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聖殿)을 정화(淨化)하신 예수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교의 예배와 삶의 중심이었다.
성전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백성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제사를 드리는 처소였다.
그런데 예수 당시 성전은 율법주의에 빠진 이스라엘이 속죄를 위하여 타성적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을 사고 파는 종교적 장사터로 변모하였다.
예수는 이 사실을 보고 진노하셨고 동물들을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테이블을 뒤엎으시면서 성전을 정화하신 것이다.
I. 구약의 성전 : 가시적 성전
구약 출애굽 광야시절에서는 하나님은 이동식 성전인 성막(聖幕, tabernacle)에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셨다.
성막의 지성소는 하나님 임재의 처소였고, 가장 거룩하였다.
성소에서는 속죄물을 바침으로써 백성들의 죄가 속(贖)함을 받았다.
지성소(至聖所, sanctum sanctorum)에는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 들어가 희생의 제물을 바침으로써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였다.
성막에는 하나님의 법궤와 만나와 아론의 지팡이가 진설(陳設)되었다.
성막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였다.
모세는 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만났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후에는 솔로몬 왕에 이르러 비로소 예루살렘 성전이 건립되었다.
이 솔로몬 성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이 성전은 바벨론(Babylon)제국에 의하여 훼파되고 하나님의 전(殿)의 집기들은 바벨론으로 옮겨가게 된다.
구약의 역사서인 역대하서는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여호야김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년 동안 다스리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와서 그를 치고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느부갓네살이 또 여호와의 전 기구들을 바벨론으로 가져다가 바벨론에 있는 자기 신당에 두었더라”(역대하 36:5-7).
그리고 다니엘서 서문에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殿)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다니엘 1:1-2).
그리하여 무너진 성전은 70년 후에 에스라와 학개와 스룹바벨이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복구되고, 헤롯 시대에 와서 성전은 다시 확장 신축된다.
II. 성전을 정화하심 : 요한복음의 기록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복음서 앞부분에 예수의 성전을 정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는 복음서 끝부분에 기록되고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성전 정화가 가나 혼인 잔치와 같이 복음서 서두에 놓여 있다.
여기에는 성전 되신 예수의 메시아성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편집 의도가 부각되어 있다.
유대인의 유월절 절기에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 가신다.
성전은 내뜰과 외뜰이 있다.
외뜰은 내뜰로 들어가는 것이 금지된 이방인 방문자들에게 열려 있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경배하러온 이방인 경외자들은 외뜰에서 경배해야만 했다.
이방인 경외자들은 방문시 히브리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도록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이사야는 예언하였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일컬어지게 될 것이다”(사 56:7).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성전은 기도의 집에서 종교적 장사터로 변모되어갔다.
짐승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희생제물로 사용되었다.
짐승들은 제사드리는 자들에게 상품처럼 팔렸다.
그런데 이것이 관례가 되어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전(殿)은 장사터로 변모된다.
외뜰이 팔리는 짐승으로 채워져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경배할 공간까지 빼앗았다.
성전은 경건의 영과 헌신의 정신 없이 단지 형식적인 율법적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각종 번제물을 사고 파는 장사터로 변모한 것이다.
예수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신다”(요 2:14-15).
그리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신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6).
성전부패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성전에서 일과를 수행하는 일반 제사장들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지도급 제사장 가문이었다.(에녹1서, 모세의 유언 5:3-6:1)
예수의 성전 정화 행위는 헤롯 성전 뜰의 남단에 위치한 주랑(Royal Portico) 가까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전 예배에는 순결한 비둘기와 동물이 필요했다.
환전상들은 성전세를 지불하려는 자들에게 두로 세겔(Tyrian Shekel)로 환전해 주었다.
두로 세겔은 비록 유대인들에게 반감을 일으키는 상징을 담고 있기는 했지만 최고의 품질과 함께 은의 함량도 가장 높았다.
두로 세겔은 오늘날 미국 달러(dollar)처럼 당시 구할 수 있는 가장 잘 통용된 주화(鑄貨)였다.
성전을 정화하신 이러한 예수의 행위를 요한은 다음같이 해석한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 2:17).
요한과 제자들은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의 메시아적 사명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복음서 저자 마태는 이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의 행위가 예수를 십자가 죽음에 이르게 한 고발거리를 제공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가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공회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이 와서 성전을 정화할 시(時) 예수가 한 말을 고발하고 있다.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마 26:61).
유대인들에 의하면 이들은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성전을 허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손상하는 것이며, 참람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제사장 신분도 아니고 갈릴리에서 올라온 무명 랍비였던 예수가 성전을 정화하신 행위는 그의 메시아 의식에서 바르게 조명될 수 있다.
성전 정화 행위는 예수의 상징적인 메시아 행위(symbolic Messianic action)였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실 시에 하신 말씀 “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만에 짓겠다”는 나중에 예수가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을 때 성전 모독의 죄목으로 고발된다.
III. 성전 정화의 권위는 예수의 메시아 되심에서 나옴
유대인들은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의 행위에 대하여 항의하면서 이에 대한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한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요 2:18).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에게 그가 어디서 그런 일을 행하는 권셰를 받았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대답한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성전 정화 행위는 예수의 메시아 의식과 관련하여 이해될 수 있다.
당시 제사장 신분도 아니고 변두리 지역인 갈릴리에서 올라온 무명 랍비에 불과한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한 것은 그의 메시아적 자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성전 정화 행위는 선지자적 표적(表蹟, wonder) 행위 이상의 것이었다.
우리는 구약의 전통에서 이사야나 에스겔 등 예언자들에게서 타락한 제의(祭儀)에 대한 비판적 예언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랍비 예수가 몸소 채찍을 들고 성전을 정화하였다는 것은 예언자적 비판을 넘어선 나사렛 예수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독특한 행위이다.
이것은 메시아적 표적 행위였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이러한 예수의 메시아적 자의식을 다음같이 표현하고 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라는 구약의 수난 시편 69장 9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장사터로 변한 성전의 불결해진 모습을 보면서 성전 자체가 되시는 자신의 몸을 청결케 하여야 한다는 성전(聖殿)사모의 열정을 표출한 것이다.
예수의 인성이 그 안에 계시는 신성을 표출한 것이다.
예수는 그의 몸인 새로운 영적 성전을 지으시기 위하여 돌로 지어지고 의식(儀式)으로 집전되는 옛 성전을 허시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말씀에는 그의 메시아적 사역의 핵심 사상이 들어 있다.
성전에서 사고 파는 행위를 금지한 이유는 당시 성전 제사가 타락한 것을 지적할 뿐 아니라 성전 제사가 자신이 몸으로 드릴 종말론적 제사에 의하여 능가될 것을 예표하신 것이다.
또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짓겠노라”는 예수의 말씀은 메시아로서의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촉발하게 하는 의도가 담겨있는 말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죄를 속하고 이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는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종말론적으로 성취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IV. 성전 정화 행위의 종말론적 성격
성전 정화 행위가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 직후에 일어났다는 것은 예수 정화 행위의 종말론적 성격을 드러낸다.
예수의 성전 정화 행위는 유대교 정결법을 수호하려한 단순한 개혁 행위로 이해하는 것은 이 행위가 갖는 종말론적 성격을 놓치는 것이다. 그것은 세 가지 종말론적 의미를 갖는다.
제도적 성전 제사 시대 종언 : 예수 안에서 종말론적 예배 시대 도래
제도적 성전 제사 시대가 지나갔다는 것이다.
제도적인 성전은 모세가 준 율법에 의하여 생긴 제도다.
율법은 신성한 하나님의 법이긴 하나 이 율법은 인간의 외면적 행위에 대한 규칙을 명하는 것으로 그것의 효율성은 외부적인 것이었다. 율법에 의한 예배는 진정한 내면성에서 나오는 진심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었다.
율법에 의하면 진정한 예배란 단지 짐승의 기름이나 제물만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법을 행하는 의로운 제사여야 했다. 성전 제사가 타락하게 되었을 때 이사야는 불의한 제사를 비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이사야 1:11).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이사야 1:13).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이사야 1:16-17).
이러한 구약적 예배는 제물드리는 자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물 드리는 자의 허물을 번제 제물에 전가(轉嫁)하여 사함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예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되심은 옛 제사의 종말론적인 성취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구약적 예배가 끝나고 그 자신 안에서 종말론적 예배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한복음 4:21-22).
예수는 성전에서 나와서 제자들에게 성전파괴를 예언하신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태복음 24:1-2).
예수의 성전 파괴 예언은 추후 70년에 로마 디도 장군이 이끈 군대에 의하여 파괴된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함께 구약적 성전 예배는 역사 속에서 종말을 고하게 된다.
신령한 성전의 시대 도래 : 예수의 몸이 성전
신령한 성전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예수의 정화 행위는 메시아가 성전 제도를 바로 잡을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를 시사한다.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제 성전 시대가 지나가고 영으로 드리는 예배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신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하나님에게는 이제 더 이상 외형적 제물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아가 오시면 참된 예배를 알려주실 것이라는 당시 널리 알려진 메시아 대망을 피력한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 4:25).
이에 예수는 자신이 바로 메시아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요 4:26).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제사장에 따라서 예배의 성격이 달라지는 가시적 성전이 필요 없다.
예수의 몸은 신령한 성전이다: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
소아시아의 콘스탄티노블에 있는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의 점령 후에 모스코로 변했고,
러시아 정교의 화려한 성전은 볼세비키 혁명과 70년간 공산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곡물창고가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영국 국교회(성공회), 덴마크 루터교회, 독일의 교회당, 네덜란드 교회당이 폐쇄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교회가 슈퍼마켓이나 꽃집 또는 서점이나 헬스 클럽으로 변경된 사례들이 발생했다.
가시적 성전은 변화무상하며, 영구적이 아니다.
가시적 성전은 비가시적 성전을 상징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가시적 성전은 유한하나 비가시적 성전은 영원하다.
하늘의 성전인 새 예루살렘에서는 더 이상 성전이 필요 없다.
성전은 (유대인들만의 성전 너머) 만인의 기도의 집
성전은 이제 더 이상 유대인들만의 성전이 아니라 만인의 기도의 집이다.
요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요 2:16b)
요한은 예수의 성전 정화 동기를 구약 시편 69편 9절을 가져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요 2:17)라고 설명하고 있다. 요한의 이러한 설명을 공관복음과 연결시키면 보다 적극적으로 구약 이사야의 예언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사 56:7b; 막 11:17a) 라는 구절과 연계하여 이해될 수 있다.
마태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21:13),
누가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눅 19:46)라고 인용했다.
“만민”을 누락했으나 인용된 구약 이사야서의 원문에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의 말씀은 성전이 더 이상 유대인만의 기도처가 아니라 택함을 맏은 모든 사람들의 기도처가 될 것을 시사(示唆)해주고 있다.
마가가 인용한 이사야 56장 7절 다음에는 하나님 선택의 보편화가 약속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사 56:8). 이방인들도 복음을 믿고 회개하면 성령으로 중생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되며 하나님의 성전에서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과 교통하게 된다.
V. 성전 보다 큰 이 인자 예수 그리스도
마태는 예수와 바리새인 간의 안식일 논쟁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시장하여 밀이삭을 잘라 먹었다.
이 장면을 본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율례를 어겼다고 비난하였다.
예수는 이에 관련하여 구약 율법 정신의 관점에서 제자들의 행위를 변호하신다.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마태복음 12:3-5).
안식일에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예배와 의식 집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안식일에 쉴 수 없다.
일을 해야만한다.
그러므로 직무상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예수는 모세 율법이 제정한 성전법을 넘어서서 성전(聖殿)의 정신을 말씀하시고 자신에게 고유한 전대미문의 결정적인 메시아 권위를 표명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2:6-8).
예수 자신은 보이는 구약의 성전보다도 크신 자다.
성전의 제사에는 회개와 새로운 삶의 결단이라는 윤리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렇치 않고 드리는 불의한 제사는 하나님이 미워하신다.
예수의 말씀은 불의한 제물을 드리는 당시의 부패한 성전제사를 질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이사야의 말씀을 확인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이사야 1:11-17).
하나님은 인격적인 신이시므로 정의로운 삶과 행실이 동반되지 않은 종교적인 제물 희생을 싫어하신다.
하나님은 선행을 행하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우며, 고아와 과부의 억울함을 변호하는 삶의 제사를 원하신다.
이러한 윤리적 제사는 구약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로부터 바라시는 것이었다.
관례적으로 드리는 속죄제, 그리고 악행과 죄을 행하면서 신의 진노를 무마하기 위하여 드려지는 제물 희생을 하나님은 가증스럽게 여기신다.
하나님은 의로운 제사를 원하신다.
예수의 성전 정화는 구약 이사야가 대언한 의로운 제사를 메시아적 권위로서 수행하신 행위이다.
구약의 다윗 회개의 시편도 이러한 예수가 가르치는 제사의 정신을 말해주고 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시편 51:16-19).
예수는 성전 제사의 정신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헌신과 회개에 기반해야 하는 것이요, 각종 성전 제사란 이의 가시적 표현이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전대미문의 결정적인 권위를 표명하신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메시아인 자신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공으로서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충족시키신다는 것이다.
VI. 신약의 성전 : 예수의 몸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씀: “내가 삼일 만에 이 성전을 지으리라” 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를 힐난한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요 2:20). 예수의 이 말씀은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새 성전을 지으실 것을 공포(公布)하신 것이다.
헤롯 왕은 주전 20년/19년에 화려한 성전 확장공사를 시작하여 실질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을 새로이 건축하였다. 46년간이나 걸렸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아는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말씀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허튼 소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 요한은 “삼일만에 성전을 일으키리라”는 예수의 말씀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21-22).
이 성전 정화 행위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과의 연관 속에서만 바르게 해석되어 질 수 있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성전이란 예수의 몸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성전인 예수를 헐어 버리고자 했다. 말하자면, 성전이신 예수를 죽이고자 했다. 몸을 지니신 예수는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는 장사된지 사흘 만에 다시 사셨다.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예수는 그의 몸으로 새로운 성전을 지으신 것이다. 몸을 지닌 예수는 부활 하신 후, 성령의 임재 안에서 새로운 성전이 되신다. 이제 신령한 성전이신 예수(교회)는 우리가 하나님 만나는 처소가 된다. 사도 요한은 그의 계시록에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이상 보이는 성전이 필요없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스스로 성전이 되시기 때문이라고 하나님의 장막이 인간과 함께 거하는 종말론적 사건을 증언한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
VII. 성도(聖徒)의 몸인 성전
나사렛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인 진리의 영을 보내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복음서 저자인 요한은 예수의 말씀을 전해 주고 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예수가 보내실 다른 보혜사란 ‘희랍어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etos)로서 ”변호사/조력자”를 의미한다. 다른 보혜사는 위로자(comforter)이다. 예수는 그가 부활하신 후에 위로자인 성령을 보내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에 따라서 오순절 이후에 믿는 자의 마음 속에 위로자 성령을 보내어 주셔서 신자들의 마음 속에 내주하고 계신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모신 신자들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聖殿)이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성령의 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신자의 몸이 성령의 전인 것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고전 6:17)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신자의 마음 속에 인격적으로 내주하기 때문이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여기서 사도 바울은 보이지 않는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가보면 헤롯의 성전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예수께서 성전 정화하신 사건 이후 40년만에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년 로마군에 의하여 훼파된다. 그 후로 돌로 지어진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옛날 성전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이슬람이 세운 황금 성전 모스크(mosque)이다. 그리고 훼파된 성벽의 일부에서 유대인 방문객들이 종이 쪽지에 기도문을 써서 성벽 틈에 밀어 넣은 장면이 보인다.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은 더 이상 가시적 성전 속에 계시지 않으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의 전파를 통하여 복음자체 이신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마음 속에 영으로 내주하심으로써 성전을 이루고 계신다.
VIII. 사라지고 있는 오늘날 유럽교회 : 한국 등 제3지역에서 성장하는 교회
기독교 이후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2천년 역사를 지녀왔던 유럽지역의 교회당은 폐쇄되거나 이슬람 모스크나 세속 상업용 건물 등으로 변모하고 있다.
서부 유럽에는 신도들의 수가 급감하자 폐쇄되어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교회당이 수백 개에 이른다.
특히 덴마크와 영국의 시골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지역 당국이 재정을 지원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서 오래된 교회 건물은 도서관이나 문화 공간으로 용도 변경하여 어떤 건물은 상업적 용도로 탈바꿈 되기도 한다.
영국 국교회(성공회)에서는 매년 약 20교회가 문을 닫으며, 덴마크에서는 매년 200개의 교회들이 용도가 변경되거나 사용되지 않게 된다.
독일의 천주교회는 지난 10년 간 515개의 교회가 폐쇄되었다.
교회 폐쇄가 가장 심한 유럽의 국가는 네덜란드이다.
네덜란드의 천주교 지도자들은 앞으로 10년 동안 전체 천주교회 1,600개의 2/3 정도가 수명을 다할 것이며, 4년 이내에 700개의 개신교 교회가 문을 닫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네덜란드는 동성애 허용 등 각종 세속주의와 인본적 자유주의가 득세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헤르만 바빙크, 아브라함 카이퍼 등이 주도된 개혁주의 정통주의가 교회와 사회를 이끌었으나 오늘날 인본적 자유주의가 교회와 사회를 지배하기에 이르런 것이다.
유럽교회가 사양(斜陽)길을 가고 있는 중요한 이유는 교회가 가진 영성의 쇠퇴다.
교회 안에 동성애, 혼외정사 허용, 종교다원주의, 세속주의가 들어오면서 이에 많은 신자들은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고 있는 것이다.
유럽에서 유대교는 아직 굳건하며, 이슬람은 아프리카와 중동의 무슬림 국가들에서 들어오는 이주민들의 증가로 오히려 성장하고 있다. 미국의 Pew Research Center에 따르면, 유럽의 무슬림 비율은 1990년 4.1%에서 2010년에는 6%로 증가했으며, 2030년에는 8% 정도로 높아지고 그 수는 5,8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교회의 쇠퇴현상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시적 교회는 조직화된 교회로서 그 수명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단체나 조직이나 국가도 그 수명이 있고 그 수명이 다하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
유럽의 가시적 교회가 세속화 됨으로써 교회의 영성이 상실되고 이 가운데 신자들도 기독교를 하나의 문화와 생활방식으로만 이해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비가시적 교회는 시대와 공간을 너머서서 영원히 지속한다.
비가시적 교회는 성령과 말씀이 지배하는 신령한 공동체다.
지구촌 북반구에 속한 유럽과 미국에서 쇠퇴한 교회는 오늘날 지구촌 남반부 지역과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지역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가시적 교회도 크게 성장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비록 탈성장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하나 세계적으로 메가처치(mega-church)가 7개나 있다.
교회의 주인이신 성부, 성자 성령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만이 쇠퇴하지 않고 썩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계시고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IX. 새 하늘과 새 땅의 성전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은 그의 계시록에서 다시 성전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지는 성전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요한은 종말론적으로 다가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본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요한계시록 21:1-2).
이 종말론적인 새 하늘과 새 땅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인간 가운데 거하신다.
하나님이 거처를 인간의 거처 가운데 정하신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요한계시록 21:3).
종말론적 현실에서 새 예루살렘 안에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요한은 증언한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요한계시록 21:22).
하나님과 어린 양 그리스도가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해와 달도 필요없다.
하나님과 어린 양 그리스도가 새 하늘과 새 땅의 등불이 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 누리에 편만하기 때문이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요한계시록 21:23).
지상의 성전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일 뿐이다. 지상의 성전은 성전 자체이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상징일 뿐이다.
X. 성전의 완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옛 예루살렘 성전이나 신약의 교회당은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 그의 성령을 보내어 주신 이래(以來) 하나님은 이제 그의 성도들의 마음 속에 내주하신다.
그러나 바울은 아직도 우리는 하나님을 희미하게 본다고 말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세상의 종말에 이르러 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며, 주님이 우리를 아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알게 된다.
이 장면을 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계시록 21장에 환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성전이 없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요한계시록 21:22).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교는 완성되기 때문이다.
지상의 성전이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난다.
그 때 하나님의 장막이 인간들 가운데 계셔서 하나님이 친히 인간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이다(요한계시록 21:3).
역대상 26장 요약
고라, 므라리 자손이 성전 문지기 임무를 맡았고, 게르손의 후손들은 성전 곳간을 맡았고, 다른 레위인들에게도 여러 임무를 맡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27장 요약
월별로 왕실 근무 지도자와 관원 24,000명을 배치, 이스라엘 각 지파 지도자들의 명단과 다윗왕 왕실의 재산 관리를 돌보는 자들의 명단,신하들과 개인 고문의 명단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역대상 28장 요약
다윗이 성전 지을 계획을 신하들에게 알려주었고, 솔로몬에게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라고 당부하였으며 성전을 지을 설계, 예배, 기구 등을 설명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29장 요약
성전을 짓기 위해서 다윗과 신하들은 하나님께 예물을 바쳤으며 다윗이 백성들과 함께 찬양과 기도를 드린 후 제사를 드렸으며, 이후 다윗이 죽고서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막(미시칸. mishkan ) מִשְׁכָּן
스트롱번호 4908
어원 / 793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39회 사용
성전(비이라. bîyrâh ) בִּירָה
스트롱번호 1002
구약 성경 / 16회 사용
교회(에클레시아. ĕkklēsia ) ἐκκλη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1577
1. 회. 2. 모임, 운집. 3. 행 7:38
발음
[ ĕkklēsia ]
몸(소마. sōma) σῶ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983
어원 / 4982에서 유래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 롬 12:5, 고전 10:17, 12:12, 27, 엡 1:23, 2:16, 4: 4, 12, 16, 5:23, 30, 골 1:18, 24, 2:19, 3:15.
관련 성경 / 몸(마 5:29, 눅 11:34, 고후 4:10), 시체(마 14:12, 요 19:31, 유 1:9), 주검(눅 17:37), 육체(요 2:21, 히 13:11), 형체(고전15:37, 38, 40), 종(계 18:13).
5월 10일(토) 역대상 26-2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전(29:2)
내가 이미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예비하였나니 곧 기구를 만들 금과 은과 놋과 철과 나무며 또 마노와 박을 보석과 꾸밀 보석과 채석과 다른 보석들과 화반석이 매우 많으며.
With all my resources I have provided for the temple of my God--gold for the gold work, silver for the silver, bronze for the bronze, iron for the iron and wood for the wood, as well as onyx for the settings, turquoise, stones of various colors, and all kinds of fine stone and marble--all of these in large quantities.
하나님의 전(殿)이란 하나님이 계신 곳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을 눈에 보이는 건물을 중심으로 "성막(聖幕)" "성전(聖殿)" "교회(敎會)" 라고 합니다.
반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심령(心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느 제한된 곳에 계시는 존재가 아닙니다.
야곱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창 28:17).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영적 존재입니다.
문제는 그 하나님이 여기에 계신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모실 곳을 건축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건축을 위한 온갖 재료를 준비하고 그 일을 다윗의 아들에게 위임하게 됩니다.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왕으로서 얼마든지 전을 건축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지만 건축하지 않았던 다윗의 믿음을 생각합니다.
또한 내가 건축하지 않는 것일지라도 아들을 위하여 넉넉한 마음으로 재료를 준비하는 다윗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고자 하는 다윗의 순종을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다윗과 같은 믿음과 생각과 순종을 잊지말아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유일하신 구세수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생각은 나를 버리는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의 계시를 찾는 것입니다.
순종은 이 길만이 내가 살아갈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다윗과 같이 잘못했을 때는 즉시 그 길에서 돌이켜 회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다윗과 같이 선한 계획일지라도 포기할 줄 알고 하나님의 계획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다윗처럼 모든 여건이 잘 갖추어졌어도 그 환경을 선택하지 않고 주님이 원하는 길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성전은 3부로 나누었습니다(울람)
(1) 현관(울람. ’ûwlâm) אוּלָם - 제사장이 들어오는 입구의 홀
אוּלָם
스트롱번호 197
발음
[ ’ûwlâm ]
어원 / 단축형으로 אֻלָם이 사용됨. 복수 אֻלָם, 481에서 유래[맨다는 의미로부터]
구약 성경 / 19회 사용
-
관련 성경 / 주랑(왕상 6:3), 낭실(대하 3:4, 욜 2:17), 현관(겔 40:7, 8, 41:15, 46:8).
(2) 헤칼. 성소(할론. challôwn) חַלּוֹן - 본관 곧 성소인데 붙박이 교창에서 빛이 스며듭니다(왕상 6:4).
성소는 높이가 약 13.63m 넓이가 약 9m 길이가 18.2m였습니다.
돌로 마루를 깔고 그 위에 백향목으로 덮었습니다. 성소 내부는 백향목으로 두르고 지붕은 백향목 서까래에 마루로
덮었습니다(왕상 6:9). 백단목 벽기둥들이 운치를 더 했습니다(10:12). 기둥에는 생명나무를 조각하고 금으로
입혔습니다(16:21).
חַלּוֹן
스트롱번호 2474
1. 창문. 2. 창 26:8. 3. 수 2:15
발음
[ challôwn ]
어원 / 혼성. 복수ים, 욜 2:9, וֹת, 겔 40:16, 2490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1회 사용
-
관련 성경 / 창(창 8:6, 왕하 9:30), 창문(수 2:21, 삿 5:28, 렘 9:21), 들창(잠 7:6).
(3) 지성소(드빌. debîyr) דְּבִיר - 지성소로 올라가는 층계 앞에 백향목으로 만든 작은 향단이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창도 없고 굴
같은 9m정방형 방인데 주님의 거하시는 방이었습니다(대하 3:8-13). 지성소는 성소보다 마루가 높으며 4.5m 높이 감람나무로 만들고 금으로 장식한 두 그룹이 법궤 위에 마주 섰습니다.
그룹은 베니게에서 들어온 날개 돋힌
스핑크스(여자 머리에 사자 몸)거나 베니게화한 천사신이었습니다(겔 9:22-25).
성전 남서북삼면에 있는 이층방들은 창고실로
썼는데 올라가는 문들과 좁은 충계가 안과 밖에 있었습니다.
דְּבִיר
스트롱번호 1687
1.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 2. 왕상 6:5. 3. 19-22
발음
[ debîyr ]
어원 / 1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6회 사용
-
1. 명사, 남성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 왕상 6:5,19-22, 8:6,8, 대하 3:16,4:20, 5:7,9.
-
관련 성경 / 지성소(왕상 6:5, 8:6, 대하 5:7), 내소(왕상 6:19, 7:49, 대하 4:20), 본전(대하 5:9), 성소(대하 3:16, 시 28:2).
성전(聖殿)

홀리랜드호텔에 있던 예루살렘 성전 모형. 현재는 이스라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성전(聖殿)은 '거룩한 전'이라는 뜻으로,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이자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를 올리는 장소로서 세워진 건축물을 가리킨다.
솔로몬 시대에 옛적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예루살렘 모리아산[1]에 최초로 건축되었고, 이후 구약시대 내내 이곳에서 제사가 이루어졌다.[2]
성전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성막을 그대로 따랐다.
다만 성막에 비해 시설의 전체적인 규모가 커졌고, 성전 기명의 숫자도 늘었다.
내소(內所)인 지성소(至聖所)에 언약궤를 보관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신약시대에는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성령의 전'이라 칭하기도 한다.
성전 역사 개괄
성전은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 '여호와의 집' 등으로 불렸다.[3]
성전 안에는 언약궤가 보관되어 있었다.
언약궤는 광야 생활 동안 이동식 성전인 성소(聖所), 곧 성막(聖幕)에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계속해서 여러 지역으로 옮겨졌다가 다윗이 시온성으로 들여왔다. 다윗은 성막에 보관하던 언약궤를 영구히 안치하기 위해 고정식 성소인 성전을 건축하기로 계획했다.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성전이 건축될 것을 예언하셨다. 이에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한 물자를 넉넉히 준비하고 성전과, 성전에서 사용될 기명들의 식양을 하나님이 알려주신 대로 그려 솔로몬에게 주었다.[4] 그의 사후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최초의 성전을 건축했다.[1] 그곳은 시온과 인접한 곳이었기에 점차 시온산을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기원전 6세기 바벨론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던 성전은, 성경의 예언대로 바사 제국의 왕 고레스가 유대 민족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령을 내림으로써 유대 총독 스룹바벨(히브리어: זְרֻבָּבֶל)[5]에 의해 재건됐다. 이후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예루살렘을 차지한 이방 나라들에 의해 또다시 수난을 겪었다. 로마의 통치 시기 때 헤롯 1세에 의해 증축이 시작되어 기원후 63년경에 비로소 완공되었지만, 약 7년 후인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의 예루살렘 공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솔로몬 성전(제1성전)
솔로몬 성전은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 대대적으로 건축된 최초의 성전이며 '제1성전'이라고도 부른다. 솔로몬 재위 4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7년 간의 공사를 거쳐 솔로몬 재위 11년에 준공되었다.[6] 이 성전은 남 유다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멸망당한 기원전 586년경에 파괴되기까지 약 400년 동안 영광을 누렸다.
건축 과정
솔로몬의 선대왕인 다윗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많은 전쟁을 치르며 피를 흘렸기에,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에 다윗은 솔로몬이 차질 없이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하나님이 알려주신 성전과 성전 기명의 식양을 솔로몬에게 주었고, 금은보석과 건축 재료를 많이 준비해 두었다.[7] 성경은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해 준비한 금만 10만 달란트에 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8]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자신의 재산으로 금과 은을 내어 봉헌했는데 금의 양만 해도 3000달란트였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즐거운 마음으로 금 5000달란트, 은 1만 달란트, 놋 1만 8000달란트와 철 10만 달란트와 보석을 봉헌했다.[9] 다윗의 사후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했을 때 짐꾼 7만 명과 산에서 돌을 떠낼 사람 8만 명에, 감독자만 3600명이 참여했다. 우호국이었던 두로의 후람왕은 기술자와 건축 자재를 배편으로 보내왔다.[10]
구조 및 구성

성전 모형도
성전의 구조와 구성은 역대하 3-5장과 열왕기상 6-7장에 기록되어 있다.
성전은 미리 다듬어둔 돌을 가지고 건축했으며, 중심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었고 그 주변으로 다락을 지었다. 다락은 3층 구조로,
많은 골방들이 있었다. 전체적인 성전의 규모가 커지면서 지성소도 장(長, 길이)과 광(廣, 너비)과 고(高, 높이)가 모두
20규빗으로 커졌지만 장·광·고가 동일하다는 특징은 그대로 유지됐다.[11]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를 덮는 속죄소의 그룹 천사와 별개로 그룹 둘을 크게 만들어 세웠다. 이 두 그룹은 외소를 바라보며 두 날개를 활짝 폈는데, 이는 지성소를 모두 덮는 크기였다.[12] 지성소의 그룹 날개 아래 언약궤가 위치했고,[13] 성막과 같이 휘장으로 외소와 구별했다.
성전 뜰에는 '바다'라고 불리는 대형 물두멍을 만들어 제사장이 이용하게 했고, 소형 물두멍 10개를 만들어 번제물을 씻게 했다.
놋으로 대형 제단도 만들었으며, 금으로 등대 10개를 만들어 외소 좌우에 두었다. 진설병을 둘 상 10개와, 성전에 쓸 100개의
대접을 만들었다. 분향단도 금으로 만들어 설치했다.
성전은 예루살렘 모리아산, 다윗이 매입했던 오르난(아라우나)의 타작마당 터에 지어졌다.[14] 성전의 방향은 광야 생활 동안 지었던 성막의 방향과 일치하여,[15][16] 성소와 지성소로 이루어진 성전 건물은 서쪽에, 제단은 동쪽에 있었다.
이후 역사
성전 짓는 일을 마치고 7일 동안 성전 낙성식을 행한 후 이어서 초막절을 지켰다.[17][18] 낙성식 때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던 솔로몬 성전은 이후 약 400년을 존속했으나, 기원전 586년경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략으로 불타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성전 기명들은 약탈당했으며, 백성들은 빈천한 자를 제외하고 대다수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19][20]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례와 명령을 버리고 다른 신을 숭배하면 그들과 더불어 성전 또한 버리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였다.[21]
스룹바벨 성전(제2성전)
유대 총독 스룹바벨의 주도하에 완공된 성전이라고 하여 흔히 스룹바벨 성전으로 부르며,[22] 두 번째 건축된 성전이므로 '제2성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70년의 바벨론 포로 기간이 지난 후 바사 왕 고레스는 바벨론을 점령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켰다.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을 내리고 성전 기명을 돌려주기까지 했는데,[23]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이뤄진 것이었다.[24] 기원전 537년경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남 유다 백성들은 이듬해부터 유대 총독 스룹바벨의 주도하에 성전의 지대를 놓고 건축에 착수했다.
건축 과정
스룹바벨 성전의 건축 과정은 에스라 3-6장에 기록되어 있다. 건축령이 내렸지만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유대인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기 전, 사마리아 지역은 앗수르의 영향으로 이방인들이 정착해 있었다.[25]
그들은 이방신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는 비정상적인 종교 생활을 했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들도 지금까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주장하면서 공사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여호수아)가 이를 거절하자 그들은
관료들에게 뇌물을 주어 공사를 막는가 하면 백성들에게 겁을 주어 약한 마음을 갖게 하기도 했다. 이방인들의 끈질긴 훼방으로, 성전
지대만 놓인 채 공사는 약 15년 동안 중단됐다. 당시 유대 백성들은 열심히 일해도 늘 결과가 좋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내버려두고 자신의 일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었다.[26]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는 성전 공사가 중단된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며 백성과 유대 총독 스룹바벨을 격려했다.[27][28][29]
기원전 520년경 선지자들의 활동으로, 오랫동안 중단된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 다시 시작되었다. 바사 제국의 다리오왕은 왕실의
창고에서 고레스의 조서를 발견했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선대왕인 고레스가 허락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다리오왕은 성전 건축을
막지 말라고 하는 한편 공사에 투입되는 비용까지 바사 제국의 세금으로 충당하라고 지시했다. 기원전 516년경에 드디어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었다.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봉헌식을 행했으며 하나님의 절기를 지켰다.
스룹바벨 성전의 자세한 구조와 구성은 성경에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이스라엘의 전성기에 건축했던 솔로몬 성전에 비해 규모와
영광이 미치지 못해 실망스러움을 느꼈던 이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은 선지자 학개를 통해 성전의 나중 영광이 더 클
것이라고 격려하시며 성전이 건축되면 큰 축복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셨다.[28]
이후 역사
50여 년 후 바사 제국의 관원으로 일하던 느헤미야는
고국의 예루살렘성이 여전히 훼파된 상태로 있고 백성들은 큰 환난과 능욕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후 느헤미야는 유대
총독이 되어, 성벽 재건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공사 소식을 들은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 아라비아 사람 게셈 등
여러 대적자가 건축을 방해하고 나섰다. 그들은 조롱과 방해를 일삼았고, 백성들을 죽이고 공사를 중단시킬 계획까지 세웠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격려했고, 백성들은 경계와 보초를 서며 성 건축을 이어갔다.
대적자들의 온갖 훼방을 이겨내고 드디어 예루살렘성이 완공되었다. 소식을 들은 모든 대적과 이방 사람들은 이 역사를 하나님이 이루셨다는 사실을 느끼고 두려워하며 낙담했다. 이후 7월 1일(나팔절)에는 백성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제사장 겸 학사인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배웠다. 15일 초막절에는
규례대로 초막을 짓고 7일간 절기를 거룩하게 지켰다. 백성들은 절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다시는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예루살렘성 중건을 기념하는 봉헌식이 거행되었고 느헤미야는 성전과 이스라엘 백성을 정결케 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가
기록된 때부터 예수님의 탄생 때까지 약 40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400년 동안 팔레스타인 지역은 여러 차례 패권이 바뀌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되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 역시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많은 수난을
겪었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의 왕이 된 알렉산더 대왕은
바사 제국을 비롯해 여러 국가를 정복하며 마케도니아에서부터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헬라 제국(헬레니즘 제국)을 건설했다. 알렉산더
사후에 휘하의 장군인 셀레우코스가 시리아 지역을 지배하면서 셀레우코스 왕조가 시작됐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유대인에게 헬라 신앙을 강요하며 핍박했다. 이 같은 정책에 유다 마카비(마카바이오스,
마카베오)가 셀레우코스 왕조에 무력으로 항쟁했고, 마침내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165년경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여 성전 내 제우스 신상을 파괴하고 성전을 정화한 뒤 새 번제단을 하나님께 봉헌했다. 하지만 독립의 기쁨을 누린 시간은
짧았다. 로마의 힘이 강해지면서 기원전 63년경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유대인들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헤롯 성전

헤롯 대왕이 개축한 예루살렘 성전(제2성전) 모형. 이스라엘 박물관.
헤롯 성전은 이두매(Idumea, 에돔) 출신의 헤롯 대왕이 건축한 성전이다.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공략할 때, 성전도 피해를 입었으나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다.[30] 헤롯은 훼손된 스룹바벨 성전(제2성전)을 웅장하게 재건축했다.[31][32]
건축 과정
로마는
식민지인 유대 나라에 이두매 출신의 헤롯을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유대교로 개종했다고는 하나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이방 출신의
통치자였다. 정통성이 부족했던 헤롯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원전 20년경 예루살렘 성전 증축에 착수했다. 성전의 건축은 예수님이 탄생하기 전부터 시작되어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며 성전을 정결케 하실 때가 건축 46년째였다.[33] 헤롯 성전은 이후에도 30년 이상이 더 걸려서 완공되었다. 헤롯 성전은 크고 화려했다. 성전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성전의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셨다.[34][35]
이후 역사
헤롯 성전은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예수님의 예언대로 로마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36]
2세기에 로마는 또다시 봉기한 유대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내쫓은 뒤 예루살렘 멸망일 하루만 출입을
허가했다. 이때 남은 성전 서쪽 외벽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통곡과 기도를 했다고 하여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유적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37] 또한 로마인들은 파괴된 성전 터에 로마식 신전을 세우고 예루살렘의 이름을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바꾸고,[38] 안식일 등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39] 기원후 7세기경에는 이슬람 제국이 이 지역을 차지하여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으로 불리는 이슬람식 사원을 세워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성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언약궤가 보관된 곳이며 구약시대 제사가 이루어지던 장소다. 하나님은 원래 하늘에 거하시지만, 성경에는 지상의 성전 역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라고 되어 있다.
모세 시대에 하나님은 당신이 거하실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셨다.[40] 이후 세월이 흘러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의 처소임을 밝혔다.[41] 이처럼 성전은 좁은 의미로는 지상에 세워진 특정한 건축물을 가리키지만, 의미를 확장하면 어디든지 하나님이 계신 곳,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곳을 성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신약시대 성자(聖子) 하나님인 예수님은 당신의 육체를 성전이라고 비유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요한복음 2:19-21
예수님이 이렇게 비유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성령, 즉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이 예수님의 육체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42]
예수님처럼 성령이 직접 육신을 입는 경우는 아니지만, 새 언약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에 신약성경은 성도들의 몸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일컫는다.[43][44] 이런 이유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도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새 언약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될 수 없고, 새 언약이 없는 교회 역시 성전이라고 불릴 수 없다.
전(殿. temple)이란 히브리 단어는 "비이라()"라고 하며 성경에서는 "전(대상 29:1, 19, 느 2:8), 궁(느 1:1, 에 1:2), 영문(營門)(느 7:2), 도성(에 1:5, 2:5, 9:11)" 이라고 소개됩니다.
구약 시대에는 전이라고 하였다면 신약에서는 "교회(에클레시아. ἐκκλησία)"라고 합니다.
전은 물질를 사용하여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믿음의 사람위에 세워야 합니다.
전은 세울 수도 있고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의 믿음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트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전(역대상 22:1)
성전을 건축할 장소가 정하여졌습니다(1절).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그리고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고백으로써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이라” 고 다윗은 말하였습니다.
만일 성전이 하나님을 위해 세워지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친히 장소를 택하는 것이
합당한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땅이 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택하신 그 터전은 이방사람들 사이에도 복음의 교회를
세우게 되리라는 것을 나타낸 행복한 전조가 되었습니다(행 15:16-17). 그 땅은 타작마당입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는 바로 그의 마당이며 그의 타작물이며 또한 “그의 마당의 곡식”이기 때문입니다(사 21:10). 그리스도는 그의 마당을
온전히 정결케 하기 위해 그 손에 키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집은 바로 제단을 위해 세워질 집이었습니다. 성전이란 바로 제단을
위해 세워진 집입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오래전부터 이미 제단은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이미 다윗 때부터 조직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장차 이스라엘의 수도가 될 예루살렘으로 옮겨다가 장막에 모시고(대상 16:4) 그 앞에서 섬기기 위해
제사장들, 레위인들, 성가대 악대를 조직했습니다(대상 16:4, 25:1-7). 그러나 나단에게 성전 지을 의사를 표시하자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그것을 짓게 하려고 했습니다(대상 17:1-12). 다윗은 성전을 위해 많은 돈과
재물을 그 아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대상 18:5-13, 22:6-17). 아버지의 유물과 자기의 모든 것으로 솔로몬(주전
960-922)은 그의 치세 제4-11년간에 아담한 성전을 건립했습니다. 그것은 헤롯 성전보다 적으나 아름답고 화려한 건물로
처음에는 작은 예배당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일반의 예배처소는 아니었고 대제사장도 1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지정소에 들어갔습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도 기름, 향, 떡을 보급하는 정도였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에게는 성전 구내가 전부 집이었습니다(시 66:13).
솔로몬의 성전은 400년을 못갔습니다. 주전 587년에 느부갓네살이 성전을 불살랐습니다. 11년 후 유다의 젊은 왕 여호야긴과
예루살렘 시민들을 바벨론으로 잡아갈 때(왕하 24:10-16) 성전 보물도 (25:13-17)다 옮겨 갔습니다. 시바의 여왕도
솔로몬의 성전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놀랐습니다(왕상 10:4). 솔로몬 성전은 베니게 직공들이 지었는데 베니게, 가나안, 애굽,
신전들의 영향을 맡이 받았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좁은 정방형으로 동편에는 문이 있고 서편에는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길이가 약 33.33m 넓이가 9m 가량이요 약 3m 높은 지대 위에 서 있었습니다.
히브리, 베니게 노동자 수천명을 풀어 흰 석회석을 갈아서
아름답게 지었습니다(왕상 5:6, 6:7). 내부는 레바논 백향목으로 목수들을 시켜서 아름답게 장식했습니다(6:5-36,
5:6). 출입구로 올라가는 층계는 10계단이 있었고 층계 좌우에는 상징적인 두 기둥(야긴과 보아스)이 벽과 따로 서있었습니다.
좁은 출입문(10×4.5m)은 백향목으로 짰고 그 위에 그룹,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핀 꽂은 금으로 박았습니다(왕상 6:18-35). 문지기가 있었습니다(시 84:10).
1. 성전은 3부로 나누었습니다(울람)
(1) 울람-제사장이 들어오는 입구의 홀
(2) 헤칼-본관 곧 성소인데 붙박이 교창에서 빛이 스며듭니다(왕상 6:4).
성소는 높이가 약 13.63m 넓이가 약 9m 길이가 18.2m였습니다.
돌로 마루를 깔고 그 위에 백향목으로 덮었습니다. 성소 내부는 백향목으로 두르고 지붕은 백향목 서까래에 마루로
덮었습니다(왕상 6:9). 백단목 벽기둥들이 운치를 더 했습니다(10:12). 기둥에는 생명나무를 조각하고 금으로
입혔습니다(16:21).
(3) 드빌-지성소로 올라가는 층계 앞에 백향목으로 만든 작은 향단이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창도 없고 굴
같은 9m정방형 방인데 주님의 거하시는 방이었습니다(대하 3:8-13). 지성소는 성소보다 마루가 높으며 4.5m 높이 감람나무로 만들고 금으로 장식한 두 그룹이 법궤 위에 마주 섰습니다.
그룹은 베니게에서 들어온 날개 돋힌
스핑크스(여자 머리에 사자 몸)거나 베니게화한 천사신이었습니다(겔 9:22-25). 성전 남서북삼면에 있는 이층방들은 창고실로
썼는데 올라가는 문들과 좁은 충계가 안과 밖에 있었습니다.
2. 성전 비품
성전 비품은 두로의 건축 기술자 허람(그 어머니는 출애굽 납달리 족속)이 많이 만들었습니다. 성전 앞 마당
우편에는 큰 번제단이 있었는데 어떤 이는 그것을 큰 바위 위에 만들어진 것이라 합니다(겔 43:14). 또 어떤 이는 대하
4:1에 묘사한대로 만든 것인데 층계있는 거룩한 탑 모양이었다 합니다. 제단 4귀에 뿔이 있었습니다. 제단 남쪽에는 큰 놋으로
부어만든 “바다”가 있었는데(대하 4:1) 그 두께가 1m 직경이 4.5m 고가 약 2.25m 되었습니다.
그 가장자리는 백합꽃처럼 아름답게 굽었습니다(왕상 7:23). 놋으로 만든 12마리의 황소등에 놓였는데
3마리씩 4방(춘하추동의 암시)을 향했습니다. 그 황소들은 모양 뿐 아니라 생식력의 상징인 동시에 비를 주는 신으로 중동에서 널리
믿는 바알에도 관련되었습니다. 거룩하게 생각한 동물들이 왕의 보좌나 거룩한 것을 바친 것은 옛적 철시대에 흔히 있던
일이었습니다. 그 놋바다는 원래 제사장들이 깨끗케 하는 의식에 쓰려한 것보다 물이나 바다는 생명의 근본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3. 성전 안에 불박이로 놓여 있던 것은 (1) 후대 제사 규칙에 의한(레 24:1-4, 민 8:1-4) 7촛대의 전신인,
10개의 금촛대 (왕상 7:49, 대하 4:7) 이 촛대란 사실, 3다리 달린 동경(등잔)으로 그 위에 불심지 7있는 등잔을 놓은
것이었습니다. 성막에는 촛대가 하나뿐이었습니다(출 37:17). 제 2성전에도 하나였는데 안디오커스 에피피네스에게 도적맞고
마카비 시대에 다시 만들었더니 주후 70년에 로마군대가 가져갔습니다. 그 모형만은 티도 개선문 조각에서 볼 수 있습니다. (2)
진설병 상을 12개 만들어 떡 12개를 차례로 놓을 때 상도 차례로 하나씩 썼습니다. 이 떡상은 왕상 6:20-22의 제단과
일치하며 안식일마다 새 떡으로 바꾸어 놓고, 전 것은 제사장들이 먹었습니다. (3) 움직일 수 있는 향단은 금으로 장식했으며 뿔이
있었습니다.
4. 솔로몬 성전은 초막절에 봉헌되었습니다(왕상 8:12)
솔로몬의 기도는 넉줄의 시였으나 주전 550년경의 포로 후의 부연하여
봉헌기도를 유창하고 가장 높은 것이었습니다.
그 내부는 때를 따라 변했을 것입니다. 르호보암 때(주전 922-915) 애굽 왕
시삭이 노래했으며 (왕상 14:25) 악한 여왕 아달야(주전 842-837)가 바알 예배를 성전에서 행했습니다. 아하스(주전
735-715)는 성전 내부를 개조하고 제단도 고쳤습니다 (왕하 16:10-18). 히스기야(주전 715-687)는 모세의 율법의
놋뱀을 버렸습니다(왕하 18:4). 므낫세(주전 687-642)가 앗수르 방식을 따라 성전을 주력했더니(왕하 21:4)
요시야(주전 640-609) 왕이 연보궤에서 율법책을 찾은 후 그것을 폐지했습니다(대하 34:14). 솔로몬 때 시작한
예루살렘성전 중심주의를 강화하여 지방성소들을 폐지하고 그 제사장들에게 예루살렘에서 할 일을 주었습니다(신 12:2-28).
온 회중에게
- 온 회중이란 28:1에 기록된 대로 다윗 왕이 솔로몬을 차기 왕으로 지목하고 또한 마지막 유언을 남기기 위해 불러모은 이스라엘의 모든 방백들과 백성의 대표자들을 말한다.
내 아들 솔로몬이...오히려 어리고 연약하고 이 역사는 크도다
- 성전 건축이
다윗왕에게 부과된 임무가 아니고 솔로몬에게 부과된 임무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이 성전 건축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준비하게 된
하나의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다윗 왕은 이전에 솔로몬과 단독으로 면담하였을 때에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많은
준비를 하였노라고 밝힌 바 있다(22:5).
그러나 22:5과는 달리 본절에서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택하사 성전 건축의
과업을 이루게 하셨다고 다윗은 언급하고있다.
그래서 22:5에서는 언급되지 아니한 '선택하다', '지정하다', '요구하다'란 뜻을
지닌 히브리어 '바하르'(*)가 여기에 사용된 것이다.
한편, 솔로몬은 여기에서 다윗 왕이 말한대로 자신의 '여리고 연약함'을
깨달아 왕상 3:7에서 "종은 작은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라고 고백한다.
전(비이라. bîyrâh) בִּירָה
스트롱번호 1002
-
1. 명사, 여성
요새, 성, 왕궁 [거의 대부분 왕궁에 대해 사용됨], 느1:1, 에1:2, 2:3,8, 3:15, 단8:2
-
2. 명사, 여성
성전, 대상29:1,19.
-
관련 성경 / 전(대상 29:1, 19, 느 2:8), 궁(느 1:1, 에 1:2), 영문(營門)(느 7:2), 도성(에 1:5, 2:5, 9:11).
בַּיִת
스트롱번호1004
-
-
어원
- 연계형 בֵּית, 복수 어미활용 בָּתֵּיהֶם ,בָּתֵּיכֶם ,בָּתֵּינוֹ, 1129에서 유래한 약어로 보임
- 구약 성경
- 2036회 사용
전(殿)
- 히브리어는 '하비라'( הַבִּירָה)인데 이 말이 사용된
용례들을 살펴보면 이 용어는 대단히 웅장하고 거대한 궁전을 가리키고 있다.
즉, 이 말이 사용된 에 1:2, 5;2:3, 5,
8;3:15;단 8:2 등을 살펴보면, 이 말은 바사의 수산궁 뿐만 아니라 여기에 인접해 있는 모든 부속 건물들까지도 포함한
거대한 하나의 왕궁 단지(團地)를 지시하고 있다.
또한 느 2:8에서도 이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거기에서도 이 단어는 성곽과 집을
포함한 요새화된 성전을 가리키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하비라'(*)라는 용어는 특별히 웅장한 모습의 성전을 묘사하는 말임에
틀림없다(Curtis, p,. 301;Pulpit Commentary).
한편, 다윗 왕이 여기에서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된
성전에 해당되는 용어 '바이트'(*) 대신에 '하비라'(*)를 사용한 것은 이 성전을 건축하는 역사(役事)가 어리고 연약한 솔로몬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대역사임을 회중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힘을 다하여
- 이와 의미가 유사한 구절로 22:14의 '환난 중에'를 참조하라.
마노
- 이 진귀한 보석인 마노(stones of onyx)는 제사장의 에봇과
흉패에 장식했던 것으로(출 25:7;35:9,27) 성경에 의하면, 이것의 원산지는 에덴 동산의 하윌라(Havilah) 강이다(창
2:11, 12).
박을 보석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밀루임'(*)은 '채우다', '가득하다'는 뜻의 동사 '몰라'(*)에서 파생된 명사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제사장의 옷이나 기타 여러 기구들에 장식된 보석을 의미하는 말이다.
꾸밀 보석
- '꾸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푸크'(*)는 '색깔있는',
'그려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왕하 9:30;사 54:11;렘 4:30). 따라서 이는 문자적으로 '색깔있는 돌'을 의미한다.
그래서 혹자는 이를 대리석이라고 생각하나(Gensenius) 이 보다는 이 돌을 여인들이 눈에 칠했던 안티모니(L.
antimony)의 돌과 같이 색깔있는 돌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Ja-mes Wolfendale).
채석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크마'(*)는 '얼룩 덜룩한 색을
넣다','수놓다'를 의미하는 '라캄'(*)에서 파생된 말로 '다양한 색깔을', '얼룩 덜룩한 빛깔', '자수를 놓은' 등의
의미이다. 이렇게 볼 때 채석은 '여러 가지 빛을 내는 그리고 그러한 무늬가 있는 돌'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혹자는 이것이 모자이크 자갈이었다고 주장한다(Payne). 그런데 이 히브리 용어는 단지 본문에서만 돌에 적용되었지 다른 곳에서는
자수, 의복, 독수리 날개 등에 사용되어졌다(겔17:3).
다른 보석
- 여기서 다른 보석이란 바른 번역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보석'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에벤 이카라'(*)는 문자적으로 '희귀한 돌'을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희귀한'에 해당하는
'이카라'(*)는 단순히 어떤 '무거운 것'을 의미했었는데 이것에서 '귀중한', '값비싼'이란 의미가 생겼기에 이를 보석을 생각한
듯하다. 사실 솔로몬은 본절에 언급된 이 값비싼 돌로 성전의 벽을 장식하였다(삼하 12:30;왕상 7:9;10:2;대하
3:6;9:1;욥 28:16;잠 1:13;3:15;사28:16;겔 28:13;단 11:38).
화반석
- 히브리어로 '아브네 샤이쉬'(*)인데 여기서 '샤이쉬'(*)는
'희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화반석은 흰대리석을 의미한다(Keil, Pulpit Commentary, Lange). 이러한 것
때문에 혹자는 이를 '설화 석고'로 이해한다(J. Wolfendale).
나의 사유의 금 은으로...드렸노니 - 다윗 왕은 지금까지 모은 전리품 뿐만 아니라 자기의 개인 재산까지도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Barker, J. Wolfendale, Wycliffe).
오빌의 금 - 오빌이 오늘날의 어느 곳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인도, 아라비아,
아프리카 등으로 추측하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확실한 증거를 가진 주장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오빌은 순도 높은 금의 산지로
고대에 알려졌었다(욥 22:24;28:16;시45:9;사 13:12). 따라서 오빌의 금은 가장 값지고 귀한 금을 의미하는
말이다. 한편 혹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이 오빌의 금을 아라비아의 상인들이 가져온 것으로 이해하나(J. Wolfendale) 이
또한 확정적인 자료가 없는 것이다.
금 삼천 달란트와 천은 칠천 달란트라 - 1 달란트(talent)는 약
34kg에 해당하는 무게이기 때문에 금 삼천 달란트과 은 칠천 달란트를 무게로 환산하면 금은 약 102톤에 해당되며 은은 약
238톤에 해당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본서 22:14를 참조하라. 한편, 본문에 언급된 '천은'에서 '은'을 수식하는 말은
히브리어 '자카크'(*)를 번역한 용어이다. 그런데 이 히브리어의 원래의 뜻이 '추출하다', '깨끗하게 하다', '정제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본절에 나타난 이 '천은'은 '잘 정련된 은', 즉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은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영역 성경이 이를 'choice silver'(잠 8:19), 'refined silver'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다(KJV).
모든 전 벽에 입히며 - 다윗 왕이 바친 사유 재산이 쓰인 용도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전(殿)'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티임'(*)은 성전 안에 있는 중요한 건축물들을 가리킨다(Lange, Curtis).
그래서 본절은 성전 안에 있는 중요한 건축물에 대해서는 모든 벽에다 금.은 칠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대하
3:4-9에 보면, 솔로몬은 다윗 왕이 바친 정금으로 낭실 안, 대전 천장과 지성소, 지성소의 다락들을 금으로 입혔다.
오늘날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라는 말은 곧 여호와께 헌물을 드리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Keil). 왜냐하면 '채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레'(*)는 '충만하다', '가득하다', '봉헌하다',
'완성하다' 등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용어는 성직에 임명되는 후보들에게 사용되어진 말로서 이는 자신이
'헌신적으로 드려지는 예물'임을 자각케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Payne, Wycliffe).
역대상 29장
1 다윗 왕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이 홀로 하나님의 택하신 바 되었으나 오히려 어리고 연약하고 이 역사는 크도다 이 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1
그런 다음 다윗왕은 모든 군중을 향해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신 내 아들 솔로몬은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는데 그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막중합니다. 이것은 그가 지어야 할 성전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이…이르되.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자기가 준비한 것들을 자세히 말하고 이스라엘의 부(富)와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헌납할 것을
호소한다(1~9절). 여호와의 지시에 응하여 백성에게 성소 건축을 위해 헌납할 것을 호소하고(출 25:1~8; 35:4~9),
아낌없는 반응을 받았던(출 35:20~29) 모세의 경험과 비교해 보라.
어리고 연약하고. 참조 대상 22:5; 왕상 3:7; 잠 4:3.
전. 비라(birah). 악갓어에서 유래한 외래어로서, 대개는 궁전이나 요새를 나타낸다(느 1:1; 7:2; 에 1:2, 5; 2:3, 5, 8; 3:15; 단 8:2). 이곳과 19절에서는 이것이 성전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2 내가 이미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예비하였나니 곧 기구를 만들 금과 은과 놋과 철과 나무며 또 마노와 박을 보석과 꾸밀 보석과 채석과 다른 보석들과 화반석이 매우 많으며
2 나는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성전 건축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자재를 준비했습니다. 금, 은, 놋, 철, 목재, 호마노와 같은 여러 가지 보석과 대리석이 바로 그것입니다.
힘을 다하여. 이 일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다윗은 자재들을 많이 모으는 데 성공했다(22:14). 전심(全心)을 다한 사랑은 전심을 다하는 봉사를 낳는다.
3 성전을 위하여 예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에 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므로 나의 사유의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3 이 밖에도 나는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내 사유 재산에서 성전 건축을 위해
내 마음에…사모하므로.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헌신하여 성전을 건축하는 데 자기 재물을 기꺼이 드렸다. 그는 아낌없이 드리는 일에 모본을 보였으므로 후하게 드리도록 요청할 수 있었다.
4 곧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천은 칠천 달란트라 모든 전 벽에 입히며
4 순금 100톤과 순은 240톤을 바쳐 성전 벽을 장식하고
삼천 달란트. 만일 이것이 34.15킬로그램에 해당하는 표준 달란트라면(참조 제2권, 106, 108), 다윗이 모은 금의 양은 113톤(미터법으로는 102톤)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고대 표준 중량의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없다.
칠천 달란트. 1달란트를 34.15킬로그램으로 계산할 때(참조 제2권, 106, 108) 헌납한 은의 중수는 263톤 또는 미터법으로 239톤이 된다. 위의 “삼천 달란트”를 참조하라.
5 금, 은그릇을 만들며 공장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쓰게 하였노니 오늘날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5 금은 제품을 만들며 기능공들이 세공품을 만드는 데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제 나처럼 여호와께 기쁜 마음으로 예물을 바칠 자가 없습니까 ?'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다윗은 기꺼이 자기 자신과 자기 가진 것을 여호와께 바쳤으므로 이제 백성에게 그처럼 행하도록 요청할 수 있었다. 그는 성전 건축
사업과 하나님 경배를 동일시했다. 그들이 이 문제에 성실히 함으로써 하나님께 그들이 얼마나 성실한가를 나타낼 것이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는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직접 드리는 예배이다.
반만 마음을 드린 봉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함―(29:5
인용)이 반응이 이르러 온 것은 그 건물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금은 보화를 자유롭게 드리는 헌금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업의
여러 분야에서 하는 자원 봉사에서도 나타났다. 마음들은 주님의 것을 주께 돌려 드릴 욕망으로 가득하여서 몸과 마음의 모든 힘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다 드렸다. 나라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술과 능력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이기심 없이 일하기로 결심하였다.
솔로몬에게
한 다윗의 권면과 그 나라의 중책을 맡은 사람들에게 한 그의 호소는 오늘날 주의 사업에서 중요한 책임을 진 사람들이 마음에
간직하여야 할 말씀들이다. 우리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경우에만 번영할 것이다. 그리고 책임을 진 사람들은
주께 헌신하라는 호소를 받고 있다.
교회의
직원들, 기관 각부 원장과 총무들, 국내외에서 일하는 일선 사역자들, 모두 다 그들의 달란트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침으로써 충실한
봉사를 해야 한다. 반만 마음을 드린 봉사를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우리의 소유와 우리의 존재는 다 그분께 빚지고 있는
것이다 (리뷰 1905. 9. 14).
역대상 23장 요약 / 레위 자손의 구분과 임무
다윗이 레위인이 하는 일을 구분하여서 인구에 따라 나누어주었고 에뤼의 후손 게르손, 고핫, 므라리의 자손들에게 일을 분배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24장 요약 / 24반차의 제사장 조직
아론의 후손 중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였고, 레위 자손들 중에 남은 자들의 명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25장 요약 / 찬양대
아삽, 헤만, 여두둔의 자손을 뽑아서 찬양의 직무를 맡기고 각 가문에서 12명씩을 뽑아 찬양과 음악을 맡겼다고 합니다.
5월 9일(금) 역대상 23-2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령한 노래(25:1)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David, together with the commanders of the army, set apart some of the sons of Asaph, Heman and Jeduthun for the ministry of prophesying, accompanied by harps, lyres and cymbals. Here is the list of the men who performed this service:
신령한 노래(
골로새서 3:16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Let the word of Christ dwell in you richly as you teach and admonish one another with all wisdom, and as you sing
psalms, hymns and
spiritual
songs with gratitude in your hearts to God.
에베소서 5:19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Speak to one another with
psalms, hymns and
spiritual
songs. Sing and make music in your heart to the Lord.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시(psalm) : 구약의 시편
찬미(hymns) : 시편 이외의 찬송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 : 성령의 감동으로 부르는 노래
첫째. 영으로 하는 찬양(고린도전서 14: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4~15).
여기에서 ‘마음으로’는 헬라어로 ‘누스’(νους)인데, ‘이성적으로’라는 뜻이다. 방언기도는 영 (spirit)이 하는 기도이므로 통역의 은사가 없으면 그 기도가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영은 기도하지만 나의 마음(mind), 곧 지각(the understanding)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영으로’(with the spirit) 기도하고, 또한 ‘지각으로’(with the understanding)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바울은 나의 영이 ‘기도’할 수 있듯이 나의 영으로 ‘찬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b).
영으로 찬양하는 것은 마치 방언기도를 드리는 것과 같다.
곧 이성의 영역을 떠나 내 영이 ‘자유롭게’ 부를 수 있는 찬송의 장르가 있다. 이것을 보통 ‘방언 찬송’이라고 부른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진정한 영의 찬송은 일정한 곡이 없고, 곡조에 자유함이 넘친다.
다시 말하면 가락이 제마음대로란 얘기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가사와 가락(곡조)을 주셔서 '즉흥적으로'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으로 하는 찬양이 ‘신령한 노래’인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함께 신령한 노래로 찬양할 때 그것은 수십 성부의 아름다운 찬송이 된다.
성령이 각 개인의 목소리를 인도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모아서 화음을 이루며 영으로 찬양하게 할 때 창출되는 그 조화란, 참으로 천사들의 합창 그 자체처럼 들릴 때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3층천’ 예배인데, 이 때 회중은 강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새 노래(a new song)
- ‘신령한 노래’의 또 한 가지 유형으로서 “새 노래” 라는 것이 있다.
성경은 도처에서 ‘새 노래’로 주를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시 33:3; 사 42:10; 계 5:9).
이 ‘새 노래’ 역시 ‘영의 찬양’처럼 악보도 없는 노래를 즉흥적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으로, 곧 지각을 사용하여 노래한다는 점이 ‘방언 찬송’과 다르다.
즉 ‘새 노래’는 성령께서 곡조와 함께 내 이성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가사를 즉흥적으로 주시는데, 바로 그 가사와 가락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정한 가사와 곡조가 없는 노래다. 이것은 '예언적 노래'로서 배워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9).
하느님은 예레미야의 입에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그는 예언할 수 있었다.
그 하느님은 우리 입에 노랫말도 주신다. 그래서 우리로 새 노래로 찬양하게 하신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1~2).
그리하여 우리는 즉흥적으로 ‘예언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초자연적 노래이다. 이러한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굴복한다. 성령의 능력이 그 노래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또 그가 내 입에 새 노래를 두셨으니, 곧 우리 하느님께 드릴 찬양이라. 많은 사람이 그것을 보고 두려워하며 주를 의지하리로다”(시 40:3․ KJV).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됨으로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 하리라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고전 14:24~26).
이와 같은 ‘신령한 노래’는 초대교회에서 체험하였고, 일찍이 ‘다윗의 장막’에서도 불리어졌었다.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 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대상 25:1).
여기서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라는 것은 “예언을 하게 했다”(prophesy)는 뜻이다(영어 성경과 비교해 보라). 이 귀한 노래가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다시 회복되고 있다.
높은 찬양(high praise)
- ‘신령한 노래’의 범주에 ‘높은 찬양’(high praise)이라고 하는 또 한 가지 유형의 찬송이 있다.
영적으로 깊고 강한 찬송으로서, 시편 149편 6절에 나온 찬양이다.
그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
尊影)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
NIV / May the praise of God be in their mouths and a double-edged sword in their
hands.
“그들의 입에 하나님을 향한 높은 찬양들이 있게 하고, 그들의 손에는 양 날 이 있는 칼이 있어”(시 149:6 ․ KJV).
Let the high praises of God be in their mouth, and a two-edged sword in their hand;
새한글 / 하나님 높이는 소리를 목청껏 내야지요, 손에는 날 선 칼을 들고서요.
여기에서 ‘높은 찬양’은 원어 ‘로맘’(םםור)의 번역이다.
이 단어는 시 66:17과 함께 성경에 꼭 두 번 사용되었다.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시 66:17).
‘로맘’(םםור)은 ‘룸’(םור)이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인데, ‘룸’은 ‘높이다’ ‘높게 하다’의 뜻이다.
시편 66:17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I cried unto him with my mouth, and he was extolled with my tongue.
רוּם
스트롱번호 7313
어원 / 아람어
구약 성경 / 6회 사용
-
1. 격찬하다, 높이다, 세우다, 단 3:1, 4:17, 스 6:3.
רוּם
스트롱번호 7311
구약 성경 / 166회 사용
그래서 ‘로맘’이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이 ‘높은 찬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높은 찬송’이 실제로 어떤 찬송을 말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찬양과 경배’ 사역에서 찬양 인도자(worship leader)로 종사하고 있는 분들은 이 찬송이 영적으로 하나님과 좀더 친밀하게 되었을 때 나오는 자연적이고 즉흥적인 노래(spontaneous song)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찬양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면 음량은 작아지고, 템포는 느려지고, 소리는 높아진다.
가사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찬송이 영적으로 매우 높은 경지에 있을 때 나오는 참으로 신비한 찬양이다.
이것이 ‘높은 찬양’으로 이때에 회중은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된다.
이 ‘높은 찬양’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사단의 진을 쳐부수는 역할을 한다. ‘높은 찬양’은 영적 전쟁의 아주 강력한 무기이다(시 149:6~9).
그들의 입에 하나님을 향한 높은 찬양들이 있게 하고,
그들 의 손에는 양 날이 있는 칼이 있어 이방에 복수하며 그 백성을 처벌하고
그들의 왕을 쇠사슬로, 그들의 귀족들을 쇠 족쇄로 묶어
기록된 판결을 그들에게 시행하게 할지니, 이 영광이 그의 모든 성도들에게 있도다.
너희는 주를 찬양할지어다.
우리에 입에는 높은 찬양이 있고, 손에는 양날 선 칼이 있어야 한다.
칼은 하나님의 말씀이다(엡 6:17; 히 6:17).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향한 높은 찬양’은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영적전쟁의 강력한 무기다.
말씀의 검을 높이 들고, 주께는 찬양을 높이 올 릴 때,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하여 흑암의 세력이 쫒겨 가게 된다.
우리는 모두 ‘신령한 노래’를 부르도록 요청받았다.
그러므로 ‘신령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것은 방언찬송, 새 노래, 높은 찬양 등과 같은 '초자연적 노래'이다.
이러한 찬양들은 우리의 의지를 뛰어 넘는 신비한 찬양들이다.
이 놀라운 영적 찬양들은 성령의 역사가 강했던 초대교회에선 예배할 때마다 흔히 불려졌던 노래들이었다.
교회 안에 ‘신령한 노래’가 회복되어야 한다.
의식적이고 예전적인 예배와 더불어 찬양과 경배로 찬양이 회복되어야 한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말씀에 의지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길 때, 우리는 모두 예배 가운데서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 있고, 결국 더욱 풍성한 찬송생활의 권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고…”(골 3:1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열심을 다해 찬양해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세 가지 유형의 찬송을 나열했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에 언급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똑같은 찬양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세 가지 모두
다른 유형의 찬양이다.
‘시’(psalm)는 구약의 시편을 말하고, ‘찬미’(hymns)는 시편 이외의 찬송을 뜻한다. 그렇다면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성령의 감동 아래 즉흥적으로 부르는 노래”이다. 일반 찬양과는 다른
독특한 장르의 찬송인 것이다. 다음과 같은 노래들이 신령한 노래이다.
1. 영으로 하는 찬양
‘신령한 노래’의 첫 번째 유형은 “영으로” 하는 찬양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서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찬양’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방언’에 대하여 말하다가 나온 말이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4~15).
여기에서 ‘마음으로’는 헬라어로 ‘누스’(νου?)인데, ‘이성적으로’라는 뜻이다. 방언기도는 영(spirit)이 하는 기도이므로
통역의 은사가 없으면 그 기도가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영은 기도하지만 나의 마음(mind), 곧
지각(the understanding)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영으로’(with the spirit) 기도하고,
또한 ‘지각으로’(with the understanding)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바울은 나의 영이 ‘기도’할 수 있듯이 나의 영으로 ‘찬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b). 영으로 찬양하는 것은 마치 방언기도를 드리는 것과 같다. 곧 이성의 영역을 떠나 내 영이
‘자유롭게’ 부를 수 있는 찬송의 장르가 있다. 이것을 보통 ‘방언 찬송’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국교회 성도들이 방언 찬송을 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기존의 찬송가 곡에 맞추어 부른다. 그것은 내 영이
‘자유롭게’ 부르는 신령한 노래가 못 된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진정한
영의 찬송은 일정한 곡이 없고, 곡조에 자유함이 넘친다. 다시 말하면 가락이 제마음대로란 얘기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가사와 가락(곡조)을 주셔서 '즉흥적으로'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으로 하는 찬양이 ‘신령한 노래’인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함께 신령한 노래로 찬양할 때 그것은 수십 성부의 아름다운 찬송이 된다. 성령이 각 개인의 목소리를 인도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모아서 화음을 이루며 영으로 찬양하게 할 때 창출되는 그 조화란, 참으로 천사들의 합창 그 자체처럼 들릴
때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3층천’ 예배인데, 이 때 회중은 강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2. 새 노래(a new song)
‘신령한 노래’의 또 한 가지 유형으로서 “새 노래” 라는 것이 있다. 성경은 도처에서 ‘새 노래’로 주를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시33:3; 사42:10; 계5:9). 이 ‘새 노래’ 역시 ‘영의 찬양’처럼 악보도 없는 노래를 즉흥적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으로, 곧 지각을 사용하여 노래한다는 점이 ‘방언 찬송’과 다르다.
즉 ‘새 노래’는 성령께서 곡조와 함께 내 이성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가사를 즉흥적으로 주시는데, 바로 그 가사와 가락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정한 가사와 곡조가 없는 노래다. 이것은 '예언적 노래'로서 배워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니다.
하느님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9). 하느님은 예레미야의
입에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그는 예언할 수 있었다. 그 하느님은 우리 입에 노랫말도 주신다. 그래서 우리로 새 노래로 찬양하게
하신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느님에게 기름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1~2).
그리하여 우리는 즉흥적으로 ‘예언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초자연적 노래이다. 이러한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하느님께 굴복한다. 성령의 능력이 그 노래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또 그가 내 입에 새 노래를 두셨으니, 곧 우리 하느님께 드릴 찬양이라. 많은 사람이 그것을 보고 두려워하며 주를 의지하리로다”(시 40:3?KJV).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됨으로 엎드려 하느님께 경배하며 하느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 하리라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고전 14:24~26).
이와 같은 ‘신령한 노래’는 초대교회에서 체험하였고, 일찍이 ‘다윗의 장막’에서도 불리어졌었다.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 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대상 25:1).
여기서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라는 것은 “예언을 하게 했다”(prophesy)는 뜻이다(영어 성경과 비교해 보라). 이 귀한 노래가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다시 회복되고 있다.
3. 높은 찬양(high praise)
‘신령한 노래’의 범주에 ‘높은 찬양’(high praise)이라고 하는 또 한 가지 유형의 찬송이 있다. 영적으로 깊고 강한 찬송으로서, 시편 149편 6절에 나온 찬양이다.
“그들의 입에 하느님을 향한 높은 찬양들이 있게 하고, 그들의 손에는 양 날 이 있는 칼이 있어”(시 149:6 ? KJV).
여기에서 ‘높은 찬양’은 원어 ‘로맘’(????)의 번역이다. 이 단어는 시 66:17과 함께 성경에 꼭 두 번 사용되었다.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시 66:17). ‘로맘’은 ‘룸’이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인데, ‘룸’은 ‘높이다’ ‘높게 하다’의 뜻이다. 높이는 것은 ‘찬양’ 하는 것이다. 그래서 ‘로맘’이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이 ‘높은 찬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높은 찬송’이 실제로 어떤 찬송을 말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찬양과 경배’ 사역에서 찬양
인도자(worship leader)로 종사하고 있는 분들은 이 찬송이 영적으로 하느님과 좀더 친밀하게 되었을 때 나오는 자연적이고
즉흥적인 노래(spontaneous song)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찬양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면 음량은 작아지고, 템포는 느려지고, 소리는 높아진다. 가사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찬송이
영적으로 매우 높은 경지에 있을 때 나오는 참으로 신비한 찬양이다. 이것이 ‘높은 찬양’으로 이때에 회중은 하느님의 임재를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된다.
이 ‘높은 찬양’은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 사단의 진을 쳐부수는 역할을 한다. ‘높은 찬양’은 영적 전쟁의 아주 강력한 무기이다(시 149:6~9).
6.그들의 입에 하느님을 향한 높은 찬양들이 있게 하고, 그들 의 손에는 양 날이 있는 칼이 있어
7. 이방에 복수하며 그 백성을 처벌하고
8. 그들의 왕을 쇠사슬로, 그들의 귀족들을 쇠 족쇄로 묶어
9. 기록된 판결을 그들에게 시행하게 할지니, 이 영광이 그의 모든 성도들에게 있도다. 너희는 주를 찬양할지어다.
우리에 입에는 높은 찬양이 있고, 손에는 양날 선 칼이 있어야 한다.
칼은 하나님의 말씀이다(엡 6:17; 히 6:17).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을 향한 높은 찬양’은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영적 전쟁의 강력한 무기다.
말씀의 검을 높이 들고, 주께는
찬양을 높이 올 릴 때,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하여 흑암의 세력이 쫒겨 가게 된다.
우리는 모두 ‘신령한 노래’를 부르도록 요청받았다.
그러므로 ‘신령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것은 방언찬송, 새 노래, 높은 찬양 등과 같은 '초자연적 노래'이다.
이러한 찬양들은 우리의 의지를 뛰어 넘는 신비한 찬양들이다.
이 놀라운 영적 찬양들은 성령의 역사가 강했던 초대교회에선 예배할 때마다 흔히 불려졌던 노래들이었다. 그러나 방언과 더불어
교회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오다가 20세기에 이르러 성령의 역사와 함께 찬양과 경배라는 새로운 양식의 예배가 시작되면서 마침내
신령한 노래들도 다시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신령한 노래’가 회복되고 있다. 의식적이고 예전적인 예배에서는 이러한 놀라운 찬양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순서에 따라 예배가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배를 우리가 만든 순서에 의지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길 때,
우리는 모두 예배 가운데서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 있고, 결국 더욱 풍성한 찬송생활의 권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오늘 우리의 삶에 예배가 풀어지고 확장되고 있습니까?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이 자리에서, 예배를 누리고 계십니까? 에베소서 5장 본문은 성령충만의 방법이자 결과로, ‘예배’를 말합니다. 예배는 세상과 구별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자 세상을 이기는 성도의 능력입니다. 교회는 다 함께 모여, 또한 각 가정과 일터로 흩어져 예배하는, 예배 공동체입니다. 함께 모이나 또한 흩어지는 예배. 이는 신약에서 말하는 예배의 두 가지 개념입니다. 먼저는 좁은 의미의 예배입니다. 이는 오늘 주일예배처럼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약속된 교회의 모임으로 드리는 제도적 예배입니다. 제도적 예배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요한복음 4장의 예배와 연결됩니다. 주님은 예배의 장소를 묻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를 것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상에 치우친 사마리아 땅의 예배와 율법에 치우친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예배의 중심을 바로 잡아 주시며, 종교적이고 제도적인 의미로의 예배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반면, 넓은 의미의 예배가 있습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로 이어지는 확장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장은 세상과 구별되어 주님께 드려진 산 제물, 예배자로 삶을 살아갈 것을 말합니다. 예배의 두 개념은 Worship과 Service란 두 표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경배를 요구하는 사탄에게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경배(Worship)가 앞서 말한 좁은 의미의 예배, 즉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모여 드리는 제도적 예배에 가깝다면 섬김(Service)은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된 예배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예배당에 모여 함께 예배할 뿐 아니라, 가정과 일터의 자리에서도 주님을 예배함으로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며 주어진 일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처럼 주일예배나 금요철야 같이 약속된 날 예배당에 함께 모일 때도, 로마서 12장처럼 제도적 예배가 끝난 후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갈 때도, 언제나 우리의 예배가 주님안에서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종교적 예배, 제도적 예배로 함께 모여 예배할 뿐 아니라,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논문을 쓰고 자료들을 정리하는 모든 삶의 현장이 예배가 되길 축복합니다. 예배를 누릴 수 있는 성도, 예배로 돌파할 줄 아는 성도, 예배로 임재를 나르는 성도로 섭시다.
서로 화답하는 코이노니아의 예배 -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세상과 구별된 빛의 자녀들로서 오직 성령 충만할것을 당부한 바울은 이어서 그 결과인 예배의 다섯 가지 형태를 말합니다. 바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감사와 피차 복종함입니다. 가장 먼저 언급된 ‘시’는 헬라어 원문으로 ‘줄을 타다’, ‘소리를 내다’라는 의미로, 악기와 함께 부르는 노래를 뜻합니다. 시편에서 악기 소리에 맞추어 불려진 노래가 ‘시’입니다. ‘찬송’은 하나님을 위해 쓴 글과 말들을 낭송하고 외치는 소리입니다.
오늘날 문학 장르 중 시가 오히려 찬송에 가깝습니다.
세 번째는 ‘신령한 노래’입니다.
이는 ‘프뉴마’, 즉 ‘영’적 요소가 강조된 노래로, 방언 기도와 같은 ‘영의 노래’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영적으로 풀어지고 선포되는 다양한 예배의 모습들을 골로새서 3장과 고린도전서 14장에서도 언급하였는데, 특별히 방언 기도에 대해 말하며 영의 기도와 마음의 기도, 영의 찬송과 마음의 찬송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이처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드려지는 예배에서 또한 주목할 것은 서로 화답함입니다.
에베소서 본문에서 바울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고 찬송하라 말합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할 때, 누군가는 시로 하나님을 노래하고, 누군가는 찬송으로 하나님을 선포하며, 누군가는 신령한 노래로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분명한 곡조에 따라 노래하는 소리, 주님의 아름다움과 위대하심을 외치고 선포하는 소리, 영의 노래로 주님을 높이는 소리, 그리고 그 영적 노래를 통역하여 풀어내는 소리까지 모두 한데 어우러져 서로 화답하는 아름다운 하모니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1세기 교회의 예배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수백명이 모일수 있는 예배당이 없었습니다. 적게는 두세사람부터 스무명 정도의 사람들이 둘러앉아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화답하며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찬송시와 계시의 말씀과 예언의 노래와 영의 노래로 코이노니아 예배가 이루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예배가 우리에게도 풀어지길 소원합니다. 에베소 교회처럼, 고린도 교회처럼, 성령님의 운행하심에 온전히 이끌려가며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여 마음이 하나되고 영이 풍성하게 되는 예배가 열리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종종 ‘신령한 노래’와 헷갈리는 ‘새노래’에 대해 나눕니다. 신령한 노래가 영적인 노래라면 새노래는 이전과 다른 노래로, 요한계시록 5장 본문으로 새노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새노래는 세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어린 양, 즉 약속하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노래입니다. 두 번째는 어린 양이 완성하신 의, 모든 저주를 끊어낸 십자가 구속의 선포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성장과 새로운 계시로의 노래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며 넓고 깊어진 만큼 새롭게 불려지는 노래를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어렸을 때는 하나님을 나를 지켜주는 분, 내가 기도하면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 정도로 경험합니다. 그러나 자라나면서 우리는 역사를 운행하시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점차 알아가게 됩니다. 주님을 더욱 경험하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깊이와 넓이가 나날이 확장되어 이전과 다른 새노래로 주님을 노래하길 축복합니다. 10년 전의 하나님, 5년 전의 하나님이 아닌, 오늘 또 새롭게 만난 하나님을 노래합시다. 아침마다 새로운 주님의 자비와 아름다움이 이 교회가 부를 새노래 되기를, 하나님을 아는 깊이와 넓이의 새로운 노래가 계속해서 울려퍼지기를 기도합니다.
신령한 노래(5구절)
역대상 25:1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역대상 25:2
아삽의 아들 중 삭굴과 요셉과 느다냐와 아사렐라니 이 아삽의 아들들이 아삽의 수하에 속하여 왕의 명령을 좇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역대상 25:3
여두둔에게 이르러는 그 아들 그달리야와 스리와 여사야와 하사뱌와 맛디디야 여섯 사람이니 그 아비 여두둔의 수하에 속하여 수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에베소서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호다이스 프뉴마티카이스
노래(5603)
신령한(4152)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 ‘그리스도의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로고스 투 크리스투’ (*)에 대해 혹자는 주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uce, Lenski, Lightfoot). 그러나 ‘호 로고스 투 크리스투’를 꼭 주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할 이유는 없다. 본절의 소유격은 주격적일 뿐 아니라 목적격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물론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Vaughan, Carson). 한편 ‘너희 속에’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개인적인 차원에서 ‘너희 마음 속에’를 의미한다(Lightfoot). 2. 공동체의 차원에서 ‘너희들 속에’를 의미한다(Masson, Lohse). 두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Bruce, O' Brien). 결국 그리스도의 말씀을 해석하고 설교를 듣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리스도인 각자는 물론 공동체내에 풍성히 거함으로 그 영향력 아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 두 가지를 행해야 한다. 1.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ㅕ 권면하고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은 바울 사도나 디모데가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1:28) 골로새 교인들이 피차 ‘모든 지혜로’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지혜’는 ‘가르치고 권면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지를 의미한다(O' Brien). 2.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 ‘시’와 ‘찬미’ㅡ 그리고 ‘신령한 노래’를 굳이 구별한다면, ‘시’는 구약 시편을 의미하며 (눅20:42 ;24:44 ; 행 1;20 ; 13:33),‘ 찬미’ 는 ‘축제의 찬양’ (O' Brien, Lohse) 혹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작곡되고 불리는 찬송’ (Lightfoot)을 의미하고, ‘신령한 노래’는 ‘하나님의 행위를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노래’ (Lohse, O' Brien)혹은 ‘즉흥적으로 불리는 영적 노래’를 가리킨다(Bruce). 그러나 세 가지 용어를 정확하게 구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헌편 찬양을 그리스도인들의 입술의 열매이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행위이다(히 13:15). 진정한 찬양은 ‘감사하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혹자는 ‘감사함으로’의 헬라어 ‘엔 카리티’ (*)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Lohse). 그러나 15절과 17절 사이에서 ‘감사함’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적절한 응답으로서의 감사함’의 의미로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O' Brien).
새노래(9구절)
시편 33:3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찌어다.
시편 40: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 새 노래는 새로운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이 즐겁게 받으실 찬송을 말합니다.
새(2319) 노래(7892) 쉬르 하다쉬
새노래...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 본 표현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찬양할
만한 새로운 경우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이번에 베푸신 구원은 너무 특징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이전의 자비 행위에 덧붙여진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감사의 표현을 매우 적절히 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의 구속 행위는 과거의 자비 행위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때
사용하였던 언어로는 불충분할 만큼 놀라운 하나님 편에서의 중재 사역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번의 구원 사역은 슬픔의 깊음 이후
영광으로 승귀(昇貴)하신 그리스도의 사건 때만큼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에는 언어가 불충분할 정도의 위대한 사역이었다는
뜻이다(Barner).
많은 사람이...두려워하여...의지하리로다
- 인류의 많은 백성들이 저자가
노래했었던 것과 같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목도하고 그 결과로 하나님을 존경하고 예배하고 경와하는 것을 배워서 그분만을 온전히
의뢰하게 된다는 것이다. 곧 그의 진실된 예배자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을 나타낸 표현이다.
시편 96: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찌어다.
시편 98:1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시편 144:9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편 149:1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찌어다.
이사야 42:10
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들과 그 거민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요한계시록 5: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요한계시록 14: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역대상 20장 요약
다윗의 군장인 요압이 암몬땅 랍바를 함락시키고,다윗의 군사들이 블레셋의 거인들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21장 요약
다윗이 요압을 시켜서 인구조사를 실시하엿고 인구조사에 대한 잘못으로 다윗은
회개합니다.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벌을 내려서 사람을 칠만명이나 죽이셨으며,이로 인해서 다윗은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구입하여서
하나님께 제사들 드리게 됩니다.
역대상 22장 요약
다윗이 성전을 짓기 위해서 여러 물자들을 준비하였고 다윗이 솔로몬과 신하들에게 성전건축에 대하여서 당부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월 8일(목) 역대상 20-2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스라엘의 인구조사(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Satan rose up against Israel and incited David to take a census of Israel.
역대상 21장은 사탄이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를 시행하도록 유혹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다윗은 이제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승리하는 삶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탄의 유혹을 받아 여호와 하나님보다 사람의 힘을 생각하며 인구 조사를 명령합니다.
인간의 힘을 의지하려는 행위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태도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적하다(알. ʽal) עַל
스트롱번호 5921
1. 옷을 입은. 2. 삼하 4:7
발음
[ ʽal ]
구약 성경 / 5772회 사용
격동하다(수트. çûwth) סוּת
스트롱번호 5496
1. 찌르다. 2. 자극하다. 3. 히필형 הִסִּית
발음
[ çûwth ]
구약 성경 / 18회 사용
관련 성경 / 충동시키다(삼상26:19), 충동되다(왕상21:25),
옮기다(욥36:16), 꾀다(신13:6, 대하32:11, 렘38:22), 청하다(수15:18, 삿1:14),
감동시키다(삼하 24:1, 대하 18:31), 설득하다(왕하18:32), 충동하다(대상21:1, 욥2:3), 권하다(대하18:2),
꾀임을 받다(대하32:15, 사36:18), 분노하다(욥36:18), 부추기다(렘43:3).
다윗의 인구 조사(역대상 21:1-17, 사무엘하 24:1-17)
본서의 내용을 살펴볼 때 지금까지 본서의 기자는 승승 장구하는 다윗 왕의 영광된
측면만을 부각시켜서 기록했다(10:1-20:8).
그러나 본장에서부터는 관심을 달리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준비하는
다윗 왕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즉, 자신의 인생 말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다윗의 신앙적 행위를 증거하는 것이다.
사실 이때는 시기적으로 다윗 왕의 통치 말기에 해당하는데 다윗 왕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던 때로부터 약 20년의 세월이 경과한
것으로 보인다(Payne).
참으로 이 20년의 기간 동안에 다윗 왕은 그의 큰 범죄로 말미암아 일련의 연쇄적인 징계들을 받았다.
그 징계들이란 암논의 추행 사건(삼하 13장), 압살롬의 반란(삼하 14-19장), 그리고 세바의 반란(20장) 등이었다.
그러나 본서 저자는 이러한 다윗(David) 왕의 불행했던 역사를 뛰어넘어 곧바로 성전 건축에 관련된 다윗 왕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저자가 다윗 왕이 겪은 고통스런 일련의 역사를 본서에서 생략한 것은 바벨론(Babylon) 유수(幽囚)에서
풀려난 유다 왕조의 후손들에게 될 수 있는 대로 그 왕조의 탁월성 및 정통성만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신정 국가 건설에 큰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자 하기 위함이었다(Payne).
그런데 이러한 저자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본장에서
다윗 왕이 크게 범죄했다고 생각되는 인구 조사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본서에 언급된 것은 이 일을 계기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전 건축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 사건을 동기로 해서 성전의 부지가 결정되고 성전 건축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단이...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 본 문맥은 내용상
삼하 24장과 일치하고 있으나 많은 차이점이 발견된다.
즉, 삼하 24장에서는 다윗을 격동한 주체가 하나님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본절에서는 그 주체가 사단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삼하 24장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Lange).
24: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유대인의 신관(神觀)에 비추어 볼 때 잘못된 추측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단의 활동을 허락하실 때에야 비로소 사단은 활동을 개시할 수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욥 1:12; 삼상 26:19).
참으로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일에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다(욥 12:23; 시 104:9-31; 사 50:2, 3; 갈 1:15,
16).
그래서 삼하 24장은 바로 이러한 섭리적 차원에서 다윗을 격동하신 주체가 하나님이었다고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움직여지는 결과적 측면에서 그 주체를 사단으로 기록한 것 뿐이다.
따라서 이 두 구절은 어느 하나
잘못된 것이 없으며 다만 상이한 관점에 따라 달리 기록된 것일 뿐이다(PulpitCommentary).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사단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였음을 알 수있다.
그러나 혹자는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사단이 다윗을 격동한 것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고 주장한다(욥 1:11; 2:5, Wycliffe).
그러나 사단이 다윗을 격동한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이라고 하기보다는 '고소', '기만' '파멸'을 일삼는 사단의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사단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은 자신의 세 가지 목적을 달성하신다.
첫째는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려는 다윗 왕의 교만을 제거하여 겸손하게 만드는것
둘째는 압살롬의 난, 세바의 난 때에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종
다윗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형벌하시는 것(삼하 24:1)
셋째는 성전건축을 구체적으로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
그리고 사단의 역할이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인데 이러한 활동을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혹은 연단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상(思想)은 포로기 전후에 나타난 유대교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O. Zockler).
출애굽기 30:12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찌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
민수기 26:2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총수를 그 조상의 집을 따라 조사하되 이스라엘 중에 무릇 이십세 이상으로 능히 싸움에 나갈만한 자를 계수하라 하시니.
사무엘하 24:1-2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왕이 이에 그 곁에 있는 군대 장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그 도수를 내게 알게 하라.
사무엘하 24:4
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장관들을 재촉한지라 요압과 장관들이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려고 왕의 앞에서 물러나서.
사무엘하 24:10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역대하 2:7
전에 솔로몬의 부친 다윗이 이스라엘 땅에 거한 이방 사람을 조사하였더니 이제 솔로몬이 다시 조사하매 모두 십 오만 삼천 육백인이라.
기독교인을 말씀에서 멀어지게 하는, 사탄의 최신 전략
최근 사회적 발전 및 디지털 미디어의 출현으로 성경을 찾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러나 브라운 박사는 "사탄은 항상 기독교인들을 성경에서 떼어놓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들인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수 세기 동안 성경읽기를 방해함으로써 사람들의 영적인 눈을 가려 온 사탄의 전략을 설명했다.
브라운
목사는 "과거에는 일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언어(라틴어) 안에 성경을 가둬둠으로써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윌리엄 틴데일의 수고와 사역으로, 성경이 유럽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영어로 번역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유럽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해외로 전파하던 식민지 시대에는, 사탄이 비영어권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읽는 것을 막기 위해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게 했다.
이에
관해 브라운 목사는 "비슷한 정서가 1655년 뉴헤븐 법전에 나타났는데, 교육의 목적이 아이들이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도록, 그리고 구원에 필요한 기독교의 주요 근거와 원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명시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브라운 목사는 "오늘날 사탄은 '주의 산만'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매우 성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며 "주의 산만에는 문자, 이메일, 전화, TV쇼, 뉴스, 스포츠 경기, 소셜미디어 글과 광고 등이 포함돼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유튜브의 추천 영상으로 주의를 빼앗겼던 자신의 경험을 떠올렸다. 그는 우연히 동물이 출연하는 영상을 접하고 거의 1시간 가량 보게 되었다고.
그는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진 데 대해 사탄을 탓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우리의 선택이다. 그러나 우리의 집중력을
빼앗가는 우리 시대의 유혹을 우리는 인식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우선순위에 두고자 결단할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브라운
목사는 "믿는 자들은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그들의 삶을 말씀을 읽고 천착하는 데 초점을 두기로 결단함으로써
말씀이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서 "충분히 말씀을 붙들고 삶 가운데 적용할 수 있다면, 이는 국가에도 말 그래도 혁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파이퍼 목사가 소개한 사탄의 전략 10가지이다.
1. 사탄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니니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사탄은
자신의 속성에 따라 거짓을 말한다. 그는 거짓말쟁이고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창세기 3장에 처음 등장한다. 그의
입술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진리에 대한 의심이었다("하나님께서 정말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리고 두 번째 나온 말은 교묘한 거짓말이었다("네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요한은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에 진리에
서지 못하고 진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거짓과 속임의 핵심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2. 사탄은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리운다.
이
세상의 신은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리우고,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다(고후 4:4). 그는 거짓을
말할 뿐 아니라 참된 것을 숨긴다. 그는 복음의 귀함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는 우리가 사실과 증거들을 보면서도, 그 귀한 가치는
알지 못하도록 가리운다.
3. 사탄은 빛과 의로움의 옷으로 자신을 가장한다.
고린도후서
11장 13~15절에서 바울은 어떤 이들은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인체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와 같이 사탄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말씀한다. 따라서 사탄의 종들이 스스로를 의의 종으로 가장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즉,
겉으로는 교회에 참여하기에 충분한 지식을 말하지만 안으로는 바울 사도가 '귀신의 가르침(딤전 4:1)'이라고 언급한 내용들을
가르치는 이들은 사탄의 종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마치 양의 탈을 쓴 늑대(마7:15)와 같다고 하셨다. 사도행전 20장 30절
말씀은 이들이 무리들을 끌어내어 멸망으로 이끈다고 기록돼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분별의 은사(빌1:9)가 없다면, 우리의
사랑은 우둔함에 빠질 수 있다.
4. 사탄은 기적을 행한다.
데로니가후서 2장
9절은 마지막 날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신다. 사탄은 마치 이러한 기적들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한다. 사실,
일부 사람들은 사탄이 거짓된 기적들만 행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있다. 설령 이것이 진리라고 해도,
사탄의 거짓은 거의 모든 이들에게 충분히 진짜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5. 사탄은 사람들을 유혹해 죄짓게 한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계실 때, 그분을 유혹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사탄은 예수님이 고통과 순종의 길을 포기하길
바랬다(마4:1~11).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삶에서 유다를 유혹하는데는 성공했다(눅22:3~6).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모든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씀을 전한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6.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뽑아내고, 신앙을 죽인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4장 1~9절에 나타난 4가지 밭 비유를 말씀해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의 땅에 뿌려지는데 일부 씨앗은 길 가에 뿌려져서
새들이 재빨리 먹어버린다. 주님은 15절에서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것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사탄은 말씀을 빼앗아간다. 왜냐하면 말씀을 통해 믿음이 자라나는 것을
미워하기 때문이다(롬 10:17).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염려의 말씀을 전했다.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의 신앙을 죽이려는 사탄의 계획을 잘 알고 있었다.
7. 사탄은 때로는 아픔과 질병을 일으킨다.
예수님은
허리가 굽어져서 스스로 펼 수 없는 한 여인을 치유해주셨다. 그러자 일부 사람들이 안식일에 이같은 일을 행한다며 예수님을
비난했다. 이에 예수님은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 13:16)"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같은 질병의 원인이 사탄에게 있음을 아신 것이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증거한다. 즉, 사탄이 병으로 사람들을
누른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그의 계획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모든 질병이 마귀의 역사라고 말하는 실수를 범해선 안 된다. 분명 '육체의 가시'가 우리의 성화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일지라도,
사탄의 사자가 될 수 있다(고후 12:7). 그러나 질병이 온전히 하나님의 계획인 경우도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그가 예수님의 자비로운 계획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탄을 데려올 필요를 못 느끼셨다.
8. 사탄은 살인자이다.
예수님은
그를 죽이려고 계획한 이들에게 "너희는 마귀의 아비로부터 나왔고, 그 아비의 일을 행하려 한다.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요8:44)"고 말씀하셨다. 요한 사도는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일 3:12)"라고 전했다. 예수님은 흠이
없는 서머나 교회에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계 2:10)"고 말씀하셨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사탄은 피에 굶주려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를 충만케 하려고(요10:10)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사탄은 할 수 있는대로 생명을 빼앗고, 결국 영원히 불행하게 만들고자 한다.
9. 사탄은 사역자들의 계획을 대적한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 2장 17~18절에서 자신의 선교 계획이 어떻게 죄절되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사탄은 전도와 제자도를 싫어한다. 그는 선교사들을 비롯해 전도에 열정이 있는 이들의
길에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해물들을 던져 놓는다.
10.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신자들을 고소한다.
요한계시록
12장 10절은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나고"라고 말씀하신다. 사탄은 반드시
패배한다. 그러나 그의 고소는 그치지 않고 있다.
사탄은 욥에게 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를 대한다. 사탄은
하나님께 우리에 대해 "그들은 정말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당신이 주시는 이익만 바라본다"고 참소한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1:11)." "그들의 신앙은 진짜가 아니라"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고소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항상 살아서 그들을 위해 간구하시는 분(히 7:25)'이 계시다는
사실이 매우 영광스럽다.
사탄은 결국 이기지 못할 것이다.
앞에서 사탄의 계획을 소개했지만, 이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은 이미 결정적인 승리를 하신 그리스도를 굳건히 붙드는 것이다.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골로새서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마가복음 3: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요한계시록 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앨리스 베일리(1880-1949)는 역사상 최고위급
사탄숭배자들의 지도자요, 귀신의 능력에 매우 민감한 영매였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적대자였던 그녀가 책을 쓴 목적은
세상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대체할 수 있는 ‘대체 가치체계’를 만들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에 기록된 모든 것들은
영계로부터 직접 왔고 자신의 창작물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녀에게 책의 내용들을 받아쓰도록 구술한 세 마리의 주신급(主神級)
영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엘리스 베일리가 기독교 가치체계를 악한 것으로 대체하는 데 실천적으로 사용했던 전략은 노인을 상대하지
않고 어린아이들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앨리스 베일리가 주창한 기독교 말살 시키기 10가지 전략
기독교를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적대자였던 베일리가 책을 쓴 목적은 세상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대체할 수 있는 '대체 가치체계'를 만들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에 기록된 모든 것들은 영계로부터 직접 왔고 자신의 창작물은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베일리가 기독교 가치체계를 악한 것으로 대체하는 데 실천적으로 사용했던 전략은 노인을 상대하지 않고 어린아이들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앨리스 베일리가 주창한 '10가지 전략'을 살펴보면, 오늘날 각국 의회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들과 꼭
같음을 알 수 있다.
앨리스가 수립한 이 전략의 핵심은 사회 각 분야에서 하나님을 추방하여 기독교적 전통을 말살하고 건전한 가정을
파괴하며 음란과 퇴폐의 영을 퍼뜨려서 국가와 사회를 타락시키는 것이다.
최고위급 '사탄숭배자' 앨리스 베일리가 전파한 '가정과 교회, 국가 무너뜨리는 10가지 전략'은 다음과 같다.
1. 교육시스템으로부터 하나님과 기도를 제거하라
커리큘럼을
변경시켜서 기독교 문화의 속박으로부터 아동들을 해방시켜라.
아동들이 학교에 가는 목적은 인생을 직면할 준비를 갖추기 위함이고
아동들은 학교와 교사를 신뢰하며 거기에 우월적 가치를 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육으로부터 하나님을 제거한다면, 아동들은
인생을 직면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는 신념을 무의식적으로 갖게 될 것이다.
아동들은 진급하는 데 있어서 학교당국이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것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며, 하나님에 관하여는 그저 부가적인 존재 정도로 여기게 될 것이다.
2. 아동들에 대한 부모의 권위를 축소시켜라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의사소통을 끊어라.
부모들이 자신들이 지키는 기독교적 전통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못하게 함으로써 부모의 전통이라는 속박으로부터 아동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이다.
아래는 앨리스 베일리가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들이다.
첫째, 아동권리를 과잉되게 신장시켜라
둘째, 체벌을 폐지하라
셋째, 교사들은 '10가지 전략'의 실행 요원이다.
3. 기독교 가정 구조 또는 전통적 기독교 가정구조를 파괴하라
전통적
기독교 가정구조의 억압은 견딜 수 없다. 가정이 국가의 핵심이라고 볼 때 만일 가정을 깨트린다면 국가를 깨트리는 것이다. 이런
감금상태의 구조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라. 이를 위해 앨리스 베일리가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들이다.
첫째, 성 문란을 조장하라
둘째, 광고 산업, 미디어-TV, 잡지, 영화 산업을 이용하여 섹스 하는 쾌락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부추겨라(선전전략).
4. '프리섹스'(Free Sex) 사회를 만들라 - 낙태를 합법화하고 낙태하기 쉽게 만들라
낙태
병원을 세워라. 학교 안에도 진료소를 만들라. 사람들이 섹스의 쾌락을 누리려면 그에 따르는 불필요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하여 그들의 섹스가 훼방 받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낙태 금지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며 이는 우리의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아이를 가질지 말지에 관해서 선택할 권리는 우리에게 있다. 한 여성이 임신을
원치 않는다면 그녀는 고통 없이 가능한 용이하게 그 임신을 지워버릴 자유를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
5. 이혼하기 쉽게 만들고 이혼을 합법화하라 - 평생결혼의 개념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라
사랑은 '사랑결합'이라는 신비로운 연결을 가졌다. 그것은 마치 난소로부터 발생하는
난자와 같아서 당신이라는 시스템을 경유하면서 당신 안에서 사랑의 호의를 클릭하는데, 세상에는 당신의 그 '사랑결합'에 응답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 당신이 그 사람을 만나면 당신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클릭하게 되며 이때 만나는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의
남자(또는 여자)이다. 만일 당신이 그 사람을 놓치면 그 사랑결합 사이클이 지나갈 때까지 수 년 간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행복하려면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그 사람을 붙들어라. 그 남자(또는 여자)를 기혼자 상태에서 빼내는 것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남자(또는 여자)인 그(또는 그녀)를 붙잡으라. 그(또는 그녀)가 엉뚱한 곳에 있다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그리고 만일 일정 기간 함께 살다가 그 사랑이 이미 죽었음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기독교적 가치 같은 속박에 얽매이지 말라.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쉽게 이혼할 수 있는 방법과 그리고 또 다른 사랑결합의 생성을 허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의 난자가 발생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랑결합이 생성되면 당신은 다시 한 번 인생을 즐기게 될 것이다.
6. 동성(연)애를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대체 생활방식으로 만들라
'섹스'하는
쾌락이 인간 최고의 즐거움이어서 누구도 이런 즐거움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되며, 누구도 그 즐기는 방법에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스스로 원해서 선택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동성(연)애든지 근친상간이든지 수간(獸姦)이든지 아무튼 쌍방이 합의하기만
하면 어떠한 형태의 섹스도 허용되어야 한다.
7. 예술의 품격을 떨어트려라 '미친 예술'이 되게 하라
예술이야말로
문화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열쇠이다. 인간의 상상력을 더럽히고 타락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장려하라. 왜냐하면 예술은 영의
언어로서 당신은 안에 있는 그것을 회화, 음악, 드라마 등의 형태로 끄집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類)의 예술과 음악과
영화들이 표현하고 있는 품격과 영성과 메시지를 살펴보라.
8. 미디어를 활용하여 선전하고 인간의 사고방식을 바꿔라
인간의 태도를 바꾸는데 가장 효과적인 최대의 경로는 미디어다. 신문, 라디오, TV, 영화를 이용하라. 미디어만이 아니라 광고회사, 옥외 광고판, 잡지 등을 통하라.
9. 종교통합운동을 일으키라
다른
종교들을 장려하여 기독교와 동등이 되도록 하라. 자신들만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을 분쇄하라.
그리함으로써 기독교는 격하될 것이고 여타 종교들이 신장될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미래와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중요성을
부각시켜라(인본주의).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선택할 권리가 인간에게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되도록 스스로 만들 능력이
있으며 자신의 목적을 결정할 권리를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말해 주라.
10. 각국 정부로 하여금 위의 모든 사항들을 법제화 하도록 하고 교회로 하여금 이러한 변화들을 추인하도록 하라 (동성애에 대한 차별금지법을 뜻함)
교회는 위의 사항들을 수용하도록 결국 교리를 변경시켜야 하며, 사람(성도)들을 변화에 적응시켜서 이러한 사탄적·세속적 구조와 체제 안으로 편입시켜야 한다.
사탄의 10가지 전략(디모데후서 3:1-4)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가정, 교회, 국가를 무너뜨리는 사탄의 10가지 전략
지피지기면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
나를 알고 적을 알면 승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성령을 잘 알고 따라가고
사탄의 정체를 잘 알아서 이기면 백전백승할 수 있습니다.
영국인 엘리스 베일리(1880-1949)는 역사상 최고 사탄을 잘
숭배하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탄 숭배자들을 모아 지도하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사탄의 영감에 매우 민감한 영매였습니다.
65년
전 그는 기독교를 말살할 수 있는 전략을 집필하였습니다.
“기독교 말살을 위하여 10가지 플랜” 이런 책입니다.
기독교를 이
땅에서 없애고 기독교를 대체할 수 있는 종교를 만들려는 책입니다.
그는 서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세 사탄이 나에게 와서 알려준
전략이다.”
그에게 와서 알려준 사탄은 사탄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스 베일리가 기독교 말살을 하려는 데 공격대상은
노인이 아니라 아동입니다.
엘리스의
‘10가지 전략’을 보니까 오늘날 세계 각국 정부의 통치 전략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오늘 날 정치는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전략을 알고 역전략을 세워야 할 필요성에서 이를 공개합니다.
사탄은 가정, 교회, 그리고
정부를 뒤엎기 위하여 10가지 전력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1. 교육 시스템에서 하나님과 기도를 제거하라
가정,
교회 그리고 정부를 파탄시키려면 아동들에게 가르치는 교육에서 기독교 문화를 없애라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모든 요소를 제거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동들로 하여금 기독교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가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교육에서 하나님을 필요하지 않은
존재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게 만들어 주는 교육이 그들의 목표입니다.
죤 듀이는 현대 교육의
아버지입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하여 주는 것이 교육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날 그런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교육은 전혀 다릅니다.
아이들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여 주는 교육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쳐주는 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과 밀담을 나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어느
정도 성숙하면 나무 위로 올라가게 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뛰어 내려라. 아빠를 믿고 뛰어 내려. 아빠가 받겠다.”
아이는
아빠를 믿고 나무에서 뛰어 내립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이를 받지 않아 곤두박질하고 맙니다.
아이가 아픔을 토하며 묻습니다.
“왜
받아준다고 하고 안 받아 주셨어요?” 아버지가 말합니다.
“너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무도 믿지 말아라. 부모 믿지 말아. 오직
하나님만 믿어라.”
이것이 유대인의 교육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성경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살라고 교육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교육 전략입니다.
사탄의 전략에
넘어간 현실입니다.
1962년 6월 25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정교분리 원칙을 발표하였습니다.
공립학교에서 하나님과 성경을 가르치는
것에 금지 판결을 내렸습니다.
주기도문과 수업전 기도는 금지되었습니다.
오히려
미국의 일부 학교들은 힌두교에서 나온 초월명상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 아이들을 의식 혼미하게 만든후 사탄과 접촉하게 하는
전략입니다.
아이들에게 명상 가운데 ‘안내자 영’을 만난다고 말해주고 있는 데 이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하나님 아닌 귀신과의
교제를 학교가 장려한다.
2. 아동 부모의 권위를 축소시켜라
사탄은
두 번째 전략으로 부모와 자녀 사이의 의사소통을 끊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부모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을
아동들에게 전달하지 못 하게 단절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전통에 속박되지 않고 해방되도록 전략을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엘리스 베일리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① 아동들 권리를 과잉되게 신장시켜라.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남아공화국은 1997-98년에 유엔이 제정한 유니세프 헌장의 아동 권리를 국내법으로 받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법대로 살아야 하기에 부모나 교사는 아동들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아동들에게 명령도 할 수 없습니다.
대신에 아동들은
부모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요. 내게 말하는 대로 하고 싶지 않아요.”
가르치려는
선생님에게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게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우리나라에도 지금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② 아동 체벌을 폐지하라.
아동체벌
금지법은 이미 세계 각국에서 이미 법제화되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선진국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아동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체벌할 수
없게 법으로 금지된 실정입니다.
한국의 학생인권조례 역시 체벌을 일체 금지하고 있습니다.
어느 초등학교 아이가 지은 시입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급히 폐기시켰던 시입니다.
지금 이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학원 가기 싫은 날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때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곡 구원 먹어 눈깔을 파먹어 이빨을 다 뽑아 버려 머리채를 쥐어뜯어 살코기로 만들어 먹어 눈물을 흘리면
핥아 먹어 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 가장 고통스럽게
③ 교사들을 10가지 전략의 실행요원으로 사용하라.
교사들이
아동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게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네 부모는 너에게 기도하고 성경 읽으라고 가르치고 강요할 권리가 없다.
너는
너다. 너는 너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너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자기표출, 자아실현, 자아성취를 해야 한다.”
지금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교사들이 아이들이 7살만 되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는
부모의 신앙을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
부모는 자기 신앙을 네게 강제할 권리가 없다.”
교사들이 가정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아이들로 하여금 부모와 하나가 되지 못 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유인이 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전략이 지금 실행되고 있습니다.
3. 기독교적 가정 구조를 파괴하라
국가의
핵심적 요소는 가정입니다.
사회의 가장 작은 세포는 가정입니다.
세포가 건강하여야 건강한 몸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이 건강하여야
건강한 국가입니다.
세포가 망가지면 몸이 망가집니다.
가정을 파괴하면 국가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가장 건강한 가정은 성경적
가정입니다.
성경적 가정 구조에서 아이들을 살지 못 하게 하면 국가는 파괴됩니다.
기독교적인 가정 씨스템에서 아이들이 나오게 하여
자유롭게 살게 하면 국가는 혼란이 오게 됩니다.
사탄은 구체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① 성(性)문란을 조장하라.
젊은이들에게
혼전 성교나 프리섹스를 장려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미화시키고 있습니다. 성적 쾌락을 인생 최고의 기쁨이라고 가치관을 심어
줍니다. 심지어 불륜과 혼외정사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긍지를 느낄 수 있도록 육욕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엡 5:3,5)
성적으로
극심하게 타락하면 말세의 징조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성적 타락이 극심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1-4)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7-39)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계 17:1-2) 쾌락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가장 추구하는 쾌락은 성적인 쾌락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 가장 많은 범죄는 성적인 범죄입니다. 로마가
멸망된 가장 큰 원인은 가정 파괴였습니다. 성적 타락이었습니다.
이혼하려고
결혼하고 결혼하려고 이혼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노아 시대에 가장 큰 범죄도 성적 범죄였습니다. 심지어 동성연애가
만연하였습니다. 서서는 춤을 추고, 앉아서는 술 퍼마시며, 누워서는 음란한 세대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시는 술로 전기를
만들면 우리나라 전체가 3시간 사용하는 전기를 만들 수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1919년 공산 국가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법”이라는 책에 나온 지침입니다. “청년을 타락시키라. 종교를 멀리 하게 하고, 성에 관심을 가지게 하라. 정신을 혼란시키고
사치하게 만들라.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성적인
타락은 종말 징조 중에 하나입니다. 특별히 AIDS (Acquired Innune Deficieney Syndrome 후천성
면역 결핍증)는 인류사 이래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노아홍수 심판이후 최대의 공포스런 징벌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암보다 무서운
말세의 징조입니다. 유해음식, 공기오염, 도덕적 타락등 어느 때보다도 유해한 환경에 살고 있는 것이 현대인입니다. 그리고 감기,
암, 폐렴, 고혈압, 당뇨병 등 인간을 위협하는 바이러스가 끊임없이 인체를 공격하는 환경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면역능력이 상실된다면 이는 치명적입니다. AIDS의 원인은 성도덕의 문란에서 오고 있습니다. 동성애, 수간 등에서 대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염은 상처난 피부와 Oral Sex등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에는 200만명이 보균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AIDS에 감염되면 2년 내에 사망하게 됩니다. 멀지 않아 노아시대, 소돔과 고모라, 바빌론, 로마제국이 성적타락으로
종말을 구했듯이 오늘의 인류도 같은 위기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알렉산더, 헨리8세, 나폴레옹, 니체도 성병으로 죽었습니다.
성적
타락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프로이드의 섹스이론은 인간을 성적동물로만 보고 있습니다.
산업혁명으로 여자들이 사회 참여가
활발하여 진 것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혼을 가정 파괴가 심해졌습니다.
영화, TV, 비디오 산업의 번창과 감각적 섹스
예찬도 문제입니다.
성의 자유를 주제로 한 문학, 연극, 저술도 문제입니다.
교육기관의 타락으로 혼탁하여졌습니다.
임신조절 능력이
발달하여 더욱 성적 타락을 부채질하였습니다.
의학의 발달, 피임법의 발달은 오히려 성의 타락과 비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낙태 증가, 인간생명의 경시 풍조. 계몽의 실패도 성적 타락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간음, 낙태, 프리섹스, 동성애 등의 무서운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는 사상도 문제입니다.
미국 통계입니다. <크리스천 투데이>(Christian Today)는
앙케이트 조사를 하였더니 기독교인 구독자 1000명 가운데 23%가 깊은 불륜의 관계를 가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5%가
부부관계 아닌 이성과 관계를 가졌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교인들의 반 정도가 음란문제 걸려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만 하여도
심각한 위기입니다.
몇
가지 이야기를 드려 봅니다.
물론 꾸민 이야기일 것입니다.
부부가 아들을 낳아 길렀습니다.
결혼할 때가 되어 연애를 하면서 한
여자를 사랑하고 결혼을 약속하였습니다.
아버지에게 여자 사진을 보여 드리면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이 여자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허락하여 주세요.”
사진을 보신 아버지가 깜짝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이렇게 된 마당에 너에게 숨길
수가 없다. 결혼하지 말아라. 얘가 네 이복 여동생이다.”
아들은 너무 충격을 받아 눕게 되었습니다.
식음을
전폐하였습니다.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대답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먹지 못 하니까 몸이 점점 수척하여 갔습니다.
겁이 난 어머니가 집요하게 물었습니다.
할 수 없이 아들이 말했습니다.
“어머니!
사실은 내가 결혼하고 싶어하는 여자가 있는 데 이복 여동생이래요. 아버지가 결혼하지 말래요.”
이 말을 듣고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아들아! 안심하고 결혼해라. 너한테만 말하지만 너는 네 아버지 아들이 아니야.”
이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성적 타락이 극에 달하는 시대입니다.
② 광고, TV, 신문 잡지, 영화 산업을 이용하여 성적 쾌락이 인생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선전하고 부추겨라.
온통
온 세계가 성적인 분위기입니다.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이 한 마디하였습니다. “한국은 어디를 보나 음풍이 불고 있습니다.” 이같은
전략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오늘날 광고는 거의 벌거벗은 젊은 여자를 이용한 섹스 모티브로 흐르고
있습니다. 모든 매스 미디어가 섹스 코드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날로 심해져가고 있습니다. 성적 범죄가 날로
증가되고 있습니다. 사탄의 전략입니다.
4. 프리섹스 사회를 만들어라
낙태를
합법화하고 용이하게 하라. 사탄은 프리섹스와 낙태를 통하여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낙태 전문병원을 늘리고
있습니다. 학교 안에 임신 진료소를 만들게 하고 있습니다. 여중고등 학교에 어린이 보관소를 설립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섹스의
쾌락을 누리려면 그에 따르는 불필요한 두려움에서 해방되게 하여야 합니다. 죄의식을 가지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면 섹스가 방해를 받게 되니까 피임법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아이를
가질지 임신한 아이를 낙태할지 결정권을 마음대로 가지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낙태 금지 주장은 우리의 인권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성이 임신 후 출산을 원치 않는다면 용이하게 태아 할 자유를 가지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낙태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피임제나 피임약과 함께 낙태는 인구조절의 유력한 수단이 된지 오래되고 있습니다. 낙태는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산
노인을 죽이는 것이 고려장이고, 태어날 생명을 죽이는 것이 낙태입니다.
성적 문란의 결과입니다.
수많은 어린 생명들이 빛을 보기
전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태어나자 말자 나일 강에 던져 죽여야 했습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미드라쉬에는
60만 명을 죽인 것으로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헤롯 왕이 어린아이들을 죽였습니다.
외경에는 60만명 죽인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수백만 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낙태의 천국이라고 별명이 붙었습니다.
일
년에 낙태로 죽어가는 생명이 150만 명입니다.
국제 가족계획 연맹은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행해지는 낙태가 매년 약
55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통계가 나오는 미국에서만 1973년에 대법원에서 낙태를 허용한 이래로
1700만 명 이상이 낙태되었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새로 태어나는 신생아는 약 600,000 명이지만
낙태로 죽어 가는 태아들은 2.5배가 되 150만 명입니다.
이것은 한국전쟁에서 죽은 생명들의 10배 이상에 해당하는 무서운
숫자입니다.

5. 이혼을 쉽게 만들고 합법화하라
평생
결혼의 개념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라.
남녀간의 사랑은 ‘사랑결합’(love bond)입니다.
사랑결합이란 육체적인 결합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하나가 되려면 긴
세월동안 조율이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결혼의 하모니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거친돌은 오랜 세월 파도에 갈고 닦아야 매끄러운 돌이
됩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안 맞으면 헤어지라고 당당히 유혹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고민하느냐고 시원스럽게 말합니다.
평생 고생하지 말고 이혼한 후
맞는 짝을 찾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교훈에 매이지 말고 과감하게 헤어지라고 충동질하고 있습니다.
이혼은 죄가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인생은 한번이고 후회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주는 영이 유여(有餘)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말라기 2:15-16)
6. 동성애를 대체 생활방식으로 만들라
사탄은
섹스의 쾌락은 인간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도 이 즐거움에서 제외되면 안 되며, 그 즐기는 방법에 있어 제약받으면
안된다고 부추기고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원해서 선택하는 것이라면 근친상간이든 동성애든 수간이든 피차 합의한 것이라면 전부
허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오바마에 의하여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었습니다.
목사에게 동성이 와서 결혼 주례를 요청하면
주례를 서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목사는 하나님이 동성 결혼을 금하고 계시기에 해주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거절하면 법을 어기는 것이기에 고발당하여 감옥에 가게
됩니다.
그리고 목회도 끝입니다.
비성경적인 것이 법적으로 합법화되고 있습니다.
말세의 징조중에 하나입니다.
동성결혼법이 통과된
나라가 18개국입니다.
동성애를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이라거나 죄라고 말하면 “증오 발언”으로 분류되어 불법 행위로 체포,
처벌받고 있습니다.
성경은 확실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는 여자와 함께 눕는 것같이 남자와 눕지 말라. 그것은 가증히 여기는
것이니라”(레 18:22)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를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으니라”(롬 1:27)
예루살렘에서도 세계 동성애자들의 축제를 열리고 있습니다.
World
Pride 라고 명명하는 이름으로 동성애 모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극구 반대하는 정통 유대인들과 정면 충돌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벽에는 이런 벽보가 몰래 붙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한 사람을 죽이면 4,500불 현상금이 붙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동성 연애자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 법을 통과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사탄의
전략입니다.
7. 예술의 품격을 떨어뜨려라
“미친
예술”이 되게 하라.
예술은 한 사회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예술이 발달한 사회가 최고 성숙한 사회입니다.
예술은 영혼의 언어입니다.
영혼을 예술로 말하면서 최고 경지에 가게 됩니다.
음악, 조각, 연극, 영화를 영적으로 잘 승화시켜
인간의 삶을 하나님께 가게 하는 것이 성경적 예술입니다.
그런데 사탄 예술을 통하여 인간의 상상력을 더럽히고 타락시키는 형태의
예술을 긍정하고 장려하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그러므로 예술을 더럽고 난잡하게 만들면 영혼도 같이 난잡해지며 기독교적 자치관은
축출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탄은 예술을 외설로 만들고 있습니다.
예술로 세상을 타락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전략은
예술까지 손을 뻗치고 있습니다.
8. 미디어를 활용 반(反)기독교적 가치를 선전하고 인간의 사고방식을 바꿔라
인간의
사고와 태도를 바꾸는데 가장 효과적인 통로는 매스 미디어입니다.
신문, 잡지, 라디오, TV, 영화, 광고를 이용하여 사탄의
전략을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치가들이 제일 먼저 점령하는 것은 미디어입니다.
사탄도 그렇습니다. 유신론을 무신론으로 바꾸는 데
미디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매스
미디어를 통해 음란, 폭력, 기타 세속적인 자료를 널리 퍼뜨리고 광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천문학적인 돈을 쓰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결혼보다 혼외 섹스 장면이 80-90배 더 많이 미디어를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치 성문란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위인
것처럼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TV 드라마로 동성애가 전 국민에게 방영되고 있다.
9. 종교통합운동을 일으켜라
다른
종교들을 관용하게 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알리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기독교와 대등하게 만들려는
전략입니다.
기독교만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니라고 조작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예수님를 격하시키고 다른 종교와 그
교주들을 격상시키려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자기 운명은 자기가 결정짓는 자기는
자기의 주인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인본주의 사상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탄을 숭배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지 못 하게 하였습니다.
눈도 밝아지지 못 하게 하고 하나님처럼 살지 못 하게 만드는 인간의 적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반대로 사탄은 자기가 저주 받을 것을 알면서도 선악과를 먹게 하고, 눈이 밝아지게
하고, 하나님처럼 가능성을 개발하게 하는 고마운 존재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멀리하고 사탄을 섬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날 사탄 교회인 그로터 교회가 늘어나게 하고 있습니다.
10. 각국 정부가 이러한 내용을 법제화하게 하고, 교회가 이런 변화들을 추인하게 만들라
교회는
위의 사항들을 추인하도록 그 교리를 변경시키도록 하는 것이 사탄의 최종적인 결론입니다.
사람들을 변화에 적응시켜서 이러한
무신론적 인본주의 체제 안으로 편입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주와 사상 가치가 기독교 아닌 인본주의에 철저히
입각하도록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국 정부들이 성경을 벗어나는 법률들을 계속해서 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픈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과 타협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위의 10가지 조항들과 관계된 사탄의 략들을 법률로 제정한 국가들이 많습니다.
정부와 교회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사탄의 전략에 말려 들어가 있습니다.
무슨 병인지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병입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것은 가장 큰 문제입니다.
따뜻한
물속에 개구리를 넣습니다.
개구리는 자기 체온과 맞는 적당한 온도속에서 포근함을 느낍니다.
서서히 조금씩 온도를 올립니다.
그래도 개구리는 모릅니다.
어느 정도 되면 개구리는 익어서 죽게 됩니다.
그러나 뜨거운 물속에 개구리를 넣으면 금방 튀어 나오게
됩니다.
이런 원리입니다.
서서히 교회가 죽어갑니다.
천천히 가정은 파멸되어 가고 있습니다.
은근히 국가는 썩어가고 있습니다.
깨달으면 늦습니다.
역전략 그러면 사탄의 전략을 이길 수 있는 역전략은 무엇일까요?
1. 마지막 징조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귀향 운동을 추진하고 있는 타쿤 단체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는 David Rudolf 유대인
목사님과 사이에라에서 30만명의 유대인들을 귀향시키려고 계획하고 있는 헝거리 선교사 M.Veenstra, Z.Gadziala 두
분에게 식사 대접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내게 예레미야 16장 15절을 수없이 많이 강조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내신 주의 사심으로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
이들은 분명 지금은 말세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2년
반 전에 하나님께서 말세의 환상을 너무나 정확하게 주셨기에 이 일에 생명을 바치며 일하고 있다고 단호한 어조로 강조하였습니다.
브라디보스톡에 있는 유대인을 직접 이스라엘로는 못데리고 가도 한국으로 데리고 왔다가 이스라엘로 이송할 수 있으니 협조하여 달라는
부탁으로 나를 만난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 징조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2. 죄짓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신다 할지라도 당장에 천국으로 들림받을 수 있는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언제 죽어도 떳떳하게 죽을 수 있는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3. 전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하여야 할 최고의 일은 전도입니다.
전도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꼭 기억하여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 더라"(행 13:48)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를 찾아내야 합니다. 시간이 급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세를 같이 살아가는 성도들이여!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하노니 말씀을 분별하는 복이 임하여서 주님을 부인하는 행동을 하지말기를 축복합니다.
다윗의 인구 조사(역대상 21:1-30. 사무엘하 24:1-17)
역대상 21장에서는 다윗이 인구를 조사하게 됩니다.
다윗의 마음에 교만한 마음이 들어가서 전쟁에 나갈 만한 자의 숫자를 계수하라고 요압에게 명령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힘을 의지하려고 했습니다.
본장은 사무엘하 24장에도 나와 있는 다윗의 인구 조사 사건이다.
[1-8절]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 . . .
1절,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사무엘하 24:1은,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사탄이 다윗을 격동한 것을 사무엘하 24장에서는 사탄이 다윗을 감동시키다로 번역합니다.
따라서 격동하다과 감동하다는 같은 히브리 단어입니다.
그 단어를 히브리 성경은 "수트(çûwth)"라고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탄이 사람을 유혹할 때 격동시키는 방법과 감동시키는 방법을 함께 병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격동하다’는 원어와 사무엘하 24:1의 ‘감동시키다’는 원어는 동일하다(수투).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사탄의 충동을 받아 범죄하도록 허용하셨다.
사탄은 존재하며 에덴 동산에서와 같이 지금도 사람들을 범죄케 하려고 활동한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도 격동시켜 범죄케 할 수 있다.
그는 욥은 시험하였었고(욥기) 베드로에게 잘못된 생각을 주었으며(마 16:23) 그를 밀 까부르듯하였고(눅 22:31) 지금도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를 지켜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넘어지기 쉽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하고 항상 주의 은혜에 의지하며 조심해야 한다.
다윗은 요압과 백성의 통치자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가서 브엘세바[남쪽 끝의 도시]에서부터 단[북쪽 끝의 도시]까지 이스라엘을 계수하고 돌아와서 내게 고하여 그 수효를 알게 하라.”
요압이 말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배나 더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이 백성이 다 내 주의 종이 아니니이까? 내 주께서 어찌하여 이 일을 명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로 죄가 있게 하시나이까?”
그러나 왕의 명령이 요압을 재촉하였다.
요압은 마침내 떠나서 이스라엘 땅에 두루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였다.
사무엘하 24:8은 그 기간이 9개월 20일이 걸렸다고 말한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백성의 수효를 다윗에게 고하기를,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110만명이요 유다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47만명이라고 하였다.
요압은 왕의 명령을 밉게 여겨 레위와 베냐민 사람들은 계수하지 아니하였다.
사무엘하 24:9는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80만명이요 유다 사람이 50만명이라고 기록하였다.
유다의 장정들의 숫자는 대략적인 것일 것이며, 이스라엘의 장정들의 숫자는 110만명 중에 담대한 자(카일)[용사]의 숫자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인구 조사의 일을 불쾌하게 여기셔서 이스라엘을 치셨다.
인구 조사는 군대의 숫자를 세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힘은 군인의 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있었다.
그러나 인구 조사는 군대의 수를 자랑하는 교만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이었다.
요압은 처음부터 그것을 느꼈고 다윗에게 그것을 하지 말기를 권하였으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치시자 뒤늦게 그것을 깨달았다. 그는 하나님께 아뢰었다.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9-14절] 여호와께서 다윗의 선견자 갓에게 이르시되 가서 . . . .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선견자 갓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갓은 다윗에게 나아가 고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마음대로 택하라. 혹 3년 기근일지, 혹 네가 석달을 대적에게 패하여 대적의 칼에 쫓길 일일지, 혹 여호와의 칼 곧 온역이 사흘 동안 이 땅에 유행하며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온 지경을 멸할 일일지 하셨나니 내가 무슨 말로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할 것을 결정하소서.” 하나님의 징벌은 구체적이었고 엄중하였다. 죄의 징벌은 엄중하다.
다윗은 갓에게 말했다.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 다윗은 예전에 약 10여년 동안 사울의 칼을 피하여 고생스런 세월을 보내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3년 기근이나 석달 피신보다 3일 온역[무서운 전염병]을 원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온역을 내리셨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의 죽은 자가 70,000명이었다.
[15-19절]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사자를 보내셨더니 사자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 . . .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멸하러 천사를 보내셨는데, 사자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시고 멸하는 천사에게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고 말씀하셨다. 천사는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을 받드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진노하시고 범죄한 자들에게 징벌하시지만,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자이시다. ‘하나님께서 뉘우치셨다’는 말은 인간적인 표현이다.
그때에 여호와의 천사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섰다. 다윗이 눈을 들어보니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과 땅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예루살렘 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윗은 장로들과 함께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겸손히 통회자복하는 마음으로 엎드려 하나님께 아뢰었다. “명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내니이다.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이것이 회개하는 자의 바른 태도이다.
여호와의 천사는 갓을 명하여 다윗에게 말하게 하였다.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 다윗은 갓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른 말씀대로 올라갔다.
[20-30절] 때에 오르난이 밀을 타작하다가 돌이켜 천사를 보고 . . . .
그때에 오르난은 밀을 타작하다가 돌이켜 천사를 보고 네 아들과 함께 숨었다. 사람은 거룩하고 권세 있는 천사를 보면 다 놀라 숨을 것이다. 다윗이 오르난에게 나아가자 오르난은 내어다보다가 다윗을 보고 타작마당에서 나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였다.
다윗은 오르난에게 말했다. “이 타작하는 곳을 내게 붙이라. 너는 상당한 값으로 붙이라. 내가 여호와를 위하여 여기 한 단을 쌓으리니 그리하면 온역이 백성 중에서 그치리라.” 오르난은 다윗에게 고하였다. “왕은 취하소서. 내 주 왕의 좋게 여기시는 대로 행하소서. 보소서, 내가 이것들을 드리나이다. 소들은 번제물로, 곡식 떠는 기계는 화목으로, 밀은 소제물로 삼으시기 위하여 다 드리나이다.” 오르난은 경건하고 착한 성도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왕과 백성을 위해 자신의 소들과 곡식 떠는 기계와 밀을 즐거이 드리려 하였다.
그러나 다윗 왕은 오르난에게 말했다.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결단코 상당한 값으로 사리라. 내가 여호와께 드리려고 네 물건을 취하지 아니하겠고 값 없이는 번제를 드리지도 아니하리라.” 다윗은 그 기지 값으로 금 600세겔을 달아 오르난에게 주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정당한 값을 지불하기를 원하였고 백성 중 어느 한 사람에게 짐을 지우기를 원치 않았다. 사무엘하 24:24는 다윗이 은 50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샀다고 기록하였다. 두 기록의 차이는 타작마당을 포함한 기지(아마, 넓은 땅이었을 것)의 범위의 차이때문일 것이다.
다윗은 거기서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다.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완전한 순종과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이며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을 상징하는 제사이었다. 여호와께서는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불로 응답하셨다. 또 그가 천사를 명하시므로 심판하는 천사는 칼을 집에 꽂았다.
이때에 다윗은 여호와께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응답하심을 보고 거기서 제사를 드렸다. 왜냐하면 옛날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여호와의 장막과 번제단이 그때에 기브온 산당에 있었지만, 그가 여호와의 천사의 칼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 앞에 가서 하나님께 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곳은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바로 그곳이었다. 역대하 3:1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고 증거하였다.
본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 우리는 사탄의 시험에 떨어지지 않도록 늘 깨어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라도 사탄의 충동에 넘어졌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깨어 있자.
둘째, 우리는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자.
다윗의 인구 조사는 그의 교만한 마음의 발동이었다고 본다. 그는 잠시 이스라엘의 힘이 하나님께 있음을 잊어버린 것 같다. 우리는 인간의 힘을 의지하는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자.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이 엄위함을 깨닫고 범죄치 말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은 신약성도들에게도 범죄하면 하나님의 징계가 있음을 잊지 말자. 히브리서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넷째, 우리는 죄를 깨달았을 때, 겸손히, 철저히 통회자복해야 한다.
이것이 회개하는 자의 바른 태도다. 징벌로부터 구원과 회복을 얻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밖에 없고, 그의 긍휼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며 철저히 회개하는 길밖에 없다.
민수기 26:1-65 / 이스라엘의 인구조사
염병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이스라엘 온 회중의 수를 계수하라 명하십니다.
야곱의 장자 르우벤 자손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명령대로 조상의 가문을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전쟁에 나갈 만한 자를 모두 계수합니다.
그 총수는 1차 인구조사 때보다 1,820명이 감소한 601,730명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각 지파별로 계수한 명수대로 땅을 나눠주어 기업을 삼게 하되 제비를 뽑아 나누라 하십니다.
레위인은 기업이 없으므로 이스라엘의 총계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1차 인구조사 때 시내 광야에서 계수했던 사람 중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인구 조사 명령(1~4절)
1. 염병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 “너희는 20세 이상으로 전쟁에 나갈 만한(군대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의 수를 가문별로 등록해서 온 이스라엘 회중의 수를 계수하라.”
3. 그래서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 가의 모압 평지에서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4. “여호와께서 모세와 애굽 땅에서 나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20세 이상 된 남자들의 수를 계수하라.”
각 지파 별 인구 숫자(5~51절)
이스라엘의 자손들 중에서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는 모든 남자들의 수는
각 지파별로 다음과 같습니다.
1차 조사(민수기 1장) 2차 조사(민수기 26장) (+ 증가, - 감소)
르우벤 지파에서 46,500명 ➠ 43,730명 (- 2,770명)
시므온 지파에서 59,300명 ➠ 22,200명 (-37,100명)
갓 지파에서 45,650명 ➠ 40,500명 (- 5,150명)
유다 지파에서 74,600명 ➠ 76,500명 (+ 1,900명)
잇사갈 지파에서 54,400명 ➠ 64,300명 (+ 9,900명)
스불론 지파에서 57,400명 ➠ 60,500명 (+ 3,100명)
에브라임 지파에서 40,500명 ➠ 32,500명 (- 8,000명)
므낫세 지파에서 32,200명 ➠ 52,700명 (+20,500명)
베냐민 지파에서 35,400명 ➠ 45,600명 (+10,200명)
단 지파에서 62,700명 ➠ 64,400명 (+ 1,700명)
아셀 지파에서 41,500명 ➠ 53,400명 (+11,900명)
납달리 지파에서 53,400명 ➠ 45,400명 (- 8,000명)
합하여 603,550명 ➠ 601,730명 (1,820명 감소)
인구 조사를 명령하신 이유(52~56절)
5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53. “등록된(계수된) 사람의 수를 따라 땅을 나눠주어 기업을 삼게 하라.
54. 인원수가 많은 자에게는 기업을 많이 줄 것이요,
수가 적은 자에게는 적게 줄 것이니, 그들이 계수된 수대로 기업을 주되
55. 오직 그 땅을 제비를 뽑아 나누어 주어 그들의 조상의 지파의 이름을 따라 물려받게 할지니라.
56. 수가 많든 적든 간에 그들의 기업을 제비를 뽑아서 나누게 할지니라.”
레위 지파(57~62절)
57. 레위인으로서 계수된 자들의 종족들은 이러하니, 게르손에게서 난 게르손 종족과, 고핫에게서 난 고핫 종족과, 므라리에게서 난 므라리 종족이며
58. 레위 종족들은 이러하니, 립니 종족과 헤브론 종족과 말리 종족과 고라 종족이었습니다. 고핫은 아므람을 낳았으며
59. 아므람의 아내의 이름은 요게벳인데, 그는 레위가 애굽에서 낳은 딸입니다. 요게벳은 아므람에게서 아론과 모세와 그 누이 미리암을 낳았습니다.
60. 아론에게서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태어났습니다.
61.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는 (금지된)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리다가 죽었습니다.
62. 레위인으로서 태어난 지 1개월 이상 된 모든 남자들의 수는 23,000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그들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수에 계수되지 않았습니다.
세대교체(63~65절)
63. 이들은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 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인구를 조사할 때에 계수한 자들입니다.
64.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이 안에는 한 사람도 포함되지 않았으니
65.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살아남지 않았습니다.
묵상
1. 2차 인구조사
1) 염병 후의 인구조사(1절)
이스라엘이 모압과 미디안 여자들에게 미혹을 당하여 바알에게 경배하였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염병에 걸려 24,000명이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를 조사하게 하십니다.
민수기 1장에서 1차로 인구조사를 한지 약 38년 만에 하는 인구조사입니다.
1절에서 ‘염병 후에’라는 말이 제일 처음에 나오는 이유는 염병으로 24,000명이나 죽었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가 겨우 1,820명밖에 감소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2) 사막에서 38년간 지낸 후의 인구수의 비교
이스라엘이 38년간 지낸 광야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사막입니다.
양식도 물도 구할 수 없는 곳이므로 수백만 명은 고사하고 단 몇 명도 지내기 힘든 곳입니다.
그런 곳에서 전쟁에 나갈 군인의 수만 해도 6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므로 백성들 전체의 수를 따지면 적어도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38년간 지냈는데 겨우 1,820명만 감소한 것입니다.
그것도 그 과정에서 몇 번이나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수만 명씩 죽임을 당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그 자체로 큰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각 지파의 증감
1) 많이 감소한 지파들
1차 조사 때와 비교하여 감소한 지파는 르우벤, 시므온, 갓, 에브라임, 납달리 지파들입니다.
그 중에서 르우벤 지파는 고라의 일당이 모세에게 대적할 때 르우벤 지파인 다단과 아비람이 함께 참여하였는데 그때 땅이 입을 열어 산채로 지옥에 빠지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또 그들과 함께 한 250명은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 살라 죽게 하였으므로 그 영향으로 그 수가 감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많이 감소한 시므온과 에브라임과 납달리 지파에 대하여는 그 원인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2) 각 지파의 증가와 감소가 중요한 이유
민수기 26장에서 1차 인구조사와 비교하며 각 지파의 인구수의 증감을 자세하게 증거하는 이유는, 이 사람들이 바로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구가 많이 감소한 자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 그만큼 많은 것이고, 인구가 많이 증가한 자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자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뜻합니다.
3) 사람의 숫자대로 땅을 기업으로 얻게 하라(52~56절)
하나님께서는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지금 조사한 인구의 수를 따라 많은 지파는 땅을 많이 얻게 하고 적은 지파는 땅을 적게 얻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그 땅을 분배할 때에 반드시 제비를 뽑아 땅을 얻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제비를 뽑으라는 것은 그 땅을 하나님께서 정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말씀대로 신실하게 살아온 자들은 가나안 땅에도 더 많이 들어가고, 그곳에서 얻는 땅도 그만큼 더 많이 얻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장차 천국에 들어가도 받는 상급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순교를 한 바울과 겨우 주일 예배에나 참여하는 자가 같은 상급을 받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묵상 :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광야 40년은 이 땅에서의 우리의 한 평생의 삶을 상징하고, 가나안은 인생의 삶을 끝낸 후에 들어가는 천국을 상징합니다.
어떤 지파는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실하게 살아서 더 많은 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어떤 지파는 걸핏하면 불평하고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광야에서 더 많은 사람이 죽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자들이 그만큼 적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사람은 땅의 일에만 몰두하다 천국을 준비하지 못해 영원히 멸망을 당하고, 어떤 사람들은 천국을 준비하는 믿음을 가져 영생을 얻습니다.
3. 세대교체
1)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한 사람도 없다(63~65절)
멀리 가나안 땅에 보이는 싯딤에서 인구조사를 할 때에는 38년 전 1차 인구 조사를 할 때 20세 이상으로 계수된 자들은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한 사람도 살아남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하여 하나님께서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차 조사 때에 20세 이하였던 자들과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자들만이 살아남았는데, 그들의 수가 1차 조사 때보다 겨우 1,820명만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2) 신앙의 명가(名家) 아므람과 요게벳 가족(59~60절)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조사한 일들이 기록된 가운데 아므람과 요게벳의 가족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므람과 요게벳이 낳은 자녀는 아론과 모세와 그 누이 미리암입니다.
이 세 사람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한 일을 최 일선에서 한 사람들입니다.
애굽의 바로왕이 이스라엘의 사내아이를 다 죽이라 명하였을 때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바로왕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더 두려워하여 모세를 살려 두었는데, 요세벳의 믿음이 그대로 모세에게 이어져서 이스라엘을 구하는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묵상 : 하나님께 세움 받는 자가 되십시오.
세상에서는 꿈과 야망을 가진 자들이 성공을 합니다만, 하나님의 일꾼은 오직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 80세 노인 모세를 일꾼으로 세우셨고, 하나님께서 노예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소년 다윗을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처럼, 또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들어 쓰임 받는 자가 됩시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 하나님께서 이런 자를 일꾼으로 들어 쓰십니다.
역대상 17장 요약
나단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를 다윗에게 말하였며,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드리고 기도를 올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8장 요약
다윗이 블레셋, 모압, 소바, 시리아, 에돔을 쳐서 굴복시켰으며 여러 전쟁에서 승리한 다윗이 공정하게 나라를 다스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9장 요약
암몬왕 나하스가 죽게되자 다윗이 위로 사절단을 보내는데 사절단이 첩자로 몰려서 조롱당하다가 돌아오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다윗의 군장인 요압이 아람을 물리치고,아비새가 암몬을 물리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3:20
토지의 후박과 수목의 유무니라 담대하라 또 그 땅 실과를 가져오라 하니 그 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더라.
사무엘하 10:12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역대상 19:13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시편 31:24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이사야 41:6
각기 이웃을 도우며 그 형제에게 이르기를 너는 담대하라 하고.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23:11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5월 7일(수) 역대상 17-1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는 담대하라(19:13)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Be strong and let us fight bravely for our people and the cities of our God. The LORD will do what is good in his sight.
담대히하다(아포톨마오. apŏtōlmaō) ἀποτολμάω
스트롱번호 662
1. 담대히 ~하다. 2. 감히 ~하다. 3. 롬 10:20.
발음
[ apŏtōlmaō ]
어원 / 575와 511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담대하다(롬 10:20).
히브리서 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히브리서 10장 35절은 신앙의 여정을 걷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강력한 격려와 도전의 말씀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의 담대함을 포기하지 않을 때, 큰 상이 기다리고 있음을 약속합니다.
이 구절은 초대교회의 박해와 어려움 속에서 믿음을 지켰던 성도들에게 특별히 중요한 메시지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현대의 삶 속에서 어떻게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담대함의 본질
히브리서 10장 35절에서 "담대함"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파르레시아"(παῤῥησία)입니다.
이는 '자신감'이나 '확신', '공개적으로 말하는 용기'를 뜻합니다.
성경에서 담대함은 단순한 인간적 용기가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앙적 확신을 의미합니다.
이는 두려움을 넘어서는 힘이며, 우리의 믿음과 소망의 기초가 됩니다.
παῤῥη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3954
1. 숨김없음. 2. παρρησίᾳ : 공공연히. 3. 용기
발음
[ parrhēsia ]
어원 / 3956과 4483의 파생어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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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숨김없음, 솔직, 명백, 막8:32, 요7:13, 16:29. [주] μετὰ παρρησίας: 분명히, 노골적으로, 자신있게, 확신을 가지고, 행2:29.
-
2. παρρησίᾳ : 공공연히, 내어놓고, 요7: 26, 11:54, 18:20, 골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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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용기, 확신, 대담, 담대, 두려움 없음, 행2:29, 고후7:4, 엡3:12, 히4:16, 요일2:28.
-
관련 성경 /
담력(딤전3:13, 히10:19). [동]
드러내다(막8:32, 요18:20), 드러나게 말하다(요7:13, 26), 드러나다(요11:54), 담대하다(고후7:4,
빌1:20, 히3:6). [부] 밝히(요10:24, 11:14, 16:29), 담대히(행2:29, 엡6:19, 히4:16),
담대하게(행4:13).
다윗의 담대함 :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을 보였습니다.
그의 담대함은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
사도들의 담대함 :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 앞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담대함은 성령의 충만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8. 12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적용 : 우리가 직장에서, 가정에서, 혹은 사회 속에서 하나님을 증거할 때에도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소리 높여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확신과 신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2. 담대함의 장애물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는 권고는, 우리의 담대함이 위협받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의 담대함을 흔들 수 있는 여러 장애물이 존재합니다.
두려움 : 두려움은 담대함의 가장 큰 적입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약화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4장에서 물 위를 걷는 베드로에게 두려움을 극복하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태복음 14:31)
세상의 유혹 : 세상의 재물, 명예, 쾌락은 우리의 담대함을 약화시키는 또 다른 요인입니다. 마태복음 6:24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적인 것에 매여 있을 때, 하나님을 향한 담대함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의 경험 : 과거의 실패는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다시 도전하려는 의지를 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실패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회복의 은혜로 인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공동체의 부재 : 신앙의 여정에서 혼자 걷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4-25절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담대함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3. 담대함의 상급
히브리서 10:35
"담대함이 큰 상을 얻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상급은 단순히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영적 상급 : 담대함은 우리의 신앙 성숙과 연결됩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은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담대함으로 믿음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관계적 상급 : 담대함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합니다. 다니엘서 3장에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담대함으로 풀무 불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담대함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경험하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궁극적 상급 : 우리의 담대함은 최후의 심판 날에 영광스러운 보상으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충성된 종들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담대함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갈 때 받을 궁극적 상급을 나타냅니다.
결론 : 담대함을 붙들라
히브리서 10장 35절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신앙의 여정을 완주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약속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담대함을 잃지 않았고,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한 도전과 격려가 필요합니다.
담대함은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선물이며, 이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두려움과 유혹, 실패의 경험을 이겨내고 담대함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동시에 우리는 아버지의 상급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담대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두려움과 죄를 이기셨기에, 우리는 주님을 믿음으로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담대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이유(이사야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은 다윗의 강하고 담대한 믿음 때문에 그를 택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실히 알면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말이지 우리에게 한말은 아니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인이요, 유대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접붙임 바 되어 영적인 이스라엘이요, 영적인 유대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두 우리들에게 주신 약속인 것입니다.
1.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면 항상 함께 계신 주님을 바라봐야지 두려움을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두려움을 바라보면 거기에 사로잡혀서 우리는 힘을 잃고 좌절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용감하고 담대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숨을 곳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피난처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시편 91편 2절에 “나는 야훼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적군이 쳐들어 오더라도 우리가 하나님 안에 피할 수가 있고 하나님이 요새가 되어서 어떠한 원수도 무너뜨릴 수가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 되시기 때문에 어려울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들고, 품에 안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91편 3절에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삶속에 여러 가지 올무가 놓여져 있고 그물이 쳐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 사냥꾼의 그물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시편 91편 5절로 7절에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부지 불식간의 밤에 다가오는 공포와, 원수의 화살에도 보호해 주시고 마귀가
흑암중에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어마어마한 질병에도 우리는 안전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천인이 내 곁에서 쓰러지고
만인이 내 우편에서 쓰러져도 이 재앙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므로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좋을때만 같이 계시고 어려울때는 우리를 떠나시는,
착할때만 같이 있고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변함이 없으신 것입니다.
아무리 위험하고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우리는 두려워 하지 않고 안전히 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두려움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 보십시오.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항상
우리를 두려워하게 하고 협박하게 하는 사건들은 늘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 되시고 하나님은 그 날개로 우리를 덮어 주시므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으면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건짐을
받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하나님께서는 “내가 천사들의 하나님뿐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여호수아의 하나님 그리고 바로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된다면 하나님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창세기 22장 13절로 14절에 하나님은 야훼 이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예비해 놓은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굽이굽이에 우리가 필요한 도움을 하나님은 항상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위기가 다가와도 그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길이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훼 이레가 되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야훼 라파가 되십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야훼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임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병들어서 상처입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고치고 치료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직접 성령의 능력으로 치료하시기도 하고 훌륭한 의사나 약을 통해서
공기나 물이나 양식을 통해서 우리를 치료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병들었을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훌륭한
병원으로 인도해 주시고 좋은 약을 먹게 해주시고 좋은 물을 마시고 좋은 음식을 취하게 하시고 혹은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치료자와 환자의 관계인 것으므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항상 치료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말라기 4장 2절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23장 25절에도 “네 하나님 야훼를 섬기라 그리하면
야훼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야훼 닛시가 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7장 15절로 16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 싸워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동안에 크고 작은 원수들이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힘으로 싸울수가
없어 괴로울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싸워주십니다. 과거를 돌이켜 보십시오. 우리를 향해 원수가 쳐들어와도 항상 하나님께
부르짖고 의지했을 때 하나님은 승리의 깃발을 흔들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미래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전쟁하는
하나님, 우리를 위해서 싸워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야훼는 샬롬입니다. 사사기 6장 24절에 있는 말씀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귀, 영화,
공명을 다 가져도 마음에 평화가 없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권력이 사람에게 행복을 갖다 주지 않습니다. 평안이 없는 권력은
고통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살아도 평화가 없으면 행복을 절대로 없습니다. 하지만
야훼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 마음속에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29편 11절에 “야훼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야훼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욥기 22장 21절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야훼 로이가 되십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시편 23편 1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서 지팡이를 들고 막대기를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지팡이는 우리 길을 만들어 주시고 막대기는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원수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러 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잔이 넘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야훼 로이, 우리 목자되신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야훼 찌드케누가 되십니다. 예레미야 23장 5절로 6절에 하나님이 우리의 의가 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더러운 인생들입니다. 우리 스스로 결코 하나님 앞에 설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죄가 되셔서 우리 죄를 십자가에서 다 청산하시므로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그 보혈로 씻음받고 은혜의 선물로 의롭다 함을 받아
하나님처럼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야훼 메카디쉬켐이 되십니다. 출애굽기 31장 13절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성령께 의지하면 성령이 세상의 부패를 다 제하시고 사망을 제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고 깨끗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 우리 하나님은 야훼 삼마가 되십니다. 야훼는 우리와 항상 같이 계신다고 에스겔 48장 35절에 말씀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너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전인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네가 내 안에 내가 너희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은 우리의 성전속에 성령으로 와서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임마누엘로 와 계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내 하나님은 야훼 이레가 되시고, 야훼 라파가 되시고, 야훼 닛시가 되시고, 야훼 샬롬이 되시고, 야훼
로이가 되시고, 야훼 찌드케누가 되시고, 야훼 메카디쉬켐이 되시고, 야훼 삼마가 되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가 늘
생각하고 의지하면 놀라지 않고 평안하게 인생을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3.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우리는 다 연약합니다. 영적으로 연약하고, 심적으로 연약하고, 육체적으로 연약하고 생활이 약합니다. 이렇게 형편없이 약한 우리를
강하게 붙들어줄 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로 10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약해도 우리 질그릇 속에 보배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아버지와 성령과 더불어 우리속에 들어와 계십니다. 예수믿는 사람과
안믿는 사람은 무엇이 다릅니까? 예수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속에 거하시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예수 안믿는 사람은 공중 권세잡은
자가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과 화목되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더불어 삼위일체가
우리속에 들어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죄와 불의와 추악과 질병과 저주와 가난과 고통이 우리를 우겨싸도 우겨싸이지 않는 것은 이를 이미
십자가에서 이겨 버리신 예수님이 우리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줄도, 부패의 줄도, 질병의 줄도, 저주의 줄도, 죽음의 줄도
산산조각으로 끊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아무리 계산해도 나갈 길이 없는 답답한 일을 당해도 홍해를 갈라서 길을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속에 계시므로 답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핍박을 당해도 버림바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핍박당해서 사람들이 만나주지 아니하고 우리를 외롭게 격리시킨다 할지라도
하늘의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과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품어 주시므로 조금도 외롭지가 않습니다. 핍박을 받을수록
우리는 은혜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28절에 “야훼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할수 있는 것은 주님은 나를
돕는 분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어떻게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시기에 내가 거꾸러져도 망하지 않습니다.
나는 약해도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은 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고 나갈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는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4.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우리를 도와 주되 미지근하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놀라운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 위에 몸찢기고 피흘려서 참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짊어지시고 세상을 다
멸하시고 질병을 감당하시고 죽음을 감당하시고 저주를 감당하시고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그냥 형식적으로 우리를 도와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23편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데 누가 나와 같이 계십니까? 부모, 형제,
친구, 친척도 다 떠나도 주님은 나와 같이 계셔서 그 지팡이로 길을 여시고 막대기로 원수를 쳐서 물리치시고 우리를 도와 주셔서
해를 받지 않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에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진수성찬을 베풀어주시는 주님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저는
원수가 올때마다 늘 말합니다. “원수가 나를 치면 주님께서 또 밥상 차리시겠구나” 평안할때는 밥상을 안차리시지만 고난당할 때
원수가 쳐들어오면 밥상을 차리셔서 먹게 하시고 원수보다 강하게 만들어 주시고 머리에 성령으로 기름부어 주셔서 긍정적 기쁨을 가지고
살고 잔이 넘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면 참으로 우리를 도와 주셔서 우리를 전인
구원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1절로 5절에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우리를 도와 주시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5. 참으로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왜 주님의 손이 의롭습니까?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몸찢기고 피흘렸기 때문에 그 손은 의롭습니다. 아울러
주님은 값없이 우리를 도와 주셨지만 그분은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저 우리를 도와 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를 친히 십자가 위에서 다 몸찢기고 피흘려서 청산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 주는 손길은 의로운 손인 것입니다. 불의한
손이 아닌 것입니다. 값을 지불한 손인 것입니다. 주님은 깨끗한 의로운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죄를 청산한
의로운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그 많은 죄가 다 청산되고 용서와 의로운 깨끗한 손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사랑의 주님은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붙드십니다. 주님이 손을 내게 내밀면 그 손은 용서의 손이요, 거룩한 손이요, 치료의
손이요, 축복의 손이요, 영생천국의 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불의하게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너희를 위해서 내가 대신
죽었다.너희를 위해 대신 몸을 찢었고 피를 흘려서 너희의 모든 불의, 추악, 저주, 절망을 청산해 버렸다. 그러므로 내 손은
의로운 손이다.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나의 백성을 내가 붙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아야 마땅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죄를
회개하고 주의 이름으로 부르면 주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를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불안과
공포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어느곳을 바라보나 불안하고 공포가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을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점을 칩니다. 과학이 발달되면 점이 없어질줄 알았는데 과학이 발달되니 인터넷을 통해서 점을 치고,
휴대전화를 이용해 점을 치고, 컴퓨터로 점을 칩니다. 오히려 점이 과학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사람들이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하고 연약하고 공포에 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것을 의지할 필요가 없는것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사자와 곰도 물리칠수 있고 골리앗도 물리칠수가 있고, 세상의 원수 마귀를
물리칠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는 한길로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놀라지 마십시오.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나가십시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이솝의 우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숲에 왕 노릇하는 사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자에게 늘 당하기만
하는 여우가 있었는데, ‘어떻게 하면 저 사자를 숲에서 쫓아낼 수 있을까?’하고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꾀를 생각해내고는 사자에게 도전장을 보냈습니다.
“너 사자는 들어라! 이제부터 이 숲의 동물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나니까 사자는 그만 왕좌에서 내려오기를 바란다.”
사자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미심쩍어서 ‘동물들이 무서워하는 증거를 대라.’고 했습니다.
여우는 ‘나를 하루만 따라
다녀 보면 알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사자는 당장 여우의 뒤를 따라 숲을 다녀 보았습니다.
아, 그랬더니
정말 동물들이 여우를 보고 줄행랑을 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토끼며 노루는 물론이고, 곰과 멧돼지도 도망을 쳤습니다.
여우보다
힘도 세고 덩치도 큰 동물들이 모두 슬금슬금 도망을 쳤습니다.
이것을 본 사자는 저 여우에게 뭔가 막강한 힘이 생겼다고 생각을
하고는 그만 짐을 사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솝 이야기에서 믿음의 사람이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여우 뒤에 사자가 있다는 것처럼 하나님이 항상 등 뒤에서 밀어주시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담대하려면 먼저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Yet I hold this against you: You have forsaken your first love.
처음 사랑(first love)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 본절은 에베소 교회에 대한 책망을 나타낸다.
'처음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 이다.
1. 에베소 교인들이 가졌던 기독교적인 사랑 즉 형제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행 20:35; 엡 1:15, Vincent, Plummer, Charles, Moffatt, Rist, Kiddle).
2. 처음 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 가졌던 그리스도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cott).
에베소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회에 있던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느라고 형제를 의심하고 엄격하게 구별함으로 형제에 대한 사랑이 식어졌다(Barclay, Mounce, Ladd).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형제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막12:29ff., Beasley-Murray, Johnson).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형제 사랑을 동반하기 때문에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은 어느 하나라도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버렸느니라'에 해당하는 '아페카스'는 부정 과거로 단회적 행동을 나타내어 에베소 교인들이 그들이 가졌던 처음 사랑과 완전히 단절되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본문은 에베소 교회가 교리적(敎理的)으로 칭찬할 사실이 있다 할지라도 생명 없는 형식주의로 전락하여 사랑을 상실했음을 단호하게 책망하고 있다(Alford, Johnson).
이사야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루이카쓰(漏活. 루활) : 눈물의 치료의 효과
루이카쓰(淚活, 루활)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눈물 활동> 이라는 모임
우리가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로마서 8:31-33)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사실 그리스도인은 외적으로 별로 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약합니다.
초대교회 이후로 로마 황제의
박해로 엄청난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인들과 우상숭배자들까지 그리스도인을 대적하는
세력은 세상에 널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을 대적할 힘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당하면서도
물리적으로 대적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나라 사정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전파되던 때는 1832년경이었습니다.
1832년 화란 선교사 구쯔라프(Gutzlaff)가 만주에서 한인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1865년 토머스(Robert J.Thomas)선교사가 대동강변에서 첫 순교를 하고,
1872년 존 로스(John
Ross)와 맥킨타이어(John McIntyre)가 만주에서 한인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이렇게 간접적인 전도 때부터 순교자가
생겨났습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General Sherman incident)
미국의 무장 상선 '제너럴 셔먼(SS General Sherman)이 1866년 7월 25일 평안도 용강현 주영포 앞바다에 도착한 뒤 대동강을 거슬러 평안도의 중심지인 평양부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대포를 쏘고 민간인을 살해하자, 9월 5일 당시 평안 감사 박규수 휘하의 조선군 부대가 배를 급습하여 불태우고 선원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19세기는 서구 열강에 의한 아시아의 개항 및 식민지화가 극에 달한 때였다.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는 민, 관을 가리지 않고 눈에 불을 켜고 아시아를 개방시켜 이권을 선점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 즈음하여 아편 전쟁과 쿠로후네 사건으로 중국과 일본도 개항의 길을 선택했다.
민간상선인 제너럴 셔먼호 역시 비슷한 이유로 조선을 개항의 대상으로 선택하였다.
제너럴
셔먼 호의 미국인 선주, 프레스턴은 조선을 상대로 개항을 선점하여 한몫 잡을 생각에 단독으로 조선에 개항을 강요하려고 했다.
그는 배를 중국 톈진에 기항하였고 영국의 메도스 상사와 용선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렇게 제너럴 셔먼 호는 메도스 상사에 위탁된 채
조선으로 출항했다.
이 배에는 영국 웨일즈 출신 개신교 목사인 토마스가 조선어 통역관으로 승선해 있었다.
그는 1865년 9월에 세관을 사임하고 1차 조선 선교 여행을 하며 성경책을 나누어주며 선교 활동을 했으나, 조선 당국에 적발되어서 추방당했다.
이듬해인 1866년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신부들의 학살에 항의차 조선으로 떠나는 프랑스 해군 원정 함대에 통역관으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때마침 베트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상하이로 떠났다.
낭패한 토마스는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 셔먼 호에 통역관으로 승선하여 다시 조선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부에 이르렀고 평양부 관민들에게 수교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반발하여 만경대 한사정(閑似亭)까지 거슬러 올라와 약탈을 감행했다.
처음에는 제너럴 셔먼호에 식량이 떨어졌다고 도움을 요청하자 조선 측에서 소고기와 쌀과 채소 등 식량과 배에 필요한 자재를 거저 나눠주기까지 했으나 이들은 장마 비에 불어난 대동강 물을 거슬러 올라 약탈을 감행하였다.
이에 조선군이 출동하였으나 배에서 가해진 포격에 여러 군졸 및 구경하던 백성들이 죽고 다쳤다.
조선군도
대응 포격을 했지만 포의 사정거리가 짧은 탓에 효과를 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평안감사 박규수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물러가라며
중군 이현익을 보냈으나 되려 그를 잡아가두고 통상을 요구했다.
실록에 따르면 중군이 납치된 것을 본 군졸들과 백성들이 노하여
배를 포위하고 활과 화승총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자 제너럴 셔먼 호의 선원들은 두려워 했고, 퇴역 장교인 박춘권이 조각배를 타고 접근해오자 중군 이현익과 부하들은 셔먼 호에서 뛰어내렸고, 이현익은 무사히 박춘권의 배에 올라탔으나 부하들은 익사하고 말았다.
분노한 군민들이 몰려오는 것을 본 제너럴 셔먼 호는 도망치려고 했으나, 중군을 억류했다 풀어주는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대동강 수위가 낮아져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평안감사 박규수는 밤중에 기름을 뿌린 짚을 가즉 실은 목선들을 가득히 보내서 불을 질렀다.
결국 배는 버티지 못하고 불탔다.
그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순교자가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순교를 당했지만 물리적으로 대응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외적으로 전혀 강하지를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는 오늘까지 전 세계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졌으며, 사람들에게 가장 강한 종교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약한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렇게 강하게 인식되며
엄청난 성장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강력하게 말씀한
곳이 본문 31-32절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온 우주를 조성하시고 운행하시며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을 위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은 하나님을 떠나 죽은 인생들을 살리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아끼지 않고 속죄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까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내놓으셨습니다. 본문 앞쪽의 16-17절 상반절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이 보다 더 확실하고 강력한 사랑이 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온전하게 의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담대할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 때문(로마서 8:33-35)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담대하게 주님의
일을 행할 수 있는 이유가 세상으로부터 정죄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쫓겨난 사탄과 그 무리들은 끊임없이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하나님께 고발합니다.
그 대표적인 내용이 욥기에 실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한 믿음으로 인정하신 욥을
사탄이 고발했습니다.
또한 사탄은 여호수아까지도 고발하고 대적했습니다.
스가랴 3:1절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이처럼 지금도 사탄과 그의 무리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고 고발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욕하고 대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대적과 고발을 듣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대속의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 때문에 결코 정죄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법’이 작용을 합니다.
‘성령의 법’은 곧 ‘생명’입니다.
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꿰뚫고 계셔서 우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결국 성령께서는 성도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도록
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지배를 받는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이든 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물론 해도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욕망을
따르는 육신의 일과 성령을 따르는 영의 일을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육신의
일은 세상의 환경과 자신의 욕망을 따르도록 요구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싸움이며, 이 싸움에서 육신의 욕망에 지게 되면 그 결과는
죽음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로마서 8:12-14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깨우쳐 주시며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본문 37절에서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지중해에 있는 ‘키프로스’(성경지명은 ‘구브로’) 기지는 군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요충지입니다.
이 섬만 뺏으면 지중해를 장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키프로스를 장악하기 위하여 공격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날씨가 흐리고 폭우가 쏟아지면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도록 안개가 낀 날을 택하여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들은 잠수정을 타고 해안으로 잠입하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조차도 분간할 수 없도록 어둡고 흐렸습니다.
아무리 철통같이 수비를 한다고 해도 침투하는 적을 분간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그런 날씨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격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침투하는 바로 코앞에서 키프로스 수비대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사로잡히고 난 후에야 왜 그렇게 일찍 사로잡혔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키프로스 기지에 있는 레이더 때문이었습니다.
최신형인 그 레이더에는 침투하는 적들의 양말 줄무늬까지 환히 보였다고 합니다.
지금 군인들은 적외선 장비나 야간 투시경 장비를 사용하면 악천후나 어둠이나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를 환하게 보면서 전투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가려지는 것들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정말 끔찍하게 사랑하시며 단 한 수간도 놓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십시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담대하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십시오.
그리하여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여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마라나 타! (주여, 어서 오소서!)
고린도전서 16:22(공동번역)
이 모든 계시를 보증해 주시는 분이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 주 예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요한계시록 22:20~21(공동번역)
본래 마라나 타는 초대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일종의 기도 구절이었다.
이를 헬라어로 음역하면 μαράνα θά 가 되고,
영어로 옮기면 maranatha가 된다.
일부 학자들은 '마란 아타'로 오인하여 '주님이 오셨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마라나타(Maranatha)", "마라나 타(maranâ thâ')", "마란 아타( maran 'athâ')"의 뜻과 기원
Maranatha (either מרנא תא: maranâ thâ' or מרן אתא: maran 'athâ' ) is a two-word Aramaic formula occurring only once in the New Testament (see Aramaic of Jesus) and also in the Didache, which is part of the Apostolic Fathers' collection. It is transliterated into Greek letters rather than translated
and, given the nature of early manuscripts, the lexical difficulty lies
in determining just which two Aramaic words comprise the single Greek
expression, found at the end of Paul's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1 Cor 16:22).
마라나타(either מרנא תא: maranâ thâ' or מרן אתא: maran 'athâ' 마라나 타 혹은 마란 아타)는 두 단어의 아람어식 어구로는 ( 예수님의 아람어를 참조하라) 신약 성경에서 그리고 디다케에서 단 한 번 사용된 것을 ‘사도의 아버지’ 수집(collection) 일부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초기 원고의 성격, 두 단어의 아람어가 단 하나의 그리스어 표현을 포함하는 결정에 어휘의 어려움이 있어 그리스어로 번역되어지기보다 그리스 문자로 바뀌어(음역되어) 졌고 , 고린도전서 16: 22절 바울 서신의 끝머리에 표현되었음을 찾을 수 있다.(고전 16: 22)
If one chooses to split the two words as מרנא תא
(maranâ thâ), a vocative concept with an imperative verb, then it can
be translated as a command to the Lord to come. on the other hand, if
one decides that the two words מרן אתא
(maran 'athâ), a possessive "Our Lord" and a perfect/preterite verb
"has come," are actually more warranted, then it would be seen as a
credal expression. This interpretation, "Our Lord has come," is
supported by what appears to be an equivalent of this in the early creed
acclamation found in the biblical books of Romans 10:9 and 1
Corinthians 12:3, "Jesus is Lord."
만약, 누군가 두 단어로 (마라나 타) 띄어 쓰도록 선택한다면, 필수 명령형 동사 호격 개념으로는 “주여 오시옵소서”로 번역할 수 있다.
다른 한 편, 누군가 소유격으로 번역하고저 할 때는 “우리의 주님”이 가능하며 완료형/과거 동사의 표현은 ”Has come, 오셨다”가 사실상 더 보장되는데 오래전 신조(교의)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번역은 성경 로마서 10:9과 고전 12:3에 나타나는 "예수는 주시라"는 교회사에서 일찍이 신조(교의) 승인(허락)을 토대로 이 해석 방법의 타당성을 지원받기도 한다.
In
general, the recent interpretation has been to select the command
option ("Come, Lord!"), changing older decisions to follow the preterite
option ("Our Lord has come") as found in the ancient Aramaic Peshitta,
in the Latin Clementine Vulgate, in the Greek Byzantine texts, Textus
Receptus, critical Greek
texts like Westcott and Hort, Tischendorf,
Cambridge, etc., and in the English translations like the King James
Version, the Finnish Raamattu, etc. one reason the change from the
previous scholarly view has occurred is that the P46 papyrus (ca. A.D.
200) divides it as μαρανα θα ("marana tha").
일반적으로,
최근의 해석은 고대 아람어 페쉬타에서, 라틴 크레멘타인 벌기트 성경에서, 그리스 비잔틴 텍스트들에서 발견되어진 것처럼 “우리
주님이 오셨다”의 이전 결정을 변경, “오소서, 주님!” 명령형으로 선택했다.
그리스 비잔틴 교재들, 까다로운 웨스트코트와 같은
그리스 텍스트들과 호르트, 라틴 클레멘타인 벌기트 성경, 호르트비스첸도르프, 캐임브리지 등등, 그리고 킹 제임스 버젼과 같은 영어
번역들, 핀란드 라아마투 등등에서 이전 학자들의 견해를 바꾼 단 하나의 이유는 중요한 그리스어 교재 학술 보기 P46 파피루스
(ca. A.D. 200) 같은 곳에 “마라나 타”로 띄어 분리하는 일이 나타났던 것이다.
The NRSV
of 1 Cor 16:22 translates the expression as: "Our Lord, come!" but
notes that it could also be translated as: "Our Lord has come"; the NIV translates: "Come, O Lord"; the NAB notes:
고전 16: 22을 “NRSV"에는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 메모는 역시 "우리 주께서 임하셨다”로 번역될 수도 있고; NIV 에는 "오시옵소서, 오 주여”로 번역되었다; NAB 메모:
"As understood here ("O Lord, come!"), it is a prayer for the early return of Christ. If the Aramaic words are divided differently (Maran atha, "Our Lord has come"), it becomes a credal declaration. The former interpretation is supported by what appears to be a Greek equivalent of this acclamation in Book of Revelation 22:20 "Amen. Come, Lord Jesus!""
“여기서 (“O Lord, come”)로 이해되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속히 있으시기를 구하는 하나의 기도문이다. 만약 아람어식 단어를 다른 형태로 나누면 "우리 주님이 오셨다(임재하셨다)”이며, 이것은 신조(교의)로 선포되었다. 이전의 번역은 그리스 어의 계시록 22: 20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와 동등한 타당성을 지원받는다.
The
1985 New Jerusalem Bible translates 1 Cor 16:22, "If there is anyone
who does not love the Lord, a curse on such a one. Maran atha." In the
context of First Corinthians, understanding the Greek "maranatha" as
Aramaic "Maran atha" in the preterits sense would provide substantiation
for the preceding anathema. That is, one who does not love the Lord is
accursed because our Lord has ascended and come unto his throne (e.g.,
Dan 7:13) and wields power to implement such a curse. It would also
substantiate the following prayer for grace from the ascended Lord
Jesus, who has come to his throne and then sends the Holy Spirit.
1985년
새 예루살렘 성경은 고전16:22을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Maran atha"로
번역한다. 고린도전서의 문맥으로 보아서, 과거의 판단력 안에서 그리스 사람들은 "maranatha"를 아람어 "Maran
atha"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앞에 말한 저주에 대한 입증을 제공할 것이다. 즉 주님의 승천과 그의 보좌 (단 7: 13)를
구현하는 것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무서운 저주를 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묘한 힘이 있다. 그것은 또한 그의 왕위와
승천하신 주 예수로부터 오는 은혜와 임하실 그분의 보좌, 그리고 거룩한 성령을 보내어 주실 것을 구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담대하라(하자크. châzaq) חָזַק
스트롱번호 2388
1. 단단히 매다. 2. 굳게 유지하다. 3. 전치사 לְ가 수반되는 경우
발음
[ châzaq ]
구약 성경 / 293회 사용
너는 담대하라(Be strong)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 요압은 여기서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하나님의 성읍들'(the cities of our God)이라고 말하면서 군사들에게 담대히 하자고 권하고
있다. 이러한 요압의 권면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모든 기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확신한 그의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의 성읍을 위하여 싸우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지키는 명분있는 싸움이므로 이 전투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요압은
권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담대하게 된 요압의 군사들은 명분없는 싸움에 임하고 있는 아람의 용병들보다 사기 면에서 훨씬 앞서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 하나님의 성읍이 죄악된
이방인의 손에 들어가지 않고 지켜지는 것이 하나님의 선(善)이다.
따라서 이러한 요압의 말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승리를
확신하는 말이다(삼하 10:12).
한편, 본문에 언급된 '선히 여기시는 대로'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하토브
베에나우'이다.
그런데 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주의 눈에 선한 것을'이라는 말이다.
이는 주님의 눈에 선해 보이는 것이 곧
완전히 선한 것이라는 의미로 여호와 중심의 사상이 강력히 내포된 구절이다.
이와같이 참으로 하나님만이 선악의 유일한 기준인
것이다(시 25:8; 33:5; 나 1:7; 마 19:17; 롬 2:4).
예수님은 이제 마지막 승부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신다. 누가 봐도 예수님의 완패, 참패 같은 끔찍한
십자가를 앞두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절), ‘내가 이겼으니
담대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도대체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담대하라’는 표현은 구약에 9번, 신약에 2번, 11번 나오고, ‘담대하여’가 6번, ‘담대히’가 24번까지 합하면 총
41번 나온다. 가장 먼저 나오는 건 민수기 13장 20절이지만 제일 인상깊은 것은 모세와 여호수아가 이 명령을 꽉 붙들었다는
것이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31:6) 바로 다음 절에 보면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고 한다.
40년을 서포트 역할만 하던 여호수아를 향한 모세의 명령이 아니라 이건 하나님의 명령이다. 신명기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여 내가 그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신31:23). 이 명령이 여호수아서에서도 강조된다.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1:6),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수1:7),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광야 시대의 마인드를 버리고 새로운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말씀인데 말씀을 잘 보면 “담대하라”는 명령은 대체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약속의 말씀과 짝을 이룬다. “내가 함께하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 성경에 나오는 약속 중 가장 많이 나오는
약속이다. “내가 함께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담대하라” 그러신다.
풍요로운 도시 문화를 이루었던 가나안의 7족속, 철병거로 무장한 거인들, 요즘 말로 하면 핵무기로 무장한 선진국 같은 그들이
광야에서만 40년을 산 이스라엘 백성이 오면 쳐서 멸망시키겠다고 벼르는 상황이다. 그들을 돌파할 이스라엘 백성들은 군사 훈련 한
번 받은 적이 없는 오합지졸,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여호수아 1장만 해도 3번이나 “강하고 담대하라”고 한다.
“주저앉을 이유 없다,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얼마나 확신했을까? 여호수아도 같은 말을 한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
너희가 맞서서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수10:25).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모세가 하고, 모세가
한 말을 여호수아가 똑같이 한다. 이게 바로 ‘제자화 사역’이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밟게 된 비결이다. 우리도 이래야 한다.
모처럼 경마장이 쉬는 날, 말들이 모여 말하는 유형에 따라 말들이 싫어하는 인간상이 무엇인가 여론조사를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동상은 말 바꾸는 인간, 말 머리 돌리는 인간이고, 은상은 이 말 저 말 왔다 갔다 하는 인간, 말허리 자르는 인간이며 금상은
말꼬리 잡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인간이었단다. 말이 씨가 된다. 말씀으로 무장하고 말씀을 나누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담대하라”는 명령은 바울에게도 임했다.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미결수로 로마 군영에 갇혀있는데 로마로 가는 길은 보이지 않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음모만 점점 다가온다고 느낄 때, 유대인들이 죽이겠다고 난리칠 때다. 그때 함께 주신 말씀이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였다. 2년
후에 로마로 가지만 할 일이 있다는 것, 사명이 있고 ‘내가 함께하니 담대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본문 33절에서도 “담대하라”고 하셨는데 바로 앞 절에 보면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16:32), 제자들이 흩어져
혼자 있게 되실 때였지만 혼자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함께하신다는 말씀, 제자들의 배신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뜻이다.
혹시 배신당한 적 있나? 당해본 자만 아는 고통이다. 믿은 만큼 배신의 고통은 큰 것, 예수님도 3년 이상 동고동락한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하셨기에 그 고통은 대단했을 것, 그런데 감내하신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거다.
임마누엘의 확신이 배신의 고통을 이기게 한다. 고통은 잠깐이지만 임마누엘은 영원한 것, 혹시 배신으로 인해 고통 중에 있더라도 그
고통보다 더 큰 임마누엘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임마누엘의 약속은 동행의 약속, 관념이 아니라 체험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43:2), 임마누엘의 확신이 이기는 힘이다.
응답하리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24절),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받을 것, 그리고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고 하셨다. “구하면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반복하며
예수님은 고별설교에서 기도가 강조하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14:13)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4:1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16:23-24).
응답받는 이유도 밝히셨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27절), 먼저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라고 하셨는데 사랑하면 듣는다는 말씀이다. 경험해서 알지 않나? 사랑하면
들린다. 그리고 사랑하면 응답한다. 그리고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로 믿은 고로’라고 하셨는데, 믿으면 응답있다는 말씀이다.
작은 믿음이라도 괜찮다. 하나님은 믿음을 보이면 응답하신다.
예수님은 14장부터 계속 기도를 말씀하면서 ‘내 이름으로 구하라,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를 강조하셨다. 이건 신앙생활에서
너무도 중요한 기도의 원리다. 마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라고 하셨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히4:16)이라고 했다. 성경의 약속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응답과 더불어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라고
하셨다(24절). 여기서 ‘충만하리라’는 ‘플레로오’(πληρόω)의 완료 분사 수동태, 수동태는 기도의 결과로 오는 충만한
기쁨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지는 신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응답받는 기쁨, 충만한 기쁨, 이건
약속이고 축복이다.
언제든지 응답하실 준비가 되어 있는 분, 응답하길 좋아하시는 분, 그래서 바울도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다(빌4:6). 중요한 것은 확신이다. 확신만 분명하면 못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막9:23). 어떻게
조지 뮬러는 평생 5만 번 기도 응답받고 ‘기도의 아버지’라고 불렸을까?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왜 하루 세 시간을 기도했을까?
기도하면 응답받고, 기도해야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씀대로 담대하라.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다.
내가 세상을 이겼으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절), 닥칠 일들이 엄청나다. 제자의 배신, 체포, 구금, 심문, 폭행, 조롱, 모함, 무고, 흑색선전,
단죄, 그리고 처형, 힘 가진 자들의 대규모 여론몰이와 속전속결식 공세 앞에 한 차례의 저항도 없이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짧은
생을 마감하시기까지 숨 가쁘게 일어날 일들,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지만 담대하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내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이기셨다는 거다.
십자가를 앞둔 목요일 밤, 시시각각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한다. 세상은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작전계획을 다 마치고 출동 명령만 기다리고 있을 시간, 이에 맞서 예수님을 보호해야 될 제자들은 근심에 쌓여
있다. 한숨만 쉰다. 불과 몇 시간 후의 모습을 말씀하신다.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32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고대로 다 달아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기까지 한다. 예수님 또한 십자가에 못받혀
죽임 당하신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끝이다. 예수는 죽고. 예수의 운동은 실패로 끝난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이겼다”고 하신다. ‘이겼다’는 헬라어 ‘니카오’(νικάω)는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다. 승리의 여신
‘니케’와 상표 ‘나이키’ 때문이다. 요한일서에서는 여러 번 승리자 되신 예수님을 말한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2:13)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2:1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4:4).
급기야 요한은 선언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5:4-5), 예수님이 니케(νίκη),
나이키(nike), 승리자이시다. 예수님이 이긴 세상은 그냥 세상이라 불리거나 흉악한 자, 악한 자라 불린다. ‘이기었느니라’는
시제도 의미가 있다. 헬라어에서 완료형, 과거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상태를 서술한다. 예수님의 승리는 앞으로
있을 부활 이후가 아니라 이미 일어났다. 그 승리는 성육신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 예수님은 이미 승리자이시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인간사에 있어서 가장 밑으로 낮은
곳으로 가는 것이지만 그 십자가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실패요 수치요 형벌이지만 이 길이
승리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언하셨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십자가의 길이 부활의 길이요 만왕의 왕이 되는
영광의 길, 그래서 피하지 않으셨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피하실 수 있지만 그 어떤 시도도 하시지 않고 군중들과 지도층과
로마정권과 그 군대와 맞서셨다.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의 형태로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 또한 승리자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승리자, 그렇다면 “피하라, 타협하라, 모른 척하라, 부인하라, 기억나지 않는다 하라, 아부하라, 너도 돈을 뿌리고 뇌물도 쓰라,
사서 고생하지 말라, 도망가라” 등 내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유혹과 시험을 물리쳐야 한다.
계시록에 보면 요한은 ‘이기는 자’를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2:7),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2:11), 버가모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2:17),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2:26),
사데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3:5), 빌라델비라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3:12),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다(계3:21). 요한은 소아시아 일곱교회를 향한 성령의 말씀을 쓸 때 한 마디로 ‘이긴 자’에 꽂힌 사람처럼 “이기는
그에게는...”을 강조하며 썼다.
매일 아침 일어나는 아프리카의 영양(antelope)은 가장 빠른 사자(lion)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먹혀 죽는다는
것을 잘 안다. 매일 아침 일어나는 사자도 가장 느린 영양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가
영양이건 사자이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해가 뜨면 그저 달리면 된다.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담대하라.”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삼하 10:12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4
‘주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이를 바랄 때 우리는 담대할 수 있다. 즉 어떠하든 주를 의뢰하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누가 답을 듣고 싶어 하는 어느 질문지에 ‘개신교 목사로서’ 기꺼이 답을 해주었다. 그러느라 나는 종일 교회에 있었고, 글방에 있는 시간이 싫지 않았다. 가만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할 수 있을 뿐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성경을 그 중심에 두고 있음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애매할 게 없다. 단호하고 단순할 뿐이다. 복잡하지 않다. 그리 말해주었다. 오늘 처한 이 모든 현실도 그러하다. 주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실 것이다. 어떠하든, 이를 붙들고 바랄뿐이다.
생각은 명료하고 삶은 단순하였다. 힘들면 힘든 거지 힘든 걸 안 힘든 것처럼 굴 것도 없고, 다만 그 가운데서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유 1:24-25).” 곧 오늘의 나로 하여금 주 앞에서 거침이 없게 하심인데, 오늘 본문은 이에 담대할 것을 말씀하신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삼하 10:12).”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신뢰하는 것이다. 설령 그 결과가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주어진 한 날의 삶에서 나의 날들이 더욱 단순하고 담백하기를 기도한다. 너무 생각이 많다. 유혹하는 것들도 많다. 한데 이는 우리 마음의 일이지, 세상은 본래 그러했다. 마치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 13:22).” 곧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막 4:19).” 그러니 이를 어쩔 것인가? 나는 누가 어떤 질문지를 주며 답을 부탁하였을 때 그저 마다할 생각이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생각을 적고 그 근거를 말씀에서 찾아가면서 나의 확고한 중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다들 그 마음에 따라 산다. ‘길가 밭’ 같거나 ‘돌짝 밭’ 같으면 영락없다. 이는 현실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성경은 엄연하였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다른 때의 이야기가 아니고, 남 이야기도 아니고,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일이다. 은혜는 그때마다 필요하다. 묵은 것으로 사는 게 아니다. 문득 드는 생각이 내가 누군가의 인생에서 어느 한 시점으로 잊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 구원 받게 할 수도 없다. 다만 그,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저는 나에게 나는 저에게 소요되는 것이다. 그 모든 일은 우리가 시작한 게 아니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나는 이처럼 아침마다 묵상을 글로 쓰는 일을 사랑한다. 또한 누구와 어떤 일로 말하거나 생각할 때 성경을 떠올릴 수 있는 것에 대해 참으로 귀히 여긴다.
다 저녁께 손위처남이 조카와 함께 어머니를 뵈러 왔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때, 두서없는 말 가운데서도 우리의 중심은 보인다. 하다못해 그 사람의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영적인 상태나 모습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겠다. 일상은 그저 스쳐서 사라지는 게 아니다. 내남없이 흘러가는 것 같으나 그것이 모여 대해(大海)를 이루듯 이는 곧 교회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7).” 각각 그 개개의 생이 모여,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었다. 서로의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한데 모여 주를 바라며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시려고,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나는 왁자지껄 오가는 말 속에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께 기도하며 아뢸 수 있는 것은 주의 영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심의 증거다.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우리 안에 소망을 두신 이유다. 그러므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누구의 부탁으로 여러 질문에 답을 하다 나는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나에게 향하신 주의 거룩하시고 인자하신 은혜를 되새길 수 있었다. 전에 같으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화두다. 또는 나의 완고함으로 더없이 덧대어 답 없는 답을 끊임없이 요구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 덧붙여 말하였다.
‘이와 같은 질문에 시달리는 것은 마귀에게 틈을 주는 일이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왜냐하면 저는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기 위해 숱한 질문을 갖게 하고, 괜한 일에 참견하게 하며,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을 품게 한다. 그래서 성경은 이를 경계한다. 정작 저들은 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 논쟁을 원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완고한 마음을 더할 뿐이다. 이에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우리는 다만 우리 스스로도 증명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 믿음은 우리가 취한 게 아니다. 그리 더하신 주의 은혜다. 값없이 주신 선물이다. 괜한 질문에 일일이 답하지 않는 것 역시 우리에게 필요한 답이 된다.’
굳이 답을 하지 않아도 이미 답이 되는 답이 있다. 빌라도가 물었다. 진리가 무엇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답하지 않으셨다. 저는 진리를 앞에 두고, 이미 다 알면서도, 실은 굳이 답을 바라고 했던 질문도 아닌 거였다. 우린 이와 같이 헛된 질문들 앞에서 얼마나 자주 시달리곤 하는지. 남이 하는 것도 그렇지만 스스로 되풀이하는 질문도 그저 피곤하기만 할 따름이다. 본래 질문이란 몰라서 하는 것이기 보다 동조를 구하는 것이다. 원하는 답은 이미 손에 쥐고 그 답에 합하면 동의하고 부합하면 적대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 지적인 허영이 또는 갈급한 호기심이 실은 그리 선하지 못하다. 종종 누가 와서 퉁명스럽게 묻는다. 교회 세습에 대해 목사님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동성애에 대해, 이혼에 대해, 돈이 많은 부자로 사는 것에 대해 목사님 생각은 무엇입니까? 할 때 저들은 이미 자기 할 말을 입에 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러니 뭐라 한들! 그저 좋으실 대로 하시라. 다만 우리는,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5).” 조금은 새삼스러웠고 새로웠다. 나의 확고함이 두려우면서도 감사하였다. 구구절절 이어지던 말을 덜어내고 성경의 근거를 놓지 않았다. 형님과 어머니가, 아내와 형님이 서로서로 주고받는 대화에서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는 것이 신비하였다. 종종 지난날을 회상하며 ‘그땐 그랬지’ 하는 말끝마다 나는 아찔하였다. 그처럼 예전의 내 모습을 스스로 미워할 수 있는 게 또한 복이었다.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겔 36:31).”
이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32).” 이 모든 게 날 위한 게 아니라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한 것이라는 데 나는 이제 안도한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22).” 조금은 의아한 게 전에 같으면 반감이 들 말씀인데 이제는 그 중심을 붙들게 하는 것이었으니, 스스로 이와 같은 변화를 눈여겨 볼 수 있는 것이 또한 은혜이었다. 종종 누구를 생각하다 또 어떤 이를 그리워하다 그만둔다. 나는 저의 어느 한 지점으로 족하다. 다만 우리의 훗날에 주 앞에서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고작 그런 정도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문득 돌이켜 보면 이 모든 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1).” 그러므로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9).” 아멘.
역대상 13장 요약
기럇여아림에 잇는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왔으며 가져온 하나님의 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4장 요약
두로왕 하람이 궁전건축을 위해서 인부들과 나무를 보내주었고,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블레셋을 물리쳣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5장 요약
다윗이 언약궤를 옮기기 위해서 아론과 레위 자손들을 불러 모았으며,하나님의 궤를 옮기기 위해서 레위인들에게 여러 임무를 부여하였고,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6장 요약
궤를 장막으로 옮긴후에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서 찬양하였고 다윗이 감사의 찬양을 하나님께 올리고 언약궤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임명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6:10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찌로다
역대하 11:16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마음을 오로지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이 레위 사람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고자 한지라.
에스라 6:21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무릇 스스로 구별하여 자기 땅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을 버리고 이스라엘 무리에게 속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다 먹고.
시편 105:3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찌로다.
시편 119:2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5월 6일(화) 역대상 13-1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를 구하는 자(16:10)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찌로다.
Glory in his holy name; let the hearts of those who seek the LORD rejoice.
11.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찌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찌어다.
Look to the LORD and his strength; seek his face always.
여호와를 구하는 것은 그의 임재를 구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인의 사고는 하나님의 임재를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그 능력을 구할찌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찌어다." 라고 합니다(11절).
여호와의 얼굴 즉 은혜를 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다리는 것
사람은 누구나 제한된 조건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제한시키는 것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며 구합니다.
비록 사람마다 그 제한된 것이 다를지라도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려는 것
제한 된 것을 해결한 후에 내 마음대로 내 멋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말씀따라 순종하는 것이 바람직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편 119:10-11)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십니까?
은혜를 받은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은혜를 받은 후에는 은혜 받기 전의 삶을 버리고 은혜 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영적 성장이라고 합니다.
제자리 걸음에 익숙한 신앙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성장하는 신앙으로 발돋움해야 하겠습니다.
주여,
나를 광활한 곳으로 인도하소서
주여,
나를 저 높은 곳으로 이끄소서
주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나를 살피소서.
히브리인의 사고는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게 되면 그분이 계시는 곳에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구한다는 것은 그의 임재를 구하는 것입니다.
“임재”란 히브리어 단어 “얼굴”에 대한 통상적 번역입니다.
우리는 그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 접근하는 히브리식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앞에 있다는 것은
그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편재하는 분이며 그러므로 항상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 가까이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존재하게 붙들고 계십니다.
그의 능력은 만물을 지탱하며 다스리시는 것 안에 항상 존재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늘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시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신다는 언약의 측면에서 항상
그의 자녀들과 함께 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20)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가 늘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여호와를...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 우리가 이를 의식하고 이에 의탁하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가 늘 끊임없이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을 등한시하고 주님을 생각하지 않으며 주님을
신뢰하고 의뢰하지 않습니다. 즉, 주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나시지 않는"—즉, 우리 마음의 눈으로 볼 때 주님이 위대하고
아름다우며 소중하게 인식되지 않는 그러한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있어서 하나님의 얼굴—그의 인격의 빛남—은 우리의 육신적 욕망들의 커튼 뒤로 숨겨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두운
상태는 늘 우리를 사로잡으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분의 임재를 항상 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위대하심과 아름다움과 가치에 대한 지속적인 자각을 즐기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는 "구하는 것"을 통해 일어납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무엇을 뜻합니까?
구약과 신약 공히 말씀하기를, 이는 하나님께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고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 마음의 의식과
우리 마음의 애정을 하나님께 의식적으로 고정하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제 너희는 마음과 뜻을 바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라" (역대상 22:19)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골로새서 3:1-2)
이렇게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설정하는 것은 생각이 그냥 떠돌아 다니는 것과 반대됩니다. 이는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려는 의식적
선택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후서 3:5). 이는 우리 측면에서 볼 때에는 우리의 의식적 노력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구하는 그러한 노력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위해 이러한 정신적, 정서적 노력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려서가 아닙니다. 동전이나 양이라면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통해서 나아가거나 아니면 빙 돌아서 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통해서 나아가거나 돌아서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숨어 계십니다. 우리는 중개하는 매개체들을 통해서 나아가야 하며 장애물들을 돌아서
나아가야 합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통하여 하나님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말씀을
통해 계시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은혜의 증거들로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통하여 하나님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자연적 수단을 통해서 나아가려는 의식적인 노력입니다. 즉, 우리의 모든 경험 속에서 지속적으로 생각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그의 계시의 수단을 통하여 그에게로 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분명하게 보고 하나님의 임재의 빛 가운데 있기 위해서는 빙 돌아서 가야 하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침체되게 하는 활동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그로부터 도망가고 돌아서 가야 합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세상과 말씀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해 우리를 지극히 민감하게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침체되게 하고 눈을 가리며 하나님을 찾고 싶어하지도 않게 만드는지 압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 이러한 것들로부터
떠나고 그로부터 돌아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것은 이러한 노력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든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을 구한다는 의미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이사야 55:6)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욥기 8:5)
구하는 것은 부르는 것과 간구하는 것을 수반합니다. 오 주님, 저의 눈을 열어주십시오. 오 주님, 저는 눈이 먼 자와 같이 어두우니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주를 계시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주의 얼굴을 보기 원합니다.
주님을 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교만입니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시편 10:4). 따라서, 주님을 구하는 데 있어 겸손은
필수적입니다.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을 향한 위대한 약속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그를 찾게 될 것입니다.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역대상 28:9) 그리고 그를 찾았을 때는 큰 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하나님 그분이 바로 우리의 가장 큰
상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갖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여호와를 구하는 자(시편 119:1-8)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주께서 주의 법도로 명하사 우리로 근실히 지키게 하셨나이다
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시 119:10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본문의 말씀은 율법을 사랑하고 계승(繼承)하기 위하여 진력하는가운데 여러가지 핍박을 받아 역경속에서 말씀을 지켜온 에스라 같은 분의 작품이라고도 합니다.
본 시편은 가장긴장으로서 22단락으로 8절씩 히브리어 알파벳순으로 구성되여 176절로 되어있습니다. [9-10, 25, 34,
111, 112, 145편] 율법 말씀 증거 도 법도 율례 계명 판단 규례의 9가지의 표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합니다.
생명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로 지키며 실천하게 되는 것 입니다.
말씀은 생명력을 발산하며 소생하고 번영케하시고 성공하게 하시고 승리하게하시고 영화롭게하는 것 입니다.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 는 말씀을 지키는자, 하나님을 의지하는자, 말씀에 붙들린자,
말씀의 진미를 아는자, 말씀을행하는자, 말씀의 복을 누리는자. 라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여러 가지 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 1:1-3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32:1-2“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고 했습니다.
시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시
118: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욜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롬10;13]
1, 회복시켜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호 6:1,3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고하였습니다.
2, 좋은 것을 주십니다.
마 7:7-11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 지 않겠느냐”
3, 성령을 주십니다.
눅 11:9-13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4, 하나님이 불러 주십니다.
출 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창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매
삼상 3:4,6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삼상 3:8-10 “여호와께서 세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왕상 3:4-5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행 9:3-4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이라고 하였습니다.
마 16:16-17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요 21:15-17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회복시키시고 좋은 것을 주시고 성령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모세를 불러서 히브리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불러서 복의 근원을 삼으시고 약속하신 언약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사무엘을 불러서 앞으로의 되어질 중대한 사건을 예고하여 주셨습니다.
솔로몬을 꿈에 불러서 원하는 대로 주시마고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을 불러서 이방의 대 사도로 사용하여 세계복음화의 기반을 놓았습니다.
베드로를 불러서 신앙의 기반이 되는 바른고백을 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세 번이나 불러서 내양을 치라 내양을 먹이라 고 사명의식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여러분 여호와를 구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읍시다.
1) 行爲가 穩全하여 여호와의 律法을 따라 行하는 者들은 福이 있음이여 (2) 여호와의 證據들을 지키고 全心으로 여호와를 求하는 者는 福이 있도다 (3) 참으로 그들은 不義를 行하지 아니하고 主의 道를 行하는도다 ㅡ"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여호와를 따라 행하고, 지키고, 구하는 자는 복이 있다." 시편 119 편의 핵심 키워드는 주의 법, 율례, 도, 증거, 의다. 한마디로 하면 '말씀'이다. 복있는 사람은 불의를 행하지 않고, 주의 도를 행한다. 의를 행하고, 주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한다.
● 엘 (El : God)
○ 엘(El) : 강한 능력을 가지신 통치자. 주로 복합어로 사용됨. '강함/첫 번째'의 뜻. 성경에서 250번 사용됨.
○ 엘로힘(Elohim)(창1:1) :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약 2,500번 사용됨.
○ 옐로아(Eloah)(욥기) : Elohim의 단수형(El의 뜻)
○ 엘 엘리온(El-Elyon)(창14:18-20 14:14. 시92)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God Most High), 천지의 소유자의 뜻. 36번 사용됨.
○ 엘 샤다이(El-Shaddai)(출6:3) : 그 백성의 궁핍을 채워 주시는 하나님(God Almighty), 전능자/가슴의 뜻. 엘과 함께 7번 사용, 전능함의 뜻으로 41번 사용.
○ 엘 올람(EL-Olam) (창21:33) : 영생하시는 하나님(the Everlasting God). 3번 사용(사40:28, 롬16:26)
○ 엘 로이(El-Roi) (창 16:13) : 감찰하시는 하나님.
● 야웨 또는 여호와(Yahweh 또는 Jehovah)
○ 여호와(창4:13:6, 말3:6) : 언약의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약 7,600번 사용됨.
○ 여호와 이레 (Jehovar-Jireh)(창22:13-14) : 준비하시는 하나님(the lord will provide).
○ 여호와 라파(Jehovar-Rapha)(출15:26) : 병을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 (the Lord who heals you), '여호와 로페카'로 발음하는 학자도 있음.
○ 여호와 닛시(Jehovar-Nissi(출17:8-15) : 승리의 깃발 되시는 하나님 (the Lord Is-My-Banner).
○ 여호와 샬롬(Jehovar-Shalom)(삿6:24) : 평강의 하나님(the Lord Shalom).
○ 여호와 라하(Jehovar-Raah)(시23:1) : 나의 목자되신 하나님(The Lord is my Shepherd).
○ 여호와 삼마(Jehovah-Shammah)(겔48:35) : 거기 계시는 하나님(The Lord is there).
○ 여호와 찌두케누(Jehovar-Tsidkenu)(렘23:6) : 우리의 의가 되시는 하나님
○ 여호와 체바오트(Jehovah-Sabaoth)(시84:8) : 만군의 여호와(Lord God of Hosts), '여호와 츠바오츠'로 발음하는 학자도 있음.
○ 여호와 메카디쉬켐(Johovar-mekoddishkem)(레20:8) :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
○ 여호와 나학카(사58:11) : 나의 인도자 되신 하나님
○ 여호와 게올레오트(렘51:56) : 보복하시는 하나님.
○ 야웨 라하민(Yahweh-Rachamin) : 고난당하는 백성들을 어머니와 같이 태중에 안아 친밀하게 돌보시는 하나님
● 아도나이 (Adonai)
○ 나의 주, 주인, 선생님의 뜻.
○ 구약에서는 주권을 내포 (23:17) - the Lord God, 통치를 내포 (10:16) - the Lord, the Lord of hosts.
○ 신약에서는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에게 사용됨 (계19:16) - King of king and Lord of lords.
○ 단수 형태인 아돈(Adon)으로 30번, 아도나히(Adonahy)로 약 290번, 복수 형태인 아도나이(Adonai)로 무수히 사용됨.
● 아버지(Father) : 압(Ab), 아바(Abba), 파테르(Pater)
○ 신구약에서 모두 사용됨.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죄사함을 얻음으로써 하나님과 영적 관계를 맺은 자녀들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
● ‘앤 스팽글러 / 축복의 이름 / 주지현 역 / 좋은씨앗’에 나오는 성호들
저자는 이 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두 싣지는 못했으나 가장 의미있는 이름들을 다루도록 최선을 다했다."며, 26가지의 성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는 위에서 살펴본 호칭과 중복되는 것도 있지만 새로운 것도 있습니다.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고 드리며 여기서는 간략히 소개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엘로힘(Elohim) : 하나님은 위대한 창조자이시다(창1:1).
2. 엘로이(El Roi) :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신다 (16:13-14).
3. 엘샤다이 (El Shadday) : 하나님은 전능하시다(창 17:1-2).
4. 엘올람(El Olam) : 하나님은 영원/영생하시다(창21:32-33)
5. 여호와 이레 (Yahweh Yireh) : 하나님이 공급하신다(창22:13-14).
6. 여호와(Yahweh) : 하나님은 주이시다(출3:14-15)
7. 아도나이(Adonay): 하나님은 주님/주인이시다(시 16:2).
8. 여호와 로페(Yahweh Rophe) : 하나님은 치유자이시다(중 15:26)
9. 여호와 닛시(Yahweh Nissi) : 하나님은 나의 깃발이시다(출17:15-16)
10. 에쉬 오클라/엘 칸나(Esti Oklar/El Kanna) : 하나님은 소멸하는 물/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출34:14: 신4:23-24).
11. 케도시 이스라엘(Qedush Yisrael)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시다. (레19:1-2).
12. 여호와 샬롬(Yahweh Shalom) : 주는 평화이시다(삿6:24)
13. 여호와 체바오드(Yahweh Technoth) : 하나님은 만군의 주이시다(삼상17:45-46)
14. 여호와 추리(Yahweh Tsuri) : 주님은 반석이시다(시 144:1).
15. 여호와 로이(Yamweh Roi) :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시23:1-3)
16. 하쉠(Hashem) :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왕상 8:28-29)
17. 멜렉(Melck) : 하나님은 왕이시다(시72-1-3)
18. 이쉬(Ish) : 하나님은 남편이시다(호2:16, 19-20). 엔력(다
19. 엘차이(El Chay):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왕하 19:15-16).
20. 믹달오즈(Migdal Oz) : 하나님은 견고한 망대이시다(시91:1-2),
21. 쇼페트(Shophet) : 하나님은 심판자이시다(시94:15).
22. 미크웨 이스라엘(Miqweh Yisrael) :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소망이시다(렘17:7-8)
23. 여호와 칫케누(Yahweh Taidgenu) : 주님은 우리의 의가 되신다(렘23:6).
24. 엘앨리온(El Elyon) : 하나님은 가장 높은 분이시다(단4:34).
25. 여호와 삼마(Yahweh Shammah) : 여호와가 거기 계신다(겔48:35).
26. 압/아바/파테르(Ab/Abba/Pater) :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눅15:20)
5월 5일(월) 역대상 9-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바벨론의 포로가 된 유다(9:1)
이스라엘이 그 보계대로 계수되고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유다가 범죄함을 인하여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더니.
All Israel was listed in the genealogies recorded in
the book of the kings of Israel. The people of Judah were taken captive
to Babylon because of their unfaithfulness.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사울과 다윗 그리고 솔로몬의 시대를 거쳐 북에는 열 지파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세웠고, 남에는 두 지파가 중심이 되어 유다를 세웠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강대국 앗수르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은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진 사건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웠던 나라가 왜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졌을까요?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 원인을 두 가지라고 합니다(예레미야 2:13).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첫번째 원인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것(생수의 근원)
두번째 원인은 우상을 숭배한 것(웅덩이를 판 것)
오늘날 자유대한민국이 무너질 위기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공짜를 좋아하기 때문(공짜는 양잿물도 마신다)
둘째는 무식하기 때문(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지식)
세새는 혈연주의와 연고주의 때문(지연, 학연, 연고주의)
대한민국은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심각한 정치적, 사회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최근 언론들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에 집중하며, 국가의 안전과 자유에 관한 중요 사항들은 대부분 보도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경계하고, 행동해야 할 시점에 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지나치면, 대한민국은 곧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한국의 공산화 수순
우리는 홍콩에서 중국 공안이 경찰로 위장하여 폭력을 유발하고,
무력으로 자유를 진압했던 사례를 잘 알고 있다.
이 사건에서 중국은 자유를 압살하고, 홍콩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제
대한민국이 그 같은 경로를 밟을 위기에 처해 있다.
사회적 갈등과 폭력적인 진압 :
최근의 정치적 혼란은 단순한 내정의 불안정이 아니다.
갈등이 격화되며, 이미 정치적인 탄압과 법적 강제들이 진행 중이다.
이를
토대로 점차적으로 정부는 시민들을 통제하고,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이들을 '정신병원'에 보내는 수순을 밟고 있다.
이는 단순히
표현의 자유를 넘어, 나아가 물리적 통제와 억압을 의미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제도적 차원에서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그들의
자유를 박탈하는 법적 수단까지 등장했다.
장기적출, 인권의 상실 :
과거의 예를 들어, 독재 정권 하에서 정치적 반대파가 감금되고, 그들이 '위험한 존재'로 낙인 찍혔을 때 어떻게 그들의 자유와
인권이 무시되었는지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적 억압은 점차적으로 폭력적인 진압과 연계되며,
장기적출과 같은 비인도적인 처우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사회 전반에 걸쳐 공포를 퍼뜨리고, 자유 대한민국을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만들 것이다.
중국 공산화의 위협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언급한 "누군가의 것을 뺏어야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상황"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이 발언에서
그는 갈등의 격화와 함께 '대규모 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경고는 단순한 정치적 예언이 아니다.
바로 지금, 그
갈등의 씨앗이 곳곳에서 자라고 있으며, 이는 통제되지 않는 폭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우리는 내란을 일으켜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처형당하고, 그 자리에 중국인을 이주시켜 중국공산화를 달성하려는 음모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에게 남은 책임 : 자유를 지키기 위한 행동
이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순국선열들이 북한
공산주의의 탱크를 향해 폭탄을 안고 돌격하여 자유 대한민국을 지켰던 그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
그들은 한민족의 자주독립과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이제 우리는 그들의 뜻을 이어받아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내야 한다.
공산화 방지의 첫 걸음 : 정보의 확산과 진실의 전달
가장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국민들에게 현재 상황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다.
언론이 침묵하고 있거나 왜곡된 정보를 제공할 때,
우리는 이를 바로잡고 진실을 알려야 한다.
대중의 눈을 가리는 미디어에 맞서,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정보가 공유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치적 저항과 참여
정치적
투쟁은 결코 선택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저항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정치적 저항은 단지 거리로
나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법적 절차에 참여하고, 입법과 정치적 논의를 통해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악법이 통과될 때마다 이를 막기 위해 서명하고,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시민 의식의 각성
시민들은 무관심과 방관으로 사회의 변화를 지켜보는 입장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부의 통제와 억압을 인정할 경우, 우리는 다시는 자유를 회복할 기회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
함께 싸워야만 한다
현재 대한민국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이 기로에서 우리가 방관하면, 이 땅은 곧 공산주의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행동한다면, 자유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순국선열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유 대한민국을 위해 싸워야 한다.
우리의 후손들이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가 나서야 한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지키고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의 싸움이 내일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공산화 되기 직전입니다
개혁주의 유산과 자유 대한민국의 위기
사무엘 러더퍼드 신학자는 “법이 곧 왕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성경이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의 주인이자 왕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왜 러더퍼드는 ‘법이 왕’이라고 했을까?
이는 성경이 정치적 질서를 확립하는 데 필요한 기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의 자의적 통치를 방지하고, 법치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최종 권위이자 기반이다.
따라서 법 아래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법치주의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계승된 소중한
유산이다.
《법이 왕이다(Lex Rex)》는 스코틀랜드의 학자이자 지도자인 사무엘 러더포드(1600~1661)가 쓴 책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분이 있다.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다.
갈라디아서 5장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말씀을 깊이 새겼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연구하며, 이를 조선 땅에 실현하고자 했다.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의 기틀을 확립하였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법 앞에서 평등하고 정의로운 국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즉,
법치주의의 뿌리는 성경이며, 이는 반드시 지키고 계승해야 할 개혁주의적 유산이자 대한민국의 근간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법치주의를 훼손하려는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에서 법치주의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특정 정치 세력을
중심으로 한 반국가세력이 이를 훼손하고 있으며, 그 실태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국회는 특정
정치인을 보호하기 위해 입법을 남용하고 있다.
여소야대의 국회를 방탄으로 무법적 자기 보호 기능으로 사용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재판을 지연시키고, 검찰 수사에 개입하며 법의 공정성을
무너뜨리고 있다.
또한, 법치를 지키려는 검사들을 탄핵하는 등 법적 질서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법 앞에 모든 국민이 평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특정 정치인을 위한 특혜가 계속되고 있는 현실은 법치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행위다.
둘째,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다.
최근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탄핵 반대 시국선언이 집회법을 위반한 이들에 의해
방해받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불법 점거에 대해 강경 대응하기는커녕, 오히려 합법적인 시위를 펼치는 대학생들과 이를 지지하는
시민들을 압박하고 있다.
법 적용이 특정 집단에게만 관대하고, 일반 국민에게는 엄격한 현실은 법치주의의 근본을 뒤흔드는 것이다.
셋째,
대통령 탄핵 심판 과정에서 법적 공정성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정치적 편향성을 보이며, 특정 이념을 앞세운
판결을 내리고 있다.
또한, 수사 권한이 없는 공수처가 무리하게 현직 대통령을 조사하고, 법원의 영장 발부 기준마저 편향적으로
운영되는 등 법치주의가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다.
이제 이러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자유와 헌정질서를 유린하는 반국가세력은 자유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있으며, 국민들은 이를 바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국민들은 이 상황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제 행동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대통령이 복귀하여 강력한 개혁을 단행하고, 반국가세력을 척결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비겁한 사역자가 되지 말라. 비겁한 신앙인이 되지 말라.”
바벨론 포로의 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 이스라엘에서 멀리 1,500km나 떨어진 바벨론 땅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것은, 율법적 관점에서 ‘언약의 땅에서 쫓겨나게 된 것’을 말합니다.
레위기에서는 이를 “땅이 그 거민을 토해내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레 18:24-25).
레위기 18:27-28
너희의 전에 있던 그 땅 거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이것은 땅을 더럽히는 자가 받는 공통적인 심판의 원리로써, 출애굽 때 가나안 거민의 죄를
심판하고 그들을 토해내는 도구로 이스라엘을 사용하셨던 하나님이 이제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고 그들을 토해내는 도구로 바벨론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2:13에서 예레미야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근본적인 두 가지 악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된 원인이었습니다.
새한글 /
나의 백성이 두 가지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를 버렸다.
생수의 샘인 나를! 자신들을 위해 웅덩이를 팠다, 무너져서 물을 담을 수 없는 웅덩이를!”
첫 번째 악은 “생수의 근원 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
두 번째
악은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곧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를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권면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경멸하며 ‘욕으로’ 여길
정도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렘 6:10). 그렇게 하나님을 버린 결과, 우상숭배하는 죄와 안식일‧안식년을 범하는 죄에서 돌이키지
못하고 바벨론에게 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1) 우상숭배의 죄
남 유다가 망하기 직전 활동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우상숭배에 대하여 여러 차례 경고하였습니다(렘 1:16-17, 5:19, 13:10, 25:6-7, 44:5-6 등). 당시 유다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골몰하여, 그 섬긴 우상의 수가 그들이 거한 성읍의 수와 같을 정도였습니다(렘 2:28, 11:13).
예레미야 16:11-13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열조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너희가 너희 열조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행하고 나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어 너희와 너희 열조의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함이라 하셨다 하라.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유시장 경제 체제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유시장경제를 통해 국가를 지탱하고 있다. 이는 모든 국민이 공유하는 가치체계이며 자유와 책임이 법치주의와 절차적 민주주의 속에서 균형을 이루고 시장 경제를 통해 국민이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최광칼럼 /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아시나요
국가 정체성에 대한 무지(無知)
정치 지도자들 중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national identity)을 정확히 알아서 자식이나 친지에게 설명해 주거나 국민에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유시장 경제 체제라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정확히 알고 국가의 수많은 정책 중 어느
것이 국가 정체성과 부합하는지 또는 부합하지 않는지를 판별할 수 있는 지도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국가와 민족을 위해 현재 정치를 하고 있는 사람들, 앞으로 새싹의 정치인이 되고 싶어 하는 청년들 모두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그 기본 중의 기본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정확히 아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전문(前文)과 10개 장 130개 조문의 본문(本文) 그리고 5개 조문의 부칙(附則)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헌법 전문을 읽어 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상당히 긴 헌법 전문이 지향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어느 나라든 각 나라의 헌법은 그 나라의 정체성을 담아내는 최고의 법률 문서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두 가지 개념으로 요약된다고 한다. 하나는 대한민국이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으로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 체제란 것이다.
사회 제도는 하늘과 자연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이 만드는 것이다. 제도를 훌륭하게 설계하고 그 제도를 본래의 취지대로 적절하게 운영하면 어느 나라든 번창하고 국민은 잘살게 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정치 지도자이든 국가 정체성의 틀 속에서 활동하고 동시에 모든 정치가는 국가 정체성을 정립하고 유지 발전시켜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국가 정체성에 관한 세 가지 질문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인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유시장 경제 체제에 대해 크게 세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첫째, 자유민주 정치 체제와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 체제란 무엇인가? 둘째, 우리나라 헌법이 과연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얼마나 잘 구현하고 있는가? 셋째,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 체제의 양립이 가능한가?
위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초보적 답은 첫째,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에 대해서는 국민 모두가 나름 잘 알고 있으나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 체제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조차도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못하며 둘째, 우리 현행 헌법은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는 상당 수준까지 구현하고 있으나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 체제와 관련해서는 매우 미흡한 수준이라는 것 셋째,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 체제는 기본적으로 양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 우리 사회를 병들어 앓게 하는 문제들이 이들 세 가지 요인으로 인해 야기되고 있다.
정치적 의사결정 대(對) 시장적 의사결정
우리 모두는 두 가지 의사결정 과정 속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하나는 유권자로서 참여하는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자·소비자로서 참여하는 시장적 의사결정 과정이다.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과 시장적 의사결정 과정은 의사결정 투표의 수·의사결정의 빈도·의사결정 합의의 기준 등에서 크게 다르다.
먼저 두 가지 다른 의사결정 과정에서 참여자가 갖는 투표 수에 차이가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결정은 사회 구성원들의 투표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사회 구성원은 모두 똑같은 수의 표, 즉 1인 1표를 가지고 참여한다. 반면에 시장적 의사결정의 경우 사회 구성원은 자신이 갖고 있는 경제력에 비례하여 불균등한 수의 표를 가지고 의사결정에 참여한다. 만약 A의 소득이 5000만 원이고 B의 소득이 5억 원일 경우 시장을 통한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B가 A에 비해 10배의 투표권을 행사한다.
다음으로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선택은 시장적 의사결정 과정에서처럼 언제나 가능한 것이 아니며 매일매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기간이 지나야만 가능하다. 경제력만 있으면 보통 재화나 용역은 시장에서 언제든 구입이 가능하지만 국민이 선출하는 공직자는 비록 현재의 공직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정 기간, 즉 선출된 공직자의 임기가 다할 때까지 4년 또는 5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합의를 결정하는 기준에서 두 가지 형태의 의사결정 과정에 차이가 있다. 시장적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참가자 전원이 합의를 해야 거래가 이루어지므로 의사결정이 항상 만장일치로 이루어지는 반면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만장일치에 의한 의사결정은 매우 드물고 통상적으로 참여자의 과반수가 찬성하면 받아들여지는 다수결 제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누가 참된 민주화 세력인가
1948년 건국과 함께 시작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 즉 민주주의를 놓고 정치 지도자와 국민 모두 회의에 빠져 있다. 인류가 갖게 된 지고지선(至高至善)의 정치 체제인 민주주의 체제에서 77년 성상(星霜)을 살며 때로는 민주화를 외치며 목숨 건 투쟁을 하기도 했는데 민주주의를 빌미로 정치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데도, 그리고 민주 세력이라 자처하는 집단이 반(反)민주적 행태를 일삼고 있는데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 나라의 일부 좌파 세력은 ‘민주화’나 ‘민주주의’가 자신들의 전용 특허인 양 내세우면서도 3대에 걸친 진짜 독재국가인 북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민주주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언제 도입되고, 누구에 의해 정착되었는가. 민주주의는 만능인가.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런데 앞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정확히 답하고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유신 체제로 대표된 왜곡된 비(非)민주적 통치 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우리는 ʻ민주화 운동ʼ이라 불러 왔다. 이 과정에서 ʻ닭장ʼ과 ʻ철장ʼ을 오간 사람들을 ʻ민주화 투사ʼ라 부르고 이들에 의해 민주화가 완성된 것으로 생각들 한다. 사실 1980년대의 민주화 투사들은 참으로 고생을 했으며 그들의 희생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논한다면 먼저 건국 과정과 6·25전쟁의 와중에서 이 나라를 세우고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사람들의 노력이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기초로 해서 대한민국을 건국한 자체가 우리의 5000년 역사에서 가장 최초의, 그리고 가장 큰 민주화 작업이었다. 인류 역사에서 공산주의·사회주의가 정점에 달했던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그 극심한 혼란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한 위업이 없었다면 1980년대 민주화가 가능했겠는가. 정부 수립 후 3년이 채 안된 시점에 공산 세력이 무력 도발을 했을 때 이를 격퇴시킨 그 고군분투의 과정이 어쩌면 건국 이후 우리나라 민주화의 두 번째 초석이 아닌가. 1980년대의 민주화는 세 번째 방점이다.
민주주의는 흠결 많은 정치 제도
민주정치 체제를 놓고 우리나라에서의 문제는 민주정치 체제를 지고지선의 제도, 하나의 절대적 가치로 신격화해 숭앙한다는 것이다. 사실 달리 보다 나은 대안이 없기에 민주정치 체제를 버릴 수 없지만 여기엔 치명적 결함이 존재하며 문제 또한 아주 많다. 성숙한 개인들의 독립적 판단이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민주주의는 ‘떼’의 정치, ‘폭도’의 정치가 되며 우중정치로 쉽게 흘러간다는 것을 역사가 수없이 보여주고 있다. 투표에 의한 민주주의의 결과 파시즘·나치즘이 탄생했고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들에서 인민민주주의 독재 체제가 등장했다.
민주주의를 놓고 완벽한 정치체제라 찬양하기는커녕 모두 언제나 문제투성이임을 지적했는데, 영국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민주주의는 당파 투쟁·선전 선동·폭민정치 따위로 변질될 우려가 가장 많은 최악의 정치 체제”라 했고 60여 년 동안 영국 의회 의사당인 웨스터민스터 궁전을 드나들었던 윈스턴 처칠은 “민주주의는 가장 나쁜 정부의 형태다. 모든 다른 정부 형태를 제외한다면”이라고도 했다.
지고지선의 가치는 자유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추구해야 할 정치적 가치는 자유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다. 인도와 홍콩이 그 좋은 사례이다.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민주정치 체제 국가이지만 인도인들은 자유를 제한하는 수많은 보호적 규제 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그들의 소득 수준은 아직도 매우 낮다. 홍콩은 영국의 지배를 받던 옛날이나 중국의 지배를 받는 현재나 시민에게 통치자를 선출할 권리가 없기에 민주정치 체제가 아니다. 그러나 지구상의 그 어떤 곳보다 가장 광범위하게 선택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다(최근은 아니지만). 그래서 소득 수준이 높다.
민주정치 체제는 가장 나쁜 국가 형태, 즉 전제정치나 독재정치를 피하는 수단이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관심의 초점은 ʻ어떻게ʼ 민주주의를 이룰 것인가에 있었으며 ʻ왜ʼ 민주주의여야 하는가는 관심의 주된 대상이 아니었다. 민주화를 위한 열렬한 투쟁이 있었지만 정작 민주정치 체제의 본질과 정당성에 대한 고민에는 그만큼의 열정이 바쳐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날 폭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정치 체제로서 민주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비교적 잘 교육을 받았으나, 경제 체제인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해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질서가 가져오는 각종 이득은 향유하면서도 그 체제의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일반인이 제대로 교육받은 바가 거의 없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또한 상당수의 학생들은 그러한 질문을 왜 하는지 무척 의아해 한다.
자유시장경제(自由市場經濟) 체제란 무엇인가?
사실 경제학 교과서뿐만 아니라 한글 사전은 물론이고 국내의 경제학 대사전에도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실려 있지 않다. 예를 들어 한글학회가 펴낸 ‘우리말 큰사전’은 자본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자본주의란) 자본의 경제적 세력을 가지고, 또는 그 이득으로 인권·상권의 패권을 가지려는 주의, 곧 자본에 대한 이윤만을 유일의 목적으로 하는 경제적 활동 내지 경제 조직의 총괄적 표현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멸망을 예언한 카를 마르크스가 규정한 자본주의에 관한 정의인데, 아주 잘못된 정의라고 판단된다. 사전이 무릇 모든 설명이나 정의의 준거(準據)가 된다는 점에서 보면 이러한 잘못된 정의는 매우 심각한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정착·발전되기 어려울 것이다.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 체제는 사유재산 제도와 선택의 자유를 근간으로 각각의 경제 주체가 자기 책임하에 자유롭게 사익을 추구하게 하여 ‘어떤 재화를, 얼만큼, 누구를 위해, 어떻게, 언제, 어디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가’ 하는 기본적인 경제 문제를 정부 아닌 시장을 통해 해결함으로써 사회 구성원의 복지를 최대로 증진시키는 경제 체제이다.
우리 국민은 경제에 관한 한 문맹이 많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정치가들을 포함해 국가 정책을 다루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의 상당수도 경제 문맹인이라는 점이다. 기본 개념을 잘 모르고 정확한 지식이 없이 경제 문제에 대해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한다.
경제 문맹이 지배적인 상태에서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각자가 자신의 주장을 제약 없이 개진하고 그리고 투표로써 경제 정책을 결정할 때 그 결과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비극적 종말로 귀착된다.
정치 논리 대 경제 논리
오늘날 우리 경제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그 구조에 있다. 따라서 문제를 치유하기 위한 처방도 구조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경제 정책의 운용은 경제 이론이라는 과학을 근거로 한 하나의 정치적 예술이다. 과학적 요소와 예술적 요소가 잘 조화될 수 있을 때 경제 정책은 성공할 수 있으며 국민 복지 또한 증진될 수 있다.
최근의 중요한 정책 결정을 살펴보면 정책 결정 과정에서 과학적 요소인 경제 논리는 뒷전으로 밀린 채 정치 논리가 경제정책을 지배하여 원하는 목적이 달성되지 않음은 물론 오히려 더 큰 부작용과 후유증만을 발생시키고 있다.
경제 논리와 정치 논리는 그 궤를 달리한다. 경제는 자체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이를 무시한 정책을 펴면 경제는 경제대로 병만 들고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정치의 전당인 국회에서 정치 논리를 깡그리 무시하고 국정을 논하라고 요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 논리가 무시되고 정치 논리가 부각될 때 결국 정치 논리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시장경제와 경기 규칙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각종 혼란과 고통,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의 혼란과 고통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뒷받침하는 사회 질서, 즉 경기 규칙에 대해 정치가와 사회 구성원 모두의 이해가 부족하고 문제의 핵심을 고심해 보지 않은 데서 초래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자본주의의 경기 규칙을 무시하고 자본주의를 실행하려는 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는 말이다.
우리 모두가 선진국 진입을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선진국 진입은 역사적으로 예외적인 사건이다. 지난 1세기 동안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나라는 일본과 아일랜드뿐이다. 남미의 몇 나라는 20세기 초에 미국·유럽에 견줄 수 있는 선진국이었으나 최근엔 중진국으로 후퇴했다.
대다수 전문가가 우리의 선진국 진입이 시간의 문제이지 종국엔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현재와 같은 반(反)시장적 정책 기조·국론 분열·국제 사회에서의 고립·노사 관계의 불안·근로 의욕의 저하·저출생과 고령화·지구적 경쟁의 심화·안보 불안 등이 계속될 경우 선진국 진입은커녕 남미와 같이 추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많은 사람들, 특히 정치가와 관료들도 입으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신봉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과 정책은 아직은 거리가 멀다. 모든 것을 정부가 주도하는 정부 중심적인 경제운영 방식에 기본적으로 큰 변화가 없다. 심지어 민간에서도 ‘작은 정부’를 주장하다가도 어떤 문제에 가서는 정부에 의존하려는 경향도 자주 나타나고 있다.
도대체 왜 우리는 누구나 구호로 내세우는 ‘시장경제’를 실천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체화되어 있는 뿌리 깊은 ‘형평’ 위주의 사고방식이 정치를 통하여 반(反)시장적 정책을 양산해 내는 데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을 짓누르고 ‘민족’ ‘평등’ ‘복지’라는 미명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교묘히 제한하면서도 자신들을 시장경제주의자라고 오도하는 사람들이 경제정책을 좌지우지하는 한 경제는 멍들 수밖에 없다.
경제민주화의 오류
최근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는 단연 경제민주화이다. 경제민주화는 말 그대로 경제의 민주화이고 이는 곧 경제의 정치화를 의미한다. 즉 경제민주화란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이 시장적 의사결정 과정을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가 경제를 다스린다는 것이 경제민주화의 본질이라면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정치와 경제의 각각의 본질이 무엇이고 그리고 정치와 경제가 어떻게 상호 연관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경제를 민주화하고 정치화하면 그 경제는 멍들어 쇠락한다. 이는 단순한 추측이 아니고 역사에서 증명된 사실이다. 경제의 민주화를 역사상 가장 완벽히 이룬 나라들이 옛 소련과 중국 그리고 현재의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다. 재벌도 없고, 노동자가 기업 운영, 아니 나라 운영의 핵심이고, 일감 몰아주기도 없고, 동반성장위원회도 필요 없고, 세금은 아예 없고, 대형마트의 영업시간 제한도 필요 없는 등 오늘날 경제민주화 주창자들이 내세우는 경제민주화가 완벽히 실현될 뻔했던 곳이 북한을 포함한 이들 사회주의 국가들이 아닌가.
양립 불가능한 민주정치 체제와 자유시장경제 체제
민주정치 체제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는 공통적으로 개인의 자유·책임·경쟁·참여·법치를 강조하는 자유주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병행 발전하는 속성이 일부 있다. 민주정치 체제는 정치권력의 남용을 차단함으로써, 그리고 자유로운 풍토를 조성함으로써 진정한 시장경제 체제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한다. 또한 시장경제 체제는 각자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정당한 보상을 받게 함으로써 민주정치 체제의 물적 기반을 제공하고 정치적 안정에 기여한다.
그러나 민주정치 체제와 시장경제 체제는 근원적으로 출발에서부터 다르고 진행 과정과 지향 목표도 다르기 때문에 각각 분리하여 논의되어야지 ‘민주적 시장경제’나 ‘경제민주화’ 같이 혼합될 경우 개념이 혼돈스러워지고 이를 바탕으로 정책이 수립되는 경우 혼란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이는 어느 한 나라가 완벽한 민주정치 체제와 완벽한 시장경제 체제를 가지고 있더라도 본래 이질적(異質的)인 두 체제가 상충할 것이고 특히 경제정책을 두고는 양립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정치적 의사결정은 과오를 범하지 않는 전지전능한 주체에 의해 높은 곳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최근 화두로 등장한 경제민주화 논의 내용과 방법을 두고 진행되는 논의에서 갑론을박의 근원은 관련자 모두가 정치적 민주정치 체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본질 그리고 그 양자의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민주정치 체제의 경우 강제성이 항시 전제되나 시장경제 체제는 자발성이 근간을 이룬다. 선거를 통해 직접 결정되든 또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사람들의 합의에 의해 결정되든 민주정치 체제에서의 의사결정은 다수결로 이루어지며 이 과정에서 반대를 한 소수도 최종 결정이 이루어진 후에는 반드시 그 결정에 따라야 할 의무를 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강제성은 시장경제 체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경제 체제에서는 생산자든 소비자든 상대방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제공할 의사를 표명하고 상대방이 자신의 제의를 수용할 때에만 거래가 이루어진다. 어느 누구도 상대방에게 자신의 선택을 강요할 수 없다. 모든 거래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며 성사되는 거래의 경우는 항시 만장일치가 이루어진다.
많은 사람이 정치적 민주정치 체제와 시장경제 체제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민주정치 체제와 시장경제 체제가 잘 조화되는 제도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는 앞서 간략히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이해와 인식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점에 있다. 참으로 잘못된 이해와 인식이 최근 대두된 경제민주화 등장의 배경이며 경제민주화 주창자들조차도 헷갈리고 소리만 요란하지 구체적 내용에 오면 전혀 새로운 것이 없는 이유이다.
경제민주화를 놓고 일반 국민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우리 국민은 대체로 정치를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 혐오하는 지경이다. 우리 국민은 또한 정부의 무능력과 비효율을 한탄한다. 경제민주화는 경제에 대한 정치의 개입이고 정부에 의한 경제의 통제이다. 정치인들이 하는 대부분의 일에 전혀 신뢰를 보내지 않는 국민이, 정치인들이 경제에 개입하면 경제가 잘 되리라고는 어떻게 신뢰하는가. 정부의 무능력과 비능률을 한탄하는 국민이,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면 경제가 잘 되리라고 어떻게 기대하는가.
국가 번영의 요체
잘사는 국가 번창의 길을 놓고 선각자들이 내놓은 수많은 처방의 핵심은 ‘리더십(leadrship)’ ʻ제도(institution)’와 ʻ사상(ideology)’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한 나라의 장기적 번영을 결정하는 것은 그 나라의 천연자원도 아니고, 문화적 자산도 아니며 ʻ지도자와 제도와 이념ʼ에 있다. 훌륭한 제도와 이념의 핵심은 자유주의 정신과 자본주의 시장경제인데 우리의 경우 반(反)자유주의 정신이 풍미하고 있으며 반(反)자본주의적·반(反)시장적 정책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20세기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나라는 번영을 누리고 경제가 번창하는 데 반하여 한정된 이성과 이기주의적 편견의 소유자인
인간 또는 그 집단이 무제한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면 그 사회는 부패하고 경제는 쇠퇴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냉혹함에 대해 말이 많은데 그 이유는 자본주의가 모든 사람을 각자의 능력과 기여에 따라 달리 대우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많은 사람이 불행함을 느끼는 것은 자본주의가 각자에게 가장 바람직한 상황 또는 지위에 도달할 수 있는 기회는 예외 없이 부여하지만 그 상황 또는 지위에는 소수의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능력을 발휘하고 더 많은 재능을 가진 소수의 모습을 볼 때 다수는 자존심이 상하고 불평하게 마련이다.
자유경제 체제에 벗어나는 특단의 조치만으로 크게는 경제 위기가 극복되고, 작게는 문제로 대두된 각각의 사안이 해결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어려운 국면이나 내용이라 하더라도 문제를 순리대로, 원칙에 따라, 원천적으로 풀어야지 충격요법으로, 대증요법(對症療法)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찾다 보면 모든 일을 정부가 해야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기 십상이다. 따라서 정부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살피고 이를 제대로 인식·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인·민간 또는 시장이 잘할 수 있는 일들에 정부가 개입하지 말아야 하며, 더더욱 국민 세금을 투입해 낭비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 경제적 번영을 보장하는 각종 제도를 확립·정착시키면서 정책의 내용을 제대로 만들어 필요조건을 충족시키고 정치적 지도력이 발휘되어 국민적 에너지가 결집되는 충분조건이 충족될 때 경제정책은 성공을 거두고 경제는 번창하게 된다.
(1) 우상숭배의 죄
남 유다가 망하기 직전 활동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우상숭배에 대하여 여러 차례 경고하였습니다(렘 1:16-17, 5:19, 13:10, 25:6-7, 44:5-6 등). 당시 유다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골몰하여, 그 섬긴 우상의 수가 그들이 거한 성읍의 수와 같을 정도였습니다(렘 2:28,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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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오지병을 깨뜨리게 하심으로써, 우상숭배한 범죄의 대가로 이스라엘이 반드시 패망할 것을 경고하셨다(렘 19:1-15, 참고-렘 7: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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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6:11-13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열조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12 너희가 너희 열조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행하고 나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어
너희와 너희 열조의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함이라 하셨다 하라”
유다의 심각한 우상숭배의 죄악을 깨우쳐 회개케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 말씀을 전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고 무시했으며(대하 36:14-16, 렘
7:25, 25:4, 26:5, 29:19, 35:15, 44:4), 하나님의 실존을 불신하면서 선지자들을 거짓 선지자로
매도하고 죽이는 데 앞장섰습니다(렘 5:12-13). 그리고 회개할 기회를 주어도 회개치 않았습니다(렘 19:1, 10-13).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 안에까지 우상을 갖다놓고 섬김으로써,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기 전 이미 그들 스스로가 성전을 더럽혔던
것입니다(렘 32:34, 겔 8:1-18, 22:4).
(2) 안식일과 안식년을 이행하지 않은 죄
1) 안식일의 불순종
안식일
준수여부는 율법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을 나누는 기준이며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분기점입니다(렘 17:19-27). 이는 안식일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는 영원한 표징이기 때문입니다(출 31:13, 겔 20:12, 20).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겠다고 예레미야를 통해 엄중하게 경고하셨는데(렘
17: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키지 않음으로, 바벨론 포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에스겔 22:8 “너는 나의 성물들을 업신여겼으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으며”
에스겔 22:26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변치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으로 분변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2) 안식년의 불순종
안식년의 규례는 ‘제 7년에 땅을 쉬게 하라’는 것과 ‘동족 히브리 사람 종을 7년째 자유케 하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레 25:2-7, 신 15:12-18).
① 6년 동안 땅에 파종하고, 제 7년에는 그 땅을 쉬게 하라(출 23:10-11, 레 25:1-7, 26:34-35)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로는 7년째 되는 그 해에는 그 땅에 파종해서는 안되었으며(레 25:2-4), 스스로 난
곡물이나 열매라 할지라도 거두지 말고 땅이 안식하도록 해야 했습니다(레 25:5). 그리고 안식년을 지키면 제 6년에 3년 소출을
주심으로 제 7년 안식년 뿐만 아니라 제 8년과 제 9년 까지도 부족함이 없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레 25:21, 렘
25:22). 이로써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셨습니다(레 25:23).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욕심으로 인하여 제 7년에도 파종함으로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하심으로 땅이 안식하게 하셨던 것입니다(레 26:43).
역대하 36: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② 종이 동족 히브리 사람이면 6년 동안 부리다가 7년째는 자유케 하라(출 21:2-6, 신 15:12-18)
율법에는
히브리 종인 경우 종이 된 지 7년째 되는 해에 반드시 놓아 자유하게 하도록 규정했습니다(출 21:2, 신 15:12). 그리고
자유의 몸이 된 종을 빈손으로 보내서는 안되며(신 15:13-14), 노예의 몸값을 받지 않고 조건 없이 해방시켜 주도록
규정하였습니다(출 21:2, 신 15:18).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안식년의 규례를 어기고 종들의 자유를 빼앗았습니다(렘 34:8-14).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벨론에 끌려가게 하시어 그들도 자유를 빼앗기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34:1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열방 중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유다 백성은 무수한 죄 때문에 피 흘린 성읍이 되었고, 두껍게 녹슬어 버린 가마같이 되고
말았습니다(겔 24:6).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이라는 풀무 속에 집어넣고, 하나님의 노와 분을 쏟아서
유다의 죄악을 정결케 하셔야만 했습니다(렘 29:10-11, 겔 22:21-22, 24:12-14).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바벨론에 포로로 보내셨으나,
7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영적 암흑 상태로 방치해두지 않으시고 말씀을 보내어 철저하게 회개케 하시어 새로운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그들이 포로로 흩어진 상태에서도 하나님에 의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습니다(렘 29:11-14). 정복자 바벨론에게 복종하고 그 땅에서 적응하며 그 역경 속에서 회개하여 정결케 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정의와 구속 경륜을 확실히 깨닫고 믿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남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의 역사
이스라엘은 북방 강대국 앗수르와 바벨론, 남방 강대국 애굽 사이에 낀 약소 국가였습니다. 남 유다의 제 16대 왕 요시야 당시는 세계 최강국이던 앗수르가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바벨론이 신흥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1. 므깃도 전투와 갈그미스 전투
애굽은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갈그미스에서 바벨론과 싸우려고 하였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갈그미스로 가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과해야 했는데, 이때 반 앗수르 입장이었던 요시야 왕은 북진하는 애굽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며, 이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자신이
싸우려는 대상은 요시야 왕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대하 35:21). 그러나 요시야 왕은 듣지 않고 변장까지 하면서 전쟁터에
남기를 고집하였습니다(대하 35:21-22). 전쟁터에서 애굽의 궁수가 쏜 화살에 중상을 입은 요시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죽고
말았습니다(대하 35:23).
요시야는 종교 개혁을 통해 영적 내리막길로 곤두박질하던 남 유다에 일시적으로나마 제동을 걸었지만, 요시야가 죽은 이후 남 유다의 국운이 갑자기 쇠약해지고 순식간에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애굽과 바벨론이 맞서는데, 이것이 갈그미스 전투(주전 605년)입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바벨론은 당시 근동 지방을 장악하였고, 애굽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왕하 24:7).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프리카 대륙과 근동 아시아 지역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남 유다 왕국마저 정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3차에 걸쳐 유다 왕과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3차에 걸친 바벨론 포로의 과정은 성전 파괴의 과정과 다름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들어서 가장 아끼는 성전을 파괴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징계하셨습니다(왕상 9:7-9).
Flight of The Prisoners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티소(James Tissot)가 그린
불타는 예루살렘과성전, 그리고 바벨론 군대에 포로로 끌려가는 유다 백성들
2. 바벨론 제 1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605년 / 여호야김 제 3(혹은 4)년, 느부갓네살 원년
이때는
여호야김 왕 제 3년(단 1:1)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46:2은 이때를 여호야김 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기록에
1년 차이가 나는 이유는 열왕기하 23:34을 통해 해명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여호야김이 그의 동생 여호아하스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지 않고, 여호야김이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요시야(주전 640-609b년), 여호아하스(주전 609b-608년), 여호야김(주전 608-597년) 순으로 왕이 되었지만(왕하
23:3-0, 34, 대하 36:1-4), 요시야 다음에 바로 여호야김이 왕이 된 것처럼 기술한 것은, 3개월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악을 일삼았던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왕하 23:31-32).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제 1차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주전 605년은 여호야김 제 4년이 되는 것입니다.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제
1차 바벨론 포로 때에는 다니엘을 포함한 왕족과 귀족들이 끌려갔습니다(단 1:3). 여호야김은 처음 3년은 바벨론을 섬기다가
다시 애굽과 동맹하여 반(反)바벨론 정책을 펼쳤고(왕하 24:1), 주전 602년 쇠사슬로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성전
기구들을 약탈당하였습니다(왕하 24:2, 단 1:1-2, 5:2).
3. 바벨론 제 2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97년 / 여호야긴 즉위년, 느부갓네살 8년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에 즉위하여 3개월 10일을 통치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8-12, 대하 36:9-10).
바벨론 역대기에 따르면, 티쉬리월(7월)로 시작되는 달력을 기준할 때 여호야긴이 왕이 딘 것은 주전 597년 불월(8월)이며,
3개월 10일이 지나 왕위에서 쫓겨난 것은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얼마 동안의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왕하 24:10-11)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에 이르러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한 것입니다. 이때 왕위에서 쫓겨난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 니산월(1월) 10일에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대하 36:10). * 남유다 통치 연도는 티쉬리월 기준이므로 해가 바뀌지 않음.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바벨론은 여호와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었으며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기명을 다 훼파하였습니다(왕하 24:10-13, 대하 36:10).
그리고
여호야긴 왕과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의 권세 있는 자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12, 15). 이때
용사 7천 명을 포함하여 방백과 백성 총 1만명, 그리고 공장과 대장장이 1천 명이 끌려갔는데, 그들은 모두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였습니다(왕하 24:14-16). 반란의 구심점이 될 소지가 있는 최고 지도자들과 탁월한 인물들을 모두 뽑아서 끌고 감으로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도록 하여 남 유다를 철저히 무력화 시킨 것입니다. 여기에는 에스겔 선지자와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의 조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겔 1:1-3, 에 2:5-6).
4. 바벨론 제 3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86년 / 시드기야 11년, 느부갓네살 19년
시드기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권면(렘 27:12)을 듣지 않고 반(反)바벨론 정책을 고집하였고(왕하 24:20, 렘
27:12-13, 37:2), 바벨론은 시드기야 제 9년 10월 10일부터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왕하 25:1, 렘 39:1,
52:4). 시드기야가 애굽에 원군을 요청하여 바벨론 군대가 떠났다가 애굽 군대가 즉각 퇴각하자 다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렘 37:5, 11, 겔 17:15) 시드기야 11년까지 약 30개월 동안(티쉬리 기준 달력)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습니다(왕하 25:1-2, 대하 36:11-20, 렘 37:7-10, 겔 17:12-21). 마침내 주전 586년 시드기야 제
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왕하 25:1-3, 렘 39:1-2, 52:4-6).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는 동안 기근이 극심하여 자녀를 잡아먹을 정도로 비극적 참상이 빚어졌는데(애 2:20, 4:10, 사 9:20, 겔
5:10), 이는 모세의 예언대로(레 26:28-29, 신 28:53-57)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였습니다. 결국 BC
586년,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4월 9일은 유다인들에게 바벨론 유수 기간 내내
금식과 애통의 날로 지켜졌습니다(슥 7:5, 8:19).
성이 함락되던 때 시드기야는 밤에 도망하다가 갈대아 군대에게 잡혀 하맛 땅 립나로
끌려가 바벨론 왕에게 신문을 당하였습니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목전에서 그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왕하 25:4-7, 렘 39:4-7, 52:7-11).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한 달 만인 5월 10일에 바벨론 시위대장관 느부사라단이
와서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사르고 사면 성벽을 헐었습니다(왕하 25:8-12, 대하
36:18-19, 렘 39:8-10, 52:12-16). 그리고 성전의 두 놋기둥(야긴과 보아스)과 받침들과 놋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또 가마들, 부삽들, 불집게들,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또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갔고,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들을 취하였습니다(왕하
25:13-17, 대하 36:18-19, 렘 52:17-23).
그리고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전 문지기 세 사람을 잡고, 군사를 거느린
장관(내시) 하나와 왕의 시종 칠 인(혹은 다섯 사람)과 군대장관의 서기관 하나와 국민 육십 명을 잡아갔으며, 립나에서 그들을 쳐
죽였습니다(왕하 25:18-21, 렘 52:24-27).
한편, 예레미야 52:28-30에는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다 소규모로 잡혀간 자들이 총 4,600명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로 끌려간 자와 고국 땅에 남겨진 자, 그리고 재난을 피하여 주변국으로 도망친 자 등으로 나뉘어, 민족 전체가 갈기갈기 찢기고 그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최악의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선민 유다 백성이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최대의 비극이요 수치였습니다. 이는 우상을 숭배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거룩하신 뜻을 멸시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의 표현이었습니다(대하 36:21, 참고-렘 34:8-16).
그러나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만 같던 바벨론이 하나님의 주권 역사로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하시고(참고-렘 50:3, 9, 41-46장, 51장) 이스라엘 백성이 귀환하도록 하셨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남유다의 멸망과 바벨론의 1차 2차 3차 4차 포로의 역사
이스라엘(남 유다)은 북쪽에는 앗수르와 바벨론이 진을 치고 있었고 남쪽에는 애굽이 진을 치고 있는 강대국의 틈새에 끼어 있는 약소국가이었습니다.
남 유다의 제16대 왕 요시야 당시는 세계 최강국이던 앗수르가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바벨론이 신흥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1. 므깃도 전투와 갈그미스 전투
애굽은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갈그미스에서 바벨론과 싸우려고 하였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갈그미스로 가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과해야 했는데, 이때 반 앗수르 입장이었던 요시야 왕은 북진하는 애굽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며, 이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자신이 싸우려는 대상은 요시야 왕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대하 35:21). 그러나 요시야 왕은 듣지 않고 변장까지 하면서 전쟁터에 남기를 고집하였습니다(대하 35:21-22).
전쟁터에서 애굽의 궁수가 쏜 화살에 중상을 입은 요시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죽고 말았습니다(대하 35:23).
요시야는 종교 개혁을 통해 영적 내리막길로 곤두박질하던 남 유다에 일시적으로나마 제동을 걸었지만, 요시야가 죽은 이후 남 유다의 국운이 갑자기 쇠약해지고 순식간에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애굽과 바벨론이 맞서는데, 이것이 갈그미스 전투(주전 605년)입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바벨론은 당시 근동 지방을 장악하였고, 애굽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왕하 24:7).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프리카 대륙과 근동 아시아 지역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남 유다 왕국마저 정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3차에 걸쳐 유다 왕과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3차에 걸친 바벨론 포로의 과정은 성전 파괴의 과정과 다름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들어서 가장 아끼는 성전을 파괴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징계하셨습니다(왕상 9:7-9).
Flight of The Prisoners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티소(James Tissot)가 그린
불타는 예루살렘과성전, 그리고 바벨론 군대에 포로로 끌려가는 유다 백성들
2. 바벨론 제 1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605년 / 여호야김 제 3(혹은 4)년, 느부갓네살 원년
이때는
여호야김 왕 제 3년(단 1:1)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46:2은 이때를 여호야김 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기록에
1년 차이가 나는 이유는 열왕기하 23:34을 통해 해명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여호야김이 그의 동생 여호아하스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지 않고, 여호야김이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요시야(주전 640-609b년), 여호아하스(주전 609b-608년), 여호야김(주전 608-597년) 순으로 왕이 되었지만(왕하
23:3-0, 34, 대하 36:1-4), 요시야 다음에 바로 여호야김이 왕이 된 것처럼 기술한 것은, 3개월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악을 일삼았던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왕하 23:31-32).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제 1차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주전 605년은 여호야김 제 4년이 되는 것입니다.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제
1차 바벨론 포로 때에는 다니엘을 포함한 왕족과 귀족들이 끌려갔습니다(단 1:3). 여호야김은 처음 3년은 바벨론을 섬기다가
다시 애굽과 동맹하여 반(反)바벨론 정책을 펼쳤고(왕하 24:1), 주전 602년 쇠사슬로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성전
기구들을 약탈당하였습니다(왕하 24:2, 단 1:1-2, 5:2).
3. 바벨론 제 2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97년 / 여호야긴 즉위년, 느부갓네살 8년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에 즉위하여 3개월 10일을 통치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8-12, 대하 36:9-10).
바벨론 역대기에 따르면, 티쉬리월(7월)로 시작되는 달력을 기준할 때 여호야긴이 왕이 딘 것은 주전 597년 불월(8월)이며,
3개월 10일이 지나 왕위에서 쫓겨난 것은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얼마 동안의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왕하 24:10-11)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에 이르러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한 것입니다. 이때 왕위에서 쫓겨난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 니산월(1월) 10일에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대하 36:10). * 남유다 통치 연도는 티쉬리월 기준이므로 해가 바뀌지 않음.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바벨론은 여호와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었으며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기명을 다 훼파하였습니다(왕하 24:10-13, 대하 36:10).
그리고
여호야긴 왕과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의 권세 있는 자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12, 15). 이때
용사 7천 명을 포함하여 방백과 백성 총 1만명, 그리고 공장과 대장장이 1천 명이 끌려갔는데, 그들은 모두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였습니다(왕하 24:14-16). 반란의 구심점이 될 소지가 있는 최고 지도자들과 탁월한 인물들을 모두 뽑아서 끌고 감으로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도록 하여 남 유다를 철저히 무력화 시킨 것입니다. 여기에는 에스겔 선지자와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의 조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겔 1:1-3, 에 2:5-6).
4. 바벨론 제 3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86년 / 시드기야 11년, 느부갓네살 19년
시드기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권면(렘 27:12)을 듣지 않고 반(反)바벨론 정책을 고집하였고(왕하 24:20, 렘
27:12-13, 37:2), 바벨론은 시드기야 제 9년 10월 10일부터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왕하 25:1, 렘 39:1,
52:4). 시드기야가 애굽에 원군을 요청하여 바벨론 군대가 떠났다가 애굽 군대가 즉각 퇴각하자 다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렘 37:5, 11, 겔 17:15) 시드기야 11년까지 약 30개월 동안(티쉬리 기준 달력)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습니다(왕하 25:1-2, 대하 36:11-20, 렘 37:7-10, 겔 17:12-21). 마침내 주전 586년 시드기야 제
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왕하 25:1-3, 렘 39:1-2, 52:4-6).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는 동안 기근이 극심하여 자녀를 잡아먹을 정도로 비극적 참상이 빚어졌는데(애 2:20, 4:10, 사 9:20, 겔
5:10), 이는 모세의 예언대로(레 26:28-29, 신 28:53-57)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였습니다. 결국 BC
586년,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4월 9일은 유다인들에게 바벨론 유수 기간 내내
금식과 애통의 날로 지켜졌습니다(슥 7:5, 8:19).
성이
함락되던 때 시드기야는 밤에 도망하다가 갈대아 군대에게 잡혀 하맛 땅 립나로 끌려가 바벨론 왕에게 신문을 당하였습니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목전에서 그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왕하 25:4-7, 렘 39:4-7, 52:7-11).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한 달 만인 5월 10일에 바벨론 시위대장관 느부사라단이 와서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사르고 사면 성벽을 헐었습니다(왕하 25:8-12, 대하 36:18-19, 렘 39:8-10, 52:12-16). 그리고
성전의 두 놋기둥(야긴과 보아스)과 받침들과 놋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또 가마들, 부삽들, 불집게들,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또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갔고,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들을 취하였습니다(왕하 25:13-17, 대하 36:18-19, 렘 52:17-23).
그리고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전 문지기 세 사람을 잡고, 군사를 거느린 장관(내시) 하나와 왕의 시종 칠 인(혹은 다섯
사람)과 군대장관의 서기관 하나와 국민 육십 명을 잡아갔으며, 립나에서 그들을 쳐 죽였습니다(왕하 25:18-21, 렘
52:24-27).
한편, 예레미야 52:28-30에는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다 소규모로 잡혀간 자들이 총 4,600명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로 끌려간 자와 고국 땅에 남겨진 자, 그리고 재난을 피하여 주변국으로 도망친 자 등으로 나뉘어, 민족 전체가 갈기갈기 찢기고 그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최악의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선민
유다 백성이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최대의 비극이요 수치였습니다.
이는 우상을 숭배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거룩하신 뜻을 멸시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의 표현이었습니다(대하 36:21, 참고-렘 34:8-16).
그러나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만 같던 바벨론이 하나님의 주권 역사로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하시고(참고-렘 50:3,
9, 41-46장, 51장) 이스라엘 백성이 귀환하도록 하셨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예레미야 선지자 - 눈물의 선지자
1. 인적 사항
①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세우시다’라는 뜻.
② 제사장 아비아달의 후손으로 추정됨(왕상 2:26).
③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베냐민 땅 아나돗에서 출생(렘 1:1).
④ 남 유다 요시야 왕 제13년 곧 B.C.627년부터 예루살렘 멸망(B.C.586년)
이후 유다 남은 백성들이 애굽에 이주하여 정착할 때인 B.C.580년까지 약 50여 년 동안 사역함.
⑤ 선민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많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 까닭에 소위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림.
⑥ 유대 전승에 의하면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말년에 애굽에 끌려가(렘 43:5-7)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함.
2. 시대적 배경
예레미야 사역 초기 국제 정세는 갈대아와 앗수르가 세력 다툼을 하느라고 남 유다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유다로서는 다소 평화로운 상태였다.
또한 내적으로는 善王(요시야)이 등극하여 성전을 정결케 하고 우상을 제거하는 등 내실을 다지던(건축)시기였다.
그러나 B.C.609년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애굽 왕 느고(Neco, B.C.610-595년)와 싸우다가 전사(대하 35:20-24)한 뒤로 하나님이 아닌 애굽을 의지 대상으로 삼은 이후 왕들의 악행과 失政이 계속됨에 따라 유다는 급속히 쇠퇴의 길로 치달았다.
그리하여 유다는 B.C.605년 바벨론에 의해 첫 침공을 당하여 복속된 이래 B.C.597년과 B.C.586년 거듭해서 침공을 당함으로써 마침내 멸망하고 만다.
이렇게 볼 때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이 시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참혹하고도 광범위하게 시련을 당한 비운의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에레미야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해서는 예레미야 서론을 참조하라.
3. 주요 생애
요시야 통치 시기 |
출생 |
B.C. 647 년경 |
― |
선지자로 소명 받음 |
B.C. 627 년 |
렘 1:4,5 |
요시야와 함께 종교 개혁 단행 |
B.C. 627-609 년 |
렘 11:1-8 |
여호야김 통치 시기 |
여호야김의 행악을 규탄함 |
B.C. 609-597 년 |
렘 22:18,19 |
예루살렘 멸망 예언 |
" |
렘 25:1-38 |
시드기야의 통치 시기 |
바벨론에 무조건 항복을 주장함 |
B.C. 597-586 년 |
렘 38:14,17,18 |
바벨론 포로 및 귀환 예언 |
" |
렘 32:1-44 |
반역죄로 고발당해 옥에 갇힘 |
B.C. 587 년 |
렘 37:4-15 |
석방되어 시위대 뜰에 거함 |
" |
렘 37:16-21 |
진흙 구덩이에 던져짐 |
" |
렘 38:1-6 |
에벳멜렉의 상소로 구출됨 |
" |
렘 38:7-13 |
예루살렘 멸망 및 시드기야와 유다인들의 포로됨 |
B.C. 586 년 |
렘 52:4-34 |
전쟁 와중에도 안전하게 보호를 받음 |
" |
렘 39:11-14 |
죽음 |
B.C. 580 년경 |
― |
4. 성품
① ‘눈물의 선지자’로 불릴 만큼 천성적으로 동정심이 많고 온유한 자(렘 9:1).
② 백성들의 박해로 인해 자신의 선지자직에 대해 수없이 갈등과 회의를 거듭한 내성적 성품의 소유자(렘 20:7-10).
③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전할 때에 사정없이 외치는 강인한 성품의 소유자.
④ 몇 차례에 걸친 투옥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주의 말씀을 전한 것으로 볼 때 소명 의식이 투철하고 인내심이 강한 자(렘 20:1-3; 37:13-15; 38:4-18).
5. 구속사적 지위
① 구약 선민의 후손 유다의 패역함을 깨우치기 위해 소명 받은 선지자(렘 3:11-22).
② 유다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대언자임과 동시에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여 하나님과 화목을 꾀하는 중보자적 역할을 감당한 자(렘 15:19).
③ 출생 전부터 하나님의 전적인 의지와 은혜로 인해 선택된 자(렘 1:5).
④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물론 심지어 가족들에 의해서 조차 배척받고 핍박당한 그의 생애는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고도 동족인 유대인들에 의해 핍박을 받고 끝내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생애를 예표함(렘 11:21-23; 26:6-9).
6. 평가 및 교훈
① 예레미야는 원래 내성적이고 나약한 인물이었지만(1:6절)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실 때에는 늘 힘있고 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의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은 자신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너무 나약하고 초라하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인간적인 나약함이나 부족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전혀 결격 사유가 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강하고 능력 있는 자를 부르셔서 그들의 강한 것에 의지해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연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택하셔서 소명과 함께 그것을 능히 감당할 힘도 함께 주심으로 스스로 힘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시다(고전 1:27-29). 그런즉 사명을 맡은 성도들은 인간적 재능을 갈고 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② 예레미야가 극심한 박해로 인해 사명을 포기하고픈 지경에까지 이르렀듯이 오늘날의 사역자들도 여러 가지 모양의 고난과 고통으로 인해 사역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이는 사역자들이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장애물들로 이런 때일수록 더욱 마음을 가다듬고 장차 있을 상급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곁길로 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낙심과 절망 중에도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끝까지 바르게 선포한 예레미야와 같이 실로 끝까지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렘 17:5-8).
③ 바벨론에 투항하라는 반민족적 언사 때문에 예레미야는 동족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해야했다. 그러나 이는 예레미야가 자기 민족을 사랑하지 않거나 세계정세에 대한 기회주의적 외교를 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대한 그의 깨달음에 의한 것이었다(렘18:6).
오늘날의 성도들도 많은 사람으로부터 동의를 얻지 못할 뿐더러 도리어 조롱과 비웃음의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이 지시하시는 바를 반드시 선포해야할 의무가 있다.
④ 예레미야는 유다의 암담한 미래를 예언함과 동시에 회복의 소망도 외쳤다. 이는 여호와 신앙에 있어서 믿음이나 사랑만큼 소망의 중요성도 가르쳐 주는 교훈으로 제시된다. 극도의 황금만능 사상과 비윤리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오늘날, 사회의 사방에서 들려오는 암울한 상황과 암담한 현실 속에서 막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도된 우리는 복음을 높이 들어 어두운 곳에 소망의 빛을 비추어야 하겠다.
7. 핵심 성구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렘 1:10).
이스라엘의 멸망
1. 北이스라엘의 멸망과 처참한 운명의 유다.
이스라엘이 南北으로 나뉘어 혼란 속에 빠져 있을 때,
티그리스강 상류의 동쪽 연안지대에서는 초강대국 앗시리아 제국이 건설되고 있었다.
앗시리아 제국의 팔레스타인 침공은 기원전 1,100년에서 633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하여,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앗시리아 제국은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에 대하여 여러 번에 걸쳐 공격을 하였다.
이 와중에 北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는 앗시리아의 3년에 걸친
공격 끝에 침략자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기원전 722년).
이렇게 북이스라엘의 역사는 끝나고 말았다.
멸망한 북이스라엘에는 異民族이 옮겨와 살았고, 앗시리아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격동 속에서 南유다의 운명은 어찌되었을까?
①앗시리아가 활동할 당시 남유다의 왕은 히스기야였다.
그는 다른 왕들처럼 바알 神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을 섬겼다.
②이에 히스기야왕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앗시리아의 엄청난 공격을 막아내고 승리하게 된다.
③때문에 유다는 북이스라엘처럼 앗시리아에 멸망당하지 않고 살아남게 되었다.
그러나 정세의 변화는 어지러웠고,
기원전 650년경에는 그때까지 앗시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바빌로니아가 점점 세력을 키워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게 된다.
과연 바빌로니아 제국의 등장은 유다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당시 주변 정세를 살펴보면,
①신흫 바빌로니아 제국의 등장으로 앗시리아의 세력이 쇠퇴하자,
②그것을 두려워한 이집트가 바빌로니아에 대항하여 앗시리아와 동맹을 하게 된다.
③이 사이에 낀 유다 왕국은 복잡한 정치적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집트와 동맹하여 바빌로니아에 대항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바빌로니아와 화해하여 대국 이집트에 대적할 것인가?
유다는 왕국의 존립을 놓고 일생일대의 선택을 해야만 하였다.
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의 처참한 운명이었다.
2. 예언자 예레미야의 등장
이러한 혼란 속에서 홀연히 나타나 절망을 누르고
고난의 길을 걸은 예언자가 있었는데, 바로 유다 왕국의 예레미야였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근교의 제사장 집안에서 태어나
생애의 대부분을 예루살렘에서 보냈다.
①이집트일까 아니면 바빌로니아일까라는 선택 속에서,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재위605-562)이
유다 왕국을 위하여 하느님이 사용할 왕이라고 예언하고,
이집트와 동맹을 맺는 것을 반대했다.
②그러나 그의 이런 주장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커다란 반감을 샀다.
③결국 예레미야는 배신자로 고발당하고 지하의 흙탕물에 잠기게 된다.
④기원전 605년, 드디어 대국끼리의 격돌이 현실로 나타났다.
바빌로니아왕 느부갓네살과 이집트 느고왕이 격돌하는데,
이것이 유프라테스강 주변에서 발생한 카르케미쉬 전투이다.
결과는 느부갓네살왕의 승리로 끝난다.
⑤바빌로니아 군대는 지중해의 해안을 따라 평야 쪽으로 침공해 왔다.
모든 것이 예레미야의 예언대로였던 것이다.
3. 南유다도 멸망
①유다 왕국의 여호야킴왕 시대에 바빌로니아가 침공하자
여호야킴은 항복하고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한다.
②그런데 정세가 다시 변하게 된다.
이집트 느고왕이 세력을 회복하여 바빌로니아를 내쫒게 된다.
이제 또 다시 유다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③지금이야말로 바빌로니아의 지배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절호의 기회였다.
유다의 여호야킴왕은 상황을 뒤집고 이집트의 느고왕에게 붙었다.
④그러나 이를 어쩌라! 여호야킴왕의 판단은 결국
유다 왕국이 바빌로니아로부터 침략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드디어 태세를 재정비한 느부갓네살왕은 반역을 이유로
즉시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점령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예루살렘의 군사와 목공과 철공 등 1만여 명이 체포되어
바빌로니아로 끌려가게 된다.
⑤이때 유다는 간신히 독립왕국의 체면을 지키는 것을 인정받게 되는데,
이는 느부갓네살왕의 특별한 처분에 의한 것이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그대로 적중한 셈이다.
⑥이때 유다 왕국은 여호야킴왕으로부터 시드키야왕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시기였다.
새롭게 왕이 된 시드키야는 이러한 굴욕을 참아내지 못하고 이집트와 동맹을 맺게 된다.
⑦이에 느부갓네살왕의 노여움이 폭발하여 바빌로니아 大군단이 예루살렘을 침공하게 된다.
양국간의 격렬한 공방은 약 2년간 계속되었고,
유다 군대는 모두 힘을 다 쏟아 부었지만,결국 예루살렘은 함락당하고 만다.
⑧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지고, 거리는 일순간에 비탄에 잠기게 되었다.
약탈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병사들은 체포되어 쇠사슬에 묶여
바빌로니아로 연행되어 갔다.
이때 연행되어진 병사가 1-2만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제2차 바빌론 유배’이다.
⑨열왕기에서 제2차 바빌론 유배에 대해 ‘이제 남아 있는 것은
포도를 만드는 자와 농부뿐이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⑩이제 남유다도 멸망하여 이스라엘은 완전히 역사의 뒷무대로 사라지고,
또한 번성하였던 바빌로니아 제국도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유, 당시 국제적 정세를 바탕으로
열왕기하 17장 당시의 국제정세와 북이스라엘의 상황
열왕기하 17장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다루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당시 고대근동의
복잡한 국제 정세와 정치적 상황이 깊이 얽혀 있습니다. 호세아 왕이 애굽에 도움을 요청하고 앗수르와 갈등을 빚게 된 사건은 단순한
정치적 실수가 아니라, 당대 강대국들 간의 힘의 균형과 북이스라엘 내부의 분열된 정치 세력 간의 갈등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당시 고대근동의 주요 강대국들, 북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 그리고 호세아가 취한 외교적 선택의 결과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고대근동의 국제 정세: 앗수르와 애굽의 패권 경쟁
기원전 8세기 후반은 앗수르 제국이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부상하던
시기였습니다. 디글랏빌레셀 3세(Tiglath-Pileser III, 재위 기원전 745-727년)의 군사적 개혁과 정복 전쟁으로
앗수르는 주변 국가들을 속국으로 만들고 조공을 통해 지배력을 확대했습니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과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은
앗수르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이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앗수르는 애굽과의 무역로와 군사적 요충지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애굽은 한때 중동 지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기원전 8세기에는
앗수르에 비해 국력이 쇠퇴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애굽은 리비아 출신 왕조인 제22왕조와 제23왕조로 나뉘어 있었고, 내부 분열로
인해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은 여전히 팔레스타인 지역의 국가들에게 하나의 대안적 세력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시리아 등 일부 국가들은 앗수르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굽과 동맹을 맺으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2. 북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 친앗수르파와 친애굽파의 갈등
북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전 왕들인 예후와 여로보암
2세 시기에 잠시 번영을 누리기도 했으나, 그 이후 왕권이 약화되고 연이은 왕위 찬탈과 반란으로 인해 혼란이 지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북이스라엘 내부에는 두 가지 주요 정치 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
친앗수르파:
이들은 앗수르의 군사적 우위를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며 평화를 유지하자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들은 앗수르와의 전쟁이 국가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을 우려하며, 외교적으로 앗수르에 굴복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친앗수르파는 정치적 안정을 통해 국내의 경제와 군사력을 보존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
친애굽파:
이들은 앗수르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굽과의 동맹을 추진했습니다. 이들은 애굽이 여전히
강대국으로서 앗수르에 대항할 능력이 있다고 믿었으며, 애굽과 협력하여 앗수르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은 당시 내부적으로 분열된 상황이었고, 북이스라엘에 실질적인 군사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호세아는 이러한 갈등 속에서 초기에는 친앗수르파의 입장을 따랐으나, 점차 친애굽파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앗수르에 조공을 끊고 애굽 왕 소(So)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외교적 결정을 내렸습니다(열왕기하
17:4). 그러나 애굽은 실질적인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북이스라엘은 고립된 상태에서 앗수르의 침략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3. 앗수르의 대응과 사마리아 포위전
앗수르는 호세아의 반란을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즉각적으로 대응했습니다. 앗수르 왕
살만에셀 5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사마리아를 포위했습니다. 이 포위전은 약 3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앗수르는 철저한 봉쇄 전략을
통해 사마리아의 외부 지원을 차단하고 내부를 고갈시켰습니다. 사마리아 주민들은 기근과 내부 혼란에 시달리며 점차 저항력을
잃어갔습니다.
사마리아가 함락된 후,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앗수르는
점령지의 민족들을 분산시키는 정책을 통해 반란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이스라엘 지역에 여러 이방 민족들을 이주시켰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4. 애굽의 소극적 대응
애굽은 호세아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당시 애굽이
앗수르와의 전면전을 회피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애굽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국가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으나, 앗수르와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며 자신들의 국익을 우선시했습니다. 이로 인해 호세아의 기대는 무너졌고, 이스라엘은 외교적 고립 상태에서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5.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유와 이후의 상황
열왕기 기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을 단순한 외교적 실패나 군사적 패배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명확하게 이스라엘의 멸망을 그들의 죄악과 하나님의 언약 파기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율법을 무시하고, 주변 이방 민족들의 우상 숭배 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열왕기하 17:7-12).
그들은 바알과 같은 이방 신들을 섬기고, 산당과 목상을 세우며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어 경고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선지자들의 음성을
무시하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17:13-14).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들의 죄악으로부터 돌이키기 위해 심판을
내리셨고, 결국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이를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함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기록하며,
이스라엘이 언약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해 멸망하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앗수르는 정복된 지역을 재편성하기 위해 이방 민족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땅에는 혼합된 민족과 종교가 형성되었고, 이는 나중에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갈등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또한,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남유다에게도 큰 경고가 되었습니다. 남유다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결과를 목격하였으나, 이후에도 우상 숭배와 불순종의 길을 계속 걷게 됩니다.
결론
열왕기하 17장에 나타난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단순히 한 국가의 멸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이 이루어진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고대근동의 국제정세 속에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전략적 결정을
내렸으나, 인간적인 방법에 의존한 선택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고를 주시고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시지만, 끝내 그분의 뜻을 무시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역대상 5장 요약
르우벤 자손의 이름과 그들이 살았던 지역,갓 자손의 지역과 그들의 후손과 그
이름,동쪽 지파의 군대 규모와 그들이 탈취한 재산, 므낫세 반지파의 영역과 자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잇습니다.
동쪽지파 사람들이
범죄함으로 앗수르에 의하여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여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6장 요약
레위의 자손과 대제사장 아론 자손의 이름, 레위의 세 아들 게르손,고핫,므리리의 자손과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임명한 찬송하는 직분을 맡은 자들의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론의 자손들과 그 자손들이 했던
일,아론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으로부터 받은 정착지와 목초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7장 요약
잇사갈,베냐민의 자손들과 그들의 군대 규모,납달리와 므낫세 자손들의 이름,에브라임 자손들의 이름과 그들이 살던 지역,아셀의 아들들과 그들의 군대 규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8장 요약
베냐민 자손들과 그들의 이름,기브온의 조상 여이엘과 그의 자손,사울왕의 가계와 그들의 이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5월 3일(토) 역대상 5-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장자의 명분(5:1)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찌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The sons of Reuben the firstborn of Israel (he was the firstborn, but when he defiled his father's marriage bed, his rights
as firstborn were given to the sons of Joseph son of Israel; so he
could not be listed in the genealogical record in accordance with his
birthright,
and though Judah was the strongest of his brothers and a ruler came from him, the rights of the firstborn belonged to Joseph)장자의 명분(the rights of the firstborn) 8구절(구약 7, 신약 1)
창세기 25:31, 32, 33, 34, 27:36. 역대하 5:1, 2. 히브리서 12:16
장자의 명분은 장자의 축복권을 말합니다(베코라)
장자의 명분(베코라. bekôwrâh) בְּכוֹרָה
스트롱번호 1062
1. 초태생. 2. 느 10:37. 3. 창 4:4
발음
[ bekôwrâh ]
구약 성경 / 7회 사용
관련 성경 / 첫 새끼(창 4:4), 장자의 명분(창 25:31, 27:36, 대상 5:1), 처음 난 것(신 12:17, 14:23, 느 10:36).
-
히브리서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프로토토키아(prōtŏtŏkia) πρωτοτόκια, ων, τά 스트롱번호 4415
1. 장자권. 2. 장자의 권리. 3. 히 12:16.
발음
[ prōtŏtŏkia ]
어원 / 4416에서 유래
πρωτότοκος, ον
스트롱번호 4416
1. 처음 난. 2. 마 1:25. 3. 롬 8:29
발음
[ prōtŏtŏkŏs ]
어원 / 4413과 5088의 대체어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맏(롬8:29, 히1:6), 먼저 나신(골1:15), 장자(히11:28, 12:23).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 영(로마서 8:1-28)
로마서 7장에서는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남편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율법이라는 옛 남편에서 벗어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남편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이라는 옛 남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 남편을 만나야
의롭다하심을 얻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얻는 것도 새 남편인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요, 예수를 믿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도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할 때 가능합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고, 역시 은혜로 거룩함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과정뿐 아니라 성화의 과정에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겁니다.
7장에 이어지는 오늘 본문 8장에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살펴봅니다.
I. 성령
먼저 본문에서 소개하는 성령님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 그리스도의 영 (9), 하나님의 영(9)
9절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 혹은 ‘하나님의 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하십니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꼭 집어 소개한 것은 초대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아닌 ‘다른 영’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1서 4장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1-3)라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서 ‘다른
예수’와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권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아닌 다른 영을 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영지주의라고 하는 이단이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다른 영, 적그리스도의 영을 전했습니다.
오늘날엔 알파코스, 신사도운동, 관상기도와 같은 영성 프로그램들을
통해 다른 영들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영적인 역사가 나타난다고 이를 다 믿지 말고 이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그리스도의 영” 또는 “하나님의 영”이라고 부른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주요한 사역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야 그리스도를 알 수 있고, “진리의 영”(요 16:13)을 받아야 진리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를 아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9)인 것입니다.
2. 양자의 영 (15)
15절부터는 성령을 “양자의 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15) 하십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아직도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면 ‘종의 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겁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항상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몰아갑니다.
“이것저것을 행하고 지키지 않으면 지옥 간다.”라고 끊임없이 위협하고 협박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만족시킬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는 항상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종노릇하는 ‘종의 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a. 하지만 율법주의라고 하는 ‘종의 영’이 아닌,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 (15)
“아바
아버지”라 할 때, “아바”는 “아빠”라는 뜻입니다.
어린 아이가 처음 말을 배우면서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아바”입니다.
율법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경건한 행위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친근히 부르며 또 그렇게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아빠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 말씀을 묵상하면 사랑하는 자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이 양자의 영을 받은 성도들을 이와 같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b. 양자의 영을 받으면,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의 자격을 얻게 됩니다.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하십니다.
‘후사’란
상속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기 위해서는 주님과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17)하십니다.
예수님도
친히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제자의 길은 고난의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18)하십니다.
양자의 영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된 후사”로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II. 성령의 역할
이제는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요, 양자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일들을 살펴봅니다.
1.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신다. (2) 하십니다.
지난
시간에도 살펴본 것처럼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십니다.
본문에서 율법을 ‘죄와 사망의 법’으로
묘사한 것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은 결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새 생명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겁니다.
2. 우리를 인도하신다. (14, 28) 하십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하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수님의 약속을 붙들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이 ‘성령 충만’(행 2:4)을 받았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령 충만(filled with
the Holy Spirit)이 무엇일까요 ? 어떤 신학자는 ‘성령 충만’을 ‘성령에 붙들리는 삶’으로 표현합니다. 성령에 붙들려
성령의 인도하시는 데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이라는 겁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한 뒤, 스데반 집사는 성령에 붙들려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빌립 집사는 성령에
붙들려 광야로 나갔다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행 8:26,27) 사도 바울도 본래는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할 계획을 세웠지만, 성령께서 막으시자 드로아 지방으로 내려가 기도하다가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행
16:10) 유럽으로 발걸음을 돌려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고린도, 에베소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14)이라 하십니다. 내 욕심과 생각이 아니라, 날마다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는 자가 곧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과연 어떤 길로 인도하시는 것일까요? 28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하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하심은 과정 속에는 어려움이
있어도 그 결과를 아름답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사서 애굽 땅으로 팔려가 억울한 종살이 옥살이를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사건들을 통해 요셉은 바로 왕 앞에 설 수 있게 되었고, 바로왕의 꿈을 해석해 줌으로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요셉은 훗날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한 형제들을 만나 그가 꾸었던 꿈처럼 형제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요셉의 실패와 고난도 합력하여 하나님의 더 큰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삶에도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자들은 언제나 그 결과를 좋게 하시는 즉,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3.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26) 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소개한 성령님의 또 다른 이름 ‘보혜사’(파라클레토스, 요 15:26)는 “옆에 서서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Counselor(NIV), Comforter(KJV) 혹은 Helper(NASB)라고 번역해놓았습니다.
상담자, 위로자,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온전한 믿음 생활을 할 수 없음을 아셨기에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하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믿음을 지키고 사명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데,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신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하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고, 또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생각과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27) 기도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모든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으로 구하는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을 근심케 만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 응답 받는 바른 기도를 드리려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III. 결론(結論)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요 양자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시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이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날마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고” (13), “육신의 생각이 아니라 영의 생각을 좇으며”(6) 육체의 소욕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3,14절)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영(로마서 8:9)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5)
예배당에 다닌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학습받고 세례받았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집사 되고 장로 되고 신학하고 목사 되었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찾는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란 말이다.
그럼 누가 그리스도인일까?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은 어떤 것인가?
1.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초월하신 성부께서 육체를
입으신 제한 있는 그리스도로 나타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신
후에 다시 부활하사 승천하시고 성령으로 오시어 "내가 세상
끝날까지 같이 하겠다"고 하시고, 너희는 내 안에 있으라 나도
너희 안에 있으리란 약속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영이시다.
하나님은 예수를 세우사 우리의 지혜와 의(義)와 성결과 구속이
되시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성결할 수 있는가? 성결의 주님께서
나의 중심에 오시어 나의 죄악을 정결케 하시고 그의 성결을 주시는
것이다.
그의 보혈로 정케 하시고 말씀으로 깨끗케 하시고 불로
사르시는 것이다.
또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연단 시키어 정화시킨다(단 12:10 ; 히
12:10)
나의 전무를 그에게 바치면 그가 다 해주시는 것이다.
내가 애쓰는 것 주께 맡기고 감정을 억제하고 말씀에 서면
불완전한 구원 완전해지고 내가 붙잡았던 것 그가 붙들어 주실
것이다.
2. 유화의 영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
너의 마음이 평안히 쉼을 얻으리라.
예수가 있는 심령은 온유하고
겸손하다.
솜과 같이 부드럽고 고기같이 부드럽다.
어떤 사람의
마음은 돌과 같아서 남과 충돌이 잘된다.
돌같은 마음은 차디찬 마음, 감각이 없는 마음, 움직임이 없는
마음, 비쭉비쭉 나와서 남을 찌르기를 잘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차지한다는 말은
논이나 몇 마지기 얻고 밭이나 몇 천 평 얻는다는 말인가? 물론 주와
같이 죽으면 주와 같이 살고, 주와 같이 욕을 받으면 주와 같이
영광을 받을 것이요, 주와 같이 참으면 주와 같이 왕 노릇하리라고
하셨다.
주께서 천년 왕국에 만왕의 왕이 되시사 이 세상을 다스리실 때에
우리는 다섯 고을 차지하고 혹은 열 고을 차지하는 분봉왕으로 땅을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람의
심지(心地)를 얻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제일 귀한 것이다. 나라의
영토는 칼과 창으로 얻으려니와 사람의 마음은 마음으로 얻는다고
어떤 성도가 말하였다.
3. 사죄의 영이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은 우리 죄를
속하러 오시어 피를 쏟아 주시고, 사죄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사죄의 법을 가르쳐 주시고, 사죄의 본을 보이시고 사죄의 기도를
몸소 하셨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는 간구를 가르치셨다.
베드로가 선생님,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할까요, 한 일곱번 하리까 하니
예수께서는 아니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다.
그러면
"7×7=49", 490번 하란 말인가?
아니 무조건 용서하란 말이다.
어떤 사람이 빚을 만 냥 지고 갚을 도리 없어 주인에게 탕감 받고
나가다가 자기에게 백 냥 빚진 사람을 보고 빚을 갚으라고 재촉하니,
빚진 자는 간절히 빌며 좀 참아 달라고 하였으나 "이 자식은
밤낮 조금만 참으라고 한다"며 가두고 빚 갚으라고 야단한다.
그
말을 그 전에 탕감하여 준 주인이 듣고 그 잔인한 자를 잡아다가
"나는 네 빚을 많이 탕감하였는데 너는 그 적은 빚을 용서하지
않느냐?
너도 내 빚을 다 갚으라"고 처음 탕감하였던 것을 도로
물렸단다. 무슨 소리인가?
우리들은 주님 앞에 만 냥 아니 억억만 냥 탕감 받은 자들인데,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백 냥은 고사하고 오십냥 아니 열 냥 아니
십 전도 받아먹으려고 하는 것이다.
깔다귀는 걸러 먹고 약대는 통으로 삼켜, 남의 죄는 깔다귀같은
죄라도 요리 거르고 저리 걸러서 정죄하고 제 죄는 약대같이 큰 죄,
들보 같은 죄라도 꿀떡꿀떡 다 집어삼키는 무자비한 자를
책망하셨다.
내가 주님 앞에 죄사함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내가 남의 죄를
얼마나 사하느냐 못 사하느냐가 표적이다. 죄 많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음행하다 잡힌 여자를 돌로 때려죽이려고 달려들었지만
죄 없으신 예수는 음행한 여자를 너그러이 용서하고 살려 주신
것이다. 죄 많은 사람이 도리어 남의 죄를 정죄하기 잘하며 죄 없는
사람은 남을 잘 용서하는 것이다.
4. 희생의 영이다
주님은 밀알이 땅에 들어가 썩어져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자신의
희생을 선고하시고 실천하셨다(요 12:12).
주님은 33세에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탄생 이후 최후까지 녹아지고 사라져 희생제물이
되셨다.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도 항상 희생의 정신을 가지고 생활해
나가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귀한 일을 많이 한다.
맛없는 것
맛있게 하고 썩을 것을 썩지 않게 한다.
그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도 칭찬 한 번도 듣지 못한다.
소금을 장에 넣으면 장 달다고
하지 소금 달다는 사람 한 사람도 없고, 소금을 김치국이나 곰국에
넣으면 김치국이나 곰국 맛 좋다고 하지 소금 맛 좋다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소금은 실컷 좋은 일을 해 놓고도 칭찬은 한 번도 못 받는 것이다.
그래도 불평 불만 없이 녹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이야 어디 그런가?
무슨 일할 적에 누가 칭찬을 하고 잘한다고 추켜 주면 아주
기분이 좋아서 신이 나 떠들지만 주가 알아주지 않으면 이것 괜히
동무 몰래 양식 내기지 누가 아나 하며 섭섭해 하고 불평, 불만,
낙망, 실망자가 많은 것이다.
잘 녹아져라.
누가 알아주든지 몰라주든지 그리스도만을 위해
녹아지자.
양초는 자체가 녹아져서 그 빛을 잘 발휘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죽으면 예수 살고 내가 살면 예수 죽으시고, 내가
높아지면 예수 낮아지시고, 내가 나타나면 예수께서 숨으시고, 내가
숨을 때에 예수 나타나시는 것이다.
녹아져라.
부스러져라.
5. 복종하는 영이다
그리스도의 영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성지에 절대 복종하는 영이시다(마 26:42).
무슨 일에든지 어느 때든지 어디서든지 아버지 뜻대로가 그의
일생 생활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은 내 뜻대로 마옵소서 하지
않고 아버지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하옵소서 하다가 망한다.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들어가는 것이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면 사막이 변하여 낙원이 되고, 아버지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하옵소서 하면 낙원이 변하여 사막이
된다고 어느 성도는 말하였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방법은 네 가지로
판별할 수 있다.
첫째, 성경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아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묵시하신 바로 아버지의 모든 사정과 뜻을 거기 발표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애독하고 상고하여 그 말씀에 하라는 것은
절대 순종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뼈를 갈고 피를 쏟아서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또한 나의 지도자에게 문의할 것이다.
거룩하고 신령한
주와 동행하는 지도자에게 순종할 것이다. 교회의 당회와 노회
총회에 순종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탈선된 지도는 받아서는
안되며 서로 겸양과 사랑으로 주의 뜻을 알아볼 것이다.
셋째, 돌아가는 섭리에 순종할 것이다.
모든 섭리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다. 요셉은 형님들에게 팔리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고 감옥에 들어갔으나 섭리에 순종하여 욕됨과
영광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이십 년만에 만난 형님들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판 것을 한탄하지 마소서.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보낸 것이 나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다"고
그의 섭리를 믿고 감사하고 증거하였다.
넷째, 사심 없는 맑은 양심으로 기도해 보아 성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모든 결정은 양심만이 해야 한다고 하였다.
양심은 의와 불의, 선과 약을 분별하며 할 일과 안 할 일을 지시하는
것이다.
모든 실패는 양심에 순종하지 않고 자아 욕심으로 동하고
정함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불행을 초래하고 과거에 주님
가슴에 창칼을 박은 것도 원통한데 주님 가슴에 잔못을 많이 박아
드리는 것이다.
결말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저희 안에 들어가 저로 더불어 먹고 저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산 그리스도를 우리 안방에 모시자. 주님을
곁방살이 시키지 말고 안방 중심에 모시어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여 주와 나와 혼연 일체의 생활을 보낼지어다.
쇠를 불에 넣으면 쇠는 쇠인데 불이다.
불은 불인데 쇠이다.
그의
개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 성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았다는 증거가 분명한 자는
행복이로다.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
나 위하여 죽음과 나 위하여 사셨네
예수님은 내 생명 또한 나의 기쁨
예수 없이 내 생명 잠시라도 못사네
예수님 내 주여 내 중심에 오셔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
나의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시는 예수께서 친히 나의 모든 것이
되시네.
따라서 명분을 잃으면 축복도 잃는다.
명분을 잃으면 축복도 잃어버리게 된다.
창세기 25: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죽게 된 현실과 장자의 명분 사이에서 현실적인 필요를 채우는 에서의 모습이 이해가 됩니다.
명분보다는 실리니까요!
명분이라는 단어의 뜻은 '이름이나 신분에 따라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입니다.
하지만 사실 원어에는 이 '명분'이라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다만 '장자권' 이라고만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에서는 죽게 되는 것보다는 장자권을 포기함으로 팥죽 한 그릇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게 가벼이 여기고 팔아버린 명분 때문에 마침내는 장자의 축복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일단 이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야 겠습니다.
에서가 당시에 그 팥죽 한그릇이 아니면 정말 죽게 되었던 것일까요?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던 것일까요?
우리가 흔히 '배고파 죽겠다' 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진짜 죽을만큼 배고파 본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정도가 되려면 한 주일 이상은 굶어봐야 겪게 될 일이니까요.
에서
역시도 마찬가지 였을 것입니다. 사냥을 하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녀야했고 육신적으로 많이 지치고 피곤했기에 많이 허기가 진 것이
사실이었겠지만 그렇다고 죽을만큼 배고프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조금만 기다렸으면 그의 어머니가 맛있고 풍성한 저녁을 준비해 왔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조금만 참고 기다렸다면 그는 그의 배고픔도 채웠을 것이며 장자의 명분을 팔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 만으로도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얼마나 가볍고 하찮게 여겼는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장자의 명분은 팥죽 한그릇에 넘겨도 될만큼 그렇게 가볍고 하찮은 것이었을까요?
장자의 명분에는 재산의 2배를 물려받을 권리, 제사장의 권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메시야의 조상이 될 거룩한 권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만큼 장자의 명분은 영예로운 것이었으며 그렇기에 그만큼의 책임과 의무도 컸습니다.
하지만 이 장자의 명분이 가진 단점?이 있었는데 (적어도 에서에게 있어서) 이 장자의 명분은 지금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일에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이 명분을 기꺼이 팥죽 한 그릇과 바꾸어 버리죠.
그러면 이제 오늘날로 한번 넘어와 봅시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에서가 살던 당시의 장자의 명분은 없지만 우리에게도 비슷한 명분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름 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속에 재물을 두배 받을 축복 같은건 없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권리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더불어 이 또한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 살다보면 그리스도인 이라는 명분 때문에 손해도 봐야하고 오해도 받아야 할 때가 종종 있음을 보게 됩니다.
당장의 유익과 편리함에 그리스도인 이라는 명분은 정말 불편스럽다고 느낄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명분을 지켜야 그리스도인이 받을 축복도 누릴 수 있습니다.
눈 앞의 이익 때문에 명분을 거스리면 축복도 놓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명분이 지금 당장의 이익이 되지 못할 때가 많죠?
지금 눈앞의 문제가 신앙 때문에 풀리지 않아 고민될 때 있죠?
당장의 이익과 편리가 신앙 때문에 가로막혀 힘들죠?
지금 그 문제 해결 안되면 끝날거 같죠?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구름 저편 밝은 태양이 빛나고 있듯이 고난 저편 그분의 약속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어려운 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의로우신 오른팔이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 백성이라는 명분을 귀하게 여기고 백성답게 삽시다.
감사하며 사랑하며 삽시다.
본절에서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요단 동편에 위치한 지파들(르우벳, 갓, 므낫세 반 지파)에 대한 기록이다.
이들 지파들은 함께 기업을 받았으며(수 13:8-12) 함께 단을 쌓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수 22:10, 27, 34).
또한 이들은 지형적 특성상 이방인들과 싸움에 있어서도 함께 연합하여 싸웠다(민 32:25-27;수 4:12, 13).
르우벤은...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
야곱의 장자(長子) 르우벤(Re-uben)이 야곱의 첩 빌하와 근친상간을 범한 것을 가리키는 구절이다(창 35: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그는 이 죄로 말미암아 장자권적 주도권은 유다에게 넘겨주고 말았으며(2절; 창 49:8), 두 몫을 차지하는 장자의 상속권(신 21:17)은 요셉에게 넘겨주고 말았다(창 49:3, 4).
창세기 49: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신명기 21:17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창세기 49:3-4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장자의 명분이...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
요셉의 장자권은 그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통해 성취되었다.
즉, 요셉은 두 아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내에서 두 기업(基業)을 획득하였다(창 48:22).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
본 족보가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었다면 요셉의 후손들이 먼저 소개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본 족보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저자의 구속사적(救贖史的) 시각에 따라 기록된 것이어서 요셉의 후손들이 나중에 기록되어 있다(23, 24절;7:14-29).
역대상 5: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
여기서 '뛰어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가바르'는 '우세하다', '힘이 강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다른 지파에 비해 숫자적으로 월등한 유다 지파의 세력을 가리키는 말이다(민 1:27).
유다 지파는 이와 같은 월등한 세력으로 인해 가나안 정복 당시 이스라엘 군대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삿 1:1-21).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
이는 유다 지파 출신의 다윗 왕을 가리키는 말이다(삼하 5:1-3).
다윗은 실로 하나님께서 택정 하셨던 이스라엘의 목자이자 주권자로서 장차 유다 지파의 계통을 좇아 탄생할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였다(28:4).
이와 관련해서는 야곱이 임종 시(臨終時)에 유다 자손들에게 베풀었던 축복을 살펴보라.
장자의 명분(장자 상속권)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맏아들이 누리는 권리를 ‘장자의 명분’ 또는 ‘장자 상속권’이라 부른다.
특별한 권리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장자는 형제들 중에서 특별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맏아들은 평소의 식탁에서도 아버지를 이어 높은 자리에 앉았고 일상 생활에서도 다른 형제들에 비해 주도적인 위치를 누렸다.
아버지가 죽을 때에는 장자에게 특별한 축복이 주어졌고 유산상속도 다른 형제들 보다 두 배 많은 몫을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를 이어 가문의 대표가 되며 왕족의 경우 당연히 왕위 계승권을 가졌다.
당시의 장자 상속권은 성경에 기록된 족장들뿐만 아니라 바빌론, 앗수르에서도 정착된 제도였다.
이미 발굴된 고대 바빌론, 앗수르의 기록물들에서도 이런 사실이 확인된다.
특별한 책임
장자에게 주어진 책임도 크다. 부친이 사망할 경우 어머니는 물론이고 다른 형제나 결혼하지 않은 여자 형제들도 부양 할 책임이 있었다.
장자권의 이동
장자의 권리는 심각한 죄를 저지르면 박탈될 수 있었다.
성경에 기록된 사례로는 르우벤이 있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였으나 아비의 침상을 더럽힌 죄로 장자의 명분을 누리지 못했다.
장자의 권리는 매매를 통해서 다른 형제에게 넘겨질 수 있었는데 흔한 일은 아니었고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있을 수는
있는 일이지만 손가락질 받는 행위였다(에서의 경우).
첩이나 종의 자식들에게는 먼저 태어났어도 장자의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이스마엘의 경우).
- 출애굽 이후 주어진 율법에서는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초태생, 곧 장자는 하나님의 소유였다.
에서의 장자권과 가나안
에서는 이삭의 맏아들로서 장자의 명분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장자 상속권을 ‘가벼이’ 여겼다.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은 당장의
배고픔 앞의 죽 한그릇 보다 못한 것이었다. 장자의 명분을 팔라는 야곱의 제안을 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삭의 하나님”이 에서의 하나님이 아닌 야곱의 하나님이 되는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에서가 물려 받을 장자의 명분에서 가장 크고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물려 받는 것이었다. 후손에 대한 약속, 그 후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은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게서 이삭의 장자권을 가진 아들에게로 이어질 것이었다. 에서는
억울할지 모르지만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구입한 것은 절차에 있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은 속여서
받았지만 훗날 장자의 명분을 소유한 아들로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고 에서는 가나안을 떠나 세일산에 정착한다.
요셉의 장자 명분(역대상 5:1-2)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침상에 올라가게 됨으로 저주를
받아 장자의 명분을 빼앗겼습니다.
르우벤의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 넘어갔습니다.
르우벤은 장자의 명분을 빼앗겼기 때문에 두 배의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신 요셉은 두 아들이 야곱의 양자로 들어가게 됨으로 가나안 땅을 두 배로 받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두
배의 복을 받는 장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르우벤처럼 죄를 지어서도 안 됩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디에서 나왔는지에 관한 정체성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족보를 통해서 자신들의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나라가 이방 나라에 의하여 파괴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정체성은 사라졌습니다.
이방 나라에서 살다 보니 자신들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조차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에 처음에 한 작업이 족보를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제사장들도 이방 나라로 끌려갔기 때문에 제사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면서 타락해져 갔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수축하고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제사장의 맥은 끊어졌습니다.
자격도 없는 자가 제사장의 사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족보를 만들어 정통성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만약에 족보의 정통성이 없으면 그 사람은 레위지파라 할지라도 제사장의 사역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자신의 정통성을 위해서라도 족보가 중요합니다.
역대 상에 기록하고 있는 족보는 유대인의 각 지파의 정통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족보를 정리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르우벤 지파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족보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족보에 올라갔다는 것은 생명 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을 의미합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빼앗기게 됩니다.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신 은혜를 거부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면 하나님은 가차 없이 장자의 명분을 빼앗아 구원의 자리에서 탈락시켜버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내가 받은 구원의 장자 명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절 우베네 레우벤 베코르 이스라엘 키 후 하베코르 우베할렐로 예추에 아비브 니트나 베코라토 리브네 요세프 벤 이스라엘 베로 레히트야헤스 라베코라
역대상 5:1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의 아들 중에 르우벤은 장자의 명분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야곱의 침상을 더럽혔기 때문에 장자의 명분이 야곱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르우벤은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했습니다.
그럼 르우벤이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한 사건을 말합니다.
22절 바예히 비쉐콘 이스라엘 바아레츠 하히 바옐레크 레우벤 바이쉐카브 에트 빌하 필레게쉬 아비브 바이쉐마 이스라엘 바이헤이우 베네 야아코브 쉐넴 아사르
창세기 35: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이스라엘이 베들레헴으로 들어오다가 라헬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을 때에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에게 들어가서 동침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이 알게 되었습니다. 르우벤이 왜 라헬이 죽자마자 첩 빌하에게 들어가서 동침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르우벤이 가서’라는 단어는 πορευω(포류오 4198 VIAPS3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단수, 3인칭) 나아가다, 행하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70인 역으로 보면 르우벤이 왜 라헬이 죽자마자 빌하에게 들어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르우벤은 항상 아버지에게 불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 레아는 사랑하지 않고 라헬만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을 르우벤은 어려서부터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라헬이 죽자마자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기 위해서 빌하에게 들어갔습니다.
아버지에게 수치심을 더해주기 위해서입니다.
현재 아버지는 사랑했던 라헬이 죽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라헬의 첩 빌하에게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빌하에게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던 르우벤의 조치였습니다.
르우벤은 이미 이런 계획을 모두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순간적인 생각으로 행동에 옮긴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기회가 왔을 때 행동에 옮긴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도 아버지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굳건히 먹고 있었으며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수동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기회가 왔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버지에게 복수를 하려고 빌하에게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자들이 누구입니까?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려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구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결국 자신의 육적인 장자의 힘을 믿고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수치를 주는 자들입니다.
‘동침하매’라는 단어는 κοιμαω(코이마오 2837 VIAPS3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단수, 3인칭) 잠자다, 죽다, 라는 뜻입니다.
70인 역에 르우벤이 빌하와 동침했다는 것은 더 이상 아버지와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더럽혀 죽였다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아버지의 것이 되지 못하도록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고 모욕을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르우벤이 하나님 앞에 괴씸 죄에 걸린 것이 무엇입니까?
르우벤은 이미 아버지에게 복수하려고 준비를 철저히 했기 때문입니다.
과거 시제를 사용한 것은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여 아버지에게 수치를 주려고 준비했다는 의미입니다.
수동태를 사용한 것은 자신에게 기회가 왔기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빌하에게 들어가서 철저하게 죽이고 파괴시킨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율법주의자들이 자신의 장자 명분을 앞세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명예와, 재물과, 권력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께 도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도전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수치를 주게 됩니다.
‘더럽혔으므로’라는 단어는 (할랄 2490 P.VPNG.MZS 전치사. 동사, 피엘(강조능동), 부정사연계형. 남성, 3인칭, 단수) 꿰뚫다, 꿰찌르다, 더럽히다, 라는 뜻입니다.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의 침상을 완전하게 더럽혔습니다. 르우벤이 빌하와 동침함으로 야곱의 마음을 꿰뚫어 버리고 관통하여 야곱은 믿었던 르우벤으로부터 꿰찔림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에게 보내셨는데 믿었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꿰찔림을 받으셨습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침상을 완전하게 더럽혀서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피엘, 강조능동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빌하에게 완전하게 들어가 다시는 아버지와 동침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들은 르우벤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자신이 가진 육적인 권세가 최고라고 장자의 명분을 함부로 사용하여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수치 주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르우벤처럼 자신의 힘이 많아지면 하나님께 도전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항상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장자의 명분’이라는 단어는 (베코라 1062) 처음 낳은 것, 장자권, 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장자의 명분을 가진 사람은 두 배의 몫을 받게 됩니다. 르우벤은 장자의 권세가 있기 때문에 두 배의 몫을 아버지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권위를 손상시켰기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박탈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장자의 명분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로 구원을 얻은 것을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열심히 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하면 르우벤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자는 야곱의 아들이지만 장자의 명분을 박탈당했습니다. 내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구원을 얻었다고 하지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르우벤이 계속해서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려고 했던 것처럼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율법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2절 키 예후다 가바르 베에하이브 우레나기드 미메누 베하베코라 레요세프
대상 5: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르우벤이 장자이지만 이 장자의 명분이 누구에게로 넘어갔습니까? 영적 장자의 명분은 유다에게 넘어갔고 육적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넘어갔습니다. 유다의 뿌리에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유다는 영적 장자의 명분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때에 자신의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두 몫을 받는 복을 받았습니다. 장자는 구약에서 두 배의 몫을 유산으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선택하셔서 두 배의 몫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주권자가’라는 단어는 (나기드 5057) 통치자, 지도자, 우두머리, 라는 뜻이며 נגד(나가드 5046) 말하다, 알리다, 선언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유다 지파에서 나오는 주권자가 누구입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구속하시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이루었다.라고 선택된 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인생의 통치자이며, 영적인 지도자이며,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시는 분입니다.
10절 로 야수르 셰베트 미후다 우메호케크 미베인 라겔라이브 아드 키 야보 쉴로 베로 이케하트 암밈
창 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를 통해서 나올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통치자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않습니다. 실로가 오시면 모든 백성이 그에게 복종하게 됩니다. 실로는 바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장자의 명분을 르우벤에게 빼앗아 유다에게 주었습니다. 유다 지파는 영적인 축복을 받아서 다윗 왕이 탄생되었고 다윗왕의 후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유다는 영적 장자의 명분을 받은 축복의 사람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 선택받은 영적 장자의 명분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르우벤처럼 자신이 가진 것을 기쁨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게 되면 하나님은 빼앗아 버립니다. 결국 르우벤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율법주의자들의 표상입니다.
육적 장자의 명분은 요셉이 받았습니다. 자신의 두 아들을 통해서 가나안 땅을 두 몫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 요셉은 육적인 장자의 명분을 받아 어떻게 쓰임 받게 됩니까? 애굽으로 가서 가족들이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됩니다. 요셉이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도 절대 탄생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요셉은 애굽에 가서 총리대신이 되어 영적인 장자인 유다가 살 수 있는 길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요셉이 없으면 영적인 장자의 명분을 받은 유다도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 신약의 요셉은 육적 장자의 명분을 받아 어떻게 쓰임을 받게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준비하게 만듭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사역을 할 수 없었습니다.
21절 호 데 에게르데이스 파렐라벤 토 파이디온 카이 텐 메테라 아우투 카이 엘덴 에이스 겐 이스라엘
마 2: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헤롯이 예수님의 목숨을 노렸지만 요셉이 애굽에 내려가서 생명을 보존하고 헤롯이 죽은 후에 나사렛에 와서 살게 됩니다. 요셉은 예수님이 공생애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사생애의 기간을 함께 했던 육적 장자였습니다. 또 한 명의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준비하는 육적 장자입니다.
59절 카이 라본 토 소마 호 이오세프 에네튈릭센 아우토 신도니 카다라
마 27: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고 자신이 들어갈 무덤에 장례를 치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육적 장자의 명분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는 길을 예비한 사람들입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여 침상을 더럽히고 수치를 주어 장자의 명분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유다와 요셉은 장자의 명분을 받아 하나님께 쓰임 받고 축복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적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주님께 충성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육적 장자의 명분을 받아 복을 받으면 주님의 영광을 높이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물질을 쓰고 교회에 충성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영적인 장자는 구원을 받고 육적인 장자는 이 땅에서 축복을 받아 누리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맏아들이 누리는 권리를 ‘장자의 명분’ 또는 ‘장자 상속권’이라 부른다.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장자는 형제들 중에서 특별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맏아들은 평소의 식탁에서도 아버지를 이어 높은 자리에 앉았고
일상 생활에서도 다른 형제들에 비해 주도적인 위치를 누렸다.
아버지가 죽을 때에는 장자에게 특별한 축복이 주어졌고 유산상속도
다른 형제들 보다 두 배 많은 몫을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를 이어 가문의 대표가 되며 왕족의 경우 당연히 왕위 계승권을 가졌다.
그리스도인의 권리포기
그리스도인의 권리포기 : 이 땅에서 하늘의 것을 성취하는 방법
'권리포기'란
단념하는 것이 아니라, 더 귀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취하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포기한 배우자, 자녀, 재산,
경력, 생명 중에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의 신을 벗기기 원하시는 때문입니다.
얻게 되는 건
오히려 우리입니다.
포기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것이 전부 우리 것이 됩니다.
포기할 때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이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포기하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 본문중에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처음에는 어렵다 신을 벗을 때 다 잃어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을 벗게 되면 그 때부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나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잇다는 것을 기억하자.
권리 포기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기본이며,
그분의 제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입니다.
예수님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고 하셨습니다.
또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 하리라"(눅 14:33)고 하셨습니다.
'부모,
처자, 형제, 자매, 자기 목숨"은 우리가 섬기며 돌아보아야 할 권리이고 책임 입니다.
우리에게는 소유하며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이 모든 것을 미워하거나 버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사랑하고 소유하며
주의 제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베드로와 안드레는 즉시 어부로서의 생명인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또한 야고보와 요한도 배와 삯군들과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들을 포기 했습니다.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권리를 양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내가 가진, 또는 나에게 주어진 권리를 예수님께 드려서 그분이 나의 권리를 가지시도록 하는 것 입니다.
김원호 장로님을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권리 포기라는 주제의 책을 쓰기에 참으로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들을 계속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철저하게 순종하려고 늘 애쓰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그는 권리를 포기할 때 예수님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이 되시는 것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삶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김원호 장로님과 함께 일하시기가 아주 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권리를 드린 그의 삶을 통해, 포기할 때 주어지는 영광과 특권을
나타내셨습니다.
김원호 장로님 부부의 경건한 삶에서 겸손, 소박함, 환경을 초월하는 마음의 평안, 예수님과 동행하는 영광,
하나님의 뜻을 행함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고받게 되는 많은 질문이 있습니다. '갖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하고 쓰십니까?' '이 책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으십니까?' 그리고 이에 대한 다양한 대답들을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혹시 '무엇을 포기 하셨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생소하게 들리는 이 질문을 받는 다면 당신은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세대의 문화는 안전과 편안함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그래서 스트레스와 고생과 위험은 가능한 멀리해야 하는 '나쁜'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와 정확히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와 권리)를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라는(쉬운 말로, 와서 죽으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구원과 은혜로 감격한 때라도 멈칫하게 하는 '무서운'말씀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자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안전과 편안함을 지향하는 이세대의 정신을 받아들였습니다.
생명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기꺼이 소유를 팔아 소외된 사람들을 돕던 교회가, 지금은 안전하고 근사한 일만을 찾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 낯설고 어려운 곳으로 가는 것은 특별한 사람과 단체와 교회들만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성경의 관점은 명확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2천 년 전에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기꺼이 채우기 원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여전히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세상과 반대되는 우선순위와 가치를 품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속한 예수 전도단은, DTS(Discipleship Training School) 훈련에서 사역에 이르기까지 '권리 포기'를
핵심 가치 중 하나로 삼고 있습니다. 저는 독자와 사역의 입장에서 이 귀한 가르침이 문서로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게 된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커다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권리 포기의 삶'을 실제로 살고 계신 김원호 장로님의 손으로 출간되는 책이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풍성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어떻습니까?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기쁘게 고난에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
책은 우리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을 바꾸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권리를 하나도 남김없이 그리스도의 발 앞에 놓게 할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그랬듯이 발에서 신을 벗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권리를 포기한 바로 그 자리에서 이전에 보지 못한
하나님의 역사를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귀한 특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갖게 되는 의문들을 1985년 봄부터 계속해서 예수전도단의 각종 훈련과 말씀 공부를 하며 이러한 의문이 풀려가지
시작했고, 차츰 삶의 모습, 사고방식, 인격, 성품이 변해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을 따르기로 선택하는 대신, 그분의 진리 앞에서도 여전히 육신으로부터 나오는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데
있다.
그래서 나는 진정한 믿음의 삶에 대해 다시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세속적이고 육신적이고 개인적인 모든 권리를 포기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뜻앞에 순복하기로 선택하며 나 자신을 투자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순복했는지,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어떠한 일을 이루셨는지, 그들의 권리 포기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 등의 내용을 나누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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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가 포기한 배우자, 자녀, 재산, 경력, 생명 중에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의 신을 벗기기
원하시는 때문입니다.
얻게 되는 건 오히려 우리입니다.
포기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것이 전부 우리 것이 됩니다.
포기할
때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이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포기하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분의 음성
앞에서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말씀하시더라도 그 말씀하신 하나님이 행하실
것임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의 권리포기 - 김원호 장로
글을 시작하며
이 땅에서 하늘의 것을 성취하는 방법 - 당신이 포기할 때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권리포기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기본이며, 그분의 제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권리를 양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내가 가진, 또는 나에게 주어진 권리를 예수님께 드려서 그분이 나의 권리를 가지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리를 드린 삶을 살 때에, 포기할 때 주어지는 영광과 특권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2천 년 전에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기꺼이 채우기 원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여전히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세상과 반대되는 우선순위와 가치를 품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권리를 포기한 바로 그 자리에서 이전에 보지 못한 하나님의 역사를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귀한 특권입니다.
1. 권리포기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십자가와 믿음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 말씀에 의하면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것이다. 그렇게 죽은 자에게 무슨 권리가 있는가?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말씀하신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나에게는 아무 권리도 없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 사신 것이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시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의 권리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육체를 입고 오늘도 살아가는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음성을 듣고, 따르고, 하나님을 신뢰하라
창조주 하나님이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지금도 우주를 다스리심을 믿는 것이 믿음에 필요한 전제조건이다. 그 다음 믿음에는 필요한 세 가지 조건이 있다. 먼저 믿음은 들음에서부터 오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서 믿음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믿음의 첫 번째 조건은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이렇게 들려주신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고, 그래서 믿음의 두 번째 조건은 들은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 조건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말씀하셨더라도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라는 온전한 신뢰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들은 대로 따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권리포기이다. 이 결정은 내 의견, 내 주장, 내 욕심, 내 계획, 내 야망대로 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순종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자기 스스로 그냥 포기하는 것은 진정한 포기가 아니다. 자신의 생각과 결정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 없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들은 후에는 즉시 따르며, 말씀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의 삶이며 이것이 권리포기의 삶이다.
2. 말씀 앞에서 신을 벗으라
신을 벗으면 ‘당신에게 나의 모든 권리를 양도합니다. 나의 소유권을 포기합니다’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 이스라엘 전통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네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시면, 이는 ‘네 권리를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부르심에 대한 모세의 반응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오기 전에 포기한 권리는 ‘바로 공주의 아들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권력과 명예, 정욕과 재물 등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것들을 이미 포기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모세에게 무슨 권리가 남아 있다고,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그를 부르시고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을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자신의 능력이나 주위 환경을 바라보면서 계산하지 말고, 그대로 따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데 모세는 비록 음성을 들었어도 ‘따르는’것부터 걸려 넘어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몇 번이나 말씀하셔도 계속 핑계를 대며 바로에게 못 간다고 대답하였던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언약까지도 부인하고 싶은 반항의 마음이 모세의 내면에 있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모세의 힘으로 하라고 하셨는가? 신을 벗으라고 하는 말은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 호렙산에서 떨기나무 불을 놓고 모세를 불러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다.
사명을 이루기 위한 여호수아의 선택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말한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왜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했을까?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여리고 성의 공략에 대하여 큰 부담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여호수아는 이제 이스라엘의 군 사령관으로서, 작전 계획을 세우고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한 전투를 지휘하여 전쟁에서 승리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신을 벗고 맨발로 전쟁을 치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모든 권리를 포기하라는 말씀이다. 아무 권리도 없으므로 작전 계획을 세우고 전투를 지휘할 권리도, 전쟁 승패에 대한 책임을 질 권리도 없다. 모든 권리를 내려놓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데 있어서 치밀한 작전 계획이나 탁월한 전투 지휘 능력이 아니고 오직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온전히 따르는 것을 원하셨다.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할 수 없어도 말씀하신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서 있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작전 명령을 듣고 그대로 따랐을 때 여리고 성은 무너졌다.
여리고 성을 보고 자신을 보면, 전쟁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전쟁을 할 수 있다. 강하고 담대해질 수 있다. 하나님은 이것 때문에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한 것이다.
누가 여호와의 종인가?
모세와 여호수아는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삶을 살았고,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이루는 영적 지도자로 영원히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도 단 한번씩, 하나님 말씀 앞에 신을 벗지 않고 자기 권리를 행사하는 실수를 범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말하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화가 나서 바위를 두 번이나 지팡이로 내려쳤다.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모세가 믿지 않았다는 것을 무엇을 말하는가?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들은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인정하였지만 말씀하신 음성 그대로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모세는 그토록 고대하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에 들어가면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하지만 하나님께 묻지 않고 기브온 족속에게 속아서 화친을 맺고 말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맘대로 했던 여호수아의 단 한번 실수였다.
그러면 누가 여호와의 종인가? 우리는 두 사람의 실수를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바로 하나님 말씀 앞에서 신을 벗고, 들은 대로 따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여호와의 종’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주님의 종’이라고 불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정말 신을 벗었는가, 벗지 않았는가가 중요하다. 사람들이 뭐라 하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신을 벗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내 종’이라고 부르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고 자신을 종이라고 한다면, 모든 권리를 그분 앞에서 포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신을 벗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은 ‘내 종’이라고 부르신다.
영적 권위는 누구에게 주시는가?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영적 권위를 주실까?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주시는 영적 권위는 절대적인가?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영적 권위에 도전하고 집단적으로 반기를 들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모세는 다만 그들 앞에서 ‘엎드리는 일’ 밖에 하지 않았다. 왜 모세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엎드리기만 했을까?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은 사람은 사람 앞에서도 신을 벗기 때문에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유익과 명예를 위해 스스로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그저 하나님께 ‘이때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자세를 취한 모세에게 엄청난 영적 권위를 주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영적 지도자로 세워 주셨다. 이러한 지도자에게 하나님은 영적 권위를 부여하신다. 모세의 영적 권위에 도전하고 성공한 백성이나 족장들은 없다. 영적지도자의 성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신을 벗고 조건 없이 따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3.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권리 포기라고 하면 다 잃어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씀 안에서 순종하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얻는 것이다.
사회적 안정감을 포기하라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신을 벗고, 사회적인 안정감과 정체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아브라함을 통해 배우게 되는 믿음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사회적 안정감과 정체성을 포함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신을 벗고 순종하는 삶이다.
더 큰 축복의 약속을 위해 포기하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하였다.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는 그대로 따랐다. 하나님이 이삭을 다시 주실 것이라고 신뢰하는 것이다. 약속의 자손을 데려가신 후에는 반드시 회복시키실 하나님을 신뢰한 것이다. 이삭 역시 아버지가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때 뿌리치며 도망치지 않았다. 이삭도 부모의 삶을 통해 믿음으로 사는 것을 배운 것이다.
신을 벗은 사람을 통해 원대한 계획을 이 땅 가운데 이루려는 하나님의 마음과 또한 자녀에게 주시는 약속과 축복을 기억해야한다. 모든 권리를 빼앗기 위해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신을 벗은 자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과 약속이 반드시 있다.
스스로 되갚음하는 것을 포기하라
다윗은 사울에 충성을 다했지만, 다윗을 시기한 사울은 오히려 그를 죽이려고 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쫓기는 생활 중에 다윗은 사울에게 복수할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하나님 말씀 앞에 신을 벗고 복수할 권리를 포기하고 말씀에 순종하였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복수할 권리를 포기한 다윗에게는 사울이 원수로 보이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만 보인다. 이런 다윗에게 엄청난 축복의 말씀이 주어졌다.
4. 예수님의 권리포기(어떻게 여호와의 종이 되는가? )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심과 천국보좌를 포기하고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시고, 우리 모든 사람의 죄 때문에 생명을 포기하셨다. 그리 이 땅에서 계시는 동안 여러 가지 권리를 포기하셨다. 예수님이 왜 이러한 권리포기를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셨을까? 앞으로 예수님을 대신해서 복음을 들고 나갈 때 그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세상 풍속을 따르는 권리
예수님은 세상 풍속을 좇는 것을 포기하시고 이 땅에서 사역하셨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항상 깨어있지 못할 때, 우리는 왜곡된 사고와 잘못된 습관의 공격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문화가 아니라 세상 풍속에 젖어 살 수 있다.
자존심을 지키는 권리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인격을 무시당하고 모욕을 받았을 때 감정적으로 말씀하지도 않고 혈기를 부리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의 영적권위에 도전한다고 저주하지도 않으셨다. 그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따라서 그냥 단순하게 반응하셨다. 이것이 자존심을 세우려는 권리를 포기하는 삶이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감사받는 권리
주님은 사랑받고 인정받고 감사받는 권리를 포기하고 이 땅에서 사셨다. 따라서 사람들의 배신을 하셨을 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행할 때,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기 영광을 취할 권리
예수님은 그분의 모든 사역 속에서 자기의 영광을 취할 권리를 포기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역하였다.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칭찬하고 경배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말하며 영광을 돌리셨다.
왕국을 만들어 군림하는 권리
예수님은 자신의 왕국을 만들어서 군림하고, 새로운 교단을 만들어 총회장이 되고, 신학대학을 만들어 총장이 되는 권리를 포기하고 이 땅에서 사역하셨다. 에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예수님께서 개척교회를 세웠다면, 기존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 장로, 바리새인들을 능가하며 이스라엘 전국을 휩쓰는 새로운 예수교단을 창설하여 이 새 교단의 총회장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몰려오는 군중을 조직화해서 그 위에 군림하지 않으시고 늘 모인 군중을 흩으셨다.
5. 제자들의 권리포기 (어떻게 여호와의 종을 대해야 하는가?)
제자들은 예수님을 섬기는 삶 속에서 어떤 권리를 포기했을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열두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섬기고 그분 앞에서 배웠는지 이해하고 배워야한다.
불평불만 하는 권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불평 불만하는 권리를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다.
여러 가지로 불평할 상황들이 많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명도 불평불만을 한 일이 없다.
건의하거나 간섭하는 권리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건의하거나 간섭하지 않았다.
제자들은 배고프고, 공동생활 집도 없고, 머리 둘 곳 없는 예수님을 좋아다니면서도, 예수님이 어떤 사역을 하시든지 건의하거나 간섭하는 권리를 포기하고 그냥 예수님을 섬기기만 하는 삶을 살았다.
비판이나 험담하는 권리
제자들은 비판이나 험담하는 권리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섬겼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비판하다가 안 되면 그 다음에 험담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제자들은 충분히 비판을 하거나 험담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러한 권리들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섬겼다.
소외되었을 때 반발하는 권리
예수님이 제자 중 누군가를 편애하더라도 반발하지 않고 주님을 섬겼다.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명의 제자들을 특별히 더 사랑하셨다.
하지만 그들 세 명만 사랑하고 자신을 찬밥 취급한다고 반발하는 제자들은 없었다.
제자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예수님께 반발하는 권리를 포기했다.
상처받고 떠나는 권리
제자들은 상처받고 떠나는 권리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섬겼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아마도 정말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좌절감 속에서 등을 돌려 돌아가지 않았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어떤 일에도 반발하고 떠날 권리를 포기하고 주님을 섬겼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자!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사람들의 평가 때문에,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말 때문에 좌지우지 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신을 벗으면 모든 것이 해결 되는 거야.
내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잖아.. ”
답을 얻으니까 마음이 참 편안하다.
‘권리포기’에 대한 나의 머릿속의 깨달음이 가슴으로 내려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리고 나의 삶으로 옮겨지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이루려고 욕심 부리지도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한걸음이 나아가려한다.
야베스의 기도(4: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Jabez cried out to the God of Israel, "Oh, that you would bless me and enlarge my territory! Let your hand be with me, and keep me from harm so that I will be free from pain." And God granted his request.
야베스(Jabez) : 고통을 불러오다
야베스는 누구?
바빌론
유배 이후 집필된 역대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유산과 정체성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야베스는 수많은
이름들 사이에서 믿음의 등대로서 돋보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짧지만 강력한 심리적, 영적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야베스는
"형제들보다 더 명예로운"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이 묘사는 그를 즉시 차별화하여 어떤 자질이 그를 그렇게 구별되게 만들었을지
생각해 보도록 유도합니다. 야베스의 가족이나 이스라엘 사회에서 그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맥락 정보가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세부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는 시대와 문화를 뛰어넘어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우리는 야베스의 이름에 대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예로운 성품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 정신의 회복탄력성과 출생 환경이나 어린 시절의 경험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해줍니다.
역대기에
야베스가 등장하는 것은 문학적 목적도 있습니다. 현대 독자들에게는 건조하게 느껴질 수 있는 족보의 한가운데서 그의 이야기는
이야기적 흥미와 영적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이 고대 목록의 모든 이름 뒤에는 희망과 고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진 실제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야베스를
통해 여러분 자신의 인생 여정을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각자는 출신이나 이름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눈에는 '더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야베스처럼 우리 모두는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백성의 이야기라는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역대기가 기록된 당시의 역사적 맥락도 고려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배 후 정체성을 재건하던 시기에
야베스의 이야기는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부르면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뿌리로부터 단절감을 느끼거나 과거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는 현대 사회에서 역대기에 나오는 야베스의 이야기는 희망을
제시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의 출신이나 우리에게 주어진 이름에 의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요?
이러한
작명은 고대 이스라엘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습으로, 이름에는 종종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으며 때로는 출생과 관련된 상황을
예언하거나 설명하기도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우리는 그러한 이름이 개인의 자기 인식과 인생 여정에 미치는 깊은 영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와 관련된 고통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이름을 가지고 자랐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러한 이름의 무게는
엄청난 부담이 될 수 있으며, 잠재적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인생관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부모의 태도와 어린 시절의 경험이
개인의 심리적 발달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야베스의 이야기는 시작이 주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아름다운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야베스는 이름과는 달리 "형제들보다 더 명예로운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운명과 자유 의지, 우리가 태어난 환경과 우리의 선택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름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많은 문화권에서 이름은 아이의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으며
매우 신중하게 선택됩니다. 따라서 야베스라는 이름은 타인이나 환경이 우리에게 부여한 꼬리표와 기대를 넘어 자신을 정의하기 위한
투쟁이라는 더 넓은 인간 경험의 축소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의 의미는 인간의 삶에서 고통의 현실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고통과 슬픔은 모든 가족과 모든 세대에 영향을 미치는 보편적인 경험입니다. 하지만 야베스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고통은 반드시 끝이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믿음과 기도를 통해 슬픔에서 시작된 고통은 축복의 원천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야베스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줍니다. 야베스의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자신의 고통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우리의 슬픔과 어려움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야베스의 이름과 그의 성품의 대조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강력한 간증으로 작용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과거나 타인의 인식에 의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과의 관계를 통해 새롭게 형성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이름과 꼬리표를 달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가져가야 할 고통스러운
연관성이나 제한적인 믿음이 있나요? 야베스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고 주어진 이름이나 환경의 한계를 넘어 우리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무엇인가요?
여러
세대에 걸쳐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짧지만 강력한 간구인 야베스의 기도에 주목해 봅시다. 역대상 4장 10절에 나오는 이
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 주께서 저를 축복하시고 제 영토를 넓혀 주시기를! 주님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시고, 저를 해로부터
지켜주셔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이 기도는 간결하고 직접적으로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본질에 대해 많은 것을 드러냅니다. 역사적 유물이자 신앙의 힘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로서 이 기도를 자세히 살펴봅시다.
야베스는
하나님의 축복을 구합니다. 이 요청은 단순해 보일 수 있지만, 신의 은총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의존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는 진정한 성취는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곳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긍정과 지지에
대한 우리의 타고난 욕구를 말합니다.
"내 영토를 넓혀 달라"는 탄원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맥락에서는 문자 그대로 영토 확장을 의미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영향력, 책임감 또는 영적 성장에 대한
요청으로 은유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의 이 부분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때 개인과 공동체의 번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진보와 발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반영합니다.
그러자 야베스는 하나님의 임재를 구합니다: "주님의 손이 저와 함께
하소서." 이 아름다운 신적 동행의 이미지는 우리가 인생을 혼자 살아갈 수 없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심리적으로는 안전과 인도에
대한 우리의 필요성을 말해줍니다. 역사적으로는 모세나 다윗과 같이 리더십 역할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의존했던 인물들의 경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야베스는 위험과 고통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이 세상의 고통의 현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보호 능력에 대한 신뢰를 표현합니다. 야베스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면 고통의 유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암시하는 이 기도문은 특히 가슴을 울립니다.
야베스의 기도에는 축복, 성장, 동반자 관계, 안전 등 인간의 가장 깊은 욕구가 담겨 있습니다. 이 기도는 이러한 욕구를 하나님께 직접적이고 정직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모델을 제시합니다.
이
고대의 기도가 여러분의 삶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세요. 신체적, 정서적, 영적 영역 중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확장하라고 부르시는 영역은 무엇인가요? 어떻게 하면 일상적인 경험에 하나님의 임재를 더 온전히 초대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보호와 치유가 필요한 곳은 어디인가요?
또한 이 개인적인 기도가 우리의 공동체적 신앙 여정에 어떻게 부합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야베스는 개인적인 축복을 위해 기도하지만, 그의 영토 확장은 그의 공동체 전체에 유익을 가져다주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이러한 축복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넘쳐날 수 있는지
고려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전과 불확실성에 압도당하는 현대 사회에서 야베스의 기도는 담대하고 신뢰하는 간구의 모범을 제시합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확신하며 우리의 욕망과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도록 격려합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야베스의 기도의 중요성은 성경에 짧게 언급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신자들에게 미친 지속적인 영향과 오늘날 우리의 삶과의 관련성은 신중하게 고려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
기도의 의미는 야베스의 이름과 출신과 대조된다는 데 있습니다. 야베스는 고통 속에서 태어났고 고통을 상징하는 이름을 가졌지만,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에서 축복으로의 변화는 인간의 경험에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인생의 도전을 극복하는 데 있어 신의 개입을 구하는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줍니다.
이 기도는
대담함에서도 주목할 만합니다. 야베스는 축복과 확장, 신적 임재와 보호를 직접적으로 요청하며 하나님께 다가갑니다. 이러한 대담한
기도는 우리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접근 방식을 점검하도록 도전합니다. 우리는 합당하지 않다는 느낌이나 두려움 때문에 기도를
제한하고 있지는 않나요? 야베스의 모범은 우리가 자신감과 신뢰를 가지고 우리의 가장 깊은 소망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도록
격려합니다.
역사적으로 역대기에 이 기도가 포함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국가와 정체성을
재건하던 포로기 이후 시기에 쓰인 이 기도는 불확실한 시대에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를 구하는 백성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 시대를 포함한 모든 시대에 우리의 필요와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이
기도가 강조하는 인간사에 대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은 이 기도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입니다. 야베스는 추상적인 축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이 자신과 함께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이는 우리 삶에 친밀하게 관여하시는 하나님, 즉 신적 내재성의
신학을 반영합니다. 세속화된 세상에서 이것은 우리 존재의 모든 측면에 임재하시려는 하나님의 열망을 강력하게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Psychologically the prayer addresses fundamental human needs –
for blessing (acceptance and affirmation), expansion (growth and
development), divine presence (security and guidance), and protection
(safety and peace). Its comprehensive nature makes it a model for
holistic prayer that addresses both spiritual and practical concerns.
The Lord’s Prayer is often seen as a beginner’s guide to prayer는
겸손과 진정성을 가지고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틀을 제공합니다. 이 기도는 영적 성취와 인도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인정하고
신과의 연결을 통해 이러한 성취를 추구하도록 상기시켜 줍니다. 이 기도는 인간의 다양한 필요를 다룸으로써 포괄적이고 접근 가능한
방식으로 더 높은 힘에 다가갈 수 있는 로드맵을 제공합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모든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신과 연결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적인 도구로 사용됩니다.
기도의 단순함과 간결함 또한 이 기도의 중요성에 기여합니다. 단 몇 마디에 강력한 신학과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접근하기 쉽고 기억하기 쉬워 신자들이 쉽게 내면화하고 개인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요청을 들어주셨다는 사실은 기도의 중요성에 무게를 더합니다. 이는 진실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모든 세대의 신자들이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격려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복잡성에 압도당하는 현대의 상황에서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축복, 확장, 임재, 보호라는 네 가지 요소는 인생의 도전과 기회에 대처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합니다.
I
encourage you to consider the significance of this prayer in your own
life. How might embracing its spirit of bold trust transform your
relationship with God? How could it reshape your approach to life’s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Embracing the spirit of bold trust found
in this prayer can lead to a deeper sense of peace and confidence in
God’s faithfulness. It can also provide a framework for approaching
life’s challenges with courage and hope, knowing that God is always at
work for our restoration. By incorporating the spirit of this prayer
into our own lives, we can experience a renewed sense of faith and a
willingness to trust God’s timing and plan for our lives. In doing so,
we can find comfort and strength in knowing that our 회복을 위한 기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
기도의 공동체적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시다. 야베스는 개인적인 축복을 위해 기도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확장은 필연적으로 그의
공동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기도가 개인적인 것이지만 항상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삶에 미치는 더 넓은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야베스 기도의 지속적인 중요성은 영감과 격려, 그리고 변화를 가져오는 기도의
힘에 있습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담대하게 기도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우리 삶에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구하도록
도전합니다. 이 기도를 받아들일 때, 야베스처럼 우리 삶과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축복, 확장, 임재, 보호의 변화시키는 힘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야베스가 몇 번이나 언급되나요?
이렇게
언급이 적다 보니 처음에는 야베스의 중요성이 줄어든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간결함이 야베스에 대한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어떻게 작용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단어에 무게가 실리는 성경의 경제학에서 야베스의 이야기를 긴
족보에 포함하기로 한 결정은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역사적으로 역대기의 맥락을 고려해야 합니다. 바빌론 유배 이후에
쓰여진 이 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유산과 정체성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족보 기록에 야베스의 이야기가 포함된
것은 그의 모범이 국가와 신앙을 재건하는 민족에게 특히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졌음을 시사합니다.
심리적으로 야베스의
짧은 등장이 주는 영향은 잘 살아온 한 인생의 힘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우리의 이야기가 단 몇 문장으로만 전해지더라도 우리는 어떤 유산을 남길 수 있을까요?
야베스가 한 번은
그의 이름을 설명하고 한 번은 그의 기도를 이야기하는 데 두 번이나 언급된다는 사실은 강력한 서사적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그의 이름에서 그가 가진 잠재적 한계를 보고, 바로 이어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변화된 만남을 봅니다. 이 간결한 스토리텔링은
인간의 한계와 신의 가능성 사이의 대비를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야베스의 이름은 단 두 번만 언급되지만, 그의
이야기의 영향력은 이러한 직접적인 언급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특히 그의 기도는 역사상 수많은 신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짧은
성경 구절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저는 야베스에 대한 제한적인 언급이 성경 전체에서 볼 수
있는 패턴과 일치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세상의 기준으로는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가족 중 막내였던 기드온이나 형제 중 막내였던 다윗을 생각해 보세요. 야베스의 이야기는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이라는 성경의 주제에 부합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야베스의 간결한 모습은 우리 자신의 성찰과 적용으로 그 빈틈을
메우도록 초대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고난과 열망을 투영할 수 있는 캔버스가 되어, 그의 기도를 접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깊은 개인적 경험을 선사합니다.
야베스에 대한 성경의 제한된 언급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짧게 기록된 삶이라도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할 때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둘째, 작은 행동도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신앙의 유산을 남길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도전합니다.
언급이 드물다는 것은 성경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접근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때로는 가장 강력한 진리는 긴 담론이 아니라 신앙과 인간 경험의 본질을 포착하는 짧고 강렬한 순간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또한
야베스의 제한된 모습이 우리 자신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여가 작거나 눈에
띄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베스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을 보시고 소중히 여기시며, 우리의 신실함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줍니다.
가시성과 양으로 가치를 측정하는 현대 사회에서, 성경에 짧지만 중요하게 등장하는 야베스는 반문화적인 메시지를 전합니다. 진정한 영향력은 언급의 양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질과 기도의 진정성에 의해 측정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야베스의 기도의 결과는 무엇이었나요?
성경은
우리에게 간결하지만 강력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역대상 4:10). 이 간단한 말씀 속에는
우리가 주의 깊게 숙고해야 할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도가 들리지 않거나 무시당한다고 느끼는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에 귀 기울이신다는 이 말씀은 깊은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나요??
성경에 나오는 야베스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이는 우리의 기도가 헛된 것이 아니라 사랑스럽고 세심한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고려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안심시켜 줍니다. 이러한 지식은 하나님께서 자녀의 부르짖음에 신실하게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담대하고 자신 있게 그분께 다가갈 수 있도록 영감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들으시는 것
이상으로 신성한 관대함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야베스의 요청을 들어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그분의 자녀들과 대화를
나누고, 우리의 삶 속에서 행동하시려는 의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멀고 비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자녀를 축복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호함은 우리 자신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항상 즉각적으로 나타나거나 우리가
기대하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때로는 기도의 열매가 천천히 익어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처음에
인식하지 못한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심리적으로도 우리는 기도하는 행위, 즉 하나님 앞에 우리의 가장 깊은 희망과
두려움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그의 외부 환경뿐만 아니라
내면의 풍경도 변화시켜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고 신의 자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강력하게 인식하게 했을 것입니다.
야베스의 요청이 받아들여진 것은 주변 사람들과 그의 이야기를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력한 간증이 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에 대한 증거가 되어 다른 사람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요청을 들어주신다는 보장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무한한 지혜로
우리에게 진정으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다. 때때로 그분의 가장 큰 선물은 우리의 구체적인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뜻에 더 가깝게 일치하도록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의 결과는 신성한 응답,
개인적인 변화, 지속적인 간증 등 겹겹이 쌓여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진실한 기도의 힘, 사랑의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 그리고
그분이 우리 삶에서 일하시는 신비한 방식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도 야베스처럼 정직과 믿음, 용기를 가지고 주님께 다가서서 우리
삶에 대한 주님의 완전한 뜻을 항상 신뢰하며 그분의 축복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야베스의 이야기는 성경의 다른 가르침과 어떤 관련이 있나요?
야베스의
이야기는 짧지만 성경 전체에서 발견되는 다른 많은 가르침과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이야기는 빛을 비추면 하나님의 더 큰
진리의 광채를 반영하는 작은 보석과도 같습니다. 이 간결한 내러티브가 성경의 지혜가 담긴 광범위한 태피스트리와 어떻게 얽혀
있는지 살펴보세요.
야베스의 이야기는 기도의 힘에 대한 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강조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마태복음 7:7의 주 예수님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야베스의 경험은 이 원리를 생생하게 보여 주며, 하나님께서 자녀의 간절한 청원에 귀 기울이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주님은 그를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로 그를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신다"(시편 145:18)는 시편
기자의 확신을 반영합니다.
야베스의 축복 기도는 신의 은총과 풍요라는 성경의 개념과 일치합니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물을 축복하기를 기뻐하시는 창조주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신학의 초석인 아브라함의 언약은
근본적으로 축복의 약속입니다. 따라서 야베스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열망에 대한 더 큰 이야기의
축소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영토를 넓혀 달라는 요청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에 대해 하신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는 여호수아가 자신의 유산을 주장한 담대함과 믿음은 종종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는
성경의 원리를 상기시켜 줍니다. 야베스의 기도의 이러한 측면은 우리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욕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영광을 돌리기 위해 우리의 능력을 확장하려는 열망에서 하나님께 '더 많은 것'을 구할 만큼 담대할 수 있을 만큼
담대한가요?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해달라는 야베스의 간구는 모세, 다윗, 선지자 등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에 의지하여
소명을 완수했던 성경 속 많은 인물들의 경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바울의 가르침과도 일치합니다(빌립보서 4:13). 이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의존과 모든 노력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을 구하는
것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줍니다.
위험으로부터 보호해달라는 기도는 죄로 인해 훼손된 세상과 영적 전쟁의 현실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반영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주기도문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고통에 대한 야베스의
관심은 또한 인간의 고통과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우리의 희망에 대한 성경의 광범위한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심리학적으로
야베스의 이야기는 정체성과 목적에 대한 인간의 욕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의 기도는 자신의 이름에 담긴 부정적인 의미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변화와 새로운 정체성이라는 주제는 복음
메시지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라는 바울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고린도후서 5:17).
역사적으로
우리는 야베스의 개인적 경험과 이스라엘의 집단적 경험 사이에 유사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야베스가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고 위험을
피하고자 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도 약속의 땅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립하고 지키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개인과 집단의 유사성은 우리
개인의 영적 여정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더 큰 이야기의 일부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야베스의 이야기는 작지만 그
안에는 기도의 힘,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열망, 믿음의 중요성, 신의 인도와 보호에 대한 우리의 의존, 하나님과의 관계가 주는
변화의 힘 등 성경의 여러 위대한 주제의 메아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더 큰 성경 이야기의 축소판 역할을 하며,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서 진행 중인 하나님의 사역의 일부로 보도록 초대합니다. 우리도 야베스처럼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는 용기와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는 믿음, 그리고 우리 개인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이라는 더 큰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볼 수
있는 지혜를 갖기를 바랍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야베스에 대해 무엇을 가르쳤나요?
초대
교회 교부들은 지혜롭게도 종종 그리스도와 복음의 렌즈를 통해 구약의 이야기를 해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교부들이 야베스에 대해
구체적으로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성경에 대한 일반적인 접근 방식은 우리의 이해를 도울 수 있습니다.
성경을
우화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은 야베스의 이야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을 예시한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영토의 확장은 하나님에 대한 미덕과 지식으로 영혼이 성장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리겐은 종종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영적 싸움을 강조했는데, 이는 야베스가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기도한 것과 일치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기도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묵상하면서 야베스에게서 인간의 의지와 하느님의 행동이 어떻게 협력하는지에 대한 모범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은혜에 대한 가르침은 모든 좋은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우리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야베스의 기도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적극적으로 그분의 축복을 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야베스의
이야기를 통해 신자들에게 기도의 힘을 격려했을 것입니다. 크리소스톰은 모든 신자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자주
강조했는데, 야베스의 성공적인 청원은 자신감을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격려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교부들의 일반적인 가르침에 근거한 사변적인 해석이지만, 모든 이야기에서 그리스도와 신앙의 삶을 가리키는 교훈을 찾아내는 성경에 대한 가톨릭적 접근 방식을 반영합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이 구약성서의 이름과 사건에서 종종 예언적 의미를 발견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을 주는 자"라는
뜻의 야베스라는 이름은 영적 성장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종종 수반되는 고통을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교부들의
성경에 대한 접근 방식은 심리적으로 인간의 조건에 대한 깊은 탐구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야베스의 이야기에서
한계를 극복하고 축복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을 반영한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신을 닮아가는 과정, 즉
신격화에 대한 교부들의 이해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역사적으로 초대 교회는 종종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부들은 야베스의 보호를 위한 기도에서 적대적인 환경에서 안전과 확장을 위한 교회 자체의 청원에 대한 모델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야베스에
대한 교부들의 상대적인 침묵이 그의 이야기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교부 해석의 광범위한 원칙을 이
이야기에 적용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교부들은 성경을 전체론적으로 읽으며 모든 부분에서 전체 구원 이야기의 울림을 보라고
가르쳤습니다.
현대의 맥락에서 우리는 교부들의 접근 방식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교부들은 성경을 단독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에 대한 장대한 이야기의 일부로 읽으라고 상기시켜 줍니다. 교부들은 문자 그대로를 넘어 더 깊은 영적
진리를 찾도록 격려합니다. 그리고 항상 그리스도와 복음에 비추어 성경을 해석하라고 가르칩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야베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을까요?
야베스의
이야기는 비록 짧지만,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깊은 지혜의 우물과도 같습니다.
이 고대의
기도를 묵상하면서 그 안에 담긴 시대를 초월한 진리에 마음을 열고 오늘날 우리의 신앙 여정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생각해
봅시다.
야베스는 우리에게 진실하고 담대한 기도의 힘을 가르쳐 줍니다.
자립과 독립을 장려하는 세상에서 야베스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의존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의 기도는 소심하거나 주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감 있고 구체적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기도 생활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도 똑같이 담대하고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실망할까 봐
두려워하거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주저하고 있지는 않나요?
야베스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신뢰하면서 우리의 가장 깊은
욕망과 필요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도록 격려합니다.
심리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필요와 욕구를 표현하는 이 행위는
깊은 치료 효과가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되며, 이를 통해 상황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고민을 맡기는 행위는 가시적인 결과를 보기 전에도 불안을 완화하고 평안함을 증진할 수 있습니다.
야베스의
영토 확장을 위한 기도는 반드시 물질적인 측면이 아니라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한 성장과 확장에
대한 기독교적 소명을 말합니다.
현대적 맥락에서 이는 선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재능과 능력을 개발할 기회를 찾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안전지대를 넘어
세상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도록 도전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해달라는 요청은
우리의 모든 노력에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개인의 성취를 미화하는 문화 속에서 야베스의 기도는
진정한 성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인생의 도전을 관리하려고
할 때 경험하는 스트레스와 번아웃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가 될 수 있습니다.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야베스의 기도는
종종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삶의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안전과 안녕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것은 문제 없는 삶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돌보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불안이나 두려움으로 어려움을 겪는 많은 사람들에게 야베스의 기도의 이러한 측면은 특히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야베스의 이야기는 매우 간결하지만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미
있는 삶은 반드시 업적의 양이나 전기의 길이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진실성과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욕망이 일치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명성과 유산에 집착하는 문화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강력하게 상기시켜 줍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야베스의 상황과 우리의 상황 사이에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베스가
변화와 도전의 시대에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로 하나님께 의지한 그의 대응은 우리가 복잡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모델을 제시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요청을 들어주셨다는 사실은 기도의 효능을
믿도록 격려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지혜에 우리의 의지를 복종해야 하지만, 야베스의 경험은 하나님께서 자녀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를 통해 기도에 대한 우리의 헌신과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대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야베스의 이야기는 비록 고대의 이야기지만 현대의 상황에 강력하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담대하게 기도하고, 영적인 삶의 성장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힘과 보호에 의지하고, 기도의 힘을 믿도록
도전합니다. 우리도 야베스처럼 우리의 가장 깊은 필요를 하나님 앞에 가져갈 수 있는 용기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수
있는 지혜,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이 짧은 성경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와 주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을 형성할 수 있도록 일상 생활에서 이러한 교훈을 실천해 봅시다.
야베스의 기도가 최근 몇 년 동안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최근
몇 년 동안 야베스의 기도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는 현상은 우리의 신중한 성찰을 촉구하는 현상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시대를
초월한 힘뿐만 아니라 현대의 특별한 영적 갈망을 말해줍니다.
목회적 감수성과 역사적 관점으로 이 트렌드를 살펴봅시다.
야베스의
기도가 다시 인기를 얻게 된 것은 2000년에 출간된 브루스 윌킨슨의 저서 '야베스의 기도'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은 책은 수백만 명의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야베스는 상대적으로 무명에서 많은 기독교인의 영적 수행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특별한 기도가 현대 신자들에게 그토록 깊은 울림을 준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문화적 맥락을
고려해야 합니다.
세속화와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시대에 많은 크리스천은 하나님과 연결되고 삶에서 그분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분명한 요청과 긍정적인 결과가 보고된 기도로서, 신과 소통하는 데 있어 간단해
보이는 공식을 제시합니다.
이 기도는 명확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에 호소하여 영적인 삶에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심리적으로
기도의 인기는 의미와 목적에 대한 깊은 욕구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간과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세상에서, 짧고 진심 어린 기도가 신의 축복과 영향력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매력적입니다.
이는 의미 있는 영향력을
끼치고 싶고, 우리 삶이 거대한 계획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우리 본연의 갈망을 대변합니다.
이 기도가
강조하는 신의 축복은 최근 수십 년 동안 두드러진 번영 신학의 특정 흐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신앙을 개인적인 이득을 위한 수단으로
축소하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열망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은 자녀에게 좋은
선물을 주기를 기뻐하시는 사랑의 아버지라는 성경적 진리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야베스 기도의 인기와 영적
돌파구의 열쇠로 특정 기도나 수행을 강조한 다른 운동의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방 정교회 전통의 예수 기도부터 가톨릭의
묵주기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은 오랫동안 신앙 생활의 닻 역할을 할 수 있는 간결하고 반복 가능한 기도에 끌려왔습니다.
야베스
기도의 단순함 또한 이 기도의 매력 중 하나입니다.
정보가 넘쳐나고 시간과 주의력이 경쟁적으로 요구되는 시대에, 핵심적인 영적
욕구를 요약한 짧고 기억하기 쉬운 기도는 일관된 기도 생활을 유지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더 정교하거나 즉흥적인
형태의 기도에 주눅이 들 수 있는 분들에게도 시작점을 제공합니다.
야베스의 기도(역대상 4:9-10)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본문에 야베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야베스는 미국의 브루스 윌킨스가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을 쓴 이후로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이 야베스에 대해서 성경은 아주
짤막하게 유다 자손임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단 두절뿐입니다. 그래서 이 야베스가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이름과 그의 어머니의 증언을 통해서 야베스는 태어날 때 아주 고통스럽게 낳았다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야베스라는 뜻은 고통,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그 어머니가 야베스를 낳을 때 난산해서 죽을 뻔하며
낳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고통이라는 뜻으로 야베스라고 지었다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이름을
지을 때 의미나 뜻을 부여해서 지었습니다. 딸을 많이 낳는 집에서는 이제 딸은 그만 낳으라는 뜻에서 말순이, 끝순 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어느 돈에 집착하는 아버지는 아들을 낳아놓고 이름을 “돈”이라고 지은 아버지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름을
지을 때 뜻을 부여해서 짓습니다. 성경을 보면 대부분 그렇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원래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고 고쳐서 지어주셨습니다. 아브람은 그냥 “아버지”인데 “아브라함”은 “많은 사람들의 아버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 장차 아브라함을 사용하시는데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고 민족의 아버지로
사용하시려고 그의 이름을 개인적 차원에서 공적차원의 이름으로 고쳐주십니다.
또 그 아내 사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이름은 사래였습니다. “여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래도 “사라”라고 고쳐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의 여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에도 공적인 뜻이 부여된 이름입니다. 또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발꿈치를
잡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태어 날 때 먼저 나오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후에 하나님은 그의
이름도 고쳐 주십니다. “발꿈치를 잡다”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이름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십니다. “하나님과 겨룬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야곱을 민족을 위해서 사용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민족적인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사기꾼이라는 뜻의 야곱이라는 이름으로는 안 된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름은
이렇게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야베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은 고통,
아픔,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을 때 아주 고통스럽게 낳았다 해서 그 이름을 고통이라는 뜻으로 야베스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야베스가 태어날 때 뿐 아니고 그가 자랄 때도 아주 고통스런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 말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자랐다는 말입니다. 아주 초라하게 자랐다는 말입니다. 야베스는 그 많은 백성들 중에서 가장 빈약하고
초라하고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후에 야베스는 크게 성공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야베스는 “그 형제들 보다 귀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 야베스가 후에 크게 성공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야베스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서 마침내 성공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야베스는 오늘 성공을 바라는 현대인들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서 드디어 크게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야베스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성공했습니까. 이 야베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금년 한해를 살아가면서 이 특징을 기억하고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기 대
첫째는 미래에 대한 분명한 기대입니다.
10절을 보면 야베스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혀
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기대이고 희망이고 비전입니다. 현재 환경은 고통스럽고 불만족스럽고 어려움이 있고
초라하고 빈약하지만 그런데 야베스는 그런 환경을 보지 않고 미래를 보고 먼 훗날을 보고 앞으로의 시간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내 지역을 넓혀 주십시오..
사람은 이 같은
미래에 대한 꿈과 계획과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이 같은 생각이나 마음 그리고 기대와 뜻이 있으면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미래를 위해서 이런 기대나 꿈이나 소망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기도하게 됩니다. 킬케골이라는 철학자는
사람으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다름 아닌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절망은 비전이 없는 삶이고 기대도 꿈도 희망도
없는 삶을 말합니다. 사람에게 이 같은 기대나 비전이 없으면 희망도 없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때로 삶을 포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두 아이를 강에 내다 버린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의 마음을 열어보면 분명 그
마음속에는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 마음 어디에도 희망의 싹이라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아이들을 강에
던져 버렸을 것입니다. 또 근래에 와서 자살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난해에는 1만 3천명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삶을
포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딜 봐도 희망이 없으니까 에라 모르겠다 하고 약을 먹고 불을 질러 죽고 철길에 떨어져 죽고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을 것입니다. 이 무소망이 문제입니다. 절망이 문제입니다. 내년은 경제가 더 어렵다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지금 지레 겁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새해가 되었는데도 별로 반가운 것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이 기대와 믿음과 소망과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야베스는
꿈과 기대와 소망과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면 내 지역을 넓혀 주십시오.” 이 꿈이 있으면
현재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모두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는 반드시 이 희망과 꿈과 비전과 기대와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야베스에게는 이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야베스는 그 꿈을 이루어 형제들 가운데서 가장 유력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꿈과 기대와 비전이 있습니까. 씨를 심으면 반드시 싹이 나듯이 기대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뜻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새해에는 이런 꿈과 기대를 가지고 시작하시길 기원합니다.
기 도
10절을
보면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지금 야베스가 처한 환경은 어려움과 고난과 힘든 환경이었습니다. 환경이 어려우면 살아가기가 참
힘듭니다. 배고픔의 고난, 열악한 환경에서 자랄 때의 아픔, 추위, 더위는 상당히 무섭습니다. 여러분, 자랄 때 방학이 얼마나
반가웠습니까. 여름방학, 겨울방학 얼마나 신나게 기다려집니까. 그런데 오늘 가난한 아이들은 방학이 두렵습니다. 방학이 되면
학교에서 먹던 점심을 굶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그렇게 아픈 것입니다. 오늘 고시원, 하숙집, 셋방으로 전전하면서 살아가는
기댈 곳 없는 젊은이들은 남들의 평안함을 보게 되면 자신의 모습은 더욱 초라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삶에는 먼 훗날이 잘
안보입니다. 오늘 현재가 너무 힘겹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낙심하게 되고 도중에서 삶을 포기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베스는 참 대견합니다. 그가 처한 환경은 열악하고 가난하고 고통스럽고 낙심의 요소들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꿈이 있었고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베스는 그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를 도우사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소서”. 야베스는 환경을 탓하지 않고 꿈을 이루려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인에게는 이런 기도하는 복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생각해 보면 참으로 굉장한 복입니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조지 뮬러는 고아를 양육하다가 먹을 것이 떨어지면
얻으러 가지 않고 기도 굴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교섭하고 보조청원을 해야 하는데 그는 기도 굴로
들어갔습니다. 기도하고 나오면 먹을 것을 실은 마차가 왔다는 것입니다.
어느 건축가의 아내는
남편이 집을 짓는데 지어놓은 집이 팔리지 않으면 남편은 아내에게 빨리 산에 갔다 오라고 안달했습니다. 그러면 아내는 짐을 싸들고
산으로 가서 기도했습니다. “집이 팔리게 하옵소서, 이 집이 팔려야 선교지에 보내던 선교비를 제때 보낼 수 있습니다. 팔리지
않으면 선교지에 보낼 돈이 없습니다, 그러면 모두 굶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내려오면 집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 기도에 명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매사 선교비 보낸다고 거짓말하고 기도하면 안 됩니다.
다윗은 어려울 때
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쁠 때 하나님께 기도했고 감사할 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예수님도 가장 힘들 때 산으로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십자가 지기 전날 밤에도 산에 올라가 밤새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던 때도 먼저 산으로 올라가 40일
금식기도하고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복이고
은혜이고 특권입니다. 어떤 때는 답답할 때 골방에 들어가 조용히 기도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조용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격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조용히 기도해서는 시원찮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산에 가서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소리를 높여서 주여, 여호와여, 아버지여 하고 기도하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확신도
주어집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할 수 있다는 것도 복입니다. 우리들이 어디 가서 누굴 붙잡고 그렇게
부르짖을 수 있습니까. 성경은 “네 입을 크게 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부르짖으면 응답하겠다는 메시지입니다. 야베스는 그
어려운 환경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야베스가 그 상황에서 기도할 때 조용조용히 기도했겠습니까. 아마 그는 큰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했을 것입니다.
어느
시부모가 며느리 자랑을 했습니다. 아들집에 가느라 미국엘 갔습니다. 며느리가 참 잘하더라고 합니다. 방문을 마치고 오는데
며느리가 편지 한통을 주면서 비행기 안에서 보라고 하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편지를 뜯어보니까 그렇게 써 있더라고
합니다. “저는 부모님을 만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저희들을 찾아주셔서 저희들에게는 상당한 용기가 되었습니다,
부모님을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하고 써 있습니다. 그 며느리가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그 며느리가 결혼 전에
결혼을 위해서 상당기간동안 기도했다고 합니다. 기도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권사 시어머니가 아닌 집사 시어머니를 만나게 해
주시고, 둘째는 가슴이 넓은 남편을 만나게 해 주시고, 세 번째는 가능하면 미국에 가서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내용이 그대로 이루진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 마음이 만족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신앙인에게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이고 은혜입니다. 그래서 야베스는 지금 처한 환경을 원망하고 탓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근심에서 벗어나 평안하게 해 주십시오.”이것이 희망과 꿈과 비전의 근거이고 소망입니다.
이것이 있는 사람은 오늘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다 이길 수가 있습니다. 장래를 바라보며 비전이 있고 꿈이 있고 기대가 있는
사람은 기도하게 됩니다. 새해는 여러분의 가슴에, 입술에 이 기도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응 답
야베스의
기도는 마침내 응답을 받습니다. 9절을 보면 “야베스는 그의 형제들보다 귀중한 자라”고 했습니다. 10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응답하셔서 만족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뜻과 기대를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야베스는 아주 초라하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형제들 가운데서 가장 귀중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이 응답받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 나라를 걱정하면서 성전에서 뜨겁게 기도를 합니다. “이 백성을 기억하소서”. 그때 환상 속에서 하늘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하늘 보좌가 나타납니다. 그 보좌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옷자락이 자신이 앉아있는 성전지붕을 덮은 것을 보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뜻은 “걱정하지 마라, 내가 이렇게 지키고 있다" 그 말입니다. 그것이 응답의 생활입니다. 기도생활에는 이런
응답받는 생활이 주어져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한나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성전에 나가 “나에게 아들을 주세요, 주시면 나실 인으로 바치겠습니다”하고 기도했습니다. 여기
나실인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실인이 되면 평생 독주를 마시면 안 되고 몸에 병들어도 약을 먹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죽은 시체를 보거나 만져도 안 됩니다. 그 말은 어머니가 죽어도 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한나는 그래도 내
몸으로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절실하고 간절한 기도는
아이없는 부인이 아이를 달라고 기도하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고 절실하겠습니까. 한나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으면 음성도 없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로 기도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엘리 제사장이 그 모습을 보고 오늘도 술 취했구나
하고 제발 술을 끊으라고 큰소리로 책망을 했을 정도입니다. 그때 한나의 심정을 이해한 엘리가 이렇게 말합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17).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아들 사무엘을 낳지
않습니까. 그것이 응답의 생활입니다.
이제 새해가 되었습니다. 새해에 우리 모두 야베스 처럼
분명한 꿈과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환경을 탓하고 원망하고 현실만 바라보면 가지고 있던 꿈도 상실되기 쉽습니다. 현실만 보면 그
어디에도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꿈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꿈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대와 꿈을 갖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또 모든 기도에는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응답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새해에는
이렇게 응답받고 꿈을 이루고 성취하며 살아가는 축복의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짧지만 강력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역대상 4:9-10에 기록되어 있으며, 야베스라는 인물이 하나님께 드린 간절한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야베스는 자신의 이름이 고통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삶이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예언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야베스의 삶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우린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그는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긍정적으로 마주하는 자세가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간곡하게 하나님께 고하며 하나님께 의지하고 구했다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어떤 기도인가요?
야베스의 기도는 가족 계보를 정리한 역사적인 구절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역대상 4:9-10).
브루스 윌킨슨 박사 (Dr. Bruce Wilkinson )와 데이빗 콥
(David Kopp )의 베스트셀러 야베스의 기도
내 삶을 기적으로 채우는 기도의 원리 (The Prayer of Jabez:
Breaking Through to the Blessed Life: 2000)의 출간으로 인해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야베스가 유다의 자손이었다는 것, 존귀한 자였다는 것, 그리고 고통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어머니가 “야베스” (“비통해하다”
혹은 “슬픔을 만드는 사람”의 의미)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것 외에, 야베스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야베스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보호와 축복을 구하며 울부짖습니다.
“슬픔의 사람” 야베스는 언어 유희를 사용하여, 자기의 이름을 상기시키고
예감하게 하는 슬픔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역대상 4:10에 있는 야베스의 기도는 네 가지 긴급 요청을 포함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축복
야베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모든
축복의 근원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은총을 구합니다.
틀림없이,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이 간구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창세기 22:17).
둘째, 지경의 확장
야베스는 자신이 도전하는 모든 시도에서 승리와 번영을 얻고, 자신의 삶의 지경이 넓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 손의 도우심
이는 야베스가 자신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구하는 방식입니다.
넷째, 환난으로부터의 보호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마태복음 6:9, 13).
야베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자신의 보호자로 여깁니다.
기도 안에 담긴 야베스의 목적은 슬픔에서 자유로워지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기도를 들으셨고, 응답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혜를 구했던 솔로몬의 겸손한 기도 (열왕기상 3:5-14)와 같이, 축복을
구했던 야베스의 경건한 기도 또한 응답 받았습니다.
야베스가 누린 성공은 태어날 때의 슬픔보다 큰 것이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야베스의 이름을 극복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우리 삶 속에서 기도를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하는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우리는 필요한 때에 도움을 얻기 위해서 늘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고, 기도 제목들을 가지고 곧장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4:16).
한나, 요나,
히스기야, 바울의 기도 – 그리고 물론 우리 주님의 본이 되는 기도 (마태복음 6:9-13) –와 함께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지하며 겸손과 믿음으로 지극히 크신 이에게 나아가는 아름다운 본을 보여줍니다.
“야베스가 하나님께 자신의 필요를 구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다 들어 주셨다.
야베스처럼 경제적 풍요와 마음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엄청난 복을 쌓아놓으셨는데,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과연 야베스의 기도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역대기의 주제 안에서, 구문에 대한 성경적 분석을 통해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우리의 삶에 적용을 해야 합니다.
역대기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의 수는 많지 않았습니다.
무너졌던 성전을 다시 건축했고 허물어진 성벽을 다시 세웠지만, 이전의 영광에 비하면 초라할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맞나?
이 땅이 약속의 땅이 맞는 걸까?
이런 의문을 가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상들과 맺어주셨던 하나님의 언약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책이 역대기입니다.
우리는 약속의 땅에 택하신 백성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중심으로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들어있는 1-9장의 계보 역시 언약의 두 축인 자손과 땅에 대한 관점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온 이스라엘의 계보와, 지파별-가문별로 거주하는 땅에 대한 기록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약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야베스가 어떤 사람일까요?
일단 기록된 위치로 봐서 유다 지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3절에 그나스와 그의 아들 옷니엘, 15절에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그의 자손 등이 나열된 것으로 봐서는 그들과 비슷한 시대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베스는 여호수아에서 사사기로 이어지는 가나안 정복시대의 사람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2:55절을 보면 야베스라는 성읍이 나오는데, 이것이 성경에서 유일하게 기도의 사람 야베스와 같은 고유명사가 사용된 구절입니다.
아마도 이 야베스라는 성읍을 세운 사람이 바로 4장의 야베스라고 여겨집니다.
야베스가 세운 도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필사하는 서기관들이 많이 거주했고, 그들이 레갑 가문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5장의 기록에 따르면 레갑 가문은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중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것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기록들을 통해 야베스가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야베스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없고, 이름을 어머니가 지었다는 것을 가지고 아버지가 없는 사생아라고 보는 것은 근거가 약합니다.
원래 역대상 4장은 자손이 아니라 땅과 성읍을 중심으로 기록한 계보라서 부모 자식 관계를 다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야곱의 열두 아들은 모두 레아와 라헬 두 어머니가 이름을 지었습니다.
어머니가 수고로이 낳았다 해서 난산이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으로 보는 것도 근거가 약합니다.
선악과 사건 이후로 모든 여자는 자식을 낳을 때 수고로이, 고통스럽게 낳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모든 남자는 먹고 살기 위해 수고를 해야 합니다.
언약의 두 요소인 자손과 땅. 여기에 관련된 모든 일, 다시 말하면 자손을 낳고 땅의 소산을 얻기 위해서 사람은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이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니 야베스에 대한 9절의 설명은 야베스 만의 특별한 배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타락한 인생의 보편적인 상황에 대한 기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고 했습니다.
고통 중에 태어난 보편적인 인생의 전형인 야베스가 다른 형제보다 귀중한 것은 그의 기도 때문인가 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하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호칭 역시 언약에 기반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 주신 것은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후인 창세기 32:28장에 처음 기록되었는데,
특히 35:10절이 중요합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올 때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복을 주시고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신 겁니다.
바로 이어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이스라엘과 그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곧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야베스가 언약의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내용을 봅시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예전의 개역 한글에는 “원컨대 주께서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하사”
이 구절도 역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언약을 기반으로 하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했다가 양으로 대신했던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창세기 22:17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여기서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라고 번역된 원문에 사용된 어휘들이 야베스의 기도의 첫 문장 “주께서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하사“와 똑같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복의 내용은 역시 자손과 땅 이라는 언약의 두 요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민족의 번성, 약속의 땅 가나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의로운 나라를 이루시기로 하셨습니다.
이렇게 세워질 나라는 그 자체가 복이며, 동시에 세상에 복을 주는 나라가 됩니다.
이것이 타락한 세상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 언약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선포될 때 더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집니다.
18: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죄로부터 벗어나 의와 공평을 행하는 나라.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서 온 세상이 죄로부터 회복될 것입니다.
결국 야베스가 구한 복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복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 하신 가나안 땅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 복을 위해 야베스가 구한 첫 번째 구체적인 기도 제목은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입니다.
개역 한글로는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이 말도 성경에서 의미가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 표현입니다.
신명기 19: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혀 네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땅을 다 네게 주실 때”
“네 지경을 넓힌다”는 말은 “네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차지한다”는 의미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출애굽기 34:24 “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의 대적을 물리치시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지경을 넓히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맺어주신 언약의 핵심입니다.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나요?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각 지파별로 가나안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여호수아 2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세겜에서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땅을 모두 차지한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 사람을 다 몰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지배를 당하는 사사 시대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땅을 온전히 차지하지 못한 것은 불순종의 결과였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야베스는 기도했습니다.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해 주십시오.”
야베스는 어쩌면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고 말했던 갈렙과 같이 가나안을 물리치고 그 땅을 취한 용사일 겁니다.
나의 지경을 넓혀 달라는 야베스의 기도는 “지금은 땅이 열 평 밖에 없지만 앞으로 100평을 갖게 해 주세요.” 이런 개념이 전혀 아닌 겁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부동산이 많아지게 해 달라, 사업이 확장되게 해달라,
꼭 돈이 아니더라도 더 많은 꿈을 꾸라. 이상을 크게 가져라.” 이렇게 적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지극히 자의적인 적용입니다.
야베스의 두 번째 기도 역시 언약에 근거한 것입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당시의 형제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난을 당하고 근심을 겪는 이유는 불순종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은 진멸하라 했던 가나안 사람들을 살려두고, 오히려 그들이 섬기는 태양신, 비의 신이라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농사가 잘 되어 부자가 되길 바랬던 거죠.
그 결과 이스라엘은 바로 그 가나안 사람들에 의해서 노략을 당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악을 행하다가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기는 환난을 겪습니다.
가나안 사람이 두려워 근심 속에 살았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야베스는 악을 버리고 죄를 멀리 함으로서 환난과 근심에서 벗어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우상이 아닌 하나님의 손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니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믿음의 사람이 하는 기도는 모두 동일한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나의 뜻으로 삼고 내 뜻을 하나님의 언약 앞에 내려 놓는 것.”
내가 처한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세상의 흐름에 동화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성경적인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바램을 구하지 않아서 복을 못 받은 것이니 강력하게 구해라.
자산이 늘어나기를 구하고, 사업이 확장되기를 구하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이 없다면서 부동산을 사놓고 오르기를 기도하고, 주식을 사놓고 오르기를 기도하면 하나님 입장에서 참 난처하실 겁니다.
옳고 그름을 모르는 채로 잘못된 관점의 기도를 계속 하다보면 잘못된 신앙의 체계가 몸에 굳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고 깨달은 만큼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든 영역이 타락했기 때문에 조금만 방심하면 신앙은 바로 변질됩니다.
지속적으로 모든 부분에서 말씀의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돌아보고 삶을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복은 타락한 세상의 회복을 위한 복입니다.
죄와 악은 고통을 가져오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온전한 안식을 줍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그러한 언약의 복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야베스와 같은 삶을 살고, 야베스와 같이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늘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성령님의 은혜로 말씀을 깨달으며, 그 말씀에 순종하여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개역개정,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새번역,18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 ㉤그, '페트로스' ㉥그, '페트라' ㉦그, '하데스의', 곧 '죽은 자들이 모여 있는 세계의' ㉧또는 '세력이'.
우리말성경,18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니 지옥의 문들이 이것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개역개정,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새번역,19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우리말성경,19 내가 네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줄 것이다. 무엇이든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묶다(데오. dĕō) δέω
스트롱번호 1210
1. 묶다. 2. 마 13:30. 3. 마 12:29
발음
[ dĕō ]
관련 성경 / 결박하다(마 12:29, 요 18:22, 행 22:5), 묶다(마 13:30), 매다(마 16:19, 18:18, 막 5:3), 매이다(마 16:19, 눅 13:16, 딤후 2:9),
잡다(눅 6:17), 체포되다(막 15:7), 동이다(요 11:44), 싸다(요 19:40), 구류하다(행 24:27), 매임을
받다(행 20:22), 매임을 당하다(골 4:3).
풀다(루오. lüō) λύω
스트롱번호 3089
관련 성경 / 버리다(마 5:19), 풀다(마 16:19, 눅 19:33,
행 2:24), 헐다(요 2:19), 범하다(요 5:18, 7:23), 폐하다(요 10:35), 벗다(행 7:33), 놓아주다(행 24:26), 깨어지다(행 27:41), 놓이다(계 9:14), 풀어지다(벧후 3:10,11,12), 멸하다(요일 3:8),
떼다(계 5:2, 5).
구약성경 열세번째장 역대상 배경
역대상은 아담에서 출발을 해 사울 왕가의 몰락,다윗왕 이야기와 솔로몬이 등극하는 그부분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역대상 1장 요약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이르는 이스라엘의 계보와 족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자손들의 계보와 족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이삭의 아들에서부터 자손들의 계보와 족보에 대해서 말합니다.에돔
땅에서 살아가는 원주민과 에돔을 통치하는 왕들의 족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2장 요약
이스라엘 열두 아들의 이름,유다의 아들들과 그 자손들의 이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다윗의 직계 존속과 그의 방계 존속과 형제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헤스론의 아들들,자손들 이름,장남 여라브엘의
자손들의 이름,갈렙의 아들과 그 자손들의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3장 요약
다윗이 헤브론과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과 딸의 이름,솔로몬 왕의 아들들과 그들이 낳은 자손의 이름,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의 자손들과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4장 요약
유다의 아들들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여러 족보와 후손의 이름,유다의 아들인 셀라의 자손과 이름,시므온 자손의 이름과 그들이 살았던 지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5월 2일(금) 역대상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담 셋 에노스(1:1)
아담, 셋, 에노스
Adam, Seth, Enosh
아담은 인류의 시조가 됩니다.
아담이란 이름은 "인간" 또는 "인류"라는 뜻입니다.
셋이란 이름은 "대신" 또는 "임명하다"라는 뜻입니다.
에노스라는 이름은 "연약한 사람" 또는 "죽어야 할 존재"라는 뜻입니다.
아담(Adam) אָדָם
이름의 뜻과 간략한 소개
'아담(Adam)'은 히브리어로 '흙', '땅'을 의미하며, 인간이 흙으로
창조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인간으로,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존재입니다.
아담은
하와(Eve)와 함께 에덴동산에 거하며 하나님과 교제했으나, 금지된 선악과를 먹고 죄를 범하여 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는
아벨, 가인, 셋 등 여러 자녀의 아버지로서 인류의 조상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생애는 창세기 1장부터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창조와 에덴동산 생활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첫 인간으로, 에덴동산에 거하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렸습니다(창세기 1:26-27).
그는 하나님께서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자유롭게 먹을 수 있도록 허락받았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금지되었습니다(창세기 2:16-17).
아담은 또한 동물들을 이름 지으며, 하나님이 맡기신
창조물 관리의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와와 짝을 이루어 가정을
이루었습니다(창세기 2:18-25).
2. 죄의 타락과 추방
아담과 하와는 뱀(사탄)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죄를 범했습니다(창세기 3장).
이 사건으로 인해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죄와 사망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동산에서 추방하시고, 남자는 땀을 흘리며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고, 여자는 출산의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창세기 3:16-19).
그러나 하나님은 이 과정에서 인류를 구원할 희망의 약속(메시아의 예언)을 주셨습니다(창세기
3:15).
3. 가족과 후손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 밖에서 자녀들을 낳아 키웠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살해하는 비극을 초래했습니다(창세기 4장).
이로 인해 아담의 가정은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하나님은 셋(Seth)을 주셔서 경건한 계보를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셋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창세기 4:26).
4. 긴 생애와 죽음
아담은 930세까지 살면서 많은 후손을 남겼습니다(창세기 5:5).
그러나 그의
죄로 인해 모든 인류는 죄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구원의 필요성이 강조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기록된 자연적 죽음으로, 죄의 결과로 인한 인간의 유한성을 상징합니다.
5. 아담의 타락과 인류의 죄(구속사적 의미)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의 불순종은
단순히 개인적인 범죄에 그치지 않고, 전 인류에 죄와 죽음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기독교 신학에서
"원죄(Original Sin)"로 정의되며,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이 죄의 본성을 물려받아 죄인이 된다고 설명됩니다(로마서
5:12).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 태어나며,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인류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 없이는 영원히 죽음과 심판 아래 놓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 전체는 이러한 타락한 상태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아담의 타락은
인류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 위해 중보자이신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명백히 합니다.
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회복
아담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첫 번째 사람으로, 타락의 상징적 인물이지만
신약성경에서는 그와 대조되는 두 번째 아담(Second Adam)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고린도전서 15:22, 45).
아담이 불순종으로 인해 죄와 죽음을 세상에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의 순종과 희생을 통해 인류에게 생명과 구원을
제공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아담이 실패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빌립보서 2:8).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를 설명하며,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로마서 5:19)고 기록하였습니다.
아담이 인류에게 육체적, 영적 죽음을 가져왔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영생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러한 구속의 사역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하나님이 친히 해결하신 사건입니다.
이로써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서 인류의 타락과 구속을 상징하는 중요한 인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담을 통해 죄가 들어왔고 예수를 통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이 구속사의 흐름은 성경의 핵심 주제 중 하나입니다.
교훈
1.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책임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존재로 설계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과 계획 속에 존재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피조세계를 관리할 책임이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맡겨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2. 순종의 중요성
아담의 타락 사건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아담과 하와의 작은 불순종은 인류 전체에 죄와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며, 불순종은
필연적으로 심판과 고통을 초래합니다. 이 교훈은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중요함을 일깨웁니다.
3. 죄와 구원의 필요성
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은 즉시 구원의 계획을 언급하셨습니다(창세기 3:15).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구속의 계획을 준비하고 계심을 나타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 교훈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강조합니다.
4. 책임과 결과의 원리
아담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죄는 그 자신뿐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타인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책임 있는 선택을 해야 하며, 그 결과를 감당할 준비가 필요합니다.
5. 회복과 희망
아담의 생애는 비록 죄로 인해 시작된 인류의 고난과 죽음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회복의 약속이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과 소망을 제공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죄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개요
셋은 아담과 하와의 세 번째 아들이다.
아벨이 죽자 아벨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주신아들이다.
셋의 뜻은 ‘대신함’
‘대체됨’이란 뜻이다.
셋은 에노스를 낳고 912세에 죽는다.
셋의 생에는 설명되어 있지 않고 에노스를 낳고 에노스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부다.
셋의 출생과 의미
셋의 출생은 두 번에 걸쳐 소개된다.
한 번은 가인의 후손을 마치고 곧바로 소개한다.
창세기 4:25~26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두 번째 언급은 5장에서 아담의 족보 안에 셋이 아담의 아들로 소개된다.
만약 창세기 4장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큰 흐름
속에서 보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셋의 두 번째 언급은 별다른 점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가인과 아벨의 족보에서 빠짐으로
셋이 곧바로 이어가고 있다는 점은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창세기 5: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세기 5: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세기 5: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세기 5: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세기 5: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세기 4장과 5장에서 셋의 자리는 확실히 가인과 아벨의 빈 공백을 채워 주고 있다.
우리는 셋의 출생애를 통해 몇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은혜를 끊지 않으신다.
비록 가인과 아벨의 일로 아담의 자손들이 끊이기지만 셋을 허락하심으로 이 땅에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은혜를 베푸신다.
타락
이후의 생육과 번성은 양면성을 가진다.
축복인 동시에 저주다.
이것은 창세기 11장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악은 합할수록 더욱
악해지고, 선을 합할수록 더욱 선해진다. 마치 물감이 합하면 검어지지만 빛이 합하면 흰색-무색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저주와 축복의 양면성
셋의 출생과 생애는 확실히 저주 안에 복이 있고, 복 안에 저주가 있음을 보여준다.
가인의 저주와 아벨의 죽음은 아담의
후손들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지만 셋을 주심으로 이어가게 하신다.
셋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팔백칠 년을 더 살다 912세에
죽음을 맞이 한다.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생명을 통해 세대와 세대가 끊이지 않게 이어가게 하신다.
하지만 자신 또한 죽음을
맞이함으로 죄의 값이 사망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미술 분야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물감은 감산혼합, 빛은 가산혼합이라 부른다.
가산 혼합
:
빛을 가하여 색을 혼합할 때, 혼합한 색이 원래의 색보다 밝아지는 혼합.
빛의 색은 겹칠수록 밝아지는데, 만들어진 색은
원래의 빛의 밝기를 합한 것이 된다.
컬러텔레비전을 비롯한 조명 따위에 이용된다.
적색(赤色), 녹색(綠色), 청색(靑色)을 기본
삼원색(三原色)으로 쓰며, 이 혼합에서의 보색(補色)은 두 가지 색을 합하여 백색(白色)이 되는 경우를 말한다.
감산혼합 :
혼합색이 원래의 색보다 명도(明度)가 낮아지도록 색을 섞는 방법.
시안(cyan), 마젠타(magenta), 황색(黃色)의 각 비율을 변화시킴으로써 여러 가지 색을 만들 수 있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에노스(Enos) 'אֱנוֹשׁ
에노스(Enos)는 창세기 5장에서 셋의 아들로 언급되는 인물로, 성경에서 중요한 신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인간의 나약함과 연약함을 상징하며, 그의 생애는 인류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냅니다.
1. 에노스의 이름 : 히브리어 의미와 풀이
에노스(Enos)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אֱנוֹשׁ' (에노시, Enosh)로
표기되며, 그 뜻은 '인간', '사람', '연약한 자'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 이름은 인류의 나약함과 필멸성을 상징하며, 인간이
본질적으로 죄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인간의 연약성을 강조할 때 에노시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아담'이란 단어는 보통 사람을 강조할 때 사용합니다.
에노스의 이름은 성경에서 인간의 한계와 죄성을 강조하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103편 15절에서 "인생은 풀과 같으며, 그의 영화는 들의 꽃과 같도다"라는 구절에서 사용된 '인생'이라는 단어가 바로 '에노스'와 같은 히브리어입니다.
이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덧없고 연약한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582. 에노쉬(’ĕnôwsh. אֱנוֹשׁ)
אֱנוֹשׁ
스트롱번호582
-
-
어원
- 605에서 유래
- 구약 성경
- 42회 사용
관련 성경
☞사람(창6:4, 삼하1:11, 겔9:2), 남자(창13:
8), 동행자(창24:54,59, 삼상18:27), 백성(창 26:7, 수8:14, 왕상21:13), 주민(레18:27),
불량배(신13:13), 쌍방(신19:17), 무리(수9:14, 삿19:25, 왕하4:40), 지휘관(수10:24), 후손
(삿9:28), 대장부(삼상4:9), 난봉꾼(대하13: 7), 인생(욥4:17, 시144:3), 신하(잠25:1),
인구(전9:14), 족속(사45:14), 장정(렘18:21), 남편(렘29:6, 44:19, 겔16:45), 친구(렘38:22).
인생(*, 에노쉬) - 히브리어 성경은 인간을 가리킬 때 '에노쉬'와 '벤아담'(*)을 사용하는데(68:18; 신 32:26; 잠 23:28; 욜 1:12), 특히 태어나지만 반드시 한번은 죽는 존재로서의 유한한 인간을 뜻할 때 주로 '에노쉬'을 사용한다.
한편, '에노쉬'를 '최선의 상태인 인간'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 별로 설득력이 없다(Davies).
벤 아담
בֵּן
스트롱번호1121
-
-
어원
- 연계형 בֶּן־, 복수 בָּנִים, 복수 연계형 בְּנֵי,1129에서 유래
- 구약 성경
- 4891회 사용
אָדַם
스트롱번호119
-
관련 성경
☞붉다(애4:7, 나2:3, 잠23:31).
그 날이 풀과 같으며 - 본 회화적 묘사는 인간 존재 본질의 일시성을 강조한다. 유사 표현으로는 90:5; 욥 14:2; 사 40:6, 7; 51:12등이 있다.
꽃과 같도다 - 곧 시들어버리는 것이 특징인 꽃이 인생의 영화(榮華)와 같다는 말이다. 여기서 '꽃'은 '치이츠'(*)로서 그 문자적인 뜻은 '빛나는 것' 혹은 '반짝이는 무엇'이며 봄철에 침울한 광경을 밝고 다채로운 색상으로 바꾸어버리는 들에 핀 꽃들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된다.
따라서, 에노스의 이름은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그분의
도우심과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그의 이름이 주는 의미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는 깊은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2. 에노스의 생애
에노스는 아담과 하와의 셋째 아들 셋의 아들로, 그의 탄생은 창세기 4장 26절과 창세기 5장 6-11절에서 언급됩니다.
"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 (창세기 4:26)
에노스의 생애는 그의 탄생 때 중요한 신앙적 전환점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4장 26절에 따르면, 에노스가 태어난 시점에 사람들은 처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인간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예배하며, 그분을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에노스의 생애는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많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인류가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는 중요한 신앙의 시작을 알리는 시대였습니다. 셋의 계보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신앙적 행위가
시작되었으며, 에노스는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에노스는 905세까지 살았으며, 그의 생애 동안
인류는 점차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께 나아가는 삶을 시작했습니다(창세기 5:11).
3. 에노스 이야기의 교훈
에노스의 짧은 기록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신앙적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가
등장한 시점에 사람들이 처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은, 에노스의 생애와 그가 상징하는 것이 신앙의 회복과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작을 의미함을 보여줍니다.
1)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돌아옴
에노스의 생애와 그가 태어난 시점은 인류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예배하기 시작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냅니다. 그의 이름이 '연약함'을 상징하는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와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류가 자신들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신앙 생활에서 회개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켜줍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분의 은혜를 구할 때 우리는 참된 회복과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기도와 예배의 시작
에노스가 태어난 때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기도와 예배가 시작된 사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다시 교제하시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그들의 마음을 열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예배와 기도가 신앙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은 그분과의 관계를 맺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시작된 이 신앙의 행위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생활에도 여전히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분의 도우심과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기도와 예배는 단순한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3)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은혜
에노스의 이름이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은 인간의 필멸성과 한계를 상기시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성과 연약함을 지닌 존재로,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온전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인류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시작했음을 상징합니다.
이 교훈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분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분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에노스의 이야기는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4. 결론
에노스는 성경에서 셋의 아들로, 그의 이름은 '연약한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는 인류가 처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예배하기 시작한 중요한 시기로 기록됩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으며, 이는 인류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신앙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에노스의 이야기는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또한, 기도와 예배는 신앙 생활에서 필수적인 요소임을 상기시킵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으며,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에노스의 생애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시작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오늘날에도 계속되며,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담(Adam)은 '흙'이란 뜻의 히브리어 '아다마'와 동일한 어원을 가진 이름으로서 그 의미는 '사람'입니다(창
1:27).
그런데 역대상의 족보는 유다 왕국의 위상과 기원을 밝히기 위해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민족의 시조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지 아니하고 인류의 시조인 아담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은 유대민족의 기원이 되시는 하나님은 온 인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과 모든 종족은 유일한 기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셋(Seth)은 '택함을 받은 자', '대신 줌'이란 뜻입니다.
셋은 가인에게 살해당한 아벨 대신 하나님께서 아담의
가정에 주신 선물이었습니다(창 4:25).
본 족보에서 아담의 맏아들 가인과 차자(次子) 아벨이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아벨은 후사가 없었기 때문이며, 가인은 불경건한 자였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생략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창
4:1-12).
에노스(Enosh)는 '약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특기할 사실은 그의 시대에 여호와께 대한 최초의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창 4:26).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은 아담의 타락(창 3장) 및 가인의 범죄 이후 죄악에 대하여 무기력해진
사람들이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는 죄의 유혹을 이기며 살 수 없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런데이같은 점은 날이 갈수록 죄악이
관영(貫盈)해지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에노스는 셋이 105세에 낳은 아들(창 5:6, 대상 1:1)로, 아담 이후 235년에 출생했다.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았고 815년간 자녀를 낳았으며, 905세에 죽었다(창 5:9-11). 에노스는 아담과 695년을, 노아와는 84년을 함께 지냈으며, 그의 나이 752세에 에녹의 승천을 목격했다.
성경은
셋이 자기 아들을 낳고 ‘에노스’라고 이름 지은 동기에 대해 ‘그 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창 4:26). 이는 쉽게 말해 공식적인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가인과 아벨도 제사를 드린 것으로 보아 이미 제사 드린
지는 오래되었으나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뜻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기 위한 규칙적인 예배 생활을 시작했음을 말한다.
에노스는 스스로 구원하기에 무능하고 나약한 전 인류를 예표한다.
이스라엘의 족보 (1-9장)
역대상은 아담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의 족보를 나열하며, 이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나타냅니다.
1.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1장) : 첫 사람 아담부터 아브라함의 족보를 기록합니다.
2. 이스라엘의 12지파 (2-8장) : 야곱의 12아들(12지파)의 족보를 상세히 나열하며, 각 지파의 후손들을 기록합니다.
3. 귀환한 백성들의 족보 (9장) :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의 족보를 기록하며, 귀환 이후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다윗 왕의 통치 (10-29장)
역대상의 주요 내용은 다윗 왕의 통치와 그의 종교적 업적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1. 사울 왕의 죽음 (10장) : 사울 왕의 죽음과 그의 왕국의 몰락을 기록하며, 다윗 왕의 등장을 예고합니다.
2. 다윗 왕의 등극과 통치 (11-29장) : 다윗 왕의 통치 기간 동안의 업적과 사건들을 기록합니다.
예루살렘 정복 (11-12장) :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의 수도로 삼는 과정입니다.
다윗의 위대한 군사들 (11-12장) : 다윗을 도운 군사들과 그들의 큰 공로를 나열합니다.
언약궤의 반환 (13-16장) :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과정과 예배의 재건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17장) :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과 다윗의 왕조에 관한 약속입니다.
다윗의 군사 활동과 정치적 업적 (18-20장) : 다윗의 승리와 정치적 확립을 기록합니다.
인구 조사와 그 결과 (21장) : 다윗의 인구 조사의 잘못과 그에 따른 재앙,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되는 과정입니다.
성전 건축 준비 (22-29장) : 다윗이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과정과 관련된 지시사항입니다.
주요 사건 및 인물
역대상은 다윗 왕의 통치를 중심으로 중요한 사건들과 인물들을 기록합니다.
다윗의 승리와 패배 : 다윗의 승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한 것이며, 그의 패배는 그의 실수와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배와 찬양의 재건 :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예배와 찬양을 재건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성전 건축 준비 : 다윗은 하나님께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솔로몬이 이를 행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다윗은 이에 따라 성전 건축을 위해 필요한 자재와 인력을 준비했습니다.
적용
1.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라
역대상에서 다윗 왕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옮기고 예배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인도함을 구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그분께 기도하며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2. 예배와 찬양을 중심에 두라
다윗 왕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예배와 찬양을 재건한 것은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삶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현대 신앙인들도 예배와 찬양을 삶의 중심에 두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을 더욱 깊이 있고 의미 있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3. 실수를 인정하고 회개하라
다윗 왕의 인구 조사와 그에 따른 잘못을 통해 우리는 실수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 중요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수를 겸허히 인정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4.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라
다윗 왕은 성전 건축의 준비 과정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건축할 자로 솔로몬을 지목하셨을 때, 다윗은 그 명령에 순종하며 필요한 자재와 인력을 준비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5. 지도자의 책임과 영향력
역대상의 다윗 왕의 이야기는 지도자의 책임과 영향력을 강조합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 노력했습니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며, 백성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윗은 여호와의 법대로 잘 이끌며 통치했습니다. 중간에 여호와를 노하게 한 일도 있었으나다윗은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고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한 내용들이 들어있는 역대상의 내용을 요약하였습니다.
[역대상]
-저자: 에스라
-연대: B.C.458~400년경 기록(2차 바벨론 포로 귀환 후)
-목적: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으며, 성전건축과 국가의 번영을 통해 구속사를 나타낸다. 하나님께 충성하면 축복을,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음을 확인시켜 준다.
-개요:아담~다윗까지의 족보 - 다윗의 등극 - 다윗의 치적 - 다윗의 말년, 솔로몬의 등극
역대상 연대기
BC 1010년 : 사울의 사망(대상 10:6), 다윗의 즉위(대상 11:3)
BC 1003년 : 예루살렘 천도(대상 11:7), 법궤의 예루살렘 안치(대상 15:29)
BC 991년 : 다윗의 간음죄(대상 11:1-21)
BC 990년 : 솔로몬의 출생(삼하 12:24)
BC 979년 : 압살롬의 반란(삼하 15:10-12)
BC 973년 : 다윗의 인구조사(대상 21:1)
BC 970년 : 다윗의 사망(대상 28:11-21), 솔로몬의 즉위(왕상 2:12)
역대기의 족보들
특히 역대상 1:1-2:2은 아담에게서 시작하여 그의 후손인 족장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족보가 나온다. 이
모든 자료들은 창세기에 언급된 족보에서 출발한다. 역대상 2:3-8:40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족보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다윗과 그의 왕위 계승자들을 포함하는 유다 지파의 족보(2:3-4:43)
(2) 이스라엘 왕국에 속하여 요단 강 동편에 살았던 지파들의 족보(5:1-26)
(3) 레위 지파의 여러 즉보(6:1-81)
(4) 북왕국에 속하여 요단 서편에 살았던 자들의 족보(7:1-40)
(5) 첫 번째 왕 사울을 포함하는 베냐민 지파의 족보(8:1-40).
역대상 9장은 주로 포로 이후 예루살렘 주민들에 대한 목적이지만, 8:29-38에 있는 사울의 족보를 반복하면서 결말을 짓는다(9:35-44).
이렇듯 족보로 이루어진 서론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대기 저자가 활동했던 시대와
상황들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역대기 저자는 포로 후기 시대, 아마도 BC 4세기 중반에 살았을 것이다. 많은 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가 활동하던 시대보다 한 세기 반 이전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고, 그 땅에 남아 있던 자들과 함께 BC 516년에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재건했다.
BC 5세기 중반에는 바사의 지원으로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돌아왔다. 에스라는 사람들이 율법의 규정들을
따르도록 했고(아마도 오경의 일부였을 것이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감독하며 그 지방의 총독으로 일했다. 당시 바사
왕국은 애굽을 포함한 고대 근동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전에 유다로 불렸던 작은 팔레스타인 공동체는 바사 제국 안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살았지만, 정지적으로 독립하고자 하는 소망은 없었다.
유다의 종교적 중심은 예루살렘 성전과 제사장 그리고 성전에서의 예배 생활이었다. 역대기는
성전의 권위와 유효성을 주장하며, 유다에 속하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을 인식하고 성전 예배에 참여하라고 초정한다. 역대기
저자가 본 이스라엘 공동체는 수적인 면에서 미약했지만, 저자는 이 공동체를 모든 이스라엘로 이해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그가 열두
지파의 족보들을 열거한 것은, 이스라엘의 과거에 대한 회상과 앞으로의 비전, 둘 다를 보여 준다.
첫 번째와 마지막 지파인 유다와 베냐민은 포로 후기 인구의 주류가 되었고, 이들 지파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과 첫 번째 왕 사울을 배출한 지파들이다. 특별히 역대기 저사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은 족보 한가운데 있는
레위인들의 족보다.
역대기 저지는 대제사장들, 일반 제사장들 그리고 일반 레위인들 외에 찬양자들과 문지기들로 불렸던 레위인들의 특별한 서열과 이스라엘 온 땅에 펼쳐진 48개의 레위인들의 성읍을 언급하고 있다.
역대상 2-8장에 있는 지파들의 족보는 창세기에서 가져온 것으로, 역대기 저자는 창조로 돌아가
이스라엘 연대기의 계속성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는 또한 광대한 족보를 가지고 있는 다른 민족들과의 관계에서 이스라엘을 이해하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1장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스라엘의 선택'을 암시하고 있으며, 세상의 다양성과
동일성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어느 시대든,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으로서 모든 인류에게 증인 역할을 하고 있다.
역대기 기록 의도
역대기 저자는 사울의 죽음과 그의 통치에 대한 심판을 서술한 후에, 역대상의 나머지 부분은 다윗 왕권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한다. 여기서 역대기 저자는 자신보다 2세기 앞서 여호수아, 사사기, 시무엘, 열왕기에 서술되었던 이야기에 자신의
신학적 이해를 적용해 다시 서술한다.
그는 여호수아와 사사기의 이야기들을 생략하고, 마지막 장을 제외한 사무엘상 모두를 생략하며, 유다 왕국에
대해 말하는데 필요한 부분 외에 열왕기의 북왕국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생략한다. 역대기 저자는 또한 다윗 왕이 밧세바와 간음한
것과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살해한 것, 다윗의 아들 암논이 그의 이복 여동생 다말을 범한 것, 압논에 대한 압살롬의 복수,
압살롬의 반역과 죽음, 사울의 후손들이 끊어진 것, 다윗 용사들의 공적, 다윗의 두 시편들과 사무엘하 11:1-23:7에 있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생략한다.
부분적으로 이런 생략은 다윗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그의 명성과 권위를 유지하려는
시도이지만,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신앙적 유산에 대한 다윗의 공헌, 곧 성전 건축을 위한 계획과 역대기 저자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봉사했던 제사장들의 다양한 반차에 대한 임명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한편 역대기 저자는 주요 부분을 많이 첨가하기도 한다. 12장에는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나아왔던 지도자들과 군사들의 명단을, 15-16장의 대부분은 예루살렘에서 언약궤의 도착과 연결된 의식들을 언급하고 있다. 22장,
28-29장에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 기록되어 있고, 23-27장은 다윗이 다양한 분야의 레위인들과 관료들을 임명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역대기 저자는 성전 중심의 예배를 지향한다
역대기의 중심 주제
역대기는 우리에게 성경 역사를 포함한 모든 역사는 특정 관점에서 기록되고, 한 세대가 과거로부터 얻은
메시지는 나중 세대의 관심사와는 무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여호수아에서 열왕기에 이르는 초기 이스라엘 역사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백성의 죄로 인해 파괴되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3세기 이후에 바벨론의 손안에 있는 예루살렘은 더
이상이 사실에 집중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대신 역대기 저자의 믿음에는 제사와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중심에 있었다. 그는 하나님 백성의 영적 생활에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 예배야말로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중요한 방편이었다.
역대기 저자는 바로 이 예배가 다윗과 솔로몬의 유산이며, 모세와 통일 왕국의 두 왕과 개개인의 하나님의
사자들에 의해 보증된 제사 제도와 제사장 제도를 통해 그의 시대에 성전에서 가장 잘 행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역대기 저자는
바사 왕이 이 예배를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했으며, 제국의 식민지 생활에서도 이 예배는 최우선 순위며, 그 시대의 중심적인
사명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결론짓고 있다.
유다 왕국 밖의 사람들, 특히 옛 북왕국 주민들에 대한 바사 왕의 환대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책들에 있는
많은 분리주의적 측면들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분열되기 전의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왕이 즉위할 때,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예루살렘으로 언약궤가 이동할 때 그리고 성전 건축할 때 함께 참여 했다.
북이스라엘을 날카롭게 비평하는 설교의 결론에서도 유다 왕아 아비야(아비얌)는 여전히 북왕국 사람들을
'이스라엘 자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대하 13:12). 여호와께서 남왕국의 아사 왕과 함께하심을 보고 북왕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에게로 도망쳐 왔다. 히스기아는 특별히 북왕국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를 포함한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를 유월절에 초대했다.
요시아의 개혁은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납달리 성읍으로 확장되었다.
역대기 저자 시대에 이들 북왕국 영토들 가운데 어느 한 부분도 유다에게 속해 있지 않았지만, 과거 북왕국에
대한 왕들의 호의적인 태도는 역대기 저자가 그의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바라고 있는 태도라는 것을 확실히 표현하고 있다. 연합과
직무를 행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열린 태도는 과거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이 지녀야 할 중심 덕목이다.
예루살렘 성전 예배의 특징과 정당성이 역대기 저자의 중심 주제이지만, 그는 또한 이스라엘 역사에서 수많은
다른 중요한 사항들을 강조한다. 다윗의 왕권은 역대기에서 여호와의 왕국과 동일시되며, 다윗 왕조에 대한 신성한 위임은 출애굽과
시내 산 사건에 대한 관심을 사그라들게 한다. 복음은 언제나 특별한 시간, 장소, 문화의 도전 혹은 나쁜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좋은 소식이다.
성경 전체를 통해 '신실함'은 상을 받으며 그렇지 못할 때는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역대기에서는 이 상과 벌이 더 즉각적이며 개인적으로, 대개 한 사람의 생애 안에서 일어난다. 죄의 결과나 의로운 행동에 대한
보상은 세대를 님 기지 않는다.
다윗은 자신의 유언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하고 있다.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 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
이런 응보의 신학은 절대적인 신적 공의의 한 원리가 아니라 여호와의 철회되지 않는 '언약적 긍휼'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17:13) 아사, 여호람,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와 같은 왕들의 이야기는 상을 받은 신실한 기간과
그렇지 못한 기간으로 나뉜다. 므낫세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신실하지 못했을 경우에도 번영이 있었다. 역대기 저자는 하나님과 왕들
사이에 상호 작용하는 이 모든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영적 교훈으로 제시하고 있다.
기쁨과 믿음이 충만한 예배 공동체를 지향한 책
성전 예배와 제사장에 대한 초점은, 우리로 하여금 역대기 저자가 경건과 신앙생활에 대하여 매우 경직된 사고를
가졌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기쁨'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믿음'에 대하여
얼마나 따뜻하게 말하고 있는지를 주목해 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외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 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대하 20:20)
예배드릴 때는 활기 넘치는 음악과 온전한 마음으로(대상 28:9)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대하 7:14:
12:6-12; 30:6-11; 32:26; 33:12-14). 기도 역시 마찬가지다(대하 32:20-24: 33:13).
역대기 저자는 예배 공동체를 지지하는 한편, 보다 나은 미래를 소망했다.
역대기의 첫 부분, 족보에 나와 있는 지역에 대한 언급들은 과거에 형성되었고, 미래에도 여전히 기대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땅을 의도적으로 개관하는 것이다. 역대하 30:6-9에서는 그 땅에 있는 자들의 회개로 인해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이 귀환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언급한다.
찬양하는 자들의 시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여 만국 가운데어서 건져내시고 모으사"(대상 16:35)
그러나 역대기 저자 자신이 왕조의 궁극적인 회복을 소망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역대기는 성전 중심의 예배를 강조한다.
나가면서
역대기 저자는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하나님 백성의 목적과 자유를 예견하고, 한 세대의 신학이 후에 다른
세대의 삶을 언급하기 위하여 변화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하나의 예가 된다. 전통으로부터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역대기 저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여전히 괴롭히고 있는 분열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 자신의 공동체에 대하여 폐쇄적인
한계를 유지하려는 자들의 주장을 거부한다.
역대기 저자는 성전 건축과 예배 드림에 있어 다윗과 솔로몬의 공헌을 강조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성전을 위한
계획이 여 호외로부터 말미암았고(대상 28:19) 솔로몬 성전의 첫 제사 때 하늘에서 내려온 불은 그것을 확증해 주는
증거물이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대하 7:1).
역대상 장별 요약
아담에서 다윗까지의 족보 1장-9장
1장 /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족보
아브라함의 후손들 족보
에돔의 원주민들과 왕들 : 에돔 땅에 거주하던 원주민들과 그 땅을 다스린 왕들의 족보.
-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 족보(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족보)
2장 / 유다의 자손들
헤스론의 자손들
갈렙의 자손들
- 유다 가문의 족보(헤스론, 갈렙의 자손들 중심)
3장 / 다윗의 아들들
유다의 왕들 : 솔로몬의 후손으로 유다의 왕들을 나열함
여호야긴의 자손들 :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의 후손들을 나열함
- 다윗의 자녀들과 후손들의 족보
4장 / 유다의 다른 자손들
시므온의 자손들
- 유다의 후손들과 시므온의 후손들 족보
5장 / 르우벤의 자손들
갓의 자손들
므낫세 동쪽 반 지파 사람들: 바산에서 바알, 헤르몬, 스닐, 헤르몬산에 이르는 넓은 땅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
- 요단 동편의 지파들(르우벤, 갓, 므낫세)
6장 / 레위의 자손들
성전의 성가대원들 : 성막에서 찬양할 성가대를 조직한 다윗
아론의 후손들
레위 사람들의 주거지 : 여러 지파에게서 땅을 분배받은 레위사람들
- 레위의 후손들 족보와 거주지
7장 / 잇사갈의 자손들
베냐민 자손들
납달리의 아들들과 므낫세 서쪽 반 지파 사람들
에브라임의 후손들
아셀의 자손들
- 요단 서편의 지파들(잇사갈, 베냐민, 납달리, 므낫세 반, 에브라임, 아셀 지파)
8장 / 베냐민의 자손들
- 재 언급되는 베냐민 지파의 족보
9장 /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 바빌로니아의 포로에서 자기들의 고장으로 돌아간 사람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제사장들 : 바빌로니아의 포로에서 돌아온 제사장과 여러 재능 있는 자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레위인들: 바빌로니아의 포로에서 돌아온 레위인들
성전 문지기 : 성전의 동, 서, 남, 북을 지키는 문지기 212명
성전 일을 맡은 다른 레위인들: 성전의 청소, 음식준비, 성가대원 등 다른 일을 맡은 레위인
사울의 족보
- 포로에서 귀환한 레위인들, 제사장들 족보와 임무, 사울 왕가의 족보
다윗의 등극
10장 / 사울왕의 죽음 :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사울왕
- 사울의 비극적 최후
11장 /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 :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다윗을 왕으로 추대함.
다윗의 명장들 : 다윗에게 충성한 용감한 군인들, 이스라엘의 3대명장, 30명의 용장
- 다윗 왕조의 시작과 협력한 장수들
12장 / 다윗을 지지한 용사들: 사울을 피해 숨어있던 다윗을 지지한 용감한 군인들은 후에 이스라엘군의 지휘관이 됨
헤브론에서 다윗의 편에 가담한 군인들 : 사울 대신 다윗을 왕으로 지지했던 많은 군인들이 다윗편에 가담함
- 다윗을 왕으로 옹위한 용사들
다윗의 치적
13장 / 법궤 운반과 웃사의 죽음 : 다윗은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려 했지만 궤를 손으로 만진 웃사를 여호와께서 노하셔서 죽임. 궤를 가져오지 못하고 오벧-에돔의 가족에게 맡겨둠.
-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다윗 왕(아미나답-오벳에돔), 웃사의 죽음
14장 / 예루살렘에 안착한 다윗
블레셋군을 격퇴함 : 이스라엘 왕이 된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의 침략을 하나님께 묻고 무찌름
- 블레셋과의 전쟁 승리
15장 /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김 : 다윗은 성막을 세운 후 오벧-에돔에 맡겨둔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옴.
다윗이 기뻐 춤추며 뛰니 그의 아내 미갈이 보고 속으로 업신여김.
- 성공적으로 옮겨진 언약궤(오벳에돔-예루살렘)
16장 / 감사의 찬송 : 다윗이 여호와께 부르던 감사의 찬송
지속된 정규적인 예배 : 다윗은 여호와의 법궤앞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명함.
- 다윗 왕의 감사 찬송
17장 /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죽은 후 다윗의 아들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말씀하심.
다윗의 감사기도 : 여호와께 다윗집안의 장래 일을 말씀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기도를 드림
-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왕국언약, 메시야 언약)
18장 / 다윗의 승리 : 하나님께서 다윗이 가는 곳마다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심
- 다윗 왕이 성취한 초기의 승리(모압, 소바, 시리아)
19장 / 다윗에게 패배당한 암몬군과 시리아군 : 다윗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암몬, 시리아군대
- 다윗 왕의 후기 승리(암몬, 시리아)
20장 / 랍바성 점령 : 요압장군은 이스라엘군대를 이끌고 암몬 왕을 침략하고 랍바성을 함락시킴.
블레셋 거인들을 죽임 : 가드에서 블레셋 거인들을 죽이고 승리한 다윗과 그 부하들
- 암몬과 블레셋을 격파한 다윗 왕
21장 / 다윗의 인구조사 : 인구조사를 시행한 다윗에게 하나님은 노하셔서 무서운 전염병을 내려 많은 사람이 죽음.
예루살렘을 치기 위해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셨으나 불쌍한 생각으로 다시 거두심.
다윗은 여호와께 회개하고 단을 쌓아 용서를 구함
- 다윗의 인구조사 성전터 선정(오르난의 타작마당)
22장 / 다윗의 성전 건축 준비: 솔로몬에게 성전건축을 할 것을 명하는 다윗, 성전의 기초작업을 하는 다윗
- 성전 건축의 준비
23장 / 레위인들의 직무상 분류 : 다윗이 나이가 많아 솔로몬을 왕으로 삼음. 성전의 여러 업무를 맡게 된 레위인들
- 레위인의 직분 배정(38,000명)
24장 / 제사장들의 직무상 분류 :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들의 업무를 나눔.
성전 직무를 맡은 다른 레위인들 : 레위 자손 중 성전업무를 맡을 사람을 제비로 뽑음.
- 제사장 24반차(엘르아살 16반, 이다말 8반)
25장 / 성가대원들과 그들의 직무 : 다윗, 레위 지도자들이 여호와를 찬양할 사람들을 뽑음.
- 찬양대의 24반차(아삽, 헤만, 여두둔)
26장 / 성전 문지기 : 고라집안의 아삽 자손들이 성전 문지기를 맡음.
성전의 다른 직무 : 성전 창고, 예물 보관 관리 업무를 맡은 레위인들
다른 레위인들의 직무 : 종교업무, 행정업무를 담당한 레위인들
- 레위인의 성전 문지기-창고 관리, 사무관과 재판관의 직무
27장 / 이스라엘의 군대 편성 : 12개 군단으로 편성된 이스라엘 군대
각 지파의 행정관들 : 각 지파에서 행정관을 1명씩 뽑음.
다윗의 재산 관리자들과 그의 측근자들 : 다윗 곁에서 재산을 지키며 왕의 자문관, 친구로 있던 여러 측근자들
- 다윗 군대의 편성(12 군단), 12지파의 행정관들, 재산관리자
다윗의 말년, 솔로몬의 등극
28장 / 성전 건축을 위한 다윗의 교훈 : 다윗은 행정관 12명, 군 지휘관, 그밖의 모든 주요인사를 소집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지킬것을
명령함. 솔로몬에게도 여호와를 잘 섬기라고 지시함.
- 성전건축을 위한 다윗의 마지막 유언
29장 / 성전건축을 위한 예물 : 다윗이 성전건축을 위해 예물을 바쳤다고 말하자 여러 족장들과 장관들이 기쁜마음으로 예물을 드림.
다윗의 찬양 : 여호와께 감사하고 성전건축을 위해 모은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며 찬양함
왕으로 인정된 솔로몬 : 다윗은 솔로몬을 다시 왕으로 선언하고 기름을 부음.
다윗의 죽음 : 40년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한 후 나이가 들어 죽은 다윗.
- 성전건축 예물과 다윗의 찬양, 임종, 솔로몬 왕의 등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