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자료






설교 좋은 예화 20가지

1. 신앙의 건망증

아프리카에 산다는 ‘뱀잡이수리’라는 새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뱀잡이수리는 독수리의 일종인 것 같은데 주로 공중을 높이 날아다니다가 두더지나 뱀 같은 것을 발견하면 쏜살같이 내려가 낚아챈다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뱀잡이수리가 민첩하게 잘 날아다닙니다.
그런데 땅에 내려와 먹이를 먹고 있는데 맹수의 습격을 받게 되면, 날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뛴다고 합니다.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자기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날짐승이 뛰어봐야 얼마나 빨리 뛰겠습니까?
결국 얼마 못 가서 맹수에게 잡아먹히고 맙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믿음의 날개를 달아주셨는데, 우리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는 때가 많습니다.
믿음을 적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뱀잡이수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무척 믿음 있는 사람으로 알려졌지만실제 믿음을 적용해야 할 상황에 맞닥뜨리면 휘청거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너희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핀잔을 들을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증발한 것입니다.
신앙의 건망증이 도진 것입니다.
신앙의 생활화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신앙인이면서도 사고하는 방식이나 행동은 세상의 영향을 그대로 받게 됩니다.
지금 내 행동은 누구에게, 무슨 영향을 받은 건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476 best de todo como en botica images on Pinterest  American art

2. 전도면허증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의 이야기다.
그는 젊은 시절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방황하던 중 극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곧 재기하여 “엠마오로 가는두 제자” 등의 명작을 남겼다.
그의 친구들이 종종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자네처럼 좋은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
그럴 때마다 렘브란트는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묻기 전에 일단 붓을 들고 그리기 시작하게.”
그렇다. 어떤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우리는 너무 망설이며 쭈뼛거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신중하게 탐색하며 준비하는 일도 필요하다.
그러나 진취성이나 실천력이 다소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행동’이다.
오랫동안 고민하며 망설이다가 결국 시작조차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지 않던가.
교회의 사명인 전도 역시 마찬가지다.
주님의 전도에 대한 명령에 우리는 얼마나 순종하고 있는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실천할 생각은 접어두고 이 말씀의 신학적 의미가 어떻고 배경이 어쩌고 하는 말 잔치에 빠져 있지나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미 운전면허를 딴 사람은 실제로 차를 전진시켜 보아야 한다.

단지 이론서만 복습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이미 전도 면허증이 주어졌다.
“Just do it!”
어떤 스포츠용품 광고에 나오는 문구이다.
전도, 그것 역시 지금 바로 시작하면 된다.
해보면 방법이생기고 그 맛을 깨달아가게 된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넋 놓고 앉아 있는 시간은 휴식이 될 수 없다.
해야 할 일을 하고서 잠깐 쉬는 시간이 휴식이며 재충전의 기회다.

3. 행복을 주시는 예수님

로베르토는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소년이었다. 다리가 무릎 안쪽으로 심하게 굽은 이 소년은 가난과 절망이 끊임없이 찾아드는 암담한 삶을 살아갔다. 로베르토는 개처럼 네 발로 기어다녀야 하는 신체의 장애 때문에 교육받을 기회를얻을 수도 없었다. 훌쩍 십대가 되어버린 로베르토에게 삶은 무정하기만 했다. 그런데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 사람들을감찰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로베르토의 불우한 삶에 들어오셨다! 가난과 질병으로 허덕이는 로베르토에게 미국에서 외과 수술을 받을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는 오랜시간 수술한 끝에 다리를 똑바로 펼 수 있게 되었고 인생의 변화까지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로베르토는 일어나 걸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뛰고 달릴 수 있는 다리를 갖게 되었다. 로베르토는 성한 다리라는 열쇠로 소망과 약속이가득한 미래라는 문을 열게 된 것이다! 몇 달 후 로베르토는 인정 많은 후원자들 덕분에 직업 훈련뿐 아니라 개인 교습까지 받을 수 있었다. 소박하고 겸허하고 열정적인 로베르토는 후원자들에게 “제가 할 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걸 도와드리는 겁니다. 그분이 절 도와주셨기에 그분을 섬기는 일이 행복할따름입니다” 하는 말로 감사함을 표현했다. 예수님은 행복에 이를 수 있게 하신다.

로베르토와 같은 육신에 장애가 있는 사람뿐 아니라 영적, 정서적으로 장애가 있는사람들도 말이다. 당신이 누구이건, 당신이 어떤 상황이나 조건 속에 놓여 있건, 당신의 과거가 어떠했건, 당신의 문제가 무엇이건 예수님은 당신을 온전케 하실 수 있다.

4.감사가 불러온 기적

일본 해군장교인 가와가미 기이찌는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귀국하여 오랫만에 고향에 돌아와 보니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으리 만치 피폐해 있어 하루하루 사는 것이 짜증이 났고 불평 불만이 쌓여 갔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전신이 굳어져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다행히 정신치료가인 후찌다 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후찌다씨는 그에게 매일 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억지로라도 만 번씩 하라고 시켰습니다. 기이찌는 자리에 누운 채로 하기 싫었지만 낫기 위해 매일 밤 계속해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들이 감 두 개를 가지고 와서 “아버지 감 잡수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는 이미 그가 매일 계속해서 감사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 감사가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손을 내밀자 신기하게도 손이 움직였고 차츰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던 목도 움직여졌다고 합니다. 말로만 하던 감사가 실제로 감사가 되어 감사로 불치의 병이 낫게 된 것입니다

5.한국교회 신자들의 의식구조

어느 기관에서 한국교회 신자들의 의식구조를 분석한 보고를 다음과 같이 해주고 있습니다.

위로설교에는 90%가 은혜를 받는다
축복설교에는 70%가 은혜를 받는다
죄와 회개설교에는 30%가 은혜를 받는다
헌금과 헌신설교에는 10%만 은혜를 받는다

6. 여성이 살기 가장 힘든 나라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최신호(7월 9일자)가, 분야별로 최악의 나라를 선정, 소개를 했는데, 여성이 살기에 가장 힘든 나라로 회교의 나라 아프가니스탄이 뽑혔다.
1996년, 과격이슬람 세력인 텔레반 정권이 전국을 장악하면서 철저한 회교원리주의 국가로 전환, 심지어 유네스코가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2천년 이상된 유물까지도 우상이라 하여 파괴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회교 율법주의 국가로 탈바꿈한 곳이다.
구체적 내용으로는, 남성들은 턱수염을 깎지 못하도록 하고 이를 어기면 턱수염이 다시 자랄 때까지 감옥에 가두는가 하면, 여성들은 공공장소에서 차도르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감싸고 있어야 함은 물론 외간 남자와 말도 건넬 수가 없다고 하였다.
또 여성들은 의무교육도 받을 수도 없으며 집밖에서는 일도 할 수 없고 친척 남성이 동행하지 않으면 외출도 할 수 없다.
집들의 모든 창에는 페인트로 칠을 해서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했으며, 여러 사람 앞에서 발가벗고 목욕하는 것이 율법에 어긋난다하여 여성공중목욕탕과 뒤이어 남성공중목욕탕까지도 없애버렸으며 도박은 물론 TV, 비디오 등 오락도 못하게 하였다.
이러다 보니 국가 경제는 최악의 상태가 되었고 거리에는 수 십년간의 내전으로 남편을 잃은 부인들이 당국의 눈을 피해 구걸을 하는 일이 다반사라 전한다.
"회칠한 무덤 같으니…"(마 23:27).
거짓종교는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

7. 시련의 유익

조용한 섬나라인 뉴질랜드.
그곳에는 날지 못하는 새가 다섯 종류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섬에는 새를 해치는 다른 동물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뱀들도 독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들은 굳이 공중으로 날아오를 필요가 없게 되고,그저 나뭇가지나 땅에서 지내다보니 날개는 있어도 날지 못하는 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안일은 삶을 무기력하게 하지만시련은 새를 날아오르도록 합니다.
이렇듯 시련은 우리의 삶을 높이 끌어올리는 필수 요소입니다.

8.함몰 웅덩이 증상

플로리다의 한 아파트 주민들이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 창 밖에서 벌어지는 무시무시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바로 앞 도로의 지반이 내려 앉아 플로리다 사람들이 함몰 웅덩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계속 꺼져 들어가는 웅덩이 속으로 자동차와 도로 그리고 잔디밭이 함몰되어 갔다.
그 다음은 아파트가 무너질 차례이다.
이러한 함몰 웅덩이는 가뭄으로 지하수가 고갈되어 지표를 지탱할 힘을 잃을 때 생기는 현상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딛고 있는 땅 조차 안전한지 의심스러울 만큼 갑자기 모든 것이 땅속으로 꺼져 들어간다.
아마 우리들의 내면이 고갈되어 영적인 침체가 왔을 때 , 피곤으로 무감각한 느낌을 받을 때 ,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목표에 대한 쓰디쓴 환멸감 등을 느낄 대 내부는 갑자기 무너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내면의 상태를 잘 돌보아야 한다.

9. 오늘 날의 바나바

사울 왕이 범한 죄 중의 하나는 질투와 미움이었다.
블레셋 대장 골리앗을 넘어뜨린 다윗을 누구보다도 아끼고 키워야 될 그가 오히려 다윗을 질투하여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다.
그는 다윗을 죽이기 위해 군대를 풀어서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굴 속에서 자기 옷만 찢기는 망신만 당했다.
그때 사울은 깨달았어야 했다.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신다는 것을. 그러나 그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시종 분노의 칼을 갈다 결국 자기가 먼저 죽는다.
요한 스타우피츠는 루터를 진심으로 아끼고 키워주었다.
루터를 키워준 스타우피츠가 없었더라면 16세기의 종교개혁이 성공했을까?
종교 개혁자 존 칼뱅을 키운 윌리엄 파렐이 제네바에 있었기에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성공했다.
다소에 묻힐 뻔한 사울을 불러내어 안디옥교회에서 동역한 바나바의 섬기는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늘도 우리 주변에 나보다 나은 사람이 생기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귀하게 여기며 인정해줄 줄 아는 현대판 바나바가 정말로 필요하다

10. 요강을 닦는 머슴

평북 정주에 있던 명문 오산학교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당시 그 동네에는 아주 똑똑한 청년이 살았다.
그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는 청년이었다.
그는 비록 집안이 가난해서 머슴살이를 했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오히려 열심히 일을 했다.
그는 매일같이 주인의 요강을 깨끗이 닦아놓곤 했다.
그러자 모든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이 머슴의 자세를 보고 주인은 이 청년이 머슴살이를 하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해 학자금을 대주며 평양에 있는 숭실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켰다.
마침내 그 청년은 숭실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오산학교 선생님이 됐다.
이 청년이 바로 민족주의자요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조만식 선생이었다.
그는 항상 제자들이 인생의 성공 비결을 물을 때마다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거든 요강을 닦는 사람이 되십시오”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생의 성공비결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데 있다”고 말해준다

11.나는 한알의 복음의 씨앗이 되리라

로마 도미티안 황제 때 안디옥 교회 감독인 이그나티우스는 짐승에 물려 몸이 찢기면서 순교당했다. 그는 로마로 잡혀가면서 소아시아 여러 교회와 서머나 교회 감독이요 동역자인 친구 폴리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타협하지 말라. 내가 놓이기를 바라지 말라. 나는 한 알의 밀씨가 되고 짐승의 이빨에 가루가 되어 하나님의 깨끗한 빵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형벌당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있다면 십자가에서 짐승의 이빨에 뼈가 가루되고 손과 발이 잘리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겠다. 나에게는 오직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다”고 말하였다.

이그나티우스는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는 말씀을 믿고,한 알의 복음의 씨앗이 되고자 각오했기 때문이다.

12.마음의 병

어떤 여자가 남편과 두번째 사별하고 한 믿음직한 남자와 세번째 결혼을 했다.새로 맞은 남편은 아내를 지극한 마음으로 사랑해주었다.그런데 행복에 겨워야 할 부인은 몸이 약해지고 얼굴마저 날이 갈수록 핼쓱해져만 갔다.보다 못한 남편이 물었다.“어디 불편한 일이라도 있는거요” 그러자 부인은 단지 마음의 병이라고만 대답 했다.이에 진실한 남편은 자신이 잘못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어떻게 더 사랑해주면 되겠느냐며 무슨 말이라도 하라고 하자 부인의 대답은 이러했다.“당신이 또 죽으면 어떻게 하나요” 즉 걱정 때문에 몸이 말라간다는 뜻이었다.

사람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할 때와 부정적인 쪽으로 생각하는 결과의 차이는 엄청나다.‘새가 노래한다’고 보는 것과 ‘새가 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로버트 슐러 목사의 책에 이런 얘기가 실려 있다.한 부인이 시장에 나와 작은 고기만 골라 사길래 상인이 물어보았더니 “우리집 프라이팬이 작아서”라고 대답했다.그러자 그 상인은 “부인,고기를 사기 전에 프라이팬을 바꾸세요”라고 했다고 한다.선입견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

13.등불 켜고 준비하는 밤

옛날 어떤 의사가 한밤중에 13㎞나 떨어진 먼 시골로 중환자를 왕진하러 가야만 했다.폭설이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그 집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의사는 가는 길목의 가장 가까운 첫번째 집에다 전화를 걸어 창문에 등불을 켜 둘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이웃집에다 전화를 해서 역시 창문에 등불을 켜 두도록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환자의 집에 이르는 동안 모든 길목의 집들이 창문에 등불을 켜게 되었고 의사는 쏟아지는 폭설과 어둠을 뚫고 길을 찾을 수가 있었다.바로 이러한 것이 우리 교회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서로 도와주는 길목의 등불이어야 합니다

14.두 소녀의 조개줍기

두 소녀가 바닷가에서 사이좋게 조개를 줍고 있었다.문득 그들의 눈앞에 큰 조개가 하나 보였다.그들은 동시에 그 조개를 자기들의 손으로 덮쳤다.두 소녀는 서로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했다.결국 고집이 센 소녀가 그 조개를 차지했다.조개를 빼앗긴 소녀는 마음이 언짢았다.두 소녀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헤어져 조개를 줍게 되었다.그런데 조개를 빼앗겼던 소녀는 뜻하지 않게 값진 진주를 발견하게 되었다.그는 그 진주를 얼른 품속에 감추었다.그의 마음은 완전히 풀렸다.그는 다시금 자기 친구 옆으로 다가가서 다정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조개줍기를 계속했다.그들 앞에 또 큰 조개가 나타났다.그러나 저들은 이전처럼 다투지 않았다.진주를 가진 소녀가 기꺼이 양보했기 때문이다.우리는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이다.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은 너무나도 좋은 곳이다.천국을 소유한 우리는 이 땅의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말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하자.

15.십자가 바로보기

오래전 어떤 목사님이 종려주일 낮 예배 시간에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오늘 저녁예배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특별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미리 깊이 묵상하고 오시기 바랍니다”저녁예배 시간이 되었다.많은 사람이 은혜를 사모하면서 예배당에 모였다.목사님은 촛불을 켜들고는 아무 말없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그는 먼저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이마에 촛불을 비추었다.한 참 뒤 그는 말없이 못박힌 예수님의 손과 발을 촛불로 비추었다.마지막으로 창에 찔려 피 흘리시는 예수님의 옆구리로 촛불을 옮겼다.이것이 그의 설교의 전부였다.그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그곳에 참석한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이번 주간은 수난주간이다.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서 큰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바란다

16.묘비 없는 칼뱅의 무덤

장로교의 창시자인 장 칼뱅은 생전에 남긴 업적도 대단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큰 영적 교훈을 남기고 갔다 칼뱅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장로교회를 창립하자 그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건너가서 장로교회를 세웠고 다른 많은 지도자들도 유럽 각지로 흩어져 개혁교회들을 세웠다.칼뱅이 죽을 때 남겼던 유언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바로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그의 유지를 따라 지금도 제네바에 가면 장 칼뱅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단지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무덤 위에 ‘J.C’라고 이름 약자만 새겨놓았다.그래서 칼뱅의 유언을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의 무덤가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장차 부활의 새 아침이 올 것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들도 칼뱅처럼 아름다운 영적 유산을 이 땅 위에 남기고 가야겠다

17. 밥 태운 건 마찬가진데

시어머니가 밥을 앉히고 며느리에게 불을 때라고 일렀다.
갓 시집을 온 며느리는 밥짓는 경험이 없었던 터라 밥물이 넘치는 줄도 모르고 계속 불을 때다가 밥은 타고 솥은 금이 가고 말았다.
놀란 며느리가 전전긍긍하고 있자 시어머니는 “내가 물을 너무 적게 부어서 그렇게 됐다”며 며느리를 위로했고, 시아버지는 “내가 부엌에 땔감을 너무 많이 들여서 그랬다”라고 했으며, 신랑은 “제가 너무 물을 적게 길어와서 그렇게 됐다”라고 말했다.
길 건너에는 술집이 있었다.
그 집에서도 새 며느리에게 불을 때라고 했고 역시 밥은 타고 솥은 깨졌다.
화가 난 시어머니가 욕설을 퍼붓고 구박하자 며느리는 일부러 그랬느냐며 대들었고, 시아버지는 어디서 말대꾸냐며 호통을 쳤으며, 이에 지켜보던 신랑이 손찌검을 하자 새댁은 죽이라며 대들었다.
대판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가정도, 교회도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은 이해, 사랑, 화해의 물꼬를 트는 것이다.
경직된 사회에 윤활유를 부어 금속음을 제거하는 일이 급선무다.
무너지는 가정, 흔들리는 나라가 걱정스럽다.
주여 이 나라를 구원하여 주소서!

18. 고통을 행복으로 바꾸는 힘

인도의 성자 선다싱이 복음을 전하다 어느 날 네팔의 감옥에 투옥됐다.
그는 마치 바울처럼 감옥에서도 다른 죄수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그러자 이를 못마땅히 여긴 간수가 그를 냄새가 심하게 나는 독방에 감금시켰다.
손과 발을 묶고 옷을 벗긴 채였기 때문에 거머리가 달라붙어 피를 빨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소리높여 찬양했다.
이 모습을 본 선다싱의 고소자가 간수에게 말했다.
“당신은 선다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오?
그는 고통에도 아랑곳없이 노래하며 행복해하고 있지 않소?”
그러자 간수는 “그는 미쳤소.
그리고 우리의 목적은 달성되지 못했소.
우리는 그의 설교를 중단시켰고 고통을 주었소.
하지만 그는 오히려 행복에 젖어 노래를 부르고 있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선다싱의 고소자는 소리쳤다.
“그는 미친 놈이다. 당장 석방시켜라!”
세상을 살다보면 나 때문에 겪는 고난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겪는 고난이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겪는 고난은 값지고 행복한 고난이다.
또 영원한 상급도 함께 마련되어 있다.

19. 마음먹기에 달렸다.

큰 물건을 등에 지고 길을 나섰던 두 장사꾼이 높고 험난한 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때는 여름이고 해는 중천에 떠 있어서 가만히 앉아 있어요 땀이 비오듯 흐르는 무더운 날씨였습니다.
장사꾼 중의 한 사람은 그 큰 재를 짜증난 시선으로 바라다보면서 중얼 거렸습니다.
"재수없는 날이군, 어느 세월에 이 재를 넘는단 말인가."
그런데 다른 한 장사꾼은 희망찬 시선으로 놓은 재를 바라보면서,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재수 좋은 날이군, 이렇게 험한 재가 있으니 재 너머 저 쪽엔 장사꾼이 자주 올 수 없었을거야.
그러니 재를 넘어 가기만하면 물건은 쉽게 팔 수 있을거야."
전자의 장사꾼은 재 너머 마을에서 얻게 될 기쁨을 보지 못하고 목전의 고생만 바라본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있어서 높은 재는 장애물로만 여겨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자의 장사꾼은 목전의 고생보다 그 다음에 올 기쁨을 바라다본 사람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높은 재는 성공을 위한 디딤돌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생의 모든 역경도 꿈이 있는 자에게는 언제나 성공을 위한 도약대가 되는 것입니다.
실패할 사람은 목전의 수고만 바라보고 쉽게 좌절합니다.
그러나 성공할 사람은 고생과 수고 다음에 찾아올 영광을 바라다보면서 인내합니다.

20. 감추인 보화

1971년 아폴로 15호로 달에 다녀온 제임스 어윈의 간증을 들어본다.
"우리가 발견했던 것은 하얀 돌이었습니다.
영국의 과학자 패트릭 모어(Dr.Patrick More)에 의해 오래전에 '창세기 돌'로도 명명되어 있던 그 돌이 왜 그토록 중요했길래 우리에게 그돌은 찾아 오도록 시켰을까요?
저는 그 돌을 발견한 것은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여러분들이 '진짜 돌'을 찾으시길 기도합니다.
저는 감추인 보화 비유를 말할 때 곧잘 이 하얀 돌의 모형을 보여드리곤 합니다.
이 돌을 구하기 위해 왜 그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들였을까요?
과학자들에 의하면 그 돌은 달의 산과 표면의 성질을 모두 알아낼 수 있는 표본이기 때문에 귀할 수 밖에 없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가장 귀한 돌-감추인 보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야말로 내인생에 진정한 의미를 가져다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목사들이 주기철을 파면하고 가족을 추방

최덕성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일제치하의 한국교회의 수난과 그 이후의 진행 과정은 로마제국치하에서의 박해, 특히 7차와 10차 대박해 동안 기독교인들이 당한 수난, 그리고 그 이후 진행 과정과 흡사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우상숭배와 황제숭배 강요와 거부라는 점,
2. 국가가 그것을 강요했다는 점,
3. 수많은 순교자가 생겼다는 점,
4. 박해 후 교회에 분열의 갈등이 일어났다는 점
그러나 갈등의 원인과 분열의 원인은 전혀 달랐다.
(이 글의 많은 내용은 최덕성 교수의 책 <한국교회친일파전통>에서 인용하였다.)

1901년 평양 장로회신학교 설립

조선총독부는 장로교 총회 (제27회, 1937)가 모여 신사참배 결의한 후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가 각 노회 대표들을 인솔하여 평양신사에서 신사참배를 하였다.
한국교회가 일본적 종교로 거듭나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약간의 변절을 한 것이 아니라 아예 신도교로 개종한 것이었다.
 

1938년 9월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평양신학교, “조선예수교장로회 신학교”가 폐교됨

1938년 여름부터 일제는 개 교회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서를 보냈다. 

“천황이 높으냐? 여호와가 높으냐?”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냐? 국가의식이냐?”
“국가지상이냐? 종교지상이냐?”

그리고 그 답변에 따라 집회를 허락하던지, 교회를 해산시키던지 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윤성범은 신앙이 약한자는 신사참배에 항거했고, 그래서 믿음이 약한자이고(롬 14:1), 신앙이 강한 자는(롬 15:1) 그것에 참여했다고 하였다.

한국교회는 1931년 일제가 제정한 법, “신도(神道)가 절대의 도이며, 국민 모두가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법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
각종의 배도하는 신앙고백서를 발표하였다.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규칙”에 의하면, “황국(皇國)의 도를 따라 신앙에 투철하며 각기의 분을 다하여 신도를 실천하여 황운(皇運)을 부익(扶翼)하여 받든다.”는 것을 교단강령으로 선언하였다.

일제 말기의 한국교회는 변절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도교로 개종한 것이다. 일본기독교 조선감리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교회가 단지 “상처받고 수모를 겪는 교회였지 악마의 교회는 아니었다”고 하는 교회역사학자 민경배의 주장은 당시 상황에 대한 바른 이해가 결여된 것임을 보여 준다.

1939년 12월 25 일 평양노회의 종교재판에 의해서 주기철은 우상숭배를 행하지 않는다는 죄명으로 파면되었다.
총회 관할 아래에 있는 자가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한 총회의 결의에 감히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교역자로[서] 국가의식 불응은 총회결의 정신 위반”
이라는 것이다.
평양 노회는 주기철의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을 해임한 것만이 아니라 목사 자격 자체를 박탈했다. 
그를 파면하고 가족을 사택에서 추방하고, 굶주리고 헐벗고 추위에 떨게한 것은 일제가 아니라 한국교회였다.
일제 충견이던 친일파 목사들의 솔선수범에 의해서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들을 박해했다.

주기철의 가족과 수진수난 성도들은 주기철에 대한 파면이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같은 결정을 한 교회를 파괴하여야할 집단으로 보았다.
배교하는 교회의 결정이 자신들의 영적 상태와 신분에 아무런 영향을 주시 못한다고 생각했다.

1940년 서울에 숭동교회에 “조선신학교”가 개교했고 초대 학원 원장에 김대현 장로가 취임했다.
조선신학교는 광복 후 미군정청으로부터 학교인가를 받았다.
교장에 김재준, 전임강사 송창근, 한경직이 취임했다.
조선신학교는 1951년 한국신학대학으로 개명하였다.
평양신학교는 “채필근 신학교”로 다시 개교했으며, 주기철 이름을 졸업생대장 원본에서 없애 버리고 현재의 대장을 다시 만들었다.

일제말기의 신사참배 거부자들은 일제와 우상숭배를 행하는 기존교회부터 이중으로 공격을 받으면서 성경적 진리 하나를 깨달았다.
교회의 기구적 연속성, 고전성, 정통성은 절대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며, 기구적 유전(遺傳)에 집착하는 것은 죽은 전통이라고 보았다.
교회는 이름을 가진 조직기구라도 성경의 중추적인 가르침을 명백하게 위반할 경우에는 그 결정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
그 횡포가 지나쳐 우상숭배를 할 정도이거나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자를 면직, 제명할 정도이면 그 기구를 파괴하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배도하는 총회와 노회의 명령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먼저 순종하고자했다.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여 순결한 한국 기독교를 계승하고자 했다. (p. 197)
 

1941년 3월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회가 해체됨

1943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해체되었다. 1945년 장로교라는 이름마저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 1907년에 첫 노회가 조직되고 1912년 가을에 총회를 조직한 한국 장로교회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 대신 (평양 장로회신학교 대신) 조선신학교 (서울에)와 채필근신학교가 (평양에) 세워졌다. 일제의 황민화 도장으로 인허된 이 학교는 목사, 전도사가 아닌, 교회사(敎誨師), 정교사, 보교사를 양성했다. 일제는 목사를 “정교사” 전도사를 “보교사”로 부르게 했다. 정교사, 보교사는 일본적 기독교의 순복음(純福音)을 전파하는 자들이었다. 순복음이란 신도주의와 기독교를 혼합한 신도교를 뜻한다. 겉모양은 기독교이지만 내용은 신도주의로 채워진 일본식 혼합종교이다. 일제의 “순복음교회”는 신도교를 뜻한다.
 

1944년 3월 26일,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의 정교사(正敎師) 안수식

순일본기독교의 교회사(敎誨師)로 안수를 받은 것이다. 1944년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임원들은 “적성(赤誠)을 다하여 하루라도 빨리 완전한 황민화(皇民化)를 하는 것이 최대의 급선무”라고 하면서 “황국의 도를 따라 ... 신도(神道,臣道)를 실천하며 황운을 부익하여 받든다”고 고백하고서 작위를 하사받듯이 목사 감투를 쓴 자들이었다. 광복 후에도 이들은 참회고백 없이 한국교회를 주름잡았다.
 

1946년 출옥성도들이 고려신학교(현 교려신학대학원, 천안) 설립

1995년 6월 장신대학 정기교수회에서 조사하여 주기철 목사의 이름을 학적부에서 제거된 것을 확인하였고, 일제 황민화 정책의 전열에선 '채필근 신학교'가 의도적으로 그의 이름을 삭제하였다고 결론지었다. 채필근 신학교는 신도주의와 기독교가 혼합된 “순정일본적 기독교”(純正日本的基督敎)라고 부르는 신도교의 교회사(敎誨師) 양성소가 되었다. 그리고 광복 (1945년) 후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친 친공산주의 신학교가 되었다.
 

한국교회 죄책 고발자 주기철

주기철은 우상숭배를 거부한다는 까닭으로 자신을 면직시킨 한국교회의 죄책 고발자로 서 있다. 한국교회의 배도, 백귀난행(百鬼亂行), 민족배신, 비인도적 행위를 고발하고 있다. 거짓이 참을 능멸하고, 불의가 정의를 학대하고, 악이 선을 짓밟는 친일파 전통의 악마적 습성에 항거하고 있다. 비진리가 진리를 배척하고, 배도자가 순수 신앙인을 추방하고, 가룟 유다들이 신실한 선지자들을 능멸하는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한국교회에 대한 고발자로 서 있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주기철의 일제에 대한 항거와 일사각오 신앙만을 강조했지, 그가 배도하는 교권주의 장로교 집단에 항거한 일에 대해서는 눈여겨 보지 않았다. 일제에 의해 박해를 받은 것만 강조했지 한국교회가 그를 박해한 것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는 우상숭배를 거부한다는 까닭으로 자신을 파면한 한국교회를 고발하고 있다. 주기철은 조직기구의 그릇된 결정을 절대화하고 광복 반세기를 넘기도록 공적인 참회고백문 한 장 발표한 바 없는 양심부재의 한국교회를 고발하고 있다.

주기철은 치리회적 질서를 무시하는 교회, 중세기적 미신을 버리지 않는 교회, 순교자를 교권의 확보와 자파의 위상향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교회에 대한 항의자로 서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성을 갖지 못한 교회, 믿는것과 행하는 것이 불일치하는 교회, 이중성, 기회주의, 두 얼굴, 양시론, 타협주의, 회색주의의 습성을 버리지 않는 교회에 대한 고발자로 서 있다.
 

1997년 4월 주기철 목사 복권

주기철 목사의 아들 주광조 장로는 주기철 목사복권과 관련하여 주기철이 “하나님 앞에서 면직도, 파면도 된 바 없다”고 했다. 복권 복직 선포식에서도 그 선포식 자체가 무용하다고 했다. 목사복권 결정은 그 자체가 신학적, 치리회적 근거가 없는 일이며 그 치리회의 결정은 불법이며, 무효이다. 그런데 왜 주광조는 주기철의 목사복권 행사를 원했느가? 주광조 일가에서 주기철의 순교정신은 표류하고 있다.

목사복권 사건은 조직기구, 형식, 제도를 절대시 하는 그릇된 교회관과 왜곡된 역사인식이 낳은 일대 불상사였다. 교회의 존재는 조직기구와 그 결정에 달려있지 않다. 주기철 목사복권 및 복적선포식에 참석한 일본인 도까 가쓰야 목사는 일본교회가 영원히 죄책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이 행사를 주도한 통합측 교단과 장신대학은 단 한 마디의 참회의 말도, 반성의 표현도 없었다.

조직기구(교회)의 결정을 절대화하거나 교회의 본질을 조직기구에서 찾는것은 잘못이다. 교회의 본질을 기구적 연속성과 고전성 혹은 정통성에서 찾는 것은 로마가톨릭 전통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교회의 존재를 외형적인 요소에서 찾지 않는다. 영적, 신앙고백적 실체에 달려있는 것으로 본다. 배도하는 교회가 결정한 것을 유효한 것으로 여겨 복권을 시킨 것은 개혁주의 교회론과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반역이다.

그러면 배도하는 교회의 파면을 유효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면, 왜 배도하는 교회의 성례나 안수는 유효한 것을 볼 것인가? 주기철 목사 복권을 주도한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한국교회를 로마가톨릭 교회관의 시녀로 갖다 바쳤다. 배도하고 우상숭배하는 교회에서 파면당한 것만큼 명예로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가 파면을 당한 것은 순교 다음 가는 영예로운 일이다. 목사복권으로 주기철의 명예가 회복된다고 하는 발상의 배후에는 한국교회의 신앙좌표 설정에 혼란을 준 특정 교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교권주의, 제도주의, 형식지상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로마가톨릭 교회관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973년 03월 17일 / 채필근 목사 소천

1973년 3월 17일 한국 교회의 산증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채필근 목사가 소천했다.
그는 일생동안 자기만의 노선을 개척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박형룡 박사가 정통주의 입장을, 김재준이 진보주의 입장을 천명했다면 채필근은 정통주의와 진보주의의 양극단을 배격하고 중도 노선을 걸었다.

191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채필근이 평양신학교의 정통주의에서 온건한 입장으로 선회한 것은 일본에서 유학하면서였다.
1920년 캐나다 선교회의 주선으로 일본에 유학한 채필근은 메이치학원 고등학부 문과(1923년 졸)와 동경제국대학 문과(1925년 졸)에 유학하면서 신학영역을 넘어 폭넓은 세상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그가 신학뿐만 아니라 종교일반, 철학, 역사, 심리학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저술도 남겼던 것도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그에게는 정통과 진보가 공존하고 있었다.
평양신학교 출신이면서도 조선신학원 설립운동에 관여하였고, 1943년 장로교 총회가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되자 초대 통리로 선출되기도 했다.
1930년대 초 김재준, 송창근 등이 <신학지남>에 진보적인 글을 발표하고 <아빙돈 단권주석> 번역에 참여하는 등 전통적인 신학이 위협을 받을 때에는 그는 교단의 입장에 서기보다는 진보적인 노선에 있는 이들과 입장을 같이했다.

교회가 단순히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적지 않은 도전을 가져다 주었지만, 교회가 상황과 시대의 변천에 따라 입장을 달리해 교회 본질 자체를 퇴색시켰다는 면에서는 비판을 받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최대의 보증서이다.

미국에서 물건을 살 때 보면 몇 십 달러짜리 물건에도 대개 보증서가 붙어 있다.
그리고 잘못되었을 때 보증서만 보이면 군소리 없이 새 것으로 바꾸거나 수리해 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최대의 보증서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는 것이다.
먹고 입고 사는 일에도 하나하나 보증이 필요하다.
그래서 보험회사가 잘 된다.
퇴직, 은퇴, 생명보험 등 여러 각도에서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하여 안정을 보장받아야 안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백 년 미만의 제한된 미래만을 보장할 뿐이다.
그리스도가 발행하시는 생명보험은 영원한 보장을 약속한다.
우리가 지불하는 보험료는 단지 믿음뿐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당하는 죽음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형의 죽음을 철저하게 통과하셨다.
빌라도의 "이 사람을 어떻게 하랴"라는 물음에 대한 군중의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죽여야 하오. 십자가요! 죽음이요!" 하고 외치는 고함소리에 예수는 만족했을 것이다.
죽어야 제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죄악을 향한 신의 진노를 풀고 용서의 은총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했던 것이다.
제단을 생략한 속죄는 있을 수 없다. 예수는 죽어야 했다.
그 길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들의 길이며 종의 길이며 구세주의 길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부활과 생명은 하나님의 만족을 나타내는 보상 곧 은혜인 것이다.
크리스찬의 행복이란 십자가가 주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가 가볍게 느껴질 때가 은혜받은 때이다.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를 생각하며 감사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예수와 함께 구체적인 십자가를 질 때 은혜에 대한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십자가는 특별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는 자는 그것을 어리석은 것이요, 부끄러운 것이요, 손실이요, 후회만이 남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 자에게는 그것이 자랑과 기쁨과 영광이 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 다시 가져 가십시오

아주, 아주 옛날에 나이가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 부부가 살았습니다.
그들은 나이가 계속 들면서, 자신들의 미래에 대하여 걱정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끔 이런 질문들을 해봅니다.
"만일 우리에게 돈이 다 떨어지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누가 우리를 돌 볼것인가?"
"누가 우리의 셋돈을 낼 것인가?"
"누가 우리에게 먹을것을 사 줄것인가?"
그들은 이와같은 생각들을 가끔 했습니다.

그들은 매일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매일 들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장래의 일에 대하여 걱정하고 걱정 했습니다.

어느날 아침이었습니다.
할머니가 아침을 만들기 위하여 부엌에 들어갔습니다.
할머니는 부엌에서 난로위에 큰 보석이 하나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할머니는 남편 할아버지에게로 황급히 와서 "여보, 이것좀 보세요! 이 큰 보석좀 보세요. 부엌에 있었어요." 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크 큰 보석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햇습니다.
"여보, 이제 우리는 미래에 대하여 더 이상 걱정안해도 되게 되었어요.
이 보석은 엄청난 가치가 있어요.
팔면 큰 돈이 될거예요.
이것을 팔아서 무엇이든지 많이 삽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날밤 할머니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에서, 할머니는 천국에 가 있었으며, 한 천사가 할머니에게 모든 곳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구경하는 가운데, 천사가 아름다운 의자가 많이 있는 곳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의자마다 아름다운 보석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천사는 설명했습니다.
"이 의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지 돈을 믿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천사는 또 할머니에게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는 의자를 보여주었습니다.
천사는 "할머니가 천국에 오시면 이 의자가 할머의 의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할머니가 자기 의자를 자세히 살펴보니 큰 보석이 하나 들어갈 만큼의 빈 구멍이 하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있던 보석은 어디 갔습니까?"
천사는 대답하기를, "여기있던 보석이 할머니의 난로위에 있던 그 보석입니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그 보석을 미리 받은 것입니다.
만일 할머니가 그것을 팔아서 돈을 써버리면 다시는 되찾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할머니가 꾼 꿈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할머니는 남편에게 꿈이야기를 했습니다.
한참동안 그들은 그 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 보석을 되돌려 주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지 보석을 믿어서는 안된다."라고 햇습니다.

그날저녁 잠자리에 들기전에 그들은 그 보석을 난로위에 되돌려놓고, "하나님 다시 가져 가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보석을 다시 가져가셨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그들이 일어나 난로를 보니보석이 없어졌습니다.

두 노인 부부는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두 노부부는 도둑맞을 염려가 없는 하늘에 보물을 두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적 성숙함의 특징들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할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가 잘못 진단을 한다면 결국 스스로에게 속고 맙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무엇으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해 왔습니까?

아래 세 가지 질문은 어쩌면 가장 정확하게 우리들의 영적인 상태를 공개하는 질문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이 질문들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대답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1.  당신은 어떠한 댓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결단이 있는가?

2.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를 양육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3. 당신은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채필근(蔡弼近) 목사 : 3년상을 치르고 공자님께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평양신학교 교장을 지냈던 채필근(蔡弼近) 목사는 한학과 동양학은 물론 해박한 신학과 철학을 겸비한 신학자였습니다. 
본래 채 목사는 철저한 유교가정에서 자랐으며 유교경전에 심취했습니다.
그런데 14살 되던 1898년도에 아버지가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당시 소년 채필근의 심정은 아버지를 이단에게 빼앗긴 것 같은 슬픔으로 가득했습니다.
개종한 아버지는 600여권의 책을 쌓아 놓고 공부하던 유명한 한학자이셨기 때문입니다.

채필근은 공자에게 이렇게 하소연했습니다.

“공자시여, 아버지가 그리스도교를 공박하고 유교를 옹호하는 글을 쓰시겠다더니 기독교 경전 성경을 보시다가 불행하게 그리스도교에 빠지셨습니다.
공자의 말씀에 이단을 공부하면 해롭다고 하심이 이것을 가리키심인 듯합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공자의 도를 버리지 않기로 맹세합니다.”

그로부터 1년 후 아버지가 채필근을 부르더니

“내일은 주일이니 예배당에 함께 가자”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난생 처음 아버지를 따라 예배당에 갔습니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온 채필근은 공자께 다시 호소하였습니다.

“공자님, 정말로 죄송합니다.
당신의 가르침 중에 아버지가 잘못하면 간하고 간하여도 듣지 않으면 울면서 좇으라고 하셨지요.
세상을 떠나시면 3년까지 고치지 말라고 하셨지요.
저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3년상을 치르고 틀림없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러나 채필근은 끝내 공자한테 돌아가지 않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훗날 채필근 목사는 ‘공자께’ 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 공자에게로 돌아오겠다던 맹세를 지키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러나 나는 공자가 살아 계시다면 반드시 그리스도교에 귀의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공자나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같은 성인들도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5 새벽묵상 역대상




성전(聖殿)을 정화(淨化)하신 예수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교의 예배와 삶의 중심이었다.
성전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백성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제사를 드리는 처소였다.
그런데 예수 당시 성전은 율법주의에 빠진 이스라엘이 속죄를 위하여 타성적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을 사고 파는 종교적 장사터로 변모하였다.
예수는 이 사실을 보고 진노하셨고 동물들을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테이블을 뒤엎으시면서 성전을 정화하신 것이다.

I. 구약의 성전 : 가시적 성전

구약 출애굽 광야시절에서는 하나님은 이동식 성전인 성막(聖幕, tabernacle)에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셨다.
성막의 지성소는 하나님 임재의 처소였고, 가장 거룩하였다.
성소에서는 속죄물을 바침으로써 백성들의 죄가 속(贖)함을 받았다.
지성소(至聖所, sanctum sanctorum)에는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 들어가 희생의 제물을 바침으로써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였다.
성막에는 하나님의 법궤와 만나와 아론의 지팡이가 진설(陳設)되었다.
성막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였다.
모세는 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만났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후에는 솔로몬 왕에 이르러 비로소 예루살렘 성전이 건립되었다.
이 솔로몬 성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이 성전은 바벨론(Babylon)제국에 의하여 훼파되고 하나님의 전(殿)의 집기들은 바벨론으로 옮겨가게 된다.
구약의 역사서인 역대하서는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여호야김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년 동안 다스리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와서 그를 치고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느부갓네살이 또 여호와의 전 기구들을 바벨론으로 가져다가 바벨론에 있는 자기 신당에 두었더라”(역대하 36:5-7).

그리고 다니엘서 서문에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殿)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다니엘 1:1-2).

그리하여 무너진 성전은 70년 후에 에스라와 학개와 스룹바벨이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복구되고, 헤롯 시대에 와서 성전은 다시 확장 신축된다.

II. 성전을 정화하심 : 요한복음의 기록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복음서 앞부분에 예수의 성전을 정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는 복음서 끝부분에 기록되고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성전 정화가 가나 혼인 잔치와 같이 복음서 서두에 놓여 있다.
여기에는 성전 되신 예수의 메시아성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편집 의도가 부각되어 있다.
유대인의 유월절 절기에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 가신다.
성전은 내뜰과 외뜰이 있다.
외뜰은 내뜰로 들어가는 것이 금지된 이방인 방문자들에게 열려 있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경배하러온 이방인 경외자들은 외뜰에서 경배해야만 했다.
이방인 경외자들은 방문시 히브리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도록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이사야는 예언하였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일컬어지게 될 것이다”(사 56:7).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성전은 기도의 집에서 종교적 장사터로 변모되어갔다.
짐승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희생제물로 사용되었다.
짐승들은 제사드리는 자들에게 상품처럼 팔렸다.
그런데 이것이 관례가 되어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전(殿)은 장사터로 변모된다.
외뜰이 팔리는 짐승으로 채워져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경배할 공간까지 빼앗았다.
성전은 경건의 영과 헌신의 정신 없이 단지 형식적인 율법적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각종 번제물을 사고 파는 장사터로 변모한 것이다.

예수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신다”(요 2:14-15).
그리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신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6).
성전부패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성전에서 일과를 수행하는 일반 제사장들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지도급 제사장 가문이었다.(에녹1서, 모세의 유언 5:3-6:1)

예수의 성전 정화 행위는 헤롯 성전 뜰의 남단에 위치한 주랑(Royal Portico) 가까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전 예배에는 순결한 비둘기와 동물이 필요했다.
환전상들은 성전세를 지불하려는 자들에게 두로 세겔(Tyrian Shekel)로 환전해 주었다.
두로 세겔은 비록 유대인들에게 반감을 일으키는 상징을 담고 있기는 했지만 최고의 품질과 함께 은의 함량도 가장 높았다.
두로 세겔은 오늘날 미국 달러(dollar)처럼 당시 구할 수 있는 가장 잘 통용된 주화(鑄貨)였다.

성전을 정화하신 이러한 예수의 행위를 요한은 다음같이 해석한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 2:17).
요한과 제자들은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의 메시아적 사명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복음서 저자 마태는 이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의 행위가 예수를 십자가 죽음에 이르게 한 고발거리를 제공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가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공회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이 와서 성전을 정화할 시(時) 예수가 한 말을 고발하고 있다.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마 26:61).
유대인들에 의하면 이들은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성전을 허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손상하는 것이며, 참람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제사장 신분도 아니고 갈릴리에서 올라온 무명 랍비였던 예수가 성전을 정화하신 행위는 그의 메시아 의식에서 바르게 조명될 수 있다.
성전 정화 행위는 예수의 상징적인 메시아 행위(symbolic Messianic action)였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실 시에 하신 말씀 “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만에 짓겠다”는 나중에 예수가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을 때 성전 모독의 죄목으로 고발된다.

III. 성전 정화의 권위는 예수의 메시아 되심에서 나옴

유대인들은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의 행위에 대하여 항의하면서 이에 대한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한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요 2:18).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에게 그가 어디서 그런 일을 행하는 권셰를 받았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대답한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성전 정화 행위는 예수의 메시아 의식과 관련하여 이해될 수 있다.
당시 제사장 신분도 아니고 변두리 지역인 갈릴리에서 올라온 무명 랍비에 불과한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한 것은 그의 메시아적 자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성전 정화 행위는 선지자적 표적(表蹟, wonder) 행위 이상의 것이었다.
우리는 구약의 전통에서 이사야나 에스겔 등 예언자들에게서 타락한 제의(祭儀)에 대한 비판적 예언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랍비 예수가 몸소 채찍을 들고 성전을 정화하였다는 것은 예언자적 비판을 넘어선 나사렛 예수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독특한 행위이다.
이것은 메시아적 표적 행위였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이러한 예수의 메시아적 자의식을 다음같이 표현하고 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라는 구약의 수난 시편 69장 9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장사터로 변한 성전의 불결해진 모습을 보면서 성전 자체가 되시는 자신의 몸을 청결케 하여야 한다는 성전(聖殿)사모의 열정을 표출한 것이다.
예수의 인성이 그 안에 계시는 신성을 표출한 것이다.

예수는 그의 몸인 새로운 영적 성전을 지으시기 위하여 돌로 지어지고 의식(儀式)으로 집전되는 옛 성전을 허시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말씀에는 그의 메시아적 사역의 핵심 사상이 들어 있다.
성전에서 사고 파는 행위를 금지한 이유는 당시 성전 제사가 타락한 것을 지적할 뿐 아니라 성전 제사가 자신이 몸으로 드릴 종말론적 제사에 의하여 능가될 것을 예표하신 것이다.
또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짓겠노라”는 예수의 말씀은 메시아로서의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촉발하게 하는 의도가 담겨있는 말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죄를 속하고 이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는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종말론적으로 성취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IV. 성전 정화 행위의 종말론적 성격

성전 정화 행위가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 직후에 일어났다는 것은 예수 정화 행위의 종말론적 성격을 드러낸다.
예수의 성전 정화 행위는 유대교 정결법을 수호하려한 단순한 개혁 행위로 이해하는 것은 이 행위가 갖는 종말론적 성격을 놓치는 것이다. 그것은 세 가지 종말론적 의미를 갖는다.

제도적 성전 제사 시대 종언 : 예수 안에서 종말론적 예배 시대 도래

제도적 성전 제사 시대가 지나갔다는 것이다.
제도적인 성전은 모세가 준 율법에 의하여 생긴 제도다.
율법은 신성한 하나님의 법이긴 하나 이 율법은 인간의 외면적 행위에 대한 규칙을 명하는 것으로 그것의 효율성은 외부적인 것이었다. 율법에 의한 예배는 진정한 내면성에서 나오는 진심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었다.
율법에 의하면 진정한 예배란 단지 짐승의 기름이나 제물만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법을 행하는 의로운 제사여야 했다. 성전 제사가 타락하게 되었을 때 이사야는 불의한 제사를 비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이사야 1:11).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이사야 1:13).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이사야 1:16-17).

이러한 구약적 예배는 제물드리는 자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물 드리는 자의 허물을 번제 제물에 전가(轉嫁)하여 사함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예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되심은 옛 제사의 종말론적인 성취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구약적 예배가 끝나고 그 자신 안에서 종말론적 예배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한복음 4:21-22).

예수는 성전에서 나와서 제자들에게 성전파괴를 예언하신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태복음 24:1-2).
예수의 성전 파괴 예언은 추후 70년에 로마 디도 장군이 이끈 군대에 의하여 파괴된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함께 구약적 성전 예배는 역사 속에서 종말을 고하게 된다.

신령한 성전의 시대 도래 : 예수의 몸이 성전

신령한 성전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예수의 정화 행위는 메시아가 성전 제도를 바로 잡을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를 시사한다.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제 성전 시대가 지나가고 영으로 드리는 예배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신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하나님에게는 이제 더 이상 외형적 제물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아가 오시면 참된 예배를 알려주실 것이라는 당시 널리 알려진 메시아 대망을 피력한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 4:25).
이에 예수는 자신이 바로 메시아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요 4:26).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제사장에 따라서 예배의 성격이 달라지는 가시적 성전이 필요 없다.
예수의 몸은 신령한 성전이다: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

소아시아의 콘스탄티노블에 있는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의 점령 후에 모스코로 변했고,
러시아 정교의 화려한 성전은 볼세비키 혁명과 70년간 공산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곡물창고가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영국 국교회(성공회), 덴마크 루터교회, 독일의 교회당, 네덜란드 교회당이 폐쇄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교회가 슈퍼마켓이나 꽃집 또는 서점이나 헬스 클럽으로 변경된 사례들이 발생했다.
가시적 성전은 변화무상하며, 영구적이 아니다.
가시적 성전은 비가시적 성전을 상징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가시적 성전은 유한하나 비가시적 성전은 영원하다.
하늘의 성전인 새 예루살렘에서는 더 이상 성전이 필요 없다.

성전은 (유대인들만의 성전 너머) 만인의 기도의 집

성전은 이제 더 이상 유대인들만의 성전이 아니라 만인의 기도의 집이다.
요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요 2:16b)
요한은 예수의 성전 정화 동기를 구약 시편 69편 9절을 가져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요 2:17)라고 설명하고 있다. 요한의 이러한 설명을 공관복음과 연결시키면 보다 적극적으로 구약 이사야의 예언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사 56:7b; 막 11:17a) 라는 구절과 연계하여 이해될 수 있다.
마태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21:13),
누가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눅 19:46)라고 인용했다.
“만민”을 누락했으나 인용된 구약 이사야서의 원문에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의 말씀은 성전이 더 이상 유대인만의 기도처가 아니라 택함을 맏은 모든 사람들의 기도처가 될 것을 시사(示唆)해주고 있다.
마가가 인용한 이사야 56장 7절 다음에는 하나님 선택의 보편화가 약속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사 56:8). 이방인들도 복음을 믿고 회개하면 성령으로 중생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되며 하나님의 성전에서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과 교통하게 된다.

V. 성전 보다 큰 이 인자 예수 그리스도

마태는 예수와 바리새인 간의 안식일 논쟁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시장하여 밀이삭을 잘라 먹었다.
이 장면을 본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율례를 어겼다고 비난하였다.
예수는 이에 관련하여 구약 율법 정신의 관점에서 제자들의 행위를 변호하신다.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마태복음 12:3-5).
안식일에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예배와 의식 집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안식일에 쉴 수 없다.
일을 해야만한다.
그러므로 직무상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예수는 모세 율법이 제정한 성전법을 넘어서서 성전(聖殿)의 정신을 말씀하시고 자신에게 고유한 전대미문의 결정적인 메시아 권위를 표명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2:6-8).
예수 자신은 보이는 구약의 성전보다도 크신 자다.
성전의 제사에는 회개와 새로운 삶의 결단이라는 윤리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렇치 않고 드리는 불의한 제사는 하나님이 미워하신다.

예수의 말씀은 불의한 제물을 드리는 당시의 부패한 성전제사를 질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이사야의 말씀을 확인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이사야 1:11-17).

하나님은 인격적인 신이시므로 정의로운 삶과 행실이 동반되지 않은 종교적인 제물 희생을 싫어하신다.
하나님은 선행을 행하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우며, 고아와 과부의 억울함을 변호하는 삶의 제사를 원하신다.
이러한 윤리적 제사는 구약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로부터 바라시는 것이었다.
관례적으로 드리는 속죄제, 그리고 악행과 죄을 행하면서 신의 진노를 무마하기 위하여 드려지는 제물 희생을 하나님은 가증스럽게 여기신다.
하나님은 의로운 제사를 원하신다.
예수의 성전 정화는 구약 이사야가 대언한 의로운 제사를 메시아적 권위로서 수행하신 행위이다.

구약의 다윗 회개의 시편도 이러한 예수가 가르치는 제사의 정신을 말해주고 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시편 51:16-19).

예수는 성전 제사의 정신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헌신과 회개에 기반해야 하는 것이요, 각종 성전 제사란 이의 가시적 표현이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전대미문의 결정적인 권위를 표명하신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메시아인 자신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공으로서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충족시키신다는 것이다.

VI. 신약의 성전 : 예수의 몸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씀: “내가 삼일 만에 이 성전을 지으리라” 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를 힐난한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요 2:20). 예수의 이 말씀은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새 성전을 지으실 것을 공포(公布)하신 것이다.

헤롯 왕은 주전 20년/19년에 화려한 성전 확장공사를 시작하여 실질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을 새로이 건축하였다. 46년간이나 걸렸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아는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말씀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허튼 소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 요한은 “삼일만에 성전을 일으키리라”는 예수의 말씀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21-22).

이 성전 정화 행위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과의 연관 속에서만 바르게 해석되어 질 수 있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성전이란 예수의 몸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성전인 예수를 헐어 버리고자 했다. 말하자면, 성전이신 예수를 죽이고자 했다. 몸을 지니신 예수는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는 장사된지 사흘 만에 다시 사셨다.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예수는 그의 몸으로 새로운 성전을 지으신 것이다. 몸을 지닌 예수는 부활 하신 후, 성령의 임재 안에서 새로운 성전이 되신다. 이제 신령한 성전이신 예수(교회)는 우리가 하나님 만나는 처소가 된다. 사도 요한은 그의 계시록에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이상 보이는 성전이 필요없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스스로 성전이 되시기 때문이라고 하나님의 장막이 인간과 함께 거하는 종말론적 사건을 증언한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

VII. 성도(聖徒)의 몸인 성전

나사렛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인 진리의 영을 보내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복음서 저자인 요한은 예수의 말씀을 전해 주고 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예수가 보내실 다른 보혜사란 ‘희랍어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etos)로서 ”변호사/조력자”를 의미한다. 다른 보혜사는 위로자(comforter)이다. 예수는 그가 부활하신 후에 위로자인 성령을 보내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에 따라서 오순절 이후에 믿는 자의 마음 속에 위로자 성령을 보내어 주셔서 신자들의 마음 속에 내주하고 계신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모신 신자들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聖殿)이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성령의 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신자의 몸이 성령의 전인 것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고전 6:17)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신자의 마음 속에 인격적으로 내주하기 때문이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여기서 사도 바울은 보이지 않는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가보면 헤롯의 성전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예수께서 성전 정화하신 사건 이후 40년만에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년 로마군에 의하여 훼파된다. 그 후로 돌로 지어진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옛날 성전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이슬람이 세운 황금 성전 모스크(mosque)이다. 그리고 훼파된 성벽의 일부에서 유대인 방문객들이 종이 쪽지에 기도문을 써서 성벽 틈에 밀어 넣은 장면이 보인다.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은 더 이상 가시적 성전 속에 계시지 않으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의 전파를 통하여 복음자체 이신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마음 속에 영으로 내주하심으로써 성전을 이루고 계신다.

VIII. 사라지고 있는 오늘날 유럽교회 : 한국 등 제3지역에서 성장하는 교회

기독교 이후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2천년 역사를 지녀왔던 유럽지역의 교회당은 폐쇄되거나 이슬람 모스크나 세속 상업용 건물 등으로 변모하고 있다.
서부 유럽에는 신도들의 수가 급감하자 폐쇄되어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교회당이 수백 개에 이른다.
특히 덴마크와 영국의 시골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지역 당국이 재정을 지원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서 오래된 교회 건물은 도서관이나 문화 공간으로 용도 변경하여 어떤 건물은 상업적 용도로 탈바꿈 되기도 한다.

영국 국교회(성공회)에서는 매년 약 20교회가 문을 닫으며, 덴마크에서는 매년 200개의 교회들이 용도가 변경되거나 사용되지 않게 된다.
독일의 천주교회는 지난 10년 간 515개의 교회가 폐쇄되었다.
교회 폐쇄가 가장 심한 유럽의 국가는 네덜란드이다.
네덜란드의 천주교 지도자들은 앞으로 10년 동안 전체 천주교회 1,600개의 2/3 정도가 수명을 다할 것이며, 4년 이내에 700개의 개신교 교회가 문을 닫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네덜란드는 동성애 허용 등 각종 세속주의와 인본적 자유주의가 득세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헤르만 바빙크, 아브라함 카이퍼 등이 주도된 개혁주의 정통주의가 교회와 사회를 이끌었으나 오늘날 인본적 자유주의가 교회와 사회를 지배하기에 이르런 것이다.
유럽교회가 사양(斜陽)길을 가고 있는 중요한 이유는 교회가 가진 영성의 쇠퇴다.
교회 안에 동성애, 혼외정사 허용, 종교다원주의, 세속주의가 들어오면서 이에 많은 신자들은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고 있는 것이다.

유럽에서 유대교는 아직 굳건하며, 이슬람은 아프리카와 중동의 무슬림 국가들에서 들어오는 이주민들의 증가로 오히려 성장하고 있다. 미국의 Pew Research Center에 따르면, 유럽의 무슬림 비율은 1990년 4.1%에서 2010년에는 6%로 증가했으며, 2030년에는 8% 정도로 높아지고 그 수는 5,8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교회의 쇠퇴현상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시적 교회는 조직화된 교회로서 그 수명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단체나 조직이나 국가도 그 수명이 있고 그 수명이 다하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
유럽의 가시적 교회가 세속화 됨으로써 교회의 영성이 상실되고 이 가운데 신자들도 기독교를 하나의 문화와 생활방식으로만 이해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비가시적 교회는 시대와 공간을 너머서서 영원히 지속한다.
비가시적 교회는 성령과 말씀이 지배하는 신령한 공동체다.
지구촌 북반구에 속한 유럽과 미국에서 쇠퇴한 교회는 오늘날 지구촌 남반부 지역과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지역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가시적 교회도 크게 성장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비록 탈성장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하나 세계적으로 메가처치(mega-church)가 7개나 있다.
교회의 주인이신 성부, 성자 성령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만이 쇠퇴하지 않고 썩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계시고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IX. 새 하늘과 새 땅의 성전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은 그의 계시록에서 다시 성전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지는 성전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요한은 종말론적으로 다가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본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요한계시록 21:1-2).

이 종말론적인 새 하늘과 새 땅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인간 가운데 거하신다.
하나님이 거처를 인간의 거처 가운데 정하신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요한계시록 21:3).

종말론적 현실에서 새 예루살렘 안에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요한은 증언한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요한계시록 21:22).
하나님과 어린 양 그리스도가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해와 달도 필요없다.
하나님과 어린 양 그리스도가 새 하늘과 새 땅의 등불이 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 누리에 편만하기 때문이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요한계시록 21:23).
지상의 성전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일 뿐이다. 지상의 성전은 성전 자체이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상징일 뿐이다.

X. 성전의 완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옛 예루살렘 성전이나 신약의 교회당은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 그의 성령을 보내어 주신 이래(以來) 하나님은 이제 그의 성도들의 마음 속에 내주하신다.
그러나 바울은 아직도 우리는 하나님을 희미하게 본다고 말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세상의 종말에 이르러 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며, 주님이 우리를 아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알게 된다.
이 장면을 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계시록 21장에 환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성전이 없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요한계시록 21:22).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교는 완성되기 때문이다.
지상의 성전이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난다.
그 때 하나님의 장막이 인간들 가운데 계셔서 하나님이 친히 인간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이다(요한계시록 21:3). 


역대상 26장 요약

고라, 므라리 자손이 성전 문지기 임무를 맡았고, 게르손의 후손들은 성전 곳간을 맡았고, 다른 레위인들에게도 여러 임무를 맡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27장 요약

월별로 왕실 근무 지도자와 관원 24,000명을 배치, 이스라엘 각 지파 지도자들의 명단과 다윗왕 왕실의 재산 관리를 돌보는 자들의 명단,신하들과 개인 고문의 명단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역대상 28장 요약

다윗이 성전 지을 계획을 신하들에게 알려주었고, 솔로몬에게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라고 당부하였으며 성전을 지을 설계, 예배, 기구 등을 설명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29장 요약

성전을 짓기 위해서 다윗과 신하들은 하나님께 예물을 바쳤으며 다윗이 백성들과 함께 찬양과 기도를 드린 후 제사를 드렸으며, 이후 다윗이 죽고서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막(미시칸. mishkan ) מִשְׁכָּן 스트롱번호 4908

1. 거주.  2. 욥 18:21. 3. 굴
발음 [ mishkan ]
어원  / 793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39회 사용

성전(비이라. bîyrâh ) בִּירָה
스트롱번호 1002

1. 요새.  2. 성전
발음 [ bîyrâh ]
구약 성경  / 16회 사용

교회(에클레시아. ĕkklēsia ) ἐκκλη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1577

1. 회.  2. 모임, 운집.  3. 행 7:38
발음 [ ĕkklēsia ]

몸(소마. 
sōma)  σῶ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983

1. 몸.   2. 신체.  3. 시체
발음 [ sōma ]
어원 / 4982에서 유래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 롬 12:5, 고전 10:17, 12:12, 27, 엡 1:23, 2:16, 4: 4, 12, 16, 5:23, 30, 골 1:18, 24, 2:19, 3:15.

  • 관련 성경 /  몸(마 5:29, 눅 11:34, 고후 4:10), 시체(마 14:12, 요 19:31, 유 1:9), 주검(눅 17:37), 육체(요 2:21, 히 13:11), 형체(고전15:37, 38, 40), 종(계 18:13).

  • 5월 10일(토) 역대상 26-2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전(29:2)

    내가 이미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예비하였나니 곧 기구를 만들 과 은과 과 철과 나무며 또 마노와 박을 보석과 꾸밀 보석과 채석과 다른 보석들과 화반석이 매우 많으며.
    With all my resources I have provided for the temple of my God--gold for the gold work, silver for the silver, bronze for the bronze, iron for the iron and wood for the wood, as well as onyx for the settings, turquoise, stones of various colors, and all kinds of fine stone and marble--all of these in large quantities.

    하나님의 전(殿)이란 하나님이 계신 곳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을 눈에 보이는 건물을 중심으로 "성막(聖幕)" "성전(聖殿)" "교회(敎會)" 라고 합니다.
    반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심령(心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느 제한된 곳에 계시는 존재가 아닙니다.
    야곱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창 28:17).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영적 존재입니다.
    문제는 그 하나님이 여기에 계신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모실 곳을 건축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건축을 위한 온갖 재료를 준비하고 그 일을 다윗의 아들에게 위임하게 됩니다.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왕으로서 얼마든지 전을 건축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지만 건축하지 않았던 다윗의 믿음을 생각합니다.
    또한 내가 건축하지 않는 것일지라도 아들을 위하여 넉넉한 마음으로 재료를 준비하는 다윗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고자 하는 다윗의 순종을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다윗과 같은 믿음과 생각과 순종을 잊지말아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유일하신 구세수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생각은 나를 버리는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의 계시를 찾는 것입니다.
    순종은 이 길만이 내가 살아갈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다윗과 같이 잘못했을 때는 즉시 그 길에서 돌이켜 회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다윗과 같이 선한 계획일지라도 포기할 줄 알고 하나님의 계획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다윗처럼 모든 여건이 잘 갖추어졌어도 그 환경을 선택하지 않고 주님이 원하는 길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성전은 3부로 나누었습니다(울람)

    (1) 현관(울람. ’ûwlâm)  אוּלָם  - 제사장이 들어오는 입구의 홀

    אוּלָם 스트롱번호 197

    1. 현관.  2. 정문.  3. 왕상7:6.
    발음 [ ’ûwlâm ]
    어원 / 단축형으로 אֻלָם이 사용됨. 복수 אֻלָם, 481에서 유래[맨다는 의미로부터]
    구약 성경 / 19회 사용
    • 1. 명사 현관, 정문, 왕상 7:6.
    • 관련 성경 /  주랑(왕상 6:3), 낭실(대하 3:4, 욜 2:17), 현관(겔 40:7, 8, 41:15, 46:8).

    (2) 헤칼. 성소(할론. challôwn)  חַלּוֹן - 본관 곧 성소인데 붙박이 교창에서 빛이 스며듭니다(왕상 6:4).

    성소는 높이가 약 13.63m 넓이가 약 9m 길이가 18.2m였습니다.
    돌로 마루를 깔고 그 위에 백향목으로 덮었습니다. 성소 내부는 백향목으로 두르고 지붕은 백향목 서까래에 마루로 덮었습니다(왕상 6:9). 백단목 벽기둥들이 운치를 더 했습니다(10:12). 기둥에는 생명나무를 조각하고 금으로 입혔습니다(16:21).

    חַלּוֹן 스트롱번호 2474

    1. 창문. 2. 창 26:8. 3. 수 2:15
    발음 [ challôwn ]
    어원  /  혼성. 복수ים, 욜 2:9, וֹת, 겔 40:16, 2490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1회 사용
    • 1. 명사 창문[벽에 구멍이 난 것으로부터], 창 26:8, 수 2:15, 삿 5:28.
    • 관련 성경  /  창(창 8:6, 왕하 9:30), 창문(수 2:21, 삿 5:28, 렘 9:21), 들창(잠 7:6).


    (3) 지성소(드빌. debîyr) דְּבִיר  - 지성소로 올라가는 층계 앞에 백향목으로 만든 작은 향단이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창도 없고 굴 같은 9m정방형 방인데 주님의 거하시는 방이었습니다(대하 3:8-13). 지성소는 성소보다 마루가 높으며 4.5m 높이 감람나무로 만들고 금으로 장식한 두 그룹이 법궤 위에 마주 섰습니다.
    그룹은 베니게에서 들어온 날개 돋힌 스핑크스(여자 머리에 사자 몸)거나 베니게화한 천사신이었습니다(겔 9:22-25).
    성전 남서북삼면에 있는 이층방들은 창고실로 썼는데 올라가는 문들과 좁은 충계가 안과 밖에 있었습니다.


    דְּבִיר 스트롱번호 1687

    1.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 2. 왕상 6:5.  3. 19-22
    발음 [ debîyr ]
    어원 / 1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6회 사용
    • 1. 명사, 남성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 왕상 6:5,19-22, 8:6,8, 대하 3:16,4:20, 5:7,9.

    • 관련 성경 /  지성소(왕상 6:5, 8:6, 대하 5:7), 내소(왕상 6:19, 7:49, 대하 4:20), 본전(대하 5:9), 성소(대하 3:16, 시 28:2).




    성전(聖殿)


    홀리랜드호텔에 있던 예루살렘 성전 모형. 현재는 이스라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성전(聖殿)은 '거룩한 전'이라는 뜻으로,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이자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를 올리는 장소로서 세워진 건축물을 가리킨다.
    솔로몬 시대에 옛적 아브라함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예루살렘 모리아산[1]에 최초로 건축되었고, 이후 구약시대 내내 이곳에서 제사가 이루어졌다.[2]
    성전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성막을 그대로 따랐다.
    다만 성막에 비해 시설의 전체적인 규모가 커졌고, 성전 기명의 숫자도 늘었다.
    내소(內所)인 지성소(至聖所)에 언약궤를 보관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신약시대에는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성령의 전'이라 칭하기도 한다.

    성전 역사 개괄

    성전은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 '여호와의 집' 등으로 불렸다.[3]
    성전 안에는 언약궤가 보관되어 있었다.
    언약궤는 광야 생활 동안 이동식 성전인 성소(聖所), 곧 성막(聖幕)에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계속해서 여러 지역으로 옮겨졌다가 다윗시온성으로 들여왔다. 다윗은 성막에 보관하던 언약궤를 영구히 안치하기 위해 고정식 성소인 성전을 건축하기로 계획했다.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성전이 건축될 것을 예언하셨다. 이에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한 물자를 넉넉히 준비하고 성전과, 성전에서 사용될 기명들의 식양을 하나님이 알려주신 대로 그려 솔로몬에게 주었다.[4] 그의 사후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최초의 성전을 건축했다.[1] 그곳은 시온과 인접한 곳이었기에 점차 시온산을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기원전 6세기 바벨론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던 성전은, 성경의 예언대로 바사 제국의 왕 고레스가 유대 민족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령을 내림으로써 유대 총독 스룹바벨(히브리어: זְרֻבָּבֶל)[5]에 의해 재건됐다. 이후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예루살렘을 차지한 이방 나라들에 의해 또다시 수난을 겪었다. 로마의 통치 시기 때 헤롯 1세에 의해 증축이 시작되어 기원후 63년경에 비로소 완공되었지만, 약 7년 후인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의 예루살렘 공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솔로몬 성전(제1성전)

    솔로몬 성전은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 대대적으로 건축된 최초의 성전이며 '제1성전'이라고도 부른다. 솔로몬 재위 4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7년 간의 공사를 거쳐 솔로몬 재위 11년에 준공되었다.[6] 이 성전은 남 유다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멸망당한 기원전 586년경에 파괴되기까지 약 400년 동안 영광을 누렸다.

    건축 과정

    솔로몬의 선대왕인 다윗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많은 전쟁을 치르며 피를 흘렸기에,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에 다윗은 솔로몬이 차질 없이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하나님이 알려주신 성전과 성전 기명의 식양을 솔로몬에게 주었고, 금은보석과 건축 재료를 많이 준비해 두었다.[7] 성경은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해 준비한 금만 10만 달란트에 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8]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자신의 재산으로 금과 은을 내어 봉헌했는데 금의 양만 해도 3000달란트였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즐거운 마음으로 금 5000달란트, 은 1만 달란트, 놋 1만 8000달란트와 철 10만 달란트와 보석을 봉헌했다.[9] 다윗의 사후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했을 때 짐꾼 7만 명과 산에서 돌을 떠낼 사람 8만 명에, 감독자만 3600명이 참여했다. 우호국이었던 두로의 후람왕은 기술자와 건축 자재를 배편으로 보내왔다.[10]

    구조 및 구성

    성전 모형도

    성전의 구조와 구성은 역대하 3-5장열왕기상 6-7장에 기록되어 있다.
    성전은 미리 다듬어둔 돌을 가지고 건축했으며, 중심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었고 그 주변으로 다락을 지었다. 다락은 3층 구조로, 많은 골방들이 있었다. 전체적인 성전의 규모가 커지면서 지성소도 장(長, 길이)과 광(廣, 너비)과 고(高, 높이)가 모두 20규빗으로 커졌지만 장·광·고가 동일하다는 특징은 그대로 유지됐다.[11]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를 덮는 속죄소의 그룹 천사와 별개로 그룹 둘을 크게 만들어 세웠다. 이 두 그룹은 외소를 바라보며 두 날개를 활짝 폈는데, 이는 지성소를 모두 덮는 크기였다.[12] 지성소의 그룹 날개 아래 언약궤가 위치했고,[13] 성막과 같이 휘장으로 외소와 구별했다.
    성전 뜰에는 '바다'라고 불리는 대형 물두멍을 만들어 제사장이 이용하게 했고, 소형 물두멍 10개를 만들어 번제물을 씻게 했다. 놋으로 대형 제단도 만들었으며, 금으로 등대 10개를 만들어 외소 좌우에 두었다. 진설병을 둘 상 10개와, 성전에 쓸 100개의 대접을 만들었다. 분향단도 금으로 만들어 설치했다.
    성전은 예루살렘 모리아산, 다윗이 매입했던 오르난(아라우나)의 타작마당 터에 지어졌다.[14] 성전의 방향은 광야 생활 동안 지었던 성막의 방향과 일치하여,[15][16] 성소와 지성소로 이루어진 성전 건물은 서쪽에, 제단은 동쪽에 있었다.

    이후 역사

    성전 짓는 일을 마치고 7일 동안 성전 낙성식을 행한 후 이어서 초막절을 지켰다.[17][18] 낙성식 때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던 솔로몬 성전은 이후 약 400년을 존속했으나, 기원전 586년경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략으로 불타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성전 기명들은 약탈당했으며, 백성들은 빈천한 자를 제외하고 대다수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19][20]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례와 명령을 버리고 다른 신을 숭배하면 그들과 더불어 성전 또한 버리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였다.[21]

    스룹바벨 성전(제2성전)

    유대 총독 스룹바벨의 주도하에 완공된 성전이라고 하여 흔히 스룹바벨 성전으로 부르며,[22] 두 번째 건축된 성전이므로 '제2성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70년의 바벨론 포로 기간이 지난 후 바사 왕 고레스는 바벨론을 점령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켰다.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을 내리고 성전 기명을 돌려주기까지 했는데,[23]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이뤄진 것이었다.[24] 기원전 537년경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남 유다 백성들은 이듬해부터 유대 총독 스룹바벨의 주도하에 성전의 지대를 놓고 건축에 착수했다.

    건축 과정

    • 이방인의 방해로 건축 중단

    스룹바벨 성전의 건축 과정은 에스라 3-6장에 기록되어 있다. 건축령이 내렸지만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유대인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기 전, 사마리아 지역은 앗수르의 영향으로 이방인들이 정착해 있었다.[25] 그들은 이방신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는 비정상적인 종교 생활을 했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들도 지금까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주장하면서 공사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여호수아)가 이를 거절하자 그들은 관료들에게 뇌물을 주어 공사를 막는가 하면 백성들에게 겁을 주어 약한 마음을 갖게 하기도 했다. 이방인들의 끈질긴 훼방으로, 성전 지대만 놓인 채 공사는 약 15년 동안 중단됐다. 당시 유대 백성들은 열심히 일해도 늘 결과가 좋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내버려두고 자신의 일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었다.[26]

    • 선지자의 권고로 공사 재개

    선지자 학개스가랴는 성전 공사가 중단된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며 백성과 유대 총독 스룹바벨을 격려했다.[27][28][29] 기원전 520년경 선지자들의 활동으로, 오랫동안 중단된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 다시 시작되었다. 바사 제국의 다리오왕은 왕실의 창고에서 고레스의 조서를 발견했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선대왕인 고레스가 허락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다리오왕은 성전 건축을 막지 말라고 하는 한편 공사에 투입되는 비용까지 바사 제국의 세금으로 충당하라고 지시했다. 기원전 516년경에 드디어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었다.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봉헌식을 행했으며 하나님의 절기를 지켰다.

    • 성전의 규모

    스룹바벨 성전의 자세한 구조와 구성은 성경에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이스라엘의 전성기에 건축했던 솔로몬 성전에 비해 규모와 영광이 미치지 못해 실망스러움을 느꼈던 이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은 선지자 학개를 통해 성전의 나중 영광이 더 클 것이라고 격려하시며 성전이 건축되면 큰 축복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셨다.[28]

    이후 역사

    •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

    50여 년 후 바사 제국의 관원으로 일하던 느헤미야는 고국의 예루살렘성이 여전히 훼파된 상태로 있고 백성들은 큰 환난과 능욕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후 느헤미야는 유대 총독이 되어, 성벽 재건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공사 소식을 들은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 아라비아 사람 게셈 등 여러 대적자가 건축을 방해하고 나섰다. 그들은 조롱과 방해를 일삼았고, 백성들을 죽이고 공사를 중단시킬 계획까지 세웠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격려했고, 백성들은 경계와 보초를 서며 성 건축을 이어갔다.
    대적자들의 온갖 훼방을 이겨내고 드디어 예루살렘성이 완공되었다. 소식을 들은 모든 대적과 이방 사람들은 이 역사를 하나님이 이루셨다는 사실을 느끼고 두려워하며 낙담했다. 이후 7월 1일(나팔절)에는 백성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제사장 겸 학사인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배웠다. 15일 초막절에는 규례대로 초막을 짓고 7일간 절기를 거룩하게 지켰다. 백성들은 절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다시는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예루살렘성 중건을 기념하는 봉헌식이 거행되었고 느헤미야는 성전과 이스라엘 백성을 정결케 했다.

    • 신구약 중간기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가 기록된 때부터 예수님의 탄생 때까지 약 40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400년 동안 팔레스타인 지역은 여러 차례 패권이 바뀌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되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 역시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많은 수난을 겪었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의 왕이 된 알렉산더 대왕은 바사 제국을 비롯해 여러 국가를 정복하며 마케도니아에서부터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헬라 제국(헬레니즘 제국)을 건설했다. 알렉산더 사후에 휘하의 장군인 셀레우코스가 시리아 지역을 지배하면서 셀레우코스 왕조가 시작됐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유대인에게 헬라 신앙을 강요하며 핍박했다. 이 같은 정책에 유다 마카비(마카바이오스, 마카베오)가 셀레우코스 왕조에 무력으로 항쟁했고, 마침내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165년경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여 성전 내 제우스 신상을 파괴하고 성전을 정화한 뒤 새 번제단을 하나님께 봉헌했다. 하지만 독립의 기쁨을 누린 시간은 짧았다. 로마의 힘이 강해지면서 기원전 63년경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유대인들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헤롯 성전

    헤롯 대왕이 개축한 예루살렘 성전(제2성전) 모형. 이스라엘 박물관.

    헤롯 성전은 이두매(Idumea, 에돔) 출신의 헤롯 대왕이 건축한 성전이다.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공략할 때, 성전도 피해를 입었으나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다.[30] 헤롯은 훼손된 스룹바벨 성전(제2성전)을 웅장하게 재건축했다.[31][32]

    건축 과정

    로마는 식민지인 유대 나라에 이두매 출신의 헤롯을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유대교로 개종했다고는 하나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이방 출신의 통치자였다. 정통성이 부족했던 헤롯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원전 20년경 예루살렘 성전 증축에 착수했다. 성전의 건축은 예수님이 탄생하기 전부터 시작되어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며 성전을 정결케 하실 때가 건축 46년째였다.[33] 헤롯 성전은 이후에도 30년 이상이 더 걸려서 완공되었다. 헤롯 성전은 크고 화려했다. 성전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성전의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셨다.[34][35]

    이후 역사

    헤롯 성전은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예수님의 예언대로 로마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36] 2세기에 로마는 또다시 봉기한 유대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내쫓은 뒤 예루살렘 멸망일 하루만 출입을 허가했다. 이때 남은 성전 서쪽 외벽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통곡과 기도를 했다고 하여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유적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37] 또한 로마인들은 파괴된 성전 터에 로마식 신전을 세우고 예루살렘의 이름을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바꾸고,[38] 안식일하나님의 절기를 지키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39] 기원후 7세기경에는 이슬람 제국이 이 지역을 차지하여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으로 불리는 이슬람식 사원을 세워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성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언약궤가 보관된 곳이며 구약시대 제사가 이루어지던 장소다. 하나님은 원래 하늘에 거하시지만, 성경에는 지상의 성전 역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라고 되어 있다.
    모세 시대에 하나님은 당신이 거하실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셨다.[40] 이후 세월이 흘러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의 처소임을 밝혔다.[41] 이처럼 성전은 좁은 의미로는 지상에 세워진 특정한 건축물을 가리키지만, 의미를 확장하면 어디든지 하나님이 계신 곳,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곳을 성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신약시대 성자(聖子) 하나님인 예수님은 당신의 육체를 성전이라고 비유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요한복음 2:19-21

    예수님이 이렇게 비유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성령, 즉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이 예수님의 육체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42]
    예수님처럼 성령이 직접 육신을 입는 경우는 아니지만, 새 언약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에 신약성경은 성도들의 몸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일컫는다.[43][44] 이런 이유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도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새 언약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될 수 없고, 새 언약이 없는 교회 역시 성전이라고 불릴 수 없다.




    전(殿. temple)이란 히브리 단어는 "비이라()"라고 하며 성경에서는 "전(대상 29:1, 19, 느 2:8), 궁(느 1:1, 에 1:2), 영문(營門)(느 7:2), 도성(에 1:5, 2:5, 9:11)" 이라고 소개됩니다.

    구약 시대에는 전이라고 하였다면 신약에서는 "교회(에클레시아. ἐκκλησία)"라고 합니다.
    전은 물질를 사용하여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믿음의 사람위에 세워야 합니다.
    전은 세울 수도 있고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의 믿음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트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전(역대상 22:1)

    성전을 건축할 장소가 정하여졌습니다(1절).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그리고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고백으로써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이라” 고 다윗은 말하였습니다.
    만일 성전이 하나님을 위해 세워지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친히 장소를 택하는 것이 합당한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땅이 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택하신 그 터전은 이방사람들 사이에도 복음의 교회를 세우게 되리라는 것을 나타낸 행복한 전조가 되었습니다(행 15:16-17). 그 땅은 타작마당입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는 바로 그의 마당이며 그의 타작물이며 또한 “그의 마당의 곡식”이기 때문입니다(사 21:10). 그리스도는 그의 마당을 온전히 정결케 하기 위해 그 손에 키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집은 바로 제단을 위해 세워질 집이었습니다. 성전이란 바로 제단을 위해 세워진 집입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오래전부터 이미 제단은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이미 다윗 때부터 조직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장차 이스라엘의 수도가 될 예루살렘으로 옮겨다가 장막에 모시고(대상 16:4) 그 앞에서 섬기기 위해 제사장들, 레위인들, 성가대 악대를 조직했습니다(대상 16:4, 25:1-7). 그러나 나단에게 성전 지을 의사를 표시하자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그것을 짓게 하려고 했습니다(대상 17:1-12). 다윗은 성전을 위해 많은 돈과 재물을 그 아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대상 18:5-13, 22:6-17). 아버지의 유물과 자기의 모든 것으로 솔로몬(주전 960-922)은 그의 치세 제4-11년간에 아담한 성전을 건립했습니다. 그것은 헤롯 성전보다 적으나 아름답고 화려한 건물로 처음에는 작은 예배당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일반의 예배처소는 아니었고 대제사장도 1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지정소에 들어갔습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도 기름, 향, 떡을 보급하는 정도였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에게는 성전 구내가 전부 집이었습니다(시 66:13). 솔로몬의 성전은 400년을 못갔습니다. 주전 587년에 느부갓네살이 성전을 불살랐습니다. 11년 후 유다의 젊은 왕 여호야긴과 예루살렘 시민들을 바벨론으로 잡아갈 때(왕하 24:10-16) 성전 보물도 (25:13-17)다 옮겨 갔습니다. 시바의 여왕도 솔로몬의 성전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놀랐습니다(왕상 10:4). 솔로몬 성전은 베니게 직공들이 지었는데 베니게, 가나안, 애굽, 신전들의 영향을 맡이 받았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좁은 정방형으로 동편에는 문이 있고 서편에는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길이가 약 33.33m 넓이가 9m 가량이요 약 3m 높은 지대 위에 서 있었습니다.
    히브리, 베니게 노동자 수천명을 풀어 흰 석회석을 갈아서 아름답게 지었습니다(왕상 5:6, 6:7). 내부는 레바논 백향목으로 목수들을 시켜서 아름답게 장식했습니다(6:5-36, 5:6). 출입구로 올라가는 층계는 10계단이 있었고 층계 좌우에는 상징적인 두 기둥(야긴과 보아스)이 벽과 따로 서있었습니다. 좁은 출입문(10×4.5m)은 백향목으로 짰고 그 위에 그룹,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핀 꽂은 금으로 박았습니다(왕상 6:18-35). 문지기가 있었습니다(시 84:10).

    1. 성전은 3부로 나누었습니다(울람)

    (1) 울람-제사장이 들어오는 입구의 홀

    (2) 헤칼-본관 곧 성소인데 붙박이 교창에서 빛이 스며듭니다(왕상 6:4).
    성소는 높이가 약 13.63m 넓이가 약 9m 길이가 18.2m였습니다.
    돌로 마루를 깔고 그 위에 백향목으로 덮었습니다. 성소 내부는 백향목으로 두르고 지붕은 백향목 서까래에 마루로 덮었습니다(왕상 6:9). 백단목 벽기둥들이 운치를 더 했습니다(10:12). 기둥에는 생명나무를 조각하고 금으로 입혔습니다(16:21).

    (3) 드빌-지성소로 올라가는 층계 앞에 백향목으로 만든 작은 향단이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창도 없고 굴 같은 9m정방형 방인데 주님의 거하시는 방이었습니다(대하 3:8-13). 지성소는 성소보다 마루가 높으며 4.5m 높이 감람나무로 만들고 금으로 장식한 두 그룹이 법궤 위에 마주 섰습니다.
    그룹은 베니게에서 들어온 날개 돋힌 스핑크스(여자 머리에 사자 몸)거나 베니게화한 천사신이었습니다(겔 9:22-25). 성전 남서북삼면에 있는 이층방들은 창고실로 썼는데 올라가는 문들과 좁은 충계가 안과 밖에 있었습니다.

    2. 성전 비품
    성전 비품은 두로의 건축 기술자 허람(그 어머니는 출애굽 납달리 족속)이 많이 만들었습니다. 성전 앞 마당 우편에는 큰 번제단이 있었는데 어떤 이는 그것을 큰 바위 위에 만들어진 것이라 합니다(겔 43:14). 또 어떤 이는 대하 4:1에 묘사한대로 만든 것인데 층계있는 거룩한 탑 모양이었다 합니다. 제단 4귀에 뿔이 있었습니다. 제단 남쪽에는 큰 놋으로 부어만든 “바다”가 있었는데(대하 4:1) 그 두께가 1m 직경이 4.5m 고가 약 2.25m 되었습니다.
    그 가장자리는 백합꽃처럼 아름답게 굽었습니다(왕상 7:23). 놋으로 만든 12마리의 황소등에 놓였는데 3마리씩 4방(춘하추동의 암시)을 향했습니다. 그 황소들은 모양 뿐 아니라 생식력의 상징인 동시에 비를 주는 신으로 중동에서 널리 믿는 바알에도 관련되었습니다. 거룩하게 생각한 동물들이 왕의 보좌나 거룩한 것을 바친 것은 옛적 철시대에 흔히 있던 일이었습니다. 그 놋바다는 원래 제사장들이 깨끗케 하는 의식에 쓰려한 것보다 물이나 바다는 생명의 근본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3. 성전 안에 불박이로 놓여 있던 것은 (1) 후대 제사 규칙에 의한(레 24:1-4, 민 8:1-4) 7촛대의 전신인, 10개의 금촛대 (왕상 7:49, 대하 4:7) 이 촛대란 사실, 3다리 달린 동경(등잔)으로 그 위에 불심지 7있는 등잔을 놓은 것이었습니다. 성막에는 촛대가 하나뿐이었습니다(출 37:17). 제 2성전에도 하나였는데 안디오커스 에피피네스에게 도적맞고 마카비 시대에 다시 만들었더니 주후 70년에 로마군대가 가져갔습니다. 그 모형만은 티도 개선문 조각에서 볼 수 있습니다. (2) 진설병 상을 12개 만들어 떡 12개를 차례로 놓을 때 상도 차례로 하나씩 썼습니다. 이 떡상은 왕상 6:20-22의 제단과 일치하며 안식일마다 새 떡으로 바꾸어 놓고, 전 것은 제사장들이 먹었습니다. (3) 움직일 수 있는 향단은 금으로 장식했으며 뿔이 있었습니다.

    4. 솔로몬 성전은 초막절에 봉헌되었습니다(왕상 8:12)

    솔로몬의 기도는 넉줄의 시였으나 주전 550년경의 포로 후의 부연하여 봉헌기도를 유창하고 가장 높은 것이었습니다.
    그 내부는 때를 따라 변했을 것입니다. 르호보암 때(주전 922-915) 애굽 왕 시삭이 노래했으며 (왕상 14:25) 악한 여왕 아달야(주전 842-837)가 바알 예배를 성전에서 행했습니다. 아하스(주전 735-715)는 성전 내부를 개조하고 제단도 고쳤습니다 (왕하 16:10-18). 히스기야(주전 715-687)는 모세의 율법의 놋뱀을 버렸습니다(왕하 18:4). 므낫세(주전 687-642)가 앗수르 방식을 따라 성전을 주력했더니(왕하 21:4) 요시야(주전 640-609) 왕이 연보궤에서 율법책을 찾은 후 그것을 폐지했습니다(대하 34:14). 솔로몬 때 시작한 예루살렘성전 중심주의를 강화하여 지방성소들을 폐지하고 그 제사장들에게 예루살렘에서 할 일을 주었습니다(신 12:2-28).





    온 회중에게
    - 온 회중이란 28:1에 기록된 대로 다윗 왕이 솔로몬을 차기 왕으로 지목하고 또한 마지막 유언을 남기기 위해 불러모은 이스라엘의 모든 방백들과 백성의 대표자들을 말한다.

    내 아들 솔로몬이...오히려 어리고 연약하고 이 역사는 크도다

    - 성전 건축이 다윗왕에게 부과된 임무가 아니고 솔로몬에게 부과된 임무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이 성전 건축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준비하게 된 하나의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다윗 왕은 이전에 솔로몬과 단독으로 면담하였을 때에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많은 준비를 하였노라고 밝힌 바 있다(22:5).
    그러나 22:5과는 달리 본절에서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택하사 성전 건축의 과업을 이루게 하셨다고 다윗은 언급하고있다.
    그래서 22:5에서는 언급되지 아니한 '선택하다', '지정하다', '요구하다'란 뜻을 지닌 히브리어 '바하르'(*)가 여기에 사용된 것이다.
    한편, 솔로몬은 여기에서 다윗 왕이 말한대로 자신의 '여리고 연약함'을 깨달아 왕상 3:7에서 "종은 작은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라고 고백한다.

    전(비이라. bîyrâh) בִּירָה 스트롱번호 1002

    1. 요새.  2. 성전
    발음 [ bîyrâh ]
    구약 성경  / 16회 사용
    • 1. 명사, 여성 요새, 성, 왕궁 [거의 대부분 왕궁에 대해 사용됨], 느1:1, 에1:2, 2:3,8, 3:15, 단8:2
    • 2. 명사, 여성 성전, 대상29:1,19.
    • 관련 성경  /  전(대상 29:1, 19, 느 2:8), 궁(느 1:1, 에 1:2), 영문(營門)(느 7:2), 도성(에 1:5, 2:5, 9:11).

    בַּיִת 스트롱번호1004
    1.

    2.

    장막

    3.

    왕하23:7.

    발음 [ bayith ]
    어원
    연계형 בֵּית, 복수 어미활용 בָּתֵּיהֶם ,בָּתֵּיכֶם ,בָּתֵּינוֹ, 1129에서 유래한 약어로 보임
    구약 성경
    2036회 사용




    전(殿)
    - 히브리어는 '하비라'( הַבִּירָה)인데 이 말이 사용된 용례들을 살펴보면 이 용어는 대단히 웅장하고 거대한 궁전을 가리키고 있다.
    즉, 이 말이 사용된 에 1:2, 5;2:3, 5, 8;3:15;단 8:2 등을 살펴보면, 이 말은 바사의 수산궁 뿐만 아니라 여기에 인접해 있는 모든 부속 건물들까지도 포함한 거대한 하나의 왕궁 단지(團地)를 지시하고 있다.
    또한 느 2:8에서도 이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거기에서도 이 단어는 성곽과 집을 포함한 요새화된 성전을 가리키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하비라'(*)라는 용어는 특별히 웅장한 모습의 성전을 묘사하는 말임에 틀림없다(Curtis, p,. 301;Pulpit Commentary).

    한편, 다윗 왕이 여기에서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된 성전에 해당되는 용어 '바이트'(*) 대신에 '하비라'(*)를 사용한 것은 이 성전을 건축하는 역사(役事)가 어리고 연약한 솔로몬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대역사임을 회중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힘을 다하여
    - 이와 의미가 유사한 구절로 22:14의 '환난 중에'를 참조하라.

    마노
    - 이 진귀한 보석인 마노(stones of onyx)는 제사장의 에봇과 흉패에 장식했던 것으로(출 25:7;35:9,27) 성경에 의하면, 이것의 원산지는 에덴 동산의 하윌라(Havilah) 강이다(창 2:11, 12).

    박을 보석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밀루임'(*)은 '채우다', '가득하다'는 뜻의 동사 '몰라'(*)에서 파생된 명사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제사장의 옷이나 기타 여러 기구들에 장식된 보석을 의미하는 말이다.

    꾸밀 보석
    - '꾸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푸크'(*)는 '색깔있는', '그려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왕하 9:30;사 54:11;렘 4:30). 따라서 이는 문자적으로 '색깔있는 돌'을 의미한다. 그래서 혹자는 이를 대리석이라고 생각하나(Gensenius) 이 보다는 이 돌을 여인들이 눈에 칠했던 안티모니(L. antimony)의 돌과 같이 색깔있는 돌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Ja-mes Wolfendale).

    채석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크마'(*)는 '얼룩 덜룩한 색을 넣다','수놓다'를 의미하는 '라캄'(*)에서 파생된 말로 '다양한 색깔을', '얼룩 덜룩한 빛깔', '자수를 놓은' 등의 의미이다. 이렇게 볼 때 채석은 '여러 가지 빛을 내는 그리고 그러한 무늬가 있는 돌'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혹자는 이것이 모자이크 자갈이었다고 주장한다(Payne). 그런데 이 히브리 용어는 단지 본문에서만 돌에 적용되었지 다른 곳에서는 자수, 의복, 독수리 날개 등에 사용되어졌다(겔17:3).

    다른 보석
    - 여기서 다른 보석이란 바른 번역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보석'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에벤 이카라'(*)는 문자적으로 '희귀한 돌'을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희귀한'에 해당하는 '이카라'(*)는 단순히 어떤 '무거운 것'을 의미했었는데 이것에서 '귀중한', '값비싼'이란 의미가 생겼기에 이를 보석을 생각한 듯하다. 사실 솔로몬은 본절에 언급된 이 값비싼 돌로 성전의 벽을 장식하였다(삼하 12:30;왕상 7:9;10:2;대하 3:6;9:1;욥 28:16;잠 1:13;3:15;사28:16;겔 28:13;단 11:38).

    화반석
    - 히브리어로 '아브네 샤이쉬'(*)인데 여기서 '샤이쉬'(*)는 '희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화반석은 흰대리석을 의미한다(Keil, Pulpit Commentary, Lange). 이러한 것 때문에 혹자는 이를 '설화 석고'로 이해한다(J. Wolfendale).


    나의 사유의 금 은으로...드렸노니 - 다윗 왕은 지금까지 모은 전리품 뿐만 아니라 자기의 개인 재산까지도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Barker, J. Wolfendale, Wycliffe).


    󰃨 오빌의 금 - 오빌이 오늘날의 어느 곳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인도, 아라비아, 아프리카 등으로 추측하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확실한 증거를 가진 주장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오빌은 순도 높은 금의 산지로 고대에 알려졌었다(욥 22:24;28:16;시45:9;사 13:12). 따라서 오빌의 금은 가장 값지고 귀한 금을 의미하는 말이다. 한편 혹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이 오빌의 금을 아라비아의 상인들이 가져온 것으로 이해하나(J. Wolfendale) 이 또한 확정적인 자료가 없는 것이다.

    󰃨 금 삼천 달란트와 천은 칠천 달란트라 - 1 달란트(talent)는 약 34kg에 해당하는 무게이기 때문에 금 삼천 달란트과 은 칠천 달란트를 무게로 환산하면 금은 약 102톤에 해당되며 은은 약 238톤에 해당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본서 22:14를 참조하라. 한편, 본문에 언급된 '천은'에서 '은'을 수식하는 말은 히브리어 '자카크'(*)를 번역한 용어이다. 그런데 이 히브리어의 원래의 뜻이 '추출하다', '깨끗하게 하다', '정제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본절에 나타난 이 '천은'은 '잘 정련된 은', 즉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은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영역 성경이 이를 'choice silver'(잠 8:19), 'refined silver'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다(KJV).

    󰃨 모든 전 벽에 입히며 - 다윗 왕이 바친 사유 재산이 쓰인 용도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전(殿)'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티임'(*)은 성전 안에 있는 중요한 건축물들을 가리킨다(Lange, Curtis). 그래서 본절은 성전 안에 있는 중요한 건축물에 대해서는 모든 벽에다 금.은 칠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대하 3:4-9에 보면, 솔로몬은 다윗 왕이 바친 정금으로 낭실 안, 대전 천장과 지성소, 지성소의 다락들을 금으로 입혔다.


    󰃨 오늘날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라는 말은 곧 여호와께 헌물을 드리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Keil). 왜냐하면 '채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레'(*)는 '충만하다', '가득하다', '봉헌하다', '완성하다' 등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용어는 성직에 임명되는 후보들에게 사용되어진 말로서 이는 자신이 '헌신적으로 드려지는 예물'임을 자각케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Payne, Wycliffe).


    역대상 29장

    1 다윗 왕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이 홀로 하나님의 택하신 바 되었으나 오히려 어리고 연약하고 이 역사는 크도다 이 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1 그런 다음 다윗왕은 모든 군중을 향해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신 내 아들 솔로몬은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는데 그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막중합니다. 이것은 그가 지어야 할 성전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이…이르되.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자기가 준비한 것들을 자세히 말하고 이스라엘의 부(富)와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헌납할 것을 호소한다(1~9절). 여호와의 지시에 응하여 백성에게 성소 건축을 위해 헌납할 것을 호소하고(출 25:1~8; 35:4~9), 아낌없는 반응을 받았던(출 35:20~29) 모세의 경험과 비교해 보라.

    어리고 연약하고. 참조 대상 22:5; 왕상 3:7; 잠 4:3.

    전. 비라(birah). 악갓어에서 유래한 외래어로서, 대개는 궁전이나 요새를 나타낸다(느 1:1; 7:2; 에 1:2, 5; 2:3, 5, 8; 3:15; 단 8:2). 이곳과 19절에서는 이것이 성전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2 내가 이미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예비하였나니 곧 기구를 만들 금과 은과 놋과 철과 나무며 또 마노와 박을 보석과 꾸밀 보석과 채석과 다른 보석들과 화반석이 매우 많으며

    2 나는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성전 건축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자재를 준비했습니다. 금, 은, 놋, 철, 목재, 호마노와 같은 여러 가지 보석과 대리석이 바로 그것입니다.

    힘을 다하여. 이 일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다윗은 자재들을 많이 모으는 데 성공했다(22:14). 전심(全心)을 다한 사랑은 전심을 다하는 봉사를 낳는다.

    3 성전을 위하여 예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에 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므로 나의 사유의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3 이 밖에도 나는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내 사유 재산에서 성전 건축을 위해

    내 마음에…사모하므로.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헌신하여 성전을 건축하는 데 자기 재물을 기꺼이 드렸다. 그는 아낌없이 드리는 일에 모본을 보였으므로 후하게 드리도록 요청할 수 있었다.

    4 곧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천은 칠천 달란트라 모든 전 벽에 입히며

    ​4 순금 100톤과 순은 240톤을 바쳐 성전 벽을 장식하고

    삼천 달란트. 만일 이것이 34.15킬로그램에 해당하는 표준 달란트라면(참조 제2권, 106, 108), 다윗이 모은 금의 양은 113톤(미터법으로는 102톤)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고대 표준 중량의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없다.

    칠천 달란트. 1달란트를 34.15킬로그램으로 계산할 때(참조 제2권, 106, 108) 헌납한 은의 중수는 263톤 또는 미터법으로 239톤이 된다. 위의 “삼천 달란트”를 참조하라.

    ​5 금, 은그릇을 만들며 공장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쓰게 하였노니 오늘날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5 금은 제품을 만들며 기능공들이 세공품을 만드는 데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제 나처럼 여호와께 기쁜 마음으로 예물을 바칠 자가 없습니까 ?'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다윗은 기꺼이 자기 자신과 자기 가진 것을 여호와께 바쳤으므로 이제 백성에게 그처럼 행하도록 요청할 수 있었다. 그는 성전 건축 사업과 하나님 경배를 동일시했다. 그들이 이 문제에 성실히 함으로써 하나님께 그들이 얼마나 성실한가를 나타낼 것이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는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직접 드리는 예배이다.

    반만 마음을 드린 봉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함―(29:5 인용)이 반응이 이르러 온 것은 그 건물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금은 보화를 자유롭게 드리는 헌금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업의 여러 분야에서 하는 자원 봉사에서도 나타났다. 마음들은 주님의 것을 주께 돌려 드릴 욕망으로 가득하여서 몸과 마음의 모든 힘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다 드렸다. 나라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술과 능력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이기심 없이 일하기로 결심하였다.

    솔로몬에게 한 다윗의 권면과 그 나라의 중책을 맡은 사람들에게 한 그의 호소는 오늘날 주의 사업에서 중요한 책임을 진 사람들이 마음에 간직하여야 할 말씀들이다. 우리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경우에만 번영할 것이다. 그리고 책임을 진 사람들은 주께 헌신하라는 호소를 받고 있다.

    교회의 직원들, 기관 각부 원장과 총무들, 국내외에서 일하는 일선 사역자들, 모두 다 그들의 달란트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침으로써 충실한 봉사를 해야 한다. 반만 마음을 드린 봉사를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우리의 소유와 우리의 존재는 다 그분께 빚지고 있는 것이다 (리뷰 1905. 9. 14).













    역대상 23장 요약 / 레위 자손의 구분과 임무

    다윗이 레위인이 하는 일을 구분하여서 인구에 따라 나누어주었고 에뤼의 후손 게르손, 고핫, 므라리의 자손들에게 일을 분배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24장 요약 / 24반차의 제사장 조직

    아론의 후손 중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였고, 레위 자손들 중에 남은 자들의 명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25장 요약 / 찬양대

    아삽, 헤만, 여두둔의 자손을 뽑아서 찬양의 직무를 맡기고 각 가문에서 12명씩을 뽑아 찬양과 음악을 맡겼다고 합니다.



    5월 9일(금) 역대상 23-2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령한 노래(25:1)

    다윗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헤만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David, together with the commanders of the army, set apart some of the sons of Asaph, Heman and Jeduthun for the ministry of prophesying, accompanied by harps, lyres and cymbals. Here is the list of the men who performed this service:

    신령한 노래(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Let the word of Christ dwell in you richly as you teach and admonish one another with all wisdom, and as you sing psalms, hymns and spiritual songs with gratitude in your hearts to God.

    에베소서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Speak to one another with psalms, hymns and spiritual songs. Sing and make music in your heart to the Lord.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시(psalm) : 구약의 시편
    찬미(hymns) : 시편 이외의 찬송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 : 성령의 감동으로 부르는 노래

    첫째. 영으로 하는 찬양(고린도전서 14: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4~15).

    여기에서 ‘마음으로’는 헬라어로 ‘누스’(νους)인데, ‘이성적으로’라는 뜻이다. 방언기도는 영 (spirit)이 하는 기도이므로 통역의 은사가 없으면 그 기도가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영은 기도하지만 나의 마음(mind), 곧 지각(the understanding)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영으로’(with the spirit) 기도하고, 또한 ‘지각으로’(with the understanding)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바울은 나의 영이 ‘기도’할 수 있듯이 나의 영으로 ‘찬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b).
    영으로 찬양하는 것은 마치 방언기도를 드리는 것과 같다.
    곧 이성의 영역을 떠나 내 영이 ‘자유롭게’ 부를 수 있는 찬송의 장르가 있다. 이것을 보통 ‘방언 찬송’이라고 부른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진정한 영의 찬송은 일정한 곡이 없고, 곡조에 자유함이 넘친다.
    다시 말하면 가락이 제마음대로란 얘기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가사와 가락(곡조)을 주셔서 '즉흥적으로'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으로 하는 찬양이 ‘신령한 노래’인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함께 신령한 노래로 찬양할 때 그것은 수십 성부의 아름다운 찬송이 된다.
    성령이 각 개인의 목소리를 인도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모아서 화음을 이루며 영으로 찬양하게 할 때 창출되는 그 조화란, 참으로 천사들의 합창 그 자체처럼 들릴 때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3층천’ 예배인데, 이 때 회중은 강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새 노래(a new song)
    - ‘신령한 노래’의 또 한 가지 유형으로서 “새 노래” 라는 것이 있다.

    성경은 도처에서 ‘새 노래’로 주를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시 33:3; 사 42:10; 계 5:9).
    이 ‘새 노래’ 역시 ‘영의 찬양’처럼 악보도 없는 노래를 즉흥적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으로, 곧 지각을 사용하여 노래한다는 점이 ‘방언 찬송’과 다르다.

    즉 ‘새 노래’는 성령께서 곡조와 함께 내 이성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가사를 즉흥적으로 주시는데, 바로 그 가사와 가락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정한 가사와 곡조가 없는 노래다. 이것은 '예언적 노래'로서 배워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9).
    하느님은 예레미야의 입에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그는 예언할 수 있었다.
    그 하느님은 우리 입에 노랫말도 주신다. 그래서 우리로 새 노래로 찬양하게 하신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1~2).

    그리하여 우리는 즉흥적으로 ‘예언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초자연적 노래이다. 이러한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굴복한다. 성령의 능력이 그 노래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또 그가 내 입에 새 노래를 두셨으니, 곧 우리 하느님께 드릴 찬양이라. 많은 사람이 그것을 보고 두려워하며 주를 의지하리로다”(시 40:3․ KJV).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됨으로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 하리라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고전 14:24~26).

    이와 같은 ‘신령한 노래’는 초대교회에서 체험하였고, 일찍이 ‘다윗의 장막’에서도 불리어졌었다.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 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대상 25:1).

    여기서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라는 것은 “예언을 하게 했다”(prophesy)는 뜻이다(영어 성경과 비교해 보라). 이 귀한 노래가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다시 회복되고 있다.

    높은 찬양(high praise)
    - ‘신령한 노래’의 범주에 ‘높은 찬양’(high praise)이라고 하는 또 한 가지 유형의 찬송이 있다.

    영적으로 깊고 강한 찬송으로서, 시편 149편 6절에 나온 찬양이다.

    그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尊影)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
    NIV / May the praise of God be in their mouths and a double-edged sword in their hands.

    “그들의 입에 하나님을 향한 높은 찬양들이 있게 하고, 그들의 손에는 양 날 이 있는 칼이 있어”(시 149:6 ․ KJV).
    Let the high praises of God be in their mouth, and a two-edged sword in their hand;


    새한글 / 하나님 높이는 소리를 목청껏 내야지요, 손에는 날 선 칼을 들고서요.

    여기에서 ‘높은 찬양’은 원어 ‘로맘’(םםור)의 번역이다.
    이 단어는 시 66:17과 함께 성경에 꼭 두 번 사용되었다.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시 66:17).
    ‘로맘’(םםור)은 ‘룸’(םור)이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인데, ‘룸’은 ‘높이다’ ‘높게 하다’의 뜻이다.

    시편 66:17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I cried unto him with my mouth, and he was extolled with my tongue.


    רוּם 스트롱번호  7313
    1. 격찬하다.  2. 높이다. 3. 세우다
    발음 [ rûwm ]
    어원  / 아람어
    구약 성경  / 6회 사용
    • 1. 격찬하다, 높이다, 세우다, 단 3:1, 4:17, 스 6:3.

    • 문법설명 /  7311과 동일

    • 관련 성경  / 칭송하다(단 4:37), 높이다(단 5:19, 23). [명] 교만(단 5:20).


    רוּם 스트롱번호 7311
    1. 높다.   2. 거만한. 3. 과시하다
    발음 [ rûwm ]
    구약 성경  / 166회 사용




    높이는 것은 ‘찬양’ 하는 것이다.

    그래서 ‘로맘’이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이 ‘높은 찬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높은 찬송’이 실제로 어떤 찬송을 말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찬양과 경배’ 사역에서 찬양 인도자(worship leader)로 종사하고 있는 분들은 이 찬송이 영적으로 하나님과 좀더 친밀하게 되었을 때 나오는 자연적이고 즉흥적인 노래(spontaneous song)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찬양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면 음량은 작아지고, 템포는 느려지고, 소리는 높아진다.
    가사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찬송이 영적으로 매우 높은 경지에 있을 때 나오는 참으로 신비한 찬양이다.
    이것이 ‘높은 찬양’으로 이때에 회중은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된다.

    이 ‘높은 찬양’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사단의 진을 쳐부수는 역할을 한다. ‘높은 찬양’은 영적 전쟁의 아주 강력한 무기이다(시 149:6~9).

    그들의 입에 하나님을 향한 높은 찬양들이 있게 하고,
    그들 의 손에는 양 날이 있는 칼이 있어 이방에 복수하며 그 백성을 처벌하고
    그들의 왕을 쇠사슬로, 그들의 귀족들을 쇠 족쇄로 묶어
    기록된 판결을 그들에게 시행하게 할지니, 이 영광이 그의 모든 성도들에게 있도다.
    너희는 주를 찬양할지어다.


    우리에 입에는 높은 찬양이 있고, 손에는 양날 선 칼이 있어야 한다.

    칼은 하나님의 말씀이다(엡 6:17; 히 6:17).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향한 높은 찬양’은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영적전쟁의 강력한 무기다.

    말씀의 검을 높이 들고, 주께는 찬양을 높이 올 릴 때,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하여 흑암의 세력이 쫒겨 가게 된다.

    우리는 모두 ‘신령한 노래’를 부르도록 요청받았다.
    그러므로 ‘신령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것은 방언찬송, 새 노래, 높은 찬양 등과 같은 '초자연적 노래'이다.
    이러한 찬양들은 우리의 의지를 뛰어 넘는 신비한 찬양들이다.
    이 놀라운 영적 찬양들은 성령의 역사가 강했던 초대교회에선 예배할 때마다 흔히 불려졌던 노래들이었다.


    교회 안에 ‘신령한 노래’가 회복되어야 한다.

    의식적이고 예전적인 예배와 더불어 찬양과 경배로 찬양이 회복되어야 한다

    찬양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불러져야 한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말씀에 의지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길 때, 우리는 모두 예배 가운데서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 있고, 결국 더욱 풍성한 찬송생활의 권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고…”(골 3:1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열심을 다해 찬양해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세 가지 유형의 찬송을 나열했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에 언급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똑같은 찬양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세 가지 모두 다른 유형의 찬양이다.

    ‘시’(psalm)는 구약의 시편을 말하고, ‘찬미’(hymns)는 시편 이외의 찬송을 뜻한다. 그렇다면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성령의 감동 아래 즉흥적으로 부르는 노래”이다. 일반 찬양과는 다른 독특한 장르의 찬송인 것이다. 다음과 같은 노래들이 신령한 노래이다.

    1. 영으로 하는 찬양

    ‘신령한 노래’의 첫 번째 유형은 “영으로” 하는 찬양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서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찬양’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방언’에 대하여 말하다가 나온 말이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4~15).

    여기에서 ‘마음으로’는 헬라어로 ‘누스’(νου?)인데, ‘이성적으로’라는 뜻이다. 방언기도는 영(spirit)이 하는 기도이므로 통역의 은사가 없으면 그 기도가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영은 기도하지만 나의 마음(mind), 곧 지각(the understanding)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영으로’(with the spirit) 기도하고, 또한 ‘지각으로’(with the understanding)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바울은 나의 영이 ‘기도’할 수 있듯이 나의 영으로 ‘찬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b). 영으로 찬양하는 것은 마치 방언기도를 드리는 것과 같다. 곧 이성의 영역을 떠나 내 영이 ‘자유롭게’ 부를 수 있는 찬송의 장르가 있다. 이것을 보통 ‘방언 찬송’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국교회 성도들이 방언 찬송을 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기존의 찬송가 곡에 맞추어 부른다. 그것은 내 영이 ‘자유롭게’ 부르는 신령한 노래가 못 된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진정한 영의 찬송은 일정한 곡이 없고, 곡조에 자유함이 넘친다. 다시 말하면 가락이 제마음대로란 얘기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가사와 가락(곡조)을 주셔서 '즉흥적으로'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으로 하는 찬양이 ‘신령한 노래’인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함께 신령한 노래로 찬양할 때 그것은 수십 성부의 아름다운 찬송이 된다. 성령이 각 개인의 목소리를 인도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모아서 화음을 이루며 영으로 찬양하게 할 때 창출되는 그 조화란, 참으로 천사들의 합창 그 자체처럼 들릴 때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3층천’ 예배인데, 이 때 회중은 강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2. 새 노래(a new song)

    ‘신령한 노래’의 또 한 가지 유형으로서 “새 노래” 라는 것이 있다. 성경은 도처에서 ‘새 노래’로 주를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시33:3; 사42:10; 계5:9). 이 ‘새 노래’ 역시 ‘영의 찬양’처럼 악보도 없는 노래를 즉흥적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으로, 곧 지각을 사용하여 노래한다는 점이 ‘방언 찬송’과 다르다.

    즉 ‘새 노래’는 성령께서 곡조와 함께 내 이성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가사를 즉흥적으로 주시는데, 바로 그 가사와 가락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정한 가사와 곡조가 없는 노래다. 이것은 '예언적 노래'로서 배워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니다.

    하느님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9). 하느님은 예레미야의 입에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그는 예언할 수 있었다. 그 하느님은 우리 입에 노랫말도 주신다. 그래서 우리로 새 노래로 찬양하게 하신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느님에게 기름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1~2).

    그리하여 우리는 즉흥적으로 ‘예언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초자연적 노래이다. 이러한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하느님께 굴복한다. 성령의 능력이 그 노래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또 그가 내 입에 새 노래를 두셨으니, 곧 우리 하느님께 드릴 찬양이라. 많은 사람이 그것을 보고 두려워하며 주를 의지하리로다”(시 40:3?KJV).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됨으로 엎드려 하느님께 경배하며 하느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 하리라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고전 14:24~26).

    이와 같은 ‘신령한 노래’는 초대교회에서 체험하였고, 일찍이 ‘다윗의 장막’에서도 불리어졌었다.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 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대상 25:1).

    여기서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라는 것은 “예언을 하게 했다”(prophesy)는 뜻이다(영어 성경과 비교해 보라). 이 귀한 노래가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다시 회복되고 있다.

    3. 높은 찬양(high praise)

    ‘신령한 노래’의 범주에 ‘높은 찬양’(high praise)이라고 하는 또 한 가지 유형의 찬송이 있다. 영적으로 깊고 강한 찬송으로서, 시편 149편 6절에 나온 찬양이다.

    “그들의 입에 하느님을 향한 높은 찬양들이 있게 하고, 그들의 손에는 양 날 이 있는 칼이 있어”(시 149:6 ? KJV).

    여기에서 ‘높은 찬양’은 원어 ‘로맘’(????)의 번역이다. 이 단어는 시 66:17과 함께 성경에 꼭 두 번 사용되었다.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시 66:17). ‘로맘’은 ‘룸’이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인데, ‘룸’은 ‘높이다’ ‘높게 하다’의 뜻이다. 높이는 것은 ‘찬양’ 하는 것이다. 그래서 ‘로맘’이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이 ‘높은 찬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높은 찬송’이 실제로 어떤 찬송을 말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찬양과 경배’ 사역에서 찬양 인도자(worship leader)로 종사하고 있는 분들은 이 찬송이 영적으로 하느님과 좀더 친밀하게 되었을 때 나오는 자연적이고 즉흥적인 노래(spontaneous song)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찬양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면 음량은 작아지고, 템포는 느려지고, 소리는 높아진다. 가사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찬송이 영적으로 매우 높은 경지에 있을 때 나오는 참으로 신비한 찬양이다. 이것이 ‘높은 찬양’으로 이때에 회중은 하느님의 임재를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된다.

    이 ‘높은 찬양’은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 사단의 진을 쳐부수는 역할을 한다. ‘높은 찬양’은 영적 전쟁의 아주 강력한 무기이다(시 149:6~9).

    6.그들의 입에 하느님을 향한 높은 찬양들이 있게 하고, 그들 의 손에는 양 날이 있는 칼이 있어
    7. 이방에 복수하며 그 백성을 처벌하고
    8. 그들의 왕을 쇠사슬로, 그들의 귀족들을 쇠 족쇄로 묶어
    9. 기록된 판결을 그들에게 시행하게 할지니, 이 영광이 그의 모든 성도들에게 있도다. 너희는 주를 찬양할지어다.

    우리에 입에는 높은 찬양이 있고, 손에는 양날 선 칼이 있어야 한다.
    칼은 하나님의 말씀이다(엡 6:17; 히 6:17).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을 향한 높은 찬양’은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영적 전쟁의 강력한 무기다.
    말씀의 검을 높이 들고, 주께는 찬양을 높이 올 릴 때,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하여 흑암의 세력이 쫒겨 가게 된다.

    우리는 모두 ‘신령한 노래’를 부르도록 요청받았다.
    그러므로 ‘신령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것은 방언찬송, 새 노래, 높은 찬양 등과 같은 '초자연적 노래'이다.
    이러한 찬양들은 우리의 의지를 뛰어 넘는 신비한 찬양들이다.

    이 놀라운 영적 찬양들은 성령의 역사가 강했던 초대교회에선 예배할 때마다 흔히 불려졌던 노래들이었다. 그러나 방언과 더불어 교회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오다가 20세기에 이르러 성령의 역사와 함께 찬양과 경배라는 새로운 양식의 예배가 시작되면서 마침내 신령한 노래들도 다시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신령한 노래’가 회복되고 있다. 의식적이고 예전적인 예배에서는 이러한 놀라운 찬양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순서에 따라 예배가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배를 우리가 만든 순서에 의지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길 때, 우리는 모두 예배 가운데서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 있고, 결국 더욱 풍성한 찬송생활의 권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신령한 노래와 새 노래


    에배소서 5:19~21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제도적 예배와 확장된 예배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오늘 우리의 삶에 예배가 풀어지고 확장되고 있습니까?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이 자리에서, 예배를 누리고 계십니까? 에베소서 5장 본문은 성령충만의 방법이자 결과로, ‘예배’를 말합니다. 예배는 세상과 구별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자 세상을 이기는 성도의 능력입니다. 교회는 다 함께 모여, 또한 각 가정과 일터로 흩어져 예배하는, 예배 공동체입니다. 함께 모이나 또한 흩어지는 예배. 이는 신약에서 말하는 예배의 두 가지 개념입니다. 먼저는 좁은 의미의 예배입니다. 이는 오늘 주일예배처럼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약속된 교회의 모임으로 드리는 제도적 예배입니다. 제도적 예배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요한복음 4장의 예배와 연결됩니다. 주님은 예배의 장소를 묻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를 것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상에 치우친 사마리아 땅의 예배와 율법에 치우친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예배의 중심을 바로 잡아 주시며, 종교적이고 제도적인 의미로의 예배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반면, 넓은 의미의 예배가 있습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로 이어지는 확장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장은 세상과 구별되어 주님께 드려진 산 제물, 예배자로 삶을 살아갈 것을 말합니다. 예배의 두 개념은 Worship과 Service란 두 표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경배를 요구하는 사탄에게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경배(Worship)가 앞서 말한 좁은 의미의 예배, 즉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모여 드리는 제도적 예배에 가깝다면 섬김(Service)은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된 예배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예배당에 모여 함께 예배할 뿐 아니라, 가정과 일터의 자리에서도 주님을 예배함으로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며 주어진 일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처럼 주일예배나 금요철야 같이 약속된 날 예배당에 함께 모일 때도, 로마서 12장처럼 제도적 예배가 끝난 후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갈 때도, 언제나 우리의 예배가 주님안에서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종교적 예배, 제도적 예배로 함께 모여 예배할 뿐 아니라,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논문을 쓰고 자료들을 정리하는 모든 삶의 현장이 예배가 되길 축복합니다. 예배를 누릴 수 있는 성도, 예배로 돌파할 줄 아는 성도, 예배로 임재를 나르는 성도로 섭시다.

    서로 화답하는 코이노니아의 예배 -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세상과 구별된 빛의 자녀들로서 오직 성령 충만할것을 당부한 바울은 이어서 그 결과인 예배의 다섯 가지 형태를 말합니다. 바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감사와 피차 복종함입니다. 가장 먼저 언급된 ‘시’는 헬라어 원문으로 ‘줄을 타다’, ‘소리를 내다’라는 의미로, 악기와 함께 부르는 노래를 뜻합니다. 시편에서 악기 소리에 맞추어 불려진 노래가 ‘시’입니다. ‘찬송’은 하나님을 위해 쓴 글과 말들을 낭송하고 외치는 소리입니다.

    오늘날 문학 장르 중 시가 오히려 찬송에 가깝습니다.
    세 번째는 ‘신령한 노래’입니다.
    이는 ‘프뉴마’, 즉 ‘영’적 요소가 강조된 노래로, 방언 기도와 같은 ‘영의 노래’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영적으로 풀어지고 선포되는 다양한 예배의 모습들을 골로새서 3장과 고린도전서 14장에서도 언급하였는데, 특별히 방언 기도에 대해 말하며 영의 기도와 마음의 기도, 영의 찬송과 마음의 찬송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이처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드려지는 예배에서 또한 주목할 것은 서로 화답함입니다.
    에베소서 본문에서 바울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고 찬송하라 말합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할 때, 누군가는 시로 하나님을 노래하고, 누군가는 찬송으로 하나님을 선포하며, 누군가는 신령한 노래로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분명한 곡조에 따라 노래하는 소리, 주님의 아름다움과 위대하심을 외치고 선포하는 소리, 영의 노래로 주님을 높이는 소리, 그리고 그 영적 노래를 통역하여 풀어내는 소리까지 모두 한데 어우러져 서로 화답하는 아름다운 하모니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1세기 교회의 예배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수백명이 모일수 있는 예배당이 없었습니다. 적게는 두세사람부터 스무명 정도의 사람들이 둘러앉아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화답하며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찬송시와 계시의 말씀과 예언의 노래와 영의 노래로 코이노니아 예배가 이루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예배가 우리에게도 풀어지길 소원합니다. 에베소 교회처럼, 고린도 교회처럼, 성령님의 운행하심에 온전히 이끌려가며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여 마음이 하나되고 영이 풍성하게 되는 예배가 열리길 바랍니다.

    서로 화답하는 코이노니아의 예배 - 새노래

    마지막으로 종종 ‘신령한 노래’와 헷갈리는 ‘새노래’에 대해 나눕니다. 신령한 노래가 영적인 노래라면 새노래는 이전과 다른 노래로, 요한계시록 5장 본문으로 새노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새노래는 세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어린 양, 즉 약속하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노래입니다. 두 번째는 어린 양이 완성하신 의, 모든 저주를 끊어낸 십자가 구속의 선포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성장과 새로운 계시로의 노래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며 넓고 깊어진 만큼 새롭게 불려지는 노래를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어렸을 때는 하나님을 나를 지켜주는 분, 내가 기도하면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 정도로 경험합니다. 그러나 자라나면서 우리는 역사를 운행하시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점차 알아가게 됩니다. 주님을 더욱 경험하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깊이와 넓이가 나날이 확장되어 이전과 다른 새노래로 주님을 노래하길 축복합니다. 10년 전의 하나님, 5년 전의 하나님이 아닌, 오늘 또 새롭게 만난 하나님을 노래합시다. 아침마다 새로운 주님의 자비와 아름다움이 이 교회가 부를 새노래 되기를, 하나님을 아는 깊이와 넓이의 새로운 노래가 계속해서 울려퍼지기를 기도합니다.



    신령한 노래(5구절)

    역대상 25:1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역대상 25:2
    아삽의 아들 중 삭굴과 요셉과 느다냐와 아사렐라니 이 아삽의 아들들이 아삽의 수하에 속하여 왕의 명령을 좇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역대상 25:3
    여두둔에게 이르러는 그 아들 그달리야와 스리와 여사야와 하사뱌와 맛디디야 여섯 사람이니 그 아비 여두둔의 수하에 속하여 수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에베소서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호다이스 프뉴마티카이스

    노래(5603)

    신령한(4152)


    󰃨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 ‘그리스도의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로고스 투 크리스투’ (*)에 대해 혹자는 주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uce, Lenski, Lightfoot). 그러나 ‘호 로고스 투 크리스투’를 꼭 주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할 이유는 없다. 본절의 소유격은 주격적일 뿐 아니라 목적격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물론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Vaughan, Carson). 한편 ‘너희 속에’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개인적인 차원에서 ‘너희 마음 속에’를 의미한다(Lightfoot). 2. 공동체의 차원에서 ‘너희들 속에’를 의미한다(Masson, Lohse). 두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Bruce, O' Brien). 결국 그리스도의 말씀을 해석하고 설교를 듣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리스도인 각자는 물론 공동체내에 풍성히 거함으로 그 영향력 아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 두 가지를 행해야 한다. 1.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ㅕ 권면하고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은 바울 사도나 디모데가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1:28) 골로새 교인들이 피차 ‘모든 지혜로’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지혜’는 ‘가르치고 권면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지를 의미한다(O' Brien). 2.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 ‘시’와 ‘찬미’ㅡ 그리고 ‘신령한 노래’를 굳이 구별한다면, ‘시’는 구약 시편을 의미하며 (눅20:42 ;24:44 ; 행 1;20 ; 13:33),‘ 찬미’ 는 ‘축제의 찬양’ (O' Brien, Lohse) 혹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작곡되고 불리는 찬송’ (Lightfoot)을 의미하고, ‘신령한 노래’는 ‘하나님의 행위를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노래’ (Lohse, O' Brien)혹은 ‘즉흥적으로 불리는 영적 노래’를 가리킨다(Bruce). 그러나 세 가지 용어를 정확하게 구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헌편 찬양을 그리스도인들의 입술의 열매이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행위이다(히 13:15). 진정한 찬양은 ‘감사하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혹자는 ‘감사함으로’의 헬라어 ‘엔 카리티’ (*)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Lohse). 그러나 15절과 17절 사이에서 ‘감사함’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적절한 응답으로서의 감사함’의 의미로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O' Brien).


    새노래(9구절)

    시편 33:3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찌어다.

    시편 40:3
    새 노래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 새 노래는 새로운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이 즐겁게 받으실 찬송을 말합니다.

    새(2319) 노래(7892) 쉬르 하다쉬

    새노래...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 본 표현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찬양할 만한 새로운 경우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이번에 베푸신 구원은 너무 특징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이전의 자비 행위에 덧붙여진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감사의 표현을 매우 적절히 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의 구속 행위는 과거의 자비 행위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때 사용하였던 언어로는 불충분할 만큼 놀라운 하나님 편에서의 중재 사역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번의 구원 사역은 슬픔의 깊음 이후 영광으로 승귀(昇貴)하신 그리스도의 사건 때만큼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에는 언어가 불충분할 정도의 위대한 사역이었다는 뜻이다(Barner).

    많은 사람이...두려워하여...의지하리로다
    - 인류의 많은 백성들이 저자가 노래했었던 것과 같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목도하고 그 결과로 하나님을 존경하고 예배하고 경와하는 것을 배워서 그분만을 온전히 의뢰하게 된다는 것이다. 곧 그의 진실된 예배자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을 나타낸 표현이다.







    시편  96: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찌어다.

    시편 98:1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시편 144:9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편 149:1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찌어다.

    이사야 42:10
    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들과 그 거민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요한계시록 5: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요한계시록 14: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역대상 20장 요약

    다윗의 군장인 요압이 암몬땅 랍바를 함락시키고,다윗의 군사들이 블레셋의 거인들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21장 요약

    다윗이 요압을 시켜서 인구조사를 실시하엿고 인구조사에 대한 잘못으로 다윗은 회개합니다.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벌을 내려서 사람을 칠만명이나 죽이셨으며,이로 인해서 다윗은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구입하여서 하나님께 제사들 드리게 됩니다.

    역대상 22장 요약

    다윗이 성전을 짓기 위해서 여러 물자들을 준비하였고 다윗이 솔로몬과 신하들에게 성전건축에 대하여서 당부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월 8일(목) 역대상 20-2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스라엘의 인구조사(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Satan rose up against Israel and incited David to take a census of Israel.

    역대상 21장은 사탄이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를 시행하도록 유혹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다윗은 이제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승리하는 삶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탄의 유혹을 받아 여호와 하나님보다 사람의 힘을 생각하며 인구 조사를 명령합니다.
    인간의 힘을 의지하려는 행위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태도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적하다(알. ʽal) עַל 스트롱번호 5921

    1. 옷을 입은. 2. 삼하 4:7
    발음 [ ʽal ]
    구약 성경  / 5772회 사용

    격동하다(수트. çûwth)  סוּת    스트롱번호 5496

    1. 찌르다.  2. 자극하다.  3. 히필형 הִסִּית
    발음 [ çûwth ]
    구약 성경  / 18회 사용
    관련 성경  /  충동시키다(삼상26:19), 충동되다(왕상21:25), 옮기다(욥36:16), 꾀다(신13:6, 대하32:11, 렘38:22), 청하다(수15:18, 삿1:14), 감동시키다(삼하 24:1, 대하 18:31), 설득하다(왕하18:32), 충동하다(대상21:1, 욥2:3), 권하다(대하18:2), 꾀임을 받다(대하32:15, 사36:18), 분노하다(욥36:18), 부추기다(렘43:3).

    다윗의 인구 조사(역대상 21:1-17, 사무엘하 24:1-17)

    본서의 내용을 살펴볼 때 지금까지 본서의 기자는 승승 장구하는 다윗 왕의 영광된 측면만을 부각시켜서 기록했다(10:1-20:8).
    그러나 본장에서부터는 관심을 달리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준비하는 다윗 왕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즉, 자신의 인생 말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다윗의 신앙적 행위를 증거하는 것이다.
    사실 이때는 시기적으로 다윗 왕의 통치 말기에 해당하는데 다윗 왕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던 때로부터 약 20년의 세월이 경과한 것으로 보인다(Payne).
    참으로 이 20년의 기간 동안에 다윗 왕은 그의 큰 범죄로 말미암아 일련의 연쇄적인 징계들을 받았다.
    그 징계들이란 암논의 추행 사건(삼하 13장), 압살롬의 반란(삼하 14-19장), 그리고 세바의 반란(20장) 등이었다.
    그러나 본서 저자는 이러한 다윗(David) 왕의 불행했던 역사를 뛰어넘어 곧바로 성전 건축에 관련된 다윗 왕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저자가 다윗 왕이 겪은 고통스런 일련의 역사를 본서에서 생략한 것은 바벨론(Babylon) 유수(幽囚)에서 풀려난 유다 왕조의 후손들에게 될 수 있는 대로 그 왕조의 탁월성 및 정통성만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신정 국가 건설에 큰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자 하기 위함이었다(Payne).
    그런데 이러한 저자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본장에서 다윗 왕이 크게 범죄했다고 생각되는 인구 조사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본서에 언급된 것은 이 일을 계기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전 건축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 사건을 동기로 해서 성전의 부지가 결정되고 성전 건축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단이...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 본 문맥은 내용상 삼하 24장과 일치하고 있으나 많은 차이점이 발견된다.

    즉, 삼하 24장에서는 다윗을 격동한 주체가 하나님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본절에서는 그 주체가 사단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삼하 24장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Lange).

    24: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유대인의 신관(神觀)에 비추어 볼 때 잘못된 추측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단의 활동을 허락하실 때에야 비로소 사단은 활동을 개시할 수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욥 1:12; 삼상 26:19).
    참으로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일에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다(욥 12:23; 시 104:9-31; 사 50:2, 3; 갈 1:15, 16).
    그래서 삼하 24장은 바로 이러한 섭리적 차원에서 다윗을 격동하신 주체가 하나님이었다고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움직여지는 결과적 측면에서 그 주체를 사단으로 기록한 것 뿐이다.
    따라서 이 두 구절은 어느 하나 잘못된 것이 없으며 다만 상이한 관점에 따라 달리 기록된 것일 뿐이다(PulpitCommentary).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사단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였음을 알 수있다.

    그러나 혹자는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사단이 다윗을 격동한 것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고 주장한다(욥 1:11; 2:5, Wycliffe).
    그러나 사단이 다윗을 격동한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이라고 하기보다는 '고소', '기만' '파멸'을 일삼는 사단의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사단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은 자신의 세 가지 목적을 달성하신다.
    첫째는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려는 다윗 왕의 교만을 제거하여 겸손하게 만드는것
    둘째는 압살롬의 난, 세바의 난 때에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종 다윗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형벌하시는 것(삼하 24:1)
    셋째는 성전건축을 구체적으로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

    그리고 사단의 역할이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인데 이러한 활동을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혹은 연단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상(思想)은 포로기 전후에 나타난 유대교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O. Zockler).


    출애굽기 30:12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사람은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찌니 이는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

    민수기 26:2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총수를 그 조상의 집을 따라 조사하되 이스라엘 중에 무릇 이십세 이상으로 능히 싸움에 나갈만한 자를 계수하라 하시니.

    사무엘하 24:1-2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왕이 이에 그 곁에 있는 군대 장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그 도수를 내게 알게 하라.

    사무엘하 24:4
    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장관들을 재촉한지라 요압과 장관들이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려고 왕의 앞에서 물러나서.

    사무엘하 24:10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역대하 2:7
    전에 솔로몬의 부친 다윗이 이스라엘 땅에 거한 이방 사람을 조사하였더니 이제 솔로몬이 다시 조사하매 모두 십 오만 삼천 육백인이라.






    기독교인을 말씀에서 멀어지게 하는, 사탄의 최신 전략

    최근 사회적 발전 및 디지털 미디어의 출현으로 성경을 찾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러나 브라운 박사는 "사탄은 항상 기독교인들을 성경에서 떼어놓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들인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수 세기 동안 성경읽기를 방해함으로써 사람들의 영적인 눈을 가려 온 사탄의 전략을 설명했다.

    브라운 목사는 "과거에는 일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언어(라틴어) 안에 성경을 가둬둠으로써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윌리엄 틴데일의 수고와 사역으로, 성경이 유럽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영어로 번역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유럽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해외로 전파하던 식민지 시대에는, 사탄이 비영어권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읽는 것을 막기 위해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게 했다.

    이에 관해 브라운 목사는 "비슷한 정서가 1655년 뉴헤븐 법전에 나타났는데, 교육의 목적이 아이들이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도록, 그리고 구원에 필요한 기독교의 주요 근거와 원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명시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브라운 목사는 "오늘날 사탄은 '주의 산만'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매우 성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며 "주의 산만에는 문자, 이메일, 전화, TV쇼, 뉴스, 스포츠 경기, 소셜미디어 글과 광고 등이 포함돼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유튜브의 추천 영상으로 주의를 빼앗겼던 자신의 경험을 떠올렸다. 그는 우연히 동물이 출연하는 영상을 접하고 거의 1시간 가량 보게 되었다고.

    그는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진 데 대해 사탄을 탓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우리의 선택이다. 그러나 우리의 집중력을 빼앗가는 우리 시대의 유혹을 우리는 인식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우선순위에 두고자 결단할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브라운 목사는 "믿는 자들은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그들의 삶을 말씀을 읽고 천착하는 데 초점을 두기로 결단함으로써 말씀이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서 "충분히 말씀을 붙들고 삶 가운데 적용할 수 있다면, 이는 국가에도 말 그래도 혁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파이퍼 목사가 소개한 사탄의 전략 10가지이다.

    1. 사탄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니니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사탄은 자신의 속성에 따라 거짓을 말한다. 그는 거짓말쟁이고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창세기 3장에 처음 등장한다. 그의 입술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진리에 대한 의심이었다("하나님께서 정말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리고 두 번째 나온 말은 교묘한 거짓말이었다("네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요한은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에 진리에 서지 못하고 진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거짓과 속임의 핵심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2. 사탄은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리운다.

    이 세상의 신은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리우고,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다(고후 4:4). 그는 거짓을 말할 뿐 아니라 참된 것을 숨긴다. 그는 복음의 귀함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는 우리가 사실과 증거들을 보면서도, 그 귀한 가치는 알지 못하도록 가리운다.

    3. 사탄은 빛과 의로움의 옷으로 자신을 가장한다.

    고린도후서 11장 13~15절에서 바울은 어떤 이들은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인체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와 같이 사탄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말씀한다. 따라서 사탄의 종들이 스스로를 의의 종으로 가장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즉, 겉으로는 교회에 참여하기에 충분한 지식을 말하지만 안으로는 바울 사도가 '귀신의 가르침(딤전 4:1)'이라고 언급한 내용들을 가르치는 이들은 사탄의 종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마치 양의 탈을 쓴 늑대(마7:15)와 같다고 하셨다. 사도행전 20장 30절 말씀은 이들이 무리들을 끌어내어 멸망으로 이끈다고 기록돼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분별의 은사(빌1:9)가 없다면, 우리의 사랑은 우둔함에 빠질 수 있다.

    4. 사탄은 기적을 행한다.

    데로니가후서 2장 9절은 마지막 날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신다. 사탄은 마치 이러한 기적들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한다. 사실, 일부 사람들은 사탄이 거짓된 기적들만 행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있다. 설령 이것이 진리라고 해도, 사탄의 거짓은 거의 모든 이들에게 충분히 진짜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5. 사탄은 사람들을 유혹해 죄짓게 한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계실 때, 그분을 유혹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사탄은 예수님이 고통과 순종의 길을 포기하길 바랬다(마4:1~11).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삶에서 유다를 유혹하는데는 성공했다(눅22:3~6).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모든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씀을 전한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6.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뽑아내고, 신앙을 죽인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4장 1~9절에 나타난 4가지 밭 비유를 말씀해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의 땅에 뿌려지는데 일부 씨앗은 길 가에 뿌려져서 새들이 재빨리 먹어버린다. 주님은 15절에서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것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사탄은 말씀을 빼앗아간다. 왜냐하면 말씀을 통해 믿음이 자라나는 것을 미워하기 때문이다(롬 10:17).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염려의 말씀을 전했다.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의 신앙을 죽이려는 사탄의 계획을 잘 알고 있었다.

    7. 사탄은 때로는 아픔과 질병을 일으킨다. 

    예수님은 허리가 굽어져서 스스로 펼 수 없는 한 여인을 치유해주셨다. 그러자 일부 사람들이 안식일에 이같은 일을 행한다며 예수님을 비난했다. 이에 예수님은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 13:16)"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같은 질병의 원인이 사탄에게 있음을 아신 것이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증거한다. 즉, 사탄이 병으로 사람들을 누른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그의 계획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모든 질병이 마귀의 역사라고 말하는 실수를 범해선 안 된다. 분명 '육체의 가시'가 우리의 성화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일지라도, 사탄의 사자가 될 수 있다(고후 12:7). 그러나 질병이 온전히 하나님의 계획인 경우도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그가 예수님의 자비로운 계획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탄을 데려올 필요를 못 느끼셨다.

    8. 사탄은 살인자이다. 

    예수님은 그를 죽이려고 계획한 이들에게 "너희는 마귀의 아비로부터 나왔고, 그 아비의 일을 행하려 한다.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요8:44)"고 말씀하셨다. 요한 사도는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일 3:12)"라고 전했다. 예수님은 흠이 없는 서머나 교회에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계 2:10)"고 말씀하셨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사탄은 피에 굶주려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를 충만케 하려고(요10:10)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사탄은 할 수 있는대로 생명을 빼앗고, 결국 영원히 불행하게 만들고자 한다.

    9. 사탄은 사역자들의 계획을 대적한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 2장 17~18절에서 자신의 선교 계획이 어떻게 죄절되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사탄은 전도와 제자도를 싫어한다. 그는 선교사들을 비롯해 전도에 열정이 있는 이들의 길에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해물들을 던져 놓는다.

    10.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신자들을 고소한다. 

    요한계시록 12장 10절은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나고"라고 말씀하신다. 사탄은 반드시 패배한다. 그러나 그의 고소는 그치지 않고 있다.

    사탄은 욥에게 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를 대한다. 사탄은 하나님께 우리에 대해 "그들은 정말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당신이 주시는 이익만 바라본다"고 참소한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1:11)." "그들의 신앙은 진짜가 아니라"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고소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항상 살아서 그들을 위해 간구하시는 분(히 7:25)'이 계시다는 사실이 매우 영광스럽다.

    사탄은 결국 이기지 못할 것이다. 

    앞에서 사탄의 계획을 소개했지만, 이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은 이미 결정적인 승리를 하신 그리스도를 굳건히 붙드는 것이다.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골로새서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마가복음 3: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요한계시록 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앨리스 베일리(1880-1949)는 역사상 최고위급 사탄숭배자들의 지도자요, 귀신의 능력에 매우 민감한 영매였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적대자였던 그녀가 책을 쓴 목적은 세상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대체할 수 있는 ‘대체 가치체계’를 만들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에 기록된 모든 것들은 영계로부터 직접 왔고 자신의 창작물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녀에게 책의 내용들을 받아쓰도록 구술한 세 마리의 주신급(主神級) 영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엘리스 베일리가 기독교 가치체계를 악한 것으로 대체하는 데 실천적으로 사용했던 전략은 노인을 상대하지 않고 어린아이들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Photo





    앨리스 베일리가 주창한 기독교 말살 시키기 10가지 전략

    기독교를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적대자였던 베일리가 책을 쓴 목적은 세상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대체할 수 있는 '대체 가치체계'를 만들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에 기록된 모든 것들은 영계로부터 직접 왔고 자신의 창작물은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베일리가 기독교 가치체계를 악한 것으로 대체하는 데 실천적으로 사용했던 전략은 노인을 상대하지 않고 어린아이들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앨리스 베일리가 주창한 '10가지 전략'을 살펴보면, 오늘날 각국 의회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들과 꼭 같음을 알 수 있다.
    앨리스가 수립한 이 전략의 핵심은 사회 각 분야에서 하나님을 추방하여 기독교적 전통을 말살하고 건전한 가정을 파괴하며 음란과 퇴폐의 영을 퍼뜨려서 국가와 사회를 타락시키는 것이다.
    최고위급 '사탄숭배자' 앨리스 베일리가 전파한 '가정과 교회, 국가 무너뜨리는 10가지 전략'은 다음과 같다.

    1. 교육시스템으로부터 하나님과 기도를 제거하라

    커리큘럼을 변경시켜서 기독교 문화의 속박으로부터 아동들을 해방시켜라.
    아동들이 학교에 가는 목적은 인생을 직면할 준비를 갖추기 위함이고 아동들은 학교와 교사를 신뢰하며 거기에 우월적 가치를 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육으로부터 하나님을 제거한다면, 아동들은 인생을 직면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는 신념을 무의식적으로 갖게 될 것이다.
    아동들은 진급하는 데 있어서 학교당국이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것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며, 하나님에 관하여는 그저 부가적인 존재 정도로 여기게 될 것이다.

    2. 아동들에 대한 부모의 권위를 축소시켜라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의사소통을 끊어라.
    부모들이 자신들이 지키는 기독교적 전통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못하게 함으로써 부모의 전통이라는 속박으로부터 아동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이다.

    아래는 앨리스 베일리가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들이다.

    첫째, 아동권리를 과잉되게 신장시켜라
    둘째, 체벌을 폐지하라
    셋째, 교사들은 '10가지 전략'의 실행 요원이다.

    3. 기독교 가정 구조 또는 전통적 기독교 가정구조를 파괴하라

    전통적 기독교 가정구조의 억압은 견딜 수 없다. 가정이 국가의 핵심이라고 볼 때 만일 가정을 깨트린다면 국가를 깨트리는 것이다. 이런 감금상태의 구조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라. 이를 위해 앨리스 베일리가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들이다.

    첫째, 성 문란을 조장하라
    둘째, 광고 산업, 미디어-TV, 잡지, 영화 산업을 이용하여 섹스 하는 쾌락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부추겨라(선전전략).

    4. '프리섹스'(Free Sex) 사회를 만들라 - 낙태를 합법화하고 낙태하기 쉽게 만들라

    낙태 병원을 세워라. 학교 안에도 진료소를 만들라. 사람들이 섹스의 쾌락을 누리려면 그에 따르는 불필요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하여 그들의 섹스가 훼방 받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낙태 금지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며 이는 우리의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아이를 가질지 말지에 관해서 선택할 권리는 우리에게 있다. 한 여성이 임신을 원치 않는다면 그녀는 고통 없이 가능한 용이하게 그 임신을 지워버릴 자유를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

    5. 이혼하기 쉽게 만들고 이혼을 합법화하라 - 평생결혼의 개념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라

    사랑은 '사랑결합'이라는 신비로운 연결을 가졌다. 그것은 마치 난소로부터 발생하는 난자와 같아서 당신이라는 시스템을 경유하면서 당신 안에서 사랑의 호의를 클릭하는데, 세상에는 당신의 그 '사랑결합'에 응답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 당신이 그 사람을 만나면 당신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클릭하게 되며 이때 만나는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의 남자(또는 여자)이다. 만일 당신이 그 사람을 놓치면 그 사랑결합 사이클이 지나갈 때까지 수 년 간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행복하려면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그 사람을 붙들어라. 그 남자(또는 여자)를 기혼자 상태에서 빼내는 것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남자(또는 여자)인 그(또는 그녀)를 붙잡으라. 그(또는 그녀)가 엉뚱한 곳에 있다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그리고 만일 일정 기간 함께 살다가 그 사랑이 이미 죽었음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기독교적 가치 같은 속박에 얽매이지 말라.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쉽게 이혼할 수 있는 방법과 그리고 또 다른 사랑결합의 생성을 허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의 난자가 발생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랑결합이 생성되면 당신은 다시 한 번 인생을 즐기게 될 것이다.

    6. 동성(연)애를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대체 생활방식으로 만들라

    '섹스'하는 쾌락이 인간 최고의 즐거움이어서 누구도 이런 즐거움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되며, 누구도 그 즐기는 방법에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스스로 원해서 선택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동성(연)애든지 근친상간이든지 수간(獸姦)이든지 아무튼 쌍방이 합의하기만 하면 어떠한 형태의 섹스도 허용되어야 한다.

    7. 예술의 품격을 떨어트려라 '미친 예술'이 되게 하라

    예술이야말로 문화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열쇠이다. 인간의 상상력을 더럽히고 타락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장려하라. 왜냐하면 예술은 영의 언어로서 당신은 안에 있는 그것을 회화, 음악, 드라마 등의 형태로 끄집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類)의 예술과 음악과 영화들이 표현하고 있는 품격과 영성과 메시지를 살펴보라.

    8. 미디어를 활용하여 선전하고 인간의 사고방식을 바꿔라

    인간의 태도를 바꾸는데 가장 효과적인 최대의 경로는 미디어다. 신문, 라디오, TV, 영화를 이용하라. 미디어만이 아니라 광고회사, 옥외 광고판, 잡지 등을 통하라.

    9. 종교통합운동을 일으키라

    다른 종교들을 장려하여 기독교와 동등이 되도록 하라. 자신들만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을 분쇄하라. 그리함으로써 기독교는 격하될 것이고 여타 종교들이 신장될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미래와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중요성을 부각시켜라(인본주의).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선택할 권리가 인간에게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되도록 스스로 만들 능력이 있으며 자신의 목적을 결정할 권리를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말해 주라.

    10. 각국 정부로 하여금 위의 모든 사항들을 법제화 하도록 하고 교회로 하여금 이러한 변화들을 추인하도록 하라 (동성애에 대한 차별금지법을 뜻함)

    교회는 위의 사항들을 수용하도록 결국 교리를 변경시켜야 하며, 사람(성도)들을 변화에 적응시켜서 이러한 사탄적·세속적 구조와 체제 안으로 편입시켜야 한다.






    사탄의 10가지 전략(디모데후서 3:1-4)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가정, 교회, 국가를 무너뜨리는 사탄의 10가지 전략

    지피지기면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
    나를 알고 적을 알면 승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성령을 잘 알고 따라가고 사탄의 정체를 잘 알아서 이기면 백전백승할 수 있습니다.

    영국인 엘리스 베일리(1880-1949)는 역사상 최고 사탄을 잘 숭배하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탄 숭배자들을 모아 지도하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사탄의 영감에 매우 민감한 영매였습니다.

    65년 전 그는 기독교를 말살할 수 있는 전략을 집필하였습니다.
    “기독교 말살을 위하여 10가지 플랜” 이런 책입니다.
    기독교를 이 땅에서 없애고 기독교를 대체할 수 있는 종교를 만들려는 책입니다.
    그는 서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세 사탄이 나에게 와서 알려준 전략이다.”
    그에게 와서 알려준 사탄은 사탄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스 베일리가 기독교 말살을 하려는 데 공격대상은 노인이 아니라 아동입니다.

    엘리스의 ‘10가지 전략’을 보니까 오늘날 세계 각국 정부의 통치 전략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오늘 날 정치는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전략을 알고 역전략을 세워야 할 필요성에서 이를 공개합니다.
    사탄은 가정, 교회, 그리고 정부를 뒤엎기 위하여 10가지 전력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1. 교육 시스템에서 하나님과 기도를 제거하라

    가정, 교회 그리고 정부를 파탄시키려면 아동들에게 가르치는 교육에서 기독교 문화를 없애라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모든 요소를 제거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동들로 하여금 기독교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가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교육에서 하나님을 필요하지 않은 존재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게 만들어 주는 교육이 그들의 목표입니다.
    죤 듀이는 현대 교육의 아버지입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하여 주는 것이 교육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날 그런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교육은 전혀 다릅니다.
    아이들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여 주는 교육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쳐주는 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과 밀담을 나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어느 정도 성숙하면 나무 위로 올라가게 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뛰어 내려라. 아빠를 믿고 뛰어 내려. 아빠가 받겠다.”
    아이는 아빠를 믿고 나무에서 뛰어 내립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이를 받지 않아 곤두박질하고 맙니다.
    아이가 아픔을 토하며 묻습니다.
    “왜 받아준다고 하고 안 받아 주셨어요?” 아버지가 말합니다.
    “너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무도 믿지 말아라. 부모 믿지 말아. 오직 하나님만 믿어라.”
    이것이 유대인의 교육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성경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살라고 교육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교육 전략입니다.
    사탄의 전략에 넘어간 현실입니다.
    1962년 6월 25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정교분리 원칙을 발표하였습니다.
    공립학교에서 하나님과 성경을 가르치는 것에 금지 판결을 내렸습니다.
    주기도문과 수업전 기도는 금지되었습니다.

    오히려 미국의 일부 학교들은 힌두교에서 나온 초월명상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 아이들을 의식 혼미하게 만든후 사탄과 접촉하게 하는 전략입니다.
    아이들에게 명상 가운데 ‘안내자 영’을 만난다고 말해주고 있는 데 이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하나님 아닌 귀신과의 교제를 학교가 장려한다.

    2. 아동 부모의 권위를 축소시켜라

    사탄은 두 번째 전략으로 부모와 자녀 사이의 의사소통을 끊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부모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을 아동들에게 전달하지 못 하게 단절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전통에 속박되지 않고 해방되도록 전략을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엘리스 베일리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① 아동들 권리를 과잉되게 신장시켜라.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남아공화국은 1997-98년에 유엔이 제정한 유니세프 헌장의 아동 권리를 국내법으로 받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법대로 살아야 하기에 부모나 교사는 아동들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아동들에게 명령도 할 수 없습니다.
    대신에 아동들은 부모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요. 내게 말하는 대로 하고 싶지 않아요.”
    가르치려는 선생님에게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게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우리나라에도 지금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② 아동 체벌을 폐지하라.

    아동체벌 금지법은 이미 세계 각국에서 이미 법제화되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선진국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아동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체벌할 수 없게 법으로 금지된 실정입니다.
    한국의 학생인권조례 역시 체벌을 일체 금지하고 있습니다.

    어느 초등학교 아이가 지은 시입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급히 폐기시켰던 시입니다.
    지금 이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학원 가기 싫은 날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때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곡 구원 먹어 눈깔을 파먹어 이빨을 다 뽑아 버려 머리채를 쥐어뜯어 살코기로 만들어 먹어 눈물을 흘리면 핥아 먹어 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 가장 고통스럽게

    ③ 교사들을 10가지 전략의 실행요원으로 사용하라.

    교사들이 아동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게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네 부모는 너에게 기도하고 성경 읽으라고 가르치고 강요할 권리가 없다.
    너는 너다. 너는 너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너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자기표출, 자아실현, 자아성취를 해야 한다.”
    지금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교사들이 아이들이 7살만 되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는 부모의 신앙을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
    부모는 자기 신앙을 네게 강제할 권리가 없다.”
    교사들이 가정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아이들로 하여금 부모와 하나가 되지 못 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유인이 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전략이 지금 실행되고 있습니다.

    3. 기독교적 가정 구조를 파괴하라

    국가의 핵심적 요소는 가정입니다.
    사회의 가장 작은 세포는 가정입니다.
    세포가 건강하여야 건강한 몸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이 건강하여야 건강한 국가입니다.
    세포가 망가지면 몸이 망가집니다.
    가정을 파괴하면 국가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가장 건강한 가정은 성경적 가정입니다.
    성경적 가정 구조에서 아이들을 살지 못 하게 하면 국가는 파괴됩니다.
    기독교적인 가정 씨스템에서 아이들이 나오게 하여 자유롭게 살게 하면 국가는 혼란이 오게 됩니다.
    사탄은 구체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① 성(性)문란을 조장하라.

    젊은이들에게 혼전 성교나 프리섹스를 장려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미화시키고 있습니다. 성적 쾌락을 인생 최고의 기쁨이라고 가치관을 심어 줍니다. 심지어 불륜과 혼외정사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긍지를 느낄 수 있도록 육욕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엡 5:3,5)

    성적으로 극심하게 타락하면 말세의 징조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성적 타락이 극심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1-4)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7-39)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계 17:1-2) 쾌락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가장 추구하는 쾌락은 성적인 쾌락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 가장 많은 범죄는 성적인 범죄입니다. 로마가 멸망된 가장 큰 원인은 가정 파괴였습니다. 성적 타락이었습니다.

    이혼하려고 결혼하고 결혼하려고 이혼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노아 시대에 가장 큰 범죄도 성적 범죄였습니다. 심지어 동성연애가 만연하였습니다. 서서는 춤을 추고, 앉아서는 술 퍼마시며, 누워서는 음란한 세대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시는 술로 전기를 만들면 우리나라 전체가 3시간 사용하는 전기를 만들 수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1919년 공산 국가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법”이라는 책에 나온 지침입니다. “청년을 타락시키라. 종교를 멀리 하게 하고, 성에 관심을 가지게 하라. 정신을 혼란시키고 사치하게 만들라.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성적인 타락은 종말 징조 중에 하나입니다. 특별히 AIDS (Acquired Innune Deficieney Syndrome 후천성 면역 결핍증)는 인류사 이래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노아홍수 심판이후 최대의 공포스런 징벌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암보다 무서운 말세의 징조입니다. 유해음식, 공기오염, 도덕적 타락등 어느 때보다도 유해한 환경에 살고 있는 것이 현대인입니다. 그리고 감기, 암, 폐렴, 고혈압, 당뇨병 등 인간을 위협하는 바이러스가 끊임없이 인체를 공격하는 환경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면역능력이 상실된다면 이는 치명적입니다. AIDS의 원인은 성도덕의 문란에서 오고 있습니다. 동성애, 수간 등에서 대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염은 상처난 피부와 Oral Sex등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에는 200만명이 보균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AIDS에 감염되면 2년 내에 사망하게 됩니다. 멀지 않아 노아시대, 소돔과 고모라, 바빌론, 로마제국이 성적타락으로 종말을 구했듯이 오늘의 인류도 같은 위기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알렉산더, 헨리8세, 나폴레옹, 니체도 성병으로 죽었습니다.

    성적 타락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프로이드의 섹스이론은 인간을 성적동물로만 보고 있습니다.
    산업혁명으로 여자들이 사회 참여가 활발하여 진 것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혼을 가정 파괴가 심해졌습니다.
    영화, TV, 비디오 산업의 번창과 감각적 섹스 예찬도 문제입니다.
    성의 자유를 주제로 한 문학, 연극, 저술도 문제입니다.
    교육기관의 타락으로 혼탁하여졌습니다.
    임신조절 능력이 발달하여 더욱 성적 타락을 부채질하였습니다.
    의학의 발달, 피임법의 발달은 오히려 성의 타락과 비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낙태 증가, 인간생명의 경시 풍조. 계몽의 실패도 성적 타락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간음, 낙태, 프리섹스, 동성애 등의 무서운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는 사상도 문제입니다.
    미국 통계입니다. <크리스천 투데이>(Christian Today)는 앙케이트 조사를 하였더니 기독교인 구독자 1000명 가운데 23%가 깊은 불륜의 관계를 가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5%가 부부관계 아닌 이성과 관계를 가졌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교인들의 반 정도가 음란문제 걸려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만 하여도 심각한 위기입니다.

    몇 가지 이야기를 드려 봅니다.
    물론 꾸민 이야기일 것입니다.
    부부가 아들을 낳아 길렀습니다.
    결혼할 때가 되어 연애를 하면서 한 여자를 사랑하고 결혼을 약속하였습니다.
    아버지에게 여자 사진을 보여 드리면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이 여자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허락하여 주세요.”
    사진을 보신 아버지가 깜짝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이렇게 된 마당에 너에게 숨길 수가 없다. 결혼하지 말아라. 얘가 네 이복 여동생이다.”
    아들은 너무 충격을 받아 눕게 되었습니다.
    식음을 전폐하였습니다.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대답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먹지 못 하니까 몸이 점점 수척하여 갔습니다.
    겁이 난 어머니가 집요하게 물었습니다.
    할 수 없이 아들이 말했습니다.
    “어머니! 사실은 내가 결혼하고 싶어하는 여자가 있는 데 이복 여동생이래요. 아버지가 결혼하지 말래요.”
    이 말을 듣고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아들아! 안심하고 결혼해라. 너한테만 말하지만 너는 네 아버지 아들이 아니야.”
    이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성적 타락이 극에 달하는 시대입니다.

    ② 광고, TV, 신문 잡지, 영화 산업을 이용하여 성적 쾌락이 인생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선전하고 부추겨라.

    온통 온 세계가 성적인 분위기입니다.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이 한 마디하였습니다. “한국은 어디를 보나 음풍이 불고 있습니다.” 이같은 전략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오늘날 광고는 거의 벌거벗은 젊은 여자를 이용한 섹스 모티브로 흐르고 있습니다. 모든 매스 미디어가 섹스 코드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날로 심해져가고 있습니다. 성적 범죄가 날로 증가되고 있습니다. 사탄의 전략입니다.

    4. 프리섹스 사회를 만들어라

    낙태를 합법화하고 용이하게 하라. 사탄은 프리섹스와 낙태를 통하여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낙태 전문병원을 늘리고 있습니다. 학교 안에 임신 진료소를 만들게 하고 있습니다. 여중고등 학교에 어린이 보관소를 설립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섹스의 쾌락을 누리려면 그에 따르는 불필요한 두려움에서 해방되게 하여야 합니다. 죄의식을 가지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면 섹스가 방해를 받게 되니까 피임법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아이를 가질지 임신한 아이를 낙태할지 결정권을 마음대로 가지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낙태 금지 주장은 우리의 인권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성이 임신 후 출산을 원치 않는다면 용이하게 태아 할 자유를 가지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낙태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피임제나 피임약과 함께 낙태는 인구조절의 유력한 수단이 된지 오래되고 있습니다. 낙태는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산 노인을 죽이는 것이 고려장이고, 태어날 생명을 죽이는 것이 낙태입니다.
    성적 문란의 결과입니다.
    수많은 어린 생명들이 빛을 보기 전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태어나자 말자 나일 강에 던져 죽여야 했습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미드라쉬에는 60만 명을 죽인 것으로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헤롯 왕이 어린아이들을 죽였습니다.
    외경에는 60만명 죽인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수백만 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낙태의 천국이라고 별명이 붙었습니다.

    일 년에 낙태로 죽어가는 생명이 150만 명입니다.
    국제 가족계획 연맹은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행해지는 낙태가 매년 약 55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통계가 나오는 미국에서만 1973년에 대법원에서 낙태를 허용한 이래로 1700만 명 이상이 낙태되었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새로 태어나는 신생아는 약 600,000 명이지만 낙태로 죽어 가는 태아들은 2.5배가 되 150만 명입니다.
    이것은 한국전쟁에서 죽은 생명들의 10배 이상에 해당하는 무서운 숫자입니다.

    5. 이혼을 쉽게 만들고 합법화하라

    평생 결혼의 개념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라.
    남녀간의 사랑은 ‘사랑결합’(love bond)입니다.
    사랑결합이란 육체적인 결합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하나가 되려면 긴 세월동안 조율이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결혼의 하모니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거친돌은 오랜 세월 파도에 갈고 닦아야 매끄러운 돌이 됩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안 맞으면 헤어지라고 당당히 유혹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고민하느냐고 시원스럽게 말합니다.
    평생 고생하지 말고 이혼한 후 맞는 짝을 찾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교훈에 매이지 말고 과감하게 헤어지라고 충동질하고 있습니다.
    이혼은 죄가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인생은 한번이고 후회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주는 영이 유여(有餘)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말라기 2:15-16)

    6. 동성애를 대체 생활방식으로 만들라

    사탄은 섹스의 쾌락은 인간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도 이 즐거움에서 제외되면 안 되며, 그 즐기는 방법에 있어 제약받으면 안된다고 부추기고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원해서 선택하는 것이라면 근친상간이든 동성애든 수간이든 피차 합의한 것이라면 전부 허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오바마에 의하여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었습니다.
    목사에게 동성이 와서 결혼 주례를 요청하면 주례를 서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목사는 하나님이 동성 결혼을 금하고 계시기에 해주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거절하면 법을 어기는 것이기에 고발당하여 감옥에 가게 됩니다.
    그리고 목회도 끝입니다.
    비성경적인 것이 법적으로 합법화되고 있습니다.
    말세의 징조중에 하나입니다.
    동성결혼법이 통과된 나라가 18개국입니다.
    동성애를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이라거나 죄라고 말하면 “증오 발언”으로 분류되어 불법 행위로 체포, 처벌받고 있습니다.
    성경은 확실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는 여자와 함께 눕는 것같이 남자와 눕지 말라. 그것은 가증히 여기는 것이니라”(레 18:22)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를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으니라”(롬 1:27)
    예루살렘에서도 세계 동성애자들의 축제를 열리고 있습니다.
    World Pride 라고 명명하는 이름으로 동성애 모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극구 반대하는 정통 유대인들과 정면 충돌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벽에는 이런 벽보가 몰래 붙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한 사람을 죽이면 4,500불 현상금이 붙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동성 연애자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 법을 통과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사탄의 전략입니다.

    7. 예술의 품격을 떨어뜨려라

     “미친 예술”이 되게 하라.
    예술은 한 사회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예술이 발달한 사회가 최고 성숙한 사회입니다.
    예술은 영혼의 언어입니다.
    영혼을 예술로 말하면서 최고 경지에 가게 됩니다.
    음악, 조각, 연극, 영화를 영적으로 잘 승화시켜 인간의 삶을 하나님께 가게 하는 것이 성경적 예술입니다.
    그런데 사탄 예술을 통하여 인간의 상상력을 더럽히고 타락시키는 형태의 예술을 긍정하고 장려하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그러므로 예술을 더럽고 난잡하게 만들면 영혼도 같이 난잡해지며 기독교적 자치관은 축출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탄은 예술을 외설로 만들고 있습니다.
    예술로 세상을 타락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전략은 예술까지 손을 뻗치고 있습니다.

    8. 미디어를 활용 반(反)기독교적 가치를 선전하고 인간의 사고방식을 바꿔라

    인간의 사고와 태도를 바꾸는데 가장 효과적인 통로는 매스 미디어입니다.
    신문, 잡지, 라디오, TV, 영화, 광고를 이용하여 사탄의 전략을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치가들이 제일 먼저 점령하는 것은 미디어입니다.
    사탄도 그렇습니다. 유신론을 무신론으로 바꾸는 데 미디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매스 미디어를 통해 음란, 폭력, 기타 세속적인 자료를 널리 퍼뜨리고 광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천문학적인 돈을 쓰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결혼보다 혼외 섹스 장면이 80-90배 더 많이 미디어를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치 성문란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위인 것처럼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TV 드라마로 동성애가 전 국민에게 방영되고 있다.

    9. 종교통합운동을 일으켜라

    다른 종교들을 관용하게 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알리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기독교와 대등하게 만들려는 전략입니다.
    기독교만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니라고 조작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예수님를 격하시키고 다른 종교와 그 교주들을 격상시키려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자기 운명은 자기가 결정짓는 자기는 자기의 주인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인본주의 사상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탄을 숭배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지 못 하게 하였습니다.
    눈도 밝아지지 못 하게 하고 하나님처럼 살지 못 하게 만드는 인간의 적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반대로 사탄은 자기가 저주 받을 것을 알면서도 선악과를 먹게 하고, 눈이 밝아지게 하고, 하나님처럼 가능성을 개발하게 하는 고마운 존재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멀리하고 사탄을 섬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날 사탄 교회인 그로터 교회가 늘어나게 하고 있습니다.

    10. 각국 정부가 이러한 내용을 법제화하게 하고, 교회가 이런 변화들을 추인하게 만들라

    교회는 위의 사항들을 추인하도록 그 교리를 변경시키도록 하는 것이 사탄의 최종적인 결론입니다.
    사람들을 변화에 적응시켜서 이러한 무신론적 인본주의 체제 안으로 편입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주와 사상 가치가 기독교 아닌 인본주의에 철저히 입각하도록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국 정부들이 성경을 벗어나는 법률들을 계속해서 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픈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과 타협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위의 10가지 조항들과 관계된 사탄의 략들을 법률로 제정한 국가들이 많습니다.
    정부와 교회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사탄의 전략에 말려 들어가 있습니다.
    무슨 병인지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병입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것은 가장 큰 문제입니다.

    따뜻한 물속에 개구리를 넣습니다.
    개구리는 자기 체온과 맞는 적당한 온도속에서 포근함을 느낍니다.
    서서히 조금씩 온도를 올립니다.
    그래도 개구리는 모릅니다.
    어느 정도 되면 개구리는 익어서 죽게 됩니다.
    그러나 뜨거운 물속에 개구리를 넣으면 금방 튀어 나오게 됩니다.
    이런 원리입니다.
    서서히 교회가 죽어갑니다.
    천천히 가정은 파멸되어 가고 있습니다.
    은근히 국가는 썩어가고 있습니다.
    깨달으면 늦습니다.

    역전략 그러면 사탄의 전략을 이길 수 있는 역전략은 무엇일까요?

    1. 마지막 징조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귀향 운동을 추진하고 있는 타쿤 단체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는 David Rudolf 유대인 목사님과 사이에라에서 30만명의 유대인들을 귀향시키려고 계획하고 있는 헝거리 선교사 M.Veenstra, Z.Gadziala 두 분에게 식사 대접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내게 예레미야 16장 15절을 수없이 많이 강조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내신 주의 사심으로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

    이들은 분명 지금은 말세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2년 반 전에 하나님께서 말세의 환상을 너무나 정확하게 주셨기에 이 일에 생명을 바치며 일하고 있다고 단호한 어조로 강조하였습니다. 브라디보스톡에 있는 유대인을 직접 이스라엘로는 못데리고 가도 한국으로 데리고 왔다가 이스라엘로 이송할 수 있으니 협조하여 달라는 부탁으로 나를 만난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 징조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2. 죄짓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신다 할지라도 당장에 천국으로 들림받을 수 있는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언제 죽어도 떳떳하게 죽을 수 있는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3. 전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하여야 할 최고의 일은 전도입니다.
    전도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꼭 기억하여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 더라"(행 13:48)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를 찾아내야 합니다. 시간이 급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세를 같이 살아가는 성도들이여!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하노니 말씀을 분별하는 복이 임하여서 주님을 부인하는 행동을 하지말기를 축복합니다.

     

     




    다윗의 인구 조사(역대상 21:1-30. 사무엘하 24:1-17)

    역대상 21장에서는 다윗이 인구를 조사하게 됩니다.
    다윗의 마음에 교만한 마음이 들어가서 전쟁에 나갈 만한 자의 숫자를 계수하라고 요압에게 명령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힘을 의지하려고 했습니다.

    본장은 사무엘하 24장에도 나와 있는 다윗의 인구 조사 사건이다.

    [1-8절]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 . . .

    1절,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사무엘하 24:1은,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사탄이 다윗을 격동한 것을 사무엘하 24장에서는 사탄이 다윗을 감동시키다로 번역합니다.
    따라서 격동하다 감동하다는 같은 히브리 단어입니다.
    그 단어를 히브리 성경은 "수트(çûwth)"라고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탄이 사람을 유혹할 때 격동시키는 방법과 감동시키는 방법을 함께 병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격동하다’는 원어와 사무엘하 24:1의 ‘감동시키다’는 원어는 동일하다(수투).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사탄의 충동을 받아 범죄하도록 허용하셨다.
    사탄은 존재하며 에덴 동산에서와 같이 지금도 사람들을 범죄케 하려고 활동한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도 격동시켜 범죄케 할 수 있다.
    그는 욥은 시험하였었고(욥기) 베드로에게 잘못된 생각을 주었으며(마 16:23) 그를 밀 까부르듯하였고(눅 22:31) 지금도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를 지켜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넘어지기 쉽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하고 항상 주의 은혜에 의지하며 조심해야 한다.

    다윗은 요압과 백성의 통치자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가서 브엘세바[남쪽 끝의 도시]에서부터 단[북쪽 끝의 도시]까지 이스라엘을 계수하고 돌아와서 내게 고하여 그 수효를 알게 하라.”
    요압이 말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배나 더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이 백성이 다 내 주의 종이 아니니이까? 내 주께서 어찌하여 이 일을 명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로 죄가 있게 하시나이까?”
    그러나 왕의 명령이 요압을 재촉하였다.

    요압은 마침내 떠나서 이스라엘 땅에 두루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였다.
    사무엘하 24:8은 그 기간이 9개월 20일이 걸렸다고 말한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백성의 수효를 다윗에게 고하기를,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110만명이요 유다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47만명이라고 하였다.
    요압은 왕의 명령을 밉게 여겨 레위와 베냐민 사람들은 계수하지 아니하였다.
    사무엘하 24:9는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80만명이요 유다 사람이 50만명이라고 기록하였다.
    유다의 장정들의 숫자는 대략적인 것일 것이며, 이스라엘의 장정들의 숫자는 110만명 중에 담대한 자(카일)[용사]의 숫자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인구 조사의 일을 불쾌하게 여기셔서 이스라엘을 치셨다.
    인구 조사는 군대의 숫자를 세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힘은 군인의 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있었다.
    그러나 인구 조사는 군대의 수를 자랑하는 교만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이었다.
    요압은 처음부터 그것을 느꼈고 다윗에게 그것을 하지 말기를 권하였으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치시자 뒤늦게 그것을 깨달았다. 그는 하나님께 아뢰었다.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9-14절] 여호와께서 다윗의 선견자 갓에게 이르시되 가서 . . . .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선견자 갓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갓은 다윗에게 나아가 고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마음대로 택하라. 혹 3년 기근일지, 혹 네가 석달을 대적에게 패하여 대적의 칼에 쫓길 일일지, 혹 여호와의 칼 곧 온역이 사흘 동안 이 땅에 유행하며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온 지경을 멸할 일일지 하셨나니 내가 무슨 말로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할 것을 결정하소서.” 하나님의 징벌은 구체적이었고 엄중하였다. 죄의 징벌은 엄중하다.

    다윗은 갓에게 말했다.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 다윗은 예전에 약 10여년 동안 사울의 칼을 피하여 고생스런 세월을 보내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3년 기근이나 석달 피신보다 3일 온역[무서운 전염병]을 원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온역을 내리셨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의 죽은 자가 70,000명이었다.

    [15-19절]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사자를 보내셨더니 사자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 . . .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멸하러 천사를 보내셨는데, 사자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시고 멸하는 천사에게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고 말씀하셨다. 천사는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을 받드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진노하시고 범죄한 자들에게 징벌하시지만,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자이시다. ‘하나님께서 뉘우치셨다’는 말은 인간적인 표현이다.

    그때에 여호와의 천사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섰다. 다윗이 눈을 들어보니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과 땅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예루살렘 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윗은 장로들과 함께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겸손히 통회자복하는 마음으로 엎드려 하나님께 아뢰었다. “명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내니이다.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이것이 회개하는 자의 바른 태도이다.

    여호와의 천사는 갓을 명하여 다윗에게 말하게 하였다.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 다윗은 갓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른 말씀대로 올라갔다.

    [20-30절] 때에 오르난이 밀을 타작하다가 돌이켜 천사를 보고 . . . .

    그때에 오르난은 밀을 타작하다가 돌이켜 천사를 보고 네 아들과 함께 숨었다. 사람은 거룩하고 권세 있는 천사를 보면 다 놀라 숨을 것이다. 다윗이 오르난에게 나아가자 오르난은 내어다보다가 다윗을 보고 타작마당에서 나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였다.

    다윗은 오르난에게 말했다. “이 타작하는 곳을 내게 붙이라. 너는 상당한 값으로 붙이라. 내가 여호와를 위하여 여기 한 단을 쌓으리니 그리하면 온역이 백성 중에서 그치리라.” 오르난은 다윗에게 고하였다. “왕은 취하소서. 내 주 왕의 좋게 여기시는 대로 행하소서. 보소서, 내가 이것들을 드리나이다. 소들은 번제물로, 곡식 떠는 기계는 화목으로, 밀은 소제물로 삼으시기 위하여 다 드리나이다.” 오르난은 경건하고 착한 성도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왕과 백성을 위해 자신의 소들과 곡식 떠는 기계와 밀을 즐거이 드리려 하였다.

    그러나 다윗 왕은 오르난에게 말했다.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결단코 상당한 값으로 사리라. 내가 여호와께 드리려고 네 물건을 취하지 아니하겠고 값 없이는 번제를 드리지도 아니하리라.” 다윗은 그 기지 값으로 금 600세겔을 달아 오르난에게 주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정당한 값을 지불하기를 원하였고 백성 중 어느 한 사람에게 짐을 지우기를 원치 않았다. 사무엘하 24:24는 다윗이 은 50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샀다고 기록하였다. 두 기록의 차이는 타작마당을 포함한 기지(아마, 넓은 땅이었을 것)의 범위의 차이때문일 것이다.

    다윗은 거기서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다.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완전한 순종과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이며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을 상징하는 제사이었다. 여호와께서는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불로 응답하셨다. 또 그가 천사를 명하시므로 심판하는 천사는 칼을 집에 꽂았다.

    이때에 다윗은 여호와께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응답하심을 보고 거기서 제사를 드렸다. 왜냐하면 옛날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여호와의 장막과 번제단이 그때에 기브온 산당에 있었지만, 그가 여호와의 천사의 칼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 앞에 가서 하나님께 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곳은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바로 그곳이었다. 역대하 3:1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고 증거하였다.

    본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 우리는 사탄의 시험에 떨어지지 않도록 늘 깨어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라도 사탄의 충동에 넘어졌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깨어 있자.

    둘째, 우리는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자.

    다윗의 인구 조사는 그의 교만한 마음의 발동이었다고 본다. 그는 잠시 이스라엘의 힘이 하나님께 있음을 잊어버린 것 같다. 우리는 인간의 힘을 의지하는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자.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이 엄위함을 깨닫고 범죄치 말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은 신약성도들에게도 범죄하면 하나님의 징계가 있음을 잊지 말자. 히브리서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넷째, 우리는 죄를 깨달았을 때, 겸손히, 철저히 통회자복해야 한다.

    이것이 회개하는 자의 바른 태도다. 징벌로부터 구원과 회복을 얻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밖에 없고, 그의 긍휼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며 철저히 회개하는 길밖에 없다.

    민수기 26:1-65 / 이스라엘의 인구조사

    염병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이스라엘 온 회중의 수를 계수하라 명하십니다.
    야곱의 장자 르우벤 자손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명령대로 조상의 가문을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전쟁에 나갈 만한 자를 모두 계수합니다.
    그 총수는 1차 인구조사 때보다 1,820명이 감소한 601,730명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각 지파별로 계수한 명수대로 땅을 나눠주어 기업을 삼게 하되 제비를 뽑아 나누라 하십니다.
    레위인은 기업이 없으므로 이스라엘의 총계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1차 인구조사 때 시내 광야에서 계수했던 사람 중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인구 조사 명령(1~4절)

    1. 염병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 “너희는 20세 이상으로 전쟁에 나갈 만한(군대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의 수를 가문별로 등록해서 온 이스라엘 회중의 수를 계수하라.”
    3. 그래서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 가의 모압 평지에서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4. “여호와께서 모세와 애굽 땅에서 나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20세 이상 된 남자들의 수를 계수하라.”

    각 지파 별 인구 숫자(5~51절)

    이스라엘의 자손들 중에서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는 모든 남자들의 수는

    각 지파별로 다음과 같습니다.

    1차 조사(민수기 1장)  2차 조사(민수기 26장) (+ 증가, - 감소)

    르우벤 지파에서 46,500명 ➠ 43,730명 (- 2,770명)
    시므온 지파에서 59,300명 ➠ 22,200명 (-37,100명)
    갓 지파에서 45,650명 ➠ 40,500명 (- 5,150명)
    유다 지파에서 74,600명 ➠ 76,500명 (+ 1,900명)
    잇사갈 지파에서 54,400명 ➠ 64,300명 (+ 9,900명)
    스불론 지파에서 57,400명 ➠ 60,500명 (+ 3,100명)
    에브라임 지파에서 40,500명 ➠ 32,500명 (- 8,000명)
    므낫세 지파에서 32,200명 ➠ 52,700명 (+20,500명)
    베냐민 지파에서 35,400명 ➠ 45,600명 (+10,200명)
    단 지파에서 62,700명 ➠ 64,400명 (+ 1,700명)
    아셀 지파에서 41,500명 ➠ 53,400명 (+11,900명)
    납달리 지파에서 53,400명 ➠ 45,400명 (- 8,000명)

    합하여 603,550명 ➠ 601,730명 (1,820명 감소)

    인구 조사를 명령하신 이유(52~56절)

    5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53. “등록된(계수된) 사람의 수를 따라 땅을 나눠주어 기업을 삼게 하라.
    54. 인원수가 많은 자에게는 기업을 많이 줄 것이요,
     수가 적은 자에게는 적게 줄 것이니, 그들이 계수된 수대로 기업을 주되
    55. 오직 그 땅을 제비를 뽑아 나누어 주어 그들의 조상의 지파의 이름을 따라 물려받게 할지니라.
    56. 수가 많든 적든 간에 그들의 기업을 제비를 뽑아서 나누게 할지니라.”

    레위 지파(57~62절)

    57. 레위인으로서 계수된 자들의 종족들은 이러하니, 게르손에게서 난 게르손 종족과, 고핫에게서 난 고핫 종족과, 므라리에게서 난 므라리 종족이며
    58. 레위 종족들은 이러하니, 립니 종족과 헤브론 종족과 말리 종족과 고라 종족이었습니다. 고핫은 아므람을 낳았으며

    59. 아므람의 아내의 이름은 요게벳인데, 그는 레위가 애굽에서 낳은 딸입니다. 요게벳은 아므람에게서 아론과 모세와 그 누이 미리암을 낳았습니다.
    60. 아론에게서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태어났습니다.
    61.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는 (금지된)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리다가 죽었습니다.
    62. 레위인으로서 태어난 지 1개월 이상 된 모든 남자들의 수는 23,000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그들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수에 계수되지 않았습니다.

    세대교체(63~65절)

    63. 이들은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 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인구를 조사할 때에 계수한 자들입니다.
    64.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이 안에는 한 사람도 포함되지 않았으니
    65.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살아남지 않았습니다.

    묵상

    1. 2차 인구조사

    1) 염병 후의 인구조사(1절)

    이스라엘이 모압과 미디안 여자들에게 미혹을 당하여 바알에게 경배하였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염병에 걸려 24,000명이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를 조사하게 하십니다.
    민수기 1장에서 1차로 인구조사를 한지 약 38년 만에 하는 인구조사입니다.
    1절에서 ‘염병 후에’라는 말이 제일 처음에 나오는 이유는 염병으로 24,000명이나 죽었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가 겨우 1,820명밖에 감소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2) 사막에서 38년간 지낸 후의 인구수의 비교

    이스라엘이 38년간 지낸 광야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사막입니다.
    양식도 물도 구할 수 없는 곳이므로 수백만 명은 고사하고 단 몇 명도 지내기 힘든 곳입니다.
    그런 곳에서 전쟁에 나갈 군인의 수만 해도 6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므로 백성들 전체의 수를 따지면 적어도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38년간 지냈는데 겨우 1,820명만 감소한 것입니다.
    그것도 그 과정에서 몇 번이나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수만 명씩 죽임을 당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그 자체로 큰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각 지파의 증감

    1) 많이 감소한 지파들

    1차 조사 때와 비교하여 감소한 지파는 르우벤, 시므온, 갓, 에브라임, 납달리 지파들입니다.
    그 중에서 르우벤 지파는 고라의 일당이 모세에게 대적할 때 르우벤 지파인 다단과 아비람이 함께 참여하였는데 그때 땅이 입을 열어 산채로 지옥에 빠지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또 그들과 함께 한 250명은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 살라 죽게 하였으므로 그 영향으로 그 수가 감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많이 감소한 시므온과 에브라임과 납달리 지파에 대하여는 그 원인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2) 각 지파의 증가와 감소가 중요한 이유

    민수기 26장에서 1차 인구조사와 비교하며 각 지파의 인구수의 증감을 자세하게 증거하는 이유는, 이 사람들이 바로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구가 많이 감소한 자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 그만큼 많은 것이고, 인구가 많이 증가한 자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자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뜻합니다.

    3) 사람의 숫자대로 땅을 기업으로 얻게 하라(52~56절)

    하나님께서는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지금 조사한 인구의 수를 따라 많은 지파는 땅을 많이 얻게 하고 적은 지파는 땅을 적게 얻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그 땅을 분배할 때에 반드시 제비를 뽑아 땅을 얻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제비를 뽑으라는 것은 그 땅을 하나님께서 정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말씀대로 신실하게 살아온 자들은 가나안 땅에도 더 많이 들어가고, 그곳에서 얻는 땅도 그만큼 더 많이 얻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장차 천국에 들어가도 받는 상급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순교를 한 바울과 겨우 주일 예배에나 참여하는 자가 같은 상급을 받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묵상 :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광야 40년은 이 땅에서의 우리의 한 평생의 삶을 상징하고, 가나안은 인생의 삶을 끝낸 후에 들어가는 천국을 상징합니다.
    어떤 지파는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실하게 살아서 더 많은 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어떤 지파는 걸핏하면 불평하고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광야에서 더 많은 사람이 죽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자들이 그만큼 적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사람은 땅의 일에만 몰두하다 천국을 준비하지 못해 영원히 멸망을 당하고, 어떤 사람들은 천국을 준비하는 믿음을 가져 영생을 얻습니다.

    3. 세대교체

    1)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한 사람도 없다(63~65절)

    멀리 가나안 땅에 보이는 싯딤에서 인구조사를 할 때에는 38년 전 1차 인구 조사를 할 때 20세 이상으로 계수된 자들은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한 사람도 살아남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하여 하나님께서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차 조사 때에 20세 이하였던 자들과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자들만이 살아남았는데, 그들의 수가 1차 조사 때보다 겨우 1,820명만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2) 신앙의 명가(名家) 아므람과 요게벳 가족(59~60절)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조사한 일들이 기록된 가운데 아므람과 요게벳의 가족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므람과 요게벳이 낳은 자녀는 아론과 모세와 그 누이 미리암입니다.
    이 세 사람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한 일을 최 일선에서 한 사람들입니다.
    애굽의 바로왕이 이스라엘의 사내아이를 다 죽이라 명하였을 때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바로왕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더 두려워하여 모세를 살려 두었는데, 요세벳의 믿음이 그대로 모세에게 이어져서 이스라엘을 구하는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묵상 : 하나님께 세움 받는 자가 되십시오.

    세상에서는 꿈과 야망을 가진 자들이 성공을 합니다만, 하나님의 일꾼은 오직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 80세 노인 모세를 일꾼으로 세우셨고, 하나님께서 노예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소년 다윗을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처럼, 또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들어 쓰임 받는 자가 됩시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 하나님께서 이런 자를 일꾼으로 들어 쓰십니다.


    역대상 17장 요약

    나단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를 다윗에게 말하였며,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드리고 기도를 올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8장 요약

    다윗이 블레셋, 모압, 소바, 시리아, 에돔을 쳐서 굴복시켰으며 여러 전쟁에서 승리한 다윗이 공정하게 나라를 다스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9장 요약

    암몬왕 나하스가 죽게되자 다윗이 위로 사절단을 보내는데 사절단이 첩자로 몰려서 조롱당하다가 돌아오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다윗의 군장인 요압이 아람을 물리치고,아비새가 암몬을 물리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3:20
    토지의 후박과 수목의 유무니라 담대하라 또 그 땅 실과를 가져오라 하니 그 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더라.

    사무엘하 10:12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역대상 19:13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시편 31:24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이사야 41:6
    각기 이웃을 도우며 그 형제에게 이르기를 너는 담대하라 하고.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23:11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5월 7일(수) 역대상 17-1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는 담대하라(19:13)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Be strong and let us fight bravely for our people and the cities of our God. The LORD will do what is good in his sight.

    담대히하다(아포톨마오. apŏtōlmaō) ἀποτολμάω 스트롱번호 662

    1. 담대히 ~하다.  2. 감히 ~하다. 3. 롬 10:20.
    발음 [ apŏtōlmaō ]

    어원  /  575와 511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담대하다(롬 10:20).

    히브리서 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히브리서 10장 35절은 신앙의 여정을 걷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강력한 격려와 도전의 말씀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의 담대함을 포기하지 않을 때, 큰 상이 기다리고 있음을 약속합니다. 
    이 구절은 초대교회의 박해와 어려움 속에서 믿음을 지켰던 성도들에게 특별히 중요한 메시지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현대의 삶 속에서 어떻게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담대함의 본질

    히브리서 10장 35절에서 "담대함"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파르레시아"(παῤῥησία)입니다. 
    이는 '자신감'이나 '확신', '공개적으로 말하는 용기'를 뜻합니다. 
    성경에서 담대함은 단순한 인간적 용기가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앙적 확신을 의미합니다. 
    이는 두려움을 넘어서는 힘이며, 우리의 믿음과 소망의 기초가 됩니다.

    παῤῥη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3954

    1. 숨김없음.  2. παρρησίᾳ : 공공연히.  3. 용기
    발음 [ parrhēsia ]
    어원  /  3956과 4483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숨김없음, 솔직, 명백, 막8:32, 요7:13, 16:29. [주] μετὰ παρρησίας: 분명히, 노골적으로, 자신있게, 확신을 가지고, 행2:29.
    • 2.  παρρησίᾳ : 공공연히, 내어놓고, 요7: 26, 11:54, 18:20, 골2:15.  

    • 3. 용기, 확신, 대담, 담대, 두려움 없음, 행2:29, 고후7:4, 엡3:12, 히4:16, 요일2:28.

    • 관련 성경  / 
      담력(딤전3:13, 히10:19). [동] 드러내다(막8:32, 요18:20), 드러나게 말하다(요7:13, 26), 드러나다(요11:54), 담대하다(고후7:4, 빌1:20, 히3:6). [부] 밝히(요10:24, 11:14, 16:29), 담대히(행2:29, 엡6:19, 히4:16), 담대하게(행4:13).


    다윗의 담대함 :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을 보였습니다. 
    그의 담대함은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

    사도들의 담대함 :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 앞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담대함은 성령의 충만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8. 12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적용 : 우리가 직장에서, 가정에서, 혹은 사회 속에서 하나님을 증거할 때에도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소리 높여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확신과 신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2. 담대함의 장애물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는 권고는, 우리의 담대함이 위협받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의 담대함을 흔들 수 있는 여러 장애물이 존재합니다.

    두려움 : 두려움은 담대함의 가장 큰 적입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약화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4장에서 물 위를 걷는 베드로에게 두려움을 극복하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태복음 14:31)

    세상의 유혹 : 세상의 재물, 명예, 쾌락은 우리의 담대함을 약화시키는 또 다른 요인입니다. 마태복음 6:24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적인 것에 매여 있을 때, 하나님을 향한 담대함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의 경험 : 과거의 실패는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다시 도전하려는 의지를 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실패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회복의 은혜로 인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공동체의 부재 : 신앙의 여정에서 혼자 걷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4-25절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담대함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3. 담대함의 상급

    히브리서 10:35
    "담대함이 큰 상을 얻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상급은 단순히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영적 상급 : 담대함은 우리의 신앙 성숙과 연결됩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은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담대함으로 믿음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관계적 상급 : 담대함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합니다. 다니엘서 3장에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담대함으로 풀무 불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담대함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경험하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궁극적 상급 : 우리의 담대함은 최후의 심판 날에 영광스러운 보상으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충성된 종들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담대함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갈 때 받을 궁극적 상급을 나타냅니다.

    결론 : 담대함을 붙들라

    히브리서 10장 35절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신앙의 여정을 완주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약속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담대함을 잃지 않았고,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한 도전과 격려가 필요합니다.

    담대함은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선물이며, 이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두려움과 유혹, 실패의 경험을 이겨내고 담대함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동시에 우리는 아버지의 상급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담대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두려움과 죄를 이기셨기에, 우리는 주님을 믿음으로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담대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이유(이사야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은 다윗의 강하고 담대한 믿음 때문에 그를 택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실히 알면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말이지 우리에게 한말은 아니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인이요, 유대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접붙임 바 되어 영적인 이스라엘이요, 영적인 유대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두 우리들에게 주신 약속인 것입니다.

    1.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면 항상 함께 계신 주님을 바라봐야지 두려움을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두려움을 바라보면 거기에 사로잡혀서 우리는 힘을 잃고 좌절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용감하고 담대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숨을 곳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피난처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시편 91편 2절에 “나는 야훼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적군이 쳐들어 오더라도 우리가 하나님 안에 피할 수가 있고 하나님이 요새가 되어서 어떠한 원수도 무너뜨릴 수가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 되시기 때문에 어려울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들고, 품에 안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91편 3절에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삶속에 여러 가지 올무가 놓여져 있고 그물이 쳐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 사냥꾼의 그물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시편 91편 5절로 7절에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부지 불식간의 밤에 다가오는 공포와, 원수의 화살에도 보호해 주시고 마귀가 흑암중에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어마어마한 질병에도 우리는 안전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천인이 내 곁에서 쓰러지고 만인이 내 우편에서 쓰러져도 이 재앙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므로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좋을때만 같이 계시고 어려울때는 우리를 떠나시는, 착할때만 같이 있고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변함이 없으신 것입니다.

    아무리 위험하고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우리는 두려워 하지 않고 안전히 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두려움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 보십시오.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항상 우리를 두려워하게 하고 협박하게 하는 사건들은 늘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 되시고 하나님은 그 날개로 우리를 덮어 주시므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으면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건짐을 받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하나님께서는 “내가 천사들의 하나님뿐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여호수아의 하나님 그리고 바로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된다면 하나님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창세기 22장 13절로 14절에 하나님은 야훼 이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예비해 놓은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굽이굽이에 우리가 필요한 도움을 하나님은 항상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위기가 다가와도 그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길이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훼 이레가 되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야훼 라파가 되십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야훼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임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병들어서 상처입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고치고 치료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직접 성령의 능력으로 치료하시기도 하고 훌륭한 의사나 약을 통해서 공기나 물이나 양식을 통해서 우리를 치료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병들었을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훌륭한 병원으로 인도해 주시고 좋은 약을 먹게 해주시고 좋은 물을 마시고 좋은 음식을 취하게 하시고 혹은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치료자와 환자의 관계인 것으므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항상 치료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말라기 4장 2절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23장 25절에도 “네 하나님 야훼를 섬기라 그리하면 야훼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야훼 닛시가 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7장 15절로 16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 싸워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동안에 크고 작은 원수들이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힘으로 싸울수가 없어 괴로울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싸워주십니다. 과거를 돌이켜 보십시오. 우리를 향해 원수가 쳐들어와도 항상 하나님께 부르짖고 의지했을 때 하나님은 승리의 깃발을 흔들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미래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전쟁하는 하나님, 우리를 위해서 싸워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야훼는 샬롬입니다. 사사기 6장 24절에 있는 말씀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귀, 영화, 공명을 다 가져도 마음에 평화가 없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권력이 사람에게 행복을 갖다 주지 않습니다. 평안이 없는 권력은 고통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살아도 평화가 없으면 행복을 절대로 없습니다. 하지만 야훼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 마음속에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29편 11절에 “야훼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야훼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욥기 22장 21절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야훼 로이가 되십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시편 23편 1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서 지팡이를 들고 막대기를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지팡이는 우리 길을 만들어 주시고 막대기는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원수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러 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잔이 넘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야훼 로이, 우리 목자되신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야훼 찌드케누가 되십니다. 예레미야 23장 5절로 6절에 하나님이 우리의 의가 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더러운 인생들입니다. 우리 스스로 결코 하나님 앞에 설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죄가 되셔서 우리 죄를 십자가에서 다 청산하시므로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그 보혈로 씻음받고 은혜의 선물로 의롭다 함을 받아 하나님처럼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야훼 메카디쉬켐이 되십니다. 출애굽기 31장 13절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성령께 의지하면 성령이 세상의 부패를 다 제하시고 사망을 제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고 깨끗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 우리 하나님은 야훼 삼마가 되십니다. 야훼는 우리와 항상 같이 계신다고 에스겔 48장 35절에 말씀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너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전인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네가 내 안에 내가 너희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은 우리의 성전속에 성령으로 와서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임마누엘로 와 계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내 하나님은 야훼 이레가 되시고, 야훼 라파가 되시고, 야훼 닛시가 되시고, 야훼 샬롬이 되시고, 야훼 로이가 되시고, 야훼 찌드케누가 되시고, 야훼 메카디쉬켐이 되시고, 야훼 삼마가 되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가 늘 생각하고 의지하면 놀라지 않고 평안하게 인생을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3.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우리는 다 연약합니다. 영적으로 연약하고, 심적으로 연약하고, 육체적으로 연약하고 생활이 약합니다. 이렇게 형편없이 약한 우리를 강하게 붙들어줄 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로 10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약해도 우리 질그릇 속에 보배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아버지와 성령과 더불어 우리속에 들어와 계십니다. 예수믿는 사람과 안믿는 사람은 무엇이 다릅니까? 예수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속에 거하시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예수 안믿는 사람은 공중 권세잡은 자가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과 화목되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더불어 삼위일체가 우리속에 들어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죄와 불의와 추악과 질병과 저주와 가난과 고통이 우리를 우겨싸도 우겨싸이지 않는 것은 이를 이미 십자가에서 이겨 버리신 예수님이 우리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줄도, 부패의 줄도, 질병의 줄도, 저주의 줄도, 죽음의 줄도 산산조각으로 끊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아무리 계산해도 나갈 길이 없는 답답한 일을 당해도 홍해를 갈라서 길을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속에 계시므로 답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핍박을 당해도 버림바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핍박당해서 사람들이 만나주지 아니하고 우리를 외롭게 격리시킨다 할지라도 하늘의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과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품어 주시므로 조금도 외롭지가 않습니다. 핍박을 받을수록 우리는 은혜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28절에 “야훼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할수 있는 것은 주님은 나를 돕는 분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어떻게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시기에 내가 거꾸러져도 망하지 않습니다. 나는 약해도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은 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고 나갈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는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4.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우리를 도와 주되 미지근하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놀라운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 위에 몸찢기고 피흘려서 참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짊어지시고 세상을 다 멸하시고 질병을 감당하시고 죽음을 감당하시고 저주를 감당하시고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그냥 형식적으로 우리를 도와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23편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데 누가 나와 같이 계십니까? 부모, 형제, 친구, 친척도 다 떠나도 주님은 나와 같이 계셔서 그 지팡이로 길을 여시고 막대기로 원수를 쳐서 물리치시고 우리를 도와 주셔서 해를 받지 않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에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진수성찬을 베풀어주시는 주님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저는 원수가 올때마다 늘 말합니다. “원수가 나를 치면 주님께서 또 밥상 차리시겠구나” 평안할때는 밥상을 안차리시지만 고난당할 때 원수가 쳐들어오면 밥상을 차리셔서 먹게 하시고 원수보다 강하게 만들어 주시고 머리에 성령으로 기름부어 주셔서 긍정적 기쁨을 가지고 살고 잔이 넘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면 참으로 우리를 도와 주셔서 우리를 전인 구원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1절로 5절에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우리를 도와 주시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5. 참으로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왜 주님의 손이 의롭습니까?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몸찢기고 피흘렸기 때문에 그 손은 의롭습니다. 아울러 주님은 값없이 우리를 도와 주셨지만 그분은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저 우리를 도와 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를 친히 십자가 위에서 다 몸찢기고 피흘려서 청산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 주는 손길은 의로운 손인 것입니다. 불의한 손이 아닌 것입니다. 값을 지불한 손인 것입니다. 주님은 깨끗한 의로운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죄를 청산한 의로운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그 많은 죄가 다 청산되고 용서와 의로운 깨끗한 손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사랑의 주님은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붙드십니다. 주님이 손을 내게 내밀면 그 손은 용서의 손이요, 거룩한 손이요, 치료의 손이요, 축복의 손이요, 영생천국의 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불의하게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너희를 위해서 내가 대신 죽었다.너희를 위해 대신 몸을 찢었고 피를 흘려서 너희의 모든 불의, 추악, 저주, 절망을 청산해 버렸다. 그러므로 내 손은 의로운 손이다.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나의 백성을 내가 붙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아야 마땅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죄를 회개하고 주의 이름으로 부르면 주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를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불안과 공포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어느곳을 바라보나 불안하고 공포가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을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점을 칩니다. 과학이 발달되면 점이 없어질줄 알았는데 과학이 발달되니 인터넷을 통해서 점을 치고, 휴대전화를 이용해 점을 치고, 컴퓨터로 점을 칩니다. 오히려 점이 과학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사람들이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하고 연약하고 공포에 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것을 의지할 필요가 없는것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사자와 곰도 물리칠수 있고 골리앗도 물리칠수가 있고, 세상의 원수 마귀를 물리칠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는 한길로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놀라지 마십시오.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나가십시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이솝의 우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숲에 왕 노릇하는 사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자에게 늘 당하기만 하는 여우가 있었는데, ‘어떻게 하면 저 사자를 숲에서 쫓아낼 수 있을까?’하고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꾀를 생각해내고는 사자에게 도전장을 보냈습니다.

    “너 사자는 들어라! 이제부터 이 숲의 동물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나니까 사자는 그만 왕좌에서 내려오기를 바란다.”

    사자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미심쩍어서 ‘동물들이 무서워하는 증거를 대라.’고 했습니다.
    여우는 ‘나를 하루만 따라 다녀 보면 알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사자는 당장 여우의 뒤를 따라 숲을 다녀 보았습니다.
    아, 그랬더니 정말 동물들이 여우를 보고 줄행랑을 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토끼며 노루는 물론이고, 곰과 멧돼지도 도망을 쳤습니다.
    여우보다 힘도 세고 덩치도 큰 동물들이 모두 슬금슬금 도망을 쳤습니다.
    이것을 본 사자는 저 여우에게 뭔가 막강한 힘이 생겼다고 생각을 하고는 그만 짐을 사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솝 이야기에서 믿음의 사람이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여우 뒤에 사자가 있다는 것처럼 하나님이 항상 등 뒤에서 밀어주시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담대하려면 먼저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Yet I hold this against you: You have forsaken your first love.

    처음 사랑(first love)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
    본절은 에베소 교회에 대한 책망을 나타낸다.
    '처음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 이다.

    1. 에베소 교인들이 가졌던 기독교적인 사랑 즉 형제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행 20:35; 엡 1:15, Vincent, Plummer, Charles, Moffatt, Rist, Kiddle).

    2. 처음 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 가졌던 그리스도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cott).
    에베소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회에 있던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느라고 형제를 의심하고 엄격하게 구별함으로 형제에 대한 사랑이 식어졌다(Barclay, Mounce, Ladd).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형제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막12:29ff., Beasley-Murray, Johnson).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형제 사랑을 동반하기 때문에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은 어느 하나라도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버렸느니라'에 해당하는 '아페카스'는 부정 과거로 단회적 행동을 나타내어 에베소 교인들이 그들이 가졌던 처음 사랑과 완전히 단절되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본문은 에베소 교회가 교리적(敎理的)으로 칭찬할 사실이 있다 할지라도 생명 없는 형식주의로 전락하여 사랑을 상실했음을 단호하게 책망하고 있다(Alford, Johnson).


    이사야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루이카쓰(漏活. 루활) : 눈물의 치료의 효과
    루이카쓰(淚活, 루활)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눈물 활동> 이라는 모임


    우리가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로마서 8:31-33)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사실 그리스도인은 외적으로 별로 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약합니다.
    초대교회 이후로 로마 황제의 박해로 엄청난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인들과 우상숭배자들까지 그리스도인을 대적하는 세력은 세상에 널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을 대적할 힘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당하면서도 물리적으로 대적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나라 사정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전파되던 때는 1832년경이었습니다.
    1832년 화란 선교사 구쯔라프(Gutzlaff)가 만주에서 한인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1865년 토머스(Robert J.Thomas)선교사가 대동강변에서 첫 순교를 하고,
    1872년 존 로스(John Ross)와 맥킨타이어(John McIntyre)가 만주에서 한인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이렇게 간접적인 전도 때부터 순교자가 생겨났습니다.

    62088f3cf1749b76

    제너럴 셔먼호 사건(General Sherman incident)
    미국의 무장 상선 '제너럴 셔먼(SS General Sherman)이 1866년 7월 25일 평안도 용강현 주영포 앞바다에 도착한 뒤 대동강을 거슬러 평안도의 중심지인 평양부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대포를 쏘고 민간인을 살해하자, 9월 5일 당시 평안 감사 박규수 휘하의 조선군 부대가 배를 급습하여 불태우고 선원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19세기는 서구 열강에 의한 아시아의 개항 및 식민지화가 극에 달한 때였다.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는 민, 관을 가리지 않고 눈에 불을 켜고 아시아를 개방시켜 이권을 선점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 즈음하여 아편 전쟁과 쿠로후네 사건으로 중국과 일본도 개항의 길을 선택했다.
    민간상선인 제너럴 셔먼호 역시 비슷한 이유로 조선을 개항의 대상으로 선택하였다.

    제너럴 셔먼 호의 미국인 선주, 프레스턴은 조선을 상대로 개항을 선점하여 한몫 잡을 생각에 단독으로 조선에 개항을 강요하려고 했다. 그는 배를 중국 톈진에 기항하였고 영국의 메도스 상사와 용선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렇게 제너럴 셔먼 호는 메도스 상사에 위탁된 채 조선으로 출항했다.
    이 배에는 영국 웨일즈 출신 개신교 목사인 토마스가 조선어 통역관으로 승선해 있었다.
    그는 1865년 9월에 세관을 사임하고 1차 조선 선교 여행을 하며 성경책을 나누어주며 선교 활동을 했으나, 조선 당국에 적발되어서 추방당했다.
    이듬해인 1866년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신부들의 학살에 항의차 조선으로 떠나는 프랑스 해군 원정 함대에 통역관으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때마침 베트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상하이로 떠났다.
    낭패한 토마스는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 셔먼 호에 통역관으로 승선하여 다시 조선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부에 이르렀고 평양부 관민들에게 수교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반발하여 만경대 한사정(閑似亭)까지 거슬러 올라와 약탈을 감행했다.
    처음에는 제너럴 셔먼호에 식량이 떨어졌다고 도움을 요청하자 조선 측에서 소고기와 쌀과 채소 등 식량과 배에 필요한 자재를 거저 나눠주기까지 했으나 이들은 장마 비에 불어난 대동강 물을 거슬러 올라 약탈을 감행하였다.
    이에 조선군이 출동하였으나 배에서 가해진 포격에 여러 군졸 및 구경하던 백성들이 죽고 다쳤다.

    조선군도 대응 포격을 했지만 포의 사정거리가 짧은 탓에 효과를 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평안감사 박규수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물러가라며 중군 이현익을 보냈으나 되려 그를 잡아가두고 통상을 요구했다.
    실록에 따르면 중군이 납치된 것을 본 군졸들과 백성들이 노하여 배를 포위하고 활과 화승총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자 제너럴 셔먼 호의 선원들은 두려워 했고, 퇴역 장교인 박춘권이 조각배를 타고 접근해오자 중군 이현익과 부하들은 셔먼 호에서 뛰어내렸고, 이현익은 무사히 박춘권의 배에 올라탔으나 부하들은 익사하고 말았다.

    분노한 군민들이 몰려오는 것을 본 제너럴 셔먼 호는 도망치려고 했으나, 중군을 억류했다 풀어주는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대동강 수위가 낮아져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평안감사 박규수는 밤중에 기름을 뿌린 짚을 가즉 실은 목선들을 가득히 보내서 불을 질렀다.
    결국 배는 버티지 못하고 불탔다.

    그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순교자가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순교를 당했지만 물리적으로 대응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외적으로 전혀 강하지를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는 오늘까지 전 세계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졌으며, 사람들에게 가장 강한 종교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약한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렇게 강하게 인식되며 엄청난 성장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강력하게 말씀한 곳이 본문 31-32절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온 우주를 조성하시고 운행하시며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을 위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은 하나님을 떠나 죽은 인생들을 살리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아끼지 않고 속죄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까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내놓으셨습니다. 본문 앞쪽의 16-17절 상반절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이 보다 더 확실하고 강력한 사랑이 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온전하게 의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담대할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 때문(로마서 8:33-35)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담대하게 주님의 일을 행할 수 있는 이유가 세상으로부터 정죄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쫓겨난 사탄과 그 무리들은 끊임없이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하나님께 고발합니다.
    그 대표적인 내용이 욥기에 실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한 믿음으로 인정하신 욥을 사탄이 고발했습니다.
    또한 사탄은 여호수아까지도 고발하고 대적했습니다.

    스가랴 3:1
    절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이처럼 지금도 사탄과 그의 무리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고 고발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욕하고 대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대적과 고발을 듣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대속의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 때문에 결코 정죄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법’이 작용을 합니다.
    ‘성령의 법’은 곧 ‘생명’입니다.
    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꿰뚫고 계셔서 우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결국 성령께서는 성도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도록 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지배를 받는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이든 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물론 해도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욕망을 따르는 육신의 일과 성령을 따르는 영의 일을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육신의 일은 세상의 환경과 자신의 욕망을 따르도록 요구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싸움이며, 이 싸움에서 육신의 욕망에 지게 되면 그 결과는 죽음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로마서 8:12-14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깨우쳐 주시며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본문 37절에서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지중해에 있는 ‘키프로스’(성경지명은 ‘구브로’) 기지는 군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요충지입니다.
    이 섬만 뺏으면 지중해를 장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키프로스를 장악하기 위하여 공격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날씨가 흐리고 폭우가 쏟아지면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도록 안개가 낀 날을 택하여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들은 잠수정을 타고 해안으로 잠입하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조차도 분간할 수 없도록 어둡고 흐렸습니다.
    아무리 철통같이 수비를 한다고 해도 침투하는 적을 분간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그런 날씨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격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침투하는 바로 코앞에서 키프로스 수비대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사로잡히고 난 후에야 왜 그렇게 일찍 사로잡혔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키프로스 기지에 있는 레이더 때문이었습니다.
    최신형인 그 레이더에는 침투하는 적들의 양말 줄무늬까지 환히 보였다고 합니다.

     지금 군인들은 적외선 장비나 야간 투시경 장비를 사용하면 악천후나 어둠이나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를 환하게 보면서 전투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가려지는 것들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정말 끔찍하게 사랑하시며 단 한 수간도 놓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십시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담대하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십시오.
    그리하여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여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마라나 타! (주여, 어서 오소서!)
    고린도전서 16:22(공동번역)

    이 모든 계시를 보증해 주시는 분이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 주 예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요한계시록 22:20~21(공동번역)

    본래 마라나 타는 초대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일종의 기도 구절이었다.
    이를 헬라어로 음역하면 μαράνα θά 가 되고,
    영어로 옮기면 maranatha가 된다.

    일부 학자들은 '마란 아타'로 오인하여 '주님이 오셨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마라나타(Maranatha)", "마라나 타(maranâ thâ')", "마란 아타( maran 'athâ')"의 뜻과 기원

    Maranatha (either מרנא תא: maranâ thâ' or מרן אתא: maran 'athâ' ) is a two-word Aramaic formula occurring only once in the New Testament (see Aramaic of Jesus) and also in the Didache, which is part of the Apostolic Fathers' collection. It is transliterated into Greek letters rather than translated and, given the nature of early manuscripts, the lexical difficulty lies in determining just which two Aramaic words comprise the single Greek expression, found at the end of Paul's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1 Cor 16:22).

    마라나타(either מרנא תא: maranâ thâ' or מרן אתא: maran 'athâ'  마라나 타 혹은 마란 아타)는 두 단어의 아람어식 어구로는 ( 예수님의 아람어를 참조하라) 신약 성경에서 그리고 디다케에서 단 한 번 사용된 것을 ‘사도의 아버지’ 수집(collection) 일부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초기 원고의 성격, 두 단어의 아람어가 단 하나의 그리스어 표현을 포함하는 결정에 어휘의 어려움이 있어 그리스어로 번역되어지기보다 그리스 문자로 바뀌어(음역되어) 졌고 , 고린도전서 16: 22절 바울 서신의 끝머리에 표현되었음을 찾을 수 있다.(고전 16: 22)

    If one chooses to split the two words as מרנא תא (maranâ thâ), a vocative concept with an imperative verb, then it can be translated as a command to the Lord to come. on the other hand, if one decides that the two words מרן אתא (maran 'athâ), a possessive "Our Lord" and a perfect/preterite verb "has come," are actually more warranted, then it would be seen as a credal expression. This interpretation, "Our Lord has come," is supported by what appears to be an equivalent of this in the early creed acclamation found in the biblical books of Romans 10:9 and 1 Corinthians 12:3, "Jesus is Lord."

    만약, 누군가 두 단어로 (마라나 타) 띄어 쓰도록 선택한다면, 필수 명령형 동사 호격 개념으로는 “주여 오시옵소서”로 번역할 수 있다.
    다른 한 편, 누군가 소유격으로 번역하고저 할 때는 “우리의 주님”이 가능하며 완료형/과거 동사의 표현은 ”Has come, 오셨다”가 사실상 더 보장되는데 오래전 신조(교의)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번역은 성경 로마서 10:9과 고전 12:3에 나타나는 "예수는 주시라"는 교회사에서 일찍이 신조(교의) 승인(허락)을 토대로 이 해석 방법의 타당성을 지원받기도 한다.  

    In general, the recent interpretation has been to select the command option ("Come, Lord!"), changing older decisions to follow the preterite option ("Our Lord has come") as found in the ancient Aramaic Peshitta, in the Latin Clementine Vulgate, in the Greek Byzantine texts, Textus Receptus, critical Greek
    texts like Westcott and Hort, Tischendorf, Cambridge, etc., and in the English translations like the King James Version, the Finnish Raamattu, etc. one reason the change from the previous scholarly view has occurred is that the P46 papyrus (ca. A.D. 200) divides it as μαρανα θα ("marana tha").

    일반적으로, 최근의 해석은 고대 아람어 페쉬타에서, 라틴 크레멘타인 벌기트 성경에서, 그리스 비잔틴 텍스트들에서 발견되어진 것처럼 “우리 주님이 오셨다”의 이전 결정을 변경, “오소서, 주님!” 명령형으로 선택했다.
    그리스 비잔틴 교재들, 까다로운 웨스트코트와 같은 그리스 텍스트들과 호르트, 라틴 클레멘타인 벌기트 성경, 호르트비스첸도르프, 캐임브리지 등등, 그리고 킹 제임스 버젼과 같은 영어 번역들, 핀란드 라아마투 등등에서 이전 학자들의 견해를 바꾼 단 하나의 이유는 중요한 그리스어 교재 학술 보기 P46 파피루스 (ca. A.D. 200) 같은 곳에 “마라나 타”로 띄어 분리하는 일이 나타났던 것이다.

    The NRSV of 1 Cor 16:22 translates the expression as: "Our Lord, come!" but notes that it could also be translated as: "Our Lord has come"; the NIV translates: "Come, O Lord"; the NAB notes:

    고전 16: 22을 “NRSV"에는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 메모는 역시 "우리 주께서 임하셨다”로 번역될 수도 있고; NIV 에는 "오시옵소서, 오 주여”로 번역되었다; NAB 메모:

    "As understood here ("O Lord, come!"), it is a prayer for the early return of Christ. If the Aramaic words are divided differently (Maran atha, "Our Lord has come"), it becomes a credal declaration. The former interpretation is supported by what appears to be a Greek equivalent of this acclamation in Book of Revelation 22:20 "Amen. Come, Lord Jesus!""

    “여기서 (“O Lord, come”)로 이해되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속히 있으시기를 구하는 하나의 기도문이다. 만약 아람어식 단어를 다른 형태로 나누면 "우리 주님이 오셨다(임재하셨다)”이며, 이것은 신조(교의)로 선포되었다. 이전의 번역은 그리스 어의 계시록 22: 20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와 동등한 타당성을 지원받는다.                  

    The 1985 New Jerusalem Bible translates 1 Cor 16:22, "If there is anyone who does not love the Lord, a curse on such a one. Maran atha." In the context of First Corinthians, understanding the Greek "maranatha" as Aramaic "Maran atha" in the preterits sense would provide substantiation for the preceding anathema. That is, one who does not love the Lord is accursed because our Lord has ascended and come unto his throne (e.g., Dan 7:13) and wields power to implement such a curse. It would also substantiate the following prayer for grace from the ascended Lord Jesus, who has come to his throne and then sends the Holy Spirit.

    1985년 새 예루살렘 성경은 고전16:22을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Maran atha"로 번역한다. 고린도전서의 문맥으로 보아서, 과거의 판단력 안에서 그리스 사람들은 "maranatha"를 아람어 "Maran atha"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앞에 말한 저주에 대한 입증을 제공할 것이다. 즉 주님의 승천과 그의 보좌 (단 7: 13)를 구현하는 것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무서운 저주를 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묘한 힘이 있다. 그것은 또한 그의 왕위와 승천하신 주 예수로부터 오는 은혜와 임하실 그분의 보좌, 그리고 거룩한 성령을 보내어 주실 것을 구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담대하라(하자크.  châzaq) חָזַק 스트롱번호 2388

    1. 단단히 매다.  2. 굳게 유지하다.  3. 전치사 לְ가 수반되는 경우
    발음 [ châzaq ]
    구약 성경  / 293회 사용


    너는 담대하라(Be strong)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 요압은 여기서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하나님의 성읍들'(the cities of our God)이라고 말하면서 군사들에게 담대히 하자고 권하고 있다. 이러한 요압의 권면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모든 기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확신한 그의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의 성읍을 위하여 싸우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지키는 명분있는 싸움이므로 이 전투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요압은 권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담대하게 된 요압의 군사들은 명분없는 싸움에 임하고 있는 아람의 용병들보다 사기 면에서 훨씬 앞서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 하나님의 성읍이 죄악된 이방인의 손에 들어가지 않고 지켜지는 것이 하나님의 선(善)이다.
    따라서 이러한 요압의 말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승리를 확신하는 말이다(삼하 10:12).
    한편, 본문에 언급된 '선히 여기시는 대로'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하토브 베에나우'이다.
    그런데 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주의 눈에 선한 것을'이라는 말이다.
    이는 주님의 눈에 선해 보이는 것이 곧 완전히 선한 것이라는 의미로 여호와 중심의 사상이 강력히 내포된 구절이다.
    이와같이 참으로 하나님만이 선악의 유일한 기준인 것이다(시 25:8; 33:5; 나 1:7; 마 19:17; 롬 2:4).


    예수님은 이제 마지막 승부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신다. 누가 봐도 예수님의 완패, 참패 같은 끔찍한 십자가를 앞두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절), ‘내가 이겼으니 담대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도대체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담대하라’는 표현은 구약에 9번, 신약에 2번, 11번 나오고, ‘담대하여’가 6번, ‘담대히’가 24번까지 합하면 총 41번 나온다. 가장 먼저 나오는 건 민수기 13장 20절이지만 제일 인상깊은 것은 모세와 여호수아가 이 명령을 꽉 붙들었다는 것이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31:6) 바로 다음 절에 보면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고 한다.

    40년을 서포트 역할만 하던 여호수아를 향한 모세의 명령이 아니라 이건 하나님의 명령이다. 신명기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여 내가 그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신31:23). 이 명령이 여호수아서에서도 강조된다.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1:6),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수1:7),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광야 시대의 마인드를 버리고 새로운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말씀인데 말씀을 잘 보면 “담대하라”는 명령은 대체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약속의 말씀과 짝을 이룬다. “내가 함께하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 성경에 나오는 약속 중 가장 많이 나오는 약속이다. “내가 함께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담대하라” 그러신다.

    풍요로운 도시 문화를 이루었던 가나안의 7족속, 철병거로 무장한 거인들, 요즘 말로 하면 핵무기로 무장한 선진국 같은 그들이 광야에서만 40년을 산 이스라엘 백성이 오면 쳐서 멸망시키겠다고 벼르는 상황이다. 그들을 돌파할 이스라엘 백성들은 군사 훈련 한 번 받은 적이 없는 오합지졸,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여호수아 1장만 해도 3번이나 “강하고 담대하라”고 한다. “주저앉을 이유 없다,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얼마나 확신했을까? 여호수아도 같은 말을 한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 너희가 맞서서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수10:25).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모세가 하고, 모세가 한 말을 여호수아가 똑같이 한다. 이게 바로 ‘제자화 사역’이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밟게 된 비결이다. 우리도 이래야 한다. 모처럼 경마장이 쉬는 날, 말들이 모여 말하는 유형에 따라 말들이 싫어하는 인간상이 무엇인가 여론조사를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동상은 말 바꾸는 인간, 말 머리 돌리는 인간이고, 은상은 이 말 저 말 왔다 갔다 하는 인간, 말허리 자르는 인간이며 금상은 말꼬리 잡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인간이었단다. 말이 씨가 된다. 말씀으로 무장하고 말씀을 나누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담대하라”는 명령은 바울에게도 임했다.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미결수로 로마 군영에 갇혀있는데 로마로 가는 길은 보이지 않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음모만 점점 다가온다고 느낄 때, 유대인들이 죽이겠다고 난리칠 때다. 그때 함께 주신 말씀이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였다. 2년 후에 로마로 가지만 할 일이 있다는 것, 사명이 있고 ‘내가 함께하니 담대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본문 33절에서도 “담대하라”고 하셨는데 바로 앞 절에 보면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16:32), 제자들이 흩어져 혼자 있게 되실 때였지만 혼자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함께하신다는 말씀, 제자들의 배신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뜻이다.

    혹시 배신당한 적 있나? 당해본 자만 아는 고통이다. 믿은 만큼 배신의 고통은 큰 것, 예수님도 3년 이상 동고동락한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하셨기에 그 고통은 대단했을 것, 그런데 감내하신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거다. 임마누엘의 확신이 배신의 고통을 이기게 한다. 고통은 잠깐이지만 임마누엘은 영원한 것, 혹시 배신으로 인해 고통 중에 있더라도 그 고통보다 더 큰 임마누엘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임마누엘의 약속은 동행의 약속, 관념이 아니라 체험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43:2), 임마누엘의 확신이 이기는 힘이다.

    응답하리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24절),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받을 것, 그리고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고 하셨다. “구하면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반복하며 예수님은 고별설교에서 기도가 강조하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14:13)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4:1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16:23-24).

    응답받는 이유도 밝히셨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27절), 먼저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라고 하셨는데 사랑하면 듣는다는 말씀이다. 경험해서 알지 않나? 사랑하면 들린다. 그리고 사랑하면 응답한다. 그리고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로 믿은 고로’라고 하셨는데, 믿으면 응답있다는 말씀이다. 작은 믿음이라도 괜찮다. 하나님은 믿음을 보이면 응답하신다.

    예수님은 14장부터 계속 기도를 말씀하면서 ‘내 이름으로 구하라,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를 강조하셨다. 이건 신앙생활에서 너무도 중요한 기도의 원리다. 마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라고 하셨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히4:16)이라고 했다. 성경의 약속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응답과 더불어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라고 하셨다(24절). 여기서 ‘충만하리라’는 ‘플레로오’(πληρόω)의 완료 분사 수동태, 수동태는 기도의 결과로 오는 충만한 기쁨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지는 신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응답받는 기쁨, 충만한 기쁨, 이건 약속이고 축복이다.

    언제든지 응답하실 준비가 되어 있는 분, 응답하길 좋아하시는 분, 그래서 바울도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다(빌4:6). 중요한 것은 확신이다. 확신만 분명하면 못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막9:23). 어떻게 조지 뮬러는 평생 5만 번 기도 응답받고 ‘기도의 아버지’라고 불렸을까?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왜 하루 세 시간을 기도했을까? 기도하면 응답받고, 기도해야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씀대로 담대하라.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다.

    내가 세상을 이겼으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절), 닥칠 일들이 엄청나다. 제자의 배신, 체포, 구금, 심문, 폭행, 조롱, 모함, 무고, 흑색선전, 단죄, 그리고 처형, 힘 가진 자들의 대규모 여론몰이와 속전속결식 공세 앞에 한 차례의 저항도 없이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짧은 생을 마감하시기까지 숨 가쁘게 일어날 일들,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지만 담대하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내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이기셨다는 거다.

    십자가를 앞둔 목요일 밤, 시시각각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한다. 세상은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작전계획을 다 마치고 출동 명령만 기다리고 있을 시간, 이에 맞서 예수님을 보호해야 될 제자들은 근심에 쌓여 있다. 한숨만 쉰다. 불과 몇 시간 후의 모습을 말씀하신다.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32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고대로 다 달아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기까지 한다. 예수님 또한 십자가에 못받혀 죽임 당하신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끝이다. 예수는 죽고. 예수의 운동은 실패로 끝난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이겼다”고 하신다. ‘이겼다’는 헬라어 ‘니카오’(νικάω)는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다. 승리의 여신 ‘니케’와 상표 ‘나이키’ 때문이다. 요한일서에서는 여러 번 승리자 되신 예수님을 말한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2:13)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2:1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4:4).

    급기야 요한은 선언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5:4-5), 예수님이 니케(νίκη), 나이키(nike), 승리자이시다. 예수님이 이긴 세상은 그냥 세상이라 불리거나 흉악한 자, 악한 자라 불린다. ‘이기었느니라’는 시제도 의미가 있다. 헬라어에서 완료형, 과거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상태를 서술한다. 예수님의 승리는 앞으로 있을 부활 이후가 아니라 이미 일어났다. 그 승리는 성육신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 예수님은 이미 승리자이시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인간사에 있어서 가장 밑으로 낮은 곳으로 가는 것이지만 그 십자가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실패요 수치요 형벌이지만 이 길이 승리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언하셨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십자가의 길이 부활의 길이요 만왕의 왕이 되는 영광의 길, 그래서 피하지 않으셨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피하실 수 있지만 그 어떤 시도도 하시지 않고 군중들과 지도층과 로마정권과 그 군대와 맞서셨다.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의 형태로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 또한 승리자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승리자, 그렇다면 “피하라, 타협하라, 모른 척하라, 부인하라, 기억나지 않는다 하라, 아부하라, 너도 돈을 뿌리고 뇌물도 쓰라, 사서 고생하지 말라, 도망가라” 등 내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유혹과 시험을 물리쳐야 한다.

    계시록에 보면 요한은 ‘이기는 자’를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2:7),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2:11), 버가모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2:17),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2:26), 사데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3:5), 빌라델비라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3:12),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다(계3:21). 요한은 소아시아 일곱교회를 향한 성령의 말씀을 쓸 때 한 마디로 ‘이긴 자’에 꽂힌 사람처럼 “이기는 그에게는...”을 강조하며 썼다.

    매일 아침 일어나는 아프리카의 영양(antelope)은 가장 빠른 사자(lion)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먹혀 죽는다는 것을 잘 안다. 매일 아침 일어나는 사자도 가장 느린 영양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가 영양이건 사자이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해가 뜨면 그저 달리면 된다.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담대하라.”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삼하 10:12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4

     

     

    ‘주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이를 바랄 때 우리는 담대할 수 있다. 즉 어떠하든 주를 의뢰하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누가 답을 듣고 싶어 하는 어느 질문지에 ‘개신교 목사로서’ 기꺼이 답을 해주었다. 그러느라 나는 종일 교회에 있었고, 글방에 있는 시간이 싫지 않았다. 가만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할 수 있을 뿐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성경을 그 중심에 두고 있음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애매할 게 없다. 단호하고 단순할 뿐이다. 복잡하지 않다. 그리 말해주었다. 오늘 처한 이 모든 현실도 그러하다. 주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실 것이다. 어떠하든, 이를 붙들고 바랄뿐이다.

     

    생각은 명료하고 삶은 단순하였다. 힘들면 힘든 거지 힘든 걸 안 힘든 것처럼 굴 것도 없고, 다만 그 가운데서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유 1:24-25).” 곧 오늘의 나로 하여금 주 앞에서 거침이 없게 하심인데, 오늘 본문은 이에 담대할 것을 말씀하신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삼하 10:12).”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신뢰하는 것이다. 설령 그 결과가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주어진 한 날의 삶에서 나의 날들이 더욱 단순하고 담백하기를 기도한다. 너무 생각이 많다. 유혹하는 것들도 많다. 한데 이는 우리 마음의 일이지, 세상은 본래 그러했다. 마치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 13:22).” 곧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막 4:19).” 그러니 이를 어쩔 것인가? 나는 누가 어떤 질문지를 주며 답을 부탁하였을 때 그저 마다할 생각이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생각을 적고 그 근거를 말씀에서 찾아가면서 나의 확고한 중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다들 그 마음에 따라 산다. ‘길가 밭’ 같거나 ‘돌짝 밭’ 같으면 영락없다. 이는 현실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성경은 엄연하였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다른 때의 이야기가 아니고, 남 이야기도 아니고,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일이다. 은혜는 그때마다 필요하다. 묵은 것으로 사는 게 아니다. 문득 드는 생각이 내가 누군가의 인생에서 어느 한 시점으로 잊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 구원 받게 할 수도 없다. 다만 그,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저는 나에게 나는 저에게 소요되는 것이다. 그 모든 일은 우리가 시작한 게 아니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나는 이처럼 아침마다 묵상을 글로 쓰는 일을 사랑한다. 또한 누구와 어떤 일로 말하거나 생각할 때 성경을 떠올릴 수 있는 것에 대해 참으로 귀히 여긴다.

     

    다 저녁께 손위처남이 조카와 함께 어머니를 뵈러 왔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때, 두서없는 말 가운데서도 우리의 중심은 보인다. 하다못해 그 사람의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영적인 상태나 모습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겠다. 일상은 그저 스쳐서 사라지는 게 아니다. 내남없이 흘러가는 것 같으나 그것이 모여 대해(大海)를 이루듯 이는 곧 교회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7).” 각각 그 개개의 생이 모여,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었다. 서로의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한데 모여 주를 바라며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시려고,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나는 왁자지껄 오가는 말 속에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께 기도하며 아뢸 수 있는 것은 주의 영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심의 증거다.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우리 안에 소망을 두신 이유다. 그러므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누구의 부탁으로 여러 질문에 답을 하다 나는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나에게 향하신 주의 거룩하시고 인자하신 은혜를 되새길 수 있었다. 전에 같으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화두다. 또는 나의 완고함으로 더없이 덧대어 답 없는 답을 끊임없이 요구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 덧붙여 말하였다.

     

    ‘이와 같은 질문에 시달리는 것은 마귀에게 틈을 주는 일이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왜냐하면 저는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기 위해 숱한 질문을 갖게 하고, 괜한 일에 참견하게 하며,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을 품게 한다. 그래서 성경은 이를 경계한다. 정작 저들은 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 논쟁을 원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완고한 마음을 더할 뿐이다. 이에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우리는 다만 우리 스스로도 증명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 믿음은 우리가 취한 게 아니다. 그리 더하신 주의 은혜다. 값없이 주신 선물이다. 괜한 질문에 일일이 답하지 않는 것 역시 우리에게 필요한 답이 된다.’

     

    굳이 답을 하지 않아도 이미 답이 되는 답이 있다. 빌라도가 물었다. 진리가 무엇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답하지 않으셨다. 저는 진리를 앞에 두고, 이미 다 알면서도, 실은 굳이 답을 바라고 했던 질문도 아닌 거였다. 우린 이와 같이 헛된 질문들 앞에서 얼마나 자주 시달리곤 하는지. 남이 하는 것도 그렇지만 스스로 되풀이하는 질문도 그저 피곤하기만 할 따름이다. 본래 질문이란 몰라서 하는 것이기 보다 동조를 구하는 것이다. 원하는 답은 이미 손에 쥐고 그 답에 합하면 동의하고 부합하면 적대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 지적인 허영이 또는 갈급한 호기심이 실은 그리 선하지 못하다. 종종 누가 와서 퉁명스럽게 묻는다. 교회 세습에 대해 목사님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동성애에 대해, 이혼에 대해, 돈이 많은 부자로 사는 것에 대해 목사님 생각은 무엇입니까? 할 때 저들은 이미 자기 할 말을 입에 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러니 뭐라 한들! 그저 좋으실 대로 하시라. 다만 우리는,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5).” 조금은 새삼스러웠고 새로웠다. 나의 확고함이 두려우면서도 감사하였다. 구구절절 이어지던 말을 덜어내고 성경의 근거를 놓지 않았다. 형님과 어머니가, 아내와 형님이 서로서로 주고받는 대화에서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는 것이 신비하였다. 종종 지난날을 회상하며 ‘그땐 그랬지’ 하는 말끝마다 나는 아찔하였다. 그처럼 예전의 내 모습을 스스로 미워할 수 있는 게 또한 복이었다.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겔 36:31).”

     

    이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32).” 이 모든 게 날 위한 게 아니라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한 것이라는 데 나는 이제 안도한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22).” 조금은 의아한 게 전에 같으면 반감이 들 말씀인데 이제는 그 중심을 붙들게 하는 것이었으니, 스스로 이와 같은 변화를 눈여겨 볼 수 있는 것이 또한 은혜이었다. 종종 누구를 생각하다 또 어떤 이를 그리워하다 그만둔다. 나는 저의 어느 한 지점으로 족하다. 다만 우리의 훗날에 주 앞에서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고작 그런 정도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문득 돌이켜 보면 이 모든 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1).” 그러므로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9).” 아멘.

     






    역대상 13장 요약

    기럇여아림에 잇는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왔으며 가져온 하나님의 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4장 요약

    두로왕 하람이 궁전건축을 위해서 인부들과 나무를 보내주었고,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블레셋을 물리쳣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5장 요약

    다윗이 언약궤를 옮기기 위해서 아론과 레위 자손들을 불러 모았으며,하나님의 궤를 옮기기 위해서 레위인들에게 여러 임무를 부여하였고,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6장 요약

    궤를 장막으로 옮긴후에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서 찬양하였고 다윗이 감사의 찬양을 하나님께 올리고 언약궤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임명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6:10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찌로다

    역대하 11:16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마음을 오로지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이 레위 사람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고자 한지라.

    에스라 6:21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무릇 스스로 구별하여 자기 땅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을 버리고 이스라엘 무리에게 속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다 먹고.

    시편 105:3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찌로다.

    시편 119:2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5월 6일(화) 역대상 13-1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를 구하는 자(16:10)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찌로다.
    Glory in his holy name; let the hearts of those who seek the LORD rejoice.

    11.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찌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찌어다.
    Look to the LORD and his strength; seek his face always.

    여호와를 구하는 것은 그의 임재를 구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인의 사고는 하나님의 임재를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그 능력을 구할찌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찌어다." 라고 합니다(11절).

    여호와의 얼굴 즉 은혜를 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다리는 것

    사람은 누구나 제한된 조건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제한시키는 것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며 구합니다.
    비록 사람마다 그 제한된 것이 다를지라도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려는 것

    제한 된 것을 해결한 후에 내 마음대로 내 멋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말씀따라 순종하는 것이 바람직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편 119:10-11)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십니까?
    은혜를 받은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은혜를 받은 후에는 은혜 받기 전의 삶을 버리고 은혜 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영적 성장이라고 합니다.
    제자리 걸음에 익숙한 신앙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성장하는 신앙으로 발돋움해야 하겠습니다.

    주여,
    나를 광활한 곳으로 인도하소서

    주여,
    나를 저 높은 곳으로 이끄소서

    주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나를 살피소서.



    히브리인의 사고는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게 되면 그분이 계시는 곳에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구한다는 것은 그의 임재를 구하는 것입니다.
    “임재”란 히브리어 단어 “얼굴”에 대한 통상적 번역입니다.
    우리는 그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 접근하는 히브리식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앞에 있다는 것은 그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편재하는 분이며 그러므로 항상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 가까이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존재하게 붙들고 계십니다.
    그의 능력은 만물을 지탱하며 다스리시는 것 안에 항상 존재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늘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시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신다는 언약의 측면에서 항상 그의 자녀들과 함께 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20)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가 늘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여호와를...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 우리가 이를 의식하고 이에 의탁하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가 늘 끊임없이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을 등한시하고 주님을 생각하지 않으며 주님을 신뢰하고 의뢰하지 않습니다. 즉, 주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나시지 않는"—즉, 우리 마음의 눈으로 볼 때 주님이 위대하고 아름다우며 소중하게 인식되지 않는 그러한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있어서 하나님의 얼굴—그의 인격의 빛남—은 우리의 육신적 욕망들의 커튼 뒤로 숨겨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두운 상태는 늘 우리를 사로잡으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분의 임재를 항상 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위대하심과 아름다움과 가치에 대한 지속적인 자각을 즐기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는 "구하는 것"을 통해 일어납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무엇을 뜻합니까? 구약과 신약 공히 말씀하기를, 이는 하나님께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고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 마음의 의식과 우리 마음의 애정을 하나님께 의식적으로 고정하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제 너희는 마음과 뜻을 바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라" (역대상 22:19)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골로새서 3:1-2)

    이렇게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설정하는 것은 생각이 그냥 떠돌아 다니는 것과 반대됩니다. 이는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려는 의식적 선택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후서 3:5). 이는 우리 측면에서 볼 때에는 우리의 의식적 노력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구하는 그러한 노력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위해 이러한 정신적, 정서적 노력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려서가 아닙니다. 동전이나 양이라면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통해서 나아가거나 아니면 빙 돌아서 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통해서 나아가거나 돌아서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숨어 계십니다. 우리는 중개하는 매개체들을 통해서 나아가야 하며 장애물들을 돌아서 나아가야 합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통하여 하나님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말씀을 통해 계시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은혜의 증거들로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통하여 하나님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자연적 수단을 통해서 나아가려는 의식적인 노력입니다. 즉, 우리의 모든 경험 속에서 지속적으로 생각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그의 계시의 수단을 통하여 그에게로 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분명하게 보고 하나님의 임재의 빛 가운데 있기 위해서는 빙 돌아서 가야 하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침체되게 하는 활동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그로부터 도망가고 돌아서 가야 합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세상과 말씀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해 우리를 지극히 민감하게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침체되게 하고 눈을 가리며 하나님을 찾고 싶어하지도 않게 만드는지 압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 이러한 것들로부터 떠나고 그로부터 돌아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것은 이러한 노력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든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을 구한다는 의미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이사야 55:6)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욥기 8:5)

    구하는 것은 부르는 것과 간구하는 것을 수반합니다. 오 주님, 저의 눈을 열어주십시오. 오 주님, 저는 눈이 먼 자와 같이 어두우니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주를 계시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주의 얼굴을 보기 원합니다.

    주님을 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교만입니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시편 10:4). 따라서, 주님을 구하는 데 있어 겸손은 필수적입니다.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을 향한 위대한 약속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그를 찾게 될 것입니다.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역대상 28:9) 그리고 그를 찾았을 때는 큰 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하나님 그분이 바로 우리의 가장 큰 상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갖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여호와를 구하는 자(시편 119:1-8)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주께서 주의 법도로 명하사 우리로 근실히 지키게 하셨나이다
    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시 119:10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본문의 말씀은 율법을 사랑하고 계승(繼承)하기 위하여 진력하는가운데 여러가지 핍박을 받아 역경속에서 말씀을 지켜온 에스라 같은 분의 작품이라고도 합니다.

    본 시편은 가장긴장으로서 22단락으로 8절씩 히브리어 알파벳순으로 구성되여 176절로 되어있습니다. [9-10, 25, 34, 111, 112, 145편] 율법 말씀 증거 도 법도 율례 계명 판단 규례의 9가지의 표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합니다.
    생명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로 지키며 실천하게 되는 것 입니다.
    말씀은 생명력을 발산하며 소생하고 번영케하시고 성공하게 하시고 승리하게하시고 영화롭게하는 것 입니다.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 는 말씀을 지키는자, 하나님을 의지하는자, 말씀에 붙들린자,
    말씀의 진미를 아는자, 말씀을행하는자, 말씀의 복을 누리는자. 라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여러 가지 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 1:1-3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32:1-2“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고 했습니다.

    시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시 118: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욜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롬10;13]

    1, 회복시켜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호 6:1,3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고하였습니다.

    2, 좋은 것을 주십니다.

    마 7:7-11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 지 않겠느냐”

    3, 성령을 주십니다.

    눅 11:9-13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4, 하나님이 불러 주십니다.

    출 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창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매
    삼상 3:4,6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삼상 3:8-10 “여호와께서 세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왕상 3:4-5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행 9:3-4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이라고 하였습니다.

    마 16:16-17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요 21:15-17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회복시키시고 좋은 것을 주시고 성령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모세를 불러서 히브리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불러서 복의 근원을 삼으시고 약속하신 언약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사무엘을 불러서 앞으로의 되어질 중대한 사건을 예고하여 주셨습니다.
    솔로몬을 꿈에 불러서 원하는 대로 주시마고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을 불러서 이방의 대 사도로 사용하여 세계복음화의 기반을 놓았습니다.
    베드로를 불러서 신앙의 기반이 되는 바른고백을 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세 번이나 불러서 내양을 치라 내양을 먹이라 고 사명의식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여러분 여호와를 구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읍시다.


    1) 行爲가 穩全하여 여호와의 律法을 따라 行하는 者들은 福이 있음이여 (2) 여호와의 證據들을 지키고 全心으로 여호와를 求하는 는 福이 있도다 (3) 참으로 그들은 不義를 行하지 아니하고 主의 道를 行하는도다 ㅡ"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여호와를 따라 행하고, 지키고, 구하는 자는 복이 있다." 시편 119 편의 핵심 키워드는 주의 법, 율례, 도, 증거, 의다. 한마디로 하면 '말씀'이다. 복있는 사람은 불의를 행하지 않고, 주의 도를 행한다. 의를 행하고, 주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한다.


    ● 엘 (El : God) 

    ○ 엘(El) : 강한 능력을 가지신 통치자. 주로 복합어로 사용됨. '강함/첫 번째'의 뜻. 성경에서 250번 사용됨.
    ○ 엘로힘(Elohim)(창1:1) :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약 2,500번 사용됨.
    ○ 옐로아(Eloah)(욥기) : Elohim의 단수형(El의 뜻)
    ○ 엘 엘리온(El-Elyon)(창14:18-20 14:14. 시92)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God Most High), 천지의 소유자의 뜻. 36번 사용됨.
    ○ 엘 샤다이(El-Shaddai)(출6:3) : 그 백성의 궁핍을 채워 주시는 하나님(God Almighty), 전능자/가슴의 뜻. 엘과 함께 7번 사용, 전능함의 뜻으로 41번 사용.
    ○ 엘 올람(EL-Olam) (창21:33) : 영생하시는 하나님(the Everlasting God). 3번 사용(사40:28, 롬16:26)
    ○ 엘 로이(El-Roi) (창 16:13) : 감찰하시는 하나님.

     ● 야웨 또는 여호와(Yahweh 또는 Jehovah)

    ○ 여호와(창4:13:6, 말3:6) : 언약의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약 7,600번 사용됨.
    ○ 여호와 이레 (Jehovar-Jireh)(창22:13-14) : 준비하시는 하나님(the lord will provide).
    ○ 여호와 라파(Jehovar-Rapha)(출15:26) : 병을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 (the Lord who heals you), '여호와 로페카'로 발음하는 학자도 있음.
    ○ 여호와 닛시(Jehovar-Nissi(출17:8-15) : 승리의 깃발 되시는 하나님 (the Lord Is-My-Banner).
    ○ 여호와 샬롬(Jehovar-Shalom)(삿6:24) : 평강의 하나님(the Lord Shalom).
    ○ 여호와 라하(Jehovar-Raah)(시23:1) : 나의 목자되신 하나님(The Lord is my Shepherd).
    ○ 여호와 삼마(Jehovah-Shammah)(겔48:35) : 거기 계시는 하나님(The Lord is there).
    ○ 여호와 찌두케누(Jehovar-Tsidkenu)(렘23:6) : 우리의 의가 되시는 하나님
    ○ 여호와 체바오트(Jehovah-Sabaoth)(시84:8) : 만군의 여호와(Lord God of Hosts), '여호와 츠바오츠'로 발음하는 학자도 있음.
    ○ 여호와 메카디쉬켐(Johovar-mekoddishkem)(레20:8) :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
    ○ 여호와 나학카(사58:11) : 나의 인도자 되신 하나님
    ○ 여호와 게올레오트(렘51:56) : 보복하시는 하나님.
    ○ 야웨 라하민(Yahweh-Rachamin) : 고난당하는 백성들을 어머니와 같이 태중에 안아 친밀하게 돌보시는 하나님

    ● 아도나이 (Adonai)

    ○ 나의 주, 주인, 선생님의 뜻.
    ○ 구약에서는 주권을 내포 (23:17) - the Lord God, 통치를 내포 (10:16) - the Lord, the Lord of hosts.
    ○ 신약에서는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에게 사용됨 (계19:16) - King of king and Lord of lords.
    ○ 단수 형태인 아돈(Adon)으로 30번, 아도나히(Adonahy)로 약 290번, 복수 형태인 아도나이(Adonai)로 무수히 사용됨.

     ● 아버지(Father) : 압(Ab), 아바(Abba), 파테르(Pater)

     ○ 신구약에서 모두 사용됨.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죄사함을 얻음으로써 하나님과 영적 관계를 맺은 자녀들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

     ● ‘앤 스팽글러 / 축복의 이름 / 주지현 역 / 좋은씨앗’에 나오는 성호들

     저자는 이 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두 싣지는 못했으나 가장 의미있는 이름들을 다루도록 최선을 다했다."며, 26가지의 성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는 위에서 살펴본 호칭과 중복되는 것도 있지만 새로운 것도 있습니다.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고 드리며 여기서는 간략히 소개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엘로힘(Elohim) : 하나님은 위대한 창조자이시다(창1:1).
    2. 엘로이(El Roi) :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신다 (16:13-14).
    3. 엘샤다이 (El Shadday) : 하나님은 전능하시다(창 17:1-2).
    4. 엘올람(El Olam) : 하나님은 영원/영생하시다(창21:32-33)
    5. 여호와 이레 (Yahweh Yireh) : 하나님이 공급하신다(창22:13-14).
    6. 여호와(Yahweh) : 하나님은 주이시다(출3:14-15)
    7. 아도나이(Adonay): 하나님은 주님/주인이시다(시 16:2).
    8. 여호와 로페(Yahweh Rophe) : 하나님은 치유자이시다(중 15:26)
    9. 여호와 닛시(Yahweh Nissi) : 하나님은 나의 깃발이시다(출17:15-16)
    10. 에쉬 오클라/엘 칸나(Esti Oklar/El Kanna) : 하나님은 소멸하는 물/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출34:14: 신4:23-24).
    11.  케도시 이스라엘(Qedush Yisrael)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시다. (레19:1-2).
    12. 여호와 샬롬(Yahweh Shalom) : 주는 평화이시다(삿6:24)
    13. 여호와 체바오드(Yahweh Technoth) : 하나님은 만군의 주이시다(삼상17:45-46)
    14. 여호와 추리(Yahweh Tsuri) : 주님은 반석이시다(시 144:1).
    15. 여호와 로이(Yamweh Roi) :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시23:1-3)
    16. 하쉠(Hashem) :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왕상 8:28-29)
    17. 멜렉(Melck) : 하나님은 왕이시다(시72-1-3)
    18. 이쉬(Ish) : 하나님은 남편이시다(호2:16, 19-20). 엔력(다
    19. 엘차이(El Chay):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왕하 19:15-16).
    20. 믹달오즈(Migdal Oz) : 하나님은 견고한 망대이시다(시91:1-2),
    21. 쇼페트(Shophet) : 하나님은 심판자이시다(시94:15).
    22. 미크웨 이스라엘(Miqweh Yisrael) :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소망이시다(렘17:7-8)
    23. 여호와 칫케누(Yahweh Taidgenu) : 주님은 우리의 의가 되신다(렘23:6).
    24. 엘앨리온(El Elyon) : 하나님은 가장 높은 분이시다(단4:34).
    25. 여호와 삼마(Yahweh Shammah) : 여호와가 거기 계신다(겔48:35).
    26. 압/아바/파테르(Ab/Abba/Pater) :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눅15:20)







    5월 5일(월) 역대상 9-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바벨론의 포로가 된 유다(9:1)

    이스라엘이 그 보계대로 계수되고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유다가 범죄함을 인하여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더니.
    All Israel was listed in the genealogies recorded in the book of the kings of Israel. The people of Judah were taken captive to Babylon because of their unfaithfulness.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사울과 다윗 그리고 솔로몬의 시대를 거쳐 북에는 열 지파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세웠고, 남에는 두 지파가 중심이 되어 유다를 세웠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강대국 앗수르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은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진 사건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웠던 나라가 왜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졌을까요?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 원인을  두 가지라고 합니다(예레미야 2:13).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첫번째 원인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것(생수의 근원)
    두번째 원인은 우상을 숭배한 것(웅덩이를 판 것)

    오늘날 자유대한민국이 무너질 위기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공짜를 좋아하기 때문(공짜는 양잿물도 마신다)
    둘째는 무식하기 때문(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지식)
    세새는 혈연주의와 연고주의 때문(지연, 학연, 연고주의)

    대한민국은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심각한 정치적, 사회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최근 언론들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에 집중하며, 국가의 안전과 자유에 관한 중요 사항들은 대부분 보도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경계하고, 행동해야 할 시점에 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지나치면, 대한민국은 곧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한국의 공산화 수순

    우리는 홍콩에서 중국 공안이 경찰로 위장하여 폭력을 유발하고, 무력으로 자유를 진압했던 사례를 잘 알고 있다.
    이 사건에서 중국은 자유를 압살하고, 홍콩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제 대한민국이 그 같은 경로를 밟을 위기에 처해 있다.

    사회적 갈등과 폭력적인 진압
    :
    최근의 정치적 혼란은 단순한 내정의 불안정이 아니다.
    갈등이 격화되며, 이미 정치적인 탄압과 법적 강제들이 진행 중이다.
    이를 토대로 점차적으로 정부는 시민들을 통제하고,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이들을 '정신병원'에 보내는 수순을 밟고 있다.
    이는 단순히 표현의 자유를 넘어, 나아가 물리적 통제와 억압을 의미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제도적 차원에서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그들의 자유를 박탈하는 법적 수단까지 등장했다.

    장기적출, 인권의 상실
    :
    과거의 예를 들어, 독재 정권 하에서 정치적 반대파가 감금되고, 그들이 '위험한 존재'로 낙인 찍혔을 때 어떻게 그들의 자유와 인권이 무시되었는지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적 억압은 점차적으로 폭력적인 진압과 연계되며, 장기적출과 같은 비인도적인 처우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사회 전반에 걸쳐 공포를 퍼뜨리고, 자유 대한민국을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만들 것이다.

    중국 공산화의 위협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언급한 "누군가의 것을 뺏어야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상황"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이 발언에서 그는 갈등의 격화와 함께 '대규모 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경고는 단순한 정치적 예언이 아니다.
    바로 지금, 그 갈등의 씨앗이 곳곳에서 자라고 있으며, 이는 통제되지 않는 폭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우리는 내란을 일으켜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처형당하고, 그 자리에 중국인을 이주시켜 중국공산화를 달성하려는 음모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에게 남은 책임 : 자유를 지키기 위한 행동

    이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순국선열들이 북한 공산주의의 탱크를 향해 폭탄을 안고 돌격하여 자유 대한민국을 지켰던 그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
    그들은 한민족의 자주독립과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이제 우리는 그들의 뜻을 이어받아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내야 한다.

    공산화 방지의 첫 걸음 : 정보의 확산과 진실의 전달

    가장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국민들에게 현재 상황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다.
    언론이 침묵하고 있거나 왜곡된 정보를 제공할 때, 우리는 이를 바로잡고 진실을 알려야 한다.
    대중의 눈을 가리는 미디어에 맞서,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정보가 공유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치적 저항과 참여


    정치적 투쟁은 결코 선택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저항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정치적 저항은 단지 거리로 나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법적 절차에 참여하고, 입법과 정치적 논의를 통해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악법이 통과될 때마다 이를 막기 위해 서명하고,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시민 의식의 각성

    시민들은 무관심과 방관으로 사회의 변화를 지켜보는 입장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부의 통제와 억압을 인정할 경우, 우리는 다시는 자유를 회복할 기회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

    함께 싸워야만 한다

    현재 대한민국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이 기로에서 우리가 방관하면, 이 땅은 곧 공산주의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행동한다면, 자유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순국선열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유 대한민국을 위해 싸워야 한다.
    우리의 후손들이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가 나서야 한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지키고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의 싸움이 내일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공산화 되기 직전입니다

    개혁주의 유산과 자유 대한민국의 위기

    사무엘 러더퍼드 신학자는 “법이 곧 왕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성경이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의 주인이자 왕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왜 러더퍼드는 ‘법이 왕’이라고 했을까?
    이는 성경이 정치적 질서를 확립하는 데 필요한 기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의 자의적 통치를 방지하고, 법치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최종 권위이자 기반이다.
    따라서 법 아래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법치주의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계승된 소중한 유산이다.

    《법이 왕이다(Lex Rex)》는 스코틀랜드의 학자이자 지도자인 사무엘 러더포드(1600~1661)가 쓴 책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분이 있다.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다.
    갈라디아서 5장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말씀을 깊이 새겼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연구하며, 이를 조선 땅에 실현하고자 했다.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의 기틀을 확립하였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법 앞에서 평등하고 정의로운 국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즉, 법치주의의 뿌리는 성경이며, 이는 반드시 지키고 계승해야 할 개혁주의적 유산이자 대한민국의 근간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법치주의를 훼손하려는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에서 법치주의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특정 정치 세력을 중심으로 한 반국가세력이 이를 훼손하고 있으며, 그 실태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국회는 특정 정치인을 보호하기 위해 입법을 남용하고 있다.

    여소야대의 국회를 방탄으로 무법적 자기 보호 기능으로 사용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재판을 지연시키고, 검찰 수사에 개입하며 법의 공정성을 무너뜨리고 있다.
    또한, 법치를 지키려는 검사들을 탄핵하는 등 법적 질서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법 앞에 모든 국민이 평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특정 정치인을 위한 특혜가 계속되고 있는 현실은 법치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행위다.

    둘째,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다.

    최근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탄핵 반대 시국선언이 집회법을 위반한 이들에 의해 방해받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불법 점거에 대해 강경 대응하기는커녕, 오히려 합법적인 시위를 펼치는 대학생들과 이를 지지하는 시민들을 압박하고 있다.
    법 적용이 특정 집단에게만 관대하고, 일반 국민에게는 엄격한 현실은 법치주의의 근본을 뒤흔드는 것이다.


    셋째, 대통령 탄핵 심판 과정에서 법적 공정성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정치적 편향성을 보이며, 특정 이념을 앞세운 판결을 내리고 있다.
    또한, 수사 권한이 없는 공수처가 무리하게 현직 대통령을 조사하고, 법원의 영장 발부 기준마저 편향적으로 운영되는 등 법치주의가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다.
    이제 이러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자유와 헌정질서를 유린하는 반국가세력은 자유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있으며, 국민들은 이를 바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국민들은 이 상황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제 행동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대통령이 복귀하여 강력한 개혁을 단행하고, 반국가세력을 척결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비겁한 사역자가 되지 말라. 비겁한 신앙인이 되지 말라.”




    바벨론 포로의 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 이스라엘에서 멀리 1,500km나 떨어진 바벨론 땅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것은, 율법적 관점에서 ‘언약의 땅에서 쫓겨나게 된 것’을 말합니다.
    레위기에서는 이를 “땅이 그 거민을 토해내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레 18:24-25).

    레위기 18:27-28
    너희의 전에 있던 그 땅 거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이것은 땅을 더럽히는 자가 받는 공통적인 심판의 원리로써, 출애굽 때 가나안 거민의 죄를 심판하고 그들을 토해내는 도구로 이스라엘을 사용하셨던 하나님이 이제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고 그들을 토해내는 도구로 바벨론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2:13에서 예레미야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근본적인 두 가지 악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된 원인이었습니다.

    새한글 /

    나의 백성이 두 가지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를 버렸다.
    생수의 샘인 나를! 자신들을 위해 웅덩이를 팠다, 무너져서 물을 담을 수 없는 웅덩이를!”

    첫 번째 악은 “생수의 근원 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
    두 번째 악은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곧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를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권면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경멸하며 ‘욕으로’ 여길 정도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렘 6:10). 그렇게 하나님을 버린 결과, 우상숭배하는 죄와 안식일‧안식년을 범하는 죄에서 돌이키지 못하고 바벨론에게 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1) 우상숭배의 죄


    남 유다가 망하기 직전 활동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우상숭배에 대하여 여러 차례 경고하였습니다(렘 1:16-17, 5:19, 13:10, 25:6-7, 44:5-6 등). 당시 유다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골몰하여, 그 섬긴 우상의 수가 그들이 거한 성읍의 수와 같을 정도였습니다(렘 2:28, 11:13).


    예레미야 16:11-13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열조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너희가 너희 열조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행하고 나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어
    너희와 너희 열조의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함이라 하셨다 하라.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유시장 경제 체제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유시장경제를 통해 국가를 지탱하고 있다.
    이는 모든 국민이 공유하는 가치체계이며 자유와 책임이 법치주의와 절차적 민주주의 속에서 균형을 이루고 시장 경제를 통해 국민이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최광칼럼 /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아시나요

    국가 정체성에 대한 무지(無知)

    정치 지도자들 중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national identity)을 정확히 알아서 자식이나 친지에게 설명해 주거나 국민에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유시장 경제 체제라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정확히 알고 국가의 수많은 정책 중 어느 것이 국가 정체성과 부합하는지 또는 부합하지 않는지를 판별할 수 있는 지도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국가와 민족을 위해 현재 정치를 하고 있는 사람들, 앞으로 새싹의 정치인이 되고 싶어 하는 청년들 모두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그 기본 중의 기본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정확히 아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전문(前文)과 10개 장 130개 조문의 본문(本文) 그리고 5개 조문의 부칙(附則)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헌법 전문을 읽어 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상당히 긴 헌법 전문이 지향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어느 나라든 각 나라의 헌법은 그 나라의 정체성을 담아내는 최고의 법률 문서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두 가지 개념으로 요약된다고 한다. 
    하나는 대한민국이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으로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 체제란 것이다.

    사회 제도는 하늘과 자연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이 만드는 것이다. 
    제도를 훌륭하게 설계하고 그 제도를 본래의 취지대로 적절하게 운영하면 어느 나라든 번창하고 국민은 잘살게 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정치 지도자이든 국가 정체성의 틀 속에서 활동하고 동시에 모든 정치가는 국가 정체성을 정립하고 유지 발전시켜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국가 정체성에 관한 세 가지 질문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인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유시장 경제 체제에 대해 크게 세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첫째, 자유민주 정치 체제와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 체제란 무엇인가?
    둘째, 우리나라 헌법이 과연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얼마나 잘 구현하고 있는가?
    셋째,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 체제의 양립이 가능한가?

    위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초보적 답은
    첫째,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에 대해서는 국민 모두가 나름 잘 알고 있으나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 체제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조차도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못하며 
    둘째, 우리 현행 헌법은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는 상당 수준까지 구현하고 있으나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 체제와 관련해서는 매우 미흡한 수준이라는 것 
    셋째,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 체제는 기본적으로 양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 우리 사회를 병들어 앓게 하는 문제들이 이들 세 가지 요인으로 인해 야기되고 있다.

    정치적 의사결정 대(對) 시장적 의사결정

    우리 모두는 두 가지 의사결정 과정 속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하나는 유권자로서 참여하는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자·소비자로서 참여하는 시장적 의사결정 과정이다.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과 시장적 의사결정 과정은 의사결정 투표의 수·의사결정의 빈도·의사결정 합의의 기준 등에서 크게 다르다.

    먼저 두 가지 다른 의사결정 과정에서 참여자가 갖는 투표 수에 차이가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결정은 사회 구성원들의 투표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사회 구성원은 모두 똑같은 수의 표, 즉 1인 1표를 가지고 참여한다. 반면에 시장적 의사결정의 경우 사회 구성원은 자신이 갖고 있는 경제력에 비례하여 불균등한 수의 표를 가지고 의사결정에 참여한다. 만약 A의 소득이 5000만 원이고 B의 소득이 5억 원일 경우 시장을 통한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B가 A에 비해 10배의 투표권을 행사한다.

    다음으로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선택은 시장적 의사결정 과정에서처럼 언제나 가능한 것이 아니며 매일매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기간이 지나야만 가능하다. 경제력만 있으면 보통 재화나 용역은 시장에서 언제든 구입이 가능하지만 국민이 선출하는 공직자는 비록 현재의 공직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정 기간, 즉 선출된 공직자의 임기가 다할 때까지 4년 또는 5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합의를 결정하는 기준에서 두 가지 형태의 의사결정 과정에 차이가 있다. 
    시장적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참가자 전원이 합의를 해야 거래가 이루어지므로 의사결정이 항상 만장일치로 이루어지는 반면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만장일치에 의한 의사결정은 매우 드물고 통상적으로 참여자의 과반수가 찬성하면 받아들여지는 다수결 제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누가 참된 민주화 세력인가

    1948년 건국과 함께 시작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 즉 민주주의를 놓고 정치 지도자와 국민 모두 회의에 빠져 있다. 인류가 갖게 된 지고지선(至高至善)의 정치 체제인 민주주의 체제에서 77년 성상(星霜)을 살며 때로는 민주화를 외치며 목숨 건 투쟁을 하기도 했는데 민주주의를 빌미로 정치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데도, 그리고 민주 세력이라 자처하는 집단이 반(反)민주적 행태를 일삼고 있는데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 나라의 일부 좌파 세력은 ‘민주화’나 ‘민주주의’가 자신들의 전용 특허인 양 내세우면서도 3대에 걸친 진짜 독재국가인 북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민주주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언제 도입되고, 누구에 의해 정착되었는가. 민주주의는 만능인가.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런데 앞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정확히 답하고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유신 체제로 대표된 왜곡된 비(非)민주적 통치 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우리는 ʻ민주화 운동ʼ이라 불러 왔다. 이 과정에서 ʻ닭장ʼ과 ʻ철장ʼ을 오간 사람들을 ʻ민주화 투사ʼ라 부르고 이들에 의해 민주화가 완성된 것으로 생각들 한다. 사실 1980년대의 민주화 투사들은 참으로 고생을 했으며 그들의 희생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논한다면 먼저 건국 과정과 6·25전쟁의 와중에서 이 나라를 세우고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사람들의 노력이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기초로 해서 대한민국을 건국한 자체가 우리의 5000년 역사에서 가장 최초의, 그리고 가장 큰 민주화 작업이었다. 인류 역사에서 공산주의·사회주의가 정점에 달했던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그 극심한 혼란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한 위업이 없었다면 1980년대 민주화가 가능했겠는가. 정부 수립 후 3년이 채 안된 시점에 공산 세력이 무력 도발을 했을 때 이를 격퇴시킨 그 고군분투의 과정이 어쩌면 건국 이후 우리나라 민주화의 두 번째 초석이 아닌가. 1980년대의 민주화는 세 번째 방점이다.

    민주주의는 흠결 많은 정치 제도

    민주정치 체제를 놓고 우리나라에서의 문제는 민주정치 체제를 지고지선의 제도, 하나의 절대적 가치로 신격화해 숭앙한다는 것이다. 사실 달리 보다 나은 대안이 없기에 민주정치 체제를 버릴 수 없지만 여기엔 치명적 결함이 존재하며 문제 또한 아주 많다. 성숙한 개인들의 독립적 판단이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민주주의는 ‘떼’의 정치, ‘폭도’의 정치가 되며 우중정치로 쉽게 흘러간다는 것을 역사가 수없이 보여주고 있다. 투표에 의한 민주주의의 결과 파시즘·나치즘이 탄생했고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들에서 인민민주주의 독재 체제가 등장했다.

    민주주의를 놓고 완벽한 정치체제라 찬양하기는커녕 모두 언제나 문제투성이임을 지적했는데, 영국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민주주의는 당파 투쟁·선전 선동·폭민정치 따위로 변질될 우려가 가장 많은 최악의 정치 체제”라 했고 60여 년 동안 영국 의회 의사당인 웨스터민스터 궁전을 드나들었던 윈스턴 처칠은 “민주주의는 가장 나쁜 정부의 형태다. 모든 다른 정부 형태를 제외한다면”이라고도 했다.

    지고지선의 가치는 자유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추구해야 할 정치적 가치는 자유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다. 인도와 홍콩이 그 좋은 사례이다.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민주정치 체제 국가이지만 인도인들은 자유를 제한하는 수많은 보호적 규제 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그들의 소득 수준은 아직도 매우 낮다. 홍콩은 영국의 지배를 받던 옛날이나 중국의 지배를 받는 현재나 시민에게 통치자를 선출할 권리가 없기에 민주정치 체제가 아니다. 그러나 지구상의 그 어떤 곳보다 가장 광범위하게 선택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다(최근은 아니지만). 그래서 소득 수준이 높다.

    민주정치 체제는 가장 나쁜 국가 형태, 즉 전제정치나 독재정치를 피하는 수단이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관심의 초점은 ʻ어떻게ʼ 민주주의를 이룰 것인가에 있었으며 ʻ왜ʼ 민주주의여야 하는가는 관심의 주된 대상이 아니었다. 민주화를 위한 열렬한 투쟁이 있었지만 정작 민주정치 체제의 본질과 정당성에 대한 고민에는 그만큼의 열정이 바쳐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날 폭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정치 체제로서 민주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비교적 잘 교육을 받았으나, 경제 체제인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해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질서가 가져오는 각종 이득은 향유하면서도 그 체제의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일반인이 제대로 교육받은 바가 거의 없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또한 상당수의 학생들은 그러한 질문을 왜 하는지 무척 의아해 한다.

    자유시장경제(自由市場經濟) 체제란 무엇인가?

    사실 경제학 교과서뿐만 아니라 한글 사전은 물론이고 국내의 경제학 대사전에도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실려 있지 않다. 예를 들어 한글학회가 펴낸 ‘우리말 큰사전’은 자본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자본주의란) 자본의 경제적 세력을 가지고, 또는 그 이득으로 인권·상권의 패권을 가지려는 주의, 곧 자본에 대한 이윤만을 유일의 목적으로 하는 경제적 활동 내지 경제 조직의 총괄적 표현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멸망을 예언한 카를 마르크스가 규정한 자본주의에 관한 정의인데, 아주 잘못된 정의라고 판단된다. 사전이 무릇 모든 설명이나 정의의 준거(準據)가 된다는 점에서 보면 이러한 잘못된 정의는 매우 심각한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정착·발전되기 어려울 것이다.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 체제는 사유재산 제도와 선택의 자유를 근간으로 각각의 경제 주체가 자기 책임하에 자유롭게 사익을 추구하게 하여 ‘어떤 재화를, 얼만큼, 누구를 위해, 어떻게, 언제, 어디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가’ 하는 기본적인 경제 문제를 정부 아닌 시장을 통해 해결함으로써 사회 구성원의 복지를 최대로 증진시키는 경제 체제이다.

    우리 국민은 경제에 관한 한 문맹이 많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정치가들을 포함해 국가 정책을 다루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의 상당수도 경제 문맹인이라는 점이다. 기본 개념을 잘 모르고 정확한 지식이 없이 경제 문제에 대해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한다.

    경제 문맹이 지배적인 상태에서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각자가 자신의 주장을 제약 없이 개진하고 그리고 투표로써 경제 정책을 결정할 때 그 결과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비극적 종말로 귀착된다.

    정치 논리 대 경제 논리

    오늘날 우리 경제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그 구조에 있다. 따라서 문제를 치유하기 위한 처방도 구조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경제 정책의 운용은 경제 이론이라는 과학을 근거로 한 하나의 정치적 예술이다. 과학적 요소와 예술적 요소가 잘 조화될 수 있을 때 경제 정책은 성공할 수 있으며 국민 복지 또한 증진될 수 있다.

    최근의 중요한 정책 결정을 살펴보면 정책 결정 과정에서 과학적 요소인 경제 논리는 뒷전으로 밀린 채 정치 논리가 경제정책을 지배하여 원하는 목적이 달성되지 않음은 물론 오히려 더 큰 부작용과 후유증만을 발생시키고 있다.

    경제 논리와 정치 논리는 그 궤를 달리한다. 경제는 자체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이를 무시한 정책을 펴면 경제는 경제대로 병만 들고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정치의 전당인 국회에서 정치 논리를 깡그리 무시하고 국정을 논하라고 요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 논리가 무시되고 정치 논리가 부각될 때 결국 정치 논리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시장경제와 경기 규칙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각종 혼란과 고통,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의 혼란과 고통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뒷받침하는 사회 질서, 즉 경기 규칙에 대해 정치가와 사회 구성원 모두의 이해가 부족하고 문제의 핵심을 고심해 보지 않은 데서 초래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자본주의의 경기 규칙을 무시하고 자본주의를 실행하려는 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는 말이다.

    우리 모두가 선진국 진입을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선진국 진입은 역사적으로 예외적인 사건이다. 지난 1세기 동안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나라는 일본과 아일랜드뿐이다. 남미의 몇 나라는 20세기 초에 미국·유럽에 견줄 수 있는 선진국이었으나 최근엔 중진국으로 후퇴했다.

    대다수 전문가가 우리의 선진국 진입이 시간의 문제이지 종국엔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현재와 같은 반(反)시장적 정책 기조·국론 분열·국제 사회에서의 고립·노사 관계의 불안·근로 의욕의 저하·저출생과 고령화·지구적 경쟁의 심화·안보 불안 등이 계속될 경우 선진국 진입은커녕 남미와 같이 추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많은 사람들, 특히 정치가와 관료들도 입으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신봉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과 정책은 아직은 거리가 멀다. 모든 것을 정부가 주도하는 정부 중심적인 경제운영 방식에 기본적으로 큰 변화가 없다. 심지어 민간에서도 ‘작은 정부’를 주장하다가도 어떤 문제에 가서는 정부에 의존하려는 경향도 자주 나타나고 있다.

    도대체 왜 우리는 누구나 구호로 내세우는 ‘시장경제’를 실천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체화되어 있는 뿌리 깊은 ‘형평’ 위주의 사고방식이 정치를 통하여 반(反)시장적 정책을 양산해 내는 데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을 짓누르고 ‘민족’ ‘평등’ ‘복지’라는 미명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교묘히 제한하면서도 자신들을 시장경제주의자라고 오도하는 사람들이 경제정책을 좌지우지하는 한 경제는 멍들 수밖에 없다.

    경제민주화의 오류

    최근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는 단연 경제민주화이다. 경제민주화는 말 그대로 경제의 민주화이고 이는 곧 경제의 정치화를 의미한다. 즉 경제민주화란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이 시장적 의사결정 과정을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가 경제를 다스린다는 것이 경제민주화의 본질이라면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정치와 경제의 각각의 본질이 무엇이고 그리고 정치와 경제가 어떻게 상호 연관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경제를 민주화하고 정치화하면 그 경제는 멍들어 쇠락한다. 이는 단순한 추측이 아니고 역사에서 증명된 사실이다. 경제의 민주화를 역사상 가장 완벽히 이룬 나라들이 옛 소련과 중국 그리고 현재의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다. 재벌도 없고, 노동자가 기업 운영, 아니 나라 운영의 핵심이고, 일감 몰아주기도 없고, 동반성장위원회도 필요 없고, 세금은 아예 없고, 대형마트의 영업시간 제한도 필요 없는 등 오늘날 경제민주화 주창자들이 내세우는 경제민주화가 완벽히 실현될 뻔했던 곳이 북한을 포함한 이들 사회주의 국가들이 아닌가.

    양립 불가능한 민주정치 체제와 자유시장경제 체제

    민주정치 체제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는 공통적으로 개인의 자유·책임·경쟁·참여·법치를 강조하는 자유주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병행 발전하는 속성이 일부 있다. 민주정치 체제는 정치권력의 남용을 차단함으로써, 그리고 자유로운 풍토를 조성함으로써 진정한 시장경제 체제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한다. 또한 시장경제 체제는 각자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정당한 보상을 받게 함으로써 민주정치 체제의 물적 기반을 제공하고 정치적 안정에 기여한다.

    그러나 민주정치 체제와 시장경제 체제는 근원적으로 출발에서부터 다르고 진행 과정과 지향 목표도 다르기 때문에 각각 분리하여 논의되어야지 ‘민주적 시장경제’나 ‘경제민주화’ 같이 혼합될 경우 개념이 혼돈스러워지고 이를 바탕으로 정책이 수립되는 경우 혼란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이는 어느 한 나라가 완벽한 민주정치 체제와 완벽한 시장경제 체제를 가지고 있더라도 본래 이질적(異質的)인 두 체제가 상충할 것이고 특히 경제정책을 두고는 양립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정치적 의사결정은 과오를 범하지 않는 전지전능한 주체에 의해 높은 곳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최근 화두로 등장한 경제민주화 논의 내용과 방법을 두고 진행되는 논의에서 갑론을박의 근원은 관련자 모두가 정치적 민주정치 체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본질 그리고 그 양자의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민주정치 체제의 경우 강제성이 항시 전제되나 시장경제 체제는 자발성이 근간을 이룬다. 선거를 통해 직접 결정되든 또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사람들의 합의에 의해 결정되든 민주정치 체제에서의 의사결정은 다수결로 이루어지며 이 과정에서 반대를 한 소수도 최종 결정이 이루어진 후에는 반드시 그 결정에 따라야 할 의무를 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강제성은 시장경제 체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경제 체제에서는 생산자든 소비자든 상대방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제공할 의사를 표명하고 상대방이 자신의 제의를 수용할 때에만 거래가 이루어진다. 어느 누구도 상대방에게 자신의 선택을 강요할 수 없다. 모든 거래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며 성사되는 거래의 경우는 항시 만장일치가 이루어진다.

    많은 사람이 정치적 민주정치 체제와 시장경제 체제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민주정치 체제와 시장경제 체제가 잘 조화되는 제도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는 앞서 간략히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이해와 인식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점에 있다. 참으로 잘못된 이해와 인식이 최근 대두된 경제민주화 등장의 배경이며 경제민주화 주창자들조차도 헷갈리고 소리만 요란하지 구체적 내용에 오면 전혀 새로운 것이 없는 이유이다.

    경제민주화를 놓고 일반 국민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우리 국민은 대체로 정치를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 혐오하는 지경이다. 우리 국민은 또한 정부의 무능력과 비효율을 한탄한다. 경제민주화는 경제에 대한 정치의 개입이고 정부에 의한 경제의 통제이다. 정치인들이 하는 대부분의 일에 전혀 신뢰를 보내지 않는 국민이, 정치인들이 경제에 개입하면 경제가 잘 되리라고는 어떻게 신뢰하는가. 정부의 무능력과 비능률을 한탄하는 국민이,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면 경제가 잘 되리라고 어떻게 기대하는가.

    국가 번영의 요체

    잘사는 국가 번창의 길을 놓고 선각자들이 내놓은 수많은 처방의 핵심은 ‘리더십(leadrship)’ ʻ제도(institution)’와 ʻ사상(ideology)’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한 나라의 장기적 번영을 결정하는 것은 그 나라의 천연자원도 아니고, 문화적 자산도 아니며 ʻ지도자와 제도와 이념ʼ에 있다. 훌륭한 제도와 이념의 핵심은 자유주의 정신과 자본주의 시장경제인데 우리의 경우 반(反)자유주의 정신이 풍미하고 있으며 반(反)자본주의적·반(反)시장적 정책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20세기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나라는 번영을 누리고 경제가 번창하는 데 반하여 한정된 이성과 이기주의적 편견의 소유자인 인간 또는 그 집단이 무제한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면 그 사회는 부패하고 경제는 쇠퇴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냉혹함에 대해 말이 많은데 그 이유는 자본주의가 모든 사람을 각자의 능력과 기여에 따라 달리 대우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많은 사람이 불행함을 느끼는 것은 자본주의가 각자에게 가장 바람직한 상황 또는 지위에 도달할 수 있는 기회는 예외 없이 부여하지만 그 상황 또는 지위에는 소수의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능력을 발휘하고 더 많은 재능을 가진 소수의 모습을 볼 때 다수는 자존심이 상하고 불평하게 마련이다.

    자유경제 체제에 벗어나는 특단의 조치만으로 크게는 경제 위기가 극복되고, 작게는 문제로 대두된 각각의 사안이 해결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어려운 국면이나 내용이라 하더라도 문제를 순리대로, 원칙에 따라, 원천적으로 풀어야지 충격요법으로, 대증요법(對症療法)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찾다 보면 모든 일을 정부가 해야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기 십상이다. 따라서 정부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살피고 이를 제대로 인식·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인·민간 또는 시장이 잘할 수 있는 일들에 정부가 개입하지 말아야 하며, 더더욱 국민 세금을 투입해 낭비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 경제적 번영을 보장하는 각종 제도를 확립·정착시키면서 정책의 내용을 제대로 만들어 필요조건을 충족시키고 정치적 지도력이 발휘되어 국민적 에너지가 결집되는 충분조건이 충족될 때 경제정책은 성공을 거두고 경제는 번창하게 된다.



    (1) 우상숭배의 죄

    남 유다가 망하기 직전 활동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우상숭배에 대하여 여러 차례 경고하였습니다(렘 1:16-17, 5:19, 13:10, 25:6-7, 44:5-6 등). 당시 유다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골몰하여, 그 섬긴 우상의 수가 그들이 거한 성읍의 수와 같을 정도였습니다(렘 2:28, 11:13).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오지병을 깨뜨리게 하심으로써, 우상숭배한 범죄의 대가로 이스라엘이 반드시 패망할 것을 경고하셨다(렘 19:1-15, 참고-렘 7:30-34)

    예레미야 16:11-13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열조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12 너희가 너희 열조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행하고 나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어

    너희와 너희 열조의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함이라 하셨다 하라” 


    유다의 심각한 우상숭배의 죄악을 깨우쳐 회개케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 말씀을 전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고 무시했으며(대하 36:14-16, 렘 7:25, 25:4, 26:5, 29:19, 35:15, 44:4),  하나님의 실존을 불신하면서 선지자들을 거짓 선지자로 매도하고 죽이는 데 앞장섰습니다(렘 5:12-13). 그리고 회개할 기회를 주어도 회개치 않았습니다(렘 19:1, 10-13).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 안에까지 우상을 갖다놓고 섬김으로써,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기 전 이미 그들 스스로가 성전을 더럽혔던 것입니다(렘 32:34, 겔 8:1-18, 22:4).

    (2) 안식일과 안식년을 이행하지 않은 죄

    1) 안식일의 불순종
    안식일 준수여부는 율법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을 나누는 기준이며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분기점입니다(렘 17:19-27). 이는 안식일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는 영원한 표징이기 때문입니다(출 31:13, 겔 20:12, 20).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겠다고 예레미야를 통해 엄중하게 경고하셨는데(렘 17: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키지 않음으로, 바벨론 포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에스겔 22:8 “너는 나의 성물들을 업신여겼으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으며”
    에스겔 22:26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변치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으로 분변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2) 안식년의 불순종
    안식년의 규례는 ‘제 7년에 땅을 쉬게 하라’는 것과 ‘동족 히브리 사람 종을 7년째 자유케 하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레 25:2-7, 신 15:12-18).

    ① 6년 동안 땅에 파종하고, 제 7년에는 그 땅을 쉬게 하라(출 23:10-11, 레 25:1-7, 26:34-35)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로는 7년째 되는 그 해에는 그 땅에 파종해서는 안되었으며(레 25:2-4), 스스로 난 곡물이나 열매라 할지라도 거두지 말고 땅이 안식하도록 해야 했습니다(레 25:5). 그리고 안식년을 지키면 제 6년에 3년 소출을 주심으로 제 7년 안식년 뿐만 아니라 제 8년과 제 9년 까지도 부족함이 없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레 25:21, 렘 25:22). 이로써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셨습니다(레 25:23).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욕심으로 인하여 제 7년에도 파종함으로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하심으로 땅이 안식하게 하셨던 것입니다(레 26:43).

    역대하 36: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② 종이 동족 히브리 사람이면 6년 동안 부리다가 7년째는 자유케 하라(출 21:2-6, 신 15:12-18)
    율법에는 히브리 종인 경우 종이 된 지 7년째 되는 해에 반드시 놓아 자유하게 하도록 규정했습니다(출 21:2, 신 15:12). 그리고 자유의 몸이 된 종을 빈손으로 보내서는 안되며(신 15:13-14), 노예의 몸값을 받지 않고 조건 없이 해방시켜 주도록 규정하였습니다(출 21:2, 신 15:18).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안식년의 규례를 어기고 종들의 자유를 빼앗았습니다(렘 34:8-14).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벨론에 끌려가게 하시어 그들도 자유를 빼앗기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34:1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열방 중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유다 백성은 무수한 죄 때문에 피 흘린 성읍이 되었고, 두껍게 녹슬어 버린 가마같이 되고 말았습니다(겔 24:6).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이라는 풀무 속에 집어넣고, 하나님의 노와 분을 쏟아서 유다의 죄악을 정결케 하셔야만 했습니다(렘 29:10-11, 겔 22:21-22, 24:12-14).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바벨론에 포로로 보내셨으나, 7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영적 암흑 상태로 방치해두지 않으시고 말씀을 보내어 철저하게 회개케 하시어 새로운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그들이 포로로 흩어진 상태에서도 하나님에 의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습니다(렘 29:11-14). 정복자 바벨론에게 복종하고 그 땅에서 적응하며 그 역경 속에서 회개하여 정결케 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정의와 구속 경륜을 확실히 깨닫고 믿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남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의 역사

    이스라엘은 북방 강대국 앗수르와 바벨론, 남방 강대국 애굽 사이에 낀 약소 국가였습니다. 남 유다의 제 16대 왕 요시야 당시는 세계 최강국이던 앗수르가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바벨론이 신흥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1. 므깃도 전투와 갈그미스 전투
    애굽은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갈그미스에서 바벨론과 싸우려고 하였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갈그미스로 가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과해야 했는데, 이때 반 앗수르 입장이었던 요시야 왕은 북진하는 애굽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며, 이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자신이 싸우려는 대상은 요시야 왕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대하 35:21). 그러나 요시야 왕은 듣지 않고 변장까지 하면서 전쟁터에 남기를 고집하였습니다(대하 35:21-22). 전쟁터에서 애굽의 궁수가 쏜 화살에 중상을 입은 요시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죽고 말았습니다(대하 35:23).

    요시야는 종교 개혁을 통해 영적 내리막길로 곤두박질하던 남 유다에 일시적으로나마 제동을 걸었지만, 요시야가 죽은 이후 남 유다의 국운이 갑자기 쇠약해지고 순식간에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애굽과 바벨론이 맞서는데, 이것이 갈그미스 전투(주전 605년)입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바벨론은 당시 근동 지방을 장악하였고, 애굽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왕하 24:7).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프리카 대륙과 근동 아시아 지역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남 유다 왕국마저 정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3차에 걸쳐 유다 왕과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3차에 걸친 바벨론 포로의 과정은 성전 파괴의 과정과 다름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들어서 가장 아끼는 성전을 파괴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징계하셨습니다(왕상 9:7-9).

    Tissot_The_Flight_of_the_Prisonersjpg

    Flight of The Prisoners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티소(James Tissot)가 그린

    불타는 예루살렘과성전, 그리고 바벨론 군대에 포로로 끌려가는 유다 백성들

    2. 바벨론 제 1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605년 / 여호야김 제 3(혹은 4)년, 느부갓네살 원년
    이때는 여호야김 왕 제 3년(단 1:1)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46:2은 이때를 여호야김 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기록에 1년 차이가 나는 이유는 열왕기하 23:34을 통해 해명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여호야김이 그의 동생 여호아하스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지 않고, 여호야김이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요시야(주전 640-609b년), 여호아하스(주전 609b-608년), 여호야김(주전 608-597년) 순으로 왕이 되었지만(왕하 23:3-0, 34, 대하 36:1-4), 요시야 다음에 바로 여호야김이 왕이 된 것처럼 기술한 것은, 3개월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악을 일삼았던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왕하 23:31-32).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제 1차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주전 605년은 여호야김 제 4년이 되는 것입니다.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제 1차 바벨론 포로 때에는 다니엘을 포함한 왕족과 귀족들이 끌려갔습니다(단 1:3). 여호야김은 처음 3년은 바벨론을 섬기다가 다시 애굽과 동맹하여 반(反)바벨론 정책을 펼쳤고(왕하 24:1), 주전 602년 쇠사슬로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성전 기구들을 약탈당하였습니다(왕하 24:2, 단 1:1-2, 5:2).

    3. 바벨론 제 2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97년 / 여호야긴 즉위년, 느부갓네살 8년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에 즉위하여 3개월 10일을 통치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8-12, 대하 36:9-10). 바벨론 역대기에 따르면, 티쉬리월(7월)로 시작되는 달력을 기준할 때 여호야긴이 왕이 딘 것은 주전 597년 불월(8월)이며, 3개월 10일이 지나 왕위에서 쫓겨난 것은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얼마 동안의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왕하 24:10-11)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에 이르러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한 것입니다. 이때 왕위에서 쫓겨난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 니산월(1월) 10일에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대하 36:10). * 남유다 통치 연도는 티쉬리월 기준이므로 해가 바뀌지 않음.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바벨론은 여호와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었으며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기명을 다 훼파하였습니다(왕하 24:10-13, 대하 36:10).
    그리고 여호야긴 왕과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의 권세 있는 자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12, 15). 이때 용사 7천 명을 포함하여 방백과 백성 총 1만명, 그리고 공장과 대장장이 1천 명이 끌려갔는데, 그들은 모두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였습니다(왕하 24:14-16). 반란의 구심점이 될 소지가 있는 최고 지도자들과 탁월한 인물들을 모두 뽑아서 끌고 감으로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도록 하여 남 유다를 철저히 무력화 시킨 것입니다. 여기에는 에스겔 선지자와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의 조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겔 1:1-3, 에 2:5-6).
     
    4. 바벨론 제 3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86년 / 시드기야 11년, 느부갓네살 19년
    시드기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권면(렘 27:12)을 듣지 않고 반(反)바벨론 정책을 고집하였고(왕하 24:20, 렘 27:12-13, 37:2), 바벨론은 시드기야 제 9년 10월 10일부터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왕하 25:1, 렘 39:1, 52:4). 시드기야가 애굽에 원군을 요청하여 바벨론 군대가 떠났다가 애굽 군대가 즉각 퇴각하자 다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렘 37:5, 11, 겔 17:15) 시드기야 11년까지 약 30개월 동안(티쉬리 기준 달력)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습니다(왕하 25:1-2, 대하 36:11-20, 렘 37:7-10, 겔 17:12-21). 마침내 주전 586년 시드기야 제 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왕하 25:1-3, 렘 39:1-2, 52:4-6).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는 동안 기근이 극심하여 자녀를 잡아먹을 정도로 비극적 참상이 빚어졌는데(애 2:20, 4:10, 사 9:20, 겔 5:10), 이는 모세의 예언대로(레 26:28-29, 신 28:53-57)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였습니다. 결국 BC 586년,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4월 9일은 유다인들에게 바벨론 유수 기간 내내 금식과 애통의 날로 지켜졌습니다(슥 7:5, 8:19).

    성이 함락되던 때 시드기야는 밤에 도망하다가 갈대아 군대에게 잡혀 하맛 땅 립나로 끌려가 바벨론 왕에게 신문을 당하였습니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목전에서 그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왕하 25:4-7, 렘 39:4-7, 52:7-11).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한 달 만인 5월 10일에 바벨론 시위대장관 느부사라단이 와서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사르고 사면 성벽을 헐었습니다(왕하 25:8-12, 대하 36:18-19, 렘 39:8-10, 52:12-16). 그리고 성전의 두 놋기둥(야긴과 보아스)과 받침들과 놋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또 가마들, 부삽들, 불집게들,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또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갔고,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들을 취하였습니다(왕하 25:13-17, 대하 36:18-19, 렘 52:17-23).

    그리고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전 문지기 세 사람을 잡고, 군사를 거느린 장관(내시) 하나와 왕의 시종 칠 인(혹은 다섯 사람)과 군대장관의 서기관 하나와 국민 육십 명을 잡아갔으며, 립나에서 그들을 쳐 죽였습니다(왕하 25:18-21, 렘 52:24-27).

    한편, 예레미야 52:28-30에는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다 소규모로 잡혀간 자들이 총 4,600명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로 끌려간 자와 고국 땅에 남겨진 자, 그리고 재난을 피하여 주변국으로 도망친 자 등으로 나뉘어, 민족 전체가 갈기갈기 찢기고 그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최악의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선민 유다 백성이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최대의 비극이요 수치였습니다. 이는 우상을 숭배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거룩하신 뜻을 멸시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의 표현이었습니다(대하 36:21, 참고-렘 34:8-16). 

    그러나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만 같던 바벨론이 하나님의 주권 역사로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하시고(참고-렘 50:3, 9, 41-46장, 51장) 이스라엘 백성이 귀환하도록 하셨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남유다의 멸망과 바벨론의 1차 2차 3차 4차 포로의 역사

    ​이스라엘(남 유다)은 북쪽에는 앗수르와 바벨론이 진을 치고 있었고 남쪽에는 애굽이 진을 치고 있는 강대국의 틈새에 끼어 있는 약소국가이었습니다.

    남 유다의 제16대 왕 요시야 당시는 세계 최강국이던 앗수르가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바벨론이 신흥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1. 므깃도 전투와 갈그미스 전투

    애굽은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갈그미스에서 바벨론과 싸우려고 하였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갈그미스로 가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과해야 했는데, 이때 반 앗수르 입장이었던 요시야 왕은 북진하는 애굽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며, 이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자신이 싸우려는 대상은 요시야 왕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대하 35:21). 그러나 요시야 왕은 듣지 않고 변장까지 하면서 전쟁터에 남기를 고집하였습니다(대하 35:21-22). 전쟁터에서 애굽의 궁수가 쏜 화살에 중상을 입은 요시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죽고 말았습니다(대하 35:23).

    요시야는 종교 개혁을 통해 영적 내리막길로 곤두박질하던 남 유다에 일시적으로나마 제동을 걸었지만, 요시야가 죽은 이후 남 유다의 국운이 갑자기 쇠약해지고 순식간에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애굽과 바벨론이 맞서는데, 이것이 갈그미스 전투(주전 605년)입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바벨론은 당시 근동 지방을 장악하였고, 애굽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왕하 24:7).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프리카 대륙과 근동 아시아 지역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남 유다 왕국마저 정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3차에 걸쳐 유다 왕과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3차에 걸친 바벨론 포로의 과정은 성전 파괴의 과정과 다름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들어서 가장 아끼는 성전을 파괴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징계하셨습니다(왕상 9:7-9).

    Flight of The Prisoners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티소(James Tissot)가 그린

    불타는 예루살렘과성전, 그리고 바벨론 군대에 포로로 끌려가는 유다 백성들

    2. 바벨론 제 1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605년 / 여호야김 제 3(혹은 4)년, 느부갓네살 원년

    이때는 여호야김 왕 제 3년(단 1:1)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46:2은 이때를 여호야김 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기록에 1년 차이가 나는 이유는 열왕기하 23:34을 통해 해명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여호야김이 그의 동생 여호아하스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지 않고, 여호야김이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요시야(주전 640-609b년), 여호아하스(주전 609b-608년), 여호야김(주전 608-597년) 순으로 왕이 되었지만(왕하 23:3-0, 34, 대하 36:1-4), 요시야 다음에 바로 여호야김이 왕이 된 것처럼 기술한 것은, 3개월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악을 일삼았던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왕하 23:31-32).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제 1차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주전 605년은 여호야김 제 4년이 되는 것입니다.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제 1차 바벨론 포로 때에는 다니엘을 포함한 왕족과 귀족들이 끌려갔습니다(단 1:3). 여호야김은 처음 3년은 바벨론을 섬기다가 다시 애굽과 동맹하여 반(反)바벨론 정책을 펼쳤고(왕하 24:1), 주전 602년 쇠사슬로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성전 기구들을 약탈당하였습니다(왕하 24:2, 단 1:1-2, 5:2).

    3. 바벨론 제 2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97년 / 여호야긴 즉위년, 느부갓네살 8년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에 즉위하여 3개월 10일을 통치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8-12, 대하 36:9-10). 바벨론 역대기에 따르면, 티쉬리월(7월)로 시작되는 달력을 기준할 때 여호야긴이 왕이 딘 것은 주전 597년 불월(8월)이며, 3개월 10일이 지나 왕위에서 쫓겨난 것은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얼마 동안의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왕하 24:10-11)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에 이르러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한 것입니다. 이때 왕위에서 쫓겨난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 니산월(1월) 10일에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대하 36:10). * 남유다 통치 연도는 티쉬리월 기준이므로 해가 바뀌지 않음.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바벨론은 여호와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었으며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기명을 다 훼파하였습니다(왕하 24:10-13, 대하 36:10).

    그리고 여호야긴 왕과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의 권세 있는 자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12, 15). 이때 용사 7천 명을 포함하여 방백과 백성 총 1만명, 그리고 공장과 대장장이 1천 명이 끌려갔는데, 그들은 모두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였습니다(왕하 24:14-16). 반란의 구심점이 될 소지가 있는 최고 지도자들과 탁월한 인물들을 모두 뽑아서 끌고 감으로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도록 하여 남 유다를 철저히 무력화 시킨 것입니다. 여기에는 에스겔 선지자와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의 조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겔 1:1-3, 에 2:5-6).

    4. 바벨론 제 3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86년 / 시드기야 11년, 느부갓네살 19년

    시드기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권면(렘 27:12)을 듣지 않고 반(反)바벨론 정책을 고집하였고(왕하 24:20, 렘 27:12-13, 37:2), 바벨론은 시드기야 제 9년 10월 10일부터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왕하 25:1, 렘 39:1, 52:4). 시드기야가 애굽에 원군을 요청하여 바벨론 군대가 떠났다가 애굽 군대가 즉각 퇴각하자 다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렘 37:5, 11, 겔 17:15) 시드기야 11년까지 약 30개월 동안(티쉬리 기준 달력)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습니다(왕하 25:1-2, 대하 36:11-20, 렘 37:7-10, 겔 17:12-21). 마침내 주전 586년 시드기야 제 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왕하 25:1-3, 렘 39:1-2, 52:4-6).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는 동안 기근이 극심하여 자녀를 잡아먹을 정도로 비극적 참상이 빚어졌는데(애 2:20, 4:10, 사 9:20, 겔 5:10), 이는 모세의 예언대로(레 26:28-29, 신 28:53-57)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였습니다. 결국 BC 586년,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4월 9일은 유다인들에게 바벨론 유수 기간 내내 금식과 애통의 날로 지켜졌습니다(슥 7:5, 8:19).

    성이 함락되던 때 시드기야는 밤에 도망하다가 갈대아 군대에게 잡혀 하맛 땅 립나로 끌려가 바벨론 왕에게 신문을 당하였습니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목전에서 그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왕하 25:4-7, 렘 39:4-7, 52:7-11).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한 달 만인 5월 10일에 바벨론 시위대장관 느부사라단이 와서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사르고 사면 성벽을 헐었습니다(왕하 25:8-12, 대하 36:18-19, 렘 39:8-10, 52:12-16). 그리고 성전의 두 놋기둥(야긴과 보아스)과 받침들과 놋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또 가마들, 부삽들, 불집게들,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또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갔고,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들을 취하였습니다(왕하 25:13-17, 대하 36:18-19, 렘 52:17-23).

    그리고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전 문지기 세 사람을 잡고, 군사를 거느린 장관(내시) 하나와 왕의 시종 칠 인(혹은 다섯 사람)과 군대장관의 서기관 하나와 국민 육십 명을 잡아갔으며, 립나에서 그들을 쳐 죽였습니다(왕하 25:18-21, 렘 52:24-27).

    한편, 예레미야 52:28-30에는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다 소규모로 잡혀간 자들이 총 4,600명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로 끌려간 자와 고국 땅에 남겨진 자, 그리고 재난을 피하여 주변국으로 도망친 자 등으로 나뉘어, 민족 전체가 갈기갈기 찢기고 그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최악의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선민 유다 백성이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최대의 비극이요 수치였습니다. 이는 우상을 숭배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거룩하신 뜻을 멸시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의 표현이었습니다(대하 36:21, 참고-렘 34:8-16).

    그러나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만 같던 바벨론이 하나님의 주권 역사로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하시고(참고-렘 50:3, 9, 41-46장, 51장) 이스라엘 백성이 귀환하도록 하셨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예레미야 선지자 - 눈물의 선지자

    1. 인적 사항

    ①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세우시다’라는 뜻.
    ② 제사장 아비아달의 후손으로 추정됨(왕상 2:26).
    ③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베냐민 땅 아나돗에서 출생(렘 1:1).
    ④ 남 유다 요시야 왕 제13년 곧 B.C.627년부터 예루살렘 멸망(B.C.586년)
        이후 유다 남은 백성들이 애굽에 이주하여 정착할 때인 B.C.580년까지 약 50여 년 동안 사역함.
    ⑤ 선민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많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 까닭에 소위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림.
    ⑥ 유대 전승에 의하면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말년에 애굽에 끌려가(렘 43:5-7)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함. 

    2. 시대적 배경

    예레미야 사역 초기 국제 정세는 갈대아와 앗수르가 세력 다툼을 하느라고 남 유다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유다로서는 다소 평화로운 상태였다.
    또한 내적으로는 善王(요시야)이 등극하여 성전을 정결케 하고 우상을 제거하는 등 내실을 다지던(건축)시기였다.
    그러나 B.C.609년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애굽 왕 느고(Neco, B.C.610-595년)와 싸우다가 전사(대하 35:20-24)한 뒤로 하나님이 아닌 애굽을 의지 대상으로 삼은 이후 왕들의 악행과 失政이 계속됨에 따라 유다는 급속히 쇠퇴의 길로 치달았다.
    그리하여 유다는 B.C.605년 바벨론에 의해 첫 침공을 당하여 복속된 이래 B.C.597년과 B.C.586년 거듭해서 침공을 당함으로써 마침내 멸망하고 만다.
    이렇게 볼 때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이 시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참혹하고도 광범위하게 시련을 당한 비운의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에레미야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해서는 예레미야 서론을 참조하라.

    3. 주요 생애

    요시야 통치 시기

    출생

    B.C. 647 년경

    선지자로 소명 받음

    B.C. 627 년

    렘 1:4,5

    요시야와 함께 종교 개혁 단행

    B.C. 627-609 년

    렘 11:1-8

    여호야김 통치 시기

    여호야김의 행악을 규탄함

    B.C. 609-597 년

    렘 22:18,19

    예루살렘 멸망 예언

    렘 25:1-38

    시드기야의 통치 시기

    바벨론에 무조건 항복을 주장함

    B.C. 597-586 년

    렘 38:14,17,18

    바벨론 포로 및 귀환 예언

    렘 32:1-44

    반역죄로 고발당해 옥에 갇힘

    B.C. 587 년

    렘 37:4-15

    석방되어 시위대 뜰에 거함

    렘 37:16-21

    진흙 구덩이에 던져짐

    렘 38:1-6

    에벳멜렉의 상소로 구출됨

    렘 38:7-13

    예루살렘 멸망 및 시드기야와 유다인들의 포로됨

    B.C. 586 년

    렘 52:4-34

    전쟁 와중에도 안전하게 보호를 받음

    렘 39:11-14

    죽음

    B.C. 580 년경

    4. 성품

    ① ‘눈물의 선지자’로 불릴 만큼 천성적으로 동정심이 많고 온유한 자(렘 9:1).
    ② 백성들의 박해로 인해 자신의 선지자직에 대해 수없이 갈등과 회의를 거듭한 내성적 성품의 소유자(렘 20:7-10).
    ③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전할 때에 사정없이 외치는 강인한 성품의 소유자.
    ④ 몇 차례에 걸친 투옥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주의 말씀을 전한 것으로 볼 때 소명 의식이 투철하고 인내심이 강한 자(렘 20:1-3; 37:13-15; 38:4-18).

    ​5. 구속사적 지위

    ① 구약 선민의 후손 유다의 패역함을 깨우치기 위해 소명 받은 선지자(렘 3:11-22).
    ② 유다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대언자임과 동시에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여 하나님과 화목을 꾀하는 중보자적 역할을 감당한 자(렘 15:19).
    ③ 출생 전부터 하나님의 전적인 의지와 은혜로 인해 선택된 자(렘 1:5).
    ④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물론 심지어 가족들에 의해서 조차 배척받고 핍박당한 그의 생애는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고도 동족인 유대인들에 의해 핍박을 받고 끝내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생애를 예표함(렘 11:21-23; 26:6-9).

    ​6. 평가 및 교훈

    ① 예레미야는 원래 내성적이고 나약한 인물이었지만(1:6절)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실 때에는 늘 힘있고 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의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은 자신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너무 나약하고 초라하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인간적인 나약함이나 부족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전혀 결격 사유가 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강하고 능력 있는 자를 부르셔서 그들의 강한 것에 의지해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연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택하셔서 소명과 함께 그것을 능히 감당할 힘도 함께 주심으로 스스로 힘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시다(고전 1:27-29). 그런즉 사명을 맡은 성도들은 인간적 재능을 갈고 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② 예레미야가 극심한 박해로 인해 사명을 포기하고픈 지경에까지 이르렀듯이 오늘날의 사역자들도 여러 가지 모양의 고난과 고통으로 인해 사역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이는 사역자들이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장애물들로 이런 때일수록 더욱 마음을 가다듬고 장차 있을 상급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곁길로 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낙심과 절망 중에도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끝까지 바르게 선포한 예레미야와 같이 실로 끝까지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렘 17:5-8).

    ③ 바벨론에 투항하라는 반민족적 언사 때문에 예레미야는 동족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해야했다. 그러나 이는 예레미야가 자기 민족을 사랑하지 않거나 세계정세에 대한 기회주의적 외교를 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대한 그의 깨달음에 의한 것이었다(렘18:6).

    오늘날의 성도들도 많은 사람으로부터 동의를 얻지 못할 뿐더러 도리어 조롱과 비웃음의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이 지시하시는 바를 반드시 선포해야할 의무가 있다.

    ④ 예레미야는 유다의 암담한 미래를 예언함과 동시에 회복의 소망도 외쳤다. 이는 여호와 신앙에 있어서 믿음이나 사랑만큼 소망의 중요성도 가르쳐 주는 교훈으로 제시된다. 극도의 황금만능 사상과 비윤리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오늘날, 사회의 사방에서 들려오는 암울한 상황과 암담한 현실 속에서 막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도된 우리는 복음을 높이 들어 어두운 곳에 소망의 빛을 비추어야 하겠다.

    7. 핵심 성구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렘 1:10).





    이스라엘의 멸망

    1. 北이스라엘의 멸망과 처참한 운명의 유다.

    이스라엘이 南北으로 나뉘어 혼란 속에 빠져 있을 때,
           티그리스강 상류의 동쪽 연안지대에서는 초강대국 앗시리아 제국이 건설되고 있었다.
    앗시리아 제국의 팔레스타인 침공은 기원전 1,100년에서 633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하여,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앗시리아 제국은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에 대하여 여러 번에 걸쳐 공격을 하였다.
    이 와중에 北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는 앗시리아의 3년에 걸친
                    공격 끝에 침략자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기원전 722년).
    이렇게 북이스라엘의 역사는 끝나고 말았다.
    멸망한 북이스라엘에는 異民族이 옮겨와 살았고, 앗시리아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격동 속에서 유다의 운명은 어찌되었을까?
    ①앗시리아가 활동할 당시 남유다의 왕은 히스기야였다.
        그는 다른 왕들처럼 바알 神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을 섬겼다.
    ②이에 히스기야왕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앗시리아의 엄청난 공격을 막아내고 승리하게 된다.
    ③때문에 유다는 북이스라엘처럼 앗시리아에 멸망당하지 않고 살아남게 되었다.

    그러나 정세의 변화는 어지러웠고,
                기원전 650년경에는 그때까지 앗시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바빌로니아가 점점 세력을 키워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게 된다.

    과연 바빌로니아 제국의 등장은 유다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당시 주변 정세를 살펴보면,
    ①신흫 바빌로니아 제국의 등장으로 앗시리아의 세력이 쇠퇴하자,
    ②그것을 두려워한 이집트가 바빌로니아에 대항하여 앗시리아와 동맹을 하게 된다.
    ③이 사이에 낀 유다 왕국은 복잡한 정치적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집트와 동맹하여 바빌로니아에 대항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바빌로니아와 화해하여 대국 이집트에 대적할 것인가?
        유다는 왕국의 존립을 놓고 일생일대의 선택을 해야만 하였다.
        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의 처참한 운명이었다.
     
    2. 예언자 예레미야의 등장
     
    이러한 혼란 속에서 홀연히 나타나 절망을 누르고
                고난의 길을 걸은 예언자가 있었는데, 바로 유다 왕국의 예레미야였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근교의 제사장 집안에서 태어나
                       생애의 대부분을 예루살렘에서 보냈다.
    ①이집트일까 아니면 바빌로니아일까라는 선택 속에서,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재위605-562)이
                  유다 왕국을 위하여 하느님이 사용할 왕이라고 예언하고,
                  이집트와 동맹을 맺는 것을 반대했다.
    ②그러나 그의 이런 주장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커다란 반감을 샀다.
     ③결국 예레미야는 배신자로 고발당하고 지하의 흙탕물에 잠기게 된다.
    ④기원전 605년, 드디어 대국끼리의 격돌이 현실로 나타났다.
        바빌로니아왕 느부갓네살과 이집트 느고왕이 격돌하는데,
                   이것이 유프라테스강 주변에서 발생한 카르케미쉬 전투이다.
        결과는 느부갓네살왕의 승리로 끝난다.
    ⑤바빌로니아 군대는 지중해의 해안을 따라 평야 쪽으로 침공해 왔다.
        모든 것이 예레미야의 예언대로였던 것이다.

    3. 南유다도 멸망

    ①유다 왕국의 여호야킴왕 시대에 바빌로니아가 침공하자
               여호야킴은 항복하고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한다.
    ②그런데 정세가 다시 변하게 된다.
        이집트 느고왕이 세력을 회복하여 바빌로니아를 내쫒게 된다.
        이제 또 다시 유다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③지금이야말로 바빌로니아의 지배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절호의 기회였다.
        유다의 여호야킴왕은 상황을 뒤집고 이집트의 느고왕에게 붙었다.
    ④그러나 이를 어쩌라! 여호야킴왕의 판단은 결국
                   유다 왕국이 바빌로니아로부터 침략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드디어 태세를 재정비한 느부갓네살왕은 반역을 이유로
                   즉시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점령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예루살렘의 군사와 목공과 철공 등 1만여 명이 체포되어
                            바빌로니아로 끌려가게 된다.
    ⑤이때 유다는 간신히 독립왕국의 체면을 지키는 것을 인정받게 되는데,
                이는 느부갓네살왕의 특별한 처분에 의한 것이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그대로 적중한 셈이다.
    ⑥이때 유다 왕국은 여호야킴왕으로부터 시드키야왕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시기였다.
        새롭게 왕이 된 시드키야는 이러한 굴욕을 참아내지 못하고 이집트와 동맹을 맺게 된다.
    ⑦이에 느부갓네살왕의 노여움이 폭발하여  바빌로니아 大군단이 예루살렘을 침공하게 된다.
        양국간의 격렬한 공방은 약 2년간 계속되었고,
                       유다 군대는 모두 힘을 다 쏟아 부었지만,결국 예루살렘은 함락당하고 만다.

    ⑧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지고, 거리는 일순간에 비탄에 잠기게 되었다.
        약탈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병사들은 체포되어 쇠사슬에 묶여
                    바빌로니아로 연행되어 갔다.
       이때 연행되어진 병사가 1-2만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제2차 바빌론 유배’이다.
    ⑨열왕기에서 제2차 바빌론 유배에 대해 ‘이제 남아 있는 것은
                   포도를 만드는 자와 농부뿐이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⑩이제 남유다도 멸망하여 이스라엘은 완전히 역사의 뒷무대로 사라지고,
         또한 번성하였던 바빌로니아 제국도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유, 당시 국제적 정세를 바탕으로


    열왕기하 17장 당시의 국제정세와 북이스라엘의 상황

    열왕기하 17장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다루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당시 고대근동의 복잡한 국제 정세와 정치적 상황이 깊이 얽혀 있습니다. 호세아 왕이 애굽에 도움을 요청하고 앗수르와 갈등을 빚게 된 사건은 단순한 정치적 실수가 아니라, 당대 강대국들 간의 힘의 균형과 북이스라엘 내부의 분열된 정치 세력 간의 갈등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당시 고대근동의 주요 강대국들, 북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 그리고 호세아가 취한 외교적 선택의 결과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고대근동의 국제 정세: 앗수르와 애굽의 패권 경쟁

    기원전 8세기 후반은 앗수르 제국이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부상하던 시기였습니다. 디글랏빌레셀 3세(Tiglath-Pileser III, 재위 기원전 745-727년)의 군사적 개혁과 정복 전쟁으로 앗수르는 주변 국가들을 속국으로 만들고 조공을 통해 지배력을 확대했습니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과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은 앗수르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이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앗수르는 애굽과의 무역로와 군사적 요충지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애굽은 한때 중동 지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기원전 8세기에는 앗수르에 비해 국력이 쇠퇴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애굽은 리비아 출신 왕조인 제22왕조와 제23왕조로 나뉘어 있었고, 내부 분열로 인해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은 여전히 팔레스타인 지역의 국가들에게 하나의 대안적 세력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시리아 등 일부 국가들은 앗수르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굽과 동맹을 맺으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2. 북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 친앗수르파와 친애굽파의 갈등

    북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전 왕들인 예후와 여로보암 2세 시기에 잠시 번영을 누리기도 했으나, 그 이후 왕권이 약화되고 연이은 왕위 찬탈과 반란으로 인해 혼란이 지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북이스라엘 내부에는 두 가지 주요 정치 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1. 친앗수르파:
      이들은 앗수르의 군사적 우위를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며 평화를 유지하자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들은 앗수르와의 전쟁이 국가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을 우려하며, 외교적으로 앗수르에 굴복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친앗수르파는 정치적 안정을 통해 국내의 경제와 군사력을 보존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2. 친애굽파:
      이들은 앗수르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굽과의 동맹을 추진했습니다. 이들은 애굽이 여전히 강대국으로서 앗수르에 대항할 능력이 있다고 믿었으며, 애굽과 협력하여 앗수르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은 당시 내부적으로 분열된 상황이었고, 북이스라엘에 실질적인 군사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호세아는 이러한 갈등 속에서 초기에는 친앗수르파의 입장을 따랐으나, 점차 친애굽파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앗수르에 조공을 끊고 애굽 왕 소(So)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외교적 결정을 내렸습니다(열왕기하 17:4). 그러나 애굽은 실질적인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북이스라엘은 고립된 상태에서 앗수르의 침략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3. 앗수르의 대응과 사마리아 포위전

    앗수르는 호세아의 반란을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즉각적으로 대응했습니다. 앗수르 왕 살만에셀 5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사마리아를 포위했습니다. 이 포위전은 약 3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앗수르는 철저한 봉쇄 전략을 통해 사마리아의 외부 지원을 차단하고 내부를 고갈시켰습니다. 사마리아 주민들은 기근과 내부 혼란에 시달리며 점차 저항력을 잃어갔습니다.

    사마리아가 함락된 후,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앗수르는 점령지의 민족들을 분산시키는 정책을 통해 반란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이스라엘 지역에 여러 이방 민족들을 이주시켰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4. 애굽의 소극적 대응

    애굽은 호세아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당시 애굽이 앗수르와의 전면전을 회피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애굽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국가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으나, 앗수르와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며 자신들의 국익을 우선시했습니다. 이로 인해 호세아의 기대는 무너졌고, 이스라엘은 외교적 고립 상태에서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5.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유와 이후의 상황

    열왕기 기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을 단순한 외교적 실패나 군사적 패배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명확하게 이스라엘의 멸망을 그들의 죄악과 하나님의 언약 파기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율법을 무시하고, 주변 이방 민족들의 우상 숭배 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열왕기하 17:7-12). 그들은 바알과 같은 이방 신들을 섬기고, 산당과 목상을 세우며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어 경고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선지자들의 음성을 무시하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17:13-14).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들의 죄악으로부터 돌이키기 위해 심판을 내리셨고, 결국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이를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함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기록하며, 이스라엘이 언약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해 멸망하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앗수르는 정복된 지역을 재편성하기 위해 이방 민족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땅에는 혼합된 민족과 종교가 형성되었고, 이는 나중에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갈등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또한,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남유다에게도 큰 경고가 되었습니다. 남유다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결과를 목격하였으나, 이후에도 우상 숭배와 불순종의 길을 계속 걷게 됩니다.

    결론

    열왕기하 17장에 나타난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단순히 한 국가의 멸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이 이루어진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고대근동의 국제정세 속에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전략적 결정을 내렸으나, 인간적인 방법에 의존한 선택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고를 주시고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시지만, 끝내 그분의 뜻을 무시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역대상 5장 요약

    르우벤 자손의 이름과 그들이 살았던 지역,갓 자손의 지역과 그들의 후손과 그 이름,동쪽 지파의 군대 규모와 그들이 탈취한 재산, 므낫세 반지파의 영역과 자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잇습니다.
    동쪽지파 사람들이 범죄함으로 앗수르에 의하여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여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6장 요약

    레위의 자손과 대제사장 아론 자손의 이름, 레위의 세 아들 게르손,고핫,므리리의 자손과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임명한 찬송하는 직분을 맡은 자들의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론의 자손들과 그 자손들이 했던 일,아론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으로부터 받은 정착지와 목초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7장 요약

    잇사갈,베냐민의 자손들과 그들의 군대 규모,납달리와 므낫세 자손들의 이름,에브라임 자손들의 이름과 그들이 살던 지역,아셀의 아들들과 그들의 군대 규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8장 요약

    베냐민 자손들과 그들의 이름,기브온의 조상 여이엘과 그의 자손,사울왕의 가계와 그들의 이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5월 3일(토) 역대상 5-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장자의 명분(5:1)

  •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 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찌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 The sons of Reuben the firstborn of Israel (he was the firstborn, but when he defiled his father's marriage bed, his rights as firstborn were given to the sons of Joseph son of Israel; so he could not be listed in the genealogical record in accordance with his birthright,
  • and though Judah was the strongest of his brothers and a ruler came from him, the rights of the firstborn belonged to Joseph)
  • 장자의 명분(the rights of the firstborn) 8구절(구약 7, 신약 1)
    창세기 25:31, 32, 33, 34, 27:36. 역대하 5:1, 2. 히브리서 12:16

    장자의 명분은 장자의 축복권을 말합니다(베코라)

    장자의 명분(베코라. bekôwrâh) בְּכוֹרָה
    스트롱번호 1062

    1. 초태생.  2. 느 10:37. 3. 창 4:4
    발음 [ bekôwrâh ]
    구약 성경 / 7회 사용
    관련 성경 / 첫 새끼(창 4:4), 장자의 명분(창 25:31, 27:36, 대상 5:1), 처음 난 것(신 12:17, 14:23, 느 10:36).
    히브리서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프로토토키아(prōtŏtŏkia) πρωτοτόκια, ων, τά  스트롱번호 4415
    1. 장자권.   2. 장자의 권리.  3. 히 12:16.
    발음 [ prōtŏtŏkia ]
    어원  /  4416에서 유래

    πρωτότοκος, ον 스트롱번호 4416
    1. 처음 난.   2. 마 1:25. 3. 롬 8:29
    발음 [ prōtŏtŏkŏs ]
    어원  /  4413과 5088의 대체어에서 유래
    • I. 처음 난.
      • 1. [문자적으로] 마1:25, 눅2:7, 히11:28.
      • 2. [비유적으로]
        • a. [그리스도] 롬8:29, 골1:18, 히1:6, 계1:5.
        • b. [사람에 대해서] 히12:23.
    • 관련 성경  /  맏(롬8:29, 히1:6), 먼저 나신(골1:15), 장자(히11:28, 12:23).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 영(로마서 8:1-28)

    로마서 7장에서는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남편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율법이라는 옛 남편에서 벗어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남편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이라는 옛 남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 남편을 만나야 의롭다하심을 얻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얻는 것도 새 남편인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요, 예수를 믿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도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할 때 가능합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고, 역시 은혜로 거룩함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과정뿐 아니라 성화의 과정에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겁니다.

    7장에 이어지는 오늘 본문 8장에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살펴봅니다.

    I. 성령

    먼저 본문에서 소개하는 성령님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 그리스도의 영 (9), 하나님의 영(9)

    9절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 혹은 ‘하나님의 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하십니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꼭 집어 소개한 것은 초대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아닌 ‘다른 영’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1서 4장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1-3)라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서 ‘다른 예수’와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권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아닌 다른 영을 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영지주의라고 하는 이단이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다른 영, 적그리스도의 영을 전했습니다.
    오늘날엔 알파코스, 신사도운동, 관상기도와 같은 영성 프로그램들을 통해 다른 영들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영적인 역사가 나타난다고 이를 다 믿지 말고 이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그리스도의 영” 또는 “하나님의 영”이라고 부른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주요한 사역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야 그리스도를 알 수 있고, “진리의 영”(요 16:13)을 받아야 진리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를 아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9)인 것입니다.

    2. 양자의 영 (15)

    15절부터는 성령을 “양자의 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15) 하십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아직도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면 ‘종의 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겁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항상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몰아갑니다.
    “이것저것을 행하고 지키지 않으면 지옥 간다.”라고 끊임없이 위협하고 협박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만족시킬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는 항상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종노릇하는 ‘종의 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a. 하지만 율법주의라고 하는 ‘종의 영’이 아닌,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 (15)

    “아바 아버지”라 할 때, “아바”는 “아빠”라는 뜻입니다.
    어린 아이가 처음 말을 배우면서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아바”입니다.
    율법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경건한 행위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친근히 부르며 또 그렇게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아빠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 말씀을 묵상하면 사랑하는 자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이 양자의 영을 받은 성도들을 이와 같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b. 양자의 영을 받으면,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의 자격을 얻게 됩니다.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하십니다.

    ‘후사’란 상속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기 위해서는 주님과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17)하십니다.

    예수님도 친히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제자의 길은 고난의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18)하십니다.
    양자의 영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된 후사”로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II. 성령의 역할

    이제는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요, 양자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일들을 살펴봅니다.

    1.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신다. (2) 하십니다.

    지난 시간에도 살펴본 것처럼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십니다.
    본문에서 율법을 ‘죄와 사망의 법’으로 묘사한 것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은 결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새 생명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겁니다.

    2. 우리를 인도하신다. (14, 28) 하십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하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수님의 약속을 붙들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이 ‘성령 충만’(행 2:4)을 받았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령 충만(filled with the Holy Spirit)이 무엇일까요 ? 어떤 신학자는 ‘성령 충만’을 ‘성령에 붙들리는 삶’으로 표현합니다. 성령에 붙들려 성령의 인도하시는 데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이라는 겁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한 뒤, 스데반 집사는 성령에 붙들려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빌립 집사는 성령에 붙들려 광야로 나갔다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행 8:26,27) 사도 바울도 본래는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할 계획을 세웠지만, 성령께서 막으시자 드로아 지방으로 내려가 기도하다가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행 16:10) 유럽으로 발걸음을 돌려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고린도, 에베소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14)이라 하십니다. 내 욕심과 생각이 아니라, 날마다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는 자가 곧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과연 어떤 길로 인도하시는 것일까요? 28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하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하심은 과정 속에는 어려움이 있어도 그 결과를 아름답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사서 애굽 땅으로 팔려가 억울한 종살이 옥살이를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사건들을 통해 요셉은 바로 왕 앞에 설 수 있게 되었고, 바로왕의 꿈을 해석해 줌으로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요셉은 훗날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한 형제들을 만나 그가 꾸었던 꿈처럼 형제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요셉의 실패와 고난도 합력하여 하나님의 더 큰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삶에도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자들은 언제나 그 결과를 좋게 하시는 즉,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3.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26) 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소개한 성령님의 또 다른 이름 ‘보혜사’(파라클레토스, 요 15:26)는 “옆에 서서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Counselor(NIV), Comforter(KJV) 혹은 Helper(NASB)라고 번역해놓았습니다.
    상담자, 위로자,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온전한 믿음 생활을 할 수 없음을 아셨기에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하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믿음을 지키고 사명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데,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신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하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고, 또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생각과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27) 기도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모든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으로 구하는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을 근심케 만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 응답 받는 바른 기도를 드리려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III. 결론(結論)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요 양자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시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이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날마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고” (13), “육신의 생각이 아니라 영의 생각을 좇으며”(6) 육체의 소욕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3,14절)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영(로마서 8:9)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5)

    예배당에 다닌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학습받고 세례받았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집사 되고 장로 되고 신학하고 목사 되었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찾는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란 말이다.
    그럼 누가 그리스도인일까?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은 어떤 것인가?

    1.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초월하신 성부께서 육체를 입으신 제한 있는 그리스도로 나타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신 후에 다시 부활하사 승천하시고 성령으로 오시어 "내가 세상 끝날까지 같이 하겠다"고 하시고, 너희는 내 안에 있으라 나도 너희 안에 있으리란 약속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영이시다.

    하나님은 예수를 세우사 우리의 지혜와 의(義)와 성결과 구속이 되시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성결할 수 있는가? 성결의 주님께서 나의 중심에 오시어 나의 죄악을 정결케 하시고 그의 성결을 주시는 것이다.
    그의 보혈로 정케 하시고 말씀으로 깨끗케 하시고 불로 사르시는 것이다.

    또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연단 시키어 정화시킨다(단 12:10 ; 히 12:10)

    나의 전무를 그에게 바치면 그가 다 해주시는 것이다.

    내가 애쓰는 것 주께 맡기고 감정을 억제하고 말씀에 서면 불완전한 구원 완전해지고 내가 붙잡았던 것 그가 붙들어 주실 것이다.

    2. 유화의 영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 너의 마음이 평안히 쉼을 얻으리라.
    예수가 있는 심령은 온유하고 겸손하다.
    솜과 같이 부드럽고 고기같이 부드럽다.
    어떤 사람의 마음은 돌과 같아서 남과 충돌이 잘된다.

    돌같은 마음은 차디찬 마음, 감각이 없는 마음, 움직임이 없는 마음, 비쭉비쭉 나와서 남을 찌르기를 잘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차지한다는 말은 논이나 몇 마지기 얻고 밭이나 몇 천 평 얻는다는 말인가? 물론 주와 같이 죽으면 주와 같이 살고, 주와 같이 욕을 받으면 주와 같이 영광을 받을 것이요, 주와 같이 참으면 주와 같이 왕 노릇하리라고 하셨다.

    주께서 천년 왕국에 만왕의 왕이 되시사 이 세상을 다스리실 때에 우리는 다섯 고을 차지하고 혹은 열 고을 차지하는 분봉왕으로 땅을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람의 심지(心地)를 얻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제일 귀한 것이다. 나라의 영토는 칼과 창으로 얻으려니와 사람의 마음은 마음으로 얻는다고 어떤 성도가 말하였다.

    3. 사죄의 영이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은 우리 죄를 속하러 오시어 피를 쏟아 주시고, 사죄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사죄의 법을 가르쳐 주시고, 사죄의 본을 보이시고 사죄의 기도를 몸소 하셨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는 간구를 가르치셨다.
    베드로가 선생님,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할까요, 한 일곱번 하리까 하니 예수께서는 아니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다.
    그러면 "7×7=49", 490번 하란 말인가?
    아니 무조건 용서하란 말이다.
    어떤 사람이 빚을 만 냥 지고 갚을 도리 없어 주인에게 탕감 받고 나가다가 자기에게 백 냥 빚진 사람을 보고 빚을 갚으라고 재촉하니, 빚진 자는 간절히 빌며 좀 참아 달라고 하였으나 "이 자식은 밤낮 조금만 참으라고 한다"며 가두고 빚 갚으라고 야단한다.
    그 말을 그 전에 탕감하여 준 주인이 듣고 그 잔인한 자를 잡아다가 "나는 네 빚을 많이 탕감하였는데 너는 그 적은 빚을 용서하지 않느냐?
    너도 내 빚을 다 갚으라"고 처음 탕감하였던 것을 도로 물렸단다. 무슨 소리인가?

    우리들은 주님 앞에 만 냥 아니 억억만 냥 탕감 받은 자들인데,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백 냥은 고사하고 오십냥 아니 열 냥 아니 십 전도 받아먹으려고 하는 것이다.

    깔다귀는 걸러 먹고 약대는 통으로 삼켜, 남의 죄는 깔다귀같은 죄라도 요리 거르고 저리 걸러서 정죄하고 제 죄는 약대같이 큰 죄, 들보 같은 죄라도 꿀떡꿀떡 다 집어삼키는 무자비한 자를 책망하셨다.

    내가 주님 앞에 죄사함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내가 남의 죄를 얼마나 사하느냐 못 사하느냐가 표적이다. 죄 많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음행하다 잡힌 여자를 돌로 때려죽이려고 달려들었지만 죄 없으신 예수는 음행한 여자를 너그러이 용서하고 살려 주신 것이다. 죄 많은 사람이 도리어 남의 죄를 정죄하기 잘하며 죄 없는 사람은 남을 잘 용서하는 것이다.

    4. 희생의 영이다

    주님은 밀알이 땅에 들어가 썩어져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자신의 희생을 선고하시고 실천하셨다(요 12:12).
    주님은 33세에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탄생 이후 최후까지 녹아지고 사라져 희생제물이 되셨다.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도 항상 희생의 정신을 가지고 생활해 나가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귀한 일을 많이 한다.
    맛없는 것 맛있게 하고 썩을 것을 썩지 않게 한다.
    그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도 칭찬 한 번도 듣지 못한다.
    소금을 장에 넣으면 장 달다고 하지 소금 달다는 사람 한 사람도 없고, 소금을 김치국이나 곰국에 넣으면 김치국이나 곰국 맛 좋다고 하지 소금 맛 좋다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소금은 실컷 좋은 일을 해 놓고도 칭찬은 한 번도 못 받는 것이다.
    그래도 불평 불만 없이 녹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이야 어디 그런가?

    무슨 일할 적에 누가 칭찬을 하고 잘한다고 추켜 주면 아주 기분이 좋아서 신이 나 떠들지만 주가 알아주지 않으면 이것 괜히 동무 몰래 양식 내기지 누가 아나 하며 섭섭해 하고 불평, 불만, 낙망, 실망자가 많은 것이다.

    잘 녹아져라.
    누가 알아주든지 몰라주든지 그리스도만을 위해 녹아지자.
    양초는 자체가 녹아져서 그 빛을 잘 발휘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죽으면 예수 살고 내가 살면 예수 죽으시고, 내가 높아지면 예수 낮아지시고, 내가 나타나면 예수께서 숨으시고, 내가 숨을 때에 예수 나타나시는 것이다.
    녹아져라.
    부스러져라.

    5. 복종하는 영이다

    그리스도의 영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성지에 절대 복종하는 영이시다(마 26:42).

    무슨 일에든지 어느 때든지 어디서든지 아버지 뜻대로가 그의 일생 생활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은 내 뜻대로 마옵소서 하지 않고 아버지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하옵소서 하다가 망한다.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들어가는 것이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면 사막이 변하여 낙원이 되고, 아버지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하옵소서 하면 낙원이 변하여 사막이 된다고 어느 성도는 말하였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방법은 네 가지로 판별할 수 있다.

    첫째, 성경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아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묵시하신 바로 아버지의 모든 사정과 뜻을 거기 발표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애독하고 상고하여 그 말씀에 하라는 것은 절대 순종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뼈를 갈고 피를 쏟아서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또한 나의 지도자에게 문의할 것이다.
    거룩하고 신령한 주와 동행하는 지도자에게 순종할 것이다. 교회의 당회와 노회 총회에 순종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탈선된 지도는 받아서는 안되며 서로 겸양과 사랑으로 주의 뜻을 알아볼 것이다.

    셋째, 돌아가는 섭리에 순종할 것이다.
    모든 섭리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다. 요셉은 형님들에게 팔리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고 감옥에 들어갔으나 섭리에 순종하여 욕됨과 영광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이십 년만에 만난 형님들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판 것을 한탄하지 마소서.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보낸 것이 나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다"고 그의 섭리를 믿고 감사하고 증거하였다.

    넷째, 사심 없는 맑은 양심으로 기도해 보아 성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모든 결정은 양심만이 해야 한다고 하였다. 양심은 의와 불의, 선과 약을 분별하며 할 일과 안 할 일을 지시하는 것이다.

    모든 실패는 양심에 순종하지 않고 자아 욕심으로 동하고 정함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불행을 초래하고 과거에 주님 가슴에 창칼을 박은 것도 원통한데 주님 가슴에 잔못을 많이 박아 드리는 것이다.

    결말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저희 안에 들어가 저로 더불어 먹고 저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산 그리스도를 우리 안방에 모시자. 주님을 곁방살이 시키지 말고 안방 중심에 모시어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여 주와 나와 혼연 일체의 생활을 보낼지어다.

    쇠를 불에 넣으면 쇠는 쇠인데 불이다.
    불은 불인데 쇠이다.
    그의 개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 성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았다는 증거가 분명한 자는 행복이로다.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
    나 위하여 죽음과 나 위하여 사셨네
    예수님은 내 생명 또한 나의 기쁨
    예수 없이 내 생명 잠시라도 못사네
    예수님 내 주여 내 중심에 오셔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
    나의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시는 예수께서 친히 나의 모든 것이 되시네.




    따라서 명분을 잃으면 축복도 잃는다.
    명분을 잃으면 축복도 잃어버리게 된다.

    창세기 25: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죽게 된 현실과 장자의 명분 사이에서 현실적인 필요를 채우는 에서의 모습이 이해가 됩니다.
    명분보다는 실리니까요!
    명분이라는 단어의 뜻은 '이름이나 신분에 따라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입니다.
    하지만 사실 원어에는 이 '명분'이라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다만 '장자권' 이라고만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에서는 죽게 되는 것보다는 장자권을 포기함으로 팥죽 한 그릇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게 가벼이 여기고 팔아버린 명분 때문에 마침내는 장자의 축복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일단 이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야 겠습니다.
    에서가 당시에 그 팥죽 한그릇이 아니면 정말 죽게 되었던 것일까요?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던 것일까요?
    우리가 흔히 '배고파 죽겠다' 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진짜 죽을만큼 배고파 본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정도가 되려면 한 주일 이상은 굶어봐야 겪게 될 일이니까요.
    에서 역시도 마찬가지 였을 것입니다. 사냥을 하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녀야했고 육신적으로 많이 지치고 피곤했기에 많이 허기가 진 것이 사실이었겠지만 그렇다고 죽을만큼 배고프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조금만 기다렸으면 그의 어머니가 맛있고 풍성한 저녁을 준비해 왔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조금만 참고 기다렸다면 그는 그의 배고픔도 채웠을 것이며 장자의 명분을 팔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 만으로도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얼마나 가볍고 하찮게 여겼는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장자의 명분은 팥죽 한그릇에 넘겨도 될만큼 그렇게 가볍고 하찮은 것이었을까요?
    장자의 명분에는 재산의 2배를 물려받을 권리, 제사장의 권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메시야의 조상이 될 거룩한 권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만큼 장자의 명분은 영예로운 것이었으며 그렇기에 그만큼의 책임과 의무도 컸습니다.
    하지만 이 장자의 명분이 가진 단점?이 있었는데 (적어도 에서에게 있어서) 이 장자의 명분은 지금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일에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이 명분을 기꺼이 팥죽 한 그릇과 바꾸어 버리죠.

    그러면 이제 오늘날로 한번 넘어와 봅시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에서가 살던 당시의 장자의 명분은 없지만 우리에게도 비슷한 명분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름 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속에 재물을 두배 받을 축복 같은건 없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권리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더불어 이 또한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 살다보면 그리스도인 이라는 명분 때문에 손해도 봐야하고 오해도 받아야 할 때가 종종 있음을 보게 됩니다.
    당장의 유익과 편리함에 그리스도인 이라는 명분은 정말 불편스럽다고 느낄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명분을 지켜야 그리스도인이 받을 축복도 누릴 수 있습니다.
    눈 앞의 이익 때문에 명분을 거스리면 축복도 놓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명분이 지금 당장의 이익이 되지 못할 때가 많죠?
    지금 눈앞의 문제가 신앙 때문에 풀리지 않아 고민될 때 있죠?
    당장의 이익과 편리가 신앙 때문에 가로막혀 힘들죠?
    지금 그 문제 해결 안되면 끝날거 같죠?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구름 저편 밝은 태양이 빛나고 있듯이 고난 저편 그분의 약속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어려운 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의로우신 오른팔이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 백성이라는 명분을 귀하게 여기고 백성답게 삽시다.
    감사하며 사랑하며 삽시다.


    본절에서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요단 동편에 위치한 지파들(르우벳, 갓, 므낫세 반 지파)에 대한 기록이다.
    이들 지파들은 함께 기업을 받았으며(수 13:8-12) 함께 단을 쌓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수 22:10, 27, 34).
    또한 이들은 지형적 특성상 이방인들과 싸움에 있어서도 함께 연합하여 싸웠다(민 32:25-27;수 4:12, 13).

    르우벤은...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
    야곱의 장자(長子) 르우벤(Re-uben)이 야곱의 첩 빌하와 근친상간을 범한 것을 가리키는 구절이다(창 35: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그는 이 죄로 말미암아 장자권적 주도권은 유다에게 넘겨주고 말았으며(2절; 창 49:8), 두 몫을 차지하는 장자의 상속권(신 21:17)은 요셉에게 넘겨주고 말았다(창 49:3, 4).

    창세기 49: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찬송이 될찌라 네 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신명기 21:17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창세기 49:3-4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장자의 명분이...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
    요셉의 장자권은 그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통해 성취되었다.
    즉, 요셉은 두 아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내에서 두 기업(基業)을 획득하였다(창 48:22).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
    본 족보가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었다면 요셉의 후손들이 먼저 소개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본 족보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저자의 구속사적(救贖史的) 시각에 따라 기록된 것이어서 요셉의 후손들이 나중에 기록되어 있다(23, 24절;7:14-29).

    역대상 5: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
    여기서 '뛰어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가바르'는 '우세하다', '힘이 강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다른 지파에 비해 숫자적으로 월등한 유다 지파의 세력을 가리키는 말이다(민 1:27).
    유다 지파는 이와 같은 월등한 세력으로 인해 가나안 정복 당시 이스라엘 군대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삿 1:1-21).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
    이는 유다 지파 출신의 다윗 왕을 가리키는 말이다(삼하 5:1-3).
    다윗은 실로 하나님께서 택정 하셨던 이스라엘의 목자이자 주권자로서 장차 유다 지파의 계통을 좇아 탄생할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였다(28:4).
    이와 관련해서는 야곱이 임종 시(臨終時)에 유다 자손들에게 베풀었던 축복을 살펴보라.


    장자의 명분(장자 상속권)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맏아들이 누리는 권리를 ‘장자의 명분’ 또는 ‘장자 상속권’이라 부른다.

    특별한 권리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장자는 형제들 중에서 특별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맏아들은 평소의 식탁에서도 아버지를 이어 높은 자리에 앉았고 일상 생활에서도 다른 형제들에 비해 주도적인 위치를 누렸다.

    아버지가 죽을 때에는 장자에게 특별한 축복이 주어졌고 유산상속도 다른 형제들 보다 두 배 많은 몫을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를 이어 가문의 대표가 되며 왕족의 경우 당연히 왕위 계승권을 가졌다.

    당시의 장자 상속권은 성경에 기록된 족장들뿐만 아니라 바빌론, 앗수르에서도 정착된 제도였다.
    이미 발굴된 고대 바빌론, 앗수르의 기록물들에서도 이런 사실이 확인된다. 

    특별한 책임

    장자에게 주어진 책임도 크다. 부친이 사망할 경우 어머니는 물론이고 다른 형제나 결혼하지 않은 여자 형제들도 부양 할 책임이 있었다.

    장자권의 이동

    장자의 권리는 심각한 죄를 저지르면 박탈될 수 있었다.
    성경에 기록된 사례로는 르우벤이 있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였으나 아비의 침상을 더럽힌 죄로 장자의 명분을 누리지 못했다.

    장자의 권리는 매매를 통해서 다른 형제에게 넘겨질 수 있었는데 흔한 일은 아니었고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있을 수는 있는 일이지만 손가락질 받는 행위였다(에서의 경우). 
    첩이나 종의 자식들에게는 먼저 태어났어도 장자의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이스마엘의 경우).

    • 출애굽 이후 주어진 율법에서는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초태생, 곧 장자는 하나님의 소유였다.

    에서의 장자권과 가나안

    에서는 이삭의 맏아들로서 장자의 명분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장자 상속권을 ‘가벼이’ 여겼다.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은 당장의 배고픔 앞의 죽 한그릇 보다 못한 것이었다. 장자의 명분을 팔라는 야곱의 제안을 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삭의 하나님”이 에서의 하나님이 아닌 야곱의 하나님이 되는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에서가 물려 받을 장자의 명분에서 가장 크고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물려 받는 것이었다. 후손에 대한 약속, 그 후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은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게서 이삭의 장자권을 가진 아들에게로 이어질 것이었다. 에서는 억울할지 모르지만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구입한 것은 절차에 있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은 속여서 받았지만 훗날 장자의 명분을 소유한 아들로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고 에서는 가나안을 떠나 세일산에 정착한다.


    요셉의 장자 명분(역대상 5:1-2)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침상에 올라가게 됨으로 저주를 받아 장자의 명분을 빼앗겼습니다.
    르우벤의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 넘어갔습니다.
    르우벤은 장자의 명분을 빼앗겼기 때문에 두 배의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신 요셉은 두 아들이 야곱의 양자로 들어가게 됨으로 가나안 땅을 두 배로 받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두 배의 복을 받는 장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르우벤처럼 죄를 지어서도 안 됩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디에서 나왔는지에 관한 정체성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족보를 통해서 자신들의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나라가 이방 나라에 의하여 파괴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정체성은 사라졌습니다.
    이방 나라에서 살다 보니 자신들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조차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에 처음에 한 작업이 족보를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제사장들도 이방 나라로 끌려갔기 때문에 제사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면서 타락해져 갔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수축하고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제사장의 맥은 끊어졌습니다.
    자격도 없는 자가 제사장의 사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족보를 만들어 정통성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만약에 족보의 정통성이 없으면 그 사람은 레위지파라 할지라도 제사장의 사역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자신의 정통성을 위해서라도 족보가 중요합니다.

    역대 상에 기록하고 있는 족보는 유대인의 각 지파의 정통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족보를 정리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르우벤 지파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족보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족보에 올라갔다는 것은 생명 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을 의미합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빼앗기게 됩니다.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신 은혜를 거부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면 하나님은 가차 없이 장자의 명분을 빼앗아 구원의 자리에서 탈락시켜버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내가 받은 구원의 장자 명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절 우베네 레우벤 베코르 이스라엘 키 후 하베코르 우베할렐로 예추에 아비브 니트나 베코라토 리브네 요세프 벤 이스라엘 베로 레히트야헤스 라베코라

    역대상 5:1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의 아들 중에 르우벤은 장자의 명분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야곱의 침상을 더럽혔기 때문에 장자의 명분이 야곱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르우벤은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했습니다.
    그럼 르우벤이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한 사건을 말합니다.


    22절 바예히 비쉐콘 이스라엘 바아레츠 하히 바옐레크 레우벤 바이쉐카브 에트 빌하 필레게쉬 아비브 바이쉐마 이스라엘 바이헤이우 베네 야아코브 쉐넴 아사르

    창세기 35: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이스라엘이 베들레헴으로 들어오다가 라헬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을 때에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에게 들어가서 동침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이 알게 되었습니다. 르우벤이 왜 라헬이 죽자마자 첩 빌하에게 들어가서 동침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르우벤이 가서’라는 단어는 πορευω(포류오 4198 VIAPS3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단수, 3인칭) 나아가다, 행하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70인 역으로 보면 르우벤이 왜 라헬이 죽자마자 빌하에게 들어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르우벤은 항상 아버지에게 불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 레아는 사랑하지 않고 라헬만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을 르우벤은 어려서부터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라헬이 죽자마자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기 위해서 빌하에게 들어갔습니다.
    아버지에게 수치심을 더해주기 위해서입니다.
    현재 아버지는 사랑했던 라헬이 죽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라헬의 첩 빌하에게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빌하에게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던 르우벤의 조치였습니다.
    르우벤은 이미 이런 계획을 모두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순간적인 생각으로 행동에 옮긴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기회가 왔을 때 행동에 옮긴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도 아버지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굳건히 먹고 있었으며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수동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기회가 왔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버지에게 복수를 하려고 빌하에게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자들이 누구입니까?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려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구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결국 자신의 육적인 장자의 힘을 믿고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수치를 주는 자들입니다.

    ‘동침하매’라는 단어는 κοιμαω(코이마오 2837 VIAPS3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단수, 3인칭) 잠자다, 죽다, 라는 뜻입니다.
    70인 역에 르우벤이 빌하와 동침했다는 것은 더 이상 아버지와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더럽혀 죽였다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아버지의 것이 되지 못하도록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고 모욕을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르우벤이 하나님 앞에 괴씸 죄에 걸린 것이 무엇입니까?
    르우벤은 이미 아버지에게 복수하려고 준비를 철저히 했기 때문입니다.
    과거 시제를 사용한 것은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여 아버지에게 수치를 주려고 준비했다는 의미입니다.
    수동태를 사용한 것은 자신에게 기회가 왔기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빌하에게 들어가서 철저하게 죽이고 파괴시킨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율법주의자들이 자신의 장자 명분을 앞세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명예와, 재물과, 권력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께 도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도전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수치를 주게 됩니다.

    ‘더럽혔으므로’라는 단어는 (할랄 2490 P.VPNG.MZS 전치사. 동사, 피엘(강조능동), 부정사연계형. 남성, 3인칭, 단수) 꿰뚫다, 꿰찌르다, 더럽히다, 라는 뜻입니다.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의 침상을 완전하게 더럽혔습니다. 르우벤이 빌하와 동침함으로 야곱의 마음을 꿰뚫어 버리고 관통하여 야곱은 믿었던 르우벤으로부터 꿰찔림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에게 보내셨는데 믿었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꿰찔림을 받으셨습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침상을 완전하게 더럽혀서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피엘, 강조능동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빌하에게 완전하게 들어가 다시는 아버지와 동침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들은 르우벤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자신이 가진 육적인 권세가 최고라고 장자의 명분을 함부로 사용하여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수치 주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르우벤처럼 자신의 힘이 많아지면 하나님께 도전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항상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장자의 명분’이라는 단어는 (베코라 1062) 처음 낳은 것, 장자권, 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장자의 명분을 가진 사람은 두 배의 몫을 받게 됩니다. 르우벤은 장자의 권세가 있기 때문에 두 배의 몫을 아버지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권위를 손상시켰기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박탈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장자의 명분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로 구원을 얻은 것을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열심히 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하면 르우벤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자는 야곱의 아들이지만 장자의 명분을 박탈당했습니다. 내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구원을 얻었다고 하지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르우벤이 계속해서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려고 했던 것처럼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율법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2절 키 예후다 가바르 베에하이브 우레나기드 미메누 베하베코라 레요세프

    대상 5: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르우벤이 장자이지만 이 장자의 명분이 누구에게로 넘어갔습니까? 영적 장자의 명분은 유다에게 넘어갔고 육적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넘어갔습니다. 유다의 뿌리에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유다는 영적 장자의 명분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때에 자신의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두 몫을 받는 복을 받았습니다. 장자는 구약에서 두 배의 몫을 유산으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선택하셔서 두 배의 몫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주권자가’라는 단어는 (나기드 5057) 통치자, 지도자, 우두머리, 라는 뜻이며 נגד(나가드 5046) 말하다, 알리다, 선언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유다 지파에서 나오는 주권자가 누구입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구속하시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이루었다.라고 선택된 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인생의 통치자이며, 영적인 지도자이며,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시는 분입니다.

      

    10절 로 야수르 셰베트 미후다 우메호케크 미베인 라겔라이브 아드 키 야보 쉴로 베로 이케하트 암밈

    창 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를 통해서 나올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통치자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않습니다. 실로가 오시면 모든 백성이 그에게 복종하게 됩니다. 실로는 바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장자의 명분을 르우벤에게 빼앗아 유다에게 주었습니다. 유다 지파는 영적인 축복을 받아서 다윗 왕이 탄생되었고 다윗왕의 후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유다는 영적 장자의 명분을 받은 축복의 사람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 선택받은 영적 장자의 명분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르우벤처럼 자신이 가진 것을 기쁨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게 되면 하나님은 빼앗아 버립니다. 결국 르우벤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율법주의자들의 표상입니다.

    육적 장자의 명분은 요셉이 받았습니다. 자신의 두 아들을 통해서 가나안 땅을 두 몫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 요셉은 육적인 장자의 명분을 받아 어떻게 쓰임 받게 됩니까? 애굽으로 가서 가족들이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됩니다. 요셉이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도 절대 탄생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요셉은 애굽에 가서 총리대신이 되어 영적인 장자인 유다가 살 수 있는 길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요셉이 없으면 영적인 장자의 명분을 받은 유다도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 신약의 요셉은 육적 장자의 명분을 받아 어떻게 쓰임을 받게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준비하게 만듭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사역을 할 수 없었습니다.

      

    21절 호 데 에게르데이스 파렐라벤 토 파이디온 카이 텐 메테라 아우투 카이 엘덴 에이스 겐 이스라엘

    마 2: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헤롯이 예수님의 목숨을 노렸지만 요셉이 애굽에 내려가서 생명을 보존하고 헤롯이 죽은 후에 나사렛에 와서 살게 됩니다. 요셉은 예수님이 공생애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사생애의 기간을 함께 했던 육적 장자였습니다. 또 한 명의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준비하는 육적 장자입니다.


    59절 카이 라본 토 소마 호 이오세프 에네튈릭센 아우토 신도니 카다라

    마 27: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고 자신이 들어갈 무덤에 장례를 치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육적 장자의 명분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는 길을 예비한 사람들입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여 침상을 더럽히고 수치를 주어 장자의 명분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유다와 요셉은 장자의 명분을 받아 하나님께 쓰임 받고 축복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적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주님께 충성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육적 장자의 명분을 받아 복을 받으면 주님의 영광을 높이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물질을 쓰고 교회에 충성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영적인 장자는 구원을 받고 육적인 장자는 이 땅에서 축복을 받아 누리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맏아들이 누리는 권리를 ‘장자의 명분’ 또는 ‘장자 상속권’이라 부른다.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장자는 형제들 중에서 특별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맏아들은 평소의 식탁에서도 아버지를 이어 높은 자리에 앉았고 일상 생활에서도 다른 형제들에 비해 주도적인 위치를 누렸다.
    아버지가 죽을 때에는 장자에게 특별한 축복이 주어졌고 유산상속도 다른 형제들 보다 두 배 많은 몫을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를 이어 가문의 대표가 되며 왕족의 경우 당연히 왕위 계승권을 가졌다.









    그리스도인의 권리포기

    그리스도인의 권리포기 : 이 땅에서 하늘의 것을 성취하는 방법

    '권리포기'란 단념하는 것이 아니라, 더 귀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취하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포기한 배우자, 자녀, 재산, 경력, 생명 중에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의 신을 벗기기 원하시는 때문입니다.
    얻게 되는 건 오히려 우리입니다.
    포기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것이 전부 우리 것이 됩니다.
    포기할 때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이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포기하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 본문중에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처음에는 어렵다 신을 벗을 때 다 잃어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을 벗게 되면 그 때부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나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잇다는 것을 기억하자.  
    권리 포기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기본이며, 그분의 제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입니다.

    예수님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고 하셨습니다.
    또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 하리라"(눅 14:33)고 하셨습니다.

    '부모, 처자, 형제, 자매, 자기 목숨"은 우리가 섬기며 돌아보아야 할 권리이고 책임 입니다.
    우리에게는 소유하며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이 모든 것을 미워하거나 버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사랑하고 소유하며 주의 제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베드로와 안드레는 즉시 어부로서의 생명인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또한 야고보와 요한도 배와 삯군들과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들을 포기 했습니다.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권리를 양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내가 가진, 또는 나에게 주어진 권리를 예수님께 드려서 그분이 나의 권리를 가지시도록 하는 것 입니다.

    김원호 장로님을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권리 포기라는 주제의 책을 쓰기에 참으로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들을 계속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철저하게 순종하려고 늘 애쓰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그는 권리를 포기할 때 예수님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이 되시는 것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삶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김원호 장로님과 함께 일하시기가 아주 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권리를 드린 그의 삶을 통해, 포기할 때 주어지는 영광과 특권을 나타내셨습니다.
    김원호 장로님 부부의 경건한 삶에서 겸손, 소박함, 환경을 초월하는 마음의 평안, 예수님과 동행하는 영광, 하나님의 뜻을 행함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고받게 되는 많은 질문이 있습니다. '갖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하고 쓰십니까?' '이 책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으십니까?' 그리고 이에 대한 다양한 대답들을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혹시 '무엇을 포기 하셨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생소하게 들리는 이 질문을 받는 다면 당신은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세대의 문화는 안전과 편안함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그래서 스트레스와 고생과 위험은 가능한 멀리해야 하는 '나쁜'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와 정확히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와 권리)를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라는(쉬운 말로, 와서 죽으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구원과 은혜로 감격한 때라도 멈칫하게 하는 '무서운'말씀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자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안전과 편안함을 지향하는 이세대의 정신을 받아들였습니다.

    생명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기꺼이 소유를 팔아 소외된 사람들을 돕던 교회가, 지금은 안전하고 근사한 일만을 찾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 낯설고 어려운 곳으로 가는 것은 특별한 사람과 단체와 교회들만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성경의 관점은 명확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2천 년 전에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기꺼이 채우기 원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여전히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세상과 반대되는 우선순위와 가치를 품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속한 예수 전도단은, DTS(Discipleship Training School) 훈련에서 사역에 이르기까지 '권리 포기'를 핵심 가치 중 하나로 삼고 있습니다. 저는 독자와 사역의 입장에서 이 귀한 가르침이 문서로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게 된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커다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권리 포기의 삶'을 실제로 살고 계신 김원호 장로님의 손으로 출간되는 책이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풍성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어떻습니까?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기쁘게 고난에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 책은 우리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을 바꾸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권리를 하나도 남김없이 그리스도의 발 앞에 놓게 할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그랬듯이 발에서 신을 벗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권리를 포기한 바로 그 자리에서 이전에 보지 못한 하나님의 역사를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귀한 특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갖게 되는 의문들을 1985년 봄부터 계속해서 예수전도단의 각종 훈련과 말씀 공부를 하며 이러한 의문이 풀려가지 시작했고, 차츰 삶의 모습, 사고방식, 인격, 성품이 변해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을 따르기로 선택하는 대신, 그분의 진리 앞에서도 여전히 육신으로부터 나오는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데 있다.
    그래서 나는 진정한 믿음의 삶에 대해 다시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세속적이고 육신적이고 개인적인 모든 권리를 포기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뜻앞에 순복하기로 선택하며 나 자신을 투자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순복했는지,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어떠한 일을 이루셨는지, 그들의 권리 포기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 등의 내용을 나누게 될 것이다.

    ---------------------------------------

    하나님은 우리가 포기한 배우자, 자녀, 재산, 경력, 생명 중에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의 신을 벗기기 원하시는 때문입니다.
    얻게 되는 건 오히려 우리입니다.
    포기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것이 전부 우리 것이 됩니다.
    포기할 때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이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포기하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분의 음성 앞에서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말씀하시더라도 그 말씀하신 하나님이 행하실 것임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의 권리포기 - 김원호 장로

    글을 시작하며

    이 땅에서 하늘의 것을 성취하는 방법 - 당신이 포기할 때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권리포기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기본이며, 그분의 제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권리를 양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내가 가진, 또는 나에게 주어진 권리를 예수님께 드려서 그분이 나의 권리를 가지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리를 드린 삶을 살 때에, 포기할 때 주어지는 영광과 특권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2천 년 전에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기꺼이 채우기 원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여전히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세상과 반대되는 우선순위와 가치를 품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권리를 포기한 바로 그 자리에서 이전에 보지 못한 하나님의 역사를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귀한 특권입니다.

    1. 권리포기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십자가와 믿음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 말씀에 의하면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것이다. 그렇게 죽은 자에게 무슨 권리가 있는가?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말씀하신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나에게는 아무 권리도 없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 사신 것이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시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의 권리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육체를 입고 오늘도 살아가는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음성을 듣고, 따르고, 하나님을 신뢰하라

    창조주 하나님이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지금도 우주를 다스리심을 믿는 것이 믿음에 필요한 전제조건이다. 그 다음 믿음에는 필요한 세 가지 조건이 있다. 먼저 믿음은 들음에서부터 오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서 믿음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믿음의 첫 번째 조건은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이렇게 들려주신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고, 그래서 믿음의 두 번째 조건은 들은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 조건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말씀하셨더라도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라는 온전한 신뢰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들은 대로 따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권리포기이다. 이 결정은 내 의견, 내 주장, 내 욕심, 내 계획, 내 야망대로 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순종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자기 스스로 그냥 포기하는 것은 진정한 포기가 아니다. 자신의 생각과 결정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 없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들은 후에는 즉시 따르며, 말씀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의 삶이며 이것이 권리포기의 삶이다.

    2. 말씀 앞에서 신을 벗으라

    신을 벗으면 ‘당신에게 나의 모든 권리를 양도합니다. 나의 소유권을 포기합니다’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 이스라엘 전통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네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시면, 이는 ‘네 권리를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부르심에 대한 모세의 반응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오기 전에 포기한 권리는 ‘바로 공주의 아들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권력과 명예, 정욕과 재물 등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것들을 이미 포기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모세에게 무슨 권리가 남아 있다고,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그를 부르시고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을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자신의 능력이나 주위 환경을 바라보면서 계산하지 말고, 그대로 따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데 모세는 비록 음성을 들었어도 ‘따르는’것부터 걸려 넘어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몇 번이나 말씀하셔도 계속 핑계를 대며 바로에게 못 간다고 대답하였던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언약까지도 부인하고 싶은 반항의 마음이 모세의 내면에 있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모세의 힘으로 하라고 하셨는가? 신을 벗으라고 하는 말은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 호렙산에서 떨기나무 불을 놓고 모세를 불러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다.

    사명을 이루기 위한 여호수아의 선택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말한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왜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했을까?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여리고 성의 공략에 대하여 큰 부담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여호수아는 이제 이스라엘의 군 사령관으로서, 작전 계획을 세우고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한 전투를 지휘하여 전쟁에서 승리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신을 벗고 맨발로 전쟁을 치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모든 권리를 포기하라는 말씀이다. 아무 권리도 없으므로 작전 계획을 세우고 전투를 지휘할 권리도, 전쟁 승패에 대한 책임을 질 권리도 없다. 모든 권리를 내려놓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데 있어서 치밀한 작전 계획이나 탁월한 전투 지휘 능력이 아니고 오직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온전히 따르는 것을 원하셨다.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할 수 없어도 말씀하신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서 있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작전 명령을 듣고 그대로 따랐을 때 여리고 성은 무너졌다.

    여리고 성을 보고 자신을 보면, 전쟁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전쟁을 할 수 있다. 강하고 담대해질 수 있다. 하나님은 이것 때문에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한 것이다.

    누가 여호와의 종인가?

    모세와 여호수아는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삶을 살았고,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이루는 영적 지도자로 영원히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도 단 한번씩, 하나님 말씀 앞에 신을 벗지 않고 자기 권리를 행사하는 실수를 범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말하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화가 나서 바위를 두 번이나 지팡이로 내려쳤다.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모세가 믿지 않았다는 것을 무엇을 말하는가?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들은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인정하였지만 말씀하신 음성 그대로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모세는 그토록 고대하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에 들어가면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하지만 하나님께 묻지 않고 기브온 족속에게 속아서 화친을 맺고 말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맘대로 했던 여호수아의 단 한번 실수였다.

    그러면 누가 여호와의 종인가? 우리는 두 사람의 실수를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바로 하나님 말씀 앞에서 신을 벗고, 들은 대로 따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여호와의 종’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주님의 종’이라고 불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정말 신을 벗었는가, 벗지 않았는가가 중요하다. 사람들이 뭐라 하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신을 벗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내 종’이라고 부르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고 자신을 종이라고 한다면, 모든 권리를 그분 앞에서 포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신을 벗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은 ‘내 종’이라고 부르신다.

    영적 권위는 누구에게 주시는가?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영적 권위를 주실까?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주시는 영적 권위는 절대적인가?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영적 권위에 도전하고 집단적으로 반기를 들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모세는 다만 그들 앞에서 ‘엎드리는 일’ 밖에 하지 않았다. 왜 모세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엎드리기만 했을까?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은 사람은 사람 앞에서도 신을 벗기 때문에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유익과 명예를 위해 스스로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그저 하나님께 ‘이때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자세를 취한 모세에게 엄청난 영적 권위를 주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영적 지도자로 세워 주셨다. 이러한 지도자에게 하나님은 영적 권위를 부여하신다. 모세의 영적 권위에 도전하고 성공한 백성이나 족장들은 없다. 영적지도자의 성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신을 벗고 조건 없이 따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3.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권리 포기라고 하면 다 잃어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씀 안에서 순종하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얻는 것이다.

    사회적 안정감을 포기하라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신을 벗고, 사회적인 안정감과 정체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아브라함을 통해 배우게 되는 믿음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사회적 안정감과 정체성을 포함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신을 벗고 순종하는 삶이다.

    더 큰 축복의 약속을 위해 포기하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하였다.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는 그대로 따랐다. 하나님이 이삭을 다시 주실 것이라고 신뢰하는 것이다. 약속의 자손을 데려가신 후에는 반드시 회복시키실 하나님을 신뢰한 것이다. 이삭 역시 아버지가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때 뿌리치며 도망치지 않았다. 이삭도 부모의 삶을 통해 믿음으로 사는 것을 배운 것이다.

    신을 벗은 사람을 통해 원대한 계획을 이 땅 가운데 이루려는 하나님의 마음과 또한 자녀에게 주시는 약속과 축복을 기억해야한다. 모든 권리를 빼앗기 위해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신을 벗은 자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과 약속이 반드시 있다.

    스스로 되갚음하는 것을 포기하라

    다윗은 사울에 충성을 다했지만, 다윗을 시기한 사울은 오히려 그를 죽이려고 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쫓기는 생활 중에 다윗은 사울에게 복수할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하나님 말씀 앞에 신을 벗고 복수할 권리를 포기하고 말씀에 순종하였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복수할 권리를 포기한 다윗에게는 사울이 원수로 보이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만 보인다. 이런 다윗에게 엄청난 축복의 말씀이 주어졌다.

    4. 예수님의 권리포기(어떻게 여호와의 종이 되는가? )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심과 천국보좌를 포기하고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시고, 우리 모든 사람의 죄 때문에 생명을 포기하셨다. 그리 이 땅에서 계시는 동안 여러 가지 권리를 포기하셨다. 예수님이 왜 이러한 권리포기를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셨을까? 앞으로 예수님을 대신해서 복음을 들고 나갈 때 그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세상 풍속을 따르는 권리

    예수님은 세상 풍속을 좇는 것을 포기하시고 이 땅에서 사역하셨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항상 깨어있지 못할 때, 우리는 왜곡된 사고와 잘못된 습관의 공격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문화가 아니라 세상 풍속에 젖어 살 수 있다.

    자존심을 지키는 권리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인격을 무시당하고 모욕을 받았을 때 감정적으로 말씀하지도 않고 혈기를 부리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의 영적권위에 도전한다고 저주하지도 않으셨다. 그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따라서 그냥 단순하게 반응하셨다. 이것이 자존심을 세우려는 권리를 포기하는 삶이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감사받는 권리

    주님은 사랑받고 인정받고 감사받는 권리를 포기하고 이 땅에서 사셨다. 따라서 사람들의 배신을 하셨을 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행할 때,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기 영광을 취할 권리

    예수님은 그분의 모든 사역 속에서 자기의 영광을 취할 권리를 포기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역하였다.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칭찬하고 경배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말하며 영광을 돌리셨다.

    왕국을 만들어 군림하는 권리

    예수님은 자신의 왕국을 만들어서 군림하고, 새로운 교단을 만들어 총회장이 되고, 신학대학을 만들어 총장이 되는 권리를 포기하고 이 땅에서 사역하셨다. 에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예수님께서 개척교회를 세웠다면, 기존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 장로, 바리새인들을 능가하며 이스라엘 전국을 휩쓰는 새로운 예수교단을 창설하여 이 새 교단의 총회장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몰려오는 군중을 조직화해서 그 위에 군림하지 않으시고 늘 모인 군중을 흩으셨다.

    5. 제자들의 권리포기 (어떻게 여호와의 종을 대해야 하는가?)

    제자들은 예수님을 섬기는 삶 속에서 어떤 권리를 포기했을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열두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섬기고 그분 앞에서 배웠는지 이해하고 배워야한다.

    불평불만 하는 권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불평 불만하는 권리를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다.
    여러 가지로 불평할 상황들이 많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명도 불평불만을 한 일이 없다.

    건의하거나 간섭하는 권리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건의하거나 간섭하지 않았다.
    제자들은 배고프고, 공동생활 집도 없고, 머리 둘 곳 없는 예수님을 좋아다니면서도, 예수님이 어떤 사역을 하시든지 건의하거나 간섭하는 권리를 포기하고 그냥 예수님을 섬기기만 하는 삶을 살았다.

    비판이나 험담하는 권리

    제자들은 비판이나 험담하는 권리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섬겼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비판하다가 안 되면 그 다음에 험담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제자들은 충분히 비판을 하거나 험담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러한 권리들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섬겼다.

    소외되었을 때 반발하는 권리

    예수님이 제자 중 누군가를 편애하더라도 반발하지 않고 주님을 섬겼다.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명의 제자들을 특별히 더 사랑하셨다.
    하지만 그들 세 명만 사랑하고 자신을 찬밥 취급한다고 반발하는 제자들은 없었다.
    제자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예수님께 반발하는 권리를 포기했다.

    상처받고 떠나는 권리

    제자들은 상처받고 떠나는 권리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섬겼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아마도 정말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좌절감 속에서 등을 돌려 돌아가지 않았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어떤 일에도 반발하고 떠날 권리를 포기하고 주님을 섬겼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자!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사람들의 평가 때문에,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말 때문에 좌지우지 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신을 벗으면 모든 것이 해결 되는 거야.
    내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잖아.. ”

    ​답을 얻으니까 마음이 참 편안하다.
    ‘권리포기’에 대한 나의 머릿속의 깨달음이 가슴으로 내려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리고 나의 삶으로 옮겨지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이루려고 욕심 부리지도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한걸음이 나아가려한다.



    야베스의 기도(4: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Jabez cried out to the God of Israel, "Oh, that you would bless me and enlarge my territory! Let your hand be with me, and keep me from harm so that I will be free from pain." And God granted his request.

    야베스(Jabez) : 고통을 불러오다

    야베스는 누구?

    바빌론 유배 이후 집필된 역대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유산과 정체성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야베스는 수많은 이름들 사이에서 믿음의 등대로서 돋보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짧지만 강력한 심리적, 영적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야베스는 "형제들보다 더 명예로운"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이 묘사는 그를 즉시 차별화하여 어떤 자질이 그를 그렇게 구별되게 만들었을지 생각해 보도록 유도합니다. 야베스의 가족이나 이스라엘 사회에서 그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맥락 정보가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세부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는 시대와 문화를 뛰어넘어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우리는 야베스의 이름에 대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예로운 성품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 정신의 회복탄력성과 출생 환경이나 어린 시절의 경험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해줍니다.

    역대기에 야베스가 등장하는 것은 문학적 목적도 있습니다. 현대 독자들에게는 건조하게 느껴질 수 있는 족보의 한가운데서 그의 이야기는 이야기적 흥미와 영적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이 고대 목록의 모든 이름 뒤에는 희망과 고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진 실제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코스


    야베스를 통해 여러분 자신의 인생 여정을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각자는 출신이나 이름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눈에는 '더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야베스처럼 우리 모두는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백성의 이야기라는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역대기가 기록된 당시의 역사적 맥락도 고려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배 후 정체성을 재건하던 시기에 야베스의 이야기는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부르면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뿌리로부터 단절감을 느끼거나 과거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는 현대 사회에서 역대기에 나오는 야베스의 이야기는 희망을 제시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의 출신이나 우리에게 주어진 이름에 의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요?

    이러한 작명은 고대 이스라엘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습으로, 이름에는 종종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으며 때로는 출생과 관련된 상황을 예언하거나 설명하기도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우리는 그러한 이름이 개인의 자기 인식과 인생 여정에 미치는 깊은 영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와 관련된 고통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이름을 가지고 자랐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러한 이름의 무게는 엄청난 부담이 될 수 있으며, 잠재적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인생관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부모의 태도와 어린 시절의 경험이 개인의 심리적 발달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야베스의 이야기는 시작이 주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아름다운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야베스는 이름과는 달리 "형제들보다 더 명예로운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운명과 자유 의지, 우리가 태어난 환경과 우리의 선택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름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많은 문화권에서 이름은 아이의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으며 매우 신중하게 선택됩니다. 따라서 야베스라는 이름은 타인이나 환경이 우리에게 부여한 꼬리표와 기대를 넘어 자신을 정의하기 위한 투쟁이라는 더 넓은 인간 경험의 축소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의 의미는 인간의 삶에서 고통의 현실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고통과 슬픔은 모든 가족과 모든 세대에 영향을 미치는 보편적인 경험입니다. 하지만 야베스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고통은 반드시 끝이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믿음과 기도를 통해 슬픔에서 시작된 고통은 축복의 원천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야베스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줍니다. 야베스의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자신의 고통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우리의 슬픔과 어려움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야베스의 이름과 그의 성품의 대조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강력한 간증으로 작용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과거나 타인의 인식에 의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과의 관계를 통해 새롭게 형성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이름과 꼬리표를 달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가져가야 할 고통스러운 연관성이나 제한적인 믿음이 있나요? 야베스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고 주어진 이름이나 환경의 한계를 넘어 우리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무엇인가요?

    여러 세대에 걸쳐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짧지만 강력한 간구인 야베스의 기도에 주목해 봅시다. 역대상 4장 10절에 나오는 이 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 주께서 저를 축복하시고 제 영토를 넓혀 주시기를! 주님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시고, 저를 해로부터 지켜주셔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이 기도는 간결하고 직접적으로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본질에 대해 많은 것을 드러냅니다. 역사적 유물이자 신앙의 힘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로서 이 기도를 자세히 살펴봅시다.

    야베스는 하나님의 축복을 구합니다. 이 요청은 단순해 보일 수 있지만, 신의 은총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의존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는 진정한 성취는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곳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긍정과 지지에 대한 우리의 타고난 욕구를 말합니다.

    "내 영토를 넓혀 달라"는 탄원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맥락에서는 문자 그대로 영토 확장을 의미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영향력, 책임감 또는 영적 성장에 대한 요청으로 은유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의 이 부분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때 개인과 공동체의 번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진보와 발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반영합니다.

    그러자 야베스는 하나님의 임재를 구합니다: "주님의 손이 저와 함께 하소서." 이 아름다운 신적 동행의 이미지는 우리가 인생을 혼자 살아갈 수 없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심리적으로는 안전과 인도에 대한 우리의 필요성을 말해줍니다. 역사적으로는 모세나 다윗과 같이 리더십 역할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의존했던 인물들의 경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야베스는 위험과 고통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이 세상의 고통의 현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보호 능력에 대한 신뢰를 표현합니다. 야베스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면 고통의 유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암시하는 이 기도문은 특히 가슴을 울립니다.

    야베스의 기도에는 축복, 성장, 동반자 관계, 안전 등 인간의 가장 깊은 욕구가 담겨 있습니다. 이 기도는 이러한 욕구를 하나님께 직접적이고 정직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모델을 제시합니다.

    이 고대의 기도가 여러분의 삶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세요. 신체적, 정서적, 영적 영역 중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확장하라고 부르시는 영역은 무엇인가요? 어떻게 하면 일상적인 경험에 하나님의 임재를 더 온전히 초대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보호와 치유가 필요한 곳은 어디인가요?

    또한 이 개인적인 기도가 우리의 공동체적 신앙 여정에 어떻게 부합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야베스는 개인적인 축복을 위해 기도하지만, 그의 영토 확장은 그의 공동체 전체에 유익을 가져다주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이러한 축복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넘쳐날 수 있는지 고려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전과 불확실성에 압도당하는 현대 사회에서 야베스의 기도는 담대하고 신뢰하는 간구의 모범을 제시합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확신하며 우리의 욕망과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도록 격려합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야베스의 기도의 중요성은 성경에 짧게 언급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신자들에게 미친 지속적인 영향과 오늘날 우리의 삶과의 관련성은 신중하게 고려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 기도의 의미는 야베스의 이름과 출신과 대조된다는 데 있습니다. 야베스는 고통 속에서 태어났고 고통을 상징하는 이름을 가졌지만,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에서 축복으로의 변화는 인간의 경험에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인생의 도전을 극복하는 데 있어 신의 개입을 구하는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줍니다.

    이 기도는 대담함에서도 주목할 만합니다. 야베스는 축복과 확장, 신적 임재와 보호를 직접적으로 요청하며 하나님께 다가갑니다. 이러한 대담한 기도는 우리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접근 방식을 점검하도록 도전합니다. 우리는 합당하지 않다는 느낌이나 두려움 때문에 기도를 제한하고 있지는 않나요? 야베스의 모범은 우리가 자신감과 신뢰를 가지고 우리의 가장 깊은 소망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도록 격려합니다.

    역사적으로 역대기에 이 기도가 포함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국가와 정체성을 재건하던 포로기 이후 시기에 쓰인 이 기도는 불확실한 시대에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를 구하는 백성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 시대를 포함한 모든 시대에 우리의 필요와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이 기도가 강조하는 인간사에 대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은 이 기도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입니다. 야베스는 추상적인 축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이 자신과 함께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이는 우리 삶에 친밀하게 관여하시는 하나님, 즉 신적 내재성의 신학을 반영합니다. 세속화된 세상에서 이것은 우리 존재의 모든 측면에 임재하시려는 하나님의 열망을 강력하게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Psychologically the prayer addresses fundamental human needs – for blessing (acceptance and affirmation), expansion (growth and development), divine presence (security and guidance), and protection (safety and peace). Its comprehensive nature makes it a model for holistic prayer that addresses both spiritual and practical concerns. The Lord’s Prayer is often seen as a beginner’s guide to prayer는 겸손과 진정성을 가지고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틀을 제공합니다. 이 기도는 영적 성취와 인도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인정하고 신과의 연결을 통해 이러한 성취를 추구하도록 상기시켜 줍니다. 이 기도는 인간의 다양한 필요를 다룸으로써 포괄적이고 접근 가능한 방식으로 더 높은 힘에 다가갈 수 있는 로드맵을 제공합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모든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신과 연결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적인 도구로 사용됩니다.

    기도의 단순함과 간결함 또한 이 기도의 중요성에 기여합니다. 단 몇 마디에 강력한 신학과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접근하기 쉽고 기억하기 쉬워 신자들이 쉽게 내면화하고 개인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요청을 들어주셨다는 사실은 기도의 중요성에 무게를 더합니다. 이는 진실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모든 세대의 신자들이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격려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복잡성에 압도당하는 현대의 상황에서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축복, 확장, 임재, 보호라는 네 가지 요소는 인생의 도전과 기회에 대처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합니다.

    I encourage you to consider the significance of this prayer in your own life. How might embracing its spirit of bold trust transform your relationship with God? How could it reshape your approach to life’s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Embracing the spirit of bold trust found in this prayer can lead to a deeper sense of peace and confidence in God’s faithfulness. It can also provide a framework for approaching life’s challenges with courage and hope, knowing that God is always at work for our restoration. By incorporating the spirit of this prayer into our own lives, we can experience a renewed sense of faith and a willingness to trust God’s timing and plan for our lives. In doing so, we can find comfort and strength in knowing that our 회복을 위한 기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 기도의 공동체적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시다. 야베스는 개인적인 축복을 위해 기도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확장은 필연적으로 그의 공동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기도가 개인적인 것이지만 항상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삶에 미치는 더 넓은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야베스 기도의 지속적인 중요성은 영감과 격려, 그리고 변화를 가져오는 기도의 힘에 있습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담대하게 기도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우리 삶에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구하도록 도전합니다. 이 기도를 받아들일 때, 야베스처럼 우리 삶과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축복, 확장, 임재, 보호의 변화시키는 힘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야베스가 몇 번이나 언급되나요?

    이렇게 언급이 적다 보니 처음에는 야베스의 중요성이 줄어든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간결함이 야베스에 대한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어떻게 작용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단어에 무게가 실리는 성경의 경제학에서 야베스의 이야기를 긴 족보에 포함하기로 한 결정은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역사적으로 역대기의 맥락을 고려해야 합니다. 바빌론 유배 이후에 쓰여진 이 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유산과 정체성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족보 기록에 야베스의 이야기가 포함된 것은 그의 모범이 국가와 신앙을 재건하는 민족에게 특히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졌음을 시사합니다.

    심리적으로 야베스의 짧은 등장이 주는 영향은 잘 살아온 한 인생의 힘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우리의 이야기가 단 몇 문장으로만 전해지더라도 우리는 어떤 유산을 남길 수 있을까요?

    야베스가 한 번은 그의 이름을 설명하고 한 번은 그의 기도를 이야기하는 데 두 번이나 언급된다는 사실은 강력한 서사적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그의 이름에서 그가 가진 잠재적 한계를 보고, 바로 이어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변화된 만남을 봅니다. 이 간결한 스토리텔링은 인간의 한계와 신의 가능성 사이의 대비를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야베스의 이름은 단 두 번만 언급되지만, 그의 이야기의 영향력은 이러한 직접적인 언급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특히 그의 기도는 역사상 수많은 신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짧은 성경 구절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저는 야베스에 대한 제한적인 언급이 성경 전체에서 볼 수 있는 패턴과 일치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세상의 기준으로는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가족 중 막내였던 기드온이나 형제 중 막내였던 다윗을 생각해 보세요. 야베스의 이야기는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이라는 성경의 주제에 부합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야베스의 간결한 모습은 우리 자신의 성찰과 적용으로 그 빈틈을 메우도록 초대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고난과 열망을 투영할 수 있는 캔버스가 되어, 그의 기도를 접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깊은 개인적 경험을 선사합니다.

    야베스에 대한 성경의 제한된 언급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짧게 기록된 삶이라도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할 때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둘째, 작은 행동도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신앙의 유산을 남길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도전합니다.

    언급이 드물다는 것은 성경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접근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때로는 가장 강력한 진리는 긴 담론이 아니라 신앙과 인간 경험의 본질을 포착하는 짧고 강렬한 순간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또한 야베스의 제한된 모습이 우리 자신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여가 작거나 눈에 띄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베스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을 보시고 소중히 여기시며, 우리의 신실함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줍니다.

    가시성과 양으로 가치를 측정하는 현대 사회에서, 성경에 짧지만 중요하게 등장하는 야베스는 반문화적인 메시지를 전합니다. 진정한 영향력은 언급의 양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질과 기도의 진정성에 의해 측정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야베스의 기도의 결과는 무엇이었나요?

    성경은 우리에게 간결하지만 강력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역대상 4:10). 이 간단한 말씀 속에는 우리가 주의 깊게 숙고해야 할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도가 들리지 않거나 무시당한다고 느끼는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에 귀 기울이신다는 이 말씀은 깊은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나요?? 성경에 나오는 야베스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이는 우리의 기도가 헛된 것이 아니라 사랑스럽고 세심한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고려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안심시켜 줍니다. 이러한 지식은 하나님께서 자녀의 부르짖음에 신실하게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담대하고 자신 있게 그분께 다가갈 수 있도록 영감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들으시는 것 이상으로 신성한 관대함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야베스의 요청을 들어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그분의 자녀들과 대화를 나누고, 우리의 삶 속에서 행동하시려는 의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멀고 비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자녀를 축복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호함은 우리 자신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항상 즉각적으로 나타나거나 우리가 기대하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때로는 기도의 열매가 천천히 익어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처음에 인식하지 못한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심리적으로도 우리는 기도하는 행위, 즉 하나님 앞에 우리의 가장 깊은 희망과 두려움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그의 외부 환경뿐만 아니라 내면의 풍경도 변화시켜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고 신의 자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강력하게 인식하게 했을 것입니다.

    야베스의 요청이 받아들여진 것은 주변 사람들과 그의 이야기를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력한 간증이 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에 대한 증거가 되어 다른 사람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요청을 들어주신다는 보장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무한한 지혜로 우리에게 진정으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다. 때때로 그분의 가장 큰 선물은 우리의 구체적인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뜻에 더 가깝게 일치하도록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의 결과는 신성한 응답, 개인적인 변화, 지속적인 간증 등 겹겹이 쌓여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진실한 기도의 힘, 사랑의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 그리고 그분이 우리 삶에서 일하시는 신비한 방식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도 야베스처럼 정직과 믿음, 용기를 가지고 주님께 다가서서 우리 삶에 대한 주님의 완전한 뜻을 항상 신뢰하며 그분의 축복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야베스의 이야기는 성경의 다른 가르침과 어떤 관련이 있나요?


    야베스의 이야기는 짧지만 성경 전체에서 발견되는 다른 많은 가르침과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이야기는 빛을 비추면 하나님의 더 큰 진리의 광채를 반영하는 작은 보석과도 같습니다. 이 간결한 내러티브가 성경의 지혜가 담긴 광범위한 태피스트리와 어떻게 얽혀 있는지 살펴보세요.

    야베스의 이야기는 기도의 힘에 대한 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강조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마태복음 7:7의 주 예수님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야베스의 경험은 이 원리를 생생하게 보여 주며, 하나님께서 자녀의 간절한 청원에 귀 기울이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주님은 그를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로 그를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신다"(시편 145:18)는 시편 기자의 확신을 반영합니다.

    야베스의 축복 기도는 신의 은총과 풍요라는 성경의 개념과 일치합니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물을 축복하기를 기뻐하시는 창조주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신학의 초석인 아브라함의 언약은 근본적으로 축복의 약속입니다. 따라서 야베스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열망에 대한 더 큰 이야기의 축소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영토를 넓혀 달라는 요청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에 대해 하신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는 여호수아가 자신의 유산을 주장한 담대함과 믿음은 종종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는 성경의 원리를 상기시켜 줍니다. 야베스의 기도의 이러한 측면은 우리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욕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영광을 돌리기 위해 우리의 능력을 확장하려는 열망에서 하나님께 '더 많은 것'을 구할 만큼 담대할 수 있을 만큼 담대한가요?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해달라는 야베스의 간구는 모세, 다윗, 선지자 등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에 의지하여 소명을 완수했던 성경 속 많은 인물들의 경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바울의 가르침과도 일치합니다(빌립보서 4:13). 이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의존과 모든 노력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을 구하는 것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줍니다.

    위험으로부터 보호해달라는 기도는 죄로 인해 훼손된 세상과 영적 전쟁의 현실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반영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주기도문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고통에 대한 야베스의 관심은 또한 인간의 고통과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우리의 희망에 대한 성경의 광범위한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심리학적으로 야베스의 이야기는 정체성과 목적에 대한 인간의 욕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의 기도는 자신의 이름에 담긴 부정적인 의미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변화와 새로운 정체성이라는 주제는 복음 메시지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라는 바울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고린도후서 5:17).

    역사적으로 우리는 야베스의 개인적 경험과 이스라엘의 집단적 경험 사이에 유사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야베스가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고 위험을 피하고자 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도 약속의 땅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립하고 지키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개인과 집단의 유사성은 우리 개인의 영적 여정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더 큰 이야기의 일부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야베스의 이야기는 작지만 그 안에는 기도의 힘,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열망, 믿음의 중요성, 신의 인도와 보호에 대한 우리의 의존, 하나님과의 관계가 주는 변화의 힘 등 성경의 여러 위대한 주제의 메아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더 큰 성경 이야기의 축소판 역할을 하며,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서 진행 중인 하나님의 사역의 일부로 보도록 초대합니다. 우리도 야베스처럼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는 용기와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는 믿음, 그리고 우리 개인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이라는 더 큰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볼 수 있는 지혜를 갖기를 바랍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야베스에 대해 무엇을 가르쳤나요?

    초대 교회 교부들은 지혜롭게도 종종 그리스도와 복음의 렌즈를 통해 구약의 이야기를 해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교부들이 야베스에 대해 구체적으로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성경에 대한 일반적인 접근 방식은 우리의 이해를 도울 수 있습니다.

    성경을 우화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은 야베스의 이야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을 예시한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영토의 확장은 하나님에 대한 미덕과 지식으로 영혼이 성장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리겐은 종종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영적 싸움을 강조했는데, 이는 야베스가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기도한 것과 일치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기도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묵상하면서 야베스에게서 인간의 의지와 하느님의 행동이 어떻게 협력하는지에 대한 모범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은혜에 대한 가르침은 모든 좋은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우리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야베스의 기도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적극적으로 그분의 축복을 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야베스의 이야기를 통해 신자들에게 기도의 힘을 격려했을 것입니다. 크리소스톰은 모든 신자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자주 강조했는데, 야베스의 성공적인 청원은 자신감을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격려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교부들의 일반적인 가르침에 근거한 사변적인 해석이지만, 모든 이야기에서 그리스도와 신앙의 삶을 가리키는 교훈을 찾아내는 성경에 대한 가톨릭적 접근 방식을 반영합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이 구약성서의 이름과 사건에서 종종 예언적 의미를 발견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을 주는 자"라는 뜻의 야베스라는 이름은 영적 성장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종종 수반되는 고통을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교부들의 성경에 대한 접근 방식은 심리적으로 인간의 조건에 대한 깊은 탐구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야베스의 이야기에서 한계를 극복하고 축복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을 반영한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신을 닮아가는 과정, 즉 신격화에 대한 교부들의 이해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역사적으로 초대 교회는 종종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부들은 야베스의 보호를 위한 기도에서 적대적인 환경에서 안전과 확장을 위한 교회 자체의 청원에 대한 모델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야베스에 대한 교부들의 상대적인 침묵이 그의 이야기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교부 해석의 광범위한 원칙을 이 이야기에 적용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교부들은 성경을 전체론적으로 읽으며 모든 부분에서 전체 구원 이야기의 울림을 보라고 가르쳤습니다.

    현대의 맥락에서 우리는 교부들의 접근 방식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교부들은 성경을 단독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에 대한 장대한 이야기의 일부로 읽으라고 상기시켜 줍니다. 교부들은 문자 그대로를 넘어 더 깊은 영적 진리를 찾도록 격려합니다. 그리고 항상 그리스도와 복음에 비추어 성경을 해석하라고 가르칩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야베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을까요?

    야베스의 이야기는 비록 짧지만,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깊은 지혜의 우물과도 같습니다.
    이 고대의 기도를 묵상하면서 그 안에 담긴 시대를 초월한 진리에 마음을 열고 오늘날 우리의 신앙 여정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생각해 봅시다.

    야베스는 우리에게 진실하고 담대한 기도의 힘을 가르쳐 줍니다.
    자립과 독립을 장려하는 세상에서 야베스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의존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의 기도는 소심하거나 주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감 있고 구체적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기도 생활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도 똑같이 담대하고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실망할까 봐 두려워하거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주저하고 있지는 않나요?
    야베스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신뢰하면서 우리의 가장 깊은 욕망과 필요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도록 격려합니다.

    심리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필요와 욕구를 표현하는 이 행위는 깊은 치료 효과가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되며, 이를 통해 상황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고민을 맡기는 행위는 가시적인 결과를 보기 전에도 불안을 완화하고 평안함을 증진할 수 있습니다.

    야베스의 영토 확장을 위한 기도는 반드시 물질적인 측면이 아니라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한 성장과 확장에 대한 기독교적 소명을 말합니다.
    현대적 맥락에서 이는 선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재능과 능력을 개발할 기회를 찾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안전지대를 넘어 세상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도록 도전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해달라는 요청은 우리의 모든 노력에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개인의 성취를 미화하는 문화 속에서 야베스의 기도는 진정한 성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인생의 도전을 관리하려고 할 때 경험하는 스트레스와 번아웃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가 될 수 있습니다.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야베스의 기도는 종종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삶의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안전과 안녕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것은 문제 없는 삶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돌보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불안이나 두려움으로 어려움을 겪는 많은 사람들에게 야베스의 기도의 이러한 측면은 특히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야베스의 이야기는 매우 간결하지만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미 있는 삶은 반드시 업적의 양이나 전기의 길이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진실성과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욕망이 일치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명성과 유산에 집착하는 문화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강력하게 상기시켜 줍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야베스의 상황과 우리의 상황 사이에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베스가 변화와 도전의 시대에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로 하나님께 의지한 그의 대응은 우리가 복잡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모델을 제시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요청을 들어주셨다는 사실은 기도의 효능을 믿도록 격려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지혜에 우리의 의지를 복종해야 하지만, 야베스의 경험은 하나님께서 자녀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를 통해 기도에 대한 우리의 헌신과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대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야베스의 이야기는 비록 고대의 이야기지만 현대의 상황에 강력하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담대하게 기도하고, 영적인 삶의 성장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힘과 보호에 의지하고, 기도의 힘을 믿도록 도전합니다. 우리도 야베스처럼 우리의 가장 깊은 필요를 하나님 앞에 가져갈 수 있는 용기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수 있는 지혜,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이 짧은 성경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와 주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을 형성할 수 있도록 일상 생활에서 이러한 교훈을 실천해 봅시다.

    야베스의 기도가 최근 몇 년 동안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최근 몇 년 동안 야베스의 기도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는 현상은 우리의 신중한 성찰을 촉구하는 현상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시대를 초월한 힘뿐만 아니라 현대의 특별한 영적 갈망을 말해줍니다.
    목회적 감수성과 역사적 관점으로 이 트렌드를 살펴봅시다.

    야베스의 기도가 다시 인기를 얻게 된 것은 2000년에 출간된 브루스 윌킨슨의 저서 '야베스의 기도'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은 책은 수백만 명의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야베스는 상대적으로 무명에서 많은 기독교인의 영적 수행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특별한 기도가 현대 신자들에게 그토록 깊은 울림을 준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문화적 맥락을 고려해야 합니다.
    세속화와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시대에 많은 크리스천은 하나님과 연결되고 삶에서 그분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분명한 요청과 긍정적인 결과가 보고된 기도로서, 신과 소통하는 데 있어 간단해 보이는 공식을 제시합니다.
    이 기도는 명확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에 호소하여 영적인 삶에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심리적으로 기도의 인기는 의미와 목적에 대한 깊은 욕구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간과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세상에서, 짧고 진심 어린 기도가 신의 축복과 영향력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매력적입니다.
    이는 의미 있는 영향력을 끼치고 싶고, 우리 삶이 거대한 계획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우리 본연의 갈망을 대변합니다.

    이 기도가 강조하는 신의 축복은 최근 수십 년 동안 두드러진 번영 신학의 특정 흐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신앙을 개인적인 이득을 위한 수단으로 축소하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열망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은 자녀에게 좋은 선물을 주기를 기뻐하시는 사랑의 아버지라는 성경적 진리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야베스 기도의 인기와 영적 돌파구의 열쇠로 특정 기도나 수행을 강조한 다른 운동의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방 정교회 전통의 예수 기도부터 가톨릭의 묵주기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은 오랫동안 신앙 생활의 닻 역할을 할 수 있는 간결하고 반복 가능한 기도에 끌려왔습니다.

    야베스 기도의 단순함 또한 이 기도의 매력 중 하나입니다.
    정보가 넘쳐나고 시간과 주의력이 경쟁적으로 요구되는 시대에, 핵심적인 영적 욕구를 요약한 짧고 기억하기 쉬운 기도는 일관된 기도 생활을 유지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더 정교하거나 즉흥적인 형태의 기도에 주눅이 들 수 있는 분들에게도 시작점을 제공합니다.

    야베스의 기도(역대상 4:9-10)

  •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 본문에 야베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야베스는 미국의 브루스 윌킨스가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을 쓴 이후로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이 야베스에 대해서 성경은 아주 짤막하게 유다 자손임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단 두절뿐입니다. 그래서 이 야베스가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이름과 그의 어머니의 증언을 통해서 야베스는 태어날 때 아주 고통스럽게 낳았다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야베스라는 뜻은 고통,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그 어머니가 야베스를 낳을 때 난산해서 죽을 뻔하며 낳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고통이라는 뜻으로 야베스라고 지었다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이름을 지을 때 의미나 뜻을 부여해서 지었습니다. 딸을 많이 낳는 집에서는 이제 딸은 그만 낳으라는 뜻에서 말순이, 끝순 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어느 돈에 집착하는 아버지는 아들을 낳아놓고 이름을 “돈”이라고 지은 아버지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름을 지을 때 뜻을 부여해서 짓습니다. 성경을 보면 대부분 그렇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원래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고 고쳐서 지어주셨습니다. 아브람은 그냥 “아버지”인데 “아브라함”은 “많은 사람들의 아버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 장차 아브라함을 사용하시는데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고 민족의 아버지로 사용하시려고 그의 이름을 개인적 차원에서 공적차원의 이름으로 고쳐주십니다.

    또 그 아내 사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이름은 사래였습니다. “여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래도 “사라”라고 고쳐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의 여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에도 공적인 뜻이 부여된 이름입니다. 또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발꿈치를 잡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태어 날 때 먼저 나오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후에 하나님은 그의 이름도 고쳐 주십니다. “발꿈치를 잡다”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이름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십니다. “하나님과 겨룬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야곱을 민족을 위해서 사용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민족적인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사기꾼이라는 뜻의 야곱이라는 이름으로는 안 된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름은 이렇게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야베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은 고통, 아픔,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을 때 아주 고통스럽게 낳았다 해서 그 이름을 고통이라는 뜻으로 야베스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야베스가 태어날 때 뿐 아니고 그가 자랄 때도 아주 고통스런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 말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자랐다는 말입니다. 아주 초라하게 자랐다는 말입니다. 야베스는 그 많은 백성들 중에서 가장 빈약하고 초라하고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후에 야베스는 크게 성공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야베스는 “그 형제들 보다 귀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 야베스가 후에 크게 성공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야베스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서 마침내 성공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야베스는 오늘 성공을 바라는 현대인들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서 드디어 크게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야베스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성공했습니까. 이 야베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금년 한해를 살아가면서 이 특징을 기억하고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기  대

    첫째는 미래에 대한 분명한 기대입니다. 10절을 보면 야베스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혀 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기대이고 희망이고 비전입니다. 현재 환경은 고통스럽고 불만족스럽고 어려움이 있고 초라하고 빈약하지만 그런데 야베스는 그런 환경을 보지 않고 미래를 보고 먼 훗날을 보고 앞으로의 시간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내 지역을 넓혀 주십시오..

    사람은 이 같은 미래에 대한 꿈과 계획과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이 같은 생각이나 마음 그리고 기대와 뜻이 있으면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미래를 위해서 이런 기대나 꿈이나 소망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기도하게 됩니다. 킬케골이라는 철학자는 사람으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다름 아닌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절망은 비전이 없는 삶이고 기대도 꿈도 희망도 없는 삶을 말합니다. 사람에게 이 같은 기대나 비전이 없으면 희망도 없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때로 삶을 포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두 아이를 강에 내다 버린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의 마음을 열어보면 분명 그 마음속에는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 마음 어디에도 희망의 싹이라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아이들을 강에 던져 버렸을 것입니다. 또 근래에 와서 자살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난해에는 1만 3천명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삶을 포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딜 봐도 희망이 없으니까 에라 모르겠다 하고 약을 먹고 불을 질러 죽고 철길에 떨어져 죽고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을 것입니다. 이 무소망이 문제입니다. 절망이 문제입니다. 내년은 경제가 더 어렵다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지금 지레 겁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새해가 되었는데도 별로 반가운 것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이 기대와 믿음과 소망과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야베스는 꿈과 기대와 소망과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면 내 지역을 넓혀 주십시오.” 이 꿈이 있으면 현재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모두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는 반드시 이 희망과 꿈과 비전과 기대와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야베스에게는 이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야베스는 그 꿈을 이루어 형제들 가운데서 가장 유력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꿈과 기대와 비전이 있습니까. 씨를 심으면 반드시 싹이 나듯이 기대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뜻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새해에는 이런 꿈과 기대를 가지고 시작하시길 기원합니다.

    기  도

    10절을 보면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지금 야베스가 처한 환경은 어려움과 고난과 힘든 환경이었습니다. 환경이 어려우면 살아가기가 참 힘듭니다. 배고픔의 고난, 열악한 환경에서 자랄 때의 아픔, 추위, 더위는 상당히 무섭습니다. 여러분, 자랄 때 방학이 얼마나 반가웠습니까. 여름방학, 겨울방학 얼마나 신나게 기다려집니까. 그런데 오늘 가난한 아이들은 방학이 두렵습니다. 방학이 되면 학교에서 먹던 점심을 굶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그렇게 아픈 것입니다. 오늘 고시원, 하숙집, 셋방으로 전전하면서 살아가는 기댈 곳 없는 젊은이들은 남들의 평안함을 보게 되면 자신의 모습은 더욱 초라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삶에는 먼 훗날이 잘 안보입니다. 오늘 현재가 너무 힘겹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낙심하게 되고 도중에서 삶을 포기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베스는 참 대견합니다. 그가 처한 환경은 열악하고 가난하고 고통스럽고 낙심의 요소들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꿈이 있었고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베스는 그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를 도우사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소서”. 야베스는 환경을 탓하지 않고 꿈을 이루려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인에게는 이런 기도하는 복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생각해 보면 참으로 굉장한 복입니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조지 뮬러는 고아를 양육하다가 먹을 것이 떨어지면 얻으러 가지 않고 기도 굴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교섭하고 보조청원을 해야 하는데 그는 기도 굴로 들어갔습니다. 기도하고 나오면 먹을 것을 실은 마차가 왔다는 것입니다.  

    어느 건축가의 아내는 남편이 집을 짓는데 지어놓은 집이 팔리지 않으면 남편은 아내에게 빨리 산에 갔다 오라고 안달했습니다. 그러면 아내는 짐을 싸들고 산으로 가서 기도했습니다. “집이 팔리게 하옵소서, 이 집이 팔려야 선교지에 보내던 선교비를 제때 보낼 수 있습니다. 팔리지 않으면 선교지에 보낼 돈이 없습니다, 그러면 모두 굶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내려오면 집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 기도에 명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매사 선교비 보낸다고 거짓말하고 기도하면 안 됩니다.

    다윗은 어려울 때 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쁠 때 하나님께 기도했고 감사할 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예수님도 가장 힘들 때 산으로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십자가 지기 전날 밤에도 산에 올라가 밤새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던 때도 먼저 산으로 올라가 40일 금식기도하고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복이고 은혜이고 특권입니다. 어떤 때는 답답할 때 골방에 들어가 조용히 기도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조용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격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조용히 기도해서는 시원찮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산에 가서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소리를 높여서 주여, 여호와여, 아버지여 하고 기도하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확신도 주어집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할 수 있다는 것도 복입니다. 우리들이 어디 가서 누굴 붙잡고 그렇게 부르짖을 수 있습니까. 성경은 “네 입을 크게 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부르짖으면 응답하겠다는 메시지입니다. 야베스는 그 어려운 환경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야베스가 그 상황에서 기도할 때 조용조용히 기도했겠습니까. 아마 그는 큰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했을 것입니다.

    어느 시부모가 며느리 자랑을 했습니다. 아들집에 가느라 미국엘 갔습니다. 며느리가 참 잘하더라고 합니다. 방문을 마치고 오는데 며느리가 편지 한통을 주면서 비행기 안에서 보라고 하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편지를 뜯어보니까 그렇게 써 있더라고 합니다. “저는 부모님을 만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저희들을 찾아주셔서 저희들에게는 상당한 용기가 되었습니다, 부모님을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하고 써 있습니다. 그 며느리가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그 며느리가 결혼 전에 결혼을 위해서 상당기간동안 기도했다고 합니다. 기도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권사 시어머니가 아닌 집사 시어머니를 만나게 해 주시고, 둘째는 가슴이 넓은 남편을 만나게 해 주시고, 세 번째는 가능하면 미국에 가서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내용이 그대로 이루진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 마음이 만족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신앙인에게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이고 은혜입니다. 그래서 야베스는 지금 처한 환경을 원망하고 탓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근심에서 벗어나 평안하게 해 주십시오.”이것이 희망과 꿈과 비전의 근거이고 소망입니다. 이것이 있는 사람은 오늘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다 이길 수가 있습니다. 장래를 바라보며 비전이 있고 꿈이 있고 기대가 있는 사람은 기도하게 됩니다. 새해는 여러분의 가슴에, 입술에 이 기도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응   답

    야베스의 기도는 마침내 응답을 받습니다. 9절을 보면 “야베스는 그의 형제들보다 귀중한 자라”고 했습니다. 10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응답하셔서 만족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뜻과 기대를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야베스는 아주 초라하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형제들 가운데서 가장 귀중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이 응답받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 나라를 걱정하면서 성전에서 뜨겁게 기도를 합니다. “이 백성을 기억하소서”. 그때 환상 속에서 하늘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하늘 보좌가 나타납니다. 그 보좌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옷자락이 자신이 앉아있는 성전지붕을 덮은 것을 보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뜻은 “걱정하지 마라, 내가 이렇게 지키고 있다" 그 말입니다. 그것이 응답의 생활입니다. 기도생활에는 이런 응답받는 생활이 주어져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한나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성전에 나가 “나에게 아들을 주세요, 주시면 나실 인으로 바치겠습니다”하고 기도했습니다. 여기 나실인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실인이 되면 평생 독주를 마시면 안 되고 몸에 병들어도 약을 먹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죽은 시체를 보거나 만져도 안 됩니다. 그 말은 어머니가 죽어도 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한나는 그래도 내 몸으로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절실하고 간절한 기도는 아이없는 부인이 아이를 달라고 기도하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고 절실하겠습니까. 한나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으면 음성도 없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로 기도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엘리 제사장이 그 모습을 보고 오늘도 술 취했구나 하고 제발 술을 끊으라고 큰소리로 책망을 했을 정도입니다. 그때 한나의 심정을 이해한 엘리가 이렇게 말합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17).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아들 사무엘을 낳지 않습니까. 그것이 응답의 생활입니다.

    이제 새해가 되었습니다. 새해에 우리 모두 야베스 처럼 분명한 꿈과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환경을 탓하고 원망하고 현실만 바라보면 가지고 있던 꿈도 상실되기 쉽습니다. 현실만 보면 그 어디에도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꿈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꿈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대와 꿈을 갖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또 모든 기도에는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응답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새해에는 이렇게 응답받고 꿈을 이루고 성취하며 살아가는 축복의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짧지만 강력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역대상 4:9-10에 기록되어 있으며, 야베스라는 인물이 하나님께 드린 간절한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야베스는 자신의 이름이 고통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삶이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예언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야베스의 삶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우린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그는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긍정적으로 마주하는 자세가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간곡하게 하나님께 고하며 하나님께 의지하고 구했다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어떤 기도인가요?

    야베스의 기도는 가족 계보를 정리한 역사적인 구절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역대상 4:9-10).

    브루스 윌킨슨 박사 (Dr. Bruce Wilkinson ) 데이빗 콥 (David Kopp )의 베스트셀러 야베스의 기도

    내 삶을 기적으로 채우는 기도의 원리 (The Prayer of Jabez: Breaking Through to the Blessed Life: 2000)의 출간으로 인해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야베스가 유다의 자손이었다는 것, 존귀한 자였다는 것, 그리고 고통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어머니가 “야베스” (“비통해하다” 혹은 “슬픔을 만드는 사람”의 의미)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것 외에, 야베스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야베스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보호와 축복을 구하며 울부짖습니다.
    “슬픔의 사람” 야베스는 언어 유희를 사용하여, 자기의 이름을 상기시키고 예감하게 하는 슬픔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역대상 4:10에 있는 야베스의 기도는 네 가지 긴급 요청을 포함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축복
    야베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모든 축복의 근원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은총을 구합니다.
    틀림없이,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이 간구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창세기 22:17).

    둘째, 지경의 확장
    야베스는 자신이 도전하는 모든 시도에서 승리와 번영을 얻고, 자신의 삶의 지경이 넓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 손의 도우심
    이는 야베스가 자신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구하는 방식입니다.

    넷째, 환난으로부터의 보호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마태복음 6:9, 13).
    야베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자신의 보호자로 여깁니다.

    기도 안에 담긴 야베스의 목적은 슬픔에서 자유로워지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기도를 들으셨고, 응답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혜를 구했던 솔로몬의 겸손한 기도 (열왕기상 3:5-14)와 같이, 축복을 구했던 야베스의 경건한 기도 또한 응답 받았습니다.
    야베스가 누린 성공은 태어날 때의 슬픔보다 큰 것이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야베스의 이름을 극복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우리 삶 속에서 기도를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하는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우리는 필요한 때에 도움을 얻기 위해서 늘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고, 기도 제목들을 가지고 곧장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4:16).
    한나, 요나, 히스기야, 바울의 기도 – 그리고 물론 우리 주님의 본이 되는 기도 (마태복음 6:9-13) –와 함께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지하며 겸손과 믿음으로 지극히 크신 이에게 나아가는 아름다운 본을 보여줍니다.


    “야베스가 하나님께 자신의 필요를 구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다 들어 주셨다.
    야베스처럼 경제적 풍요와 마음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엄청난 복을 쌓아놓으셨는데,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과연 야베스의 기도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역대기의 주제 안에서, 구문에 대한 성경적 분석을 통해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우리의 삶에 적용을 해야 합니다.
    역대기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의 수는 많지 않았습니다.
    무너졌던 성전을 다시 건축했고 허물어진 성벽을 다시 세웠지만, 이전의 영광에 비하면 초라할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맞나?
    이 땅이 약속의 땅이 맞는 걸까?
    이런 의문을 가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상들과 맺어주셨던 하나님의 언약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책이 역대기입니다.
    우리는 약속의 땅에 택하신 백성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중심으로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들어있는 1-9장의 계보 역시 언약의 두 축인 자손과 땅에 대한 관점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온 이스라엘의 계보와, 지파별-가문별로 거주하는 땅에 대한 기록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약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야베스가 어떤 사람일까요?
    일단 기록된 위치로 봐서 유다 지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3절에 그나스와 그의 아들 옷니엘, 15절에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그의 자손 등이 나열된 것으로 봐서는 그들과 비슷한 시대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베스는 여호수아에서 사사기로 이어지는 가나안 정복시대의 사람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2:55절을 보면 야베스라는 성읍이 나오는데, 이것이 성경에서 유일하게 기도의 사람 야베스와 같은 고유명사가 사용된 구절입니다.

    아마도 이 야베스라는 성읍을 세운 사람이 바로 4장의 야베스라고 여겨집니다.
    야베스가 세운 도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필사하는 서기관들이 많이 거주했고, 그들이 레갑 가문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5장의 기록에 따르면 레갑 가문은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중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것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기록들을 통해 야베스가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야베스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없고, 이름을 어머니가 지었다는 것을 가지고 아버지가 없는 사생아라고 보는 것은 근거가 약합니다.
    원래 역대상 4장은 자손이 아니라 땅과 성읍을 중심으로 기록한 계보라서 부모 자식 관계를 다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야곱의 열두 아들은 모두 레아와 라헬 두 어머니가 이름을 지었습니다.
    어머니가 수고로이 낳았다 해서 난산이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으로 보는 것도 근거가 약합니다.
    선악과 사건 이후로 모든 여자는 자식을 낳을 때 수고로이, 고통스럽게 낳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모든 남자는 먹고 살기 위해 수고를 해야 합니다.
    언약의 두 요소인 자손과 땅. 여기에 관련된 모든 일, 다시 말하면 자손을 낳고 땅의 소산을 얻기 위해서 사람은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이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니 야베스에 대한 9절의 설명은 야베스 만의 특별한 배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타락한 인생의 보편적인 상황에 대한 기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고 했습니다.
    고통 중에 태어난 보편적인 인생의 전형인 야베스가 다른 형제보다 귀중한 것은 그의 기도 때문인가 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하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호칭 역시 언약에 기반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 주신 것은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후인 창세기 32:28장에 처음 기록되었는데,
    특히 35:10절이 중요합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올 때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복을 주시고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신 겁니다.

    바로 이어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이스라엘과 그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곧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야베스가 언약의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내용을 봅시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예전의 개역 한글에는 “원컨대 주께서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하사”
    이 구절도 역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언약을 기반으로 하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했다가 양으로 대신했던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창세기 22:17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여기서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라고 번역된 원문에 사용된 어휘들이 야베스의 기도의 첫 문장 “주께서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하사“와 똑같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복의 내용은 역시 자손과 땅 이라는 언약의 두 요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민족의 번성, 약속의 땅 가나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의로운 나라를 이루시기로 하셨습니다.
    이렇게 세워질 나라는 그 자체가 복이며, 동시에 세상에 복을 주는 나라가 됩니다.
    이것이 타락한 세상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 언약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선포될 때 더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집니다.
    18: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죄로부터 벗어나 의와 공평을 행하는 나라.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서 온 세상이 죄로부터 회복될 것입니다.
    결국 야베스가 구한 복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복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 하신 가나안 땅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 복을 위해 야베스가 구한 첫 번째 구체적인 기도 제목은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입니다.

    개역 한글로는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이 말도 성경에서 의미가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 표현입니다.

    신명기 19: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혀 네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땅을 다 네게 주실 때”

    “네 지경을 넓힌다”는 말은 “네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차지한다”는 의미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출애굽기 34:24 “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의 대적을 물리치시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지경을 넓히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맺어주신 언약의 핵심입니다.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나요?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각 지파별로 가나안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여호수아 2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세겜에서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땅을 모두 차지한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 사람을 다 몰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지배를 당하는 사사 시대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땅을 온전히 차지하지 못한 것은 불순종의 결과였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야베스는 기도했습니다.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해 주십시오.”

    야베스는 어쩌면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고 말했던 갈렙과 같이 가나안을 물리치고 그 땅을 취한 용사일 겁니다.

    나의 지경을 넓혀 달라는 야베스의 기도는 “지금은 땅이 열 평 밖에 없지만 앞으로 100평을 갖게 해 주세요.” 이런 개념이 전혀 아닌 겁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부동산이 많아지게 해 달라, 사업이 확장되게 해달라,

    꼭 돈이 아니더라도 더 많은 꿈을 꾸라. 이상을 크게 가져라.” 이렇게 적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지극히 자의적인 적용입니다.

    야베스의 두 번째 기도 역시 언약에 근거한 것입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당시의 형제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난을 당하고 근심을 겪는 이유는 불순종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은 진멸하라 했던 가나안 사람들을 살려두고, 오히려 그들이 섬기는 태양신, 비의 신이라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농사가 잘 되어 부자가 되길 바랬던 거죠.
    그 결과 이스라엘은 바로 그 가나안 사람들에 의해서 노략을 당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악을 행하다가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기는 환난을 겪습니다.
    가나안 사람이 두려워 근심 속에 살았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야베스는 악을 버리고 죄를 멀리 함으로서 환난과 근심에서 벗어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우상이 아닌 하나님의 손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니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믿음의 사람이 하는 기도는 모두 동일한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나의 뜻으로 삼고 내 뜻을 하나님의 언약 앞에 내려 놓는 것.”
    내가 처한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세상의 흐름에 동화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성경적인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바램을 구하지 않아서 복을 못 받은 것이니 강력하게 구해라.
    자산이 늘어나기를 구하고, 사업이 확장되기를 구하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이 없다면서 부동산을 사놓고 오르기를 기도하고, 주식을 사놓고 오르기를 기도하면 하나님 입장에서 참 난처하실 겁니다.

    옳고 그름을 모르는 채로 잘못된 관점의 기도를 계속 하다보면 잘못된 신앙의 체계가 몸에 굳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고 깨달은 만큼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든 영역이 타락했기 때문에 조금만 방심하면 신앙은 바로 변질됩니다.
    지속적으로 모든 부분에서 말씀의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돌아보고 삶을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복은 타락한 세상의 회복을 위한 복입니다.
    죄와 악은 고통을 가져오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온전한 안식을 줍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그러한 언약의 복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야베스와 같은 삶을 살고, 야베스와 같이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늘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성령님의 은혜로 말씀을 깨달으며, 그 말씀에 순종하여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개역개정,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새번역,18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 ㉤그, '페트로스' ㉥그, '페트라' ㉦그, '하데스의', 곧 '죽은 자들이 모여 있는 세계의' ㉧또는 '세력이'.

    우리말성경,18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니 지옥의 문들이 이것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개역개정,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새번역,19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우리말성경
    ,19 내가 네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줄 것이다. 무엇이든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묶다(데오. dĕō) δέω 스트롱번호 1210

    1. 묶다.   2. 마 13:30. 3. 마 12:29
    발음 [ dĕō ]
    관련 성경  /  결박하다(마 12:29, 요 18:22, 행 22:5), 묶다(마 13:30), 매다(마 16:19, 18:18, 막 5:3), 매이다(마 16:19, 눅 13:16, 딤후 2:9), 잡다(눅 6:17), 체포되다(막 15:7), 동이다(요 11:44), 싸다(요 19:40), 구류하다(행 24:27), 매임을 받다(행 20:22), 매임을 당하다(골 4:3).

    풀다(루오. lüō) λύω
    스트롱번호 3089

    1. 풀다.  2. 깨다. 3. 열다
    발음 [ lüō ]
    관련 성경  /  버리다(마 5:19), 풀다(마 16:19, 눅 19:33, 행 2:24), 헐다(요 2:19), 범하다(요 5:18, 7:23), 폐하다(요 10:35), 벗다(행 7:33), 놓아주다(행 24:26), 깨어지다(행 27:41), 놓이다(계 9:14), 풀어지다(벧후 3:10,11,12), 멸하다(요일 3:8), 떼다(계 5:2, 5).



    구약성경 열세번째장 역대상 배경

    역대상은 아담에서 출발을 해 사울 왕가의 몰락,다윗왕 이야기와 솔로몬이 등극하는 그부분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역대상 1장 요약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이르는 이스라엘의 계보와 족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자손들의 계보와 족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이삭의 아들에서부터 자손들의 계보와 족보에 대해서 말합니다.에돔 땅에서 살아가는 원주민과 에돔을 통치하는 왕들의 족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2장 요약

    이스라엘 열두 아들의 이름,유다의 아들들과 그 자손들의 이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다윗의 직계 존속과 그의 방계 존속과 형제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헤스론의 아들들,자손들 이름,장남 여라브엘의 자손들의 이름,갈렙의 아들과 그 자손들의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3장 요약

    다윗이 헤브론과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과 딸의 이름,솔로몬 왕의 아들들과 그들이 낳은 자손의 이름,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의 자손들과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4장 요약

    유다의 아들들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여러 족보와 후손의 이름,유다의 아들인 셀라의 자손과 이름,시므온 자손의 이름과 그들이 살았던 지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5월 2일(금) 역대상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담 셋 에노스(1:1)

    아담, , 에노스
    Adam, Seth, Enosh

    아담은 인류의 시조가 됩니다.
    아담이란 이름은 "인간" 또는 "인류"라는 뜻입니다.
    셋이란 이름은 "대신" 또는 "임명하다"라는 뜻입니다.
    에노스라는 이름은 "연약한 사람" 또는 "죽어야 할 존재"라는 뜻입니다.


    아담(Adam) אָדָם

    이름의 뜻과 간략한 소개

    '아담(Adam)'은 히브리어로 '흙', '땅'을 의미하며, 인간이 흙으로 창조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인간으로,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존재입니다.
    아담은 하와(Eve)와 함께 에덴동산에 거하며 하나님과 교제했으나, 금지된 선악과를 먹고 죄를 범하여 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는 아벨, 가인, 셋 등 여러 자녀의 아버지로서 인류의 조상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생애는 창세기 1장부터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창조와 에덴동산 생활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첫 인간으로, 에덴동산에 거하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렸습니다(창세기 1:26-27).
    그는 하나님께서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자유롭게 먹을 수 있도록 허락받았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금지되었습니다(창세기 2:16-17).
    아담은 또한 동물들을 이름 지으며, 하나님이 맡기신 창조물 관리의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와와 짝을 이루어 가정을 이루었습니다(창세기 2:18-25).

    2. 죄의 타락과 추방

    아담과 하와는 뱀(사탄)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죄를 범했습니다(창세기 3장).
    이 사건으로 인해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죄와 사망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동산에서 추방하시고, 남자는 땀을 흘리며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고, 여자는 출산의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창세기 3:16-19).
    그러나 하나님은 이 과정에서 인류를 구원할 희망의 약속(메시아의 예언)을 주셨습니다(창세기 3:15).

    3. 가족과 후손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 밖에서 자녀들을 낳아 키웠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살해하는 비극을 초래했습니다(창세기 4장).
    이로 인해 아담의 가정은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하나님은 셋(Seth)을 주셔서 경건한 계보를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셋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창세기 4:26).

    4. 긴 생애와 죽음

    아담은 930세까지 살면서 많은 후손을 남겼습니다(창세기 5:5).
    그러나 그의 죄로 인해 모든 인류는 죄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구원의 필요성이 강조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기록된 자연적 죽음으로, 죄의 결과로 인한 인간의 유한성을 상징합니다.

    5. 아담의 타락과 인류의 죄(구속사적 의미)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의 불순종은 단순히 개인적인 범죄에 그치지 않고, 전 인류에 죄와 죽음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기독교 신학에서 "원죄(Original Sin)"로 정의되며,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이 죄의 본성을 물려받아 죄인이 된다고 설명됩니다(로마서 5:12).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 태어나며,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인류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 없이는 영원히 죽음과 심판 아래 놓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 전체는 이러한 타락한 상태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아담의 타락은 인류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 위해 중보자이신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명백히 합니다.

    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회복

    아담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첫 번째 사람으로, 타락의 상징적 인물이지만 신약성경에서는 그와 대조되는 두 번째 아담(Second Adam)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고린도전서 15:22, 45).
    아담이 불순종으로 인해 죄와 죽음을 세상에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의 순종과 희생을 통해 인류에게 생명과 구원을 제공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아담이 실패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빌립보서 2:8).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를 설명하며,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로마서 5:19)고 기록하였습니다.

    아담이 인류에게 육체적, 영적 죽음을 가져왔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영생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러한 구속의 사역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하나님이 친히 해결하신 사건입니다.

    이로써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서 인류의 타락과 구속을 상징하는 중요한 인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담을 통해 죄가 들어왔고 예수를 통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이 구속사의 흐름은 성경의 핵심 주제 중 하나입니다.

    교훈

    1.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책임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존재로 설계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과 계획 속에 존재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피조세계를 관리할 책임이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맡겨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2. 순종의 중요성

    아담의 타락 사건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아담과 하와의 작은 불순종은 인류 전체에 죄와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며, 불순종은 필연적으로 심판과 고통을 초래합니다. 이 교훈은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중요함을 일깨웁니다.

    3. 죄와 구원의 필요성

    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은 즉시 구원의 계획을 언급하셨습니다(창세기 3:15).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구속의 계획을 준비하고 계심을 나타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 교훈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강조합니다.

    4. 책임과 결과의 원리

    아담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죄는 그 자신뿐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타인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책임 있는 선택을 해야 하며, 그 결과를 감당할 준비가 필요합니다.

    5. 회복과 희망

    아담의 생애는 비록 죄로 인해 시작된 인류의 고난과 죽음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회복의 약속이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과 소망을 제공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죄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셋(Seth)  שֵׁת

    개요

    셋은 아담과 하와의 세 번째 아들이다.
    아벨이 죽자 아벨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주신아들이다.
    셋의 뜻은 ‘대신함’ ‘대체됨’이란 뜻이다.
    셋은 에노스를 낳고 912세에 죽는다.
    셋의 생에는 설명되어 있지 않고 에노스를 낳고 에노스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부다.

    셋의 출생과 의미

    셋의 출생은 두 번에 걸쳐 소개된다.
    한 번은 가인의 후손을 마치고 곧바로 소개한다.

    창세기 4:25~26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두 번째 언급은 5장에서 아담의 족보 안에 셋이 아담의 아들로 소개된다.
    만약 창세기 4장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큰 흐름 속에서 보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셋의 두 번째 언급은 별다른 점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가인과 아벨의 족보에서 빠짐으로 셋이 곧바로 이어가고 있다는 점은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창세기 5: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세기 5: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세기 5: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세기 5: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세기 5: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세기 4장과 5장에서 셋의 자리는 확실히 가인과 아벨의 빈 공백을 채워 주고 있다.
    우리는 셋의 출생애를 통해 몇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은혜를 끊지 않으신다.

    비록 가인과 아벨의 일로 아담의 자손들이 끊이기지만 셋을 허락하심으로 이 땅에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은혜를 베푸신다.
    타락 이후의 생육과 번성은 양면성을 가진다.
    축복인 동시에 저주다.
    이것은 창세기 11장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악은 합할수록 더욱 악해지고, 선을 합할수록 더욱 선해진다. 마치 물감이 합하면 검어지지만 빛이 합하면 흰색-무색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저주와 축복의 양면성

    셋의 출생과 생애는 확실히 저주 안에 복이 있고, 복 안에 저주가 있음을 보여준다.
    가인의 저주와 아벨의 죽음은 아담의 후손들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지만 셋을 주심으로 이어가게 하신다.
    셋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팔백칠 년을 더 살다 912세에 죽음을 맞이 한다.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생명을 통해 세대와 세대가 끊이지 않게 이어가게 하신다.
    하지만 자신 또한 죽음을 맞이함으로 죄의 값이 사망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미술 분야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물감은 감산혼합, 빛은 가산혼합이라 부른다.

    가산 혼합 :
    빛을 가하여 색을 혼합할 때, 혼합한 색이 원래의 색보다 밝아지는 혼합.
    빛의 색은 겹칠수록 밝아지는데, 만들어진 색은 원래의 빛의 밝기를 합한 것이 된다.
    컬러텔레비전을 비롯한 조명 따위에 이용된다.
    적색(赤色), 녹색(綠色), 청색(靑色)을 기본 삼원색(三原色)으로 쓰며, 이 혼합에서의 보색(補色)은 두 가지 색을 합하여 백색(白色)이 되는 경우를 말한다.

    감산혼합 :
    혼합색이 원래의 색보다 명도(明度)가 낮아지도록 색을 섞는 방법.
    시안(cyan), 마젠타(magenta), 황색(黃色)의 각 비율을 변화시킴으로써 여러 가지 색을 만들 수 있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에노스(Enos) 'אֱנוֹשׁ

    에노스(Enos)는 창세기 5장에서 셋의 아들로 언급되는 인물로, 성경에서 중요한 신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인간의 나약함과 연약함을 상징하며, 그의 생애는 인류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냅니다.

    1. 에노스의 이름 : 히브리어 의미와 풀이

    에노스(Enos)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אֱנוֹשׁ' (에노시, Enosh)로 표기되며, 그 뜻은 '인간', '사람', '연약한 자'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 이름은 인류의 나약함과 필멸성을 상징하며, 인간이 본질적으로 죄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인간의 연약성을 강조할 때 에노시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아담'이란 단어는 보통 사람을 강조할 때 사용합니다. 

    에노스의 이름은 성경에서 인간의 한계와 죄성을 강조하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103편 15절에서 "인생은 풀과 같으며, 그의 영화는 들의 꽃과 같도다"라는 구절에서 사용된 '인생'이라는 단어가 바로 '에노스'와 같은 히브리어입니다.
    이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덧없고 연약한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582. 에노쉬(’ĕnôwsh. אֱנוֹשׁ)

    אֱנוֹשׁ 스트롱번호582
    1.

    사람.

    2.

    일반적으로는 전 인류에 대한 집합명사로 쓰임

    3.

    무리

    발음 [ ’ĕnôwsh ]
    어원
    605에서 유래
    구약 성경
    42회 사용
  • 관련 성경
    ☞사람(창6:4, 삼하1:11, 겔9:2), 남자(창13: 8), 동행자(창24:54,59, 삼상18:27), 백성(창 26:7, 수8:14, 왕상21:13), 주민(레18:27), 불량배(신13:13), 쌍방(신19:17), 무리(수9:14, 삿19:25, 왕하4:40), 지휘관(수10:24), 후손 (삿9:28), 대장부(삼상4:9), 난봉꾼(대하13: 7), 인생(욥4:17, 시144:3), 신하(잠25:1), 인구(전9:14), 족속(사45:14), 장정(렘18:21), 남편(렘29:6, 44:19, 겔16:45), 친구(렘38:22).

  • 인생(*, 에노쉬) - 히브리어 성경은 인간을 가리킬 때 '에노쉬'와 '벤아담'(*)을 사용하는데(68:18; 신 32:26; 잠 23:28; 욜 1:12), 특히 태어나지만 반드시 한번은 죽는 존재로서의 유한한 인간을 뜻할 때 주로 '에노쉬'을 사용한다.
    한편, '에노쉬'를 '최선의 상태인 인간'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 별로 설득력이 없다(Davies).

    벤 아담

    בֵּן 스트롱번호1121
    1.

    아들

    2.

    손자의 아들

    3.

    복수 בָּנִים

    발음 [ bên ]
    어원
    연계형 בֶּן־, 복수 בָּנִים, 복수 연계형 בְּנֵי,1129에서 유래
    구약 성경
    4891회 사용
    אָדַם 스트롱번호119
    1.

    얼굴이 붉어지다

    2.

    푸알형 분사 םְאָדָּם : 붉어지다.

    3.

    붉게 물들다

    발음 [ ’âdam ]
    구약 성경
    10회 사용

  • 관련 성경
    ☞붉다(애4:7, 나2:3, 잠23:31).

  • 󰃨 그 날이 풀과 같으며 - 본 회화적 묘사는 인간 존재 본질의 일시성을 강조한다. 유사 표현으로는 90:5; 욥 14:2; 사 40:6, 7; 51:12등이 있다.

    󰃨 꽃과 같도다 - 곧 시들어버리는 것이 특징인 꽃이 인생의 영화(榮華)와 같다는 말이다. 여기서 '꽃'은 '치이츠'(*)로서 그 문자적인 뜻은 '빛나는 것' 혹은 '반짝이는 무엇'이며 봄철에 침울한 광경을 밝고 다채로운 색상으로 바꾸어버리는 들에 핀 꽃들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된다.



    따라서, 에노스의 이름은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그분의 도우심과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그의 이름이 주는 의미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는 깊은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2. 에노스의 생애

    에노스는 아담과 하와의 셋째 아들 셋의 아들로, 그의 탄생은 창세기 4장 26절과 창세기 5장 6-11절에서 언급됩니다.

    "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 (창세기 4:26)

    에노스의 생애는 그의 탄생 때 중요한 신앙적 전환점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4장 26절에 따르면, 에노스가 태어난 시점에 사람들은 처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인간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예배하며, 그분을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에노스의 생애는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많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인류가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는 중요한 신앙의 시작을 알리는 시대였습니다. 셋의 계보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신앙적 행위가 시작되었으며, 에노스는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에노스는 905세까지 살았으며, 그의 생애 동안 인류는 점차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께 나아가는 삶을 시작했습니다(창세기 5:11).

    3. 에노스 이야기의 교훈

    에노스의 짧은 기록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신앙적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가 등장한 시점에 사람들이 처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은, 에노스의 생애와 그가 상징하는 것이 신앙의 회복과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작을 의미함을 보여줍니다.

    1)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돌아옴

    에노스의 생애와 그가 태어난 시점은 인류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예배하기 시작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냅니다. 그의 이름이 '연약함'을 상징하는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와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류가 자신들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신앙 생활에서 회개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켜줍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분의 은혜를 구할 때 우리는 참된 회복과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기도와 예배의 시작

    에노스가 태어난 때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기도와 예배가 시작된 사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다시 교제하시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그들의 마음을 열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예배와 기도가 신앙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은 그분과의 관계를 맺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시작된 이 신앙의 행위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생활에도 여전히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분의 도우심과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기도와 예배는 단순한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3)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은혜

    에노스의 이름이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은 인간의 필멸성과 한계를 상기시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성과 연약함을 지닌 존재로,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온전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인류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시작했음을 상징합니다.

    이 교훈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분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분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에노스의 이야기는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4. 결론

    에노스는 성경에서 셋의 아들로, 그의 이름은 '연약한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는 인류가 처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예배하기 시작한 중요한 시기로 기록됩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으며, 이는 인류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신앙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에노스의 이야기는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또한, 기도와 예배는 신앙 생활에서 필수적인 요소임을 상기시킵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으며,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에노스의 생애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시작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오늘날에도 계속되며,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담(Adam)은 '흙'이란 뜻의 히브리어 '아다마'와 동일한 어원을 가진 이름으로서 그 의미는 '사람'입니다(창 1:27).

    그런데 역대상의 족보는 유다 왕국의 위상과 기원을 밝히기 위해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민족의 시조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지 아니하고 인류의 시조인 아담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은 유대민족의 기원이 되시는 하나님은 온 인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과 모든 종족은 유일한 기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셋(Seth)은 '택함을 받은 자', '대신 줌'이란 뜻입니다.
    셋은 가인에게 살해당한 아벨 대신 하나님께서 아담의 가정에 주신 선물이었습니다(창 4:25).
    본 족보에서 아담의 맏아들 가인과 차자(次子) 아벨이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아벨은 후사가 없었기 때문이며, 가인은 불경건한 자였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생략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창 4:1-12).

    에노스(Enosh)는 '약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특기할 사실은 그의 시대에 여호와께 대한 최초의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창 4:26).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은 아담의 타락(창 3장) 및 가인의 범죄 이후 죄악에 대하여 무기력해진 사람들이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는 죄의 유혹을 이기며 살 수 없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런데이같은 점은 날이 갈수록 죄악이 관영(貫盈)해지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에노스는 셋이 105세에 낳은 아들(창 5:6, 대상 1:1)로, 아담 이후 235년에 출생했다.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았고 815년간 자녀를 낳았으며, 905세에 죽었다(창 5:9-11). 에노스는 아담과 695년을, 노아와는 84년을 함께 지냈으며, 그의 나이 752세에 에녹의 승천을 목격했다.
    성경은 셋이 자기 아들을 낳고 ‘에노스’라고 이름 지은 동기에 대해 ‘그 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창 4:26). 이는 쉽게 말해 공식적인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가인과 아벨도 제사를 드린 것으로 보아 이미 제사 드린 지는 오래되었으나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뜻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기 위한 규칙적인 예배 생활을 시작했음을 말한다. 에노스는 스스로 구원하기에 무능하고 나약한 전 인류를 예표한다.

    이스라엘의 족보 (1-9장)

    역대상은 아담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의 족보를 나열하며, 이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나타냅니다.

    1.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1장) :
    첫 사람 아담부터 아브라함의 족보를 기록합니다.
    2. 이스라엘의 12지파 (2-8장) : 야곱의 12아들(12지파)의 족보를 상세히 나열하며, 각 지파의 후손들을 기록합니다.
    3. 귀환한 백성들의 족보 (9장) :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의 족보를 기록하며, 귀환 이후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다윗 왕의 통치 (10-29장)

    역대상의 주요 내용은 다윗 왕의 통치와 그의 종교적 업적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1. 사울 왕의 죽음 (10장) :
    사울 왕의 죽음과 그의 왕국의 몰락을 기록하며, 다윗 왕의 등장을 예고합니다.
    2. 다윗 왕의 등극과 통치 (11-29장) : 다윗 왕의 통치 기간 동안의 업적과 사건들을 기록합니다.
            예루살렘 정복 (11-12장) :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의 수도로 삼는 과정입니다.
            다윗의 위대한 군사들 (11-12장) : 다윗을 도운 군사들과 그들의 큰 공로를 나열합니다.
            언약궤의 반환 (13-16장) :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과정과 예배의 재건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17장) :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과 다윗의 왕조에 관한 약속입니다.
            다윗의 군사 활동과 정치적 업적 (18-20장) : 다윗의 승리와 정치적 확립을 기록합니다.
            인구 조사와 그 결과 (21장) : 다윗의 인구 조사의 잘못과 그에 따른 재앙,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되는 과정입니다.
            성전 건축 준비 (22-29장) : 다윗이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과정과 관련된 지시사항입니다.

    ​주요 사건 및 인물

    역대상은 다윗 왕의 통치를 중심으로 중요한 사건들과 인물들을 기록합니다.

    1. 다윗의 승리와 패배 : 다윗의 승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한 것이며, 그의 패배는 그의 실수와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2. 예배와 찬양의 재건 :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예배와 찬양을 재건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3. 성전 건축 준비 : 다윗은 하나님께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솔로몬이 이를 행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다윗은 이에 따라 성전 건축을 위해 필요한 자재와 인력을 준비했습니다.

    적용

    1.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라

    역대상에서 다윗 왕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옮기고 예배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인도함을 구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그분께 기도하며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2. 예배와 찬양을 중심에 두라

    다윗 왕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예배와 찬양을 재건한 것은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삶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현대 신앙인들도 예배와 찬양을 삶의 중심에 두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을 더욱 깊이 있고 의미 있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3. 실수를 인정하고 회개하라

    다윗 왕의 인구 조사와 그에 따른 잘못을 통해 우리는 실수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 중요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수를 겸허히 인정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4.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라

    다윗 왕은 성전 건축의 준비 과정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건축할 자로 솔로몬을 지목하셨을 때, 다윗은 그 명령에 순종하며 필요한 자재와 인력을 준비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5. 지도자의 책임과 영향력

    역대상의 다윗 왕의 이야기는 지도자의 책임과 영향력을 강조합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 노력했습니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며, 백성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윗은 여호와의 법대로 잘 이끌며 통치했습니다. 중간에 여호와를 노하게 한 일도 있었으나다윗은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고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한 내용들이 들어있는 역대상의 내용을 요약하였습니다.

    [역대상]

    -저자: 에스라

    -연대: B.C.458~400년경 기록(2차 바벨론 포로 귀환 후)

    -목적: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으며, 성전건축과 국가의 번영을 통해 구속사를 나타낸다. 하나님께 충성하면 축복을,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음을 확인시켜 준다.

    -개요:아담~다윗까지의 족보 - 다윗의 등극 - 다윗의 치적 - 다윗의 말년, 솔로몬의 등극




    역대상 연대기

    BC 1010년 : 사울의 사망(대상 10:6), 다윗의 즉위(대상 11:3)

    BC 1003년 : 예루살렘 천도(대상 11:7), 법궤의 예루살렘 안치(대상 15:29)

    BC 991년 : 다윗의 간음죄(대상 11:1-21)

    BC 990년 : 솔로몬의 출생(삼하 12:24)

    BC 979년 : 압살롬의 반란(삼하 15:10-12)

    BC 973년 : 다윗의 인구조사(대상 21:1)

    BC 970년 : 다윗의 사망(대상 28:11-21), 솔로몬의 즉위(왕상 2:12)


    역대기의 족보들

       특히 역대상 1:1-2:2은 아담에게서 시작하여 그의 후손인 족장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족보가 나온다. 이 모든 자료들은 창세기에 언급된 족보에서 출발한다. 역대상 2:3-8:40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족보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다윗과 그의 왕위 계승자들을 포함하는 유다 지파의 족보(2:3-4:43) 

       (2) 이스라엘 왕국에 속하여 요단 강 동편에 살았던 지파들의 족보(5:1-26) 

       (3) 레위 지파의 여러 즉보(6:1-81) 

       (4) 북왕국에 속하여 요단 서편에 살았던 자들의 족보(7:1-40) 

       (5) 첫 번째 왕 사울을 포함하는 베냐민 지파의 족보(8:1-40).

       역대상 9장은 주로 포로 이후 예루살렘 주민들에 대한 목적이지만, 8:29-38에 있는 사울의 족보를 반복하면서 결말을 짓는다(9:35-44).

        이렇듯 족보로 이루어진 서론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대기 저자가 활동했던 시대와 상황들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역대기 저자는 포로 후기 시대, 아마도 BC 4세기 중반에 살았을 것이다. 많은 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가 활동하던 시대보다 한 세기 반 이전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고, 그 땅에 남아 있던 자들과 함께 BC 516년에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재건했다. 

       BC 5세기 중반에는 바사의 지원으로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돌아왔다. 에스라는 사람들이 율법의 규정들을 따르도록 했고(아마도 오경의 일부였을 것이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감독하며 그 지방의 총독으로 일했다. 당시 바사 왕국은 애굽을 포함한 고대 근동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전에 유다로 불렸던 작은 팔레스타인 공동체는 바사 제국 안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살았지만, 정지적으로 독립하고자 하는 소망은 없었다.

        유다의 종교적 중심은 예루살렘 성전과 제사장 그리고 성전에서의 예배 생활이었다. 역대기는 성전의 권위와 유효성을 주장하며, 유다에 속하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을 인식하고 성전 예배에 참여하라고 초정한다. 역대기 저자가 본 이스라엘 공동체는 수적인 면에서 미약했지만, 저자는 이 공동체를 모든 이스라엘로 이해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그가 열두 지파의 족보들을 열거한 것은, 이스라엘의 과거에 대한 회상과 앞으로의 비전, 둘 다를 보여 준다. 

       첫 번째와 마지막 지파인 유다와 베냐민은 포로 후기 인구의 주류가 되었고, 이들 지파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과 첫 번째 왕 사울을 배출한 지파들이다. 특별히 역대기 저사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은 족보 한가운데 있는 레위인들의 족보다. 

       역대기 저지는 대제사장들, 일반 제사장들 그리고 일반 레위인들 외에 찬양자들과 문지기들로 불렸던 레위인들의 특별한 서열과 이스라엘 온 땅에 펼쳐진 48개의 레위인들의 성읍을 언급하고 있다. 

        역대상 2-8장에 있는 지파들의 족보는 창세기에서 가져온 것으로, 역대기 저자는 창조로 돌아가 이스라엘 연대기의 계속성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는 또한 광대한 족보를 가지고 있는 다른 민족들과의 관계에서 이스라엘을 이해하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1장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스라엘의 선택'을 암시하고 있으며, 세상의 다양성과 동일성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어느 시대든,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으로서 모든 인류에게 증인 역할을 하고 있다.


    역대기 기록 의도

       역대기 저자는 사울의 죽음과 그의 통치에 대한 심판을 서술한 후에, 역대상의 나머지 부분은 다윗 왕권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한다. 여기서 역대기 저자는 자신보다 2세기 앞서 여호수아, 사사기, 시무엘, 열왕기에 서술되었던 이야기에 자신의 신학적 이해를 적용해 다시 서술한다. 

       그는 여호수아와 사사기의 이야기들을 생략하고, 마지막 장을 제외한 사무엘상 모두를 생략하며, 유다 왕국에 대해 말하는데 필요한 부분 외에 열왕기의 북왕국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생략한다. 역대기 저자는 또한 다윗 왕이 밧세바와 간음한 것과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살해한 것, 다윗의 아들 암논이 그의 이복 여동생 다말을 범한 것, 압논에 대한 압살롬의 복수, 압살롬의 반역과 죽음, 사울의 후손들이 끊어진 것, 다윗 용사들의 공적, 다윗의 두 시편들과 사무엘하 11:1-23:7에 있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생략한다. 

       부분적으로 이런 생략은 다윗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그의 명성과 권위를 유지하려는 시도이지만,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신앙적 유산에 대한 다윗의 공헌, 곧 성전 건축을 위한 계획과 역대기 저자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봉사했던 제사장들의 다양한 반차에 대한 임명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한편 역대기 저자는 주요 부분을 많이 첨가하기도 한다. 12장에는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나아왔던 지도자들과 군사들의 명단을, 15-16장의 대부분은 예루살렘에서 언약궤의 도착과 연결된 의식들을 언급하고 있다. 22장, 28-29장에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 기록되어 있고, 23-27장은 다윗이 다양한 분야의 레위인들과 관료들을 임명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역대기 저자는 성전 중심의 예배를 지향한다

    역대기의 중심 주제

       역대기는 우리에게 성경 역사를 포함한 모든 역사는 특정 관점에서 기록되고, 한 세대가 과거로부터 얻은 메시지는 나중 세대의 관심사와는 무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여호수아에서 열왕기에 이르는 초기 이스라엘 역사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백성의 죄로 인해 파괴되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3세기 이후에 바벨론의 손안에 있는 예루살렘은 더 이상이 사실에 집중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대신 역대기 저자의 믿음에는 제사와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중심에 있었다. 그는 하나님 백성의 영적 생활에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 예배야말로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중요한 방편이었다.

       역대기 저자는 바로 이 예배가 다윗과 솔로몬의 유산이며, 모세와 통일 왕국의 두 왕과 개개인의 하나님의 사자들에 의해 보증된 제사 제도와 제사장 제도를 통해 그의 시대에 성전에서 가장 잘 행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역대기 저자는 바사 왕이 이 예배를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했으며, 제국의 식민지 생활에서도 이 예배는 최우선 순위며, 그 시대의 중심적인 사명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결론짓고 있다. 

       유다 왕국 밖의 사람들, 특히 옛 북왕국 주민들에 대한 바사 왕의 환대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책들에 있는 많은 분리주의적 측면들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분열되기 전의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왕이 즉위할 때,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예루살렘으로 언약궤가 이동할 때 그리고 성전 건축할 때 함께 참여 했다. 

       북이스라엘을 날카롭게 비평하는 설교의 결론에서도 유다 왕아 아비야(아비얌)는 여전히 북왕국 사람들을 '이스라엘 자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대하 13:12). 여호와께서 남왕국의 아사 왕과 함께하심을 보고 북왕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에게로 도망쳐 왔다. 히스기아는 특별히 북왕국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를 포함한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를 유월절에 초대했다. 요시아의 개혁은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납달리 성읍으로 확장되었다.

       역대기 저자 시대에 이들 북왕국 영토들 가운데 어느 한 부분도 유다에게 속해 있지 않았지만, 과거 북왕국에 대한 왕들의 호의적인 태도는 역대기 저자가 그의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바라고 있는 태도라는 것을 확실히 표현하고 있다. 연합과 직무를 행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열린 태도는 과거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이 지녀야 할 중심 덕목이다.

       예루살렘 성전 예배의 특징과 정당성이 역대기 저자의 중심 주제이지만, 그는 또한 이스라엘 역사에서 수많은 다른 중요한 사항들을 강조한다. 다윗의 왕권은 역대기에서 여호와의 왕국과 동일시되며, 다윗 왕조에 대한 신성한 위임은 출애굽과 시내 산 사건에 대한 관심을 사그라들게 한다. 복음은 언제나 특별한 시간, 장소, 문화의 도전 혹은 나쁜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좋은 소식이다. 

       성경 전체를 통해 '신실함'은 상을 받으며 그렇지 못할 때는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역대기에서는 이 상과 벌이 더 즉각적이며 개인적으로, 대개 한 사람의 생애 안에서 일어난다. 죄의 결과나 의로운 행동에 대한 보상은 세대를 님 기지 않는다. 

       다윗은 자신의 유언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하고 있다.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 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 

       이런 응보의 신학은 절대적인 신적 공의의 한 원리가 아니라 여호와의 철회되지 않는 '언약적 긍휼'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17:13) 아사, 여호람,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와 같은 왕들의 이야기는 상을 받은 신실한 기간과 그렇지 못한 기간으로 나뉜다. 므낫세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신실하지 못했을 경우에도 번영이 있었다. 역대기 저자는 하나님과 왕들 사이에 상호 작용하는 이 모든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영적 교훈으로 제시하고 있다.

    기쁨과 믿음이 충만한 예배 공동체를 지향한 책

       성전 예배와 제사장에 대한 초점은, 우리로 하여금 역대기 저자가 경건과 신앙생활에 대하여 매우 경직된 사고를 가졌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기쁨'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믿음'에 대하여 얼마나 따뜻하게 말하고 있는지를 주목해 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외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 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대하 20:20) 

       예배드릴 때는 활기 넘치는 음악과 온전한 마음으로(대상 28:9)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대하 7:14: 12:6-12; 30:6-11; 32:26; 33:12-14). 기도 역시 마찬가지다(대하 32:20-24: 33:13). 역대기 저자는 예배 공동체를 지지하는 한편, 보다 나은 미래를 소망했다. 

       역대기의 첫 부분, 족보에 나와 있는 지역에 대한 언급들은 과거에 형성되었고, 미래에도 여전히 기대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땅을 의도적으로 개관하는 것이다. 역대하 30:6-9에서는 그 땅에 있는 자들의 회개로 인해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이 귀환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언급한다. 

       찬양하는 자들의 시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여 만국 가운데어서 건져내시고 모으사"(대상 16:35)

       그러나 역대기 저자 자신이 왕조의 궁극적인 회복을 소망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역대기는 성전 중심의 예배를 강조한다.

    나가면서

       역대기 저자는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하나님 백성의 목적과 자유를 예견하고, 한 세대의 신학이 후에 다른 세대의 삶을 언급하기 위하여 변화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하나의 예가 된다. 전통으로부터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역대기 저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여전히 괴롭히고 있는 분열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 자신의 공동체에 대하여 폐쇄적인 한계를 유지하려는 자들의 주장을 거부한다. 

       역대기 저자는 성전 건축과 예배 드림에 있어 다윗과 솔로몬의 공헌을 강조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성전을 위한 계획이 여 호외로부터 말미암았고(대상 28:19) 솔로몬 성전의 첫 제사 때 하늘에서 내려온 불은 그것을 확증해 주는 증거물이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대하 7:1).


    역대상 장별 요약

    아담에서 다윗까지의 족보 1장-9장

    1장 /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족보  
      아브라함의 후손들 족보
      에돔의 원주민들과 왕들 : 에돔 땅에 거주하던 원주민들과 그 땅을 다스린 왕들의 족보.

     -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 족보(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족보)

    2장 /  유다의 자손들
      헤스론의 자손들
      갈렙의 자손들

     - 유다 가문의 족보(헤스론, 갈렙의 자손들 중심)

    3장  /  다윗의 아들들

      유다의 왕들 : 솔로몬의 후손으로 유다의 왕들을 나열함
      여호야긴의 자손들 :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의 후손들을 나열함

     - 다윗의 자녀들과 후손들의 족보

    4장 / 
    유다의 다른 자손들

      시므온의 자손들

     - 유다의 후손들과 시므온의 후손들 족보

    5장 /  르우벤의 자손들

      갓의 자손들
      므낫세 동쪽 반 지파 사람들: 바산에서 바알, 헤르몬, 스닐, 헤르몬산에 이르는 넓은 땅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

     - 요단 동편의 지파들(르우벤, 갓, 므낫세)

    6장  /  레위의 자손들

      성전의 성가대원들 : 성막에서 찬양할 성가대를 조직한 다윗
      아론의 후손들
      레위 사람들의 주거지 : 여러 지파에게서 땅을 분배받은 레위사람들

     - 레위의 후손들 족보와 거주지

    7장 /  잇사갈의 자손들

      베냐민 자손들
      납달리의 아들들과 므낫세 서쪽 반 지파 사람들
      에브라임의 후손들
      아셀의 자손들

     - 요단 서편의 지파들(잇사갈, 베냐민, 납달리, 므낫세 반, 에브라임, 아셀 지파)

    8장  /  베냐민의 자손들

     - 재 언급되는 베냐민 지파의 족보


    9장  /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 바빌로니아의 포로에서 자기들의 고장으로 돌아간 사람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제사장들 : 바빌로니아의 포로에서 돌아온 제사장과 여러 재능 있는 자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레위인들: 바빌로니아의 포로에서 돌아온 레위인들
      성전 문지기 : 성전의 동, 서, 남, 북을 지키는 문지기 212명
      성전 일을 맡은 다른 레위인들: 성전의 청소, 음식준비, 성가대원 등 다른 일을 맡은 레위인
      사울의 족보

     - 포로에서 귀환한 레위인들, 제사장들 족보와 임무, 사울 왕가의 족보

    다윗의 등극

    10장  / 사울왕의 죽음 :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사울왕

     - 사울의 비극적 최후

    11장  /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 :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다윗을 왕으로 추대함.

     다윗의 명장들 : 다윗에게 충성한 용감한 군인들, 이스라엘의 3대명장, 30명의 용장

    - 다윗 왕조의 시작과 협력한 장수들

    12장  /  다윗을 지지한 용사들: 사울을 피해 숨어있던 다윗을 지지한 용감한 군인들은 후에 이스라엘군의 지휘관이 됨

     헤브론에서 다윗의 편에 가담한 군인들 : 사울 대신 다윗을 왕으로 지지했던 많은 군인들이 다윗편에 가담함

     - 다윗을 왕으로 옹위한 용사들

    다윗의 치적

    13장  /  법궤 운반과 웃사의 죽음 : 다윗은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려 했지만 궤를 손으로 만진 웃사를 여호와께서 노하셔서 죽임. 궤를 가져오지 못하고 오벧-에돔의 가족에게 맡겨둠.

     -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다윗 왕(아미나답-오벳에돔), 웃사의 죽음

    14장  /  예루살렘에 안착한 다윗

     블레셋군을 격퇴함 : 이스라엘 왕이 된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의 침략을 하나님께 묻고 무찌름

     - 블레셋과의 전쟁 승리

    15장  /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김 : 다윗은 성막을 세운 후 오벧-에돔에 맡겨둔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옴.
    다윗이 기뻐 춤추며 뛰니 그의 아내 미갈이 보고 속으로 업신여김.

     - 성공적으로 옮겨진 언약궤(오벳에돔-예루살렘)

    16장  / 감사의 찬송 : 다윗이 여호와께 부르던 감사의 찬송

      지속된 정규적인 예배 : 다윗은 여호와의 법궤앞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명함.

     -  다윗 왕의 감사 찬송

    17장  /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죽은 후 다윗의 아들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말씀하심.

     다윗의 감사기도 : 여호와께 다윗집안의 장래 일을 말씀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기도를 드림

    -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왕국언약, 메시야 언약)

    18장 /  다윗의 승리 : 하나님께서 다윗이 가는 곳마다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심

    - 다윗 왕이 성취한 초기의 승리(모압, 소바, 시리아)

    19장  /  다윗에게 패배당한 암몬군과 시리아군 : 다윗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암몬, 시리아군대

     - 다윗 왕의 후기 승리(암몬, 시리아)

    20장  /  랍바성 점령 : 요압장군은 이스라엘군대를 이끌고 암몬 왕을 침략하고 랍바성을 함락시킴.

      블레셋 거인들을 죽임 : 가드에서 블레셋 거인들을 죽이고 승리한 다윗과 그 부하들

     -  암몬과 블레셋을 격파한 다윗 왕

    21장  /  다윗의 인구조사 : 인구조사를 시행한 다윗에게 하나님은 노하셔서 무서운 전염병을 내려 많은 사람이 죽음.
         예루살렘을 치기 위해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셨으나 불쌍한 생각으로 다시 거두심.
         다윗은 여호와께 회개하고 단을 쌓아 용서를 구함

     - 다윗의 인구조사 성전터 선정(오르난의 타작마당)

    22장  /  다윗의 성전 건축 준비: 솔로몬에게 성전건축을 할 것을 명하는 다윗, 성전의 기초작업을 하는 다윗

    - 성전 건축의 준비

    23장  /  레위인들의 직무상 분류 : 다윗이 나이가 많아 솔로몬을 왕으로 삼음. 성전의 여러 업무를 맡게 된 레위인들

     - 레위인의 직분 배정(38,000명)

    24장  /  제사장들의 직무상 분류 :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들의 업무를 나눔.

      성전 직무를 맡은 다른 레위인들 : 레위 자손 중 성전업무를 맡을 사람을 제비로 뽑음.

     - 제사장 24반차(엘르아살 16반, 이다말 8반)

    25장   /  성가대원들과 그들의 직무 : 다윗, 레위 지도자들이 여호와를 찬양할 사람들을 뽑음.

     -  찬양대의 24반차(아삽, 헤만, 여두둔)

    26장  /  성전 문지기 : 고라집안의 아삽 자손들이 성전 문지기를 맡음.
     
      성전의 다른 직무 :
    성전 창고, 예물 보관 관리 업무를 맡은 레위인들
      다른 레위인들의 직무 : 종교업무, 행정업무를 담당한 레위인들

     - 레위인의 성전 문지기-창고 관리, 사무관과 재판관의 직무

    27장  /  이스라엘의 군대 편성 : 12개 군단으로 편성된 이스라엘 군대

      각 지파의 행정관들 :
    각 지파에서 행정관을 1명씩 뽑음.
      다윗의 재산 관리자들과 그의 측근자들 : 다윗 곁에서 재산을 지키며 왕의 자문관, 친구로 있던 여러 측근자들

     - 다윗 군대의 편성(12 군단), 12지파의 행정관들, 재산관리자

    다윗의 말년, 솔로몬의 등극

    28장  / 성전 건축을 위한 다윗의 교훈 : 다윗은 행정관 12명, 군 지휘관, 그밖의 모든 주요인사를 소집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지킬것을
     명령함. 솔로몬에게도 여호와를 잘 섬기라고 지시함.

     - 성전건축을 위한 다윗의 마지막 유언

    29장  /  성전건축을 위한 예물 : 다윗이 성전건축을 위해 예물을 바쳤다고 말하자 여러 족장들과 장관들이 기쁜마음으로 예물을 드림.

      다윗의 찬양 : 여호와께 감사하고 성전건축을 위해 모은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며 찬양함
      왕으로 인정된 솔로몬 : 다윗은 솔로몬을 다시 왕으로 선언하고 기름을 부음.
      다윗의 죽음 : 40년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한 후 나이가 들어 죽은 다윗.

      - 성전건축 예물과 다윗의 찬양, 임종, 솔로몬 왕의 등극






































































































































    2025 시편 묵상




    누가 '아쉬레(복된 사람)'인가

    오늘은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시편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 시편 전체의 서론이며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시편 1편과 2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복 있는 사람' 또는 '복된 사람'이라 하시는지, '복된 사람'이 행할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시편'은 성경 전체의 핵심이다

    탈무드에서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5권의 율법서를 주었고 다윗은 5권의 찬양을 주었다고 하며 시편을 유대인들이 가장 중시하는 '토라(창, 출, 레, 민, 신)'에 비교합니다. 이는 시편이 내용적으로도 단순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개인적인 기도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핵심적인 내용과 구약의 역사, 공동체 삶의 방향과 내용을 충실하게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구약의 본문을 인용할 때 이사야(419번)와 함께 시편(414번)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편은 총 150편으로 되어 있는데 세부적으로 보면 5권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1권은 1편~42편, 2권은 42편~72편, 3권은 73편~89편, 4권은 90편~106편, 5권은 107편~159편입니다. 시편은 형식과 내용에 따라 찬양시, 탄식시, 감사시, 토라(말씀)시, 제왕시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구성은 그냥 마구잡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권별, 편별로 그 내용이나 저자 등을 고려해 위치가 정해진 것입니다. 시편은 앞부분이 탄식의 간구에서 점점 적들과의 상황에서의 구원에 대한 간구로 진행되다가, 감사 찬양으로 전개되어 갑니다. 특별히 시편 150편의 마지막을 '할렐루야(여호와를 찬양하라)'로 마치는 것은 전능자이시고, 창조자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마땅한 고백과 확신과 감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시편 1편'의 독특성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편의 위치와 내용은 독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은 그냥 우연히 150편 시편 중에 첫 번째로 배치된 것이 아닙니다.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이고 핵심 내용입니다.

    우리가 시집이나 찬양집을 발간할 때 편집자는 가장 첫 편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할 것입니다. 대체로 첫 편은 그 시집이나 찬양집의 내용을 포괄하는 것이나 개인이나 단체에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한 것을 넣을 것입니다. 시편 1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을 편집한 사람들은 깊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가장 먼저 넣을 시를 정했을 것이고 그 가운데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시편 1편이 시편의 서론이고 핵심 내용이라는 것은 시편이 성경 전체의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는 것을 참작하면 시편 1편이 성경 전체의 서론이고 핵심이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시편 1편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편 1편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시편, 아니 성경 전체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결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1편과 2편의 '아쉬레'

    그런데 시편 1편은 시편 2편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편 1편과 2편은 원래 하나의 시가 2개로 나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시편 1편과 2편에 3편부터 붙여져 있는 특정 '표제'가 없는 것에서도 알 수 있고 특정 단어로 두 시가 'Inclusio(수미쌍관)' 되어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내용적으로도 일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 시편 1편 1절에 있는 '복 있는 사람'은 히브리어로 '복되도다!' 또는 '얼마나 복된 지' 등의 일종의 감탄사 같은 말인 '아쉬레'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편 1절은 "복되도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 사람", "복되도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의 의미이며, 또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은 얼마나 복된지"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쉬레'가 시편 2편의 마지막인 12절에도 등장합니다. 우리 성경에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고 한 것이 바로 '아쉬레'입니다. 즉 시편 1편과 2편은 '아쉬레'라고 하는 단어 사이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시편 1편과 2편은 '아쉬레' 즉, '복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며 바로 이 하나님 앞에서 '복된 사람'에 대한 내용이 시편 전체의 내용이고 성경 전체의 내용이며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뜻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가 복된 사람이 되어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과 민족과 국가에 복을 나누어 주는 복의 근원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창 12:2~3).

    '아쉬레'는 '하가'하는 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을 어떻게 받고 누리고 사는지 알고 싶으십니까? 오늘 시편 1편과 2편이 설명하는 '아쉬레(복된 사람)'에 대해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어떤 사람이 복된 사람이고 우리가 어떻게 복을 받고 누리고 살 수 있는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시편 1편 1절은 "복된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앉은 자"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어찌 그렇게 악인, 죄인, 오만한 자들이 많은지요. 악한 자들은 우리를 밤낮으로 꾀어 함께 속이고 불법을 하는 자로 살기를 요구합니다. 우리로 죄인의 길에 서게 함으로 '너도 똑같은 놈이야. 그러니 닥치고 있어, 시키는 대로 해, 좋은 게 좋은 거야' 라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보다 높아진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우리를 눌러앉게 합니다.

    시편 1편 2절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만이 이런 악인, 죄인, 오만한 자에게서 벗어나 '복된 사람'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알다시피 '토라'입니다. 이것은 시내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고 이를 지킴으로 제사장 나라요, 하나님 백성 삼겠다고 하신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이렇게 주신 율법을 지킴으로 노예이고, 죽을 수밖에 없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백성과 다르고, 가나안 족속과 다른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넓게 보면 오경(창, 출, 레, 민, 신)이고 좁게 보면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하가1-읊조리다

    이 '토라'를 밤낮으로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묵상'은 히브리어로 '하가'입니다. '하가'라는 단어에 있는 여러 가지 뜻을 살펴보면, 복된 사람이 되기 위해, 아니 이미 복된 사람이 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묵상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가'의 첫 번째 뜻은 '읊조리다'입니다. 단지 마음으로 음미하거나 명상하듯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뜻을 음미하며 낮은 소리로 반복적으로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 동서고금 책을 읽을 때 눈으로만 읽지 않고 소리를 내어 읽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책 읽기)'라는 프로그램이 유행인데 렉시오 디비나는 뜻을 음미하며 소리 내어 읽는 것입니다.

    자주 말씀드리는 이야기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반복해서 읽는 것은 중요합니다. 성경 말씀 각 단어나 각 절, 권, 나아가 특정 주제에 대한 신학적인 뜻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성경 말씀 자체에 대한 각 책의 줄거리와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용도 모르는데 뜻과 의미를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경은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책이 아닙니다. 시간을 내서 읽어 보면 그 내용과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책이 두껍고 여러 권이다 보니 쉽게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다독입니다. 여러 번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서백독이면 의자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책을 백 번 읽으면 뜻이 스스로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성경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내용을 이해하는 데 좋습니다. 최소한 신앙 연수만큼 읽어야 합니다. 읽을 때 속으로 읽다 보면 잡생각도 많이 나고 졸리기도 하니 소리 내서 읽거나 여럿이서 읽는 것도 효과적입니다.

    '아쉬레', '복된 사람'은 말씀을 밤낮으로 틈만 나면 읽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읽다 보면 이해가 되고 힘이 나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군대 갔을 때 훈련소에서 6주간 훈련을 받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훈련도 힘들지만 걸핏하면 욕설과 얼차려를 주는데 마음이 얼마나 강퍅해지는지 온갖 짜증이 올라오고 폭력적인 본성이 드러납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입대할 때 갖고 온 신약성경과 시편이 묶인 작은 성경책을 윗주머니에 넣고 정말 틈만 나면 읽었습니다. 얼마나 지독하게 읽었는지 그 모진 훈련을 받으면서 6주 만에 신약을 1번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등병 생활 4개월도 그 못지않게 힘들었는데 이등병 생활하면서 다시 1번 읽었습니다. 이렇게 매일 틈만 나면 성경을 읽으니까 정말 마음도 다스려지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도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훈련소에서 함께했던 동기 중에 제가 틈만 나면 성경 읽는 모습을 보고는 자기도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 친구와는 다른 부대에 배치되었는데 제가 대대에서 군종병을 할 때 군종 집체 교육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그 친구도 중대 군종병이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매일 '라마나욧 성경묵상표'를 따라 읽는 성경 말씀이 저를 돌아보게 하고 제 삶에 대해, 가정에 대해, 더함공동체교회에 대한 방향을 정하는 데 순간순간 생생한 지침이 됩니다. 성경을 밤낮으로 '읊조리는 것'은 '복된 사람'이 되는 길이며 사는 방법입니다.

    하가2-으르렁거리다

    뜻밖에 '하가'의 두 번째 뜻은 '으르렁거리다'입니다. 이는 맹수가 사냥감을 앞에 두고 으르렁거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으르렁거리며 읽는다는 것은 전투하듯이 치열하게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큰 소리로 처절하게 읽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낮은 소리로 읊조리지만 읽는 태도나 자세가 마치 전쟁터에 나간 군사와 같고 먹을 것을 앞에 둔 맹수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은 '복된 사람'이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의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1절에 이미 등장한 것처럼 '악인', '죄인', '오만한 자'들이 득실거립니다. 그들은 조용히 자기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의인'들을 공격하고 함께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기를 사자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듯이 합니다.

    그래서 시편 1편과 연결된 시편 2편은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고…세상 군왕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는 자를 대적(시 2:1~2)"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의인'들이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리고 부수어야(시 2:9)"한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전쟁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터의 한가운데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 이하는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이 땅 가운데 우리에게 닥쳐오는 싸움을 위해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흉배),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등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방어 무기입니다. 유일한 공격 무기는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갖 악인, 죄인, 오만한 자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로 이끄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맹수가 먹이를 포획할 수 있는 강한 발톱이며 이빨입니다.

    하가3-경영하다

    '하가'의 세 번째 의미는 한걸음 여기서 더 나갑니다. 시편 2편 1절은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라고 하는데, 이때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 개역개정에서 '꾸민다'로 번역한 말을 예전 성경 개역한글에서는 '경영하는가'라고 번역했습니다. 꾸민다, 경영한다, 이 단어가 바로 '하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내 삶과 상관없이 그저 음미하고 반복해서 읽고 으르렁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읊조리고 으르렁거리는 것은 내 삶의 구체적인 현실에 대해, 내가 닥친 문제에 대해, 내 직장 속에서, 내가 고민하는 어떤 선택의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경영하고 일을 꾸미는 것입니다.

    말씀에 길이 있고 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삶과 관계없이 그저 무슨 경전 읽듯이, 주문 외우듯이 읊조리는 것이 아니라 한 말씀 한 말씀이 내 삶의 현실과 직결되어 길이 되고 답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고 묵상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의인'이며, 그런 사람이 '복된 사람(아쉬레)'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같이 형통한다는 것입니다(시 1:3). 그런 사람을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는(시 1:6)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리고', '으르렁거리고', '경영'하며 '하가'하는 '복된 사람(아쉬레)'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진정한 '아쉬레'의 비결

    그러나 시편 1편과 시편 2편이 하나의 시편인 것을 고려해 연속해서 읽으며 묵상해 보면 '아쉬레(복된 사람)'가 단지 개인적으로 '하가(묵상)'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시편 1편과 달리 시편 2편은 그 범위를 개인에서 국가로, 국제적으로 확장시킵니다. 시편 2편은 이방 나라들과 민족들이, 그들의 군왕과 관원들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받은 자를 대적해 그의 통치를 벗어나겠다고 선언하며 시작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세운 왕을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우겠다(시 2:6)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자를 '내 아들'이라 칭하고 '내가 낳았다'고 선언하십니다(시 2:7). 그리고 그에게 이방 나라를 유업으로 주사 땅끝까지 이르게 하고, 대적자들을 철장으로 질그릇같이 부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행 13:33), 예수님이 천사보다 위대한 분이라는 것을 선언할 때(히 1:5), 예수님이 진정한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심(히 5:5) 등에 적용해 인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마지막 때에 예수님의 위대한 통치를 성취함에 대한 선언(계 12:5, 19:15~16)에 인용됩니다.

    '기름 부음받은 자', '아들'이 누구입니까? 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입맞춤으로 순종함으로, 완전히 항복함으로 '아쉬레(복된 사람)'가 되고 '의인'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아쉬레(복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리고 으르렁거리고 경영하며 '하가(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쉬레(복된 사람)'입니까? 기름 부음받은 자,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항복함으로 순종하며 그를 따르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하나님의 말씀을 '하가(묵상)'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그의 뜻을 쫓는 진정한 '아쉬레(복된 사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찰스 스펄전은 시편 1편이 시편의 서론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시편 전체의 내용을 요약한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관심사는 우리에게 축복받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죄인들이 반드시 멸망한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잠 24:19-20절을 보면,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고 했다.

    세상적인 안목으로 볼 때, 악한 사람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인에게는 장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장래”라는 말이 히브리어 ‘아하리트’인데, ‘미래’라는 뜻도 있고 ‘끝’이라는 뜻도 있다. 그러니까 악인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끝이 없다. 그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전혀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어떻게 된다고 했나? 잠 23:17-18절을 보면,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의인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미래”가 있다고 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끊어지지 않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끊어지지 않는 소망 안에서 축복의 삶을 살기 원하신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 축복의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람이 간증을 남기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

    1. 말씀이 진리가 된 사람이 축복의 사람이다.

    1절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다. “복 있는 사람”의 길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어에서 복이라고 할 때 대표적으로 말하는 단어가 ‘바라크’라고 했다. 바라크는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주시는 것과 같은 복이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할 때, 사용된 단어는 ‘바라크’가 아니라 ‘에쉐르’란 단어이다. 히브리어 성서로는 시편 1:1절 말씀이 ‘아쉬레 하이쉬 아쉐르’로 시작된다. 여기서 ‘아쉬레’가 ‘에쉐르’의 복수형 단어이다. 직역하면 ‘~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혹은 ‘복들이 있도다 ~하는 사람은’이라는 뜻이다. ‘에쉐르’는 ‘바라크’와 구별되는 ‘복’이란 뜻의 단어이다.

    그런데 이것은 복을 받은 사람의 존재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된다. ‘에쉐르’는 ‘곧다, 솔직하다, 똑바로 가다’라는 뜻이 있다. 그러니까 ‘에쉐르’는 ‘똑바로 걸어가는 상태’이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길이 있고 목표가 있다. 그 정도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진리를 따라가는 것이 ‘에쉐르’이다.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1편에서 복 받은 사람의 존재 상태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1절에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라고 했다. 다르게 표현하면 ‘악한 생각을 가지고 걸어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은 빠른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시는 길’을 걷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른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다음으로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라고 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길과 목표가 있는데, 거기에서 벗어난 곳에 서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마드’는 맞은 편에 정면으로 대치해서 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맞은 편에,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서지 않는 상태이다. 그것이 바로 ‘에쉐르’, 곧 “복 있는 사람”의 상태라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맞은 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 말씀의 편에” 선다.

    그 다음으로 나오는 말이 같은 맥락이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했다. 여기서 “오만한 자들”이란 ‘조롱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성도를 조롱한다. 왜 그럴까? 하나님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을 비난하지도 않고, 성도를 조롱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진리이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믿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이 정하신 길과 목표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다.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다. 이게 진짜 “복 있는 사람”인 것이다.

    2. 말씀이 삶이 된 사람이 축복의 사람이다.

    복이 있는 사람의 존재 상태를 좀더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 2절 말씀이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기서 “즐거워하여”라는 단어가 ‘헤프초’인데, ‘기쁨, 소원’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가 ‘소유격’ 표현이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기쁨, 그의 소원’이란 뜻이 된다. “복 있는 사람”의 상태란 어떤 상태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소원, 자기의 기쁨으로 간직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악인들은 세속적인 꾀를 생각하는데,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한다. 그들은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자기의 기쁨이며 소원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소원으로 품고 있으니까 어떻게 되겠나? 기억하시나? 여러분이 마음에 어떤 소망이나 소원을 가득 품고 있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나? 그 소원이 입에서 흘러 나오게 되어 있다고 했다. 말을 하기만 하면 소원이 튀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는 말씀의 뜻이라고 했다. 여기서 “묵상하는도다”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흐께’의 원형이 ‘하가’라는 단어이다. 무언가를 계속해서 “중얼중얼” 이야기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이다.

    본래 ‘하가’라는 단어는 의성어에서 나온 말이라고 했다. 어떤 의성어라고 했나? “비둘기가 우는 소리”라고 했다. 우리는 비둘기 우는 소리를 들으면 ‘구구구구’라고 표현한다. 그렇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비둘기가 우는 소리를 ‘하가하가’라고 표현한다. 그렇게 들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들이 짓는 소리를 ‘멍멍’이라고 듣고 표현한다. 미국 사람들은 ‘바우와우’라고 듣고 표현한다. 이렇게 듣고 표현하는 것이 다르다. 히브리인들이 비둘기 우는 소리를 의성어로 표현한 것이 ‘하가’이다.

    비둘기는 입만 열면 ‘구구구구’ 같은 소리만 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말씀이 자기 안에서 소원이 된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기쁨이 된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는 비둘기가 입만 열면 ‘구구구’하는 것처럼, 일을 열었단 하면 ‘말씀, 말씀’만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너무나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누가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인가? 자기 마음에 “하나님”밖에 없는 사람이다. 생각으로도 소원으로도 하나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입만 열었다 하면 말씀이 자기 안에서 흘러나오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3. 말씀으로 인정받은 사람이 축복의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복 있는 사람”의 삶을 어떻게 하신다고 했나? 3절을 보시라.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놀라운 말씀이 지금 선포되고 있다. 사막과 같은 곳에 심겨진 나무도 물가에 닿아 있으면 열매를 낸다. 물가에 닿아 있으면 메마른 땅에서도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 말씀에 사로잡혀서 사는 사람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했다.

    하나님이 가게 하시는 약속의 길에도 고난과 시련이 있다. 고난, 시련, 배신, 실패와 같은 것이 약속의 길을 막아선다. 그런데 하나님이 결국에는 그 길을 평탄하게 하신다. 약속의 길을 가게 하신다. 그래서 마침내 언약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형통”(=찰라흐)이라고 했다. 이렇게 형통하게 되니까 그 인생의 결국이 어떻게 되겠나? 6절에 보니까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했다.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고 했다.

    히브리어로 시편 1편을 읽으면, 알파벳 첫 글자로 시작해서 마지막 글자로 끝을 맺는다. 1편의 첫 단어가 ‘아쉬레’인데,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자음인 ‘알레프’로 시작한다. 마지막 단어가 6절에 나오는 “망하리로다”에 해당하는 ‘토베드’인데, 히브리어 알파벳 자음의 마지막 글자인 ‘타우’로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시는 알레프로 시작해서 타우로 끝나는 시이다. 알레프는 ‘하나님’을 뜻하는 글자이고, ‘타우’는 끝을 이야기하는 단어인데, ‘완성’을 의미한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언어적 유희를 가미해서 시편 1편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완성하신다.”는 의미가 보여진다. 이 부분이 재미있는 대목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끝”이란 그냥 마지막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이기도 하고, 소망이기도 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의미로 그것은 완성을 의미한다. 악인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라. 그들의 삶은 완성되지 않는다. 4절에서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라고 했다. 악인들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아지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형통함이 없다.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고, 소망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약을 성취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완성되지 못하고” 흩어져 버린다.

    5절에 따르면,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의인들은 심판 때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백성이 된다. 그러나 악인들은 심판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들은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결국은 6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완성되지 못한다. 미완의 삶, 심판과 저주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악인과 죄인의 결국이다. 반면에 의인들은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완성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의 길에는 간증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쉐르(אֶשֶׁר)의 복을 받게 하소서!

    시편 1:1-6

    시편 1편은 평생 암송해도, 다시 암송해도, 세월이 지나서 암송해도 은혜가 되는 귀한 말씀입니다.
    시편 전체 시편 150편의 주제가 되는 말씀이기도합니다.

    저자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다윗이라고 보기도 하고 시편 1편의 내용이 예레미야 17장의 내용과 같기에 예레미야가 저자라고 보기도 합니다.

    [렘17: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렘17:8]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그 누가 저자라도 해도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의 고백시편이기도 합니다. 복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기도의 고백입니다.  복福있는! 사람, 복福없는 사람이 아니라 복福있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그런데 이 복福-축복祝福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라크 בָּרַךְ의 축복이요
    하나는 아쉐르(에쉐르 אֶשֶׁר)의 축복입니다.

    바라크의 축복은 물질적인 것을 포함한 현세적, 가시적 축복입니다.

    창세기의 생육(生育)의 축복이 바로 바라크의 축복이었습니다.

    [창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바라크)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도 바라크의 축복이었습니다.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바라크)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런데 시편 1편의 축복은 아쉐르 אֶשֶׁר의 축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의 영혼 깊은 곳의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의미하는 영적 축복을 말합니다.
    헬라어로는 마카리오스 μακάριος 라고 하는데 바로 예수님의 마태복음 5장의 마카리오스의 축복과 같습니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마카리오스 μακάριος)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아쉐르의 축복은 영혼 깊은 곳의 축복입니다.

    물론 바라크의 축복도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한 수단의 축복입니다.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면 신앙은 기복주의祈福主義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기복주의자는 아니지만 복을 하나님께 구하는 기복祈福은 정당한 기도임을 믿기에 현실의 축복을 위한 기도도 당당하게 드립니다. 

    그런데 영원한 것은 바로 아쉐르의 축복! 영혼의 축복입니다. 바라크의 축복과 함께 결코 다함이 없는 에쉐르- 시편 1편의 축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런 복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깨닫는 사람, 악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 오만함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 깨달음이 있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지 않을' 결단력이 강한 사람입니다.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악인의 꾀עֵצָה 에차 counsels는 대단한 것 같지만 결국 바닥이 드러나는 인간적인 꾀일 뿐입니다. 맑지 않습니다. 그 악인들과 함께 걷지 않고  does not walk ! 죄인들의 길에 함께 서지 않고  does not stand  , 오만한 자들과 함께 앉지  does not sit  않습니다.  

    [시 1:1] Blessed is the one who does not walk in step with the wicked or stand in the way that sinners take or sit in the company of mockers.

    누구와 함께 걸어야하는지, 어디에 서야하는지 어디에 앉으면 안되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깨닫고 판단하고 분별하는 영적인 지혜, 생각의 힘입니다.

    생각의 힘이 있기 원합니다. 욕심이 눈을 가리면 생각이 약해집니다. 그리고 항상 배워도 진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딤후 3:6] -어리석은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딤후 3:7]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그래서 기도합니다. 생각의 힘을 주소서! 분별력과 판단력과 의지의 힘을 주소서! 생각하게 하시고, 결단하게 하소서! 내 자신의 기질과 경향을 스스로 알아 늘 조심하게 하시고 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바로 지켜나가게 하소서! 

    나는 무엇이 가장 즐거운 사람인가!

    무엇보다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오직!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 즐거움 חֵפֶץ 헤페츠 delight 기쁨, 즐거움

    나는 무엇을 할 때 즐거워하는 성향인가요? 어떤 것이 가장 즐거우십니까? 나는 무엇이 즐거운 것일까요? 이것이 그의 영성을 좌우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영적 품격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즐거우십니까? 그렇게 되기 원합니다!

    내 기도하는 그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

    세상의 즐거움도 많겠습니다. 멋진 연애를 하는 것, 일류 레스토랑을 가는 것, 비싼 가방이나 옷을 입는 것, 멋진 여행지를 구경가는 것은 어쩌면 누구에게나 본능적으로 '즐거운' 일일 것입니다. 그것 또한 지나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늘', '더' 즐거우면 아직 우리는 복있는 사람이 되고 있는 과정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진정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릴까요?

    지금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의 즐거움이 있다면 나는 이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주야晝夜로 그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 묵상(默想)הָגָה 하가 meditate 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내 생각을 발전시키고 내 생각을 훈련시키고 내 생각을 새롭게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묵상하며 생각하며 거룩한 생각의 힘을 키워내는 것입니다.

    말씀이 체질화되고 인격화되고 언어화되고 습관화되고 드디어는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기쁨이 될 때까지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런 축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러면 그의 인생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될 것입니다.

    [시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모든 생명있는 것은 잘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보이지 않는 뿌리가 시냇가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내 마음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뿌리가 나아가 닿아있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이 늘 닿아있는 곳, 내 무의식의 심연이 연결되어있는 곳,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내 영혼은 늘 아름답게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형통할 것입니다.

    형통(亨通)의 히브리어 צָלַח 찰라흐 앞으로 나가다, 발전하다, 전진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고 전진하고 발전하는 것이 형통입니다! 꼭 형통하시기를 바랍니다!

    악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They are like chaff that the wind blows away.

    너무나도 많이 보았습니다. 지금도 많이 보고 있습니다.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은 마음과 생각들이 시대에 가득합니다. 

    어쩌면 나도 열매없는 겨와 같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알곡이 되기 원합니다. 그렇게 살기 원합니다. 의인은 생산적인 삶을 살지만 악인은 생에 대하여 무의미만 남기고 부정적인 기록만 남기게 될 것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악인은 결국 불안정하고 무의미라고 무가치하고 순간성에 머무르고 말 것입니다.

    [시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마지막에 알곡과 겨가 분명히 구분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 그 심판이 이루어질 것을 예고했습니다!

    [눅3: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오늘! 알곡으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덧없이 날아가지 않기 원합니다. 

    알곡으로 남아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내게 진리에 대한 지적 능력! 지성知性! 생각의 힘을 주옵소서!
    주님을 만나는 시간, 주님의 말씀이 진정한 즐거움이 되게 하시옵소서!
    내게 주신 시간과 달란트가 열매를 맺어 알곡으로 살게 하시옵소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편 2편,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종국

    시편 2편은 “제왕시”이면서 “메시아 예언시” 혹은 “찬양시”이다. 시편 1편과 더불어 작자가 미상 시이다. 1편은 복으로 시작되고 2편에서는 복으로 끝마친다. 그래서 한 쌍의 시로 보는 학자도 있다.

    시편 전체를 왕궁으로 비유할 경우, 시편 1편을 그 출입구라고 한다면 시편 2편은 그 왕궁의 보좌에 앉으신 메시야를 만나게 된다.

    이방 나라들이 다윗 왕국에 대한 음모와 반약으로 통치를 거절하는 것을 비웃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언약의 주로 오신 그리스도의 왕국의 우주적 통치를 예언적으로 노래하며 그 분을 경외하며 섬기기를 요청하고 있다.

    본 시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두 왕국의 종국을 보며 준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신분과 영적 싸움의 현장과 삶의 원칙과 우선순위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A. 이방 나라들의 음모와 하나님의 비웃음(1-6절)

    1. 반역한 나라들에 대한 탄식(1-3절)

    “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표준 새 번역은 “1. 어찌하여 뭇 나라가 a) 공모하며, 어찌하여 뭇 민족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a.70인 역에는 격노하며) 2. 어찌하여 세상의 임금들이 나서고, 어찌하여 통치자들이 음모를 꾸며 주를 거역하고, 기름 부음 받은 분을 거역하면서 이르기를 3. 이 족쇄를 벗어 던지자. 동여맨 이 사슬을 끊어 버리자 하는가?”이다.

    1절에 시인은 ‘어찌하여’라고 수사 의문을 통하여 놀람, 의분, 격정을 표출하고 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어찌하여”가 일석이조(一夕二鳥, double-duty) 기법으로 1절, 2절에 각각 2번씩 총 4개의 동사에 각각 적용할 만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이방 나라(뭇 나라, 열방, 민족들, 나라들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됨)의 이스라엘에 왕에 대한 반역에 대한 통탄과 의문을 제기하는 말이다. ‘어찌하여’는 좌절감을 나타내는 의문사가 아니라 이방 나라들의 반역적 행위에 대해 놀라움과 조소를 나타내는 수사 의문사이다(D. Kidner).

    이스라엘 역사를 회고해 볼 때, 뭇 나라들(이방 나라, 민족들, 열방들)이 그동안 예루살렘 왕의 통치를 받으며 그에게 복종하였다. 그러나 새 왕이 등극하면서 여러 속국의 왕들이 음모와 반역을 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어찌하여’ 어리석고 허무한 짓들을 하고 있는가 하며 수사 의문으로 놀라움을 나타내고 있다.

    로저손과 맥카이(Rogerson & Mckay)는 “본문에서 언급된 열방은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 지배하에 있었던 이방 나라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이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협하는 모든 종류의 세상 사람들을 가리킨다” 라고 했다.

    이 세상의 왕들과 관원들은 서로 꾀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속박으로 여기며 그에게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악인들은 당을 지어 악을 행하며(롬 2:8),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지만, 그들의 모든 계획은 헛될 것이다.

    여기서 '기름 부음 받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쉬야’는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자’란 의미로 여기서는 이스라엘 왕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왕들(특히, 다윗 계열의 왕들)은 대관식 때 기름 부음을 받았다(왕상 1:45). 이 기름 부음은 하나님의 왕직을 대리하기 위하여 그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낸다(출 28:41; 3:3; 삼상 10:1; 16:3).

    당시 이방 나라들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통치와 체제를 벗어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반역을 꾀하였다. 이것은 종말론적으로 만왕의 왕 되시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이신 메시야에 대한 다스림을 거부하는 세상 나라의 통치자인 악한 권력자, 악한 제도, 악한 영, 악한 무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본 시는 일차적으로 다윗 왕가의 정통성에 대한 제왕시(royl psalm)이나 긍극적으로는 장차 오실 영광의 왕이신 메시야 예언시(messianic psalm)이다.

     

    다윗 왕가의 정통성을 말하는 제왕시이자

    메시야 예언시인 시편 2편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헤롯 왕과 로마 총독 빌라도가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아를 십자가에 죽게 하였다. 사도 베드로는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라고 말하였다(행 4:27-28).

    ‘기름 받은 자’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구약에서 왕, 선지자, 제사장이 기름 부음을 받았다. 기름 부음의 신학적 의미는 하나님의 선택받음, 직책 임명, 직분 수행에 필요한 성령님의 지혜와 덧입음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메시야로서 왕, 선지자, 제사장 등 3 중직을 수행하는 진정한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시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부정하고 그의 보내신 메시아를 대항하였지만,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뭇 나라들이 하나님께 분노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 분노하여도 유익이 절대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은 헛된 일이 될 뿐이다.

    이방, 세상 통치자들이 함께 은밀하게 도모하고 음모를 꾸민다. 바벨탑 사건 때부터 인간들은 계속해서 서로 뭉쳐서 하나님을 대적해 왔다. 그들은 두 명 이상의 사람이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한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였다.

    3절에 “우리가...하자”라고 스스로 격려 내지 권고하는 언급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이방 왕들의 음모를 꾸미기 위한 악한 결의를 말한다. 그들은 이스라엘 왕이 부과한 여호와의 율법이나 통치 체제를 “맨 것과 결박” 혹은 “족쇄”와 “사슬”로 보고 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자체를 때로는 족쇄와 사슬로 여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도전하는 자유방임적 생각이며 태도이다. 하나님 말씀 가운데 사는 것이 자신을 얽어매고 결박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미 자신의 영혼이 병들었거나 은혜가 소진되어 버린 상태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현대 인본주의, 세속주의, 향락주의가 얼마나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깨뜨리고 성경적 윤리관을 파괴하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교만의 극치인 현대 자유주의 극치는 곧 인간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엄청난 죄를 범하는 것이다.

     

    2. 하늘에서 비웃으시는 여호와 하나님(4-6절)

    “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5. 그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표준 새 번역을 다음과 같다. “4.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 웃으신다. 내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 5. 마침내 주께서 분을 내고, 진노하셔서, 그들에게 호령하시며, 이르시기를 6. 내가 거룩한 산 시온 위에 나의 왕을 세웠다 하신다.”

    세상 나라와 민족들과 그들의 왕들과 제왕들의 음모와 반역에 대하여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정서적, 감정적 반응(4-5절)과 행동적, 정치적 반응(6절)을 보여주고 있다.

    4절의 ‘하늘에 계신 자’는 매우 높은 분에 대한 칭호이다. 위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초월성을 나타낸다(시123:1). 표준 새 번역에는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 ‘공동번역에는 “하늘 옥좌에 앉으신 야훼”, 기타 번역에는 ‘하늘에 좌정하신 분’ 등으로 번역하였다.

    하나님은 단순히 ‘하늘에 계신 자’(개역 개정) 혹은 ‘하늘에 앉으신 자’(RSV, NASB)가 아니라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자’(the One enthroned in heaven, NIV, NJB, NAB)이시다.

    또한, 그분은 ‘주'가 되신다. ’주‘는 히브리어로 '아도나이’이다. 그것은 만물을 소유하신 분(8:1), 지극히 탁월하신 주, 만물 위의 주를 나타내는 말이다.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분은 바로 우주의 왕, 만유의 주가 되신다. 이 우주의 왕께서 ‘지상의 왕들’의 악한 도모와 음흉한 음모를 비웃으신다.

    “하늘에 계신 분이 웃으실 뿐 아니라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웃으신다'는 표현은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anthropomorphic)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반역 음모를 결국 이루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37:13:59:8).

    이처럼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전 우주를 통하시는 주권자가 되신 하나님께서 그분과 그분의 통치자들을 반역하는 자들에 대해 웃으실 뿐만 아니라 가소롭게 여기시고 비웃으신다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은연중에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심을 나타내시는 것이다(Kraus).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기를 대적하여 음모하는 것을 보시고 웃으시고 비웃으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반대를 두려워하시거나 당황하거나 멈짓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다만 그들의 음모와 도모에 대하여 비웃으실 뿐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앉아 계시는 분이시기에 웃으신다. 그분은 영광스러운 보좌에 위대한 왕으로 앉아 계신다. 그분의 우주의 통치자로 앉아 계신다. 그분은 인간들처럼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궁금해하면서 하늘 보좌 앞에서 이리저리 서성거리고 당황하고 계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 속에 세상을 통치하기에 완전한 평화와 확신 속에 앉아 계신다.

    하나님은 하늘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웃으신다. 그분의 통치 영역이 세상의 왕좌가 아니다. 그분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지닌 하늘의 보좌에 앉아 계신다. 하늘에 앉아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땅을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보이스(Boise)는 “하나님은 떨지 아니하신다. 그는 광대한 하늘 성벽 뒤에 숨어 적의 수를 세시지 않는다. 그분은 자신의 왕국에 대하여 상대방 적수에 맞대응하기 위하여 충분한 군사력이 있는가 계산하지 않는다. 그는 당황하여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으신다. 그는 이 엄청난 지상의 바보들을 보고 그저 '웃기만 하신다’” 라고 적절히 비유적으로 말했다.

    모건(Morgan)은 “하나님께서 비웃으시는 이 웃음은 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위로가 된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능력의 웃음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 사랑의 웃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인간의 고난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분의 뜻이 성취되는 것을 막으려는 사람들의 모든 교만한 자랑과 폭력을 비웃으신다”라고 하였다.

    여호와께서 모든 역사의 현상에서 악인들의 대적을 비웃으실 것이다. 지난 수 세기에 걸쳐 많은 악인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분의 왕국을 도전하고 핍박해왔다. 이 적들의 모든 일은 좌절되고 무너질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 예를 살펴볼 때, 기독교를 혹독하게 핍박했던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AD 284-305 재위)가 있었다. 그는 극심하게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무자비하게 박해했고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그는 “기독교의 이름이 말살된다”는 문구가 적힌 메달을 만들어 매달라고 명령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또한 그의 제국 국경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힌 두 개의 기념물을 세웠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조비아누스 막시미아누스 헤라클레우스 카이사르레스 아우구스티(Diocletian Jovian Maximian Herculeus Caesares Augusti)는 로마 제국을 동서로 확장하고 공화국을 파멸로 몰고 간 기독교인의 이름을 말살시킨 공로를 인정한다.”

    그는 이처럼 자신의 신상을 만들고 전 지역에 세우고 강제 숭배를 하게 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모든 곳에서 금지시켰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죽어서 역사 페이지의 한구석에 달린 한낱 각주처럼 사라졌다. 반면에 그 악한 자가 그처럼 혹독하게 말살하고 박해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명성과 영광이 온 땅에 왕성하게 퍼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바로 우주의 왕, 역사의 왕께서 땅의 악한 왕들을 통치는 비웃으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6절에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고 했다. 여기서 '내가'는 히브리 본문에서 강조 어법으로 사용되었다. 다윗 왕조의 왕을 세우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심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메시아를 거절하고 대적하는 세상의 왕들과 메시야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자신과 대조시킨다.

    또 ‘나의 왕’이라는 말은 사람들에 의해서나 사람들의 혈통에 따라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한 작정과 뜻에 따라 세움을 받은 왕이라는 뜻이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행하실 왕이시다.

    ‘내 거룩한 산 시온’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를 모두 하나님께서 세우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세우신 그곳에 거하신다. 하나님께서 그의 왕 메시아를 그곳에 세우신다는 것은 메시아께서 그곳에 오실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신약시대의 메시야 도래와 그분의 통치를 예고하시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육체로 그곳에 오셨고 부활하심으로 자신을 주와 그리스도로 확증하셨고(행 2:36), 그의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땅에 전파될 것이며 장차 재림하심으로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딤후 4:1).


    B. 이방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7-12).

    1. 아들의 법령(7-9절).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표준 새 번역은 “7. 나 이제 주께서 내리신 칙령을 선포한다. 주께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c) 네 아버지가 되었다. (c. 또는 너를 낳았다) 8. 내게 청하여라. 뭇나라를 유산으로 주겠다.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네 것이 되게 하겠다. 9. 네가 그들을 d) 철퇴로 부술 때에, 질그릇 부수듯이 부술 것이다 하셨다. (d. 또는 철 홀로 다스릴 때에)”라고 되어 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법령(의정서, 칙령, 영令) 전한다. 이것은 어떤 인물을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준하는 증빙 문서를 의미한다(Kraus). 이 법령의 다윗 언약인 삼하 7:14의 내용과 일치한다. 다윗 언약에서 다윗과 그의 후손은 여호와의 양자로 선택되었다. 양자됨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권을 부여받게 되었음을 뜻한다.  즉, 다윗 계열의 왕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땅을 기업으로 받고 아울러 그의 대적들을 심판할 권세를 부여받은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Weiser, Briggs, Rogerson, & Mckay).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로 지목된 시온의 왕은 신약시대에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본 절은 구속 역사 관점과 언약 신약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행하여질 예수의 대관식을 보여 준다.

    또한, 본문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인정을 받는 동시에 그 증거들이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그것은 (1) 예수의 세례(마 3:17), (2) 변화 산상에서의 변모하심(마 17:5), 그리고 (3) 예수의 부활 등이다. 이 셋 중에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 사건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과 만왕의 왕이심을 충분히 증거하고도 충분하게 남는다(Craigie).

    그는 메시아의 예표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다. 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핵심 내용인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 저자는 본문에서 메시아에 대해 세 가지를 예언한다. 그런 맥락에서 본 저자를 다윗으로 본다.

     

    첫째로, 메시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7절에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며, 그가 아버지의 아들임을 밝히시고, 아버지에게서 ‘난 자’로서의 그의 신분을 강조하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장 5절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라고 언급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모든 천사보다 우월하신 증거로 인용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모든 천사보다 더 뛰어나고 뛰어난 이름을 받으셨다고 언급한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뛰어난 ‘이름’은 바로 ‘아들’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때로는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 부른다(욥1:6).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특정한 의미에서 어떤 천사에게도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것은 오직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그 이름이 바로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2위 성자, 아들 되신 하나님의 호칭이다. 놀랍지 않는가?

    ‘오늘날’은 언제인가? 하나님께도 우리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자가 아니신가? 그러므로 하나님께 ‘오늘날’은 ‘영원한 현재’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의 관계는 영원적이다. 그것은 그의 아들의 신성(神性)에서 증거된다. 시간 세계 속에서의 관계라면 아들은 참된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창세 전에 그가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영광에 대해 말씀하셨다(요 17:5). 성경의 풍성한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은 그가 행하신 기적들과 부활로 확증되었다(요 20:30-31; 롬 1:4).

     

    둘째로, 메시아 왕국은 온 세상 땅 끝까지 미칠 것이다.

    8절에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라고 했다.

    "내게 구하라” 이는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20:4;21:2, 4;삼하 24:12;왕상 3:5). 하나님께 자유롭게 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선택된 왕, 그의 아들이 가질 수 있는 특권 중 하나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 자녀인 성도들이 받은 기도의 특권이기도 하다(요16:23-24).

    이어서,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선택된 왕의 아버지이신 주 하나님은 온 우주를 소유하고 계신다. 그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에게 온 땅을 물려주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상속자(相續者)(마 21:38;갈 4:7)가 되기 때문이다.

    크라우스(Krause)는 “‘그의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겠다’는 뜻은 그의 통치가 온 세상에 미칠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또한 페로네(Perowne)는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하신 자녀에게 '아낌없이' 무엇이든 주신다” 뜻이다고 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를 통한 우주적인 통치를 예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Craigie, Rawlinson, Briggs).

    사실, 이스라엘 역사상 그 어떤 왕도 8절의 제시된 것처럼 이방 나라, 곧 열방 모두를 복속시키고 땅끝까지 다스린 적이 없다. 솔로몬 경우에도 그의 통치권이 북으로 유브라데 강변까지 남으로 애굽 하수까지 미쳤다고 할지라도 두로같은 푀니시아 지역은 복속하지 못하였다(왕상 11:14-25).

    물론 하나님의 약속에는 유브라데 강 이편에서 대해까지, 애굽 시내까지 이스라엘이 차지할 약속의 땅이다(창15:18-21; 신1:7; 수1:4; 왕상 4:21). 이 약속은 솔로몬 당대에 잠시 이루어졌을 뿐이다.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영토 확장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므로 시편 2장 8절의 ‘세상 끝까지’는 문자적 성취가 아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 약속의 땅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야 통치가 지역적인 가나안 약속의 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미친다고 선교학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시 6:1-7; 68:31-32; 72:8; 사49:6; 단 7:14; 눅2:32; 행1:8; 행13:37)등이다.

    메시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유업을 받으시고 온 세상을 심판하실 권세를 하나님 하아버지께서 맡기셨다. 요한복음 5장 22절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종말에 이르러 요한계시록 11장 15절에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라고 예언하셨다.

    구약의 다윗 왕국의 확장은 신약의 메시아 왕국을 예표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온 세상의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며(마 28:19; 행 1:8)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셀 수 없이 큰 무리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계 7:9). 세계 복음화에 대한 시편 저자의 예언으로 오늘날 거의 이루어지고 있다.

     

    셋째로, 메시아께서는 철장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실 것이다.

    9절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저희를 깨뜨린다’는 원어(테로엠)는 고대 번역들(LXX, Syr, Vg)에서 ‘저희를 다스린다’(티르엠)는 말로 읽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니엘 2:34에서 ‘열방을 부서뜨리는 돌’로 예언되셨다.

    철장(鐵杖, rod of iron)은 '쇠로 만든 지팡이나 막대기, 철퇴"이다. 쇠막대기로 질그릇을 부수는 것은 고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질그릇, 항아리에 적국들과 그들의 왕들의 이름을 적어서 박살을 내면서 그들을 통치하고 지배할 것에 대한 상징적 행동을 나타낸다. 애굽의 왕들은 대관식 때에 주변 세계에 대한 자신의 통치권을 과시하기 위하여 주변 나라들의 이름을 적은 질그릇들을 깨뜨리곤 하였다(Kraus).

    역사적으로 볼 때, 다윗 왕국이 이처럼 강력한 통치권을 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것은 메시야 되신 그리스도께서 초림의 부활 역사와 재림의 온 우주 심판을 예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애굽의 왕은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질그릇을 깨뜨렸지만 메시야는 '실제로' 질그릇을 깨뜨림과 같이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요한계시록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철장으로 다스리는 자’로 묘사되셨다(계 2:27; 12:5; 19:15). 그의 통치권은 그의 구원 사역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으나, 장차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완성될 것이다(행 17:31; 딤후 4:1).

    어떤 학자들은 ‘깨뜨린다’는 단어가 파괴적인 용어이므로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그라스도의 통치를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Wette, Hupfeld). 그러나 이 구절은 계시록에서 세 번이나 그리스도의 통치와 관련되어 인용되었다. 요한계시록에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를 묘사한 구절이 여러 곳에 나와있다(계 2:27;12:5;19:15). 로린손(Rawlinson)의 언급처럼 “그리스도의 통치에는 두가지 요소 즉, 평화적인 요소와 아울러 악한자들에게 무서운 형벌을 내리시는 심판적인 요소가 함께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이방 나라들에 주신 법령(10-12).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표준 새 번역에는 “10. 그러므로 이제, 왕들아, 지혜를 배워라. 땅 위에 있는 통치자들아, 경고하는 이 말을 받아들여라. 11. 두려운 마음으로 주를 섬기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를 찬양하여라. 12.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진노하실 것이니, 너희가, 걸어가는 그 길에서 망할 것이다. 그의 진노하심이 지체없이 너희에게 이를 것이다. 주께로 피신하는 사람은 모두 복을 받을 것이다.

    10절에서 12절은 이방인들에게 주는 법령이다. 이 법령에는 이방인들이 행하여야 할 일들 3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 둘째, 그 아들에게 입맞추는 것, 셋째,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등이다.

    10절은 세상의 악한 자들에 대한 권고이다.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 곧 메시야에 대한 도전에 대한 어리석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대한 절대복종을 촉구하고 있다. 그들에게 지혜롭게 행동하고 그의 경고를 받아들여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 지혜로운 행동과 경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11-12절의 내용이다.

     

    첫째,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떨며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에 대하여 랑게(Lange)는 “첫째로, 신앙적인 차원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라는 뜻이며, 둘째로) 정치적인 차원에서 여호와께서 세우신 왕에게 복종하면서 다윗 왕조의 속국으로 만족하라는 뜻이다”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순복하라는 권면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 태도이다(잠 1:7). 떠는 것은 마땅히 두려할 자를 두려워하는 뜻으로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촉구하는 것이다. 즐거워하라는 것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참된 기쁨과 만족을 얻으라는 말이다.

    히브리서 13:28도,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라고 교훈하였다. 경건함과 두려움과 기쁨은 성도들이 가져야 할 신앙생활의 올바른 덕목들이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로 오실 메시야에게 ‘입 맞추라’고 권한다.

    입 맞추는 것은 주로 고관이 아랫사람의 겸손한 키스를 받는 복종의 키스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께서 그분과의 관계에서 원하시는 애정을 뜻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앞에서 우리의 합당한 위치와 자세를 갖추시길 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 안에서 기뻐하고 사랑의 관계를 갖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와 중보자이시며 세상의 모든 왕들 중의 왕이시다. 모든 사람은 그를 구주와 주로 고백하고(롬 10:9; 고전 12:3)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그들의 길에 속히 임할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6:22).

    하나님이 세우신 왕께 입맞추지 않으면, “길에서 망한다”고 했다, 그 뜻은 무엇일까? 일차적으로 객사한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자기에 주어진 명에 다하여 살지 못하고 일찍 죽는다는 뜻이 있다. 이것은 각자가 처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 진노의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왕권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아들 되신 메시야에게 순복하지 아니하고 대적하는 자는 그 악한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요한복음 3장 18절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심이라”이라고 했다. 공동번역에는 “자칫하면 불붙는 그의 분노” 표준 새 번역에는 “자신이 걸어가는 그 길에서 망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신속한 심판을 일컫는 것으로 두 번 다시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 시는 진노의 무서운 경고로 끝나지 않고 복된 삶을 누리를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구하는 것이며 이방 나라들의 회심을 요청하는 것이다.

     

    셋째로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의 뜻은 문자적으로 “그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자”이다. 곧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이다. 이방 나라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대적하고 음모를 꾸미지 말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야 진정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뜻이다. 세상이나 세상 권세를 의지하지 말고 사람이나 그의 지혜도 의지하지 말고 돈이나 재물도 의지하지 말라는 권면이다. 사람이 참으로 의지할 자는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뿐이다.

    결론을 맺으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신하는 자에게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고 그분을 바로 알고 섬기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에게 진노하시나 그에게 피하는 자에게는 확실하고 분명한 도움과 보장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또한 구속 역사와 언약 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 아무리 이 세상 나라와 세상 권력이 그리스도의 나라, 그리스도를 도전하고 악한 도모를 꾸릴지라도 결국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승리할 것임을 선포하며 그의 진노가 임하기 전에 하나님께 나와 굴복하고 그분을 경외하며 섬기라는 뜻이다. 늘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편 3편, 믿음으로 얻은 참된 평강


    시편 1편과 2편은 시편 150편 전체의 서론이고, 시편 3편은 시편 150편 전체의 본론이다. 시편 3편으로 시편의 본론이 시작되면서 위기를 만나는 시편 기자인 다윗을 본다. 시편 3편은 다윗의 일생 중 가장 절망적이고 비참한 순간에 지은 시요, 기도요, 고백이다. 본 시편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황급히 신발을 벗은 채, 통곡하며 쫓길 때 그때 지은 비탄(悲嘆) 시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믿음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고난의 인생사를 본다. 삶은 순탄하지 않고 험산준령의 인생길임을 보여준다. 시편 3편은 우리 인생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인생의 삶의 현장이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진퇴양난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참된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믿음의 자세를 보여준다. 또한,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외칠 수 있는 기도와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은 대적의 에워싸임 속에서도 깊은 단잠에서 깨어 아침 햇살과 더불어 믿음으로 아침기도를 드린다. 환경을 초월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받는 참된 평강과 안식을 볼 수 있다.

    시편 1편은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고 따르는 자’의 “복”을 말한다. 시편 2편은 ‘우주의 왕되신 왕이신 메시야를 섬기고 여호와께 피하는 자’의 “복”을 언급한다. 시편 3편은 ‘하나님 자신이 완전한 “복”임을 가리킨다.

    1편, 2편은 “복”(아쉬레)는 상대적인 복된 상태 의미한다. 시편 3편은 하나님 자신의 절대적 복(베레카)임을 강조한다. 1, 2편은 인간의 측면에서 진정으로 참된 복의 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해 변증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3편은 완전히 복되신 분으로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절대적 하나님을 강조한다.

    시편 1편, 2편의 상대적인 복이

    시편 3편에서는 절대적인 복으로

    1. 대적자에 대한 다윗의 탄식(1-4절).

    [개정]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새번역]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쫓길 때에 지은 시> 1. 주님 나를 대적하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나를 치려고 일어서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2 나를 빗대어 하나님도 너를 돕지 않는다 하고 빈정대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1.1. 다윗의 뼈저린 아픔의 탄식(1-2절)

    본 시의 표제에 본 시편의 기자와 상황을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고 소개하고 있다. 본 시의 역사적 배경은 삼하 15장으로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쫒길 때, 기록한 시이다.

    성경 여러 곳에 피하는 인생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아담과 하와가 여호와의 낯을 피한 경우(창3:8), 하갈이 사라의 얼굴을 피한 경우(창16:60), 야곱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한 경우(창35:1). 모세가 바로의 낮을 피한 경우(출2:15), 입다가 자기 형제들을 피한 경우(삿11:3), 다윗이 사울의 낯을 피한 경우(삼상 20:1; 21:11), 요나가 하나님을 피한 경우(욘1:3, 10) 등이 있다.

    약자로 피하는 인생, 범죄자로 피하는 인생, 사명을 버린 자로서 피하는 인생이다. 다윗은 그가 범한 죄의 대가로 자산의 아들의 반란으로 쫓기고 피신하는 가운데 본 시를 기록하였다.

    1.1.1. 다윗의 탄식 소리(1절).

    1절에 다윗은 하나님께 탄원한다. 자신을 대적하고 치는 자들이 ‘어찌 그리 많은가, 하면서 탄식한다. 본 시도 이런 면에서 일종의 탄식 시이다. 다윗은 ‘여호와여’라고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절규의 기도를 드린다.

    ‘어찌’(히브리어, ‘마’)라는 의문부사가 1절에 2번, 2절에 1번 연속으로 나온다. 그 만큼 ‘대적들이’(1절), ‘일어나는 자들이’(2절),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들이“(3절) 엄청나게 많다고 탄식한다. ’어찌‘는 다윗이 당면한 위기와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심각성을 잘 표현해 주는 단어이다(Kraus, Lange). 사면초가의 궁지에 빠진 다윗은 그의 수많은 대적과 그를 구원해 주실 하나님을 교차하면서 바라보고 있다.

    혹자는 본 시의 상황이 다윗이 압살롬을 피하여 예루살렘 성전에서 막 빠져나온 때, 곧 요단강을 넘지 못한 때일 것이라고 추측한다(Rawlinson). 이때가 압살롬의 반란 기간 중에서도 다윗에게 가장 어려웠던 때였다(삼하 17:1-23)고 보는 입장도 있다.

    1.1.2. 대적자의 조롱 소리(2절).

    2절에 대적들이 다윗은 ‘하나님께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빈정된다. 그러한 조롱과 비웃음이 다윗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그들의 조롱은 이미 범죄로 인해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 자신의 핍절한 심정에 더욱더 다윗을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다윗은 자신의 아들 압살롬과 그의 추종 세력들의 반역으로 다급하게 왕궁과 수도 예루살렘을 피신하여 쫓겨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갈 정도로 비참했다(삼하 15:13-16:4).

    다윗이 신하들과 함께 피난 길 가운데 바후림에 이르렀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에 속한 시므이가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연달아 돌을 던지며 저주하고 빈정거렸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 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사무엘하 16:5-8) 하였다.

    2절에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여기서 도움은 ‘넓히다’, ‘공간을 만들다’의 뜻으로 전쟁에서 구출, 승리를 얻는 ‘구원’을 뜻한다. 죄에서 구원을 받는 속죄적 의미보다 위기 속에서 구원, 구출을 의미한다.

    신자에게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할 만큼 양심의 가책이나 불신의 생각만큼 심령의 지옥을 만드는 것이 없다. 자신이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존재라는 불신과 불안감은 영혼을 핍절하게 만든다.

    또한 주변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도움이 없어,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아”라는 말만큼 비참한 상황이 없다.

    2절에 대적자들이 다윗을 가리켜, 즉 ‘나를’은 히브리 원어로 ‘레납쉬’로, 직역(直譯)하면 ‘나의 영혼에게 대하여’이다. 원수들이 다윗의 영혼을 질타하고 있다.

    맨튜 헨리(Mattew Henry)는 그들의 비아냥거림이 “다윗의 몸에 가시가 아닌, 뼈 속에 칼이 되었다”고 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도움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그 생각 만으로라도 매우 두려워진다. 나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보다 그들을 더욱 괴롭히는 것은 없다. 성도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본인의 영적 상태를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마귀와 주변 사람들이 먼저 직감하기 때문이다.

    스펄전(Spurgeon)은 “우리가 하나님께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스스로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 모든 고난 중에서 가장 괴로운 일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신령한 교훈은, “신자의 범죄는 대적자에게 공격의 별미가 된다. 그러나 신자의 회개는 원수를 물리치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사실이다.

    2절 말미에 ‘셀라’로 끝맺음한다. 시편 3편 2절에 처음 등장하는 셀라는 총 39편의 시편에서 68회 사용되었고, 하박국에서 3회(합 3:3, 9, 12) 등 구약 성경에만 총 71회 기록되어 있고 신약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셀라의 문자적 의미는 ‘올리라’는 뜻이고 기능적으로 음악 적 막간을 위한 기호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셀라는 ‘아멘’과 비슷한 뜻도 있다. 셀라가 나오면 ‘쉬어가라’는 노래의 기호이다. 성경을 읽을 때, 읽지 않아도 된다.

    매튜 헨리(Mattew Henry)는 ‘셀라’를 다음과 같이 의미 있게 해석했다. 셀라의 뜻은 "그것을 주목하라" 또는 "거기에서 멈추고 잠시 생각해 보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서 다윗의 대적자들이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잠시 거기서 멈추고 이러한 것에 대해 생각하라.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리로다! 이처럼 사악한 암시를 걷어 치루라“고 했다.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는 절망의 골짜기를 지나는 듯 하다. (사진제공:정준모목사)

    2. 하나님을 전적 신뢰하는 다윗(3-6절).

    [개정] 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새번역] 3. 그러나 주님, 주님은 나의 방패, 내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 나를 떳떳하게 살게 해주시는 분이시니, ) 4.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소리 높여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는 그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여 주십니다. (셀라) 5. 내가 누워 곤하게 잠들어도 또 다시 깨어나게 되는 것은 주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6. 나를 대적하여 사방에 진을 친 자들이, 천만 대군이라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렵니다.

    2.1. 방패와 영광되시며 머리를 들게 하시는 주님(3절)

    개역 성경에는 이 호칭 앞에 '그러나'라는 용어(웨)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란 말은 기도의 노래에서 흔히 시인이 절박감에서 벗어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부사이다(Kraus). 이 신뢰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생겨나는 것이며 결코 인간을 의지함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다윗은 자신을 공격하는 ‘수많은 대적”과 매우 대조적으로 “그러나 주님’이라고 고백한다. 위기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는 근거를 밝히고 있다. 현실적 상황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소망이 있는 것은 주님이 나에게 이런 분이시길 때문이다. 다윗은 언약의 말씀을 확고히 붙잡고 부르짖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기 속에서 다윗은 밤새 기도드린다. 아무리 원수들의 공격이 맹렬하다고 할지라도 다윗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자신을 돌보신다는 철저한 믿음의 고백을 한다. 2절에 대적자들은 다윗에게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것처럼 비양거린다. 3절에 “그러나” 다윗은 그에 반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3가지로 반격하며 선포한다.

    다윗은 자신의 범죄로 인한 대적자들의 음모와 반역에 대하여 당연시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아파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범죄행위로 인한 위기적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라보고 그분의 신실한 언약을 믿고 하나님께 회복과 구원을 간구한다. 여기서 믿음은 연약한 자신, 범죄한 자신, 그리로 인한 고난의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며 고백하며 주님의 구원을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불안한 현실, 불확실한 미래, 이성주의과 인본주의의 물결이 온 세상에 가득 찬 시대에 다윗처럼 “그러나”(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고백하는 다윗처럼 주님의 구원을 앙망하며 기도하며 여전히 소망을 노래할 수 있는 신자들이 이곳 저곳에서 주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2.1.1. 방패가 되시는 주님(3절).

    ‘나의 방패’는 나를 온 사방의 공격에서 철저히 방어해 주는 ‘나를 두르는 방패’(a Shield aroud me, NIV)을 일컫는다. ‘방패’라는 히브리어 단어(마겐)는 시편 84:9,11; 89:18 등에서는 ‘주권자’라고 번역했다. 주님은 다윗 자신을 온 사방을 둘러막아 주시는 ‘방패’이면서 자신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주관하신 ‘주권자’이심이라는 뜻이다.

    또한 시편 76:3; 91:4에는 ‘병기’로 되어 있다. 주님은 우리를 공격하는 어떤 원수와 세력을 막아주시는 방패요, 병기이시며, 이러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권자가 되시기에 결국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승리를 보장해 주신다는 미래적 소망을 표현하는 고백이다.

    궁겔((Gunkel)은 "방패는 단지 한 면만을 막아 주지만 여호와는 모든 면을 다 막아 주신다"고 해석했다.

    2.1.2. 영광이 되시는 주님(3절).

    주님이 다윗 자신의 영광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영광은 명예와 평판을 뜻한다. 표준 새 번역에서 주님은 ‘내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으로 의역하였다. 다윗은 왕적 권위를 도전하고고, 반역과 음모와 함께 조롱을 당하였다. 이처럼 그의 명예는 땅바닥까지 추락되었다. 그러나 다윗은 원수들과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으로 확신하고 있다.

    또한, 영광은 하나님의 찬란하고 위엄찬 임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 자신이 다윗의 영광이 된다는 뜻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에게 허락하시는 위엄과 존엄을 뜻하기도 한다.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날 때, 자신에게 임한 명예와 평판이 떠나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올 때, 잃어버리고 떠나 버렸던 명예와 평판을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하게 하신다.

    또한 다윗은 반란으로 왕관을 벗은 채, 맨발로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모든 왕적 권위의 영광이 추락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땅의 왕으로서 자신의 영예가 추락 되어버렸지만, 천상의 왕, 우주의 왕되신 주님의 영광을 믿고 바라보는 다윗의 신앙고백을 볼 수 있다. 마치, 하박국의 고백처럼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황, 모든 것이 살아져 버린 상황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였듯이, 위기일발의 도망자 상황 속에서 자신의 모든 왕적 권위와 위엄을 상실해버렸을지라도 주님만은 빼앗을 수 없고 주님만은 자신의 영원한 영광이 되심을 고백하고 있다.

    다윗의 이 고백은 “주는 내 유업과 내 잔의 분깃이시니, 주께서 나의 몫을 지키시나이다.”(시 16:5, 한글 킹 제임스 역본)라는 말씀과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등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생들은 명예, 권력, 소유물 등에 자신의 영광을 찾는다. 그러나 다윗은 주님 안에서 그 영광을 찾았다.

    메이어(Meyer)는 “오 내 영혼아, 너는 하나님을 너의 영광으로 삼았느냐? 다른 이들은 부, 아름다움, 지위, 성취를 자신의 영광으로 삼는다. 너는 그들이 이것들에서 발견한 것을 하나님에게서 발견하고 있는가?”라고 우리 스스로에게 자문자답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자신의 모든 명예가 실추되는 절망의 순간,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보는 시선 (사진제공:정준모목사)

    2.2.3. 머리를 들게 하시는 주님(3절).

    머리를 들게 하신 것은 법적 용어이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피고가 재판장에 의해 죄가 없다는 것을 판결하고 인정하는 것을 일컫는다.

    슈미트(H. Schmidt)는 “‘머리를 드는 자’란 판사가 법정에서 부복하고 있는 피고의 머리를 세우면서 ‘당신은 무죄요’ 라고 선언하는 장면과 연관된다”고 하였다.

    델리취(Delitzsch)는 “하나님께서 실의와 좌절 가운데서 수그러진 다윗의 머리를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들어 올리게 하시리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설명하였다.

    요즈음 정치인들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단식에 돌입하는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게 된다. 사법적 혐의가 있는 자는 자기 자신이 무죄임을 주장하고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재판이란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무죄가 입증되어야 한다. 피고에 대하여 무죄로 판정될 때, 억울한 누명을 벗고 추락된 명예와 평판이 회복된다. 그때 숙여졌던 머리를 당당하게 들게 된다.

    다윗은 원수들의 대적과 공격, 고소와 참소의 혐의를 벗고 머리를 들게 된다. 역사적으로 다윗은 감람산에서 수치로 뒤덮혔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원수로터 승리를 주시고, 상실한 영예를 회복주시고, 뿐만 아니라 억울한 혐의를 벗게 하신다.

    2.2.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는 주님(4절).

    방패가 되시고, 영광이 되시고, 머리를 들게 하시는 주님께서는 위기 속에 기도할 때,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내가 부르짓고, 주님은 응답하신다”는 문장 패턴이다.

    성경에서 ‘부르짖다’ 또는 ‘소리 내어 기도하다’라는 성경 구절 다음에는 대부분 ‘응답하겠다’혹은 ‘응답 되었다’라는 놀라운 약속의 말씀이 마치 세트처럼 따라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히브리어로 ‘부르짖다’가 ‘쯔아흐’인데 마치 ‘으악’ 하면서 소리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살려달라’고 하는 부르짖음이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들어주겠다고 하시는 ‘샤마’가 나온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쯔아흐’ 하면 하나님은 ‘샤마’ 해주신다는 기도의 신비이며 기도의 역사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고난의 풍파 속에서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참으로 어리석고 교만한 자이다. 아직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약5:13)." 죽느냐, 사느냐의 생사의 기로에서 다윗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과 최고의 선택은 부르짖는 기도였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맨발로 기도의 자리에 뛰어들어 힘써 부르짖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의 결과 자기 마음속의 가득 찼던 두려움 먹구름이 사라지고 소망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죽을 고비를 만나는 엄청난 고통의 상황 속에서 낙심되어 계속 적으로 심적 괴로움과 정서적 불안이 몰려올 때,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는 찬란한 아침 햇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기도는 자신의 목소리로 부르짖는 행위이다. 기도는 심혈을 기울려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역사가 일어난다. 부르짖는 것은 단순히 악을 쓰고, 열정을 내는 것과 전혀 다르다. 하나님을 전적 신뢰할 때, 매달리는 영적 간절함을 뜻한다.

    성경에 부르짖는 기도의 예가 많이 나온다. 성경에는 다윗은 물론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위기 상황 속에서 부르짖는 기도는 역전승의 역사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수없이 증거하고 있다.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위기를 만났을 때, 부르짖는 기도를 드린 자들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부르짖는 기도의 훈장을 받은 자들이다.

    원수들의 포위망 속에서 다윗이 전심으로 부르짖어 기도했을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뿐 아니라, 실제로 죽음의 수렁에서 생명을 보존하는 깊은 영적 체험과 더불어 기적을 체험하고 되었다. 우리가 영적으로 긴장감을 가지고 깨어 있지 않으면 범죄하게 되고 하나님을 쉽게 망각하게 된다. 우리가 무시로 깨어 있지 않으면 작은 문제 앞에서 자신이 비참하게 초라해지고 문제 앞에 굴복당하고 만다. 그러나 부르짖어 기도할 때, 영혼이 깨어나 힘을 얻고 근심, 걱정,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위기일발의 상황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 그 결과는 무엇인가? 주님께서 성산에서 응답하신다(4절)고 했다. 성산(聖山)은 시편 2:6에서 언급된 ’거룩한 산’이다. 하나님이 왕을 세우시고 다스리시는 곳을 일컫는다. 다윗은 거룩한 산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는 분임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법괘가 안치되어 있는 성막과 성전이 위치했던 시온 산을 가리킨다(시15:1; 43:3; 렘31:23; 단9:16, 20). 시온 산을 또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 보았기에 성산이라고 불렀다.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성산을 향하여 부르짖는 기도

    출애굽 시에는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임재하셔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가나안에 정착 이후 다윗 왕국 시대가 열리면서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자신의 처소를 시온 산으로 옮기셨다(시68:8, 17).

    다윗은 기럇여아림에서 법궤를 가져다가 시온에 두었다. 그가 압살롬의 반란을 피하여 예루살렘을 떠날 때에 그것을 가지고 가지 못하였다(삼하 15:25). 사독에게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가라"고 명했다(삼하 15:25). 그 이유는 피난 속에서 법궤를 이동하는 어려움도 있겠지만 다윗의 언약 사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기도 응답은 상징적 의미에서 시온 산에 있는 언약궤에 있다고 표현하지만 그 실제적으로 언약의 약속의 주 곧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워진 왕(2:6)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전이 건축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 그곳에서 혹은 그곳을 향하여 기도하는 관습이 생겼다. 다윗은 여기서 개관식을 거행했었다(시2:6). 다윗 왕을 성산에서 세우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임재하신 곳에서 다윗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

    시편 여러 곳에서 기도의 응답이 시온 산에서 나온다고 기록하고 있다(시14:7; 20:2). 우리가 부르짖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임재하신 곳에서 응답하신다.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은 지역이라는 시온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디에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짖고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렘 29:11-13)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교훈하시는 것처럼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때 역사가 일어난다.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 임재의 성산을 향해 부르짖는 기도 (사진제공:정준모목사)

    2.3. 단잠을 자게 하시는 주님(5절)

    개정 성경에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또한 새번역 성경에 “5. 내가 누워 곤하게 잠들어도 또 다시 깨어나게 되는 것은 주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마음이 평안할 때, 단잠을 잘 수 있다. 마음의 안정을 찾는 길은 무엇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4-7)

    어떤 상황에서 밀려오는 염려, 근심, 걱정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감사함으로 아뢰면 하나님께서 마음의 평강을 주시며 깊은 단잠을 잘 수 있다. 소망의 빛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부르짖는 기도는 성산에서 떠오르는 밝은 아침 햇살을 보게 될 것이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기도의 불씨가 되고 기도의 불길이 두려움의 세력을 물리치고 평강의 새벽을 맞게 된다.

    2.4. 두렵지 않게 하시는 주님(6절).

    개역 개정 성경의 본문 6절에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새번역 성경 본문의 6절에는 “6. 나를 대적하여 사방에 진을 친 자들이, 천만 대군이라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렵니다.”라고 번역하였다.

    다윗을 포위한 자들은 ‘천만 사람’이 아니라 ‘천만 군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천만도 구체적인 숫자라기보다 ‘수많은’ 군대를 의미한다.

    ‘에워싸 진 친다’는 말을 군사적 용어로 ‘진을 치고 막 공격하려 한다’는 긴박한 상황을 의미한다. 전쟁의 소용돌이, 아수라장 속에서도 깊은 평강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신다는 믿음의 역사이다.

    수많은 대적자의 군대가 사방에서 진을 치고 죽음의 위협으로 더욱 두렵고 무서운 밤을 깊어갔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다윗의 마음에는 샘솟는 평안과 확신이 가득차 있기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신 1:29, 3:22, 7:18, 20:1. 수 10:8).

      수많은 군대가 에워싸도 하나님을 그 중심에 모신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성산 같다.(사진제공:정준모목사)

    위기를 당하고 온갖 두려운 생각으로 몰려올 때, 아무리 몸부림치고 별수단을 다 동원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신다고 확신하니 별 어려움 없이 단잠을 잘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분(시 127:2)이시고 대적자들이 온 사방 둘러싸고 언제 공격해 올 줄 다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붙잡아 주시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떠한 해도 받지 않는다 확신이다.

    사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도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장기가 작동하여 생명이 유지된다. 사람이 잠을 잘 때, 방어 기재와 능력이 없어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그러나 잠자는 순간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에 평안한 잠을 잘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무차별하게 공격하는 인생 문제들이 수없이 산적해 있다. 그 문제 속에 우리 자신이 침몰당하고 만다. 동서남북 사방에 이 문제, 저 문제 낙망과 좌절의 벼랑 끝에 서게 된다. 이때, 우리가 낙심하여 스스로 벼랑 끝으로 추락하느냐 아니면 벼량 끝에서 곧바로 하늘을 향하여 날 수 있느냐 그것은 믿음에 달려있다. 믿음은 날개이다. 소용돌이, 둘러싸인 현안 문제들을 제치고 창공을 나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향한 믿음이다. 믿음은 절망의 절벽에서 하늘을 향해 나는 날개이다.

    3. 구원과 복을 주시길 간구하는 다윗(7-8절).

    [개정]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새번역] 7. 주님, 일어나십시오. 나의 하나님, 이 몸을 구원해 주십시오. 아, 주께서 내 모든 원수들의 턱을 치시고, 악인들의 이빨을 부러뜨리셨습니다. 8 구원은 주께만 있습니다. 주의 백성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편 4편, 고난 속에 믿음으로 얻는 기쁨과 평안

    시편 3, 4, 5편은 모두 다윗이 쓴 비탄시이다. 다윗이 그와 맺는 하나님이 신실하신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탄원시, 신뢰시이다. 시편 3편, 4편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의 반역으로 급박하게 쫓기는 다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긴급한 구원을 간구한다.

    시편 3편을 아침의 기도이며, 시편 4편은 저녁의 기도로 한 쌍을 이룬다. 5편은 압살롬 반역이 터지기 직전에 다윗이 닥쳐올 위기 상황을 감지하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간구하는 시이다.

    본 시편은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자는 두려움이 몰아치는 밤조차도 평안히 맞이할 수 있음을 노래하는 ‘저녁 찬송시’이다. 본 시는 탄식과 애가로 시작되지만(1-2절), 신뢰의 찬양(7-8절)로 마무리하고 있다. 그래서 본 시를 비탄의 시, 애가의 시, 신뢰의 시라고 불리운다.

    본 시의 표제에 ‘다윗의 시, 인도자(메낫체아크, 찬양대장, 지휘자, 혹은 파트장)를 따라 현악기(네기노스)에 맞춘 노래라고 하였다.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확신하며 진정한 심령의 평안과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고난의 현재의 실존에서 오직 참 구원과 참 소망되신 주님을 전적 신뢰하는 가운데 누리게 될 기쁨과 평안을 찬양드리는 시다. 나그네 인생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형형색색으로 끊임없이 침노하는 각종 고난과 시련 속에 위로를 받고 또한 각자의 시편 4편을 노래해야 할 것이다.


    1. 탄식: 나의 기도를 들어주소서(1절)

    [개정]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새번역] [지휘자를 따라 현악기에 맞추어 부르는 다윗의 노래] 1.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내가 곤궁에 빠졌을 때에, 나를 막다른 길목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곤란을 당한 다윗이 자신의 의가 되신 하나님께 자신의 무죄함을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여 기도드리고 있다. 막다른 길목, 곤란의 상황에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 주시길 확신하며 부르짖고 있다.

     

    1.1. 의의 하나님(1절)

    1절에 ‘내 의의 하나님(개정)’ 혹은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새번역)’은 히브리 원문에 ‘엘로헤 티데키’로 되어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의를 주시는 분’이라기보다 ‘나의 하나님 곧 의의 하나님’이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공정한 재판을 주관하는 재판관처럼 자신의 억울한 상황을 잘 판단하셔서 자신에게 ‘의를 주시는 하나님’이란 뜻이다. 곧, '정의롭게 판단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다윗의 대적들은 그를 정죄하고 대적하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바르게 판단하셔서 오해와 누명을 벗기신다는 뜻이다(Rawlinson).

    벤게메런(vanGemeren)은 ‘의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아버지-자식관계를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다. 다윗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에서 자신을 의롭게 여기시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확고하게 서 있는 ‘의’ 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다윗의 자만이나 교만한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의로운 관계 때문에 갖게 되는 자신감 혹은 확신이라고 볼 수 있다.

    브릭스(Briggs)는 “하나님은 다윗의 송사를 원수를 대항하여 신원해 주시며, 그의 권리를 세워주시는 분”으로 해석하고, 비텐비져(Buttenwieser)는 ‘억울함을 보상해 주시는 분”으로 해석하였다.

    ‘의의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기에 에게게 구원을 베푸시는 인자하신 하나님이시다. ‘내 구원의 하나님’(시18:47)이시며 또한 내 인자함의 하나님(시59:11, 18)으로서 ‘구원과 인자함을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했으나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잘 판결하셔서 우리가 의롭다고 판정해 주시는 분이시다. 인생사에서 얼마나 원통하고 억울한 일로 가슴에 멍이든 우리의 현실을 온전하게 억울함 없이 판단해 주실 분은 오직 우리 하나님, 의의 하나님뿐이시다.

     

    1.2.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는 하나님(1절)

    시편 여러 곳에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응답해 주시길 간구하고 있다(시3:5; 17:6; 27:7; 55:17; 86:6,7; 91:15; 99:6; 102:3; 118:5; 119:145, 146; 120:1; 138:3). 예레미야도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리라’라고 약속하셨다. 기도를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응답의 확신을 갖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무용지물이다. 기도드릴 때,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고 교훈하는 몇 가지 말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마태복음 7장 7~8절 -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 마태복음 18장 19절-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 마가복음 11장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 요한복음 15장 7절-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요한복음 16장 23~24절-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 히브리서 11장 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요한일서 5장 14~15절- “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1.3. 곤란에서 해결해 주시길 간구(1절)

    ‘곤란’(챠르)은 히브리에 동사 “챠라르”에서 나온 말이다. 그 뜻은 ‘묶다’, ‘제한되다’, ‘괴롭히다’, ‘좁은’, ‘부족한’ 등이다. ‘너그럽게 하다’는 ‘자리를 넓게 만들다’, ‘마음을 크게 갖는다’는 뜻이다. 문자적으로 ‘곤란 중 너그럽게 하셨다’는 것은 ‘협곡에 포위된 군대가 포위를 뚫고 넓고 광활 지역으로 빠져 나오는 해방과 승리’를 의미한다.

    다윗이 위기를 당했을 때는 포위망에 갇혀있는 곤란 중에 있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 넓고 위험이 전혀 없는 지역(너그럽게 된 지역)으로 나오게 되는 것을 간구하고 있다.

    젠거(Zenger)는 “위기에서의 구원을 얻게 됨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라고 했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협곡(곤란)에서 구속을 받는 (너그럽게 되는 것)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주님, 오늘 당면한 제 인생의 협곡, 곤란에서 주님의 도우심으로 해방과 평안, 곧 너그러움을 주옵소서”

    다윗은 과거에 이미 구원받은 신앙체험을 근거하여, 또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상기 하면서 확신에 찬 기도를 드린다. “곤난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곧 이미 지난날에도 너그럽게 해주신바 있으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신앙생활에서 지난 날 체험과 간증을 현재와 미래에 당면한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과 역사를 기대하고 호소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큰 힘이 된다.

     

    1. 4. 은혜 베푸시길 간구(1절)

    주님의 은혜을 간구하는 것은 절박한 문제에 부딪칠 때, 나타나는 기도 내용이며 마땅한 자세이다. 주님은 부르짖을 때, 은혜를 베푸시고,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시다.

    어려움을 당하면 기도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닐까? 곤란을 만나면 기도하는 신호이다. 곤란은 기도 시작으로 곤란을 끝을 내어야 한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5:13).

    다윗은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라고 간구한다. 다윗이 자신이 가진 의(義)는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전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얻은 것이다.

    또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구원도 전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다윗은 자신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곤란 즉 환란과 위기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의 여유와 안정을 주시고 그를 건져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2. 촉구: 인생들아 주님을 위로하라(2-5절).

    [개정] 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새번역] 2. 너희 높은 자들아, 언제까지 내 영광을 욕되게 하려느냐? 언제까지 헛된 일을 좋아하며, 거짓 신을 섬기겠느냐? (셀라) 3. 주님께서는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을 각별히 돌보심을 기억하여라. 주님께서는 내가 부르짖을 때에 들어 주신다. 4. 너희는 분노하여도 죄짓지 말아라. 잠자리에 누워 마음 깊이 반성하면서, 눈물을 흘려라. (셀라) 5. 올바른 제사를 드리고, 주님을 의지하여라.

    위기 속에서도 전적 하나님을 신뢰한 다윗은 승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확신하였다. 다윗은 용기백배하여 대적자들에게 헛된 일을 하지 말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를 경외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2.1. 헛된 일, 거짓을 그만 두라(2절)

    ‘인생들’은 원문에 ‘인간의 아이들아’로 되어 있다. 다윗에게 반역한 그의 아들 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킨다(삼하15:1-12). 그들에게 인간(이쉬)이라고 한 것은 유한성을 가리킨다. 다윗 자신에게 반역하고 대항하는 그들의 행위와 노력이 결국 헛되고 허사로 돌아갈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인생들’이 지닌 뉘앙스가 ‘부자들’, ‘권세가’들로 이해하고 새번역에서는 “높은 자들’로 현대어 번역에서는 “권력 잡아 힘깨나 쓴다는 자들’로 번역했다. 이것은 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의 위치와 신상을 표현한 것 같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부, 권력, 영화도 순간일 뿐이다.

    ‘어느 때 까지’ 혹은 ‘언제까지”는 견디기 힘들 것나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탄식시에서 많이 등장한다. 때로는 삶의 긴 터널을 지나갈 때, 탄식하며 주님, 어느 때까지 이런 고난의 밤을 지내야 합니까? 하며 울부짖을 때가 있지 않는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는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 왕국의 왕권에 도전하고 탈취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의 ‘헛된 일’은 ‘허사’(리크)로 ‘어떤 일을 망치고 방해하는 악한 행위’를 뜻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의 왕권에 도전하고 찬탈하려는 행위는 곧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거역하는 인간의 무모하고 부질없는 악한 행위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행위가 ‘거짓(카찹:궤휼, 잘못된 것, 거짓된 것)을 구하는 것’으로 보았다.

    압살롬의 반역은 그의 계획 시초부터 거짓으로 시작되고 진행되고 거짓으로 마쳤다.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 권위, 제도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불응하고 도전하는 것은 하나님 권위에 대한 도전이요, 그 일은 헛된 결과를 가져오며 거짓 행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압살롬의 거짓 행위를 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압살롬의 생애는 안타깝게도 거짓으로 일관되었다. 그는 이복동생 다말을 겁탈한 동생 암논을 살해하기 위해 마음에 없는 거짓으로 성대한 잔치를 베푼다. 부왕 다윗이 병석에 누워있는 동안 4년 동안 거짓으로 민심을 도적질 하였다(삼하 15:1-6). 반역을 도모하기 위해 무리들을 헤브론으로 군집시킬 때에도 제사드리고 간다고 부왕 다윗을 속였다(삼하 15:7-12). 병석에 누워있는 다윗 왕을 문병한 것도 다윗의 상황을 면밀히 확인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기 위해 거짓으로 한 짓이다(시41:5-9).

    압살롬은 늘 다윗의 왕권을 빼앗기 위해 거짓말만 즐겨하고 그의 입은 다윗을 축복하나 그의 속마음은 저주를 품는 간사스럽고 거짓으로 일관되었다. “너희가 그를 그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릴 궁리만 하고, 거짓말만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저주를 퍼붓는구나( 셀라 )(시62:4).

    결국 압살롬은 그처럼 자랑하던 자신의 머리카락이 나무에 걸리고 심장이 창에 찔려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다. 그의 생애는 간사와 거짓으로 일관되었다. 그러나 거짓으로 시작된 그의 반역이 허사로 끝나버린 사울 왕과 마찬가지로 가련한 인생이다. 어떤 경우에도 진실하게 살며 공의를 따라 살아가야 하겠다. 요즈음 거짓이 활기 치는 시대이다.

    수원수구(誰怨誰咎:남을 원망하거나 탓할 것이 없음)의 세상이다. 정계, 언론계, 교육계, 군 당국, 교계 등 어느 한 분야에 정직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이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도 하나니”(딤후 3:13). 종말의 징조 중 하나임을 지적한 바울의 교훈이 예사롭지 않다. 거짓없는 정직한 영성을 주옵시고, 정직한 세상을 만들기에 썩어지는 밀알이 되게 하소서, 아멘.


     

    2.2.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알라(3절)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워 그에게 왕권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이요,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하신 일이심을 여러 성경에서 언급했다. 다윗은 이런 사실을 대적자들에게 선포하여 그들의 반역행위가 철저히 잘못된 것으로 다윗에게 범하는 죄악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범하는 죄악상임을 밝히고 있다.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이 택하신 ‘경건한 자’로 고백하고 있다. 이 뜻은 ‘거룩한 자’, ‘신실한 자’, ‘자비한 자’, ‘성도’ 등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전적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앙고백적 자아관이라고 할 수 있다.

    ‘택하다’는 뜻은 ‘구분하다’, ‘특별히 취급하다’는 뜻이다. 구약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며 선민사상을 강조한다(Brueggemann & Bellinger).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를 구분하신다”(set apart, KJV, NIV, RSV, NASB) 혹은 “경건한 자를 위해 기이한 일을 행하다”(performs wondersNJB, NAB) 등으로 번역하였다.

    경건한 자는 자기 스스로 경건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택하여 경건한 사람으로 세우시고 경건하게 살 수 있도록 도우셨기에 경건한 자라고 일컫는 것이다. 성경에 수없이 다윗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심에 대한 사실을 언급한다. 그 이유 중 언약 신학과 사상에서 볼 때, 다윗은 바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적 인물, 그림자가 되기 때문이다.

    2절에 언급된 ‘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는 자’들에게 3-5절에 7가지 명령문으로 권면을 한다. ‘알아라’, ‘두려워마라’, ‘죄를 짓지 말라’, ‘잠자리에 누워 말하라’(깊이 반성하라), ‘잠잠하라’(눈물을 흘리라), ‘제사를 드리라’, ‘의지하라’ 등이다. 이는 더 이상 범죄하지 말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명령적 권면이다.

    크레이기(Craigie)는 7개 명령문이 점진성을 띤 명령문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너희는 화와 분노로 가득해 떨 수 있다. 그러나 죄는 짓지 말아라! 너희 마음속이 악한 말로 가득할 수 있다. 그러나 밖으로 표현하지는 말아라! 조용히 침대에 누워라, 그곳에서는 나쁜 짓을 할 수 없다.”고 했다.

     

    2.3. 떨며 범죄하지 말라(4절)

    ‘떨다’(라가즈)는 ‘분노하다’, ‘두려워 떨다’는 뜻이다. 크레이기Craigie)는 “분노함으로 떨 수는 있으나 어떠한 행위를 함으로 범죄하지는 말라”고 해석했다. 다윗은 압살롬과 그 추종자들이 자신의 잘못과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두려워 떨면서 분하게 여기고 더 이상 죄짓지 는 어떤 행동을 하지 말고 회개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다.

    수많은 밤을 기도로 새워본 다윗(시16:7; 17:3; 22:2; 57:8; 108:2)은 그들에게 잠자리에 누워 자신들이 행한 행위에 대하여 깊이 반성하고 자들이 범한 행동을 깊이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권면한다.

    새번역에는 마음 깊이 반성하고 눈물을 흘리며 각성하라는 뜻으로 번역되어 있다. 다윗에 대한 압살롬과 그 무리들의 반역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요 범죄이기에 그들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2.4. 하나님을 의지하라(5절)

    다윗은 대적자들에게 3-4절에서 7개 명령문으로 ‘이런 짓들을 하지 말라’로 부정적 명령을 한 후, 두 가지 긍정적 명령을 한다. ‘의의 제사를 드리라’(5절). 여호와를 의지하라(5절) 등이다.

    첫째로 다윗은 의의 제사를 드리라고 권면한다. 압살롬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자신들의 반역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거짓된 제사를 드렸다(삼하 15:7-12). 다윗은 그러한 불의한 제사가 아닌 의의 제사, 형식적 제사가 아닌 진정성 있는 제사를 드리라고 권면한다. 의의 제사는 마음을 찢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진실하게 드리는 제사를 일컫는다(시51:17; 욜2:13).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품고 회개하지 아니한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시66:18). 하나님은 악인의 제사는 미워하시고 정직한 자의 기도는 기뻐 받으신다(잠15:8).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 통회하는 마음을 원하신다(시51:19).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의 희생제물을 기뻐하신다(시51:19). 하나님은 스스로 마음의 가죽을 베는 자를 찾으신다(렘4:4). 하나님은 마음을 찢고 돌아오기를 원하신다(욜2:3). 하나님은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미워하신다(사1:13).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에서 거짓말하는 것을 심히 경계하신다(렘7:4). 하나님은 삶에서는 죄악을 짓고 하나님 전에서는 제사 드리는 거짓을 책망하신다(렘7:8-10).

    두 번째로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자신을 전적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이다(McCann). 하나님께서는 어떤 종교 행위 그 자체보다 그 행위자의 신실성, 곧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고 살아가는 삶을 원하신다.

    오늘날 성도들이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거슬려 살다가, 예배자리에 와서는 진실한 자기 성찰, 회개와 각성도 없이 형식적 예배와 감정적 열정에 몰입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예배는 두렵고 떨리는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 상한 마음으로 의의 제사를 드리고 그분을 전적으로 앙망하며 사모하며 의지하는 예배자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

     

    3. 기쁨과 평안: 주의 얼굴을 비취소서(6-8절)

    [개정] 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새번역] 6.수많은 사람이 기도할 때마다 "주님, 우리에게 큰 복을 내려 주십시오."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며 불평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의 환한 얼굴을 우리에게 비춰 주십시오. 7. 주님께서 내 마음에 안겨 주신 기쁨은 햇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에 누리는 기쁨보다 더 큽니다. 8. 내가 편히 눕거나 잠드는 것도, 주님께서 나를 평안히 쉬게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다시 한 번 더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재확인한다. 주변 사람들은 하나님께 복을 구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다윗 자신은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무한한 복을 누리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주위 사람들은 땅의 복을 구하나 자신은 하나님의 얼굴, 즉 하나님 자체를 구한다고 확신에 넘치는 고백과 간구를 하고 있다.

     

    3.1. 하나님 얼굴을 바람(6절)

    6절의 ‘여러 사람’, ‘수많은 사람’은 2절의 교만한 대적자와 달리 6절에는 소심한 회의론자, 낙심한 자들을 일컫는다. 그들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자, 좋은 일을 보여줄 자가 어디에 있는가”하며 내뱉는 불신앙적 불평과 불만, 의심과 회의라고 할 수 있다.

    ‘선’(토브)은 추수절 수확물 혹은 수확물을 얻게 하는 비를 가리킨다고 하나 일반적으로 땅에서 얻는 물질적 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불경기, 물가 상승, 이자율 급등, 직장 퇴출, 사업장 폐업으로 고통당하는 상황에서 누가 우리에게 선을 베풀까 의심하고 신앙을 포기하는 연약한 성도들을 보게 되는 안타까움을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땅의 것에 대한 관심, 육적인 일에 대한 집중으로 영적이고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윗은 땅의 물질적인 풍요만을 구하는 수많은 인생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웃으시는 얼굴을 구하고 있다(6절). 대적자들의 입에서 뿜어내는 불 신앙적 회의와 불평에 대하여 다윗은 아론의 축복 기도문(민6:25-26)을 상기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였다.

    ‘하나님 얼굴’은 구약에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언약적 축복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이 땅에 어떤 물질적인 복과 비교될 수도 없고 비교할 수도 없는 복 중의 복이요 복 그 자체이다. 또한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것으로 하나님 임재 안에 있다는 그 자체보다 더 큰 은혜와 더 큰 복이 무엇이 있겠는가?

    다윗은 1절에서는 ‘하나님’(엘로힘)으로 기도하였으나 여기서는 ‘여호와’(야웨)로 기도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그 신실하신 하나님,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축복을 간구하고 있다. 기도는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고 찾는 것이 중요하며 그 하나님의 성품, 능력, 약속을 바라보고 언약을 근거하여 기도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이다.


     

    3.2. 하나님이 주신 기쁨(7절)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을 체험한 다윗은 그에게 임한 기쁨은 햇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한 수확보다 더 큰 만족감을 고백하고 있다. 진정한 행복은 어떤 예배나 예식, 또한 거대한 종교 축제나 행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더위기 풍성한 수확의 햇곡식과 가득 찬 새 포도주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행복과 기쁨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주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평안, 안식, 위로, 기쁨을 주시기 때문이다.

    추수의 기쁨은 수고와 땀, 노동과 인내의 열매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보람으로 얻는 기쁨이다. 그러나 다윗의 심령 속에 흘러넘치는 영적 만족과 기쁨은 물질적 풍성함으로 오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보이는 물질의 풍요는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다. 그러나 여호와로 말미암는 기쁨은 영원하신 주님 그 자체이기에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고 영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영생과 천국의 소망이 아닐까?

     

    3.3. 하나님이 주신 평안(8절)

    추적자들에 의해 쫓기는 정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다고 확고한 믿음을 가진 다윗에게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평안히 잘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오직 주님만이 진정하고 온전한 보호자가 됨을 고백하고 있다. 자기 욕심과 죄책감 속에 두려움과 불안 속에 평안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인생과는 차별된 참된 평강과 안식을 볼 수 있다.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에서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히브리 원어에는 ‘눕고’ 앞에 ‘함께’, 혹은 ‘한번에’라는 단어가 있다. 한글 번역에는 생략되었다. 게세니우스(Gesenius)에는 “be united” 또는 “make one”으로 번역했다. 또한 포세트(Fausset)에는 “at once”로 해석했다. 이것은 매우 의미를 잘 살린 해석으로 “눕고 자는 것이 동시에 바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눕자마자 잠들었다”는 뜻이다. 대적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위기 속에서 눕자마자 잠들었다는 것은 상상 밖의 모습니다. 추적자의 쫓기는 자로서 피곤하여 바로 쓰러져 잠들었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을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분이 오직 여호와 곧 언약의 하나님, 약속을 신실히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잠, 안식의 잠, 평강의 잠이다.

    현대인들이 제일 많이 복용하고 있는 약 중에 하나가 수면제이다. 현대 사회를 불면증 사회라고 불명예로운 이름이 부쳐져 있다. 최근 뉴스 보도에 따르면, “국민 3명 중1명, 한번 쯤 겪는다는 불면증..건강한 삶을 위한 첫 걸음은 '숙면’이라고 서울대 병원 정신 건강 의학과 이유진 교수의 글이 소개된 것을 보면 쉽기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또한 불면증이 가져 오는 합병증도 매우 심각하다. 특히, 우울증을 동반하고 자살까지 이르는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어떤 약물, 민간, 운동 요법도 근본 치료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처방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아무리 위험한 위기일발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을 모신 자는 어디서나 환경을 초월하여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다.

    시편 40편 2절에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시편 78편 52-55절에 “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들의 기력의 처음 것을 치셨으나 그가 자기 백성은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그들을 안전히 인도하시니 그들은 두려움이 없었으나 그들의 원수는 바다에 빠졌도다 그들을 그의 성소의 영역 곧 그의 오른손으로 만드신 산으로 인도하시고 또 나라를 그들의 앞에서 쫓아내시며 줄을 쳐서 그들의 소유를 분배하시고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그들의 장막에 살게 하셨도다”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계시면 대적자의 공격, 험산준령, 검푸른 바다, 삭막한 광야, 뜨거운 태양 빛 그 무엇이 두렵겠는가? 하나님께서 그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에는 ‘안전히’, ‘평안히’ 인도하실 것이다.

    모세도 요단강 동편에서 이스라엘 12지파를 축복하면서, 신명기 33장 27-28절에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평화에 대하여 대표적으로 물리적 힘, 패권자의 힘으로서 평화(Pax) 있고 심령에 솟아나는 내면에 솟구치는 평화Shalom)가 있다. 다윗은 패권자의 힘을 상실하는 가운데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 평강이 있었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우리의 가장 우선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이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것’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회복하는 것’이고 이러한 것을 통해, 우리가 모든 조건과 상황에서 평안을 쟁취하는(Peace Making) 능력을 얻게 된다”고 했다.

    주님께서 어떤 환경,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임마누엘로 안전하게 하시니 두려움과 불안 초조감 없이 눕자마자 평강의 잠을 곧 바로 잘 수 있는 것은 믿는 사람들의 참된 안식과 평강의 잠을 주시는 주님의 큰 은총이요 은혜요 선물이요 축복이다.

     

    결론

    본 시의 저자인 다윗은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이다. 그는 위기 속에 자신이 그 상황을 다급하게 모면하거나 급박하게 탈출하기 위하며 하나님께 현상적이고 물리적인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으로 긴박하고 다급한 상황에 대하여 그 심각한 현상과 문제들을 하나님께 토로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의 현장에 분명코 개입하셔서 전화위복의 상황으로 급전시키고 회복시켜 주실 것을 믿고 고백하고 노래를 드렸다.

    대적자들이 호시탐탐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두려운 마음과 걱정스런 생각을 바꾸게 하였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처한 상황을 변화시키기보다 기도하는 자신을 기쁨과 평강으로 이끌어 준다.

    기도를 통하여 상황에 대한 불평과 원망을 하기보다 하나님의 전적 도우심을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참된 평강과 안식을 누리게 된다는 진리를 배울 수 있다.

    험악한 인생길에 수많은 시험이 복병처럼 호시탐탐 밀려올 때에도 항상 주의 얼굴빛을 구하는 자에게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큰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된다. 그것은 보혜사 성령님께서 영원히 우리 안에 거하시며 참된 위로자가 되시면 진정한 문제 해결자가 되어 주시길 때문이다.

     


    우리는 호라티오 스페포드(Horatio Spafford(1828-1888)가 작시한 "내 영혼 평안해 (It is well with my soul)"라는 찬송시 속에 4명의 자녀들의 생명을 동시에 빼앗아간 참람한 아픔의 심연 속에 주님이 주신 평화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찬송시를 썼던 호라티오 스페포드(Horatio Spafford(1828-1888)는 당시 시카고에서 성공한 변호사이자 부동산 투자자였다. 그와 그의 아내 에나(Anna)는 1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낳고 교회에서 자선 활동과 봉사의 삶을 살며, 신실하게 그리고 유복한 삶을 영위했던 가정이었다.

    1871년 그들 가족의 불행이 다가왔다. 그 해에 성홍열(Pneumonia)로 네 살 된 아들을 잃었습니다. 몇 달 후 시카고 대 화재(Great Chicago Fire)로 인해 소유 재산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 1873년 다시 큰 비극이 설상가상으로 닥쳤다.

    인생사에 지친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려 온 가족이 유럽 여행을 계획했다. 가장인 호라디오 스페포드는 가족과 함께 할 계획이었지만 예기치 않은 사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카고에 머물고 아내와 자녀들을 먼저 보내게 되었다.

    1873년 11월 21일, 프랑스 정기 여객선인 ‘빌 뒤 아브르’(SS Ville du Harve) 호에 호라티오의 부인 에나와 네 딸을 포함, 313명의 승객을 태우고 출항하여 미국에서 유럽으로 가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다.

    출항을 한지 약 4일 만에 대서양 바다 한가운데서 ‘빌 뒤 아브르’ 호는 스코틀랜드의 강력한 철제 선박인 락크 에론(Loch Earn)과 충돌했다. 갑자기 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

    에나는 서둘러 네 자녀를 갑판으로 데려왔다. 그녀는 그곳에서 네 자녀(Annie, Maggie, Bessie, Tanetta)와 함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를 살려주시거나, 우리에게 닥친 위험을 잘 견디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약 12분 이내에 이 선박은 4명의 호라티오 자녀들을 포함하여 226명의 승객을 대서양의 어두운 바다 아래로 수장시켜 버렸다.

    배가 침몰한 지점에서 구조작업을 하던 선원이 잔해 위에 떠 있는 한 여성을 발견했다. 아직 살아 있는 에나였다. 그는 그녀를 배에 태웠고 그들은 9일 후 웨일즈 카디프에 상륙한 또 다른 큰 배에 실렸다. 거기에서 그녀는 남편에게 "혼자 살아남았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Saved alone, what shall I do?)"라는 문구가 적힌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짧은 전보를 남편 호라티오 에게 보냈다.

    혼자 살아남아 보낸 그의 아내의 전보를 보고 그는 충격과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사랑하는 네 딸들을 잃고 정신없이 헤메고 있을 그의 아내를 생각하여 정신을 차리고 부인을 만나기 위해 사고 선박회사에서 제공하는 배를 타고 사고 현장으로 갔다.

    가는 도중 선장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지금 배는 당신의 딸들이 잠긴 물 위를 지나고 있다”고 했다.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던 그의 마음에 또 다시 커다란 파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검푸르고 깊은 차디찬 바다 속에 잠들어 있을 딸들의 얼굴이 떠올라 너무나 괴로웠다. 그는 눈물로 통곡하며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주님,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했던 저에게 어찌하여 이토록 큰 시련을 주십니까?”

    죽은 아이들의 얼굴이 밤새 자기 눈앞을 지나갔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 아닌 씨름을 하던 중 그에게 갑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평안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의 입술에서는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평안을 고백하였다.

    “It is well with my soul.” (내 영혼 평안해)의 시를 적었다. 시카고로 돌아온 그는 필립 폴 블리스(Philip Paul Bliss, 1838-1876)에게 자신의 아픈 사연과 고백을 들려주었다.

    작곡자 필립 폴 블리스는 미국의 복음 성가 작곡자로서 가장 이름이 높던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스페포드의 고백과 시에 감동을 받은 블리스는 바로 그 자리에서 곡조를 붙였고, 이런 계기로 우리 말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하든지>이다.

    위와 같은 비극적이고 처참한 상황 속에서 좌절과 낙심 속에서도 주님의 위로와 평강을 체험한 후 위대한 찬송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편 5편: 인도와 보호를 위한 아침 기도

    본 시편은 애가 시편으로 분류된다. 간청의 시, 무죄 천명의 시, 보호의 시, 확신의 시, 피고소인의 기도 시 등으로 불린다.

    본 시는 표제어에 나온 것처럼 다윗 왕의 시로서 다윗이 악인들의 횡포로 괴로워하여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하는 시이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이 있기 직전 자신에 대한 반역의 음모가 원수들에 의해 꾸며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드린 기도이다.

    이 시는 아침 희생 제사 전에 제사장들에 의해 낭독되었거나 개인 예배자들이 예배 시 입례 송으로 불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용 구조는 아침에 드린 기도 내용들(1-3절),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인생들(4-6절), 하나님께 간구하는 소원들(7-8절), 악인이 받는 벌(9-10절), 의인 받는 복(11-12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아침에 드리는 기도의 내용들(1-3절)

    [개역 개정]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관악에 맞춘 노래> 5.1.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5.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5.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표준새번역] <지휘자를 따라 관악기에 맞추어 부르는 다윗의 노래> 1.주님,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이 하소연을 살펴 주십시오. 2.이 탄식 소리를 귀 담아 들어 주십시오. 나의 임금님,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께 기도를 드리니, 3 주님, 새벽에 드리는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새벽에 내가 주님께 사정을 아뢸 준비를 하고 기다리겠습니다.

    본 시편은 다윗이 지는 시로서 인도자 혹은 지휘자를 따라 관악기(참고, 오늘날 NIV를 비롯하여 많은 번역본에서는 ‘플룻’으로 번역) 에 맞춘 노래이다. 다윗은 대적자들의 공격에 두려워하지 않고 위기 상황 속에서도 이른 아침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기다렸다. 다윗의 기도는 마음 중심에서 외치는 기도였고, 하나님의 왕권을 철저히 인정하는 기도였고, 하루가 시작되는 첫 시간에 온 마음을 다해 드린 기도였다.

     

    1.1.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1절)

    다윗은 1, 2절에 ‘귀를 기울여 주소서’, ‘헤아려 주소서’, ‘들어주소서’ 등 세 개의 강조형 명령문을 사용하여 다급한 상황에 마치 황급히 주님이 계신 방을 노크하듯이 주님께 아뢰고 있다. 또한 다윗 기도의 긴박성은 물론 간절성, 끈기성을 보여주고 있다.

    다윗이 거듭해서 3번씩이나 명령형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긴박한 상황에 대하여 주님께서 속히 개입하셔서 문제 해결을 해 주실 것에 대한 강렬한 요청이다. 특별히, 자신이 간구하는 ‘말들’(에메르), ‘심정’(하기그, 신음소리), ‘부르짖음(콜 쉐바, 부르짖는 외침) 등을 기울여 주시고, 헤아려 달라고 점점 더 간절하고 간곡하게 기도드리고 있다.

    여호와, 즉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주님을 믿고, 그의 중얼거리고, 속삭이는 말, 더 나아가 그의 마음아리하는 속 심정, 더 강렬하게 울부짖는 목소리로 하나님께 탄원하며 기도드리고 있다.

    다윗의 기도에서 기도 원리를 배울 수 있다. 기도 대상은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인격자 되신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기도의 자세는 점진적으로 더 강렬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입술에서 나오는 말,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탄식과 신음, 그리고 울부짖음으로 기도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렬해 진다. 기도의 시간은 언제나 드릴 수 있지만, 하루가 시작되는 고요하고, 정숙한 이른 아침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1.2. 부르짖음을 들어주소서(2절)

    1절에 ‘여호와’께로 부르짖는 기도가 2절에서는 ‘나의 왕’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다윗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우주 왕이시요,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 자신이 왕으로 세우신 분이 진정한 통치자가 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자신의 억울한 상황, 다급한 문제를 친히 재판관이 되셔서 올바르게 판단, 판결을 내려 달라는 간구이다.

    여기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시44:4; 47:6,7; 68:24; 74:12; 84:3; 95:3, 145:1 참조)이라고 부르짖는 것은 당시 최종 재판과 판결에게 있기에 다윗은 왕인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진정한 왕이시고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판결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잘못된 판결을 받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수십 년 후에 새로운 증거를 통해 무죄 판결을 받은 경우도 허다하다. 이처럼 세상의 법과 세상의 재판으로 진실이 가려져 억울한 누명을 쓸 때도 많이 있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다. 진정한 재판관, 온전한 재판관, 정의의 재판관은 오직 우리의 왕 되신 주님뿐이시다.

     

    1.3. 아침의 기도를 들어주소서(3절)

    3절에 ‘아침’이 두 번 나온다. 아침은 동녘이 밝아오는 시간, 곧 새벽을 가리킨다. 아침 혹은 새벽은 아침 제사 시간과 기도 시간과 연관이 있다(왕하3:20; 16:15; 암4:4).

    구약에서 아침 시간은 주님의 도우심이 임하는 시간으로 본다(시46:5). 아침에 큰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였다(출14:24; 사37:36). 아침에 번제를 드렸다(겔46:13,14,15). 아침에 모세가 율법을 받았다(출19:16; 34:2). 아침에 제사를 드렸다(출29:38-42; 민 28:2-8). 아침에 여리고 성을 돌았고 아침에 무너졌다(수 6:12, 15).

    맥케이(McKay)는 “새벽 시간은 하나님께서 도우시기 위해 오시는 시간, 하나님 자신께서 그의 사랑을 계시하는 시간,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시기 위해 오시는 시간이다”(시90:14; 애3:23; 습4:5 참조)라고 하였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벽에 어두움을 물리치고 떠오르는 태양은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구원의 빛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현현으로 보았다. 그들은 빛을 통하여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을 악, 죽음, 두려움, 공포가 물러가고 선, 생명, 기쁨, 평화가 임하는 것으로 느끼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아침에 주님께 기도드리고 아침에 주님의 응답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기도로 번역된 ‘아라크’는 ‘제사를 준비하다’. ‘제물을 차리다’(레1:8-9; 12) 뜻이다. 그것은 기도가 곧 제사요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아라크’는 ‘말을 내다’, ‘진술하다’, ‘사정을 아뢰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고(혹은 제사드리고, 혹은 사정을 아뢰고), ‘바란다’ 혹은 ‘기다린다”고 했다. 이것은 기도 응답 혹은 제사 열납, 혹은 의로운 판단, 재판의 결과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구약을 살펴볼 때, 아침 일찍이 행하였고(삼하15:2; 렘21:12; 시101:8)고 아침에 판결을 기다렸기에(삼하15:2), 다윗은 아침에 주님께서 정의롭고 공정한 판단을 내려 주시길 기다리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2.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인생들(4-6절)

    [개역 개정] 4.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5.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6.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표준새번역] 4. 주께서는 죄악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죄악은 주님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5. 교만한 자들 또한 감히 주님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 주께서는 악한 일을 저지르는 자들을 모두 미워하시고, 6. 거짓말을 일삼는 자들을 멸망시키시고, 피를 흘리는 것과 속이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을 몹시도 싫어하십니다.

     

    2.1.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4절)

    다윗은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그들의 특성을 밝히고 하나님께 그들의 행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라는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은 4절에 죄악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5절에 미워하시고, 멸망시키시고, 6절에 싫어하신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사랑의 주님이시지만, 죄는 미워하셔도 죄인은 미워하지 않는다는 논리는 맞지 않는다. 성경은 죄와 죄인을 구분하지 않으시고 모두 싫어하시고 미워하신다. 다만, 죄인이 자신이 범한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때는 자비와 긍휼을 베푸셔서 용서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그 이유는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죄악은 주님과 어울릴 수 없기 때문이다(표준 새번역). 여기서 머물다, 유한다는 뜻은 ‘-의 손님이 된다’는 뜻이다.

    고대 근동 아시아에서는 주인이 손님을 극진히 환대하고 대접하는 풍습이 있다(창18:1-8; 19:1-11). 우리나라에도 아직 그런 미풍양속(美風良俗)이 남아 있다. 그러나 악한 자는 그런 손님 대접을 받을 수가 없다. 악인이 비록 명예와 부와 권세를 다 누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악인은 주님의 손님으로 주님과 함께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없다.

    시편 15편에 보면, 여호와의 장막에 유할 자가 누구인가?고 질문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시편 5장 4절 본문에는 “악인은 주와 함께 유하지, 거하지 못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인, 악인은 어떤 자인가? 5-6절에서 사중적으로 밝히고 있다. ‘오만한 자’, ‘행악자’, ‘거짓말하는 자’, ‘살인자(피흘리기를 좋아하는 자)’, ‘속이는 자’로 언급되고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레11:44; 19:2; 20:26; 벧전 1:16)으로 조그만 죄악도 용납하지 아니하신다. 그런데 어찌 악이 가득 찬 죄인과 함께 거하시고 그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지체할 수 가 있겠는가?

    다윗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자들이 자신에게 악행을 행하고 있기에 그러한 죄악을 범하는 자들을 싫어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2.2. 오만한 자를 미워하시는 하나님(5절)

    다윗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오만한 자, 교만한 자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하고 기도드리고 있다. 오만한 자, 거만한 자, 교만한 자들로 번역되어지는 이들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자들’이다(시75:4; 롬 1:30; 고전 13:3; 고후11:17)이다. 브릭스(Briggs)는 ‘자랑쟁이’라고 번역하였고, 크리우스(Kraus)는 ‘자랑하는 자’, ‘어리석은 자’, ‘미친 자’(시83:3; 75:4 참조)로 번역하였다.

    자신의 자랑거리 자체를 감사거리로 겸손히 여겨야 한다. 자랑거리가 있으면, 자랑거리를 주신 주님을 자랑하거나 주안에서 자랑해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 성공과 잘난 것을 자랑하는 것은 오만과 교만의 자태로 죄악의 근본이 된다.

    오만한 자는 주님 앞에 서지 못한다. 주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머무를 수 없다. 오만한 자도 외형적인 종교적 의식에 동참할 수 있으나 근본 주님 앞에서 설수 없고 설령 선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그와 함께 머무르시지 않고 역겨워하신다.

    5절 하반절에 그런 자를 ‘악행자’로 칭하고 있다. 행악자는 ‘허망한 자’(사 58:9; 암5:5) 혹은 ‘궤사한 자’(잠17:4)로 하나님은 이런 모든 악을 행하는 자를 미워하신다. 케일과 델리츠(Kei & Delitzch)는 “오만한 자들에게는 어떤 고상함, 진실함, 순결함을 발견할 수 없다”라고 했다.

     

    2.3. 거짓과 살인을 싫어하시는 하나님(6절)

    다윗은 대적자들의 거짓말과 거짓 행동으로 살인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몹시 실어하시길 때문이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악한 행동을 하는 그들이 다윗을 대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속성에 반한 악행을 하는 그들을 막아주시고 그들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는 ‘피 흘리는 죄를 지은 자’, ‘피에 주린 자’, ‘피 흘리는 것을 좋아하는 자’ 로 번역된다. 곧 ‘살인자’이다(삼하 16:7,8; 시 139:19). 특히, 사람을 죽이기 위해 극도로 악한 거짓말과 더불어 거짓말을 하는 자를 일컫는다.

    살인은 실제로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행위와 함께 의로운 자, 무흠자를 모함해서 죽이려는 의도와 행동, 그리고 사람을 마음으로 미워하는 모든 죄악을 일컫는다(요한일서 3:15).

    거짓의 근원은 사탄이다(창3:4; 요8:44). 하나님께서 심히 미워하시는 것 중의 하나가 거짓이다(잠16:17,17,19; 11:1, 20:10; 슥 8:17). 거짓말 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계21:8), 영원한 형벌인 유황불에 던짐을 받게 된다(계21:8).

    하나님은 누구를 죽이기 위해 거짓과 속임수를 쓰는 행위를 몹시 싫어하신다. 크레이기(Craige)는 시편의 악인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추방된 사람들의 원형”이라고 했다. 우리의 삶은 두 길이 펼쳐져 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하는 의인의 삶과, 하나님의 임재에서 쫓겨난 악인의 삶이다.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여 기도한 다윗, 하나님의 속성에 거역하는 자들에 대한 판단과 심판은 주님께 있다. 하나님 속성에 따라 기도할 때, 기도 응답의 확실성이 있다. 그러나 기도자 자신도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에 합당한 거룩한 삶,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약 2:21-24).


     

    3. 하나님께 간구하는 소원들(7-8절)

    [개역 개정] 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8.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표준새번역] 7. 그러므로 나는 주의 크신 은혜를 힘입어 주의 집으로 왔습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의 성전 바라보며, 주께 엎드립니다. 8. 주님, 나를 대적하는 원수를 보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내 앞에 주의 길을 환히 열어 주십시오.

    다윗의 간절 두 가지 소원(6절)이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살면서 그분의 인자하심을 얻는 것이고 주님을 예배하며 살길를 원하고 있다. 또한 다윗은 원수들로 인하여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 없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고 있다(7절).

     

    3.1. 성전에서 경배를 드리는 소원(7절)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의 크신 은혜를 힘입어 주의 집으로 왔습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의 성전 바라보며, 주께 엎드립니다.

    7절에 ‘그러나’가 한글 번역에는 생략되었다. 앞 절에 하나님께 거하지 못하는 악인과 달리 다윗 자신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사랑과 은혜로 주의 집에 들어가 예배하기를 갈망하고 있다.

    시편에서 자주 등장하는 ‘은혜’, ‘자비’,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헤세드’이다. 헤세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에서 근거한다. 시편 136편에서는 절절마다 2번씩 헤세드를 노래한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1-9절), 이스라엘의 역사에서(10-22절), 삶의 현실에서(23-35)에 반복에서 헤세드가 펼쳐진다.

    그는 육신의 것이나 땅의 부와 풍요를 원하지 않고, 주님의 풍성한 사랑을 받으며, 주님께 예배하며 그 분과 더불어 살기를 원했다. ‘사랑’은 곧 주의 인자하심이다. 그것은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사랑이다.

    다윗은 수많은 대적자들의 악랄한 음모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그 인자하심, 그 사랑과 그 은혜를 의지할 것 밖에 없음을 깨닫고 거기에 매어 달렸다.

    다윗은 주님의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원하고 있다. 여기서 ‘주의 집’은 솔로몬 때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고 언약궤가 안치되어 있는 성막, 곧 여호와의 장막을 가리킨다. 그곳인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처소로 ‘성전’이라고 불렸다(삼하 1:9; 3:3; 삼하 12:20).

    다윗은 주님의 전에 들어가 주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주님의 성전에서 경배를 드리겠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는 다윗이 얼마나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사모하고 있는 가를 알 수 있다.

     

    3.2. 길을 인도하시고 환히 열어주시길 간구(8절)

    다윗은 하나님의 ‘헤세드’(사랑, 은혜, 자비)를 체험하였기에 주님께 담대하게 “주의 공의로 인도해 주소서’, ‘ 내 앞에 주의 길을 환히 열어주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헤세드 악인의 공격에서 보호해 주실 뿐 아니라 놀라운 길로 활짝 열어주시길 확신하고 간구하였다.

    ‘주의 의’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가리키는 의이다(롬 1:17). ‘주의 길’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말씀(시 25:4, 5, 12, 27:11, 32:8; 86:11)이요 응답이다. 다윗은 평생도록 자기의 길을 자기 스스로 택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인도와 지도를 받았다.

    시편 27:11 “11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편 86: 11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등의 고백을 보면 알 수 있다.

    성경에 인간의 길에 대하여 여러 교훈이 있다. 인간의 길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다(렘 10:23). 인간의 길이 하나님께 있다(잠 5:21). 주께서 친히 길이 되신다(요14:6). 인간의 길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시 37:5). 인간이 보기 좋은 길도 결국 사망이다(잠 14:12). 주님의 말씀은 인생길의 빛이다(시 119:105)등을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하나님께 의의 길로 인도하시길 날마다 간구하여야 하겠다.

    종교개혁을 앞두고 마틴 루터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 갈 길 나 모르나 누가 나를 이끄시는지 내 확실히 아노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리오. I do not know what my future will hold, but I do know who is leading me. Whom shall I fear?” 라고 자신의 가는 길을 주님께 맡기고 담대히 개혁의 불을 지폈다.


     

    4. 악인이 받는 벌(9-10절)

    [개역 개정] 9.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10.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표준새번역] 9. 그들의 입은 믿을 만한 말을 담는 법이 없고, 마음은 썩었습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혀는 언제나 아첨만 일삼습니다.10. 하나님, 그들을 정죄하셔서 제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들이 저지른 많고 많은 허물을 보시고서, 그들을 주 앞에서 쫓아내십시오. 그들은 주님을 거역하는 자들입니다.

    다윗은 악인의 특징과 악인에 대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 악인의 특징 네 가지를 밝히고 있다. ‘신실함이 없는 자’, ‘심중이 심히 악한 자’, ‘목구멍이 열린 무덤 같은 자’, ‘아첨하는 자들’ 등이다. 악인에 대한 기도는 ‘자기 꾀에 빠지게 하소서’, ‘그들을 쫓아내소서’ 등이다.

     

    4.1. 악인의 특징

    다윗은 주님께 원수에 대한 악한 특징을 고발하고 그들을 주님의 공의로운 판결이 임하길 기도하고 있다. 악인의 4가지 특징을 요약하면 거짓말, 중상, 비방 등이다.

     

    4.1.1. 말에 신실함이 없는 자.

    다윗의 원수들은 전혀 근거 없는 거짓 비방으로 끊임없이 퍼붓고 있었고, 앞뒤가 맞지 않는 거짓 증거로 다윗을 심히 괴롭히고 있었다. 악인의 입에는 신실함이 하나도 없다는 뜻은 다음과 같다. “그들의 한 말은 하나도 믿을 수 없다”. “그들의 입은 믿을 만한 말을 담는 법이 없다”. “그들 말에는 성실함이 없다”는 뜻이다.

    식언이비(食言而肥: 말을 먹고 살이 찐다는 뜻으로 늘 거짓말로 살아가는 사람), 자식기언(自食其言: 스스로 자신이 한 말을 먹어 버린다는 뜻으로 약속한 것을 스스로 어기는 사람), 이와전와(以訛傳訛:거짓말에 또 거짓말이 섞여 말한다는 뜻으로 거짓말에 더 거짓말을 보태는 사람) 등의 고사성어를 교훈삼아야 할 것이다.

    다음 명언을 기억하고 말, 언어에 신실성을 가져야 하겠다.

    플리톤은 “거짓말 그 자체가 죄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 정신까지 더럽힌다.” 아브라함 링컨은 “모든 사람을 얼마동안 속일 수는 있다. 몇 사람을 늘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늘 속일 수는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생에서 무엇보다 어려운 거 인생에서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이다.” 체호프는 “거짓말은 그 말한 사람의 눈빛을 비천하게 한다.”

    거짓말을 삼가하고 말에 신실성과 정직성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살펴본다.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눈 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잠언12:19).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언12:22).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잠언19:1).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태복음5:37).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야고보서1:26)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계시록 21:27)

    하나님 말씀은 나의 거짓을 적나라하게 들춰낸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 소위 정치, 교계 지도자, 심지어 직장인, 학생, 어린이, 젊은이, 평신도의 거짓들도 드러나게 하신다. 정치인, 기업인, 사업인, 공무원,교사, 목회자, 농부, 어부, 의사, 법조인, 언론인, 스포츠맨 총망라해서 “정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교회, 교계 안에서 진리를 선포하면서 부정직함으로 포장된 것이 많다.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정직하게 사는 목회자, 선교사, 평신도들이 많다. 그러나 그와 정반대인 온 지면에 이름이 부각된 자들 가운데 스스로 경건과 정직의 가면을 쓰고, 부정직의 탐익과 권세욕에 빠진 자들을 많이 본다. 그래서 이 시대가 어둡고, 살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기보다 지탄을 받는다. 세상이 교회를 탓하고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 주변에 어떤 사람들의 말에 대하여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경우가 많고 또한 어떤 이의 말에는 전혀 믿지 않고 냉소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대하여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하는 지, 얼마나 나의 말에 대하여 신뢰감을 갖고 있는지 스스로 자각해 볼 필요가 있다.


     

    거짓말에 관한 시가 많이 있다. 그 중에 두 편을 소개해 본다.

    [거짓말] 김형출 작

     

    “사람은 하루에 거짓말을 몇 번씩 하고 있다.

    나도 오늘 거짓말을 한다.

    남을 배려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나를 과시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양심에 가책 없이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밥 먹듯이 거짓말 하는 잘 난 사람이 있다.

    바로 나 바로 당신 오늘 또 거짓말을 한다.

    바로 나 바로 당신.”

     

    「문예사조」2003년 12월호

     

    [새빨간 거짓말/ 박이화]

    “먹다 보면

    껍질만 남는 것이 석류다.

    먹으면 먹을수록 새빨간 껍질만 쌓이는,

    사랑하고부터 거짓말도 늘었다.

    생각만 해도 신트림 끄윽 괴는

    그 새콤달콤한 말 들키지 않으려

    석류처럼 석류꽃처럼

    내 입술도 반지르르 붉어졌다.

    익다 보면 제풀에 단내 쩌억 풍기는

    벗기다 보면 겉과 속이 한통속인

    석류 한 통 다 먹고 나니 거짓말처럼

    석류보다 더 많은 껍질이 쌓였다.

    단물 쏙 빠진 알맹이까지 시금털털 껍질로 남았다.

    생이 아름답다는 건 거짓말

    사랑에 온통 정신 팔려

    영영 지울 수 없는 얼룩만 남긴

    ​생이 아름답다는 건 거짓말

    석류보다 석류꽃보다 더 새빨간 거짓말.

    『흐드러지다』(천년의시작, 2013)

    4.1.2. 심중이 심히 악한 자

    심중(心中)은 마음 중심을 일컫는다. 심중이 악하다는 것은 “마음속에 항상 악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마음이 더러운 것으로 푹 썩었다.” “마음으로 흉계만 꾸미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히브리어 원문의 뜻은 “그들 속은 파멸이다.” 혹은 “그들의 속에서 쏟아내는 것은 멸망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과 같다고 했다. 성경에서 전적 부패한 인간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레미야 17:9-10 절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마태복음 12장 34-35절에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가복음 7장 21-23절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6세기 청교도 목사 피터 모펫(Peter Moffat)는 “여러분의 샘을 깨끗이 하는 것보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에, 여러분의 양떼를 먹이기보다 여러분 자신을 먹이는 것에. 여러분의 집을 지키는 것보다 여러분의 마음을 지키는 데 주의를 더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l) 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우리의 모든 생각이 그리스도께 복종할 수 있을 때까지 ‘마음, 이성, 의식’을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존 오웬(John Owen, 1616년-1683)을 비롯한 청교도들은 마음을 지키고 다스리는 것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존 오웬은 ‘마음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며, 인생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라고까지 했다.

    아더 핑크(Arthur Pink)는 “마음은 우리 책임 영역의 중심에 있으며, 마음을 개선하고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마음을 지키는 일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마음을 지키게 되면 우리 삶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일치가 될 것이며, 우리 삶의 목적은 그를 따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을 무시해 버린다면, 이 지상에서는 순종을, 이후에는 영광을 잃어버린 생활이 될 것이다.”하라고 마음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한 농촌 교회 목사님의 [마음을 다스리는 기도문]을 소개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른 아침에 저희로 말씀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저희로 마음을 다스릴 수 잇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을 살다가 보면 저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저희로 이 세상의 유혹에 사정없이 흔들릴 때도 많습니다. 저희로 세상의 유혹이 주는 쾌락에 대책 없이 저희의 마음이 끌려갈 때도 많습니다.

    주 하나님 아버지! 저희의 마음을 주님께서 주장하여 주옵시고 저희의 마음을 주의 뜻대로 다스려 주옵소서! 저희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이 세상적인 것에 의해 흔들리지 않게 하옵시고 평안한 마음 잔잔한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에 주님의 은총의 손을 얹어 주시어 너른 마음을 주시옵소서! 남의 허물을 너그러이 가싸 안을 수 있는 마음을 주옵시고 더 덜 오해하게 하옵시고 더 더 이해하게 해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을 주장하사 저희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다스려 주옵시고 저희가 하는 말이나 행실로 인해 저희의 이웃이 캄캄함을 경험하거나 지옥을 경험하지 않게 하옵시고 따뜻함을 주고 시원함을 주고 하늘나라를 경험케 하옵소서!

    주님 저희의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로 가슴이 열린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삶이 이웃에게 유익을 줄지언정 해를 끼치지 않게 하옵소서! 저희로 따뜻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4.1.3. 목구멍이 열린 무덤 같은 자

    목구멍은 소리를 내고 음식물을 삼키는 기관이다. ‘열린 무덤’은 시체가 보전되는 것으로 부패하는 시신으로 썩는 악취가 난다. 무덤을 파헤쳐 놓으면 무엇이 나오는가? 죽은 시체가 나온다. 이 세상의 냄새 중에서 가장 고약한 냄새가 시체 썩은 냄새라고 한다. 사람의 목구멍을 통하여 나온 것이 바로 열린 무덤에서와 같이 썩은 시체 냄새가 진동한다는 뜻이다.

    악인의 목구멍이 열린 무덤 같다는 것은 악한 악담을 내뱉고 악독한 말로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심지어 죽이기기 까지 한다는 비유로 표현되고 있다. 사도바울은 전적 부패한 인간의 죄성을 논하면서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롬 3:13-14)”라고 언급하였다.

    예수님께서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셨다(마 12:35). 중생한 자에게도 여전히 악한 본성이 남아 있어 날마다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기 통제와 훈련, 절제가 요청된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교훈하였다(엡 4:31).

    랠프 왈드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누구나 그가 하는 말에 의해서 자기의 초상을 그려 놓게 된다"이처럼 말(언어)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이요, 삶이요, 열매요, 미래요, 결과이다. 말(언어)은 그 사람의 인격을 대표한다. 자신의 언어 관리가 자신의 인생의 행불행을 결정짓는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옛 언어생활을 벗고 새 언어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는 바로 언어생활의 승리와 직결된다. 향기 나는 언어생활, 즉 영혼을 치유하고 살리는 말은 성화된 인격, 성숙한 인격의 열매이다.

    성도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의 향기는 미국의 보타닉 정원의 예쁜 꽃 보다, 덴버 워싱톤 공원이 장미 꽃 향기처럼 향기로워야 한다. 로키산맥의 아름다운 딜론의 호수가에 핀 야생화보다 더 아름답고 그윽한 향기를 발하여야 한다.

     

    4.1.4. 아첨하는 자들

    아첨하다의 원어의 뜻은 ‘미끄럽다’이다. 아첨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과장되고 마음에 없는 거짓 칭찬을 하거나 호의를 표시하는 것을 일컫는다. 아첨하는 혀는 우선 보기에는 매우 미끄러워 보이는 그 혀 밑에는 독이 가득 차 있다.

    압살롬은 아침 일찍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오는 사람을 가로채 그들에게 입을 맞추고 아첨하는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하였다(삼하 15장 2-6절 참조). 성경에는 많은 곳에 아첨하는 자들의 언어적 특성과 그들의 종국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시편 12:2-3에,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말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시편 55편 21절에 “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했다.

    잠언 5:5-5절에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그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의 걸음은 스올로 나아가나니”라고 했다.

     

    4. 2. 악인에 대한 심판 기도(10절)

    다윗은 하나님께 행악자들에 대한 세 가지 기도를 드리고 있다. 첫째, 그들을 정죄하시하고 둘째, 자신들의 꾀에 빠지게 해달고 셋째, 그들을 쫓아내시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는 다윗이 복수심에 가득 찬 분노의 기도나 저주의 기도가 아니다. 죄와 죄인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기 위한 기도이다. 10절 하반절에 “그들이 주를 배역한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4.2.1. 악인을 정죄하소서(10절)

    다윗은 앞에서 악인들의 간악성을 지적한 후 하나님께 저희들에게 정죄해 주시길 간구하고 있다.

    ‘정죄하다’의 원문의 뜻은 ‘죄책이 있다’이다. 어떤 번역본에는 ‘저들에게 죄가 있다고 선포하소서’(NIV, NAB)라고 하였고, 어떤 번역본에는 ‘저들과 죄를 담당케 하소서’(RSV, NASB, NJB)라고 하였고, 어떤 번역본에는 ‘저들을 멸망시키소서”(REN)라고 되어 있다.

    악인에 대한 정죄 기도는 원수에 대한 복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시라는 구약 성도의 간절한 표현이다. 또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 대한 도전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정국가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악한 자의 도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 위한 기도이다.

    신약 시대에 사는 성도들에게는 구약 시대의 저주시나 기도가 가능한가? 문제가 야기된다. 예수님 혹은 스데반처럼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해야 되지 않는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우리가 저주해야할 대상은 그들의 인격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행위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세력에 대한 저주이다. 그들 자체가 죽어지는 저주라기보다 그들이 악한 일에서 떠나고 그들의 추구하는 헛된 도모가 패망하도록 간구하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악한 세력과 영에 대하여 망하게 해 달고 저주 기도를 할 수 있으나 그 대상을 사람에게 악한 감정을 가지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4.2.2. 자기 꾀에 빠지게 하소서(10절)

    다윗은 앞서 악인을 정죄한 결과로 그들이 스스로 자기 꾀에 빠지길 간구하고 있다. 다윗은 원수를 보복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판단하셔서 그들을 벌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벌은 공의롭고 철저하며 사람의 보복보다 훨씬 더 무섭기 때문이다.

    ‘빠진다’는 ‘떨어진다’. ‘파멸되다’(시 20:8; 27:2; 36:12)는 뜻이다. 이 뜻은 ‘자가들의 꾀가 자신들의 패망을 가져 오게 하소서’ 라는 뜻이다. 악인들이 악을 심었으니 그들 자신들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원수들이 악한 꾀로 하나님의 세우신 자를 괴롭게 하였으니 자신들의 꾀에 스스로 빠져서 멸망되기를 간구하고 있다.

    이 기도의 장면은 마치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50규빗이나 되는 높은 장대에 세운 하만이 오히려 그 장대에 자신이 걸려 죽게 되는 것을 연상케 한다(에 5:14; 7:10).

    다니엘서에 보면, 악한 자들은 선한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 죽이려고 한 법령을 제정케 하였으나 그들과 그 처자들을 거기에 던졌다(단 6:7, 24).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이 스스로 자기 꾀에 빠져, 자기가 행한 대로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 3:18).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이라 하였고”(고전 3:19)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시31:19-20).

     

    4.2.3. 그들을 쫓아내소서(10절)

    다윗은 그들을 ‘쫒아 내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쫓아내다’는 것은 ‘추방하다’. ‘흩어 버리다’. ‘몰아내다’ 등으로 해석된다. 그들의 허물 때문이다. 허물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반역 행위이다. 다윗은 이미 5절에 악인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단언하고 선포하였다.

    하나님께 주권과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와 세우심을 받은 자에 대한 반역은 곧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이 이름에 대한 악한 도전 행위이다. 그래서 다윗은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거나 뿔뿔이 흩어지거나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서 그들이 감당했던 직책 등을 상실케 해달라고 기도했다.

    신약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련이 일들이다. 교회와 주의 성도들과 사역자들에 대한 핍박, 역행, 도전 등이 바로 그들의 세우신 주님의 이름과 주권에 대한 도전과 반역임을 알 수 있다.


     

    5. 의인이 받는 복(9-10절)

    [개역 개정] 11.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12.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와 같은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표준새번역] 11. 그러나 주께로 피신하는 사람은 누구나 기뻐하고, 길이길이 즐거워할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기쁨을 누리도록 주께서 그들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12. 주님, 주께서는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고, 큼직한 방패처럼, 그들을 은혜로 지켜 주십니다.

    의인은 주께 피하는 사람,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주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5가지 복을 언급하고 있다.

     

    5.1. 기쁨을 얻는 복(11절)

    다윗은 억울하게 고소를 당하고 위기를 직면했을 때,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의인이다(시64:1). 의인은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에게서 기쁨을 찾고(시16:11), 안식과 평안을 누린다. 하나님께서 의인의 기업(시16:5)이며 소망이며 전부(시17:15: 73:25)가 되기 때문이다.

    의인을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이다. 주님과 친밀한 언약관계를 맺는 자들이다. 주님의 이름을 아는 것과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것은 시편에 나타나는 평행구절이다. 이름은 속성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속성인 그분의 거룩, 의, 자비, 긍휼 등을 알고 체험한 자를 의인으로 통칭한다.

    주께 피하는 사람,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 곧 의인은 주님께서 특별하게 보호하시고 복을 주신다고 고백하고 있다.

    다윗은 원수들의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한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께 피하는 자가 다 기뻐하며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전서 5:16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했고, 빌립보서 4:4에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였다.

     

    5.2. 보호를 얻는 복(11절)

    여기에 사용된 ‘보호’는 언약궤 덮개인 속죄소를 그룹천사가 날개를 펴서 ‘덮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출25:20; 37:9; 왕상 8:7; 대상 28:18). 그룹 천사들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속죄소를 날개를 펴서 보호하듯이 의인들을 보호해 주신다는 놀라운 의미를 담고 있다.

    주님이 보호는 완벽하며 그 어떤 원수도 상황도 헤칠 수 없다(요 10:28; 롬8:31-39: 시 118:6-7).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가려짐’(출 40:3, 시 140:7), ‘덮어줌’(왕상 8:7; 욥40:22), ‘둘러쌈’(욥3:23), ‘막아줌’(욥38:8; 나2:5) 등을 뜻한다.

    다윗은 또한 그 보호하심을 "돌로 높은 성벽을 만들어 요새화 시킨 견고한 성(城)"으로 비유 하였다. 그 성(城)은 어떠한 적의 공격 앞에서도 난공불락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지만 사람들에게는 많은 미움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詩)를 지었다.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시 59:16-17).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사무엘하 22:4~7).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보호하심의 근거는 바로 믿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벧전 1: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5.3. 즐거움을 얻는 복(11절)

    이것은 한나가 기도 응답을 받은 후, 그녀의 마음이 즐거워했을 때(삼상2:1)에 같은 의미이다. 흑암 속에 광명한 아침의 빛을 얻을 때 솟아나는 기쁨처럼 위기일발의 상황 속에서 안전과 평화를 얻게 될 때, 깊은 영혼의 내면 속에 피어오르는 기쁨과 즐거움이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성도는 세상의 것에 즐거워하기보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자이다.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 1문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주를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전도하다가 채찍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당하는 것을 합당한 것으로 여기고 기뻐했던 사실을 볼 수 있다(행5:41). 주님을 사랑하는 일 그 자체가 기쁘고 즐거운 일이기에 주를 위한 사랑의 수고가 아무리 고되고 괴로워도 즐거이,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비교할 수 없는 참된 평강과 놀라운 즐거움을 주시길 때문이다.

     

    5.4. 복을 얻는 복(12절)

    원문에는 “여호와여, 의인을 축복하는 분을 바로 주님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을 의지 하고 살아가는 다윗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주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베풀어 주실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다. 고난과 시련의 상황 속에서도 의인에게는 늘 주께서 함께 하시는 복이 있다.

    여기에 사용된 ‘복’(히, 바렉)은 하나님께서 의인들의 영과 육에 은혜가 충만케 하셔서 삶의 활력과 생기와 기쁨이 넘치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사용된 복이 창세기 1장 천지창조 시, 그리고 신명기 28장에 언급된 복과 같은 단어임에 주목할 수 있다.

    ‘의인’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이 있다. ‘주께 피하는 자들’, ‘주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 등이다. 의인의 반역에 선 자들은 언제나 주님께 피하는 자들이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고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들이다.

    의인 하박국은 모든 소출이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했다(합3”16-18-19). 그가 바로 의인이요 그가 의인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는 놀라운 로마서 1:16-17 단서를 제공하였다.

     

    5.5. 방패로 호위를 얻는 복(12절)

    방패는 하나님의 보호를 의미한다. 방패(shield)는 히브리어의 ‘마겐’으로,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무기(몸의 앞뒤와 전신을 가릴 수 있는 원통형 방패와 머리만을 가릴 수 있는 작은 방패가 있음)를 가리킨다.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시편 35:1-2)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시편 3:3).

     

    여기에 언급된 방패는 온몸을 막기기 충분한 방패를 일컫는다. 주님의 은혜로 호위해 주시고 주님의 날개로 보호해 주시고, 주님의 방패 전신을 감싸주신다고 철저한 보호를 확신하고 있다.

    결론을 맺으면 다음과 같다. 다윗은 원수들의 무차별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고난 속에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를 드렸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여 하나님의 응답의 역사를 체험하는 아침에 기쁨으로 찬양과 감사를 드리고 있다.

    특히, 의인된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주님께 믿음으로 나아갈 때, 주님이 주시는 기쁨, 보호, 은총, 승리를 체험함을 고백하고 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시시때때로 당면한 억울한 일, 고통스런 일, 난공불락의 문제들을 만날 때, 의인 다윗처럼 주님께 피하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고 그 이름으로 부르짖을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시는 승리와 보호, 은총과 기쁨을 체험하는 삶이되길 간구한다.

     


     

    [시편 5편으로 드리는 영한 기도문]

     

    주님, 저의 신음 소리를 들으소서

    주님, 저의 탄식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저의 왕 되신 주님, 아침에 드리는 기도를 응답하소서

    Lord, hear my groaning

    Lord, listen to my groaning

    Lord, my King, answer my prayer in the morning.

     

    저의 억울한 사정을 주께서 판단하여 주소서

    주님은 악인을 미워하시고 그들의 죄악을 판단하십니다.

    May the Lord judge my unfair situation.

    The Lord hates the wicked and judges their sins.

     

    주께서 원수들의 입, 마음, 목구멍, 혀를 질책하여 주소서

    주님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꾀에 빠지게 하소서

    Lord, rebuke the mouth, heart, throat, and tongue of my enemies.

    Lord, let them fall into their schemes.

     

    주님, 저는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고 주님께 피합니다.

    주님의 원수의 목전에서 저를 감싸주시고 큰 방패로 막아주셔서

    기뻐하며 찬양하며 즐거움을 더해지는 은혜를 주소서, 아멘

    Lord, I love your name and take refuge in you.

    Lord, protect me from the sight of my enemies and keep safe me with a great shield.

    Give us the grace to rejoice, praise, and increase our joy, Amen.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카톡 자료 모음

    신한은행 콜센터에서 확인했습니다
    ** 송금인에게 알려줘야하는 정보 안내드립니다.
     송금인에게 알려줘야하는 정보 안내드립니다.

    ① 신한은행 영문명 : SHINHAN BANK
    ② 신한은행 영문주소 : 20, SEJONG-DAERO 9-GIL, JUNG-GU, SEOUL, SOUTH KOREA (우편번호 : 04513)
    ③ 신한은행 스위프트코드 : SHBKKRSE
    ④ 입금받을 계좌번호 : 원화입출금 계좌번호 또는 외화입출금 계좌번호
    ⑤ 받으시는 분 정보 : 영문성명 (FULL NAME) / 주소 / 연락처

    [유의사항]
    - 미국에서 국내로 송금을 보내면서 신한은행의 Routing Number 또는 ABA Number를 요구하는 경우에는 당행 스위프트코드인 SHBKKRSE 와 계좌번호를 알려주시면 송금이 가능합니다.

    ④ 입금받을 계좌번호 : 110 046 344998
    ⑤ 받으시는 분 정보 : 영문성명 (FULL NAME) / 주소 / 연락처
    YEO SONG PHIL/
    TEL 010 6501 3571/
     103-201 sk apt, 174 solsam-ro, kangbuk-ku seoul KOREA 01192






    영화 벤허의 세 가지 교훈

    AD 26년 예루살렘은
    로마제국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당시 예루살렘에
    유다 벤허(Judah Ben-Hur)가
    살고 있었습니다.

    벤허는 당대 제일가는
    유대 귀족이었습니다.

    어느 날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이스라엘에 새로운 총독과
    그를 보좌하는 사령관이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령관은
    다름 아닌 벤허의 옛 친구
    메살라였습니다.

    어린 시절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로마제국의 사령관인 메살라는 통치자로,
    벤허는 억압받는 시민으로 살다 보니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그러던 중
    신임 총독의 취임 행렬이 있었는데,
    베란다에서 오빠 벤허와 함께
    이를 구경하던 여동생이
    아래를 내려다 보는 순간
    오래된 기왓장이 떨어졌습니다.

    이 사고로 말이 놀라 뛰면서
    신임 총독이 낙마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오래된 기왓장이
    스스로 떨어져 나간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출세욕에 눈이 먼
    친구 메살라는 현장을 검증하고,
    이들이 아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기회에 유대인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려고,
    절친인 벤허의
    계획 범행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리곤 아주 가혹하게 처벌했습니다.

    메살라는
    벤허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지하 감옥에 가두어 버렸고,
    벤허는 노예로 팔아
    갤리선에 노를 젓는
    형벌을 내렸습니다.
    갤리선은
    로마시대에 노예나 죄인들을
    쇠사슬로 묶어서,
    노를 저어 전투를 하는
    일종의 전투선입니다.
    그렇게 벤허는 두 손이 묶여
    갤리선으로 끌려 가던 중에
    나사렛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우물가에서 물을 먹는데,
    로마 군인들은 유독
    벤허에게는
    물을 먹지 못하도록 금지했습니다.
    목말라 쓸어져
    죽을 지경에 이른 벤허에게
    한 유대인이 와서 물을 먹여 주었는데,
    결국 벤허는 그 물을 마시고
    다시 힘을 얻었습니다.

    걷고 또 걸어서
    모진 고생 끝에
    벤허는 갤리선을 탔고,
    배의 가장 밑바닥에서
    쇠고랑을 발에 차고
    노를 젓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를 담당하는 담당관은
    유독 벤허에게 심한
    채찍질을 가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복수심에 불타오른
    벤허는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더 강해졌고,
    노 젓기를 통해서
    그의 근육은 더욱 더 단단해졌고,
    고통을 이겨내느라
    눈은 더욱 더 빛났고,
    끝까지 살아 남기 위해
    몸부림을 치다 보니
    강철 멘탈로 더욱 더 강해졌습니다.

    그렇게 벤허는
    1년이면 죽어 나간다는
    갤리선에서 3년 동안이나
    살아 남았습니다.
    그런 벤허를
    함대 사령관인 아리우스 제독은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쟁이 벌어질 때
    벤허의 다리에 묶인 쇠사슬을 풀어주고,
    치열한 해상전이 펼쳐지면서
    전투 중에 아리우스 제독이
    바닷물에 빠졌습니다.
    이를 본 벤허는 지체하지 않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아리우스 제독을 구했습니다.
    이를 통해 벤허는
    아리우스 제독의 총애를 받고,
    시간이 흘러
    그의 양아들이 되어
    로마 귀족으로 신분 상승을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인생 반전을 이룩한
    벤허는 원수를 갚기 위해
    메살라가 출전한
    로마 최대 이벤트였던
    전차 경주에 출전합니다.
    메살라는 원수지간이 된
    벤허를 죽이려고
    전차 바퀴에 칼날을 달아
    상대 전차를 갈아 버립니다.

    그러나 벤허는 과거에 허약해 빠진
    유대 귀족이 아닙니다.
    노예선에서 수년 동안 갈고 닦은
    강인한 체력과 멘탈로 무장한 벤허는
    메살라와 한판 승부를 벌리는데,
    총 아홉 바퀴를 도는
    거대한 전차 경기장에서
    서로 채찍으로 치고
    칼날로 가는 사투를 벌입니다.
    결국 벤허를 죽이려고
    만든 전차 바퀴에 오히려
    메살라가 치어 치료를 받다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 후 벤허는
    수소문 끝에
    어머니와 누이 동생을 찾았는데,
    그들은 당시에 모든 사람이
    피하는 문둥병에 걸려
    너무나도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충격과 슬픔에 빠진 벤허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이들을 데리고 기적을 행한다는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께서 쓰러지자,
    벤허는 황급히 물을 떠다가
    주님에게 먹이려고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 분은 다름 아닌 자신이
    나사렛에서 목이 말라 쓰려졌을 때,
    자신에게 물을 먹여 준 분이었습니다.
    그렇게 벤허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따라 골고다 언덕에 올라갔습니다.

    벤허는 그곳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메시지를 듣게 되는데,
    그것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그 동안 복수에 사로잡혔던 벤허는
    완전히 새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자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면서,
    벤허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문둥병이 깨끗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작품은
    루 월리스(1827~1905)의 소설
    '벤허'를 영화화한 벤허의 스토리입니다.

    소설로 쓰여진 원작 벤허는
    1800년대 말에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렸고,
    이후 50년이 넘는 동안
    베스트셀러로 사랑을 받았고,
    1900년대부터 2010년대 까지
    무려 4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1959년에 만든 '벤허'는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로
    11개 부문에서 상을 휩쓸었습니다.
    저는 벤허를 여러번 보면서
    왜 이렇게 이 작품이
    많은 사람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았는지
    궁금했습니다.

    이 작품에는
    세 가지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째, 아무리 어려워도 목숨 걸고
    노력하는 자는
    인생 역전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삶의 노력에는
    속임수가 있을 수 없다!'
    한 마디로 노력한 만큼
    그 대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벤허는
    노예선에서 쇠고랑을 차고
    노를 저으면서
    오히려 몸이 더 강해졌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강철멘탈이 되었습니다.
    지금 어렵고 힘들다고
    모두 다 잘못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노력하면 오히려 더 잘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일 수 있습니다.

    시편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둘째, 물 한 잔이라도 섬기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벤허라는 영화 속에
    예수님은 딱 두 장면 등장합니다.
    한 장면은 예수님께서
    벤허에게 말없이
    물을 먹여 주는 장면이고,
    또 한 장면은
    벤허가 예수님께 물을 먹여 주는 장면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신앙은 결코
    이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삶이고,
    신앙은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러니 목마른 자에게
    물 한 잔이라도 성심껏 섬기는
    삶을 사십시오!

    셋째, 기적은 만남의 축복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벤허는
    옛 친구인 메살라를 잘못 만나
    한 순간에 인생 종쳤습니다.
    그러나
    벤허는 함대 사령관인
    아리우스 제독의 눈에 들어
    그의 양아들이 되었고,
    예수님을 만나
    복수에 사로잡힌 인생에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인생으로 거듭났고,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예수님을 만나
    문둥병이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은 만남의 축복으로부터 옵니다.
    만남의 축복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사순절 동안의 기도입니다.

    주님!
    인생은 한 편의 영화입니다.
    이왕이면 내 인생에
    어떤 어려움에도 굴복하지 않고
    노력해서 인생 역전을 이루게 하옵소서!

    물 한 잔이라도 섬기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기적은 만남의 축복으로부터 옵니다.
    2025년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만남의 축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메살라처럼 나쁜 친구가 아니라,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대속죄(代贖罪) 

    '기름때 묻은 원숭이의 미국 이민 이야기'
    송석춘

    공군 대위로 전역하고  현대자동차에 입사하여  차장으로 고속 승진했습니다.
    당시 대졸 초임이 2만 원일 때  자신은 15만 원을 받았습니다.
    좋은 직장을 퇴사하고 아들 둘, 딸 셋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왔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인 큰 아들이 교도소에 가게 되었습니다.
    자식을 잘 키우겠다고 이민 왔는데 아들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고,
    미국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그 때마다 아들은 반격을 가했고,
    이 때문에 교장에게 여러 차례 불려가 체벌을 받았습니다.
    불만이 쌓인 아들은 어느 휴무일 이틀 동안  다른 미국인 친구와 함께
    학교에 들어가 건물 이곳저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지역신문 1 면에 났고 온 가족은 좁은 응접실 구석에 모여 앉아 통곡했습니다.
    “한국인의 얼굴에 먹칠했다.”는 비난은 기본이었고,
    등하교 때  “그 집을 피해 가라.”는  한인들도 있었고,
    “같은 교육구 학교에  내 아이를 보낼 수 없다.”며
    전학을 시키는 부모도 있었습니다.
    나이 젊은 어떤 한인은 면전에서 “당신 자식 교도소에 갔다며?” 하고 빈정거리며 말했습니다.
    겨우겨우 섬기던 교회에서 조차도 성도들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아 출석을 끊었습니다.
    교장은  “세상에 이렇게 학교 건물을  때려 부순 사건은 처음입니다.
    카운티(County: 자치주) 내의 어떤 학교에도 전학이 불가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아들 죄가 바로 내 죄' 라 생각하고 속죄를 위해 매주 주말에 온 가족을 동원하여
    학교 청소를 하겠다고 했고, 교장은 '별난 아버지'라는 표정으로 허락했습니다.
    이 별난 행동은 나중에 다시 한 번 플로리다 주 주류 사회를,
    아니 전 미국을 흔들었습니다.
    교도소에 간 중2 아들의 속죄를 위해  부부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네 아이와 함께 주말마다 학교에 나와 청소하는 장면을,
    운동장을 청소하는 광경을 AP통신 기자가
    “가족의 명예와 아들을 위해 부모는 모른 채 하지 않았다.”는
    제하의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기사에는 “내 아들이 죄를 지었으면 내가 죄를 지은 것이다.
    내 아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변상은 물론 어떤 일이든 하겠다.”
    라는 그의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美 전역의 신문들이 AP통신 기사를 받아쓰면서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는 며칠 만에 수백 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변호사비로 쓰라며 5 불, 10 불 짜리 수표와 현찰을 동봉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신문들은 아버지의 '아들 죄가 바로 내 죄' 라는 고백을 들어
    “미국인 부모들도 본받아야 한다.” 라거나
    “미국 교육계도 유교적 가족관계에서 이뤄지는 독특한 교육 철학을 배워야 한다.”
    라는 논지의 기사와 논평을 내보냈습니다.
    며칠 후에 반가운 소식이 가족에게 전달됐습니다.
    법정에서 아들을 방면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교육청에서는 다니던 학교로는 되돌아 갈 수 없지만,
    멀리 떨어진 다른 학교에는 갈 수 있다는 서한도 보내왔습니다.
    그 후 말썽꾼 아들은 변하여 센트럴 플로리다 대학교(UCF) 학사와
    플로리다 텍(FIT)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미 우주항공국(NASA) 산하 방산업체에 근무하며 고위 우주선 탑재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우주선을 쏘아 올릴 때 수십 명이 달라붙어 점검하는데
    그 가운데 최고참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오는 'VVIP(Very Very Important Person)' 들에게
    직접 브리핑하는 유일한 한국계라고 합니다.
    '기름때 묻은 원숭이의 미국 이민 이야기'라는 책을 쓴 송석춘 씨 이야기입니다.
    큰아들 송시영 씨가 사고를 쳤을 때만 해도
    “아이고 저놈이 자라서 뭐가 될까?”
    하고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지금은 가장 가까운 곳에 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낚시를
    시도 때도 없이 함께 가 준다고 합니다.
    선트러스트 은행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큰딸도 명절 때마다
    제법 큰 용돈을 보내주고 있답니다.
    한 아버지의 대속(代贖)으로 사고뭉치 아들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자녀들 모두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 우뚝 일어선 아름다운 가정사 입니다.
    세상은 누군가를 위해 대속(代贖) 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대속(代贖) 할 수 있습니다.
    내 몸처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저기에서 많이 접했던 글이겠지만
    현재 우리나라 안에서는
    아들이 상습도박과 매춘으로 신문방송이 도배를 해도 "아들은 남이다."고 하는 대통령되겠다는 僞人이 있으니 기가찰 노릇입니다.


    이해(理解)와 배려(配慮)

    다스릴 이(理), 풀 해(解)
    짝지을 배(配), 생각할 려(慮)


    이해와 배려

    일본 도쿄에
    이상한 식당이 있습니다.

    시키지도 않은
    엉뚱한 메뉴가 나오는
    식당입니다.

    라면을 시켰는데
    우동이 나오고,
    햄버거를 시켰는데
    만두가 나오곤 합니다.

    이래 가지고 어떻게 돈을 버나…
    주문도 제대로 못받으면서
    어떻게 장사를 하나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어이 없는 식당입니다.

    헌데
    놀라운 것은
    엉뚱한 음식을 가져다 줘도
    화내는 손님이 한 명도 없고,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주는 대로
    감사히 먹는다는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이 이상한 식당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유명한
    인기 맛집입니다.

    이 어이 없는 식당이
    유명 맛집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식당을 찾는 고객들은
    "바로 여기서만의
    특별한 이해와 배려와
    사랑이 넘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이 식당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아르바이트생들’때문입니다.

    이곳의 아르바이트생들은
    모두 여섯 명인데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 할머니들’입니다.

    이 분들은 최선을 다해
    웃음을 잃지 않고
    일하려고 노력합니다.

    주문을 받아가지만
    음식을 가져다 줄 때
    누가 주문했는가도 헷갈리고
    그래서 주문과는
    전혀 다른 음식을 가져다 줍니다.

    식당을 처음 방문한 한 손님은
    "좀 당황했죠.
    정말 주문한 것이 제대로 나올까,
    두근거렸어요"라고 말합니다.

    많은 자원 봉사자와
    더불어 운영되고 있는
    이 식당 한 관계자는

    “어르신들이 비록 치매일지라도
    아직 사회구성원의 일부라는
    소속감을 주며,
    식당을 찾는 고객들에게도
    이 같은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운영하게 됐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식당의 성공 비결은
    바로
    '이해와 배려'인 것입니다.

    식당을 찾은 손님들은
    주문한 음식이 안 나오고
    다른 음식이 나와도,
    가끔씩 물을 쏟아
    바지나 치마가 적셔도
    화를 내거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습니다.

    알바생들이 조금 실수하고,
    조금 느리고,
    조금 서툴러도 괜찮습니다.

    이곳을 찾는 손님들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할머니들은
    우리의 어린 시절,
    모든 실수를 보듬고 길러주신
    우리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할아버지들은
    우리의 어린 시절,
    우리들이 공부하고
    자랄 수 있도록 희생하신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해와 배려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오늘입니다.






    오늘 내가 슬픔을 넘어 기쁜 이유 


    리차드 위트컴 장군(Richard S. Whitcomb)과
    그의 부인 한묘숙 여사의
    전설적인 실화 이야기다.

    6. 25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성,
    그는 당시에 미군군수 사령관이었다.

    1952년 11월 27일,
    부산 역 건너편 산의 판자촌에
    큰 불이 났다.

    판자집도 변변히 없어
    노숙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피난민들은
    부산 역 건물과 인근에 있는
    시장 점포 등이 유일한 잠자리 였는데
    대화재로 오갈 데가 없게 됐다.

    입을 옷은 커녕 먹을 것조차 없었다.
    이때 위트컴 장군은
    군법을 어기고
    군수창고를 열어
    군용 담요와 군복,
    먹을 것 등을 3만 명의
    피난민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었다.
     
    이 일로 위트컴 장군은
    미 연방의회의 청문회에 불려 갔다.
    의원들의 쏟아지는 질책에
    장군은 조용히 말했다.

    "우리 미군은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지만,
    미군이 주둔하는 곳의 사람들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그들을 돕고 구하는 것
    또한 우리의 임무입니다.

    주둔지의 민심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고,
    이기더라도 훗날
    그 승리의 의미는
    쇠퇴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 입니다" 라고 답하자,

    의원들은 일제히 기립,
    오래도록 박수를 쳤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 온 뒤
    장군은 휴전이 되고도 돌아가지 않고,

    군수기지가 있던 곳을
    이승만 정부에 돌려 주면서

    "이곳에 반드시 대학을세워달라"
    고 청하였다.
    부산대학이 설립된 배경이다.

    그러나 부산대 관계자도,
    교직원도, 졸업생도 재학생도
    이런 역사적 사실을 거의 모른다.

    그리고 장군은 메리놀 병원을 세웠다.

    병원기금 마련을 위해
    그는 갓에 도포를 걸치고
    이 땅에 기부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애썼다.

    '사람들은 장군이 체신없이
    왜 저러느냐'고 쑤근댔지만 개의치않았고
    온 맘과 힘을 쏟았다.

    전쟁 기간 틈틈이 고아들을 도와온
    위트컴 장군은
    고아원을 지극 정성으로 운영하던
    한묘숙 여사와 결혼했다.

    위트컴 장군이 전쟁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연유다.

    그리고 그는 부인에게 유언을했다.

    ''내가 죽더라도 장진호 전투에서
    미처 못 데리고 나온 미군의 유해를
    마지막 한 구까지  찾아와달라''고...

    부인 한묘숙 여사는
    그 약속을 지켰다.

    북한은 장진호 부근에서  
    길죽길죽한 유골만 나오면
    바로 한묘숙 여사에게로  가져왔고,

    한 여사는 유골 한쪽에
    300불씩 꼬박꼬박 지불했다.

    그렇게 북한이   한 여사에게
    갖다 준 유골 중에는
    우리 국군의 유해도 여럿 있었다.

    하와이를 통해 돌려받은
    우리 국군의 유해는 거의 대부분
    한 여사가 북한으로부터
    사들인 것들이다.

    한 여사는 한 때
    간첩 누명까지 쓰면서도
    굴하지 않고 남편의 유언을 지켰다.
    남편만큼이나 강한  여성이었다.

    장군의 연금과 재산은
    모두 이렇게 쓰였고,

    장군 부부는 끝내 이 땅에
    집 한 채도소유하지 않은 채
    40년 전에 이생을 달리 했다.

    부산 UN공원묘원에 묻혀 있는
    유일한 장군 출신 참전용사가
    바로 위트컴 장군이다.
    끝까지 그의 유언을 실현한
    부인 한묘숙 여사도
    장군과 합장되어 있다.

    이 땅에는  
    이러한 장군을 기리는 동상
    하나가 없다.

    부산에도,
    서울에도,
    아니 부산대학교에도
    메리놀병원에도 물론 없다.

    그런데 오늘,
    장군이 떠난지 꼭 40년 만에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위트컴 장군 조형물을 만들기로 결의했다.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국가 예산 말고,
    재벌 팔을 비틀지도 말고,

    70여 년 전 수혜를 입었던
    피난민 3만명,
    딱 그 수만큼
    1인당 1만원씩 해서
    일단 3억을 마련하기로 했다.

    브라보 !

    민주주의의 생명은 참여다.
    보은도 십시일반,
    참여해야 한다고.
    오늘 그 첫 결의를 했다.

    1만원의 기적을 이루어보자.

    70년 전,
    전쟁고아들을 살뜰하게 살피던
    위트컴 장군을 생각하면서,

    메리놀 병원을 세워 병들고
    아픈 이들을 어루만지던
    장군의 손길처럼

    대학을 세워 이 땅에
    지식인을 키우려던 그 철학으로,

    부하의 유골 하나라도
    끝까지 송환하려고 했던
    그 마음을 생각하며

    각자 내 호주머니에서
    1만원씩 내보자.
    딱 커피 두 잔 값씩만 내보자.

    1만원의 기적이 한국병을
    고칠 수도 있지 않을까 ?

    설마 이 땅에 1만원씩 낼 사람이
    30만 명도 안 되지는 않겠지 ?
    라고 생각하니
    또 내 마음은 두둥실,
    하늘을 날 것만 같다.

    그리고 정부는
    장군에게 무궁화
    훈장을 추서한다는 소식이다.
    너무 늦었지만 감사한 일이다.

    정말 기쁜 날이다.

    팝콘이 탁탁 터지듯이
    그렇게 내 온 몸의 세포들이
    기쁨에 겨워 꿈틀거린다.

    에스프레소 덕분인가?
    까뮈 엑스오 덕분인가?

    이제 나는 죽어도
    한묘숙 여사를 만나 웃으며
    두 손을 잡을 수 있게 됐다.

    브라보 !

    부산출생
    박선영  
    국제대학교 교수의 페이스북 글입니다.



    청어 / 쳥년처럼 살아가는 어르신


    청년처럼 사는 어르신
    나이 80· 90· 100세(歲)가 되어도
    청년(靑年)처럼 사는 어르신을
    줄여서 ‘청어’라고 한다.
    청어는 나도 모르게
    존경심(尊敬心) 우러나는 어르신으로
    긍정적(肯定的) 열정(熱情)과
    미래(未來) 호기심(好奇心)이 가득하다.
    ‘청어 DNA’를 심고 가꿔야
    내 마음속 청어 떼가 뛰논다고 생각한다.
    건강(健康) 백세(百歲)라는 말이
    실감나는 세상(世上)이다.
    여러분이 잘 아는
    철학자(哲學者) 김형석 교수(敎授)님은
    올해 104세 이신데
    열심(熱心)히 강의(講義)하고
    신문(新聞) 칼럼을 쓰신다.
    요즘도 서울 뿐만 아니라
    지방(地方)까지 강의가 있어
    KTX를 타러 서울역에
    자주 가신다고 한다.
    100세가 넘으신 분이
    서울에서 저녁 강의를 하고
    곧바로 열차(列車)로 포항에 가서 잠깐 주무시고
    조찬(朝餐) 강의를 하신다니
    저절로 감탄사(感歎詞)가 나온다.
    청어처럼 사는
    또 다른 사람은
    이길여 가천대학교 총장(總長)이다.
    지난해 말에 ‘길을 묻다’ 라는
    자전적 책을 내셨는데
    큰 화제(話題)가 됐다.
    시골 소녀(少女)가 큰 뜻을 품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가고
    미국 유학(留學) 후 귀국(歸國)해
    길병원을 열어 의술(醫術)을 펼친 이야기부터
    가천대를 명문대로 키우기까지
    진솔(眞率)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총장의 인생철학(人生哲學)은 ‘박애(博愛)’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
    따뜻한 세상(世上)을 만드는 것이다.
    꾸준히 박애를 실천(實踐)하려면
    먼저 스스로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이 총장은 남들보다
    수십 배 더 노력(努力)하며
    역량과 성과를 쌓아온 분이다.
    도전(挑戰)과 열정(熱情)의 화신이다.
    이길녀 총장은
    젊은이와 대화(對話)를 좋아한다.
    대화 내용(內容)도 70% 이상이
    미래(未來)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인공지능(人工智能)(AI) 시대(時代)에
    새로운 인재(人材) 교육(敎育)의 방향(方向),
    새롭게 펼쳐지는
    바이오산업과 우주산업,
    대학의 미래상 등을 말씀하시고
    끝없이 질문(質問)한단다.
    그녀의 나이는 올해 92세이다.
    나이가 80~90세가 되어도
    청년처럼 사는 분이 늘어난다.
    넓고 푸른 바다를
    마음껏 헤엄치는
    등푸른 생선 청어(靑魚)가 저절로 떠 오른다.
    청년처럼 사시는
    어르신 ‘청어’를 보면
    나도 모르게 존경심이
    우러나오고 힘이 솟는다.
    현존(現存)하는 사람 중
    어떤 분이 청어일까 꼽아봤다.
    한국의 ‘탑건’이라는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이며
     보수당 원로 신영균 선생님(94세),
    국민(國民) 건강(健康)을 위해
    세로토닌 문화(文化)를 이끄시는
    이시형 박사(博士)님(90세),
    활기(活氣)찬 목소리로
    가요무대(歌謠舞臺)를 진행(進行)하시는
    김동건 아나운서님(85세),
    봉사(奉仕) 활동(活動)을 활발(活潑)히 하시며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김상희 가수(歌手)님(82세),
    올해도 현역 최고령으로
    연예인 골프대회에 참가한
    국민배우 이순재님(89세) 등이
    모두 청어로 부를 만한 분이다.
    이들의 공통점(共通點)은 무엇일까?
    이런 생각으로
    자세히 살펴봤더니
    몇 가지가 나왔다.
    첫째,  늘 미래(未來)에 대한
    호기심(好奇心)이 강하다.
    둘째,  공익적(公益的)이고
    이타심(利他心)이 크다.
    셋째,  긍정적이고 잘 웃는다.
    나이 들었다고
    과거(過去) 전성기 추억(追憶)을 먹고 살면
    청어가 아니다.
    자기 혼자 잘 되겠다고
    열심(熱心)히 살아도
    청어가 될 수 없다.
    긍정적 열정이 식으면
    더 이상 청어가 아니다.
    나이 들어 갑자기
    청바지를 입는다고
    청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청어가 되려면   
    젊은 시절(時節)부터 몸과 마음에
    청어 DNA를 심고 가꿔야 ?한다.
    이게 내가 찾아낸
    ‘청어로 사는 방법’이다.
    매력적(魅力的)인 시니어가
    많은 사회(社會)가 좋은 사회다.
    나이가 들어서도
    건강(健康)한 삶을 유지(維持)하며
    세상(世上)을 위해 활기(活氣)차게
    활동(活動)하는 분이 많으면
    이 자체가 젊은이들에게는
    희망(希望)의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나도 청어로 살고 싶다.
    끝없이 다가오는
    미래라는 바다를 향해
    힘차게 헤엄치고 싶다.
    요즘 내 마음속에는
    청어떼가 뛰놀고 있다.




    틈을 만들어 주자


    고대 페르시아를 떠올릴 때
    많은 이들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고급 양탄자입니다.

    페르시아의 장인들은 양탄자를 만들 때
    한 올 한 올 손으로 만들어 가격이 비쌀 뿐만 아니라,
    정교한 문양과 복잡한 기하학적 디자인,
    자연을 모티브로 한 패턴이 특징이며,
    중세 시대부터 왕실과 귀족들의 권위를 나타내는
    요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뽐내는
    예술과 문화의 결정체에도 잘 찾아보면
    반드시 흠이 있기 마련입니다.

    흥미롭게도 페르시아 양탄자에서 발견되는 흠은,
    혼신의 힘을 다해 양탄자를 제작하던 장인이
    일부러 남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세상에는 완벽한 것이 없다고 여기는
    그들의 장인 정신과 철학이 담긴
    흠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를
    '페르시아의 흠(Persian Flaw)' 이라고  부릅니다.


    틈이 있어야
    햇살도 스며들 수 있듯이

    틈이 있어야
    다른 사람이 들어올 공간이 생기고,
    이미 들어온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결국 틈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창구와 같습니다.
    완벽해지려 하지 말고 굳이 틈을 가리려
    애쓰지도 마세요.

    그 빈틈 사이로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들이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내 삶을 지금보다 더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완벽함이란 더 이상 보탤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완성된다.
    – 생텍쥐페리 –


    예수님의 동상(銅像)과 기도(祈禱)


    북유럽 어느 시골 성당에
    사람 크기만 한
    예수님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 동상 앞에서 기도를 하면
    소원이 잘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이 찾았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기도를 하고 소원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문지기가
    예수님이 서 있는 곳에
    한번 서 있어 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소원을 말하며
    여러 날을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짜로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 네가 하도 소원을 말하니
    딱 하루만 너와 자리를 바꾸겠다.
    그런데 나와 한 가지
    약속을 해야 된다.
    너는 누가 와서 어떤 행동이나
    기도를 하던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 말하지 말거라.  
    알겠느냐?"

    문지기는 절대 침묵하겠다고
    굳건히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문지기는
    예수님의 동상이 되었고
    예수님은 문지기가 되었습니다.

    문지기가 예수의 동상으로 서 있을 때
    첫 번째 사람이 왔습니다.

    그는 아주 부자였고
    도박을 즐기는 자였습니다.
     자기가 도박을 하러 가는데
    돈을 잃지 않고 많이 딸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소원이었습니다.

    한참을 기도한 부자는 갔습니다.
    그런데 돈다발이 들어있는 가방을
    깜박하고 놓고 나갔습니다.
    문지기는 가방을 놓고 갔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예수님과의 약속 때문에 침묵했습니다.

    두 번째 조금 후에
    아주 가난한 농부가 들어왔습니다.
    자기 아내가 중병으로 누워있는데
    치료비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도와달라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농부가
    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려다가
    돈 가방을 보았습니다.
    그 농부는 그것이
    하느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감사 기도를 드린 후
    돈 가방을 들고 나갔습니다.

    문지기는 그 돈 가방은
    주인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예수님과의 약속 때문에 참았습니다.

    세 번째로 기도를 하러 온 사람은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가는
    청년이었는데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기도를 하러 온 것입니다.

    청년이 기도를 막 시작하였는데
    갑자기 예배당 문이 활짝 열리더니
    돈 가방을 놓고 간 부자가 들어왔습니다.

    돈 가방이 없는 것을 확인한 부자는
    다짜고짜 기도하는 청년의 멱살을 잡고
    돈 가방을 내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청년은 이게 무슨 행패냐고 하면서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였지만,
    이미 분이 날 대로 난 부자는
    청년을 이끌며 경찰서로 가자고 했습니다.

    청년은 자기는 지금 바로 가지 않으면
    배를 탈 수가 없다고 하면서
    경찰서로 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며
    다투는 것을 본 문지기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을 해 주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청년은 배를 타게 되었고
    부자는 돈 가방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노하신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니 내려오너라."

    그러자 문지기는 말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죄송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화를 내실 정도로
    잘못은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잘못된 상황을 바로 잡아서
    평화를 이루었을 뿐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 만으로도
    잘못이 큰 것이다.
    그리고 네가 개입해서 해결한 것보다
    침묵했으면 더 좋은 결과가 있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부자는 어차피
    그 돈은 도박장에서 다 날릴 돈이니라.
    그 돈이 농부에게 갔더라면
    농부의 아내를 살릴 수 있었느니라.

    더욱 잘못이 큰 것은
    청년의 문제이니라.
    청년은 그냥 두었으면
    배를 타지 못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네가 개입하므로
    그 청년은 배를 타게 되었고
    그 배는 바다에서 침몰하여
    죽게 되었느니라.
    내가 침묵으로 임하는 이유를
    이제 알겠느냐?"

    인간들은 하느님의 침묵을
    못 견뎌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흉내를 낼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이 판단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의 과도한 개입은
    일을 그르칩니다.

    원래 하느님은 침묵 중에 계십니다.
    그리고 침묵 중에 일하십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을 내어버리실 때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침묵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죄를 지고
    예수님이 죽으실 때
    하느님은 침묵하셨습니다.
    하루살이 곤충에도,
    들에 핀 잡초 하나에도,
    하느님의 뜻이 있습니다.

    서로 조화를 이루기에
    서로에게 유익을 주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감옥에 갇힌 어떤 사람은
    감옥의 먼지나 열악한 환경을 헤아리며
    불평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밤하늘의 별을 세며
    꿈을 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난 과거의 불행과 실패,
    일어나지도 않은 염려를 붙잡고 있고,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쁨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인이란
    우리 삶의 먼지를 헤아리고
    불평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새로운 희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역사가 찰스 베어드는
    꽃이 꿀벌에게 꿀을 빼앗기는
    그 순간에도 하느님은
    수정의 신비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하느님은 별을 더욱 빛나게 하십니다.

    나는 특히 Mark Miller 교수가 작곡한
    “I believe(나는 믿네)" 라는 노래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는
    1945년 독일 유태인 수용소 발견된
    다음과 같은 낙서였습니다.

    그 글은 어느 무명의
    한 유태인이 죽음을 앞두고
    벽에 쓴 글이라고 합니다.

    I believe in the sun,
    even when it's not shining.
    (나는 태양이 비치지 않을 때에도
    태양이 있는 것을 믿는다.)

    I believe in love,
    even when I don't feel it.
    (나는 사랑을 느낄 수 없을 때에도
    사랑이 있는 것을 믿는다.)

    I believe in God,
    even when God is silent.
    (나는 하느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도
    하느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는다.)

    고통 중에 부르짖는 욥의 기도도
    침묵하시는 하느님께 부르짖는 내용입니다.

    하박국의 기도도
    불의한 일들에 대하여 침묵하고 계신
    하느님께 부르짖는 절규입니다.

    우리는 너무 호들갑을 떱니다.
    하느님의 침묵에 못 견뎌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침묵은
    절망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침묵하십니다.
    하느님은 침묵 중에 계시지만
    역사는 도도하게 흘러갑니다.

    하느님이 돌리시는 역사의 맷돌은
    비록 천천히 돌아가지만
    정확하게 돌아갑니다.

    하느님의 하시는 일은
    지금은 보이지 않고 들을 수 없지만,
    지나고 뒤돌아보면
    세심하게 하나하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세상은 부조리하고 혼란합니다.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불의한 자들이 큰소리치고
    활개를 치는 오늘이지만
    하느님은 여전히 침묵 중에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침묵 중에 섭리하시고,
    침묵 중에 간섭하심을...
    (글쓴이 :  미상 )

    종교를 떠나서
    우리가 살아가며 행복을 느끼게  하는
    좋은 내용이라  생각되어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오직 찬양(讚揚)만을 드리라(시편 7:10-17)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1025년경 이탈리아의 목회자이자 음악이론가인
    귀도 다레초(Guido d’Arezzo)가 저녁 기도를 마치고
    찬송을 부르다가 찬송의 각 첫 구절을 본 따
    점차 높아지는「음계」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조금씩 다듬어지고 변형되어서
    오늘날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8음계」가 완성되었습니다.  

    목회자가 만들고,
    찬양의 첫 소절을 따서 이름 지어진 만큼
    8음계인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에는
    다음과 같은 복음적인 뜻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1. 도(Do)는 하나님(Domine)
      2. 레(Re)는 하나님의 음성(Reasonare)
      3. 미(Mi)는  기적(Miracle)
      4. 파(Fa)는 제자(Famuti)
      5. 솔(Sol)은 덮어줌(Solve)
      6. 라(La)는 가르치는 사람(Labii)
       7. 시(Si)는 거룩한 성령님(Sancte loannes)
      8. 그리고 마지막 도는 다시 하나님으로 끝을 맺습니다.

    모든 노래를 이루는 음계의 시작은
    하나님을 향한 목회자의 찬양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부르는 모든 찬송은
    오직 하나님만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나를 만드시고 구원하신,
    찬양받기 합당하신,
    거룩하신 하나님께
    매일 감사의 찬송을 올려드리십시오.
    복되고 형통합니다. 아멘

    주님,
    찬양받기 합당하신 유일한 이름이
    바로 주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게 하소서.

    말씀 묵상과 기도를 쉬지 않듯이,
    매일 우리의 목소리로
    주 하나님을 높여 드립시다.

    - 김장환 목사님의 여호와께 맡기라 중에서


    치매(癡呆)와 물(水) 



    🔹️인간에게 생기는 치매는
        나이 먹고 늙어서 생기는 병이 아닙니다.

    🔹️치매는 물을 잘 마시지 않아 생기는
        병 중 하나입니다.

    🔹️우리 몸은 면역체계가 가동됩니다.

    🔹️우리 몸에 물이 부족하면,
        물이 없어도 살 수 있는 부분부터
        물 공급을 줄여 나갑니다.

    🔹️이 때가 물을 잘 마시지 않는
          30대 부터입니다.
          4, 50대부터는 더 마시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 몸 중 어디가
        먼저 늙어 갈까요?
        피부입니다.

    🔹️피부가 말랐다고
        죽지 않습니다.
        피부가 늙어갑니다.

    🔹️그래도 물이 부족하면
        어디를 줄여 나갈까요?

    🔹️장기입니다.
        이 때는 5, 60대가 되겠네요.

    🔹️그래서 이때부터
        여기 저기 아파지는 곳이
        많아지는 겁니다.
        물론 그동안
        많이 사용하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 물이 부족하면,
         뇌에 물 공급이 잘 되지 않습니다.

    🔹️뇌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질환 중에서
        뇌 관련 질환이 많습니다.

    🔹️물 부족은 만병의 근원입니다.

    🔹️반대로 물만 잘 드셔도
        질병 80%는 스스로 낫는다고 합니다.

    🔹️물을 잘 드시면 치매 예방도 되고,
        치매도 늦출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물이 목에 걸려서
        먹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옛날 노인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

    🔹️물도 힘들어서 마시지 못한다며
        한 모금도 못 마시는
        노인들도  많았습니다.

    🔹️사람이 늙어서 죽을 때는
        몸에 수분이 거의 빠져나가
         양자 파동이 없을 때 죽습니다.

    🔹️물을 자주 마시는 습관을 들이세요

    🔹️모든 건강과 질병은 식생활 습관과
        평소 생활습관이 90%이며,
        부모로부터 유전으로 물려받은 질병도
        습관으로 고칠 수있습니다.


    온수(溫水)는 보약(補藥)


       우리가 상온(常溫)의 물만 마셔도
       몸은 몰라보게 건강해진다.

       냉수는 체온을 떨어뜨리는데
       체온이 1도 떨어질 때 마다
       면역력은 30%
       기초 대사력은 12%씩 떨어진다.

       냉수는 소화, 혈액순환,
       효소의 활성기능을 떨어뜨린다.

       냉수는 체내 산화를 촉진시켜
       노화를 촉진한다.

       암세포는
       저체온 상황에서 활성화되고,
       고체온에서는 얼씬도 못한다.

       우리가 병에 걸리면
       일단 몸이 불덩이가 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몸이 스스로 알아서
       체온을 높여 몸속에 들어온
       병균을 죽이거나 퇴치하여
       살리는 생명의 자생능력이다.

       몸이 따뜻해지면
         '더 이상 지방 비축이 필요없구나' 라고
        인체가 스스로 판단해 음식을
        과다 섭취하지 못하게 하거나,
        몸속의 지방 비축을 스스로 제어한다.

        몸이 건강해지려면,
          일단 가정에서 부터
         생수나 식수를 냉장고 안에서
          밖으로 끌어 내도록 하라!

        세상 살기 싫으면
        냉수를 자주 마셔라!

        뜨거운 파인애플 물

         베이징 육군 종합병원의
         천희렌 교수는
         만약 이 소식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10부를 전달한 다면,
         최소한  한 명의 목숨은
         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저는 제 책임을 다했습니다.
         당신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널리 전파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뜨거운 파인애플 물은
            당신의 평생을 살릴 수
            있습니다.

          뜨거운 파인애플 물은
          암세포를 죽일 수 있습니다.

          얇게 자른 파인애플
             2~3조각을 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알칼리성 물이되며
          매일 마시면,
          아무에게나 좋습니다.

           뜨거운 파인애플 물은
           항암물질을 분비하는데,
           이것은 의학에서
           가장 최근에 개발된
           효과적인 암 치료법입니다.

           뜨거운 파인애플 과일은
           낭종이나 종양을 죽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암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뜨거운 파인애플 물은
           알레르기의 결과 물인
           신체의 모든 세균과
           독소를 죽일 수 있습니다.

           파인애플 추출물이
           들어있는 약의 종류는
           단지 폭력적인 세포들을
           파괴할 뿐,
           건강한 세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또 파인애플 주스에
           들어있는 아미노산과
           파인애플 폴리페놀은
           고혈압을 조절할 수 있어
           내혈관의 막힘을 방지하고
           혈액순환을 효과적으로 방지하고
           혈전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읽고 나서
           가족, 친구등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서
           건강을 지키세요!

           이 메시지를 묻어두지 말고
           퍼뜨리면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건강합시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해와 배려

    일본 도쿄에
    이상한 식당이 있습니다.

    시키지도 않은
    엉뚱한 메뉴가 나오는
    식당입니다.

    라면을 시켰는데
    우동이 나오고,
    햄버거를 시켰는데
    만두가 나오곤 합니다.

    이래 가지고 어떻게 돈을 버나…
    주문도 제대로 못받으면서
    어떻게 장사를 하나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어이 없는 식당입니다.

    헌데
    놀라운 것은
    엉뚱한 음식을 가져다 줘도
    화내는 손님이 한 명도 없고,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주는 대로
    감사히 먹는다는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이 이상한 식당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유명한
    인기 맛집입니다.

    이 어이 없는 식당이
    유명 맛집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식당을 찾는 고객들은
    "바로 여기서만의
    특별한 이해와 배려와
    사랑이 넘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이 식당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아르바이트생들’때문입니다.

    이곳의 아르바이트생들은
    모두 여섯 명인데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 할머니들’입니다.

    이 분들은 최선을 다해
    웃음을 잃지 않고
    일하려고 노력합니다.

    주문을 받아가지만
    음식을 가져다 줄 때
    누가 주문했는가도 헷갈리고
    그래서 주문과는
    전혀 다른 음식을 가져다 줍니다.

    식당을 처음 방문한 한 손님은
    "좀 당황했죠.
    정말 주문한 것이 제대로 나올까,
    두근거렸어요"라고 말합니다.

    많은 자원 봉사자와
    더불어 운영되고 있는
    이 식당 한 관계자는

    “어르신들이 비록 치매일지라도
    아직 사회구성원의 일부라는
    소속감을 주며,
    식당을 찾는 고객들에게도
    이 같은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운영하게 됐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식당의 성공 비결은
    바로
    '이해와 배려'인 것입니다.

    식당을 찾은 손님들은
    주문한 음식이 안 나오고
    다른 음식이 나와도,
    가끔씩 물을 쏟아
    바지나 치마가 적셔도
    화를 내거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습니다.

    알바생들이 조금 실수하고,
    조금 느리고,
    조금 서툴러도 괜찮습니다.

    이곳을 찾는 손님들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할머니들은
    우리의 어린 시절,
    모든 실수를 보듬고 길러주신
    우리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할아버지들은
    우리의 어린 시절,
    우리들이 공부하고
    자랄 수 있도록 희생하신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해와 배려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오늘입니다.


















    2025 새벽 묵상 열왕기하



    요시아(공동번역),
    요시야(개역개정)(히브리어: יאשיהו, 그리스어: Ιωσίας; 기원전 640년경 ~ 기원전 609년경 재위)
    유다 왕국의 16대 왕으로, 재임중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다.
    많은 역사가들은, 그의 신명기 개혁운동 과정에서 성서에 속한 여러 책들이 편집되거나 확립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전왕 아몬과 보츠캇 출신 아다야의 딸 여디다의 아들이었던 요시야는 아몬이 죽임을 당하자 백성들에 의해 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하나님에 눈에 드는 옳은 일들을 하였고 자기 조상 다윗의 길을 걸었다.

    역대하는 요시아가 왕이 되었을 때 여덟 살이었다고 기록한다.
    재위 8년째에 그는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기 시작했고, 재위 12년째에는 예루살렘과 유다 전역에 있는 바알, 아세라 제단과 우상을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어린 몸으로 하나님을 찾아 산당과 아세라 목상, 조각 신상, 주조 신상들을 치우고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화하기 시작했다.
    바알 제단도 무너뜨리고 제단 위 분향 단들도 부수었으며 아세라 목상과 조각 신상과 주조 신상들을 부수어 가루로 만들고는 그 가루를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던 자들의 무덤 위에 뿌렸다.

    그리고 사제들의 뼈를 그 제단 위에서 태웠고 이렇게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화하였다. 므낫세와 에브라임, 시므온, 납달리에 이르기까지의 성읍들의 광장에서, 곧 온 이스라엘 땅에서 제단을 무너뜨리고 아세라 목상과 조각 신상들을 깨뜨려 가루로 만들고 분향 단들을 부순 다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역대기에서는 요시아가 재위 18년 이전부터 추진하던 종교개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반면, 열왕기하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복원에서부터 기록을 시작한다.

    요시야는 나라와 성전을 정화한 다음 아찰야의 아들 사판마아세야 성주와 요아하스의 아들 요아 기록관을 보내 성전을 보수하게 하였다.
    그리고 므낫세와 에브라임, 나머지 이스라엘 지역의 모든 주민과 온 유다와 베냐민과 예루살렘 주민들과 레위인에게서 모은 돈을 힐기야 대제사장에게 내놓았다.

    그 돈을 성전 보수 공사를 책임지는 일꾼들에게 나눠주고 일꾼들에게 성전을 고치고 보수하게 하였다.
    또 목수와 석수에게도 돈을 주어 전 유다의 왕들이 폐가로 만들어 버린 건물들을 고치는 데 쓸 깎은 돌과 도리와 들보 재목을 사게 하였다.

    그 사람들은 일을 성실히 하여 그들을 지휘할 사람으로 므라리의 자손 야핫오바드야, 크핫의 자손 즈카르야므술람 등 레위인들이 임명되었다. 악기를 잘 다루는 레위인들은 짐꾼을 감독하고 각종 작업을 하는 일꾼들을 지휘하였다. 그리고 몇몇 레위인들은 서기관, 행정관, 문지기 역할을 맡았다.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온 돈을 꺼내고 있었는데 힐기야 사제가 모세를 통해 주어졌던 하나님의 율법서를 발견했다.
    힐기야는 사반 서기관에게 책을 주고 사판을 그 책을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열왕기하 22장 8절에 나오는 '세페르 하토라(ספר התורה)'라는 구절은 여호수아 1장 8절 8장 34절에서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받은 율법을 묘사할 때 사용한 구절과 동일하다.
    본문에서는 이 책이 토라라고 명시하지는 않으나,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신명기의 사본이거나 신명기의 일부가 된 본문이라고 본다.
    율법서의 내용을 들은 요시야는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캄, 마가의 아들 압돈, 사반 서기관, 시종 아사야에게 명령해 힐기야는 왕이 보낸 이들과 함께 여예언자이자 하스라의 손자이자 톡핫의 아들 살룸 예복 담당관의 아내 훌다에게로 갔다.

    이에 훌다는 이스라엘에 큰 재앙이 내릴 것을 예언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법궤는 이스라엘의 기럇 여아림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기원전 7~8세기에 이 곳은 강력한 신앙의 중심지였고, 이 도시 유적에서는 이스라엘 북왕국과 관련된 일종의 거대한 신전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몇몇 학자들은 이 같은 발견과 역대하 35:3을 근거로, 사실 법궤는 성경에서처럼 왕국 형성 초기에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왕국 후기 요시아 통치기에 옮겨졌다고 주장한다. 
    또한 고고학자들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성물을 상자 속에 넣어 운반하는 것은 매우 흔한 전통이었음을 지적하며, 법궤 속에 사실은 수천년 된 석상들이 대신 들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요시야는 사람을 보내 유다와 예루살렘의 원로들을 소집해 왕은 모든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과 제사장들, 레위인들과 높은 자에서 낮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들이 성전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서를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잘 지켜 그 책에 쓰여 있는 계약의 말씀을 실천하기로 하나님의 앞에서 계약을 맺었고 예루살렘과 베냐민의 사람도 그 계약에 참여시켰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주민들은 하나님의 계약을 잘 따르게 되었고 요시야는 모든 지역에서 역겨운 것들을 없애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였다.

    성경적 인물이다.

    요시야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기리는 파스카 축제(유월절)를 지냈다. 유월절 양을 잡고 사제들에게 임금을 맡기고 성전에서 맡은 일을 잘 하라고 격려하였다. 또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레위인들에게 유월절의 준비에 대해 일러두었다.

    요시야는 모든 백성이 유월절 제물로 쓸 수 있도록 어린양과 새끼 염소 3만 마리와 황소 3000마리를 기부하였다.
    대신들도 백성들과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위해 기부하고 성전 책임자들인 힐기야와 즈카르야와 여히엘도 사제들이 파스카 제물로 쓸 수 있도록 어린양과 새끼 염소 2600마리와 황소 300마리를 내놓았다.
    레위인들의 지도자 코난야, 그의 동생 스마야와 느탄엘, 하사브야, 여이엘, 요자밧도 레위인들이 파스카 제물로 쓸 수 있도록 어린 양과 새끼 염소 500마리와 황소 500마리를 기부했다.

    예배가 준비되었을 때 임금의 명령으로 사제들은 자기 자리에 서조 레위인들은 조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파스카 양을 잡자 사제들을 그 피를 받아 뿌리고 레위인들은 가죽을 벗겼다.
    그러고 나서 레위인들은 번제물을 따로 떼어 백성의 집안 갈래에 따라 나누어 주고 모세의 책에 쓰인 대로 하나님께 바치게 하였다.
    황소도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법규대로 유월절 양을 불에 굽고 나머지 거룩한 제물을 냄비와 솥과 단지에 넣고 삶고 뛰어다니며 온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런 다음에야 자신들과 제사장들의 몫을 준비하였다.

    아론의 자손 사제들은 번제물과 굳기름을 밤까지 바쳐야 했으므로 레위인들이 자신들과 아론의 자손 자세장들이 몫을 준비하였다. 아삽 자손의 성가대는 다윗과 아삽과 헤만과 임금의 환시가 여두둔의 명령에 따라 제 위치에 서고 문지기들도 저마다 책임을 맡은 대문에 서 있었는데 레위인들이 그들의 몫을 준비해 주어 자기들의 일 자리에서 벗어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예배가 모두 준비되어 유월절을 지내고 하나님의 제단 위에 번제물을 바칠 수 있었다. 이렇게 요시야 임금은 어느 임금들 보다도 가장 성대하게 유월절을 지켰다.

    기원전 609년 봄 또는 초여름에, 파라오 네카우 2세신아시리아 제국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원조하기 위해 출정을 떠난다. 네카우 2세는 군대를 비아 마리스 해안 도로를 따라 시리아로 배치한 뒤 블레셋과 샤론의 저지대를 따라 이동시키고, 남쪽의 이스르엘 골짜기에 있는 언덕의 능선을 넘을 준비를 했다. 이 때 요시아가 이끄는 유다 군대가 메기도에서 이집트군을 막아섰다. 그러나 유다 군대는 패퇴했고 요시야는 전사했다. 이집트는 아시리아와 합류하여 하란에서 바빌로니아인들과 싸웠다. 바빌로니아 연대기는 기원전 609년 담무스월부터 엘룰월까지 이어진 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시야는 기원전 609년 담무스월 이전에 사망하였음을 알 수 있다.[7]

    구약성경은 요시아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기록을 전한다. 열왕기하에서는 네카우 2세메기도에서 요시아를 만나 죽였다고만 언급하고 있는 반면,[8] 역대하에서는 요시아가 이집트 궁수들에 의해 치명상을 입고 예루살렘으로 끌려가 죽었다고 말한다.[9] 후자의 경우 요시아의 죽음은 네카우가 신의 명령에 따라 한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적는다. 여기서 전하는 네카우의 말은 다음과 같다.[10]

    유다 왕이여, 당신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소? 나는 오늘 당신을 치러 온 것이 아니고 나와 싸움이 벌어진 왕실을 치러 가는 것이오. '어서 가라.'는 신의 명령을 받고 가는 길이오. 나와 함께 하시는 신의 손에 멸망하지 않으려거든 길을 막지 마시오.

    — 공동번역 개정판, 역대기하 35장 21절

    이 두 기록 중 역대기의 기록을 신뢰하지 않는 학자들이 있다.[11] 이들은 이 구절이 다른 왕인 아합의 죽음에 대한 묘사와 (1) 경고를 무시하고 전투를 벌인 것, (2) 전투 전에 변장한 것, (3) 화살에 맞아 죽은 것, (4) 화살에 맞은 뒤 남긴 말을 비롯해 많은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의로운 왕의 죽음의 까닭을 특정한 죄로 돌리는 연대기의 종교적 의제로 서술되었다고 본다.[12]

    특히 에릭 클라인은 메기도에서의 전투가 아예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노먼 핑켈슈타인이나 나답 나아만을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열왕기에서 요시아가 네카우를 전투에서 조우한 것이 아니라, 네카우의 신하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고선 이집트에게 바친 공물의 양이 정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참수되었다고 본다.[13]

    유대교 랍비 문헌은 요시아의 경건함과 그의 아버지 아몬에 대해 "아몬이 유다의 모든 악한 왕들 중 가장 죄가 많았던 사실은 탈무드의  다음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아하즈는 제사를 중지했고, 므나쎄는 제단을 허물었고, 아몬은 성전을 황량한 곳으로 만들었고, [거미줄로 덮혀 판독 불가] 아하즈는 율법의 두루마리를[17] 봉인했고, 므나쎄는 신성한 이름을 도려냈고, 아몬은 두루마리들을 모두 불태웠다.[18] 아합은 근친상간을 허용했고, 므나쎄는 스스로 그 일을 저질렀으며, 아몬은 네로처럼 행동해 네로가 어머니 아그리피나로부터 들은 말을 들었다. 아몬은 아들 요시아가 존경받은 왕이 되었음에도 그 스스로의 이름을 앞으로 세상에 올 왕조에 기록되지 못하였다"라고 전한다.[19][20]

    하란에서의 패배 이후, 파라오 네카우 2세는 상당한 병력을 남겨두고 이집트로 돌아왔다. 네카우는 돌아오는 길에 여호아하즈가 그의 아버지 요시아의 뒤를 이었다는 것을 알았다.[21] 네카우는 재위한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여호아하즈를 폐위시키고 형 여호야김을 그 자리에 앉혔다. 네카우는 여호아하즈를 포로로 데려가며 은 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받아갔다. 메기도에서 요시아의 패배는 다윗 왕조의 종말을 의미하는데, 요시아의 후계자들은 단명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가 전통적인 지배권을 되찾으며 유다의 자치권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요시아의 사망 이후 온 유다와 예루살렘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예언자 예레미야도 그를 위한 애가를 지었다.







    * 남왕국 제8대 요아스왕 <7세에 왕위에 오르다> 

    요 아 스 /  은혜를 원수로 갚은 유다 제8대 왕

    1. 인적 사항

      (1) 요아스는 '주께서 주셨다'는 뜻.
      (2) 유다 왕 아하시야와 브엘세바 사람 시비아의 아들(왕하 12:1).
      (3) 고모 여호세바에 의해 생명을 건짐.
      (4) 남유다의 제8대 왕으로 40년간 통치.
      (5)두 아내를 둠(대하 24:3. 제사장 여호야다가 왕으로 두 아내에게 장가들게 하였더니 저녀를 낳았더라)

    2. 시대적 배경

      B.C.835-796년까지 통치, 북이스라엘 왕 예후, 여호아하스, 요아스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북왕국과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 요아스 때에도 북왕국과 그리 우호적인 관계를 갖지는 못했다.
      이 시기는 가나안 땅 북방에 위치한 아람이 계속 남쪽으로 세력을 펼치던 시기로서 요아스 당시에도 아람 왕 벤하닷의 한 차례 큰 침입을 받았다.

    3. 주요 생애

      출생

      B.C. 841 년

      여호세바가 구출

      대하 22:11

      숨겨져 6년간 양육

      대하 22:12

      여호야다에 의해 왕위에 오름

      7세, B.C. 835 년

      대하 23:11

      두 아내를 취함

      대하 24:3

      성전을 수리

      대하 24:5

      여호야다의 죽음

      대하 24:15

      우상을 숭배

      대하 24:18

      선지자의 경계 거절

      대하 24:19

      여호야다의 아들 살해

      대하 24:20,21

      아람군의 침입

      대하 24:23

      암살됨

      B.C. 796 년

      대하 24:25


    4. 성 품

      (1) 여호야다의 조언에 따라 정직히 행하고, 성전을 수리할 만큼 현명하고 하나님을 사랑했던 자.
      (2) 성전 수리가 지연되자 재정관리 방법과 책임자를 달리하여 마침내 성전을 복원시킨 것으로 보아 행정력과 지도력을 갖춘 자(대하 24:5-14).
      (3) 여호야다가 죽자마자 신하들의 간언에 마음이 흔들려 우상을 섬길 만큼 심지가 유약한 자(대하 24:17).
      (4) 선지자 징계를 듣지 않고 더욱이 은혜를 베푼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죽인 것으로 보아 경솔하고 배은 망덕한 자(대하 24:20-22).

    5. 구속사적 지위

      (1) 아달랴로 인하여 다윗 가문의 멸절위기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출됨으로써 다윗 가문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이어가게 된 자.
      (2) 유다 열왕 중 처음으로 성전을 수리한 자.
      (3) 여호야다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를 성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인 자로서 하나님의 종을 핍박한 자.

    6. 평가 및 교훈

      (1)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서 자신에게 조언을 베풀 동안은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여호야다 사후에는 바알의 지도자들과 방백의 충동에 따라 악정을 행하였음을 보게 된다.
      이는 요아스의 믿음이 여호야다가에게 깊이 의존되어 하나님과의 주체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도 눈에 보이는 신앙 인물이나 지도자에게 우리의 신앙을 의존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리할 때 어떠한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버티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2) 현명하고 분별력 있었던 요아스가 통치 말년에는 배은 망덕하고 잔인한 인간으로 변모했다.
      이는 요아스가 처음과는 달리 주님의 훈계로 자신을 부단히 경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보다 현재에 더 경건한 모습으로 살아가는가?
      진정 주의 말씀아래 겸손히 나를 살펴서 항상 오늘보다 더 경건한 내일을 만들어야 하겠다.


    * 남왕국 제16대 요시야왕<8세에 왕위에 오르다>

    요아스(  יואש : Ιωάς 기원전 835년경 - 기원전 796년경 재위) <모. 지비야>
    유다 왕국 8대 왕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을 했으나 후에는 변절하여 악한 일을 저지르다가 죽었다.

    브엘세바 출신의 어머니 지비야의 아들로 태어나 7살에 왕이 되었다.
    처음에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 옳은 일을 할 수 있었다.
    한때는 요아스와 여호야다가 성금으로 돈을 모아 성전 보수를 맡은 이들에게 주고 석수들과 목수들을 고용해 성전을 고치게 했다.

    성전 복구가 끝난 뒤 남은 돈은 그것으로 집을 위한 기물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 내내 하나님께 번제물을 바쳤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130살로 죽은 후 유다의 대신들의 말을 듣게 되었고 하나님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수많은 예언자들이 그에게 경고를 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경고하던 여호야다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를 살해했다.

    이 해가 끝날 무렵 아람 군대가 요아스를 치러 올라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들어와 백성들 가운데 관리들을 모두 죽이고 전리품들을 가져갔으며, 요아스는 큰 부상을 입었다.
    결국에는 암몬 출신 여자 시므앗의 아들 자밧과 모압 여자 시므릿의 아들 여호사밧이 일으킨 모반으로 밀로 궁의 침상에서 살해당했다.

    훌다(Heldah)

    유대왕 요시아 시대의 여선지인데 예루살렘 제 2통에 사는 살롬의 아내이다(왕하 22:8-20).
    왕은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에 대하여 그 여선지에게 묻기위하여 힐기야를 파견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그 책에 있는대로 재앙을 내릴 것이로되 왕이 이미 겸손히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목전의 그 재앙을 면케되리라고 하였다.
    요시아왕의 종교개혁을 도왔다(왕하 22:3-20, 대하 34:8-28).




    5월 1일(목) 열왕기하 21-2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시야(23: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Neither before nor after Josiah was there a king like him who turned to the LORD as he did--with all his heart and with all his soul and with all his strength, in accordance with all the Law of Moses.

    요시야 왕은 남 유다 왕국의 16대 왕이었습니다.
    요시야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잘 섬겼던 인물이며 이와같이 율법을 잘 지킨 왕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고 칭찬하는 왕입니다.

    남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들을 먼저 정리한 후 그 이름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16대 요시야(31년) - 요하난, 여호야김, 시드기야, 살룸(역대상 3:15)
     * 여호야김의 아들 : 여고냐, 시드기야(역대상 3:16)

    17대 여호아하스(3개월)
    18대 여호야김(11년)
    19대 여호야긴(3개월)
    20대 시드기야(11년)

    요시야 왕의 업적을 소개합니다.







    종교개혁을 단행한 "요시야(Josiah)"
    ‘요시야(Josiah)’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격려하신다’라는 뜻이다.
    부친은 아몬왕이고 조부는 므낫세왕그리고 증조부는 히스기야왕이다.
    요시야는 아버지 아몬이 암살당하자 불과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등극하여 예루살렘에서 31년을 치리하였다.
    우상숭배에 빠졌던 분열 왕국시대에 하나님 언약의 중요성을 깨닫고 유월절을 지킴으로 각종 우상을 타파하면서 요시야왕은 백성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신앙심을 갖게 해주었다. 

    어둡고 암담했던 그 시대에 우상의 실체를 드러내고 전멸시켰던 요시야왕의 과감한 개혁은 오늘날 이 세상을 진리로 개혁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마지막 종교 개혁자로서의 사명을 고취시켜 준다.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던 요시야왕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배우고 본받을 수 있다(왕하 22:1∼2).

    시대적 배경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나뉘어 분열 왕국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북쪽 이스라엘(사마리아)은 여로보암왕이 10지파를 규합하여 나라를 세울 때부터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던 호세아왕 시대까지(B.C.721) 하나님을 떠나 금송아지를 섬기는 등 각종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다. 

    또한 남쪽 유다 나라도 몇몇 왕을 제외한 대다수의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백성들을 각종 우상 숭배에 빠지게 했다. 특히 요시야의 조부였던 므낫세왕은 치리 기간 중 너무나 많은 악을 행하였고 각종 우상숭배에 빠졌다. 그는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는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과 하늘의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섬겼으며 또한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였다. 그리고 혹독하게 백성을 다스렸고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렸다(왕하 21장 2∼16절). 그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기에 충분했다. 

    왕하 21장 20∼22절 “아몬이 그 부친 므낫세의 행함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부친의 행한 모든 길로 행하여 그 부친의 섬기던 우상을 섬겨 경배하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그 길로 행치 아니하더니” 

    이렇듯 그 시대적인 상황은 어지럽고 어수선하였으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지 못하다 보니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고 영적 세계는 매우 피폐해졌다. 

    성전을 수리하다
    요시야왕은 8세의 나이로 왕이 되다 보니 초기에는 별다른 업적이나 치적을 나타낼 수 없었다. 그러나 즉위한 지 18년이 지나 사리를 판단할 수 있게 된 나이(26세)에는 나라의 상황을 세밀히 관찰하여 평가하고 크게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대제사장 ‘힐기야’를 시켜 퇴락한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게 하였다. 

    왕하 22장 3∼7절 “요시야 왕 십팔 년에 … 여호와의 전 역사 감독자의 손에 붙여 저희로 여호와의 전에 있는 공장에게 주어 전의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하되” 

    그때까지만 해도 성전 주변 곳곳에는 바알과 아세라, 해와 달과 별을 섬기는 단들이 있었고 몰록과 아스다롯, 그모스, 밀곰, 태양수레 등 각종 이방나라 우상들과 섬기는 단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책을 발견하다
    왕의 명령을 받고 성전을 수리하던 대제사장 힐기야는 성전 안에서 너무도 소중한 하나님의 언약책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기쁨의 소식이었으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언약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왕하 22장 8절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대제사장 힐기야는 하나님의 언약책을 서기관 사반에게 전해 주었고, 사반은 왕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언약책에 기록된 말씀을 봉독하였다. 

    왕하 22장 9∼10절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돌아가 … 고하여 가로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왕의 앞에서 읽으매”

    하나님 언약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왕은 마음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나라가 우상숭배에 빠져 있고 때로는 외적의 침입을 당하고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참담한 현실이 언약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한 결과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왕하 22장 11∼13절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 옷을 찢으니라 …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

    할아버지(므낫세왕)나 아버지(아몬왕)가 온통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던 형편으로 보아 요시야는 어린 시절 부패한 궁중에서 자랐고 그 누구한테도 종교적으로 올바른 가르침을 받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한 요시야의 심장을 찌르는 언약의 말씀은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고 감동시켰던 것이다. 

    유월절을 지키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나님의 언약(유월절)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고 진노를 샀던 선왕들의 역사가 스쳐 지나갔다. 

    또한 예루살렘 도처에 각종 더러운 우상이 널려 있었고 심지어 성전 안까지도 우상으로 채워져 있었지만, 누구 하나 그러한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고 올바른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요시야왕에게 들려왔던 하나님의 말씀은 메마른 심령에 비를 내렸고 마음을 감화시켜 눈과 귀를 열어 주셨고 무릎을 힘있게 일으켜 세워 주셨다. 그리하여 요시야왕은 입을 열어 외쳤고 하나님의 언약(유월절)을 지킬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왕하 23장 2∼3절 “…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왕이 대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좇기로 하니라”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지키기로 굳게 다짐한 요시야왕은 드디어 왕위에 나아간 지 제 십팔년에 하나님 앞에서 유월절을 거룩히 지키게 된다. 

    왕하 23장 21∼23절 “왕이 뭇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열왕의 시대에든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요시야왕 십팔 년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이 얼마나 감격스러우며 기쁜 일인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으로서 당연히 기억하여 지켜야 할 이 소중한 절기 유월절을 참으로 오랫동안 지키지 못하다가 이제야 지키게 되었으니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대하 35장 1절 “요시야가 예루살렘 여호와 앞에서 유월절을 지켜 정월 십사일에 유월절 어린 양을 잡으니라” 

    대하 35장 18절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열왕도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거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

    요시야의 종교개혁
    북쪽 이스라엘은 물론 남쪽 유다 나라도 참으로 오랫동안 하나님의 언약을 잊고 살았다. 또한 온 나라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다. 이때에 등장한 요시야왕은 하나님의 은혜로 문제 파악을 정확히 하였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백성들의 마음을 일깨워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게 하는 것이 급한 일이었다. 악명 높았던 므낫세왕의 52년 통치와 부왕이었던 아몬왕의 2년 통치 기간에 유다 나라는 더욱더 깊은 우상숭배의 죄악에 빠져 있었고, 성전을 모독하며 하나님의 언약은 멸시되고 있었다. 바알과 아세라 목상 앞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는 일은 당연시되었고 너무 오랜 세월동안 습관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잘못된 관행과 관습을 뜯어고쳐 올바르게 바로잡는 개혁에 요시야왕이 나서게 되었으니 참으로 하니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이었다. 먼저 퇴락한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게 하였으며, 성전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말씀을 읽게 된 요시야왕은 성령에 감동되어 하나님의 분명한 길을 알게 되었다. 언약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읽어주며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해주었다. 철저한 회개와 아울러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지킬 것도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성전 안에 있던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기명을 꺼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르고 우상을 섬긴 제사장들을 폐하며 예루살렘과 유다 여러 고을에 있던 각종 우상을 타파하였다. 그것은 그가 유월절을 지킴으로 우상과 신접한 자까지 다 멸하는 개혁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왕하 23장 4∼7절 “왕이 대제사장 힐기야와 모든 버금 제사장들과 문을 지킨 자들에게 명하여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기명을 여호와의 전에서 내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르고 그 재를 벧엘로 가져가게 하고 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워서 유다 모든 고을과 예루살렘 사면 산당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폐하며 또 바알과 해와 달과 열두 궁성과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 또 여호와의 전에서 아세라 상을 내어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가져다가 거기서 불사르고 …”

    왕하 23장 23∼24절 “요시야왕 십팔 년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유월절을 지켰더라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하나님께 받은 축복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던 요시야!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며 공경하여 섬겼던 요시야! 참으로 오랫동안 지키지 못하였던 유월절을 지킨 요시야!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더러운 우상들을 가차없이 멸하고 개혁을 이루어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인도한 요시야왕을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기뻐하시며 칭찬과 축복을 내리셨다. 

    왕하 23장 25절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하나님)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장 37절) 하시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첫째 되는 계명!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서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 섬기는 이 첫째 계명을 완수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이며 축복이 되겠는가? 그런데 성경 66권, 모든 선지자의 기록 가운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째 계명을 지킨 사람은 유다 왕 요시야의 행적 가운데서만 볼 수가 있다. 요시야왕은 모세의 모든 율법을 준행한 임금이라고 하였는 바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첫째 되는 계명인 유월절을 지킨 것이 그에게는 큰 성공이고 축복이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종교 개혁! 진리의 개혁! 이것은 오늘날 이 어둠의 세상을 깨우치라며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사명이다. ‘개혁(改革)’이라는 뜻은 잘못된 제도나 기구 따위를 올바르게 뜯어고치는 것이다. 오늘날 역시 요시아왕 당시처럼 온 세상이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고 온통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께로부터 마지막 종교 개혁자의 사명을 받은 우리라 한다면 옛적 요시야의 그 불붙는 마음처럼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는 위대한 정신을 가지고 과감하게 개혁을 진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렘 5장 30절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예언된 말씀처럼 참으로 오늘날 이 세상에는 거짓과 불법이 난무하고 있다. 이밖에도 많은 거짓과 우상이 참인 것처럼 오도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의 참 진리로 세상을 깨우치며 개혁해야 할 사명을 허락하셨으니 우리는 어떠한 마음과 정신을 가져야 하겠는가 ? 

    요시야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모든 우상을 깨뜨리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개혁을 이루어나간 것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영원한 새 언약의 말씀을 들은 우리는 하나님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 기뻐하시는 진리의 개혁을 힘있게 이루어가는 마지막 종교 개혁자가 다 되어야겠다. 또한 마지막 종교 개혁자로서의 받을 축복을 세상의 돌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하여 요시야를 칭찬하셨던 것처럼 잘했다 칭찬 듣는 시온의 자녀가 되자.

    요시야(Josiah)




    시대 분열왕국 시대(B.C. 7세기경)

    가족 관계 증조부: 히스기야
    아버지: 아몬 어머니 : 여디다
    아들 : 여호아하스

    직업(특징) 남 유다 왕국 제16대 왕
    활동 지역 예루살렘
    통치 기간 31년
    주요 행적 유월절 지킴
    대대적인 종교개혁 주도

    요시야(Josiah. יֹאשִׁיָּה)

    13대. 히스기야 - 14대. 므낫세 - 15대. 아몬 - 16대. 요시야 <부 아몬 + 모 여디다>


    요시야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고쳐주신다', '여호와께서 지지하신다'는 뜻이다.
    아몬왕과 보스갓 사람 아다야의 딸인 여디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요시야8세에 왕이 되어 31년 동안 국가를 다스렸다(왕하 22:1).

    여로보암이 만든 금송아지를 비롯한 각종 우상들을 타파하며 종교개혁을 주도했으며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킴으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했다는 인정을 받았다.  

    시대적 배경

    이스라엘 왕국은 제3대 왕 솔로몬 사후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뉘었다. 북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여로보암은 백성들의 마음이 예루살렘이 있는 남 유다로 향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택하지 않은 곳에 금송아지 제단과 제사장을 세우고, 자기 마음대로 절기를 정해 제사를 행했다. 하루는 여로보암이 벧엘에 있는 제단에서 분향하고 있을 때,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선지자가 '장차 다윗의 후손 중 요시야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등장해 여로보암이 만든 산당과 제단을 파괴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전했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은 여전히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했고, 일반 백성을 제사장으로 삼는 등의 악행을 저질렀다.
    시간이 흘러 남 유다의 제13대 왕 히스기야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므낫세는 부친이 없앤 산당과 우상을 다시 만들어 이방 신을 섬겼고, 하나님의 성전 안에 이방 신의 제단을 쌓았다. 또 힌놈의 골짜기에 있는 도벳 산당에서 자기 아들을 불태워 이방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등 악한 행위를 일삼았다.[7] 므낫세가 죽고 그 아들 아몬이 왕위에 올랐지만, 그도 아버지의 길을 따라 우상 숭배하는 악행을 행했다.[8] 이에 신하들은 반역을 일으켜 아몬을 죽이고, 아몬의 아들 요시야를 왕으로 삼았다.[9]

    요시야의 생애

    왕위 등극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난 요시야는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
    왕위에 오른 지 8년에 다윗하나님을 찾았고, 12년에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는 우상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요시야는 하나님의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했다.[11]

    성전을 수리함

    요시야가 나라를 다스린 지 18년째, 요시야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서기관 사반을 보내 성전 수리를 지시했다.
    힐기야는 성전 공사 감독을 레위인에게 맡겼다. 
    이때 성전에서 여호와의 율법책이 발견되었다.
    힐기야는 율법책을 사반에게 주었고, 사반은 요시야왕 앞에서 율법책을 읽었다.
    요시야는 외적의 잦은 침입과 수많은 백성들이 우상 숭배에 빠진 참담한 현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였음을 깨달았다.
    그는 율법에 기록된 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옷을 찢으며 크게 슬퍼했다. 
    이에 온 백성을 불러 모으고 율법책의 내용을 읽어주며 유월절 등 모든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백성들도 율법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따르기로 마음을 모았다. 

    우상을 타파함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을 통해 유월절을 비롯한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은 요시야는 대대적으로 우상을 타파했다. 먼저 여호와의 전에 있던, 우상을 섬기기 위해 만든 모든 기구와 아세라상을 내어다가 불태워 재로 만들었다.[15] 각 성읍에 있던 산당도 부수었고, 우상 숭배를 했던 제사장들을 폐했다.[16] 그리고 자식을 불살라 이방 신의 제물로 바쳤던 힌놈의 골짜기(도벳 산당)를 부정한 곳으로 만들어 더 이상 자식을 제물로 바치지 못하게 했다.[17] 태양신에게 바친 말들을 없애고 태양신을 섬길 때 사용하던 수레도 불태웠으며,[18] 솔로몬왕이 세운 이방 신의 제단을 헐고 그곳을 해골로 채웠다.[19]
    요시야왕의 개혁은 이미 멸망해 앗수르(아시리아)의 치하에 있던 북 이스라엘 땅까지 이르렀다. 이는 요시야가 왕위에 있던 기원전 7세기경, 앗수르의 국력이 국가 내부 갈등으로 인해 약해져 있었기에 가능했다.[20] 요시야는 벧엘에 가서 여로보암이 세웠던 제단과 산당을 헐고, 그 주변 산에 있는 무덤의 해골을 끄집어내어 단 위에서 불살라 그 제단을 부정하게 했다. 이로써 여로보암 시대에 선지자를 통해 주신 요시야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었다.[6]

    유월절을 지킴

    남 유다와 더불어 북 이스라엘 지역까지, 온 이스라엘을 정결하게 한 요시야는 성력 1월 14일 저녁에 어린양을 잡아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켰다. 요시야는 유월절 제물로 어린양과 어린 염소 3만 마리와 수소 3000마리를 하나님께 바쳤다. 대신들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위해 수많은 짐승을 제물로 드렸다.[21] 사사 시대부터 분열왕국 시대까지 이때처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예루살렘 거민을 포함한 남 유다 사람들 그리고 북 이스라엘 무리가 모두 함께 유월절을 지킨 일은 처음이었다.[22]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열왕도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거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 요시야의 위에 있은 지 십팔 년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 역대하 35:18-19

    요시야는 계속해서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서 각종 우상들을 제거했다.[23] 그 결과, 요시야는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왕'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고, 그 행적이 성경에 기록되었다.[3]

    요시야의 죽음


    기원전 612년경, 바벨론(신바빌로니아)과 메대(페르시아)의 연합군에 의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니네베)가 함락됐다. 하란으로 수도를 옮긴 앗수르는 애굽(이집트)의 바로(파라오) 느고와 연합하여 바벨론에 대항하고자 했다. 느고가 앗수르의 니느웨 탈환을 돕기 위해 유프라테스강으로 출병했을 때, 요시야는 느고의 계획을 방해하려고 나섰다.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자를 보내 그와 싸울 의지가 없음을 표하며 길을 내달라고 했지만[24] 요시야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 요시야가 적이 쏜 화살을 맞았다. 간신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치명상을 입어 소생하지 못하고 사망했다.[25] 선지자 예레미야는 백성들과 함께 요시야의 죽음을 애도했다. 요시야는 예루살렘 조상의 묘실에 안치되었고, 그 아들 여호아하스가 뒤를 이었다.

    교훈

    요시야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왕이었지만, 즉위 후 18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들을 그대로 두었다.
    하나님의 계명인 유월절을 깨닫고 나서야 온 나라에 있던 각종 우상을 멸하고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실시하는 데 앞장섰다.
    그 결과, 성경에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왕'으로 기록됐다.
    어느 시대든지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다.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계명인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요한일서 5:2-3)



    요시아 왕의 죽음(逆說의 죽음)

    열왕기하 23장은 요시야 왕의 역동적인 신앙개혁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는 성전 수리 중에 발견된 율법 책을 토대로 하여 무너진 신앙을 새롭게 구축하는 반면, 과거의 잘못된 신앙의 악습들을 깡그리 말소시킨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요시아의 신앙개혁은 하나의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일로 남는다.

    그런데 23장 후반부에는 성군(聖君) 요시아의 죽음을 보도하고 있다.
    그는 8세라는 이른 나이에 등극하여 30년의 선전(善政)을 펼치다가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신앙의 관점에서 그의 죽음은 참 아쉽고도 큰 손해인 듯하다.
    요시야가 죽은 당시에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 예레미야는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모든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였다(대하 36:24~25절)]고 전한다.

    너무나 아쉬워서 심정(心情)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같은 요시야 왕의 죽음을 묵상해 본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열왕기 기자는 이렇게 전한다(29절).
    [요시야 당시에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맞서 나갔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났을 때에 죽인지라.]

    개역한글이나 개정 번역에는 애굽 왕이 앗수르와 전쟁을 하기 위해 원정 길을 나선 의미로 번역하고 있으나 표준 새번역이나 영어 번역은 보다 구체적인 목적을 부연해준다:
    [그가 다스리고 있던 때에, 이집트의 바로 느고 왕이 앗시리아 왕을 도우려고 유프라테스 강 쪽으로 올라갔다(During Josiah's rule, King Neco of Egypt led his army north to the Euphrates River to help the king of Assyria).]
    즉 당시 앗수르와 신바벨론과의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은 앗수르를 돕기 위해서 원정했던 것이다.
    요시아는 그 바로 느고의 원정길을 막아서다가 전사(戰死)하였던 것이다.

    요시아 통치 시절, 유다의 원수인 앗수르는 쇠퇴기에 접어들었으나 신바벨론은 급부상하는 시기였다.
    요시아 왕을 비롯한 남 유다는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에 들떠있었다.
    그들은 <인간적인 카운트다운>에 돌입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 앗수르를 돕고자하는 바로 느고의 원정은 유다의 희망에 찬물을 껴 얹는 것과 같았다.
    이는 요시야에게는 너무나 쉽게 인간적인 힘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그 일로 요시야는 죽는다.

    그의 죽음에 대한 열왕기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25~26절).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즉 요시아의 선정이 므낫세의 악정을 극복하기란 역부족이었다는 설명이다.

    한편, 동시대의 역사를 또 다른 관점에서 해석했던 역대기 기자는 좀 더 부연 해석한다(대하 35:20~21절). [이 모든 일 후 곧 요시야가 성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 애굽 왕 느고가 유브라데 강 가의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왔으므로 요시야가 나가서 방비하였더니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르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오늘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와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나...]

    이 부분은 아주 특이한 장면이다. 왜냐하면 애굽 왕 바로 느고의 입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요시아 왕에게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요시아는 받아들이지 않는다(22~23절).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을 입었으니...]

    즉 역대기 기자는 요시야와 남 유다의 판단과 행동보다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뜻>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앗수르가 쇠퇴하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날지라도 그 때와 시기는 하나님께 달려 있지, 인간의 판단과 행동에 좌우되지 않음을 강하게 시사해준다.

    사실상, 열왕기 저자 역시 아무리 요시야가 선정을 펼쳤을지라도, 그것보다 그 이전 므낫세의 악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즉 남 유다의 역사를 일개 왕이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시사해준다.

    열왕기 저자나 역대기 저자는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며, 인생의 주인도 하나님이심을 요시야 왕의 죽음을 통해 역설적으로 메시지를 전해 준다. 다된 일 같고, 당연한 결과로 여겨질지라도, 모든 결정권자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며, 그 분의 시간과 뜻에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뜻 앞에 자아(自我)가 죽고, 하나님의 의지에 기꺼이 순종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주님! 나는 죽고 예수로 다시 사는 삶을 선택하게 하소서.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종교개혁자 요시야(열왕기하 23:21-25, 역대하 34:1-33)

    요시야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도와 주신다’ ‘여호와의 낫게 한 자’ 또는 ‘고치시다’ 라는 의미입니다.
    유대 왕 아몬의 아들로(마 1:10), 요시야는 8세에 왕위에 올라 31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요시야는 유다 왕들 중에서 가장 경건한 왕입니다(왕하 23:25).
    선지자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성실함에 비추어 요시야의 무가치한 후계자들을 정죄하였습니다(렘 22:15).
    역대기에서 요시야는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히스기야의 모든 장점들을 지닌 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조부 므낫세는 55년간이나 왕위에 있으면서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행하다가 말년에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 나라에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과거에 범한 죄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우상 숭배하던 백성들의 마음은 좀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들 아몬도 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악을 행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2년 만에 죽었습니다.
    요시야 왕은 이런 사악한 배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평생 하나님만 섬기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요시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렸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다윗의 길로 행하였습니다.
    그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확고부동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그는 선대의 악한 왕들이 섬기던 우상을 제하고 우상을 섬기던 제단을 훼파하였습니다.
    그리고 퇴락한 성전을 수리하고 정결케 하였습니다.
    이 개혁은 유다 뿐 아니라 북국 이스라엘에 까지 미쳤으며 앗수르의 세력을 배제하는 운동이기도 하였습니다.

    제사장 힐기야는 백성들이 여호와의 전에 연보한 돈을 꺼내다가 모세의 율법책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책을 서기관 사반이 왕 앞에서 읽으니 왕은 옷을 찢고 발견된 율법책에 비취어 볼 때에 자기와 그 백성과 그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여호와께 알아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말씀대로 살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요시야 왕이 여호와께 알아보기를 원했던 유다 백성들의 장래는 여선지자인 훌다가 예언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이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살지 않고 사신 우상을 섬긴 결과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겸손히 자신의 옷을 찢고 통곡하며 회개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죽을 때까지는 재앙이 임하지 않을 것을 예언 했습니다.

    요시야 왕은 여호와의 말씀에 근거하여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들을 불러 모으고 모든 백성을 모은 후에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먼저 하나님 앞에 언약을 세웠습니다. 그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로 언약했습니다. 그는 모든 백성들에게도 오직 하나님만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아가 사는 동안에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후 애급 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려고 유대국을 통과하는 것을 막다가 므깃도 전투에서 죽으니 전 국민이 슬퍼하고 예레미야는 애가를 지어 불렀습니다(대하 35:24-25).

    종교개혁을 단행한 요시야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시대적 배경

    B.C. 640- 609년경, 애굽(이집트)과 바벨론(바빌로니아), 앗수르(아시리아)가 근동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패권을 다투던 시기입니다.

    2. 생애

    ① 부왕 아몬이 암살당하자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대하 34:1)

    ② 즉위 8년째 부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정을 펼쳤습니다.(대하 34:3)

    ③ 즉위 12년에 모든 이방 우상을 파괴하고 이교의 예배를 폐함(대하 34:3- 7)

    ④ 18년에 성전을 수리함, 이때 율법서를 발견하고 대대적인 신앙개혁 운동을 펼침

    ⑤ 애굽과 교전 중인 앗수르를 돕기 위해 므깃도 전투에 참전했다 전사하였습니다.

    3. 성품과 행적

    ① 선왕들의 실책과 우상숭배오 인해 퇴락된 성전을 수리하여 예배의식의 규율을 확립하였습니다.

    ② 율법서를 발견하여 대대적인 회개운동을 일으키고 종교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

    ③ 온갖 악행으로 범죄한 선대의 두 왕들과는 달리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율례대로 선정을 베푼 어질고 신실한 왕입니다.

    ④ 하나님께 옷을 찢고 눈물로 회개하는 겸손한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⑤ 하지만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앞서 성급하게 행동하는 일면도 있었습니다.(왕아23:29)

    4. 종교 개혁자로서의 요시야

    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반기를 든 종교 개혁가들의 보편적인 사상은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인본주의적인 악습과 제도를 개혁함과 동시에 평신도를 위한 성경 번역 및 성경적인 교리 체계를 수립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개혁 정신이 온 세계 교회를 변화시켰고 세계 도처에 많은 개신교들을 융성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개혁의 기치로 건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사상은 일찍이 유다 왕 요시야의 치적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유다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성군(聖君)이였으며 또한 하나님께 인정받은 인물로서, 오늘날 개혁 교회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1) 하나님 중심

    요시야 종교 개혁의 첫 번째 목표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순종하다는 말은 '따르다'(삼상 30:21), '좇다'(신 11:28) 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요시아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다는 신념을 굳히고 이것을 종교 개혁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와 같이 매사에 하나님의 뒤를 따를 큰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2) 말씀 중심

    요시야 종교 개혁의 두 번째 목표는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시야는 말씀을 부흥시키고 또 그 말씀을 실행하는 데 목표를 두었습니다. 요시야 이전의 왕들은 우상을 섬기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하였지만, 요시야가 율법책을 발견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기로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다시 그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이 중세 암흑 시대에 교회의 부패에 의해 가려 있다가 종교 개혁자들의 개혁으로 다시 부흥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요시야는 말씀 중심의 개혁가였습니다.

    요시야의 개혁이념은 종교적 형식주의에 안주하던 종교가들을 질타하는 세례 요한에게서 다시 되살아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그 원리는 다시 정립되었고 후에 교회사 가운데는 또다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종교 개혁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로부터 약 오백년, 지금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신앙 상태는 어떻습니까? 과연 성경이 보여 주는 개혁 정신을 따라 하나님과 말씀 중심의 신앙 위에 굳게 서 있습니까? 우리 안에 그 어떤 부패적인 요소가 있다면 우리는 과감히 그것을 개혁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타락한 존재이므로 개혁하지 않으면 점점 더 부패의 정도는 심해집니다. 또한 신본주위(神本主義) 신앙은 사라지고 말씀은 우리 삶에 더 이상 영향력을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개혁가의 자세로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신앙에 바로 서야겠습니다.

    5. 여호와를 향해 힘을 다한 사람 요시야

    요시야는 불과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유다의 왕이 되어 31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면서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긴 왕입니다. 요시야의 할아버지는 므낫세로 55년간 유다를 통치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무죄한 사람들까지 마구 죽여(21:16) 유다 모든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으로 유명했습니다. 므낫세가 죽고 아들 아몬이 왕이 되었을 때 백성들과 신하들은 새로운 시대가 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몬 역시 그 아버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우상숭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기대했던 신하들은 대단히 실망했습니다. 그 아버지처럼 수십 년간 이런 사람을 왕으로 섬기고 이런 사람에게 나라를 맡기려 하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결국 신복들이 왕을 반역하였습니다. 왕을 궁중에서 죽였습니다. 그러자 국민들은 또 반역한 신복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리고 요시야가 비록 어리지만 그에게 왕관을 씌워 주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왕 된 요시야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22:2에 기록된 종합평가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그가 이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살수 있었던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먼저, 그는 선왕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아버지가 불과 왕위에 오른지 2년만에 신하들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 요시야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왜 왕을 죽였을까요? 할아버지에게 고생한 사람들이 아버지에게도 큰 소망이 없음을 알 때 살해한 것이 분명함을 알았을 때 요시야는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백성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정직하고 백성들에게는 선정을 베풀기로 다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선배나 조상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나로 저분처럼 저렇게 살아야지 하는 것과 “나는 절대로 저렇게 살지는 말아야지” 하는 것인데 요시야는 후자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나이가 너무 어렸습니다. 신하들이나 백성들에게 신뢰받기는 어차피 어려운 일이니 하나님께라도 인정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을 향해 힘을 다한 왕이라는 칭호를 결정적인 동기가 된 것입니다.

    첫째, 요시야는 여호와의 전을 깨끗이 수리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히스기야가 죽은 이후 누구에 의해 청소되거나 수리된 일이 없었습니다. 60여 년이나 누가 돌보지 않았으니 지저분하고 낡을 대로 낡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옛날 요아스가 성전 수리를 위해 헌금을 모았듯이(12:4-14) 요시야도 성전 보수를 위해 은을 모았습니다. 요아스는 어머니(아합의 딸) 아달랴가 우상숭배 정책을 쓰면서 낡아진 성전의 보수를 위해 20세 이상의 장정에게서 주민세 성격의 은을 받았고 서원한 사람들이 몸값으로 드리는 은과 자원하여 드리는 은을 제사장들이 받아 성전 수리하는 데 쓰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어느 교회든지 그 교회의 성전을 보면 그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의 신앙 수준이나 교역자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 식어진 교회는 건물도 사방 구석이 낡고 지저분한 채로 있습니다. 누구나 청소하는 사람이 없고 덜렁거리는 창문을 고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열심이 있는 교회는 항상 건물이 깨끗하게 청소 정리되었고 부서지고 낡아진 곳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가 성전 관리하는 모습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청소를 해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 모습과 그저 할 수 없이 한 사람의 모습은 큰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둘째,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대제사장 힐기야는 성전을 청소하고 보수하다가 율법 책을 발견했습니다. 성경이 흔치 않던 시대에 발견된 이 율법 책은 대단한 선물이었습니다. 수십 년, 아니 그 이상 성전의 어느 구석이나 창고에 처박혀 있던 것이 보수공사를 하다가 발견된 것입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이 율법 책 때문에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율법 책을 읽어본 서기관 사반은 왕 앞에서 읽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는 옷을 찢었습니다.

    거기에는 율법을 범하는 자들에게 내릴 경고와 저주의 말씀인 신명기 28장이나 레위기 26장 같은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은 곧 이 말씀에 대하여 하나님께 묻도록 하였습니다.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여선지 훌다를 찾아갔습니다. 선지자는 왕이 읽은 재앙과 진노가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요시야는 이 재앙에서 제외될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왕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장로들을 모았습니다. 다시 율법 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언약을 세웠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율법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기로 하였고 백성들은 그 언약을 따르기고 했습니다.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요시야는 먼저 여호와의 전에 있던 우상숭배에 쓰이던 물건들을 꺼내어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살랐습니다. 그리고 아세라 상을 내다 불사르고 미동(남창)의 집을 헐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전에서 시작된 개혁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23:4-20까지 읽어 보면 얼마나 철저히 우상의 뿌리를 뽑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요시야는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이제까지 유월절을 지키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의미도 바로 기억하지 못하고 해마다 형식적으로 지켜온 절기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깨끗이 수리하고 전국에 있는 우상의 제단을 헐어 버린 요시야는 온전한 마음으로 유월절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요시야는 백성들에게 명령하기를 이 언약 책에 기록된 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였습니다. 그들이 유월절을 지킨 모습은 역대하 35장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아무튼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열왕의 시대에든지 유다 열왕의 시대에든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습관적이고 관례적인 주일 성수나 절기를 지키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 주일에 하루, 주일을 성수하게 하시고 여러 기념할 절기를 주신 것은 그 의미를 바로 헤아려 하나님과의 신앙에 유익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 없이 형식적으로 지나치는 절기는 차라리 지키지 않은 만도 못한 것입니다. 죄악의 사슬에서 해방된 그날의 감격을 잊지 않고 지켜지는 유월절, 일 년의 풍성한 수확과 소출을 감사하여 드리는 수장절, 율법을 받아 언약 백성이 된 것을 잊지 않고 지키는 칠칠절이 의미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어진 절기마다 그 의미를 바로 알고 진정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절기를 지키는 일이 중요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성전을 수리하고 우상의 잔해를 제거하는 종교개혁, 다시 새롭게 지켜진 유월절, 이 모든 것은 모세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려한 요시야의 값진 업적이었고 하나님은 이런 요시야를 인정하시고 기뻐하신 것입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아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23:25)

    우리가 요시야를 통해 배울 교훈이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1. 요시야 왕은 태어나기 약 300년 전에 이미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통해 “요시야란 아들이 태어나 우상숭배하는 제사장들을 죽여 그 뼈를 태우리라”(왕상13:2)하였습니다. 그 예언대로 요시야는 멸망직전에 있는 유다왕국을 바로잡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통치하려고 힘썼습니다. 그는 16세 때 여호와를 찾기 시작했고 20세 때는 예루살렘의 여러 우상들을 훼파하였으며 6세 때는 각 지방에 있는 우상과 그 단들을 다 훼파하였습니다. 이만큼 그는 일찍부터 신앙생활에 굳게 서 있었습니다.

    2. 등극한 요시야는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성전 뿐 아니라 교회의 지체된 마음의 성전까지도 깨끗이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마수가 뻗치는 곳은 어디든지 가지 말고, 죄악된 사람과는 교제를 끊는 단호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3. 요시야 왕은 즉시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이런 행위는 깊은 후회와 자책의 표시입니다. 요시야는 왜 그토록 자책을 했을까요?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율법의 거룩한 기준을 듣는 즉시, 유다 왕국이 하나님의 명령을 전적으로 거역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요시야가 단지 느끼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인가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즉시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원하시는 바를 따르기 위해 결단했고, 명령을 내려 행동을 취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그의 응답은 즉각적이었고, 과감했습니다. 말씀을 듣거나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리는 단지 즉석에서 우리 삶에 적용하기 위한 진리를 찾고는 끝나지 않는가요? 또는 ‘며칠안에 시작하도록 하자. 언젠가 행동을 바꿀꺼야. 이건 그 당시에나 가능해’라면서 꾸물거리거나 적당히 합리화시키지 않는가요? 오늘이 지나가기 전에 결단할 것은 결단하자. 하나님은 당신으로 하여금 즉시, 그리고 온전히 순종 할 수 있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4.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엄숙한 서약을 함으로써 하나님 말씀에 대한 확신을 표현했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심령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순종하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과의 신령한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5. 요시야의 개혁이 왕국분열 이후 전대미문의 대대적이고 전국적인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후 다시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그의 개혁이 외형에 치우친 미완성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요시야의 개혁은 국가 외적인 생활에만 작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마음 속에 까지 파고드는 힘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국가를 완전히 소생시키거나 구원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개혁이란 마음으로 부터 시작되는 개혁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6. 요시야가 거의 60여년 동안이나 사회의 곳곳에 뿌리박힌 온갖 우상숭배와 악한 제도를 철저하게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악에 물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단호한 결단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7. 요시야는 비록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왕하22:2)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관을 가졌기 때문에 과거의 오랜 악습과 부정을 척결할 수 있었습니다.

    8.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말씀을 주십니다. 다음을 묵상합시다.

     ① 당신은 성경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가?

     ② 당신의 경우 말씀의 즉각적인 적용과 순종에 방해되는 요인들은 무엇인가?

     ③ 당신의 습관 중 당장 변화되어야 할 것들을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 보자.

    9. 그토록 신실했던 요시아 왕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다가 죽었습니다. 애굽 왕 느고가 팔레스틴의 지배권을 획득하려고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 왕을 치러왔을 때, 요시야 왕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군사를 이끌고 나아갔습니다. 즉 앗수르에 반감을 지녔던 요시야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채 인간적인 생각으로 바로느고의 행진을 저지하려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바로 느고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요시야 왕에게 전하여서 전투에서 물러서게 하십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이 원치 않는 전쟁을 하다가 적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 뜻보다 자신의 뜻이 앞서는 것은 항상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생의 순간 순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원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라"(롬12:2)


    또한 요시야처럼 신실했던 자도 넘어진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 인간이 얼마나 허약하고 넘어지기 쉬운 존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신격화하거나, 의지하지 말고, 신앙생활에서 한 순간도 방심하지 말고 쉬지말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요시야는 기도하기를 잊어 인생을 수치스럽게 마감했습니다.

     참고로 요시야라는 동명이인으로 두 사람이 있습니다.(대상4:34, 슥6:10)

    지금 우리는 ‘교회 성장 감소’라는 위기가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그래도 이런 위기의식조차 갖지 못하는 무감각한 지도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를 맞이하고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체념에 빠지지 말고, 요시야 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정의 회복과 도덕성의 회복,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모든 목회의 역량을 집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순교적 신앙의 유산으로 이러한 것을 되살릴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한국교회여! 다시 부흥을 일으킵시다! 다시 뜁시다! 다시 일어납시다!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하려면 교회 안에서는 신자인데 교회 밖에서는 신자가 아닌 이중적인 생활을 회개하고 앞으로는 신앙과 생활이 일치해야 하겠으며 특히 목회자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회개운동이 선행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과 섬김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섬기기 위해서 오신 예수의 몸입니다. 따라서 섬김의 종으로 오신 예수의 몸된 교회는 마땅히 섬기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섬김을 거부하는 교회는 스스로의 존재의 의미를 부정하는 교회요 예수의 정신에서 떠난 것입니다. 성령이 떠난 교회는 영혼이 떠난 몸과 같습니다. 교회는 섬김의 운동을 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가장 시급히 갱신되어야 할 과제는 무엇보다도 초대교회와 같이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그리고 섬김의 공동체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모든 목회자와 성도가 하나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과 뜻대로 순종하고, 복음을 가지고 앞장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기도 제목

    1. 동성결혼 철폐

    2. 성경적 가정의 회복

    3. 공립학교와 각급 교사들의 영적 회복

    4. 영화 TV 방송 인터넷 언론계의 복음화

    5. 대통령과 장관들, 입법부 사법부와 군 지도자들을 위해

    6. 각 주와 도시 및 교회를 위하여 기도

    한국의 국가 기도의 날 제정을 위하여

    1948년 5월 31일 제헌 국회가 개회할 때 기독교 국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의장의 제안에 따라 의원이 기도하므로 모든 의원들이 함께 기도를 하였다는 역사적 사건을 기리며 그 날을 국가 기도의 날로 정하도록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관심을 갖고 새로운 한국을 세워나가야 하겠다.

    기도 제목 / 이제는 달라지겠습니다!

    1. 손해 보더라도 정직하게 살겠습니다!(경제 분야) 

    2. 막말하지 않고 좋은 말만 하겠습니다!(언어생활) 

    3. 퇴폐문화 멀리하고 깨끗하게 살겠습니다!(문화 분야) 

    4. 방황하지 않고 가족과 함께 하겠습니다!(가정 회복) 

    5. 외면하지 않고 이웃을 돕겠습니다!(사회봉사) 

    6. 불편하더라도 참고 아끼겠습니다!(환경 공해) 

    7. 대한민국을 사랑하겠습니다!(조국 사랑)



    요시야 ― 남유다의 마지막 개혁자

    1. 인적 사항

    ① 요시야는 ‘여호와께서 도와주심’이라는 뜻
    ② 남유다 제16대 왕, 8세에 즉위하여 31년간 통치(왕하 22:1)
    ③ 므낫세 손자, 유다 왕 아몬의 아들(왕하 21:24).
    ④ 모친은 보스갓 아다야의 딸인 여디다(왕하 22:1).
    ⑤ 아들로는 요하난과 여호야김과 시드기야, 살룸이 있음(대상 3:15).
    ⑥ 그리스도의 조상(마 1:10).

    2. 시대적 배경

    유다 왕국의 마지막 시대로 접어든 B.C.640년경부터 왕국 분열 후 유다 역사상 가장 부흥했던 시기인 B.C.609년까지를 주활동 배경으로 한다. 당시의 대외 정세는 남유다를 계속하여 위협하던 앗수르의 세력이 매우 약화된 때였다. 즉 앗수르는 무리한 대외정복 정책으로 국력을 많이 낭비하게 되었고 급기야 B.C.612년에 바벨론에 의한 수도 니느웨 城 함락(陷落)으로 멸망한다. 그리고 신흥 바벨론이 앗수르를 제치고, 새로운 국제 질서의 주도권을 잡고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세력이 활발하여지는 요시야 왕 말기부터였다. 그러므로 8세에 왕에 오른 요시야 왕 때에는 앗수르의 힘은 약화되었고, 아직 바벨론은 대외적으로 큰 영향을 행사하지 못하던 때였다. 그러므로 요시야 통치 초기의 유다 왕국은 평화로운 중에 여호와의 신앙을 제정할 수 있었다.

    3. 주요 생애

    여로보암 때에 출생이 예언됨

    B.C.926년경

    왕상 13:1,2

    출생

    B.C.647년

    부왕 아몬이 암살 당함

    8세, B.C.640년

    왕하 21:23

    왕이 됨

    왕하 21:24

    1차 종교 개혁 실시

    20세, B.C.628년

    대하 34:3

    성전 수리

    26세, B.C.628년

    왕하 22:3-6

    율법 책 발견과 대각성

    왕하 22:8-13

    백성들과 언약 체결

    왕하 23:1-3

    대대적인 종교 개혁 단행

    왕하 23:4-15

    유월절을 지킴

    왕하 23:23

    므깃도에서 전사

    왕하 23:29

    예루살렘에서 장사됨

    왕하 23:30

    4. 성품

    ①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으로 즉위한 뒤 선왕들과는 달리 다윗의 율례를 모범으로 삼아 그 율례대로 선정을 베푼 것을 볼 때 어질고 신실한 자(왕하 22:2).

    ② 율법서를 발견한 후 말씀을 읽으며 옷을 찢고 눈물로 회개할 만큼 겸손하고 순종적인 자(왕하 22:10-13).

    ③ 백성들과 더불어 여호와 앞에서 말씀에 순종했다는 언약을 맺을 만큼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뢰하는 자(왕하 23:3).

    ④ 대대적인 회개 운동 후에 우상 숭배의 제단과 그 형상, 또 이를 주관하는 자들까지도 제거할 만큼 결단력 있고 실천적인 자(왕하 23:4-15).

    ⑤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을 만큼 가치관이 확고한 자(왕하 22:2).

    ⑥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신의 판단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을 볼 때 일면 경솔한 자(왕하 23:29).

    5. 구속사적 지위

    ① 국가적으로 대대적인 신앙 개혁운동을 주도한 남유다 제16대 왕(왕하 23:4-15).

    ② 신앙적 암흑기에 여호와 예배 의식을 회복하고, 백성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언약을 갱신한 지도자(왕하 23:1-3).

    ③ 이스라엘 분열 왕국 이후 유다 역사상 최대의 종교적 부흥기를 꾀한 왕(왕하 23:25).

    6. 주요 업적

    ① 성전을 깨끗이 수리하고, 이 때 율법 책을 발견함(왕하 22:3-8).

    ②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 책을 읽어 자신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에 빠져있던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함(왕하 22:8-19).

    ③ 백성들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갱신함(왕하 23:1-3).

    ④ 남방만 아니라 북방 이스라엘까지 온 이스라엘의 우상을 제거하고 정결케 함(대하 34:3).

    ⑤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사 시대 이후 처음으로 모세의 율법을 따라 유월절을 지킴(23:21-23).

    7. 실수

    애굽 왕 바로느고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고 끝까지 므깃도 전투를 감행하다 죽임을 당함(대하 35:20-24).

    8. 평가 및 교훈

    ① 요시야 왕은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을지라도 선왕의 악행을 따르지 않고, 오직 다윗의 본을 따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 없이 하나님만을 섬겼던 현군이었다(대하34:1-7). 곧 그는 즉위 후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고, 또 온갖 이방 신을 다 제하여 버렸을 뿐만 아니라, 온 나라의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세대에 물들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결단력 있고 진취적인 신앙의 기상을 잘 보여준다. 당신에게도 이러한 신앙의 결단과 행동이 살아있는가? (롬12:2).

    ② 요시야 왕은 말씀에 대해 순종하겠다는 결심과 함께, 나아가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왕하 23:21-25). 이러한 요시야의 모습은 말씀에 대한 지식은 많지만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는(약 2:14) 오늘날 많은 성도들에게 참 신앙이 어떠한 것인가를 잘 보여 준다. 실로 우리도 그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③ 요시야는 왕으로서 권위를 내세우는 개혁이 아닌, 자신부터 말씀에 근거하여 철저히 변화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방 우상 숭배에 젖어 있던 백성들을 회개시키고 국가적인 종교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다(왕하 22:11-13). 이처럼 성도들도 먼저 겸손하게 자신을 말씀 앞에 복종시켜 변화하는 가운데 교회와 사회를 예리한 말씀으로 변화시켜 나아가야 한다(히 4:12). 실로 요시야가 오직 말씀에 준거하여 모든 개혁을 일으켰듯이 우리 역시 말씀에 근거하여 변화하는 모습과 노력이 있을 때 진정 이 사회가 하나님 앞에 무릎꿇어 경배드릴 수 있는 것이다.

    9. 핵심 성구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5).








    4월 30일(수) 열왕기하 18-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느후스단(18:4)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He removed the high places, smashed the sacred stones and cut down the Asherah poles. He broke into pieces the bronze snake Moses had made, for up to that time the Israelites had been burning incense to it. (It was called Nehushtan. )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전파하는 강단이었습니다.
    - 어거스틴

    The cross was a pulpit, in which Christ preached His love to the world.
    - Augustine


    십자가는 단순한 처형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강력하게 선포된 자리였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길을 발견합니다.

    복음은 바로 그 십자가에서 시작되며, 세상에 전해지는 가장 유일하고 강력한 메시지가 됩니다.

    십자가는 매일의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샘물과 같고,
    자기를 부인하는 '자기 형벌'의 도구이며,
    거룩한 삶을 향한 중심이 되어 끊임없이 나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결국 십자가는 기독교의  처음이자 모든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도 세상 가운데 선포되는 살아 있는 강단입니다.






     느후스단이란 히브리어 놋쇠 또는 구리라는 단어 "네호세트(nechôsheth)"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그 의미는 구리 또는 놋쇠로 만들어진 것(a thing of brass)을 말합니다.

    네호세트(nechôsheth) נְחֹשֶׁת 스트롱번호 5178

    1. 놋쇠.  2. 놋쇠로 만든 물건.  3. 렘 6:28
    발음 [ nechôsheth ]
    구약 성경 / 133회 사용
    관련 성경 / 동철(창4:22), 놋(출25:3, 신28:23, 사60:17),동(민31:22, 신8:9, 대하2:14), 놋줄(삿16:21), 차꼬(삼하3:34), 사슬(왕하25:7, 렘39:7), 쇠사슬(대하33:11, 36:6), 누추한 것(겔16:36).

    1. 느후스단의 역사적 배경

    느후스단은 구약성경 열왕기하 18:4에 등장하는 유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 사건(민수기 21:4-9)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만들도록 명하신 놋뱀(bronze serpent)을 가리킵니다. 그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민수기 2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에 대하여 불평하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에 불뱀을 보내어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의 마음을 가진 백성들을 위해 놋뱀을 만들어 그것을 쳐다보는 자마다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놋으로 된 뱀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상징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놋뱀을 우상화하게 되었고, 그들은 이를 "느후스단"이라 불렀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금속 조각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느후스단을 숭배하며 그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며 이러한 우상 숭배를 폐지하려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느후스단을 파괴하며, 이것이 본래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졌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본래의 뜻을 잊고 그것을 숭배 대상으로 삼았음을 비판했습니다.

    2. 신학적 의미

    구원의 상징 : 놋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도구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구원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로 향하는 믿음이 구원의 본질이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사건을 인용하시며, 자신이 바로 그 놋뱀처럼 십자가에서 들려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실 것임을 선언하셨습니다(요한복음 3:14-15).

    우상화의 위험성 : 느후스단 사건은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된 상징조차도 잘못된 방식으로 숭배될 때 우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도 인간이 그것에만 집중하고, 그것 자체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을 때 신앙의 본질이 왜곡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며, 오직 말씀으로 그분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예배의 순수성 : 히스기야 왕의 개혁은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예배를 회복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관습조차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경우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점은 예배에서 형식보다는 본질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3. 현대적 적용

    우상의 현대적 형태 : 느후스단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화되었듯이, 오늘날 우리는 종종 형식적인 종교 생활이나 교회 전통을 절대화하며 본질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건물, 교회의 사역, 특정 교리나 전통 등을 하나님보다 우선시할 때 그것은 우리의 느후스단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본질 회복 : 하나님은 우리가 형식적 예배가 아닌, 마음에서 나오는 진실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십니다(요한복음 4:24).
    예배가 형식적이거나 외형적인 것에만 집중될 때, 우리는 신앙의 본질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느후스단의 교훈을 통해 우리가 진정 무엇을 숭배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혁의 필요성 : 느후스단 사건은 때로는 우리의 신앙과 예배 속에서 개혁이 필요함을 상기시킵니다.
    히스기야 왕이 모든 사람의 관습으로 자리 잡은 느후스단을 부수고 예배의 순수성을 회복한 것처럼, 현대 교회와 개인의 신앙에서도 영적 개혁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전통이나 문화적 요소가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할 때, 우리는 그것을 과감하게 제거하고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결론

    느후스단의 이야기는 하나님께로의 순수한 믿음우상 숭배의 위험성을 강력하게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느후스단 사건을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형식적인 요소나 전통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과 순수한 예배를 추구하며, 우상화된 요소들을 제거하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Not everyone who says to me, 'Lord, Lord,' wi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 but only he who does the will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Th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화려한 예배가 사람들을 감동시킬지라도 주님께서 기뻐하는 예배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걸어놓았다고 그 자리가 거룩한 자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믿음으로 전진하는 것만이 바람직한 예배가 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과 상징
    -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가?

    기호와 상징의 차이

    1. 상징(das Symbol. symbol)

    본래 가지고 있는 뜻을 정확히 부연 설명하거나 의미 전달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의 기호로 표현되어지는 것.

    2. 기호(das Zeichen. sign)

    상징을 주기 위한 하나의 신호적인 의미이므로 그 안에 아무런 의미나 뜻이 들어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십자가는 예수의 고난을 상징한다.
    십자가 그 자체는 하나의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기 위한 하나의 기호(Zeichen)에 불과하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상징의 필요성

    왜 기독교는 상징이 필요한가?
    - 상징이 주는 신앙적 의미 

    신앙은 참된 하나님의 상징성을 통하여 우리가 바라보는 믿음의 대상을 의지하고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의 대상은 상징적 요소를 통하여 하나님의 실재를 대변하게 된다.

    기독교 상징을 통한 의미부여 :

    우리가 하나님의 실재를 확인할 수 없기에 우리는 상징적인 요소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부분을 투영하며 그 본체에 가깝게 의미부여하는 것이다.  

    상징이 주는 신앙의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

    긍정적인 요소

    1. 하나님에 대한 거룩성 수용

    2. 타자로서의 하나님 이해

    3. 하나님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의 가능성

    부정적인 요소

    1. 인간의 이해 방식에 따라 자의적 해석가능

    2. 인간의 경험과 이성의 한계로 인한 하나님의 사고에 대한 고착화 우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신앙의 상징적인 요소가 있는가?

    인간의 신앙의 자율성과 지속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특별히 신앙의 폐쇄성을 탈피하고 상징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와 투영을 가깝게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다.

    개신교는 상징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가?
    가톨릭은 상징을 절대화하여 우상적인 요소가 있고, 개신교에서는 본질적 상징마저 잃어버린 현실의 상황이다.

    나는 신앙에 대한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참된 기독교의 상징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 신앙의 회복, 삶의 회복이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참된 신앙의 자리를 갖기 위하여 상징의 의미를 회복하여야 한다.
    상징이 고착화가 되면 우상이 될 수 있지만 상징이 사라지면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를 잃어버릴 수 있다. 특히 개신교는 상징의 신학이 회복되어야 한다. 예배, 찬양, 기도, 말씀에 대한 상징의 본질이 회복되어야 한다.

    상징을 통하여 성서와 신앙을 위한 제언

    성서는 과학적인 근거나 객관적인 자료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근거를 위한 텍스트로서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신앙인 들에게 부여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의 토대로서의 말씀이다.
    자신을 어떤 대상물이나 상징적인 의미로 표현하고자 할 때, 대부분 그 자신이 투영하는 것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과 의미와 정신이 반영되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과 그릇된 편견 또는 자의적인 해석에 따라 자신을 마음대로 신앙을 판단하고 해석하고는 있지 않는가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신앙은 소유가 아니라 개방이자 열림이다.
    신앙은 자신의 삶만을 보호하는 방어막이 아니라 장애물과 난관을 헤쳐나가게 해주는 원동력이다.
    신앙을 그러한 참된 의미를 각성하게 하고 자신의 나태한 모습을 새롭게 받아들이려는 믿음의 근거이다.

    모세의 놋뱀(민수기 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The LORD said to Moses, "Make a snake and put it up on a pole; anyone who is bitten can look at it and live."

    습관적인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힌 민족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항상 잊어버리고, 어려운 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습관적인 불평을 일삼아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쉽게 망각하는 자들입니다.

    가나안을 향하는 길에 에돔 왕이 자기 영토로 이스라엘이 지나가는 것을 용납지 아니함으로 지름길을 제쳐 놓고(민 20:21),
    에돔 땅을 우회하게 되어 백성의 마음이 상하게 되었습니다(민 21:4).
    그들에게 있어서 광야 길은 육체적으로 고역스럽고 사람의 마음을 지치게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결국 인내심이 사라진 그들의 마음에 극한 분노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분노와 원망 즉 남의 탓으로 돌리는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했습니다.

    하나님은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물게 하셨고 죽음의 사건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뱀을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러한 불뱀의 습격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해결책으로 자신들의 범죄함을 인정하게 되었고 모세에게 여호와께 기도해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마음을 보시고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8절)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고 그것을 쳐다본 자들은 모두 살았다고 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얻은 사망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로 생명을 얻은 사건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습관적으로 나오는 불평과 불만이 나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고 원망의 말을 서슴지 않고 하게 됩니다.
    죄를 지을 때 마다 나에게 찾아오는 불편한 마음과 평안을 깨트린 상황에서는 무엇을 해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나에게 찾아오는 감정은 분노, 짜증, 우울, 고독이 밀려옵니다.
    결국 감사가 없는 마음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인내심의 결여는 나에게 영적으로 큰 손해를 입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의 원인을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나에게 임하게 됩니다.

    나의 잘못된 생각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던 것을 회개하며 내 삶을 돌이킬 때에 성령님이 내 마음 가운데 임하셔서 평안과 안식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바라본 것처럼 나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인생의 여정을 나 혼자가 아닌 성령님과 함께하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 많은 적을 이기게 하신 것,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보호하신 것,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것,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신 것 등은 기억하지 않고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민수기 21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로 인해 마음이 상해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뱀에게 물린 자마다 쳐다본즉 살더라

    하나님은 원망에 가득 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불뱀이 천막 안을 기어다니고,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 죽어갔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애원했습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제발 불뱀을 떠나게 해주소서!”

    모세가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불뱀을 떠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 뱀을 쳐다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으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습니다.
    성경에는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뱀에게 물렸는데 놋뱀을 쳐다보면 어떻게 삽니까?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이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6)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들에는 저마다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포도주는 기쁨을 나타냅니다.
    기쁨이 있는 곳에는 포도주가 등장합니다.

    기름은 성령을 나타냅니다.

    금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은은 구속의 대가를 나타내며, 놋은 심판을 나타냅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심판받은 뱀’을 나타냅니다.
    불뱀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고, 그 불뱀이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고, 죄가 심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구원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과 그의 아들이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버지, 놋뱀을 쳐다보면 산대요. 놋뱀을 쳐다보세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몸에 독이 퍼져서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놋뱀을 쳐다본다고 살 리 있냐?”

    “아버지, 쳐다보세요.”

    “글쎄, 헛소리하지 마라니까!”

    “아버지, 그래도 한번 쳐다보세요.”

    “그만하라잖아!”

    “안 됩니다. 그러다가 아버지 죽습니다. 제가 강제로라도 아버지가 놋뱀을 보시게 하겠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놋뱀이 있는 곳까지 모시고 가서 얼굴을 들어 쳐다보게 했습니다.
    그러자 몸 안에 있던 뱀의 독이 사라졌습니다.

    “이거 진짜 신기하네! 놋뱀을 쳐다보니까 몸이 싹 나았다!”

    구원은 아주 간단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해서 불뱀이 왔지.
    죄로 인해 불뱀이 온 거야.
    놋뱀은 그 뱀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니 우리 죄가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구나. 그러면 죄가 끝났네!’
    십자가는 단순히 기독교를 표시하기 위해, 혹은 보기 좋으라고 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쳐다보십시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죄가 심판받은 곳입니다. 죄가 끝나고, 저주가 끝나고, 심판이 끝나고, 고통이 끝난 곳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가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통하다가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내 죄를 사하셨지!’


    아리우스 가문의 반지

    ‘벤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등장인물인 벤허멧살라는 어릴 적에 친구였는데, 유대인인 벤허와 로마인인 멧살라는 자라면서 다른 이념을 가져 서로 원수가 됩니다.

    멧살라는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호민관이 되어 유대로 돌아온 뒤 벤허를 로마군 함선에서 노를 젓는 노예로 만듭니다.
    얼마 후, 로마의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 아리우스가 해적들을 소탕하려고 함대를 이끌고 바다로 나가면서 벤허가 노를 젓는 배에 탑니다.

    곧 로마군과 해적들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싸움 중에 아리우스가 바다에 떨어집니다.
    그 광경을 본 벤허가 바다로 뛰어들어 아리우스를 구해 부서진 배의 큰 나무판 위에 올려놓습니다.
    아리우스가 정신을 차려 자신의 배가 불길에 휩싸인 것을 보고는 자결하려고 하는데, 벤허가 그의 팔을 잡아 칼을 빼앗습니다.
    잠시 후 함선들이 몰려오고, 아리우스는 해적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배들이 가까이 와서 보니 로마군 함대였습니다.
    아리우스가 배에 올라가자 한 장군이 ‘배 두 척만 잃고 해적들을 전멸시켰다’고 보고합니다.

    로마로 돌아간 아리우스벤허를 양자로 삼고,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인장반지를 벤허의 손가락에 끼워 줍니다.
    벤허는 어머니와 여동생 생각에 유대로 돌아가서 멧살라를 만나러 갑니다.
    가기 전에 “아리우스의 아들로부터”라고 적은 선물을 멧살라에게 보냅니다.
    멧살라가 선물을 보고 “집정관 아리우스에게 아들이 있었나?” 하자, 옆에 있던 장교가 최근에 양자로 삼은 아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때 벤허가 나타나 멧살라가 깜짝 놀랍니다.

    “네가 무슨 요술로 아리우스의 아들이 되었지?”

    “요술의 주인공은 바로 너다! 네가 나를 노예선으로 보내 내가 전쟁터에서 아리우스를 구했다.”

    그러고는 “표식은 알겠지?” 하고 서판에 인장반지의 문양을 찍어 멧살라에게 보여 줍니다.
    벤허가 이전의 벤허가 아닌 로마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집정관의 아들이기에 멧살라가 쩔쩔맵니다.
    벤허가 말합니다.

    “내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소식을 알려다오. 그러면 모든 걸 잊겠다.”

    “그건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를 받아내!”

    벤허가 아리우스의 아들이 되어 가문의 반지를 껴도 그 능력을 모르면 멧살라에게 여전히 수모를 당해야 했겠지만, 벤허는 ‘아리우스 가문의 인장반지’가 가진 힘을 알았습니다.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라

    십자가에는 힘이 있습니다.
    사탄이 자주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너, 거짓말했잖아! 너, 나쁜 짓 했잖아!”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로 우리를 슬퍼하고 괴로워하게 만듭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근심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쉬지 않고 우리를 정죄합니다.

    “네가 죄를 지었으니까 하나님이 너를 미워하고 벌하고 버리실 거야!”

    그때 우리가 놋뱀을, 십자가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사탄아, 맞아. 내가 죄를 지었어. 하지만 저 십자가 앞에서는 죄가 죄가 아니야. 저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가 사해졌어. 거기서 죄가 끝났어! 심판이 끝났어!’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고통하다가 놋뱀을 쳐다보면 모두 나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이 죄로 인해 우리를 조소하고 괴롭힐 때 십자가를 바라보면 그 고통에서 해방됩니다.

    “너, 거짓말했잖아!”라고 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어! 거기에서 내가 거짓말한 죄가 끝나고 모든 죄가 끝났어!’ 하면 됩니다.

    성경은 확실히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가 지은 죄의 기록이 없습니다. 본래 가지고 있는 뜻을 정확히 부연 설명하거나 의미 전달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의 기호로 표현되어지는 것.

    2. 기호(das Zeichen. sign)

    상징을 주기 위한 하나의 신호적인 의미이므로 그 안에 아무런 의미나 뜻이 들어 있지 않다.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로 모두 도말(塗抹)했습니다.
    어디에도 우리를 정죄할 자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모든 죄를 눈처럼 희게 씻었습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받은 것 아니요
    거룩한 하나님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이 찬송을 옛날에는 입으로 불렀지만 이제는 마음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우리의 선한 행위로도 아니고, 노력이나 수고로도 아니고,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우리 죄를 씻었는지 가르쳐 주시기 위해 성경 구석구석에 구원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아놓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해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다가 놋뱀을 쳐다보고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이 성경 이야기를 내용만 압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거기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됩니다. 놋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십자가에서 끝났습니다. 심판받을 죄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죄에서 해방되어 참된 자유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마음에서 저주가 끝나고 고통과 슬픔이 끝나 밝게 삽니다. 사탄에게 속아서 죄를 지었을 때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저기서 내 죄의 심판이 끝났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쁘고 즐거운 삶을 값 없이 은혜로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 복음을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느후스단 (열왕기하 18:1-4)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만들어 장대에 매달았던 구리뱀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살았습니다.  
    그 뱀은 죄를 지은 백성들을 불뱀의 독으로부터 치료하기 위한 하나님의 처방이었는데 언제부터였는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구리뱀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히스기야 임금이 그 놋뱀을 파괴하고 누후스단이라 하였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모세의 놋뱀을 느후스단이라 부르며 가차없이 깨뜨려버리게 된 배경을 먼저 살펴보면 오늘 말씀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의 뒤를 이어 25세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열왕기하 16장을 보면, 그의 아버지 아하스 왕은 예루살렘에서 16년간 통치하는 기간에 역대 유다 임금들 중에 우상숭배를 가장 심하게 했던 왕이었습니다. 
    금송아지와 바알을 섬겼을 뿐 아니라 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는 몰록을 섬길 정도로 타락한 왕이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과 아람 왕국이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하여 궁지에 몰릴 때 아하스는 앗수르에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며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의 금은 보화를 선물로 보냈습니다.  
    그 당시 이사야 선지자가 애타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큰 나라 앗수르 제국을 의지하였습니다.  

    아하스의 선물을 받은 앗수르 왕은 구원병을 보내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을 함락시켰고 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 왕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에 있는 거대한 규모의 우상 제단을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제단에 제사를 드리니 효험이 있는 모양이구나 생각하고 우리도 이렇게 크고 화려한 제단이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의 구조와 규격 등을 그림으로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이것과 똑같은 제단을 만들어놓으라 명령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왕은 새롭게 세워진 제단을 보고 마음이 흡족하여 그 단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놋단을 북쪽으로 옮겨버리고 그날 이후로 모든 제사는 새로 만든 큰 단에 드리게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문들을 닫아 걸었으며 등불을 끄고 성소에서 분향하지 아니했습니다.  예루살렘 곳곳에 새로운 산당을 세워 온갖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멀어졌고 백성들은 고통 속에 시달렸습니다(역대하 28장). 

    그와 같은 시대에 북쪽 이스라엘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호세아가 왕으로 다스리고 있을 때  이스라엘 지파들은 여호와를 배반하고 모든 산 위에 산당을 짓고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겼습니다.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으며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숭배하였고 자녀를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는 몰록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그들을 앗수르의 손에 붙이셨고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패하여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앗수르의 왕은 멸망당한 사마리아 성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신하여 앗수르에 패한 이방 민족들을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식민지 백성들이 앗수르에 대항하지 못하도록 뿔뿔이 흩어놓는 강제이주 정책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때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온 이방 민족들이 각자 자기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가져왔습니다.  사마리아 성은 물론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마다 산당을 짓고 거기 우상들을 모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때부터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잡족이 되었으며 이방의 신상들이 득실거리는 종교 시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악행을 보시고 벌하여 이방인들 몇을 죽게 하셨더니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앗수르 왕에게 한 가지 청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주관하는 신을 섬기는 법을 몰라 이런 벌을 받았으니 전에 사마리아에서 여호와를 섬기던 제사장을 보내어 우리에게 그 신을 섬기는 법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들은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에서 포로로 잡혀온 제사장 하나를 돌려보내 벧엘에 살면서 여호와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방법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이방 잡족들이 마음을 돌이켜 그때부터 여호와 하나님만 섬겼다는 말이 아닙니다. 각 민족이 각각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들이 세운 여러 산당에 두었고, 각 성읍마다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을 세워 자기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 땅의 수호신에게 잘 보여야 재앙을 만나지 않고 평안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그저 사마리아 지역의 수호신 정도로 여겨 섬겼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앗수르에게 망한 이스라엘 땅에서 벌어진 혼합주의 신앙이었습니다. 

    이럴 때 남쪽 유다 왕국에서는 아하스 왕을 이어 히스기야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조상 다윗의 의로운 길을 따랐던 히스기야는 가장 먼저 종교개혁을 실시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처럼 여러 산당들을 무너뜨리고 거기 두었던 모든 우상들을 깨뜨리고 찍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부숴버렸습니다.  유다 왕국에 일대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5절과 6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 히스기야를 가리켜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런 왕이 없었으니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하였습니다. 

    역대 어느 왕들보다 모세의 계명을 잘 지킨 히스기야가 모세가 만든 놋뱀을 부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뱀을 가리켜 느후스단이라 불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백성들이 그 놋뱀을 향해 향을 피우며 제사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놋뱀이 처음부터 우상으로 섬김받은 것은 아니었는데 언제인가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질병을 치료하는 신으로 섬겨졌던 것입니다.  느후스단이란 말은 그저 놋조각이라는 뜻입니다.  지난 주일 말씀드린 내용과 오늘 말씀을 연결지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았던 놋뱀은 불신앙으로 멸망당하는 죄인들의 치료와 생명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수단이었습니다.  불신앙을 신앙으로 바꾸게 하시는 하나님의 치료방식이었지 숭배의 대상은 아닙니다.  뱀의 모양을 한 그 놋조각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상징적인 도구였습니다.  ‘놋뱀을 쳐다본다고 어떻게 죽을 사람이 살아나느냐 말도 되지 않는 소리 하지마라’ 하고 끝까지 거부하던 사람들은 고통 중에 죽어갔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놋뱀을 언급하시며 ‘나도 높이 달려야 하리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라’(요3:14, 15) 하셨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희생이 나의 죄를 대신한 형벌임을 인정하고 그 십자가의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높이 든 놋뱀과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믿음으로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전남 보성의 어떤 교회 목사 부부가(엄밀히 말하면 목사라고 할 수 없는 자칭 목사지만) 세 자녀를 굶기고 때려 죽게 했습니다.  처음에 신문기사를 읽었을 때는 정신질환을 앓는 부부가 아이들을 학대한 폭행치사 사건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건 내용이 자세히 밝혀지면서 이 부부의 어리석은 행동이 갈수록 기가 막혔습니다. 감기 든 아이들의 몸 안에 병을 가져다 준 귀신이 들었으니 때려서 내쫓아야 한다고 그렇게 무자비하게 아이들을 때렸습니다. 그냥 때린 것이 아니라 금식기도를 하며 어린 아이들에게도 음식을 주지 않고 굶겨가며 때렸습니다.  

    이 정도면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고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알고 보니 이 어리석은 부부를 부추겨 아이들을 죽음에 몰아넣게 하고 돈을 뜯어낸 또 한 여인이 있습니었다. ‘아이를 채찍으로 때려도 죽지 아니하리니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23:13, 14) 잠언의 말씀을 귀신 내쫓는 푸닥거리에 적용하였습니다. 같은 성경을 읽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런 무지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이해가 되지 않지요? 

       작년 5월 경북 문경에서 자기가 메시야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십자가에 자기 손발을 못 박아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이나 이번 보성의 사건들 모두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욕되게 한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절이 되면 세계 곳곳에서 십자가 고난을 재현하는 이벤트가 벌어집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실제로 체험한다고 십자가에 손과 발을 못박는 이벤트를 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나 경북 문경에서 일어난 자칭 예수의 엽기적인 자살 사건은 종교적 영웅심으로 자기를 과시하고픈 욕망에서 나온 행동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어찌 이런 어리석은 행동들을 하였을까요?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고난을 재현한다고 무거운 통나무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는데 코메디 같은 행동을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는데 십자가 밑에 바퀴를 달아 끌고 다닙니다. 연극 무대에서 공연 중이었다면 혹시 모르겠지만 기독교계에서 이름 꽤나 알려진 사람들이 날보란 듯이 쇼하는 모습을 볼 때 기가 막히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십자가의 무게도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서 바퀴달린 십자가 이벤트를 벌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이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거나 나무 십자가를 끌고 다니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전혀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겉으로 경건한 척 자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자신의 이익과 성공의 도구로 삼는 일입니다.

    모세의 놋뱀 느후스단을 깨뜨렸던 히스기야의 종교개혁 관점에서 보면 이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념이나 자기 주관적인 어떤 신을 섬기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따르고 있는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 신앙이 아니라 느후스단을 섬기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신앙 신념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정말 그런 뜻이었습니까?  

    현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심취되고 있는 왜곡된 신앙 행동은 무엇일까요?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이기적인 욕심과 소원성취를 위해 종교행위에 몰입하는 일입니다.  예배당과 불당이라는 장소만 다르고 의식이 서로 다를 뿐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비슷하거나 동일하다면 그렇게 예수를 믿는 신앙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느라 다른 사람의 불행에는 무관심하고 오로지 나의 행복을 위해 금식하며 맹렬하게 기도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와 미신이지 바른 신앙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신 성공과 번영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사하러 오신 분이시지 사람들이 부자되고 성공하도록 도와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와 심판을 말하기 꺼려하는 기독교는 세상의 도덕 종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입술로는 그리스도를 말하지만 인류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말하는 그리스도는 위대한 스승이나 도덕 선생에 불과합니다.  거기에는 구원이나 영생이라는 진리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들이 있습니다.  뜨거운 신앙 체험,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도와준 사람, 존경스런 신앙의 인물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신비한 체험이나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바라봐야지 예수께서 달리셨던 십자가를 섬길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 형상을 놋뱀 섬기듯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책을 신성한 부적처럼 여기는 믿음도 있으니 이것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지 본질은 외면하고 십자가라는 물질을 바라보거나 이차적인 축복에 더 관심이 있으면 그것이 곧 느후스단이고 불신앙입니다. 
    ‘달을 보라고 손으로 가리켰더니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손만 보더라’는 말과 같습니다. 

    모세의 놋뱀을 통해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찍어 불태우고 깨뜨려야 할 누후스단이 무엇인가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빙자하여 자기 이익의 기회로 삼는 종교인들이나 종교 장사치들의 헛된 영웅심과 세속적인 욕심을 깨뜨리고 불태워야 합니다. 
    놋뱀을 바라보라 했지 그것을 하나님 자리에 두고 섬기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라 하셨지 주님이 달리셨던 십자가 형상을 우상처럼 받들고 거기 절하며 기도하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높은 종탑에 십자가를 걸어놓았다고 모두 거룩한 교회는 아니며, 거실과 안방 벽에 십자가를 걸었다고 거룩한 백성의 집은 아닙니다.  
    금과 은으로 도금한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걸었으니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 그 행실과는 상관없이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며 입을 열면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다고 모두 좋은 믿음, 좋은 신앙인은 아닙니다. 

    그 중심에 진짜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모든 종교활동은 북쪽 이스라엘이나 남쪽 유다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따르고 제사했던 혼합주의 신앙에 불과합니다.  
    히스기야가 부쉈던 놋조각 느후스단일 뿐입니다.  
    사마리아에 강제 이주된 앗수르의 식민지 백성들이 섬겼던 다원주의, 혼합주의 종교에 불과합니다. 

    옥스포드 대학 크라이스트 처지 컬리지의 성당에 가면 옥스포드 수호신을 기념하는 제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제단이 부서져 일부만 전시되었고 주변의 여러 조각상들을 보면 코가 깨지거나 얼굴이 무너진 흔적들이 있습니다.  
    중세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인물들이나 성인들의 조각상, 벽화 등을 너무 성스럽게 여기다 못해 그 앞에 촛불을 켜고 기도하며 거기 절하고 복을 비는 일들이 흔하게 일어났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이것을 비판하며 교회 안에 어떤 형상이든 세우거나 걸어놓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크라이스트 처치 컬리지 성당의 성상들도 대부분 파괴되고 교회 밖으로 내던져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거기 절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것을 경배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계명을 받고 있는 40일을 참고 기다리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아론을 부추겨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이것이 우리를 애굽으로부터 인도한 하나님이라 하며 그 앞에 절하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조차 사람들의 손으로 만든 형상 속에 가두어 두고 자기들 마음대로, 자기들 편한 방식으로 섬기려 합니다. 

    그리고 그 예배와 섬김의 궁극 목적은 자기 자신을 위함입니다.  
    주문을 외면 불려 나오는 알라딘 등잔의 거인처럼 하나님은 그저 필요할 때 불러내어 도움을 청하는 수호신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섬김의 방식이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상숭배요 미신적인 습관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주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 14:6)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아니고는 나에게는 도무지 구원 받을만한 아무 능력도 자격도 지혜도 없음을 인정하고 그분께 나를 내맡기고 의지하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힘입어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한다.


    모세의 놋뱀(민 21:9)은 타우형(헬라어 T자) 십자가라고 한다.
    이 십자가는 예로부터 모세가 광야에서 치켜들었던 십자가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모세의 놋뱀(민 21:9)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하기 때문에 이 십자가는 예언(의) 십자가라고도 불린다.
    타우형 십자가는 축 늘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힘겨운 어깨를 상기시킨다.
    가로막대와 교차하는 세로막대의 윗부분이 생략된 모습은 십자가의 고통을 한층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예수는 자기의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고, 영적 의의를 모세 때 있은 놋뱀 사건을 인용하여, 부활의 예수를 바라봄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하였다.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고 요한복음 3장 14~15절에 나타나 있다.

    요르단에서 꼭 가봐야 할 역사적 기독교 유적가운데 하나는 해발 835m의 느보산이다.
    눈치 챘겠지만 모세의 출애굽 여정 중 마지막 기착지이기 때문이다.
    40년 광야생활을 청산한 모세는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가나안 땅을 조망하고 숨을 거둔다.(신 32:49)

    모세기념교회 옆 전망대에 서면 멀리 사해와 예리코(여리고) 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으면 예루살렘의 올리브산(감람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4세기 비잔틴제국 시대에 모세의 무덤위에 지었다고도 전해지는 모세기념교회는 지금도 그 교회 터가 남아 있다.
    이 교회 정원에는 이탈리아 조각가 지오반니 판토니의 ''모세의 지팡이'' 작품이 세워져 있다.
    놋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복합시킨 작품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에게 불평하여 불뱀이 그들을 물었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을 낫게 하기 위해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로 놋뱀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장대에 매달고 그것을 보는 자는 살게 된다고 민수기 21장에 기록되어 있다.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본 자는 모두 치료됐다.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우상으로 섬기게 됐는데, 히스기야는 이것을 부숴 버렸다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열왕기하 18:4)고 기록돼 있다.

    모세는 40년간 광야를 헤매다 결국 가나안 땅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느보산에서 가나안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숨을 거뒀다.
    느보산에 거대하게 세워진 모세의 지팡이 ''놋뱀''이 은혜를 잊고 하나님을 원망하다 불뱀에 물려죽은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음''을 닮지 말라고 오늘도 경고하고 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 21:9)."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놋 뱀 사건을 예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중에 자신에게 닥칠 사건과 비교하여 언급하신 내용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이 분분하기에 서로 비교하고 그 해답을 찾아보기로 하자.

    다섯 부류의 주장이 있다.

    1. 전통적 주장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놋 뱀을 달게 하여 이를 쳐다본즉 뱀에 물린 자가 살게 되었으므로 놋 뱀은 예수의 십자가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놋 뱀을 예수라 할 수 없으니 여호와께서 은혜의 선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모순(矛盾) :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가 십자가를 쳐다봄으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으라(마 16:24) 하였으며 육체와 합하여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매달아야(갈 5:24)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뱀은 무엇인가?
    뱀에 대한 해명이 뒤따라야지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은혜로 포장하고 있다.

    2. 일부 주장 (1)

    놋 뱀은 사탄이므로 사탄이 매달렸으니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내 자신 안에 있는 사탄의 속성을 독배로 마시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모순(矛盾) : 예수는 죽을 권세도 있고 살 권세도 있어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려고(롬 8:2, 갈 4:5) 바리새인들의 손을 빌어서 죽으신 것이지 사탄의 독배를 마신 것이 아니다.

    3. 일부 주장 (2)

    놋 뱀은 예수님이다.
    놋 뱀 사건은 예수님 십자가 사건의 상징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놋 뱀에 대하여 무엇이라 분명하게 말하지 않으므로 '놋 뱀이 예수이다' 주장하는데 주장하는 이유로는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도 뱀같이 지혜롭게 하라 했으니 뱀을 예수라 주장한다.

    모순(矛盾) : 뱀은 사탄이다.
    뱀같이 지혜롭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신중하라(프로니모스)고 하셨으니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뜻이지 뱀을 지혜롭다고 오역한 부분을 가지고 뱀과 예수를 동일시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신중하고 순수하라는 것은 방법이 선해야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는 당부이다.

    4. 전통적인 주장 (2)

    어떤 주장도 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입장으로 침묵하겠다는 부류가 있다.

    모순(矛盾) : 해답을 내놓지 않고 있음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해석과 주장이 있어 오늘과 같은 혼란을 초래하였다.

    5. 새로운 주장

    놋 뱀사탄이지 예수님이 될 수 없다.
    놋 뱀 사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가 아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의 상황이다.
    그 해답은 요한복음 3장 14절에 있다(스타우로스 원어성경연구원).

    요한복음 3장 14절 번역에 문제가 있어 다시 번역한다.

    "그리고 모세가 광야 안에서 뱀을 높인 것같이 이같이 인자를 높이게 됨이 마땅하다(요 3:14)."

    뱀을 들었다는 것은 매단 것으로 보았고 인자가 들려야 하는 것도 십자가 사건으로 보았기에 내용이 풀리지 않고 꼬이기 시작했던 것인데 든 것이 아니라 높인 것이다.

    아래에서 동일한 단어가 사용된 예를 살펴보자.

    높이다(5312, 휘프소오)에 대한 고찰

    휘프소오(
    hüpsŏō) ὑψόω
    1. 높이 올리다.
    2. 높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5312)(마 23:1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5312)(눅 1:52)."

    "무리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삶은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에 이르도록 머무신다고 들었는데도 당신은 어찌하여 인자를 높임을 받아야(5312) 한다고 말하느냐? 이 사람의 아들이 누구냐?(요 12:34)."

    사도행전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혹시 내가 너희가 높임을 받게(5312) 하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내가 죄를 지었느냐?(고후 11:7)."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의 삶을 높이실 것이다(5312)(약 4:10)."

    예수님을 높임 받게 한 사건은?

    예수님이 높임을 받는 전제 조건은 낮아짐이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낮아졌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높이시는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주신 것이다.
    우리에게도 주시는 동일한 은혜의 말씀은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의 삶을 높이실 것이다(5312)(약 4:10)."
    십자가의 죽음까지 자신을 낮추면 주께서 높여 주신다는(5312)약속이다.

    광야에서 뱀을 높였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고린도전서 10:7-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씩 죽었고 시험하다 뱀에게 멸망하였고 원망하다가 멸망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러다간 다 죽이게 생겼기에 뱀(사탄)을 깃대(닛시) 위에 높이고 이를 쳐다봄으로 살도록 하여서, 구세주 예수를 보내시기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종살이하게 두신 것이다.

    이후 이스라엘은 뱀(사탄)을 높인 깃발을 들고 행진하기 시작하여 가나안에 들어갔고, 이후 히스기야 왕 이전까지 산당에서 분향하며 섬기고 있었으나, 여호와께서 놋 뱀을 파기하라 명한 적이 없었다는 점을 유념하여 볼 필요가 있다.

    놋 깃대는 히스기야 왕에 의해 부서지게 된다(열왕기하 18:3~4)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 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왜 하나님께서는 뱀(사단)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맡기신 것인가?

    포도원인 이스라엘을 맡겨 두심(사 5:7)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눅 20:9~15)."

    유대인들 : 마귀 자식

    "어찌하여 내 말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씀을 들을 수 없음이로다. 너의 삶은 마귀인 아비에게서 난 삶이니 너희 아비의 정욕을 너의 삶도 행하려 하는구다. 저는 시작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안에 없으므로 진리 안에 서지 못한 것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면 자기 삶에서 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의 아비가 거짓말쟁이더라(요 8:43~44)."

    서기관 바리새인 : 후견인과 청지기

    "내가 또 말하나니 상속자가 모든 삶의 주인이지만 미숙아로 있는 기한에는 아무도 종에서 옮겨 가지 못한다. 오히려 아버지의 작정함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도다. 이와 같이 우리도 미숙아로 있는 기한에 세상 초등 학문 아래서 종살이 당하고 있더니 기한의 충만이 이르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율법 아래 속하여 아내에게서 낳아 내어 보내셨으니 율법 아래 있는 삶을 속량하려 함이요, 나의 삶이 아들의 명분을 쟁취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에 이르고자 내어 보내사 아버지 아빠라 외치게 하셨느니라(갈 4:1~6)."

    뱀이란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뱀은 창세기 3장 1절에서 처음 등장하며 창세기 3장 15절에서는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이며 뱀의 후손은 머리요, 여자의 후손은 발꿈치로서 서로 상하게 할 것이라 하였으며 마태복음 4장에서는 예수를 시험하는 자로 등장하며 요한계시록 20장 2절에서는 옛 뱀, 마귀, 사탄, 천하를 꾀는 자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어디 한군데도 뱀이 예수를 예표하는 성구는 없다.

    은 히브리어로 '5175(스트롱번호) 나하쉬'라 하는데, 동사 '5172 나-하쉬 : 점치다'에서 유래한다.
    동의어로는 '5173 나하쉬 : 점, 예지력'
    '5174 네하쉬 : 놋쇠, 구리'
    '5178 네호세트 : 청동, 놋쇠'

    놋 뱀이란 뜻은 히브리어로 '네하쉬(뱀) 네호세트(놋) :
    예지력 있는 점쟁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어 다니는 뱀의 히브리어 이름은 '텓트'이지만 성경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나하쉬
    (뱀)은 예지력을 가진 자, 점쟁이로 언급하고 있다는 데 주의해야 한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구원 계획을 미리 수립하시고 각 날에 해당하는 시나리오를 정하셔서 그 과정을 학습하고 통과하게끔 하시고 일정한 날에 메시아를 보내 주셔서, 죄와 사망의 법에 붙여서 종살이하면서 믿음으로 낮아지고 순종하는 자들을 해방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쟁취하고 하나님나라를 상속하는 데까지 높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하시는 말씀이다.


    느후스단 우상 (열왕기하 18:1~4)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경제 살리기에 나서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각 나라를 순방하며 국제 외교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상징적으로 농민들과 함께 모내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행동은 “내가 앞으로 이 나라를 다스릴 때 이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만큼 한 나라의 통치자가 취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성군 중 하나라 일컫는 히스기야 임금은 아버지 아하스의 뒤를 이어 25세에 왕에 오르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우상 타파였습니다.

    이것은 “내가 앞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길 일은 바로 우상을 타파하고 하나님만 섬기는 나라로 만드는 일이다!” 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전국에 있는 산당(山堂)을 제거하고 각종 우상들을 깨뜨려 없애는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산당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 위에 우상을 섬기기 위해 세운 집들인데 이 산당이 이스라엘 전국에 산마다 널려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얼마나 우상 숭배가 만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신(男神)인 바알 신과 여신(女神)인 아세라를 비롯해 정말 수많은 종류의 우상을 섬겼는데 그 가운데 히스기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 ‘느후스단’이라 불리던 특이한 우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모세가 만든 놋뱀입니다.

    민수기 21장 4절부터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다가 길이 멀고 험하니까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어떤 원망을 했나 들어볼까요? 5절에 나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한 마디로 애굽에서 잘 살고 있는 우리를 왜 이런 황량한 광야로 끌고 나와서 죽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여기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다며 불평합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주셨지만 백성들은 만나를 보고 “이 하찮은 음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하찮은 음식 싫다는 것입니다.
    애굽에 있을 때 살려달라고, 우리를 해방시켜 달라고 아우성치던 것은 또 언제고 이제 와서 “왜 애굽에서 잘 살고 있는 우리를 여기까지 끌어냈냐”고 불만입니다.

    광야에서 처음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실 때는 환호하고 감격하더니 이제 와서 “이따위 하찮은 음식”에 이제 질렸다고 투덜거립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신 것 다 잊어버리고 지금은 뭐가 없다, 뭐도 없다, 뭐가 불편하다며 원망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는 오늘 우리에게서도 종종 나타납니다.
    과거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는 영적 건망증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하신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와서 부족한 것만 보이고 불편한 것만 보이니 원망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미 받은 놀라운 은혜는 다 잊어버리고 지금 없는 것, 부족한 것, 불편한 것만 보는 배은망덕한 죄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하고 찬송은 잘 부르는데 정작 지금까지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그 한량없는 은혜와 도우심은 다 잊어버리고 삽니다. 

    이미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지금 뭐가 부족하다고, 뭐가 불편하다고 투덜거리며 원망하기에 급급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영적 건망증에 걸린, 배은망덕한 사람들을 어떻게 하실까요?

    그 벌은 불뱀들을 보내 백성들을 물게 한 것입니다.
    불뱀은 한 번 물리면 몇 분 만에 즉사하는 맹독을 지닌 독사 종류입니다.
    특히 사막에 사는 독사는 더 독합니다.
    미국 사막지역에 사는 방울뱀은 물리면 수십 분 내에 즉사합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맹독을 지닌 불뱀을 보내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어 죽이게 한 것이지요.
    이대로 간다면 모든 백성들이 다 뱀에 물려 죽게 생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잔인한 분이 아닙니다. 자비의 하나님이시지요. 그래서 백성들이 회개하자 모세에게 뱀에 물린 자가 살 방법을 일러 주십니다. 바로 놋으로 불뱀의 모양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매달게 하고 그 놋뱀을 보는 자는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때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고 살아난 사람들은 “이제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자” 하고 교훈을 얻게 끝냈어야 하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놋뱀을 소중하게 보관한 것입니다.

    민수기에는 놋뱀을 보관했다는 말이 안 나오지만 이 놋뱀이 세월이 흘러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보관되었다는 것을 보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이 놋뱀을 보관했을까요?

    놋으로 만들었으니 무게도 만만치 않을 텐데 그 힘든 광야생활에서도 이 놋뱀을 끝까지 보과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 까닭을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신기했던 것입니다. 이 놋뱀 자체에 무슨 신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 내가 불뱀에 물려 다 죽어갈 때 장대 위에 달린 이 놋뱀을 한 번 쳐다보기만 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해지더라구요.”

    사람들은 너무나 신기해하면서 이 놀라운 힘을 지닌 놋뱀을 잘 보관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놋뱀을 아예 우상으로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마 병이 들면 그 놋뱀 우상 앞에 가서 분향(향으로 제사 드림)하며 그 신기한 힘으로 고쳐달라고 빌었겠지요.

    아무튼 히스기야 임금은 왕이 되자마다 이 놋뱀 우상을 부수어 버립니다.
    다른 수많은 우상도 부수었는데 특히 이 놋뱀 우상을 부순 것을 본문이 기록한 데는 뭔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상은 우상일 뿐

    첫째로, 히스기야가 이 놋뱀 우상을 부순 후 그 이름을 ‘느후스단’이라고 부릅니다.

    ‘느후스단’은 히브리 말로 ‘놋조각’이라는 뜻입니다.
    전에는 이 놋뱀 우상을 뭐라고 불렀는지 모릅니다.
    아마 ‘전지전능하신 뱀님’ 이런 식으로 불렀겠지요.
    하지만 이 놋뱀을 부숴버린 후 히스기야는 그 이름을 ‘느후스단’이라고 짓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존재하고 있을 때야 이름을 붙이는 것이 당연하지만 부수어 버린 후에 이름을 짓는 것은 이해가 안 갑니다.
    마치 형산강 다리가 멀쩡하게 서있을 때는 이름도 안 붙이다가 다 철거해서 없어진 다음에야 이름을 ‘형산강 다리’ 하고 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여기에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 히스기야 임금의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느후스단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교훈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느후스단’이란 ‘놋조각’이라는 뜻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이름은 이 놋뱀이 무슨 신비한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병을 고쳐주는 그런 능력을 가진 신이 아니라 그저 ‘놋조각’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상은 돌조각, 나무 조각, 쇳덩어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돌로, 나무로, 쇠로 만든 우상이 무슨 힘을 가지고 있거나 내 소원을 들어줄 리 만무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똑똑히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갓바위 부처 앞에서 기도하면 대학입학 시켜준다고 열심히 비는 사람들, 그것은 바위에 새겨놓은 돌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돌덩어리가 어떻게 내 소원을 들어주고 내 자녀를 대학에 들여보내 준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엎드려 절하는 대웅전의 부처상은 쇳덩어리에 불과하고, 우리가 지성을 드리는 영험한 바위와 영험한 나무는 바윗돌과 나뭇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에 붙이고 몸속에 지니고 다니는 부적은 붉은 글씨가 쓰인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무생물인 나뭇조각, 돌덩이, 쇳조각이 내 소원을 들어주고 종잇조각이 나를 지켜준다는 말입니까?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 한 분 만이 우리의 소망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응답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오. 우상은 돌덩이, 쇳조각, 나뭇조각에 불과합니다. 그 우상은 나를 고쳐줄 수도, 나를 지켜줄 수도, 내 소원을 들어줄 수도 없습니다.

    교회 안의 우상

    둘째로, 느후스단은 본디 장대 위에 단 놋뱀이었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보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바로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요한복음 3장 16절 정말 유명한 말씀 아닙니까? 그런데 그 바로 앞에 이 놋뱀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 위에 놋뱀을 달아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것처럼 인자(人子)이신 예수님도 들려야 할지니, 즉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죽어가는 사람들, 사망권세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살리신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외에는 그 무엇도 우리의 숭배나 섬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이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은 그 놋뱀이 사람들을 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놋뱀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대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자신을 살리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그 상징에 불과한 놋뱀을 숭배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느후스단 우상은 오늘날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숭배하는 우상을 뜻합니다. 특히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인데 하나님 외에 그 상징을 숭배할 때 아주 위험한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심지어 십자가조차도 우리의 숭배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들은 십자가를 보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잘못입니다. 눈으로는 십자가를 보더라도 우리는 십자가가 아닌 오직 거기 달리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십자가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 이 십자가가 나를 지켜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목걸이로 귀걸이로 십자가를 가지고 다닙니다. 마치 영화에 보면 흡혈귀 드라큘라가 덤벼들 때 십자가로 물리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보수적인 교단은 아예 예배당 안에 십자가를 달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십자가조차도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뿐만 아닙니다. 교회도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모임일 뿐 교회 자체가 결코 숭배 대상이 아닙니다. 자기 교회를 사랑하고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이것이 너무 심한 나머지 교회 자체를 우상시하고 내 교회만 옳고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숭배 우상에 빠진 것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를 존중하고 사랑해 주시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목회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선포하고 가르치는 대리인에 불과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주인이 심부름꾼을 보냈을 때 그 심부름꾼이 마치 자기가 주인인 양 착각하거나 아니면 주인이 받을 영광을 대신 받으면 안 되는 것처럼 목회자는 하나님 대신 영광을 받으면 안 됩니다. “저는 목사님 보고 교회 다닙니다.” 이런 말이 저 듣기에는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큰 함정입니다. 어느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큰 힘을 가진 목회자들이 이런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정리해 볼까요? 느후스단이 자신이 아니라 그 느후스단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살린 것처럼,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하고 하나님 받으실 경배를 대신 받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또 우리 신앙에 대단히 중요한 존재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느후스단을 “교회 안의 우상”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신앙 안에 있지만 하나님을 대신한 우상이 되기 쉬운 것은 목회자나 어떤 사람(person), 재정이나 전통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조심해야 합니다.

    표적의 우상

    셋째로, 느후스단은 진정한 기적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너무도 기적을 바라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마가복음 8장 11절부터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비난하며 이렇게 시험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봐라. 그러면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어주마.” 그러자 예수님은 깊이 탄식하시면서 “내가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하고 말씀하시곤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떠나가십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바리새인들이 구한 ‘표적’을 구합니다. 표적이란 영어로는 사인(sign)입니다. 어떤 특별한 사인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이적, 기적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표적’(sign)을 구하고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처럼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사인이 있어야 예수 믿겠다는 것입니다. 지루한(?) 일상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특별한 체험이나 사인을 받아야 예수 잘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간증집회에 나와 간증하는 사람들처럼 죽을병이 고침 받거나 망해가는 사업이 다시 일어나거나 하는 이적이나 기적도 체험하면 금상첨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날마다 ‘특별한 은혜’를 구합니다. ‘특별한 체험’을 구합니다. 기적을 구하며 삽니다. 이것을 ‘표적(sign)의 우상’이라고 불러봅시다.

    물론 이런 태도가 다 잘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체험이나 사인은 지치거나 낙심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줍니다.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에 젖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어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끔 사람들에게 특별한 체험이나 이적을 베푸십니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체험이나 은혜만 사모한 나머지 일상적인 신앙생활은 지루하고 능력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특별한 표적이나 이적이 반드시 일상적인 신앙생활보다 우월하다고 믿고 나는 이런 특별 은혜 받았다, 나는 이런 특별한 체험했다고 자랑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목회를 하면서 가장 안타까울 때가 이때입니다. 

    누구누구가 어떤 분에게 기도 받으러 다닌답니다. 어디 가면 신령한 분이 있답니다. 기도 받으러 가고 신령한 것 찾아가는 것이 뭐가 문제겠습니까? 저도 신령한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이고 또 기도 받으면서 힘을 많이 얻은 사람이라 이런 일에 전혀 거부감이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입니다. 신령한 것, 특별한 것 좋아하다가 기도해준다는 그 사람이, 그 장소가 과연 건전한지 아닌지도 생각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찾아다니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디 기도 받으러 갈 때나 기도원이나 집회 갈 때 꼭 저에게 먼저 의논하라는 것이 이것 때문입니다. 제가 감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도와주려는 거예요. 과연 그 곳이, 그 사람이 건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인지 아니면 아주 위험한지 미리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또 그런 곳에 가서 무슨 특별한 체험하고 은혜 받았다며 멀쩡하게 교회 잘 다니고 일상적인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 그런 식으로 예수 믿으면 안 돼. 그게 뭐야? 시시하잖아? 나처럼 특별한 은혜 체험해야지” 하고 깔보듯이 이야기한다면 그 분은 이미 교만의 우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특별한 은혜나 체험도 좋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정말 우리가 꼭 필요할 때 특별히 허락하는 별식(別式)과도 같은 것입니다.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먹고 어쩌다 한 번 별식으로 메추라기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매일 먹고 사는 것은 이 만나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면서 매일 별식으로 메추라기 달라고 조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매일 만나 먹으면서 하나님 잘 섬기는 사람들 보고 “너희는 어떻게 매일 그 지겨운 만나만 먹고 사냐?”고 깔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신자들에게 내 교회와 내 지도자, 내 목회자를 허락하신 까닭은 다른 무엇보다 내 교회를, 또 내 지도자와 내 목회자를 우선 중심으로 신앙생활 하도록 하신 것인데 별미만 좋아하며 거기에 우선권을 두고 쫓아다닌다면 어떻게 신앙이 건강하게 자라겠습니까?

    나아가 기적이나 특별한 이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적이나 기적을 하나님이 주실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특별한 경우입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를 인정하려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기적”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구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할 만한 사인이었습니다. 주님은 깊이 탄식하며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표적이나 이적 자체가 나쁘지는 않지만 잘못된 의도로 구하는 것은 단호하게 거부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전제로 표적이나 기적을 구하는 태도, 이런 것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신앙을 경고하신 것이지요.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일어난 가장 놀라운 기적은 다름 아닌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 자체가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기적인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우리가 이 기적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작은 기적이나 이적에 매여 살며 그것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느후스단 우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 설교 중에 나온 용어가 몇 가지 있지요. ‘영적 건망증’이나 ‘배은망덕의 죄’, 또한 우상은 쇳조각, 돌덩이에 불과하지 결코 우리를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 ‘교회 안의 우상’ 그리고 ‘표적의 우상, 기적의 우상’ 등 꽤 많습니다. 이것을 다 기억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한 가지만 분명히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의 은혜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놋뱀이 느후스단 우상이 되어버린 것처럼 교회 안에도 우상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우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우상은 마치 열심 있는 신앙, 뜨거운 신앙처럼 위장하고 우리의 건강한 신앙을 위협합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이 우상임을 깨닫고 하루빨리 버리고 건강한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하나님 잘 믿는 줄 알고, 나는 아주 특별하게 잘 믿는 줄 착각하고 살다가 마지막 주님 앞에 섰을 때 그만 주님이 “나는 너를 모른다” 하시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을 가장한 우상의 무서운 점입니다. 따라서 열심히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믿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열심 있는 것도 좋고 뜨거운 것도 좋지만 바르게 믿지 않으면 오히려 훨씬 위험합니다. 올바른 신앙관 위에 건전하게 바르게 믿어야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 하세요. “바르게 믿자!” 아무쪼록 오늘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만 바라보며 건강하고 건전한 신앙관 위에 바로 서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만을 바라보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기독교의 상징들

     

    기독교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우선 십자가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보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적십자나 병원이 떠오르는 분도 계시겠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십자가는 고대 근동의 앗수르, 이집트,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에서 죄수를 처형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형틀입니다. 십자가 형벌은 죄수의 양팔을 사람의 키보다 약간 큰나무에 못박아 고정 시켜 매달려 있게 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피가 몸의 밑으로 몰리게 되고 혈액 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 호흡이 빨라지며 심한 고통을 격게 됩니다. 십자가 형벌은 사람을 한번에 죽이는 것이 아니고 3-5일간을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이는 매우 가혹하고 치욕적인 형벌로써 로마시대에는 정치범이나 반역자들에게만 적용했던 사형법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던 강도들은 단순한 좀도둑들이 아니라 정치범이거나 반정부세력의 테러리스트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죄와 형벌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잔인하고, 끔직한 십자가를 교회의 상징으로 여기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씀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요? 차라리 사도바울처럼 참수를 당하시거나, 사도 도마처럼 창에 찔려 죽으시면 간단할 텐데 왜 하필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을까요?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3)그러나 너희는 그 주검을 나무에 매달아 둔 채로 밤을 지내지 말고, 그 날로 묻어라. 나무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유산으로 준 땅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를 포함해서 나무에 매달려 죽는 것은 매우 치욕스럽고 ‘하나님게 저주를 받았다’는 상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대신 짊어지신 우리의 죄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으셔야 했을 만큼’ 크고 심각한 죄였습니다.

     

    그러기에 이 은혜를 경험한 우리들은 십자가에서 형벌과 저주를 보기 전에, 우리가 받아야할 형벌과 저주를 대신 짊머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보면서 눈물 흘리는 이유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주님이 죽으시고, 대신 내가 살게 된 은혜의 상징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오랜 역사와 전통에는 Icon (아이콘) 또는 Symble (심볼) 로 불리는 여러가지 신앙적 상징들이 있습니다.

     

     

    1. 익투스 (ἰχθύς)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익투스 (고대 그리스어 :  ἰχθύς 이크투스, 대문자 표기로 ΙΧΘΥΣ)

     

    Ιησους (예수) 

    Χριστος (그리스도 - 크리스토스) 

    θεου (데우) 하나님의  

    Υιος(휘오스)  아들 

    Σωτηρ (소테르) 구원자

     

    '익투스'라는 단어는 '물고기'라는 뜻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 물고기라는 단어를 상징적으로 생각했으며 위 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익트스가 되었다는 학설이 유력합니다.

    박해를 받았던 초대 기독교인들은 피아식별의 방법으로 물고기 그림을 암호처럼 그려서 활용했고, 물고기를 그린 사람의 뒤를 따라가면 기독교인들의 은신처 '카타콤'에 찾아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익투스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또는 '주는 나의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라는 뜻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2. 키로(XP) 십자가

     

    그리스도(Χριστοσ) 라는 헬라어의 단어 첫번째와 두번째 알파벳

     

     

     

    영어 스펠링 PX 를 겹합한 것 처럼 보이는 이 아이코은 그리스도 Χριστοσ (크리스토스) 라는 헬라어의 첫번째와 두번째의 알파벳을 결합시켜 놓은 것 입니다.

    X 를 헬라어로 [ㅎ키], P 를 [로ㅎ-] 로 부르기 때문에 키로 십자가 입니다.

     

    이 아이콘은 기독교를 로마의 공인 국교로 삼은 '콘스탄틴 황제'가 꿈에서 본 것을 깃발로 삼아 전쟁터에 나갔다고 해서 널리 알려진 문장입니다.

     

    키노문자는 가톨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표식인데 '그리스도'의 헬라어 표기 'Χριστοs'의 첫째자와 둘째자를 겹친 것입니다. 이 글자는 헬라어이므로 '키로'(Chi Ro)로 읽어야지 '엑스 피'가 아닙니다. 이 표식의 유래는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대제에서 시작이 됩니다. 콘스탄틴은 312년 로마의 티버강 너머 밀비안 다리에서 막센티우스와 격전을 벌이기 전날 밤 하늘에 십자가가 보였는데 십자가에는 “이 부호를 가지고 정복하라 In this sign, conquer”고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부호가 바로 키로문자였습니다. 그래서 콘스탄틴은 자신의 헬멧과 군기에 이 키로문자로 장식을 했고, 실제로 전투에서 정말로 승리해서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로 군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313년 그 유명한 밀라노 칙령을 내려 로마에서 기독교의 박해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러기에 키로문자는 이제 로마가 기독교 제국으로 바뀌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똑같은 기독교의 상징이지만 물고기와 키로문자는 서로 완전히 상반된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전자는 숨어있는 기독교를, 후자는 제국을 점령한 기독교입니다.

     3. INRI

     

    (라틴어 :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 예수님의 십자가 명패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I.N.R.I.) 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요한복음 19:19~19:22]  

     

    라틴어 성경 요한복음 Evangelium Secundum Ioannem 19:19~19:22

    scripsit autem et titulum Pilatus et posuit super crucem erat autem scriptum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hunc ergo titulum multi legerunt Iudaeorum quia prope

    civitatem erat locus ubi crucifixus est Iesus et erat scriptum hebraice graece et latine dicebant

    ergo Pilato pontifices Iudaeorum noli scribere rex Iudaeorum sed quia ipse dixit rex sum

    Iudaeorum respondit Pilatus quod scripsi scripsi

     

     

    위 라틴어 성경에 나타난 바와 같이 INRI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붙인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의 라틴어(로마어) 첫글자만을 딴 것입니다.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 영어 / Jesus of Nazareth, King of the Jews)

     

      

     

     

     

     

     

        

    4. IHS

     

    고대 그리스어로 예수 'Ιησους' 의 첫번째, 두번째, 마지막 스펠링의 약자    

    또는 라틴어라 'Iesus Hominum Salvator'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HIS 는 예수(Jesus) 를 뜻하는 약어 입니다. 

    희랍어는 'Ιησους'라고 표기하며 ...η (에타)는 라틴어로 표기할 때  대문자로 'H' , σ(시그마) 는 대문자 'S' 가 되며, 양피지로 필사하던 시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단어들을 약자로 기록하던 시절의 유래입니다. 

    그후, 라틴어로 새로운 의미가 부가되었는데 옮겨쓰는 과장에서 새로운 의미를 더했다고도 추정되며 뜻에 비중을 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Iesus

        Hominum

        Salvator'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라틴어에서 I J는 종종 구별되지 않고 혼용됩니다.

        예수Iesus 를 지저스Jesus라고 부르게 되는 과정이 이 I와 J가 구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IHS라는 글은 JHS로 표기되기도 했습니다.

     


     

     

     

     

     

     

     5. 알파와 오메가

     

     

    [계 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처음과 마지막 입니다.

    세계와 인류의 처음이시고 마지막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표기]

     

    그리스어 알파벳 기호 θ (세-타) theta; 를 하나님으로 표기합니다.

    이는 헬라어 '테오스' (하나님 θεοs =Θεου) 의 머릿 글자와도 같으며 세계 각국의 표기는 아래와 같습니다. 

     

    한   국 : 하나님

    일   본 :    神

    중   국 : 上   帝

    미   국 : God

    독   일 : Gott

    터   키 : Tanrı

    프랑스 : Dieu

    그리스 : θεός

    러시아 : бог

    이태리 : Dio

    스페인 : Dios

    폴란드 : Bóg

    아랍어 : الله

    페르시아 : خداوند

    포르투갈 : deus

    우크라이나 : Бог

    인도네시아 : Tuhan

     

    6. 닭

     

     

    마지막으로 소개할 기독교의 상징물은 ‘닭’입니다. 상징에는 긍정적인 기억을 위한 상징물도 있지만 부정적이고, 부끄러운 의미를 가진 상징물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닭’이라고 생각됩니다. 닭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사도 베드로와 관련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밤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 상징 용어 설명

    • by 메리 페어차일드

    그리스도인의 상징에 대한 예시 여행

    의심의 여지없이, 라틴 십자가 - 소문자, t 자 모양의 십자가는 오늘날 기독교에서 가장 인정받는 상징입니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많은 다른 표식, 식별자, 구별되는 표식들이 기독교 신앙을 대표합니다. 이 기독교 상징의 수집은 가장 쉽게 확인 된 기독교 상징의 그림과 묘사를 포함합니다.

    크리스티앙 크로스

     셔터 잭 / 게티 이미지

    라틴 십자가는 오늘날 기독교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널리 인정 받고있는 상징입니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십자가에 못 박힌 구조의 형태 였을 것입니다.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가 있었지만 라틴 십자가는 두 개의 나무 조각으로 이루어져 네 개의 직각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십자가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희생함으로써 죄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냅니다.

    십자가의 로마 가톨릭 묘사는 십자가에 아직도 그리스도의 몸을 계시합니다. 이 형태는 십자가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통에 중점을 둔다. 개신교 회는 부활 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강조하면서 빈 십자가를 묘사하는 경향이있다. 그리스도를 믿는자는 예수의이 말씀을 통해 십자가를 식별합니다 (마태 복음 10 장 38 절, 마가 복음 8 장 34 절, 누가 복음 9 장 23 절).

    예수 께서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다. "너는 내 추종자가되기를 원한다면, 네가 이기적 인 길에서 돌아 서서 네 십자가를지고 나를 따라야한다." (마태 16:24, NIV )

    기독교 물고기 또는 Ichthys

       Ichthys 기독교 기호는 용어 설명 기독교 물고기 또는 Ichthys. 이미지 © 수에 Chastain

    예수 물고기 (Jesus Fish) 또는 이시스 (Ichthys)라고도 불리는 기독교 물고기는 초기 기독교에 대한 비밀의 상징이었습니다.

    Ichthys 또는 물고기 상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로 확인하고 기독교에 그들의 친화력을 나타내는 초기 기독교인에 의해 사용되었습니다. 이시스 (Ichthys)는 그리스어로 "물고기"라는 단어입니다. "기독교 물고기"또는 "예수 물고기"기호는 물고기의 윤곽을 따라가는 두 개의 교차 호로 구성됩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물고기는 왼쪽으로 "수영"합니다). 그것은 신원을 밝히는 비밀의 상징으로 초기 핍박받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사용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물고기 (Ichthus)라는 단어는 "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의 아들, 구주"라는 약어를 형성합니다.

    기독교의 추종자들은 흔히 물고기가 그리스도의 사역에 나타 났으므로 물고기를 상징으로 식별합니다. 그들은 성경 시대의 필수품이었고 물고기는 종종 복음서에 언급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는 마태 복음 14 장 17 절에 있는 두 개의 물고기와 다섯 개의 빵 덩어리를 곱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가 복음 1:17 절에 "와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되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IV)

    기독교 비둘기

    기독교 기호 용어 해설을 설명합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비둘기는 기독교에서 성령 또는 성령을 나타냅니다. 성령 은 요르단 강에서 침례받을 때 비둘기처럼 예수님 께 내려 왔습니다.

    ... 그리고 성령은 비둘기 같이 육체적 인 형태로 그에게 내려 왔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났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이요, 너와 함께하면 나는 기쁘다." (눅 3:22)

    비둘기도 평화의 상징입니다. 창세기 8 장 홍수 후에 비둘기가 그 부리에 올리브 가지를 가진 노아 에게로 돌아와 하나님의 심판의 종말과 인간과의 새로운 언약의 시작을 나타 냈습니다.

    가시 왕관

     Dorling Kindersley / 게티 이미지

    기독교의 가장 생생한 상징 중 하나는 예수님십자가에 못 박으시기 전에 입었던 가시관의 면류관입니다.

    ... 그리고 나서 가시관을 뒤틀어 머리에 씌워 라. 그들은 오른손에 스탭을 배치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조롱했습니다. "우박, 유대인의 왕!" 그들은 말했다. (마태 복음 27:29)

    성서에서 가시는 종종 죄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가시 면류관은 적합합니다 - 예수 께서 세상의 죄를 담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왕관은 기독교의 고난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 왕의 왕, 그리고 주님의 군주를 상징하기 때문에 왕관도 적합합니다.

    트리니티 (Borromean Rings)

     Borromean Rings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 삼위 일체 (Borromean Rings)를 나타냅니다.

    기독교에는 삼위 일체의 상징이 많이 있습니다. Borromean Rings은 신성한 삼위 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연동 서클입니다.

    " 삼위 일체 "라는 단어는 라틴어 명사 "trinitas"에서 유래했습니다. "trinitas"는 "three is one"을 의미합니다. 삼위 일체는 하나님이 하나라는 믿음을 나타냅니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 님 과 동등하고, 영원한 교제 속에 존재하는 세 분명한 인격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음 구절은 삼위 일체 개념을 표현합니다 : 마태 복음 3 : 16-17; 마태 복음 28:19; 요한 복음 14 : 16-17; 고후 13:14; 행 2 : 32-33; 요한 복음 10:30; 요한 17 : 11 & 21.

    트리니티 (트리 케라)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 트리니티 (Triquetra)를 묘사했습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Triquetra는 그리스도교의 삼위 일체를 상징하는 3 부분으로 구성된 연상 기호입니다.

    세계의 빛

     기독교 기호는 세계의 빛을 용어로 설명했습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성경에서 하나님이 "빛"이신 것에 대한 언급이 너무 많으므로 양초, 불, 램프와 같은 빛의 표현은 기독교의 공통된 상징이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에게서들은 메시지이며, 여러분에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가볍습니다. 그에게는 전혀 어둠이 없다. (요일 1 : 5, NIV)

    예수 께서 백성들에게 다시 말씀하실 때, "나는 세상의 빛이며, 나를 따라 오는자는 결코 어두움에 다니지 않을 것이나,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요한 복음 8:12)

    여호와는 나의 빛 이요 나의 구원 이시라.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할까? (시편 27 : 1)

    빛은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불타는 덤불모세 에게 불꽃의 기둥으로 나타나 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원한 불꽃은 예루살렘에있는 성전에서 항상 켜져 있어야했습니다. 사실 유대인 의 헌신 축제 또는 "빛의 축제"에서 우리는 마카비의 승리와 그레코 - 시리아의 포로 생활 속에서 신성 모독을당한 이후의 성전 재 헌법을 기억합니다. 비록 그들은 단지 하루 동안 충분한 성스러운 기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더 많은 정화 된 기름이 처리 될 수있을 때까지 8 일 동안 그의 존재의 영원한 불꽃을 기적적으로 일으켰습니다.

    빛은 또한 하나님의 지시와 인도를 나타냅니다. 시편 119 편 105 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발에 등불이고 우리의 길에 비춰 진다고 말합니다. 사무엘 하 22 장은 주님은 등불 이시며 어둠을 빛으로 변하게하십니다.

    크리스티앙 스타

    기독교 기호 용어 설명 스타. 이미지 © 수에 Chastain

    데이비드 스타는 두 개의 연동하는 삼각형에 의해 형성된 여섯 개의 별 모양의 별입니다. 하나는 위로 향하고 하나는 아래로 향하게됩니다. 그것은 다윗 왕의 이름을 딴 것으로 이스라엘의 국기에 나타납니다. 유대교와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널리 인식되고있는 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데이비드 스타와도 동일시합니다.

    다섯개의 별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탄생 과 관련된 기독교의 상징이기도합니다. 마태 복음 2 장에서 동방 박사 (또는 현자)는 신생아 왕을 찾아 예루살렘을 향한 별을 따라 갔다. 거기에서 그 별은 베들레헴 으로 예수님이 태어난 바로 그 위치로 인도했습니다 . 그 아이가 어머니와 함께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절하고 경배하며 선물로 선물했습니다.

    계시록 에서 예수님은 아침 별 (계 2:28, 요한 계시록 22:16)이라고 불립니다.

    빵과 와인

     기독교 기호는 빵 & 와인 용어를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빵과 포도주 (또는 포도)는주의 만찬이나 성만찬을 상징합니다.

    빵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영양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날마다 마나를 저장 하시거나 "하늘에서 나는 빵"을 주셨습니다 . 예수님은 요한 복음 6 장 35 절에서 "나는 생명의 떡 이니 나에게 오는자는 결코 주 리지 아니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IV)

    빵은 또한 그리스도의 육신을 나타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께서는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 하셨다. "이것은 내 몸이 너에게 주어 졌음 이니라."(눅 22:19).

    포도주는 인류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쏟아 부은 피의 하나님 언약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누가 복음 22 장 20 절에서 "이 잔은 내 피의 새 언약 이니 너희를 위하여 부어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IV)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그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서 우리를 위해했던 모든 것을 기억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성찬을 취합니다.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자기 점검과 참여의 시간입니다.

    무지개

     쥬타 쿠스 / 게티 이미지

    그리스도교의 무지개는 하나님의 신실 하심에 대한 상징이며 다시는 홍수로 지구를 파괴하지 않겠다는 그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노아와 홍수에 관한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홍수가 있은 후,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무지개를 놓아 노아 와 언약을 맺으셔서 땅과 모든 피조물을 홍수로 다시는 결코 멸망시키지 않으 셨습니다.

    지평선 위로 높이 솟아 오르기 때문에, 무지개는 은혜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충실 함을 완전히 포용하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 를 믿는 신앙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는 일부 소수 영혼들만을위한 것이 아닙니다. 무지개처럼 구원복음 은 모든 것을 포괄하며 모든 사람은 그것을 보도록 권유받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 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임 이니라. 하나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세상을 정죄하지 않으시 고 세상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요한 복음 3 : 16-17, NIV)

    성경의 저자들은 무지개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 구름 속에있는 활 모양처럼, 모든 주위에 밝기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한 것은 주님의 영광을 닮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보았을 때, 나는 내 얼굴에 떨어졌고, 나는 말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에스겔 1 장 28 절, ESV)

    계시록 에서 사도 요한하늘계신 하나님 보좌 주위에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즉시 나는 성령 안에 계셨고, 나 앞에 하늘에 앉은 누군가가 앉아있는 보좌가있었습니다. 그곳에 앉은 사람은 재스퍼와 카네 리안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에메랄드를 닮은 무지개가 왕좌를 둘러 쌌다. (계시 4 : 2-3, NIV)

    신자들이 무지개를 볼 때, 그들은 신의 충실 함,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은총, 그의 영광스러운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의 삶의 보좌에 거룩하고 영원한 존재가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크리스천 서클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을 묘사했습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끝이없는 원이나 결혼 반지는 영원의 상징입니다. 기독교인 부부 의 경우, 결혼 반지 교환은 내재적 인 유대의 외적 표현입니다. 두 개의 마음이 하나로 결합되고 서로를 영원히 충실히 지키겠다고 약속합니다.

    마찬가지로 결혼 계약과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 인 교회 사이의 관계를 묘사 한 것입니다. 남편은 희생적인 사랑과 보호를받으며 목숨을 바칠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의 안전하고 소중한 포옹에서 아내는 자연스럽게 제출과 존중으로 응답합니다. 끝이없는 순환계에서 상징되는 결혼 관계 가 영원히 지속되도록 설계된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모든 영원을 위해 견디게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Agnus Dei)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이미지 © 수에 Chastain

    하나님의 어린 양은 사람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하나님 께서 주신 완전하고 죄가없는 희생 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합니다.

    그는 압제 받고 괴롭힘을 당했지만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살장에 어린 양 같이 인도되었다. (사 53 : 7)

    그 다음날 요한은 예수님 께서 자기에게 다가와서 "보라, 세상 죄를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로구나!"하고 외쳤다. (요한 1시 29 분, NIV)

    그리고 그들은 큰 소리로 외쳤다. "구원은 보좌에 앉으 신 우리 하나님, 어린 양에게 달려있다." (계시 7:10, NIV)

    성경

    기독교 기호 용어 설명 성경입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성경 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생활 수첩입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 - 그의 연애 편지 -는 성경의 페이지에 들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을받은 것이며의를 가르치고, 책망하고, 교정하고, 훈련하는 데 유용합니다 ... ( 디모데 둘째 3:16)

    나는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 때까지, 하나님의 율법의 가장 작은 부분조차 그 목적이 성취 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태 복음 5:18, NLT )

    십계명

    기독교 기호는 10 가지 계명을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십계명 또는 율법은 이집트에서 그들을 이끌어 낸 모세 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입니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구약의 법에서 발견 된 수백 가지 법칙을 요약 한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 및 도덕적 생활을위한 행동의 기본 규칙을 제공합니다. 십계명이야기는 출 20 : 1-17과 신명기 5 : 6-2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와 크라운

      기독교 상징 십자가 및 왕관 용어 설명. 이미지 © 수에 Chastain

    십자가와 왕관은 기독교 교회에서 친숙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믿는 자들이 지상에서의 삶의 고통과 시련 (십자가) 후에 받게 될 하늘 (크라운)에서 기다리고있는 보상을 나타냅니다.

    시련을 견디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시험을 치른 후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삶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 1:12)

    알파 그리고 오메가

     기독교 상징은 알파 & 오메가를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알파는 그리스 알파벳의 첫 글자이고 오메가가 마지막 글자입니다. 이 두 문자는 함께 예수 그리스도 의 이름 중 하나 인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모노그램 또는 상징을 이룹니다. 요한 계시록 1 장 8 절에 나오는 용어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 다"라고 주 하느님이 말합니다, "전능하신 분이 누구 시며 누구이며 앞으로 올 것인가?" 요한 계시록 에서 예수님에 대한이 이름이 두 번 더 나옵니다 .

    "나는 끝났어.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이야. 목이 말린 사람에게는 생명수 샘물을 마시지 않고 마실 것이다."(계 21 : 6 , NIV)

    "나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끝이다." (요한 계시록 22:13)

    예수님에 의한이 진술은 그리스도교에있어 결정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 께서 창조 전에 존재 하셨고 모든 영원 토록 존재할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것도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창조에 참여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상징 인 알파와 오메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을 상징합니다.

    Chi-Rho (그리스도의 모노그램)

    Chi Rho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 Chi-Rho (그리스도의 모노그램)를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치로 (Chi-Rho)는 그리스도를위한 가장 오래된 알려진 모노그램 (또는 문자 기호)입니다. 어떤 이들은이 상징을 "크리스 그램 (Christogram)"이라고 부르며 로마 황제 콘스탄틴 (Constantine) (AD 306-337)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이야기의 진실은 의심 스럽지만, 콘스탄티누스는 결정적인 전투가 있기 전에 하늘에서이 상징을 보았고, 그는 "이 표식으로 정복하십시오."라는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의 군대에 상징을 채택했다. Chi (x = ch)와 Rho (p = r)는 그리스어로 "Christ"또는 "Christos"의 처음 세 글자입니다. Chi-Rho에는 여러 변형이 있지만 가장 일반적으로 두 글자의 겹침으로 구성되며 종종 원으로 둘러 쌉니다.

    예수님의 모노그램 (Ihs)

    Ihs  기독교 기호는 Ihs (예수의 모노그램)를 설명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Ihs는 1 세기로 거슬러 올라간 고대 모노그램 (또는 문자 기호)입니다. 그리스어 "Jesus"의 처음 세 글자 (iota = i + eta = h + sigma = s)에서 유래 된 약어입니다. 서기관은 문자 위에 줄을 쓰거나 줄을 써 약어를 나타냅니다.


    예배와 상징

     

    가. 상징으로 가득 찬 예배 :

    우리가 예배드리는 자리에는 각 종 상징물들이 놓여져 있다. 십자가, 설교대, 성찬상, 세례대, 촛대와 헬라어 알파와 오메가(Α Ω) 혹은 키로(☧) 등이 그것들이다. 예배 봉사자들은 회중과는 다른 복장(vestment)을 하고 있으며, 설교자는 설교대에 올라선다. 그러면 회중들은 선포될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며 조용히 앉아서 귀를 기울인다. 함 께 신앙을 고백하고 주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찬송을 부를 때면 회중은 일어선다. 또 한 기도 인도자가 기도를 드릴 때면 마지막에 반드시 “아멘!”이라는 화답을 하기도 한다. 이런 모든 예배의 내용과 행위들이 사실은 상징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상징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종교적인 내 용과 행위들은 상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상징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상징은 우리 예배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 런데 불행스럽게도 이런 상징이 갖는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예배나 신앙생활에서 상징자체를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그 리고는 상징이 우상처럼 될까 염려가 된다는 엉뚱한 해석을 한다. 상징과 우상을 구 별하지 못한다면, 거기엔 더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교육이 부재하다는 현 실이다. 잘못 이해하고 잘못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상징 이외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해서 눈을 딱 감고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상징의 의미를 제대로 배우는 일 밖에 없다고 하겠다.

    나. 예수님과 성경 그리고 역사는 상징을 창조해 나갔다

    예수님은 상징적인 용어들을 많이 창조하셨다.

    가령 자신을 <선한 목자>(요 10:11),  <양의 문>(요 10:7), <세상의 빛>(요 8:12)과 <포도나무>(요 15:1-5)로 말씀하셨다.
    제자들에게 대부분 비유로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다(막 4:34).
    이런 비유들은 대체로 상징들로 가득 찬 내용들이었다. 천국에 관한 비유들은 상징어들이다. <밭에 숨겨진 보화>(마13:44)나 <진주 장사꾼>(마14:45-46), <씨 뿌리는 농부>(마13:2-8), 그리고 <가만히 자라는 씨>(막4:26-29)와 같은 이야기들이다. 천국을 일상의 말로 소개하거 나 설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들이 땅에서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다른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득불 땅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말씀하 셨던 것이다.

    역시 성경 안에는 상징 언어가 풍부하다. 역사의 여명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 들의 신앙을 상징을 창조해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는 아직 성전도 없었 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없었다. 오직 그들은 상징 언어를 만들어 하나님을 만났 고 관계를 맺었다. 가령,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후 거기에 돌단을 쌓았다. 그리고 거 기에 “하나님의 집” 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창28:10-19). 가령 보통 일반인과 구별 되는 하나님의 사람을 일컫는 <나실인>이라는 사람을 세웠는데, 그들은 머리털을 깎 지않고, 독주를 마시지 않으며, 사체에 손을 대지 않음으로 <나실인>의 지위를 유지 하였다(민6:1-21). 그렇게 함으로 누구든지 그를 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두 려워하였다. 또한 예배를 섬기는 제사장들에게는 특별한 예복(에봇)을 입도록 규정하 였다(출28:1-4).

    이런 상징의 발전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풍부하게 이루어졌다. 가장 오래된 예전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 교회의 성직 서품의식도 7세기 후반기에서야 나타나는데, 거기에 보면 특별한 예복(vestments)이나 목사의 목에 두르는 영대(stole) 같은 것이 없었다.

    이렇듯 상징은 우리로 영적인 것들에게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데 크게 도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상징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이고,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들 의 관심사, 그리고 중요한 기독교의 가르침들을 기억나게 해 준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상징들은 예배드릴 마음을 갖도록 도와준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상징들은 예배 자들의 순례생활에 있어서 필수인 이정표와 같은 구실을 한다고 하겠다.

    다. 상징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 :

    일반적으로 상징이란 의사표현의 한 도구로,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하거나 나타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그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제한적이다. 이렇듯 언어는 무엇인가를 말하지만, 상징은 그것을 나타내 보여준다. 언어가 한계에 부딪히게 될 때, 상징은 말하기 시작한다. 상징이 말하기 시작하면 언어는 침묵을 지킬 수 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을 흔들거나, 반갑게 누군가를 포옹할 수 있다. 물론 이런 행동을 대신해서 언어로 전달한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우리의 삶에서 많은 아름다움이나 색채를 잃게 될 것이다. 말보다는 이상과 같은 상징적인 행동들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존경’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 하고 있는지를 생각할 때, 왠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때가 있다. 그러나 만일 존경의 표시로 <큰 절>을 올려드릴 수 있다. 그 때 언어가 주는 의미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깊은 감동을 전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징들이 신앙생활에 사용 될 때, 얼마나 풍부하고 심오한 신앙으로 이끄는 도구가 되는지 모른다.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이란 무한하고 영원하신 절대자와의 관계맺기 이기 때문에 상징은 가 장 적절한 대화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신앙적인 표현 가운데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 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며, 이런 경우에 상징보다도 더 적합한 도구가 없다고 하겠다.

       어느 예배당 제단 뒤 벽면에는 알파와 오메가란 희랍어 글자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만일 그 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교인이라고 한다면, 예배당에 들어섰을 때, 그는 처음이 되실 뿐 아니라, 끝이 되시는 하나님이 여전히 자 신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생각에(계1:8), 그가 조금전까지 자신을 사로잡고 있었던 온 갖 근심과 걱정들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라. 예배와 관계된 상징의 종류들 : 상징에는 다양한 종류들이 있다.

    첫째, 시간의 상징

    생활의 리듬을 암시해 주는 한 주간(레 23:3),

    언제나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계1:10),

    작은 창조로써 아침(창1:1-31),

    활동과 구별되는 시간인 저녁(창1:1-31),

    수면과 침묵 그리고 죽음으로써 밤(요9:4)이 그런 것들이다.

    둘째,  장소의 상징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행2:46-47),

    세상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나그네의 집(시119:54, 고후5:1-3, 벧전2:11),

    주님의 살고 피를 겸격으로 나누는 제단(마26:26-28),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단,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자리 찬양대석, 등이 그런 것들이다.

    셋째, 상징적인 사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성도(고전1:2-3),

    하나님의 사자(使者)인 목사(딛1:7-9),

    천국 음악으로 섬기는 찬양대원(대하29:25-28),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서 직분자들(고전4:1-2),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돌보는 관리인(대상9:17-27),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넷째, 거룩한 용어

    하나님과 대화인 기도(마6:5-15),

    마음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막8:29),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는 찬송(시95:1-2),

    말없는 기도인 묵상(시19:14, 119:97),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잠30:5-6, 롬3:2, 벧전4:11),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봉헌(시96:8),

    하나님의 은총을 비는 인사(삿6:12, 눅1:28) 등이다.

     

    다섯째, 거룩한 행동

    세례를 기억하는 십자성호,

    화해와 용서로써 악수와 포옹(벧전5:14),

    천국으로 향하는 순례로써 행진(시95:2),

    권위와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로서 안수(막10:16),

    하나님의 은총을 선포하는 강복의 손(민6:22-26) 등이다.

     

    여섯째, 예배를 돕기 위해 준비된 상징

    두 개의 촛대와 촛불은 주님의 두 성품인 신성과 인성(마16:16, 요1:1-14),

    촛불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신 주님의 임재(시27:1, 요1:4-5),

    생명의 근원인 세례대의 물(요한7:37, 행8:38),

    승리를 말하는 깃발(렘50:2),

    예배를 섬기기 위해서 입는 예복(출28:2-43, 삼상2:18),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돕는 오르간-악기(대하29:25-28),

    주님의 사랑의 결정체인 십자가(고전1:18-24) 등이다.

     

    일곱째, 경건한 자세들의 상징

    하나님을 높여 드리기 위한 일어 섬(수7:10, 삼상9:26, 사60:1),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한 앉음(대상17:16-27, 막3:34-35),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무릎꿇음(시95:6, 엡3:15),

    목적지를 향한 걸음(사40:31, 행3:6),

    사람 사이의 교량으로서 인사(눅1:28) 등이다.

     

    여덟째, 거룩한 의미를 전하는 글자의 상징

    신앙고백을 요약한 물고기란 글자(Ιχθυς는 물고기라는 희랍어인데, ‘예수 그리스도 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란 신앙고백의 첫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과 나중 되시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Α Ω(알파와 오메가)
    우리의 구주가 되신 주님을 의미하는 ☧(희랍어 크리스토스의 처음 두 글자)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ΙΗΣ(희랍어 예수의 줄임말) 등이다.

    상징의 특징

    모든 상징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관계하는 매체요, 그것이 바라보는 주체를 섬기는 매체이다. 그런데 이런 상징들은 외적이고 내 적인, 그리고 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징의 외적 특징이라함은, 십자가나 어떤 의식을 집례하면서 행동하는 동작과 같은 유형적인 실재를 말하며, 내적인 특징은 한 집단이 그 상징에 부여하는 해석을 말하며, 영적인 특징이란 개인이나 집단이 외적인 상징과 내적인 의미와의 관련 속에서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말한다. 가령, 십자가는 고 난과 죽음을 외적으로 암시하는 외적 상징과,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해석하는 내적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로써 십자가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주는 영적 에너지를 발산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상징은 이런 특징 외에도, 역설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징은 어떤 사람들 에게는 의미를 분명히 드러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깊은 의미가 감추어진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의 비유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진 의미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런 상징들에 대한 교육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상징은 의미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징들 속에서 살고 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의 실제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상징은 폭 넓게 사용되고 있다. 이런저런 상징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고, 우리의 신앙이 자라날 수 있다.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영적 의미를 전달해 주는 상징이라는 점에서 더욱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상징은 이렇듯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의미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수단이 아닐 수 없다(마13:13-43).

        그런데 문제가 있다.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상징들 중에는 잘 알려지고 이해 되는 것들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상징들이 많이 있다는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상징이 갖는 본래적인 의미를 알지 못할 때 심각한 괴리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상징은 공감대가 형성된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 처음 상징의 의미를 바르고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 자칫 우상을 섬긴다는 오해를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징에 대한 교육이 절실하 다. 그리고 그 상징들을 신앙과 삶에서 나눌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 신앙의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을 여행할때, 대부분의 교회당 지 붕에 큰 장닭 한 마리가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옆에 앉은 아이가 물을 수 있다. “엄마, 저게 뭐야?” 그 때 “저건 말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 했거든(마26:69-75).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장닭이 세 번 울었지. 엄마는 저 장 닭을 볼때마다, 나는 지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자신을 돌아본단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면, 그 아이는 그 장닭을 예사롭게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예배에서 말과 상징의 균형과 전망 :

    예배에서 말과 상징 사이에 균형이 깨지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예배에서 필요이상으로 말을 많이 하려고 하지만, 실제로 전달되는 의미는 그리 많지 못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모국어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에 상징이 서 있을 자리를 잃은 것이다.
    그리스도인도 아니요, 종교인도 아닌 에리히 프롬은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상징적 언어를 우리 각자가 배워야 할 외국어라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배우면, 지혜의 의미심장한 출처 가운데 하나인 신화와의 관계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그것은 내용과 형식에서 전인류에게 공통적이기 때문에 특히 인간적이라고 하는 체험분야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악수와 인사말이 서로 상충되지 않으면서, 서로의 따스함과 의미를 강화시켜 주듯, 언어와 상징행위는 서로를 보완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현대 기독자들이 말의 홍수속에서 살지만 실제로 그들의 마음에 오랫토록 남아있는 말이란 과연 얼마나 될 까?
    오히려 이와같은 우리의 빈약한 언어를 보완해 주기 위해서 상징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면서 함께 공유하고 익히도록 할 때, 지금보다 훨씬 더 풍성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상징의 의미는 마음속에서 잘 보존될 뿐 아니라, 말보다는 훨씬 더 용이하게 기억되는 장점도 있기 때문이다.

    예배에서 말과 상징이 균형을 이루므로 더욱 풍성한 신앙의 의미를 살려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늘 교회 지도자들에게 달린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 자료출처 : https://lutherfriend.tistory.com/6246 [lutherfriend.tistory.com]




    סֵפֶר 스트롱번호5612
    1.

    집필

    2.

    글을 읽거나 쓸 줄 아는 것

    3.

    학문

    발음 [ çêpher ]
    어원
    어미활용 סִפְרִי, 복수 סְפָרִים, 복수 연계형 סִפְרֵי, 5608에서 유래
    구약 성경
    185회 사용



  • 관련 성경
    ☞책(출32:32, 신28:58, 시56:8, 렘36:13), 두루마리(민5:23), 증서(신24:1, 렘32:10,44),편지(삼하11:14, 왕상21:8, 에9:30), 역대지략(왕상14:19, 왕하8:23, 느12:23), 글(왕하5:6, 렘29:29, 나1 : 1), 조서(에1:22, 3:13, 8:10), 일기(에2:23, 6:1, 10:2), 학문(단1:4,17). [동] 기록하다(삼상10:25, 느7:5).

  • דָּבָר 스트롱번호1697
    1.

    2.

    복수로 쓰인 경우

    3.

    약속

    발음 [ dâbâr ]
    어원
    1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1442회 사용
    יוֹם 스트롱번호3117
    1.

    2.

    יוֹם: 낮에

    3.

    날마다

    발음 [ yôwm ]
    어원
    어미활용 יוֹמְךָ ,יוֹמִי, 쌍수 יוֹמַיִם, 복수 יָמִים, 복수 연계형 יְמֵי, 덥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2291회 사용



    4월 29일(화) 열왕기하 14-1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역대지략(14:15)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그 권력과 또 유다 왕 아마샤와 서로 싸운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As for the other events of the reign of Jehoash, what he did and his achievements, including his war against Amaziah king of Judah, are they not written in the book of the annals of the kings of Israel?

    역대지략이란 용어가 구약 성경에서만 35구절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열왕기상 11구절, 열왕기하 22구절, 역대상 1구절, 느헤미야 1구절).

    역대지략이란 이스라엘의 여러 왕대(王代)의 행적을 간략하게 적은 기록으로 성경에 포함된 역대기가 아니라 역대기 저자에 의해 활용된 자료라고 합니다.

    역대지략은 사관들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나 역대기의 편찬자는 바로 이 문서를 이용하여 역대기를 편집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역대지략에는 왕들의 남은 사적들을 기록한 이스라엘 왕의 역대지략(왕상 14:19), 유다 왕의 역대지략(왕하 15:6), 특정한 왕명(王名)이 들어간 다윗의 역대지략(대상 27:4) 등이 있습니다.

    역대지략은 과거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역대 왕들에 대한 기록이라고 한다면 성도들의 행적에 대해서 기록한 것을 "생명책" 또는 "어린양의 생명책"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0:15에서는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에서 생명책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을 말합니다.
    이 책은 구원받은 자들의 이름이 적힌 두루마리입니다.
    이 생명책은 요한계시록 3:5; 20:12과 4:3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 주 예수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기 때문에 이 책을 어린 양의 생명책이라고도 부릅니다(계 13:8; 21:27).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으십시오(빌 4:3; 계 3:5).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면 결코 지울 수 없습니다(계 3:5; 롬 8:37-39).
    진정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삶을 의심하지 않습니다(요 10:28-30).





    역대지략이란 무엇인가? (역대지략의 뜻과 의미)

    왕조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을 간략하게 적은 역사 기록
    이것은 사관들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나 역대기의 편찬자는 바로 이 문서를 이용하여 역대기를 편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성경은 '이스라엘 왕의 역대지략'(왕상 14:29; 왕하 1:18), '다윗왕의 역대지략'(대상 27:24), 그리고 '제사장 가계에 대한 역대지략'9느 12:23)을언급하고 있다

    1. 역대지략에 대해서

    역대지략이란 이스라엘의 여러 왕대(王代)의 행적을 간략하게 적은 기록으로 성경에 포함된 역대기가 아니라 역대기 저자에 의해 활용된 자료입니다.

    이것은 아마 왕국의 사관(史官)들에 의해 기록된 왕들의 국정일지(國政日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왕상 14:19) 분실이 된 관계로 오늘날 전해져 오지 않고 있습니다.

    역대지략에는 왕들의 남은 사적들을 기록한 이스라엘 왕의 역대지략(왕상 14:19), 유다 왕의 역대지략(왕하 15:6), 특정한 왕명(王名)이 들어간 다윗의 역대지략(대상 27:4) 등이 있습니다.

    그외에도 제사장의 가계(家系)와 명부(名付) 및 여러 가지 기록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 역대지략(느 12:23)도 있습니다.


    2. 밧세바에 대한 다윗의 맹세에 대해서

    다윗이 밧세바에게 했다는 맹세, 즉 솔로몬에게 왕좌를 물려주겠다는 맹세는 성경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는 다윗이 실제 그런 맹세를 하지 않았음에도 나단이 다윗의 연로함과 기억이 희미한 것을 이용하여 계략을 꾸민 것이라고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대상 22:9에 의하면 솔로몬을 향한 하나님의 선택이 이미 있었음이 분명하고, 열왕기상 1:28-30에서 보듯이 다윗이 즉각적으로 수긍과 대응을 한 것을 보면 기억이 희미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비록 다윗이 밧세바에게 맹세를 한 기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할지라도 다윗이 그런 맹세를 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따라서 나단은 하나님의 뜻과 달리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는 위기 상황에서 다윗 왕으로 하여금 맹세를 재확인하고 이를 공식적으로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 밧세바에게 이같이 권면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역대지략(Book of the annals of the kings)

    역대 왕들의 역사기록을 말한다(왕상 14:19, 29; 15:23; 대상 27:24; 느 12:23).
    이것은 지금의 ‘역대상·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분실된 문서로, 왕국의 사관들에 의해 기록된 문서로 여겨지고 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왕의 역대지략’(왕상 14:19; 왕하 1:18 등), ‘유다 왕의 역대지략’(왕상 14:29; 왕하 8:23), ‘다윗 왕의 역대지략’(대상 27:24), 제사장 가계에 대한 ‘역대지략’(느 12:23) 등이 언급되고 있다. 

    역대지략(sepher dibre hayyamim)

    역대지략(sepher dibre hayyamim)이라는 자료는 지금은 망실되었다고 한다.
    문자적인 의미는 세페르 디브레 하야밈[날마다의 사건의 일]라고 이해할 수 있다.
    역대지략(Book of Chronicles)은 문자적 의미는 '날마다의 사건의 일'로서, 왕국의 사관들에 의해 기록된 왕들의 국정일지, 또다른 말로 '왕조의 역사기록'을 가리킨다.
    현재의 역대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오늘에는 분실된 문서로, 열왕기의 편찬자가 역대기의 편집에 쓴 문서이다.
    그 실물은 분실되고 남아있지 않지만 본래는 2종의 역대지략이 있었다.

    (1) 이스라엘왕의 역대지략

    ㆍ왕상 14:19,15:31,16:5,14,20, 27, 22:39

    ㆍ왕하 1:18,10:34,13:8,12,14:15, 28, 15:11, 15, 21, 26, 31

    (2) 남쪽 유대왕의 역대지략

    ㆍ왕상14:29,15:7,23,22:45

    ㆍ왕하 8:23,12:19,14:18,15:6, 36, 16:19, 20, 21:17, 25, 23:28, 24:5

    이들은 상세한 기록이었는데, 열왕기 편찬자는 그의 사관(史觀)에 따라 정리하여  이용했다.
    또한 특정 왕명이 들어간 '다윗왕의 역대지략(대상 27:24)', 제사장 가계와 명부 및 여러가지 기록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 '역대지략(느 12:23)'도언급되어있다.

    역대지략은 왕국의 사관들에 의해 기록된 왕들의 국정일지를가리킨다.
    현재의 역대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오늘에는 분실된 문서로 열왕기의 편찬자가 역대기 편집에 쓴 문서이다.
    그 실물은 분실디고 남아 있지 않지만 본래는 2종의 역대지략이 있었다.
    왕하 1:18, 10:34, 13:8, 12, 14:15, 28, 15:11, 15, 21, 26, 31.

    생명책


    1. [시편 69: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2. [빌립보서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3. [요한계시록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4. [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5. [요한계시록 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6. [요한계시록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7.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8.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요한계시록 20:12(개역개정)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하나님의 최후 심판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죽은 자'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인류 전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easley-Murray).
    2. 첫째 부활을 오직 순교자에게만 제한함으로 본절에서 나타난 죽은 자는 불신자들과 순교하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주장한다(Mounce).
    3. 첫째 부활을 그리스도에게만 충성을 다한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하여
    본절에 나타난 죽은 자는 오직 하나님을 대적한 불신자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add, Johnson).

    이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심판을 받기 위해 보좌앞에 선 자들에게는 두 종류의 책이 펼쳐져 있다.
    여기서의 두 책 중에서 첫번째 책인 행위를 기록한 책이 믿는 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행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불신자들의 행위만을 기록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Johnson).

    책들이 펴 있고...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 첫번째 책은 다니엘 7:10을 반영한 것으로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진다.

    다니엘 7: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으니 곧 생명의 책이라.
    - '생명책'은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과는 달리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다(출 32:32, 33; 단 12:1; 눅 10:20; 빌 4:3). 


    출애굽기 32:32-33 /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다니엘 12:1 /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누가복음 10:20 /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빌립보서 4:3 /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이 책은 오직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만이 열수 있는 책이다(3:5. 13:8. 21:27).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에게 충성한 자들만이 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암시한다(Ladd).
    두 책, 즉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과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함으로 구속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 사이에는 인간의 행위와 믿음이라는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상 아무런 문제가 발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위는 그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Johnson).

    생명책이란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20:15에서는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에서 생명책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을 말합니다.
    이 책은 구원받은 자들의 이름이 적힌 두루마리입니다.
    이 생명책은 요한계시록 3:5, 20:12, 4:3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 주 예수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기 때문에 이 책을 어린 양의 생명책이라고도 부릅니다(계 13:8; 21:27).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으십시오(빌 4:3; 계 3:5).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면 결코 지울 수 없습니다(계 3:5; 롬 8:37-39).
    진정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삶을 의심하지 않습니다(요 10:28-30).

    요한계시록 20:11-15에 묘사된 백 보좌 심판은 불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심판입니다.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은 이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계 20:12-14).
    경건하지 못한 자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으며,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들의 심판은 확실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3:5를 어떤 사람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증거"라고 말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3:5의 약속은 주님께서 그 이름을 지우지 않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기는 자는. . .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여기에서 말하는 이기는 자는 세상의 유혹과 시험, 악을 이긴 사람으로 구속받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며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부분에서 때로 혼돈을 일으키는 구절은 시편 69:28입니다.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여기에서 말하는 “생명책”과 어린 양의 생명책을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다윗은 천국의 영생이 아니라 이 땅의 육체적 생명을 가리켜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2:32-33에서 말하는 “책”도 다윗이 언급한 책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기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알고 계시며 그들의 이름을 책에 영원히 기록하셨습니다.


    생명책과 어린 양의 생명책은 어떻게 다른가요?

    신약 성경에는 '생명책'에 대한 8개의 구절이 있고(시 69:28, 빌 4:3, 계 13:5. 8. 17:8. 20:12. 15. 21:17).
    2개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생명책을 언급합니다(계 13:8, 21:27).

     
    생명책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고,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기와 함께 일한 사람들을 일컬어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적혀 있다고 말했습니다(빌립보서 4:3).
    여기서 다시 생명책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얻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요한계시록 3:5도 주를 믿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생명책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적 삶의 시험을 이겨낸 사람들이며, 구원의 진실성을 증명한 사람들입니다.
    이 구절은 또한 생명책에 이름이 적히면, 예수님이 결코 그 이름을 지우시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다시 한 번 영원한 보장에 대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이 부분에서 교회를 향해 말씀하고 계신 우리 주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자기 사람들을 시인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와 반대로 요한계시록 20:15은 생명책에 이름이 적히지 않은 사람들의 운명, 즉 영원한 불못에 대해서도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 13:8과 21:27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 받은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들어 있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당신의 희생을 통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생명책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들이 바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자들이며 (요한계시록 21:10),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 영원히 거하게 될 자들입니다.
    생명책이 어린 양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므로, 생명책과 어린 양의 생명책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월 28일(월) 열왕기하 11-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을 수리하라(12:5)

    제사장들이 각각 아는 자에게서 받아 들여서 전의 어느 곳이든지 퇴락한 것을 보거든 그것으로 수리하라.
    Let every priest receive the money from one of the treasurers, and let it be used to repair whatever damage is found in the temple.

    전을 수리하라(repair the temple)

    요아스(Joash)는 일곱 살에 남 유다 왕국 제8대 왕이 되어 40년을 치리하였으며 그의 중요한 업적은 성전을 수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아스는 남왕국 유다왕 아하시야의 아들이었습니다.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왕의 혈족들을 전멸시키려 할 때 요아스의 고모 여호세바에 의해서 6년 동안 성전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남국 유다왕 아하시야의 아들(B.C.837-800).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왕의 계통을 전멸할때 어린 요아스는 고모 여호세바에게 구원을 받아 6년간 성전에서 숨어 자랐다(대하 22:11).
    그 후 왕이 되자 아달랴와 바알의 제사장 맛단은 죽임을 당하였다.
    바알의 산전을 파괴하고 여호와의 성전이 수축되었다.
    그러나 대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은 후 타락하여 진언하는 스가랴(여호야다의 아들)를 성전에서 돌로 쳐 죽였다(대하 24:20-22).

    열왕기하 12장은 대체로 요아스의 왕권 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왕권 강화라는 주제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신앙 교육을 받았지만, 변질되는 신앙의 모습을 통해 이스라엘의 죄악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생각됩니다.
    변화는 좋은 것이지만, 변질은 역시 나쁜 것으로 나타납니다.

    요아스의 지시대로 대제사장 여호야다는 제사장들과 함께 성전 수리를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갑니다.
    우선 성전 수입에 관한 규칙을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 문 앞에 궤(헌금함)를 놓고 먼저 채워지는 것을 계산하여 밀봉하고 성전 맡은자의 손에 넘겨 성전 수리하는 사람과 재료를 위해 사용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재정의 투명성을 위해 만들어 놓은 장치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재정을 투명하게 하기 위해 아무리 좋은 시스템을 갖춰놓는다고 해도 쓰는 사람이 투명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15절에는 다소 놀라운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여러 규칙을 통해 제사장들이 성전 수입에 손을 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뜻 밖에도 은을 일꾼에게 주는 사람과 회계하지 않는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성전을 수리하는데 일꾼들에게 정확한 돈 계산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듯보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지만, 조금 넓게 생각해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일꾼들은 자신들이 받을 사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고, 일꾼에게 사례하는 쪽에서는 최선을 다해 일꾼을 섬기는 것에 노력하는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 44~47절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성령을 통해 초대교회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나누는 데 어색함이 없었습니다.
    "주고 받는" 사탄의 법칙이 아닌,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는" 하나님의 법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섭섭하고 서운한 감정이 생기는 것은 '본전 생각'이 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를 예로 들어볼까요?
    사역지가 없으면 "사역지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사역지가 생기면 "사례비 없어도 된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라고 생각하면서 섭섭한 감정을 드러냅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죠. 취직만 해도 좋겠다고 했다가 시간이 흐르면 첫 본전 생각나는 것이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망각의 은혜'를 찾아야 합니다.
    내가 헌신한 것에 대해서는 빨리 잊고, 누군가로부터 받은 것이 있다면 길게 기억하세요.
    그래야 이웃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내가 헌신한 것을 잊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헌신을 잊게 되면 섭섭한 '감정'이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뒤틀리게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요아스의 종교 개혁에 협조합니다.
    자신들의 기득권과 재산권을 다 내려 놓고 자신의 삶 보다도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개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돈, 권력, 이성 문제에 대해 초월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제사장들(그리고 레위인들)은 오랜 시간 요아스의 개혁을 따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왕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성전 수입만으로는 살아가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위치가 '부'를 축적하는 자리가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요아스의 개혁에 (싫든 좋든) 협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최선을 다해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사람들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내가 할 일은 무엇인지 찾아보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헌신은 누군가의 강요가 아닌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 해야 할 사명입니다.
    오늘도 주님 앞에서 제사장들과 같이 새로운 개혁을 일으키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아스의 유다 통치

    남왕국 유다의 제8대 왕으로서 통치한 요아스의 영성에 대한 평가와 그의 치세하에서의 종교적, 정치적 상황 그리고 그의 죽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종교적 사역은 제사장 여호야다의 섭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요아스의 의로운 통치력을 나타내지만, 후에 언급된 그의 정치적 사업은 불신앙적 범죄로서 악정을 행했다.
    본장의 내용은 요아스의 선정과(1-3절), 성전 수리를 명하는 요아스(4-8절), 그리고 수리되는 성전(9-16절) 및 아람 왕 하사엘의 침입과 요아스의 최후가 기록되어 있다(17-21절).
    요아스 왕은 처음엔 성전 수리를 제사장들의 소관 사항으로 그들에게 맡겼는데, 후에는 왕 자신이 직접 주도하여 전국민적 운동으로 전개시켰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업적이다.

    요아스는 태어나자마자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아달랴의 손에서 극적으로 구출되었고, 또한 감격스런 즉위식을 치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아달랴로부터 왕권을 빼앗아 즉위한 요아스는 흐트러져 있는 유다를 다스려 재정비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리하여 요아스 이후 근 100년 기간 동안 유다는 평온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 요아스의 40년 통치

    요아스는 역대 유다의 왕들 중 가장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7세에 즉위하여 40년 간 유다를 통치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모부이자 은인이요,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생존한 기간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올바로 행동하였습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가르침에 힘입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는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점차적으로 여호와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경우에도, 이들은 바알의 제단을 훼파했으나 여호와가 금지한 산당에서 제사하는 행위는 계속 행하였습니다.
    아마도 다른 왕들처럼 요아스도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율법에서 금한 죄악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a. 계속되는 백성들의 죄악(왕하 14:4)
    b. 여호와께 대한 일시적인 순종(수 24:31)

    2. 요아스의 성전 수리 명령

    요아스는 성전을 수리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바알을 숭배하는 아달랴가 통치하던 6년 동안 성전이 많이 파손되고 손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아스는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이 성전에 헌금으로 바치는 각종 은을 모아 수리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계획을 제사장들에게 알리고, 헌금된 은으로 성전 수리를 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a. 여호와의 전에 드린 헌금(왕하 22:4)
    b. 자원함으로 드리는 헌물(출 35:5)

    3. 요아스와 제사장들의 합의

    성전 수리에 대한 왕의 명령은 그가 통치한 지 23년이 되기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요아스 왕은 제사장들을 불러모아 성전 수리 작업에 진전이 없음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새로운 계획을 제사장들에게 제안하였습니다.
    즉 백성들이 직접 성전 수리 헌금을 내되 이를 제사장들이 관여하지 못하고, 또한 성전 수리 책임도 제사장에게 부과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다만 모든 것을 성전 수리 실무자들이 담당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아스의 제의에 제사장들은 흔쾌히 수락하였습니다.

    a. 성전 수리에 게으른 백성들(학 1:2)
    b. 전을 건축하라(학 1:8)

    4. 요아스의 성전 수리

    성전 수리를 위한 헌금

    대제사장 여호야다는 요아스의 명령대로 구멍 뚫린 큰 나무 궤짝을 성전 문 옆에 두었습니다.
    백성들이 성전 수리를 위한 헌금으로 은을 가지고 와서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들은 이 은을 궤짝 구멍에 넣었습니다.
    그 궤짝이 다 채워지면 왕의 비서와 대제사장이 이 은을 계수한 후 성전 수리의 감독자에게 그 은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면 감독자는 성전 수리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목수와 건축하는 자, 미장이, 그리고 석수들에게 정직하게 인건비를 지불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는 성전 수리를 위해 필요한 각종 재료들을 샀던 것입니다.

    a. 연보궤(막 12:41)
    b. 성전의 수리(왕하 22:5-6)

    정직하게 쓰여진 헌금들

    백성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성전 수리를 위해 헌금을 바쳤습니다.
    이러한 헌금이야말로 거룩한 재물이었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헌금이 거룩하고 정당하게 쓰여져야 함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성전 수리 감독자들은 모든 일들을 신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어떠한 부정 축재도 하지 않고 정당하게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일꾼들에게 지불하였던 것입니다.
    자연히 일꾼들도 열과 성을 다하여 성전 수리에 힘을 썼고 성전은 하루가 다르게 복원되어져 갔습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이 부지중에 범한 죄와 이웃에 대한 과실을 사함받기 위해서 드린 속건제의 은과 속죄제의 은은 성전 수리하는 것에 드려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예물들은 제사장들의 생활 보장을 위해 제사장들에게 돌리도록 조치하였습니다.

    a. 헌금으로 만든 성전의 그릇(대하 24:14)
    b. 여호와의 성물(레 15:15-16)

    5. 요아스의 죽음

    1) 하사엘에게 조공을 바친 요아스
    아람의 하사엘 왕은 나신의 세력을 극대화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여세로 유다의 해안을 따라 침공해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블레셋의 도시 중에 하나인 가드도 공략하여 점령하였습니다. 이 같은 하사엘의 침략은 이제 유다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사엘은 유다를 공략하기 위한 전위대를 예루살렘에 파견하였습니다. 이에 다급해진 요아스는 하사엘의 환심을 사서 위험을 모면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보물들을 하사엘에게 조공으로 바치게 되었습니다. 요아스는 왕실 내의 보물들과 성전 안에 있는 모든 금들, 그리고 선조들이 구별하여 여호와께 바쳤던 모든 신성한 성물들을 하사엘에게 다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사엘은 자신의 군대를 철수하였습니다. 결국 요아스 왕은 왕궁 내의 모든 보물들과 자신의 생명을 맞바꾼 꼴이 되었습니다. 이는 요아스가 점차적으로 여호와를 떠난 결과로 나라가 약해졌으며, 이 같은 고초를 당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a. 아람 왕 하사엘(왕하8:12)
    b. 앗수르에 바친 조공(왕하17:3)

    2) 요아스의 죽음
    하사엘에게 조공을 바친 요아스의 행적은 백성들에게 반감을 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또한 요아스가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성전 뜰 안에서 쳐죽인 행위는 백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따라서 요아스에 대한 적대감이 날이 갈수록 팽배해져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아스는 실라라는 지역으로 가던 중 밀로 궁에서 자신의 신복들에 의해 암살을 당하였습니다. 요아스를 암살한 장본인은 바로 요사갈과 여호사바드이었습니다. 이들이 왜 요아스를 암살했는지 분명히는 모르지만 스가랴를 죽인 것에 대한 보복 내지는 왕의 잘못된 통치에 반감을 가졌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요아스는 다윗 성에 장사되었고 유다의 왕위는 요아스의 아들인 아마샤가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a. 암살되는 요아스(대하24:25)
    b. 밀로 궁(삼하5:9)

    결론
    요아스 왕의 통치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죽음을 기점으로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여호야다의 가르침에 힘입어 성전을 수리하는 등 의욕적인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야다의 죽음과 함께 요아스의 신앙도 곤두박질하였습니다. 그 또한 하나님을 멀리하며 선지자 스가랴를 살해하는 등의 악행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요아스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아 하사엘에게 조공도 바치고 끝내는 신복들에게 죽음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단어해설

    1절. 예후의 칠년. 북왕국 이스라엘을 통치한 예후의 7년.

    3절. 산당. 이방인들이 바알이나 아스다롯을 섬기던 장소. 보통 산이나 구릉의 정상에 있었으며 그곳에 높은 단을 쌓아 제사를 드렸음. 이스라엘 백성도 가나안에 정착하여 이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이방의 우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음.

    4절.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은. 일종의 종교세로 정규적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임.

    5절. 아는 자. 성전에서 헌금을 계산하고 관리하는 담당 회계사.

    6절. 퇴락한. 원어 <qd<B,:베데크>는 건물의 '갈라진 틈'을 가리키는 말로 예루살렘 성전이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오랫동안 방치되었음을 나타냄.

    8절. 응락하니라. '오다, 나타내다, 동의하다'를 뜻. 입술로만 승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행동으로 동의하는 것.

    10절. 계수하여. 원래는 '담다'라는 뜻. 고대에서는 화폐를 개수로 세지 않고 무게를 달아서 계산하였음. 봉하고. 원어 <rWx:추르>는 '속박하다, 포위하다, 동여매다'라는 뜻. 본문에서는 자루에 넣어 묶는 것을 의미.

    15절. 회계하지. 숫자를 나열하거나 계산함.

    16절. 속건제의 은. 성전에 바치는 헌금의 일종.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지은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돈.

    17절. 아람. 셈의 다섯 번째 아들인 아람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 이스라엘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가졌음.

    18절. 구별하여. 원어 <카다쉬>는 '성결하다, 거룩하게 봉헌하다'를 의미.

    20절. 밀로.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한 성으로 요새로 쓰였음.

    신학주제

    성전 수리 사역 / 본문에는 요아스가 행한 종교 사역 중에 가장 큰 사역인 성전 수리가 언급되어 있다.
    그는 즉위 후에 첫 사역으로 아달랴의 통치로 인해 훼손된 예루살렘 성전의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해 성전 수축을 명하였다.
    그러나 본문은 1차 수축의 실패와 그 대책, 그리고 백성들의 자발적인 헌신으로 완결되는 2차 수축의 전모를 기록함으로써 제사장들의 사명감 결여가 그 원인이었다는 암시적인 표현과 함께, 성전 수축이 왕의 지휘와 계획하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왕의 사역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성전 수리 사역이 왕과 백성들의 협력으로 성취되었다는 하나님 나라의 보편성과 전체성을 엿볼 수 있도록 해준다.

    영적교훈 /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은 그 외형상에 있어서는 별 문제가 없는 것같이 보였으나, 솔로몬 사후 예배에 대한 생각과 여호와께 대한 신앙의 문제는 점차 약화되어 성전이 없던 사사 시대에 성행하였던 산당 예배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여호람 왕이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따라 바알 숭배까지 허용했기에 그 심각성은 더욱 깊어 갔다.
    이러한 때 일어난 요아스의 성전 회복 운동은 바알 숭배로 말미암아 멀어져 있던 백성들의 신앙을 다시 여호와의 전으로 돌이킨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처럼 성도들도 각자의 삶 속에서 요아스와 같은 신앙 회복 운동을 꾸준히 일으켜야 될 것이다.

    요아스의 성전 수리(열왕기하 12:1~8)

    7세에 남왕국 유다의 왕이 된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자신을 교훈하는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합당하게 행하였으나, 산당은 없애지 않아 백성들이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향하였습니다.    
    요아스는 성전의 부서진 곳을 수리하기 위해 제사장들에게 백성들로부터 직접 예물을 받아 성전 수리에 사용하도록 하였으나 제사장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백성들이 직접 성전을 수리하는 자들에게 드리게 합니다. 

    1. 성전을 수리하는 요아스(1~5절)

    예후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된 지 7년째 되던 해에 요아스가 (남왕국 유다)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40년을 다스렸습니다.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여호와 보시기에 합당하게)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산당은 없애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습니다.
    요아스가 제사장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성전에 거룩하게 바치는 모든 은, 곧 각 사람이 통용하는 은이나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이나 개인이 자원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드리는 모든 은을 제사장들이 각각 아는 사람에게서 받아들여  성전의 어느 곳이든지 파손된 것을 발견하면 그것으로 수리하라”하고 말했습니다.

    각 사람이 통용하는 은(4절) :
    직역하면 ‘각 사람이 지나갈 때 내는 돈’이라는 뜻으로 모든 사람이 의무적으로 내는 세금 같은 돈을 뜻합니다.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은 반 세겔을 냅니다(출 30:11~16).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4절) :
    각 사람이 성전에 바치는 성전세로 20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는 은 50세겔, 여자는 은 30세겔을 바칩니다(레위기 27장).

    자원하여 여호와의 전에 드리는 은(4절) :
    각자 자원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감사예물입니다.

    각각 아는 사람에게서 받아들여(5절) :
    위의 세 가지 헌금을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직접 거둬들이라는 것

    제사장을 책망하는 요아스(6~8절)

    그러나 요아스가 왕이 된 지 23년이 지나도록 제사장들이 성전의 부서진 곳을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요아스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다른 제사장들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성전의 부서진 곳을 수리하지 않았느냐?
    이제부터는 너희가 아는 사람에게서 은을 받지 말고, 그들이 성전을 수리는 데를 위하여 직접 드리게 하라.”
    그래서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돈을 직접 받지도 않고, 또 성전 수리하는 일을 맡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우리의 몸 = 성전 + 장막(고전 3:16-17. 고후 5:1-5)

    I. 우리의 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교우들 가운데 건강이 안 좋으신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 차례의 수술 때문에 얼굴도 야위고 몸도 야윈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창세기 2: 7에 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에게 주어진 심판 중에 하나가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3: 19 말씀을 다같이 찾아서 읽어봅시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니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우리가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흙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병마로 온몸이 일그러진 분들이나 숨을 거둔 분들의 시신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육신(SOMA)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우리의 몸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기독교는 육신은 무조건 악하고 영혼은 무조건 선하다는 영육 이원론(DUALISM)을 배격합니다.
    사실 초대 교회를 가장 큰 위기에 몰아넣었던 이단 종파도 이와 같은 이원론에 빠졌던 영지주의자들(GNOSTICS)이었습니다.
    이들은 물질로 만들어진 육체는 악하고 오직 영혼만 선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연약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성육신론(INCARNATION)을 거부해버렸습니다.

    영지주의와 달리 우리 기독교는 육체를 긍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역시 우리와 똑같이 썩어질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육체가 겪어야 할 고통을 그대로 남김없이 당하셨다고 믿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우리 인간의 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주목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고린도 후서에 가서 바울은 인간의 몸을 장막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성전'과 '장막,' 이 두 가지 비유(METAPHOR)야말로 우리 몸의 속성을 그대로 말해줍니다.

    II.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우리의 몸을 성전으로 비유했을까요?
    이 문제를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몸을 온갖 더러운 쾌락에 내맡긴 채 그릇되게 사용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는 항구 도시로서 아주 부유한 상업 도시였습니다. 대개 항구 도시가 그렇듯이 고린도는 온 세상이 알아주는 향락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희랍어 'CORINTHIAZOMA'라는 말은 '고린도인처럼 행하다'는 뜻인데 '매춘 행위를 하다'는 뜻으로 널리 쓰여졌다고 합니다. 그만큼 고린도는 음란 행위가 일반화된 도시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음행에 젖어 몸을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몸이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역설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세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① 성전은 하나님의 영이 계시는 거룩한 곳이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여러분, 성전의 제일가는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 성전에 계시는 것 아닙니까?
    거룩한 장소로 성별하셔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곳이 성전이 아닙니까?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몸을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채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몸은 어떤 주인을 모시고 사는가에 따라 그 주인을 그대로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존귀하신 주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존귀한 몸이 됩니다. 세상의 정욕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추한 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전이 성령의 전이듯이 여러분들의 육신이 성령의 지배를 받게 하십시오! 거룩한 영을 따라 움직이는 거룩한 몸이 되게 하십시오!

    ② 성전은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함이 아닙니까? 하나님께 각종 예물과 희생 제물을 드리며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장소가 성전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위하여 봉사하는데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12: 1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러분의 몸은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성전임을 잊지 마십시오!

    ③ 성전은 하나님의 소유이다.

    성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아무리 인간이 공을 드리고 고생을 해서 성전을 건축했다고 할지라도 성전의 주인은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면 우리 몸의 주인도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몸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이 제것인양 함부로 자기 맘대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군인이 훈련에 빠지기 위하여 잔꾀를 부렸습니다.
    자신의 새끼발가락에 자해를 입혀서 고장이 나게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이 병사의 잘못을 알아낸 상관이 영창에 보냈는데 그 죄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국가 기물 훼손죄'였습니다.
    군인은 몸 전체가 국가를 위해 바쳐진 몸인데 그 몸을 훼손했으니 국가 기물을 자기 맘대로 파손했다는 것이지요.

    성전의 주인이 하나님이듯이 우리 몸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6:19-20을 보십시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우리의 몸을 사셨습니다. 죄와 사탄의 지배하에 있던 우리의 몸을 엄청난 값을 치르시고 하나님의 소유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멋대로 하나님의 소유물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술이나 담배나 마약과 같은 나쁜 것으로 우리 몸을 축나게 해서는 안됩니다. 음행이나 노름이나 오락에 빠져 하나님의 성전을 악의 소굴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늘 건강하고 아름답고 경건하게 가꾸고 사용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롬 6: 12-13에서 주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옳습니다. 여러분의 몸이 하나님의 것이매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십시오!

    그런데 이렇게 우리의 몸이 거룩한 성전인데 병에 걸리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왜 툭하면 질그릇처럼 깨질까요? 왜 늙어서 쇠약해지고 결국은 싸늘한 시신이 될까요? 바울 선생에 따르면 그 이유가 우리 몸의 또 다른 속성, 즉 장막이라는 사실에 있다는 것입니다.

    III. 우리의 몸은 장막이다

    바울은 고후 5:1-5에서 부활 후에 우리가 영체(SPIRITUAL BODY)로 변형될 것이라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신비하고도 신령한 몸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 땅위에서의 우리의 몸을 '장막,' 즉 '텐트'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이 장막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뜻할까요?
    세 가지 장막의 속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① 장막은 영구용이 아니라 임시용

    유목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막 생활을 했습니다. 가축들이 풀을 뜯어먹을 수 있는 목초지를 찾아 이곳 저곳 장막을 치며 떠돌아 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주택과 달리 장막은 언제나 일시적이었습니다. 한 곳에 장막을 쳐 놓고 일평생 그곳에 몸담아 사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장막은 영구용이 아니었습니다. 임시용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몸이 장막이라는 것도 우리의 몸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유한합니다. 일시적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아무리 아름답고 건강한 육체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언젠가 늙고 일그러져 보기 싫을 날이 오고 쇠약해질 날이 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산이나 사막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중세의 신비주의자들은 사람의 해골을 옆에 놓고 그 해골을 쳐다보면서 자주 관상(觀想)에 빠졌다고 합니다. 인생무상을 깊이 체감하기 위해서였지요.

    여러분, 여러분의 몸은 장막처럼 일시적입니다. 영구하지 못합니다. 아침에 잠깐 보이다가 금방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약 4: 14). 풀의 꽃과 같이 허망한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십시오!   

    ② 장막은 연약하다.

    그 옛날 바울이 살았을 때의 장막은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볼 때 그리 튼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비바람이 칠 때 많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눈보라가 몰아칠 때 추위가 장막 안에까지 미쳐서 사람들이 덜덜 떨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장막이라는 사실 역시 우리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지 않습니까? 우리는 장막처럼 기후와 지형 조건에 'VULNERABLE,'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에 왜 병마가 찾아오고 노쇠가 찾아오고 죽음이 찾아옵니까? 우리 몸의 또 다른 속성, 장막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우리 몸을 성전처럼 거룩하고 깨끗하게 잘 관리했다고 할지라도 장막인 이상 온전할 수 가없습니다. 연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또한 인정하십시오!

    ③ 장막은 언젠가 거두어서 무너질 날이 온다.

    장막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무엇입니까?
    목적이 있어서 장막을 세웠다면 그 목적이 다 끝난 다음에는 반드시 해체하게 되어 있는 것이 장막이 아닙니까?
    한국에서 운동회를 하거나 마을의 큰 행사가 있을 때 꼭 큰 텐트를 여러 개 쳤습니다.
    그러다가 행사가 다 끝나고 사람들이 돌아갈 때가 되면 그 많은 텐트를 하나도 남김없이 거두어버리고 맙니다.

    우리의 몸이 장막이라고 하는 사실도 꼭 이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인 우리의 몸을 통하여 영광 받으실 일이 다 끝날 경우 우리의 몸은 거두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땅에 있는 장막집, 곧 우리의 육체가 해체되면 하나님께서 직접 지으신 하늘의 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위에서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질 때 훨씬 더 좋고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거룩한 하늘의 집, 즉 신령한 부활의 몸으로 바꾸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진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거룩한 하늘의 집으로 변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IV. 맺음말

    인간이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저주받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신 선물이 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성전을 더러운 것으로 채우는 사람은 신성모독죄를 범하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을 학대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불경죄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으면 여러분의 몸을 거룩하고 아름답고 건강하게 잘 관리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십시오! 성전을 성전답지 못하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몸을 성전처럼 잘 관리했다고 할지라도 장막과도 같이 무너질 날이 올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장막처럼 영구하지 못합니다. 연약합니다. 모든 목적이 다 달성될 경우 반드시 해체할 날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땅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의 신령한 집으로 다시 세워질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고전 16: 52-53에서 바울 사도가 말씀한 것처럼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겠고,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서 신령한 몸으로 변화가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부활의 소망을 마음 속에 간직하시고 오늘 우리 몸에 찾아오는 가지가지의 고통을 잘 이겨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성도의 몸(에베소서 4:1-16)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어있다. 영혼 없는 몸은 짐승과 같고 몸 없는 영혼은 귀신과 같다. 영혼만 귀중한 것이 아니라 몸도 같이 귀중하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구하려 십자가를 지셨지만 삼일 만에 부활하실 때는 몸으로 부활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한다. 사람의 몸은 약 71%가 물이고 18%의 탄소, 4%의 질소, 2%의 칼슘, 2%의 인, 1%의 칼륨, 0.5%의 나트륨, 04%의 염소로 이루어졌다. 그 밖에도 모든 원소, 마그네슘, 아연, 망간, 구리 등이 조금씩 다 들어있다. 이렇게 단순한 물질의 집합처럼 보이는 몸이지만 정교하면서도 조직적으로 많은 일을 한다. 몸이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각 지체들이 각자의 몫을 해주어야 한다. 눈은 눈대로, 발은 발대로, 손은 손대로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소망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몸의 건강이라고 한다. 몸이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소중한 몸의 정체는 무엇인가? 곧 몸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냥 몸을 튼튼하게 유지하는 것이 목표인가? 아니면 몸의 즐거움이 목표인가? 그래서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이 몸의 목표인가? 오늘은 그것을 보려고 한다. 특히 성도의 몸은 무엇을 위한 존재인지를 보려고 한다.

    1. 성도의 몸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30년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몸은 바로를 위한 것이다. 바로는 그들에게 국고성인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도록 했고 이스라엘은 싫어도 해야 했다. 그 몸이 바로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모세가 나타나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했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하나님의 산 시내산으로 인도하고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다. 이제부터 그 몸은 하나님의 몸이 되었다. 2천년 전 예수님이 오셨다. 사탄에게 노예가 되어 우리의 몸은 사탄의 몸이 되었다. 사탄이 시키는 대로 그 몸을 사용하였다. 몸은 사욕과 음란과 악의 도구가 되었다. 그 몸은 죄악의 도구가 되었다. 예수님은 갈보리 산으로 올라가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몸을 샀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하나님의 몸이 되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기 전에는 그들의 몸은 자유롭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결혼을 하면 달라진다. 남자의 몸은 여자의 소유가 되고 여자의 몸은 남자의 소유가 된다. 만약 그 몸을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게게 준다면 이를 간음이라고 한다. 그 몸은 배우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가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몸은 예수님의 몸이고 하나님의 몸이다. 주님은 ‘너는 내 것이라’ 고 하였다. 남자나 여자나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배우자의 부정이다. 이스라엘의 몸은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면 오직 그 몸을 하나님에게만 보여야만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몸을 바알이나 아스다롯 우상에게 보였다. 간음을 저지른 것이다. 결혼을 안 했으면 모르되 결혼은 약속이요 구속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내 몸의 소유자이다. 그 몸으로 다른 신에게 절할 수 없다. 왜 우리가 우상에게 절하면 안되나? 왜 불당에서 내 몸을 굽히면 안되나? 우리가 절에 가서 구경을 하고 불상을 보는 것은 관계없다. 나도 불교국가에 가서 절을 보고 불상을 본다. 그러나 몸을 굽히지는 않는다. 그것이 절에 갔으면 예의라고? 아니다. 결혼한 여자가 남의 집에 방문했다고 그 집 남자에게 내 몸을 주는 것이 예의인가? 아니다. 내 몸은 하나님께만 굽혀야 한다. 아람 나라에 나아만 장군은 나병환자였다. 이스라엘 엘리사 선지자에게 가면 나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담그라고 하였다. 몸을 담그라는 것이다. 나아만은 나았다.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그가 가지고 온 예물을 드리려고 하니 엘리사가 받지를 않는다. 그래서 나아만이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주시면 고국에 돌아가 제단을 쌓고 거기에다 번제나 다른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자 엘리사는 허락한다. 그런데 다만 한가지만 용서를 구했다. 왕이 림몬의 신당에 들어갈 때 내 손을 의지하고 들어가 신당에서 몸을 굽히는데 그러면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내 몸도 굽히게 되는데 그것을 용서해 달라고 한다. 지금 그는 자신의 의사로 굽히는 것이 아니라 왕이 자기 손을 의지하기에 옆에서 도와 주다 보니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엘리사는 허락했다. 나아만이 지금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가? 내 몸은 하나님의 몸이다. 그러니 그 분에게만 내 몸을 굽혀야 한다는 얘기다. 어찌 하찮은 돌이나 나무나 우상이나 돼지머리에 몸을 굽힐 수 있는가? 우리가 일제36년의 치욕적인 식민지배를 받았다. 그 치욕의 역사 속에서 교회도 치욕의 역사가 있었다. 한국교회가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된 평양 대 부흥을 통해 3년 정도의 짧은 시간에 기독교 인구가 3.5배 정도 증가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국 교회의 부흥이 시작되었던 평양이 현재는 가장 심각한 기독교 박해국가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국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장로교는 해방 후 3차에 걸쳐 큰 분열을 일으키게 됐고 이후 사분오열을 거듭하여 지금은 수 많은 교단과 교파로 나누어졌다. 그 근본원인에 신사참배가 있다. 신사참배는 일제강점기에 신도사원인 신사를 곳곳에 세우고 한국인에게 강제로 참배하게 한 일을 말한다. 조선총독부는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인에게 신사참배와 신도신앙을 강요했으며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종교단체들도 일제히 굴복하기 시작해 천주교, 성공회, 성결교, 구세군, 감리교 등 모든 교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장로교 역시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제 27회 총회를 열어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지금 내 몸을 누구에게 굽히라고 하고 있는가? 내 몸은 하나님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굽혀서는 안 된다. 아내든 남편이든 자신의 몸은 배우자 외에는 허락해서는 안 된다. 마귀가 예수님께 와서 ‘네가 내게 몸을 굽히면 이세상을 주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만 경배하라’고 하였다. 왜? 내 몸은 하나님의 몸이기 때문이다. 이번 총회에서도 우리가 그 때 잘못 결의한 것을 회개하자는 헌의안이 들어와 있다. 잘못된 것은 용서받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만큼 그 영혼과 몸을 귀하게 하셨다. ‘너는 내 것이라’ 선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몸이 됨을 한시라도 잊지 말라.

    2. 성도의 몸은 형제의 것이다.

    요1서 3: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셨고 예수님은 친히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많은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였다. 시편 133편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하였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하라’ 고 하였다. 원수라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지 않을 지도 모른다. 형제니까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카인은 형제 아벨을 살해하였다. 최초의 살인이고 그것도 형제살인이다. 형제는 피로써 맺어진 형제가 있고 믿음으로 맺어진 형제가 있다. 우리는 피가 아닌 믿음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한다. 돈은 피보다 진하다고 한다. 그런데 믿음은 돈보다 진하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마지막 만찬을 무척 원하였다고 하였다. 최후의 식사였다. 최후의 식사치고는 빈곤했다. 빵과 포도주가 다였다. 예수님은 빵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잔도 나누어 주셨다. 우리가 성찬식을 할 때 대부분은 목사님이나 장로님이 떡과 잔을 가지고 나누어 준다. 그런데 최초의 성찬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님 양편에 제자들이 각기 여섯씩 나누어 앉았다. 다빈치 그림에는 그렇게 그려 있다. 설사 그렇게 앉지 않았다고 해도 상관은 없다. 예수님께서 빵을 주셨다. 베드로에게 이만큼, 요한에게도 요만큼, 야고보에게도 요만큼 주셨을까? 포도주도 각각의 잔에 이 만큼씩 각각 따로 나누어 주셨을까? 아니다. 누가 복음에 보면 이것을 가져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고 하셨다. 예수님이 일일이 나누어 주시 것이 아니라 한 덩어리의 빵을 둘로 나누어 주시면서 너희끼리 나누라고 하셨다. 내 앞에 빵이 왔다. 내 앞에 포도주가 왔다. 얼마를 떼어야 할까? ‘지금 나는 배가 고파. 누가 배가 고프던 말든 우선은 내가 먼저 받았으니 기회야 이왕 뗄 것 왕창 떼어야지’그렇게 생각하면 맨 나중에 ‘주여, 내 빵은 어디 있나이까?’ ‘주여, 내 포도주는 어디 있나이까?’하고 물을 것이다. 제가 신학교 2학년 때 신대원 전체가 운동장에 모여 성찬식을 한 적이 있었다. 한 400명 정도 이었을 것이다. 그때 시멘트 바닥에 다 앉았다. 그 때는 빵이 아니라 떡을 주었다. 큼지막한 것을 주면 앞에서 떼고 다음으로 넘기면 다음 사람이 떼고 하였다. 그러면 맨 마지막 사람이 뗄 때는 엄청 손때가 묻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런 위생관념 없이 먹었다. 그런데 포도주가 문제였다. 포도주도 조그만 잔이 아니라 대접에다 부어 앞 사람이 마시고 뒤로 돌리면 뒷사람이 마시고 또 뒷사람한테 돌렸다. 그러면 마지막 사람은 얼마나 입을 많이 된 대접으로 마셨을까? 지금 생각하니 위생적으로 문제가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떡은 괜찮은데 포도주를 돌릴 때 우리는 성찬식이니 조금씩 마시고 뒷사람도 생각해야 한다. 신학생은 술을 마시지 못한다. 목사도 그렇다. 그런데 포도주가 오니 조금씩 마신 것이 아니라 어떤 이는 벌컥 마셨다. 그러니 얼마 못 가 포도주가 떨어졌다. 내 포도주는요? 중간에 갑자기 포도주가 떨어져 성찬식 중간에 포도주를 찾는다고 법석을 떨었던 적이 있다. 마지막 만찬은 무엇인가? 떡을 주고 잔을 주시면서 너희끼리 나누라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가족의 탄생이요 형제의 탄생이다. 너희는 형제요 너희는 가족이다. 너희끼리 나누라는 뜻이 그런 뜻이다. 내 몸은 성도의 것이다. 형제가 그런 것이다. 유대교의 한 랍비가 제자들에게 밤이 지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한 학생이 대답했다. "멀리 있는 동물을 보고 그것이 양인지 늑대인지 분간할 수 있는 때가 아닙니까?" 랍비가 대답했다. "좋은 대답이다.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다." 두 번째 제자가 말했다. "멀리 있는 나무를 보고 그 나무가 올리브나무인지 무화과나무인지를 알 수 있는 때가 아닙니까?" "아니다. 정확한 대답이 아니다." "저희는 알지 못합니다. 랍비님 가르쳐 주십시오." "사람의 눈을 보고 그가 형제인지 자매인지 알아볼 수 있을 때, 그 때가 바로 아침이 되는 때이니라. 이를 구분할 수 없다면 아직도 밤이니라." 사람의 눈 속에서 원수의 증오가 아니라, 형제와 자매 됨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는 것은 상대방과 내가 동일화되는 것이다. 그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고, 그의 절망이 나의 절망이 된다. 그런데 그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될 때, 그에게 치유가 시작된다. 그의 절망이 나의 절망이 될 때, 그에게는 희망이 싹튼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이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육체의 한계를 입으시고, 지리적인 한계에도 함께 갇히셨고, 인종적 편견의 고통을 받으셨고, 종교의 억압과 정치의 잔혹함을 함께 겪으셨다. 인간의 죄악의 고통을 함께 당하시고, 인간의 병의 고통에 함께 우셨다. 예수님이 부활했을 때 막달라 마리아가 제일 먼저 예수님을 알아 보았다. 그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만지려고 했을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하셨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형제라 부르신 것이다. 내가 형제로서 너희를 사랑했으니 너희도 형제로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너희의 몸은 형제의 것이라고 한 것이다.

    3. 성도의 몸은 세상을 위한 것이다.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세상에 속한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는 불타는 연기 속에서, 넘치는 홍수 속에서 건져 내신 것이다.
    그런데 누가 다시 불구덩이로, 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가?
    우리는 그 세상에서 건짐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건진 이유가 다시 세상으로 보내시기 위함이었다.
    그럼 우리는 또 세상에서 빠져 버리라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를 다시 세상에 보내신 것은 빠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 아직 불구덩이와 물 속에 있는 자들을 건지려 함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그곳으로 보내면서‘두려워 말라 네가 물 가운데 지날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하게 할 것이요 불 가운데 지날 때에 불이 너희를 사르지 못하게 하리라’ 하였고 ‘내가 세상을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너희를 이리 가운데 보내는 양과 같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 나왔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 세상에 유행 따라 사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하려 가는 것이다.
    주님은 이것이 교회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성도의 몸은 세상과 떨어져 살 수 없다. 세상과 떨어져 살면 어떻게 세상을 구할 수 있는가? 마귀는 세상은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하였다. 그 말씀은 세상은 더 이상 마귀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귀는 예수님께 ‘네가 내게 절하면 세상을 주겠다’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세상을 접수하신 것이다. 등기부등본을 떼어보면 마귀의 이름에는 줄이 그어졌고 새로운 이름 예수 그리스도가 쓰여져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고 하였다. 그 땅에는 이미 이방의 7부족의 족속들이 그 나름대로 문화와 종교와 경비를 하고 저마다 고유의 특성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임자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땅도 아니었다. 그런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고 하였다. 여호수아에게는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 하라 하였고 이 땅과 백성을 다 너희 손에 붙였다고 하였다. 그 세상은 이스라엘의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은 이제 더 이상 마귀의 것이 아니다. 가나안 부족들이 전쟁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선포하였듯이 오늘도 마귀가 우리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귀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으로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였다. 세상은 주님의 것이요 우리의 몸은 세상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접수하려 다시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성공을 최우선으로 삼으려 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최우선 하라.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신다. 내가 세상에서 출세하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는 벌써 세상에 속한 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화평이라 하였다. 어떤 지도자가 젊은이를 위한 잡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우리 중의 한 총명한 젊은이는 자신이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기독교적인 일들에 대해 반대하는 분명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항상 우호적으로 웃는 얼굴이었으며 독선적이 아니면서도 그것을 해냈다. 그가 학생 회장직의 입후보자가 되었을 때 그는 교내에서 춤을 추는 것을 찬성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주머니에 매일의 성경 말씀을 넣고 다니면서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사랑한다고 말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많은 학생들이 그가 매우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어떤 학생들은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그는 2,000명이 넘는 학생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학생 회장으로 당선이 되었다. 한 학기의 임기를 마쳤을 때 학생들은 그가 재선에 입후보하기를 원했다. 그는 그 지역 사회에서 젊은이들의 방종을 배격하는 프로그램에 많은 공헌을 했으며 시 당국으로부터 특별한 상도 받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많이 달랐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를 소유하고 있었기에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그의 태도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신을 분명히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내세울 만한 용기가 없었던 다른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는 지도자가 되기에 충분히 강했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모을 능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결국 그는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무릅쓴 그였기에, 그는 우정과 존경을 그리고 대중의 변덕스런 마음에 기초된 것이 아닌 그의 장점에 근거를 둔 인기로 보상을 받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고린도전서 3:16-17)

    구약 시대에는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법궤가 있고,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고 하셨기에 그곳을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성령 하나님은 성도들의 마음속에 임하여 계십니다.
    성령께서 입주해 계신다는 것은 곧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의 주인으로 와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아파트에 입주를 하면 그때부터 내가 그 아파트의 주인으로 마음대로 사용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우리 마음에 입주하시면 그분 뜻대로 쓰임 받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귀신이 내 마음에 입주하면 귀신이 시키는 언어와 행동이 있듯이 성령께서 입주하셔서 자리를 잡으면 성령께서 시키는 언어와 행동이 있습니다.

    고전12:3절에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도록 만듭니다. 쉽게 말하면 성령께서 임하시면 '예수님을 가리켜 나의 생명의 주인'이시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고백이 신앙을 좌우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서는 우리 몸이 거룩한 성전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입니까? ⑴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며, ⑵주의 성령이 우리 몸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고후4: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질그릇과 같다고 합니다. 질그릇은 ⑴볼품이 없습니다. ⑵깨어지기 쉽습니다. ⑶우리 인생을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질그릇 속에는 보배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보배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또 하나는 '진리의 복음'입니다.
    ▶고후6:9절 이하를 보면,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지 자"라고 했습니다.
    ▶고후4:10절에 이 보배를 전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 복음전파를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복음전파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복음전파는 세상말로 장난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몸이 거룩한 성전임을 깨닫고 우리 몸을 잘 보존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1. 우리 몸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몸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자기 맘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 몸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주인을 위해 주인이 원하는 곳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내 것이라 생각하는 자체도 문제고 내 맘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내 것이라고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몸입니다.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아무렇게나 살다보면 죄의 도구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우리가 우리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에도 치명타를 가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멸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죄를 멀리해야 우리 몸이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죄가 멀어질까요?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아야 합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2. 내 몸을 학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몸은 우리 영혼의 그릇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 몸이 늘 건강을 유지하기를 원하십니다. 잘 관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을 해하는 도구로는, ▶몸의 과로는 성전을 더럽히는 죄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7일 중에 하루를 쉬어야만 살수 있도록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술을 마시는 것은 주의 영이 성전 삼고 계신 내 몸을 더럽히는 행위이며,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3. 남의 몸도 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성전이면 다른 사람도 성전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학대해서도 아니 되고 ▶미워해서도 아니 되며 ▶살인은 제일 큰 죄악입니다.

    4. 어떻게 하면 성령을 내 안에 영원히 모실 수 있습니까?

    ▶순결해야 합니다. 성령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나의 마음에 모시기는 했으나 내 마음 한 구석에 죄가 있다면 성령은 근심하고 괴로워하시다가 떠나가고 맙니다.
    ▶화목해야 합니다. 성령은 화목의 영입니다. 부모님을 주안에서 평안히 모시는 가정, 형제간에 우애가 있는 가정은 화목한 가정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의 화목을 이뤄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임을 ▶모셔들이고 ▶환영하고 ▶영접해야 합니다.

    5. 성령께서 오신 목적은 평강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워 문을 닫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20:19, 21, 26)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평강이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하고(고후5:20), 형제와도 화목해야 합니다. 평강이란 화목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고린도는 어떤 도시였나?

    뿔이라는 뜻을 가진 고린도.

    “스파르타커스”의 본고장 또한 바로 이곳,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고린도와 이웃한 도시국가, “스파르타(Sparta)”였습니다.

    지금은 비록 인구3만 명의 작은 시골이지만, 고대 고린도를 그리스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국가 중의 하나로 만든 참주(僭主) 페리안더(Periander)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상업이 번성하여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도시로 번영하다 보니 여러 인종들이 많이 모여 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동서 문화의 생활 습성과 또 여러 신들을 믿던 그네들의 종교가 서로 뒤엉켜 혼잡을 이루었던, 인구 60만명의 큰 도시가 되였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 후서”를 써서 고린도 교회로 보내던 로마 시대에는, 번창한 항구 도시가 다 그랬듯이 고린도 역시 심한 빈부의 차이와 부유층의 퇴폐적인 생활로 악명이 높은 곳이 되었지요.

    고린도에는 아프로디테(Aphrodite, 영어로는 Venus)”라는 여사제가 있어, 600피트나 되는 아크로고린도(Acrocorinth)라 부르는 산상에 신전을 지어 놓고는 무려 1,000명이나 되는 무녀들을 거느리며 고린도를 찾아온 뱃사람들을, 또 신들을 숭배한다는 미명 하에 사람들을 불러 드려 온갖 음탕한 짓들을 다 자행하였기에 고린도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음탕한 풍습에 젖게 되어 “고린도 사람”은 “음탕한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로 가자!”하는 말은 남자들 사이에서 “몸 풀러 가자!”라는 말의 은어처럼 사용되였었다고 합니다.  (전 호의 답이 되었나요? ㅎㅎㅎ)

    시시포스(Sisyphus)

    아크로고린도(Acrocorinth)라고 부르는 산에 전해오는 재미있는 신화가 있습니다.

    그리스에서는 "신이 신과 결혼을 하면 신을 낳고, 신이 인간과 결혼을 하면 영웅을 낳고, 신이 동물과 결혼을 하면 괴물을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헤라클레스 같은 영웅도 많았고, 켄타우로스 (Kentauros)처럼 반은 사람이고 반은 말인 괴물도 많이 등장을 합니다.
    영원한 죄수의 화신으로, 현대에까지 잘 알려져 있는 시시포스(Sisyphus)가 바위를 굴려 올려야만 하는 산이 바로 아크로고린도(Acrocorinth)라고 부르는 산입니다.

    고대 코린토스 왕국에서 전설적인 시조로 받들었었던 시시포스는 바람의 신인 아이올로스와 그리스 사람의 시조인 헬렌 사이에서 태어난 영웅입니다.

    호머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시시포스는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들의 편에서 보면, 엿듣기 좋아하고, 입이 싸고, 교활할 뿐 아니라, 특히나 신들을 우습게 여긴다는 점에서 심히 마뜩잖은 인간으로, 일찍이 신들의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이기도 하였습니다.

    도둑질 잘하기로 유명한 전령 신 헤르메스는 태어난 바로 그날 저녁에 강보를 빠져나가 이복 형인 아폴론의 소 떼를 훔쳤습니다.
    그는 떡갈나무 껍질로 소의 발을 감싸고, 소의 꼬리에다가 싸리 빗자루를 매달아 땅바닥에 끌리게 함으로써 소의 발자국을 감쪽같이 지운 후, 시치미를 뚝 떼고 자신이 태어난 동굴 속의 강보로 돌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 행세를 하였답니다.

    아폴론이 자신의 소가 없어진 것을 알고 이리저리 찾아다니자 시시포스가 범인은 바로 헤르메스라고 일러바쳤던 것이지요.

    아폴론은 헤르메스의 도둑질을 제우스에게 고발하였고 이 일로 시시포스는 범행의 당사자인 헤르메스 뿐만 아니라 제우스의 눈총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도둑질이거나 말거나, 감히 신들의 일에 오지랖 넓게 끼어든 게 주제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시포스는 제우스가 독수리로 둔갑해 요정 아이기나를 납치해 가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아이기나의 아버지인 강의 신 아소포스는 딸을 찾아 사방을 헤매다가 고린도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시시포스가 다스리던 고린도에는 물이 귀해 백성들이 몹시 고생을 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아크로고린도(Acrocorinth)에 마르지 않는 샘을 만들어 주면 딸이 있는 곳을 알려주겠다고 하자, 딸을 찾는 게 급했던 아소포스는 시시포스의 청을 들어주었고, 시시포스는 그에게 제우스가 아이기나를 납치해 간 섬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소포스는 곧 그곳으로 달려가 딸을 제우스의 손아귀에서 구해내려던 찰나,제우스가 던진 벼락에 맞아 새까맣게 타 죽었다지요.

    자신의 떳떳지 않은 비행을 엿보고 그것을 일러바친 자가 다름 아닌 시시포스임을 알아낸 제우스는 저승 신 하데스에게 당장 그놈을 잡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영웅이자 현명한 시시포스는 저승사자가 당도하자 되레 그를 쇠사슬로 꽁꽁 묶어 돌로 만든 감옥에다 가두어 버렸습니다.
    명이 다한 사람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저승사자가 묶여 있으니 당연히 죽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데스가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제우스에게 고했고, 제우스는 전쟁 신 아레스를 보내 저승사자를 구출하게 하였습니다.
    호전적이고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아레스에게 섣불리 맞싸우다가는 온 고린도가 피바다가 될 것임을 알고 시시포스는 순순히 항복했습니다.

    저승사자에게 끌려가면서 시시포스는 아내에게 자신의 시신을 화장도, 매장도 하지 말고 광장에 내다 버리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고 은밀히 부탁한 후, 저승에 당도한 시시포스는 하데스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눈물로 호소하는 척했습니다.

    "아내가 저의 시신을 광장에 내다 버리고 장례식도 치르지 않은 것은, 죽은 자를 수습하여 무사히 저승에 이르게 하는 이제까지의 관습을 조롱한 것인 즉 이는 곧 명계의 지배자이신 대왕에 대한 능멸에 다름 아니니 제가 다시 이승으로 가 아내의 죄를 단단히 물은 후 다시 오겠습니다. 하니 저에게 사흘간만 말미를 주소서."

    어째 “별주부전(鼈主簿傳 거북이와 토끼)”의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은가요? 

    시시포스의 꾀에 넘어간 하데스는 그를 다시 이승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그 후 왕 노릇하며 오래 동안 잘 살았는데···. 그러나 아무리 영웅이라 한들 어찌 죽음을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마침내 시시포스도 다시 저승사자의 손에 끌려 저승으로 갈수 밖에요.  
    저승에선 가혹한 형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데스는 높은 바위산을 가리키며 그 기슭에 있는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라고 했습니다.
    시시포스는 온 힘을 다해 바위를 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면 바로 그 순간에 바위는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렸습니다.
    시시포스는 다시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데스가 "바위가 늘 그 꼭대기에 있게 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올리면 떨어지고, 또다시 올리면 또 떨어지고….
    그리하여 시시포스는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하는 영원한 죄수의 화신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음행의 원천지인 신전이 있는 산이 바로, 올리면 굴러 내리는 일을 평생 하여야 하도록 형벌을 받은 그 산이라니 흥미 있는 일이 아닌가요?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또 산 위로 힘겹게 오르려는 영겁의 형벌!
    "고린도로 가자!” 라는 말뜻을 다시 한번 헤아려 보는 것이 좋을 것만 같습니다.



    1. 성전 수리를 명하는 요아스

     

     1) 성전을 수리하는 요아스(1~5절)

    요아스는 대제사장 여호야다 덕분에 죽지 않고 살아서 왕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가르침대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갑니다.
    요아스가 왕이 된 후 첫 번째 한 일은 그의 할머니인 아달랴가 망가뜨린 여호와의 성전을 다시 회복하는 일입니다.
    요아스는 제사장들에게 성전의 부서진 곳을 복구할 것을 명합니다.
    성전을 복구하라는 명령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다시 회복하라는 명령과 같은 것이니 이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이었습니다.

    성전복구를 위한 요아스의 구체적인 명령(4~5절)

    요아스는 제사장들에게 성전의 부서진 부분을 복구하라고 명하면서 그 복구 비용을 다음 세 가지의 헌금으로 충당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각 사람이 통용하는 은(4절)
    모든 사람이 의무적으로 내는 인두세(人頭稅)와 같은 성격의 헌금입니다.
    출애굽기 30:11~16을 보면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할 것 없이 모두 동일하게 반 세겔을 낼 것을 규정하였습니다.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4절)

    이것은 각 사람이 성전에 바치는 성전세로 20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는 은 50세겔, 여자는 은 30세겔을 바치도록 되어 있습니다(레 27장)

    자원하여 여호와의 전에 드리는 은(4절)

    이것은 오늘날의 감사헌금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하는 자가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입니다.

     각각 아는 사람들에게서 받아들여(5절)

    여기에 십일조가 빠진 것은 십일조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활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다 왕 요아스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헌금을 성전 복구비로 충당하도록 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제사장들이 각자 아는 사람들에게서 받아서 그것을 성전 복구비로 충당하라고 명했습니다.
    이것은 아달랴로 말미암아 바알 신앙이 남왕국 유다에 유입되었고, 따라서 헌금 바치는 일들이 많이 느슨해졌으므로 제사장들로 하여금 주변 사람들에게 헌금 바칠 것을 독려하여 성전 보수비로 사용하도록 한 것입니다.

    2. 성전 수리를 하지 않은 제사장들

    23년째 성전 복구가 지지부진하고(6절)

    그런데 요아스가 왕이 된지 23년이 지나도록 제사장들이 성전 복구에 전혀 나서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그 이유가 나와 있지 않으니 잘 알 수 없습니다만, 본문의 문맥을 통해 추정하여 본다면 그것은 이웃에게 독려하여 받아들인 헌금을 자기들이 사용하지 않고 성전 복구비로 내놓아야 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신앙이 좋지 않은 때였으니 십일조가 잘 바쳐졌을 리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제사장들의 삶이 그리 넉넉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그동안 성전세와 자원하여 바치는 헌금 등을 통해서 부족한 살림을 충당하였을 텐데 그것을 모두 성전복구비로 내라고 하니 신이 나지 않은 것입니다.

    제사장 여호야다를 책망하는 요아스(6절)

    그런데 요아스가 그가 왕이 된지 23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이때에 이 말을 한 것은, 이때 그의 나이가 30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는 그의 고모부인 대제사장 여호야가의 섭정을 받지 않고 그가 독자적으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아스는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포함한 제사장들을 불러 성전 수리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책망합니다.

    제사장들이 성전 수리에 열심히 하지 않은 이유 :

    제사장들이 왜 23년이나 성전 수리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을까요?
    본문에 그 이유를 자세히 밝히고 있지 않으나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의 이기심 때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왕의 명령이 없었다면 그 돈은 제사장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갈 돈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성전 복구비로 사용하라고 하니 마음이 상한 제사장들이 이 일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체면 때문

    또 하나는 제사장들에게 그들이 아는 주변 사람들을 독려하여 헌금을 거두라고 한 점입니다.
    제사장 체면에 마치 오늘날의 영업사원들처럼 사람들에게 헌금을 내 달라고 부탁해야 한다는 것이 영 마땅치 않은 일이었던 것입니다.

    ➡ 그러나 이 일은 여호와의 성전을 복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위한 일에 자기들의 이기심이나 체면 따위를 벗어던지고 왕이 명령한 그날부터 온 힘을 다하여서 했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이기심이나 체면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자칫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니다.

    3. 헌금이 성전 수리에 직접 사용되게 하라고 명하는 요아스(7~8절)

    요아스는 제사장들에게 헌금을 걷으라고 하니 그들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을 보고, 생각을 바꾸어서 헌금을 바치고자 하는 자들이 제사장의 손을 통하지 말고 성전을 복구하는 자들에게 직접 가져다주게 하라고 명을 내립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성전을 복구하는데 일체 관여하지 말 것을 명합니다.    
    제사장들 역시 성전이 복구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같은 생각이지만 자기들이 나서서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성전 복구는 일꾼들이 직접 헌금을 받아서 하는 방식으로 하도록 돕습니다.

    ● 묵상 : 먼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이들처럼 자기 이익을 따지면서 하지 마십시오.
    만일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이때의 제사장들처럼 자기 이득을 따져가며 한다면, 주께서도 우리에게 주님의 피의 권세를 거저 주셨던 모든 것을 다시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주께로부터 거저 용서받았고, 거저 구원받았으며, 거저 영광을 얻었는데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 이득을 따진다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신 주님께 할 일이 아닙니다.

    4. 여호야다가 교훈하는 동안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한 요아스(2절)

    그러나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까지 책망하면서 성전 복구를 완료할 것을 명령한 요아스는 그를 살려준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여호야다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요아스는 말씀대로 사는 모든 일을 중단하며 아세라 목상과 우상들을 섬깁니다.
    이에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그 일이 잘못이니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형통치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자, 요아스가 스가랴를 죽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요아스가 그의 부하들의 칼에 맞아 죽게 하십니다(역대하 24:17~27).

    ● 묵상 :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신앙생활을 처음 할 때에는 누군가를 신앙의 롤모델로 삼고 그를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는 신앙에 도움을 주는 자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자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요아스처럼 누군가를 지나치게 의지하면, 혹 그가 실족하여 믿음을 잃어버리거나 여호야다처럼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그와 함께 믿음도 같이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제목

    1. 주님의 일을 할 때 이해득실을 따지며 하지 말게 하옵소서.
    2. 주께서 우리를 먼저 섬기셨으니 우리도 주님을 온 마음을 다해 섬기게 하옵소서.
    3.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이 11장까지는 교리적인 부분을 증거하였는데,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 택하여 주시고, 불러 주시고, 하나님의 의를 입혀 주시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영이 중생하고, 새 생명을 받아 양자가 되게 하셨으므로 오늘 본문에서는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하는가를 권면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인애하심으로 로마서의 수신자들에게 권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행함으로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므로 성도는 항상 그 은혜에 감격하여 그 사랑 안에서 권면을 받아 모든 믿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 택한 백성을 의미하고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 성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성부 하나님께 성도의 몸으로 산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본문에는 산 제물이라고 되어 있는데 산제물은 헬라어 원문의 뜻으로 '희생 제사', 또는 '제사 드리는 행위'라는 뜻입니다.

    성도의 몸은 성령의 전이라고 했습니다(고전 6:19). 그러므로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몸은 육신적인 몸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성령과 중생한 영에게 이용된 마음과 몸을 가리킵니다(살전 5:23).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영과 마음을 드리지 않는 물질(육신)만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사 29:13).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몸으로 산 제사 드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산제물는 육으로 드리는 형식적인 제물이 아니라 마음과 영이 하나되어 드리는 영적 제물입니다. 그리스도와 생명적으로 연합되어 믿음과 순종과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제물입니다.

    여기 제물에는 산 제물이 있고 죽은 제물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제사와 산 제사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제사는 죽은 제사요 아벨의 제사는 산 제사였습니다. 아벨은 그 아버지 아담에게서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는 메시아의 언약을 믿고 희생의 피를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의지하여 구속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시고 산제사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농작물로 제사를 드리는 소제의 제사를 드렸지만 메시아의 언약을 믿고 구속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형식에만 치중하는 불신앙적 제사였기 때문에 죽은 제물, 죽은 제사였고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산 제사를 드리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구비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1).

    하나님은 산 제물로 영적 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그리스도의 언약, 구속 제사를 믿음으로 드려야 하고, 거기에 합당한 제물을 가지고 나가서 제사 드려야 합니다. 아무리 값진 제물을 많이 바치고, 성대하게 제사를 드린다고 해도 성경 말씀에 맞지 않는 제사는 모두 죽은 제사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제사입니다.

    요한복음 4:24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가인이 제물로 드린 곡식은 레위기 2장에 나와 있는 소제의 제사입니다. 성경에 나왔다고 해서 무조건 괜찮다고 하면 안되고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드려야 합니다. 소제를 연구해 보면 이는 반드시 드려야 하는 의무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소제는 첫 이삭이나 곡식으로 제사를 드리고 싶을 때, 제사 드리는 사람이 감사함으로 드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에, 번제와 화목제와 더불어 자원제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드려야 하는 제사가 아니라 누구든지 드리고 싶을 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2장 1절에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이라고 하였습니다. 드리려거든 하는 것은 반드시 드려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속죄제와 속건제는 인간이 죄인이므로 반드시 드려야 하는 의무제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은 반드시 드려야 하는 의무제를 빼먹고 곡식으로 드리는 자원제를 먼저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반면에 아벨은 자신이 죄인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세로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먼저 드려야 할 속죄제사를 드린 것이고 그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신 것입니다.

    성경의 전체이 맥은 구속사입니다. 구속의 주님을 도외시하고 다른 것의 형식을 먼저 취하면 그것은 죽은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은 제사인 헛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사야 1:13에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이 양이나 소의 피를 가지고 제사 드림으로 성경에는 맞는 제사를 드렸으나 그 피가 상징하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통이 없이 의식적으로만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성경에 맞는 예배를 드려야 되고, 또 영적으로 드려야 참 예배가 됩니다. 산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죽은 제사는 기뻐하지 않으시고, 받지도 않으십니다.

    2.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2).

    '이 세대'란 속세를 말합니다. 속세는 더러운 세상을 의미합니다. 타락하고 저속한, 경건을 잃어버린 죄악 세상을 말합니다. 그것을 본 받지 않는 것이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15에는 이 세대를 가리켜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라고 했으며, 마태복음 16:4에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했고, 사도행전 2:40에는 “패역한 세대”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2:16에는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쫓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를 본받는 자는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바울은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갈 6:14). 바울은 세상을 십자가에 못박고 십자가만 바라보고, 자랑하며 달음박질한 것입니다.

    3.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2).

    “마음(νούζ)은 영(πνεύμα)과는 달리 선악을 분별하고, 옳은 것을 계획하고 행하도록 명령을 내리는 기관입니다.
    마음은 영에 속한 것이 아니고 영과 별개의 기관인데 영이 사용하는 기관입니다.
    죽은 영도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이용하여 죄를 범하게 만들고, 중생한 영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믿음을 지키고, 선한 일을 시행하도록 사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려면 인간적인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중생한 영으로 살아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또 진리를 순종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9-20에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멸시하는 자는 마음이 새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4.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2).

    이것은 심령의 변화를 말하고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상한 인격으로 변화되고, 친절한 기쁨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됩니다.
    술 담배 하던 사람이 변화를 받아 끊어버리게 되고, 조상 숭배하던 사람도 그것이 우상 숭배인 줄 깨달아 변화를 받아 끊어버리게 됩니다.
    산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내적으로나 외부적으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5.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2).

    분별하라 원어 δοκιμαζω (도키마조)는 시험하여 갈라놓는 다는 뜻인데 우리는 참진리와 비진리를 시험하여 갈라놓고 비진리는 떠나고 참진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성도는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잘 찾아서 옳은 것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되 희생을 각오하고 몸을 바쳐 나가야 된다.

    성도들이 드리는 예배는 모두가 산제사,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데 육은 끝나는 것으로 죽은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배를 드리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생명과 연합된 산제사, 구속의 진리를 믿고 그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변화의 역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크게 일어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아스의 성전수리 사역(4-16절)


    솔로몬 때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달랴의 악한 통치로 인하여 훼손되었습니다.
    요아스는 훼손된 성전을 회복하기 위해 제사장들에게 성전 수축을 명했습니다.
    여호와의 전에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은 곧 사람의 통용하는 은이나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이나 자원하여 여호와의 전에 드리는 모든 은을 제사장들이 아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 전의 퇴락한 곳을 수리하라고 했습니다 (4-5절).

    은(銀) 은 당시 화폐 거래의 수단입니다.
    여호와의 전에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은은 모세가 한 때 성막을 위해 거두었던 세금입니다(대하 24:6).
    사람의 통용하는 은은 인구조사에 의해 계수된 남자 장정 20세 이상 된 자들에게 부과한 인두세입니다(출 30:13-14).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은 서원하는 자들에게 제사장이 평가하여 징수하는 징수액입니다(레 27:2-8).
    첫 태생을 여호와께 바칠 때 드리는 세금도 여기에 해당합니다(민 8:15-16).
    여호와의 전에 드리는 모든 은은 성소에 바치는 자발적인 헌물입니다(출 35:21).
    그런데 이 돈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각각 자기가 살던 성읍에 가서 잘 아는 사람들에게 받아 와 성전수리를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23년이 지나도록 퇴락한 곳을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아달랴의 우상숭배 정책으로 피폐해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그 돈을 생계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성전의 다른 필요한 기명들을 만드는 데에 사용했거나 믿음이 변질되어 수입이 매우 미미했을 수도 있습니다(13절).
    근본적으로 우상숭배가 횡행한 때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성전 회복에 대한 사명이나 능력이 매우 부족했으리라고 추측해 봅니다.
    여호야다의 권면을 받은 요아스는 성전 수축이 23년 동안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단점들을 보완하라고 다시 명령합니다.

    첫째는 성전수리를 위한 헌금을 직접 하게 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각 성에 가서 아는 사람에게 받아 오라고 했던 것을 이제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거치지 않고 여호야다가 만든 궤를 번제단 옆에 두어, 문지기 제사장들을 통해 직접 넣게 했습니다.
    이 때 만든 헌금궤가 예수님 때까지 사용됩니다.

    둘째 성전 수리를 위한 헌금은 오직 성전 수리를 위해서만 사용하게 했습니다.
    비록 성전 기명이라 해도 성전 수리용 돈은 성전 수리에만 사용하게 했습니다.

    셋째 수리비를 성전 수리를 받은 감독자에게 직접 전달하게 했습니다.
    물론 감독자는 레위인이 맡았을 텐데 건축 담당자에게 직접 주어서 일군을 투입하는데 유용하게 했습니다.

    넷째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생활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속죄제와 속건제 헌물은 제사장에게 주게 했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위한 헌물과 성전수리를 위한 헌물을 구분하여 제사장들의 생계를 유지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조치는 지난번 1차 수축 명령에서 나타난 폐단을 고쳐서 내린 조치입니다.
    그런 지시에 따라 여호야다가 궤를 만들게 해서 구멍을 뚫고, 그 궤를 성전 단 옆에 두었고 대제사장이 그 은을 계수하여 성전 수리를 맡은 자들에게 주고, 그들은 그 은을 성전을 수리하는 목수와 석수와 미장이 등 건축자들에게 곧장 주어 퇴락한 곳을 수리하게 했습니다. (7-16절).

    요아스의 성전수축 사역은 의미가 깊습니다.
    과거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을 이행하기 위해 7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을 만들었습니다(삼하 7:12-13, 왕상 6:38). 그러나 그 성전이 지어진 지 130~140년 가까이 흘렀고 아달랴의 악정으로 인해 많이 훼손되었습니다(대하 24:7).
    그러기에 성전을 수축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회복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아 성전 사역을 잘 완수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성전은 우주적 성전도 있고 지역적 성전도 잇고 개인적 성전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의 성전이든 퇴락한 곳을 수축하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성을 수축하다가 중단한 것처럼, 하박국 시대에 성전을 건축하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넋을 놓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수 시대의 유대 세금

    성경에는 세금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요셉은 이집트인들에게 20%의 세금을 매겼다(창 47:20-26).
    유대인들은 성막을 지을 때 최초로 세금을 냈다(출 30:11-16).
    사무엘이 왕정을 반대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세금 때문이다(삼상 8:14-18).
    이스라엘이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나뉜 이유도 세금 때문이다. 솔로몬이 중과세를 매긴 것은 잘 알려져 있다(왕상 12:4)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세금을 얼마나 냈을까?
    1년 수입이 500데나리온이라고 하면 세금 내역은 다음과 같다(데나리온은 보통 노동자의 하루 품삯).

    십일조 50 데나리온
    3년에 한번씩 두 번째 십일조 (450x10%x1/3) 15데나리온
    첫열매
    들어올려 바치는 것 (500-50)x1/50 9데나리온
    성전세 2데나리온
    총계 76 데나리온 (수입의 15.2%)
    정부에 바치는 세금을 포함하면 28% 정도

    이렇게 수입의 28%나 세금으로 바쳐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마 22:17)라는 질문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이 질문은 무거운 세금에 대한 불만이 반영되어 있다. 헤롯 당시 어떤 물건에는 1,000%의 tax를 부과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종교세를 제외한 세금은 세리가 징수했다.
    1세기에는 로마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금은 로마의 손에 들어갔다. 로마 정부는 각 지역에 유대인들을 세리로 임명하였다. 로마인들을 세리로 파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동네에 같이 사는 사람들은 동네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누구네 수입이 어떤지 훤히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을 통해 더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

    세리는 로마의 앞잡이로 인식되었다. 그들이 거둔 세금으로 로마의 체제가 이스라엘에서 계속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세금이 로마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갈릴리에서 거둔 세금은 갈릴리에서만 사용되었다.

    1998년 한국의 비리 공무원 가운데 80%가 세무 공무원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예수 당시도 지금처럼 세리는 부정이 많았다. 세리들은 거두어야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 일정량만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는 착복했다. 세례 요한도 그들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고 가르쳤다(눅 3:13). 동족들에게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멸시를 받았던 것이다.

    세, 과세(taxation)

    당국이 사람이나 재산에 대해 세(돈, 물품, 혹은 노역)를 부과하는 일. 정부의 공공사업과 공무원, 또한 제사장을 지원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여러 형태의 과세가 있어 왔다.
    고대에 부과되던 세금에는 십일조, 조공, 통행세, 인두세에 더하여 소비재, 수출품, 수입품 그리고 상인들이 그 지역을 통과하며 운반하는 상품에 대한 세금이 포함되었다.

    여호와의 신성한 곳을 유지하기 위한 세금
    신성한 곳의 봉사는 세금을 통해서 유지되었다.
    의무적인 십일조는 아론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주요 생계 수단이었으며, 그들은 적어도 한 번은 여호와께서 규정하신 세에 따라 전리품을 할당받은 적이 있었다. (민 18:26-29; 31:26-47. 십일조 참조)
    여호와께서는 또한 모세가 인구 조사를 한 후에, 등록된 각 사람은 “여호와의 헌금”으로 반 세겔(1.10달러)을 내야 하며 그것은 만남의 천막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모세에게 지시하셨다. (출 30:12-16)
    해마다 인구 조사를 하지는 않더라도, 매년 일정액을 내는 것은 유대인들의 관습이 된 것 같다.
    예를 들어, 여호아스는 “모세가 명한 신성한 세금”을 내도록 요구하였다. (대둘 24:6, 9) 느헤미야 시대의 유대인들은 성전 봉사를 위해 해마다 삼분의 일 세겔(약 75센트)을 낼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과하였다.—느 10:32.

     예수께서 지상 봉사를 수행하시던 무렵, 유대인들은 성전을 위해 두 드라크마를 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이 세금을 내실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받자,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다. 그 후 예수께서는 그 문제를 논하시면서, 왕들은 자기 아들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왕의 아들들은 왕실의 일원이며, 사실 그들을 위해서 세금을 걷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숭배를 받으시는 분의 독생자이셨지만 다른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할 빌미를 제공하지 않으시려고 그 세금을 내도록 조처하셨다.—마 17:24-27.

     통치자들이 부과한 세금 이스라엘에 왕권이 확립됨에 따라, 왕과 왕의 집안사람들, 많은 정부 관리들과 종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가축 떼와 소출의 십분의 일을 포함한 여러 가지 세금이 부과되었다. (삼첫 8:11-17; 왕첫 4:6-19) 솔로몬의 통치가 끝나자, 백성은 강제 노역에 징발되고 정부를 지원하는 데 너무 지친 나머지 솔로몬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르호보암에게 ‘가혹한 노역과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르호보암이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자 열 지파가 반란을 일으켰다.—왕첫 12:3-19. 강제 노역 참조.

     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인들은 또 다른 형태의 세금을 내야 하였다. 일례로, 파라오 느고가 여호야김을 자신의 봉신(封臣)으로 삼고 유다에 무거운 벌금 혹은 조공을 부과하자, 여호야김은 신민들로 하여금 “각자에게 정해진 세율에 따라” 일정한 금액을 내게 하여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왕둘 23:31-35.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던 시대에 유대인들(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롱기마누스에 의해 면제를 받은, 신성한 곳에서 섬기는 제사장들과 다른 사람들은 제외됨)은 세금(아람어, 밋다 혹은 민다), 공세(벨로), 통행세(할라크)를 내야 하였다. (라 4:13, 20; 7:24) 밋다는 개개인에 대한 개인세를, 벨로는 소비재에 물리는 세금 곧 물품세를, 할라크는 여행자들이 도로의 관문이나 강 여울목에서 내는 통행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밋다(느 5:4의 경우 「신세」, AS, KJ에서는 “공세”로 번역됨)는 세율이 상당히 높았음에 틀림없는데, 많은 유대인들이 그것을 내기 위하여 돈을 빌려야 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사람들이 부과한 세금을 내야 했을 뿐만 아니라, 통상적으로 총독을 지원하기 위한 세금도 내야 하였다.—느 5:14, 15.

     기원 일 세기에 유대인들은 세금 납부를 몹시 불쾌한 일로 여겼다. 그 이유는 세금 징수원들 사이에 만연해 있던 부패 때문만이 아니라 세금을 내면 자기들이 로마에 종속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금 징수원 참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은 “카이사르” 곧 “위에 있는 권위”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합당한 일임을 알려 주셨다. (마 22:17-21; 로 13:1, 7. 카이사르 [하느님과 카이사르] 참조)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여러 종류의 세금 중에는 텔로스(간접세, 관세, 혹은 공세; 마 17:25; 로 13:7)가 있다. 또한 켄소스(인두세; 마 17:25; 22:17, 19; 막 12:14)와 포로스(집과 토지와 사람에게 부과된 세금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지는 보다 폭넓은 의미의 단어; 누 20:22; 23:2)도 언급되어 있다.



    구약에서의 세금 종류는 다양하며, 로마 제국 통치기의 유대인들에게는 토지세, 인두세, 재산세, 출입세, 가옥세 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실시하는 헌금의 종류도 38가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는 세금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며,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세금을 얼마나 냈는지에 대한 기록도 있습니다




    대수
    왕조
    이름
    재임기간
    비고
    1
    여로보암 왕조
    기원전 931년~기원전 910년
    초대 북이스라엘 왕이자 에프라임 지파 출신
    2
    기원전 910년~기원전 909년

    3
    바아사 왕조
    기원전 909년~기원전 886년
    나답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름, 잇사갈 지파 출신
    4
    기원전 886년~기원전 885년

    5
    시므리 왕조
    기원전 885년
    엘라를 제거하고 꼴랑 7일짜리왕위에 오름. 상나라 주왕 비슷한 최후를 맞이함
    6
    기원전 885년~기원전 874년
    시므리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름. 그 초기에 디브니의 세력이 오므리의 세력에 도전하다 패망함
    7
    기원전 874년~기원전 853년
    배우자는 이제벨 왕비, 유다에 딸 아달리야를 시집보내 혼인동맹
    8
    기원전 853년~기원전 852년
    유다의 아하시야와 동명이인
    9
    기원전 852년~기원전 841년
    동시대 유다의 여호람과 구별하기 위해 '요람'이라고도 부름
    10
    기원전 841년~기원전 814년
    유다의 여호람아하시야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름
    11
    기원전 814년~기원전 798년 |
    12
    기원전 798년~기원전 782년
    히브리어로는 '예호아쉬'로 표기되어 유다의 요아스와 구별됨
    13
    기원전 782년~기원전 753년
    최장기 재위
    14
    기원전 753년

    15
    살룸 왕조
    기원전 752년
    즈가리야를 제거하고 꼴랑 한달짜리왕위에 오름
    16
    므나헴 왕조
    기원전 752년~기원전 742년
    살룸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름
    17
    기원전 742년~기원전 740년

    18
    베가 왕조
    기원전 740년~기원전 732년
    브가히야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름
    19
    호세아 왕조
    기원전 732년~기원전 722년
    베가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름, 이스라엘 마지막 왕. 아시리아에 압송 억류됨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 재정 운영에 관한 연구
    정중호(계명대)

    . 서론 

    고대 근동 지역의 성전들은 종교적 임무를 수행할 뿐 만 아니라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기능까지 담당하고 있었다. 특히 성전이 왕의 통치와 연관되어 국가의 중요한 일에 깊숙히 관련되어 있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주변 환경 가운데 살아간 고대 이스라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스라엘 역사와 사회상을 연구함에 있어서 왕실 중심의 연구만으로는 역사를 재구성하기 어렵다. 왕실 다음에 중요한 부분은 바로 성전이다. 성전의 실상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성전의 체계 뿐 만 아니라 성전 운영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인인 성전 재정을 파악해야 한다. 본 논문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필요성에 부응하여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 역사를 재구성하는 연구의 일환으로 성전 재정 운영의 실상을 역사적으로 연구하려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 재정 운영을 논의함에 있어서 우선 '성전'의 범위를 정할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건물이 있는 성전이 있었는가 하면 제사만 드리는 소위 '야외 제단(open cultic place)'도 있었다. 또한 왕정시대에 중앙성전이 있었는가하면 '산당'이라 불리우는 지방성전도 있었다. 성전경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주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논의하게 되겠지만 중요한 지방성전인 '산당'도 역시 논의의 대상으로 포함시킬 것이다. 그리고 '야외 제단'에 대해서는 야외 제단의 특성상 남아있는 자료가 부족함으로 간략하게 언급할 수 밖에 없다.
      왕정시대에는 요아스 왕 시대와 요시야 왕 시대의 성전 수리 사건을 중심으로 논의할 것이고 포로 후기의 상황은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논의할 것이다.


    II. 왕의 통치와 성전


      예루살렘 성전은 왕궁 곁에 있으며 왕실의 체플 역할을 하였다. 또한 왕궁과 성전은 일반 백성들의 생활영역과는 별도로 구분된 하나의 통치중심지역인 아크로폴리스(acropolice)를 형성하였다. 성전의 위치만 보아도 성전이 왕의 통치와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남북으로 분열된 후 북왕국 이스라엘의 중앙성전은 벧엘과 단이었다. 벧엘 성전의 제사장인 아마샤는 벧엘 성전을 가리키며 "이는 왕의 성소요 왕의 궁궐이라"(암 7:13)고 하였다. 성전이 왕의 통치기구와 정확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확인해 주는 말이다.
      고대 근동 지역의 통치형태를 살펴보면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신(神)의 소유이며 왕은 신의 대리자로 지상에서 통치하게 된다. 때로는 이집트같이 왕 자신이 신의 모습으로 혹은 대제사장의 신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신의 대리자인 왕은 신성한 신분으로 백성 앞에 나타나며 신적인 권위를 등에 업고 통치를 하게된다.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통합된 이러한 통치형태가 있었던 시대에는 성전이 통치기구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 성전은 왕의 통치를 합법화시키는 역할을 하며 통치에 필요한 세금을 징수하는 창구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왕이 성전을 건축하고 성전을 수리하며 증축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은 승리한 신과 왕의 특권에 속하였다.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도 예외가 아니었다. 왕이 신의 모습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받은 거룩한 신분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통치하였다. 전형적인 왕의 통치시대를 출범시킨 다윗과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위해 준비하였고 또 건축하였다. 그리고 성전건축은 왕의 독자적인 사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계획되고 건설되었다. 성전건축은 단순한 건축사업이 아니라 왕실통치의 청사진이 담긴 사업이었으며 그 의도는 성전건축설계도에 나타나 있다(출 24:12-40:38; 겔 40:1-44:31).
      성전수리도 왕이 주도하였으며(왕하 12:7-17; 22:3-7) 왕권강화와 맥락을 같이 하였다. 요아스와 요시야는 어린나이에 즉위한 왕들이었다. 이들이 청년이 되어 왕권을 강화시키려 할 때 성전수리를 명하였고 결국 왕이 주도권을 쥐고 성전을 수리하였다. 그리고 성전을 수리할 때 성전의 재정을 왕이 관리를 통해 직접 관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성전경제가 왕의 통치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지방 성전인 산당의 경우는 어떠한가? 산당을 비판한 신명기사가도 산당이 왕실에 의해 건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위 '악한 왕' 뿐 만 아니라 '선한 왕'도 산당을 건축하였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예루살렘 제사장을 왕이 임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산당의 제사장도 왕이 임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왕상 12:31; 왕하 23:5). 중앙성소와 마찬가지로 산당 역시 왕실의 통치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산당의 기능 가운데는 세금을 거두는 기능도 있었다.
      성전 경제가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것은 무게와 부피를 재는 각종 단위가 성전에서 사용된 소위 성전단위(sanctuary weight)가 있었다는 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레 5:15; 27:3, 25). 특이한 것은 왕실 재산에 대해 언급하는 곳에도 성전단위만 언급되어 있지 별도의 왕실단위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왕실의 경제와 성전 경제가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움직이고 있다는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반인이 상거래를 할 때는 다른 측정단위가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장사하기 위해 에브론의 밭을 살 때 "상인들이 통용하는 단위"로서 대금을 지불하였다(창 23:16).
      성전이 국가의 재산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장소였다는 것은(왕상 15:18; 왕하 12:1; 18:15) 강대국에 조공을 바치는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강대국이 성전을 약탈하는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성전에 바쳐진 예물들은 성전 창고에 보관되었는데 이 창고는 국가의 재산을 보관하는 역할도 하였다. 약소국가였던 이스라엘과 유다는 강대국의 요구에 의해서 혹은 종주국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서 성전 창고를 열어 그 보물들을 종주국에 바치곤 하였다. 솔로몬 시대의 성전 창고에는 다윗이 드린 것이 보관되어 있었다(왕상 7:51). 이집트 왕 시삭은 "야훼의 전과 왕궁의 보물"을 약탈하여 갔다(왕상 14:26 = 대하 12:9). 유다 왕 아사가 아람 왕 벤하닷에게 뇌물을 바칠 때 "야훼의 전 곳간과 왕궁의 곳간"(왕상 15:18)에서 은금을 취하여 주었다. 또한 유다 왕 요아스는 아람 왕 하사엘에게 "야훼의 전 곳간과 왕궁의 금"을 취하여 조공으로 바쳤다(왕하 12:19).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 성전인 "야훼의 전 곳간"을 헐어 보물을 탈취하였다(왕하 14:14). 유다 왕 아하스는 "야훼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취하여 앗수르 왕 티글랏빌레셀에게 예물을 바쳤다(왕하 16:8).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을 침공한 산헤립에게 조공을 바쳤는데 "야훼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바쳤다(왕하 18:15). 유다 왕 여호야긴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항복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갔을 때 느부갓네살은 "야훼의 전과 왕궁 곳간"(왕하 24;13)에 있는 것을 약탈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갔다. 이러한 본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왕궁에 있는 창고는 물론이요 야훼의 전에 있는 창고의 모든 권한이 왕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전창고에는 때로 왕실의 무기가 저장되어 있기도 하였다.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혁명을 일으킬 때 성전에 있는 다윗 왕의 창과 방패를 분배하는 장면에서 그 증거를 찾아 볼 수 있다(왕하 11:10 =대하 23:9). 또한 도망하는 다윗에게 놉 제사장인 아히멜렉이 성전에 있던 칼을 주는 장면에서도 성전창고에 무기가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삼상 21:10).


    III. 성전 수리 사건에서 나타난 성전 재정 운영


      1. 요아스 왕과 성전 수리


      열왕기하 12장(4-5, 7, 16절)에는 왕정시대 성전에 드리는 헌금 종류가 나타나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헌금은 "야훼의 전에 거룩하게 드리는 모든 은(돈/예물)"(4절)이라 하였다. 즉 은(돈)으로 드릴 수 있는 헌금 종류인 것이다. 제사를 드릴 때 필요한 가축이나 곡식에 대한 언급은 없다. 따라서 이 헌금은 성전세의 성격이 강한 헌금이었다. 이제 그 내역을 살펴보자.


       1) 사람의 숫자를 헤아려 드리는 성전세로써 인두세(人頭稅).
      이러한 성전세는 출 30:11-16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빈부를 막론하고 20세 이상 남자이면, 이스라엘 땅에 살던 혹은 외국에 살던 간에, 각 사람이 생명의 속전으로 반세겔씩 야훼께 드리도록 규정되어 있다. {개역}에는 4절에 "사람의 통용하는 은"이라 번역된 부분이 바로 인두세인 성전세를 말하는 것이다. 히브리어성서(왕하 12:5 - {개역}에는 4절)에서 이 부분 즉 케세프 오베르 이쉬 를 직역하면 "사람이 건너갈 때 드리는 은"이라 번역할 수 있다. 미쉬나에는 양을 헤아려 십일조 양을 선별하는 방법을 제시해 주는데 그 방법은 양을 우리 속에 몰아넣은 후 양 한 마리씩만 통과할 수 있는 좁은 통로를 만들어 놓고 그 통로를 지나가는("오베르") 양 가운데 열번째 양을 십일조 양으로 택한다고 하였다. 짐승에 대한 십일조를 드리는 이러한 관습이 배경이 되어 사람에 대한 성전세를 드릴 때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사람의 수대로 드리는 은"이라 번역하는 것이 적합하다. 신약시대에도 반세겔의 성전세 제도가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마태복음 17:24-27에 의하면 지방인 가버나움에서도 이 반세겔을 거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예수님도 이 성전세에 대해 거부하지 않았다.  


        2) 사람의 성별과 나이에 따라 능력을 감안하여 드리는 성전세
      이 성전세는 레위기 27장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예를 들면 20세 이상 60세까지의 남자이면 은 오십 세겔이요 여자이면 은 30세겔을 바치도록 되어 있다. 이 성전세는 4절에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으로 표현되어 있다.


        3) 자원해서 드리는 예물
      4절에 "각사람이 자원하여 야훼의 전에 드리는 은"이 이 예물을 말한다. 이 예물은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며 성전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바치는 모든 자발적인 예물을 가리킨다.


      "야훼의 전에 거룩하게 드리는 모든 은"의 내역은 위와 같이 세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으며 그 내용을 새롭게 번역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요아스가 제사장들에게 말하였다, "야훼의 전에 가져 오는 모든 은 곧 각 사람의 수대로 드리는 은, 사람들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 그리고 각 사람이 자원하여 야훼의 전에 드리는 모든 은 등을... (왕하 12:4)


      그러면 요아스가 명령한 기본적인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요아스는 4절에 나오는 세가지 예물들 즉 "야훼의 전에 드리는 것"으로 성전을 수리하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왕의 명령을 따라 성전을 수리하지 않았다(6절). 따라서 요아스는 여호야다와 제사장들을 불러 성전을 수리하도록 한번 더 명령하였다. {개역}의 7절 후반절을 보면 마치 백성들이 제사장을 거치지 않고 성전 수리를 위해 예물을 드리도록 명령한 것처럼 되어있는데, 히브리어 성서(MT, 8절)를 보면 제사장들이 "성전 회계로 부터의 은"을 받아 소유하지 말고 제사장들이 성전 수리를 위해 그 은을 내놓도록 되어 있다. 7절 후반절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제 너희들은 너희 성전 회계로부터 은을 취하지 말고 너희들이 성전 수리를 위해서 그것을 주도록 하여라.


      그러나 제사장들은 왕의 명령을 그대로 순복하기 보다 하나의 절충안에 동의하였는데 그것은 제사장들이 백성들로부터의 예물을 받지 않고 제사장들 단독으로 성전 수리도 하지 않는다는 절충안이었다(8절). 다시 말하면 8절의 "백성으로부터의 은"(4절의 "야훼의 전에 드리는 은"과 동일한 것) 즉 세가지의 예물을 제사장들이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동시에 제사장들은 단독으로 성전 수리하는 책임을 벗었다. 그리고 요아스는 제사장의 몫을 분명히 하였는데 배상제사(속건제)의 은과 정화제사(속죄제)의 은을 "야훼의 전에 드리지 아니하고 제사장이 차지하도록 하였다"(16절). 여기서 야훼의 전에 드리는 것과 제사장의 몫을 구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별히 여기서 "야훼의 전에 드리는 것"이란 표현은 성전 창고에 들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왕과 함께 계산해야하는 성전의 재산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자발적인 예물 몇 가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헌금은 왕의 관리와 제사장의 통제 아래 성전 수리를 위해 사용하도록 결정된 것이다.  


      2. 요시야와 성전 수리


      요시야가 성전을 수리한 내용은 열왕기하 22:1-9와 역대기하 34:8-17 부분에 나타나 있다. 여덟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요시야는 청년이 되었을 때(26세) 성전을 수리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때 왕의 명령을 받든 사람들은 서기관 사반과 부윤 마아세야와 서기관 요아하스의 아들 요아였다. 이들은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성전수리를 위해 성전에 바쳐진 돈을 기술자들에게 주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성전에 바쳐진 헌금을 사용하는 권한은 대제사장이 아니라 왕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 그 헌금을 사용할 때는 대제사장이 참여하여 왕의 의도대로 헌금을 사용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왕의 신하들은 왕명을 대제사장에게 전달할 뿐 만 아니라 실제 그 헌금을 사용하는 과정에도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왕의 관리들이 어느정도 개입했는 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성전수리와 같은 특별한 경우에는 상당히 세밀하게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IV. 성전 재정을 운영하는 관리자들
     
     1. 왕정 시대의 성전 재정 관리자
        


    1)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들" - 쇼므레 하사프


      왕정시대에 성전 재정을 관리하는 모습은 열왕기하 12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한 궤를 취하여 그 뚜껑에 구멍을 뚫어 야훼의 전문 어귀 우편 곧 단 옆에 두매 무릇 야훼의 전에 가져오는 은을 다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그 궤에 넣더라. 이에 그 궤 가운데 은이 많은 것을 보면 왕의 서기와 대제사장이 올라와서 여호와의 전에 있는대로 그 은을 계수하여 봉하였다.(왕하 12:9-10)


      예루살렘 성전 문전에 헌금궤를 놓아두고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이 관리하였다. 이 구절에서  "문턱"이라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는 사프이다. "사프"는 성전문 맨 아래를 가로지르는 부분을 가리키며 성전과 세속세계를 분리시켜주는 경계선의 역할을 한다. 보통 바닥 보다는 약간 위로 올라와 비가올 때 물이 안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은 단순한 수위나 경비원이 아니었다.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은 성전의 제사장 서열에서 고위층에 속하는 제사장이었다. 대제사장과 부제사장 그 다음 중요한 인물이 바로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이었다(왕하 12:9; 22:4 = 대하 34:9; 왕하 23:4; 25:18 =렘 52:24; 35:4). 특히 "문턱을 지키는 사람"은 성전에 드린 예물을 수납하여 관리하는 직책을 감당하고 있었는데 요아스 왕 시대와(왕하 12:9) 요시야 왕 시대(왕하 22:4 = 대하 34:9), 그리고 유다 멸망 직전에(왕하 23:4; 25:18 =렘 52:24; 35:4) 이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요아스 시대에는 제사장이라 명시되어 있으나 요시야 시대에는 명시가 없다. 역대기에는 요시야 시대에 레위인이 "문턱을 지키는 자"로 되어 있으며 이들이 전국적으로 예물을 수납하는 직무를 수행하였다.


            저희가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나아가 전에 하나님의 전에 연보한 돈을 저에게 붙이니 이 돈은 문턱을 지키는 레위 사람이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남아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에게서 거둔 것이라.(대하 34:9)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은 성전에 방이 있었으며 예레미야 시대에 그 중 한 제사장의 이름도 나타나 있다. 즉 살룸의 아들 마아세야가 바로 이러한 직무를 수행한 제사장이었다(렘 35:4).
      중요한 점은 성전 문전에 놓여진 헌금함에 담겨진 헌금을 사용할 때는 먼저 왕의 관리와 대제사장이 공동으로 그 금액을 계산하여 성전수리를 위해 지출하였다는 점이다. 성전재정을 왕이나 대제사장이 독자적으로 관리한 것이 아니라 왕과 대제사장이 공동으로 성전재정을 운영 관리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고대 이스라엘에만 국한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앗수르의 성전에도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앗수르의 성전관리에 관여하는 왕의 관리인 마르-이쉬타르(Mar-Ishtar)가 앗수르 왕 에살하돈에게 성전수리를 위해 보고한 편지가 있는데, 이 편지에서 그 관리는 제사장과 왕의 관리가 공동으로 성전재정을 계수하고 지출함을 언급하였다. 열왕기하 12장에 나타난 사건을 볼 때 왕이 성전운영에 대해 명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선 발견할 수 있으며, 왕의 명령과 제사장의 의견이 합치되지 않을 때 왕과 제사장의 의견절충을 통해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다. 여호야다가 채택한 이 절충안, 즉 왕의 관리와 제사장이 공동으로 성전재정을 관리 운영하는 안은 고대 근동의 관습을 차용하여 실시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요약하면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들"은 왕정시대 예루살렘 성전에서 세번째 고위직에 있었던 제사장으로서 성전의 재정을 관리하는 제사장이었다. 이들은 헌금을 거두어 들이는 역할도 하였고 수납한 헌금을 관리하고 지출하는 임무도 수행하였다. 물론 독자적으로 할 때도 있겠지만 중요한 사안에는 왕의 관리와 공동으로 이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들이 포로 후기에도 동일한 명칭으로 활동했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왕정시대 역사를 기술하는 부분에만 등장한다는 점을 참조해 볼 때 왕정시대에 사용한 성전 재정 관리자의 명칭일 가능성이 짙다.    


        2) 성전 회계(temple-teller) - 마카르


      요아스의 성전 수리 사건 가운데 열왕기하 12장 5절과 7절에 나타나는 "아는 자에게서 받아들인..."이라는 구절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5절(MT 6절)과 7절(MT 8절)에서 "아는 사람"이라 번역한 마카르 란 단어는 구약에서 여기에만 나타나는 희귀한 단어이다. BDB사전에는 이 단어가 나카르 란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 명사형의 뜻은 "아는 사람" 혹은 "친구"이다. {개역}은 이러한 분류에 따라 "아는 사람"이라 번역하였다.
      그러나 LXX에는 히브리어 모음이 변경되어 "그의 상업행위"라는 의미로 번역되어 있다. 그레이(J. Gray)는 라스 샤므라 텍스트(Ras Shamra Text, UT 82, 83, 113)에서 mkrm이 제사장과 함께 성전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었던 점에 근거하여 희생제물의 가격을 사정해주고 예물의 정도를 결정해 주는 "사정자 (business assessor)"로 번역하였다. 몽고메리와 게만(J. S. Momtgomery and H. S. Gehman)은 "성전 회계 (temple-teller)"라 보았고 홉스(T. R. Hobbs)는 "수입 (income)"으로 번역하였다. "아는 사람"이라 번역한 것은 "마카르"의 어원을 "나카르"에서 찾았기 때문인데 이 어원은 적합하지 않다. 오히려 "마카르"에서 어원을 취하면 그 뜻은 예물을 평가하고 계수해주는 사람인 "사정자"를 가리키게 된다. 그리고 그 명칭은 "성전 회계"라고 하느 것이 오히려 이해하기 쉬울 것으로 판단되어 "성전 회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요아스 시대의 성전 회계는 제사장의 지휘 아래 성전 재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인원으로 추정된다. 이 인원은 아마도 성전 재정을 총괄하는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의 지휘를 받은 재정 담당 실무자였을 것이다.


      2. 포로후기 성전 재정 관리자


        1) 주조자 - 요체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Darius I Hystaspis) 시대에는 왕이 조공으로 받은 귀금속을 녹여서 토기에 넣었는데 토기에 모두 차면 토기를 깨어 귀금속을 보관하였다. 그리고 필요할 때는 이 귀금속을 잘라서 사용하였다. 동전이 일반화되기 이전, 적어도 주전 300년 이전에는 이러한 방법이 고대 근동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고대 근동에서는 귀금속을 주조하고 보관하는 일을 주로 성전에서 전담하였는데 고대 이스라엘에도 귀금속을 성전에서 주조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특별히 예루살렘 제2성전 시대에 귀금속을 주조하는 것과 관련된 본문이 스가랴에 나타난다.


            야훼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30을 야훼의 전에서 주조자(토기장이)에게 던지고...(슥 11:13)


      {개역}에서 "토기장이"라 번역한 요체르 는 문맥에 맞지 않는다 하여 학자들은 히브리어 단어를 오차르 로 수정하여 "창고/곳간"으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들어 시리아어 역본이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토레이(C. C. Torey)는 70인역(LXX)과 아퀼라역(Aquila) 그리고 심마쿠스역(Symmachus)을 근거로 "요체르"를 귀금속을 주조하는 전문적인 단어임을 주장하면서 히브리어 성서(MT)를 수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토기장이"는 토기를 굽는 과정에서 고도의 열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귀금속을 주조하는 역할을 겸임할 수도 있다. 따라서 MT를 수정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굳이 MT를 수정할 필요가 없으며, 문제는 "요체르"를 어떻게 번역하는가에 있다. 즉 "토기장이"로 번역할 것인가 아니면 "(귀금속) 주조자"로 번역할 것인가 하는 것인데, 문맥상 여기서는 "주조자"로 번역하는 것이 오해를 줄이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귀금속을 주조하는 장면은 열왕기하 12:10에도 찾아 볼 수 있다.


            이에 그 궤 가운데 은이 많은 것을 보면 왕의 서기와 대제사장이 올라와서 야훼의 전에 있는 대로 그 은을 녹여서 계수하고,


    "녹여서 계수하고"라고 번역한 부분은 {개역}에서는 "계수하여 봉하고"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서(왕하 12:11)에는 봐야추루 봐임누 즉 "녹여서 계수하고"의 순서로 되어 있으므로 이 순서를 따라 번역을 시도한 것이다. 여기서 "녹이다"로 번역된 단어의 기본 뜻은 "묶다" 혹은 "만들다" 등의 뜻인 추르 인데 NEB와 NAB 등은 이 단어를 "주조하다/녹이다)"로 번역하였다.  은을 계수할 때 동전이 아닌 경우 무게로 달 수 밖에 없고 이 경우 은을 용기에 담거나 묶어서 저울에 달 수 도 있다. 또 다른 방법은 당시의 보편화된 방법인데 은을 녹여 그 무게를 달게 된다. 히브리어 성서를 그대로 직역하면 "만들어서(묶어서) 계수하고"로 번역할 수 있으며, 귀금속을 "만들 때" 당시의 보편적인 방법을 감안하면 "녹여서 계수하고"로 번역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본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은을 녹여 계수하는 즉 귀금속을 주조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면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요체르(주조자)"는 어떤 역할을 하였으며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 기본적으로 "요체르"는 흙을 구워 토기를 제조하는 토기장이를 가리킨다(사 30:14; 41:25; 64:8; 렘 18:4, 6; 애 4:2; 단 2:41; 대상 4:23). 이들은 높은 열을 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불을 다룰줄 아는 기술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토기 뿐 만 아니라 귀금속을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토기장이만 불을 다룰줄 아는 것은 아니다. 대장장이도 있고 금장색도 있다. 성서에는 철을 다루는 대장장이나 금, 은 등 귀금속을 다루는 금장색 등의 기술자에 대해서는 다른 명칭을 붙이고 있다. 대장장이는 마스게르(왕하 24;14, 16; 렘 24;1; 29:2), 혹은 하라쉬(삼상 13:19; 사 44:12; 54;16) 등으로 부른다. 그리고 금장색(goldsmith)은 초래프(사 40;19; 41:7; 46:6; 렘 6:29; 10;9, 14; 51:17; 느 3:8; 31, 32)로 부른다. 이들 귀금속 주조자들이 성전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여러 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우선 광야에서 성막을 건설할 때 필요로 했던 다양한 금, 은, 동의 기구들을 이들이 제조하였고(출 31:2-6),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성전 기구들을 제조하는데 이들의 기술이 필요하였다(왕상 7:14).
      성전세를 비롯하여 성전에 바쳐지는 귀금속 형태의 예물들을 계수할 때는 토기장이, 대장장이, 금장색 등 누구든지 불을 다룰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 그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기술자는 귀금속을 녹여 일정한 형태를 만들어 성전 창고에 간수하였다. 따라서 왕정 시대에 성전 재정 운영을 담당한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의 지휘아래 귀금속을 계수하고 제조하는 실무자의 역할을 이들이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스가랴 11:13에는 "요체르"가 성전에서 예물을 수납하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요체르"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성전 재정을 관리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왕정 시대에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이 담당했던 기능 즉 예물을 수납하는 기능을 포로후기에는 "요체르"가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포로후기의 성전 재정 관리자는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이 아니라 "요체르"였을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요체르"는 적어도 고위 제사장이어야 이 직무를 성전에서 담당할 수 있었을 것인데 "요체르"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었다는 언급은 찾아 볼 수 없다. 굳이 찾아 본다면 아론이 금으로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을 들면서 제사장이 귀금속을 제조한 예를 들 수는 있을 뿐이다(출 32:4). 스가랴 11:13을 근거로 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요체르"가 성전 재정을 관리하는 중요한 직무를 어느정도 수행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제사장이었는지 혹은 레위인이었는지 또는 평민이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오히려 다음에 논의할 포로후기의 성전 재정 위원회 아래서 귀금속 계수와 관리를 담당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2) 성전 재정 위원회


      왕정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전이든 지방 성전이든 제사장이 성전 재정을 관리해왔다.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이 있기 전에는 지방에서 레위인이 제사장 역할을 하면서 지방 성전의 재정을 관리해왔다. 그러나 요시야의 개혁이 있은 후 예루살렘에 올라 온 레위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사독계열 제사장과 동등한 지위를 얻지 못하고 하위직으로 밀려났다. 이 과정에서 레위인은 성전 재정에 깊이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포로후기에는 느헤미야가 다시 레위인을 등용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하나가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 곧 곳간에 두되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기명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및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느 10:38-39)


    십일조를 받을 때 레위인과 제사장이 함께 공동으로 받고 관리하고 분배하는 것도 서로를 배려하여 시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레위인과 제사장이 공동으로 성전의 재정을 관리하는 모습은 느헤미야 13:12-13에 더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내가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로 고지기를 삼고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으로 버금을 삼았나니 이는 저희가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 그 직분은 형제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느니라. (느 13:12-13)


    십일조를 받고 관리하고 분배하는 일에 제사장과 레위인이 함께 동참하였다. 위에 나타난 명단을 살펴보면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와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 등이 나타난다. 이 가운데 서기관 사독은 이름만 보아도 제사장임을 알 수 있다. 왕정 시대 서기관은 왕의 신하로서 법률적인 일과 왕명을 출납하는 일 그리고 국가 재정을 관리하는 일 등을 담당하였으며 제사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포로후기에는 제사장이 서기관의 직함을 사용하였는데 대표적인 예가 에스라였다(스 7:11). 즉 하나님의 율법을 맡아 율법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서기관 에스라였다. 따라서 서기관이라는 직함이 있어도 사독은 제사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명단에서 하위직을 맡은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은 족보상 레위인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전 재정을 관리한 이들 집단은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느헤미야는 이제까지 제사장이 관리해 오던 성전 재정을 개혁적인 차원에서 레위인도 성전 재정에 관여하도록 조치하였다. 느헤미야 13장에서 주목할 부분은 제사장과 레위인이 공동으로 재정 관리자 집단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느헤미야 시대부터 나타난 성전 재정 관리자 집단을 S. J. Spiro는 느헤미야 13:12-13를 근거로 하베르 라 보았다. 원래 하베르라는 단어는 랍비 문학에 나타나는 단어이며 느헤미야에는 이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S. J. Spiro는 "하베르"의 전단계가 네에만 이라는 명칭의 성전 재정위원회임을 랍비문학에서 밝혀내었다. 바로 이 단어 "네에만"이 느헤미야 13:13에 나타나 있음을 발견하고 S. J. Spiro는 느헤미야 시대 "하베르"가 성전 재정위원회였음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 위원회가 유다 전역에 조직되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이 위원회는 지역의 종교적 정치적 행정적인 역할도 감당하였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J. Schaper는 포로후기의 재정위원회가 종교세 뿐 만 아니라 세속세금도 관리했음을 주장하면서 종교세만을 관리하는 "하베르"가 있었다는 가설에 대해 반대하였다. 또한 이 위원회가 유다 전역에 조직되어 있었을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J. S. Spiro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느헤미야 13장에 나타나는 성전 재정 관리자들의 명칭이 "하베르"였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적어도 이들이 재정 위원회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성전에서 받은 것을 분배하는 일도 하고 있었다. 즉 헌금의 수납과 관리와 분배까지 모두 관장하는 실질적인 재정위원회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3) 레위인 성전 재정 관리자


      성전 창고를 관리하는 레위인 창고지기의 명단이 역대기상 26:20-28에 나타나 있다. 이들은 성전 창고를 관리하는 인원으로 자물쇠와 열쇠를 관리할 뿐 만 아니라 창고에 들어가는 물목과 창고에서 나가는 물목을 계수하고 관리하는 인원이었다. 단순한 창고지기가 아니라 성전 재정을 관리하는 실무자들이었다. 느헤미야 13장에 나타나는 재정 위원들 역시 그 명칭이 "창고지기"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역대기상 26장에 나타나는 레위인 역시 중요한 성전 재정 관리자로 볼 수 있다.
      역대기 기자는 다윗이 이들을 배치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 실상을 살펴보면 역대기 기자가 기록할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 인원 배치 명단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명단을 분류할 때 문맥이 맞지 않는 20절의 아히야 는 수정이 불가피하다. "아히야"는 문맥상 70인역을 따라  아헤헴 즉 "그들의 형제" 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합하다.  레위인들의 명단을 살펴보면, 게르손 자손과 고핫 자손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게르손 자손은 주로 성전 운영과 종교 행사와 관련된 물품이 있는 "야훼의 전 창고"를 담당하였고(21-22절) 고핫 자손은 주로 전쟁에서 노획한 전리품과 야훼의 성전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성물 창고"를 담당하였다(23-28절).
      게르손 자손의 명단을 보면 여히엘리의 아들들인 스담과 요엘이 나타나 있다. 고핫 자손의 명단을 보면 게르솜의 아들 스브엘과, 엘리에셀의 아들들인 르하뱌, 여사야, 요람, 시그리, 슬로못 등이 나타난다.   
      느헤미야 시대에 구성된 성전 재정 위원회와 다른 점은, 레위인들 역시 역대기 기자 시대의 성전 재정을 관리하였지만 제사장과 동등하게 위원회의 일원이 된 것이 아니라 제사장의 지휘를 받으며 성전의 재정을 관리하는 실무자였다는 점이다.  


    V. 포로 후기 성전 재정 운영과 페르시아


      포로 후기의 성전 재정 운영자들이 십일조를 중심한 종교세를 관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포로후기의 상황을 참작해 볼 때 이들이 국가의 세무행정 기능도 담당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포로후기 특히 느헤미야와 에스라 시대에는 정치지도자와 종교지도자의 구분이 없었으며 통합해서 유다 백성들을 이끌고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통제를 받고 있었던 약소 민족인 유다의 역할 가운데 중요한 것은 세금을 거두어 페르시아에게 바치는 일이었다. 십일조와같은 종교세를 받고 있었던 성전이 이 일을 도외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에 있었던 성전 재정 위원회가 종교적인 예물 뿐 만 아니라 세속적인 세금까지 관리하는 일을 담당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J. Schaper에 의하면 당시 페르시아에 바치는 은과 금은 주조소에서 관리할 수 밖에 없었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이러한 주조 기능의 핵심이었으며, 후일 화폐로 통용된 동전을 주조할 수 있는 장소도 예루살렘 성전이었다는 것이다. 페르시아에 바친 세금의 종류에 대해서는 에스라 4:13, 20; 7:24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페르시아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세금으로 보통 은으로 바치는 세금형태인 미다, 노동력의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인두세인 벨로, 토지세인 할라크 등이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페르시아의 세금을 수납하고 관리하는 기구였을 가능성은 크지만 J. Schaper의 주장같이 성전이 국세청이나 화폐주조창의 역할을 전담했다고 주장하기는 이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부족한 형편이다. "요체르"가 성전에 있었고(슥 11:13)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요체르"가 성전에만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는 "요체르(토기장이)"에게 가서 토기를 사기도 하였다(렘 18:2, 3, 4, 6). 다시말하면 예루살렘 성전 외에도 "요체르"가 있었고 페르시아에 바칠 세금을 수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도 논의한 바와 같이 포로후기의 "요체르"는 성전 재정 위원회 아래서 귀금속 계수와 관리를 담당하는 실무자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록 명확한 근거가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십일조가 기본적인 세금이었음을 감안할 때 성전에서 세속적인 세금을 취급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페르시아의 통제 아래 그 영향을 받으면서 성전이 핵심적인 주조소의 역할을 하면서 세속세금의 일부를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VI. 결론


      왕궁과 성전이 국가 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고대 근동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도 왕실과 연결되어 국가 경제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다. 왕이 성전을 건축하였으며 제사장을 임명하였다. 더구나 왕은 성전 수리를 주도하였으며 성전 재정을 관리하는 일까지 관여하였다. 강대국에 조공을 바칠 때 왕은 왕궁의 창고와 성전의 창고를 모두 열어 조공물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왕정 시대 성전 재정 운영에 관한 내용이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 곳은 성전 수리 사건에 관한 기록이다. 유다 왕들인 요아스와 요시야가 왕권을 강화하는 시점에 성전을 수리하였는데 제사장과 협의하는 과정을 거치기는 하였지만 왕의 주도하에 성전이 수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왕은 제사장과 협동하여 헌금을 수납하고 관리하였다. 바벨론 성전의 "왕의 궤(king's chest)"와 같이 요아스도 예루살렘 성전에 "궤"를 마련하여 헌금을 수납하고 왕의 관리가 그 재정 운영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성전 재정을 운영하는 관리자로는 왕정 시대에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들"과 "성전 회계"를 들 수 있고, 포로 후기에는 "요체르(주조자)"와 "레위인 재정 관리자"와 "성전 재정 위원회"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왕정 시대의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과 포로 후기의 "성전 재정 위원회" 등이 성전 재정을 관리하는 고위층이었으며 그 외의 인원들은 재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실무자로 볼 수 있다. 이들은 헌금을 수납하고 계수하여 관리하며 분배하는 일 등을 관할 하였다.
      왕궁과 성전이 하나의 아크로 폴리스 안에 위치해 있으며 "성전단위(sanctuary weight)"를 공통으로 사용하고, 성전 재정의 최종 결정권자가 왕인 점을 감안할 때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이 세속적인 세금을 수납하고 관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명확한 근거가 충분하지 못한 실정이지만 정치와 종교의 구분이 힘들었던 포로 후기에는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전이 세속적인 세금을 관리하는 기능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4월 26일(토) 열왕기하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후는 왕이라(9: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They hurried and took their cloaks and spread them under him on the bare steps. Then they blew the trumpet and shouted, "Jehu is king!

    예후(Jehu. 그가 여호와시다)
    예후는 북 이스라엘 왕(B.C. 842-815 재위).
    제 4 왕조의 창시자이다.
    그는 본래 아람왕을 따랐으나 이스라엘 군대장이 되어 라못 길르앗에서 수리아와 싸웠다(왕하 9:25-).
    이때 여호람이 부상을 입고 엘리사의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으나 예후는 신앙적 인물이 아니었고 수리아에 대항코자 친 앗수르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수리아의 침공으로 예후는 실의의 죽음을 했다(왕하 10:35).


    열왕기하 8장 요약

    엘리사는 수넴 여인에게 7년간의 기근을 경고하고 피신하게 합니다(8:1-2).
    기근 후 그녀는 왕에게 자신의 땅을 돌려받고, 엘리사의 기적이 왕에게 알려집니다(8:3-6).
    한편, 아람 왕 벤하닷은 엘리사를 통해 병의 회복 여부를 묻고, 하사엘이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8:7-15).

    열왕기하 9장 요약

    엘리사는 예후를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붓도록 지시합니다(9:1-6).
    예후는 아합 왕가를 제거하며, 이세벨을 처단하고 아합의 예언된 심판을 이행합니다(9:22-33).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됩니다.

    열왕기하 10장 요약

    예후는 아합의 아들들과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제거하여 이스라엘에서 바알 숭배를 근절합니다(10:18-28).
    그러나 그는 여전히 금송아지 숭배를 유지하여 온전한 개혁에는 실패합니다(10:29-31).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위협에 시달리게 됩니다.


    엘리사는 예후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라는 명을 받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예후는 이로써 하나님께 구별되고 하나님의 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악을 일삼는 오므리 가문을 심판할 명을 받습니다.

    1. 오므리의 가문을 멸하시는 하나님 (9:1-13)

    ​하나님께서 오므리 가문에게 주신 예언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오므리로부터 시작하여 아합과 그의 아들들에 의해 자행된 우상 숭배를 비롯한 악한 일에 대해 갚으시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불러 예후에게 가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십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제자 중 한 청년을 택하여 예후에게 보냅니다. 보내기 전에 기름을 붓고는 속히 그 집을 나오라고 주의를 합니다. 이는 사람을 세우는 일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하십니다(1-3절).

    청년은 엘리사가 명한 대로 예후를 찾아 길르앗 라못으로 갑니다.

    그곳에 모인 군대 장관 중에 예후만 불러 엘리사가 정하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합과 이세벨이 행한 수많은 악한 일을 아시고 그 집안을 심판하시고자 예후를 택하셨음을 알립니다. 예후가 감당할 일은 오직 아합과 이세벨에 속한 심판을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예후에게 기름을 붓고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곧장 도망을 갑니다. 그곳에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사명을 감당할 예후만 남았을 뿐입니다. 예후는 하나님께서 다른 장군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기적을 봅니다(4-13절).

    적용과 결단 (9:1-13)

    ​신자는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세상에 나가 하나님의 원수가 된 마귀의 일을 깨뜨리는 일입니다. 두렵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사명을 주신 분이 그 사명을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신자는 오직 믿음으로 그 사명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달리는 일만 감당하면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명을 받고서 가야 할 그 길을 결코, 포기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1. 하나님께서 예후에게 청년을 보내시면서 그 자리에서 속히 떠날 것을 명하십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봅시다.
    2. 예후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예후는 아합의 집안을 멸절시키게 됩니다. 예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지 묵상해봅시다. 내게 주시는 도전이 있다면 함께 나누어봅시다.


    전쟁에서 부상당한 요람왕은 치료를 위해 돌아갔지만, 예후는 길르앗 라못에 남아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계속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사는 예후를 왕으로 세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속하게 순종하며 제자를 보내서 예후에게 기름을 부으라 명령합니다.

     

    선지자의 제자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1-6)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왕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엘리사가 직접 가서 기름을 부어 예후를 왕으로 세우지 않고, 제자를 보낸 이유는 이 일이 하나님의 명령이긴 하지만, 요람 왕에 대한 모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1). 왕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예후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왕에 대한 반역이기 때문에 은밀하게 행했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전에 엘리야에게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왕상 19:16). 그런데 이 말씀이 엘리사 때에 이루어진 이유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 이후에 아합이 죄를 뉘우쳐서 그 집에 대한 심판이 지연되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제자에게 예후를 찾아 골방으로 들어가서(2) 이 일을 은밀하게 행하고 지체하지 말고 도망치라(3)는 것은 바로 엘리사에게 복귀하라는 명령입니다.

     

    너는 네 주 아합을 치라(7-10) 예후에게 기름을 부은 엘리사의 제자는 그가 해야 할 일들에 관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후를 왕으로 세우시려는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아합의 집의 죄악에 대한 심판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예후는 자신의 주인인 요람 왕을 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요람 왕의 집을 치라”가 아니라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므리, 아합, 아하시아, 요람으로 이어지는 오므리 가문의 왕조 중에서 아합 왕의 죄악이 가장 극심했던 이유도 있지만, 열왕기상 19장 15-18절에 나오는 예언의 성취를 드러내기 위함 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예후가 도구로 선택된 것입니다. 특별히 이세벨의 비참한 최후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시체가 개들에게 먹힌다”(10)는 것은 가장 수치스럽고 비참한 일로써 그녀가 우상 숭배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고,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주목할 것은 아합의 집안에 속한 모든 남자, 그 후손들이나 심지어 종들까지도 완전히 멸절된다는 것입니다(8-9). 여로보암의 집처럼(왕상 15:29), 바아사의 집처럼 말입니다(왕상 16:11).

     

    적용: 내 안에 있는 우상을 제거하지 않으면 ‘아합의 집’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우상을 어떻게 제거하시겠습니까?

     

    예전에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응답하셔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높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꼭 내가 원하는 방법, 방식이어야 할까요? 하나님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신 분임을 안다면 주님의 시간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역사하실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설 교 >

    예후는 왕이라(열왕기하 9:1-13)

    하나님이 오해받고, 왜곡된 대표적인 주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세상에서는 ‘신’의 반대말 또는 비교 대상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신의 주권’이 강조되면 ‘인간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으로, ‘신의 영광’이 강조되면 ‘인간의 수고’가 희생당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신의 뜻을 따르려면 인간의 뜻을 포기해야 하고, 신을 섬기려면 인간은 신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신과 인간은 양립할 수 없는 경쟁대상이기에 신이든 인간이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반대말 또는 비교 대상은 절대로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경쟁대상이 아니고,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반대말은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면 ‘하나님의 책임’이 수반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강조되면 ‘하나님의 역할’이 요청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수고를 밝고서 영광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반응이 나올 수 있도록 인간에게 유익하고 좋은 역할을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인간의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누릴 때에야 인간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과 경쟁상대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주시는 분, 인간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며 충성하시는 분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예후를 ‘왕’으로 기름을 붓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왕’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이 참 다릅니다.

    열왕기서에 이스라엘과 아람의 전쟁이야기가 아합 왕 시대부터 여호람 왕 시대의 불과 30여년 사이에 다섯 번 정도 나옵니다.
    상황적으로는 늘 아람이 우세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늘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아람의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할 것이고 더더욱 원수 같을 것입니다.

    분명히 두 나라는 매우 적대적인 관계인데 왕하 8:7절에서 엘리사가 적국의 지역인 다메섹을 방문하고, 아람의 왕은 엘리사를 불러서 일종의 국가기밀일 수도 있는 자기 병에 관해 질문을 하고, 엘리사는 하사엘이 왕이 될 것을 예언하는 정도로 우호적입니다.

    하지만 국제관계가 변해 8:28절에서 다시 전쟁이 있고 상황적으로는 북 왕국의 왕이 부상을 당하는 등 매우 불리한 상태에서 9장이 전개됩니다.
    일반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단결’과 ‘충성’입니다.
    대표적으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인데 하나님은 이 순간에 새로운 왕을 세우십니다.
    ‘전쟁 중에는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병법의 기초도 모르시는 것일까요?
    엘리사 선지자는 최소한의 애국심도 없는 것일까요?

    만약 전쟁 중에 장수 하나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왕을 바꿀 정도라면 엄청난 인물, 누가 봐도 이 전쟁의 상황을 역전시킬 만한 장수가 등장해야 하고 이 일을 진행하는 사람도 누구에게나 인정을 받을 만한 지명도가 있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늘 저와 여러분의 예상을 깹니다.
    사람들이 나라를 강성하게 만드는 방법과 하나님이 나라를 강성하게 만드는 방법이 원천적으로 다르고, 사람들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과 하나님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이 근본적으로 다르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의 신분이나 역할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왕의 신분이나 역할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진행하는 사람이 그냥 선지자의 제자입니다.
    당시 북왕국은 여호와가 아닌 우상을 섬기고 있어 엘리야와 엘리사 조차도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인데 새로운 왕을 세우는 일을 전혀 비중이 없고 영향력이 없는 사람, 이름조차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기에 세우는 사람이나 세움받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위대한 선지자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의 경우 사울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중요한 역할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기에 매우 하기 싫은 역할이었고, 다윗에게 왕으로 기름을 붓는 것은 사울에게 알려지면 죽을 지도 모르는 매우 위험한 역할이었습니다. 북왕국의 여로보암 왕을 기름부은 것도 매우 평범한 아히야 선지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역사이래 최초로 민족이 분열되고, 지파가 붕괴되고, 나라가 갈라지는 엄청난 순간에 지명도도 없고 존재감도 없고 영향력도 없는 그냥 어떤 선지자에 불과한 아히야가 이 일을 감당했습니다. 이게 성경의 방식입니다.

    새로운 왕으로 세워지는 사람이 예후인데 예후가 어떤 사람인가를 파악할 때 왕으로 세워질 정도의 사람이라면 무엇인가 독특성이 있고, 가능성이 있고, 남들과 다른 우월한 것이 있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예후는 그냥 매우 평범한 장수 중의 한 사람입니다. 2절에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이라고 소개가 되지만 실제로는 님시가 누구인지, 그의 아들이 누구인지, 그의 손자 여호사밧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5절에 의하면 전쟁터에 군대장관들이 모여 있는데 예후는 유일한 장군도, 뛰어난 장군도, 대장군도 아니고 그냥 여러 군대장관들 중에 하나입니다. 11절에 장수들 간의 대화가 소개되고 있는데 정황으로 볼 때 예후가 대표가 아닙니다. 만약 예후가 높은 사람이었다면 아랫사람들이 높은 사람에게 발생한 일에 대해 묻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더군다나 질문한 사람들의 표현이 매우 거친 것으로 보아서 예후는 그들 중에 하급 장교인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상황을 정리해보면 매우 평범한 선지자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매우 평범한 장군 중의 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고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비 된 사람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의 방식입니다.

     

    3. 예후는 왕이라

    예후가 왕으로 세움을 받자 조금 전까지 자신들의 동료 또는 자신들의 부하였는데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여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예후를 높이고 스스로 자기들을 낮추었습니다.
    저들에게 왕은 권세요, 신이 선택한 사람, 신이 점지한 사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요, 이스라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하나님의 기준과 원리대신 이방적 기준과 원리, 세상적 기준과 원리, 죄의 기준과 원리를 따라 생활했기에 ‘여호와가 왕으로 세운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기준과 원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가 어떤 사람을 왕으로 세우는지, 여호와가 세운 왕의 위치가 어떠한지, 여호와가 세운 왕의 역할이 무엇인지 도무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죄의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반응하고 행동합니다.

    다윗의 경우 하나님은 다윗이 아무 공로도 없을 때에, 집안에서 부모나 형제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때에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기름을 부었지만 기름부름을 받은 이후에도 다윗은 가족들이나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자 사울부터 백성까지 다윗에 대한 반응이 달라집니다.
    당장 사울의 군대에 차출되어서 왕의 무기를 담당하는 부관이 됩니다.
    후에 전쟁에 나가서 연전연승하자 사울은 군대 장관으로 삼고, 백성들은 ‘다윗은 만만이로다’ 칭송을 합니다.
    백성들의 관점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을 부었기에 왕이 된 것이 아니라 공로를 세웠기에 왕이 된 것입니다.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불렀다, 하나님이 세웠다, 하나님이 기름부었다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고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을 도우신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단지 다윗이 행한 업적만 본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들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자신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워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위대한 사역에 내가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하나님의 사역을 현장에서, 직접 본인이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것이 옳습니다.

    사람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
    사람의 방식은 그 사람이 무엇을 행하였는가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그 사람이 누구를 통하여 무엇을 하였는가에 촛점을 맞춥니다.

     








    여호람

    1. 여호람, 그는 누구인가요?

    여호람은 남 유다의 5대 왕으로, 아버지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어요.
    열왕기하 8장 16절에 따르면, 그는 여호사밧이 아직 살아계실 때 공동 통치를 시작했는데, 이는 당시 정치적 안정성을 유지하려는 흔한 방식이었죠. 여호람은 32세에 왕이 되어 8년간 통치했어요(열왕기하 8:17). 이름 뜻이 “여호와께서 높이시다”라는 뜻이라니, 뭔가 기대감이 생기죠? 하지만 이 이름과는 달리 그의 행적은 그리 빛나지 않았답니다.

    ​여호람의 이야기는 북 이스라엘의 동명 왕 여호람(아합의 아들)과 혼동되기도 하는데, 오늘 다룰 여호람은 남 유다의 왕이에요. 이 점 꼭 기억해 주세요!

    2. 아합 가문과의 위험한 결혼

    여호람의 통치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은 바로 그의 결혼이에요. 그는 북 이스라엘의 악명 높은 왕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했어요(열왕기하 8:18). 이 결혼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정치적 동맹의 산물이었죠. 문제는 이 결혼이 여호람과 유다 백성에게 엄청난 비극을 불러왔다는 거예요.

    ​아합 가문은 바알 숭배로 악명 높았는데, 아달랴를 통해 이 우상 숭배가 남 유다에까지 스며들었어요. 열왕기하 8장 18절은 이렇게 말해요: “여호람이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되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쉽게 말해, 여호람은 아버지 여호사밧의 신앙심 깊은 길을 버리고 아합 가문의 타락한 풍습을 따랐다는 거죠. 이 선택이 그의 운명을 어둡게 만들었어요.

    3. 백성의 믿음을 배신한 왕

    여호람은 유다 왕으로서 여호와를 섬기기보단 우상 숭배에 빠졌어요. 이건 단순한 개인적 실수가 아니었어요. 왕의 결정은 백성 전체에 영향을 미치니까요. 열왕기하 8장 18절은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단호하게 기록하고 있어요. 아버지 여호사밧은 여호와께 충실한 왕으로 칭송받았는데, 아들 여호람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죠.

    ​흥미로운 건, 하나님께서 여호람을 즉시 벌하지 않으셨다는 점이에요. 열왕기하 8장 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를 멸하시지 아니하셨다”*고 나와요. 다윗과의 언약 때문에 유다가 망하지 않은 거예요. 이 부분 읽으면서 여호람이 얼마나 큰 은혜 속에 있었는지 새삼 느끼게 되더라고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4. 반역과 전쟁, 흔들리는 왕권

    여호람의 통치는 외부적으로도 위태로웠어요. 열왕기하 8장 20절부터 22절에 따르면, 그의 시대에 에돔이 유다의 지배에서 벗어나 반역했고, 립나라는 성읍도 독립을 선언했어요. 에돔과의 전투에서 여호람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섰지만, 밤에 적군에게 포위당한 상황에서 간신히 빠져나왔을 뿐 큰 승리를 거두지 못했어요. 이 사건은 그의 리더십이 얼마나 약했는지를 보여줘요.

    ​당시 유다는 북 이스라엘과 달리 비교적 안정적이었는데, 여호람의 실정으로 이런 기반마저 흔들리기 시작했죠. 백성들은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왕이 믿음을 저버리고 나라까지 위태롭게 하니 실망이 컸을 거예요.

    5. 비참한 최후와 그 뒤

    여호람의 마지막은 참담했어요. 열왕기하 8장 23절과 24절에 따르면, 그는 8년간 통치한 뒤 죽었고, *“그 백성이 장사한 후에 다윗 성에 장사되었으나 열조의 묘실에는 들어가지 못하더라”*고 나와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당시 왕들은 보통 조상의 묘실에 안장되는 영예를 누렸는데, 여호람은 그 자격을 잃은 거예요. 백성들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한 왕으로 기억된 거죠.

    ​더 충격적인 건, 그의 죽음 뒤에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지만, 어머니 아달랴의 영향으로 유다는 더 큰 혼란에 빠졌다는 점이에요. 여호람의 선택이 대를 이어 비극을 낳은 셈이죠.

    맺음말 : 여호람에게서 배울 교훈

    여호람의 이야기는 화려한 영웅담이 아니라 실패와 경고의 기록이에요. 그는 좋은 환경에서 시작했지만 잘못된 선택으로 자신과 나라를 망쳤죠. 특히 아합 가문과의 결혼은 단순한 정치적 결정이 아니라 신앙의 배신이었어요. 우리 삶에서도 선택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여호람, 아달랴, 요아스, 웃시야, 아하스

    여호람 (정략결혼을 한 남유다 제5대 왕)
     
    1. 인적 사항
    ① 여호람은 ‘여호와는 존귀하시다’라는 뜻. 
    ② 여호사밧의 아들로 (요람)(왕하 8:16).
    ③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대하 21:6).  
    ④ 남유다 제5대 왕으로 8년간 통치(대하21:5).
     
    2. 시대적 배경
      B.C.848-841년까지 통치, 북이스라엘 왕 요람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여호람은 선왕 여호사밧이 아합과 맺은 경혼 동맹의 제물이 된 자로서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하였다. 이 결과 여호람 당시 남왕국 유다는 북이스라엘과 밀접한 동맹을, 혈연관계에 있게 되었고 또 북왕국의 바알 종교도 들어오게 되었다. 이 당시의 국제 상황은 여호사밧 때와 유사하다.
     
    3. 주요 생애
     출생
            ―
           ―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
            ―
      대하 21:6
     반대 세력 제거
      B.C. 848 년
      대하 21:4
     에돔과 림나의 반역
      B.C. 845 년
      대하 21:8
     우상 숭배 조장
            ―
      대하 21:11
     블레셋과 아라비아의 침입
      B.C. 842 년
      대하 21:16,17
     창자의 중병으로 사망
      B.C. 841 년
      대하 21:18-20
     
    4. 성품
    ① 등극 후 세력 강화를 위해 잠재적인 반대 세력이라고 판단되는 모든 아우와 방백 몇 사람을 살해한 것을 볼 때 잔인하고 정권욕이 강한 자(대하 21:4).
    ② 속국들이 독립하고, 또 블레셋과 아라비아의 침입을 받은 것으로 보아 통치력이 부족한 자(대하 21:10,16,17).
    ③ 아내의 사주를 받아 바알을 숭배하며 악정을 행할 만큼 신앙이 유약하고 주관이 없는 자(대하 21:6, 11).
     
    5. 구속사적 지위
      아내 아달랴로 인해 남유다를 바알 종교로 물들여 놓은 자.
     
    6. 평가 및 교훈
    ① 여호람은 선왕 여호사밧의 신실함을 본받지 못하고 폭정을 가하며,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했다. 이는 아무리 부모의 신앙이 신실하다 해도 자신의 신앙은 스스로의 경건에 대한 훈련에 좌우됨을 증거 한다.
     
    ② 여호람의 모든 악행의 원인은 수상숭배자인 아내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는 성도가 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를 교훈 하는 것이다.
     
    ③ 여호람은 다윗의 자손임에도 불고하고 우상 숭배로 일관하며 선지자의 경고조차도 무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여호람은 중병에 걸려 죽고, 또 열왕의 묘실에 묻히지도 못하는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불신자의 종말이 어떠한가를 잘 보여준다.   
     
    7. 핵심 성구
      “저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 아내가 되었음이라”(대하 21:6).

     

     

    87-아달랴 (왕위를 찬탈한 남유다 제7대 왕)
     
    1. 인정 사항
    ① 아달랴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라는 뜻. 
    ② 아합과 이세벨의 딸. 오므리 왕의 손녀.
    ③ 남유다 제5대 왕 여호람의 아내, 아하시야 모친.
    ④ 유다 열왕 중 유일한 여왕(대하 22:12).
     
    2. 시대적 배경
      B.C.841-835년까지 통치, 북이스라엘 왕 예후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정략결혼에 의해 다윗 가문으로 시집 온 아합의 딸로서 한동안 북왕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예후의 반역으로 인해 아달랴의 친정 가문인 아합 가문이 몰락하게 됨으로써 아달랴는 북왕국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한편 이 시기는 아람이 세력 확장을 위하여 계속해서 남․북 왕국을 침입해 오던 시기이다.
     
    3. 주요 생애
     출생
            ―
            ―
     여호람과 결혼
            ―
      왕하 8:16,17
     남편의 우상 숭배 조장
            ―
      대하 21:6
     남편의 죽음
       B.C. 841 년
      대하 21:19
     아들의 우상 숭배 조장
            ―
      대하 22:3
     아들의 죽음
       B.C. 841 년
      대하 22:9
     다윗 왕가의 자손 진멸
       B.C. 841 년
      왕하 11:1
     6년간 통치
            ―
      왕하 11;3
     여호야다의 혁명에 의해 살해됨
       B.C. 835 년
      왕하 11:14-16
     
    4. 성품
    ① 남편을 충동하여 우상을 숭배케 하고 악정을 하게 할만큼 사악한 자(대하 21:6).
    ② 다윗 왕가로 시집왔으나 친정의 교훈대로 아들을 양육한 것으로 보아 주관이 뚜렷하고 고집이 센 자(대하 22:3.4).
    ③ 아들의 통치 기간 중 섭정을 행하고 아들이 죽자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학살을 자행할 만큼 잔인하고, 권력욕이 강한 자(왕하 11:1).
    ④ 6년 동안 외세의 간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왕좌를 지킨 것을 볼 때 정치적 역량이 뛰어 났던 자(대하 22:12).
     
    5. 구속사적 지위
    ① 여호람 당시 남왕국 유다에 바알 종교를 들여온 결정적인 자.   
    ② 다윗 가문의 씨를 진멸하려 함으로써 다윗 가문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방해하려 한자(대하 22:10,11).
    ③ 남왕국 유다 역사상 유일한 여왕(대하 22:12).
     
    6. 평가 및 교훈
    ① 사악한 아달랴의 비참한 최후는 악인은 그 심은 행위대로 열매를 거두게 됨을 깨닫게 된다(갈 6:8).
    ② 다윗 가문으로 시집 온 아달랴가 유다 왕국을 바알 종교로 물들이며, 또 다윗 가문을 진멸하려 한 사실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하는 것이 자신과 후손에게 불행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도 큰 장애가 됨을 보여준다(고후 6:14).

     



    유대인의 생각공부

    부자하면 떠오르는 민족이 있는데 바로 유대인이다.
    로스차일드가문부터 워렌버핏, 스티븐 스필버그까지 수많은 유대인들은 자본주의 철학에 영향을 끼쳤다.
    독일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는 "유대인들이 북반구에 분산 이주하지 않았다면 근대자본주의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했다.
    조그마한 동네가게에서 부터 거대 재벌에 이르기 까지 그들은 어떻게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 하게 되었을까?
    그 비밀과 그들의 사고방식을 생각해보자.

    ​첫째, 생각공부

    유대인은 말한다.
    경제적 자유를 찾는 첫걸음은 생각이다.
    여기서 생각이란 적극적인 자세, 다시 말해 사물이나 생활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끄는 긍정적인 생각을 말한다.

    당신이 누구든 나이가 몇살이든 지금 어떤 상황이든 학력이든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한 가지 적극적으로 생각하면 돈을 벌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다수의 사람들과 달리 부자가 되는 목표를 먼 미래로 설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고를 확장하며 진지하며 능동적으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작은 일부터 실행에 옮겼다.
    유대인들은 하나의 사고에만 갇혀있지 않는다.
    틀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둘째, 알파와 오메가 전술

    유대상인들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속성은 알파와 오메가 전술이다.
    처음(알파)과 끝(오메가)를 모두 소유한다는 뜻이다.
    가령 A와 B가 경쟁한다고 할 때 유대인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다.
    둘 다에게 투자하면서 둘 다로 부터 이익을 얻어낸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석유관련 자본을 소유하면서 동시에 전기차 회사나 대체 에너지 기업에도 투자한다.
    그들은 어떤 싸움에서든지 항상 돈을 벌수 밖에 구조를 만드는데 능하다.

    ​셋째, 보이지 않는 지식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았다면, 유대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식을 팔았다.
    실제로 탈무드에는 음악과 미술같은 지적인 활동이 금전보다 가치가 더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형태가 없는 일은 경쟁자가 적어 비교적 쉽게 비지니스를 확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컨데 월스트리트를 위시한 세계금융산업은 사실상 유대인의 손아귀에 있고 아이티 산업에서도 구글, 페이스북, 오라클 등 선두 기업 창업자 역시 모두가 유대인이다.
    영화산업은 아예 유대인에 의해 태동되었으며 할리우드 제작자 대부분이 유대인이다.
    이외에도 법률, 의료, 서비스 산업 대부분을 유대인이 주도하고 있다.

    ​넷째, 디테일이 성패를 결정한다

    '스놈'이라는 유대인이 금방이라도 망할 것 같은 백화점을 헐값에 사들였다.
    사람들은 그를 매우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불과 3년만에 업계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과연 그가 어떻게 했길래 이런 폭풍적인 성장이 가능했을까?
    스놈은 백화점을 인수하고 나서 백화점의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객들이 버린 영수증을 모아 어떤 상품이 인기가 있는지, 추가 구매하는 물품은 어떤 것들인지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고객들의 소비심리와 구매양상을 파악하여 백화점을 정상화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을 줄일 수 있었다.
    유대인은 작은 변화와 디테일이 만나면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낸다고 말한다.

    다섯째, 1과 250법칙

    1과 250법칙은 고객 한명을 만족시키면 그 한명의 고객이 새로운 고객 250명을 데려올 수 있다는 의미이다.
    반면로 고객 한명을 화나게 하면 잠재 고객 250명이 달아날 수도 있다는 법칙이다.
    고객이 훌륭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받으면 고객은 당신을 좋아하게 되고 어디를 가든 당신의 제품과 서비스를 홍보할 것이다.
    당연히 좋은 입소문을 널리 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고객 한 사람을 단순한 판매대상이 아닌 250명의 고객으로 여겨야 한다.
    유대인은 언제 어디서나 서비스 제일주의, 진정성이 생명이라는 교훈을 되세기며 단골고객이 자신을 믿을 수 있게 만드는 전략을 사용해왔다.

    ​여섯째, 윈윈전략

    유대인은 사업이란 한 가족만 하는 것이 아니며 서로 돕고 서로 이익을 도모해야 자신의 부가 점점 늘어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악성 경쟁으로 인한 피해를 없애거나 최소화하기 위해 경쟁상황을 교묘하게 조정함으로써 양측 모두 이익을 얻는 윈윈 전략을 실현한다.
    이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한단계 높은 협력을 하게 되어 더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된다.

    ​일곱째,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려라

    부정적인 감정은 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할 뿐 긍정적인 변화를 거의 일으키지 못한다.
    부를 획득한 유대인은 결코 부정적인 감정에 휘말리지 않는다.
    부정적인 때문에 일을 그르치거나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승자라는 마인드로 자신과 상대방을 격려한다.
    세상은 주로 긍정주의, 낙관주의자들이 승리한다.


    여로보암 / 벧엘, 단에 우상을 세우고 이곳에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

    단(Dan), 벧엘(Bethel), 종교의 중심지- 벧엘

    단(Dan) :

    야곱의 다섯 번째 아들이며 라헬의 종 빌하의 아들이다(창 35:25).
    납달리의 친형이었으며 성경의 여러 곳에 그와 함께 이름이 나타난다(창 35:25; 46:23; 출 1:4등).
    단은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하나인 단 지파의 시조가 되었으며 오홀리압과 삼손은 단 지파 출신이다(출 31:6; 삿 13:2, 24).

    지명 :
    남쪽으로 유다, 서쪽으로 지중해, 북쪽으로 에브라임, 동쪽으로 베냐민의 땅과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 단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다(수 19:40-46).
    그러나 이곳에는 강력한 아모리인들이 살고 있어서 단 지파는 이곳의 골짜기를 차지하지 못하고 산지로 쫓겨났다(삿 1:34-35).
    후에 단 지파가 북쪽으로 이동하여 취한 레센(라이스) 땅이 그들 조상의 이름을 따라 단 지파의 땅이 되었다(수 19:47. 삿 18장).

    여로보암 1세가 이곳에 금송아지를 세우므로 단은 우상숭배를 위한 장소가 되었다(왕상 12:25-33).
    ‘단으로부터 브엘세바까지’라는 말의 의미: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관용구는 구약의 여러 곳에서 사용되었다(삿 20:1; 삼상 3:20; 삼하 3:10; 17:11; 24:2, 15; 왕상 4:25; 대상 21:2; 대하 30:5).
    이것은 이스라엘의 북에서 남까지의 전 지역을 묘사하며 이스라엘 최장 길이를 표시한다.


    벧엘(Bethel) :

    예루살렘 북쪽, 실로 북쪽(삿 21;19), 아이 서쪽(수 7:2), 라마 북쪽(삿 4:5)에 위치한 곳으로 현재의 ‘베이틴’(Beitin)으로 본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들어온 아브라함은 벧엘 동편 산에 도착하여 제단을 쌓았다(창 12:8).
    이곳의 원래 이름은 ‘루스’였는데(창 28:19; 삿 1:23) 에서를 피해 밧단아람으로 도망가던 야곱이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그곳 이름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 칭하였다(창 28:10-22).

    후에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이곳에 와서 제단을 쌓고 ‘엘벧엘’이라 불렀다(창 35:1-7).
    야곱은 여기서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과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을 재확인받았다(창 35:9-15).
    한편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어 묻힌 곳도 이곳 상수리 나무 아래이다(창 35:8).
    벧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초기에는 베냐민 지파에게 분배된 곳이었으나(수 18:22) 후에는 에브라임 지파의 영토가 되었다(삿 4:5; 대상 7:28). 분열 왕국 시대에는 북이스라엘의 영토였으나 유다 왕 아비야가 이곳을 공략하여 유다의 영토로 편입되었고(대하 13:19) 바벨론에서 돌아온 뒤에는 베냐민 지파가 이곳에 거주하였다(스 2:28; 느 7:32; 11:31).

    신약 성경에는 이곳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마카베오서에 의하면 마카베오 왕조 때 이곳이 번창했으며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되기 전 마지막으로 정복한 곳이 이곳이라고 한다.

    성경 속의 또 다른 벧엘: 시므온 지파에게 할당되었던 성읍으로 ‘브두엘’(대상 4:30), ‘브돌’(수 19:4)이라고도 하였다. 다윗이 시글락 전투에서 탈취한 전리품을 이곳에 거주하는 장로들에게 선물로 보냈다(삼상 30:27).


    종교의 중심지, 벧엘

    사사 시대 이후로 이곳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구심점 역할을 한 곳이었다.
    이곳에 하나님의 법궤가 있었고(삿 20:27)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이곳에 올라와(삿 20:18)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삿 20:26; 21:4).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위해 순회하던 세 곳 가운데 한 곳일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삼상 7:16).
    또한 선지자의 생도들이 이곳에 있었으며(왕하 2:3)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 이곳에 들렀다(왕하 2:2).
    그러나 여로보암 이후 벧엘은 우상숭배의 본거지가 되었다(렘 48:13).
    여로보암은 이곳에 금송아지를 세워 섬기게 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게 하였다(왕상 12:28-29).
    북이스라엘의 제일 큰 성소가 되게 하였다(암 7:10).
    예후도 이곳에서 금송아지 섬기는 것을 계속하였다(왕하 10:29).
    이 때문에 벧엘은 아모스나 호세아 같은 선지자에게서 멸망에 대한 선포를 들었다(호 4:15. 암 3:14).
    호세아가 이곳을 ‘우상의 집’이란 뜻의 ‘벧아웬’이라고 칭한 데서(호 10:5) 이곳에서의 우상 숭배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요시아 왕 때 요시아의 종교개혁으로 이곳에 있던 우상 숭배의 제단이 파괴되었다(왕하 23:15).


    4월 25일(금) 열왕기하 5-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 생각에는(5: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But Naaman went away angry and said, "I thought that he would surely come out to me and stand and call on the name of the LORD his God, wave his hand over the spot and cure me of my leprosy.

    누가복음 5: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노련한 어부 베드로와 목공의 일에 익숙한 예수
    물고기를 잡는 방법은 베드로가 전문가이었지만 자기 생각과 경험 및 판단을 포기하고 말씀에 의지할 때 나타난 결과는 이제까지 잡아볼 수 없었던 어획량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늙은 젊은이


    1967년에 캐나다의 리키 갤런트라는 아이가 ‘프로제리아’란 병으로 죽었습니다.
    이 병은 나이는 어리지만 노쇠, 동맥경화, 탈모, 근육이완,주름살 등 노인의 육체적 증세가 나타나는 조로증세를 나타냅니다.
    이 아이는 당시 11세였지만 신체는 90세 된 노인이었던 것입니다.
    생물학적인 나이만 가지고 늙었다거나 젊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는 젊은 늙은이가 있고 늙은 젊은이가 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청년이란 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붉은 뺨이나 입술이 아니라 굳센 의지, 상상, 감정, 생명력에 달렸다.
    청년은 용기로 비겁을 이기며 모험으로 앞일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사고나 신앙이나 생활이 젊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육체적 젊은이로서 뿐만 아니라 정신적,영적으로 젊은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골로새서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두 수도승이 순례길을 가다가 강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이 강둑에 이르렀을 때 한 여성이 아름다운 옷을 차려입은 채 서 있었다.
    그녀는 혼자서 강을 건너자니 두렵기도 하고, 옷을 벗고 건널 수도 없어서 그렇게 서성거리고 있는게 분명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한 수도승이 그녀를 업고 건너편 강둑까지 데려다 주었다.
    강둑에 여성을 내려놓고 두 수도승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다른 수도승이 비난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분명히 옳지 않은 일이오.
    그것은 계율을 어기는 행동이오.
    어떻게 수도승의 몸으로 그런 불륜스런 행동을 할 수 있소? "
    여성을 업어 강을 건너다 준 수도승은 말없이 듣고 있다가 마침내 동료 수도승을 돌아보며 말했다.
    " 난 그 여성을 한 시간 전에 강둑에 내려 놓았다.
    그런데 왜 형제는 아직도 그녀를 등에 업고 있소?




    두 수도승이 순례길을 가다가 강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이 강둑에 이르렀을 때 한 여성이 아름다운 옷을 차려입은 채 서 있었다. 그녀는 혼자서 강을 건너자니 두렵기도 하고, 옷을 벗고 건널 수도 없어서 그렇게 서성거리고 있는게 분명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한 수도승이 그녀를 업고 건너편 강둑까지 데려다 주었다. 강둑에 여성을 내려놓고 두 수도승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다른 수도승이 비난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여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분명히 옳지 않은 일이오. 그것은 계율을 어기는 행동이오. 어떻게 수도승의 몸으로 그런 불륜스런 행동을 할 수 있소? "
    여성을 업어 강을 건너다 준 수도승은 말없이 듣고 있다가 마침내 동료 수도승을 돌아보며 말했다.
    " 난 그 여성을 한 시간 전에 강둑에 내려 놓았다. 그런데 왜 형제는 아직도 그녀를 등에 업고 있소?


    내 생각에는(I thought) in my opinion

    어떤 낚시꾼이 낚시를 하는데 큰고기는 걸러내고 작은 고기만 바구니에 담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모든 낚시꾼들이 하는 것과는 반대로 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놓아주고 보다 더 큰 것을 바구니에 담는 것이 상식이며 낚시법입니다.
    그래서 하도 이상해서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우리집 고기를 굽는 후라이팬이 15인치 밖에 안되서 후라이팬 안에들어가는 고기만 바구니에 담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후라이팬의 크기만 생각할 줄 알았지 고기를 토막내서 굽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이 부족하면, 생각이 막혀 있으면 손발이 고생하고 육체가 고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생각을 하면서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됨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고 사느냐가 그의 인생을 결정하며 그의 미래를 결정하며 영생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루 중에 무엇을 가장 골똘히 생각하며 사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인 것입니다.

    "생각을 심으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으면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심으면 인격을 거두고 인격을 심으면 운명을 거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에서부터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모든 만사를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자기 고집만 내세우고 옛패러다임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존중하고 내 생각을 버리고 나보다 더 나은 이의 생각을 받아들여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아람의 나아만 장군도 "내 생각에는" 하면서 자기 생각에 갖혀있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이러이러 해야 한다"이러한 사고의 틀은 영적인 한계가 되고 영적인 경계가 되어 믿음의 기적을 일으키는데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 생각을 깨트리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특별한 의식을 통하여 고쳐줄줄 알았는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 선지자로부터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는 말을 전해듣게 되었을 때에 그는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신분과 위엄에 걸맞는 정결케 하는 거창한 의식을 기대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체면을 따지고 신분을 따지고 형식을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선지자를 통해서 무엇인가 대단하고 거창한 의식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병이 나을 줄 생각을 한 것입니다.
    무당 푸닥거리하는 식에 무슨 의식을 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기대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쉽게 빠질 수 있는 믿음의 과오입니다.

    나아만이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노하여 물러가려는 일을 하려했습니다.
    분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병이 믿음으로 고쳐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역사는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그것을 알게 해 주고 전해주고 도와주는 것일 뿐입니다.

    "아람에는 더 맑고 더 큰 강이 있거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아만이 생각할 때 요단강물보다 더 나은 물이 다메섹의 아마나와 바르발 강에 흐르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의 강이 이스라엘의 모든 강물보다 더 깨끗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치료한 것은 팔레스틴에 있는 요단강이냐 아니면 다메섹의 아마나와 바르발 강이냐하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강물 자체의 맑고 더러움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곧 거기에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요단강물로 뛰어드는 믿음이 그를 치료한 것입니다.
    요단강물이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의 강, 겸손의 강에 들어가는 믿음이 능력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일곱번이어야 하느냐?"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요단강 물이어야 하며 왜 하필이면 일곱번이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빠지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빠질 수 있는 어쩌면 당연한 생각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은 허망한 생각인 것입니다.
    우리가 뚫고 넘어가지 아니하면 안될 견고한 우리의 불신앙과 의심의 성벽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믿음의 과오를 부채질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말씀대로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요단강물에 7번씩이나 들어갔다 나왔다는 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은 쓸데 없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쓸데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계속적으로 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왜 한번이나 다섯번이나 여섯번이면 안되느냐는 자신의 생각을 이기고 7번씩이나 반복하여 그 강물에 뛰어들었을 때 치료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나아만은 하마터면 좋은 기회를 놓칠뻔하였습니다.
    그는 일생일대에 가장 큰 과오를 범할 뻔 한 것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때때로 "믿음의 과오"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주의 말씀보다도 오히려 내 생각에는, 혹은 내 소견에는 이러저러하다는 자기 주장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 가운데서 발생하는 아주 뿌리 깊은 본성에 의해서 이 믿음의 과오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게 된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 치유 이야기 가운데 나타나 있는 그 자신의 모습이 우리가 "빠지기 쉬운 믿음의 과오"가 어떤 것인가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좋은 실례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처럼 "내 생각에는 이러 저러하니"라는 이 무서운 믿음의 적을 이기셔야 합니다.
    이런 생각은 믿음에 있어서 거치는 돌이며 우리를 믿음에서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믿음의 과오로 몰아넣는 불신앙적이고 악마적이고 사탄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겸손히 머리숙이기를 배우지 아니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내 생각에는"하였던 것을 무너뜨렸습니다.
    하마터면 내 생각을 고집하다가 과오를 범할 뻔 했는데 그 종들의 충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전해준 처방전을 믿고 요단강으로 내려갔고 그리고 그곳에서 일곱번 몸을 잠그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서 그의 문둥병은 고침을 받았는데 그의 육신이 어린아이의 것과 같이 부드러운 살결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이처럼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호모 사피엔스, 호모 파베르, 호모 루덴스

    문명사가인 호이징하(J. Houizinga)는 3가지 개념으로 정리한 바가 있다(J. Houizinga, 1993).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강조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piens)
    무언가를 직접 만들고 제작하는 특성을 강조하는 호모 파베르(Home faber)
    인간이 즐길 줄 아는 특성, 그래서 놀이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착안하여 부르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

    호이징하는 인류문명, 심지어 전쟁까지도 인간의 놀이본능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와 같은 지적은 이른바 ‘문화우위의 시대’로 가고 있는 현 시대의 인간을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사람은 동물들과는 달리 생각을 하면서 사는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아무리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끊임없이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멍하니 있는 것 같아도 분명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 잠을 잘 때에도 생각은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70억이 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 쉬임없이 생각을 하고 있고, 저마다 생각이 전부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저런 생각을 하면서 각자의 생각대로 생각을 합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맞벌이로 일하는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보통은 아내가 먼저 집에 들어오고 남편이 늦게 퇴근을 했지만, 가끔씩은 아내가 늦게 귀가하는 일도 있었는데, 그날따라 아내는 회사에 일이 많아서 늦게 퇴근을 해서 집에 오게 되던 날이었습니다. 
    아내는 많은 업무로 인해 지친 몸이었지만, 그래도 집에 들어가면 남편이 반갑게 맞아주면서 편안하게 쉬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집으로 바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한편, 집에서는 남편이 먼저 퇴근을 해서 아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편 역시 피곤한 몸으로 만사가 다 귀찮은 상태에서 아내가 집에 오면 자신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현관문이 열리고 아내가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아내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이 아니라, 이제 금방 신발을 벗은 아내에게 대뜸 한다는 소리가 “여보, 나 커피 한 잔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얼마나 지친 모습으로 들어왔는지는 보지도 않고, 남편은 TV만 보면서 커피나 달라고 재촉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힘들기는 서로 마찬가지인데 “힘들었지? 밥은 먹었어?”라고 다정하게 말은 못해 줄 망정, 커피 심부름이나 시키는 남편이 못마땅했습니다. 
    아내와 남편의 생각은 이렇게 달랐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반갑게 맞아주면서 편하게 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남편은 아내가 오면, 커피 한 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인데도 생각이 이렇게 달랐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 것 같습니까? 
    1번 : 아내가 신발을 던지면서 대판 싸웠다. 
    2번 : 그날로 이혼 도장 찍었다. 
    3번 : 커피를 남편 머리에 갖다 부었다. 
    4번 : 사이좋게 커피 마셨다. 
    몇 번일 것 같습니까? 
    정답은 4번입니다.

    남편이 커피를 달라고 했을 때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 순간 하나님께서 아내에게 이런 생각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 남편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다보니까 나와 같이 커피 한 잔을 함께 마시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을 해보니까, 아내의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 부부는 행복한 커피 타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말씀드리지 않더라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충분히 겪어보셨을 것입니다. 
    저도 저희 집사람과 생각의 차이를 느끼게 되는 일이 많이 있는데, 결혼 전에 처음 만나던 때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제가 옷이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가짓수도 적은 데다가 대부분 싼맛에 산 거라서 데이트 할 때 입을만한 옷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마음 먹고 좀 비싼 옷을 하나 사입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옷이 제일 좋은 거니까, 만날 때마다 그 옷을 입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결혼하고 나서 한 얘기였지만, 저희 집사람이 장모님께 한 얘기가, “엄마 그 사람은 맨날 만날 때마다 똑같은 옷만 입고 나온다.”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래도 데이트할 때 좋은 옷을 입고 간다는 차원에서 새로 산 그 옷만 입고 나갔는데, 저희 집사람은 허구헌날 똑같은 옷만 입고 나오니까 그게 못 마땅했던 것 같습니다.

    결혼하고 나서도 저는 늘 싸고 양 많은 것을 좋아하고, 저희 집사람은 싼 거는 다 이유가 있으니까 좀 비싸더라도 제대로 된 것을 사야 한다는 생각이고... 해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지금은 서로 잘 이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제 생각에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상대방은 자기 사고방식대로 나를 오해하는 경우도 있고, 부부 간에 시댁과 친정에 대해 생각하는 견해의 차이라든지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달라서 갈등을 겪게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은 나병환자였던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선지자에게로 와서 나음을 얻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이 일이 있기 전에 아람왕은 자신의 신하 나아만의 병을 고쳐달라고 편지를 써서 이스라엘왕에게로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왕은 자기 생각대로 오해를 하고서는 이것은 분명, 아람왕이 공연히 트집을 잡아 싸울 기회를 찾으려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아람왕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보다도 더 심각한 생각의 차이는 그 뒤에 나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이스라엘 왕이 옷을 찢었다는 얘기를 듣고서 나아만 장군을 자신에게로 보내달라고 전갈을 보내서, 나아만 장군은 이제 이스라엘 왕에게서 엘리사 선지자에게로 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인간들은 늘 끊임없이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아만 장군 역시 엘리사 선지자에게로 가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했을 것입니다. 
    내가 그에게로 갔을 때 그가 어떻게 할 것이라는 생각을 미리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엘리사 선지자의 집 문앞까지 도착을 했습니다. 
    하지만, 어땠습니까? 
    나아만 장군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어떤 점이 달랐습니까?

    나아만 장군 생각에는 엘리사 선지자가 직접 나올 줄 알았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5장 1절 말씀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아람 나라를 구원한 적이 있는 큰 용사였고, 나라에서 크고 존귀한 자였습니다. 
    아람 나라 주위에 있는 나라들은 나아만이라는 이름만 듣고도 벌벌 떠는 명성 높은 장수였고, 권력의 정점에 서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나병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그를 상대하거나 얕잡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였기 때문에, 그의 생각에는 당연히 엘리사 선지자가 공손히 자기 앞에 고개를 숙이고 나와서 자신의 병을 치료해 줄줄 알았습니다. 
    11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나아만 장군 생각에는 엘리사가 직접 나올 줄 알았는데, 버릇없게도 사람을 보내서 한다는 얘기가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아만이 이스라엘왕에게서 엘리사 선지자에게 찾아가는 것만 해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엘리사 선지자가 왕궁까지 직접 올라와서 치료를 해줘야지, 자기를 오라 가라 하는 것만도 기분 나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그것까지는 감수를 하고 내려갔는데, 엘리사 선지자는 얼굴도 내비치지 않고 사람을 시켜서 치료법 한 마디만 던져줄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의 병든 부위에 안수해서 고쳐줄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어떠한 특정한 의식을 통해 고쳐줄 줄로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의 신분과 위엄에 걸맞는 거창한 의식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는 것도 자신의 생각과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다마섹에 있는 아마나와 바르발강이 훨씬 더 나은데 하필 요단강에서 씻으라는 것도 못마땅했고, 더군다나 그런 일을 일곱 번이나 반복적으로 해야 된다는 것도 자신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어찌나 화가 났던지, 11절 말씀을 자세히 보면,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가 보낸 사람의 말을 듣고 난 후에, “내 생각에는 그가 이렇게 고칠까 하였도다”라고 말하고 나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들은 직후에 바로 노하여 물러가면서 그 얘기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무나도 격분한 나머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발길을 돌린 것입니다. 
    그의 성격이 얼마나 불같았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부하들의 말을 듣고서 그 생각을 돌이켰습니다. 
    그래서, 엘리사 선지자가 시킨 대로 요단강으로 가서 일곱 번 몸을 잠그고 나니 어린 아이의 살같이 깨끗이 나음을 얻었다는 내용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은, 우리는 나아만과 같이 “내 생각에는 이러하다”고 하면서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믿음의 과오를 범할 때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보다도 오히려 내 생각과 뜻을 주장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내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거라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잘 알고 있지만, 기도한 내용들을 분석해 보면, 전부 내 생각대로, 내 뜻을 하나님께 주장하는 내용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40명 정원의 기독교학과에 목회자 자녀 120명이 원서를 넣었다고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우리 생각대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내 자녀가 꼭 합격해야 되는데! 내 생각에는 다른 아이들보다 내 자녀가 더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우리 아이는 재수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꼭 합격해야 되는데! 
    내 생각에는 올 해 이 학과에 못 들어가면 큰 일 나는데! 
    교회에서 내 직분과 체면도 있기 때문에 이번에 떨어지면 안 되는데!”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생각일 뿐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라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십니다. 우리 생각은 합격만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생각을 갖고 계셨던 것을 누가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경우를 통해서도 깨닫게 됩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은 소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도 바울의 생각이었고,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께서 바울의 뜻을 막아서시고, 그를 마게도냐 지역으로, 유럽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왠지 모를 실망과 좌절감을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을 마게도냐 지역으로 인도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무슨 생각이 있으셔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오늘날 많은 역사가들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생각대로 소아시아로 진출했다면 기독교는 오늘날과 같이 전 세계로 확장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유럽 선교를 통해서 복음의 전환점이 마련되고, 복음이 세계 제일의 나라였던 로마로 들어가게 되었고, 복음이 로마를 정복하게 되었고, 복음의 로마 정복이 오늘날의 거대한 기독교를 낳는 씨앗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생각한 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각대로 일하셔서, 결국은 바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생각을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지 못하게 되면, 나아만처럼 상처를 받고 분노하게 됩니다. 
    “내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해주셔야 될 것 같은데...” 
    “내 생각에는 목사님이 이렇게 하시는 게 맞다고 생각되는데...” 
    “내 생각에는 교회에서 이렇게 해야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할수록 상처를 받게 되고, 불평하게 되고, 분노하게 됩니다. 

    나아만 장군이 자기 생각대로만 했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 결과를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다시스로 행했던 요나 선지자가 어떻게 됐습니까? 
    그 답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들 생각대로 행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종말이 어떠했습니까? 
    내 생각대로 행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숲속 마을에 숲속 마을을 다스리는 호랑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호랑이도 어느 날 아주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어떤 생각을 했느냐면, 험한 산 길을 다니다 보니까, 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돌뿌리에 걸리기도 하고 발이 성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는 인간들이 도로 포장을 하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아스팔트를 깔아서 반들거리는 도로를 보면서, 호랑이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내가 다니는 산 길에 도로 포장을 해야 되겠다. 
    토끼들을 잡아다가 가죽을 벗겨서 내가 다니는 길에다가 깔아놓으면 발을 다치는 일이 없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다니다가 마침 토끼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토끼에게 “미안하지만 이 어르신이 산 길을 편하게 다니려면 니가 희생될 수밖에 없구나.”하면서 모든 산 길을 토끼 가죽으로 덮을 자신의 계획을 말해줬습니다. 
    그랬더니, 토끼가 하는 말이, “어르신, 참 놀라운 생각이십니다. 
    하지만, 이 산에 있는 우리 토끼들을 다 잡는다 해도 토끼 가죽 길을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차라리, 제 꼬리를 잘라서 어르신의 발에 가죽신을 만들어 신으신다면 산 길 전체가 토끼 가죽길이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토끼의 그 말 한 마디로 인해서, 그 숲 속에 있는 토끼들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하는, 한 숲속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만 내려 놓으면! 
    자기 생각 하나만 바꾸면 모든 것이 평안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 관철하려 들게 되면, 피바람이 불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대로만 하려고 하는 것은 이렇게나 위험한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데에 있어서 큰 걸림돌이고 무서운 믿음의 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믿음의 적을 믿음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루터가 말한 것과 같이 믿음은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 생각과 이성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나아만처럼 우리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나병과 같은 어려운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업장의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내 가정과, 또 어떤 분들에게 있어서는 수능시험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이러한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내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생각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지만, 우리 인생의 질병이 치료되지 못하는 것은 내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 생활이란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자신을 맞추어 가는 훈련입니다. 이런 훈련을 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인생에서 문제들을 결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고, 기적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가장 먼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섭리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이들 들어보셨을 줄 아는데, 이런 글이 있습니다. “큰 일을 이루기 위해서 힘을 주십사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부유함을 구했더니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것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걸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선물로 주셨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 들어 주셨다. 나는 가장 많은 복을 받은 사람이다.” 

      내 생각에는 큰 일을 이루기 위한 힘이 필요하고,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이 필요하고, 부유함이 필요하고, 성공이 필요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달라서 우리에게 연약함을 주시고, 병을 주시기도 하시고, 가난을 주시고, 실패를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만을 구하고, 합격을 구하고, 물질의 축복만을 내 생각대로 구하는 우리들이 되기 보다, 그 이전에 내 생각을 내려놓는 훈련을 쌓아가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읽는 훈련을 쌓아 나가서, 하나님의 생각대로 내 인생이 조율되어지고, 움직여질 수 있는! 그런 우리 모두의 삶이 되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생각과 착각(錯覺)

    착각이란 한자는 어긋날 착, 깨달을 각이란 훈으로 사실을 실제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이란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을 말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매우 영리하고 지혜로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짐승보다도 미련한 것이 사람입니다. 2004년도에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 동물들은 미리 알고 다 도망을 갔습니다. 덩치 크고 미련해 보이는 코끼리도 산으로 도망갔습니다. 두꺼비도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 지혜롭다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보트를 타고 뱃놀이를 즐기다가 무수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4장 13절~14절 말씀에“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하셨습니다. 

    또한 짐승들은 아무리 맛있는 먹이가 있어도 자기 위장 70%까지만 채운다고 합니다. 심지어 먹는 것 밖에 모르는 돼지도 자기 위장 70%를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120%~200%까지 먹다가 채하고 탈이 납니다. 짐승들이 내일에 대한 염려나 근심을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만 근심하고 걱정하다가 병이 납니다. 이렇게 미련한 것이 사람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착각을 잘합니다. 착각이란 현실과 다른 생각을 말합니다. 두 의대생이 복도를 걸어가는데 어떤 한 남자가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고 엉거주춤하게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한 의대생이 그 모습을 보고“저런 자세는 류마티스 관절염이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의대생이“아니야 디스크 걸리면 저런 자세가 나오는 거야.”라고 했습니다. 서로 류마티스 관절염이냐 디스크냐를 두고 다투는데 그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아주 심각하게 묻기를“선생님 제가 너무 급한데 화장실이 어디 있어요?”라고 했습니다. 화장실 갈 일이 급해서 억지로 참으며 몸을 꼬며 다가오는 사람을 두고“류마티스 관절염이니, 디스크니”하고 다투었습니다. 

    아는 척하며 전문 병명까지 말했지만 착각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의대생들처럼 이렇게 착각하고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상대방은 전혀 모르고 있는데 스스로 착각을 하면서 오해를 하고 분노하고 또는 절망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너무 의지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 23장 41절에는“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이란 내 생각, 내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내 방법을 버릴 때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법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내 경험을 버릴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내 기준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8절~9절에“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법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과 내 방법, 내 경험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갈 때 그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람나라 군대장관인 나아만 장군이 자기 생각, 자기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므로 자기의 소원을 성취한 내용입니다. 나아만은 어떤 사람입니까?

    一. 나아만은 문둥병자였습니다.

    열왕기하 5장 1절에 나아만에 대해 설명하기를“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의 직위는 군대장관이며 권력자요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심각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둥병자였습니다. 당시 나병은 저주받은 질병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나병은 전염이 되기 때문에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성 밖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나병은 속에서부터 썩어져서 일 년 이 년은 모르다가 삼 년쯤 되면 피부 겉으로 나타나면서부터 문드러지고 손마디가 빠지고, 눈썹이 빠지고, 얼굴이 일그러지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런 병에 걸렸으니 장군이면 뭐하고 권력이 있으면 뭐하겠습니까? 화려한 모습 속에 날마다 썩어서 죽어가고 있는 이런 나아만을 누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육체는 나아만과 같지 않을지라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나아만과 같은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화려함 속에 감춰진 내면에 말 못할 고민들로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하면서 갈등하는 가정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행복해 보이는 모습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속은 다 썩어져 가는 모습들, 겉은 거룩한 척 꾸몄지만 외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쾌락을 즐기면서 만족이 없고, 소유한 것은 많은데 평안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까 이혼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현대사회에는 나아만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근본적으로 치유 받아야 할 것이 많습니다. 우리 자신과 가정과 더 나아가 이 사회 전반적으로 나아만과 같이 병들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나아만의 나병을 고친 분이 하나님이 셨듯, 병든 영혼, 병든 가정, 병든 사회를 치유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 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하셨습니다. 

    二. 나아만은 문둥병에서 고침 받았습니다. 

    불치의 문둥병으로 괴로워하던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으로부터 깨끗하게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14절에“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기적이 나타난 과정이 있었습니다. 

    첫째, 나병을 치유할 수 있는 희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열왕기하 5장 2절~3절에 기록하기를“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 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집에는 이스라엘에서 붙잡아온 한 여자아이가 가정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 가정부 아이가, 화려함 가운데 나병으로 괴로워하는 주인 에게 희소식을 전했습니다. 우리나라에 가면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그분을 만나면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전도입니다. 복음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분 예수님을 의지하고 섬기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소식입니다. 절망에 빠진 자에게 희망을 주는 소리, 낙심한 자에게 소망을 주는 소리, 지옥 갈 사람에게 천국 가는 길을 알려주는 소리가 복음이며 전도입니다. 
    우리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나아만에게 기쁜 소식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엘리사를 만나면 고침 받을 수 있다는 소식입니다. 확신 있는 소식입니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한 것뿐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 내가 알고 있는 교회, 내가 예배드리면서 깨달은 유익한 것을 이웃에게 말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엘리사가 바로 우리 주님의 모형이라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전해야 됩니까?“예수님을 만나면 해결됩니다. 예수님 만나면 평안을 얻습니다. 예수님 만나면 문제가 해결 됩니다. 예수님 만나면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잃은 자들, 기쁨과 평안을 잃은 자들, 인생의 답을 찾지 못해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다니면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예수님이 평안이요, 안식이요, 길이요, 인생의 해답”임을 확신 있게 전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무속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8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목사의 10배가 훨씬 넘는 숫자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왜 땅에 오셨습니까? 생명을 구원하고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영혼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라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 받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0장 13절~15절 말씀에“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은혜가 개인에게 전달되는 과정이 전도입니다. 이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말씀하시기를“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전도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미련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해야 합니다. 전해야 구원받는 역사가 있습니다. 만일 나아만 장군의 집 개집종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나아만 장군은 일평생 문둥병으로 고통당하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를 알고 있는 우리가 입을 다물면 구원의 역사는 없습니다. 우리가 입을 다물면 죄악과 힘겨운 삶에 시달리며 고통당하다가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부하시기를“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고 하셨습니다. 

    둘째, 나아만이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순종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자기 집 하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만나고자 이스라엘로 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고 저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아만 장군이 화가 나서 하는 말이“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열왕기하 5:11)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12절에“다메섹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 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라고 하면서 화를 내며 돌아 가려했습니다. 

    그때 동행한 신하들이 권면하기를“장군이여 당신이 나병을 고치러 왔으면 이것보다 더 한 것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뭐가 어렵다고 그러십니까?”라고 했습니다. 이 권면을 받아들인 나아만 장군은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 들어가서 일곱 번 씻고 나왔습니다. 그때 나아만의 문둥병은 어린아이의 살같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나아만이 어떻게 치유를 받았습니까? 나아만이 11절에 말한“내 생각”이란 말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내 생각”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데에 장애물이었습니다.“내 생각, 내 상식, 내 경험”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데 장애물이었습니다. 나아만은 마침내 장애물인 자신의 생각을 버렸습니다. 만약 나아만이 자기의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면 그는 영영토록 나병환자로 고통 속에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치명적인 장애물이“내 생각”이란 것입니다.“내 기준, 내 생각, 내 방법”으로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내 뜻대로 안 되면 원망하며 불평하게 되고 또는 절망하고 좌절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우리도“내 생각, 내 방법, 내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사무엘상 23장 2절~4절을 보면, 다윗은 블레셋과 싸울 때에 먼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하나님, 블레셋을 치리이까 말리이까?”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먼저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생각을 버릴 때 하나님의 생각이 떠오르고“내 경험”을 버릴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내 아집”을 벼리면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내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나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본문 14절 말씀에“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이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그 결과 어린아이 살처럼 치유가 되었습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결국은 순종입니다. 
    성경에 수많은 기적과 응답의 배후에는 순종이 있었습니다. 
    순종을 통해서 기적이 나타나고 응답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 온 천하가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어려운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부잣집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극히 가난한 사르밧 과부에게로 보내셨습니다. 
    가난한 과부에게 떡을 구하자 과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 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상 17:12) 

    이때 엘리야가 다시 불쌍한 과부에게 말합니다.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 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상 17:13~14) 

    이 말에 사르밧 과부는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에 대해 열왕기상 17장 15~16절에 기록하기를“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순종의 끝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5장에는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는 기사가 있습니다. 
    고기잡이가 직업인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깊은 데로 가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리라.”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누가복음 5:5)하고 그물을 내렸습니다. 
    이 경우 상식에 비춰볼 때 순종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물고기 잡는 것이 직업인 전문가이고, 예수님은 내륙지방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신 분이므로 고기잡이에는 문외한이었습니다. 
    더욱이 물고기는 밤에 잘 잡히는 것이 상식인데, 간밤에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물고기를 낮에 잡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하기를“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누가복음 5:5)라고 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5:5-6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 상식에 벗어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누가복음 5:6~7)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입니다. 

    이사야 55:8~9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왜 순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까요? 
    순종은 살아있는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도 죽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죽은 믿음의 사람 즉 순종이 없는 사람, 행동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실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신앙의 위대한 힘이 무엇입니까? 내 방법 내 생각을 내려놓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약 100년 전 이집트에서 3천년 된 고분을 발굴했는데 미이라가 나왔고, 그 옆에 꽃병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꽃병을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는데 그만 어떤 사람이 실수로 떨어뜨려 깨졌습니다. 꽃병이 깨지자 바닥에 몇 개의 완두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너무 오래되어 겉이 쭈글쭈글했고 차돌처럼 딱딱했습니다. 전문가들이 연구 검토한 후 땅에 심었더니 30일 후에 새파란 싹이 돋아났습니다. 3천 년간 침묵을 지킨 생명이 잠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씨앗은 수분과 온도만 적당하면 3천년이 지났어도 싹이 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진 땅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마음 밭에 심겨진 씨앗의 싹을 틔우는 습도와 온도는 순종입니다. 
    이처럼 살아있는 믿음 즉 순종하는 믿음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열매가 순종이고, 순종의 열매가 축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내 경험, 내 방법, 내 생각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기 바랍니다. 

    “나아만은 큰 용사이나 문둥병자더라”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풍요롭고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고뇌와 고통과 불안과 평안이 없는 삶,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포장된 행복, 만족이 없는 소유, 끝없는 불만 속에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나아만처럼 “내 생각”을 버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내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내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내 방법의 올무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내 생각이 장애물이 될 때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내 생각을 버리고 순종했을 때 치유됨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내 방법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나를 보시기 바랍니다.
    내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내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나아만 장군의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난제가 해결되었던 나아만 장군의 결단과 경험이 우리의 결단, 우리의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열왕기하 5장 요약

    아람 장군 나아만이 나병에 걸리자 엘리사를 찾아와 치유를 받습니다(5:1-9).
    엘리사는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고, 나아만은 순종하여 나병에서 치유됩니다(5:10-14).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이방인에게도 미친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열왕기하 6장 요약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 하자 엘리사는 하나님의 계시로 아람 군대의 동선을 미리 알려줍니다(6:8-10).
    엘리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적군의 눈을 멀게 하고, 사마리아로 이끌어 그들을 살려 보냅니다(6:18-23).
    이후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를 포위하지만, 기근 속에서 하나님의 개입으로 기적적인 구원이 이루어집니다(6:24-33).

    열왕기하 7장 요약

    엘리사는 기근 속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을 예언합니다(7:1). 나병 환자들이 아람 진영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전하자, 백성들은 아람 군대가 남긴 물자를 얻어 기근에서 벗어납니다(7:5-16).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어 절망적인 상황이 반전됩니다.


    영적 여정 / 믿음, 희망,사랑

    영적 여정의 단계들을 구분하려 시도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0-250년경)였다고 여겨진다.
    그는 영성 생활의 이상을 하느님에 대한 참된 인식으로 보았다.
    그는 인간이 관상을 통하여, 이어서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리고 아가페적 사랑과 평정을 실천함으로써 이러한 참된 인식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다.
    그는 이 단계들에서 각각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첫 단계에는 믿음으로 열광을 억제하고 두려움으로 악을 피해야 하며
    둘째 단계에서는 희망으로 덕행을 실천해야 하고
    셋째 단계에서는 하느님을 위한 사랑으로 선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한 카시아누스(360년경-435년)도 이와 유사하게 믿음, 희망, 사랑의 차이를 통하여 세 단계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믿음을 통한 두려움은 노예들의 속성이고
    희망은 보상을 받으려는 노력의 속성이며
    사랑은 하느님 자녀들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적 여정에서 차례로 믿음, 희망, 사랑의 여정을 거치게 된다.

    사랑의 진보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1090-1153년) 사랑을 중심으로 여겨,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단계들을 구분하였다.
    그에 따르면,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완덕의 길을 시작하고 자신의 무능함을 느끼면서 하느님을 찾게 되고, 다음으로는 하느님을 가까이 함으로써 하느님의 은혜와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고, 순수한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345-399년) 역시 영적인 삶의 단계를 셋으로 나누어 각각 실천, 관상, 신학으로 구분하였다.
    그의 영향을 받은 위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6세기 초 )도 신비 체험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단계를 정화, 조명, 일치의 상승적 단계들로 설명하였다.
    여기서 정화 단계는 죄와 싸우는 단계이고, 조명 단계는 덕을 실천하는 단계이며, 일치 단계는 하느님과 일치하고 신비 체험을 하는 단계이다.

    ​다른 예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누가 9:23)라는 말씀에서 자신을 버리는 것이 완덕의 첫 단계인 자기희생과 포기를 뜻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둘째 단계인 적극적인 덕행 실천을 뜻하며.
    하느님을 따르고 예수님과 내적 일치를 이루는 것이 마지막 단계인 일치의 길을 뜻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마찬가지로 세 단계를 구분하는데,
    성 아우구스티노에게서와 같이 사랑을 완덕의 핵심으로 여긴다.
    어떤 존재자의 완성이 그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데에 있다고 할 때, 사랑만이 인간을 하느님과 완전히 결합시킴으로써 그의 최종 목적에 도달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완덕에 이르는 세 단계에 관하여 그는 [신학대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 먼저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자신을 내몰아가는 자신의 욕망을 이겨내고 죄를 벗어버리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영적 삶을 시작하는 초보자들이 해야 하는 것이다. ...
    그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것은 영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 자신이 어떻게 하면 선에 더 나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을 다하여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바로 진보하고자 하는 자들의 일인 것이다. ... 세 번째의 단계로는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여 하느님 안에서 참된 복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완성된 자의 일인 것이다."

    영적인 삶의 단계를 세 단계로 나누는 것이 전반적인 추세임을 알아볼 수 있다.
    그 세단계는 정화-조명(빛)-일치 또는 초보자-진보자- 완성자의 단계들로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정들이 반드시 시간 순서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성인들의 영적 안에서도 이와는 전혀 다른 순서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성녀 소화 데레사의 경우 일찍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합일을 맛본 후 더 늦은 시기에 오랜 기간 동안 어둠을 겪기도 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는, 영적인 진보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어떤 시기에는 영적인 퇴보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일부 저자들은 "여러 단계들의 연속을 엄격하게 주장하지 않고 신적인 시련과 은혜, 위로와 실망의 교차"로 그 여정을 이해한다.


    "죽음"과 관련된 성경 구절

    창세기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3:19 

    네가 흙에서 취함을 입었으니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기 5:5

    아담은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세기 35: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출애굽기 12:29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을 치시니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자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레위기 20:9

    사람이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면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민수기 6:6

    그가 여호와께 바치는 구별된 자로 있는 모든 날 동안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신명기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여호수아 23:14

    보라 나는 오늘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사사기 16:30

    삼손이 이르되 나의 죽음이 블레셋 사람과 함께하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 많았더라.

    룻기 1:16-17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사무엘상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기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열왕기상 19:4

    자기는 광야로 들어가 하루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열왕기하 13:14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와 자기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역대하 32:33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그의 자손들이 다윗의 자손의 묘실 중 높은 곳에 장사하고.

    욥기 14:14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내가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고 내게 임할 변화(부활)를 기다리겠나이다.

    욥기 19:25-26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피부가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 49:15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 내시리로다.

    시편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전도서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도서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이사야 25: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레미야 31: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이 있을 것임이라.

    에스겔 18: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호세아 13:14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마가복음 8: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구원하리라.

    누가복음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사도행전 7:59-60

    그들이 돌을 던질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부르짖어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로마서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고린도전서 15:26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린도전서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빌립보서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요한계시록 1: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의 정의와 원인

    1. 죽음의 정의

    성경에서 죽음은 영적·육체적 분리를 의미합니다.
    육체적 죽음은 사람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상태이며(전도서 12:7), 영적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가리킵니다(에베소서 2:1).
    죄의 결과로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왔으며(로마서 5:12), 모든 인류가 이에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2. 죽음의 원인

    죽음은 죄로 인해 들어온 결과로 성경은 설명합니다.

    •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 창세기 2:17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고, 아담과 하와가 이를 어길 때 영적·육체적 죽음이 시작되었습니다(창세기 3장).

    • 죄의 삯 : 로마서 6:23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명확하게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며(로마서 3:23), 이로 인해 죽음이 필연적으로 따릅니다.

    3. 죽음과 하나님의 심판

    성경은 죽음을 이후의 심판과 연결짓습니다.

    • 육체적 죽음 이후의 심판 : 히브리서 9:27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 : 요한복음 5:29에 따르면,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영생을,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됩니다.

    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죽음의 승리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죽음이 궁극적으로 패배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 예수님의 부활 : 고린도전서 15:54-55에서 "사망이 이김에 삼킨 바 되리라... 사망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선포하며 부활의 승리를 찬양합니다.

    • 영생의 약속 : 요한복음 11:25-26에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하십니다.

    5. 성도의 죽음에 대한 위로와 소망

    성경은 성도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 천국 소망 : 빌립보서 1:21에서 바울은 "나에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며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강조합니다.
    • 영원한 안식 : 요한계시록 21:4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라고 말하며 성도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약속합니다.

    6. 영적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회복

    성경은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적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 영적 회복 : 에베소서 2:4-5에서는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새로운 생명이 주어짐을 설명합니다.
    • 복음의 능력 : 요한복음 5:24에서 예수님은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선언하십니다.

    7. 결론

    성경은 죽음을 단순한 끝이 아닌, 심판과 영생으로 이어지는 영적 여정의 일부로 설명합니다.
    죽음은 죄로 인해 들어왔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주어집니다.
    성도들은 이 소망을 통해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하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4월 24일(목) 열왕기상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1:4) 6. 16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찌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
    Therefore this is what the LORD says: 'You will not leave the bed you are lying on. You will certainly die!' " So Elijah went.

    열왕기하 1장 요약

    북이스라엘 왕 아하시야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고, 블레셋의 신 바알세붑에게 병의 회복 여부를 묻습니다(1:2).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는 그를 막아 하나님의 심판을 전합니다(1:3-4). /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아하시야엘리야를 잡으려 하지만 하나님의 불이 군사들을 삼킵니다(1:9-12).
    결국 아하시야는 회복되지 못하고 죽습니다(1:17).

    열왕기하 2장 요약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며, 엘리사가 그의 뒤를 이어 선지자가 됩니다(2:11-13).
    엘리사는 엘리야의 능력을 이어받아 요단강을 가르고 여러 기적을 행합니다(2:14-15).
    그는 백성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하며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시작합니다.

    열왕기하 3장 요약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모압 왕 메사를 대항하여 전쟁을 벌입니다(3:5-7).
    엘리사는 이들 연합군의 요청에 따라 하나님의 도움을 예언하고, 전투에서 물 공급과 승리를 얻게 합니다(3:16-20).
    그러나 모압 왕은 마지막으로 극단적인 제사를 드리며 저항합니다.

    열왕기하 4장 요약

    엘리사는 한 과부의 기름병을 채우는 기적을 비롯해 여러 기적을 행합니다(4:1-7).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고, 독이 든 국을 해독하며,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등 하나님의 공급과 구원을 보여줍니다(4:32-44).
    이로써 엘리사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백성들 속에서 크게 존경받게 됩니다.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You will certainly die!)(1:4, 6. 16)

    열왕기상하는 원래 한 권의 책입니다.
    본문은 아하시야가 중병에 걸렸을 때 블레셋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을 의지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알세붑을 헬라식으로는 "바알세불"이라고 합니다.

    1절에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라고 말씀합니다.

    고대사회에서는 한 나라의 왕이 바뀌면 조공을 바치던 주변국들이 정치적인 독립을 꿈꾸며 바치던 조공을 철회하고 새 왕에게 항거하는 것이 일반적인 전례였습니다.
    그래서 새로 즉위한 왕은 이런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이 이전 왕만큼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또다시 원정과 정복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아람과의 전쟁에서 3번이나 승리한 아합이 죽자, 북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치던 모압이 반기를 들고 독립을 선언한 것입니다.

    열왕기하 3:4-5에 의하면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압이 이렇게 배신한 것이 오직 아합이 죽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즉위했을 때, 주변국 중에는 조공을 철회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 많은 주변국 중에서 한 나라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윗이 살아있을 때처럼 이스라엘을 섬겼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잠잠했던 것일까요?
    성경은 그 해답을 솔로몬이 하나님만을 섬겼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주의 종에게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계속해서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며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악한 대적을 막아주시고, 이길 힘과 용기를 주시고, 때로는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든든히 설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섬길 때에는 세계에도 평화가 임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불의에 빠졌을 때, 여지없이 세상에 제국들이 일어나고 불의가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바로 서면 세계가 평화를 누리게 되고,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죄에 빠지게 되면 온 세계가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신실하게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절 함께 읽습니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왕궁의 다락 난간은 왕궁의 가장 높은 지붕 근처에 만들어 왕의 휴식 장소나 명상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열왕기상 10:12에 솔로몬 왕도 이같은 난간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하시야가 이러한 난간을 거닐다가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하시야가 어떻게 난간에서 떨어지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앞선 열왕기상 22:52-53에 기록된 그의 교만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낮추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22:51-53
    유다 왕 여호사밧 제 십 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 아비의 과 그 어미의 과 이스라엘로 범죄케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로 행하며.
    바알을 섬겨 숭배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동하기를 그 아비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기도

       영의 눈과 귀를 열어주옵소서!
       - 깨닫는 은혜를 내려주소서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언 28:5) 

    그런데 그는 자기의 병이 나을지의 여부를 하나님께 묻지 않고 블레셋 에그론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인 ‘바알세붑’에게 묻기 위해 사자를 파견하는 어리석은 짓을 합니다.
    그가 생명의 위태로움을 느끼고 다급하게 생각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파리들의 주’라고 불리는 파리의 형상을 한 우상 바알세붑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우상이 어떠한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파리는 곤충 중에서도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해충입니다.
    그런데 에그론 사람들은 이러한 파리를 신으로 섬기고 있었고 여기에 아하시야도 동참한 것입니다.
    파리에게 자기의 생명이 어떻게 될지를 묻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시대를 초월해서 자기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태양과 달과 별과 바다를 섬기고 바위와 나무와 동물들을 섬깁니다.
    심지어 개구리를 섬기고 뱀을 섬기고 몸에 붙어사는 이를 섬기기까지 합니다.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면 이렇게 됩니다.
    성경 출애굽기에 기록된 열 가지 재앙에 등장하는 동물들도 다 애굽의 우상과 관련된 것입니다.

    인간들은 스스로를 굉장히 지혜롭고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이 자기들이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만물, 그중에서도 파리, 개구리, 뱀, 그리고 자기들이 만든 신상을 신이라고 섬기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 자신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나는 과연 이러한 어리석은 우상 숭배에서 자유한 삶을 살고 있는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4절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아하시야가 자신의 병의 치유 여부를 묻기 위해 에그론의 신인 바알세붑에게 사자를 파견하자 하나님께서 그 사자에게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어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아하시야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진노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고 그들의 대적 블레셋의 우상 바알세붑을 찾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농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 아합의 삶을 통해 충분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한 상태였습니다. 8절에 그가 엘리야의 옷차림만 듣고도 알아본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이러한 행동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악행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크게 진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천하보다 소중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심지어 악인들이 그의 죄로 인해 멸망하기보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겔 33:11).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마 12:20). 그럼에도 아하시야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의 죄가 너무 무겁고 커서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진 것은 하나님의 긍휼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 아하시야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만일, 아하시야가 회개했다면 병을 치유받게 되는 것은 물론 다른 큰 은혜도 입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을 짓밟고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바알세붑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멸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멸시하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으나,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멸시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하고 긍휼 없는 심판의 자리에 서게 합니다(히 10:28-29).

    예수님께서도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마 12:31-3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긍휼과 은혜를 베푸실 때 믿음의 자리에서 감사로 받을 수 있도록 날마다 말씀과 기도에 더욱 힘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알세불은 누구인가요?

    바알세불은 바알세붑의 헬라어식 이름입니다.
    바알세붑은 구약시대에 에그론이라는 고대 블레셋 도시에서 숭배된 이방 신으로 “파리 대왕”을 뜻합니다(열왕기하 1:2).
    고대 블레셋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금으로 된 파리 형상이 발견되었습니다.
    블레셋 시대 이후로 유대인들은 그 이름을 헬라어 신약성경에 따라 “똥의 대왕”을 뜻하는 “바알세불”로 바꾸었습니다.
    파리의 공격으로부터 구제 받기 위해 숭배했던 파리의 신을 딴 이름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바알세붑이 향후 바리새인들에게 지독한 경멸의 이름이 된 “오물의 신”으로도 알려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알세붑은 특히나 경멸받는 신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유대인들에 의해 사탄의 별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알세불은 구약에서 나오는 가나안의 풍요의 신의 이름인 “바알”과 고귀한 집을 뜻하는 “세불”로 나뉠 수 있습니다.
    두 단어를 합쳐서 악마들의 신인 사탄을 위한 이름을 만든 것입니다.

    바알세불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 10:24-25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묘사할 때 최초로 사용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바알세불(마가복음3:22; 마태복음12:24)을 언급하며 예수님을 향해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습니다(마태복음9:34).

    마태복음 12:22에서 예수님은 귀신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러자 무리가 다 놀라 “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말했습니다(마태복음 12:23-24).

    바리새인이 예수님의 엄청난 기적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임을 깨달은 무리와는 정반대로 반응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예수님께서 기적이나 그 어떤 인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초월적인 일을 하셨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었지만, 그 힘의 원천을 하나님이 아닌 바알세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악마는 순수한 선을 행하지 못한다는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중심적인 교만으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영향력이 커지면, 자신들이 더 이상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적은 부정하지 못할 지라도 예수님의 힘의 원천이 악마들의 신인 바알세붑의 악한 힘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 볼 것은 바알세불과 현대의 크리스천들의 연관성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 사도들을 세상으로 내보내려고 하십니다(마태복음 10:7).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복음10:17,22)고 하시고, 이어서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마태복음10:24-25)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당시 바리새인처럼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탄이라고 부른다면 그분의 제자들 역시 사탄이라 부를 것이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요한복음15:18-21).


    바알세불

    히브리어로는 'בעל זבוב‎(Baʽal Zebûwb, 바알 제부브)'
    라틴어로는 'Beelzebūb(베엘제부브)' 또는 'Baal-Zebul(바알제불)'로 음역되었다.
    한글 표기는 다양한데, 라틴어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표기와 히브리어를 기초로 한 20세기 초 역본에 근거하는 개신교 표기, 이 밖에 영어식 표기, 프랑스어 표기, 일본어 서적을 중역하며 들어온 표기, 영화 등 대중 매체에서의 표기 등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알제붑, 바알제불, 베엘제붑, 베엘제불, 바알세붑, 바알세불, 벨제붑, 벨제뷔트, 베르제뷰트, 베르제브브, 베르제부부, 벨제브브, 벨제부브, 벨제부르 등 거의 등장할 때마다 다르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이 가운데 베르제브브, 베르제부부, 벨제브브, 벨제부브 등은 전부 일본의 가타카나 표기인 '베루제브브(ベルゼブブ)'를 중역하다 수입된 것으로, 라틴어 베엘제부브의 가나 음차에서 유래한 표기이며, 베르제뷰트, 벨제뷔트 등은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표기이다.

    이러한 문제점들 때문에 본 문서의 제목은 대한민국의 주요 교단에서 채택한, 공인된 한국어 성경의 표기들 중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을 제목으로 삼았다.

    성경의 바알(Baal)

    I. 구약성경에서 이것은 페니키아 사람들 특히 두로 사람들의 우상을 가리킨다.

    바알 숭배는 아스다롯 숭배와 함께 히브리 사람들에게 특별히 사마리아에서 엄숙한 의식과 함께 도입되었다(삿 6:25-32; 왕하10:18, 28). 바알의 복수인 바알들(Baalim)은 바알의 형상들을 의미했다(삿 2:11; 10:10).
    엣바알, 여룹바알, 한니발 같은 이름들을 통해 바알 숭배가 페니키아와 카르타고 지역에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바빌론 사람들은 이것을 벨이라 불렀다(사 46:1; 렘 50:2; 51:44).
    바빌론의 바알 숭배는 유명한 바벨탑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탑의 꼭대기 방은 별을 관측하고 그 기록들을 담아 둔 곳이었다.

    동방의 점성술에서 바알 숭배는 곧 천체 숭배를 뜻하였으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바알이 태양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이것을 행운의 신 주피터라 불렀다.
    그래서 주피터는 비너스와 함께 사람의 행운을 주관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그 관계가 바알과 아스다롯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 이해되었다.

    바알의 형상들과 전들은 대개 높은 곳에 있었다.
    므낫세는 예루살렘 성전의 두 뜰에 하늘의 군대 특히 아스다롯을 위한 제단들을 세웠다(왕하 21:5-7).
    예레미야는 지붕에서 바알에게 경배를 드린 유대인들에게 경고를 주었으며(렘 32:29) 요시야는 아하스가 자기의 궁전의 난간에 세운 이런 제단들을 파괴시켰다(왕하 23:12).
    또 고대 사람들은 종종 인신 제물을 바알에게 드리기도 했다.
    예레미야는 바알의 산당들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불로 태워 바알에게 번제 헌물로 드린 유다와 예루살렘의 거주민들을 책망하였다(렘 19:5).

    바알, 아세라, 바알세불, 아스다롯

    • 바알(בּעל)

    바알'은 당시 모압과 아모리인들이 섬기던 남신(男神)으로서 태양을 상징한다(레 26:1-3).


    모압은 여러 우상들을 섬겼는데, 그 중 주신(主神)으로 '바알'(Baal)을 섬겼다.
    이 '바알'은 '주인'이란 뜻으로서(호 2:16), 주로 생산과 다산(多産)을 주관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므로 이 바알 숭배와 관련하여 풍성한 생산을 기원하는 뜻으로 난잡한 혼음(groupsex), 인신 제사 등의 음탕하고 끔찍한 행위가 곁들여졌던 것이다.
    특히 바알 숭배자와 바알신전의 여인들과의 음행은 바알 제사의 절정이며 또한 바알 숭배자들의 의무였다.

    *참고 /  히브리어 '바알'은 본래 '주인', '남편', '소유자'란 뜻인데, 때로는 '우두머리'(a chief man) 또는 '지도자'(a leader)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이 바알의 음란한 종교에 처음 빠진 것은 출애굽후 광야 생활을 할 때 발람의 꾀에 빠졌을 때이다.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두려워 메소포타미아의 거짓 예언자 발람을 매수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으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로 결국 그는 이스라엘 축복하게 된다.
    발람은 예언 직후 자기 고향 메소포타미아(신 23:4)로 가지 않고 자기를 발람에게로 인도해 왔던 미디안 장로들과 함께 미디안 땅으로 갔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이스라엘을 범죄케 하는 사악한 꾀를 발락에게 일러줌으로써 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저주(심판) 받도록 했다(계2:14).
    발락과 헤어진 발람은 자기의 예언이 이스라엘에게 길(吉)함을 알고 이스라엘 진영으로 찾아가 그 예언의 의미를 풀이해 준뒤, 발락이 보장해주었을 부(富)와 명예를 모세에게 요구하다가 거절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런 후 격분한 그는 이스라엘에게 보복하기 위해 미디안 족속에게로 가서 사악한 꾀를 베풀어 이스라엘을 범죄케 했다(결국 그는 이 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발람의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행한 음모는, "모압 여자들과 이스라엘 남자들이 음행"하게 한 것이다.
    모압여인들은 우상 승배 권유에 앞서 음행(淫行)을 미끼로 이스라엘남자들을 유혹하였으며, 그후에 자연스럽게 그들을 우상 숭배로 미혹하였다.
    그런데 이같은 미인계(美人計)를 통한 우상숭배 유도 계획은 발람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후일 분명히 지적되고 있다(민 31:16; 계2:14).
    즉 이같은 계획(바알브올 사건)은 발람의 꾀에 미디안과 모압이 연합하여 주도 면밀하게 시행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 사건의 비극성은 후일 사도 바울에 의해 또다시 지적되고 있다(고전 10:8).
    실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유기적인 것으로, 한쪽의 부패는 곧 전인격의 타락으로 발전한다. 그런의미에서 하나님은 영육의 순결을 동시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출 20:3-5,14).

    바알 숭배와 관련하여 풍성한 생산을 기원하는 뜻으로 난잡한 혼음(groupsex), 인신 제사 등의 음탕하고 끔찍한 행위가 곁들여졌던 것이다. 특히 바알 승배자와 바알신전의 여인들과의 음행은 바알 제사의 절정이며 또한 바알 숭배자들의 의무였다.

    아마 주도 면밀한 계획하에서 모압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급 인사들을 주로 유혹했을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을 올무에 빠뜨리는 일에 모압과 미디안이 긴밀히 연락, 협조했던 것 같다.

    이 일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게 했다. 하나님은 거룩한 의미에서 '질투하시는 분'(출 20:5;수24:19)으로서, 당신의 백성이 당신을 버리고 우상의 노예로 전락했을때 당신의 그거룩한 속성상 극열한 진노로 다가오신다.
    이는 역설적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백성을 얼마만큼이나 사랑하시는가를 대변해 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교수형에 처했다.
    이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라는 뜻이다.
    따라서 70인역(LXX)은 이를 '파라데이그마티제인' 곧 '공개적으로 수치틀 주다', '드러내다'로 번역하였다.
    한편 '태양을 향하여'란 말을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우상 바알이 태양을 상징하기 때문에 본절과 같이 형벌을 가한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은 바알을 섬긴 자들의 어리석음을 적나라하게 보이시기위해 그들이 섬긴 그 '태앙을 향하여' 처형케 만드셨고, 그 결과 우상 숭배자들의 처참한 결말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셨다(22:41).

    그러나 훗날 이스라엘은 이러한 일을 거울로 삼지 않고 가나안 정착후에도 여전히 바알과 아세라 숭배에 깊숙이 빠져즐었다.

    바알 종교를 이스라엘 전역에 퍼뜨린 장본인은 이세벨이다.
    그녀가 지은 수많은 범죄, 즉 바알을 숭배한 우상 섬김의 배도(背道)는 음행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또한 '술수'는 우상숭배에 따르는 일종의 마술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모세 율법에서는 이를 엄격히 금하고 있는 것이었다(출 22:18;신 18:10, 11).

    •바알세붑

    바알과 더불어 함께 알아야 할 것은 바알세붑이다.
    '바알세붑'(Baal-zebub)에서 '바알'은 '주'(Lord), '소유주', '남편' 등을 의미하며,
    '세붑'(제붑)은 '파리, 날벌레'라는 뜻이다(사 7:18; 전 10:1).
    그러므로 '바알세붑'은 '파리의 주', '날벌레의 주'라는 뜻이 된다.
    혹자(G. Rawlinson)는 '바알세붑'을 '베엘 사멘'(Beel-Samen)과 동일한 신으로도 보았다.
    '바엘 사멘'은 베니게인(Phoenician)들이 섬기던 '하늘의 주'이다(풀핏주석). 그러나 이것은 어원적인 자료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그런데 70인역(LXX)은 '바알세붑'을 '바알 뮈안' 또는 '데온 뮈안'으로 번역하였다. 이와 관련해 혹자는 '데온 뮈안'을 파리 형상으로 된 신으로서 질병을 보내기도 하고 파리로부터 오는 질병을 지켜 주기도 하는 신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신약에서는 '제붑'이 '제불'(Zebul)로 읽혀지고 있는데(마10:25), '제불'은 '왕'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알세불', 즉 '바알 왕'이라는 칭호가 '바알세붑'의 본래의 칭호라는 간접적인 증거가 된다. 또한 바알세붑은 후대 랍비들에 의하여 '바알세벧'(Ball-Zebel)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분토(糞土)의 왕'이라는 뜻이다. 이것으로 보아 왕이라는 뜻의 '세불'이 점차 '세붑', '세벧' 등으로 불리워진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우상에 대하여 나쁜 인상을 심어 주려 한 탓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후에 '바알세불'은 여호와의 적대자인 사단의 칭호로도 쓰이게 되었다(마 10:25; 막 3:22; 눅11:1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마 10:25)

    • 아세라
    '아세라'(Ashera)는 본래 두로(Tyre)의 신이었으나 후에 고대 근동의 여러 족속들, 특히 페니키아, 아모리족과 가나안족이 숭배하게 된 여신(女神)이다. 가나안 최고의 신 '엘'(El)의 아내이자 풍요와 다산(多産)의 신 '바알'(Baal)의 모신(母神)이기도 한 아세라는 성교(性交)와 전쟁의 신인데, 아낫(Anath), 아스다롯(Ashtaroth)과 더불어 가나안의 3대 여신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런데 아세라는 주로 나무에 그 상(像)을 새겼으므로 단순히 '목상'으로만 불리우기도 하였다(레 26:1; 왕하 10:26).


    아세라는 '바알'을 비록한 여타 가나안 70우상의 모신(母神)이기도 했다. 아세라는 분열 왕국 시대에 여호와 신앙의 주요적으로 등장한다.

    '바알' 제단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아세라 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므로 이 두 우상의 숭배에는 필연적으로 성적 타락이 동반되었다(출34:13). 따라서 성경은 종종 바알과 아세라를 함께 연결하여 사용하고 있다(삿6:28; 왕하23:4). 한편 아세라 상은 흔히 푸른 나무 아래나 곁에 세워졌는데(왕상14:23; 렘17:2), 주로 나무에 그 상(象)을 새겼으므로, 단순히 목상(木象)이라고 명명되기도 했다(레26:1; 왕하10:26).

    • 아스다롯
    한편, '아스다롯'(Ashtaroth)은 '아세라'(Ashe-rah)와 더불어 풍요,다산, 사랑 또는 쾌락의 여신이다. 그런데 이 여신에 관한 난제는 아스다롯 및 바알과의 관계 문제이다. 과거에는 아세라와 아스다롯이 동일한 신인 것으로 오해되었으나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 결과 엄연히 구분되는 다른 두 신임이 판명되었다. 한편 아스다롯은 고대 근동의 여러 지방에서 두루 숭배되었느데 그가운데서도 특히 두로 (Tyre)와 시돈(Sidon) 백성들이 열렬히 숭배하였다. 이 아스다롯은 지역에 따라 여러 명칭으로 불리웠는데 헬라에서는 아프로디테(Aphrodite), 로마에서는 비너스(Vinus)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이 여신 숭배와 관련된 진흙상들이 출토된다. 그런데 이 우상들은 유방과 음부를 두드러지게 만든 소규모의 우상으로, 당시 일반 가정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당시에 이 아스다롯 숭배가 얼마나 널리 퍼졌는지 알 수 있다. 삿 2:13; 삼상 7:3; 31:10

    한편, 이스라엘이 가나안 신을 섬기려면 반드시 그 종교의 속성상, 이들 종교의 여사제(女司祭)는 공인된 창기였으니, 신에게 제사드리러 나오는 남자는 곧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그러한 신을 대리한 이들 여사제와 성관계를 갖는 것이 곧 신과 접촉하는 행위(예배)를 저질렀음을 뜻한다.

    • 가나안의 다른 신들
    *왕하 17:31/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다르닥(Tartak)은 아람 이주민들의 신으로서 숭배된 여신 아타르카티스(Atargatis)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신은 라스 샤므라 사본들에 나오는 앗타르(Athar)와 아스다롯과 시리아인의 여신 아낫(Anath)을 혼합한 복합적인 존재이다.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은 자녀를 불살라 바치는 것으로 보아 이 신은 몰록 종교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7절 주석 참조. 그래서 혹자는 이 신들이 스발와임의 몰록 신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이 신이 태양 신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Keil & Delitzsch). 아무튼 이 가운데 아남 멜렉(Anammelech)은 일반적으로 '아누'(Anu)라는 메소포타미아의 태양 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Hobbs).

    닙하스(Nibhaz)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한편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위에서 언급된 신들 중 숙곳브놋은 암탉의 형상을, 네르갈은 수탉의 형상을, 아시마는 염소 형상을 띠고 있었다 한다. 그리고 닙하스는 개의 형상을, 아드람멜렉은 노새의 형상을, 아남멜렉은 말의 형상을 각기 띠고 있었다 한다(플핏, 메튜헨리 주석).

    이스라엘의 문제는 이러한 우상들과 더불어 또 여호와 하나님을 혼합하여 섬겼다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했다는 것은 유일 신 하나님으로 알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경배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러 신들 중 하나로 섬겼다는 의미다.

    •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출 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질투의 하나님" - 이 표현은 하나님을 의인화시킨 신인 동형 동성론적 표현이다(20:5).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상 숭배하는 자들에 대하여 질투하시는 분으로 묘사되는데, 그것은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 외의 다른 대상에게 애정과 헌신을 바치는 것을 결코 용납치 않으신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다(20:5;신32:16;수24:19,20).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에게 돌아올 고유한 영광이나 찬양이 자신의 피조물인 다른 대상에게 엉뚱하게 돌아갈 때, 그리하여 그 백성의 영혼이 헛된 우상에게 빼앗길 때, 당신의 속성상 우러나오는 그러한 공의로써 그러한 행위를 질투하시는 것이다. 특별히 본절에서 다시금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 것은 다시는 금송아지 숭배와 같은 죄를 범하지 말라는 의미에서일 것이다.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출 34: 15), 12절 내용의 재차 반복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과의 언약 체결을 강하게 금지하시고 있는 까닭은 이스라엘이 이미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 백성이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과 의무를 지고 있는 백성이므로 또다시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민족에 대해서 어떠한 책임이나 의무를 지게 되는 언약을 이중으로 맺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언약을 맺게 되면 서로 상대방의 신을 인정하고,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당대의 관례였으니 하나님께서 그처럼 우상 숭배와 직결되는 가나안인과의 언약 체결을 금지하신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영적으로 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영적으로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6에서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아담은 모든 인류에 죽음을 들여온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명령은 불순종할 경우 죽게 될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내려졌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세기 2:16-17).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죽어가는 너는 죽게 될 것이다”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는 영적인 죽음으로 시작되어, 점진적인 육체의 노쇠로 생애에 걸쳐 지속되며, 결국 육체적인 죽음으로 끝이 나는 지속적인 죽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당장의 영적 죽음은 아담이 하나님과 분리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숨은 아담의 행동 (창세기 3:8)은 죄에 대한 비난을 여자에게 돌리려 했던 행동과 마찬가지로 (창세기 3:12) 그러한 분리를 입증합니다.

    불행하게도, 이 영적 – 그리고 결국은 육체적인 – 죽음은 아담과 하와에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은 모든 인류를 그의 죄로 끌어들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12에서 아담의 죄를 통해 죄와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왔고, 모든 사람들에게 퍼졌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또한, 로마서 6:23은 죄의 대가가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기 때문에, 죄인들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의 당연한 결과는 죽음뿐입니다.

    하지만 단지 물려받은 죄만이 영적 죽음의 원인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사악함 또한 그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은 구원받기 이전에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었다고]” 가르칩니다 (1절). 이것은 영적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 이전에는 여전히 육체적으로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5절, 또한 로마서 5:8 참조). 골로새서 2:13은 이 진리를 되풀이합니다.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는 죄로 죽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요한복음 15:5), 하나님의 이끄심 없이는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고 거듭 주장하십니다 (요한복음 6:44).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우리의 천성적인 마음은 하나님께 복종할 수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7-8절). 타락한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이해조차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2:14).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인 죽음으로부터 살리시는 행동을 중생이라고 부릅니다. 중생은 오직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중생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고 (에베소서 2:5),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됩니다 (디도서 3:5). 요한복음 3:3, 7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가르치신 것처럼, 이것은 마치 두 번째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살게 되었으므로, 절대 진정으로 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당신을 믿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16, 36, 17:3).

    죄는 사망으로 끝납니다. 그 사망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아 믿음을 통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의 믿음은 우리를 영적인 삶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반드시 죽으리라” vs. “죽을까 하노라” – 하와를 위한 변명

    1. 하와의 문제적 발언

    말 한번 했다고 그렇게 비난 받은 사람이 하와 말고 또 있을까요?
    하와는 성경 전체에서 딱 두 번 말을 합니다(창 3:2-3, 창 4:1).
    첫 발언에서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3:3, 개역개정)”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창 2:17)을 심각하게 왜곡한 것으로 많은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두 문장을 비교해 보자면,

    창세기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세기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는 둘 다 생명나무를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보더라도,
    1) “반드시 죽으리라”에서 “반드시”가 빠져 있고,
    2) “만지지도 말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데 하와가 임의로 첨가했으며,
    3) “죽을까 하노라”라는 표현으로써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확정적인 말씀을 상대적이고 온건한 표현으로 왜곡하거나, 혹은 가능성의 수준으로 격하시켰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하와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의심의 영”으로 가득했고, 이렇게 말을 잘못 옮기는 것은 인류 최초의 여성으로부터 시작된 여자들의 고질적인 질병이며, 그래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것이라는 데까지 나아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을까요?

    원문 해석과 비교

    문제가 되는 본문의 히브리어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2:17 – 하나님의 말씀

    וּמֵעֵץ הַדַּעַת טֹוב וָרָע לֹא תֹאכַל מִמֶּנּוּ כִּי בְּיֹום אֲכָלְךָ מִמֶּנּוּ מֹות תָּמוּת

    “그러나 좋음(선)과 나쁨(악)의 지식(알게 하는)의 나무에 대해서는, 너는 그것으로부터 먹어서는 안 된다. 네가 그것으로부터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개역한글 “정녕”)”라고 번역한 부분은 부사로 “반드시”란 말이 쓰인 것이 아니고, “너는 죽을 것이다 (תָּמוּת)”라는 동사의 부정사 절대형 (מוֹת)이 동사 앞에 쓰인 형태로, 문법적으로 말하자면 “부정사 절대형의 강조적 용법”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3:3 – 하와의 말

    וּמִפְּרִי הָעֵץ אֲשֶׁר בְּתֹוךְ־הַגָּן אָמַר אֱלֹהִים לֹא תֹאכְלוּ מִמֶּנּוּ וְלֹא תִגְּעוּ בֹּו פֶּן־תְּמֻתוּן

    “그러나 동산 한 가운데에 있는 나무의 열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것으로부터 먹어서는 안 되고 그것을 만져서도 안 된다, 너희가 죽지 않으려면.”

    이 두 문장은 많은 표현들이 서로 다릅니다.

    첫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직역: 좋음과 나쁨의 지식의 나무)”라는 표현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로 바뀌었습니다.

    둘째, “만지지 마라”는 표현은 2장의 하나님 말씀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셋째, “정녕 죽으리라”라는 말은 “죽지 않으려면/죽지 않기 위하여”라는 표현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넷째,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주어(인칭-성-수)의 변화입니다.
    창세기 2장의 동사와 인칭어미는 2인칭 남성 단수(“너는”)인데 반해, 3장의 하와의 말은 2인칭 복수(“너희는”)로 되어 있습니다.

    이 차이들을 위에서 제기한 문제들에 비추어 살펴보자면,

    우선, 하와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타나는 강한 명령을 결코 완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하와의 פֶּן־תְּמֻתוּן(펜-테무툰)을 “죽을까 하노라”라고 번역한 개역성경에 있습니다.
    히브리어 접속사 פֶּן־(펜-)은 “죽을 지도 모른다, 혹은 죽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나 가능성의 뜻이 아닙니다.
    “죽지 않기 위하여, 혹은 죽지 않으려면”의 뜻으로 영어로 주로 “lest – (should)”로 번역되는 접속사입니다 (참고: 공동번역/우리말성경 “죽지 않으려거든”; 새번역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하와의 표현인 “죽지 않으려면/죽지 않기 위하여(פֶּן־תְּמֻתוּן 펜-테무툰)”라는 말은 부정사 절대형을 사용한 “반드시(정녕) 죽으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해 그 강도가 결코 낮지 않습니다. 같은 의미를 다른 표현으로 썼을 뿐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거 먹으면 죽어”라는 말이 “죽고 싶지 않으면 먹지 마”라는 말과 대체 얼마나 차이가 난다는 말인가요. 이 두 문장 사이에 어떤 문장이 더 강하고 어떤 문장이 더 약한지, 그 세밀한 뉘앙스의 차이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성경 히브리어의 원어민들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중 어느 누구 하나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혹여나 살아남았다고 해도 그 대답은 아마 사람들마다 똑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부정사 절대형이 들어간 표현이 하나님의 명령에 얼마만한 강세를 더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 역시 더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정녕 죽으리라"라고 말하면 100퍼센트 죽는 "강한 명령/단정"이고, 그냥 (부정사 절대형 없이) "죽으리라"고 말하면 살 가능성이 약간이나마 있는 "약한 명령/단정"이 되나요? 그렇다면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등의 명령들은 부정사가 사용되지 않은 약한 명령이라 가끔 어겨도 괜찮은가요?

    게다가 “만지지도 말라”는 하와의 첨가는 하나님의 명령의 강도를 보다 더 강하게 하면 했지 약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하와의 "죽을까 하노라"가 하나님의 명령의 강도를 약화시켰다고 비난하면서, 왜 "만지지도 말라"가 명령의 강도를 더 강하게 하는 사실은 외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을까"로 번역된 תְּמֻתֽוּן(테무툰)의 마지막 자음 “n(눈)”은 “energic-nun”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전통적인 문법적 시각에서 동사의 의미를 강조할 때 쓰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현대의 비교셈어학적 관점에서는 일종의 고어체 정도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3. 하와 발언의 진정한 왜곡

    두 문장의 차이를 히브리어 원문으로 살펴보면, 앞에서 말했지만, 가장 도드라진 변화는 “주어”의 변화입니다. 창세기 2장 17절의 하나님의 명령은 2인칭 남성 단수, 즉 아담에게 주는 명령입니다. 바로 그 앞 절 2장 16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로 시작함으로써, 2장 16-17절의 명령이 아담에게(만?) 주어지는 명령임을 분명히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하와는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구절 다음에서야 “남자가 홀로 있음이 좋지 않다(18절)”고 하시며 여자를 창조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따라서, 하와는 2장 17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을 똑같이 반복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하와 혼자만 감당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와에게 따로 전달하지 않았다면 분명 아담이 하와에게 전했을텐데, 전달 시에 오류가 발생했을 가능성도 고려되어야 형평에 맞을 듯 합니다.

    문법적으로만 따지자면, 2장 17절의 명령은 하와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와는 2장의 “너”를 “너희”로 바꾸면서 남자에게 주는 명령을 자기 자신까지 포함한 명령으로 받아들입니다. 만약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다고 한다면, 가장 커다란 왜곡의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자기 남자에게 주는 명령에 자신까지 포함시킨 죄.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3장 11절에서 하나님이 “네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로부터 너는 먹었느냐”라는 문장에서 다시 2인칭 남성단수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장 17절의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로부터 네가 먹었은즉” 역시 2인칭 남성단수입니다. 즉, 하나님은 하와에게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질책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담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게 한 사실만 문제가 됩니다.

    4. 정말 여자가 문제인가?

    정말 여자가 문제일까요?

    말을 잘못 옮기는 성향이 여성의 DNA에 흐르고 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에서 잘 드러나듯이, 하나님과 여자에게 일타쌍피로 책임을 전가하는 찌질함이 모든 남성의 DNA에 내재되어 있을 것입니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자기 남자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한, 그리고 그 여자를 자기에게 준 신에게까지 연대책임을 물어 면피하려고 한 인류 최초의 찌질남이, 그리고 자기들이 번역해 놓고 그 번역을 빌미로 지난 2천년간 여성들을 비난해온 찌질남의 후예들이 오히려 문제가 아닐까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열왕기하 정의

    열왕기하는 구약 성경의 역사서로,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몰락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우상숭배와 불의를 행한 결과,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과정을 다룹니다.
    특히 선지자들의 활동이 중심에 있으며,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역이 하나님의 경고와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열왕기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신실하심을 강조하며, 백성들에게 회개와 순종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적 개입이 어떻게 인간 사회에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신학적 기록입니다.


    열왕기하 1장 요약

    북이스라엘 왕 아하시야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고, 블레셋의 신 바알세붑에게 병의 회복 여부를 묻습니다(1:2).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는 그를 막아 하나님의 심판을 전합니다(1:3-4).
    아하시야는 엘리야를 잡으려 하지만 하나님의 불이 군사들을 삼킵니다(1:9-12).
    결국 아하시야는 회복되지 못하고 죽습니다(1:17).

    열왕기하 2장 요약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며, 엘리사가 그의 뒤를 이어 선지자가 됩니다(2:11-13). 엘리사는 엘리야의 능력을 이어받아 요단강을 가르고 여러 기적을 행합니다(2:14-15). 그는 백성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하며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시작합니다.

    열왕기하 3장 요약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모압 왕 메사를 대항하여 전쟁을 벌입니다(3:5-7).
    엘리사는 이들 연합군의 요청에 따라 하나님의 도움을 예언하고, 전투에서 물 공급과 승리를 얻게 합니다(3:16-20).
    그러나 모압 왕은 마지막으로 극단적인 제사를 드리며 저항합니다.

    열왕기하 4장 요약

    엘리사는 한 과부의 기름병을 채우는 기적을 비롯해 여러 기적을 행합니다(4:1-7).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고, 독이 든 국을 해독하며,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등 하나님의 공급과 구원을 보여줍니다(4:32-44).
    이로써 엘리사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백성들 속에서 크게 존경받게 됩니다.

    열왕기하 5장 요약

    아람 장군 나아만이 나병에 걸리자 엘리사를 찾아와 치유를 받습니다(5:1-9).
    엘리사는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고, 나아만은 순종하여 나병에서 치유됩니다(5:10-14).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이방인에게도 미친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열왕기하 6장 요약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 하자 엘리사는 하나님의 계시로 아람 군대의 동선을 미리 알려줍니다(6:8-10).
    엘리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적군의 눈을 멀게 하고, 사마리아로 이끌어 그들을 살려 보냅니다(6:18-23).
    이후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를 포위하지만, 기근 속에서 하나님의 개입으로 기적적인 구원이 이루어집니다(6:24-33).

    열왕기하 7장 요약

    엘리사는 기근 속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을 예언합니다(7:1). 나병 환자들이 아람 진영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전하자, 백성들은 아람 군대가 남긴 물자를 얻어 기근에서 벗어납니다(7:5-16).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어 절망적인 상황이 반전됩니다.

    열왕기하 8장 요약

    엘리사는 수넴 여인에게 7년간의 기근을 경고하고 피신하게 합니다(8:1-2).
    기근 후 그녀는 왕에게 자신의 땅을 돌려받고, 엘리사의 기적이 왕에게 알려집니다(8:3-6).
    한편, 아람 왕 벤하닷은 엘리사를 통해 병의 회복 여부를 묻고, 하사엘이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8:7-15).

    열왕기하 9장 요약

    엘리사는 예후를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붓도록 지시합니다(9:1-6).
    예후는 아합 왕가를 제거하며, 이세벨을 처단하고 아합의 예언된 심판을 이행합니다(9:22-33).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됩니다.

    열왕기하 10장 요약

    예후는 아합의 아들들과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제거하여 이스라엘에서 바알 숭배를 근절합니다(10:18-28). 그러나 그는 여전히 금송아지 숭배를 유지하여 온전한 개혁에는 실패합니다(10:29-31).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위협에 시달리게 됩니다.

    열왕기하 11장 요약

    아달랴가 유다의 왕위를 찬탈하여 왕가의 자손들을 살해하려 하지만, 요아스가 구출되어 성전에서 보호받습니다(11:1-3). 제사장 여호야다가 반역을 일으켜 아달랴를 처단하고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며, 우상들을 제거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합니다(11:12-20).

    열왕기하 12장 요약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지도 아래 성전 수리를 진행하며,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통치합니다(12:4-16).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은 후 요아스는 신앙에서 멀어지고, 결국 신하들의 반란으로 인해 암살당합니다(12:20-21).

    열왕기하 13장 요약

    여호아하스와 여호아스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아람의 억압이 계속됩니다(13:3-7). 엘리사가 죽기 전 여호아스에게 승리의 상징으로 화살을 쏘게 하고, 이스라엘은 아람과의 전투에서 부분적인 승리를 거둡니다(13:14-19).

    열왕기하 14장 요약

    아마샤 왕은 에돔과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교만하여 북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다 패배합니다(14:7-14).
    그의 후계자인 웃시야는 통치 초기에 강력한 왕국을 이루지만, 이후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습니다.

    열왕기하 15장 요약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은 여러 왕들의 짧은 통치와 반란으로 혼란에 빠집니다(15:8-31).
    특히 북이스라엘은 계속되는 암살과 정권 교체로 인해 정치적 불안이 심화되며, 앗수르의 침략을 받게 됩니다.

    열왕기하 16장 요약

    유다의 아하스 왕은 앗수르의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의 성전을 변형하고 이방 신들을 섬깁니다(16:7-10).
    이는 유다 왕국의 영적 타락을 심화시키고,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계기가 됩니다.

    열왕기하 17장 요약

    북이스라엘은 결국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갑니다(17:6). 저자는 이 멸망의 원인을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죄로 설명하며, 경고의 메시지를 전합니다(17:7-23).

    열왕기하 18장 요약

    히스기야 왕은 종교 개혁을 단행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앗수르의 위협에 맞섭니다(18:4-7).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구원을 받습니다(18:28-37).

    열왕기하 19장 요약

    히스기야는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께 앗수르의 협박을 올려드리며 간구합니다(19:1-4).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앗수르가 패망할 것임을 예언하고,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군대를 전멸시킵니다(19:32-36).

    열왕기하 20장 요약

    히스기야가 병에 걸리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생명을 15년 연장받습니다(20:1-6).
    그러나 바벨론 사절들에게 국고와 성전을 보여준 후, 이로 인해 바벨론 침략의 예언을 받습니다(20:12-19).

    열왕기하 21장 요약

    므낫세아몬 왕은 우상숭배로 인해 유다를 영적으로 타락시킵니다(21:2-9).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멸망을 예고하시며, 결국 아몬은 신하들에 의해 암살당합니다(21:11-24).

    열왕기하 22장 요약

    요시야 왕은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단행합니다(22:8-13).
    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하고, 우상 숭배를 제거하며 언약을 갱신합니다(22:14-20).

    열왕기하 23장 요약

    요시야는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키며, 모든 이방 신전과 우상들을 철저히 파괴합니다(23:21-25).
    그러나 유다의 영적 부패는 깊이 뿌리박혀 있었고, 결국 요시야는 전투 중에 전사하게 됩니다(23:29-30).

    열왕기하 24장 요약

    유다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점차적으로 무너집니다(24:1-4).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성전의 보물들이 약탈당합니다.
    시드기야가 마지막 왕으로 즉위하지만, 바벨론의 압박 속에서 반란을 꾀합니다(24:17-20).

    열왕기하 25장 요약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성벽을 무너뜨립니다(25:1-4).
    시드기야는 붙잡혀 두 눈이 뽑히고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25:6-7).
    성전과 왕궁은 불타고, 유다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러나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에서 석방되며 하나님의 회복의 희망이 암시됩니다(25:2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