데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조각목이 모퉁이의 머리 돌처럼 성막 기구를 만드는데 아주 귀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십계명 돌 판이 들어있는 증거궤의 덮개(뚜껑)가 속죄소입니다. 속죄소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서 모세를 만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천사)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25:22)


증거궤(법궤)와 속죄소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증거궤도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고, 예수님도 진리요(요 14:6),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요 1:1). 속죄소는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뜻하고, 예수님 역시 용서와 자비의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7:10-16절은 출애굽기 25:23-30절에서 설명한 떡 상(진설병을 얹는 상)을 만든 이야기입니다.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쌉니다. 길이가 2규빗, 광 1규빗, 높이가 1규빗 반(100*50*75). 금고리 4개가 양쪽에 둘씩 있고, 멜 채가 꿰여 있습니다. 정금으로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잔을 만들어 떡과 함께 놓습니다.

떡상 위에는 떡 열 두 덩이가 두 줄로 올려져 있습니다. 이 떡은 히브리어로 ‘레헴파님’인데, 얼굴의 떡’, ‘면전의 떡’이라는 뜻입니다. 매 안식일마다 새 떡으로 바꿔 놓습니다.



떡상(진설병상)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싼 떡 상 역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조각목(아카시아나무)은 연약한 인간(성)을 뜻하고 금은 예수님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조각목은 보통 땔감으로 사용하던 나무입니다. 가시가 나 있고, 뒤틀려 있습니다. 너무 단단해서 건축재료로 사용하기가 힘든 나무입니다. 조각목은 마치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나무입니다.

그런데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조각목이 모퉁이의 머리 돌처럼 귀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아시고 우리를 감싸주시는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떡 상에 올려진 떡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떡이 12개니까 하나님 앞에 드려진 이스라엘 12지파를 뜻할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의 떡으로 임하신다는 뜻일까요?
제사 상에 떡을 올려놓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일까요? 

떡 상에 올려진 12개의 떡도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12지파를 뜻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장 기쁘게 받으신 떡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51).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떡상은 아카시아 나무(조각목)로 만든 작은 테이블이며 정금으로 그 위에 입혔습니다.
떡상의 크기는 가로가 3피트(90cm) * 세로가 1.5피트(45cm), 그리고 높이가 2피트 3인치(67.5cm) 정도입니다.
떡상은 금등대(금촛대) 맞은 편, 성소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나타내는 12 덩어리의 빵을 그 상 위에 두었습니다.

제사장은 고운가루로 빵을 굽고 일주일(7일) 동안 주님 앞에 항상 떡상을 두었습니다.
매 안식일마다 제사장은 떡을 치우고 그것을 거룩한 성소에서 먹었고, 새롭게 구운 12 덩어리의 떡을 테이블 위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아무나 떡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제사장들만 떡을 먹을 수 있었고, 떡이 거룩하기에 거룩한 성소에서만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먹는 떡을 주님 앞에 항상 거룩하기에 "진설병(bread of the presence)"으로 불렀습니다.
상과 떡은 사람과 함께 교제하고 교통하고 나누는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가 담겨있는 그림을 먼저 구약시대에 성막에서 예표적으로 보여줍니다.

(출 25:30)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
 

그것은 마치 식사 때 친구의 우정을 나누고 교제하는 초대와 같습니다.
일반 세상에서도 사랑하는 친구와 더불어 식사하는 것은 친근한 교제의 한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신 하나님은 자기백성과 더불어 떡상을 사이에 두고 즐거운 식사와 대화, 그리고 사랑과 생명의 교제를 하고자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렇게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원함을 날마다 거절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이 당신과 더불어 영광스럽고 거룩한 사랑의 교제를 위해 당신의 임재가운데로 나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중개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우리가 살펴보는 떡상 곧 "진설병"이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진설병의 의미와 가치를 세리들과 창기들과 유대 사회의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심으로 그 한 예로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 땅에서 관계맺는 친구사이의 우정의 모습을 초월하고 뛰어 넘은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당신 자신에게로 초청하여,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와 바른 교제권 안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인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한 교제와 사랑과 생명의 관계를 맺어 주기 위해 하늘의 영광과 보좌를 모두 버리시고 독생자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요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요 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우리와 생명의 교제를 영원히 갖기 원하셨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 땅으로 그 떡에 참여하는 모두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갖도록 "생명의 떡"으로 자원하여 약속을 좇아 죄인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제자와 함께 한 주님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 때, 주님은 자신을 다시 한번 떡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내십니다. 


(마 26: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정리합니다.
십자가 상에서 우리 자신의 죄로 인해 예수님의 찢겨진 몸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생명의 교제를 영원히 가능토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유월절에 제자들과 맺은 새 언약(예수의 살과 피)의 은혜의 진리(복음)를 성령으로 믿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하늘나라의 모형인 성막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영광과 거룩과 생명으로 교제하며 기쁨과 즐거움의 축제와 같은 예배를 갖고자 원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 약속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런 "생명의 떡"을 나누어 가진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영원한 생명의 교제와 사랑의 나눔과 교통을 위해서 말입니다. 당신은 혹 그리스도 예수 안에 그런 예배자입니까?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 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출애굽기 37:17-24
출애굽기 25:31-40절에서 설명한 순금 등잔대를 만든 이야기입니다.

등잔대는 정금 1달란트(34kg)를 쳐서 만듭니다. 살구꽃 형상의 꽃과 잔과 받침을 만듭니다. 양쪽에 세 개의 가지가 있고 가운데 한줄기로 그 가지들이 연합되어 있습니다. 등잔대에 일곱 개의 등잔이 있습니다. 불 집게와 불똥 그릇도 정금으로 만듭니다.


등잔대


등잔은 성소를 밝히는 유일한 빛입니다. 등잔이 없다면 성소는 칠흑 같은 어둠뿐입니다. 성소에 있는 모든 기구들을 조각목으로 만든 후에 금으로 싸는데, 등잔대만 정금을 쳐서 만듭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겠지요. 금 덩어리를 쳐서 성소를 밝히는 등잔대를 만드는 것처럼 예수님의 고난(죽음)을 통해 세상에 생명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등잔대의 7개 등잔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와 지혜를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빛, 진리의 빛을 상징합니다(요 1:9; 8:12). 등잔에서 사용하는 기름은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사용해야 합니다. 감람열매가 찧어지고 깨짐으로 순전한 기름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참 빛이 세상에 비치게 되었습니다.

등잔대를 설명하면서 반복해서 언급하는 꽃이 ‘살구꽃’입니다. 등잔의 모양을 설명하면서 등잔대 가지와 줄기에 살구꽃 형상의 잔에 대해 반복합니다. 살구꽃’은 팔레스타인에서 봄이 올 때 가장 먼저 꽃을 피웁니다. 살구꽃을 뜻하는 히브리어 ‘샤가드’“파수꾼, 망보다, 깨어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레위 후손인 고라와 다단, 온이 모세를 거역하여 들고 일어났던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 앞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와 아론의 권위(리더십)에 대해 뭔가 말씀하실 게 있었습니다. 그 사건이 민수기 17장에 나옵니다.

민수기 17장에 보면, 놀랍게도 아론의 지팡이에 살구꽃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고 나옵니다. 살구꽃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순종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살구꽃은 하나님 앞에 늘 깨어 있으라는 메시지도 담고 있습니다.

등잔대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어두운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참 빛, 생명의 빛을 비추어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요 1:4-9).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진리의 빛, 지혜와 계시가 우리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출애굽기 37:25-29,
출애굽기 30:1-10절에서 설명한 분향단을 만든 이야기입니다.

분향단은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쌉니다.
가로세로가 1규빗이고, 높이가 2규빗 정사각형이며, 네 모퉁이에 뿔이 있습니다. 단 상단 부분에 금테를 만들고, 금고리 4개가 양쪽에 둘씩 있고 멜 채를 꿰어 놓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이 1년 단 한 번 대속죄일에 분향단의 뿔을 위하여 속죄하고 피를 바릅니다.


분향단


분향단은 성소의 중앙에 위치하고, 지성소 바로 앞에 있습니다. 분향단은 증거궤 위 속죄소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에 위치합니다. 아침마다 향기로운 향기를 사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향기입니다. 저녁에 등불을 켤 때에도 향을 사릅니다.

분향단도 조각목을 정금으로 쌉니다. 우리 힘으로는 결코 향기를 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모두 뒤틀리고 가시가 많이 나 있는 조각목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덮어주시고 감싸 안아주셔야만 향기를 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분향단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고후 2:14-15). 성경은 기도의 분향단에서 피우는 향을 ‘성도의 기도’라고 말합니다(계 5:7,8; 8:3,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린도후서 2:14-15)

“그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요한계시록 5:7,8)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요한계시록 8:3,4)



묵상을 위한 질문


등잔대 가지와 줄기에 살구꽃 형상의 잔이 있다는 내용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등잔대를 만들면서 살구꽃 형상의 잔을 만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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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2022(수) (출애굽기 36:2)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  

출애굽기 36장  /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성막 제작

출애굽기 36-38장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중심으로 성막의 기구들을 만드는 내용입니다.

1-2 공인들의 피택
3-7 헌물이 많이 모이다.
8-19 성막의 앙장, 그 위에 덮는 막, 그 위에 덮는 두개의 덮개
20-30 널판과 그 은 받침의 제작
31-34 띠(항목)의 제작
35-38 간막이 휘장과 출입 문장 및 그 기둥의 제작


출애굽기 36-38장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성막 기구들이 또 한 번 나옵니다. 출애굽기 25장부터 30장까지 나오는 성막 기구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성막 기구들이고, 출애굽기 36-38장에 나오는 성막 기구들은 성막 건축 책임자인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셔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성막 기구들을 만든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36장은 성막 기구 제작(1) - 성막 덮개와 널판과 널판을 연결하는 띠,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성막 휘장을 만들었다는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36:1-7절은 먼저 성막을 건축하는데 헌신한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성막 건축 책임자인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성막을 짓겠다고 자원하여 모였습니다.

모세는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주께서 그 마음에 지혜를 더하여 주신, 기술 있는 모든 사람, 곧 타고난 재주가 있어서 기꺼이 그 일을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불러모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필요한 것을 만드는 데 쓰라고 가져온 모든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침마다 계속, 자원하여 예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성소에서 일을 하는 기술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모세에게 가서 백성들에 예물을 그만 가져오게 해달라고, 너무 많이 가지고 와서 일을 할 수가 없다고 부탁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짓기 위해 온 백성들이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모습 참 감동입니다.


출애굽기 36:8-19절은 출애굽기 26:1-14절에서 이미 설명했던 ‘성막 덮개’를 만들었다는 내용입니다.

성막 덮개는 성막(성소와 지성소)을 보호하는 천막 또는 천인데, 성막을 잘 보호하기 위해 네 겹(4중)으로 덮습니다.

@ 성막 덮개
첫 번째 덮개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천사를 수놓아 만든 휘장
(5폭+5폭=10폭, 청색고리 50X2=100개, 금 갈고리 50개로 연결
20mX14m)
두 번째 덮개
염소 털로 만듦(22mX5m)/ 성막을 덮는 막
(5폭+6폭=11폭, 전면과 후면 1/2 더 내림,
청색고리 50X2=100, 놋 고리 50개로 연결)
세 번째 덮개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만듦, 두 번째 덮개 보다 더 큼
막의 덮개
네 번째 덮개
해달의 가죽으로 만들었고 제 3 덮개 보다 더 큼/ 윗 덮개


성막 덮개


성막의 첫 번째 덮개는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그룹(천사)을 공교히 수놓아서 만든 휘장입니다(출 26:1). 첫 번째 덮개는 길이가 28규빗(14m)이며 너비는 4규빗(2m)으로 5폭씩을(10m) 연결한 두 폭의(20m) 휘장을 50개의 금 갈고리로 연결시켜서 만듭니다.

성막의 두 번째 덮개는 염소 털로 짠 덮개입니다. 길이가 30규빗(15m)이며 너비가 4규빗(2m)의 5폭과 6폭으로 연결된 두 휘장을 청색고리 50개씩을 양쪽같이 달고 놋 갈고리 50개로 연결시켜 만든 11폭의 덮개입니다. 두 번째 덮개는 첫 번째 덮개보다 전면과 후면에 1m씩이 더 내려 덮습니다(출 26:7-13).

성막의 세 번째 덮개는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만듭니다(출 26:14). 숫양은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쳐집니다 이는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예수님께서 흘려주신 피로 구원받았습니다.

성막의 네 번째 덮개는 해달의 가죽(물개 가죽)으로 만듭니다(출 26:14).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성막은 물개가죽(해달의 가죽)으로 덮인 모습밖에 안 보입니다. 초라한 모습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금으로 만들어진 기구들이 있습니다. 눈에 부시게 환하고 아름다운 집이 성막, 하나님의 집입니다.


성막의 덮개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왕궁이나 근사한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동물들의 똥이 나뒹구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작은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목수 요셉의 아들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예수님은 명함 한 장 떳떳하게 내놓을 수 없는 초라한 사람입니다. 유명한 대학졸업장도 없고 아무런 학위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대놓고 예수님을 우습게 보았고 멸시천대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평강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6:20-34절은 성소와 지성소의 벽이 되는 널판과 널판을 연결하는 띠를 만든 내용입니다. 
이미 출애굽기26:15-25절에서 설명 드렸습니다. 기억이 안 나실 것 같아 한 번 더 설명 드립니다.

널판도 모두 조각목(싯딤나무 또는 아카시아 나무)으로 만듭니다. 남쪽에 20개 북쪽에 20개 서쪽에는 벽에 6개 모퉁이에 2개로 8개이며 성막에는 모두 48개의 널판이 필요합니다. 한 널판마다 은 받침이 2개씩 들어갔으니까 은 받침은 총 96개가 필요합니다.

널판에도 보이는 띠가 4줄이 있고 속으로 보이지 않은 1줄의 띠가 있어 모두 5띠의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널판 마다 띠를 꿸 금고리 4개씩이 부착되어 있었으며 널판의 높이는 10규빗(5m)이며 넓이는 1규빗 반(75cm)으로 만들어집니다.



널판과 띠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싼 널판 역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조각목(아카시아 나무)은 연약한 인간(성)을 뜻하고 금은 예수님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조각목은 보통 땔감으로 사용하던 나무입니다. 가시가 나 있고, 뒤틀려 있습니다.

조각목은 너무 단단해서 건축재료로 사용하기가 힘든 나무입니다. 조각목은 마치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나무입니다. 그런데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조각목이 모퉁이의 머리 돌처럼 귀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사용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임하는 거룩한 장소인 성소와 지성소의 벽이 널판입니다. 우리 역시 널판과 같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시니까요. 조각목처럼 거룩한 성전을 만들 재목이 아닌데,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를 향해 고백했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린도전서 3:16,17)


출애굽기 36:35-38절은 출애굽기 26:31-37절에서 이미 설명한 휘장을 만든 내용입니다.

휘장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지성소 휘장(26:31-35)이고 다른 하나는 성소에 들어오는 출입문 역할을 하는 성소 휘장(26:36,37)입니다.



지성소 휘장과 성소 휘장


휘장은 모두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만듭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은 그 위에 천사를 공교히 수 놓아 만듭니다. 색깔도 눈에 띄지만 아름답게 수를 놓은 천사가 있어 더욱 거룩하게 보이는 천입니다.

지성소 휘장은 네 개의 기둥 위에 금 갈고리로 드리워집니다. 네 기둥은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쌉니다. 네 기둥은 은 받침 위에 세워집니다. 휘장을 갈고리 아래로 늘어뜨린 후에 증거궤를 그 휘장 안에 들여놓습니다.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시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리라”(35)

성소 휘장은 다섯 개의 기둥 위에 금 갈고리로 드리워집니다. 다섯 기둥 역시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쌉니다. 성소 휘장과 지성소 휘장을 설치하는 내용이 거의 비슷합니다. 지성소 휘장과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다섯 기둥은 놋 받침 위에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성소보다 지성소가 더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휘장은 모두 예수님을 뜻합니다. 성소로 들어가는 문 역할을 하는 휘장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요한복음 14:6).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은 예수님의 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받혀 돌아가실 때, 성소의 휘장(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몸이 찢어진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태복음 27:50,5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산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브리서 10:19,20)


묵상을 위한 질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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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2022(화) (출애굽기 35:1) 행하게 하신 말씀 

출애굽기 35장  / 성막 건축을 위한 자원하는 예물  

출애굽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2개를 선택한다면 "성막"과 "안식일" 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성막"은 광야에 머물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볼 수 있는 장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거룩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애급에서 급하게 나왔던 히브리 민족에게 광야(미드바르)는 애급보다 더 불편한 거주지라고 느꼈습니다.
마실 물도 없었고 심지어 먹을 것조차 없는 사막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히브리 민족은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성막"이었고, "안식일"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확인할 수 있는 거룩한 날이었습니다.

33-34장은 모세의 중보로 언약을 갱신합니다.
34장은 모세의 얼굴의 광채(카란)에 의해서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웠습니다.
35장은 비로서 성막 제작이 시작됩니다. 

* 죄는 순식간에 짓지만 회개는 어렵다!

성막 제작 과정

1. 안식일 명령(35:1-3) / 창조 질서 회복
2. 성막 재료 준비(35:4-36:7) /
3. 성막 건설(36:8-38, 26:1-37)
4. 언약궤(37:1-8, 25:10-25) / 언약 위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사도행전 2:4,
 사도행전 2:2, 앉아 있다는 말씀을 듣는 자세, 유대인은 기도할 때와 말씀을 읽을 때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가복음 4:20, 랍비가 강의하는 것은 앉아 있는 것
 * 앉은 자리는 말씀을 경청하는 자리 - 오순절 성령 강림은 곧 통성 기도가 아니라 말씀을 경청하던 자리라고 하겠다.
 사도행전 10:44,
 * 성령 강림과 말씀의 일치되는 현상을 앉아 있을 때에서 찾는다.
 
요한복음 14:26,

5. 떡상(37:10-16, 25:23-30)
6. 등잔대(27:17-24, 25:31-40)
7. 분향단(37:25-29, 30:1-5, 30:22-38)
 
요한계시록 8:3,
 창세기 22:2,
 창세기 18:2,

8. 번제단(38:1-7, 27:1-8)
9. 놋 물두멍(38:8, 30:18)
10. 성막울타리(38:9-20, 27:9-19)

* 성막의 제작 과정은 안에서부터(언약궤) 시작하여 성막 밖으로(성막울타리) 진행되었다.
로마서 15:15. 대략

회막과 성막의 차이는?
성막은 출애굽기 40장에서 완성되었다
회막은 모세가 들어갈 수 있었으나(33:7-11) 성막은들어갈 수 없다(40: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 회막은 모세의 기도로 백성들에게 임할 진노를 제하시고 가나안 땅에 하나님은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므로
이때에 주어진 것이 회막이었다.
모세가 회막에 나갈 때에만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다.
회막은 이스라엘 진영 밖에 쳤다.
성막은 이스라엘 진영 안에 쳤다. 이스라엘의 왕국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


회막(會幕)과 성막(聖幕)

성막(מִשְׁכָּן ) 4908

1.  거주,  2. 굴,  3. 욥기 18:21 

발음 / 미쉬칸(mishkan)

어원 / 79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장막(출 25:9, 레 15:31, 대하 1:5), 성막(출 26:1, 민 3:26, 대상 23:26), 휘장(출 26:35), 회막(출 39:32, 민 3:7, 대상 6:32),
집(욥 18:21), 거처(시 49:11, 78:28, 사 32:18, 렘 9:19), 처소(시 132:5, 사 22:16, 겔 37:27).
[동] 계시다(시 26:8), 살다(욥 21:28).
구약 성경 / 139회 사용

* 7931. 솨칸(shâkan)   שָׁכַן
1. 아래 앉다,  2. 눕다,  3. 거주하다

발음 / 솨칸(shâkan) 

관련 성경 / 거하다(창 9:27), 들어가다(출 40:35), 엎드리다(신 33:20), 깃들이다(사 13:21, 겔 17:23), 머물다(출 24:16, 민 9:22, 잠 7:11), 계시다(왕상 8:12, 사 8:18), 살다(욥 30:6, 렘 46:26), 덮이다(욥 3:5), 쉬다(나 3:18), 두다(신 12:11, 느 1:9, 렘 7:12), 세우다(수 18 : 1),
떨어뜨리다(시 7:5)
[명] 소유지(수 22:19), 주소(잠 8:12), 있는 곳(욥 38:19).
구약 성경 / 129회 사용
회막( סֻכָּה) 5521

1. 오두막,  2. 회막의 축제  הַג הַסֻּכּוֹת

레위기 23:43

관련 성경 / 우릿간(창 33:17), 초막(레 23:42, 느 8:14, 욘 4:5), 야영(삼하 11:11), 장막(삼하 22:12, 왕상 20:12, 시 18:11), 굴(욥 38:40),
원두막(사 1:8), 천막(사 4:6, 암 9:11).

구약 성경 / 31회 사용




드디어 성막을 짓는 일이 시작됩니다.
먼저 모든 회중들에게 성막을 짓는 일에 필요한 재료들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함께 나누려는 신앙의 모습을 세 가지로 살펴봅니다.

첫째, 자원하는 신앙(5절, 21절, 22절)
둘째, 동역하는 신앙(10절, 26절)
셋째, 숙고하는 신앙(32절)


시내 산에서 두번째 십계명 돌판을 받아 온 모세가 성막 건축을 위한 각종 기구와 장비를 설명하고 백성들은 그것을 만들기 위한 재료를 즐거이 바친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모세는 성막 건축에 앞서 안식일에 관한 규례를 한 번 더 강조하였다(1-3절).
그리고 성막 건축에 필요한 각종 재료와 만들어야 할 기구와 장식들에 관해 설명하였다(4-19절).
그러자 백성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각종 장신구를 비롯한 재물들을 기꺼이 하나님께 바쳤다(20-29절).
이를 본 모세는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뽑아 성막 건축의 모든 것을 감독하고 제작하게 하였다(30-35절).


1-3. 안식일에 관한 모세의 교훈
4-19. 성막을 위해 헌물 할 것과 그에 필요한 기구들을 제조할 것을 명하다.
20-29. 백성들이 즐겨 여러가지의 헌물을 하다.
30-35. 공인에 대한 모세의 훈시

출애굽기 35장은 성막을 건축하기 위해 백성들이 자원하여 예물을 드린 내용과 하나님께서 성막 건축 책임자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세우신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35장은 성막 건축을 위해 필요한 재료(예물)와 사람을 준비하는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35:1-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말씀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아 놓고 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명하신 말씀은 이러하다. 엿새 동안은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렛날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 곧 주께 바친 완전히 쉬는 안식일이므로, 그 날에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형에 처해야 한다. 안식일에는 너희가 사는 어디에서도 불을 피워서는 안 된다.

성막을 건축하라고 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신 것은 안식일에 대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막을 건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는 않는 성막을 건축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성막보다 먼저 지어야 할 눈에 보이지 않는 성막은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안식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공간의 성소 - 성막 -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공간(장소)
시간의 성소 - 안식일 -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

출애굽기 35:4-9.
성막 건축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원해서 하나님께 드릴 예물 

너희 소유 중에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바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주께 예물을 바칠 수 있는데, 성막 건축을 위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예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금, 은, 동, 청색, 자색, 홍색, 가늘 게 꼰 베 실, 염소 털, 붉게 물들인 숫양 가죽, 해달 가죽, 조각목
(아카시아 나무), 등잔용 기름, 관유(예식용 기름)에 넣는 향품, 분향할 향에 넣는 향품,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들

출애굽기 35:10-19.
하나님께서 만들라고 명령하신 성막 기구들


마음이 지혜로운 자가 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을 다 만들어야 합니다.

성막과 그 덮개, 그 윗덮개, 갈고리와 널판, 그 띠, 기둥, 받침, 증거궤와 그것에 딸린 채와 속죄판과 그것을 가릴 휘장, 상과 상을 옮기는 데 쓸 채, 그 밖의 모든 기구와 상에 차려 놓을 빵, 불을 켤 등잔대와 그 기구, 등잔과 등잔용 기름과, 분향단과 단을 옮기는 데 쓸 채와 예식용 기름과 분향할 향, 성막 어귀의 휘장, 번제단, 거기에 딸린 놋그물과 번제단을 옮기는 데 쓸 채와 모든 기구, 물두멍과 그 받침, 뜰의 휘장, 그 기둥과 밑받침과 뜰의 정문 휘장, 성막의 말뚝과 줄, 울타리의 말뚝과 줄, 성소에서 예식을 올릴 때에 입는 잘 짠 옷, 곧 제사장 아론의 거룩한 옷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 일을 할 때에 입는 옷

출애굽기 35:20-29.
성막 건축에 필요한 재료들과 그것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들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
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남녀 구별 없이 스스로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장식 핀과 귀고리와 반지와 목걸이 등 온갖 금붙이를 가져 왔으며, 그 모든 사람이 금붙이를 흔들어서 주께 바쳤다.
2. 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홍색 실과 가는 모시 실과 염소 털과 붉게 물들인 숫양 가죽과 돌고래 가죽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그 물건들을 가져 왔다.
3. 은과 동을 예물로 바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주께 그 물건들을 예물로 가져 왔다.
4. 제사 기구를 만드는 데 쓰는 아카시아 나무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가져 왔다.
5. 재주 있는 여자들은 모두 손수 실을 빼서, 그 뺀 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홍색 실과 가는 모시 실을 가져 왔다.
6. 타고난 재주가 있는 여자들은 모두 염소 털로 실을 자았다.
7. 모든 족장은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을 가져왔다.
8. 모든 족장은 향품과 등잔용 기름과 예식용 기름과 분향할 향에 필요한 기름을 가져 왔다.
9. 스스로 바치고 싶어 하는 모든 남녀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서 모세를 시켜 명하신 모든 것을 만들려고, 기쁜 마음으로 물품을 가져다가 주께 바쳤다.

출애굽기 35:30-35.
성막 건축 책임자 브살렐과 오홀리압

출애굽기 31:1-11에도 브살렐과 오홀리압 이야기가 나옵니다.
출애굽기에 두 번 나온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3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 건축 책임자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임명한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35장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막 건축을 위해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세우셔서 그 일을 하게 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유다 지파 사람, 훌의 손자이며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가득하게 하시고,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온갖 기술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 내어, 그 생각해 낸 것을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고, 온갖 기술을 발휘하여, 보석을 깎아 물리는 일과, 나무를 조각하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단 지파 사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 묵상을 위한 질문

하나님께서 감동시키사 그에게 남을 가르치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하나님께서 성막을 건축하기 위해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책임자로 세우실 때, 그들을 선택하신 기준은 무엇입니까?

오늘 나를 움직이게 하는 말씀은 무엇일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를 향하여 부활하신 주님께서 질문하셨던 말씀입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믿는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정말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라고 거듭 강조하여 질문한다면 주저할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나는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나의 사랑이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나의 사랑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의 사랑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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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2022(월) (출애굽기 34:30, 모세의 얼굴)

출애굽기 34장  / 언약의 갱신  


출애굽기 34장 내용 구조

     1-4. 모세가 다시 산에 오르다(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5-9.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선포하시다(여호와로라)    
   10-17. 하나님의 약속과 경계(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맺지말라)

     17-27. 안식일과 삼대 절기를 지키라(무교절, 칠칠절, 수장절)

     28-35. 모세의 하산과 변모(얼굴의 광채)

출애굽기 34: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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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채(카란. qâran) קָרַן  

(29, 30, 35절)

출애굽기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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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번역)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공동번역) 야훼와 대화하는 동안에
(현대인) 여호와와 말하였으므로



첫번째 언약
출애굽기 32:15-16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 오는데
증거의 두 판이 그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편 저편에 글자가 있으니.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두번째 언약
출애굽기 34: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아침 전에 예비하고 아침에 시내산에 올라와
산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마태복음 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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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형되사(메타모르포오, mĕtamŏrphŏō) μεταμορφόω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것처럼
다른 차원으로의 변화

마태복음 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로마서 5:19 /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야고보서 2:23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로마서 3:28 /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사도행전 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5절 /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
8절 /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디모데후서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히브리서 6:1- 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요한삼서 1: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오늘의 기도
선과 악을 분별하는 지혜
오직 선을 행하는 믿음으로  

왜 처음 것과 같은 두 개의 돌판을 깎아서 준비하라고 하셨을까?
처음 돌판은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처음의 것을 던져서 깨트린 것이 모세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순종하려 할 때는 반드시 그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요나가 타고 있던 배가 큰 풍랑을 만났을 때 요나는 나를 니느웨로 보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바다로 던져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다에서 큰물고기가 요나를 삼키고 요나는 그 큰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지내며 회개합니다.
그리고 요나는 니느웨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얼굴의 ‘얼’은 영혼(靈魂)을 뜻하며 ‘굴’은 구멍(窟)을뜻합니다. 
얼굴은 영혼이 드나드는 통로라는 뜻입니다. 
우리말의 ‘얼’은 모두 ‘혼’이라는 뜻입니다.
‘얼빠지다’라는 말을 ‘혼이 빠지다’로 쓰이기도 합니다.
‘얼씨구’란 말은 혼이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얼싸안다’는 반가워두 팔을 벌리며 혼을 싸 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영적존재입니다. 
그래서 저쪽에 누가 숨어서 나를 몰래 보면 누가 있는 것 같아 쳐다봐집니다.

‘얼핏’이란 말은 그런 의미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얼굴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거울에 비친 내 영혼의 상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데반은 순교 직전 공회 앞에 섰을 때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환하게 빛났습니다(행 6:15). 
그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놀라워했습니다. 
성경은 스테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보였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 7:55). 
우선 성령 충만했습니다.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술 취하는 것과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술 취함과 성령 충만과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말수가 늘고, 노래를 하고, 권하고, 감정적이 되고, 용감해지고, 지배당하고, 중독되고, 냄새를 풍깁니다. 
아마 바울도 둘 사이의 공통점을 생각하며 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상적인 공통점은 있어도 그 내용과 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술은 사람을 방탕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우리에게 참된 기쁨을 주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술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으로 기쁨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스데반은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스데반의 순교를 앞두고 그를 격려하기 위해서 영광스러운 환상을 보여 주셨을 것입니다. 복음서와 바울 서신을 보면 일반적으로 승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마26:64, 눅 22:69, 엡 1:20, 골 3:1, 히 1:3).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도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본 환상에서는 예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서 계셨을까요? 많은 주석가들이 이에 대해 ‘순교자를 격려하고 환영하기 위해서’라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을 환영하는 주님을 바라본 스데반에게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도 감내할 수 있는 은혜를 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때마다 필요한 은혜를 주십니다. 암 환자들을 돌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렸지만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으로 충만하니 세상을 떠날 때 얼굴이 맑고 밝고 깨끗하고 평안했습니다.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모두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라고 하십니다. 세상 것으로는 일시적으로 기뻐할 수 있지만, 항상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변함없는 하늘의 것이 있어야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도하고 돌아와 성과를 보고하며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늘은 기쁨의 근원이고 본질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우리가 갈 곳을 예비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보장을 해주셨는데도 걱정하며 얼굴이 어둡고 침침하다면 과연 나에게 믿음이 있는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도록 하늘을 소망해야하고, 성령 충만으로 마음의 근심을 몰아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중요한 언약을 체결하는 신성한 기간 동안에 오히려 황금 송아지를 만들면서 추태를 부려온 자들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목이 뻣뻣한 백성(32:9)이라 하시면서 그들을 진멸해버리겠다고 서두르셨습니다.

이를 막아선 사람이 바로 언약의 중개자 모세였으며 하나님과 다시금 대화의 물꼬를 터 갔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오래 전 알아오던 친구처럼 하나님과 깊은 신뢰의 관계를 회복하였고 이로 인해 두 번째 돌판을 받으러 다시 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은혜의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돌판 두 개를 처음 것과 똑같이 다듬고 깎아서 만들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모세가 직접 돌판을 만든 것인지는 몰라도 밤새도록 돌판을 깎아 만든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모세는 급히 제작된 두 돌판을 들고서 아침 일찍 시내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은 그 판에다 모세가 깨뜨렸던 첫 돌판에 새겼던 동일한 언약 말씀을 똑같이 새겨주셨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행위에 근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고 있는 관계였던 것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중대 범죄를 저질러 진멸할 뻔한 최대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백성으로 인정해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산 정상에까지 올라선 모세가 구름 가운데 휩싸인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들은 하나님의 첫 메시지 또한 이것을 잘 뒷받침해줍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6-7절).

하나님께서 인자와 자비가 넘치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자손 삼사 대까지 죄를 묻겠다 하신 것은 다름 아니라 황금 송아지 사건에 대해 가족의 살아있는 구성원 모두에게 공동체 개념으로 그 죄를 묻겠다는 하나님의 의지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죄에 대해 보응하실 뿐 아니라 가족 전체를 은혜의 자리로 인도해가기 위해서는 때로 징계도 서슴지 않으시는 영적인 아버지와 같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첫 언약이 맺어진 순간부터 가장 패역한 죄악으로 그 언약을 서슴없이 위반했건만,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용서와 더불어 새로운 언약을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언약의 중개자요 기도의 중보자인 모세는 이번에 또 다시 하나님께 납작 엎드려 목이 뻣뻣한 백성을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산 정상에 올라가서 처음 성막 제작과 관련해 하나님의 세밀한 지침을 듣느라 40일간 체류하고 있는 와중에 하나님을 통해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는 진노하심을 눈으로 보았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비서 여호수아와 터벅터벅 산 아래로 내려오다가 금 송아지 우상숭배 현장을 목격하고서 그때까지 손에 들고 있던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버렸습니다(32:19). 그러자 그 돌판이 산으로 내려가면서 돌과 돌끼리 부딪히며 깨어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마음이 깨어진 것이 아니라 돌비가 깨어졌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단단하고 완악한지 죄를 지을 때 잘 압니다. 사람끼리 부딪히면 잘 양보하지 않고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목소리를 높이고 심지어는 얼토당토 않는 억지를 부리면서까지 자신을 정당화하는 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이 속한 이스라엘이 목이 뻣뻣한 공동체임을 고백합니다.
모세가 ‘목이 곧은 백성’이라 말하고 납작 엎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입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깨어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고 교만한 자는 한없이 낮추게 하시지만, 자신을 죄인이라 인정하고 깨어진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오는 자에게는 또한 한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과 다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맺으시면서 신신당부한 것은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가나안 족속들과의 평화 협정은 나중에 가서 올무로 걸려 넘어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중 언약을 맺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유혹거리들에 노출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쉽사리 마음속에 도사린 죄된 속성으로 말미암아 때로는 못 이기는 척 악하고 추잡한 것을 허용하고 눈감으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때로는 건강한 상식을 넘어서서 과감히 세상의 가치를 쫓아가고 있는 우리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싸움은 눈에 보이는 싸움이 아닙니다. 이 작은 머리와 가슴 속에, 생각 속에서 매일 치열한 전투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이익 때문에 인간의 가치를 무시하는 사고방식과의 싸움이요, 돈 때문에 사람의 인격을 파는 사업적인 마인드와의 치열한 싸움입니다.

가나안 종교는 또한 성적인 즐거움을 주는 종교였습니다. ‘아세라’ 신상은 가슴을 내놓은 음란한 여신상이었고 성적인 타락을 오히려 정당하고 부추기는 문화생활로 꼬드기는 집단입니다. 오늘날 성의 남용으로 점점 더 음란해지고 사람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문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럴수록 우리의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심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경계선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중 언약을 경계하십니다. 우리 마음에 그것을 명심하고 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하기에 늘 우리들 삶의 기쁨의 근원이 하늘에 둔 또 다른 질료들임을 깨닫고 누리며 사는 자이길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교회와 세상에서 늘 회색지대 근처에 주변 경계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적극적인 해답이 되기에, 로마서에서의 권면처럼 의의 병기로 우리 자신을 드리려고 애쓰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황금 송아지 사건을 거울삼아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경험하게 되면서 35장부터는 성막을 실제로 제작하는 데 놀라운 열성을 보여줄 정도로 바뀌어졌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하늘 양식을 공급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무는 우리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40일 동안 모세는 물과 음식을 전폐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얼굴에는 광채가 났습니다.
이 광채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함으로 인하여 생긴 광채이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뒤덮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산에서 내려올 때 모세 자신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론과 온 백성은 모세의 광채를 보고 그에게 접근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르신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전한 후에 수건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하나님 앞에 들어갈 때에만 수건을 벗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아닌 모세에게 집중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모세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얼굴에 수건을 가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 모세가 하나님과 40일을 있을 때에는,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지만,
두 번째 모세가 40일을 하나님과 있었을 때에는 그 얼굴의 광채를 보여주심으로, 결코 이스라엘이 다른 생각을 품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모세의 빛나는 얼굴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에 대한 분명한 각인이 되고, 모세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리더십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정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본문이 주는 교훈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첫째, 예배는 하나님의 성품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아가는 것은,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면 알수록, 예배하지 않을 수 없고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언약은 세상과의 언약을 배제합니다.
세상과 벗됨은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셋째, 우리가 성도로서 추구하고 살아야 할 가장 큰 가치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을 구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아 아는 은혜와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부메랑(Boomerang)

영어로는 "부머랭"이라고 발음한다.
호주 원주민의 단어를 음차한 것인데다 원주민들도 부족마다 이를 달리 발음하였기에 (워머랑, 워머레잉, 보머랑 등등) "진짜" 발음은 달리 없는 셈이다.

세간에서는 하술할 리터닝이 유명하여 부메랑이면 '반드시 돌아오는 나무토막'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다. 부메랑은 '그냥 물건을 던졌을 때보다 멀리 날아간다는 점'에 착안하여 무기・수렵 도구로 발전한 투척 소모용 도구이며, 오히려 돌아오도록 만드는 것이 특수한 사례이다.

사냥용 부메랑은 투척무기의 일종으로 30~80 cm가량 되는 휘어진 나무조각이다.
나무로 제작된 이 무기는 ㄴ 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모양인데, 던지면 빙글빙글 돌아가며 날아가지만 직선으로 날아가며 되돌아오지 않는다.
이때 회전력에 의해 부메랑의 어느 부분이 상대에게 맞든 대미지는 충분하다.

던지는 방법은 ㄱ 자 상태에서 한쪽 날개가 앞을 향하게, 마치 낫을 잡듯이 쥐고 던지는 것이다.
전투용 부메랑은 일반적인 ㄴ자 모양과는 다르며, 두껍고 길고 거대하다. 이것을 던져서 공격하기가 원주민의 주된 전법이었으나, 후대에 창이 발명되며 사장되었다.
원래 이 사람들이 호주에 처음 이주할 때는 원시적이나마 활도 있었으나, 호주에 활의 재료가 될 만한 나무가 고갈되면서 활 대신 부메랑을 만들었다.

부메랑이 유럽인들에게 처음 소개된 것은 1804년인데, 당시 부메랑을 목격했던 이들이 부메랑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지 아주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터키인의 시미터처럼 굽고 날이 선 나무 막대를 붕가리족 전사가 던졌는데, 투척 솜씨는 매우 정교했으며 투척력 또한 엄청났기에 우리 백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기는 20~30 야드(18~27미터)를 날아간 뒤 공중에서 놀라운 속도로 방향을 전환해 적의 오른팔을 가격한 후 튕겨져 적어도 70~80야드(64~73미터)를 더 날아갔다. 적의 팔은 끔찍한 타박상을 입었으며 구경하던 이들 모두 그 솜씨에 감탄하였다.


부메랑이란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아보리진(Aborigine)이 동물 뼈 등으로 만들어 새를 잡을 때 사용한 것으로 던지면 다시 돌아오는 도구입니다.

이후에는 새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냥이나 다른 부족과 전투를 벌일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부메랑이 목표물에 맞지 않고 되돌아오면, 이는 자신이 공격받을 수 있다는 위험 신호였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같이, 의도를 벗어나 오히려 위협적인 결과로 다가오는 상황을 '부메랑 효과'라 합니다.


사람들을 대하는 마음은 부메랑 효과와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악의를 가지고 대할 때 때로는 그 악의가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경우가 제법 많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나쁜 일을 곰곰이 살펴보면 스스로 저지른 나쁜 일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당신이 행한 좋은 일은 당신에게 일어난 좋은 일의 밑거름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 네게서 나간 것은 네게로 돌아온다.
(戒之戒之, 出乎爾者, 反乎爾者也)   - 증자(曾子)

얼굴(파님, 6440)  פָּנִים

1. 얼굴,  2. 활용 예 : 대면  / 파님 엘 파님(פָּנִים אֶל פָּנִים)

발음 / 파님(pânîym)  

어원 / 643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얼굴(로부터 피하다)(창 16:8), 대항(창 16:12),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다)(창 17:3, 민 16:4), (소돔) 쪽(으로 향하다) (창18:16), 소원(창 19:21), 앞(창 23:12), 섬김(창 24:40), 말미암음(창 27:46, 출 8:24, 레 26:10),  (기근)까닭(창 47:13), 인도(출 32:1, 민23:28), 얼굴(레 17:10),  (세력 있는) 자(레 19:15), 거느림(신 3:28), 낯(창 3:8, 출 2:15), 위(창 6:1), 얼굴(창 9:23, 출 10:28, 민 12:15), 나그네(창 23:4), 후일(창 30:33), 맞은편(출 14:9, 신 32:49), 목전(출 17:6, 수 10:12), 진설병(출 39:36), 들(레 14:7, 민 19:16), 선봉(신 3:18), 용모(신 28:50), 본래(수 11:10), 손(삿 2:14), 전례(룻 4:7), 선견자(삼상 9:19), 건너편(삼하 10:16), 아귀(삼하 17:19), 부하(삼하 18: 9), 내소(왕상 6:20), 옛적(대상 4:40), 몸(대하 35:22), 가죽(욥 41:13), 앞잡이(잠 16:18), 생명(잠 16:15), 시작(잠 17:14), 형편(잠 27:23), 안색(사 3:9), 까닭(사 10:27), 얼굴가리개(사 25:7), 사람(사 36:9), 이전(사 41:26), 얼굴빛(렘 30:6), 내시(렘 52:25), 대적(애 1:5), 모양(겔 1:28), 징조(겔4:3), 빈들(겔 39:5), 현관(겔 40:22, 26), 출입구(겔 42:11),어귀(겔 42:12).
구약 성경 / 2038회 사용

* 6437(파나, pânâh)  פָּנָה

1. 돌다,  2. 향하게 하다,  3. 창세기 18:22

관련 성경 / 권고하다(레 16:9, 왕하 13:23), 돌아가다(신 16:7, 수 22:4, 렘 50:16), 돌이키다(신 31:18,왕하 2:24, 겔 10:11), 돌아보다(왕상8:28, 대하 6:19, 렘 47:3), 떠나다(신 29:18, 왕상 17:3), 지나가다(시 90:9), 보다(대하 26:20, 욥 6:28, 전 2:11), 쳐다보다(사 8:21), 가다(사 53:6), 올라가다(렘 6:4), 들다(창 25:63), 거스르다(출 14:27), 들어오다(신 23:11), 엎드러지다(삿 19:26), 향하다(창 18:22, 겔 17:6), 돌리다(신 1:7), 들어가다(신 1:40,  2:1), 돌이키다(사 45:22), 살피다(출 2:12), 바라보다(출 16:10, 민 16:42), 만들다(레 19:4), 추종하다(레 19:31, 20:6), 정탐하다(신 1:24), 돌아서다(수 7:12), 보이다(수 8:20), 나오다(삼상 13:17), 행하다(왕상 2:3), 이르다(수 15:2), 돌아오다(렘 46:5, 겔 44:1), 섬기다(호 3 :1), 예비하다(사 40:3), 준비하다(시 80:9), 쫓아내다(습 3:15), 수축하다(사 57:14), 매다(삿 15:4).
[부] 도리어(학 1:9).
[명] 새벽(시 46:5), 모퉁이(대하 25:23).
구약 성경 / 135회 사용

얼굴 : 한글
한글사전에서 얼굴에 대한 정의를 소개합니다.

1. 사람의 눈·코·입·이마·턱 및 두 뺨과 두 귀 등이 있는 머리의 앞면. 또는, 그 전체적 윤곽이나 생김새. 안면(顔面). 용안(容顔).
"귀여운 얼굴"

2. 사람의 감정이나 체면 등을 드러내는 부분으로서의 머리 앞면. 낯. 체면. 면목.

얼이란 "영혼"을 의미하고, 굴이란 "동굴(통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얼굴이란 영혼이 드나드는 통로 즉 마음의 창 또는 생각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얼굴을 깎다"

얼긴이는 얼이 간 사람
어른은 얼이 큰 사람
어린이는 얼이 이른 사람
어리석은 이는 얼이 썩은 사람
얼이 빠진 사람은 멍한 사람을 말합니다. 

광채(카란. qâran) 7160.  קָרַן

광채(카란. qâran) 7160.  קָרַן 

1. 빛나다,  2. 히필형, 뿔나다

발음 / 카란(qâran)
관련 성경 / 광채가 나다(출 34:29, 30, 35).  [명] 뿔(시 69:31).
구약 성경 / 4회 사용

뜻풀이부

1. 빛나다, 출 34:29, 30, 35.
  a. 히필형 : 뿔이 나다, 시 69:32(1).

뿔(케렌. qeren) 7106. קֶרֶן

1. 뿔,  2. 뿔로 만들어진 용기,  3. 나팔

발음 / 케렌(qeren)
어원 / 710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뿔(창22:13, 삼상2:1, 시148:14), 양각나팔(수6:5), 양각(왕상1:39), 나팔(대상25:5), 뿔(시75:4), 산(사5:1), 광선(합3:4).
구약 성경 / 76회 사용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은 단순히 사물을 보는 기능 뿐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고 의사소통에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눈을 통해서 밖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눈을 보면 어느 정도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코나 입이나 귀는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마음을 알 수 없지만, 눈을 보면 어느 정도 그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사나운 사람은 눈빛도 사납고, 마음이 불안한 사람은 눈빛도 불안하고, 마음에 거리낌이 있는 사람은 눈빛도 맑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꾸짖었습니다.
눈의 기능 중 가장 나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것은 크게 보고,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흐리게 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눈빛이 우리의 시선에도 가득한 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눈에서 사람의 성격을 읽을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스웨덴 오레브로 대학의 마트 라르손 박사는 과학전문지 '생물심리학(Biological Psychology)' 최신호에 발표한 연구논문에서 눈의 홍채(虹彩)에 있는 구멍(음와)과 선(수축구)을 분석하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홍채의 구멍과 선들은 동공이 확대될 때 형성된다.

라르손 박사는 428명의 홍채를 근접촬영한 사진을 분석하고 각자 성격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구멍이 많은 사람들은 성격이 온화하고 따뜻하며 사람을 쉽게 신뢰하는 성격인 반면 선이 많은 사람은 신경질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라르손 박사는 홍채의 이러한 차이는 태아 때 홍채의 발달을 조절하는 유전자로 알려진 PAX6 신경발달유전자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생각된다면서 홍채의 이러한 개인적 특징은 개인차를 나타내는 생물표지(biomarker)로 이용될 수도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유전자가 변이되면 충동적 성격을 갖게 되고 사회성이 저하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라르손 박사는 지적했다.

이에 대해 영국 버킹엄셔 칠턴스 대학 심리학교수인 조지 필드먼 박사는 유전자에 의해 형성되는 성격적 특징을 눈의 홍채를 통해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말하고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금언은 유전적 근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행복의 얼굴
김현승(1913-1975)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이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

오늘의 얼굴
박목월(1916-1978)

세수를 하고
마른 타올로
얼굴을 문지른다
오늘의 얼굴
누구에게나
오늘은 새롭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날마다
새로 창조된
아침을 맞이한다.
세수를 하고
누구나
오늘의 얼굴과
대면한다
거울에 비치는
늙고 주름진 얼굴
그것은
오늘의 나의 얼굴
그러나 뉘우칠 것이 없다
마른 타올로 얼굴을 문지르는
신선한 시간 속에서
천하의 모든
꽃가지에는
오늘의 꽃송이가 벌어지고
오늘의 태양이 빛난다
어떻게 살아도
충만할 수 없는
이 신선한 시간 속에서
얼굴을 씻고
눈보다 흰 타올로
문지른다.
 

출애굽기 34장 / 언약의 갱신

1-4. 모세가 다시 등산하다.
5-9.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선포하시다.
10-17. 하나님의 약속과 경계
18-27. 안식일과 삼대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 및 첫 새끼의 대속
28-35. 모세의 하산과 변모

모세는 금 송아지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이 깨졌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받았던 십계명 두 돌 판을 깨뜨려버렸습니다(출 32장). 

모세는 다시 십계명 두 돌판(증거판)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그 내용이 출애굽기 34장에 나옵니다.

언약 갱신의 첫 단계로, 모세가 두 돌 판을 처음 것과 같이 만들었습니다.
모세는 두 돌 판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그 돌 판을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산으로 올라갑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십니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나는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34:6-7)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서 경배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주께서 저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사실이면, 주께서는 우리와 함께 가 주시기 바랍니다.
이 백성이 고집이 센 백성인 것은 사실이나, 주께서 우리의 악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주의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34:10-1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시 언약을 맺는다 

“내가 이제 너희와 언약을 세운다. 내가 너희 모든 백성 앞에서, 이 세상 어느 민족들 가운데서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놀라운 일을 하여 보일 것이다. 너희 주변에 사는 모든 백성이, 나 주가 너희에게 하여 주는 그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것을 삼가 지키도록 하여라. 내가 이제 너희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겠다.”(34:10-1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들(1)

1. 너희는 삼가, . 너희가 들어가는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않도록 하여라
2. 너희는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그들의 석상을 부수고, 그들의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려라.
3. 너희는 다른 신에게 절을 하여서는 안 된다.
4. 너희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아라.
5. 너희는 신상을 부어 만들지 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특별히 언약을 맺으시면서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하신 명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12, 15)”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씩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하신 이유

1.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올무가 될까 봐
2. 그들이 자기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따를까 봐
3. 그들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제물을 드릴까 봐
4. 그들이 너를 청하면 그 제물을 먹을까 봐
5. 너희가 너희 아들들을 그들의 딸들과 결혼시키면, 그들의 딸들은 저희 신들을 음란하게 따르면서, 너희의 아들들을 꾀어, 자기들처럼 음란하게 그 신들을 따르게 만들 까 봐


출애굽기 34:18-2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들(2)
1. 무교절을 지키고 일주일 동안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어라.
2. 처음 태어난 짐승들은 다 하나님께 바치라. 모두 하나님의 것이니까.
3. 너희 아들들 가운데 맏아들도 모두 대속해야 한다.
4. 아무도 내 앞에 빈 손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5. 6일 동안 일하고, 제 7일에 쉬어야 한다.
6. 밀을 처음 거두어들일 때에는 칠칠절을, 한 해가 끝날 때에는 수장절을 지켜야 한다.
7. 모든 남자들은 모두 한 해에 세 번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주 앞에 나와야 한다.

      위에 나오는 7번 명령에 순종하면 – 언약을 맺으면 - 받는 복이 여기 있습니다.
       1. 내가 뭇 민족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너희의 영토를 넓혀 주겠다.
       2. 너희가 한 해에 세 번, 주 너희의 하나님을 뵈려고 올라올 때에, 아무도 너희의 땅을 점령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8. 너희는 나에게 바치는 희생제물의 피를, 누룩을 넣은 빵과 함께 바치지 말아라.
9.유월절 제물은 이튿날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10. 너희는 너희 땅에서 난 첫 열매 가운데서 제일 좋은 것을 주 너희의 하나님의 집으로 가져오너라.
11. 너희는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면서 하신 명령들


12.
너희는 삼가, 너희가 들어가는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않도록 하여라.
13.
너희는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그들의 석상을 부수고, 그들의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려라.
14.
너희는 다른 신에게 절을 하여서는 안 된다.
15.
너희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아라.
17.
너희는 신상을 부어 만들지 마라.
18.
무교절을 지키고 일주일 동안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어라.
19.
처음 태어난 짐승들은 다 하나님께 바치라. 모두 하나님의 것이니까.
20.
너희 아들들 가운데 맏아들도 모두 대속해야 한다.
20.
아무도 내 앞에 빈 손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21.
6일 동안 일하고, 제 7일에 쉬어야 한다.
22.
밀을 처음 거두어들일 때엔 칠칠절을, 한 해가 끝날 때엔 수장절을 지켜야 한다.
23.
모든 남자들은 모두 한 해에 세 번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주 앞에 나와야 한다.
24.
너희는 나에게 바치는 희생제물의 피를, 누룩을 넣은 빵과 함께 바치지 말아라.
25.
유월절 제물은 이튿날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26.
너희는 너희 땅에서 난 첫 열매 가운데서 제일 좋은 것을 주 너희의 하나님의 집으로 가져오너라.
26.
너희는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 된다.


출애굽기 34:27-35,
하나님께 십계명 두 돌판(증거판)을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들을 기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에 기록하였습니다.

모세가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습니다.
주와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모세 얼굴의 살결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로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모세가 그들을 부르자, 아론과 회중의 지도자들이 모두 그에게로 가까이 갔습니다.

모세가 먼저 그들에게 말을 거니, 그 때에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로 가까이 갔습니다.
모세는, 주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하였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하던 말을 다 마치자,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주 앞으로 들어가서 주와 함께 말할 때에는 수건을 벗고, 나올 때까지는 쓰지 않았습니다.
나와서, 주께서 명하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게 되므로, 모세는, 주와 함께 이야기하러 들어갈 때까지는, 다시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다는 증거로 얼굴에 광채가 났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을 볼 수 없어 수건으로 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AD 5세기 경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합니다.
이 성경을 벌게이트 성서라고 부릅니다.
이때 광채라는 "카란"이란 단어를 "케렌"으로 이해하고 번역하여 마치 모세의 얼굴에 뿔이 났다고 이해하였다.

카란(광채)
케렌(뿔)

*  자료 참조 사이트 / https://m.blog.naver.com/yanghwajin/222181883290


모세에게 뿔이 있었을까요?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은 성경 오역이 낳은 치명적인 결과물입니다.
돌판을 손에 쥔 채 머리에 뿔을 달고 있는 모세상으로 인해, 수세기 동안 전세계인들은 모세를 포함한 모든 유대인들이 머리에 뿔을 달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을까요?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에 있는 머리의 뿔은 출애굽기 34장 29절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서 발생한 실수였습니다.
본래 히브리어 성경구절에서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어근 קרן은 두가지 의미로 해석되는데 바로 “뿔”이라는 뜻을 가진 קֶרֶן (케렌)과 “빛을 뿜다/광채가 나다”라는 뜻을 가진 קָרַן (카란)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전자의 뜻으로 해석하여 결국 뿔 난 모세의 모습을 그리게 된 것입니다.

출애굽기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 증거의 두 판 – 참조 : (32:15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 오는데 증거의 두 판이 그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편 저편에 글자가 있으니)

▶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 이것은 성물과 접촉하는 것이 거룩해진다는 원리와 일맥상통한다.

출애굽기 29:37 
네가 칠 일 동안 단을 위하여 속죄하여 거룩하게 하라 그리하면 지극히 거룩한 단이 되리니 무릇 단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

출애굽기 30:29
그것들을 지성물로 구별하라 무릇 이것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

 즉 모세는 다른 모든 것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하나님과의 교제에만 집중했는데 그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 혹은 거룩함이 자연스레 모세에게도 나타난 것이다.

즉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모세가 성화(聖化)되어진 것이다.

근묵자흑(近墨者黑) 
- 가까울 근(근), 먹 묵(묵), 놈 자(자), 검을 흑(흑)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 는 뜻으로, 나쁜 사람을 가까이하면 그 버릇에 물들기 쉽다는 말.

성경에서 얼굴에 나는 광채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의인의 얼굴(마태복음 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있는 자는 들으라.

둘째, 예수님의 얼굴(마태복음 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셋째, 스데반의 얼굴(사도행전 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넷째, 모세의 얼굴(출애굽기 7:20)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출애굽기 34: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 원문에 가깝도록 직역하면, '보라! 빛나는 얼굴의 피부가 되었도다'란 뜻으로 모세의 빛나는 얼굴의 광채를 보고 놀라워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생생히 묘사되었다.

▶ 두려워하더니 
- 앞절의 '광채가 나다'에 해당하는 원어 '카란'은 '뿔이나다'는 뜻도 있다.

아마 모세의 얼굴에서 나는 광채는 뿔과 같은 모양으로 빛났던 것 같고 이 때문에 사람들은 더 두려워했던 것 같다.

따라서 라틴어 벌겟역(Vulgate)은 이를 '뿔이 났다'로 번역했고, 이에 따로 모세를 묘사한 얼굴에 뿔이 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적용이다.

한편 후일 사도 바울은 이 모세 얼굴의 광채를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새언약의 영광스러운 광채로 승화시켰다.

고린도후서 3:7-18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출 34: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니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하고

▶ 회중의 모든 어른 -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가리킨다.

(12:21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율법에만 집착하여 그 율법이 가리키는 바, 그리스도의 빛나는 영광을 바로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어두운 심령 상태를 나타내는 비유로 인용하였다.

(고후 3:7-18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출 34:34-35]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 하나님의 영광(33:18)을 대하기 위해서이다.

(33:18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그런데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거하기만 하면 이 율법의 수건이 저절로 벗겨져, 율법이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와 그의 영광에 대하여 깨닫게 되어 날마다 변화 받아 그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된다.

고린도후서 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마태복음 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 변형되사(3339. 메타모르포오, mĕtamŏrphŏō) μεταμορφόω

1. 변화하다,  2. 외형적 변화,  3.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

발음 / 메타모르포오오(mĕtamŏrphŏō)

어원 / 완료수동분사 μεταμεμορφωμένος, 제1부정과거 수동태 μετεμορφώθην, 3326과 344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변형되다(마 17:2, 막 9:2), 변화받다(롬 12: 2), 변화하다(고후 3:18).
신약 성경 / 4회 사용

* 3326. 메타(μετά)

1. ~와 함께,  2. ~가운데,  3. ἧνμετά τῶν θηρίων : 그는 들짐승들과 같은 상황 속에 있었다
관련 성경 / 후에(요 2:12), ~와 함께(마 4:21, 살전 3:13), 동행하고(마 5:41), 으로(엡 4:2), 더불어(갈 4:25), 데리고(마 20:20), 지나면(마26:2), 가지고(마 26:47), 다음(마 27:62), 만에(막 8:31), 겸하여(막 10:30), 타고(계 1:7), 동류로(눅 22: 37), 가운데서(눅 24:5), 뒤에(히9:3), 겸한 (엡 6:23), 취하여(히 9:19), 후로는(히 10:16),에게(계 1:12).
신약 성경 / 473회 사용


* 3445. 모르포오(μορφόω)

1. 형성하다,  2. 꼴을 이루다,  3. 형을 이루다

어원 /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μορφώθην, 3449와 동일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형상을 이루다(갈4:19).
신약 성경 / 1회 사용

- 얼굴에 대한 예화 

1. 빛나는 얼굴

오래 전, 몬타나 주의 배노크에 살고 있던 몇몇 사람들이 금광을 찾아나섰다.
험한 산과 들을 지나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 몇몇 사람은 도중에 쓰러져 죽었다.
또한 인디언들이 공격하여 좋은 물건과 말들을 모두 빼앗아가면서 다시 한번 자기들의 영토에 들어오면 그때는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할 수없이 그들은 다시 배노크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한 사람이 돌이 이상해서 주워들고 함께 깨뜨려보니 금이었다!
기진맥진했던 사람들에게 힘이 솟았다.
주변을 살펴보니 그 곳에는 엄청난 사금이 묻혀 있었다.
며칠 동안 금을 채취했으나 음식이 떨어지고 장비가 없어서 도저히 더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배노크의 집으로 돌아가 음식과 장비를 새롭게 챙겨서 정한 날에 만나 함께 그 곳으로 오기로 했다.
물론, 모두 목숨을 걸고 약속하기를, 금을 발견한 일에 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며칠에 걸쳐서 다시 떠날 준비를 했다.
이제 떠나는 날이 되어서 약속된 장소에 모였는데, 이것이 웬일인가?
그들 주변에 백여 명의 사람들이 따라나선 것이었다.
누가 비밀을 누설했단 말인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계획을 알고 따라나섰던 것일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금광을 발견한 사람들의 얼굴에 솟아나는 기쁨과 생기와 희망이 나타나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비밀이 탄로 나고 말았던 것이다.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황금 노다지를 발견한 것보다 못한 것일까?
크리스천들의 가슴과 얼굴에는 환희가 넘쳐야 한다. 또한 생활과 언행에도 이러한 기쁨이 있어야 한다.


2. 저드슨 얼굴의 광채

저드슨은 미국교회에서 해외에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다.
이 위대한 선교사가 휴가를 받아 귀향하는 도중 코네티컷 주 스트니튼을 지나가게 되었다.
다시는 스트니튼이 뉴잉글랜드와 뉴욕을 연결하는 철도 분기점이었으므로 이곳에서 열차를 갈아타야 했기 때문이다.
스트니튼의 소년들은 유명한 사람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고 철길 옆 폐차장에서 저녁 늦게까지 떠나지 않았다.
드디어 저녁 무렵 육중한 몸을 이끌며 열차가 구내로 들어 왔다.
그러자 소년들은 우루루 달려가 소문으로 듣던 인물이 내리는가를 살폈다.
이 때 무리 중 한 소년은 열차에서 막 내리는 한 사람에게 시선을 끌렸다.
소년은 지금까지 그처럼 얼굴에 환한 광채가 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순간 그 승객이 옛날에 그림에서 본 유명한 선교사라는 직감이 들었다.
소년들이 보고자 한 얼굴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세월이 흘러 그 소년 트럼블은 유명한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추억>이란 책을 출간했는데, 그 저서 중에 "소년이 저드슨의 얼굴을 보고서"라는 장이 있다.
이 저서로 말미암아 저드슨 선교사의 얼굴에 빛나던 광채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언제나 그리스도를 향해 얼굴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광채가 난다.
그래서 오랜 전 이 사실을 안 시편 기자는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라고 말한 것이다.


3. 얼굴을 빛나게 하는 약

어떤 힌두 원주민이 선교사를 찾아와 말하기를 '얼굴을 빛나게 만드는 약을 내게 좀 주십시오'라고 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고 선교사가 묻자, 그 원주민이 말하기를 '당신들 그리스도인들은 한결같이 빛나는 얼굴들을 하고 있다는 걸 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 좀 달란 말입니다'.
모세도 이약을 얼굴에 바른 사람이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약이 필요한것 같다

4.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

링컨이 미합중국의 대통령이었을 때 한 지도자가 내각의 인물을 추천했다.
링컨은 거절했다.
그가 이유를 묻자 링컨은 『그의 얼굴이 마음에 안듭니다』라고 말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시는 겁니까? 얼굴은 자기 책임이 아닙니다』그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러자 링컨이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40 대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전쟁을 겪은지 40 년이 훨씬 넘었다.
그런데 지금 책임지는 얼굴을 하고 있을까.

5. 형사와 목사

누가 그랬던가?
서른 살 때에는 서둘러 살고, 마흔 살 때에는 마음대로 살고, 쉰 살 때에는 쉬엄쉬엄 살고, 예순살 때에는 여유있게 사는 거라고.
그 말이 사실이라서, 서둘러 살 수 밖에 없는 나의 서른 살 때를 깔끔하게 정리해 놓고, 마음대로 살 수있는 마흔 살로 싹 넘어갈수만 있다면 그 얼마나 좋으랴!

혼자서 이런 궁리를 하며 좋아하는데, '마흔이 넘으면 제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생각이 불쑥 튀어나온다.
오늘 우리 공동체 나눔의 집을 모교단의 목사님 두 분과, 서울시경에 근무하는 정보과 P형사가 다녀가셨다.
K형사는 우리 공동체 자원봉사자이고, P형사는 도시빈민선교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막무가내로 나를 찾아오는 분이다.
그런데 그 분들을 잘 모르는 자원봉사자들은 형사들을 가리키며
"이 분들은 어느 교회 목사님이신가요?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 하고 내게 물었다.
그리고는 목사님 두 분을 향해서는 "이 분들이 경찰서에서 오신 분들인가요?" 하고 묻는 게 아닌가.
목사같은 형사님 얼굴에 비해 형사같은 목사님 얼굴이라니....
아 아, 이제 책임져야 할 내 얼굴!
난 과연 뭐 같은 목사 얼굴인가?


6. 얼굴 만들기

홀리 브러바흐는 성형수술의 역사에 관한 그녀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50살이 되었을 때 자신의 얼굴에 대해서 자신 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그 말에 동의합니다.
50년 동안 반복된 우울, 웃음, 걱정, 그리고 삶에 대한 태도는 그 사람의 얼굴에 새겨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많이 보여주는 그 얼굴을 우리가 매일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상기시켜 줍니다.
성경이 성형수술에 대해 언급한 것은 없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기도와 말씀묵상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그것이 우리의 외모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놀라운 관념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후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이 너무나 밝게 빛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출애굽기 34:29-30.  고린도후서 3:7).
바울은 그 영광을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경험하는 훨씬 놀라운 영광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면 우리가 점점 더 주 예수님처럼 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3:18).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일은 우리에게 완벽한 얼굴을 만들어 주지는 못하지만, 찌푸리고 눈썹을 찡그리는 원인들을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내적인 평화로 바꾸어 줍니다.
얼굴을 위한 어떤 미용술도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은혜에 비교될 수 없습니다.

7. 신앙인의 얼굴표정

미국의 어느 도시를 여행하던 여행자가 주일이 되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통순경에게 교회를 좀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순경은 멀리 보이는 한 교회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여행자가 주위를 둘러보니 가까운 곳에도 교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순경에게 "왜 가까운 교회도 있는데, 저렇게 먼 데 있는 교회를 가르쳐 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순경은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이 근처에 있는 교회들보다도 저 교회에서 예배들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훨씬 기쁘고 즐겁게 보였습니다.
나는 불신자이지만 그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이고 참된 교회인 것 같아서 소개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우리 신앙인들의 얼굴 표정이 기쁨으로 충만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8. 얼굴로 말한 전도사

매콜은 신앙심이 두터운 그리스도인이었다. 매콜이 파리에서 죽었을 때 전에 무정부주의자였던 한 노동자가 매콜관 옆에서 몹시 슬프게 울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 사람의 친척입니까?"
그러자 그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슬퍼하십니까?"
"이 분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분이 당신에게 특별한 말을 하셨습니까?"
그는 좌우로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얼굴이 말씀하셨습니다."
즉 매콜의 얼굴이 예수의 구원을 말했다는 뜻이다.

9. 사랑하면 얼굴도 바뀝니다

1896년, 영국의 맥스 비어봄(Max Beerbohm)이 발표한 ‘행복한 위선자(The Happy Hypocrite)’란 장편 우화가 있습니다.
우화의 주인공 로드 조지 헬(Lord George Hell)은 무례한 사람이었고, 수많은 악을 행하면서 얼굴까지 흉하게 변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아름다운 처녀를 보고 곧 사랑에 빠졌습니다.
결혼을 원했지만 그는 그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가 자기처럼 흉측한 사람과 결혼하지 않을 것을 알고 죄로 찌든 자신의 얼굴을 감추려고 성자의 가면을 썼습니다.
가면 덕분에 마침내 그는 결혼에 성공했습니다.
결혼 후, 헬은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몇 년 후, 과거에 헬과 사귀었던 여자가 나타나 그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헬의 가면을 벗기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어느 날, 헬이 아내와 함께 있을 때 그 여자는 헬 앞에 나타나 “이제 위선의 가면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그의 가면이 벗겨졌을 때, 성자의 가면 뒤에 있던 그의 얼굴은 더 이상 흉측한 죄인의 얼굴이 아니었고 진짜 성자의 얼굴로 변해있었습니다.

10. 링컨이 수염을 기른 까닭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이 되기전 어느 시골의 여학생으로부터 편지 한통을 받은 적이 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링컨 아저씨, 저는 아저씨가 훌륭하게 되기를 바라요. 그런데 아저씨는 얼굴이 너무 못 생겼어요. 턱은 주걱턱이고 눈은 움푹 들어갔고요, 광대뼈는 왜 그렇게 뾰족 튀어나왔나요. 그래서 우리 동네 어른들은 아저씨가 너무 못 생겨서 싫대요. 어쩌면 좋아요. 그래서 여기 저의 소원을 보냅니다”는 사연이었다. 그의 소원은 링컨에게 지금부터 양볼과 턱에 수염을 길러서 흉한 얼굴 모습을 바꿔달라는 것이었다.이에 링컨은 ‘그렇지, 옳은 충고야’ 하고 빙긋 웃고는 그때부터 수염을 길러 대통령에 출마했다는 일화다.한 어린 학생의 의견도 소홀히 여기지 않은 탓에 그는 큰 인물이 됐고 불의와 부정에 생명을 걸고 과감히 싸워 이길 수 있었다. 그가 남긴 말중 “소수의 사람을 잠시는 속일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을 항상 속일 수 없다”는 말은 너무도 유명하다.

11. ‘추남’ 소크라테스의 여유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얼굴이 못생겼다.
어느 극작가는 ‘구름’이라는 글에서 보기 싫은 그의 얼굴을 풍자하기도 했다.
이 글이 연극으로 꾸며져 공연중일 때였다.
소크라테스는 이 자리에 직접 참석,관중을 향해 절을 하며 “내 실물을 보고 연극을 즐기라” 해서 웃긴 적이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멋에 산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감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남을 모방하는 데만 신경쓴다.
자신만의 매력이 있고 미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음을 알 때 우리에게는 삶의 보람이 생긴다.
흉내만 내다가는 만족감을 잃는다.
뱁새는 뱁새대로 매력이 있고 황새는 역시 황새로 사는 게 바람직하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다리가 찢어진다’는 속담은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흉내를 금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남이 한다고 무조건 나도 하겠다는 식의 모방보다는 ‘자기식’을 독창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철학자 코도르세의 “네 자신의 생활을 다른 사람의 그것과 비교함이 없이 즐기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12. 코끼리 죽이는 법

코끼리에게 거울을 보여주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앗! 세상에 내 모습이 이렇게 못생겼었나?" 하면서 너무 놀라 죽어버린다고 하지요.
정말인지 진짜인지 사실인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이라... 그래서 늙은 코끼리는 연못에서 물을 마실 때 얼른 앞서가서 다른 가족들이 연못에 비치는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연못물을 흙탕물로 만들어 놓는다고 합니다.
어제는 길을 가다가 정말 그 얼굴이 도깨비 같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무슨 장애인이나 사고로 다쳐서 얼굴이 상한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인데 얼굴의 표정이 너무나 기묘하여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12귀신의 하나처럼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괴상하였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자신의 얼굴을 저렇게 만들었을까?
저분의 집에는 얼굴을 볼 수 있는 거울이 없는 게 분명합니다.
얼굴이 자신의 것이기는 하지만, 거울의 도움 없이는 비춰보지 못하는 것처럼, 마음도 자신의 것이기는 하지만 타인의 입의 도움 없이는 내 마음을 잘 알 수 없습니다.
어때요?
내 마음을 다른 사람들의 입은 어떻게 비추어 줍니까?


13. 기쁨이 있는 얼굴

잠언 15:13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립보서 4:4)

어떤 분이 미국에 이민을 가서 처음으로 미국인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설교는 연방 웃음을 자아내고 교인들은 함께 웃으며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어가 짧은 이 사람은 왜 웃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 옆에 앉은 한국사람에게 지금 무엇 때문에 웃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자기도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그가 잘 모르면서 웃는 것이 너무 우스워서 같이 웃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짧은 영어는 할 수 있지만 유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민 초기의 에피소드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웃든 저렇게 웃든 웃음은 인간에게 매우 유익하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입니다.
한번 웃으면 심장박동을 촉진하고 근육이완에 도움이 되기에 에어로빅과 같은 효과가 있으며, 또 20초만 깔깔대고 웃으면 5분동안 노를 저은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웃음은 치료제로서도 유익합니다.
노먼 커슨이라는 미국인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의사는 그에게 단 한가지 유일한 처방을 말해주었습니다. 그것은 항상 좋은 것만 보고 즐겁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그는 재산을 정리해 세계를 일주하면서 코미디와 희극 영화를 보고 항상 웃으며 생활했습니다.
놀랍게도 그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의 병은 말끔히 나아 있었다고 합니다.
노먼 커슨은 그 뒤로 웃음학 박사가 되었고, 웃음은 체내의 조깅과 같으며 내면 세계의 깊숙한 마사지라는 유명한 말도 남겼습니다.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들의 얼굴 표정은 어떠해야 할까요?
웃음과 기쁨이 있는 표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교회를 처음 방문한 불신자의 눈에 비친 교인들의 모습이 무표정하고 무뚝뚝하다면 다시는 그런 딱딱한 분위기에 오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반겨주는 성도들이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흐르고 있다면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을 가질 뿐 아니라 또 오고 싶은 마음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특히 은혜 받은 성도의 얼굴은 어떠해야 할까요?
기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 이하에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소개하면서 사도 바울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또 잠언 15장 13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억지로 기뻐하고 미소 지으라는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먼저 우리의 심령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우십시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감사가 넘치게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인생의 무거운 짐과 염려를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심령 깊숙한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성령의 기쁨과 평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늘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늘 우리 안에 구원의 즐거움이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14. 웃는 얼굴

어떤 흑인 관광객이 조선호텔에 투숙했다.
그런데 호텔에 투숙해 있는 동안 호텔 보이가 얼마나 친절하고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그 흑인에게 시중을 잘 들었는지 아주 좋아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자기 나라로 가는 날, 웃는 얼굴의 보이를 부르더니 참 수고했다면서 자기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몽땅 털어 내놓고 호텔 보이에게 주고 가더라는 것이다.
그 돈의 액수를 우리 나라 돈으로 계산해 보았더니 이천만 원이나 되는 큰 돈이었다.
그 보이는 웃는 얼굴과 친절 때문에 큰 돈을 벌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아 봤더니 흑인 관광객은 아프리카 어느 나라 황제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
"그러므로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갈라디아서 6:10)"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전서 5:16-18)

15. 화장은 지워진다

화장을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들은 고대 이집트 여인들이었다고 한다.
자기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천연두가 유행하던 중세에는 마마 자국을 감추기 위해 화장을 진하게 했다.
서커스단의 도화사는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피에로 화장을 한다.
아프리카나 뉴기니 원주민들은 전쟁을 할 때 무섭게 보이려고 화장을 한다.
마치 카멜레온이 상대방과 싸울 때 붉은 색을 진하게 내는 것처럼 말이다.
화장을 하는 경우들은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그 이유를 다져보면 남을 속이기 위한 것으로 집약된다.
화장을 잘 하면 얼굴의 결점도 감춰지고 더 아름답게 보인다.
화장은 여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만 그 형태가 다를 뿐이다.
남자 여자 가리 것 없이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화장을 한다.
학벌, 가문, 지역, 돈 명예 등 여러 가지 다양한 화장 도구들을 사용한다.
그것으로 자기의 본성을 가리고 남 앞에서 멋진 사람으로 내보이고자 한다.
그러나 얼굴에서 화장이 지워질 때 추한 모습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지워진 자국에서 차츰 드러나는 본래의 얼굴이 곱기는 어렵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얼마든지 화장을 하며 살 수 있다.
그러나 잘못된 화장은 언젠가 지워지게 마련이고 이땅에서 지워지지 않는다해도 하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지워질 것이다.
위조 화폐가 통용되지 않듯 하늘 나라에서는 거짓이나 위선이 통하지 않는다.
교회에서나마 참 모습으로 살 수 없을까!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에게 마음을 드리지 못하고, 때때로 세상의 부귀 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두고 부러워했습니다.
주님, 용서하시고, 제가 가진 작은 물질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섬기는데 사용할 용기와 지혜를 주옵소서.

16. 눈썹이 없는 여인

어디를 보나 나무랄 데가 없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한가지 숨겨진 큰 컴플렉스가 있다면 그것은 눈썹이 정말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짙은 화장으로 눈썹을 그리고 다녔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이 여자에게도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습니다.
정말로 사랑했어요.
남자도 여자에게 다정하고 따스하게 대해 주었고 둘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그놈의 눈썹 때문에 항상 불안했습니다.
일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여자는 자기만의 비밀을 지키면서 행여나 들키면 어쩌나... 그래서 남편이 자기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따뜻하기만 한 남편의 눈길이 경멸의 눈초리로 바뀌는건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삼년이란 세월이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이들 부부에게 예상치 않던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상승일로를 달리던 남편의 사업이 일순간 망하게 된거지요.
둘은 길거리고 내몰리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했습니다.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연탄배달이었습니다.
남편은 앞에서 끌고 여자는 뒤에서 밀며 열심히 연탄을 배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던 오후였습니다.
언덕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리어카의 연탄재가 날아와 여자의 얼굴은 온통 검뎅 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눈물이 나고 답답했지만 여자는 얼굴을 닦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나 자기의 비밀이 들켜버릴까봐요. 그때 남편이 걸음을 멈추고 아내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눈썹부분만은 건드리지 않고 얼굴의 다른 부분을 모두 닦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눈물까지 다 닦아준 후 다정하게 웃으며 남편은 다시 수레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17. 얼굴의 연탄자국

어느 무더운 여름철에 연탄 장사가 교회 사택에 연탄을 싣고 와서 창고에 쌓고 있었다.
그런데 목사는 그것이 미안해서 남방셔츠를 벗어 놓고 같이 연탄을 날랐다. 그런데 이 날은 목회자들의 회의가 있는 날이었는데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그래서 급히 손을 씻고 남방셔츠를 다시 입고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시내를 활보하며 가는데, 행인들마다 힐끔힐끔 목사를 쳐다보았다. 회의장에 도착하니 친구 목사가 몇 명이 와 있었는데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이봐, 부업 차렸나?"
"부업이라니? 목사가 무슨 부업이야?"
그의 질문이 별로 듣기 좋은 말이 아니어서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아무래도 부업을 차린 듯한 증거가 보여서 하는 말이야."
"이봐, 농담이 지나치군. 무슨 증거가 보인 단 말이야?"
친구 목사는 거울을 가리키려 말했다.
"가서 거울 좀 보고 오게나"
그래서 거울을 보니 얼굴과 목 등에 검은 자국이 여기저기 나있었다.
연탄 만진 손으로 땀 을 씻었던 모양이었다.
목사는 그것을 보고 "거울을 미리 보고 왔더라면 이런 실수가 없었을 텐데..."하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18. 당신의 얼굴이 바뀝니다  
출애굽기 34:29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얼굴이 정말 못 생긴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고상한 성품을 지녔지만 못생긴 자기 얼굴이 늘 큰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파티에 참석한 그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게 되었고 첫눈에 사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녀 앞에 자신있게 나갈 수 없는 외모 때문에 여러 날을 망설였습니다.
고민 끝에 이 여인을 결코 놓칠 수 없음을 확신한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멋진 가면을 쓰고 청혼하였고 그녀는 남자의 고상한 분위기와 멋진 그 가면에 반해 청혼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는 결혼한 후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정성을 다해 아낌없이 바치며 사랑했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세심하게 모든 것을 배려하며 위로하는 멋진 남편이 되었습니다.
행복한 결혼생활이 이어지던 어느 날 아내는 우연히 남편의 곤히 잠자는 모습을 보았고 남편의 얼굴이 이상함을 발견하고는 그 가면을 벗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못 생기고 추했던 남자의 예전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놀랍게도 가면의 모습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인간 안에는 하나님께서 창조의 신비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인간에게도 창조의 능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그분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 안에 두신 그 신비한 능력이 내 삶을 창조합니다. 물론 죄악으로 인해 파괴되고 훼손된 것이긴 하지만 여전히 그 가능성은 내 안에 존재합니다. 그분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말입니다.
본문을 보면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사십주야를 함께 했던 모세의 얼굴이 바뀌었습니다.감히 범접할 수 없는 광채가 모세의 얼굴을 휘감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의 얼굴도 광채가 날 수 있습니다. 아니 완전히 얼굴이 바뀔 수 있습니다.삶도 말입니다. 퀴퀴한 냄새가 나고 어둡고 그늘진 내 인생에 하나님의 밝은 평강의 빛, 은혜의 빛, 축복의 빛이 내리쬐기를 기대합시다. 우리가 주 안에서 지향하는 것에 따라 주님은 분명 인도하시리라 믿습니다. 성실과 충성으로 최선을 다해 기도하는 대로 이끄시는 주님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인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 기도: 주여, 내 얼굴을 바꿔주소서. 그늘진 내 삶에 어둠을 몰아내주소서. 내 안에 정결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학중 목사(새안산교회)

19. 예수님의 얼굴

2차대전 말기 눈에 덮힌 중국의 오지를 의심에 잠긴 한 사나이가 말을 타고 가고 있었다.
그는 말 등에 실려, ‘오오 주여, 주의 얼굴을 한 번 보기만 했으면 저는 믿겠습니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때 즉각 그의 마음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사진을 찍어라, 사진을 찍어라.”
그곳은 눈이 녹기 시작하여 이곳 저곳에 검은 땅이 나타나 보기에 흉한 들판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들려오는 명령을 따라 그는 말에서 내려 그 장면을 그의 카메라에 담았다.
돌아와 그 필름을 현상하였을 때 거기에는 온유와 사랑이 넘치는 예수님의 얼굴이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이 사진과 이야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다.

20. 어머니의 얼굴

선생님은 한동안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넌 엄마의 얼굴을 그리라고 했더니 왜 옆모습만 그렸니?"
"저... 사랑은 어떤 허물도 덮는다고 하셨죠?"
"그래서?"
"저의 엄마는 제가 실수로 쏟은 뜨거운 물에 얼굴 반쪽이 흉하게 일그러졌어요.
하지만 저를 원망하지 않아요.
제 눈엔 우리 엄마 얼굴이 이 그림처럼 아름다워요."

21. 성령의 열매

갈라디아서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예수 믿는 사람의 얼굴은 어떻게 생겨야할까?
만약 시험관으로 우리를 면접하신다면 합격할 수 있는 얼굴을 가져야하는데 어떤 얼굴이어야 하나?
불만과 불평, 찌그러진 얼굴이나 교만과 독선, 절망과 낙심, 위선과 거짓의 얼굴은 좋아하실 리 없습니다.
독한 얼굴이나 절망과 낙심으로 힘이 없는 얼굴이나 위선과 조그마한 유혹을 당해도 그곳으로 치우치고, 조그마한 고통을 당해도 예수님을 멀리하고, 낙심과 원망이 서려있는 얼굴을 좋아 하실리 없습니다.
신앙으로 무장한 유연하고 꿋꿋한 기상이 풍기는 얼굴을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합격시켜 주시지 않을까?
사람의 얼굴은 묘한 데가 있습니다.
거의 눈, 코, 귀가 같은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은 모양입니다.
어딘가 조금씩은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얼굴이 그 사람을 대표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얼굴을 간직해야 합니다.
오늘도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히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2. 얼굴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언 15: 13)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산의 한 쪽에 강하고 위엄 있고도 친절하며 존경스럽게 보이는 그 얼굴을 매일 바라보며 기뻐하는 어네스트라는 소년이 그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그 마을에 큰 바위 얼굴과 똑같은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소년은 그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모여 그 전설에 대하여 담소하고 있을 때 드디어 어떤 사람이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어네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입니다."
우리가 진정 누굴 닮기 원합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닮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매일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하며 바라볼 때 우리도 그의 성품을 조금이라도 닮아가지 않겠습니까?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조금이라도 닮아 가는 일이 아닐까요,

23. 믿음의 얼굴

가난한 사람은 적게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원하는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비둘기처럼 더불어 사는 게 아니라 공작새처럼 과시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외모를 과시하고 돈의 권력을 과시하며 명예에 굶주리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지요.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얼굴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참다운 신앙은 하나님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과거의 이력서요, 현재의 현황판이요, 오늘을 알리는 게시판입니다.
그러므로 얼굴에 신앙이 나타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공작새의 깃털이든, 비둘기의 눈이든 무엇인가를 닮게 마련이겠죠.
비오는 날도 아름답게, 바람 부는 날도 감사하게 항상 주를 찬양할 수 있는 힘은 참 신앙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질 줄 아는 것입니다.

24. 얼굴은 마음의 거울

영국의 과학잡지 뉴 사이언티스 최근호는 밝고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잿빛 하늘 아래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건강하다는 보고서를 게재,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조사된 건강실태의 경우, 북부 칼레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남부 피레네에 사는 주민들보다 소화계통의 암이나 간경변에 걸릴 확률이 3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자살 건수도 햇살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메이요 클리닉의 공동 설립자인 찰스 H. 메이요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근심은 순환기관과 심장, 임파선 및 모든 신경계통에 영향을 주어 건강을 크게 해칩니다.
나는 지금까지 과로로 인하여 죽은 사람은 거의 못 보았지만 근심으로 인하여 죽은 사람은 많이 보았습니다”

얼굴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마음의 상태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것입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빛납니다. 멀리서 봐도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근심이 있는 사람은 얼굴이 어두워 보입니다. 마음에 염려와 근심이 있으면 심령이 상하며, 얼굴에도 어두운 그늘이 생기는 것입니다.

25. 얼굴은 마음의 창

링컨은 “사람 나이 40이면 자신의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자신의 삶의 내용에 따라 만들어진다는 말입니다.
대통령이 된 링컨에게 하루는 한 친구가 어떤 사람을 추천했습니다.
링컨은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거절했습니다.
그 사람의 얼굴에 진실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그러면서 한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부모가 준 얼굴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나지만 그 후 40년동안 자신이 살아간 삶의 내용에 따라 얼굴이 새로 만들어진다는 말입니다.

셰익스피어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한 얼굴을 주셨는데 사람들이 악의 얼굴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선하고 천사같고 천진합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그 얼굴이 추해지고 일그러지고 욕심이 가득한 얼굴이 됩니다. 얼굴은 마음의 창입니다.

26. 얼굴이 빛나는 사람은

1. 희망이 있는 사람이다.
2. 기분 좋은 일이 있는 사람이다.
3. 사랑하는 사람과 데이트 약속이 있는 사람이다.
4. 남몰래 선한 일을 한 사람이다.
5.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다.
6.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다.
7. 하나님의 사람이다.
8. 세상을 환하게 하는 사람이다.
9. 교회에 가고 있는 사람이다.
10. 호주머니에 돈이 두둑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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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2022(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애굽기 33:3) 

출애굽기 33장  / 모세의 중보 기도

33장 내용 구조

33:1-6. 동행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슬픈 고시와 이스라엘 자손의 근심 및 겸기(회개).
33:7-11. 회막에 들어간 모세.
33:12-17. 모세의 간구와 하나님께서 동행하시겠다는 언약의 갱신.
33:18-23.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한 모세의 기도와 그 응답.

흐르다(2100) 주브(zûwb) זוּב  

1. 흐르다,  2. 시편 78:20,  3. 레위기 15:25

발음 / 주브(zûwb)
관련 성경 / (물을) 내다(시 78:20), 흘러나다(시 105:41,사 48:21), 쇠약하다(애 4:9), 흐르다(출 3:8, 레 20:24, 겔 20:6), 유출하다(레15:19).
[명] 백탁병자(삼하 3:29), 유출(레 15:25),  유출병(레 15:2, 민 5:2).
구약 성경 / 41회 사용

이사야 64:8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하나님과 사람을 비유할 때 하나님은 토기장이, 사람은 진흙이라고 합니다.
질문을 하겠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무엇을 만들려고 할 때 그 진흙을 언제까지 사용할 수 있을까요?
진흙에 수분이 있을 동안만 그 진흙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을 신앙생활에 적용해보면 토기장이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언제까지 사용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사용하실까요?
사람에게 영적 수분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애급에서 홍해를 건너 광야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는데 약속의 땅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갈지라도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출애굽기 33장 내용 구조

      33:1-6. 하나님의 부정적 고지

      33:7-11. 회막으로 나가는 모세(장막 - 회막)


      33:12-17. 모세의 간구(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33:18-23. 모세의 기도(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the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
출애굽기 33:3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아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 가나안 땅의 대명사

문자적 의미 /
목초지와 꽃과 화초가 무성한 땅

영적 의미 / 
일차적인 자연조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언약이 임하는 땅


창세기 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시편 77:20
주의 백성을 무리양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출애굽기 33:3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죄  때문에  함께 하지 않는다 

여호수아 7:12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33:4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죄를 슬퍼할 수 있는가?

출애굽기 33: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순식간이라도 너희 중에 행하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단장품을 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일을 알겠노라.


출애굽기 33: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은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가? 


출애굽기 33:7b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오늘의 기도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소서!

주와 동행 365
말씀과 기도로 날마다 새롭게





출애굽기 33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시는 하나님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중보 기도한 말씀입니다. 

한글 개역 성경을 인터넷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란 말씀을 검색하였더니 모두 구약에서 19회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출애굽기(4회), 레위기(1회), 민수기(1회), 신명기(6회), 여호수아(1회), 예레미야(2회), 에스겔(2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산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아직 매듭짓지 못한 일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 언약을 새롭게 맺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34장에 가서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언약을 맺습니다.

출애굽기 33:1-6,
하나님께서 금송아지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네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이 백성을 이끌고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고 그들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그 땅으로 올라가거라.
내가 한 천사를 보낼 터이니, 그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
나는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겠다.
너희는 이제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
너희는 고집이 센 백성이므로, 내가 너희와 함께 가다가는 너희를 없애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땅이 약속의 땅이 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데 무슨 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은 참담한 말씀을 듣고 통곡합니다.
그들은 아무도 장식품을 몸에 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라.
너희는 고집이 센 백성이다.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와 함께 올라가다 가는, 내가 너희를 아주 없애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 너희는, 너희 몸에서 장식품을 떼어 버려라.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이제 결정하겠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호렙 산을 떠난 뒤로는 장식품을 달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33:7-11,
성막이 세워지지 전,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는지 그 비결, 곧 모세의 회막 생활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칠 때마다, 모세는 장막을 거두어 가지고 진 바깥으로 나가, 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장막을 쳤습니다.
모세는 그 장막을, ‘하나님과 만나는 곳’이라고 하여, ‘회막’이라고 하였습니다.
‘회막’은 ‘임시 성막’이라고 보면 됩니다.
출애굽기 39, 40장에 이르러 성막이 완성됩니다.
성막이 있기 전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던 곳입니다.

여호와를 찾을 일이 생기면, 누구든지 진 밖에 있는 이 회막으로 갔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갔습니다.
모세가 회막으로 갈 때마다 백성은 모두 일어나서 자기 장막에서, 모세가 장막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 뒤를 지켜보았습니다.

모세가 장막에 들어서면, 구름기둥이 내려와서 장막 어귀에 서고, 주께서 모세와 말씀하십니다.
그 때, 백성은 구름기둥을 보면, 모두 일어나서 자기 장막 어귀에서 엎드려 주를 경배하였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이,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진으로 돌아가도, 눈의 아들이며 모세의 젊은 부관인 여호수아는 장막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가 왜 장막을 떠나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가 모세의 후계자로 조금씩 부각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출애굽기 33:12-16,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시는 하나님께 모세가 다시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뜻을 꺾으시고 친히 함께 가겠다고 응답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한 번 더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가나안 땅에 함께 가지 않으시면 가나안 땅에 가봐야 아무 소용없다고 말합니다.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친히 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길이 행복입니다.
아무리 좋은 길이라고 해도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그 길은 불행입니다.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은 하나님께서 그 땅에 계셔서 축복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 중에 16절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모세가 하나님께 질문하고 본인이 하나님께 대답합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출애굽기 33:17-23,
모세가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하나님께 소원을 아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어서 요청한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인도해 달라는 간절한 소망이 담긴 요청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렇게 하시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나의 옆에 있는 한 곳, 그 바위 위에 서 있어라.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바위 틈에 집어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나의 손바닥으로 가리워 주겠다.
그 뒤에 내가 나의 손바닥을 거두리니,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묵상을 위한 질문 /

우리가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새벽마다 일어나 오늘의 묵상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에 따라 하루의 삶을 시작하며 하루를 마감하는 것입니다.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시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시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은총을 입었다는 증거입니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를 사모하라 

성도에게 가장 위험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신자를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범죄함으로 스스로 하나님과의 동행을 거절하고 자기 길을 가는 것은 스스로 죽음과 파멸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금송아지로 반역한 백성과 동행하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시고(동행하시면 하나님의 공의는 그들을 진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하지만 천사를 보내 약속한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는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을 통해서 드러난 것은, 이들에게 하나님은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떤 신이라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주면 되고, 성공하도록 이끌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성공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생각입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그러한 마음이라면, 너희가 원하는 대로 가나안 땅에는 들여보내주겠지만,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3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합니다(4).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습관대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진 밖에 설치한 회막으로 나아가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본래 성막은 진중에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죄악 이후로 진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을 덮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곳을 회막(會幕)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모세의 행동은 백성들에게 모범이 되어, 하나님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회막으로 들어간 것을 본 자들 중,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밖 회막으로 모세와 함께 나아갔고(7), 그를 바라보았다고 말합니다(8).

하나님의 역사는 거창한 캠페인이나 운동이 아니라, 이런 하나님을 앙모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모세는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하나님을 만나던 사람입니다(11).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고 그 축복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 없는 성공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저주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구하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뿐이었습니다.
또한 이런 모세를 수종들던 여호수아 역시 이 하나님 임재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회막을 떠나도 그는 회막을 떠나지 않았습니다(11).

모세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했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가시지 않는 성공을 위해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모세는 함께 하시는 은혜를 구했고(12~13), 이어서 백성들과 함께 가시는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15~16).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모두 승낙하셨습니다(14, 17).
특히 13절에 모세의 기도를 보십시오.
신자라면 누구라도 해야 할 기도의 내용입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이라는 것뿐입니다.
하다못해 성공으로 신앙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동행만이, 하나님 백성의 증거요, 표지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응답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구합니다(18).
이것은 인간이 지상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기도입니다.
그는 이미 40일 40야를 하나님 앞에서 십계명과 율법과 계시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더 풍성하고 충만한 계시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미 보았고 이미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조금이라도 맛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갈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맛본 사람이 더 큰 은혜를 구합니다.
이런 은혜를 구하십시오.
더 큰 은혜를 구하십시오.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없는 성공과 축복을 미워하게 하시며, 비록 덜 성공하고 상황은 덜 만족스럽더라도, 오직 하나님으로 인하여 만족하는 인생되게 하옵소서.
돈 없어도, 어려운 일을 만나도, 하나님 때문에 웃을 수 있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더 강력한 임재를 기다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금송아지 사건으로 비롯된 비극은 드디어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과 동행하기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동행거부(同行拒否)’ 선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3절).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미래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함께하시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경고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차마 자신들의 몸을 단장할 수 없었습니다(4절).
당시 장신구는 각종 형태의 신상들이 새겨져 있는 우상숭배의 상징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장신구들이 어떠한 마력을 지니고 있어서 사람들을 우상숭배의 범죄에 빠지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의 장신구를 가지고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우상숭배 문화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금송아지 숭배로 이미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또다시 우상숭배의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몸에서 장신구들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5절).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도 죄악된 세상에 살면서 죄와 우상숭배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한 경각심을 조금이라도 늦추면 언제든지 죄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요소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리에게서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죄를 범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들은 각종 우상숭배와 더불어 세상의 음란하고 불건전한 문화에 가까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것들은 눈에 띄지 않게 우리에게 슬며시 다가와 우리를 유혹해 죄악으로 몰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에게 이스라엘을 타락하게 했던 우상의 장신구는 없는지 스스로를 살펴보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7절에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회막’이란 ‘만남의 장소’ 라는 뜻으로 모세가 하나님께 경배하고 기도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곳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설치한 회막은 이스라엘 진중에 설치된 성막(민 2장)과 달리 이스라엘 진 밖에 설치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당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가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 막아서 회막이 이스라엘 진중이 아닌 진 밖에 설치되게 된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회막은 분명 이스라엘 진중에 설치되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죄가 있는 곳에는 임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와 함께 거하지 않으시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은혜와 축복을 베푸시기를 원한다면 우리 안에서 죄의 모습이 발견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만일 우리 안에 죄가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속한 교회 가운데 임재하시지 않을 것이고, 결국 그 교회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는다면 그 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교회에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는다면 교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교회는 여느 사회단체와 마찬가지로 단지 사람들의 모임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들의 모임이 교회로 불리는 것은 그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교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우리 스스로 성결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만이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로서 은혜와 축복이 넘치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의 사명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에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모세와 하나님이 얼마나 친밀한 사이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모세와 하나님은 마치 친구가 만나 이야기하듯 서로 마주 보고 마음을 터놓고 허심탄회하게 대화했습니다.
물론 이 만남은 직접 얼굴을 보고 만난 만남이 아니라 기도로서의 만남을 뜻합니다.

특히 우리는 모세의 기도가 자신의 말만 하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화’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모세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장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회막을 지키며 관리하던 여호수아가 후에 모세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은 자격이나 자질보다는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여호수아와 같이 하나님과 가까이 거하기를 기뻐하고, 하나님의 장막의 일을 기꺼이 맡아 감당하는 신앙적 열정이 있는 사람이 교회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세상적인 능력을 많이 소유한 자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 넘치게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17절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의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안다” 고 말씀하신 것은 모세를 인격적으로 세세하게 알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인격적으로 만나기 원하십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 한 영혼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며,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눈동자처럼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시 17:8, 9).

하나님과 이러한 만남을 갖는 사람은 어떤 일에 부딪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며,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염려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결코 두려워하지도 염려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를 아시되 인격적으로 세세하게 아시는 그 하나님께서 눈동자처럼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담대하게 맡겨진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삶을 결단하시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환경을 열어 주셔서 반드시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사명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우리를 인격적으로 세세하게 아시는 그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인생의 참된 승리자가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의 죄악이 하나님과 그들과의 사이를 갈랐음을 보았습니다.
또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범죄한 가운데에서도 믿음을 지킨 모세와 여호수아를 보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혹, 저희들에게도 이스라엘과 같은 죄악이 없는지 스스로를 살펴봅니다.
그리고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성령충만으로 함께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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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2022(금) 목이 곧은 백성(출애굽기 32:9)  

출애굽기 32장  / 금송아지 사건    

출애굽기 32장은 모세가 시내 산 꼭대기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 아래에서 아론을 부추겨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한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32장 내용 구조

    32:1-6. 백성의 배신(금송아지를 만들다)
    32:7-14. 하나님의 진노와 모세의 첫번째 중보기도
    32:15-20. 모세의 하산과 분노
    32:21-24. 모세의 힐문과 아론의 변명
    32:25-29. 죄에 대한 모세의 조처
    32:30-35. 모세의 두번째 중보기도

목이 곧은 백성
They are a stiff-necked people
출애굽기 32: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아멘

목이 곧은 백성
농부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소, 말을 일컫는 말
(성경) 고집 세고 악한 상태를 의미하는 관용어

이사야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나님만을 기뻐하는 신앙
출애굽기 32: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2: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주인이 누구인 줄 아는 신앙

출애굽기 3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출애굽기 32:11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언약을 확신하는 신앙

출애굽기 32: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주의 보혈을 믿는 신앙
출애굽기 32:20

모세가 그들의 만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 


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출애굽기 32: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오늘의 기도
오직 주만 믿고 따라가자! 

말씀과 기도로 새롭게
주와 동행 365

출애굽기 32:1-6,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시내 산에 갔는데 40일이 지났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불안했는지 아론에게 찾아가서 모세가 없으므로 이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요구합니다.
불안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우상숭배에 길들여진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모세가 없을 때는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이요 초대 대제사장이 될 사람인데, 백성들을 진정시키기는 커녕 우상을 숭배하는데 앞장을 섭니다.
아론이 백성들에게 금 고리들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그것들을 다 모아서 녹여서,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듭니다.

아론이 금 고리를 녹여서 만든 금 송아지 상을 본 백성들이 뭐하고 소리를 쳤는지 아세요?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이에 질세라 아론은 한술 더 뜹니다. 금 송아지 앞에 제단을 쌓고 아론이 백성들을 부추겨서 금 송아지를 '여호와'라고 선언합니다.
내일은 여호와의 절기다!”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서, 번제를 올리고,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런 다음에,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흥청거리며 뛰놀았습니다.


출애굽기 32:7-14,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에 분노하신 하나님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시내산에서 모세와 깊은 교제를 하시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서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이렇게 빨리 벗어나서, 그들 스스로 수송아지 모양을 만들어 놓고서 절하고, 제사를 드리며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하고 외치고 있다. 나는 이 백성을 살펴 보았다. 이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노하였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그러나 너는, 내가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32:7-10)


출애굽기 32:11-14,
하나님의 진노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애원합니다. 그 결과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십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주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주신 주의 백성에게 이와 같이 노하십니까? 어찌하여 이집트 사람이 '주가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그들을 이끌어 내어, 산에서 죽게 하고, 땅 위에서 완전히 없애 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려 하십니까?

제발, 진노를 거두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주의 백성에게서 이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주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시며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모든 땅을 너희 자손에게 주어서, 영원한 유산으로 삼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32:11-14)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백성을 진멸하시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의미가 없지 않느냐고 설명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내용을 언급하면서 재앙을 거두어 달라고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기억하고 지켜 달라고 부탁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진노를 백성에게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출애굽기 32:15-20,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에 분노하신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모세가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받은 두 돌 판을 산 아래로 던진 사건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증거판 둘(십계명)을 손에 들고서 산에서 내려옵니다.
모세가 진에 가까이 와서 보니, 사람들이 수송아지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고 있습니다.
모세는 화가 나서,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돌 판 두 개를 산 아래로 내던져 깨뜨려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시겠다고 하셨을 때,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진노를 거두시고 제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던 모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홧김에 모세가 증거판(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을 산 아래로 집어 던진 게 아닙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다고 생각하고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 판을 산 아래로 던졌습니다. 출애굽기 34장에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다시 받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다시 언약을 맺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언약 갱신’이라고 합니다.  

20절 말씀은 상당히 무서운 느낌이 드는 내용입니다.
모세가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서, 그것을 물에 타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금 송아지 우상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 입니다.
우상숭배가 얼마나 큰 죄인지 백성들에게 분명하게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대 근동의 자료들에 따르면 신들의 전쟁에서 상대방 신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의미로 신의 우상을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서, 그것을 물에 타서, 마시게 했습니다.
모세가 금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서, 그것을 물에 타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한 것도 우상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 입니다. 

출애굽기 32:21-24,
모세와 아론이 나눈 대화인데, 아론의 변명

“이 백성이 형님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형님은, 그들이 이렇게 큰 죄를 짓도록 그냥 놓아 두셨습니까?”

모세의 질문에 아론은 어처구니없는 말을 합니다.

“아우님은 우리의 지도자입니다. 나에게 그렇게 화를 내지 마십시오. 이 백성이 악하게 된 까닭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들이 나에게 ‘우리 앞에 서서, 우리를 인도하여 줄 신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모세라는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르겠습니다’ 하고 말하기에,

내가 그들에게, 금붙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금을 빼서 나에게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금붙이를 가져왔기에, 내가 그것을 불에 넣었더니, 이 수송아지가 생겨난 것입니다.”

아론의 변명(출애굽기 32:4)

아론이 그들에게서 그것들을 받아 녹여서,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드니, 그들이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내가 그들에게, 금붙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금을 빼서 나에게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금붙이를 가져왔기에, 
내가 그것을 불에 넣었더니, 이 수송아지가 생겨난 것입니다.




출애굽기 32:25-29,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을 듣고 여호와의 편에 선 것

도륙하라(2026) 하라그 הָרַג

도륙하라(2026) 하라그  הָרַג     

1. 죽이다,  2. 창세기 4:8,  출애굽기 2:14, 시편 27:1

발음 / 하라그(hârag)

관련 성경 / 죽이다(창 4:23, 출 2:14, 시 10:8), 죽다(삿 9:54, 욥 20:16), 죽임을 당하다(왕상 18:12, 대상 7:21, 민 31:19), 살륙하다(느 4:11, 애 3:43, 합 1:17), 도륙하다(에 9:16, 출 32:27), 멸하다(창 20:4), 쳐죽이다(대하 24:25), 살인하다(호 9:13), 살륙을 당하다(겔 26:15, 애 2:20, 사 27:7), 죽음을 당하다(렘 18:21, 겔 37: 9), 살해당하다(사 26:21).
[명] 죽임(에 7:4), 주검(사 14:19).
구약 성경 / 167회 사용

모세는, 백성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론이 그들을 제멋대로 날뛰게 하여, 적들의 조롱거리가 되게 한 것입니다. 모세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모세가 진 문에 서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고 하였고, 레위 자손이 다 모여 모세에게 나아왔습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편에 서겠다고 앞으로 나온 레위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레위 자손들은 하나님의 명을 받고 우상을 숭배함으로 적들의 조롱거리가 된 자들을 심판했습니다. 그 날, 백성 가운데서 어림잡아 삼천 명쯤 죽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레위 자손에게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라고 명령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모세는 레위 지파에게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도록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심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레위 지파 중에서 우상 숭배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32:29절에, 모세가 저마다 자녀와 형제자매를 희생시켜 자신을 여호와께 드린 레위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었다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 지파가 죽인 3,000명 안에 레위 지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레위 지파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제사를 드려야 할 지파입니다. 그런데 아론과 더불어 레위 지파 사람들 일부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 숭배를 주도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레위 지파 스스로 악을 제거해야 하고, 뼈를 깎는 고통을 통해 하나님만 섬기는 거룩한 지파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출애굽기 32:30-35,
모세가 우상 숭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

속할까 하노라(3722) 카파르 כָּפַר

속할까 하노라(3722) 카파르  כָּפַר

1. 덮다,  2. 전면에 퍼지다, 3. 머리로 덮히다

발음 / 카파르(kâphar)

관련 성경 / 칠하다(창 6:14), 속죄하다(출 30:10, 신 32:49, 겔 45:17), 알다(사 47:11), 용서하다(겔 16:63), 마치다(단 9:24), 속량하다(신21:8), 풀다(창 32:20), 속죄하게 하다(레 17:11), 사하다(대하 30:18, 시 78:38), 폐하다(사 28:18).
[명] 속죄제(느 10:33, 겔 43:26), 속죄물(출 29:33).
구약 성경 / 101회 사용

이튿날 모세는 백성들이 지은 크나큰 죄를 지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다시 한 번 더 하나님께 가서 백성들이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다시 나아가 기도합니다.
자신의 이름이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질 각오하고 드린 기도입니다.

“슬픕니다. 이 백성이 금으로 신상을 만듦으로써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죄를 지으면, 나는 오직 그 사람만을 나의 책에서 지운다. 이제 너는 가서, 내가 너에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여라. 보아라, 나의 천사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여라. 때가 되면, 내가 그들에게 반드시 죄를 묻겠다.”

그 뒤에 하나님께서, 아론이 수송아지를 만든 일로,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금송아지 사건에서 여호와의 편에 선 레위 자손이 자기 형제와 친구와 자기의 이웃을 죽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죄는 철저하게 멸해야만 용서의 자리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멀리하려는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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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2022(목) 공교한 일(출애굽기 31:4) 

출애굽기 31장  / 브살렐과 오홀리압 

공교한 일(4284) /  מַחֲשָׁבָה

1. 명상,  2. 공교한 일

발음 / 마하솨바(machăshâbâh) 

어원 / 28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각(창 6:5, 욥 21:27, 사 55:8), 방책(삼하 14:14), 의도(대상 28:9), 사상(시 33:10), 심중(대상 29:18), 양식(대하 2:14), 꾀(에8:3, 렘 18:18), 계교(욥 5:12, 잠 6:18), 경영(잠 15:22), 계책(렘 18:11, 49:30), 계획(렘 49:20, 잠 19:21),모략(단 11:24,25), 뜻(미 4:12), 정교한 일(출 31:4, 35:33, 35), 기술(출 35:32), 고안(대하 26:15), 경영하는 것(잠 16:3), 모해함[하는 것](애 3:60, 61).
[동] 꾀하다(에 8:5, 렘 11:19).
구약 성경 / 50회 사용

* 연구하다는 "하솨브"는 "생각해내다, 고안하다, 계산하다"는 뜻이다.
공교한 일이란 "마하솨바"는 "고안" "계획" 이란 뜻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안에서 지혜롭게 생각하고 연구하여 하나님의 의도를 아름답게 나타내야 한다
* 2803. חָשַׁב

1. 생각하다,  2. 생각해내다,  3. 악을 꾀하다

발음 / 하솨브(châshab) 

관련 성경 / 여기다(창 38:15), 생각하다(삼상 1:13, 시 73:16), 계수(計數)하다(레 25:27)

브살렐(Bezalel) :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자
유다의 6대 손
유다 - 베레스 ㅡ 헤스론 - 갈렙 - 훌 - 우리 - 브살렐

오홀리압(Oholiab) : 아버지는 나의 장막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 = 숙련된 기술이 있는 자




출애굽기 31장부터 35장은 지혜로운 두 사람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세워 모세를 통하여 보여주신 성막과 성막의 기구들을 제작하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31:1-11, 성막 건축 책임자 두 사람, 브살렐과 오홀리압
31:12-17, 안식일에 대한 말씀
31:18, 증거판 둘(십계명 두 돌판) 

출애굽기 31장 내용 분해

31:1-11, 성막 건축 책임자 두 사람, 브살렐과 오홀리압 이야기
31:12-17, 안식일(영원한 언약)
31:18, 하나님이 친히 쓰신 증거판 둘

출애굽기 31:1-11, 성막 건축 책임자 브살렐과 오홀리압

보아라, 내가, 유다 지파 사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불러서,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채워 주어,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온갖 기술을 갖추게 하겠다. 그가 여러 가지를 생각하여, 그 생각한 것을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고, 온갖 기술을 발휘하여, 보석을 깎아 내는 일과 나무를 조각하는 일을 하게 하겠다.”(31:2-5)

분명히 나는, 단 지파 사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이 브살렐과 함께 일하게 하겠다. 그리고 기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지혜를 더하여, 그들이, 내가 너에게 명한 모든 것을 만들게 하겠다.

회막과 증거궤와 그 위에 덮을 속죄소와 회막에 딸린 모든 기구와 상과 거기에 딸린 기구와 순금 등잔대와 거기에 딸린 모든 기구와 분향단과 번제단과 거기에 딸린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과 제사장 일을 할 때에 입는 잘 짠 옷, 곧 제사장 아론의 거룩한 옷과 그 아들들의 옷과 성별하는 기름과 성소에서 쓸 향기로운 향을, 그들이, 내가 너에게 명한 대로 만들 것이다.

브살렐과 오홀리압 한 눈에 보기

브살렐 /
유다 지파, 훌의 손자, 우리의 아들.

하나님의 영을 채워 주어,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온갖 기술을 갖춤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고, 온갖 기술을 발휘하여, 보석을깎아 내는 일과 나무를 조각하는 일을 함

오홀리압 /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재능이 있음(출 38:23)
브살렐과 함께 일함
조각하며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로 수 놓음

출애굽기 31:12-17,
안식일에 대한 말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라.
이것은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세워진 표징이 되어, 너희를 거룩하게 구별한 이가 나 주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안식일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므로,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그 날을 더럽히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 날에 일을 하는 사람은, 백성 중에서 제거될 것이다.

6일 동안은 일을 하고, 7일 째는 주께 바친 거룩한 날이므로, 완전히 쉬어야 한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 안식일을 영원한 언약으로 삼아, 그들 대대로 지켜야 한다.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표징이니, 이는, 주가 6일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7일째 쉬면서 숨을 돌리셨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출애굽기 31:18,
증거판 둘에 관한 말씀

6일 동안은 일을 하고, 7일 째는 주께 바친 거룩한 날이므로, 완전히 쉬어야 한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 안식일을 영원한 언약으로 삼아, 그들 대대로 지켜야 한다.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표징이니, 이는, 주가 6일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7일째 쉬면서 숨을 돌리셨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출애굽기 31:18,
증거판 둘에 관한 설명입니다.

주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을 마치시고, 하나님이 손수 돌 판에 쓰신 증거판 두 개를 그에게 주셨습니다.
증거판 두 개에 적힌 내용은 출애굽기 20장에서 살펴본 십계명이었습니다.
참고로, 출애굽기 32:15,16절에 보면, 두 증거판 앞뒤로 글자가 적혀 있다고 나옵니다.
돌 판 앞뒤로 동일한 계명을 기록했는지, 십계명을 돌 판 앞뒤에 나누어서 기록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하나님의 성막을 만드는 기술자의 자격 조건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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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2022(수) 분향단(焚香壇)(출애굽기 30:1) 

출애굽기 30장  / 분향단, 속전, 물두멍, 관유  







분향단은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쌉니다.
가로세로가 1규빗이고, 높이가 2규빗 정사각형이며, 네 모퉁이에 뿔이 있습니다.
단 상단 부분에 금테를 만들고, 금고리 4개가 양쪽에 둘씩 있고 멜 채를 꿰어 놓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이 1년 단 한 번 대속죄일에 분향단의 뿔을 위하여 속죄하고 피를 바릅니다.


분향단(焚香壇)  / ‘미즈바흐 하케토레트’

출애굽기 30장분향단물두명, 관유향의 제조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소에서 하나님께 드릴 향을 올려놓을 분향단에 대해서 소개합니다(1-10절).

분향단은 성소에서 향을 피우는 곳입니다.
향을 피우는 것은 하나님께 제사의 진행과 제사 드리는 자들의 정성을 알려 드리기 위해서 하는 의식인데, 그들은 향의 연기가 하늘에 상달될 때 자신들의 기도도 함께 상달된다고 믿었습니다.

‘분향단’은 히브리어 ‘미즈바흐 하케토레트’이며, ‘제단’을 뜻하는 ‘미즈베아흐’와 ‘분향, 제물의 향기로운 향기’를 뜻하는 ‘케토레트’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케토레트’는 히브리어 동사 ‘카타르’에서 유래하였는데, 이 동사는 ‘향기롭게 하다’(아 3:6), ‘불사르다’(레 6:22), ‘기름을 태우다’(삼상 2:16), ‘분향하다’(대하 26:18, 28:3)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분향단의 크기와 위치

1. 분향단은 장이 1규빗, 광이 1규빗, 고가 2규빗

출애굽기 30:1-2에서 “너는 분향할 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 장이 일 규빗 광이 일 규빗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고는 이 규빗으로 하며 그 뿔을 그것과 연하게 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출 37:25).

2. 분향단은 네모 반듯합니다.

출애굽기 37:25에서 “네모 반듯하고”는 히브리어 ‘라바’로, ‘정방형(정사각형)으로 만들다’라는 뜻입니다.
장 1규빗, 광 1규빗의 비교적 작은 정방형 제단입니다.
이는 기도하는 자의 마음자세가 대신(對神), 대인(對人) 관계에서 반듯해야 함을 뜻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하고(욥 22:21), 또 이웃과 화목한 후에 드리라는 의미입니다(마 5:24). 

3. 분향단은 “속죄소 맞은편”에 두었습니다.

출애굽기 40:5에 “또 금향단을 증거궤 앞에 두고 성막 문에 장을 달고”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성소 안의 떡상과 등대가 마주하도록 한 것과 달리, 분향단은 독립적으로 지성소와 성소 사이 휘장 앞에 두었습니다.
출애굽기 30:6에 “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금향단을 둘 자리에 대하여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인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두도록 한 것은, 분향단과 속죄소의 긴밀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인구 조사를 통해 생명의 속전을 내게 하시고 그것으로 성막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셨습니다(11-16절).
놋으로 만든 물두멍은 회막과 단 사이에 있습니다(17-21절)
향유 제조법을 말씀하시며 일반인들은 만들지 못하도록 엄격히 금지하셨습니다(22-38절).


분향단은 성소의 중앙에 위치하고, 지성소 바로 앞에 있습니다.
분향단은 증거궤 위 속죄소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에 위치합니다.
아침마다 향기로운 향기를 사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향기입니다.
저녁에 등불을 켤 때에도 향을 사릅니다.

분향단도 조각목으로 만든 후에 정금으로 쌉니다.
우리 힘으로는 결코 향기를 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모두 뒤틀리고 가시가 많이 나 있는 조각목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덮어주시고 감싸 안아주셔야만 향기를 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분향단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고후 2:14-15).
성경은 기도의 분향단에서 피우는 향을 ‘성도의 기도’라고 말합니다(계 5:7,8; 8:3,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린도후서 2:14-15)

“그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요한계시록 5:7,8)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요한계시록 8:3,4)


출애굽기 30:11-16절은 생명의 속전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를 세어 인구를 조사할 때에, 그들은 각자 자기 목숨 값으로 속전을 주께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구를 조사할 때에, 그들에게 재앙이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인구 조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내야 합니다. 한 세겔은 이십 게라인데, 하나님께 올리는 예물입니다.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1년에 한 번 반 세겔의 생명의 속전을 내야 합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 반 세겔을 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낸 생명의 속전은 회막을 수리하고 유지하는 비용으로 씁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숨 값을 대신하여 그들을 기억하여서 지켜 주십니다.


출애굽기 30:17-21, 물두멍

물두멍은 큰 대야와 같은 모양입니다.
성소와 번제단 사이에 있는데,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물을 담아둡니다.
안 씻으면 죽습니다.




물두멍


물두멍의 재료는 회막문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의 놋 거울로 만듭니다.
왜 하필이면 여인들이 사용하던 놋 거울로 물두멍을 만들었을까요?
물두멍은 다른 성막 기구와 다르게 크기와 무게가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물두멍을 여인들의 놋 거울로 만든 이유는 거울의 용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여인들은 자기의 모습을 살피고 단정하게 하려고 거울을 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들도 물두멍에서 깨끗하게 씻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 반드시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물두멍은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제사장들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제사장은 반드시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물두멍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막 기구들과 달리 물두멍의 크기와 무게, 모양이 나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그 크기를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무게와 크기, 그 깊이를 우리는 감히 잴 수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어떤 말로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0:22-38,
관유와 향을 만드는 법과 사용하는 방법

출애굽기 30:22-33. 관유에 대한 설명
출애굽기 30:34-38. 향에 대한 설명  
 


출애굽기 30:22-33
관유에 대한 말씀

성막에 사용하는 관유를 만들기 위해서는 제일 좋은 향품을 사용해야 합니다.

1. 순수한 몰약 500 세겔
2. 향기로운 육계 250 세겔
3. 향기로운 창포 250 세겔
4. 계피 500 세겔
5. 올리브 기름 한 힌

향을 제조하는 법을 따라서, 이 모든 것을 잘 섞어서, 성별하는 기름(관유)을 만들어야 합니다.

관유를 어디에 사용할까요?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상과 그 모든 기구와 등잔대와 그 기구와 분향단과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서, 이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가장 거룩한 것이 되며, 거기에 닿는 모든 것이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그 기름을 발라서, 그들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일러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너희가 대대로 성별하는 데만 써야 하는 기름이다.
너희는 이것을 아무의 몸에나 부어서는 안 되며, 또 그것을 만드는 방법으로 그와 똑같은 것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
이것은 거룩한 것이니, 너희가 거룩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렇게 섞어 그와 똑같은 것을 만들거나, 그것을 다른 아무에게나 발라 주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백성에게서 끊어질 것이다.”


출애굽기 30:34-38,
향을 어떻게 만드는지, 어디에 사용하는지에 대한 말씀

먼저, 분향단에 사용할 향을 만드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을 유향과 섞되 저마다 같은 분량으로 섞습니다. 향을 제조하는 법을 따라서 잘 섞은 다음에, 소금을 쳐서 깨끗하고 거룩하게 합니다.

향을 어디에 사용하는지 설명합니다.
향 중에서 그 가운데서 일부를 곱게 빻아서, 제사장이 하나님과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놓습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에게 가장 거룩한 것입니다.

끝으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가지 주의를 주십니다.
제사장들이 만들 유향은 주의 것이며, 거룩한 것입니다.
사사로이 쓰려고 같은 방법으로 그것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혹시나 백성 중에서 그 냄새를 즐기려고 이와 같은 것을 만드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백성에게서 끊어질 것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성막의 모든 기구들은 치수가 나옵니다.
그런데 왜 물두멍은 치수가 나오지 않을까요?


물두멍은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갈 때 더러워진 손과 발을 씻는 물을 담아두는 용기를 말합니다.
죄인들의 죄를 씻어주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느 누구도 그  크기를 측량할 수 없기 때문에 물두멍에 대한 크기와 규모는 소개하지 않습니다.

분향단의 구속사적 교훈

1.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
- 분향단의 위치가 “속죄소 맞은편”인 것은 지속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30:6a
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두라.

대제사장은 성소를 지나 휘장을 통과하여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성소는 가장 거룩한 장소로 1년에 하루(7월 10일 대속죄일, 욤 키퍼) 대제사장이 들어가 백성의 모든 죄를 위하여 속죄하는 곳입니다(레 16:34, 히 9:7).
이것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오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를 나타냅니다(히 5:6, 10, 6:20, 9:12, 10:11-12).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만나는 곳,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말씀하시는 곳’입니다(출 25:22, 29:42).
이는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에 대한 놀라운 교훈을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분향단이 놓인 속죄소 맞은편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의 처소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스도가 계신 곳은 하나님 보좌 우편, 곧 “위엄의 우편”입니다(히 1:3, 8:1).
그곳이 바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중보기도의 자리입니다. 

둘째, 분향단을 속죄소 맞은편에 두라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함과 영광스러움을 알려 줍니다.

이 땅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흠모할 만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아름다운 것이 없고, 심지어 멸시를 받아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나(사 53:2-3), 본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요(빌 2:6), 보좌 가운데 계신 분이셨습니다(계 7:17).

성막 뜰의 “회막문 앞 번제단”(레 1:5, 4:18, 17:6)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대속해 주신 일을 상징하며,
회막 안 ‘속죄소 앞의 분향단’(출 30:6)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을 나타냅니다(행 2:33-36, 엡 1:20).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 보좌에 좌정하시므로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되셨습니다(엡 1:20-21). 

2. 성도의 거룩한 기도
- 지극히 거룩한 분향단에 지극히 거룩한 향이 있어야 함은 성도의 기도가 거룩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기도를 천사가 금향로에 담아 보좌 앞으로 가지고 올라갑니다(계 5:8, 8:3-5, 시 141:2).
지극히 거룩한 분향단에서 지극히 거룩한 향연을 올린다는 것은, 우리의 잘못된 기도 습관에 큰 경종을 울립니다.
우리가 올리는 기도가 지극히 거룩해야 한다는 사실, 그러한 기도가 얼마나 귀중하고 보배로우며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를 암시합니다(히 9:4).
금 같은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라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상달됩니다.
막연히 허공을 향해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결코 보좌에 계신 하나님 앞에 올라가지 못합니다(마 6:7).
기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순전하게 올려야 합니다. 

3. 네 가지 향은 네 가지 유형의 기도 모범

①. 소합향의 기도

소합향은 햇빛을 받으면 분출되는 향입니다.
실로, 예수님의 기도 속에서 분출하는 소합향의 기도였습니다.
소합향을 얻는 나무에서 수액이 방울방울 떨어지듯이,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히 5:7).
우리 성도들도 소합향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소합향(stacte)

‘소합향’은 ‘스며 나오다, 새어 나오다, 방울방울 떨어지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나타프’에서 유래하여, ‘물방울, 향기로운 나무의 진’을 의미합니다(욥 36:27). 나무에서 진액이 떨어질 때 눈물 모양으로 나오며(잠 5:3, 아 5:13), 그 맛은 쓰며,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 많이 자랍니다.

②. 나감향의 기도

나감향은 연체동물의 껍질을 빻아 가루로 만들어진 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42, 44).
소라나 연체동물의 껍질을 빻아 만든 나감향처럼,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완전히 부수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신령한 나감향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우리 성도 역시 나감향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나감향(onycha)

‘나감향’은 히브리어 ‘쉐헬레트’로, ‘껍질’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지중해나 홍해에서 사는 소라 혹은 연체동물의 껍질을 빻아서 가루로 만든 향입니다.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향 조개’입니다. 이 가루는 태울 때 진한 향을 내며, 다른 향품과 섞으면 그 향기를 더욱 진하게 하여 오래가도록 도와주며, 철저히 부수어질수록 향기를 더 발합니다(참고-출 30:34).

③. 풍자향의 기도

풍자향은 강한 향의 진액입니다.
풍자향처럼 진액을 짜듯 마음을 다 쏟는 기도가 될 때, 모든 죄와 질병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가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심한 통곡이었고 강물같이 쏟아지는 눈물이었습니다(히 5:7).
예수님께서 온 힘과 진액을 쏟아 기도하시는 순간, 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예수님께 힘을 도왔습니다(눅 22:43-44).
분명히 기도는 보통의 힘으로는 안 되는 영적 중노동이요, 피나는 투쟁입니다.
자신을 진액처럼 쏟아 재물이 되는 순간입니다(눅 22:44, 히 5:7).

풍자향(galbanum)

‘풍자향’은 히브리어 ‘헬베나’로, ‘풍성함, 기름짐, 비옥함’을 가리킵니다. 페룰라(ferula)식물의 줄기 밑부분에서 얻는 강한 향의 진액이며,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풍자향은 방부제 역할을 하며, 해충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④. 유향의 기도

유향은 ‘희다’라는 뜻에서 유래된 향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유향과 같이 깨끗한 기도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기도에는 단 1퍼센트도 인간의 욕심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기도도 예수님처럼 깨끗한 유향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유향(frankincense)

‘유향’은 히브리어로 ‘레보나’이며, ‘희다’(white)라는 뜻을 가진 ‘라반’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고대로부터 유향은 매우 귀한 향료로 알려졌습니다. 유향은 아라비아 사막에 자생하는 유향나무(Boswellia trees)에 상처를 입혀 채취한 진액으로, 쓴맛을 지니고 있습니다.

4. 분향단의 네 뿔은 기도의 힘과 권세를 상징

뿔은 힘과 능력과 권세의 상징입니다(신 33:17, 삼상 2:1, 10, 시 75:10, 89:17, 24, 92:10, 112:9, 148:14, 애 2:3, 겔 29:21, 암 6:13, 눅 1:69).
뿔 달린 짐승들을 보면 기(氣)가 살아 당당하며, 뿔을 높이 치켜들고 그 뿔을 흔들며 자랑합니다.
하지만 힘이 없으면 뿔을 들지 못하고 구석으로 도망칩니다.
적(敵)이 침범할 때 뿔로 들이받아서 자기 영역에서 몰아냅니다.
우리도 나의 생명을 해하거나 교회를 해롭게 하는 어둠의 세력이 공격해 올 때, 기도와 말씀의 권능의 뿔을 들고 싸워 이겨서 자신과 교회를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다니엘 7:7에서 넷째 짐승이 열 뿔을 가졌습니다.
붉은 용의 세력도 열 뿔을 가졌습니다(단 7:24, 계 12:3, 13:1, 17:3, 7, 12, 16).
사단의 뿔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인간이 죽기까지 마구 찌릅니다.
그것은 교만, 시기, 질투, 정욕, 허무, 두려움, 이기심 등입니다(마 15:19, 막 7:21-23, 엡 4:30-32).
이러한 사단 마귀의 뿔을 꺾고, 행악자들의 교만의 뿔을 잘라 버리고, 의인들이 뿔을 높이 들고 승리하는 비결은 믿음의 기도입니다(시 75:10).
바로 하나님의 도움을 입어 자기의 뿔을 높이 드는 것이 기도입니다(시 92:10).
금향로에 성도의 기도를 받아 올라간 천사가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을 때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났습니다(계 8:3-5).
이처럼 우리의 기도는 악한 세상을 심판하며 징계하는 권세와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 앞에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자의 억울한 호소를 들으시고, 의인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고 악한 자를 징계하십니다(시 109:4, 마 5:44, 롬 12:19-20).
항상 깨어 기도하는 자만이 장차 올 모든 환난을 능히 피하고, 다시 오시는 인자 앞에 설 수 있습니다(눅 21:36).



분향단(altar of incense)은 지성소 입구의 휘장 앞, 즉 떡 상과 등대 중간 전면에 놓았다(출 30:6).
분향단은 금으로 입힌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졌고 이것은 휘장 앞에 놓여졌는데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막이다.
분향단은 정방형이었고 크기는 가로 1규빗(0.5m) 넓이 1규빗(0.5m) 높이 2규빗(1m)로 되어있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향으로 아침과 밤마다 이 제단에서 분향을 해야 했다(출 30:7-8).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씩 분향단의 뿔에 속죄제의 피를 뿌리며 속죄하는 시간을 가졌다(출 30:10).

분향은 기도를 상징하며(시 141:2, 계5:8) 우리에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가리키고 있다(요 17장, 막 14:32-42).

진설병과 유사하게도 분향단은 그 꼭대기 주위에 금관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영광과 존귀로 관쓰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히 2:9).
그러나 분향단은 기도의 장소이기 때문에 관과 기도는 왕적 제사장의 모습을 의미하고있다(히 9:4).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멜기세덱의 순서를 좇아 대제사장이 되었다(시 110:1, 히 7장).
그는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와 함께 공감하실 수 있으시고 (히 4:15) 의와 평강의 왕으로써 그의 자비와 은혜를 공급하실 수 있으신 분이시다(히 7:25, 4:16, 창 14:18).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신자의 일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단 6:10,마 6:5-13).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고(살전 5:17) 감사함으로 모든 기도와 간구를 드리며,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위해서도 깨어 구해야 한다(엡 6:18).
기도는 전투가 심하고 복음의 선교가 어려울수록 특히 더 중요해진다(엡 6:19).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진실로 분향단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더 풍부한 향을 부어 주실 것이다.
그 향은 우리가 그 분의 뜻대로 구할 때에 그 분에게 올라가고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다(계 8:3-4).

언약궤는 하나님의 집이고, 그 분의 거처이자(출 25:8-9),
그리스도와 교회 모두의 모형이다(골 2:9, 딤전 3:15,  엡 2:21-22).
그것은 그 분의 집이 "모든 열방을 위한 기도의 집"이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열망이다(사 56:7).

분향단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피가 먼저 충당되어야 한다는 것이고(레 4:7).
그 피는 속죄의 피다.
그러므로 그 향은 그 아들의 이름에 대한 참 지식과 경험으로 예비되어져야 한다.
- 그의 순결, 거룩, 순종,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의존이다.
그래서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그가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3-24).

분향단에서 사용되어지는 향(출 30:34-38)

분향단에서 사용되는 향은 소합향 나감향 풍자향 유향을 섞고 소금을 넣어서 향으로 피워졌다.
소금은 언약의 상징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약속한다(레 2:13).
소햡향은 향나무의 향이고 그리스도의 생애를 의미한다.
나감향은 조개를 빻고 찧어서 얻어지는 향으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의미한다.
풍자향은 고무나무에서 나오는 소독약을 말하며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한다.
유향은 죽은 시체에 바르는 향유로 고약한 냄새를 없애주는 향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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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2022(화) 직분 위임(출애굽기 29:1) 

출애굽기 29장  / 대제사장의 위임식

제사장 위임식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릴 제사장들이 거룩해야 하기 때문에 필요한 절차입니다.
실제로 레위기 8장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위한 제사장 직분 위임식을 행합니다. 본문에서는 제사장 위임식을 위해 모세가 무엇을 준비하고, 아론과 그의 아들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위임식(밀루) / 구약 11회 - 출애굽기 6회(29:22, 26, 27, 31, 34, 35)
                                          레위기 5회(8:22, 28, 29, 31, 33)

위임식(4394) מִלֻּא

1. 완성,  2. 박음,  3. 봉헌

발음 / 밀루(millûʼ)
어원 / 43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동] 물리다(출 25:7, 35:9), 가공하다(대상 29:2).
                  [명] 위임식(출 29:22, 레 8:22, 33, 레 7:37).
구약 성경 / 5회 사용
* 4390. מָלֵא 

1. 타동사 채우다,  2. 창세기 1:22,  3. 출애굽기 16:32

발음 / 마래(mâlêʼ)
관련 성경 / 가득하다(창 6:13, 삿 16:27, 사 1:15), 차다(창 29:21, 레 12:4, 사 30:27), 충만하다(출 40:34, 시 33:5, 사 11:9), 넘치다(수3:15, 겔 23: 33),품다(에 7:5), 강장하다(욥 20:11), 담대하다(전 8:11), 채우다(출 15:9, 사 27:6, 렘 19:4), 끝나다(사 40:2), 다하다(왕하9:24, 에 1:5, 애 4:18), 마치다(레 8:33, 에 2:12, 렘 25:12), 풍족하다(욥 20:22), 헌신하다(출 32:29), 걸리다(창 50:3), 지나다(출 7:25), 가지다(삼하 23:7),구비하다(왕상 7:14), 풍부하다(겔 27:25), 물리다(출 28:17, 31:5), 거룩하게 하다(출 28:41), 위임되다(레 21:10), 담다(수9:13), 확증하다(왕상 1:14), 이루다(왕상 8:15, 대하 6:4), 드리다(대하 29:31, 삼상 18:27), 부요하다(사 23:2), 만족하게 하다(렘 31:25), 먹이다(슥 9:13), 위임받다(출 29:29), 위임하다(출 29:33), 응하게 하다(왕상 2:27), 받다(대하 13:9), 지내다(대하 36:21), 모이다(렘 4:5), 움키다(겔 10:2), 메우다(창 26:15), 채우다(레 9:17), 자원하다(왕상 13:33), 찌르다(욥 41:7), 가득하다(시 80:9), 거룩하게 구별하다(민3:3, 삿 17:12), 가득하게 하다(렘 51:14), 위임식을행하다(출  29:35, 레 8:33).
[부] 매우(에 3:5), 온전히(민 32: 12, 신 1:36, 수 14:14).
구약 성경 / 250회 사용

출애굽기 29:1-3, 제사장 위임식을 위해 기본적으로 준비할 것들

1. 수송아지 한 마리
2. 숫양 두 마리(흠 없는 것)
3. 누룩을 넣지 않은 빵
4. 누룩 없이 기름만 섞어 만든 과자
5. 누룩 없이 기름만 바른 속 빈 과자(모두 고운 밀가루로 만들기)

이 모든 것들을 모두 한 광주리에 넣어서, 수송아지와 두 마리의 숫양과 함께

출애굽기 29:4-9, 제사장 위임식 순서

1.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회막 어귀로 데리고 와서 목욕을 하게 하라
2. 제사장 옷을 가져다가, 속옷과 에봇 받침 겉옷과 에봇과 흉패를 달고, 정교하게 짠 에봇 띠를 띠게 하여라
3.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관 위에 ‘여호와께 성결’ 금패를 붙여라
4. 거룩하게 구별하는 데 쓰는 기름을 가져다가, 그의 머리 위에 부어, 그를 거룩하게 구별하여라
5.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속옷을 입게 하고, 띠를 띠게 하고, 머리에 두건을 감게 하라.

이런 절차를 통해 그들에게 제사장의 직분을 맡겨라. 이것이 영원한 규례가 되게 하여라

출애굽기 29:10-14, 제사장 위임식 절차 중에 속죄제에 대한 설명 

준비한 흠 없는 수송아지를 하나님께 속죄제물로 드립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하는 일은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는 것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모세가 할 일입니다.

모세가 수소를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수소의 머리에 두 손을 얹게 한 다음에, 회막 어귀 주 앞에서 그 수소를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수소의 피를 받아다가 손가락으로 제단의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모두 제단 밑에 부어야 합니다.

내장을 덮은 모든 기름기와 간에 붙은 기름 덩어리와 두 콩팥과 거기에 붙은 기름기를 떼어 내서 제단 위에서 살라 바쳐야 합니다. 수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은 진 바깥에서 불에 태워야 합니다. 모세가 할 일이 엄청납니다.

출애굽기 29:15-18, 제사장 위임식 절차 중에서 번제에 대한 설명

준비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를 하나님께 드리는데, 역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하는 일은 숫양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뿐이고, 모든 일은 모세의 몫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숫양 한 마리를 끌어다 주고, 그 숫양의 머리 위에 그들의 손을 얹게 한 다음에, 그 숫양을 잡고, 피를 받아서, 제단 둘레에 뿌려야 합니다. 그 숫양의 각을 뜬 다음에, 내장과 다리는 씻어서 각을 뜬 고기와 머리 위에 얹어 놓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 숫양 전체를 제단 위에서 통째로 살라 바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 드리는 번제이며, 이것이 바로 향기로 주를 기쁘게 해 드리는 살라 바치는 제물입니다.


출애굽기 29:19-21, 피와 관유로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예식

한 마리 남아 있는 숫양의 피과 관유를 가지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거룩하게 합니다.

그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다른 숫양 한 마리를 끌어다 놓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숫양의 머리 위에 손을 얹게 합니다.
2. 그 숫양을 잡고, 피를 받아서, 아론의 오른쪽 귓불과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불에 바르고, 그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도 발라야 합니다.
3. 남은 피를 제단 둘레에 뿌려야 합니다.
4. 제단 위에 있는 피와 거룩하게 구별하는 기름을 가져다가 아론과 그의 옷 위에 뿌리고, 아론의 아들들과 그들의 옷 위에 뿌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론과 그의 옷과 그의 아들들과 그들의 옷이 거룩하게 됩니다.


이 절차를 통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옷이 피로 붉게 물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거룩해 진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보혈이 우리를 덮어 주심으로 우리가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브리서 9:13,14)


출애굽기 29:22-25,  제사장 위임식 절차 중에서 화제와 요제에 대한 설명

숫양에서 기름기와 기름진 꼬리와 내장을 덮은 기름기와 간에 붙은 기름 덩어리와 두 콩팥과 그것을 덮은 기름기를 떼어 내고, 오른쪽 넓적다리를 잘라 내어야 합니다.
이것은 제사장을 위임하는 의식에서 쓸 것인데, 요제를 드린 후에 불태워 드릴 번제물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둔 광주리에서, 빵 한 덩이와 기름을 섞어서 만든 과자 한 개와 속 빈 과자 한 개를 가져다가, 그 전부를 아론의 손과 그의 아들들의 손에 얹어 주어, 그것으로 주 앞에 흔들어 바치는 제물로 드리게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흔들어 드리는 제사가 바로 요제입니다.

그들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다가, 제단의 번제물 위에 놓고 불살라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향기로 주를 기쁘게 해 드리는, 주께 살라 바치는 제물, 화제입니다.

출애굽기 29:26-28, 제사장 위임식 절차 중에서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오는 것과 거제물에 대한 설명 

아론의 제사장 위임식에 쓸 숫양에서 가슴을 떼어, 주께 흔들어 바치는 예식을 하고 나서, 그것은 제사를 집례한 제사장의 몫이 됩니다. 본문에서는 모세의 몫이 되는 거구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제사장 위임식에 쓴 숫양 고기 가운데서 흔들어 바친 것(요제)과 들어올려 바친 것(거제), 곧 흔들어 바친 가슴과 들어올려 바친 넓적다리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들어올려 바친 제물(거제물)이므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을 영원한 분깃입니다. 제사를 집례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이 제물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화목제물로 주께 들어올려 바친 제물입니다.


출애굽기 29:29-30, 아론의 성의(대제사장의 옷)에 대한 설명 

아론의 거룩한 옷은 그의 자손들에게 물려주어서, 그들이 제사장 위임식 때에 그것을 입고 기름부음을 받게 하여야 합니다. 아론의 아들 가운데서, 그의 제사장직을 이어받고 회막에 들어가서 성소에서 예배를 드릴 사람은, 일주일 동안 이 옷을 입어야 합니다.


대제사장 옷


출애굽기 29:31-34절은 제사장 위임식 식사에 대한 설명입니다.

제사장 위임식 때에 드린 숫양의 살코기를 가져다가, 거룩한 곳에서 삶아야 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회막 어귀에서 바로 이 숫양의 살코기와 광주리에 든 빵을 먹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여 제사장으로 세우고 속죄의 제물로 바친 것이므로, 그들만이 먹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것이므로, 다른 사람은 먹을 수 없습니다. 제사장 위임식의 살코기나 빵이 이튿날 아침까지 남아 있거든, 너는 그 남은 것을 불에 태워야 합니다. 그것은 거룩한 것이므로, 남은 것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기 29:35-37,  제사장 위임식 절차 중에서 속죄제에 대한 설명

일주일 동안 제사장 위임식이 진행되는데, 매일 속죄제를 드리라는 명령입니다. 날마다 수송아지 한 마리씩을 바쳐서, 죄를 속하는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제단 위에 속죄제물을 드려서, 그 제단을 깨끗하게 하고, 그것에 기름을 부어서 거룩하게 하여야 합니다. 일주일 동안 제단 위에 속죄제물을 드려서, 제단을 거룩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제단은 가장 거룩하게 되고, 그 제단에 닿는 것도 모두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29:38-42,  제사장이 매일 하나님께 드릴 번제에 대한 설명

매일 1년 된 어린 양 두 마리를 드리는데, 아침에 한 마리, 저녁에 한 마리 드립니다.
한 어린 양에 고운 가루 10분의 1에바(약 2.2리터)와 찧은 기름 4분의 1힌(약 900그램)을 같이 드립니다.
번제를 드릴 때, 소제와 전제를 함께 드립니다.


출애굽기 29:43-46,  제사장 위임식 결론 

왜 매일 번제를 드려야 하는지, 왜 제사장이 필요한 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날 것이다. 거기에서 나의 영광을 나타내어 그 곳이 거룩한 곳이 되게 하겠다. 내가 회막과 제단을 거룩하게 하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거룩하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겠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이후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습니다(20장).
출애굽기 24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산 언약을 맺습니다.
25장부터 27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지시한 성막 제작에 관한 규례가 나오고 28장에는 제사장에 관한 규례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에서 제사장 직무를 행할 제사장으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지명하고 있습니다.
29장은 제사장 위임식에 관한 규례가 나오는데 이는 제사장과 제단을 거룩하게 하는 의식에 관한 내용입니다.
제사장 위임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제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5대 제사가 있습니다.
레위기에 나오는데 그 종류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그리고 속건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제사장 위임에 필요한 제사로 속죄제, 번제, 그리고 화목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제사 이외에도 화제, 거제, 요제, 그리고 전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화제, 거제, 그리고 요제는 제사의 종류가 아니라 제사 방법에 해당됩니다.
화제는 불로 태우는 제사이고,
거제는 제사장이 두 손으로 제물을 들어서 제사하는 방법이고,
요제는 제사장이 제물을 흔들어 제사하는 방법이고,
전제는 포도주와 같은 액체를 부어서 제사하는 방법입니다.

29장에는 제사장 위임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제사의 종류와 제사의 방법이 언급되어 있는데 중요한 점은 상세한 제사 규례가 아니라 이런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성막을 만들게 하시고, 다음으로 제사장의 옷을 만들게 하시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사장을 위임하고 성결케 하는 의식을 하셨는데 이 위임식을 통해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29장 마지막 45절 46절을 보면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45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46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언약을 맺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수 있도록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심과 홍해의 기적을 베푸신 목적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이 참 신이며 여호와임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강조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10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불평하는 습성을 아시고 불평을 잠재우기 위해서 끊임없이 교제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제의 기적도 오래 가지 않아서 오늘에 직면하는 어려움을 참지 못하고 불평했습니다.
제대로 먹고 마시지 못함에 대한 불평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목마름에 대한 불평과 고기를 먹지 못함에 대한 불평에도 마라의 쓴 물을 단 물로, 그리고 만나와 메추라기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욕구해결만으로 하나님을 찾고 인식하도록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속성을 고려하면 오래가지 않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내산과 같은 특별한 장소에서 모세와 같은 중재자를 불러 현현하여 자신의 살아계심과 여호와이심을 알리시기보다 인간의 입장을 고려하여 좀 더 쉽고 편안하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막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어 먼저 찾아오시며 은혜를 베푸시기 원하십니다.
제사 역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4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광야시대에 하나님께서는 회막에서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찾아오셔서 만나시고 말씀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속적인 만남과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여호와임을 알게 되고, 구원자임을 잊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을 잊게 됩니다.
하나님을 잊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 석 자를 잊게 된다기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매일의 기적보다 하나님을 만날 장소에서 만나 그 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만남의 장소로 가기만 하면 되겠습니까?
만남의 장소에 있다고 하더라고 인간이 거룩해지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만나지 못하면 당연히 하나님의 음성도 듣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위임에 필요한 3종류의 제사를 언급하면서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9절 하반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위임하여 거룩하게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위임의 목적은 ‘거룩’입니다.
이러한 제사들은 나중에 레위기에서도 언급되는데 일반인인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적용됩니다.

먼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거룩해야 합니다.

첫째, 안수하라

거룩해지는 절차로 안수가 있습니다.

29장에 언급된 3가지 제사인 속죄제, 번제, 화목제는 수송아지와 숫양을 제물로 바치는데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수송아지나 숫양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입니다.
동물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은 특이한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안수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안수는 주로 사람에게 합니다.

이를테면 직분을 위임할 때에 안수를 합니다.
안수의 특징을 보면, 안수를 함으로써 안수받는 자가 안수자로부터 권위와 직분과 능력을 받게 됩니다.
때로는 예수님의 사역과 사도들의 사역에서 볼 수 있듯이 안수받는 자의 병이 치유되거나 성령을 받게 됩니다(막 6:5, 행 8:18, 행 28:8). 이처럼 안수는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인데 구약의 제사법을 보면 사람이 아니라 제물인 동물에 안수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과 달리 권위와 직분과 능력의 전가가 아니라 죄의 전가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가 제물로 전가되도록 하는 의식입니다.
이것 역시 거룩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피를 뿌리라

제물의 피를 사람과 사람의 옷에다 뿌리는 것입니다.
동물의 피가 사람의 몸과 제사장의 옷에 뿌려지게 되면 상식적으로는 그 몸과 그 의복이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피비린내와 피로 얼룩지게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21절에 아론과 그 아들들과 그들의 옷이 거룩하리라고 하셨겠습니까?

거기에는 의식의 중요성보다 의식을 통해서 그 의식이 의미하는 바를 알도록 하는 의도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드리는 자가 그 의도를 알기 원하십니다.
죄의 전가와 속죄의 피의 의미를 아는 것이 제사하는 자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거룩해야 할 대상이 제사드리는 사람에게만 있지 않습니다.
제물이 거룩해야 하고 제단이 거룩해야 합니다.

27절을 보면 숫양의 가슴과 넓적다리를 요제를 통하여 거룩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36, 37절에서는 제단을 거룩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서는 반드시 제단과 제물과 제사드리는 자, 모든 것이 거룩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피비린내 나는 제사를 제단에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단 번에 화목제물이 되시어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을 가지고 나아가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거룩해 질 수도 없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은혜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오늘도 여호와의 이름을 잊지 않는 자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단 번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저희들을 속죄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잊지 않고 그 피로 거룩해짐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어떤 기적보다도 기도를 통하여 은밀하신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기뻐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 제사장 위임을 위한 예식(1-37)

하나님은 제사장 직분을 위하여 모세에게 젊은 수소 하나와 숫양 둘, 무교병과 과자와 무교 전병을 가져오고 성막 뜰로 들어와 거기서 아론과 그 아들들을 만나 물로 씻고 대제사장의 옷을 입게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론은 그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아론의 아들들은 기름부음을 받진 않았지만 속옷과 때를 포함하는 제사장의 복장을 갖추어 입었습니다(1-9).

아론은 먼저 수송아지로 속죄제를 드릴 때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하고 제단에 드려졌습니다. 이 의식을 통해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죄인 됨과 피로 씻음의 필요성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매년 대속죄일에 제사장들은 씻음을 받았으며 피의 일부는 번제단 뿔에 발랐고, 나머지는 단 밑에 쏟았습니다(10-14). 

두번 째로 숫양 둘 중 하나를 번제로 드려야 했습니다. 이 번제는 제단 위에서 전부를 태워드림으로 제사장으로 위임받는 사람이 자기 전체를 다 드려 그 직무에 임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15-18).

다른 숫양으로는 세 번째 희생을 드리되 그 피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오른쪽 귀뿌리와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발라야 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정결하고 성별되었다는 표시가 됩니다. 귀뿌리의 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의 성별을 상징하며, 엄지 손가락의 피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의 거룩성을 묘사하고 엄지 발가락의 피는 하나님을 섬길 때에 조심스럽게 걸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숫양의 피는 단 주위에 그리고 관유와 함께 제사장들과 그들의 옷에 뿌려야 했습니다(19-21). 

세 번째 제사는 화목제로 화목제의 본질은 제물의 일부를 경배자가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화목되고, 이 제사의 일부를 '요제'로 드려졌는데 그 제물이 하나님께 속했음을 강조하는 의식 행위였습니다. 숫양의 가슴은 요제로서 아론과 그 아들들이 먹어야 할 몫입니다. 그리고 칠 일 동안의 성별식에서 아론의 대제사장의 성의는 그를 계승한 아들에게 주어지고 다음 세대까지 계속 전달 계승되어야 했습니다. 또한 회막 문에서 먹어야 할 위임식 숫양의 먹는 부분에 대해서 지시하고 이 경우 숫양과 떡은 매우 거룩한 성질의 식사로서 남은 것은 모두 태웠습니다. 제사장 위임식은 칠 일 동안 행해졌는데 매일 속죄제로 수송아지 하나를 드렸습니다(22-37).

2) 매일 드려야 하는 번제(38-46)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번 소제(밀가루와 기름)와 전제(포도주)와 함께 어린 양은 아침과 저녁에 한 마리씩 드려야 했습니다(38-41).

이스라엘의 일상 생활에서 매일의 번제를 드릴 때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거기서 만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이나 일반 백성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42-46).

주께서 주신 오늘! 자신을 성별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기에 흠 없는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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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2022(월) 제사장 직분(출애굽기 28:3)

출애굽기 28장  /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할 것

28:1-43.

1절,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할 것
2-5절, 제사장의 예복이 될 거룩한 옷을 지을 것
6-14절, 에봇과 띠 및 견대
15-30절, 흉패
31-35절, 에봇 받침 겉옷
36-38절, 패
39절,  속옷, 관, 띠
40-43절,  아론의 아들들의 복장과 그들의 성별

3절.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모든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마음에 지혜있는 자(하크메 레브)

- '지혜'를 의미하는 '하크모트' '마음'을 가리키는 '레브'가 합하여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히브리어 '하크모트' 혹은 '호크마' '지혜'라는 뜻 이전에 '솜씨좋음', '능숙함'이라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제사장의 옷을 만드는 데 참여한 '지혜있는 자'란 곧 뛰어난 재단 기술과 바느질 솜씨를 지닌 기술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NEB는 이를 '기술자'(craftsman)로 번역했는데, 가정이나 조직을 통해 기술을 전수받던 고대 이스라엘에서 이처럼 특별한 기술은 곧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졌다(사 28:24-29).
그러나 그러한 기술 뿐만 아니라 예술적 재능과 학문등도 모두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

- 여기서 '지혜의 영'(루아흐 호크마)이란 곧 하나님의 영을 말한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임했는데 왕이나(삼상 16:13), 선지자(삼상 19:20), 사사(삿 3:9; 6:34), 제사장(레 4:3, 5, 16; 6:22) 등이 바로 그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이 임한 사람들은 모두가 특별한 일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신약 시대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며 또한 내재하신다(요 14:16, 17; 롬 8:9; 고전 3:16).



출애굽기 25장부터 27장은 성막 제작에 관한 특별 규례를 소개합니다.
28장에서는 제사장에 관한 규례를 소개하며 하나님께서는 아론 가문을 제사장으로 직접 선택하시고(1-5절) 그들에게 입힐 에봇과 띠, 판결 흉패, 겉옷 등에 관한 규례를 자세히 알려 주셨습니다(6-43절).

백성들의 죄에 대한 중보적 역할을 담당하는 제사장들에 대해 이처럼 세심하게 명령하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 준다.

성막이 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합니다.
본장에서는 성막에서 봉사하는 제사장 직분과 제사장이 갖추어야 할 복장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제사장의 옷은 특별했고 거룩한 옷이었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성막에서 섬김으로 봉사하는 제사장들은 아론과 그의 네 아들들이었습니다.
후에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었으므로 아론계 제사직이 그의 두 어린 아들 즉,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통해 이어졌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다양한 직무를 담당했습니다.
매일 두 번씩 금 제단에 향을 피우는 일, 등대와 임재의 떡 상을 유지하는 일, 번제 단 위에서 희생을 드리는 일과 백성에게 축복을 비는 일 등의 직무를 해야 했습니다.
덧붙여 그들은 민사 판결을 주관하고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며, 전쟁시에는 용기를 북돋웠습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생활은 성막을 중심으로 한 생활이었고 제사장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a. 하나님의 심판(예레미야 10:1-2)

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열방의 을 배우지 말라 열방인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 말라.

b. 제사장(레위기 l:5)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를 가져다가 회막 문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제사장 직분을 행하다 / 카한(3547)  כָּהַן 

1. 예시하다,  2. 사제가 되다,  3.  피엘형 כִּהֵןהֵן
발음 / 카한(kâhan)

관련 성경 / 제사장 직분을 행하다(출 28:41, 겔 44:13), 제사장이 되다(호 4:6), 제사장 직을 행하다(출 31:10, 39:41)
구약 성경 / 23회 사용

제사장 코헨(3548) כֹּהֵן

1. 제사장,  2. 대제사장,  3. 왕 

발음 / 코헨(kôhên)
관련 성경 / 제사장(창 14:18, 레 14:18, 대하 31:19, 스 6:9, 7:12, 24)
구약 성경 / 752회 사용
대제사장의 예복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직의 영광과 거룩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구속 사역을 나타내시기 위해, 대제사장에게 특별한 옷을 입도록 명령하셨다.
대제사장이 입는 예복은 ‘흉패, 에봇, 겉옷, 반포 속옷, 관, 띠’와(출 28:4), ‘고의’(출 28:42)가 있다.
‘반포 속옷, 띠, 관, 고의’는 일반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공통으로 입는 옷이지만, 특별 제작된 ‘에봇, 에봇 띠, 겉옷, 흉패’는 오직 대제사장만 입을 수 있다.

제사장 및 대제사장의 예복의 특징을 그림과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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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의

linen breeches, 미크나스

출 28:42, 39:28, 레 6:10, 16:4

제사장의 예복 중에 살에 가장 가까운 데 입는 옷으로, 대제사장의 하체를 가리기 위해 입는다. 가는 베실로 짠 세마포로 된 속바지로, 길이는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였다. 우리나라의 ‘고쟁이’에 가깝다.

2. 속옷

tunic, 케토네트

출 28:39-40, 29:5, 8, 39:27, 레 6:10, 8:7, 13

겉옷 안에 살에 닿게 입는 통으로 된 옷으로, 소매는 손목까지 내려오며 길이는 발뒷꿈치까지 내려온다. 가는 베실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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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속옷) 띠

sash, 아브네트

출 28:39, 39:29, 레 8:7, 13

위에서 아래까지 통으로 짜인 속옷은 매우 헐렁하기 때문에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띠를 띤다. 가는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수놓아 만들었으며, 가슴에서 한 바퀴 돌려서 묶고 발목까지 길게 늘어지게 했다.

4. 에봇 받침 겉옷

the robe of the ephod, 메일 하에포드 

출 28:31-35, 29:5, 39:22-26, 레 8:7

하얀 속옷 위에 입는 에봇 받침 겉옷은 청색 실로 짜인 통옷으로 옷 전체가 청색이다. 두 어깨 사이에 머리 들어갈 구멍을 내고, 목테두리로 돌아가면서 깃을 짜서 입고 벗을 때 해지거나 찢어지지 않도록 했다. 겉옷의 가장자리에는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석류를 수놓아 만들고 정금으로 방울을 만들어, 석류 사이사이에 금방울을 일정한 간격으로 달도록 했다.


5. 관

일반 제사장이 쓰는 관과 대제사장의 관은 모두 가는 베실로 만들지만 형태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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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일반 제사장의 관

미그바아

출 28:40, 29:9, 39:28, 레 8:13 

산처럼 위쪽이 불룩하게 솟아 있는 모양의 관이다.

② 대제사장의 관

미츠네페트

출 28:39-40, 29:6, 39:28,

레 8:9, 슥 3:5 

터번 형태로 빙빙 돌려가며 짜서 꿰맨 두건(turban) 모양이었다.

또한 금으로 만들고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쓴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앞에 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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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에봇
ephod, 에봇
출 28:6-14, 29:5, 39:2-7, 레 8:7

대제사장이 그 직분을 행할 때 입는 거룩한 옷 중의 하나로, 에봇 받침 겉옷 위에 입는다.
소매가 없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앞치마 같은 모양의 옷이다.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 및 가늘게 꼰 베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들었다.
앞판과 뒷판이 견대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어깨 견대에는 호마노 두 개가 각각 붙어 있다.

7. 에봇 띠
skillfully woven bandof ephod, 헤쉐브 아푸다 
출 28:8, 29:5, 39:5, 레 8:7

에봇 위에 매는 띠로, 허리에 감아 앞에서 묶게 되어 있다. 가는 베실, 금실, 청색, 자색, 홍색실로 짠다.

8. 판결 흉패
breastpiece of judgement, 호쉔 미쉬파트
출 28:15-30, 29:5, 39:8-21,레 8:8

에봇 위의 가슴 부분에 붙이는 큰 패를 가리킨다.
흉패는 가로 세로가 한 뼘 길이(반 규빗, 약 22.5cm)이의 네모 반듯한 형태로 금실, 청색, 자색, 홍색실,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들었고, 두 겹이었다.
한 겹에는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보석을 달고, 다른 한 겹에는 우림과 둠밈을 넣었다.
흉패 위쪽은 금사슬에 매어 대제사장의 어깨의 두 견대에 붙어있는 호마노 금테에 고정시키고, 아래쪽은 청색 끈으로 대제사장의 에봇 허리띠에 매어 에봇에서 떨어지지 않게 했다.










제사장의 에봇 ( 28:6-14 )

대제사장이 제일 겉에 입었던 에봇에 관한 지시가 주어지고 있다.
하급 제사장들은 세마포로 만들어진 에봇을 입었다(삼상 22:8).
사무엘은 어렸을 때(삼상 2:18), 또한 다윗은 법궤 앞에서 춤을 출 때 이 세마포 에봇을 입었다(삼하 6:14).
그러나 대제사장이 입었던 에봇만은 '금 에봇'으로 불렸다.
왜냐하면 많은 금실을 섞어 그것을 짰기 때문이었다.
이 에봇은 소매없는 짧은 상의로서 단추로 옷을 채우게 되어 있었으며 동일한 재료로 공교하게 만들어진 띠가 달려 있었다(6-7절).
또한 두 개의 견대가 있어 한 어깨에 하나씩 매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두 개의 보석이 각 견대에 하나씩 금테에 물리워 부착되어 있었다(9-12절).


겉옷 אַדֶּרֶת (아데레트)

엘리야는 엘리사를 만났을 때 “겉옷”을 던졌다(왕상19:19, 새번역 외투). 이 때 “겉옷”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는 אַדֶּרֶת (아데레트)이다. 헬라어로는 μηλωτή (멜로테)이다. 비잔틴 시대에 이르러 ‘멜로테’는 수도원의 수사들이 입는 옷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이 단어는 엘리야와 엘리사 사이의 관계를 암시하는 매우 교묘한 용어이기 때문에 좀 더 깊이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엘리야가 호렙산 동굴에서 작은 미세한 소리 속에 계시는 야훼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는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운 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왕상19:13). 엘리야는 “겉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것은 예언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특별한 옷이었다.

스가랴는 거짓예언자를 꾸짖었는데 “그 날이 오면, 어느 예언자라도 자기가 예언자 행세를 하거나 계시를 본 것을 자랑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예언자처럼 보이려고 걸치는 그 거친 털옷(아데레트)도 걸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슥13:4). 아데레트는 예언자의 영광스러운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서 어깨로부터 걸치는 망토와 같이 생긴 겉옷이었을 것이다. 이것을 한글 역본들은 “털옷”, “외투”, “겉옷”, “왕복/어의/임금의 옷”, 따위로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 아마도 아데레트는 염소나 양의 털가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털옷”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에서가 태어났을 때 “전신이 털옷 같았다”고 묘사할 때 이 단어 ‘아데레트’를 사용했다(창25:25).

본디 אַדֶּרֶת (아데레트)는 “영광/광휘/존귀”를 의미하였다. אַדֶּרֶת (아데레트)는 여성명사 연계형인데 남성명사로는 אֶדֶר (에데르)가 있다. 이 단어의 동사 אָדַר (아다르)는 ‘넓다/위대하다/존귀하다’란 뜻으로 쓰이는데 성경에서 니팔형으로 두 번, 히필형으로 한 번, 도합 세 차례만 언급된다. 출애굽기 15장에 ‘바다의 노래’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이 동사는 니팔형으로 야훼의 위대함을 가리켜 두 차례 사용되고 있다(출15:6, 11). 이 동사는 영광스러움을 나타내는 상태동사이다. 이 동사에서 남성명사 ‘에데르’와 여성명사 ‘아데레트’가 파생한 듯하다.

대부분 ‘겉옷’이라고 번역된 여성명사 ‘아데레트’는 야훼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나타내기도 한다(슥11:3). 이 단어는 본디 하나님의 영광이나 왕이나 귀족과 같은 존귀한 신분을 묘사한 것이었을 것이다(욘3:6). 여호수아가 여리고 도성을 함락했을 때 아간이 금과 은과 시날 산 “외투”(아데레트)를 숨겼는데 이 ‘아데레트’는 바벨론에서 수입한 최고급 옷으로서 여리고 도성의 왕이 입고 있던 왕복이었을 수도 있다(수7:21, 24).

‘영광’이나 ‘존귀’란 말뜻이 어떻게 ‘겉옷’이란 뜻으로도 발전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중요한 단서는 스가랴 13장 4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슥13:4). 예언자들이 자신의 존귀한 신분을 나타내려고 염소털로 망토를 만들어 입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언자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존귀함과 영광을 나타냈던 것 같다. 엘리야는 본디 디셉(티스베)에서 농사짓는 농부였는데 야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염소털로 망토를 지어서 어깨에 걸치고 다녔던 것 같다.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신현현의 체험을 하였을 때 야훼로부터 세 가지 분부를 받는다. 이 중 하나가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이다. “아벨므홀라 출신인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서,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왕상19:16 새번역). 이 명령에 의하면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서 후계자로 삼아야 했다. 그러나 엘리야는 엘리사를 만났을 때 겉옷을 툭 던진다. 왜 기름을 붓지 않고 겉옷을 던졌을까? 제자로 삼으려면 기름을 붓지 않았어도 좀더 예식을 갖추어 엘리사에게 겉옷을 입혀주는 정중함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엘리야가 승천하는 장면에서도 이상한 모습이 보인다. 그토록 열심히 따라 다니던 엘리사에게 엘리야는 승천하면서 하늘에서 겉옷을 떨어뜨려 준다. 엄숙하게 망또를 입혀주면서 엘리사를 제자로 삼는 장면은 찾아 볼 수 없다. 예언자가 걸치던 겉옷을 제자에게 물려주는 것이 고대의 일반적인 관례였음을 이 대목에서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주께서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제자로 삼되, 그 제자 엘리사로 하여금 우상숭배자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예후의 칼날을 피한 자들을 모조리 다 죽이는 사명이 엘리사에게 떨어진 것이다.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기름을 부어라는 명령을 받았다. 엘리야는 엘리사가 밭을 갈고 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왕상19:19), 기름을 붓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예언자의 “겉옷”(아데레트)를 툭 던졌다. 엘리야는 승천하면서 끝까지 따라온 엘리사에게 “겉옷”(아데레트)을 마지막으로 툭 던져 주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주석 전통과는 매우 다르다. 스승 엘리야의 능력을 갑절로 구한 엘리사에게 성령의 능력이 갑절로 임하였다는 이해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엘리야의 겉옷에 관한 묵상을 바르게 하려면 열왕기상 16장부터 열왕기하 1장에 걸쳐있는 매우 장황한 엘리야-엘리사 이야기를 다른 관점으로 더욱 깊이 세밀하게 읽어 보아야 할 것이다. 엘리야는 야훼로부터 세가지 분부를 받았으나(왕상19장), 이 중 한 가지도 이행하지 않았다. 하사엘에게 기름을 붓지도 않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붓지도 않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붓지도 않았다. 호렙산 동굴에서 변화를 받은 엘리야의 사상과 마음을 이 겉옷이란 모티프를 통해서 신명기사가는 지극히 조심스럽게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반포 속옷

반포(班布)는 반물(검은 빛을 띠는 남색) 빛의 실과 흰 실을 섞어 짠 띠나 수건 감의 폭이 좁은 무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속옷’이란 표현과 같이 사용 되는데, 수 놓은 옷, 체크 무늬 옷, 섞어 짠 옷 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28장 요약

제사장의 옷은 흉패, 에봇, 겉옷, 반포 속옷, 관, 띠, 그리고 성패로 구성되어 있다.

제사장의 의복은 두 가지 사실을 나타낸다.

첫째,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제사장 직분의 거룩성과 위엄
둘째, 권위를 부여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순종

28장 서두에서,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을 가까이 오게 하셨다(1절).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제사장에게 옷을 입히고 기름을 부어 위임식을 행하여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도록 하였다(41절).
이 두 곳 사이에는 신성한 제사장의 옷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 있다(2-39절).
에봇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를 늘 기억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긴 호마노가 부착되어 있었다(6-14절).
판결 흉패에는 각 보석에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가 빛날 것임을 상징해 준다(15-28절).
우림과 둠밈은 흉패 안에 두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길은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29-30절).
에봇을 받쳐 주는 겉옷과 기타의 기구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엄연한 구분을 시사해 주고 있다. 곧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긴 패에 의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성물을 받으신다(311-39절).
따라서 제사장의 옷은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에서 중보 역할을 감당한다(38절).

하나님은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혀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시고,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게 하셨다.

제사장 아론을 위해 거룩한 옷을 지어 입히는 이유가 무엇인가?(2-3절)

성막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으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장소'라면, 제사장은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장 아론을 위해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구별하셨다(2절).
하나님은 제사장의 옷을 만드는 방법과 재료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다.

첫 번째 소재는 금이다.
옷에 금이 들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값지고 귀한 옷이라는 의미이다.

두 번째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이다.
고대사회에서 이것은 다 왕권을 상징하는 재료들이다.
제사장의 옷을 만드는 재료와 성막을 만드는 재료가 동일하다는 것은 성막과 제사장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제사장의 에봇 위의 어깨에 붙인 보석은 무엇이며, 그 위에 무엇을 새겼는가?(9-12절)

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해서 그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다.
제사장의 에봇은 그것을 말해 준다.
에봇은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금실,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든 것으로, 제사장의 제일 밖에 덧입는 일종의 앞치마이다.

그 어깨에는 호마노 보석 두 개를 달고 한 호마노당 이스라엘 지파 이름 6개씩, 합해서 열두 지파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것은 제사장이 이스라엘을 보석처럼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선다는 상징이다.

구약에서는 제사장만이 영광과 존귀로 옷 입고 하나님 앞에 섰지만, 신약에서는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로 옷 입고(롬 13:14 ; 갈 3:27), 세상을 섬기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벧전 2:9).

우리가 택함 받은 것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짊어지고 섬기는 존귀한 사명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날마다 잊지 않아야 한다.




36절. 너는 또 순금으로 패를 만들어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패(치츠)

본래의 의미는 '반짝임'인데, '꽃'이나 '꽃 모양의 무늬'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종종 '장식패'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70인역에서는 '잎'을 뜻하는 '프페탈론'으로 번역했다.
고대종교에서는 꽃이 주술적 효과를 지닌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는데, 그것은 꽃 자체가 생명의 요소로 화(禍)를 방지하는 효과를 지닌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즉 만약 신에게 제사를 드리다가 그 제사가 신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어떤 '죄과'가 발생하게 되는데 그럴 경우 '꽃'이 이 '죄과'를 막아 준다는 것이다(Keil).
또한 꽃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형상으로도 종종 쓰였는데, 여기서 제사장이 꽂 모양의 패를 쓴 것은 이방종교의 주술적 효과를 따른 것이 아니라 왕과 같은 위엄과 권위를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는 성도들을 가리켜 '왕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 했고, 또한 이와 비슷한 표현을 하고 있는 부분을 볼 수 있다(계 1:6; 5:10; 사 61:6; 66:21).

인을 새기는 법으로
- 11절 주석 참조.

여호와께 성결(코데시 라예호와)

- 우리말로 '성결'이라고 번역된 '코데쉬''거룩'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여호와께 거룩' 혹은 '여호와를 향한 거룩'이 된다.

대제사장의 의복은 여러 가지 장식과 보석 등으로 꾸며져 일반 의복과 완전히 구별되었는데, 그 목적이 사람들 앞에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것'임을 일깨우기 위해 이같은 글을 새겼을 것이다.

또한 대제사장은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는 자이니 그가 그 제물의 죄건(罪愆)을 담당해야 함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서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 이래 만물은 인류와 함께 죄로 오염되었는바 그대로는 하나님께 바칠 수 없으니 여호와 앞에서 성결함을 보장받은 대제사장이 이를 책임지고 바쳐야 했기 때문이다(38절).

따라서 여기 대제사장은 장차 온 인류가 만물의 죄건을 담당하실 이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러나 한편 당시 이방 종교의 사제들은 주술적(呪術的) 효과를 위해 주문을 새긴 띠나 두건을 머리에 두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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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판을 만들어 세우라(출애굽기 26:15)

너는 조각목으로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어 세우되.
Make upright frames of acacia wood for the tabernacle.

16. 각 판의 장은 십 규빗, 광은 일 규빗 반으로 하고 

널판의 길이는 10규빗, 넓이(폭)은 1규빗 반(1 1/2 규빗) 

17. 판에 두 촉씩 내어 서로 연하게 하되 너는 성막 널판을 다 그와 같이 하라.
18. 너는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되 편을 위하여 널판 스물을 만들고
19. 스무 널판 아래 은받침 마흔을 만들찌니 이 널판 아래에도 그 두 촉을 위하여 두 받침을 만들고 저 널판 아래에도 그 두 촉을 위하여 두 받침을 만들찌며
20. 성막 다른 편 곧 그 북편을 위하여도 널판 스물로 하고

* 다른 편(젤라, 첼라) - 널판과 동의어. 창세기에서 갈비뼈를 젤라라고 한다. 
  남자의 갈비 뼈 24개. 여자의 갈비뼈 24개 도합 48개
  성막의 구조에서 널판이 48개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깨닫게 한다.
  신랑되신 그리스도께서 신부가 되는 교회를 보호하신다.
  은받침은 성경에서
  1. 아브라함은 막벨라 굴을 은 400세겔을 지불한다.  
  2. 요셉이 애급으로 팔려갈 때 은 30에 팔렸다/
  3. 예수께서 은 30에 팔렸다.
  - 조각목과 같은 인생을 널판지로 만들어 금으로 씌워서 보혈의 댓가를 지불한 은으로 받침을 만들어 세운다.




26-27절. 띠를 만들라 

너는 조각목으로 띠를 만들찌니 성막 이편 널판을 위하여 다섯이요.
성막 저편 널판을 위하여 다섯이요 성막 뒤 곧 서편 널판을 위하여 다섯이며.


골로새서 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은 : 댓가, 금 : 믿음, 성령 : 하나되게하는 은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


에베소서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1.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2.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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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2022(토) 단(壇) 출애굽기 27:1 

출애굽기 27장  / 번제단(燔祭壇), 성막 뜰(세마포 휘장)

27:1-8, 번제단에 대한 설명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동물을 희생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동물을 희생 제사로 드려서 죄 용서를 받아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동물을 잡아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곳이 번제단입니다.
번제는 히브리어로 ‘올라’로, ‘올라간다’는 뜻이고, 단은 ‘미즈베아’로 ‘죽이다’는 뜻입니다.

번제 / עֹלָה   5930

1. 제단 위에 드려진 것,  2. 상승

발음 / 올라(ʽôlâh)

관련 성경 / 번제(창 8:20, 레 10:19), 번제물(출 10:25, 레 3:5, 민 6:11)
[동] 올라가다(겔 40:26), 번제하다(창 22:7, 8) 
구약 성경 / 9회 사용

단(번제단) / מִזְבֵּחַ    4196

1. 제단,  2. 출애굽기 30:27-28

발음 / 미즈베하(mizbêach)
어원 / 207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향단(출 40:5, 26, 레 4:7), 번제단(레 4:7), 제단(민 16:39, 왕상 1:53, 시 84:3)
구약 성경 / 400회 사용

번제단도 조각목으로 만듭니다.
다른 기구와 차이점은 금으로 싸지 않고 놋으로 감싼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금보다 놋이 불에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금은 1,065도에 녹고, 놋은 1,085도에 녹는다고 합니다.

번제단은 가로 5규빗(2.5미터), 세로 5규빗(2.5미터), 높이가 1규빗반(75센티) 정도의 정사각형이며 4개의 뿔이 있고 가운데는 그물망이 있습니다.
놋 고리 한쪽에 2개씩 네 개가 붙어 있고, 멜 채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으로 쌉니다.
번제단에는 몇 가지 보조기구들이 있는데, 재 담는 통, 부삽, 대야, 고기 갈고리, 불 옮기는 그릇이며 다 놋으로 만듭니다.


번제단(燔祭壇)

번제단은 희생제물을 바치는 곳입니다.
번제단은 죄를 용서받는 자리,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장소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는 일반인들이 못 들어갑니다.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입니다.
물두멍도 성소에 들어가서 섬기는 제사장들이 손과 발을 씻는 곳입니다.

따라서 번제단이 유일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나 나아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 피였습니다(히 9:22).
구약제사는 동물의 피를 흘림으로 죄를 용서받는 제사였습니다.
신약의 제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제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번제단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동물의 피가 필요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뒤틀린 조각목을 놋이 감싸주어 용서와 은혜의 번제단이 된 것처럼 연약하고 무지한 우리 인생을 보혈로 덮어주심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삶(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번제단(燔祭壇)


1. 번제단의 제작

번제단은 하나님께 제물을 불태워 드릴 때 사용하였습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번제단이라고 부르는 것은 분향단과 구별하여 부르기 위한 것이었고 번제단은 또한 놋 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번제단은 성막과 동편 문 사이에 놓여졌습니다.
번제단의 크기는 대략 가로 2m, 세로 2m, 높이 1.25m로서 속이 비어 있고 나무 틀에 놋을 입혀 만들어 쉽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네 모퉁이 위에는 뿔이 있었으며 이 뿔 또한 놋으로 입혀야 했습니다.
그릇들 역시 놋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제사장의 성별 시와 속죄일에는 피를 그 뿔에 발라야 했습니다.
놋 그물은 무슨 용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마 번제단 아랫부분을 바깥으로 둘러서 제사에 쓸 불이 바깥으로 퍼지지 않도록 막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채 역시 놋을 입히고 제단 가장자리의 놋 고리에 꿰어 단을 이동시키는 데 사용케 했습니다.
물두멍은 단과 성막 사이에 있었습니다.
이 물두멍은 제사장들이 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a. 번제단(겔 43:13)
제단의 크기는 이러하니라 한 자는 팔꿈치에서부터 가락에 이르고 한 바닥 넓이가 더한 것이라 제단 밑받침의 높이는 한 척이요 그 사방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척이며 그 가로 둘린 턱의 너비는 한 뼘이니 이는 제단 밑받침이요.

b. 놋(민 16:39)
제사장 엘르아살이 불탄 자들이 드렸던 향로를 가져다가 쳐서 제단을 싸서.

놋은 강력한 힘과 능력을 상징한다.

레위기 26:19
내가 너희의 세력으로 말미암은 교만을 꺾고 너희의 하늘을 철과 같게 하며 너희 과 같게 하리니.

신명기 28:23
네 머리 위의 하늘이 되고 네 아래의 은 철이 될 것이며.

요한계시록 1: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 주석(bronze, 놋)
- 주님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놋과 같다.

놋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요한복음 3:14-15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당신을 소개하시면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한 마디 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은 이야기가 민수기 21장에 나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어서 불순종으로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렸습니다.
불평과 원망으로 인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하자,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고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놋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뒤틀린 조각목을 놋이 감싸주어 용서와 은혜의 번제단이 되지 않았습니까?
성막의 뜰을 든든히 지탱해주는 놋 기둥 역시 우리 인생을 든든히 붙들어 주시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2.  번제단이 주는 의미

이 번제단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회막의 성막 문 앞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은 누구든지 희생 제사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는 오직 희생 제사를 통해서만 죄가 사해질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제단 위에서는 장막 뜰에서 예배자가 볼 수 있듯이 죄를 위한 희생 제사가 계속 드려졌습니다.
우리는 이 희생의 궁극적인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히 10:1-18).
번제단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속자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제단의 희생,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뿔은 원래 제사로 드릴 가축들을 상징했으나 후로는 짐승들을 단단히 잡아매기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뿔은 또한 다른 용도로도 쓰였습니다.
생명을 보호받기 위해 성전으로 도망 온 사람은 제단의 뿔을 잡음으로써 상징적으로 자기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고, 그로써 보호를 요청했던 것입니다.

a. 그리스도의 희생(고전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b. 뿔(레 4:7)
제사장은 또 그 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들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전부를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27:9-19, 성막의 뜰에 대한 설명

성막의 울타리를 세마포로 만드는데, 가로가 100규빗(45m), 세로가 50규빗(22.5m) 울타리의 높이가 5규빗(2.25m)입니다.

   성막 뜰


울타리를 만드는데, 60개의 기둥이 필요합니다.
모두 놋으로 만듭니다.
동쪽과 서쪽에 10개씩 남쪽과 북쪽에 20개씩 놋 기둥을 세웁니다.
그 기둥들을 잘 고정시키기 위해 갈고리와 가름대를 은으로 만듭니다.
성막 울타리는 성막 뜰과 성소, 지성소를 보호해야 합니다.
울타리를 칠 때, 동쪽에 문을 만드는 10m만 제외하고 모두 하얀 세마포로 두릅니다.

동쪽에만 있는 문은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진 휘장입니다.
거기도 기둥이 넷 필요하고 받침대도 네 개 필요합니다.
누구나 성막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넓고 큰 문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집, 성막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막 울타리 동쪽에 있는 문은 우리에게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요한복음 14:6).

번제단을 만들 때도 놋을 사용했고, 물두멍도 성막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이 사용하던 놋거울로 만들었습니다. 성막의 울타리를 만들 때 역시 놋으로 기둥을 만들고 받침대도 만듭니다. 성막을 만들 때 금이 사용되는 것만큼이나 놋도 많이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놋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요한복음 3:14,15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당신을 소개하시면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한 마디 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은 이야기가 민수기 21장에 나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어서 불순종으로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렸습니다. 불평과 원망으로 인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하자,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고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놋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뒤틀린 조각목을 놋이 감싸주어 용서와 은혜의 번제단이 되지 않았습니까? 성막의 뜰을 든든히 지탱해주는 놋 기둥 역시 우리 인생을 든든히 붙들어 주시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할렐루야!

27:20,21, 감람으로 짠 기름으로 성소 안에 등불을 켜라는 내용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올리브를 찧어서 짜낸 깨끗한 기름을 가져다가 등불을 켜게 하되, 그 등불은 늘 켜 두어라.
아론과 그 아들들은 등불을 회막 안의 증거궤 앞에 쳐놓은 휘장 밖에 켜 두어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주 앞에서 꺼지지 않도록 보살펴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길이 지켜야 할 규례이다.    


적용을 위한 질문 / 
성막 기구를 만드는 주 재료가 조각목과 놋인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27장. 번제단과 성막의 뜰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동암 머무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계명과 함께 성막에 대한 설계도를 받았습니다.
27장은 번제단과 성막 뜰의 세마포 휘장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를 말씀합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번제단을 마주 대하게 됩니다.
번제단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5규빗이고 높이가 3규빗으로 성막에서 가장 큰 기구인 만큼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번제단(燔祭壇)조각목으로 만들어서 놋으로 쌌습니다.

성경에서는 금은 영광, 은은 구속을, 놋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놋으로 싼 번제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놋제단에서 이스라엘을 만나시겠다고 하셨습니다(29:42, 43).
십자가는 하나님과 죄인이 만나는 곳입니다.

“무릇 단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고 하신 말씀처럼(29:37) 그리스도를 붙드는 모든 죄인들은 깨끗함을 입게 될 것입니다.

번제단의 위 사방 모서리에는 뿔을 이어서 만들게 하였는데, 희생제물을 묶는 용도였습니다.
그러나 뿔은 또한 능력과 힘을 상징하는데, 구세주의 단호한 목적과 그의 사랑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붙들어 맨 것은 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그 힘이었습니다(요 10:19,  빌 2:9).
번제단에서 태우고 있는 제물은 예배하러 회막에 들어오는 모든 자들에게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선포하기에 충분합니다.

이어서 성막 뜰에 대한 지시가 나옵니다(9~19).
바깥뜰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세마포 휘장입니다.
성막의 세마포 휘장은 흰 세마포로 만들어서 모든 주변의 이스라엘 진영의 텐트나 또는 가나안 사람들의 어두운 것과는 확연하게 구별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죄 없으신 순결하심과 아름다우심을 드러냅니다.
이 세마포 휘장은 뜰 내부로 세워진 60개의 기둥에 5규빗 간격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이 기둥의 받침은 불의 작용을 견뎌내는 놋으로 만들어야 했는데 이것은 죄인들의 대속물 위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에 소멸되지 않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상징입니다.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만들라고 지시하시는데(11), 가름대는 기둥과 기둥을 연결해주는 막대기였고, 갈고리는 세마포장을 가름대에 연결하게 했습니다. 이 은은 구속의 상징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거룩한 의와 거룩한 은혜가 결합된 것을 보여줍니다.

문은 오직 하나입니다.
여기서 하나 더 주목할 것은 문에 수를 놓으라고 했는데, 회막 안의 휘장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회막 안의 휘장과 덮개에는 그룹을 수놓으라고 지시하셨지만, 여기 성막의 문에는 그런 지시가 없고 단지 삼 색 실로 수를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 성막으로는 모든 죄인들이 들어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만일 그룹을 수놓으라고 하셨다면 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이 성막 문으로조차 들어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은 모든 죄인들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이 되어야 했기에 그룹을 수놓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문은 성막 안으로 연결됩니다(20~21).
제사장들은 증거궤(지성소) 앞 휘장 밖에서(성소)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등불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것은 제사를 드리지 않는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게 하라는 강조의 말씀으로, 24시간 불이 켜져 있도록 하라는 명령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해했습니다.
이 등불은 창문 하나 없는 성막 안을 언제나 환하게 밝혀주는 유일한 빛입니다.
빛이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언제나 밝히 비추시고 보고 계시며 생명과 빛을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 불을 위해서는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만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성도 안에 언제나 내주하시는 빛 되신 주님에 대한 상징이며, 그 빛은 언제나 오직 성령의 기름으로만 타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번제단에서 타오르는 희생제물은, 그 제물을 가지고 온 예배자와 동일하게 여겨졌습니다.
그 제물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마치 그 희생제물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에서 번제단에서처럼 타오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진노를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실 때 그 안에서 함께 죽은 것이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놋으로 싼 번제단이 상징하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고, 그것만이 우리의 심령에 평안을 주는 복음인 것을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불이 우리의 심령 가운데 꺼지지 않도록 순결한 기름, 성령의 은혜에 완전히 붙들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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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聖幕) (히) 미시칸(mishkan) 4908 מִשְׁכָּן

1. 거주,  2. 엽기 18:21,  3. 굴

발음 / 미시칸(mishkan)

어원 / 79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장막(출 25:9, 레 15:31, 대하 1:5), 성막(출 26:1, 민 3:26, 대상 23:26), 휘장(출 26:35), 회막( 출 39:32, 민 3:7, 대상 6:32), 집(욥 18:21), 거처(시 49:11, 78:28, 사 32:18, 렘 9:19), 처소(시 132:5, 사 22:16, 겔 37:27).
[동] 계시다(시 26:8), 살다(욥 21:28).
구약 성경 / 139회 사용

* 7931. שָׁכַן    
1. 아래 앉다,  2. 눕다,  3. 거주하다

발음 / 사칸(shâkan)

관련 성경 / 거하다(창 9:27), 들어가다(출 40:35), 엎드리다(신 33:20), 깃들이다(사 13:21, 겔 17:23),머물다(출 24:16, 민 9:22, 잠 7:11), 계시다(왕상 8:12, 사 8:18), 살다(욥 30:6, 렘 46:26), 덮이다(욥 3:5), 쉬다(나 3:18), 두다(신 12:11, 느 1:9, 렘 7:12), 세우다(수 18 : 1), 떨어뜨리다(시 7:5).
[명] 소유지(수 22:19), 주소(잠 8:12), 있는 곳(욥 38:19).
구약 성경 / 129회 사용

성막(聖幕) (헬) 스케네(σκηνή) /  4633 σκηνή, ῆς, ἡ  

1. 초막,  2. 오두막집

발음 / 스케네( skēnē)

4632와 4639와 유사어로 보임 : 천막

관련 성경 / 초막(마 17:4, 막 9:5, 눅 9:33), 처소(눅 16: 9), 장막(행 7:43, 히 8:2, 계 13:6) 
신약 성경 / 20회 사용

성전(聖殿) (히) 바이트(bayith)  בַּיִת 1004  / 바이트(bayith) בַּיִת

1. 집,  2. 장막

열왕기하 23:7, 여호와의 전 가운데...

어원 / 연계형 בֵּית, 복수 어미활용 בָּתֵּיהֶם ,בָּתֵּיכֶם ,בָּתֵּינוֹ, 1129에서 유래한 약어로 보임
관련 성경 / 집(창 7:1, 레 14:35, 삼상 1:7), 권속(창 18:19,레 16:6, 삼하 2:3), 궁(창 12:15, 삼하 7:2), 처소(창 24:31, 대 하5:7), 집 안(창 27:15, 시 55:14), 전(출 34:26, 신 23:18), 옥(창 39:20, 삿 16:21,왕하 25:27), 간수장(창 39:21), 궁중(창 45:2, 왕하 21:33, 에 7:8), 가족(창 5:22, 신 11:6, 시 68:6), 족속(출 2:1, 레 22;18, 수 17:17), 식구( 출 12:3), 안쪽(출 28:26), 가옥(레 14:55, 신 19:1,사 5:8), 친정(레22:13), 종족(민 1:2, 대상 7:4), 지도자(민 25:14), 지파(수 22:14), 신전(삿 9:4,왕하 19:37, 대상 10:10), 신당(삿 17:5), 궁내(왕하10:5), 성전(왕하 16:18, 대상 29:3), 창고(왕하 20:13), 궁궐(왕하 21:18, 대상 14:1), 성막(대상 9:23), 궁전(대상 17:1), 곳간(대상26:15, 사 22:8), 반열(대상 28:13), 내전(內殿)(대하 3:13), 무더기(욥 8:17), 가산(욥 20:28), 국고(사 22:15), 딸(사 10:32), 부엌(겔46:24),  집(미 2:2).
구약 성경 / 2036회 사용

교회(敎會) (헬) 에클레시아(ĕkklēsia) ἐκκλησία / 1577 ἐκκλησία

1. 회,  2. 모임

사도행전 7:38
관련 성경 / 교회(마 16:18, 행 2:47, 롬 16:4), 모인 무리 (행 19:32), 민회(행 19:39), 모임(행 19:41).
신약 성경 / 114회 사용

새 하늘과 새 땅(新天地)
οὐρανὸν καινὸν καὶ γῆν καινήν


거하시매 / 
σκηνόω   4637

1. 살다,  2. 거주하다,  3. 요한계시록 13:6

발음 / 스케노(skēnŏō)
어원 / 미래 σκηνώσω, 제1부정과거 ἐσκή- νωσα, 463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거하다(요 1:14, 계 13:6, 21:3), 장막을 치다(계 7:15).
신약 성경 / 5회 사용
성막 /
σκηνή, ῆς, ἡ  4633

1. 초막,  2. 오두막집

4632와 4639와 유사어로 보임 : 천막

발음 / 스케네(skēnē)

관련 성경 / 초막(마 17:4, 막 9:5, 눅 9:33), 처소(눅 16: 9), 장막(행 7:43, 히 8:2, 계 13:6) 
신약 성경 / 20회 사용
영광
δόξα, ης, ἡ  1391

1. 광명,  2. 위엄,  3. 누가복음 2:9

발음 / 독사(dŏxa)

어원 / 1380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광(마 4:8, 막 8:38, 눅 2:9), 광채(행 22:11), 영화(榮華)(요 17:5).
신약 성경 / 166회 사용
카보드(영광)
כָּבוֹד  3519

1. 무거움,  2. 영광,  3. 사무엘상 4:21

발음 / 카보드(kâbôwd)
어원 / 351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재물(창 31:1), 영화(창 45:13, 삼상 6:5, 시 8:5), 영광(창 49:6, 출 33:18, 대하 1:11, 에 5:11), 존귀(잠 15:33), 귀(貴)(대상29:12, 잠 3:16), 존영(잠 11:16), 영예(잠 25:2, 29:23), 위력(사 8:7),심령(시 108:1).
구약 성경 / 199회 사용

광야생활을 하는 백성들에게 성막을 만들게 하신 이유는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이었다.
왜냐하면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한 백성들은 문제에 부딪치면 애급으로 돌아가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애급에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다양한 신들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다가올 때마다 다양한 신들에 의해서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보여졌기 때문이었다.
광야생활은 수시로 이동하는 생활이었으므로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천막과 같은 주거지를 사용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처소도 천막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게 하셨다.
이렇게 천막으로 만들었던 성막은 솔로몬 왕 때에 반영구적인 건물로 건축되었다.
이것을 솔로몬 성전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성전 중심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많은 유능한 젊은이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고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그 결과 성전에서 더 이상 모일 수 없었다.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환하여 새로 건축한 성전은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스룹바벨 성전도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도 증축하는 중이었는데 이 성전을 헤롯 성전이라고 한다.
헤롯 성전도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었고 지금은 서쪽의 통곡의 벽만 남아 있다.
마지막 때를 예언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제4의 성전이 건축되면 마지막이 된다고 하지만 성경은 성전은 이 땅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솔로몬 성전(기원전 968-961년)

솔로몬이 최초의 성전을 아브라함이 제사를 지냈다는 예루살렘 동쪽 모리아산에 세웠다.
성전 건축을 위해 다윗이 준비해둔 자재 외에도 레바논으로부터 목재를 구입했고, 히람 왕이 보낸 건축기술자와 이스라엘 인부들을 동원하였다.
이 성전은 완성된 후 이스라엘의 중심지가 되었다.

기원전 587년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 파괴됨.

스룹바벨 성전(기원전 520-516년)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유대인들에게 귀향을 허락하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명했다.
당시 유대인들의 지도자였던 스룹바벨은 옛 예루살렘 성전에 비해 규모가 매우 축소된 것이긴 했지만, 옛 성전 자리라고 짐작되는 곳에 성전을 재건하였다.
그렇지만 성전 안에 계약의 궤를 안치하지는 못했다(2마가 2장)

기원전 169년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에 의해 파손됨.

마카베오의 성전(기원전 164년)

마따디아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는 파손된 성전을 보수했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 다시 파손됨.

헤롯 성전(기원전 20년 경 시작)

헤롯 왕은 파손된 성전을 모두 헐고 새로운 양식으로 엄청나게 확장하여 다시 짓기 시작했다.
또한 성전 둘레에 거대한 장벽을 둘러쌓았다.
오늘날 이중 일부가 보존되어 '통곡의 벽'이라 불린다.
그러나 이 재건 작업은 예수 시대에도 완성되지 않았다(마가 13:2).
역사가들에 의하면, 서기 64년경 헤롯 아그립바 2세 때에 완성되었는데 매우 화려하고 웅장했다고 한다.

유다 전쟁이 있었던 서기 66-70년경에 폐허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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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출애굽기 26:1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가는 베실 - 쉐시(8336) 흰색 /

שֵׁשׁ  8336

1. 흰 대리석,  2. 에스더 1:6,  3. 아가 5:16

발음 / 쉐시(shêsh)
관련 성경 / 세마포 옷(창 41:42), 가는 베실(출 25:4, 39:29), 가는 베(출 39:27, 겔 16:10, 13), 가는 베줄(에 1:6), 세마포(출 38:16, 잠31:22), 화반석(아 5:15), 세마포 휘장(출 27:9, 18).
구약 성경 / 38회 사용
청색(7504)  רָפֶה

1. 늘어진,  2. 연약한

발음 / 라페(râpheh)
어원 / 75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약한(민 13:18. 삼하 17:2, 사 35:2), 늘어진(욥 4:3).
구약 성경 / 4회 사용
하늘색 - 하나님의 마음
푸른색 -ㅡ 아들
자색 - 왕의
홍색 - 피

자색(713)



홍색(8438)


휘장(앙장)(3407)(에리아) - יְרִיעָה

1. 장막,  2. 이사애 54:2,  3. 출애굽기 26:1

발음 / 에리아(yerîyʽâh)

어원 / 341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휘장(출 26:1, 36:9,16, 26:6, 36:14, 민 4:25,삼하 7:2, 시 104:2, 사 54:2, 렘 4:20, 10:20, 49:29)
구약 성경 / 3회 사용
* 3415. יָרַע

1. 떨다,  2. 약하다,  3. 해롭다

발음 / 야라(yâraʽ)  
관련 성경 / 떨다(사 15:4), 근심하다(창 21:12, 느 2:10,13:8), 악하다(창 38:10, 삼하 11:27), 기뻐 아니하다(창 48:17, 삼상 8:6, 사 59:15), 아끼다(신 15:10), 미운 눈으로 바라보다(신 28:54,56),슬프다(삼상 1:8), 불쾌하다(삼상 18:8), 걱정하다(삼하 11:25), 해하다(삼하 20:6), 악하게 여기다(대상 21:7), 멸하다(욥 20:26), 미치다(시 106:32), 싫어하다(욘 4:1).
[명] 근심(창 21:11), 수심(느 2:3).
구약 성경 / 21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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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8일(금) 출애굽기 26장 성막(聖幕)

성막의 네 가지 기구 - 성막 덮개, 널판, 띠, 휘장


출애굽기 25-30 : 성막의 식양(설계도)

출애굽기 35-40 : 성막의 제작(브살렐, 오홀리압)

* 성막(聖幕, Tabernacle)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


26:1-14, 성막 덮개

성막(성소와 지성소)을 보호하는 천막 또는 천으로 네 겹으로 덮는다.

성막 덮개 :

첫 번째 덮개 /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천사를 수놓아 만든 휘장
                      (5폭 + 5폭 = 10폭, 청색고리 50 x 2 = 100개,  금 갈고기 50개로 연결 20m x 14m)

두 번째 덮개 / 염소 털로 만듦(22mX5m)/ 성막을 덮는 막
                     
(5폭+6폭=11폭, 전면과 후면 1/2 더 내림, 청색고리 50X2=100, 놋 고리 50개로 연결)

염소털(5795) - 7절.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휘장을 염소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지며.

עֵז  5795

1. 암염소,  2. 염소털

발음 / 에즈(ʽêz) 
어원 / 58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염소(창27:9, 출12:5, 아4:1), 염소털(출35:23, 민31:20, 삼상19:13).
구약 성경 /  75회 사용
  염소털은 희생을 상징
 
26:14

세 번째 덮개 /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만듦, 두 번째 덮개 보다 더 큼
                       ☞ 막의 덮개

네 번째 덮개 /
해달의 가죽으로 만들었고 제 3 덮개 보다 더 큼/ 윗 덮개  

14절. 14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지니라

붉다(아담) - 수양의 가죽에 아담의 색으로 염색하라 즉 죄를 뒤집어 쓰신 예수 그리스도

해달의 가죽(돌고래) - 방수의 기능 및 멸시를 받으신 메시아(이사야 53장 고난 받으신 예수)
* 해달의 가죽으로 질겨서 신발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의 모습은 나이 오십도 안 되어서....(요한복음 8:57)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나이가 쉰도 안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3- 수양 가죽의 붉은 색
2- 염소의 머리털로 짠 덮개
1-하나님의 마음이 설명된 네 가지 색갈
지성소
속죄소(시은좌)

신앙은 점점 더 깊어지고 넓어져야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저 점점 더 좁아지고 굳어지는 것이 문제라고 하겠다.






성막의 덮개







성막 덮개


성막의 첫 번째 덮개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그룹(천사)을 공교히 수놓아서 만든 휘장입니다(출 26:1).


첫 번째 덮개는 길이가 28규빗(14m)이며 너비는 4규빗(2m)으로 5폭씩을(10m) 연결한 두 폭의(20m) 휘장을 50개의 금 갈고리로 연결시켜서 만듭니다.


성막의 두 번째 덮개
염소 털로 짠 덮개입니다.

길이가 30규빗(15m)이며 너비가 4규빗(2m)의 5폭과 6폭으로 연결된 두 휘장을 청색고리 50개씩을 양쪽같이 달고 놋 갈고리 50개로 연결시켜 만든 11폭의 덮개입니다.
두 번째 덮개는 첫 번째 덮개보다 전면과 후면에 1m씩이 더 내려 덮습니다(출 26:7-13).

성막의 세 번째 덮개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만듭니다(출 26:14).


숫양은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쳐집니다.
이는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예수님께서 흘려주신 피로 구원받았습니다.

성막의 네 번째 덮개
해달의 가죽(물개 가죽)으로 만듭니다(출 26:14).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성막은 물개가죽(해달의 가죽)으로 덮인 모습밖에 안 보입니다.
초라한 모습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금으로 만들어진 기구들이 있습니다.
눈에 부시게 환하고 아름다운 집이 성막, 하나님의 집입니다.

성막의 덮개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왕궁이나 근사한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동물들의 똥이 나뒹구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작은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목수 요셉의 아들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예수님은 명함 한 장 떳떳하게 내놓을 수 없는 초라한 사람입니다. 유명한 대학졸업장도 없고 아무런 학위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대놓고 예수님을 우습게 보았고 멸시천대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평강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6:15-30, 성소와 지성소의 벽(뼈대)이 되는 널판과 띠 

널판도 모두 조각목(싯딤나무 또는 아카시아 나무)으로 만듭니다.
남쪽에 20개 북쪽에 20개 서쪽에는 벽에 6개 모퉁이에 2개로 8개이며 성막에는 모두 48개의 널판이 필요합니다.
한 널판마다 은 받침이 2개씩 들어갔으니까 은 받침은 총 96개가 필요합니다.

널판에도 보이는 띠가 4줄이 있고 속으로 보이지 않은 1줄의 띠가 있어 모두 5띠의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널판 마다 띠를 꿸 금고리 4개씩이 부착되어 있었으며 널판의 높이는 10규빗(5m)이며 넓이는 1규빗 반(75cm)으로 만들어집니다.

널판과 띠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싼 널판 역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조각목(아카시아 나무)은 연약한 인간(성)을 뜻하고 금은 예수님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조각목은 보통 땔감으로 사용하던 나무입니다. 가시가 나 있고, 뒤틀려 있습니다.

조각목은 너무 단단해서 건축재료로 사용하기가 힘든 나무입니다.
조각목은 마치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나무입니다.
그런데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조각목이 모퉁이의 머리 돌처럼 귀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사용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임하는 거룩한 장소인 성소와 지성소의 벽이 널판입니다.
우리 역시 널판과 같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시니까요.
조각목처럼 거룩한 성전을 만들 재목이 아닌데,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를 향해 고백했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린도전서 3:16,17)

출애굽기 26:31-37, 휘장 

휘장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지성소 휘장(26:31-35)
다른 하나는 성소에 들어오는 출입문 역할을 하는 성소 휘장(26:36-37)

지성소 휘장과 성소 휘장


휘장은 모두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만듭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은 그 위에 천사를 공교히 수 놓아 만듭니다.
색깔도 눈에 띄지만 아름답게 수를 놓은 천사가 있어 더욱 거룩하게 보이는 천입니다.

지성소 휘장은 네 개의 기둥 위에 금 갈고리로 드리워집니다.
네 기둥은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쌉니다.
네 기둥은 은 받침 위에 세워집니다.
휘장을 갈고리 아래로 늘어뜨린 후에 증거궤를 그 휘장 안에 들여놓습니다.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시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리라”(35)

성소 휘장은 다섯 개의 기둥 위에 금 갈고리로 드리워집니다.
다섯 기둥 역시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쌉니다.
성소 휘장과 지성소 휘장을 설치하는 내용이 거의 비슷합니다.
지성소 휘장과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다섯 기둥은 놋 받침 위에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성소보다 지성소가 더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휘장은 모두 예수님을 뜻합니다.
성소로 들어가는 문 역할을 하는 휘장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요한복음 14:6).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은 예수님의 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받혀 돌아가실 때, 성소의 휘장(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몸이 찢어진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태복음 27:50-5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산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브리서 10:19-20)


적용을 위한 질문

1. 성막의 덮개는 왜 하나가 아니라 네 개였을까?

2. 성막 덮개를 4중 구조로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널판을 만들어 세우라(Make upright frames of acacia w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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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40장 / 성막의 완성과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한 성막 


출애굽기 40장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이 세워지고 여호와의 영광(하나님의 임재)이 성막에 충만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드디어 출애굽기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39:32-43절에서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의 모든 기구들을 만들어서 모세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이제 성막을 세우고, 기구들을 제 자리에 넣기만 하면 됩니다.

출애굽기 40:1-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세우고, 성막 기구들을 제자리에 들여놓고 모든 기구에 관유를 발라 성막 기구들을 거룩하게 하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라고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 곧 회막을 세워라. 거기에 증거궤를 들여놓고, 휘장(지성소휘장)을 쳐서, 그 궤를 가려라. 또 너는 떡상을 가져다가 격식대로 차려 놓고, 등잔대를 가져다가 그 위에 등잔불을 올려놓아라. 또 금 분향단을 증거궤 앞에 놓고, 성막 어귀에 휘장(성소 희장)을 달아라.

번제단은 성막, 곧 회막 어귀 앞에 가져다 놓아라. 회막과 제단 사이에는 물두멍을 놓고, 거기에 물을 채워라. 회막 주위로 울타리를 만들고, 거기에 휘장을 치고, 동쪽 울타리에다 낸 정문에는 막을 드리워라.

너는 관유(예식용 기름)를 가져다가, 성막과 거기에 딸린 모든 것에 발라서, 성막과 그 모든 기구를 거룩하게 하여라. 그러면 그것이 거룩하게 될 것이다. 너는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제단을 거룩하게 하여라. 그러면 제단이 가장 거룩하게 될 것이다. 너는 물두멍과 그 밑받침에 기름을 발라, 그것들을 거룩하게 하여라.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회막 어귀로 데려다가, 목욕을 하게 하여라. 그리고 너는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게 하고,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제사장으로서 나를 섬기게 하여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혀라. 그리고 네가 그들의 아버지에게 기름을 부은 것과 같이,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기는 제사장이 될 것이다. 그들은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대대로 영원히 제사장직을 맡게 된다.”


출애굽기 40:16-33a,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세가 성막을 세우고 모든 기구들을 제 자리에 들여 놓았다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애굽에서 나온 지 1년 만인 제 2년 1월 1일에 성막(전체)을 세웠습니다.
모세는 받침들을 놓고, 널판들을 맞추어 세우고, 그 띠를 띠우고, 기둥을 세워, 성막(성소와 지성소 부분)을 완성하였습니다.
또 성막 위에 막을 펴고, 그 위에 덮개(4중으로)를 덮었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증거판을 가져다가 증거궤 안에 넣고, 그 궤에 채를 꿰고, 궤 위에 속죄소를 덮었습니다.
궤를 성막(지성소) 안에 들여놓고, 휘장을 쳐서 증거궤를 막았습니다.

회막(성소와 지성소 부분) 안, 성막의 북쪽 면, 휘장(지성소 휘장) 바깥에 떡(진설병)상을 들여놓았습니다.
상 위에는 하나님께 바치는 빵(진설병)을 차려 놓았습니다.
회막 안의 떡상 맞은쪽, 성막의 남쪽 면에 등잔대를 놓고, 주 앞에 등잔을 올려놓았습니다.
금향단을 회막 안, 휘장 안(지성소 휘장 앞)에 들여놓고,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피웠습니다.

또 동쪽의 성막 문에 막(휘장)을 달고, 성막, 곧 회막 문 앞에 번제단을 놓고, 그 위에 번제물과 곡식제물을 바쳤습니다.
회막(성소와 지성소 부분)과 번제단 사이에 물두멍을 놓고, 거기에 씻을 물을 채웠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그 물로 손과 발을 씻었는데, 회막에 들어갈 때와 단에 가까이 갈 때에 그렇게 씻었습니다.

울타리를 만들어서 성막과 번제단을 둘러싸고, 동쪽 울타리에다가 낸 정문에는 막을 달아 가렸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모든 일을 마쳤습니다.
 



성막 세우기 끝


모세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성막을 세운 이야기 안에 반복해서 계속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40:19, 21, 23, 25, 27, 29, 32절에 7번씩이나 반복해서 나오는 문장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일을 다 마쳤습니다.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세계역사에 모세와 같은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위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수백 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탈출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세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마쳤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40:33b-38, 
성막이 완성된 후,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임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모든 일을 다 마쳤습니다. 그 때에 구름이 회막을 덮고, 주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습니다. 모세는, 회막에 구름이 머물고, 주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으므로, 거기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구름이 성막에서 걷히면, 진을 거두어 가지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걷히지 않으면, 걷힐 때까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길을 가는 동안에, 낮에는 주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구름 가운데 불이 있어서, 이스라엘 온 자손의 눈 앞을 밝혀 주었습니다.


성막 완성 후 하나님의 영광 충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향해 행진할 때,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로 함께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40년 동안 그것을 늘 보고 지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걸으면서 밤에는 불이 함께 하고, 낮에는 구름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매일 경험했다는 것으로 출애굽기를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과 불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약 성경에서 종종 구름과 불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각적으로 표현할 때, 구름과 불로 표현합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임재)이 구름과 불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 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출애굽기 24:15-18)


출애굽기를 마무리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과 불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밤이나 낮이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낮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가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거기서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마무리는 이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머물러 있으면 그냥 머물러 있었습니다. 밤에도 행진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불이 구름 가운데 있어서 그것을 바라보고 움직였습니다.

구름과 불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실제입니다.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을 향해 걸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실제, 하나님의 임재 -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 - 는 구름과 불이었습니다. 구름과 불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잖은 위로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도 사람인지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가끔은 눈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는 게 믿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격언들이 몇 개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 일견이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
“To see is to believe!”
"눈으로 봐야 믿을 수 있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우리는 대화 중에 ‘보다’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전혀 못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를 들겠다고 해도 되는데, 습관적으로 예를 들어보겠다고 말하는 저 자신을 봅니다.

먹어 봅시다!먹읍시다’ 하면 되는데...
입어 봐도 되나요?입어도 되나요?’ 하면 되는데...
만나 보고 싶다! 만나고 싶다! 하면 되는데...
만져 보자, 가 보자, 물어보자, 해 보자. 걸어 보자, 뛰어 보자, 살아 보자 등등


구름과 불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의미였습니다. 하나님의 실제를 눈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구름이 눈에 보이고, 불이 내 눈 앞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고 안심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실제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름과 불입니까? 무지개입니까? 천둥과 번개입니까?

출애굽기 전체 40장 중에서 10장 이상이 성막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두 번에 걸쳐 성막 이야기를 출애굽기에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막을 이스라엘 백성들 한 가운데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텐트를 치고 살아가는 그 한 가운데 성막을 세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만들기 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해서 모세를 만났습니다. 어디서 모세를 만났습니까? 시내산에서 모세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위에서 모세를 불러 따로 만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텐트를 치고 생활하는 삶의 현장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과 같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려고 그들이 살고 있던 곳이면 어디나 한 가운데 성막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정말 감사한 일인데요,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게 하신 성막이 중요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꼭 그것에 눈에 보여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지만 우리가 믿습니다. 그건 보고 믿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성막이나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이 우리 눈에 보여야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나요? 거룩하게 장식된 교회 건물에 들어가야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나요? 잘 갖춰진 예배시간에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미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고,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살아서 움직이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교회(건물)에 와서, 정해진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더 귀한 예배는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삶(생활예배)입니다.

출애굽기를 마무리하는 이 시간, 이 찬양 가사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우리는 주의 움직이는 교회
이 곳은 주님을 위한 자리
내가 기도하는 모든 땅 위에서
하나님 예배 받을 그 날을 고대하네

나의 노래로 주님의 성전을 지으리 높임을 받으소서
이스라엘의 찬송 중 거하신 주님은 거룩하십니다
두 손 들어 주님의 보좌를 만들고 온 맘 다해 경배하라
그룹 날개 사이에 임하신 것처럼 내 위에 임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이 곳에 섰으니 이 땅을 치유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주를 높이리다
열방들아 주님을 송축할지어다 그 발아래 입 맞추라
영원한 통치자 주 예수 그리스도 그는 위대하신 왕



묵상을 위한 질문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집(성전/교회)입니까? 구름과 불입니까? 무지개입니까? 천둥과 번개입니까?


출애굽기 다음에 바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여호수아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레위기와 민수기, 신명기 - 나와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지루한 제사와 율법 이야기 - 가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너고, 매일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놀라운 기적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리타분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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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40장 / 성막의 완성과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한 성막 


출애굽기 40장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이 세워지고 여호와의 영광(하나님의 임재)이 성막에 충만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드디어 출애굽기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39:32-43절에서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의 모든 기구들을 만들어서 모세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이제 성막을 세우고, 기구들을 제 자리에 넣기만 하면 됩니다.

출애굽기 40:1-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세우고, 성막 기구들을 제자리에 들여놓고 모든 기구에 관유를 발라 성막 기구들을 거룩하게 하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라고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 곧 회막을 세워라. 거기에 증거궤를 들여놓고, 휘장(지성소휘장)을 쳐서, 그 궤를 가려라. 또 너는 떡상을 가져다가 격식대로 차려 놓고, 등잔대를 가져다가 그 위에 등잔불을 올려놓아라. 또 금 분향단을 증거궤 앞에 놓고, 성막 어귀에 휘장(성소 희장)을 달아라.

번제단은 성막, 곧 회막 어귀 앞에 가져다 놓아라. 회막과 제단 사이에는 물두멍을 놓고, 거기에 물을 채워라. 회막 주위로 울타리를 만들고, 거기에 휘장을 치고, 동쪽 울타리에다 낸 정문에는 막을 드리워라.

너는 관유(예식용 기름)를 가져다가, 성막과 거기에 딸린 모든 것에 발라서, 성막과 그 모든 기구를 거룩하게 하여라. 그러면 그것이 거룩하게 될 것이다. 너는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제단을 거룩하게 하여라. 그러면 제단이 가장 거룩하게 될 것이다. 너는 물두멍과 그 밑받침에 기름을 발라, 그것들을 거룩하게 하여라.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회막 어귀로 데려다가, 목욕을 하게 하여라. 그리고 너는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게 하고,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제사장으로서 나를 섬기게 하여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혀라. 그리고 네가 그들의 아버지에게 기름을 부은 것과 같이,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기는 제사장이 될 것이다. 그들은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대대로 영원히 제사장직을 맡게 된다.”


출애굽기 40:16-33a,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세가 성막을 세우고 모든 기구들을 제 자리에 들여 놓았다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애굽에서 나온 지 1년 만인 제 2년 1월 1일에 성막(전체)을 세웠습니다.
모세는 받침들을 놓고, 널판들을 맞추어 세우고, 그 띠를 띠우고, 기둥을 세워, 성막(성소와 지성소 부분)을 완성하였습니다.
또 성막 위에 막을 펴고, 그 위에 덮개(4중으로)를 덮었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증거판을 가져다가 증거궤 안에 넣고, 그 궤에 채를 꿰고, 궤 위에 속죄소를 덮었습니다.
궤를 성막(지성소) 안에 들여놓고, 휘장을 쳐서 증거궤를 막았습니다.

회막(성소와 지성소 부분) 안, 성막의 북쪽 면, 휘장(지성소 휘장) 바깥에 떡(진설병)상을 들여놓았습니다.
상 위에는 하나님께 바치는 빵(진설병)을 차려 놓았습니다.
회막 안의 떡상 맞은쪽, 성막의 남쪽 면에 등잔대를 놓고, 주 앞에 등잔을 올려놓았습니다.
금향단을 회막 안, 휘장 안(지성소 휘장 앞)에 들여놓고,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피웠습니다.

또 동쪽의 성막 문에 막(휘장)을 달고, 성막, 곧 회막 문 앞에 번제단을 놓고, 그 위에 번제물과 곡식제물을 바쳤습니다.
회막(성소와 지성소 부분)과 번제단 사이에 물두멍을 놓고, 거기에 씻을 물을 채웠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그 물로 손과 발을 씻었는데, 회막에 들어갈 때와 단에 가까이 갈 때에 그렇게 씻었습니다.

울타리를 만들어서 성막과 번제단을 둘러싸고, 동쪽 울타리에다가 낸 정문에는 막을 달아 가렸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모든 일을 마쳤습니다.
 



성막 세우기 끝


모세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성막을 세운 이야기 안에 반복해서 계속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40:19, 21, 23, 25, 27, 29, 32절에 7번씩이나 반복해서 나오는 문장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일을 다 마쳤습니다.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세계역사에 모세와 같은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위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수백 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탈출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세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마쳤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40:33b-38, 
성막이 완성된 후,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임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모든 일을 다 마쳤습니다. 그 때에 구름이 회막을 덮고, 주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습니다. 모세는, 회막에 구름이 머물고, 주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으므로, 거기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구름이 성막에서 걷히면, 진을 거두어 가지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걷히지 않으면, 걷힐 때까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길을 가는 동안에, 낮에는 주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구름 가운데 불이 있어서, 이스라엘 온 자손의 눈 앞을 밝혀 주었습니다.


성막 완성 후 하나님의 영광 충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향해 행진할 때,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로 함께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40년 동안 그것을 늘 보고 지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걸으면서 밤에는 불이 함께 하고, 낮에는 구름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매일 경험했다는 것으로 출애굽기를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과 불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약 성경에서 종종 구름과 불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각적으로 표현할 때, 구름과 불로 표현합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임재)이 구름과 불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 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출애굽기 24:15-18)


출애굽기를 마무리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과 불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밤이나 낮이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낮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가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거기서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마무리는 이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머물러 있으면 그냥 머물러 있었습니다. 밤에도 행진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불이 구름 가운데 있어서 그것을 바라보고 움직였습니다.

구름과 불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실제입니다.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을 향해 걸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실제, 하나님의 임재 -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 - 는 구름과 불이었습니다. 구름과 불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잖은 위로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도 사람인지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가끔은 눈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는 게 믿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격언들이 몇 개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 일견이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
“To see is to believe!”
"눈으로 봐야 믿을 수 있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우리는 대화 중에 ‘보다’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전혀 못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를 들겠다고 해도 되는데, 습관적으로 예를 들어보겠다고 말하는 저 자신을 봅니다.

먹어 봅시다! – 먹읍시다’ 하면 되는데...
입어 봐도 되나요? – 입어도 되나요?’ 하면 되는데...
만나 보고 싶다! – 만나고 싶다! 하면 되는데...
만져 보자, 가 보자, 물어보자, 해 보자. 걸어 보자, 뛰어 보자, 살아 보자 등등


구름과 불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의미였습니다. 하나님의 실제를 눈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구름이 눈에 보이고, 불이 내 눈 앞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고 안심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실제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름과 불입니까? 무지개입니까? 천둥과 번개입니까?

출애굽기 전체 40장 중에서 10장 이상이 성막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두 번에 걸쳐 성막 이야기를 출애굽기에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막을 이스라엘 백성들 한 가운데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텐트를 치고 살아가는 그 한 가운데 성막을 세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만들기 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해서 모세를 만났습니다. 어디서 모세를 만났습니까? 시내산에서 모세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위에서 모세를 불러 따로 만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텐트를 치고 생활하는 삶의 현장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과 같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려고 그들이 살고 있던 곳이면 어디나 한 가운데 성막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정말 감사한 일인데요,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게 하신 성막이 중요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꼭 그것에 눈에 보여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지만 우리가 믿습니다. 그건 보고 믿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성막이나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이 우리 눈에 보여야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나요? 거룩하게 장식된 교회 건물에 들어가야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나요? 잘 갖춰진 예배시간에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미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고,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살아서 움직이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교회(건물)에 와서, 정해진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더 귀한 예배는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삶(생활예배)입니다.

출애굽기를 마무리하는 이 시간, 이 찬양 가사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우리는 주의 움직이는 교회
이 곳은 주님을 위한 자리
내가 기도하는 모든 땅 위에서
하나님 예배 받을 그 날을 고대하네

나의 노래로 주님의 성전을 지으리 높임을 받으소서
이스라엘의 찬송 중 거하신 주님은 거룩하십니다
두 손 들어 주님의 보좌를 만들고 온 맘 다해 경배하라
그룹 날개 사이에 임하신 것처럼 내 위에 임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이 곳에 섰으니 이 땅을 치유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주를 높이리다
열방들아 주님을 송축할지어다 그 발아래 입 맞추라
영원한 통치자 주 예수 그리스도 그는 위대하신 왕



묵상을 위한 질문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집(성전/교회)입니까? 구름과 불입니까? 무지개입니까? 천둥과 번개입니까?


출애굽기 다음에 바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여호수아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레위기와 민수기, 신명기 - 나와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지루한 제사와 율법 이야기 - 가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너고, 매일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놀라운 기적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리타분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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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4장 / 언약의 갱신 



모세는 금 송아지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이 깨졌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받았던 십계명 두 돌 판을 깨뜨려버렸습니다(출 32장). 모세는 다시 십계명 두 돌판(증거판)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그 내용이 출애굽기 34장에 나옵니다.

언약 갱신의 첫 단계로, 모세가 두 돌 판을 처음 것과 같이 만들었습니다. 모세는 두 돌 판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그 돌 판을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산으로 올라갑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십니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나는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34:6,7)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서 경배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주께서 저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사실이면, 주께서는 우리와 함께 가 주시기 바랍니다. 이 백성이 고집이 센 백성인 것은 사실이나, 주께서 우리의 악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주의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34:10-17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시 언약을 맺는 내용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와 언약을 세운다. 내가 너희 모든 백성 앞에서, 이 세상 어느 민족들 가운데서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놀라운 일을 하여 보일 것이다. 너희 주변에 사는 모든 백성이, 나 주가 너희에게 하여 주는 그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것을 삼가 지키도록 하여라. 내가 이제 너희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겠다.”(34:10,11)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들(1)
1)너희는 삼가, 너희가 들어가는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않도록 하여라.
2)너희는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그들의 석상을 부수고, 그들의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려라.
3)너희는 다른 신에게 절을 하여서는 안 된다.
4)너희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아라.
5)너희는 신상을 부어 만들지 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특별히 언약을 맺으시면서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하신 명령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그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12,15)”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씩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뭘까요?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하신 이유
1)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올무가 될까 봐
2)그들이 자기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따를까 봐
3)그들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제물을 드릴까 봐
4)그들이 너를 청하면 그 제물을 먹을까 봐
5)너희가 너희 아들들을 그들의 딸들과 결혼시키면, 그들의 딸들은 저희 신들을 음란하게 따르면서, 너희의 아들들을 꾀어, 자기들처럼 음란하게 그 신들을 따르게 만들 까 봐


출애굽기 34:18-26절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들입니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들(2)
1)무교절을 지키고 일주일 동안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어라.
2)처음 태어난 짐승들은 다 하나님께 바치라. 모두 하나님의 것이니까.
3)너희 아들들 가운데 맏아들도 모두 대속해야 한다.
4)아무도 내 앞에 빈 손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5)6일 동안 일하고, 제 7일에 쉬어야 한다.
6)밀을 처음 거두어들일 때에는 칠칠절을, 한 해가 끝날 때에는 수장절을 지켜야 한다.
7)모든 남자들은 모두 한 해에 세 번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주 앞에 나와야 한다.

위에 나오는 7)번 명령에 순종하면 – 언약을 맺으면 - 받는 복이 여기 있습니다.
1)내가 뭇 민족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너희의 영토를 넓혀 주겠다.
2)너희가 한 해에 세 번, 주 너희의 하나님을 뵈려고 올라올 때에,
아무도 너희의 땅을 점령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8)너희는 나에게 바치는 희생제물의 피를, 누룩을 넣은 빵과 함께 바치지 말아라.
9)유월절 제물은 이튿날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10)너희는 너희 땅에서 난 첫 열매 가운데서 제일 좋은 것을 주 너희의 하나님의 집으로 가져오너라.
11)너희는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 된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면서 하신 명령들
구절
언약 또는 명령
12
너희는 삼가, 너희가 들어가는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않도록 하여라.
13
너희는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그들의 석상을 부수고, 그들의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려라.
14
너희는 다른 신에게 절을 하여서는 안 된다.
15
너희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아라.
17
너희는 신상을 부어 만들지 마라.
18
무교절을 지키고 일주일 동안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어라.
19
처음 태어난 짐승들은 다 하나님께 바치라. 모두 하나님의 것이니까.
20
너희 아들들 가운데 맏아들도 모두 대속해야 한다.
20
아무도 내 앞에 빈 손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21
6일 동안 일하고, 제 7일에 쉬어야 한다.
22
밀을 처음 거두어들일 때엔 칠칠절을, 한 해가 끝날 때엔 수장절을 지켜야 한다.
23
모든 남자들은 모두 한 해에 세 번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주 앞에 나와야 한다.
25
너희는 나에게 바치는 희생제물의 피를, 누룩을 넣은 빵과 함께 바치지 말아라.
25
유월절 제물은 이튿날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26
너희는 너희 땅에서 난 첫 열매 가운데서 제일 좋은 것을 주 너희의 하나님의 집으로 가져오너라.
26
너희는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 된다.


출애굽기 34:27-35절은 하나님께 십계명 두 돌판(증거판)을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들을 기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에 기록하였습니다.

모세가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습니다. 주와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모세 얼굴의 살결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로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모세가 그들을 부르자, 아론과 회중의 지도자들이 모두 그에게로 가까이 갔습니다.

모세가 먼저 그들에게 말을 거니, 그 때에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로 가까이 갔습니다. 모세는, 주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하였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하던 말을 다 마치자,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주 앞으로 들어가서 주와 함께 말할 때에는 수건을 벗고, 나올 때까지는 쓰지 않았습니다. 나와서, 주께서 명하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게 되므로, 모세는, 주와 함께 이야기하러 들어갈 때까지는, 다시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 적용 질문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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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3장 / 모세의 중보 기도


출애굽기 33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시는 하나님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산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아직 매듭짓지 못한 일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 언약을 새롭게 맺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34장에 가서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언약을 맺습니다.

출애굽기 33:1-6절은 하나님께서 금송아지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네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이 백성을 이끌고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고 그들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그 땅으로 올라가거라. 내가 한 천사를 보낼 터이니, 그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 나는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겠다. 너희는 이제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 너희는 고집이 센 백성이므로, 내가 너희와 함께 가다가는 너희를 없애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땅이 약속의 땅이 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데 무슨 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은 참담한 말씀을 듣고 통곡합니다. 그들은 아무도 장식품을 몸에 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라. 너희는 고집이 센 백성이다.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와 함께 올라가다 가는, 내가 너희를 아주 없애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 너희는, 너희 몸에서 장식품을 떼어 버려라.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이제 결정하겠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호렙 산을 떠난 뒤로는 장식품을 달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33:7-11절은 성막이 세워지지 전,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는지 그 비결, 곧 모세의 회막 생활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칠 때마다, 모세는 장막을 거두어 가지고 진 바깥으로 나가, 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장막을 쳤습니다. 모세는 그 장막을, ‘하나님과 만나는 곳’이라고 하여, ‘회막’이라고 하였습니다. ‘회막’은 ‘임시 성막’이라고 보면 됩니다. 출애굽기 39,40장에 이르러 성막이 완성됩니다. 성막이 있기 전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던 곳입니다.

여호와를 찾을 일이 생기면, 누구든지 진 밖에 있는 이 회막으로 갔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갔습니다. 모세가 회막으로 갈 때마다 백성은 모두 일어나서 자기 장막에서, 모세가 장막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 뒤를 지켜보았습니다.

모세가 장막에 들어서면, 구름기둥이 내려와서 장막 어귀에 서고, 주께서 모세와 말씀하십니다. 그 때, 백성은 구름기둥을 보면, 모두 일어나서 자기 장막 어귀에서 엎드려 주를 경배하였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이,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진으로 돌아가도, 눈의 아들이며 모세의 젊은 부관인 여호수아는 장막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가 왜 장막을 떠나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가 모세의 후계자로 조금씩 부각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출애굽기 33:12-16절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시는 하나님께 모세가 다시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뜻을 꺾으시고 친히 함께 가겠다고 응답하신 내용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한 번 더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가나안 땅에 함께 가지 않으시면 가나안 땅에 가봐야 아무 소용없다고 말합니다.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친히 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길이 행복입니다. 아무리 좋은 길이라고 해도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그 길은 불행입니다.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은 하나님께서 그 땅에 계셔서 축복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 중에 16절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모세가 하나님께 질문하고 본인이 하나님께 대답합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출애굽기 33:17-23절은 모세가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하나님께 소원을 아룁니다. 그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어서 요청한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인도해 달라는 간절한 소망이 담긴 요청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렇게 하시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나의 옆에 있는 한 곳, 그 바위 위에 서 있어라.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바위 틈에 집어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나의 손바닥으로 가리워 주겠다. 그 뒤에 내가 나의 손바닥을 거두리니,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적용 질문

우리가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시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시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은총을 입었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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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2장 / 금송아지 사건 

출애굽기 32장은 모세가 시내 산 꼭대기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 아래에서 아론을 부추겨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한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32:1-6절은 시내 산에 올라간 모세가 내려오는 게 늦어지자 불안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에게 그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자 아론이 모든 백성의 금 귀고리를 모아서 금송아지 형상을 만든 내용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시내 산에 갔는데 깜깜 무소식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간 지 40일이 다 되어 갑니다. 백성들이 불안했는지 아론에게 찾아가서 모세가 없으니까 이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요구합니다. 불안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는 게 참 놀랍습니다. 우상숭배에 길들여진 증거입니다.

모세가 없을 때는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이요 초대 대제사장이 될 사람인데, 백성들을 진정시키기는 커녕 우상을 숭배하는데 앞장을 섭니다. 아론이 백성들에게 금 고리들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그것들을 다 모아서 녹여서,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듭니다.

아론이 금 고리를 녹여서 만든 금 송아지 상을 본 백성들이 뭐하고 소리를 쳤는지 아세요?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이에 질세라 아론은 한술 더 뜹니다. 금 송아지 앞에 제단을 쌓고 아론이 백성들을 부추겨서 
금 송아지를 '여호와'라고 선언합니다. 내일은 여호와의 절기다!”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서, 번제를 올리고,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런 다음에,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흥청거리며 뛰놀았습니다.


출애굽기 32:7-14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에 분노하신 하나님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내용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와 깊은 교제를 하시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서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이렇게 빨리 벗어나서, 그들 스스로 수송아지 모양을 만들어 놓고서 절하고, 제사를 드리며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하고 외치고 있다. 나는 이 백성을 살펴 보았다. 이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노하였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그러나 너는, 내가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32:7-10)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출애굽기 32:11-14절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 내용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애원합니다. 그 결과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십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주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주신 주의 백성에게 이와 같이 노하십니까? 어찌하여 이집트 사람이 '주가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그들을 이끌어 내어, 산에서 죽게 하고, 땅 위에서 완전히 없애 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려 하십니까?

제발, 진노를 거두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주의 백성에게서 이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주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시며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모든 땅을 너희 자손에게 주어서, 영원한 유산으로 삼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32:11-14)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백성을 진멸하시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의미가 없지 않느냐고 설명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내용을 언급하면서 재앙을 거두어 달라고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기억하고 지켜 달라고 부탁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진노를 백성에게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출애굽기 32:15-20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에 분노하신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모세가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받은 두 돌 판을 산 아래로 던진 내용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증거판 둘(십계명)을 손에 들고서 산에서 내려옵니다. 모세가 진에 가까이 와서 보니, 사람들이 수송아지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고 있습니다. 모세는 화가 나서,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돌 판 두 개를 산 아래로 내던져 깨뜨려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시겠다고 하셨을 때,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진노를 거두시고 제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던 모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홧김에 모세가 증거판(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을 산 아래로 집어 던진 게 아닙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다고 생각하고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 판을 산 아래로 던졌습니다. 출애굽기 34장에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다시 받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다시 언약을 맺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언약 갱신’이라고 합니다.  

20절 말씀은 상당히 무서운 느낌이 드는 내용입니다. 모세가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서, 그것을 물에 타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금 송아지 우상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 입니다. 우상숭배가 얼마나 큰 죄인지 백성들에게 분명하게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대 근동의 자료들에 따르면 신들의 전쟁에서 상대방 신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의미로 신의 우상을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서, 그것을 물에 타서, 마시게 했습니다. 모세가 금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서, 그것을 물에 타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한 것도 우상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 입니다. 


출애굽기 32:21-24절은 모세와 아론이 나눈 대화인데, 아론의 변명이 걸작입니다.

이 백성이 형님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형님은, 그들이 이렇게 큰 죄를 짓도록 그냥 놓아 두셨습니까?”

모세의 질문에 아론은 어처구니없는 말을 합니다.

“아우님은 우리의 지도자입니다. 나에게 그렇게 화를 내지 마십시오. 이 백성이 악하게 된 까닭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들이 나에게 ‘우리 앞에 서서, 우리를 인도하여 줄 신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모세라는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르겠습니다’ 하고 말하기에,

내가 그들에게, 금붙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금을 빼서 나에게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금붙이를 가져왔기에, 내가 그것을 불에 넣었더니, 이 수송아지가 생겨난 것입니다.


@ 아론의 변명
출애굽기 32:4
출애굽기 32:24
아론이 그들에게서 그것들을 받아 녹여서,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드니, 그들이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내가 그들에게, 금붙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금을 빼서 나에게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금붙이를 가져왔기에, 
내가 그것을 불에 넣었더니,
이 수송아지가 생겨난 것입니다.


출애굽기 32:25-29절은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을 듣고 여호와의 편에 선 내용입니다.

모세는, 백성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론이 그들을 제멋대로 날뛰게 하여, 적들의 조롱거리가 되게 한 것입니다. 모세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모세가 진 문에 서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고 하였고, 레위 자손이 다 모여 모세에게 나아왔습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편에 서겠다고 앞으로 나온 레위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레위 자손들은 하나님의 명을 받고 우상을 숭배함으로 적들의 조롱거리가 된 자들을 심판했습니다. 그 날, 백성 가운데서 어림잡아 삼천 명쯤 죽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레위 자손에게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라고 명령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모세는 레위 지파에게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도록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심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레위 지파 중에서 우상 숭배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32:29절에, 모세가 저마다 자녀와 형제자매를 희생시켜 자신을 여호와께 드린 레위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었다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 지파가 죽인 3,000명 안에 레위 지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레위 지파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제사를 드려야 할 지파입니다. 그런데 아론과 더불어 레위 지파 사람들 일부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 숭배를 주도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레위 지파 스스로 악을 제거해야 하고, 뼈를 깎는 고통을 통해 하나님만 섬기는 거룩한 지파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출애굽기 32:30-35절은 모세가 우상 숭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이튿날 모세는 백성들이 지은 크나큰 죄를 지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다시 한 번 더 하나님께 가서 백성들이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다시 나아가 기도합니다. 자신의 이름이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질 각오하고 드린 기도입니다.

슬픕니다. 이 백성이 금으로 신상을 만듦으로써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죄를 지으면, 나는 오직 그 사람만을 나의 책에서 지운다. 이제 너는 가서, 내가 너에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여라. 보아라, 나의 천사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여라. 때가 되면, 내가 그들에게 반드시 죄를 묻겠다.”


그 뒤에 하나님께서, 아론이 수송아지를 만든 일로,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 적용 질문

금송아지 사건에서 여호와의 편에 선 레위 자손이 자기 형제와 친구와 자기의 이웃을 죽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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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1장 / 브살렐과 오홀리압 


31:1-11, 성막 건축 책임자 두 사람, 브살렐과 오홀리압
31:12-17, 안식일에 대한 말씀
31:18, 증거판 둘(십계명 두 돌판) 

출애굽기 31장 한 눈에 보기
출애굽기 31:1-11
성막 건축 책임자 두 사람, 브살렐과 오홀리압 이야기
출애굽기 31:12-17
안식일(영원한 언약)
출애굽기 31:18
하나님이 친히 쓰신 증거판 둘


출애굽기 31:1-11절은 성막 건축 책임자 두 사람, 브살렐과 오홀리압 이야기입니다.

보아라, 내가, 유다 지파 사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불러서,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채워 주어,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온갖 기술을 갖추게 하겠다. 그가 여러 가지를 생각하여, 그 생각한 것을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고, 온갖 기술을 발휘하여, 보석을 깎아 내는 일과 나무를 조각하는 일을 하게 하겠다.”(31:2-5)

분명히 나는, 단 지파 사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이 브살렐과 함께 일하게 하겠다. 그리고 기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지혜를 더하여, 그들이, 내가 너에게 명한 모든 것을 만들게 하겠다.

회막과 증거궤와 그 위에 덮을 속죄소와 회막에 딸린 모든 기구와 상과 거기에 딸린 기구와 순금 등잔대와 거기에 딸린 모든 기구와 분향단과 번제단과 거기에 딸린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과 제사장 일을 할 때에 입는 잘 짠 옷, 곧 제사장 아론의 거룩한 옷과 그 아들들의 옷과 성별하는 기름과 성소에서 쓸 향기로운 향을, 그들이, 내가 너에게 명한 대로 만들 것이다.


브살렐과 오홀리압 한 눈에 보기

브살렐
오홀리압
지파
유다 지파
단 지파
가족
훌의 손자, 우리의 아들
아히사막의 아들
재능
하나님의 영을 채워 주어,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온갖 기술을 갖춤
재능이 있음(출 38:23)

업무
여러 가지를 생각하여, 그 생각한 것을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고,
온갖 기술을 발휘하여, 보석을
깎아 내는 일과 나무를 조각하는 일을 함
브살렐과 함께 일함
조각하며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로 수 놓음
(출 38:23 참고)


출애굽기 31:12-17절은 안식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라. 이것은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세워진 표징이 되어, 너희를 거룩하게 구별한 이가 나 주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안식일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므로,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그 날을 더럽히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 날에 일을 하는 사람은, 백성 중에서 제거될 것이다.

6일 동안은 일을 하고, 7일 째는 주께 바친 거룩한 날이므로, 완전히 쉬어야 한다.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 안식일을 영원한 언약으로 삼아, 그들 대대로 지켜야 한다.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표징이니, 이는, 주가 6일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7일째 쉬면서 숨을 돌리셨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31:18절은 증거판 둘에 관한 설명입니다.

주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을 마치시고, 하나님이 손수 돌 판에 쓰신 증거판 두 개를 그에게 주셨습니다. 증거판 두 개에 적힌 내용은 출애굽기 20장에서 살펴본 십계명이었습니다. 참고로, 출애굽기 32:15,16절에 보면, 두 증거판 앞뒤로 글자가 적혀 있다고 나옵니다. 돌 판 앞뒤로 동일한 계명을 기록했는지, 십계명을 돌 판 앞뒤에 나누어서 기록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 적용 질문

하나님의 성막을 만드는 기술자의 자격 조건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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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0장 / 분향단과 물두멍


분향단은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쌉니다. 가로세로가 1규빗이고, 높이가 2규빗 정사각형이며, 네 모퉁이에 뿔이 있습니다. 단 상단 부분에 금테를 만들고, 금고리 4개가 양쪽에 둘씩 있고 멜 채를 꿰어 놓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이 1년 단 한 번 대속죄일에 분향단의 뿔을 위하여 속죄하고 피를 바릅니다.


   분향단


분향단은 성소의 중앙에 위치하고, 지성소 바로 앞에 있습니다. 분향단은 증거궤 위 속죄소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에 위치합니다. 아침마다 향기로운 향기를 사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향기입니다. 저녁에 등불을 켤 때에도 향을 사릅니다.

분향단도 조각목을 정금으로 쌉니다. 우리 힘으로는 결코 향기를 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모두 뒤틀리고 가시가 많이 나 있는 조각목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덮어주시고 감싸 안아주셔야만 향기를 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분향단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고후 2:14-15). 성경은 기도의 분향단에서 피우는 향을 ‘성도의 기도’라고 말합니다(계 5:7,8; 8:3,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린도후서 2:14-15)

“그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요한계시록 5:7,8)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요한계시록 8:3,4)


출애굽기 30:11-16절은 생명의 속전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를 세어 인구를 조사할 때에, 그들은 각자 자기 목숨 값으로 속전을 주께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구를 조사할 때에, 그들에게 재앙이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인구 조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내야 합니다. 한 세겔은 이십 게라인데, 하나님께 올리는 예물입니다.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1년에 한 번 반 세겔의 생명의 속전을 내야 합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 반 세겔을 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낸 생명의 속전은 회막을 수리하고 유지하는 비용으로 씁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숨 값을 대신하여 그들을 기억하여서 지켜 주십니다.


출애굽기 30:17-21절은 물두멍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름이 이상하지만, 물두멍은 우리 말로 하면 큰 대야입니다. 성소와 번제단 사이에 있는데,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물을 담아둡니다. 안 씻으면 죽습니다. 누가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요.

물두멍


중요한 사실은 물두멍의 재료입니다. 회막문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의 놋 거울로 만듭니다. 왜 하필이면 여인들이 사용하던 놋 거울로 물두멍을 만들었을까요? 물두멍은 다른 성막 기구와 다르게 크기와 무게가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물두멍을 여인들의 놋 거울로 만든 이유는 거울의 용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여인들은 자기의 모습을 살피고 단정하게 하려고 거울을 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들도 물두멍에서 깨끗하게 씻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 반드시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물두멍은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제사장들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제사장은 반드시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물두멍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막 기구들과 달리 물두멍의 크기와 무게, 모양이 나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그 크기를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무게와 크기, 그 깊이를 우리는 감히 잴 수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어떤 말로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0:22-38절은 관유와 향을 어떻게 만드는지, 그것들을 어디에 사용하는지 설명합니다. 
출애굽기 30:22-33절은 관유에 대한 설명이고, 30:34-38절은 향에 대한 설명입니다.    


출애굽기 30:22-33절은 관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성막에 사용하는 관유를 만들기 위해서는 제일 좋은 향품을 사용해야 합니다. 순수한 몰약500 세겔, 향기로운 육계 250 세겔, 향기로운 창포 250 세겔, 계피 500 세겔, 이렇게 성소 세겔로 취하고, 올리브 기름 한 힌과 함께 향을 제조하는 법을 따라서, 이 모든 것을 잘 섞어서, 성별하는 기름(관유)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관유를 어디에 사용할까요?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상과 그 모든 기구와 등잔대와 그 기구와 분향단과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서, 이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가장 거룩한 것이 되며, 거기에 닿는 모든 것이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그 기름을 발라서, 그들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일러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너희가 대대로 성별하는 데만 써야 하는 기름이다. 너희는 이것을 아무의 몸에나 부어서는 안 되며, 또 그것을 만드는 방법으로 그와 똑같은 것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 이것은 거룩한 것이니, 너희가 거룩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렇게 섞어 그와 똑같은 것을 만들거나, 그것을 다른 아무에게나 발라 주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백성에게서 끊어질 것이다.”


출애굽기 30:34-38절은 향을 어떻게 만드는지, 어디에 사용하는지 설명합니다.

먼저, 분향단에 사용할 향을 만드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을 유향과 섞되 저마다 같은 분량으로 섞습니다. 향을 제조하는 법을 따라서 잘 섞은 다음에, 소금을 쳐서 깨끗하고 거룩하게 합니다.

다음은 향을 어디에 사용하는지 설명합니다. 위에서 만든 향 중에서 그 가운데서 일부를 곱게 빻아서, 제사장이 하나님과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놓습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에게 가장 거룩한 것입니다.

끝으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가지 주의를 주십니다. 제사장들이 만들 유향은 주의 것이며, 거룩한 것입니다. 사사로이 쓰려고 같은 방법으로 그것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혹시나 백성 중에서 그 냄새를 즐기려고 이와 같은 것을 만드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백성에게서 끊어질 것입니다.            


@ 작용 질문

모든 성막 기구들은 치수가 나오는데, 왜 물두멍은 치수가 나오지 않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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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9장 / 대제사장의 위임식 


제사장 위임식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릴 제사장들이 거룩해야 하기 때문에 필요한 절차입니다. 실제로 레위기 8장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위한 제사장 직분 위임식을 행합니다. 본문에서는 제사장 위임식을 위해 모세가 무엇을 준비하고, 아론과 그의 아들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출애굽기 29:1-3절은 모세가 제사장 위임식을 위해 기본적으로 준비할 것들입니다.

모세가 제사장 위임식을 위해 친히 준비할 것들
수송아지 한 마리, 숫양 두 마리(흠 없는 것), 누룩을 넣지 않은 빵, 누룩 없이 기름만
섞어 만든 과자, 누룩 없이 기름만 바른 속 빈 과자(모두 고운 밀가루로 만들기)
이 모든 것들을 모두 한 광주리에 넣어서, 수송아지와 두 마리의 숫양과 함께


출애굽기 29:4-9절은 모세가 진행할 제사장 위임식 순서입니다.

1)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회막 어귀로 데리고 와서 목욕을 하게 하라
2)제사장 옷을 가져다가, 속옷과 에봇 받침 겉옷과 에봇과 흉패를 달고, 
정교하게 짠 에봇 띠를 띠게 하여라
3)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관 위에 ‘여호와께 성결금패를 붙여라
4)거룩하게 구별하는 데 쓰는 기름을 가져다가, 그의 머리 위에 부어, 그를 거룩하게 구별하여라
5)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속옷을 입게 하고, 띠를 띠게 하고, 머리에 두건을 감게 하라
이런 절차를 통해 그들에게 제사장의 직분을 맡겨라. 이것이 영원한 규례가 되게 하여라


출애굽기 29:10-14절은 제사장 위임식 절차 중에 속죄제에 대한 설명입니다.

준비한 흠 없는 수송아지를 하나님께 속죄제물로 드립니다. 여기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하는 일은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는 것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모세가 할 일입니다.

모세가 수소를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수소의 머리에 두 손을 얹게 한 다음에, 회막 어귀 주 앞에서 그 수소를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수소의 피를 받아다가 손가락으로 제단의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모두 제단 밑에 부어야 합니다.

내장을 덮은 모든 기름기와 간에 붙은 기름 덩어리와 두 콩팥과 거기에 붙은 기름기를 떼어 내서 제단 위에서 살라 바쳐야 합니다. 수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은 진 바깥에서 불에 태워야 합니다. 모세가 할 일이 엄청납니다.


출애굽기 29:15-18절은 제사장 위임식 절차 중에서 번제에 대한 설명입니다.

준비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를 하나님께 드리는데, 역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하는 일은 숫양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뿐이고, 모든 일은 모세의 몫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숫양 한 마리를 끌어다 주고, 그 숫양의 머리 위에 그들의 손을 얹게 한 다음에, 그 숫양을 잡고, 피를 받아서, 제단 둘레에 뿌려야 합니다. 그 숫양의 각을 뜬 다음에, 내장과 다리는 씻어서 각을 뜬 고기와 머리 위에 얹어 놓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 숫양 전체를 제단 위에서 통째로 살라 바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 드리는 번제이며, 이것이 바로 향기로 주를 기쁘게 해 드리는 살라 바치는 제물입니다.


출애굽기 29:19-21절은 피와 관유로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예식입니다.

한 마리 남아 있는 숫양의 피과 관유를 가지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거룩하게 합니다.

그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1)다른 숫양 한 마리를 끌어다 놓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숫양의 머리 위에 손을 얹게 합니다.
2)그 숫양을 잡고, 피를 받아서, 아론의 오른쪽 귓불과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불에 바르고,
그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도 발라야 합니다.
3)남은 피를 제단 둘레에 뿌려야 합니다.
4)제단 위에 있는 피와 거룩하게 구별하는 기름을 가져다가 아론과 그의 옷 위에 뿌리고, 
아론의 아들들과 그들의 옷 위에 뿌려야 합니다.
☞ 그렇게 하면, 아론과 그의 옷과 그의 아들들과 그들의 옷이 거룩하게 됩니다.


이 절차를 통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옷이 피로 붉게 물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거룩해 진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보혈이 우리를 덮어 주심으로 우리가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브리서 9:13,14)


출애굽기 29:22-25절은 제사장 위임식 절차 중에서 화제와 요제에 대한 설명입니다.

숫양에서 기름기와 기름진 꼬리와 내장을 덮은 기름기와 간에 붙은 기름 덩어리와 두 콩팥과 그것을 덮은 기름기를 떼어 내고, 오른쪽 넓적다리를 잘라 내어야 합니다. 이것은 제사장을 위임하는 의식에서 쓸 것인데, 요제를 드린 후에 불태워 드릴 번제물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둔 광주리에서, 빵 한 덩이와 기름을 섞어서 만든 과자 한 개와 속 빈 과자 한 개를 가져다가, 그 전부를 아론의 손과 그의 아들들의 손에 얹어 주어, 그것으로 주 앞에 흔들어 바치는 제물로 드리게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흔들어 드리는 제사가 바로 요제입니다.

그들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다가, 제단의 번제물 위에 놓고 불살라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향기로 주를 기쁘게 해 드리는, 주께 살라 바치는 제물, 화제입니다.


출애굽기 29:26-28절은 제사장 위임식 절차 중에서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오는 것과 거제물에 대한 설명입니다.

아론의 제사장 위임식에 쓸 숫양에서 가슴을 떼어, 주께 흔들어 바치는 예식을 하고 나서, 그것은 제사를 집례한 제사장의 몫이 됩니다. 본문에서는 모세의 몫이 되는 거구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제사장 위임식에 쓴 숫양 고기 가운데서 흔들어 바친 것(요제)과 들어올려 바친 것(거제), 곧 흔들어 바친 가슴과 들어올려 바친 넓적다리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들어올려 바친 제물(거제물)이므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을 영원한 분깃입니다. 제사를 집례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이 제물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화목제물로 주께 들어올려 바친 제물입니다.


출애굽기 29:29,30절은 아론의 성의(대제사장의 옷)에 대한 설명입니다.

아론의 거룩한 옷은 그의 자손들에게 물려주어서, 그들이 제사장 위임식 때에 그것을 입고 기름부음을 받게 하여야 합니다. 아론의 아들 가운데서, 그의 제사장직을 이어받고 회막에 들어가서 성소에서 예배를 드릴 사람은, 일주일 동안 이 옷을 입어야 합니다.


대제사장 옷


출애굽기 29:31-34절은 제사장 위임식 식사에 대한 설명입니다.

제사장 위임식 때에 드린 숫양의 살코기를 가져다가, 거룩한 곳에서 삶아야 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회막 어귀에서 바로 이 숫양의 살코기와 광주리에 든 빵을 먹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여 제사장으로 세우고 속죄의 제물로 바친 것이므로, 그들만이 먹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것이므로, 다른 사람은 먹을 수 없습니다. 제사장 위임식의 살코기나 빵이 이튿날 아침까지 남아 있거든, 너는 그 남은 것을 불에 태워야 합니다. 그것은 거룩한 것이므로, 남은 것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기 29:35-37절은 제사장 위임식 절차 중에서 속죄제에 대한 설명입니다.

일주일 동안 제사장 위임식이 진행되는데, 매일 속죄제를 드리라는 명령입니다. 날마다 수송아지 한 마리씩을 바쳐서, 죄를 속하는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제단 위에 속죄제물을 드려서, 그 제단을 깨끗하게 하고, 그것에 기름을 부어서 거룩하게 하여야 합니다. 일주일 동안 제단 위에 속죄제물을 드려서, 제단을 거룩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제단은 가장 거룩하게 되고, 그 제단에 닿는 것도 모두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29:38-42절은 제사장이 매일 하나님께 드릴 번제에 대한 설명입니다.

매일 1년 된 어린 양 두 마리를 드리는데, 아침에 한 마리, 저녁에 한 마리 드립니다. 한 어린 양에 고운 가루 10분의 1에바(약 2.2리터)와 찧은 기름 4분의 1힌(약 900그램)을 같이 드립니다. 번제를 드릴 때, 소제와 전제를 함께 드립니다.


출애굽기 29:43-46절은 제사장 위임식 결론입니다.

왜 매일 번제를 드려야 하는지, 왜 제사장이 필요한 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날 것이다. 거기에서 나의 영광을 나타내어 그 곳이 거룩한 곳이 되게 하겠다. 내가 회막과 제단을 거룩하게 하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거룩하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겠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머물면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내가, 그들 가운데 머물려고,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그들의 주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주 하나님이다.”(43-46)



@ 적용 질문


대제사장 위임식 순서와 절차가 왜 이렇게 복잡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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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8장 / 대제사장의 옷과 판결 흉패




대제사장의 옷은 오직 대제사장 직분을 위해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옷입니다. 세상에 단 한 벌 밖에 없는 아주 귀한 옷입니다. 대제사장의 옷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입는 옷입니다. 거룩하고 아름답게 하나님을 섬길 때 입는 옷입니다.

출애굽기 28:1-5절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과 그의 아들들(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을 위하여 옷을 만들라고 명령하신 내용입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너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불러내서, 나를 섬기는 제사장 일을 맡겨라. 너는 너의 형 아론이 입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보이는 거룩한 예복을 만들어라. 내가 슬기로운 생각으로 가득 채워 준 모든 재주있는 사람을 불러다가, 나를 섬길 아론이 제사장이 되어서 입을 예복을 만들라고 하여라.

그들이 만들어야 할 예복은 이러하니, 곧 가슴받이와 에봇과 겉옷과 줄무늬 속옷과 관과 띠이다. 이렇게 그들은 너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만들어 주어서, 나를 섬기는 제사장 일을 맡게 하여야 한다. 에봇을 만드는 이들은, 금 실과 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모시 실을 써서 에봇을 만들어야 한다.


   대제사장의 옷


출애굽기 28:6-14절은 대제사장이 입는 겉옷 에봇에 대한 설명입니다.

대제사장의 겉옷인 에봇은 금실,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을 짜서 만듭니다. 에봇에 어깨받이 둘을 달아 그 두 끝을 이어지게 하고, 에봇 위에 매는 띠는 에봇을 짜는 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에봇에 정교하게 붙여 짭니다. 호마노 두 개를 에봇의 두 어깨받이에 하나씩 견대처럼 부착합니다. 호마노 위에는 야곱의 12아들 이름을 한 호마노에 6명씩 새깁니다.




주의할 점은 르우벤부터 베냐민까지 이스라엘의 아들이 태어난 순서대로 이름을 보석에 새겨야 합니다. 보석을 새기는 자가 도장에 새김 같이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보석에 새기고 금테에 물려야 합니다. 소중한 이름이니까요.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그 두 어깨에 메워서 기념이 되게 합니다.


출애굽기 28:15-29절은 판결 흉패에 대한 설명입니다.

판결 흉패는 에봇을 짜는 방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듭니다. 길이와 너비가 한 뼘씩 네모 반듯하게 두 겹으로 만들었고 네 줄로 열 두 보석을 답니다. 흉패의 보석들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 둘입니다.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여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이 되게 합니다. 그의 가슴에 있는 보석도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의미합니다.


   판결 흉패
  

출애굽기 28:30절은 판결 흉패에 넣는 우림과 둠밈에 대한 설명입니다.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여호와 앞에 나아갈 때에 그의 가슴에 붙이게 해야 합니다. 우림과 둠밈의 뜻이 있는데요, 우림은 ‘빛’이고, 둠밈은 ‘온전함’입니다. 우림과 둠밈은 인간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결정할 수 없을 때에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사용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 왜 우림과 둠밈 두 가지가 필요한 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모양이 어떠한 지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확인했는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우림과 둠밈(추정)


출애굽기 28:31-35절은 대제사장이 입는 에봇 받침 겉옷에 대한 설명입니다.

에봇에 딸린 겉옷을 만들되, 청색으로 만듭니다. 그 겉옷 한가운데 머리를 넣을 구멍을 내고, 그 구멍의 둘레를 갑옷의 깃처럼 단단히 홀쳐서 찢어지지 않도록 합니다. 겉옷자락 둘레에는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석류 모양의 술을 만들어 달고, 석류 술 사이사이에 금방울을 만들어 답니다.

겉옷자락을 돌아가며, 금방울 하나 석류 하나, 또 금방울 하나 석류 하나를 답니다. 그리하여 아론이 제사를 드릴 때에, 이것을 입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 성소를 드나들 때에, 방울 소리가 나면, 그가 죽지 않을 것이고, 방울 소리가 안 들린다면 죽었다는 것입니다.   


에봇 받침 겉옷


출애굽기 28:36-38절은 대제사장이 쓰는 순금패가 달린 관에 대한 설명입니다.

순금으로 패를 만들어서, 그 위에, 인장 반지를 새기듯이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깁니다. 이것을 청색 실로 꼰 끈에 매어서 제사장이 쓰는 관에 달되, 그것이 관 앞쪽으로 오게 합니다. 이것을 아론의 이마에 달게 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거룩한 예물을 드릴 때에, 그 거룩한 봉헌물을 잘못 드려서 지은 죄를 그가 담당하도록 합니다. 그는 그것을 늘 이마에 달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가 바치는 예물을, 주께서 기꺼이 받아 주십니다.


대제사장 쓰는 관과 순금패


출애굽기 28:39절은 대제사장의 반포 속옷에 대한 설명입니다.

가는 베 실로 반포 속옷을 만듭니다. 가는 모시 실로 제사장이 쓰는 관을 만들고, 수를 놓아 예복의 허리띠를 만듭니다. 여기까지가 대제사장이 하나님을 섬길 때 복장입니다. 


대제사장의 의복 일체


출애굽기 28:40-43절은 아론의 아들들이 입을 속옷에 관한 설명입니다.

아론의 아들들에게 입힐 속옷과 그들이 띨 허리띠도 만들고, 그들이 쓸 관도 만들어서, 그들이 영화롭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그것을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서 제사장으로 세우고,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그들에게 허리에서 넓적다리까지 덮이는 속바지를 모시 실로 만들어 입히고, 그들의 몸 아래를 가리게 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성소에서 제사를 드리려고 제단으로 나아갈 때에, 그것을 입어서 몸 아래를 가려야 합니다. 몸 아래를 노출하는 죄를 지으면 죽습니다. 이것은 그와 그의 자손이 지켜야 할 영원한 규례입니다.


@ 적용 나눔과 질문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시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다른 지파보다 레위 지파가 특별히 하나님 앞에 거룩하기 때문일까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다른 가족들보다 거룩하고 신실하기 때문일까요?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게 한 사건과 레위기 10장에 나오는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죽은 사건을 봐도 아론이나 그의 아들이 특별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럼 무슨 이유로, 이들이 제사장으로 임직을 받게 된 걸까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이 특별해서 제사장 직분을 받은 게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사실을 잘 알면 겸손하게 직분을 감당할 수 있지만, 그 사실을 잊으면 자신의 지위나 명예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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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7장  / 번제단, 성막 뜰(세마포 휘장)


27:1-8, 번제단에 대한 설명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동물을 희생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동물을 희생 제사로 드려서 죄 용서를 받아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동물을 잡아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곳이 번제단입니다.
번제는 히브리어로 ‘올라’로, ‘올라간다’는 뜻이고, 단은 ‘미즈베아’로 ‘죽이다’는 뜻입니다.

번제단도 조각목으로 만듭니다.
다른 기구와 차이점은 금으로 싸지 않고 놋으로 감싼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금보다 놋이 불에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금은 1,065도에 녹고, 놋은 1,085도에 녹는다고 합니다.

번제단은 가로 5규빗(2.5미터), 세로 5규빗(2.5미터), 높이가 1규빗반(75센티) 정도의 정사각형이며 4개의 뿔이 있고 가운데는 그물망이 있습니다.
놋 고리 한쪽에 2개씩 네 개가 붙어 있고, 멜 채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으로 쌉니다.
번제단에는 몇 가지 보조기구들이 있는데, 재 담는 통, 부삽, 대야, 고기 갈고리, 불 옮기는 그릇이며 다 놋으로 만듭니다.


번제단


번제단은 희생제물을 바치는 곳입니다.
번제단은 죄를 용서받는 자리,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장소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는 일반인들이 못 들어갑니다.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입니다.
물두멍도 성소에 들어가서 섬기는 제사장들이 손과 발을 씻는 곳입니다.

따라서 번제단이 유일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나 나아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 피였습니다(히 9:22).
구약제사는 동물의 피를 흘림으로 죄를 용서받는 제사였습니다.
신약의 제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제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번제단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동물의 피가 필요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뒤틀린 조각목을 놋이 감싸주어 용서와 은혜의 번제단이 된 것처럼 연약하고 무지한 우리 인생을 보혈로 덮어주심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삶(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27:9-19, 성막의 뜰에 대한 설명

성막의 울타리를 세마포로 만드는데, 가로가 100규빗(45m), 세로가 50규빗(22.5m) 울타리의 높이가 5규빗(2.25m)입니다.

   성막 뜰


울타리를 만드는데, 60개의 기둥이 필요합니다.
모두 놋으로 만듭니다.
동쪽과 서쪽에 10개씩 남쪽과 북쪽에 20개씩 놋 기둥을 세웁니다.
그 기둥들을 잘 고정시키기 위해 갈고리와 가름대를 은으로 만듭니다.
성막 울타리는 성막 뜰과 성소, 지성소를 보호해야 합니다.
울타리를 칠 때, 동쪽에 문을 만드는 10m만 제외하고 모두 하얀 세마포로 두릅니다.

동쪽에만 있는 문은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진 휘장입니다.
거기도 기둥이 넷 필요하고 받침대도 네 개 필요합니다.
누구나 성막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넓고 큰 문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집, 성막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막 울타리 동쪽에 있는 문은 우리에게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요한복음 14:6).

번제단을 만들 때도 놋을 사용했고, 물두멍도 성막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이 사용하던 놋거울로 만들었습니다. 성막의 울타리를 만들 때 역시 놋으로 기둥을 만들고 받침대도 만듭니다. 성막을 만들 때 금이 사용되는 것만큼이나 놋도 많이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놋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요한복음 3:14,15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당신을 소개하시면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한 마디 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은 이야기가 민수기 21장에 나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어서 불순종으로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렸습니다. 불평과 원망으로 인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하자,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고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놋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뒤틀린 조각목을 놋이 감싸주어 용서와 은혜의 번제단이 되지 않았습니까? 성막의 뜰을 든든히 지탱해주는 놋 기둥 역시 우리 인생을 든든히 붙들어 주시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할렐루야!

27:20,21, 감람으로 짠 기름으로 성소 안에 등불을 켜라는 내용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올리브를 찧어서 짜낸 깨끗한 기름을 가져다가 등불을 켜게 하되, 그 등불은 늘 켜 두어라.
아론과 그 아들들은 등불을 회막 안의 증거궤 앞에 쳐놓은 휘장 밖에 켜 두어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주 앞에서 꺼지지 않도록 보살펴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길이 지켜야 할 규례이다.    


적용을 위한 질문 / 
성막 기구를 만드는 주 재료가 조각목과 놋인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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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6:1 성막(聖幕) 미시칸(mishkan) 4908 מִשְׁכָּן

1. 거주,  2. 엽기 18:21,  3. 굴

발음 / 미시칸(mishkan)

어원 / 79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장막(출 25:9, 레 15:31, 대하 1:5), 성막(출 26:1, 민 3:26, 대상 23:26), 휘장(출 26:35), 회막( 출 39:32, 민 3:7, 대상 6:32), 집(욥 18:21), 거처(시 49:11, 78:28, 사 32:18, 렘 9:19), 처소(시 132:5, 사 22:16, 겔 37:27).
[동] 계시다(시 26:8), 살다(욥 21:28).
구약 성경 / 139회 사용

* 7931. שָׁכַן    
1. 아래 앉다,  2. 눕다,  3. 거주하다

발음 / 사칸(shâkan)

관련 성경 / 거하다(창 9:27), 들어가다(출 40:35), 엎드리다(신 33:20), 깃들이다(사 13:21, 겔 17:23),머물다(출 24:16, 민 9:22, 잠 7:11), 계시다(왕상 8:12, 사 8:18), 살다(욥 30:6, 렘 46:26), 덮이다(욥 3:5), 쉬다(나 3:18), 두다(신 12:11, 느 1:9, 렘 7:12), 세우다(수 18 : 1), 떨어뜨리다(시 7:5).
[명] 소유지(수 22:19), 주소(잠 8:12), 있는 곳(욥 38:19).
구약 성경 / 129회 사용

성막(聖幕) 4633 스케네 σκηνή, ῆς, ἡ 

1. 초막,  2. 오두막집

발음 / 스케네( skēnē)

4632와 4639와 유사어로 보임 : 천막

관련 성경 / 초막(마 17:4, 막 9:5, 눅 9:33), 처소(눅 16: 9), 장막(행 7:43, 히 8:2, 계 13:6) 
신약 성경 / 20회 사용

성전(聖殿) 1004 바이트(bayith) בַּיִת

1. 집,  2. 장막

열왕기하 23:7, 여호와의 전 가운데...

어원 / 연계형 בֵּית, 복수 어미활용 בָּתֵּיהֶם ,בָּתֵּיכֶם ,בָּתֵּינוֹ, 1129에서 유래한 약어로 보임
관련 성경 / 집(창 7:1, 레 14:35, 삼상 1:7), 권속(창 18:19,레 16:6, 삼하 2:3), 궁(창 12:15, 삼하 7:2), 처소(창 24:31, 대 하5:7), 집 안(창 27:15, 시 55:14), 전(출 34:26, 신 23:18), 옥(창 39:20, 삿 16:21,왕하 25:27), 간수장(창 39:21), 궁중(창 45:2, 왕하 21:33, 에 7:8), 가족(창 5:22, 신 11:6, 시 68:6), 족속(출 2:1, 레 22;18, 수 17:17), 식구( 출 12:3), 안쪽(출 28:26), 가옥(레 14:55, 신 19:1,사 5:8), 친정(레22:13), 종족(민 1:2, 대상 7:4), 지도자(민 25:14), 지파(수 22:14), 신전(삿 9:4,왕하 19:37, 대상 10:10), 신당(삿 17:5), 궁내(왕하10:5), 성전(왕하 16:18, 대상 29:3), 창고(왕하 20:13), 궁궐(왕하 21:18, 대상 14:1), 성막(대상 9:23), 궁전(대상 17:1), 곳간(대상26:15, 사 22:8), 반열(대상 28:13), 내전(內殿)(대하 3:13), 무더기(욥 8:17), 가산(욥 20:28), 국고(사 22:15), 딸(사 10:32), 부엌(겔46:24),  집(미 2:2).
구약 성경 / 2036회 사용

교회(敎會) 1577 에클레시아(ĕkklēsia) ἐκκλησία

1. 회,  2. 모임

사도행전 7:38
관련 성경 / 교회(마 16:18, 행 2:47, 롬 16:4), 모인 무리 (행 19:32), 민회(행 19:39), 모임(행 19:41).
신약 성경 / 114회 사용

새 하늘과 새 땅(新天地)
οὐρανὸν καινὸν καὶ γῆν καινήν


거하시매 / 
σκηνόω   4637

1. 살다,  2. 거주하다,  3. 요한계시록 13:6

발음 / 스케노(skēnŏō)

어원 / 미래 σκηνώσω, 제1부정과거 ἐσκή- νωσα, 463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거하다(요 1:14, 계 13:6, 21:3), 장막을 치다(계 7:15).
신약 성경 / 5회 사용
성막 /
σκηνή, ῆς, ἡ  4633

1. 초막,  2. 오두막집

4632와 4639와 유사어로 보임 : 천막

발음 / 스케네(skēnē) 


관련 성경 / 초막(마 17:4, 막 9:5, 눅 9:33), 처소(눅 16: 9), 장막(행 7:43, 히 8:2, 계 13:6) 
신약 성경 / 20회 사용
영광
δόξα, ης, ἡ  1391

1. 광명,  2. 위엄,  3. 누가복음 2:9

발음 / 독사(dŏxa)

어원 / 1380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광(마 4:8, 막 8:38, 눅 2:9), 광채(행 22:11), 영화(榮華)(요 17:5).
신약 성경 / 166회 사용
카보드(영광)
כָּבוֹד  3519

1. 무거움,  2. 영광,  3. 사무엘상 4:21

발음 / 카보드(kâbôwd)
어원 / 351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재물(창 31:1), 영화(창 45:13, 삼상 6:5, 시 8:5), 영광(창 49:6, 출 33:18, 대하 1:11, 에 5:11), 존귀(잠 15:33), 귀(貴)(대상29:12, 잠 3:16), 존영(잠 11:16), 영예(잠 25:2, 29:23), 위력(사 8:7),심령(시 108:1).
구약 성경 / 199회 사용



개역개정,1.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성막(미쉬칸)
- '거주하다'는 뜻의 '솨칸'에서 유래할 말로 거처 '거주지'라는 의미이다.
즉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거주하심을 나타내는 장소를 가리킨다.
자세한 설명은 25:8 주석을 참조하라.

내가... 거할 성소
- '거한다'는 뜻의 히브리어 '쇠칸'은 '숙박'이라는 개념을 가지며 동시에 '휴식한다'는 뜻의 '쇠카브'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성소에 머무르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하며 그들을 돌봐 주겠다는 의미이다.
그 속성상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떠한 특정 장소에만 머물러 계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은 성경이 재차 강조하고 있는 바이다(왕상 8:27; 대하 2:6; 사 66:1; 렘 23:24; 행 7:48; 17:24).

한편 성소란 말은 '성막'(26:36), '회막'(29:42), '증거의 장막'(17:7) 이라고도 한다.
한 곳에 고정된 집이 아니라 이동할 수 있는 텐트였다.
따라서 이처럼 이동하는 성소에 하나님이 거하시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계시며,
인간을 앞서 인도하시겠다는 표현임을 분명알 수 있다(민 9:17-23; 신 1:33).

그러나 솔로몬은 성전 건축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성전에만 계신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하나님은 제한하고, 성전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여 나중에는 성전 숭배 사상까지 생겨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집에 거하시지 않음을 선포했고(사 66:1, 2),
스데반도 이를 강조했으며(행 7:48-50),
예수께서도 예배의 참된 요소는 예배드리는 '장소'가 아닌 예배드리는 자의 '신령과 진정' 임을 분명히 가르치셨다(요 4:21-24).
이처럼 하나님은 특정 장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성전된 신자 안에 거하신다(고전 3:16; 6:19; 고후 6:16; 엡 2:21).

앙장
- 텐트나 상여 등의 위에 치는 휘장(covering)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성을 덮는 막을 의미한다.

열 폭을... 만들지니
- 성막의 제일 안쪽을 덮는 소위 제1앙장에 대한 제조법이(제1앙장의 모양은 36:8 주석의 그림을 참조하라>.
이것은 길이 약 12. 8m, 너비 약 18m 만들어진 앙장을 길이 부분이 앞뒤 방향으로 양옆 방향으로, 너비 부분이 앞뒤 방향으로 오게끔 해서 성소와 지성소 위에 덮었다.
성막 본채는 좌우 그리고 서쪽 벽은 있었지만 동쪽 입구는 휘장으로 되어 있었고, 천장은 이 앙장을 포함해서 4겹의 피륙으로 덮혀졌다. 따라서 본절에 나오는 제1앙장은 성막 안쪽에서만 볼 수 있었고 바깥에서는 볼 수 없었다.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
- 26:1-14강해, '앙장을 수 놓은 네가지 색실'을 참조하라.

그룹
- 25:18, 19 주석 참조.
그리고 수 놓인 그룹의 모양에 대해서는 36:37, 38 그림을 참조하라.

공교히(마아쉐 호쉐브)
- '마아쉐'는 '만들다'는 뜻의 '아솨'에서 온 말로 '활동', '일', '만든 것' 등의 뜻이고,
'호쉐브'는 '생각하다', '계산하다', '고안하다'는 뜻으로서 여기에는 '공교한' '숙련된'의 뜻도 있다.
따라서 '공교한 일로', '숙련된 일로'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지만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은 최고의 기술로 만들 것이 요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 놓아 만들지니
- 원어에는 수를 놓는다는 말이 없으나 실을 사용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놓아'가 첨가되어 있다.
이때 앙장과 수는 따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앙장을 짜면서 각각 다른 4색의 실을 사용, 그룹의 모양이 함께 짜지도록 했다.
즉 앙장도 카페트나 담요를 만드는 기법으로 '공교히'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막 안쪽에서 볼 수 있는 제 1앙장에 이처럼 그룹(25:18)을 수놓은 것은 친사들이 성막 내부의 성결을 유지하며 또한 보호하고 있음을 상징하기 위함이다.

 


출애굽기 26:1 성막(聖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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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장에서 성막의 기구들 언약궤, 떡상, 등잔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26장에서는 성막에 대한 말씀입니다.

첫째는 성막의 덮개(1~14)

성막의 천장 덮개는 4중으로 되어있습니다.
가장 안쪽에는 흰 세마포에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정교하게 그룹을 수놓아 만든 휘장이 씌워졌고, 그 위에는 염소털로 만든 막이 덮여졌습니다.
이 질긴 천은 지금도 중동의 유목민들이 천막을 만들 때 사용하는 천입니다.
그 위에는 붉은 물을 들인 수양의 가죽이 덮여졌고 맨 위에는 해달의 가죽이 덮여졌습니다.
염소털로 만든 덮개는 그 아래의 천을 보호하고 다른 것들과 분리하는 거룩한 성별을 의미합니다.
붉게 칠해진 수양의 가죽은 희생 제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빌 2:8).
수양 가죽에 들여진 붉은 색은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상징합니다.
해달의 가죽은 외양상 조금도 아름답지 않고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인성을 입으신 그리스도는 매력적이지 않았으나, 알면 알수록 그분의 영광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둘째는 성막 둘레의 널판(15~30)

성막의 둘레에 세워지는 기능으로서, 48개의 널판은 조각목(아카시아나무)으로 만들어졌고 금으로 입혀졌습니다.
각 널판은 10규빗 x 1.5규빗이었습니다.
널판은 가로세워져서 서로 연결하여 성막의 둘레를 형성하였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서로 어깨를 연결하여 교회를 형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들은 조각목으로 만들어 금으로 싼 각각 다섯 개의 띠로 엮어져 있었는데(26~28),
성령께서 교회를 하나로 묶는 것을 상징합니다(엡 4:3).
널판의 아래에는 은으로 받침을 만들어 끼워지게 하였습니다.
은받침은 하나에 40kg이 나가는 무게로 만들어졌습니다.
은은 이스라엘의 장정(20~50세 남성)을 계수하여 각각 속전으로 은 반 세겔씩 내게 하였는데 바로 그것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은은 사람의 생명을 대신하는 속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널판 하나에 은받침 2개씩 있었는데 바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속함 위에 세워진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셋째는 휘장(31~33)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기능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존하는 기능이요, 구별하는 기능입니다.
휘장은 역시 흰 세마포에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수놓아 만들어졌고 아래로는 금갈고리를 붙여서 언제나 아래로 늘여뜨리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는 휘장 외에 널판과 같은 네 개의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어 금으로 싸서 은받침 위에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휘장은 아무도 지성소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장차 이 휘장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하나님께서 성소의 휘장을 찢으심으로, 예수님의 휘장이 성소의 휘장을 찢는 죽음, 곧 하나님께로 죄인들이 나아올 수 있도록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을 여는 죽음이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넷째는 성막의 문(36~37)

지성소를 막고 있는 휘장과 마찬가지로, 흰 세마포에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수놓아 짜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지성소의 입구와는 달리 5개의 기둥을 세우라고 하셨고, 역시 금갈고리도 달게 되어있었습니다.
기둥 다섯에 놋받침 다섯이 있습니다.
놋은 십자가를 견디신 구세주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문 마다, 입구 마다 그룹이 수놓아진 세마포를 휘장으로 두었다는 것은 아무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성막의 덮개는 성도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안,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오는 것은 전적으로 모든 죄인된 인간에게 금지된 사항입니다.
휘장 그리고 거기 수놓아진 그룹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오직 십자가에 죽으시고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만이 그 보혈의 능력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널판과 그 받침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성도들이 교회의 기둥처럼 교회를 형성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 안에 구속함을 입은 백성들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굳게 서서 교회의 기둥을 형성하는 것, 이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그런 교회를 이루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교회에는 분명한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자리하고 있습니까?
거룩하게 구별된 백성들이 서로 연합하여 기둥을 이루고 있습니까?

성막을 통해서 교회를 봅니다.
성막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봅니다.
성막을 통해서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를 봅니다.
우리가 오늘 어디를 보아야 하며, 무엇을 꿈꾸어야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다시 새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구원받은 천국백성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오늘도 충만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성막(聖幕)의 재료들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바친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성막을 짓기 위하여 드려진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방법으로 된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과 능력과 역사에 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적인 순종과 헌신에 의하여 드린 것이다.
즉 하나님께로 난 하나님의 아들의 도성인신으로 참 이스라엘로써 신앙적인 순종과 헌신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됨을 말해준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하나님과 참 잇라엘의 결연자에게 말씀하심과 같이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34) 고 했다.
그 여자가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라"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내가 그로라"(요 4:25-26).
그러므로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막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상징이었다(출 25:8, 왕상 8:27)

말씀의 도성인신,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매

헬라어의 성막은 육신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다(요 1:14, 고후 5:1)



그러므로 성막은 도성인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로서 그로 인하여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만나게 되고 영적으로 교제하게 되며 그 안에서, 즉 그를 중계로하여 하나님께 그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만나거나, 참 예배가 있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령한 참 성막이다.
우리는 이하에서 성막의 기구들을 생각하기 전에 주의할 것이 있다. 그것은 성경에 법궤로부터 시작하여 속죄소, 그룹, 떡상, 향단, 촛대,놋단, 세수대야와 안마당, 바깥마당의 순으로 논한 것이다.
위의 순서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심을 의미하며, 죄인을 위한 희생을 나타낸다. 그 희생은 십자가의 희생이다. 죄인의 공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요, 그 역사이다. 또 성막에 들어가는 과정을 생각하여 보면 깊은 진리가 있다. 이방인의 죄인에게 구원을 주는 복음의 문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여 잡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생명과 거룩함과 영원한 축복을 받게 된다. 즉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하나님의 하향적 사랑과 인간의 상향적 신앙을 보여 준다.

2.법궤

[하나님께서는 조각목으로 법궤를 만들 것을 명령하셨다(출25:10). 그 조각목은 광야에서 자라는 무척 굳은 나무이다.]그 궤는 조각목,즉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었다.]38)그 [아카시아 나무는 선택되었다. 그 나무는 아라비아 사막에서 성장하는 나무이다. 그 나무를 선택하여 재료로 사용하였다.]39) 이것은 예수님의 성품을 설명하여 준다. 우리는 각각 성품이 다르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 대하여 그 개성도 완고하면서도 마귀에게는 유순하여 패하는 자가 많다. 즉 보잘것 없는 고난, 시험과 시련 속에서 그 성품이 움직여 신앙을 잃어 버리는 마귀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품은 외유내강 하셨다. 예수님은 세번이나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그뿐 아니라 공생애에 수없는 고난과 위험을 당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육신을 쓰신 인간이었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으셨다. ..... 조각목이 견고하여 벌레가 먹을 수 없을 같이 주님의 의지는 움직여지지 않으셨다.]40) 그 나무는 결이 아름답고 귀한 나무이다. 그와같이 우리 주님의 성품은 아름답고 고귀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조각목은 순금으로 입혔다. 이에 대하여 엉거(Unger)박사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나타낸 것이라]41) 고 했다. 그러나 성경에 순금은 순수한 참 신앙을 의미하는 때가 많다.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이시고, 또 신성이 신앙의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카일(keil)씨도 "내외에 금으로 포장한 것은 그의 백성 가운데 있는 여호와의 성성(聖性)이라"42)고 했다. 그러므로 조각목은 예수님의 인성을 말하며 정금은 예수님의 신성을 말한다. 주님은 신성을 가지셨을 뿐 아니라 인성도 가지고 계신다(사7:14). 고로 조각목을 정금으로 싼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神人양성의 소유를 나타낸다43). 그 안에는 만나 항아리와 십계명 두 돌비와 아론의 싹난지팡이를 넣어 두었다(히9:4). 그와같이 그리스도의 마음 속에 심판과 의에 근거한 은헤의 왕국, 하나님 자신의 증거로써 언약 돌비들이 있었다44).
이는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와 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의 입에서는 그것이 늘 차고 넘쳐 흘렀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놀랄 뿐 아니라 충만함을 받았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부활을 하신 생명의 주님을(민17:10)의미하는데 그가 죄인들을 원수에게서 구원하고, 천국길로 인도하심을 의히만다. 만나 항아리는 생명의 소유자로써(요6:) 택한 양들에게 영생의 양식과 생명을 주심을 의미한다.
이상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세가지의 유대를 가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요14:6).여기에 대해 차남진 박사는 "십계명은 성부의 대표요, 만나는 희생 제물된 성자의 대표요, 아론의 싹난지팡이는 성신의 대표라"했다. 또 그리스도의 삼중직도 의미한다고 했다(기독신보,1966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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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궤(언약궤, 법궤) 출애굽기 26:1 성막(聖幕)

궤에 대한 다양한 명칭
히브리어 : 아론

1. 언약궤,   2. 증거궤,   3. 법궤,  4. 나무궤,   5. 만군의 여호와의 궤,   6. 여호와의 궤,   7. 하나님의 궤,   8. 이스라엘 신의 궤,
9. 주의 능력의 궤,  10. 거룩한 궤,  11.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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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 삼으시려고 이스라엘을 부르신 하나님(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출애굽기 1-6장 / 모세의 사명
출애굽기 7-13장 / 열 재앙과 유월절
출애굽기 14-18장 / 출애굽과 신광야
출애굽기 19-24장 / 시내산 언약

 19장 : 시내산 언약
 20장 : 십계명
 21장 : 종과 폭행, 소의 잘못에 관한 배상
 22장 : 손해배상, 소외된 자에 관한 법
 23장 : 정의, 안식, 절기, 순종과 축복
 24장 : 시내산 언약식, 모세사 산에 오름 40일

출애굽기 25-40장 / 성막

 25-31장 : 성막 설계
 32-34장 : 범죄와 중보기도
 35-40장 : 성막 건축과 완성

출애굽기 25장-40장은 성막에 대한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25-30장 :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성막 설계도입니다.
성막을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의 재료와 모양, 치수 등등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35-40장 : 모세가 하나님께 받았던 성막 설계도대로 성막건축 책임자 브살렐오홀리압이 성막을 짓는 내용입니다.

성막에 대해서는 ‘성막(Tabernacle)을 인터넷에 검색하면 사진들이 많이 나옵니다.
성막에 관한 사진들을 보면서 성막을 이해하시면 한결 쉽습니다.

특별히 기억해두실 것은 성막에 나오는 모든 기구들 – 번제단, 물두멍, 떡상, 분향단, 금촛대, 증거궤(법궤, 언약궤) – 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5장은 성막 기구  증거궤, 떡상, 등잔대를 소개합니다.

출애굽기 25:1-7 /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성막 건축에 필요한 예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예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말씀하신 모든 예물들은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에게 공짜로 받아서 온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 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애굽기 12:35, 36)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위해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곧 금과 은과 동과 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홍색 실과 가는 모시 실과 염소 털과 붉게 물들인 숫양 가죽과 돌고래 가죽과 아카시아 나무와 등잔용 기름과 예식용 기름에 넣는 향품과 분향할 향에 넣는 향품과 에봇과 가슴받이에 박을 홍옥수와 그 밖의 보석들이다.”(25:3-7)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위해 하나님께 드릴 예물
   금, 은, 동, 청색 실, 자주색 실, 홍색 실, 가는 모시 실, 염소 털,
   붉게 물들인 숫양 가죽, 돌고래 가죽, 아카시아 나무, 등잔용 기름, 
   예식용 기름에 넣는 향품, 분향할 향에 넣는 향품, 에봇, 가슴 받이에 
   박을 홍옥수, 그 밖의 보석들


출애굽기 25:8-9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이 왜 필요한 지 말씀하시는 내용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거할 성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살고 싶어서 지으라고 하셨다는 말입니다.
성막은 모세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모세가 디자인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성막은 솔로몬에 의해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지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던 곳입니다.

성전은 고정되어 있는 예배 장소라면, 성막은 이동식 예배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할 때 백성들이 지파 별로 텐트를 치고 머무는 곳마다 성막이 이스라엘 한 가운데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증거궤(언약궤, 법궤) 


출애굽기 25:10-22 / 증거궤와 증거궤의 뚜껑인 속죄소(贖罪所)

증거궤언약궤 또는 법궤라고 부릅니다.
증거궤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안과 밖을 쌉니다.
길이가 2규빗 반, 너비가 1규빗 반, 높이가 1규빗 반입니다(1규빗 45-50cm).

금고리 4개를 정금으로 만들고 양쪽에 둘씩 답니다.
멜 채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쌓고, 고리에 항상 꿰어 둡니다.
단 상단 부분에 금테를 두릅니다.
증거궤 윗부분(뚜껑)은 속죄소입니다.
증거궤 안에 십계명 돌 판이 들어있습니다.

증거궤는 어디에 있을까요?

성막 안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증거궤는 지성소에 있는 유일한 성물(거룩한 물건)입니다.
언약궤 또는 법궤라고 부릅니다.
증거궤 안에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 판, 만나 항아리(출 16:34)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민 17장)가 있습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증거궤보다 길이가 길면 증거궤 앞에 보관했을 지도 모릅니다.

증거궤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쌉니다.
성막에 사용하는 대부분의 기구들이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쌉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만든 것을 놋으로 쌉니다.
물두멍은 놋 거울로 만듭니다.
조각목은 조각 난 나무토막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아카시아 나무를 말합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을 때, 백향목과 감람나무를 사용했습니다.
솔로몬은 부자였기 때문에 가장 좋은 나무로 성전을 건축했습니다(왕상 6:14-36).
성막을 세울 때, 대부분의 기구들을 조각목(아카시아 나무)을 사용한 이유는 광야에 제일 흔한 나무가 조각목이었기 때문입니다.

조각목은 보통 땔감으로 사용하던 나무입니다.
가시가 나 있고, 뒤틀려 있습니다.
너무 단단해서 건축 재료로 사용하기가 힘든 나무입니다.
조각목은 마치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나무입니다.
그런데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조각목이 모퉁이의 머리 돌처럼 성막 기구를 만드는데 아주 귀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십계명 돌 판이 들어있는 증거궤의 덮개(뚜껑)가 속죄소입니다.
속죄소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서 모세를 만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천사)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22)          


증거궤(법궤)와 속죄소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증거궤도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고, 예수님도 진리요(요 14:6),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요 1:1).
속죄소는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뜻하고, 예수님 역시 용서와 자비의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5:23-30  / 떡상(진설병을 얹는 상)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쌉니다.
길이가 2규빗, 광 1규빗, 높이가 1규빗 반(100*50*75).
금고리 4개가 양쪽에 둘씩 있고, 멜 채가 꿰여 있습니다.
정금으로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잔을 만들어 떡과 함께 놓습니다.

떡상 위에는 떡 열 두 덩이가 두 줄로 올려져 있습니다.
이 떡은 히브리어로 ‘레헴파님’인데, 얼굴의 떡’, ‘면전의 떡



출애굽기 25장 성막 기구 설계(1) 언약궤, 떡상, 등잔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 삼으시려고 이스라엘을 부르신 하나님(19:5,6)
출애굽(1-18장)
모세의 사명
(1-6장)
열 재앙과 유월절
(7-13장)
출애굽과 신 광야
(14-18장)
시내산 언약(19-24장)


시내산 언약
(19-24장)
시내 산 언약(19장)
십계명(20장)
종과 폭행, 소의 잘못에 관한 법(21장)
손해 배상, 소외된 자에 관한 법(22장)
정의, 안식, 절기, 순종과 축복(23장)
시내 산 언약 + 모세가 산에 오름(24장)




성막(25-40장)

성막 설계
(25-31장)
성막 기구 설계(1) 25-27장
대제사장의 옷과 판결 흉패(28장)
제사장 위임식 준비(29장)
성막 기구의 설계(2) 30장
브살렐과 오홀리압(31장)
범죄와 중보기도
(32-34장)
금 송아지 사건(32장)
모세의 중보기도와 언약 갱신(33,34장)

성막 건축과 완성
(35-40장)
성막 건축을 위한 준비(35장)
성막 기구 제작(36-38장)
대제사장의 옷 완성 & 성막 기구 완성(39장)
성막 세우기 &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40장)


출애굽기 25장-40장은 성막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막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있는 분들 외에는 출애굽기 25장부터 거의 읽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20장 십계명까지는 읽지만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 특히 성막 이야기는 사실 관심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25-40장 중에서 그나마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은 32장에 나오는 금 송아지 사건 정도입니다.  

사실 우리가 가장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마음 어렵게 여기는 부분이 성막입니다(출애굽기 25-30장, 35-40장). 출애굽기 전체 40장 중에서 성막에 대한 이야기가 분량이 가장 많습니다. 분량이 많은 만큼 중요한데 사실 읽어도 잘 모르겠습니다. 성막에 대한 설명이 두 번씩이나 나와서 더 부담이 되고 짜증이 납니다.

하지만 왜 출애굽기에 성막 이야기가 두 번 반복되어 나오는지 그 이유를 알면 너무 쉽습니다. 출애굽기 25-30장에 나오는 성막 이야기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성막 설계도입니다. 성막을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의 재료와 모양, 치수 등등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35-40장에 나오는 성막 이야기는 모세가 하나님께 받았던 성막 설계도대로 성막건축 책임자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성막을 짓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성막에 대해서 똑같은 내용이 두 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만 자세히 공부하면 됩니다.

성막에 대해서는 ‘성막’, ‘Tabernacle’을 인터넷에 검색하면 사진들이 많이 나옵니다. 성막에 관한 사진들을 보면서 성막을 이해하시면 한결 쉽습니다. 특별히 기억해두실 것은 성막에 나오는 모든 기구들 – 번제단, 물두멍, 떡상, 분향단, 금촛대, 증거궤(법궤, 언약궤) – 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5장은 성막 기구 설계  세 가지 성막 기구들(증거궤, 떡상, 등잔대)을 설명합니다. 

출애굽기 25:1-7절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성막 건축에 필요한 예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예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말씀하신 모든 예물들은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에게 공짜로 받아서 온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 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애굽기 12:35,36)



출애굽기 25:8, 9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이 왜 필요한 지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거할 성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살고 싶어서 지으라고 하셨다는 말입니다.
성막은 모세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모세가 디자인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성막은 솔로몬에 의해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지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던 곳입니다.
성전은 고정되어 있는 예배 장소라면, 성막은 이동식 예배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할 때 백성들이 지파 별로 텐트를 치고 머무는 곳마다 성막이 이스라엘 한 가운데 자리를 잡았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증거궤(언약궤, 법궤)


출애굽기 25:10-22 / 증거궤와 증거궤의 뚜껑인 속죄소(贖罪所)

증거궤언약궤 또는 법궤라고 부릅니다.
증거궤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안과 밖을 쌉니다.
길이가 2규빗 반, 너비가 1규빗 반, 높이가 1규빗 반입니다(1규빗 45-50cm).

금고리 4개를 정금으로 만들고 양쪽에 둘씩 답니다.
멜 채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싸고, 고리에 항상 꿰어 둡니다.
단 상단 부분에 금테를 두릅니다.
증거궤 윗부분(뚜껑)은 속죄소입니다.
증거궤 안에 십계명 돌 판이 들어있습니다.

증거궤는 어디에 있을까요?
성막 안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증거궤는 지성소에 있는 유일한 성물(거룩한 물건)입니다.
언약궤 또는 법궤라고 부릅니다. 증거궤 안에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 판, 만나 항아리(출 16:34)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다(민 17장).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증거궤보다 길이가 길면 증거궤 앞에 보관했을 지도 모릅니다.

증거궤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쌉니다.
성막에 사용하는 대부분의 기구들이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쌉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만든 것을 놋으로 쌉니다.
물두멍은 놋 거울로 만듭니다.
조각목은 조각 난 나무토막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아카시아 나무를 말합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을 때, 백향목과 감람나무를 사용했습니다.
솔로몬은 부자였기 때문에 가장 좋은 나무로 성전을 건축했습니다(왕상 6:14-36).
성막을 세울 때, 대부분의 기구들을 조각목(아카시아 나무)을 사용한 이유는 광야에 제일 흔한 나무가 조각목이었기 때문입니다.

조각목은 보통 땔감으로 사용하던 나무입니다.
가시가 나 있고, 뒤틀려 있습니다.
너무 단단해서 건축 재료로 사용하기가 힘든 나무입니다.
조각목은 마치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나무입니다.
그런데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조각목이 모퉁이의 머리 돌처럼 성막 기구를 만드는데 아주 귀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십계명 돌 판이 들어있는 증거궤의 덮개(뚜껑)가 속죄소입니다.
속죄소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서 모세를 만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천사)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22)          

증거궤(법궤)와 속죄소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증거궤도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고, 예수님도 진리요(요 14:6),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요 1:1).
속죄소는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뜻하고, 예수님 역시 용서와 자비의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역대하 5장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긴 내용입니다.

역대하 5:1절은 솔로몬이 성전을 다 지었다는 요약적 진술입니다.
이렇게 해서, 솔로몬은 여호와의 성전을 짓는 모든 일을 완성하였습니다.
솔로몬은 그의 아버지 다윗이 거룩하게 구별해서 바친 성물, 곧 은과 금과 모든 기구를 가져다가, 하나님의 성전 창고에 넣었습니다.

역대하 5:2-10절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성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옮긴 내용입니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시온, 곧 ‘다윗 성’에서 성전으로 옮기려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이스라엘 자손의 각 가문의 대표인 온 지파의 지도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모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가 일곱째 달 절기에 왕 앞에 모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모이니, 레위 사람들이 궤를 메어 옮겼습니다.
궤와 회막과 장막 안에 있는 거룩한 기구를 모두 옮겨 왔는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그것을 날랐습니다.
솔로몬 왕과 왕 앞에 모인 온 이스라엘 회중이 궤 앞에서, 양과 소를,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잡아서 제물로 바쳤습니다.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제자리, 곧 성전 내실 지성소 안, 그룹들의 날개 아래에 가져다가 놓았습니다.
그룹들은 궤가 놓인 자리 위에 날개를 펼쳐서, 궤와 채의 위를 덮었습니다.
궤에서 삐죽 나온 두 개의 채는 길어서 그 끝이 지성소의 정면에 있는 성소에서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성소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채는 오늘날까지 그 곳에 그대로 놓여 있습니다.

궤 속에는 호렙에서 모세가 넣어 둔 두 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 두 판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서 나온 다음에 여호와께서 호렙에서 그들과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거기에 넣은 것입니다. 

여호와의 궤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요?

왕상 8:9절과 대하 5:10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어디 있을까요?

히브리서 
9:4에는 여호와의 언약궤 안에 십계명을 기록한 언약의 두 돌판과,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이렇게 세 가지가 들어있다고 나오거든요.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출애굽기 25:23-30 / 떡상(진설병을 얹는 상)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쌉니다.
길이가 2규빗, 광 1규빗, 높이가 1규빗 반(100x50x75).
금고리 4개가 양쪽에 둘씩 있고, 멜 채가 꿰여 있습니다.
정금으로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잔을 만들어 떡과 함께 놓습니다.

떡상 위에는 떡 열 두 덩이가 두 줄로 올려져 있습니다.
이 떡은 히브리어로 ‘레헴파님’인데, 얼굴의 떡’, ‘면전의 떡’이라는 뜻입니다.
매 안식일마다 새 떡으로 바꿔 놓습니다.



떡상(진설병상)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싼 떡 상
역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조각목(아카시아나무)은 연약한 인간(성)을 뜻하고 금은 예수님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조각목은 보통 땔감으로 사용하던 나무입니다. 가시가 나 있고, 뒤틀려 있습니다.
너무 단단해서 건축재료로 사용하기가 힘든 나무입니다.
조각목은 마치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나무입니다.

그런데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조각목이 모퉁이의 머리 돌처럼 귀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아시고 우리를 감싸주시는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떡 상에 올려진 떡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떡이 12개니까 하나님 앞에 드려진 이스라엘 12지파를 뜻할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의 떡으로 임하신다는 뜻일까요?
제사 상에 떡을 올려놓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일까요? 

떡 상에 올려진 12개의 떡도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12지파를 뜻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장 기쁘게 받으신 떡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51).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5:31-40 / 등잔대


정금 1달란트(34kg)를 쳐서 만듭니다.
살구꽃 형상의 꽃과 잔과 받침을 만듭니다.
양쪽에 세 개의 가지가 있고 가운데 한줄기로 그 가지들이 연합되어 있습니다.
등잔대에 일곱 개의 등잔이 있습니다.
불 집게와 불똥 그릇도 정금으로 만듭니다.




등잔대

등잔은 성소를 밝히는 유일한 빛입니다.
등잔이 없다면 성소는 칠흑 같은 어둠뿐입니다.
성소에 있는 모든 기구들을 조각목으로 만든 후에 금으로 싸는데, 등잔대만 정금을 쳐서 만듭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겠지요.
금 덩어리를 쳐서 성소를 밝히는 등잔대를 만드는 것처럼 예수님의 고난(죽음)을 통해 세상에 생명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등잔대의 7개 등잔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와 지혜를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빛, 진리의 빛을 상징합니다(요 1:9; 8:12).

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이 있었나니.

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을 얻으리라.


등잔에서 사용하는 기름은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사용해야 합니다.
감람열매가 찧어지고 깨짐으로 순전한 기름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참 빛이 세상에 비치게 되었습니다.

등잔대를 설명하면서 반복해서 언급하는 꽃이 ‘살구꽃’입니다.
등잔의 모양을 설명하면서 등잔대 가지와 줄기에 살구꽃 형상의 잔에 대해 반복합니다.
살구꽃’은 팔레스타인에서 봄이 올 때 가장 먼저 꽃을 피웁니다.
살구꽃을 뜻하는 히브리어 ‘샤가드’“파수꾼, 망보다, 깨어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שָׁקֵד 스트롱번호 8247

1. 살구나무,  2. 살구나무 열매
발음 / 샤케드(shâqêd)
어원 / 824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감복숭아(창 43:11), 살구 열매(민 17:8), 살구나무(전 12:5, 렘 1:11)
구약 성경 / 4회 사용

* 8245. שָׁקַד 

1. 밤을 새우다,  2. 경계하다,  3. 주목하다

발음 / 샤카드(shâqad)
관련 성경 / 새우다(시 102:7), 깨어있다(시 127:1, 렘 31:28, 44:27), 기다리다(잠 8:34), 지키다(스 8:29), 엿보다(사 29:20, 렘 5:6),
보다(렘 1:21)
구약 성경 / 18회 사용

레위 후손인 고라와 다단, 온이 모세를 거역하여 들고 일어났던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 앞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와 아론의 권위(리더십)에 대해 뭔가 말씀하실 게 있었습니다.
그 사건이 민수기 17장에 나옵니다.

민수기 17장에 보면, 놀랍게도 아론의 지팡이에 살구꽃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고 나옵니다.
살구꽃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순종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살구꽃은 하나님 앞에 늘 깨어 있으라는 메시지도 담고 있습니다.

등잔대 :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

어두운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참 빛, 생명의 빛을 비추어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요한복음 1:4-9)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이라.
5. 빛
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이 아니요 이 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이 있었나니.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진리의 빛, 지혜와 계시가 우리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사진 : 벤구리온 공항에 비치된 메노라입니다.

메노라와 관련된 성서 구절들을 찾아 읽다보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성막안의 기물들 중 하나인 메노라와 훗날 솔로몬의 성전에 만들어진 메노라는 각각 제작법이 다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한 성막의 메노라 제작법(출 25:31-40, 37:17-24, 민8: 4)과 솔로몬 시대의 메노라 제작법 (왕상 7:48)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1) 메노라의 재료는 순전한 금 (히브리어로 메노라 자하브 타호르)한 달란트를 쳐서 만들도록 하였다. 한편 솔로몬 성전의 메노라 (왕상 7:49)는 좌우에 다섯개씩의 정금 등잔대 (히브리어로 메노로트 자하브 사구르)를 만들어 설치하도록 되어 있다. “자하브 사구르”(solid gold- zahav sagur)라는 단어는 아카드에서 기원한 것이다. 반면 “자하브 타호르” (pure gold – zahav tahor)는 이집트에서 사용되던 전문 용어와 가깝다.  

 2)같은 모양, 혹은 다른 모양:  성막에 설치되는 메노라는 한 달란트의 금을 쳐서 만든 것이다.즉 여러개의 조각을 붙여 만든 것이 아니다. 또한 성막에는 단 하나의 메노라만을 제작하여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의 메노라는 하나가 아닌 열개이다.

3). 성막에 설치하는 메노라는 자세한 제작법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민 8:4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메노라의 제작 양식을 보여주셔야 할 정도로 복잡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성전의 메노라는 그 제작 방법에 대한 기술이 간단하게 등잔대와 금꽃과 등잔을 만들라고 언급한다.

4) 성막의 메노라에는 아몬드 꽃을 장식한다. 그러나, 성전의 메노라는 꽃을 장식하지만 어떤 꽃인지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왜 솔로몬은 또 다른 메노라를 만들었을까? 모세 시대의 만든 메노라 외에 또 다른 메노라들을 만들어서 성전에 비치하였을까? 아니면 성막에 있던 메노라를 잃어버렸을까? 성서는 이에 대해 침묵한다.

성서의 메노라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히브리대 레아 마조르 교수의 글에 의하면 (http://mikrarevivim.blogspot.com/search?q=מנורה - 성막의 금촛대(메노라) - 빛의 나무)
메노라는 생명과 능력을 상징한다.
이유는, 메노라에 장식되는 꽃인 아몬드 꽃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시작 되었음을 알리는 꽃이다.
즉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힘을 상징한다.
또한 아몬드 나무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기도 하다.

예를 들면, 민 17장에 나오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 (아몬드 꽃이 핀 지팡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야곱과 라반 이야기에서도 메노라의 아몬드 꽃이 나온다.
창 30:37에 나오는 “루즈” 라는 단어는 아몬드 나무(다른 말로는 샤케드)를 뜻한다.
이 “루즈”역시 생명의 탄생과 직접 관련이 있다.
성막의 불을 밝히는 제사장은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이 역시 생명을 뜻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의 상징 메노라(Menorah)

히브리어 메노라는 מְּנֹרָ֖ה 입니다.
멤, 눈, 레쉬, 헤이 이 4글자의 조합인데,
각 글자마다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의 특성을 고려하여 단어들을 조합해보니
가장 높은 진리를 드러내는 압도적인 삶이 바로 메노라의 의미라는 걸 알게 하셨습니다.
가장 높은 진리를 드러내는 압도적인 삶.
(Life of overpowering to reveal the highest things)


메노라는 가지가 일곱인 등대로 성막시대부터 유대인의 상징이었고 오늘날 이스라엘 국가의 상징이다.
메노라는 유대교 회당의 제대에 놓여지는 등대로 성막과 성전의 일곱 등대의 모습이다.

출애굽기 25장 31~40
출애굽기 37장 17~24
성막에서 사용하는 등대(등잔)의 제작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1. 성막의 메노라(등대)

(1). 등대의 재료
등대는 정금 1 달란트로 만들었다(정금 1달란트 = 34kg)(출 25:31, 출 37:17)
금은 믿음을 상징한다.
빛된 생활을 하려면 믿음 생활을 하여야 함을 뜻한다.

(2). 만든 방법
금을 녹여 틀에 부어 만든 것이 아니라 쳐서 만들었다.(출 25:31, 출 37:17)
이는 고난을 통하여 정금과도 같은 빛된 생활을 하게 됨을 상징한다.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이야 말로 가장 빛나는 메노라(등대)이다.

(3).등대의 모양
가운데 한줄기가 있고 양편에 각각 3가지씩 6개의 가지가 있다.(출 37:18)
등잔은 모두 7개로 살구꽃 형상이다.(출 25:33)

(4).살구나무의 신학적 의미
살구나무는 정확하게 아몬드를 말한다.
살구꽃은 2월 초에 꽃이 피기 때문에 이 지방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이다.
꽃이 활짝 피었을 때는 마치 땅 위의 흰구름 처럼 보인다.
꽃이 핀지 10주가 지나면 열매를 딸수 있는데 이 아몬드가 그 해의 첫 열매이다.
히브리인들은 살구나무를 [깨어 있는 나무]라는 뜻인 [솨케드]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예레미야 1장 11~12절에 하나님이 [예레미아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네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막과 성전 지성소 등잔의 형상적 소재가 된 살구나무는 그 해의 첫 열매를 맺는 나무인 동시에 깨어 있는 나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전 15:20)
살구나무 등잔(메노라)은 시종일관 깨어 계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영적 파수꾼인 예언자들과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 것이다.
고대 히브리 전통에 의하면 히브리인들은 깨어 계시는 하나님이 강림하시는 신성한 나무는 깨어 있는 나무인 살구나무이며 이 나무는 신내림의 성소였다.
창세기 3장 3절에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창세기의 저자 모세는 살구나무를 엔덴 동산의 생명나무로 발전 시킨 것이다.

(5).성막의 등대 위치
출27:21절에 의하면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 두었으며 출27:20절에 의하면 순결한 감람유를 사용하였고(출27:20) 저녁부터 아침까지 밝게 켜 놓았다고 하였다.
성막에는 창문이 없다.
오직 하나의 빛 등대가 있을 뿐이다.

성막의 등대가 주는 성경적 의미는
①예수 믿고 구원 받은 성도는 세상의 빛이요 등경위에 놓인 등불과 같이 온 집안을 비추는 빛이니 사람 앞에서 비추어야 한다(요5:14~16)는 의미가 있다.
②등잔은 감람유를 공급받아야 빛을 낼수 있다.
감람유는 성령을 의미한다.
우리는 스스로 빛을 낼수는 없는 것이며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빛을 낼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빌4: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③빛을 내지 못하는 등잔은 등대가 아니다.
계2:5절에서 하나님은 빛된 생활을 하지 않으며, 회개치 않으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긴다고 하였다.

(6).등대의 역사
성막에는 등대가 하나 밖에 없었으나 솔로몬 성전에는 10개의 등대가 있었다.
성전에는 10개의 등대에서 70개의 등잔이 빛을 발하게 된다.
70 개의 빛은 완전한 빛을 의미하고 있다.
70 이라는 숫자는 완전을 뜻하며 성경 여러곳에서 70 이라는 숫자를 사용하고 있다.
①야곱이 애굽에 데리고 간 식구가 70명(창46:27)
②엘림에 있는 종려 나무수가 70주(출15:27)
③바벨론 포로기간이 70년(렘25:11)
④유대인 산해드린 공회에 장로가 70인(겔8:11)
⑤예수님이 파송하신 70문도(눅10:1)

2. 국회 의사당의 메노라

이 거대한 메노라는 1956년 영국의 통치하에 있던 이스라엘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하여 영국 의회가 이스라엘 국가에 기증한 작품이다.
이 메노라는 브론즈 제품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애기하는 29개의 장면이 조각되어 있고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매노라는 신앙의 빛의 상징인 동시에 4천년에 걸친 제국의 방랑 동안에 바른 신앙을 일관하여 사명에 순종하는 의지를 지탱한 희망의
상징]



3. 하누카 메노라
유대인의 절기 중에 빛의 절기라고 하는 하누카 절기가 있다.
하누카 절기(수전절 또는 봉헌절)에 불을 켜는 등대를 하누카 메노라 라고 부른다.
하누카 등대는 성전의 7개의 등잔으로 이루어진 등대와 달리 9개의 등잔으로 되어 있다.
중앙에 있는 등잔은 약간 길고 나머지 여덟 개는 짧다.
유다 마카비가 핼라의 분활국 셀류쿠스로 부터 성전을 탈환하고 메노라에 가보니 대제사장의 확인이 있는 순결한 기름(감람유=올리브유)은 단 하루치 밖에 없었다.
레위기법에 따라 성전 기름은 순결한 기름만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적은 양의 기름임에도 성전의 메노라는 8일 동안 꺼지지 않고 성전을 밝혔다.
8일 동안 대제사장은 성전을 청결케 할수 있었으며 거룩한 기름도 준비 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하누카 절기는 8일동안 빛을 밝히면서 지키는 절기가 되었고 하누카 등대도 8개의 가지를 가진 9개의 등잔으로 된 것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후 기름 대신에 초를 사용하는 촛대로 변했다.
하누카 절기가 되면 유대인들은 대문밖에 메노라를 내 놓고 하루에 한개씩 촛불을 더해가면서 8일동안 불을 밝힌다. 처음 불은 중앙에 있는 촛대와 다른 하나를 밝히고 다음날 다른 하나를 추가하여 불을 밝힌다.
이 날을 빛의 축제라고 부르며 이는 AD 1세기경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여 처음 붙여진 이름이다.
유대인의 하누카 축제일은 서방의 크리스마스와 같은 날로 지키고 있다.


출애굽기에서 메노라(금촛대)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한 덩어리의 순금을 쳐서 만드는 기술을 요구하는 엄청 어려운 작업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메노라는 일곱 촛대입니다. 이 각각의 촛대를 만들어 연결하여 붙이는게 아니라 한 덩어리의 순금을 다듬고 쳐서 가운데 한 줄기에서 양 옆으로 각각 3줄기씩 총 6줄기가 나고, 가운데 줄기로 기름을 부으면 양쪽으로 퍼저가는 형태입니다. 100% 순금으로 메노라를 제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과 깨끗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계시록에서 표현하는 일곱 촛대 역시 메노라의 모습인데, 이 것은 일곱영을 뜻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각 줄기의 생김을 보면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고 저쪽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출 37: 19)’가 있다고 합니다. 각 줄기마다 3개의 잔에 꽃받침과 꽃이 각각 있어 총 9개 부분이 있습니다. 이렇게 9개 구분으로 만들어진 줄기가 좌우로 각각 3줄기씩 있고 가운데 등잔대만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출 37: 20)’이 있습니다. 즉 가운데 등잔대만 12부분입니다. 다시 살펴보면, 좌측에 9,9,9개 부분 가운데 12부분, 우측에 9,9,9개 부분으로 각각 만들어진 메노라 입니다. 이 숫자들에 대해서도 어떤 유대인 교수가 좌측 줄기와 가운데 등잔대, 9+9+9+12= 39, 그리고 우측 줄기 9x9x9=27 이렇게 보고 성경 구약과 신약이 각각 39장과 27장으로 이뤄진 것과도 일치한다고 하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약간은 끼워맞춘 것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딱 숫자가 맞게 떨어지는 것 또한 신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더 주목할 것은 가운대 등잔대만 12개의 부분인데, 이 것에 대해 12제자를 의미하며, 가운데 12제자로 부터 하나님의 복음이 세계에 전파 된 것 같이 나머지 6개의 줄기가 그 12부분이 있는 등잔대로 부터 기름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 메노라는 각 줄기에 직접 기름을 채워 넣지 않습니다. 가운데 등잔대를 통해 기름이 채워질 때 가장 먼 곳 줄기부터 채워져 옵니다. 동방으로 부터 시온의 대로가 회복이 되어 일본, 한국, 북한을 거쳐 실크로드를 지나 예루살렘까지 충만해 지는 과정과 정말 흡사하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메노라의 꽃의 모양은 살구꽃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 원어 성경에서 말하는 꽃은 바로 아몬드 꽃입니다. 번역상 오류인데, 당시 아몬드 꽃이 없었던 우리 나라에서 아마 가장 흡사한 모양을 했던 꽃으로 살구꽃이라고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가장 유력한 듯 합니다.
실제로 아몬드 꽃은 시리고 매서운 겨울이 지나 1월이 되면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가장 먼저 꽃 피우는 나무라고 합니다. 어떤 자매가 얘기 해 준 바로는 예슈아를 믿었던 반 고흐가 이 살구꽃의 비밀을 알고 그림의 소재로 이 살구꽃을 그렸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사실 한가지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바로 이 아몬드 나무 가지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죽어 생명이 없는 나무에 싹이 났습니다. 이 것은 아론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 일 뿐 아니라 완전히 죄로 부터 죽어 마땅한, 말라 비틀어진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이 불어 넣어주신 생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야곱이 라반의 양을 칠 때 자기의 몫을 늘리기 위해 아롱진 양들을 낳게 하려고 시내에 꽂아 놓은 나무 중에 하나가 또 아몬드 나무 입니다.
다시 출애굽기 메노라로 돌아가서, 이렇게 만들어진 메노라의 역할은 성막 안을 환하게 비춥니다. 특히 마주보게 놓여진 떡상을 비추는데, 그 떡상에 놓인 빵의 이름은 진열빵입니다. 물론 우리가 읽는 성경에는 진설병이라고 나옵니다. 이를 영어로 보면 Showbread 입니다. Show 즉 보이는, 보여주는 빵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전 묵상 가운데 성막을 하나님의 얼굴과 비교했을 때 메노라와 마주보는 떡상은 하나님의 두 눈과 비교했던 적이 있습니다.
메노라의 형태 또한 나무가지와 아주 흡사한데 그래서 인지 생명나무라고 많이 말합니다. 실제로 성소를 비추고 그 앞에 놓여진 빵, 이스라엘 지파를 상징하는 두 줄의 빵을 비추는 메노라는 실제로 에덴 동산에 심겨져 있던 생명나무, 우리의 유일한 생명나무 되시는 예슈아 입니다.
이 메노라는 항상 꺼지지 않습니다. 레 24:2에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두라고 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시 121:4). 여호와의 일곱 영이 항상 이스라엘을 24시간 돌보시고 지키십니다. 그리고 메노라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늘 기름을 채우는 일은 바로 제사장의 역할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제사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이 부분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다니는 교회에는 메노라가 있어서 매일 목사님 혹은 전도사님 혹은 어떤 모습이든 사역자들이 메노라에 기름을 채우거나 불을 붙이지 않지만,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특별히 일반인과 구분되어 풀타임 사역을 하는 자라면 사역의 기본은 내 양, 내 교회, 내 명성을 떨치는 게 중요한게 아니라, 하나님과 영혼들 사이에 항상 그 빛이 꺼지지 않게 유지하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이는 여담이지만, 새벽에 겨우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로, 눈도 다 제대로 못 뜨고 식탁(방이 좁아서 책상을 못 놓고 결국 식탁 한 켠이 제 공부방이 되었습니다, 하하)에 앉아 성경을 열고 눈은 읽고 있어도 뇌는 여전히 깨지 못하는 찰나를 지나 어느새 이렇게 눈에 불을 켜고 타이핑을 하고 있는 제 모습이 신기합니다.
제가 ‘하나님, 오늘은 어떤 걸 묵상하길 원하세요? 뭘 가르쳐 주실꺼에요?’라고 물었을 때 스스로에게도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야, 내가 지금 이렇게 묵상하려는 이유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을 올리기 위한 이유라면 접자. 차라리 잠을 더 자라. 본질이 흐려진다면, 동기와 태도에 문제가 있다면 접자.’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서 봤던 메노라를 보여주셨고, 오늘은 메노라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처음 말씀드린 가장 높은 진리를 드러내는 압도적인 삶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제 영이 기뻐 뛰고 오른쪽에 앉으셔서 늘 상냥하게 가르쳐 주시는 예슈아를 오늘도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조금이라도 글로 표현하여 전달할 수 있다는 기쁨은 정말 감겼던 눈이 똥그랗게 떠지는, 정말 흥분된 일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메노라, 영원한 생명 나무 되신 예슈아를 몸 된 성전에 늘 밝혀 두십시오. 그 빛을 통해 가장 높은 진리를 드러내는 압도적인 삶을 살아낼 것 입니다. 축복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매일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오늘은 특별히 갑절의 축복이 임하기를 더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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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8일 / 03- 16-2024(토)
출애굽기 28:1-43
거룩한 옷(2절)
찬송 / 92장(어둠의 권세)




제단 뿔

레위기 4:25

제사장은 그 속죄 희생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번제단 밑에 쏟고.

레위기 4:30
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단 밑에 쏟고.

레위기 4:34
제사장은 그 속죄제 희생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전부를 단 밑에 쏟고.

열왕기상 1:50-51
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 잡으니.
혹이 솔로몬에게 고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솔로몬왕을 두려워하여 지금 제단 뿔을 잡고 말하기를 솔로몬왕이 오늘날 칼로 자기 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기를 원한다 하나이다.

시편 118:27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우리에게 비취셨으니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찌어다.



What Does Brass Represent in the Bible?


Introduction

Brass is mentioned numerous times throughout the Bible, both in the Old and New Testaments.
But what exactly does this metal represent symbolically and spiritually?
In this comprehensive blog post, we will explore the significance and meaning of brass in the Scriptures.

Key Takeaways:

  • Brass is associated with strength, durability, and judgment in the Bible
    성경에서 황동은 힘, 내구성, 심판(판단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 It was commonly used for altars, lavers, pillars, and musical instruments in the Tabernacle and Temple
  • Brass often represented the judgment of God against sin
  • The brazen serpent foreshadowed Christ’s crucifixion
  • Brass also symbolized the feet of Jesus and his triumph over evil
What does brass represent in the bible

Table of Contents

Properties of Brass in the Ancient World

In ancient times, brass was an alloy of copper and zinc that was known for its strength and brightness. The Hebrew word translated as “brass” or “bronze” is nechosheth, which comes from a root word meaning “to glisten” or “shining.” This reflects how brass would gleam in the sun’s rays.

Brass was harder and more durable than pure copper. It maintained a sharp edge and was resistant to corrosion. For these reasons, brass was used to make weapons, armor, coins, mirrors, hinges, and works of art in biblical times.

The Thera Sea in Solomon’s Temple measured 10 cubits across and 30 cubits around, with a depth of 5 cubits. It rested on 12 oxen made of brass (1 Kings 7:23-26 NKJV). This huge laver could hold thousands of gallons of water for the priests to wash themselves. The brass gave it strength to remain intact.

The Bible first mentions brass when Cain’s descendant Tubal-Cain became “an instructor of every craftsman in brass and iron” (Genesis 4:22 NKJV). The Canaanites and Philistines were also skilled metal workers in brass and iron when the Israelites entered the Promised Land (Joshua 22:8, 1 Samuel 13:19-20 NKJV).

These pagan groups probably produced brass idols and false gods. But God intended for the Israelites to use brass to construct holy things for His Tabernacle and Temple.

Brass Representing Strength and Judgment

The symbolism of brass in Scripture seems connected to its characteristics of hardness, firmness, and brightness. Brass often represents strength, durability, and the judgment of God against sin.

When King Nebuchadnezzar saw a mysterious figure in the fiery furnace, its feet were like “burnished bronze” (Daniel 10:6 NKJV). Here, brass conveys supernatural strength and a divine nature.

Similarly, when the Apostle John saw the risen Christ in Revelation, his feet “were like fine brass, as if refined in a furnace” (Revelation 1:15 NKJV). The brightness and burnished nature of Christ’s feet depict his holy judgment against the wicked.

His feet of brass will trample all evil underfoot. As a strong metal, brass was appropriately used in scales, chains, and shackles to convey military conquest, imprisonment, and judgment (2 Kings 25:7, Psalm 149:8 NKJV).

The Bible says God judges sin with “justice like the great deep” and righteousness like “the strong mountains” (Psalm 36:6 NKJV). So it is fitting that when God commanded Moses to build the Tabernacle, he was to construct the altar of burnt offering from acacia wood overlaid with brass (Exodus 27:1-2 NKJV).

The acacia wood speaks of Jesus’ humanity, while the brass conveys the strength and fiery judgment of God against sin at the cross.

Brass Objects in the Tabernacle and Temple

In the construction of the Tabernacle and later the Temple, brass was heavily utilized for altars, lavers, pillars, and musical instruments. God provided Bezalel and Oholiab with the skills to craft beautiful objects from brass and other metals (Exodus 31:2-6 NKJV). Let’s survey some of the key furnishings made of brass.

The Brazen Altar – This outer altar of burnt offering was 7.5 feet square and 4.5 feet high, overlaid with brass. It was the first object encountered when entering the Tabernacle, pointing to Christ’s sacrifice (Exodus 38:1-2 NKJV).

The Brazen Laver – The priests washed their hands and feet at this brass basin before proceeding further, picturing purification from sin through Christ’s blood (Exodus 30:17-21 NKJV).

The Pillars of Brass – Two towering 27-foot brass pillars named Jachin and Boaz stood on the porch of Solomon’s Temple (1 Kings 7:15-22 NKJV). These majestic columns represented the strength of God.

Brass Musical Instruments – Many instruments like cymbals, harps, and trumpets were made of gleaming polished brass (1 Chronicles 15:19, Daniel 3:7 NKJV). They were used to praise God.

The Brazen Sea – This colossal brass basin held water for priestly cleansing in the Temple (1 Kings 7:23-26 NKJV). It foreshadowed the living water of Christ.

The Brass Serpent – When venomous serpents bit the Israelites, God told Moses to make a brass snake and lift it up on a pole. All who gazed upon it lived (Numbers 21:4-9 NKJV).

Brass objects in God’s Tabernacle and Temple symbolized His glory, strength, purity, and salvation. They ultimately pointed to Jesus Christ.

The Brazen Serpent as a Foreshadow of Christ

One of the most significant brass objects was the brazen serpent that God instructed Moses to lift up on a pole to deliver the people from snakebites (Numbers 21:4-9 NKJV). Anyone who looked to the brass serpent lived, even though serpents represent sin and judgment. Jesus told Nicodemus:

“And as Moses lifted up the serpent in the wilderness, even so must the Son of Man be lifted up,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4-15 NKJV)

Here, Jesus indicated the brass serpent pointed to Himself being lifted up on the cross for our salvation. Just as those who looked to the brass snake were healed, so too, those who look to Christ on the cross are saved from the “venom” of sin and its judgment.

The serpent represented the sin Christ took upon Himself, while the brass depicted the judgment He bore in our place. What an amazing foreshadow!

The Bible says “Christ has redeemed us from the curse of the law, having become a curse for us (for it is written, ‘Cursed is everyone who hangs on a tree’)” (Galatians 3:13 NKJV).

The brass serpent hanging on a wooden pole was a vivid object lesson of Jesus taking our curse on the “tree” of Calvary to redeem us. The serpent and brass together beautifully illustrate God’s plan of salvation.

Jesus’ Feet of Burnished Brass

We previously saw how the risen Christ’s blazing feet of brass in Revelation point to His divine judgment (Revelation 1:15 NKJV). But this brass imagery also occurs in another prophetic vision.

The prophet Daniel saw a glorious man with “his legs like the gleam of burnished bronze” (Daniel 10:6 NKJV). Here, the brilliant bronze likely depicts Jesus’ triumph over all evil powers through His death and resurrection.

Daniel’s vision occurred while the Jews were in Babylonian captivity due to the sins of their nation. But God showed Daniel the future victory of the Messiah, with feet and legs of judgment to tread down all His enemies.

The Apostle Paul possibly had this image in mind when he wrote of Christ’s triumph over demonic rulers and authorities at the cross, “having disarmed principalities and powers, He made a public spectacle of them, triumphing over them” (Colossians 2:15 NKJV).

So the gleaming bronze legs and feet seen by Daniel and John point to Christ victoriously crushing satanic foes underfoot by His sacrificial death and glorious resurrection. What amazing brass symbolism showing Jesus’ definitive defeat of evil!

Brass Pictures Spiritual Lessons for Believers

For the early Christians under Roman rule, the imagery of brass in the Bible provided encouragement and instruction.

Since the emperors ruled with an iron fist, casting Christians to lions in the brass-barred Colosseum, the believers found hope in Revelation’s vision of Jesus’ brass feet judging this cruel empire while standing on the golden sands of heaven (Revelation 1:15). His flaming feet assured them of Rome’s eventual collapse.

Paul told the Corinthian church that he and the apostles endured many dangers so that “the life of Jesus also may be manifested in our body” (2 Corinthians 4:8-11 NKJV).

Their physical afflictions refined and “polished” their character like burnished brass to reveal the resurrection life of Christ. Suffering allowed God’s strength and glory to shine through their weakness.

For modern believers, the durability of brass in the Tabernacle’s laver and altar can picture how standing firm on Christ enables us to persevere through trials.

Like Job who endured loss and pain, we “shall come forth as gold” and shine brighter for Jesus (Job 23:10 NKJV). The spiritual lessons mediated through brass point us to the risen Savior.

Conclusion

In summary, brass in Scripture clearly signifies Jesus’ strength to redeem us, judge evil, and defeat satanic powers through His death and resurrection. He is the fulfillment of the brass furnishings, altar, serpent, and symbolic feet.

May this metal remind us of the durability, purity, and triumph of our Lord. Let’s trust in His proven strength to uphold us by faith in all troubles and persecution until He returns. Our Savior with “feet like fine brass” can trample every foe. We will walk in victory with our God.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7일 / 03- 15-2024(금)
출애굽기 27:1-21
단을 만들라(1절)
찬송 / 361장(주의 주실 화평)

단(4196)

מִזְבֵּחַ 스트롱번호4196

1.

제단

2.

출30:27

3.

28

발음 [ mizbêach ]
어원
2076에서 유래
구약 성경
400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제단, 출30:27,28, 39:39, 레1:9,13,15,왕상7:48, 대하29:22.

번제(

עֹלָה 스트롱번호5930

1.

제단 위에 드려진 것

2.

상승

발음 [ ʽôlâh ]
구약 성경
9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여성 제단 위에 드려진 것, 번제, 창22:3,6,레1:4
  • 2.
    명사, 여성 상승, 계단, 겔40:26




성막의 뜰에 들어서서 성막을 만나기 전에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놋으로 만든 번제단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은 성막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가장 큰 성구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번제단으로 하나님이 지시하신 희생제물을 가지고 나아갔고 매일 아침마다 바쳐진 희생제물은 이 번제단에서 태워져 그 연기는 하늘을 향하여 올랐고 하나님은 그 희생제물의 연기를 흠향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이 성막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 번제단이었습니다.

그러면 번제단의 재료는 무엇으로 되어졌는가를 생각해보겠습니다(1절).

“너는 조각목으로 길이가 다섯 규빗 너비가 다섯 규빗의 제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높이는 삼 규빗으로 하고”

약 2미터 50센티미터의 정사각형 모양에다 높이는 1미터 50미터의 큰 박스와 같은 모양을 하도록 만들되 그 재료는 아카시아나무인 조각목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겉은 놋으로 싸도록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놋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금은 영광은은 속전구속을 그렇다면 놋은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심판주로 오시는 재림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계 1:15절입니다.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재림주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발을 보니 단련한 빛난 주석 즉 놋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원망과 불평하는 죄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셔서 장막 안에 이스라엘백성들을 물어 독이 퍼진 백성들로 죽게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모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백성들의 완악함을 회개하였고 이 불뱀으로부터 구원하여 달라고 울부짖어 기도하게 될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뱀의 모양처럼 구리뱀을 만들어서 높은 장대에 매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불뱀에 물린 사람들은 누구든지 나와서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보는 순간 낫게 하셨습니다.
놋뱀은 이스라엘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께 범죄한 이스라엘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백성들은 놋뱀을 바라보면 누구든지 낫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자신들이 거하는 천막에서 억지로라도 나와서 놋뱀을 바라본 자는 정말 말씀대로 죽어가던 데서 나음을 얻고 온전해 지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구리 뱀은 무엇의 그림자입니까?
사단에 물려 영원히 죄 가운데서 사망을 당하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그 구리 뱀은 십자가에 사단의 저주를 자신의 몸에 짊어지시고 자신의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구리 뱀은 누구 대신 심판을 당하신 것입니까?
죄인인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백성들을 대신 하여 심판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놋은 바로 심판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백성들은 심판에서 생명을 얻는 은혜를 받았듯이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위해 저주와 심판을 동시에 받으심으로 이를 믿는 우리가 심판에서 생명으로 바뀌어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놋의 시작은 창세기 4:22절에서 나타납니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는 놋의 출발이 바로 가인의 후손을 통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사사기 16:21절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무엇입니까? 삼손이 무엇에 묶였습니까?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는 놋줄에 묶였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범죄하여 하나님께 득죄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을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 넘기시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하25:7절입니다. “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

삼상 17:5절에 “골리앗은 머리에 놋투구를 썼고 놋갑옷을 입었고 다리에는 놋각반을 쳤고 어깨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다”
블레셋 장수 골리앗은 무엇으로 몸을 감쌌다는 것입니까? 저주와 심판으로 반면에 사울임금은 삼상17:38절에 다윗에게 무엇을 씌워줍니까?
놋 투구
그랬을 때 다윗은 놋 투구를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 싸우려고 물매만 준비하고 나갔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심판과 저주의 상징인 놋으로 둘러싼 골리앗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을 의미합니다.
여기다 무엇을 입혔습니까?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는 놋으로 입혔습니다.
놋은 붉습니다.
저주와 심판을 당하시고 한없이 흘리신 보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번제단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
말할 것도 없다 예수께서 택하신  인류의 죄를 지시고 죽으신 갈보리 언덕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제일 먼저 발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저주와 심판을 대신 당하셨다.

하나님은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무리 하나님의 독생자라 할지라도 백성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백성의 죄를 짊어지셨다면 심판을 받으셔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에서 무엇을 봅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서 그룹들인 천사들이 모셔 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가 외친 것이 무엇입니까?

이사야 6:5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 왕을 뵈었음이로다.”

왜요? 하나님 계신 것은 너무나 거룩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천사들이 서로 노래하기를 이사야 6:3에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그러니 어떤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 대신 저주와 심판을 받게 하시고 우리로 의롭게 하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담대함으로 나갈 수 있게 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깨끗게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조순하고 얌전한 생활입니까?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히브리서 9:14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하나님은 여기서 만나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9:42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예수 십자가 밑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 주시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6일 / 03- 14-2024(목)
출애굽기 26:1-37
성막을 만들라(1절)
찬송 / 65장(생명의 빛 주 예수여)

26장    
      1-6. 성막을 위한 앙장 열폭
    7-13. 성막을 덮는 막(염소 털)
       14. 성막을 덮는 막(수양 가죽, 해달 가죽)
 15-25. 조각목 널판, 은받침
  26-30. 조각목 띠
  31-33. 구별하기 위한 장
  34-35. 지성소의 기구의 위치
  36-37. 문장과 기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막을 만들라(출애굽기 26:1)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 놓아 만들찌니.
"Make the tabernacle with ten curtains of finely twisted linen and blue, purple and scarlet yarn, with cherubim worked into them by a skilled craftsman.

성막(4908) 미쉬칸(mishkan) מִשְׁכָּן    

1. 거주  2. 욥 18:21. 3. 굴
발음 [ mishkan ]

어원 / 793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39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거주, 주택, 거처, 거주지.
 a. 명사, 남성 [사람] 욥18:21, 시87:2.
 b. 명사, 남성 [동물] 굴, 동굴, 욥39:6.
 c. 명사, 남성 [하나님] 성전, 시46:5(4), 84:2(1),132:5
2. 명사, 남성 천막, 장막, 성막, 성소, 아1:8.
 a. 명사, 남성 이스라엘의 성막, 출25:9, 26:1이하, 40:9이하.
 b. 명사, 남성 증거막, 출38:21, 민1:50,53, 10:11.
 c. 명사, 남성 성막의 휘장, 출39:32, 40:2,6,29.

출애굽기 25장은 성소를 만들되 그 안에서 사용하는 세 가지 기구 즉 궤(언약궤)와 떡상과 등대(메노라)에 대하여 계시하셨습니다.
성소를 만들라고 하신 것은 이제까지는 족장 중심의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났으나 성소를 세운 후부터는 민족 공동체가 모두 하나님을 만나야 하므로 하나님 중심의 거룩한 백성과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위한 하나님의 임재를 항상 볼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6장에서는 성막을 만들라고 합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 중에 함께 계시며 그들을 만나시고, 인도하시며, 돌보시고, 지키시는 분임을 증거해 주는 증거 장막이라고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죄인들을 위해 속죄와 정결함과 거룩함의 은혜를 베푸시는 은총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막은 새 언약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과 영원한 영광에 관한 청사진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성막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해야 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요 5:39).
따라서 성막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살펴야 합니다.
모든 내용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또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고증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성막이 말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더 확실하게 찾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어느 누구도 그 속에 담긴 영적 의미를 완벽하게 다 찾아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상징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해석이 100% 성경적이라고 감히 주장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현재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무려 3천 년 전의 구조물을 오로지 성경 기록과 문헌들만으로 추적해 가는 작업이기 때문에 정확도에서 있어서 당연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의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한계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해한 것은 하나님이 계시해 놓으신 전체 내용의 10분의 1이라도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이 정도의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성막을 통해 얻는 은혜는 너무도 깊고 크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성막의 상징성에 대해 큰 틀에서 종합적인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성막의 공간들이나 재료들, 그리고 색상, 모양, 크기, 수량 등이 모두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 중요한 영적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작 과정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대로, 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했습니다.

성막은 만유 위에 계시는 창조자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셔서 어떻게 세상에 내려오셨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첫째로 정리한 소주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사시며 사역하시다가 최종적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 영광스런 보좌에 다시 오르셨습니다. 그 길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대표자인 대제사장이 되어 앞서 가신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앞서 가신 길’로 정리했습니다. 그다음은 그 예수께서 가신 길을 따라 우리가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나아갈 새롭고 산 길, 영생의 길’이라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성막의 덮개에 숨겨진 네 가지 비밀들(The Four Mysteries hidden in the Coverings of The Tabernacle)


성막의 덮개에 숨겨진 네 가지 비밀들과 의미 #. 1
- 첫번째 덮개로 만든 가늘게 꼰 베실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1)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 놓아 만들지니, 매 폭의 장은 이십팔 규빗, 광은 사 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하고, 그 앙장 다섯 폭을 서로 연하며 다른 다섯 폭도 서로 연하고, 그 앙장의 연락할 말폭 가에 청색 고를 만들며 다른 연락할 말폭 가에도 그와 같이 하고, 앙장 말폭 가에 고 오십을 달며 다른 앙장 말폭 가에도 고 오십을 달고 그 고들을 서로 대하게 하고, 금 갈고리 오십을 만들고 그 갈고리로 앙장을 연합하여 한 성막을 이룰지며,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앙장을 (2)염소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지며, 각 폭의 장은 삼십 규빗, 광은 사 규빗으로 열한 폭의 장단을 같게 하고, 그 앙장 다섯 폭을 서로 연하며 또 여섯 폭을 서로 연하고 그 여섯째 폭 절반은 성막 전면에 접어 드리우고, 앙장을 연락할 말폭 가에 고 오십을 달며 다른 연락할 말폭 가에도 고 오십을 달고, 놋 갈고리 오십을 만들고 그 갈고리로 그 고를 꿰어 연합하여 한막이 되게 하고, 그 막 곧 앙장의 나머지 그 반폭은 성막 뒤에 드리우고, 막 곧 앙장의 길이의 남은 것은 이편에 한 규빗, 저편에 한 규빗씩 성막 좌우 양편에 덮어 드리우고, (3)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4)해달의 가죽으로 그 웃덮개를 만들지니라.” (출 26:1-14)

성막의 덮개들(The Coverings of the Tabernacle)

성막의 덮개를 살펴봅시다.
성막의 덮개는 “네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그에게 세부적인 사항을 지시하셨습니다.

첫 번째 덮개는 성막의 보드판과 안쪽에 있는 기구를 덮고 있어서 “성막 안쪽에서만” 첫 번째 덮개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덮개는 땅 바닥까지 성막의 판, 곧 성소와 지성소를 덮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덮개는 청색, 자색, 그리고 홍색실과 가늘게 짠 베실로 짜여있고, 아름다운 천사들의 형상이 그 덮개에 수놓아져 있습니다.

 

첫 번째 덮개는 서로에게 붙어있는 두 개의 중요한 커튼 세트(sets)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은 서로에게 다섯 개의 더 작은 커튼형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중요한 커튼을 각각 연결하기 위해, 청색실로 된 50개의 고리가 커튼의 끝부분에 각각 연결되는데 사용됩니다.
금 걸쇠(잠금쇠)는 두 개의 커튼 세트를 하나의 큰 덮개로 만드는데 청색실의 고리에 사용됩니다.

성막의 첫 번째 덮개는 두 개의 더 넓은 커튼으로 연결된 열 개의 커튼으로 만들어집니다.
그 길이는 28큐빗(1큐빗-45cm)이고, 그러니까 오늘날 환산법에 의하면 길이가 12.6m이고, 각 커튼의 너비는 4큐빗, 즉 1.8m입니다.

다섯 개의 더 작은 커튼은 우선 두 개의 커튼 세트를 만드는데 연결이 되고, 이 세트는 각각 50개의 고리로 된 청색실과 50개의 금 걸쇠로 붙입니다. 이것은 성막의 첫 번째 덮개가 어떻게 완성되는지 우리에게 세세히 보여줍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성소와 지성소를 덮는 덮개가 세 개 더 있습니다.
즉, “염소 털로 된 덮개”와 “숫양에 붉은색으로 물든 가죽 덮개”와 “해달로 된 덮개”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성막의 첫 번째 덮개는 “청색, 자주색, 홍색실과 가늘게 짠 베실”로 사람 손으로 만든 인공적 천사들의 모양으로 된 커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성막의 첫 번째 덮개에 사용된 “청색실”은 예수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기 위해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받았던 세례를 의미하고 뜻합니다.

곧 예수님은 세례를 통해 세상의 모든 죄의 짐을 지시고,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의의 세계를 당신의 십자가로 활짝 연 것입니다(마 3:15). 세상의 모든 죄를 예수님만이 당신의 세례를 통해 해결할 수 있기에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 세례가 이제 우리에게 영광스런 구원의 표시가 되었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벧전 3:21-22)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영생으로 부활하심으로 세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주님의 의와 사랑으로 하나 된 연합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 된 거룩한 연합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된 영광의 연합을 십자가의 세례를 통해 이룬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5-17)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짚고 가겠습니다.
가늘게 짠 베실 커튼에 수놓아진 천사가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첫째는 하늘나라의 아름다움입니다.
둘째는 하늘세계를 수호하는 보호의 상징입니다.
즉 “죄인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셋째는 하나님의 처소를 보호하는 거룩의 상징입니다.
넷째는 천국의 모형을 나타내며 그곳에 천사들로 충만하고, 그들로 아름답게 수놓아진 천국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또한 천국에서 하나님을 에워싸고 천국 보좌의 영광과 거룩을 그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천사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1-3)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막은 이 땅의 것이 아닌 하늘나라의 모형이라고 신약시대 예수의 사도들이 성경곳곳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덮개, 즉 성소와 지성소를 덮고 있는 수놓아진 천사들과 네 가지 색깔의 아름다움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예수님이 친히 우리의 죄를 지신 십자가의 영광과 은혜와 주님의 나라와 그 아름다움과 영광과 찬란한 거룩한 광채로 다가오는지요?

거룩과 의로움이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당신에게도 거룩과 의로움으로 성령 안에서 충만하길 원합니다.
또한 천국의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당신의 심령과 영혼에 충만하길 원합니다.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합하여 십자가에 내가 죽고(세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고 경험되는 복된 하루이길 원합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행 3:14-15)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성막의 덮개에 숨겨진 네 가지 비밀들과 의미 #. 2
- 염소털로 만든 두번째 덮개

성막의 두 번째 덮개는 염소털로 만듭니다(출26:7). 그 길이는 첫 번째 덮개보다 90cm나 차이가 나고 더 깁니다. 두 번째 덮개는 길이가 13.5m, 너비가 1.8m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덮개는 11개의 커튼으로 되어 있는데, 두 개의 커튼 세트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중 하나의 세트는 다섯 개로 또 다른 하나의 세트는 여섯 개의 커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두 세트는 놋걸쇠(잠금쇠)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출 26:7)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앙장을 염소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지며

염소털로 만들어진 성막의 두 번째 덮개는 예수님이 당신의 십자가로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의로 우리를 온전하고 거룩하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로 오셔서 30세가 되었을 때, 주님은 스스로 자원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세상의 죄를 주님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를 자기 십자가에 가져가서, 우리의 손에 못 박혀 처형과 죽음을 당하시고, 우리를 위한 단 번의 영원한 죄를 자기 피로 용서하시고, 자기백성에게 영원한 주님과 구원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막 위에 덮여 있는 염소털의 흰 덮개, 곧 두 번째 덮개는 속죄염소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세례와 피로써 우리를 죄 없는 깨끗한 자로 만드심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 제물을 위하여 수염소 둘과 번제물을 위하여 수양 하나를 취할지니라. (레 16:5)

또 그 두 염소를 취하여 회막문 여호와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레 16:7-10)

 

 

말씀을 정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위한 하나님께 번제물이요 우리에게는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는 영원한 영광이 되셨고, 우리에게는 영원한 평강과 화평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길과 생명과 진리가 되셔서, 하나님께 영광과 영생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당신과 저는 주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의 길이 되심을 믿고 신뢰하며 소망하는지요? 주님 자신을 우리 자신보다 영원토록 사랑하며 살고픈 마음의 소원이 일어나는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를 영원한 구원의 반석과 영생의 소망과 영광의 주님으로 온 맘과 몸을 다해 섬기며 진리의 성령 안에서 이 땅을 사시길 바랍니다. 주님 안에 축복하며 사랑합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성막의 덮개에 숨겨진 네 가지 비밀들과 의미 #.3
- 붉은 색으로 물든 숫양가죽의 세번째 덮개


성막의 세 번째 덮개를 위해 사용된 재료는 붉은 색으로 물들인 숫양가죽입니다.
이것은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지시고 세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의 백성의 죄를 위한 희생적 제물이 된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세상의 모든 죄를 위한 죽음의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구속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안에서 구원과 새창조질서의 회복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밖에 없는 독자였습니다.
이 아들의 이름이 이삭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난 아들입니다.
즉 땅이 아닌 하늘나라에 속한 아들이란 것입니다.
그러니까 땅에서 만들어 낼 수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하늘세계에서만 창조할 수 있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별안간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받치라(잡으라)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에서 하나님께서 이런 엄청난 살인행각을 벌이려 할까요?
하나님이 할 일이 없으셔서, 너무 심심하셔서 이런 무모한 행동을 아브라함에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장차 온 인류의 메시야로 오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나타내고자 먼저 우리를 대표해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선물로 허락하신 이삭을 통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신 생명의 주님을 보여주고자 아브라함을 먼저 찾아가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약속의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모리산까지 독자 이삭을 데려가 번제물로 하나님께 받치려합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향해 칼을 빼어 내리치려는 순간 아브라함의 마음에 교차된 것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교차된 것이 또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그 마음을...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향한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압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명하십니다. 하나 뿐인 아들 이삭을 향해 빼든 칼을 다시 칼집에 꽂아 넣으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됐다!”
“이제 네 독자 이삭을 통해 네게 모든 것을 다 보여주었다!”
“이제 됐다!”
그런 후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주위를 살펴본즉 한 숫양이 덤불에 자신의 뿔이 걸려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 숫양을 독자 이삭을 대신할 희생제물로 예비해 두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 22:13)

“여호와이레!”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위해 친히 모든 것을 예비하시리니!

(The LORD will provide. 여호와이레)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 22:14)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을 위해 친히 한 독생자를 영원전에 예비해 두셨습니다.
그 독생자는 하나님께는 하나 밖에 없는 당신의 꿈이요 소망이요 영광이요 사랑이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독생자께서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찾아 오신 것입니다.​

이 분이 저와 당신이 믿고 신뢰하고 있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에서 살이 갈기갈기 찢기시고 창에 찔려 피를 쏟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예비하시고 준비하신 독생자 예수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여러분은 무엇을 소망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기대하며 이 땅에 살고 있습니까?
그 소망과 기대가 주 예수님이십니까?
아니면 다른 그 무엇입니까?

성막 세 번째 덮개 천이 숫양의 피로 물든 것을 기억하시며 오늘을 십자가에 나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만이 죄인에게 복음이십니다. 주 예수 안에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냐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고전 10:16)



성막의 덮개에 숨겨진 네 가지 비밀들과 의미 #. 4
- 해달의 가죽으로 만든 네번째 덮개


 

성막의 네 번째 덮개는 해달의 가죽으로 만들어집니다.
해달은 구약성경 히브리어로 “타카쉬”로 포유류의 번역된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몇 가지 다른 포유류로 번역되는데, 가령 “바다소(해우)”(NIV), “물개”(ASV), “고운염소”(NLT), 그리고 “알락돌고래”(NASB) 등입니다.

우리는 이 포유류가 무엇인지 정확히 입증할 수 없습니다.
성경 언어학자들은 “타카쉬” 란 단어의 기원이 아마도 외래어 어원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경우는, “타카쉬” 란 포유류는 그 가죽이 성막의 네 번째 덮개를 만드는데 사용됩니다.
그리고 이 덮개는 아름답거나 매혹적이지 못한 재질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해달 가죽의 네 번째 덮개는 예수께서 사람의 죄로 인한 추하고 더러운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심을 암시합니다.
게다가 주님은 자신의 얼굴이 흠모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해달의 가죽 덮개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오래 전 구약시대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인 사람의 비천한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성령으로 태어나신 것은 우리가 죽음의 날까지 죄로 인한 수치스러운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영생으로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추하고 흉측한 모습의 예수를 십자가에 죽임으로 거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담의 후손으로 보십니다.
죄로 인해 망가진 해달의 가죽 덮개처럼 흠모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보십니다.
이 모든 것은 첫 사람 아담의 죄로 인한 결과입니다.
이 죄의 흉측한 모습을 메시야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반면교사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모습을 자신의 모습이 아닌 타인의 모습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틈만 나면 타인을 해하고 자기 유익만을 구하는 죄를 짓기를 좋아합니다.
더럽고 추한 해달가죽의 모습처럼, 우리는 출생부터 죽음까지 자신의 배만 채우는데 관심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사람의 육체를 입으시고 십자가에 고통을 대신 당해야만 하는 실질적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죄의 본질과 본성의 심각성을 실제적으로 아는 자만 메시야를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한 자는 자신의 죄에 무지하고, 죄로 인한 영원한 사망과 영원한 심판을 믿지 않는 자들은 죄로부터 용서와 사면을 받을 자격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향하여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합니다(시 49: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 49:20)

창세기 1장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담의 죄 안에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스스로 영접지 못합니다.
오직 죄인을 향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믿지 않는 자들은 십자가를 통한 죄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멸망할 짐승처럼 파멸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한 가지 계획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모든 사람이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감찰해보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한 개인에게만 국한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둠과 죄의 미혹 아래 그리고 마귀의 권세아래 속박당하여 살기에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게다가 사람은 자신이 이 땅을 살면서 죄를 지은 적이 없고, 다른 사람보다 더 낫고 더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삽니다.
인간이 얼마나 우둔하고 어리석은 자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교만과 자기기만으로 가득 차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2)

우리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실제적으로 발견하는 차이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비교를 통해 얼마나 실제적으로 타인보다 더 낫고 더 못한 것입니까?
우리는 늘 자신의 이기적인 관심과 탐심을 먼저 앞세우며 이웃과 타인을 괴롭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과 죄로 타락한 마음입니까?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0)

우리가 일평생 살면서 하나님을 얼마나 수많은 죄로 대적하며 사는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사람을 당신의 형상과 영광스럽게 소중히 창조하셨음에도, 인간은 아담 안에 자신의 죄로 인해 그 아름다운 형상이 파괴되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이 불행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죄로 타락한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죄로 인한 제한적인 존재이기에 자신을 위한 미래도 완벽하게 준비할 수도 없습니다. 특별히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고 영이 죄로 인해 죽어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원한 파멸과 죽음을 피할 다른 길과 선택이 없음에도 생명의 주님께 나아올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성경은 “본능으로 행하는 이성 없는 짐승”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 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유1:10)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성막의 네 번째 덮개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로부터 구원하신 방식을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즉 메시야가 인간의 더러운 죄의 몸을 그대로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세상의 죄를 친히 자원하여 스스로 지시고, 죄의 형벌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자기 백성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십자가의 피의 능력으로 구원함과 영생으로 부활하심을 말씀해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구원의 은혜와 십자가의 용서는 메시야를 자신의 주님으로 믿는 자에게만 이루어지고 성취됩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에 선택한 자녀에게 이 구원의 소식과 죄 사함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중 누가 선택한 하나님의 자녀인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믿어지기 전까지 누구도 모릅니다.

우리는 성막을 덮는 네 가지 종류의 덮개의 사용된 재료를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희미하게 성령으로 발견하고  드러낸 것을 믿고 신뢰하는 하나님의 자녀요, 영광스런 성도요, 왕 같은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세례 받으심과 십자가를 지심과 단 번에 영원히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심을 믿는 하나님의 친백성입니다. 그러나 해달의 가죽 덮개와 같이 흠모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주님의 모습과 형상을 모르고 또한 믿지 않는 자들이 우리 주변에 대부분의 사람입니다. ​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혈과 육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 곧 그리스도의 복음인 십자가와 은혜의 방식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성령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예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모습을 입으시고 그리스도로 오시기 전,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의 모습”을 예언의 말씀으로 기록합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사 53:1)

하나님의 메시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시며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에 사람은 그 모습을 보고 메시야를 멸시하고 조롱하고 싫어했고, 그로부터 자신의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당하는 현장에서 욕을 하며 증오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 때문에 십자가에 고통과 채찍에 맞았음에도, 우리는 오히려 그를 향해 침 뱉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과 주님으로 여기지 않았던 우리였습니다. 모든 만물이 주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주님에 의해서 만물이 움직이는데도 우리는 진리와 은혜가 충만한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조롱과 조소와 침 뱉음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저주의 십자가로 향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잃어버린 택한 한 영혼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신의 피로 영원히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우리가 저주하고 멸시한 그 십자가로 스스로 자원하여 자신의 하늘 영광과 권세를 모두 포기하시고 그 죽음의 길로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 27:42)

세상에서는 가장 추하고 가장 아름답지 못하고 가장 흠모할 만한 것이 없어도, 예수는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거룩하고 가장 은혜로우시고 가장 기쁨이 되시고 가장 큰 소망이 되시고 가장 큰 사랑이시고 영생이신 그리스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저 자신과 당신에게 질문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많이 버림받고 가장 싫어버린 바 된 그 예수를 당신의 영원한 생명의 주님으로, 영광의 왕으로, 구원의 하나님으로서 모시고 있습니까?” 주 예수가 없는 인생의 삶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가장 추하고 가장 악하고 가장 더러운 것임을 당신은 알고 계십니까?

십자가에 나의 죄 때문에 죽임 당하심으로 나에게 천국을 영원한 상속의 기업으로 선물하신 예수를 당신의 영원한 영광과 기쁨과 은혜의 찬송과 감사의 제목이 되며, 또한 주님과 늘 사모하고 교제하고 사랑하고 동행하는 것이 당신에게 가장 복되고 영광스럽고 축복된 삶임을 알고 계십니까?

당신을 향한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과 사랑이 진리의 성령으로 믿어지고 경험되길 원합니다!

당신의 죄로 타락한 지혜와 이성과 지식과 경험으로 예수를 바라보지 않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버리기까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사랑하신 부활과 영광의 주님을 만나길 바랍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요 12:16-17)


묵상 가이드 /  ABC 묵상법

1. A : A Title(제목을 정하라)
2. B :Best Sentence(요절을 찾으라)
3. C :Challenge(도전을 주는 말씀)
4. 적용을 찾으라


첫 번째 앙장(26:1~6)
본문은 지성소와 성소를 덮을 수 있는 ‘성막 덮개’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성막 덮개는 두 개의 앙장과 그 앙장을 덮을 두 개의 덮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본문은 첫 번째 앙장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앙장’이란 성막의 천장에 치는 휘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앙장은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만들도록 했습니다. 앙장은 모두 열 폭으로 다섯 폭씩 서로 이어서 만들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앙장에는 ‘그룹’을 새기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그 그룹들을 만들 때 “공교히 수놓아 만들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교히 만들라는 말은 열심히 고안하고 연구하여 정성껏 수를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성을 담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의 한 부분에서조차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두 번째 앙장과 덮개(26:7~14)
두 번째 앙장은 첫 번째 앙장과는 달리 염소털로 만들도록 했습니다. 염소털은 방습과 보온 효과가 뛰어나 고대 근동에서 천막을 만들 때 많이 사용하던 재료입니다. 이것으로 첫 번째 앙장을 덮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염소털로 만든 앙장은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만든 앙장보다 한 폭이 더 많았습니다. 이것은 첫 번째 앙장을 완전히 덮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붉은 물을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덮개를 만들라고 합니다. 이것은 두 번째 앙장을 덮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달의 가죽으로 덮개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결국 성막 덮개는 그룹을 수놓아 만든 앙장, 염소털로 만든 앙장, 숫양의 가죽으로 만든 덮개, 해달의 가죽으로 만든 덮개 등 이렇게 네 겹으로 이루어져 성소와 지성소를 덮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소와 지성소를 외부와 완전히 차단했을 뿐만 아니라 강렬한 태양으로부터 성막 내부의 모든 성물들을 보호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공동체 속에서 내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나는 나의 삶을 가꾸어 가시는 하나님의 준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주님, 주님의 일에 드리는 마음과 정성이 직장 일에 쏟는 마음 같지 못했음을 고백하오니 용서하소서. 이제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겸손히 쓰임받기 원하오니 ‘공교하게’ 주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시고, 지극히 작은 일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도록 도와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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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5일 / 03- 13-2024(수)
출애굽기 25:1-40
식양을 따라(9절)

찬송 / 65장(생명의 빛 주 예수여)


성막의 모든 구조와 기물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다.
성막의 모든 구조물을 보면서 우리가 구속사 관점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성막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해야 한다.
출애굽기의 성막에 대한 부분은 가장 길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곳이다.

25:10-22 / 법궤 : 
재료 : 조각목(싯딤나무) - 예수님의 인성을 상징,
          정금 - 신성을 상징
크기 : 길이가 2규빗 반(약 1.25m) 너비와 높이는 각각 1규빗 반(약 75cm)
구조 : 속죄소(법궤의 뚜껑), 두그룹 천사, 증거판(공의), 만나(신령한 양식), 아론의 싹이난 지팡이(인도, 보호)
이제 성소를 지나서 지성소를 들어가게 되는데 휘장을 지나면 법궤를 보게 된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이 지성소에 속죄제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게 된다.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은 법궤 위 시은소(속죄소)에 피를 쏟게 된다.
법궤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각각 다른 의미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으므로 별도로 취급해야 한다.
간단히 그 세 부분을 언급하면 법궤 위에 속죄소가 있고
그 속죄소 위에는 두 그룹이 날개를 펴고 있다.
법궤는 네모지게 만든 상자와 같은 것으로 길이가 2규빗 반(약 1.25m) 너비와 높이는 각각 1규빗 반(약 75cm)이다.
이 궤 역시 각목으로 만들어서 안팎에 순금으로 입혔다.

위의 모서리는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 넷을 만들어 그 네 발에 달아서 양편에 두 고리를 두고 채를 만들어 끼었다.
그 궤 안에는 만나 항아리와 십계명의 두 돌비를 넣어 두었는데, 그 두 돌비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친히 기록하여 주신 것으로 ‘언약의 말씀’, ‘언약의 비석’이라고도 한다.
그 후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넣어 두었다.

이 법궤의 순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하는데 카일(Keil)은 법궤의 내외를 순금으로 씌운 것은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여호와의 신성(神性)을 뜻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법궤의 조각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순금은 그의 신성을 의미한다.
법궤 안에 있는 십계명 돌비는 하나님의 지존하신 공의를, 만나는 신령한 양식을, 아론의 지팡이는 주님의 인도와 보호를 의미한다. 즉 십계명은 공의의 성부 하나님을 만나는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성자 하나님을 아론의 지팡이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나타낸다.

속죄소(시은소)

법궤의 두 번째 부분인 속죄소는 <카포레트>인데 이는 동사 <카파르>에서 온 것으로 근본 뜻은 ‘덮는다’이다.
즉 우리의 죄를 덮어 주는 용서와 자비의 장소를 의미한다.
이 속죄소는 순금으로 만들며 길이가 2규빗 반(약 1.25m), 너비가 1규빗 반(약 75cm)으로 순금으로 된 덮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심판의 보좌로서 그 밑에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에 의해서 죄인들을 심판하시고 벌하시게 된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1년이 한번 희생 제사의 피를 가지고 이 하나님의 보좌 위에 뿌림으로서 이 심판의 은혜의 보좌로 바뀌게 된다.
즉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에 대한 대가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피로서 만족되어짐을 나타낸다.

두 그룹

속죄소의 두 끝에는 순금으로 만든 두 그룹을 세웠는데 한 그룹은 이 쪽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연하여 있으며 이 두 그룹은 두 날개를 펴서 속죄소를 덮게 하였고 얼굴은 속죄소를 내려다보게 되어 있다. 그룹의 형상은 사람의 얼굴, 사자, 송아지 그리고 독수리 형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참조, 겔 1:6; 계 4:7-8). 여기서의 그룹은 사람의 형상이며 그들은 천사의 한 부류로서(참조, 창 3:24), 하나님의 보내신 대사로서 하나님을 대리한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성도들이 천사를 보았을 때 하나님처럼 경배하고 우대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참조, 삼하 22:11; 시 18:10). 그러므로 그들이 속죄소 위에 있는 것은 그곳이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나타내며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은 그곳에 뿌려지는 속죄의 피를 경탄한 듯 보고 있음을 나타낸다.

25:23-30 / 떡상 : 길이가 2규빗(약 1m), 높이가 1규빗 반(약 75cm), 너비가 1규빗(50cm)

제사장이 성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편에 떡상이 있는데 이 떡상은 일명 진설병 상이라고도 한다. 이 상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졌는데 길이가 2규빗(약 1m), 높이가 1규빗 반(약 75cm), 너비가 1규빗(50cm)정도이며 안과 밖을 순금으로 쌌다. 그 위에 차려지는 떡은 고운 밀가루로 만든 것으로 매 안식일마다 새 것으로 갈아 놓았다. 이 떡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었는데 누룩과 꿀을 넣지 않고 소금과 기름을 넣어서 만들었다. 떡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따라서 12개를 놓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받은 양무리들의 영혼의 양식임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으로 말씀하셨다.

지금도 제사장 된 성도들의 영혼의 양육자로서 매 성일마다 예배를 통해서 새로운 양식을 공급해 주고 계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다 주님을 떠나가고 말았다. 이때 베드로에게 ‘너도 가려느냐?’고 주님이 물으시자 ‘영생의 말씀이 있으니 우리가 뉘께 가오리까?’라고 함으로써 주님 자신이 그 생명의 떡이심을 베드로는 고백했다. 이 떡은 누룩 없는 신령하고 순수한 생명의 참 떡이시며 진리의 떡이시다. 이 떡에 기름과 소금이 첨가되었는데 기름은 성령을 의미하며 소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상징한다(참조 히 13:8).

25:31-40 / 등대

재료 : 정금

등대는 정금으로 만들었는데 밑판에 줄기가 세워져 있고 그 줄기에는 여섯 개의 가지가 있었다. 각 가지 끝에는 잔과 꽃, 꽃받침이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꽃의 형상은 살구꽃이었다. 가운데 1개 줄기를 중심으로 양쪽에 3개의 가지가 있었다. 이 등대의 빛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꺼지지 않게 켜 놓아야 하는데 이는 어두울 동안은 계속 빛을 발해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등불 켜는 일을 맡은 것으로 추측되며, 사무엘 3장에서는 사무엘이 이일을 맡았던 것 같다(참조, 삼상 3:1-9). 등대의 꽃받침 위에 올려놓는 등잔도 역시 순금으로 만들었으며 일곱 개의 등불이 모두 동시에 켜지게 되면 매우 밝은 빛을 내게 된다.

이 등대는 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의미하는데 주님은 친히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으며(참조, 요 1:4-5) 등잔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감람유(올리브유)로 가득 채우게 되는데 스가랴 4장 2절에 의하면 순금 등대 좌우에 두 감람나무가 서서 그 등에 기름을 공급하여 주어서 불이 힘 있게 타게 했다. 이것은 주의 몸 된 교회가 성도들에게 은혜의 기름을 공급하여 주어서 성도들로 세상에 및을 발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참조, 마 5:14; 엡 5:8).

향단

재료 : 조각목, 싯딤나무
크기 : 길이와 너비 모두 1규빗(약 50cm)으로 네모가 반듯하며, 높이는 2규빗(약 1m)

향단은 조각목으로 만들되 길이와 너비 모두 1규빗(약 50cm)으로 네모가 반듯하며, 높이는 2규빗(약 1m)이었다.
이것도 역시 금으로 안팎을 쌌으며 그 향단 위와 전후좌우에 금테 무늬를 놓았고, 그 위에 네 뿔을 금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고리 네 개를 만들어 향단 양편에 붙여서 채를 꿰게 하였다. 또한 향단에는 관유와 향품을 드렸다.
그 향품을 제조하는 법은 출 30장 22절, 25절에 의하면 유질 몰약 50세겔, 그 반수의 향기로운 창포 250세겔, 계피 500세겔과 감람기름 한 힌(hin: 3.67ℓ)을 취하여 섞여서 만들었다. 아론의 자손은 그 향품을 아침마다 그 향단위에 사르되 등불을 점검할 때와 저녁에 등불을 켤 때 향품을 사르게 했다.

그러나 이 향단은 다른 향이나 다른 불 즉 번제단의 불 이외는 사용치 못했다. 이 향단은 기도의 제단으로 요한계시록 8장 3절 이하에 보면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께 항상 드려져야 하는 향불인 것이다. 진실과 성심으로 제단에서 드리는 기도는 향단에서 향을 분향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것은 향단의 불을 꺼뜨리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하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식양을 따라(출애굽기 25: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Make this tabernacle and all its furnishings exactly like the pattern I will show you.

식양(8403) 타브니트() תַּבְנִית 스트롱번호8403

1. 건물.   2. 견본. 3. 사물의 모양
발음 [ tabnîyth ]
어원  /  1129에서 유래
구약 성경
20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여성 건물, 건축양식, 시144:12
  • 2.
    명사, 여성 견본, 모범, 출25:9,40, 왕하16:10.
  • 3.

    명사, 여성 사물의 모양, 형상, 신4:16-18, 겔8:3, 8:10, 10:8.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 성막과 그에 관계된 모든 기구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지 결코 인간이 계획하거나 고안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히 8:2).
즉 성막의 신적 기원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히브리서 8:1-2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식양(타브니트)
- '견본' 또는 '모형' 으로 번역 될 수 있는 말로서 어떠한 실체의 그림자와 같은 청사진이나 모델 하우스 등을 가리킨다.
사실 구약 시대의 성막 제도는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인 것이다(히 8:5).
따라서 모형과 그림자인 구약 시대의 성막 제도는 참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이었다(요 2:21; 히 8:13 ; 계 21 :22).

히브리서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8:13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







성소(4720) 미크다쉬

מִקְדָּשׁ 스트롱번호4720

1.

거룩한 것

2.

성지

3.

이스라엘의 성막

발음 [ miqdâsh ]
어원
어미활용 מִקְדְּשׁוֹ ,מִקְדָּשׁוֹ 민18:29,6942에서 유래
구약 성경
73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남성 거룩한 것, 봉헌된 것, 성스러운 것, 성물, 민18:29
  • 2.
    명사, 남성 성지, 성소.
    • a.
      명사, 남성 이스라엘의 성막, 출25:8, 레12:4,21:12, 민10:21, 18:1.
    • b.
      명사, 남성 성전, 대상22:19, 대하29:21.
  • 3.
    명사, 남성 수용소, 보호소, 피난처, 도피처, 은신처, 사8:14, 겔11:16.


󰃨 내가... 거할 성소 - '거한다'는 뜻의 히브리어 '쇠칸'(*)은 '숙박'이라는 개념을 가지며 동시에 '휴식한다'는 뜻의 '쇠카브'(*)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성소에 머무르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하며 그들을 돌봐 주겠다는 의미이다. 그 속성상 무소 부재(無所 不在)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떠한 특정 장소에만 머물러 계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은 성경이 재차 강조하고 있는 바이다(왕상 8:27;대하2:6;사66:1;렘23:24;행7:48;17:24). 한편 성소란 말은 '성막'(26:36), '회막'(29:42), '증거의 장막'(17:7) 등으로도 표현되는데, 한 곳에 고정된 집이 아니라 이동할 수 있는 텐트였다. 따라서 이처럼 이동하는 성소에 하나님이 거하시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계시며, 인간을 앞서 인도하시겠다는 표현임을 분명알 수 있다(민9:17-23;신1:33). 그러나 솔로몬은 성전 건축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성전에만 계신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하나님은 제한하고, 성전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여 나중에는 성전 숭배 사상까지 생겨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집에 거하시지 않음을 선포했고(사 66:1, 2), 스데반도 이를 강조했으며(행 7:48-50), 예수께서도 예배의 참된 요소는 예배드리는 '장소'가 아닌 예배드리는 자의 '신령과 진정' 임을 분명히 가르치셨다(요 4:21-24). 이처럼 하나님은 특정 장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성전된 신자 안에 거하신다(고전 3:16;6:19;고후 6:16;엡 2:21).

󰃨 그들을 시켜 ... 짖되 - 예물을 바친 사람들이 또한 건축의 당사자가 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마음과 물질과 육체적 노력이 분리되지 않고 온전히 '당신을 위해' 하나가 되는 진정한 헌신을 원하신다.

성소

유일한 구원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막에 들어가면, 먼저 번제단을 만난다.
이곳에서 우리는 주님께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죄를 용서받게되며, 다음으로 우리는 물두멍에서 더러워진 우리의 몸과 마음 영혼을 씻고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성소에는 세 개의 성물이 놓여 있었다.
이것은 성도의 신앙생활과 예배생활이 어떠해야 함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것들이다.
성소에는 떡상과 등대와 분향단이 있다.

1. 떡상

떡(진설병)상은 이것은 법궤와 마찬가지로 금으로 도금되었으며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이상의 규격은 길이 91.2cm, 넓이 45.6cm, 높이 68.4cm였다.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떡을 하나님께 진설해 바치는 기구이다. 그런데 구약 시대 이스라엘은 오늘날의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를 예표하므로 진설병을 바치고 있는 상은 오늘날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떠받드는 중보자적 역할을 담당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롬 8:34)을 예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떡상의 사면 테두리는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둘렀다(출 25:25). RSV는 '턱'을 '틀'(frame)로, 공동 번역은 '가름장'으로 각기 번역하고 있는데 곧 떡상의 사면 테두리에 붙은 보강재(補强材)를 가리킨다. 이것은 상위의 떡이 지면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보조 장치로서 그 크기는'손바닥 넓이 곧 7.6cm 가량이었다.

“상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찌니라”(출 25:30).

• 진설병 : 직역하면 '얼굴의 떡', '면전에 놓인 떡'이란 뜻으로 곧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떡을 가리킨다. 제사장들은 매 안식일마다 떡상에 이러한 진설병을 두 줄로 6개씩 12개를 늘어놓아야 했는데(레 24:8), 이는 이스라엘 12지파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거두게 될 노동의 결과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은 이 떡이 당신 앞에 항상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잎에서 나오는 말씀(레마의 말씀)으로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떡이 이스라엘의 수고로 얻어진 노동의 결과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노력을 들여 말씀을 먹는 일을 해야함을 가리킨다(성경읽기, 듣기, 공부, 암송, 묵상, 나눔 등). 만나는 하늘로서 내려왔기에 그냥 새벽에 나가서 줍기만하면 되지만 떡은 차원이 달랐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2. 등대

“그가 또 정금으로 등대를 만들되 그것을 쳐서 만들었으니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이 그것과 한 덩이로 되었고”(출 37:17).

"등대"는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을 알게 하는 빛이 되어야 할 성도를 상징한다. 등대는 떡상 반대편에 놓여 있는 것인데, 밤낮 계속적으로 불을 켜 놓도록 되어 있었다(27:21; 레 24:3). 성도들도 세상에서 빛의 생활을 함에 있어서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마5:14-16 ; 엡 5:8-9). 성소 안은 낮에는 출입구를 통하여 빛이 들어와 밝았지만 밤에는 어두웠다. 따라서 제사장은 매일 밤에 불을켜고 아침에는 불을 껐다. 잔'(bowl)은 등잔(37절)과는 다른 것으로 일종의 악세서리인데 살구꽃 형상을 하고 있다(33절).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위하여는 꽃받침이 있게 하였으되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였고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였고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였으니”(출 37:21).

여섯 가지가 그 곁에서 나왔으니 - 기본 축을 이루는 중앙의 줄기에서부터 좌우로 각 3개씩 뻗은 6개의 가지를 가리킨다. 따라서 줄기까지 합하면 7개의 가지가 되는데, 여기서 '7'이란 수는 등대가 완전한 빛을 발하는 것을 뜻하는 상징수로 볼 수 있다.

“줄기와 연하여” - 예수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요 15:5,6)를 연상시켜 주는 대목이다. 즉 이것은 가지가 줄기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연합 관계를 보여 주는데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우리들도 생명의 근원과 모든 능력의 중심되시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말한다. 성도가 세상에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참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살구꽃 형상" - 살구꽃의 문자적인 기본의미는 ‘(잠자지 않고) 밤을 새우다’, ‘경성하다’라는 의미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 꽃은 부활과 희망, 각성과 보호를 상징하는 꽃으로서 널리 사랑받고 있었다. 우리의 신앙을 경계하고 그 영혼을 각성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둥대에서 발하는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된 사역을 상징한다. 따라서 살구꽃으로 등대를 장식한 점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참 희망이 될 뿐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자가 되심을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등대를....쳐서 만들었으니" - 속죄소를 만들듯이 금덩어리를 망치로 쳐서 늘여 등대의 기본 형태를 다듬어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7절). 그런데 왜 어렵게 망치로 쳐서 만들게 하였는가? 불속에 들어가 불순물이 걸러지고 망치로 두들겨 맞아 더욱 단단해지면서 등대의 모양으로 다듬어진다. 성도가 세상에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과정(연단과 시험)을 거쳐야 참된 빛을 발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3.
분향단

“너는 분향할 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 장이 일 규빗, 광이 일 규빗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고는 이 규빗으로 하며 그 뿔을 그것과 연하게 하고”(출 30:1-2).

• 분향단: 직역하면 '향(케토레트)을 태우는 곳(미크타르)인 단(미즈 베아호)'이다. 분향단은 향을 사르기 때문에 일명 '향단'으로 불리우기도 하고(10절:대상6:49), 금으로 만들어졌다고해서 '금단'으로 불리우기도 했다(39:38;민4:11). 크기는 가로, 세로 각 45.6cm에 높이 912cm정도였으며 위치는 성소의 중앙, 지성소 맞은 편에 놓여졌다.

번제단 뿔(27:2)이 실제적인 용도와 더불어(시118:27) 상징적으로 사용 (29:12;레8:15;9:9;16:18;왕상1:50;2:28;시18:112:9)된 것처럼, 분향단 뿔 역시 번제단과 동일한 상징적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설치된 것 같다.

"단...정금으로 싸고", 분향단은 땅바닥에 닿는 아래 바닥을 제외하고는 전부 금으로 싸야 했다. 이처럼 분향단뿐 아니라 성막의 주요 기구를 모두 정금으로 도금한 이유는 금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 때문인 것 같다(25:11,24,31,38; 26:29), 즉 금은 그 아름다움에 있어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며, 그 변하지 않는 속성에 있어 하나님의 언약의 불변성을 나타내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 분향단은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휘장(26: 33) 바로 앞쪽 성소 부분에 분향단에 두었다. 따라서 분향단은 성소의 여러 기구 중 속죄소에 가장 가까이 놓여지게 된다. 여기서 속죄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처소이고(25: 22), 분향단 위에서 타오르는 향은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와 기도를 상징한다(계5:8).그러므로 분향단이 속죄소에 가장 가까이 위치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가장 가까이에 계셔 항상 그 기도를 들어 주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도 기도로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음을 말해준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계 8: 3-4).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며”(출 30: 7).

한편 분향은 매 아침마다 해야만 했다. 이 시간은 등불을 끄는 시간과 일치한다. 따라서 해가 돋을때 제사장은 등불을 끄는 일(27:20,21)과 향을 피우는 일. 이 두 가지 일을 함으로써 하루를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 "향기로운 향을...사르되",
성막에서는 늘 희생 제사가 이어졌기 때문에 고기태우는 냄새와 피 냄새 등으로 가득찼을 것이다(레1-6장). 따라서 이런 냄새를 제거하거나 중화시키기 위해서도 향가로운 향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축된다. 특히 제단 주변에는 피를 뿌리기 때문에(29: 12,16,20) 더욱 이러한 향이 필요했을 것이다. 등불을 정리할 때 - 어기서 '정리하다'로 번역된 '야타브'는'좋게 만들다', '잘되게 하다', '단장하다'는 뜻이 있으며 '기쁘게 하다'는 의미도 갖는다. 성소의 등불은 아침에 끄도록 되어 있는데(27:21; 레24:3; 삼상3:3)등불을 끄는 행위를 이처럼 '단장하는' 행위로 표현한 것은 그것이 심지를 다듬고 기름을 보충하는 간검(看檢) 행위이기 때문이다(27:21).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 8).



하나님이 보인 식양대로(출애굽기 25:8-9, 골로새서 1:15-17)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창세전에 작정하신 것을 미리 알리시고(고전 2: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그가 보여주신 식양대로 지은 집에 거하시는 분이다(히 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신앙은 그를 믿음이요,  신앙생활은 그의 지시하신 대로 준행하는 생활이니(창 12:1-10)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질 때까지라(갈 4:9).

마치 건축이 당국이 허가한 설계도대로 치수, 모양, 자재, 색깔, 배선, 배관, 조경 등  수많은 검사를 통과하며 진행되고 준공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창조에 식양(pattern)이 있는바(창 1:3-31)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 그대로 되어지고 ~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심이요(창 1:27),
생령(아담)을 지으시되 오실 자의 표상(pattern)으로라(롬 5:14).
세상 모든 문화, 문명에도 창작이란 없고 있던 것의 재생뿐이다.

하나님의 명대로 행하여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에게(출 12:28)
광야에 이르러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셨으니(출 25:8-9)
호렙산에서 보여주신 식양대로라(출 26:30).
모세는 그 같이 역사를 필했고(출 36:8-40:33),
다윗은 성신이 그려주신 식양을 솔로몬에게 주었고(대상 28:11-19),
솔로몬은 7년에 걸쳐 그 설계, 식양대로 전을 필하였다(왕상 6:38).

이스라엘이 받은 계명은 아무 형상도 만들어 절하지 못하도록 금하였으나(출 20:4-5)
지성소와 성소에는 그룹(천사)의 형상을 새기게 하였다(출 6:29).

예슈아께서 성전을 헐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심은 성전 된 자기 육체의 죽음과 부활로(요 2:19-10)
여호와 이름이 아닌 예슈아 이름으로(요 5:43)
유일하게 허락한 천사의 형상을 헐고 창조자의 형상을 보여주려 하심이었으니(골 3:6)
그는 태초부터 하나님 안에 계신 말씀(요 1:1-3),
곧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골 3:15)
육신으로 오신 바 된(요 1:14)
하나님의 본체, 본체의 형상이심이다(빌 2:6, 히 1:5).

그가 죽으실 때
천사 문양이 있는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며(마 27:51)
다 이루었다 하셨으니(요 19:30)
① 아버지 계명대로 이루시고(요 10:18)
그 피로 모형이 아닌 참성소를 정결케 하심(히 9:23).
② 하늘성소를 더럽힌 마귀를 심판하심(겔 28:12-18, 요일 3:8).
③ 첫 아담의 죄 대신 마지막 아담이 죽으심이다(고전 15:22).

그는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부활승천하시고(고전 15:49)
영생을 믿는 자의 마음에(딤전1:4)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주셨으니(고후 1:22)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재연하게 하심이라.

예슈아 이름으로 침례 받은 자는(마 28:19)
선한 일에 본이 되려(롬 8:29)
예슈아 그리스도의 말씀에 절대복종하고,
무소유를 고집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도 고립도 고난도 죽음도 피하지 아니하니
‘하나님의 식양 =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패턴 = 죽음과 부활’
‘침례 = 죄와 함께 죽고 의로 부활함’이요(롬 6:3-7),
하늘에 가서 주를 모시고 살 그의 집이 되려 함이다(히 3:6).

오! 주여,
나, 과연 몇 % 그리스도인인지?
짝퉁 그리스도인이 아닌지?
분, 악의, 훼방, 부끄러운 말, 거짓말을 버리고
아들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하게 하옵소서.
죽어 하늘문이 열리는 진품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아멘.





출애굽기 성막 성경공부
성막의 구조와 성전 변천사

출애굽기 성막 성경공부는 우리에게 중요하다.
성막의 모든 구조와 기물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다.
성막의 모든 구조물을 보면서 우리가 구속사 관점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성막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해야 한다.

출애굽기의 성막에 대한 부분은 가장 길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곳이다.
출애굽기 25장에서 40장 끝까지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재료와 그 구조물, 기구 그리고 거기서 행해지는 의식에 대해서 놀랄 만큼 상세한 사항까지 세밀하게 묘사하셨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고 지상에 인간이 살 수 있는 여건을 만드시는 데에 성경의 2장 분량을 소비한 것에 비해 성막에 10장이 소요된 것은 이 말씀 속에 내포된 영적 교훈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친히 지시하신 성막의 구조와 모형을 한낱 지난날의 의식, 곧 사라진 지 오래 된, 이제는 무가치한 유대인의 관습과 풍속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은 슬픈 사실이다.
성막의 모든 구조와 모형 속에 숨어 있는 구속의, 복음의 원초적 의미를 연구하는 일은 모든 성도들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성막의 모든 구조와 기구들을 순서별로 연구하며 그 영적 의미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성막의 어의

성막에 대한 구체적인 것을 다루기 전에 먼저 성막을 뜻하는 어의를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에는 성막을 뜻하는 용어들이 적지 않게 쓰였는데 구약의 어법과 신약의 어법은 약간 차이점이 있기에 하나하나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오헬>

성막에 대해서 가장 일반적으로 쓰인 용어인데 이것은 ‘천막’을 뜻하는 말로서 140회 이상이나 사용되었다.
이 말이 출 26:9에서는 성막의 전면에 있는 휘장을 의미하였고
27:21에서는 회중에 모이는 성막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정관사와 함께 쓰여서 성막을 나타내는데 문자적인 의미는 ‘덮는 것'(Covering)을 뜻한다.

<미쉬칸>

이 말은 ‘거주지’나 ‘거처’를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 백성들에게 나타내시는 장소로서, 또는 그들과 함께 하는 장로로서 성막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의 어근은 ‘거하다'(to dwell)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
이 <미쉬칸>은 출 25:9을 비롯하여 약 100회 정도 사용되는데 장막을 표현하는 말로서는 <오헬>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이 두 단어의 의미상의 차이에 대해서는 출 26:7에서 볼 수 있는데 원문은 <레오헬 알 하미쉬칸>으로 흠정역(King James Version)에서는 ‘Covering upon the tabernacle’로 개역 표준역 (Revised Standard Version)은 ‘a tent over the tabernacle’로 개역 표준역(Revised Standard Version)은 ‘a tent over the tabernacle’로 번역했다.

한글 개역판에서는 ‘그 성막을 덮는 막’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이 두 단어의 의미상의 차이를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즉 미쉬칸은 하나님의 거처로서 성막 전체를 의미 할 때가 많고 오헬은 성막의 지붕 덮개를 나타내는 말로서 성막 자체를 의미하는데 쓰여졌다.

기타 용어들

<쏙>은 시 76:2에 <쇽>은 암 2:6에 각각 기록되어 있는데 덮여 있는 밀실을 뜻한다.
또한 <씰쿠트>와 <셐카>도 암 5:26에 기록되어 있는데 역시 덮여 있는 은밀한 처소로서의 장막을 의미한다.

신약의 용어들

신약에서 성막은 처소(dwelling place)란 의미의 <스케네>, <스케오스>, <스케노마>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들은 구약의 <미쉬칸>과 <오헬>을 번역한 것들이다. 즉 구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에서 사용한 것들이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이 두 단어에 대한 구분 없이 <스케네> 또는 <스케노마>를 사용했는데 이는 신약에서는 구약에서와 같이 성막의 구조와 형식에 중점을 두지 않고 그 의미 또는 실체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곧 성막 그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명시하고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성막의 건립상, 구조상으로 그 적용어를 사용했고 신약에서는 성막의 대표적 용어를 택하여 성막의 구조와 단어의 의미에 구애 됨이 없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2. 성막의 구조

성막은 그 구조가 사람의 고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 재료에서부터 건조 방법까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에 의해 되어졌기 때문에 성막 그 자체로 이미 중요하고 교훈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로 성막은 하나님께서 그의 처소를 두신 하늘의 모형을 보여 주고 있는 실례
둘째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보여 주고 있으며,
셋째로 신자들이 예수님과 교제하는 장소로 교회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셨다.
그러므로 성막의 모든 기구들과 구조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성막을 건조한 사람들

성막의 구조 자체를 다루기 전에 그 구조를 만든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막의 모든 구조와 재료에 대해서 뿐 아니라 만들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지정하셨기 때문이다. 출 36장에 보면 성막을 건조할 사람들을 지정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름이 지정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한다.

① 이름이 지정된 사람들

출 35장에 성막을 건조한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하나는 ‘브살렐’로 그 이름의 뜻은 ‘주의 그늘에서’이다. 이 사람은 유다 지파의 ‘훌’의 손자이며 ‘우리’의 아들이다. 또 다른 사람은 ‘오홀리압'(나의 하나님 아버지의 장막)으로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이다(참조 출 35:34). 이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들로서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부어 주셔서 성막에 필요한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하셨으며 이들은 여호와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여 일을 했다.

성경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같이 하셨고 재능과 기술을 겸비했으며, 순종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다 그들이 성령에 충만함을 입어 얻게 된 능력들인데 성령께서는 지혜와 재능과 모략의 신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귀한 성품과 자격을 구비한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하나님의 참된 일꾼과 도구로서 그의 뜻을 좇아 거룩한 성막의 건조 사업을 이룩하게 되었다.

②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출 36:2을 보면 위의 두 사람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성막 건조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이외의 많은 기능공들로서 출 35:35, 36:4, 8 등에서 그들에 대한 간단한 언급을 보게 된다. 그들은 조각하는 일과 공교로운 일과 수 놓는 일과 짜는 일 등 여러 가지 일들을 한 사람들이다. 비록 이들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으나 성막 건조에 참여하여 크게 협조하고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왜 이들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것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하나님과 모세로부터 공식적으로 임명받았기 때문이나 그들은 자원하여 협조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성막의 모든 것을 설계하고 감독하며 지도한 자들이나 그들은 그 감독과 지도를 받아서 일한 자들로서 각 분야에서 자기의 재능대로 헌신 봉사한 기능공들이었다(참조 출 36:8-39:43).

성막의 모형

오늘날 성막의 영적인 중요성에 대한 무지가 만연하고 있는 것은 모형론(Typology)에 대한 관심 부족으로 인한 것이다. 성막은 이미 신약의 모든 복음의 진수를 간직한 신약에 대한 주석과도 같다. 이 점에서 성막의 모든 구조와 모형에 대한 설명과 그 영적 의미까지도 다루고자 한다.


① 바깥마당

성막 전체의 모형에 대한 기록은 출 26:1-27:2에 나오는데 그 기록에 의하면 성막의 크기는 길이가 45m, 너비 22.5m, 높이가 2.25m의 직사각형인데 이동할 수 있는 조립식 구조로 되어 있다. 성막의 울타리 동쪽 끝에는 성막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이 문에 들어가기 전 외부의 마당을 바깥 마당이라 한다.

이 넓은 마당은 ‘이방인의 뜰’로도 부르는데 매우 넓은 공간이다. 즉 성막을 둘러싸고 있는 전 지역이 이 이방인의 뜰이 된다. ‘이방인의 뜰’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곳까지는 이방인들이 성막에 접근할 수 있으나 성막 안으로는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방인이란 하나님의 선민이 아닌 죄인들을 지칭하는데 우상숭배, 살인, 간음, 도적질 등 여러 가지 불의와 악행을 행하는 자들을 나타내며 그들이 있는 이 바깥 마당은 죄악의 장소를 의미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을 나타내는데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대상이 된다.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이 세상에는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에 죽을 수밖에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과 긍휼 가운데서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도록 부르셨다. 곧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이요,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 부르심을 입은 이 무리들은 이 바깥 마당에서 성막의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있게 되었다.

② 문

성막에는 출입문이 있는데 이 문에는 기둥과 그 기둥의 밑받침이 있으며 4색실로 곧 청색, 자색, 홍색, 금색과 가는 베실로 아름답게 수놓은 휘장이 드리워져 있다. 이 문의 폭은 약 10m가량 되는데 이는 너무 넓은 문이다. 이 문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그는 친히 자신을 양이 우리로 들어가는 문으로 말씀하셨다. 이 문으로만이 성막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다른 데로 들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인 것이다(참조, 요 10:1) 그러므로 이 문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시금석이 된다.

이 문의 휘장이 4색으로 된 것은 우리 구조의 인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4복음이 표현하는 왕과 종, 인자,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그러나 이 문은 항상 열려 있지는 않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기간이 끝나면 곧 닫히게 되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의 문이 닫혔듯이, 이 문도 닫히게 된다. 이때 문 밖에 있느냐 문 안에 있느냐에 따라 영원한 생명과 심판으로 분류된다.

③ 담과 안마당

성막은 네 개의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남쪽과 북편의 담이 45m이면, 각각 20개의 조각목을 세우고 그 밑에 놋받침을 받치고 그 기둥에 머리를 씌운 후 은으로 만든 갈고리와 가름대로 이어서 세마포로 드리워서 만들었다. 그 바깥 휘장의 높이는 2.5m인데 세마포는 청색, 자색, 홍색과 가는 베실로 수를 놓아 짠 휘장으로 높이가 2.5m가량 되었다. 서편 담은 길이가 25m이며 기둥이 10개 있었는데 서편과 동편의 길이는 같으나 동편 담에는 출입문이 있었다. 이 담은 안마당과 바깥마당을 구별하고,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인을 구별하며,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였다.

또한 이 담은 성도의 육신을 가리키는데(참조, 고후 5:1; 벧전 1:13-14) 성도의 육신인 이 장막 속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게 된다. 이 담 안의 마당은 ‘안마당’으로 불리는데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다. 즉 이 안마당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이 들어와서 하나님 아버지와 영적 교제를 나누는 교회를 뜻한다. 성도들은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영적 교제를 하게 되었다(참조, 엡 2:20-22).

④ 성소와 지성소의 덮는 막

이 덮는 막은 안마당 안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를 같이 덮어 주는 막으로서 4중으로 되어 있다. 첫 번 덮막은 가는 베실로 짠 고운 막으로 성막 내부에서 보이게 되는데 금색, 자색, 청색 그리고 가늘게 꼰 베실로 아름답게 수가 놓아져 있다. 또한 이 천에는 성막으로 들어와 예배하는 자들을 내려다보는 천사의 모습과 함께 수놓아져 있다. 두 번째 막은 염소 털로 만든 것으로 그 크기는 44X30 규빗의 크기로 첫 번째 덮막보다 조금 더 크게 되어 있다. 이것은 ‘성막 위의 천막’으로 불리는데 아래 있는 앙장들을 보호하고 동시에 주위에 있는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하는 안전장치와 같은 것이다.

세 번째로 붉게 염색된 수양의 가죽이 덮여 있는데 이 가죽은 제사의 제물로 쓰인 양의 가죽으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헌신을 의미한다. 붉게 염색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를 뜻한다. 맨 윗덮개는 수달의 가죽으로 외부 표면에서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 가죽은 햇빛의 자극에 강하고 잘 썩지 않는 것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도 아름답거나 매력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외적으로는 초라하시고 볼품이 없으셨으나 그 내면적으로는 완전하고 고귀한 성품을 지니시고 이 세상 풍조나 죄악에 물들지 않으심을 보여 준다.

⑤ 성소

이상에서 말한 4중 덮개 밑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게 되는데 성소에는 3개의 성막 기구가 있다. 곧 떡상과 향단과 등대이다. 제사장들은 이 성소에서 매일 등대의 불을 점검하고, 향단에 향불을 피우며, 떡상의 떡을 1주일에 한 번씩, 특별히 안식일에 12덩어리의 새로운 떡으로 갈아놓고 6가지 제사를 드렸다. 이 성소는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제사장들이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곳이다. 이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목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즉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우리 주님을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⑥ 지성소

성소를 지나서 휘장 뒤에는 지성소가 있다. 이 지성소에는 법궤가 속죄소 또는 시은소가 있고 그 위에는 두 그룹이 있다. 이 곳은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짐승의 피를 가지고 온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들어가게 되어 있다(참조, 출 30:10; 레 16:18; 23:27). 이 지성소는 휘장으로 가려 있는데 이는 함부로 하나님의 존전에 나갈 수 없음을 가리킨다. 이 지성소는 하나님이 계신 곳 즉 천국을 뜻하며 이 곳은 아무도 나갈 수 없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임을 나타낸다. 일 년에 한 번 이곳에 들어가는 대제사장도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자신과 회중의 죄를 위해 매년마다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갔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짐승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 하나님께 단번에 나아가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참조, 히 9:25).

⑦ 안 휘장

이 안 휘장은 앞에서 말한 성막의 첫 덮개와 같이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만든 것으로 그 위에 그룹의 모습을 수놓아 만들었다. 이것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어서 두 곳을 구별하는 역할을 했다. 이 휘장은 막힌 담으로 인류가 처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 한 이후로 갈라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이다. 에덴동산 이후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화염검으로 막으셨고, 노아의 홍수 때도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간 후 하나님이 친히 방주의 문을 닫으심으로 세상 사람들과 노아의 식구 사이를 구분하셨다. 이제 이 지성소와 성소도 휘장으로 막으셔서 죄인들의 접근을 막으신 것이다.

휘장이 의미하는 것은 첫째로는 위에서 말한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며 둘째는 둘 사이의 교제의 단절을 뜻한다. 휘장 자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휘장이 수놓아진 천사가 이 역할을 하는데 이것이 그들의 사명인 것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하나님가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이 무너져 버리게 되었다(참조, 마 27:5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사업으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가로 놓였던 죄악의 담이 무너짐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 제물로서 중보자가 되어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잃었던 화목, 즉 교제의 상실을 회복하셨다. 제2의 아담이 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회복된 것이다.

3) 성막의 기구들

성막에는 8개의 기구들이 있게 되는데 이것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곧 외향적인 면과 내향적인 면인데 외향적인 면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는 것이며 내향적인 면은 그 기구들이 가지는 영적 의미를 통한 인간의 구속적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두 면에 근거하여 성막의 기구들과 그 영적 의미를 알아보겠다.

① 놋제단(번제단)

놋단을 히브리어로 <미즈베하>라 하는데 ‘제물’ 또는 ‘희생’의 뜻이 있으며 ‘죽인다, 희생한다’는 뜻을 가진다. 이 단은 조각목(아카시아나무)으로 만들어져 그 위에 놋으로 싼 것으로 그 길이와 너비는 모두 5규빗(2.5m)이다. 단 위 네 모퉁이에는 각각 뿔이 나와 있으며 단 네 면 가운데는 제물을 받치는 그물망이 있다. 그리고 단 높이 중앙에 고리 넷을 이편과 저편에 둘씩 달아서 금을 입힌 막대기로 꿸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단을 이동할 때 어깨에 메고 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단은 번제단이라고도 하는데 ‘번제’라는 말은 ‘올라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번제단에서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열납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 같은 희생 제단은 인간의 범죄 이후로 생겼는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 하였을 때 그들의 수치를 가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짐승을 죽여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던 사실에서 시작되어 아벨의 제사에서 짐승이 드려졌고, 홍수 이후에는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짐승을 죽여 드리는 희생 제사의 단을 쌓았었다. 또한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명령으로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다가 수풀 사이에 걸려 있는 수양을 드렸고 그 외에 이스라엘의 족장들도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려왔다.


그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희생 제사를 자신의 몸으로 완전하게 드릴 때까지 이스라엘은 이 희생 제사를 짐승으로 드려왔다. 이 번제단은 죄의 결과로 당하는 형벌을 나타내는 것으로 제물이 죄를 대신 쓰고서 그 형벌을 받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놋제단에 제물을 가져 첫째는 먼저 죄를 자각하고 둘째는 양을 제단으로 끌고 가서, 셋째는 그 위에 안수하여 죄를 전가시키고 넷째는 죽여서 단위에 얹고 다섯째는 피를 제사장이 단 사면에 바르고 여섯째는 그 제물을 태우는 순서를 거치게 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 희생을 나타내는 것으로 제단의 네 뿔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의 머리, 양손, 다리에서 흘리신 피로 십자가의 네 귀퉁이에 뿌리셨으며 친히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존전, 지성소로 나아가심을 뜻한다.

② 물두멍

물두멍은 번제단 다음에 위치한 것으로 성소에 들어가는 길에 두 번째로 놓여 있다. 이것은 전체가 놋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물을 가득 담아서 성소에 출입하는 제사장이나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이 제사 전후에 손과 발을 씻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이곳에서 수족을 씻지 않고 출입하는 자는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는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자신의 허물과 범죄, 실수를 살피고 회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물두멍의 물은 거울로도 사용되었는데 제사장은 그곳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아서 더러운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했다. 이는 성령의 감화에 따라서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신앙 양심으로 어긋난 허물과 범죄를 비추어 보고 주님의 보혈로 정결케 함을 뜻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로마 병정이 찌른 창으로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흘리신 것은 그의 피로 우리를 대속하신 후에 그 물로서 정결케 씻어 주심을 뜻하는 것으로 곧 성막의 물두멍의 본래 의미이다. 출애굽 시 유월절 양을 잡아서 문설주에 피를 바른 것이 번제단의 의미를 가진다면 홍해 바다를 지나는 것은 곧 물두멍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순서적으로 먼저는 대속의 피, 그리고 정결케 하는 물의 순서가 된다. 성경에서 이 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유되기도 하였다. 에베소서 15장 26절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15장 3절에서는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하셨다.

③ 떡상

제사장이 성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편에 떡상이 있는데 이 떡상은 일명 진설병 상이라고도 한다. 이 상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졌는데 길이가 2규빗(약 1m), 높이가 1규빗 반(약 75cm), 너비가 1규빗(50cm)정도이며 안과 밖을 순금으로 쌌다. 그 위에 차려지는 떡은 고운 밀가루로 만든 것으로 매 안식일마다 새 것으로 갈아 놓았다. 이 떡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었는데 누룩과 꿀을 넣지 않고 소금과 기름을 넣어서 만들었다. 떡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따라서 12개를 놓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받은 양무리들의 영혼의 양식임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으로 말씀하셨다.

지금도 제사장 된 성도들의 영혼의 양육자로서 매 성일마다 예배를 통해서 새로운 양식을 공급해 주고 계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다 주님을 떠나가고 말았다. 이때 베드로에게 ‘너도 가려느냐?’고 주님이 물으시자 ‘영생의 말씀이 있으니 우리가 뉘께 가오리까?’라고 함으로써 주님 자신이 그 생명의 떡이심을 베드로는 고백했다. 이 떡은 누룩 없는 신령하고 순수한 생명의 참 떡이시며 진리의 떡이시다. 이 떡에 기름과 소금이 첨가되었는데 기름은 성령을 의미하며 소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상징한다(참조 히 13:8).

④ 등대

등대는 정금으로 만들었는데 밑판에 줄기가 세워져 있고 그 줄기에는 여섯 개의 가지가 있었다. 각 가지 끝에는 잔과 꽃, 꽃받침이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꽃의 형상은 살구꽃이었다. 가운데 1개 줄기를 중심으로 양쪽에 3개의 가지가 있었다. 이 등대의 빛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꺼지지 않게 켜 놓아야 하는데 이는 어두울 동안은 계속 빛을 발해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등불 켜는 일을 맡은 것으로 추측되며, 사무엘 3장에서는 사무엘이 이일을 맡았던 것 같다(참조, 삼상 3:1-9). 등대의 꽃받침 위에 올려놓는 등잔도 역시 순금으로 만들었으며 일곱 개의 등불이 모두 동시에 켜지게 되면 매우 밝은 빛을 내게 된다.

이 등대는 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의미하는데 주님은 친히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으며(참조, 요 1:4-5) 등잔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감람유(올리브유)로 가득 채우게 되는데 스가랴 4장 2절에 의하면 순금 등대 좌우에 두 감람나무가 서서 그 등에 기름을 공급하여 주어서 불이 힘 있게 타게 했다. 이것은 주의 몸 된 교회가 성도들에게 은혜의 기름을 공급하여 주어서 성도들로 세상에 및을 발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참조, 마 5:14; 엡 5:8).

⑤ 향단

향단은 조각목으로 만들되 길이와 너비 모두 1규빗(약 50cm)으로 네모가 반듯하며, 높이는 2규빗(약 1m)이었다. 이것도 역시 금으로 안팎을 쌌으며 그 향단 위와 전후좌우에 금테 무늬를 놓았고, 그 위에 네 뿔을 금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고리 네 개를 만들어 향단 양편에 붙여서 채를 꿰게 하였다. 또한 향단에는 관유와 향품을 드렸다. 그 향품을 제조하는 법은 출 30장 22절, 25절에 의하면 유질 몰약 50세겔, 그 반수의 향기로운 창포 250세겔, 계피 500세겔과 감람기름 한 힌(hin: 3.67ℓ)을 취하여 섞여서 만들었다. 아론의 자손은 그 향품을 아침마다 그 향단위에 사르되 등불을 점검할 때와 저녁에 등불을 켤 때 향품을 사르게 했다.

그러나 이 향단은 다른 향이나 다른 불 즉 번제단의 불 이외는 사용치 못했다. 이 향단은 기도의 제단으로 요한계시록 8장 3절 이하에 보면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께 항상 드려져야 하는 향불인 것이다. 진실과 성심으로 제단에서 드리는 기도는 향단에서 향을 분향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것은 향단의 불을 꺼뜨리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하였다.

⑥ 법궤

이제 성소를 지나서 지성소를 들어가게 되는데 휘장을 지나면 법궤를 보게 된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이 지성소에 속죄제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게 된다.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은 법궤 위 시은소(속죄소)에 피를 쏟게 된다. 법궤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각각 다른 의미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으므로 별도로 취급해야 한다. 간단히 그 세 부분을 언급하면 법궤 위에 속죄소가 있고 그 속죄소 위에는 두 그룹이 날개를 펴고 있다. 법궤는 네모지게 만든 상자와 같은 것으로 길이가 2규빗 반(약 1.25m) 너비와 높이는 각각 1규빗 반(약 75cm)이다. 이 궤 역시 각목으로 만들어서 안팎에 순금으로 입혔다.

위의 모서리는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 넷을 만들어 그 네 발에 달아서 양편에 두 고리를 두고 채를 만들어 끼었다. 그 궤 안에는 만나 항아리와 십계명의 두 돌비를 넣어 두었는데, 그 두 돌비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친히 기록하여 주신 것으로 ‘언약의 말씀’, ‘언약의 비석’이라고도 한다. 그 후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넣어 두었다.

이 법궤의 순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하는데 카일(Keil)은 법궤의 내외를 순금으로 씌운 것은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여호와의 신성(神性)을 뜻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법궤의 조각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순금은 그의 신성을 의미한다. 법궤 안에 있는 십계명 돌비는 하나님의 지존하신 공의를, 만나는 신령한 양식을, 아론의 지팡이는 주님의 인도와 보호를 의미한다. 즉 십계명은 공의의 성부 하나님을 만나는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성자 하나님을 아론의 지팡이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나타낸다.

⑦ 속죄소(시은소)

법궤의 두 번째 부분인 속죄소는 <카포레트>인데 이는 동사 <카파르>에서 온 것으로 근본 뜻은 ‘덮는다’이다. 즉 우리의 죄를 덮어 주는 용서와 자비의 장소를 의미한다. 이 속죄소는 순금으로 만들며 길이가 2규빗 반(약 1.25m), 너비가 1규빗 반(약 75cm)으로 순금으로 된 덮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심판의 보좌로서 그 밑에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에 의해서 죄인들을 심판하시고 벌하시게 된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1년이 한번 희생 제사의 피를 가지고 이 하나님의 보좌 위에 뿌림으로서 이 심판의 은혜의 보좌로 바뀌게 된다. 즉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에 대한 대가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피로서 만족되어짐을 나타낸다.

⑧ 두 그룹

속죄소의 두 끝에는 순금으로 만든 두 그룹을 세웠는데 한 그룹은 이 쪽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연하여 있으며 이 두 그룹은 두 날개를 펴서 속죄소를 덮게 하였고 얼굴은 속죄소를 내려다보게 되어 있다. 그룹의 형상은 사람의 얼굴, 사자, 송아지 그리고 독수리 형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참조, 겔 1:6; 계 4:7-8). 여기서의 그룹은 사람의 형상이며 그들은 천사의 한 부류로서(참조, 창 3:24), 하나님의 보내신 대사로서 하나님을 대리한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성도들이 천사를 보았을 때 하나님처럼 경배하고 우대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참조, 삼하 22:11; 시 18:10). 그러므로 그들이 속죄소 위에 있는 것은 그곳이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나타내며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은 그곳에 뿌려지는 속죄의 피를 경탄한 듯 보고 있음을 나타낸다.

3. 대제사장과 그 의상

이제까지는 성막의 모형과 기구들에 대해서 다루었었다. 즉 성막의 모형과 기구들이 그리스도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가를 살펴보았는데 이제는 그 성막에서 봉사하는 대제사장과 그의 의상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 의미에 대해서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1) 대제사장

광야에서의 대제사장은 아론이었는데 그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아론이 가지고 있던 대제사장의 사역을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수행하셨던 것이다. 아론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들은 단번에 완전하게 제사장의 임무를 마치신 것이다(참조, 히 7:11). 대제사장이 입는 거룩한 제의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귀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 옷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로 짜여졌다(참조, 출 28:5, 6, 15, 33).

이때의 푸른색은 하늘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늘에 속한 자의 신분을 나타내며 자색은 존귀함을 나타내는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존귀와 영광을 나타낸다. 진홍색은 피의 색깔로 사랑과 희생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희생하심을 상징한다. 아론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제사장들은 신약시대의 성도들을 의미한다. 대제사장의 옷은 제사장들과는 구별되는데 그 옷의 구조와 의미에 대해서는 대제사장의 의상에서 다루고자 한다.

2) 대제사장의 의상

① 속옷

속옷은 가는 베실로 짜서 만든 옷이다. 이 속옷에는 띠가 있어서 한 번 입으면 벗겨지거나 자리가 움직이는 일이 없게 되어 있는데, 이 띠는 속옷을 입게 되면 꼭 매어야 했다. 이 옷의 특징은 통으로 짠 것이며 반드시 속옷을 입은 후에야 겉옷을 입어야 했다. 이 겉옷은 대제사장뿐만 아니라 제사장까지도 입게 되어 있었다. 이 속옷은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으로 우리의 죄를 가리고 칭의를 얻게 해 주는 것을 말한다(참조, 렘 23:6, 16). 여기에 매는 띠는 진리의 띠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를 나타낸다.

구속사 맥 1189 출애굽기

② 겉옷

에봇 받침은 겉옷이다. 이 겉옷은 푸른색의 옷인데 두 어깨 사이에 머리가 들어갈 구멍을 내고 그 주위에 갑옷 깃을 짜서 찢어지지 않게 하고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청색, 자색, 홍색실로 석류를 수 놓고 옷 가장자리를 따라서 석류 무늬 다음에 금방울을 계속 돌아가며 달게 되어 있다. 이 겉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직을 표현하며 존귀와 영화를 나타낸다. 옷단의 방울은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석류는 그 말씀대로 충실한 결실을 보여 준다. 이 겉옷이 성도에게 적용될 때는 의와 영광의 옷으로(참조, 사 61:10), 장차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며, 세상을 심판하며 영광을 누릴 것을 의미한다(참조, 계 5:10; 20:4, 6).

③ 에봇

에봇은 겉옷 위에 입는 것으로 모양이 긴 앞치마처럼 생겼는데 대제사장의 어깨에 걸치게 되어있다. 또한 에봇에는 매는 띠가 있어서 대제사장의 허리에 단단히 맬 수가 있었다. 그 띠는 금실,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잘 조화 있게 짠 아름다운 띠이다. 이 에봇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서 세운 지상의 교회가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깨에 달려 있는 것을 나타낸다. 어깨는 힘, 능력을 상징하는데 곧 우리 주님의 힘과 능력으로 교회가 지탱되고 유지됨을 나타낸다. 주님은 선한 목자와 같이 친히 그 어깨에 잃은 양과 같은 죄인들을 메고 오시는 것이다(눅 15:5).

④ 흉패

에봇 위에는 12보석으로 장식된 흉패가 있는데 대제사장의 가슴 부분에 위치함으로 흉패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에봇이 교회를 의미한다면 흉패는 그 교회의 구성원을 나타낸다.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가슴에 붙어 있는 지체이며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의 몸을 기꺼이 대속 제물로 주시기까지 하셨다. 이 흉패는 각 줄에 3개씩 도합 12개의 보석을 가지고 있는데 그 보석들은 그림에서와 같다. 이 흉패는 금사슬에 매여 대제사장의 어깨에 있는 호마노로 만든 두 견대에 고정되어 있다.

아랫부분은 대제사장의 허리띠에 매게 된다. 어깨의 두 호마노의 두 견대에는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참조, 출애굽기 도표7). 이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12지파에게 예고된 약속을 따라 나시고 이 땅 위에 계시는 동안 12사도를 택하여 믿음으로 접 붙게 하심을 나타낸다. 즉 12보석은 예수님의 12사도를 나타내며 견대에 12지파의 이름이 있는 것은 이 견대의 고리에 12보석이 매달려 있듯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12사도가 계승함을 나타낸다.

⑤ 우림과 둠밈

대제사장의 가슴속에 있는 흉패는 주머니처럼 위에서 물건을 집어넣을 수 있게 되어 있는데 마치 지갑처럼 생긴 것이다. 이 속에 우림과 둠밈을 집어넣는데 <우림>은 ‘빛들’이라는 뜻이며 <둠밈>은 ‘완전함’이란 뜻이다.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고, 선악과 길흉의 원인과 결과를 알기 원할 때 이 두 패를 내어 봄으로 깨달았다고 한다. 이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성도들이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 그 해결을 위해서 기도하면 주님이 응답해 주심을 나타낸다. 또 이것은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우림과 둠밈 같은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심을 의미한다.

⑥ 성관

성관은 대제사장의 머리에 쓰는 모자로서 대제사장의 직분과 그 직분의 영광과 존귀를 나타낸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며(참조, 슥 3:1), 영광과 존귀를 입은 자로서 그 관을 쓰는 것이다.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히브리서 2장 9절에 의하면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했다. 즉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실 때 수치와 고난의 가시관을 쓰셨으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하나님 앞에서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셨다.

⑦ 금패

금패는 대제사장의 성관에 붙이는 패로서 여기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란 글이 쓰여 있으며 청색 끈에 매어 성관 앞에 달게 되었다. 이것은 첫째로 ‘모든 일에 조심하여 하나님을 섬기라’는 경고이며 둘째로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성별된 자임을 명심하여야 함을 주지시키는 표시이다. 그러므로 기름부음 받은 자와 선지자를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참조, 대상 16:22). 왜냐하면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대리자와 하나님이 쓰는 자이며 하나님이 친히 처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성별하여 성령의 기름을 부어 세운 유일하고 영원한 하나님께 성결 된 대제사장이시며 만사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신 분이셨다.

4. 성막의 역사적 변천

성막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한마디로 성막의 역사 곧 성전의 역사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성전의 파괴와 함께 이스라엘의 정치적 멸망이 있었고 성전의 재건과 함께 이스라엘의 부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막의 구조와 그 의미 못지않게 성막의 변천 과정을 다루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본 장에서는 이스라엘 성막의 변천 과정을 연대순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시내산에서의 성막

이는 최초의 성막으로 출 40:2, 17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한 후 제2년 1월 1일에 시내 산 밑에서 성막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얼마나 오랜 시일을 성막 건조에 보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 초기 장막은 그 후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 40년을 보내는 동안 이스라엘의 진행과 함께 수 차례 이동되었다. 성막 위에 여호와의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곧 성막을 분해해서 성막과 그것에 속한 부속품들과 기구들을 정리하여 레위인들의 어깨에 메고 진행케 했다. 레위인들은 각각 그들이 맡을 부분이 정해져 있어서 각자가 그들이 책임지는 성막의 부품들을 메고 출발했다(참조, 민 3:31-32; 4:15). 이때까지의 성막의 구조나 모형은 앞서 다른 성막의 구조와 동일한 것으로 가나안 정착 전까지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2) 가나안 정착 이후의 성막

40년의 방황을 끝내고 마침내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진입했다. 그들도 그곳에서 먼저 성막을 안치할 장소를 찾게 되었는데 그 장소는 사람이 살지 않고, 묘지로 더럽혀지지 않은 곳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여리고 근처 길갈이라는 곳을 임시 장소로서 선정하였다가 마침내 에브라임 영지에 있는 실로로 정하여 이곳에 성막을 두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성막의 기구와 구조는 변동이 없이 그대로 보존되었으나 그 후로 성막이 분해되고 여러 곳에 제단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레위 자손들이 여러 곳으로 분산되었기 때문이었다(참조, 삿 17:12). 벧엘에는 언약궤가 이동하게 되었고 실로에는 성막이 있었다(참조, 삿 20:27).

3) 실로의 멸망

언제 어떻게 실로에 성막이 서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곳에 성막과 언약궤와 제사장직과 제사와 분향이 있었다. 사무엘상은 실로의 성막과 당시의 제사장 엘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블레셋의 침략으로 법궤를 빼앗긴 것을 말해 준다. 이 일로 인해서 실로 자체는 블레셋 사람들의 장중에 들어갔음을 성경 여러 곳에서 암시하고 있다(참조, 렘 7:12). 그런데 성막 자체까지 다 약탈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에 ‘놉’에서 다시 언약궤와 성막이 한 곳으로 모이게 되었다.

4) 비지역적 예배

실로의 패망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지역적이고 공간적인 신앙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가견적인 유형 신앙에서 불가견적인 정신과 영적인 신앙으로 돌아가 인위적인 신본주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그 증거로서 대제사장직의 성격 상실을 들 수 있다. 사무엘은 레위 지파가 아닌데도 대제사장과 사사로서의 역할을 겸하여 행하였다. 법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이스라엘에 돌려져서 벧세메스에 잠깐 머물렀다가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서 약 20년간 있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벧엘, 미스바, 라마, 길갈 등을 순회하며 예배의식과 행정적인 문제를 처리했는데 이는 성막이 비지역화된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어서 다윗 왕 때에는 완연한 현상이 되어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지역을 초월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셨다.

5) 놉과 기브온의 성막

놉은 여부스에서 북쪽으로 6km 떨어진 곳으로서 시온보다 90m나 높은 산시였다. 어떻게 해서 이곳에 성막이 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는 대제사장과 85명의 제사장이 거할 수 있었고, 에봇과 진설병을 놓는 상이 있었다. 이곳에서 사울 왕이 모든 제사장을 죽일 때 아비아달 하나만이 다윗에게 피하여 있었다. 그 후에 사울 왕은 성막을 기브온으로 옮긴 것 같다. 이 기브온은 여부스에서 10km, 벧엘에서 11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6) 기브온과 예루살렘의 성막

다윗은 왕이 된 후에 군사 삼만여 명과 함께 바알레 유다 즉 기럇여아림에 가서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와서 다윗 성에 친 장막에 두었다. 그리고 그곳에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이렇게 해서 기브온과 예루살렘 두 곳에 성막이 있게 되었는데 기브온에는 제단이 있는 성막이 있었고 예루살렘에는 법궤가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 법궤와 제단이 성전의 수축으로 한 곳에 모이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기브온의 성막이 주로 제사에 이용되었으나 성전 건축과 함께 흩어져 있던 성막의 기구들이 모아져 한곳에 두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막은 가나안 입주 후 200년 뒤부터 그 존재가 사라지게 되고 성전이 대신하게 된다. 이때부터 모세의 성막 기구들은 사라지거나 변형되었다. 역대하 4장 19절에 보면 솔로몬이 기구를 만들어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원 성막의 기구들이 분실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여러 가지 재난과 환난으로 많은 부분이 분실되었다. 처음에 법궤에는 두 돌비와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었으나 후에 성전에 법궤를 안치할 때는 두 돌비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참조, 왕상 8:9; 대하 5:2-10).

7) 성전의 수난과 변천

성막이 성전의 건축과 함께 사라지고 성전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이 성전 역시도 수차례 파괴되고 재건되는 과정을 통해서 유지되다가 결국 예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A.D. 70년에 로마 군인들에 의해 헤롯 성전이 파괴됨으로서 성전의 역사는 끝을 맺는다.

① 솔로몬 성전

다윗의 뜻을 이어서 그의 아들 솔로몬이 그의 통치 제4년에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B.C. 967). 이 성전의 전장은 60규빗(30m), 너비는 20규빗(10m), 높이가 30규빗(15m)으로 성전의 기구들은 성막에서 옮겨온 법궤와 함께 새로이 만들어 두었다. 이 성전은 솔로몬 이후 분열 왕국 시대로부터 시드기야 때까지 존속하다가 B.C. 586년에 갈대아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성전도 함께 소화되고 그 기물들은 바벨론으로 이전되었다. 그 후 380년 동안 성전은 복구되지 못했는데 이는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된 것이다(참조, 렘 25:3).

② 스룹바벨 성전

B.C. 539년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면서 그는 일찍이 바벨론에 잡혀온 포로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회유 정책을 폈다. 이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돌아온 지 2년째 되던 해에 세스바살의 지휘 아래 성전의 기초를 놓았다(참조, 스 5:16). 이것이 스룹바벨과 그의 건축자들에 의하여 많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다리오 왕 제6년 B.C. 515년에 끝내게 되었다. 이 성전에서 일한 제사장의 반열이 정해지고 유월절이 지켜지게 됨으로서 구약성경의 역사는 끝을 맺게 된다. 그 후 이 성전은 구약 중간사의 기간을 걸치면서 수 차례의 파괴와 복구의 수난을 걸치다가 B.C. 20년에 헤롯의 재건 공사로 이 성전의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③ 헤롯 성전

스룹바벨의 성전은 요새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헤롯에게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는 성전의 크기가 포로시대 이전의 성전 즉 솔로몬 성전보다 높이가 60규빗이나 모자란다는 이유를 들어서(참조, 대하 3:4) 성전을 재건하려고 했는데 실제적 이유는 그 재건을 통해서 자신의 이름을 영구히 기념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이 성전은 46년에 걸쳐 완공되었으나(참조, 요 2:20) 예수께서 예언하셨던 대로 A.D. 70년 로마의 티토(Titus)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그때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주님의 말씀(참조, 눅 21:20-21)을 기억한 사람들은 성밖으로 도피하여 난을 면할 수 있었다.

이로서 시내산에서 시작한 성막은 여러 과정을 거쳐서 결국 성막의 완전한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완성과 함께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제 성막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 성막에서 행해지던 동물을 잡아 드리는 희생 제사도, 대제사장도 사라졌다. 다만 유대교를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원 상태로 복귀시키려하나 이 일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들 속에도 의견이 구구하다. 그렇다면 성막의 존재와 그 의미는 이제 시대의 변천과 함께 소멸된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지금도 성막의 모든 구조와 모형이 주는 의미는 살아 움직인다. 다만 우리 주님께서 행하신 단 한 번으로 그 모든 성막에서의 의식들이 마지막 심판날까지 지속되게 하심으로 더 이상의 동일한 의식이 필요 없을 뿐이다. 이제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는 이 성막이 각자의 몸에 해당되어 주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다(참조, 고전 3:16).

돌에 새겨 있던 돌비가 이제는 우리 맘에 새겨진 언약으로 바뀌었고(참조, 렘 31:31-33)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서 뿌리던 속죄의 피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뿌려졌으며 이제는 모든 성도가 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을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게 되는 것이다(참조, 벧전 2:9). 이제 제물은 우리 자신의 몸으로서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지고 있는 것이다(참조, 롬 12:1). 그러므로 성막이 가졌던 모든 영적 의미는 지금도 적용되나 그 실제적인 것들은 완전한 수행으로 재차 재현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면 이제는 사라진 구약의 성전과 현대의 교회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오늘날의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주님이 명하신 성례전이 시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구약의 성전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구약과 같은 장소적인 개념으로서가 아닌 우리 주님을 머리로 해서 한 몸 된 지체가 서로 교제하는 표식으로서 공동체의 개념을 강조한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4일 / 03- 12-2024(화)
출애굽기 24:1-18
찬송 / 171장( 비둘기 같이 온유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언약의 피(출애굽기 24:8)

모세가 그 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니라.


첫째, 언약의 피

고린도전서 11장 25절에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옛날 부족들은 피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두 부족의 족장이 그들의 팔을 칼로 베고 그 피를 잔에 담아 함께 마셨습니다.
이 피의 언약을 통해 두 부족은 형제 부족이 되어 서로 의리를 지키면서 상부상조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대표하고 인간을 대표하여 피를 흘리시고 새로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치고 피곤할 때, 그리고 마귀에게 공격을 당할 때, 성령님께서 오셔서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죄 사함의 피(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케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만일 우리들이 스스로 죄값을 갚아야 한다면 한 사람도 구원함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우리는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와 절망과 저주와 죽음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피로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셋째, 칭의의 피(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롬 5:9)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의롭다고 인정도 받았습니다.
의로움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이요, 마귀의 참소를 받지 않는 보증이 됩니다.
우리는 이제 죄인이 아니라 의인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로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게 하고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기 때문에 보배로운 것입니다.
이 보배로운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우리들은 이제 마귀의 공격이나 참소를 받을지라도 담대히 맞서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 성화의 피(히브리서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3장 12절에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무엇이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듣는 것, 손으로 만지는 것, 모두 죄로 가득한 것들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욕을 없애고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다섯째, 하나님과 가깝게 하는 피(에베소서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로 가까와졌느니라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죄짓고 살다가 하나님께 돌아와 “아버지”라고 부르면 기도도 잘 나오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구만리장천에 계신 것 같이 느껴집니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피를 찬송하고 그 피를 의지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통로가 되어 우리를 하나님과 가깝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고 나오기만 하면 그 피를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여섯째, 화평의 피(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뿐만 아니라 부부 사이, 자식과 부모 사이의 관계를 화평케 하는 화목제가 됩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으나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거룩케 하였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으나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과 가깝게 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만물 가운데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피를 의지하면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게 됩니다.

일곱째, 기도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기도할 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예수님의 피를 의지합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의인의 피는 땅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4)
예수님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우리를 위해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기도가 잘 안될 때에는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의 입술을 사로잡아 기도할 수 있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여덟째, 생명의 피(요한복음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고 말씀하셨습니다.
식물이 생명의 근원인 물을 빨아올리지 못하면 말라 죽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도 겉으로는 돈과 명예와 권세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생기를 잃어버리고 시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시면 넘치는 생명감과 소망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아홉째, 승리의 피(요한계시록 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면 사회생활에서 성공할 뿐 아니라 결함이 있는 성품도 좋은 새로운 성품으로 변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셔서 하나님 앞에 드리셨고, 또한 하나님의 예비하신 복을 그의 피로 사셔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값비싼 피입니다.
그러므로 그 피의 값으로 산 우리들은 절대로 값싼 인생이 아닙니다.

리는 예수님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성경의 중심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피의 의미를 모르고서는 성경을 안다고 할 수 없고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으며 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 교회가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은 피를 말하면서도 피가 중심이 아니며 관심 또한 피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히브리서 9:18-22절을 다시 보면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떤 말을 하면 되겠습니까? ‘이 말씀을 열심히 지키며 사세요’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책과 백성에게 피를 뿌렸다는 것입니다. 계명을 말한 후에 그 계명이 기록되어 있는 책과 백성에게 피를 뿌린다는 것, 이 의미를 깨닫는 것이 피의 의미를 아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24:7절을 보면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고 말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그대로 준행하겠습니다’라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스런 반응이 아니겠습니까? 백성이 이런 반응을 보이면 모세는 어떻게 나와야 할 것 같습니까?

교회에서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칩니다. 말씀을 들을 교인들이 말씀에 감동이 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열심히 지켜 행하겠습니다’라고 외친다면 목사는 어떤 마음이 될까요? 말씀을 지켜 행하겠다는 교인들의 반응에 감동하면서 무척 고무된 마음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 말씀에 은혜를 받으셨군요. 감사합니다. 그대들이 진정 믿음이 있는 분들입니다’ 뭐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 피를 뿌린 것입니다. 언약서에 피를 뿌린 것은 없지만 본문과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다짐하는 백성들에게 피를 뿌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한 모세가 행한 이것은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앞서 예로 든 것처럼 목사의 설교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교인들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모세처럼 피를 뿌리는 것이 될까요?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피를 뿌린 것이 죄사함을 의미하는 것이 전부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할 이유가 없이 피만 뿌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왕 피로써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굳이 말씀을 낭독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피로써 죄사함을 얻었으니 죄사함을 받은 신자답게 살기 위해서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 얻은 자들이 구원 얻은 자답게 살게 하기 위해 내려진 하나의 생활 지침서가 되는 것입니까?

먼저 간과하기 쉬운 것 중 하나는 피가 죽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피에서 자기 구원만을 보려고 하지만 사실 피는 죽음을 담고 있습니다. 나의 죽음을 대신한 죽음이 있음을 외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백성들에게 피를 뿌리는 것은 단순히 ‘너희는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너희는 죽은 자다’는 의미가 강하다고 봐야 합니다.

죽은 자라는 것은 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할 능력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할 수 있는 자질이 없습니다. 이것이 피 뿌림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모세가 책에도 피를 뿌린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죽은 존재임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피로 인해서 자신이 죽은 존재임을 알게 될 때, 그리고 피 흘리신 주님을 바라볼 때 그는 피로써 죄사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언약의 피’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언약은 이스라엘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취하실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독생자의 피를 흘리시면서 까지 언약을 기어코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언약의 피 앞에서 우리의 실천 의지를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실천 의지까지 몽땅 무너져야 하는 것이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16-17절을 보면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신의 죽음 이후의 일을 미리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은 후에 그가 살았을 때의 권위를 그대로 지닌 채 그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는 그 효력이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더욱 견고하게 되어 그 효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으시면서 예수님의 일을 우리에게 맡겼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말씀이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보다 더욱 견고하게 되어 그 효력을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의 효력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늘에 계시는 지금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왕성한 활동과 그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신자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이러한 우리를 보게 하고 예수님의 활동만을 의지하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여전히 살아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심을 선포하게 합니다. 이것이 언약의 피를 믿는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지켜 실천하겠다’고 나서는 신자가 있을 때 그들에게 피를 뿌리는 것은 ‘인간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생명이며 말씀이 살아서 활동하고 계심을 외치는 것이 목사입니다.







절기(하그)

חָג 스트롱번호2282

1.

축제

2.

희생 제물

발음 [ châg ]
어원
2287에서 유래
구약 성경
62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남성 축제, 절기, 출10:9, 12:14, 신16:10, 대하5:3
  • 2.
    명사, 남성 희생 제물, 출23:18, 시118:27, 말2:3.

מוֹעֵד 스트롱번호4150

1.

정한 때.

2.

시간의 한 점

3.

시간의 공간

발음 [ môwʽêd ]
어원
3259에서 유래
구약 성경
223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남성 정한 때.
    • a.
      명사, 남성 시간의 한 점, 창17:21, 레23:2,4,37,44, 삼상13:8,11, 삼하20:5,24:15, 시75:3(2), 1:4, 2:6, 렘8:7, 단8:19, 11 :27,35, 호9:5, 12:10.합2:3.
    • b.
      명사, 남성 시간의 공간, 창1:14, 단12:7
  • 2.
    명사, 남성 회중, 민16:2, 욥30:23, 사14:13, 33:20.
  • 3.
    명사, 남성 집회 장소, 수8:14, 시74:8, 애2:6.
  • 4.
    명사, 남성 신호, 삿20:38.

חָגַג 스트롱번호2287

1.

선회하다

2.

춤을 추다

3.

절기를 지키다.

발음 [ châgag ]
구약 성경
16회 사용

뜻풀이부

I.
원형 선회하다, 돌다
  • 1.
    원형 춤을 추다, 삼상30:16
  • 2.
    원형 절기를 지키다.
    • a.
      원형 [어지럽게 뛰논다는 뜻], 출5:1, 레23:41.
    • b.
      원형 [공적인 모임으로서] 시42:5(4).
  • 3.
    원형 비틀거리다, 현기증이 나다[술 취한 자에 대해 사용], 시107:27.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3일 / 03- 11-2024(월)
출애굽기 23:1-33
찬송 / 337장(인애하신 구세주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절기를 지키라(출애굽기 23:14)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찌니라.

구약의 3대 절기와 ‘수장절(收藏節)’의 참 의미

3대 절기

성경의 절기(출 5:1)는 여호와가 그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날로 ‘제사(예배, 롬 12:1)드리기 위해 정해진 날’을 말한다.

성경에 나타난 절기로는
▲매주 드려진 절기로 안식일(출 20:8)
▲매달 지켜진 절기로 월삭(민 28:14)
▲매년 드려진 절기로 유월절(혹은 무교절), 초막절(혹은 맥추절, 칠칠절), 초실절, 수장절(혹은 장막절, 초막절), 나팔절(레 23:23~26), 속죄일(레 16:29~34), 부림절, 수전절이 있다.

그 가운데 ‘3대 절기’라고 하면 ‘유월절, 초막절, 수장절’이 이에 해당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년 7회의 절기를 드렸지만 여호와는 특별히 이스라엘의 남자들에게 1년 3차에 걸쳐 절기를 지키도록 명했기 때문이다(출 23:14~19).
이 3대 절기만큼은 유대인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반드시 연 3차씩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드려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된 신앙의 자세를 갖추지 않고 외형적으로 절기만 지키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사 1:12~15).

7 20190325-28  30







3대 절기의 의미

이제 구체적으로 3대 절기 속에 감추어진 참 의미를 되새겨 보자.

먼저 날짜를 보면 유월절은 1월 14일(출 12:2,6),
초막절은 7월 15일(레 23:34),
수장절은 9월 24일(학 2:18, 20)이다.
이스라엘의 추수는 일 년에 크게 나누어 봄에는 보리와 밀, 가을에는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나무 열매 등을 수확한다고 한다.
여기서 가을의 수장절을 초막절(신 16:16, 대하 8:13)이라고도 하는 이유는 ‘초막절’의 의미에 추수, 곧 수장(收藏)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 여름의 초막절을 ‘처음 거둔다’는 의미의 초실절(初實節), ‘보리를 추수한다’는 의미의 맥추절(麥秋節, 출 34:22)이라고도 한다.
초막절의 다른 이름인 ‘칠칠절’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았던 오순절(레 23:16)의 바로 전날을 가리킨다.

칠칠은 ‘7×7=49일’을 말하며 오순(五旬)은 ‘다섯 오, 열흘 순(旬)’이니 숫자 오십을 뜻하는 것이다.
다음에서 설명할 초막(성전)의 영적 의미와 관련해 볼 때 말씀으로 지어져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성전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었을 때 거룩한 영, 성령이 임할 수 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초막의 영적인 의미는 우리 육체를 풀이나 꽃(사 40:7, 벧전 1:24)으로 비유하신 것으로 볼 때 우리 몸 된 성전이 풀로 된 장막, 즉 초막(草幕)이 된다. 초림 때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께서 거하실 초막의 실체로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요 2:21, 요 1:32). 그리고 변화산 상에서 베드로가 고백했듯이 그 당시 율법에서 벗어나 예수님과 하나 되어 진리의 말씀으로 지어진 제자들이 또한 진정한 하나님의 초막이요 성전이었다(마 17:4).

3대 절기의 개혁된 의미

진정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곳은 육적인 초막이 아니라(행 17:24) 거룩한 말씀으로 지어진 우리 육체인 성전(고전 3:9, 16, 6:19)인 것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400년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고 감사드리는 절기이다. 애굽 전역에 장자 심판이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으로 흠 없는 어린 양(출 12:1~12)을 잡아 고기는 구워먹고 피는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 재앙에서 건짐을 받은 것에서 유래된 절기다.

구약 율법의 유월절 어린 양은 모형과 그림자(히 10:1)로 참 실체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초림의 예수 그리스도(고전 5:7)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육적인 어린 양을 잡았던 모세 때의 유월절을 기념하지 않고 이제는 죄와 사망 가운데 빠진 인류를 위해 희생 양으로 오신 예수님(요 1:29)의 피와 살 같은 말씀(요 6:51-55) 안에서 성만찬식의 떡과 포도주로 2천년 동안 기념해오고 있다.

또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또 다른 유월절 양식을 먹게 해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기록하고 있다(눅 22:14~20). 

수장절(收藏節)에서 ‘수장(收藏)’의 사전적 의미는 ‘열매를 거두어 곳간에 저장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열매는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의 말씀과 같이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성도’, 즉 첫 열매, 장자들(히 12:23), 시온산에서 새 노래를 부르는 14만 4천(계 7장, 계 14:1, 3)을 의미한다.

이들은 예수님의 피로 사서 나라와 제사장(계 5:9~10)이 될 자들이며 이들이 12지파에 각 지파 일만 이천씩 모여 14만 4000명을 이루게 된다. 12지파가 완성된 후 흰 옷 입은 큰 무리들이 몰려오게 되는데 이들이 예수님의 피로 씻어 그 옷이 희게 된,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계 7:14)이다.

‘피로 씻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셔서 죄를 사함 받았다는 뜻이며 이로써 예수님의 피의 효력이 마지막 계시록 때가 되어 비로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곳간에 저장한다’고 할 때 곳간은 천국을 의미한다. 그 곳간은 육이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마 6:10) 하나님의 나라(계 21:1~2)이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씨(눅 8:11로) 거듭난 천국(마 13:24)의 아들들(마 13:38), 즉,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름 받는 시온산(계 14:1)이다.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해 시온으로 데려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로부터 지식과 명철로 양육(렘 3:14~15)받는다는 그 시온이다. 그 곳에서 이들은 새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예언이 이루어진 실상(요 14:29)을 그 예언의 말씀을 통해 증거하게 되는 것이다.

산 제사 즉, 영적 예배

예레미야는 세 가지 중요한 예언을 했는데 그 중에 첫째가 새 일, 둘째 두 가지 씨 뿌릴 것, 셋째 새 언약 세울 것을 예언했다.
여기서 두 가지 씨마태복음 13장 24~25절의 예수님이 제 밭(자기 밭)에 뿌리시는 좋은 씨와 원수, 즉 마귀가 뿌리는 가라지이다.

예수님의 제 밭, 즉 예수교 세상(마 13:38)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각각 하나님의 말씀과 사단의 말에 의해 자라게 되고 그 가운데 가라지는 단에 묶여 버림을 받게 되고 알곡은 곳간에 데려가게 되는 것(마 24:40~41)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절에 ‘도적같이 추수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재림 때 영으로 오셔서 초림 때 씨 뿌리셨던 그 밭(교회)에서 추수를 하시는데 주인이면서도 도적과 같은 입장이 되시는 이유는 사단의 방해 가운데 참 신앙인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초림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오늘날도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마 23:13)”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깨어있으라(마 24:42, 살전 5:6)’고 하셨는데 참 신앙을 하려고 노력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게 되고 그 말씀의 길(요 14:6)을 따라 진리의 말씀이 있는 곳(계 15:5)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또 예수님께서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눅22:14~20, 마 26:26~29)’이라고 하시면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아버지 나라가 임할 때까지 먹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포도나무(요15:1)이시니 예수님의 피와 살, 즉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재림, 계시록 때 먹는다는 것이다.

즉, 마지막 때 약속의 목자를 통해 열리는 계시의 말씀을 먹고 마음에 새겨서 새 언약을 지켜야만 죄 사함(히 8:10~13)받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수장절 감사 예배’는 수장절을 맞아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첫 열매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은하는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산 제사, 즉 영적 예배를 뜻한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듯이 추수한 곡물이나 과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사람의 몸과 마음과 뜻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또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4:35~36)”라고 말씀과 같이 복음을 전하여 말씀으로 맺어진 열매를 천국 창고인 성전으로 인도하는 전도 즉, 영적 추수를 실천하는 것이 수장절의 진정한 의미이다.

성경 속의 절기는 사람으로 비롯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절기이며 히브리서 4장에서도 사도 바울은 분명히 “그의 안식에 들어갈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아직 남아있다”고 기록했다.

성경 속의 절기가 단지 유대인에게만 한정되어 지키라는 절기가 아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지켜야 할 절기로 남아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구약 절기의 이면 속에 감춰진 온전한 의미를 모른 채 구습에 젖어 지켜 왔던 유대인들의 절기는 무의미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초림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신앙의 목적인 구원과 영생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시대를 거울삼고 ‘성경적 절기의 참 의미’를 깨달아 그에 합당하게 드리는 절기(감사 예배)가 거룩한 산 제사인 영적 예배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참 절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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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8545) 테무라(emûwrâh) תְּמוּרָה    

1. 교환하다.  2. 교환.  3. 교환된 물건 : 레 27:10
발음 [ temûwrâh ]
어원 / 417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회 사용
뜻풀이부

I. 명사, 여성 교환하다.
 1. 명사, 여성 교환, 매매, 물물 교환, 룻 4:7, 욥 15:31.
   a. 명사, 여성 [주]교환된 물건 : 레 27:10, 33, 욥 28:17
 2. 명사, 여성 배상, 보상, 보수 징벌, 보응, 욥 15:31, 20:18.

1-15절은 배상에 관한 법
16-31절은 도덕에 관한 법에 대하여 말씀

1. 도둑질에 따른 배상 (1~4절)

하나님께서 정하신 손해 배상은 상당히 엄격합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해서 도살하거나 팔면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으라’(1)고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끼친 만큼만 배상하도록 하는데, 도둑질 한 경우에는 다섯 배나 네 배로 갚아야 하고, 만약에 배상할 능력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둑질한 것을 배상하라’(3)고 엄격하게 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둑질한 짐승이 살아서 그의 손에 아직 있으면 ‘같은 종류의 짐승으로 갑절을 배상하도록’(4)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생계형 도둑이 아니라 이스라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소와 양 그리고 나귀와 같은 짐승을 도둑질한 경우에 대한 말씀입니다. 소는 농경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권에서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소는 힘든 농사일과 각종 짐 부리는 일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도 하면서, 소의 각종 부산물은 주요 식량자원이자 원자재로 생활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양도 많은 문화권에서 인간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경제적 동물의 이용 외에도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역할을 맡아 왔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생활에서 양은 중요한 희생동물임과 동시에 소유한 양의 수가 재산을 뜻했고, 털과 가죽과 고기는 이스라엘 가정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짐승입니다. 따라서 이처럼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 경제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나 양 그리고 나귀와 같은 짐승을 도둑질하는 것에 대해서 무거운 배상을 하게 한 것은 이웃의 재산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최근 청소년 범죄 연령이 낮아지고 잔혹성이 커지다보니 촉법소년 연령을 낮추거나 폐지하자는 의견을 둘러싸고 찬반 논쟁이 있습니다. 찬성 측에서는 청소년들이 촉법소년이라는 법을 악용하고, 낮은 처벌 수위로 재범률이 높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아직 미성숙한 단계의 청소년에게 교화의 기회가 제공되어야 하고, 꼭 처벌만이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대한민국헌법 제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처럼 법은 힘 있는 사람에게는 거미줄이고, 없는 사람에게는 오랏줄입니다. ‘사기’를 쓴 사마천(司馬遷)도 ‘바늘을 훔친 자는 주륙을 당하고,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는 말로 고무줄 같은 법집행을 개탄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배상제도의 특징은 다른 사람의 큰 재산을 도둑질한 자는 작은 재산을 도둑질한 사람보다 더 무거운 책임이 요구된다는 점입니다.

본문에는 남의 것을 훔치려는 도둑과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는 주인 사이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2-3a 도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은 후에는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둑이 한밤중에 남의 집에 침입했다가 죽게 되더라도 그 도둑을 죽인 집 주인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전기가 없기에 침입자를 알아보려고 불을 켜다가 주인이 먼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주인이 그를 죽여도 정당방위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식별이 가능한 해가 뜬 후라면 도둑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고, 그를 벌하도록 재판장에게 데려가게 하셨습니다. 이 규정은 한밤중에 도둑이 들어 놀란 사람과 대낮에 들어온 도둑 모두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2. 타인의 밭이나 곡식 등에 대한 배상 (5~6절)

(5) 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짐승을 먹이다가 자기의 짐승을 놓아 남의 밭에서 먹게 하면 자기 밭의 가장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할지니라

가축을 풀어놓아 남의 밭이나 포도원에 들어가 먹게 하면, 즉 남의 밭이나 포도원을 훼손하면 가축의 소유자는 자기 밭의 제일 좋은 산출물과 포도원에서 최상품의 포도나 포도나무로 배상해야 합니다. 타인의 재물을 그만큼 소중히 여기라는 의미입니다. 요즘 길을 다니다보면 길바닥이나 심지어는 도로에 내동댕이쳐있는 전동킥보드를 심심치 않게 목격합니다. 무슨 심보일까요? 자기 것이라면 절대로 저렇게 하지 않을 것인데 말입니다. 내 것이 소중하면 남의 것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예전에 교외에 있는 조그마한 찜질방을 갔는데, 월요일 낮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한 무리가 들어왔는데 그분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목회자들이 월례회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샤워를 하려고 샤워실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샤워실 곳곳에 수건과 대야가 지저분하게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분명 제 앞에서 들어간 일행은 목회자들이었는데 말입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나중에 주인이라도 보면 어쩔까 싶어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수건을 다 수거해서 수거함에 넣고, 대야도 정돈하고 나왔습니다.

(6) 불이 나서 가시나무에 댕겨 낟가리나 거두지 못한 곡식이나 밭을 태우면 불 놓은 자가 반드시 배상할지니라

농사철이 시작되면 땅 속에서 월동하는 해충의 방제를 위해 논.밭두렁이 태우기나 잡풀 소각 등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한 화재가 빈번해지자, 산림인접지역에서는 논두렁 태우기를 금지하고 있고, 부득이하게 논.밭두렁 소각이 필요할 때는 시군 산림담당부서의 허가를 받아 공동 소각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가시덤불은 불에 타기 쉽습니다. 따라서 자칫하면 이웃의 재산에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여하한 목적으로 들판에 불을 놓는 경우 주의할 것을 당부함과 동시에 남의 곡식이나 밭을 불태우는 결과를 초래했다면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3. 위탁 물품이나 짐승에 대한 배상과 소유권 분쟁 시의 배상 (7~13절)

7절과 8절은 위탁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람이 돈이나 물품을 이웃에게 맡겼는데, 그 이웃집에서 도둑맞았는데 그 도둑이 잡히면 그 도둑질한 자는 갑절로 배상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도둑이 잡히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위탁받은 사람은 위탁물을 잘 보관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위탁물을 잃어버리거나 도둑을 맞았다면 손실을 갚든지, 재판장(또는 하나님)에게 가서 자신이 잘못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받도록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재판장으로부터 잘못이 없다고 인정받으면 물품을 위탁한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을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9절은 어떤 잃어버린 물건에 대하여 서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소유권 분쟁이 생길 경우, 그 소유권을 주장하는 쌍방은 재판장(또는 하나님)에게 가서 재판을 받아야 하고, 재판장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상대편에게 갑절을 배상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10-11절에서는 나귀, 소 그리고 양과 같은 짐승을 이웃에게 맡겼는데 맡긴 짐승이 죽거나 다치거나 아무도 안 볼 때 끌려갔다면, 맡은 자는 그 이웃의 것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여호와께 맹세하면, 맡긴 자는 그대로 믿어야 하고, 맡은 자는 배상하지 않아도 됩니다(10~11절). 그러나 도둑맞았다면 맡은 자는 맡긴 자에게 배상해야 합니다(12절). 그리고 만일 맡은 짐승들이 사나운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면, 그것을 가져다가 증거로 내놓으면 그 찢긴 것에 대해서는 배상하지 않아도 됩니다(13절).

4. 빌려온 짐승에 대한 배상 (14~15절)

이웃에게서 빌려온 짐승이 다치거나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빌려온 짐승의 주인이 없을 때, 다치거나 죽었다면 반드시 배상해야 합니다(14). 그런데 그 짐승의 주인이 함께 있을 때 다치거나 죽었다면 배상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사용료를 내기로 하고 빌려온 짐승이 다치거나 죽었다면 배상하지 않아도 됩니다(15).

이상에서 배상에 대한 규정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중요한 점은 타인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반드시 배상하도록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배상하되 경우에 따라서 두 배, 네 배, 다섯 배로 배상하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도둑과 같이 나쁜 의도를 갖고 타인에게 피해를 입혔는데 배상할 능력이 없으면 몸을 팔아서라도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의도치 않게 피해를 주었다 할지라도 타인의 것은 자신의 것만큼 소중하기 때문에 배상하되 그보다 더 좋은 것으로 배상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남의 물건을 위탁받았으면 마치 자기 것처럼 책임감을 갖고 지켜야 하며, 만약 위탁한 것에 문제가 발생했다면 맡은 사람은 배상하거나, 책임이 없음을 재판장에게 가서 판결 받아야 하며, 맡은 사람이 자신의 무죄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맡긴 사람을 더 이상 그를 의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계명과 함께 언약서를 주신 이유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해, 즉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자유는 나 한 사람만의 자유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배상에 대한 법이 의도하는 바는 공동체 전체의 화합과 평화입니다. 내 것이 소중한 만큼 이웃의 것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서로가 서로를 믿고 신뢰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의 선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철저한 고백이자 공동체 전체를 위한 온전한 내려놓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한 것도 대단한데, 그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로 갚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은 남을 속여서 부를 축적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자기 관할 구역의 세금을 미리 로마 제국에 선납하고 자기 마음대로 더 거두어서 부를 축적했습니다. 즉 그는 부당하게 부를 축적했습니다. 따라서 재산의 절반은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남은 절반으로 네 배의 배상을 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재산을 공동체를 위해 완전히 포기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재물을 바라보던 그는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는 율법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게 됩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동족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세리 삭개오가 아니라, 존경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삭개오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삭개오와 같이 율법 안에서 자유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웃의 것을 소중히 여기며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갈 것을 결단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배상에 대한 법에 대해 살펴보면서 내 것만 소중히 여겼던 완악한 우리의 실상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본 삭개오는 내 것이 소중한 만큼 이웃의 것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의하게 모은 재산 모두를 공동체를 위해 내려놓았습니다.
이웃의 것을 탐하지 않게 도와주시고 삭개오와 같이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봄으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으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2.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둑질한 것을 배상하라는 말씀을 오늘 날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3. 자기 밭의 가장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하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4. 하나님께서 배상에 대한 법을 주신 근본적인 이유는?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키라고 하는 법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문 16절부터 17절은 성도덕과 올바른 신앙법에 대해, 18절부터 20절은 이방 풍습에 대한 법에 대해, 21절부터 27절은 이스라엘 백성 중 약자에 대한 법에 대해, 28절부터 31절은 하나님에 대한 법입니다.

성도덕과 올바른 신앙(16-17절)

(16-17) 사람이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납폐금을 주고 아내로 삼을 것이요 만일 처녀의 아버지가 딸을 그에게 주기를 거절하면 그는 처녀에게 납폐금으로 돈을 낼지니라

만약 공동체 내에서 약혼하지 않은 여자를 꾀어 동침하였을 경우에는 납폐금을 주고 아내를 삼아야 합니다. 납폐금이란 혼인 때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 예물이나 돈을 의미하고, 성적인 결합은 상대방과 하나가 됨을 뜻하기에 약혼하지 않은 여자의 삶을 책임지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의 아버지가 결혼을 거절하게 되면 납폐금은 지급해야 했습니다. 납폐금을 얼마 지급했는지 정확히 언급이 되어 있지 않지만 신명기 22장 29절에 근거하여 은 오셉 세겔을 주었을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이방 풍습에 관한 법(18-20절)

이어 이방 풍습에 대한 세 가지 명령이 나타납니다.

(18-20)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이 세 가지 명령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위협하는 이방인들의 풍습에 관한 것입니다. 18절에 나오는 ‘무당’은 마법사, 요술사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여성형이므로 ‘신접한 여인’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무당에 대해서는 살려두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점술은 고대근동 사회에서 흔히 행해졌던 종교 행위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무당들을 찾아 다니며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 간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음을 당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은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들과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에게는 돕는 배필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배필로 하와를 보내 주셨습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의 창조 섭리는 부부로 맺어진 남녀의 성적인 결합과 이로 인한 자손의 번성함입니다. 그러나 이런 창조 섭리를 벗어나는 부끄러운 행위 즉, 짐승과 교합하는 사람은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하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멸하게 된다는 것은 단지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멸이라는 개념은 생명을 포함해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까지도 함께 파괴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안에 스며들어 있던 이방 풍습과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를 강하게 하십니다.

21절부터 27절은 이스라엘 백성 중 약자에 대한 법에 대해 설명합니다.

공동체 중 약자에 관한 법(21-27절)

(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출애굽기 12장 37-38절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수많은 잡족’도 함께 출애굽했다고 증언합니다. 이들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지만 그들도 함께 광야생활을 했고, 가나안 땅에 이르러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본문에서도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고 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나그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애굽에서 나그네 생활을 했기에 그들의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나그네들을 학대하지 않고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기억하는 동시에 나그네였던 자신들의 정체성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회적 약자인 과부나 고아에 대해서도 해롭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들은 사회에서 가장 천대를 받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이기에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을 학대하지 않고 오히려 섬겨야 합니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 중 이들의 인권을 지속적으로 짓밟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을 벌하시고, 고아와 과부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경고를 더하십니다. 이어서 공동체의 채무관계에 대한 법이 이어집니다.

(25-27)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공동체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었을 경우 채권자처럼 하지 말고, 이자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당시 고대 근동지방의 이자는 곡식에 대해서 33.3퍼센트에 달했고, 은을 빌릴 경우에 20~25퍼센트인 것을 감안하면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인애와 사랑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전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심지어 담보로 가지고 있던 물건도 해가 지기 전에 돌려줄 정도로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서로를 향한 사랑이 흘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따라 가는 삶이 아니라 사랑을 따라 가는 삶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과 고아, 과부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으며 지금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 있는 우리들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의 시선은 어디를 향해야 하겠습니까? 더 많은 것을 얻고자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는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소외된 모두에게 손을 내밀어서 세상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교회 내에서만 사랑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그 사랑이 전해지도록 주님의 통로 역할을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법(28-31절)

28절부터 31절은 하나님에 관한 법에 대하여 열거합니다.

(28)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28절에 재판장의 원어는 ‘엘로힘’입니다. 이 단어는 통상적으로 하나님을 지칭하기에 본문에서 나오는 ‘재판장’으로 해석하기 보다 ‘하나님’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에 대한 모독과 백성의 지도자들에 대한 저주를 금하는 내용으로 보아야 합니다. 본문을 다른 성경 번역본에서는 ‘재판장’이 아니라 대부분 ‘하나님’으로 번역합니다. 또한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섬겨야 하는 대상임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제물 드림에 대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29-30) 너는 네가 추수한 것과 네가 짜낸 즙을 바치기를 더디하지 말지며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네 소와 양도 그와 같이 하되 이레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여드레 만에 내게 줄지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 위해 예물을 드릴 때는 먼저 지체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지체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물질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는 고린도후서 9장 7절과 같이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원하여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곡물에 대해서는 처음 추수한 것을 드리고, 짐승에 대해서는 칠일 동안에는 어미의 젖을 먹게 하고, 여덟째 날에 하나님께 바치게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주어야 한다는 말은 이방 종교에서처럼 사람을 제단에 바치는 인신공양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 13장 13절 대속의 개념으로 모든 탄생을 대표하는 장자를 받으시는 대신 레위인을 대속물로 받아 하나님의 소유로 삼고, 성소를 관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에 대해 언급하며 마무리 됩니다.

(31)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것을 개에게 던질지니라

앞서 말한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법에 대한 결과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거룩은 무엇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까?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의 모습으로는 그 사람의 거룩함을 볼 수 없습니다. 매일같이 먹는 음식이야 말로 거룩한 삶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기에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 즉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아야 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먹는 행위조차 거룩해야 한다면 우리의 일상이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거룩한 성도의 삶을 보이시겠습니까? 그것은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가 될 때에 비로소 삶에서도 거룩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실 때 우리가 하는 언행과 먹고 마시는 그 모든 것이 주님 안에서 거룩함을 이루어야 함을 기억하며, 주님과 동행하시는 날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 도
하나님, 우리가 주님이 주신 법들을 지키며 살아가는 목적이 율법적인 삶이 아니라 거룩한 주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것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삶 속에서 주님의 거룩한 자녀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세상의 논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기를 소망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는 신앙을 위협하는 이방인들의 풍습을 금하셨습니다. 혹시 나의 삶에 신앙과 별개로 이방인들의 풍습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2. 하나님은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원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바라보아야 하는 주변에 소외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살펴보고 무엇으로 섬겨야 하는지 묵상해 봅시다.
3.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지체없이 드려야 합니다. 나의 삶에 주님께 드려야 하는데, 지체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4. 거룩의 삶은 일상입니다. 오늘 하루 일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고 실천합시다.


속죄론(속죄론)

Ⅰ. Anselm(11세기 스콜라 신학의 아버지)이전의 속죄론

1. 이레네우스(Irenaeus of Lyon. 115- )의 속죄론

총괄갱신설 (Racapitulation Theology)을 주장하였다.

아담이 범죄 하므로 온 인류가 초대된 저주에 임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가 순종하므로 온 인류가 총괄적으로 갱신되게 되었다. 아담 이전에 에덴동산이 있었듯이 둘째 아담이 총괄되고 난 후에는 지상 천년왕국이 있다. Irenaeus는 예수님이 온 인류의 죄를 다 속죄하셨다는 이야기인지, 애매한 주장을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고, 사람을 해방시켰다고도 하였다.

총괄갱신설은 이론이 뚜렷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가리켜 Esoteric(무언가 비밀스러운, 비교(秘敎)적인, 비밀 종교적인)한 속죄설이라 한다.

2. 오리게네스(Origen of Alexandria 185-.)와 그레고리(Gergory of Nyssa,320-.)의 속죄론

이 두 사람은 속전신학(Ransom Theology)을 주장했는데, 이것을 속전설 또는 속상설이라고 한다

▶ Origen의 이론

그리스도의 속죄는 사단에게 지불한 속전이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미끼를 삼키고 신성의 낚시에 걸려들었다. 그래서 지옥에 있는 영혼까지 사단의 권세에서 자유 함을 받았다.  만인구원설을 주장한 것이 되고.  나중에는 사단, 귀신까지도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였다.  공개적인 Exoteric 이론이다.

▶ Gergory of Nyssa의 주장

   사단이 기만 당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속상설은 사단 기만설이다.

   ⑴ 기만자가 기만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⑵ 사단도 기만당하므로 유익을 얻었다. 사단도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3. 아우구스틴과 그레고리(Gregory 540-)Ⅰ세의 속죄론

   이 두 사람은 형벌 대속설을 주장하였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스스로 죄와 죽음의 지배아래 떨어졌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갚으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는 속죄의 죽음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형벌 대속설을 주장한 것이다.

▶ GregoryⅠ세는 칼빈과 비슷한 형벌 대속설을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인간이 죄 없는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통해 진노를 면하고 죄의 부채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후대의 칼빈이 주장한 형벌 대속설과 같은 맥락인 것을 보게 된다.

Ⅱ. 안셂(Anselm)에서 종교개혁까지의 속죄론

1. Anselm(1033~1109)의 속죄론

그는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나”(Cur Deus Homer?)란 저서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 속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속죄론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 이의 속죄론을 만족설(Satisfaction Theology)=상거래설 이라고 한다.

   ⑴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계약아래 있었으나, 인간은 범죄하고 하나님 영광을 도둑질 또는 더럽혔다.

        따라서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은 회복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속죄는 절대 필요한 것이라 하여  속죄 절대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⑵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길은 형법적으로 형벌을 부과하던지 아니면 민법적으로 손해배상을 해야만 한다.

   ⑶ 인간은 배상할 능력이 없으므로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셔서 무죄하신 분이 자원해서

       수난을 받으심으로 하나님께 무한한 영광을 돌리셨다.

       그리스도는 수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손해배상을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를 민법적 속죄 배상으로 본 것이다.

  ⑷ 이 업적은 성례전을 통해 죄인들에게 이전된다.  성례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손해배상의 업적이 이전된다.  

       Satisfaction Theology란 하나님이 손해배상을 다 받으시고 만족하신 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 거래설 이라고도 한다

           ◉ Anselm의 이론에 대한 평가

① 속죄의 객관성과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공헌이다.

②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대리적 죽음이라는 개념이 약하다.

    대리적(Vicarious) 개념이 약하고 단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성부의 영광을 위해 자발적으로 받쳐진 성물로 보았다.  

    입다가 자기 딸을 받친 것같이 그렇게 보았다.

③ 그리스도의 공로가 인간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신앙에 대한 설명이 없다. 성례전적인 요소만 강조했다.  

    그리스도의 공로가 믿음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성례전적으로 전달된다고 본 것이다.

④ 그리스도의 죽으심만 강조했고, 삶에도 구속적인 측면이 있는 것을 부인했다.

    종교 개혁가들은 그리스도의 죄 없는 삶을 굉장히 중요시 했던 것이다.

⑤ 공법과 사법 가운데 양자 택일하는 것은 아니다. 개혁가들은 둘 다 보았으며, 주로 공법 쪽으로 보았던 것이다.

2. 아벨라드(Peter Abelard, 프,1079-1142)의 속죄론

도덕감화설(Moral unifluence theology)을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는데 죄인의 고난을 체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영향을 주어서 회개로 이끈다는 도덕 감화설이다

◉ 아벨라드 속죄론의 문제점.

   ① 속죄의 동기로 사랑만 강조되었지 공의는 무시되었다.

   ② 속죄의 객관성이 무시되고 주관적인 화해만 강조되었다.

   ③ 예수님을 감화주시는 도덕 교사로 전락시켰다.

3. 롬발드(Peter Lombard)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7-1274)의 속죄론

 안셀름과 아벨라드의 주장을 혼합한 혼합적 속죄관이다.

  (1) 속죄는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속죄의 필요성을 부인하였다, 하나님은 배상없이도 죄를 용서하실 수 있었다.

  (2) 그러나 하나님은 배상을 요구하는 길을 택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도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나 위대한 사랑의 표시였다.

       삶과 죽으심으로 충분한   배상이 되었고 인간은 성례전을 통해 이 업적을 전가 받았다.

  (3) 아퀴나스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네 가지 측면에서 죄인의 구원을 가져왔다고 한다.

     ① 죄인들에게 구원의 축복을 받게 하는 공로    
     ②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충분히 만족한 대속     
     ③ 하나님이 기뻐하신 자원적 희생     
     ④ 죄인들을 노예와 형벌에서 구속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4. 던스 스코터스(Duns Scotus, 1255-1308)의 속죄론

  던스는 인정론(Acceptilation Theory)이라는 속죄론을 주장하였다.

(1) 프란체스코 소속으로 실제론과 유명론의 다리를 놓은 사람으로서 속죄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으나

    ‘하나님의 전횡적 의지’에 의해 결정되었다.

     죄에 대한 배상은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 배상자가 꼭 그리스도일 필요는 없다.  천사일 수도 있다.

(2) 그리스도의 공로는 유한한 인성의 공로이므로 죄의 부채에 미치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즐겨 받으시고 인정해 주셨다는 것

Ⅲ. 종교개혁기의 속죄론

1. Anselm과 개혁가들의 속죄론 비교

⑴ 속죄의 필요성 :

    Anselm ― 절대 필요성을 주장. 하나님 것 훔치고 배상해야 한다는 개념.

   개혁가 ― 필요하기는 한데 상대적 필요성을 주장.

⑵ 죄의 개념∶

    Anselm ― 하나님의 영광 침해요, 손해의 배상을 동반한다.

    개혁가 ― 하나님의 율법 위반으로, 형벌을 동반한다.

⑶ 속죄의 개념

    Anselm ― 속죄란 민법적으로 파악하여 하나님의 영광 회복을 위한 손해배상으로 보았다.

    개혁가 ― 공의를 만족시키는 형법적으로 파악하여,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희생적 형벌이었다.

                  형벌대속설(Penal Substitution)

⑷ 그리스도의 사역

     Anselm ― 그리스도의 죽으심만 강조하였다.

     개혁가 ― 그리스도의 속죄는  능동적으로 죄 없는 삶을 사셨다.수동적으로 죄 있는 자처럼 죽으셨다.

⑸ 그리스도의 공로가 전가되는 방법

     Anselm ― 성례전적 이전을 강조 ― 성례전을 통하여 이전된다는 주장.

     개혁가 ― 믿음에 의해 죄는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義는 죄인에게 전가된다.

2. 소키너스파(Sociniem)의 속죄론

모범설 (Example Theory)을 주장하였다, 대속적인 속죄 개념을 전면 부인했고 속죄 필요성을 부인했다. 그리스도는 삶과 죽음을 통해 믿음과 순종의 모범   을 보이셨을 뿐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 사함과 화  목의 기초로 결합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3. 그로티우스(Hugo Grotius)의 속죄론

Hugo Grotius는 항론파의 알미니안 주의자로서 화란에서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1621년 파리로 도망갔다.

1617년 「the Satisfaction of Christ」(그리스도의 관점) 라는 책에서 율법 위반에 대한 형벌은 엄격히 집행되지 않는다고 했고, 고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거룩한 불쾌감을 표현하신 것이다. 꼭 안 죽어도 되는데  율법이 꼭 그렇게 실행되지 않는데, 그리스도가 죽으신 이유는 하나님이 죄에 대한 거룩한 불쾌감을 나타내신 것이다. 따라서 우주적 통치 방법으로 사용하신 것이다. 즉 율법 위반을 방지한다는 의미에서 우주적 통치의 수단으로 그리스도를 사용하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일벌백계(一罰百戒)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통치설(Goverment Theory=정치적 속죄설)이라 한다.

   ◉ 이 주장의 문제점

① 속죄의 절대적 필요성을 부인했다는 점이다.

② 속죄는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형벌 대속이 아니라,

    미래 죄 방지를 위한 모범일 뿐이라 하여  속죄의 가치를 떨어뜨린 점이다.

4. 아르미니안(Arminian)주의 속죄론

(1) 그리스도의 속죄는 완전한 공의의 완전한 대속물로 볼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형벌을 가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완전한 대속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적 형벌이 아니라 자선의 대속이라고 하였다.

(2) 그리스도의 속죄 대상은 모든 사람이나(일반 속죄설), 그 효과적인 적용은 궁극적으로 죄인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 
알미니안 주의자는 속죄의 범위를 확대했고 속죄의 효력은 엄청나게 약화시켰다.
그러나 도르트 대회에서는 이들의 보편적 속죄설의 잘못을 지적하고, 제한 속죄설을 채택하였다.

5. 사우머르(Saumur)파의 속죄론

이들은 도르트회의 엄격한 칼빈주의를 부드럽게 하고 동시에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잘못을 피하려 절충설(Amyraldus, Placaeus)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가설적 만인 구원설을 주장했다, 하나님의 제 1작정과 제 2작정이 있다고 말하였다..

▶제 1 작정 ―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모든 사람 위해 죽게 하셨다.(일반속    죄설)

▶제 2 작정 ― 추가적 작정으로서 그대로 두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므로 은    혜를 베푸실 대상을 선택하셨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한 것을 보나 부자연스러운 것을 면할 수 없다.

Ⅳ. 종교개혁 이후의 속죄론

1. 스코틀랜드(Scotland)의 Marrow(정수,알맹이)논쟁(1717~1722)

Marrow 논쟁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서 일어난 논쟁이다.

▶ Scotland 역사∶

1560년 John Knox가 장로교를 국교로 하였다.

1603년 James Ⅰ세와 Charles Ⅰ세가 Willam Load라는 대주교를 통하여 James Ⅰ세 때부터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한 왕이 통치를 한다. 그러나 행정적으로 한 나라가 된 것은 아니었다. 한 나라가 된 것은 1703년의 일이다. Charles Ⅰ세가 스코틀랜드에 감독정치를 강요하였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이제까지 장로 정치를 해왔는데 감독정치를 강요하니까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영국의 의회 청교도들과 연합하여, ‘거룩한 연맹’을 맺는다. 이 사람들을 언약주의자(Covenanters)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 사람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다.

1689년 William Mary가 공동으로 장로정체를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17세기 한 세기동안 너무 심한 율법 주의적 장로교였다.

18세기 초 Moderate파(Calvin주의도 완화하고, 신앙생활도 완화하는 파)가 스코틀랜드에서 득세하게 되었다. 득세를 하게 되자 이들은 자꾸 신학적인 변질을 하게 된다. 자꾸 변질을 하게 되자 정통적인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Free Church를 만들게 되었다. 1843년 Thomas Chalmers를 중심으로 Free Church로 분리하게 된 것이다.

▶ Marrow 논쟁 :

18세기초에 Moderate파와 Moderate파에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의 문제로 일어난 사건이다. 18세기 초에 두 가지 파가 나타났다.

⑴ 신 율법주의(Neo-Nomianism = Moderates)의 속죄론

 18세기 초 Scotland 국가교회가 주도하던 파로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가능케 했고, 인간에게 먼저 회개와 믿음을 요구하셨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 것이 아니고,  회개와 믿음(신앙과 회개=회심 ― 이것을 신율법이라 하였다)으로 되는 것이라 하였다.  신 율법에 순종한 의가 칭의의 근거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이름만 바꾼 Arminianism 이었다.

⑵ 머로우(Marrow Men)파 의 속죄론

 1647년 Edward Fish가 「Marrow of Modern Pivinity」(현대 신학의 정수)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신 율법주의를 비판하자, 이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을 Marrow Men이라고 불렀다. 18세기에 이를 따르는Marrow Men 중에는 James Hog , Thomas Boston등이 있었다.Marrow Men의 주장은 칼빈주의와 비슷하면서 Saumur주의와 비슷했다.

① 그리스도는 택함 받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며 선택적 사랑 (Electing love)을 강조하였다.

② Giving love를 강조하고,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죽음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즉각적 신뢰를 하게 되면 그리스도와 합일이 되고 그리스도와 합일이 오면, 그 다음에 선행을 행할 능력이

   오고, 죄를 버릴 능력이 온다는 것이다.  칼빈주의와 비슷한데, Saumur가 섞인 완화된 칼빈주의다.

   Marrow Men은 Moderates를 율법주의자라고 부르고, Moderates는 Marrow Men을 율법 폐기론자라고 불렀다.

   1720년 Scotland의 Neo-Nomianism(=Moderates)들은 Marrow Men을 율법폐기론 자라 하여 정죄 하였다.

2. 실라이마허(Schleiermacher)의 속죄론

    실라이마허는 신비설(Mystical Theory)을 주장했다

▶ Schleiermacher의 주장

대속 교리를 완전 부인하고 그리스도는 죄성을 소유한 인간이나 성령의 감화로 죄성이 범죄로 나타나지 않도록 보호를 받았다. 그리스도의 활동은 창조적인 것이어서 심령을 감화시키며, 생명을 주는 영의 위대한 힘이며, 그는 자발적인 순종과 죽음을 통해 인간에게 심오한 주관적 변화를 일으켜서 인간의 “신 의식성”을 높인다고 하였다.

                              예수    보통인간

인간---신 망각성      0%       100%

           신 의식성      100%     0%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은 보통 인간에게 “신 의식성”을 높이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신비설이라 한다.

▶ 신비설은 도덕 감화설과 공통점 및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가지고 있다.

      공통점 ― 영향을 미쳐서 변화를 초래한다는 것.

      차이점 ― 도덕 감화설은 도덕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인데, 신비설은 잠재 의식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 Schleiermacher는 현대 신학에 영향을 크게 주었다. 그는 현대 조직신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 조직신학은 Schleiermacher 이후로 객관성을 상실하고 주관화되었다. 그래서 학자마다 제각기 주장하는 것이 다른 것을 보게된다.  Schleiermacher가 영향은 크게 미쳤으나 좋은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고 엄청나게 악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3. 리츨 (Ritschl)의 속죄론

리츨의 견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실과 그 가능성을 부정하고, 화목은 완전히 하나님에 대한 죄인의 태도의 변화에서 생겨진다고 하였다.

▶ Ritschl의 개념은 타원에 두 개의 중심이 있듯이, 하나는 그리스도의 속죄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완전히 윤리적인 나라이면서, 현세적인 나라이다. 영적인 나라가 아니다. 이 공동체를 위해서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죄란 공동체에 대한 반역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속죄라는 것은 이 공동체 안에서 승리하는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속죄라고 주장하였다.

▶ 속죄는 일차적으로 공동체에 관련되는 것이고, 이차적으로 그 공동체에 속한 개인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속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창설하셨고, 그리스도의 속죄는 공동체 안에서 순종, 신뢰, 세상 향한 승리 의식을 일으키는 것이다.

Ritschl을 따르는 사람은 공동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Ritschl의 속죄론은 개인의 형벌 대속과는 무관한 것을 보게된다.

4. 미국 후기 뉴잉글랜드파(New England Theology)의 속죄론

Joseph Bellamy, Samuel Hopking은 Timothy Dwight의 제자들인데 Yale 大에서 1820년에 큰 부흥(제 2차 대각성운동)을 일으켰던 사람들이다. Timothy Dwight의 외할아버지 Jonathan Edward 때에는 철저한 칼빈주의 였다. 그러나 Timothy Dwight 때에 와서는 약간 수정 칼빈주의(Modifier Calvinism)로 수정 되었다.  이후 Joseph Bellamy 때에 와서는 완전히 알미니안주의로 빠졌다. 조금 지나서 Yale 大에서 Horace Bushnell이 나오게 됐는데. 그는 완전히 자유주의자(Liberalism)가 되었다. 이것을 가리켜 New England Theology라고 한다.

Joseph Bellamy,와 Samuel Hopking의 속죄론은 통치설과 간접 전가설을 따랐으나  Horace Bushnell은 “인간이 왜 죄인이냐?”며 인간의 죄성을 점점 부인하고 인간은 착한 존재라 하고, 그러므로 인간은 양육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착한 인간을 잘 길러주면 착한 인간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속죄론은 도덕 감화설이었다. 그의 저서 ‘대리적 희생「Christian Nerture Vicarious Sacrifice」'에서 도덕 감화설을 취하였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셔야 한다는 관념을 거절하고,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 되어 사랑과 순종의 새 정신을 보이는 것만이 유일한 요구 조건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그의 모든 거룩과 고난받으신 사랑으로서 하나님을 계시하셨으니 이것이 속죄라고 하였다.

▶ 유화(宥和 Propitiatiation)설

신의 진노를 달랜다는 것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달래진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속죄의 한 단면 가운데에는 Propitiatiation이라는 단면이 있다. (레온 모리스가 Propitiatiation 개념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썼는데 그는 성경의 속죄 가운데에는 Propitiatiation 개념이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하였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2일 / 03- 09-2024(토)
출애굽기 22:1-31
찬송 / 장(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배상하라(출애굽기 22:1)

갚을찌니라.
배상

3절.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적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7919) 배상할 것이(369)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 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4376)

7919. 사칼(
sâkal)  שָׂכַל  

1. 바라보다
2. 신중하다
3. 피엘형 : 창48:14.
발음 [ sâkal ]
구약 성경  / 61회 사용

369. 아인( ’ayin)  אַיִן     

1. 무.  2. ~아니다.  3. ~ 없는
발음 [ ’ayin ]
어원  /  연계형 אֵין, ‘존재하지 않다’는 어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무, 공허, 진공, 사 40:23] :
구약 성경  /  787회 사용
4376.  마카르(mâkar) מָכַר   
1. 팔다.   2. 약혼시키다.  3. 민족을 팔다
발음 [ mâkar ]
구약 성경  / 80회 사용


해 돋은 후
- 가택 침입자를 죽였을 경우, 야간과 달리 주간에 살인죄가 성립되는 이유는 밝을 때에는 이웃의 도움이나 기타 방법으로 그를 사로잡거나 내쫓음으로써 살인만은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정당 방어의 차원을 넘어 과잉 방어의 경우에는 주인이 그 책임을 지도록 규정하고 있는 본 규례는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인권이 부정되어지는 것을 금하고 있는 모세 율법의 탁월성을 잘 보여준다<레 25장 강해, 모세의 율법과 고대의 법전들>.

몸을 팔아... 배상할 것이요
- 이처럼 모세 율법이 도둑질에 대하여 엄격한 형벌을 가하고 있는 목적은 사람들에게 큰 경고를 주어 도둑질을 금하게 하려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 이후 타락한 인간에게 주신 명령은 땀흘려 일한 대가로 얻은 소득을 가지고 생활하라는 것이었다(창 3:19).
그런데 도둑질은 이에 역행하여 자신은 땀흘림이 없이 타인이 수고한 대가를 가로채려는 패역 행위이다.
따라서 성경은 이러한 도둑질에 대하여 수차 엄격한 금지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신 23:24; 엡 4:28; 벧전 4:15).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1일 / 03- 08-2024(금)
출애굽기 21:1-36
찬송 / 349장(나 주의 도움 받고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귀를 뚫을 것이라(출애굽기 21:6)

재판장(*, 엘로힘)
- 이는 본래 지존자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명칭이다(창 24:3;수 2:11. 그러므로 70인역은 이를 '하나님의 판단'으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추측컨대 이는 공개된 장소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엄숙히 판단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귀를 뚫을 것이라
- 고대 근동의 관습으로 이것은 완전한 예속(隸屬)과 순종을 나타내는 의식이었던 것같다(Knobel). 왜냐하면 고대 근동인들에게 있어서 귀는 '예속의 기관'이었으니 귀를 뚫린다는 것은 곧 '자유의 상실'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후일 칼타고인들은 종의 표식으로 종의 귀에 귀걸이를 매달았다고 한다(J. P. Lange). 한편 키케르(Cicero, B. C. 106-43)는 그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리비아 노예에게 '네 귀를 충분히 뚫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다.

십계명과 613가지 규례

하나님의 교회 성도들인 우리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하여 자녀를 낳습니다.
자녀를 낳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법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은 종에 대한 법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남종을 향한 5조이고, 7~11절은 여종을 향한 5조입니다.
종들은 6년간은 의무적으로 종살이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7년 째 되는 해에는 무조건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인과 살다보니 주인이 너무나 좋고, 나가서 자유인으로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주인의 종으로 사는 것이 더 좋다는 결심이 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처리하는 법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송곳으로 귀를 뚫은 종은 어떤 종입니까?
이 시대 스스로 자진하여 귀를 뚫은 종은 어떤 그리스도인입니까?

첫째, 종신토록 상전을 섬기기로 자원함(영원한 하나님의 종) 6절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

다른 사람의 종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종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에는 종이 되는 경우를 몇 가지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1. 빚을 갚지 못해서 종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레 25:39).
2. 도적질한 것을 배상할 능력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한 것을 배상하라고 하십니다(출 22:3).

그런데 이런 저런 이유로 종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6년만 참고 종살이 하면 7년째 되는 해에는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 종의 노동 연한을 ‘6년’으로 정한 기준은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6일간 일하시고 제 7일에 쉬셨다는 데 있습니다.

제7년에 자유함을 얻은 종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함을 획득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
것은 우리가 지금 죄의 종으로 살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언젠가는 자유함을 주실 것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그런데 6년을 종으로 살고도 “나는 내 주인이 너무 좋고 내 처자가 좋아서 이 집을 떠나지 않겠다” 라고 결단하면 주인은 그를 재판장에게 데리고 갑니다.

재판장은 그 종의 의사를 확인하고 문설주에 종의 귀를 대게 합니다.
그리고 송곳으로 귀를 뚫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종이 되었다’ 라는 표시입니다.

자원하여 귀를 뚫은 종은 어떤 종입니까?
그는 종신토록 상전을 섬기기로 자원한 종인데, 이것은 영원히 하나님의 종으로 살기를 자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한번 구멍 뚫은 것은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사용하십니다. 

미국의 어느 주일학교 예배 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헌금 시간이 되었습니다.
모든 아이가 헌금을 하는데 한 아이만 헌금은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앉아 있었습니다.
담임 교사가 아이를 따로 불러 사정을 물어보았더니 아이는 집이 너무 가난하여 헌금할 돈이 없어 대신 그 시간에 기도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일화

선생님은 무슨 기도를 하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하나님께 내 몸과 생명과 내 일생을 바치겠다고 기도드려요.”
그 말에 감동한 선생님은 아이를 격려하고 나서 약간의 돈을 주면서, ‘잔돈으로 바꿔 매주일 1달러씩 헌금하라’고 말했습니다.

몇 주일이 지나자 매주 꼬박 꼬박 헌금을 하던 소년이 더 이상 헌금을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다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잔돈으로 바꿔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헌금을 했는데, 사먹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어요.
사먹으면 죄를 지을 것 같고... 그래서 지난 주일에 몽땅 바치고 이제는 다시 기도만 하기로 했어요."

어려서부터 이렇게 성실하게 기도하던 소년이 바로 1884년 부활절에 당시 미국인들에게 불모지나 다름 없던 조선 땅에 건너온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님입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먼 오지인 한국에 와서 평생을 귀에 구멍 뚫은 종으로 자신의 삶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여러분은 귀에 구멍 뚫은 종입니까?
여러분은 종신토록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하셨습니까?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가장 귀한 자유까지 포기하고 자원하여 영원한 주님의 종이 되기로 헌신하셨습니까?

프랑스 군대의 최고의 명사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군인 봉급을 절약하여 조그마하고 아담한 집을 샀습니다.
그 집은 담쟁이 덩굴이 우거지고 각종 꽃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집이었습니다.
그가 은퇴하여 평화롭게 이 집에서 살 수 있을 때를 손꼽아 기다리던 그 무렵 보불전쟁이 발발했고, 독일군이 이 조그만 마을을 점령하여 그의 집을 병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어느 날 이 명사수인 병사는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의 대포 곁에 서 있었습니다.
그 때 그를 지휘하는 장군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자네, 저기 저 시골집이 보이나?”
병사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작은 집을 장군이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집에 독일군이 들어가 있네. 잘 겨냥하여 일격에 날려버리기를 바라네,” 장군이 말했습니다.
명령에 복종한 이 병사는 그가 가진 기량을 다하여 장군이 지적한 집을 겨냥했습니다.
무서운 굉음이 터지면서 그 아름다운 집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잘 했군,” 하며 장군이 병사를 돌아다 보았을 때, 병사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자네 왜 그러나? 무슨 일이야?”
그러자 충성스러운 병사는 대답했습니다. “장군님, 제 집입니다.”
이 병사는 그가 사랑하는 조국을 위하여 그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기꺼이 버렸습니다.

우리도 십자가에 피흘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의 가장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자원하여 귀에 구멍 뚫어 영원한 하나님의 종이 되는 엄숙한 결단의 순간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상전을 사랑하니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자유를 포기한 종) 5절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 

누구든지 잠시라도 종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부득이 종이 될 뿐입니다.
그런데 6년만 참고 주인을 섬기면 이제 자유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자원하여 귀 뚫은 종은 6년 만에 주어진 자유를 스스로 거절하고 영원한 종이 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6년 종은 임시 종이요 귀 뚫은 종은 영원한 종입니다.
이 사람은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자유를 스스로 포기한 것을 가리킵니다.

귀를 뚫은 것은 자신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자유를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아낌없이 포기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사실 7년째의 종의 해방은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은 주인의 신앙적인 행위에 기인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6년간의 종 생활을 마친 자에게 신분상의 자유만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자립의 기틀까지 마련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해방되는 종들이 빈손으로 출발하게 되면 분명히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또다시 빚을 지고 종이 되는 생활을 반복할 것이기 때문에 그를 6년 간 부렸던 주인으로 하여금 얼마의 물질을 주어 보내도록 배려를 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15:12-14
“···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영원히 주인의 종으로 살겠다고 자원하는 종의 마음을 보십시오.
귀에 구멍 뚫은 종, 상전을 사랑하여 자유인이 되기를 포기한 종 --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사역을 맡기십니다. 

링컨이 어느날 시장을 걷고 있었습니다.
노예시장이었습니다. 한 가족을 진열하여 놓고 흥정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이 뿔뿔이 헤어져 따로따로 팔려가는 현장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여종이 필요하다고 그 가정의 예쁜 딸을 사가려고 하니까 딸이 안 떨어지겠다고 부등켜 안고 몸부림치면서 막 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링컨은 이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다가가서, 그 종의 가정 식구를 모두 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의 몸값은 내가 다 지불하였네. 그대들은 이제 자유네.” 그때 그들은 말했습니다.
“주인님, 우리는 주인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리고 주인님의 영원한 종이 되겠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스스로 거절하고 자원하여 종이 되기로 선택한 종이 ‘귀에 구멍 뚫은 종’입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의 자유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필요한 시간을 쓰는 사람, 내가 가진 물질을 다 쓸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하고 자원하여 주님께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리는 사람, 내 몸의 편함을 누리기를 거부하고 주님의 일을 위해 몸을 불사르기를 자원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귀에 구멍 뚫은 종입니다.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 C. T. 스터드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수석을 달리는 우수한 학생이었을 뿐 아니라 아주 탁월한 크리켓 선수였습니다.
그는 크리켓으로 영국 전체 시합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보장된 출세의 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캠퍼스 집회에 참여했다가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가겠노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열정 때문에 그는 부와 명예를 모두 버리고 선교사가 되는 훈련을 마치고 중국 땅으로 갔습니다.

중국에서 10여 년을 섬긴 후에 그의 육신은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쇠약해졌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와 투병 생활을 하던 중 그는 다시 아프리카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제정신이 아닌 결정이라며 그를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스터드가 남긴 말은 모든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깊은 의미를 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날 위해, 날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 바치는 희생은 그 어떤 것도 지나친 희생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우리의 헌신은 그 이하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헌신은 그 이하로 만족해서도 안 되고 만족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자원하여 귀에 구멍 뚫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자원하여 귀에 구멍 뚫은 종입니까?
주님을 사랑하여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주께 헌신하기로 작정하셨습니까?

3. 귀를 뚫은 귀를 부끄러워하지 않음(종의 직분을 자랑스러워하는 종) 5절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 

아무리 종이라도 귀에 구멍을 뚫지 않으면 종의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귀에 구멍을 뚫으면 평생 종이라는 표시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종은 자원하여 귀에 구멍을 뚫은 것이라 이 흔적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종이라고 깔보는지 모르지만 본인은 조금도 숨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귀에 구멍 뚫은 종은 종의 직분을 자랑스러워하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성경 인물 중 종의 직분을 그리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사람으로 사도 바울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가 쓴 서신서의 초두에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종 됨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빌립보서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디도서 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

바울 사도는 자신의 종 됨을 자랑스러워하며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전도하다가 매를 맞았고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복음으로 인해 받은 많은 상처와 고통의 자국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그의 자랑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이 흔적을 ‘예수님의 흔적’이라 하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몸에는 바울처럼 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흔적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신학, 철학, 음악, 의학 등 4개의 박사학위 소지자인데 하나의 밀알이 되는 사명으로 아프리카 오지에서 흑인들을 위해 일평생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아프리카에 온 방문객이 그의 헌신을 보며 “당신 같은 사람이 꼭 이렇게 고생스럽게 살아야 합니까?” 라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슈바이처는 “나를 동정적으로 보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손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아십니까?” 라고 했다고 합니다.

성 프랜시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흔적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정말 몸에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이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프란시스는 아무에게도 이 비밀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그에게 난 못자국, 창자국, 채찍자국을 그의 옷을 빨래하던 여인만이 알았습니다.
빨아도 빨아도 자꾸만 피가 흘렀다고 합니다.
프란시스는 온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던 주님의 참 종이었습니다.

귀에 구멍 뚫은 종은 사람들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그 표를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당당하게 살아간 종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주님의 종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탈북자인 <이순옥> 여사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호주를 비롯한 곳곳에서 북한의 참상을 증언했습니다.
그 분은 북한의 감옥과 교화소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던 분입니다.
그 증언이 책으로 엮어져 나왔는데, 그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교화소 안에는 용광로 시설이 있는 작업장이 있는데, 그 곳에서는 무기 생산에 필요한 것들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 곳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하게 됩니다.

옷도 거의 입지 않고 고무로 된 치마만 걸친 수백 명의 사람들을 보게 되었는데, 멀리서 보니 그들은 머리가 둘 달린 괴물 같이 보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가까이 가 보니 고문을 당해 머리에 혹이 하나씩 달려 있었고, 척추가 내려앉아 꼽추처럼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혹독한 형벌을 당했으면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그곳의 간수들은 그들을 <하늘을 믿는 미친놈들>이라고 욕을 했다고 합니다.

하늘을 믿는 이 사람들은 누굴까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간수들은 징을 박아 만든 구두로 그들을 밟고 짓이기곤 했습니다.
그들은 피투성이가 되고 뼈가 부러져 나갔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서도 그들은 <주여, 주여>하면서 찬송을 부르고 있었고, 그 얼굴에는 고통이 보이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얻어맞다가 죽으면 시뻘건 쇳물을 갖다 부어 숯처럼 만들었는데, 공장 안에 살타는 냄새가 진동했다고 합니다.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북녘 땅에서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주님의 종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지하교회 성도들이 계십니다.
남한의 교회는 북한 인권의 개선을 위해, 그리고 북한 성도들의 신앙의 자유를 위해 연합하여 움직여야 하는 절체절명의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들은 왜 그런 고생을 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나요?
천국에 가 봤습니까?
그들로 하여금 끝까지 버티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비록 천국에 가 보지 않았지만 성경책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천국을 믿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과 고난을 오히려 천국 가는 보증수표로 생각하고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의 종 됨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피 값을 지불하고 사셨다는 말입니다.
그 흔적이 복음이 되어 여러분의 영혼에 새겨져 있습니다.
지금 나는 자원하여 귀에 구멍 뚫은 사람들로 부름받아 나와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제 영원한 하나님의 종이요,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주님의 종 됨을 자랑스러워하는 종이어야 합니다. 

이제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자기가 가기 원하는 곳으로 마음껏 달려가시겠습니까?
아니면 힘들고 어렵지만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로 기도하며 걸어가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에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고, 여러분의 육체에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며, 여러분의 시간에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고, 여러분의 물질에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는 참된 헌신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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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싱(Piercing)

요사이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피어싱(piercing)이 상당히 유행을 합니다.
피어싱이란 몸의 각 부위에 구멍을 뚫어 고리들을 끼우는 것을 말하는데 예를 들자면 귀, 입술, 눈꺼풀, 코, 혀, 배꼽 등등 어느 부위든지 뚫어서 고리를 끼우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 피어싱이란 게 마시면 마실수록 계속 더 마시고 싶은 콜라처럼 살을 뚫으면 뚫을수록 계속 뚫고 싶은 욕구를 일으키게 한다고 합니다.

대개 피어싱을 하는 사람들은 뚫는 순간은 만족을 느끼나 다 채워지지 못한 다음 욕구를 위해 뚫을만한 또 다른 부위를 찾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까지는 잘 하지 않지만 귀걸이는 대개 하는 편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도 귀걸이는 웬만하면 한 번쯤은 해 보셨지 않습니까?
그러나 귀걸이의 유래를 바로 알고 하는 사람은 별로 드문 것 같습니다.
귀걸이가 어떻게 유행되었느냐고요?

오늘의 말씀이 설명을 해 주고 있는데 즉 한 가정의 종(노예)이 그 주인이 좋아서 그 주인을 영원히 섬기기 위한 종의 표시로서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서는 율법을 따라 종에게는 두 종류가 있는데 일시적인 종과 귀를 뚫은 영원한 종입니다.
귀를 안 뚫은 종은 평생 종노릇하는 사람이 아니라 6년 동안만 주인에게 속하여 있다가 그 기간이 지나면 본래의 자유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즉 안식년이 되면 주인도 그 종을 놓아주어야 하고 그 종도 자유롭게 나갈 수 있으나 대신 혼자 주인의 집에 들어왔으면 혼자 나가면 됩니다.

가령 장가를 들어서 왔으면 아내와 함께 나가게 되나 만일 그 아내가 주인이 돈을 주고 사와서 그 종에게 아내로 준 상태라면 아내는 물론 그 낳은 자식도 주인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정의 종(노예)이 그 주인이 좋아서 그 주인을 영원히 섬기기를 원한다면 그 종이 자원하여 영원한 종이 되는 표시로서 귀를 뚫는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06절).
그러면 이때부터 그 종은 종이지만 행복하고 즐거움이 있는 생활을 누리게 되는데 저는 바로 귀를 뚫은 행복한 종에 대하여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노예가 되었습니까?


1. 전쟁에서 붙잡힌 사람을 노예로 삼는 경우입니다(민 31:09; 왕하 05:02).
이것은 전쟁에서 가능한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오기 위해서와 적군이라도 생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생긴 법입니다.

2. 너무 가난해서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을 노예로 파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노예로 팔아 주인의 보살핌 속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게 되는 피치 못할 사정인 것이지요.

3. 자녀를 양육할 수 없어서 노예로 파는 경우입니다(출 12:02, 07; 레 25:39).
물론 이것도 주로 가난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종이란 얼마나 불행한 신분입니까?
자유는 고사하고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 인간성을 부인 당해야만 하는 불행한 존재입니다.

옛날 종의 비참 성에 관한 기록을 보면 종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으며 주인의 허락 없이는 결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오직 주인이 짝지어 주는 대로만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결혼하여 잘 사는데도 주인이 이혼하라면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이혼도 해야 했는데 그만큼 주인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주인은 마음대로 종들을 희롱할 수 있었고, 종들은 주인의 갖은 학대와 힘든 노역에도 불평 한마디 못하고 절대적인 복종을 해야 했으니 주인의 권세는 대단했고 동시에 종이 된다는 것은 비극 중에 비극이었습니다.

노예제도가 가장 성황하던 로마 제국 당시에는 종들이 무려 육천만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최대의 행운은 종으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최고의 행복은 종의 생활을 하던 자가 종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전해지는 유대인 남자들의 기도문 중에 의하면 남자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다음 세 가지의 감사 기도를 했다고 하죠.

1.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2.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3. 종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간 부정과도 다름없는 노예제도를 언약 백성 가운데 율법으로서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 2절의 의미를 잘 살펴보면 히브리인의 종의 제도가 한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즉 그 기간이 6년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요.

히브리 종은 육년간 고용된 계약 노동자로서 종이 그 기간이 지나 자유함을 얻을 때는 더 이상의 값을 지불하지 않고 무조건 자유민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주변 상황으로 볼 때 파격적인 것으로서 노예제도의 근본 정신이 사랑과 자비에 있음을 신명기 15:12~14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15:12-14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 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이렇게 보면 종이 실제로 고난의 종살이를 하는 것은 계산적으로 하자면 얼마가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삼년은 자신의 몸값이나 부채의 반환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고, 그리고 한 이년간은 그 동안 먹고 산 것에 대한 값으로 여기고, 한 일년은 나아갈 때 얻는 물품 값이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요?

이처럼 당시 히브리인들의 종에 대한 규례는 다른 여러 종에 비해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규례는 종의 규례가 아니라 물질적으로 어렵게 된 사람을 돕는 규례라는 주장을 할 정도였습니다.
물질이 없어 부채를 지거나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을 데려다가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살만큼 준비시켜 내 보내는 제도가 바로 히브리 종의 제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50년째가 되는 희년이오면 그때는 노예가 된 그 사람을 놓아주는 것은 물론이고 빚으로 잡혔던 농토까지도 전부 되돌려주어야 했습니다.

자원하는 영원한 종 

같은 유대인들끼리 종을 삼았을지라도 칠년 째 되는 안식년에는 반드시 자유인으로 신분 환원을 시켜 주어야 함이 법입니다.
그러나 종 된 사람이 특수한 사정이 있어서 주인을 위해 평생 종이 되겠다고 하면 재판장의 허락을 받아 송곳으로 그 귀를 뚫어 영원한 종이 되는 의식을 가집니다. (5-6절)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

재판장(엘로힘) : 이는 본래 지존자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명칭인데(창 24:3; 수 02:11) 70인 역은 이를 하나님의 판단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 추측컨대 이는 공개된 장소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엄숙히 판단 받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귀를 뚫을 것이라 : 고대 근동의 관습으로 이것은 완전한 예속(隸屬)과 순종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Knobel).
왜냐하면 고대 근동인들에게 있어서 귀는 예속의 기관으로서 귀를 뚫린다는 것은 곧 자유의 상실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귀를 뚫은 종은 아내나 자식들 때문에 주인을 떠날 수가 없는 그야말로 자원하는 종으로서 이 사람은 평생토록 그 주인을 섬깁니다.
해방될 날이 없지요. 해방이라면 그 종이 죽는 날이 아니겠습니까?
혹 이 종이 마음이 바뀌어 주인의 집에서 나가려고 할 때 주인이 재판장에게 이 사람은 귀를 뚫은 종입니다 라고 말 한 마디만 하면 재판장은 그를 떠나지 못하도록 법적인 제재를 가하는데 귀를 뚫었던 흔적이 그를 평생 종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귀를 뚫은 종은 빚 때문이 아니라 주인의 고마움과 사랑 때문에 자발적으로 노예가 된 자로서 그에게는 안식년을 맞아 서 귀를 뚫기 전 주인을 계속 섬기거나 떠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상전과 자신의 처자를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 자유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으니 이제부터 그는 비천한 노예가 아니라 진정 사랑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자유를 허락한 그 주인이 너무 고맙고 좋아서 자유를 포기하는 종이 주인님! 제가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유하는 것보다 주인의 집에서 영원히 종으로 사는 것을 원한다면 그 종을 어떤 종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유의 종 다른 말로 말하면 사랑의 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주인은 그날부터 그 종을 예전처럼 부리지 않고 마치 자기 아들처럼 대하게 됩니다

자원해서 된 종, 사랑의 종, 자유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이 종이 짊어지고 다니는 종의 멍에는 결코 무거운 멍에가 아님을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도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한다면, 그리고 충성한다면 얼마나 그 신앙이 값어치가 있겠습니까?

가령 아내가 여보,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요 내가 평생 당신을 섬기겠어요 라고 자진해서 고백한다면 이것은 진짜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섬긴다면 그 멍에는 결코 무겁지 않을 것이며 그 대상이 주인이든 남편이든 아내든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주님의 종이라는 말을 아주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까? 이 말은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수직적 명령계통으로 인정하겠다는 말이며 성도간에는 모든 일을 섬기는 자세로 살겠다는 의사표시입니다.

나는 어떠한 종이며 어떠한 생활을 하여야 합니까?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절에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던 바울이 13절에서는 왜 또 다시 종노릇을 하라고 명하고 있는지를 신중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먼저 무엇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까? 죄에서 자유, 사단의 지배에서의 자유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자유의 삶, 구원의 삶을 살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자유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를 얻었으므로 이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기회를 삼아 타락과 방종의 기회, 다시 사단에게 지배를 받는 자리에 떨어지는 일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13절의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는 경고의 말 속에는 그 자유로 주님 안에서 서로 종노릇하며 살아가라는 적극적인 추진력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귀를 뚫은 종은 스스로 종노릇을 하는 사람 아닙니까? 자원하는 종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주님을 향하여, 성도를 향하여 귀를 뚫은 종이 되어야지요. 기쁨으로 종노릇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종노릇을 하여야 합니다.

참 자유를 주신 분, 우리에게 참된 죄사함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신 우리 주님의 종노릇을 하여야 합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불행한 처지의 노예처럼 부리려고 종이 되라, 종노릇하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주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면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은 저의 주인이십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주님의 종만이 아니라 서로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13 ....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수직적인 관계의 종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의 종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길 뿐만 아니라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섬겨야 하고 그들의 종이 되기를 자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피차에 서로 복종할 수 있고, 피차에 종노릇 할 수 있다면, 우리들의 인간 관계는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풍요롭고, 얼마나 아름다워지겠습니까?

목사가 성도들을 섬기고, 성도들이 목사를 섬기는 관계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교회는 얼마나 사랑이 넘치겠습니까?
아내가 남편을 섬기고 남편이 아내를 섬겨 피차에 복종한다면 그 부부의 삶이 얼마나 보기 좋겠습니까?
아우가 형을 섬기고 형이 아우를 섬기는 가정, 경영주가 노동자를 섬기고 노동자가 경영인을 섬기는 직장은 얼마나 생산성이 높겠습니까?

인간 관계가 파괴되는 이유는 교제의 근본 동기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심지어 서로 잡아먹으려고까지 하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면 자연히 서로를 섬길 수 있고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 종노릇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주님의 종노릇을 해야 하고 주님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주님이 사랑하는 내 남편, 내 아내, 내 이웃들을 섬기는 종노릇을 해야 합니다.

자원하여서 귀에 구멍을 뚫었던 종들처럼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종으로서의 자세를 가져야 됩니다.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세대 서로 종노릇을 하지 못하는 이 세대는 서로 잡아먹으려고 하며 다르게 표현하면 서로 시기 질투하여 이용하고 착취하려 하는 비극의 세대입니다.

분명히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사랑의 종노릇을 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종이라는 단어 얼마나 비천한 단어입니까? 인간이면서 인간의 대접을 받지 못한 체 살아가는 비참한 처지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종이란 단어를 가장 영광스러운 단어로 바꾸어 놓았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종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6- 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제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D. L. 무디는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할 때 그가 얼마나 많은 종을 거느리고 살았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종노릇을 했느냐 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지배했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겼느냐 입니다.

종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 이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성도 여러분께서 이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진정으로 이웃을 섬기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로부터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종이 되셨다면 우리가 종이 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종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종이 세상으로 나갈 자유를 포기하고 주인의 종이 되고자 귀를 뚫겠다는 것은 상전의 은혜에 감사하여 그 상전을 잘 섬기고 가정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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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히브리 노예에 대한 율법 규정 중 일부분입니다.
노예에는 전쟁 노예 히브리 노예 두 종류가 있습니다.
전쟁 노예는 전쟁 중에 사로잡힌 포로 출신으로 노예가 된 이방인들입니다.
반면 히브리 노예는 동족 중에서 노예가 된 사람입니다.
히브리인이 노예가 된 이유는 주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 타인에게 손해를 끼쳤는데 이를 배상할 돈이 없는 경우, 몸으로 때우기 위해서 노예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노예가 육년 동안을 섬긴 후 제 칠년에는 자유를 주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에도 본문과 같은 규정이 있는데 약간 다릅니다.

"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신명기 15:13,14)

보낼 때 공수로 보내지 말고 후히 주어 보내라는 부분이 신명기에는 추가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자유한 종이 이후에 먹고 살 밑천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빈 손으로 나가게 되면 경제적 기반이 없어서 또 다시 다른 집 노예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6년을 섬기고 제 칠년에 자유를 주었을까요?
이는 7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안식년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규례는 7년을 일곱번 보낸 49년을 지낸 후 50년마다 돌아 오는 희년 규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희년에는 노예 해방 뿐 아니라 노예가 되기 전에 저당 잡혔던 농토까지 돌려 주는 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을 자비의 법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 제도는 경제적으로 파산난 사람을 일거리를 주고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입혀 주고, 보낼 때는 자립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준비시켜 보내 주는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이스라엘 버전의 빈민 구제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는 일시적인 노예 신분은 있었지만, 사실상 노예 제도는 없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법을 가진 민족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게 한 번 노예는 영원한 노예였습니다.
자신은 물론이고 처자식까지 노예 신분은 세습되었습니다.
어떤 주인이 노예를 딱 육 년만 부려 먹고 퇴직금까지 두둑이 챙겨서 자유를 주겠습니까?
육년을 일하면 기업체로 치면 과장 직급으로서 가장 일을 잘 하고 열심히 할 때입니다.
종을 풀어 주려고 할 때 주인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실제로 예레미야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이 규례를 잘 지키지 않는 주인들이 있어서 하나님께 심한 책망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인들이 종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지 않자, 이제 하나님께서는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대신 자유를 주어 그 주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규례를 이처럼 중요시 여기실까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보통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되는 특별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이용하고 착취하는 일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절대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서로에게 남이 아닙니다. 그들은 한 아버지 아래 있는 형제요 자매들이기 때문에 영원토록 종 삼는 일이 없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규례에서 정말 특별한 것은 스스로 해방되기를 거부하는 종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5절에 보면 첫째는 주인을 너무 사랑해서 둘째는 처자를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 계속 종이 되길 소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종살이 도중 결혼한 처자는 주인에게 소유권이 있어 함께 데리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선택은 전적으로 본인의 자유에 속했습니다. 처자를 사랑해서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은 그럭저럭 쉽게 수긍이 갑니다. 그런데 주인을 사랑해서 자유를 뿌리치고 스스로 종이 되기를 원한다니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러면 이런 선택을 받은 그 주인은 어떤 주인일까요? 그 주인은 분명 인자하고 자비로운 주인일 것입니다. 그는 공의롭고 만사를 공평하게 다루는 주인일 것입니다. 그 주인은 노예를 노예를 여기지 않고 친 자식처럼 친 형제처럼 아끼는 주인일 것입니다.


성경에는 본래 자유하지만 스스로 종이 된 사례들이 여럿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은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아무 누구에게도 빚을 지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이 되어야 할 의무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종이 되신 이유도 역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사랑하는 아버지 성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성부의 뜻을 이루시고자 스스로 종이 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종이 이렇게 영원히 종이 되길 원하는 경우 재판장에게 가서 문에 귀를 대고 송곳으로 귀를 뚫도록 했습니다. 오늘날은 누가 귀를 뚫습니까? 주로 자매들이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귀를 뚫습니다. 또 피어싱이라는 이상야릇한 취미가 있어서 귀 뿐만 아니라 코, 배꼽, 심지어 혓바닥까지 뚫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귀를 뚫는다는 것은 치장이나 취미가 아니라 영원한 예속을 상징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군대에서 "말뚝 박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말뚝을 박는다는 것은 군대에 장기 복무 지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군에서 다른 건 강요하지만, 장기 복무 선택만큼은 본인의 자유에 맡깁니다. 다들 말뚝 박기를 극도로 싫어 합니다. 군에서 가장 심한 저주가 ‘너 말뚝 박아라’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은 그 중에 군대가 좋다고 장기 복무를 신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기 복무를 지원하기 전과 후는 군인이란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신분에 있어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지원 전에는 의무 복무 군인이었지만, 지원 후에는 자원하여 복무하는 군인 즉 직업 군인이 됩니다. 귀를 뚫기 전이나 후나 종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귀를 뚫은 후에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이 됩니다. 의무에 의한 종이 아니라 자원하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 가운데 스스로 속박되기를 결정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원하는 종의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주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래도 아내와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유와 퇴직금도 다 버리고 스스로 종이 됩니다. 사랑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사랑은 그 소중한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은 종이 되기를 기뻐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의무에 의한 종은 6년이라는 의무 복무 기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종은 종신토록 그 상전을 즐거이 기쁨으로 섬기게 됩니다.

두번째로 사도 바울이 생각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 장에서 자신을 종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김남준 목사님이란 분도 항상 싸인을 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노예 김 남준’이라고 서명을 하십니다.
우리는 과거 죄의 빚을 진 자였습니다.
이 빚을 도저히 갚을 수 없어 인생이 파산했습니다.
빚을 갚기는 커녕 날마다 그 채무가 점점 더 늘어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나를 값 주고 사셨습니다.
내 대신 댓가를 지불하시고 빚을 청산해 주셨습니다.
그 댓가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어린 양의 보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피로 우리를 죄의 종 노릇하던데서, 사단의 종 노릇 하던데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또한 우리는 율법과 양심의 의무 아래서 짓눌리던 자들이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율법의 의무 아래서 신음하며 짓눌려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율법의 의를 우리를 대신해서 모두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의를 우리의 것으로 전가시켜 주셔서 우리도 율법 앞에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율법으로부터도 해방되어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죄와 율법로부터 자유케 하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왜 늘 자신을 종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제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 귀 뚫은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을 사랑하고 처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귀 뚫은 종이 된 것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종이 되기를 자청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 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랑 때문에 자원하여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자원하여 종이 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귀를 뚫습니까? 갈라디아서 5장 24절은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송곳으로 귀를 뚫듯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죄악된 성품 곧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 다음으로 종신토록, 영원히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헌신하는 종이 됩니다.

여러분 귀를 한 번 만져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코를 한 번 만져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 분은 어디에 구멍이 뚫려 있습니까? 귀 뚫은 종도 있지만 코 뚫은 종도 있습니다. 코 뚫은 종은 코에 코뚜레가 끼여서 주인에게 질질 끌려가는 종입니다. 코 뚫은 종은 가기는 가되 오만가지 인상을 찌푸리며 억지로 끌려 갑니다. 코 뚫은 종은 주인이 고삐를 당기기 전까지는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달란트 비유에 보면 이런 코 뚫은 종이 나옵니다. 달란트 비유는 첫째 종은 주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이 종은 말합니다. "주님은 나에게 너무 많은 부담과 의무를 지우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이 종을 악한 종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가 악한 종일까요? 이는 그가 주인을 욕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굳은 사람도 아니고 심지 않은데서 거두는 그런 가혹한 사람도 아닙니다. 이 주인은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종은 달란트를 묻어 두는 바람에 결국 주인을 악랄하고 나쁜 사람으로 몰아간 셈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인상을 박박 쓰면서 질질 끌려가는 신앙 생활을 하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저 사람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가혹한 존재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또 그렇게 질질 끌려가며 신앙 생활하는 본인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얼마 전에 러시아 김 에스더 선교사님이 오셨을 때 저에게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니 아직도 기타 들고 찬양을 인도하세요? 나이가 몇인데..."
그런데 찬양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찬양을 통해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는 것이 즐겁고, 찬양 중에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때문에 기쁘게 찬송합니다.
이렇게 메시지를 준비해서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기도하면서 자꾸만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싶고 자꾸만 더 하나님께 기대고 싶습니다.
이제 보니 코에 뚫려 있던 구멍이 어느새 귀 쪽으로 옮겨져 버린 것 같습니다.
도대체 저에게 무슨 일이 있어났던 것일까요?
원인은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 저는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압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 제 영혼에 빛을 비추어서 하나님은 참으로 어떤 분이신지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제가 만난 하나님은 좋은 분이십니다.
이 좋다는 말 속에 온갖 귀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들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이렇게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며 공의로우시면서 능력이 크시고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귀를 뚫어서라도 영원히 그 곁에 함께 있고 싶은 분이십니다.
사람을 돕다 보면 과거 저와 같이 코 뚫은 종처럼 질질 끌려가는 신앙 생활을 하는 분들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너무 안타까워서 속으로 눈물이 흐를 때가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이신데... 참 좋으신 하나님인데 ..."
그리고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우리 속에 새 영을 창조하시어 좋으신 하나님을 알게 도와 주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심령을 우리 모두 속에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코를 뚫어 질질 끌고 가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유 가운데 사랑으로 스스로 속박되어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주를 섬기길 원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이미 우리 속에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새 본성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선물을 받고 즐거이 주님을 따르는 귀 뚫은 종들입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0일 / 03- 07-2024(목)
출애굽기 20:1-26
찬송 /266장(왕의 명령 전달할 사자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십계명(출애굽기 20:2)


십계명(十誡命, .עֲשֶׂרֶת הַדִּבְּרוֹת‬,  Decalogus)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중시하는 계명이자 모세 율법의 핵심이다.
모세 율법은 출애굽기 20:1-23:33의 ‘계약서’
신명기 1장-29장의 ‘신명기 법전’
핵심은 출애굽기 20:1-17, 신명기 5:6-21에 해당하는 열 가지 계명이라고 하겠다.

십계명이란 용어는 히브리어 "아쉐레트 하드바리임"(열 가지 말씀들)에서 유래한 것으로, 출애굽기 34:28, 신명기 4:13, 10: 4에서 언급된다.

출애굽기 34: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 사십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Moses was there with the LORD forty days and forty nights without eating bread or drinking water. And he wrote on the tablets the words of the covenant--the Ten Commandments.

십계(the Ten Commandments)

신명기 4:13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He declared to you his covenant, the Ten Commandments, which he commanded you to follow and then wrote them on two stone tablets.

신명기 10:4
여호와께서 그 총회날에 산 위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The LORD wrote on these tablets what he had written before, the Ten Commandments he had proclaimed to you on the mountain, out of the fire, on the day of the assembly. And the LORD gave them to me.

십계명을 소개하는 출애굽기/탈출기 20장 1절에는 “이 모든 말씀”으로 나오고, 신명기 5장 5절에는 “주님(야훼)의 말씀”으로 나온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히브리 사본과 사마리아 오경, 70인역(Septuagint, LXX), 타르굼, 불가타(Vulgata, 새 라틴말 성경) 등에 근거하여 이를 말씀들, 즉 복수로 수정할 것을 BHS 비형 각주는 제안하고 있다.

십계명은 70인역에서 모두 목적격으로 나타나는데, 출애굽기/탈출기 34장 28절과 신명기 10장 4절은 '투스 데카 로구스'로, 신명기 4장 13절은 '타데카 레마타'로 번역되고 있다.
모두 "열 가지 말씀들"로 번역이 된다.
이 계명들은 출애굽기/탈출기 20장 3-17절과 신명기 5장 6-21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 두 본문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점들이 있지만, 그 순서와 일반적인 내용은 본질상 동일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십계명이 주어진 방법

십계명은 두가지 방법으로 주어졌는 데, 하나는 하나님의 선언이었고, 다른 하나는 두 개의 돌판에 새겨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천둥소리와 번개와 트럼펫의 소리가 널리 펴졌으며, 사람들에게 경외와 존경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였다.

예레미야 31:33에는 사람의 마음 속에 새겨진 것은 언약이며 이것은 사람의 마음도 돌판처럼 딱딱하여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이 새길 수 있으며, 이것은 율법의 영원함을 드러내는 언약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뒤 50일만에 주어졌으며, 그들의 행동규범으로 주어졌다.


개신교 및 유대교에서 사용하는 십계명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3. 주(야훼)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5.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해서는 안 된다.
    (간음하지 말라.)
  8.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하지 말라.)
  9.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0.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지 말라.)


쉽게 외우는 십계명

1.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일. 일절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지니라.
이. 이상한 우상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

3.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지니라.
삼. 삼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사. 사적인 일 핑계 말고 안식일을 지키라.
사. 사업일 하루 쉬고 안식일을 지키라.
죽을 사. 죽어도 안식일은 지키고 죽어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오. 오늘도 내일도 부모님을 공경하라.
오. 오마이 파파 마마

6. 살인하지 말지니라.

육. 육신을 살인하지 말라

육. 육혈포로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지니라.

칠. 칠칠치 못하게 간음하지 말라.

칠. 칠배로 저주받을라 간음하지 말라.

8.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팔. 팔로 도둑질하지 말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구. 구차한 말로 거짓증거 하지 말라.

10.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십. 십 원이라도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9일 / 03- 06(수)
출애굽기 19:1-25
찬송 / 357장(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사장 나라(출애굽기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제사장 - pontiff.  (라틴어) pontificem.

언약(言約) : 신뢰가 중심이다 / covenant
- 말씀 언, 맺을 약

(예) 노아의 언약 - 무지개
       모세의 언약 - 계명(이스라엘 공동체)
      다윗의 언약 - 나단 선지자(다윗의 가문)

계약(契約) : 이익이 중심이다 / contract
- 맺을 계, 맺을 약


제사장 나라

모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이집트)에서 고역과 학대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3개월 만에 시내산에 도착하여 그 아래 장막을 쳤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했습니다.

4절에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새는 새끼를 옮길 때 입으로 물어 옮깁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새끼를 등에 업어서 옮깁니다.
새끼를 등에 없어서 높이 올랐다가 새끼를 떨어뜨리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 등에 업어서 올라가기를 반복합니다.
그것은 새끼에게 나는 훈련을 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런 훈련이 반복될 때 새끼들은 두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독수리는 새끼를 안전하게 다루어 추락하지 않게 하며 스스로 날 수 있도록 성장시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했다는 것은 두려운 상황이 연속되는 가운데서도 안전하게 보호하고 인도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8-14장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역과 학대를 당할 때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갈라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고 애굽 추병들을 수장시켰습니다.
신광야에 이르렀을 때 먹을 것이 없어 아우성이었으나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려 풍성이 먹게 했습니다.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마실 물이 없어 아우성이었으나 반석에서 물을 내어 풍족히 마시게 했습니다.
르비딤에서 아말렉 족속이 쳐들어왔을 때 그들과 싸워 이기게 해 주시고 그들을 완전히 진멸하게 해 주었습니다.
심히 두렵고 무서운 상황에서 하나님이 안전하게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거치면서 나일 강물이 피로 변한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애굽의 군대가 홍해 바다에 몰사한 사건까지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을 심판하신 그 놀라운 사건들을 생생히 두 눈으로 목도하였다.
이제 하나님은 율법을 베풀기 전, 그 구원 사건을 상기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시키고 있는 것이다(사 43:3-7).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 사랑의 팔로 당신의 백성을 보호, 인도하시는 크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말이다(Keil).
이러한 표현은 신명기 32:10, 11, 12에 보다 자세히 나와 있으니 그 곳을 참조하라.

마치 독수리가...새끼를 받으며
- 어미 독수리는 새끼들을 날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둥지에서 새끼들을 떨어뜨려 날게 한다.
그런 후 주위에서 조심스럽게 지켜보다가 새끼들이 힘에 부쳐 떨어질 때는 재빨리 그 강한 날개로 받쳐 결코 새끼들이 해(害)를 당하지 않게 한다.
이런 방법을 반복함으로써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독수리답게 강하고 튼튼하게 키운다.
모세는 바로 이러한 사실에 비유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답게 양육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사랑과 공의로 훈련시키셨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출 19:4).

그 보금자리를...너풀거리며
- 새끼들이 보금자리에서 졸고 있을 때 깨워 날게 하려고 어미 독수리가 그 둥우리를 어지럽게 휘젖는 것을 가리킨다(Knobel, MatthewHenry).

새번역 성경
출애굽기 19:1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초하룻날, 바로 그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

폰티펙스(pontifex)는 교량을 의미하는 '폰스'(pons), '폰트'(pont-)와 '무언가를 만들다, 이루다를 뜻하는 '파케레'(facere)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인도하신 언약적 목적을 제시했습니다.
5-6절에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소유'는 일반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 밖에 없는 매우 값진 아주 귀중한 보석을 의미합니다.
모든 족속 가운데 가장 귀히 여기는 족속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는 하나님과 모든 나라 사이의 중재 역할을 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했을 때 그들 대신 제사를 드려 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의 은혜를 입게 하는 직책으로서,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모든 나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하는 중보역할을 하게 하는 위치에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를 70인역에서는 'βασιλειον ιερατευμα' (왕같은 제사장직)로 번역했는데, 이는 왕처럼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서 중보역할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 번영하여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올라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나라에 계시되고 모든 나라가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거룩한 백성'은 이스라엘이 단순히 경제적 군사적 우위에 있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영적으로 구별된 생활을 하므로 모든 백성이 흠모할만한 영성이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열방 백성이 사모할 만한 독특한 영적 가치(καρισμα)가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장 귀한 존재로 삼는다는 것, 열방 백성이 존중할만한 영적 가치가 있게 하는 동시에 군사와 경제에 있어서도 부강하게 한다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 모든 나라가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중보 위치에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구원하고 안전하게 인도하신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언약을 지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 주신다는 언약적 목적을 제시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에 따른 언약적 요구를 하셨습니다.
5절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고 했습니다.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계를 주관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왕같은 제사장 위치에 오를 수 있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격적인 하나님이기 때문에 언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그리해 주실 만한 인격적인 반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안식일을 지키고... 조건이기도 하지만 마땅한 반응을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사장 나라 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구원하여 인도했으니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하나님이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할 언약적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세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그런 목적으로 가지셨습니다.
그 목적 때문에 반드시 잘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 어떤 외부의 대상이나 환경이나 상황이 그 목적을 헛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할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그에 합당한 반응을 해야 합니다.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19:21. 신칙(申飭)하라
- 거듭 신, 신칙할 칙
- 단단히 타일러 경계함

새번역. 공동번역  / 단단히 일러두어라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려가서 백성에게, 나 주를 보려고 경계선을 넘어 들어오다가 많은 사람이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단단히 일러 두어라.

현대인 / 경고하여라
그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려가서 백성들에게 나를 보려고 경계선을 뚫고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하여라. 그러다가는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것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 19:4-5)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은 베드로를 통하여 교회인 우리들에게 주신 정체성과 동일하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보물 ‘세굴라’로 삼으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케 하기 위함이었다. 사명과 이어지지 않은 은혜와 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라는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들도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갖고 있다. 그런 사명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곧 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은 모든 백성이 제사장으로서 직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에는 아론의 후손들로 이어지는 특별한 제사장 제도가 따로 있었다. 그들은 성전제사 업무를 전적으로 책임 맡은 특수 계층이었다. 그러므로 제사장 나라라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적문직으로서의 제사장 직능이기보다는 존재적 의미 곧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명감을 갖고 살아야하는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제사장 나라 사명을 이해하려면 제사장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제사장을 히브리어로는 ‘코헨’이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세우다’ ‘정착시키다’ 등을 의미하는 동사 ‘쿤’에서 파생된 것으로, ‘서있는 사람’ 곧 ‘봉사하거나 돕는 사람’을 가리킨다. 히브리적 관점에서 ‘서 있다’는 것은 봉사하는 자세를 말한다. 제사장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하며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제사장을 ‘봉사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사 61:6)

제사장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중간 매개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제사장의 사역은 두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

(1) 하나는.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속죄의 재물과 중보기도를 드리는 일이다. 구약시대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을 상대하지 않고 백성 대표로 제사장을 가까이 나오게 하셨다. 제사장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물과 기도를 바치게 하신 것이다.

(2)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과 축복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일이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과 기도를 드릴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민수기 6:24-26에서 볼 수 있듯이, 제사장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는 일이다.

다른 민족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이스라엘의 제사장 나라 사명은 아브라함의 부름에서 이미 예고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주신 약속은, 아브람에게 복을 주어 그의 이름이 창대케 될 것이며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 아브라함의 받은 복으로 말미암아 다른 민족들도 함께 복을 받게 된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로 확대가 되었으며, 그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서 우리들이 해야 할 기본적이면서도 우선해야 할 일은 중보기도이다. 중보기도는 자신을 넘어서서 남을 위한 관심과 배려의 기도이다. 중보기도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응답이 보장되어 있다(약 4:3). 그러면서 중보기도는 자신을 넘어서는 기도이기에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 지는 새로운 경험을 갖게 한다. 우리들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면 성숙한 만큼 더 많이 볼 수 있게 되고, 많이 본 만큼 더욱 기도하게 되는 거룩한 순환이 이루어진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하나님의 뜻은 제사장 나라로서 우리들이 정체성을 회복한 아름다운 모습일 수 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8일 / 03- 05(화)
출애굽기 18:1-27
찬송 / 279장(주 하나님의 사랑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제 내가 알았도다(출애굽기 18:11)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히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Now I know that the LORD is greater than all other gods, for he did this to those who had treated Israel arrogantly.

이제 내가 알았도다
-
'이제'란 말의 히브리어는 '아타'로서 '지금에야', '방금에야'란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현재를 시점으로해서 과거와 미래의 인생관이 전적으로 변화되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내가 알았도다'란 말은 히브리어의 '야다에티'로서 '내가 깨달았다. ' 또는 '내가 알아차렸다'라는 의미의 현재형 동사이다.
이것은 과거에는 몰랐던 사실을 이제 비로소 분명히 깨닫고 있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 이드로는 여기서 다른 모든 이방신, 즉 자기가 섬기던 신을 포함하여 애굽의 모든 여러 신들이나 다른 부족들의 신들보다 여호와의 능력이 더 위대함을 증거하였다.
그런데 이 표현을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즉 다신교(多神敎) 사상의 표현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단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함을 다른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들과 비교하여 수사학적으로 강조한 것 뿐이다.
즉 이것은 홍해 바다에서 구원받은 후 이스라엘이 올렸던 찬양이나(15:11), 시편의 노래 가운데 자주 나타나는(시 136:2, 3) 표현과 같은 것이다.


남아공 올리버 판사의 고백

그는 직장을 잃었지만 그 순간 그의 영혼을 찾았다

엘런 페이튼(Alan Paton)이 “당신의 땅은 아름답다(Ah, But your Land is beautiful)”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 속에서 올리버 판사의 그 섬김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흑백 차별이 심한 나라였습니다.
흑백 차별이 한참 심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최대 도시 요하네스버그에 흑인 교회인 성시온 교회에서 고난주간에 목요일 날 성찬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세족식에 참여할 3명의 신자를 선정하였습니다.
그런데 2명의 발을 씻겨줄 사람은 정하였는데 한 명을 결정하지 못했고 결국 저명한 백인 판사를 초청했습니다.

'쟌 크리스티안 올리버(Jan Christiaan Oliver)' 라고 하는 판사입니다.
이분은 대법원장 서리직을 수행하고 있었고 차기의 유력한 대법원장 후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예배 순서 가운데 세족식이 있었어요.
누구나 자기가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는 행사입니다.
예수님이 성만찬 하시고 세족식 하신 것처럼, 발을 씻어주신 것처럼 그날 예배 순서에 세족식이 있었습니다.
사실 올리버 판사는 그 순서가 있는지 모르고 참석을 했어요.
그 예배에 참석하는 것조차도 백인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부터 한 사람, 한 사람 나와서 발을 씻기 시작하는데 올리버 판사 순서가 되었을 때 슬그머니 뒤로 일어나 나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앞으로 나와서 한 흑인 여인 앞에 대야를 놓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흑인 여인은 그 판사님 집에서 30년 동안 종으로 일하고 있는 마르다 포투인(Martha Fortuin) 이라고 하는 여종이었습니다.
마르다 포투인은 30년 동안 올리버 판사의 집에서 그의 아들과 딸들을 돌보았고, 그들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런데 그 흑인 여종 앞에 판사가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종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리고는 마르다의 양발에 입을 맞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보던 그 여종도 울고, 판사도 울고 갑자기 온 예배당 안이 숙연해졌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백인 사회에서 크게 이를 문제 삼았고, 결국 판사직을 박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장 직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담임목사님이 너무나 죄송했어요.
자기 교회 초청했다가 판사직을 잃게 되니까 사과하려고 그의 집에 찾아갔습니다.
그때 올리버 판사가 말합니다.

“성 목요일에 당신의 교회에서 행한 예식에 참여한 일은 나에게 판사로서 한 어떤 중요한 일들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더 이상 그것에 대하여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판사 직도, 사회의 다른 지위도 무덤에 갈 때는 먼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먼지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감사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 이 이야기를 기록한 저자 엘런 페이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그의 직장을 잃었지만, 그 순간 그는 그의 영혼을 찾았다.”
올리버 판사는 백인 우월주의가 지배하는사회에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차기 대법관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는 사회의 윤리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





병행구조(parallel structure)
출애굽기 18장과 창세기 14-15장의 경우

모세를 방문한 이드로

내용개요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은 서서히 민족 공동체로 형성되어 갔다.
본장에서는 이드로의 방문을 계기로 모세가 이스라엘 공동체를 운영해 나갈 최초의 행정 조직을 세우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의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출애굽 한 모세를 찾아왔다.
하나님의 사명자로 부름받아 공식 생애를 살고 있던 모세에게 뒤늦게 그 처자들이 나타난 것이다(1-12절).
이튿날 백성들의 송사를 혼자 처리하는 모세의 모습을 보고, 백성 중에 재덕이 겸비한 자를 뽑아 모세를 대신해 행정 업무를 담당시키도록 권고하였다. 이에 모세는 이드로의 말대로 각 지위대로 행정을 담당할 자를 세웠다(13-27절).

모세의 장인 이드로(호밥, 사사기 4:11. 르우엘, 출애굽기 2:18)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 근방에 머물렀을 때 모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동반해서 모세를 찾아왔습니다.
이드로는 모세로부터 하나님께서 애굽인에게 하신 일들을 듣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이튿날 모세의 재판 광경을 본 이드로는 겸손한 자세로 모세에게 재덕이 겸전한 자를 세워 업무를 분담할 것을 조언하자 모세는 이를 받아들입니다.

영적교훈

모세는 백성들의 송사를 처리하기 위하여 혼자서 하루 종일 수고하였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개인적으로 모세의 기력을 쇠하게 하고 백성들로서는 송사가 지연되는 불편을 겪게 하였다.
마침내 행정관을 세움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전체 공동체가 더 원만히 움직여 나가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도 혼자의 힘이 아니라, 성도들이 서로 힘을 합쳐 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교훈해 주고 있다.
모든 일을 혼자 행하려는 것은 오히려 지치고 낙심케 하기 쉽고, 성도들의 공통된 영적 발전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일은 모든 성도들이 함께 섬김으로 주 안에서 성숙된 성도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고린도전서 13:9~12)

신학의 한 분야 가운데 ‘변증학’이라는 유신론증의 과목이 있습니다.
이 과목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 과목의 내용 가운데 보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는 것입니다.

어떤 섬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섬에 새가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섬에서 새의 발자국을 하나만 발견하면 됩니다.
그러나 새가 살았던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섬을 샅샅이 뒤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명이 훨씬 쉽다는 것입니다.

섬에서 발자국 하나만 발견하면 “야, 정말 새가 살았구나”라고 탄성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하나만 발견하면 “이제야 내가 알았도다”라고 탄성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숲 속에서 동물 발자국을 찾고, 섬에서 새 발자국을 찾아 뒤쫓으려면 어떻게 합니까?
집중과 침묵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발자국을 찾고, 일상의 모든 사건에서 하나님의 손자국을 발견한다면 우리의 삶은 무한히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발자국, 손자국을 발견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극적인 동기가 필요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이제 내가 알았도다”라고 탄성과 감동이 우러나게 될 것입니다.

조각가 로댕은 “나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다시 발견했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있던 것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재발견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해 아래 새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발견하는 동기가 필요하며 중요합니다.

요즘에는 재창조, 제2의 건국, 재 창립 등의 용어를 많이 씁니다.
이런 것들은 이미 있던 것들을 새로운 자세, 새로운 비전,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의지를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에도 이런 새로운 의지가 필요한 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왕이 죽은 후에 이사야 6:5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잘 알고 있던 하나님을 다시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탕자는 집을 나간 다음에 있던 돈을 다 허비하고 돌아와서 비로소 아버지를 새롭게 만납니다.
같은 집이었고, 같은 가족이었고, 같은 아버지였지만 새롭게 느끼며 맞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가 닭이 울 때까지 자신의 하는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닭이 울자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이제야 알았습니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순절의 성령 충만을 경험한 다음에 비로소 “이제야 주님의 뜻을 알았습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드로는 이방인입니다.
그렇지만 여호와 종교의 제사장이었습니다.
모세
를 권하여 사법제도를 창설할만큼 통솔력이 비범한 미디안의 추장이었습니다.
사위인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행적을 보았습니다.
그 때 이드로는 “이제 내가 알았도다”라고 탄성을 지릅니다.

여러분, 이드로가 이 말을 할 때의 감격을 느끼십니까?
흥분과, 감동과, 기쁨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드로의 모습을 보십니까?
우리도 이드로와 같이 하나님의 행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다시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발견한 고백입니다(11절)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이드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듣고 하나님의 크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합니다.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재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우주적 힘’, ‘제일 원인’, ‘부동의 동자’ 등의 말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어떤 말로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왜 창세기를 기록했을까요? 창세기는 그들의 역사인데 왜 창조 기사를 역사에 썼을까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다른 신들은 다 헛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위대하시고 크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란 말입니다.

일본의 어느 목사님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러 갔습니다. 폭포를 보고 너무 좋아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함께 구경하고 있던 캐나다 목사님이 보니 누군지는 모르지만 키가 자그마한 일본인이 너무 좋아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좋아하십니까?” “우리 아버지가 만든 건데 너무 좋지 않습니까?” 캐나다목사님은 놀라서 당신이 누구 길래 아버지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일본인은 자신을 일본의 목사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캐나다 목사님은 아무 것도 물어보지 않고 일본인 목사님께 다음 주일에 자신의 교회에서 설교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캐나다 목사님은 주일 예배 시간에 일본인 목사님을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이 일본에서 오신 목사님은 제가 처음 만났습니다. 제가 잘 모르지만 이분은 나이아가라 폭포의 주인의 아들입니다”.

자연 만물과 우주의 신비, 이 모든 것을 보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크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 있습니다. 우리의 낮음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천문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태양계가 있는 이 은하계 안에는 별이 일천억 개나 있습니다. 또 이런 은하계가 일천억 개가 있습니다. 이 우주의 별의 수는 10의 25승이나 됩니다. 별들과 별들의 거리는 수백, 수천광년씩 됩니다. 무한한 공간과 영원한 시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심, 크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표현하려면 말이 적절치 않을 정도입니다.

요즘은 공해가 심하여 하늘의 별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밤에도 하늘이 흐립니다. 이런 흐린 하늘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잊고 삽니다. 별이 보이는 맑은 하늘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기 쉽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작업장입니다. 하늘은 그분의 이력서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고 싶습니까? 그 분의 집을 방문해 보세요. 주소는 하늘시 별마을 10억번지입니다.

자연뿐만 아니라 인생에게도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사람의 머리카락을 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대머리의 좋은 점들이 많이 있답니다. 우선 죄가 적답니다. “머리털보다도 더 많던 내 죄가”라고 하는데 머리털이 많은 사람이 죄가 많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힘을 덜어드린답니다. 머리카락도 헤아리시는데 셀 게 별로 없으니까 하나님이 편하시답니다.

시편 95:3에는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라고 합니다. 시편 145: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가리키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다 모아놓으면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찬송도 그렇습니다. “크신 주께 영광 돌리세”,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 등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찬양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찬송가에도 위대하심을 나타내는 찬송이 많이 있습니다.

1900년대 초 하이네라는 러시아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카바디아 산골 마을에서 엄청난 뇌우를 만나 하룻밤을 피신합니다. 이 때 뇌성을 들으면서 노랫말을 만듭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온 우주 가운데 녹아 있습니다. 어디에나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님의 손을 벗어나 도망하다가 벧엘에서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합니다. 창세기 28:16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자기 혼자 도망하고, 자기 혼자 고통당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이제야 내가 알았도다”는 경험입니다.

칼빈대학교의 학장이었던 코넬리우스 플랜팅거 2세는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전하는 설교자는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선하신 분이며 동시에 이해하기 어렵고 낯선 분임을 강조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영적인 건강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설교자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고 강조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다시 발견한 자는 하나님께 제사합니다(12절)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제사합니다. 희생을 드리고 예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하나님의 새롭게 발견하고 “이제야 알았도다”라고 한 그들은 즉각적으로 번제물과 희생제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말합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높이는 행위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입니다. 예배하는 일이었습니다.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던 이드로는 참 제사의 대상은 야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제사를 드리는 것은 감동적이었을 것입니다.

이드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이방종교의 제사장이 아니라 야훼 종교의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라고 합니다. 찬송과 위대하심을 선포합니다. 찬송과 영광, 이 모든 것이 제사입니다. 예배입니다. 아름다운 산천을 볼 때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라고 찬송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제사입니다.

아브라함은 제사의 명수였습니다. 어디 가든지 먼저 제사를 드립니다. 이사하여 짐을 풀기 전에 제사를 드립니다.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장사였다고 합니다. 한번은 저녁 해가 질 때에 아브라함이 들판에 나왔는데 지는 해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태양을 보고 넙죽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는 해는 금방 산너머로 사라지지 않습니까? 일어나 보니 태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털고 일어나면서 “내가 섬기는 신은 영원히 지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태양을 숭배하지 않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일본의 스스끼라는 학자는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된 다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800만의 신에서 유일한 한분의 신으로 돌아왔다”. 많은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은총입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인 것을 아는 것이 축복입니다.

니콜라스 헤르만이라고 하는 로랜스형제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란 책에서
“첫째,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그 분을 본래의 마땅한 자세로 예배하는 것을 뜻한다.
둘째,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그 분을 그분으로, 우리를 우리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셋째,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과는 완전히 반대란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우리의 약함과 낮음을 인정하는 예배가 되게 하기를 바랍니다.


인종차별의 악명이 높던 남아공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당시에는 흑인과 백인은 따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 시온교회(Holy Church of Zion)’라는 흑인교회가 있었습니다.
고난주간을 맞아 성만찬에 앞서 세족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주일에 흑인교회에 올리버라는 백인 대법원장이 혼자 이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세족식 때에 마르다라는 흑인 여성에게 다가가서 무릎을 꿇고 정성을 다해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교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놀라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백인 대법원장이 흑인의 발을 씻긴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사실이었습니다.
발을 다 씻긴 올리버는 “여러분, 이 사람은 내 집의 노예입니다.
한평생 우리 집 아이들의 발을 수백 번 더 씻겼습니다.
그 때마다 내 마음이 늘 괴로웠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발을 씻어준 이 사람의 발을 내가 씻겨 주어야 내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아서 이렇게 한 것뿐입니다”.

올리버 대법원장은 이 일로 대법원장직에서 파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제야말로 참으로 하나님께 찬양할 자유로운 그리스도인 되었다”고 하며 기뻐하며 감사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제대로 믿게 되었다”,
“이제 참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3:12에는 바울이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우리 온전히 알 때가 옵니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우리가 새롭게 하나님을 아는 감격과 탄성이 우러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위대하고, 크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아는 감격 속에 날마다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사는 매일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7일 / 03- 04(월)
출애굽기 17:1-16
찬송 / 390장(십자가 군병들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반석을 치라(출애굽기 17: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I will stand there before you by the rock at Horeb. Strike the rock, and water will come out of it for the people to drink." So Moses did this in the sight of the elders of Israel.

반석(6697) 추르(tsûwr) צוּר   

1. 돌.  2. 바위.  3. 가장자리
발음 [ tsûwr ]

어원 / 6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4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돌, 둥근 돌, 욥 22:24, 사 8:14
2. 명사, 남성  바위, 욥 18:4, 24:8, [은유적으로 하나님께 사용되어] 이스라엘의 피난처, 신 32:37, 시 18:3(2), 32(31), 47(46), 사 30:29, [한 나라의 설립자에 적용되어] 사 51:1, [복수로] 욥 28:10.
3. 명사, 남성 가장자리, 시 89:44(43), 칼날, 수 5:2, 3.
4. 명사, 남성  형태, 시 49:15(14).

치라(5221) 나카(nâkâh)  נָכָה   

1. 치다.  2. 니팔형 : 매맞은.  3. 피엘형 : 피엘형 부정사로 언급된 말 נַכֶּה
발음 [ nâkâh ]
구약 성경 / 504회 사용

호렙 산
- 시내 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해발 2, 291m의 '예벨 무사'(Jebel Musa, 모세의 산)인 것으로 추정된다.
성경에서는 흔히 '시내산'으로도 불리운다(19:11, 18; 24:16; 레 26:46).
한편, 호렙 산과 시내 산과의 관계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은 3:1 주석을 참조하라.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 이 기적 사건은 만나 사건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 사역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즉 후일 바울은 물을 '신령한 음료'로, 반석을 '신령한 반석'으로 해석함으로써(고전 10:4) 당시 사막의 갈증으로 인해 목말라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렙 산 반석의 물이 생수가 되었듯이, 오늘날 사막과 같은 삶의 터전에서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숱한 사람들의 영원한 생명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교훈했던 것이다(요 4:14; 7:37; 계 22:7; 사 55:1).
특히 반석이 모세에 의해 때림을 당함으로 물을 낸 것은 예수께서 친히 저주를 받아 사람들로부터 매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인간 구원 사역을 이루신 것을 예표한다(사 53:4, 5; 요 19:1-3, 17-9).
같은 견지에서, 레온 우드(Leon Wood) 박사도 본 사건 속에서 영적인 의미를 발견했는데, 곧 그는 모세가 반석을 쳐 물을 낸 이 사건은 장차 갈보리 산에서 그리스도께서 매를 맞아 피를 흘림으로써 그 보혈로써 만 백성을 영적 갈증에서 구원하신 사건을 상징한다고 보았다(A Survey of Israel's History).
특히 반석을 통해 흘러 나온 물의 양을 가리켜 시편 기자는 '강'(나하르)이라고 표현했는데(시 105:41), 이때 이 '강'과 같은 단어이다(창 2:10).
한편 '반석을 쳐서'는 더 있는데, 곧 민수기 20:2-13에 나오는 사건이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6일 / 03- 02(토)
출애굽기 16:1-31
찬송 / 73장(내 눈을 들어 두루 살피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만나와 메추라기(출애굽기 16:13, 31)

13.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31.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고도 희고 맛은 섞은 과자 같았더라.

(질문)
1. 메추라기를 얼마동안 먹었는가?
- 한 달(1개월) 민수기 11:20

2. 만나는 얼마동안 먹었는가?
- 40년 동안. 여호수아 5:12
- 만나를 담은 항아리 출애굽기 16:33, 여호와 앞에 두어 대대로 간수하라

메추라기(7958) 셀라우(selâv)  שְׂלַו    

1. 메뚜기.  2. 복수 ׃ שַׂלִוִים 민 11:32.
발음 [ selâv ]
어원  / 795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메뚜기, 민 11:32, 시 105:40.
  a. 명사 [주]복수 ׃שַׂלִוִים 민 11:32.

메추라기
- 짧은 날개와 작고 둥근 머리, 그리고 통통한 몸집을 가진 꿩 아과(亞科)의 철새이다(민 11:31).
이 메추라기는 팔레스틴을 중심하여 봄에는 아프리카에서 떼를 지어 북쪽으로 나아왔다가 가을쯤 되면 아라비아와 시리아 쪽으로 옮겨가 겨울에는 다시금 아프리카로 돌아간다(Schubert, Knobel)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이러한 계절풍을 타고 이동하는 메추라기 떼들을 마치 비 같이 이스라엘 진에 떨어지게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한편이 메추라기는 40년간 내렸던 만나(35절)와는 달리 1개월 동안만 내려 졌다(민 11:21).

만나(4478) 만( mân)  מָן     

1. 달콤하고 맛있는 과자.   2. 만나.  3. 민 11:7
발음 [ mân ]
어원  / 4100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5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달콤하고 맛있는 과자, 만나, 민 11:7, 9, 출 16:31이하, 민 11:6.

* 만나는 여호와께서 주어 먹게 하신 양식(15절)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 양식(3899)  레헴(lechem)  לֶחֶם 스트롱번호3899

1. 음식.   2. 레 3:11. 3. 레 21:8
발음 [ lechem ]
어원 / [여] 389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97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음식, 양식.
 a. 명사, 남성 [사람과 짐승의] 레 3:11, 욥 20:14, 시 41:10(9), 102:5(4).
 b. 명사, 남성 [하나님의 희생 제물에 대해 사용] 레 21:8,17, 렘 11:19

2. 명사, 남성 빵, 떡, 진설병, 출 25:30, 35:13, 39:36.
3. 명사, 남성 밀, 곡물, 곡식, 사 28:28.

이것이 무엇이냐
- 이 말의 히브리어는 '만 후'(*)로서 '만나'(Manna)라는 명칭은 바로 이 단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
즉 '무엇이냐'(What)라는 뜻의 히브리어 '만'을 70인역이 헬라어로 '만나'라고 번역한 데서 그 명칭이 유래하였다( Wycliffe).

여호와께서...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 성경에서 말하는 만나에 대하여 시나이 반도 내륙 지방의 유목민들은 '만'이라 불리우는 연지벌레에서 나오는 분비물이 바로 이 '만나'인 것으로 주장한다.
반면에 일부 아랍인들은 위성류(tamarisk)에서 나오는 진액이 굳어 흰색을 띤 것이 '만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몇몇 학자들 역시 이 만나를 시내 반도 부근에서 자생하는 식물액(液)으로 이해하여 기적적 만나의 공급을 의심한다(Seetzen, Burckhardt, Ritter).
하지만 이러한 주장과 달리 분명 만나는 하나님께서 초자연적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급하신 하늘의 양식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사실은 만나가
1. 40년동안 백성들이 행진하는 곳마다 사철 구분없이 주어졌으며
2. 일정한 시간, 제한된 장소에서만 200만 명의 인구에 부족함 없이 충족하게 주어지고 안식일 전날은 평일의 2배가 내려졌다는 점 등에서 분명히 입증된다.

깟씨
- 미나리과에 속하는 '고수풀'(coriander)의 씨를 가리킨다.
이 씨는 회백색에 직경 3mm 정도 되는데 소화제나 향료 또는 조미료로 쓰인다(민 11:7).

이스라엘은 메추라기와 만나로 생존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단지 생존문제의 해결을 위해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신 것일까요?
그런 것이라면 한 사람이 거둘 분량을 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분량을 정하지 않고 마음껏 거두어서 먹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16절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처럼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시면서 한 사람에 한 오멜이라는 분량을 정하십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고 말합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생각해 보면 세상의 이치와는 맞지 않습니다.
많이 거두면 그만큼 더 남아야 하고 적게 거두면 그만큼 부족한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남보다 더 많이 거두고 많이 남기기 위해 피나는 경쟁을 합니다.
그리고 그 또한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이 거두어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두어도 부족함이 없다면 많이 거두었다 적게 거두었다는 것이 의미가 없게 됩니다.
많이 거둔 것이 부와 자랑이 되지 못하고 적게 거두었다 해도 비천과 불만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그들이 살았던 기존의 세상, 애굽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신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생존을 위해 한 일이 또 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19, 20절)는 말씀처럼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고 더러는 아침까지 둔 것입니다.

날마다 아침이면 지면에 만나가 있을 것인데 왜 남겨두었을까요?
그것은 내일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있는 만나가 내일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있는 만나가 내일은 없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장 내일에 대한 불안감이 있게 됩니다.
만나가 없으면 당장 생존에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생존을 위해 아침까지 남겨둔 것이라면 결국 이스라엘은 만나를 생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으로만 여겼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성향의 인간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가나안 땅은 기존에 존재하던 가나안 민족의 삶의 방식 그대로 유지될 것입니다.
많이 거두기 위해 경쟁할 것이고, 많이 거둔 것이 힘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적게 거둔 사람은 힘없는 약자가 되는 세상의 속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애굽의 삶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을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는 균등입니다.
이러한 균등으로 나타나는 세계는 인간의 힘으로 거둔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은 그 은혜조차 받을 수 없는 존재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망을 들으시고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시는 이유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메추라기와 만나는 이스라엘의 열심과는 무관합니다.
이스라엘이 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지면에 있었던 것이고 그것을 거두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오멜씩 거두면서 자신들의 노력과는 무관한 은혜임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알지 못한 양식을 주신 이유입니다.

고린도후서 8:14-15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헌금의 문제로 연결하여 말합니다.
헌금을 단순히 교회에 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많이 거두었든 적게 거두었든 그것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세상의 이치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시각, 새로운 세계입니다.

세상은 많이 거둔 자를 적게 거둔 자보다 더 가치 있게 대우합니다.
실력이 있기에 많이 거두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이 거둔 자는 많이 헌금할 수 있습니다.
적게 거둔 자는 상대적으로 적게 헌금하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가 헌금을 많고 적음의 시각으로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에서 균등은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두었다는 것 또한 무시되면서 많이 헌금한 사람이 대접받는 지옥의 현장이 될 뿐입니다.
많이 거둔 것이 자랑이 될 수 없고 적게 거둔 것이 불만이 될 수 없는 균등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균등의 세계는 소유가 균등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소유가 균등해 질 수는 없습니다.
균등은 십자가로 가능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안다면 그리스도의 피를 가장 존귀한 생명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얻은 자라면 세상에서 거두는 것의 많고 적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균등입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의 차등이 없고 따라서 헌금 액수의 많고 적음에 따른 차등도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로 인한 균등이며 성령으로 새롭게 된 신자의 세계인 것입니다.
생명을 얻었고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된 것이야 말로 참된 부요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땅의 것의 많고 적음은 그야말로 의미 없는 것으로 추락해 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일을 불안 해 하면서 거둔 것을 아침까지 둡니다.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믿지 못하고 내가 거둔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게 하신 하나님이 내일을 살게 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오늘도 내일도 많이 거둘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활의 생명에 참여한 신자는 천하를 얻은 것보다 귀한 것을 가진 부요한 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많이 거두어도 남은 것이 없고 적게 거두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만 귀할 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을 소망하며 균등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만나와 메추라기에 대한 첫 언급은 출애굽기 16장에서 시작된다.
이스라엘 회중은 광야에서 굶어 죽겠다며 그들을 인도해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사실 이 원망은 모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먹을 것을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줄 것이다. 저녁에는 먹을 고기를 주고, 아침에는 배불리 먹을 빵을 줄 것이다. 그러면 너희가 나를 인정할 것이다.”(16:4, 8, 12)

뒤이어 출16:13절에 처음으로 ‘메추라기’(Quail)가 먼저 등장한다.
[그날 저녁에 메추라기가 날아와서 진 친 곳을 뒤덮었고, 다음 날 아침에는 진 친 곳 둘레에 안개가 자욱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메추라기가 내려왔다.
그런데 백성이 그 메추라기를 잡았는지, 먹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만나’(Manna)가 처음 등장한다.
[안개가 걷히고 나니, 이럴 수가, 광야 지면에, 마치 땅 위의 서리처럼 보이는, 가는 싸라기 같은 것이 덮여 있는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 자손이 그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서로 "이게 무엇이냐?" 하고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입니다.”]

여기에서 ‘이게 무엇이냐?’라는 단어가 ‘만 후’이고 여기에서 ‘만나’라는 말이 파생되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본문은 16장이 14절부터 36절로 끝낱때까지 ‘만나’를 어떻게 먹는지에 대한 규칙을 설명한다.
언제 어떻게 얼마나 자주 만나를 먹을 것인가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메추라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
메추라기를 어떻게 먹을지, 언제 먹을지에 대한 설명도 없으며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배고픈 백성이 갑자기 내려온 메추라기를 당연히 먹었는데 다만 기록이 되어있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좀 더 관련 근거가 필요하다.
앞서 말했듯이, 출애굽사건은 유대교와 기독교 배경에서 대단히 중요한 이슈였기 때문에, 신구약 저자들은 그때의 사건을 자주 인용했다.

메추라기

1. [출애굽기 16: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2. [민수기 11:31]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 곁 이편 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3. [민수기 11:32]
백성이 일어나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진 사면에 펴 두었더라

4. [사무엘상 26:20]
그런즉 청컨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곳에서 이제 나의 피로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5. [시편 105:40]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로 오게 하시며 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


다음은 성경에서 ‘만나’에 대한 언급을 찾아서 모아보았다.

출애굽기16:31, 35
이스라엘 사람은 그것을 만나라고 하였다. 그것은 고수 씨처럼 하얗고, 그 맛은 꿀 섞은 과자와 같다. 이스라엘 자손은 정착지에 이를 때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를 때까지 만나를 먹었다.

민수기11:9
밤이 되어 진에 이슬이 내릴 때면, 만나도 그 위에 내리곤 하였다.

신명기 8:3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 5:12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날부터 만나가 그쳐서, 이스라엘 자손은 더 이상 만나를 얻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 해에 가나안 땅에서 나는 것을 먹었다.

느헤미야 9:15, 20
굶주릴까봐 하늘에서 먹거리를 내려 주시고, (생략) 그들의 입에 만나가 끊이지 않게 하시며, 목말라 할 때에 물을 주셨습니다.

시편 78:24, 25
만나를 비처럼 내리시어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으니, 사람이 천사의 음식을 먹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풍족할 만큼 내려 주셨다.

요한복음 6:31
'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서, 그들에게 먹게 하셨다' 한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히브리서 9:4
거기에는 금으로 만든 분향제단과 온통 금으로 입힌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생략) 돌판이 들어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17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감추어 둔 만나를 주겠고, 흰 돌도 주겠다.

위와 같이, 단순히 키워드 검색만 해봐도 신구약을 통틀어 ‘만나’는 약 20회 정도 인용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 어떤 저자도 ‘만나와 메추라기’라는 표현을 쓴 적은 없다.
쓰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만나’라고만 표현했을 뿐이다.
이에 비해, 메추라기가 등장하는 본문은 성경 전체에서 딱 3번뿐이다.
그 중 첫 번째는 위에서 설명한 출애굽기 16장의 첫 등장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번을 찾아보자.

메추라기가 등장하는 두 번째 본문은 민수기 11장이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섞여 살던 무리가 먹을 것 때문에 탐욕을 품으니, 이스라엘 자손들도 또다시 울며 불평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이집트에서 생선을 공짜로 먹던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그 밖에도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에 선한데,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입맛마저 떨어졌다.” (11:4-6)]

이 본문을 보면 위의 출애굽기 16장에서 그들은 메추라기를 먹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이제 '만나만 먹는 것이 지겨우니' 제발 고기를 달라고 원성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백성의 불평을 들은 모세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심지어 ‘한 달 내내, 냄새만 맡아도 먹기 싫을 때까지, 줄곧 그것을 먹게 될 것이다.’(20절)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신다.
왜냐하면, 그 백성의 불평에 대단히 노하셨기 때문이다.(10절)
그리고 실제로 메추라기 기적이 일어난다.
[주님께서 바람을 일으키셨다. 주님께서 바다 쪽에서 메추라기를 몰아, 진을 빙 둘러 이쪽으로 하룻길 될 만한 지역에 떨어뜨리시어, 땅 위로 두 자쯤 쌓이게 하셨다. 백성이 일어나 바로 그날 온종일, 그리고 밤새도록, 그리고 그 이튿날도 온종일 메추라기를 모았는데, 적게 모은 사람도 열 호멜은 모았다. 그들은 그것들을 진 주변에 널어 놓았다. (민 11:31-32)]

그토록 고기를 원하던 그들은 드디어 메추라기를 먹게 되었다.
아니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길래 이 긴 글을 적었는가?
그 이유는 이어지는 다음 절에 나온다.

[고기가 아직 그들의 이 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주님께서 백성에게 크게 진노하셨다. 주님께서는 백성을 극심한 재앙으로 치셨다. 바로 그곳을, 사람들은 기브롯 핫다아와(탐욕의 무덤)라 불렀다. 탐욕에 사로잡힌 백성을 거기에 묻었기 때문이다. (민 11:33-34)]

그렇다. 메추라기를 먹은 백성은, 행복하고 맛있게 냠냠 쩝쩝한 게 아니라, 먹고 죽었다. 심지어 ‘고기가 아직 그들의 이 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그들의 불평과 원망에 대한 대가였던 것이다.
그들은 극심한 재앙 때문에 죽고 말았다.
그들이 메추라기를 먹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재앙을 받은 이후에 다시 메추라기를 내려주셨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
여호수아서에서 출애굽이 끝난 후 가나안에 도착하자 이제는 '만나'가 멈추었다고만 말한다.(수 5:12)

성경에서 메추라기를 언급한 마지막 세 번째 본문은 시편 78편 27-29절이다.
사실 이 본문은 민수기 11장의 내용으로 지은 시편이다.
"고기를 먼지처럼 내려 주시고, 나는 새를 바다의 모래처럼 쏟아 주셨다. 새들은 진 한가운데로 떨어지면서, 그들이 사는 곳에 두루 떨어지니, 그들이 마음껏 먹고 배불렀다.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넉넉히 주셨다."

비록 '메추라기'라는 단어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만나와 함께 '하늘의 새'를 내려주셔서 먹었다는 점에서 민수기 본문의 메추라기로 간주할 수 있다.
그들은 분명 메추라기를 먹긴 먹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30-31절의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먹을 것이 아직도 입 속에 있는데도, 그들은 더 먹으려는 욕망을 버리지 않았다. 마침내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노하셨다. 살진 사람들을 죽게 하시며,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을 거꾸러뜨리셨다.]

결국 이 시편은 민수기 11장에서의 사건을 그대로 요약한 것이며, 결말은 동일하다.

메추라기를 먹은 백성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욕망에 진노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메추라기를 먹었던 사건은 결코 ‘긍정적인 예화’로 사용될 수 없었던 것이고, 신구약 모든 저자들도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표현할 때 ‘메추라기’를 언급하지 않고, ‘만나’만 언급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나’와 ‘메추라기’는 함께 사용하기 상당히 민망한 단어의 조합이며, ‘만나와 메추라기’라는 제목으로 간증을 해서는 더더욱 안되겠다는 결론을 내려본다.

만나와 메추라기의 역사를 보여준 신 광야

신 광야는 엘림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가기 전에 지나간 지역이다.

출애굽기 16: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신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 씬’으로, 가데스 바네야가 있는 미드바르 친 광야와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경에서는 둘 다 똑같이 ‘신 광야’로 표현되어 혼동을 주고 있다.

친 광야는 에돔 옆에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 지역의 남쪽에 있는 광야를 말하며, 신 광야는 시내 산에 가기 전에 통과한 광야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여정 때 지나간 광야는 에담 광야, 수르 광야, 씬 광야, 시내 광야, 바란 광야, 친 광야가 있다.
신 광야는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으며, 이스라엘 자손이 르비딤에 도착하기 전에 있었던 곳이다(출 17:1).
신 광야는 광범위한 지역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명칭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신 광야의 정확한 위치는 추정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오늘날 와디 타이베에서 동쪽으로 이르는 산악 도로를 통과하여 시나이 반도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있는 황량한 구릉 지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이곳에 도착하는 데 꼭 1개월이 소요되었다.
따라서 아무리 많은 양식을 가지고 나왔다 할지라도 이 때쯤 거의 떨어진 상태였을 것이다.
양식이 떨어지자 그들은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원망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께서 면하게 하신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이 없는 자들은 항상 과거지향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과거에만 집착하는 것은 불신앙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곳이 바로 신 광야이다.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은 정말 인내를 요구하는 고난의 길이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만드는 좋은 약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지렛대의 구실을 한다.

고난에 능숙한 사람은 그만큼 자기 부족을 절실히 깨닫게 되며,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내적 의지가 강해진다.
그러나 때로 고난은 우리들을 좌절의 함정으로 이끄는 모티브가 된다.
신 광야에서 양식이 떨어졌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은 우리들에게 많은 점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 인간들의 나약하고 간교한 심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난 중에 있는 자가 고난을 인내하지 못할 때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는 악한 사단의 세력에 동조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신 광야에서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해결해주는 만나와 메추라기의 역사가 있었던 곳이 바로 신 광야이다.

메추라기는 히브리어로 셀라우라고 하는데 꿩과에 속하는 새로서, 몸 길이는 약 18cm 정도이며 털은 다갈색이고 흑색의 반점이 있다.
이 메추라기는 작은 철새로서 3-4월경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이동하는데, 시내 반도와 팔레스틴은 그 통로가 된다.
이 새는 날개가 짧으므로 계절풍을 이용하여 대군의 떼를 이루어 날아 이동한다.
이 지역을 통과하는 메추라기는 살이 쪄 둔중하므로, 시내 반도 및 애굽에서는 손으로 메추라기를 잡을 수가 있다.
그리고 9월에는 반대로 대군을 이루어 북에서 남쪽으로 이동한다.
특히 가을 메추라기는 별미로 알려져 있다.
이 새는 둥지를 지면에 만들고 평균 16개의 알을 낳아 키우는데, 알은 식용으로 쓰인다.
다윗왕은 사울 왕에게 쫓기는 자신을 메추라기에 비유하기도 하였다(삼상 26:20).

그리고 히브리어 셀라우는 비만을 뜻한다.
신 광야에서 음식물이 부족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 원망하고 있을 때 하늘로부터 비같이 내린 양식이 만나라고 한다(출 16:4).
그런데 실제로 시나이 반도의 건조 지대에서는 만나와 비슷한 음식이 존재하고 있다.
위성류 나무에 기생하는 깍지벌레가 있는데 ‘만’은 이 곤충의 분비물을 가르키는 말이라고 한다.
6월이 되면 깍지벌레는 탄수화물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위성류 나무의 수액을 빨아, 일부는 애벌레에게 주고 나머지는 가지 위에 방울 모양으로 뱉어 놓는다.
이 분비물은 건조한 기후 탓에 물기가 빠져 금방 결정체가 되어 땅에 떨어지는데, 매우 달고 쫀득쫀득하여 먹을 수가 있다. 성경에서는 만나가 고수풀씨 같이 희었고 맛은 벌꿀과자 같았다고 하였다(출 16:31). 고수풀은 미나리과에 속하는 일년생 식물로 1-3mm 크기의 씨는 옅은 회색이다. 실제 만나는 흰색, 갈색, 노르스름한 색(민 11:8) 등 다양하다. 그리고 만나 성분을 화학적으로 분석해 본 결과 펙틴을 지닌 세 가지 기본 당으로 짜여 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는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인 만나를 서로 많이 거두겠다고 욕심 부리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어느 한 개인에게 축적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는 곳이 신 광야이며, 적게 거둔 자나 많이 거둔 자나 자신이 만족할 만큼의 일용한 양식이 되었다는 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다음날까지 남겨 놓은 자의 만나를 썩게 하심으로, 내일의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은 단호하게 배척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산업 사회에서 풍족한 물질문명을 향유하고 있지만, 함께 나누어 먹어야 할 양식을 독식하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이 사회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내일의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함께 더불어 사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곳이, 바로 만나와 메추라기의 역사를 보여준 신 광야다.






만나와 메추라기의 비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오랜 기간 동안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사막에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만나 때문이었다.
하늘에서 쏟아진 하얀 서리 같은 것을 보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서로 “이것이 무엇이냐?” 라고 물었다.
만나는 아랍말로 “이것이 무엇이냐?”를 뜻한다.
그것은 고수(미나리과의 1년생 초본)씨앗 같이 하얗고 맛은 벌꿀과자 같았다. 

만나는 사막에서 자라는 관목 잎사귀에 연지벌레가 붙어서 만들어내는 이슬 모양의 형성물이다.
우리나라에서 연지곤지 할 때 연지가 연지벌레 말린 것이다.
입술과 뺨에 바르는 빨간색 연지를 이마에 바르면 곤지가 된다.
딸기맛 우유나 빨간 립스틱에 들어가는 코치닐추출색소가 바로 연지벌레에서 채취한 것이다.

만나는 연지벌레의 침을 통해 나오는 분비물에서부터 생성되어 나뭇잎에 맺혔다가 땅바닥에 떨어지는데 밤이 되어 기온이 떨어지면 딱딱하게 굳는다.
그래서 아침에 나가면 그걸 수확해서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녹는 온도가 낮기 때문에 햇빛이 나면 다 녹아버려서 햇빛이 나기 전에 거둬들여야 했다. 

만나는 맛이 달콤해서 지금도 먹을거리가 부족한 토착 유목민들은 그것을 인스턴트 먹을거리로 이용한다.
모세는 원래 미디안 광야에서 이미 40년 동안 양을 치면서 살았기 때문에 만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배고파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이거 어떻게 해결하지?” 고민하다가 불현 듯 만나를 기억해냈을 것이다.
그걸 여호와께서 주신 양식이라고 백성들에게 말해주고 그들은 그렇게 믿고 먹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은 참 간사하다.
하나님이 만나 외에 다른 것을 주지 않고 40일이 지나자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보내주시기로 하였다.
실제로 메추라기는 이 지역을 지나 아프리카로의 긴 여정을 하였고, 긴 여정 끝에 지친 메추라기들이 땅에 떨어졌을 거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은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동하는 철새의 통로이고, 겨울철에 팔레스타인을 통해서 이집트로 이동한다.
즉 일 년에 두 차례 보통 메추라기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때에 지났던 지역을 통과한다.
이런 철새의 이동은 고대인들에게는 분명히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19세기에는 철새의 대량포획이 일어났으며 20세기에 들어서도 수년 동안 메추라기는 이집트의 주요 수출품의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1920년경에 이르러서는 그 번식률이 극히 떨어져 메추라기의 이동이 중단되었다. 

민수기 11:33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불평하는 죄를 저지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벌을 받는데, 이를 오염된 메추라기를 먹고 식중독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메추라기는 크리스마스로즈와 사리풀 등을 먹는데, 이 풀에는 독성이 있다.
결국 이 독성이 농축되어 있는 새를 먹을 경우 사람에게도 해가 될 수 있다.
바로 만나에 대해 불평을 했던 사람들은 이런 메추라기를 먹고 죽었을 것으로 본다.

메추라기는 꿩과의 철새로, 유럽 전 지역과 아시아 서쪽에서 주로 번식한다.
원래 야생조였으나 일본에서 최초로 식용 및 채란용으로 가금화되었다.
알과 고기는 모두 식용 혹은 약용으로 이용되는데, 동물성 식품이면서도 알칼리성 식품이고, 비타민 A와 단백질이 풍부하고 기름기가 적어 다른 동물성 식품에 비해 저칼로리 식품으로 특히 다이어트와 강장효과가 탁월하다.

우리는 고기보다는 알에 익숙하다.
메추리알은 일반 계란처럼 그냥 쪄서 먹거나 생으로 먹는데, 달걀보다 비타민 B1, B12가 훨씬 많이 들어있으며, 인과 철 등이 더욱 풍부하다.
단백질도 계란에 비해 많이 들어있고, 아미노산 조성은 계란과 비슷하나 글루탐산이 메추리알에 더 많다.
메추리알은 산후에 먹으면 회복이 빠르며, 허약체질 혹은 소모성 질환을 앓고 난 뒤에 보양으로도 좋은 음식이다. 

메추라기 고기는 맛도 좋고, 스태미나 식품으로 유명하다.
메추라기 고기가 비타민 B군이 많아 에너지 대사와 성호르몬 기능을 조절하여 성적욕구증대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본초강목에 따르면 메추라기는 체내 모든 장기의 기능을 보강하고 근골을 굳건히 하며 상식하면 겨울에는 추위를 이기게 하고 여름에는 더위를 이기게 한다.
동의보감을 보면 메추라기 고기는 ‘순육’이라고 하는데 “순육은 오장을 보강하고 힘줄과 뼈를 튼튼히 한다”라고 하였다.

한 오멜(16절) : 한 오멜은 약 2.3리터입니다.

● 묵상 :

하나님께서 날마다 그들을 먹이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같은 은혜를 내리십니다.

날마다 우리를 먹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합시다.

2) 만나는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는 하나님의 은혜(16~18절)

  하나님께서는 1인당 한 오멜씩 식구수대로 가져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대로 하였더니 어떤 사람은 많이 가져가고, 어떤 사람은 적게 가져갔습니다. 그것을 식구수대로 나누었더니 많이 가져간 자도 남지 않았고, 적게 가져간 자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았다는 것은 사람이 배불리 먹는데 충분한 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충족감을 느낄 만큼 충분히 배부르게 먹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40년간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게 만나를 주신 하나님은,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 묵상 :

이렇게 40년간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게 만나를 주신 하나님은,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십니다.

3) 만나는 나눔을 훈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만나를 식구수대로 가져가게 하신 후에 식구들과 함께 나누어 먹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져간 것을 식구수대로 나누었더니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만나를 나 혼자만의 것으로 따로 챙겨둘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40년간 반복하심으로 하나님의 주신 것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누는 것을 ‘체데카(의)’라고 말합니다.

● 묵상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나누는 삶을 실천하십시오.

말씀을 배운 이들은 말씀을 나누고, 물질을 가진 이들은 물질을 나누고,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이들은 자신이 가진 지식이나 기술을 나누십시오.

하나님께서 더 풍성한 것을 채우십니다.

4) 만나는 안식일을 지키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5절)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마다 만나를 내리셨으나, 제 7일에는 만나를 내리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제 6일에 이틀 치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다른 날에는 만나를 남기고 보관하면 다음 날 아침에 그 만나에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지만, 안식일에는 전날의 싱싱함이 그대로 보전되어 안식일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40년 동안 매 안식일마다 만나를 내리시지 않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5) 만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 만나를 진영의 지면에 내리셨으니 그들은 그저 그릇을 들고 장막을 나가서 만나를 퍼오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만나를 먹는데 있어서 몇 가지 규칙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리시는 이 규칙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훈련시키셨습니다.

그 규칙은

① 각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만 거두라는 것,

② 거둔 것을 식구수대로 골고루 나누어주라는 것,

③ 다음 날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것,

④ 제 6일에는 이틀 치를 거두어 안식일을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필요한 만큼만 거두라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훈련하게 하기 위함이고, 식구들끼리 골고루 나누어 먹으라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나누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또 다음 날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나누지 않고 쌓아두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과 탐욕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 6일째에는 이틀 치를 거두게 하셔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을 훈련하셨습니다.

● 묵상 : 이스라엘은 40년 동안이나 이런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만나를 통해서 매일, 또는 매주 반복적으로 행하는 일들 속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 있음을 훈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매주 주일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그리고 매주 반복적으로 행하는 봉사와 섬김에 충성합니다.


● 묵상 :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걱정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공연히 걱정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일을 주께 맡겨 믿음 있는 자가 되십시오.

* 기도제목

1. 우리 입에서 불평이 사라지게 하시고, 늘 감사가 가득한 입이 되게 하옵소서.
2. 끝없이 채우려는 저주받은 욕심과 탐욕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3. 날마다 육의 양식을 먹듯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여 영의 양식을 섭취하게 하옵소서.
4.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항상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않게 하셔서 육신의 것을 얻으려는 일로 영의 자리를 잃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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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5일 / 03- 01(금)
출애굽기 15:1-27
찬송 / 229장(주 예수 다스리시니 )

신유(神癒)  하나님 신, 병 나을 유
- 신의 힘으로 병이 낫는 일
- 신앙 요법의 하나

치유(治癒) 다스릴 치, 병나을 유
- 치료하여 병을 낫게 하는 일

신유(信癒) 믿을 신, 병나을 유
- 믿음으로 병을 고치는 것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치료하는 여호와(출애굽기 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He said, "If you listen carefully to the voice of the LORD your God and do what is right in his eyes, if you pay attention to his commands and keep all his decrees, I will not bring on you any of the diseases I brought on the Egyptians, for I am the LORD, who heals you."

치료하는 여호와(I am the LORd who heals you.)
여호와 로파(יְהוָה רֹפְאֶךָ)

치료하다(7495) 라파 [ râphâʼ ]  רָפָא   

1. 수선하다.   2. 고치다. 3. 신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발음 [ râphâʼ ]
구약 성경 / 67회 사용

너희가... 규례를 지키면
- 이 구절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며 순종에의 촉구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의 언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법도와 율례'는 그의 백성에게 '계명과 규례'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는 그의 백성들에게 의(義)의 행위를 요구한다.
즉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육신적 편안함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정하신 법을 따라 사는 의로운 사람을 요구하신 것이다. 질병으로부터의 보호 약속에 앞서 요구하신 이 요구는 곧 오늘 우리의 신앙의 표준이기도 하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 문자적으로 '여호와', 와 '너희의 치료자'란 동격의 단어가 합성을 이뤄 만들어진 것으로, 직역하면 '나 여호와는 너희의 치료자'가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절대자이신 동시에 우리의 모든 질병과 아픔을 치료해 주시는 친근한 분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치료하는'의 히브리어 '라파'는 '의사' 또는 '의원'을 가리킨다.
곧 우리의 의원되시는 여호와는 실로 모든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실 뿐만 아니라, 죽음과 죄 등 인생의 모든 문제점까지도 깨끗이 해결해 주시는 진정한 우리의 치료자이시다(마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청종하고(8085) 솨마 [ shâmaʽ ]  שָׁמַע  
 

1. 듣다.   2. 창 3:10.  3. 창 37:17
발음 [ shâmaʽ ]
구약 성경  / 1159회 사용


행하며(6213) 아사[ ʽâsâh ] עָשָׂה
스트롱번호6213

1. 노동하다.  2. 만들다.  3. 생산하다
발음 [ ʽâsâh ]
구약 성경 / 2627회 사용


기울이며(238) 아잔 [ ’âzan ]   אָזַן  스트롱번호 238

1. 날카롭다.  2.  명확하다.  3. 히필형 : הֶאֱזִין
발음 / [ ’âzan ]
구약 성경 / 2회 사용


지키면(8104) 발음 [ shâmar ]  שָׁמַר   


1. 지키다.  2. 동산을 지키다.  3. 창 30:31.
발음 [ shâmar ]
구약 성경  / 411회 사용

한 나무를... 던지매 물이 달아 졌더라
- 혹자는 시내 반도 부근에 자생하는 어떤 나무의 열매, 예를 들면 '구르쿠드'(Ghurkud)란 나무의 열매가 쓴 물을 달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Burckhardt).
그러나 비록 나무 자체에 물을 맑게 하는 어떤 성분이 소량 함유되어 있는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효력이 갈증에 목이 탄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충족히 먹게끔 하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 나무는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의 도구로 사용됐을 뿐이다.
왕하 2:19-22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영적으로 이 나무는 만국을 치료하며 죽은 것을 소생시키는 하늘 나라의 생명 나무를 예표한다(계 22:2).





엘림
- '상수리 나무' 또는 '참나무'란 뜻으로 수에즈 동남쪽 약 100Km, 마라 남쪽 10여Km 지점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오늘날의 '와디 구룬델'(Wadi Ghurundel)인 듯하다(West-minster Historical Atlas to the Bibble).
당시 '엘림'은 비가 자주 왔고 개울과 샘이 상당히 많았다.
특히 이곳은 물샘 12개와 종려 70주가 있었는데, 이는 완전수인 12와 70(7x10)이 상징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완전한 휴식처와 안식처를 의미했다(Keil).
그리고 몇몇 학자는 물샘 12개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종려 70주는 이스라엘 70장로를 각각 위한 것이고, 또한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Kurtz, Baumgarten).
따라서 이곳은 우연히 이스라엘이 도달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섭리하심에 따라 인도된 곳이라 본다.
한편 출애굽 후 이곳까지의 여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애굽 고센 땅 라암셋(12:37)->숙곳(12:37)->에담(13:20)->바알스본(14:2)->홍해(14:22)->수르 광야(15:22)->말(15:23)->엘림(15:27)이다.


찬송하리니(5115) 나바 [ nâvâh ]  נָוָה

1. 앉다.  2. 단정하다. 3.  히필형 : 돋보이게 하다
발음 [ nâvâh ]

구약 성경  / 2회 사용

뜻풀이부
1. 원형  앉다, 쉬다, 합 2:5
2. 원형 단정하다, 어울리다.
 a. 원형 히필형 : 돋보이게 하다[찬양으로], 축하하다, 출 15:2.


노래하리니(2176) 지마라트 [ zimrâth ]   זִמְרָת

1. 노래.   2. 찬양의 대상.  3. 노래 제목
발음 [ zimrâth ]
어원  / 216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회 사용

뜻풀이부
1.명사, 여성 노래, 찬양의 대상, 노래 제목, 시  118:14, 사 12:2.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은 "신유(神癒)"라고 합니다.
'신유'라는 한자어는 "귀신 신(神), 병나을 유(癒)"
"Faith Healing" 이란 신앙요법 또는 신앙으로 치유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 나무를... 던지매 물이 달아 졌더라
- 혹자는 시내 반도 부근에 자생하는 어떤 나무의 열매, 예를 들면 '구르쿠드'(Ghurkud)란 나무의 열매가 쓴 물을 달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Burckhardt).
그러나 비록 나무 자체에 물을 맑게 하는 어떤 성분이 소량 함유되어 있는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효력이 갈증에 목이 탄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충족히 먹게끔 하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 나무는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의 도구로 사용됐을 뿐이다.
왕하 2:19-22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영적으로 이 나무는 만국을 치료하며 죽은 것을 소생시키는 하늘 나라의 생명 나무를 예표한다(계 22:2).

한 나무(6086) 에츠[ ʽêts ] עֵץ

1. 나무.  2. 숲. 3. 나무로 만든 우상
발음 [ ʽêts ]
어원 / 복수 עֵצִים, 연계형 עֲצֵי, 609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29회 사용

한 나무를... 던지매 물이 달아 졌더라
- 혹자는 시내 반도 부근에 자생하는 어떤 나무의 열매, 예를 들면 '구르쿠드'(Ghurkud)란 나무의 열매가 쓴 물을 달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Burckhardt).
그러나 비록 나무 자체에 물을 맑게 하는 어떤 성분이 소량 함유되어 있는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효력이 갈증에 목이 탄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충족히 먹게끔 하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 나무는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의 도구로 사용됐을 뿐이다.

열왕기하 2:19-22 
그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엘리사가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찌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엘리사의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날에 이르렀더라 .

한편 영적으로 이 나무는 만국을 치료하며 죽은 것을 소생시키는 하늘 나라의 생명 나무를 예표한다(요한계시록 22:2).

요한계시록 22:1-2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신유는 성경적 근거와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유는 지금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은혜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신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종말의 메시아이심을 증명해 주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성도들이 이미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신유의 은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 지으심의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해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후에도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본래 목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사명은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타락한 후에 임하게 된 육신의 질병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하나님을 찾게 되는 중대한 이유가 되었으며, 구원을 얻은 후에는 더욱 온전히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는 성화의 방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를 건넌 직후의 상황입니다.
홍해를 건넘으로써 이스라엘 자손은 세례를 받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나 그 전에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광야는 물이 없는 곳이요 양식을 얻을 수 없는 아무 것도 없는 메마른 황무지입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광야로 인도하셨을까요?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된 자들이 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연합한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광야 40년의 여정 동안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목이 말라 죽은 자들은 없었습니다.
양식이 없어서 굶어 죽은 자들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필요한 물과 양식을 공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그 모든 일을 감당하시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셨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자손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얼마나 온전히 믿느냐에 따라 좌우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광야 40년의 기간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연합하기 위한, 생명을 담보로 한 훈련의 기간이었고 시험의 기간이었습니다.

그 훈련과 시험의 첫 과정이 마라에서 있었습니다.
마라는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물을 얻기 위해 도착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라의 물은 쓴 물이어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낙심과 절망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가면 좋은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쓴 물만 있었습니다.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입에서는 모세를 향한 거친 원망의 말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을 주실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으며 그 나무를 물에 던졌을 때 마실 수 없었던 쓴물이 마실 수 있는 물로 변화되었습니ㅏㄷ.
이 사건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 15:2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애굽 사람에게 임한 모든 질병은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니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사람처럼 불순종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 연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쓴 물이 변하여 단물이 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여정 동안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불신앙을 치료하셔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연합하는 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은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신유의 은혜를 단순히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신유의 은혜는 언제나 영혼의 잘됨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나의 영과 혼과 육이 온전히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병 고침의 은사들"이라면서 복수를 사용한 것은 여러 가지 병들을 고치는 은사들을 말함을 알 수 있다.
먼저 병 고침의 은사들의 정의를 보면 다음 과 같다.

병 고침의 은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어떤 사람들에게 주신 능력인데,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뜻대로 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 사람을 통하여 질병을 고치시고 건강을 회복한다(C. Peter Wagner).

이 은사들은 질병이나 연약함을 초자연적으로 치유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사람을 통해서 나타난다(David Pytches).

이 은사들은 이 은사를 가진 사람이 안수, 기도, 명령 또는 이것들을 종합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의 육체적인 질병을 초자연적으로 고치는 능력을 말한다(Bobby Clinton).

1. 병 고침의 은사자들만 병을 고치는가?

- 병 고침의 은사들을 등한시하는 많은 보수교회에서도 야보고서 5장을 근거로 병자를 위해 기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약 5:14).
이렇게 하는 기도는 병 고치는 은사로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장로들(목사들)이 가진 영적 권세로 하는 기도이다.
물론 그렇다고 교회의 장로나 목사들만 병자를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은 아니다.
병 고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모든 신자들, 곧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이기도하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 . .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18).
그리고 병 고침의 은사들을 통해서(고전 12:9) 행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많은 종류의 병을, 더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잘 고침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극단적인 경우는 드물지만 아직도 신유만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일반적인 은혜의 산물인 의학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조심해야할 일이다.

어느 병원의 실험에 의하면, 한쪽 병자들은 약만 투입하고 다른 쪽 병자들은 약과 기도를 병행한 결과,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한 쪽의 병자들이 통증도 훨씬 적고 훨씬 빨리 회복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 기도와 의학을 병행하는 것이 좋다.
또한 기도를 통해 병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을 했더라도 의사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 좋다.
(미국 신유 사역자는 의사들을 대동한다.)

어떤 분들은 "목사님이 낫는다고 하니 병원에 가지말까요?"라고 질문도 한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하지만 은사자는 가급적 대상자에게 의사에게 가서 확인해보라는 것이 좋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으므로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는 극단에 치우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 성경이 말하는 치유들

- 성경은 치유라는 말을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성경에서 치유와 관련된 단어들을 찾아보면*세라퓨오: 주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육체적인 병을 치유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마 4:23; 8:7, 16 등).

* 이아오마이 : 육신적인 병은 물론(마 15:28), 마음이나 영적인 병은 물론 축사로 치유하는 것을 말한다(마 13:15; 눅 4:18; 요 12:40; 행 10:38; 히 12:3; 벧전 2:24; 약 5:16 등).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은사는 통상적으로 말하는 병 고침은 물론 귀신 쫓는 은사도 포함된다고 주장한다(마 15:28; 행 10:38).

ἰάομαι 스트롱번호2390

1.

고치다

2.

눅5:17

3.

회복하다

발음 [ iaŏmai ]




1.
고치다, 치료하다.
  • a.
    [문자적으로] 눅5:17, 6:19, 요4:47, 행9:34, 10:38등, [수동] 마8:8, 15:28, 눅7:7, 8:47, 요5:13, 약5:16등.
  • b.

    [상징적으로] [여러 종류의 병으로부터 온전하게 됨] 회복하다, 마13:15, 요12:40, 행28:27.


* 소조 : 구원하다(마 1:21; 18:11), 위험에서 건져내다(마 8:25; 14:30), 치유하다 또는 온전하게 하다(막 5:23; 6:56), 귀신 들린 자가 깨끗함을 받다(눅 8:36)에서 사용되었다.

σώζώ 스트롱번호4982

1.

구원하다

2.

구하다

3.

구출하다

발음 [ sōzō ]
어원
미래 σώσω, 제1부정과거 ἔσωσα, 완료 σέσωκα, 미완료수동태 ἐσῳζόμην, 현재 완료수동태 3인칭단수 σέῳσται, 완료수동분사 σεσῳσμένος,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σώθην, 미래 수동태 σω- θήσομαι, 기본형 σῶς ‘안전’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구원하다, 해 받지 않게 하다, 보전하다, 구출하다.
  • 2.
    [자연적인 위험이나 피해에서 구출하거나 그것을 당하지 않는 것]
    • a.
      [죽음에서] 구하다, 마14:30, 막15:30, 눅23:35.
    • b.
      [위험에서] 구출하다, 요12:27, 히5:7.
    • c.
      [병에서] 구하다, 놓아주다, 마9:21, 22, 막5:23,28,34, 6:56, 눅8:48, 17:19, 18:42, 행4:9, 14:9, 약5:15.
    • d.
      지키다, 보존하다.
    • e.
      [수동] 번창하다, 낫다, 건강해지다.
  • 3.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다, [영원한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다.
    • a.
      구원하시다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요12:47, 고전1:21, 딤후1:9, 히7:25.
    • b.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이] 눅7:50, 약1:21, 2:14, 벧전3:21.
    • c.
      [수동] 구원을 얻다, 마10:22, 막10: 26, 요5:34, 행2:21.
  • 4.
    [어떤 구절은 1,2에 다 속한다] 막8:35, 눅9:24, 롬9:27, 고전3:15.





* 라파 : 구약에서 사용된 것으로 원상태로 회복하다(창 20:17; 시 6:2; 렘 17:14).
사람의 병(출 15:26; 왕하 2:22), 나라의 죄악이 치유 받다(대하 7:14; 호 6:1; 렘 3:17).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에서 사용된다.

רָפָא 스트롱번호7495

1.

수선하다

2.

고치다

3.

신32:39

발음 [ râphâʼ ]
구약 성경
67회 사용

뜻풀이부

  • 1.
    원형 수선하다
  • 2.
    원형 고치다, 치료하다, 욥5:18, 사19:22,전3:3, [분사로] 의사, 창50:2, 대하16:12.
    • a.
      원형 치료하다 [하나님께 사용되어], 신32:39, 대하7:14, 시30:3(2), 호7:1, 11:3.
    • b.
      원형 용서하다, 대하30:20, 렘3:22, 호14:5(4).
    • c.
      원형 위로하다, 욥13:4.
    • d.
      원형 니팔형
    • e.
      원형 수선되다, 고쳐지다, 렘19:11
    • f.
      원형 치료되다, 레13:37, 신28:27, 왕하2:22, 사53:5.
    • g.
      원형 피엘형
    • h.
      원형 고치다, 수리하다, 왕상18:30
    • i.
      원형 치료하다, 왕하2:21, 렘6:14, 겔34:4,[은유적으로] 위로하다, 렘8:11.
    • j.
      원형 치료되게 하다, 출21:19.







- 이상 단어를 통해서 본 바와 같이 성경은 치유라는 말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치유는 5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영적 치유(spiritual healing)

죄인이 구원 받아 영혼이 치유 받는 것을 말한다(마 1:21; 13:15;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서 하였나이다."(시 41:4).


둘째, 육신 치유(physical healing)

몸의 질병이 치유 받는 것을 말한다.(마 4:23; 고전 12:9; 약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셋째, 심령 치유 또는 내적 치유(emotional healing, inner healing)

사람의 마음이 치유 받는 것을 말한다.(사 61:1-3; 눅 4:18-19; 마 12:20).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사 61:1-3), 육체의 질병의 70%가 마음의 질병에서 기인하는 심인성 질병임을 감안할 때 내적 치유는 육체의 치유 못지않게 중요하다.


넷째, 축사 또는 축귀(deliverance)

귀신을 쫓는 것을 말한다.(막 16:17; 눅 10:19; 행 10:38) 축사도 치유 사역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막 16:17).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신유의 은사라고 할 때는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 것으로 국한해서 이해하기도 한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영혼의 질병을 고치는 것(구원), 마음을 병을 고치는 것(내적 치유), 귀신 쫓는 것은 다른 단어나 개념으로도 소개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죽은 자를 살림

성경에는 죽은 자를 살린 기록이 가끔 나온다.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린 엘리야(왕상 17:22), 직원의 죽은

을 살리시고(마 9:18-24),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요 11:43-44), 죽은 도르가를 살린 베드로(행 9:36-40), 졸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게를 살린 바울의 경우(행 20:9-10)를 들 수 있다. 현대의 경우, 영국의 능력 사역자인 스미스 위글워쓰는 그의 집회에 오랫동안 참석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죽은 자를 최소 10명 이상은 살렸다고 하며, 인도네시아에 임한 부흥기간 중, 죽은 사람의 시신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찬양을 드렸을 때 그 사람이 살아났다고 증언한다.


3. 질병의 원인들

사람들이 병들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첫째, 원죄로 인한 연약함

죄를 지은 인간은 영, 혼, 육이 타락하여 기능이 약화되고 부실해졌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질병이나 연약함에 걸리지 않는 사람을 거의 없다.

둘째, 본인의 죄와 허물들

본인의 죄와 허물들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 징계를 받을 경우이다.
구스 여인과 결혼한 모세를 비방한 미리암은 7일 동안 문둥병에 걸렸다(민 12:1-16).
40년 광야생활을 보면 불뱀 사건 등 심판과 징계를 받는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를 하여 왕의 위세를 뽐낸 것으로 인해 이스라엘 전역에 온역이 내려 7만 명이나 죽었다.
세상의 온갖 죄악 가운데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질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지은 모든 죄를 회개하면 자신도 모르게 질병이 낫는다.

셋째, 마귀의 공격

마귀가 모든 질병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마귀가 질병을 주는 경우도 많다.
이스라엘의 어떤 여인은 사단에게 매여 18년 동안이나 허리가 꼬부라져 있었는데 예수님의 안수로 치유받았다(눅 11:13).

넷째, 마음의 상처

오늘날 질병의 70%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생긴다고 한다.
그러므로 치유사역자는 육체적인 치유는 물론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내적 치유에도 통달해 있어야 한다.
허리병, 관절염 등은 스트레스와 관계있고, 마음속에 증오심을 회개한 사람의 경우 관절염등이 나은 사례는 드문 일이 아니다.

다섯째, 자신의 부주의

생활 습관이 체계적이고 규칙적이지 못한 경우, 운동을 게을리 하는 경우, 음식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 질병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이때는 자신의 식생활, 일정 및 운동량을 조절하여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여섯째, 조상의 죄

조상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죄악을 저질렀을 때 그 자손은 그 죄악의 열매를 먹어 질병에 걸리는 경우도 있다.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

"이 모든 저주가(각종 질병을 포함하는 여러 가지 재앙들)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적과 감계가 되리라"(신 28:46).
유전병도 이런 원인 때문에 생기는 것들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가계 치유를 통해 그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한다.

일곱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날 때부터 병약자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1-3).

세계적 교회성장 학자인 피터 와그너는 전 세계적으로 오순절교단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주요 요인은 신유의 은사 덕분이라고 분석한다.(오랄 로버트, 케네스 헤긴, 조용기, 라인하르트 본케, 베니힌 목사 등은 오순절 교단 소속이다.)
그는 오순절주의자들도 할 수 있다면 성경을 철저하게 믿는 보수주의자들이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런 저런 신학적인 편견에서 벗어나서 믿음으로 마음 문을 열고 행하면 주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에 있는 무수한 약속은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풍성하게 역사한다.
승리와 패배의 차이는 항상 그 믿음에 달려 있다.
믿음으로 은사를 간구할 때 성령께서 병 고침의 은사들을 주신다.
많은 사람들은 혹시 내가 기도하여 병이 낫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한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가 아니다.
병을 낫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님을 반드시 자각해야 한다.
존 윔버 목사는 신유 기도를 일년 내내했으나 한 사람도 고침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끊임없이 믿음을 사용하여 말씀에 따라서 기도한 결과 일년 후부터 고침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나타나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유의 종이 되었다.














어떤 여자가 자기의 삶을 마치고 사후 세계로 가기 위해서 스탁스 위버라는 강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그 여자는 웨론이라는 요정을 만납니다.
요정은 그 여인에 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대는 이 강을 건너가기 전에 리틀스 계곡의 샘물을 마시고 가겠는가?" 여인은 물었습니다.
"내가 그 샘물을 마셔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자 요정은 "만약 그대가 리틀스의 샘물을 마시면 세상을 모두 망각하고 이 강을 건널 수가 있다"고 말했습니 다.
그러자 여인은 "나에게 그 샘물을 주십시오. 나는 이 세상에서의 고통을 다 잊고 싶습니다"
"허나 여인이여, 그대는 동시에 모든 기쁨도 잊을 것이요"
"허지만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실패를 망각하고 싶습니다."
요정이 다시 말하기를 "여인이여 하지만 동시에 그대는 성공도 잊을 것이요"
여인이 다시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상처를 잊고 싶습니다"
"여인이여, 하지만 그대는 동시에 사랑도 잊을 것이요"
한참을 생각하던 여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 샘물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이 여인은 마지막 인생 순례의 정점에서 기쁨은 고통을 동반하고, 성공은 실패를 수반하며, 사랑은 상처를 동반한 다는 진리를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옛날 헬라 때부터 내려오는 이비커스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비커스 는 주전 5세기경에 산 사람입니다.
그는 그 당시 유명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비커스가 고린도에서 가까운 시골로 여행을 갔다가 어느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지고 있던 것 다 빼앗긴 것은 말할 것 없고 매를 수없이 맞아 그만 죽게 되었습니다.
이비커스는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나 억울하게 매맞아 죽으면서 그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학을 보고 "너 학은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매맞아 죽는 것을 보지 않느냐. 나 는 이렇게 죽지만 이 다음에 네가 내 원수를 좀 갚아 다오"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비커스가 죽으면서 하는 말을 강도는 다 들었습니다.
그처럼 유명한 시인 이비커스가 행방불명이 되니까 사람들은 그의 행방을 확인하려 애썼지 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달이 지나도 모르다가 나중에 어느 산골짜기에서 그가 입고 있던 옷을 보고 그가 강도에게 맞아 죽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강도를 잡을 길이 없었습니다.
완전범죄였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고린도시의 노천극장에서 연극 공연이 있어서 많은 사람이 모여 연극 관람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 연히 학 몇 마리가 공중에서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은 구경하는 사람의 머리에 거의 닿을 정도로 낮게 날았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앉아 있던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벌떡 일어나면서 "아, 이비커스의 학이 나한테 원수 갚으러 오는구나"라고 소리쳤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져서 붙잡아서 알아보았더니, 바로 그 사람이 유명한 시인 이비커스를 몇 달 전에 산골짜기에서 죽인 강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강도가 왜 그런 소리를 질렀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연극 구경하는데 학이 머리 위로 날아가면 어떻습니까?
그저 '학이 날아가는가보다'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강도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죄가 그 사람의 양심 속에 서 그 사람의 죄를 찾아내서 그 사람의 양심 속에서 그 사람이 범한 무서운 죄를 만나게 한 것입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4일 / 02- 29(목)
출애굽기 14:1-31
찬송 / 장(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구원을 보라(출애굽기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Moses answered the people, "Do not be afraid. Stand firm and you will see the deliverance the LORD will bring you today. The Egyptians you see today you will never see again.

크리스천 작가였던 유명한 마크 트웨인은 이런 재미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Samuel Langhorne Clemens, 1835. 11. 30 ~ 1910. 4. 21)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
주요 작품으로는 미시시피 강 유역을 배경으로 개구쟁이 소년인 톰 소여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그린 동화 "톰소여의 모험"이 있다.

“나는 고양이를 한 우리 안에 넣어 보았다.
뜻밖에도 그들은 내 기대를 뛰어넘어서 잘 지내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이번에는 돼지 염소를 한 우리 안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들은 약간의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마침내 그들도 더불어 잘 어울릴 수가 있었다.
나는 이번에는 장로교인 감리교인침례교인을 한 우리 안에 함께 있도록 했다.
그런데 그들은 결코 잘 지낼 수가 없었다.”


하늘과 땅과 이웃을 이어 주는 나무

핀란드에 한 왕이 있었다. 
왕은 나라를 잘 다스렸으므로 백성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왕에게는 커다란 근심이 있었다.
그것은 자기의 뒤를 이을 왕자가 없고 공주만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공주의 신랑을 뽑아 대를 잇게 할 생각으로 왕은전국에 사윗감을 구한다는 방을 붙였다.
드디어 공주의 신랑을 뽑는  날이 되자 전국에서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몰려왔다.
첫번째  시험은 말타기와 활쏘기였다.
이 시험에서 20명 정도의 건장한 젊은이가 뽑히게 되었다.
두번째 시험은 지혜의 시험이었다.
왕은 문제를 냈다.
"높은 하늘과 땅을 잇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는 나무를 구해오너라. 기간은 100일을 주겠다." 
그러자 20명의 젊은이들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려면 우선 키가커야 하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려면 나뭇가지 또한  길어야 할텐데....'라고 생각하며 제작기 길을 떠났다.
그 20명 중에는 수녀원에서  고아로 자란 존 페로라는 청년이 있었다.
페로 역시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가장 커다란나무를 구하려다가 찾지 못하고 수녀원 성당에 들어가 기도했다.
현명한 왕이  되어 세상의 불쌍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하여 일할수 있게 해달라고 오랜 시간 기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려던페로는갑자기 무슨 생각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 때 나무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나무십자가다!" 
그 후 페로는 핀란드를 잘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찬송가 38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

* 막다른 길에 선 이스라엘 (1-12)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발길을 일반적으로 알려진 길이 아닌 네비게이션에 조차 나와 있지 않은 생소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즉 고센에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가려면 북동쪽으로 올라가야 하지만, 하나님은 정반대로 이스라엘을 남동쪽으로 내려가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출 13:17)” 우려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장소가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입니다(2).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바다에 막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홍해 바닷가에 이스라엘의 장막을 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이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에는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게 하셨다가(13:20), 그들의 발길을 “돌이켜”(2) 이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본문과 같은 내용의 민 33:7은 “에담에서 발행하여 바알스본 앞 비하히롯으로 돌아가서 믹돌 앞에 진쳤고” 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막다른 장소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로 하여금 배수진을 치게 해서, 죽기 살기로 애굽과 전투를 하라는 뜻인가요?
이스라엘은 아직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바로와 그가 이끄는 애굽 군대가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10b-12)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자유냐? 빵이냐? 빵은 인간의 육체적 굶주림 뿐 아니라 물질적 욕망의 상징입니다.
빵과 자유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이 있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했습니까?
그들은 무엇보다도 인간다운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소망대로 자유인이 된 그들에게 죽음이라는 공포가 밀려오자,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노예로 사는 편이 좋다면서 빵을 추구합니다.

광야에서 40일간 금식을 마치신 예수님께 마귀가 도발한 첫 번째 시험은 돌로 하여금 빵이 되게 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며(마 4:4),
사람의 욕망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빵을 택했습니다.
빵을 택한 그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출애굽한 수백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물도 먹을 것도 제대로 없는 광야로 간다는 것은 마치 자살행위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로 들어갔고, 역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막다른 홍해 바닷가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막다른 홍해로 인도하신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4, 18)

본문에서의 애굽 사람은 문자 그대로 애굽 백성 만을 한정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시 최대 강대국인 애굽은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온 세상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도 포함되고, 출애굽 여정 중에 거치는 모든 나라와 가나안은 물론 온 세상을 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세상이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줄 알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4.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그들이 이스라엘을 쫓아 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한 상태로 두신다’는 의미라고 일전에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얼마든지 돌이키실 수 있음에도 그를 완악한 상태로 두신다는 것처럼 무서운 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이 막다른 홍해 바닷가에 도달했다는 소식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마음이 완악해졌습니다.
마지막 10번째 재앙, 즉 장자와 첫 번째 태생의 죽음이라는 재앙 앞에서 망연자실해있던 그들은 복수심에 전 병력을 소집합니다.

5-7.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본문에서 병거는 말이 이끄는 전차로 오늘 날의 탱크와도 같습니다.
평지에서 탱크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선발된 병거만 600대였고, 그밖에도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했고 모든 지휘관들도 참여했으니, 애굽 군대의 규모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합니다.
600대 이상의 전차와 마병과 보병대가 뒤따르는 소리는 아마 지축이 흔들릴 정도 였을 것입니다. 점점 더 가까이 들리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흙먼지를 날리며 다가오는 애굽 군대의 위용 앞에서 막다른 홍해 해변에 장막을 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비백산할 만 합니다.

모세의 믿음 (13-14)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앞으로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아직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는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다’, ‘완악해진 바로가 온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뒤쫓아올 것이다’,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겠다‘ 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로와 그 군대를 어떻게 물리쳐주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백성들에게 뭐라 말했습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 본 애굽 군사를 앞으로 영원히 보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실 것이니 너희는 잠자코 구경만 하면 된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모세는 애굽이라는 구렁텅이 속에서 고통받던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믿음의 순도는 99%가 아니라 100% 여야 합니다.
99.9% 믿음도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역사해주실 것인지 몰랐음에도 하나님께서 무시무시한 바로의 군대를 물리쳐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바로 이 같은 순도 100%의 믿음을 통해 세상에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15-20)

15-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해주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앞으로 가게해라’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위로 내밀어라’
‘그러면 바다가 갈라질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갈라진 바다 가운데 마른 땅을 밟고 건너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해서, 애굽 병사가 너희 뒤를 따라 갈라진 바다로 들어갈 것이다.’

혹시 자연 현상 앞에서 경외심을 갖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스위스의 라우터브루넨라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은 트뤼멜바흐 폭포로 유명합니다.
트뤼멜바흐는 ‘드럼같은 소리를 내는 물’이라는 뜻입니다.
10단으로 이루어진 계단형 폭포로 높이가 140m에 달합니다.
동굴을 들어가면서부터 들리는 물소리가 폭포에 가까워지면서는 그야말로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커집니다.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며 쏟아지는 폭포를 바라보면서 ‘찬송가 79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불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넘실대는 바다가 갈라져서 양쪽으로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있는 물 절벽이 펼쳐있는 경이로운 모습을 보게 된다면 사람들은 경외심에 감히 갈라진 바다에 쉽사리 발을 디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완악하게 하셔서, 이스라엘 뒤를 따라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내일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복수심에 눈이 먼 바로와 그 병사들은 초자연적인 엄청난 현상 앞에서도 신에 대한 경외심은 없었고, 그들은 이스라엘의 뒤를 쫒아갔습니다.

모세에게 앞으로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목전까지 다가온 애굽과 이스라엘 사이에 경계를 치셨습니다.
앞서 가던 구름 기둥을 애굽 진 쪽으로 뒤로 물러서게 하셔서(19) 애굽 진영 쪽을 구름과 흑암으로 가두어서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쪽으로 오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20a).
반면 이스라엘 진영은 밤을 환히 밝히셔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준비를 하게 하셨습니다(20b).

이스라엘을 막다른 곳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은 애굽은 물론 온 세상과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확실히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은 홍해 사건을 통해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확실히 알아야 할 제일 우선의 대상은 이스라엘입니다. 내일 살펴보겠지만, 눈앞에서 펼쳐진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종 모세를 믿게 됩니다(31). 코로나 팬데믹은 신앙인과 비신앙인 모두를 힘들게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하셨을까?를 오늘 본문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제일 먼저는 신앙인인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당이 아닌 온라인을 통해 예배를 드리는 사상 초유의 경험을 해보았습니다. 주일예배를, 구역모임을, 성경공부를 현장이 아닌 온라인을 통해 하면서 대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서로 마주보며 말씀을 배우고, 신앙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깨달았습니다. 또 현장 예배를 드리지 못하면서 하나님과 일대일 관계로 홀로 서게 되는 유익도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해제되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어제 교육관을 방문해서 보니 그동안 휑했던 예배 현장에 어린 아이들로 가득함에 참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을 어제 주일 설교 말씀으로 해석하면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애굽과 같이 완악한 세상은 하나님을 절대 믿지 않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일수록 우리가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이 땅에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누구에게나 어려운 상황이 다가옵니다.
어려운 상황을 애굽과 같이 완악한 세상의 시선이 아닌 모세와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완악한 세상을 향하신 주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순도 100%의 믿음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소망하오니, 주님 연약한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전쟁이라는 막다른 길에 선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주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완악한 러시아 위정자들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이스라엘을 막다른 바닷가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3. 4절 하나님의 말씀과 13-14절 모세의 말에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4. 내 인생에서 막다른 길에 처했던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앞으로 막다른 길에 처한다면 어떻게 극복하시겠습니까?


성경 안에서 출애굽 사건은 중요한 사건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절대 잊지 말아야할 사건이었다.
그래서 이후의 구약 성경을 읽다보면 출애굽 사건이 종종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이 사건이 예수님에 대한 예표임을 밝히기도 했고 출애굽 자체가 영적 구원의 의미를 보여주는 좋은 모형이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출애굽기 14장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고 그래서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말씀을 기록한 성령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이 말씀의 배경과 상황을 통해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안에 등장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교훈을 얻기를 원한다.

 

여기까지의 상황

이 사건의 배경은 수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온 세상에 복을 주시기로 결정하셨던 창세기 12장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언약을 주셨고 그가 믿음으로 화답하기를 기다리셨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것을 약속하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화답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시며 공식적인 언약을 체결하신다. 그리고 그 때 그의 자손들이 이방에서 400년을 객으로, 노예로 고통 중에 살다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 이방 나라를 심판하시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구원해 낼 것을 약속하셨다.

결국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의 때에 엄청난 가뭄으로 인해서 야곱은 애굽(이집트)로 내려가게 되고 그곳에 그와 모든 가족들이 정착을 하게 된다. 물론 그 전에 하나님은 요셉을 먼저 그곳에 보내셔서 그들이 정착할 수 있는 준비를 해 두셨다. 그리고 창세기의 끝에서 요셉은 죽으면서 아브라함께 하나님께서 하셨던 약속을 그 형제들에게 상기시켰다.

창 50:24-25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단순히 약속의 땅에 묻히고 싶었던 것이 요셉의 바람이었다면 그는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 야곱의 경우는 그렇게 해달라고 유언을 했고 그의 아들들은 야곱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를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장사하였다. 요셉도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의 형들, 그리고 모든 자손들이 기억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굳이 자신의 해골을 메고 올라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후 많은 시간이 지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이방의 객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노예가 되어 이방 왕을 섬기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번성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들은 애굽이라는 당시의 강대국 안에 거주하면서 비록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생육하고 번성하고 강하게 성장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되었다.

출 2:23-25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 그리고 요셉이 말했던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아보실 때”가 되었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신다(출 3장).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알리시면서 그 자손들을 “애굽에 있는 내 백성”(출 3:7)이라고 부르시며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 내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실 계획을 밝히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이 계획에 애굽의 대항과 그로 인한 심판도 포함되어 있음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강한 손으로 애굽을 치실 것으로 그 모든 일을 통해 이스라엘의 여호와가 참 신, 참 하나님이심을 알리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가지고 계신 계획이었고 출애굽기에 와서 하나님은 그것을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시며 약속하시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허무맹랑할 것이다. 사실 애굽 왕 바로가 이 말을 듣고 처음에 보인 반응도 그랬다.

출 5: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당대 세계의 강대국이었던 애굽 왕의 입장에서 자신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민족을 그냥 보내달라는 모세의 말은 기가 찼을 것이다. 니가 뭔데, 니가 말하는 여호와라는 신이 뭔데 내가 그렇게 해야되느냐라고 바로는 반응했다. 그 여호와를 나는 모르니 그가 하는 말도 난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바로의 이 말은 틀린게 없다.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이 후에 이어지는 모든 출애굽 사건의 목적은 사람들도 하여금 여호와를 알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여호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었다.

출 6: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이스라엘]가 알지라

출 7:5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출 7:17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바로]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출 8:10 그가 이르되 내일이니라 모세가 이르되 왕의 말씀대로 하여 왕에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니

출 8:22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바로]가 알게 될 것이라

출 9:14-16 [14]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바로]가 알게 하리라 [15] 내가 손을 펴서 돌림병으로 너와 네 백성을 쳤더라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 [16]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출 10:1-2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2]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모세, 이스라엘, 그 자손]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결국 이 모든 재앙과 사건을 통하여 바로와 당시의 애굽인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는 결국 이스라엘에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출 12:31)고 말하게 된다. 여호와를 모르니 보낼 수 없다고 말하던 그가 이제는 여호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고 출애굽을 하게 되었고, 그들은 이제 요셉의 유언에 따라 언약이 성취되었음을 상징하는 그의 유골을 가지고 낮에는 구름 기둥을 따라 이동하고 밤에는 불 기둥 아래 쉬며 약속의 땅을 향해 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쩌면 조금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모든 일들때문에 약간 얼떨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들도 정말 하나님을 알고 진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 뒤에서 살펴보자.

상황은 다 끝난 것 같았다. 바로는 백기를 들었고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사람들에게서 많은 물품(금, 은, 패물, 옷 등)을 취하여 나왔다. 이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변수가 생긴다. 바로가 마음을 바꾼 것이다.

출 14:5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시간이 좀 지났다. 그러자 생각이 바뀌었다. 재앙은 끝났고 지금 자신들이 큰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잘 부려먹던 노예들을 다 그냥 내보내다니. 우리가 무슨 생각을 했던거지! 그래도 상식적으로 그 동안의 일들을 생각하면 사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그들의 굳은 마음은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길을 돌이킨 것(14:2)을 보면서 그들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들의 신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여호와는 광야에서는 힘을 못쓰는 그런 신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바로는 그들이 내보낸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잡아오기 위해 추격대를 보낸다.

출 14:6-7, 9 [6]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7]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8] … [9]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

가장 빠르고 강력한 애굽의 최정예 부대가 이스라엘을 추격해 왔다. 바로 전만 해도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영화로 치면 치열한 전쟁이 끝나고 에필로그로 잔잔한 음악이 이어지면서 평온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이어질 그런 상황이었다. 소설로 치면 발단, 전개, 절정을 지나 이제는 결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하나님의 오래된 약속이 눈 앞에 현실로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그 때, 그들의 눈 앞에 그들이 절대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바로의 군대가 나타난 것이다.

출 14: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

끝인 줄 알았는데 끝나게 생긴 것이다. 결말인 줄 알았는데 절망이었다.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스라엘은 숫자가 많았지만 그냥 숫자만 많았다. 그들은 군대가 아니었다. 바로의 군대가 끌고온 병거는 지금으로 치면 탱크다.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은 보병과 민간인 앞에 탱크 부대가 나타난 상황이다.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들과 싸울 수 없다. 이길 수 없다. 그럼 도망할 수는 있을까? 그것도 불가능하다. 그들은 바닷가에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두려움과 원망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반응을 보라.

출 14: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상황을 보면 이 정도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이 상황에서 두렵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어지는 이들의 말을 보면 이들은 단순히 두려운 마음을 가진 정도가 아니라 두려움이 이들을 삼켜버린 것을 알 수 있다.

출 14: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이들은 지금의 상황에서 죽음의 두려움, 공포를 느끼고 있다. 지금 여기서 절대로 살아서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차라리 죽을거면 그냥 애굽에서 살던대로 살다가 나이 들어 죽으면 되는데, 이렇게 광야까지 나와서 비참하게 죽어야할 이유가 어디있냐고 모세에게 따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전에 그들이 모세에게 했던 말을 상기시킨다.

출 14: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우리가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느냐. 누가 종살이에서 구해달라고 했느냐. 5장에 보면 모세가 처음 바로를 만나고 나서 그들은 오히려 더 학대를 당했고 그로 인해 모세와 아론에게 그들은 하나님께서 너희를 판단하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아마 그때 이들은 이런 식을 말을 했었을 것이다.

사실 이들은 이후에도 힘든 일을 만날 때 마다 종종 이런 식의 과거미화를 하며 왜 애굽에서 우리를 구해냈느냐는 식의 불평과 원망을 한다. 먹을 것이 없으니까 애굽에서는 자신들이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었다고 말하고 떡을 배불리 먹었다고 한다(16:3). 물이 없을 때에도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목말라 죽게 하느냐고 원망한다(17:3). 가나안의 정탐꾼들이 돌아왔을 때도 이들은 애굽에서 죽는게 나았다고 말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며 폭동을 일으켰다(민 14장).

결국 이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현재의 평안, 안전, 만족, 기쁨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기대하고 모세를 따라 나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깨뜨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나의 적이고 내가 벗어나야할 상황이었다. 나에게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하는 ‘악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어려움보다 차라리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지금의 이 상황, 애굽의 군대가 그들의 눈 앞에 다시 나타난 이 상황은 그들에게는 일어나지 말아야할 일이었을까? 조금 있다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자.

뜻밖의 상황, 예상 못한 상황, 내가 원하지 않았던 상황, 흔히 고난, 시련, 어려움이라고 부르는 이런 모든 상황들을 우리는 이렇게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고난은 나에게 좋지 않다고 단정짓고 따라서 단순히 거기서 벗어나는 것을 그 순간 최우선의 목표로 삼는다.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그런 상황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원인을 찾아 책임을 묻는다. 어떤 경우는 끊임없는 자책에 빠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어떤 환경, 다른 사람을 그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낸다. 때로는 그 대상이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도 하고 하나님이기도 하다.

바다를 뒤로 하고 애굽의 군대를 마주한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이렇게 하고 있다. 그들은 애굽의 군대를 마주하자 심히 두려워했다. 8절 끝에 보면 그들이 나올 때는 담대하게 나왔다. 그때는 그들이 승리를 경험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두려워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부르짖은 내용이 무엇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올바른 믿음의 고백은 아니었을 것이다. 절박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하늘을 찾듯 그들은 하나님을 찾았을 것이다. 아마 그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섞여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인 모세에게 했던 말을 보면, 그들은 모세에게 지금 고난의 모든 책임을 물으며 원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다.

13장까지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에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들은 단지 두려워하고 원망할 뿐이었다. 이 사건 전까지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그 놀라운 일들의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다. 그리고 믿는 것이었다. 이들에게는 아직 그런 믿음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백성들의 원망을 듣고 있었던 모세는 달랐다.

 

모세의 믿음의 확신

자신을 향해 원망을 쏟아내는 백성들에게 모세는 이렇게 답한다.

출 14:13-14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 부르셨을 때 모세는 정말 연약해 보였다. 뭐 저렇게까지 못하겠다고 하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모세는 전혀 다르다.

그는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어쩔줄 몰라하는 자들에게 가만히 서라고 한다. 애굽의 강력한 군대를 보고 죽음을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오히려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도전한다. 다시 보지 않을 줄 알았지만 다시 너희 눈 앞에 나타난 이 애굽 사람들을 이제는 정말 영원히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확신한다. 너희가 경험할 것은 너희의 죽음이 아니라 너희를 두렵게 하는 이 군대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너희가 싸울 필요가 없다고 단언한다. 하나님께서 싸우실 것이고 너희가 해야할 일은 가만히 있는 것, 두려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모세는 왜 이렇게 말했을까? 그저 지도자로서 백성들이 힘을 내서 싸울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은 아니다. 오히려 모세는 그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싸우실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싸우신다는 확신은 어디에서 왔을까?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그가 경험한 것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후로 하나님은 그 뜻을 빠짐없이 이루셨고 모세는 그 모든 역사의 산증인이 되었다. 하지만 더욱 분명한 확신의 근거가 있다. 그것은 경험이 아니라 말씀이다.

출 14:1-4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3]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 [4]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하나님은 이 일이 있기 전 모든 것을 말씀해 주셨다. 어떤 일이 어떤 목적으로 벌어질 것인지를 말씀해 주셨다. 이스라엘이 길을 돌이켜 바닷가에 진을 치면 바로는 그들이 광야에 갇혔다고 생각하고 쫓아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와 그의 군대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얻으실 것이고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을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이 목적은 출애굽 과정에서 계속해서 반복되었던 것이고 이제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모세에게 하셨고 모세는 백성들에게 전달하였다. 그래서 온 무리는 “그대로” 행하여 바닷가에 진을 쳤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바로는 군대를 보내 이스라엘 자손을 추격하게 했고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은 그 군대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처음에 우리가 살펴봤던 상황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바로의 군대가 보이는 순간 이들이 보였어야 할 반응은 두려움과 원망이 아닌 확신과 기쁨이어야 했다. 오히려 반대로 바로의 군대가 보이지 않았다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인지 의심했어야 했다. 바로의 군대가 보였기 때문에 이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시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선포되기를 기대할 수 있었다.

좀 전에 했었던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자. 이 일은 그들에게 일어나면 안되는 일이었는가? 괜한 고난이었을까? 이것은 단순히 그들에게 고통만 가져오는 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하는 일이었는가? 아니다. 그들에게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이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뜻을 세우시고 목적을 가지고 계획하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와 같이 반응하는 것이 맞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계속해서 행하실지를 기대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가 옳다는 것을 다시 확신시켜 주신다.

출 14:15-18 [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17]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18]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1-4절에서 하셨던 말씀과 같지만 더욱 구체화되었다. 하나님은 이제 어떻게 바로의 군대를 통하여 영광을 얻으실 것인지도 밝히신다.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할 것이고 애굽 사람들은 그들을 따라 들어가 그곳에서 멸망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이 증명될 것이다.

특히 성경이 반복해서 바로의 병거와 마병을 강조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11번, 4, 6, 7, 9, 17, 18, 23, 24, 25, 26, 28절).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드러내고 하나님께서 더욱 큰 영광을 얻으시게, 사람들이 살아계신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의 병거와 마병이다. 그들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들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더욱 강하신 능력의 하나님으로 찬양을 받으실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의 병거와 마병을 보았을 때, 그 강력함을 보았을 때, 그들은 두려워하고 원망할 이유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순간 두려움을 느낄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에 사로잡혀 어쩔줄 몰라하고 원망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이 자신의 안위와 평안, 만족, 기쁨을 최우선에 두지 않았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알았다면, 오히려 그들은 눈 앞에 보이는 시련 가운데 안심하며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이다.

 

결론

성경의 많은 이야기가 그렇듯 결론은 참 간결하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되었다. 이스라엘은 마른 땅으로 바다를 건넜고 애굽 군대는 그들을 따라 들어 갔다가 멸망한다. 참으로 어리석고 완악한 마음이다. 그동안 그렇게 당했었고 지금도 바다가 그렇게 갈라지는 것을 보면 정말 안되겠구나하고 도망할 법도 한데 그들은 바다 가운데까지 뛰어들었다. 결국 그들은 그 안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하여 싸우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도망하려 했지만 결국 멸망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병거로 무장한 애굽 군대를 보고 두려워했지만 결국 그들이 마지막에 본 것은 그들의 죽음이었다(30절).

이 사건의 결론으로 모세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출 14: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큰 능력을 보고 경험하자 그분을 믿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한 마음으로 15장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그 노래의 주제는 11절부터 기록되어 있다.

출 15:11-15 [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12]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13]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4] 여러 나라가 듣고 떨며 블레셋 주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15]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출 15:18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이것이 출애굽 사건의 결론이다. 사람들은 많은 신을 섬기지만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다. 모든 신은 사람이 만들었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신 참 신이시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시며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하나님만이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신다.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 애굽의 왕이든, 그의 군대든, 바다든 마찬가지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든 믿음이 없는 사람이든 하나님의 주권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도전 /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게 되었던 세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애굽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 그리고 모세다.
오늘날도 우리는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경험해도 애굽 사람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능력을 보여주셨고 살아계심을 나타내셨다. 그들도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았다. 하나님을 겸손히 의지하고 따르지 않았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출애굽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다시 애굽으로 데리고 오려 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받았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통해, 환경을 통해 계속해서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편에 서라고 하시는데 거절한다. 만약 지금 그런 상태에 있다면, 성령께서 출애굽기 14장을 통하여 하는 말씀에 귀기울이기를 바란다. 지금은 은혜의 때이지만 언젠가 끝난다. 그 때가 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길,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야 한다. 늦기 전에 그렇게 해야 한다.








가나안 7족속의 의미

적을 알고 우리 자신의 권세를 알면 적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된다.
이것은 영적인 싸움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영적 대적들인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그 일곱 족속들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그들을 물리치는 능력을 가져야 하겠다.


1. 헷 족속(Hittites) - 공포, 두려움

공포와 두려움을 뜻한다.
악몽, 우울증, 거짓, 속이는 것 등으로 영적 두려움 가운데 고통 속에서 살도록 하는 것이다.
헷 족속은 B.C. 1600-1700년 사이 족장 시대부터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가지 그곳에 거주한 종족 중에서도 매우 큰 민족이었다. 광야와 레바논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온 땅이 헷 족속의 영토로 불리웠을 정도다.
또 헷 족속은 히타이트족속들을 말하는데 BC10세기에 일어난 강력한 철기문명을 가지고 지역의 두려움이 대상이 된 족속이다.

2. 기르가스 족속(Girgashites) - 진흙탕, 혼돈 무질서

진흙탕을 의미하며 혼돈과 무질서로 해석할 수 있다.
기르가스 족속은 우리의 삶에 진흙탕 같이 앞길을 볼 수 없도록 혼돈하고 공허함을 주고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모르게 얽히게 한다.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 중에 우선순위를 놓치게 만든다.
성경은 에서를 가르켜 ‘망령된 자’라고 지칭했다.
에서는 장자권의 진가를 모르고 야곱에게 팔았다. 이러한 기르가스의 영을 물리치고 지혜와 분별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3. 아모리 족속(Amorites) - 산중 사람, 교만, 교육(지식, 학문)

산중 사람이라는 뜻으로 교만 또는 교육(지식, 학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Amorite라는 단어는 ‘자랑하다’, ‘불룩 내밀다’, ‘산을 오르는 자’, ‘교만하게 행동하다’, ‘마음에 교만을 품다’ 라는 뜻인데 이 단어의 모든 정의들은 다 함께 인본주의적인 자세를 기본적으로 취하고 있다.
아모리 족속은 교육의 산을 말하는 것이다.
인본주의는 우주적인 인간의 가치와 지식을 최우선시 하는 윤리 철학이다. 이것은 이성주의에 의해서 강화된다.

4. 가나안 족속(Canaanites) - 낮은 땅, 저주

낮은 땅이라는 뜻으로 낮은 자존감, 경제, 저주(가난과 실패)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나안 족속은 가나안 땅에 거하는 일곱 족속 전체를 통칭하는 말인 동시에 가나안의 7족속 중 한 족속인 가나안 족속을 뜻하기도 하는 말이다.
그들은 주로 무역에 종사했기에 고대 세계에서 가나안이라고 하면 곧 ‘상인’을 의미하는 말과도 같았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착 이후 그들에게 점차적으로 흡수됐다.
가나안 족속은 ‘저주’라는 뜻도 있다(창 9:25).

5. 브리스 족속(Perizzites) - 시골 사람, 신경질, 미움, 광활한 평야, 전쟁터

시골사람이라는 뜻으로 신경질, 미움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난 무식하다고 하면서 비신앙적인 사람이 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해서 부르심을 받은 무리가 되지 못하게 하고 게으르게 하고 멀리 볼 수 없게 해서 약한 자립심과 존재감을 갖고 있다. 또 브리스는 ‘광할한 평야, 전쟁터’라는 의미도 있는데 혈기와 짜증, 신경질이 미움을 일으킨다.

6. 히위 족속(Hivites)

마음에 속한 축제(예술, 음악, 스포츠, 패션, 오락) 등으로 신념과 이념으로 하나님이 어디있느냐면서 기만하고 땅의 것을 즐기게 하는 향략과 쾌락주의로 빠지게 한다.
구체적으로 예술, 음악, 스포츠, 오락 등 사람들이 세상에서 즐기며 깊게 빠지게 되는 모든 것을 뜻하고 있다.

7. 여브스 족속(Jebusites) - 짓밟다, 억압(증오, 원망, 불평)

짓밟다는 뜻으로 억압(증오, 원망, 불평) 그리고 의료계로 해석할 수 있다.
밟히다 혹은 타작마당 등의 뜻을 가진 여부스는 다윗 왕 때 엄청난 전염병 재앙이 임했던 곳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자리가 바로 여부스 족속의 오르난의 타작마당이다.
죄사함을 받고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은혜와 긍휼을 느꼈지만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부정하고 온전히 주님께 순종하면서 말슴과 기도로 장성함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올바른 마음의 성전을 건축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상 가나안 7족 같은 우리 안의 구습과 욕망을 우리는 타파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여기서 말하는 가나안 7족이란 한마디로 인간의 죄성을 가르킨다. 7족은 요단을 건너간 이들의 영적 쟁투라는 점에서 우리 기존 신앙인들이 해결해야할 인간 죄성의 쓴 뿌리다. 가나안 7족은 수십년간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성도의 고질적인 죄성으로 이것을 내쫓는 일에 잇어 그 주체는 하나님이 되셔야 한다. 

팔레스타인 지도

 

왕의 대로

'왕의 대로'라고 부르는 길 역시 고대 이스라엘에서 중요한 도로였습니다.
'왕의 대로'란 말은 (민 20:17)과 (민 21:22)에 기록된 표현입니다.

(민 20:17)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우리로 당신의 땅을 통과하게 하소서. 우리가 밭으로나 포도원으로나 통과하지 아니하고, 우물물도 공히 마시지 아니하고, 우리가 '왕의 대로'로만 통과하고, 당신의 지경에서 나가기까지 좌편으로나 우편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리이다....".

 "이 이름은 왕이 다니는 특별한 길이라기 보다는 '주된 길'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길이 다른 길에 비해 빈번하게 사용된 주도로라는 말입니다.
왕의 대로는 지리적으로 다메섹을 기점으로 해서 아라비아 사막의 경계선에 가까운 트랜스 요르단 고원의 동쪽 가장자리의 길하레셋과 페트라를 지나고, 남북으로 달려 아카바 만의 에일랏에 이르는 국제 간선도로 입니다.
이 길은 사막의 경계 부근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에 대상들이 많이 이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국제 교역에 있어서 남 아라비아 국가들의 값진 향료를 수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 이 길은 이스라엘 왕국시대에 남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의 교역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현대에 대한 정의들
   철학자들은 현대를 가리켜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를테면  획스터는 현대를 '혼란의 시대'라고,
   소로킨은 '위기의 시대'로,
   오든은 '불안의 시대'로,
   알렉산더는 '불합리의 시대'로,
   괴슬러는 '갈망의 시대'로,
   드러커는 '단절의 시대'로,
   갤브레이드는 '불확실성의 시대'로 표현한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3일 / 02- 28(수)
출애굽기 13:1-22
찬송 / 221장(나 가난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애굽기 13:5)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땅 곧 네게 주시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바 젖과 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시거든 너는 이 에 이 예식을 지켜.
When the LORD brings you into the land of the Canaanites, Hittites, Amorites, Hivites and Jebusites--the land he swore to your forefathers to give you, a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you are to observe this ceremony in this month:

13:1-2. 초태생은 여호와께 바치라
(애굽에서 장자와 생축의 처음 난 것에 대한 재앙을 잊지 말라는 교훈)

13:3-10. 무교병을 먹으라

13:11-16. 초태생을 바치라
(수컷은 여호와의 몫, 손의 기호와 미간의 표를 삼으라)
13:17-20. 애급에서 탈출(숙곳에서 에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인도하심)
13:21-22.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a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

한글개역성경 인터넷에서 검색한 결과 구약에서만 19회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4, 레위기 1, 신명기 6, 여호수아 1, 예레미야 2, 에스겔 2

《 출3:8, 33:3, 레 20:24, 민 13:27, 14:8, 16:13, 16:14, 신 6:3, 11:9, 26:9, 26:15, 27:3, 31:20, 수 5:6, 렘 11:5, 32:22, 겔 20:6, 20:15》

성경을 읽으면 ‘좋은 땅’을 설명하는 것임은 알겠는데 왜 하필이면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는지 궁금한 것도 사실입니다. 어느 땅이고 간에 길바닥에 젖이 흐르고 꿀이 흐르는 땅은 현실적으로 없고 이스라엘 역사에도 나오지 않으니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곱의 때에 기근을 피하여 애굽에 내려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센’ 이라는 땅에서 목축을 주로 하며 살았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애굽은 비옥한 나일 강 주변으로 해서 농업이 발달 했습니다. 따라서 애굽에 이주하러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100% 목축만 하지는 않고 농사도 지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등장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농사의 여러 일’을 엄하게 시킨 것으로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출1:14)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축도 하고 농사의 여러 일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축과 농업을 하는 이들에게는 목축을 할 수 있는 드넓은 푸른 목초지와 농사지을 수 있는 자기 소유의 땅을 갖는 것이 환상적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소명을 주실 때 바로 이러한 땅을 주시겠다고 설명을 하십니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지방의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8)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땅을 준다고 하니까 또, 바로왕의 박해도 있고 하니까 그들이 모세를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라고 할 때, 문자 그대로 그 땅에는 젖과 꿀이 땅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땅일까요?

  '젖'은 우유를 생산할 수 있는 양과 염소를 먹일 수 있는 풍성한 초장을 의미하고 또한 성경에서 꿀은 벌꿀 자체를 의미하는 곳은 몇 군데 안 되고(삼손의 이야기 삿 14:8, 요나단 이야기 삼상 14:27, 잠언의 경고 잠 25:16 등에서는 문자 그대로 꿀을 의미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의  ‘꿀’은 “대추야자 꿀과 같이 단 여름 과실을 생산하는 과실 수” 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많이 쓰입니다.<同旨, 그 말씀, 2008.8. p169>

 따라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젖으로 대표되는 목축업과 꿀로 대표되는 농업 - 종 되었던 집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싶고 소망하고 꿈꾸었던 - 을 모두 할 수 있는 풍성한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에스겔서 20장 6절은 이를 부연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내가 내 손을 들어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그들을 위하여 찾아두었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겔 20:6)

 따라서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감추어 두었다가 찾아주신 땅이요, 모든 땅 중의 가장 아름다운 땅(겔 20:6)입니다.
또한 그 땅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땅(민 35:34)이요, 시내와 분천과 샘이 있는 땅(신 8:7)이요, 광대한 땅(출 3:8)이요,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신 11:11-12)입니다.

 그러면 신약시대에 우리에게 적용할 가나안 땅은 어디일까요? 평강과 감사와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예수 안에서의 삶이 곧 현재 우리의 가나안 땅이 될 것입니다. 그 땅은 신자만이 찾아 누리는 땅이요, 모든 만족 중에서 가장 최고의 만족을 누리는 아름다운 삶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가나안 부족을 쫒아 내야 했듯이 우리들도 끊임없이 내 속에서 올라오는 육신의 일들을 쫒아내며 살아야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이 천국의 상징이라는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천국의 상징이라면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싸움을 할리가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문화와 싸워야 했고 가나안 종교와 싸워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나와야 했으며, '하나님'을 배우고 알기 위해 '광야'를 지나야 했으며, 마지막으로 '가나안 족속'과는 싸워서 정복해야 했습니다. 그동안 가나안 땅을 지배하고 있던 세력은 블레셋 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안식을 얻고 누리려면 필연적으로 블레셋과 싸워서 이겨야 했습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해도, 세상으로부터 구분되었다고 해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여전히 '세상' 입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하나님 나라와는 정반대 되는 가치관, 문화, 종교, 세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 문화, 종교하고 싸워 자신을 주 안에서 지켜야 합니다. 또한 끊임없이 올라오는 육신의 정욕과도 싸워야 합니다. 세상의 문화, 가치관, 종교와 육신의 본성은 가나안의 여섯 족속처럼 끊임없이 신자를 공격해 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성령을 받아 거듭났다고 해서 신앙생활이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기 위한 싸움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신자들은 이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고 불신자들은 이 싸움이 아예 없는 사람들입니다.  

 요컨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만사형통, 승승장구하는 땅이 아니며 고통과 질고가 없는 땅이 아닙니다. '산과 골짜기가 있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신11:11)이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이 요구되는 땅이며, 그래서 날마다 하늘(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땅이며, 유혹하는 세상과 자신에게 있는 정욕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싸워야 하는 땅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물리적으로 그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아니고, 토양이 매우 기름져서 농사짓기 아주 좋은 땅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시고, 간섭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소개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무조건 세상 복을 받고 고통도 없고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誤算)이며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 됩니다.  

  신자들은 오직 '세상의 복'을 받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을 닮기 위해 말씀을 가지고 기도로 날마다 십자가를 지며, 육체의 정욕과 세상의 유혹과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지금 가나안 땅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김으로 승리의 기쁨이 늘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의미(신명기 11:8-12)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대부분의 신자들, 아니 많은 목회자들마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젖과 꿀이란 당시로선 일용하는 필수 식품이 아니라 기호 식품 중에서도 상당히 고급스런 식품의 대명사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아주 풍요로운 땅으로 쉽게 단정짓고는 예수를 믿고 나면 이전보다 생활 형편이 훨씬 나아지는 축복을 받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아주 잘못된 해석이자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의 본질과는 거리가 멉니다.

많이 생산된다는 의미로 "흐른다"라고 표현했듯이 가나안 땅의 주산물은 물론 젖과 꿀입니다만 땅 자체가 풍요롭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젖과 꿀이 주산품이라는 것은 목축과 양봉이 주산업이라는 의미인데 곡물을 심을 수없는 아주 척박한 땅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아리조나 사막 지역에 가보면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보호 구역이 곳곳에 있는데 너무 덥고 메마른 모래 땅이라 염소와 꿀벌을 치고 토산품을 만들어 파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바로 그런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 흐르다(2100) 주브(zûwb)  זוּב    

1. 흐르다.   2. 시 78:20.  레 15:25.
발음 [ zûwb ]
구약 성경  / 41회 사용

[젖과 꿀, 풍부함을 뜻함] 출 3:8, 13:5, 33:3, 레 20:24, 민 13:27, 14:8, 16:14

-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땅이 풍요롭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젖을 생산할 수 있고 양봉만 할 수 있는 척박한 땅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흐른다(주브.
zûwb.  זוּב)'라는 동사는 "생산된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그 정의를 어떻게 내리고 있습니까?
"파종한 후에 채소 밭에 발로 물대기"를 할 수 있는 애굽 땅과 비교했습니다.
수차(水車)를 발로 저어 물을 댈 수 있는 비옥한 평지라 채소나 곡물을 심기만 하면 풍족하게 수확할 수 있는 곳입니다.
반면에 가나안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라고 합니다.
우선 채소와 곡물을 심을만한 평지가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간혹 내리는 비가 대지를 적실 정도가 안 됩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일용할 주 식품인 곡물과 채소를 경작할만한 여건이 전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젖과 꿀을 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기호 식품은 양으로 따지면 조금만 생산해도 사실은 아주 많은 양이 됩니다.
기호식품이란 주 식품에 첨가해서 아주 적은 양을 섭취하는 것이고 또 매일 젖과 꿀만 먹고 살 수는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쌀 수십만 톤과  꿀 1 톤이 먹일 수있는 사람 수를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나아가 당시의 경제적 형편과 식생활 습관을 감안하면 젖과 꿀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최고급 식품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흐르는"이란 표현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도저히 사람이 살 데가 못되는 땅이 가나안입니다.

신자가 관심을 쏟아야 할 부분은 "왜 그런 척박한 땅을 하나님은 오히려 축복의 땅이라고 약속하셨고 또 그 크고도 수많은 희생들을 거쳐서야 인도하셨는가?" 입니다.

애굽의 종살이 사백년과 가데스 바네야와 광야에서의 온갖 반역으로 인해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죽었지 않습니까?
그 중에 모세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 해답을 본문이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歲初-신년초)부터 세말(歲末-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척박하여 산물이 희귀한 땅이라 오히려 하나님이 일년 365일 한 시도 떠나지 않고 항상 지켜 보호해 주시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땅을 당신의 백성에게 권고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여건이 풍족한 곳이 아니라 정반대의 땅으로 당신의 자녀들이 들어가 살기를 하나님은 원한다는 것입니다.
또 바로 그러하기에 세상 수단에 절대 의지하지 않고 오직 당신의 계명대로만 살아라고 합니다.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선정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백성으로 선정한 이유와 완전히 동일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

신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해주는 백성들의 모습도 동일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한 마디로 신자가 되었다는 것, 믿음으로 산다는 의미는 주위 여건이 어떠하든 삶의 세밀한 구석부터 전 인생을 걸기까지 오직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에 의존하여 산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절대로 돈의 많고 적음이나, 사람들의 칭찬이나 멸시와, 환경의 풍족함이나 궁핍함에 굴복하지 않고 사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신 8:3).

또 그렇게 살면 젖과 꿀은 커녕 마실  물마저 없는 광야에서 무려 40년을 방황해도 주리거나 갈하지 않고 의복이 헤어지지 않으며 발이 부릍지 않게 해줄 하나님이 세초부터 세말까지 항상 우리를 지켜봐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참 정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막상 가나안 땅에 들어가선 젖과 꿀을 싫컷 맛보았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젖과 꿀과는 거리가 멀어져 버렸습니다.
어쩌면 40년간 방황하던 광야가 오히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지금 당신은 발로 물 대는 애굽 땅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의 탐심을 좇아 살고 있습니까?(골 3:5)
진정한 젖과 꿀을 사모하기에 땅이 물을 흡수하는 험한 산과 골짜기에서 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손을 잡고 따라 가고 있습니까?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광야에서 본 가나안

신명기가 기록된 느보산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면,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보이지 않는다.
가나안 동편이 광야이기에 이스라엘이 차지한 길르앗과 골란보다 결코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성경에서는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할까?
그동안 걸었던 광야보다 가나안이 상대적으로 더 기름지다는 뜻일 수 있다.
요단 동편에서 볼 때 가나안은 서쪽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서풍으로 이슬을 공급받는다.
이슬은 밤마다 땅을 촉촉이 적시며, 겨울에는 농사가, 여름에는 목축이 가능한 땅으로 만든다.
겨울, 우기에 지중해 구름이 가나안산지에 부딪혀 내리는 비는 서쪽으로 흐르며 숲을 만들어 계단식 농법을 사용한 풍요로운 농사를 짓게 한다. 동쪽으로 흩뿌리고 지나가는 비는 유다광야에 초지를 형성해, 겨울에는 푸른 풀을 공급하고, 여름에는 건초로 목축을 하게 한다.

목축과 과일 농사에 적합한 땅
‘젖이 흐르는 땅’이라는 말은 가나안이 목축에 적합한 땅이라는 의미다.
가나안은 건조한 날씨에 적당한 수의 양 떼를 키울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젖을 얻기 적절하다.

또한 ‘꿀이 흐르는 땅’이란 골짜기에 숨은 샘 곁에서 자라는 과실수의 열매를 말한다.
가나안의 여름은 가혹할 만큼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다.
그런데 겨울에 내린 물을 품는 석회암층은 여름에 샘물을 꾸준히 공급해, 골짜기든 산지에 시내와 샘이 흐르게 하며(신 8:7), 과실수에 수분을 공급해 따가운 햇볕에 과일의 당도를 최고로 높인다.

신명기 8장에 나오는 7대 식물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이 과일이며, 대추야자 열매다말(Tamar)을 의미한다(신 8:8).
이스라엘의 포도, 무화과, 대추야자는 세계 최고의 당도를 자랑한다.
즉, 농업적으로 봤을 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은 적당한 목축에 적합한 땅이요, 당도 높은 과일 농사에도 적합한 땅이다.
그래서인지 현대 이스라엘의 주력 산업도 농업이다.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는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기후나 주변 상황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만 살 수 있는 땅이다.
왜냐하면 항시 흐르는 요단강이 있지만 낮은 곳에 있어 사용할 수가 없고, 농사를 지으려면 비가 내려야 한다.
서쪽으로는 베니게와 블레셋, 동쪽으로는 아람, 암몬, 모압, 에돔, 심지어 광야의 미디안과 아말렉이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노리고, 추수기만 되면 침략해 왔다.

또한 거대 문명이 위치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가 이집트로 가려고 쳐들어왔고, 이집트도 북진 정책을 쓸 때는 가나안을 교두보로 삼았다.
전쟁이 많고, 사망의 그늘진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려면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말씀에 순종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기근과 강대국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은 곡물을 심을 수 없는 척박한 땅,
그러나 건조한 날씨에 양떼를 키울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젖을 얻기 적절했다.
또 골짜기에 숨은 샘 곁에서 자라는 과실수는 단맛이 강하다.
지금도 이 지역의 포도, 무화과, 대추야자는 당도가 높다.
비록 농사는 못짓지만 하나님이 일년 365일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켜 보호해 주시는 땅이라고도 해석된다.

가나안은 시나이 반도와 아나폴리아 사이에 있는 해안 지역을 가리키는 옛지명으로 오늘날 레반트 지역에 속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북부, 시리아 일부 지역이다.

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이 요즘 ‘피와 살이 튀는 전장’이 되었다.

가자 분쟁의 불씨는 1948년 신생국 이스라엘과 아랍연합의 1차 중동전쟁이 시작이다.
이 전쟁으로 서안지구는 요르단 차지가 됐고 가자는 이집트 수중에 떨어졌다.
이스라엘은 1967년 3차 중동전쟁(6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1993년 오슬로협정으로 반환, 팔레스타인 자치구), 시나이반도(1982년 평화협정으로 이집트 반환), 골란고원 등을 전리품으로 챙긴 후 이스라엘 정착촌을 만들기 시작했다.

3차 중동전쟁에서 아랍연합군(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이 모두 이스라엘에 패한 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구의 국경선은 더욱 견고해졌다.
강한 지도자가 없는 팔레스타인인들은 난민 신세로 떨어졌다.

1987년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이 시작되었으나 2006년 총선이후 가자는 강경파 하마스가 지배하고 서안(West Bank)지구는 온건파 파타가 통치하는 이중권력 상태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서방(미국, 유럽, 이스라엘)대 이슬람문화권(아랍 및 페르시아계, 파키스탄)의 군사적 대립의 근원이자 테러 분쟁 핵심지라 할 수 있다.

지난 7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 본토를 기습폭격, 민간인을 학살하고 인질을 납치하자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전면봉쇄하고 대규모 보복공습을 했다.
이스라엘측에서 보면 팔레스타인은 갓난아기와 여성들까지 잔인하게 죽이는 테러리스트이고 팔레스타인측에서 보면 땅과 종교적 상징을 빼앗아가는 점령자이다.

중동의 전쟁은 전세계에도 영향을 미쳐 각국마다 이스라엘 지지와 팔레스타인 지지로 분열되고 있다.
가장 많은 유대인이 사는 뉴욕도 긴장하고 있다.
8일 타임스 스퀘어에서 이스라엘 지지시위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지지시위가 맞서며 경찰이 출동했었다.
지난 10일부터 유대교 회랑과 이슬람교 사원 인근에 대한 순찰도 강화되었다.

기원전 1,800년 경에 헤브론에 살았다고 알려진 아브라함(아랍어로 이브라힘)은 아랍과 유대 민족의 시조이다.
이스라엘민족은 아브라함의 첫째 부인 사라의 아들 이삭의 후손, 아랍민족은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샬롬(shanlom)’은 안녕하세요, 잘가세요라는 일반적 인사로 평화, 평강, 평안을 의미한다.
팔레스타인 인사말로 ‘샬람, 알레이 쿰’은 ‘당신의 평화를 빈다’이다.
샬롬과 샬람은 비슷한 발음으로 모두 ‘평화’ 라는 뜻이다.
그런데 입으로는 ‘평화’를 외치면서 한 형제의 후손들이 죽으라고 싸우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극우도 아니고 극좌도 아니고 중도의 목소리이다.
한쪽으로 치우친 목소리는 권력욕으로밖에 볼 수가 없다.
더 이상은 ‘피가 피를 부르는’ 확전은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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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 12 일 / 02- 27(화)
출애굽기 12:1-51
찬송 / 장(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유월절(출애굽기 12: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찌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This is how you are to eat it: with your cloak tucked into your belt, your sandals on your feet and your staff in your hand. Eat it in haste; it is the LORD's Passover.

유월절(逾越節)이란 한자는 "넘을 유(逾), 넘을 월(越), 마디 절(節)"
영어로는 "Pass Over" 라고 합니다.
유월절은 히브리민족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으로 시작을 말합니다.

유월절(페사흐) [ peçach ]  פֶּסַח 스트롱번호 6453

1. 형벌과 재난으로부터의 면제.  2. 유월절의 어린 양. 3. 유월절
발음 [ peçach ]
어원 / 6452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9회 사용

뜻풀이부
1. 고유명사, 남성 형벌과 재난으로부터의 면제
 a. 고유명사, 남성 유월절의 어린 양[백성들의 죄를 면하기 위하여 바쳐지는 희생 제물], 출 12:48, 12:21, 27, 대하 30:15, 17, 35:1,6,  민9:4, 대하 30:18
 b. 고유명사, 남성 유월절[니산월의 제14일 : 무교절의 7일 이후에 곧바로 이어지는 날], 레 23:5.

12:1-13, 유월절 지침
12:14-20, 무교절 지침
 누룩이 없는 빵(누룩은 부정한 것, 죄악을 상징)
12:21-28, 유월절 지침(현관문 문설주에 피를 바르라)

27.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12:29-30, 멸하는 자(죽음의 천사)
12:31-36, 은금의복을 준비
12:37-51, 이집트를 떠나는 이스라엘
  42절 이하 이방인, 일군들이 유월절 지키는 규례, 양고기의 뼈를 꺾지 말라





허리에 띠를 띠고... 급히 먹으라
-
마치 출정하는 군인들의 그것처럼 긴장이 감도는 지시이다. 사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 출애굽하라는 명령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만반의 여행 준비를 갖추고 모든 행동을 재빨리 시행해야 했다. 실로 이 지시는 430년간 기다렸던 출애굽이 이제 목전에 다가왔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여기서 '급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파존'은 '도망하다'는 뜻의 '히파드'에서 온 말로서 도망치듯 서두르는 것을 뜻한다.
한편 하나님께서 이렇게 급히 먹도록 하신 이유는 그들이 당시 그토록 급하게 구출된 것이 오직 주의 은총 때문이었음을 후손들에게 두고 두고 알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 지금까지 지시한 모든 내용은 이스라엘의 구속자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특별히 제정하신 유월절이었다.
따라서 너희는 경건한 마음으로 이 식사에 임하라는 뜻이다.
한편 여기서 '유월절'(페사흐)이란 문자적으로 '넘어간다'(Passover)는 뜻으로서, 즉 여호와께서 애굽을 심판하시던 날 밤, 죽음의 천사가 피 묻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은 그냥 지나쳐 넘어간 사건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면서 부터 준행해야 할 이 유월절은 이스라엘인과 애굽인(이방인) 사이를 구별하여 축복과 저주, 생명과 죽음의 대조적인 일을 행하신 여호와의 구원 행위를 기념하는 절기인 동시에,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이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레위기 서론, 히브리 절기와 축제>. 또한 이는 오순절, 장막절과 함께 이스라엘 3대 절기 중 하나이다.





사전적인 의미는 "이스라엘 민족(民族)이 이집트에서 탈출(脫出)한 일을 기념(紀念ㆍ記念)하는 유대교(Judea敎)의 축제일(祝祭日).
하늘의 천사(天使)가 밤중에 이집트의 각 집의 맏아들을 죽일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에는 어린양(羊)의 피를 문설주(門楔柱)에 발랐기 때문에 그대로 지나가서 재앙(災殃)을 받지 않은 일을 기념(紀念ㆍ記念)한 데서 유래(由來)한다."고 합니다.

유월절의 교훈은 어린 양의 피를 히브리 백성들의 집 문설주에 바르고 초태생의 죽음이란 재앙을 넘어간 후에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섭리를 깨닫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새해는 한해의 새로운 시작인 것처럼 유월절은 히브리 민족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가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고 넘어가는 그날이 우리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삶을 새롭게 하시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새롭게 시작되시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왜면하고 살아오셨나요?

아직도 보혈을 통해서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시고 계시다면 주의 성령이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보혈에 의해서 바뀐 인생은 더이상 내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이상 죄가 지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바라보는 시선과 행동은 모두 예수님의 그 십자가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매일의 삶이 여호와의 유월절과 같은 새로운 출발을 경험하는 은혜가 넘쳐나시기를 기도합니다.

내 주의 보혈은














The Lords Passover (여호와의 유월절)

지극히 높은 주님의 나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세상의 신을 벗고서 주 보좌 앞에 엎드리리

내 주를 향한 사랑과 그 신뢰가 사그러져갈 때
하늘로부터 이곳에 장막이 덮이네

이곳을 덮으소서
이곳을 비추소서
내 안에 무너졌던 모든 소망 다 회복하리니

이곳을 지나소서
이곳을 만지소서
내 안에 죽어가는 모든 예배 다 살아나리라

The Lords Passover (여호와의 유월절)

In to the highest place of all
In to the most holy place I come
Taking off my worldly shoes
I fall before throne just as I am
When all of my love for me and all of my for you are dying
Down to this very plave Oh Lord, Comes heaven's Ta ber na cle
Cover me with Your blood Changer me with Your blood
All of my broken hopes in me will be restored in my God
Pass by me Oh my Lord Lay your hands Oh my Lord
All of my dying worship for
You will be revived in my God


여호와의 유월절


이 재앙은 출애굽의 10가지 재앙중에 마지막 재앙이자 가장 큰 재앙 그리고 가장 중요한 생명을 누가 손에 쥐고 있는가 심판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 혼은 구원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 보여주기도 합니다.
Exodus 12:29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왕의 장자부터 - 가축의 처음 난 것 이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유추해볼 수 있어요.
하나님의 눈에는 그 강대한 바로의 장자도 귀족들의 장자도 서민들의 장자도 가축의 처음 난 것도 높낮이가 없습니다. 그사람이 착하든지 나쁘든지 천하든지 귀하든지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재앙 아래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을 통해 여호와의 사자는 집을 넘어갔나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두어서 하나님의 재앙에서 넘어갈 수 있었어요.
유월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이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를 구분할때 보는 단 한가지는 그 사람의 성품도 아니였고요 그사람의 생김세도 그사람이 어떤 신을 섬기는지도 아니었어요.
단 한가지를 봤습니다. 바로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러져 있었는가 아닌가
이게 중요합니다.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가 아닌가
그럼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나요?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성품 때문에 우리의 행동 때문에 우리의 지위 때문에 우리의 힘 때문에 우리의 돈 때문에 우리에게 닥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단 한가지 어린양의 피로 우리가 살아가는지 그것 하나만을 중요하게 여기시고 그것으로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그런 여러분들께 이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나요?
그럼 우리에게 어린양의 피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누구의 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 대답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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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는 유월절의 어린양되시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피를 통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몇주간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배웠어요.
이런 배움은 결국 우리가 왜 예수님이 필요한가 에 대해서 배우기 위해 선제적으로 배워야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죠 우리가 우리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다면 말이죠
예수님의 희생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심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죄인이 아니면 우리를 구원할 분이 왜 필요하겠나요
예수님의 이야기가 왜 복음인가 왜 복된 소식인가 이 이 이해의 바탕은 우리들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였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의 가르침 만으로 우리의 죄가 고백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이 여러분의 귀를 여시고 여러분의 눈을 여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주님의 복음은 그리스도인이 듣고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시는 것 자체가 하나의 특권 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깨닫는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이해가 되시나요?
이 사랑은 간단한게 아닙니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도 모두에게 당연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라고 고백되어 나오는 그 탄식과 부르짖음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요
그 회개를 들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이 일들은 단순히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질서를 질서로 만드는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 입니다.
하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복음이 되는 이유는 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께 용서받고 구원받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이 백성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바로 심판을 확정짓는 마지막 한방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 마저 죽였다’는 사건으로 들어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여 독생자까지 내어 주셨지만 인간은 그 마저도 거부하고 하나님의 아들까지 죽이게 된 겁니다.
이제 그 어떤 사람도 이 죄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이전에는 변명거리가 있었어요 율법을 잘 지켰다고 변명하였고 좋은 사람으로 살아갔다고 변명하였고 하나님을 잘 섬겼다고 변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사건이 딱 세워지고 나서부터는 더이상 변명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을 잘 믿는다는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앞장 섰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힘섰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호산나 호산나 다윗에 자손이라고 부르던 민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자고 동의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 죄에서 더이상 도망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절망적인 그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반대로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제 여호와의 진노와 심판이 남아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성령을 통해 믿게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님의 흘리신 보혈을 통해 살아납니다.
그 차이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걸 가르는 거에요.
유월절의 교훈은 여기 있습니다. 새해는 한해의 새로운 시작이듯이 유월절은 민족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가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고 넘어가는 그날이 우리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하시려고 하십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새롭게 시작되시기를 원하고 바라시나요? 아니면 십자가를 왜면한체 살고 계신가요.
여러분 아직도 보혈을 통해서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시고 계시다면 주의 성령이 여러분을 변화시키고 여러분을 새롭게 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직도 십자가의 그 사랑을 믿지 못하고 계시다면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바꾸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보혈에 의해서 바뀐 인생은 더이상 내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이상 죄가 나오지 못한다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바라보는 시선이 행동이 일들이 이제 모두 예수님의 그 십자가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유월절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의 백성들을 넘어간 날이라고 배웠습니다. 또 그 백성들을 구분하는 방법이 행위도 신분도 성품도 아닌 오직 어린양의 피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의 피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의 보혈의 피라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오직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사람 하나님의 백성임을 다시한번 배웠습니다.
여러분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예수님의 그 희생을 감사의 마음으로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한주간도 믿음의 눈을 들어 그 십자가를 붙잡고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또 시작되는 한주간을 오직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 11 일 / 02- 26(월)
출애굽기 11:1-10
찬송 / 192장(양원히 죽게 될 내 영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 가지 재앙(출애굽기 1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가지 재앙을 바로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보낼찌라 그가 너희를 보낼 때에는 여기서 정녕 다 쫓아 내리니.
Now the LORD had said to Moses, "I will bring one more plague on Pharaoh and on Egypt. After that, he will let you go from here, and when he does, he will drive you out completely.

이제까지 애급 땅에 내려진 재앙은 아홉 가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하여 재앙을 한 번 더 내려야 애굽의 왕과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고 히브리 백성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될까요?
이러한 과정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없습니다.

애굽에 대한 마지막 재앙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재앙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재앙인 장자의 죽음에 대한 재앙은, 애굽의 왕궁에서부터 일반백성들에게 이르기까지의 기초를 흔드는 재앙입니다. 장자는 그 집안의 기둥이며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집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찬송 : 새찬송가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성경 : 출애굽기 11장 1절-10절
설교 : 세상이 위대하게 보는 성도
우리 마음 속에는 두려워 하는 존재가 하나씩 이상은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지금은 괜찮지만 결혼하기 전까지는 주사 바늘을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래서 동네 병원에서 주사 바늘 쇼크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이유를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가느다란 주사 바늘이 너무나도 공포스러웠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두려워하는 것 혹은 두려운 존재가 있습니까?
지금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들로 인하여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있습니다. 계속되는 재앙들은 애굽 사람들의 삶을 바꿔 놓았고 거의 멸망 직전까지 간 상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하여,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두려운 일이 생길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집안의 힘의 근원이 되는 "장자" 즉 "상속자"가 죽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애굽 왕 바로의 장자로부터 집에서 키우는 가축의 첫째까지 하나도 예외 없이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애굽 사람들은 공포를 넘어서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백성은 은혜를



חֵן 스트롱번호2580

1. 자비.   2. 품위. 3. 탄원
발음 [ chên ]

어원 / 260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9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자비, 호의, 선의, 창6:8, 19:19,32:6(5), 33:8, 30:27, 47:29, 50:4, 출3:21, 11:3, 12:36, 전9:11
2. 명사, 남성 품위, 아름다움, 우아함, 잠22:11, 31:30, 전10:12.
3. 명사, 남성 탄원, 기원, 기도, 슥12:10.​

모세가 위대하게 보이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인 모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더 이상 애굽의 왕 바로가 두려운 존재나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 애굽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대변하는 모세가 두려운 존재요 위대한 존재로 보였습니다.
출애굽기 11:3,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위대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가돌"(גדל)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크기나 숫자, 효과 등에 있어서 "매우 큰" 것을 의미합니다. 혹은 명성이 있거나 많은 물질을 가진 것처럼 부유해 보이거나 높은 위치에 올라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모세는 가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미디안에서 양을 치던 모세가 애굽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높은 지위도 많은 재산도 대단한 명성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신하들과 백성들에게는 모세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처럼 위대하게 보였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왜 모세가 애굽 사람들의 눈에 두려운 존재, 모든 것을 다 가진 위대한 존재로 보였을까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애굽 왕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입'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모세의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여겨졌던 바로는 무능력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세는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되었습니다. 지금껏 아홉 개의 재앙 모두 모세가 말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장 두려운 열 번째 재앙에 대해 경고하였으니, 곧 모세의 말대로 될 것이라고 애굽 사람들은 생각하였습니다. 모세의 뒤에는 하나님이 계셨기에, 애굽 사람들은 모세를 두려워하고 위대하게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베드로와 함께 하실 때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과 함께 하실 때 있었던 놀라운 일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9장의 요셉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형들이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던 사람이며, 흘러 흘러 애굽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나이도 어린데 노예가 된 요셉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였겠습니까? 하지만 요셉은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인정 받아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이후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간수장이 요셉에게 모든 사무를 맡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9장 3절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형통케 하셨음을 보디발이 보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창세기 39장 2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셔서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예의 신분, 죄수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는 상황이 역전됨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 5장의 초대교회의 모습을 기억해 봅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거짓말을 하였지만, 베드로는 성령께서 말씀하심을 듣고서, 책망을 합니다. 이 사건으로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믿지 않는 자들까지 베드로와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 하였다라고 사도행전 5장 11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능력의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며,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위대하게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11:7. 구별하는

פָּלָה 스트롱번호 6395

1. 분리하다.  2. 니팔형 : 분리되다.  3. 히필형
발음 [ pâlâh ]
구약 성경 / 7회 사용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지만 다시 주님의 이름으로 각자의 처소에서 온라인으로 만날 수 있게 하시고 기도하는 은혜를 누리게 하시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으며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내 힘이나 노력이 아닌, 오직 주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에 오늘 우리의 하루는 형통할 것이며, 위대한 능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보며 모든 것을 다 가진 위대한 사람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약하지만 강한 용사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오늘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오늘도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연약한 나와 함께 하시며 인도하여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주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때, 세상의 유혹과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음을 믿습니다.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세상에 나타내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 하나님은 처음부터 무서운 재앙으로 단번에 바로를 굴복시키지 않고 10번째의 재앙까지 힘들게 끌고 오셨을까요?
살면서 계속되는 수많은 문제를 이겨낼 수 있도록 참고 인내하는 능력과 권세를 키워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실상 참고 인내하는 능력은 최고의 능력입니다.
왜 하나님은 충성스러운 사도 바울의 질병을 고쳐주시지 않았습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약할 때 더 강해진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사람은 아무 문제가 없으면 하나님께 더 감사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사람이 더 감사를 안 합니다.
사람은 감사할 것이 많으면 더 감사를 모릅니다.
대개 보면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감사합니다.
헌금도 부자들은 잘 하지 않습니다.
봉사도 시간이 많은 사람이 봉사하지 않고 대개 바쁜 사람들이 봉사합니다.
믿음생활도 고난과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잘 믿고 결국 큰일을 합니다.

때로 고난도 겪어보아야 건강에 대한 고마움, 축복에 대한 고마움, 부모와 교회와 이웃에 대한 고마움을 알게 됩니다.
기독교는 고난의 역사입니다.
성도도 고난 중에 참고 인내하는 훈련을 이겨내야 진짜 훌륭한 성도가 됩니다.
고난에는 뜻이 있습니다.
그 고난을 잘 활용하면 좋은 것이 남지만 물질과 명예와 인기가 찾아오면 대개 믿음을 비롯해서 더 좋은 것을 뺏깁니다.

사람들은 잘 입고, 잘 먹고,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상 돈이 많을수록 걱정도 많고, 고민도 많고, 해도 많고, 나쁜 것도 많아집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문제를 오히려 감사하며 인내하십시오. 자녀들이 고생 없이 자라야 큰일을 할 것 같지만 사실상 그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녀가 고생할 때 너무 불쌍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 때문에 오히려 사람이 되고, 인물이 되고, 좋은 교인이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기를 때 강하게 기르려고 어려운 난관도 계속 지나게 하십니다.
이제 고난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난을 주는 사람에게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보면 고난을 주는 사람은 오히려 천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좋은 사람 만들려고 그를 보낸 것입니다. 그처럼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을 마귀가 아닌 천사로 보시고 그 천사와도 잘 지내십시오. 참된 능력은 잘살고, 힘 있고,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잘 참아내는 것입니다.





1. 애굽왕 바로가 아홉 가지의 재앙을 당하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한 가지 재앙만 더 애굽에 내리게 되면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내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1절).

이 말씀은 지금까지 애굽에 내린 아홉 가지의 재앙들이 모두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졌음과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내려지면 바로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임을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셨음을 시사해 줍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이미 아시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일들을 미리 정하시고, 또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역사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세상 역사는 어느 뛰어난 영웅적 인물이나 우연한 사건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역사 속에서는 선하신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많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원래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던 것으로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이루는 한 과정일 뿐입니다.
성도는 바로 이러한 역사의 주체자로서의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이 있을 때, 어떤 고난과 역경이 온다 할지라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를 바라보며 인내할 수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와의 힘들고 지루한 싸움에서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사명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심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서 모든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2. 그리고 “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2절).

물론, 이것은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금 패물을 순순히 내어줄 것을 전제한 말씀이었습니다.
실제로 애굽 사람들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은금 패물을 다 내어줍니다.
애굽 사람들이 그렇게 준 이유는 재앙의 원인이 된 이스라엘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속히 내보내기 위함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창세기 15:16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지키신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에게서 은금 패물을 취함으로 그동안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며 착취당한 것에 대하여 일순간에 보상받게 된 것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면서 착취당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수고를 다 기억하고 계셨다가 그들이 출애굽 할 때에 애굽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고를 다 보상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수고를 다 갚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므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조금도 실망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수고와 고통을 다 기억하시고 언젠가는 다 갚아 주심으로 그 모든 수고와 고통을 잊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창 41:51).

특히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마지막 때에 친히 성도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하늘 영광으로 덧입혀 주심으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흘린 눈물과 수고를 완전히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계 21:4).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수고를 하고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다 갚아 주실 것을 믿으며 끝까지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애굽왕 바로의 장자로부터 천한 일을 하는 여종의 장자까지, 그리고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5절).

이것은 생명이 있는 존재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나님의 장자 재앙으로부터 피할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임을 시사해 줍니다.
애굽인들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권력이 있는 자나 권력이 없는 자나, 지식이 있는 자나 지식이 없는 자나 누구나, 그들에게 속한 모든 가축들까지도 다 하나님의 장자 재앙으로부터 피할 수 없었습니다(12:29.30).

고대 세계에서 장자는 한 가정을 대표하는 자였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애굽에 임한 장자 재앙은 모든 애굽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애굽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6-7절).

여기서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말은 ‘개도 짖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개는 주변에 어떤 일이 발생하면 민감하게 반응하며 짖어대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가 짖지 않는다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거주하는 곳에는 이전과 다름없이 지극히 평안했음을 시사해 줍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애굽인들의 거주지에는 모든 가정의 장자가 죽어감으로 대 혼란과 통곡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이스라엘의 진영에서는 개도 짖지 않았으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가 얼마나 완벽한 것이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 요한계시록에는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 때에도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완벽하게 보호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계 9:4, 13:8, 16:15).

사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마지막 때에 이 세상에 임할 각종 재앙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과연 우리가 그러한 심판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요 3:18).

여러분, 마지막 심판 때의 심판 주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 안에 거하는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벽하게 보호받은 것과 같이 장차 하나님의 최후 심판으로 말미암아 불의한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 그날에도 완벽하게 보호를 받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애굽 왕 바로는 아홉 가지의 재앙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장자 재앙이라는 무서운 심판의 경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장자 재앙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끝내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마침내는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하는 심판의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심판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 대하여 분명한 최후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심판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악된 마음을 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구원하시되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며,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는 심판하여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애굽 왕 바로는 그 마음이 강퍅해서 아홉 번이나 되는 경고를 받고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전도해야 할 사람들도 이와 같음을 알고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금패물을 주신 것을 통해 우리의 모든 수고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시니 감사하옵나이다.
어떤 경우에도 믿음 잃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시내산 언약

시내산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후 시내 광야에 도착하여 머무르는 동안, 모세를 중보자로 하여 하나님께서 십계명과 여러 율례를 주시면서 맺은 언약입니다(출 24:1-8).
모세는 시내산 아래에서 단을 쌓고, 희생의 피 반(半)을 뿌린 후, 시내산에서 받은 말씀을 기록한 ‘언약서’(the book of the covenant)를 백성 앞에서 낭독하여 들려주었습니다(출 24:4-7).
이에 백성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遵行)하리이다”라고 서원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백성에게 피를 뿌리면서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라고 선포함으로, 마침내 시내산 언약이 체결되었습니다(출 24:7-8).

시내산 언약은 출애굽 초기에 광야 1세대와 맺은 언약이었습니다.
이 언약은 출애굽 말기에 41번째로 진을 친 모압 평지에서(신 29장) 광야 2세대에게 다시 확증되었습니다(일명 ‘모압 평지 언약’).
시내산 언약은 아브라함과 횃불 언약을 맺은 이후 계속되어 온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갱신하여,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 ‘언약 백성’으로 삼으신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언약입니다.

1. ‘나라’를 대상으로 한 언약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지 45일째 되던 날에 시내 광야에 도착하여 진 친 다음(출 19:1-2),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 시내산에서 부르실 때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출 19: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언약의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가 한 사람에서 시작되어 한 가족을 중심으로 진행되다가 이제는 한 국가(백성 전체)를 중심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특히 시내산 언약을 체결할 때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기둥을 세운 것은, 언약의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임을 보여 줍니다(출 24:4).

1) 이스라엘은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구원 받은 백성입니다.

시내산 언약의 핵심을 담고 있는 십계명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2)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체결하기에 앞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강조함으로, 이스라엘의 과거가 비참한 노예에 불과했음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해 주실 때, 이스라엘은 그에 합당한 수고도 없었고 의로움도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참고-신 7:7, 9:4-6).
출애굽은 참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은혜 그 자체였습니다(참고-겔 16:1-14).

우리도 죄와 사망의 권에 아래 영원한 사망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였지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비로소 영원한 생명을 허락받고(요일 2:25), 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양자의 자격을 부여 받았습니다(롬 8:15, 갈 4:6).
이는 자격을 따지지 않고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엡 2:4-8).

2)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성취되어 세워진 큰 나라입니다.

시내산 언약은 출애굽기 2:24을 볼 때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심으로 맺어진 언약입니다(출 6:5).
출애굽 역사는 우연한 사건이 아니요, 이스라엘의 노력에 의한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언약의 성취였던 것입니다(신 9:5).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셨던 말씀대로 “큰 민족”(창 12:2)이 되었습니다(출 1:7, 9).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대로 “강대한 나라”(창 18:18)가 되었습니다(출 1:9).
더 이상 나약한 노예 민족이 아니라 ‘항오를 이루며 행진하는 여호와의 군대’ 곧 당당한 정복자로 성장한 것입니다(출 12:41, 13:18, 민 33:1).

2. 하나님께서 직접 전 백성에게 음성으로 들려 주신 언약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서 전 백성에게 직접 선포하신 언약입니다(출 20:1-19, 신 5:4, 23-24).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백성이 없었고, 또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생존한 국민은 없었습니다(참고-출 20:19, 신 5:25, 18:16, 히 12:18-20).
이러한 언약은 인류의 역사가 있어 온 이래로 한 번도 없었던 최초의 언약이었습니다(신 4:8, 32-33, 시 147:19-20).

3. 기록으로 구체화된 최초의 언약

시내산 언약의 뚜렷한 특징은 처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기록으로 구체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십계명은 두 돌판에 새겨졌습니다(출 31:18). 하나님께서 친수로 기록하셨다고 한 것은(신 9:10) 그만큼 하나님께서 시내산 언약을 귀하고 소중하게 생각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증거의 두 돌판을 하나님께 받아 내려올 때 산 아래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숭배하였습니다(출 32:1-6). 이에 모세는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서 깨뜨렸고(출 32:19), 방자한 백성 가운데 삼천 명 가량을 도륙한 후에(출 32:25-28), 모세는 다시 시내산으로 올라가 40일 중보기도를 올렸고, 산 밑으로 내려와 회막에서 또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후 모세가 깎아서 시내산으로 가지고 올라간 돌판에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다시 친수로 기록해 주셨습니다(출 34:1, 28).


하나님께서는 또 여러 가지 율례를 주셨습니다(출 20:22-23:33). 이는 모세에 의해 기록되었는데(출 24:4, 7), 하나님의 언약이 언약서에 기록되었을 뿐 아니라, 그 분량이 많은 것도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큰 은혜입니다(참고-호 8:12). 하나님의 언약이 돌판에 새겨지고 언약서에 기록되었다 함은, 그 언약이 만대까지 영원히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참고-사 30:1-8).

4. 언약의 땅에서 지킬 실천적 언약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땅에 대한 약속이 구체화되는 것은, 이제 가나안 입성이 임박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언약을 체결하기 전 하나님께서는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23:20, 30).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언약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1) 약속의 땅
가나안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통해서 약속된 땅입니다(창 12:7, 13:14-17, 15:7, 18-21, 17:8). 가나안 땅이 ‘열조에게 언약을 주신 땅’이라는 사실은, 신구약 성경에서 각 시대마다 거듭거듭 기록되었습니다. 가나안 입성이 임박한 상왕에서 받은 시내산 언약은 실제 가나안 땅에 관련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내산 언약 가운데 출애굽기 23:10-33에서는 그 땅에서 지킬 안식년과 안식일(10-13절), 3대 절기(14-19절), 그리고 그 땅을 정복하는 규례(20-33절)를 매우 구체적으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한편, 신명기에는 하나님께서 시내산 언약을 통해 주신 십계명을 비롯한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반드시 지키고 행해야 되는 것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신 4:1, 5, 13-14, 5:31, 6:1). 그 복된 언약의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면, 모든 일에 풍요롭고 형통하도록 축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신 6:18-19, 7:12-14, 8:1, 9:1, 11:9 등). 그러나 불순종하는 자는 약속의 땅에서 풍요로운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망각하고 말씀에 불순종하여 이방 사람과 결혼하거나 우상 숭배에 빠지면 그들을 토해 버리는 땅이기 때문입니다(레 18:24-28, 20:22).

2) 왕벌을 통한 땅의 정복(하나님의 주권 역사)
약속의 땅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땅입니다(출 29:45-46). 특히 광야와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이었던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함께하신다’는 외적인 표였습니다(출 25:22, 29:42-43).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지키면 그 땅의 정복은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것입니다(출 34:11, 레 25:18, 신 7:1, 8:1). 가나안 땅 정복은 결코 칼이나 활로 한 것이 아니라, 시내산 언약에서 약속해 주신 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왕벌을 통해 이루어 주셨습니다(참고-신 7:20, 수 24:12). 특히 가나안 7족속 중에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세 족속(히위, 가나안, 헷)을 멸할 때, 왕벌을 보내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출 23:28). 왕벌은 떼를 지어 날아다니면서 침을 쏘아 한 방에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공포의 벌입니다. 그 왕벌을 보내셔서 적들 가운데 문을 잠그고 숨어서 남아 있는 자까지 쫓아 들어가서 기어이 다 죽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신 7:20-24). 신명기에는 왕벌의 역사로 아모리 왕 시혼, 바산 왕 옥을 패배시킨 일이 자주 언급되었습니다(신 1:4, 2:26-35, 4:46-47, 29:7, 31:4).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방법을 동원하여 주권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약속의 하나님은 언제든지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시는 미쁘신 분입니다(고후 1:18, 20, 히 10:23, 11:11). ‘미쁘시다’ 함은, 믿음직하고 결코 꾸밈이나 거짓이 없다는 의미이며(신 7:9, 사 49:7), 이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살전 5:24, 살후 3:3, 딤후 2:13, 요일 1:9). 하나님의 미쁘심은 영원히 폐할 수 없습니다(롬 3:3). 하나님의 미쁘심이야말로 우리의 참된 소망입니다.




출애굽 열가지 재앙에 담긴 신학적 의미

출애굽기는 말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한 이야기로, 열가지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 나오는데 있어서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만약에 이 열가지 재앙이 없었다면, 애굽의 바로가 바로 국가 노동력의 원천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도록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열 재앙은 출애굽에 있어서 아주 필수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열가지 재앙에 담겨 있는 신학적 의미가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열가지 재앙에 담긴 신학적 의미]

1. 열가지 재앙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의 신들을 벌하신 사건이다.

열가지 재앙에 등장하는 생물들은 하나같이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이었습니다. 

민수기 33:4,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 벌을 주셨더라.

  애굽의 신들에 대한 심판을 위해 재앙 내려졌음을 알 수 있다. 이전까지 애굽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몰랐지만, 열가지 재앙을 겪으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믿었던 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목격하면서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보다 우월한 신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2.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데 목적이 있었다. 

  열가지 재앙은 마술도 아니고, 자연재해도 아니고, 사람들이 따라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이적이다. 이 일을 보면서 애굽 사라들도 하나님을 알아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알아갔을 것이다. 그러니까, 열가지 재앙은 하나님 스스로가 나타내 보이신 신존재 증명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열가지 재앙이다. 출애굽기 7장 5절은 열가지 재앙에 대해서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3.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 애굽을 향하여 내린 재앙이기 때문에, 열가지 재앙이 애굽을 향하여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학습하게 되었을 것이다. 열가지 재앙은 분명 애굽의 바로와 애굽을 향한 재앙이지만,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신 사건이다. 바로와 애굽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참 신으로 여겨야 그들을 놓아 줄 수 있듯이 이스라엘도 비록 노예였지만 생활의 기반을 모두 버려두고 광야로 나가기 위해서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모세 만 믿고 따라 나서기에는 무리수로 여겼을 것이다.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광야로 나가라' 하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 의미에서 어쩌면 지금 애굽 사람들보다 하나님께서 참 신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은 이스라엘에게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지금의 열가지 재앙의 중요한 효과는 애굽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지식은 가지고 있었지만, 430년 동안 애굽에서 살면서 조상으로부터 들은 하나님이 전부였겠지만, 열 가지 재앙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이스라엘은 확신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믿음의 확신이 있었기에 출애굽 여정을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4.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보여주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재앙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열가지 재앙을 보여주시면서 한결같이 하신 말씀은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것이니라." 이다. 열가지 재앙 내내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은 내 백성임을 선포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열가지 재앙은 구별이라는 의미 또한 있다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바로야 이 백성은 네것이 아니다. 내 백성이다. 보내라~" 그러므로,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지극한 사랑을 볼 수 있다. 

5. 열가지 재앙은 구원의 의미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복음 자체는 모두가 믿거나, 모두 믿지 않고 누구는 믿고, 누구는 믿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심판적  의미가 있다. 마찬가지로 열가지 재앙이 일어나는 애굽에서도 누구는 구원을 받고, 누구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러기에 열가지 재앙에는 구원의 의미가 있다할 수 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로 지킨다.

  첫번째 재앙은 나일강물을 피로 바꾸신 이적이다. 공교롭게도 마지막 재앙인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한 재앙에서도 피가 등장한다. 장자들을 살해하실 때,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집의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게 한다. 그러면 죽음의 사자가 어린양의 피가 발린 집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죽음이 넘어가고 피가 발라지지 않은 집에서는 재앙이 임하게 된다. 그러기에 열가지 재앙은 구원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단지 애굽에서 탈출한 사건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은 사건으로, 이 예표는 신약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열가지 재앙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열가지 재앙이 끔찍한 사건이고, 없어야 할 사건을오만 받을 것이 아니라 사실은 대단히 심오한 구원과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이 담겨 있는 열 가지 재앙을 살펴볼 것이다. 

  출애굽기 7:16,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였으나 이제까지 네가 듣지 아니하도다

이 재앙의 목적은 분명하다.
애굽의 바로와 애굽 사람들이 나일강을 숭배하듯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 이것이 첫번째 재앙의 목적이다.
단순히 이 재앙은 애굽을 초토화 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 백성으로 하여금 나를 섬기게 하는 것에 있다.

10가지 재앙이 미래에 닥칠 대환란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야곱의 대환란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전에 파라오에게 겪었던 것처럼 혹독한 압박과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사 60:14,렘 30:5-8).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의 음성을 귀를 기울이실 것입니다(렘 31:18-20).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압제자들에게 ‘그들을 가게 하라’ 명하실 것입니다(사 43: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할 것이요, 남쪽에게 이르기를, 붙잡아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데려오고 내 딸들을 땅 끝에서 데려오라, 하리니](사 43:6).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주셨듯이 모세와 엘리야라는 두 증인을 주실 것입니다(계 11:3-6).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하여 이적을 일으켰듯이 대환란 때의 적그리스도와 거짓 대언자들은 이적을 일으켜서 온 세상을 미혹할 것입니다(계 13:13-15).

1. 하나님은 세상에 전무후무한 강한 재앙의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렘 25:15-16).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내게 이같이 이르시되, / 너는 /  내 손에서 이 격노의 포도즙 잔을 가져다가 내가 너를 보내어 / 경고한/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 그들이 마시고 움직이며 미치리니 이는 내가 그들 가운데 칼을 보내었음이니라, 하시기에](렘 25:15-16).

2.  하나님은 이 재앙의 심판 가운데 자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실 것입니다(계7:4, 12:6, 14-16).

3. 물은 다시 피로 변할 것입니다(계 8:8, 16:4, 5).

4.사탄의 개구리들이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계 16:13).

5. 메뚜기의 역병이 다시 보내질 것입니다(계 9:2-11).

6. 하나님은 다시 종기를 보내십니다(계 16:2).

7. 끔찍한 우박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입니다(계 8:7).
   흑암이 세상을 덮칠 것입니다(계 16:10).

8. 파라오가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듯이 악인들 역시 회개하지 않고 더욱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입니다(계 9:20-21).

9.이집트의 장자들이 모두 죽었듯이 대환란 때 역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계 9:15).

10.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듯이 대환란을 통과해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슥 14:3, 4; 롬 11:26).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역사는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종말로 달려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역사를 통해 교훈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전에 일어난 일들은 훈계하기 위하여 본보기로 기록된 것입니다.

[이제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그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기 위함이며 또 그것들이 기록된 것은 세상의 끝을 만난 우리를 훈계하기 위함이니라.](고전10:11)

애굽 10대 재앙의 분석적 연구

애굽 10대 재앙(The Ten Plagues on Egypt)은 그 각각의 하나씩도 참으로 놀라운 초자연적 이적(異蹟)들이었다. 하물며 이런 놀라운 이적들이 한 주체에 의하여, 그리고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여 10회나 연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애굽 10대 재앙은 하나님의 백성과 그 적(敵)들이 명확히 구분된 상태에서 그 적들을 향해 이적적 재앙이 폭발적으로 연속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의 승리와 해방을 가져온 일대 사건으로서 구약에 기록된 가장 역동적 기사의 하나이다. 

또한 애굽 10대 재앙은 애굽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끔찍한 재앙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감격적 해방과 구출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최종 결과 애굽인에게는 죽음과 몰락이 닥쳐왔으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승리와 자유의 쟁취 및 새 역사의 출발이 비롯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구약 선민으로서 시내 산에서 선민 언약을 체결하고 선민으로서의 역사를 본격 태동시킨 것도 이 애굽 10대 재앙으로 이루어진 영광의 탈출인 출애굽(Exodus)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실로 애굽 10대 재앙은 선민 역사의 본격적 태동을 위한 대전주곡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태동된 선민의 역사는 신약 시대에 이르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계 만민 중에 세워진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로 확장되었다. 

그 결과 애굽 10대 재앙은 단순히 과거의 놀라운 이적 시리즈(Miracle Series)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악의 무리를 멸하시고 택한 백성을 초월적 능력을 가지고 강한 팔로 구출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의지를 실증하는 살아있는 역사인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애굽 10대 재앙은 그 세부 내용을 다음과 같은 몇몇 새로운 각도에서 분석해 볼 때 더욱 오묘한 그 실체와 거기에 담긴 깊은 의미가 새삼스럽게 드러난다. 이에 애굽 10대 재앙의 실체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다음 세 가지 주요 관점별로 시도해 보기로 한다. 

1. 애굽 10대 재앙의 구조 분석 

가. 10대 재앙의 기본 구조 설명 

아래에서 보듯이 애굽 10대 재앙은 먼저 크게는 하나님이 간접적으로 행하신 첫번째부터 아홉번째까지의 재앙과 하나님이 유일하게 직접적으로 행하신 마지막 열번째 장자 재앙으로 나뉘어진다. 그런데 매우 흥미있는 사실로서 첫번째에서 아홉번째까지의 간접 재앙들은 다음과 같은 내적 규칙성 내지 통일성에 의하여 다시금 순서대로 각각 세 개씩을 한 그룹(Group)내지 하나의 사이클(Cycle)로 하는 세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진다. 

먼저 각 그룹의 첫번째 재앙들 그러니까 제 1 피 재앙, 제 4 파리 재앙, 제 7 우박 재앙들은 모두 다 아침에(In the Morning) 그 재앙이 예고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다음으로 각 그룹의 두 번째 재앙들 그러니까 제 2 개구리 재앙, 제 5 악질 재앙, 제 8 메뚜기 재앙들은 모두가 모세가 바로의 왕궁(To the Palace)으로 들어가서 경고한 다음에 일어났다. 각 그룹의 첫번째 재앙들에 대한 경고가 인간의 모든 활동이 시작되는 시점인 아침에 주어졌고 그리고 각 그룹의 두번째 재앙들의 경고는 인간 권력의 중심 공간인 바로의 왕궁에서 주어진 것은 결국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가 시간과 공간의 모든 요소를 망라하여 그 주요 포인트마다 거듭 주어졌 음을 의미한다. 끝으로 각 그룹의 세번째 재앙들 즉 제 3 이 재앙, 제 6 독종 재앙, 제 9 흑암 재앙 등은 각 그룹의 첫째 둘째 재앙들이 일단 먼저 예고된 후에 일어난 것과 달리 모두 다 아무런 사전 예고 없이(Without Warning) 일어났다. 이것은 때로 인간에게는 사전 경고없이 하나님의 징계와 징벌이 임할 수 있는 두려운 현실을 반영한다.

 

나. 10대 재앙의 3X3+1 구조의 의미 

이렇게 분석해 볼 때 우리는 애굽 10대 재앙이 단순히 열 번이라는 많은 회수에 걸쳐 일어났거나 또는 어찌해서 계속 진행하다 보니까 열 번에 달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과 의도 아래 매우 섬세한 의미를 가진 완벽한 구조로 진행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애굽 10대 재앙은 일면 각각 정확한 규칙성 내지 통일성에 의하여 세 재앙씩을 한 그룹 내지 한 사이클로 하는 재앙이 세 번 반복되는 구조의 간접적 재앙이 있은 후 단 한 번의 직접적 재앙으로 10대 재앙 전체가 최종 종결되는 체제 내지 구조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애굽 10대 재앙은 보다 세부적으로는 3x3의 간접적 재앙과 단 1회의 직접적 재앙으로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10’ 이라는 숫자는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필요한 모든 구성 요소를 완비(完備)한 숫자를 의미했다. 따라서 애굽에 내려진 재앙의 총수가 ‘10’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학대하는 원수들에게 모든 재앙을 다 내리셨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분석하였듯이 애굽 10대 재앙은 그 총수가 ‘10’이라는 전반적 사실보다 그 총 10개의 재앙을 이루는 세부 구조에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성경에서 ‘3’은 충만(充滿)올 상징하는 숫자였다. 따라서 애굽에 내린 간접적 재앙은 이처럼 충만을 의미하는 3개씩의 재앙을 묶은 한 그룹의 재앙이 그 역시 충만을 의미하는 3회에 걸쳐서 반복된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직접적 재앙은 단 1회였으며 이것으로 모든 재앙 전체가 종결되었다. 이같은 애굽 10대 재앙의 구조는 한마디로 애굽 왕 바로와 그의 신하들에게 참으로 완전히 충만한 사전 경고성 재앙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순복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단 1회에 모든 것을 종결하셨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즉 하나님은 단 1회에 그들을 완전 굴복시킬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자발적 순종의 기회를 참으로 충만히 주시고자 먼저 3x3의 간접적 재앙을 진행시키셨다. 그러나 끝내 그들이 거부하자 하나님은 단 1회의 직접적 재앙을 통하여 마침내 애굽인들을 굴복시키시고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실현시키셨다. 하나님은 절대 초월자이심으로 그가 직접 시행하시는 일은 이처럼 그의 뜻한 바대로 단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애굽인들을 향한 심판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종말까지 모든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기본 패턴(Pattern)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종들과 우주 만물을 통하여 모든 죄인들에게 거듭하여 경고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신다. 특히 세상 끝날에는 그 역시 일련의 재앙들을 통하여 최종적 경고를 주실 것이다. 그러나 끝내 회개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마침내 단 1회의 대종말(大終末)을 통하여 역사 전체나 각 개인을 최종 심판하실 것이다. 

다. 기타 관련 사항과 그 의의 

한편 다시 한번 애굽 10대 재앙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도 추가로 발견된다. 먼저 세번째 이 재앙에서부터는 앞서의 첫째, 둘째의 피 재앙이나 개구리 재앙들과 달리 애굽의 술객(Magicians)들은 도저히 모방할 수 없었다. 이것은 사단과 그를 따르는 자들도 비록 보통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잠시 인간을 현혹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능력과 비교할 때에는 그 한계가 너무나 분명함을 보여 준다. 

또한 네번째 파리 재앙부터는 그 재앙이 이스라엘인들을 제외하고 오직 애굽인들에게만 임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 만물을 어느 정도까지는 동일한 원리로 다스리시나 근본적으로는 구원 얻을 자와 저주 받을 자로 엄격히 구분하여 다스리심을 보여 준다. 

끝으로 셋째 그룹에 속하는 일곱번째에서 아홉번째까지의 재앙에서는 하나님이 매 경우마다 왜 바로와 그 백성을 즉각 멸망시켜서 단번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시지 않고 굳이 번거롭게 거듭하여 많은 재앙을 내리시는 것인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는 분명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으로 행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요청을 거부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을 더욱 억누름으로써 결국 사단(Satan)의 화신(化身)으로 등장한 바로에게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똑똑히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둘째는 하나님의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즉 그 당대는 물론이고 훗날 애굽 10대 재앙에 대한 역사를 전해 들은 오고 오는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듣고 더욱 확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따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본문에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보다 궁극적인 전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에 바로를 향한 하나님의 점진적 정벌과 이를 통한 이스라엘의 출애굽 성취의 과정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매우 긴 장구한 역사적 과정에 걸쳐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오묘한 예표이기도 하다. 

2. 애굽 10대 재앙과 애굽 우상들과의 관계 

애굽 10대 재앙은 표면적으로는 자연의 각종 이상 현상을 통한 재앙의 반복 내지 열거로 보인다. 그러나 이면적으로는 10대 재앙 각각은 수다한 자연 현상의 배후에 그 각각의 현상을 주도하는 신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섬겼던 애굽인들이 신으로 간주한 각종 우상(偶像)들을 역으로 애굽인들을 향한 심판의 도구 내지 애굽인들과 함께 심판을 받을 대상으로 전락시킨 것이었다. 즉 애굽 10대 재앙은 일차적으로는 이적적 자연 현상을 통한 재앙들이었다. 동시에 보다 근본적으로는 애굽인들이 섬기던 우상 전반에 대한 징벌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신으로서 하나님께서 거짓 우상들을 이기심은 물론 그 거짓 신들을 믿는 백성은 벌하시고 당신의 백성은 구출해 주실 능력과 사랑이 있으심을 실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많은 이들의 일반적 생각과 달리 비록 마지막 열번째 재앙이 마침내 인간의 죽음을 초래한 것으로 가장 엄중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애굽 10대 재앙은 엄밀하게는 뒤로 갈수록 그 양상이 혹독해지는 소위 점층적 양상을 보이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처음 피 재앙과 아홉 번째의 흑암 및 열 번째의 장자 재앙이 대략 수미 쌍관식의 소위 양괄식 구조를 보이는 가운데 두 번째에서 여덟 번째 재앙까지는 거의 동일 수준의 재앙이 계속 열거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첫번째 피 재앙은 애굽인들의 농경과 식수 둥 실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나일강(the River Nile)과 나일강의 신 하피(Hapi)를 치신 것이었다. 그리고 아홉번째 흑암 재앙은 최후의 재앙을 예고하는 동시에 애굽인들이 국가적 차원에서 가장 주요시하였던 태양신 라(Ra)를 무력하게 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열번째 장자 재앙은 이집트인 전반은 물론 바로의 가장 직접적 수 호신으로 여겨진 생명의 신이요 이집트 최고의 신인 오시리스(Osiris)를 치신 것이었다. 반면에 두 번째에서 여덟 번째까지는 상호 신적 위계(位階)에 있어서나 이집트인들의 선호도에 있어서 그 다지 차이가 없는 여러 신들과 그들이 각각 관장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여러 자연 현상을 통한 동일 수준의 재앙의 연속이었다. 

이처럼 그 관련 우상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의 애굽 10대 재앙의 전개는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을 멸하시되 그들 모두를 남김없이 다 멸하실 것을 시사하고 있다 하겠다. 

 

3. 애굽 10대 재앙 과정에 대한 바로의 자세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던 애굽 왕 바로를 향한 하나님의 징벌은 단 한번으로 종결되지 않고 10번에 걸쳐서 반복되었다. 이것은 역으로는 그만큼 바로에게 자발적 순복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비록 바로가 처음에는 몰랐다 해도 10번의 재앙이 전개 되어 가는 과정에서 지금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을 요구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Jehovah the God)이 절대 초월자로서 유일한 신적 존재이시라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애굽의 왕으로서의 자신의 정권 안정과 애굽의 국익 수호라는 세속적 이해 타산에만 집착하여 계속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심지어는 각 재앙이 극에 달했을 때에는 모세에게 빌거나 타협안을 제시하다가도 그 재앙이 사라지면 곧바로 말을 바꾸거나 식언(食言)하는 등 일국의 왕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간교와 추태까지 부리고 있다. 한마디로 애굽 10대 재앙에 임하는 바로의 자세는 아집과 기만으로 축약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바로는 끝내 하나님으로부터 장자 재앙의 징벌까지 당하였으며 최후의 장자 재앙을 당한 후에는 참담한 패배자로서 도리어 이스라엘에게 출애굽할 것을 애걸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은 이후의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생활 40년과 가나안 정복까지의 전체적 과정에서 볼 때에는 대략 각 성도가 사단과 이 세상의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일단 성도(聖徒)의 지위(地位)를 얻는 것에 비교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출애굽 사건을 하나님과 바로의 투쟁이란 관점에서만 본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도를 억누르고 있는 사단과 그의 무리들로부터 성도를 구출하여 성도의 구원을 마침내 실현시키시는 사건의 예표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出埈及)을 그토록 집요하고도 악착같이 거부한 바로의 행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거부하는 사단과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의 영원한 행태를 예표한다 하겠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이같은 바로의 실로 끈질기고도 파렴치한 행태를 요약해 보면서 이를 우리 시대에 적용시켜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상 공중 권세 잡은 사단(엡 2:2)의 사주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거부와 멸시의 실체를 직시하여야 한다. 그리고 끝내 바로가 단 1회의 하나님의 직접적 개입으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이 실현되었었듯이, 사단의 세력은 필히 몰락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최후 승리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天國)이 영구히 실현될 것도 분명히 깨달아 현실의 일시적 현상에 연연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말세(末世)에는 극심한 환난과 사단과 그를 따르는 거짓 선지자들의 최후의 만행이 극성할 것이 구체적으로 예언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사단의 만행이 극에 달할수록 오히려 출애굽 당시의 이 바로의 행태가 주는 교훈을 깨닫고 더욱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바로 나 자신이 이 바로와 같이 사단에 속한 자의 하나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하다가 멸망 당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애굽 10대 재앙에 임하는 바로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우리 모두 앞에 뚜렷이 남아 있는 살아 있는 상징(Symbol)인 것이다.






바로가 재앙만 풀어 주면 보내 주겠다고 하다가 재앙이 끝나면 약속을 어기고 보내 주지 않는 식으로 속인 경우에는 제 2,4,7,8 재앙 때이먀, 바로가 부분적 타협안을 제시한 경우는 제 4,8,9 재앙 때이다.

출처 ; 옥스퍼드 주석 

http://atsnu.org/_chboard/bbs/board.php?bo_table=m5_1&wr_id=243929&page=24



2024 사순절(02 / 14 - 03 / 30)  119 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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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가지 재앙의 내용

첫 번째 재앙 : 피(7:14-25)

여호와는 바로가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재앙들을 내리기로 결정하였고, 그 첫째 재앙이 바로 애굽의 젖이며, 신으로 숭배되는 나일 강이었던 것이다.

첫째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신으로 믿고 있는 것이 모두 헛된 것이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시며 전능한 창조주이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첫째 재앙은 눈에 보이는 모든 물을 피로 바뀌게 함으로써 생명의 근원인 물이 죽음의 상징인 피로 바뀌었음을 애굽 사람들이 보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
왜냐하면 애굽 사람들에게 ‘생명(물) ’을 ‘죽음(피) ’로 만드시는 분이 여호와이심을 보여줌으로써 여호와 하나님만이 생명을 좌우하시는 유일한 창조주이심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재앙은 무려 일주일동안 애굽 사람들이 그토록 자랑하던 나일 강을 죽음과 고통의 장소로 바뀌게 했다.[3]

두 번째 재앙 : 개구리(8:1-15)

나일 강에 살고 있던 개구리는 ‘문나 모지리카’(학명 Moonna Mozirica) 라는 학명을 가진 개구리이다.
애굽인들은 나일 강이 범람했다 감해지는 때에 보이는 개구리가 애굽 땅을 기름지게 한다고 여겨서 신성시했다.
인간의 몸에 개구리의 머리를 가진 여신 헤케트를 풍요와 다산의 신이며, 나일 강에 장마를 가져다 주는 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개구리들의 이른 침투로 인해서 왕은 오염된 음식을 먹게 되었고, 이것은 곧 건강에 해를 입게 되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만이 아니라 그의 신하들도 마찬가지고, 애굽 백성들도 마찬가지다.
즉 애굽 사람들 전체가 오염된 음식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걸 보면 개구리들이 애굽 온 땅에 가득하게 된 것은 애굽의 ‘땅’이 오염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결국에는 애굽 땅 자체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황폐하게 변한다는 ‘총체인 오염’을 의미한다.[3]

세 번째 재앙 : 이(8:16-19)

세 번째 재앙에서부터는 애굽 주술사들이 그들의 패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이 재앙이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고백하며 바로를 설득한다.
세 번째 재앙은 아무런 경고가 없었던 재앙 중 하나이다.
이 재앙은 땅으로부터 시작된 재앙으로 땅의 신 ‘게브’와 연관된다.
애굽인들은 밭을 갈 때마다 대지의 신 게브에게 감사를 드렸는데, 이들에게 흙은 생명과 풍요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이 생명으로 여기는 흙을 통해 애굽인들에게 괴로움과 죽음을 내린다.
또한 애굽의 ‘땅’을 황폐화 시키시고, 동시에 땅의 신 게브와의 영적인 전쟁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애굽인들에게 알게 하였다.[3]

네 번째 재앙 : 파리(8:20-32)

이전의 첫째 재앙부터 셋째 재앙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포함되었는데 넷째 재앙부터는 여호와가 이스라엘인과 애굽인들 사이를 구분지으셨다.
이를 통해 여호와가 애굽땅을 관장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네 번째 재앙과 관련된 애굽의 신은 ‘케프리’이며, 풍뎅이의 모습을 하고 있고 하루 일정을 관리하는 신으로 숭배되고 있다.
네 번째 재앙은 두 번째, 세 번째 재앙과 한 세트를 이루는데, 네 번째 재앙인 파리는 물과 땅에 연관된 것이고 이 세 재앙은 여호와가 물과 땅과 공기를 지배하는 분이심을 드러내심과 동시에 애굽의 물과 땅과 공기가 파괴되고 있음을 상징하기도 한다.[3]

다섯 번째 재앙 : 가축 돌림병(9:1-7)

다섯 번째 재앙도 애굽인과 이스라엘 백성을 구분하신다.
애굽의 가축들만 심한 돌림병에 걸리게 된다.
또한 가축의 죽음을 통해 지금까지는 창조된 것들을 통해서 애굽을 심판하였지만 이번 재앙은 창조된 것을 ‘죽이는 일’로 심판을 진행하여 ‘죽음 모티브’가 시작된다.
본문에 나오는 ‘여호와의 손’이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능력을 말할 때 쓰이는 특별한 단어이다.
그리고 이것은 돌림병이 여호와의 능력으로 일어난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다섯 번째 재앙을 통해 심판한 애굽의 신들 하토르, 아피스 등이 있다.[3]

생축 (미크네)
- 이는 각종의 가축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원래 '미크네'란 '소유', '재산'이란 의미를 가진 것으로서 가축들이 곧 고대인들의 재산 명세서에서 가장 큰비중을 차지했음을 암시한다.
한편 '생축'이란 말과 더불어 제시된 '말'은 주로 전쟁용으로 사용된 듯하며, '나귀'는 단거리 수송용 또는 경작에, '약대'는 장거리 수송용에 각각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러한 생축들에의 피해는 애굽인의 군사, 경제, 교통에 치명타를 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심한 악질(데베르 카베드 메오드)

- '악질'(데베르)은 일종의 무서운 전염병을 뜻하는데, 여기에 '매우'(메오드), '심한'(카베드)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여 이 악질의 정도가 대단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악질이 얼마나심했는지는 애굽의 모든 생축이 죽을 정도였다는 사실을 통해 여실히 알 수 있다(6절). 따라서 이전까지의 재앙은 단순히 사람 또는 짐승을 일시적으로 괴롭히는 것으로 끝났지만, 이 다섯번째 재앙부터는 생명과 직결된 문제로서 훨씬 재앙의 정도가 심화되었다. 동시에 이 악질 재앙은 나일 강물이 피로 변한 첫번째 재앙(7:17-25)과 더불어 애굽의 각종 우상 신들에 대한 직접적인 심판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생축들은 각종 형태로 형상화되어 애굽인들의 경배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애굽 우상 종교의 희생 제물용으로도 쓰여졌기 때문이다<32:1-6 강해, 애굽의 종교>. 동시에 이 재앙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의 생사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계심을 분명히 보여준다.

여섯 번째 재앙 : 악성 종기(9:8-12)

여섯 번째 재앙은 세 번째 재앙처럼 아무런 경고 없이 애굽을 강타하여 어떤 경고에도 반응하지 않는 바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처음으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재앙이다.
바로왕 앞에 날려진 재는 벽돌을 굽던 풀무에서 끄집어낸 재일 것이며 이것은 여호와의 백성이 당한 고난의 증거로 볼 수 있다.
특별히 눈여겨 볼 것은 주술사들도 바로와 그의 신하들도 악성 종기로 고통을 받아 여호와 앞에서 점점 애굽의 통치권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섯째 재앙을 통해 심판한 애굽의 신은 임호테프이다.[3]


일곱 번째 재앙 : 우박(9:13-35)

대기와 공중에 관련된 재앙.
우박 재앙은 인간 생명을 대규모로 위협하는 첫번째 재앙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우박으로 인한 보리와 삼의 파손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짚을 구해다 벽돌을 만들라고 했던 바로의 요구에 대한 보복, 대기의 신 와 농업의 신 이시스, 습기의 신 테프누트를 겨냥한 것이다.
여호와의 ‘구별’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던 고센 땅에는 전혀 피해가 없었다.
생명과 관련된 재앙으로 ‘경고’를 통해서 피할 방법을 알려주였다.[3]

중한

- 원 의미는 '무거운', '격렬한', '고통스런'이란 뜻으로서 우박의 엄청난 무게와 크기 및 그것이 미치는 극심한 피해를 예감케 한다.

우박(바라드)

- 동사 '춥다'에서 유래된 말로, 돌처럼 단단한 얼음알갱이를 가리킨다.
이것은 종종 천둥과 함께 가축 떼가 들에 방목되는 시기인 겨울과 이른 봄(12-4월)사이에 내리곤 하여 곡물들에 큰 피해를 주어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우박이 단순히 자연 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 재앙의 도구가 되어 사람과 짐승의 생명까지 해치는 애굽 역사이래 전무 후무한 무서운 심판이 되었다.
이때로부터 우박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벌의 표와 심판의 도구로 자주 쓰이게 되었다(수 10:11; 학 2:17; 계 8:7; 16:21).

여덟 번째 재앙 : 메뚜기(10:1-20)

농경 지역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재해 중에 하나이다.
왜냐하면 모든 곡식을 순식간에 파괴해버리는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이 결과로 심각한 기근을 초래했다.
땅의 신에 대한 영적 전쟁으로 내려진 재앙이다.
메뚜기로부터 땅의 소산을 지켜주는 땅의 신에 대한 무능함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위대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애굽의 신들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았을 때, 애굽의 신앙은 산산히 무너지고 말았다.[3]

아홉 번째 재앙 : 흑암(10:21-29) 

이 재앙은 여호와가 ‘세상에서 가장 해가 잘 드는 나라’ 위에 내린 것이다.
‘태양의 집’ 을 의미하는 헬리오폴리스라 불리는 도시는 태양숭배의 중심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흑암 재앙은 애굽인들의 최고의 신인 태양신 를 그들로부터 빼앗고 여호와만이 신 중의 신임을 증명하는 재앙이었다.
3일동안 재앙이 일어났다.[3]

열 번째 재앙 : 장자의 죽음(12:29-30)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장자와 처음 난 짐승들을 특별하게 생각했다.
땅에서 처음 난 것과 가축의 처음 난 것처럼 여인의 몸에서의 맏아들도 여호와가 준 첫 선물로 여겨졌고, 이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여호와께 돌려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애굽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신성시 되고 귀하게 여겨졌던 바로의 장자와 애굽의 모든 장자, 그리고 처음 난 것들을 죽이는 재앙이 바로 장자의 죽음 재앙이었다.
이 재앙은 다산의 신인 오시리스 와 생명의 신인 이시스에 대한 재앙이다.
바로는 태양신의 현신이며, 바로의 장자는 청년의 육체를 입은 호루스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 신의 현신에 한 열 번째 재앙은 바로의 왕위 계승자를 없애는 재앙이었다.
그런 장자의 죽음을 통해 여호와의 완전한 승리가 나타나게 되었고, 이 재앙 이후에 바로는 패배를 인정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인정하게 된다.[3]

신학적 의의

여호와는 애굽에서의 영적인 전쟁을 통해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드러내심으로 애굽인들 뿐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을 지켜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까지 그들의 조상들이 말하던 여호와가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심으로써 ‘영적 전쟁’의 목적을 분명히 하였다.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는 분명한 목적 아래 벌어진 여호와와 애굽 신들의 전쟁 가운데, 여호와는 애굽의 모든 신들에 대해서 승리를 나타내였지만 성경에서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재앙의 원인은 바로의 완악함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출 5:2).
바로는 여호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애굽 백성들과 함께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불신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는 애굽의 신들과의 전쟁을 통한 승리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나타내신 것이다.
세 번째 재앙에서는 애굽의 주술사들이 여호와의 권능을 고백했고,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을 통해 바로의 신하들은 여호와의 재앙을 두려워해 종들과 가축들을 집으로 들임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를 통해 바로는 여호와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고,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을 통해 모든 애굽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권능’을 인정하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출애굽기에서 나타난 10가지 재앙에 대해서 그 재앙이 어떤 ‘애굽 신’을 가리키는 것이며, 여호와의 완전한 승리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았다. 출애굽기에서 나타나는 애굽의 10가지 재앙은 애굽을 향한 단순한 재앙이 아닌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는 목적 아래에서 수 많은 애굽 신들을 대면하여 누가 참된 신이며, 참된 신이라 말하는 여호와 자신이 누구인지를 온 천하에 드러내신 ‘영적 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3]

각주

  1. Greifenhagen, F.V. (2000). 〈Plagues of Egypt〉. Freedman, David Noel; Myers, Allen C. 《Eerdmans Dictionary of the Bible》. Amsterdam University Press. 1062쪽. ISBN 9789053565032.
  2. Tigay, Jeffrey H. (2004). 〈Exodus〉. Berlin, Adele; Brettler, Marc Zvi. 《The Jewish Study Bible》. Oxford University Press.
  3. 이동: 가나경열 (2015). “출애굽의 10가지 재앙을 통해 바라보는 여호와와 신들의 전쟁”.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제10일 / 02-24-2024(토)
출애굽기 10장(10:1-29)
메뚜기, 흑암 재앙(4절, 21절)


1862년 2월 링컨 대통령의 아들 윌리가 죽은 지 얼마 못되어 다른 아들 데드가 심각한 병에 걸렸다.
병원을 찾은 링컨은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내 생애에 가장 큰 어려움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옆에서 그 말을 들은 간호사가 자신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미망인이라고 밝히며, 그러한 시련 후에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링컨은 간호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죠?”
그러자 그녀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가능합니다.”
링컨은 진지하게 물었다.
“처음 불행이 닥쳤을 때도 완전히 복종했나요?”
간호사는 온화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요. 하지만 불행이 닥칠수록 신뢰를 가지게 되었고 완전히 복종할 수 있었어요.”
며칠 후 그녀를 다시 찾아온 링컨은 간호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때 참 고마웠습니다. 이제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재앙으로 빨리 깨닫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깨닫는 것이 느립니다.






출애굽기 10장 - 메뚜기와 흑암 재앙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신 이유는

첫째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심을 애굽 온 땅에 보이기 위함이었다.
둘째는 이러하신 하나님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절).

특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모든 역사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손들에게 전하기를 원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영원토록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놀라운 일들은 훗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게 되는 근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였을 때에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동기를 제공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자녀들에게 전할 때 그 자녀들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되며, 혹 떠날지라도 그 말씀을 기억하는 날에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그 자녀들에게 전하는 것은 부모된 성도들이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의무일 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가치있는 일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남겨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혹 재산을 남겨 준다면 그들은 게으름에 빠질 수 있습니다.
혹 지식을 더하여 준다면 교만하게 될 수 있습니다.
혹 기술을 가르친다면 일평생 먹고 사는 데는 유익하겠지만 그것 역시도 그의 삶을 완전히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역사를 전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리가 전하여 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자가 된다면 그는 일평생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살아갈 것이며,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후에는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토록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외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할 만큼”(빌 3:8)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의 역사를 가르치기를 더욱 귀하게 여기므로 우리의 자녀들에게 영원한 삶의 열쇠를 남겨주는 부모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한 번 전달합니다(3절)

그런데 이 명령은 이미 7차례에 걸쳐서 반복되었으나 바로에 의하여 계속 거절되었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해서 거절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께 한번쯤 ‘이 말씀을 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라든가 아니면 ‘다른 명령을 주십시오’ 라고 말씀드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몇 번이든 간에, 그것이 바로에게 거부되든 수용되든 간에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세에게 맡겨진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사명을 맡은 자는 그 결과에 관계없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는 곳까지 가고, 행하라고 하는 것을 행하고, 멈추라고 하는 순간 멈추면 되는 것입니다.
일의 결과를 예측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에스겔 3장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경고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해야 할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경고하시기를 만약 악인에게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는데도 그가 범죄하여 죽는다면 에스겔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겠지만 만약 에스겔이 하나님의 경고를 전달하지 않아서 그가 범죄하여 죽는다면 그 책임을 에스겔에게 묻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명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만 충실하면 됩니다.
그 결과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자가 행한 일의 결과가 나쁘기 때문에 그를 책망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지 않았기에 책망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을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전하기도 전에 미리 포기부터 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듣지 않을 거라고’, ‘괜히 창피만 당할 거라고’ 스스로 결과를 예측하면서 이웃을 향하여 한 마디의 말씀도 전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오늘 이 모세와 아론을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를 통해 새 생명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메뚜기 재앙으로 멸망의 위기에 처한 애굽 왕 바로는 급히 모세와 아론을 불러 자신이 여호와 앞에 득죄하였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구하여 재앙을 떠나게 해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합니다(16-17절).

이는 10절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데리고 애굽에서 나가려고 하는 것을 악하다고 비난하던 바로가 도리어 자신의 악함을 스스로 시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고백은 9장의 본문에서 보신 것과 같이 마음 중심에서 나온 진실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는 현실의 감당할 수 없는 큰 고통 앞에서 그 고통을 면할 속셈으로 자기 잘못을 거짓으로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의 순간에 이르면 신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임시방편이지 참된 믿음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도 그러한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평안할 때에는 하나님을 찾지도,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다가 고난만 찾아오면 하나님을 찾으며 구원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물론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단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만 하나님을 찾는다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은 바로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자신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헌신된 마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 본문의 바로와 같은 처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임하였다(22절).

이 흑암은 당시 애굽에서 최고의 신으로 숭배받던 태양신 ‘라’에 대한 심판으로 이 태양신 역시 한낱 우상에 불과함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그들의 그릇된 신앙에 대한 마지막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만일 바로가 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이 재앙을 대했더라면 그는 분명히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체없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 땅에서 내보냄으로써 마지막 재앙, 곧 장자 재앙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감지할 만한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모세에게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엄포를 놓음으로써 장자 재앙을 더욱 재촉할 뿐이었습니다.

오늘 이러한 바로왕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바로와 별 반 다름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겸손으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기적을 허락하시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돌이키시려는 것과 우리들의 간증을 통해 우리 자손들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저희들도 모세처럼 주신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하시되, 자녀들에게 썩어질 재물이 아니라 영원한 신앙의 유산을 남겨주는 지혜로운 부모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제9일 / 02-23-2024(금)
출애굽기 9장(9:1-35)
악질, 독종, 우박 재앙(3절, 9절, 18절)

5재앙 - 악질
6재앙 - 독종
7재앙 - 우박


계속되는 재앙으로 인하여 바로는 깨닫는 것처럼 반응하였으나 재앙이 멈추면 다시 완악해지는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완악(完惡) : 완전할 완, 악할 악
 -
성질(性質)이 모지락스럽고 악독(惡毒)함.


완강(頑強) : 완고할 완, 강할 강
 - 태도(態度)가 완고(頑固)하고 의지(意志)가 굳셈.

강퍅(剛愎) : 굳셀 강, 강퍅할 퍅
 - 성미(性味)가 깐깐하고 고집(固執)이 셈.

내 백성을 보내라


출애굽기 5: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출애굽기 7:16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였으나 이제까지 네가 듣지 아니하도다.

출애굽기 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8:2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로 나오리니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9: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9: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바로 앞에 서서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10:3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치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말씀을 두려워하는 사람과 멸시하는 사람(잠언 13:13)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룬다는 말은 성경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순종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다는 말은 말씀을 순종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신명기 28장축복의 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의 장이지만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저주의 장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좋은 분이시지만 그 반면에 조금도 자비가 없으신 저주도 내리시는 엄위하신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축복을 주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성경에서 어느 곳을 찾아보거나 동일하며 변개할 수 없는 하나의 법칙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가만히 살펴보면 그 사람의 생활에서 정확한 진단이 나옵니다.
그 진단에서 나온 정확한 원인은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음 두 가지 말씀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명기 28:15-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더 자세하고 두려운 내용이 신명기 28:58-67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신명기 28:58-67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 60절 → 67절’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언제나 우리들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그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자기 생애에 잡아끌어 드리지만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스스로 자기 가정과 사업에 이끌어 들여 패망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렸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패망하는 경우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 일에 대하여 ‘기왕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시고 너희로 번성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던 것같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던 사람이 그 순종을 버리면 하나님께서 순종했을 때 축복을 주셨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멸하시기를 기뻐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고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재앙을 받는다는 사실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바울이 증거 하는 이 한 사람으로 인한 불순종은 아담의 경우를 의미하며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은 온 인류의 비극을 가져 왔다는 사실을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은 축복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가져왔으며 의를 가져 왔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고 사망을 유업으로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지만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인하여 그 안에서 의인이 되었고 생명을 유업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지난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가고 있을 때, 한 사람의 불순종한 죄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서운 해독을 끼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점령하거든 그곳에서 탈취한 물건 중, 하나님께 바칠 물건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성안에 있는 은금과 강철로 만든 기구들은 다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인솔 아래 여리고성을 정복하여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정복할 목표는 산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아이라고 하는 적은 성이었습니다.
정탐꾼을 보내어 살펴보았더니 보고하기를 ‘아이성은 여리고성에 비하면 아주 적은 성이라 많은 군대를 올려 보낼 필요가 없고 약 2,3천 명 정도의 병력만 보내면 문제없이 점령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호수아는 약 3천명의 군사들을 그 성에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 군병들이 아이성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도망쳐 왔습니다.
이 때 여호수와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옷을 찢고 티끌을 무릅쓰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그들이 이 전쟁에서 참패한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중 한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성물을 도적질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성 사람들에게 참패한 원인이 이 한 사람의 죄로 인한 것이었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아간이란 자가 여리고성에서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 세겔과 50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몰래 숨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아간을 어떻게 처치했습니까?
아간을 잡고 그가 훔친 물건들과 그의 가족들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아골 골짜기란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하니 하나님의 진노가 풀려 아이성을 다시 공격케 하시어 승리를 거두게 하신 것입니다.
그 집의 한 사람의 불순종은 때로는 온 가정의 불행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한 사람의 순종으로 온 가정이 놀라운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죄악 중에도 가장 하나님을 노엽게 하고 용서를 받지 못할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불순종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3:36절 말씀에서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18절 말씀을 보면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단체나 국가는 결국에는 망합니다. 지금 일본이란 나라가 번창하는 것처럼 보이고 세계 경제를 주름 잡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우상 숭배의 길에서 돌이키고 지난날 한국 교회를 핍박하고 많은 하나님의 종들의 피를 흘린 일을 회개치 않으면 그들은 반드시 멸망 할 것이며 이 땅에 임할 인류의 무서운 환난 중에서 후회하고 땅을 치며 통곡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위정자들도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모르고 하나님을 떠난 생활을 하며 돈을 축재하려고 부정한 일을 저지르며 오늘의 국가적 위기를 초래한 사실을 철저히 회개치 않으면 얼마 안가 정말로 패가망신하고 영영히 구제 받을 길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리고 세계 역사를 돌이켜 볼 때도 어느 나라건 어느 민족이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 그를 존중히 여김으로 그를 위대하게 하고 그 나라를 번창케 하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했을 때 그가 누구이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며 하나님을 순종하므로 복을 받는 나라와 민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

한편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계명이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말씀을 두려워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1) 자기 생애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는 생활을 말합니다.

욥이란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일정한 음식보다 더 귀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욥23:11-12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는 영적 음식입니다. 음식을 멀리하는 자는 굶어 죽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는 자는 영의 주림으로 그의 생명이 죽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의 맛이 그의 입에 꿀보다 더 하다고 했습니다. 시119:103절 말씀을 보면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하니이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순종의 생활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에는 축복의 열매가 따르고 언약한 말씀대로 이루어짐으로 즐거움과 기쁨이 따르게 됨으로 그 말씀의 맛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맛인즉 무엇보다 더 달아요? ( ). 그러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말씀이 달기는 고사하고 그렇게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이 따르지 않으니 그의 생활에 말씀의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의 신앙생활이란 즐거운 것이 아니라 괴로운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긴다는 말은 말씀을 따라 그의 생활을 삼가는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스승입니다. 우리 인생의 참된 길의 안내자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따라 자신의 생활을 절제하며 삼가지 않으면 그는 결국 믿음에서 떠나게 되고 그의 인생길에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긴다는 말은 자신의 인생을 그 말씀에 의지하는 생애를 말합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지 아니합니다. 인간의 지식을 따라 처신하지 않습니다. 자기 지혜나 자기 지식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 살아갑니다. 자기 상식이나 경험이나 사람들의 권고를 따라 말씀에서 떠나거나 벗어나는 일을 결코 하지 아니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의지하며 그곳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사나 이적을 믿고 결코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을 때, ‘내가 어제 밤에 그곳에도 여러 번 그물을 던졌지만 잡지 못했습니다’고 말하면서 의심하지 아니했습니다. ‘내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고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물이 찢어지는 많은 고기가 그 그물에 잡힌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고 이치적으로는 합리성이 없지만 그러나 주님이 하신 말씀이니 내가 오직 그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겠습니다고 고백하는 믿음의 자세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비결입니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약속한 상은 영생으로 갚으시는 생명의 상입니다.
하늘에서 받는 면류관의 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상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에도 그 마음의 소원대로 성취되는 축복의 상입니다. 이 모든 상을 준비하시고 누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며 순종하는가 찾으시는 것입니다.

같은 교회에서 같은 신앙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어떤 사람은 상을 얻는 길로 다니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미련스럽게도 패망을 이루는 길로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생의 성공은 한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생활이 그 길입니다. 이 생활은 곧 순종을 말합니다. 이 생활에는 상이 따릅니다. 이 세상의 상으로서의 축복은 말할 것도 없고 하늘의 놀라운 상이 높이 쌓인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더욱더욱 순종의 생활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명기 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명기 28: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애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요한계시록 11:8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유다서 1:8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숫자 0과 10의 의미는무엇일까?

조동욱(충북도립대학 교수)

통상 수(數)는 총 세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가 많고 적음과 같은 양(量)을 나타내며 이를 기수라 한다.
영어로는 one, two 등으로 표기한다.

둘째는 1층, 2층처럼 순서를 나타내며 이를 서수라 한다.
영어로는 first, second 등으로 표기한다.

셋째는 주민등록증 번호처럼 기호의 역할을 한다.

사실 우리가 통상 사용하는 아라비아 숫자는 원래 인도에서 만든 것이다.
이것이 아라비아 상인에 의해 아라비아 숫자로 그 명칭이 바뀌었으니 인도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가슴 칠 일이 아닌가 싶다.

또 아라비아 숫자가 1, 2, 3 등과 같이 표기 된 것은 메사포타미아 등은 점토판에 숫자를 그은 것이어서 작성한 숫자가 변형이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인도는 모래에 수를 표기했고 그 결과 만일 바람이라도 불면 작성한 수에 대한 구분이 어려워져 수를 1, 2, 3 등과 같이 표기했다.

그리고 인도에서 무(無)의 개념으로 '0' 이란 숫자를 만들어 냈다.
'0'이란 없다는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0'을 다른 숫자의 뒤나 중간에 붙임으로 인류는 엄청나게 큰 수를 만들어 내게 된다.
1뒤에 0을 3개를 붙이면 천(千)이 되고, 4개를 붙이면 만(萬)이 된다.
1과 2 사이에 0을 2개를 넣으면 1002가 된다.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의 '0'이 사실은 엄청나게 큰 수를 표기하는 도구가 되어 수의 혁명을 가져 오게 된다.

또 숫자 10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을까?
10은 모든 계산의 기본이 되는 수이고 법, 질서, 지배를 상징하는 수라고도 하고 또 창조와 완성을 나타내는 수로 쓰인다.
또한 10은 귀신을 쫓는 수이기도 하다.
그 결과 로마에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임으로써 최대 악귀를 쫓아냈다고 생각한 것이고 예수님 입장에서는 구원의 완성이란 의미로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다.

또한 10은 창조를 뜻하기 때문에 우리가 욕이라고 생각하는 십새끼란 원래 창조란 뜻인 것이다.
새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도 10달간 어머니 뱃속에 있어야 하고 또 어머니의 십XX을 통해 새 생명이 창조되어 나온다.
우리가 욕이라고 생각하는 단어가 얼마나 소중한가.


1~10까지 숫자의 의미

1

1은 원초의 통일, 태초의 시작, 창조자, 주동자, 모든 가능성의 총합, 본질, 중심, 나눌 수 없는 불가분의 것, 배아(胚牙), 고립을 나타낸다. 또한 융기, 상승을 나타낸다.


중국 양(陽), 남성, 하늘, 길(吉)을 뜻한다.

기독교 하나님 아버지, 신성을 뜻한다.

유태교 1은 아도나이를 나타낸다. 또한 숨겨진 지식(카발라에서는 세피로스의 케텔)을 뜻한다.

이슬람교 통일로서의 신, 절대자, 모든 것을 자족할 수 있는 존재를 뜻한다.

피타고라스 학파 영(靈), 만물의 기원으로서의 신, 본질, 모나드를 의미한다.

도교 도(道)는 1을 낳고, 1은 2를 낳고, 2는 3을 낳고, 3은 만물을 낳는다.

2

2는 이원성, 둘의 교체, 차이, 갈등, 의존,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정적인 상태, 뿌리박음, 변하여 균형을 유지함, 안정, 반영, 대극, 인간의 이원성과 욕망을 나타낸다. 이원성으로서 현현되는 것은 모두 서로 대립되는 쌍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1는 점(点)을, 2는 길이를 나탄내다. 2는 1에서 출발한 최초의 숫자며 따라서 최초의 선(善)에서 일탈이라는 의미의 죄를 상징한다. 또한 순간적으로 타락하기 위숨을 나타낸다. 동시에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두마리의 동물은 배가된 힘을 나타낸다.


연금술 2는 태양과 달, 왕과 왕비, 유황과 수은 등 대립물을 나타낸다. 따라서 처음에는 대립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융합되는 남녀추니로서의 통일이다.
불교 2는 윤회의 이원성, 남과 여, 이론과 실천, 지혜와 방법을 나타낸다. 또한 서로 도와 길을 찾고 걷는 맹인과 절름발이를 뜻한다.
중국 2는 음(陰), 여성, 뭍(지상), 흉(凶)을 뜻한다.
기독교 신성과 인간성을 겸비한 예수를 뜻한다.
유태교 생명력을 의미하고, 카발라에서는 지혜와 자기 인식을 뜻한다.
힌두교 이원성, 샥타와 샥티를 뜻한다.
이슬람교 영(靈)을 뜻한다.
플라톤주의 플라톤에 의하면 2는 뜻이 없는 수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3의 요소를 도입하는 관계를 함의(含意)하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 학파 2는 한 쌍, 즉 2분된 지상적 존재를 나타낸다.
도교 괘(卦)는 음과 양 두 가지 결정요소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2는 중심이 없기 때문에 음에 속하는 약한 숫자다.


3

 

3은 다수, 창조력, 성장, 이원성을 극복한 전진운동, 표현, 통합을 뜻한다. 3은 모든이라는 말이 붙을 수 있는 최초의 숫자이며 처음과 중간과 끝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전체를 나타내는 숫자다. 3의 힘은 보편적이며 하늘, 땅, 바다로 이루어지는 세계의 3중성을 나타낸다. 또한 인간의 육체·혼·영, 탄생·삶·죽음, 처음·중간·끝, 과거·현재·미래, 달의 세 가지 상(초승달, 반달, 보름달)을 나타낸다. 3은 천계의 숫자이며, 4가 육체를 나타내는 데 비해 3은 영혼을 상징한다. 3은 4와 합쳐져 7이라는 성스러운 숫자가 된다. 또 3과 4를 곱하면 12가 되는데, 그것은 황도십이궁, 일년 열두 달을 의미한다. 3은 1과 2를 더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2와 1로 나누어질 수 있다. 도교에서 3은 평형을 성립시키는 중심점을 가지기 때문에 강한 숫자다. 3에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성(아버지, 어머니, 아들)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가족에게도 반영된다. 또한 3에는 중첩효과라는 권위가 있다. 즉 한 번이나 두 번은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지만 세 번이 되면 확실성과 강한 힘을 지닌다. 예를 들면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 3배 위대한 주(主), 3배 행복한 섬 등이 그것이다. 민화에서는 3이라는 숫자가 자주 등장한다. 3번의 소원, 3번의 시련, 3인의 왕자, 왕비, 마녀, 또는 운명의 세 여신, 3인의 요정을 뜻한다. 이중 둘은 착한 요정, 나머지 하나는 악한 요정인 경우가 많다. 3은 다수를 의미하는데 많은 숫자, 군집, 만세삼창을 나타낸다. 또한 성취를 상징하기도 한다. 신들과 영적 존재의 삼위일체의 예는 무수히 많다. 삼위일체의 달의 여신이나 삼면의 여신은 특시 셈족, 그리스, 켈트, 게르만 등의 종교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하나의 신격을 가진 세 개의 상(相), 힘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3을 나타내는 상징으로는 제일 먼저 삼각형이 있다. 3개의 원 또는 삼각형이 일부 중첩되어 있는 도형은 삼위일체로서의 3개의 인격의 불가분의 통일을 보여주는 것이다. 삼각형 외에 3을 나타내는 상징으로는 삼지창, 붓꽃, 세개의 잎, 3중 벼락, 괘상 등이 있다. 달에 속하는 동물들은 다리가 세 개인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달의 세 가지 모양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달에 3마리의 토끼 또는 세 사람의 인간이 살고 있다고 전해진다.


아프리카 아샨티 족 달의 여신은 셋인데 그중 둘은 흑인, 하나는 백인이다.
연금술 황, 수은, 소금의 세 성분으로 이것들은 각기 영, 혼, 육체를 나타낸다.
고대 서아시아 삼위일체의 신이 많다. 카르타고에서는 달을 뜻하는 '태모신'이 3개의 상징적인 기둥으로 묘사되었다.
아라비아   이슬람교 이전에 마나트는 3인의 성처녀(알-이타브, 알-우자, 알-마나트)로 나타내지는 삼위일체의 여신이다.1) 이 여신의 상징은 돌기둥, 돌, 기둥 또는 꼭대기에 비둘기를 장식한 기둥이다.
1) 이타브는 타이프 근교의 계곡에 있는 흰 돌에 사는 처녀신, 우자는 메카 근교의 계곡 아카시아 나무에 살고, 마나트는 메카와 메디나 사이의 쿠다이드에서 제사지내는 검은 돌에 산다.
불교 3은 삼보(三寶) 즉 불교를 구성하는 세 가지 기본 요소인 부처, 부처의 가르침, 승려를 나타낸다.
켈트 브리지트 여신은 세 가지 모습을 가진다. 켈트에는 지복의 세 여인 외에 무수한 3인조 신들이 있다. 이 신들은 같은 신의 세 가지 다른 모습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다. 켈트의 전통문화에서 3은 특히 중요한 숫자다.
중국 3은 성스러움, 길(吉)한 숫자, 가장 작은 홀수이다. 달에 사는 두꺼비 혹은 태양에 사는 새는 다리가 세 개다.
기독교 3은 삼위일체, 혼, 인간과 교회의 영육간의 결합, 삼인의 동방박사가 신, 왕, 희생으로서의 예수에게 바치는 세 가지 선물(유향, 황금, 몰약), 변용된 예수의 세 가지 모습, 예수가 받은 세 차례의 유혹, 베드로의 세 차례에 걸친 부인, 골고다 언덕의 세 개의 십자가,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기까지의 날 수, 부활한 예수가 세 번 출현함, 엠마오의 순례자, 사도들에게 출현, 3인의 마리아, 신앙·희망·은총으로 이야기되는 신을 향한 세 가지 덕목을 뜻한다.
이집트 그리스·로마 시대에 토트 신은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로 불렸다.
그리스, 로마 3은 숙명, 운명으로서 세 가지 모습을 가진 하나의 신 모이라이(라케시스, 클로토, 아트로포스)를 나타낸다. 헤카테(Hecate) 여신도 삼위일체다. 복수의 여신으로 나타나는 에리니에스(Erinyes, 알렉토, 타시포네, 메가이라)들과 메두사로 알려진 괴물 고르곤의 세 자매들(Gorgon, 스테노, 에우리알레, 메두사)도 하나이자 셋인 모습이다. 또한 아름다움과 우아함의 세 여신 카리테스들(Caritas, 아글라이아, 에우프로시네, 탈레이아), 미의 세 여신들(graces), 3인의 세이렌(Seiren), 식물의 성장을 주관하고 자연과 사회의 질서를 상징하는 세 명의 여신 호라이들(Horae, 에우노미아, 디케, 에이레네 또는 탈로, 아우크소, 카르포), 헤스페리데스의 정원을 지키는 세 명의 여신들(아이글레, 아리티아. 헤스펠라레투사 또는 아이글레, 아레투사, 헤스페리아), 태어날 때부터 백발을 하고 나온 그라이아이(Graeae, 팜프레도, 에니오, 데이노)도 있다. 지옥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Cerberos)는 머리가 셋이고 스킬라(Scylla)에게는 거대한 꼬리가 세 개, 키마이라(Chimaera)는 머리와 몸, 꼬리가 세 가지 다른 동물(사자, 산양, 뱀)의 모습이었다. 3,4 그리고 두 숫자의 합인 7은 3가지의 세계와 4대 원소를 주관하는 여왕으로서의 여신 아프로디테/베누스(Aphrodite/Venus)의 성스러운 숫자다. 오르페우스(Orpheus) 교의 상징체계는 존재, 생명, 지성이라는 3대 요소를 가진다.
유태교 3은 무한의 빛, 성화(聖化)된 지성, 카발라에서 3은 세피로스의 비나(지성)을 나타내며 남·녀, 통합적 지성의 삼위일체를 나타낸다.
헤르메스 사상 지고의 힘힘으로서의 신 즉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를 의미한다.
힌두교 트리무르티(trimurti,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를 의미한다. 이는 창조·지속·파괴와 시작·유지·종결의 세 가지 힘을 나타낸다. 이외에도 삼신일체의 신은 많다. 달의 전차는 바퀴가 세 개 달려 있다.
잉카 태양신에는 아버지 태양(아포인테이), 자식 태양(첼리인테이), 형제 태양(인테이카오키)의 세 가지 모습이 있었고 이들은 삼신일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 세 가지 신기(神器)에는 거울(八咫鏡), 검(天叢雲劍), 옥(八坂瓊曲玉)이 포함되며 각기 진리·용기·연민의 뜻을 가진다.
마오리 족 창조신인 큰영은 태양, 달, 대지의 삼위일체 신이다. 또한 자연의 신 즉 과거·현재·미래의 신이기도 하다. 3은 세워진 세 개의 손가락으로 상징되는 정신·인격·체격이다.
피타고라스 학파 3은 완성을 나타낸다.
북유럽, 게르만 숙명은 세 명의 노른(마니, 니, 니시), 즉 운명의 세 여신을 통해서 나타난다. 세 자매는 순서대로 보름달, 초승달, 반달을 상징한다. 게르만 신화에서는 달이 숙명을 나타내며, 달의 여신 홀다는 두 자매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룬다. 달에 사는 토끼는 다리가 셋이다. 천둥신 토르(Thor)는 때로 머리가 셋 달린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삼각 소용돌이 무늬 또는 삼각 호 장식은 오딘/보탄(Odin/Wotan)의 상징이다. 또한 3은 행운의 숫자다. 뭐든 좋은 것은 3이다.
슬라브 달의 신은 머리가 세 개다.
도교 삼재는 천, 지, 인을 가리킨다. 3은 모든 것을 둘로 나누면 중심이 남는 최초의 강한 숫자다.
3은 양. 길함을 뜻하며 다수를 상징한다.

4
 
최초의 입체는 4에서 비롯된다. 4는 현현의 공간적 구조 또는 질서, 동적인 원에 대립하는 정적인 상태를 상징한다. 4는 완전성, 전체성, 완성, 연대, 대지, 질서, 합리성, 측정, 상대성, 정의를 상징한다. 4에서 비롯되는 것으로는 4가지 기본 방위, 사계절, 4개의 바람, 정사각형의 4변, 십자가의 4개의 팔, 낙원에 있는 4개의 강, 지옥에 있는 4개의 강, 네 개의 성산(聖山), 낮과 밤의 네 구분, 달의 4현(弦), 4복음서 기록자 등이 있다. 서구에서는 세계가 4대 원소(동양에서는 5행)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성스러운 사위일체는 삼위일체와 대조적이다. 구약성서에서는 4가 상징적인 숫자였고 낙원의 중심에서 네 방향을 향해서 십자형으로 흘러나가는 4개의 강(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지상 세계의 4개 지방 등 보편적인 상징이었다. 사위일체는 정사각형이나 십자가 뿐 아니라 4개의 잎 형상으로도 묘사된다.

아메리카 인디언 4는 네 개의 기본방위, 4가지 바람 등 가장 자주 사용되는 숫자이며 십자, 만(卍) 등의 형태로 묘사된다. 의식이나 의례에서는 같은 동작이 네 번 반복된다.
고대 서아시아 바람의 네 신은 동사남북의 네 방위와 동일시되었다.
불교 생명의 나무 담바에는 큰 가지가 4개 있고, 뿌리에서는 낙원의 4개의 성스러운 강이 흘러나온다. 이것들은 자무량심(慈無量心), 비무량심(悲無量心), 희무량심(喜無量心), 사무량심(捨無量心)의 4무량심1)을 나타낸다. 중국 불교에서는 4가지 기본 방위에 사천왕(四天王)2), 즉 동에는 옥반지와 창을 들고 있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에는 비파를 지닌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에는 혼돈과 지진, 암흑의 우산을 들고 있는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에는 채찍, 표범가죽으로 만든 자루, 용, 진주를 가지고 있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자리잡고 있다.
1) 자무량심은 안락을 베풀려는 마음, 비무량심은 다른 사람의 고난을 덜어주려는 마음, 희무량심은 중생이 기쁨을 얻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 사무량심은 다른 사람에 대한 원한을 버리고 모두 평등하게 대하려는 마음이다.
2) 한국에서는 동쪽에 옥반지와 검을 지닌 지국천왕, 남쪽에 용을 들고 있는 증장천왕, 서쪽에 탑을 들고 있는 광목천왕, 북쪽에 비파를 지닌 다문천왕이 있다.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의 목조 사천왕 참조.
중국 4는 정사각형으로 상징되는 대지의 숫자다. 불사의 강은 모두 네 개다.1) 4는 짝수이며 음(陰)의 숫자다.
1) 사독(四瀆): 신앙의 대상이 된 4대강. 양쯔(揚子), 지수이(濟水), 황허(黃河), 화이허(淮水).
기독교 4는 육체의 숫자, 3은 영혼의 숫자다. 낙원에서 흘러나오는 4개의 강, 4복음서, 4복음서 기록자, 4명의 대천사(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우리엘), 4악마(사탄, 바알제붑, 벨리아르, 몰록), 4대 교부(성 암브로시우스, 성 히에로니뭇,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그레고리우스), 4대 에언자(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4덕(신중, 용기, 절제, 정의), 하나인 영기에서 불어오는 4개의 바람, 계시록의 4기사, 4복음서 기록자의 형상을 뜻한다.
이집트 4는 시간과 태양의 운행을 이해하는 성스러운 숫자다. 4개의 기둥이 하늘의 궁륭을 떠받치고 있다. 사체(死體)의 네 부분(간장, 폐, 내장, 위)이 담겨 있는 4개의 카노푸스의 단지를 지키는 수호자는 4가지 기본 방위와 연관되는 호루스(Horus)의 네 자식들이다.
그노시스 주의 바벨로(태모신)의 4를 뜻한다.
그리스 4는 헤르메스 신의 숫자다.
유태교 4는 측정, 은혜, 지성을 나타낸다. 카발리즘에서 4는 세피로스의 헤세트(은총)를 나타내며, 카발라의 4세계(유출 세계, 창조 세계, 형성 세계, 활동 세계), 공간의 4방위, 토라의 4가지 위계를 나타내는 숫자다.
헤르메스 사상 헤르메스 사상에서 4는 사위일체의 신(누스, 로고스, 누스 데미우르고스, 안트로포스)을 나타낸다.
힌두교 전체성, 충실, 완성을 의미하며, 창조주인 브라흐마는 4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힌둑 사원은 정사각형의 4변을 기초로 건축되며 질서와 완결성을 상징한다. 4개의 물질전개원리, 인간의 사지, 4자연계(동물, 식물, 광물, 정신), 4유가를 뜻한다. 4는 주사위에서 가장 이길 승산이 많은 숫자(서양에서는 7)이다. 4개의 카스트, 둘씩 대립하는 4개의 쌍이 있다.
이슬람교 원질을 나타내는 4가지 요소는 원리(창조주), 보편적 지성, 보편 영혼, 제1질료다. 이것은 카발리즘의 4세계에 대응하는 것이다. 또한 4인의 천사, 4개의 죽음의 집이다.
마야 천둥번개를 타고 지상계의 기본방위로 나타나는 챠크스 신이 있다. 또한 바카브 신과 4인이 교대로 1년의 1/4씩 지상계를 통치한다.
피타고라스 학파 완성, 조화로운 균형, 정의, 대지를 뜻한다. 4는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서약의 숫자다. 4와 10는 신을 뜻하며 테트라크티스(tetraktys, 1+2+3+4=10)의 성수(聖數)다.
북유럽 신들의 세계 아스가르트(Asgard)에는 젖이 흐르는 4개의 강이 있다.
게르만 4인의 난장이가 세계를 떠받치고 있다.
도교 하늘을 지키는 네 사람의 수호신은 옥으로 만든 탑을 들고 있는 이(李), 검(劍)을 들고 있는 마(馬), 두 자루의 검을 들고 있는 조(趙), 못이 박혀 있는 곤봉을 들고 있는 온(溫)이다. 4종류의 영적인 짐승으로 된 4신과 4령이 있다. 4신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이며, 순서대로 4가지 기본방위(동서남북)를 나타낸다. 4령은 기린, 봉황, 거북, 용이다.


5

 

5는 소우주로서의 인간을 나타낸다. 사지를 뻗어 오각형의 별 모양을 한 사람을 나타내는 숫자다. 오각형 별에는 끝나는 점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별과 마찬가지로 완전성과 힘의 상징이다. 5는 n제곱을 했을 때 마지막 숫자가 항상 5로 끝나기 때문에 순환수라고 불린다. 오각형 별은 원처럼 전체를 상징한다. 5는 중심과 기본방위를 나타내는 4점을 합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각형 별 모양은 4대 원소라는 힘을 만들어낸 중심적 창조주인 신성을 나타낸다. 5는 여성, 짝수인인 2와 남성, 홀수인 3의 결합으로서 성혼의 숫자다. 또한 5는 명상, 종교, 섭리, 다재, 오감을 나타낸다. 다섯잎 꽃, 다섯 개의 끝을 가진 잎은 소우주를 나타낸다. 별포는 펜타그램과 마찬가지로 통합된 인격을 나타내며 별표의 곡지점이 위쪽을 향하고 있을 때에는 요술과 검은 마법을 뜻한다. 사람의 다섯 손가락은 최초의 계산기 구실을 했다.

연금술 다섯잎 꽃과 오각형 모양의 별은 제5원소를 나타낸다.
불교 심장에는 네 가지 방향이 있고, 중심과 합해서 5라는 숫자가 되어 보편성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네 개의 섬에 둘러싸인 성산(聖山)도 보편성의 상징이다.1) 다섯의 선정불(禪定佛)2)이 있다.
1) 수미산(須彌山)은 동의 승신주(勝身洲), 서의 섬부주(贍部洲), 남의 우화주(牛貨洲), 북의 구로주(俱盧洲)의 네 대륙에 둘러싸여 있다.
2) 1. 대일여래(大日如來, 광휘의 뜻)는 법륜(法輪)과 중심과 흰색으로 상징된다. 2. 아축여래(阿축如來, 부동의 뜻)는 금강, 동쪽, 청색으로 상징된다. 3. 보생여래(寶生如來, 보탄(寶誕)의 뜻)는 보석과 남쪽, 황색에 의해서 상징된다. 4.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무량광(無量光)의 뜻)는 연(蓮)과 서쪽, 적색에 의해서 상징된다, 5 불공성취여래(不空成就如來, 아주 확실한 성공의 뜻)는 검(劍)과 북쪽, 녹색으로 상징된다.
중국 오행(五行)1), 오기(五氣)2), 오운(五運)3), 오성(五星)4), 오악(五嶽)5), 오곡(五穀)6), 오색(五色), 오미(五味)7), 오독(五毒)8), 오진(五塵)9), 오덕(五德)10), 오복(五福)11), 오상(五常)12), 오륜(五倫)13)을 뜻한다.
1)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2) 추위(寒), 더위(暑), 가뭄(燥), 습함(濕), 바람(風)
3) 오행의 운행
4) 목성(歲星), 화성(熒惑星), 금성(太白星), 수성(辰星), 토성(鎭星)
5) 태산(泰山), 형산(衡山), 화산(華山), 항산(恒山), 숭산(嵩山)
6) 중국에서는 참깨, 보리, 피, 쌀, 콩(또는 참깨, 보리, 피, 수수, 콩)을 오곡이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쌀, 보리, 콩, 조, 기장을 오곡이라 한다.
7) 신맛, 쓴맛, 짠맛, 매운맛, 단맛
8) 뱀, 두꺼비, 지네, 전갈, 도마뱀의 독
9)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다섯 가지 욕망. 물질(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촉감(觸)의 오욕
10) 온화, 양순, 공손, 검소, 겸양
11) 장수, 부유, 무병식재, 도덕을 즐기는 것, 천수를 누리는 것(또는 자손이 많은 것)
12) 어짐(仁), 의리(義), 예절(禮), 지혜(智), 신뢰(信)의 다섯 가지 덕
13) 부자유친(父子有親), 장유유서(長幼有序),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붕우유신(朋友有信)
기독교 5는 타락 후의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다. 오감(五感), 십자가의 다섯 개의 점, 십자가 형을 받은 예수의 몸에 난 다섯 개의 상처(두 손, 두 발, 허리), 5천 사람을 먹인 물고기, 모세 오경1)의 숫자다.
1) 창세기, 출애급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집트 나일강에 있는 다섯 마리 악어의 숫자다.

그리스, 로마 사랑과 화합을 나타내는 혼례의 숫자다. 5는 비너스(금성)의 숫자며, 비너스는 5년을 주기로 완성된다. 빛의 신으로서의 아폴론/아폴로는 전능, 전지, 편재, 영원, 통일의 5가지 상징물을 가지고 잇다.

유태교 5는 강함과 엄격, 근원지의 상징이다. 카발에서 5는 세피로스의 게브라(엄격함)를 의미한다.

힌두교 세계는 다섯 가지 요인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오대(五大, 조악하고 큰 다섯 원소), 오유(五唯, 미세 원소), 다섯 가지 원색, 오감, 시바 신의 다섯 가지 얼굴이다. 비슈누(Vishnu) 신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10가지(5의 2배) 권화1)가 있다.

1) 마즈야(물고기), 쿠르마(거북), 바라하(멧돼지), 누리싱하(사람사자), 바마나(난쟁이), 파라슈라마(도끼를 가진 라마), 라마, 크리슈나, 석가세존, 칼키
이슬람교 실행해야 할 다섯 가지 의무인 오주(五柱)1), 신의 다섯 가지 재림2), 다섯 가지 기본 교리3), 다섯 가지 활동, 하루 다섯 차례4)의 예배를 나타낸다.

1) 신앙 고백, 예배, 단식, 희사, 순례
2) 물질세계, 이미지와 상징의 세계, 영의 세계, 신의 이름과 속성의 차원, 신의 본질의 차원
3) 무아타지라파는 1. 신의 유일성, 2. 신의 공정함, 3. 내세에 대한 약속과 위협, 4. 중간적인 위치, 5. 윤리적 명령이고, 시아파는 1. 신의 유일성, 2. 신의 공정함, 3.예언자직, 4. 사도직, 5. 이맘직
4) 새벽, 정오, 오후, 일몰, 밤
파르시 교 파르시 교와 만다 교의 의식에서 5는 매우 중요한 숫자다. 그것은 성스러운 빛의 윤일이 5일이라는 사실과 결부된다.

피타고라스 학파 5는 성혼, 즉 하늘(3)과 대지(2)의 결혼을 나타낸다. 빛, 빛의 신 아폴론과 그의 다섯 가지 특성을 가리킨다.


6

6은 평형, 조화를 상징한다. 6은 1에서 10까지의 범위 안에서 완전수(1+2=3=6)다. 필론에 따르면 모든 수의 중심으로서 가장 생산적이다. 6은 서로 반대되는 대극(對極)의 통일을 상징하는데, 자웅 두 개의 삼각형이 합쳐져 남녀추니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때 꼭지점이 위를 향하고 있는 삼각형은 남자와 불, 하늘을 나타내고, 역삼각형은 여자, 물, 대지를 나타낸다. 또한 6은 사랑, 건강, 아름다움, 기회, 행운을 의미한다. 서양에서는 주사위에서 6이 다른 숫자를 누르는 가장 강한 숫자다. 태양의 바퀴에는 6개의 빛줄기가 있다. 교차하는 두 개의 삼각형 즉 솔로몬의 봉인이라고 불리는 6개의 꼭지점을 가진 별은 완전한 균형을 상징한다.


고대 서아시아 창조에 소요되는 6일간을 뜻한다.

중국 우주는 6이라는 숫자에 의거한다. 4가지 기본 방위와 하늘(위)과 땅(아래)이 6가지 방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여섯 가지 감각1)이 있다. 밤낮의 깊이는 각기 여섯으로 구분된다.

1)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육감으로서의 마음
기독교 6은 완전, 완성, 우주 창조에 필요한 6일간을 나타낸다.

유태교 창조에 필요한 6일간, 명상, 지성을 나타낸다. 카발라에서 6은 창조, 세피로스의 디후엘레트(아름다움)의 상징이다.

피타고라스 학파 기회, 행운을 뜻한다.


7

7은 대우주를 나타내는 숫자다. 완전, 전체성의 뜻이다. 3은 하늘과 혼을, 4는 대지와 육체를 나타내기 때문에, 7은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의 덧없음을 모두 포함하는 제일 작은 숫자다. 7은 완성, 보증, 무사, 안식, 풍부, 재통합, 종합 등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고 처녀성과 '태모'를 나타내는 숫자다. 7과 연관되는 것으로는 우주의 7단계, 일곱 개의 하늘, 일곱층의 지옥, 7개의 행성과 그 행성이 나타내는 금속들(달은 은, 수성은 수은, 금성은 동, 태양은 금, 화성은 철, 목성은 주석, 토성은 납)이 있다. 우주의 일곱 개의 원, 태양의 일곱가지 광선, 인간의 일곱시기, 지혜의 일곱기둥, 일곱가지 무지개색, 1주일의 일곱 요일, 7음계, 세계의 7대 불가사의1) 등이다. 태양의 제7의 광선은 인간이 현세에서 내세로 가는 길이다. 단식과 회개는 7일간 행한다. 고대 유태인 철학자 필론에 따르면 어떤 수도 7제곱을 하면 제곱과 세제곱 모두를 포함하므로 7은 매우 중요한 숫자다.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용은 인도, 페르시아, 동아시아, 켈트, 지중해의 신화에 등장한다.


1) 이집트의 피라밋,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터키 에베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그리스 로도스 섬의 거인청동상, 이라크 바빌론의 공중정원, 허티 할리카르나소스의 무덤, 그리스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
연금술 작업에서 7개의 금속이 관계된다.

고대 서아시아 월령의 일곱 가지 구분과 1주일의 일곱 요일이다. 달이여! 그대는 뿔 모양의 빛으로 6일을 정하고 7일째에는 반쪽의 관으로 빛난다. 이런 의미에서 음력 일곱째 날은 태양에 대립하는 어둠과 불길을 상징하며 일곱째 날에 어떤일을 시작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그 날이 안식일이 되었다. 대지에는 일곱 개의 지역이 있다. 지구라트의 일곱 행성들로 상징되는 일곱 개의 하늘이다. 생명의 나무의 일곱가지에는 각기 일곱 개의 잎이 달려 있다. 지옥의 일곱 개의 문, 티아마트 여신의 일곱 악령과 그 여신을 죽인 일곱 개의 바람, 7가지 색, 일곱개의 인장, 일곱 기둥의 운명의 신을 나타낸다.

점성술 큰곰자리의 일곱 개의 별은 1년 중 어느 때라도 볼 수 있다는 면에서 불멸이다. 플레이아데스, 일곱 개의 큰 행성, 태양의 일곱 가지 광선을 뜻한다.

불교 7은 상승의 숫자, 지고천(至高天)으로 올라가 중심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는 숫자다. 부처의 칠각(七覺, 일반적으로 팔상)은 시공을 초월하는 칠천(七天)1)을 넘어가는 것을 상징한다. 자바 섬에 있는 보루부두르 불교사원의 7층 건축물은 성산이자 우주축을 상징한다. 정상은 초월적인 북쪽을, 정상에 오르는 것은 부처의 영역에 도달했음을 상징한다.

1) 야마천(夜摩天), 도사다천(覩史多天), 낙변화천(樂變化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범중천(梵衆天), 대범천(大梵天)
기독교 신은 천지창조를 나타내는 6개의 광선의 한가운데 있는 일곱번째 광선으로 상징된다. 7과 관계되는 것으로는 7가지 성사1), 성령의 일곱가지 선물2), 7덕3), 일곱가지 큰 죄4), 연옥에 있는 일곱 층으로 된 산5), 중세의 자유 7과6), 행성을 포함하고 있는 일곱 개의 투명구체, 7대 예언자7), 지상에 관계하는 일곱 대천사8), 예수에 의해서 추방된 일곱 악마, 7일간의 단식과 회개, 성모 마리아의 일곱 가지 기쁨9)과 슬픔10), 기독교 국가의 7대 영웅11), 초대 교회의 일곱가지 충고다. 또한 천지창조의 6일이 지난 후 일곱째 날은 안식일이다. '구약성서'에서 7이라는 숫자는 바알람의 일곱 개의 제단, 제물로 바친 일곱 마리 수소와 숫양, 일곱 개의 양각 나팔,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돎, 나아만이 요단 강에서 목욕한 횟수, 또한 삼손은 푸른 칡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이라고 말했다. 엘리사에 의해 깨어난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를 했다. 노아의 방주는 7개월 만에 육지에 도달했다.

1) 성세, 견진, 성체, 고백, 병자, 신품, 혼인
2) 지혜, 총명, 지식, 의지, 영리, 효애, 경외
3) 3가지는 신에 대한 덕이고, 4가지는 기본 도덕
4) 교만, 탐욕, 색욕, 질시, 폭식, 분노, 나태
5) 일곱 가지 큰 죄를 하나씩 씻어내는 곳
6) 문법, 논리학, 수사학, 기하학, 산술, 천문학, 음악
7) 4대 예언자에 요나, 요엘, 자카리아 포함
8) 4대 천사에 카무엘, 요피엘, 쟈디엘 포함
9) 수태고지, 엘리사벳의 내방, 예수의 강탄, 동방박사 3인의 내방, 잃었던 예수의 발견, 부활, 승천
10) 시누온의 예언, 이집트로의 피난, 예수를 잃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뭇사람에게 전시된 예수의 시신,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매장
11) 영국의 성 게오르기우스/조지, 스코틀랜드의 성 안델레, 웨일즈의 성 다비드, 아일랜드의 성 파트리키우스, 스페인의 콤포스테라의 성 야곱, 프랑스의 성 도니, 이탈리아와 파트와의 성 안토니우스
이집트 운명의 여신으로서의 일곱 명의 하토르(Hathor)와 마아트(Maat)가 있었으며, 이 여신의 여사제들은 7개의 항아리를 가지고 있었다. 라(Ra) 신의 일곱 딸은 7벌의 내의에 일곱 개의 매듭을 만들었다. 라 신의 일곱 마리 매들은 칠현인을 나타낸다. 라의 호아소와 함께 있는 일곱 마리의 암소는 풍요를 나타낸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이집트 신화 해석에서는 명계에 일곱 가족이 있고 21개의 문이 있다. 7은 오시리스(Osiris) 신의 성수(聖數)다.

그리스, 로마 7은 7현의 리라를 가진 아폴론/아폴로 신의 수이며 아테나/미네르바 여신, 군신 아레스/마르스의 수이기도 하다. 목신 판(Pan)은 일곱 개의 갈대로 만든 갈대 피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에는 일곱 명의 현인1)이 있다.

1) 로도스 섬의 클레오불롯, 코린토의 정치가 페리안드로스, 레스보스의 정치가 피타코스, 그리스의 격언가 비아스,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 스파르타의 정치가 케일론, 아테네의 정치가 솔론
유태교 신비의 지혜를 뜻한다. 유태의 1년에는 일곱 번의 큰 제삿일1)이 있다. 메노라(Menorah)라는 가지가 일곱인 촛대가 있다. 솔로몬의 신전을 건축하는 데 7년이 걸렸다. 지혜의 일곱 기둥2)의 뜻이다.

1) 신년제(로슈 하샤나), 속죄의 날(욤 피르르), 초막절 축제(수코프), 궁결제(하누카), 프림 제, 과월제(페사하), 칠주제(샤보트)
2) 카발리즘에서 세피로스의 네시아하(영원)의 뜻이다.
힌두교 브라흐마의 칠보, 대홍수 이전의 일곱 신과 홍수에서 구원된 일곱 현자를 나타낸다.

이슬람교 7은 가장 작은 완전수, 일곱 개의 하늘, 일곱 가지 기후, 일곱 대륙과 바다, 일곱 색, 7인의 예언자1), 일곱 가지 활동력, 혼의 일곱 가지 상태2)를 뜻한다. 순례에서 가파 신전을 일곱 바퀴 도는 까닭은 알라가 가진 일곱 가지 속성을 상징한다. 순례에서 가파 신전을 일곱 바퀴 도는 까닭은 알라가 가진 일곱 가지 속성3)을 상징한다.

1) 아담, 누흐(노아), 이브라힘(아브라힘), 무사(모세), 다우드(다윗), 이사(예수), 무하마드
2) 명령을 내려 악으로 유도하는 혼, 비난하고 비판하는 혼, 영감을 받는 혼, 평온한 혼, 만족하는 혼, 기뻐하는 혼, 완전한 혼
3) 생명, 지식, 의지, 능력, 청력, 시력, 언어
일본 칠복신(七福神)1)을 상징한다.

1) 대흑(大黑), 혜비수(惠比須), 비사문(毘沙門), 변천(辯天), 포대(布袋), 복록수(福祿壽), 수로인(壽老人)
마법 주문으로 옭아매기 위해서 끈에 일곱 개의 매듭을 만든다. 주문은 일곱 번 반복한다.

미트라교 미트라스 신전에는 일곱 개의 가로대를 가진 사다리가 있는데, 그것들은 밀의의 이니시에이션의 일곱 계단을 상징한다.

피타고라스 학파 3은 하늘, 4는 대지를 뜻하며 7은 이승의 신, 완성을 나타낸다.


8

영적인 의미에서 8은 신참자가 이니시에이션의 일곱 단계 칠천계(七天界)를 통과해서 도달하는 최종지점을 상징한다. 따라서 8은 낙원의 회복, 재생, 부활, 지복, 완전한 리듬의 상징이다. 신의 은총에 의해서 인간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제8일째다. 단식과 참회의 7일간이 끝난 8일째는 풍요와 신생의 날이다. 7+1이라는 의미에서 8은 옥타브를 나타내는 숫자, 재출발을 상징한다. 8은 8개의 꼭지점을 가진 정육면체와 결부되기 때문에 입체성을 상징한다. 동서남북의 4가지 기본 방위에 각각의 중간 방위를 다하면 8개의 방위가 되며, 바람에도 8가지 종류가 있다. 8은 서로 반대되는 두 개의 쌍을 나타낸다. 정팔각형은 정육면체에서 원으로서의 변형의 시작을 나타낸다.


고대 서아시아 일설에 의하면 네보 신의 마법의 숫자다.

불교 8은 완성상태, 모든 가능성을 나타내며 불족석(佛足石)의 팔길상인(八吉祥印)이다.

중국 8은 전체, 모든 가능성의 현현, 행운의 상징이다. 팔괘(八卦)는 양(陽)을 나타내는 효(爻)가 세 개씩 다양하게 결합해서 8개의 조합으로 나타난 도형이다. 이들 8개의 조합은 대개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때 원주는 시간과 공간(및 그 속에서의 생성 유전)을 상징한다. 인간에게는 여덟 가지 기쁨이 있다.

기독교 신생, 재생의 듯이다. 성수반은 대개 다시 태어남의 상징으로 8각형이다. 여덟가지 행복을 뜻한다.

이집트 신 토트의 성수(聖數)다.

유태교 8은 완벽한 지혜, 광휘, 세피로스의 호드(권위), 요드 헤 바브 헤(YHVH, 야훼)의 숫자, 주(主)의 숫자다. 솔로몬 신전은 8일째 되는 날 깨끗이 청소되었다.

헤르메스 사상 8은 헤르메스 신학에는 수와 기하학의 발명자인 주신 토트/헤르메스와 그 밑의 여덟 명의 신1)이 있다.

1) 눈, 네네트(심연), 후후, 후후트(무한), 쿠쿠, 쿠쿠트(암흑), 아멘, 아메네트(불가시성, 공기)
힌두교 8*8는 지상에 현현된 천계의 질서를 상징한다. 사원과 '만다라'의 형태는 8*8의 상징을 토대로 건축되었다. 세계 8대 지역, 8개의 태양, 하루의 시간을 8등분함, 8개의 '차크라'가 있다.

이슬람교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왕관은 8명의 천사가 떠받치고 있다. 이것은 공간의 8구분에 대응하는 것이다. 아라비아 어의 철자의 여덟 가지 구분1)에도 대응한다.

1) 순(脣) 문자, 치경(齒莖) 문자, 치찰(齒擦) 문자, 설단(舌端) 문자, 구각(口角) 문자, 경구개(硬口蓋) 문자, 구개수(口蓋垂) 문자, 연구개(軟口蓋) 문자
일본 8은 수가 많은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 주의 플라톤에 의하면 빛나는 하늘의 기둥을 중심으로 동심원상으로 색색가지 여덟 개의 천구가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 8은 연대, 안정을 나타낸다.

도교 8은 현현된 모든 가능성을 나타낸다. 현상계의 여러 가지 힘은 팔괘로 상징된다. 팔선 또는 불멸을 뜻한다.


9

9는 강력한 숫자인 3의 거듭제곱(3x3)이고 3조의 3배다. 9는 완성, 성취, 달성, 처음과 끝, 전체를 의미하며 천계와 천사의 숫자다. (9천계, 9천사의 위계) 또한 지상낙원을 나타낸다. 9는 불후의 숫자다. 또한 9는 원주를 나타내는 숫자다. 원주는 90도 단위로 4등분되며 원주 전체는 360도이기 때문이다. 9는 2개의 삼각형이 조합된 모양으로 상징되며, 남과 여, 물과 불, 산과 동굴과 같은 대립원리를 상징한다.


불교 9는 지고의 영적인 힘을 상징하며 구천(九天)1)의 의미가 있다.

1)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생각된 아홉 개의 천체. 일천(日天), 월천(月天), 수성천(水星天), 화성천(火星天), 목성천(木星天), 금성천(金星天), 토성천(土星天), 항성천(恒星天), 종동천(宗動天)
불교 8은 완성상태, 모든 가능성을 나타내며 불족석(佛足石)의 팔길상인(八吉祥印)이다.

켈트 켈트의 전통문화에서 9는 매우 중요한 의미르르 가진다. 8가지 방위와 중심점을 더한 숫자로 9는 중심을 상징한다. 삼중의 여신에서 삼중이란 3의 세제곱을 의미한다. 9인의 켈트 처녀, 9개의 흰 돌로 브리지트 여신의 시중을 드는 아홉처녀를 나타낸다. 9는 벨테인 불의 축제와 연관된다. 의식에서 9명씩 9번 총 81명이 참가한다.

중국 모든 숫자 중에서 3x3은 가장 길(吉)한 숫자이며, 9는 하늘의 힘을 나타낸다. 9는 명당에서처럼 8가지 방위와 아홉번째 점으로서의 중심을 나타낸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한 구법(九法)1), 구관(九官)2)을 뜻한다. 정전법(井田法)에서는 토지를 우물 정자 모양으로 아홉 구획으로 분할했다. 이때 중심에 있는 토지는 아홉번째 토지로서 최고 지배자인 상제에게 바쳤고 신의 토지라고 했다. 이 토지는 공전(公田)이라고도 불렀는데 그것은 천자가 천제의 대리인이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다. 풍수에서도 지관이 용혈(龍穴)을 찾으면 그 구멍 앞에 있는 공간(명당)을 9분할한다.

1) 주나라 무왕에게 기자가 답했던 아홉가지 큰 법. 오행, 오사(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懲), 오복(五福)
2) 고대의 관제에 따른 아홉 명의 대신. 사공(司空), 황직(皇稷, 농경), 사도(司徒, 교육), 사(士, 형벌), 공공(共工, 공업), 우(虞, 산림), 질종(秩宗, 제사), 전악(典樂, 음악), 납언(納言)을 뜻한다.
기독교 기독교의 상징체계에서 9는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천사에는 3계급씩 3조, 즉 아홉 위계가 있다. 하늘에는 아홉 천구, 지옥에는 아홉 환도(還道)가 있다.

이집트 이집트에는 아홉 신1)이 있다.

1) 헬리오폴리스의 아홉 신에는 아톤(Aton, Ra), 슈, 테프누트, 게브, 누트, 오시리스, 이시스, 세트, 네프티스가 있다.
그리스, 로마 아홉 신, 후에는 9명의 뮤즈를 나타내는 숫자다.

유태교 9는 순수지성을 나타낸다. 9는 그 배수로 다시 9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진리를 뜻한다. 카발라에서 9는 10단계의 세피로스에서 아홉번째인 '이에소드(토대)'를 상징한다.

힌두교 불의 신 아그니의 성수다. 9의 제곱은 81개의 사각형으로 이루어지는 만다라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우주를 형성하고, 우주를 포함한다.

마야 명계는 9층으로 나뉘어 있고 각 층을 다스리는 명계의 주인이 배치되어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 9는 다른 모든 숫자가 그 속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순환하는 것으로 숫자의 한계를 나타낸다.

북유럽 오딘 신은 인간을 위해서 지혜의 비밀을 손에 넣으려고 아홉 낮, 아홉 밤 동안 '이그드라질'에 매달려 있었다. 북유럽의 페르세포네라고 불리는 눈(雪)의 여신 스켈디는 1년 중 3개월은 산 속에서, 9개월은 니오르드(항해, 교역의 신)의 바다에서 산다. 북유럽과 게르만의 상징체계에서 9는 성수(聖數)다.

10

10은 우주를 타나태는 수, 창조의 패러다임이자, 모든 수를 포함한다.
따라서 모든 사물과 모든 가능성을 상징한다.
10는 모든 계산의 기본이 되는 숫자, 10진법의 전환점이 되는 숫자다.
10은 모든 것을 포함하며, 법, 질서, 지배를 상징한다.

테트라크티스(tetraktys) 형(1+2+3+4=10)은 신성(神性)을 상징한다.
이 경우 1은 점, 2는 선, 3은 면, 4는 공간을 나타낸다.
10은 완전수로 1로의 회귀를 상징한다.
10은 양 손의 열 손가락을 기초로 나온 숫자이며, 완성, 모든 계산의 기본을 나타낸다.
또한 보다 높은 범주의 완전성으로서 백(百)과 천(千)은 힌두교 우주론의 토대가 되는 숫자다.
또한 중국에서 만(萬)은 셀 수 없이 많음을 의미하고, 현현 세계 전체를 뜻한다.
10은 여행의 완성을 나타내며 기원으로의 회귀를 뜻한다.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는 9년간 방랑을 하고 10년째에 고국으로 돌아갔다.
트로이는 9년간 포위를 견디다가 10년째에 함락되었다.
10은 원주를 둘러싸는 9와 중심을 나타내는 1의 합으로 나오는 숫자로 완전성의 상징이다.
우주축으로서의 1과 그 주위를 돌며, 춤추는 9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서아시아 봄 축제에서 10일째에는 신상들을 모두 등장시켜 행렬을 지어 축하한다.
중국 10은 한자로는 종횡의 길이가 모두 같은 '십(十)'으로 나타낸다.
이것은 음과 양이라고 불리는 두 방향을 향하고 있는 자신을 상징한다.
통설로는 동서를 뜻하는 ㅡ와 남북을 뜻하는 |이 모두 갖추어져 완전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십간(十干)에 12지를 배합해 모두 60가지 조합으로 연월일을 표시한다.

기독교 10은 모세의 십계를 나타내는 숫자다.
10개의 등불, 10인의 처녀, 10탈란트 등의 비유에 나오는 숫자다.
신에게 바치는 1/10세(십일조)다.

그노시스 주의 충일의 세계, 이이온의 로고스(말씀)와 조에(命)에서 다시 10개의 아이온이 나왔다.

유태교 카발리즘에서 10은 '영원세계'인 요드(히브리어 알파벳의 열번째 문자), 신(神)(요드 헤 바브 헤, YHVH)이라는 단어의 첫번째 문자에 대응하는 숫자이며, 눈부신 지성, 신의 지원, 십계, 세피로스의 말후트(국왕), 신의 10개의 이름을 뜻한다.

또한 카발라에서 10은 절대무에서 흘러나오는 세피로스의 수다.
세피로스는 대개 생명의 나무에 의해서 상징되는데, 열 개 중의 첫번째 것이 모나드, 즉 다른 압홉 개의 '제1원인'이다.
또한 나머지 아홉 개의 세피로스는 각기 남, 녀, 그리고 둘을 통일시키는 지성의 삼위일체의 3가지로 구성된다.

열번째의 아도니(adoni)는 통일성으로서의 신비적 회귀를 상징한다.
솔로몬 신전에는 10개의 커다란 사제 목욕용 대야, 10개의 식탁, 10개의 촛대가 있다.
계약의 궤 앞에는 10명의 레위 인 사제가 있다.

힌두교 10보다 큰 범주들, 즉 백(百)과 천(千)은 힌두교 우주론의 기반을 이룬다.

이슬람교 이슬람법에서 10분의 1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피타고라스 학파 10은 모나드를 나타낸다.
10은 완전의 상징이다.

로마 로마 숫자에서 10은 X(완전한 숫자)로 완성의 상징이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40일 / 03- 30-2024(토)
출애굽기 40:1-
언약궤(1절)
찬송 /  장(  )


40장


1-15 성박의 건설과 각 기구의 위치와 그 성별 및 제사장의 성별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
16-33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을 세우고, 여러 기구를 각각 그 위치에 두다.
34-38 성막 위에 구름이 덮이고, 성막 안에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하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9일 / 03- 29-2024(금)
출애굽기 39:1-
언약궤(1절)
찬송 /  장(  )



39장


1-31 제사장의 성의의 제조.
32-43 성막의 완성과 모세의 검열 및 축복.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8일 / 03- 28-2024(목)
출애굽기 37:1-29
번제단(1절)
찬송 /  209장(주의 말씀 받은 그날)

38장
     1-7. 제단과 그 부속품의 제작
        8. 세수통(물두멍)의 제작
  9-20. 뜰의 포장과 기둥 및 문장의 제작
21-31. 금·은·동의 헌물의 분량과 그 용도


창세기 45:6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요한복음 4:18
내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번제단(燔祭壇)의 필수품(必需品)

1. 불(火) - 보혜사 성령

레위기 9: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성령은 어떻게 불과 같은가요?

성경은 하나님을 “소멸하는 불” (히브리서 12:29).
불이 자주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불에 붙은 떨기나무(출애굽기 3:2), 쉐키나의 영광(출애굽기 14:19; 민수기 9:14-15), 에스겔의 환상 (에스겔 1:4)이 그 예입니다.
많은 경우, 불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의 수단이었고(민수기 11:1, 3; 열왕기하 1:10, 12), 또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사사기 13:20; 열왕기상 18:38).

불은 구약성경 제사에서 중요했습니다.
번제 제단 위의 불은 하나님께서 직접 피우신(레위기 9:24) 신성한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제단 위에 피워진 당신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킬 임무를 맡기셨고 (레위기 6:13), 다른 근원에서 피워진 불은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레위기 10:1-2).

신약성경에서 제단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으로 그려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은사로 단장한 “산 제물” (로마서 12:1)로 드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신약성경의 맨 처음 부분에서, 성령은 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 (마태복음 3장)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성령이 초대 교회에 내주하시는 사역을 시작했을 때,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모습으로 나타나 각 사람 위에 임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 순간,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 했습니다(사도행전 2:3-4).

불은 성령이 하시는 일의 경이로운 묘사입니다. 성령은 적어도 다음 세 가지 방식으로 불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열정, 그리고 하나님의 순결을 가능하게 합니다. 성령은 믿는 자들의 마음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로마서 8:9). 구약성경의 하나님께서는 성막 위를 불로 덮으심으로 (민수기 9:14-15) 당신의 존재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 불 같은 존재는 그들에게 빛과 길을 제공하였습니다 (민수기 9:17-23). 신약성경의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서 “장막 집”, “하나님의 성전”인 (고린도후서 5:1; 6:16) 우리들의 몸에 거하심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시고, 위로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열정을 부어주십니다. 길을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고 난 뒤, 서로에게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누가복음 24:32)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후,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식지 않는 열정을 가지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4:31).

성령은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순결이 가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고 (디도서 2:14),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인이십니다 (고린도전서 6:11; 데살로니가 후서 2:13; 베드로전서 1:2). 은세공인이 불을 사용해 찌꺼기를 제거하여 고가의 은을 추출하듯이, 하나님은 성령을 사용해 우리의 죄를 제거하십니다 (시편 66:10; 잠언 17:3). 하나님의 불은 우리를 씻어주시고, 정결케 하십니다.


2. 피(血) - 용서(죄 사함)

히브리서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3. 뿔(角)
- 구원(생명 보호)

시편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성경에서 뿔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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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뿔이 나 있는 '모세 조각상'(미켈란젤로 작, 1515년).

일반적으로 뿔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힘을 가진 자를 상징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예부터 황소 뿔에 기름을 담아 그 기름을 왕이나 예언자, 사제에게 붓는 의식이 있었다.
이것은 기름 부음을 받는 자에게 하느님의 힘을 실어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 네 모서리 장식으로 뿔이 달려 있었다.


성경에서도 뿔에 관한 언급이 많이 등장한다.

구약성경에서 들소의 뿔은 하느님의 힘, 우리를 지켜주는 표징으로 왕이 백성을 보호하거나 원수를 물리치는 상징으로 종종 사용됐다.

"그는 맏이로 난 소, 그에게 영예가 있어라. 그의 뿔은 들소의 뿔. 그 뿔로 민족들을 땅 끝까지 모두 들이받으리라. 에프라임의 수만 명이 그러하고 므나쎄의 수천 명이 그러하리라"(신명 33:17).


뿔을 든다는 것은 힘과 기쁨과 건강과 우월함을 나타낸다.

"주님이신 그분께 맞서는 자들은 깨어진다.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천둥으로 호령하신다"(사무엘상 2:10).

뿔은 힘의 상징, 특히 왕적인 힘의 상징이 된다.
따라서 뿔을 베는 것은 그 사람의 힘이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압의 뿔이 잘리고 그의 팔이 부러졌다. 주님의 말씀이다"(예레미야 48:25).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모세 상을 보면 모세에게 뿔이 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중세 교회의 모세에 대한 그림을 보면, 머리에 뿔이 난 모세를 그리거나 조각한 것이 많다.
모세 머리에 뿔이 나도록 조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그 원인이 라틴어 성경의 번역 오류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어 흥미롭다.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증언판 두 개를 들고 내려왔다.
그런데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쳐다보니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려워서 모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출애굽기 34:9-35).
이때 모세의 빛나는 얼굴 상태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얼굴 살결이 빛나다'와 '뿔이 나다'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때문에 예로니모 성인은 구약성경 라틴어 역본인 '불가타'에서 이 대목을 그의 얼굴에 뿔이 돋은 것이라고 번역했다.
미켈란젤로는 이 성경 구절에 근거해 모세상을 조각했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후대 주석가들은 이 번역이 본래 의미와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 '모세 얼굴이 빛이 났는데 그 형태가 뿔 모양이었다'라고 해석하게 됐다고 한다.
하느님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고 하느님 영광이 모세 위에 머물렀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도 하느님의 어린양, 곧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을 상징하는 일곱 뿔을 갖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요한계시록 5:6).
성경에서 뿔은 하느님의 능력과 도움, 승리의 영광을 상징하고 있다.

사무엘하 3:4
네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열왕기상 1:5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인을 예비하니.

열왕기상 1:50-51
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 잡으니.
혹이 솔로몬에게 고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솔로몬왕을 두려워하여 지금 제단 뿔을 잡고 말하기를 솔로몬왕이 오늘날 칼로 자기 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기를 원한다 하나이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7일 / 03- 27-2024(수)
출애굽기 37:1-29
언약궤(1절)
찬송 /  장(  )


언약궤는 지금 어디에 있나?

역대하 5:7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본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 개 아래라.

성경에서 언약궤의 이동과 그 위치에 대한 마지막 말씀이다.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만들어진 언약궤가 솔로몬 왕이 만든 성전에 자리 잡는 이야기를 끝으로 언약궤의 이야기는 더 이상 성경에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면 '현재 그 언약궤는 어디에 있을까?'하는 질문을 갖게 된다.
솔로몬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무너졌을 때 언약궤는 어떻게 되었을까?
언약궤가 지금 어디에 있을까에 대한 답은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솔로몬 성전이 무너질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던 예레미야 선지자가 언약궤를 어디엔가에 잘 감춰 놓았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장소는 현 예루살렘 황금돔 밑이다.

성전이 있던 자리에 이스람교도들이 황금 돔을 세워 놓았는데 그 밑에 언약궤가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눈에 거슬려도 황금 돔을 깨부수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언약궤가 상할까 해서.

두 번째 장소는 로마 베드로 성당 밑이다.

자기들의 정통성을 강조하 기 위한 가톨릭의 주장이다.

세 번째 장소는 에디오피아의 어느 성당이다.

몇 년 전에 에디오피아에 있는 한 성당 신부가 보관 중인 언약궤를 공개하겠다고 신문 기자 인터뷰를 요청해서 소동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결국 인터뷰는 무산되고 말았지만 예레미야 선지자가 에디오피아로 갖고 갔을 것이라는 전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와 같이 언약궤가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이 엮어 있는 것은 아마도 예레미야 3장 16절에 "...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라는 말씀 때문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숨겼다고 본다.

외경 마카비 2서 2:7-8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언약궤와 분향단을 이스라엘의 회복의 날에 대비하여 감추어 놓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장소는 그 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채 남겨져 있을 것이다.

지팡이와 만나는 증거판 앞에 두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언약궤 속에 두 돌 판과 같이 넣었다(히 9:4).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두 돌 판만 남아 있었다(대하 5:10).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지 않으신다는 교훈을 주는 사건이다.
그러나 진정한 언약궤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계 11:19)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시편 110:10)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의 특징    

1. 지혜로운 사람(1, 8절) - 솔로몬

2. 총명한 사람(1절) - 아비가일
3. 자원하는 사람(3절) - 다윗

지혜를 구한 솔로몬(열왕기상 3:1-15)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야보고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여러분 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지혜로운 사람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솔로몬 왕을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로운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왕위에 올랐습니다. 나이가 많아야 20세였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아버지처럼 잘 할 수 있을까?’ ‘이 많은 백성들을 어떻게 잘 다스릴 수 있을까?’하는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반대세력을 제거하였습니다.
먼저 2장 13절~25절에 보면 왕위에 오르려 했던 아도니야를 제거하였습니다.
아도니야가 살려고 밧세바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보호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밧세바는 이 이야기를 솔로몬에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나를 세워 내 부친 다윗의 위에 오르게 하시고 허락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오늘날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왕상 2:23-24)
결국 25절에 말씀을 보면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반역에 동참하였던 아비야달과 요압을 제거하였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유언대로 아버지 다윗에게 모멸감을 주었던 시므이도 제거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2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3장에서는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립니다.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왕상 3:4)

여러분 일천번제가 쉽습니까?
2년을 하고도 270일 동안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매일 매일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솔로몬의 일천번제에 도전을 받고 일천번제헌금을 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헌금을 합니다. 그 액수를 다 다르지만 어떤 분들은 매일 매일 천원을 봉투에 넣어 헌금하고 어떤 분들은 매일매일 5,000원을 헌금하고, 어떤 분들은 매일 매일 만원을 봉투에 넣어서 헌금을 합니다. 그래서 혹시 빼먹을 수 있으니까 아예 번호를 1,000번까지 써서 놓고 헌금을 하는 모습을 저는 보았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30일 작정하고 매일 기도회를 가졌지만 30일 동안 기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때로 아플 때도 있고, 갑자기 바쁜 일이 생기기도 하고, 하다보면 체력이 따라주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천번제를 드린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여러분 헌금하는 것은 그래도 조금은 쉽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별히 번제를 드린다는 것은 정말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매일 송아지를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송아지의 각을 뜨고, 율법대로 버릴 것은 버리고 태울 것은 태워야 합니다. 정말 손이 많이 가고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물론 제사장들이 준비했겠지요? 그런데 솔로몬이 이 모든 것에 주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생각하면서 우리도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겠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작정하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가졌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저는 교만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께 작정하고 사는데 무슨 날을 정해서 작정을 하고 기도할 필요가 있겠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연약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작정하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없이 게으름을 피우기가 쉽습니다. 한없이 뒤로 미루면서 열심을 품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표를 정해 놓고/ 시간을 정해 놓고/ 날짜를 정해 놓고/ 그 목표를 향하여 힘을 쏟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십시오. 정말 될 수 있으면 시간을 작정하고/ 날짜를 정하고 작정하여 기도해 보십시오. 가능하다면 기도하면서 여러분도 일천번제를 드리십시오.
분명히 우리의 신앙의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천번제를 드릴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릴 수 있는 근거도 여호와를 사랑하고 부친의 법도대로 행하기를 힘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왕상 3:3)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면 천일이 하루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하루가 천년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낫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과 연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라헬을 얻기 위해서 삼촌 라반과 계약을 하였습니다. “7년 동안 일하면 라헬을 주리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7년을 봉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라헬과 연애함으로 인하여 그 칠년을 수일같이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일천번제를 드리는 것도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면 교회를 위해서 늘 봉사하고 헌신하여도 그것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이요. 감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일주일을 작정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정기도 시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꽉 차 있을 때 너무나 즐거운 시간, 기쁜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혹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매 말랐다면 이 시간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헌신이 감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보시고 하나님이 감동하셨습니다. 그래서 꿈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내게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이 6절부터 대답합니다.
(왕상 3:6)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왕상 3: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왕상 3:8)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왕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결론적으로 무엇을 구했습니까? 지혜를 구했습니다.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로운 마음을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10절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왕상 3:10)
솔로몬은 주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기도하여도 주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 기도를 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주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위하여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왕상 3:11)

그렇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았습니다.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기만을 위한 정욕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님은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
그렇습니다. 주님의 맞는 기도는 자기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나님의 맞는 기도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가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중보하고
연약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며 힘쓰는 것입니다.
우선순위가 바로 주님의 일에 있는 것이 바로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옛날의 성도들의 마음에는 좀 더 주의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집안일을 해도 먼저 예배시간을 피해서 하고
약속을 해도 하나님의 일을 먼저 할 수 있도록 약속을 정하고
재정이 생겨도 하나님께 먼저 받칠 것을 생각하고
정말 복 받는 사람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남는 시간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먼저 내가 쓸 것부터 챙기고 다음에 하나님 것을 생각합니다.
먼저 내 볼일 이 우선순위로 되어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일을 보는 것이 순서가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넘버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넘버 투입니다.

여러분 솔로몬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감동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보너스를 주셨습니다.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왕상 3:13-14)

그렇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가 되고 하나님이 감동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시는 것뿐 아니라 보너스로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존귀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솔로몬에게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여러분 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시는 것뿐 아니라 그 외에 것도 보너스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작정하십시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기를 작정하십시오. 그리하면 주님 우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내게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발과 아비가일이 주는 교훈(사무엘상 25:23~38)

사무엘상 25:2~3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

마온에서 5리정도 떨어진 갈멜이라는 곳에 다윗이 육백 명의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고 훗날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능멸하고 거역하여 불순종했고 오히려 자기를 추켜세워서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신 아말렉과의 전쟁을 자기 전술과 전략으로 이긴 것처럼 자기 이름으로 공덕비를 세우기도 하고 하나님이 철저히 금하셨음에도 아말렉 사람들의 가축들을 골짜기에 자기 몫으로 숨기기도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세움 받고 쓰임 받는다고 다 된 것이 아니라 교만하게 됨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공덕을 치하하고 자기이름으로 행세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부득이 그를 버리시기도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와같은 사울을 이미 버리시기로 작정하시고 이스라엘 왕의 후계자로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다윗은 늘 성령충만하여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인이었습니다. 또한 맡겨진 양떼를 돌봄에 있어서도 맹수들과 싸우면서까지 목자의 사명을 다해 돌보았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목숨보다 귀한 것으로 여겨 신앙인격적 사명을 성공적으로 감당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의 믿음을 맘에 들어 하셨습니다.

이런 다윗을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세우시기 위하여 그에게 망명생활의 훈련을 시키시는 과정입니다.

무용(武勇)에 뛰어난 600명의 용사들이 다윗왕조를 세우기 위하여 훈련하고 있었던 곳이 갈멜이었습니다.

다윗은 근처에서 양과 염소를 돌보고 있던 나발의 목자들을 당시 강도들이 들끓었기 때문에 그의 군사들로 하여금 해치지 못하게 지시하고 더불어 목동과 양떼까지 보호하여 지키게끔 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나발의 양털 깎는 날이 되어 갈멜에서 양털을 깎고 있었습니다. 유목민들에게는 양털 깎는 날이 수입이 생기는 소망적인 날이라 큰 잔치를 베풀고 지나가는 나그네까지도 넉넉히 대접함으로 그 즐거움에 참여하도록 하여 인심을 후히 쓰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고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로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삼상 25:5~8)”고 그의 부하 열 명을 나발에게로 보냈습니다.

그러자 나발은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삼상25:10~11)”고 합니다. 그는 빈정대며 주인에게서 떠나 반란을 시도하여 갈라져나가 문제를 일으키는 놈들이 있다고 다윗을 빗대어 욕을 한 것입니다.

나발의 미련함은, 첫째로 하나님이 성령을 충만케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쓰실 사람인 다윗을 몰라본 것입니다. 둘째로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가축들을 자기의 소유물로 생각하여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이 모든 것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밝히고 계십니다. 나발의 세 번째 미련함은 시대를 분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게 될 것인지에 대한 분별이 전혀 없었습니다.

나발의 이런 미련함에 빈손으로 돌아온 다윗의 부하들을 보고 다윗은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는 사백 명 가량은 칼을 차게 하고 그들을 죽이러 올라가고 이백 명은 그 소유물 곁에 남겨 두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동도 실수였습니다. 자신이 그들의 목동과 가축을 돌보아준 것에 대한 응당한 댓가로 생각한 다윗은 나발이 자기를 모욕하고 무시했다고 생각하여 감정적으로 대처한 것입니다.

로마서 12:19~20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하셨습니다.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그의 종으로부터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사자들을 보내었거늘 주인이 그들을 수욕하였나이다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상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을 알아 생각하실지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이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삼상25:14~17)”고 보고를 받습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서둘러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 준비한 양 다섯과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을 취하여 나귀들에게 싣고 다윗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나발을 향해 가고 있는 다윗을 만난 아비가일은 본문의 내용과 같이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자신의 남편 나발이 너무나 서운하게 대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러 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쓰실 계획을 압니다. 곧 왕이 되실텐데 왕좌에 오르시게 되면 이런 미련한 사람 때문에 피 흘리는 죄를 지었다는 것이 평생에 지울 수 없는 왕의 허물이 될까봐 이처럼 사정하고 비오니 미련한 자들을 죽일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런 피흘림을 막는 것이 아니겠습니까”하고 다윗에게 하나님을 인식시키는 말을 합니다.

이에 다윗은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두지 아니하였으리라(삼상25:32~34)”합니다. 그리고는 그 음식을 받고 그녀의 말을 듣고 그 청을 허락했다고 말을 합니다.

아비가일이 그 남편 나발에게로 가보니 왕의 잔치같은 잔치를 하며 술에 크게 취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을 바로 말하지 않고 다음날까지 기다려 술이 깬 후에 말을 해줍니다.

신앙적인 지혜는 반드시 해야 할 말도 상황과 때를 분별하고 상대를 잘 알아 상대가 영적인 유익함으로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신앙인격으로 슬기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 남편 나발이 다음날 아침, 술이 깨어 일어났을 때 전날에 있었던 일을 설명합니다. 아비가일의 말을 다 들은 그는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어 열흘 후에 죽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나발의 어리석음을 통한 아비가일의 신앙지혜를 본받으라고 여러분들에게 유익한 교훈으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이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에게 대적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아비가일은 그 남편이 죽은 후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거역하다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이상 회개할 소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면 나발과 같이 없애버리십니다.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살기를 힘쓰는 사람은 예수님과 영원한 영적신부가 되도록 예수님의 짝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한 교회의 목자인 목사들은 오로지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선한 목자가 되어 그 교회에 속한 양 떼가 모두 하늘나라 가도록 하기 위하여 진액을 다하여 애쓰고 있다면 이런 목자의 뜻을 따라 함께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다윗(사무엘하 5:1-25)


●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예수님 빼고 다윗만큼 많은 분량에 걸쳐 일생이 자세하게 소개된 인물도 없다.
그만큼 성경에서, 또 기독교 신앙에서 다윗은 중요한 인물이다.
다윗은 어떤 인물인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도 어느정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윗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알고 있다. 여러분도

다윗에 대해서는 한마디씩 할 수 있을 것이다.

일개 목동이었으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되었던 극적인 인물이요, 예수님의 조상이요, 성실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우며,

위대한 시인이요 음악가요 골리앗을 넘어뜨린 최고의 용맹스런 장수요,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실수도 저질렀던, 참으로 다양한 재능과 인간미와 신앙을

겸비했던 인물!

이 한시간에 다윗에 대해 말하기란 사실 무리일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은

다윗의 일생을 초기, 중기, 말기로 나누어서, 평소 여러분들이 성경 이야기를

통해 잘 알고 있는 부분 몇가지를 신앙적으로 재해석하도록 하겠다.

‘다윗’은 아브라함의 14대 손이며, 유다지파 이새의 여덟째 막내아들로, 그

이름은 히브리 말로 ‘사랑받는 자, 사랑스러운 자’라는 뜻이다. 그의 이름대로

다윗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다. 유대땅 베들

레헴에서 태어났으며, 일개 목자에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되기까지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은혜로 장식되어 있다.

● 다윗이 등장할 당시 이스라엘은 사울을 초대 왕으로 세워 왕정을 수립하게

되었고, 백성들이 여망하는 바 외적의 압제로부터 막 벗어나는 시기에 있었다.

그러나 사울이 비록 왕이라는 직책을 수행하긴 하였지만, 정치적.군사적 입장

에서 볼 때 여전히 불안정하였다. 그는 이전의 사사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주변의 국가들이 강력한 왕정국가를 형성하고, 막강한 군대와 병기들을

갖추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국력을 신장시킬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세워 신본주의적 왕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다윗은 앞선 다른 신앙의 위인들과 달리 조금 일찍 70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평생 전쟁터에서 많은 고생을 해서인지 수명이 짧았다. 다윗의 70 생애는, 20세 이전의 초기와, 약 20세 경 골리앗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의 장수로 등장하여, 30세에 왕위에 즉위하고 주변의 모든 이방민족을 정복했던 30년간의 중기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면서부터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고 70에 죽기까지 20년간의 말기로 구분할 수 있다.

● 초기

다윗은 베들레헴이라는 시골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들판에서 양떼들과 생활하면서 자랐고, 그래서인지 몸집은 크지 않았지만 기운도 세고 침착하며 기지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다윗은 양을 치다가 사자와 곰을 만났지만 그들을 쳐죽이고 양과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던 용맹스러운 청년이었다. 나이에 비해 다윗은 책임감이 투철했고 생각이나 마음가짐은 어른스러웠다.

다윗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사울 대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는 기름을 붓기 위해 이새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사울왕이 알게되면 이것은 반역으로서 사무엘은 물론 이새의 집안까지 죽임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무엘은 우연히 베들레헴에 방문한 것처럼 하여 화목제사를 드리면서 이새의 가족, 즉 아들들도 초청하였다. 이때 이새는 여덟명의 아들 가운데 일곱 아들을 사무엘 앞에 세웠다. 다윗은 아직 20세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어린 목동에게로 향해 있었다. 사무엘의 예상을 뒤엎고 이새의 막내 아들 다윗이 미래의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이때부터 다윗은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어른들의 제사에 참석할 수도 없었던 어린 다윗이었지만, 이미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

다윗의 모친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부정확하고 미흡하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다윗왕의 위치로 볼 때 이것은 예외이다. 성경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다윗의 어머니는 이방 암몬 사람과 관계가 있는 여인 같다. 즉 다윗은 이방 여자에게서 태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하고 다윗은 외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형들에게 눌려 살면서 들판에서 양을 쳤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볼 때, 다윗은 결코 좋은 환경 속에서 자란 인물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들어 쓰시기 전에 반드시 준비시키시고 연단을 하신다. 쇠를 강하게 하기 위해 불로 달구고 물로 식히듯이. 다윗은 어려서부터 형들에게 눌려 집안에서 귀여움받고 지내지를 못하고 베들레헴 들판을 뛰어다녀야만 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당시에도 목자는 가장 비천한 직업이었다. 집에서 잠자지 못하고 들판에서 밤새워 양떼를 지켜야 하는 일은, 요즘으로 치면 3D 업종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고난의 목장이 어린 다윗에게는 그대로 교실이요 도장이요 또 예배당이기도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자연의 배움터에서 그를 가르치고 그와 교제하면서 은혜를 베푸셨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목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 다윗이 집안에서 고이 자랐다면 어찌 이런 시가 탄생할 수 있었겠는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8).” 밤을 새며 양떼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쏟아지는 별빛을 바라보지 못한 사람이 어찌 이런 시를 지을 수 있었겠는가?

다윗은 힘들고 지친 고난의 현장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을 마음껏 맛보았고, 여호와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있는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이 고달프고 힘이 드는가? 밤이 깊을수록 별빛은 더욱 빛나게 마련이다. 다윗처럼 여러분도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아가게 될 때, 오늘의 힘든 처지가 오히려 여러분을 더욱 빛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 주실줄로 믿는다.

● 중기

여호와의 신에 감동한 다윗은 더욱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게 되었고 드디어 이스라엘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기 전, 이미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수금을 잘타고 용기와 구변이 준수한 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여호와의 신이 떠나고 악신이 든 사울을 치료하기 위해 다윗이 추천된다. 이에 다윗은 사울왕을 곁에서 보좌하는 사람이 되어, 사울왕이 악신으로 인해 괴로워할 때 수금을 타서 사울을 상쾌하게 하였고, 사울의 총애를 받게 되어 왕의 병기드는 자가 되었다. 즉 사울왕의 최측근 비서가 된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블레셋 사람들이 골리앗을 앞세워 침범해 왔다. 당시 다윗은 베들레헴 집과 사울왕을 오가면서 그 아비의 양을 쳤는데, 한번은 아비 이새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간 형들에게 음식을 전하기 위해 전장으로 오게 되었다. 이때도 다윗이 징집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면, 아직 20세가 되지 않은 모양이다. 전장에 당도한 다윗은 적장 골리앗이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능멸하는 것을 듣게 되었고, 여호와의 영에 감동된 다윗은,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사울왕을 설득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 골리앗을 넘어뜨린다.

이날의 승리 후 다윗은 사울의 장수가 되어 가는곳마다 승리를 거두게 된다. 다윗의 명성은 금새 전국에 퍼져나갔다. 그런데, 사울왕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렇게 노래한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신하가 군주를 능가하여 백성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다윗의 극심한 고난은 시작되었다.

사울은 여러번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 다윗은 산속으로 들판으로 도망쳐 다녀야만 했다. 당시의 자기 신세를 다윗은, ‘죽은 개나 벼룩’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다윗은 결코 사울왕을 미워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라고 한다면, 다윗은 참으로 위대한 사랑의 소유자였다. 하나님은 결코 그를 적의 손에 넘겨주시지 않았다. 그의 생명은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여’ 있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은 환난을 받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떨 땐 더 큰 환난 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보호 아래 연단을 받아 믿음이 깊어지는 사람이다.

다윗은 30세에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으로 즉위하기까지 10년 가까이 유리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미친사람처럼 침을 흘리며 목숨을 구걸해야할 때도 있었다. 그 동안의 싸움이 얼마나 괴로웠는지는 수많은 시편에서 다윗은 자신의 심정으로 토로하고 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어 주소서.’ 이러한 극심한 역경과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그릇은 완성되는 것이다.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선을 행하고자 열심을 다하는 성도의 앞길에도 때로는 고난과 역경의 장벽들이 계속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역경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이 예비되어 있음을 믿고 의지하며, 선을 행하되 낙심치 말고 끝까지 인내하자. 절대 서두르지 말고 조급해하지 말자. 하나님이 세우시는 때를 기다리라. 그리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며, 복되고 존귀한 자리에 앉게 하실 것이다.

● 말기

다윗은 먼저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 되었다. 그 기간은 7년 반이었다. 그리고 사울왕의 사촌 아브넬의 반역 사건으로 다윗이 유다와 이스라엘 전국의 왕이 되었다. 이리하여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33년 동안 전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통치 하에서 날로 융성해 갔다.

이런 다윗에게 실패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성공하여 이름을 널리 떨친 후의 일이었다. 사울에게 쫓겨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고난을 받을 때 그의 영혼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사방이 평정되어 왕위가 견고해지자, 그는 방심하기 시작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암몬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승리는 이미 다윗의 수중에 들어와 있었다. 그래서 나이든 다윗은 요압을 보내어 이스라엘 전군을 지휘하게 하고 자기는 왕궁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왕궁에서 평안히 낮잠을 자고 저녁 때가 다되어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처럼 안일한 장소 - 그곳이야말로 성도에게 위태로운 곳이다. 다윗은 여기서 실패하고 말았다.

충성스런 부하 우리야가 왕을 위해 전쟁에 나가 있을 때 그 아내를 범한다는 것은 얼마나 파렴치한 행위인가? 게다가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야를 전사하게 했다. 그리하여 다윗은 한꺼번에 간음죄와 모살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물론 이 일로 다윗이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일로 다윗의 가정은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참에 빠지고 만다. 왕자들간의 싸움, 가장 아꼈던 아들 압살롬의 반란, 다윗은 환갑을 넘은 나이에 맨발로 예루살렘성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다윗의 두 번째 실수는 인구조사의 실시였다.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 지시대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인구 조사를 하여 군대를 뽑고 세금도 거두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아니었으나, 높고 영화로운 권세가 다윗으로 하여금 교만으로 눈이 가려진 모양이다.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 7만 명이 전염병에 걸려 죽어갔다. 지도자들이 정말 정신 차리고 잘해야 한다. 지도자의 잘못된 선택 하나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게 되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윗의 최대 강점은, 금방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사람은 실수하거나 넘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의 영적 성향이 더 중요하다. 다윗도 엄청난 죄를 범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회개하는 사람이었다. 시편에는 측은할 만큼 뜨겁고 간절한 다윗의 회개기도가 나타나 있다. 다윗은 회개를 통해 바로 자신을 회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실수할 때마다 자신을 바로 일으키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 다윗은 시인으로서, 가인(歌人)으로서, 군인으로서, 정치가로서, 신앙인으로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실 메시야의 조상으로서, 또한 그 모형으로서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다윗은 자기가 왕이 되고 이스라엘의 국위가 높아진 원인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임을 끊임없이 고백하며, 감사드리며 살았던 겸손한 사람이었다. 

실로 이 땅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 있겠는가? 하지만 그 은혜를 깨닫고 살아가는 자는 심히 적다. 믿음의 백성들도 마찬가지다. 삶의 걸음걸음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늘 실감하며, 감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한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5일 / 03- 25-2024(월)
출애굽기 35:1-35
행하게 하신 말씀(1절)
찬송 / 279장(주의 말씀 듣고서)

디럭스 바이블 출애굽기 35장

거룩한 장소(공간)
거룩한 시간(안식일)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20장, 35장)
* 성

1-3 안식일에 관한 모세의 교훈
4-19 성막을 위해 헌물 할 것과 그에 필요한 기구들을 제조할 것을 명하다.
20-29 백성들이 즐겨 여러가지의 헌물을 하다.
30-35 공인에 대한 모세의 훈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출애굽기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 십계명을 주셨을 때 명령하신 것


출애굽기 31:13-16

- 성막을 완성한 후에 말씀하신 것으로 장차 성막에 하나님의 임재를 원한다면 반드시 안식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이 됨이니라 그 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4일 / 03- 23-2024(토)
출애굽기 34:1-35
모세의 얼굴(30절)
찬송 / 495장(내 영혼이 은총 입어)

    1-4. 모세가 다시 등산하다.
    5-9.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선포하시다.
10-17. 하나님의 약속과 경계
18-27. 안식일과 삼대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 및 첫 새끼의 대속
28-35. 모세의 하산과 변모

광채(7160) 카란(qâran)  קָרַן   

1. 빛나다.  2. 히필형 : 뿔이 나다
발음 [ qâran ]
구약 성경  /  4회 사용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광채가 나나
- 이것은 성물과 접촉하는 것이 거룩해진다(29:37; 30:29)는 원리와 일맥 상통한다.
즉 모세는 다른 모든 것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하나님과의 교제에만 집중했는데 그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 혹은 거룩함이 자연스레 모세에게도 나타난 것이다.
즉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모세가 성화(聖化)되어진 것이다.
이외에도 성경에는 얼굴에 나는 광채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이 몇 군데 있다(마 13:43; 17:2; 행 6:15; 7:20).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 원문에 가깝도록 직역하면, '보라! 빛나는 얼굴의 피부가 되었도다'란 뜻으로 모세의 빛나는 얼굴의 광채를 보고 놀라워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생생히 묘사되었다.

두려워하더니
- 앞절의 '광채가 나다'에 해당하는 원어 '카란'은 '뿔이나다'는 뜻도 있다.
아마 모세의 얼굴에서 나는 광채는 뿔과 같은 모양으로 빛났던 것같고 이때문에 사람들은 더 두려워 했던 것 같다.
따라서 라틴어 벌겟역(Vulgate)은 이를 '뿔이 났다'로 번역했고, 이에 따로 모세를 묘사한 얼굴에 뿔이 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적용이다.
한편 후일 사도 바울은 이 모세 얼굴의 광채를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새언약의 영광스러운 광채로 승화시켰다(고후 3:7-18).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3일 / 03- 22-2024(금)
출애굽기 33:1-23
그 반석 위에 서라(21절)
찬송 / 539장(이 몸의 소망 무엔가)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Then the LORD said, "There is a place near me where you may stand on a rock.

    1-6. 동행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슬픈 고시와 이스라엘 자손의 근심 및 겸기(회개).
  7-11. 회막에 들어간 모세.
12-17. 모세의 간구와 하나님께서 동행하시겠다는 언약의 갱신.
18-23.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한 모세의 기도와 그 응답.

반석
- 본래 의미는 '절벽'이며 일반적 의미는 '바위'인데 상징적으로 '피난처'를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모세를 '반석'에 두겠다는 것은 상징적으로는 피난처에 숨기시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편 성경에서 '반석'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는데(신 32:15;삼상 2:2시 89:26),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보호하는 피난처이자 구원하는 능력이심을 나타낸다.

서다(나찹. 5324)
נָצַב 스트롱번호5324

1.

두다

2.

니팔형 נִצַּב

3.

놓다

발음 [ nâtsab ]
구약 성경
19회 사용
반석(6697. 추르)

צוּר 스트롱번호6697
1.

2.

바위

3.

가장자리

발음 [ tsûwr ]
어원
6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74회 사용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을 때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모세가 죽은 줄 알고 성급하게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시내 산에서 내려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는 화가 나서 내려오다가 첫 번째 돌 판을 우상을 섬기고 있는 자들에게 던져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첫 번째 돌 판이 깨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금송아지 우상을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리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금송아지 사건 때문에 같은 동족이 죽게 됩니다.
이때에 모세의 편에 섰던 사람들이 레위지파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우상을 섬겼던 자들을 죽였습니다.
이들이 죽인 사람이 삼천 명 정도가 됩니다.
이때에 레위 자손들이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복을 받게 됩니다.
이 정도로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일 때문에 하나님은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같이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에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풀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급하다 하더라도 금송아지와 같은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우뚝 서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출애굽기 33: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하나님의 응답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네가 말하는 이 일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같이 올라가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름도 안다는 것입니다.

‘너를 앎이니라’ (י דע야다 3045 와우접속사. 동사, 칼, 미완료, 공성, 1인칭, 단수. 남성, 2인칭, 단수)
동침하다, 알다, 익숙하다, 기억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아는데 이름으로도 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개념에 서로 동침하는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신랑과 신부가 서로 결혼하여 익숙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항상 어디에 있는지 기억하게 되고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가 이런 관계입니다.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말에 즉시로 대답하셔서 너의 이름도 알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도 계속해서 내가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너의 이름을 잊지 않고 내 마음에 새겼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와우접속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미리 정하셨으니’ (προοριζω 프로오리조 4309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 단수, 3인칭) 예정하다, 미리 정하다, 예정을 입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προ 프로 4253) ~전에, 앞에, 라는 뜻과 (οριζω 호리조 3724) 결정하다, 정하다, 선포되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구원받을 자로 선택하셨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공로가 필요 없이 믿음도 필요 없이 예정하셔서 구원시키기로 결정을 내리시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선택받은 것은 나의 공로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잘 믿을 것을 아시고 예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이것이 선택받은 자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창세전에 나의 이름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직설법과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창세전에 나의 이름을 아셨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사실이 있습니다. 또한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 땅에 왔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고 믿게 하셔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출33: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베푸느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 모든 선한 것을’ (טוב투브 2898 명사, 남성, 단수. 공성, 1인칭, 단수)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선한 것, 이라는 뜻이며 어근은 (טוב토브 2895) 좋았다, 선히 여기다, 기뻐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시겠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과 기뻐하는 것을 지나가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1:17-18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여주신 선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은혜와 진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원래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선한 것에서 단수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어 줄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출33: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을 보면 살 수가 없습니다.

‘내 얼굴을’ (פנים파님 6440 명사, 남성, 복수. 공성, 1인칭, 단수) 얼굴, 진설병, 용모, 라는 뜻이며 어근은 (פנה파나 6437) 권고하다, 돌아보다, 살피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볼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복수형을 쓴 것은 하나님의 얼굴이 많아서 복수형을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영광의 광채가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복수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가 없어서 하나님은 진설병으로 주셨던 것입니다.

출39:36 상과 그 모든 기구와 진설병과

성막에서 떡상 위에 놓여진 진설병이 (לחם הפנים레헴 하파님)입니다. 이것을 번역하면 그 얼굴의 떡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의 떡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떡을 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죄인들은 이 떡을 먹어야 만이 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생명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요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원죄가 사라지고 생명의 떡을 먹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서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죄를 예수님께 담당시키셔서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가 있는 것입니다.

출33: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반석 위에’ (צור추르 6697) 바위, 반석, 이라는 뜻이며 (צור추르 6696) 함께 묶다, 압박하다, 괴롭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반석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반석입니다. 바로 고난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십자가에서 고통의 압박을 받으시게 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고통과 괴로움의 압박을 받으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셔야 만이 선택받은 죄인들과 하나님을 함께 묶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10:4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료를 뒤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 반석은 신령한 음료가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입니다. 생수가 나와서 뜨거운 광야에서 마실 수가 있습니다. 이 반석도 (צור추르)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반석을 준비하여 주시고 그 위에 서라고 한 것입니다.

‘서라’ (נצב나차브 5324 동사, 닢알, 완료, 남성, 2인칭, 단수) 두다, 자리 잡다, 정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반석 위에 세워주셨습니다. 주님의 자리에 올려주셔서 생명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서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정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닢알 단순 수동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자리는 죄인인 인간 스스로 올라갈 수 없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올려주셔야 가능합니다. 인간의 의지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세워지면 하나님이 내려오게 하지 않는 한 절대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번 구원받은 백성들은 절대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반석 위에 서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출33:22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반석 위에 세워주시니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반석 틈에 두고 하나님이 지나갈 때에 주님의 손으로 모세를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반석 틈에’ (נקרה네카라 5366) 갈라진 틈, 구멍, 이라는 뜻이며 어근은 (נקר나카르 5365) 구멍을 뚫다, 찌르다, 파내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석 틈에 두시겠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셔서 옆구리에 창을 맞으시고 피를 쏟아주셨습니다. 주님은 몸에 채찍 자국으로 구멍이 뚫리듯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온몸이 찢기시면서 살 조각이 파내어지는 고통을 당하신 분입니다. 이 반석 틈에 죄인들을 숨겨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요19: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시고 피와 물을 쏟아내어 주셨습니다. 죄인을 위한 대속의 피를 운명하신 후에도 쏟아주신 것입니다.

‘옆구리’ (צד차드 6654) 옆, 측면, 이라는 뜻이며 어근은 (צדד차다드) 외면하다, ~의 쪽으로 돌리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옆구리에 창을 찔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택받은 자들이 원죄에 빠져 하나님을 몰라보고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바라보면서 그쪽으로 눈을 돌리고 우상을 섬겼던 죄 때문에 예수님은 옆구리에 창을 찔리셔서 내가 우상을 섬겼던 죄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원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모세도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 은혜 가운데 세워주시고 손으로 덮어주신 것입니다.

출33: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반석 틈에 세워주시고 지나가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손으로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을 거두어 주시게 됩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등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등을’ (אחור아호르 268 명사, 남성, 복수. 공성, 1인칭, 단수) 뒤쪽으로, 뒤에, 라는 뜻이며 어근은 (אחר아하르 309) 뒤에 남다, 머물러 있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의 등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얼굴에 나오는 영광은 볼 수가 없지만 뒤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호하심을 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등에서 나오는 후광의 보호하심도 얼굴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강력합니다.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등을 보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요14:8-9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빌립은 예수님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등만 보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서 있어야 만이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반석 위에 세우지 않으시고 창세전에 선택한 백성들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의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세워졌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등만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율법에 빠져있다면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가 사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얼굴을 보여주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어떠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안으로 들어와서 은혜가 충만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게 되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반석 위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주님만을 섬기면서 독생자의 은혜와 진리를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2일 / 03- 21-2024(목)
출애굽기 32:1-35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32절)
찬송 / 514장(누가 주를 따라)

1-6.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상 아래서는 민중이 금송아지를 만들다(백성의 배신).
7-14. 산상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첫째 중보기도)
15-20. 모세의 하산과 분노
21-24. 모세의 힐문과 아론의 변명
25-29. 죄에 대한 모세의 조처
30-35. 모세의 두번째 기도(둘째 중보기도)


주의 기록하신 책
- 이 말이 성경 다른 곳에서는 '생명책'으로도 표현되었다(시 56:8; 69:28; 139:16; 단 12:1; 빌 4:3; 계 3:5; 13:8; 17:8; 20:12).
이것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 준다.
시민 명부에 자신의 이름이 등재된 자들만이 그 지방의 주민 또는 그 나라의 국민으로 인정되며 아울러 시민권이 보장되었던 당시의 풍습에서 따온 이 '생명책'이라는 말은 신약에서는 보다 영적인 의미를 지닌 개념으로 나타난다(빌 4:3; 계 3:5).
곧 이 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 모세의 이 기도는 신약 시대 자기 동족 유대인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던 바울의 기도와 유사하다(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책임을 회피했던 아론과 달리 모세는 이처럼 자기 민족을 위해 생명까지 내놓을 만큼 투철한 책임 의식과 동포를 사랑하는 정신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Bengel).
실로 모세나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천국의 기쁨과 지옥의 고통을 잘 아는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적인 생명까지 걸고서 그토록 간절히 중보 기도 드리는 이유는 죄중에 죽어갈 저 무지하고 불쌍한 뭇 영혼들에 대한 '사랑'때문이었다.
즉 불쌍한 영혼들에 대한 불타는 사랑이 지옥의 그 고통스런 불꽃(눅 16:24)까지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랑의 힘은 크고 위대하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그 치욕스런 십자가를 흔쾌히 지신 것도 '오직 사랑'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저 죽어가는 뭇 영혼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책임이 있는 우리들도 이같은 사랑의 마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고전 4:1, 2).

내 이름을 지우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지 3개월쯤 지나 시내 광야에 도착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40일간 있었습니다.
시내산은 한라산(1,947.06m)보다는 높습니다.(대략 343.94m)
해발 2291m입니다.
그 기간 동안 산 아래의 백성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백성들은 금 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하며 거기에 절하고, 화목제까지 바쳤습니다.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이 사태를 산상에서 다 지켜보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여러분은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걸 섬길 수 있습니까? 

백성들이 바친 금붙이로 아론이 만든 형상은 송아지 모양의 애굽의 아피스입니다.
황소의 신 '아피스(Apis)'
사람의 생산을 돕고 곡물의 생산을 도와 잘 살게 해준다는 아피스 신상입니다.
아무리 모세가 한 달 이상 자리를 비웠다 해도 이것은 너무한 처신입니다.
백성들은 애굽 땅에 임한 10가지 재앙을 목격한 사람들이고, 홍해를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했고, 반석에서 나온 생수를 먹었고, 어제만 해도 메추라기를 먹었고, 당일 아침에는 만나를 먹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한자성어 '배은망덕(背恩忘德)'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인간관계 속에서 은혜를 입고도 마음이 변하는 상황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이처럼 남의 도움이나 은혜를 잊고 배신하는 것을 한마디로 표현한 단어가 바로 배은망덕입니다.
한자로 살펴보면, 背는 등을 뜻하며 배반하다는 뜻도 가지고 있고, 恩은 은혜를 의미합니다. 忘은 잊다라는 뜻이고, 德은 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들 한자가 조합되어 '배은망덕'이라는 성어가 완성되는데요, 이는 남에게 입은 은덕을 잊고 배반하는 것을 말합니다.
배은망덕이란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와, 이를 피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보려 합니다.

배은망덕(背恩忘德) 이란?

유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례나 전래동화와 같은 구체적인 이야기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배은망덕이라는 행동이 인간 세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를 간결하게 표현한 성어로 전해져 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인간 사회에서 배은망덕이란 행위는 종종 목격되었으며, 이러한 행위는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배은망덕이라는 행동은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행위로 여겨지고 있으며, 가족, 친구, 동료와 같은 인간관계에서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배은망덕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남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갚아야 함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인간관계의 소중함과 신뢰를 쌓아가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은망덕을 피하고자 한다면, 남에게 받은 도움이나 은혜를 잊지 않고 갚아야 하며, 인간관계에서의 도덕적 가치를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자풀이

  • 背 : 등 배, 배반할 배 
  • 恩 : 은혜 은 
  • 忘 : 잊을 망 
  • 德 : 클 덕, 덕 덕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는 단어는 남에게 받은 은혜를 잊고 배신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가치인 은덕을 인정하고 갚아야 함을 강조하며, 이를 잊어버리고 배신하는 것은 큰 죄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실생활 예시

  1. 그의 배은망덕한 행동에 사람들은 큰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2. 한 번의 배은망덕으로 오랜 친구와의 관계가 망가졌다.
  3. 그녀는 어머니의 큰 은혜를 잊고 배은망덕한 행동을 했습니다.
  4. 정부의 배은망덕한 정책에 시민들의 분노가 치솟았다.
  5. 이런 배은망덕한 행위를 저지른 사람에게 용서할 수 없어요.
  6. 그는 기업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하여 경쟁사로 넘어갔다.
  7. 군주의 배은망덕한 행동으로 세력이 무너졌다. (옛날 사례)
  8. 소설 《춘향전》에서 병렬차관의 배은망덕한 행동이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가져왔다. (소설 출처: 춘향전, 작자 미상)
  9. 시인 정지용의 시 《무진기》에서 "허무하게 배은망덕한 세월아"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시 출처: 무진기, 정지용)
  10. 고려시대 문헌 《경기록》에는 배은망덕한 자에게 벌을 내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문헌 출처: 경기록, 고려시대)

그런데 문제는 이 사건을 황당해하는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인가입니다.
우리는 금송아지를 섬기지 않습니까?
이 시대 최고의 신은 금송아지, 맘몬입니다.
물신숭배주의가 여전히 이 시대의 최고의 우상입니다.
우리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욕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섬겨도 나가서는 금송아지 앞에 절하는 광신도가 우리입니다.
신자나 비신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하나님만 섬기면서 여기까지 왔습니까?
아니면 아피스에게 절하며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본문 25절을 보면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 절하며 방자했다고 합니다.
원어의 의미는 벌거벗었다는 뜻입니다.
물신숭배는 벌거벗는 문화와 함께 갑니다.
우리는 쾌락주의 문화의 홍수 속에 삽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황금만능주의, 물신숭배주의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여호수아와 함께 40일 만에 내려온 모세가 백성들의 진풍경을 보고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양손에 든 십계명을 내던집니다.

19절입니다.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모세는 하나님이 직접 써주신 십계명 돌판을 던져 깨뜨립니다.
민수기를 보면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모세가 이토록 흥분해서 십계명 돌판을 내던졌을 정도였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니라”

이것은 우상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자 아피스가 무력하고 거짓된 신이라는 사실을 백성 스스로 확인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세의 금송아지 사건 처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1절 이하입니다.
“[21]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당신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당신이 그들을 큰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
[22] 아론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23]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24]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여기서 왜 모세가 아론을 심문하고 추궁합니까?
시내산에 올라가기 전에 아론에게 백성들의 치리를 맡겼기 때문입니다.
아론이 대답합니다.
22절 하반절입니다.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자신의 잘못이나 지도력의 한계를 시인한 게 아니라 백성들의 악함을 탓하고 있습니다. 지도자는 이러면 안 됩니다. 자기 책임이라고 해야 합니다. 아론은 자기 책임을 회피하려고 과장하고 거짓말도 합니다. 24절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불에 금을 던졌더니 거기서 송아지가 나옵니까? 32장 4절입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이렇게 엄청난 사건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지도자인 아론의 책임이라고 하고, 아론은 백성들이 협박했기에 그들 책임이라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사회는 반드시 망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 책임적 주체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반드시 자기 선택에 책임을 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결단과 선택에 대해 책임을 물으십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주님이 어느 날 회당에서 한 손이 불구가 된 장애인을 고치셨습니다.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의료행위를 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안식일 법을 범한 겁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무슨 생각으로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치셨을까요? 마가복음은 그 사건이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게 된 최초의 동기라고 합니다. 주님은 그 책임을 홀로 지겠다는 듯이 숨어서 그런 일을 하지 않고 백일하에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장애인 한 사람을 고쳐주시면서도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각오를 하신 겁니다. 이 일로 책임을 지고 죽어야 한다면 죽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론과 백성들은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현 시대도 마찬가집니다. 

하지만 모세를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가 엎드립니다.
31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백성들의 물신숭배, 아론 같은 공직자들의 무책임까지 모두 자기가 짊어지고 비상한 각오로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32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역할입니다.
남의 허물과 죄악을 내가 대신 짊어지고 모세처럼 화해의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내 가정, 내 교회, 내 사회, 내 나라, 내 민족의 허물을 대신 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사죄를 빌고 구원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비장함을 보십시오.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달라고 합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지금은 나라와 사회, 민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모세처럼, 심판에 직면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하나님과 밀당하며 끝까지 기도한 아브라함처럼, 자신이 저주를 받는 한이 있어도 내 민족은 구원받기를 원한 바울처럼 우리도 맘모니즘이 창궐하는 이 시대를 위해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큰 은혜를 베푸사 이 시대와 나라를 구원해 주실 줄 믿습니다.


"쓴 뿌리"란 무엇인가?

쓰다는 표현은 보통 분노 및 원한 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12:15에서 과연 그런 뜻으로 쓰인 것일까요?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첫째, "쓴 뿌리"는 (나무 토막처럼) 뿌리가 쓰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뿌리가 식물로 자라난 후 쓴 열매를 맺는다는 뜻일까요?

둘째, 히브리서 12:15의 쓰다는 것은 곪아 터진 분노를 의미할까요?
아니면 독이 있고 더러운 것을 의미할까요?

셋째, "쓴 뿌리"라는 이미지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마지막 질문부터 시작해 봅시다.
이는 신명기 29:18에서 유래하는 표현입니다.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역자주: 영어성경을 번역하면 "독 있고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너희 중에 생(기지 않게 하라)” 이 말씀의 배경은 앞선 두 개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도 도움이 됩니다.

뿌리 자체가 쓰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 쓴 열매는 독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쓴 열매는 어쩌면 곪아 터진 분노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치명적인 쓴 열매가 나오도록 하는 뿌리가 무엇인가?
신명기 29장의 그 다음 절은 놀랍지만 히브리서의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답변을 줍니다.
18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독초와 쑥(쓴 열매)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기지 않게 하라).” 그 후 19절은 이 뿌리를 정의하면서 시작합니다.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그렇다면 쓴 열매를 맺게 하는 뿌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원한 평안에 대해 그릇된 관점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안전하지 않은데 안전함을 느낍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 마음이 완악할지라도 내게는 평안[=구원]이 있으리라”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언약의 백성 중에 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건너짚는 사람들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과거의 몇몇 영적 체험 때문에 혹은 현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안에서 어울리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신앙고백자들 말입니다.

히브리서의 목적은 이렇게 자신의 안전을 추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치료하여, 믿음과 거룩함 안에서의 성실한 견인을 일구어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적어도 네 번에 걸쳐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고 마음이 완고하게 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감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분깃이 없는 자라는 것을 입증하지 않도록 날마다 믿음의 싸움에 열심을 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2:3, 3:12,14, 6:4-7, 10:23-29).

히브리서 12:15의 쓴 뿌리라는 용어의 문맥을 보아도 그러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12:14-15).
이는 거룩함을 가볍게 여기거나 더 많은 은혜를 남용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쓴 뿌리는 믿음의 싸움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깨어 경계하는 삶 없이도 구원이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처럼 여기도록 교회 안에서 권장하는 사람들 혹은 그러한 교리를 말합니다.
그러한 사람이나 교리는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더럽히며, 자신의 유업을 아무렇게나 대하여 결국 회개하지 못하고 생명을 얻지 못했던 에서처럼 되게 이끕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1일 / 03- 20-2024(수)
출애굽기 31:1-18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13절)
찬송 / 383장(환난과 핍박 중에도)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안식일은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하는 날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신약의 그리스도인은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
안식일은 “구약”의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율법”이기 때문이다.
“안식일”(Sabbath)이라 하면 한 주의 맨 끝 날인 토요일을 말한다.
(소위 “주일” 즉 일요일은 신약에서 “주(week)의 첫날”로 불린다.)
많은 이들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십계명”에 들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십계명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인, 간음, 도둑질, 탐심 등에 대한 계명들은 우리들이 지키기에 무방할 뿐 아니라 지켜야 하는 것들이다(그러나 구원받기 위해서 지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십계명은 유대인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방인이요 그리스도인인 우리와는 무관한 안식일에 관한 계명이 들어 있는 것이다.

안식일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성경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단지 교회에 나가고 일을 하지 않으며 방탕하게 보내지 않는 것이 이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절대로” 일을 해서는 안됐고 불도 지필 수 없었으며 이를 어길 시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그것이 너희에게 거룩함이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누구라도 그 혼이 자기 백성 가운데서 끊어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주께 거룩히 쉬는 안식일이니, 안식일날에 일하는 자는 누구라도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31:14-15)

"육 일 동안은 일하되, 일곱째 날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니, 주께 쉬는 안식일이라. 이날에 일하는 자는 누구라도 죽일지니라. 너희는 안식일 날에 너희의 온 처소에서 불을 피우지 말지니라."(출 35:2-3)

이를 어겼던 어떤 사람은 실제로 돌에 맞아 죽었다(민 15:32-36).

오늘날 안식일을 어겼다고 해서 사람을 돌로 치면 어떻게 되는가?
당연히 살인죄로 감옥에 갈 것이다.
그러나 신정통치국가였던 이스라엘에서는 율법에 따라 안식일을 어긴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유대인도 아니면서 안식일을 지키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안식교인들이다.
그러나 왜 유독 안식일만을 지키는가?
안식일을 지키려는 사람은 구약의 온 율법을 지킬 의무가 있는 사람이다.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고, 수염을 기르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며, 양을 잡아 희생 제사를 드리는 등... 자기 마음대로 편한 것만 골라서 지켜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들은 율법을 다 지키지도 않으면서 안식일을 지킨다며 토요일에 교회에 모인다.
(이들은 처음에는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것이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요 저주를 받는 것이라고 가르쳤으나 지금은 그 교리를 바꾸었다.) 안식일을 어기는 사람을 사형에 처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이들은 자기들이 지킬 필요도 없는 안식일을 그나마 제대로 지키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표적”(sign)으로 주어진 것이지 이방인에게 주어진 명령이 아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너는 또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들을 참으로 지킬지니 이는 그것이 너희 대대에 걸쳐 나와 너희 사이에 표적임이라. 이로써 내가 너희를 거룩케 하는 주임을 너희로 알게 하려는 것이라."(출 31:13, 겔 20:20을 볼 것).

출애굽기 31: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에스겔 20:20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리라 하였노라.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으로 판단 받지 않는다.

골로새서 2:16
"그러므로 음식으로나 마시는 것으로나 거룩한 날이나 새 달이나 안식일들에 관해서는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안식일을 포함해서)을 십자가에서 못 박아 없애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한 손으로 쓴 법령을 지워 버리고 또 그것을 그의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셨으며"(골 2:14). 그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상관없이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한 것으로 모든 자와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치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그러나 구약의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되었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었다.

한편 한국 교회들은 안식일의 개념을 “주일”로 바꾸어 “주일성수”라는 것을 교리로 만들어 가르친다.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에 와서는 부활의 주일로 바뀌었기 때문에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도 하지 말고 매매 행위도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소위 “주일”(사실 일요일은 성경에서 한 번도 “주일” 또는 “주의 날”이라는 말로 불리지 않았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쏟아 부어지는 심판의 날을 가리키는 말이다.)이 아무리 비슷하게 보이더라도 둘을 동일선상에 놓으려 하면 혼동만 야기될 뿐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 날은 사도들과 제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빵을 떼며 교제한 날이었기 때문에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날을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처럼 지켜야 한다는 명령은 성경 어디에도 없으며,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날이 거룩한 날인 것이다.

일요일에 교회에서 예배도 드리지 말고 흥청망청 보내도 된다거나, 일주일 내내 하나님은 거의 잊어버리고 생업에만 매달려 살았는데 일요일에도 똑같이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요일에 교회에 가고, 돈을 쓰지 않으며,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주일성수” 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구약의 율법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안식일에 대해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혼동에 빠지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이단들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복의 길4-주일을 주일답게 지키는 것입니다. / 출 20:8-11, 눅 13:14-16

** 들어가는 말

출애굽기 20:8-11,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3:14-16,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복의 길 네 번째는 주일성수(主日成遂), 즉 주일을 주일답게 지키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해 온 사람이라면 이 말은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어릴 때부터 주일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듣고 보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20년 이상 목회를 해 온 지금까지도 주일이면 긴장이 되고 나를 한 번 더 돌아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일은 단어의 뜻 그대로 ‘주인의 날’이며 ‘거룩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어떻게 지내야 되는가?’라는 물음은 지금도 매 주일마다 나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주일에 대하여 마음을 쓰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됨의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1:13절에서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고 하시고, 에스겔 20:12절에서는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고 하십니다. 안식일(安息日)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 사이의 표징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구약시대의 안식일이 신약시대에서 주일로 바뀐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성경에서 정확하게 그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이루시고 새 언약을 주신 것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로마서 10: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하시며, 누가복음 22:20절에서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는 십자가의 죽음과 영원한 하나님 자녀의 소망을 주시기 위한 부활로서 새 언약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새 언약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에 예배와 성만찬을 행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7절입니다. “그 주간의 첫 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nbsp;&nbsp;주간의 첫 날은 지금의 일요일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없어지고 주일이 새롭게 생긴 것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이루시고 마침이 되셨다는 것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 속에 그 의미를 다 포함시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인 사랑의 법이 모든 율법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들어봅시다. 마태복음 22:37-4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리고 요한복음 13:34-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옛 언약인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일 역시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일을 주일답게 지키는 길을 살펴봅시다.

출애굽기 본문 말씀은 십계명 중에서 네 번째 계명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십계명은 율법의 기본법입니다.
십계명은 권면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이며 규범입니다.
이 말씀에서 안식일의 의미와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가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고 이 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므로 너희도 쉬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출애굽기 31:14-15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성경에는 안식일에 일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실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5:32-36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류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으로 끌어 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니라.”

누가복음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행하신 기적 사건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즉 예배 때였습니다.
그곳에는 귀신들려서 허리가 꼬부라져서 18년 동안이나 고생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을 보신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시다가 그 여인을 불러서 안수하셔서 고쳐주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회당장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께 대단히 화가 났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하여 안식일의 법을 어겼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도리어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화를 내시며 유대인들의 외식적인 신앙을 드러내시면서 나무라셨습니다.
그들은 소나 나귀 등 자신들이 기르는 가축들을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물을 먹이려고 끌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짐승들을 죽지 않게 하려고 안식일에도 끌고 다녀 불법을 행하면서, 사람이 사탄에게 놓임을 받는 치유를 불법이라 한다고 호통을 치신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안식을 정하신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법만을 고집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어떻게 주일을 주일답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주일(主日)은 ‘주님의 날’이며, 성일(聖日)이라고 합니다. 즉 주일은 하나님의 날이며 거룩하게 구별된 날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바쳐진 날’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 날 중에서 여섯 날을 사람들이 자신의 생업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 하루를 ‘하나님의 날’로 거룩하게 구별하시면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예배하며 선한 일을 행하는 날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섯 날도 모자라서 마지막 하루까지도 ‘자신의 날’로 만들어버립니다. 성경에는 안식일에 대한 말씀이 끊임없이 나옵니다. 이는 사람들이 안식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에도 많은 교인들이 주일 낮 예배 혹은 저녁만 참석하면 그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인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주일 예배만 참석 하고는 자기 마음대로 갈 곳 가고, 만날 사람 다 만나고, 영업하고 사업하고 즐기는 일에 나머지 시간들을 다 사용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배시간을 한 시간으로 엄숙하게 지켜달라고 요구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이후 시간에 약속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일성수(主日成遂)라는 말은 일요일 하루를 주님의 날로 온전히 바치는 것을 뜻합니다. 구약시대의 안식일은 온 종일 제의식과 화목제의 음식을 나누는 교제의 시간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사람과의 교제의 시간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도 주일은 말씀을 듣고 찬양하는 기쁨의 예배와 성만찬의 친교의 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날을 바르게 지켜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사야 58:13-14절을 봅시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날을 바르게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하물며 죄악으로 죽은 나를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를 주신 주님을 어떻게 경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일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생명으로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의 영원한 소망을 위하여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주님의 날입니다. 마태복음 12:8절에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온 마음을 다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여왕(女王)’이라고 표현하며, 여왕을 맞이할 때와 같이 준비된 마음을 가지고 안식일을 맞이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해가 지는 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달력에는 금요일 해가 지는 시간을 기록해 두는데, 해가 지는 시간에서 18분을 앞 당겨서 기록합니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시계가 늦어져서 안식일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안식일이 시작 되는 사이렌을 울려서 모든 안식일 준비를 다 끝내고 시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라는 여왕을 맞이하기 위해서 주부들은 집안 청소를 합니다. 즉 주일 맞이 대청소를 하고, 미리 시장을 보고, 안식일에 먹을 음식을 다 준비해 둡니다. 식탁에는 꽃도 꽂아서 여왕을 맞이하듯이 준비를 하고 아름다운 초 두 개를 준비해서 켭니다. 두 초는 본문 8절의 “기억하라”는 말과 “지키라”는 이 두 가지를 기억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기 전에 구제함에 구제헌금을 넣습니다. 남자는 흰 셔츠를 입고 여자는 흰 블라우스를 입고 안식일을 맞이합니다. 안식일이 시작되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합니다.

여러분의 주일을 이런 마음으로 지켜보십시오. 주일은 거룩한 날, 즐거운 날, 존귀한 날이라고 하며, 하나님께 진정한 마음으로 기뻐하고 감사함으로 예배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날에 가족이 잘 준비된 식탁을 마주하고 음식을 나누며 기뻐하십시오. 느헤미야 8:10절입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교회에서 음식을 준비하여 성도들이 함께 즐겁게 나누며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이며 능력이 됩니다. 그리고 혹 시간이 있으면 삶에 지친 사람들을 격려하며, 병든 자를 위로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사랑을 나누는 일을 하십시오. 로마서 12:6-9절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이는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서 섬기고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은사는 무엇입니까? 지금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지 않고 묵혀두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받은 책망을 받게 됩니다. 마 25:30절입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특히 하나님께서 주일에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사야 58:13-14절을 현대어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안식일을 나의 거룩한 날로 지켜라! 안식일에도 너희의 용건에 따라서 여행을 하거나 무슨 일을 함으로써 나의 거룩한 날을 너희의 날로 쓰지 말아라. 안식일에는 너희가 다니고 싶은 곳으로 다니지도 말고 너희가 원하는 일도 하지 말고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지도 말아라! 오직 그날을 기쁜 날로 여기며 나 여호와의 거룩한 날로만 지켜라! 그러면 내가 직접 너희에게 참된 기쁨을 주겠다. 그리고 너희의 모든 장애물을 내가 세상에서 제거하여 주겠다. 그래서 내가 너희 조상 야곱에게 준 땅의 열매를 너희가 먹고 살 수 있도록 하겠다.\' 여호와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다.” 주일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여행을 할 경우, 특별한 사정에 의한 일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아십니다. 여기서 금하는 것은 자신의 사사로운 마음으로 행하는 경우를 뜻합니다. 그리고 주일에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무엇을 사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주일에는 말도 쓸데없는 잡담이나 험담 등 함부로 말하는 것까지도 금합니다. 서로 세워주는 말,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 간증과 감사의 말 등. 하나님 앞에서 덕이 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자녀의 복을 내리십니다.

미국의 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테일러(Zachary Taylor)는 헌법에 따라서 1949년 3월 4일 주일에 대통령 취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테일러는 그 날에 취임하기를 거절했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못되었으면 못되었지 주일까지 범해가면서 대통령이 될 생각은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적인 행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했지만 테일러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일 12시부터 월요일 12시까지 24시간, 하루 동안의 임시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당시 상원의원장이었던 ‘데이빗 라임스 엘치슨’을 1일 임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엘치슨은 토요일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가서 24시간 동안 잠자리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는 주일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높이며 주일을 주일답게 지키면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릴 것이라.”고 하시며, “내가 너를 땅에서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시며, “내가 너를 세상의 어느 민족보다 높이리라.”고 하십니다.

주일을 잘 지키는 법

주일이면 습관을 따라 교회에 다녀오는 것이 크리스천으로서 당연한 일로 여기고 의무에 사로 잡혀 발걸음만 예배당에 뜰을 밟을 때가 많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교회에 다녀왔지만 진정 생각해 보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찬송 몇 곡과 얼마 안 되는 시간에 기도를 드리고 적은 헌금을 드리며 설교를 듣고 돌아와서는 주일을 지키는 성도의 의무를 다 한 것처럼 착각에 빠질 때가 많다.

이것이 주일 지키는 자의 모습인가도 생각을 해보지만 역시 동의하가 어려운 부분이 나에게 있다.
성도라면 누구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휴식을 취할 수도 있고 교회의 각종 봉사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다른 사람을 도우며 주일을 보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일을 잘 지켰느냐고 한다면 이 역시 만족함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나로서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일까?
주일 성수란 말은 세상의 일을 접어두고 하나님께 나가 주님과 온전히 하루를 보내면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찬송하며 교제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분의 말씀을 잘 들고 주신 말씀이 내 삶에 적용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충분한 사랑의 교제가 필요하다.
한 주간 동안 어려움을 겪은 이, 혹은 소외된 이가 없는가, 등 주님이 허락하신 믿음의 가족들을 매주 돌보기 위한 정보의 창고가 교회여야 한다.
내게 주께서 명하신 사랑해야 할 이가 누구이며 어떻게 그를 섬겨야 할지를 알고 실천하는 것이 주일을 지키는 기본이 된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경험하는 일이야 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므로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은 예배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에 실천하는 것이 주일을 잘 지키는 방법이라 생각된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자(이사야 58:13~14)

신자와 불신자를 분별하는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주일날 성경찬송가를 들고 예배당에 가는 사람은 신자입니다. 
성숙한 성도와 미성숙한 성도를 분멸하는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주일날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하여 예배를 잘 드린다면 그 사람은 성숙한 성도의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주일은 우리의 날이 아니고 하나님의 날임을 깨닫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이 곧 신약시대에 지키는 주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이 안식일을 철저히 지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주전 165년경 마카비 형제들에 의해 잠깐 동안 독립국가의 모습을 보이다가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 후 1948년에 다시 이스라엘나라를 세우기까지 약 2000년 동안 세계를 방황하며 나라 없는 온갖 서러움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 오랜 세월동안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었겠습니까? 

많은 연구가들은 안식일 준수가 그 비결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몇 가정이 있든지 반드시 회당을 세웁니다. 
그 회당에서 안식일을 구별하여 그 날은 지킵니다. 
이날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웁니다.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칩니다. 
회당, 안식일, 율법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그 결과 그 들은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2000여년이 지난 후에도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의 날입니다. 
주일 예배가 우리의 믿음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주일 예배가 우리의 영혼과 육신의 건강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주일 예배가 우리의 인생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은 축복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의 지혜입니다. 

이 복된 안식일에 대해 시편 84:10~12에 말씀하기를“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안식일은 어떤 날입니까?

1.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입니다.

출애굽기 20:9~10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육일은 사람의 날이지만 제 칠일 즉 주일은 날을 만드신 하나님의 날로 정하셨습니다. 

2.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쉬신 날입니다.

출애굽기 20:11에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이란 하나님께서 6일 동안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후 쉬신 날, 일곱째 날을 말합니다. 
창세기 2:1~3에“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 안식일을 잘 지키도록 10계명에 기록하셨습니다. 
구약시대의 안식일이 신약시대인 오늘날의 주일입니다. 
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날을 말합니다. 
이날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타락하여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신 날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인간 재창조를 완성하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날을 주의 날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안식일이나 신약의 주일은 의미가 같습니다. 

3. 안식일은 십계명중 제 4계명입니다.

출애굽기 20:8에“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십계명가운데 4계명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4.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신 날입니다.

출애굽기 20:11에“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축복하신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 날을 거룩하게 지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 누리라는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은 이날을 소홀히 여기거나 다른 날과 똑같이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미국 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 장군은 헌법에 의거 1849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해야 하는데 그날이 주일이라 취임을 거부하여 에치슨 상원 의장이 24시간 대통령 임무를 대신했습니다. 대통령 취임식보다 우선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정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에스겔서 20:12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하시고자 주일을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에 행해지는 엄숙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이날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된 특권이며 표증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깨닫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깨달아 하나님을 잘 섬길 때에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는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가난하게 혼자 살던 허만이라는 여든 아홉 살 된 노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청직원이 그 노인의 유품을 정리하고자 노인이 살던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집은 거지의 집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온통 넝마와 부서진 가구들로 가득했습니다. 
시청직원이 짐을 하나하나 챙기는 중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넝마 속에 파묻혀 있던 다섯 개의 바이올린을 찾아낸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바이올린 제작의 대가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만들고 그가 직접 사인한 것들이었습니다. 
그 값은 당시의 돈으로 수십만 달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노인은 그것을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알고 그렇게 쓰레기 속에 던져놓고 가난하게만 살았던 것입니다. 

바이올린의 가치를 아는 것도 이러한데 하물며 생명의 근원,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잘 섬기는 사람의 축복에 대해 요한삼서 1:2에“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하셨습니다. 

2. 하늘나라를 바라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골로새서 2:16~17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장래에 있을 일 즉 하늘나라의 그림자로 주일을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안식이 있음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안식일 즉 주일을 정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며, 하늘나라를 위해 준비하도록 하기 위해 안식일 즉 주일을 정하신 것입니다.

3. 사람을 위해 있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가복음 2:27에“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니...)”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기계와 달리 쉬지 않고는 일할 수 없기에 적절한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 검증을 걸쳐 일과 휴식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효율적인 생산성을 유지하는 기간이 7일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한 예를 통해 하나님의 섬세하신 섭리를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 무신론 혁명 당시 주일 예배를 막기 위해 일주일을 10일로 바꾼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산업의 생산량이 40%로 감소했습니다. 러시아 혁명 때 레닌이 일주일을 8일로 늘려 일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생산량이 30%로 감소해서 일주일을 다시 6일로 줄였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생산량이 30%로 감소되었습니다. 레닌도 어쩔 수 없이 일주일을 7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일주일의 7일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소중한 삶의 리듬이 무너진다면 개인의 건강이나 땅의 축복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로 정하신 것은 우리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위한 방법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1. 발을 금해 오락을 행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인 이사야 58:13에“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빼앗는 사사로운 언행을 삼가하면서 이날을 존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2. 개인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말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20:9~11에“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하셨습니다. 

느헤미야 10:31에는“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화나 식물을 가져다가 팔려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사지 않겠고”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 약속된 축복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본문인 이사야서 58:14에“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하셨습니다. 

미술가이며 시인인 제임스 스메탄이라는 사람은 몹시 가난 하게 살았습니다. 
그에게 “당신은 왜 교회에 나갑니까? 하고 묻자 “축복을 받으려고 나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무슨 축복입니까?”하고 묻자 “분노와 경멸, 그리고 냉대를 갖게 하는 유혹이 사라지고 기쁨과 만족이 가득 차게 되고 하나님의 섭리에 만족하게 되 는 것이지요. 
어둡고 복잡한 생각으로 꽉 차서 교회에 가면 평안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돌아오지요. 
모든 근심은 사라지고 내가 구원받은 기쁨과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이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르신 주님 앞에 나오는 날이 곧 주일 예배 시간입니다. 
주일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이날에 하나님께로부터 영적인 신령한 은혜가 임합니다.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는 사람에게 내리시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낙심한 사람에게는 소망을 주십니다. 염려와 금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넘치는 평화가 있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삶의 지혜도 주십니다. 그리하여 험한 세상을 이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2. 땅의 높은 곳에 올려주십니다. 

본문인 이사야서 58:14에“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더 알기 쉽게 이렇게 번역 한다면“너는 당당히 올라갈 것이며, 눈에 띄게 나타날 것이며, 너의 이웃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눈여겨 볼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영화 “불의 전차”는 에릭 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제8회 올림픽 경기가 파리에서 열렸을 때, 100m선수 중 가장 좋은 기록을 가진 금메달 유망주이자 믿음 좋은 스코틀랜드 청년 “에력 리들”이 경기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런데 경기 일정이 주일로 잡혀 있는 것을 보고 이 신실한 청년은 경기를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러자 국민들은 조국을 배반한 자, 위선자, 옹졸한 신앙인 등으로 말하면서 분노하고, 있는 대로 폭언을 하고 비난을 했습니다. 
에릭 리들은 주일을 범하면서 까지 금메달을 향하여 뛸 마음은 없다며 거절하고는 주일에 교회에 나가서 온종일 경건하게 하나남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 목요일에 400m 경기가 있었는데 그 경기에 나갈 선수에게 문제가 생겨서 에릭 리들이 대신 나가게 되었습니다. 
100m 선수가 400m에 나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기에서 에릭 리들은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기자들이 어떻게 100m 경주자로서 400m를 뛸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100m 는 내 힘으로 뛰었고, 나머지 300m는 하나님의 힘으로 뛰었습니다. 
100m 경주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섬겼더니, 나머지 길은 주님께서 인도해주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일예배를 소중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주일 예배에 성공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주일은“하나님의 날”입니다. 주일을 성실히 지키는 사람을 사랑하셔서 높은 곳에 올리셔서 존귀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3.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하셨습니다. 

본문인 이사야서 58:14에“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하셨습니다.“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는 것은 야곱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성취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야곱은 단신으로 고향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20년 후 거부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야곱의 업이란, 풍성한 물질과 자녀의 축복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정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세상의 모든 축복과 자녀의 축복과 내세의 축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축복이 안식일 즉 주일을 잘 지키며,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는 것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五. 안식일을 어겼을 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 얻는 것이 없습니다(헛수고가 됨).
출애굽기 16:25~30에 말씀하시기를“모세가 가로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그것을 들에서 얻지 못하리라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일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제 칠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 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제 육일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제 칠일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그러므로 백성이 제 칠일에 안식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육신의 양식을 주시는 날이 아니라, 영의 양식을 주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을 더럽히는 것이 됩니다.
에스겔 22:26에“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3. 패망하게 됩니다.
예레미야 17:27에 말씀하시기를“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케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주일을 범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의 생각을 더 중하게 여기는 불순종이기 때문입니다. 

4. 돌로 쳐 죽이라 하셨습니다.
민수기 15:32~36에 기록하시기를“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 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날인 안식일 즉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축복의 길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종교적 엘리트들이 바쁘다는 것 때문에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을 소홀히 한다면 그는 도덕적으로 진흙탕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주일예배의 의미와 가치를 깨달은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예배를 더 없이 소중히 여긴다. 영국의 명재상이었던 글래드스턴은“나에게는 예배석이 대영제국의 수상석보다 더 존귀하다.”고 말했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내 영혼이 잘되는 길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길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 누리는 길입니다. 
주일예배의 승리자가 신앙생활의 승리자이며, 신앙생활의 승리자가 곧 인생의 승리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성경에는 시간을 가리키는 두 가지 단어가 있다.
하나는 크로노스로 물리적, 객관적인 시간을 의미하며, 또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로 의미와 내용이 있는 질적 시간을 의미한다"

인생이란 것은 모두에게 크로노스의 시간이 주어지지만, 어김없이 지나가는 이 시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같은 시간이지만 허비하는 시간이 있는가 하면 썩어지지 않는 영원한 것에 투자하는 시간이 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 번째 강령"이라며 "즉, 세상의 크로노스 시대를 살지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카이로스의 영원한 삶을 살아가고 회복할 것인가에 대해 우리에게 세 가지 의미를 전달한다"고 했다.

그는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삶의 첫 번째는 예배하는 삶, 삶의 안식,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며 "시대가 변하여 주일에 일하시는 분들이 많다. 직장 관계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을 하나님 앞에 지키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는 하나님이 내 삶에 가장 최우선이라는 중요한 고백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주일은 세상의 모든 시끄러웠던 삶의 소리를 뒤로하고 하나님께 시야를 고정시키는 시간이며, 나의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시간이며,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시간이며, 무엇보다 나의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라며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무엇을 '기억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수동적인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새기라'는 뜻이다. 즉, 습관적인 억지로의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지키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때로 우리는 전쟁터와 같은 치열한 삶이 계속 끝나지 않고 지속될 때가 많다. 우리에게는 영과 육의 쉼, 특별히 우리의 심령 한복판에 있는 영의 쉼이 필요한 것"이라며 "기계처럼 일을 하다가는 우리가 망가지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실 때 쉼을 일부러 보여 주신 것이다. 여기서 쉼은 단순히 놀고먹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있어야 한다.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님이라면 우리가 안식을 하는 목적은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분의 기쁨과 상급을 보장한다"며 "많은 것을 가졌지만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 이유는 영원한 안식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의 참된 목적은 어떤 일을 금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며,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섬기는데 있다"고 했다.

주일을 시간적으로 율법적으로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기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느헤미야 공동체 행동 강령 두 번째는 이웃을 돕는 삶으로, 땅의 안식, 칠년마다 안식하는 것이다.

영적인 의미에서 '희년'은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완전한 자녀가 되는 것을 뜻한다"며 "구속(redemption)은 '되 무른다, 다시 찾는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말은, 원래 하나님의 소유였던 우리를 마귀에게 빼앗겼다가 다시 찾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우리를 되돌려 받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7년에 한 번씩 쉬는 안식년이나 50년째의 희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그 은혜를 나도 이웃에게 베푸는 시간을 의미한다"며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의 시간 속에서 잘못된 부분들을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도 마찬가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누린 만큼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이웃을 섬기기를 원하신다. 안식일과 안식년에는 그런 의미가 있다"고 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시간 속에 사는 삶

영혼의 안식,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것도 회복되지 않은 상황 가운데 느헤미야 10장 31절에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모든 허물의 빚을 탕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별히 "학생들을 격려하기 원한다. 청소년들이 하는 공부,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시간들이 때로 어른들의 압력과 사회적인 시스템으로 인해 힘들고 포기하고 싶고, 의미 없이 느껴져도 하나님이 현지 나에게 직분과 시간을 맡겨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최선을 다해 스쳐 지나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억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거룩한 주일처럼 거룩한 매일을 위하여!


안식일 준수 명령

1. 안식일을 지키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주신 계시 가운데 마지막으로 안식일에 관한 명령을 부연해서 강조하셨습니다.
이 명령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을 계속해서 섬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창세기 2:2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나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출애굽기 16:23부터 입니다.
안식일 규례는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의 내용이 되었는데, 이것은 안식일이 하나님 앞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은 언약의 증표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안식일을 언약으로 지켜야 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율례를 지키면 살고 지키지 않으면 죽는 문제였습니다.

a. 안식일 준수 명령(이사야  56:2)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하는 사람,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

b. 안식일의 목적(신명기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2. 엿새와 제칠일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준수를 명령하시면서 그날 일하는 자는 생명이 끊어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의 의미는 엿새 동안의 수고를 통해서 제칠일에 안식하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십계명에 언급한 바대로 6일 간의 창조 사역 후의 하나님의 휴식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 사역, 즉 하나님은 온 인류와 만유의 창조주시라는 사실과 그들은 단지 그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케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엿새 동안 수고한 그들에게 육체적 휴식을 주시려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안식일은 또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는 표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준수는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에게 구별된 백성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 됩니다.

a. 엿새의 사역(창세기 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이니라.

b. 칠일에 쉼(히브리서 4:4)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2절. 훌. '존귀한, 고위함'이란 뜻의 이름.
유다 지파 갈렙의 후손으로 아말렉 전투 시 모세의 팔을 들어 올린 자.

브사렐. '하나님의 보호 속에 있는자'란 뜻의 이름. 성전 장식들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다른 기능인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6절. 오홀리압. 원어로 '아버지가 내 장막이다'라는 뜻.
성막 건축의 사명을 지녔다. 세워. 문자적 의미는 '그에게 주어서'로 브사렐을 돕는 자로서 오홀리압이 세워졌음을 가리킨다.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 잘 숙련된 기술공을 의미한다. 특별한 기술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그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13절. 나의 안식일.
이스라엘 장인들에 대한 안식일의 엄수 명령은 하나님 스스로가 안식일의 제정자이심을 나타낸다.
표징. '표시, 증거'란 뜻의 <twOa:오트>는 이스라엘의 안식일 준수를 지칭.

14절. 더럽히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다.
원어 <ll'j;:할랄>은 '어기다, 모독하다'라는 뜻. 죽일지며. 문자적으로 정확한 뜻은 '반드시 죽일지니라'. 사형은 이스라엘의 위기 의식에 따른 안식일 준수의 철저한 시행을 나타낸다. 생명이 끊쳐지리라. 이는 육체적인 죽음 뿐 만이 아닌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15절. 큰 안식일.
문자적으로 '안식의 안식 일'을 뜻하는 <@/tB;v' tB'v':솨바트 솨바톤>은 철저히 쉬어야 함을 의미한다.

17절. 창조하고. '일하다'라는 뜻의 <hc;[;:아사>는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일' 그 자체를 의미. 제칠일에 쉬어. 하나님 자신의 안식은 인간은 안식일 준수의 근거가 된다.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을 의인화시킨 표현으로, 창조 사역 후 휴식하시면서 창조물을 보고 흡족해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원어<vp'n::나파쉬>는 '숨을 쉬었다'는 문자적 의미.

18절. 증거판 둘. 시내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다. 친히 쓰신 것이더라. 하나님 귄능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날 말씀은 성막 설계에 관한 말씀이 끝나고 그 설계대로 일을 진행할 사역자에 관한 말씀입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어떤 사람이며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가가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관한 말씀이 또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출 20:8~11절에서 안식일 계명을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한, 23:10~13절에서도 안식일과 안식년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만나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간접적으로 안식일 준수를 가르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안식일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막을 만드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안식일은 지켜져야 한다는 의미가 표면적으로 드러납니다.

브살렐(1~5절)

항상 새로운 말씀이 시작될 때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그럽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의 출처라는 의미입니다. 이 모든 규례들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사람을 지명하십니다.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그럽니다. '훌'은 이스라엘이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 아론과 함께 모세의 팔을 들어 올려 이스라엘이 승리케 하는데 기여한 사람입니다(17:10). 그리고 그는 모세가 시내 산에 계명을 받으러 올라갔을 때 아론과 함께 백성들을 다스렸던 사람이기도 합니다(24:14). '우리'는 3인의 동명이인(왕상 4:19; 슥 10:24)이 존재합니다. 여기서는 성막 건축자 브살렐의 부친입니다. '브살렐'은 성막 건축을 지휘 감독한 유다 지파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브살렐을 소개하면서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브살렐이 하는 일이 큰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의 마지막 장까지 브살렐의 이름이 여러 번 기록되고 있습니다. 특히 출 37:1절에는 법궤를 만든 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브살렐의 족보는 브살렐에 관한 말씀이 분명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불렀다고 합니다. 여기서 '지명하다'(nominate)란 말은 여럿 가운데서 가려 뽑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지명받는 자의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이보다도 그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택이 더 중요함을 말해줍니다. 즉 누구를 택하여 쓰시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브살렐을 콕 찝어서 지명하여 부르시고 성막 건축의 거룩한 사역을 맡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봉사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신'은 곧 성령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2. 6절). 그다음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에 매임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혜와 총명과 여러 가지 재주는 하나님의 은사이면서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 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선물인 갖가지 재능들을 사모하는 마음과 아울러 끊임없는 자기 계발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뒤에 이어지는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라는 말에서 드러납니다. 쉬운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설계를 잘하고 또 금과 은과 놋으로 그 설계대로 만들 수 있는 재능을 그에게 주리니”

그러니까 브살렐을 택하신 하나님께서 브살렐 자신의 개인적인 인격과 능력을 무시하고 단지 그를 기계적인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브살렐의 개인적 인격과 능력을 존중하셔서 그의 능력이 극대화되도록 일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제사장직뿐만 아니라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신을 충만케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직업의 귀천이 없을 뿐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신이 함께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먼저입니다. 이 부르심은 브살렐이 가진 재능과 모든 것을 고려하신 부르심입니다. 성막의 모든 기물들을 만드는 공교한 일꾼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렇게 부르신 후에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하십니다. 즉 감당할 힘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럴 때 그의 재능은 꽃피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성막의 모든 물건들 증거궤 속죄소, 회막의 모든 지구, 떡상, 등잔대, 분향단, 번제단, 물두멍 제사장 의복을 하나님의 설계대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만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성막을 만드는 사람도 소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 삶의 자리는 모두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오홀리압(6절)

6절에서는 브살렐을 돕는 동역자로 오홀리압을 임명하고 있습니다.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우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단'은 야곱과 그의 아내 라헬의 몸종이었던 빌하 사이에서 태어난 야곱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습니다(창 30:1~6). 그리고 단의 후손들은 '길의 뱀'과 같이 교활하며, '첩경의 독사'같이 호전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창 49:17). 또한, 이들은 '사자의 새끼'(신 33:22)로도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들의 성격은 전투적이요 공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지파적인 배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오흘리압을 부르셔서 성막 건축에 쓰일 휘장을 비롯한 각종 직물 제작을 담당케 하신 것은(38:23), 하나님은 외모를 보는 인간과는 달리 오직 중심을 보시는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를 택하시지 않고(고전 1:26) 당신의 사역에 꼭 필요한 자들을 적재적소에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세워라는 말은 본래 '주다'(give)는 뜻입니다. 또한, 이 말은 '그에게'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이토'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두 단어를 직역하면 '그에게 주어서'가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브살렐에게 오흘리압을 조력자로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성경은 이러한 의미를 살려 '그와 함께 일하게 하며'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라고 할 때 지혜로운에 해당하는 '하캄'은 '숙련된'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란 '특별한 재능이 있는 모든 자' 혹은 '숙련된 기술이 있는 모든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막은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지혜로운 사람들, 재능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부르셔서 감당하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세는 모세의 일를 아론은 아론의 일을 그리고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그들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각양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대로 각자 삶의 자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최선을 다해 맡겨주신 일들을 감당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보겠습니다.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12~17절)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안식일에 관해서는 만나를 주시면서(16:21~30) 또 십계명(20:8~11)에서 이미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언급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단 저는 안식일 준수가 모든 신앙생활의 핵심이기 때문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그침의 원리가 지켜지지 않으면 예배도 등한히 되게 되고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안식일 준수는 탐욕을 그치고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는 성도의 가장 중요한 원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여기서는 성막 제작이라는 막중한 사역을 진행한다고 할지라도 안식일 만큼은 거룩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핑계로 안식일 계명을 어기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에게 엄중한 경고가 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주목할 말씀은“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날을 도적질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식일은 동시에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데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막 3:27). 이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통하여 인간에게 육체의 노동으로부터 귀중한 휴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휴식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나그네 등 인간뿐 아니라 소나 나귀 등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휴식의 적용 범위가 하나님의 모든 피조 세계에 공히 적용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그럽니다. 여기서 표징은 '오트'라는 말입니다. '신호'(sign)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몇 가지 표징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무지개와 할례와 안식일이 있습니다. 이 세 표징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① 무지개는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임하는 구원에 대한 표징입니다(창 9:13). ② 할례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임을 나타내는 언약의 표징입니다(창 17:10, 11). 그러나 이 언약의 표징은 예수의 오심으로 폐하여 졌으며, 육신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가 중요시 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롬 2:28, 29). 그리고 마지막 안식일은 거룩함과 복 주심의 표징입니다. 창 2:2, 3절에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사람에게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안식일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고통받던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2:23; 3:7, 9) 이들을 이끌어 내어(신 4:20)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신 이유는(3:8; 15:17)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친히 '지명하여 부르신' 선민(選民)이요(사 43:1), 성민(堅民)으로 불린 것도 이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신 4:39, 40)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준수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여기는 만나를 통한 40년의 훈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안식일 준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중요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우리는 14절에서 안식일 계명이 강화되는 과정을 봅니다.

14절입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그럽니다. 여기서 가장 핵심은 더럽힌다는 말입니다. '더럽히다'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상처를 입히다'. '욕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 말은 '약속을 어기다'(break promise)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RSV는 이 단어를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신성을 더럽히는'(profane)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란 곧 세속적인 생활과 관련된 일체의 일들로 인해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하나님의 신성을 더럽히는 자를 일컫습니다. 그러니까 고의적으로 안식일을 어기고 더럽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을 죽이라고 말씀합니다. 더구나 이 말은 같은 의미 동사를 두 번 반복해서 사용한 강조형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직역하면 '반드시 죽여라'가 됩니다. 이러한 안식일을 어긴 자의 처벌 규정은 안식일을 더럽힌 죄가 우상 숭배의 죄만큼 중죄(重罪)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죽이라는 말씀은 신 8:19. 20; 17:2~5절에서 반복됩니다. 더 나아가 생명이 끊쳐지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육체적인 생명의 끊어짐 뿐만 아니라, 영적인 생명의 단절,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안식일 준수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장 강력한 표징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원리를 강조하십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지만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또 여호와께 거룩한 날, 즉 구별된 날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큰 안식일이라는 말은 철저하게 안식하는 날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솨바트 솨바톤'은 '안식의 안식일'(the stabbath of rest, KJV)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17절에서 다시 창조 안식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너희도 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쉴줄 알아야 합니다. 그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이라고까지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에게 그만큼 유익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언약을 삼으라고 하십니다. 신약에서도 이 정신은 주일로 계승되어 계속해서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17절에 ‘왜냐하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셨기 때문에 인간들도 안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① 하나님의 엿새 동안의 창조에 대한 기념의 성격과, ⓶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감사의 성격이 그것입니다. 오늘날의 주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에 대한 감사의 성격을 가지는 것은 이러한 안식일의 참 의미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쉬었다는 말씀에 있습니다. 쉬었다는 말 히브리어 '나파쉬'는 원래 '숨', '호흡'이라는 말입니다. 동사형으로 '숨을 쉬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안식일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재충전의 의미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RSV는 이를 '기운을 회복하셨다'(refreshed)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처럼 쉼을 필요로 하는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들에게 쉼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계명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욕망에 제동을 걸어줄 안전장치가 안식일 준수이며 그치고 주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새로운 충전을 통해 건강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온전히 그치고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안식일에 담아놓은 귀하고 소중한 진리입니다.

십계명 두 돌판을 주심

마지막 18절은 십계명이 기록된(20:3~7절) 두 개의 들판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시는 장면입니다. 즉 하나님은 약속대로(24:12) 이미 선포하신 계명(신 5:1~21)을 두 개의 돌판에 친히 써서 모세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이로써 율법 중심의 시대가 그 막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증거판 위에 기록된 십계명은 모든 율법의 핵심이자 본질로서. 단순한 율법의 차원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표면적으로 볼 때는 율법이지만, 그 내면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십계명의 돌판을 주신다는 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가 임박했음을 말해줍니다. 즉 40일이 지나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산 아래에서는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애굽의 음란한 춤을 추며 하나님을 섬긴다고 난리를 피우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묵상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감당해야 하는 성막의 모든 것들을 만드는 일도 소중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과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며 그것이 표징이라고 도전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치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꼭 기억할 일입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1일 / 03- 20-2024(수)
출애굽기 31:1-18
브살렐(유다 지파)과 오홀리압(단지파)(1, 6절)
찬송 / 383장(환난과 핍박 중에도)


내가 유다 지파 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See, I have chosen Bezalel son of Uri, the son of Hur, of the tribe of Judah,

내가 또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
Moreover, I have appointed Oholiab son of Ahisamach, of the tribe of Dan, to help him. Also I have given skill to all the craftsmen to make everything I have commanded you:


  뜻 : 아비의 장막
오홀리압(Oholiab)



가장 큰 은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어느새 6월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해마다 6월이 오면 가슴에 새겨진 아픈 기억으로 속앓이를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동족끼리 벌인 전쟁, 그리고 계속되고 있는 분단 상황이 빚어낸 아픔과 상처가 좀처럼 아물지 않습니다. 6월 10일은 민주화 항쟁 역사에서 기념할만한 날입니다. 온 국민의 힘으로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꾼 날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내내 제 마음이 머문 곳은 시리아의 북부 도시 훌라(Houla)입니다. 지난 25일에 벌어진 학살극으로 인해 수십 명의 어린이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무차별적인 폭격이 아니라 의도적인 살해였기에 충격은 더욱 컸습니다. 학살을 저지른 이들은 이슬람 시아파 소수 종파인 알라위파의 폭력단체인 ‘샤비하Shabiha’에 속한 이들이었다고 합니다. ‘유령’을 뜻하는 아랍어에서 유래한 샤비하는 자기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그 여린 생명들을 무참히 학살했던 것입니다. 수니파 무슬림들의 보복이 예고되고 있기에 그 땅에서는 더 큰 학살의 악순환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무저갱이 열린 것 같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그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며, 다시금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나치의 학살에서 살아남아 평생을 그 잔학한 시대에 대한 증언자로 살았던 프리모 레비의 말대로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지식의 총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사람다운 삶에 대한 의식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을 휩쓸고 있는 탐욕과 광기에 맞서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삶으로 증언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대정신에 맞서는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 세상의 권세자들은 우리 속에 끊임없는 불만족을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를 지배하려 합니다. 그들은 인간이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 속에서 사고하는 이들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세상 질서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좁은 문을 통하지 않고는 영생에 이를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일찍이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엡6:12)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의 전략이 뭔지 아십니까? 그들은 우리에게서 공동체를 빼앗아갑니다. 함께 나누고 돌보고 섬기는 이들은 악한 영의 주술에 넘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을 느끼는 사람, 그리고 기꺼이 누군가를 돌보려고 하는 사람의 내면에는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든든함이 찾아듭니다.

• 교회의 근본
현대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돈’이라는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 자포자기한 사람들에게 제2이사야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합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기대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 소식은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사40:9c)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사52:7c).

아름다운 소식이란 무엇입니까? 바벨론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제 아무리 막강하게 보여도 세우기도 하고 허물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은 일견 든든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사십니까? 오늘의 교회가 무기력증에 빠진 것은 바벨론에 동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결국 하나님의 몸이 되는 데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입니다만 저는 오승윤 화백의 전시회를 보며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오방색(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을 뜻하는 청백적흑황색)을 가장 잘 활용한 화가로 알려진 그는 한국 인상주의 회화의 대가인 오지호 화백의 아들입니다. 그 전시회에 걸린 그림은 모두 ‘산 그림’이었는데, 화가가 100개의 산에 오르며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그림을 보면서 제가 좀 놀란 것이 있습니다. 초기의 그림은 봄․여름․가을․겨울에 따라 변화하는 산 빛과 형태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후기로 갈수록 화가는 산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골격을 그렸습니다. 어쩌면 그는 계절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어떤 핵심을 그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그림에 빗대 말하자면 교회도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판단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세월이 가도 상황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본질을 붙들고 있는가 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살아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죽어가는 것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교회의 중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살려는 결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려는 열린 태도야말로 교회가 한순간도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입니다.

교회는 중심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는 서른 개의 바퀴살이 바퀴통 하나에 모이되 바로 거기가 비어 있어서 수레를 쓸 수 있다(11장)고 했습니다. 서른 개가 하나의 중심에 모인다는 것이 우선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곳이 비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각각 자기로 가득 차 있다면 교회라는 수레는 구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겠다는 이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다름 아닌 ‘자기 부인’이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빈 데 없이 내 이익, 내 견해, 내 계획으로 꽉 차 있으면 하나님의 뜻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지고, 이웃과의 평화도 불가능한 법입니다.

• 성막 짓기
일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저는 출애굽 공동체가 함께 지었던 성막이야말로 아름다운 교회의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을 압제의 땅인 애굽에서 이끌어내셨고, 시내산에서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당신의 법을 일방적으로 부과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동의를 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맺으면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백성의 정체성은 핏줄이나 지역에 뿌리를 둔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함께 이루어가야 할 미래의 비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비전이라는 말은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비전은 미래의 청사진입니다. 지향해야 할 비전이 없다면 삶은 무기력하거나 권태로울 것입니다. 문제는 비전은 아름답지만 그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만만치 않다는 사실입니다. 역사가 아주 조금 진보하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헌신과 희생이 있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세상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사람들은 끈질기게 요구하지 않는 한 자기들의 기득권을 조금도 내놓지 않습니다. 비전은 현실의 장벽에 가로막혀 퇴색되기 일쑤입니다. 그렇기에 자꾸만 새롭게 상기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비전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과 지속적으로 만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 성막을 만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현존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상징물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억압과 착취와 비인간화의 땅인 애굽을 떠나 자유와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새로운 세상을 향하고 있음을 일깨우는 상징물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바로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에 동참하는 백성임을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성막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재를 헌납했습니다. 강요 때문에 마지못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의지로 창조적인 일에 동참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봉헌한 헌물이 너무 많아서 ‘이제는 그만 가져오라’고 부탁해야 할 정도였다고 말합니다. 자기 것을 내주면서도 기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자유인의 긍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물건만 봉헌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시간과 재능까지도 바쳤습니다.

몇 해 전 여수에 신앙집회를 인도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의 안내를 받아 교회를 둘러보며 참 놀랐습니다.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놀랐던 것은 그 교회를 짓는데 온 교인들이 몸으로 동참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남편들이 일 나가고 아이들도 학교에 가고 나면 아내들은 도시락을 싸들고 교회에 와서 온갖 허드렛일을 다 했습니다. 저녁이 되면 퇴근한 남성 교우들이 찾아와 늦도록 함께 일을 했다고 합니다. 요즘도 이런 교회가 있나 싶었습니다. 그 땀 흘림의 과정을 통해 교인들은 하나가 되었고, 주님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기술, 하나님의 선물
성막을 짓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입니다. 그들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아주 솜씨 좋은 장인匠人들입니다. 어쩌면 출애굽 이전에도 비슷한 일을 하던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서 기자는 그들의 그 숙련된 솜씨를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도 말합니다. 하나님은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신 후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가득하게 하시고,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온갖 기술을 갖추게 하셨습니다.”(31) 그는 아이디어가 넘치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머릿속 생각을 작품으로 만드는 일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습니다.

오홀리압에게도 동일한 은사를 주셨는데, 특히 그에게는 ‘남을 가르치는 능력도 주셨다’고 합니다. 그는 재능 있는 사람들을 선발하여 성막과 기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을 전수해주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창조적인 일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면서 그들은 이전의 노동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기쁨과 감사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깐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재능이 하나님의 영의 충만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러 차례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잠깐 그리스적 사고와 히브리적 사고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아주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는 아레테aretē입니다. 주로 인간의 탁월함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따라서 삶의 모든 분야에서 적용됩니다. 건강의 아레테, 아름다움의 아레테, 운동 능력의 아레테, 기술의 아레테를 성취하는 것이 그리스인들의 이상이었습니다. 기술 혹은 예술을 뜻하는 테크네technē라는 단어도 매우 중요한 데, 이 단어는 신의 활동에 대비되는 인간의 활동을 뜻하는 말입니다. 테크네를 가진 사람은 인간적 자부심을 가질 만합니다. 그는 빼어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아레테 혹은 테크네가 인간의 탁월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입장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인간 자신에게서 유래한 탁월함이라면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우월감을 가져도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도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의 다양성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은사를 주신 까닭은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쓰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12:7). 그는 은사를 자랑하는 성도들에게 “아무도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십시오.”(고전10:24)라고 단호하게 요구합니다.

요즘 들어 많은 사람들이 재능 기부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을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활용하려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교인들이 자신의 재능을 우리 신앙공동체는 물론이고 사회의 성숙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브살렐 오홀리압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오늘 우리가 다소라도 잘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나누고 섬기는 일에 열중하다 보면 ‘돈’의 지배력은 약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에 중독되었던 이들이 깨어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자각할 뿐만 아니라, 그런 세상을 이루기 위해 기쁘게 헌신하는 이들이 나오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 때 삶의 외로움은 극복되지 않습니다. 이웃을 위해 자기를 바치며 살 때 외로움과 두려움은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 아름다운 사귐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이 한 주간 동안 살아가면서 일상의 모든 순간에 주님이 요구하시는 바를 기쁘게 수행하십시오. 세상 도처에서 평화의 일꾼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땀 흘려 씨를 뿌리고, 목숨을 바치기도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언제나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 길을 거치지 않고는 부활의 기쁨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더디더라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따라 한 걸음씩 내딛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성령에 충만한 자 브살렐과 오홀리압”(출 31:1-11)

르호봇
9~11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출애굽기 히브리어 설교 중에서 성령에 충만한 자 브살렐과 오홀리압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명령하시고 어떻게 지을 것인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막을 짓는 일꾼의 지도자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지명하여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성막을 짓게 됩니다.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은 교회를 통해서 예배를 드림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처럼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아 봉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광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렀을 때에 모세는 시내 산에 오르게 됩니다. 시내 산에서 40일 동안 하나님과 교제를 하면서 십계명의 율법을 받고 하나님이 죄인들을 만나서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성막의 식양을 받게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율법만 주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게 됩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용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막은 죄지은 백성들이 제물을 가지고 와서 용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용서가 없지만 복음은 용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짓는데 중요한 인물을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오늘 그 사람이 바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성막을 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없었다면 성막을 짓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완전한 성전을 지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이 세상의 죄인들은 한 명도 죄 사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통해서 성막을 짓게 되고 이 사람들을 통해 성막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진리가 무엇입니까?

첫째, 유다지파 출신의 사람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2절 레에 카라티 베솀 베찰엘 벤 우리 벤 후르 레마테 예후다

출 31:2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께서는 유다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유다 지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된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육적인 메시아가 유다지파를 통하여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보라’라는 단어는 (라아 7200 VQMMYS 동사 칼 명령법 남성 2인칭 단수) 보다, 감찰하다, 결정하다, 즐겁다, 준비하다, 라는 뜻입니다. 번역본에는 없지만 원문에는 ‘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지파의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면서 먼저 보라고 주목시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브살렐을 감찰하여 보았고 이 사람을 보면 기쁘고 즐거우며 이미 하나님께서 준비한 사람으로 성막을 지을 수 있는 자로 이미 하나님의 마음에 결정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직접 명령하시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주목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막을 지을 자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브살렐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브살렐을 선택한 이유를 주목하여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라는 단어는 (우리 221) 우리,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אור(오르 215) 빛나다, 영화롭다, 광채 나다, 불사르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브살렐은 우리의 아들입니다. 우리의 아들로서 선택받은 브살렐은 성막을 지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이며 자신의 몸을 불살라 아버지의 뜻을 이룰 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브살렐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죄인들의 흑암을 빛으로 물러가게 하는 자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브살렐이 유다지파의 우리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브살렐의 이름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을 발견해 보겠습니다.

‘브살렐’이라는 단어는 (베찰엘 1212) 브살렐,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אל(엘 410) 하나님, 이라는 뜻과 צל(첼 6738) 보호자, 그늘, 이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이 단어가 צלל(찰랄 6751) 그늘지다, 어두워가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우리가 브살렐의 이름을 종합하여 보면 ‘하나님의 보호자’라는 사람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죄악 가운데 어둠에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빛을 전파하여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이 사람이 성막을 짓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지명되어 부름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는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이 어둠에 있을 때에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4절 엔 아우토 조에 엔 카이 헤 조에 엔 토 포스 톤 안드로폰 

5절 카이 토 포스 엔 테 스코티아 파이네이 카이 헤 스코티아 아우토 우 카텔라벤

요 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임했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기 전에는 모든 세상이 어둠에 있었고 죽음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브살렐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빛으로 성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육신은 유다 지파의 뿌리를 통하여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브살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지파의 혈통을 통하여 오신 육신을 부인한다면 이것은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감정이 있었습니다. 아프면 아파하셨고 괴로우면 괴로움을 표출하셨습니다. 이것이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영을 브살렐에게 충만하게 채워주셨다는 것입니다.

3절 바아말레 오토 루아흐 엘로힘 베호크마 우비트부나 우베다아트 우베콜 멜라카

출 31:3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하나님은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를 주셨습니다.

‘충만하게’라는 단어는 (말레 4390 CW.VPICXS 와우접속사 동사 피엘 미완료 공성 1인칭 단수) 가득하게 하다, 충만하다, 헌신하다, 만족하게 하다, 거룩하게 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브살렐에게 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채워주시고 있습니다. 이 충만은 부족함이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합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브살렐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님이 임하니 성막을 짓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삶을 브살렐이 사니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고 만족스럽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신 후에 즉시로 성령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성령님이 브살렐에게 임하게 하셨습니다. 피엘 강조능동을 사용했다는 것은 이 충만은 받기 싫어도 받을 수밖에 없는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임하게 된 충만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절대 받을 수 없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브살렐이 받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성령님의 충만함이 임할 때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성막을 짓는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브살렐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도 세례 요한의 세례를 통하여 성령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 카이 유데오스 아나바이논 아포 투 휘다토스 에이덴 스키조메누스 투스 우라누스 카이 토 프뉴마 호세이 페리스테란 카타바이논 에프 아우톤

11절 카이 포네 에게네토 에크 톤 우라논 쉬 에이 호 휘오스 무 호 아가페토스 엔 호 유도케사

막 1:10-11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에게 임하였습니다. 성령님의 충만함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늘에서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사생애의 기간은 끝나고 공생애의 기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브살렐도 자신의 사생애 기간이 있었지만 하나님께 지명을 받아 성막을 짓게 되고 하나님의 성령의 영이 임하게 됨으로 공생애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브살렐은 사생애에서 공생애로 들어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유다 지파의 요셉의 아들로 살다가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을 것은 브살렐은 성막의 기초를 놓는 작업을 했던 인물입니다.

4절 라헤쇼브 마하솨보트 라아쇼트 바자하브 우바케세프 우바네호쎄트

5절 우바하로쎄트 에벤 레말로트 우바하로쎄트 에츠 라아쇼트 베콜 멜라카

출 31:4-5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라

브살렐은 성막을 짓는 전반적인 책임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막의 기초를 놓게 됩니다.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였고 보석을 깎았으며 나무를 새기는 기술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금과 은과 놋은 성막의 기본 재료들입니다. 이것을 다루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금과 은과 놋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성막의 기초를 놓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인성으로 구원의 기초를 놓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4절 호스테 아델포이 무 카이 휘메이스 에다나토데테 토 노모 디아 투 소마토스 투 크리스투 에이스 토 게네스다이 휘마스 헤테로 토 에크 네크론 에게르덴티 히나 카르포포레소멘 토 데오

롬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른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율법에서 살아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몸이 없었다면 우리는 죄악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기초한 자가 바로 브살렐입니다. 주님의 몸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선택받은 죄인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셋째, 단 지파 오홀리압을 선택한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6절 바아니 힌네 나타티 이토 에트 오홀리아브 벤 아히사마크 레마테 단 우베레브 콜 하캄 레브 나타티 호크마 베아슈 에트 콜 아쎄르 치비티카

출 31:6 내가 또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

하나님께서는 왜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웠는지를 영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오홀리압을 세운 것은 브살렐을 도와주라고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지을 수 있도록 협력자로 세운 것입니다.

‘단’이라는 단어는 (단 1835) 단,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דין(딘 1777) 심판하다, 억울함을 풀다, 심판을 내리다, 공정하게 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 중에 단 지파는 심판하는 지파였습니다. 이 지파에서 오홀리압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기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들을 풀어주고 공정하게 심판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셔서 구원받은 백성들은 데리러 오시고 심판받을 자들은 공정하게 심문하여 재판하시는 분이 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오홀리압의 이름을 통하여 영적으로 깨달아 보겠습니다.

‘오홀리압’이라는 단어는 (오홀리아브 171) 오홀리압,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אב(아브 1) 아버지, 라는 뜻과 אהל(오헬 168) 장막, 성막, 성전, 이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이 단어는 אהל(아할 166) 장막을 세우다, 밝다, 빛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오홀리압은 ‘아버지의 장막’이라는 의미를 가진 인물입니다. 무너진 아버지의 장막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장막에서 밝게 빛이 비추어져 구원받은 백성들이 몰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우신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0일 / 03- 19-2024(화)
출애굽기 30:1-38
분향단(1절)
찬송 / 467장(내게로 와서 쉬어라)

분향단, 기도를 상징하는 분향의 제단,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

1 너는 분향할 제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
2길이가 한 규빗, 너비가 한 규빗으로 네모가 반듯하게 하고 높이는 두 규빗으로 하며 그 뿔을 그것과 이어지게 하고
3제단 상면과 전후 좌우 면과 뿔을 순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 테를 두를지며
4금 테 아래 양쪽에 금 고리 둘을 만들되 곧 그 양쪽에 만들지니 이는 제단을 메는 채를 꿸 곳이며
5그 채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고
6그 제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7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지며
8또 저녁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9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
10
아론이 일 년에 한 번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 년에 한 번씩 대대로 속죄할지니라. 이 제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니라.

분향단(焚香壇, the altar of incense)은 향을 사르는 제단으로 지성소로 향하는 휘장 앞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길이와 넓이가 각각 1규빗(약 50cm)이며 높이는 2규빗(100cm)의 크기로 싯딤나무로 만들었고 금을 입혔습니다.
번제단처럼 네 귀퉁이에 뿔을 만들었고 운반을 위해 금고리와 멜 수 있도록 채를 만들어 모두 금을 입혔습니다.
향단에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대로 제조된 거룩한 향들만 피울 수 있었고 이른 아침과 저녁때 등잔대의 불을 정리할 때 향을 살랐습니다.
명칭이 ‘분향하는 제단’이라고는 하나 번제나 소제, 전제 등 제사는 드리지 못하며 오직 향만 사르도록 규정되었습니다.

1. 분향단은 기도를 상징합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고 해석하여야 합니다.
상징적이나 영적인 부분들을 해석하는 원칙도 마찬가집니다.
앞선 글에도 언급했듯이 요한계시록의 환상들에는 성막이나 성전의 각종 기구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그 기구들이 가진 영적 의미들을 더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요한의 환상 중에 24장로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5: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요한계시록 8: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구약에 있었던 그림자와 요한이 본 환상들의 전체적인 부분들을 일치시키는 것은 무리지만 최소한 ‘향’이 의미하는 바가 ‘기도’라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향을 태울 때 발생하는 향연(香煙)은 우리의 기도가 이 향연처럼 위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기도가 분향처럼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시편 141:2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분향단의 위치를 규정하실 때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이라고 지정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금등대에 대해서는 ‘떡상의 맞은 편’이라고 하셨듯이 분향단을 ‘속죄소 맞은 편’이라고 하신 것은 분향단이 속죄와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또 번제단처럼 분향단에도 사방으로 네 뿔을 만들었는데 여기는 일 년에 한번 속죄제의 피로 속죄합니다.
아마도 이날이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속죄일(大贖罪日, Yom Kippur, 7월 10일)일 것입니다.
레위기 16:13에는 그날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분향단에 있는 향로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향연으로 속죄소를 가리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레위기 16:13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할 것이며”

정리하자면 분향단은 언약궤의 속죄소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과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가는 길이라는 것도 이 향단의 위치에서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기도란 자신이 필요한 것을 구하는 기복적인 차원을 넘어 하나님과 나누는 깊은 교제이며 자신을 산제물로 드리는 헌신이기도 합니다. 기도처럼 하나님께 실제적으로 가장 가까이 나가는 길은 없습니다.

분향에 사용되는 향에 대한 규정

출애굽기 37:29에서 “거룩한 관유와 향품으로 정결한 향을 만들었으되 향을 만드는 법대로 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향품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조법을 따라 만들어야 했으며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관련 명령은 이것은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동일한 제조법으로 자신을 위해서나 사람을 위해서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가져다가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같은 분량으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네가 여호와를 위하여 만들 향은 거룩한 것이니 너희를 위하여는 그 방법대로 만들지 말라. 냄새를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모든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출 30:34-38)

1) 향의 원료

향의 원료는 ‘소합향’, 나감향‘, ’풍자향‘, 유향’ 등 네 가지입니다.

먼저 소합향(蘇合香, stacte)은 ‘스며 나오다, 방울되어 떨어지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나타프(נָטָף)’에서 나온 말인데 단풍나무와 비슷한 소합향나무가 햇빛을 받으면 송진처럼 진액이 흘러나와 방울처럼 맺하는데 그것을 채취한 것이 소합향입니다.

대부분의 향 재료가 식물에서 얻어지는데 특별히 나감향(onycha)은 홍해나 지중해에서 서식하는 향조개(aromatic shell)의 껍질을 빻아서 가루를 내어 만든 향입니다. 이 가루는 특히 불로 태울 때 진한 향을 발합니다.

풍자향(galbanum)은 인도나 페르시아 등지에서 자라는 페룰라 갈바니플루아(Ferula galbaniflua)라는 다년생 식물에서 추출한 진액으로 만들어졌는데 향이 자극적라서 불쾌하기도 하나 다른 향과 배합되면 향기를 오래 지속시켜 준다는 특성이 있고 해충을 막고 방부제 역할도 했습니다.

이 세 가지 향료를 유향(乳香, frankincense)에 섞습니다. 유향은 아라비아 사막에 서식하는 유향나무에 상처를 입혀서 채취한 진액으로 쓴맛이 나지만 대단히 상쾌한 꽃향기를 발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재료들은 진정한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잘 말해 줍니다. 뜨거운 태양빛을 받아 진액이 스며 나와 방울이 맺히는 소합향처럼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강렬한 은혜 아래 우리 안에서 자발적으로 스며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개의 껍질을 잘게 부수듯 우리의 육신의 자아가 깨어지고 그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 향연이 되어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입니다. 단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삶의 필요만을 구하는 기도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고 지극히 자아적인 것입니다. 나의 자아와 육체의 욕망은 죽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구하는 것이 바로 껍질의 부서짐입니다.

풍자향은 칼로 베임을 당한 곳에서 나오는 진액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더욱 향기를 발하는 향료가 되게 합니다. 고난 속에서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다윗의 시편에서 하나님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시 50:15). 고난 속에 부르짖는 기도는 방부제처럼 우리 영혼을 타락의 죄악에서 지켜 줍니다. 고난은 쓰지만 향의 효과는 큽니다. 이 세 가지 향 재료는 유향과 섞여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합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향기 나게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교제의 삶은 하나님 앞과 세상 속에서 향기를 발합니다.

향 제조에 첨가되는 또 하나의 재료는 소금입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지만 영적인 면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언약을 나타냅니다. 레위기 2:13에서는 소제를 드릴 때 ‘언약의 소금’을 반드시 포함시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민수기 18:19에서 레위인에게와 역대하 13:5에서 다윗과 맺은 언약을 ‘소금언약’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2) 금지사항과 의미

향과 관련된 금지명령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분향단에 하나님의 방식대로 만든 향 외에 다른 향을 절대 사르지 말라는 것과 또 하나는 앞서도 보았듯이 이러한 제조과정으로 만들어진 향은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향재료들은 인반적인 것들이라서 그것을 가지고 사람이 임의로 삶에 필요한 향품을 만들어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겠으나 다만 거룩한 향을 만드는 동일한 방식으로 제조하여 사람이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집니다.

‘거룩한 것’이란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해야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개별적인 향 재료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르는 제조의 방식이 거룩한 것입니다. 상징이나 그림자란 영적이거나 앞으로 다가올 어떤 실체를 보여 주는 것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말씀하신 대로 해야만 합니다. 분향단의 향은 성도들의 기도와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라는 실체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령하신 방식대로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동일한 제조법으로 사람을 위하여 만들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기도는 오직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기도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고 인간이 만든 우상도 역시 우리의 기도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께만 이 분향과 기도가 드려져야 합니다.

3. 분향단은 기도의 사람이신 예수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병자를 고치시거나 말씀을 가르치시는 사역과 함께 가장 많이 하신 일은 기도였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막 6:4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 5:16)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한다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이란 지존자이고 전능자이며 주권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란 존재는 기도하는 분이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입장으로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의 모범이 되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삶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사는 것이 합당한가를 본보기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가 사역을 하지 않는 시간은 거의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또 그의 기도는 구원받고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중보 사역은 육신을 입으셨을 때부터 부활하여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으로 중보하시는 시점까지, 그리고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넘어지지 않도록 중보기도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사도들을 세울 때 밤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 6:12-13)

요한복음 17장 전체에는 제자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죽으심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는 자신을 핍박하고 조롱하며 능욕하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중보기도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자기를 부인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합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그 때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흘러나왔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마치 진액이 나무에서 방울처럼 스며 나오는 소합향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는 나감향처럼 깨어지고 부서졌습니다. 풍자향처럼 채찍맞고 가시관 쓰이고 창에 찔리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생명을 내어놓으신 그의 기도는 향기로운 향연이 되어 보좌로 올라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전히 중보자로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예수님은 부활 후 살려주시는 영(성령)으로, 다른 형태의 보혜사로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4. 분향단의 뿔

앞서 번제단에 대해 나눌 때 네 뿔이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구원의 뿔이라고 한 것을 보았습니다. 분향단에 있는 네 뿔도 역시 동일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초월적 권능을 우리 삶의 현장에 나타나게 하는 능력의 통로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면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막 9:29).

분향단은 속죄소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중보는 구원과 절대적으로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중보의 힘으로 연약함 가운데서 우리가 굳게 설 수 있고 또 성도들이 하는 진정한 기도는 믿음 안에 든든히 서 있게 하고 죄악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베드로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 분향단의 불에 대한 중요한 명령

레위기 10장에는 대단히 당황스러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가 성소에서 분향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 10:1)

그들이 죽임을 당한 이유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불이란 무엇일까요? 레위기 16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록상으로 보면 이는 대속죄일에 대한 규정으로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언급되지만 이미 성막을 만드는 모든 과정에 모세가 세부적인 사항들을 자세히 가르쳤던 내용일 것입니다.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레 16:12)

분향단에 사용되는 불은 번제단에서 가져오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번제단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향을 사른 것으로 보입니다.

성막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있어서도 향로에 향을 사를 때는 번제단에서 가져온 불을 사용했습니다.

민수기의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광야에서 고라의 반역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매우 진노하셔서 반역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심판하시자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민 16:41).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온 백성에게까지 진노하셔서 전염병으로 그들을 치십니다, 이때 모세는 아론에게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에서 불을 담아 향을 피우고 회중들에게 가서 속죄하라고 다급하게 말합니다.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피워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작되었음이니라”(민 16:46)

아론이 모세의 말대로 하자 염병이 그칩니다. 향로에 향을 사를 때는 반드시 제단에서 불을 가져와야 합니다. 속죄 사역과 기도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것으로 영적 실체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번제단은 우리 죄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그림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속죄 사역을 이루신 복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모든 간구의 바탕에는 복음의 진리와 영혼 구원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면 다른 복음이고 다른 불입니다. 그 복음이의 진리가 바탕되지 않는 기도의 제단은 다른 불로 향을 사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구하는 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로움이 되는 복음 진리를 바탕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위한 모든 중보의 사역은 복음과 영혼 구원이 중심이 되고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국가의 안위와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그 바탕에는 복음과 영혼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1-4)

소위 성령 사역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 원칙을 망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역의 성격상 특히 기도하는 일에 많은 비중을 두지만 그 기도와 사역이 복음이나 영혼 구원과는 거리가 먼 ‘능력의 나타남’ 자체를 추구하거나 ‘성공과 축복과 번영’이라는 기복 신앙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 역시 번제단에서 가져온 불이 아닌 다른 불로 향을 사르는 것과 같습니다.

불은 반드시 번제단에서 가져온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와 간구와 추구하는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복음에서 가져온 것이라야 합니다.

분향단은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기도를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기도 생활의 모범입니다.

6. 분향은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지며 또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출 30:7-8)

번제단에 제사가 끊이지 않으며 떡상에 떡이 항상 진설되어야 하고 등잔대에 불이 항상 켜 있어야 하며 분향단에도 아침 저녁으로 끊이지 않고 향을 살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중보 사역은 다 마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도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눅 18:1)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 12:12)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6-17)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9일 / 03- 18-2024(월)
출애굽기 29:1-46
제사장 직분(1절)
찬송 / 341장(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제사장의 성별식

1. 물로 씻고 제사장 옷을 입음

준비물 / 젊은 수소 1, 수양 2, 무교병, 과자, 무교 전병
과정 / 물로 씻김, 제사장 의복, 머리에 기름 부음

하나님은 모세에게 젊은 수소 하나와 숫양 둘, 무교병과 과자와 무교 전병을 가져오고 성막 뜰로 들어와 거기서 아론과 그 아들들을 만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먼저 물로 씻겨야 했고 대제사장의 옷을 아론에게 입혀야 하는 것입니다.
아론은 그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아야 했습니다.
특별한 임무를 받으면서 기름부음 받는 직분은 제사장 이외에 선지자, 왕을 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아론의 아들들은 기름부음을 받진 않았지만 속옷과 때를 포함하는 제사장의 복장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a. 무교병(레 2:4)
b. 물로 씻음(히 10:22)

2. 속죄제

아론은 먼저 수송아지로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이라는 특별한 직분을 맡은 사람일지라도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죄에 속해 있음을 기억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때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하는 것은 동일시를 뜻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그들 대신해서 죽은 짐승과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죄인 됨과 피로 씻음의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매년 대속죄일을 통해서 제사장들은 씻음을 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를 대표하는 자들의 허물을 그냥 넘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주셨습니다.
피의 일부는 번제단 뿔에 발랐고, 나머지는 단 밑에 쏟았습니다.

a. 안수(레 8:14)
b. 속죄제(출 30:10)

3. 번제와 화제

숫양 둘 중 하나로 드리는 두 번째 제사는 번제로 드려야 했습니다.
예배자와 제사장들이 먹는 제사와는 달리 번제는 제단 위에서 전부를 태워야 했습니다.
번제는 또한 제사장으로 위임받는 사람이 자기 전체를 다 드려 그 직무에 임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른 숫양으로는 세 번째 희생을 드려야 합니다.
그 피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오른쪽 귀뿌리와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발라야 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정결하고 성별되었다는 표시가 됩니다.
귀뿌리의 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의 성별을 상징하며, 엄지 손가락의 피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의 거룩성을 묘사하고 엄지 발가락의 피는 하나님을 섬길 때에 조심스럽게 걸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숫양의 피는 단 주위에 그리고 관유와 함께 제사장들과 그들의 옷에 뿌려야 했습니다.

a. 숫양(창 22:13)
b. 번제(민 29:13)

4. 요제

세 번째 제사는 화목제의 범주에 속했으며, 위임제에 맞게 조금 수정되었습니다.
화목제의 본질은 제물의 일부를 경배자가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화목되고 따라서 하나님께 가납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이 제사의 일부는 '요제'로서 그 제물이 하나님께 속했음을 강조하는 의식 행위였습니다.
요제를 드린 다음에는 대개 하나님의 대표자들인 제사장들이 그 제물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졌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이 드린 첫번째 제물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숫양의 가슴은 요제로서 아론과 그 아들들이 먹어야 할 몫입니다.
누군가가 화목제를 드릴 때 그 짐승의 가슴과 넓적다리는 항상 제사장들의 몫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칠 일 동안의 성별식에서 아론의 대제사장의 성의는 그를 계승한 아들에게 주어지고 다음 세대까지 계속 전달 계승되어야 했습니다.
또한 회막 문에서 먹어야 할 위임식 숫양의 먹는 부분에 대해서 지시하고 이 경우 숫양과 떡은 매우 거룩한 성질의 식사로서 남은 것은 모두 태웠습니다.
제사장 위임식은 칠 일 동안 행하며 매일 속죄제로 수송아지 하나를 드렸습니다.
칠 일 동안 단은 거룩한 섬김을 위해 제사를 통하여 속죄되고 성별되어야 했습니다.

a. 위임식(레 8:28)
b. 요제(민 5:25)

매일 드려야 하는 번제

1.  소제와 전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번 소제(밀가루와 기름)와 전제(포도주)와 함께 어린 양 두 마리를 드려야 했습니다. 매일의 제물에는 백성들의 일상적인 식사의 요소들, 즉 고기와 밀가루와 기름과 포도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매일의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였습니다.

a. 어린 양(겔 46:13)
b. 소제(레 2:7)

2. 매일 번제의 중요성

이 마지막 구절은 이스라엘의 일상 생활에서 매일의 번제가 갖는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거기서 만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하나님과의 교제는 죄를 위해 흘린 피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매일 두 차례의 이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이나 일반 백성은 자신의 궁핍과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a. 속죄의 피(히 9:22)
b. 하나님과의 교제(시 16:8)

결론 /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을 기름부으셔서 성막에서의 섬기는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제사장들은 성별 예배를 통해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갔고 자신의 삶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사장들이 성별되어 여호와를 섬길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며 그들은 그분이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선영목사(소천 2019년 1월



김선영 목사님이 유방암과 신장결석등의 병으로 1월경 소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검색어가 많이 유입이 되어 왜 그런가 알아봤더니 소천하셨고 예전 8개 간증 중 하나와 비슷한게 마지막 간증으로 올라왔습니다.
내용은 8개짜리 간증을 들으신분들은 다 아시는 내용입니다.

https://blog.naver.com/470123/220870136907


안녕하십니까?
저는 3개월간 교회를 안나가다가 다시 마음 다잡고 경기 시흥 월곶에 있는 살구선교회 새마음교회 김선영 목사님께서 사역하시는 곳에서 예배 드리는 성도입니다.

저희 교회는 교인의 90%가 다 외지에서 오시는 분들입니다.
저도 평택에서 시흥으로 다니구요.
가장 멀리서 오시는 분은 충북 충주에서 오십니다.

​작년 3월에 캐나다 영생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다가 국내로 집회차 계시던중 하나님의 명령으로 짐도 제대로 챙겨오시지 못한 상황에서 시흥 월곶에 개척을 하게 됐습니다.

​참고로 성도수가 30여분 정도로 미미한 수라 월 사례비도 없이 목회를 하십니다.
교회 이사장님은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께서 운영해주신다는 믿음만으로 오직 복음 전하시는데만 매진하고 계십니다.

​김선영 목사님은 외부에서 특히 해외에서도 초빙을 많이 받으십니다.
근데 모든걸 자비로 가시고 현지에서는 사례비도 안 받으세요.
하나님이 다 하신거니까 본인은 한것이 없다라는 목사님만의 고집 때문에요.

​저희 김선영 목사님이 지금 많이 아프세요 결석으로 허리가 끊어질듯한 고통과 유방암까지 지금 말도 아니게 고생이세요.
목사님 말로는 예수님 믿고 이렇게 아파보긴 첨이래요.
기도 좀 부탁드릴께요.

​참고로 저희 교회에서는 오늘부터 저녁 8시에 모여서 합심기도 하기로 했어요 당분간 계속요.
저희 목사님 너무 불쌍해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볼려는 방편으로 여기에 글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김선영목사님은 20살때 병원에서 사형선고 받고 예수님 믿고 영접하신후 지금까지 40여년을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쭈욱 가고 계셨던 분이에요.

故김선영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 [살든지 죽든지 오직 주님께 영광!]

youtu.be/nhk8mTcpryk


김선영 목사님의 놀라운 회심 간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