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사과식초(Apple Cider Vinegar, ACV), 스트레스 강해지는 생활습관 일곱 가지, Summer Time, 아름다운 영어 단어 Top 15



Alzheimer's Dementia(알츠하이머 치매)


'고규명 박사" IBS(Irrtable Bowel Syndrome 과민성 대장 증후군), 혈관 연구단장

ㅡ사람의 머리는 두개골,
뇌수막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ㅡ뇌를 감싸고 있는 뇌척수액은
뇌를 보호하고,
뇌의 대사로 만들어진
노폐물을 배출하는 역할을 합니다.

ㅡ뇌척수액 양은 하루 평균 150ml이지만,

ㅡ하루 450~500ml의 뇌척수액이
새로 만들어집니다.

ㅡ매일 만들어진
450~500ml의 뇌척수액이,
어디로 배출되는지
지금까지 미궁에 빠져 있었습니다.

ㅡ이에 고규영 박사는 기초 과학 <혈관 연구단장 겸
KAIST 특훈 교수입니다.>

ㅡ고규명 박사 연구팀은,
뇌 아래쪽 림프관을 통해서,

ㅡ뇌척수액이 배출되는 것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습니다.

ㅡ이른 바,
뇌척수액의 배수구인 것입니다.

ㅡ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램프관의 배수 능력이 서서히 떨어집니다.

ㅡ따라서 뇌의 노폐물이 밖으로
잘 나가지 못해 쌓이게 되고,

ㅡ결국 이 폐뇌척수액이 쌓이게 되어,
''치매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을 세계 최초로 밝힌 것입니다.

ㅡ고규명 단장은 이 연구로
올해 대한민국 최고 과학기술인상을
수상한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ㅡ뇌에서 나온 폐뇌척수액이,
이번에 발견된
뇌막 림프관을 통하여 배출되고,
 
ㅡ목에 있는 200~300여 개의 림프샘에 모인 뒤,
전신 혈액 순환 계통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ㅡ그래서 턱 밑에 목 부위를 마사지해 주면, 뇌척수액 흐름이 아주 원활해집니다.

ㅡ이로 인해 치매가 예방되고 치매 환자도 서서히 회복됩니다.

ㅡ아주 간단하게 매일 아침 저녁으로 10~15분간,
턱 밑 목을 잡고 부드럽게 어루만지시면 됩니다.

ㅡ치매 예방 및 치료 하는 게 간단하고 참 쉽지요?

ㅡ이번 고규명 박사 연구팀은 각 년령층 100명씩 1년간 아침 저녁으로 10분~15분간 목 맛사지를 실시한 결과,

ㅡ모든 계층에서 치매가 발생하지 않았고 뇌가 활발하게 활동해 기억력이 향상되었습니다.

ㅡ노년층은 건망증이 61%가 서서히 회복되어 가고 있었으며,

ㅡ특히 장년층에서는 기억력 향상으로 인해 업무 수행능력이 향상되었고,

ㅡ학생들은 기억력 향상으로 성적이 대부분 향상된 것으로 학교 시험결과로 나타났습니다.

ㅡ또한 치매환자  100명을 위와 같은 방법으로 시험한 결과,

ㅡ초기환자는 46%가 서서히 회복되어 가고 있었으며,

ㅡ 중증환자층은 15%가 서서히 회복 되어가고 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ㅡ이제 모든 분들은 꼭 실천하십시요!

ㅡ이렇게도 쉬운 턱 아래 목을, 매일 부드럽게 마사지하는
습관을 들이시고 꼭 실천하십시오.
 
ㅡ이제부터 턱밑의 부드러운 목 마사지를 통하여,

ㅡ 젊어지는 두뇌활동으로 젊음을 되찾고,

ㅡ나이들어 치매 걱정에서 해방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ㅡ항상 젊고 싱싱한 두뇌로 공부, 연구활동, 늙어서 치매 걱정에서 벗어나 항상 건강하시고,

ㅡ멋지게, 활기차게, 행복한 삶을 누리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ㅡ대단히 감사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애사비 효과 알아보기

애플사과식초(Apple Cider Vinegar, ACV)는 오랜 세월 동안 자연 요법으로 사랑받아왔습니다.
다이어트, 혈당 조절, 피부 개선 등 다양한 건강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과학적 연구를 통해 그 효능이 점차 입증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애사비의 주요 효능을 과학적 및 의학적 근거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혈당 수치 조절

ACV는 식사 후 혈당 급상승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식초에 포함된 아세트산(acetic acid)이 탄수화물의 소화를 늦추고 인슐린 민감성을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미국 당뇨병 협회(American Diabetes Association, ADA) 2007년 연구에 따르면, 취침 전 식초 섭취가 제2형 당뇨병 환자의 아침 혈당 수치를 조절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2. 체중 감소 보조

애사비는 포만감을 증가시키고, 결과적으로 칼로리 섭취를 감소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일부 연구에서는 애플사과식초를 꾸준히 섭취한 그룹이 체중과 내장지방이 감소했다고 보고했습니다. 바이오사이언스 바이오테크놀로지 바이오케미스트리(Bioscience, Biotechnology, and Biochemistry, BBB) 2009년 연구에 따르면, 식초 섭취가 일본 비만 성인의 체중, 체지방, 혈중 중성지방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3. 심혈관 건강 지원

ACV는 콜레스테롤 수치를 개선하고 혈압을 낮추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동물 실험에서는 나쁜 콜레스테롤(LDL) 감소와 혈압 강하 효과가 관찰되었습니다. 영국 영양학 저널(British Journal of Nutrition, BJN)) 2001년 연구에 따르면, 식초 보충이 고콜레스테롤 식이를 한 쥐의 혈중 콜레스테롤과 중성지방 수치를 낮추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4. 항균 및 살균 효과

국제 식품 미생물학 저널(International Journal of Food Microbiology, IJFM) 1997년 연구에 따르면, 애사비는 항균 작용이 있어 일부 세균과 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하는 데 유용할 수 있습니다. 특히 E.coli와 같은 식중독균에 대한 억제 효과가 연구되었습니다.

5. 피부 건강 개선

피부약리학 및 생리학 저널(Skin Pharmacology and Physiology, SPP) 2006년 연구에 따르면, ACV는 피부의 pH 균형을 조절하고 항염 효과를 통해 여드름과 습진 관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항균 특성이 피부 감염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6. 소화 촉진

알레르기 및 임상면역학 저널(The Journal of Allergy and Clinical Immunology, JACI) 2009년 연구에 따르면, 애플사과식초는 위산 분비를 촉진하여 소화를 돕고, 위에 부담을 덜어줄 수 있습니다. 특히 식후 소화불량을 완화하는 데 유익할 수 있습니다.

7. 항산화 효과

식품과학저널(Journal of Food Science, JFS) 2017년 따르면, ACV에는 폴리페놀(polyphenols)과 같은 항산화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 세포 손상을 방지하고 노화 방지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애플사과식초는 단순한 민간요법을 넘어, 다양한 건강 이점이 과학적으로도 점차 밝혀지고 있습니다. 혈당 조절, 체중 관리, 심혈관 건강 지원, 항균 작용, 피부 개선, 소화 촉진, 항산화 효과까지, 일상 속 작은 습관으로 건강을 지키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다만, 고용량 섭취는 부작용(치아 부식, 위장 장애 등)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적정량을 꾸준히 섭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스트레스 강해지는 생활습관 일곱 가지

현대 사회에서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완전히 없애는 것보다는, 스트레스에 잘 대응하고 회복하는 능력인 ‘회복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과학적 연구를 통해 입증된 7가지 생활 습관 소개를 통해 스트레스에 강한 삶을 위한 실질적인 방법을 나누고자 합니다.


1. 마음챙김 명상 실천하기

마음챙김 명상(Mindfulness Meditation)은 현재 순간에 주의를 집중하고, 판단 없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 신체 감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명상 방식입니다. 이 명상은 불교의 전통에서 유래했으며, 현대 심리학과 의학에서는 스트레스 감소(MBSR: Mindfulness-Based Stress Reduction), 불안 장애, 우울증, 주의력 향상 등에 효과적인 과학적 중재법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Psychiatry Research 2013년 연구에 따르면, 마음챙김 기반 스트레스 감소 프로그램을 8주간 수행한 참가자들은 코르티솔 수치와 염증 지표가 감소하였습니다. 코르티솔(Cortisol)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분비되어 우리 몸의 에너지를 조절하고 면역 반응을 조절하는 주요 스트레스 호르몬입니다.

2. 규칙적인 신체 활동

규칙적인 운동은 신체 건강뿐만 아니라 스트레스 감소에도 도움이 됩니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Stanford Lifestyle Medicine, 2022년에 따르면, 일상적인 신체 활동은 기분 개선에 항우울제와 유사한 효과를 보였습니다.

3. 웃음의 힘 활용하기

웃음은 엔도르핀 분비를 촉진하여 웰빙을 증진시킵니다. 미국 미네소타주 종합병원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에 따르면, 웃음은 산소 섭취를 증가시키고 심장과 폐를 자극하며, 엔도르핀 분비를 증가시킵니다.

4. 자연 속에서 시간 보내기

자연환경에 노출되면 스트레스 수치가 낮아집니다. 환경 건강 및 예방 의학(Environmental Health and Preventive Medicine) 2012년 연구에 따르면, 숲속에서 시간을 보낸 참가자들은 도시 환경에 있는 사람들보다 코르티솔 수치와 혈압이 낮았습니다.​

5. 양질의 수면 확보하기

충분한 수면은 스트레스 관리에 필수적입니다. 미국 심리학회(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의 미국 스트레스 설문 결과에 따르면, 수면 부족이 집중력 저하와 스트레스 수준 증가를 초래한다고 강조합니다.

6. 사회적 연결 유지하기

강한 사회적 유대는 스트레스에 대한 완충 역할을 합니다. 심신의학 2004년 연구에 따르면, 지지적인 사회적 네트워크를 가진 사람들은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낮고 전반적인 건강 상태가 좋습니다.

7. 감사하는 마음 갖기

감사 표현은 심리적 웰빙을 향상시킵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Emmons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감사 실천은 스트레스를 줄이고 전반적인 정신 건강을 개선합니다.

스트레스는 삶의 일부이지만, 이를 관리하고 회복하는 능력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위에서 소개한 7가지 생활 습관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방법으로, 일상에 쉽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작은 변화가 큰 차이를 만들 수 있으니, 오늘부터 하나씩 실천해 보세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계 바늘을 다시 맞춰요! Summer Time

일광 절약 시간제는 하절기에 표준시를 원래 시간보다 한 시간 앞당겨 쓰는 것으로, 캐나다에서는 주로 Summer time, 미국에서는 Daylight saving time 또는 DST라고 부릅니다. 서머 타임은 3월 두 번째 일요일 오전 2시에 시작하여 11월 첫 번째 일요일 오전 2시에 해제 가 됩니다. 즉, 3월 두 번째 일요일 오전 2시가 오전 3시가 되어 1시간이 사라지고, 11월 첫 번째 일요일 오전 2시가 오전 1시가 되어 1시간이 다시 생기는 거예요. 올해 2016년은 3월 3일 일요일 오전 2시(3시로 이동)에 시작하여 11월 6일 일요일 오전 2시(1시로 이동)에 해제됩니다. 내년 2017년은 3월 12일 일요일 오전 2시(3시로 이동)에 시작하여 11월 5일 일요일 오전 2시(1시로 이동)에 해제됩니다.

서머 타임을 하는 나라


대체로 북미와 유럽 에서 서머타임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유럽은 동시에 일괄적으로 바뀌는 반면, 미국과 캐나다의 경우 각 지역별 시간대 기준으로 바뀌기 때문에 헷갈리는 경우가 많아요. 또한, 캐나다의 서츠캐처원 주와 미국의 하와이 주, 애리조나 주, 인디애나 주, 괌 등 일광 절약 시간제를 따르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948년부터 1960년(6.25전쟁 기간은 제외)까지 일광 절약 시간제가 실시되었다가 서울 올림픽 개최될 즈음인 1987~88년에 잠시 사용되었다가 폐지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한 번도 일광 절약 시간제가 시행된 적이 없습니다.

서머 타임을 하는 이유

가장 큰 이유는 에너지 절약 때문입니다. 제1, 2차 세계대전에 낮시간을 늘려 전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석탄과 석유를 아끼고 야간 공습에 대한 공포를 줄이기 위해 시작되었어요. 종전 이후, 에너지 절약을 위한 명목으로 다시 부활되었습니다. 에너지 절약뿐만 아니라, 낮 시간대의 활동 영역을 넓히는 데도 일조를 하고 있는데요. 하교 및 퇴근 시간 이후에도 이번보다 더 밝은 낮과 같은 상태이다 보니, 오후에 개인 활동의 영역이 더 넓어지는 것 같아요. 한여름인 경우, 밤 9시가 되어도 어두워지지 않아요. 특히 북미에서는 우리나라보다 야근 문화가 거의 없기 때문에, 하교 및 퇴근 시간 이후의 여가 시간에 다양한 개인 활동을 많이 한답니다.

서머 타임의 부작용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머 타임 무용론 이 나오고 있는데요. 서머타임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던 에너지 절감 부분이 그리 실효성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서머 타임을 실시하는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조사를 한 결과, 서머 타임 실시가 전력 소비 감소에 큰 효과가 없다는 보고서가 연달아 발표되고 있습니다. 1시간을 앞당김으로써 전력 소비가 밤에는 줄지만, 아침에는 늘었기 때문이에요. 또한, 1년에 두 번씩 시간대를 다르게 갈아탐으로써 피로도를 호소하고 있는데요. 보통 시간대가 1시간 바뀔 때마다 생체리듬이 그에 따라 적응하는데 꼬박 하루가 걸린다고 보고 있어요. 하지만, 심장 질환이나 당뇨 등 만성 질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더 오래 걸리고,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의학계 보고도 있습니다. 또한, 컴퓨터나 휴대폰은 자동으로 시간이 바뀌지만, 집안의 가전제품과 시계는 수동으로 맞춰야 하니 번거롭기도 합니다. 전 세계의 컴퓨터 시간을 바꾸는 데도 엄청난 시간을 소모하고 혼란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서머 타임의 반론이 계속 일어나고 있고, 실제로 폐지 법안화를 논의하는 곳이 늘어나 그 인기가 점점 식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

영국 문화원(British Council)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전 세계 102국 4만 명을 대상으로 영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를 조사하는 설문에서 mother(어머니)가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 로 뽑혔습니다. 참고로, 영국문화원은 전 세계의 영어 학습을 촉진하고 매년 50만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언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Mother라는 영어 단어 자체에서 매력적인 것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편안함과 따뜻한 가정의 모습(또는 영원한 고향이자 안식처)를 연상케 하여 가장 아름다운 단어로 뽑힐 수 있었다고 해요. 반면, 아버지는 인기 목록에는 없었습니다.  mom, momma, mammy, mother로 다양하게 불리는 ‘어머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처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르게 되는 말이지 않을까 싶네요. 그럼, 1위를 한 Mother 외에 또 어떤 단어가 가장 아름답다고 이야기했는지 볼까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 Top 15

1위: Mother 어머니
2위: Passion 열정
3위: Smile 미소
4위: Love 사랑
5위: Eternity 영원
6위: Fantastic 환상적인
7위: Destiny 운명
8위: Freedom 자유
9위: Liberty 자유
10위: Tranquillity 평온
11위: Peace 평화
12위: Blossom 꽃
13위: Sunshine 햇빛
14위: Sweetheart 연인
15위: Gorgeous 화려한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라고 생각했던 단어가 이 중에 있나요? Top 15에 드는 단어들 모두 좋은 뜻을 담은 단어들이네요. 8위와 9위에 같은 뜻의 다른 단어가 나란히 있는 점이 인상적이네요.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로 Love가 1~3위 안에는 들 줄 알았는데, 4위를 차지한 것도 개인적으로 약간 의외였어요. Mother라는 호칭은 우리 모두에게 국적을 초월해 가슴 뭉클한 말인 것 같습니다. 특히, 자주 뵐 수 없는 지리적 환경이 있을 때는 더욱 그리워지는 이름 같네요.




루활(涙活・るいかつ・루이카츠), 혼활・婚活(こんかつ・콘카츠), 취활・就活(しゅうかつ・슈우카츠 = 종활과 발음이 같다), 종활.終活(しゅうかつ・슈우카츠)


루이카츠(루활) 눈물을 흘리며 치유를 경험하는 일본의 사회 운동

"부활(部活. ぶかつ・부카츠)"
'부카츠'는 '특별활동, 동아리모임'을 뜻하는 일본어.
학생들에게는 필요한 단어이니 새로운 단어로 등장하는 것이 이상할 것 없다.

최근에 어느 일본인의 사전장례식이 소개되면서 "종활.終活(しゅうかつ・슈우카츠)"라는 새로운 단어도 소개되었다.
원래부터 있었던 말이 아니라 최근에 만들어진 조어라고 하니 새로운 것이 나올 때마다 이름 붙이기를 주저하지 않는 일본인들의 조어 능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러한 특별활동의 종류에는 취업준비생을 뜻하는 취활・就活(しゅうかつ・슈우카츠 = 종활과 발음이 같다)"
결혼을 준비하는 "혼활・婚活(こんかつ・콘카츠)"라는 말도 있다.
결혼 적령기의 미혼 남녀가 선을 본다거나 소개팅을 결혼을 목적으로 한다고 해서 이것에 이름을 붙이는게 어색하기만 한 우리로서는 여전히 어색할 따름이다.

한 라디어 방송에서 토론자로 나온 사람이 혼활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을 "아이들・こども(코도모)"라고 불러서 결혼까지 시켜야 하는 성인의 아들,딸을 저렇게 불러야 하는지? 의아하기는 했지만, 혼활은 분명히 중요한 인생의 과정 중에 하나로 여김에 틀림없는 모양이다.

루활(涙活・るいかつ・루이카츠)





일본의 웰다잉, ‘종활(終活. 슈유카츠)’


이웃 나라 일본은 세상에서 가장 늙은 나라이다.
65세 이상 고령자가 3,620만 명이나 된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70%에 달하는 수준이다.
지난해 연간 사망자가 140만 명을 넘어서면서 일본 언론에서는 ‘다사(多死) 사회’라는 말이 회자된다.
한국의 저출산 고령화 추세는 일본을 빠르게 쫓아가고 있다.
2025년 한국도 초고령사회로 진입한다.
요즘 국내에서 웰다잉에 대한 논의가 확산하고 있는 것도 그런 배경이 있다.
세계 최고령 국가 일본 구성원들의 죽음을 대하는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이유이다.

일본에서는 웰다잉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웰다잉에 대응되는 용어로 일본에서는 ‘종활’(終活, 일본어 발음 ‘슈카츠’)을 사용한다.
종활이란 마지막이라는 뜻의 ‘종(終)’과 활동의 ‘활(活)’을 조합해 만든 조어이다.

일본 종활카운슬러협회는 ‘인생의 종말을 직시함으로써 나를 되돌아보고, 지금보다 더 나답게 살아가기 위한 활동’이라고 종활을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국내 (사)웰다잉문화운동은 웰다잉을 ‘스스로 준비할 수 있는 죽음, 가족들과 좋은 관계로 끝맺는 죽음, 본인이 생사를 결정하는 죽음’으로 정의한다.
두 나라의 웰다잉 개념이 주체적인 죽음을 핵심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지만 일본의 종활이 한국의 ‘웰다잉’보다 좀 더 포괄적이고 적극적이다.

소원해진 가족, 그리고 ‘폐 끼치기 싫다’

종활이라는 말은 2009년 여름 주간아사히(週間朝日)가 ‘현대 종활(終活) 사정’이라는 연재 기사를 게재하면서 첫선을 보였다. 연재 초기에는 주로 장례나 장묘에 관한 정보와 사전 준비 요령이 담겼다가 후반에는 죽음 준비를 넘어 현재 인생을 잘 살기 위한 준비로 개념이 확장됐다.

일본의 장례문화는 1980년대 후반부터 큰 패러다임의 변화를 보였다. 저출산으로 제사 승계자의 확보 곤란, 지역 사회나 가족과의 관계 소원, 장의 문화의 상품화 등으로 장례나 장묘 등 자신의 죽음과 관련한 절차를 스스로 결정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는 생전에 장례나 장묘 준비와 유언 등을 기록한 ‘엔딩 노트’가 인기를 끌었다. 2009년 이전부터 죽음을 대하는 자세는 변화하고 있었고, 이런 현상에 매스미디어가 ‘종활’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기무라·안도, 2018).
일본판 웰다잉, 종활이 등장한 배경으로 5가지를 들 수 있는데 먼저 가족 구성의 변화, 즉 1인 세대, 독거 고령자의 증가이다. 미혼, 사별 등으로 혼자 살거나, 자녀가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어 자신의 마지막을 의지하기 어려운 고령자가 많아진 탓이다. 일본의 독거노인 가구는 2019년 기준 671.7만 세대이다. 여성의 독거노인 비율이 65%로 남성 독거노인에 비해 2배가 높다. 가족 구성의 변화는 남에게 폐 끼치기 싫어하는 일본 사람들의 성향과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종활이 빠르게 현실성을 띠게 되었다. 나카노(2017)는 종활을 이야기할 때 ‘폐(弊), 부담, 수고’라는 3개의 키워드가 빈번히 등장한다며 자녀나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생각이 종활의 확산 요인이라고 강조한다.

고령화의 심화도 종활의 배경이다. 죽음을 현실로 느끼는 고령자들이 증가하고, 마지막을 의탁할 자녀들도 동반 고령화하면서 종활의 필요성이 커졌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연명치료, QOL(삶의 질) 등 종말기 의료에 대한 여러 가지 선택지가 증가한 것도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도록 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베이비붐 세대를 중심으로 죽음을 터부시하지 않는 고령자들이 증가한 것도 종활 활성화에 기여했다. 일본 베이비붐 세대는 1947~1949년에 태어난 약 700만 명으로, 덩어리지어졌다고 해서 ‘단카이세대’로 불린다. 종활이 확산하기 시작하는 2010년대 초는 이들이 65세 고령자로 진입하는 시기와 맞물린다. 사생관의 변화로 장례 방식, 장묘 형태, 수의를 고를 때 나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려는 모습이 나타났다(中野敬一, 2017).

3.11 대지진의 참사, 죽음이 곁으로 다가와
2009년 출생한 종활은 이듬해 ‘유행어 대상’에 진입하면서 존재를 알린다. 이후 2011년 3월, 2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동북 대지진의 참사는 일본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함께 죽음이 바로 곁에 있음을 각인시켰다. 이 해에 종활카운슬러협회 등 다양한 종활 단체가 출현했고, 각지에서 종활 강좌가 생겨났다. 정부(경제산업성)도 ‘안심과 신뢰가 있는 라이프엔딩 스테이지 창출을 향해(2011)’라는 보고서를 내면서 웰다잉 관련 서비스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각종 전문 서적과 핸드북 등 출판물이 나오고 영화 상영이 잇따르면서 2012년 드디어 일본 유행어 대상 톱 10에 등극한다. 종활 전문가 고타니(2018)는 이를 두고 종활이 시민권을 획득했다고 평했다. 이후 종활은 상속, 재산정리, 연명치료, 간병, 치매, 유품 정리까지 폭넓게 끌어안으면서 범위를 넓혔고, 2015년에는 관련 기업들을 한자리에 모은 엔딩산업전(ENDEX: Endding Expo)이 성황리에 개최되면서(200개 사 참여, 2만 명 방문), 퓨너럴(funeral) 비즈니스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한다.
종활 4대 부문, 여생 설계, 생전 정리,장례 장묘 준비, 엔딩 노트
종활은 여생의 생활설계, 생전 정리, 장례와 장묘의 준비, 엔딩노트 작성 등 4대 부문으로 정리할 수 있다. 여생(餘生)의 설계는 종말기 거주 형태, 즉 자택에서 보낼지 고령자시설에서 보낼지 결정해두고 준비하는 것이다. 간병 및 돌봄에 대한 희망, 연명치료에 대한 의사표시를 분명히 표시해 두는 것도 포함된다. ‘생전(生前) 정리’는 재산이나 소지품 정리, 상속 재산의 처분 등이 해당한다. 유언장 작성이 가장 중요한 생전 정리이다. 최근에는 디지털 유품의 처리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어떤 장례식을 원하는지, 장례식에 누구를 부를 것인지, 묘지와 묘석, 수의, 영정사진 등은 어떻게 할 것인지는 종활의 대표 항목이다. ‘엔딩 노트’는 종활의 모든 부분에 관여하기 때문에 법적 효력은 없지만 종활 계획서로서 중요한 활동이다. 엔딩노트에는 △가족·친척·친구의 정보(가계도, 입원이나 사망 시 연락했으면 하는 친구 지인) △의료·간호에 관한 희망(연명 조치나 종말기 의료·장기기증 등) △재산 정보 △장례·매장 희망 △기타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말 등을 기록한다.
종활의 확산은 일본 고령자들의 죽음 관련 라이프스타일을 바꿔가고 있다. ‘생전 계약(生前契約)’이라는 게 있는데, 자신의 사후에 필요한 수속, 절차 등을 살아있을 때 미리 계약해 두는 것을 말한다. 독거노인이 생전에 장례업체에 비용을 지불하고 자신의 사후 절차를 위탁하는 것이다. 장례뿐만 아니라 신원보증이나 재산관리에서부터 안부 확인이나 간병과 같은 일상생활도 서포트해 준다. 반려견 케어, 성묘 대행까지 서비스 내용에 포함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노인시설이나 병원들이 고령자의 입주나 입원 시에 신원보증인을 요구하고 있다.
미츠이스미토모 신탁은행은 2020년 4월부터 ‘1인 신탁’이라는 생전계약 신탁상품을 선보였다. 돌봐줄 가족과 친인척이 없는 독신자를 대상으로, 생전에는 주로 안부 확인, 사후에는 엔딩노트에 기재된 희망에 따라 서비스한다. 수탁 금액은 300만 엔 이상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고령자가 주요 고객이다. 유통그룹 ‘이온’은 2016년부터 ‘이온 라이프’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온 센터가 가족을 대신해 신원보증인이나 긴급 연락처 응대를 맡고, 긴급 입원 시 절차를 대행해준다. 주 1회 안부 확인과 전화로 건강 상담도 한다.
종활 사이트 가마쿠라신쇼(鎌倉親書)의 ‘좋은 생전계약 서비스’는 기본요금 25만 엔 정도의 저가형 서비스로, 보험증이나 운전면허증, 여권 등의 반납과 사망신고, 납세나 연금 신고, 부고 연락을 주 업무로 하고 있다.
우주 장례식 치르고, 데스카페 가고…
‘우주 장례식’을 치르는 사람들도 있다. 미 셀레스티스(Celestis)라는 업체는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인공위성에 고객의 유골을 탑재하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인공위성의 위치는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으로 확인할 수 있어 상공을 올려다보면서 언제라도 고인의 명복을 빌 수 있다고 한다. 일본의 엔딩박람회에서 우주장(葬)이 일본 고령자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요금은 50~95만 엔. 고가인데도 적잖은 예약이 성사됐다고 한다.
타워형 납골당의 등장도 종활이 낳은 퓨너럴 비즈니스의 하나이다. 이 납골당은 주차 빌딩처럼 번호나 카드를 대면 타워에 비치된 납골이 참배 부스로 자동 이동되면서 참배하는 방식이다. 핵가족화로 가족묘가 사라지고, 후대에 조상의 묘지 관리를 기대하기 힘든 현실이 ‘납골 빌딩’을 출현시켰다. 먼 시골의 납골당까지 가지 않아도 되고, 묘비 청소 등 관리 부담도 없고, 비용마저 저렴한 타워형 납골당은 인기가 많다.

일본에는 ‘묘 친구(墓友)’가 있다.
같은 장소에 납골묘를 마련한 고령자끼리 교류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저세상을 함께 준비하는 동창생인 셈이다.
납골 회사가 묘 친구들의 모임을 주선한다.
묘 친구들은 매년 벚꽃이 필 즈음 한자리에 모여 시를 낭송하거나 애도식을 하고 먼저 간 묘 친구의 명복을 빌어준다.
친구들끼리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지 알게 돼 자신의 죽음을 정리하는 데 힘이 된다고 한다.
카페에서 커피나 다과를 즐기면서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데스 카페(Death Cafe)란 곳도 있다.
여러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생각과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자신의 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현재의 삶을 되돌아보자는 것이 데스 카페의 취지이다. ‘죽음 준비 교육장’은 2011년 대지진 이후 많이 늘어났다고 한다.

지자체의 엔딩플랜 서포트 사업

다사사회, 초고령사회, 무연(無緣)사회 현상은 일본 지자체에 독거 고령자 종활 지원을 강제하고 있다. 간병의 사회화를 넘어 임종(죽음)도 사회가 떠안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수중에 15만 엔밖에 없습니다. 화장해서 무연묘를 만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를 거둬줄 사람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2015년 초 요코스카(横須賀) 시에서는 고독사 한 노인이 남긴 쓸쓸한 ‘생전 편지’가 공개되면서 충격을 줬다. 지자체가 독거노인들의 장례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하면서 요코스카 시는 그해 7월부터 경제적으로 어려운 독거 고령자를 대상으로 사후 절차를 지원하는 ‘엔딩플랜 서포트 사업’을 시작했다. 시청에 담당 창구를 두고 고령자의 희망에 따라 장례업체와 생전계약을 체결하도록 중개해 준다. 비용은 20만 6,000엔(2016년 기준) 정도. 시는 예산으로 장례비용을 일부 지원해 준다. 사업 배경에는 급증하는 ‘무연 유골’ 처리 부담을 생전계약 지원으로 줄여보겠다는 뜻도 있다.
2018년 5월부터는 ‘종활 정보 등록 전달 사업’(나의 종활 등록)으로 확대했다. 경제적 형편과 관계없이 시민이면 종활 등록은 누구나 가능하다. 장례나 납골은 자유롭게 계약 받고, 성명이나 주소, 긴급 연락처나 주치의 등의 종활 정보와 함께 등록해 두고 만일의 경우 사전의 본인 의사에 따라 사후 절차를 진행한다.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야마토시(大和市)는 독거노인들의 종활지원 사업을 선구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1인 세대 종활을 지원하는 전용 창구를 설치하고 종활 컨시어지(집사) 제도를 운영, 지역 고령자들의 웰엔딩을 지원하고 있다. 종활 컨시어지는 장례·납골 이외의 방 정리나 유품 정리, 상속 재산의 처분 등 다양한 상담도 한다.

‘죽음의 사회화’가 필요한 시대

일본 종활의 모습이 우리나라 웰다잉의 미래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양국은 사생관이 다르고 가족 관계나 고령화 정도도 차이가 작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종활의 등장 배경인 가족 관계의 소원화,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죽음에 대한 인식의 변화, 독거 고령자의 증가 등은 한국의 현재이기도 한다.

최근 국내 웰다잉을 통한 주체적인 죽음에 대한 논의가 확산하고 있는데, 일본의 종활이 참고 사례가 될 만하다.

매스컴에서 붙여준 ‘종활’이라는 용어가 일본의 웰다잉 문화에 주체적이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듯이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에는 매스컴의 역할이 중요하다.

일본판 웰다잉이 ‘종활’이라는 용어로 시민권을 획득한 데 반해 국내에서 ‘웰다잉’이라는 용어는 비(非) 시민인 상황이다.
웰다잉이라는 용어의 대중적 확산에 매스컴의 역할이 요구된다.

일본 경제산업성의 종활의 사업화 가능성 보고서가 종활에 대한 국가의 정책적 의지를 보여주자 지자체는 물론이고 민간 기업이 종활 대응에 적극적으로 나섰듯이, 웰다잉과 관련한 당국의 정책 의지는 웰다잉의 활성화에 필요불가결한 부분이다.

혼자 죽는 시대가 일반화하는 상황에서 모두가 안심하고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사회의 구축이 필요하다.
일본의 개호보험, 한국의 노인장기요양보험을 통해 간병이 사회화한 것처럼 다사사회에서는 죽음의 사회화가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 일본 지자체들이 독거 고령자 등을 대상으로 생전 계약 지원 등 웰다잉 정책을 펼치고 있는 점은 참고할 만하다.
데스카페 등 죽음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의 장을 확대함으로써 죽음의 터부에서 벗어나려는 일본의 모습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요즘 일본에서 종활이 너무 상업화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2025 새벽묵상 전도서






전도서 장별 요약

헛된 것들 속에서 참된 의미를 찾아서

전도서 1장: 인생의 헛됨 선언

전도자는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고 선언한다. 자연과 역사는 반복되고, 인간의 수고도 결국은 무익하다. 지혜를 탐구했지만, 오히려 근심이 더해질 뿐이다.

전도서 2장: 쾌락과 수고의 무의미

쾌락과 부를 쌓고, 지혜와 어리석음을 비교해 보았지만 결국 모두 헛되다. 사람은 아무리 애써도 죽음 앞에서 동일하며, 자신이 수고한 것을 후대가 이어받을 뿐이다.

전도서 3장: 때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모든 일에는 때가 있으며, 인간은 그 흐름을 통제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때에 맞게 아름답게 하셨고,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전도서 4장: 인간 관계와 외로움

세상의 불공평함과 탐욕으로 인해 고통이 가득하다. 그러나 혼자보다 둘이 함께하는 것이 낫다. 권력과 부도 결국 허무하며, 사람은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전도서 5장: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

말을 조심하며 하나님 앞에서 경건해야 한다. 재물은 만족을 주지 못하며, 부와 명예도 결국 헛되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는 것이 참된 복이다.

전도서 6장: 만족 없는 인생

부와 자녀가 많아도 만족을 모르면 헛될 뿐이다. 사람은 미래를 알 수 없으며, 욕망은 끝이 없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 안에서 살아야 한다.

전도서 7장: 지혜의 가치와 한계

지혜가 어리석음보다 낫지만, 완전한 지혜를 가진 사람은 없다. 지나친 의로움도, 지나친 악도 피해야 한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전도서 8장: 권력과 정의의 모순

악인이 번성하고 의인이 고난받는 현실이 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전도서 9장: 인생과 죽음의 필연성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찾아오지만, 살아 있는 자에게는 희망이 있다. 지혜로운 삶을 살되, 결과를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고 현재를 즐기는 것이 좋다.

전도서 10장: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이

작은 실수가 큰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지도자는 지혜롭게 행동해야 하며, 말과 행동을 신중히 해야 한다. 지혜는 힘이지만, 권력도 결국 한계가 있다.

전도서 11장: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

인생은 불확실하지만, 믿음으로 행동해야 한다. 미래를 두려워하기보다 현재를 선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젊은 날에 기쁨을 누리되,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전도서 12장: 인생의 결론

청년의 때에 하나님을 기억하라. 모든 것이 헛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행위를 심판하실 것이다.

결론

전도서는 인생의 헛됨을 강조하지만,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결론으로 제시된다. 세상의 재물, 권력, 지혜조차도 유한하며,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것 안에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삶의 의미는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찾을 때 온전해진다.







전도서의 구조와 중심 주제

전도서는 12장으로 이루어진 성경이다. 전도서 한 절 한 절 낱낱이 보려고 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큰 틀에서 전도서를 보면 나름 이해가 된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큰 틀에서 전도서의 구조와 전도서의 주제를 3가지로 말씀하려고 한다.

 
1)전도서 구조와 관련해서, 전도서는 죄 아래서의 헛됨을 가르친다. 전도서의 유명한 말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말씀을 잘 아실 것이다. 이것은 언듯보면 허무주의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전도서가 무엇 때문에 이런 헛됨을 말하고 있는지 알게 되면, 세상 철학자들이 말하는 허무주의와 어떻게 다른지를 깨닫게 된다.
 
전도서 처음과 끝을 보시면 알겠지만, 전도서 1장 2절과 12장 8절에서 전도서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선언한다. 그 헛됨 사이에 죽음이 자리 잡는다. 처음과 끝을 같은 것으로 배치하는 것을 수미상관법이라 부른다. 전도서의 이런 수미상관 구조는 죄 아래 있는 인류의 삶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강조한다. 그리고 전도서 12장 9-14절은 전도서의 결론 부분으로, 그 헛됨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오늘 읽은 전도서 12장 9-14절은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혹시 우리 삶이 꼬였다고 생각하거나, 뭔가 풀리지 않아 아주 힘들어한다면, 근본적인 차원에서 오늘 본문은 여러분에게 정답을 제공할 것이다.
 
2)전도서 주제와 관련하여, 아담을 보면 사람의 본분이 보인다. 사람의 본분이 뭐지 하면 낯선 주제가 되고 만다. 오늘날같이 세속화된 사회에서는 사람의 본분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절대 규범이 행동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오늘날은 하나님이 주신 남성 여성조차도 스스로 바꾸려고 한다. 하나님이 주신 성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가 성을 결정하려 한다. 이런 세대에게 사람의 본분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가 되고 만다.
 
사람의 본분 이야기는 곧장 우리를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에게로 이끌어간다. 아담에게 있어서 그의 본분은 무엇인가? 우리는 아담의 본분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이 명하신 선악과를 먹지 않고, 주어진 통치권을 바르게 행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도서가 말하는 사람의 본분이다. 전도서는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이다.
 
히브리어로 사람을 가리킬 때 보통 아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아담 앞에 관사가 없으면 보통명사이고, 정관사가 있으면 특별한 의미가 담긴다. 마치 사람과 그 사람의 차이처럼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시편이나 잠언에서 사람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거의 대부분 관사 없이 그냥 아담을 사용하여, 보편적인 사람들에게 교훈한다. 그런데 전도서에서 아담은 약 49회 정도가 사용되는 가운데, 몇 번의 예외를 빼고는 모두 정관사가 있는 아담을 사용한다. 세세한 설명은 생략하더라도, 전도서에서 말하는 그 사람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그 아담을 가리키며, 그 아담의 죄 때문에 이 세상에 헛됨이 찾아왔음을 강조한다. 그 사람-아담-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연결된다.
 
3)끝으로 사람의 본분을 아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입니다. 용수철을 늘렸다가 놓으면 제자리로 되돌아가듯,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역영에 이런 놀라운 회복력을 주셨습니다. 다친 상처가 저절로 치료가 되고, 오염된 자연이 자연적으로 정화됩니다. 그런데 이런 회복력만 믿고, 상처나 오염을 방치하면 회복력이 떨어져 자연 치유가 불가능해집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양심과 성경을 주셔서 양심의 소리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의 잘못된 부분을 고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양심의 소리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영혼의 회복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쉽게 죄를 범하고 돌아서지 못하며, 나중에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조차 발견하지 못하게 됩니다.
 
11절에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다고 말씀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세대를 보면, 하나님을 떠나 너무나도 멀리 와버렸다는 느낌이 듭니다. 더 이상 회복될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스라엘이 망할 때처럼 각종 우상과 미신과 음란과 폭력이 온 나라에 가득합니다. 이런 문제의 해결책은 사람의 본분을 분명히 알아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동명의 모든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













전도서 요약

전도서는 솔로몬의 말년 인생이 담긴 책이며 그의 철학적 소견이라고 할 수 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은 다 헛되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중히 여기고 있는 부귀영화, 명예, 권세, 지혜와 지식이 다 사람을 번뇌하게 할 뿐이며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전도서는 회중의 스승의 말씀. 즉, 솔로몬의 인생론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는 사람이 해 아래에서 가족이 화목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최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주장한다.

전도서의 핵심은 1장에 있는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것이 아니다. 헛된 것은 불교적인 것으로 이는 성경의 핵심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모든 것을 누려보게 했고 그에게 인생에 대해 결론을 내게 했다. 그 결론이 1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장에 있다.

그러므로 전도서의 핵심은 하나님을 떠나서 추구하는 것이 헛된 것이며,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서 사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대로 선악간에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도 알려 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솔로몬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이야말로 한 번뿐인 인생을 진실로 가치 있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다.

주요 내용 및 요점 정리

1

◈ 헛된 인생

•이 세상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모두 헛되다.

•세상의 모든 지혜와 지식도 번뇌만 있고 모두 헛된 것이다.

2

◈ 세상의 헛된 것들

•세상의 즐거움과 세상의 지혜와 세상 금은보화도 모두 헛되다.

•세상의 권력과 성취들도 모두 헛되다.

•슬기로움과 어리석음도 덧없는 것이니 모두가 헛되다.

•애쓰고 수고하는 모든 것들이 모두 헛된 것이다.

3

◈ 때와 시기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때와 시기가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한결 같으시다.

•사람의 운명은 흙으로 돌아가니 모든 것이 헛되다.

4

◈ 학대와 수고

•학대받고 억눌려 사는 모든 것도 헛되다.

•세상의 수고와 소유도 모두 허무한 것이다.

•친구가 있어도, 세상의 출세와 권력도 모두 헛되다.

5

◈ 하나님과 물질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을 조심하며 신중하게 서원하라.

•돈과 재산이 많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세상에서 수고한 것들로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다.

6

◈ 물질과 오락

•물질이 아무리 많아도 즐기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삶을 만족하며 욕심없이 살아가야 한다.

7

◈ 지혜

•인생을 지혜롭게 살며 우매하고 어리석게 살지 않아야 한다.

•너무 의롭게도 너무 슬기롭게도 살아가지 말아야 한다.

•진정으로 선한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

8

◈ 왕과 악인

•왕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말고 왕에게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

•악인과 죄를 지은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든 사람은 세상일을 다 알지 못한다.

9

◈ 운명과 희락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같은 운명이다.

•모든 삶이 끝나기 전에 자신의 삶을 즐겨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 때가 있다.

•가난한 자들의 지혜가 무시되기도 한다.

10

◈ 지혜

•지혜가 어리석음보다 나으니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

•사람을 저주하지 말며 게으르지 않게 살아야 한다.

11

◈ 지혜와 충고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하니 지혜롭게 인생을 살아야 한다.

•젊을 때 하나님을 바르게 섬겨야 한다.

12

◈ 주를 경외하라

•자신의 종말이 오기 전, 젊을 때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계명을 지키고 사는 게 사람의 본분이다.





2025 새벽묵상 잠언










잠언(箴言):Proverbs - 총론

[영] Proverbs(The Book of Proverbs) 구약성서 중의 1서.

1. 본서의 정전(正典)에서의 위치-

본서는 히브리어 성서인 구약정전의 3부분-제1부 율법, 제2부 예언서, 제3부 제서(諸書)에 있어서, 제3부에 속하고, 제서는 그리스어의 [성문집]( aJgiovgrafa=hagiographa) 또는 [성문학서]를 말한다. 본서는 그 성문학서 11권 중의 1권으로, 시편욥기 다음에 두어져 있다. 또 그 문학적 특징에서, 히브리의 지혜문학에 속하고, 더구나 그대표적인 것이다. 히브리의 지혜문학 중에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구약 정전 중에서는 욥기와 잠언과 전도서의 3권과 구약외전에 속하는 벤 시라의 지혜서(The Wisdom of BenSirach, Ecclesiasticus)의 2권으로, 합쳐 5권이다. 이 외에 시편 중의 수편(1, 37, 49, 50, 73,112편, 기타).

2. 본서의 명칭-

히브리어의 명칭[마-샬- lv:m:(mashal)]은 [비교](Comparison) 또는 [유사](Likeness) 등의 의미인데, 깊은 진리를 알기 쉬운 일과 대조케하여, 가르치기 위해 이러한 문체를 쓴 것으로, 즉 A를 생각케 하기 위해, B를 아우러 비교케 하여 기억케 하는 방법이다(잠 11:22). 한글역의 잠언은 일본역과 한가지로 한역성서에서 온 것이고, 영어는[Proverbs](속담)라는 역을 붙이고 있다. 잠언은 한문에 있어서는 [가르쳐서 훈계되는 말]이다.

3. 본서의 저자,연대-

히브리 성서의 표제(表題)는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의 잠언이다]고 했다. 랍비의 가르침에서는, 아가는 솔로몬의 청년기에 있어서, 잠언은 중년기에 있어서, 전도서는 노년기에 있어서 집필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전설은 솔로몬이 지혜에 뛰어나 있었다는 성서의 기사에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왕상 3:28,4:32,5:9-,10:1-, 11:41). 체인(Thomas Kelly Cheyne 1841-1915 영국의 신학자, 벨하우젠파의 대표자)같은 비평적 학자도, [이 전설의 본질이 인정될 수 없다는 이유는 없다](Job and Solomon, p. 131)고 말하고 있다.

유다 전통에 의하면, 구약의 율법은 모세에게, 시가는 다윗에게, 지혜는 솔로몬에게관련시키고, 잠언도 또 솔로몬의 작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솔로몬(10:1) 이외에도 몇사람인가의 저자명이 더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지혜 있는 자](22:17, 24:23), 또는 [야게의 아들아굴의 잠언](30:1), [르무엘왕, 곧 그 어머니가 그를 훈계한 잠언](31:1)등의 표현, 그리고[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25:1)이라는 말도 나온다.

그러므로 이들 잠언의 대부분이 솔로몬의 작이었다고 해도, 실제로 편집되고, 수록된 것은, 히스기야의 신하들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잠 25:1). <<벤 시라의 지혜>>에는, 이 잠언을 알고 있었던 것을 뒷받침하는 말이 있는데서(시라知 47:17), 전 180년경기록된<<벤시라의 지혜>> 보다 일찍 편집되고, 이미 책으로 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서잠언은, 히스기야왕 시대와 <<벤 시라의 지혜>>의 시대 사이에 완성된 것으로 보아야 할것이고,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온 직후, 이스라엘의 정책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서,에스라가 활약하고 있었던 때로 여겨진다.

4. 본서의 목적-

지혜를 획득하여 하나님을 경외케 하도록 하는데 있다. 1:2-4에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당할일에 대하여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요컨대 잠언의 목적을 말한 것이다. 잠언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알게하는 일을, 제1의 목적으로 한다. 그리하여 커다란 하나님의 통치 질서를 잘 분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곤란한 부정에의 유혹이 많은시대 중에서 어떻게 냉정하게, 평화롭게, 품위를 지켜가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를 가르치려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언자적 정렬이나 율법의 엄정함은, 무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고요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주(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1:7외에 20회)라는 말은, 잠언 전체의 기조(基調)이고, 따라서 단순한 철학사상, 휴머니즘, 인생교훈과는달리, 신앙에 의한 삶의 방식(윤리)의 가르침이다. 또, 이것이 청소년의 교육을 목적으로 하여 기록되어 있는데 의미가 있다.

5. 본서의 내용 구분-

본서는 8집 또는 7집으로 구분할 수 있고, 그 모두가 표제(表題)를 가지고있을 뿐 아니라, 각집(各集)이 특성을 가지고 있다. 7집으로 구성할때는 제3, 4집을 하나로 한다.

제1집 1:1-9:18.

전체의 서문의 역할을 하고 있고, 여기서는 지혜의 찬미가 주로 되어 있다. 각절이 병행의 시형(詩形)을 이루고 있다. 그 배열에는 일정한 순서는 없고, 사상도 논리적이 아니다.

제반문제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으나, 특히 현저하게 특징적인 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추상(抽象)하여 의인화한 교훈이다(8:1-9:6). [지혜 hm;k]j;(chokmah=wisdom)는 하나님의 창조의 제1로서, 그리하여 지혜를 하나님의 첫아들(초생자)로 보고, 우주는 이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하며, 모두 이에 따르는 왕자, 현인등은 반드시 이에 의해 보상된다고 한다.후세의 로고스설의 서곡(序曲)으로 일컬어지기에 족한 것이다. 이 1집에 있어서의 문체(文體)의 특징은 [아름답게 연마된 시라기보다는 오히려 풍부한 수사적 산문이다].

델리치(F.Delitzsch 18:50-1922 독일의 구약학자)는, 이 1집의 장려적 요소를, 신명기의 그것에 비교하여 [신영기가, 후에 올 시대의 사람들의 마음에 모세의 율법을 심어놓듯, 여기서 저자는, 듣는 자의 마음에, 지혜의 율법을 각인(刻印)하려고 했다]고 말하고 있다.

제2집 10:1-22:16.

솔로몬의 잠언으로 되어 있고, 본편은 잠언의 가장 주요한 중심부분이다. 각절이 모두 2행시의 대구(對句)로 이룩되고, 반대의 경우를 대조하여 진리를 강조한다.375(374로 계수하기도 한다)의 2행시가 여기서는 수집되어 있다. 하나님의 지배가 강조되고,사회생활에의 지시가 풍부하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인과가 필연적임을 말하며, 사람의 도를 가르친다. 왕의 덕을 예찬하여, 충성과 순종을 권하고(14:35, 16:10, 12, 13, 20:8, 21:1,22:11), 부모의 사랑을 말하여 복종을 촉구한다(13:1, 24, 15:5, 19:18, 26, 20:20, 22:6, 15).

기타 오만을 경계하고, 혀의 죄를 말하는 등 각종의 실제문제에 언급한다. 또 하나님의 권위와능력을 강조하여 마음으로 이를 경외할 것을 가르치고(15:3, 11, 16, 29, 16:2, 4, 17:3, 19:21,20:12, 24, 21:2, 30, 22:2), 또 하나님의 희생제물보다도 정의를 기뻐하시는 점을 지적하여,예언자적 경고를 준다(21:3, 및 15:8, 16:6, 21:27 참조). 널리 인생문제에 언급하나, 그 사이에 연락없고, 개개의 교훈의 잡연(雜然)한 집성(集成)인데서, 장절에 따라 이것을 분류할 수는 었다.

제3집 22:17-24:22.

지혜있는자의 말로서, 본편의 시형은, 제2편에 비하여 보다 자유롭고, 4행시도 적지 않은데, 개중에는 단시(短詩)로 보아야 할 것도 있다. 여기 취급되어 있는 주제는, 2집에 있어서와 같고, 다만 장려적 요소가 현저한데 일상 생활을 깊이 관찰하여,인생의 공리(公理)를 엿보게 한다.

제4집 24:23-34.

이것도 역시 지혜있는 자의 말로, 제3집에 유사하고, 그 보충과 추가, 또는 부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제5집 25:1-29:27.

솔로몬의 잠언으로, 제2편의 보충,추가, 또는 부록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같은 종류의 격언을 한데 모아놓은 것이 적지 않다. 예컨대 왕(25:1-7), 이러석은 자(26:3-12), 게으른 자(26:13-16), 궤휼한 자(26:23-26, 28)등과 같이. 제2집과 한가지로 대구법으로 이룩된 것이지만, 유사한 사실을 비교하여, 의미를 강하게 하는 것도 있다(25-29장에 이런 유가 많다). 이것은 당시의 학자(히스기야시대)가 왕명에 의해 편집한 것으로되어 있다.

제6집 30장.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으로, 본편은 다른 것에 비교하여 현저히 다른데가있다. 하나님에 대하여 회의로 고민하는 자에게 향하여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려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다음에 10-33절까지에 9종 가지의 격언을 싣고 있다. 그중의 6종, 즉 (1) 악한 세상의 죄악 넷(11-14), (2) 족한줄 알지 못하는 것 넷(15-16), (3) 헤아려(깨달아)알기 어려운 것 넷(18-20), (4) 견디기 어려운 것 넷(21-23), (5) 지혜로운 동물넷(24-28), (6) 잘 걸으며 위풍있게 다니는 것 넷(29-41)을 열거한 것은, 각각 4종의 사실을 병기한 점에 있어서, 잠언중, 다른 유를 볼 수 없는 것이고, [수(數)의 잠언]으로 일컬어진다.

제7집 31:1-9.

르무엘왕의 말로, 즉 그 어머니가 그에게 가르쳐준 말이다. 여기서는 음주(飮酒)가 금해지고, 가난한 자에 대한 동정이 고조되어 있다.제8집 31:10-30. 어진 부인, 완전한 아내에 대한 말로서,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부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본서의 부록이기도 하다. 이 아름다운 시는, 알파벳 시로서, 최초의 행(行)이 히브리어 알파벳의 최초의 글자로 시작되고, 나머니 21자가 각절 처음마다 순차로 나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부와 명예는 어진 부인이 당연히 받는 보상인데, 그러나 어진 아내로서의 귀한 생애의 원천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경건한 신앙에 의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6. 본서의 형식 -

본서 중에는 대별하여, 세가지의 형식이 있다.

1) 짧은 구술의 격언 같은 것이 그 하나인데, 이것이 가장 오래고, 예컨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군 같다](창 10:9)든가, [악은 악인에서 난다](삼상 24:13)등에 보여지는 것이다.

2) 이행으로 된 대구인데, 이것이 잠언 중에서는 가장 많이 보여진다. 이것은 서로 동의적인 경우도 있는가 하면, 반의적인 경우도 있는가 하면, 반의적인 경우도 있다. 예컨대 다음 같은 것을 들 수가 있다.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리라](10-16)-동의적 대구.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고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14:1)-반대적 대구.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16:8)-비교적 대구.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26:11)-비유적 대구.

3) 약간 수필 같은 줄거리를 가진 것이다. 7:6-23, 31:10-31 등이 그것이다.

7. 본서의 본문 -

잠언에 있어서 가장 곤란한 것은, 저본으로 되는 히브리어의 본문이 오손되었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히브리어 본문에는, 난해한 곳이 많고, 특히 솔로몬이 지은 것에 많이 보여진다. 그것은 고전인 이상 부득한 일이다. 당시의 히브리 언어의 지식은 오늘도 불충한 때문이다. 그러나 연구의 진전과 함께, 차츰 새로운 빛이 던져지고 있다. 그렇지만 성급한 수정은 극력 삼가해야 할 것으로 되고 있다.

 

잠언 장별 요약

 1장

Ⅰ. 잠언의 목적과 의도 1:1-6

이 책의 서론을 편집자인 에스라가 썼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솔로몬이 기록한 것으로 생각하는 편이 낫다. 이 책 초두에서 솔로몬은 책을 쓰는 목적을 제시한다.

Ⅱ.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부모를 공경하는 것 1:7-9

'젊은이에게 지식과 근신을 가르치려고' 했던 솔로몬은 여기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두가지 법칙을 규정한다.

Ⅲ. 악한 자의 유혹에 대한 경고 1:10-19

Ⅳ. 지혜에 주목하라고 촉구함 1:20-33

솔로몬은 사단의 유혹에 귀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준 후에 여기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청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2장

Ⅰ. 지혜 추구의 방법과 결과 2:1-9

솔로몬은 우리에게 어디에 가서 지혜를 찾을 것이며 어떻게 얻을 것인가를 말해 준다.

Ⅱ. 지혜의 유익 2:10-22

참 지혜는 죄의 길에서 우리를 지키며, 세상에서 가장 부귀하게 되는 것보다도 더 큰 유익을 준다.

 

3장

Ⅰ. 지혜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 3:1-6

하나님과 교제한 삶은 말할 수 없이 유익하다.

Ⅱ. 하나님께 대한 봉헌 3:7-12

각기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는 세 가지 권면이 본문에 나타난다.

Ⅲ. 지혜의 유익 3:13-20

지혜를 얻은...자는 복이 있나니(13절). 참 지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으며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율법에 전적으로 순종하는데 있다.

Ⅳ. 지혜에 거하라는 권면 3:21-26

Ⅴ. 이웃에 대한 교훈 3:27-35

 

4장

Ⅰ. 부모의 훈계 4:1-13

Ⅱ. 악인의 길에 대한 경고 4:14-19

다윗이 솔로몬에게 한 교훈이 4절에서 시작하여 이장 끝까지 계속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기서부터는 솔로몬의 교훈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이 부분에서 솔로몬은 악인의 길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Ⅲ. 선을 행하는 길 4:20-17

악을 행하지 말라고 경고했던 솔로몬은 여기서 선을 행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5장

Ⅰ. 음행에 대한 경고 5:1-14

Ⅱ. 악의 치료법 5:15-23

간음과 음행의 크나큰 피해를 보여 준 솔로몬은 이제 그러한 악에 대한 구제책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

 

6장

Ⅰ. 경솔한 보증에 대한 경고 6:1-5

저 세상에서 필요한 하나님의 지혜를 가르쳐 줄뿐만 아니라 신중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이 세상에서 필요한 인간적인 분별력도 가르쳐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우수성이다. 보증하지 말라는 것은 훌륭한 원칙이다. 왜냐하면 보증을 서는 일로 인해서 알거지가 되고 파탄을 맞는 가정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Ⅱ. 게으름에 대한 책망 6:6-11

솔로몬은 여기서 게으른 자 즉 안일을 좋아하고, 게으름 가운데 살며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고 특히 신앙에 대해서 무관심한 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Ⅲ. 일곱 가지 악행 6:12-19

Ⅳ. 음란한 죄에 대한 경고 6:20-35

 

7장

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훈계 7:1-5

이 부분의 말씀은 6:20이하의 말씀과 같이 정욕에 대해서 경고하는 내용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다.

Ⅱ. 우매한 소년 7:6-23

솔로몬은 여기서 음란의 죄에 대해 경고했던 바를 강조하기 위해서 음란한 여인의 꾐에 빠져 사실상 파멸하게 된 소년의 이야기를 한다.

Ⅲ. 음란에 대한 경고 7:24-27

우리는 여기서 앞에 나온 이야기의 해설을 듣게 된다.

 

8장

Ⅰ. 지혜로의 초대 8:1-11

Ⅱ. 지혜의 유익함 8:12-20

여기에서의 지혜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 지혜는 말씀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이시며 마음속에 게신 그리스도이시다. 우리에게 계시된 그리스도일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된 그리스도이기도 하다.

Ⅲ. 지혜의 영원함 8:21-31

여기서 지혜는 인격적인 속성과 행동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이 신적 인격체는 하나님의 아들임이 분명하며 여기서 지혜에 대해 설명하는 주요 사항들이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Ⅳ. 지혜의 훈계 8:32-36

지혜가 말씀하시는 내용의 의도와 취지는 우리 모두를 신앙의 법에 전적으로 복종시키고 우리 마음과 생활 속에 잘못된 것을 교정하려는 것이다.

 

9장

Ⅰ. 지혜의 초대 9:1-12

여기에서 지혜는 아주 훌륭하고 관대한 여왕으로 소개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게 하는 지혜이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바로 이 지혜이시며, 아버지께서는 심판을 모두 그에게 위임하셨다. '지혜'라는 말은 여기서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지혜의 보화가 그리스도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Ⅱ. 우매함의 초대 9:13-18

방심하고 있는 영혼을 죄의 길로 끌어들이려고 얼마나 열심히 유혹하고 있는가!

 

10장

Ⅰ.잠언 십장 10:1-32

1. 부모의 기쁨과 근심(1)

혈연에 의해서건, 정치적인 관계에서건, 교회적인 관계에서건 부모된 자들이 받는 기쁨이란 자기의 보호 아래 있는 자들의 선한 행실에 달려 있다. 자녀들은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지혜롭게 처신하며 부모로부터 받은 선한 교육에 맞춰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모가 치른 수고를 어느 정도나마 보상하며 노년의 부모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것은 젊은이들에게도 기쁨을 더해 준다. 또한 자녀의 지혜와 선행을 기뻐하는 것은 부모의 도리이다.

 

2. 의인과 악인의 소욕(2,3)

이 두 구절은 같은 취지의 내용이다. 부당하게 취한 재물은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날려 버리시기 때문이다.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2절). 손익을 달아본다고 하더라도 재물로 인한 이익으로는 악으로 인한 손해를 결코 상쇄하지 못한다(마 16:26). 재물은 영혼을 유익하게 못한다. 여호와께서...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3절). 사람이 부정으로 모아놓은 재물을 하나님이 공의로 흩어 버리시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정직하게 얻은 재물은 하나님이 그것을 축복하시기 때문에 유용하게 쓰인다.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즉 정당한 방법으로 얻고 간직하고 사용하는 재물은 재물의 목적에 부합되는 것이다. 재물의 목적은 우리를 살아 있게 하며 우리를 방어해 주는 것이다.

 

3.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4)

손을 게으르게 놀리고, 자기 일에 부주의하고 태만한 자는 틀림없이 가난하게 된다. 손을 속이며 놀리는 자들(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속임수로 부자가 되려고 하는 자들은 그들이 얻은 재물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서 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신임도 잃게 됨으로써 마침내는 가난해진다. 근면하고 정직하며 신중한 자는 아마도 가진 것을 늘일 것이다. 이는 세상일에서 뿐만이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게으르고 사특한 자는 영적인 빈궁에 처할 것이나 열심을 품고 여호와를 섬기는 자는 믿음과 선행에 부요하게 된다.

 

4. 지혜로운 아들(5)

기회를 잘 이용하는 자들 즉 준비할 수 있는 동안에 나중을 위해 대비하고 수확기인 여름에 거두는 자들이다. 이같이 하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다. 그는 부모를 위해서도 지혜롭게 행하며 기회가 있을 때면 마땅히 부모를 봉양한다. '자는 자'는 시간을 허비하고 일을 게을리한다. 특히 겨울을 대비해서 저장해야 할 때는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다.' 즉 그는 어리석은 아들이며 겨울이 올 때에 지혜를 얻는 자는 '여름에 거두는 자'이며 근면하다는 신임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청년의 때를 빈둥거리며 보내는 자는 늙어서 나태함의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5. 의인의 복(6)

여러 가지 축복이 하늘에서 내려와 선한 사람의 머리 위에 눈에 보이도록 임한다. 축복이 머리 위에 화관같이 임해서 그들을 존귀하게 만들 것이며, 또한 투구같이 임해서 그들을 보호할 것이다.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그들의 입은 그들이 행한 독으로 인해 수치로 막힐 것이다.

 

6. 의인과 악인의 이름(7)

의인도 악인도 수명이 다하면 틀림없이 죽는다. 무덤에 누운 그들의 시체에서는 차이점을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영의 세계에서는 양자의 영혼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복된 사람들은 뒤에 복된 기억을 남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시112:3,6,9). '의인을 기념할 때 칭찬하는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해야 할 본분이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해석하고 그것을 율법으로 준수하며 고인이 된 의인을 부를 때에는 항상 "그의 기념이 복될지어다"하고 덧붙인다. 악인은 잊혀질 것이며 욕될 것이다.

 

7. 지혜자와 우매자(8)

순종하는 자는 다스림을 받는 것을 특권으로 여긴다. 또한 해야 할 바에 대해서 듣는 것을 특권으로 여긴다. 이는 그들의 지혜이다. 순종하는 자들은 마음이 지혜로운 자이며 견고하고 요동치 아니할 것이다. 다스림을 받지 않고 어떤 멍에도 참지 못하며 가르침이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우매한 자이다. 즉 이들은 자신과 자신의 이익에 상반되게 행동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대체로 입이 미련한 자들이며 말은 많으나 헛소리뿐이며 자기 자랑만 하고 다닌다.

 

8. 바른 길과 굽은 길(9)

인간의 순전함을 곧 그 사람의 안전을 보장한다.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서 바른 길로 행하는 자 즉 하나님과 사람에게 충실한 자는 걸음이 평안하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다. 그는 겸손하고 담대하게 계속해서 자기 길을 간다. 또한 그는 사단의 유혹과 세상의 환난과 세인의 비난에 대비해서도 단단히 무장하고 있다. 부정직은 치욕이 된다. 굽은 길로 행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속이는 자는 당분간은 그냥 지나칠 수 있어도 정체가 드러나고야 만다.

 

9. 미련한 자의 해(10)

여기서는 음모를 꾸미고 자신을 가장하는 죄인들에게 화가 미친다고 말하고 있다. 해를 끼칠 기회를 엿보고 있으면서도 전혀 관심이 없는 것같이 눈짓을 하며, 공범자에게 신호를 해서 자기를 도와 악한 계획을 실행하게 하는 자는 타인에게나 자신에게 모두 근심을 끼친다. 입이 미련한 자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패망하게 된다(8절). 그러나 이 경우가, 눈짓하는 자보다는 덜 위험하다. 입이 미련한 자는 눈짓하는 자만큼 타인에게 근심을 끼치지는 못한다. 짖는 개라고 항상 무는 것은 아니다.

 

10. 의인과 악인의 입(11)

선한 사람은 선을 전달하기에 얼마나 열심인가! 마음의 출구인 그의 입은 생명의 샘이다. 그의 입은 끊임없는 샘이어서 다른 사람을 교화할 수 있는 선한 담화가 계속해서 솟아 나온다. 악인은 악을 은폐하기에 즉 악으로 해로운 일을 하기에 얼마나 열심인가!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으며 호의적인 말로 모의하고 있는 악을 가장한다.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그런즉 폭력으로 얻은 것은 폭력으로 빼앗길 것이다(욥 5:4,5).

 

11. 미움과 사랑(12)

가장 해를 끼치는 것은 미움이다. 특별히 다툴만한 일이 없는 곳에서도 미움은 기회를 노리다가 다툼을 일으킨다. 고자질과 악한 추측과 허위 진술로 이웃의 싸움을 일으키는 데서 쾌락을 느끼며, 숨어 있던 불화의 불꽃을 당겨놓고 거기에서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끼며 자기 손을 녹이는 자는 가장 악한 성미의 사람들이다. 가장 위대한 화해자는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즉 사랑은 불협화음을 내는 잘못된 관계를 다 가리운다. 사랑은 잘못을 드러내거나 과장하지 않으며 가능한 한 잘못을 덮어 준다. 사랑은 잘못을 용서해 준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수로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여전히 친구를 사랑할 때 사랑은 그 허물을 용서해 주는 것이다. 사랑은 또한 우리의 허물도 가리며 덮어 줄 것이다.

 

12. 명철한 자의 지혜(13)

지혜와 은혜는 선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명예이다. 지혜가 있다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지혜롭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것은 더더욱 명예로운 일이다. 우매함과 죄악은 악인에게 해당하는 치욕이다. 지혜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13절). 그는 스스로 양심의 채찍에, 국가의 비난에,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나아가는 자이다.

 

13. 지혜로운 자의 지식(14)

(1) 자기를 보호해 줄 유용한 지식들을 많이 쌓는 것이 바로 지혜로운 자의 지혜이다. '명철한 자의 입술에 지혜가 있는 것'(13절)은 그들이 지혜를 마음 속에 쌓아 두었기 때문이다.

(2) 마음 속에 해악을 쌓아 두는 것이 바로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이다. 그들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며, 언제고 당길 수 있도록 "독한 말의 날카로운 화살"을 준비하고 있다.

 

14. 부자와 가난한 자의 재물(15)

부자들은 자기들이 부자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부자들을 최악의 재앙에서 보호해 주기에는 전적으로 무능하다. 가난한 자들은 자기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착각이다. 가난은 의기를 소침하게 한다. 하지만 먹고 살 것이 조금밖에 없더라고 만족하고 선한 양심을 지키며 신앙으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아주 안락하게 살 수가 있는 것이다.

 

15. 의인의 수고(16)

의인은 자기 손이 수고한 것만을 먹는다. 하지만 그 수고는 생명에 이른다. 의인은 정직하게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것으로 족하게 여긴다. 이러한 생활 태도는 자신을 생명에 이르게 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게 한다. 그는 '구제할 것이 있도록 하기 위해' 수고를 한다(엡 4:28).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악인은 재물로 정욕의 도구를 삼으며, 교만과 사치의 도구로 삼는다. 그것은 그에게 해를 끼칠 뿐이지 유익이 되지 못한다.

 

16. 훈계와 징계(17절)

훈계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간직하고 그 훈계를 따라 자신을 다스릴 수 있도록 훈계를 지키며,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훈계를 지키는 자들은 의로운 자들이다. 훈계를 받지 않고 아주 완강히 거부하는 자는 악한 자들이다. 그들은 마땅히 행할 바에 대해서 배우고 싶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허물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길을 잘못 든 여행자가 바른 길을 알려 주는 것을 참지 못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실수할 것이며 생명의 길을 잃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17. 미움과 참소(18)

악의는 아첨과 위선으로 위장한다 하더라도 미련하고 악한 짓이다. 자기를 아무리 모사로 생각한다 해도 그는 미련한 자이다. 거짓된 입술은 그 자체만으로도 악하지만, 악의의 가면을 슬 때에는 더더욱 악해진다. 참소하는 자 역시 미련한 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조만간에 구름에 가리웠던 의를 빛처럼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18. 말조심의 지혜(19)

대체로 말이 많으면 실수를 하게 마련이고,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실없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기의 지껄이는 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자는 자기가 지금 회개거리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재갈을 물리듯 입술을 지키는 것이 좋다. 즉 '입술을 제어하고', 자신을 종종 억제하는 자가 현명한 사람이다.

 

19. 의인과 악인(20,21)

재산이나 세상에서의 지위를 보지 말고 덕으로 사람을 평가하라. 선한 사람은 무엇인가 유익한 데가 있다. 그들에게 말할 수 있는 입이 있는 한 그 입술로 인해서 그들은 굉장히 유익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그들은 진실하며 교활하거나 악의라고는 없다. 그들의 말에 지혜롭게 귀기울이는 자들은 부요해진다. 혀로 인해 그들은 유용한 사람이 된다.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왜냐하면 거기에는 생명의 양식이며, 영혼을 살찌우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인은 아무데도 소용이 없다.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그들의 생각이나 사상, 목적, 그리고 그들을 잔뜩 지배하는 모든 것, 그들이 애착을 갖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세상적이며 육적인 것들이다. 그래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한 것을 말하며,' 하나님의 일을 알지도 맛보지도 못한다(요 3:31;고전 2:14).

 

20. 여호와의 복(22)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 재물에 마음을 두고 있지만, 대체로 자기들이 바라는 그 재물의 성격에 대해서 그리고 재물을 취득하고자 하는 방법에 있어서 잘못을 많이 범하고 있다. 바라는 재물을 얻으려면 세상에 집착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으로만 가능하다(시 127:2).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에는 하나님의 표적이 들어 있다. 즉 부하면 부할수록 대체로 탐욕과 욕망이 더 강해지기 쉬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영혼을 극심한 탐욕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21. 미련한 자와 명철한 자의 낙(23)

미련한 자는 행악으로 낙을 삼는 것같이. 그에게는 죄를 짓는 것이 웃는 일처럼 즐겁다. 범죄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면 그는 그 훈계를 농담으로 여긴다. 죄를 짓고 나서도 책망하는 자를 비웃으며 양심의 소리도 웃어넘기고 만다(14:9). 지혜에는 그 자체 안에 훌륭하다는 표시가 있다. 명철한 사람을 칭찬할 때 "그는 명철한 자요, 그에게는 지혜가 있다"는 말 이상은 필요없다.

 

22. 악인과 의인의 성취(24,25)

(1) 악인에게는 크게 두려움이 될 만한 화가 미칠 것이며, 의인에게는 바라는 것 이상으로 길하게 될 것이다. 악인이 자신을 속이는 헛된 망상으로 행악 중에도 마음이 떠있을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나 두려움으로 떨어야 할 때도 한두 번이 아니다.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의인도 두려워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나 그들의 소원은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 안에서의 복을 향하고 있으며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 그들이 두려워하던 대로가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따라서 그들에게 이루어진다(시 37:4).

 

(2) 악인의 번영은 곧 끝이 나지만 의인의 행복은 끝이 없다(25절).

 

23. 게으른 자(26)

게으른 성향을 가진 자들은 심부름 보내는 데 적합치 못하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사역자나 그리스도의 사자가 되기에는 적합치 못하다. 게으른 종은 주인에게 '이에 초같고 눈에 연기같이' 쓸모없고 성가시다. 이에 식초가 묻은 것같이 주인의 화를 돋굴 것이며 연기가 나서 눈에 눈물이 나듯 일에 태만한 것을 봄으로써 근심을 끼치게 될 것이다.

 

24. 의인과 악인의 소망(27,28)

신앙은 사람의 수명을 연장시키고 소망을 이루게 한다. "좋은 세월을 보기 원하는 자가 누구인가? 그는 경건할지어다. 그러면 그의 날이 길 뿐만 아니라 복될 것이다."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은 인간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희망을 무참히 밟아 버린다.

 

25. 의인과 악인의 결말(29,30)

정직에는 강건함과 안정이 뒤따른다. '여호와의 도가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며' 정직을 더 굳건하게 해준다. 자비를 베푸시든 환난을 주시든 하나님이 정직한 자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그를 마땅히 행할 바에 충실하도록 격려하며 낙심하지 않도록 용기를 부어 준다. 선한 양심은 죄에서 깨끗케 해주며 위험한 시기에도 담대하게 해준다. '여호와의 도'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여호와로 인한 기쁨'은 우리의 산성이다(8:10). 의인은 영영히 이동되지 아니하여도. 파멸은 악의 확실한 결과이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들은 근절되고 말 것이다.

 

25. 의인과 악인의 말(31,32)

지혜로운 말을 한다는 것은 지혜롭고 선한 사람들이 받는 칭찬이자 증거이다. 선한 사람은 이야기하는 가운데 지혜를 내어서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한다. 그는 '기쁘게 할 것을 알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대화가 어떤 것인지를 안다. 악하게 말하는 것은 악인이 행하는 죄악이며 패역이다.

 

11장

Ⅰ.잠언 십일장 11:1-31

1. 공평한 저울(1)

속이는 장사보다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은 없다. 여기서 말하는 '속이는 저울'이란 어떤 사람과의 거래에서든 온갖 모양의 부당한 행위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서 모두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속임수를 하찮게 생각하며 돈을 버는 데 있어서는 그런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공정하고 정직한 거래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없으며, 우리와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필수적인 것이 없다.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2. 교만과 겸손(2)

땅에서 나서 시혜물을 먹고 살며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교만하게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긴 인간에게 있어서 교만은 수치가 될 것이다. 거만한 자는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자로 만든다. 흔히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이나 헤롯에게 하셨던 것처럼 인간을 파멸시킨다. 그들의 헛된 영광 뒤에는 수치가 곧 뒤따랐던 것이다. 교만한 자에게는 어리석음이 있고 욕이 돌아





잠언의 12가지 주제  


 잠언은 대부분 성경이 구원의 역사와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과 달리 하나님의 백성이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보다 더 치중하였다. 

따라서 잠언의 말씀은 우리가 근본 하나님의 백성이나 잠시 육신을 입고 이땅에 사는 동안에는 하늘나라 시민인 동시에 이 땅의 시민이기도 한 바 성도로서 어떻게 이 땅에서의 생활을 하여야 하는 지의 성경적 처세의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잠언이 제시하는 12대 주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교훈의 내용

관 련 본 문

지혜와

우매함

지혜의 근본은 우주와 역사의 주권자인 하나님을 그가 참으로 깨닫고 경외하는 데에 달려 있다. 지혜의 가치는 다른 무엇보다 뛰어나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에 이르게 한다. 반면 우매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점점 멸망으로 빠져들게 한다. 따라서 구원을 희구하는 모든 성도에게는 하나님 안에서 그를 경외하는 삶을 살 때에만 얻을 수 있는 참 지혜가 요청된다.

1:7; 3:13,14; 4:7; 9:10; 12:15; 15:14; 16:16; 24:9; 28:26

하나님께
대한 경배

하나님은 지혜의 근본이시며 모든 축복과 승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의 마음을 아시며 심판하시는 창조주로서 마땅히 우리 인간이 악에서 떠난 상태에서 인정하고 공경해야 할 분이시다.

2:5,6; 3:6-11; 19:21; 20:10; 21:3,31; 28:25; 29:25

선과 악

선은 하나님을 따라 행하는 것이며 악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을 행하는 의인에게는 하나님의 구원과 온갖 축복이 임하는 반면 악을 행하는 자는 정죄함을 당하여 결국 망하게 될 것임을 경고한다.

10:6,7; 11:6-11; 12:2,3; 13:5,6; 14:9,11; 20:7; 24:15,16; 28:1; 29:2

생명과

죽음

살고 죽는 것은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섭리자이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으로써 온전한 생명을 얻는 길은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안에 거하며 그에게서 비롯된 의와 진리를 좇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하는 자는 음부로 내려가는 사망에 처할 수 밖에 없다.

4:10; 7:27; 8:35; 9:6,11; 10:11; 11:30; 13:12,14; 15:4; 16:22; 19:23; 21:21

언어
생활

지혜롭고 의로운 말은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우매하고 악한 말은 죽음과 징벌을 초래하기도 할 만큼 말의 위력은 엄청나다. 따라서 영생을 추구하는 의로운 자는 자신의 입술을 통해 의로운 말을 하고 그 혀를 잘 제어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10:18-21; 12:6,13,14; 14:5,25; 17:4-7; 19:5; 20:19; 21:6; 28:23

가정
생활

가정은 모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곳으로서 그 가치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인 가족간에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자녀의 부모 공경, 부부간의 신실한 사랑, 부모의 올바른 자녀 교육과 징계 등은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행복한 가정의 영위를 위하여 지켜져야 할 하나님의 규례이다.

1:8; 5:18,19; 13:1; 19:13; 22:6; 23:13-16; 30:17

성실과
게으름

사람의 생활은 심는대로 거두는 원리가 적용되는 바 성실히 수고한 자에게는 풍족함이 찾아 들고 게으른 자에게는 궁핍과 빈곤이 찾아들 것임을 경고함으로써 더욱 이 세상에서 성실한 삶을 살 것을 요청한다.

6:9-11; 12:11; 14:23; 20:4,13; 28:19

이웃

인간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뿐 아니라 인간끼리의 수평적 관계속에서도 살아 가는 존재이다. 또한 이웃도 나와 함께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로서 그의 창조주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로 선하게 대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웃에게 행한대로 보응받게 된다.

3:29; 14:21; 17:9; 25:8-10; 26:18,19; 27:10; 29:5

부와
가난

진정한 부는 재물의 풍족함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영적, 심적인 모든 면에서 판단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자는 외적인 부를 얻기 위한 재물에 연연함을 버리고 진정한 부에 대한 이해는 물론 바람직한 부의 축적 과정과 올바른 사용을 더 중시해야 한다.

10:15; 11:4; 8:14; 20:19:4,7; 22:1,2; 23:4,5; 28:3,6; 30:8,9

겸손과

교만

겸손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미덕이나 교만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이다. 따라서 스스로의 겸손은 높아짐과 존귀히 여김받음을 가져오지만 오히려 교만은 낮아짐과 멸망의 선봉이 됨을 교훈한다.

11:2; 15:25; 16:18,19; 18:12; 21:4; 22:4; 29:23

성공과

패망

성공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 자체에 따르게 되는 것이며 패망은 말씀을 거역하고 죄를 저지른 모든 자에게 임한다. 이러한 패망의 원인은 악행, 악독한 말, 재물을 의지함, 말씀 멸시, 교만, 거짓 증거, 아첨, 완고함 등이다.

6:12,15; 10:8,10; 11:28; 13:6,13; 16:18; 21:28; 26:28

현숙한

아내

온전한 부부 관계의 성립은 매우 중요하다. 그중 특히 현숙한 아내의 역할은 매우 크다. 이러한 현숙한 여인은 지혜로움과 부지런함을 갖춘 신뢰할 만한 아내요 어머니를 일컫는다.

14:1; 31:10,11,13



잠언의 교훈 


1. 잠언의 명칭


히브리어 성경은 ‘미쉘레 솔로모’-솔로몬의 잠언이라고 되어 있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의 ‘잠언’의 이름은 히브리 성경에서 유래되었다.


  ‘잠언’(proverbs)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마샬’(mashal)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인데, 이것은 ‘경계의 말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비교를 통해 어떤 사물의 속성을 드러낼 때 사용되는 말이었다.


  솔로몬은 열왕기상 4:29-34까지의 기록을 보면 3천 가지의 잠언을 지었고, 천 다섯 편의 노래를 지었으며, 자연만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지혜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잠언의 대부분은 솔로몬이 지었고, 그 밖의 것들을 아굴과 르무엘, 그리고 익명의 저자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잠언의 기록 목적


잠언의 기록의 목적은 1장 1-6절에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첫째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둘째는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셋째는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하려는 것이며, 그 결과로 온전한 삶을 살게 하려는 것이다.


  넷째는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려는 것이다.


  다섯째는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도록 돕고자 하는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과 권면을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3. 잠언은 언제 기록되었는가?


대체적으로 잠언 25장 1절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최소한 히스기야 시대에 편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대체적인 연대를 주전 971년 경부터 시작해서 700년 경에 편집이 완성 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4. 잠언의 문학적 형식


잠언에는 많은 격언, 교훈, 수수께끼, 우화, 찬양시, 자서전인 고백, 예화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 책이다.


  먼저 격언 형식의 예를 들면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게 되느니라.”(잠언10:7),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잠언 11:24),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잠언 14:31)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구절들은 재치 있고 간결한 문장으로 된 격언 형식이다.


  교훈은 평행법을 이용해서 권위 있는 교사가 제자에게 가르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장, 22:17-24:22 등에서 나타난다.


  수수께끼는 1:6의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는 구절을 비롯해서 6:16-19, 30:18-31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우화는 은유법을 확장한 형태를 취하는데 예를 들면 5장 15-23의 우물에서 물을 마시고 샘에서 물을 마시는 은유이다.


  지혜를 찬양하는 시의 형태는 1:20-23에서 나타나며, 지혜로운 사람들의 지혜를 예화 형태로 전하는 7:6-23, 24:30-34, 그리고 지혜로운 자가 자신의 경험을 제자나 독자에게 소개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4:3-9 등을 들 수 있다.




5. 잠언의 구조


여덟 혹은 일곱 단락으로 되어 있다. 일곱 단락으로 구분할 때에는 제 3단락과 4단락을 하나로 본다. 각각의 단락에는 표제가 붙어 있다.


  제1단락은 1:1-7까지로 잠언의 목적과 주제를 언급하고 있는 서론 부분이다.


  제2단락은 1:8-9:18까지로 지혜의 효용성에 관한 솔로몬의 잠언이다.


  제3단락은 10:1-22:16까지로 솔로몬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제4단락은 22:17-24:34까지로 ‘지혜 있는 자의 말씀’으로 불린다.


  제5단락은 25:-29:장까지로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제6단락은 30장까지


  제7단락은 31:1-9까지인데, 6단락과 7단락은 아굴과 르무엘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제8단락은 31:10-31까지로 르무엘 왕을 훈계한 잠언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잠언은 그 내용에 따라 크게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이해하기도 한다.


  젊은이들을 위한 지혜의 말씀 - 1:1-9:18


  모든 사람들을 위한 지혜의 말씀 - 10:1-24:34


  지도자들을 위한 지혜의 말씀 - 25:1-31:31




6. 잠언의 주요 주제


잠언에는 많은 주제들이 등장한다. 이 주제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지혜(wisdom)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지혜롭기를 원하신다. 사람들을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삶의 길을 걷는다. 어리석고 교만하고 고집이 센 사람들은 악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무시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항상 하나님을 찾고자 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신다.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은 우리를 의로운 길로, 사람들과 바른 관계로 그리고 바른 결정으로 인도해 준다.




  관계(relationship)


  잠언은 우리게 친구관계, 가족관계, 그리고 함께 일하는 자들과의 관계를 성장시키기 위한 충고들과 권면들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관계에서 우리는 사랑, 헌신, 그리고 높은 도덕적 수준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혜를 활용하는 언행일치라는 일관성, 세련된 재치, 훈련이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따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어가지 않는다면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말(speech)


  우리가 하는 말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진정한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말하는가는 우리가 진정으로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의 말은 우리의 지혜가 어리로부터 왔는가를 시험하는 것이다.


  우리의 말에 지혜가 담기기 위해서는 자기통제의 훈련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말은 정직하고 스스로 선택한 것이어야 한다.




  일(work)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이루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게을러서는 안 되며, 근면함과 자기훈련을 통하여 우리가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평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재능을 사용함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느슨하거나 혹은 자기만족에 빠져 게으른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공(success)


  사람들이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성공은 좋은 평판과 도덕적 성품과 하나님께 대한 순종하는 영적인 헌신을 통해서만 성취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과의 성공적인 관계는 영원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유한하고 결국은 사라진다. 우리의 모든 자원과 시간과 재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지혜롭게 활용하려고 해야 한다.




<잠언의 지혜와 가르침의 의미>




  첫째, 잠언의 지혜는 인생을 세우는 가장 중요한 기초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덕적 성품을 가르친다. 잠언의 지혜는 인생을 이끌어 가는 바른 길과 잘못된 길을 동시에 가르치면서 이를 거듭 상기시켜 준다. 그리고 우리가 바른 길을 갈 때는 기꺼이 축복한다.


  “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잠22:19-21).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1:7).




  둘째, 잠언의 지혜는 ‘원인과 결과’라는 논리적인 필연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논리는 우리가 한 도덕적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돌아보게 한다. 선을 행하면 이에 상응하는 좋은 일이 따라온다. 반대로 악을 행하면 우리 인생은 산산이 쪼개져 버린다. 잠언 안에서만 의인과 악인의 대조가 부려 117절에 걸쳐 나타난다. 이 지혜서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모든 것을 보여 준다. 비록 하나님의 영향력이 희미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도덕적 결정을 내릴 때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




  셋째, 잠언의 지혜는 인간관계에서 성공하는 방법들을 가르쳐 준다. 잠언은 인생이 공동체에서 시작하여 그 안에서 끝난다고 말해 준다. 지혜문학을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또한 가까운 인간관계에서의 성공이 인생의 성공을 이루는 데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 준다(물론 성경 저자가 말하는 진정한 성공은 세상적인 성공과는 다르다.). 이 지혜는 우리가 갈구하는 사랑과 행복을 발견하는 데 필요한 자아의식을 바르게 세워준다.




  넷째, 잠언의 지혜는 인간의 경험이 도덕관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라고 가르쳐 준다.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라 할지라도 조심스럽게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경험에 대하여 명쾌하게 설명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의미 있는 인생의 길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다섯째, 잠언의 지혜는 세상의 현실과 그 당위성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이 세상에서 어떻게 감당할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해준다. 삶의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잠언의 지혜는 인간이 가져야 할 근본적인 관점으로 그 상황을 바라보라고 가르친다. 지혜는 결코 난관을 피해가지 않는다. 도한 거친 비난에도 물러서지 않는다. 이것은 인생의 성공이 걸린 문제다. 용기 있는 올바른 가르침은 틀림없이 올바른 행동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행복하고 모범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




  잠언의 지혜는 각각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 머물게 한다. 어떻게 해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는지 여러 기준과 방법을 제시해 준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발견함으로써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한다.




<진리로 더욱 풍성해지는 지혜>


잠언은 지혜로 말미암아 큰 유익을 얻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잠언 3장과 4장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교훈의 말씀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지혜로운 사람은 사랑하고, 신실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악을 멀리하고, 옳고 선한 것을 택하고, 듣고 배우기를 즐겨하고 그리고 바르고 의로운 것을 행하는 자이다.


  이러한 지혜로운 자가 얻는 유익은 무엇인가? 그것은 장수하며, 번성하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바른 판단을 가지고 있다는 평판을 얻으며, 성공하고, 건강과 활력이 있으며, 부유해지고, 명예를 얻고, 즐겁고, 평화롭고, 나아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고 말한다.




  잠언 8장과 9장에는 지혜가 인격화되어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지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지혜를 가진 자는 지식과 명철을 얻으며, 교만과 오만과 악한 행실을 미워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바른 충고와 상식을 갖추고 있으며, 바른 충고와 가르침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지혜가 주는 유익은 무엇인가? 부와 명예와 공평과 의로운 삶이요,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지속적인 가르침과 학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잠언이 말하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여덟 가지


잠언에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삶의 태도에 대해서 매우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삶에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포학한 자 - 3:31


교만한 눈, 거짓된 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 - 6:16-19


거짓 입술 - 12:22


악인의 제사 - 15:8


악인의 길 - 15:9


악한 꾀 - 15:26


교만한 자 - 16:5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자 - 17:15




돈에 대한 하나님의 충고


잠언은 돈과 부에 대한 하나님의 충고의 말씀이 많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러한 돈과 부를 어떻게 활용하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돈과 부와 재물을 어떻게 활용하며 살아가는가는 지혜에 해당된다. 여기에는 아래에 예로 든 구절만이 아니라 11:15, 20:16, 25:14, 27:13 등을 통하여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베풀며 살아가라.  11:24-25, 22:9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공급하라  11:26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17:18, 2:26-27


  뇌물을 받지 말라.  17:23


  가난한 자를 도와주라.  19:17, 21:13


  미래를 위해 저축하라.  21:20


  빚을 지지 말라.  22:7


  


잠언이 가르쳐주는 효과적인 삶의 전략


잠언은 삶의 가치와 처세술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첫째는 무엇으로 시작할 것인가의 우선순위의 문제,


  둘째는 그것을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것인가의 문제,


  마지막은 그 결과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모든 일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히 인식하고 그분을 경외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도덕적 적용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해야 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도덕적 적용만이 아니라 실천적 적용도 요구하신다. 매일 매일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과 지시를 적용하고 실천하려고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에 실제의 삶에 이러한 경건한 삶의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해 주시는가가 실제적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가르침과 배움


좋은 가르침은 좋은 배움에서 나온다. 이런 원리로 잠언은 가르치는 자들에게보다 배우는 학생들에게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잠언은 지혜를 배우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지혜를 얻는 방법에는 다른 것이 없다. 오직 열심히 배우고 익히는 슬기로운 학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학생과 어리석인 자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슬기로운 학생과 어리석은 자의 차이


지시와 책망을 주의 깊게 듣는다.  잠언 10:8, 23:12, 25:12


훈계를 사랑한다.  잠언 12:1


충고를 듣는다.  잠언 12:15, 21:11, 24:6


아버지의 훈계를 받아들인다.  잠언 13:1


생명의 길로 나간다.  잠언 10:17


존경을 받는다.  잠언 13:18


건설적인 비판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잠언 15:31-32, 29:1


가르치는 자에 대한 충고


사람들이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한다(13:4)


부드러운 말을 사용해야 한다(16:21)


적절한 때를 따라 말을 해야 한다.(15:23, 18:20)




잠언의 지혜에 대한 말씀


잠언서의 중심이 되는 말은 물론 "지혜"이다.


(1) 지혜가 젊은이를 보호한다(잠 2:8).


(2) 지혜가 젊은이를 인도한다(잠 3:5-6).


(3) 지혜가 젊은이를 원만하게 만든다(잠 4:18).




잠언의 열 두 가지 주제들


잠언은 중요한 삶의 열두 가지의 주제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1) 의인의 이름


  ①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으리라"(잠 10:7).


  ② "많은 재물보다 명예(a good name)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 22:1).




(2) 젊음과 훈계


  ①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잠 10:1잠17:21,25잠19:13).


  ②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잠 13:1).


  ③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


  ④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고 죽일 마음은 두지 말찌니라"(잠 19:18).


  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⑥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 22:15잠29:15,17).


  ⑦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찌라도 죽지 아니하리라"(잠 23:13-14).


  ⑧ 참조, 잠 23:15-25


  ⑨ 참조, 잠 30:11-14




(3) 사업에 관한 일


  ① 하나님은 부정한 저울을 미워하고 정직을 기뻐하신다(잠 11:1잠16:11잠20:10,23).


  ②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보증을 서지 말라(잠 6:1-5잠11:15잠17:18).


  ③ 빚진 자에게 지체하지 말고 아낌없이 선을 베풀어라(잠 3:27).


  ④ 하나님은 의인을 굶어 죽지 않게 하신다(잠 10:3).


  ⑤ 게으른 자는 가난하게 되고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된다(잠 10:4잠22:29).


  ⑥ 게으른 자는 고용주의 눈에 연기같고 이에 초같다(잠 10:26).


  ⑦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한다(잠 11:28).


  ⑧ 공의를 왜곡하여 뇌물을 받는 것은 옳지 못하다(잠 17:23).


  ⑨ 자기 집을 짓기 전에 먼저 사업을 일으키라(잠 24:27).


  ⑩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대저 재물은 영영히 있지 못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으랴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나니 산에서 꼴을 거둘 것이니라 어린 양의 털은 네 옷이 되며 염소는 밭을 사는 값이 되며 염소의 젖은 넉넉하여 너와 네 집 사람의 식물이 되며 네 영종의 먹을 것이 되느니라"(잠 27:23-27).




(4) 여인과 아내에 관하여


  ① 네 우물에서 물을 마셔라(잠 5:15)


  ②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잠 5:18)


  ③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코에 금고리 같다(잠 11:22).


  ④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의 소득은 바람이다(잠 11:29).


  ⑤ 어진 여인은 남편의 면류관이다. 그러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남편의 뼈를 썩게 한다(잠 12:4).


  ⑥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헌다(잠 14:119:13).


  ⑦ 아내를 얻은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다(잠 18:22).


  ⑧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잠 21:925;24).


  ⑨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잠 21:19).


  ⑩ 누가 현숙한 여인을 얻겠느냐? 이 질문에 대한 상세한 답변은 잠언서의 마지막 장(31장)에 기록되어 있다.




(5) 부도덕한 생활


  ① 부도덕은 하나님의 법을 경멸하는 것이다(잠 2:17).


  ② 그것은 사망과 음부의 길로 인도한다(잠 2:18잠7;27잠9:18).


  ③ 그것은 양심을 오염시킨다(잠 5:4).


  ④ 그것은 괴로움으로 번민케 하며 질병이 육신을 삼킬 때 부끄럽게 만든다(잠 5:11).


  ⑤ 그것은 심한 후회로 인도한다(잠 5:12-13).


  ⑥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잠 5:21).


  ⑦ 그것은 사람을 가난으로 인도한다(잠 6:26).


  ⑧ 그것은 불이 피부를 태우듯이 분명히 영혼을 불태운다(잠 6:27,32).


  ⑨ 그것은 다음과 같이 비교될 수 있다(잠 7:22-23).


    ㉠ 소가 도살장으로 가는 것 같다.


    ㉡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려 가는 것과 같다.


    ㉢ 새가 그물로 날아 들어가는 것과 같다.




(6) 나쁜 친구


  ① 그들과 사귀지 말라. 그들은 남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그 함정에 빠지는 자들이다(잠 1:10-19).


  ② 그들과 사귀지 말라. 그들은 불의의 떡을 먹으며 강포의 술을 마시는 자들이다(잠 4:17).


  ③ 그들과 사귀지 말라. 그들의 친절은 속임수이다. 그들은 그대를 앞잡이로 이용하려고 한다(잠 23:6-8).


  ④ 그들과 사귀지 말라. 사람의 진정한 성품은 그 사람이 선택하는 친구를 보면 알 수 있다(잠 27:19).




(7) 지혜


  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잠 1:7잠9:10).


  ② 그것은 인간을 영예롭게 해 준다(잠 1:9).


  ③ 그것은 부도덕함을 멀리하게 한다(잠 2:16).


  ④ 그것은 인간을 바른 길로 인도한다(잠 3:6).


  ⑤ 그것은 소생케 하고 건강케 하며 활력을 더해준다(잠 3:8).


  ⑥ 그것은-지혜롭게 십일조를 드렸을 때와 같이-밀과 보리로 곡간을 채워주고 포도주 통에 좋은 포도즙이 넘쳐 흐르게 한다(잠 3:9-10).


  ⑦ 그것은 금이나, 은이나 값진 진주보다 더 낫다.(잠 3:14잠8:11,19).


  ⑧ 그것은 장수함과 부귀와 즐거움과 평강을 가져다 준다(잠 3:16-17잠9:11).


  ⑨ 그것은 창조 때 하나님께서 쓰신 도구이다(잠 3:19).


  ⑩ 그것은 제일 중요한 것이다(잠 4:17).


  ⑪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듯이 그것을 사랑해야 한다(잠 7:4).


  ⑫ 그것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게 한다(잠 8:35).




(8) 자제


  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성을 빼앗는 것보다 낫다(잠 20:1).


  ② 자제하지 못하는 자는 때때로 자기가 끝마치지 못할 일을 시작한다(잠 25:8).


  ③ 자제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벽이 무너질 무방비 상태의 성과 같다(잠 25:28).




(9) 과음


  ① 그것은 거짓 용기를 갖게 하고 떠들게 만든다(잠 20:1).


  ② 그것은 마음을 근심과 슬픔으로 채운다(잠 23:29).


  ③ 그것은 많은 상처를 내게 하고 눈을 충혈시킨다(잠 23:29).


  ④ 그것은 뱀같이 물고 독사 같이 쏜다(잠 23:32).


  ⑤ 그것은 환각증세와 정신착란증을 일으킨다(잠 23:33).


  ⑥ 그것은 망령된 것을 말하게 한다(잠 23:33).


  ⑦ 그것은 바닥에서 흔들리는 배 위의 선원같이 비틀거리게 한다(잠 23:34).


  ⑧ 그것은 얻어 맞아도 얻어 맞은 것을 모르게 한다(잠 23:35).


  ⑨ 그것은 지도자론 하여금 그들의 임무를 망각케 하고 공의를 굽게 만들도록 한다(잠 31:5).






(10) 우정


  ① 친구는 항상 신실하고 위급할 때 도운다(잠 17:17).


  ② 친구의 통책은 원수의 입맞춤보다 낫다(잠 27:6).


  ③ 자신의 친구나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라(잠 27:10).


  ④ 친구의 권고는 즐거운 향내와 같이 아름답다(잠 27:9).


  ⑤ 우정어린 토론은 쇠가 쇠를 칠 때 불꽃이 튀는 것과 같이 친구를 자극한다(잠 27:17).


  ⑥ 친구를 얻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친절하게 행동해야 한다(잠 18:24).


  ⑦ 진정한 친구는 형제보다 더 친밀하다(잠 18:24).




(11) 말 과 혀


  1.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다(잠 10:20).


  2. 말을 삼가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잠 10:19잠11:12).


  3.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한다(잠 10:21).


  4. 위선자의 입은 그 이웃을 망하게 한다(잠 11:9).


  5.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신실한 자는 남의 비밀을 숨겨준다(잠 11:13).


  6. 어떤 자는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나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같다(잠 12:18).


  7.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는 멸망을 자초한다(잠 13:3).


  8.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한다(잠 14:25).


  9.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게 하나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케 한다(잠 15:1).


  10. 온량한 혀는 생명나무요,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한다(잠 15:4).


  11. 때에 맞는 말은 유익하다(잠 15:23).


  12.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한다(잠 15:28).


  13. 선한 말은 꿀송이 같이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된다(잠 16:24).


  14.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장이는 친한 벗을 이간시킨다(잠 16:28).


  15. 다툼의 시작은 방축에 물이 새는 것 같으므로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치라(잠 17:14).


  16. 지혜가 있는 자는 말을 아낀다(잠 17:27).


  17.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상처를 입힌다(잠 18:8).


  18.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한다(잠 18:13).


  19.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다(잠 18:21).


  20. 거짓말을 하는 자는 벌을 면치 못한다(잠 19:5).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론새긴 은쟁반에 금사과와 같다(잠 25:11).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며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는다(잠 25:15).


 길로지나가다가 자기에게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의 귀를 잡는 것과 같다(잠 26:17).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는 것과 같이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도 그친다(잠 26:20).


  타인이 자기를 칭찬하게 하고 자신의 입으로 하지 말라(잠 27:2).




(12) 여러 가지 교훈의 묶음




①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곱 가지(잠 6:16-19).


  ㉠ 교만한 눈


  ㉡ 거짓된 혀


  ㉢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


  ㉣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


  ㉤ 악에 대한 열심


  ㉥ 거짓 증거


  ㉦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것




②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네 가지(잠 30:15-16)


  ㉠ 음부


  ㉡ 아니 배지 못하는 태


  ㉢ 불모의 땅(사막)


  ㉣ 불




③ 네 가지 놀랍고 기이한 것(잠 30:18-19)


  ㉠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


  ㉡ 반석 위로 기어다니는 뱀의 자취


  ㉢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


  ㉣ 남녀 사이에서 자라나는 사랑의 자취


④ 세상이 참지 못하는 네 가지(잠 30:21-23)


  ㉠ 종이 임금된 것


  ㉡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


  ㉢ 모진 계집이 시집간 것


  ㉣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




⑤ 가장 작고도 지혜로운 것 네 가지(잠 30:24-28)


  ㉠ 개미(힘이 없는 미물이지만 겨울에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한다)


  ㉡ 사반(약한 종류지만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다)


  ㉢ 메뚜기(인도자가 없지만 떼를 지나 나아간다)


  ㉣ 도마뱀(손에 잡힐만 하지만 왕궁에도 산다)




⑥ 네 가지 위엄 있는 거물(잠 30:29-31)


  ㉠ 동물의 왕, 사자(어떤 짐승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 사냥개


  ㉢ 수염소


  ㉣ 당할 수 없는 왕




⑦ 아굴이 하나님에게 요구한 두 가지(잠 30:7-9)


  ㉠ 허탄과 거짓을 멀리하여 주시라는 것


  ㉡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며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라는 것.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




  귄위있는 말씀들


  앞에서 언급한 것 외에도 이 잠언서에는 많은 권위 있는 말씀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광풍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잠 1:24-28).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네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여호와께서는 지혜로운 땅을 세우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 그 지식으로 해양이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로 네 눈 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되며 네 목에 장식이 되리니 네가 네 길을 완연히 행하겠고 네 발이 거치지 아니하겠으며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은즉 네 잠이 달리로다 너는 창졸간의 두려움이나 악인의 멸망이 임할 때나 두려워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는 너의 의지할 자이시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잠 3:5,6,9-12,19-26).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잠 6:16-19).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태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 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잠 8:22-31).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잠 11:30).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리라"(잠 14:12,34).


  "너희 행사를 여호아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3,7,18).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대저 의인은 인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라…너는 까닭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찌니라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찌니라"(잠 24:16-17,28-29).


 "환난날에 진실치 못한 자를 의뢰하는 의뢰는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 같으니라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같고 쏘다 위에 초를 부음 같으니라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잠 25:19-22).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른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18).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잔하게도 마옵시고 부단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네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냐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 오히려 그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눈이 심히 높으며 그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 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가 있느니라"(잠 30:4-9,11-14).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치 아니하겠으며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그 자식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10-12,28-30).








잠언 요약

솔로몬이 남긴 책으로는 젊었을 때 기록된 아가서, 솔로몬이 중년이 되었을 때 지었던 잠언, 그리고 솔로몬이 타락한 이후 말년에 지은 책이 전도서이다. 이중 잠언은 솔로몬이 가장 지혜가 충만하고 지식적인 것들이 충만했을 때 지었던 책이다. 솔로몬 왕이 많은 여인으로부터 태어난 자녀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잠언 3000을 말했는데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하였다. (잠언 25장 1절)

잠언이란 히브리어로 마샬이라고 하는데 풀이하면 솔로몬의 격언, 또는 솔로몬의 금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잠언은 한마디로 말해서 지혜에 관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잠언에서는 지혜가 사람처럼 잔치를 벌이고 우리를 초대하기도 하고, 지혜가 있는 사람과 지혜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면서 설명해 준다.

잠언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의뢰하는 것, 인간의 부족함과 약함을 아는 것, 정직한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것,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는 것, 훈계와 징계받기를 즐겨하는 것, 입술의 말을 조심하는 것, 부지런한 삶의 자세를 갖는 것,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 어리석은 유혹을 물리치는 것,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을 지혜라고 말하고 있다.

잠언은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지식과 근심함을 주기 위함이며, 학식과 모략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이 잠언을 읽는다면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가야 하며, 헛된 인생 살지 않도록 해야 하며, 참되고 의미 있게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주요 내용 및 요점 정리

1

◈ 잠언의 목적과 주제

•잠언은 지혜, 명철, 공평, 슬기, 학식을 더하여 준다.

•악한 길로 가지 말 것을 충고하다.

•충고를 듣는 사람은 평안히 살게 된다.

2

◈ 지혜

•구하고 깨달으면 주께서 지혜와 명철을 주신다.

•지혜는 사람을 악에서 구할 것이며 영혼을 즐겁게 해준다.

•지혜가 있을 때 음란한 여자에게서 구함을 받는다.

3

◈ 충고와 교훈

•주의 계명과 진리를 알고 주를 인정하면 가는 길을 인도하신다.

•주의 훈계와 책망을 거부하지 말라.

•지혜는 보화보다 나으며 평안이 있다.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말고 선을 행하며 의로은 길을 걸어라.

4

◈ 부모의 훈계

•부모의 교훈을 저버리지 말고 지혜를 사랑하며 얻으려고 노력하라.

•악을 따르지 말고 의인의 길을 걸어라.

5

◈ 아내 사랑

•음행하는 여자를 가까이하지 말라.

•아내를 사랑하고 같이 즐거워하라.

6

◈ 삶의 경고와 교훈

•보증을 서지 말며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라.

•주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하지 말라.

•부모의 가르침을 버리지 말고 간음하지 않도록 하라.

7

◈ 간음

•말씀과 교훈을 지키고 살아가라.

•부도덕한 여인과 음란의 길로 가지 말라.

8

◈ 지혜

•악을 버리고 지혜와 명철을 배우라.

•훈계를 듣고 지혜를 얻으며 그 지혜에 귀를 기울이라.

9

◈ 지혜와 어리석음

•어수룩함을 버리고 지혜와 명철을 따라가라.

•지혜로운 자는 거만한 자를 꾸짖어라.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어리석은 여자는 아는 것이 없으며 수다스럽다.

10

◈ 솔로몬의 잠언

•의인의 삶을 살고 악인의 삶을 살지 말라.

•근면한 삶과 의인의 삶을 살라.

•훈계를 지키며 입을 조심하며 지혜롭게 살아라.

11

◈ 언행일치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롭게 살아라.

•너그럽고 정의롭게 살며 선하게 베풀며 살아라.

12

◈ 선과 악

•악인처럼 살지 말고 의인의 삶을 살아라.

•미련하게 살지 말고 슬기롭고 진실하게 살아라.

•게으르지 말고 근면의 삶을 살아가라.

13

◈ 지혜의 친구

•거짓을 말하지 말고 선한 말을 하며 말씀과 계명을 지키고 살아라.

•어리석고 교만하지 말며 지혜의 사람을 사귀어라.

14

◈ 지혜의 유익

•거만하지 않고 바른 길을 걸으며 미련하지 살지 말아라.

•지혜있고 슬기롭게 행동하며 선과 진리를 따라 살아라.

•주를 경외하며 성내지 않고 평안하게 살며 정의롭고 슬기롭게 살아라.

15

◈ 사랑하며 실천하며

•온화한 말을 하며 정직과 정의를 실천하라.

•밝은 얼굴로 즐겁게 살며 분내지 않고 사랑하며 살아라.

•악하며 불의를 탐하지 말고 훈계를 지혜롭게 받아라.

16

◈ 거룩한 삶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께 맡기고 살아라.

•거만하지 않고 행실을 바르게 살아라.

•남을 속이지 말고 지혜롭고 공의롭게 살아라.

•악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선하고 지혜롭게 살아가라.

17

◈ 윤리와 도덕

•화목하고 거짓없이 살며 남의 잘못됨을 기뻐하지 말라.

•뇌물을 쓰지 말고 허물을 덮어주며 미련하게 살지 말라.

•싸우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며 살라.

18

◈ 윤리와 도덕

•욕심부리지 않고 미련하지 않고 슬기롭게 살아가라.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으며 오만하지 않고 겸손히 살아가라.

•화내지 않고 다투지 말며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19

◈ 윤리와 도덕

•거짓을 말하지 말며 너그럽게 대하며 살아라.

•노하지 않고 허물을 덮어주고 살아라.

•게으르지 않고 가난한 이들을 돌봐주며 부모를 잘 섬겨라.

20

◈ 삶의 지혜

•사람끼리 다투지 말고 부지런히 인생을 살아가라.

•행실을 바르게 하고 남을 속이지 말라.

•함부로 보증서지 말고 험담하며 살지 말라.

21

◈ 격언과 지혜

•주께서 정의로운 사람을 이끄시며 악한 사람에게 벌을 내리신다.

•지혜롭게 다투지 않으며 게으르지 않고 교만하지 않게 살아야 한다.

22

◈ 훈계와 교훈

•겸손하고 슬기롭게 살며 깨끗하고 슬기롭게 살아야 한다.

•아이를 가르치고 훈계하며 주를 의뢰하며 살게 해야 한다.

•가난한 이를 도와주며 성내지 않으며 살아야 한다.

23

◈ 훈계와 교훈

•재물과 음식을 탐하지 말며 미련하지 않고 슬기롭게 살아야 한다.

•자녀들을 잘 다스리고 죄의 길로 가지 않게 해야 한다.

•부모를 섬기고 순종하며 술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

24

◈ 훈계와 교훈

•악한 사람과 함께 하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의 교훈을 들어야 한다.

•악한 이는 멸망할 것이니 원수가 쓰러질 때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

•옳은 재판을 하며 가정을 바로 세우고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

25

◈ 솔로몬의 교훈

•악을 행하지 않으며 높은 자리 앉으려 하지 말라.

•이웃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며 분노하지 말라.

•타인에게 상처 주지 말고 여자와 관계를 원만하게 하라.

26

◈ 윤리와 도덕

•어리석고 미련한 말을 하지 말고 남을 함부로 저주하지 말라.

•게으른 사람처럼 살지 말고 함부로 말하지 말며 다투지 말라.

•남을 헐뜯거나 미워하지 말고 거짓을 말하지 말라.

27

◈ 윤리와 도덕

•자랑하지 말고 이웃과 친구에게 잘 대해주라.

•칭찬을 잘 해주고 윗사람을 잘 영접하라.

28

◈ 율법과 교훈

•공의를 깨닫고 율법을 들으며 지키고 살아야 한다.

•죄를 자복하고 그릇된 길을 가지 말며 헛된 꿈을 꾸지 말라.

•부유하기를 바라지 말고 욕심을 버리고 주를 의지하며 살아라.

29

◈ 도덕과 윤리

•지혜와 의로 행하며 아첨하지 말고 거만하지 말라.

•미련하게 말을 앞서지 말며 오만하며 화를 내지 말라.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주를 의지하며 불의를 행하지 말라.

30

◈ 아굴의 잠언

•순결한 주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 말씀에 다른 것을 더하지 말라.

•거짓을 멀리하고 필요한 양식을 때에 따라 주옵소서.

•부모를 멸시하거나 저주하지 말고 순종하고 살아라.

•세상에는 기이한일, 감당못할 일, 지혜로운 일, 지혜로운 일이 있다.

31

◈ 훈계와 잠언

•르무엘 왕에게 어머니가 전하는 훈계의 말씀.

•현숙하고 유능하며 부지런한 아내에 대한 칭찬과 조언.





2025 새벽묵상 시편

7월 16일(수) 시편 144-15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새 노래(149:1)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찌어다.
Praise the LORD. Sing to the LORD a new song, his praise in the assembly of the saints 


새 노래(쉬르 7892 하다쉬 2319) שִׁיר חָדָשׁ 


󰃨 새 노래 - 본 시편의 전반적인 분위기로 보아 그 저작 시기는 포로 귀환 이후 성전을 재건하고 헌당(獻堂)한 시기 정도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이 '새 노래'란 새로운 시대의 소망과 기쁨을 담은 노래를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 성도(*, 하시딤) - 이를 마카비 시대 역사속에 나타나는 하시디안과 동일시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마카비전서 2:42). 여기서는 단지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들'을 의미할 뿐이다. 5, 9절에서 연거푸 '하시딤'이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본 시편의 특징적 용어인 것 같다(Perowne).

새 노래를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 앞에 드리는 찬송

벤자민 쉬몰크, 그는 헝가리의 신교도 목사님이었습니다. 어느 날 외출했다 돌아오니 교회당에 누군가가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어린 자녀들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조용히 하나님을 향해 찬송했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시고 살든지 죽든지 주 뜻만 따르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작사 : 벤자민 슈몰크(Benjamin Schmolk, 1672-1737)
작곡 : 칼 마리아 본 웨버(Carl Maria von Weber, 1786-1826)

벤자민 슈몰크 목사.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독일 슈레지아 출생.
1702년 프리덴 교회 부목사.
1714년 루터파 교회의 감독이 되었으며 1,000여편의 찬송시를 지었다.

벤자민 슈몰크는 라이프치히(Leipzig) 대학 시절에 시를 지어 그 수입으로 학비를 충당한 시인.
졸업 후 부친 Martin Schmolck의 목회를 조력하다가 목사가 된다.

유럽에 30년 전쟁이 있었다(1618~1648)
이 전쟁은 유럽 대륙 거의 전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

전쟁 발발의 원인

1618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의 자격으로 자신의 영토 내에서 가톨릭 절대 신앙을 강요하려고 하자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반란으로 발생했다.
이 전쟁을 시작으로 유럽 대륙의 나라들이 영토 확장을 이루기 위해서 아전 투구 현상의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 
전체적으로는 가톨릭과 합스부르크 왕가가 대표하는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과 지금의 오스트리아를 거점으로 한 합스부르그 
王家가 주도한 神聖(신성)로마제국(독일 여러 영주국의 연합체)과 독일의 舊敎徒 편)
Vs 반(反)가톨릭 세력의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등 新敎 국가는 독일의 신교도 편에 의지한 프로테스탄트 도시들 및 
공화국과의 전쟁

⇨ 독일의 수많은 公國과 영주 국가들은 신교, 구교편으로 갈렸다.

  프랑스는 舊敎 국가였는데, 스페인과 神聖로마제국을 경쟁자로

                                      삼고 있어서 新敎 편을 들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때에 프랑스는 구교의 편을 들어 주었다.)

       이 전쟁의 전반부에서는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합스부르그)이,

                    중반부에선 스웨덴이,

                    종반부에선 프랑스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조약(The peace of Westfalen)으로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전쟁을 종결할 때

                      전체적으로는 新敎가 유리한 결과를 얻었다.

    이 전쟁으로 유럽의 지도가 완전히 바뀌었고,

    당시 독일 1,600만 인구가 600만으로 줄었고,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게 되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신.구교의 대립은 여전히 앙금으로 남아 있었다.

 

 나중에 슈몰크 목사가 시무하던 실레지아(Silesia)라는 곳이 있는데

      (당시에는 독일(독일명은: 슈바츠(Schweidnitz), 지금은 폴란드)

          이곳이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 중의 한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전쟁으로 인해 모두 로마 카톨릭으로 돌아가 버렸고

            그 지역에 단 한 교회만 루터교회로 허용이 되었다.

  이 교회는 통나무 움막에 흙벽으로 지은 건물이었고 종탑이나 종도 없었다.

    이 교회가 바로 슈몰크 목사가 시무한 유일한 개신교 교회

             ?성 삼위교회?였다.(조사(助事) 두 명과 함께)

    베스트팔렌조약으로 그 지역에서는 도심지에 개신교회를 세울 수 없었고,

                       성 밖에서만 허용이 되었다.

     또 로마 카톨릭교회 신부의 허락이 없이는 개신교(루터교) 목사가

      그 지방의 환자를 심방할 수도 없었고 장례식도 치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런 악 조건 속에서도 슈몰크 목사는 36개의 마을을 가톨릭 신부들의 눈치를 보면서 심방을 하면서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방항하던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했다.
그는 30대 초반부터 중풍에 백내장까지 오는 시련을 겪었다.
1730 어느 주일에는 과로로 쓰러졌고 중풍 병으로 한 동안 누워있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회복된 후에도 끝내 오른손과 발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그 후에도 그는 두 번이나 중풍 병이 재발하였고 백내장으로도 고생하였다.
성공적인 수술로 잠시 병세가 나아지는 듯 했지만 결국은 실명을 하고 와병 중에 있었다.
그는 1737년 2월 12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704년(32세 되던 해) 어느 날,
슈몰크 목사 부부가 먼 지역의 심방을 마치고 돌아와 집이 불타고 있었다.
타다 남은 것들이 마저 타느라고 여기저기에서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슈몰크 목사는 두 아들을 찾아 보았지만 이미 두 아들은 서로 부둥켜 앉은 채 불에 타서 죽은 상태였다.
슈몰크 목사 부부는 새까맣게 탄 두 형제의 시체를 놓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다.
그 내용을 이후에 시로 옮겨 놓은 것이 바로 이 찬송시이다
그는 1,000 편 정도의 시를 남겼다.
 현 우리 찬송가에 333장(충성하라 죽도록)이 실려 있다.
이 곡은 슈몰크 목사가 소천하신 후 100년이 넘은 후 발견되어 
Holbrook, Joseph Perry "웨버의 ?마탄(魔彈)의 사수(射手)"
(Der Freischütz)'의 서곡(序曲 overture)(1821) 호른(도 Horn) 연주 부분에서 가사를 붙였다. 

작곡자 : Carl Maria von Weber (1786-1826)

베버는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음악가이자, 독일 국민 오페라를 수립한 선구자이다.
그가 이 가사를 위해서 직접 작곡하지는 않았다.

편곡자 : Holbrook, Joseph Perry(1822~1888)

홀스 부룩의 다른 곡들

                    74(오 만세 반석이신),    82(성부의 어린양이),

                    395(자비하신 예수여),   549(내 주여 뜻대로)







탑레이디(Toplady)라고 마흔두 살에 죽은 청년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몸에 무수한 질병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를 보며 사람들이 움직이는 종합 병원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오해와 질시 속에 죽으면서도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습니다.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살아 생전 숨쉬고 죽어 세상 떠나서 거룩하신 주 앞에 끝날 심판 당할 때 만세 반석 열리고 내가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찬송으로 우리 인생을 인도해 주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찬송을 갖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바라본 자는 하나님 앞에 찬송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만세반석(萬歲磐石) 열리니

만세반석(萬歲磐石) 히브리어 מָעוֹז צוּר 마오즈(피난처) 추르(바위) 영어 Rock of Ages 

시편 62:6-8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작사·작곡자 및 배경 이야기

  • 작사 : 아우거스터스 탑레이디(Augustus M. Toplady, 1740–1778)
  • 작곡 : 토마스 헤이스팅스(Thomas Hastings, 1784–1872)

이 찬송은 18세기 영국 성공회 복음주의 목사 토플레이에 의해 쓰인 시로,
그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이 한 곡으로 기독교 복음주의 찬송사의 거장이 되었습니다.

“Rock of Ages, cleft for me”는 어느 날 폭풍우를 피하여 바위틈에 숨던 중,
자신을 죄에서 피할 수 있는 바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임을 깊이 깨달으며 써내려간 고백 시입니다.
“만세반석(萬世磐石)”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하나님을,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단어로,
그리스도 안에 피난처와 구원이 있음을 상징합니다.

✦ 1절 – 십자가 보혈의 피로 정결하게

“그 군병 중 하나가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한복음 19:34)
“우리를 씻기시되 그 피로 하셨도다” (요한계시록 1:5)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그 구속의 능력을 말합니다.
‘만세반석 열리니’는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열린 사건을 상징하며,
그 안에 피신할 때 우리는 정결함을 입습니다.

✦ 2절 – 나의 공로 아닌 은혜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 2:8)

‘내가 공을 세우나’는 인간이 아무리 선행을 해도 구속에 이를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겸손한 고백입니다.
‘예수 홀로 속하네’는 그리스도 중심, 십자가 중심 복음의 핵심 선언입니다. 

✦ 3절 – 빈손으로 나아오는 믿음

“너희가 값을 주고 산 것이 아니니 오직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라” (로마서 3:24)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태복음 4:17)

우리는 그 어떤 의도 없이, 오직 믿음으로 십자가를 붙드는 자들입니다.
‘빈손 들고 앞에 가’는 믿음의 겸손함, ‘생명샘에 나가니’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샘물을 상징합니다.
그분만이 나를 씻으실 수 있습니다. 

✦ 4절 – 심판의 날, 내가 숨을 곳은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1)

죽음 이후,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 날에도 내가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는 열린 만세반석,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숨는 것뿐입니다.
이 마지막 절은 신자의 구원 확신을 담은 영원한 고백이자 찬양입니다.

 4. 삶의 적용과 묵상

이 찬송은 죄책감으로 눌려 있는 이들에게 위로를,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때 다시 복음의 중심으로 이끄는 힘을 줍니다.

  • 매주 성찬예식 전후 묵상 찬송으로
  • 죄사함을 주제로 한 말씀 설교 후 응답 찬양으로
  • 장례예배, 위로예배 시 ‘구원의 확신’ 찬송으로
  • 전도 집회, 복음 제시 모임에서 십자가 중심 메시지로

이 찬송은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모든 성도가 함께 고백할 수 있는 복음의 요약 찬송입니다.

관련 성경구절 정리

  • 요한복음 19:34 – 창에 찔려 흘린 피와 물
  • 요한계시록 1:5 – 그 피로 우리 죄에서 해방하신
  • 에베소서 2:8–9 – 은혜로 구원받음
  • 로마서 3:24 – 값없이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 히브리서 9:27 – 죽음 후의 심판
  • 로마서 8:1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정죄 없음








시편 40편의 '새노래': 히브리어 원어와 성경학적 의미

1. 히브리어 원어 분석

시편 40편 3절(개정개역)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이 구절에서 '새 노래'는 히브리어로 'שִׁיר חָדָשׁ' (shîr chādāsh)입니다. 이 용어를 개별적으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שִׁיר (shîr): '노래', '찬송'을 의미합니다. 이는 종종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관련된 문맥에서 사용됩니다.
  • חָדָשׁ (chādāsh): '새로운', '참신한'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로, 시간적 또는 질적 새로움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새노래'는 문자적으로 "새롭고 참신한 찬송"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시간적으로 새로운 노래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새로운 구원 행위를 기념하고 찬양하기 위해 드려지는 특별한 노래를 지칭합니다.

2. '새노래'의 성경학적 의미

'새노래'는 성경에서 단순한 찬송 이상으로 중요한 신학적 함의를 지닙니다. 이 개념은 구약과 신약 전반에 걸쳐 나타나며,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사역, 통치, 그리고 백성의 회복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찬양을 강조합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2.1. 구약에서의 '새노래'

구약에서 '새노래'는 여러 군데에서 나타나며, 주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구원이나 놀라운 일을 행하신 후에 백성들이 부르는 찬양으로 묘사됩니다. 대표적인 구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시편 96: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 이사야 42:10: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이 구절들에서 '새노래'는 하나님의 통치와 구속 활동을 기념하는 찬양입니다. 이 노래는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들까지도 구원하시는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역할을 합니다.

2.2. 신약에서의 '새노래'

신약에서도 '새노래'는 종종 언급되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찬양하는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 요한계시록 5: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 요한계시록 14: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요한계시록에서의 '새노래'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룬 구속 사역을 찬양하는 노래로, 천상의 존재들이 부르는 찬송을 묘사합니다. 이는 궁극적인 구원의 성취와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선언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2.3. 예배와 공동체적 의미

'새노래'는 단순히 개인적인 찬양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적 예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성경에서 '새노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부르며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함을 선포하는 공적인 찬양으로 나타납니다.

3. 신학적 해석

'새노래'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의미를 함축합니다:

  1.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와 행위에 대한 응답
    '새노래'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새로운 구원 사역이나 놀라운 기적을 이루신 후에 드리는 응답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단순한 감사의 표현을 넘어,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을 선포하는 역할을 합니다.
  2. 미래의 구원에 대한 소망
    '새노래'는 종종 현재의 구원뿐 아니라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기대하는 희망을 표현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를 새롭게 하시고, 모든 피조물이 그분의 구원과 통치를 경험할 날을 바라보는 찬양입니다.
  3. 모든 민족과 열방을 향한 초대
    '새노래'는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모든 민족과 열방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초대합니다. 이사야와 시편에서는 온 땅과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노래할 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4. 천상적 예배의 예표
    요한계시록에서의 '새노래'는 천상에서 드려지는 예배의 모습으로, 모든 성도가 하나님과 어린 양을 찬양하는 영원한 예배를 예표합니다.

4. 현대적 적용

오늘날 교회에서 '새노래'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체험한 신자들이 새롭게 작곡하여 부르는 찬송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는 단순히 음악적 새로움을 넘어,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행하시는 구원 사역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삶을 상징합니다.

5. 결론

'새노래'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 개념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과 창조의 역사를 기념하고 찬양하는 특별한 방식입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신뢰와 소망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노래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핵심으로서, 모든 성도들이 함께 부르는 찬양의 중요한 부분을 이룹니다.






본문 해석 및 적용

시편 96편은 온 세상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부르는 찬양시입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는 말씀은 단지 새로운 멜로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경험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기억하고 노래하라는 초대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시며, 그 찬양은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알고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이 시편은 찬양이 개인적 감정의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 가운데에” 선포되어야 할 공적인 행위임을 강조합니다. 찬양은 전도이기도 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가장 아름다운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일 때, 그분의 영광은 더욱 드러나고, 우리의 마음도 그분 안에서 높아집니다.

케빈 드영은 말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단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찬양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다시 하나님의 형상 안으로 회복시키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감사가 넘칠 때 찬양이 흐르고, 그 찬양 속에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루의 시작을 찬양으로 열어보시길 바랍니다. 힘들고 지친 삶의 순간에도, 찬양과 감사는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끌고, 그 이름을 높이는 특권을 누리게 합니다. 온 땅이 주님을 예배하듯, 우리도 오늘 주님의 영광을 노래합시다.




λατρεύω 스트롱번호3000

1. 섬기다.  2. 예배하다
발음 [ latrĕuō ]

어원
미래 λατρεύσω, 제1부정과거 ἐλά- τρευσα, λάτρις ‘고용된 하인’에서 유래
  • 1.  섬기다, 마4:10, 눅4:8, 행7:7, 롬1:25.
  • 2. 예배하다, 빌3:3, 히9:9, 10:2.
  • 관련 성경  /  섬기다(마4:10, 행7:7, 딤후1:3), 봉사하다 (빌3:3), 받들다(행26:7).

λατρεία, ας, ἡ 스트롱번호2999

1. 섬김.   2. 예배.  3. 요 16:2
발음 [ latrĕia ]
어원  /  3000에서 유래

  • 1.  섬김, 예배, 요16:2, 롬9:4, 12:1, 히9:6.
  • 관련 성경
    섬기는 일, 예식(요16:2, 히9:6), 예배(롬9:4, 12:1), 섬기는 예법(히9:1).


노벨상 제도의 유래

노벨상 제도

1833년 스웨덴에서 노벨이라는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화학자요 발명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게 됩니다. 33세에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조간신문에 난 가사를 보고 노벨은 깜짝 놀랐습니다. 기사 내용인즉슨 알프레드 노벨이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기자가 동명이인(同名異人)을 잘못 알고 "노벨이 죽었다"하니까 그 노벨인 줄 알고 당장 '노벨 사망하다'하고 기사를 실었던 것입니다. 버젓이 살아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노벨한테는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이너마이트의 왕 죽다,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 죽다'라고 되어있는 기사내용이었습니다. 그 기사를 보는 순간 노벨은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내가 살아있기에 망정이지 정말로 죽는다면 이 기사가 사실이 되지 않겠는가, 오늘이라도 내가 죽으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노벨은 마음속으로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으로 모은 전 재산을 이제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자기 것을 다 내놓고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공헌한 사람에게 그것을 나누어주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제도가 바로 노벨상 제도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세상을 떠난다면 사람들은 무엇으로 결론을 맺으며, 어떻게 평가될 것 같습니까? 또 주님은 여러분을 좌측과 우측, 알곡과 쭉정이, 양과 염소 중 어느 쪽으로 분류 심판하실까요?

알프레드 노벨(1833. 10. 21- 1896. 12. 10)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공학자 집안에 태어났다. 그는 화학자, 공학자, 발명가였다. 
1894년 노벨은 보포스 철강 공장을 인수하여 주요 무기 제조업체로 만들었다. 
노벨은 또한 발리스타이트를 발명했다. 
이 발명은 많은 무연 군사용 폭발물의 전신이었으며, 특히 영국 무연 화약인 코다이트의 전신이었다. 
그의 특허 주장으로 인해 노벨은 결국 코다이트에 대한 특허 침해 소송에 휘말렸다. 
노벨은 평생 동안 부를 축적했으며, 그의 재산 대부분은 355개의 발명품에서 나왔으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다이너마이트이다.

1888년에 노벨이 프랑스 신문에서 "죽음의 상인은 죽었다"라는 제목의 자신의 부고를 읽고 놀랐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사망한 사람은 알프레드의 형인 루드비그 노벨이었고, 부고는 8년 전에 잘못 나온 것이었다. 
이 기사는 노벨을 당황하게 했고, 그가 어떻게 기억될지에 대해 걱정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그는 유언을 바꾸도록 영감을 받았다.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를 확인할 수 없었고 일부는 이 이야기를 신화로 치부한다. 

1896년 12월 10일, 알프레드 노벨은 이탈리아 산레모의 별장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향년 63세였다.[17]




7월 15일(화) 시편 138-14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의 책(139:16)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your eyes saw my unformed body. All the days ordained for me were written in your book before one of them came to be. 


현대인의 세 가지 정신적 죄악
- 인도의 케리 여사(교육자)
- 안병욱교수 좌우명 365일 p. 121

1. 모르면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 죄
2.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죄
3. 할 수 있으면서도 하려고 하지 않는 죄

다니엘 7: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기념책(말라기 3: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세페르 지카론(세펠 5612 지카론 2146)  סֵפֶר זִכָּרֹון 


* 2146. זִכְרוֹן 스트롱번호 2146

1. 기억.   2. 기념물.  3. 축하
발음 [ zikrôwn ]

어원  /  2142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4회 사용
  •  1.  명사, 남성 기억, 회상, 출12:14, 28:12, 39:7, 수4:7, 전1:11, 2:16
  •  2.  명사, 남성 기념물, 기념비, 출17:14, 에6:1, 말3:16.
  •  3.  명사, 남성 축하, 찬양, 레23:24.
  •  4.  명사, 남성 격언, 욥13:12.
  • 관련 성경
    ☞기념(출28:12, 민31:54, 말3:16), 표(출13:9), 기념물(민16:40), 기억되는 바(느2:20), 일기(에6:1), 격언(욥13:12), 기념표(사57:8). [동] 기념하다(출12:14, 레23:24, 슥6:14), 생각하다(민5:15,18), 기억하다(민10:10, 전1:11).

위의 13-15절에서 하나님을 대적 하는 자들의 그릇된 주장을 보았다. 
거기에 반대 되는 진실한 신자들의 주장을, 선지자 말라기가 여기에 소개한다. 
이들의 주장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자세히 말하지 않고, 다만 "피차에 말하매"- 라고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담화 내용이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들의 주장(14,15절)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시어 상선벌악하신다 (18절)는 담화일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들의 담화를 들으시고 그것을 "기념책"에 기록 하셨다고 한다. 
그가이렇게 기록하신 목적은, 그들이 믿는대로 장차 갚아주시려는 것이다. "돌아와서" -라는 말은, "또 한번"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또 한번 깨달을 것은, 하나님이 의인을 구원하시고 악인을 벌하시는 사실이다.


생명책(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시편 69: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세페르 하임(5612. 2416) 

빌립보서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조에 비브리오스(2222. 976) 

요한계시록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호 비브리오스 호 조에(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 '이기는' 것에 대해서는 사데 교회의 경우 다른 소아시아의 교회와는 달리 외적 핍박이나 특별한 이단 그리고 신비주의가 언급되지 않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문맥과 사데 교회가 처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세상의 부패나 타협, 안일함에서 승리하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한편 승리자에게 주어질 첫번째 약속은 '흰 옷을 입는다'는 것이다. '흰 옷을 입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희게 되었으며(7:14)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과의, 영광을 닮아(18절; 6:11; 7:9,13; 19:14) 하나님 나라에서의 궁극적인 승리를 약속받음을 시사한다(4절 주석 참조, Ladd,Johnson).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 '생명책'은 신,구약 성경에서 자주 언급된다(13:8; 17:8; 20:12,15; 21:27; 출32:32; 시69:28; 눅10:20; 빌4:3).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시민권을 소유한 자들을 의미하였으며(출32:32,33), 신약성경에서는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구별하는 의미로 쓰여 그리스도의 피로 의로워진 자들은 영생을 소유하고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13:8; 17:8; 20:12,15; 21:27; 눅10:20; 빌4:3, Rosh). 그리스도께서 승리자에게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신 것은 승리자를 생명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결코 분리할 수 없으며(롬8:38,39)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께 의존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시민권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시사한다(Johnson, Beasley - Murray).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 본문은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세번째 약속으로 마10:32을 반영한다(막8:38; 눅9:26; 12:8). 이것은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공적(公的)으로 시인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시인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몰로게소'(*)는 법정에서 증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자신을 의지하여 승리한 자들의 이름을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증언하심으로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임을 확인하실 것을 시사한다.



4. [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5. [요한계시록 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6. [요한계시록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비브리온. 975)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7.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조에. 2222)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8.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행위책(요한계시록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책 

βιβλί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975

1. 책.  2. 율법의 두루마리.  3. 예언의 두루마리
발음  [ bibliŏn 
관련 성경  /  증서(마 19:7, 막 10:4), 글(눅 4:17), 책(눅 4: 20, 갈 3:10, 딤후 4:13), 두루마리(계 6:14).


에스겔 36:19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열방에 헤쳤더니




주의 책

시편 56: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시편 139:16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출애굽기 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


󰃨 합의하시면... 사하시옵소서 - 여기서 '합의하시면'이란 말이 원문상에는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이 부분에 해당하는 원어 '임티사'(* - )는 '만약(임) 용서하십시요(티사)'이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는 '원하시면 용서하십시오' 혹은 '가능하면 용서하십시오'로 되어 있다(If you will, forgive). 따라서 '용서하실 수 있거든... 용서하소서' 혹은 '가능하면... 용서하소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준다. 곧 (1) 하나님께서는 능히 죄를 사해 주실 수 있는 권능자이시다 (2) 그러나 죄를 사해 주고 안 사해 주고는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에 달려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죄를 자복하기만 하면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시니(사 1:18, 19), 우리는 이 약속에 의지하여 그분께 죄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이와 비슷한 기도를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if is possible;가능하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 주의 기록하신 책 - 이 말이 성경 다른 곳에서는 '생명책'으로도 표현되었다(시 56:8; 69:28; 139:16; 단 12:1; 빌 4:3; 계 3:5; 13:8; 17:8; 20:12). 이것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 준다. 시민 명부에 자신의 이름이 등재된 자들만이 그 지방의 주민 또는 그 나라의 국민으로 인정되며 아울러 시민권이 보장되었던 당시의 풍습에서 따온 이 '생명책'이라는 말은 신약에서는 보다 영적인 의미를 지닌 개념으로 나타난다(빌 4:3; 계 3:5). 곧 이 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 모세의 이 기도는 신약 시대 자기 동족 유대인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던 바울의 기도와 유사하다(롬 9:3). 책임을 회피했던 아론과 달리 모세는 이처럼 자기 민족을 위해 생명까지 내놓을 만큼 투철한 책임 의식과 동포를 사랑하는 정신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Bengel). 실로 모세나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천국의 기쁨과 지옥의 고통을 잘 아는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적인 생명까지 걸고서 그토록 간절히 중보 기도 드리는 이유는 죄중에 죽어갈 저 무지하고 불쌍한 뭇 영혼들에 대한 '사랑'때문이었다. 즉 불쌍한 영혼들에 대한 불타는 사랑이 지옥의 그 고통스런 불꽃(눅 16:24)까지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랑의 힘은 크고 위대하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그 치욕스런 십자가를 흔쾌히 지신 것도 '오직 사랑'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저 죽어가는 뭇 영혼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책임이 있는 우리들도 이같은 사랑의 마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고전 4:1, 2).





주의 책(5612) 세페르(çêpher)   סֵפֶר 스트롱번호 5612

1. 집필.   2. 글을 읽거나 쓸 줄 아는 것.  3. 학문
발음    [ çêpher ] 
어원  / 어미활용 סִפְרִי, 복수 סְפָרִים, 복수 연계형 סִפְרֵי, 560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85회 사용
관련 성경  /  책(출32:32, 신28:58, 시56:8, 렘36:13), 두루마리(민5:23), 증서(신24:1, 렘32:10,44),편지(삼하11:14, 왕상21:8, 에9:30), 역대지략(왕상14:19, 왕하8:23, 느12:23), 글(왕하5:6, 렘29:29, 나1 : 1), 조서(에1:22, 3:13, 8:10), 일기(에2:23, 6:1, 10:2), 학문(단1:4,17). [동] 기록하다(삼상10:25, 느7:5).

  • 내 형질(形質)이 이루기 전에(골렘. 1564) 
    - 영역본들 중 KJV는 '내 형질이 불완전할 때'(yet being unperfect)로, NIV는 '채 형성되지 않은 나의 몸'(my unformed body)으로 번역하고 있다. 
    '골렘'은 이곳에서만 나오는 용어로 정확한 의미를 규정하기는 어려우나 왕하 2:8에서 '돌돌 말린 망토'를 가리킬 때 그 동사형이 사용되고 있어서 의미 추론을 가능케한다. 
    이러한 용례와 본 문맥에서 '골렘'을 통해 어떤 존재를 말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종합할 때 여기서 '골렘'은 아직 미완성 상태로 그 모양을 동그랗게 유지한 채 어머니 뱃속에서 출산을 기다리고 있는 '태아'(보통 임신 8주까지의 아이)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하겠다. 
    인간의 눈으로는 그 어떤 형태나 모습을 식별하기 어려운 상태인 태아의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형태나 모습을 아셨다고 말함으로써 시편 기자는 인간 생명의 시작 때부터 피조물인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을 다시 한번 찬양하고 있다. 

    גֹּלֶם 스트롱번호1564
    1.

    포장된 것

    2.

    불완전한 것

    3.

    시139:16.

    발음 [ gôlem ]
    어원
    1563에서 유래
    구약 성경
    1회 사용
    • 1.
      명사, 남성 포장된 것, 불완전한 것, 시139:16.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시139:16).
    겉옷을 말아(1563) 열왕기하 2:8

    우리말성경,8 엘리야가 자기 겉옷을 둘둘 말아 강물을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강물이 양 쪽으로 갈라졌고 그들 두 사람은 마른 땅을 밟고 건너가게 됐습니다. 

    󰃨 겉옷을 취하여 - '겉옷'은 히브리어로 '에데르'(*)로서 소매없는 외투 또는 양가죽으로 되어 어깨를 감싸는 망토를 가리킨다(Pulpit Commentary). 70인역(LXX)에는 '톤 멜로텐'(*)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양가죽'을 의미한다. 한편 모세의 지팡이가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권위의 상징인 것과 비교해서 여기에 나타난 엘리야의 겉옷은 선지자의 직분을 상징한다. 그리고 엘리야가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가 일하는 곳에다 던진 일(왕상 19:19)이 있는데 이는 엘리야가 엘리사를 선택한다는 상징적 의미와 함께 선지자직을 위임한다는 의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무리들 앞에서 엘리야의 겉옷을 보인 것은 엘리사가 그의 후계자임을 명백히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외투를 말면 모양이 어느 정도 지팡이와 같이 되었을 것이다.

    󰃨 물을 치매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 이 사건은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가른 사건(출 14:16,21)과 여호수아가 요단 강을 가른 사건(수3:13)에 상응한다. 또 이것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가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처럼 스승과 제자의 관계, 혹은 지도자 위임의 관계인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본 사건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여호와의 권능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한 이적이다. 왜냐하면 '권능'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기 때문이다(시 62:11). 따라서 겉옷을 취하는 선지자의 상징적 행위와 이 이적의 사건은 이것을 지켜보는 생도들에게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그분의 목적을 알게 했을 것이다. 한편 '육지'는 히브리어로 '하라바'(*)로서 '마른 땅'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에 따라 공동 번역과 영역본들에서는 모두 '마른 땅'(dry ground)이라고 번역했으며 70인역(LXX)도 이와 비슷하게 '에레모스'(*) 즉 '사막', '광야'란 의미로 옮겼다.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와 요단 강을 건널때 '마른 땅'(출 14:21;수 3:17)이라고 말했던 그 표현으로서 성경에서는 드물게 사용된다. 이처럼 하나님은 강물과 바닷물을 갈라 놓을 수 있는 분일 뿐만 아니라 갈라서 드러난 땅을 마르게도 하셔서 백성들의 불편함을 알고 조처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다. 한편 이 두 선지자가 요단 강을 건너 당도한 곳은 모압 땅이었는데 이곳이 바로 모세가 죽음을 맞이했던 곳이다. 신 34:6을 보면 "오늘까지 이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묘가 없는 엘리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즉, 17절에서 무리들이 엘리야의 시체를 찾았으나 찾지 못한 사건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엘리야를 에녹과 연관시키려고 하지만 오히려 모세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무덤의 위치에 대해 논란을 벌이고 있는 것은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두 기사 뿐이기 때문이다.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알 시프레카 쿨람 이카테부 야밈 유차루웰로 에하드 바헴) 
    - 직역하면 '명령은 되었지만 아직 오지 않은 날들 모두가 당신의 책에 기록되었다'이다. 
    여기서 '책'이란 원래 건축가가 그의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그 작업의 방향과 계획 따위를 그려놓은 책을 말하지만, '그의 책' 곧 하나님의 책이라고 한 사실과 문맥을 고려할 때 한 생명이 시작되어서 자라갈 모든 과정을 기록한 책이라고 보면 되겠다. 
    또한 '날들'이란 한사람, 곧 '시편 기자의 전 인생 기간'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기자의 모든 형질, 형태가 아직 발달되기도 전 아직 태아 상태에 있었을 때 따라서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에 관한 모든 것이 결정되지도 않았던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셔서 그의 형질과 형태에 관한 것의 수명, 그의 인생에 관한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는 뜻이다.





    명책과 어린 양의 생명책은 어떻게 다른가요?신약성경에는 “생명책”에 대한 여덟 개의 참조 구절이 있고, 그 중 두 개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생명책을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덟 개 중 일곱 개의 참조 구절은 요한계시록에 들어 있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고,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기와 함께 일한 사람들을 일컬어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적혀 있다고 말했습니다 (빌립보서 4:3). 여기서 다시 생명책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얻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요한계시록 3:5도 주를 믿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생명책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적 삶의 시험을 이겨낸 사람들이며, 구원의 진실성을 증명한 사람들입니다. 이 구절은 또한 생명책에 이름이 적히면, 예수님이 결코 그 이름을 지우시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다시 한 번 영원한 보장에 대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이 부분에서 교회를 향해 말씀하고 계신 우리 주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자기 사람들을 시인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와 반대로 요한계시록 20:15은 생명책에 이름이 적히지 않은 사람들의 운명, 즉 영원한 불못에 대해서도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 13:8과 21:27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 받은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들어 있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당신의 희생을 통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생명책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들이 바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자들이며 (요한계시록 21:10),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 영원히 거하게 될 자들입니다. 생명책이 어린 양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므로, 생명책과 어린 양의 생명책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책과 어린 양의 생명책은 어떻게 다른가요?

    신약성경에는 “생명책”에 대한 여덟 개의 참조 구절이 있고, 그 중 두 개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생명책을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덟 개 중 일곱 개의 참조 구절은 요한계시록에 들어 있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고,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기와 함께 일한 사람들을 일컬어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적혀 있다고 말했습니다 (빌립보서 4:3). 여기서 다시 생명책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얻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요한계시록 3:5도 주를 믿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생명책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적 삶의 시험을 이겨낸 사람들이며, 구원의 진실성을 증명한 사람들입니다. 이 구절은 또한 생명책에 이름이 적히면, 예수님이 결코 그 이름을 지우시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다시 한 번 영원한 보장에 대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이 부분에서 교회를 향해 말씀하고 계신 우리 주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자기 사람들을 시인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와 반대로 요한계시록 20:15은 생명책에 이름이 적히지 않은 사람들의 운명, 즉 영원한 불못에 대해서도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 13:8과 21:27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 받은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들어 있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당신의 희생을 통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생명책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들이 바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자들이며 (요한계시록 21:10),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 영원히 거하게 될 자들입니다. 생명책이 어린 양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므로, 생명책과 어린 양의 생명책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의 기록하신 책

     1. 주의 기록하신 책《내 책》은~

     ○생명록(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 계3:5 / 계20:12 / 출32:32

    2. 성경(*신약성서+구약성서)

    ○책들(십계, 율법책, 신구약 성경, 여호와의 책, 복음의 말씀),

    3. 기념책/ 주의 책

    => 말라기 3:16

    말라기 3:16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시편 56: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이렇게...

    '생명책, 책들, 기념책'은 구약 끝장 부분 및 신약 끝장 부분에 

    그 명칭(*책 제목)이 적혀 있다.

    - 모세의 책 또는 《모세의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에는 최초의 십계명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에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라는 책들이 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까지 모아둔 성경을 《여호와의 책》이라 표현한다. 

     그러므로 이런 구약들은 아직 《책들》이란 것의 완성본은 아닌 것이다. 계시록에서는 이 구약과 신약 성경을 《책들》이라 표현하였다.

    _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신 것과 각 성도와 교회들에 보낸 서신서 등이 신약인데... 《복음의 말씀》이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사도행전 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

    ​​

    이런 줄기의 책들이 다 《책들》에 포함되는 것이고, 이것은 인류의 끝에 창조주 및 심판주 하나님께서 각 사람들(*순종치 아니한 자들)을

    처벌할 때에(*크고 흰 보좌 심판대) 심판의 근거가 될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천(*그리스도의 것이라 이름표가 찍힌 사람들)들에게 의미가 있는 책이 두 개의 책이다.

    《생명책》에는 그의 자녀들 이름이 적혀 있다. 우리 인간들은 동명이인도 있어서 헷갈릴 때도 있겠다. 이런 헤프닝은 판타지물 영화 소재로 쓰이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책"에 해당하는 《생명록》은 그런 불분명한 기록(이름, 명부, 명록)이 없다.

     그가 어디에서 났는지 분명히 설명하신다. 그것도 매우 신이 나셔서 얘기하신다. 

    흐려진(*지워진) 이름들을 제외하고, 분명히 새긴 모든 등록된 이름들을 호명하시며(*출첵) 여호와께서 매우 기뻐하시는 모습이 시편 87에 적혀 있다.

     "고라 자손의 시"《시편》를 보자~

    (시편 87:6)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

    - 그리고 그 둘(생명책, 성경책) 다음으로 하나가 《기념책》이다. 이는 사무엘하 23장을 읽어야 한다.

    모든 천국의 민족, 하늘 아버지의 아들들은...

    군대처럼 보시는 것이다. 그중에는 특별한 충신이 있고, 목숨도 아끼지 아니한 심복들 이름도 있다. 심지어는 작은 직분 병기 맡았던 자도 있다.

    그들의 "충심 태도"와 "그 이름들"이... 그 《기념책》(*엘범)에 기록된 것이다.

    이것은  《기념책》의 그림자(예시)를 보여주신 것이다.

    ☆'주의 기록하신 책'[출32:32]은 생명록을 뜻한다.

    과연 천국 아카이브에는 《주의 기록하신 책/생명책》과 《책들》과 《기념책》 이렇게 세 종류 기록물이 있다.

    - 말씀하시지 않은 책이 더 많을 것이다. 그 책들은 이 세상 사람들의 뇌와 감각으로 이해하려다가 오히려 오해만 잔뜩 일으킬 만한 책일 것이다.

    그래서 굳이 다른 책 종류는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외경, 위경 가지고도 분분한 해석을 하며 생각이 꼬인 사람들을 보면... 상상이 된다. 얼마나 더 많은 착각들이 만들어지겠는가)

    ●세상에서 기록되어가는 책 말고, 아담이 만들어지기 직전까지의 이야기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얘기해 주시고 싶지 않으셨을까?

    (*잠언 8장// 욥기 1, 2장을 깊이 생각해보면... 그런 제목의 책도 있겠구나... 생각할 수 있다.)

     "천상의 모의" 또는 "인간 창조 전 천사들의 형성 역사서" 이런 종류의 책들이 없으란 법이 있겠는가?

     '창세 7일간 일지'... '천국의 보석 종류', '천국 만물 백과 사전', '천국 성의 규모와 천사의 척량 설명서', '천사의 방언 사전', '천체 별들의 이름 설명서', '방주의 제도' 등등.

     시간계(인간계) 언어의 표현에 한계가 있는 것들은 문자(글) 체계로 설명하려는 순간부터 논란의 여지가 커질 수 있다.

     과연 천국의 언어 체계도 지상의 말들처럼 한계가(장애가) 많을까?​​

     《주의 기록하신 책/내 책》이란 것을 오해하면 안될 일이라서 하는 얘기다.

     모세는 천국 성소의 식양《책: 설계도》을 눈으로 봤다고 했다. 그러면 분명, 그런 책이 있단걸 염두해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천국에 가면 천국 아카이브(*기록물 보관소:도서관)부터 찾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기록하신 책》에 대하여 한정하거나 덧붙이는 것은 "자신의 영원한 구원 자체를 부정하는 일"로 번질 수도 있으니... 명확한 개념 정립이 필요하겠다.

    확고부동한 영원한 구원에 대하여 잃어질 수 없다. 다만 이미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만 그 이름이 흐려질(지워질) 수는 있다. 생명의 말씀과 자신의 죄사함을 연관하여 받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은 다 지워질 뿐이다.

    영원한 속죄 방법은 이미 책들《성경》에 소개되어 있다. 히브리서 말씀에 반복적으로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 생명책에 지워지지 않고 제 이름이 기록될 방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예수님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 출애굽기 32장 32절에서 말한 '주의기록하신책'은 《생명책》에 해당한다. 특히 모세와 그의 민족들은 "영혼의 생명을 구원받은 자들"에 해당한다.

    그들이 《생명록:생명책》에서 삭제해달라고 요청하더라도 그것이 그리 될 수가 없는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기념책》에서는 그 수고의 행동들이나 교제의 내용들이 삭제될 수는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적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고 외식이나 탐욕, 허탄한 것을 좇아 살아간다면... 주께서 기록하시는 책, 그 《기념책》에서 그들 언행이 부정적으로 기록된다.

    그러면 그들은 요압처럼 허무한 삶으로 기록되어 마감 되는 것이다. 쌓아놓은 공로들은 모두 사라지거나 허무한 것이 된다. (*돌이키고 반성할 기회의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 오늘이란 시간은 어제 죽은 요압이, 그렇게도 원했던 하루일 것이다.)

    그는 《생명책: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이름이 도말된 것이 아니다. 기념책에서 공로나 말들이 다 부정적으로 기록될 뿐이다. 천국의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거의 없고, 온갖 수치스러움 투성이일 것이다.


     ●만약 모세의 민족들 말고... 이방 민족들 중 기독교 종교인 리더가 모세처럼 말했다면 어땠을까?

    "얘들아, 너희들 수효와 이름들은 얼마든지 흐려질(지워질) 수 있단다. 그러니 00두령아, 착각 말고 "너의 거반 죽게 된 피흘림"이나

    치료를 받아서 생명록에 네 이름이나 지워지는 일이 생기지 않길 부디 바란다"

    "사단에게 그 영혼 생명이 탈취되고 난 이후로 네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으로 구원되었느냐?...

    무슨 이름을 삭제해달란 얘기니? 곰곰 생각해보렴!"



    -영원한 평안과 안전-

    (고린도전서 5: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전서 1: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출교를 의미)",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하려고

    《기념책》... 칭찬할 만한 것이 거의 없고, 맥락상 그 공로들이 다 자기 영광을 드러내는 것들이라서 징책을 듣기 위한 근거는 될 수 있겠다... 

    《생명록》에서 "이름이 지워진단 얘기는 아니다."

    신약시대의 알렉산더와 후메네오는 다 천국에 있을 것이다.

    몸이 살아가는 동안에 성품구원을 얻을 기회는 삭제되었다. 출교는 신앙 성장(*상급 쌓는/자기 건축)의 기회가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다만 《기념책》에서는 공로를 다 삭제당했거나 부정적으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아주 수치스럽고, 불가운데서 얻은 구원 같을 것이다.

    부활의 날에 구원받은 자들 무리에 있긴 하지만 상당히 부끄러울 것이다.

    요압 장군은 (*신약)교회 문화에 살아간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방식으로 출교당한 것이 아니다.

    방법과 문화만 다를 뿐이다.

     조직(*또는 왕조,정부)의 이름으로 "징계를 받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명예스럽지 못하였다.

     (*제가 쌓은 상급이 헛것이 될 수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 얼마나 피눈물 나는 이야기인가!!)

    (*그 모든 노력이나 승리나 견뎌낸 일들이 칭찬이 아니라 핀잔이 된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 공력이 불탄다는 것은~ 사랑, 지혜, 진리(공의, 공평, 정직)를 기본 건축재료로 사용하지 않은 믿음의 집이... 불이 탈 것이란 얘기다.

     (*고전3:11)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사도들이 사단과 거래해야 하나? 그 "거친 땅 같은 영혼들"을 준다고 사단의 나라에 이름이 등록되겠는가?

    하나님이 《기념책》에서 이름과 공로들을 부정적으로 기록한다고, 사단에게 자녀가 넘기워지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매우 간단한 얘기이다.

    훗날 심판대에서 간신히 의인으로 분별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단의 자녀가 되었다거나 지옥에 버려졌단 얘기가 아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불순종적인 성도들을 지옥에 버리거나 지옥으로 옮겨 넣는 일을 하지 않는다. 할 수도 없다.​

     ●《지옥》과 《옥》은 또 어떤가.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람이 《지옥》에서 혼나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옥》에서 혼나는 것이다. 

     《지옥》은 한 번도 거듭난 적이 없는, 끝까지 불순종한 인간들의 땅에 서 있었던 자들이 가는 영멸의 장소다. 《옥》과는 다른 곳이다.

     《영멸 및 영원한 처벌의 음부: 지옥 불못》와 《죽은 자의 영혼들이 대기하는 음부: 옥》가 어찌 같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역시도 분별력이 부족하면, 그렇게만 읽고 해석하며, 끝까지 오해하고 눈이 가리워져 있는 것이다.

    (눅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

    (눅8: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구원 받은 내 이름, 영혼이 빼앗기는 것이 아니다. 쌓아놓은 공로가 있는 줄로 알았던 것까지 모두 빼앗긴단 얘기다. 말씀을 어떻게 듣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성경에서 주의 뜻은 매우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다만 '오해'{어떻게 듣는가/ 어떻게 읽고 이해하는가}는 무지한 인간들의 몫이다. 

     보는 눈과 믿음의 부족 탓은 고스란이 인간 각자 본인의 몫이다. 

     천국 문 앞에서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할 것이다. 《책들》에 기록한 문장이 매우 분명하고, 반복적으로 써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나 비유, 함축, 그림자, 모형이지...그날에,

    그곳에 가면, 과연 그 문장들이 선명히 보이지 않을까?

    인간의 경향이나 색안경은 매우 무섭다. 그것은(*착오는) 믿음을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치명적" 부메랑이 될 것이다.

    [편벽:

    1.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쳐 공정하지 못하다

    2.     마음이나 생각이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침]

    ※ 물리적인 장애로 인하여 절룩이거나 기울어진 자세로 살아갈 수는 있겠다. 그러나...

    아는 것(지식)이나 믿음이나 진리에 대하여 편견, 편벽된 것, 기울어진 길을 걷는 영적 자세는... 자신에게 영원한 것을 못보게 하는

    '치명적인 자학'이 될 것이다.

    ●(고린도후서 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린도후서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 기념책에 기록되고 있다. 또 주님은 그 영광의 순간에도 우리와 늘 함께 계셔서 즐거워 하셨다. 매우 놀라운 일이다. / 말3:16)

     주께서 기록하시는 것은 즐겁거나 위대한 사건들만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주라 여기는 사람들의 삶은 천국과 연결되어 있다. 소소한 것도 기록되는 것이다. 작은 한숨도 하나님께서 다 보시고 있으셨단걸 알게 될 것이다. 《기념책》에서 열람하게 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계수하고, 해석하고, 기록으로 담거나 평가하는 일은 신의 영역이다. 우리는 블랙박스 영상을 보듯이 내 삶의

    흔적들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신의 자녀들은 영멸의 처벌을 받는 것을 위한 기록이 아니다. 그런 것은 심판과 영벌적 처벌이다. 

    신의 자녀들은 이미...

    《생명책》에 등록되었고, 자녀들이 된 이후의 삶이 《기념책》에 기록되며, 우리의 중생 이후의 삶과 모든 언행이 "천국과 명확한 의미적 연결성"을 지닌 것이 핵심이다.

    "언젠가, 우린 기억될테니까~"

    《책들》, 《생명책》보다 더 비교 불가하도록 방대한 분량이 이 《기념책》이다. 하나님과 연관된 사랑(충성)의 추억들은 영원한 기업처럼, 기록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기념책》은 "영원한 삶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오늘 하루라는 것'은 '영원한 삶을 평가하시는 하나님의 시험지'를 받아든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미움, 노, 시기, 허탄, 외식"과 같은 것에 가까이 하며 살게 되면... 《기념책》에서 그 이름과 행적들이나 계의들이 다 부정적으로 기록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차라리 깊은 바닷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악인들의 패역한 말과 행적이 다 기록되어질 필요도 있어 보인다. 그들은 크고 흰 보좌 심판대에서 지옥에 떨어질 뿐만 아니라... 기념은 아니겠지만... 그들의 악행과 언어사용 흔적과 비양심 등은 분명히 기록 누적되어 그 행위 만큼의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얼룩진 마음을 아름답게!

    어느 부잣집에서 파티가 열렸습니다.
    술을 나르던 하인이 실수로 
    포도주잔을 깨트리는 바람에 
    그만 깨끗하게 수리가 끝난 벽을 
    얼룩지게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주인은 심한 꾸중과 더불어 화를 내고는 
    손님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스스로 남겠다고 자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안절부절못하는 하인을 위로한 후, 
    갑자기 붓을 꺼내 들더니 
    얼룩진 곳을 중심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주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얼룩진 벽은 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벽화가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그림은 '쫓기는 사슴'이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얼룩진 모습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허물없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감추고 살 뿐입니다.
    우리의 얼룩진 모습이 
    새로이 변화되길 바랍니다.

    또한, 
    얼룩진 곳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人生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무례한 인간으로 살지 맙시다.
    자기보다 약하다고 힘으로 누르고, 
    권력으로 누르며, 
    이해심도 조금도 없는 
    그런 사람은 자기중심적이요, 
    이기주의적인 인생입니다.

    이기주의에 빠지면 
    타인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에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참으로 피곤합니다.

    우리는 안절부절못하는 하인을 위로하고 
    소망의 웃음을 주듯, 
    사랑이 가슴으로부터 피어오르도록 만드는 
    인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한번 사는 인생인데 
    자기 자신에게도 떳떳하며, 
    타인에게도 위로와 웃음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천국입니다.

    오늘도 
    사랑하는 하루되시기를......
    그리고
    늘 감사합니다.


    ο του θεου ανθρωπος
    하나님의 사람(호 데오스 안드로포스)



    개역개정,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 / ㉡또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모든 성경은 교훈과……'
               17.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사 그라페'의 문자적인 뜻은 '모든 책'으로 구약성경을 의미한다. 
    그런데 '모든'의 헬라어 '파사'에 대한 견해는 두가지이다. 
    (1) '파사'는 '단일체로서의 전체'(all)를 의미한다(Lenski). 
    (2) '그라페' 앞에 관사 '헤'(*)가 없으므로 '각각의 개별 성경을 강조하는 모든'(Lenski). 
    (2) '그레페' 앞에 관사 '헤'(*)가 없으므로 '각각의 개별 성경을 강조하는 모든'(every)을 의미한다(Bernard, Simpson, Guthrie). 
    두 가지 견해의 차이는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으로 의미에는 별 차이가 없다(Calvin).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하나님의 감동'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오프뉴스토스'는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호흡하시는'의 의미로 사람이 하나님의 생기로 생령(生靈)이 된 것같이(창 2:7) 성경의 말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성경의 절대 영감설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된다(벧후 1:21). 이에 대하여는 딤후 3:16,17 주제강해 '성경 영감론'을 참조하라.

    * 하나님의 감동
      1.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2. 성령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개념
      3. 정서적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도록 이끄는 중요한 과정
      4.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감동을 주실 때 이는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성경 기록과 신앙생활에서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헬라어 데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가 성경 전체에서 유일하게 사용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숨결로,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셔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다른 성경 구절들도 말씀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지지합니다.


    θεόπνευστος, ον 스트롱번호 2315

    1.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2. 딤후 3:16.
    발음 [ thĕŏpnĕus- tŏs ]

    어원 / 2316과 추정된 4154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딤후 3:16.
    • 관련 성경  /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딤후 3:16).

    * 2316

    θεός, οῦ , ὁ, ἡ 스트롱번호 2316


    1. 하나님.   2. 행 28:6.  3. 요 1:1,18
    발음 [ thĕ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 4154

    πνέω 스트롱번호4154
    1.

    불다

    2.

    숨을 쉬다

    3.

    마7:25

    발음 [ pnĕō ]
    • 1.
      (바람이) 불다, 숨을 쉬다, 마7:25, 눅12:55, 요3:8, 계7:1.

    참고 정보

    문법설명

    [기본형] 제1부정과거 ἔπνευσα

    연관 단어

    • 문법설명
      [기본형] 제1부정과거 ἔπνευσα
      관련 성경
      불다(마7:25, 요3:8, 계7:1). [명] 바람(행27:40).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쓰여졌다는 것이 말씀에 깊이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고(창 2:7),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0:22). 

    베드로후서 1:21에서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바울이 “그 받은 지혜대로” 편지를 쓴 것이며 그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읽으면 위험하다고 말합니다(벧후 3:15–16). 

    성경은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한다”고 합니다(고전 2:13). 
    사실, 베뢰아 사람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을 신실하게 받아들임으로 바울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을 타당하게 혹은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영에 속한 사람”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믿음의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엡 2:8–9).

    히브리서 11:1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계시한 복음에는 의가 드러나 있으며, 우리의 의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드러나고 유지될 수 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디모데후서 3:16에서 말씀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말하지만 다른 구절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진리와 사랑이 우리 삶의 모든 면을 인도하실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도 야고보는 성경(그리고 모든 다른 것들)의 본질에 관해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이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감동의 성경적 의미

    감동(感動)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헬라어로는 "πνεῦμα"(pneuma, 성령) 또는 "κινεῖν"(kinein, 움직이다)로 표현되며, 영어로는 "inspiration"이나 "moving of the Spirit"으로 번역됩니다. 성경에서 감동은 단순한 정서적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도록 이끄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감동을 주실 때, 이는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성경 기록과 신앙생활에서 핵심적인 요소가 됩니다.

    1. 성경에서의 감동의 개념

    성경에서 감동은 주로 성령의 역사와 관련됩니다. 성경 기록자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16)

    여기서 "감동"으로 번역된 헬라어 "θεόπνευστος"(theopneustos)는 "하나님의 숨결이 들어갔다"는 뜻으로,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단순한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구약에서도 선지자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내 말을 그들에게 전하라.” (에스겔 3:4)

    이처럼 감동은 성경을 기록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2. 성령의 감동과 신앙생활

    감동은 성경 기록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에게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성령께서 믿는 자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실 때, 이는 기도, 찬양, 말씀 묵상, 봉사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1. 기도 중의 감동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26)
    2.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우리는 더 깊이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3. 예배와 찬양 속의 감동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에베소서 5:19)
    4. 성령의 감동을 받을 때 찬양과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5. 말씀 묵상과 순종 속의 감동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6. 성령께서 감동하시면 성경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이를 삶에 적용하는 힘을 얻게 됩니다.

    3. 감동을 실천하는 삶

    성경적 감동은 단순한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를 실천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1.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
      “너희가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16)
    2. 감동을 받은 후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이웃을 사랑하는 삶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34)
    4.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5. 복음 전파의 사명 감당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6. 감동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도록 이끄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결론

    감동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끄시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기도와 찬양, 말씀 묵상과 실천을 통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을 때, 이를 단순한 감정적 경험으로 끝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편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성경은 40여 명의 기자(記者)들에 의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을 저자(著者)라 부르지 않고 기자라고 부르는데, 성경은 사람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러주신 것을 받아 적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느 유명인사의 연설을 기자가 그대로 받아 적은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되었음을 뜻하는 다음과 같은 표현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겔 6:1)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렘 7:1)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되었다는 말의 뜻은 다음 말씀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여기서 '감동(感動)' 이라는 말은 원어로 '페로메노이'입니다. 이 헬라어 낱말은 사도행전 27장 15절과 17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사도 바울이 탄 배가 바람에 쫓겨 가는 사건이 나오는데, 이때 '쫓겨 가다'라는 의미로 쓰인 헬라어 낱말이 바로 '페로메노이'입니다.

    그러므로 "감동으로 쓰여졌다"는 말의 뜻은 바람에 의해 의지와 상관없이 밀려가는 배처럼, 성경이 그 기자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기록되었다"라고 할 때, 그대로 모든 것이 완전히 무시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실 때 각각의 기자들에 따라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그 방법을 달리하셨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히 1:1)

    직접 불러주어 받아쓰게도 하셨고, 환상이나 꿈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또, 기자들의 교육 수준이나 환경, 각각의 재능이나 문제가 반영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모든 성경은 그 기록 과정에 하나님이 직접 관여하셔서, 하나님의 의지대로 기록하셨기 때문에 기자들의 자의적인 생각이나 해석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완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고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또한 하나님은 성경을 완성하시면서 성경 각 권의 맨 끝부분에 사도 요한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명백히 선언하셨습니다.

    네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 교육하기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데이아'(*)는 '모든 삶 가운데 어린아이를 올바로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 교훈 -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딤전 5:17).

    󰃨 책망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레그몬'(*)은 '유죄 판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Lenski) 잘못된 교리나 행동의 오류를 바로잡고 이단자들의 거짓을 밝혀내는 것을 시사한다(엡 5:18;딛 2:15).

    󰃨 바르게 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노르도신'(*)은 '추를 바로 세우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성도들을 진리와 사랑으로 바로잡고 그들이그 길로 더욱 매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시사한다(단 12:3;요 21:15-17).

    󰃨 의-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쉬네'(*) 는 법률적인 용어로 '엄격한 정의'(正義)를 뜻한다. 

    온전케 하려(에크사르티조. ĕxartizō)  ἐξαρτίζω 스트롱번호 1822 

    1. 완성하다.  2. 갖추다
    발음 [ ĕxartiz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ξήρτισα, 완료수동태분사 ἐξηρτισμένος, 1537과 739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완성하다, 행21:5.
    • 2.  갖추다, 딤후3:17.
    • 관련 성경 /  날을 지내다(행 21:5), 완전히 갖추다(딤후 3:17)

    본절은 접속사 '히나'(*, '...하기위해')로 시작되는 문장이다. 
    이것은 본절이 앞절의 4개의 항목으로 교육한 결과임을 시사한다(Lenski).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일반 신자들을 가리킨다(Hendriksen). 
    (2)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교사들을 가리킨다(딤전 6:11, Guthrie). 
    두가지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하나님의 사람'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선지자에게 적용되었다.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교사는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선포해야 한다(Scott). 
    한편 '온전케 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오스'(*)는 '아로'(*, '적합하다')에서 파생된 것으로 '완전히 적합한'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교사는 성경 즉 말씀을 통해서 그 사역에 완전히 적합한 일꾼으로 변화된다.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 본절은 성경으로 교육한 또 다른 결과이다.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의 헬라어 '엑세르티스메노스'(*)는 '완전히 구비된', '완전히 공급된'이란 의미로 '아르티오스'와 어원은 같으나 더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성경으로 교육을 받아서 '모든 선한 일'(2:21;딤전 5:10;딛 3:1)을 행하기에 충분히 준비된 사람으로 변화됨을 시사한다.







    7월 14일(월) 시편 132-13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열방의 우상(135:15)


    열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he idols of the nations are silver and gold, made by the hands of men.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참신이며, 우상들의 무가치함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강화하고, 이방 신들의 무능력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우상 숭배를 반대하며,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아무 힘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도를 강화하고, 잘못된 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주요 주제

    • 하나님의 유일성
    • 우상의 무가치함
    • 신앙의 중요성
    • 그리스도인의 경건함

    매튜 헨리 주석 : 
    헨리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참된 신임을 강조하며, 실제로 그 우상들이 과거와 현재를 포함한 모든 신이 아님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며, 그분께만 의지해야 한다고 언급합니다.

    알버트 반즈 주석 : 
    반즈는 이사야서와의 비교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우상의 무의미함을 더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우상은 생성하였지만 전혀 진정성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아담 클락 주석 : 
    클락은 신들의 우상이 가진 권능이 없음을 명확히 하고, 참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에게 의지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영적인 진리를 의미하며 이것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편 135편 15절과 관련된 구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이사야 44:9-20 - 우상의 헛됨과 하나님과의 대조
    • 출애굽기 20:3-5 -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계명
    • 시편 115:4-8 - 우상의 힘이 없음
    • 예레미야 10:14 - 인생들이 우상을 만들고 헛된 것을 따름
    • 고린도전서 8:4-6 - 신의 하나가 되어 그 방법의 중요성
    • 마태복음 6:24 -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
    • 로마서 1:22-23 - 우상을 섬기는 것의 결과

    묵상과 적용

    오늘날 신앙 생활에서 우상들을 피하고 오롯이 하나님께 매진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해졌는지를 성찰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영적 교훈은 우상 숭배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방해하므로, 우리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변하지 않으며, 언제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관련 성경 구절의 요약 :
    • 하나님은 유일하신 이이며, 그 외의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 우상은 무의미하고 내려놓아야 할 것임을 일깨워 줍니다.
    • 참된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핵심입니다.

    결론

    시편 135편 15절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우상들의 헛됨을 깨닫게 하며, 진정한 신앙을 다짐하고 하나님만을 예배할 것을 다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구절이 주는 교훈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할 진리입니다.

    우상숭배(偶像崇拜)시편 115:4-8저희 우상은 은과


    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 But their idols are silver and gold, made by the hands of men.
  • They have mouths, but cannot speak, eyes, but they cannot see;
    they have ears, but cannot hear, noses, but they cannot smell;
  • they have hands, but cannot feel, feet, but they cannot walk; nor can they utter a sound with their throats.
  • Those who make them will be like them, and so will all who trust in them

  • 그러나 우상은 이와 같이 사람이 만든 것이나, 자연물과 짐승에게 절하고 섬기는 것만이 아니라,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Put to death, therefore, whatever belongs to your earthly nature: sexual immorality, impurity, lust, evil desires and greed, which is idolatry.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탐심(貪心) 프레오네크시아(plĕŏnĕxia) πλεονεξ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4124 

    1. 탐심.   2. 탐욕.  3. 눅 12:15
    발음 [ plĕŏnĕxia ]
    어원  /  4123에서 유래
    • 1.   탐심, 탐욕, 눅12:15, 롬1:29, 고후9:5.
    • 관련 성경  /  탐욕(막7:22, 롬1:29, 벧후2:14), 탐심(눅12:15, 골3:5, 벧후2:3), 억지(고후9:5).


    πλεονεξία, ας, ἡ   4124 [plĕŏnĕxia] 탐심, 탐욕, 눅12:15, 롬1:29, 고후9:5.

    φιλαργυρία, ας, ἡ  5365  [philarguria]  돈을 사랑하는 것, 탐심, 인색, 딤전6:10. 

    ἀφιλάργυρος, ον 866 [aphilargürŏs] 돈을 사랑하지 않는, 탐심이 없는, 딤전3:3, 히13:5.

    πλεονέκτης, ου, ὁ  4123 [plĕŏnĕktēs] 욕심꾸러기, 탐심 많은 사람, 고전5:10, 6:10, 엡5:5.



    그러므로 - 본절은 앞서 언급한 2:20-3:4을 상기시킨다. 특히 3,4절에서 언급한 신학적 기초를 가리킨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3499) 
    - ‘죽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네크로사테’에 대해서 혹자는 ‘죽은 것으로 여기라’로 해석한다(Bruce). 
    그 근거로 ‘네크로사테’가 부정 과거로서 이미 이루어진 것을 의미하며, 3절에서 바울이 ‘죽은 것’을 선포한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신분상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죄에 대해서 죽었고, 의인이 되었지먄(롬 3:24) 현재의 삶은 죄와 투쟁하는 삶이다. 

    따라서 ‘네크로사테’는 현재의 삶 속에서 죄와의 투쟁을 아시하며, 과단성 있는 행위를 통한 죄의 제거를 의미한다(마 5:29, 30). 
    한편 ‘지체’는 신약성경에서 문자적으로 신체의 여러 부분을 가리키나(마 5:29, 30 ; 롬 6:13,19; 약 3:6). 
    본절에서의 ‘지체’는 신체적 부분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절의 문맥에서 ‘악의 목록’들이 ‘지체와’와 동격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지체’를 ‘악’으로 해석한다(Calvin, Hendriksen, Vaughan). 
    그러나 바울은 단순히 ‘지체’와 ‘악’을 동일시하는 차원뿐 아니라 그 이상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바울이 사용한 ‘지체’는 옛 본성에 이용되어서 범죄하는 여러 중류의 죄의 차원의 범주를 훨씬 넘어선 것으로(O' Brien, 롬 6:19 ; 7:23), 도덕적인 인격을 시사한다(Lightfoot).

    음란(4202) 
    - 혼외정사(살전 4:13)와 같은 불법적 성관계를 의미한다. 
    ‘음란’이란 말은 신약 시대의 헬라에 편만했던 문란한 생활을 반영한다(Lohse). 
    바울은 음란을 금지하는 명령에 무조건 순종할 것을 요구하였으며(고전 6:18 ; 갈 5:19) 이를 어기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음을 경고하였다(고전 6:9).

    부정(167) 
    - ‘부정’은 음란보다 더 넓은 의미로 때로는 육체적 부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마 23:27) 
    넓은 의미에서의 도덕적인 부정 즉 사상이나 행동, 말 등의 불순함을 의미하기도 한다(Vaughan). 
    여하튼 이것은 육체의 일이며(갈 5:19) 성령 안에서의 삶과는 조화를 이룰 수 없다(Lohae, O' Brien).

    사욕(3806)과 악한 정욕(2556. 1939) 
    - ‘사욕’은 색욕을  발하는 부끄러운 욕망을 의미하며(롬 1;26 ; 살전 4:5), 
    ‘악한 정욕’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게 하는 사악한 욕망을 의미한다(Lohse). 
    악한 정욕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자연인을 지배하며, 그 자연인 안에 거하는 죄의 현현이다(O'Brien). 
    그것은 육욕(갈 5:16, 24).

    탐심(4124)은 우상 숭배니라(1495) 
    - ‘탐심’은 앞서 언급한 네가지 ‘악’과 상관성을 갖고 있으며 (Carson) 물질에 대한 무절제한 욕심을 의미한다. 
    ‘탐심’이 ‘우상 숭배’와 동일시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마 6:24 ;엡 5:5, O' Brien).




    1495.  εἰδωλολατρέια    

    1. 우상 숭배.  2. 고전 10:14.  3. 골 3:5
    발음 [ ĕidōlŏlatrĕia ]
     어원  /  1497과 2999에서 유래
    •  1.  우상 숭배, 고전 10:14, 골 3:5, 벧전 4:3.
    • 관련 성경  /  우상 숭배(고전 10:14, 벧전 4:3).

    * 1497

    εἴδωλον, ου, τʹο 스트롱번호1497
    1.

    2.

    거짓신

    발음 [ ĕidōlŏn ]
    어원
    1492에서 유래
    • 1.
      상, 형상, [물건으로서의] 우상, 행7: 41, 고전12:2, 계9:20.
    • 2.
      거짓신, 우상, 고전8:4,7, 10:19, 고후6:16, 살전1:9, 요일5:21.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우상(행7:41, 고전8:4, 요일5:21).


    * 2999

    λατρεία, ας, ἡ 스트롱번호2999
    1.

    섬김

    2.

    예배

    3.

    요16:2

    발음 [ latrĕia ]
    어원
    3000에서 유래
    • 1.
      섬김, 예배, 요16:2, 롬9:4, 12:1, 히9:6.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섬기는 일, 예식(요16:2, 히9:6), 예배(롬9:4, 12:1), 섬기는 예법(히9:1).


    의지하라(bâṭach)   בָּטַח 스트롱번호 982
     

    1. 신뢰하다.   2. 잠 11:28.  3. 왕하18:20
    발음 [ bâṭach ]   
    구약 성경  /  120회 사용





    하나님외에 탐욕으로 더 사랑하고 숭배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만일 하나님보다 자녀를 더 사랑한다면 자녀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우리의 가장 귀한 애정을 빼앗거나 하나님 대신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곧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우리 마음속에 최고의 지위를 차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상에서 멀리하라 하심은 우상숭배만을 금하신 것이 아니라 일보 나아가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경배하고 그만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외에 다른 신이 없고, 만약 다른 신을 두고 섬기면 이는 두 주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자기의 아내, 자녀 혹은 돈, 명예, 권력, 사업을 우상으로 삼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말은 아내나 그들을 너무 사랑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내나 그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아내나 그들의 지위를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자기 아내나 그들을 하나님 보다 더 중하게 여겨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보다 아내나 그들을 더 기쁘게 하려고 애쓴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내나 자식이나 부모나 사업을 첫째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둘째로 생각하는 사람은 곧 재물이나 아내나 가족을 우상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우상숭배자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정죄함을 받습니다.(겔 14:3-8).

    에스겔 14:3-8
  •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 그런즉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무릇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 나아오는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많은대로 응답하리니
  •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인하여 나를 배반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의 마음에 먹은대로 그들을 잡으려 함이니라.
    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이켜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 이스라엘 족속과 이스라엘 가운데 우거하는 외인 중에 무릇 나를 떠나고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고 자기를 위하여 내게 묻고자 하여 선지자에게 나아오는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친히 응답하여
  • 그 사람을 대적하여 그들로 놀라움과 감계와 속담거리가 되게 하여 내 백성 가운데서 끊으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태어날 때부터 종교심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심에 따라 가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봅니다. 
    "나는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으나 그 자체가 신조요, 종교임을 느낍니다. 
    어린아이에게는 그 우상이 어머니이며, 북한 사회의 우상은 김일성과 김정일이며, 많은 현대인의 우상은 돈과 권력욕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제각기 믿던 종교가 와르르 무너질 날이 옵니다. 
    빛이 나타나면 어두움이 물러가듯이 참되신 구주가 나타나시는 날 모든 믿든 것들이 헛되고 허망한 것임이 들어 날 것입니다. 
    말로는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던 자들도 그들이 주와 섬기던 신이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가 아닌 돈과 물질과 자기 가족과 심지어 자기 배를 우상으로 섬겼던 것도 백일하에 드러납니다.

    한국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교회 밖을 나서면 일반 시회인과 별다른 생활을 하고 있지 않고 교회자체를 우상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말씀을 생활화하지 못한 현상으로 관념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우상에 절하고 섬기면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현대교회가 사람이 만든 교회건물에 일주일에 한 번 나와서 예배에 참석하고, 교인이 되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똑같이 우상숭배하는 것임은 다를 바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교회건물과 교역자를 우상화하고 입으로는 주님을 찬양하나 실제 생활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외면하는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에서 어서 속히 탈피합시다. 입으로는 헌신과 충성을 노래하나, 정작 실행함이 없고, 마음의 생각은 육신적인 것과 허망한 것만을 쫓는 교인들에게 화있으리니 이들이 어찌 마지막날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1천만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자기 아내의 절반만 사랑해도 한국교회는 이 정도의 잠자는 교회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교인들 중 많은 사람이 이 핑계 저 핑계대고 일주일에 한 번 예배도 참석치 않습니다. 이러구서 무슨 예수를 주로 모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일 예배에 빠진 이유도 각가지입니다. 집이 비어서 못나온다, 이사하는라, 너무 추워서, 애기가 아퍼서 등입니다. 현재 교인들 대다수가 첫째에 놓여야 할 하나님을 20 번째 쯤 갖다 놓은 현상에 있습니다. 수박 겉핥기 식의 내용 없는 신앙생활은 불필요합니다. 이것이 또한 누구의 책임입니까? 현대판 바리새인과 서기관, 외식하는 교역자들과 삯꾼 목자에게 그 책임이 있지 않겠습니까?

    엘리야가 가멜산상에서 백성을 향하여 외친 말씀은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쫓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 지니라"(왕상18:21)하였습니다. 신자가 신앙에 전심치 아니할 때 그 신앙은 무의미한 것이요, 목자가 양들이 신앙에 전념토록 인도하지 아니할 때 이미 그는 목자가 아니요 자기 사욕을 쫓는 이리인 것입니다.

    어떤 교인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열심하는 것 같이 보이나 실은 그 열심히 정말 하나님을 위하는 진정한 열심히 아니요, 자기 명예와 지위를 위함에서 동기가 된 육(肉)의 열심인 경우가 있습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육신을 쫓는 자의 결과는 사망입니다.(롬 8:5-8)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든 우상숭배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안에 지나쳐 거하지 않거나 그리스도에 미치지 않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 신앙생활을 하는 자는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숭배자나 그와 같은 자들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생활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든지 어느 때든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관념적 신앙을 버리고 실천적 신앙을 갖고 우상화된 신앙을 버리고 생활화된 신앙을 가집시다. 
    또한 하나님 앞에 돈과 명예와 쾌락과 안일을 두지 맙시다. 
    결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우상숭배하다가 멸망을 받았나니 말세를 만난 우리는 이것을 거울삼아(고전10:5-11) 온갖 탐심과 악을 버리고 온전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사는 크리스천이 됩시다.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이 우리를 죽음과 절망가운데서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출20:3-6)

     
    강제 결정된 신사참배
     
    1938년 9월, 대한 예수교 장로회에서는 총회를 열고 신사참배 문제를 토의한 끝에 박응률 목사의 찬성 발언에 따라 사회를 보던 총회장 홍택기는 신사에 참배하기로 가결해 버렸다. 
    이 무렵에 김익두 목사는 서울에서 부흥 집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종로 경찰서에서도 김 목사의 부흥회에 형사대를 파견하여 그의 설교를 책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김 목사의 설교는 목사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어,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생겨날 정도로 은혜스러웠다. 
    하루는 종로서에서 형사 한 사람이 김 목사를 찾아왔다. 
    김 목사는 올 것이 왔구나 하고 물었다.

    “나를 연행하러 왔소?”
    “아니, 그게 아니라, 상부의 지시가 있어서요."
    “지시라니요?”

    그러자 형사는 신사참배의 문제를 끄집어내었다.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국민된 도리이니, 교계의 지도자가 이것을 외면해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왜경에 의해 강제로 신사 앞에 끌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신사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1938년 9월 9일부터 15일까지 평양서문밖교회에서 조선과 만주 27개 노회의 총대 193명(목사 86명, 장로 85명, 선교사 22명)이 모여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를 개최하였다. 
    개회 당시 총회장은 이문주 목사(경북노회· 대구남산교회)였다.

    첫날 저녁 8시에 개회하여 임원을 선출하니 총회장으로 평북노회 홍택기 목사가 선출됐다. 
    이튿날 오전 9시 30분 속회하여 박응률 목사로 기도하게 하고 회무를 시작한 후 1시간이 지나서 10시 50분경, 평양노회장 박영률 목사평양노회 평서노회 안주노회의 연합대표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자는 제안을 하여 즉시 가결하였다
    그리고 성명서를 발표한다.

    “아등(我等)은 신사(神社)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려행(勵行)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 있어서 총후(銃後) 황국 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한다.

    소화 13년(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총회는 신사참배 가결 후 후속조치로 부총회장과 각 노회장이 총회를 대표하여 즉시 신사를 참배할 것을 결정하여, 12시 정회 후 평양 신사에 참배하고 돌아와서 오후 2시부터 속회했다.

    평북노회는 총회 개회 이전인 1938년 2월에 이미 신사참배를 가결하였고, 전북노회도 6월 8일 제32회 정기노회 중에 가결하였으며(‘전북노회록’ 참고), 경북노회는 8월 19일 제36회 2차 임시노회에서 신사참배하기로 가결하고 이에 찬성하는 회원들을 총대로 선정하였다(‘경북노회105년사’ 참고).


    ▲ 신사참배를 결의한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표들이 1938년 9월 10일 평양신사를 찾아가 참배하는 모습이 당시 조선일보에 게재됐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전남노회였다. 
    전남노회(당시 노회장 박연세 목사)는 전국 27개 노회 중에 유일하게 노회 보고서에 신사참배를 결의한 내용을 총회에 제출하여 총회록에 남겼다. 
    1938년 5월 6일부터 10일까지 목포 양동교회에서 열린 전남노회의 제30회 정기노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노회록에 담았다.

    “광주 4교회 도당회와 목포양동교회 당회의 헌의안을 받아 다음과 같이 보고하나이다.

    1.신사참배는 국민정신통일에 순연한 국가의식임으로 본 노회로서는 혼연히 참배함이 당연한 국민의 의무인 동시에 교회지도상 선명한 태도인줄을 아오며.” (만장 일치 가결)

    이와 관련해 제27회 총회회의록(121쪽)의 제9호 각 노회 상황보고에서 전남노회 해당 부분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특별사항은 금춘 정기노회에 오랫동안 문제로 되어오던 참배 문제에 대하여 당국의 지시대로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참배는 국민정신 통일을 위한 국가 의식임을 인식하고 본 노회로서도 참배함이 국민의 당연한 의무인 동시에 교회 지도상 선명한 태도일줄 알고 이를 결의 실행하는 동시에 관내 각교회에 통지하여 일반 교인으로 취할 것을 보였사오며.”

    제27회 총회에 참석한 전체 27개 노회 중에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는 17개였다. 
    이때 일제는 총회에 참석할 총대들은 신사참배를 찬동하는 자들로 선정할 것을 지시하였다. 
    당시 총회에 참석하고 상황을 목격한 김양선 목사는 당시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제는 각 지방 경찰서를 통하여 총대로 선정된 노회 대표들에게 다음 3개의 조건 중 택일할 것을 강요하였다. 
    3개의 조건은 
    ‘1.총회에 참석하면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동의할 것 
    2.신사참배 문제가 상정되며 침묵할 것 
    3.상기 양안을 실행할 의사가 없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참석하지 말 것’ 등이었다. 

    그리고 이 세 조건을 모두 불응하는 사람들을 구속 투옥하였다.

    뿐만 아니라 총회 석상에서 경찰서 지도부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총대석 옆에도 정복 경찰이 서 있었으며, 총대석에도 사복경찰이 포진해 있었다.

    이처럼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일제의 엄청난 강압에 의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수치스러운 결의를 한 것이며, 또한 당일 12시에 총회 대표가 직접 평양 신사에서 참배를 실시함으로 범죄를 저지르는데 이르고 말았다.

    해방 후 1946년 남부총회에서 신사참배 취소 결의를 하였으나, 이는 남한 노회들만의 것으로 인정됐다. 
    이후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남북한 노회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안건(권연호 목사 제안)으로 받아, 신사참배 결의가 불법인 것으로 취소하는 정식 결의를 한다. 
    당시 총회 기간 중 회개의 성찬과 3시간 특별기도회를 열고, 6월 한 주일 전국교회가 회개하는 의미로 연보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들의 가족을 위로하는 일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총회와는 달리 과거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가 정식으로 회개하고 취소한 기록은 오랫동안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2016년 7월 31일 산정현교회에서 평양노회에서 분립한 7개 노회(경평, 남평양, 동평양, 서평양, 평양, 평양제일, 북평양)들이 과거 신사참배에 앞장선 노회 결의를 무효로 선언하는 취소결의를 했다.

    또한 이 자리에서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복직도 결의한 후, 각 노회 대표들과 노회원들 그리고 총회역사위원회가 함께 모여 ‘주기철 목사 복권 감사예배’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과거 신사참배에 앞장선 노회와 선배 노회원들의 불의와 허물을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아가 신사 참배 거부운동에 앞장선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결의도 하였다,



    ▲ 평양 금수산에 세워진 신사.

    이름도 예쁜 ‘금수산’ 자락에 ‘광풍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서있던 자리였다. 모란대와 을밀대 그리고 대동강 등 평양의 온갖 장관을 한 눈에 볼 수 있던 바로 그 자리. 하지만 이미 빼앗긴 조국의 산하였고, 거기에는 치욕의 상징인 일본 신사(神社)가 서있었다.

    일행은 왼손, 오른손, 입을 차례로 씻고 옷깃을 여민 후 본격적인 신사참배 의식에 들어갔다. 정해진 순서대로 절을 하고, 손뼉을 치는 행위가 반복됐다. 바로 몇 시간 전 예배당에서 찬송을 부르던 그 입술이었고, 기도하기 위해 모았던 그 손이었다.

    신사는 일본의 국교 신도(神道)의 사당이다. 당초 신도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선조나 자연을 숭배하던 토착신앙이었다. 그러나 1868년 일본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천황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신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국가종교로 부각되었다.

    대륙침탈의 야욕을 불태우던 일제는 자신들이 진출한 지역에는 반드시 신사를 세워 자국민의 단합과 상대민족의 사상통일을 꾀했고, 우리나라에도 1876년 개항 이후 전국에 수많은 신사를 설치한다. 처음에는 일본 거류민들 중심의 민간차원에서 건립과 운영이 이루어졌지만, 1910년 한일병탄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국가 차원의 육성이 시작됐다.


    ▲ 서울 남산에 건립된 조선신궁.

    1925년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이 건립된 것을 계기로 일제는 본격적으로 신사참배를 우리 민족에 강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립학교, 그 다음에는 일반 사립학교, 나중에는 기독교학교와 교회들까지 주요 공략대상이 됐다.

    처음에는 ‘우상숭배’라며 강력히 맞섰던 한국기독교의 대오는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부르짖으며 강력한 식민정책을 펼친 일제의 탄압 앞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로마 교황청의 훈령을 받고 투항한 가톨릭에 이어, 개신교에서는 감리교회가 앞장서 1936년에 백기를 들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도했던 장로교회마저 1938년 9월 10일 평양서문밖교회에서 개회한 제27회 총회를 기점으로 변절하며, 한국교회는 결국 패배의 쓴잔을 받아든다. 일본 경찰들이 대놓고 자행하는 감시와 통제 속에서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한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대표들은 회의까지 멈추고, 평양신사로 향했다.

    평양신사는 일본인들이 ‘천조대신(天照大神)’이라 부르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를 제신으로 섬기는 사당이었다.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린 이들은 ‘기독교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다’ ‘애국적 국가의식이다’고 스스로 강변했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는 우상숭배이자 배교행위였다.

    한국교회는 그렇게 쓰러졌다. 한 번 내준 신앙의 정절은 속절없이 내팽개쳐졌다. 이후 장로교 총회 기간에는 신사참배가 당연한 절차처럼 실시됐고, 전국 교회로부터 돈과 종을 거두어 일본군대의 무기 구입자금으로 헌납하기도 했다. 1942년에는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이 붙은 전투기가 등장했다.

    이름 있는 목사들은 겨레 청년들을 점령국의 용병으로 내몰고, 일제의 대동아전쟁에 협력하도록 교회를 독려하는 시국강연회 연사로 등장했다. 한 때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었던 ‘대부흥’의 성지 평양의 교회들은 신사참배 결의 이후 쇠락의 길을 걷다가 결국 해방 이후에도 회복되지 못했다. 무서운 암흑기가 도래했다.


    신사참배 결정 후 수많은 배교행위도 구체적으로 가르쳐야
    노회 결의 취소로 법적 정당성 얻고 대대적 회개기도 필요


    장로교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정을 내린 지 2025년은 87주년이 된다. 

    신사참배란 일본이 민간종교 신도(神道:Shintoism)의 사원인 신사(神社)를 곳곳에 세우고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한국인에게 강제로 참배하도록 한 일을 말한다. 
    물론 일본정부는 이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로서의 신사와 국가의례로서의 신도를 구분해서,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라 국가의례일 뿐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신사신도(神社神道)에는 이렇게 규정이 되어 있다.


    ▲ 교회당 안에는 일본신도의 신단인 가미다나가 들어섰다.

    ‘일본은 신의 나라이고, 최고 신은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이며, 가장 실질적인 신은 천조대신의 손자이며 현인신인 천황이며, 그 천황은 신성불가침이다. 이 천황에게 국민은 죽음으로써 충성할 것이며, 천황의 조상신들을 모신 신사에 참배치 않는 것은 비국민이다.’

    천조대신이 최고 신이고, 천황을 현존하는 신이며, 그 천황의 조상신들을 모신 곳이 신사라면 이 신사를 참배하는 것이 어떻게 종교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조상신을 숭배하는 것 또는 과거 로마시대에 로마황제를 신으로 숭배한 그것과 다르지 않다. 장로교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이 중요했던 이유는, 장로교가 한국기독교의 대표 교단이었기 때문(당시 장로교는 다른 교단들을 다 합한 것보다 3배가 넘는 교세를 가지고 있었다)만 아니라, 이 결정 이후 기독교의 배교행위가 공식적으로 가속화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교계 지도자들의 신사참배가 시행되었다. 당시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정이 되자마자 점심시간에 총회 임원대표와 23명의 노회장들이 평양신사에 가서 절을 했다. 이어 1938년 12월 12일, 한국교회의 각 교파 대표들이 일본까지 가서 신도 사원인 이세신궁과 가시하라신궁에서 참배하였다.

    그리고 총회 3개월 후에는 총회장 명의의 공문을 모든 교회에 하달하여,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무리는 처벌해야 한다고 공고하기도 했다. 이 공고에 따라 각 노회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목사들과 선교사들 또는 성도들을 제명하거나 노회원 자격을 박탈하였다. 심지어 일부 교회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목회자들을 교회 목사로 청빙하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다.


    ▲ 목회자들은 한강에서 신도침례를 받고 있다.

    더욱 충격적인 일은 목사들이 서울의 한강과 부산의 송도 앞바다에서 일본 신도 승려들이 행하던 신도의식, 곧 ‘미소기하라이’라는 세례(엄밀하게는 침례)를 단체로 받았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 신도세례는 ‘천조대신보다 더 높은 신은 없다’고 고백한 사람에게 베풀어졌고, 한국교회는 ‘천조대신이 높으냐, 여호와 하나님이 높으냐?’하는 질문에 천조대신이 더 높다고 하는 문건에 서명을 하여 관청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다. 이때부터 교회에서 예배할 때는 ‘가미다나’라는 일본의 신단(신도의 신들을 모시는 제단)을 교회당 안쪽 동편에 두었고, 또 황국민 서사, 황도 실천, 전도, 보국 등의 게시물들로 교회당을 메우게 하였다. 매주일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기도, 소원간구, 찬양-손뼉, 예물 바치기, 황국신민서사 낭독 등의 순서로 1부 신도예배를 먼저 가졌다. 그리고 주일 정오 사이렌이 울리면, 예배를 드리다가도 일어나서 일본천황이 사는 동쪽을 향해 절하는 동방요배를 하게 하였다. 천황예배가 하나님예배보다 더 우선이었던 것이다.

    주일 오전예배를 제외하고는 모든 예배가 폐지되었고, 찬송가 가운데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와 같은 전투적인 찬양이나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찬송가는 금지되었다. 4복음서 이외의 신구약 성경은 모두 출간이 금지되었고, 신앙고백 가운데서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옵고’와 같은 조항들은 천조대신을 부정한다고 하여 삭제되었다.

    모든 신학교들은 폐쇄하되, 일본정부에 협조하는 신학교만 다시 복구하도록 했다. 그 때에도 신학교 이사장은 일본인으로 하고, 교육과목 중에도 구약이나 바울서신, 예언서와 같은 과목은 없애는 대신 일본종교인 신도학, 신도역사, 불교학, 교련 등과 같은 과목을 가르치도록 제한했다. 기독교신학교인지 신도신학교인지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 주일예배 중에도 교인들은 정오 사이렌이 울리면 일본 천황이 있는 쪽을 향하여 동방요배를 했다.

    더 나아가 기독교 지도자들을 충동하여 전 교회적 차원에서 일제 신민화정책에 협조하도록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교회가 앞장서 침탈전쟁을 위한 기도운동과 모금운동을 벌였다. 그래서 전승축하회 604회, 무운장구기도회 9053회, 위문 181회, 시국강연 1300여 회가 열렸고, 158만원이라는 거금을 국방헌금으로 헌납하기도 했다. 또 감리교에서는 ‘감리교단호’라는 이름을 붙인 ‘애국기’ 3대 값 21만원을 헌납하였고, 장로교에서는 ‘조선장로호’라는 해군함상전투기 등의 무기구입비를 헌납하면서 미군과 싸워 이기라는 신도의식을 거행하였다.

    여기에 전쟁물자 조달을 위해 교회 종이나 철제 문짝을 헌납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신도 섬긴 사사기 시대의 신앙행태가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이 모든 매국적, 배교적 행위의 출발이 바로 1938년 9월 9일의 장로교총회 결의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에 진노하실 수밖에 없었다. 해방과 동시에 남북이 분단되었고, 그 뒤 3년간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하였다. 또한 신사참배 결의가 이루어진 북한 땅은 70여 년간이나 황무하게 되었다. 신사참배 결의 후 정확히 10년 뒤인 1948년 9월 9일에는 북한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었고, 정확히 20년 뒤인 1958년 9월 9일에는 김일성의 포고령이 내려져 그나마 미약하게 남아있던 북한의 교회들이 완전히 말살되었다. 그리고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장대현교회 자리에는 교회 대신 김일성 동상이 섰다. 하나님께서는 만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들을 숭배하면, 내 이름을 둔 이 성전이라도 던져버리겠다고 하신 말씀(왕상 9:6~7)을 그대로 이루신 것이다.

    과연 이 사실들을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제대로 알고나 있을까? 일반 성도는 물론 목회자들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부끄럽지만 필자도 얼마 전까지 이 정도로 심한 배교행위가 이루어졌는지는 알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역사교육의 부재에서 비롯된 일이다. 이렇게 엄청난 과거의 잘못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았고, 제대로 회개하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이 죄에 대해 얼마나 회개를 했을까?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먼저 이북의 16개 노회가 연합으로 모여 신사참배의 죄를 통회한다는 결정을 했다. 남쪽에서는 1946년 승동교회에서 남부대회가 열려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교회사에 따르면 이 결의들은 남과 북 각각 반쪽으로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문서로 된 성명서가 없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결정이라고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주도했던 목회자들이 교권을 잡음으로써 그 사이에 큰 갈등이 생겼고, 결국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나타나 고신 교단이 분리되어 나갔다. 뒤늦게 위기의식을 느낀 장로교 교단은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기로 결의했다. 신사참배 결의 이후, 16년 만에 비로소 법적인 취소결정이 내려진 셈이다.

    진정한 회개에는 법적 취소와 더불어 마음의 회개가 뒤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마음의 회개는 이루어졌는가? 1954년도 총회에서 신사참배 회개를 결정하고 성찬식 거행 전 한 시간과, 다음날 새벽기도 등 총 2번의 회개기도를 결정했다. 그러나 성찬식 전 기도회 시행 여부는 기록이 없어서 다소 불확실하다. 다음날 새벽기도에 회개 기도를 하기는 했지만 참석자들이 극소수였고, 정작 참회를 해야 할 당사자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설령 회개를 했다하더라도 이런 정도로 과거 7년 동안 한국교회가 저질렀던 크나큰 죄에 대해 충분한 회개가 되었는 지 의문이다.

    그 뒤에는 이렇다 할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다가 2007년에 와서야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신사참배에 대해 사과했다. 그리고 신사참배 결의 70주년이 된 2008년에 예장합동과 통합, 합신, 기장 등 4개 교단은 제주에서 장로교단 분열 60년 만에 처음으로 연합예배를 갖고 신사참배 참회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인 올해 우리 교단 제103회 총회에서 회개의 기도를 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저지른 크나큰 죄에 비하면 이 회개로 충분하지 않다. 과거에 저지른 죄는 전 교단, 전 교회 성도들이 다 함께 저지른 죄인데 비해, 이 회개는 몇몇 목사 장로들만의 회개일 뿐이다. 전 교단, 전 교회의 회개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다음의 사항들을 제안한다.

    첫째는 총회의 결의는 취소되었지만, 노회들의 경우에는 과거 신사참배 결의를 그대로 둔 노회들이 많다. 

    당시 기록에는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이미 신사참배 결의를 한 상태에서 총회가 개최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해당 노회들에서도 그 결의가 취소되어야 한다. 필자가 알기로는, 2015년 소래노회와 2016년 평양노회에서 분립된 7개 노회들(경평 남평양 동평양 서평양 평양 평양제일 북평양), 그리고 2017년 대경노회에서만 취소결의와 회개기도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노회 결의는 총회 결의와는 별개로 진행되었기에, 법적으로는 별개로 취소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모든 성도들과 다음세대들에게 이런 부끄러운 과거사를 가르치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신학교 교육에서도 예전에 신사참배 결정이 있었다는 정도로 간단히 다룰 것이 아니라, 신사참배 결정 이후에 이루어진 수많은 배교행위들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지금처럼 과거를 모르고 그 속에서 교훈을 받지 못하면, 역사는 또 다시 반복될 것이다.

    세 번째로 신사참배는 전체 한국교회가 저지른 죄이므로 다른 교단들과 연합하여 함께 회개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전 교회적으로 87년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큰 죄였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날짜를 잡아서 전 한국교회가 함께 미스바 회개와 같은 대대적 회개기도를 해야 한다.

    “주여 이 민족과 한국교회가 지은 신사참배와 배교의 죄를 용서하시고, 한국교회와 북한 땅을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도덕재무장(Moral Re­Armament, MRA)

    미국의 루터파 교회 목사인 부크만이 영국의 케딕크 집회에 참석, 영적인 체험을 얻고 귀국하여 학생전도에 전심, 1921년에는 해외전도로서 옥스퍼드의 학생집회에서 큰 감명을 주게 되었던 탓으로 옥스퍼드 그룹 운동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절대정직(絶對正直)· 절대순결(絶對純潔)· 절대무사(絶對無私)· 절대애(絶對愛)를 목표로 몇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스스로의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증언함으로써 도덕적인 재생을 이룩하자는 것. 이러한 운동은 구미제국(歐美諸國)의 기독교계에 널리 퍼지게 되어 처음에는 개인적이고 기독교적이던 것이 1938년에는 M.R.A.로 개칭하고 사회적·정치적인 면에도 운동을 확대해 나갔다. 스위스에 본부를 두고 매년 이곳에서 세계대회를 연다.

    로고스 재무장(Logos ReArmement)  / 성경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Bible)
    절대순종(絶代順從)
     
     

     

     

    신사 참배 No! 하나님 경배 Yes!
     
    “우리 학교선생과 학생들이 남산으로 신사 참배를 갔다. 나는 ‘예수의 이름 권세여 엎디세 천사들 금 면류관을 드리고…’를 내 발걸음에 맞춰서 4절까지 전부 불렀다. 예복을 입은 중년의 관리로 보이는 사람이 일본말로 ‘차렷!’ 하고 고함을 질렀다.

    모두가 동쪽을 향해서 차려 자세로 섰다. “살아 있는 신이신 천황 폐하와 황태 신궁을 향해 경례!” 나는 내가 처음부터 섰던 그래도 똑바로 하늘만 바라보면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산에 있던 모든 사람은 호령과 동시에 머리가 땅에 닿도록 수그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바로!’ 하는 호령이 울려 퍼지니 모든 사람들은 비로소 머리를 들고 허리를 바로 했다. 이것으로 오늘의 신사 참배는 끝난 것이었다.”

    안이숙 선생은 끝끝내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 안 선생은 이 사건 이후 수년 동안 도망자 신세로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는 붙들려서 사형 선고를 받고 혹독한 감옥살이를 했다.
    왜 안이숙 선생은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만 경배했는가? 다른 신상에게 경배하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께만 경배하는 일은 이런 대가를 지불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가?

    그렇다. 이것은 영원히 죽느냐 영원히 사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인간에게 있어 창조주 하나님과 죽임 당하신 어린양 예수님 외에 진정한 경배의 대상은 없다. 창조자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주님의 선하신 뜻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할 수 있다.

    내게 두 주인은 없다
     
    러시아의 군인 하나가 나폴레옹의 군대에게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군대의 군사들이 포로로 잡은 러시아의 병사에게 이제는 그가 나폴레옹의 군대에 속하게 되었다는 표시로 그의 팔에 N자를 새겼다고 합니다


    . 이때 러시아 병사는 물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오?”
    나폴레옹 군사가 대답합니다.

    “그 N자는 네가 오늘부터 나폴레옹 대제에게 속했다는 표시야”
    이 말을 듣자마자 러시아 군사는 칼을 뽑아 자기의 팔을 잘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기의 팔을 내던지면서 하는 말이
    “내게는 한 주인만 있을 따름이요. 내게 두 주인은 없소. 나는 오직 러시아 대제에게만 속해 있을 따름이오.”

    생명을 빼앗아가는 가증한 물건
     
    아프리카 선교사의 간증입니다. 의사로서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에 병원을 세웠습니다. 수많은 흑인들을 치료하던 어느 날 아내가 병이 들었습니다. 도무지 무슨 병인지 병명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와서 큰 병원을 다 돌아 다녔습니다.

    역시 병명을 찾지 못 하였습니다. 아내는 점점 생명이 꺼져 가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이왕 죽을 바에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선교하다가 사명속에 죽겠고 결심하고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 왔습니다. 그 때 영적으로 깊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선교사 부인 팔목에 걸려 있는 팔거리를 유심히 보고 물었습니다.

    형형색색의 줄로 꼰 팔찌였습니다. 어디에서 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병원을 세운 마을에 살고 있는 마술사가 준 장신구였습니다. 그는 그 것이 병의 원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 마을에 살고 있는 마술사는 예수믿는 이들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이들에게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그것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늘 마술을 걸어 왔던 것이었습니다. 선교사 부인은 그 팔찌를 빼냈습니다. 그리고 산산조각을 잘라 버렸습니다. 거짓말처럼 병이 나았습니다. 우리 가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부터 약 5년전 아내가 직장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후 아내는 가구를 보다가 장롱에 용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제법 비싼 장이었지만 과감하게 바꾸어 버렸습니다. 지난 주간 수술한 의사에게 정밀검사를 받았습니다.

    중앙병원 유창식 박사가 말했습니다. "이제는 의사를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집에 가면 술병들이 구구 색색 놓여져 있는 것을 봅니다. 가증한 물건들입니다. 결코 복을 주지 못 합니다.
    자식들이 이렇게 아버지가 술을 많이 마셨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술종류가 이렇게 많고, 술병 종류가 이렇게 많다는 것을 알아서 유익될 것 없습니다. 다 깨뜨려 버려야 합니다.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 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가난을 가져오는 가증한 물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세 자녀를 두고 다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유능한 사업가였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이였습니다. 하나님의 일도 잘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5년 전부터 사업이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얼마 안 가서 사업이 완전히 파산나고 말았습니다.

    그 후 하는 일마다 되는 노릇이 없었습니다. 이제 집 한 채 남은 것도 날라가 버렸습니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이제 거지같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때 이들은 <까닭없는 저주는... 이르지 아니 하느니라>(잠26;2)라는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부부는 집안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가증한 것이 집안에 있으면 가증한 것이 올무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증한 것과 함께 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집안에 가증한 물건이 있으면 가르쳐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가증한 물건을 없애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하는 데 침실에서 무엇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깜짝 놀라서 가보고 이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몇 년 전에 할아버지가 멕시코를 여행하다가 길거리에서 90센티쯤 되는 걸인 모습 조각 품을 사다가 선물로 주었습니다. 아주 정교하고 잘 조각하여 비싼 조각품이라 침실에 두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걸인이 마귀역사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귀중하게 간직하여 두었었는 데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쓰러져 깨지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부부는 그 깨진 걸인 상을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 완전히 부수워 버렸습니다. 그 순간 궁핍의 저주도 깨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시 사업은 번성기를 맞았습니다. 그 동안 잃어 버렸던 재산도 다시 찾았습니다.
    그 걸인 조각상에는 궁핍을 가지고 오는 저주가 붙어 있었습니다. 가증한 물건을 집안으로 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물건을 통하여 물권이 오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합니다.
    집안에 무슨 물건을 가지고 있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다니엘의 신앙의 자세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당시 세계 최강국 바벨론에서 사회적 지위를 착실히 쌓아나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른바 출세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서가 보여 주는 그들의 삶은 한 순간도 하나님 섬기기를 멈추지 않은 지극히 신앙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살던 바벨론에서는 벨 신 등 여러 신을 섬기는 일이 공식적으로 강요되었습니다.


     또한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므로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죽음을 담보로 해야만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네 사람은 하나님 섬기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돈, 인기, 첨단기술, 섹스, 인생의 성공 등 세상 사람들이 ‘신’으로 여기며 추구하는 것들을 함께 섬기자는 유혹을 받으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니엘이 가졌던 신앙의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앞장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단 1:8-9).


    독재자
     
    나치 독재에 저항했던 20세기의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독재자 히틀러가 하나님 행세를 하던 역사적 상황에서 하나님을 '절대타자'라고 강력한 어조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독일 국민이 히틀러를 마치 하나님처럼, 구세주처럼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해가던 상황에서 "하나님은 절대타자이시다"
    즉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자리에 오를수 없다며 강력히 히틀러 독재체제를 비판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역사 속에 나타난 수많은 독재자들이 다 이런 범주에 속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섬김을 강요할 때
    이것도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독재자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정권을 잡은 자들의 공통점은 자신을 신격화하고 우상화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로 부터 맹목적인 충성을 받아내기 위한 아주 야비한 방법입니다.
    여러가지 그럴듯한 구호들이 난무하고 귀에 솔깃한 정책이 등장하지만 그 이면에는 냄새나는 인간의 야욕만이 들끓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권력은 절대타락 위에서만 구출될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박물관에는 여섯 개의 촛불이 켜져 있고 그 옆에는 비누 세 개가 놓여 있다. 여섯 개의 촛불은 히틀러에게 희생 당한 600만명의 유대인을 의미한다.

    세 개의 비누는 가스실에서 죽은 유대인들의 몸에서 뽑아낸 지방으로 만든 비누다. 그 촛불과 비누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악랄한 독재자 히틀러를 저주한다.


    어린 시절,히틀러의 이웃에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히틀러는 아버지에게 상습적으로 매를 맞고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인 지주의 사생아였다. 히틀러는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학대 받으며 분노가 억압된 채 성장한 것이다.

    인간성을 파괴하는 주 요인인 공격적 행동은 어린 시절의 폭력과 학대와 해결되지 않는 슬픔의 결과물이다. 어린 시절,학대 당하며 성장한 아이가 커서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미움 받고 자란 아이가 남을 미워하고,사랑 받고 자란 아이가 남을 사랑한다. 수입 없는 지출은 없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갈 6:7∼9)

    교회는 연약한 사람들이 종교를 의지하러 가는 곳이라고 비하하며 무시했던 아인슈타인이 활동할 당시에 독일에서 나치스가 일어났습니다. 그 때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대학의 지성인들을 기대했다. 그러나 대학 교수들은 즉시 나치즘에 무릎을 꿇고 아첨했다.


    그들은 나치즘이 주장하는 잘못된 인종이론을 마치 옳은 것인 양 떠들어댔다. 또 나는 신문과 언론인들을 기대했다. 그러나 신문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필봉을 놓았다. 그런데 오직 교회만이 독재자에 항거하여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줄지어 감옥으로 향했다. 나는 교회에 한없는 찬사를 보낸다.”

    교회가 불의하면 이 사회는 아예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어야 할 교회조차 불의하다면 이미 다른 집단은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항상 정의롭고 공의롭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사회를 향해 광야의 소리를 발할 수 있습니다.


    우상숭배
     
    일제는 기독교를 저들의 식민지 통치의 커다란 장애물로 간주했다.
    그들은 교회를 항일 애국사상의 발상지로 보고, 교인들을 백안시했다. 그리하여 음으로 양으로 기독교를 탄압했으며, 드디어 노골적인 배교의 수단으로써 신사참배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신사참배는 두 말 할 것 없이 우상 숭배요, 우상 숭배는 설사 그것이 외부의 강압 에 의해 마지못해 저지른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모독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많은 교역자와 신도들은 이 신사참배 문제로 큰 시험에 빠지게 되었다.

    저들의 박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 사람도 없지는 않았으나 본의 아닌 억울한 희생자가 많이 생기게 되었다. 해방이 되어 일제가 물러가자 교역자들이 평양 신학교에서 일제 하에서의 신사참배를 회개하는 모임을 갖게 되었다.

    나이 이미 70세가 되고도 남은 김익두 목사는 이 모임에 연사로 강당에서 설교하는 도중에 "내가 일정 때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 왜경에 이끌려 신사 앞에 갔던 건 사실입니다" 하고 신상발언을 했다.
    그러자 장내는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이 숙연해지면서 저마다 김익두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나는 결코 신사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하고 김 목사가 채 말 을 맺기도 전에 청중 속에 앉아 있던 채정민 목사가 강단에 뛰어 올라와 "그래 네가 잘했단 말이냐?" 하고 지팡이로 김 목사를 후려갈겼다.
    모두들 아연실색하는데 김 목사는 웃는 얼굴로 "형님, 왜 이러십니까? 너무 흥분하지 마시고 자리로 돌아가 제 얘기를 다 듣고 나서 말씀하세요" 하고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장내에서도 진정하라는 소리가 높아 채 목사가 퇴장한 뒤, 김 목사는 설교를 계속했다. 그의 설교는 장내에 모인 교역자들의 심금을 때려 은혜스럽게 모임을 마쳤다.
    일제가 이른바 황민화(皇民化)운동의 일환으로 강요한 신사참배는 교계에 큰 시련을 안겨 주었다. 일제는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 의식이라는 그럴싸한 궤변으로 저들의 악랄한 책동을 합리화하려고 했다.

    교역자와 신도들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일본 신사에 가서 귀신에게 절하자니 신앙 양심이 허락하지 않고, 이를 거절하자니 저들의 서슬 푸른 핍박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우상 숭배
     
    대개 우상 숭배는 아주 서서히 교묘한 방법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밝히 보이시기 전까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성경 교사인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한 자매가 나에게 해준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그녀가 바느질 방에 있었을 때 갑자기 불이 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 자매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주님께 여쭤보자 하나님께서는 그 자매가 먼저 하나님을 구하기 전에 취미로 바느질하는 일에 열중해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셨다.

    이 자매는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께 대한 우선 순위를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자매의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얻게 되었으며 또한 더 큰 지혜를 얻게 되었다. 언젠가 나에게 선교 동역자인 한 친구가 해준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잉크병을 사용하셨다고 한다.

    그 친구는 자기에게 우상 숭배하는 것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성경을 공부하던 중 그만 잉크가 쏟아져서 펼쳐놓은 성경 안쪽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성령께서 그 친구에게 깨닫게 해주신 것은 하나님보다도 성경공부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마음속에 품었던 우상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 우상이 어떤 것인지 고하고 생각과 마음과 생활을 바꿈으로써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해방시켜 주신다.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우상을 멀리하라

    우상이란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자신에게 경배하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유·무형의 형상입니다. 
    참(진리)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개조되는 거짓 교리도 참에 대한 우상이며,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도록 하는 모든 것들이 우상입니다. 이 시간에는 우상의 개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유형의 우상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 출 20장 4~5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는 무한 광대하여 인간의 지식으로는 가히 측량할 수조차 없습니다. 과학이 발달함으로 우주의 더 먼 곳까지 관측이 이루어져 이 우주가 얼마나 광대한지를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우주의 크기를 논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만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과학적인 지식에 근거해서 우주의 크기를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주의 거리는 주로 ‘광년’이라는 단위를 사용합니다. 빛은 1초에 약 30만 ㎞/sec의 속도로 지구 둘레를 일곱 바퀴 반을 도는데 이러한 빛의 속도를 광속이라고 하며, 빛의 속도로 1년간 가는 거리를 광년이라 합니다.

    우주에는 수천억 개의 은하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구에 살고 있으므로 지구가 속해 있는 은하계를 통상적으로 ‘우리은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태양과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별무리들을 총칭하여 ‘태양계’라고 부릅니다.

    태양계는 우리은하의 중심으로부터 약 2만 8천 광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있으며 태양계에 딸린 별들을 이끌고 초속 200㎞의 엄청난 속도로 은하계 주위를 선회하는데, 한 바퀴를 도는 데 약 2억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속한 은하계에는 약 2천억 개 정도의 별들이 있는데, 그 별들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일 때는 반짝이는 별로 보이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1만 광년 거리에만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태양은 밤하늘에 보는 다른 별, 그것도 희미한 별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은하 중심에는 태양 에너지의 1백조 배나 되는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되는데 우리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희끄무레한 별무리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속한 은하계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의 거리는 빛의 속도로도 십만 년이나 걸릴 정도로 먼 거리이며 우주에는 이러한 은하계가 수천억 개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무한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무엇에 비길 수 있으며 어떠한 형상으로 기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태양으로 하나님을 상징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달로 상징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있어서 태양이나 달은 아주 미미한 존재일 뿐입니다. 아무리 큰 은하계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 어느 것으로도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상징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만이 하나님 백성들의 본분입니다.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 사 40장 13~20절

    열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 입에는 아무 기식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 시 135편 15~18절

    2. 무형의 우상

    1) 교리의 우상

    우상의 범주에 드는 것으로 교리의 우상을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계명이 있는데 하나님의 계명을 없애고 다른 계명으로 대신 지킨다면 이는 참것에 대한 우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안식일이 있는데 일요일을 안식일이라고 하며 이날을 지키면 이것이 곧 안식일의 우상을 만드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유월절이 있는데 유월절은 지키지 않고 태양신 탄생일인 12월 25일을 대신 지킨다면 곧 유월절의 우상을 만드는 것이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초막절이 있는데 초막절을 지키지 않고 사람이 정한 추수감사절을 지킨다면 이는 곧 초막절의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를 어기고 다른 규례를 정하여 지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참것에 대한 우상을 만드는 것이 됩니다.

    2) 취미의 우상

    세상에서는 건전한 취미 생활을 권면하고 장려합니다. 취미 생활이 나쁠 것은 없겠지만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구속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우상적인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등산을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안식일에도 등산을 가게 되었다면 이 사람에게는 등산이 우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믿음 약한 성도가 안식일에 하는 축구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예배에 불참한다면 그에게는 축구가 우상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 또는 하나님에게로 향한 마음보다 더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것이 있다면 그건 분명한 우상입니다.

    그러나 여가 시간에 취미 생활을 알맞게 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에는 예배드리고 또 복음 활동을 한다면 그 취미 생활이 우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3) 물질의 우상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장 10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재물 모으는 것을 더 중요시한다면 그 재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우상이 됩니다. 물론 우리가 육신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재물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재물을 좋아하는 것이 지나쳐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더 재물을 사랑한다면 이는 분명 그 영혼에게 우상이 됩니다.

    살인, 강도, 절도와 같은 흉악한 범죄도 모두가 돈을 지나치게 사랑하여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이와 같이 돈을 사랑하는 도가 지나치면 사람을 위해서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치 돈을 위해서 사람이 필요한 것처럼 왜곡되어 우상이 됩니다.

    4) 탐심의 우상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골 3장 5~6절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심령을 유혹하는 여러 가지의 우상들이 존재하는데 그중 하나가 탐심입니다. 육신적으로 더 좋은 것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그 욕망이 지나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커진다면 이는 필시 경계하여야 할 우상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도 탐심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지위나 명예를 지나치게 탐하는 것도 우상 숭배라 할 수 있습니다. 지위나 명예가 우리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든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라면 이는 분명 우상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장 5~7절

    5) 사람의 우상

    어떤 사람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중시한다면 자칫 그 사람이 자신에게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가령 연예인을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고 하나님께 경배드려야 할 시간까지도 잊고 쫓아다닌다거나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시간에도 다른 일들로 생각이 지배를 받는다면 이는 분명 우상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보다 자녀나 부모를 더 사랑해도 우상이 될 수 있고 이성 관계가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0장 37~39절

    이 말씀은 부모나 자식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모나 자식을 사랑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여 하나님을 멀리하고 구원을 놓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하늘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이 시대 그리고 사후 세계에 이르기까지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축복받게 하기 위해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한다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이 관심을 갖는 분야에 대해 알고자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이 시에 대해 관심이 많다면 서점에 가서 시집을 사서 읽는 정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시에 대해 얘기하는 등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이루려고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6) 자기 생각의 우상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의에 따르고 순종하기보다는 자신이 정한 의의 기준을 따라 행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역사하셔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방법과 다른 방법으로 역사하시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방법으로 인간들을 사랑하시면 싫어하고 거부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보다 자신의 의를 더 나타내려는 것이 우리에게 우상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옛적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이 하나님께로부터 아말렉 족속과 그 모든 소유를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고 군대를 출동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백성들의 말을 더 합당하게 생각하고 아말렉 족속, 그리고 짐승 중에서 가치 없고 볼품없는 것들은 진멸하고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은 진멸치 않고 가져왔습니다.

    사울왕은 잘못을 지적하는 사무엘 선지자에게 변명하기를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 하였습니다. 
    그때, 선지자 사무엘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하였습니다(삼상 15:21~23).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사악의 주술과 같으며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는 것은 우상 숭배와 같은 죄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불순종과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는 것이 우상 숭배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했을 때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를 수 있습니다.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르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의롭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방법은 하나님께서 하실 만한 방법이 아니지 않는가?’라는 생각 때문에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 10장 2~3절

    사람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무지합니다. 악한 원수 마귀가 내가 가려고 하는, 내 생각에 좋아 보여 나아가려고 하는 그 길에 함정과 올무를 준비해 놓고 있음을 자신은 알지 못합니다. 이를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 길을 피해 가게 하시려고 돌아갈 것을 명하시지만 이미 내 생각이 정답이라고 정한 이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보다 더 의롭게 여겨 순종하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며 나아가다가 마귀의 올무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행위가 얼마나 큰 우상입니까? 하나님의 참 진리 안에 거하고 있는 우리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우상이 바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가장 큰 의로 여기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8장 2절). 사실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들은 지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척한다고 해서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무지한 존재인가를 깨달았을 때에야 겸손한 생각을 갖게 되고 겸손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즉, 나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입장과 처지와 형편을 알아야 하나님이 올바로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경외란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방자해지고 교만해집니다. 그리하여 마음속에 우상이 가득하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마귀 곁으로 가게 됩니다. 내가 커지면 내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작아지고 내가 작아지면 내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커짐을 알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르는 ‘어린양보다 더 작은 양’이 되어야 합니다.

    3. 우상에 대한 견해

    우상이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 또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 즉 생각과 사상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모든 우상적인 요소들이 내 주위에 있는지 항상 살펴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유·무형의 우상들이 있습니다. 육안에 보이는, 또는 교리로 존재하는 그리고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온갖 우상들을 타파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가도록 합시다. 구약시대로부터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행위입니다.

    …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계 21장 8절

    새 언약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시온의 백성들은 자신의 주위에, 혹은 마음속에 우상 숭배적인 요소가 없나 살펴서 늘 근신하여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 고전 10장 14~22절

    우리는 새 언약 유월절을 통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성령께서 거하실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고후 6장 16절).

    초대교회 성도들과 사도들이 우상 숭배에 대해 가졌던 사상은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지침서가 되고 거울이 되어 천국 길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안에 우상이 있거나 우상을 숭배하게 되면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거하실 수 없어 떠나시게 되고 악신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상을 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안에 우상적인 존재들을 모두 다 없애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를 주관하시고 인도하셔서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게 해주실 것입니다.









    나르시시즘(自己愛. Narcissism)
    그리스 로마 신황에 나오는 "나르키소스"에서 유래된 단어로, 이상화된 자신에 대한 자기애적 왜곡을 의미한다. 
    나르시즘, 나르시스트로 잘못 쓰곤 하는데, 올바른 단어는 나르시시즘, 나르시시스트이다.

    나르키소스

    그리스 로마 신화의 등장 인물.
    어원은 마취, 혼수, 마비를 뜻하는 헬라어 '나르케'에서 유래한 '마취자'.

    강의 신 <케피소스> + 물의 신 <리리오페>의 아들 

    3천명의 포타모이 중 하나인 강의 신 케피소스와 물의 토속신 리리오페의 아들
    어머니 리리오페는 케피소스강의 홍수에 휘말린 후 나르키소스를 낳게 되었다.
    그녀는 유명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불러 아들의 운명을 물어보았는데, 테이레시아스는 나르키소스가 자신의 얼굴만 보지 않으면(혹은 자신을 알지 못하면) 오래 산다고 예언했다.

    이 말을 듣고 리리오페는 동료 님프들에게 부탁해 아들이 수면에 닿으면 얼굴을 보지 못하게 조치를 해 놓았고 나르키소스는 잘 자라난 듯했지만, 문제는 성격이 얼음처럼 차갑고 자존심이 너무 세서 수많은 님프들과 인간들의 구애를 받았으나 모두 귀찮다며 차갑게 차버렸고[4] 화가 난 님프 한 명이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에게 기도해 사랑이 거절당하는 게 어떤 것인지,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깨닫게 되는 저주를 내리게 하였다.

    판본에 따라 네메시스에게 기도한 게 나르키소스를 좋아했던 사람들 중 남자인 아메이니아스라는 이야기도 있다. 나르키소스가 그를 차면서 준 칼로 그의 문 앞에서 자살하며 네메시스에게 기도했다고 한다.

    그 저주로 나르키소스는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졌으며, 이후 며칠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을 그리다가 아사했다. 
    자신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실감해 자살했다거나 익사했다는 판본도 있다. 
    판본에 따라서는 그에게 매우 똑같이 생긴 쌍둥이 누이가 있었고 그녀를 사랑했는데, 그녀가 일찍 죽자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누이에게 투영했다고도 한다. 
    그 뒤 그가 숨을 거둔 자리에서 피어난 꽃이 바로 수선화라고 한다. 
    자신에게 애착을 가진다는 뜻의 '나르시시즘'이라는 말은 나르키소스의 영어 이름인 나르시서스에서 따왔다.

    휘기누스의 《이야기》에 기록된 바로는 미인이 많은 그리스 신화의 수많은 인간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미남이었다고 한다.





















     

     

     
     
     

     

     


     

     

     
     
     

     

     


     

     

     
     
     

     

     


     

     

     
     
     

     

     




     

     

     
     
     

     

     


     

     
     
     

     

     


     

     

     
     
     

     

     

    멸망 재촉하는 우상숭배
     
    1938년 9월9일 평양 서문밖교회. 188명의 총대들이 모여 제27회 장로회 총회를 열고 있었다. 방청이 금지된 이날 각 총대 곁에는 일본 형사가 붙어 앉아 삼엄한 분위기를 조성했고, 결국 신사는 종교가 아니므로 참배는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며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당시 선교사 블레어는 “불법이오”라며 이의를 제기했으나 묵살당한 채 신사참배가 결의됐다. 사전에 일경(日警)은 총대들에게 총회에 참석하면 신사참배는 죄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할 것, 신사참배 문제가 상정되면 침묵할 것,그렇지 않으면 총대를 사퇴하고 출석하지 말 것을 강요했다.

    1938년 9월10일 오전 10시30분. 평양 경찰서장의 각본대로 신사참배는 가결됐다. 총회가 우상숭배를 가결한 것이다. 그로부터 63년이 지난 오늘 일본 총리는 신사참배에 나섰고, 우익단체들도 때를 기다렸다는 듯 신사참배를 들고 나섰다. 우상숭배로 망한 일본이 한 세기도 지나기 전 같은 전철을 다시 밟고 있다.

    단 다른 것이 있다면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발로 걸어가 참배하고 있다는 것이다.형태와 형식이 어떻든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신다. 그리고 멸망의 원인이 된다. 일본은 이 점을 두려워하라.

     






     

     

     
     
     

     

     

    우상의 어리석음
     
    고전12: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순금으로 지반과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세운 집이 이 세상에 꼭 하나 있습니다. 인도의 [푸나와] 가까운 곳에 있는 [프랜드할]의 성문이 그것입니다. 1920년 이곳에 성문을 세우려고 한 페라르의 왕은 기술자들로부터 그곳은 땅이 물러 어떤 건물만 지어도 곧 가라앉을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왕은 궁리하다가 황금으로 지반을 단단히 만들고 그 위에 문을 세우기로 결심하고 10.5평방미터 깊이 3.6미터의 큰 구덩이 둘을 파고 3만7천5백 파운드 지금의 천5백75만불 어치의 금덩이를 묻고 성문을 세웠습니다.


     몇 해 전에 인도 [보이스카웃]의 일단이 이 금덩이를 파내려고 정부의 허가를 얻었으나 그 부근의 [마하레바] 사원의 승려들이 신을 모독하는 짓이라고 엄중하게 항의하여 허가가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제일 가는 낭비의 상징으로 남아있습니다. 만약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우리들은 허탄한 이야기를 멀리하여야 합니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늘도 참 하나님만 섬기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알 숭배
     
    바알(Baal)은 '주인' , '소유주', '남편'이라는 뜻으로 페니키아와 가나안의 농업 신이다.
    성경에 의하면 산당에서 음란한 예식을 거행하고 자해행위를 하며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는 일 등을 하였다고 한다.

    이 바알 신앙으로 인해 점차 야훼 신앙이 혼란해지자 예언자들로부터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배격되었다.


     일반적으로 바알은 천둥과 번개를 나타내는 창으로 땅을 짚고 암소에 올라탄 모습으로 표현된다

     

     

     
     
     

     

     

    우상숭배와 마술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 몸에 대해 짓는 죄를 언급한 후에(갈 5:17 이하) 종교적 죄인 우상숭배와 마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두가지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상과 방법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으나 없어지지 않고 있다.
    먼저 우상이란 말은 아이돌로라트리아(eidololatria)란 헬라어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우상이란 말과 숭배란 두 말이 합쳐진 합성어다. 구약시대에는 우상숭배가 주변의 이방세계에서 많이 행해져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을 위협할 정도였다.

    가장 무서운 것이 바알 숭배였다. 바알신은 풍년신이다. 비가 오게 하는 방법으로 바알신이 성행위를 하도록 하면 비가 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밤이면 창녀들이 바알 신전에 바글바글 모여서 주위 사람들과 성행위를 했으며 바알신이 성행위를 보고 흥분해 비를 내린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는 만나를 먹었기 때문에 비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해 농사를 지으면서부터 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 방법으로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 바알신을 섬기는 것을 배웠던 것이다.

    우상숭배는 신약시대에도 계속됐다. 공통점은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음행과 함께 일어난다는 점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우상숭배란 영적 음행(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육적 음행과 연결됐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가증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 여호와의 존재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그의 영광을 작은 모양 속에 가두어놓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가증하게 여기시는 것이다.

    우상 다음으로 두번째 영적 전쟁은 마술(성경에서는 때로 복술이라고 번역)이다. 마술이란 말은 팔마케이야(Pharmakeia)란 헬라어에서 왔는데 이 말에서 유래된 영어 단어가 약국의 조제(Pharmacy)란 말이다. 약을 조제하고 섞는다는 뜻이다. 고대에 약을 사용하여 복술을 행한 데서 유래했다.

    마술이라고 하면 보통 마술사들의 눈속임과 환상을 통한 대중적 마술을 연상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마술은 그런 마술이 아니다. 마술로 유명한 것은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된 에베소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바울이 여기서 마술책들을 태워 사회적 소요를 일으킨 것이다. 이 마술은 마약과 연결되는 것은 물론이고 더욱 무서운 것은 악령의 역사라는 점이다.

     

     

     
     
     

     

     

    이집트의 암소숭배
     
    고대 이집트에서는 토테미즘이 성행하며 소, 고양이, 악어, 매 등의 동물이 신성시되었는데, 이를 미라로 만들었다. 특히 유명한 것은 '아비스의 암소'라고 불리는 므네비스 신의 성수(聖獸)로 전 국민으로부터 숭배를 받았다.


    그들은 이 암소가 죽으면 미라로 만들어 매장하고 새끼소를 구하여 다음 '아비스의 암소'로 인정되면 그것을 수도인 멤피스로 옮겼다. 선별 기분은 검은 암소로 이마에는 삼각형 보양의 흰 반점이, 옆구리에는 달 모양의 반점이 있어야 했다.

    한편 파라오는 자주 암소로 상징되는데, 유명한 메네스 왕의 화장터에서 암소는 모습을 한 왕이 적을 격파시키는 그림이 발견되었다. 암소의 힘과 번식력은 오리엔트 각 지방의 농경민족 사이에서 널리 숭배되었다. 당시 이집트의 신앙의 중심지는 멤피스, 헤리오 폴리스, 테베 등이었다.
    * 참조: 출32:1-6, 신9:16, 느9:18  




    제사문제의 역사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지 근 2백년 동안 교인들이 크건 작건 갈등을 느겨온 것이 조상에 대한 제사다.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도 이 갈등에서 탄생하고 있다.

    젊은 천주학도였던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은 어머니 초상을 당하자, 그 신주(神主)를 "공산(空山)의 한낱 편목(片木)에 불과하다"면서 태워버리고 순교를 하였다. 그런지 1백 20년 후인 1920년에 이 교리와 제사와의 갈등은 신문지상을 통해 공개논쟁으로 비화하여 사회문제로 번졌던 일이 있었다.

    영주에 사는 기독교인 권성화의 아내 박씨가 시어머니의 초상을 당해 제청을 지어놓고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자, 권씨가 교리를 어기는 일이라고 완강하게 말렸고, 박씨는 시어머니의 신주를 정결한 곳에 묻고 자결한 것이 불씨가 된 것이다.

    이에 민족운동과 기독교계의 지도자요, 당시 YMCA총무이던 이상재 선생은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반드시 서양사람이 하는 그대로를 본받는 것이 예수를 진실히 믿는 것이 아니라 하고, 예수의 마음을 조선 형식으로 동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곧 어떤 종교도 조선혼을 물실(勿失)하라 하고 신주를 위해 생명을 끊고 경제활동을 중단하고 길흉화복을 그에 미루어 미신에 빠지는 것을 경계할 따름이지 부모 섬기는 공경심을 예수가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제사옹호론을 폈다. 이에 맞서 나선 사람이 당시 적십자 운동의 공로자요, 종교(宗橋) 감리교회의 양주삼 목사였다.

    제사 모시는 것이 조선혼일 수는 없다 하고 제사는 과학지식이 천박하고 종교사상이 미흡하며 도덕관념이 유치할 때 우러나오는 미신적 풍속이라면서 이상재 씨의 지자천려 필유일실(知者千廬必有一失)이라고 반박했다. 이를 계기로 교회 투석사건이 있었으며 교인과의 통혼거절 등의 수난이 생겨 났었다.

     

     

     
     
     

     

     

    예수를 버릴 수 없어
     
    금란 감리교회 시무하시는 김홍도 목사님의 간증 가운데 이런 간증을 읽을 수 있습니다.
    김 목사님의 가친께서 공무원으로 재직 당시 평안남도 양덕에 근무하셨습니다. 위로 딸 둘을 낳아 기르다가 죽고 세 번째 김 목사님의 형제(김선도 목사)를 낳아 다섯살쯤 되던 해였습니다. 그 동리는 산골이라 해마다 마을 사람들이 소를 잡아 제사를 드리는 풍습이 있었고 그 소를 잡기 위하여 얼마씩 마을 사람들에게 걷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모친에게도 내라고 하여서 그분은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 낼 수 없소."라고 거절하니 모두 큰일 났다고 위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해도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우상 숭배요, 사신 숭배이므로 김 목사 어머님께서는 단연코 거절해 버렸습니다. 며칠 후에 그 귀여운 아들이 갑자기 앓기 시작하는데 하루 밤 사이에 열이 40도로 오르고 눈을 뒤집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날이 밝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산신령께 제사를 드리지 않아 산신령이 노하여 그러는 것이니 이제라도 경을 읽고 굿해야 산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기도를 잘하던 어린 아들이 정신없이 헛소리를 하면서 "엄마. 박옥순 데려다가 경 읽어 줘."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이때 예수를 버리느냐 그렇지 않으면 아들을 버리느냐 하는 막다른 길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 보시라고 하면서 당신 고집부리다가 자식 죽이겠다고 야단입니다. 의사도 왔다가 급성 폐렴인데 시간이 늦었다고 말합니다.
    이때 김 목사님 아버님은 손발이 차갑게 되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아들을 내려보며 "선도야, 너 죽을테면 죽어라. 하나님이 주셨다가 하나님이 데려가시면 할 수 없지.


     너를 잃을지언정 나는 예수를 버릴 수 없다. "라고 말한 후 원산에 올라가 찬 바위를 안고 간절히 "하나님, 나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들을 잃을지언정 믿음을 잃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에 마을 한 노인이 이야기한 것인데 무슨 풀잎을 끓는 물 속에 넣어 그 물로 찜질을 하라고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얼른 내려와 기도하는 마음으로 찜질을 30분쯤 계속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어린 아들이 재치기를 하며 얼굴에 혈색이 돌고 한 시간도 안되어 일어나 밥과 과일을 먹는 것이 아닌가 ? 온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김선도 어머님이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독일의 어느 조각가가 예수의 초상을 볼 마음이 생겨 시작한 지 4년 만에 완성했다. 그는 만족하여 주일학교 학생을 불러서 자기가 조각한 것을 보여 주며, "이것이 누구와 같으냐?"라고 물었다.

     

    학생은 "어떤 유명한 사람과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작업에 들어가 6년 만에 예수의 초상을 조각한 후에 그 학생에게 다시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 학생은 놀라며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라'하신 예수님입니다."라고 하였다. 그제서야 그는 만족하였다. 그 후 이 소식을 들은 프랑스에서 국신(國神)인 비너스 조각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그는 "내 손은 예수를 조각한 거룩한 손이므로 당신 나라의 더러운 신의 초상을 조각할 수 없소."라고 거절하였다.(겔42:20, 고후1:12)

     

     

     

     
     
     

     

     

    강제 결정된 신사참배
     
    1938년 9월, 대한 예수교 장로회에서는 총회를 열고 신사참배 문제를 토의한 끝에 박응률 목사의 찬성 발언에 따라 사회를 보던 총회장 홍택기는 신사에 참배하기로 가결해 버렸다. 이 무렵에 김익두 목사는 서울에서 부흥 집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종로 경찰서에서도 김 목사의 부흥회에 형사대를 파견하여 그의 설교를 책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김 목사의 설교는 목사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어,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생겨날 정도로 은혜스러웠다. 하루는 종로서에서 형사 한 사람이 김 목사를 찾아왔다. 김 목사는 올 것이 왔구나 하고 물었다.

    “나를 연행하러 왔소?”
    “아니, 그게 아니라, 상부의 지시가 있어서요."
    “지시라니요?”
    그러자 형사는 신사참배의 문제를 끄집어내었다.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국민된 도리이니, 교계의 지도자가 이것을 외면해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왜경에 의해 강제로 신사 앞에 끌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신사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상반된 간구
     
    일본의 아사구사에 있는 어떤 절에서 담요를 두른 시골영감이 정성스럽게 부처에게 빌고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저는 자식을 출세시키려고 이곳에 보냈는데 전날 '병이 났으니 돈을 보내라.'는 급보를 받고 아비 된 마음에 농사도 중지하고 이곳에 와 보니 병이란 거짓말이고 아들이 악한 동무를 사귀어 탕자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술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살님이시여, 제 자식을 속히 개과천선케 하여 주옵소서."

    다른 한편에서는 술살이 잔뜩 오른 뚱뚱한 술집 주인이 역시 큰 소리로 빌로 있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 대보살님, 아무쪼록 장사가 번창하여 영업이 잘 되고 손님이 많이 오도록 하여 주십시오.


    만일 이 달 안으로 1천 5백 만 엔을 벌게 해주시면 이 문전에 큰 등을 달아드리겠나이다."
    * 참조: 고전10:7,14, 골3:5, 사41:29, 약2:20

     

     
     
     

     

     

     

    우상을 때려부순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어린 시절에 관한 전설이다.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 파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어린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하나님 앞에 죄짓는 우상장사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우상장사를 하지 않으실까?" 하면서 늘 생각하고 고민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 데라가 아브라함에게 "저 신상들이 상하지 않도록 잘 지켜라."고 부탁하며 출타하였다. 마침 그때 이웃집에서 음식 한 그릇을 가져왔다.

    아브라함은 아버지께서 출타하신 틈을 타고 작고 큰 여러 가지 모양의 우상들이 진열되어 있는 신당에 들어가서, 우상들을 망치로 때려부순 후 그 중에 제일 큰 우상의 손에 망치를 끈으로 꽁꽁 묶어 쥐게 해 놓고는 음식 그릇을 우상의 앞에 갖다 놓았다. 외출했다 돌아온 아버지 데라가 신당에 들어가 보니 신상들이 모두 목이 부러지고 팔, 다리, 허리 등이 꺾어져 있었다. 데라는 놀라고 화가 나서 아브라함을 불러 야단쳤다.

    아브라함은 시치미를 뚝 떼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웃집에서 떡을 가져 왔기에 그 떡을 신상 앞에 두었더니 신상들이 서로 먹겠다고 소동을 부렸는데 결국 제일 크고 힘센 우상이 망치를 들고 다른 신상들을 모두 때려부수고 떡을 차지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 데라는 더욱 화가 나서 "사람이 만들어 놓은 흙덩이 신상이 어떻게 다른 신상을 때려부수고 떡을 먹는단 말이냐?" 하고 호통쳤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겸손하게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그래요, 아버지. 생명도 없는 우상이 어떻게 사람에게 명을 길게 하여 주고, 복을 준다고 하며 속여서 우상을 파십니까? 이제 이런 일은 그만두세요."
    그러자 아버지는 깊이 깨달은 바 있어 우상 만들어 파는 직업을 버렸다. 그리고 가족을 이끌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옮겨갔다.
    * 참조: 창11:27-32, 살전1:9, 고후6:6, 요일5: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편 연구 분류

     

    시편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세가지 기본적인 방법이 있다.

    ①책별 연구 ②저자별 연구③주제별 연구

    1. 책별(각각 송영으로 끝난다)
    1) 제 1 권(시1-41편,창세기에해당)
    (1) 중심이 되는 말 :사람
    (2) 발췌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시 25:12).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시 34:12).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시37:23).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찌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시 37:37).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40:4).

     

    2) 제 2 권(시42-72편,출애굽기에해당)
    (1) 중심이 되는 말 :건짐(해방)
    (2) 발췌
    "환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대저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셨나이다"(시 54:7).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시 56:13).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시 69:14).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시 71:2).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시 72:12).

     

    3) 제 3 권(시73-89편,레위기에해당)
    (1) 중심이 되는 말 :성소
    (2) 발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7).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시 74:7).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이오니이까"(시 77:13).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시 78:69).

     

    4) 제 4 권(시90-106편,민수기에해당)
    (1) 중심이 되는 말 :불안, 방황
    (2) 시편 90편과 106편 참조

     

    5) 제 5 권(시 107-150편,신명기에해당)
    (1) 중심이 되는 말 :하나님의 말씀
    (2) 시편 119편 참조

     

    2. 저자별
    1) 다윗
    (1) 목자의 시 :시8,19,23,29,144편
    (2) 죄인의 시 :시편 32,38,51편
    (3) 고난의 시 :시편 3,4,5,6,7,11,12,13,14,17,22,25,26,27,28,31,34,35,39,40,41,53,54,55,56,57,58,
    59,61,62,63,64,69,70,86,109,140,141,142,143편
    (4) 만족의 시 :시편 9,15,16,18,20,21,24,30,36,37,52,60,65,68,72,101,103,105,108,110,122,124,
    131,133,138,139,145편
    2) 고라 : 시편 42,44,45,46,47,48,49,84,85,87편
    3) 아삽 : 시50,73,74,75,76,77,78,79,80,81,82,83편
    4) 헤만 : 시88편
    5)에단:시89편
    6) 솔로몬 : 시127편
    7)모세:시 90편
    8) 히스기야 : 시120,121,123,125,126,128,129,130,132,134편
    9) 작자 불명 : 시 1,2,10,33,66,67,91,92,93,94,95,96,97,98,99,100,102,104,106,107,111,112,113,
    114,115,116,117,118,119,135,136,137,146,147,148,149,150편

    3. 주제별
    1) 헌신의 시 :시1,4,9,12,13,14,16,17,18,19,22,23,24,27,30,31,33,34,35,37,40,42,43,46,50,55,56,61,
    62,63,66,68,69,71,73,75,76,77,80,81,84,85,88,90,91,94,95,100,103,106,107,111,115,116,118,119,
    122,123,126,133,136,138,139,141,142,144,147,148,149,150편
    2) 참회의 시 :시6,32,38,51,102,130,143편
    3) 저주의 시 :시35,55,58,59,69,83,109,137,140편
    4)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 시 120-134편
    5)할렐루야송 : 시 113-118편
    6)역사시:시 78,105,106편
    7) 두음(-Acrostic)시 : 시 9,10,25,34,37,111,112,119,145편
    8) 메시야 예언시 : 2,8,16,22,23,24,31,34,40,41,45,55,68,69,72,89,102,109,110,118,129편 우리들은 지금부터 시편을 주제별 방식으로 연구할 것이다.

     

    헌신의 시

    앞에 열거한 70편의 시는 "헌신의 시"라는 제목이 붙여져 온 시편들이다. 왜냐하면 이 시편들은 다른 내용들 가운데서도특히 모든 신자들의 음미하여야 할 값진 개인적 약속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시玆湧?다룸에 있어서 때때로 아무런논평없이 약속 그 자체만을 인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다른 경우는 그것에 한 두 마디의 말을 더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이들시편에는 흐느낌과 노래가 있다. 그리고 저자들은 때때로 불평도하고 의심도 하며 부르짖기도 한다. 이들은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내다본다. 다른 저서에서는 보기 힘든 인간의 적나라한 영혼의 소리를 이 시편에서 들을 수 있다.
    1) 시편 4편
    발췌 :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시 4;3).
    "내가평안히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시 4:8).
    명상 :
    다윗의 기도는 그에게 평안과 안식을 가져다 주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특별한 유익중의 하나는 평안이다.
    주 :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 29:11).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로다"(시 119:165).
    2) 시편 9 편
    발췌 :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하리로다"(시 9:17).
    명상 :
    이는 어느날 무서운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참조, 시 116;마25:31-46; 계 14:10;19:20; 20:11-15;21:8).
    3) 시편 13편
    발췌 :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시 13:2).

     

    명상 :
    성서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오해는 성서 인물들 중의 영웅들이 보통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라는 것이다. 그들은 패배의고통을 맛보지도 않고 낙담하지도 않으며 항상 성공을 거두고 거룩하며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였다고 생각한다. 이는 사실과 너무나거리가 먼 이야기다. 사실은 그들 모두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약 5:17)들이다. 그들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패배의쓰라린 고배를 맛보았으며 그들도 때때로 오늘날의 아담의 후손들과 같이 실망에 사로잡혔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러한 낙담의소리가 종종 그들의 기도에 나타난다. 시편 13편의 이렇게 고통 당하는 사람들의 영혼의 간구에 대한 한 실례이다. 다른주목할만한 예는 다음과 같다.
    시편 6:1-7;31:1-14에 있는 다윗의 기도
    시편 77:1-20에 있는 아삽의 기도
    시편 88:1-18에 있는 헤만의 기도
    시편 102:1-11에 있는 무명 저자의 기도
    시편 137:1-6에 바벨론으로 잡혀간 유대인 포로의 기도
    민수기 11:1,12,14,15에 있는 모세의 기도
    여호수아 7:6-9에 있는 여호수아의 기도
    열왕기상 19:4,10,14에 있는 엘리야의 기도
    욥기 3:3-12;10:18-22에 있는 욥의 기도
    예레미야 4:10;20:7-9, 14-18에 있는 예레미야의 기도
    요나 4:1-3에 있는 요나의 기도
    하박국 1:2-4에 있는 하박국의 기도
    시편 42:3-11;44:8-26에 있는 고라의 기도
    4) 시편 14편
    발췌 :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명상 :
    다윗은 여기서 무신론자의 어리석음을 기술했다. 성서적으로 말하면 어리석은 자는 머리에 문제가 있는 자가 아니고 마음에 문제가 있는 자이다. 성서에 있는 다른 부류의 어리석은 자는 다음과 같다.
    (1) 죄를 가볍게 여기는 어리석음(잠 14:9)
    (2) 훈계를 업신여기는 어리석음(잠 15:5)
    (3) 다툼을 일으키는 어리석음(잠 20:3)
    (4) 영광을 구하는 어리석음(삼상 26:12)
    (5) 돈을 사랑하는 어리석음(눅 12:20)
    (6) 그리스도를 높이는 어리석음(고전 4:10,어리석은 자들 중에서 유일한 "현명"한 바보)
    5) 시편 17편
    발췌 :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시 17:8).
    명상 :
    여기서 다윗은 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함에 있어서 두 가지의 온유한 말을 사용하고 있다.
    (1) 눈동자(참조, 신 32:10; 슥 2:8)
    (2) 주의 날개 그늘(참조, 신 32:11,12;36:7;57:1;19:1,4;마 23:27).
    6) 시편 18편
    발췌 :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 내셨도다"(시 18:16).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시 18:19).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 암흑을 밝히시리이다"(시 18:28)
    "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시 18:35).
    명상 :
    시편 18:16에서 저자 다윗은 많은 물에서 건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시편에 있어서 물은 종종 괴로움이나 고통을 상징하는데사용되어 왔다(참조, 시 69:1,2;144:7;사 43:2). 실제로 바로의 딸은 나일강에서 한 아이를 건져내고 무의식 중에하나님의 아이인 그에게 모세-"물에서 건져 니였다"(출 2:10)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윗은 이 시에서 하나님이 많은 물에서자기를 건져내었다고 주장한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사도 요한은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계7:17)라고 기록했다.
    7) 시편 23 편
    발췌 :
    (시23편전체)"여호와는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명상 :
    이 시편은 마태복음 6:9-13의 "주기도"를 제외한다면 아마 역사상 가장 유명한 기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그가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다.
    (1) 그의 영혼이 영적 양식을 필요로 할 때 목자께서 푸른 초장을 제공하신다.
    (2) 그의 영혼이 피로할 때 목자께서는 잔잔한 물을 제공하신다.
    (3) 그의 영혼이 재생을 필요로 할 때 목자께서 그를 소생시켜 주신다.
    (4) 그의 영혼이 안내를 필요로 할 때 목자가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다.
    (5) 그의 영혼이 죽음에 직면할 때 목자께서 그와 동행하여 주신다.
    (6) 그의 영혼이 적을 만날 때 목자께서 그에게 승리의 상을 베풀어 주신다.
    (7) 그의 영혼이 상처를 입을 때 목자께서 기름으로 머리에 발라 주신다.
    (8) 그의 영혼이 동반자를 원할 때 목자께서는 선함과 인자함이 그를 따르도록 정해 주신다.
    (9)다윗이 이 일시적인 지상의 처소를 떠날 때 목자는 영원한 하늘의 처소를 제공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간증은 "내가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을 바벨론의 한 연회석 벽에 벨사살에 대하여 쓴 말과 비교해 볼 때 얼마나 큰 대조를 이루는것인가!
    그 메시지는 마음과 같다.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단 5:26).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단 5:27).
    (10) 여기서 시편의 3부작이라고 알려져 있는 시편 22,23,24편을 비교해 보는 것이 적절한 것같다.

     

    시편 22편(요 10:11)
    1. 선한 목자
    2. 구주
    3. 기초
    4. 죽임을 당하시는 그리스도
    5. 십자가
    6. 그의 생명을 주심
    7. 은총
    시편 23편(히 13:20)
    8. 큰 목자
    9. 만족케 하는 자
    10. 나타나심
    11. 살아있는 그리스도
    12. 위로자
    13. 사랑을 주심
    14. 안내
    시편 24편(벧전 5:4)
    15. 목자장
    16. 주권자
    17. 소망
    18. 재림하시는 그리스도
    19. 면류관
    20. 빛을 주심
    21. 영광

    8) 시편 34편
    발췌 :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복이 있도다"(시 34:6-9).
    명상 : 우리들의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의 세상 자녀들을 돕고 보호하며 권면하기 위하여 사자(천사)를 이용하신다.
    9) 시편 35편
    발췌 :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여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나는 저희가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시 35:11-13).
    명상 :
    이러한 형태의 기도는 참으로 어려운 기도이다. 즉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여 주기를 바라지도 않은 자, 그리고 같은 재난이 당신에게덮치는 것을 더욱 기뻐할 그런 자의 어려움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이러한기도를 하도록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다.
    10) 시편 37편
    발췌 :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찌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찌어다"(시 37:1-3).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뤄 주시리로다"(시 37:4).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시 37:5).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찌어다"(시 37:7)
    "악인이 의인 치기를 괴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시 37:12).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시 37:1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시 37:23).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 37:24).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 37:25).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을 끊어지리로다"(시 37:28).
    명상 :
    이 기도의 시편은 "숭고함을 향하여 올라가는 시" 또는 "좌절(1절)에서 높임(34절)으로 향하는 시"로 불리워져 왔다. 처음 몇 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시편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데는 다섯 개의 발판이 있다.
    불평하지 말라 - 문제의 인식
    의지하라 - 문제에 대하여 응답하실 하나님을 믿음
    기뻐하라 - 문제를 해결할 하나님을 믿음
    맡기라 - 문제를 하나님에게 가지고 감
    안심하라 - 문제 해결을 하나님에게 위탁함
    시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두가지 일에 대하여 비웃었음을 볼 수 있다.
    (1) 하나님의 아들을 왕좌에서 끌어 내리려는 사악한 자들의 행위에 대하여(시 2:2-4).
    (2) 하나님의 성도들을 멸하려는 사악한 자들의 행위에 대하여(시 37:13;59:8)
    시편에서 종종 인생의 짧음을 하나님에게 호소하며 그 값진 인생의 날들을 조물주에게 맡길 수 있게 하여 달라고 부탁하는 기도를 볼 수 있다. 이러한 기도는 이 시편 37편과 다른 시편에 나타나 있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시 31:15).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4).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시 119:84).
    이 시편 37편 23,24,25및 28절은 하나님이 자신의 일꾼들에게 주시는 여러 가지 특별 급여와 하나님의 사회보장제도를 기술하고 있다.
    11) 시편 40편
    발췌 :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 40:1-3).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수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5).
    명상 :
    시편 40편 1-3절은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다. 다음 이야기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여기 어떤 사람이어둡고 더러운 웅덩이에 빠졌다. 그리고 떨어질 때 그의 다리와 팔이 부러졌다. 곧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된 그의 고통에 찬울부짖음이 웅덩이로부터 울려 나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침 공자가 그 곁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는 웅덩이를 내려 다 보며 다음과같이 말했다. "친구여! 내가 당신이 그 웅덩이에서 나오거든 다시는 그런 곳에 빠지지 않도록 길을 걸을 때 조심을 하시오."이렇게 말한 이 중국 철학자는 자기의 길을 걸어갔다.
    얼마후 부처가 그 곳을 지나가다가 이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게되었다. 부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친구여, 당신에게는 도움이 필요하군요. 반쯤만 올라와 보시요 그러면 내가 당신을끌어내겠소. 조금만 올라와서 팔을 나에게 내어 미세요." 그러나 팔 다리가 부러져 피를 흘리고 있는 이 사람은 움직일 수가없었다. 그래서 부처는 가슴 아파하면서도 자기의 길을 걸어가고 말았다. 고통의 감옥에 갇힌 이 사람은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려보았지만 그의 모든 희망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도 그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구원을 부르짖었다. 그때, 만인의 구주께서 사랑과동정심을 가지고 그를 내려다보셨다. 구주께서는 한 마디의 충고나 훈계도 없이 웅덩이 안으로 미끄러져 내려가서 고통 당하고 있는나그네를 그의 힘찬 양어깨에 메고 웅덩이를 올라오셨다. 그리고 구주께서는 나그네의 부러진 뼈를 다시 맞추어 주고 그의 발끝을하늘로 향하게 하여 한 노래를 그 마음에 심어 주셨다. 이것이 "구원"이다.
    시편 40편 5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그에게베풀어주신 놀라운 역사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생각"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보배로운진리가 담긴 다른 성서 구절로는 시편 92:5; 139:17-18; 예레미야 29:11을 참조하라.
    12) 시편 42편
    발췌 :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담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 참조, 42:11;43:5).
    명상 :
    앞에 있는 세 가지의 성서 구절이 여기에 발췌된 것은 특별히 그 말씀이 반복되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문하는것은 좋지만 자문자답하는 것은 좋이 않다고 농담조의 말을 한다. 그러나 이 말은 고라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고라는자문자답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혼에 대한 자기 확신은 좋은 습관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자기자신을 타이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위로하기도 하는 것은 도움이 되는 일이다.
    13) 시편 46편
    발췌 :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 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시 46:1-3).
    "이방이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피난처시로다(셀라)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찌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시 46:6-9).
    명상 :
    이는 마지막 무서운 대환난 때에 적 그리스도를 피하여페트라(Petra)에 숨었다가 살아 남은 공포에 질린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이 좋아하는 시편이 될 것이다(참조, 사26:19-20;계 6:12-14;특히 유의할 성구, 마 24:15-16;계 12:14).
    14) 시편 50편
    발췌 :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네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시 50:5).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사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감사로 하나님께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시 50:10-14).
    명상 :
    히브리 부족의 신이 사람을돕기보다는 유혈이 낭자한 제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 하며 구약성서를 비판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그러나 아삽은 이 시편에서하나님께서 제물보다는 인간 영혼에 더 관심을 두신다고 말함으로써 도끼로 자르듯이 거짓 비난을 일축하고 있다. 헌신하는 마음을불사르는 것은 피흘리는 짐승보다 하나님에게 훨씬 더 값진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놋 제단(번제단)이아니고 심중에 있는 마음의 제단이다. 모세는 약 4세기전에이와같은값지고 위대한 원리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킨 바있다(참조, 신 10:12-16).
    15) 시편 56편
    발췌 :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 56:8).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시 56:13).
    명상 :
    여기 시편 56:8에 있는 감미로운 말씀은 낙담한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말씀이다. 다윗은 하나님에게 그의 눈물을 담아보관하여 주기를 간구했다. 저자는 한 때 개인적으로 성서를 연구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인간이 흘린 눈물의 흔적을 추적해 본 일이있다. 그 결과를 통하여 이 비탄에 찬 영혼의 눈물 바다가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성서의 각 책에서 흘려진 눈물로 점점 불어나마침내 요한계시록에 가서 그 절정에 도달했음을 알게 되었다.
    신자가 처음 울음을 터뜨렸던 예는 아브라함이 헤브론의 어느 한 쓸쓸하고 삭막한 굴에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장자 지낼 때 눈물을 흘린 경우였다(참조, 창 23:2).
    이 눈물 방울에 계속적으로 요셉을 위한 야곱의 눈물이 더해지고(창 37:35). 미리암을 위한 모세의 눈물이(민 12:13),아들을 위한 한나의 눈물이(삼상 1:10), 사울을 위한 사무엘의 눈물이(삼상 15:11,35). 압살롬을 위한 다윗의눈물(삼하 18:33)이 더해져서 마침내 하나의 강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 즘 이 눈물의 강은 급류가 되어 흐르기 시작했지만그러나 그 눈물의 강은 아직도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히스기야는 자신을 위하여 울었고(왕하 20:2,3). 느헤미아는 예루살렘을위하여(느 1:4). 한 아버지가 그의 어린 딸을 위하여(막 5:39), 그리고 두 자매가 죽은 오빠를 위하여 울었다(요11장).
    이제이급류는가장 보배로운 우리 구주의 눈물까지 보태어 걷잡을 수 없는 강물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위하여 우셨고(요 11:35),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다(눅 19:41).
    그러나 마지막 요한계시록에 가서 이 불어나기만 하던 눈물의 바다는 극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마지막으로 신자가울었던 예는 요한계시록 5:5에 있다. 결국에 가서 하나님은 몸소 모든 눈물자국을 씻기신다(계 21:4).
    16) 시편 63편
    발췌 :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시 63:6).
    명상 :
    이 시편에서 우리는 다윗이 하루에 여러번 기도한 것을 알 수 있다. 특별히 그는 시편 60:6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요한 밤중에 그의 목자를 찾은 기쁨을 누렸다. 밤중에 하나님을 향한 그의 메시지들을 숙고해 보자.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시 4:4).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 나를 감찰하셨으나…"(시 17:3).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시 42:8).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마음에 묵상하며…"(시 77:6).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시 92:3).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시 119:55).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저희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찌어다"(시 149:5).
    17) 시편 66편
    발췌 :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명상 :
    이 기도의 절대 원리는 성서 전반에 걸쳐 언급되어 있고 성도나 죄인에게 다 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가 고백한모든 죄를 사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궁색한 변명은 절대로 덮어 주지 않는다(참조, 잠 15:29;28:9;사1:15;59:1,2;요 9:31;약 4:3).
    18) 시편 68편
    발췌 :
    "하나님의 병차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같도다"(시 68:17).
    명상 :
    시편 68:17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고 계수했다. 이 추정은 다니엘 7:10, 마태복음 26:53 그리고요한계시록5:11등의 여러 성서 구절들에 의해서 더욱 확실하여진다. 약 5세기이후에한비탄에잠긴 선지자가 바로 얼마전 바벨론의침략으로 멸망 당한 예루살렘의 폐허 가운데 가독하게 앉아 있었다. 아마 이 선지자는 그 폐허 가운데 앉아 이 시편 68:19의다윗의 간증을 회상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선지자는 이전에 있었던 다윗의 간증에 근거하여 가슴찌르는 다음과 같은 간증을 기록했다.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 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 3:21-23).
    19) 시편 69편
    발췌 :
    "여호와여 열납하시는 때에 나는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시 69:13).
    명상 :
    이 열납의 때는 언제인가? 어느 주일학교 선생이 자기 반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여러분,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준비를 하기에 가장 좋은 때는 그 사람이 죽기 바로 전 날입니다." 처음에 학생들은 이 말을 옳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때 한어린 소년이 손을 번쩍 들고 이렇게 외쳤다. "선생님, 그러나 그 사람이 자기가 죽기 24시간 전에 자기가 죽을 것을 모를 수도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가 어떻게 해야 되지요?" 이에 대하여 선생은 현명한 대답을 했다. "그렇구나, 그러면 그 사람이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데 두 번째로 가장 좋은 때는 바로 오늘이겠구나!" 가장 중요한 성서적 신학 개념의 하나는 오늘이라는현재 시제의 교리이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것을 원하신다.
    (1) 죄인이 오늘 그의 상한 심정을 그리스도에게 맡기기를 바라신다(고후 6:2).
    (2) 성도가 그의 몸을 오늘 그리스도에게 바치기를 원하신다(롬 6:19;12:1-3;히 3:7,13,15).
    이처럼 모든 것을 서두르는 명백한 이유는 잠언 27:1; 야고보서 4:13-15에서 찾아 볼 수 있다.
    20) 시편 71편
    발췌 :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시 71:5).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시 71:9).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 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시 71:17).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 71:18).
    명상 :
    이 시편은 "노인의 시"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신자에게 주어진 가장 큰 "특별한 축복" 중의 하나는 노년기에 그리스도를닮는 영광스러운 목표에 더욱 가깝게 가는 것이다. 이는 젊음과 두뇌와 체력 그리고 외모가 절대적 요소인 분야, 곧 불행히도늙어서 이 모든 것을 소유하지 못한 자는 잔혹하고도 무자비하게 배척당하는 스포츠계나 다른 직업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세상적목표와는 완전히 다른 목표이다(참조, 시 25:7;37:25;전 11:9,10;12:1).
    21)시편 73편
    발췌 :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시 73:2).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시 73:3).
    "타인과 같이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시 73:5).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시 73:7).
    "볼찌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시 73:12).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시 73:13).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시 73:14).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시73:16-19).
    명상 :
    아삽은 여기서 오랫동안 수없이 신자들을 괴롭혀 온 한가지 질문을 했다. 그것은 왜악한 자가 흥하고 의로운 자가 고통을 당하느냐는 질문이다. 나사로는 몰인정하고 분별 없는 한 백만장자의 문전에서 누더기 옷을걸치고 굶주린 상태에서 그리고 헌데를 앓으며 앉아 이러한 문제를 심사숙고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무엘도 오만한 사울을 피해도망다니는 기름부은 다윗을 바라보며 이러한 생각으로 고통 당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몇 년 전에 한 농민 잡지의 편집자가자기는 아직 경건한 신앙 생활은 하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엿새 동안을 일하고 일곱째 날은 쉬라고 한 성서 계명의 지혜만은 지키고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쓴 일이 있었다. 그 기사가 실린 잡지가 발간된 후 곧 한 농부가 그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그 기사가엉터리 기사라고 꼬집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그 농부는 매년 일요일날 곡식을 심고, 일요일날 그것을 돌보고 또 일요일 날그것을 수확했던 자기의 경험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 농부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편지를 끝맺었다. "이제여기는 벌써 10월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금년에 저는 일요일에 일하지 아니한 소위 기독교인이라는 나의 친구 농부들보다 더 많은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편지를 받은 그 편집인은 다음과 같은 야무진 회답을 써서 그 농민 잡지의 다음 호에 실어발간했다.
    "농부 귀하, 하나님은 10월에 자신의 모든 계산을 끝낸 것은 아니올시다!"
    22). 시편 75편
    발췌 :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75:6,7).
    명상 :
    아마 모든 역사를 통해서 바벨론의 군주 느브갓네살만큼 이 말씀의 놀라운 정확도를 증명해 보인 왕은 없을 것이다. 그는 꿈에서 한큰 나무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베임을 당하는 것을 보았다. 다니엘은 그 꿈을 오만한 통치자 느브갓네살 왕이 스스로겸비하여지라는 하나님의 경고임을 올바르게 예언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왕위를 탈취당하게 될 것임을 예언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일어날 뿐만 아니라 그가 7년동안 정신이상으로 고통당하리라는 것도 예언해 주었다. 그러나 오만한 왕은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을경배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채찍을 맞았다(단 4:29-37).
    23) 시편 76편
    발췌 :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명상 :
    여기 아삽이 기동한 내용을 증명하는 성서적 실례는 너무나 많다. 그 몇 가지 실례를 살펴보자.
    (1) 에서의 분노는 야곱으로 하여금 먼 곳으로 도망가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라헬을 만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창 27:4-45;29:10).
    (2) 요셉의 열 한 형제의 분노는 그를 노에로 애굽에 끌려가도록 했다. 그러나 요셉은 후에 총리가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창 37:23-28;41:38-44).
    후에 요셉은 다음과 같은 그의 형제들에게 상기시킨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 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3) 한 모압 왕이 성을 내어 한 선지자를 고용하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였지만, 이는 결국 그리스도에 관하여 아름다운 예언을 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였다(민 22:1-6;24:17).
    (4) 하만의 노여움은 교수대를 세우고 한 유대인을 매어 달려고 하였지만, 하만 자신이 그 교수대에 매어달려 죽음으로써 그 유대인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에 5:12-14;7:10).
    (5) 한 이스라엘 왕의 노여움으로 하나님의 책이 불태워졌으나, 그 책은 왕의 운명에 대한 예언까지 포함하여 다시 기록됨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였다(렘 36:22,23,27-32).
    (6) 바리새인들의 분노가 그리스도를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게 했지만, 이로 인하여 죽어가던 강도가 구원받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눅 23:39-43).
    (7) 로마 황제의 노여움이 사도 요한으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를 외로운 고도로 추방했지만, 이로 인하여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케 됨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계 1:9).
    24) 시편 80편
    발췌 :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를 좌정하신 자여 빛을 비취소서"(시 80:1).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시 80:8).
    명상 :
    여기에 그룹에 대하여 언급한 말씀이 있다. 지성소 안에 놓여진 언약궤의 속죄소 위에 서 있는 약 15피트높이의두금그룹상은 실재의 존재를 대리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룹에 대해서는 성서에 64번 가량 언급되어 있다.
    (1) 모세와 솔로몬이 다 같이 그룹을 지성소에 두었다(출 25:18;왕상 6:27).
    (2) 하나님이 그룹 사이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민 7:89).
    (3) 히스기야가 그룹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기도했다(왕하 19:15).
    (4) 에스겔이 나르는 데 그룹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겔10장).
    (5)천년왕국의성전은 그룹들로 특정지워진다(겔 41:17-20).
    앞에서 언급한 그룹에 관한 것을 제외한다면 아삽의 이 기도의 시편은 "시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포도나무는 성서에서 종종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어 왔다. 아삽이 이 포도나무에 대해서 말한것에 유의하여 보자.
    (6) 하나님은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오셨다(시 80:8).
    (7)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신 땅에 이 포도나무를 심으셨다(시 80:8).
    (8) 하나님은 이 포도나무를 위하여 땅을 말끔하게 손질하고 기경했다(시 80:9).
    (9) 포도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얼마동안 성장했다(시 80:9).
    (10) 포도나무는 산들을 가리우고 백향목과 같이 높게 자라났다(시 80:10).
    (11) 그 가지가 대해와 유브라데강까지 뻗어나갔다(시 80:11).
    (12)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이 포도나무를 보호하는 담을 헐어버리셨다(시 80:12).
    (13) 다른 사람이 그 포도나무의 열매를 약탈했다(시 80:12).
    (14) 산돼지가 그 포도나무를 상해하고 들짐승들이 포도를 따먹었다(시 80:13).
    (15) 마침내 적들이 그 포도나무를 찍어 불태웠다(시 80:16).
    왜 하나님께서 자신의 포도나무를 이렇게 취급하셨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 분명하다(참조, 사 5:1-4;렘2:21;호 10:1). 하나님은 이 선택받은 포도나무가 많은 열매를 맺어 주위에 있는 굶주린 나라들을 먹일 수 있게 되기를바라셨다. 그러나 이 포도나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때가 차매 하나님은 이 사악하고 쓸모없는 들포도나무를 버리셨다.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사악한 바리새인들을 향한 한 강론에서 비통한 마음으로 이러한 거부의 뜻을 엄숙하게 천명하셨다. 예수님은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이받으리라"(마 21:43).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그분은 하나님의 축복받은 포도나무였으며(사 53:2). 이적과비유와 기도 그리고 설교들을 통해서 좋은 열매를 많이 맺으셨다. 그러나 그후, 때가 되어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는포도나무가 되어 아버지의 하늘 포도밭으로 다시 올라가셨다. 그러면 이제 누가 이 지상에서 아버지의 포도 열매를 맺을 것인가? 이감동적인 계획은 요한복음 15:1-8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상세히 제시되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스라엘이 하지 못한 일을해야 되는데 그것은 열매를 맺고 더욱 더 많이 맺는 일이다. 이러한 일은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기도),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우리 안에 거하도록(성경공부) 함으로써만 가능해진다. 그분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다. 가지가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은 열매를맺기 위한 것이다. 가지는 열매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맺기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다. 포도나무가지는 건물을 짓는 데나 가구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땔감으로 사용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열매를맺고 그 열매를 나누어주기 위해서 존재한다.
    25) 시편 81편
    발췌 :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의 강퍅한대로 버려두어 그 임의 대로 행케 하였도다 내 백성이 나를 청종하며 이스라엘이 내 도행하기를 원하노라 그리하면 내가 속히 저희 원수를 제어하며 내 손을 돌려 저희 대적을 치리니"(시 81:10-14).
    명상 :
    거의 10세기가 지난 후 배척당하신 이스라엘의 구주가 감람산에 올라서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며 이와 유사한 말씀을 강력하게 선포하신다(참조, 마 23:37-39).
    26) 시편 84편
    발췌 :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84:5-7).
    명상 :
    시편 84:7은 힘을 얻어 나아감을 말하고 있다. 힘은 기도와성화(Sanctfication)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성서적 단어이다. 사람의 내적 힘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힘의 대조적인면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씀에 유의해 보자.
    사람의 힘
    "내 힘이 말라 질르릇 조각 같고…"(시 22:15).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시 31:10).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단 10:8).
    하나님의 힘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 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28-31).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참조, 시 27:1;28:7;29:11;43:2;46:1:81:1;118:14;119:28;빌 4:13;벧전5:10;엡 3:16;롬 5:6;딤후 4:17;고후 12:9).
    27) 시편 85편
    발췌 :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시 85:6).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대저 그 버성,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저희는 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말지로다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이에 영광이 우리 땅에거하리이다"(시 85:8-9).
    "긍휼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시 85:10).
    명상 :
    아마 이 시편 85:6에 표현된 바와 같은, 부흥을 위한 기도만큼 하나님의 귀를 기쁘시게 하는 기도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자녀들만이 부흥될 수 있다. 죄인들은 부흥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죽음에서 부활되어야 한다. 죽은 자는 부흥될 수없다. 산사람만 부흥될 수 있으며 또 부흥되어야 한다. 후에 하박국은 자신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위하여 이와 비슷한 기도를 한다."…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3:2). 교회 역사를 통해서 수백만의 신도들에게 증거된 바와 같이 하나님은 부흥을 위한 영혼의 기도에 속히 응답하려고 하신다.그러나 시편 85:8하반절의 몇 마디말로 고라가 암시한 것처럼 부흥을 위한 참된 소원은 먼저 부흥을 필요로 했던 바로 그 죄의상태를 과감히 떨쳐버리는 결심이 수반되어야 한다.
    성서에는 부흥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다. 그 모든 부흥은 기도나 성경공부 둘 중 하나, 그렇지 않으면 이 두 가지 방법 모두를 통해서 촉진되어졌다.
    다음과 같은 성서적 개혁과 부흥을 숙고하자.
    (1) 야곱을 통하여(창 35:2-4)
    (2) 모세를 통하여(출 14:31-15:21)
    (3) 다윗을 통하여(대상 15:25-28;16:1-43;29:10-25)
    (4) 솔로몬을 통하여(대하 7:4-11)
    (5) 엘리야를 통하여(왕상 18:21-41)
    (6) 아사를 통하여(왕상 15:11-15)
    (7) 예후를 통하여(왕하 10:15-28)
    (8) 여호야다를 통하여(왕하 11:17-20)
    (9) 요시야를 통하여(왕하 22,23장)
    (10)여호사밧을 통하여(대하 20장)
    (11)히스기야를통하여(대하 29-31장)
    (12)므낫세를 통하여(대하 33:11-20)
    (13) 에스라를 통하여(스 9,10장)
    (14)느헤미야를 통하여(느 13장)
    (15)요나를통하여(욘 3장)
    (16)에스더를통하여(에 9:17-22)
    (17) 세례 요한을 통하여(눅 3:2-18)
    (18) 구주를 통하여(요 4:28-42)
    (19) 빌립을 통하여(행 8:5-12)
    (20) 베드로를 통하여(행 9:32-35;2:1-47)
    (21) 바울을 통하여(행 13:14-52;17:10-12;18:8;19:18)
    기도의 놀라운 능력을 시편 85:10에서 볼 수 있다. 여기에 상호 대립적인 두 짝이 있다. 즉 긍휼과 진리, 그리고 공의와화평이다. 긍휼이 죄인을 보고 "용서해 줍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리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주장한다. 화평이 죄인의괴로워하는 영혼을 보고 그 괴로움을 달래려고 한다. 그러나 공의는 "죄를 지은 영혼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런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화해의 길을 찾아낸다. 이로써 대립되는 이 두짝은 화해를 하게되고 서로 입을 맞춘다.
    28) 시편 88편
    발췌 :
    "대저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웠사오니"(시 88:3).
    명상 :
    이 시편은 성서 전반에 걸쳐 가장 암담하고 낙담에 찬 기도이다. 한줄기 희망의 빛도 보이지 않는다.
    29) 시편 90편
    발췌 :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다.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명상 :
    이 시편은 "죽음의 시" 또는 "첫째 아담의 시"로 불리워져 왔다. 이 시편은 모세가 쓴 것이다. 인간의 수명이 평균 70세라고한 10절의 말씀에 유의해 보라. 이는 창세기 5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 원시 족장들의 나이에 비하면 한개의 물방울과 같이 비참한것이다. 그러나 첫째 아담이 발견한 것처럼 죄의 가장 쓴 열매는 육체적 죽음이다. 이러한 배경을 토대로 해서 인간의 유일한논리적 결론이 시편 90:12에 언급되어 있다. 죄인은 오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이것이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신자는 돈을 아껴 쓰도록 권고받은 것처럼 주어진 날들을 지혜롭게 보내야 한다. 실제로 낭비해버린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때문에 돈을 아끼는 것보다 시간을 더 아껴야 한다.
    30) 시편 91편
    발췌 :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시 91:1).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시 91:11).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시 91:12).
    명상 :
    이 시편은 "생명의 시" 또는 "둘째 아담의 시"로 알려져 왔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그아들에 대하여 아버지되신 하나님이 능력으로 역사하심을 기술한 최초의 말씀이다. 시편 91:11에 "사자들을 명하사…너를 지키게하겠다"고 언급되어 있다.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사자가 주님을 섬긴 기록들에 대하여 유의해 보자.
    (1) 주님께 경배했다(히 1:6)
    (2) 주님의 탄생을 알렸다(눅 1:26-38;2:8-14;마 1:20-23).
    (3) 예수님을 섬겼다.
    ① 광야에서(마 4:11)
    ② 감람산에서(눅 22:43)
    (4) 무덤의 돌을 굴려 내었다(마 28:2)
    (5)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렸다(마 28:6).
    (6) 승천 시에 함께 했다(행 1:10-11).
    (7) 재림 시에 그분을 수행할 것이다(살후 1:7-8).
    예수께서 무서운 시험을 받을 때 사탄은 시편 91:11의 말씀을 인용했다(마 4:6). 셰익스피어가 "마귀가 성서를 인용한다"고 한 말은 옳은 말이다.
    31) 시편 94편
    발췌 :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시 94:18),
    명상 :
    이 성서 구절은 시편의 다른 성서 구절들과 같이 신자의 영원한 안전에 관한 것을 가르쳐 준다. 이 성서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자기들의 고귀한 생명을 위하여 필사적으로 "매달리는"것을 기술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연약한 손이 하나님의 강하신 손에 안전하게잡혀진 것을 묘사하고 있다(참조, 시 37:23-24).
    32) 시편 100편
    발췌 :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찌어다"(시 100:1).
    명상 :
    이 시편은 "백번째의 옛 시"로 알려져 왔으며 그 아름다운 문체와 내용으로 시편 23편과 대등한 자리에 올려 놓을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시편이다.
    33) 시편 103편
    발췌 :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시 103:1).
    명상 :
    이 시편은 아마 지금까지 작시된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시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장대하고 훌륭한 시일 것이다. 이 시편에서다윗의 열정이 그 절정에 이른다. 그가 도달한 곳은 더욱 높은 곳이며 그의 생각은 더욱 깊고 그의 노래는 한층 더 감미롭다.그리고 그의 마음은 성서에서 하나님을 송축한 다른 어떤 기도보다도 더욱 큰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34) 시편 107편
    발췌 :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사람이 암흑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시 107:9,10,29).
    명상 :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이 성서 말씀을 문자 그대로 그리고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성취하셨다.
    (1) 시편 107:9-10의 말씀을 마태복음 4:16과 히브리서 2:14-15에서 성취하셨다.
    (2) 시편 107:29의 말씀을 마태복음 8:26에서 성취하셨다.
    35) 시편 111편
    발췌 :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시 111:10).
    명상 :
    성서에 있어서 "경외"란 말은-특히 이 말이 100번 이상 사용된 시편에 있어서-기도 및 찬송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경외라는 이 특별한 말은 공포라는 뜻보다는 존경의 뜻을 더 강하게 나타낸다. 거룩함과 유사한 의미에 속하는 이 경외하는 마음은오늘날의 세상에서는 분명히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다. 바울은 인간의 악함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8). 하나님과의 교제 및 기도와 관련시켜 사용된 경외란 말의 용도에 유의해 보자.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신 10:12).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수 24:14).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시 2:11).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시 5:7).
    "그 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말 3:16).
    36) 시편 118편
    발췌 :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 118:18,23,24).
    명상 :
    욥의 인생과 경험은 시편 118:18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주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편 118:23,24의 말씀은로마서 8:28에 근거하여 모든 신자들이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말씀이며 이러한 주장은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식 날에도 적용될수 있는 말씀이다.
    37) 시편 119편
    발췌 :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시 119:75).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시 119:89).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시 119:99).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5).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
    명상 :
    이제 우리는 가장 긴 시편을 감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편은 성서에서 가장 긴 기도이다. 이 기도의 유일한 주제는 하나님의말씀이다. 176절중 5절만 제외한 모든 절에 이 주제가 언급되어 있다. 시편기자는 이 시편 119편에서 성서에 아홉 개의명칭을 붙이고 성서의 사역이 열 두 가지임을 밝히고 있다.
    (1) 아홉가지 제목
    ① 하나님의 법(1절)
    ② 하나님의 증거(2절)
    ③ 하나님의 도(3절)
    ④ 하나님의 법도(4절)
    ⑤ 하나님의 율례(5절)
    ⑥ 하나님의 계명(6절)
    ⑦ 하나님이 의로운 판단(7절)
    ⑧ 하나님의 말씀(9절)
    ⑨ 하나님의 규례(91절)
    (2) 열 두 가지 사역
    ① 깨끗케 함(9절)
    ② 소성케 함(25절)
    ③ 강하게 함(28절)
    ④ 세우심(38절)
    ⑤ 방어케 함(42절)
    ⑥ 위로함(50절)
    ⑦ 지혜롭게 함(98,99절)
    ⑧ 밝혀줌(105절)
    ⑨ 확신케 함(114절)
    ⑩ 격려함(116절)
    ⑪ 평안을 가져다 줌(165절)
    ⑫ 건지심(170절)
    시편 119:11에 관하여 : 무디(D,L. Moody)는 "성서가 성도를 죄와 분리시킨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성도를 성서와 멀리하게 한다"고 말했다.
    시편 119:71에 관하여 :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말씀을 배우게 하기 위하여 때때로 고난을 당하게 하신다고 언급되어있다(참조, 시 94:12). 시편 119:75에 관하여 :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씀에 의하여 히브리 12:5-15의 말씀을기록했을 것이다.
    시편 119:89에 관하여 : 우리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일이 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참조, 마 5:18;벧전 1:23,25).
    시편 119:99에 관하여 : 이 시편 기자는 자기의 두뇌의 명석함을 과대 평가한 것도 아니고 모든 교사들의 가르침을 과소 평가한것도 아니다. 그는 다만 그의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있어서 다른 모든 현인의 가르침이나 인간적인 자문을 따르는것보다는 성서를 연구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매우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 교사도 때때로 다른신도에게 잘못된 충고를 하는 수가 있다. 이러한 예는 성전건축을 위한 다윗의 계획을 처음에 나단 선지자가 지지한 사실에서 찾아볼수 있다(참조, 대상 17:1-4). 사도 요한이 그의 첫번째 서신에서 이에 관한 것을 언급했다(요일 2:27).
    시편119:105에 관하여 : 사탄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빛을 발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과 사탄의 빛에는 차이가 있다.하나님의 빛은 사람의 발에 비추워 길을 밝히 보게 하지만 사탄의 빛은 사람의 눈에다 비추워 오히려 눈을 멀게 한다. 이에 관해서바울은 후에 이렇게 언명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추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참조, 시 97:11).
    시편 119:130에 관하여 :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우둔한 자의 마음에 축복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현명한 신자에게도도전을 줄 수 있는 심오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어린아이를 위한 우유도 될 수 있고 어른을 위한 고기도 될수 있다.
    38) 시편 123편
    발췌 :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 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시 123:1-2).
    명상 :
    모든 사람의 평등을 옹호하는 서양문명(문서상으로나마)의 영향 아래 살아온 사람이 이 시편에 기록된 시편 123:1-2의 말씀을읽을 경우, 그는 동양 사회의 주인과 종의 관계에 존재하는 절대 복종과 충성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못하고 희미하게 납득하는 정도가 될 것이다. 종이 주인의 면전에 있을 때에는 그의 시선이 주인의 손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고전해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종은 주인의 간단한 손짓만 보고도 즉각적으로 주인이 원하는 모든 행동을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종의시선과 주인의 손짓으로 이루어지는 섬김은 여자 주인과 그의 종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시편 32:8-9에 있는 다윗에대한 하나님의 말씀에도 분명히 이런 뜻이 담겨져 있는 것 같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찌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바울은 로마서 1:1에서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했다. 이는 분명히 하나님을 위한 위대한 사역을 은밀히 강조하는것임에 틀림없다.
    39) 시편 136편
    발췌 :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명상 :
    이것은 성서에서 인자가 가장 많이 반복된 시편이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말이 각 절마다 한번씩 모두 26번이나 나타나 있다. 인자하심이 주된 내용으로 되어 있는 성서의 다른 기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야곱의 기도(창 32:10).
    (2) 아브라함의 종의 기도(창 24:27)
    (3) 모세의 기도(출 15:13).
    (4) 다윗의 기도(삼하 22:26;24:14)
    (5) 남은 자의 기도(느 9:19)
    (6) 요나의 기도(욘 4:2)
    (7) 세리의 기도(눅 18:13)
    (8) 다른 시편들(시 25:6;40:11;51:1;69:16;79:8;103:4;119:77,156;145:9)
    40) 시편 139편
    발췌 :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시 139:1).
    명상 :
    다윗은 이 시편에서 성서의 다른 어느 기도에서 보다도 더 많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1) 하나님은 그가 앉고 일어섬을 아신다(시 139:2).
    (2) 하나님은 그의 모든 생각을 아신다(시 139:2).
    (3) 하나님은 그의 모든 습관을 아신다(시 139:3).
    (4) 하나님은 그의 모든 말을 알고 계신다(시 139:4).
    (5) 하나님은 그의 행동거지를 모두 알고 계신다(시 139:5).
    (6) 하나님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그를 아셨다(시 139:16).
    이러한 놀라운 지혜로 말미암아 그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에게 감사했다.
    (7) 자기를 창조하심에 대하여(시 139:13-16).
    (8) 자기를 보호하심에 대하여
    ① 하늘에 올라갈지라도(시 139:8)
    ② 음부에 내려갈지라도(시 139:8)
    ③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시 139:9)
    ④ 흑암의 밤으로 자신을 덮을지라도(시 139:11-12)
    (9) 자기를 생각하여 주심에 대하여(시 139:17-18)

    참회의 시(시 6,32,38,51,102,130,143편)

    참회의 시편 일곱편 중 다섯 편을 다윗이 기록했다. 그가 기록한 참회의 시편은 시편 6,32,38,51, 및 143편인데, 여기서는 시편 32,38 및 51편만 고찰해 보기로 한다.
    1) 시편 32편
    이 시편은 시편 51편과 관련시켜 보아야 할 것이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간음과 살인 죄(삼하11장)를고백할때의그의 심정을묘사한 것임에 반하여, 이 시편은 그러한 고백을 하기 전, 아직도 무서운 죄의 짐이 그를 무겁게 억누르고 있을 때의 느낌을묘사한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롬 4:7,8)에서 성서의 중요한 교리 중 하나인 전가에 대한 교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 시편의첫두절을 인용했다. 전가란 어떤 사람이 무슨 일을 다른 사람에게 더하는 행위를 말한다. 성서에는 세 가지의 중요한 전가가 있다.
    (1) 아담의 죄의 본성이 인류에게 전가됨(롬 3:23;5:12)(2)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됨(사 53:5-6;히 2:9;고후 5:14-21;벧전 2:24)
    (3)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죄인들에게 전가됨(빌 3:9;약 2:23;롬 4:6-24).
    2) 시편 51편
    우리는 이미 다윗이 이 시편을 쓴 배경을 살펴보았다.
    (1)다윗은, 모든 범죄한 성도들이 자기의 죄를 자유롭게 고백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위대한 고백의 시를 쓰기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눈물을 받으시지만 우리의 변명을 용납하시지는 않는다. 다윗은 그의 잘못을 사회나 전통이나가난이나 환경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2) 시편 51:4에서 그는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실제적인 의미에 있어서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다윗은 그 자신, 우리아, 밧세바, 그리고 그를 경애하는 왕으로 우러러 보았던모든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범죄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지은 그의 죄가 너무나 심각하고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죄는그것에 가리워지고 만 것이다. 바울은 시편 51:4의 끝부분을 인류의 보편적 정죄를 증명하기 위하여 인용했다(롬 3:4).
    (3) 시편 51:7에서 다윗은 우슬초로 정결케 되기를 원했다. 아미 이 때 다윗의 마음은 약 5세기전이스라엘민족의 첫 유월절 밤으로 거슬러 올라갔던 것 같다. 분명히 그는 이에 대한 기록을 여러번 읽었을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너희는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것임이니라"(출 12:21-23).
    그리하여 하나님은 다윗을 정결케 하셨다. 후에 다윗의 위대한 후손이 세계 도처에 있는 모든 믿는 자를 위하여 이러한 사역을 행하신다. 히브리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하반절).
    다윗은 이 역사를 통하여 자신이 눈보다 더 희게 되기를 원했다. 약 3세기후에하나님은죄많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하실 때에 다윗의말을 사용하신다.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눈과 같이 희어 질 것이요…"(사1:18).
    (4) 그러나 시편 51:11에서 다윗은 오늘날의 신자들이 요구할 필요도 없고또 요구해서도 안되는 기도를 한다. 인간이 지은 죄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재하는 성령을 잃어버릴까 스스로 염려할 필요가없다. 다락방에서 우리 주님은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14:16).
    (5)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언젠가 시편 51:12에 있는 다윗의 기도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에베소 교회의 온 교인들은 이러한 기도를 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리라"(계 2:4).
    이러한 기쁨과 처음 사랑이 회복될 때 진정 시편 51:13에 언급한 바와 같은 죄인의 회개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6)죄를 자복한 이 시편은 많은 값진 진리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진리를 시편 51:16-17에서 찾아볼 수있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즉 간음죄에 대한 희생 제물은 없다. 간음죄를 범한 자는 다만 끌려 나와 돌로 죽임을 당하는길밖에 없었다(레 20:10). 그래서 다윗은 레위기의 제사를 드리지 않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에 내어맡긴다.
    3) 시편 38편
    이 시편은 다른 이유가 아닌 바로 절대적인 솔직함이라는 이유 때문에 성서 중에 가장주목할만한 말씀들 중의 한 대목으로 평가받을 수 있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가련한 기도자는 원하기만 하면 성서가 기록되어지는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기록할 능력이 있다고 해서 기록되어지는 것도 아닌 유일한 책임을 입증한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아름다운노래를 부르는 자,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자인 다윗이 있다. 그러나 이 기도의 언어들을자세히 살펴보면 다윗이 종종 부도덕한 생활과 행위를 수반되는 질병으로 괴로움을 당하였을 충격적인 가능성을 배제할 괴로움을당하였을 충격적인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게 된다(시 51:3-11).

    저주의 시(시 35,55,58,59,69,83,109,137,140편).

    1. 이 시편의 정의
    저주의 시편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재앙이나 불행이 내려지기를 비는 기도의 시이다.
    2. 이 시편에 나타난 저주의 사실들
    이 시편에는 시편기자가 그의 적들에게 심판이 내려지기를 비는 많은 예가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이렇게 빌었다.
    1) 하나님이 적들과 싸워 주시기를 (시 35:1)
    2) 하나님이 적들을 혼란에 빠뜨리시기를(시 35:4)
    3) 하나님이 적들을 바람 앞에 겨와 같이 흩으시기를(시 35:5)
    4) 하나님이 사자로 하여금 적들을 추격케 하여 몰아 내어 주실 것을(시 35:5)
    5) 하나님이 적들의 길을 어둡게 하고 미끄럽게 하시기를(시 35:6)
    6) 사망이 저들을 사로잡기를(시 55:15)
    7) 사망이 저들을 음부에 끌고 내려가기를(시 55:15)
    8) 저들의 이를 꺾으시기를(시 58:6)
    9) 저들의 방어가 허물어지게 하시기를(시 58:7)
    10) 저들로부터 모든 자비를 거두시기를(시 59:5)
    11) 진노하심으로 저들을 소멸하시기를(시 59:13)
    12) 저들에게 덫을 놓으시기를(시 69:22)
    13) 저들의 눈을 어둡게 하시기를(시 69:23)
    14) 저들의 허리가 떨리게 하시기를(시 69:23)
    15) 저들의 거처가 황폐하여지게 하시기를(시 69:25)
    16) 저들을 생명책에서 도말하시기를(시 69:28)
    17) 저들을 땅의 거름과 같이 되게 하시기를(시 83:10)
    18) 저들을 핍박하시기를(시 83:14)
    19) 저들을 사탄에게 넘겨주기를(시 109:6)
    20) 저들의 년수를 단축케 하시기를(시 109:8)
    21) 저들의 자녀가 거지가 되게 하시기를(시 109:10)
    22) 뜨거운 숯불이 저들에게 떨어지게 하시기를(시 140:10)
    23) 깊은 웅덩이로 저들을 던지시기를(시 140:10)
    3. 이들 시편과 관련된 문제점
    우리는 이 성서 구절들을 마태복음 5:44에 있는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 이 시편을 위하여 제시된 답변
    다음의 자료는 알드리치(Roy L. Aldrich) 박사의 소책자「시편 강해를 위한 요점」에서 발췌한 것이다.
    1) 시편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며 성령은 죄와 죄인을 고발할 권리를 갖는다.
    2) 이는 율법과 조화를 이룬다(시 28:4;렘 50:15).
    3) 악과 행악자에 대한 이러한 심판은 그리스도의 가르침 및 서신들과 일치한다(마 18:6;23:33;26:24;갈 1:8-9;5:12;약 5:3;유 13,15;벧후2:12,22;살후 2:10-12;계 14:10-11).
    4) 성서도 죄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에 대하여 저주를 선포한다(레 26장;신27-28장;사5:24-25;28:13등).
    5) 다윗은 개인적으로 위대한 자제심을 발휘했다. 그러나 시편에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그의 뜻으로 삼았다(시 5:10-11).
    6) 동양에서는 서양에서보다 강한 어휘를 사용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의 비난은 보다 과장되었으며 그의 찬송은 보다 열정적인 것이었다.
    7) 상한 자나 억눌린 자들을 위한 동정으로 인해 많은 저주의 소리가 흘러나왔다(시 10:8-10).
    8) 이 시편들 중 얼마는 전쟁의 승리를 비는 기도이다(시 144:5-7). 이스라엘이 치룬 많은 전쟁은 분명히 하나님의 승인을 받은 전쟁이었다.
    9) 이 간구 중 얼마는 성서적 예언을 언급한 것이다(시 137:8-9). 이 시편은 그 후에 같은 말로 바벨론의 멸망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직접 예언되어졌다(사 13:16;렘 50:15;51:6,36).
    10) 어떤 시편들은 그리스도와 그를 배신한 자에 관련되어 있다(시 40,55,60편).시편69:22-25은 유다에게 내릴 형벌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리고 시편 109편은 "가룟 유다의 시"로 불리워져 왔다.
    11) 시편의 악한 자들은 완고하고 신앙을 버린 사악한 자들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일치되는 것이며 시편의 예언적 성격과도 조화를 이룬다. 대부분의 시편은 악한 자들에 대한 마지막 지상 심판을 예견하고 있다.
    12) 은총은 분명하게 천명되었고 악에 대한 경고는 수없이 반복되었다(시 2:12).
    13)명령법은 히브리어 문법에 저축됨이 없이 미래 시제로 바꿔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혼란케 하리라"하는 대신에 "그들이혼란케 될 것이다"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의 예언이 된다(참조, 시 109:8-10).
    5. 이 시편들에 대한 간략한 고찰
    1) 시편 35편
    이 시편은 9편의 저주의 시 중에서 첫번째이다(참조, 시 35:1-8).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다윗이 그를잔혹하게 대했던 그의 흉포한 적들을 위해서 처음에 열심히 기도했다는 점이다(참조, 35:12-16). 이 시편은 4편의 가룟유다의 시 중에서 첫번째 시편이 된다. 즉 이 시편은 신약에 있어서의 유다의 배신을 예언적으로 기술한다. 유다의 배신에 대한다른 세 곳의 예언적 기술은 시 41:9;55:12-14;109:6-8에 있다.
    다음 시편에 들어 있는 저주의 기도를 참조하라.
    2) 시편 55:9
    3) 시편 58:6-9
    4) 시편 59:11-15
    5) 시편 69:22-28
    6) 시편 83:9-17
    7) 시편 109:6-20
    8) 시편 137편
    이 시편에는 두가지의 저주의 기도가 들어 있다.
    (1)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함락될 때 배신한 바 있는 에돔을 하나님이 심판하여 주실 것을 기도했다(시 137:7).
    (2) 하나님이 바벨론을 심판하여 주시기를 기도했다(시 137:8-9).
    그러나 이 저주의 기도는 이스라엘의 군대가 철없는 병사들처럼 돌아다니며 바벨론의 어린 것들을 메어치는 모습을 기술하고 있지않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볼 때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정복했지만 이스라엘은 바벨론을 정복하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벨론을 실제로 패망시킨 바사를 일컫는 예언으로 간주된다(참조, 단5장 ;사13장).하나님의보응하시는 법칙은 다음 성서 구절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명기되어 있다. 출애굽기 32:34;시편7:16;잠언 11:19-21;갈라디아서 6:7.
    9) 시편 140편
    시편 140:8-10에 있는 저주의 기도를 참조하라.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 작자
    일반적인 학설은 이 시편들이 세 사람에 의해서 지어졌다고 한다.
    1) 히스기야가 그중 10편을 기록했다(시 120,121,123,125,126,128,129,130,134편).
    2) 솔로몬이 그 중 1편을 기록했다(시 127편).
    3)다윗이그중4편을 기록했다(시 122,124,131,133편).

    2. 기록한 이유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믿고 있다. 기원전 7년경, 하나님께서 치명적인 병에 걸린유대 왕 히스기야를 고쳐주셨다. 이사야는 은혜를 입은 왕의 감사 기도를 기록했는데(사 38장).이감사기도는병이 완치된 후 지어진것이다. 이사야 38:20에서 그는 이렇게 부르짖고 있다.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 하리로다"(사 38:20).
    몇몇 학자들(Thirtle, Lightfoot, Scroggie를 포함)은 작자 미상으로 된 15편(120-134)의 성전에올라가는 노래 중 10편이 히스기야의 노래라고 믿고 있다. 이 시편들은 문체에 있어서 어떤 유사성을 갖고 있다. 히스기야는일영표 위의 해 그림자가 10도 물러간 사실(왕하 20:9-11)을 기념해서 이 작자 미상의 10편의 노래를 기술했는지도모른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시켜 주신 것(왕하 21:6)을 감사해서 아직 편집되지 아니한 다윗과솔로몬이 쓴(참조, 잠 25:1) 5편의 시를 적절히 골라 자기가 쓴 10편에 추가하여 모두 15편이 되게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3. 이 노래는 어떻게 불리워졌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다.
    1) 한 오래된 유래 전승에 의하면 성가대가 성전의 뜰로 올라가는 반원형으로 된 계단을 오를 때 불렀다고 한다.
    2) "올라간다"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의 단계를 일컫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각종 절기 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자들이 길을 걸으며 불렀을 것이다.
    3) "올라간다"는 것은 "높은 곳의 성가대의 노래"를 뜻한다. 즉 어떤 높은 계단 위에서 성가대가 이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4) 이 노래들은 음악적으로 그 음표가 단계적으로 계속 올라가는 것이 특징이었을 것이다.

    할렐루야 시편(시113-118편)

    이여덟편의 시편은 유월절 밤에 불리워졌다.
    1. 시편 113편과 114편은 식사 시작때에 불리워졌다.
    2. 시편 115편과 116편은 식사 후에 불리워졌다.
    이 시편들은 마태복음 26:30에서 주님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불리워졌다. 그리고 이 시편은 지금도 연중 각종 절기에팔레스틴에 있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18번 암송되고 거룩한 땅 밖에 있는 유대인들에 의해서는 매년 21번 암송된다.

    역사시(시 78,105,106편)

    이스라엘의 역사를 서술한 이 3편의 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가 있다.
    1. 이스라엘의 범죄
    1)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율법 준행하기를 거절했다(시 78:10).
    2) 그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를 잊었다(시 78:11;42;106;13).
    3)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해서 말했다(시 78:19).
    4)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믿지 않았다(시 78:22).
    5) 그들은 하나님에게 거짓말을 했다(시 78:36).
    6) 그들은 하나님은 슬프시게 했다(시 78:40).
    7)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했다(시 78:41).
    8) 그들은 새긴 우상을 숭배했다(시 78:58;106:19).
    9) 그들은 지도자 모세를 투기했다(시 106:6).
    10) 그들은 약속의 땅을 멸시했다(시 106:24).
    11) 그들은 장막에서 원망했다(시 106:25).
    12) 그들은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었다(시 106:28).
    13) 그들은 이방 사이에 섞였다(시 106:35).
    14) 그들은 자녀로 사신에게 제사했다(시 106:37).
    15) 그들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다(시 106:38).

    2. 하나님의 은총
    1) 이스라엘이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셨다(시 105:8-11).
    2) 하나님은 홍해를 갈라 놓으셨다(시 78:13).
    3) 낮에는 구름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다(시 78:14).
    4) 밤에는 화광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다(시 78:14).
    5) 반석을 쪼개어 그들에게 물을 공급했다(시 78:15).
    6) 그들을 위하여 만나를 비같이 내리셨다(시 78:24).
    7) 자비하심으로 그들의 죄를 사하셨다(시 78:38).
    8) 애굽에서 그들에게 징조와 기사를 나타내셨다(시 78:43;105:27-36).
    9) 그들을 약속한 땅의 지경까지 인도하셨다(시 78:54).
    10) 이방인들을 그들 앞에서 쫓아내셨다(시 78:55)
    11) 다윗을 택하사 그들은 인도하셨다(시 78:70-71)
    12) 그들을 헤치는 사람을 용납하시지 아니했다(시편 105:14).
    13) 그들을 먹이셨다(시 78:72).
    14) 그들을 위하여 열왕을 꾸짖으셨다(시 105:14).
    15) 요셉을 통하여 그들을 높이셨다(시 105:17).
    16) 애굽의 부를 그들에게 주셨다(시 105:37).
    17) 그들을 모두 강하게 하셨다(시 105:37).
    18) 계속하여 그들을 용서하셨다(시 106:43).
    19) 항상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셨다(시 106:44).

    두음시(시 9,10,25,34,37,111,112,119,145편)

    이 아홉편의 시는 "알파벳 시편"(Alphabetical Psalms)으로도 불리워진다. 왜냐하면 이 시편의 각 행이 히브리어 22개 문자의 순서대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시119편은물론가장유명한 두음 시편이다. 이 시편은 22개의 연으로 되어 있고 각 연에는 여덟개의 절이 있어 총176절이 된다.각 연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문자로 각각 시작된다. 두음 시편 전부가 이러한 완전한 배열을 갖춘 것은 아니다. 즉 어떤 시편에는한 자 내지 그 이상이 빠져 있다.
    1. 시편 9,10, 25편에는 여러 문자가 빠져 있다.
    2. 시편 34, 45편에는 한 문자만 빠져 있다.
    3. 시편 37,111,112,119편은 완전한 배열을 갖추고 있다.
    이렇게 두음법을 사용한 것은 기억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메시야 예언시

    우리는 이 매우 중요한 시편들을 두가지 방법, 첫째로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 시편의 예언들을 성취하신 순서를 따라서, 둘째 시편에 나타난 메시야 예언의 순서를 따라서 고찰해 보기로 한다.

    1. 신약에서 그리스도가 시편의 예언을 성취한 순서에 따른 고찰

    1) 그리스도의 순종(시 40:6-10)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히 10:5-7과 비교해 볼 것).
    2) 그리스도의 열심(시 69: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참조, 요 2:17).
    3) 그리스도의 버림당하심(시 118: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참조, 마 21:42).
    4) 그리스도의 배신당하심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9).
    5) 그리스도의 고난(시 22:1,6,7,8,16,18).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시 69:21; 참조, 마 27:34,48).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시 31:5;참조, 눅 23:46).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꺽이지 아니하도다"(시 34:20; 참조, 요 19:33-36).
    6) 그리스도에 대한 거짓 증거
    "대저 저희가 악한 입과 궤사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거짓된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무고히 나를 공격하였나이다"(시 109:2-3;참조, 마 26:59-61;27:39-44).
    7) 적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기도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4;참조, 눅 23:34).
    8) 그리스도의 부활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시 16:10;비교, 행 13:35).
    "내가 주의 이름을 행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22:22;비교, 요 20:17).
    9) 그리스도의 승천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받으시니"(시 68:18;비교, 엡 4:8).
    10) 그리스도의 천국입성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시 24:7-8;참조, 행1장).
    11)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사역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 110:4;참조, 히5-7장).
    12)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혼(시 45:2,6,8,13,15;참조, 계19장).
    13)그리스도께서 이방을 멸하심
    "여호와께서 내 주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 110:1;참조, 시2편).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시 110:6;참조, 계6-19장).
    14)그리스도의 천년왕국 통치(시 89:27;102:16-21)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시 8:6;비교 히2장).
    "그 이름이 영구함이며 그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시 72:17;참조, 마 23:39;계 11:15).

    2. 나타난 메시야 예언의 순서에 따른 고찰
    1) 시편 2편 : 이방 나라들의 환난과 멸망 그리고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통치를 예언함.
    이 시편은 4개 부분으로 되어 있다.
    (1) 인간의 반역(시 2:1-3).
    (2) 하나님의 반응(시 2:4-6).
    (3) 성자의 통치(시 2:7-9).
    (4) 시편기자의 권면(시 2:10-12).
    메시야에 관한 예언
    시 2:2;"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행 4:26에서 인용).
    시 2:7;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행 13:33에서 인용).
    2)시편8편 :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통치 예언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손이 필요했다는 이 시편의 말씀(시 8:6)과 우리를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팔이 필요했다는 말씀(사 53:1)을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창조보다한없이 값비싼 것이다.
    메시야에 관한 예언
    시 8: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3) 시편 16편 :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
    메시야에 관한 예언
    시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4) 시편 22편 : 그리스도의 심한 고난을 예언
    이 시편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1) 십자가에 달린 자의 흐느낌(시 22:1-21)
    (2) 영화롭게 된 자의 노래(시 22:22-31)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1:10-11의 말씀을 쓸 때 이 시편을 마음에 두고 썼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시편 22:1-21은 고난을 말하고 시편 22:22-31은 영광을 서술한 것이다.
    메시야에 관한 예언
    시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인용하심, 마 27:46).
    시 22:8;"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이스라엘의 악한 통치자들이 인용, 마 27:43).
    시 22:16;"…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십자가에 달리실 때 로마 병정들에 의하여 행해짐, 마 27:35).
    시 22:18;"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십자가에 달리실 때 로마 병정들에 의하여 성취됨, 막 15:24).
    시 22:22;"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히 2:12에 인용).
    5) 시편23편: 그리스도의 자비로우신 목양 사역을 예언
    메시야에 관한 예언
    시 23: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신약성서는 이 말씀의 정확한 인용은 없지만,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요한복음 10:1-18에서 이러한 내용을 언급하셨다).
    이는 '시편의 진주'로 알려져 있으며, 그 내용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1) 양과 목자(시 23:1-3;예비해 두심)
    (2) 안내자와 나그네(시 23:3-4;인도하심)
    (3) 주인과 손님(시 23:5-6;영적 교제)
    6) 시편 24편 : 그리스도의 천국입성을 예언
    이 시편은 본래 다윗이 새로 점령한 예루살렘 입성을 축하하고 그와 더불어 그의 왕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서 기록되었지만,한편으로는 주님께서 구속 사업을 완수하시고 감람산에서 승천하셔서 영광으로 들어가시는 승리의 천국입성을 노래한 것이기도 하다. 이시편은 두 성가대에 의해서 불리워졌다.
    (1) 시편 24:1-6은 예루살렘이 위치한 언덕 밑에서 불리워졌다.
    ① 성가대 A가 1-3절을 노래하면
    ② 성가대 B가 4-6절 화답했다.
    (2) 시편 24:7-10은 예루살렘 성문 앞에서 불리워졌다.
    ① 성가대 A가 7절을 노래하면
    ② 성가대 B가 8절 전반부를 노래하고
    ③ 성가대 A가 8절 후반부를 노래하면
    ④ 성가대 B가 9절을 노래하고
    ⑤ 성가대 A가 10절 전반부를 노래하면
    ⑥ 성가대 B가 10절 하반부를 노래했다.

    (3) 어떤 시편들은 한 주간의 각 요일 아침 성전 예배시에 불리워졌는데, 요일별로 성가대가 노래한 시편은 다음과 같다.

    ① 월요일 : 시편 48편
    ② 화요일 : 시편 82편
    ③ 수요일 : 시편 94편
    ④ 목요일 : 시편 81편
    ⑤ 금요일 : 시편 93편
    ⑥ 토요일 : 시편 92편
    ⑦ 일요일 : 시편 24편

    메시야에 관한 예언
    시 24:7-10;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 시로다"(이 말씀들이 신약성서에서 직접 인용되지는 않았지만 사도행전 2:32-33에 이러한 내용이개략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7) 시편 31편 : 십자가 상의 주님의 생각과 말씀을 예언

    메시야에 관한 예언
    시 31:5;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이 말씀은 예수님이 갈보리산 위에서운명하시기 직전에 직접 인용하신 것이다. 눅 23:46). 사도 바울은 후에 이 시편 31:19 말씀을 고린도전서 2:12에서언급했다.
    8) 시편 40편 :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실 때의 순종을 예언함.

    메시야에 관한 예언
    시 40:6;"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니하시며…"(히 10:5-6에서 인용).
    시 40: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히 10:7에서 인용).
    9) 시편 41편 : 유다가 주님을 배반할 것을 예언
    이 시편은 유다의 배반을 언급한 세 시편 중 첫번째 시편이다. 다른 시편은 55,109편이다.

    메시야에 관한 예언
    시 41: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유다에 관한 언급임, 요 13:18).
    10) 시편 45편 :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결혼을 예언
    이 시편은 솔로몬이 애굽 왕의 딸과 결혼한 사실에(왕상 3:1) 그 역사적 근거를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시편은분명히 요한계시록 19:7-9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결혼을 예언한 말씀이기도 하다. 이 시편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1) 첫째 부분 : 신랑의 특성(시 45:1-8상반절)
    ① 그분은 가장 훌륭하다.
    ② 그분의 말은 은혜로 가득 차 있다.
    ③ 그분은 하나님의 축복을 최대한으로 누리고 있다.
    ④ 그분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의 옹호자이시다.
    ⑤ 그분은 모든 적을 파멸시키신다.
    ⑥ 그분의 왕좌는 영원하다.
    ⑦ 그분의 나라의 훌은 공평이다.
    ⑧ 그분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신다.
    ⑨ 그분의 옷에는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난다.
    (2) 둘째 부분 : 신부의 특전(시 45:8하반절-17)
    ① 그녀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가득찬 상아의 궁전에서 살게 된다.
    ② 그녀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값비싼 보석으로 단장될 것이다.
    ③ 그녀는 영원토록 신랑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메시야에 관한 예언
    시 45:6;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히 1:8에서 인용).
    시 45:7;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히 1:9에서 인용).
    11) 시편 68편 :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승리와 천국입성을 예언

    메시야에 관한 예언
    시 68: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엡 4:8에서 인용).
    갈보리 역사 이전에 죽은 의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몇몇 성경 연구가들이 주장하는 자의 영혼은 땅 및 어느 곳에 위치한 거처, 즉신약에서는 음부로, 구약에서는 '사망의 방'(Shoel)으로 내려간다고 한다. 본래 음부에는 두 구역이 있는데, 한 구원은구원받은 자들을 위한 곳이다. 구원받은 자들을 위한 구역은 때때로 "낙원"(눅 23:43)으로 불리워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아브라함의 품"(눅 16:22)으로도 일컬어졌다.
    음부라는 일반적명칭 외에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거하는 구역에 대한특별한 명칭은 없다. 누가복음 16:19-31에 보면 우리 주님이 한 신앙 없던 자가 죽어 음부의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구역에내려간 것을 설명하신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강 갈보리에서 믿는 자들의 죄값을 완전히 지불한 뒤에는 이모든 것이 변화되었다고 믿고 있다. 「스코필드 성서」 (Scofield Bible)는 우리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에 주님자신이 직접 음부에 내려가 그 때까지 구원받은 모든 자들을 이끌고 하늘 나라에 개선하심으로써 지옥이 텅비게 되었다고 시사한다.그리고 그 증거로 에베소 4:8-10의 말씀을 제시했다. 고반하우스(Barnhouse)박사는 그의 「계시」라는 책에서 다음과같이 기록했다.
    "그분이 위로 올라 가실 때(엡 4:8), 지옥을 비우시고 거기 있던 자들을 하나님 앞으로 직접 데리고가셨다.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고…그 순간 이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에게는 어떤 형태의 이별도 있을 수 없다. 지옥의문은 이제 어떤 신자에게도 대적할 수 없다"(참조, 마 16:18).
    12) 시편 69편 : 그리스도의 열심과 고난을 예언

    메시야에 관한 예언
    시 69:9;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마 27:34,48에서 성취됨).
    13) 시편 72편 : 그리스도의 천년 왕국 통치를 예언
    이 시편이 하나님에 대한 솔로몬의 기도인지, 또는 솔로몬에 관한 다윗의 기도인지, 그 어느 쪽도 절대적 확실성은 없다. 어쨌든이 시편은 다윗의 위대한 후손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천년왕국 통치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통치의 특징은아래와 같다.
    (1) 가난한 백성이 공의를 얻을 것임(시 72:2)
    (2) 산과 언덕이 번성할 것임(시 72:3)
    (3) 모든 압제자들을 꺾으실 것임(시 72:4)
    (4) 그리스도의 통치는 풀 위에 내리는 봄비와 같이 온화하여 열매를 많이 맺게 할 것임(시 72:6)
    (5) 모든 의인이 넘치도록 번영할 것임(시 72:7)
    (6) 그리스도의 통치는 땅끝까지 마칠 것임(시 72:8)
    (7) 모든 나라가 그분께 예물을 바치고 섬길 것임(시 72:10-11).
    (8) 모든 백성이 그분을 위하여 기도하고 찬송할 것임(시 72:15)
    (9) 그분의 이름이 영영히 존경을 받을 것임(시 72:17).

    메시야에 관한 예언
    시 72:8;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 부터 땅끝까지 다스리리니"(계 11:15에서 요한이 언급).
    14)시편 89편 : 다윗 왕조의 계속적인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성실함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날 것임을예언하고 있다. 이 시편은 예스라 사람 에단이 기록했는데, 그는 솔로몬의 통치 때 이름이 난 현명한 사람이었다(왕상 4:31).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시편은 솔로몬이 자신의 범죄 때문에 어려운 세월을 보내는 만년의 생각을 나타낸 것같기돈 하다(참조,왕상11장).

    메시야에관한예언
    시 89:27;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빌 2:9-11에서 바울이 언급).
    15) 시편 102편 : 그리스도의 영원함을 예언
    이 시편은 아마 바벨론 포로기의 마지막 해에 쓰여지고, 그 작시의 의도는 유대인들의 귀환과 예루살렘 재건을 격려하기 위한것이었던 것같다. 그리고 또 이 시편은 예루살렘의 위대한 왕이 다시 오리라고 언급하고 있다(참조, 시 102:16).
    메시야에 관한 예언
    시 102:25-26;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히1:10-12에서 인용).
    16) 시편 109편 : 가룟 유다의 배반과 그에 대한 무서운 징벌을 예언

    메시야에 관한 예언
    시 1-9:8; "그 년수를 단축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행 1:20에서 베드로가 언급).
    17) 시편 110편 :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을 예언.
    (1) 그리스도에 대한 인 시편의 다섯가지 묘사
    ① 그분은 하나님이시다(시 110:1).
    ② 그분은 왕이시다(시 110:2).
    ③ 그분은 제사장이시다(시 110:4).
    ④ 그분은 재판장이시다(시 110:6).
    ⑤ 그분은 힘있는 용사시다(시 110:6).
    (2) 그리스도의 백성에 관한 이 시편은 두가지 묘사
    ① 그들은 제사장이다.
    "주의 백성이…즐거이 헌신하니"(문자적 의미는 "그들이 자유로이 제물을 드리며"(시 110:3;비교, 계 1:6).
    ② 그들은 군사들이다.
    "주의 권능의 날에"(실제적 의미는 "주의 군대", 시 110:3;비교, 엡 6:11).
    메시야에 관한 예언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이 성서 구절은 구약 성경의 어느 성서 구절 못지 않게 신약성서에서 많이 인용된 말씀인데, 적어도 4번씩이나 반복 인용되었다.
    ③ 마태복음 22:41-46에서(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④ 사도행전 2:34-35에서(그리스도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⑤ 히브리서 1:13에서(질문 형식으로,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⑥ 히브리서 10:12-13에서(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나타내기 위하여)
    시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 성서 구절은 신약성서에서 세번씩이나 나타나는데, 세번 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다.
    ⑦ 히브리서 5:6에서(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이 대제사장직의 자격을 나타내기 위하여)
    ⑧ 히브리서 6:20에서(이 대제사장직의 불변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⑨ 히브리서 7:21에서(대제사장직에 대한 필요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18)시편 118편 :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서는 버림받으시나 하나님으로부터는 택하심을 입어 하나님의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실 것을예언하고 있다. 때때로 초막절 기간에 노래로 불리워졌던 이 시편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시던 주님에 의해서도 불리워졌을 것이다.

    메시야에 관한 예언
    시 118: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 "성서의 큰 돌"은 신 구약성서에서 여러번 언급되었다.
    (1) 모퉁이 돌(마 21:42;엡 2:20).
    (2) 머릿돌 (슥 4:7;행 4:11)
    (3) (쳐서 물을 낸)반석(고전 10:4)
    (4) 거리끼는 돌(고전 1:23)
    (5) 부수는 돌(단 2:34)
    (6) 택함을 받은 보배로운 산 돌(벧전 2:4-7)
    시 118: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마 21:9에서 주님과 함께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을 하는 군중들에 의해서 인용됨) 몇몇 시편의 이름과 제목들을 소개하면서 이 시편 부분의 연구를 끝맺는다.
    1.경건한 자의 시(시1편)
    2.창조의 시(시8,104편)
    3.선한목자의 시(시22편)
    4.큰목자의시(시23편)
    5.목자장의시(시24편)
    6.연합의시(시133편)
    7.예루살렘의시(시48,122,126,132,137편)
    8.가족의 시(시127,128편)
    9.안전의시(시121편)
    10.진정한유일신이신 하나님(시115편)
    11.출애굽의시(시114편)
    12.피난처의시(시46편)
    13.신앙의사다리(시37편)
    14.지극한찬송(시103,148,150편)
    15.노인의 시(시71편)
    16.100번째의옛시(시100편)
    17.죽음의시(시90편)
    18.생명의시(시91편)
    19.해방의시(시31,116편)
    20.하나님의 집(시84편)
    21.하나님의부요하심(시50편)
    22.하나님의말씀(시19,119편)
    23.하나님의 음성(시29편)
    24.하나님의자비(시136편)
    25.하나님의선하심(시27,107편)
    26.하나님의 전지하심과 무소부재하심(시139편)
    27.하나님의전능(시147편)
    28.다윗과의언약(시89편)
    29.이스라엘의역사 시(시78,105,106편)
    30.'의문'의 시(시42,73편)
    31.깊은절망의 시(시69,88편)

     

    시편 5권 간단 요약

     

    시편-살아 있는 자의 행복한 찬양 할렐루야

    1권 다윗의 시
    형식 내용
    41 14 2 2 1 1 - 복있는 사람 6
    1 2 - 너는 내 아들이라 12
    12 4 4 3 다윗 시 압살롬 피할 때 대적 많음 8
    4 다윗영장 현악 곤란에서 평안히 눕게 8
    5 다윗영장관악 행악자미움의인은 복 12
    6 다윗 스미닛 눈물로 침상을 띄움 10
    4 4 7 다윗식가욘 베냐민구시말칼 갈고 활을 당기심 17
    8 다윗영장 깃딤 주의 이름 어찌 아름다운지 9
    9 A 다윗 뭇랍벤 열방이 자기는 인생뿐 20
    10 A - 모든사상에 하나님 없다 18
    4 4 11 다윗 영장 터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7
    12 다윗 스미닛 말씀 7번 단련한 은같음 8
    13 다윗 영장 얼굴을 언제까지 숨기심 6
    14=53 다윗 영장 어리석은자 하나님없다함 7
    12 12 4 4 15 다윗 주의 장막 성산 거할 자 5
    16 다윗 믹담 주밖에는 나의 복 없음 11
    17 다윗 기도 금생 분깃을 받은 자 15
    18 다윗 시 원수와 사울 손에서 구원 50
    4 4 19 다윗 영장 자연 율법 찬양 14
    20 다윗 영장 기름 부음자를 구원 9
    21 다윗 영장 구원을 기뻐함 13
    22 아앨렛샤할 어찌 버리나이까 31
    4 4 23 다윗 시 여호와 나의 목자 6
    24 다윗 시 왕이 들어가심 10
    25 A 다윗 시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22
    26 다윗 시 완전함에 행함 판단 12
    15 12 4 4 27 다윗 시 누구를 무서워하리 14
    28 다윗 시 잠잠하면 무덤에 9
    29 다윗 시 여호와의 소리7번 11
    30 다윗 시낙성가 노염 잠간 은총 평생 12
    4 4 31 다윗 영장 구설다툼에서면케 24
    32 다윗 마스길 허물사함죄가리운 자 복 11
    33 - 하나님을 삼는 나라의 복 22
    34 다윗 시 아비멜렉 미친체 뼈 보호 22
    4 4 35 다윗 시 내기도 내 품으로 돌아옴 28
    36 다윗 영장 주의 인자하심이 보배 12
    37 A 다윗 시 행악자 인하여 불평말라 40
    38 다윗 기념케 내 죄악 머리에 넘침 22
    3 3 2 39 다윗 여두둔 내 입에 재갈을 먹임 13
    40=70 다윗 영장 하하에게 수치를 17
    1 41 다윗 영장 재앙 날에 건지심 13
    2권 다윗의 삶
    형식 내용
    31 9 6 3 3 42 고라 마스길 사슴이 시냇물을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11
    43 -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5
    44 고라 마스길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음 26
    3 3 45 고라 마스길 사랑의 노래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가타 17
    46 고라자손 시 가만히 있어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11
    47 고라자손 시 찬양찬양찬양찬양찬양하라 9
    3 3 3 48 고라자손 시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 즐거워함 14
    49 고라자손 시 존귀에 처하나 못 깨달으면 멸망짐승같음 20
    50 아삽의 시 환난 날에 부르라 너가 나를 영화롭게 함 23
    9 6 3 3 51 다윗 밧세바: 내 죄가 아니 내 죄에 항상 내 앞에 19
    52 다윗 마스길 도엑- 사울에게: 하나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9
    53=14 다윗 마스길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6
    3 3 54 다윗 마스길 10인-사울에게 다윗 숨음: 환난에서 건지시고 원수 보응 7
    55 다윗 마스길 입은우유 마음은 전쟁 말은 기름부드러움 실상 뽑힌 칼 23
    56 다윗 믹담 블레셋에잡힐때: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사망에서 구원 13
    6 3 3 57=108 다윗 믹담 사울 피해 굴에: 내가 새벽을 깨움 11
    58 다윗 믹담 의인 악인 보복 당함 보고 기뻐함 11
    59 다윗 믹담 사울 암살자 파송: 개처럼 울며 성으로 다니게, 나의 산성 17
    9 3 3 60=108 다윗교훈 아람과 전쟁중: 경외자에게 기, 대적을 밟으심 12
    61 다윗 영장 주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 나의 서원 이행 8
    62 다윗 여두둔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12
    6 3 3 63 다윗 유다광야: 주의 인자가 [내]생명보다 나음 11
    64 다윗 영장 칼같이 혀 연마 화살같은 독한 말 10
    65 다윗 영장 초장 양떼 골짜기 곡식 다 즐거이 노래함 13
    3 3 66 영장 온 땅 주께 경배 주를 찬양 20
    67 영장현악 우리에게 복주시리니 땅 모든 것이 하나님 찬양 7
    68 다윗 영장 고아 아버지 바산산은 하나님 산 우리 짐을 날마다 지심 35
    4 4 3 3 69 다윗 소산님 쓸개로 식물로, 갈할 때에 식초,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 36
    70=40 다윗영장 노래 아하 하는 자로 수치를 5
    71 . 늙어 백수될 때 나를 버리지 마소서 24
    1 1 72 솔로몬시 판단력을 왕에 의를 왕의 아들에게 다윗의 기도 마침 19
    3권 이스라엘 역사
    형식 내용
    17 17 11 5 5 73① 아삽시 악인형통 28
    74② 마스길 성소 불사름 23
    75③ 알다스헷 악인 뿔 베고 10
    76④ 현악 장막이 살렘에 12
    77⑤ 여두둔 눈을 못붙임 20
    1 1 78 마스길 이스라엘역사 72
    5 5 79① 성전 더럽힘 13
    80② 소산님에듯 다량의 눈물 19
    81③ 깃딤 어깨짐을 벗김 16
    82④ 세상을 판단 8
    83⑤ 아삽 노래 세계 지존자 18
    6 3 2 84① 고라자손 주의 장막 사랑 12
    85② 고라자손 귀환 죄악 용서 13
    1 86③ 다윗 곤고 곤고 궁핍 17
    3 2 87④ 고라자손 영광스런시 온 7
    88⑤ 고라자손 주 얼굴을 숨김 18
    1 89 에스라인 에단 세계 열왕 언약 52
    4권 17편 공의 공평
    형식 내용
    17 17 10 3 3 90 모세 연수가 7-80 17
    91 - 지존자 은밀 16
    92 신뢰 늙어도 풍부 15
    7 3 93 - 통치 5
    94 - 공의 23
    95 - =대상 16출애굽 크신 11
    4 96 - 심판주 13
    97 - 초월주 12
    98 땅을 의로 9
    99 - 3번거룩찬양 9
    7 7 3 100 감사 감사로 궁중에 5
    101 다윗 인자공의찬송 8
    102 곤고 중년에 마소서 28
    4 103 다윗,할렐루야 인생은 풀 22
    104 할렐루야 출애굽천지창조 35
    105
    출애굽역사 45
    106
    출애굽회복역사 48
    시편 5권 44편
    44 13 8 4 1 107 구속찬양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로 찬송 43
    3 108 다윗 시 57:8-12+60: 7-14 내마음 정함, 우리의 대적 밟으실 자 13
    109 다윗 시 년수를 단촉케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31
    110 다윗 시 118 참고: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 멜기세덱의 반차 7
    8 4 111① 할렐루야 A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 그 언약 영원히 기억하심 10
    112② - A 경외 즐거워하는 자 복 후손 강성 정직 후대 복 10
    113③ - 해돋고 지는 데까지 여호와 이름 찬양 받으심 9
    114④ -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반석이 못, 차돌이 샘물 8
    5 4 115① - 여호와 의지 도움 방패 18
    116② -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심 19
    117③ -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 2
    118④ - 107참고, 감사하라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9
    1 1 119 계명 안 잊음 A[8X22] 주의 말씀 계명 율례 법도 판단 증거 규례 성실 176
    15 8 4 4 120 환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환난 중에 부르짖음 7
    121 - 나의 도움이 천지 지으신 여호와에게로서다 8
    122 내용132 성 안에는 평강이 궁중에는 형통이 9
    123 -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4
    4 3 124 - 저희 이에 주어 씹히지 않게 하신 여호와 찬양 8
    125 - 산들이 예루살렘 두름같이 그 백성을 두르심 5
    126 -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 6
    1 127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수고 성 지킴이 헛됨 5
    7 3 3 128 - 내실의 아내 결실한 포도나무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같음 6
    129 - 악인의 줄을 끊으심 8
    130 - 파수꾼이 아침 기다림보다 내 영혼 주를 더 기다림 8
    4 4 131 -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다 3
    132 내용122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하실 것 기름부은 자 위해 등 예비 18
    133 - 형제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선하고 아름다운고 3
    134 찬송 시온에서 네게 복 주심 3
    15 7 3‘ 3 135 출애굽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21
    136 출애굽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26
    137 출바벨 바벨론 강변 시온 기억하며 울음 8
    8 4 138① 주께서 소성케,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9
    139② 영장 주께서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 주의 책에 기록 8
    140②' 영장 악인에게 건지시며 나를 보존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13
    141①'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10
    8 4 142① 교훈시 내 영혼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7
    143② 아침에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하소서 12
    144②' 사람이 무엇이관대 인생이 무엇이관대 15
    145①' 교훈시 왕이신 나의 하나님 주의 이름을 송축함 21
    4‘ 4 146① - 할렐루야 방백 인생 의지 말라 하나님 영원히 대대에 통치하심 10
    147② - 별의 수효 계수, 눈, 서리, 우박 바람 규례를 보이심 20
    148③ - 해 달 별 하늘 물 불 우박 아이들까지 찬양하라 14
    149④ - 영광중에 즐거워하며 침상에게 기쁨으로 노래 9
    1 1 1 1 150 할렐루야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 6

    cafe.daum.net/cgsbong

     










    7월 12일(토) 시편 120-131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판단의 보좌(122:5)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
    There the thrones for judgment stand, the thrones of the house of David.


    판단(4941) 미쉬파트(mishpâṭ)  מִשְׁפָּט 스트롱번호 4941

    1. 판단.   2. 레 19:15.  3. 욥 9:32
    발음 [ mishpâṭ ]
    어원  /  819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24회 사용

    보좌(3678) 키쎄(kiççêʼ  ) כִּסֵּא 스트롱번호 3678

    1. 터.  2. 욥 36:7.  3. 렘 3:17.
    발음 [ kiççêʼ ]
    어원  /  어미활용 כִּסְאִי, 
    복수 כִּסְאוֹת,3680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35회 사용
    • 1. 명사, 남성 터, 자리, 의자, 보좌.
      • a. 명사, 남성 [왕의] 욥36:7, 삼하3:10, 7:13, 대상22:10, 대하7:18. 
        b. 명사, 남성 [하나님의] 렘3:17. 
        c. 명사, 남성 법관석, 느3:7, 시122:5.  
        d. 명사, 남성 [대제사장의] 삼상1:9, 4:13. 
         e. 명사, 남성 보통의자, 왕하4:10, 잠9:14.

    • 관련 성경  /  ☞왕좌(창41:40), 보좌(왕상10:19, 22:10, 시97:2), 왕위(신17:18, 삼하14:9), 좌석(삿3:20),의자(삼상1:9), 총독(느3:7), 재판장(시94:20), 자리(잠9:14, 20:8, 렘1:15). [동] 즉위하다(에1:2).

    판단의 보좌 
    - 여기서 '보좌'란 공의를 집행하는 자리를 뜻한다. 
    즉 일반적으로 '보좌'는 왕의 좌소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심판관, 재판관이 앉는 자리를 뜻한다. 
    문맥상, 예루살렘이 모든 백성에게 공정한 법의 혜택을 베푸어 주던 공의의 도시였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다시 한번 그곳이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확인케 한다.

    다윗 집의 보좌 
    - 법을 집행하였던 다윗 가문으로서는 다윗 가문이 그 같은 일을 맡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재판관들은 공의의 재판을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또 공의의 재판이 시행될 때 그들은 여호와의 왕권을 뒷받침하는 귀한 역할을 감당하는 셈이 되었다(사 9:7; 11:3-5).
    한편 이 직무를 위임받지 않았던 압살롬은 그 일하기를 사모했고 결국 그가 반역을 도모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도 이와 관련되어 있었을지 모른다(삼하 15:3,4).

    다윗 집의 판단의 보좌
    판단의 보좌란 왕권을 뜻하는데, 주께서는 이를 다윗의 집안에 두셨습니다. 다윗의 후손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대대로 자기 열조의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다윗의 가문에 세워진 왕권은 영원할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특히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의 권세를 행하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판단의 보좌 아래 사는 자는 영원한 사람을 얻게 됩니다. 이는 주께서 인간에게 값없이 주신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a. 송사를 재판하는 여호사밧(대하19:8)
    b. 이새의 뿌리에서 날 한 싹(사11:10)
    c. 값없이 얻은 칭의(롬3:24)

    예루살렘과 교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 이스라엘에 살고 있고, 그 이스라엘의 중심지가 바로 예루살렘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정치, 경제, 종교, 문화의 중심지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나큰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축복하셨고,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그 축복받은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했다. 
    또한 예루살렘은 영적인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고 나아가 초대교회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 이 지대한 곳이다. 
    예루살렘은 원어적으로 평화의 땅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셔서 통치하시는 땅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땅에는 평화와 안식만이 존재하며 이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신 교회의 의미와 상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여 평화가 깃드는 곳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예루살렘이 찬양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 곳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여러 왕들을 통해 임했기 때문이다. 
    또한 예루살렘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은 모든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힘이 된다.  


    122:6

    • 예루살렘...평안 - '평안'의 히브리어 '솰롬'(* )인데, 본절에서부터 8절까지에 3번 등장하고있다. '예루살렘'(* , 예루솰람) 속에도 '솰롬'(* )과 동일 어원인 '솰람'(* )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본절에서부터 8절까지에서는 일종의 언어 유희(play of words)가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Perowne, Anderson).


    시편 122편은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시입니다. 
    예루살렘 성정을 향해 가는 순례하는 자의 찬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3대 절기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절기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출애굽기 23:14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3대 절기를 지키도록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출 23:15-16]

    1. 무교절(15절). 
    2. 맥추절(16a). 
    3. 수장절(16b)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이 절기들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갈 때 억지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이 찬양을 부르면서 기쁨으로 올라갑니다.

    시편 122: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오늘 다윗이 이렇게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순례자가 성전에 오르며 이렇게 어린 아이와 같이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 하나님께서 성전에 임재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십니다.(1-5)

       (1-2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상황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할 때의 기쁨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3-5절)은 앞에서 이야기한 예루살렘이 과연 어떤 곳인지 더 자세히 설명하며 예루살렘의 의미를 부각하여 찬양합니다. 공의로 다스리시는 다윗 집, 곧 예루살렘을 찬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과연 어떤 곳이기에 시인이 사모하고 기뻐합니까?

    시편 122:5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광야생활 중에는 계속 민족이 이동하고 있었지만 성막은 그 백성 중앙에 있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지파는 성막 중심으로 장막을 쳤고, 진행할 때도 성막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고, 왕국을 이룬 후 성전을 건축하였지만, 성전은 늘 백성들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성전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전에 임재하여 계시며 그 백성의 왕으로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장막 생활할 때 성막이, 왕국이 이루어진 후 성전이 하나님이 임재 하셔서 다스리시는 장소였습니다.

    "올라감"(ascents)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직역하면 "계단들"을 의미합니다. 
    이 시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에서 불린 노래들입니다. 
    4절의 "이스라엘의 증언에 따라"라는 표현이 보여주듯이,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라고 명하고 있는 신명기 16:16에 따라 정기적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시편 121편과 123편 모두 각각 1절에서 시인은 "내 눈을 든다"는 표현을 통해서 야훼의 도움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이 122편 1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는" 행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은 여호와 하나님의 집(1, 9절)과 다윗의 집(5절), 곧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예루살렘은 closely compacted together 로서 허술한 점이라고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잘 짜인 성읍이란 뜻입니다. 이 성전에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올라갑니다.

    예루살렘은 아름다운 곳입니다. 
    건물의 외형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두신 심판의 보좌(There stand the thrones for judgment) 때문입니다.

    그 보좌에 의로운 왕이 앉아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또 자기 백성을 사랑과 진리로 다스리십니다.

    이런 예루살렘에 예배 드리러 올라가는 것은 가슴 벅찬 감격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는 기쁨의 축제입니다. 
    교회는 새 예루살렘입니다.

    121편 6절에서는 "상하다", "해(害)", 환난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시인의 곤고함을 드러냅니다.

    이어오는 123편은 3절의 "멸시", 4절의 "조소" 등의 단어로 시인 혹은 이스라엘이 이방의 멸시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122편은 "여호와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자고 할 때 기뻐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5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판단의 보좌를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곤고함은 오로지 여호와께서만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지파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역할을 합니다.

        다윗 집에 속한 보좌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 공의의 판단이 행사되는 역할을 합니다. 이 공의의 판단은 예루살렘 안에서만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서 그들의 대적을 무찌르시는 열방에 대한 판단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이 시의 중심을 이루는 어구 '여호와의 집', '다윗의 집'으로도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성전은 삶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지요.

       1절과 9절에서 "여호와의 집"이라는 단어가 수미쌍관법을 이루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의 시작과 끝, 동기와 목적지가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의 중앙에 해당하는 5절에 나오는 "다윗의 집"은 "집"이라는 중심어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통치의 대리자로서 그의 임무는 하나님의 통치의 근본적인 목적인 "공의(미쉬파트, 5절)"를 실현시키고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일들은 다른 곳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예루살렘 

    그 한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할 이유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살펴보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기쁨이 넘치는 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사야 40:9-11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권세를 잡고 그분의 팔로 다스리신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 24:23]

       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

       만군의 야훼께서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본문 5절에서 예루살렘에 여호와 하나님의 판단의 보좌, 곧 다윗 집에 속한 보좌가 있다고 하는 선언과 부합되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재판권을 행사하시는데 바로 그 곳이 예루살렘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사 27:13]

       "그날에 큰 나팔을 울려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파멸케 된 자와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가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

       12절에서도 "너희를 과실처럼 일일이 모으시리라"고 합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는데 그 백성이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 66: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

    통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평화"가 강물처럼 넘치게 하며(12절) 그들을 예루살렘에서 위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죄악의 용서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40: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이 되어서 세상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죄까지 용서함을 주십니다.

        다윗이 기뻐 뛰면서 성전에 올라가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합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모실 때 기쁨으로 모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습니다(시 135:3-4).

        택하신 데서 하나님의 사랑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 택한 백성을 위해 메시아를 보내주심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가게 하시고 그 백성들의 죄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사건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요 2:13, 23, 5:1, 12:12).

        그분의 마지막 사역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는 큰 무리들에 의해 임금으로 추앙받으셨습니다.

    왕 중 왕으로, 세상에 오시는 통치자로 오십니다.

    마치 본문 5절의 "다윗 집에 속한 판단의 보좌"에 오르는 임금처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분의 사역을 갈릴리에서 시작하셨지만(마 4:12-17, 막 1:14-15), 최종 사역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갈 것을 아시고 계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을지 아시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마 17-19).

       본문 1절에서 다윗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기쁜 일이었지만, 예수님께 있어서는 반대로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그곳에서 죄 용서함의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여호와의 집을 사모하고 기뻐하는 까닭은 시온에서 죄용서함의 축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놀라운 만왕의 왕, 하나님의 어린 양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계3:12에서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이 시험을 이기는 자 위에 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계21:2에서도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계21:10도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교회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고, 교회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갖고,  교회 평안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인가를 배우게 원합니다.

    시편 122: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는 말을 들었을 때 기뻐했습니다. 
    기뻐하다는 것은 어떤 일에 대하여 즐거움이나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대하여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그 앞에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예배를 드릴 수 있고 하나님께 죄를 고하여 용서의 은총을 받을 수 있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 응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성전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의의 보좌가 있습니다.
    교회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은 천국 백성의 특권입니다.
    왕 되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예배는 이 땅에서 누리는 천국의 축제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이 왜 그렇게 기쁩니까?

    시편 122:2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인간 실존의 모든 영역에 공포와 주림 억압과 전쟁이 인간을 위협합니다.
    이런 인간 세상에서 가장 갈망하는 것이 바로 샬롬입니다.
    오늘 말씀은 샬롬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에 평강의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계셔야 함을 잘 말씀해 주십니다.

       (6-9절)에서는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을 찬미한 이후에 이제는 예루살렘을 위해서 평화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찬미하다가 분위기를 바꾸어 예루살렘의 평화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심이 되는 단어는 예루살렘의 '샬롬'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6, 7, 8절에서 각각 '샬롬'을 언급하고 있으며, 마지막 9절에서는 '샬롬'과 상응하는 '토브'를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예루살렘을 계속 2인칭으로 부르며 복을 빌고 있습니다. 6-7절은 만약 예루살렘을 위해 평화를 구하면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은 형통하고, 예루살렘은 평화가 있고, 그 성채는 형통할 것이라고 합니다.

         평안은 무사하여 마음에 아무 근심과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형통은 바라고 원하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이 임하면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온전히 살게 됩니다. 무엇을 어떻게 이룰 것을 하나님께서 그 지혜로 가르쳐 주시고 함께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목적을 형통하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의 집으로 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야 하며 죄를 고하여 용서를 받아야 하며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평안과 형통을 구하여야 합니다.

       1] 교회 사랑하는 자가 형통합니다.

    시편 122: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평안”이란 무슨 뜻일까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런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 성경에서 나오는 샬롬이란 “항상 어떤 것이 예상대로, 계획대로, 당연히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대로 진행되어 나가는 것”그것을 샬롬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도성, 평화의 도성,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그 말씀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어가시고, 그 통치를 즐겁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목표와 목적을 향해서 힘있게 걸어나가도록 모든 환경과 여건이 안정되고, 혼란스럽거나, 흔들림이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도성, 하나님의 교회의 본질을 충실하게 만들어 갈 것을 간구하라,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예루살렘이란 말의 뜻은 “평화의 도성”입니다. 
    “평안의 도성”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는 것은 그 성이 갖고 있는 본래의 특성, 본질이 풍부하게 드러나도록 간구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다니엘은 포로생활을 하던 중에도 예루살렘 쪽을 향해서 기도했습니다.

    다니엘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예루살렘을 생각하고 그곳을 향해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일생을 책임져 주셨습니다.

    시편 122:7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성읍’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예루살렘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합니다. 예루살렘이 평안할 때 평화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소중한 선물입니다. 평안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 속에서 누리는 기쁨과 자유입니다.

        이런 샬롬(평안)은 형통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형통할 때 세상을 복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당시 히브리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예루살렘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는 것입니다.

        모리아산은 지금의 예루살렘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자리이며,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자리(대하3:1)입니다.

        다윗왕은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솔로몬은 그곳에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교회의 평안입니다. 교회가 불화와 분열로 갈등할 때 하나님이 슬퍼하십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평안하고 형통하여 세계를 복주는 일에 쓰임 받는 것이 하나님의 큰 기쁨입니다.

    친구와 형제가 평안을 누립니다.

    시편 122:8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8-9절은 시인이 예루살렘의 평화를 구하는 것은 예루살렘 자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사는 형제와 이웃, 그리고 심지어는 하나님 야훼의 집을 위해서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이 평안해야 형제와 이웃, 야훼의 집인 성전도 평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이 왜 예루살렘을 그다지 아끼고 사모하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평화는 예루살렘의 평화에 따라 달렸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아끼는 것입니다.

    1. 교회에 모이기를 사모하고 기뻐해야 합니다(1절)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히브리서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2) 오늘 교회에서는 모든 형제들이 하나 되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여호와 한분이십니다. 그 한분 아래 하나로 모여 예배드리는 모습이 우리가 바라는 새 예루살렙입니다. (3절)

        3) 오늘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감사하기 위해 모여야 합니다.(4절)

        4) 오늘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정의가 펼쳐져야 합니다.(5절) 

        5) 우리는 오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6절)

        교회가 평화해야 교인들도 평화하며, 나라도 또한 평화로와질 것입니다.

    시편 122:9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2.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3.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4.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5.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7.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8.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9.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본문의 짜임새

    (1) 1절과 9절에서 "야훼의 집"(ꕛ 야훼)이라는 단어가 수미쌍관법을 이루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의 시작과 끝, 동기와 목적지가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편의 중앙에 해당하는 5절에 나오는 "다윗의 집(ꕛ 다윗e)"은 "집"이라는 중심어를 통해 야훼의 집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 있는 "집"(야훼의 집과 다윗의 집)이 뼈대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통치의 대리자로서 그의 임무는 하나님의 통치의 근본적인 목적인 "공의(미쉬파트, 5절)"를 실현시키는 것이다.3) 바로 이와 같은 일들은 다른 곳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일어난다. "예루살렘"이라는 또 하나의 중심어는 제1소단락(1-2절)인 2절, 제2소단락(3-5절)인 3절, 제3소단락(6-9절)인 6절에 나타난다. 3-5절은 예루살렘이 어떤 곳인가를 묘사하는 단락으로서 이 소단락의 양쪽 외곽인 2, 6절에 예루살렘이 나오는 것은 세 단락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예루살렘"이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 위에서 구분한 단락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제 1소단락(1-2절)에서는 시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상황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할 때의 기쁨을 회상하고 있다. 여기에서 1절 상반절에서 쓰인 '레다윗'은 제 2소단락의 마지막(5절 하반절)에서 '다윗'이 언급되면서 포함법을 이루어 제 1, 2소단락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제 1소단락과 2소단락의 연관성은 여기에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 1소단락의 끝(2절 하반절)과 제 2소단락의 처음(3절 상반절)에서 각각 '예루살렘'이 극적인 대칭을 이루어 양 소단락이 '예루살렘'이라는 주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제 1, 2소단락의 바깥쪽은 '다윗'이, 안쪽은 '예루살렘'이 각각 상응하면서 교차대구법을 이루고 있다.

    제 2소단락(3-5절)은 앞 단락에서 이야기한 예루살렘이 과연 어떤 곳인지 더 자세히 설명하며 예루살렘의 의미를 부각하여 찬미조로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3절 상반절에서 명사문장을 사용하여 이 단락을 강조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시의 중심주제가 바로 이 단락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바로 이 단락에서는 야웨께서 공의로 다스리시는 다윗 집, 곧 예루살렘을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시가 순례시의 유형에 포함되지만, 여느 순례시와 다른 점은 '예루살렘'이 지나칠 정도로 강조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 제 3소단락(6-9절)에서는 2소단락에서 예루살렘을 찬미하다가 분위기를 바꾸어 예루살렘의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심이 되는 단어는 예루살렘의 '샬롬'이다. 시인은 6, 7, 8절에서 각각 '샬롬'을 언급하고 있으며, 마지막 9절에서는 '샬롬'과 상응하는 '토브'를 언급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예루살렘'은 2인칭으로 각 절마다 표현되고 있다. 한편 이 3소단락은 두 부분(6-7절/ 8-9절)으로 세분하여 나눌 수 있다. 6-7절은 2인칭 명령형을 사용하며 '샬롬'(평화)과 '샬라'(형통)가 번갈아가면서 등장한다. 8-9절은 각각 1인칭 청유형을 사용하며, 각 절 모두 같은 문장구조를 가지고 있다.

    위와같은 짜임새로 볼 때 1절부터 9절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주제는 예루살렘임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예루살렘은 이 시의 중심을 이루는 어구 '야훼의 집', '다윗의 집'으로도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결론적으로 이 시는 순례시의 유형을 빌어 야훼께서 공의의 보좌로 두신 다윗 집, 예루살렘을 찬미하는 시이다.

    4. 문학유형과 삶의 자리

    시편 122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쉬르 하마알로트)라는 표제가 붙은 시편 120-134편의 일부이다. 이 시편들은 모두 순례시 유형에 속한다. "올라감"(ascents)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직역하면 "계단들"을 의미한다. 이 시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에서 불린 노래들인 것같다. 4절의 "이스라엘의 증언에 따라"라는 표현이 보여주듯이,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라고 명하고 있는 신명기 16:16에 따라 정기적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다.4) 그런데 여기에서 '증언'을 의미하는 '에두트'를 살펴보면 야훼께서 선택하신 장소로 일년에 3번씩 모든 이스라엘인이 올라가는 규례를 언급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예루살렘의 특권들(the prerogatives of Jerusalem)을 언급하기도 한다.5) 이와 관련해서 볼 때 1절의 "야훼의 집에 올라가자"라는 문구는 왕상 12:23의 경우처럼 제사를 드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 2:3의 경우처럼 재판을 위해 올라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게다가 5절의 '판단의 보좌'는 확실히 재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6) 이렇게 본다면 이 시는 이방의 압제 속에서 공의로 판단하시는 야훼의 국제적인 재판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편 본문의 저작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일단 표제에 있는 '레다윗'에 따라 다윗 시대에 저작된 것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본문비평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많은 사본들에서 빠져있으며, 3절에서 이미 예루살렘은 건설된 곳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포로기 이전에 저작된 것일까? 이것은 가능성이 있다. 크라우스는 12 지파동맹 제도에 대해서 연구하고 '지파동맹'(amphictyony)에 있어서 중앙 성소의 기능에 대해서 지적했던 노트의 의견을 내세우면서 다윗 시대에도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중앙 성소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서 포로기 이후 저작설을 부인했다.7) 그러나 포로기 이후에 지어졌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일까? 우선 3절에서 예루살렘의 기능을 살펴보면 야훼의 지파들이 함께 하나로 모이는 곳으로 표현된다. 포로기 이후의 시대는 그야말로 귀환 공동체에 의해서 새롭게 예루살렘이 건설되는 희망의 시기였다. 그리고 이 시기는 오랫동안 남, 북 왕국으로 나뉘어져 각각 다른 전승들을 가지고 있던 지파들이 화해하고 두 왕국에서 내려오던 전승들, 곧 출애굽-시내 전승과 다윗 전승이 융합하여 새로운 계약이 탄생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귀환 공동체가 함께 모이는 중심지는 바로 예루살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1절에서 야훼의 집에 올라가자는 말을 들었을 때 시인은 기뻐했는데 그 이유는 4절과 5절에서 야훼의 이름에 감사하기 위해서 올라가는데 그곳은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다윗 집의 보좌를 통해 공의로 심판하시는 곳이다. 이것은 아마도 '전쟁 후의 상황'일 것이다. 6절 이하에서 특히 예루살렘, 성루, 성채, 형제와 이웃에 대한 샬롬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더욱 전쟁이나 포로 시대 이후의 상황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볼 때 이 시의 저작시기는 가능성이 열려져 있기는 하지만 포로기 이후에 귀환 공동체가 새로 세워진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감격을 누리며 예루살렘의 평화와 형통을 기원하는 시이며, 이방을 재판하시는 야훼께서 다윗 집인 예루살렘에 보좌를 두심을 확신하는 시로 볼 수 있다.

    시편 122편의 자리

    1. 121편과 123편과의 관계

    시편 121편과 123편 모두 각각 1절에서 시인은 "내 눈을 든다"는 표현을 통해서 야훼의 도움을 바라고 있다. 
    이런 표현이 122편 1절에서는 "야훼의 집에 올라가는"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은 야훼의 집(1, 9절)과 다윗의 집(5절), 곧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121편 6절에서는 "상하다", "해(害)", 환난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시인의 곤고함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123편은 3절의 "멸시", 4절의 "조소" 등의 단어로 시인 혹은 이스라엘이 이방의 멸시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122편은 "야훼의 집에 올라가자고 할 때 기뻐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5절에서 "야훼께서 예루살렘에 판단의 보좌를 두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이스라엘의 곤고함은 오로지 야훼께서만 해결하실 수 있다는 시인 곧 이스라엘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2) 중심어 '예루살렘'으로 살펴본 자리

    순례시와(시편 120-134) '예루살렘' : 

    120-134편의 순례시 가운데 예루살렘이 언급되고 있는 곳은 단 네군데 뿐이다(122:2, 3, 6, 128:5). 
    이 네  군데 중 세 곳이 바로 본문이다. 
    128:5에서는 야훼를 경외하는 자는 평생 예루살렘의 복을 본다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본문에서는 야훼에게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루살렘에 더욱 매달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로 보아서 '예루살렘'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는 122편은 순례시의 유형 속에서도 아주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사야서와 '예루살렘' : 

    이사야 66:10
    예루살렘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고 한다. 
    왜냐하면 야훼께서 예루살렘에 "평화"가 강물처럼 넘치게 하며(12절) 그들을 예루살렘에서 위로할 것이기 때문(13절)이다. 
    여기에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본문 6절의 "너를 사랑하는 자들"과 상응한다. 
    여기에서 '너'는 바로 예루살렘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 66:12처럼 6절에서도 예루살렘의 "평화"가 언급되고 있다.

    사 40:2에서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라고 한다. 이 본문은 사 39장의 상황과는 다르게 유대 성읍들은 황폐화되었고 성전은 폐허가 되었으며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내렸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유배기간은 끝났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분명히 희망의 메시지이다. 이런 분위기는 예루살렘의 재건과도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사 40:9-10에서는 예루살렘에게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하라고 하면서 그 하나님이 친히 권세를 잡고 다스리신다고 외치고 있다. 또 사 24:23에서도 만군의 야훼께서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신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본문 5절에서 예루살렘에 야훼의 판단의 보좌, 곧 다윗 집에 속한 보좌가 있다고 하는 선언과 부합되는 구절이다. 야웨께서 재판권을 행사하시는데 바로 그 곳이 예루살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 33:20에서도 "네 눈에 안정한 처소된 예루살렘이 보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고 하면서 예루살렘의 영속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사 27:13에서는 "그날에 큰 나팔을 울려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파멸케 된 자와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가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고 한다. 12절에서도 "너희를 과실처럼 일일이 모으시리라"고 한다. 이것은 본문 3절에서 예루살렘을 "함께 어우러지는 성읍으로 세운 곳"으로 묘사하는 것과 상응시켜 볼 수 있다.

    예수와 '예루살렘' : 

    시 122편의 시인이 예루살렘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찬미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도 그의 생애에서 예루살렘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요한복음 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우선 예수는 절기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요 2:13, 23, 5:1, 12:12). 
    그리고 예수는 그의 사역을 갈릴리에서 시작하셨지만(마 4:12-17, 막 1:14-15),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행하신 최종 사역지는 바로 예루살렘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갈 것을 아시고 계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을지 아시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마 17-19). 

    본문 1절에서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기쁜 일이었지만, 예수에게 있어서는 반대로 죽음의 길이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그의 마지막 사역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는 큰 무리들에 의해 임금으로 추앙받으셨다. 
    마치 본문 5절의 "다윗 집에 속한 판단의 보좌"에 오르는 임금처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한편 예수는 예루살렘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시 122편의 시인의 표현과는 반대의 방법으로 애정을 표시하셨다. 
    본문의 시인은 예루살렘의 평화와 형통을 간구하며(6-7절), 희망의 목소리로 예루살렘에 평화와 복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눅 19:42-44에서 시인과는 반대로 "예루살렘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라고 하시며 탄식하셨다. 
    시인은 3절에서 예루살렘을 "함께 모이는 성읍으로 세워졌다"고 하지만, 예수는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포위하며, 예루살렘과 자식들을 땅에 매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요한계시록과 '예루살렘'

    요한계시록에서는 '예루살렘'을 3번 언급하고 있다(3:12,  21:2,  21:10). 


    요한계시록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요한계시록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이 세 구절 모두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3:12에서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이 시험을 이기는 자 위에 기록된다고 한다. 
    21:2에서도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한다. 
    21:10도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인다고 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편의 '예루살렘'과 요한계시록의 그것은 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본문에서의 평화로운 예루살렘은 '함께 어우러지는 성읍'(3절), '성루'(7절), '성채'(7절) 등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의미에서 언급되지만, 계시록에서는 반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의미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한 본문해설

    1) 1-2절 (순례의 과정 : 기쁨) : 
    시인은 "야훼의 집에 올라가자"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기쁨을 회상한다. 
    이것은 시인이 야훼의 집을 사모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야훼의 집에 올라가자"라는 문구는 왕상 12:27과 사 2:3에 나오는데, 각각 전자는 제사에의 초대이며 후자는 재판의 초대에의 공식문구이다. 
    본문은 5절과 연관해서 볼 때 후자에 가깝다. 시인이 야훼의 집을 사모하고 기뻐하는 까닭은 그곳에서 축복이 나오고(시 118:26, 134:3), 이스라엘을 자신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기 때문이다(시 135:3-4). 
    이렇게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올라온 시인은 예루살렘을 마치 사랑하는 사람처럼 2인칭으로 대한다.

    2) 3-5절 (순례의 장소 : 예루살렘) : 
    2절 마지막에서 예루살렘을 불렀는데, 3절 첫머리에서도 예루살렘을 거듭 부르고 있다. 
    이는 시인이 얼마나 예루살렘을 사모하고 있는지 잘 드러내준다. 
    여기에서는 2절에서 언급한 예루살렘이 과연 어떤 곳이길래 시인이 사모하고 기뻐하는지 그 이유를 이야기한다. 
    그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지파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며, 야훼의 이름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역할을 하며, 다윗 집에 속한 보좌를 통해 야훼의 공의의 판단이 행사되는 역할을 한다. 
    이 공의의 판단은 예루살렘 안에서만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야훼께서 예루살렘을 위해서 그들의 대적을 무찌르시는 열방에 대한 판단이다.

    3) 6-9절 (축복 간구 : 샬롬) : 
    시인은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을 찬미한 이후에 이제는 예루살렘을 위해서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시인은 예루살렘을 계속 2인칭으로 부르며 복을 빌고 있다. 
    6-7절은 만약 예루살렘을 위해 평화를 구하면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은 형통하고, 예루살렘은 평화가 있고, 그 성채는 형통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신명기 사가의 문체를 보는 듯하다. 
    8-9절은 시인이 예루살렘의 평화를 구하는 것은 예루살렘 자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사는 형제와 이웃, 그리고 심지어는 하나님 야훼의 집을 위해서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이 평안해야 형제와 이웃, 야훼의 집인 성전도 평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인이 왜 예루살렘을 그다지 아끼고 사모하는지 엿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평화는 예루살렘의 평화에 따라 달렸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아끼는 것이다.

    선포를 위한 제안

    1. 오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 모이기를 사모하고 기뻐해야 한다.(1절)
    2. 오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서는 갈라진 모든 형제들이 하나로 어우러져야 한다.(3절) 
    모든 교회들이 섬기는 야훼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그 한분 아래 하나로 모여 예배드리는 모습이 우리가 바라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이다.
    3. 오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감사하기 위해 모여야 한다.(4절)
    4. 오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정의가 펼쳐져야 한다.(5절) 
    오히려 교회 안에서 정의가 가리워지고 그리스도인들이 부정을 앞장서서 행한다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는 옛 예루살렘처럼 사라질 것이다.
    5. 우리는 오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6절) 
    교회가 평화해야 교인들도 평화하며, 나라도 또한 평화로와질 것이다.






    예루살렘을 찾아 예배하러 온 한 순례자가 지은 시로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하나님의 임재 장소인 예루살렘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본시에는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먼저 서술되어 있고 (1-5절), 
    그 예루살렘을 찬양하는 시인의 격정 어린 감동이 노래되고 있다(6-9절). 
    시인은 하나님의 집인 예루살렘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를 위해 예루살렘을 찾아온 순례자에 의해 기록된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문 3-7절에 묘사된 예루살렘의 모습이 다윗 당시의 예루살렘의 상황과 상당히 일치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본시의 저자가 다윗이란 견해도 있습니다. 
    이 시는 예루살렘을 화려하게 묘사했는데, 단순한 땅 위의 예루살렘에 대한 찬양을 넘어서 장차 나타날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인 새 예루살렘에 대한 영광스러운 찬양도 포함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기쁨

    1.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는 기쁨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도가 언젠가는 확실하고 안정된 자리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 때로부터 천년이 훨씬 지나도록 언약궤는 마치 순례자들처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어 여호와 집에 올라가니 그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시인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순례자의 기쁨과 가슴 벅찬 감격을 노래했는데, 장차 성도들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읍에 들어갈 때 환희와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a. 여호와의 이름을 두실 곳(신 12:10-11)
    b. 장막에 거하신 하나님(삼하 7:6)

    2) 예배의 처소인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소가 예전에는 거할 곳이 없어서 이리저리 옮겨 다녔지만 이제는 주께서 택하신 곳 즉 예루살렘에 두심으로 모든 성도들이 한결같이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오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영원한 상징의 처소로 이곳에서 예배하면 되었습니다. 이는 완성된 성전을 의미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의미합니다. 과거에는 제사장들을 통해 죄 사함을 얻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길 기뻐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길 기뻐해야 합니다.  

    a. 성전이신 예수(요 2:21)
    b. 담대히 나아갈 은혜의 보좌(히 4:16)
    c. 주 안에서 하나(요 17:21-23)

    3) 조밀한 성읍 예루살렘
    시인은 예루살렘이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조밀한 성읍이란 예루살렘의 번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조형상 밀집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성민들의 내적 연합을 의미함과 동시에 성전과 백성들 사이에 아주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므로 다른 성읍보다 훌륭한 질서와 거룩한 통치를 이루었습니다. 우리의 생활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는 건조하고 웃음이 없으며 화평을 모르고 살았지만,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는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것을 느끼며 진정한 기쁨을 소유케 됩니다.  
    ·믿음과 성령의 충만(행 6:4-5)

    2. 다윗 집에 두신 판단의 보좌

    1)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리는 예배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은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사대로가 아니라 전례 즉 하나님의 뜻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종교적 중심지이며 또한 정치적 중심지였습니다. 다윗 이래의 모든 왕들은 여기에서 정치를 하였고 또한 모든 중요한 재판이 여기서 행하여졌습니다. 유대 백성은 그들의 삼대 절지에 여호와 앞에 모여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오늘날 예배의 목적이 퇴색해 버려서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예배를 축복을 받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하는 부류가 많습니다. 이는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예배는 복을 받는 과정이기 전에 앞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의무에 해당합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예배에 임하기를 바라십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온전히 드릴 때 부수적으로 형통함의 복이 강림할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a.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신16:16)
    b. 하나님의 가증히 여기시는 제사(사1:11-13)

    2) 다윗 집의 판단의 보좌
    판단의 보좌란 왕권을 뜻하는데, 주께서는 이를 다윗의 집안에 두셨습니다. 다윗의 후손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대대로 자기 열조의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다윗의 가문에 세워진 왕권은 영원할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특히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의 권세를 행하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판단의 보좌 아래 사는 자는 영원한 사람을 얻게 됩니다. 이는 주께서 인간에게 값없이 주신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a. 송사를 재판하는 여호사밧(대하19:8)
    b. 이새의 뿌리에서 날 한 싹(사11:10)
    c. 값없이 얻은 칭의(롬3:24)

    3.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의 형통

    1) 예루살렘을 위하는 자의 헝통함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며 사랑하은 자는 형통하게 됩니다. 이는 예루살렘의 번영을 위해 기도하라는 권면과 같은데,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교회를 확장하고 번영케 하기 위해 힘쓰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우리가 주의 교회의 안녕을 위해서 힘쓰고 이 땅에 주의 뜻을 펼칠 때, 평안이 있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형통한 생활들 하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주의 교회를 위해 헌신된 삶을 사는 자는 형통한 삶을 축복받게 됩니다.  
    ·먼저 구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마6:33)

    2) 성안의 헝통함과 헝제의 평강을 위한 기도
    시인은 성안과 궁중에 형통이 있기를 원하여 예루살렘의 번영을 진심으로 바랐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왕권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예언적 내용입니다. 또 시인은 자기의 형제와 친구들을 위해 평강을 빌었습니다. 시인이 모든 사람들의 평화를 위해 주께 간구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전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친구와 형제의 화평을 구한 멋은 현대 교회에 큰 본이 됩니다. 있어야 할 사랑이 식어 가고 질투와 반목이 성행하는 현대 교회에서, 공동체 의식과 형제 사랑을 구축하여 참된 교회의 모습으로 발전해 나감이 시급합니다.  
    a.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대상29:3)
    b. 빛 가운데 거하게 하는 형제 사랑(요일2:10)

    3) 교회의 번영을 위한 관심
    시인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해 성도의 복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법궤가 안치된 성막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세운 성막을 주의 거처로 삼으신 것은, 출애굽시 모세의 장막에 거하신 것과 후일 솔로몬의 전에 거하신 사실과 부합합니다. 인생에게 있어 구원의 여부가 가장 절박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구원 계획을 실천하는 장소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번영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한 수고(골1:24-25)

    다윗 시대에 하나님의 도성으로 처음 선택된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으로 백성들이 새로이 사랑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본시를 통해 복음의 교회 즉 '위에서부터 내려온 예루살렘'으로 불리는 교회를 섬김에 있어 헌신적이어야 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됩니다.  

    [단어해설]
    1절. 여호와의 집.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

    2절. 섰도다. 단회적이 아니라 항상 그 곳에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4절. 이스라엘의 전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과 규례를 말한다.

    5절. 판단의 보좌. 법정에서 재판관이 앉는 자리를 가리킨다.

    9절. 구하리로다. '너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라는 뜻.

    [신학주제]
    예루살렘과 교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 이스라엘에 살고 있고, 그 이스라엘의 중심지가 바로 예루살렘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정치, 경제, 종교, 문화의 중심지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나큰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축복하셨고,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그 축복받은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했다. 또한 예루살렘은 영적인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고 나아가 초대교회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 이 지대한 곳이다. 예루살렘은 원어적으로 평화의 땅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임 재하셔서 통치하시는 땅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땅에는 평화와 안식만이 존재하며 이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신 교회의 의미와 상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여 평화가 깃드는 곳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영적교훈]
    예루살렘이 찬양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 곳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여러 왕들을 통해 임했기 때문이다. 또한 예루살렘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은 모든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힘이 된다.  





    7월 12일(토) 시편 120-131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판단의 보좌(122:5)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
    There the thrones for judgment stand, the thrones of the house of David.


    판단(4941) 미쉬파트(mishpâṭ)  מִשְׁפָּט 스트롱번호 4941

    1. 판단.   2. 레 19:15.  3. 욥 9:32
    발음 [ mishpâṭ ]
    어원  /  819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24회 사용

    보좌(3678) 키쎄(kiççêʼ  ) כִּסֵּא 스트롱번호 3678

    1. 터.  2. 욥 36:7.  3. 렘 3:17.
    발음 [ kiççêʼ ]
    어원  /  어미활용 כִּסְאִי, 
    복수 כִּסְאוֹת,3680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35회 사용
    • 1. 명사, 남성 터, 자리, 의자, 보좌.
      • a. 명사, 남성 [왕의] 욥36:7, 삼하3:10, 7:13, 대상22:10, 대하7:18. 
        b. 명사, 남성 [하나님의] 렘3:17. 
        c. 명사, 남성 법관석, 느3:7, 시122:5.  
        d. 명사, 남성 [대제사장의] 삼상1:9, 4:13. 
         e. 명사, 남성 보통의자, 왕하4:10, 잠9:14.

    • 관련 성경  /  ☞왕좌(창41:40), 보좌(왕상10:19, 22:10, 시97:2), 왕위(신17:18, 삼하14:9), 좌석(삿3:20),의자(삼상1:9), 총독(느3:7), 재판장(시94:20), 자리(잠9:14, 20:8, 렘1:15). [동] 즉위하다(에1:2).

    판단의 보좌 
    - 여기서 '보좌'란 공의를 집행하는 자리를 뜻한다. 
    즉 일반적으로 '보좌'는 왕의 좌소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심판관, 재판관이 앉는 자리를 뜻한다. 
    문맥상, 예루살렘이 모든 백성에게 공정한 법의 혜택을 베푸어 주던 공의의 도시였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다시 한번 그곳이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확인케 한다.

    다윗 집의 보좌 
    - 법을 집행하였던 다윗 가문으로서는 다윗 가문이 그 같은 일을 맡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재판관들은 공의의 재판을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또 공의의 재판이 시행될 때 그들은 여호와의 왕권을 뒷받침하는 귀한 역할을 감당하는 셈이 되었다(사 9:7; 11:3-5).
    한편 이 직무를 위임받지 않았던 압살롬은 그 일하기를 사모했고 결국 그가 반역을 도모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도 이와 관련되어 있었을지 모른다(삼하 15:3,4).

    다윗 집의 판단의 보좌
    판단의 보좌란 왕권을 뜻하는데, 주께서는 이를 다윗의 집안에 두셨습니다. 다윗의 후손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대대로 자기 열조의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다윗의 가문에 세워진 왕권은 영원할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특히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의 권세를 행하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판단의 보좌 아래 사는 자는 영원한 사람을 얻게 됩니다. 이는 주께서 인간에게 값없이 주신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a. 송사를 재판하는 여호사밧(대하19:8)
    b. 이새의 뿌리에서 날 한 싹(사11:10)
    c. 값없이 얻은 칭의(롬3:24)

    예루살렘과 교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 이스라엘에 살고 있고, 그 이스라엘의 중심지가 바로 예루살렘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정치, 경제, 종교, 문화의 중심지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나큰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축복하셨고,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그 축복받은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했다. 
    또한 예루살렘은 영적인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고 나아가 초대교회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 이 지대한 곳이다. 
    예루살렘은 원어적으로 평화의 땅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셔서 통치하시는 땅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땅에는 평화와 안식만이 존재하며 이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신 교회의 의미와 상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여 평화가 깃드는 곳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예루살렘이 찬양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 곳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여러 왕들을 통해 임했기 때문이다. 
    또한 예루살렘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은 모든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힘이 된다.  


    122:6

    • 예루살렘...평안 - '평안'의 히브리어 '솰롬'(* )인데, 본절에서부터 8절까지에 3번 등장하고있다. '예루살렘'(* , 예루솰람) 속에도 '솰롬'(* )과 동일 어원인 '솰람'(* )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본절에서부터 8절까지에서는 일종의 언어 유희(play of words)가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Perowne, Anderson).


    시편 122편은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시입니다. 
    예루살렘 성정을 향해 가는 순례하는 자의 찬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3대 절기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절기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출애굽기 23:14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3대 절기를 지키도록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출 23:15-16]

    1. 무교절(15절). 
    2. 맥추절(16a). 
    3. 수장절(16b)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이 절기들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갈 때 억지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이 찬양을 부르면서 기쁨으로 올라갑니다.

    시편 122: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오늘 다윗이 이렇게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순례자가 성전에 오르며 이렇게 어린 아이와 같이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 하나님께서 성전에 임재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십니다.(1-5)

       (1-2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상황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할 때의 기쁨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3-5절)은 앞에서 이야기한 예루살렘이 과연 어떤 곳인지 더 자세히 설명하며 예루살렘의 의미를 부각하여 찬양합니다. 공의로 다스리시는 다윗 집, 곧 예루살렘을 찬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과연 어떤 곳이기에 시인이 사모하고 기뻐합니까?

    시편 122:5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광야생활 중에는 계속 민족이 이동하고 있었지만 성막은 그 백성 중앙에 있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지파는 성막 중심으로 장막을 쳤고, 진행할 때도 성막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고, 왕국을 이룬 후 성전을 건축하였지만, 성전은 늘 백성들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성전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전에 임재하여 계시며 그 백성의 왕으로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장막 생활할 때 성막이, 왕국이 이루어진 후 성전이 하나님이 임재 하셔서 다스리시는 장소였습니다.

    "올라감"(ascents)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직역하면 "계단들"을 의미합니다. 
    이 시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에서 불린 노래들입니다. 
    4절의 "이스라엘의 증언에 따라"라는 표현이 보여주듯이,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라고 명하고 있는 신명기 16:16에 따라 정기적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시편 121편과 123편 모두 각각 1절에서 시인은 "내 눈을 든다"는 표현을 통해서 야훼의 도움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이 122편 1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는" 행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은 여호와 하나님의 집(1, 9절)과 다윗의 집(5절), 곧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예루살렘은 closely compacted together 로서 허술한 점이라고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잘 짜인 성읍이란 뜻입니다. 이 성전에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올라갑니다.

    예루살렘은 아름다운 곳입니다. 
    건물의 외형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두신 심판의 보좌(There stand the thrones for judgment) 때문입니다.

    그 보좌에 의로운 왕이 앉아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또 자기 백성을 사랑과 진리로 다스리십니다.

    이런 예루살렘에 예배 드리러 올라가는 것은 가슴 벅찬 감격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는 기쁨의 축제입니다. 
    교회는 새 예루살렘입니다.

    121편 6절에서는 "상하다", "해(害)", 환난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시인의 곤고함을 드러냅니다.

    이어오는 123편은 3절의 "멸시", 4절의 "조소" 등의 단어로 시인 혹은 이스라엘이 이방의 멸시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122편은 "여호와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자고 할 때 기뻐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5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판단의 보좌를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곤고함은 오로지 여호와께서만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지파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역할을 합니다.

        다윗 집에 속한 보좌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 공의의 판단이 행사되는 역할을 합니다. 이 공의의 판단은 예루살렘 안에서만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서 그들의 대적을 무찌르시는 열방에 대한 판단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이 시의 중심을 이루는 어구 '여호와의 집', '다윗의 집'으로도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성전은 삶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지요.

       1절과 9절에서 "여호와의 집"이라는 단어가 수미쌍관법을 이루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의 시작과 끝, 동기와 목적지가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의 중앙에 해당하는 5절에 나오는 "다윗의 집"은 "집"이라는 중심어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통치의 대리자로서 그의 임무는 하나님의 통치의 근본적인 목적인 "공의(미쉬파트, 5절)"를 실현시키고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일들은 다른 곳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예루살렘,

    그 한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할 이유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살펴보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기쁨이 넘치는 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사 40:9-11]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권세를 잡고 그분의 팔로 다스리신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 24:23]

       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

       만군의 야훼께서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본문 5절에서 예루살렘에 여호와 하나님의 판단의 보좌, 곧 다윗 집에 속한 보좌가 있다고 하는 선언과 부합되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재판권을 행사하시는데 바로 그 곳이 예루살렘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사 27:13]

       "그날에 큰 나팔을 울려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파멸케 된 자와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가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

       12절에서도 "너희를 과실처럼 일일이 모으시리라"고 합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는데 그 백성이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 66: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

    통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평화"가 강물처럼 넘치게 하며(12절) 그들을 예루살렘에서 위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죄악의 용서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사 40: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이 되어서 세상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죄까지 용서함을 주십니다.

        다윗이 기뻐 뛰면서 성전에 올라가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합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모실 때 기쁨으로 모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습니다(시 135:3-4).

        택하신 데서 하나님의 사랑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 택한 백성을 위해 메시아를 보내주심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가게 하시고 그 백성들의 죄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사건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요 2:13, 23, 5:1, 12:12).

        그분의 마지막 사역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는 큰 무리들에 의해 임금으로 추앙받으셨습니다.

    왕 중 왕으로, 세상에 오시는 통치자로 오십니다.

    마치 본문 5절의 "다윗 집에 속한 판단의 보좌"에 오르는 임금처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분의 사역을 갈릴리에서 시작하셨지만(마 4:12-17, 막 1:14-15), 최종 사역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갈 것을 아시고 계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을지 아시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마 17-19).

       본문 1절에서 다윗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기쁜 일이었지만, 예수님께 있어서는 반대로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그곳에서 죄 용서함의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여호와의 집을 사모하고 기뻐하는 까닭은 시온에서 죄용서함의 축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놀라운 만왕의 왕, 하나님의 어린 양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계3:12에서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이 시험을 이기는 자 위에 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계21:2에서도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계21:10도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교회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고, 교회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갖고,  교회 평안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인가를 배우게 원합니다.

    시편 122: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는 말을 들었을 때 기뻐했습니다. 
    기뻐하다는 것은 어떤 일에 대하여 즐거움이나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대하여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그 앞에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예배를 드릴 수 있고 하나님께 죄를 고하여 용서의 은총을 받을 수 있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 응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성전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의의 보좌가 있습니다.
    교회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은 천국 백성의 특권입니다.
    왕 되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예배는 이 땅에서 누리는 천국의 축제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이 왜 그렇게 기쁩니까?

    시편 122:2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인간 실존의 모든 영역에 공포와 주림 억압과 전쟁이 인간을 위협합니다.
    이런 인간 세상에서 가장 갈망하는 것이 바로 샬롬입니다.
    오늘 말씀은 샬롬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에 평강의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계셔야 함을 잘 말씀해 주십니다.

       (6-9절)에서는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을 찬미한 이후에 이제는 예루살렘을 위해서 평화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찬미하다가 분위기를 바꾸어 예루살렘의 평화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심이 되는 단어는 예루살렘의 '샬롬'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6, 7, 8절에서 각각 '샬롬'을 언급하고 있으며, 마지막 9절에서는 '샬롬'과 상응하는 '토브'를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예루살렘을 계속 2인칭으로 부르며 복을 빌고 있습니다. 6-7절은 만약 예루살렘을 위해 평화를 구하면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은 형통하고, 예루살렘은 평화가 있고, 그 성채는 형통할 것이라고 합니다.

         평안은 무사하여 마음에 아무 근심과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형통은 바라고 원하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이 임하면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온전히 살게 됩니다. 무엇을 어떻게 이룰 것을 하나님께서 그 지혜로 가르쳐 주시고 함께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목적을 형통하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의 집으로 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야 하며 죄를 고하여 용서를 받아야 하며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평안과 형통을 구하여야 합니다.

       1] 교회 사랑하는 자가 형통합니다.

    시편 122: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평안”이란 무슨 뜻일까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런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 성경에서 나오는 샬롬이란 “항상 어떤 것이 예상대로, 계획대로, 당연히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대로 진행되어 나가는 것”그것을 샬롬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도성, 평화의 도성,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그 말씀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어가시고, 그 통치를 즐겁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목표와 목적을 향해서 힘있게 걸어나가도록 모든 환경과 여건이 안정되고, 혼란스럽거나, 흔들림이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도성, 하나님의 교회의 본질을 충실하게 만들어 갈 것을 간구하라,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예루살렘이란 말의 뜻은 “평화의 도성”입니다. 
    “평안의 도성”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는 것은 그 성이 갖고 있는 본래의 특성, 본질이 풍부하게 드러나도록 간구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다니엘은 포로생활을 하던 중에도 예루살렘 쪽을 향해서 기도했습니다.

    다니엘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예루살렘을 생각하고 그곳을 향해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일생을 책임져 주셨습니다.

    시편 122:7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성읍’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예루살렘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합니다. 예루살렘이 평안할 때 평화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소중한 선물입니다. 평안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 속에서 누리는 기쁨과 자유입니다.

        이런 샬롬(평안)은 형통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형통할 때 세상을 복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당시 히브리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예루살렘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는 것입니다.

        모리아산은 지금의 예루살렘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자리이며,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자리(대하3:1)입니다.

        다윗왕은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솔로몬은 그곳에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교회의 평안입니다. 교회가 불화와 분열로 갈등할 때 하나님이 슬퍼하십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평안하고 형통하여 세계를 복주는 일에 쓰임 받는 것이 하나님의 큰 기쁨입니다.

       3] 친구와 형제가 평안을 누립니다.

       [시122:8]

       8.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8-9절은 시인이 예루살렘의 평화를 구하는 것은 예루살렘 자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사는 형제와 이웃, 그리고 심지어는 하나님 야훼의 집을 위해서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이 평안해야 형제와 이웃, 야훼의 집인 성전도 평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이 왜 예루살렘을 그다지 아끼고 사모하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평화는 예루살렘의 평화에 따라 달렸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아끼는 것입니다.

    1. 교회에 모이기를 사모하고 기뻐해야 합니다(1절)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히브리서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2) 오늘 교회에서는 모든 형제들이 하나 되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여호와 한분이십니다. 그 한분 아래 하나로 모여 예배드리는 모습이 우리가 바라는 새 예루살렙입니다. (3절)

        3) 오늘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감사하기 위해 모여야 합니다.(4절)

        4) 오늘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정의가 펼쳐져야 합니다.(5절) 

        5) 우리는 오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6절)

        교회가 평화해야 교인들도 평화하며, 나라도 또한 평화로와질 것입니다.

    시편 122:9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2.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3.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4.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5.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7.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8.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9.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본문의 짜임새

    (1) 1절과 9절에서 "야훼의 집"(ꕛ 야훼)이라는 단어가 수미쌍관법을 이루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의 시작과 끝, 동기와 목적지가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편의 중앙에 해당하는 5절에 나오는 "다윗의 집(ꕛ 다윗e)"은 "집"이라는 중심어를 통해 야훼의 집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 있는 "집"(야훼의 집과 다윗의 집)이 뼈대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통치의 대리자로서 그의 임무는 하나님의 통치의 근본적인 목적인 "공의(미쉬파트, 5절)"를 실현시키는 것이다.3) 바로 이와 같은 일들은 다른 곳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일어난다. "예루살렘"이라는 또 하나의 중심어는 제1소단락(1-2절)인 2절, 제2소단락(3-5절)인 3절, 제3소단락(6-9절)인 6절에 나타난다. 3-5절은 예루살렘이 어떤 곳인가를 묘사하는 단락으로서 이 소단락의 양쪽 외곽인 2, 6절에 예루살렘이 나오는 것은 세 단락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예루살렘"이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 위에서 구분한 단락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제 1소단락(1-2절)에서는 시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상황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할 때의 기쁨을 회상하고 있다. 여기에서 1절 상반절에서 쓰인 '레다윗'은 제 2소단락의 마지막(5절 하반절)에서 '다윗'이 언급되면서 포함법을 이루어 제 1, 2소단락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제 1소단락과 2소단락의 연관성은 여기에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 1소단락의 끝(2절 하반절)과 제 2소단락의 처음(3절 상반절)에서 각각 '예루살렘'이 극적인 대칭을 이루어 양 소단락이 '예루살렘'이라는 주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제 1, 2소단락의 바깥쪽은 '다윗'이, 안쪽은 '예루살렘'이 각각 상응하면서 교차대구법을 이루고 있다.

    제 2소단락(3-5절)은 앞 단락에서 이야기한 예루살렘이 과연 어떤 곳인지 더 자세히 설명하며 예루살렘의 의미를 부각하여 찬미조로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3절 상반절에서 명사문장을 사용하여 이 단락을 강조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시의 중심주제가 바로 이 단락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바로 이 단락에서는 야웨께서 공의로 다스리시는 다윗 집, 곧 예루살렘을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시가 순례시의 유형에 포함되지만, 여느 순례시와 다른 점은 '예루살렘'이 지나칠 정도로 강조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 제 3소단락(6-9절)에서는 2소단락에서 예루살렘을 찬미하다가 분위기를 바꾸어 예루살렘의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심이 되는 단어는 예루살렘의 '샬롬'이다. 시인은 6, 7, 8절에서 각각 '샬롬'을 언급하고 있으며, 마지막 9절에서는 '샬롬'과 상응하는 '토브'를 언급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예루살렘'은 2인칭으로 각 절마다 표현되고 있다. 한편 이 3소단락은 두 부분(6-7절/ 8-9절)으로 세분하여 나눌 수 있다. 6-7절은 2인칭 명령형을 사용하며 '샬롬'(평화)과 '샬라'(형통)가 번갈아가면서 등장한다. 8-9절은 각각 1인칭 청유형을 사용하며, 각 절 모두 같은 문장구조를 가지고 있다.

    위와같은 짜임새로 볼 때 1절부터 9절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주제는 예루살렘임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예루살렘은 이 시의 중심을 이루는 어구 '야훼의 집', '다윗의 집'으로도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결론적으로 이 시는 순례시의 유형을 빌어 야훼께서 공의의 보좌로 두신 다윗 집, 예루살렘을 찬미하는 시이다.

    4. 문학유형과 삶의 자리

    시편 122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쉬르 하마알로트)라는 표제가 붙은 시편 120-134편의 일부이다. 이 시편들은 모두 순례시 유형에 속한다. "올라감"(ascents)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직역하면 "계단들"을 의미한다. 이 시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에서 불린 노래들인 것같다. 4절의 "이스라엘의 증언에 따라"라는 표현이 보여주듯이,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라고 명하고 있는 신명기 16:16에 따라 정기적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다.4) 그런데 여기에서 '증언'을 의미하는 '에두트'를 살펴보면 야훼께서 선택하신 장소로 일년에 3번씩 모든 이스라엘인이 올라가는 규례를 언급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예루살렘의 특권들(the prerogatives of Jerusalem)을 언급하기도 한다.5) 이와 관련해서 볼 때 1절의 "야훼의 집에 올라가자"라는 문구는 왕상 12:23의 경우처럼 제사를 드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 2:3의 경우처럼 재판을 위해 올라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게다가 5절의 '판단의 보좌'는 확실히 재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6) 이렇게 본다면 이 시는 이방의 압제 속에서 공의로 판단하시는 야훼의 국제적인 재판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편 본문의 저작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일단 표제에 있는 '레다윗'에 따라 다윗 시대에 저작된 것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본문비평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많은 사본들에서 빠져있으며, 3절에서 이미 예루살렘은 건설된 곳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포로기 이전에 저작된 것일까? 이것은 가능성이 있다. 크라우스는 12 지파동맹 제도에 대해서 연구하고 '지파동맹'(amphictyony)에 있어서 중앙 성소의 기능에 대해서 지적했던 노트의 의견을 내세우면서 다윗 시대에도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중앙 성소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서 포로기 이후 저작설을 부인했다.7) 그러나 포로기 이후에 지어졌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일까? 우선 3절에서 예루살렘의 기능을 살펴보면 야훼의 지파들이 함께 하나로 모이는 곳으로 표현된다. 포로기 이후의 시대는 그야말로 귀환 공동체에 의해서 새롭게 예루살렘이 건설되는 희망의 시기였다. 그리고 이 시기는 오랫동안 남, 북 왕국으로 나뉘어져 각각 다른 전승들을 가지고 있던 지파들이 화해하고 두 왕국에서 내려오던 전승들, 곧 출애굽-시내 전승과 다윗 전승이 융합하여 새로운 계약이 탄생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귀환 공동체가 함께 모이는 중심지는 바로 예루살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1절에서 야훼의 집에 올라가자는 말을 들었을 때 시인은 기뻐했는데 그 이유는 4절과 5절에서 야훼의 이름에 감사하기 위해서 올라가는데 그곳은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다윗 집의 보좌를 통해 공의로 심판하시는 곳이다. 이것은 아마도 '전쟁 후의 상황'일 것이다. 6절 이하에서 특히 예루살렘, 성루, 성채, 형제와 이웃에 대한 샬롬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더욱 전쟁이나 포로 시대 이후의 상황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볼 때 이 시의 저작시기는 가능성이 열려져 있기는 하지만 포로기 이후에 귀환 공동체가 새로 세워진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감격을 누리며 예루살렘의 평화와 형통을 기원하는 시이며, 이방을 재판하시는 야훼께서 다윗 집인 예루살렘에 보좌를 두심을 확신하는 시로 볼 수 있다.

    시편 122편의 자리

    1. 121편과 123편과의 관계

    시편 121편과 123편 모두 각각 1절에서 시인은 "내 눈을 든다"는 표현을 통해서 야훼의 도움을 바라고 있다. 
    이런 표현이 122편 1절에서는 "야훼의 집에 올라가는"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은 야훼의 집(1, 9절)과 다윗의 집(5절), 곧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121편 6절에서는 "상하다", "해(害)", 환난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시인의 곤고함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123편은 3절의 "멸시", 4절의 "조소" 등의 단어로 시인 혹은 이스라엘이 이방의 멸시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122편은 "야훼의 집에 올라가자고 할 때 기뻐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5절에서 "야훼께서 예루살렘에 판단의 보좌를 두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이스라엘의 곤고함은 오로지 야훼께서만 해결하실 수 있다는 시인 곧 이스라엘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2) 중심어 '예루살렘'으로 살펴본 자리

    순례시와(시편 120-134) '예루살렘' : 

    120-134편의 순례시 가운데 예루살렘이 언급되고 있는 곳은 단 네군데 뿐이다(122:2, 3, 6, 128:5). 
    이 네  군데 중 세 곳이 바로 본문이다. 
    128:5에서는 야훼를 경외하는 자는 평생 예루살렘의 복을 본다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본문에서는 야훼에게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루살렘에 더욱 매달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로 보아서 '예루살렘'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는 122편은 순례시의 유형 속에서도 아주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사야서와 '예루살렘' : 

    사 66:10에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고 한다. 왜냐하면 야훼께서 예루살렘에 "평화"가 강물처럼 넘치게 하며(12절) 그들을 예루살렘에서 위로할 것이기 때문(13절)이다. 여기에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본문 6절의 "너를 사랑하는 자들"과 상응한다. 여기에서 '너'는 바로 예루살렘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 66:12처럼 6절에서도 예루살렘의 "평화"가 언급되고 있다.

    사 40:2에서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라고 한다. 이 본문은 사 39장의 상황과는 다르게 유대 성읍들은 황폐화되었고 성전은 폐허가 되었으며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내렸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유배기간은 끝났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분명히 희망의 메시지이다. 이런 분위기는 예루살렘의 재건과도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사 40:9-10에서는 예루살렘에게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하라고 하면서 그 하나님이 친히 권세를 잡고 다스리신다고 외치고 있다. 또 사 24:23에서도 만군의 야훼께서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신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본문 5절에서 예루살렘에 야훼의 판단의 보좌, 곧 다윗 집에 속한 보좌가 있다고 하는 선언과 부합되는 구절이다. 야웨께서 재판권을 행사하시는데 바로 그 곳이 예루살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 33:20에서도 "네 눈에 안정한 처소된 예루살렘이 보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고 하면서 예루살렘의 영속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사 27:13에서는 "그날에 큰 나팔을 울려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파멸케 된 자와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가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고 한다. 12절에서도 "너희를 과실처럼 일일이 모으시리라"고 한다. 이것은 본문 3절에서 예루살렘을 "함께 어우러지는 성읍으로 세운 곳"으로 묘사하는 것과 상응시켜 볼 수 있다.

    예수와 '예루살렘' : 

    시 122편의 시인이 예루살렘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찬미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도 그의 생애에서 예루살렘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예수는 절기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요 2:13, 23, 5:1, 12:12). 
    그리고 예수는 그의 사역을 갈릴리에서 시작하셨지만(마 4:12-17, 막 1:14-15),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행하신 최종 사역지는 바로 예루살렘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갈 것을 아시고 계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을지 아시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마 17-19). 
    본문 1절에서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기쁜 일이었지만, 예수에게 있어서는 반대로 죽음의 길이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그의 마지막 사역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는 큰 무리들에 의해 임금으로 추앙받으셨다. 
    마치 본문 5절의 "다윗 집에 속한 판단의 보좌"에 오르는 임금처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한편 예수는 예루살렘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시 122편의 시인의 표현과는 반대의 방법으로 애정을 표시하셨다. 
    본문의 시인은 예루살렘의 평화와 형통을 간구하며(6-7절), 희망의 목소리로 예루살렘에 평화와 복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눅 19:42-44에서 시인과는 반대로 "예루살렘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라고 하시며 탄식하셨다. 
    시인은 3절에서 예루살렘을 "함께 모이는 성읍으로 세워졌다"고 하지만, 예수는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포위하며, 예루살렘과 자식들을 땅에 매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요한계시록과 '예루살렘'

    요한계시록에서는 '예루살렘'을 3번 언급하고 있다(3:12,  21:2,  21:10). 
    이 세 구절 모두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3:12에서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이 시험을 이기는 자 위에 기록된다고 한다. 
    21:2에서도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한다. 
    21:10도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인다고 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편의 '예루살렘'과 요한계시록의 그것은 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본문에서의 평화로운 예루살렘은 '함께 어우러지는 성읍'(3절), '성루'(7절), '성채'(7절) 등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의미에서 언급되지만, 계시록에서는 반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의미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한 본문해설

    1) 1-2절 (순례의 과정 : 기쁨) : 
    시인은 "야훼의 집에 올라가자"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기쁨을 회상한다. 
    이것은 시인이 야훼의 집을 사모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야훼의 집에 올라가자"라는 문구는 왕상 12:27과 사 2:3에 나오는데, 각각 전자는 제사에의 초대이며 후자는 재판의 초대에의 공식문구이다. 
    본문은 5절과 연관해서 볼 때 후자에 가깝다. 시인이 야훼의 집을 사모하고 기뻐하는 까닭은 그곳에서 축복이 나오고(시 118:26, 134:3), 이스라엘을 자신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기 때문이다(시 135:3-4). 
    이렇게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올라온 시인은 예루살렘을 마치 사랑하는 사람처럼 2인칭으로 대한다.

    2) 3-5절 (순례의 장소 : 예루살렘) : 
    2절 마지막에서 예루살렘을 불렀는데, 3절 첫머리에서도 예루살렘을 거듭 부르고 있다. 
    이는 시인이 얼마나 예루살렘을 사모하고 있는지 잘 드러내준다. 
    여기에서는 2절에서 언급한 예루살렘이 과연 어떤 곳이길래 시인이 사모하고 기뻐하는지 그 이유를 이야기한다. 
    그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지파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며, 야훼의 이름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역할을 하며, 다윗 집에 속한 보좌를 통해 야훼의 공의의 판단이 행사되는 역할을 한다. 
    이 공의의 판단은 예루살렘 안에서만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야훼께서 예루살렘을 위해서 그들의 대적을 무찌르시는 열방에 대한 판단이다.

    3) 6-9절 (축복 간구 : 샬롬) : 
    시인은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을 찬미한 이후에 이제는 예루살렘을 위해서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시인은 예루살렘을 계속 2인칭으로 부르며 복을 빌고 있다. 
    6-7절은 만약 예루살렘을 위해 평화를 구하면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은 형통하고, 예루살렘은 평화가 있고, 그 성채는 형통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신명기 사가의 문체를 보는 듯하다. 
    8-9절은 시인이 예루살렘의 평화를 구하는 것은 예루살렘 자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사는 형제와 이웃, 그리고 심지어는 하나님 야훼의 집을 위해서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이 평안해야 형제와 이웃, 야훼의 집인 성전도 평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인이 왜 예루살렘을 그다지 아끼고 사모하는지 엿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평화는 예루살렘의 평화에 따라 달렸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아끼는 것이다.

    선포를 위한 제안

    1. 오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 모이기를 사모하고 기뻐해야 한다.(1절)
    2. 오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서는 갈라진 모든 형제들이 하나로 어우러져야 한다.(3절) 
    모든 교회들이 섬기는 야훼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그 한분 아래 하나로 모여 예배드리는 모습이 우리가 바라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이다.
    3. 오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감사하기 위해 모여야 한다.(4절)
    4. 오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정의가 펼쳐져야 한다.(5절) 
    오히려 교회 안에서 정의가 가리워지고 그리스도인들이 부정을 앞장서서 행한다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는 옛 예루살렘처럼 사라질 것이다.
    5. 우리는 오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6절) 
    교회가 평화해야 교인들도 평화하며, 나라도 또한 평화로와질 것이다.






    예루살렘을 찾아 예배하러 온 한 순례자가 지은 시로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하나님의 임재 장소인 예루살렘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본시에는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먼저 서술되어 있고 (1-5절), 
    그 예루살렘을 찬양하는 시인의 격정 어린 감동이 노래되고 있다(6-9절). 
    시인은 하나님의 집인 예루살렘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를 위해 예루살렘을 찾아온 순례자에 의해 기록된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문 3-7절에 묘사된 예루살렘의 모습이 다윗 당시의 예루살렘의 상황과 상당히 일치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본시의 저자가 다윗이란 견해도 있습니다. 
    이 시는 예루살렘을 화려하게 묘사했는데, 단순한 땅 위의 예루살렘에 대한 찬양을 넘어서 장차 나타날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인 새 예루살렘에 대한 영광스러운 찬양도 포함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기쁨

    1.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는 기쁨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도가 언젠가는 확실하고 안정된 자리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 때로부터 천년이 훨씬 지나도록 언약궤는 마치 순례자들처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어 여호와 집에 올라가니 그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시인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순례자의 기쁨과 가슴 벅찬 감격을 노래했는데, 장차 성도들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읍에 들어갈 때 환희와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a. 여호와의 이름을 두실 곳(신 12:10-11)
    b. 장막에 거하신 하나님(삼하 7:6)

    2) 예배의 처소인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소가 예전에는 거할 곳이 없어서 이리저리 옮겨 다녔지만 이제는 주께서 택하신 곳 즉 예루살렘에 두심으로 모든 성도들이 한결같이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오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영원한 상징의 처소로 이곳에서 예배하면 되었습니다. 이는 완성된 성전을 의미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의미합니다. 과거에는 제사장들을 통해 죄 사함을 얻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길 기뻐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길 기뻐해야 합니다.  

    a. 성전이신 예수(요 2:21)
    b. 담대히 나아갈 은혜의 보좌(히 4:16)
    c. 주 안에서 하나(요 17:21-23)

    3) 조밀한 성읍 예루살렘
    시인은 예루살렘이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조밀한 성읍이란 예루살렘의 번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조형상 밀집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성민들의 내적 연합을 의미함과 동시에 성전과 백성들 사이에 아주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므로 다른 성읍보다 훌륭한 질서와 거룩한 통치를 이루었습니다. 우리의 생활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는 건조하고 웃음이 없으며 화평을 모르고 살았지만,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는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것을 느끼며 진정한 기쁨을 소유케 됩니다.  
    ·믿음과 성령의 충만(행 6:4-5)

    2. 다윗 집에 두신 판단의 보좌

    1)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리는 예배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은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사대로가 아니라 전례 즉 하나님의 뜻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종교적 중심지이며 또한 정치적 중심지였습니다. 다윗 이래의 모든 왕들은 여기에서 정치를 하였고 또한 모든 중요한 재판이 여기서 행하여졌습니다. 유대 백성은 그들의 삼대 절지에 여호와 앞에 모여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오늘날 예배의 목적이 퇴색해 버려서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예배를 축복을 받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하는 부류가 많습니다. 이는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예배는 복을 받는 과정이기 전에 앞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의무에 해당합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예배에 임하기를 바라십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온전히 드릴 때 부수적으로 형통함의 복이 강림할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a.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신16:16)
    b. 하나님의 가증히 여기시는 제사(사1:11-13)

    2) 다윗 집의 판단의 보좌
    판단의 보좌란 왕권을 뜻하는데, 주께서는 이를 다윗의 집안에 두셨습니다. 다윗의 후손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대대로 자기 열조의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다윗의 가문에 세워진 왕권은 영원할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특히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의 권세를 행하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판단의 보좌 아래 사는 자는 영원한 사람을 얻게 됩니다. 이는 주께서 인간에게 값없이 주신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a. 송사를 재판하는 여호사밧(대하19:8)
    b. 이새의 뿌리에서 날 한 싹(사11:10)
    c. 값없이 얻은 칭의(롬3:24)

    3.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의 형통

    1) 예루살렘을 위하는 자의 헝통함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며 사랑하은 자는 형통하게 됩니다. 이는 예루살렘의 번영을 위해 기도하라는 권면과 같은데,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교회를 확장하고 번영케 하기 위해 힘쓰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우리가 주의 교회의 안녕을 위해서 힘쓰고 이 땅에 주의 뜻을 펼칠 때, 평안이 있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형통한 생활들 하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주의 교회를 위해 헌신된 삶을 사는 자는 형통한 삶을 축복받게 됩니다.  
    ·먼저 구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마6:33)

    2) 성안의 헝통함과 헝제의 평강을 위한 기도
    시인은 성안과 궁중에 형통이 있기를 원하여 예루살렘의 번영을 진심으로 바랐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왕권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예언적 내용입니다. 또 시인은 자기의 형제와 친구들을 위해 평강을 빌었습니다. 시인이 모든 사람들의 평화를 위해 주께 간구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전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친구와 형제의 화평을 구한 멋은 현대 교회에 큰 본이 됩니다. 있어야 할 사랑이 식어 가고 질투와 반목이 성행하는 현대 교회에서, 공동체 의식과 형제 사랑을 구축하여 참된 교회의 모습으로 발전해 나감이 시급합니다.  
    a.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대상29:3)
    b. 빛 가운데 거하게 하는 형제 사랑(요일2:10)

    3) 교회의 번영을 위한 관심
    시인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해 성도의 복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법궤가 안치된 성막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세운 성막을 주의 거처로 삼으신 것은, 출애굽시 모세의 장막에 거하신 것과 후일 솔로몬의 전에 거하신 사실과 부합합니다. 인생에게 있어 구원의 여부가 가장 절박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구원 계획을 실천하는 장소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번영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한 수고(골1:24-25)

    다윗 시대에 하나님의 도성으로 처음 선택된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으로 백성들이 새로이 사랑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본시를 통해 복음의 교회 즉 '위에서부터 내려온 예루살렘'으로 불리는 교회를 섬김에 있어 헌신적이어야 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됩니다.  

    [단어해설]
    1절. 여호와의 집.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

    2절. 섰도다. 단회적이 아니라 항상 그 곳에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4절. 이스라엘의 전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과 규례를 말한다.

    5절. 판단의 보좌. 법정에서 재판관이 앉는 자리를 가리킨다.

    9절. 구하리로다. '너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라는 뜻.

    [신학주제]
    예루살렘과 교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 이스라엘에 살고 있고, 그 이스라엘의 중심지가 바로 예루살렘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정치, 경제, 종교, 문화의 중심지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나큰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축복하셨고,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그 축복받은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했다. 또한 예루살렘은 영적인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고 나아가 초대교회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 이 지대한 곳이다. 예루살렘은 원어적으로 평화의 땅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임 재하셔서 통치하시는 땅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땅에는 평화와 안식만이 존재하며 이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신 교회의 의미와 상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여 평화가 깃드는 곳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영적교훈]
    예루살렘이 찬양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 곳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여러 왕들을 통해 임했기 때문이다. 또한 예루살렘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은 모든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힘이 된다.  










    7월 11일(금) 시편 119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Open my eyes that I may see wonderful things in your law

    주의 법(8451) 토라(tôwrâh)  תּוֹרָה   

    1. 교훈.   2. 잠 1:8.   3. 선지자를 통한 예언
    발음 [ tôwrâh ]  
    어원  /  3384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20회 사용
    • 1.  명사, 여성 교훈, 교리, 욥22:22.
      • a. 명사, 여성 [인간, 부모의] 잠1:8, 3:1, 4:2, 7:2.
      • b. 사, 여성 선지자를 통한 예언, 사1:10, 8:16,20, 42:4,21
    • 2. 명사, 여성 율법.
      • a. 명사, 여성 인간의 규례, 삼하7:19.
      • b. 명사, 여성 거룩한 규례, 레6:7(14), 7:7.
      • c. 명사, 여성 집합적인 율법, 율법책, 수1:8, 8:34,왕하22:8,11, 느8:3.
      • d. 명사, 여성 [주]복수형 תּוֹרוֹת : 율법들, 출18:20, 레26:46.
    • 관련 성경  /  계명(창 26:5, 왕하17:37, 시19:8), 법(출12:49, 민19:2, 시119 : 1), 율법(출13:9, 민31:21, 신 17:11, 왕하10:31, 겔7:26), 법도(출18:16, 시78:5, 겔43:11), 규례(레6:9, 14:2, 민15:16), 법률(왕상2:3), 말씀(욥22:22).


    기이한 것 -


    פּוֹטִיפַר 스트롱번호6318
    1.

    바로 왕의 관원중한 사람 ‘보디발’

    2.

    창39:1.

    발음 [ Pôwṭypâr ]
    구약 성경
    2회 사용
    • 1.
      고유명사 바로 왕의 관원중한 사람 ‘보디발’, 창39:1.

    참고 정보

    문법설명

    애굽어의 파생어

    연관 단어

    • 문법설명
      애굽어의 파생어
      관련 성경
      ☞보디발(창39 : 1).

    열어서()

    גָּלָה 스트롱번호1540
    1.

    발가벗기다

    2.

    이주시키다

    3.

    삼하15:19.

    발음 [ gâlâh ]
    구약 성경
    113회 사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5절 아자브   

    소성케 하소서(25절)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아자브(ʽâzab)  עָזַב 스트롱번호 5800

    1. 끈을 늦추다.  2. 사람을 남기고 가다.  3. 어느 곳에 두다
    발음 [ ʽâzab ]  
    구약 성경  /  208회 사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7절 외 6구절 하이야


    소성케 하소서(37절) / 40절, 88절,  107절, 154절, 156절, 159절 - 7구절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하이야( châyâh) חָיָה 스트롱번호 2421

    1. 살다.   2. 생존하다.  3. 다시 살다
    발음 [ châyâh ]  
    구약 성경  / 283회 사용

    40.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88.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로 소성케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증거를 내가 지키리이다.
    107.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154. 주는 나의 원한을 펴시고 나를 구속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156. 여호와여 주의 긍휼이 크오니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소성케 하소서.
    159. 내가 주의 법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신 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나를 살리소서 

    50.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149.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내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와여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살리소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일반적인 시야로부터 숨겨진, 비밀스러운 것으로서 신령한 의미를 가리킨다. 
    일단 그것이 밝혀지면 놀라움과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주의 법은 명령 조항을 모아놓은 세상 법 같은 것과는 상이하게 다르다. 
    그 속에는 인생의 궁극적 지침을 담은 깊고 신령한 의미가 숨겨져 있는데 그것은 영적 시야를 가질 때에만 파악이 가능하다.


    시편 119편을 알파벳 시라고 합니다.
    히브리 알파벳은 모두 22자입니다.
    22개의 알파벳에 여덟(8)을 곱하면 176구절이 됩니다.
    여덟(8)을 곱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여덟"은 모든 것을 완성 한 후에 다시 시작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영의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것을 보려고 합니다.
    기이한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세우소서(28절)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세우소서(쿰.  qûwm)   קוּם 스트롱번호 6965

    1. 일어나다 / 창 19:1.   2. ~에게 대항해서 일어나다.   3. 존재하다
    발음 [ qûwm ] 
    구약 성경  /  629회 사용

     
    둘째는 살리소서(50, 149절) / 2421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2421)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내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와여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살리소서. (2421)  


    셋째는 소성케 하소서(25, 37, 40, 88, 107, 154, 156, 159절)

    25.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아자브(ʽâzab)  עָזַב 스트롱번호 5800

    1. 끈을 늦추다.  2. 사람을 남기고 가다.  3. 어느 곳에 두다
    발음 [ ʽâzab ]  
    구약 성경  /  208회 사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7.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40.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88.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로 소성케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증거를 내가 지키리이다. 
    107.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154. 
    주는 나의 원한을 펴시고 나를 구속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156. 여호와여 주의 긍휼이 크오니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소성케 하소서. 
    159. 내가 주의 법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신 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50.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149.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내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와여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살리소서.

    하이야( châyâh) חָיָה 스트롱번호 2421

    1. 살다.   2. 생존하다.  3. 다시 살다
    발음 [ châyâh ]  
    구약 성경  / 283회 사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이한 것 
    - 일반적인 시야로부터 숨겨진, 비밀스러운 것으로서 신령한 의미를 가리킨다. 
    일단 그것이 밝혀지면 놀라움과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주의 법은 명령 조항을 모아놓은 세상 법 같은 것과는 상이하게 다르다. 
    그 속에는 인생의 궁극적 지침을 담은 깊고 신령한 의미가 숨겨져 있는데 그것은 영적 시야를 가질 때에만 파악이 가능하다.




    성경에서 숫자 8이 직접적으로 언급 된 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몇 가지는 확연히 8과 연관이 있다. 
    첫 번째는 할례는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 반드시 받아야 한다. 
    두 번째는 4의 배수로서 8의 의미로 사용된다. 
    이것은 직적으로 8과 연관이 없지만 상징적 의미는 통한다. 
    에를 들며 방향은 4방향이다. 
    여기 2곱이 되어 8이 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성막은 4방향이며, 3지파씩 12지파가 완성된다. 
    여기서 1겹은 레위지파가 싸고, 다음으로 세 지파가 네 방향으로 진을 친다. 
    이렇게하여 성막을 중심으로 두 겹이 되어 성막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할례 언약

    할례를 태어난 지 팔일째 되는 날 받아야 한다는 내용은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할례 언약에서 근거한다. 하나님은 이삭이 태어나기 직전 아브라함을 불러 할례 언약을 명하신다. 그때 아브람의 나이는 99세였다.1

    • 창 17:12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왜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받도록 명하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당시 이스라엘은 한 주가 7일이고, 8일은 첫 주의 시작이기 때문에 생명의 탄생을 한 주의 시작과 연결하려는 일종의 교육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뿐이다.

    안식 후 첫 날

    안식후 첫날은 8일째 되는 날이다. 1주가 7일이기 때문에 안식이 지난 첫날은 지금의 일요일이다. 일요일은 한 주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신약의 성도들은 주님의 부활이 안식 후 첫날 일어난 것을 두고 새로운 시작의 의미로 받아 들였다.

    광야의 진영

    이 부분을 8과 연결 시키기에는 모호함이 존재한다. 
    하지만 8과 연관을 시킨다 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

    광야의 진영은 성막을 중심으로 세 지파씩 12지파가 자리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한 지파가 더 있다. 
    바로 레위 지파이다. 
    레위지파는 성막의 어느 위치에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레위지파는 어디에 있었을까? 
    동일하게 성막 4방향에 하나씩 자리하고 있다.

    동쪽은 모세와 제사장의 장막이 있고, 남쪽은 고핫 자손이, 서쪽(뒷편)에는 게르손 자손이, 북쪽에는 므라리 자손들이 텐트를 쳤다. 
    성막의 1차 장막은 레위지파가 진을 쳤다. 
    그 다음 세 지파씩 장막을 쳐서 사방으로 둘러쌌다.

    광야의 장막은 4방향을 두겹씨 쌓는 형태를 짓고 있는 것이다. 
    4의 곱 8의 형태이다. 
    이것을 8의 개념 보다는 4의 두 겹의 의미가 강하다. 
    4의 두 겹으로서의 팔은 완전함, 강력함, 거룩함을 뜻한다. 
    성막을 레위인들이 일차적으로 보호하는 이유는 성막의 규례를 알지 못하고 함부로 성막에 들어가거나 해하려는 자들을 막기 위함이다. 거룩하지 못한 자가 성막에 들어가면 죽임을 당하기때문이다. 
    성막을 보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으로 죄인들이 접근하여 죽는 것으로 죄인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 수 1:51 성막을 운반할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걷고 성막을 세울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세울 것이요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일지며
    • 수 3:38 성막 앞 동쪽 곧 회막 앞 해 돋는 쪽에는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진을 치고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위하여 성소의 직무를 수행할 것이며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일지니라
    • 수 18:22 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하지 말 것이라 죄값으로 죽을까 하노라

    레위인의 장막은 성막을 지키기 위함이지만 하나님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죄인들의 죽음을 막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죄인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반드시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의지하여 그분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한다.

    8의 의미

    성경 속의 8을 획일적으로 정의할 수 없으나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먼저는 완전에 하나를 더함으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할례의 팔일이나, 안식 후 첫날은 정확히 8 여덟째 날을 의미하다. 
    이것은 새로운 시작이며,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고 있다.

    두 번째는 4의 겹으로 완전성, 강력한 힘, 또는 거룩성을 의미하고 있다. 
    거룩성과 완전성을 성막의 이스라엘 지파에게서 분명히 드러난다.

     -









    7월 10일(목) 시편 113-118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도의 죽는 것(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Precious in the sight of the LORD is the death of his saints.

    관주 성경(貫珠 聖經)  / 

     聖徒(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貴重(귀중)히 보시는도다.

             ㄱ
             시 50:5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너의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ㄴ
             시 72:14 저희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속하리니 저희 피가 그 목전에 귀하리로다



    야카르 베에네 아도나이 함마웨타 라하시다우 
      יָקָר בְּעֵינֵי יְהוָה הַמָּוְתָה לַחֲסִידָיו

    יָקָר     בְּעֵינֵי      יְהוָה          הַמָּוְתָה       לַחֲסִידָיו

    라하시다우 함마웨타 아도나이 베에네 야카르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
    이 구절의 문자적 번역은 '성도의 죽음은 여호와의 눈에 귀중하다'이다. 

    '성도'에 해다하는 히브리어는 '친절한', '경건한', '자비로운' 등의 뜻을 가진 형용사 '하시드'(*)의 복수형
    '하시드'란 말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을 나타내는 '헤세드'(*)란 말과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본문의 '성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성품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삼하 22:26). 

    성도(2623) 하시드(châçîyd)  חָסִיד    

    1. 친절한.  2. 자비로운.  3. 경건한
    발음 [ châçîyd ]
    어원 / 261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2회 사용
    • 1. 형용사 친절한, 뛰어난, 상냥한, 시12:2(1),18:26(25), 43:1
    • 2. 형용사 자비로운, 은혜로운[하나님께 사용],시145:17, 렘3:12.
    • 3. 형용사 경건한[하나님을 향한], 시30:5(4),31:24(23), 37:28.
    • 관련성경 /  경건한(신 33:8, 시 4:3, 32:6), 거룩한(삼상 2:9, 시 16:10), 자비한(삼하 22:26, 시 18:25),성도(대하 6:41, 시 31:23, 잠2:8), 긍휼(렘 3:12), 경건한 자(미 7:2), 은혜로운(시 145:17). 

    '귀중히'에 해당하는 '야카르'(*)는 '값이나 가치가 높은', '영광스럽고 찬란한', '영향력 있고 무게가 많이 나가는'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욥 31:26). 

    귀중히(3368) 야카르(yâqârיָקָר    

    1. 값비싼.   2. 귀여운.   3. 영광스런
    발음 [ yâqâr ]

    어원  /  336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6회 사용

    • 1. 형용사, 남성 값비싼, 귀한, 귀중한, 가치있는, 왕상10:2,10, 11, 대하3:6, 시116:15
    • 2. 형용사, 남성 귀여운, 사랑스런, 친애하는, 친한 사이의, 소중한, 시45:10(9).
    • 3. 형용사, 남성 영광스런, 명예로운, 존경받는, 전10:1.
    • 4. 형용사, 남성 장대한, 장엄한, 화려한, 훌륭한, 멋진,욥31:26.
    • 5.형용사, 남성 드문, 진기한, 삼상3:1.
        관련 성경 / 희귀한(삼상 3 :1), 귀중한(시 116:15), 밝게뜬(욥 31:26), 귀한(왕상 7:9, 잠 3:15, 사 28:16), 보배로운(대하 32:27, 시 36:7,                        애 4:2), 가까이하는(시 45:9), 
         [명] 부귀(잠 12:27), 존귀(전 10:1).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생명은 불신자들의 생명처럼 무가치한 것이 아니므로 결코 아무런 가치없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확신있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성도의 생명이 때로는 사악한 자들의 손에 무참히 짓밟히는 일이 있어도,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성도의 생명이 때로 무참하게 또 아무런 영광도 없이 훼파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성도의 생명을 귀중하게 보시는 것이다. 
    이 구절은 분명, 성도의 사후(死後) 세계가 하나님의 면전에 펼쳐질 것임을 나타내는 것으로까지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에 동사가 없는 것에 착안하여 '야카르'란 형용사를 이 말의 동사형인 '야카르'의 피엘형으로 보기도 하나 해석상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죽음'에 해당하는 본문의 히브리어는 '마웨타'(*)로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주로 '마웨트'(*)로 기록된다. 
    이것은 아마 '마웨트'의 감상적인 표현이거나 아니면 운율을 맞추기 위한 소유격 어미 '헤'(*)가 첨가된 것으로 보인다.

    죽는 것(4194) 마베트(mâveth)  מָוֶת  

    1. 죽음.  2. 시 7:14.  3. 깊은 잠에 대해 사용] 삼상 20:31 (이새의 아들이 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발음 [ mâveth ]
    어원  /  419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61회 사용
    • 1. 명사, 남성 죽음, 사망.
      • a. 명사, 남성 [가공할 무기에 대해 사용] 시7:14(13).
      • b. 명사, 남성 깊은 잠에 대해 사용] 삼상20:31,26:16, 시13:4(3).
      • c. 명사, 남성 [무거운 죄에 대해 사용] 삼하19:29(28), 왕상2:26
    • 2. 명사, 남성 죽은 자들이 사는 곳, 지옥, 욥28:22,시9:14(13), 잠7:27.
    • 3. 명사, 남성 고질병, 악역, 악질, 흑사병, 전염병,욥27:15, 렘15:2, 18:21, 43:11.
    • 4. 명사, 남성 파멸, 멸망, 소멸, 절멸, 파괴, 출10:17,잠11:19, 12:28.
    • 관련 성경  / 죽음(출10:17, 민16:29, 시89:48), 주검(레11:31,32), 사망(신30:15, 삼상5:11, 시6:5), 스올(시116:3, 잠5:5), 무덤(사53:9). [동] 죽다(창21:16, 신21:22, 욘4:3), 돌아가다(창50:16), 죽이다(신19:6, 시7:13, 렘43:11).

    보시는도다(5869)  아인( )  עַיִן

    1. 흐르다.   2. 분사 עוֹיֵן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발음 [ ʽayin ]  
    구약 성경  / 868회 사용





    死 죽을 사

    획수 6획  
     부수  (죽을사변, 4획)    
    다른 형태  동자(同字) 

    ,

    死자는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死자는 歹(뼈 알)자와 匕(비수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匕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死자를 보면 人(사람 인)자와 歹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시신 앞에서 애도하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해서에서부터 人자가 匕자로 바뀌기는 했지만 死자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모습에서 ‘죽음’을 표현한 글자이다.

    회의문자

    𣦵(알)+人(인)의 합자(合字). 죽을사변(歹(=歺) ☞ 뼈, 죽음)部는 뼈가 산산이 흩어지는 일을 나타냄. 즉 사람이 죽어 영혼(靈魂)과 육체의 생명력이 흩어져 목숨이 다하여 앙상한 뼈만 남은 상태(狀態)로 변하니(≒匕) 「죽음」을 뜻함.







    성도의 죽음이 귀한 까닭

    개역성경은 본문을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라고 합니다. 
    죽음을 귀하게 보시는 분도 있네요? 
    하나님께서 귀중히 여기시는 죽음은 있을지 몰라도, 유족들 입장에서 귀중한 죽음은 없습니다. 
    원통하고 슬프고… 오죽했으면 따라 죽기까지 합니까?

    전직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했습니다. 
    한 편에서는 애석하다, 억울한 죽음이다… 하고 다른 쪽은 검찰 수사를 모면하기 위한 무책임한 도피다, 그렇게들 말해요. 
    어느 편도 그 죽음이 귀하다, 그렇게 말하지는 못합니다. 죽음의 성격이 그런 것입니다.

    모든 죽음은 귀하다, 아름답다…, 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위로가 통하지 않는 인생의 유일한 슬픔과 아픔이 있다면 죽음입니다. 죽음은 전혀 위로가 듣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기도자의 삶(2절)

  • 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 2.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 본절 서두에는 이유나 시간 등의 뜻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접속사 '키'(*)가 쓰이고 있는데 영어로는 'that', 'for', 'when' 등으로 번역된다. 본절외에 1절에서도 이 접속사는 시인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의미로 쓰였는데 둘다 강조적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어떤 주석가들은 이를 '진실로'라고 번역하는데 타당성 있는 주장인 것 같다(M. Dahood). 참조로 칼빈(Calvin)은 이를 시간의 접속사(when)로 보아 '...할 때'라고 이해하기도 했다. 하나님은 구할 바를 당신에게 아뢸 것을 명령하셨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라'(50:15)고 약속하셨다.

    󰃨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우베야마 에크라'(*)로서 문자적 의미는 '그리고 나의 날들 동안에 내가 부르리라'이다. 여기서 '에크라'는 '부르다', '선언하다'란 뜻의 히브리어 '카라'(*)의 미래형인데 '카라'는 '소리쳐 부르짖다', '큰소리로 읽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갔을 때 보디발의 처는 요셉을 모합하면서 자신이 소리쳐 보르는 것에 놀라 요셉이 자신을 겁탈하려다가 도망하였다고 말할 때 이 말을 사용하였으며(창 39:14), 예레미야는 유다의 심판을 경고하는 중에 이 말을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렘 3:4). 한편, 칼빈은 여기에 '카라'의 미래형이 쓰인 것을 두고 1절의 '들으시므로'라는 동사와 연결시켜 이 둘이 시간의 전후 관계를 나타낸다고 보았다. 즉, 1절의 동사는 과거 시제로 해석하고 본절은 그에 대한 결과로서 미래 시제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이 두 동사 모두가 미래 시제로 기록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관용적 표현으로서 흔히 이렇게 표현된다는 것이다.






  •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 영혼의 안식(7절) 
    7절,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의 시간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의 시간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 시인은 여기서 대화의 대상을 자기 영혼에게로 돌린다. 

    '평안함'을 뜻하는 히브리어 '메누하'는 '휴식'이란 의미뿐만 아니라 '휴식을 취하는 장소'를 가리키기도 한다. 
    미가 선지자는 동족(同族)의 재산을 빼앗고 교만하게 사는 것이 이스라엘의 '쉴 곳'이 아님을 지적하면서 떠나라고 말한다(미 2:10). 
    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안식'할 곳이 하나님이 주시는 가나안 땅임을 말하고 있다(신 12:10). 

    '메누하'는 또한 평화와 태평 성대(太平聖代)를 뜻하기도 하는데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는 기도를 마치고 백성들을 축복하며 '태평'에 대해 언급하였다(왕상 8:56). 
    이상의 내용을 검토해 볼 때 '평안함'이란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안식과 평화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평안함'이란 것이 이 세상에서의 부귀나 일시적인 평화가 아니라 영적이면서도 역동적인 평화도 포함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 이 구절은 접속사 '키'에 의해 인도되는 원인절로 볼 수 있는데, 그러하다면 하나님의 후대하심으로 평안함 속에 거할 수 있다는 뜻이다. '후대하다'의 히브리어 '가말'은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데 '관대하다', '젖을 떼다', '무르익다' 등으로 해석된다.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사울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내었나니"(삼상 24:18). 
    모세의 마지막 노래에는 이것이 '보답하다'는 뜻으로 쓰였다(신 32:6). 
    시인은 배은 망덕(背恩忘德)한 인생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함께해 주심과 구원 베풀어 주심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한다.




    9절,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내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 앞의 실존(코람 데오)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행하다는 히브리 단어는 "할라크"라고 합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할 때 동행하다는 단어가 할라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생존 세계에서 
    - '생존 세계'는 '산 자의 땅'으로 버역할 수도 있겠다. 
    '생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임'(*)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수식하는 형용사인데 하나님을 수식할 때에는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사신 분을 뜻한다(수 3:10). 
    '생존세계'를 이러한 뜻과 결부시키면 아마도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는 곳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시인은 사망의 세계에서 건짐 받았기 때문에 앞으로는 그의 장래의 삶을 하늘에 계신 여호와의 면전에서 살아가고자 다짐하였던 것이다.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 '행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형 동사인 '할라크'(*)는 구약 성경에 매우 자주 언급되는 말들 중 하나이다. 
    이것은 '걷다', '행동하다', '연습하다', '돌아다니다'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본문에서 이 말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 이 세상에서 형통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15절,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보시기에 귀중하다.

    시편 116:3-7

  • 3.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 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6.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문자적 번역은 “성도의 죽음은 여호와의 눈에 귀중하다”입니다. 
    죽음을 보는 우리 눈과 하나님의 눈은 다르군요. 

    죽음을 보는 우리 눈에는 눈물, 슬픔, 고통이 있는데 죽음을 보는 하나님의 눈에는 잘 죽은 죽음이야, 귀한 죽음이야… 그렇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1. 성도의 죽음이 귀한 까닭은, 가는 주소지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나 형제… 자식… 교우를 보내면서 왜 웁니까? 헤어짐…, 그냥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헤어지니 울지 않고 보내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런데 유독 우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주 효자가 울고 아주 불효자가 웁니다. 적당히 잘 했던 분들은 적당히 웁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안해서 죄송해서 우는데… 3년 4년이 지나면 신기하게도 부모님의 죽음이 귀중하게 여겨지고 갈수록 더욱 또렷해지고 소망이 생깁니다. 비신자들은 갈수록 더 막막해지고 괴로워하다 마음에 지워버립니다. 제사상으로 추모한다지만 저들도 알아요, 아무리 좋은 음식을 채려놓아도 돌아가신 부모님이 한 숟갈도 뜨지 못하신다는 사실을….

    비신자들 부모 죽음에서 황망한 것은,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니까 장례식 치르면서도 아득한 거예요. 혼이 있다고 믿고 어디론가 떠난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로 갔느냐 말이에요.

     

    사람의 혼이 떠나면 구천(九天)을 헤맨다잖아요? 구천은 불교용어인데 아홉 하늘이에요! 아홉 하늘 어디에도 갈 수 없어 이리저리 떠도는 혼을 구천을 헤맨다는 거예요! 그러니 아무리 성공하고 권세와 명예 누리지만 죽으면 흙이 되고 한 줌의 재가 됩니다. 뭐가 남아요? 혼이 구천을 떠돌고 있으니 죽음은 귀한 것이 아닙니다. 허망한 거예요! 허망한 죽음이고 인생이 풀처럼 연기처럼 가벼운 것입니다. 떨어져 시든 풀과 꽃이 귀한 것이 아니잖습니까?

     

    헨리 나우엔은 <죽음, 가장 큰 선물>에서 공중 곡예사 이야기를 합니다. 
    공중 곡예사가 줄을 놓는 것은 날아 갈 곳이 있기에  받아주는 상대방이 있기에! 틀림없이 잡아준다는 믿음이 그 공중에서 줄을 놓도록 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비신자들은 어느 하늘로 날아가 어느 하늘에서 헤매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니 괴로움이고 나중에는 체념하고 잊어버립니다. 물론 구천을 헤맨다는 것은 그들 생각이지 성경 가르침은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비신자들이 가는 곳의 정확하게 문패가 있어요! 지옥이라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의 줄을 놓을 때 혼이 날아가는 거예요! 어디로? 번지수가 분명해요! 날아가는 곳이 분명해요! 천국! 번지도 나와요! 
    3927번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손을 붙잡고 정확한 방면으로 날아가는 거예요!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미사일이 나를 태우고 날아가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우는 것은 가는 곳을 몰라서가 아니라 헤어짐 때문에 우는 거예요! 그러다 어느 정도 지나면 가 계신 곳을 아니까 그리움과 함께 만날 생각으로 소망이 생깁니다. 그러니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눈에 귀하게 보입니다.

    2. 성도의 죽음이 귀한 까닭은, 천국을 실감해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을 믿고 있습니까? 
    남자 분들이 왜 이리 소리가 작아요? 믿습니다! 큰소리로 아멘! 해봐요! 천국을 믿는다, 아멘! 했지만 그 천국믿음은 교리적이고 종교적이고 상당히 관념적입니다. 천국을 일본 중국 미국처럼 실재하는 나라로 믿는다는 게 실감이 안가요. 아무리 제가 천국 설교하고 장례식에서 천국 설교해도 믿고는 있지만 실감은 가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님이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사정은 달라집니다. 갑자기 천국이 분명히 있는 거예요! 성경에서 그렇게 천국이 있다고 했고! 천국이 있다고 설교를 들었을 때도 그냥 심드렁했어요! 천국을 믿기는 하지만 막연하고 나와 관계가 없는 거예요!

    아프리카에 나이지리아가 있다는 것은 알았어요. 
    그게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때요? 지식은 있었는데 별로 관심도 없고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어요! 그런데 정인태 장로님이 나이지리아로 갔어요! 나이지리아는 더 이상 지도가 아닙니다. 그 나라는 남편 생각할 때마다 믿어지고 가고 싶고 내게는 프랑스나 이탈리아보다 더 정답고 가까운 나라입니다. 왜 그런가요? 남편이 가 있고 아버지가 가 있고 우리 장로님이 가 있으니까 실감나는 것입니다.

     

    천국! 하늘나라! 성경을 읽고 설교도 들어서 알고 믿기는 했지만 실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계신다, 생각하니 그건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죽어봐야 아는 그런 장소가 아닙니다. 천국은 분명히 있습니다. 왜? 어머님이 계시니까! 천국을 부인한다는 것은 어머님의 믿음과 생애! 어머니와의 약속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머님이 계신다, 하면 저절로 천국이 들어옵니다. 설교 갖고도 제대로 믿어지지 않고 성경공부해도 안 되는 것을 어머님은 단 한 방의 죽음을 통해 천국믿음을 소유하는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성도의 죽음! 어머님의 죽음이 어떠하겠어요? 당연히 귀하게 보십니다.

     

    비신자들은 어때요? 고인이 천국에 가셨다는 확신이 안 들어요! 그러면 어디로 가신 거예요? 죄송하지만 지옥입니다. 지옥이 괴롭지요! 나도 괴로워요! 아버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어요! 지옥에 계신 부모님 생각하면 괴로워요! 그러니 천주교회에서는 연옥을 만들어 냈어요! 다 부질없어요! 그런 식의 천국이라면… 기독교의 다른 가르침이 거짓이 됩니다. 왜 그런 비성경적인 교리를 전하는지 모르겠어요! 돈 때문에! 성당 부흥 때문에 그런 걸까요?

     

    부모님이 지옥에 계신다! 괴롭지요? 괴로우니까 차라리 잊어버리고 맙니다. 세월이 지나면 잊어집니다. 부모님 사후(死後)를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겪느니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국에 가 있는 분들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 그립고 이제 만난다는 소망이 생기고… 지옥에 가 있다고 생각하면 방법이 없으니까 잊어버리고 사는 거예요! 그러니 자식에게 고통을 주는 비신자의 죽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귀중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 잘 믿어야 합니다. 돌아가실 때 꼭 천국에서 만나자고 유언 남기세요! 꼭 기독교식으로 장례식해라~! 그러면 예수님 더 잘 믿고 안 믿어지던 천국이 믿어집니다. 

    천국은 부모님의 고향이 되었으니까! 내가 죽어서 우리 자식들 천국을 돌아갈 고향으로 실감하는 믿음이 되었으니 그 죽음이 당연히 귀한 죽음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눈에 성도의 죽음은 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3. 성도의 죽음이 귀한 까닭은, 유족들의 슬픔을 덜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어머니, 마음이 어땠을까요? 제가 서울이 처음이에요! 두 번째네요.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한번 와봤으니까! 지금은 서울역하고 청계천 삼일빌딩 밖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서울에 아는 이가 없어요. 아는 이라고는 고향교회 집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의 번지수 하나 들고 올라가는 거예요! 어머니 마음이 찢어지겠지요? 전화나 제대로 있어요?

     

    세월이 지나니까 같은 서울에 올라가는데 이번에는 하나도 애처롭지 않습니다.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겨서 아들이 내려왔다 서울로 올라가는데 결혼해서 아내가 있어요! 두 아들이 있어요! 여객선이나 비행기 타는 아들의 뒷모습은 늘 미안하고 애처로운 것이 어머니 마음이잖아요? 그러나 잘 가라~! 하면서도 옛날 같지 않아요! 맞은편에서 어서 와요! 여보! 하고 맞아줄 며느리가 있기에 떠나보내면서 섭섭은 하지만 괴로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들을 떠나보내는 그 이별은 귀한 거예요? 절망이에요? 당연히 귀한 이별입니다. 서울에 가야 아들의 가족을 만나니까 그 이별은 슬픔이 아니라 귀한 것입니다.

    죽음이 그래요. 남편이 아내가 죽어 천국에 먼저 올라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천국에 가 있습니다. 죽음의 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떠나가는 죽음을 향해, 아버지 잘 가요! 여보 잘 가요~ 인사하잖아요! 참 슬픈 인사말이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먼저 가 계신 거예요! 아니면 남편이… 저쪽에서는 뭐라고 해요! 어서 와요! 어서 오세요~ 어서 오너라!

     

    내 쪽에서는 보내는 슬픔의 환송이지만 저쪽에서는 반가움의 환영식이에요! 나는 택배로 시신을 보내지만 반대편 천국에서는 영화의 영체로 택배 받아요! 그걸 생각하고 자식들이 슬픔 중에서 위로를 받아요! 아내가 위로를 받아요! 목사 설교로도 위로받지 못했는데 돌아가신 고인이 유족들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죽은 분이 산 사람을 위로하는 격이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성도의 죽음은 내 눈에 귀중하다…하시고 그 죽음은 당연히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이 아니고 어둠의 세계로 가는 이들에게는 사자(死者)는 가지 않으려 하고 죽음의 사자는 너 잘 왔다! 하면서 끌고 가려하기에 보내는 이는 슬프고 괴롭고 견디기 힘듭니다. 비록 믿음생활은 하지 않지만 그 영이 자신도 모르게 영적인 사실들을 감지하고 슬픔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갈 곳도 없고 기쁨으로 받아줄 이도 없고… 지옥의 어느 곳에 있는지 만나지도 못하고… 만나도 남남처럼 증오하고 미워하고 으르렁거리기에… 비신자들이 영이 그걸 감지하고 죽음 앞에서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는 것도 힘들다지만 죽음은 얼마나 두렵고 죽음 이후는 얼마나 힘들까요?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은 구원을 받지 못한 비신자들의 사후(死後) 영혼을 부인합니다. 천국에 갈 사람은 영혼이 살아남는데 구원이 없는 영혼은 육체가 죽을 때 같이 죽어버리기에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예 지옥을 부인하는 것이지요!

     

    저도 개인적으로는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성경에는 천국과 지옥이 분명히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믿고 싶어하는 것만 믿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 요즘 우리 사회의 편갈린 사람들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천국을 믿으려면 지옥도 믿어야지요!

     

    비신자들의 죽음은 잘 가요~ 이별인사만 있기에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괴로운 인사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죽음에는 어서 오너라! 어서 오세요~! 영접의 인사가 있기에 그 상상을 그려보면서 떠나보내는 자녀들이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먼저 가서 기다리다가 어서 와요~ 인사할 생각으로 위로를 주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에는 성도의 죽음은 참 귀하다! 그렇게 보시고 말씀해 놓으신 것입니다.

    결론

    3절,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4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건져주지 않았습니다.

    8절,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어떤 이들은 건짐을 받지 못하고 사망으로 눈물로 넘어짐으로 남게 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15절이 해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죽음을 귀하게 보신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생명이었다면 어떤 죽음이든지 무가치한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공중에 떠도는 죽음이 아니라 가는 주소지가 분명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유족들에게 천국을 실감시켜주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유족들의 슬픔을 덜어주는 위로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타임>지의 창간자 헨리 루스의 부인 클레어 부츠 루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은 날로 기억된다.”

    살아있는 사람은 생일로 축하를 받습니다. 
    죽은 이들은 죽은 날로 기억됩니다. 
    그가 언제 돌아가셨나? 
    그것만 남지 생일은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 죽음은 귀한 죽음이 될까요?

    우리 죽음이 가는 곳을 분명히 보여줄까요? 
    유족들에게 천국을 실감시키는 죽음일까요? 
    남은 이들에게 울지 마! 먼저 가서 기다리다 내가 영접해 줄께~ 그렇게 말해주고 가는 죽음이라면, 하나님의 눈에 귀한 죽음이고 슬퍼하는 우리들에게 공중으로 사라지는 덧없는 죽음이 아니라 귀중한 죽음입니다. 

    중세기 수도사들은 대문에 이런 글을 새겨놓았습니다.

    memento mori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15)

    고린도전서 15:35-54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전 15:35-38)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하늘에 속한 형체와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고전 15:39-41)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5-49)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고전 15:51-54)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도의 죽는 것을 귀중히 보시는 것은 다음과 같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전 15:35-38)
    하늘에 속한 형체와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고전 15:39-41)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2-44)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5-49)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고전 15:51-54)


  •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 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 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
  •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 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의 몸도 있느니라
  •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이 되었나니
  •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 47. 첫 사람은 에서 났으니 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 48. 무릇 에 속한 자들은 저 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 육체(肉體), 영체(靈體), 부활의 몸

    영혼을 담은 세 가지 신체(육체, 영체, 근원체)

    <애플의 창업자 스티븐 잡스가 애독한 '요가난다, 영혼의 자서전'과 마르키데스가 지은 '지중해의 성자 다스칼로스2'>

    우주에는 3차원, 4차원, 5차원이라는 3가지의 세계가 있고, 
    사람의 영혼을 담을 수 있는 몸도 3가지로 되어 있다. 
    3차원에 해당하는 육체와 4차원에 해당하는 영체(심령체), 5차원에 해당하는 근원체(이지체)가 그것이다. 
    3차원 세계에서 육체가 죽으면 사람은 영체와 근원체를 가지고 4차원 세계에서 살게 된다. 
    높은 경지의 스승들은 영체도 버리고 5차원 세계에서 근원체로 산다. 
    4차원 세계에 있는 영혼이 영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환생할 때에는 영체와 근원체를 버리고 새로운 육체와 영체, 근원체를 갖게 된다. 
    5차원 세계에 있는 높은 경지의 스승들은 자기 의지로 3차원 세계나 4차원 세계에 물현하여 그곳의 존재들과 만날 수도 있다. 
    4차원 세계는 공간 제약이 없고 5차원 세계는 시공간 제약이 없고 3차원 세계보다 완벽하고 아름답다. 
    영혼은 본질상 보이지 않으므로 영혼을 담은 그릇(육체, 영체, 근원체)에 의해서만 구분될 수 있다. 
    영혼이 무지와 욕망에 의해(충족되지않은 욕구에 위해, 감각적인 욕망에 대한 집착에 의해) 한 개(근원체), 두 개(영체와 근원체) 혹은 세 개(육체, 영체, 근원체)의 몸이라는 그릇 안에 들어가서 갇혀 있다가 지혜로서(깨달음으로서) 감각적인 욕망에 대한 집착을 끊고, 무욕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자유를 얻은 자그마한 인간의 영혼은 밖으로 나온다. 
    그리하여 그 영혼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광대한 존재와 하나가 된다. 
    신이 원하는 것은 인간이 신에게 복종하며 노예처럼 섬기는 걸 원하는 게 아니라 신의 속성을 알고, 신과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내면에는 신의 모든 속성을 지닌 심오한 영적 세계가 깃들어 있다.

    <마르키데스가 지은 '지중해의 성자 다스칼로스2 세가지 신체'에서>

    다스칼로스는 이렇게 가르쳤다. 
    모든 인간은 동시에 세가지 존재 차원 속에서 산다. 
    즉, 거친 물질계와 심령계와 이지계가 그것이다. 
    이 모두가 물질 우주이지만 서로 다른 진동 수준에 있다. 
    거친 물질계, 소위 3차원 세계가 가장 낮은 수준의 세계이다. 
    이곳은 우리가 시간과 공간, 곧 그가 즐겨 부르는 시공간적 조건을 경험하는 세계이다. 
    심령계, 즉 종종 4차원 세계라 불리는 곳 역시 물질 우주이지만 좀더 높은 수준의 진동을 한다. 
    공간은 해체되고 사람은 순간적으로 광활한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 
    심령계를 지배하는 법칙은 3차원계, 즉 거친 물질계를 지배하는 법칙과는 다르다. 
    이지계, 곧 5차원계도 역시 물질 우주이지만 다른 법칙들에 의해 지배된다. 
    이 5차원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모두 극복된다. 진동은 더 높은 수준이어서 다른 두 세계에서보다 더 자유롭게 움직이고 행동할 수 있다. 
    여기서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지구의 넓은 지역뿐만 아니라 시간을 가로질러 순간적으로 여행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이 세 가지 세계에 상응하는 세 가지의 신체를 가지고 있다. 3차원계에서는 거친 육신을 가지고 살고, 4차원계에서는 심령체, 즉 감정과 정서의 신체를 가지고 살며, 5차원계에서는 이지체를 가지고 산다. 이 이지체는 우리로 하여금 구체적 혹은 추상적인 생각들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신체이다. 이지체는 고차원 이지체와 저차원 이지체로 나뉘어져 있다. 이 세 가지의 신체가 자아의식을 지닌 현재인격을 형성하고 있다. 저차원 이지체는 거친 물질계에서 지니고 있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생김새를 갖고 있다. 저차원 이지체는 다른 성질을 지니고 다른 차원에 존재하지만 그 형상은 거친 육체나 심령체와 동일하다. 고차원 이지체는 형상이 없고 고차원 이지계에 존재한다.

    심령체는 이지체나 거친 육체와 마찬가지로 결국은 죽는다. 자아의식을 지닌 영혼은 환생할 때마다 새로운 이지체, 심령체, 육체를 가지고 자신을 현상화시킨다. 이 세 가지 신체는 자아의식을 지닌 영혼이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자신을 나타날 때 걸치는 옷이다. 현재인격을 형성하는 세 가지 신체들은 각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육체는 항상 그 속에 다른 두 가지 신체를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심령체는 늘 그 안에 이지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지체는 따로 존재할 수 있으며, 자아의식을 지닌 영혼을 표현하는 완전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현재인격은 거친 육체를 버리고 심령체, 즉 감정과 느낌을 표현하는 몸을 가지고 완전한 의식을 지닌 채 심령계에서 살 수 있다. 마찬가지로 먼저 거친 육체를 버리고 다음에 심령체를 버리고 이지체만을 지닌 채 완전한 의식을 지니고 살 수도 있다. 사람이 죽을 때 그는 심령체와 이지체를 지닌 채 떠나서 심령계에서, 거친 물질계에서 살 때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살게 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을 떄 이러한 변화를 인식하지 못한다. 높은 경지의 신비가들은 이지체만을 가지고 이지계에서 살 수 있으며, 의지로써 심령체를 만들어 심령계 속으로 물현(物顯)할 수도 있고, 그는 또 의지로써 거친 육체를 만들어 거친 물질계에 사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도록 나타날 수도 있다. 높은 경지의 신비가들은 거친 육체로서 살건, 심령체로서 살건, 이지체로서 살건 간에 그는 이 모든 신체를 지배하여 의지로써 세 가지 세계에서 각각에 상응하는 신체를 사용하여 자신을 드러 낼 수 있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븐 잡스가 애독한 '요가난다, 영혼의 자서전 43. 스리 유크테스와르의 부활'에서>

    너도 경전에서 읽었을 것이다. 
    신이 인간의 영혼을 차례대로 세 종류의 몸[육체(physical body), 영체(astral body), 근원체(causal body)] 속에 집어넣는다는 것을 말이다. 
    지구 상의 인간은 육체적 감각을 갖추고 있으며, 영계의 인간은 의식과 감정과 생명자로 이루어진 몸을 사용한다. 
    근원체를 가진 존재들은 기쁨이 넘치는 상념의 세계에 머무르게 된다. 영계의 우주에는 영적인 존재들로 가득 찬 많은 영계가 있다. 그곳의 주민들은 영계의 비행기인 빛덩어리를 이용하여 이쪽 영계에서 저쪾 영계로 전기나 방사선 에너지보다 훨씬 빠르게 여행을 다닌다. 여러가지 미묘한 빛과 색의 진동으로 이루어진 영계의 우주는 물질적 우주보다 수백 배나 크다. 수많은 물질적 태양과 별들이 우주 공간을 이리 저리 움직이듯이 영계의 우주에도 무수한 태양계와 항성계가 있다. 그곳의 행성들은 물질계의 해와 달보다 훨씬 아름다운 해와 달을 가지고 있다. 영계의 낮과 밤은 지구의 낮과 밤보다 더 길다. 영계는 무한히 아름답고 깨끗하고 순결하며 정돈된 곳이다. 선한 영들은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지만 악한 영들은 제한된 구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지구상에서 인간은 땅 위에서 살고, 벌레는 땅 속에서 살고, 물고기는  물에서 살고, 새는 하늘에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기 다른 등급을 가진 영계의 존재들도 제각각 적당한 진동 구역에 거주한다. 악한 영들은 영계 우주의 보다 낮은 차원에 마련된 어둠침침하고 음습한 구역에 거주하면서 자신들의 악업을 소진시킨다. 어두운 영계 감옥 위에 자리잡은 광대한 영역은 모두 찬란하고 아름답다. 영계의 우주는 지구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신의 의지와 완성계획에 맞춰져 있다. 영계의 모든 사물은 우선적으로 신의 의지에 따라 나타나고, 그 다음에 부분적으로 영계 존재들이  요구하는 의지에 따라 나타난다. 창조주는 영계에 거주하는 자녀에게 의지대로 영계를 변화시키고 개선할 수 있는 자유와 특권을 주었다. 영계의 존재들은 자신의 형체를 마음대로 나타나게 할 수도 있고 또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영계의 모든 존재들은 어떤 형태도 갖출 수 있기 때문에 서로 쉽게 사귄다. 이렇듯 절대적이지 않고 유동적인 자연 법칙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으므로 이를테면 영계의 어떤 나무가 영계의 망고나 원하는 다른 과일 혹은 꽃, 아니면 완전히 다른 물체까지 열매 맺게 할 수 있다. 카르마에 따른 제약이 있긴 하지만 영계에서 원하면 여러가지로 형태를 바꿀 수 있다는 점에는 차별이 없다. 모든 것이 신의 창조적인 빛으로 진동한다. 영체는 과거의 육체와 정확히 동일하다. 영계인(영체)의 얼굴과 몸매는 지상에서 머물렀던 기간의 젊은 시절 모습과 같다. 때로는 나처럼 노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겠다고 하는 영계인도 있다. 어떤 존재가 영적 진보를 통해 영계에서 해방되어 근원계의 천상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을 때 고차원 영계의 행성에서는 즐거운 축제가 벌어진다. 그런 경우에는 '보이지 않는 천상의 아버지'와 그분과 합일된 성자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몸을 현현시켜 영계의 축제에 참가한다. 영계인의 직관은 장막을 뚫고 지상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갖가지 활동을 관찰한다. 그러나 지상의 인간은 육감이 어느정도 발달하지 않는 한 영계를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수많은 지구인들은 순간적으로나마 영적 존재나 영계를 스치듯 보았다. 광선을 닮은 빛나는 채소가 영계에는 많다. 영계인은 그 채소를 먹고 찬란한 빛의 샘과 영계의 실개천이나 강에서 감로수를 마신다. 천상의 거주자들을 식사의 필요성에 대부분 행방되어 있지만 거의 완전히 해탈한 근원계의 영혼들은 더 없는 행복의 만나(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이르러 굶주릴 때 하나님이 내려준 기적의 양식) 이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 영계의 방문자들은 각각 육체적 카르마(업)의 경중에 따라 오래 혹은 짧게 머물렀다가 업에 따라 정해진 시간 안에 지상으로 다시 이끌려 돌아간다. 영계와 물질계를 오가는 이와 같은 반복적 순환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 모든 인간의 불가피한 운명이다. 근원계의 우주와 근원체, 영계의 우주와 영체, 믈질계의 우주와 육체,  육체가 죽으면 영혼은 여전히 영체와 근원체에 담겨 있다. 이들 세 가지 몸을 한데 묶는 결합력은 욕구이다. 충족되지 못한 욕구의 힘이야말로 인간이 처한 모든 속박 상태의 뿌리인 것이다. 육체적 욕구은 자기 중심적이고 감각적 쾌락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감각적 경험의 충동이나 유혹은 영적 애착이나 근원적 지각과 관련된 욕구보다 훨씬 강하다. 근원적 존재들은 욕구가 생기면 즉각적으로 실현시켜 욕구를 해결한다. 근원체라는 미묘한 면사포로 휘감겨 있음을 아는 이들은 창조주와 마찬가지로 삼라만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모든 피조물은 우주의 꿈이라는 직물로 짠 것이므로 얇은 근원체만을 입은 영혼은 모든 것을 창조하는, 실로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진 셈이다. 영혼은 본질상 보이지 않으므로 영혼을 담은 몸에 의해서만 구분될 수 있다. 몸이 있다는 것은 충족되지 않은 욕구들에 의해 그 몸의 존재가 가능해졌다는 의미이다. 영혼이 무지와 욕망이라는 코르크 마개로 단단히 밀봉된 한 개, 두 개 혹은 세 개의 몸이라는 그릇 안에 들어가서 갇혀 있는 한, 그런 사람은 대영혼의 바다에 합류할 수 없다. 거친 물질적 용기를 죽음이라는 망치로 깨부순다 해도 나머지 두 개의 덮개, 곧 영체 덮개와 근원체 덮개는 그대로 남아 그 영혼이 편재하는 대생명과 의식적으로 결합하는 것을 막는다. 그러나 지혜로서 무욕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그 힘이 남은 두 개의 그릇을 깨뜨릴 수 있다. 그러면 마침내 자유를 얻은 자그마한 인간의 영혼이 밖으로 나온다. 그리하여 그 영혼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광대한 존재와 하나가 된다. 

    (요가난다) 
    천사 같으신 스승님, 스승님의 몸은 제가 푸리 암자에서 엎드려 울던 그 때, 돌아가셨을 때의 모습과 완전히 같습니다.

    (스리 유크테스와르) 
    나의 새로운 신체는 옛것과 완전히 같다. 
    나는 지상에서 그랬던 것보다 훨씬 자주, 언제든지 마음대로 이 형체를 만들거나 없애거나 조절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재빨리 몸을 비물질화해서 빛의 특급열차를 타고 한 행성에서 다른 행성으로, 더 나아가 영계에서 근원계로, 영계에서 물질계로 즉시 여행할 수 있다. 
    너는 요즘 매우 바삐 돌아다녔지만, 내가 봄베이에서 너를 찾아내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스리 유크테스와르처럼 예수님도 부활후 육체로 현현하여 갑자기 나타났다 한순간에 재빨리 몸을 비물질화해서 사라졌다.> 
    누가복음 24:31, 누가복음 24:36-39, 요한복음 20:19, 요한복음 21:1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가 지은 '사후생' 제2장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10개월 전에 세상을 떠난 그녀의 환자였던 슈왈츠 부인이 살과 피를 갖춘 육체로 나타나 로스 박사가 중단하려 했던 죽음과 임종에 대한 세미나를 계속하라는 약속을 부탁도 하고 게인즈 목사님에게 짧은 글도 남기고, 로스 박사가 '약속할게요'라고 말한 순간 슈왈츠 부인은 사라졌다. >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에서>

    인간은 영원불멸의 존재로 창조되었다. 
    인간에게는 죽임이란 없고 다만 지상에서 영계로 이주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세상에서는 이를 죽음이라 하는데 이는 전혀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태아가 모태를 통해 지상에 태어나듯 인간은 지상에서 영계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 역사 이래 지상에 왔다 간 인간 중에서 소멸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인간은 한번 지상에서 태어나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 
    다만 지상에서 수명을 다하면 마치 옷을 벗듯이 육신을 지상에 벗어 놓고 영계로 이주하는 것 뿐이다. 
    고치(지상)에서 탈피한 나비(영계)처럼.


    세 종류의 사람(로마서 8:12-14)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실로 다양합니다. 
    그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성경은 크게 세 종류의 사람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첫째, 육체로 사는 사람

    육체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육체의 일을 따라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육체의 일은 도덕적인 면으로는 음행, 더러움, 호색이며 종교적인 면에서는 우상 숭배, 술수, 이단이고 대인 관계로는 원수 맺음,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분리, 투기이며 개인 생활에서는 술취함, 방탕함, 유혹, 욕심, 그리고 탐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향해 진노하심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맙니다. 
    이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지우는 둘째 사망에 처하게 됩니다(계 21:8).


    둘째, 혼으로 사는 사람

    혼으로 사는 사람은 인본주의적으로 사는 사람이며 인간의 이성과 경험, 그리고 과학을 의지하여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 중에서도 혼으로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판단하려 하며 성령의 역사를 부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혼으로 사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자, 오만한 자라고 책망하십니다.


    셋째, 영으로 사는 사람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사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지켜 주십니다. 
    영으로 사는 사람은 중생한 사람이며, 말씀과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또한 영으로 사는 사람은 몸의 행실을 죽이고 혼을 영에 굴복시키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영으로 사는 사람을 성경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씀으로 혼을 다스리며 믿음으로 사는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죽음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주의 눈 앞에서 귀중합니다 (시116:15).

    그들은 새로운 탄생을 통해 육신의 죄들에 속한 몸을 벗어 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골2:11),

    죽은 후 지옥에 가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채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됩니다.

    첫째 사망은 우리 몸을 다스려 몸을 흙으로 돌아가게 하고,

    둘째 사망은 우리의 혼을 다스려 지옥의 형벌을 감당하게 하지만,

    성도들은 둘째 사망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성도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이기에 복이 있고 거룩합니다.

    둘째 사망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통치할 특권을 누립니다 (계20:6).

    성도들의 몸은 주님이 오실 때 부활합니다.

    부활은 생명이 사망을 이기는 것입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 것...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고전15:53-55).

    2. 성도들이 가는 곳

     

    성도들은 부활의 권능을 체험한 자들이기에

    죽으면 셋째 하늘로 갑니다.

    대기권 (첫째 하늘)을 지나,

    우주 공간(둘째 하늘)을 지나,

    하늘들 위에 있는 물들을 지나 가는 곳,

    즉, 주님이 거하시는 바로 그 곳이 셋째 하늘 입니다.

    하늘에서 살기 위해 성도들은 하늘에 속한 몸을 입게 됩니다.

    부활할 때 입은 몸이 바로 영에 속한 몸, 하늘에 속한 몸입니다.

    하늘에 가면 영적인 존재들이 있고

    (그룹들, 스랍들, 천사들)

    구약 성도들, 신약 성도들을 비롯한 모든 시대에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의인들의 영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준비하신 맨션도 있고,

    생명나무도 있습니다.

    그곳에는 주님이 주신다고 약속하신 유업의 상급이 있고,

    영광스런 관들도 있습니다.

    3.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는 곳

    죽음은 몸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영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전 12:7).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조차 죽는 것을 ‘돌아가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데, 혼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한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일이지만(히 9:27),
    그 후에 갈 곳은 두 부류로 나누어 집니다.
    거지 나사로의 혼은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고, 부자의 혼은 지옥으로 갔습니다.
    나사로는 안식을 얻었지만, 부자는 불꽃 가운데 고통을 받았습니다(눅 16:23).
    육체가 죽는 첫째 사망 후 혼이 고통당하는 둘째 사망이 있습니다.

    4. 기회를 놓친 자들

     누구에게나 거듭날 기회가 주어졌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자는 새롭게 탄생할 기회를 놓친 채 죽어서 죄에 대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둘째 사망의 해’이며 지옥의 고통입니다.

    성도들은 둘째 사망에서 벗어나지만

    성도가 아닌 자들은 살아난 몸을 입고 지옥에서 고통받다가 때가 되면 지옥이 불 호수에 던져지므로, 영원히 그 곳에 거하게 됩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둘째 사망에 참여하는 자는

    믿지 않는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마법사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 입니다 (계21:8).

    이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에서 자기 몫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계21:8).

    지옥은 어두우면서, 불이 있고, 고통스런 곳입니다.

    그 곳은 죽지도 못하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입니다 (막9:48-49).

    사람마다 불로 절여지고, 희생물마다 소금으로 절여질 것입니다.

    성도들의 죽음은 귀중한 것이지만,

    믿지 않은 자의 죽음은 비참한 것입니다.

    [관련구절]

    - 성도들의 죽음은 귀중하다

    * 시116:15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그분의 눈앞에서 귀중하도다.

    - 육신의 죄들에 속한 몸을 벗다

    * 골2:11 또한 그분 안에서 그리스도의 할례로 말미암아 육신의 죄들에 속한 몸을 벗어 버림으로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로 할례를 받았느니라.

    -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

    * 계20:6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릴 권능을 갖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분과 함께 통치하리로다.

    - 썩지 아니함을 입다

    * 고전15:53-55

    13: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반드시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15:54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사망이 승리 가운데서 삼켜졌도다,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

    15:55 오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 돌아가다

    * 전12:7 그 때에 흙은 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며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로다.

    -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

    *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

    - 부자와 나사로

    * 눅16:23 그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 둘째 사망

    * 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마법사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에서 자기 몫을 받으리니 이것은 둘째 사망이니라.

    - 지옥

    * 막9:48-49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 이는 사람마다 불로 절여질 것이요, 희생물마다 소금으로 절여질 것이기 때문이라.

    [성경비교] 시116:15

    * LORD에 대한 한글 번역의 차이

     

    LORD는 구약의 LORD 하나님과 신약의 LORD 예수님을 일치시키는 단어이므로 ‘주’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개역과 개정은 ‘여호와’라고 번역했습니다.

     

    시편116:15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귀중하다.
    흠정역, 한킹, 권위역 / KJV
    개역, 개정, 공동번역 / NIV
     
    {주}의 성도들의 죽음그분의 눈앞에서 귀중하도다. (흠정역)
     
    주의 성도들의 죽음께서 보시기에 값진 것이니이다. (한킹)
     
    {주}의 성도들의 죽음의 눈앞에서 귀중합니다. (한국어 권위역)
     
    성도의 죽는 것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개역)
     
    그의 경건한 자들죽음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개정)
     
    야훼충실한 자죽음그분귀중하다. (공동번역)
     
    Precious in the sight of the LORD [is] the death of his saints. (KJV)
     
     
    Precious in the sight of the LORD is the death of his saints. (NIV)
     






    본시는 내용으로 볼때,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하여 곤란중에 있을 때의 처지와 그 소원을 반영하고 있다(삼하16-18장). 그래서 다윗의 저작으로 보기도 한다.

    1-11절까지, 당신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자상하심을 찬양하고, 12-19절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 인해 행한 서원을 온전히 갚겠다는 다짐을 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은혜를 받았는데, 금수가 아닌 이상, 아무런 반응이 없이 있을 수 없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본을 보여주고 있다.

    1. 여호와는 우리의 음성과 간구를 들으신다(1-4)

    목자가 사랑하는 양들의 음성을 알듯이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의 음성을 아신다. 아버지가 아들의 간구를 들어 주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시50:15)“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하셨다. 따라서 성도는 어떤 형편 가운데 있든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기 위해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2.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자비하시다(5)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자라는 사실은 경험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그 자비하심도 우리를 죄악에서 구속하신 사건 속에서 구체적이고도 명확하게 드러났다. 바울의 증거 가운데 거듭 강조되고 있듯이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주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엡2:8-9).

    이 하나님의 은혜는 강권적인 것이다. 우리는 공로로 보나, 처지를 보나, 은혜받을 만한 구석이 없는 존재들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을 멀리해 온 죄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는 못배겨나게 하는 요소가 된다.

    3. 이 하나님의 은혜를 단순히 깨닫고 받아들이는 자를 보존하시는 하나님(6-7)

    6절에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어리석은 자‘란? 단순하다는 뜻으로서 마음에 간교와 잔꾀가 없는 자를 뜻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단순하고 순진한 마음을 가진 자를 하나님은 보존하신다. 한 마음으로 두가지 생각을 품지 않고, 그 마음이 변치 않는 자를 보호해 주신다.

    4. 환난에서 건지시는 하나님(8-16)

    본문에서 시인은 당한 환난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모른다. 사망의 줄(3절), 음부의 고통(3절), 사망, 눈물, 넘어짐(8절), 큰 곤란(10절), 죽는 것(15), 결박(16) 등의 표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더욱이 이 고통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거의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심각한 생과 사에 관한 문제였다. 이런 엄청난 위기에서 주님은 구원하셨다. (시116:8)“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내 눈을 눈물에서,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를 위경에서 구원하셨다. 바로 이런 구원을 생각할 때, 어찌 감사, 찬송이 흘러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도는 죽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 환난이 왔다고 바로 죽는 것이다. 그래서, 15절에는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이 함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택한 백성은 아무런 의미없이 사악한 자의 손이나, 질병, 뜻하지 않는 변고로 죽임을 당하도록 버려두시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부합할 때에만 성도를 데려가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 앞에서 죽음이 기정 사실화 되더라도 원망하거나, 슬퍼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죽음도 감사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바울과 실락가 감옥과 죽음 앞에서도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이 이같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이 당한 결박을 풀어주신다(16). 16절에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고 하였다. 마귀에게 묶이는 결박을 오직 주의 권세로만 풀 수 있는 것이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그분께서 닫으면 열자가 없고, 열면 닫을 자가 없는 최고의 권위와 권세로 오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하시면 모든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5. 이같이 놀라운 은혜를 보답하는 마음으로 찬송하고 감사해야 한다(17-19)

    시인은 주의 은총을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께 감사함은 물론 서원한 것을 지키기로 다짐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 은총에 대해 보답하려고 하는 자의 올바른 자세이다. 은혜받으면 반드시 그 은혜를 갚으려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받은 이 엄청난 은혜들에 대하여 감사하기는 커녕 더 부어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한다면, 어리석은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시편 116편

    1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2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3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4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5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6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7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8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9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10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11내가 놀라서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12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13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14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15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16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17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8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

    19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곧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지키리로다 할렐루야

     








    7월 9일(수) 시편 107-112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소원의 항구(107:30)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They were glad when it grew calm, and he guided them to their desired haven.



    헬렌 켈러의 세 가지 소원

    헬렌 켈러(Helen Keller)가 소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단 3일만 자신이 볼 수 있다면.......
    세 가지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첫째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싶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
    둘째는, 새벽에 밤이 낮으로 바뀌는 그 거룩한 장면을 한번 보고 싶다. 
    셋째는, 길거리에 서서 오가는 행인들을 바라보고 싶다. 

    눈이 안 보였던 그녀는 우리가 늘 누리고 사는 것을 간절히 바랬습니다.
    눈이 보이는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인가요?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더 높은 지위와 명예를 바라며 살고 있지는 않은 가요?
    저 역시 아니라고 말 못 합니다.

    바라볼 것을 바라보고.
    해야 할 것을 해야 함에도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성공만을 바라보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어쩌면 우리는
    아주 쉽지만, 아름다운 삶을 위해 꼭 바라보고,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눈먼 자처럼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헬렌 켈러가 간절히 바랬던 이 세 가지를 오늘 하루만이라도 실행해 봅시다. 

    그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기에 그토록 바랬는지,
    누군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을 이루어 보며 삶의 방향을 바로잡아 보길 바랍니다.

    소원의 항구가 어디에 있을까요?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은 건강을 되찾는 곳이 소원의 항구가 될 것입니다.
    학위를 걱정하는 사람은 학위를 받는 자리가 소원의 항구가 될 것입니다.
    배우자를 찾는 사람은 결혼예식장이 소원의 항구가 될 것입니다.

    소원(2656) 헤페츠(chêphetsחֵפֶץ    

    1. 기쁨.   2. 바람.  3. 귀중한 것
    발음 [ chêphets ]
    어원  /  2564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0회 사용
    • 1. 명사, 남성 기쁨, 즐거움, 삼상15:22, 왕상10:13,시1:2, 16:3, 전5:3(4), 12:10
    • 2. 명사, 남성 바람, 욕구, 의지, 의도, 소원, 욥31:16.
    • 3. 명사, 남성 귀중한 것, 값진 것, 소중한 것, 사54:12, 잠3:15, 8:11.
    • 4. 명사, 남성 추구, 종사, 열정, 열의, 일, 용무, 욥21:21, 22:3, 전3:1, 사44:28, 58:3,13.
    • 문법설명  /  어미활용 חֶפְצִי, 복수 חֶפָצִים   
    • 관련 성경 / ☞소원(삼하23:5, 왕상9:11, 욥31:16), 원(왕상5:9,10), 관계(욥21:21), 기쁨(욥22:3, 사44:28), 즐거움(시16:3), 일(전8:6), 뜻(사48:14,53:10), 오락(사58:3,13).[동] 사모하다(잠3:15), 좋아하다(삼상15:22), 원하다(삼상18:25, 잠8:11), 바라다(왕상5:8), 즐거워하다(시1:2, 111:2), 기뻐하다(전5:4, 사46:10, 말1:10).

    항구(4231) 마호즈(mâchôwz)  מָחוֹז

    1. 해안.  2. 해변.  3. 항구
    발음 [ mâchôwz ]
    어원  /  ‘둘러싸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회 사용
    • 1.  명사, 남성 해안, 해변, 항구, 항, 시107:30.
    • 관련 성경  / 항구(시 107:30).

    평온함(솨타크) 
    - 폭풍 후의 바다의 고요함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지만(욘 1:11, 12) 다툼의 종식을 뜻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잠 26:20).

    소원의 항구 
    - '항구'로 번역된 '메호즈'가 구약 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용어이기 때문에 본문을 해석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소원'으로 번역된 '헤프참'이 '소망하는 대상'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본 구절 전체는 '바라던 그 목적지'등으로 보면 되겠다. 
    바라던 목적지로는 기업, 태어난 고향, 선조의 무덤이 있는 곳, 처자가 있는 곳 등을 들 수 있겠다. 
    본문의 항해를 일종이 인생 여정으로 보는 어떤 학자는 이것을 '죽음'으로 해석하기도 하나 다소 어색하다. 
    아무튼 본절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올바른 삶의 도리를 배운 인생들을 그들의 바라던 곳,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이 있는 목적지로 그들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이다.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They were glad when it grew calm, and he guided them to their desired haven.

    소원이 없는 사람이 없고 소원성취를 바라지 않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 다. 
    본문은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여, 거센 풍파를 해치고 고난을 극복하며, 목적지에 들어가는 항해자의 환희의 광경을 연상하면서, 소원의 항구로 들어가는 승리자의 환희의 개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항해자가 "소원의 항구"로 들어 갈 수 있었을까요? 

     1.부르짖을 때(28절)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부르짖으매(6817) 차아크( tsâʽaqצָעַק    

    1.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다.   2. 피엘형 : 소리지르다.   3. 히필형: 소집하다
    발음 [ tsâʽaq ] 
    구약 성경  /  55회 사용
    • 1. 원형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다, 창41:55, 신22:24,27, 삿4:3, 대하13:14, 욥19:7.
      •   a. 원형 피엘형 : 소리지르다, 왕하2:12.
      •   b. 원형 히필형: 소집하다, 불러모으다, 삼상10:17.
      •   c.  원형 니팔형: 소집되다, 불러모아지다, 왕하3:21.
    • 관련 성경  /  소리지르다(출 5:8, 신 22:24, 왕상 20:39), 부르짖다(왕하4:1, 애2:18, 사19:20), 외치다(왕하4:40, 시34:17, 렘22:20), 호소하다(창4:10, 출5:15, 왕하8:3), 소리를 높이다(렘22:20), 간구하다(출8:12), 울다(창27:34), 모이다(삿7:23, 삼상13:4, 왕하3:21), 통곡하다(사65:14), 모으다(삼상10:17). 
      [명] 부르짖음(출 22:23, 시 88:1).


    본문에서 항해자의 상황은 26절의 말씀과 같이 "저희가 하늘에 올랐 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저희가 이리 저리 구르며 취한자 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이것은 참 으로 위험한 상황을 직접 체험한 사람의 글인것 같습니다.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저희가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인도하여 내신 것입니다. 
    어떤 위험이 있는 상황일찌라도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 도로 소원의 항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2.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때(30절)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평온이란 광풍을 거쳐 얻게 된 것을 말합니다(29절)

  •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 평온함(8367) 솨타크(shâthaqשָׁתַק

  • 1. 잠잠하다.  2. 파도.  3. 투쟁
    발음 [ shâthaq ]
    구약 성경  /  4회 사용 
    • 1. 원형 잠잠하다, 조용하다. 
        a. 원형 파도, 시107:30, 욘1:11,12. 
        b. 원형 투쟁, 싸움, 잠 26:20. 

    • 문법설명  /  미완료형 ׃ יִשְׁתֹּק
    • 관련 성경 / 평온하다(시107:30), 쉬다(잠26:20), 잔잔하다(욘1:11,12).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인도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능력이 임할 때에 파도는 잔잔해지고 광풍이 평정하게 되며, 또한 이러한 은혜를 체험하면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망의 항구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 십니다.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도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살전 5:16-18)

    3. 기이한 일을 만날 때(31절)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

    기이한 일(6381) 파라(pâlâʼ)  פָּלָא    

    1. 분리하다.  2. 뛰어나다.  3. 니팔형
    발음 [ pâlâʼ 
    구약 성경  /  27회 사용  
    관련 성경  / 기이하다(삼하1:26, 욥10:16, 시131 : 1), 능하지 못하다(창18:14, 렘32:17,27), 어렵다(신17:8, 30:11, 욥42:3), 기묘하다(사28:29,시31:21), 비상하다(단11:36), 온전하다(레22:21), 정하다(레27:2, 민15:3), 예비하다(민15:8, 대하2:9), 구별하다(민6:2).
     [명] 재앙(신 28:59), 이적(출 3:20, 34:10, 삿 6:13), 기사(대상 16:9, 시 86:10).

    은혜를 받은 자는 자기가 은혜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하며 또한 받은 은혜를 인하여 감사와 찬송을 돌릴수 있어야합니다. 
    본문의 말씀과 같이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 찌로다." 
    진정한 찬송은 받은 은혜의 감격 때문에 부르는 찬송일 것입니다. 
    찬송을 인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는 더 큰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시편 107편은 하나님의 크신 구원과 인도하심에 대한 찬양의 노래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삶의 다양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아버지의 백성을 구원하셨음을 증언하며,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기뻐하고 찬양합니다. 
    특별히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고난 중에 부르짖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에게 평안을 주시는 모습과, 그들을 마침내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평온함"은 단순히 고난이 끝난 상태를 넘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안정과 평화를 의미합니다. 
    이는 외부 환경이나 상황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적인 평안입니다. 
    이 평온함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서 비롯되며, 아버지의 임재를 경험하는 가운데 우리가 얻게 되는 소중한 축복입니다.

    "소원의 항구"는 단순한 물리적 목적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최선의 결과와 상태를 상징합니다. 
    항해 중인 배가 폭풍을 지나 평안한 항구에 도달하듯이, 우리의 삶 또한 다양한 어려움과 혼란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결국 평안과 기쁨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이루어지고, 아버지의 선하심이 완전히 드러나는 상태를 말합니다.

    반응형

    우리의 삶 속에는 여러 가지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때로는 폭풍과 같은 환경 속에서 방향을 잃고 불안과 두려움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르짖을 때 들으시며, 우리를 평온으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어가시며, 우리를 아버지 예비하신 항구로 인도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다시금 굳건히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며 나아가도록 격려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고, 아버지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간증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소원의 항구를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여정 속에서 평온함을 주시고 마침내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며, 오늘도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높이는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말씀 묵상을 위한 질문:

    1. 내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평온함은 어떤 상황에서 오는가? 이 평온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2.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소원의 항구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향해 얼마나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3. 내 삶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셨던 구체적인 순간은 무엇이며, 그로 인해 나는 어떤 변화를 경험했는가

    하나님 아버지, 고난 가운데에서도 저를 향한 신실하심을 잊지 않게 하시고, 평온함과 소망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은혜를 믿음으로 붙들게 하소서. 
    제 삶의 여정 속에서 언제나 선하신 주님의 뜻을 따르며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소원이 있고, 꿈이 있어요. 
    저희들이 어릴 때에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너 장래 꿈이 뭐냐?” 물어보면, 그때 많이 이야기하던 이야기가 남자아이들은 “대통령이요.” 그랬어요.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대통령의 권력이 굉장히 막강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던 것 같아요. 
    “대통령이요.” 미국에서 목회할 때 어느 집사님 아들은 “저는 앰뷸런스 운전사요.” 왜? 그 차가 왱왱거리고 가면 다 비켜 주니까. 아이들은 자기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을 마음에 소원으로 가집니다. 
    그러나 사람이 성장하면서 평생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고, 소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과 소원이 갑자기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어려움을 거치고 고난의 과정을 통과한 후에 우리에게 꿈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하면 안 됩니다. 고난은 삶의 한 과정인 것입니다. 바다에 가 보세요. 늘 물이 출렁거리고 있어요. 우리 인생에 늘 고난의 파도가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 고난을 잘 극복하고 모든 어려움을 이겨서 우리의 꿈과 소원을 이루어 나가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면 하나님께서 환난이 변하여 축복이 되게 해 주시고 고난의 풍랑을 넘어서 우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풍랑을 통해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첫째로 풍랑을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시편 107편 26절에,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배의 모습입니다. 풍랑이 산처럼 막 높아서 하늘로 배가 솟구쳤다가 갑자기 푹 꺼지면 배가 곤두박질합니다. 배 안에 모든 것이 다 뒤집어지고 사람들은 막 이리 굴렀다가 저리 굴렀다가, 그 순간에 마음에 두려움이 다가와서 ‘어이쿠, 이러다가 나 죽는 것이 아닌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요 난기류를 만나면 뚝 떨어져요. 갑자기 가슴이 철렁합니다. 그러나 그런 풍랑을 만나고 그런 어려움의 순간이 다가와도 주님만 꽉 붙잡고 있으면 우리는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다 풍랑을 만났어요. 보세요. 마가복음 4장 37절에,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대부분이 어부 출신인지라 ‘이것쯤이야.’ 하고 노를 저어 봤는데 자기들이 감당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깨웁니다. 마가복음 4장 38절에,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주님은 풍랑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셨어요. 풍랑이 다가와도 주님은 편안하게 주무실 수 있어요. 왜?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권능이 주님께 있기 때문에. 그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자나요. 할렐루야! 주님을 의지해야지 내 힘으로 풍랑을 이겨 보려고 막 노력하면 풍랑은 점점 거세지고, 내 삶에 문제는 점점 더 커지고, 내 마음 속에 상처는 점점 더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욥을 보세요. 욥은 동방의 의인이라 그랬습니다.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하나님께 허락을 받아서 그를 시험합니다. 하루아침에 전 재산이 다 날아갑니다. 태풍이 불어와서 집에서 잔치를 하고 있는데 집이 무너져서 열 자녀가 다 죽습니다. 건강했던 그에게 온몸에 악성 피부병이 나서 기와로 벅벅 긁어야 됩니다. 그런데 아내는 와서 그런 하나님 저주하고 죽으라고 그러고 곁을 떠납니다. 옆에서 같이 손 붙잡고 간절히 주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해도 부족할 판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하고 가 버렸어요. 여기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지만 욥의 아내는 그랬단 말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와서 무슨 죄를 지어서 그러냐고 회개하라고 그러고.
     
    여러분, 때때로 욥기를 읽으면 그 내용이 그 내용이 같고 뒷부분에 가면 잘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욥이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았느냐? 따라하세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할렐루야! 욥의 마음속에 알게 모르게 ‘나는 의인이다. 나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고 하는 그러한 영적인 교만의 모습이 있어요. 그가 하나님을 만난 후에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백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갑절로 복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꼭 깨달아야 될 것은 풍랑이 어디에서 오느냐? 내 마음으로부터 오는데 내 마음의 무엇 때문에 오느냐? ‘내가’라는 것 때문에 옵니다. “내가! 내가! 내가!” 어린아이를 키울 때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뭐에요. “내가 할게.” “내가 할게.” 하지도 못하면서 내가 한데요. “국그릇을 내가 들고 갈게.” 다 엎지르면서. “내가! 내가! 내가!” 그런데 우리가 크리스천이 되어서 신앙생활하면서도 “내가! 내가! 내가!” 여러분, 시험은 우리를 연단시키는 것이에요. 낮추는 것이에요. 야고보서 1장 2절로 4절을 보세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1장 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아멘. 시련은 우리를 훈련시켜서 겸손하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 준비되어지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성숙한 주님의 일꾼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하고 평생 싸워야 되요. 늘 자기가 잘 나가서 제 잘난 맛에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왜 상처를 받는지 아세요? 내가 잘났으니까 상처를 받는 거예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상처를 받고 낙심합니다. 분노합니다. 미워합니다. 속상해 합니다. 다툽니다. 왜? 내가 잘나서! 따라하세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날부터 부부싸움을 안하는 것입니다. 왜? 자꾸 자기주장만 하니까 부부끼리 부딪히는 거예요. 부모 자식 간에 갈등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에서도 늘 부딪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 내가 좀 특별하다고 생각을 하고 저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회사에서 노사 간에 갈등이 왜 일어나느냐? 서로가 ‘내가’ 그것을 굽히지 않아요. 낮추면 되는데, 낮아지면 되는데, “내가! 내가!” 하니까 또 부딪히고, 또 부딪히고, 또 부딪히고. 끊임없이 갈등과 대립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영적으로 은혜를 깨닫고 난 다음.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는 순간부터 가정이 평화로워집니다. 직장이 내가 기쁘게 일할 수 있는 그러한 장소로 바뀝니다. 노사 간에 갈등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내가! 내가!” 하면, 끊임없는 갈등과 끊임없는 대립과 끊임없는 미움과 분노와 상처가 우리 삶 가운데 계속되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 교수에게 학생들이 물었습니다. “왜 세상에 고난이 많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십니까?” C. S. 루이스 교수가 이렇게 답변을 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교만한 인간들에게 고난마저 없다면 얼마나 더 교만하겠는가!”그렇습니다. 교만한 우리들이 깨어지려면 고난이라고 하는 채찍을 맞아야 되요. 시편 119편 11절에,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몇 주 전에 저희 교회에 와서 설교하고 가신 로잔 총재 마이클 오 목사님. 작년도에 41세의 나이로 최연소로 아시아인 최초로 국제 로잔 세계에서 가장 큰 복음주의 단체의 총재 겸 이사장이 되었어요. 그런데 이분이 최근에 책을 내었는데 책 제목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I`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하세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분은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미국에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한국인 2세인데 미국에서 자라가지고 한국말보다 영어가 편한 분이에요. 한국계 미국인이죠. 그런데 머리가 좋은가 봐요. 하버드 대학과 펜실베니아 대학을 나왔고 트리니티 대학을 나왔어요. 그리고 그의 누님, 매부, 처남, 아내, 이렇게 모두 다섯 명이 미국의 명문 대학을 나왔어요.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 코넬 펜실베니아 대학으로부터 받은 학위가 15개에요.
    그런데 학위를 자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요. 아이비리그의 명문 대학을 나왔는데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다섯 사람이 모두 다 선교사든지 선교사로 지금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할렐루야! 이런 고백을 합니다. “삶의 부스러기가 아닌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이 마이클 오 선교사는 일본 나고야에 신학교를 세우고 가서 학장을 하고 있는데요.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과의 관계가 안 좋잖나요.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일부러 일본에 가서 신학교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몇 년 전에 그가 로잔 총재가 되기 전에 한국에 로잔 모임에 왔는데 한국의 로잔 커미티의 직분을 맡은 분은 다 한국에서 큰 교회 목사님, 거물급 목사님들이에요. 그런데 이제 본인이 뒤에 있는 것도 모르고 얘기하는 것을 들어 보니까 “아니 마이클 오가 누구야? 그 젊은 사람이 어떻게 로잔 커미티에 들어왔어?” 자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때 이런 일기를 썼어요. “주여, 저는 이름도 없고 가난하지만, 제가 가진 전부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쏟아 붓게 하소서. 크게 칭찬받는 존엄한 사람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해도 좋으니 우리 주님께는 주목과 은혜를 받는 종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할렐루야! 이 책 마지막 뒷부분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나는 수줍음이 많고, 자신감도 없으며, 무척 내향적인 사람인데, 어쩌다보니 큰 무대에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나는 ‘깨지기 쉬운 그릇’입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냥 ‘작은 선교사’일 뿐이지만 ‘크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풍랑을 극복하고 고난 가운데 축복받는 비결은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만이 모든 것이 되십니다.’를 깨닫는 것입니다. 완전히 깨어지고 낮아져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고백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나를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건져 주시는 하나님

    둘째로 우리를 건져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시편 107편 28절에, (시 107:28)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야훼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고난의 때에 우리가 주님께 부르짖어야 되요. 시편 50편 15절에,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우리 순복음 교회의 특징 중의 하나가 부르짖는 기도를 드리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제가 50년 전에 순복음 교회를 왔을 때에, 그 당시 한국 교회에는 부르짖는 교회가 없었어요. 저는 4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부르짖는 기도를 한 번도 교회에 다닐 때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충현교회를 다녔는데 한 번도 부르짖는 기도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냥 엄숙하고 조용하게 예배시간 기억밖에 안 나요. 숨소리도 내면 안 돼, 조용하게. 그런데 순복음교회에 오니까 “주여!”, 얼마나 부르짖어 기도하는지 깜짝 놀랐어요. 얼마나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하는지 종을 아무리 쳐도 기도가 안 끝나니까 마이크에 갖다 대고 막 종을 쳤어요. 그때는 예배만 끝나고 나서 인사할 때 보면 다 목이 쉬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그랬다고. 그렇게 부르짖었어요. 왜? 60년대, 70년대에 얼마나 우리가 힘들고 어려웠습니까! 정말 힘들고 어려웠거든요. 저도 6.25 직후에 태어나 가지고 참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지나는 것을 체험하면서 자란 사람인데, 그때는 주님밖에는 의지할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부르짖은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가서 430년 종살이 할 때 부르짖은 것처럼, 그때 우리 모든 주님의 백성들이 부르짖었기 때문에 오늘날 대한민국에 이러한 축복이 다가온 것입니다. 출애굽기 2장 23절에 성경 말씀을 봅니다. (출 2: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출애굽기 3장 7절에, (출 3:7) 야훼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할렐루야!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 우리가 다 같이 말씀을 고백합니다.(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아멘 .그런데 제가 50년 전에 순복음 교회에 오니까,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는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뭐라고 했냐면요, “하나님이 귀머거리야 왜 소리 지르고 그래!” 여러분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사람 살려!” 소리쳐야지, “사람 살려. 사람 살려.” 그러면 빠져 죽는 거에요. 부르짖는 기도는 그렇게 간절한 기도, 애타는 기도, 막 목숨 내놓고 부르짖는, 안타깝게 외치는 기도가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왜? 그런 깊은 절망에 처했기 때문에 문제에 빠져서 헤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주님께 부르짖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도 부르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원에 들어가서 기도원에서 부르짖으세요. 철야 때에 나와서 부르짖으세요. 새벽에 나와서 부르짖으세요. 여러분,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이 다가옵니다. 축복이 다가오는 겁니다.

    부르짖으실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나느냐, 시편 107편 29절에, (시 107:29)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간절히 예수님께 부르짖어 예수님을 깨우니, 마가복음 4장 39절에, (막 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여러분, 예수님이 같이 계시잖아요. 뭘 걱정하세요? 가정에 문제가 있어요? 몸에 질병이 다가왔어요? 사업이 어려워요?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졌습니까? 그 풍랑 속에 주님을 찾으세요.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할렐루야!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잖아요. 뭘 걱정하세요? 북한에서 세 번째 탈출에 성공해서 한국에 내려와서 선교사가 되신, 주 에스더 선교사님이 「빛이 그리워」라는 책을 쓰셨어요. 1990년대 식량 공급이 그치고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지요. 그때 한 십 년 동안 한 삼백 만 명이 굶어 죽었어요. 북한에서. 이때 국경을 넘어 중국에서 잠깐 자리 잡고 있다가 붙잡혀 다시 북한에 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고, 다시 또 탈출해서 있다가, 다시 또 잡혀 감옥에서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세 번째 또 탈출했어요. 추운 겨울에 동상으로 열 개 발가락이 다 썩어지고, 도망치다 발끝에 뼈가 으스러지고 그런데 뒤에서 사람들은 추격해 오는데, 그때 주님 앞에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 “저를 살려 주시면 제가 하나님 영광 위해서 내가 일생을 바치겠습니다.” 부르짖고, 부르짖고, 부르짖는 가운데 하나님이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때 그 기록을 이렇게 썼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기다리는 암흑의 땅에서 강제 송환되어 한 줄기 해 조차 볼 수 없는 어두운 감방에서 저는 인권유린과 모욕의 구둣발에 짓밟히며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잃었습니다. 그 고통의 심연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빛으로 찾아오셔서 순간순간 만져 주시고, 일으키시고, 붙들어 주셨습니다. 초인간적 힘으로 그때그때 부르짖었던 저의 간절한 기도는 단 한 번도 외면당하거나 땅에 떨어지지 않고 모두 응답되었고, 생명을 움키려고 쉼 없이 달려드는 악한 무리의 포위와 추격에서 기적적으로 건져졌습니다. 이제는 동상으로 인해 빠진 열 개의 발가락과 으스러진 발 뼈는 모두 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우리가 고통 중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절망 중에서 건져주십니다.”

    할렐루야! 기도하는 백성은 망하는 적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나라는 망하는 적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교회는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습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기도하면 좋은 일이, 축복받을 일이, 놀라운 일들이 우리 앞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할 수 없는 연단의 과정을 통과했지만 하나님께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어요. 보세요. 시편 22편 20절, 21절에 보면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물고 뜯으려고 그러니까)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시편 22편 2절 보니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나 깨나 부르짖고 또 부르짖고, 또 부르짖고, 또 부르짖어서 주님의 도우심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주님, 기도할 때 들으세요. 예레미야 29장 12절, 13절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할렐루야! 여러분, 어떤 문제 가운데 처해 있습니까? 어떤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습니까? 부르짖을 때인 것입니다. 통회 자복하고 주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부르짖어 기도할 때 기적이 다가옵니다. 은혜가 다가옵니다. 축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꿈과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부르짖을 때 셋째로 우리의 꿈과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07편 30절, 다 같이 고백합니다.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야훼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아멘. 여기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 있어요. 풍랑이 일어서 배가 이리 쓰러졌다, 저리 쓰러졌다, 방향도 잃어버리고 어디 갈 바를 모르고, 목적지를 잃어버렸는데 갑자기 부르짖었을 때 바다가 잠잠해졌는데 눈 떠보니 목적지에 와 있어요. 소원의 항구로 주님이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풍랑을 일으켜 더 빨리 우리를 목적지로 데려다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거룩한 꿈을 꾸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이 그 꿈이 이루어지게 만들어 주세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꿈을 가진 것, 안 이루어 주신 것이 없어요. 다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평생 주의 일 하시다가 은퇴하셨는데 갈 곳이 없는 주의 종들을 위한 은퇴 교역자 숙소를 지을 수 있도록 주님, 도와주옵소서.” 기도했더니 하나님의 은혜로 땅도 주시고 또 여기저기서 헌금도 해 주셔서 은퇴 교역자 숙소가 준공이 되었어요. 이제 들어오실 분들을 전국적으로 모집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그 소원을 갖고 기도하는 분들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거룩한 소원을 들어 주십니다. 여러분, 거룩한 꿈과 소원을 가지세요. 하나님이 기뻐하시게 하는 꿈과 소원을 가지세요.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열일곱 살 때 꿈을 꾸었는데 두 번이나 연거푸 꾸었어요. 얼마나 꿈이 영롱한 꿈인지 장차 자기가 높은 사람이 되어서 형들이 다 와서 절을 하는 꿈이에요. 그 꿈을 이야기합니다. 형들이 그 꿈을 듣고 아주 미워서 동생을 죽이려고 그랬어요. 그래서 구덩이에 집어넣었다가 노예로 팔아 버렸어요. 꿀을 꾸었는데 다가오는 것은 고난의 풍랑이었어요. 말할 수 없는 환난이었어요, 그것도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일 년도 아니고, 무려 십 삼년. 그가 노예로 팔려갔다가 또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까지 갔으니, 그 절망은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절망의 자리에서도 주님만 바라보고 그 마음에 꿈을 품고 믿음으로, 믿음으로 나아갔을 때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노예로 팔려가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감옥에 가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결국 13년 후에 그가 서른이 되었을 때 그를 높여서 당시 최대의 강대국인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로부터 9년 후에 그가 꿈을 꾸었던 대로 형들이 다 와서 그 앞에서 절을 합니다. 13년 플러스 9년, 22년 후에 그 꾼 꿈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거룩한 꿈은 반드시 주님의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늘 기도하고 부르짖고, 고난의 때에 부르짖고 거룩한 꿈을 품고 믿음으로 나아가세요. 환난이 변하여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큰 풍랑이 다가오면 더 큰 축복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은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거룩한 꿈과 소원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달려 나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2012년 천국가신 강영우 박사님. 
    그 분이 천국가시기 전에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 
    이분이 앞을 못 보는 분인데,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 
    책 제목이 조금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영의 눈을 떠서 본 것이에요. 
    그는 참 어린 시절 너무나,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시절을 보냈어요. 
    그가 중3이 되었을 때에 축구공을 눈에 맞아 두 눈이 멀게 되었는데 바로 1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축구공을 맞아서 아들이 앞을 못 보게 된다는 말을 듣고 그 엄마가 충격을 받고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8시간 만에 돌아가셨어요. 
    고등학교에 다니는 누나는 이 동생 돌본다고 봉제 공장, 고등학교 중퇴하고 봉제 공장 다니다 과로로 2년 만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러면 이 강영우라고 하는 어린 학생의 앞은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절망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누나가 죽기 전에 이 동생 손을 잡고 불광동에 가면 천막을 친 교회가 있는데 거기 누가 병 고치는 사람이 있다더라. 
    그래서 기도를 받았어요. 
    그 분이 조용기 전도사님이에요. 
    그래 가지고 기도를 받았는데 육신의 눈을 뜬 게 아니고 영의 눈을 떴습니다. 
    꿈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한 꿈을 주었습니다. 
    “너는 비록 앞을 못 보지만, 너는 비록 고아이지만,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앞으로 너는 불쌍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될 것이라.” 
    꿈을 품고 믿음으로 나아갔더니 하나님께서 연세대학을 졸업하게 만들어주시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3년 8개월 만에 피츠버그 대학에서 교육학 박사를 하게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복에 복을 주셔서 부시 대통령 때에 백악관에 장애인 위원회 정책 차관보로서 7년 넘게 미국의 장애인을 섬길 수 있게 해 주시고 또 세계 장애인 위원회 부회장 겸 루즈벨트 재단 고문으로 7억 명에 가까운 세계 장애인을 섬기는 귀한 인물로 주님이 사용해 주셨습니다. 

    강영우 박사를 보면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요. 
    부모님도 안 계시지요, 혈혈단신 고아이지요. 
    앞도 보지 못하지요. 그러나 그에게 꿈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있었습니다. 소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그는 그의 마지막 책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저에게 장애는 축복 그 자체였습니다. 
    저를 보면 어둠인데 주님을 보니 빛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만 보았습니다. 장애는 불편함일 수는 있어도 불완전함은 아닙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질병과 같은 것입니다. 당신을 지배하는 생각의 장애, 마음의 장애, 영의 장애를 뛰어 넘어 나의 장애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꿈은 이뤄집니다. 하나님은 저의 실명을 통해 저의 삶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꾸셨습니다. 실명을 하기 전 저는 딱히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이 없었습니다. 원대한 꿈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 이 세상을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명을 하고 나서야 저는 꿈을 가졌습니다. 그때서야 온전히 하나님의 도구로 살아가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목표가 생기니 공부할 이유도 생겼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희망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습니다. 제 생애는 결코 고통의 시간들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꿈을 이어받은 두 아들이 다 잘되었어요. 
    둘째 아들 크리스토퍼 강, 강진영은 오바마 대통령 입법보좌관이 되어서 백악관에서 지금 크게 활약하고 있고, 큰아들 강진석은 안과의사로 조지타운 의과대학 교수로 그 많은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데 큰아들, 둘째 아들 모두가 아버지의 거룩한 꿈을 이어받아서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 병든 사람, 문제 있는 사람을 돕는 변호사요, 의사로 크게 쓰임 받고 귀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꿈을 다 마음에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한번 뿐인 인생입니다. 
    지나가는 인생길에 그냥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목적도 없이, 방향도 없이 살지 마시고 주님 안에서 거룩한 꿈을 품으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남은 여생 하나님의 영광 위해 살기 원합니다. 
    어떤 풍랑이 다가와도 꿈을 이루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나가기 원하오니 주님 나와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한 꿈을 품고 믿음으로 전진해 나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107:23-24에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이 말씀은 우리의 지금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를 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곧잘 “인생은 항해와 같다”는 말을 합니다. 어떨 때는 순풍에 돛단 듯 잔잔한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예기치 않았던 폭풍이 찾아옵니다.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는 고난의 파도가 휘몰아쳐 오기도 합니다.

    집채 만 한 파도에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곧바로 저 아래로 곤두박질칩니다. 많은 이들이 “이젠 끝이구나, 끝장이구나” 완전히 절망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경험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시107:26절,“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저희가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라고 고난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다양합니다. 어떤 분은 질병으로, 어떤 분은 경제적인 문제나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로 폭풍을 만나고 있습니다. 폭풍의 종류도 너무 많고 다양합니다. 예수 믿어도 질병에 걸릴 수 있고, 사업에 실패할 수 있고,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항상 어린 아이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춘기를 거치고, 청년기에 질풍노도의 시절을 거쳐야 하고, 가정을 꾸려 자녀를 길러야 하고, 중년기의 슬럼프를 극복해야 하고, 노년기의 고독이나 경제적, 신체적 어려움들을 겪어야만 합니다. 

    어떤 분은 고난 중에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요. 왜 하필 납니까?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깁니까?” 충분히 이런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파도를 잘 넘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넘쳐나는 고난 중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어야’ 합니다.(인사3회)

    세계적인 천재문학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 사람입니다. 그는 16세때 어머니를 폐병으로 잃고, 18세 때 아버지가 농노들에게 살해 되고, 청년 때 사회주의 단체에 들어간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감형을 받아 시베리아 감옥에서 4년 간 징역을 살고, 그 후 5년 간 중앙아시아에서 막노동을 하며 불행한 청년 시절을 보냈고, 36세에 결혼한 아내도 몇 년 뒤 결핵으로 죽고, 3년 후 재혼하여 낳은 아기도 추위에 얼어 죽고, 친 형까지 죽게 됩니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 자신도 한평생 간질병이 있어서 자주 정신을 잃고 쓰러지곤 하였습니다. 그는 평생 질병, 가난, 가족의 죽음, 바닥 생활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움직이는 글을 쓰게 됩니다. 

    그는 ‘분신', ’백야' 등의 글을 통해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여 읽는 이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1866년 ‘죄와 벌'을 쓸 때는 빚 때문에 4년간이나 쫓겨 다니며 써야 했고, 1880년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 수많은 명작들을 남기게 됩니다. 그가 작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고난의 파도가 칠 때마다 ‘오직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이겨냈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파도는 우리를 고통을 주지만 그 고난의 파도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소망의 항구는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항해는 아무런 예고 없이 폭풍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인생의 풍랑 앞에서는 힘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시107:26-27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저희가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어떤 환난과 시련에 부딪치면 그 누구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일한 돌파구가 있습니다. ‘주님께 부르짖어 간구하기만 하면, 주님은 기꺼이 그 풍랑 속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시107:28“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고난의 파도 앞에 두려워하지 말고 부르짖어 기도하시길 축복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소원의 항구로 인도해주십니다. 

    막 4:35절, 예수님의 제자들도 갈릴리 바다 한 복판에서 큰 풍랑을 만나지만, 주님의 손길로 소원의 항구로 안전하게 도착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그 어떤 풍랑 속에서도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나갈 때 소원의 항구로 인도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찬373장 2절,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찬432장 2절, “큰 풍랑이 이 배를 위협하며 저 깊은 물 입벌려 달려드나 이 바다에 노 저어 항해하는 이 작은 배 사공은 주님이라 나 두렴없네 두렴없도다 주 예수님 늘 깨어 계시도다. 이 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 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리라” 

    인생의 험난한 파도를 내 힘으로는 밀어낼 수 없으나, 내 인생의 선장이신 예수님은 그 어떤 풍랑도 잔잔케 하실 수 있습니다. 고난은 여전히 변장된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보자기에다가 축복을 싸서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어떤 일로 아파하고 계신가요? 힘들고 괴로운 일이 무엇인가요? 어떤 고난을 겪고 계십니까? 어떤 이는 자신의 허무와 고독이 두려워 순간의 쾌락을 좇기도 하고, 도피적인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시적 방법으로는 영혼의 공허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도리어 거기에 매혹되면 될수록 영혼의 공허는 더욱 커져 갈 것입니다. 겪고 있는 풍랑이 크면 클수록 더 믿음으로 이겨내시길 축복합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끝나지 않습니다. 십자가 다음에 부활이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더라면 사흘 후에 살아나는 영광스런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현재의 고난, 주님께 기도하면 영광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혹시 나의 십자가가 다른 사람 보다 더 무겁다고 느껴지십니까? 면류관도 그만큼 더 클 것이라고 믿으시길 바랍니다. 고난이 컸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영광도 컸습니다. 요셉, 욥, 모세, 다윗, 다니엘, 바울 등입니다. 

    고난을 승리로 이끈 베드로는 벧전1:6-7에, “그러므로 지금 잠시 동안 여러분이 여러 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어쩔 수 없이 슬픔에 빠져 있더라도 이것을 기뻐하십시오.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몸이 건강해지려면 적당한 단련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성은 고난을 통해 강해집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인 파스칼은 선천적으로 허약체질이었고, 결핵성 복막염으로 종종 심한 복통과 두통을 앓았습니다. 파스칼의 39년 인생 중 건강을 유지한 것은 고작 2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데는 강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극한 고난 중에 떠오른 지혜들을 924개나 모아 그 유명한 ‘팡세’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신앙고백은, “내가 찾고 구하는 것은 하나님뿐입니다. 육체의 병이 영혼의 약이 됐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선이요 주님을 거역하는 것은 악입니다.” 지금 극한 고난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믿음이 더 강해지는 기회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옛날 장군들이 쓰는 명검도 대장간에서 많이 두들겨 맞아서 만들어졌고, 고급 구두일수록 많이 두들겨 맞고 만들어지며, 다이아몬드도 커팅이 많이 된 것일수록 그 값이 높고, 본차이나 도자기도 뼈가 곱게 갈릴수록 고급 그릇이 되며, 들의 배합화도 가시에 많이 찔려야 그 향기가 더 진해지는 것처럼, 고난을 믿음으로 잘 통과하면 더 귀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크게 쓰시려고 13년간 종살이, 감옥살이 등 강한 훈련을 시켰습니다. 모세를 귀하게 쓰시려고 완전 밑바닥부터 40년간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다윗도 13년간 사울의 박해를 통해 혹독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바울을 세계적인 선교사로 쓰시려고 육체의 가시까지 주신 것입니다. 학교에서 저능아로 쫓겨났고 각종 실험으로 기차에 불을 내기도 했고 자신이 청각장애를 갖게 된 발명 왕 에디슨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을 방해하고 있는 파도가 무엇입니까? 어떤 고난으로 지쳐 계신가요? 어떤 좌절로 막다른 골목에 처해 계신가요?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 해 보시길 축원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들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실까요? 24절에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본다”는 말씀과 25절에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광풍이 일어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폭풍과 인생의 폭풍 모두가 하나님의 주관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시107:28-30절,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우리가 엎드려 애절하게 부르짖기만 하면 그 어떤 곤경에서도 건져주십니다. 벗어나게 하십니다. 

    모 여대 교수였던 한분이 뜻하지 않는 유방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수술을 받고 완쾌되어 강의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 다시 재발했고, 이젠 현대 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녀는 절망에 빠져 생을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때 이웃 사람의 권고로 교회에 나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도하던 중 자신의 죄를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죄를 자복했습니다. 그때 “네 죄를 모두 사했다. 너는 이제부터 사랑하는 나의 딸이다.” 라는 음성을 들었고 그의 모든 병도 깨끗이 씻겨 졌습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옵니다.

    아무리 큰 폭풍을 만나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으로 소원의 항구에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엎드려 부르짖기만 하면, 주님은 그 어떤 풍랑도 잔잔케 해주시며, 목표 달성의 항구로, 성공과 승리의 항구로 인도해주실 줄 믿습니다.


    7월 8일(화) 시편 101-106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말씀 그 찬송(106:12)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Then they believed his promises and sang his praise.

    ▣ 개미의 힘 

    생명을 가진 곤충 가운데 개미처럼 신비한 곤충도 없다. 
    가느다란 허리로 하루종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일을 한다. 
    그리고 그 작은 체구로 자기보다 몇 배나 더 큰 먹이를 끌고가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감동적이다. 
    죽은 메뚜기를 질질 끌고가는 개미를 지켜보던 어떤 관찰자가 개미의 몸무게를 달아보았다. 
    그랬더니 개미는 무려 자기보다 60배나 더 되는 것을 끌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 능력은 바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주신 훌륭한 선물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보다 더 큰 힘과 능력을 선물받았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와야아미누 비드바라우 야쉬루 테힐라토 
     

    󰃨 저희가...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 
    분명히 출 14:31; 15:1에 대한 언급이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여기서 이스라엘이 드러낸 신앙과 그들이 부른 노래는 뿌리깊은 신앙과 그 신앙에서 우러나온 찬양이 아니었다. 

    출애굽기 14:31 /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출애굽기 15:1 / 이 때에 모세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심판이나 구원의 섭리에 따라 어떤 이적적 현상이 초래되었을 때 생겨날 수 있는 일시적이고 표면적인 현상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의 신앙은 이슬과 같아서 곧 사라져버릴 정도에 불과했다. 
    이 사실을 어떤 설교가는 적절하게 풍자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찬양과 이스라엘의 범죄 사이는 오십 보 백 보이다'(Spurgeon). 
    이스라엘의 신앙과 찬양에 대한 이러한 판단의 진실성은 문맥이 증명한다.

    그 말씀(1697) 다바르( dâbâr)   דָּבָר 

    1. 말.   2. 약속 
    발음 [ dâbâr ] 
    어원  /  1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442회 사용

    그 찬송(8416) 테힐라() תְּהִלָּה    .

    1. 찬양.   2. 열광.  3. 찬양 받을 자
    발음 [ tehillâh ]
    어원  /  1984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7회 사용

    • 1. 명사, 여성 찬양, 시22:26(25), 48:11(10), 51:17(16),찬송곡, 찬송가, 시22:4, 66:2, 145:1
    • 2.  명사, 여성 찬양, 열광, 시9:15(14), 사42:8.
    • 3.  명사, 여성 찬양 받을 자, 신10:21, 렘17:14.
    • 관련 성경 / 찬송(신10:21, 대하20:22, 시22:3), 칭찬(습3:19,20), 찬양(느9:5), 영예(시78:4, 102:21),명예(렘13:11). 
      [동] 찬송하다(출15:11, 느12:46, 시111:10), 찬양하다(대상16:35, 시149:1), 송축하다(느9:5, 시34:1, 145:21), 칭찬받다(렘51:41).


    사도행전 16:25-26
    밤중쯤 되어 바울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그 말씀(시편 107:20)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찬송(시편 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하박국 3:3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산에서부터 오시도다 (셀라)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 거미와 모기와 미치광이

     다윗 왕은 거미란 놈은 아무 곳에나 거미줄을 치는 더럽고 아무 쓸모가 없는 벌레라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전쟁터에서 그는 적군에서 포위되어 빠져나갈 길을 잃었다. 왕은 간신히 어느 동굴 속으로 숨어 들게 되었는데, 마침 그 동굴 입구에는 거미 한 마리가 거미줄을 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곧이어 그를 추격해 온 적군의 병사는 동굴 앞까지 왔으나, 동굴 입구에 거미줄이 있는 것을 보고 동굴 안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냥 돌아가 버렸다. 또 다윗 왕은 적장이 잠자고 있는 방에 숨어 들어가 적장의 칼을 훔쳐낸 다음, 이튿날 아침에 '내가 당신이 자고 있을 때 칼을 가져왔을 정도이니 마음만 먹었다면 당신의 목을 가져오는 것쯤은 간단히 해낼 수 있었소.' 하는말을 전하여, 그의 마음을 변하게 하려는 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밤 가까스로 적장의 침실에 숨어 들어갔는데, 칼이 적장의 다리 밑에 있어서 꺼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다윗 왕은 단념하고 돌아가려 했다. 바로 그때 모기 한마리가 날아와 적장의 다리 위에 앉았다. 적장은 무의식중에 다리를 움직였다. 다윗왕은 그 틈을 이용해 재빠리 적장의 칼을 빼낼 수 있었다. 그리고 한번은 다윗 왕의 적군에게 포위되어 위기일발의 순간에 처했을 때 그는 느닷없이 미치광이 흉내를 내었다. 적의 병사들은 미치광이가 왕은 아니겠지 생각하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쓸모없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보잘것 없는 것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18:6) ▣ 개미의 힘 생명을 가진 곤충 가운데 개미처럼 신비한 곤충도 없다. 가느다란 허리로 하루종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일을 한다. 그리고 그 작은 체구로 자기보다 몇 배나 더 큰 먹이를 끌고가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감동적이다. 죽은 메뚜기를 질질 끌고가는 개미를 지켜보던 어떤 관찰자가 개미의 몸무게를 달아보았다. 그랬더니 개미는 무려 자기보다 60배나 더 되는 것을 끌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 능력은 바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주신 훌륭한 선물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보다 더 큰 힘과 능력을 선물받았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 찬송

    1. [시편 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2. [시편 106:12]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3. [이사야 63:7]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 찬송을 말하며 그 긍휼을 따라,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4. [하박국 3:3]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산에서부터 오시도다 (셀라)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그 말씀

    [로마서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33. [이사야 45:18]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느니라.


    7월 9일(수) 시편 107-112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7월 8일(화) 시편 101-106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말씀 그 찬송(106:12)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Then they believed his promises and sang his praise.

    ▣ 개미의 힘 

    생명을 가진 곤충 가운데 개미처럼 신비한 곤충도 없다. 
    가느다란 허리로 하루종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일을 한다. 
    그리고 그 작은 체구로 자기보다 몇 배나 더 큰 먹이를 끌고가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감동적이다. 
    죽은 메뚜기를 질질 끌고가는 개미를 지켜보던 어떤 관찰자가 개미의 몸무게를 달아보았다. 
    그랬더니 개미는 무려 자기보다 60배나 더 되는 것을 끌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 능력은 바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주신 훌륭한 선물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보다 더 큰 힘과 능력을 선물받았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와야아미누 비드바라우 야쉬루 테힐라토 
     

    󰃨 저희가...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 
    분명히 출 14:31; 15:1에 대한 언급이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여기서 이스라엘이 드러낸 신앙과 그들이 부른 노래는 뿌리깊은 신앙과 그 신앙에서 우러나온 찬양이 아니었다. 

    출애굽기 14:31 /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출애굽기 15:1 / 이 때에 모세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심판이나 구원의 섭리에 따라 어떤 이적적 현상이 초래되었을 때 생겨날 수 있는 일시적이고 표면적인 현상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의 신앙은 이슬과 같아서 곧 사라져버릴 정도에 불과했다. 
    이 사실을 어떤 설교가는 적절하게 풍자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찬양과 이스라엘의 범죄 사이는 오십 보 백 보이다'(Spurgeon). 
    이스라엘의 신앙과 찬양에 대한 이러한 판단의 진실성은 문맥이 증명한다.

    그 말씀(1697) 다바르( dâbâr)   דָּבָר 

    1. 말.   2. 약속 
    발음 [ dâbâr ] 
    어원  /  1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442회 사용

    그 찬송(8416) 테힐라() תְּהִלָּה    .

    1. 찬양.   2. 열광.  3. 찬양 받을 자
    발음 [ tehillâh ]
    어원  /  1984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7회 사용

    • 1. 명사, 여성 찬양, 시22:26(25), 48:11(10), 51:17(16),찬송곡, 찬송가, 시22:4, 66:2, 145:1
    • 2.  명사, 여성 찬양, 열광, 시9:15(14), 사42:8.
    • 3.  명사, 여성 찬양 받을 자, 신10:21, 렘17:14.
    • 관련 성경 / 찬송(신10:21, 대하20:22, 시22:3), 칭찬(습3:19,20), 찬양(느9:5), 영예(시78:4, 102:21),명예(렘13:11). 
      [동] 찬송하다(출15:11, 느12:46, 시111:10), 찬양하다(대상16:35, 시149:1), 송축하다(느9:5, 시34:1, 145:21), 칭찬받다(렘51:41).


    사도행전 16:25-26
    밤중쯤 되어 바울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그 말씀(시편 107:20)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찬송(시편 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하박국 3:3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산에서부터 오시도다 (셀라)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7월 7일(월) 시편 94-100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구원의 반석(95: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Come, let us sing for joy to the LORD; let us shout aloud to the Rock of our salvation.


    거미와 모기와 미치광이

    탈무드에 보면 다윗이 평소에 이 세상에 불필요한 것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거미
    둘째는 모기
    셋째는 미친 사람

    그런데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도망하던 때에 어느 동굴에 들어가서 숨었을 때 마침 사울의 군사들이 동굴 앞에 이르러 거미가 거미줄을 친 것을 보고는 여기는 거미줄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니 아무도 없는 굴이구나! 하고 지나쳤다고 합니다.
    (사무엘상 24장, 엔게디 황무지의 어느 굴에서)

    두번째는 다윗이 아비새와 함께 사울의 진영으로로 잠입하여였을 때 아비새는 단번에 사울을 죽이자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사울의 창과 불명만 가지고 나가자고 합니다.
    문제는 사울의 창과 물병이 잠든 사울 왕의 몸 아래에 있었는데 사울의 몸을 움직이면 사울이 깨어날 것 같은 때에 마침 모기가 날아와서 사울을 괴롭히므로 사울이 몸을 뒤척이며 창과 물병을 쉽게 가져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무엘상 26장, 십황무지 하길라 산)

    다윗이 가드로 도망하여 블레셋 왕 앞에서 미친척하였을 때 가드 왕은 다윗을 내 집에 들일 수 없다하여 극적으로 도망한 사건
    (사무엘상 21장)


    다윗 왕은 거미란 놈은 아무 곳에나 거미줄을 치는 더럽고 아무 쓸모가 없는 벌레라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전쟁터에서 그는 적군에서 포위되어 빠져나갈 길을 잃었다. 
    왕은 간신히 어느 동굴 속으로 숨어 들게 되었는데, 마침 그 동굴 입구에는 거미 한 마리가 거미줄을 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곧이어 그를 추격해 온 적군의 병사는 동굴 앞까지 왔으나, 동굴 입구에 거미줄이 있는 것을 보고 동굴 안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냥 돌아가 버렸다. 

    또 다윗 왕은 적장이 잠자고 있는 방에 숨어 들어가 적장의 칼을 훔쳐낸 다음, 이튿날 아침에 '내가 당신이 자고 있을 때 칼을 가져왔을 정도이니 마음만 먹었다면 당신의 목을 가져오는 것쯤은 간단히 해낼 수 있었소.' 하는말을 전하여, 그의 마음을 변하게 하려는 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밤 가까스로 적장의 침실에 숨어 들어갔는데, 칼이 적장의 다리 밑에 있어서 꺼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다윗 왕은 단념하고 돌아가려 했다. 
    바로 그때 모기 한마리가 날아와 적장의 다리 위에 앉았다. 
    적장은 무의식중에 다리를 움직였다. 
    다윗왕은 그 틈을 이용해 재빠리 적장의 칼을 빼낼 수 있었다. 

    그리고 한번은 다윗 왕의 적군에게 포위되어 위기일발의 순간에 처했을 때 그는 느닷없이 미치광이 흉내를 내었다. 
    적의 병사들은 미치광이가 왕은 아니겠지 생각하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쓸모없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보잘것 없는 것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윗을 구한 것은 평소에 다윗이 귀찮아 하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경험을 통하여 구원의 은혜의 폭을 넓혀갈 수 있었다.
    왜냐하면 거미 한 마리, 모기 한마리, 미친 사람조차도 하나님이 적재적소에 준비시켜 주셨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다윗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오늘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러주셨다.

    구원의 반석이 되신 은혜를 소개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18:6)


    구원의 반석(레추르 이쉬에누)  לְצוּר יִשְׁעֵנוּ׃    the Rock of our salvation.

    성경에서 "구원의 반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로 표현하는 용어입니다.
    예를 들면, 흰 돌, 집 모퉁이 돌, 택한 돌, 견고한 반석, 신령한 반석 등과 같은 용어로 소개됩니다.
    특별히 구원의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절대 주권과 절대 통치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시편 95편은 표제가 없는 시로서 92편에서 "안식일의 찬송시"라고 소개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다음에 노래한 시라고 추측합니다.
    평온한 가운데서 하나님께 찬송하고 노래를 부르는 광경이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시편 95편은 히브리서 3장, 4장과 관계가 있습니다.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는 일은 죄의 가장 뿌리 깊은 현상이다.
    가령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아담은 하와에게 죄를 전가하고 하와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3).” 하고 뱀에게 전가하는데, 결국 그 모든 ‘탓’은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가(轉嫁)는 회개(悔改)의 기회도 잃게 하고 탓은 원망의 기회를 더할 뿐입니다.

    * 전가 / 돌릴 전, 시집 갈 가

    • 1. 잘못이나 책임 등을 남에게 떠넘겨 덮어씌움
    • 2. 다른 데로 다시 시집감
    • 3. 감정이 다른 대상에게까지 옮겨 감

    회개는 전적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일이다.
    그런데 자책은 자신을 탓함으로 하나님을 비난하고, 원망은 남을 탓하면서 하나님을 모욕한다.
    자기비애와 상대를 경멸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것에 대한 경멸이다.
    이에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라며 ‘다툼과 허영’을 ‘겸손’의 대척점에 두었다.
    허영은 외적으로 분수에 넘치는 겉치레이고, 다툼은 내적으로 자기가 옳다는 토대이다.
    이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은 겸손이다.
    남을 존중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겸손이다.
    이를 지키려면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해야 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지혜서에는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잠 11:2)”,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19:29).”고 일갈하였다. 곧 ‘아직도 가야 하는 길’에서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고전 9:26).” 이를 위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바울은 주의하였다(27). 예수님은 일러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음을 알리셨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

    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이를 에스겔은 훗날 하나는 양으로, 하나는 염소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의 양 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 사이와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심판하노라(겔 34:17).” 하고, 우리 주님은 그날에,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3).” 하고 구분하셨다.

     

    시편 95편부터 100편까지를 "신정시(神政詩)"라고 합니다.
    신정시란 하나님의 통치를 찬양하는 시라고 하겠습니다.
    절대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와 "경륜과 섭리"를 찬양하는 시를 말합니다.

    시편은 100편까지, 절대주권자 <하나님의 구속사>와 <경륜과 섭리>를 노래하는 여섯 편의 시 가운데 첫째 시다. 
    이 시들은 신정시(神政詩)라 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다룬다.

     

    창세기 49:24 목자 - 이스라엘의 반석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신명기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사무엘상 2: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사무엘하 22:2
    가로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시편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편 18:31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뇨.

    시편 94:22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나의 피할 반석이시라.

    이사야 26:4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고린도전서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지혜서에는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잠 11:2)”,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19:29).”고 일갈하였다. 
    곧 ‘아직도 가야 하는 길’에서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고전 9:26).” 
    이를 위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바울은 주의하였다(27). 
    예수님은 일러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음을 알리셨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이를 에스겔은 훗날 하나는 양으로, 하나는 염소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의 양 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 사이와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심판하노라(겔 34:17).” 하고, 우리 주님은 그날에,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3).” 하고 구분하셨다.

     

    오늘 시편은 100편까지, 절대주권자 <하나님의 구속사>와 <경륜과 섭리>를 노래하는 여섯 편의 시 가운데 첫째 시다. 
    이 시들은 신정시(神政詩)라 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다룬다.

    첫 번째 시, 95편은 ‘하나님의 통치’를 찬송한다. 
    1연은 1-2절로 여호와께 올리는 성도의 찬송을 담고 있고,
     2연은 3-7절로 우리의 목양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찬양하고 있으며, 
    3연은 8-11절로 과거 광야에서의 불순종과 그에 따른 주권자 하나님을 나타낸다. 
    특히 8절 이하의 내용은 히브리서 3장 7-11절에 그대로 인용하여 영적교훈을 확장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마음이 완고하여 남을 탓하고, 
    죄를 전가하여 미혹을 당하고, 
    미혹됨으로 주의 길을 가지 못한다. 
    고로 오늘 시편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절대통치인 구원의 반석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1. 즐거이 외치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시 95:1).”

    환희와 기쁨은 우리의 표현이다. 
    ‘오라!’ 하고 시인은 우리를 초대한다. 
    청유형으로 우리를 멈추어 돌아보게 한다. 
    히브리서를 근거로 이 시는 다윗의 시다.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히 4:7).”

    오늘, 우리로, ‘오라!’ 하고 부른다. 
    부르심의 소명은 칼빈의 표현처럼 비밀한 소명이다. 
    믿는 사람만 안다. 
    이를 응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의 바지랑대를 치우신다.’ 
    헨리 나우웬의 표현이다. 
    곧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우리가 기대고, 의지하는 것을 치워버리시는 것이다. 
    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3:13).” 
    세상이 우리를 날마다 미혹한다. 

    이를 위해
    첫째, 우리의 신분을 알리기 위해 바지랑대를 치우신다. 
    곧 우리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신다. 

    둘째, 우리가 주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린다. 

    셋째, 그 길을 우리만 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리신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 2:3).”

    고로 궁극적인 환희와 기쁨은 우리의 것이다. 이
    김은 여호와께 있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다들 애쓰며 살지만 결국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16:9).”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한 가운데서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생존했습니다.
    육체는 물이 있어야 생존이 가능하고 영혼은 생명수가 있어야 생명이 가능합니다.
    인생의 본원적인 갈증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길은 반석에서 나오는 물입니다.
    생명수가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반석입니다.
    요새나 산성은 반석 위에 건설해야 견고합니다.
    석회암 반석으로 이루어진 동굴은 몸을 피하기에 더 없이 좋습니다.
    삶을 도모해야 했던 다윗에게 반석은 능력과 안전, 보호와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반석은 개인의 신앙과 교회의 터를 잡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반석 위의 신앙이 있고 모래 위의 신앙이 있습니다.
    반석을 반석인 줄 몰라보는 사람, 반석을 떠난 사람에게는 좋기만 한 반석이 도리어 걸림 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됩니다.

    신앙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는 신앙이 있는가 하면 ‘자기의 의’ 즉, 자기의 잘남과 자기의 남다름, 자기의 열심과 자기의 공로에 기초를 둔 신앙이 있습니다. 
    같은 위난(危難) 속에서 반석으로 인하여 굳게 서는 신자가 있는가 하면 반석 때문에 넘어지는 신자도 있습니다.
    여호와 외에 의지할 반석과 의지할 신은 더 이상 없습니다.
    반석을 향해 나아갈 때 신자들의 마음은 기쁘고 그 반석을 향해 찬양하게 됩니다.
    주 여호와는 우리의 영원한 반석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반석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갈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갈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회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히 3:7-15) 

    구약과 신약은 항상 연결이 되고 또 구약은 다분히 신약의 그림자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면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생활을 했을 때는 축복을 받고 믿음에서 떠나 우상 숭배를 했을 때에는 큰 곤경에 빠졌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것도 역시 우상 숭배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스라엘 민족의 양상이 조금도 틀림없이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양상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세상으로 흐르고 믿음이 없을 때에는 항상 육신이 앞서고 육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그러한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반석

    시편 95: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구원'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영혼의 구원을 체험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은 육신적인 구원입니다.
    그들의 육신적인 구원이 오늘 우리들에게는 영혼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육신적인 구원은 적군과 싸워서 이기는 것을 말하거나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육신이 어려운 지경에 있다가 놓임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 시대에 있어서 영혼 구원의 그림자적인 역사인 것입니다.
    그 때는 영혼이 구원을 받는 그런 체험은 없는 시대였습니다.
    영혼이 구원받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사 부활하시고 또 성령이 오셔서 우리 마음에 내주하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반석' 이시라고 하였는데 현재 우리들에게도 구원의 반석이신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절)고 말씀하신 후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딛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24-27절)

    반석이 바로 예수님인데 신앙생활은 예수님 위에다가 집을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영혼의 보좌이시고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 다.
    반석은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고 큰 홍수가 날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만일 주님을 믿는 확실한 믿음을 가졌으면 우리 영혼의 상태뿐만 아니라 믿음의 생활도 흔들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거나 시험을 받거나 곤경에 처할 때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분명히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에 부딪히고 고난과 핍박과 환난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정말 견디기 어려운 환경에 부딪혔을 때에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확실히 가질 때에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어 주셔서 모든 역경을 이기도록 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석이신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걱정과 염려로 마음이 흔들리고 곁길로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의 반석(돌) 이야기와 예수 그리스도

    고린도전서 10:1-4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참고 성경 : 고린도후서 3:12-18, 빌 3:8, 엡 4:13-15)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역사를 기록한 구원의 책이다.
    성경 66권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 신약은 오신 예수님, 요한계시록은 다시 오실 예수님에 관한 기록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성경 속에 감추어 두셨다(골 1:26-27).

    성경 속에 감추어진 구원의 비밀을 푸는 열쇠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다.

    성경을 예수님으로 보고, 예수님으로 해석하면 모든 문제들이 풀린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보지 않으면 성경은 난제와 수수께끼로 가득한 책이 된다.

    성경의 기록 방식 중 하나는 비유와 상징 언어다.

    성경은 우주만물을 동원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성경 속에 감추어진 비밀인 예수님을 깨달아 믿는 것이 신약시대의 참된 믿음이다.

    사도 바울은 구약성경을 읽되 반드시 예수님으로 읽고 해석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고린도후서 3:13-16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겨지리라'는 말은 곧 예수님으로 해석하면 구약의 모든 비밀이 벗겨진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구약의 모든 내용을 예수님으로 해석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광야의 반석이다.

    고린도전서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모세 시대의 광야의 반석(돌)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이다.

    돌이 예수다? 예수님을 돌에 비유한다? 육적인 눈으로는 이해가 안될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해석이 정답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반석을 통해 생수를 마신 사건을 초대교회가 마가다락방에서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사건과 연결하여 해석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약 성경 속 돌(반석) 하나도 결국 오실 메시야 곧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목적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돌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이 가는 곳마다 돌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반석에서 나온 생수를 마셨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기는 자에게 흰 돌을 준다고 약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 속 돌과 관련한 사건과 이야기들이 주는 복음적 의미는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성경 속 돌 이야기의 대부분은 예수님 이야기다.

    성경에 등장하는 돌(반석)과 관련한 사건들에 대해 살펴보자.

    1.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

    신명기 32:15 “그러한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시편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편 89:26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시편 95: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이사야 26:4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2. 야곱의 광야 돌베개 사건

    창세기 28:10-12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장자권축복을 받은 야곱은 형 에서의 핍박을 피해 하란으로 도망한다.

    도망치던 야곱은 광야에서 밤 중에 한 돌을 취해서 돌 베개로 삼고 잠을 잤다.

    야곱은 광야의 한 돌을 의지하여 잠을 자고 쉼을 얻고 평안을 얻었다.

    그 돌을 통해서 사닥다리 꿈을 꾸었다.

    그 돌에 기름을 붓고 기둥으로 세우고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다.

    그 한 돌은 바로 구원의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 한 돌은 교회의 머릿돌이요, 산 돌이시며, 구원의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3. 모세와 돌

    출애굽기 17:8-16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말렉과의 전투가 기록되어 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세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 지팡이를 든 손을 들면 이기고 그 손이 내려오면 졌다.
    그래서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어 주었다.
    나중에 모세가 피곤해지자 돌을 가져다가 그 아래에 받쳐놓고 앉았다.
    일반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말렉 전쟁에서의 승리 비결을 모세의 기도의 손에 달려 있었다고 말하며 성도들이 기도의 손을 높이 들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아론과 홀의 도움은 곧 중보기도요 합심기도로 적용한다.
    그러한 해석은 성경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이요, 초보적 해석이다.
    출애굽 사건의 모든 것을 바로 해석하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로 보아야 한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유대인)의 출애굽 사건은 신약시대에 이방인 구원역사의 모형이요 거울이며 시청각 교훈이다.
    이스라엘의 해방자 모세는 온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모세의 기도는 곧 예수님의 기도의 모형이며, 모세가 지팡이로 능력을 행한 것은 예수님의 메시야적 능력과 권세의 모형이다.
    모세의 모든 기적은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표적의 모형이다.
    모세의 중보기도는 예수님의 중보기도의 모형이다.
    모세가 피곤해지자 돌을 가져다 받쳐준 그 돌도 구원의 반석되신 예수님의 모형이다.
    결국 오늘날 우리들이 죄악 세상에서 도망치고 탈출(출애굽, 엑소더스)하여 교회(광야) 생활을 하는 것과 마귀 사탄 세력과의 영적 전쟁 승리하여 천국(가나안 땅)가는 그 모든 역사의 중심이며 핵심이요 모든 것은 결국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4. 기타 구약 성경 속의 돌과 관련한 이야기

    여호수아가 길갈에 세운 12돌(수 4:20)
    사무엘이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운 에벤에셀 돌(삼상 7:12)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물맷돌(삼상 17:50)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의 돌(왕상 6:7)

    5. 예수님과 돌(반석)

    예수님을 상징하며 또한 직접적으로 비유하는 돌에 대한 성경구절들을 보라.

    고린도전서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시편 118:22-23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사야 28:1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이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마태복음 16:18
    ...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반석'도 단순히 베드로(조각돌, 작은돌)나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를 배경으로 구원의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해석해야 한다.
    결국 신약시대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세워진 교회가 예수님의 교회요 반석위에 세워진 참 교회다.

    마태복음 21:42-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사도행전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로마서 9: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베드로전서 2:4-8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다니엘 2:45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하니.

    '손대지 아니한 돌'을 이전 개역성경에서는 '뜨인 돌'로 번역했다.
    뜨인 돌이 한 큰 신상을 깨트린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 특별계시로 주신 구원의 책인 성경은 다 예수님 이야기다.

    누가복음 24:44-45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마틴 루터(Martin Luther)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다.
    성경을 따면 그리스도의 피가 나온다.

    존 칼빈(John Calvin)
    성경은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위한 목적으로 읽어야 한다.
    누구든지 이것을 외면하면, 평생 학문에 힘써도, 결코 진리를 알지 못할 것이다.

    성경 속 수많은 돌 이야기도 결국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역사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돌 만이 아니다.
    성경은 해, 달, 별, 나무, 물, 열매, 짐승 등 우주만물을 동원하여 메시야를 증거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증거한다.그러므로 성경을 예수님 이야기로 깨달아 믿자.
    구원의 반석되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의지하자.
    성경의 돌 이야기를 통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더욱 자라가자.




    형상(形象) : 형상 형, 코끼리 상

    צֶלֶם 스트롱번호 6755

    1. 우상 숭배적인 형체.  2. 형상.  3. 우상
    발음 [ tselem ]
    어원  / 아람어
    구약 성경  / 17회 사용
    • 1.  명사, 남성 우상 숭배적인 형체, 형상, 우상, 단2:31, 3:1.
    • 문법설명 /  6754와 일치함
    • 관련 성경  /  모양(단 2:31), 우상(단 2:32, 35), 신상(단 2:34, 3:1,12), 낯빛(단 3:19).

    * 6754. צֶלֶם    

    1. 그림자.  2. 형상
    발음 [ tselem ]
    어원  / ‘그늘지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7회 사용
    • 1.  명사, 남성 그림자, 시39:7(6), [은유적으로] 헛된 것, 시73:20
    • 2.  명사, 남성 형상, 창1:27, 5:3, 9:6, 우상, 형상, 왕하11:18, 암5:26.
    • 관련 성경  /  형상(창 1:26, 삼상 6:5, 시 73:20), 석상(민 33:52), 우상(왕하11:18, 겔7:20, 암5:26), 그림자(시39:6).






    재(에페르)

    אֵפֶר 스트롱번호 665

    1. 재 : 민19:9
    2. 이 말은 주로 슬픔을 표현할 때 사용됨
    발음 [ ’êpher ]
    어원  / ‘흐트러 뿌리다’는 의미를 갖는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2회 사용
    • 1. 명사, 남성 재: 민19:9,10, 삼하13:19.
      • a. 명사, 남성 [주] 이 말은 주로 슬픔을 표현할 때 사용됨, 렘6:26, 애3:16.
    • 관련 성경 /  재(창 18:27, 민 19;9, 욥 13:12, 말 4:3).

    티끌(아파르)

    עָפָר 스트롱번호 6083

    1. 먼지.  2. 점토. 3. 쓰레기 더미
    발음 [ ʽâphâr ]
    어원  / 6080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10회 사용
    • 1.  명사, 남성 먼지, 마른 땅, 창2:7, 26:15, 수7:6, 욥2:12.
      • a.  명사, 남성 점토, 흙, 양토, 레14:42,45.
      • b.  명사, 남성 쓰레기 더미, 합1:10.
      • c.   명사, 남성 작은 모래[바람에 날리는], 시18:43(42)
    • 2.  명사, 남성 עַל עָפָר
      • a. 명사, 남성 땅 위에, 세상에, 욥19:25, 22:24,39:14, 41:25(33), 사47:1.
        b. 명사, 남성 무덤에, 욥7:21, 20:11, 21:26.

    • 3.  명사, 남성 יָרַד עָפָר, 먼지가 되다, 무덤으로 가다, 창3:19, 시22:30(29), 30:10(9), 104:29.
    • 4. 명사, 남성 [비유적으로]진토[인생에 대한 표현], 창3:14, 18:27, 민23:10, 시103:14,사65:25, 애3:29,
      • a. 명사, 남성 [주]복수 עֲפָרוֹת:욥28:6, 잠8:26.
    • 관련 성경 /  흙(창2:7, 레14:41, 왕상18:38), 티끌(창13:16, 민23:10, 시78:27), 재(민19:17, 왕하23:4), 진토(삼상2:8, 왕상16:2, 시7:5), 가루(왕하23:15), 땅(욥19:25), 사금(욥28:6), 흙(욥39:14), 흉벽(합1:10), 부스러진 것(왕상20:10).



    티끌과 재(עָפָר וָאֵפֶר)

    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며 피조세계의 대장 노릇하기를 즐겨한다.
    그러나 성서는 인간은 피조세계의 한 구성원이며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가는(창 3:19; 전 3:20; 12:7; 욥 4:19; 8:19; 10:9; 34:15; 시 104:29) 유한적 존재임을 되풀이해서 알려준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도 아니지만 티끌과 같은 무상한 가치없는 존재도 아닌,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이다.

    창세기 2장 7절은 최초 인간의 창조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담을 아다마(땅, אֲדָמָה)의 아파르(עָפָר)로 만드셨다”고 묘사한다.
    히브리어 아파르(עָפָר)는 우가릿어('pr)와 아카드어(eperu), 그리고 아라비아어('afarun)과 동족어이다.
    그 뜻은 '티끌, 먼지, 지면의 가루, 부스러기'를 뜻한다.
    아마르나 가나안(Amarna Canaanite)에서는 이 단어가 haparu(='aparu)로 발견되었다.
    히브리 남성명사인 아파르(עָפָר)는 구약에서 '티끌 혹은 먼지,' 즉 '땅의 마르고 가는 가루'를 뜻하는 용어로 스트롱스에 따르면 총 110회 사용된다.
    이 땅 위에 티끌이 많고 널리 퍼져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수 많은 후손을 약속할 때 비유로 사용되었다.(창 13:6)
    티끌은 눈에 잘 보이지 않고 너무 흔하기 때문에 가치 없는 어떤 것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습 1:17)
    또한 가벼운 성격 때문에 흩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왕하 13:7)

    아파르(עָפָר)는 구약에서 통상 '재'로 번역되는 동의 명사 에페르(אֵפֶר)와 짝말로 나온다.
    에페르(אֵפֶר)는 구약에서 21회 나온다.
    재는 애통의 전통적인 표시였다(사 61:3).
    베옷(사크, שַׂק)을 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있는 행위는 비통과 회개의 표시이며, 금식의 표시이기도 했다. (삼하 13:19; 사 58:5; 렘 6:26; 겔 27:30; 욘 3:6; 단 9:3; 에 4:1)
    애곡의 상징으로 재를 하늘로 던져 머리로 뒤집어 쓴다.(욥 2:8)

    아파르(עָפָר)와 에페르(אֵפֶר)는 언어유희(paronomasia)를 이루어 중언법으로 구약에 세 번 언급된다.(창 18:27; 욥 30:19; 42:6) 한국어 음역으로 읽어만 봐도, 이 짝말이 모음만 다르고 자음이 같아 반복되는 음율을 느낄 수 있다.
    두 말이 짝을 이루어 인간의 존재 정체성을 묘사한다.
    즉, 아파르 봐에페르(עָפָר וָאֵפֶר)로서 인간은 티끌로 만들어진, 그리고 살다가 재로 사라질, 그 자체로는 무색무취(생명없음)의 존재이다. 이는 '가치없는 존재'라기보다 '생명이 없는 무상의 존재'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다.
    이러한 무상적 존재가 생명체로 살아나 유의미한 존재가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숨(너샤마, נְשָׁמָה 창 2:7)을 불어넣어주신 은총 때문이다.
    결국 아파르 봐에페르(עָפָר וָאֵפֶר)는 인간의 비천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을 표현해주는 짝말이다.
    갓난아기가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가치없는 존재가 아닌 것과 같다.

    그럼에도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고난 상황에 처하면 자신을 버려져서 비천하고 쓸모없게 되어버린 존재라고 쉽게 한탄한다.

    욥도 마찬가지였다.
    욥기에는 이 짝말이 30:19와 42:6에 두 번 언급되는 데, 30:19에서 욥은 이 짝말을 자신이 비천한 존재로 떨어진 처지를 애통해하면서 사용한다.
    그러나 폭풍우 가운데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창조주로서의 위엄과 피조물을 향한 사랑을 목격한 후, 이제 자신의 예전 생각을 거두고 아파르 봐에페르(עָפָר וָאֵפֶר)란 단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됨을 하나님께 고백한다. 두 절을 직역하면 그 차이를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הֹרָ֥נִי לַחֹ֑מֶר וָ֜אֶתְמַשֵּׁ֗ל כֶּעָפָ֥ר וָאֵֽפֶר׃ (호라니 라호멜 봐에트맛셀 케아파르 봐에페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시니, 내가 아파르 봐에페르(티끌과 재)처럼 되었구나 (욥 30:19)

    עַל־כֵּ֭ן אֶמְאַ֣ס וְנִחַ֑מְתִּי עַל־עָפָ֥ר וָאֵֽפֶר׃ (알-켄 에메아쓰 베니함티 알-아파르 봐에페르)

    그리하여 내가 (예전 생각을) 거두고, 아파르 봐에페르(티끌과 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욥 42:6)

    전통적으로 '회개하다'로 번역된 동사 나함(נָחַם)은 '다시 생각하다'는 뜻도 있고, 잿더미 위에서 회개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두 단어의 짝말이 나온 경우가 없다.
    뿐만 아니라, 욥기 전체의 주제가 욥이 죄가 없음에도 고난을 받은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고려할 때, 42:6을 회개의 전형적인 장면으로 보기 어렵다.
    욥이 만일 회개했다면, 그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는 생명(욥 자신)을 버림받은 비천한 존재로 비하했던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도 고난이 찾아오거나, 일이 내 뜻데로 풀리지 않을 때, 욥기 30장 19절에서의 욥처럼 하나님께 버려진 비천한 존재로 애통하며, “어찌하여”를 외치기 보다, 욥기 42장 6절의 욥처럼 나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내 눈의 방향을 바꿔 주를 바라보고 인내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란다.

    티끌(dust)히브리어 닥카(뉘우치는, 회한에 찬)
    우리말 구약성서에
    1. 낙심한 사람(시 34:18)
    2. 티끌(시 90:3)
    3. 잘못을 뉘우치는(사 57:15)으로 번역돼 구약 전체에 3번 나옵니다.

    동사 다카(부수다, 찧다, 가루로 만들다)에서 온 말입니다.
    마음이 완전히 부서져 가루가 된 느낌이 드는 단어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삼상 2:8)에서처럼 구약에 티끌, 먼지로 번역돼 많이 쓰인 단어는 ‘아파르’입니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창 2:7)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 3:19)에서의 ‘흙’이 아파르입니다.
    영어 성경은 아파르를 더스트(dust·먼지, 미세한 가루)로 번역했습니다.

    “주님은 대대로 우리의 거처이셨습니다.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과 세계가 생기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죽을 인생들아, 돌아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순간과도 같습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아난 한 포기 풀과 같이 사라져 갑니다. 풀은 아침에는 돋아나서 꽃을 피우다가도, 저녁에는 시들어서 말라 버립니다.”(시 90:1~6, 새번역)

    산산이 부서져 버린 티끌처럼 보잘것없는 우리는 오로지 주 하나님을 의지할 뿐입니다.



    7월 5일(토) 시편 89-93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티끌로 돌아가라(90: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You turn men back to dust, saying, "Return to dust, O sons of men

    작은 것의 소중함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이 조그만 나라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몰라도 유달리 큰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이름부터 대한민국이라고 합니다. 세계에서 우리나라 이름처럼 위대한 나라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 최고 수반을 대통령, 최고 학부는 대학교, 대학원, 우리나라에서 외국으로 보내는 외교관들을 대사라고 합니다. 또한 한국의 모든 길들을 보면 다 대로(大路)입니다. 양재대로, 강남대로 등 절대 소로(小路)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다리를 놓아도 다 대교(大橋)입니다. 성수대교를 위시해서 다 대교라고 합니다. 술을 마실 때도 대포 한잔하지라고 할 정도로 하여튼 큰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이 어떤 열등감, 작다는 열등감을 보상하려는 일종의 보상 심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것들도 비하시킵니다. 자꾸만 작다는 것을 감추려고 하고 작다는 것을 무시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말과 관련된 것을 연구해 보면 작다는 것은 다 안 좋은 쪽으로 쓰여집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렸을 때만해도 ‘사람이 잘다’, ‘좀씨’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이 말들은 다 작고 조그맣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작은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성수대교 건설할 때 작은 나사 하나, 작은 시멘트 하나가 제대로 있어야 할 곳에 있었다면 그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작은 것이 소중한 것인데 우리는 작은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이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작은 것 속에서 미래를 볼 줄 아는 것이야말로 중요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누가복음 16:10)


    사람(에노쉬)
    -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로서 한번은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이라는 의미로 보면되겠다.(8:4; 103:15).

    티끌로(아드다카)
    - '먼지로' 혹은 '멸망으로'로 번역이 가능하나, 전자가 문맥상 더 자연스럽다.
    진흙으로 지은 집에 사는 사람(욥 4:19)은 흙으로 부터 왔으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창 3:19).

    돌아가라(슈부)
    - 하나는 티끌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는 해석(Rashi)
    또 하나는 새로운 세대의 발흥, 즉 한 세대가 가고 또 다른 세대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는 해석(Westermann).
    전자로 볼 경우 본절은 동의적 평행법이 적용된 구절이 되고
    후자로 볼 경우는 반의적 평행법이 적용된 구절이 되는데, 계속되는 내용이 인간의 유한성, 일시성, 덧없음을 다루고 있음을 고려할 때 전자를 취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티끌(1793) 다카(dakkâʼ) דַּכָּא 스트롱번호1793

    1. 심하게 뭉그러진.  2. 일그러진
    발음 [ dakkâʼ ]
    어원  / 1792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회 사용
    • 1. 형용사 심하게 뭉그러진, 산산조각난, 시90:3
    • 2. 형용사 일그러진, 깨진[영적으로], 사57:15,시34:19(18).
    • 문법설명  /  복수 연계형  דַּכְּאֵי
    • 관련 성경 /  통회하는(시 34:18, 사 57:15). [명] 파멸,티끌(시 90:3).

    *1792  דָּכָא      

    1. 부스러지다.  2. 잘게 부수다.  3. 피엘형 דִּכֵּא
    발음 [ dâkâʼ ]
    구약 성경  / 18회 사용
    관련 성경  /  통회하다(사 57:15), 깨뜨리다(시 89:10, 94:5), 엎다(시 143:3), 상하다(사 53:5, 10), 밟다(애 3:34), 무너지다(욥 4:19),
    멸하다(욥 6:9), 꺾다(시 72:4), 탈취하다(잠 22:22), 짓밟다(사 3:15), 겸손하다(렘 44:10), 억눌리다(욥 5:4), 부숴지다(사 19:10).

    사람(*, 에노쉬)
    - 본 문액에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로서 한번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이라는 의미로 보면 되겠다.(8:4; 103:15).

    티끌로(*, 아드다카)
    - '먼지로' 혹은 '멸망으로'로 번역이 가능하나, 전자가 문맥상 더 자연스럽다.
    진흙으로 지은 집에 사는 사람(욥 4:19)은 흙으로 부터 왔으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창 3:19).

    돌아가라(*, 슈부)
    - 본 구절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가지이다. 하나는 티끌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고(Rashi), 또 하나는 새로운 세대의 발흥, 즉 한 세대가 가고 또 다른 세대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Westermann). 전자로 볼 경우 본절은 동의적 평행법이 적용된 구절이 되고 후자로 볼 경우는 반의적 평행법이 적용된 구절이 되는데, 계속되는 내용이 인간의 유한성, 일시성, 덧없음을 다루고 있음을 고려할 때 전자를 취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시편 90:3 성경 구절 주석

    시편 90:3의 의미

    “주의 구역으로 사람이 돌아가리니”라는 구절은 인생의 유한성과 하나님의 Sovereignty를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연약하고 덧없는 존재인지를 상기시킵니다.

    구절 해석

    이 구절은 죽음의 본질과 인간의 삶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절대적이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달리, 인간의 존재는 순간적이고 덧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주요 해석

    • 인간 존재의 유한성 : 이 구절은 인간이 흙에서 나왔으며 최종적으로는 흙으로 돌아간다는 진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참된 겸손과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인식하게 합니다.
    • 하나님의 주권 : 하나님이 사람의 삶을 주관하시며, 죽음 또한 그의 권한 아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생명의 주인께 의지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 회개와 돌이킴의 필요성 : 우리의 나약함을 인식하고 죄에서 돌아서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회개가 없이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교훈을 줍니다.

    주요 성경적 연결

    이 구절과 관련된 여러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 창세기 3:19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 히브리서 9:27 -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 시편 103:15-16 -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 욥기 14:1-2 - “사람은 여필 곧 여자에게서 나왔으며... 푸른 풀과 같다.”
    • 전도서 3:20 - “모든 인생이 한 곳으로 가나니... 모든 것은 흙으로 돌아간다.”
    • 이사야 40:6-7 -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입니다.
    • 로마서 6:23 - “죄의 삯은 사망이요.”

    종합적 해석

    이 구절은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우리의 삶의 목적을 일깨우는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우리의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합니다.

    성경 구절 해석 도구

    성경 공부를 할 때는 다음과 같은 도구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 성경 주석 : 깊이 있는 해석을 위해.
    • 성경 참고 자료 : 상호 연결된 성경 구절을 찾기 위해.
    • 성경 사전 : 특정 용어와 개념을 이해하는 데 유용합니다.
    • 주제별 성경 분류 :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다른 구절을 연결해 봅니다.

    시편 90:3은 인생의 한계와 하나님의 Sovereignty에 대한 중요한 진리를 가르칩니다.
    이 구절은 성경 전체와 연결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 깊은 이해와 각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귀한 말씀입니다.





    모세의 기도 첫 부분은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조해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함과 유한함을 상기시킴으로써 뒷부분에 나올 간구의 기반을 닦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는 표제를 살펴봅시다.

    출애굽기에 나타난 모세는 능력의 사람입니다. 당대 최강대국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선포한 자입니다. 홍해를 갈라서 마른땅처럼 건너가게 했습니다. 날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때로는 반석에서 샘물이 솟게 했습니다. 어떤 선지자에 못지않게 능한 일을 행한 자입니다.

    또한 신명기서를 읽어보면 그는 위대한 설교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도의 사람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는 큰일을 위해서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구약 오경을 기록하는 일을 위해서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택하시고 감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존귀히 여기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그 맡은 일에 충성한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기에 합당한 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에서 어떤 칭호를 얻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안수집사나 권사입니까? 장로나 목사입니까?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랄 가장 영광스러운 칭호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도록 사는 날 동안 힘써 노력합시다.

    하나님의 사람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시편 90편은 모세가 드린 유일한 기도가 아닙니다. 다만 그의 드린 기도의 한 실례입니다. 시편 90편은 150편의 시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일 뿐 아니라 가장 장엄한 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장엄함과 영원함에 대비해서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준 시편입니다.

    1. 신앙의 기도는 하나님을 묵상하므로 시작합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1. 모세는 언제 이 기도를 드렸을까요?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는 표제는 있지만 언제 그가 이 기도를 드렸는지는 기록되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의 정황을 미루어 살필 때에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을 때에 지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다면 ‘비록 거친 바람이 귓가에 들리는 광야에 지금 우리가 처해 있지만, 주님, 당신의 품안에 우리의 거처가 있습니다.’라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에서 우거하던 우리 조상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당신만이 우리의 영원한 거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거처는 어디에 있습니까?

    몸과 마음을 두는 처소는 어디에 마련되어 있습니까?

    성도는 고급 아파트 대신에 하나님의 품에 그 거처를 마련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광야의 거친 비바람 소리를 들을 때에도 하나님의 품에서 그 순간을 지내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위로자이십니다. 그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여우는 굴에, 새는 둥지에 그 거처를 마련하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품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여기 복산동이나 매곡, 신정의 예배당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그 거처를 확보합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이사를 다녀 보셨을 것입니다.

    이사를 가면 퇴거신고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하는 퇴거신고는 여러분이 사는 세상의 거주지를 옮긴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여러분의 영원한 거주지에는 변동 사항이 없습니다.

    화려한 왕궁도 세월 속에 매몰되기도 하지만 왕 같은 제사장이 된 우리의 신분은 결코 변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나그네의 삶 속에서도 하늘의 시민권을 확인하십시오.

    그러면 순례자의 노정을 찬송으로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거처나 직장에 대한 불안 속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분은 없습니까?

    비워 달라는, 그만 두라는 통고를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영원한 거처, 거기에는 변동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내 안에 거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약속해 주고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지나간 365일, 여러분은 어떤 열매를 맺었습니까?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그 사람은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주님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90편 1절이 한 해 마지막 주일을 보내는 여러분의 묵상이 되게 하십시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모세는 임종 시에 열두 지파를 위해서 축복했습니다. 아셀 지파를 위해서 이렇게 축복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희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여러분이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이 여러분의 좋은 거처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2 우리의 거처가 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2절을 보십시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2)

    만년설을 뒤집어쓴 그 어떠한 산악도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은 존재하신 분입니다.

    땅과 하늘도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만물이 존재하기 전에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신 분으로 존재하셨습니다.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도 아무런 아쉬움이 없이, 넘치는 영광 가운데 계셨습니다.

    온 세상이 흑암 속에, 혼동 가운데 있던 그 때도 하나님은 빛 가운데, 질서 속에 계셨습니다.

    하늘이 빛을 발하고 땅이 생명을 내기 전에 하나님은 생명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역사 속에 왔다가 가는 조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신 주연이십니다.

    그 분만이 하나님 나라 역사를 확장하는 주인공이십니다. 오직 그분께 여러분의 소망을 두십시오.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을 빌면 그 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사도 요한의 표현을 빌면 그 분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이십니다. 그 분은 새로운 역사를 열고 오시는 분입니다.

    모세의 표현을 빌리면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분 안에 여러분의 거처를 마련하십시오.

    3 하나님의 영원성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의 유한성과 연약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은혜란 사람이 자기 크기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를 바로 알게 만듭니다.

    망년회 회식은 자신의 처지를 잊게 만들지 모르지만 이 같은 예배는 여러분의 인간됨을 기억나게 만들 것입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우리는 흙에 불과합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인생임을 기억하십시오.

    숨이 끊어지는 순간부터 여러분의 신체는 분해되기 시작하고 결국 흙으로 환원되고 맙니다.

    범죄한 인생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사라져 갈 뿐입니다.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주의 선고 아래서 인생들은 모두 티끌로 환원되고 맙니다.

    올 한 해 동안 우리의 곁을 떠나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게 참 소중한 분들, 우리 울산교회에 존귀한 분들 가운데서도 올해 떠난 분들이 많습니다.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사람은 떠나갑니다. 사람은 죽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완성해 가십니다.

    우리가 남길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리라”

    하나님이 결정하시면 우리 인간은 결단 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만드셨고 그 말씀이 우리를 끝장내십니다.

    어떤 사람도 자기의 결정에 의해서 세상에 오지도 않았고, 자기의 결정에 따라서 세상을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 왔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돌아갈 뿐입니다.

    영원하신 그 분의 손길을 지켜보십시오.

    영원하신 그 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주의 손짓, 주의 말 한 마디에 여러분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그 분의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물 한 그릇도, 밥 한 그릇도 그 분의 선하신 뜻을 따라서 여러분에게 공급되어 집니다.

    하나님이 살리기로 작정하면 온 세상이 달라붙어서 죽이려고 해도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죽이기로 결정하면 하늘의 천사가 모두 달라붙어도 살려낼 수가 없습니다.

    자기 분수, 자기 한계를 인식하면 거룩하신 그 분의 손에 우리의 남은 날들을 의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신앙의 기도는 자신을 돌아봄으로 그 깊이를 더합니다.

    모세는 사람 사는 것을, 그 유한함을 몇 가지 비유로서 연속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하루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년은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수많은 나라가 시작하고 수많은 정권이 매몰되는 기간입니다. 새로운 사건이 나타나기도 하고 새로운 역사가 기록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주님의 눈에는 하루가 지나간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2.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개역성경에는 “밤의 한 경점뿐”이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여러분은 야간 보초를 서 보셨습니까? 저는 다행히 방위 출신이어서 밤에 보초를 서 본 적이 없습니다. 천년이라고 해 봤자 하늘 보초병하나 교체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표현합니다.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져 간 역사의 무대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3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순식간에 쓸어 가시나이다.”

    갑작스러운 폭우로서 냇물이 불어서 모든 것을 순식간에 쓸어 가듯이 하나님은 인생을 그 눈앞에서 죽음으로 쓸어 가십니다. 폭풍우가 검은 구름을 몰고 가듯이 시간은 인생을 보내어 버립니다. 사람은 순식 간에 삶의 터전에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갈 뿐입니다.

    4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피곤한 오후 잠간 눈을 붙여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삶은 우리의 경험 속에 꿈과 같다는 말입니다. 순식간에 사라질 뿐입니다. 우리의 꿈과 우리의 계획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 존재 그 자체가 꿈과 같이 순식간에 사라질 뿐입니다.

    5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사람들이, 성경기자들이 아주 즐겨 사용하기 좋아했던 주제가 풀의 꽃과 같다는 표현입니다. 아니 인생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이라고 하면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소나무가 아닙니다. 우리는 전나무가 아닙니다. 우리는 참나무가 아닙니다. 그냥 풀에 지나지 않습니다. 봄에 무수히 돋아나다가 여름 한 철 끝까지 버티지도 못하고 시드는 존재, 그것이 우리 인생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살아가다가 꽃피우고 그러다가 벤바 되어 마르는 것이 풀의 생태고 인생의 역사입니다. 풀이나 인생이나 잠간이면 모두 끝장을 봅니다.

    자라다가 꽃피우고 열매 맺고 사라져 가는 것은 보편적인 과정 같기도 하지만 그것이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과정은 아닙니다. 할 일 다 하고 가는 사람은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중도 탈락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어릴 때 친구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가운데는 중도 탈락을 하고만, 한참 꽃피울 때도 되기 전에 벤바 되어 마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지금 생명 있음을 찬양하십시오. 생명 주심을 감사하십시오.

    3. 신앙의 기도는 자신의 죄악됨을 인식함으로 간절해집니다.

    그러면 인생은 어쩌다가 이렇게 유한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까? 왜 이렇게 연약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까? 7절부터 11절이 그 이유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인간의 유한한 것이 우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쉬 사라지는 것은 창조주의 본래적인 의도가 아닙니다. 죄로 인한 하나님의 분노의 결과로 인생은 그렇게 사라집니다.

    특히 지금 모세는 자기 눈앞에 사라져 가는 세대를 바라보면서 드린 기도라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광야 40년간의 시간 속에 벤바 되어 사라지는 동료 인생들을 바라보면서 읊는 시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모든 세대가 광야에서 소멸되는 것을 보면서 드리는 탄식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면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이 노하시면 우리가 끝납니다. 아스팔트 위에 풀은 자랄 수 있을지언정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인생은 결코 번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의 분내심에 쓰러질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진노 속에 내일을 계획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기뻐하지 아니하는데 여러분이 세우는 계획이 설 수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과 더불어서 화해하십시오. 하나님의 호의 속에서 구주대망 2016년 새해를 설계하십시오.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께 의탁하십시오. 세끼 밥 찾아 먹듯이 하나님을 즐겨 하십시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삶의 소원으로 삼아 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달픈 한 해 보내셨습니까? 지금도 목에까지 차오르는 답답함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부르짖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때로는 이루게 합니다. 우리가 이 한 해 동안 당했던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를 빚어 가고 있습니다. 잠시 환난의 경한 것이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

    모세의 기도에 계속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 하였나이다.”

    2 하나님이 보신 죄악은 반드시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보실 수 없는 죄악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숨은 동기까지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나는 착한 사람인데 나는 이런 선한 일을 하려고 했고 이런 좋은 일을 하려고 했는데’

    때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설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뒤편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지신 분입니다.

    모든 죄악은 그 대가를 지불하고야 맙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지금도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정오의 햇빛보다 더 밝은 하나님의 얼굴빛 아래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빛이신 그 분 앞에 어두움은 조금도 용납되지를 않습니다. 숨은 죄를 낱낱이 고백하는 시간을 이 해가 다가기 전에 가집시다. 그 분 앞에 있는 그대로 고백하는 것만이 살길입니다. 속죄의 피만이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여러분의 앞날이 복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심중에 죄악을 품지 마십시오.

    오직 죄인의 소망은 사죄의 보혈에 있습니다.

    항상 기억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약속하셨습니다.

    3. 죄악을 품고 살면 인생이 소모적입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시 90:9) 다른 번역은 ‘주께서 노하시면 우리의 인생은 사그라지고, 우리의 한 평생은 한숨처럼 스러지고 맙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삶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는 것이 진지해집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의 삶이 참으로 사람의 삶답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올해가 가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이 부질없이 지나간다고 생각듭니까?

    사는 하루하루가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만나야 할 그 분을 만나 보십시오.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 분을 기쁘시게 하는 소원이 자리하면, 사는 것이 황홀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사실 모세는 보통 사람보다 더 오래 살았습니다.

    동시대인의 수명뿐 아니라, 요즈음의 평균 수명과 비교해도 예외적인 기록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지금 옛 족장들의 연한과 비교해서, 특히 영원과 비교할 때 몹시 짧은 것을 고백합니다.

    나이가 들면 움직이는 것도 힘들고 숨 쉬는 것조차 괴롭습니다.

    감각은 무디어지고 손에 힘조차 빠져나갑니다.

    메뚜기도 짐이 되고 원욕도 사라집니다.

    “아무 낙이 없다”고 한탄하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주를 아는 백성에게는 노년도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백향목 같이 청청하며 결실 합니다.

    비록 태양이 떨어지면 열기는 사라지지만 달콤한 고요와 저녁의 시원함이 찾아옵니다.

    복잡하고 분주한 날들은 이제 지나갔지만, 어둡고 무서운 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소망의 날로 연결됩니다.

    죽을 것은 죽지 않을 것에 자리를 내어 주게 될 것입니다.

    옛 사람, 낡은 신체는 잠들고 영원한 젊음으로 충만한 새 사람으로 우리가 깨어날 것입니다.

    모세는 지금 수고와 슬픔뿐인 삶을 살다가 떠나가는 동료 인생들을 위해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하지만 성도들은 그 날아가는 날들을 슬퍼하거나 탄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수고와 슬픔의 날이 바람에 불려서 날아간 후에 보람과 기쁨의 날이 도래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세월이 흘러가는데 이 나그네 된 나는 괴로운 세월 가는 것 금할 것 아주 없네 주께서 오라 하시면 내 고향 찾아 가리.’라고 노래합니다.

    한 해가 지나갈 때마다 인생이 서글퍼집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월이 흘러가는데 이 나그네 된 나는 괴로운 세월 가는 것 금할 것 아주 없네.’라고 찬송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순례자의 묵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모세는 주위에서 죽어가고 있는 인생들을 보고 있습니다.

    모세는 그 인생이 장례 행렬 속에 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40년 동안 60만 명이 죽어 나가는 것을 목도했어야만 했습니다.

    머무는 곳마다 무덤을 남기는 진노의 여정의 길잡이 노릇을 했던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삶은 스러져 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최후를 보면서 절규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4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를 있는 그대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한 결코 과장법을 쓸 수 없습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드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전에는 알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조차도 그들은 농담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한날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글로서 기록한 것이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어떤 작가의 묘사도 실상보다 결코 지나친 과장이 아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기억하십시오.

    욕망을 따라 살다가 광야에 남긴 무덤들을 여러분 잘 기억해 두십시오.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장소를 명심하십시오.

    누가 능히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구원을 얻겠습니까?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고 명하시는 그 분 앞에 누가 거역하겠습니까?

    좀 더 있다가 가야 되겠다고 누가 말대답하겠습니까?

    말씀 맺습니다.

    우리를 오늘 티끌로 돌리시고, 내일 우리를 지옥에 던지시는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배우게 될 때에 인생은 은혜 입은 자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티끌에 불과한 자신을 아는 복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원 자존하신 그 품안에 여러분의 거처를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기도문>

    “주여, 우리에게 주의 품안에 안식하는 법을 배우게 해주옵소서.

    모든 짐을 내려놓고 그 영원하신 품속에 우리의 거처를 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복된 연습을 하는 우리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원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유한하며 쉬 사라지는 연약한 인생, 우리를 기억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천년이 주님께는 밤의 한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의 진노 가운데 소멸되어 지지 않도록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주의 진노 가운데 소모적인 시간들이 이상 더 지속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광야의 40년, 지나간 60년을 뒤로하고 약속의 땅에서, 영광가운데 살아가는 날들이 되게 하옵소서.

    이제는 우리에게 돌아와 주시옵소서.

    슬픔을 당한 햇수대로 고통을 느낀 날 수 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시고 즐겁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크신 행사를 저희들에게 나타내소서.

    저희 자손들에게 보여 주시옵소서.

    우리 손으로 하는 일들을 견고케 하여 주옵소서.

    견고케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티끌로 돌아가라? 한다 - 원어성경에 기록된 어휘(단어)는 차별(구별)이 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그게 불가능 해진 것이다.

    창세기 2:7, 흙으로(아파르 민-하아다마)의 아파르[6083 rp;[; `aphar,먼지,티끌]가 순전하였다면,
    첫 사람 아담의 죄(罪)로 인해 오염(汚染)되어 ‘다카’와 비교되는 것은 아닌지,,,.물론, ‘죄를 깊이 뉘우치는,,,’이 우선이겠지만,
    영어,dark[daːrk,다크]어두운, 어둠, 지다 등---아래 욥기4:19, 참조.

    -----------------------------------------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으로(히,6083아파르 4480민-127하아다마) 사람을(히,120아담/헬,444안드로포스) 지으시고 생기를(히,5397니쉬마트 2416하이임)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히,120아담/헬,444안드로포스) 이 생령이(히,5315네페쉬-2416하야) 된지라

    [개역개정]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으로(헬,5522쿤 575아포 3588테스 1093게스)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

    [욥] 4:19 하물며 흙집에(히,1004밭테-2563호메르/헬,3614오이키아스 4081펠리나스) 살며 티끌로(히,6083베아파르/헬,4081펠루)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개역개정] 19.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

    -----------------------------------------

    [시] 90:3 주께서 사람(히,582에노쉬/헬,444안드로폰)을 티끌(히,1793닼카/헬,5014타페이노시스)로 돌아가게 하시고(히,7725타쉐브/헬,3361메 654아포스트렢세스)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히,1121베네(이)-120아담/헬,444안드로폰~)은 돌아가라(히,7725슈부/헬,1994에피스트렢사테) 하셨사오니

    [개역개정] 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

    יט אַף, שֹׁכְנֵי בָתֵּי-חֹמֶר-- אֲשֶׁר-בֶּעָפָר יְסוֹדָם: יְדַכְּאוּם, לִפְנֵי-עָשׁ. 19

    *로마자 음역; 19 af sho·che·nei vat·tei-cho·mer a·sher-be·'a·far ye·so·v·dam ye·dak·ke·'um lif·nei-ash.

    19. ‘'aph shok’'ney batey-chomer ‘'asher-be`aphar y’'sodam y’'dak’'um liph’'ney-`ash.

    Job4:19 How much more those who dwell in houses of clay, whose foundation is in the dust, who are crushed before the moth!

    [욥] 4:19 하물며 흙집에(히,1004밭테-2563호메르/헬,3614오이키아스 4081펠리나스) 살며 티끌로(히,6083베아파르/헬,4081펠루)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개역개정] 19.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

    637 [아프] ’ap̄ אַ֤ף ׀ How much less Conj 7931 [쇼케네이] šō-ḵə-nê שֹׁכְנֵ֬י [in] those who dwell in Verb 1004 [밭테-] ḇāt-tê- בָֽתֵּי־ in houses Noun 2563 [호메르] ḥō-mer, חֹ֗מֶר of clay Noun 834 [아쉐르-] ’ă-šer- אֲשֶׁר־ Whose Prt 6083 [베아파르] be-‘ā-p̄ār בֶּעָפָ֥ר [is] in the dust Noun 3247 [예쏘오담] yə-sō-w-ḏām; יְסוֹדָ֑ם foundation Noun 1792 [예닼케움] yə-ḏak-kə-’ūm, יְ֝דַכְּא֗וּם [which] are crushed Verb 6440 [리프네-] lip̄-nê- לִפְנֵי־ before Noun 6211 [아쉬] ‘āš. עָֽשׁ׃ the moth Noun

    637 אַף 아프 Original Word: #a' 'aph {af}기본 불변사;‘접근(接近)’을 의미함 (부사나 접속사로서 사용됨) ;‘또한’, 또는 ‘뿐만 아니라’ 반의적으로 ‘비록’:- 또한, 비록, 그리고(게다가, 아직), 그러나, 조차, 얼마나 많이 적게 (많게, 오히려), 게다가, 함께, 그러면, also, Indeed, <창3:1,18:13,23,24,욥4:19,34:17,36:33,40:8,시16:6,7,9,18:48,44:9,58:2,65:13,77:16,잠15:11,22;19,외 구약134회>

    *Strong's Hebrew 637 - 134 Occurrences ; *’ap̄ [아프]—105.Occ.(창3:1,40:16,시16:6,7,9,18:48,44:9,58:2,65:13,68:8,16,77:16,17,119:3,135:17,잠9:2,11:31,15:11,17:7,19:7,10,21:27,22:19,23:28,외),*ha·’ap̄[하아프]—6.Occ.(창18:13,23,24,욥34:17,40:8,암2:11),*wə·’ap̄[뵈아프-]—23.Occ(레위기26:39,40,42,2회,44,욥19:4,36:16,시68:18,외).

    7931 שָׁכַן 솨칸 Original Word: @k'v; shakan {shaw-kan'}기본어근; ‘숙박(宿泊)’이라는 개념으로 7901(솨카브)과(변형에 의해)유사함; 5531(씨클루트), 7925(솨캄)와 비교; ‘거주(居住)하다’, 또는 ‘영구히 머무르다’(문자적, 또는 상징적으로): -살다, 계속하다, 거주하(게 하)다, 거주자, 정착하다, 두다, 머무르(게 하다)다, 쉬다, 자리 잡다. <창3:24,14;13,출24:16,25:8,29:45,46,민14:30,욥4:19,시7:5,15:1,16:9,37;3,29,55:6,65:4,68:6,74:2,78:55,잠7:11,8:12,사18:3,26:19,외 구약128회>

    *Strong's Hebrew 7931 - 128 Occurrences ; ~생략~ *šō·ḵə·nê [쇼케네]—2.Occ.(욥4:19,사26:19), ~생략~ .

    1004 בָּ֫יִת 바이트 Original Word: tyIB' bayith {bah'-yith}아마 1129(바나) 에서 유래한 약어, ‘집’ (아주 다양한 적용에서 특히 가족(家族) 등) :- 뜰, 딸, 문, 지하 감옥, 가족, 에서(부터), 할 수 있는 대로 크게, 휘장, 본국(에서 난), 겨울】집, 안에(으로), 궁전(宮殿), 장소, 감옥, 청지기, 석판, 성전(聖殿), 직물, 안에(밖에). <창6:14,7:1,12:1,35:2,(7),출37:2,수12:16,욥4:19,시23:6,30:1,68:6,잠17:1,19:14,24:27,외 구약2,056회>

    *Strong's Hebrew 1004 - 2056 Occurrences ; ~생략~ *ḇāt·tê[밧테]—3.Occ.(레위기25:33,욥4:19,사8:14), ~생략~ .

    2563 חֹ֫מֶר 호메르 Original Word: rm,j chomer {kho'mer}2560(하마르;부풀다)에서 유래; 본래 의미는 ‘부글부글 끓어 ‘오름’, 즉 물의, ‘파도’ 땅의, ‘진흙’ ,또는 ‘흙’ 또한 ‘무더기’ 따라서 곡물계량기구, ‘호멜’: -진흙, 무더기, 호멜, 흙, 역청 <창11:3,출1:14,욥4:19,10:9,30:19,렘18:4,호3:2,외 구약33회>

    *Strong's Hebrew 2563 - 33 Occurrences ; *ba·ḥō·mer [하호메르]—1.Occ.(렘18:4), *bə·ḥō·mer [베호메르]—1.Occ. *ḵa·ḥō·mer [카호메르]—2.Occ. *ḥă·mō·wr [하모르]—1.Occ.*ḥă·mō·rā·ṯā·yim[하모라타임]—1.Occ.*ḥo·mā·rim[호마림]—3.Occ.(출8:14,2회,민11:32),*ḥō·mer[호메르]—9.Occ.*ha·ḥō·mer[하호메르]—4.Occ. *kə·ḥō·mer[케호메르]—3.Occ.*la·ḥō·mer[라호메르]—2.Occ.(창11:3,욥30:19), *mê·ḥō·mer [메호메르]—3.Occ.*ḇa·ḥō·mer[바호메르]—1.Occ.*wə·ḵa·ḥō·mer[뵈카호메르]—1.Occ. *wə·ḥō·mer [뵈호멜]—1.Occ(호3:2).

    6083 עָפָר 아파르 Original Word: rp;[; `aphar {aw-fawr'}6080(아파르)에서 유래; ‘티끌’ (‘가루가 된’, 또는 회색의);따라서 ‘흙’, ‘땅’, ‘진흙’:-재(災), 먼지, 흙, 땅, 반죽, 가루, 티끌더미 ‘Aphrah. 아프라; 1035(베트-레헴?)를 보라. <창2:7,3:14,19,2회,13:16,2회,18:27,신28:24,삼하16:13,욥4:19,17:16,42:6,시7:5,18:42,22:15,29,30:9,78:27,103:14,113:7,잠8:26,전3:20,2회,12:7,애3:29,미1:10,외 구약110회>

    *Strong's Hebrew 6083 - 110 Occurrences; *‘ā·p̄ār[아파르]—47.Occ.(창2:7,3:19,2회,13:16,18:27,26:15,시22:29,30:9,72:9,103:14,외),*‘ă·p̄ā·rāh[아파라]—3.Occ.(왕하23:6,시102:14,겔26:4),*‘ă·p̄ā·rām[아파람]—3.Occ.(왕하23:4,12,시104:29), *‘ă·p̄ā·rōw[아파로]—1.Occ.(신9:21),*‘ā·p̄ə·rō·wṯ[아페로트]—1.Occ.(잠8:26),*‘ā·p̄ār[아파르]—1.Occ.(욥38:38).*be·‘ā·p̄ār[베아파르]—6.Occ.(레위기17:13,삼하16:13,욥4:19,40:13,사2:10,애가3:29),*he·‘ā·p̄ār[헤아파르]—8.Occ.(레위기14:41,민5:17,왕상16:2,18:38,느4:2,전3:20,2회,12:7),*ka·‘ă·p̄ar[카아파르]—4.Occ.(창13:16,28:14,외), *ke·‘ā·p̄ār [케아파르]—8.Occ.(왕하13:7,욥27:16,30:19,시18:42,78:27,외),*lə·‘ā·p̄ār[레아파르]—7.Occ.(신9:25,왕하23:6,15,욥7:21,시7:5,44:25,119:25), *mê·‘ă·p̄ar [메아파르]—6.Occ.(민19;17,삼상2:8,욥5:6,28:2,시113:7,사52:2),*ū·mê·‘ā·p̄ār[우메아파르]—3.Occ.(욥8:19,외),*ū·ḇe·‘ā·p̄ār [우베아파르]—1.Occ.(욥14:8), *wa·‘ă·p̄ar [봐아파르]—1.Occ.(사49:23),*wa·‘ă·p̄ā·rāh[봐아파라]—1.Occ.*wa·‘ă·p̄ā·rām[봐아파림]—1.Occ.*wa·‘ă·p̄ā·rêḵ [봐아파레크]—1.Occ. *wə·‘ā·p̄ār [뵈아파르]—4.Occ.(창3:14,레위기14:42,신28:24,욥16:15),*wə·‘ap̄·rōṯ[뵈아파로트]—1.Occ.*wə·he·‘ā·p̄ār[뵈헤아파르]— 1.Occ.(느4:10),*wə·la·‘ă·p̄ar-[뵐라아파르-]—1.Occ(시22:15).

    *665 אֵ֫פֶר 에페르 Original Word: rp,ae 'epher {ay'-fer} ‘흐트러 뿌리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근에서 유래; ‘재’:- 재(災). <창18:27,민19:9,10,욥2:8,30:19,42:6,외 구약22회>

    *Strong's Hebrew 665 - 22 Occurrences; *bā·’ê·p̄er[바에페르]—2.Occ.(애가3:16,겔27:30),*’ê·p̄er[에페르]—8.Occ.(민19;9,10,시102:9,외),*hā·’ê·p̄er[하에페르]— 2.Occ.(욥2:8,욘3:6),*kā·’ê·p̄er[카에페르]—1.Occ.(시147:16),*lə·’ê·p̄er[레에페르]— 1.Occ.(겔28:18),*wā·’ê·p̄er[바에페르]—8.Occ(창18:27,욥30:19,42:6,외).

    3247 יְסוֹד 예쏘드 Original Word: יְסוֹד / d/sy] y@cowd {yes-ode'}3245(야싸드;세우다,기초를 두다)에서 유래;‘기초(基礎)’(문자적, 또는 상징적으로) :- 밑바닥, 기초, 수선 <출29:12,욥4:19,시137:7,외 구약20회>

    *Strong's Hebrew 3247 - 20 Occurrences ; *hay·sō·wḏ [하이쏘드]— 2.Occ.(대하23;5,시137:7),*wî·sō·wḏ[뷔쏘드]—1.Occ.(대하24:27),*wî·sō·ḏe·hā[뷔쏘데하]—1.Occ.(미1:6),*yə·sō·wḏ[예쏘드]—11.Occ.(출29;12,레위기4:7,잠10:25,외),*yə·sō·w·ḏām[예쏘담]—2.Occ.(욥4:19,22:16),*yə·sō·ḏōw[예쏘도]—1.Occ.(겔13;14),*yə·sō·w·ḏō·ṯe·hā [예쏘도테하]— 2.Occ(애가4:11,겔30:4).

    1792 דָּכָא 다카 Original Word: ak;D: daka' {daw-kaw'}기본어근(1794,‘다카,부서진’와 비교/1792,‘다카’는 부서진 ‘가루’ );‘부수러 뜨리다’ 타동사, 상처를 입히다 (문자적, 혹은 상징적으로) : -다져서 조각을 내다, (조각으로)부수다, 상처를 입히다, 죄를 깊이 뉘우치다, 으스러뜨리다, 파괴하다, 낮추다, 압박하다, 치다. Adj. <욥4:19,5:4,6:9,시72:4,89:10,94:5,143:3,잠22:22,사53:10,외 구약18회>

    *Strong's Hebrew 1792 - 18 Occurrences ; *dak·kə·’ōw[닼케오]—1.Occ.(사53:10),*dik·kā[딬카]—1.Occ.(시143:3),*ḏik·ki·ṯā[딬키타]—1.Occ.(시89:10), *ḏuk·kə·’ū[둨케우]—1.Occ.(렘44:10),*lə·ḏak·kê[레닼케]—1.Occ.(애가3:34),*mə·ḏuk·kā[메둨카]—1.Occ. *mə·ḏuk·kā·’îm[메둨카임]—1.Occ.*niḏ·kā·’îm[니드카임]—1.Occ.(사57:15),*tə·ḏak·kê[테닼케]—1.Occ.(잠22:22),*tə·ḏak·kə·’ū[테닼케우]—1.Occ.*ū·ṯə·ḏak·kə·’ū·na·nî[우테닼케우나니]—1.Occ.*wə·yid·dak·kā·’ū[뵈잇닼카우]—1.Occ.*wə·yid·dak·kə·’ū[뵈잇닼케우]—1.Occ.(욥5:4),*wî·ḏak·kê[뷔닼케]—1.Occ.(시72:4),*wî·ḏak·kə·’ê·nî[뷔닼케에니]—1.Occ.(욥6:9),*yə·ḏak·kə·’ū[예닼케우]—1.Occ.(시94:5),*yə·ḏak·kə·’ūm[예닼케움]—1.Occ.(욥4:19), *yə·ḏuk·kā [예둨카]—1.Occ(요22:9).

    1793 דַּכָּא 다카 Original Word: aK;D" dakka' {dak-kaw'}1792(다카;부서진 ‘가루’)에서 유래; ‘부수러뜨린’ (문자적으로 ‘가루’, 혹은 상징적으로 ‘죄를 깊이 뉘우치는’) :-죄를 깊이 뉘우치는, 파괴(破壞). Verb <시34:18,90:3,사57:15, 구약3회>

    *Strong's Hebrew 1793 - 3 Occurrences ; *dak·kā [닼카]—2.Occ.(시90:3,사57:15), *dak·kə·’ê-[닼케에-]—1.Occ(시34:18).

    6211 עָשׁ 아쉬 Original Word: v[; `ash {awsh}6244(아쉐쉬)에서 유래;‘좀’: -좀, 5906(아이쉬)을 보라 <욥4:19,13:28,27:18,시39:11,외 구약12회> *욥4:19,‘하루살이’로, 시39:11, ‘좀’으로 번역됨.

    *Strong's Hebrew 6211 - 12 Occurrences ; *‘āš [아쉬]—4.Occ.(욥4:19,13:28,사50:9,51:8),*ba·‘ă·śaḇ[바아사브]—1.Occ.(단4:15),*ḵā·‘āš[카아쉬]—2.Occ.(욥27:18,호5:12), *‘iś·bā [이스바]—2.Occ. *kā·‘āš [카아쉬]—1.Occ.(시39:11),*wə·‘iś·bā [뵈이스바]—2.Occ(단4:25,33).

    --------------------------------------------

    19tous de katoikountas oikias phlinas ex wn kai autoi ek tou autou phlou esmen epaisen autous shtos tropon

    [투스 데 카토이쿤타스 오이키아스 펠리나스 엨스 혼 카이 아우토이 에크 아우투 펠루 에스멘 에파이센 아우투스 세토스 트로폰]

    *[헬]3614 οἰκία, ας, ἡ 오이키아(oikia) {oy-kee'-ah}3624(오이코스;집안,집 식구)에서 유래;아마 ‘거주(居住)’ (추상적으로), 그러나 (구상적으로) 거주지(문자적 또는 상징적으로),함축적으로 ‘일가족’ (특히 가정적인)집안, 집(식구); 여성명사. abode; <마2:11,5:15,7:24,25,26,8:6,14,9:10,23,10:12,13,14,13:1,36,57,24:17,43,26:6,눅11:5,요4:53,외 신약95회>

    *Strong's Greek 3614 - 95 Occurrences ; *οἰκίᾳ [오이키아]N-DFS—35.Occ.(마5:15,7:25,27,8:6,9:10,10:13,12:25,13:57,26:6,요14:2,외),*οἰκίαν[오이키안]N-AFS—41.Occ.(마2:11,7:24,26,8:14,9:23,10:12,12:29,2회,13:36,17:25,24:43,고전16:15,고후5:1,요이1:10,외),*οἰκίας[오이키아스]N-GFS—18.Occ.(마10:14,13:1,19:29,23:14,24:17,딤전5:13,딤후3:6,외),*οἰκιῶν[오이키온]N-GFP—1.Occ(행4:34).

    *[헬]4081 πηλός, οῦ, ὁ 펠로스(pelos) {pay-los'}아마도 기본어근인 듯; ‘진흙’; 남성명사. clay, mud; <요9:6,2회,11,14,15,롬9:21, 신약6회>

    *Strong's Greek 4081 - 6 Occurrences ; *πηλὸν [펠론]N-AMS— 5.Occ.(요9:6,2회,11,14,15), *πηλοῦ [펠루~]N-GMS— 1.Occ(롬9:21).

    4597 σής, σητός, ὁ 세스(ses) {sace}기원은 히브리어인듯【5580,싸쓰;나방】;‘좀’; 중성명사. a moth;<마6:19,20,눅12:33, 신약3회>

    *Strong's Greek 4597 -3 Occurrences ; *σὴς [세스]N-NMS— 3.Occ.

    *[히]5580 סָס 싸쓰 Original Word: ss; cac {sawce}5483(쑤쓰)과 동형에서 유래; ‘나방’ (날수 있는 ‘능력’에서):-나방 cuc. 쑤쓰 5483(쑤쓰)을 보라 <사51:8, 구약1회>

    *Strong's Hebrew 5580 -1 Occurrence ; *sās [싸쓰]— 1.Occ.

    5158 τρόπος, ου, ὁ 트로포스(tropos_) {trop'-os}5157(트로페;회전,혁명)과 동일어에서 유래;‘전환’, 즉 (함축적으로) ‘분위기’, 또는 ‘양식’ (특히 전치사, 전접사와 함께), 비유적으로 ‘태도’, 또는 ‘성격’, 대화, 수단 ;남성명사. a turn; <마23:37,눅13:34;행1:11,롬3:2,빌1:18,살후2:3,3:16,딤후3:8,히13:5,유1:7,외 신약13회>

    *Strong's Greek 5158 -13 Occurrences ; *τρόπῳ[트로포]N-DMS—2.Occ.(빌1:18,살후3:16),*τρόπον[트로폰]N-AMS—10.Occ.(마23:37,살후2:3,딤후3:8,약1:7,유1:7,외),*τρόπος [트로포스]N-NMS—1.Occ(히13:5).

    =============================================

    ג תָּשֵׁב אֱנוֹשׁ, עַד-דַּכָּא ; וַתֹּאמֶר, שׁוּבוּ בְנֵי-אָדָם. 3

    *로마자 음역; 3 ta·shev e·no·vsh ad-dak·ka vat·to·mer shu·vu ve·nei-a·dam.

    [타쉐브 에노쉬 아드-닼카 ; 봣토메르, 슈부 베네(이)-아담]

    Ps90:3 You turn man back into dust and say, Return, O sons of men.

    [시] 90:3 주께서 사람(히,582에노쉬/헬,444안드로폰)을 티끌(히,1793닼카/헬,5014타페이노시스)로 돌아가게 하시고(히,7725타쉐브/헬,3361메 654아포스트렢세스)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히,1121베네(이)-120아담/헬,444안드로폰~)은 돌아가라(히,7725슈부/헬,1994에피스트렢사테) 하셨사오니

    [개역개정] 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7725 [타쉐브] tā-šêḇ תָּשֵׁ֣ב turn Verb 582 [에노쉬] ’ĕ-nō-wōš אֱ֭נוֹשׁ man Noun 5704 [아드-] ‘aḏ- עַד־ to Prep 1793 [닼카] dak-kā; דַּכָּ֑א destruction Adj 559 [봣토메르] wat-tō-mer, וַ֝תֹּ֗אמֶר and say Verb 7725 [슈부] šū-ḇū שׁ֣וּבוּ Return you Verb 1121 [베네(이)-] ḇə-nê- בְנֵי־ children Noun 120 [아담] ’ā-ḏām. אָדָֽם׃ of men Noun

    582 אֱנוֹשׁ 에노쉬 Original Word: vwOna> 'enowsh {en-oshe'} 605(아나쉬)에서 유래; 아마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보다 고귀한 120(아담)과는 다름); 따라서 일반적으로 ‘사람’ (개별적으로 집단적으로) :- (또)다른, 피에 굶주린, 어떤, 녀석, 각색의, 동료, 한창 때에, 남편, (어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 백성, 그 무리, 종, 몇 사람(그들 중), 낯선 사람, 그(것) 들, +그 무리 376(이쉬)과 비교. <창3:6,4:23,6:9,34:20,룻4;2,시8:4,90:3,104:15,잠28:5,29:10,전9:14,사8:1,외 구약222회>

    *Strong's Hebrew 582 - 222 Occurrences ; ~생략~ *’ĕ·nō·wōš[에노쉬]—26.Occ.(대하14:11,시8:4,9;20,55;13,56;1,66;12,73:5,90:3,104:15,2회,외), ~생략~.

    1793 דַּכָּא 다카 Original Word: aK;D" dakka' {dak-kaw'}1792(다카;부서진 ‘가루’)에서 유래; ‘부수러뜨린’ (문자적으로 ‘가루’, 혹은 상징적으로 ‘죄를 깊이 뉘우치는’) :-죄를 깊이 뉘우치는, 파괴(破壞). Verb <시34:18,90:3,사57:15, 구약3회>

    *Strong's Hebrew 1793 - 3 Occurrences ; *dak·kā [닼카]—2.Occ.(시90:3,사57:15), *dak·kə·’ê-[닼케에-]—1.Occ(시34:18).

    ................................................................................

    Psalm 90:3 Greek OT: Septuagint with Diacritics

    3. μὴ ἀποστρέψῃς ἄνθρωπον εἰς ταπείνωσιν καὶ εἶπας ἐπιστρέψατε

    υἱοὶ ἀνθρώπων

    [메 아포스트렢세스 안드로폰 에이스 타페이노신 카이 에이파스 에피스트렢사테 휘오이 안드로폰]




    전설에 의하면 교황 인노센트 4세토마스 아퀴나스가 교 황청의 발코니에 있었을 때였다.
    교황은 13세기에 교황권 을 크게 휘두른 사람이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의 대신학자였다.
    그 때 마침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 시로 돈주머니가  수송되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것을 본 교황은 "저기 봐요.
    이제는 `금과 은은 내게 없노라'고 교회가 말하던 그런 시대는 지나갔소."
    그러자 아퀴나스가 이를 받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앉은뱅이더러 `일 어나 걸으라'고 교회가 말할 수 있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교회의 낱말 뜻 / 성구

    1. 히브리어

    헤칼 - 성전, 전, 성소, 신당, 전각, 궁, 왕궁.

    미크다쉬 - 성소, 성물, 거룩한 장소, 성당, 신전,

    사원, 교회;예루살렘의 성전.

    미쉬칸 - 장막, 성막, 회막, 집, 성소, 거처, 처소.

    코데쉬 - 신의, 거룩함, 청결함, 신성함, 성소, 성당,

    신전, 지성소.

    2. 헬라어

    에클레시아 - 불러내다, 교회.

    * 교회에 대한 성구 *

    *교회의 비유 명칭

    엡4:12 - 그리스도의 몸 히12:23 - 장자의 총회

    엡5:22-31 - 그리스도의 신부

    딤전3:15 - 살아있는 하나님의 교회

    행20:28 -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

    히12:22 - 하나님의 도성 고전3:9 - 하나님의 집

    벧전2:5 - 하나님의 신령한 집

    엡2:22 -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

    히12:22-23 - 시온산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행20:28 - 피로 값주고 사심 엡5:26 - 거룩하게 하심

    2:19-20 - 모퉁이 돌이 되심

    마16:16 - 교회를 세우심 엡5:25 - 사랑하심

    엡5:29 - 교회를 봉양하심

    *교회의 임무(사명)

    행11:22 -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

    행11:26 -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일

    행14:23 - 교회의 일군을 세우는 일

    마28:18-20 -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

    딤후2:1-2 - 진리를 수호하는 것

    엡4:11-15 - 성도를 교육하여 성장케 하는 것


    두 손이 없는 소금 장수

    해마다 명절이 되면 충남 서산 일대에 사는 독거노인들 집 수십 채 앞에는 맑은 천일염 30킬로그램들이 포대가 놓여 있곤 했습니다.

    13년째입니다. 아무도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난 해에 ‘범인’이 잡혔습니다.

    “나 혼자 여러 해 동안 소금을 나르다 보니 힘이 들어서...” 읍사무소에 맡기겠다고 소금을 트럭에 싣고 그가 자수했습니다.

    강경환(56) 충남 서산 대산읍 영탑리에서 '부성염전'이라는 소금밭을 짓는 소금장수입니다.

    그런데 보니 그는 두 손이 없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손 없이 염전을..?

    또 서류를 살펴보니 그는 7년 전까지 그 자신이 기초생활수급자였던 빈한한 사람이 아닙니까?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 사내가 남을 돕는다?

    소금장수 강경환은 사건이 발생한
    연월일시를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1972년 12월 24일 오전 9시 40분.
    1959년생인 강경환이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을 맞은 6학년, 나이는 13세였습니다.

    서산 벌말에 살던 강경환은 해변에서
    ‘안티푸라민 통을 닮은 깡통을 발견했습니다.

    나비처럼 생긴 철사가 있길래
    그걸 떼내 가지고 놀겠다는 생각에
    돌로 깡통을 두드려댔습니다.
    순간 앞이 번쩍하더니 참혹한 현실이 펼쳐졌습니다!
    안티푸라민이 아니라 전쟁 때 묻어놓은 대인지뢰, 속칭 발목지뢰였습니다.

    폭발음에 놀란 마을 사람들이 집으로
    달려와 경환을 업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사흘 뒤 깨어나 보니 손목 아래 두 손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노래를 잘 해서 가수가 꿈이었던 소년의 인생이 엉망진창이 된 것은...
    피를 너무 흘려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소년이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남 보기가 부끄러워서” 중학교는 가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 뒤로 3년 동안 경환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어머니가 밥 먹여주고, 소변 뉘어주며 살았다고 했습니다. 소년은 고등학교 갈 나이가 되도록 그리 살았습니다.

    인생을 포기했습니다.
    “어느날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어머니가 친정에 가셨는데, 오시질 않는 겁니다.
    배는 고프지… 결국 내가 수저질을 해서 밥을 먹었어요.”
    3년만이었습니다. 석달 동안 숟가락질 연습해서 그 뒤로 스스로 밥을 먹었습니다.

    스스로 밥을 먹고 스스로 혁대를 차게 되었다고 해서 인생이 완전히 바뀐 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게 귀찮아서 농약 먹고 죽으려고도 했습니다. '열일곱 살 때부터 주막에 출근했다.' 고 합니다.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에 퇴근했어요. 주막에 친구들이 많이 있으니까, 술로 살았죠.”

    어느 날 유인물이 하나 왔길래 무심코 버렸다가 아침에 유인물을 보니까 "정근자씨라고, 팔 둘이랑 다리 하나가 없는 사람이 교회에서 간증을 한다는 거예요. 가서 들었죠."

    "야, 저런 사람도 사는데, 나는 그 반도 아닌데... 이 사람같이 못 살라는 법 없지 않나.”
    강경환은 편지를 썼습니다.
    “나도 당신처럼 잘 살 수 있을까요?” 답장이 왔습니다.
    "나처럼 잘 살 수 있다."고...

    아주아주 훗날이 된 지금 강경환은 이렇게 말합니다...

    “손이 있었다면 그 손으로 나쁜 짓을 하고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손이 없는 대신에 사랑을 알게 되고, 마음의 변화를 갖게 되고, 새롭게 살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
    강경환은 훌륭하게 그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술을 끊고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삽질을 익히고, 오른쪽 손목에 낫을 테이프로 감고서 낫질을 하며 아버지 농사일을 도왔습니다. 지독히 가난한 집이였습니다.

    1994년, 아버지 친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 염전 할 수 있겠냐?"

    그 때는 이미 1987년 교회에서 사랑을 만나 결혼한 가장이었습니다.

    피눈물 나는 삶이 시작됐습니다.
    농사짓는 삽보다 훨씬 무겁고 큰 삽을 손 몽둥이’로 놀리는 방법을 익히면서 일을 해야했습니다.

    정상인만큼 일하기 위해 밤 9시까지 염전에 물을 대고, 새벽까지 소금을 펐습니다.
    하루 2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했지만
    보람으로 일을 했습니다.
    '노력도 노력이지만, 인내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1996년 그 와중에 그의 머리 속에 남을 돕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으니..
    손을 잃은 대신에 얻은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금 한 포대가 1만원 가량 하는데,
    여기에서 1000원을 떼서 모았죠.
    그걸로 소금을 저보다 불행한 사람들에게 주는 겁니다.”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올해까지 14년째입니다.
    한달 월급 받고선 고된 일 마다하고 도망가 버리는 사람들 대신에 부부가 직접 염전을 지으며 실천하고 있는 일입니다.

    아산의 한 복지단체를 통해 소록도에
    김장용 소금을 30포대씩 보내는 것도 빠뜨지지 않습니다.

    강경환! 그는 말합니다.
    “조금만 마음을 가지면 되는 겁디다.
    소금 한 포대 팔아서 1000원 떼면,
    5000포대면 500만원이잖아요.
    하나를 주면 그게 두 개가 되서 돌아오고, 그 두 개를 나누면 그게 네 개가 되어서 또 나눠져요. 연결에 연결, 그게 사는 원리지요...”

    그 나눔과 연결의 원리에 충실한 결과, 2001년 그는 기초생활수급자 꼬리표를 뗐습니다. 작지만 아파트도 하나 장만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시청으로 가서 자발적으로 기초생활수급자 신분을 포기했습니다.
    수급자 수당 30만원이 날아갔습니다.
    장애인 수당도 포기했습니다. 6만원이 또 날아갔습니다.

    “나는 살 수 있는 길이 어느 정도 닦아졌으니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 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어렵습니다.

    염전도 남의 염전을 소작하고 있고,
    여고생인 둘째딸 학비도 아직은 버겁습니다.
    손을 내밀라고, 보이지 않는 사랑의 손을 내밀라고 작년에는 ‘밀알’이라는 자선단체를 만들었습니다..

    혼자서 하기에는 버거운 일!
    "그래서 마음 맞는 사람들을 모아서
    불우한 사람들을 더 도우려구요.
    한 30억원 정도 모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마음놓고 남을 도울 수 있잖아요. 지금은 형편이 이래서 돕고싶어도 어렵고….”

    오늘도 부부가 소금밭에 나가서 소금을 거두는데, 손 없는 남편이 능숙하고 진지한 몸짓으로 소금을 모으면 아내는 얌전하게 삽으로 밀대에 소금을 담고, 남편이 그 밀대를 ‘손몽둥이’로 밀어
    소금창고로 가져갑니다.

    그 모습은 실로 장엄(莊嚴)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아름다운 마음'을 확실히 보았습니다.

    당신같은 분과 이 지구상에서 함께 호홉하고 있음에 행복합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자주 인용했던 '철새 이야기'

    ​겨울 찬바람을 피해 남으로 가던 철새 떼들이 첫날밤 어느 농부의 밭에 내려 앉아 옥수수를 마음껏 먹고 있었습니다.
    배부르게 먹은 후 떠날 채비를 하는데, 그 중 한 마리가 한사코 하루만 더 쉬었다가 가겠다고 했습니다.
    맛있는 옥수수를 두고 떠나기가 아쉽기는 동료 새들도 마찬가지였으나 갈 길이 바빠 미련을 둘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 한 마리만 남고 모두 날아갔습니다.
    남아 있는 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옥수수를 두고 떠나다니.. 하루만 더 쉬었다 내일 남쪽으로 가야지.'
    그러나 그 다음 날도 떠나기로 했던 마음이 다시 변하였습니다.
    지천에 깔린 많은 양식을 놓고 떠나기가 섭섭해서, 피곤해서, 포만감에 사로잡혀서 또 하루를 보내고 미루다보니....
    어느새 날씨가 추워져 동사 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제야 방심한 철새는 황급히 길을 떠나려고 있는 힘을 다해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너무 많이 먹어 뚱뚱해져 날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 새는 날아가지 못하고 눈 속에 묻혀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다음 날 하고 미루면서 '하루쯤 어쩌랴!' 하는 안일한 태도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평소 즐겨 인용하던 철새 이야기로...,
    그는 '오늘 더 편히 쉬려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밝은 내일은 다가오지 않는다.'는 삶의 진리를 일깨워 주기 위해 사람들에게 전해 주곤 했습니다.

    오늘을 편히 보내려는 본능에 얽매여 할 일을 뒤로 미루는 우를 범하곤 합니다.
    그러다보니 더 안좋은 내일을 살아가며 지난 날에 대해 후회를 하곤합니다.
    이는 지금 당장의 편안함에 안주하려는 나쁜 습성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오늘 할 일들에 대해 미리 계획을 세우고, 노력을 다하는 바른 습관과 실천력이 필요 할 때입니다 .




    7월 4일(금) 시편 84-88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궁정(84: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My soul yearns, even faints, for the courts of the LORD; my heart and my flesh cry out for the living God.


    내 영혼 - '영혼'(* , 네페쉬)이란 영혼, 산 것, 생명, 자아, 인간, 욕구, 감정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는 말로서 이 단어 자체만으로 인간을 가리킬 수 있으나 본문에서는 하반절의 '내 마음과 육체'란 말과 함께 인간의 전존재를 암시하는 의미로쓰여졌다 할 수 있다(VanGemeren, Anderson).
    여호와의 궁정(宮庭)을 사모하여 - '궁정'이란 히브리어로 '하초체르'(* )로서 '마당', '뜰'을 의미하는데, 성경에서는 많은 곳에서 '뜰'로 번역되었다(65:4;출27:9, 12, 13, 17;40:8, 33;대상 23:28;28:12).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성전(또는 성막)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저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대한 경외심이 가득한 나머지 하나님의 성전 뜰에 이르러 그분을 경배하고 경외코자 소원하고 있다.순례자들은 성전을 방문할 때 성전 뜰에서 거하였다 한다(65:4, Anderson).
    내 마음 - '마음'(* ,레브)이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약 850번 나타나는데 이는 인간의 지적이며(83:5), 의지적인(141:4) 측면에 강조점이 두어진 인격의 좌소(seat) 또는 인간의 전인격을(27:3;77:6;102:4, Anderson)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본문에서는 전문(前文)의 '내 영혼'과 후문(後文)의 '육체'란 말과 함께 인간의 전존재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육체(* , 바사르) - '바사르'(* 신선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살', '몸'등을 뜻한다. 이는 사람과 동물들이 만들어지게 된 육체적인 질료(물질)를 뜻하기도 하며(창 40:19) 인간의 몸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이나(79:2;109:24), 인간 또는 인류를지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된다(136:25;145:21;창 6:12;사 40:5).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 '죄악'의 히브리어 '아온'(* )은'아와' (* , 구부리다, 왜곡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악', '사악함' 등을 뜻하는데,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그릇되게 행동한 불의들을 가리킨다(the iniquity,KJV,RSV).한편'사하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나사'(* )로서 '들어올리다', '받아들아다' , '감당(담당)하다' (출 28:38;레 10:17;민 18:1,23;30:15) 등의 뜻을 갖는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속죄 제물의 희생에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감당하신다는 뜻으로서 곧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의미이다.
    덮으셨나이다(* , 카사) - 이는 '(눈을 해치는 것을) 덮는다'는 뜻을 내포하는 말이다(Kissane).이로 볼 때 본문은 하나님께서 당신외 희생 제물의 구속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당신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온전히 가리우시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한편,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에 의해 죄 를 온전히 제거하시사 기억조차 아니하시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히 9:12 ;10 :11-18).

    여호와의 궁정(the courts of the LORD)

    시편기자가 사모하고 있는 '주의 장막', '여호와의 궁정', '주의 집', '주의 제단'은 성막(Tabernacle)입니다.
    이 성막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여 짓게 한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은 이 성막에 내가 머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동안 이 성막을 중심하고 생활하였습니다.
    성막이 이동하면 함께 이동하고 성막이 멈추면 함께 멈추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해서도 오랫동안 이 성막을 중심으로 생활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만났습니다.
    그래서 성막을 가리켜 만남의 장소라고 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제사를 드리고 자신들의 허물과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의 전을 사모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막은 사람들의 집회장소가 아닙니다.
    특별한 처소였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었습니다. 이 성막이 성전으로 이어집니다.

    솔로몬은 모리아 산에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역대하 3장 1절에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고 했습니다.
    성전이 완성되고 여호와의 언약궤가 지성소로 운반되었을 때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성전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낙이었습니다. 성전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발전되어 갔습니다.

    이사야 56장 7절에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2장 6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성전은 이 세상의 돌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건축된다는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장 19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58절에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자들의 마음속에 세울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0-21절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라고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계시록 21장 22절에서는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전휘장이 찢어졌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0-51절에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에 약속대로 보혜사 성령이 강림하였습니다.
    성령강림과 함께 사도들에 의해 신약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 23절에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2절에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8절에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는 성전에 대한 최고의 평가입니다.
    여기 다른 곳이란 주의 궁정을 제외한 모든 곳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의 첫째 의미는 주의 궁정 외에는 모든 것이 가치론적으로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둘째 의미는 주의 궁정의 유일무이한 독보적 가치를 말합니다.

    Ⅰ. 성전을 사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 교회(주의 집)를 통해서만 참된 평화를 얻기 때문입니다.
    본문 84편 3절에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짐승도 주의 은혜 가운데 평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들도 주의 장막 안에서만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두 처소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가정입니다. 가정은 우리의 육신의 평안을 누리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정을 귀하게 여깁니다.

    나를 받아 주는 곳도 가정입니다. 내 집이 없으면 세상을 방황하게 됩니다. 내 집이 없으면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내 집이 없으면 떠돌이가 되어 정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주 안에서 가정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이 가정만으로 우리 인간은 참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참 평안은 영혼의 평안입니다. 따라서 참 평안은 바로 교회를 통하여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요 14:7).

    어거스틴(Augustine)은 말하기를 "인간은 주의 품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결코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평안을 누리는 곳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벗기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걱정의 짐, 죄악의 짐, 물질의 짐, 고통의 짐을 벗는 곳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수고로운 짐을 맡아주는 곳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짐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참 사랑이 있는 곳에 우리의 짐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2) 교회(주의 집)에 거하는 자마다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84편 4절에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수종들었던 고라의 자손들이 참예했던 문지기를 뜻합니다. 역대상 23장 5절에 『사천은 문지기요 사천은 다윗의 찬송하기 위하여 지은 악기로 여호와를 찬송하는 자라』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는 모든 특권자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 『복이 있다』에서 복은 문법상 복수적 의미로 행복하고 충만하다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봉사하는 직분자들은 이미 복 받은 자들이요 행복한 자들입니다.

    Ⅱ. 성전을 어떻게 사모해야 합니까?

    1.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84편 2절에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모한다』는 말은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그리워하며 함께 있고 싶은 열망을 의미합니다. 가슴이 타고 얼굴이 창백할 정도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징입니다. 그렇다면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나의 속을 털어놓는 것입니다. 오늘 세상에 우리의 마음을 내어놓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할 곳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교회 생활 잘하는 사람은 항상 기도의 줄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늘 간구하는 성도는 영적으로 병들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이 세상의 불의한 자리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성경에 다윗은 늘 주의 장막에서 자신의 답답한 사정을 주님께 말씀드리고 상의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수치나 멸시밖에 될 수 없는 일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답답한 것을 해결하여 주시고, 채워주시고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2. 주의 전을 최우선 추구해야 합니다.
    본문 84편 2절에서 여호와의 전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영혼이 쇠약할 때까지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아버지의 집을 사모하고 사랑했습니다. 사랑하는 자가 여호와의 집에 머무를 수가 있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사랑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단체입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사랑이 넘칠 때 교회는 많은 영혼들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이슬람교 교도들은 죽을 때 사람의 시체를 세워서 묻는데 그 얼굴을 성지 곧 메카쪽으로 향하게 해서 묻는다고 합니다. 이교도의 풍습도 이 정도입니다.
    우리도 날마다 주의 전을 향하여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니엘은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하루 세 번씩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교회는 어머니의 품이라고 칼빈은 말했습니다.
    어머니 품처럼 우리는 교회를 그리워하고 가까이 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자가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3. 주의 전에서 충성해야 합니다.
    본문 84편 4절에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것은 충성을 의미합니다. 주의 집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충성이 아닙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곧 교회에 뿌리를 내리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교회운동에 충성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자기 자리를 굳게 해야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의 깊은 곳에서 충성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증거입니다. 교회 사랑의 증거는 충성입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84편 10절에 주의 전 곧 교회가 얼마나 좋았던지 주의 궁전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를 위해 충성하고 싶은 열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여 우리의 생명까지 바쳐 충성하는 곳입니다.
    성도들이 축복 받은 다음에 시험에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주의 성전을 멀리하고 교회의 일을 경홀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딘가에 매여야 되는데 하나님의 일에 매이지 아니하면 마귀의 일에 매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주의 교회를 멀리하면 안 됩니다.

    Ⅲ. 성전을 사모한 결과론적 가치가 무엇 입니까? 

    1. 복이 있다 
    본문 84편 4절에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라고 했습니다.

    2. 힘을 얻는다
    본문 84편 5절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편 18편 1-2절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고유명사들은 주의 교회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3. 기쁨의 샘을 주신다
    본문 84편 6절에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라고 했습니다.

    4. 비의 은택을 주신다 
    본문 84편 6절에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5. 힘 위에 힘을 얻는다 
    본문 84편 7절에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힘으로부터 힘을 얻는다는 말인데 타계에서 오는 계속되는 힘의 공급을 말합니다.

    6. 기도에 응답하신다 
    본문 84편 8절에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라고 했습니다.

    7. 방패가 되신다
    본문 84편 9절에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라고 했습니다.

    8. 해와 방패가 되신다
    본문 84편 11절 상반절에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라고 했습니다.

    9. 좋은 것을 아낌없이 주신다
    본문 84편 11절 하반절에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좋은 것』은 구원입니다. 구원은 최후의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최고로 성공한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증거는 보은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들이 진정 사모해야 할 대상은 교회입니다.
    주의 전을 제일로 여기고 교회운동이 나의 목적이 되고 수단으로서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자에게 주님은 하늘의 신령한 것과 땅의 기름진 것으로 그와 그 자손에게 주십니다.
    우리가 섬기는 갈보리교회는 주님이 자기 피 값을 지불하고 세우신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주의 궁전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한 시편 기자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중국 고전 <서경>에 나오는 오복 즉 다섯가지 복을 알고 있습니다. 

    수(壽) : 오래 사는 것, 
    부(富) : 부유하게 사는 것,
    강녕(康寧) : 건강하게 사는 것, 
    유호덕(攸好德) : 덕을 좋아하고 베푸는 것,
    고종명(考終命) :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러나, 남자들에게는 세 가지가 있어야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한답니다. 

    아내가 있어야 하고, 마누라가 있어야 하고, 집사람이 있어야 한답니다. 

    성경에서는 무엇이 복인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12:1)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144:15)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 16:2)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33:12)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다”(4절)고 했습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다”(5절) 했습니다.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12절)라고 했습니다. 
    적어도 시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우리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돈이 없어도, 건강이 없어도, 오래 살지 못해도, 친구가 없어도 
    주의 집에 사는 자들 즉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2. 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복입니까?

    11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하나님은 해”입니다. 태양에서 나오는 빛은 생명을 유지, 성장시켜줍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붙드시는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오늘도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해가 없으면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듯이, 우리는 하나님 없이 결코 살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이십니다. 우리를 보호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와 영화를 주십니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 다시 말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넉넉히 공급해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3. 시편 기자는 1-2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주의 장막”, “여호와의 궁정”은 하나님이 계신 곳, 성전입니다. 
    성전을 사랑하고, 그 성전에 올라가기를 그렇게 사모하였습니다. 
    상사병이 나서 쇠약할 정도로 성전에 올라가기를 사모하였습니다. 
    성전에서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10절에서는 이렇게까지 고백합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은 바로 주일을 말합니다. 주일 하루 하나님의 성전에서 보내는 것이 세상에서 천 날을 보내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복 있는 삶입니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주일 하루를 온전히 주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 복 있는 삶입니다.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는 것, 즉 주일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 이것이 복 있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새해는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는 복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성별하다, 즉 따로 떼어놓는다”는 뜻입니다. 
    주일을 따로 떼어놓으십시오. 평일에서 구별하여 떼어놓으십시오. 

    장로교를 창시한 칼빈 선생은 주일의 핵심적인 의미를 세 가지로 압축했습니다.

    1. 영적인 휴식을 맛보는 것
    - 영적인 휴식이란,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 누리는 영혼의 즐거움, 평안을 말합니다. 

    2. 경건의 훈련을 쌓는 것
    - 경건의 훈련이란, 섬김과 봉사와 구제를 말합니다. 

    3. 쉼(휴식. 안식)
    - 육체의 노동에서의 쉬는 것입니다. 
    평일의 일을 멈추고 쉬는 것입니다. 

    우리 장로교 신앙고백의 뿌리가 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는 주일을 이렇게 지켜야 한다고 잘 안내하고 있습니다. 

    “이 날을 신자는 마음으로 잘 준비하고, 미리 모든 일을 정돈해서, 주님께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이 날에는 하루 종일 모든 일이나 말이나 생각에서 떠나서 거룩하게 쉬며, 이 세상의 고용주나 오락에서도 떠나 쉬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쓰며, 필요한 의무에나 자비를 베푸는 일에 바칠 것이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이것입니다. 

    첫째, 주일을 미리 마음으로 잘 준비하여야 합니다. 
    둘째, 하루 종일 세상의 일을 하지 말고, 생각하지도 말 것입니다. 
    셋째, 오직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자비와 섬김의 일을 하는 날입니다. 

    달력을 보면, 주일은 빨간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교통 신호등에서 빨간색은 멈춰 서라(stop)는 싸인입니다. 
    주일은 일단 멈추어 서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날입니다. 
    고속도로에 휴게소가 있습니다. 두 시간쯤 달리면 휴게소에서 쉬어야 합니다. 
    주일은 휴게소와 같습니다. 6일간 열심히 달리다가 쉬는 날입니다. 
    예배드림으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찬양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날입니다. 

    메가스터디 엠베스트 김성오 대표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온라인 학원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분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래 마산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분입니다. 
    대학 졸업 후 600만원 빚을 내서 4.5평 가게를 얻어 약국을 개업합니다. 
    그로부터 1년 후 빚을 다 갚고, 10년 만에 200배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성공했는지 그 비결이 그가 쓴 <육일약국 갑시다> 라는 책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있는데, 친절과 주일성수입니다. 

    약국의 이름부터 육일만 문을 열어서 ‘육일 약국’입니다. 
    그분은 시골교회의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대학도 고학을 하면서 다녔습니다. 유산 물려받을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에게서 주일성수의 신앙을 물려받았습니다. 
    손해를 각오하고 주일성수를 철저히 했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를 축복하신 겁니다. 
    올해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이 주일을 따로 떼어놓고 잘 지킴으로 육일약국처럼 복 받는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4. 오늘 본문을 보면, 시인은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는데” 시인은 주님의 제단에 나오지 못하는 안타까운 처지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시인은 주의 집에 올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5절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합니다. 성전에 올라가지 못하는 형편에서도 주님께 힘을 얻어 그 마음이 시온을 향하여 열려있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 시온을 올라가고자 하는 데 “눈물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눈물 골짜기에 많은 샘을 주실 것입니다. 
    이른 비를 내려 사막에 오아시스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는데 많은 장애가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힘을 얻어 하나님의 은혜로 결국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7절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주일을 지키는 데 어려움을 겪는 교우들이 많습니다. 
    주일에 일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주일에 자격시험을 봐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주일에 학교에 공부하러 나가야 하는 고등학생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궁정을 사모하여 마음에 하나님의 집을 향하는 대로가 열린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또 얻어 반드시 주일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는 사람, 
    주일 성수하는 사람, 
    그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주일 성수의 복, 우리 모두의 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7월 3일(목) 시편 79-83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온 세계의 지존자(83:18)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Let them know that you, whose name is the LORD-- that you alone are the Most High over all the earth.

    온 세계의 지존자( the Most High over all the earth)


    󰃨 여호와라 이름하신...알게 하소서 - '여호와'와 '지존자'에 대해서는 각각 80:4;78:17 주석을 참조하라. 본문은 이방 대적들로 하여금 이스라엘과 언약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온 세계의 지존자 ,즉 온 세계를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절대자, 최고의 권위(권세)자이심을 알게 해주십사 하는 기도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주의 원수'(2절)로 하여금 자신들의 침략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고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부복(俯伏)하게 해 달라는 뜻까지 함축하고 있다.


    지존자(至尊者) / 이를 지, 높을 존, 놈 자
     - 다른 사람이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

    엘욘(5945)  [ ʽelyôwn ]   עֶלְיוֹן     

    1. 높은.  2. 지고의
    발음 [ ʽelyôwn ]
    어원 / 592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3회 사용
    • 1.  형용사, 남성 높은, 더 높은, 창40:17, 왕상9:8, 왕하18:17, 겔42:5
    • 2. 형용사, 남성 지고의, 가장 높은[하나님께 사용], 창14:18, 시7:18(17), 9:3(2), 21:8(7),57:3(2).
    • 문법설명  /   여성형 עֶלְיוֹנָה
      관련 성경 /  지극히 높으신(창 14:18, 민 24:16, 시 7:17, 21:7, 57:2, 애 3:35), 위의(창 40:17, 느 3:25, 사 36:2, 겔 42:5),
      뛰어난(신 26:19), 지존하신(시 78:35), 높은(왕상 9:8, 대하 7:21).
      [명] 지존자(시 77:10, 89:27, 92:1, 107:11), 지존하신 이(삼하 22:14, 시 18:13).
    עָלָה 스트롱번호 5927

    1. 올라가다.   2. 사 14:14.  3. 출 24:13
    발음 [ ʽâlâh ]
    구약 성경  /  890회 사용



    * 지존자
    1. 거짓이 없는 존재(삼상 15:29)
    2. 뜻을 바꾸지 않는 존재(삼상 15:29)
    3. 시온을 세우실 존재(시 87:5)




    사무엘상 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새번역) 이스라엘의 영광이신 하나님은 거짓말도 안 하시거니와, 뜻을 바꾸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뜻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변함이 없으신 분.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더.

    시편 77:10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시편 78:17
    저희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황야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시편 82: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시편 83:18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시편 87:5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나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리로다.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 지존자에 대해서는 78:17, 35 주석을 참조하라.
    본문은 절대적인 권위와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시온을 세우리라는 뜻으로서 곧 하나님께서 그곳 시온 백성들을 돌보시며 나아가서 3절에 암시된 바와 같이 영광스럽게 하실 것임을 나타낸다.
    특히 본절에서 시인을 시온을 신실한 자들의 모성(母城)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여기서 이 성은 지상의 시온을 넘어 성도들의 궁극적 처소가 되는 하나님의 도성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사 49:20-21, 54:1-2,  65:18-24; 슥 8:2-13; 갈 4:26 등 참조). 

    그곳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성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6절 ; 69:28; 출 32:32; 단 12:1; 말 3:16, VanGemeren).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 '지존자'란 히브리어로 '옐룐'(*)으로서 직역하면 '가장 높은'의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로서 그분이 모든 존재보다 뛰어나시고 탁월하게 거하심을 가리키며, 특히 대적에 대해서는 그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으시는 초월적 능력자로서, 당신의 백성들에 대해서는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는 분으로서 거하심을 나타낸다.
    이는 다른 곳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자'(9:2; 21:7; 46:4; 73:11; 민 24:16; 신 32:8; 사 14:14)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한편 본문의 '배반하였도다'의 '마라'(*, 쓰다, 반역하다)는 8절의 '패역하여'란 말과 같다.
    결국 본문은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반역하여 거스르었다는 뜻이다.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
    - '지존하신 하나님'(*, 엘 엘룐)이란 하나님의 복합 고유 이름이며, 같은 유형으로 '엘 로이'(*, 감찰하시는 하나님, 창 16:13). '엘 솨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창 17:1) 등이 있다.
    이는 창 14:18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한편 '구속자'의 히브리어 '가알'(*)은 '무르다', '무르는 자', '복수자' 등의 뜻이 있다.
    이는 원래 히브리인 사회에서 어떤 가난한 사람이 종으로 팔리거나 그의 토지가 다른 사람에게 팔렸을 경우, 그를 대신해서 그 종된 자나 토지를 다시 되돌려 속해 주는 친척을 가리킨다(레 25:25, 48, 49).
    이 말은 또한 다른 사람에 의해 고의적으로 피살된 친척을 대신 복수해 주는 자를 가리키기도 한다(민 35:19, 24, 25).
    만약 이 말이 하나님에게 적용될 경우, 이는 당신의 백성들을 압박자로부터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뜻한다(19:14;잠 23:11).
    본문의 경우는 제일 후자에 해당한다.



    시편 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시편 91:9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지존자의 거처는 피난처

    시편 92:1-3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시편 107: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시 83편은 아삽의 시로 되어 있습니다(다윗 시대의 악사).
    시편은 총 5권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 제3권 시작이 시 73편이고 오늘 본문 83편까지는 아삽의 시, 마스길로 되어 있습니다.
    시 83편 기자, 아삽이 삶 속에서 만나고 경험하고 찬양하는 하나님은 지존자(至尊者)이신 하나님이십니다(시 18:13, 91:1, 107:11 등).
    온 세계의 至尊者(the Most High)
    지존자라는 단어를 표.새.개.에서는 <홀로 가장 높은 분>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시 83편은 한편의 기도라고도 할 수 있는데, 시편 기자가 지존자이신 하나님을 찾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세상에서 보게 되는 악인들, 악한 세력들 때문입니다.
    본문 2절에서는, <주의 원수들>,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그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도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데, 악의 세력이 활개치고 판을 칠 때, 세상사람들은, 특히 의인들은 그들로 인해서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시편 기자 당시에도 이렇게 악이 성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습니다. 참고 있다가, 인내하고 있다가 마침내 터진 겁니다. 그런데 단지 감정적으로 폭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악인들, 악한 세력들에 대한 심판을 간구하면서, 그런 중에 마침내 지존자이신 하나님을 찾게 된 겁니다. 기도 같은 찬양, 찬양 같은 기도 속에서 시편 기자가 과연 악인들, 악한 세력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는지, 함께 묵상해보고 적용해봅시다.

     

    1절부터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침묵하지 마소서... 잠잠하지 마소서... 조용하지 마소서... 다 같은 표현인데, 강조하는 것입니다. 지금 악인들이 판치고 있는데, 악한 세력들이 주의 나라, 택한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는데 어찌 보고만 계시냐는 것입니다.

    2절 이후부터, 그들의 실상을 낱낱이 공개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는, 그들이 주의 백성을 치려 하여 간계를 꾀한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숨기신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을 멸하여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4절) 그들이 과연 누구인지, 6절 이후에서 구체적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에돔의 장막, 이스마엘인, 모압과 하갈인... 그발과 암몬과 아말렉, 블레셋과 두로 사람... 앗수르... 지명들을 보면, 대부분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나라들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면, 때로 이스라엘을 대적하기도 침략하기도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하기도 한 나라들입니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시편 기자 당시에도 이런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악을 행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이 적극 개입하셔서 심판해달라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덮어놓고 심판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이스라엘 역사를 회고하면서 과거에 하나님이 악인들, 악한 세력들에 대해서 심판하신 것처럼 그렇게 해달라고 강력 요청하고 있습니다. 9절 <주는 미디안인에게 행하신 것 같이,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소서> 시편 기자는 2가지 역사적인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사사시대 때 기드온이 이스라엘을 압제한 미디안 군대를 대파한 사실(삿 6-7장, 기드온 300명 용사)... 그리고 드보라와 바락이 가나안 하솔 왕 야빈과 군대 장관 시스라를 진멸한 사실(삿 4장)... 그들은 엔돌에서 패망했다고 했습니다(10절). 11절에 나온, 오렙과 스엡은 기드온에게 죽임을 당한 미디안의 두 방백이고(삿 7:25), 세바와 살문나는 기드온에게 죽임을 당한 미디안의 왕들인데(삿 8장), 지금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세력들 그리고 그 지도급 인사들이 그들처럼 심판을 받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해서 욕심을 내면서 침략하는 대적들에 대해서(12절), 시편 기자는 엄중한 심판을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13-15절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비유적으로 표현되었는데, 그렇게 진노하셔서 완전 심판해달라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그들이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같게 하소서 / 삼림을 사르는 불과 산에 붙는 불길 같이 / 주의 광풍으로 그들을 쫓으시며 주의 폭풍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소서> 검불... 지푸라기... 바람만 날려도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산에 대형 화재가 나면 끌 수 없는 것처럼, 바다에 폭풍이 치면 살아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심판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가 악인들, 악한 세력들에 대한 엄중한 심판을 간청하면서도, 동시에 그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제목이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단순히 대적들에 대한 심판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악인들, 악한 세력들에 대해서는 심판과 철저한 응징, 보복만을 원하지만,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기에, 대적들에 대한 심판을 통해서 대적들이 자신을 심판하신 분이 누구인지, 제대로 깨닫고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시편 기자의 간절한 소원이 16-18절에 담겨져 있습니다. 앞선 1-15절이 시편 기자가 이 시편을 쓴 참 목적이 아니라, 16-18절이 참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절에서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해달라고 합니다. <여호와여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17-18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들로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놀라게 하시며 낭패와 멸망을 당하게 하사 /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16-18절을 묵상하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분명히 1-15절까지만 읽으면, 지금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인해서 완전히 끝장나야 하는데, 모두 다 진멸해서 사라져야 하는데, 그런데 16-18절에서는 갑자기 분위기 바뀌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자들이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게 되고, 여호와를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해달라니...

    오늘 우리도 이러한 시편 기자의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도 여전히 악이 성행하는 세상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각종 악인들, 악한 세력들이 도처에서 활개치고 있고, 세계 곳곳에 악한 나라들, 악한 집단들이 실존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과 가장 가까운 지역, 한반도 북쪽에도 그런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런 세력들로 인해서 우리가 얼마나 큰 고통을 받고 있습니까? 사실상 이런 대적들이 너무 악하게 나오면, 말이나 행동도 잔인하게, 무자비하게 하면, 어서 속히 멸망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서 끔찍한 테러를 저지르는 악한 집단들, 전쟁을 일으키는 세력이 있는데, 그런 자들은 어서 속히 눈 앞에서 당장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심판해달라는 기도를 자주 하게 됩니다.

     

    물론 악에 대해서는 당연히 공의롭게 심판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맞지만,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아는 사람이라면 거기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심판 기도 차원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시편 기자처럼 그 심판을 통해서 대적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자신들을 심판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알고 고백하게 되기를 또한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오늘 시편 기자가 18절에서 결론적으로 기도했던 것처럼,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이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게 악을 행하는 자들, 악행을 서슴지 않는 악한 세력들은 진짜 지존자가 누구인줄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지금 자기가 지존자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 또한 현재 자기들이 추종하고 있는 지도자가 지존자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를 우상시하기도 하고, 자기들의 지도자를 우상시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확실한 예 중 하나가 지금 북한 정권, 김씨 일가입니다. 3대에 걸쳐서 자신들이 지존이라고 여깁니다. 북한 주민들도 세뇌가 되어서 그렇게 부릅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지존은 따로 있는데... 성경을 읽어보면 나와 있는데... 그래서 북한 정권에서는 북한 주민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성경을 읽으면 참된 지존이 누구인지 다 알게 되니까... 그러면 한 순간에 정권이 흔들리고 무너지게 되니까... 물론 때가 되면, 공의의 하나님은 반드시 엄중하게 심판하실 것이요, 그러면 그 심판으로 인해서 북한 주민들은 김씨 일가, 김 아무개를 지존이라고 찬양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온 세계의 지존자로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같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대한민국, 한국교회 성도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시편 기자처럼 계속 기도하면 하나님께 간청해야 합니다.

     

    악이 너무 성행하면, 악의 세력들이 판을 치면, 현실적으로는 절망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현실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누가 있으니까요? 참된 지존, 온 세계의 지존자, 하나님이 여전히 그리고 영원토록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세상의 모든 악한 자들, 악한 나라들보다 더 높은 곳에 계셔서 공의로 다스리시고, 최후심판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시편 기자 시대나 오늘이나 하나님은 온 세계의 지존자 the Most High가 되신다. <온 세계에서 가장 높은 분>, <홀로 가장 높은 분>... 결코 비교대상이 없는, 절대적으로 높은 곳에 계신 분... 그 분이 오늘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결코 두려워할 대상이 없습니다. 제 아무리 높은 권세를 가진 자도, 제 아무리 無所不爲의 권력을 행사하는 독재자도 결코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이 세대를 초월해서 세상 최고의 고수가 되시고, 그 나머지는 다 하수에 불과합니다. 만약에 로마 황제들, 네로 황제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나폴레옹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히틀러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마오쩌둥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만을 참된 지존자로 인정했다면, 오늘날 세계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 시대의 모든 악한 자들이, 악한 세력들이 여호와 하나님만을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고 인정하게 되는, 그 날까지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언제나 기도하면서 하나님 편에만 서서 살아가심으로 열방의 모든 백성들이 다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찬양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존자의 의미 : 절대적 권력과 영향력의 상징

    '지존자(至尊者)'라는 단어는 일상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은 아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흥미롭고 유익합니다. 이 단어는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절대적인 권력과 영향력을 상징합니다. 이번 블로그에서는 지존자의 의미와 그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지존자의 정의

    '지존자'는 한자어로 '지(至)'는 '최고의', '극도의'를 의미하며, '존(尊)'은 '존경받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지존자'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사람',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자'를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권력이 강한 사람을 넘어, 최고 위치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인물을 가리킵니다.

    2. 역사적 맥락에서의 지존자

    역사적으로 지존자는 주로 왕이나 황제와 같은 절대 권력자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동아시아의 군주제 국가들에서 이러한 표현이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중국의 황제 : 중국 역사에서 황제는 '천자(天子)'로 불리며, 하늘의 뜻을 받드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황제는 지존자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국가의 모든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한국의 왕 : 조선시대의 왕도 지존자로서 신하들과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국가를 통치했습니다. 왕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으며, 그의 명령은 곧 법이 되었습니다.

    3. 지존자의 문화적 의미

    문화적으로 지존자는 단순히 권력을 가진 자를 넘어, 존경받고 숭배받는 존재로 인식됩니다. 이는 종교적, 철학적 맥락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종교적 지도자 : 많은 종교에서 신적 존재나 성인을 지존자로 숭배합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절대적 권위를 가진 존재로 여겨집니다.

    철학적 사상가: 철학에서는 지혜와 덕을 갖춘 인물을 지존자로 존경합니다. 공자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상가들은 그들의 지혜와 가르침으로 인해 지존자로 추앙받습니다.

    4. 현대 사회에서의 지존자

    현대 사회에서는 지존자라는 표현이 구체적인 개인보다는 상징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는 특정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자나 영향력을 가진 인물을 지칭하는 데 사용됩니다.

    정치 지도자 : 대통령이나 총리와 같은 정치 지도자들은 현대 사회에서 상당한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들의 결정은 국가의 방향을 좌우하며, 따라서 그들은 일종의 지존자로 볼 수 있습니다.

    기업 리더 : 글로벌 기업의 CEO나 창업자들도 경제적 권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은 경제 분야에서 지존자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혁신과 리더십으로 인해 지존자와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문화적 아이콘 : 예술, 음악,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성취를 이룬 사람들도 지존자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그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존경받고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5. 지존자의 상징성과 중요성

    지존자는 단순히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 그 권력을 올바르게 행사하고 존경받는 존재입니다. 이는 리더십과 도덕적 책임의 중요성을 상징합니다.

    리더십: 지존자는 단순히 명령을 내리는 자가 아니라, 그 명령이 존중받고 따를 수 있는 리더십을 갖춘 인물입니다. 이는 신뢰와 존경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을 의미합니다.

    도덕적 책임: 지존자는 그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책임을 집니다. 이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감을 강조합니다.

    결론

    '지존자'라는 단어는 절대적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존재를 의미하며, 이는 역사적, 문화적, 현대적 맥락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지존자는 단순히 권력을 가진 자를 넘어, 그 권력을 올바르게 행사하고 존경받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가지며, 이는 리더십과 도덕적 책임의 중요성을 상징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러한 지존자의 개념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은 건강한 리더십과 공동체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9절에서 시인은 과거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회상하며 하나님께 이를 언급하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고작 300명의 군사로 미디안의 13만 5천 명을 대파한 사건이며, 철병거 900대를 갖춘 시스라와 야빈의 군대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둔 드보라와 바락의 이야기입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더욱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도움의 손길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방이 막혀 희망이 없다고 외칠 때, 기적을 일구어 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해야 희망이 보이며 믿음이 굳건해집니다. 내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내 삶 속에 보이신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은 무엇입니까?

    오늘 시인은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 13절 이하를 살펴 보세요. 시인의 궁극적인 바람은 무엇입니까(18절)?

    하나님의 백성은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크리스천이 맞게 될 최종적인 승리 이전에 우리는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체험들은 고통스럽지만, 그런 고통을 통하여 우리는 평온할 때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구하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오늘 하루 묵상할 말씀 : 18절

    기도 : 온 세계의 지존자 되신 하나님,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제 주위에 많지만, 그들 가운데에서 살아갈 때에 제가 더욱 깨어 기도하며 주님의 이름을 구하게 하옵소서. 설령 저에게 고통의 순간이 올지라도, 하나님이 모든 일의 주관자가 되심을 믿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배가 지나가면서 만드는 변화무쌍한 물결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지나간 흔적이 직선이면 배가 꾸준히 항로를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꺾인 곡선이 나오면 배가 회전을 했다는 것입니다. 물결이 다른 물결과 충돌하여 끊긴다면 다른 배가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가 움직였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가지의 물결은 그 배의 흐름을, 상태를 그대로 말해줍니다.

        온 세계의 지존자이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현장에 남기시는 흔적이 있습니다.


        2011년도를 맞이하면서 진지하게 우리 자신의 현장을 돌아봅시다. 나에게 남겨주신 지존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흔적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2011년에 나에게 남겨져야 할 흔적은 또한 무엇입니까?



        1. 악의를 가진 원수는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합니다.



        1] 원수들이 머리를 들었습니다.


        [2절]


        무릇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


        원수들은 나의 원수가 아닙니다. 주님의 원수들입니다. 주님을 미워하는 자들입니다.

        본문에서 주의 원수, 주를 미워하는 자, 주의 대적은 구체적으로 에돔, 이스마엘인, 모압, 하갈인(6) 그발, 암몬, 아말렉, 블레셋, 두로거민(7) 앗수르, 롯의 자손(8)등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을 둘러 싼 동서남북에 위치한 모든 족속이 다 하나님의 원수요, 주의 대적들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주님의 원수들이 떠들며 머리를 들었습니다. 주님의 원수들이 득세합니다.

    주의 대적들(5)이 일심으로 의논을 합니다.(5)


        이들이 일심으로 의논하고 언약하여(5) 행할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의 백성과 그 나라를 무너뜨리려 음모를 진행합니다.


        [3-4절]


        그들이 주의 백성을 치려 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께서 숨기신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4. 말하기를 가서 그들을 멸하여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주변의 악인들은 주의 백성을 치려하고(3) 주님께서 숨긴 자를 치려고 음모를 꾸밉니다.(3)

    주의 백성을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자.(4)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4)라고 모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대적들의 공격 앞에서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롭습니다.

    대적들은 “한마음으로 의논하고” “서로 동맹”맺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연약하고, 그를 후원하고 받쳐주는 동맹군이 없기 때문입니다.


        열 나라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 연합세력을 구축하였는데, 이스라엘은 수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 이 대적 동맹들에게 어떻게 맞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세상은 이해관계에 따라 적이 동지로 되고 동지와 갈라서기도 하며, 언제나 타협의 여지가 있고 이익만 되면 양보도 하고 으름장도 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이해와 이익에 따라 이 나라 저 나라에게 손을 내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지금 외톨입니다.




        3]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5절]


        그들이 한마음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동맹하니



        이스라엘을 멸망시켜 다시는 그 이름이 기억되지 못하게 하려고 이 악인들은 함께 모여 의논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면 “일심으로” (with one mind)의논하였습니다. 


        [사도행전4장25-28절]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시편 83편4-5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하는 그들의 원수들도 합심하여 합동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려고 모여 의논하였던 것입니다. 

        [6-8절]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려고 하였던 악인들을 일심으로 모여 의논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로 언약하”였습니다.(they form an alliance against you).   곧 이들은 연합전선을 폈습니다.


        “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인과 모압과 하갈인이며 그발과 암몬과 아말렉이며 블레셋과 두로 거민이여 앗수르도 저희와 연합하여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나이다”



        4] 하나님의 목장을 자신들의 소유로 취하려는 궁극적 목적을 진행시킵니다.


        [12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 하였나이다



         하나님의 목장을 자기들의 소유로 만들어 버리자 라는 슬로건을 내 걸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동맹을 맺고 있었습니다

    교회 전체를 타락의 길로 가도록 만들기 위한 거대한 전략을 만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온 세계의 지존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고 교회에 세상의 풍속을 집어 넣고 세상 방식으로 운영이 되도록 은밀히 조작을 하게 되면 교회는 사단의 놀음에 놀아나게 됩니다

    유럽의 많은 교회들이 그 증거입니다.

        똑똑하다는 이성주의자들이 온 세계의 지존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상대화 시켜 사람들을 현혹하였을 때,

    그 거대한 교회들이 거의 텅텅 비어가고 일부는 술을 파는 집으로, 빙고장으로 식당으로 변해 버리게 되었습니다.

    사단이 교회 건물을 접수를 해 버렸음을 보게 됩니다


    사단이 교회를 무너 뜨리기 위해서 열나라의 지혜를 모았다면

    어떤 지혜들을 모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온 세계의 지존자이신 여호와보다 물질을 의지하여서 물질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축복을 받았다 라는생각을 갖도록 그 백성들을 현혹하는 일 또한 사탄의 음모입니다

    사단은 맘몬인 돈의 신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백성은 온 세계의 지존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 속에 있습니다.


        [9-11절]


    9. 주는 미디안인에게 행하신 것 같이,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소서

    10. 그들은 엔돌에서 패망하여 땅에 거름이 되었나이다

    11. 그들의 귀인들이 오렙과 스엡 같게 하시며 그들의 모든 고관들은 세바와 살문나와 같게 하소서


        그러면 정말 이스라엘은 혼자입니까? 외톨이로 소망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사실 이스라엘에게는 든든하고 견고한 동맹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나라와 세력들이 똘똘 뭉쳐 동맹을 맺어도 상대가 되지 않는 강한 동맹이 이스라엘에게는 있다.

    누구입니까? 

    온 세계의 지존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온 세계의 지존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동맹이십니다.

    언약 속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숨긴 자가 누구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의 공격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숨기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보호해주시고 지켜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의 “숨긴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의 가슴 속에 소중히 간직한 자 (마음에 품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음에 품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가슴 속에 소중히 간직하는 자녀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분의 보호하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우리 성도들은 그분께서 가슴에 품으신 소유된 보물들입니다.



       다만 지금 하나님께서 그냥 침묵하시며 잠잠하시고 조용하실 뿐입니다.


        만일 가장 강하시고 유일한 동맹세력이신 온 세계의 지존자이신 여호와하나님께서 대적들의 침공 앞에서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으신다면 이스라엘 앞에 있는 것은 멸망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온 세계의 지존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돌보시면 누구도 그 백성을 해할 수 없습니다.


        사사 시대 때 미디안 대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였을 때, 온 세계의 지존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일으키시고 미디안을 깨뜨리시고 그 백성을 돌봐주셨습니다.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가 철병거 900승을 거느리고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습니다. 온 세계의 지존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드보라를 사사로 세우시고 그녀에게 동역자 바락이 붙여 주셔서 기숀에서 그의 원수를 대파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은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들을 패망시켜 주시길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3. 기도를 드렸습니다.


        1]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1절]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때로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과 같은 때가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때로 고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생각이 듭니다.


        요셉의 고난시절에 어떠한 하나님을 생각하였을까요?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공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어떤 면을 생각하였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한 방법으로 요셉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일하고 계셨습니다.


        북한에서 핍박 가운데 신앙 생활을 하시는 분이 있다면, 어떤 하나님을 생각할까요?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위해 일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줄 압니다.


        [83:1] 


        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치 말고 고요치 마소서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1)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고요하지 마옵소서(1)


        침묵하고 계신듯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의식을 깨울 일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셨던 일들을 기억함으로 하나님을 향한 의식을 깨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실 뿐만이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잠들어 있을 뿐입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침묵하시지 않습니다.이런  때에 하나님을 향한 중심을 일깨우는 방법은 과거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추억해 보는 것입니다.


        미디안인에게 행하신 것같이(9)


        기손시내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신 것같이(9)


    그리고 기도드립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원수를 향해 일하셨지요?


        굴러가는 검불같이(13)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같이(13)


        산림을 사르는 불과 같이(14)


    주의 광풍으로 저희를 쫓아 주셨지요?


        이를 알 때 우리는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 오늘도 '주의 광풍으로 저희를 쫓아 주옵소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15)


        주님,


        열나라가 힘을 합쳐서 이러한 방법들로 개인과 가정과 교회를 넘어 뜨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목장을 원수가 접수하려고 합니다

    목장안에 어두움의 권세가 역사를 하므로 주님의 양들이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아삽은 그러한 악한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사단에게 접수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의 말씀을 묵상하여야 할 것이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할 것이며

    그러한 것들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그리고 감사를 드립니다.


        열 나라가 힘을 합쳐 정체도 없이 보이지도 않게 찾아와서 우리의 하루 생활 가운데 틈틈이 분노가 나도록 만들고 불평을 하도록 만들고 비판하며 낙심하게 만드는 일들이 사단의 주요 전략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심에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기게 하시는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사단의 음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서 성령님을 의지하며 말씀을 늘 묵상할 때에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의 원수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소리가 떠들썩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공격이 하나님을 향한 공격이요, 이스라엘의 이름이 끊겨 기억되지 못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과 같기에,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저희로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초개 같게 하소서 삼림을 사르는 불과 산에 붙는 화염같이 주의 광풍으로 저희를 쫓으시며 주의 폭풍으로 저희를 두렵게 하소서”(13-15절). 




        2]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16절]


        여호와여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저들은 연합했는데 이스라엘은 혼자인 것 같이 보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절규합니다.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이 기도는 공허한 외침으로 끝날까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결국 망해 없어져버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여호와라 이름 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가 계십니다.


    “여호와라 이름 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있습니다.


       “여호와라 이름 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이신 하나님은 여전히 주의 백성의 동맹이십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여호와여 수치로 저희 얼굴에 가득케 하사 저희로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저희로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놀라게 하시며 낭패와 멸망을 당케 하사”(16-17절).


       여기서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들로 하여금 수치를 당케 해달라는 기도는 곧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멸하려던 악인들의 계획이 실패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박윤선). 


        그리고 그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그 악인들이 “주님의 이름을 찾게” 되길 간구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려는 자신들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원수 대적을 망하게 해 달라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럼 무슨기도입니까? 


        "저희로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여호와여 수치로 저희 얼굴에 가득하게 하사(16)

    저희로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16)


    여호와 이름만이 온 세계의 지존자임을 알게 하소서(18)할렐루야.




    원수의 멸망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원수들도 주의 이름을 찾고 구원을 얻기를 원하는 기도입니다.

    원수가 멸망하게 해 주십시요라는 기도가 아니라

    주의 이름을 찾아 하나님의 자녀되게 해 주세요. 




    나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였던자이다.

    그런데 주의 이름을 부르고 그 분을 모셔 들이므로 주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오늘 기도해야 할 중요한 것은 주의 원수된자들, 주를 미워하는 자들, 주의 대적을 향하여 멸망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찾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3] 주님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18절]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산에 관심을 갖고 산에 오르면 산의 소리를 듣고

    바다에 관심을 갖고 바다를 찾으면 바다의 소리를 듣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갖고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


        이규정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한 작은 웅덩이가 하늘을 사랑했단다.

    그래서 작은 웅덩이는 자기 가슴 속 가득 그 하늘을 담았단다.


        파란 맑은 하늘만 담은 것이 아니로

    흐린 하늘도 어두운 하늘도 다같이 담았단다.


        작은 웅덩이는 하늘을 사랑해서 자기도 그 하늘이 되었단다.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

    그분만 사랑하여 우리 가슴에 담을 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떤 고난도 넉넉히 이길 줄 압니다.



        [마무리하는 말]


         온 세계의 지존자되시는 주님이십니다.  오직 주님만에 온 세계의 지존자가 되십니다.

    주님은 악인을 심판하시므로 온 세계의 주님만이 지존자이심을 알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거룩하심과 그의 공의로우심을 들어내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온 세계의 주님만이 지존자이심을 알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피조물들은 온 세계의 지존자이신 여호와 앞에서 한없이 겸비해야 할 줄 압니다.


        앤드류 머레이 목사는 “겸손”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 되신 예수그리스도에게서만 겸손을 배울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겸손이라는 영역은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길고 고된 싸움을 치러야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귀한 보물입니다. 그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신앙의 열정, 배움과 무관합니다. 아무리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도 겉모습은 흉내 낼 수 있지만 겸손이 삶 가운데 자연스럽게 나타나도록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노력으로 배움으로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가장 중심 되는 자리에 모시게 되면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내 중심에 모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고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고 예수님의 겸손 또한 배우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경건한 리더십에 대한 완전한 모델로서 겸손에 대한 완전한 본을 세워놓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 안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겸손을 드러내기 위하여 노력하기 전, 당신이 예수님의 본을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7월 2일(수) 시편 73-78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육체 뿐이라(78:39)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
    He remembered that they were but flesh, a passing breeze that does not return.


    육체는 이미 결정이 된 것으로 그 결정은 죽음입니다.
    따라서 육체는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여전히 육체를 떠받들고 살아갑니다.

    이슬을 먹다 굶어죽은 당나귀 이야기
    이솝 우화(寓話. fable) 중에 "이슬을 먹다 굶어죽은 당나귀" 라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여치의 청아한 울음소리에 흠뻑 도취된 당나귀가 여치에게 물었습니다.
    “ 너는 도대체 어떤 음식을 먹기에 그렇게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지게 됐니?”
    여치는 “이슬!” 이라고 짧게 대답했습니다.
    여치의 울음소리를 가지고 싶었던 당나귀는 앞으로 이슬만 먹고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결국 이슬만 핥아먹던 당나귀는 얼마 후 굶어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즐기고 있습니까?
    삶을 을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육체를 위한 삶
    다른 하나는 영혼을 위한 삶

    육체는 이미 결정된 것을 향하여 가고 있을 뿐입니다.
    결정이란 곧 죽음입니다.
    반면에 영혼은 영원합니다.
    따라서 영혼을 위한 삶은 육체를 갖고 살아가되 영원한 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는 날마다 약해지고 보잘 것 없지만 영혼은 날마다 새로운 것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그리스도인의 삶은 날마다 속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속이란 곧 영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양식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Read) 묵상하고(Meditate) 적용해야(Apply) 합니다.

    "육체(肉體) 뿐이라!"
    오늘의 묵상의 주제를 마음에 담고 온 종일 주와 동행(同行)하는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동행하는 사람들은 첫째는 서로 대화가 잘 통해야합니다.
    동행하는 사람들은 둘째는 서로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동행하는 사람들은 셋째는 관심이 같아야 합니다.




    동행하다
    할라크(hâlak)  הָלַך 스트롱번호 1980

    1. 가다.  2. ㉠ 창 7:18. ㉡ 대하 26:8. ㉢ 수 16:8. ㉣ 느 6:17.  3. ㉠ אֶל
    발음 [ hâlak ]
    구약 성경  /  1549회 사용

    동행하다
    파라람바노(paralambanō)   παραλαμβάνω 스트롱번호 3880


    1. 데리고 가다.  2. 인계하다. 3. οἱ ἴδιοι αὐτὸν οὐ παρέ- λαβον : 자기 백성이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발음 [ paralambanō ]


    "육체뿐이라"는 말은 "단지 육체일 뿐이다" 또는 "육체만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주로 인간의 유한함이나 일시적인 존재를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육신이 영원하지 않고 언젠가는 사라지는 존재임을 의미하거나, 인간의 물질적인 측면만을 강조할 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 시편 78편 39절에서는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인간이 육체적인 존재이며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여 사라지는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인간의 육체적인 욕구나 세속적인 것에 집착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표현할 때 "육체뿐이라"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고린도후서 5:16-18)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사실 이 이름만 들어도 우리 성도들은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알기 원치 않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 그의 은혜가 감사가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아니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에 이방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을 하면서 점점 예수 그리스도는 사라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초대 교회에 잠깐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전해 졌지만 서기 250년이 넘어가면서도 교회가 급속히 타락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만 알기를 싫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자기 지식을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사람이 세상 적으로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보고 신학을 공부를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퇴보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정말 그런 목사가 있다면 저는 이 그리스도편지를 그분께 모두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에서 잘 조명을 해서 우리에게 알 수 있게 해 주는 목사가 있다면 그가 사역을 하는데 있어 제 모든 것을 다 해서 도와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이 몰랐던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자기 지식을 자랑을 하고 있지만 실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목사를 아니 성도를 만나 보지를 못 했습니다.

    이사야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성경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 때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몰랐다고 그들만 지혜가 없어서 모른 것으로 치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똑같이 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사야 시대 뿐 아니라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에게 늘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의 말씀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이스라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지혜가 없어서 하나님을 몰랐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지적인 수준이 많이 높아지다 보니까 모두가 성경을 스스로 볼 수 있고 그렇게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자부를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시대 어느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저를 탓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에게 시비를 걸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이사야의 말씀도 그리고 호세아의 말씀도 안 보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말씀을 하면 마치 제가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그 시대 사람들이 모른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자기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공부를 하고 또 성경을 많이 읽고 신앙서적도 많이 보고 있는 자기가 대단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도 역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고 있지만 소경들은 그것을 깨닫지를 못 합니다. 소경은 자기가 소경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고 또 소경들은 인도하는 자가 인도하는 대로 가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육적인 이스라엘입니다. 그들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이방의 교회들도 역시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문자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성경말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지 몰라도 그 안에 담겨져 있는 메타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민을 하시기 바랍니다. 왜 이 말씀을 기록했는가를 지혜를 구해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쉽게 이해를 하고 있다면 그 자체가 성경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절대로 쉽지가 않습니다. 얼마나 어렵고 그 안에 담겨져 있는 비밀이 오묘한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을 몰라서 구원을 못 받는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있었으면 그를 통해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 주변에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 어려운 성경을 고아도 알아듣고 과부도 알아듣고 이 세상에서 가장 무식한 자도 알아들을 수 있게 설교를 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 유식을 자랑하느라고 문자를 쓰고 있습니다. 설교를 하는데 있어 영어 한마디는 해야 하고 히브리어 한 마디는 해야 하고 헬라어 한 마디는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고아가 헬라어를 듣는다고 그 뜻을 압니까? 그런 행위들은 다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무슨 히브리어가 필요합니까? 헬라어가 왜 필요합니까? 물론 꼭 필요할 때 사용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에 히브리어 헬라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문자를 쓰면서 자기가 마치 많이 아는 것으로 포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성경에서 예수만 전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늘 성경과 씨름을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서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화를 캐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보화를 캐내어 낼 때 얼마나 어려운 가를 광산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열악한 환경에서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해서 보석 한 조각을 얻기 위해서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수많은 흙을 지상으로 퍼 올려서 그 중에서 보화 한 조각을 찾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저 문자를 보고 그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보석도 그렇게 캐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영생이 있는 성경을 우리가 어떻게 보아야 하는 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늘 성경에만 집중을 하지 않고는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말을 아무리 잘 하면 뭐 합니까? 그 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는 거짓을 전하고 있

    는 사단의 일군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시대 목사들이 탤런트입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전하려 고는 하지 않고 그저 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문자를 씁니다. 히브리어 헬라어 영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찬양을 아주 잘 부르고 있습니다. 또 자기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은사를 통해서 그것으로 목사라는 직업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아닙니다.

    아니 진리를 전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내가 탤런트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절대로 진리를 전하는 자가 아닙니다. 진짜 진리를 전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탤런트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불행하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사라지고 목사들이 그리고 교회가 외형으로 보이면서 그것으로 마치 진리가 있는 것 같이 사람들을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주님이 두려우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두려워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선악 간에 심판을 하실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심판 주라는 것을 바로 앞 절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심판 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실 때는 심판을 하시러 오신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모두가 한 길로 가다 보니까 죽은 후에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죽은 후에 반드시 선악 간에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다 아십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한 일을 하는지 악한 일을 하는지 주님이 다 아시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심판을 하실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한 일들을 다 알고 계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주님 앞에 이미 다 알려 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이 진리인가는 이미 주님이 다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알려 지기를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늘 자기가 진리를 전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있고 또 너희도 그것을 알기를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사도바울이 전하는 진리가 참이라는 것이 알려져야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이 복음이 사실이라는 것을 마음에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아는 것과 같이 너희 마음에서도 그렇게 알려 졌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간절합니까?

    사도 바울은 늘 영혼 구원을 위해서 이런 마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는 것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알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보다 더 호소력이 있는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정말 지혜롭게 가르쳤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너희 양심에서 환하게 들어났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정말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환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공동번역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또다시 우리 자신을 내세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주어 속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만 가지고 자랑하는 자들의 말을 반박할 수 있게 해주려는 것뿐입니다.”

    쉽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에게 또 다시 우리 자신을 내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 자신을 치켜세우려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를 자랑 할 수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주어서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만 가지고 자랑을 하는 그들의 말을 반박할 수 있게 해 부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보이는 것으로 자랑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다 보니까 사람들은 표적을 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외모를 자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반박을 할 수 있게 해 주려고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면 사람들은 너무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아니 겉으로 들어나는 것을 자꾸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사도바울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환하게 드러나 있다고 말씀을 하면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이 말은 우리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겉을 가지고 자랑하는 자들에게 너희가 반박을 할 수 있게 이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겉을 보고 있습니다.

    행위를 보고 그가 하나님을 믿는 가 아닌가를 분별을 하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행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마음으로 믿는 것이기 때문에 겉으로 들어나는 것이 아닌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환하게 들어났다고 하는 이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우리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로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 주려고 한다는 말씀입니다

    육신대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누가 더 믿음직스럽습니까? 영으로 하는 사람보다는 육신대로 하는 사람이 더 믿음직스럽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더 웅장하게 짓고 있고 그 안에서 예배를 더 성스럽게 드리려고 하고 있고 모든 행위를 다 그렇게 겉으로 들어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자는 겉으로 보일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겉으로 들어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고린도교회에 사도바울이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여러분이 깨달아야 합니다. 한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안에 있는 숫자를 보고 아주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다보니까 사람들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이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고린도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딱 맞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위해 미친 것 같아 보입니다. 오직 예수를 전하면 사람들은 예수에 미쳤다고 합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미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운동에 미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생각을 하면 됩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하나님께 미쳤다고 말 합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믿음에 대해서 말을 하니까 저가 하나님께 미쳤구나 하고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미쳤다고 하면 내가 하나님

    께 미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정신이 온전하면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예수에 미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온전하다고 받아들이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비록 하나님께는 미친 사람이 되었어도 너희는 나를 정신이 온전한 자로 받아들여서 이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에 미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정말 그렇게 보였습니다. 모든 율법도 다 버리고 오직 예수만 전하니까 미친 사람입니다 그러나 너희에게는 정신이 온전한 자로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신이 온전한 자로 보여야 너희가 내가 전하는 복음을 믿을 수 있을 것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미쳐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무도 크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가 하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죄를 대신 해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사랑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 되어서 이제는 더 이상 사망이 왕 노릇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가 죽은 자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랑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나를 대신해서 죽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나를 아무리 사랑하는 부모라 해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것이 영의 일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잘 실감이 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 사형을 당하는 사형수에게는 이것은 엄청난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누가 대신 죽고 내가 산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가 살아 있다 보니까 이 말씀이 사실 잘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어서 사형을 당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대신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가 나를 너무도 사랑해서 대신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사형에서 면하고 세상에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대신 죽으신 것은 이제 우리가 대신 얻은 생명을 우리를 위해서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해 살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 복음을 기회로 삼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에게 자유 하는 복음을 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대신 죽으신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주셨습니다.

    이미 엄청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을 주셨으니까 이제 이 세상은 덤으로 사는 것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라는 말씀입니다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천국이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주셨으니까 이제는 이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 달라는 부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입은 성도의 당연한 본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않겠다고 말씀을 합니다. 이성의 잣대로는 사람을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도 육신대로 알았지만 이제부터는 이 같이 알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성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알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아무 사람이라도 육신대로 알기를 원치 아니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 세상에서 교회 안에서 누구냐 하는 것으로 알고 싶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목사라 해도 그것으로 알지 않고 또 그가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다 해도 그것으로 알고 싶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제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신은 이제 죽은 것이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하든 또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든 그가 유명한 사람이라 해도 그것으로 알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너무 육신대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을 하고 있다면 절대로 육신대로 살지 않습니다. 자기를 대신해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데 자기가 왜 나타나고 있습니까?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고 육신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새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육신이 새로워지는 것입니까?
    우리 육신은 이전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지나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면 이전 것은 지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이전 것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 육신이 새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것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새 것이 안 되었습니다.
    아직도 육신대로 살고 있습니다.
    이전 것 우리 육신의 것은 다 지나가야 하는데 그것이 아직까지 그대로 있습니다.

    내가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전혀 죽지를 않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하고 있는 겉으로 들러나는 행위를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말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다고 하지만 옛 것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이전 것은 지나가야 합니다.
    내 육체의 모든 것은 죽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육신대로 살고 있습니다.
    자기 육신대로 율법의 행위에 빠져 있고 육신으로 사람을 알고 교회를 알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육체의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은 새 것이 안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육신대로 살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새 것이 된 성도는 절대로 육신대로 살지 않습니다.
    육신대로 살던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새 것이 안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고 하는 그들이 옛 것을 그대로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행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고 하면서 옛 것을 지키고 있습니다.
    지나간 옛 것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고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새 것이 안 되어 있는 사람은 그렇게 옛 것을 아직까지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로 새 것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 직책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와 화목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을 하나님과 하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성도는 육신대로 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육신대로 알고 있지 않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목적이 바로 화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가 있는 우리가 화목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 직무를 행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육신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다고 하면서 육신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육신대로 살고 있고 옛 것을 그대로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시고 그것을 위해서 살라고 하셨지만 사람들은 옛 것을 지키면서 육신대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옛 것을 지키면서 새 것이 되려고 하고 있습니까?
    그 자체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 그것은 옛 것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고 하면서 지나간 옛 것을 지키면서 육신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간곡히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해서 이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라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정말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을 하고 있는 성도는 이 일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을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는 이제 옛 것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해서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 성도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을 하고 있는 성도는 알고 있습니다.
    옛 것을 버리고 이제 새 것이 되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세상에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가 되어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영접을 받아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영원한 삶을 위하여 - 단 한번 걷는 인생 길

    우리는 매일 바쁘게 살아갑니다.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알람 소리에 눈을 뜨고 바쁘게 일터로 나갔을 것입니다.
    알람 소리를 기뻐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피곤하고 지친 몸, 좀 더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끔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일어나서 하루의 시작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날도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 소풍 가던 날, 원하는 대학에 합격을 해서 처음 등교하는 날, 취업에 성공해서 첫 출근하는 날, 군 복무를 전역하는 날,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게도 기다렸던 결혼식을 올리는 날.
    이런 날은 하루의 시작을 기다리게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아침 시간에 알람 소리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서 알람 소리를 들어도 결코 일어나지 못하는 날이 한 번 있습니다.
    알람 소리에 기계처럼 일어나던 우리가 그 소리에 아무런 반응을 보일 수 없습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다시는 아침 해를 볼 수도 없는 그 때.
    우리는 이것을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열차가 역을 출발하여 종착역을 향하여 달려가듯이 우리의 인생도 탄생을 시작으로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향하여 하루 하루 달려가고 있습니다.
    가는 도중에 먼저 도착한 사람들, 곧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소식을 접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그 죽음이 자신에게도 반드시 오게 된다는 사실을 잠깐씩 기억하지만, 금방 다시 우리는 거의 잊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언젠가 반드시 도착해야만 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싱판이 있으리니 (신약성경 히브리서 9:27)

     하루는 하루살이와 나비가 들판에서 즐겁게 놀고 있었습니다.
    [나비] "하루살이야, 이제 날이 저무는데 내일 다시 만나자."
    [하루살이] "내일?"



     나비는 하루살이에게 내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또 하루살이는 그것을 이 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하루살이는 애벌레로 I~2년을 살다가 어른 벌레로 하루를 삽니다.
    그리고 입이 없어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단지 알을 낳고 죽습니다.


     하루살이가 알지 못하는 내일이 존재하듯이 당신이 알지 못하는 내세(來世)가 존재합니다.
    당신은 그것을 이 세상 떠나기 전에 당신의 목적지, 종착역을 찾아야 만합니다.
     오늘 당신의 생애가 끝이 난다면 지금 이 순간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떠날 준비-

     사막에서 길을 잃었을 때 조심해야 될 것이 신기루를 보고 자신의 힘을 허비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막에서 더위와 갈증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가 밀려올 때,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그늘과 목을 축일 수 있는 물을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그 때, 멀리서 드넓은 호수가 눈에 들어옵니다.
    있는 힘을 다하여 달려가 보지만 눈 앞에 보이는 것은 그 어디에도 황량한 사막 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보다 좀 더 가까운 쪽에 작은 산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또 힘을 다해 뛰어 가보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러기를 몇 번, 결국 죽음이 그를 기다립니다.

     당신 인생은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무엇을 잡기 위하여 달려왔습니까?

    만물(萬物)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구약성경 전도서 1 : 8)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구약성경 전도서 1 : 14)

     그렇습니다.
    차를 타고 창밖으로 손을 내밀면 바람이 손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주먹을 움켜쥐어 보지만, 그 바람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인생은 바람처럼 잡힐 듯 잡힐 듯 하지만 잡히지 않고, 신기루처럼 다가서면 없어지는 허무한 것이 아닐까요?

      행복이라는 것을 잡기 위하여 쫓아가지만 이미 그것은 멀리 앞서 갑니다.
    재물을 얻기 위하여 노력을 하지만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은(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 헛되도다 (구약성경 전도서 5:10)

     자신의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무엇을 준비하는 것이 참된 준비가 될까요?
    혹시 많은 재물, 지식, 명예 등을 얻은 것으로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나라에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재산이 많아 집에서 일하는 일꾼도 많았는데, 그 중에 어리석고 바보스러운 한 일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그 어리석은 일꾼에게 목걸이를 주면서 자기보다 더한 바보를 만나면 그 목걸이를 넘겨주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 부자가 희귀한 병을 앓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 어리석은 일꾼도 다른 일꾼들처럼 부자를 위문하기 위하여 찾아갔습니다. 부자는 그 일꾼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잠시 후면 먼 길을 떠나야 한다네."
    "도대체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입니까? 주인님." 일꾼은 물었습니다.
    "다른 세계로 간다네."
    "그러면 언제 쯤 집으로 다시 돌아오십니까? 보름 후입니까?"
    "아니네."
    "한 달 후입니까?"
    부자는 일꾼을 한심스러운 듯 바라보며 힘들게 대답하였습니다.
    "아니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그 일꾼은 계속 부자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쯤 집으로 돌아오십니까?"
    "한 번 가면 결코 돌아올 수 없다네."
    "결코 돌아올 수 없다고요?"
    일꾼은 깜짝 놀라더니 다시 물었습니다. "주인님은 그 곳을 가기 위하여 무슨 준비를 하셨습니까?"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했네."
    "아무 것도요?"
    그 어리석은 일군은 의아한 표정으로 주인을 바라보더니, 잠시 후 목걸이를 벗어서 그 주인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이 목걸이의 주인을 이제 만났습니다. 비록 저는 어리석지만 당신처럼 바보스럽고 어리석은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

      자신의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무엇을 준비하는 것이 참된 죽음의 준비가 될까요?
    혹시 많은 재물, 지식, 명예 등을 얻은 것으로 준비를 마쳤다고 한다면 더욱 어리석은 자가 될 것입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신약성경 누가복음 12:19)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사람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신약성경 누가복음 12 : 20)

      성경에서는 죽음을 영혼이 떠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육신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영혼을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하셨습니까?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구약성경 전도서 9:12)

      우리는 아무도 자신의 죽는 날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직 한 번 뿐인 인생에서 당신은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고 계십니까?
    당신에게 주어진 생명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너무나도 귀중합니다.
    보이는 것 만을 위하여 사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 만으로도 족합니다.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마음은 우리 영혼의 욕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만족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이 당신에게도 있습니다.
    신기루를 좇아 가듯이 그저 막연하게 사는 것, 그것으로 그 공간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 빈 공간은 오직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만날 때에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신약성경 고린도후서 4:18)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원한 세계는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신기루처럼 잡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통하여 영원한 세계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그 때 당신은 참 만족과 참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창조자가 계시기에 당신은 존귀합니다.
    다이아몬드는 그것을 잘 다듬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때만이 그 찬란한 빛을 낼 수 있고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당신의 인생도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인생도 이 세상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당신도 죽음 후에 하나님을 만납니다.

    나의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구약성경 욥기 19:26)

    그리고, 우리는 아무도 자신의 죽는 날을 알지 못합니다.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구약성경 전도서 9:12)

    -지금까지 걸어온 길-

      탈무드라는 책에 인생에 대하여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남자의 생애를 크게 일곱 개의 단계로 나누어서 구분한다.
      1단계 : 탄생에서 한 살 까지를 임금님이라고 한다.
                 가족 모두가 모여서 왕을 받들듯이 달래거나 어르기 때문이다.
      2단계 : 두 살은 돼지라고 한다. 흙탕 속을 더러운 줄 모르고 뛰어다닌다.
      3단계 : 열 살은 양이다. 웃기도 하고 뛰어 다니기도 하고 떠들기도 한다.
      4단계 : 열 여덟 살은 말이다. 크게 자라서 자기의 힘을 보이고 싶어한다.
      5단계 : 결혼하면 당나귀이다. 가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터벅터벅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6단계 : 중년은 개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사람들의 호의를 구걸하지 않으면 안 된다.
      7단계 : 노년은 원숭이이다. 어린이처럼 되어서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기 위하여 노력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의 어릴 때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필요한 일을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말처럼 자신의 힘을 나타내고 싶어 많은 경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면서 가정이라는 무거운 짐이 지워지기에 당나귀처럼 그저 그 짐을 지고서 터벅터벅 걸어갑니다.
    때론 힘들어도 사랑하는 아내의 아름다운 모습을 생각하며 이겨냅니다.
    괴로울 때는 귀여운 자녀들의 재롱 떠는 모습을 그리며 참아내곤 합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아내의 모습도 사라지고 자녀들의 재롱도 사라져가는 중년의 때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사람들 앞에서 개처럼 꼬리도 치고 구걸도 해야만 됩니다.
    자신의 꿈도 접어야 되고 가족의 안전을 위하여 밤에도 집을 지켜야 됩니다.
    낯선 자가 찾아오면 맨 먼저 나가 확인을 합니다.
    그러다가 자녀들도 결혼을 하게 되고, 당신의 얼굴에는 주름이 늘고, 머리가 희어지는 노년이 찾아옵니다.
    어린이가 되어서 원숭이처럼 사람들 앞에 재롱을 떨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신기한 듯 바라볼 뿐입니다.

      그리고는 죽음이 찾아오고 가족들은 당신의 몸을 캄캄한 땅 속으로 보내게 됩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구약성경 전도서 12:1)

      당신은 지금 인생의 어느 단계에 와 있습니까?
    그리고 어느 단계에서 당신의 인생이 끝이 난다고 생각하십니까?
      단순히 이것으로 인생이 끝이 난다면 우리가 짐승보다 나은 것은 무엇일까요?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열망하는 짐승 같도다 (구약성경 시편 49:20)

      당신이 인생의 어디 쯤 왔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서 존귀함을 찾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때, 지금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면 홀연히 망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사람에게 정해져 있듯이 죽음 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이 계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신약성경 마태복음 10:28)

      죽음 후에 당신의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옳은 길 선택하기-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믿고 거듭난 그리스도인 사업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업을 하여서 많은 돈을 벌었고 또한 그 도시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한 친구는 성경책은 사람이 지어낸 하나의 책에 불과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성경을 비판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는 돈이 급하게 필요하게 되어서 부자인 사업가를 찾아가 돈을 잠시만 빌려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무 말 없이 종이쪽지에 무언가 메모를 하고서 그 친구에게 주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메모지를 펼쳐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내일 새벽 4시에 우리 집을 방문하면 원하는 돈을 빌려 주겠네"
    그 친구는 다음날 새벽 이른 시간이지만 사업가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문을 두드리자 사업가가 나와서 화난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무리 친구지만 새벽부터 와서 잠을 깨우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자 그 친구는 억울한 듯이 메모지를 보여 주면서 사업가에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내가 준 메모지를 믿고서 여기 왔지만, 그것보다 더 믿을 수 있는 말씀이 성경이라네. 이 성경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지"

      "나는 자네가 준 이 메모지에 적힌 대로 4시에 찾아오면 돈을 빌려 준다기에 왔다네."
    "자네는 그 종이에 적힌 그 글을 믿는단 말인가?"
    "내가 자네가 준 그 메모를 믿지 않았다면 지금 이 시간에 여기에 올 수 있겠는가?"
    그 때 사업가는 웃으며 친구를 집 안으로 안내하였습니다.
    "자네는 내가 준 메모지를 믿고서 여기에 왔지만, 그것보다 더 믿을 수 있는 말씀이 성경이라네. 이 성경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지"

      많은 사람들은 아침 신문에 끼워져 들어오는 백화점 세일 광고를 보고 시간을 내서 그 기간에 물건을 구입합니다. 그 이유는 광고지의 내용을 믿기 때문일 겁니다. 장난감 로보트 하나도 설명서가 없다면 정확하게 조립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설명서를 신뢰하지 못한다면 결코 그것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모자이크 퍼즐 같은 우리 인생을 정확하게 맞추는 방법은 성경이라는 안내도를 사용하는 것 뿐입니다.
    성경을 믿고 의지하여 멸망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수 천 년의 역사가 증거합니다.

      당신의 한 번 뿐인 인생을 위해서는 무엇을 믿고 살아가십니까?
    내일 아침 신문에 당신이 가지고 있는 현금을 오늘 당장에 은행에서 수표로 바꾸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다는 기사가 나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확인을 해보고 사실이라면 가장 먼저 은행에 달려가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떠한 말보다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당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섬기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본분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구약성경 전도서 12:13)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반복해서 다시 살 수 없습니다.
    인생은 단 한 번의 기회가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려야 할 그림, 자신이 완성해야 할 인생의 그림이 무엇인지를 당신은 아셔야 합니다.
    자신의 운명이 다하기 전에 찾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선택을 합니다.
    때로는 잘못 선택하여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고 자칫 자신의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용변이 급해서 달려간 공중 화장실 앞에서, 매표소 앞에서 당신이 선 줄 보다 다른 쪽 줄이 빨리 줄어들 때 당신은 후회를 합니다.
      어렵게 모은 돈으로 물건을 구입했으나 고장이 났을 때, 주식을 샀으나 주가가 폭락을 할 때, 많은 돈을 투자하여 사업을 시작했으나 실패를 했을 때 당신은 더 큰 후회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다시 시작하면 새로운 것을, 더 나은 것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선택일지라도 실패를 교훈 삼아 다시 시작하면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다시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인생길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바르게 선택하지 못한다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영혼은 존재할까?    내세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성경이 사실일까?
    천국과 지옥은 존재할까?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실까?"

     당신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당신의 선택에 따라 당신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내세(來世)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없다고요? 지옥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지금 이 순간 그 선택을 위해 고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 (구약성경 예레미야 21 :8)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는 물건을 살 때도, 길을 갈 때도 몇 번씩 확인을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죽음 후에 가야 되는 그 선택의 기로에서는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당신은 생명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신약성경 요한복음 14:6)


    -옳은 길로 가는 안내자-

    우리의 짧은 인생 길에서 우리가 정말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우스개 소리는 그냥 웃고 넘길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로 승객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갑작스런 죽음에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다음 세 가지의 경우라고 합니다.


      첫째, 목적지를 잘 못 보고 탄 사람.
      둘째, 졸다가 목적지에서 내리지 못한 사람.
      셋째, 떠나는 버스를 손들고 뛰어가서 겨우 탄 사람.

     우스개 소리 같지만 우리의 삶도 혹시 이와 같지는 않을까요?
    목적지를 잘 못 보고 탄 사람처럼 지금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데 바른 줄로 착각하고 있는 당신의 모습은 아닌지요?
      졸다가 목적지에서 내리지 못한 사람처럼 목적지도 잃어버리고 무감각한 채로 살아가는 당신의 모습은 아닌지요?
      떠나가는 버스를 쫓아가는 사람처럼 세상의 물질만을 따라가며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하여 바쁘게 살아가는 당신의 모습이 아닌지요?

      오직 한 번 뿐인 우리의 인생은 어디를 향하여 달려가며, 그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길을 찾기 위하여 지금까지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낯선 길을 여행하기 위해서는 지도가 필요합니다.
    지도를 사서 지도 위의 현재 위치를 확인하고 목적지를 향하여 여행을 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 지도가 틀렸다면 우리는 결코 목적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전혀 엉뚱한 곳에 도착할 수도 있습니다.   낯선 인생을 살기 위해서도 지도가 필요합니다.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안내하는 인생의 지도가 당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살아왔던 많은 사람들의 모습 가운데서 나에게 적합한 길을 찾기 위해 고민하다가 아마도 이거다 생각하고 당신은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정말 옳은 길인지, 지금 사는 삶이 참다운 삶인지 확신하십니까?
    당신이 보고 있는 인생의 지도가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까?

      단순한 여행이라면 지도가 틀려서 잘못 갔더라도 다시 돌아와서 다시 가면 됩니다.
    그러나 당신의 인생은 한 번 뿐입니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기에, 인생은 돌이킬 수 없기에 더욱 더 확실한 인생의 지도가 필요합니다.
    그 지도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창조자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신약성경 디모데후서 3:16)

      당신을 만드신 창조자만이 당신 인생의 길을 안내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경만이 참다운 인생지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의 모습이 하나이듯이 당신의 삶 또한 한 번 뿐입니다.
    한 번 뿐인 삶 가운데서 진리를 찾지 못한다면 죽음 후에 저주만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이 세상에 육신이 한 번 탄생한 것처럼, 당신의 영혼이 다시 탄생해야만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원한 천국에 설 수 있습니다. 죽음 후에는 결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의 인생이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살아야합니다.
      인생의 안내자는 바로 성경이며, 성경만이 당신을 완전한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01. 영의 사람인가? 육의 사람인가?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 2:14).

    1. 아담은 영의 사람으로 창조되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고전 15:45~46).

    아담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창 2:7; 눅 3:38). 하나님의 생명을(엡 4:18) 소유한 사람을 영의 사람 또는 영의 속한 사람이다(요 3:6).

    아담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생명을(영생) 잃었다(창 2:17).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과 연합할 때 유지되고 소유한다(요일 1:2, 2:25). 아담은 사단의 반역에 가담하므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졌다(롬 5:12~17).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서 끊어진 것이 죄이며 사망이다(사 59:2). 아담 안에서 인류는 사망이 (육, 육체) 되었다(고전 15:22).

    2. 아담은 타락으로 인류는 육(체)의 사람이 되었다.

    “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2).

    아담은 선악과를 먹었으나 그날 죽지 않았다(창 2:17). 영원한 생명은 잃었지만, 육체의 생명은 유지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담보로 사망(사형)이 잠시 집행유예된 것이다(창 3:15).

    인류는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과 대속을 담보로 "육체의 생명"이 유지되었다(레 17:11, 14; 민 16:22, 27:16). 육체의 생명은 바람처럼 소멸된다(시 78:39). 예수님은 육체의 생명을 가진 인간을 "죽은 자" 라고 하였다(마 8:22). 사도 바울도 육의 사람은 죽은 자라하였다(엡 2:1). 육의 생명은 영의 생명을 얻도록 주신 마지막 은혜의 기간이다. 육의 생명은 언제든지 끝날 수 있다.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 (시 78:39).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마 8:22).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ᆢ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1~3).

    노아 당시의 인류는 육체(육)가 되었다. 이것은 노아 홍수의 대심판을 불러왔다. 육의 사람은 성령이 떠난 상태이다. 성령만이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주신다.

    노아 시대 인류는 성령이 떠난 육체(고기 덩어리),

    흙 덩어리가(시 103:14) 되었으므로 멸망하였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 6:3).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3.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이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육체를 따라 사는 자는 육체의 일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한다. 육체의 생각은 사망이나,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ᆢ 육체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 8:5~8. 바른성경).

    아담의 후손은 육(체)의 사람 곧 죽은 자로 태어났다. 죽은 자(상태)의 삶 전체가 죄이다(엡 4:2). 인류는 스스로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렘 13:23). 죽음은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다.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대속을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

    “율법이 육체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었던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으니, 곧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체의 모양으로 보내 속죄 제물로 삼으셔서, 그 육체 안에서 죄를 심판하신 것이다. 이는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성취되게 하려는 것이다”(롬 8:3~4).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계시면, 너희는 육체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ᆢ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너희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너희 안에 계시는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다”(롬 8:9~

    11. 바른 성경).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을 거부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요 3:6). 성령으로 난 자만이 영이 된다.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신 삼위 하나님과 연합할 때 이루어진다. 생명은 생명으로 이어진다(요 3:16).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 2:14).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6~7).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와 구세주로 영접하면 성령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이 된다.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니라” (요 1:12~13. 흠정역).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 8:11).

    4. 영의 사람이 사는 법이 하나님의 계명을 즐겨 순종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영의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10).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 5:22~25).

    영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성령의 생명력 때문이다. 그 생명력이 품성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케 한다. 순종의 힘은 우리 안에 역사하는 성령의 생명력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동행하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ᆢ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일 2:3~6).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마음의 문을 열고 구주로 영접하자. 오늘 영의 사람,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4:12).

    아멘.


    성경에는 세상적인 사상과는 반대되는 역설적인 진리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거의 절반인 13권을 쓴 위대한 바울에게는 ‘사단의 가시’로 불리는 질병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나님께 세 번 가시를 제거해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내 은혜가 네게 충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능력이 사람의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지는 능력’ 이것은 분명 세상적인 사상은 아닙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사람이 자신의 약함을 인정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좀처럼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려들지 않습니다. 자신의 무능과 실수라 할지라도 끝까지 변명하며 아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관점은 어떠하겠습니까? 야고보서4:14절에서는,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셨으며, 시편78:39절에서는,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라고 하셨으며, 이사야45:9절에서는,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프랑스의 화가인 ‘고호’는 젊었을 때, 광산에서 전도사의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고호는 광부 한 사람이 물건을 포장했던 천으로 셔츠를 만들어 입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셔츠에는 글씨가 쓰여 있었는데, 그것은 원래 포장한 물건에 쓰여 있던 글씨였습니다. 거기에는 ‘부서지기 쉬우니 주의해서 다룰 것’이라는 글입니다. 이 때 고호는 광부가 입었던 그 옷의 글씨를 보고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부서지기 쉬운 것, 그것이 바로 사람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표현처럼, 우리 사람은 ‘질그릇’과 같아서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자신이 강한 것처럼 자랑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 약함을 인정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본문7절을 봅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시”라는 말은 ‘말뚝’, ‘파편’, ‘뾰족한 창’이라는 의미입니다. ‘육체에 가시’는 ‘몸에 박힌 말뚝’이라는 뜻으로, ‘견디기 어려운 심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이 가시가 무엇이었든 간에 ‘사단의 사자’로 불릴 만큼 바울에게는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스러운 가시를 주신 목적이 바울의 교만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받은 계시는 너무나 신비스럽고 큰 것이어서 교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오늘에 이런 큰 계시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유명해지고 교만해졌지 않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런 가시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가시가 자신의 육체의 질병일 수도 있고, 어려운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고통스러운 가시를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우리의 영혼이 파멸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시므로 우리가 무엇에 약한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그 약한 부분이 사단으로부터 뚫리지 않도록 깨어있게 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서울 광림교회 이경옥 집사의 간증입니다.
    10여년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순탄한 삶과 늘 주님께 감사하며 사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 수련회가 끝난 다음날이었습니다.
    그동안 눈이 잘 보이지 않고, 야맹증과 같이 밤에는 계단을 잘 내려가지 못하던 남편과 함께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왼쪽 눈의 신경이 너무 상해서 실명위기까지 왔으며, 오른쪽 눈도 많이 상해 있어서 절망적입니다.”라는 의사의 말과 함께 “녹내장 중증”이라는 진단 결과가 나왔습니다.
    여태까지 순탄하게 직장생활을 잘하고 신앙생활도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해 왔기 때문에 이 집사 부부는 남들이 부러워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졸지에 청천벽력과 같은 환경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집사 부부는 고통 속에서 기도했고 자신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0여 년 동안의 신앙생활이 ‘나’ 중심의 신앙생활, ‘내 가족만을 위한 생활’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집사는, “내가 좋아 성가대를 하고, 내가 좋아 선교와 봉사를 하며, 내가 좋으면 무슨 일이든 해왔던 나와 남편은 이런 고통 속에서 자아가 깨어지고 성령의 체험과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후로 이 집사 부부의 생활은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되기 시작했고, 눈도 계속 안정되어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주어지는 인생의 가시는 영원한 생명을 유지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입니다.

    인생의 가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인생의 가시가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라고 하더라도 그 고통 자체가 좋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가시로 말미암아 더욱 타락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주님의 뜻을 깨닫고는 오히려 그 고통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는 자와는 함께 일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록 약함이 있고 고통과 고난의 환경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을 이루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미국 ‘앨라배마’주 남부 ‘엔터프라이즈’에는 세계 유일의 벌레를 위한 기념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1895년 멕시코산 목화 바구미가 엔터프라이즈에 생기기 시작, 앨라배마 주의 목화 생산은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목화 농부들은 생존을 위해 다각적인 농업 운영을 계획하여 목화 대신 옥수수, 감자, 낙화생을 재배하여 크게 성공했습니다.
    목화 바구미가 나타난 지 25년 후인 1919년, 그곳의 낙화생 생산량은 엄청났으며, 수입은 목화 재배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해 주민들은 기념탑을 하나 세웠습니다.
    탑에 새겨진 글을 소개합니다.

    “벌레가 번영의 전령자로서 이루어 놓은 거대한 업적을 감사하며 엔터프라이즈 전 주민의 이름으로 이 탑을 세우노라.”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의 성도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넘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순종합시다. 더 큰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말입니다.




    창세기 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神)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욥기 7:7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 나의 눈이 다시 복된 것을 보지 못하리이다
    야고보서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욥기 7:16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욥기 10:9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 보내려 하시나이까 ?
    시편 103:14-16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요한복음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 시는 '아삽의 시 마스길' 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실제로는 다윗이 지은 시를 아삽이 읊은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기사와 이적을 상기시키고 다시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에서 씌여진 것 같습니다.

    역사의 교훈과 의미

    과거의 역사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교훈을 줍니다. 이러한 점에서 일반적인 역사 뿐만 아니라 교회사 그리고 우리 모임의 역사에 대해서도 자세히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전우주적인 경륜과 계획을 알면 현재 우리들이 처해 있는 위치를 조명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임의 역사를 알면 현재 우리들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말씀 안에서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초대교회가 이루어져 갔는지를 역사적으로 엮어 놓았습니다. 이 사도행전을 공부하면 성령에 의한 교회의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28장까지 되어있지만 28장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 역사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오순절에 성령이 오심으로 시작되었고 그 성령의 인도로 지금까지 교회의 역사가 펼쳐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역사를 경영해 가시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류가 이 세상에 창조될 때부터 그리고 인류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성경을 공부하고 이해하면 세상 사람들이 역사 의식을 가지고 역사를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정한 역사를 알 수 있고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성경을 통해서 역사의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굉장한 일입니다.

     시편 78편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고 또 들으면서도 줄곧 하나님을 떠나서 딴길로 가고 자꾸만 죄를 짓는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저지른 불순종의 죄는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저지를 수 있습니다.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

    "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시 78:1-2)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길을 걸어가고 그 다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하고 나중에 다윗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역사는 다 알수 있는 이야기인데 여기서는 왜 옛 비밀한 말이라고 했을까요?

     아마 당시 사람은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리기 때문에 비밀이라고 했을지 모르지만 그보다는 다른 뜻이 있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틀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5-7)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보낸 이 편지를 보면 지혜가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세상 지혜와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완전히 구별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혜는 연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만세 전에 미리 정한 것입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현재 이 세상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지혜는 전부 다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있던 하나님의 뜻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창세 전에 하나님의 마음 속에 품고 계시던 뜻이 시간을 따라서 이 세상 속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가 계시에 의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든 지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시기 전부터 가지셨던 하나님의 모든 지혜와 축복과 생명이 온전히 구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이 세상에 나타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알 수 있도록 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숨겨져 있는 지혜와 진리와 비밀을 우리가 아직은 다 맛보지 못했습니 다. 그 비밀은 무궁무진하게 깊은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작은 부분만을 맛보고 경험한 것 뿐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시 78:2)

    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 담겨 있는 그림자적이고 비유적인 비밀한 뜻을 성경 말씀을 통해서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후손들에게 전해준 진리의 말씀

    "이는 우리가 틀은 바요 아는 바요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 바라 우리가 이를 그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 능력과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시 78:3-4)

     이 시편 기자는 조상들이 전해준 이야기를 이 시로 읊었지만 그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는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이야기를 듣고도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요일 1:1-2) 

     사도 요한이 쓴 편지 내용은 시편 기자가 발표한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들은 바요 아는 바라고 말했는데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말씀을 눈으로 보고 주목하고 손으로 만졌다고 했습니다.

     구약과 신약이 이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은 어디까지나 본 바는 아닙니다. 보지는 못한 사실입니다. 구약은 조상들이 전해준 것을 들어서 아는 것인데 신약시대에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서 알았습니다. 그 만진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하나님의 생명을 이 세상에 나타내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생명이요 사람들이 만질 수 있는 생명입니다. 하나님 안에 감취었던 그 비밀이 사람들이 만질 수 있는 생명체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도 바로 이 비밀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려고 꾸며진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을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주목할 수 없는 시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회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 13:16-17)

    많은 선지자와 의인들은 구약시대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현재 우리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성령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영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영의 눈으로도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님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회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회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0-12)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구약의 선지자들은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였다고 했습니다.

     가령, 이사야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을 했지만 현재 우리들이 예수님을 아는 것처럼 알지는 못했습니다. 천사들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영광스러운 구원이 어떤 것인가 알지 못했습니다. 아직은 주님이 이 역사 속에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메시야에 대한 선입관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면 로마 정부를 엎어버리고 이스라엘이 온 세계를 다스리는 이상국가가 될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부활하신 다음에 성령이 오셔서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된 것,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받은 이것은 너무도 영광스럽고 귀한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 구원을 못받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 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11:39-40)

     구약시대에도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습니다. 오순절 이후로 이제는 실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교회의 역사가 이루어져 가고 있는데 이것이 더 온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역사 가운데 가장 풍성하고 아름다운 축복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큰 축복과 은혜와 생명의 시대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우리 마음이 힘이 없다면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받으면서도 자꾸만 딴길로 가면서 자꾸만 죄를 짓는 것과 같은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중단되지 않아도 지켜야 할 진리의 복음

    "여호와께서 증거를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열조에게 명하사 저회 자손에게 알게 하라 하셨으니 이는 저회로 후대 곧 후생 자손 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 자손에게 일러서 저희로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 계명을 지켜서 그 열조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은 하나님께 충성치 아니한 세대와 같지 않게 하려 하심이로다"(시 78:5-8)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선조들로 말미암아 진리의 말씀을 그 자손 들에게 들려주신 것은 조상들처럼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을 떠나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 너昌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인도하시고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 너는 무릇 초태생과 네게 있는 생축의 초태생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너의 아들 중 모든 장자된 자는 다 대속할지니라 장래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찜이냐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실새 그 때에 바로가 강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낳은 것을 사람의 장자로부터 생축의 처음 낳은 것까지 다 죽이신고로 초태생의 수컷은 다 여호와께 희생으로 드리고 우리 장자는 다 대속하나니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으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지니라"(출 13:11-16)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날을 기념해서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유월절에는 생축의 제일 먼저 난 것을 다 하나님께 드리는데 죽여서 드립니다. 사람은 죽여서 못 드리니까 사람 대신 양을 잡아서 드립니다. 이렇게 할 때에 이 사실을 모르는 후손들에게 왜 이렇게 하는가를 설명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유월절의 진리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 계속 흘러가도록 명령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유월절을 지켜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유월절 역사는 실지로 이미 다 이루어졌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유월절의 참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계속 지켜 왔습니다. 이미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것처럼 십자가에 달려서 이미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 유월절 양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미 오셨는데도 지금까지도 유월절을 지키는 것을 보면 종교라는 것이 참으로 무서운 것임을 느낍니다.

     우리 영혼 속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져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변화를 받는데 이것이 시일이 흐르면서 점차 변질이 되어갑니다. 구원의 문제를 수박 겉핥기 식으로 간단히 생각하고 넘어가 버리는 경향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가짜가 얼마나 많이 생겨나는지 모릅니다.

     우리 모임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는 한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다 둘러앉아 같이 찬송 부르고 간증도 듣고 혹시 구원이 아닌가 싶으면 또다시 점검해 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꼼꼼히 따져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구원받았다고 하면 별로 묻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얼렁뚱땅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번씩 수양회 하면 몇 천 명씩 구원받았다고 손 들고 일어나니까 그중 가짜도 상당히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문제도 이제 너무 형식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구원받고 신앙생활할 때에는 목숨을 걸어놓고 살았는데 요즈음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것이 우리 속에 나타나서 우리가 그 큰 생명에 참여한 것이 너무도 큰 일인데도 요즈음 사람들은 구원을 그렇게 감사히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만일 이렇게 세월이 오래 흘러가서 복음이 한 세대가 지나가면 그 다음에는 완전히 종교로 변하기 쉽습니다. 옛날에 장로교 안에서도 구원의 역사가 있었고 감리교 안에도 웨슬리에서 시작된 굉장한 구원의 역사가 있었지만 점차 변해가서 종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같은 성경을 읽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생명 자체가 빠져 나가버리면 형식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히 2:3)

     이같이 큰 구원은 창세 전에 하나님이 감춰놓았던 비밀인데 이 엄청난 구원을 받고 우리가 과연 구원받은 사람답게 생명을 걸고 사는가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

     이제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자신을 위해 사는 게 아니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도 현실적으로는 우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간이 있거나 생활 의 여유가 있을 때 주님을 위해서 조금 희생을 하겠다는 정도로 살아가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우리 한 시대에서 중단이 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시면 들림받을 사람들이지만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는 날 속에서 계속 이 복음이 확장이 되고 전해지는 역사가 계속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들이 많은 것입니다.

     자손들로 하여금 유월절의 뜻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하도록 명하셨지만 나중에는 유월절이 완전히 형식이 되어버리고 그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알맹이는 빠져버리고 그냥 형식만 끌고 나가면 종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지난날에 바울과 믿음의 용사들 그리고 디엘 무디나 웨슬리, 스펄젼 같은 이들로 인해서 지금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져 주님의 은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사와 말씀을 잊어버린 민족

    "에브라임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저희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 율법 준행하기를 거절하며 여호와의 행하신 것과 저희에게 보이신 기사를 잊었도다"(시 78:9-11)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우상숭배를 한 결과로 나중에 두 나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를 중심으로 한 북쪽 이스라엘 남쪽의 유다로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솔로몬 왕 다음에 여로보암 때에 나라가 둘로 갈라져 버렸습니다.

    "옛적에 하나님이 애굽 땅 소안 들에서 기이한 일을 저희 열조의 목전에서 행하셨으되 저가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같이 서게 하시고 저회로 지나게 하셨으며 낮에는 구름으로 온 밤에는 화광으로 인도하셨으며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갈이 저희에게 물을 흡족히 마시우셨으며 또 반석에서 시내를 내 사 물이 강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저희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황야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저희가 저희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여 그 심중에 하나님을 시 험하였으며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 저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매 시내가 넘쳤거니와 또 능히 떡을 주시며 그 백성을 위하여 고기를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심이여 야곱을 향하여 노가 맹렬하며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가 올랐으니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연고로다 그러나 저가 오히려 위의 궁창을 명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저희에게 만나를 비갈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으로 주셨나니 사람이 권세 있는 자의 떡을 먹음이여 하나님이 식물을 충족히 주셨도다 저가 동풍으로 하늘에서 일게 하시며 그 권능으로 남풍을 인도하시고 저희에게 고기를 티끌갈이 내리시니 곧 바다 모래 갈은 나는 새라 그 진중에 떨어지게 하사 그 거처에 둘리셨도다 저희가 먹고 배불렀나니 하나님이 저희 소욕 대로 주셨도다"(시 78:12-29)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면 참으로 완악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이적을 보앗으면서도 얼마 되지 않아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따라오고 앞에는홍해가 가로막혀 있을 때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가리키자 홍해가 갈라져 이스라엘 민족이 마른 땅을 걷는 것처럼 홍해를 건넜고 뒤를 추격해 오던 애굽의 군대가 수장되는 큰 이적을 보았지만 광야에 왔을 때에 물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말씀을 소화하지 못하는 신앙생활과 하나님의 징계

    "저희가 그 욕심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저희 식물이 아직 그 입에 있을 때에"(시 78:30)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월 십오 일이라 이스라엘 은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결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회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1-3)

     이스라엘 민족이 물이 없다고 원망하였을 때에 물을 주셨고 배가 고프다고 원망했을 때에 만나를 내려주셨지만 그들은 계속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하루 분만 거두라고 하셨는데도 욕심을 부려서 많이 거두어 남은 만나가 썩어 버리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현재 우리들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보통 성경만 많이 읽으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을 읽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성경 말씀이 생활에서 소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동과 실천이 없이 성경만 많이 읽으면 영적인 소화 불량이 되는 것입니다. 만나는 한끼 이상 두끼를 모아오면 한끼 외에는 다 썩어 버렸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서 그 먹은 것을 소화하는 생활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그리스도인이 서로 사랑하고 도우면서 모임에서 함께 움직이는 생활입니다. 어떤 사람은 귀만 높아 듣기는 하지만 실천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들은 바 말씀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지나친 욕심을 내어서 만나를 끌어 모으고 메추라기를 배가 부르게 먹었을 때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저희를 대하여 노를 발하사 저희 중 살진 자를 죽이시며 이스라엘의 청년을 쳐 엎드러뜨리셨도다"(시 78:31)

     그들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배불렀을 때에 그 청년들을 치신 것을은 무언가를 깨닫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종종 어려운 일이 생기게 하신것은 그들이 뭔가를 반성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민족은 완악하여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완악한 마음

    "그럴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범죄하여 그의 기사를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저희 낳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저희 해를 두렵게 지내게 하셨도다 하나님이 저희를 죽이실 때에 저희가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요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회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그러나 저회가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저희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치 아니하였음이로다"(시 78:32-37)

     이스라엘 민족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는데 이 만나는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입니다.

    "내 삶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삶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4-55)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온 양식이고 만나라는 것은 누누히 설명드린 바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다음에도 계속적으로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먹으면서 산다는 것은 십자가의 진리를 계속적으로 알아가면서 믿음이 성장해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의 피로써 영원히 해결이 되었지만 시간이 지났어도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평생의 과정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말이 죽는다는 뜻입니다. 내가 죽은 만큼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살아납니다. 바울은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경험을 간증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평생의 생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번 안식을 깨달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그것으로 다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여전히 죽음을 경험하면서 살아가야 할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항상 육신이 무너져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 속에서 고통하고 괴로워했던 것처럼 여러 가지 시련과 어려운 일들이 많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가 차츰 차츰 내 자신이 죽어가고 점점 주님이 내 안에 새 생명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를 눈으로 보았으면서도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지으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현재 사람들을 위해 이 일에 대한 교훈으로 이 시편을 쓴 것입니다.

    참으로 포용력이 넓으신 하나님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시 78:38-39)

     하나님의 백성들이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시험하기도 하는 때에 그 행한 일에 대해서 응분의 조치를하나님이 하셨다면 그들은 다시 심판을 받아 죽어 벗어져 버렸을 것입니다. 현재도 교회 안에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들이나 죄를 짓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가 깊이 니우쳐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만일 이것을 하나님이 죄대로 처리하신다면 우리가 살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죄가많고 하나님께 합당치 않는 면이 많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당장에 심판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육체뿐인 흙뭉치이고 가치 없는 나약한 존재들인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멸하지 않으시고 진노를 참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똑똑한 것같이, 선한 것같이 여기면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합니다. 내 열심이나 노력은 하나님 앞에 인정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아니고 내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만을 인정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주님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만 인정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 육체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거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무가치한 것을 아시기 때 문에 자비하신 마음으로 우리를 살려주시고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가슴이 넓으십니다. 포용력이 넓으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죄도 짓고 원망을 해도 하나님은 그 넓은 가슴으로 우리를 안아 주십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의 생명을 보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하나님은 우리 육체를 보시지 않고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의 생명을 보십니다. 주님의 생명에 근거를 두고 하나님은 일을 해나가 십니다. 그냥 우리 자신으로서는 아무 보잘 것이 없고 쓸모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우리는 자신이 이 바울의 간증처럼 하나님 앞에 가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뭘 조금 했다고 하나님이 그것을 인정해주시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하느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정직하게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야 자기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를 알 수 없습니다. 양심적으로 정직하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열심을 다해서 사는 사람은 나중에 가서 자기는 정말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는 죽은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지 않는 사람은 항상 물에 물 타놓은 것 같은 태도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하는 죄

    "저희가 광야에서 그틉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번인고 저희가 돌이켜 하나님을 재삼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격동하였도다 저희가 그의 권능을 기억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구속하신 날도 생각지 아니하였도다"(시 78:40-42)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시험하는 죄를 짓고 죽음을 당한 일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고 성령을 시험하는 일은 큰 잘못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내려보라고 시험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지금 우리도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시험하기 쉬운 많은 여건들이 종종 생겨납니다. 그런 여건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지 아닌지 따지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내 생각을 초월해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과 은혜 속에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자신을 완전히 맡겨버리는 것이 믿음의 생활인데도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하는 것입니다.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민 14:22-23)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는 장정만 해도 육십만이 나왔는데 애굽에서 나온 사람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 말고는 한 사람도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나안 땅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마음의 안식을 얻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교회가 형성되는 것이고, 역사적으로는 주님이 오시면 이루어질 천년왕국이 가나안 땅입니다. 구원받고 나서도 육신대로만 사는 사람은 육신이 심판되지 않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롯의 처가 그러한 경우입니 다. 육신의 소욕대로만 흘러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시험하면서 살아가게 되는데 거기에는 징계가 뒤따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이 바로 이 육신입니다.

    하나님과의 심판과 징계

    "그 때에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 징조를 소안 들에서 그 기사를 나타내사 저희의 강과 시내를 피로 변하여 저회로 마실 수 없게 하시며 파리 떼를 저희 중에 보내야 물게 하시고 개구리를 보내어 해하게 하셨으며 저희의 토산물을 황충에게 주시며 저희의 수고한 것을 메뚜기에게 주셨으며 저회 포도나무를 우박으로 저희 뽕나무를 서리로 죽이셨으며 저희 가축을 우박에 저희 양떼를 번갯불에 붙이셨으며 그 맹렬한 노와 분과 분노와 고난 곧 벌하는 사자들을 저희에게 내려 보내셨으며 그 노를 위하여 치도하사 저희 혼의 사망을 면케 아니하시고 저희 생명을 염병에 붙이셨으며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 기력의 시작을 치셨으나 자기 백성을 양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떼같이 지도하셨도다 저희를 안전히 인도하시니 저희는 두려움이 없었으나 저희 원수는 바다에 엄몰되었도다 저희를 그 성소의 지경 곧 그의 오른손이 취하신 산으로 인도하시고 또 열방을 저회 앞에서 쫓아내시며 줄로 저희 기업을 분배하시고 이스라엘 지파로 그 장막에 거하게 하셨도다 그럴지라도 저희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며 반성하여 그 증거틀 지키지 아니하며 저희 열조갈이 배반하고 궤사를 행하여 속이는 활같이 빗가서 자기 산당으로 그 노를 격동하며 저희 조각한 우상으로 그를 진노케 하였으매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실로의 성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 그 능력된 자를 포로에 붙이시며 자기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그 백성을 또 칼에 붙이사 그의 기업에게 분내셨으니 저희 청년은 불에 살라지고 저 희 처녀에게는 혼인 노래가 없으며 저희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고 저희 과부들은 애곡하지 못하였도다"(시 78:43-64)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 그 땅을 나누어 가지고 살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가나안 땅에서 이방 사람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고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주변에 있는 이방 사람들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완전히 멸망하여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들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고 세상의 공격을 받는데 이것이 단순하게 핍박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한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에 회개할 줄 아는 마음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모임만 하더라도 상당히 잘못된 부분이 많습니다. 우리가 조용히 생각해서 개인적으로나 모임 차원에서나 잘못된 일들은 솔직히 시인하고 그 잘못을 뉘우쳐야 합니다. 주님 앞에 우리가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모임 안에도 여러 가지 죄들이 많습니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가 징계를 받아야 할 많은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일들이 반드시 핍박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더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낮아진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직접 죄를 짓지 않았어도 우리의 죄이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 형제의 죄도내 죄이고 다 우리들의 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어려움을 당하고 이방 군대들이 와서 치는 일이 바로 징계였습니다. 그때는 마치 하나님이 주무시는 것 같고 하나님이 아무것도 안하시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약속을 반드시 이행하시는 하나님

    "때에 주께서 자다가 깬 자갈이 포도주로 인하여 외치는 용사같이 일어나사 그 대 적을 쳐 룰리쳐서 길이 욕되게 하시고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시 78:65-68)

     다윗은 모든 이방인의 세력을 다 무찔러 버리고 가나안 땅을 통일하는데 그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죄 지은 것까지 그림자는 아닙니다만 여호수아 이래로 완전히 정복을 못했던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다윗의 생애 자체가 예수님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 아들 솔로몬은 성전을 짓게 되는 데 솔로몬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솔로몬 왕은 영광의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잠자는 자 중에서 깬 것같이 떨치고 일어나셔서 하나님이 옛날부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약속을 실행하십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난 백성이지만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큰 일을 마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키시는 주님

    "그 성소를 산의 높음갑이 영원히 두신 땅같이 지으셨으며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시 78:69-72)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흙덩이 같은 우리 인간들이지만 그래도 결국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마지막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때로는 어려움을 당하고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고난을 받고 때로는 징계를 당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계속 주무시지는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틀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 121:3-4)

     하나님은 계속 우리를 통해서 하실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주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과 주님을 맞이할 비젼을 가지고 더욱 힘차게 남은 날들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시인은 우리가 죄악을 사함받고 멸망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 인함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처음 스스로를 반포하실 때에도 "여호와로다 여호와로다 자비롭고 은해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출 34:6) 라고 하나님의 자비의 속성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느낄때 비로서 우리 안에서 요동치던 많은 번민들이 사라졌던 지난 기억들을 통해 더 쉽게 공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존 칼빈의 경우도 "하나님에 관한 이와 같은 인식은 산 경험으로 되는 것이지 공허하며 과장된 사색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기독교강요/1.10.2)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다른 시편에서 다윗도 이와 비슷한 체험의 고백을 하고 있음을 기억합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23:6). 다윗은 수많은 고난중에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늘 삶을 통해 가깝게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 체험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인식을 통해 자신의 삶이 지상의 삶에서부터 시작해서 저 천상의 영원한 삶으로 이어질 것임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으로 기억하셨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를 다른 시편에서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시103:15)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시인의 고백처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같은 인생을 불쌍히 여겨 주시는 주님의 선하심에만 우리 구원의 근거를 두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처지를 분명히 기억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여러가지 상한 몸과 마음의 문제로 고난을 당하고 계신 우리 성도님들에게 주님의 그 크신 자비가 임하기를 바라며 기도드립니다.

    존 칼빈 주석 / 시편 78:39
    시편 103편13-16절에서 이와 유사한 말,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시는데 그것은 인간이 풀과 같은 존재여서 곧 시들고 건초같이 마른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말을 접하게 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오직 비참함을 발견하고 우리를 동정한다면 우리를 지켜주도록 그를 움직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순수하심과 그의 과분한 선하심이다.




    이솝우화에서 얻는 예화 14가지

    일중독_열심히 일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을 죽일 수 있다.

    대장간에 들어간 족제비와 칼

    족제비 한 마리가 대장간에 들어섰다. 칼 한 자루를 보이기에 족제비는 칼을 혀로 핥았다. 칼을 혀로 핥으니 날카로운 칼날에 혀가 베여 피가 스며 나왔다. 피 맛을 본 족제비는 칼에서 피가 나오는 줄 알고 계속 혀로 칼을 핥았다. 결국 족제비의 혀는 칼날에 베이고 닳아 없어지고 말았다.

    은사_부르심에 따라 살라

    이슬을 먹다 굶어 죽은 당나귀

    여치의 울음소리에 훔뻑 빠진 당나귀가 여치에게 물었다. “ 너는 어떤 음식을 먹기에 그렇게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지게 됐니?” 여치는 “이슬!”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여치의 울음소리를 가지고 싶었던 당나귀는 앞으로 이슬만 먹고 살겠다고 다짐했다. 결국 이슬만 핥아먹던 당나귀는 며칠 후 굶어 죽고 말았다.

    혼자 싸우지 마라_어려운 상대를 대하는 법

    개와 수탉과 여우

    친한 친구 사이인 개와 수탉이 여행을 가다가 밤이 늦어 잠을 자고 가기로 했다. 수탉은 나무 위로 올라가고, 개는 나무 아래 움푹 패인 곳에서 잠을 잤다. 새벽이 되자 수탉은 평소처럼 “꼬끼오, 꼬끼오!” 새벽을 알리며 울었다. 나무 근처에서 수탉의 울음소리를 들은 여우는 나무 아래로 와서 수탉에게 “울음소리가 너무 멋있다.”며 “가까이에서 들어보고 싶으니 내려오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여우의 수작을 알아차린 수탉은 “내가 내려가려면 밑에 있는 문지기한테 문을 열어달라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을 믿은 여우는 자는 개를 깨웠고, 여우를 본 개는 그 자리에서 여우를 물어 죽였다.

    지금의 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_가능성을 보라.

    번데기를 놀린 개미

    화창한 봄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먹이를 찾아 분주히 돌아다니던 개미 한 마리가 길거리에서 번데기를 만났다. 개미와 번데기는 서로 처음 만났다. 꾸물꾸물 몸을 움직이지만 제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 번데기를 보며 안됐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불쌍한 운명을 타고난 동물이잖아. 나는 다니고 싶은 곳에 맘대로 다니고, 심지어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쯧쯧” 번데기는 개미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며칠 후, 개미는 번데기를 만난 곳을 다시 지나가게 됐다, 그 자리에서 번데기의 빈껍데기만 놓여 있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 갑자기 개미의 머리 위에 그늘이 지더니 멋진 날개를 펼친 나비가 개미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보게, 개미 친구. 지난번처럼 자랑 좀 해보시지.” 나비는 멋진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 높이 날아올라 개미의 눈에서 사라져버렸다.

    선동에 휘둘리지 마라

    꼬리가 잘린 여우

    여우 한 마리가 덫에 걸렸다 간신히 탈출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우는 꼬리가 덫에 걸려 싹둑 잘리고 말았다. 꼬리가 잘린 여우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고민하다가 불현듯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여우는 여우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꼬리를 자르는 게 어떨까요? 원래 꼬리는 사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꼬리가 없어지고 나니 오히려 몸도 가벼워지고 번거롭지도 않아 덫에 걸릴 일도 없어 아주 좋습니다.” 이때 나이가 많은 늙은 여우가 나와서 말했다. “만일 네 꼬리가 덫에 잘리지 않았다면 이런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을걸!” 그 얘기를 들은 여우들은 꼬리 잘린 여우를 보고 깔깔깔 웃어댔다. 톡톡히 창피를 당한 여우는 뒤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Equipping_일을 가르치지 않는 사람 밑에서 일하면 C급 인재가 된다.

    포도밭에 보물을 숨긴 농부

    병상에 누워 죽음을 앞둔 농부가 있었다. 농부는 임종을 앞두고도 농사를 지어보지 않은 자식들이 자신이 죽고 나면 포도밭을 팔아 흥청망청 써버릴 것 같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농부는 자식들을 모두 불러 모아 다음과 같이 유언을 했다. “내가 너희를 위해 포도밭에 보물을 숨겨 놓았으니 그것을 찾도록 해라.” 농부는 유언을 남기고 결국 죽음을 맞았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자마자 포도밭을 파헤쳤다. 포도밭을 죄다 파헤쳤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보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자식들이 포도밭을 파헤친 것이 오히려 포도밭을 잘 가꾼 형국이 돼서 그해 포도 농사에서 풍작을 거뒀고, 자식들도 큰돈을 벌었다.

    진실함_솔직함이 최고의 무기이다

    배가 부른 늑대와 어린양

    먹이를 잔뜩 먹어 배가 부른 늑대와 어린양이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됐다. 어린양이 늑대가 무서워 꼼작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하지만 배가 부른 터라 굳이 어린양을 잡아먹을 생각이 없었던 늑대는 어린양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만일 자신에게 세 가지 진실을 말한다면 어린양을 잡아먹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어린양은 “다시는 늑대를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늑대가 눈이 멀었으면 좋겠다.” 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늑대들이 모두 죽어버려서 양들이 늑대를 만날까 걱정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늑대는 어린양의 말이 모두 진심이라는 걸 인정하고 어린양을 살려 보내주었다.

    중보기도(알리라)

    -혼자서 당하지 마라. 주변에 상황을 알려라

    피리 부는 늑대와 춤추는 어린양

    어린양 한 마리가 무리와 떨어져 놀고 있다가 늑대에게 잡혔다. 잡아먹힐 위기에 처한 양은 늑대에게 “죽는 마당에 춤이라도 추다가 죽게 해달라.”고 부탁하면서 피리를 내밀었다. 늑대는 피리를 불기 시작했고 어린양은 춤을 췄다. 그때 피리 소리를 듣고 양을 지키던 개들이 달려와 늑대를 쫒아냈다. 늑대는 도망치면서도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피리를 분 자신을 참 한심한 늑대라고 생각했다.

    방심을 금물(영적경계)

    -목소리를 낮추고 고개를 숙여 경계심을 없애라

    당나귀 발에 턱뼈가 날아간 늑대

    목장 근처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던 당나귀는 자신을 잡아먹으려 살금살금 다가오는 늑대를 발견했다. 그러나 이미 도망갈 수 없는 가까운 거리다. 당나귀는 다리를 절뚝거리다가 늑대를 보고 깜짝 놀란 척했다. 늑대는 당나귀에게 “넌 어쩌다가 불구가 됐니?”라고 물었다. 당나귀는 “목장 울타리를 넘다가 날카로운 가시가 발에 박혔다.”라고 말하곤 “날 잡아먹을 때는 목에 가시가 박히지 않도록 미리 빼놓고 먹으라.”고 말했다. 당나귀는 다리를 들었고 늑대는 온 신경을 집중해서 당나귀 다리에 박혔다는 가시를 찾고 있었다. 바로 그때, 당나귀는 사정없이 늑대의 턱을 뒷발로 차버렸고, 늑대는 이가 몽당 날아가 아픔 때문에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인생

    사자 굴로 도망간 암사슴

    암사슴 한 마리가 사냥꾼에게 쫓기고 있었다. 정신없이 도망가다가 동굴이 보이자 동굴로 뛰어들었는데 불행하게도 사자가 살고 있는 굴이었다. 사자는 암사슴이 동굴로 들어오는 것을 눈치 채고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동굴 깊숙이 들어온 암사슴을 잡아먹었다. 암사슴은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좀 더 도망갈걸. 동굴에 숨으면 살 줄 알았지. 겨우 사잣밥 되자고 사냥꾼을 피했단 말인가.”

    때를 기다리라_때론 시간이 해결해 준다.

    구멍에 갇힌 여우

    굶주린 여우가 먹이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커다란 나무에 뚫린 구멍 속으로 양치기가 먹으려고 놓아둔 음식을 발견했다. 여우는 좁은 구멍으로 들어가 음식을 마음껏 먹었다. 배가 잔뜩 부른 여우가 밖으로 나오려 했는데 나오려 했는데 배가 너무 불러서 도저히 나무 구멍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여우는 자기의 행동을 후회하며 이제 죽게 됐다며 엉엉 울었다. 그때 나무 옆을 지나던 늙은 여우가 우는 여우에게 사정을 물었다. 사정을 들은 늙은 여우는 웃으며 “걱정하지 말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배가 쏙 들어가 나올 수 있을 거야.”라고 여우를 안심시켜주었다.

    “낙심하지 마라” 당신이 최악인 것 같다구?

    토끼와 개구리들

    토끼들이 모여 심각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토끼들은 항상 맹수의 공격에 떨고 있으며 맹수에게 무참히 찢겨 잡아먹히는 동료를 봐야 하고, 쫓기고 도망 다니는 것이 삶의 전부라며 한탄했다. 토끼들은 더는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모두 죽어버리자고 결의했다. 토끼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물에 빠져 죽으로 호수로 향했다. 호수에 가까워질 즈음 갑자기 개구리들이 혼비백산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본다. 토끼들은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토끼들이 무서워 도망치는 개구리 떼를 보고 오히려 힘을 얻은 것이다.

    신중_잘못된 판단이 재앙을 부른다.

    제비를 보고 외투를 팔아버린 남자

    부자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다. 부자는 죽으면서 아들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었다. 부자의 아들은 놀고먹는 것이 몸에 밴 사람으로 재산을 물려받은 후 놀고먹는데 온 힘을 쏟았다. 결국 모든 재산을 탕진해 남은 거라곤 외투 한 벌뿐인 상태가 됐다. 겨울이 가고 봄이 가까워져 오는 어느 날, 부자의 아들은 제비 한 마리를 보게 된다. ‘아! 이제 봄이 됐구나!’라고 생각한 부자의 아들은 남은 외투마저 팔아버렸다. 그런데 이게 웬걸! 길바닥에는 너무 일찍 강남에서 돌아온 제비가 얼어 죽어 있는 것이다. 며칠 후 부자의 아들도 길에서 얼어 죽고 말았다.

    아빠 게와 새끼 게

    해변에 아빠 게와 새끼 게가 있었다. 옆으로 기어가는 새끼 게를 보고 아빠 게가 “왜 똑바로 걷지 않고 옆으로 걷는 거니?”라고 했다. “그럼 아빠가 한 번 시범을 보여주세요.”라고 새끼 게가 말했다. 아빠 게가 시범을 보였다. 아빠 게도 새끼 게와 마찬가지로 옆으로 걸었다.








    7월 1일(화) 시편 68-72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의 판단력과 주의 의(72:1)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Endow the king with your justice, O God, the royal son with your righteousness.

    시편 150편 중에서 "왕의 시"라고 일컫는 시는 "2편, 24편, 45편, 72편"이라고 합니다.
    왕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주의 판단력이며 왕의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의 의라고 합니다.
    왕은 다윗을 말합니다.
    왕의 아들은 솔로몬을 말합니다.
    따라서 다윗에게는 주의 판단력을, 솔로몬에게는 주의 의를 주옵소서 하고 간구합니다.

    자유대한민국의 현실을 생각할 때 다윗과 같은 통치자 그 대를 잇는 솔로몬과 같은 지도자가 그립습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경제부흥 대통령 박정희
    그 대를 잇는 대통령을 기다리는 것은 무모한 일인가?
    아니면 간절히 기다려야 하는가?

    정신이 피폐해진 경제부흥의 결말은 거짓의 탈을 쓴 사람을 선호하고
    무조건 잘 살아야 한다는 헛된 꿈의 결과
    범법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도 오히려 어깨를 으쓱이며
    나라와 민족의 장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주의 판단력(your justice) 4941 미쉬파트(mishpâṭ)  מִשְׁפָּט

    1. 판단.  2. 레 19:15. 3. 욥 9:32
    발음 [ mishpâṭ ]
    어원 / 819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24회 사용

    주의 의(your righteousness) 6666 체다카(tsedâqâh)  צְדָקָה

    1.  올바름.  2.  정의.  3.  의로움
    발음 [ tsedâqâh ]
    어원 / 666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57회 사용
    관련 성경  /  의(창 15:6, 삼하 8:15, 잠 11:5), 의로움(신 6:25, 24:13, 사 5:7), 공의(신 33:21, 왕상 3:6, 사 10:22), 권리(느 2:20), 정의(암 5:7, 6:12, 슥 8:8).
    [형] 의로운(삿 5:11, 대하 6:23, 시 11:7), 옳은(삼하 19:28), 적당한(욜 2:23).

    * 6663. 차다크(tsâdaqצָדַק    
    1. 올바르다.  2. 정당한 이유를 가지다.  3. 창 38:26
    발음 [ tsâdaq ]
    구약 성경  / 41회 사용

    시편 72편 1~7 주의 판단력과 지혜를 주소서

    ➜ 1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이 시를 솔로몬의 시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고 다윗의 시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솔로몬의 시라고 말하는 자들은 이 시의 제목이 “솔로몬의 시”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다윗의 시라고 말하는 자들은 20절이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 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느 의견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건 다윗 왕이나 솔로몬 왕이 기록한 시인 것은 맞다.
    이 시에서 시인은 주의 판단력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왜 판단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걸까?
    판단력이 바로 지혜이기 때문이다.
    지혜는 바르게 판단하고 선택하는 능력이다.
    또한 우리 인생은 우리의 판단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결혼도 우리들의 판단에 의해 결정된다.
    누구와 결혼할지는 우리들의 판단의 결과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과 결혼했는지가 우리의 인생을 결정한다.
    왕이 될 사람을 선택했다면 왕비로 살게 되고, 거지가 될 사람을 선택했다면 거지가 된다.
    좋은 사람과 결혼했다면 행복하게 살고, 악인과 결혼했다면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한 번의 판단으로 우리 운명이 결정된 것이다.

    그래서 시편 72편의 저자인 왕은 판단력을 하나님께 구한 것이다.
    특히 왕의 판단력은 굉장히 중요하다.
    왕의 판단력으로 인해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결정된다.
    모든 백성들의 운명이 좌지우지 되는 것이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을 하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
    또한 자신의 죄를 무마하고자 밧세바 남편 우리아를 죽이기로 선택했다.
    이렇게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다윗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왕의 판단력은 특히 더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주의 판단력을 달라고 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주의 판단력”이라는 말에 주목하자.
    판단력은 “주님의 것”이다.
    바른 판단력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온다.
    그래서 잠언은 지혜의 근본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바르게 판단하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지혜와 바른 판단력을 주시는 것이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후에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깨지자 다윗은 계속해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니 지혜를 잃게 되고 잘못된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교훈 삼아서 우리들은 늘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기를 힘써야 한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도록 애써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지혜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가 바른 판단을 하게 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라.
    우리가 잘못된 판단이나 선택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던 때를 생각해 보라.
    그 때 나와 하나님 관계를 생각해 보라.
    그 때 나는 과연 성령 충만 했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속에 있어야 한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의 지혜나 명철을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그럴 때 가장 바른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잠언 3:5-7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지 말고 여호와를 경외하고 악을 떠나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신다.
    우리가 가장 지혜로운 판단과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이후로 주의 판단력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롤 소유하길 바란다.

    하나님, 주님과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의 지혜와 바른 판단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로 인해 내 주변에 의인들이 넘쳐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시편 제 3권 72편을 마치고 내일부터 12일 동안 전도서 말씀을 보고 다시 시편 4권 73편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이렇게 5권은 시가서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만난 이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록한 성경입니다.

    시가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2.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오늘 말씀은 다윗이 아들 솔로몬을 위한 시편입니다.
    다윗의 고백이며 솔로몬의 고백입니다.

    1절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할 때의 말하는 이는 다윗을 나타내고 왕은 솔로몬을 나타냅니다.
    오늘 시편에 나타나는 왕은 다윗이며 솔로몬 왕이면서 한편 왕으로 오실 메시야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세상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영원하지 않았지만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영원합니다.

    ‘주의 판단력’은 의와 같은 개념입니다.
    아버지 다윗은 아들 솔로몬이 자신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백성들의 송사를 바르게 판단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바른 판단력과 지혜와 공의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의 공의’는 ‘정의, 공평, 공의’로 판단 즉 재판의 필수 요건입니다.
    왕의 판결은 하나님을 대신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 판단하여야 됩니다.
    만일 왕이 하나님의 지혜와 공의를 사모하고 사랑함이 없다면 백성들이 무고하게 고통을 당하고 하나님의 공의는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겸손의 왕이 오셔서 다윗과 솔로몬이 다 이루지 못한 참 평강과 참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참 왕이 오시어 심령이 가난하여 애통하고 자신의 죄로 마음을 찢는 상한 심령들의 아픔을 위로하시고 그 억울함을 풀어주시며 그 죄의 짐에서 놓임으로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십자가 우리구주 예수그리스도 평강의 왕이 오셔서 하신 일입니다.

    8. 그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9. 광야에 사는 자는 그 앞에 굽히며 그의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10.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11.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

    의의 왕 곧 장차 오실 메시야 예수그리스도의 통치가 열방 땅 끝까지 이르게 될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이방의 나라들이 주님 앞에 엎드릴 것이며 원수들은 땅바닥의 먼지를 핥을 정도로 무릎을 꿇고 엎드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주님이시고 승리의 주님이십니다. 세계만민이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경배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21:10-11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요한계시록 7:4, 9-10
    4.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열방이 지금 지금 잡은 귀하고 값진 생선들을 왕 되시는 주님 앞에 예물로 드리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그 날에 주님께서 사람 낚는 어부 된 우리에게 지금 잡은 생선을 보자고 하실 것입니다.
    그 때 귀한 생선을 주님 앞에 데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18.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19.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우리 안에 스스로 하나님의 일 한다 말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홀로 우리를 위하여 기이한 일을 행하신다 고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온 땅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며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온 세상에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이 터키 땅이 메시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가득한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택하신 족속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과 십자가 예수그리스도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 구원을 얻게 하시고 그 지혜와 공의와 아름다운 십자가 복음의 덕을 열방에 선포하고 전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택하고 세우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이 아들 솔로몬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택하신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판단력과 공의가 가득하기를 구하시는 기도입니다.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택하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 '판단역'(미쉬파팀)은 '다스리다', '재판하다'의 뜻인 동사 '솨파르'에서 파생되었으며, 원래 '공의', '재판' 등을 뜻하나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통치적인 지혜(C. B. Moll, Rawlinson, Calvin, kidner)로 이해된다.
    이는 솔로몬이 집권 초기에 백성들을 정의롭게 잘 다스릴 수 있기 위한 지혜를 하나님께 구한 바 있었던 점과도 일맥 상통한다(왕상 3:1-12).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 여기서 '의'(체다카)는 본 문구가 앞 문구와 동의적(同意的) 대구(對句)라는 점에서 앞의 '판단력'과 같은 뜻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군주들에게는 공평한 통치가 율법에 의해서 특별히 명령이 되었다(출 23:3, 6)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 단어는 '율법의 기준에 부합되는 옳은 행실'이라고 하는 폭넓은 뜻을 아울러 시사한다(Kidner).
    한편 '왕의 아들'은 솔로몬을 가리킨다.
    이처럼 솔로몬이 자신을 '왕의 아들'로 묘사한 까닭은 자신이 다윗의 후계자임을 암시하기 위함인 듯하다.
    즉 솔로몬은 자신이 다윗의 후계자임을 이처럼 암시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견고하게 하시겠다던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키며(삼하 7:12, 13).
    그래서 그 언약 당사자의 아들인 자신에게 이스라엘을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게끔 해주는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정확한 판단을 구성하는 6가지 요소들

    앤드루 리키어먼(Sir Andrew Likierman)은 런던경영대학원 교수이자 영국의 타임스뉴스페이퍼스와 비즐리그룹 이사다. 런던경영대학원 학장과 영국중앙은행 이사를 역임했다.

    누군가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필요한 정보들이 수집됐고, 택할 수 있는 옵션들에 대한 찬반양론도 모두 나왔지만, 그중 하나를 택할 수 있는 분명한 근거가 없다. 회의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이제 CEO만 쳐다본다. 그들이 지금 원하는 건 옳은 선택을 가리키는 증거를 해석할 줄 아는 좋은 판단력이다. <판단력: 위기에 빛을 발하는 리더의 첫 번째 조건>의 공동저자인 노엘 티시Noel Tichy와 워런 베니스Warren Bennis는 ‘모범적인 리더십의 핵심’으로 판단력을 꼽는다. 판단력이란 개인의 자질에 적절한 지식 및 경험을 결합해 의견을 형성하고 결정을 내리는 능력이다. 판단력은 명확하고 적절한 데이터나 뚜렷한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타당한 선택을 내릴 수 있게 한다. 물론 사람은 다들 관점을 형성하고 증거를 해석하는 능력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판단력이다.

    무엇이 좋은 판단력을 이루는지 이해하기 위해 지금까지 엄청난 잉크가 소모돼 왔다. 어떤 전문가들은 좋은 판단력을 후천적으로 습득된 본능이나 ‘직감’으로 규정한다. 부지불식간에 풍부한 경험과 분석력을 어떻게든 결합시켜 통찰력을 낳거나 다른 이들이 놓치는 패턴을 파악하는 능력으로 보는 견해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정의가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판단력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이를 어떻게 습득하는지, 혹은 무엇이 좋은 판단력인지를 알아차리기라도 하는 수준으로 넘어가기란 어려운 일이다.

    필자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세계 최대 기업부터 스타트업까지 다양한 유형의 기업 CEO들과 만나 대화를 나눴다. 법률회사나 회계법인의 시니어 파트너는 물론 장군, 의사, 과학자, 목사, 외교관 등 전문직 분야의 리더들도 만났다. 그들에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보여준 판단력에 대한 의견을 요청했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새로운 통찰력을 위한 환경을 집단적 차원에서 조성해서 남들이 놓치는 패턴을 포착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기술과 행동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는 또 리더십과 심리학 관련 문헌도 살펴봤다.

    판단력이 좋은 리더들은 남의 말을 잘 듣고 잘 읽는 경향이 있다. 덕분에 남들이 하는 말의 진짜 의미를 알아채고 남들이 볼 수 없는 패턴을 파악할 수 있다. 그들은 남들이 지나치는 사실을 바탕으로 내용을 유추할 수 있는 폭넓은 경험과 관계를 갖고 있다.(심지어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을 잘 아는 지인이 있어서 그 사람의 판단에 의지할 수 있다.) 자신의 감정과 편견을 인식해 이를 판단의 방정식에서 제거할 줄도 알고, 자신이 고려하고 있는 일련의 선택지들을 확장하는 데에도 능숙하다. 마지막으로, 좋은 판단력을 갖춘 리더들은 현실 세계에 기반을 두고 의사결정을 내린다. 즉, 어떤 선택을 할 때는 그 실행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결정을 한다.

    리더들이 채택하는 업무방식, 그들이 쌓아가는 기술 및 일상에서 맺어가는 관계, 이 모든 것이 판단력에 영향을 미친다. 본 글에서는 좋은 판단력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 기본 요소를 살펴보고 이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할 것이다. 바로 학습, 신뢰, 경험, 객관성, 옵션, 결과 내기이다.

    1. 학습(LEARNING)

    주의 깊게 듣고 비판적으로 읽어라

    좋은 판단을 위해서는 지식을 완전히 소화해야 한다. 뻔한 말로 들리겠지만 항상 그렇듯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이 경우에는 학습방식이 그렇다. 많은 리더들이 들어오는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걸러내거나 자신이 듣고 읽는 것들을 충분히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섣불리 나쁜 판단을 한다.

    안타깝지만, 사실 자신이 접하는 정보를 제대로 흡수하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기대하지 않았거나 듣고 싶지 않은 내용은 걸러낸다. 이런 경향은 나이가 들어도 나아지지 않는다.(요컨대 아이들은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알아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그 결과 리더들은 주위에 정보가 있는데도 놓치고 만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을 과신하므로 이런 경향은 특히 뛰어난 능력자들의 취약한 특징이 된다.

    물론 예외도 있다. 필자가 존 뷰캐넌John Buchanan을 처음 만난 건 그가 40년간 눈부신 경력을 쌓아 올리던 시절의 초기였다. 그동안 그는 BP의 최고재무책임자가 됐고, 스미스앤드네퓨Smith & Nephew의 회장과 보다폰Vodafone의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아스트라제네카AstraZeneca, 얼라이언스 부츠Alliance Boots, BHP 빌리턴BHP Billiton의 이사로 활약했다. 존 뷰캐넌을 처음 봤을 때, 그리고 그와 관계를 이어가면서 필자가 느꼈던 놀라운 점은 그는 나뿐 아니라 누군가와 있을 때 상대방에게 완전히 집중한다는 것이었다. 많은 경우 뷰캐넌 정도의 업적을 이룬 사람들은 거들먹거리며 자기 말만 하느라 남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이미 한참 전에 그만뒀을 텐데 말이다.

    뷰캐넌은 남의 말을 경청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남들이 먼저 꺼내지 않을 만한 정보를 캐내는 데도 능숙했다. 일단 그는 흥미로운 대답을 이끌 만한 질문을 했다. 가령 그가 어떤 회사의 이사직을 수락할지 고민하고 있다면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당신은 이 회사를 흰색부터 회색까지 이어진 스펙트럼의 어디쯤에 놓을 겁니까?”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얼핏 보면 이런 질문은 기발하긴 하나 별 의미 없어 보이겠지만, 사실은 아주 다양한 사안에 대한 답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개방된 질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의미 있는 정보를 얻을 수도 있고요.”

    정보 과부하, 특히 문서로 인한 정보 과부하는 또 다른 문제다. 여기저기 시간과 관심을 쏟아야 할 CEO가 엄청난 양의 이메일과 브리핑 자료들을 처리하느라 힘겨워 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필자 또한 대형 상장사의 이사로서 중요한 회의 전에는 100만 단어 정도는 읽어야 한다. 그렇게 쏟아지는 대량의 정보와 맞닥뜨리면 사람은 보통 자신의 믿음에 부합하는 자료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걸러낸다. 스마트한 리더들이 보고서에서 양보다 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중요한 회의가 있을 때마다 300페이지가 넘는 자료를 읽어야 한다면 어떨까? 아마존과 영국중앙은행에서는 어떤 안건이든 자료가 6페이지를 넘기면 안 된다.

    뭔가를 읽을 때 정보 과부하만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좀 더 미묘한 리스크는 쓰여진 내용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남들이 하는 말을 들을 때 그 말의 질을 판단하기 위해 (의식하든 아니든) 비언어적 단서를 찾는다. 하지만 뭔가를 읽는 경우에는 그 맥락을 파악하기가 더 어렵다. 게다가 ‘가짜 뉴스’가 판치는 시대의 의사결정자들은 자신이 보거나 듣는 정보의 질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동료가 이미 필터링했거나 검색엔진 혹은 SNS를 통해 얻은 자료에 대해서는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당신은 정보의 질이 얼마나 제각각인지 인식하면서 정보를 평가하고 필터링할 때 그만큼 신중하게 접근하는가? 무의식적으로 정보를 걸러내는 일이 절대 없다고 확신한다면, 혹시 자신과 이념이 비슷한 신문만 골라서 보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 보라.

    판단력이 좋은 사람들은 타당하지 않은 정보를 의심한다. 만약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Stanislav Petrov라는 소련 중령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이미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사건은 공산주의가 몰락한 직후인 1983년의 어느 날 발생했다. 소련 미사일관제센터의 당직 사령관이던 페트로프는 소련연방을 공격하는 미국의 미사일이 인공위성에 탐지됐다는 정보를 접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공격이 100% 확률이라는 기기 판독값은 말이 안 된다고 여겼고, 그래서 그 정보를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보고했어야만 하는데 말이다. 그 대신 그는 시스템이 오작동을 일으켰다고 보고했다. 페트로프는 2013년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가진 데이터는 전부 미사일 공격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해줬습니다. 만약 그 내용이 그대로 지휘계통을 따라 보고됐다면 아무도 그에 반하는 의견을 내놓지 않았을 겁니다.” 결국 미국의 미사일 공격은 구름에 반사된 햇빛을 인공위성이 착각한 것으로 밝혀졌다.

    개선 방법: 말하지 않은 것을 알아채고 보디랭귀지를 해석하는 등 남의 말을 적극적으로 듣는 소중한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 이와 관련된 조언도 많다. 자신이 갖고 있는 편향성을 경계하고, 방어적이거나 공격적 태도로 인해 나의 생각과 다른 의견이 나오는 것을 막지 않도록 주의하라. 듣는 것이 지루하고 짜증난다면 질문하면서 결론을 확인하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서면 브리핑 자료로 힘들다면 어차피 회의에서 듣게 될 내용을 요약한 부분보다는 질문과 이슈들을 다룬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라.(회의 전 배포되는 이사회 자료집을 보면 발표할 자료들로 채워지는 경우가 너무 많다.) 말하는 내용 중 서면 자료와 차이가 있거나 일치하지 않는 부분을 찾아라. 기초 데이터의 출처가 어디인지, 데이터를 제공하는 업체와 특별한 이해관계는 없는지 면밀히 따져 보라. 가능하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과 다양한 출처의 데이터를 활용하고, 특히 당신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의 견해를 접하라. 마지막으로 당신이 의지하는 데이터의 척도와 지표가 타당한지 확인하라. 지표들이 불일치하는 곳은 없는지 찾고 그 원인을 파악하라.

    2. 신뢰(TRUST)

    자기와 같은 부류인지 검증하려 하지 말고 다양성을 추구하라

    리더들의 독단적인 노력은 금물이다. 리더들은 결정을 내리려 할 때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역량과 경험을 끌어낼 수 있다. 어떤 조언자들의 말을 듣고, 그들을 얼마나 신뢰할지는 리더가 양질의 판단을 내리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불행히도 많은 CEO와 사업가들이 자신과 견해가 비슷한 사람들을 끌어들인 다음 그들이 실제 그런지를 검증한다. 사기극으로 유명해진 실리콘밸리의 생명공학기업 테라노스의 불명예스러운 창업자인 엘리자베스 홈스Elizabeth Holmes와 임원인 서니 발와니Sunny Balwani는 사업에 우려를 표하거나 반대 의견을 내는 사람들을 모두 냉소주의자나 비관론자로

    간주했다. 파이낸셜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아첨꾼들은 승진했지만 계속 이의를 제기하는 직원들은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해고됐다”고 한다. 중국 안방보험그룹의 설립자이자 회사의 얼굴이던 우샤오후이Wu Xiaohui는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 등 주요 자산들을 매입하면서 국제적으로 다각화된 기업제국을 구축했다. 그러나 최근 18년형을 받고 구속됐다. 안방보험의 한 직원은 그가 “자신의 지시에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그대로 따르는 평범한 사람들로 둘러싸여 살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에 밝혔다.

    역사학자 도리스 컨스 굿윈Doris Kearns Goodwin은 자신의 저서인 <권력의 조건>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은 자신이 존경하지만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는 전문가들로 내각을 구성했다고 전한다. 컨설팅사 맥킨지는 반대의견을 제시해야 하는 의무를 직원들에게 강조한다. 아마존의 리더십 원칙은 리더들이 “다양한 견해를 추구하고 자신이 가진 신념의 부당성을 증명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도 같은 철학을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이 기술적 이해도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그는 33세에 처음으로 컴퓨터를 갖게 됐다), 이에 야후 출신인 존 우John Woo를 최고기술책임자로 기용하면서 “우리는 일류 기업으로서 일류 기술이 필요합니다. 존이 회사에 합류하면 저도 푹 잘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거물 사업가 중 자신의 결점을 채울 수 있는 조직적, 개인적 자질과 경력을 가진 조언자를 원한 사람이 마윈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도 비슷한 이유로 셰릴 샌드버그를 영입했다. 온라인 패션업체인 네타포르테Net-a-Porter의 창업자인 나탈리 마세네Natalie Massenet는 자신보다 훨씬 연장자인 마크 세바Mark Sebba를 CEO로 임명했다. 영국의 타임스는 이에 대해 “네타포르테의 절제된 CEO가 마치 영화 ‘인턴’의 로버트 드니로처럼 전자상거래 스타트업에 질서를 부여했다”고 밝혔다. 필자의 동생인 마이클은 그랜드옵티컬GrandOptical이라는 브랜드로 운영되는 그의 안경점 체인이 프랑스 최대 업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로 그가 다니엘 아비탄Daniel Abittan과 손을 잡은 것을 꼽았다. 다니엘은 마이클의 사업가적 비전과 전략적 역량을 보완하는 탁월한 오퍼레이션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선 방법: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들어야 할 말을 해 줄 사람들로 믿을 수 있는 조언자 기반을 마련하라. 의지할 수 있는 조언자들을 기용하려면 훌륭한 과거 업적을 판단력의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된다. 그리고 판단력을 평가와 승진 결정의 분명한 요건으로 삼아라. 영국의 법무장관을 임명하는 기관에서 의장을 지낸 우샤 프라샤르Usha Prashar는 후보가 어떤 업적을 달성했는지뿐만 아니라 어떻게 그런 업적을 달성했는지도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맥킨지의 도미닉 바턴Dominic Barton 전 회장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상대방이 말하지 않는 정보도 찾아 본다고 밝혔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커리어에서 겪었던 ‘진짜’ 고난이나 좌절, 혹은 실패담은 들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CEO는 상대방에게 정보가 불충분하거나 상충되는 조언을 들었던 경험을 말해 달라고 요청한다고 했다. 후보가 ‘다르다’는 이유로 밀어내서는 안 된다. 당신과 견해가 다른 누군가가 당신에게 정말 필요한 조언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3. 경험(EXPERIENCE)

    관련 경험을 활용하되 너무 좁게 보지 마라

    리더는 의사결정을 할 때 그와 관련된 데이터와 증거를 넘어 자신의 경험을 참고한다. 경험은 맥락을 파악하고 잠재적 솔루션과 예상되는 난관들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전에도 현재와 비슷한 어려움에 처한 적이 있으면 리더들이 에너지와 자원을 집중할 영역들을 더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바이에 있는 에마어 부동산Emaar Properties의 회장이자 중동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가 중 한 명인 모하메드 알라바Mohamed Alabbar가 그런 예에 속한다. 그는 1991년 싱가포르에서 처음으로 대형 부동산 위기를 겪으면서 경기가 하락할 때 과도한 융자를 받으면 어떤 위험이 따를 수 있는지를 알았고, 위기를 겪으며 과도한 부채의 교훈을 깨닫는 사람만이 부동산 시장에서 장기적으로 생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알라바는 이후 두바이의 변화무쌍한 경기 사이클을 잘 헤쳐나갔고 오늘날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부르즈 칼리파와 세계에서 가장 큰 쇼핑몰인 두바이몰 등 거대 포트폴리오를 소유하게 됐다.

    하지만(꽤 큰 반전이지만) 경험의 폭이 좁은 경우에는 익숙함이 도리어 위험할 수 있다. 만약 어떤 회사가 인도시장에 진출하려고 할 때 미국에서만 제품 출시를 해 본 사람의 판단은 신뢰도가 떨어지므로 맹신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중국과 남아프리카에서도 신제품을 출시했던 사람이 해 준 조언은 신빙성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중요한 신호를 간과할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또 한 영역에서만 오래 경험을 쌓은 리더들은 습관, 안일함, 과신 때문에 타성에 젖은 판단을 할 수 있다. 이런 폐단은 보통 외부 위기를 통해 표출된다. 절대 침몰하지 않는다 했던 타이타닉호는 구명보트가 부족해 대형 사고의 상징이 됐다. 2008년의 경제위기는 난공불락으로 보였던 수많은 거대 기업들에 진실의 순간이 됐다. 비슷한 예로, 요즘은 환경문제가 사업의 중심이 됐으며 이에 대한 가시적인 대응이 시급하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해 온 리더들이 많다.

    개선 방법:첫째, 의사결정을 할 때 개인의 경험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 평가하라. 모범 사례와 실패 사례를 확인하기 위해 중요한 판단이 필요했던 경우들을 되짚어 보라. 각각의 경우에 적절한 경험을 활용했는지, 또 올바른 유추작업을 했는지 검토하라. 잘했던 점과 잘못 했던 점을 모두 기록하라. 역사를 다시 쓰는 과정은 어렵고 유혹에 빠지기 쉽다. 같은 경험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으므로 자신이 내린 결론을 상사나 동료들과 공유하면 도움이 된다. 중립적인 비평가가 될 만한 현명한 친구를 끌어들이면 더 좋다.

    둘째, 젊은 리더의 경우에는 경험을 넓히는 일에 주력하라. 해외 근무 기회나 재무, 영업, 생산처럼 사내의 핵심 기능 부서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노력하라. 중요한 사업을 따내는 인수작업에 참여하는 것도 좋다. 만약 당신이 CEO라면 관리자들의 커리어 플래닝에 관여하라. 발전 가능성이 높은 관리자들이 더 다양한 영역에 노출될 수 있도록 CEO로서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이들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활용할 수 있는 경험의 폭을 최대한 넓힐 수 있다는 점에서 젊은 관리자에게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기업과 CEO 자신에게도 득이 될 것이다.

    4. 객관성(DETACHMENT)

    자신 안의 편견을 확인하고 그에 도전하라

    정보를 처리하고 자신과 남들이 가진 다양한 지식을 활용할 때 유념할 점은 자신이 갖고 있는 편견을 알고 그에 대응하는 것이다. 목표와 가치에 대한 열정은 추종자들의 열의를 높이고 자극하는 멋진 리더십의 자질이지만 정보를 처리하고, 경험을 통해 배우고, 조언자를 선별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객관성을 유지할 줄 아는 능력은 좋은 판단력의 필수 요소다. 그러나 이는 숙달하기 어려운 기술이다. 최근 몇 년간 수행된 행동경제학, 심리학, 결정과학 연구들이 보여줬듯이 기준점, 확증, 위험회피, 지나친 위험수용 등의 인지편향들은 사람들이 하는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독일계 전력회사인 RWE의 사례는 경각심을 준다. 2017년 인터뷰에서 RWE의 CFO는 회사가 재래식 발전소를 건설하는 데 5년간 100억 달러를 투자했는데 그중 대부분을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에너지산업 전체가 재생에너지 분야로 전환되는 상황에서 왜 재래식 발전 기술에 그런 막대한 투자를 했는지 파악하기 위해 RWE는 사후분석을 수행했다. 그 결과 의사결정자들이 투자전략을 평가할 때 현상유지와 확증편향을 보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게다가 계층편향을 보인 경우도 많았다. 상사의 판단에 의문을 가진 부하직원들이 반박하는 의견을 내지 않고 침묵했던 것이다. CFO는 RWE가 “과도한 자신감과 낙관주의 같은 행동 편향에 깊이 빠져 있었다”고 인정했다.

    조직에 위기가 닥치고 직원들의 일자리가 위협 받을 때 CFO나 변호사가 종종 CEO에 오르는 이유는 의사결정을 할 때 인지편향을 거부하고 객관성을 더 잘 유지하는 그들의 능력 때문이다. 이런 자질은 2011년에 국제통화기금(IMF)의 총재였던 도미니크 스트로스칸Dominique Strauss-Kahn이 스캔들로 떠들썩하게 퇴출당한 후 신임 총재로 뽑힌 크리스틴 라가르드Christine Lagarde가 널리 칭송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라가르드는 IMF 총재로서는 드물게 경제학자가 아니었고 정치 경험도 거의 없었지만 프랑스 재무장관으로서 이미 능력을 입증한 바 있었다. 또 그녀는 대형 국제 법률회사의 파트너로 재직하면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협상하는 능력을 터득했고 이는 글로벌 재무시스템이 심각한 위기에 놓인 시점에 매우 중대한 자질로 부각됐다.

    개선 방법: 다른 관점을 이해하고, 명확히 정리하고, 수용하라. 사람들이 자신과 상관 없는 사안들도 생각할 수 있도록 역할극과 시뮬레이션에 참여하게 독려하고, 반대 의견을 안전하게 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라. 가령 직원들이 경쟁자 역할을 해 보면 평소에는 상사에게 제안하지 않았을 아이디어를 가지고 실험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리더십 개발 프로그램을 열어도 좋다. 문화와 지리적 배경이 다른 동료들이 만나 다양한 관점을 논의하고 평소에 갖고 있던 가정들을 서로 압박해 볼 수 있는 훌륭한 장이 된다.

    마지막으로, 판단력이 좋은 사람들은 편견을 인지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확실히 구축한다. RWE는 잘못된 투자로 인한 금전적 손해를 파악한 다음 새로운 업무방침을 확립했다. 이제 중대한 결정을 할 때는 논의 이전에 서로가 가진 편견부터 확인하고, 필요하다면 한 사람이 악마의 변호인 역할을 맡아 일부러 반대 의견을 내기도 한다. 실수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을 과신하는 사람들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하라.

    5.  옵션(OPTIONS)

    제시된 일련의 솔루션들에 대해 질문하라

    의사결정을 할 때 리더는 부하직원들이 수립하거나 제시한 두 가지 정도의 옵션 중 하나를 골라야 할 때가 많다. 그러나 현명한 리더는 그런 옵션들이 전부라고 여기지 않는다. 2008년부터 2009년까지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오바마 대통령은 티머시 가이트너Timothy Geithner재무장관에게 왜 은행을 국유화시키는 방법을 고려하지 않는지 설명해 달라고 압박했다. 가이트너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과 정말 힘든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 전략이 정말 통할 거라고 확신하세요? 저를 안심시킬 수 있습니까? 그렇게 자신만만한 이유는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겁니까?’ 같은 질문들로 저를 몰아붙이더군요. 그때 저는 대통령에게 당시 시행하려 했던 계획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는 게 제 판단이라고 말씀드렸거든요.”

    오바마는 “다른 옵션은 없습니다”라든지 “두 가지 옵션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정말 최악입니다”라든가 “세 가지 옵션이 있지만 그중 하나만 선택 가능합니다” 같은 말을 들었을 때 좋은 리더가 취해야 할 모든 행동을 보여줬다. 사실 다른 옵션은 언제나 존재한다. 가령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거나, 더 많은 정보를 얻을 때까지 결정을 보류하거나, 한시적 대책을 세우거나, 시험적 대응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영국의 금융서비스 기업인 리갈앤드제너럴Legal & General의 CEO를 지낸 팀 브리던Tim Breedon은 이런 태도를 “상황을 제시되는 방식으로만 한정하지 않기”라는 말로 설명했다.

    지나고 나서 보면, 나쁜 판단을 하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중요한 옵션들과 의도치 않은 결과를 일으키는 리스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주 다양한 원인들이 이런 상황을 초래하는데, 잠재적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위험을 회피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이 때문에 일련의 가능한 솔루션들을 철저히 검토하는 것은 리더의 판단 행위에서 아주 중요하다. CEO가 모든 옵션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CEO는 경영진이 두려움과 편견으로 인해 여러 가능성들을 자체 편집하지 않고 모든 옵션을 보고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모든 옵션들을 논의하면 옳은 판단을 할 가능성이 커진다.

    개선 방법: 정보가 엉성하면 명확성을 높이도록 지시하고, 중요한 사실이 누락돼 있으면 담당자에게 따져 물어라. 사람들에게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변수가 무엇이며 변수들의 가중치는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라. 타이밍이 핵심이라면 그것이 정당한지 따져보라. 스트레스와 자만심처럼 새로운 해결책과 결부된 위험 요인들을 고려하고 그런 리스크를 완화할 수 있는 실험 기회들을 모색하라. 모델링과 제 3자의 의견, 인공지능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들도 고려하라. 솔로몬 왕(‘좋은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 누가 있을까?’라는 질문에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인물)의 지혜를 본받아 최종 결정에 따라 사람들이 떠안을 리스크를 파악하라. 특정 결과에 대해서는 숨길 수 없는 표시가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다. 그 해결책이 효과를 내거나, 반대로 실패한다면 그들에게(그리고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 상의하라. 그런 사람이 없거나 시간이 부족하다면 당신이 신뢰하는 사람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지 상상해 보라. 규칙과 윤리적 문제들도 선택을 필터링하는 데 도움이 되므로 관련 이슈들을 명확히 파악하라. 마지막으로 급진적인 옵션도 과감히 고려하라. 그런 옵션들을 논의하다 보면 덜 급진적이지만 고려할 가치가 있는 솔루션이 떠오르고,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자기 주장을 펼치도록 자극할 수 있다.

    6. 결과 내기(DELIVERY)

    실행 가능성을 고려하라

    모든 선택이 전략적으로 올바르다 할지라도 그런 선택을 어떻게, 그리고 누구를 통해 실행할지 판단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1880년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기업가였던 페르디낭 드 레셉스Ferdinand de Lesseps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기 위해 파나마 해협에 운하를 파자고 투자자들을 설득했다. 당시 레셉스에게는 이미 수에즈운하를 성공적으로 완공한 이력이 있어서 투자자들과 정치인들은 그의 계획을 면밀히 살펴봐야 할 자신들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사막을 뚫고 운하를 만드는 것과 정글을 뚫고 운하를 만드는 것은 다른 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접근법은 완전히 부적절했고 결국 운하 작업은 미국 정부가 인수해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완공됐다.

    스마트한 리더들은 프로젝트를 검토할 때 계획 실행 시 수반될 수 있는 리스크들을 신중하게 따져보고, 프로젝트 옹호자들에게 관련 요인들을 명확히 확인하라고 압박한다. 이는 프로젝트가 크든 작든 똑같이 중요하다.

    판단력이 좋은 리더는 어떤 길을 가야 할지가 결정되면 그에 따르는 리스크들을 예측하고 그런 리스크를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안다. 그 사람이 애초에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특히 아이디어 제안자가 레셉스처럼 어떤 비전에 사로잡혀 있다면 더욱 그렇다. 더 일반적으로 보면 재능과 창의력, 상상력이 언제나 결과물을 내놓는 능력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작은 테크회사들이 자신들의 영감을 통해 수익을 내지 못하다가 결국 창의력은 떨어지지만 조직력이 뛰어난 거대 기업에 인수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개선 방향:어떤 제안을 평가할 때 그런 투자를 추천한 사람들이 제안 내용에 걸맞은 경험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라. 그들이 이전에 했던 일을 언급한다면 그 일이 현재 상황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라. 잠재적 실패 요인들을 사전에 파악하는 ‘사전부검premortem’ 토론에 제안 옹호자들을 참여시켜서 그들이 가진 가정들에 대해 자문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라. RWE는 이제 사전부검 토론을 프로젝트 평가 프로세스의 일부로 시행하고 있다.

    리더들에게는 많은 자질이 필요하지만 그 모든 것들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좋은 판단력이다. 야심은 있으나 판단력이 없는 리더들은 돈을 잃는다. 카리스마는 있으나 판단력이 없는 리더들은 추종자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 열정은 있으나 판단력이 없는 리더들은 잘못된 길로 돌진한다. 추진력은 있으나 판단력이 없는 리더들은 일찍 일어나서 잘못된 일들을 벌인다. 완전한 행운과 개인의 통제력 밖에 있는 요인들이 궁극적인 성공을 좌우할 수도 있지만, 좋은 판단력이 있으면 당신에게 유리한 카드들이 쌓이게 될 것이다.






     








    6월 30일(월) 시편 61-67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67:5)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May the peoples praise you, O God; may all the peoples praise you.

    찬송(3034) 야다(yâdâh)  יָדָה   

    1. 던지다.  2. 피엘형 : 미완료형  וַיַדּוּ
    3. 히필형 미완료형 יְהוֹדֶה
    발음 [ yâdâh ]
    구약 성경  / 117회 사용
    관련 성경  /  쏘다(렘 50:14), 떨어지다(슥 1:21), 던지다(애 3:53), 인정하다(왕상 8:33, 대하 6:24), 감사하다(시 75:1, 대상 16:4, 23:30, 느12:24), 찬송하다(창 29:35, 대하 7:6, 시 45:17), 자복하다(민 5:7, 시 32:5, 단 9:4), 찬양하다(시 43:4, 71:22, 사 38:18), 칭찬을 받다(시49:18), 아뢰다(레 16:21).

    찬송(휨노스. hümnŏs)  ὕμνος, ου, ὁ   스트롱번호5215

    1. 찬송.  2. 노래. 3. 엡 5:19
    발음 [ hümnŏs ]
    • 1.  찬송, 노래, 엡 5:19, 골 3:16.

    ὕδέω ‘찬양하다’의 축약형

    • 문법설명  /  ὕδέω ‘찬양하다’의 축약형
      관련 성경  찬송(엡5:19, 골3:16).


    3절과 동일하다. 이러한 반복은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저자의 기도가 지극히 간절함을 보여준다. 또한, 3절과 본절을 예언으로 볼 수 있음을 생각한다면, 예언 성취의 확실성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하나님이여 -
    이 표현은 위급한 상황에서 구출받기 원할 때, 혹은 간절한 소원을 아뢸때 사용된다(51:1; 60:1).
    그런 점에서 본 시편 기자는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하겠다(VanGemeren).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 이방 민족들도 이스라엘과 동일하게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면 동일한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는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구원받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특히 저자는 거의 동일한 문구를 반복 사용함으로써 이방인 구원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시편 67:1- 7)

    기독교를 축제의 종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신랑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흥겨우면 콧노래를 부르거나 어깨춤을 추며 즐거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주를 찬송해야 합니다.
    주를 찬송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창조의 주(성부 하나님)
    둘째, 구속의 주(성자 예수님)
    셋째,  견인의 주(성령 하나님)

    사람들은 유익한 것을 서로 공유합니다.
    맛집을 소개하고 유용한 정보를 공유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알려야 하는 사람들이므로 복음을 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과 은혜를 주시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모든 민족이 보고 주님을 찬송할 미래를 꿈꿉니다.
    이 소망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간구합니다.
    시인이 이렇게 간구한 이유는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은혜받은 자신들의 모습을 통해 주님의 도가 땅 위에 퍼지고, 구원이 모든 나라에 알려지기를 바랐습니다1〜2절).
    시인의 고백처럼 성도가 은혜를 구해야 하는 이유는 내가 아니라 남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불러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벧전 2:9).
    은혜는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이루는 도구입니다.

    시인은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합니다(3절).
    하나님은 사람들의 찬송을 받으시는 분이며 동시에 사람들이 찬송하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모든 민족이 하나님 찬양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저자처럼 하나님이 일해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일을 행하시는 분, 만들어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렘 33:2).
    그러니 기도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에 기도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공의롭게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입니다(4절).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마땅한 이유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공의를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공의가 없는 세상에서 공의의 하나님을 찬양할 때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복을 주십니다.
    시인은 땅의 소산을 주시는 하나님이 넘치는 복을 부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6절).
    지금까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좋은 은혜를 풍성히 내려 주신 하나님은 앞으로도 넘치도록 복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은 복 있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 복은 땅의 복만이 아니라 하늘의 복을 말합니다. 성도는 하늘의 복을 충만히 받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엡 5:1).

      하나님은 공의로 세상을 통치하시며 자녀들의 삶에 땅과 하늘의 복을 주십니다. 시인은 복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열방을 향해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촉구합니다(7절). 복의 목적은 복에 담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성도는 하나님 품 안에서 누리는 복된 모습을 세상에 보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복이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열방을 주께 돌이키는 일에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성도는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자들입니다(벧전 2:9). 그러므로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늘의 복이 충만한 삶을 통해 이 사명을 이루어 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통해 모든 민족이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




    잔치집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쁨의 노래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찬양을 제일 좋아하십니다.

    시 69:30~31에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고 말씀했고,사 43:21에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했으며,시 22:3에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교회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찬양드려야 할 이유 몇 가지를 살펴봅시다.

    첫째, 창조하신 능력

    창 1장에 보십시오. 하나님이 창조하시기 전의 세상은 얼마나 암울합니까?

    2절을 보세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계와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하시자 어두움은 광명으로, 무질서는 질서와 아름다움으로, 우울함은 명랑함으로, 흑암과 공허의 죽음의 세계는 빛과 의미가 충만한 생명세계로 탈바꿈합니다.

    3~4절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했고,욥 38:7에는 “그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은 시 150편에서 하나님의 찬양드릴 장소와 이유와 방법과 누가 노래할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성소에서,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나팔 소리와 비파와 수금으로, 소고치며 춤추어, 현악과 퉁소로, 큰 소리나는 제금으로, 높은 소리나는 제금으로, 호흡이 있는 자마다, 할렐루야!

    요 1:3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했는데 예수님은 처음 하늘과 땅만 창조했습니까?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 멋진 신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사 65:17~19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짓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요”

    예수님이 두 번째 종말론적으로 창조한 세계는 훨씬 행복한 세상입니다.

    첫 번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온전한 세계입니다.

    히 12:26~29에 “그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고 말씀했는데 이 진동할 세상뿐 아니라 진동하지 아니하는 세상을 주셨으니 감사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둘째, 구속하신 사랑

    요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했는데 하나님의 구속하신 사랑이 얼마나 컸으면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찬양이 가득하겠습니까?

    계 4~5장은 하늘에 기록된 음악입니다.

    4장은 우리 주 하나님의 창조의 오라토리오요, 5장은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구속의 역사를 찬양한 부활의 Cantata입니다.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있는 네 생물이 노래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계 4:8).

    이십사 장로가 거문고로 노래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 자시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

    힘있는 천사가 완성된 구원역사의 주권을 독창합니다.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시기에 합당하냐?”(계 5:2).

    한 장로가 솔로로 화답합니다.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계 5:5).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자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가 새 노래로 노래합니다.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음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계 5:9~10).

    다음에 천사의 대 합창이 울려퍼집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마지막으로 우주의 대 합창이 휘날레를 장식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 아멘 아멘 아멘”(계 5:13).

    셋째, 성령의 견인 

    하나님은 창조를 계획하셨고, 예수님은 창조를 말씀하셨으며, 성령님은 창조를 운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계획하사 메시야를 보내시고,
    예수님은 오셔서 당신의 피로 우리를 속량하시고,
    성령님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천국을 가져오시고 또 완전한 천국으로 책임지고 인도하십니다.
    단 번에 거듭나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신앙하게 하시고, 일생에 걸쳐 거룩하게 하시고, 단 번에 영화롭게 하십니다.

    우리 속에서 행하시는 성령님의 크신 역사를 보십시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또한 교회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님의 선행적 역사를 보십시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지면을 새롭게 하시듯이 아침마다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산 소망을 주십니다. 계속 우리를 높여주시고 지혜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렇게도 크신 은혜를 성령님이 우리 교회에 베푸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엡 2:4에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했고,

    엡 1:6에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히 13:15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말씀했고,엡 5:15~21에는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삼가 말씀에 주의하면 잘될 줄 믿으십시오.

    오늘도 잘되고 내일도 잘되고 끝날까지 잘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넷째로, 교회가 선교를 위해 복을 구할 때 풍성하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시 67편은 선교공동체인 교회의 기도문입니다.

    교회는 은혜의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증거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1~2절에서 교회는 신령한 복을 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 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

    “성령이여 임하소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성령의 은사를 부어주시옵소서”

    성령의 은혜를 구하는 목적은 3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6절에서 선교란 지상에서만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교회는 선교를 위해서 필요한 지상의 축복들을 구합니다.

    “땅이 소산을 내는 복을 주시옵소서. 건강, 물질, 사람, 명예, 지식의 복을 주소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말게 하소서. 지혜와 총명이 뛰어나게 하소서. 갑절의 부자로 살게 하소서. 교회와 선교를 위하여 이제 형통케 하소서. 전략적 부자들이 많이 나오게 하소서”

    이땅의 축복을 구하는 목적은 5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교회의 소원은 택한 자 몇 사람을 구원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벧후 3:9)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 12만 모든 영혼들에게 복음을 증거했듯이, 우리는 서구 12만 시민, Everybody,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전략을 세우고 전도합시다.

    시 90:13에 이스라엘을 위해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 탄원하는 율법의 수여자 모세처럼 간구합시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이니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들이 아무리 악하고 못났지만 영원한 주의 나라를 상속케 하려고 당신께서 택한 자들이 아닙니까 미워도 다시 한 번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당신의 마음을 바꾸소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자신을 주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넘치는 풍성함의 전부를, 무한의 광대함과 부를 상속자로서 가질 수 있습니다.

    요나가 선교 사명을 망각하고 선교의 사명에서 벗어나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고기 뱃 속에 들어가서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선교 사명을 잊으면 영적 담대함, 축복의 광대함을 놓쳐버립니다.

    지지리도 못 살고 고생만 하다가 쫓기듯이 천국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습니다(약 4:2~3).

    그러나 우리가 선교의 대 사명에 살면 우리가 받는 복을 보고 땅에 사는 거민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민 18:20에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고 말씀했고,시 16:5에는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고 말씀합니다.

    한국교회가 선교사 3만 명을 보내면 GNP 3만 불 시대가 열릴 줄 믿습니다.

    찬양대는 교회의 찬양을 선도하는 사역팀입니다.

    찬양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찬양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느끼고 깨닫습니다.

    찬양은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입니다.

    드리는 기쁨이 최고의 기쁨이기는 하지만, 마음과 힘을 다하여 드리는 찬양은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열정으로 찬양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최고의 하나님께 최고의 찬양을 드리기 위하여 계속 정진합시다.

    찬양의 절정은 하나님께 선물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선물에는 정성과 애정이 깃들어 있습니다.

    축제의 선물에는 감사가 배여있습니다.

    선물은 의무라기 보다는 감격과 감사의 행위입니다.

    찬양대의 열렬한 찬양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만방에 전합시다. 온 교회로 주를 찬송케 합시다.

    “May the peoples praise you, O God,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교회는 세상의 찬양을 선도하는 선교공동체입니다.

    선교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교회에 복을 주심으로 모든 세상 사람으로 주를 찬송케 합시다.

    온 교회가 하나님을 열렬히 찬양함으로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합시다.

    “May all the peoples praise you, O God,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할렐루야!


    108 번뇌의 의미


    절에 가면 대부분 스님들의 세납이 일흔을 훌쩍 넘기신 분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봐도 연세가 많은 것 같지 않은데 물어보면 의외로 많습니다.
    하루는 큰 스님께 무례를 무릅쓰고 세납을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스님, 올해 세수가 어떻게 되십니까?”
    “그건 왜 물어. 이 놈아!”
    “그냥요. 이리 봐도 저리 봐도 헷갈려요.”

    “허허, 이 놈 봐라, 세속에서 산 세월이 20년이요. 부처님하고 산 세월이 60년
    이니 갈 날이 꼭 1년 밖에 남지 않았다.”
    대개 스님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81세에 열반 하셨으니 81세까지 사시려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알고 있는 스님들은 부처님의 삶보다 오래 사신 분들이 많고 정정하시다.
    “그럼 여든이시네요.”  
    “계산도 잘 하네. 이놈아. 그런데 너 사람이 오래 사는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사람이 오래 살고 싶으면 마음이 먼저 건강해야 한다.
    우리 몸에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義) 육근(六根) 이라는 여섯 도둑놈이 있는데
    이 놈의 욕심이 지나쳐 사람의 생명을 빨리 거두어간다.
    그러니 이 도둑놈들을 잘 다스려야 하느니라.

    1. 예쁜 것만 보려는
         눈이라는 도둑놈

    2.자신에게 좋은 소리만 들으려는
         귀라는 도둑놈

    3.좋은 냄새만 맡으려는
         코라는 도둑놈

    4.맛있는 것만 처먹으려는
         입이라는 도둑놈

    5.쾌감만 얻으려는
        육신 이라는 도둑놈

    6.그리고, 명예와 권력에 집착하려는
        생각이라는 도둑놈

    그리고 이 여섯 도둑놈을 다스리는 놈이 바로 마음인데 이를 잘 다스려야
    만 오래 살 수 있다.
    이 여섯 도둑놈이 자꾸 번뇌를 일으켜서 우리 몸을 빨리 망치게 하기 때문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108 번뇌’ 라는 숫자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義) 육근(六根)과 색성향미촉법의 육경, 좋음.나쁨.평등이라는 호악평등(好惡平等),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가  끊임없이 작용하여 생긴 것을 말합니다.

    즉, 육근에 육경을 더하면 12,  거기에 호악평등 3을 곱하면 36, 여기에 과거.현재.미래 3을 곱하면 108이 됩니다.

    말하자면, 108번뇌는 우리가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반복하여 작용한다는 뜻
    입니다. 그러니, 육근이라는 번뇌의 도둑을 조종하는 내 마음을 잘다스려야
    만 건강한 삶을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제행무상(諸行無常)
    태어나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
    형태 있는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
    "나도 꼭 죽는다." 라고 인정하고 세상을 살아라.
    죽음을 감지하는 속도는 나이별로 다르다고 한다.

    청년에게 죽음을 설파한들 자기 일 아니라고 팔짱을 끼지만, 노인에게 죽음은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림과 같나니 종교, 부모, 남편, 아내, 누구도 그 길을 막을 수 없고, 대신 가지 못하며
    함께 가지 못한다.

    하루 하루, 촌음(寸陰)을 아끼고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나면 헤어짐이 세상사 법칙이요 진리이다.

    사랑하는 사람, 일가친척, 남편, 부인, 자식, 명예, 부귀영화, 영원히 움켜쥐고 싶지만 하나 둘 모두 내 곁을 떠나간다.

    인생살이는 쉼 없는 연속적인 흐름인 줄 알아야 한다. 매달리고, 집착하고, 놓고 싶지 않는 그 마음이 바로 괴로움의 원인이며 만병의 시작이니, 마음을 새털같이 가볍게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  원증회고(怨憎會苦)
    미운 사람, 싫은 것, 바라지 않는 일, 반드시 만나게 된다. 원수, 가해자, 아픔을 준 사람, 꼴도 보기 싫은 사람도 만나게 되며, 가난, 불행, 병고, 이별, 죽음 등 내가 피하고 싶은 것들이 나를 찾아온다.
    세상은 돈다. 빙글빙글... 주기적 사이클로... 나도 자연의 일부인 만큼 사이클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이를 '라이프 사이클(life cycle)'이라한다.

    현명하고 지혜롭고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은 능히 헤쳐 나가지만 우둔하고 어리석고 매사에 소극적인 사람은 그 파도에 휩쓸리나니 늘 마음을 비우고 베풀며 살아라.

    ⚫  구부득고(求不得苦)
    구하고자, 얻고자, 성공하고자, 행복하고자,하지만 세상살이가 그렇게 만만치 않다.

    내가 마음먹은 대로 다 이루어지면 고통도 없고 좋으련만 모든 것은 유한적인데 비해 사람 욕심은 무한대이므로 아무리 퍼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항아리와 같다. 그러므로 욕심덩이 가득한 마음을 조금씩 덜어 비워가야 한다.

    자꾸 덜어내고 가볍게 할 때, 만족감, 행복감,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마치 형체를 따르는 그림자와 같이. . .

    《모셔온 글》

    오늘도 알아차림의 수행으로 행복한 날 만들어 가소서.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지혜로움과 건강하고 화평하고 즐거움이 가득한 나날을 이루어 가서소.




    6월 28일(토) 시편 54-60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리를 회복시키소서(60:1)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You have rejected us, O God, and burst forth upon us; you have been angry-now restore us!


    회복시키소서(7725) 슈브(shûwb) שׁוּב

    1. 방향을 돌리다.  2. 회복하다. 3. 돌이키다
    발음 [ shûwb ]
    구약 성경  /  1059회 사용

    1.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2. 주께서 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이 요동함이니이다
    3.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척거리게 하는 포도주로 우리에게 마시우셨나이다
    4.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셀라)
    5. 주의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우리를 회복시키소서(시편 60:1-5)

    시편 60편은 다윗의 시로서 긴 표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표제는 ‘다윗이 교훈하기 위하여 지은 믹담, 인도자를 따라 수산에둣에 맞춘 노래,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 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소금 골짜기에서 쳐서 만 이천 명을 죽인 때에’입니다.

    믹담 여러 번 설명 했듯이 황금과 같은 보배로운 시를 뜻하며,
    수산에둣알다스헷과 마찬가지로 곡조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 뜻은 ‘증거의 백합’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부분은 시를 짓게 된 배경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8장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통합 왕이 된 후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된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소금 골짜기에서의 전투는 에돔 사람과의 전투인 데 만 팔천 명을 죽인 것으로 나옵니다.

    사무엘하 8:13, “다윗이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팔천 명을 쳐죽이고 돌아와서 명성을 떨치니라”

    그런데 표제에서는 요압이 만 이천 명을 죽인 것으로 나옵니다.

    시편 60편의 내용을 볼 때 에돔과의 전쟁에서 일시적으로 수세에 몰린 때가 있었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에 근거하여 승전을 위한 간곡한 애가를 불렀으며 그 응답으로 요압이 합류하였을 때 대승을 거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열왕기상 11:15-16을 보면 다윗이 에돔과의 전쟁에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요압이 합류하여 여섯 달 동안 전쟁하여 대승을 거두었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문은 에돔과의 전쟁에서 잠시 패배의 위기에 놓였던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시고 분노하신’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이는 전쟁의 패배 위기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 범죄로 말미암음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단적인 예로 여호수아가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을 정복할 때 여리고 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던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아간의 죄로 인하여 아이 성과의 1차 전투에서 패배한 일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작은 죄를 소홀히 하게 될 때는 큰 실패와 낭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흩으시고’라는 말씀은 ‘분쇄하다’라는 아주 강한 뜻을 가진 단어인데 하나님의 분노하심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군대가 에돔 군대에게 큰 타격을 입고 이리저리로 도망치는 모습을 묘사한 말씀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다윗은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회복시키소서’라는 단어의 원형은 ‘슈브’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사용하실 때는 용서와 회복을 주시는 것으로 사용되지만, 하나님을 향한 인간에 행동을 표현할 때는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회복시키소서’라는 말은 철저한 회개를 바탕으로 한 간절한 회복을 위한 간구인 것입니다.

    2, 3절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인하여 현재 상황이 얼마나 위급한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군대가 에돔 군대의 군사력에 밀려 땅이 갈라지듯 흩어지고 고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 틈을 기우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은 앞서 갈라진 땅을 회복시켜달라는 간구이지만, 내적 의미는 하나님의 진노로 패배의 위기에 놓여 낙심하고 부서져 있는 이스라엘 군대의 영적 상태를 치료하고 회복시켜 달라는 간구입니다.

    이어서 ‘땅이 흔들림이니이다’라고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라면 어떠한 곳에 피하더라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밝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 군대의 현재 상황을 포도주를 마시고 비틀거리는 상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이스라엘 군대를 혹독한 고난을 겪게 하셨습니다.
    그 상태가 마치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것과 같은 무기력한 상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를 경외하는 이스라엘 군대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라는 고백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끝내 승리하게 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승리를 기원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사랑하시는 주의 군대를 위험에서 건지시고 권능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삶의 작은 일도 다 주께 아뢰고 고난 가운데도 주의 권능의 손을 의지하여 승리하시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시편 60편은 사무엘하 8장과 역대상 18장의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에 북쪽의 아람과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소바와 전쟁을 치루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시기에 에돔이 이스라엘을 침략해 들어왔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일시적으로 큰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혹시 이러다가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이때에는 빨리 도망가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위기감이 생겨났습니다.

    개인의 인생이나 가정과 나라의 진행과정을 볼 때에 역경과 환난은 하나만 일어나지 않고 대부분 겹쳐서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엎친 데 덮친 격’이란 표현도 있고,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무엘하 8장과 역대상 18장에서는 이러한 전쟁에서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대상 18:13)
    이렇게 그 결과만 간단명료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60편에서 다윗은 전쟁 초반에 상당한 고전을 당한 것을 이렇게 실토하고 있습니다.
    1-3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요동함이니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척거리게 하는 포도주로 우리에게 마시우셨나이다.”

    다윗은 인생의 생사화복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두고 있습니다.
    왕으로서 나라의 흥망성쇠도 하나님께 두고 있습니다.
    또한 군인으로서 전쟁의 승패도 하나님께 두고 있습니다.
    즉 그는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모으기도 하시고 흩으시기도 하시는데, 지금은 흩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지금은 이스라엘을 향해 분노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을 윤택하게도 하시지만, 지금은 땅을 갈라지게 하고 황폐하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 땅에 평화를 주시기도 하지만, 지금은 땅을 흔들고 요동시키시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형통함도 주시지만, 지금은 어려움을 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견고하게 세우기도 하시지만, 지금은 우리로 비척거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로 그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이제는 갈라진 땅을 기워주소서.”

    위기가 닥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경제 회복을 위해 지혜롭게 대처해야 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외국 땅에 살면서 가정적으로도 위기와 고난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이때에는 하나님을 부를 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치시기도 하시지만 싸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고로 인생의 위기를 당할 때 다윗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지금 우리가 힘이 듭니다. 빨리 도와주시고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여러 가지 위기를 극복한 인물들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절망을 소망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탄식을 기쁨으로 바꾼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는 고향을 떠났습니다.
    약속의 가나안 땅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셨으니 모든 것이 잘 폴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는 기근이 다가왔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경제 위기가 다가왔습니다.
    낯선 땅이다 보니 돈 꿔 줄 사람도 없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당장의 힘든 상황을 모면해보려고 죄악의 도시인 애급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아내 사래를 애급 왕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외국 땅에서 그것도 왕에게 아내를 빼앗겼으니 이제 아브라함은 어떡합니까?
    이 문제를 도대체 누가 해결해 줄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다급하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애급 왕의 꿈에 나타나 명령을 합니다.
    "네가 취한 사래라는 여인은 남의 아내다. 그녀를 빨리 남편에게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를 죽이겠다.“

    그러자 애급 왕이 금과 은과 노비를 많이 주어 그녀를 남편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위자료를 준 것입니다.
    손해 배상을 해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때로 내 생각대로 하다가 일이 더욱 꼬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빨리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낙심은 금물입니다.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위기와 고난을 당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서 그 문제가 해결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문제의 홍해수를 만났습니까? 그로 인해 오도 가도 못합니까?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홍해수가 갈라졌습니다. 문제의 여리고 성을 만났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성을 칠일 동안 도니까 그 문제의 견고한 성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목말라 죽겠는데 도저히 마시지 못할 문제의 쓴 물이 나타났습니까?
    십자가를 상징하는 나무를 물에 넣었더니 그 쓴 물이 단물로 변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문제도 하나님이 해결하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안 다윗은 기도합니다. 4절입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즉 ‘여호와 닛시’ 즉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승리를 주시는 깃발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군대의 깃발을 높이고 나가서 싸우시니 적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 손으로 구원하소서.”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은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노래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우리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건지시지 않으면 누구를 건지시고 누구를 구원하시겠습니까? 그 옛날 다윗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들도 능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고로 우리들도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들도 구원하소서.”

    여러분! 어떤 위기가 다가왔습니까? 혹시 피할 길이 막막합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도와주시는 분이 옆에 있습니다. 그 분이 회복시키기 위하여 일을 하시고 있습니다. 고로 우리들도 다윗처럼 노래할 수 있습니다.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라, 주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4:17)

    여러분! 고난이 다가올 때 하나님이 옆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반드시 도와준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의 본문 6절-8절에 보니 하나님이 다윗의 기도를 듣고 이렇게 응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유다는 나의 홀이며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라 하였도다.”

    세겜은 가나안 땅 서쪽에 있는 주요 도시입니다. 숙곳은 가나안 땅 동쪽에 있는 주요 도시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한 땅을 모두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길르앗은 정복하기 힘든 가나안 땅 산지입니다. 그 땅도 예외 없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의 두 아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겠다는 것입니다.

    유다도 야곱의 4번째 아들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한 지파입니다. 그들에게 계속 왕권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모압과 에돔을 각각 목욕통과 신발을 던지는 장소로 만들겠다는 것은 그들을 이스라엘의 종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기쁨을 주는 도구로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 에돔은 이스라엘이 적들과 전쟁을 치르자 그 기회를 노리고 어려운 시기에 쳐들어 온 괘씸한 민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돔 족속을 크게 물리치게 만들었습니다.

    성경은 이때 다윗의 장수 요압이 나가서 에돔 족속을 18000명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다윗은 에돔 지역을 점령하고 그들의 요새와 같은 성에 승리자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10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처음에 다윗은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 같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들도 때때로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다하셨는가 의심이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을 붙잡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11-12절입니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심이이로다.” 즉 하나님이 나서서 일을 해주셔야 최후의 승리, 완벽한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들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고로 그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나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본 시편은 다윗이 쓴 것으로 에돔과의 전쟁에서 초반에 패배할 지경에 이르자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승리를 호소하는 사실을 그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결국 다윗은 이 전쟁에서 대승읕 거둔다(삼하 8:13; 대상 18:12).

    하나님이여
    - 이는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있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는 문맥에서 흔히 나타나는 부르짖음이다(51:1;54:1;55:1;56:1;57:1;59:1).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
    다윗이 에돔에 원정을 갔으나 도리어 많은 군사를 잃는 등 패배한 사실을 가리킨다(왕상 11:15, 16).
    여기의 '흩으셨고'(파라츠)는 '깨뜨리다' 혹은 '부수다'의 뜻으로서, 구조물(構造物)의 경우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시킬 만큼 파괴하는 것을(대하 32:5; 잠 25:28), 대열(隊列)의 경우는 적의 일격을받아 갈팡질팡 혼잡케 된 상태(삼하 5:20)를 가리킨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적의 공격으로 다윗의 군대가 사방으로 도망쳤던 사실을 뜻함이 분명하다.

    분노하셨사오나
    - 이것은 다윗이 패전(敗戰)을 죄의 결과로 보았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죄가 하나님을 분노케 하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패전케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성도에게 있어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멀어지는 일은, 비록 짧은 기간이라 할지라도, 엄청난 재난을 의미한다(44:9, 23; 74:1; 77:7; 89:38).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 에돔 군대에 의해서 쫓기는 신세에서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 상황으로의 반전(反轉)에 대한 간구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 존재와 시간(Zeit und Sein)

    당신은 살아가면서 ‘존재’라는 개념을 당연하게 여길 수도 있지만, 사실 그것은 철학적으로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어려운 질문이다.
    하이데거는 당신이 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존재를 단순한 개념으로 다루며 깊이 있는 탐구를 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당신이 철학을 통해 존재를 이해하려 한다면, 먼저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부터 다시 던져야 한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탐구하는 데 있어 ‘시간’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당신은 단순히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다.
    그는 이러한 존재 방식을 ‘현존재(Dasein)’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며, 당신은 스스로의 존재를 의식하고 그것을 규정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말한다.

    세상 속에서의 당신 : 피투성(被投性)과 세계 - 내 - 존재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당신이 선택한 일이 아니다. 당신은 이미 던져진 존재(피투성, Geworfenheit)로서, 특정한 시대와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당신은 이러한 조건 속에서 자신의 삶을 구성해야 하며, 이 과정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찾게 된다. 하이데거는 당신이 단순히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로서 살아간다고 말한다. 당신은 언제나 어떤 관계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며, 단절된 개체가 아니라 주변과 연결된 존재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잊고, 일상적인 존재 방식에 안주한다. 당신도 때때로 ‘비본래적 존재’(Uneigentlichkeit)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이것은 당신이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자신의 존재를 깊이 고민하지 않고,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살아가는 상태다. 예를 들어, 당신이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타인의 기대에 따라 직업을 정하거나, 관습에 따라 행동한다면, 이는 비본래적 존재 방식에 해당한다.

    불안과 죽음의 문제

    하지만 당신은 완전히 비본래적인 상태에서만 살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반드시 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당신이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당신은 보통 이 사실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사회는 죽음을 ‘막연한 어떤 날’로 미루고, 당신도 그것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 행동한다. 하지만 죽음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며, 당신 자신의 가능성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궁극적인 사건이다.

    죽음을 직면하면 당신은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이 불안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며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깨닫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 불안을 피하는 대신 직시할 때, 당신은 본래적인 존재(Eigentlichkeit)로 살아갈 가능성을 얻게 된다.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그것을 직시함으로써 당신은 자신의 삶을 보다 주체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

    시간성과 존재

    하이데거는 당신의 존재가 ‘시간성’(Zeitlichkeit)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당신은 과거의 경험과 기억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이처럼 시간은 선형적인 흐름이 아니라, 당신의 존재 방식 그 자체를 결정하는 요소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선택하는 것은 곧 당신의 미래 가능성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다.

    하이데거는 철학이 추상적인 개념 분석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당신이 자신의 삶 속에서 직접 경험하는 존재의 문제를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전통적인 철학이 존재를 하나의 ‘객체’로 취급하며, 그 의미를 시간과 분리해서 이해하려 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당신의 존재는 언제나 시간 속에서 펼쳐지며, 과거와 현재, 미래가 서로 얽혀 있다.

    본래적인 존재를 향한 길

    하이데거는 당신이 진정한 의미에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본래적인 존재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당신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 나는 누구인가?
    • 나는 왜 이 삶을 살아가는가?
    • 나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할 때 당신은 보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구성할 수 있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철학은 단순한 지적 탐구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존재를 깊이 이해하고, 더 나은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한 실천적 탐색이다.

    맺음말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단순한 철학적 논의가 아니라, 당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단순히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직시함으로써 본래적인 존재 방식을 찾고, 시간을 통해 스스로를 구성해 나가는 존재다. 하이데거는 당신에게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보다 깊이 있는 존재 방식을 고민할 것을 요구한다. 당신이 이 철학적 사유를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면, ‘존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대표 저작, 『존재와 시간』을 함께 탐구해보려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 같은 질문 앞에 섰을 때,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존재가 무엇인지 묻지 않으면 안 된다고요. 그의 철학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방식**과 밀접하게 닿아 있습니다.

    현존재(Dasein) : 나는 ‘존재하는 자’입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가리켜 현존재(Dasein)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독일어로 “거기에 존재하는 자”라는 뜻인데, 단순히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무는 존재하지만,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걸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죠.
    이처럼 존재를 묻는 존재, 그게 바로 현존재입니다.

    “현존재는 자기 존재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 마르틴 하이데거

    하이데거에게 있어 존재를 묻는 것은 철학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그 물음은 먼 이론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살아가는 **나 자신의 삶**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불안과 죽음 : 진짜 나를 깨닫는 순간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세상에 휩쓸려 사는 삶**을 산다고요.
    그는 이를 비본래적 존재라고 불렀습니다.
    남들이 하니까 따라 하고, 시간에 쫓겨 살고,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 삶이죠.

    하지만 우리가 문득 불안을 느낄 때, 예컨대 “나는 왜 여기 있는 걸까?”라는 막막한 감정이 들 때, 우리는 비로소 본래적 존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죽음이라는 강렬한 경험이 있습니다.

    “죽음을 향해 자신을 미리 던지는 것, 그것이 본래적인 삶이다.” – 마르틴 하이데거

    죽음은 모든 가능성의 끝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죽음을 단순히 무서운 일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궁극의 기준**이라고 보았습니다.
    내 삶이 끝날 수 있다는 걸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니까요.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현존재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사실을 외면하지 말고, 오히려 죽음을 의식함으로써 삶을 더 진정성 있게 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시간과 존재(Zeit und Sein ) : ‘지금’이라는 순간의 의미

    하이데거에게 시간은 단순히 시계로 재는 흐름이 아닙니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며, 미래를 계획하고, 지금을 살아갑니다.
    이 세 가지 시간 구조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고,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특히 미래는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무엇이 될지**, **어떤 사람이 될지**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죠. 하이데거는 이를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존재"라고 표현합니다.

    “존재는 시간 속에서만 드러난다.” – 마르틴 하이데거

    결국 존재를 진지하게 묻는다는 것은, 시간 안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끊임없이 반성하고 결정하는 과정입니다.
    하이데거에게 철학이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삶의 자세를 묻는 일**이었던 셈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계신가요?

    혹시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 “지금, 당신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묻고 있나요?”
    우리 모두가 존재를 자각하는 현존재로서, 시간 안에 자신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호모 템포라리스(homo temporalis) : 시간적 인간 

    호모 로퀜스(Homo loquens) : 언어적 인간, 이성적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 : 도구적 인간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 정치적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 유희적 인간
    호모 그라마티쿠스(Homo grammaticus) : 문법적 인간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 경제적 인간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 손을 이용하는 인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 직립인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 생각하는 인간



    6월 27일(금) 시편 48-53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멸망하는 짐승(49:12, 20)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But man, despite his riches, does not endure; he is like the beasts that perish.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A man who has riches without understanding is like the beasts that perish.

    현대인의 성경 / 아무리 영화를 누리며 살아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짐승처럼 죽으리라.

    새번역 / 사람이 제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

    짐승(929)


    בְּהֵמָה 스트롱번호929
    1.

    짐승

    2.

    가축.

    3.

    들짐승

    발음 [ behêmâh ]
    어원
    연계형 בֶּהֱמַת, 어미활용 בְּהֶמְתְּךָ ,בְּהֶמְתּ, 복수 בְּהֵמוֹת, 복수 연계형 בַּהֲמוֹת, ‘침묵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190회 사용
    • I.
      명사, 여성 짐승
      • 1.
        명사, 여성 가축.
        • a.
          명사, 여성 [주]들짐승, 레25:7
      • 2.
        명사, 여성 짐 싣는 짐승[나귀 또는 낙타].
      • 3.
        명사, 여성 들짐승, 신32:24, 합2:1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가축(창1:24, 레19:19, 신2:35), 짐승(창7:2,출12:12, 민18:15), 들짐승(사18:6, 욜1:20).


    깨닫다(995) 빈

    בִּין 스트롱번호995
    1.

    구별하다

    2.

    식별하다

    3.

    보다.㉠

    발음 [ bîyn ]
    구약 성경
    171회 사용

    못하는(3808) 로

    לֹא 스트롱번호3808
    1.

    ~하지 않았다

    2.

    .

    3.

    ~하지 않을 것이다

    발음 [ lôʼ ]
    구약 성경
    5097회 사용

    깨닫지 못하는(*, 로 야빈).
    - 직역하면 '이해(지혜)가 없는'이다.
    시인은 본 시편을, 12절의 내용과는 유사하지만 후렴구는 다른 단어를 넣어 결론을 짓고 있는데, 그 단어가 바로 '로 야빈'이다.
    이 말은 격언적인 말로서 '지혜가 없다면'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
    즉, 본절은 일반적으로 말 못하는 소와는 다른 존재인데 본 시편이 가르치는 참지혜를 소유하지 못한다면 그는 소처럼 소멸되어 버리고 말 존재라는 것이다.
    결국 본 시편의 가르침은 땅 위의 소유물을 믿고 사는 자는 세상을 떠난 후 영원한 암흑 속으로 들어가 버릴 것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고 사는 자는 하나님 손에 이끌리어 영원한 빛의 안식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깨닫는 존재이다
    Man is a being who realizes.
    호모 일루미나투스(homo illuminatus)는 깨달은 사람을 의미하는 라틴어입니다.

    철학자 하이덱거는 인간은 깨달음 존재(Homo Illuminatio)라고 정의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현재 내가 있는 그 자리에 던져진 존재(Dasein)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인간은 "왜 내가 이런 곳에 있어냐 하는가?" 하며 부정적인 사고에 붙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환경에 있든지 그 자리에서 "소망"을 찾아야 합니다.
    소망을 찾은 인간은 그의 삶이 행복합니다.
    반면에 소망을 찾지 못한 인간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 있을지라도 곧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요즈음 뉴욕은 136년만에 무더위가 찾아왔다며 뉴스에서 강조합니다.
    우리들은 136년만에 그 이전에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날씨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경험을 하게 하셨을까?
    각자가 깨닫는다면 그 자리가 곧 인간으로 올라서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짐승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간으로 승화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어리석은 짐승으로 타락하기를 원하십니까?
    선택과 결정은 나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늘과 땅만큼 엄청난 차이가 될 것입니다.

    깨닫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깨닫는 인생이 되라(시편 49:13-20)

    성경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고 말씀하십니다(시 49:20).
    많은 사람들은 부귀 영화를 누리는 것을 귀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비록 부귀영화를누리는 존귀한 사람일지라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같을 뿐이라고 말씀합니다.

    인생에게 깨닫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말로는 다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창 1:26, 27).
    따라서 사람은 인격적이며, 이성적이며, 도덕적 책임이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파스칼이 사람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하고 생각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따라서 사람은 한시도 생각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사람은 과연 생각하면서, 그리고 생각하는 중에 깨달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사람이 생각하는 중에 무엇을, 어떻게 깨달으면서살아 가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우리가 꼭 깨달아야 할 중요한 몇가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 그러한 깨달음을 어떻게 얻을것인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이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계심을 새삼스럽게 따지려고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은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창조하신 만물을 붙드시고 계시며, 마지막에는 심판도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창 1:1, 히 11:3, 1:1-3, 행 17:31).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시며(잠 1:7), 하나님께 나아갈 사람을 반드시 하나님이계신 것과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한다고 말슴하시는 것입니다(히 11:6).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이 계심을 깨달아, 하나님을 알아 뵈오면서살아야 하겠습니다.
    모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보는듯이 살았으며(히 11:27),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내 아들 솔로몬아너는 내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찌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고 유언하였으며(대상 28:9), 시편 기자도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줄 너희가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시 100:3).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여주면 하나님을 믿겠다고 합니다(요 14:8).
    그러나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요 4:24, 눅 24:39).
    우리들은 모든 것을 보아서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소리는 귀로 들어서 알게 되며, 냄새는 코로써 맡아서 알게되며, 맛은 혀로써 먹어 보아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영이신하나님은 마음으로 믿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말씀에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기쁘신뜻을 계시하여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하나님을 알아뵈여야 합니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은 창조주와 섭리주의와 입법주의와 심판주가 되신

    다고 말씀하십니다 (전12:1,히1:3,약4:12). 그러므로 하나님은 큰 주권을 가지시고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며, 우주만물을 붙드시는 중에 우리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장하시며,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보여 주시며, 이 기쁘신 뜻에 순종하는 여부를 따라서 심판하시어 상급을 주시기도 형벌을 내리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피조물된 인생,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받은 인생인 우리들은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고, 하나님을 알아뵈오면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아뵈오면서 살아가는 것을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잠1:7,9:10),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며(요14:1,벧전 5:7,시37:5,55:22),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딤전 4:8). 그리고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우리의 보배라고말씀하십니다 (사33:6).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고 의지하면서, 경건하게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에게 정성드려 예배하는 생활로 나타나며, 크고 작은 모든 하나님에게 정성드려 예배하는 생활로 나타나며, 크고 작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도우심과 복 주심을 바라면서 하나님을 중심하여 처리하는 생활로나타나며,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생활로나타나는 것입니다.그리고 이러한 삶은 하나님에게 영광과 기쁨을 드리게 될 것이며,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크신 축복속에서 기쁨과 평안과행복과 보람이 넘치게 하여 줄 것입니다.

     2.사람은 인생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중에서 영장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창조주, 섭리주, 입법주,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도 깨달아 알아야 하지만, 인생 자체에 대하여서도 바르게 깨달아 알아서 인생을 바르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아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존귀한 것입니다 (시49:12).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바로 알려고 하여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을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가되시며, 우리를 향하신 기쁘신 뜻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한번만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태어났다가 죽어서 세상을 떠나면 이 세상에는 영영히 다시 올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인생은 되풀이 되고 반복되는것이 아닙니다 (시90:3,히9:27). 이렇게 단 한번 뿐인 인생은 그렇게장구치를 못하여 짧은 인생을 살다가 떠나가야하는 것입니다 (시49:12,시90:5-6). 그리고 이 땅 위에서의 인생은 수고와 슬픔이 있는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날아가나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90:10). 그리고 사람은 형편을 따라서 땅 위에서 치부하며, 영화를 누리며 살 수가 있지만, 이 부귀영화가 죽음의 저 편에 까지 따라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찌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못함이로다"고 말씀하십니다 (시49:16-17). 어떤 사람은 이 땅에서 가난과 궁핍과 괴로움이 많은 인생을 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난과 궁핍과 고생이 죽음의 저 편에까지 꼭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러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에 대하여 교훈

    해 주고 있습니다.성경은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시146:3-4). 인생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잠27:1), 세상의 부귀영화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시62:10), 치부하고 영광을누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시며(시49:16), 다만 하나님을 만나고, 그 후에 있을 영원한 때를 위하여 준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내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내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고 말씀을 선포하였으며 (암4:12),바울 사도는 보이는지금의 세계는 잠간이지만 보이지 않는 내세는 영원하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고후 4:17-18). 그러므로 어디에서, 어떻게 우리의 영원을 보낼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과 평화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기 위하여 준비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3. 사람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짧은 인생을 살아야 하며,그것도 수고와 슬픔이 있는 인생을 살게 된데는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에게 죄를 지어서 이 모든 것이 인생에게 오게 되었으며,죽은 후에는심판을 받아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고 말슴하시는 것입니다 (창3:16-19, 23:24,히9:27,마25:41).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불쌍한 처지에 있는 인생을 위하여구원을 마련하셨다고 말씀하시며, 이 구원이 심히도 귀중한 것이라고말씀하십니다 (시49:8).

     하나님이 인생을 위하여 마련하신 구원은 사람으로 하나님에게 죄의용서를 받게 하는 구원이며 (사1:18,행2:38), 하나님에게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는 구원이며 (롬5:1),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자녀가 되게하시는 구원이요 (요1:12,롬8:14-17), 날마다의 생활에서 죄를 멀리하고빛의 열매를 맺으면서 거룩하게 사는 중에 구원을 이루게 하시는 구원이며 (히12:4,엡5:8-9, 벧전 1:13-15,빌2:12),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받으면서 기쁨과 평안과 축복 속에서 살게 하시는 구원이며 (롬5:11,빌4:4,요14:1,27, 요삼1:2),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시는 구원인 것입니다 (요14:1-3,12:26).

     이러한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한 인생으로서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울어도 어찌할 수 없고, 힘써도 어찌할수 없고, 참아도 어찌할 수 없는 구원인 것입니다 (새찬송가256장).

    범죄한 인생으로서는 다만 슬프고 괴로운 인생을 살다가 죽어서,영원한 형벌의 처소인 지옥에 가서 슬피 울며, 이를 갈면서 영원토록 지낼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참한 정황 가운데 처하여 있는 인생을 위하여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우리를 위한 구원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엡2:4). 이 구원을 이루시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시게 하신 것입니다 (고전15:3-4). 이렇게 인생을 위한 구원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된 것입니다 (엡1:7). 그러므로 인생을 위한 구원은 대가가 없는 구원이 아니라. 너무나도 고귀한 대가를 지불하시고 비로소 마련된 구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하신 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시지 않으시고 다만 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엡2:8). 무슨 고행을 요구하지도 않으십

    니다. 다만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행16:31,고전15:1-4). 성경말씀에 의지하면 이 믿음마저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다고 말씀하시는것입니다 (엡2:8). 우리가 여기에 깊이 명심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얻기 위하여 고행도, 돈도, 제물도 요구하시지 않으시지만, 믿음 하나만은 진실한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귀한 구원을 얻기 위하여 진실하고, 전폭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생명력이 있고 역사함도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4.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최후에 하나님께서 인생을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히9:27,롬14:10-12,계20:11-15).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한번은 서야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대로 될 것이며(롬2:2), 회피할 수 없으며 (롬2:6), 사람의 차별도 없이 공정하게 될것이며 (롬2:9-11). 은밀한 것 까지도 심판하실 것이며 (롬2:16),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롬2:16). 우리들은 이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행한 바 일들을 낱낱이 직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롬14:12).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는 사람에게는 정죄하여 심판은없는 것입니다 (롬8:1).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정죄를 대신 받으셨으며,죄의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나 믿지 않는사람에게는 어찌할 수 없이 정죄가 있고, 따라서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고 감격하여서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면서 봉사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큰 상급으로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고전 3:10-15,15:58).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행과 수고의 지극히작은 것도 다 기억하여 주시겠기에 우리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게 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10:40-42,25:31-40). 그리고우리가 행하는 악행이나, 게으름의 지극히 작은 것도 잊혀지지 않고다 기억하신 바 되어서 형벌로써 갚아지리라는 것입니다 (마25:26-28,41-46).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대를 의식하면서, 먼저 진실한 믿음으로써 죄의 정죄에 구원을 받는 우리가 되어야 하며, 악하고 게으르지 말고, 선행과 희생하면서 봉사하는 삶을 힘쓰는 중에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정죄를 면하는 것만 아니라, 영광스러운 상급도 받아 영원히 영광 속에서 즐길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에서 귀한 것들을 깨닫는 사람이되어야 하겠습니다.

     창조주와 섭리주의와 입법주의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고 의지하며, 경건하게 살아가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예배하며, 이 하나님을 중심하며, 이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십시다.

     우리는 우리 인생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인생은 짧습니다. 그러나 죽음 저 편에 있는 인생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영원을 위하여 준비하는 인생이 지혜로운 인생인 것입니다. 땅 위에서의 인생은 의지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으며, 다만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는 중에 영원을 위하여 준비하여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범죄한 인생을 위하여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은 너무나도 귀한 것입

    니다. 그 구원의 내용도 귀하고,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구원을 마련하여 주신 은혜도 귀하고, 예수님이 지불하신 대가도 귀하고,믿음으로써만 받게 하신 은혜도 귀한 것 뿐입니다. 진실한 믿음으로써만 받게 하신 은혜도 귀한 것 뿐입니다. 진실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를 의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안에만 정죄가 없스빈다. 지극히 작은 선행과 봉사도 상급으로 보상이 될것이며, 또 지극히 작은 악행이나 게으름도 낱낱이 형벌로써 갚아질것입니다.

     인생이 만물의 영장이요, 존귀한 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을깨닫지 못하는 인생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것입니다 (시49:20). 그러므로 말씀을 상고하는 중에, 그리고 기도하는 중에 이러한 귀한 진리들을 깨닫게 되고 우리의 한 번 뿐인 인생을 바로 살며, 영원을 위하여 바로 준비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시편 49:1~20)


    만민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물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묵상하리로다.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는 환난의 날에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저희의 속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셀라). 양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셀라).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지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은 많습니다만 깨닫는 바가 적어서 어리석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공부했고 그렇게 많은 지식을 얻었다고 해도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함으로해서 어리석고 미련한 자로 생을 끝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신문지상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비극적인 종말을 봅니다.
    즉 행위의 결과를 보는 것입니다.
    그 때마다 느끼는 것은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입니다. 그렇게도 바보스러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은 한마디로 깨달음의 문제입니다. 안다는 것은 이성의 기능에 근거해서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지혜를 생산하는 것으로, 알고 느끼고 결단하는 종합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지식을 과거 지향적이라고 한다면, 지혜는 미래 지향적입니다. 교육학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지적인 것(Knowledge), 받아들이는 것(Acceptance), 그리고 실천하는 의지력(Practice)의 세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지․정․의(知情意)가 합쳐진 그런 지식을 뜻합니다. 오늘의 복잡한 모든 문제가 알고 보면 깨달음이 부족한 데서 비롯한 그릇된 가치관 때문입니다. 무엇이 귀중한 것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입니까? 무엇이 정말로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길입니까? 이 길이 죽는 길인지 사는 길인지도 모르고 그릇된 욕망으로 인하여 치닫는 어리석은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깊은 이해가 없고 가치관이 결핍되고 미래적인 깨달음이 없어서입니다.
    인간은 깨달음을 축적하면서 지혜를 얻어 오늘의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야고보서 1 : 24에 보면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라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쉽게 풀이하면 거울을 통하여 자기 얼굴 생김새를 보았는데 곧 잊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건망증이 심한 사람입니까? 거울을 보면서 이 얼굴을 씻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곧 잊어버렸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경험에서 오는 깊은 지식이므로 그렇게 쉽게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마음 문을 열고 뜻을 굽히고 고집을 버려 믿음으로 이해하면 깨달음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몽롱한 가운데서 경험한 것은 무효입니다. 생각과 경험이 합쳐지고 여기에 믿음이 플러스되어야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즘 자녀 교육에 문제가 많다고들 합니다. 그 이유로는 오늘의 어머니들이 해산의 고통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해산의 고통이란 정말 대단히 어려운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면하기 위해 제왕절개니 무통분만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고통 없이 마취된 상태에서 아기들을 낳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어머니가 아니고 자식도 자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통하여 생명의 소중함과 자녀의 소중함, 그리고 부모님의 고마움이 우러나는데, 이것이 없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된다는 이 사실까지도 의식 밖의 경험이기에 무효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마취 중의 경험은 경험이 아닙니다. 맑은 의식 상태에서 경험과 생각이 합치고 여기에 플러스 알파로 믿음과 사랑이 합쳐지면, 완전한 깨달음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전인적(全人的)인 것입니다.

    깨달음에도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우선 보기만 해도 깨닫는 사람이 있고, 듣고 깨닫는 사람이 있으며, 매맞고 깨닫는 사람, 그리고 잃어버리고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경험이 없이는 돈 십원의 귀중함을 깨닫기란 쉬운 일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어느 분이 길을 가다가 지갑을 몽땅 잃어버렸답니다.
    그래서 집으로 전화를 해야겠는데 20원이 없어 쩔쩔매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잔돈이 없기도 하거니와 바쁜 걸음걸이를 멈추기가 귀찮아서 많은 사람들이 그냥 못들은 척하고 지나치곤 해서 20원을 얻는 데 그렇게도 힘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제야 10원이 귀한 것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대체로 잃어버린 다음에야 그 가치를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현재는 모르다가 과거사로 돌아간 다음에 그 가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은 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러다가도 조금만 사정이 나아지면 또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저 죽을 지경이 되어야 기도하고, 죽을 지경이 되어야 교회도 나오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항상 죽을 지경으로 살아야 제대로 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좀더 심한 사람은 죽은 다음에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부자는 살아생전에 끝내 깨닫지 못하고 죽어 지옥에 떨어져서 아브라함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서야 깨닫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믿었어야 했다고 지옥에서 깨닫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사실 지옥에까지 가서야 깨닫게 될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느 쪽에 속합니까? 보고 압니까? 듣고 압니까? 아니면 죽을 지경이 되어야 압니까? 혹시 아직도 깨닫지 못했습니까? 그렇다면 지옥까지 가서 알게 될 것입니다. 깨달음의 시점이 어디며 어느 정도에서 깨닫는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경험에는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이 있습니다. 내가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사람이 경험한 것을 듣고 보고 또한 책을 통하여서 전승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 말씀도 들으면서 이 모든 사건을 내 사건 내 경험으로 깨닫게 되는데 이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만약 이 깨달음이 없다면 기어이 그 모든 시련을 자신 스스로가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분적으로 경험하고 전체를 압니다. 어떤 사람은 한번 경험하고 그리고 일생동안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즉 하나를 경험하고 전체의 경험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미련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특히 바로 왕을 보면 그 대표적인 예로, 열 가지나 되는 재앙을 다 받고서야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는 것을 봅니다. 웬만하면 눈치 있게 한두 가지 재앙에서 알아차려야지 어쩌자고 열 가지 재앙을 다 받고 나서야 손을 듭니까? 솔직히 말하면 그는 홍해를 건너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쫓다가 그 곳에 빠져 죽었으니 열한 가지 재앙을 받은 셈입니다. 미련하게도 꼭 여기까지 왔어야 했습니까? 하나님이 양보하리라고 미련을 부렸는지도 모릅니다.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면 빨리 돌이키는 용기가 중요합니다. 출애굽기를 볼 때마다 사람이 어찌 이렇게도 미련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님을 곧 깨닫게 됩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우리는 몇 가지나 매맞고 지금 여기까지 와있는지 자신이 더 잘 알 것입니다. 사실 모든 경험은 단회적입니다. 한 번이면 충분하고 두세 번이면 충분하지, 여기서 또 맞고 또 맞아야 하겠습니까? 이사야서 1:5이하에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 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라고 간곡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흐르는 물에 여러 번 발을 담글 수는 있으나 같은 물에는 한 번밖에 담글 수 없습니다. 사건이 지나갑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사는 것도 한 번이요 죽음도 한 번이며 청춘도 한 번입니다. 즉 모든 사건이 단 일회적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경험을 결코 두 번 겪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간 다음에 후회한들 이제 무슨 소용입니까?
    본문은 우리에게 강하게 말씀하시기를 깨달음이 없는 자는 멸망할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실 짐승만도 못할 때도 많습니다. 저는 시골서 자랐는데 아버님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소는 자기가 빠진 함정에 두 번 빠지는 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한 번 잘못한 실수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미련하게도 실수할 줄 알면서 번번히 가던 길을 또 가고 또 가서 마침내는 죽어야 끝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깨달음에 대해서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재물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첫째, 재물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서 은사입니다. 둘째, 재물은 기회입니다. 얻을 기회도 있지만 써야 할 기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써야 할 기회에 쓰지 못하면 그 재물은 나에게서 다른 곳으로 넘어가서 그 때는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아무튼 재산이란 많든 적든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재물은 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이요 능력이며, 넷째, 자유하게 합니다. 내게 주어진 경제적인 여유만큼 나로 하여금 자유를 향유하게 해서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재물은 책임을 가지게 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만큼 책임이 있고,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만큼의 축복이기 이전에 책임이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혹시 가난합니까? 책임이 적습니다. 그러나 남보다 얼마간의 재산을 더 가졌다면 더 가진 만큼 책임이 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재산을 잘 관리하고 잘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가서 추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주변을 어지럽게 하는 문제들을 보십시다. 지나치게 많은 재산을 모으기만 했지 잘 쓰지 못하여, 그 책임을 신랄하게 추궁 당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하루 세 끼면 족한데, 쓸데없이 많이 가졌다가 망신당하는 것입니다. 소유한 재물만큼 무거운 책임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한 재물은 악으로 기울어지는 큰 함정입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황금흑사심(黃金黑邪心)을 말씀하셨고 청빈낙도(淸貧樂道)를 원했습니다. 그저 가난하면 마음이 깨끗하고 부하면 마음이 어지럽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들은 옛날 이야기로만 돌리기에는 상당히 의미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재물로 인해 기울어지기 쉬운 악은 무엇입니까? 재산을 지나치게 신임하는 것입니다. 아니 필요 이상으로 그 능력을 믿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극복해야 할 심리적 함정이 네 가지나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귀족 심리 발동입니다. 돈이 있다고 귀족입니까? 사람들은 부하면 스스로 교양 있고 인격이 있다고 착각하기까지 합니다. 인격과 재산은 별개입니다. 나를 보고 남을 보듯이 재산과 그 인격은 완전히 별개입니다. 그러므로 부유하다고 귀족인 체하지 말고, 가난하다고 비굴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재물과 상관없이 고결한 자기 인격과 체통을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빠지기 쉬운 함정은 의인 심리를 자극하는 것입니다. 즉 돈이 있으면 스스로 의인인 양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 가운데도 모아서는 안 될 재산을 축적해 놓고는, 하나님께서 내게 축복을 주셨다고 감사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이 돈을 모으면서 지은 죄들을 다 사함 받은 것처럼 오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의인에게 내리시는 부함도 있지만 악인에게도 부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부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고 가난하면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잘못 알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셋째로 이기심이라는 함정입니다.
    돈이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려고 하는 이기심이 있어, 극복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미주 여행을 하면서 긴 비행 시간 동안 4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공교롭게도 모두가 갱 영화였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같이 경찰과 불량배들과의 시이소 같은 싸움이었습니다. 불량배들은 은행을 털거나 보석 등을 훔치는 것까지는 모두가 합심하여 일을 잘 진행시키는데, 문제는 공정한 분배에서 꼭 말썽이었습니다. 서로 좀더 가지겠다는 이기심에서 드디어는 "서로를 죽이고 죽는 혈전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부한 자에게 큰 경고가 있습니다. 즉 분배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으로 나만 생각하면, 그것으로 인해 남도 망하고 나도 망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우상 심리가 있습니다. 즉 돈을 섬기고 자기는 돈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사실 알고 보면 돈이란 그렇게 귀한 것이 못 됩니다. 돈이 절대적인 것 같지만 돈처럼 시시하고 가치가 적은 것은 없습니다. 자,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 보십시다. 나에게 건강이 있고 명예가 있고 자식이 있고 그리고 재산이 있다고 합시다. 이 중에 만약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어느 것을 포기하겠습니까? 건강입니까? 자식입니까? 아니면 명예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재산이 가장 시시한 것입니다. 재산이 가장 낮은 가치의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맨 꼭대기에 올라가서 왕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인간사에서 맨 마지막에 있어야 할 돈이 제일 위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으니 웬일입니까? 이것이 바로 세상이 어려워지는 이유입니다. 돈은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여기에 안정이 있거나 영구적인 것은 더욱 아닙니다. 돈은 지극히 상대적이며 임시적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사는 정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입니다. 잠깐이면 지나가는 영화 장면처럼 금방 지나갑니다. 여러분, 이 세상일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깨달음의 문제는 죽음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은 지금 죽음을 향하여 달리고 있습니다.
    종말이 순간순간 가까워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나이가 50을 넘었다면 이제 욕심을 줄이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생각과 행동을 다듬어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 잘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지난날은 되는대로 살았더라도 이제부터 정신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지난날에는 후회할 일도 많습니다만 이제는 다시 후회할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곧 떠나야 하므로 시행착오할 시간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비행기를 탈 때는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라고 했습니다. 내 인생이 여기서 끝난다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우리들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과 정직함의 유산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떠나야 하고 요단 강을 건너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나의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을 뵈올 것입니까? 욥은 말하기를 그는 내게 낯설지 않게 대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그 날에 너희는 나의 자랑이 되리라"고 하는 그런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주님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멀어져 가는 세상을 아쉬워 말고 가까워 오는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주님 뵈올 준비를 해야 합니다. 송나라에, 어떤 사람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희귀한 보석을 재상에게 뇌물로 진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재상에게 말하기를 "이 보석을 감정해 보니 대단히 희귀한 것이라 재상에게 바칩니다" 하며 보석을 내놓았습니다. 그 때 재상은 "그것이 소중한 보석이지만 내게도 귀한 보석이 있소. 그것은 탐심하지 않는 것이오. 그러니 내가 당신의 보석을 받는다면 그 순간 당신도 보석을 잃게 되고 나도 나의 보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당신 보석은 당신이 가지고 내 보석은 내가 가지도록 해 주시오"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보석은 어떤 것입니까? 무엇을 자랑거리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람은 존귀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짐승과 같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이제 죽음에 대하여 종말에 대하여 깨달아야 하는 시간이 왔습니다. 그리고 물질에 대한 새로운 정리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깨달음이 있어야 인간입니다.
    한번 깨달았으면 곧 실천해야 합니다. 다시는 후회하지 않는 깨끗하고 정결한 신앙 생활로 하나님께 바르게 응답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6월 26일(목) 시편 41-47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극락의 하나님(43:4)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Then will I go to the altar of God, to God, my joy and my delight. I will praise you with the harp, O God, my God.

    극락(極樂)의 하나님

    극락(極樂)이란 한자의 훈은 "다할 극" "풍류 악"이라고 하며 사전적 의미는 두 가지로 소개됩니다.
    첫쨰는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 둘째는  지극히 안락하여 아무런 근심이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다할 극, 잦을 극, 극진할 극

    • 1. 다하다.   2. 잦다.   3. 재빠름.   4. 극.   5. 용마루
    풍류 악, 즐거울 락, 좋아할 요, 노래 악
    • 1. 풍류.  2. 즐기다.  3. 좋아하다. 4. 음악.  5. 연주(演奏)하다
    1.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
    2. 지극히 안락하여 아무런 근심이 없는 상태
    극락을 히브리어로 "시므하트 길리(שִׂמְחַת גִּילִי)" "joy and delight"


    8057. 시므하


    1524. 길


    나의 극락(極樂)의 하나님
    -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기쁨중의 기쁨이신 나의 하나님'이다.
    이것은 최고의 기쁨을 제공하는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기자의 고백이다.
    더군다나 극한 고통을 당하던 끝에 드디어 하나님 전에, 나아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때 기자가 맛보게 될 때 기쁨은 최고의 기쁨이 될 것이 분명하다.

    찰스 스윈돌 목사님에 의하면 기쁨을 빼앗는 요인 중 오늘날 가장 심각한 것이 셋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근심, 둘째는 스트레스, 셋째는 두려움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엇비슷해 보이지만 뚜렷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근심은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대한 터무니없는 염려’입니다. 사건의 결말을 기다리는 동안 근심은 서서히 효력을 드러내는 산(酸)처럼 기쁨을 부식시키는 것입니다. 둘째로, 스트레스는 근심보다 더 심각한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우리가 변화시키거나 조정할 수 없는 상황, 즉 우리 통제 밖에 있는 것에 대해 심하게 긴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대신 우리는 마음에 동요를 일으킵니다. 지속되는 마음의 동요 속에 스트레스는 가중됩니다. 마지막 셋째로, 두려움은 근심이나 스트레스보다 더 심각합니다. 위험, 불행 또는 고통이 있을 때 느끼는 무서운 불안정감입니다. 근심이나 스트레스와 마찬가지로 두려움은 어떤 일을 사실보다 과장시킵니다. ‘기쁨을 빼앗는 이런 것들에서 자유롭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다’라고 스윈돌 목사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빌립보서1장 6절 말씀 나눴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과연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믿음으로 우리의 기쁨을 뺏았아 가는 이 세 가지 요소인 근심과 스트래스와 두려움들을 이겨 나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이겨 나아가야 합니다. 특히 스바냐 3장 17절 말씀을 붙잡으십시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근심과 스트래스, 두려움 같은 것을 이겨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시며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우리 안에 근심과 스트래스와 두려움 같은 것들을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성령의 열매인 희락)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43편 4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가리켜 “나의 극락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의 극락의 하나님”이란 “내가 기뻐하는 기쁨의 하나님”이라고 직역할수 있습니다. 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자기의 최고의 기쁨으로 삼았습니까?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한 3가지로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 또한 하나님을 우리의 최고의 기쁨으로 삼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 주님은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43:1)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건지소서

    פָּלַט 스트롱번호6403
    1. 부드럽다.  2. 피엘형.  3. 모두 빠져나가다
    발음 [ pâlaṭ ]
    구약 성경  /  27회 사용
  • 관련 성경  /  피하다(시 18:2, 31:1, 겔 7:16), 구원하다(시 17:13, 82:4), 건지다(삼하 22:44, 시 18:43, 91:14), 벗어나다(욥 23:7),
    보존되다(미 6:14).

  • 사도행전 12:1-19의 말씀 중심으로 주님께서 사도 베드로를 감옥에서 이끌어 나오게하신 구원의 역사에 대해서 묵상하였습니다.
    아무리 헤롯 왕이 베드로를 철통같이 지키도록 하였었지만 주님의 구원의 능력 앞에서는 그 모든 쇠사슬이나 군사들 및 감옥, 쇠문 등이 무용지물이었음을 배웠습니다.
    주님께서는 헤롯 왕과 불신자 유대인들의 “모든 기대”에서 베드로를 벗어나게 하셨습니다(행 12:11).
    그리고 주님께서는 교회의 기도와 기대를 들어 응답하시사 베드로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물론 교회의 간절하고 지속적이며 함께 기도한 것이 온전한 믿음의 기도와 기대가 아니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의 주권적인 뜻인 베드로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경험한 후 내세울께 뭐가 있습니까?
    과연 기도 공로를 내세울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의 역사인데 과연 우리가 내세울 공로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그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경험하는 자들로써 찬송가 474장 찬양의 후렴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로다 참 기쁘고 즐겁구나 그 은혜를 영원히 누리겠네 곧 평안히 쉬리로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이 세상에는 근심된 일이 많고, 곤고한 일 그리고 죄악된 일이 많은 세상인데 그 가운데 살아가면서 우리는 참 평안을 누리기가 쉽지 않고 또한 쉬는 날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더 나아가서 “참 죽을일 쌓”인 이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가 평안히 쉴 수있는 것은 주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로 하나님께 고소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고소하는지 1절에서 한 두 문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경건치 아니한 나라”(an ungodly nation) .
    “무자비한 나라”로서 죤 칼빈에 의하면 이것은“이방적인 불신앙으로 동하여 다윗을 핍박한 사울과 그 정권을 가리킨 듯하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박윤선). (

    “간사하고 불의한 자”(the deceitful and unjust man).
    “막무가한 악인”인 간사하고 불의한 자를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고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악인들로부터 건져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이유는 그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같이 경건치 아니하였던 자들 그리고 간사하고 불의한 자들을 십자가의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이 구원의 주님은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런 저런 삶 속에 예기치못한 어려운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시사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지속적인 구원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내일도 자신의 공의로우심을 나타내시사 우리를 이 악한 세상에서 건져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한 기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주님은 그의 힘이 되시기 때문(43:2)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시편 기자는 불경건하고 불신앙적인 악인들의 압제와 핍박으로 인해 고통 중에서 슬퍼하면서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자기를 버리셨는지 자신의 솔직한 느낌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 어찌하여 …”라는 말씀속에서 우리는 시편 기자의 간절함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극심한 고통 중에서 “어찌하여”, 즉 “왜”(why?)라는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고통과 슬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시지않았는가라는 느낌 가운데 “왜”라는 질문은 우리 또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시편 기자의 “어찌하여”라는 기도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원망에서 나온 기도라기 보다 “벌써 하나님의 응답을 얻은 것과 같은 신념에서 나온 것”입니다(박윤선).

    이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하면 “힘”이라는 단어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성경에는 “” 그리고 영어로는 “strength”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 원어 “마우즈”는 실상 “피난처”를 의미합니다(박윤선).

    힘(4581) 마우지 <마오즈. mâʽôwz> מָעוֹז  

    1. 요새.  2. 도피처
    발음 [ mâʽôwz ]
    어원 / 어미활용 מָעוּזִּי ,מָעֻזִּי, 복수 מָעֻזִּים,5810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3회 사용
    • 1. 명사, 남성 요새, 견고한 곳, 방벽, 성채, 도성, 삿6:26, 사17:9, 23:4, 겔30:15, 단11:7,10,38
    • 2. 명사, 남성 도피처, 은신처, 사25:4.
      • a. 명사, 남성 [주]비유적으로; 여호와[도피처가 되심], 시37:39, 43:2.
    • 관련 성경
      ☞힘(느8:10, 시52:7, 사27:5), 능력(시27:1,사17:10), 산성(시28:8, 잠10:29, 단11:10, 나1:7), 요새(사23:4, 25:4, 렘16:19), 세력(단11:12), 성(단11:7), 피난처(나 3:11), 견고한 곳(단11:31).
      [동] 강하게 하다(단11 : 1).

    시편 기자는 피난처가 되시는 주님을 의지하면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라고 간구하였던 것입니다(2절).
    그는 비록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고통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자기의 피난처가 되심을 알고있었기에 그에게 피하여 주시는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어찌하여”, 즉 “왜”라는 질문을 던질 때가많치 않나 생각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역경으로 인하여 고통 중에 있을 때 그 고통을 견딜수가 없을 때에 우리는 피난처가 되시는 주님의 품 안에 앉겨서 “왜?”라는 질문식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간사하고불의한 자들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때 그의 영혼이 낙망하며 불안하였습니다(5절). 그 때에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힘으로 다시금 일으킴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저는 우리가 이미 묵상한 시편 18편 1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주를 사랑하나이다”(I love Thee, O Lord, my strength).
    힘이 없어 철저히 무기력함을 깨달아 가는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는 반석이 되시며 요새가 되시며 우리의 피할 바위가 되시며 산성이되시는 주님을 의지하므로 말미암아 새 힘을 얻어 다시금 독수리처럼 창공을 나르는 신앙인으로 세움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시편 기자는 주님을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였습니다.

    셋째, 주님은 인도자가 되시기 때문(43: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인도하사(5148)  나하흐(nâchâh) נָחָה

    1. 인도하다.  2. 이끌다. 3. 멸하다
    발음 [ nâchâh ]
    구약 성경 / 39회 사용
    • 1. 원형 [칼형의 완료형과 명령형, 히필형의 부정사와 미완료형] 인도하다,출32:34, 민23:7, 삼상22:4, 욥38:32, 시5:9(8), 27:11, 31:4(3),61:3(2), 73:24, 143:10
    • 2. 원형 이끌다[군대같이], 왕상10:26, 왕하18:11.
    • 3. 원형 멸하다, 욥12:23.
    • 관련 성경  /  인도하다(창 24:27, 삼상 22:4, 시 5:8), 이끌다(시 60:9), 데리다(민 23:7), 두다(왕상 10:26, 왕하 18:11),
      사로잡히다(욥 12:23), 다스리다(시 67:4).

      욥기 12:23 / 사로잡히다
      만국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열국으로 광대하게도 하시고 다시 사로잡히게도 하시며.





    시편 기자는 그의 원수들의 간사하고 불의한 행동으로 인하여 낙망하고 불안하고 있었을 때에 그 마음의 어두움 속에서도 주님의 빛의 인도하심을 바라보았습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합니까?
    우리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가고 있을 때에 그 어두움의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낙망하며 불안해하는 가운데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무서운 것은 우리가 그 어두움에 익숙해 져 가면서 빛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그 어두움 속에서 빛을 바랄 볼 수 있는 힘(혹은 믿음) 조차도 상실해 가지 않나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지 그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빛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그의 인도하심을 받아 어두움 속에서 빠져 나올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주의 진리”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박윤선 박사님에 의하면 진리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어김 없이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 이행의 신실성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곧, 시편 기자는 어두운 고통의 터널 안에서 빛되신 주님의 인도하심을 사모하였는데 특히 그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여 주님의 인도하심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는 빛되시며 진리가 되시는 주님께서 자기를 주님의 성산과 장막으로 인도해 주시길 간구하였습니다(3절).
    그러므로 주님의 임재 가운데 그는 거하길 원했습니다.

    요나서 2장 4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 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하나님의 말씀(명령)에 불순종하므로 결국은 “깊음 속 가운데”(3절) 물고기 안에 있었던 요나 선지자는 다시금 주님의 성전을 바라보므로 말미암아결국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요나 2장 9절에서 요나 선지자는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Salvation is from the Lord)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어서 새 힘을 주시므로 오늘도 우리를 약속의 땅이 저 높을 곳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인도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우리의 극락의 하나님, 우리가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하나님, 그러기에 우리는 낙망하며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 구원의 소망!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과 힘(피난처)과 인도자가 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우리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해야 합니다.







    1. 이 시인에게 있는 간절한 소망은 무엇인가?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는 것(3, 4): 주의 거룩한 산은 예루살렘을, 주께서 계시는 곳은 성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 성전 예배에 동참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42편과 동일한 내용이다. 대다수의 히브리 사본에서는 이 시편이 42편과 한 편의 시로 묶여 있다. 42편의 3연인 셈이다.

    2. 성경에 극락이란 단어가 있을까? 예전 번역에는 바로 이 시편에 있었다. 본 시편의 어느 표현을 극락이라고 번역했을까?

      큰 기쁨(4): 그러니까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을 ‘나의 극락의 하나님’이라고 했었다. 불교 용어와 같은 단어이기는 하지만 괜찮은 번역이라고 생각했는데 좀 아쉽다. 하나님이 최고의 기쁨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표현이다. 섬기고 굴복해야 하는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내가 가장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3. 시인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자는 누구인가?

      경건치 아니한 나라(1): 나라, 혹은 백성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을 사용한 것은 대적하는 무리가 적지 않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은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킨 경우가 가장 적합하기에 저자는 다윗과 같은 처지에 내몰린 고라 자손이라고 보면 안 될까?

    4. 대적에게 맥없이 쫓기는 자신의 처지를 보면 하나님이 원망스럽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지 않고서야 내가 이렇게 힘을 쓰지 못할 리가 없다(2). 이렇게 슬프게 쫓기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2절을 42:9과 비교해 보자.

      강도가 더 세어졌다: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대적으로 인한 고난이 더욱 심해진 모양이다.

    5. 때로는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

      그럴지라도 즉시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3-5)이 회복의 지름길이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 아니, 그럴수록 하나님께 더 달라붙는 것이 매를 덜 맞는다.

    6. 시인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힘(2), 기쁨(4), 도움(5): 이 세 가지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호연관된 것이다. 능력의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기쁨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시의 지은이로 생각되는 다윗은 그의 원수들의 옳지 못한 폭력과 포악에 의해 자기 나라에서 쫓겨난 후에 그것을 보응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곳에 다시 돌아갈 소망을 갖도록 자신을 격려하고 있다.”

    –     칼빈 주석 시편 43편 서론 중에서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계속되는 몇 절에서 그는 자기가 성전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된 것보다 더욱 슬픔을 느끼게 한 것도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가 처음으로 사용하고 잇는 ‘판단’이란 말은 ‘어떤 이의 사건을 변호하다’라는 의미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는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자기가 하고 있는 말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그가 드린 기도의 내용과 목적은 자기를 부당하게 핍박하는 악하고 악의에 찬 사람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소송을 심리해 주시기 위하여, 그것을 무시해 버리지 아니하시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될 때 굉장한 힘을 주는 위안의 원천이 되는 것같이 우리들의 결백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적을 대항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만큼 분명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가해진 손상과 잘못을 하나님이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     칼빈 주석 시편 43편 1절 중에서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다윗은 주님께서 자기 원수들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들이 자기에게 손상을 줄 수 없음이 절대적으로 확실하다고 간주했다.”

    “잠시 동안 자기에게 나타나지 않았던 은혜를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내시고자 하신다는 사실로부터 그는 기도할 용기를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내시고자 하신다는 사실로부터 그는 기도할 용기를 얻고 있다.”

    –     칼빈 주석 시편 43편 2절 중에서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빛’은  ‘은혜’로서 이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역경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하늘을 구름과 안개로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를 풍요하게 해주는 하나님의 복을 우리가 받게 될 때, 이 복은 우리를 둘러 비추는 청명한 날에 빛나는 상괘한 빛과 같고, 슬픔 가운데에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 그 모든 두터운 어둠을 몰아내는 생명의 빛 과도 같기 때문이다.”

    “다윗은 ‘진리’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이 빛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자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있다.”

    “다윗은 진실되시고 누구를 속이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을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사실을 확신있게 신뢰하고 있다.”

    “하나님의 호의가 어떠한가를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믿음이 안전하게 설 수 있는 다른 기초란 있을 수 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 위하여 그의 손을 펴실 때, 이에 대한 체험은 말씀과 믿음을 위한 적지 않은 확신이 된다.”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다윗은 이 말로써 자기가 당한 재난으로부터 구원을 얻고자 했을 당시에 자기 소원의 주요 목적이 무엇이며, 어떤 목표를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선언하고 있다. 그가 가진 슬픔의 주요 이유는 경건한 자들의 모임에서 쫓겨난 것이 었으므로, 그는 최고의 기쁨을 종교적 행사에 가담하고 성소에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자유를 갖는 것이 두고 있다.”

    –     칼빈 주석 시편 43편 3절 중에서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다위은 하나님을 ‘기쁨이신 하나님’ ‘극락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슬픔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즐거움으로 회복 되었으므로, 그는 극히 긐 은혜를 공공연하게 인정하기로 결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더욱 훌륭하게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하나님을 ‘나의 기쁨 중에 기쁨’이라고 부르고 있다.”

    *묵상*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극락(나의 큰 기쁨)이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가장 큰 즐거운 존재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 고백을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과연 우리 인생에서의 가장 즐거움을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사람은 인생에서 수 많은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아름다운 자연, 배우자, 자녀들, 건강, 직장, 친구, 취미 등등.. 나열 할 수 없을 정도 입니다. 그것이 선한 것이라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이 되어야 하는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자연도, 배우자도, 자녀도들도, 자신의 건강도, 직장도, 친구들도, 취미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속에서만 즐거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그 첫번째 질문을 이렇게 묻습니다‘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 대답으로 이렇게 말합니다‘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 때 가장 기쁩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체를 기뻐할 때 사람은 가장 행복합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가장 행복한 상태는,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을 자신의 극락(최고의 기쁨)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슬픔 이유를 원수들에 의해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가지 못하게 된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빛과 진리를 속히 보내셔서, 자신을 성소로 인도해 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라고 영혼의 기쁨을 다시 찾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까? 우리의 원수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허무와 슬픔에 빠지게 합니다. 헛된 목적으로 삶을 바쁘게 살도록 하거나 목적없이 인생을 허비하게 합니다. 그때 우리는 다윗의 기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허무와 슬픔에 빠진 이유는 하나님 기뻐하지 않게 된 것에 있습니다. 속히 우리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인도되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말씀은 빛과 진리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소망을 둔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참 기쁨을 찾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최고의 기쁨으로 고백할 것입니다.



    43편은 42편의 계속입니다. 원래는 하나의 시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5절에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는 말씀이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43편의 핵심은 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극락의 하나님"입니다. 극락의 하나님은 43편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언제나 중심에 좌정하셔야만 할 분이십니다. 문제는 범죄하여 추방당한 인간이 어떻게 극락의 하나님 제단에 나아갈 수가 있는가, 이 점이 풀어야 할 난제요 43편은 그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고 하나님 제단에 나아가게 되기를"(4) 사모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도 극락의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합니다. 42편에서도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2) 하고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음을 봅니다.

    첫 절에 보면 지금 시편 기자는 "경건치 아니한 나라"의 "간사하고 불의한 자”(1)에게 붙들려 송사를 당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에게 "나를 판단하시고 변호하시며 건지소서" 하고 호소합니다.

    경건치 아니한 나라가 1차적으로 어떤 나라를 가리키고 있든지 그리고 간사하고 불의한 통치자가 누구를 가리키든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고 그의 백성을 압제하는 "원수”(2)라는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 임금“(요12:31)이요,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엡6:12인) 사탄의 권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그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4)라고 될 수가 있겠습니까? 해답은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 이르게 하소서"(3) 합니다.

    그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주도록 하나님이 보내주실 "빛과 진리"가 누구이겠습니까? 57:3에서는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고 같은 뜻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실 빛과 진리가 되시고 은혜와 진리(요1:9,17)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벤전 3:18에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죄인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결론은 분명하여졌습니다. 42편과 43편의 낙망과 불안은 육적인 낙심이 아니라 극락의 하나님께 이를 수 없음에 대한 근원적이고도 본질적인 낙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답은 "빛과 진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시편 기자는 빛과 진리를 보내주실 하나님을 앙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42:1에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은" 갈망도 결국 극락의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사모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마5:6) 갈급함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시편 기자만의 갈급함이 아니라 구약시대 성도들 모두의 갈망임을 성령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을 신약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이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히10:19-20) 이제 아셨습니까?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4하) 한대로 선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묵상해 봅시다.

    42, 43편의 중심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낙망과 불안은 결국 무엇에 대한 낙망입니까?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게 됨이 어떻게 가능해졌습니?까

    적용: 형제도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게 됨을 확신하게 되었다면 낙심이 변하여 오히려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암송: 하나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4).

    제 44 편

    옛날에 행하신 일을 추억하라

    요절: 4절

    내용 관찰

    44편은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이 적과의 싸움에서 패퇴한 후에(9-16) 하나님께 호소한(17-26) 마스길입니다. 마스길이란 교훈 시라는 뜻인데 이런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만 하는가를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대적들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9-10) 한대로 적과의 싸움에서 패퇴하였습니다.

    먼저 알 것은 성도가 당하는 크고 작은 시련이 반드시 어떤 죄 값으로 당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점을 17절 이하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17)고 말씀합니다. 시련을 만나면 하나님은 주무시는 것 같기도 하고 나를 영원히 버리신 것 같은(23) 절망감에 빠지기도 쉽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하고 극복하여야만 할까요. 44편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 묵상함이 도움이 됩니다. 시인은 첫 부분(1-3)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1)을 회상합니다.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었던 것은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3),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1) 말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고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여 주신(롬5:8) 그 사랑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이 당면한 시련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과거를 기억하며 그런 연후에 둘째 부분(4-8)에서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4) 하고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고백할 때에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책임져 주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5)고 확신합니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6-7)고 이미 승리하게 해주신 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 연후에 셋째 부분(9-16)에서 "그러나 이제는…… "하고 비로소 현재의 고난을 진술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17-26)에서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26) 하고 간구함을 올립니다.

    사도바울은 본문 22절을 환난 중에 있는 로마교회에 보낸 서신에 인용함으로써 (롬8:26) 시편 44편이 성령께서 시련 중에 있는 신구약 모든 교회에 주시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임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6-37) 합니다. 우리도 그러합니까?

    44편은 결론에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26하) 합니다. 이는 일시 대적과의 싸움에서 패퇴하였으나 결국은 승리할 것을 확신하는 이 사건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대적 원수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될 것과 속량(구원)하여 주실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속량"입니다.


    본문: 시편 139편 3절

    제목: 심판의 하나님, 극락의 하나님

    3절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기에 보면 “살펴보다.”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흩뿌리다. 까부르다.”라고 합니다. 곡식을 타작할 때 껍질은 바람에 날려 보내고 곡식 알갱이만 남도록 하는데 오늘 본문에서 “살펴보다.”라는 단어가 바로 그런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은 우리 삶의 모든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다.”라는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하나 살펴보시고 곡식의 알갱이에 해당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위는 남겨놓으시지만, 곡식의 껍데기에 해당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시는 행위는 전부 다 날려버리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행위 하나하나를 심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무심코 살아가고 있지만 이와 같이 우리의 행위 하나하나는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있음을 잊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깨어 있으라.”(마24:42)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매 순간을 깨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삶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져주십니다.

    즉 우리가 매 순간을 깨어서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반드시 책임지셔서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이 항상 형통하고 복된 삶이 되게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매 순간을 깨어서 살아갔던 사람이 바로 이 시를 쓴 다윗 자신이었습니다. 다윗은 어릴 때부터 부모와 형들에게 버림을 받고 산속에서 양을 치는 목동으로 살아가야만 하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산속에서 양이나 치다가 80세가 될 때까지 양을 쳤던 모세처럼 그의 삶을 마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사무엘을 보내셔서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게 하시고 그를 사울의 뒤를 잇는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우리는 얼마든지 그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는데, 그것은 다윗이 산속에서 양을 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산속에서 양을 치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시로 만들어서 수금과 비파를 연주하며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였을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바로 그것이 그를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일이 취미였으며 특기였으며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였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산속에서 양을 치면서 그렇게 살았을 것이라는 것을 시편에 기록된 약 70여 편의 그의 시를 통하여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노아가 바로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노아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성경은 노아를 가리켜서 “의인”이라고 소개하였으며 “완전한 자”라고 소개하였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하며 어떻게 하든지 자기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을 하려고 하였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런 일은 누가 시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노아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노아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며 보람이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노아에게 가장 큰 만족을 안겨주었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던 궁극적인 원인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가 그렇게 항상 하나님만 생각하고 그의 모든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도 마찬가지이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그리고 노아처럼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우리의 생각과 행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각과 행위를 하려고 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노아처럼, 그리고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런 것이므로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으며 그런 우리를 통하여 칭찬을 받고 높임을 받으셔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와 같이 노아처럼, 다윗처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하나님께서 살피셔서 알갱이가 되는 생각과 행위는 남겨놓으시고 껍데기가 되는 생각과 행위는 모두 날려버리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의 마땅한 삶의 모습입니다. 노아와 다윗은 평생 그 삶을 살아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에 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우리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죄인인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사함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4장에서는 그 예수님을 가리켜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는 없으시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순간도 죄를 범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만약 예수님도 우리처럼 지극히 작은 죄라도 범하셨다면 그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봐야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와 똑같은 죄인인 누군가가 내 죄를 사해주겠다고 하며 죽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나의 죄를 사해주기 위하여 아무리 죽어봐야 그 죽음은 결코 내 죄를 사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털끝만한 죄도 없는 의인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을 때 비로소 그 죽음이 내게 효력이 있어서 내 죄가 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효력이 있어서 우리의 죄가 사함 받은 것은 예수님께는 털끝만한 죄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가시면서 그렇게 털끝만한 죄도 범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까지 살아가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삶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입니다.

    다윗이 평생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였으며 노아가 평생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다가 갔습니다. 우리도 비록 예수님처럼 완벽하게 살아갈 수는 없지만 그 삶을 동경하고 그 삶을 목표로 삼고 그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있는 모든 힘을 그 일에 쏟아 부어야 합니다.

    다윗과 노아와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살아가야만 했을까요? 우리가 볼 때 그 삶은 너무 힘들고 불편하며 아무런 재미도 없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생각이지 그들에게는 그 삶이 결코 힘들거나 불편하거나 아무런 재미도 없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아주 오래 전에 시편을 읽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성경에 있어서는 안 되는 단어를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보았던 개역한글 성경을 보면 시편 43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43:4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여기에 보면 “나의 극락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극락”이라는 단어는 불교용어이기 때문에 제가 성경에서 이 단어를 보고 깜짝 놀란 것입니다. 이 부분을 지금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

    아마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이 “극락”이라는 단어가 불교에서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이렇게 바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큰 기쁨”보다 “극락”이라는 단어가 더 와 닿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을 가리켜서 “극락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극락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이 시를 쓴 시인에게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최고의 기쁨, 극한의 기쁨을 안겨주시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에 밤마다 산에서 기도하면서 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는 이 분 한 분으로 충분했으며 이 분 외에 아무 것도 원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사랑이 너무 컸기 때문에 이 세상이 내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이 전 우주와 영계의 주인이시니까 이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내 것이라는 생각이 그 당시에는 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은 제게 “극락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다윗이, 노아가, 예수님께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는 모두 “극락의 하나님”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극락의 하나님”을 가장 잘 표현한 성경이 아가서입니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 사이에 나눈 사랑을 기록한 성경인데 하나님께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 사이에 나눈 사랑을 통하여 예수님과 우리 성도들이 나누는 사랑에 대하여 말씀해주셨습니다.

    아가서 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가서 4:9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지금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에게 완전히 다 빼앗겨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솔로몬의 마음이 온통 술람미 여인에게 쏟아 부어진 것처럼 예수님의 마음이 전부 다 우리에게 쏟아 부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의 온 마음이 예수님 한 분께 쏟아 부어지기를 원하시는데, 다윗이, 노아가 바로 그렇게 살다가 갔습니다. 그들이 매 순간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을 높여드리며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갔던 것은 의무적으로, 억지로, 형식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두 연인이 상대방에게 마음을 완전히 빼앗긴 상태에서 오직 상대방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아가도록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는 “극락의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은 그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극락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들처럼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며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갈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극락의 하나님”, 즉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앎이 우리로 하여금 다윗처럼, 노아처럼, 예수님처럼 매 순간을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도만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멈추지 않게 계속하게 해줄 것입니다. 그 삶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맛보았던 그 기쁨, 천국에서 맛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해줄 것입니다.

    날마다, 매 순간을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보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마시고 늘 그 하나님 앞에서 매 순간순간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하여 “극락의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날마다 맛보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극락하면 우선 생각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용어로 이해된다.

    그러나 성경 (시편43:4)에 “극락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로 인해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천국과 극락에 대해서 혼돈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참 하나님이 계신 진리의 천국과 극락은 본질이 다른 곳으로서,

    예수께서 공중 강림하시기까지는 하늘나라로서 극락이라 하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바울이 증거한 삼층 천의 비밀을 알아야 하는바,

    1층은 각종 짐승들이 들어가는 곳이고,

    2층은 각종 새들 곧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 곧 귀신이 들어가는 곳이다.

    3층은 진리의 아들로 택함을 받은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다.

     

    이와 같은 비밀은 노아의 방주(3층 구조)에서 예표해 주셨는데,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육신 세상은 1층천이고,

    1층천에 살다가 죽은 후에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이 가는 곳이 2층천이다.

    3층천은 구원을 받는 진리의 아들들이 들어가는 곳이다.

     

    천국하면 오직 하나로 이해되지만,

    사람이 죽고 난후에 가는 곳은 두 군데인데...천국과 지옥이다.

     

    창세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직 천국과 지옥은 이루어지지 않고

    천국 백성의 수가 정해지면....나머지는 지옥 백성이 되고,

    그때가 되면 삼층 천에 계신 예수께서 이층 천으로 공중 강림하셔서

    첫째부활의 역사가 이루어지고...영원하신 예수와 함께 하는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삼층 천의 비밀은...1층과 2층은 율법 아래서 여호와를 믿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인데,

    이들은 율법의 의를 이루고 세상적으로 육신적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의인들이 들어가는 2층천 천국 곧 극락이라는 곳이다.

    극락의 하나님이란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곳 곧

    율법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들 곧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이다.

     

    이층천도 이 세상의 끝 날이 오기까지는 천국이지만...

    그곳은 진리의 천국이 아니라 율법의 천국이고 극락의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그러나 진리이신 예수께서 2층천에 공중 강림하시게 되면...

    이층에 있던 모든 자들은 용과 더불어 이 세상 땅으로 내어 좇기게 되고...

    이 세상 땅이 지옥이 되는 것이다.(계12:7-9)

     

    -------

    (마 13:47) ○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마 13: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마 13: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마 13: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이층 천을 천국으로 알고 구원 받은 것으로 알고 있던 율법의 의인들...

    이들 중에는 구원을 받을 자도 있고 또한 구원을 받지 못할 자도 있는데,

    구원을 받지 못할 자들은 삼충 천에 예수께서 빛으로 이층 천에 강림하시게 되면

    다 지상으로 좇기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이층 천에 거하는 자들 곧

    율법의 의인들 중에는 악인이 많기 때문에 가르는 역사가 있게 된다.

    그리고 구원을 받을 자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밀을 알지 못함은

    율법의 여호와 하나님을 진리의 하나님으로 알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말씀 속에는 참 하나님이 계시고 또한 여호와도 있고,

    참 하나님인체 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안에서 말씀에 대한 분별이 없게 되면

    참 하나님 아닌 자를 믿고 따라가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증거하기를 사울이었을 때에는

    “본질상 하나님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갈4:8) 했던 것을 고백한 것이다.

     

    (요17:3)에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말씀하셨는데,

    창조 받은 율법의 사람이면서

    진리의 참 하나님인체 하는 자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거짓 하나님인 것이다.

    거짓이란 참 진리가 아닌 율법을 가지고 참인체하기 때문에 거짓이다.

     

    극락의 하나님 나라는 바로 율법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가는 천국이고,

    진리의 참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가는 참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어찌하여 진리의 참 하나님을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가고자 하는 극락의 하나님 나라에 가고자 하는가?

    진리의 참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예수 안에 있고,

    예수님은 죽으시고 다시 사셔서 이루어 주시고 예비하신

    보혈의 공로인 십자가의 도를 믿는 자의 심령에 보혜사께서 함께 하시고,

    보혜사로 말미암아 예수를 알게 하시고 진리의 참 하나님을 바로 깨달아 알고 믿고

    섬기게 되는 것이 삼위일체로 역사하시는 구원의 비밀인 것이다.

     

    ------------

    인터넷에 어떤 불로그에 보니까....

    속리산 대형부처 사진을 걸고...율법에서 말하는 극락은 곧 천국이라고 말하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이...극락과 같은 곳이라면,

    예수님을 부처와 같은 자로 보는가?

    석가모니 부처가 예수님이요 하나님이란 말인가?

    극락의 하나님과 함께하시는 000총회장님이라고 말하면서,

    극락=천국=낙원=무릉도원=유토피아=신세계=신천지를 말하고,

    그러면서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오직 목자는 000총회장님이라고 보혜사라고 이긴 자라고 하면서

    성경대로 믿는다고 하니...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람을 따라 가고 있음을 모르는가?

    결국 우상을 섬기는 것을 알지 못하니...

    진리의 성령 보혜사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부활의 영 곧 아들의 영인데,

    000총회장이 죽었다가 다시 산 자인가?

    사람으로서 자신이 보혜사라고 하는 자들은 미혹의 역사일 뿐이다.

    -----------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경륜 섭리는... 먼저는 첫 사람 아담이고,

    다음은 마지막 아담 예수로 역사하시는 것인데,(고전 15;45-49)

    이는 육이 먼저이고 다음에 신령한 영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섭리(하나님의 뜻=십자가의 도)를 따라서

    예수께서도 성육신의 몸으로 율법의 이 세상에 오셨고,

    다시는 육신의 몸으로 오시지 않고...약속하신대로 진리의 성령 보혜사(부활하신 예수)로

    우리들의 심령에 오시는데....사람으로서 자신이 어느 누가 보혜사라고 말하는가?

    사람으로서 내가 보혜사라고 하는 자들은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이다.

     

    극락의 하나님 나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이다.

    율법의 믿음 아래서 신앙하다가 죽은 후에 가는 곳...이층 천을 말한다.

    극락의 하나님을 진리의 참 하나님으로 알고 믿는 자들은 분별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율법의 여호와 하나님을 진리의 참 하나님으로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 안에서 진리의 참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극락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층 천을 가는 것은 구원의 확증이 되지 않는다.

    극락의 하나님이 진리의 참 하나님이라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직 예수께서 약속하신 보혈의 공로인 십자가의 도(약속의 말씀)를 믿음으로

    약속을 받고 진리의 아들로 3층천에 확실한 택함을 받아야 할 것이다.

     










    6월 25일(수) 시편 36-40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생명의 원천(36:9)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For with you is the fountain of life; in your light we see light.

    생명의 원천(메코르 하이욤) מְקֹור חַיִּים  / the fountain of life


    원천(4726) 마코르(mâqôwr) מָקוֹר 

    1. 샘.   2. 우물.  3. 근원
    발음 [ mâqôwr ]
    어원  /  697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8회 사용
    • 1. 명사, 남성 샘, 우물, 근원, 출처, 수원, 자손, 레12:7, 20:18, 시36:10(9), 68:27(26).
    • 관련 성경  /  산혈(레12:7), 근원(레20:18, 시68:26, 렘17:13), 원천(시36:9), 샘(잠5:18, 렘51:36, 슥 13:1).


    생명(2416) 하이(chayחַי   

    1. 살아있는.  2. 생기 있는.  3. 소생하는
    발음 [ chay ]
    어원  /  242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39회 사용



    생명의 원천
    - 결코 끝나거나 다함이 없는 생명의 근원을 암시하는 표현이다.(잠10:11;13:14;14:27;16:22)
    물줄기가 그 근원에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하듯이 모든 인간 및 생물의 기원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 근원이 하나님인 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란 무가치할 뿐이다.(Barnes)
    그 뜻을 분명히 밝히는 동일한 표현의 좀더 완전한 형태는 렘2:13; 17:13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주의 광명 중에 ... 광명을 보리이다
    - 전자의 '광명'은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4:6)로도 표현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89:15)을 가리킨다.(Ander-son)
    반면에 후자의 '광명'은 '사는 것' 자체를 의미한다.(49:19; 욥3:16)
    그런데 학자에 따라서는 '풍성한' '만족스러운 삶', 더 나아가서는 '영원한 삶'(Dahood)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사53:11)
    즉 하나님이 그 얼굴을 돌리시어 그 은총과 사랑을 내리시는 곳, 바로 그곳에 좀더 풍성한 삶,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영원한 삶이 있는 것이다.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시편 36:1-12)

    시 36편의 표제는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여호와의 종(레에베드 아도나이)으로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왕으로 부르실 뿐 아니라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행 1:16절에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영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시고 선포하게 하시는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행 4:25절에도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일 뿐 아니라 선지자였습니다.
    이것은 그의 직분이 장차 오실 예수님의 그리스도직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성경 전체의 흐름인 구속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간구합니다.

    1. 악인들(1-4)

    1절에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라고 합니다. 죄(페솨)는 ‘반역, 위반, 죄’를 말합니다. 악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악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절대 죄를 짓지 못합니다. 악인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지옥의 심판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악인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않고 미워함을 받지도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2). 악인의 자랑은 헛된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지어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죄악이 절대 드러나지 않고 미움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있으며, 아무리 악인들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태양을 가리려 해도 불가합니다.

    3절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과 속임이라 그는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라고 합니다. 악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과 속임수입니다. 죄악(아벤)과 속임(미르마)은 악인들의 일상입니다. 악인들은 늘 죄를 범하고 속이며 살아갑니다. 반대로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하는 지혜와 선행을 하지 않습니다. 그쳤도다(하달)는 칼완료로 온전히 그쳤다는 의미가 됩니다.

    4절에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악인은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합니다. 꾀하며(야흐쇼브)는 칼미완료형입니다. 계속해서 꾀하는 것입니다. 악인은 항상 침상에서 죄악을 꾀합니다. 그것이 악인의 일상입니다. 또 악한 길에 서다(이트야쩨브)는 히트파엘 미완료형입니다. 스스로 계속해서 악한 길에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거절하지 않다(이므아쓰)는 칼미완료형입니다. 계속해서 거절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2. 인자하신 하나님(5-8)

    5-6절에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6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은 하늘과 공중에 사무칩니다. 즉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하심이 온 세상, 온 우주에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신 32:4절에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이루시는데 진실하시고 신실하셨습니다. 그 언약대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면 우리는 모두 아담의 원죄와 우리의 자범죄로 인해 죽음에 놓이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은 죄악으로 고통하는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의”는 공평과 공의로운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주의 의가 하나님의 산들과 같다고 합니다. 산들은 불변성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의 관용표현입니다. 불변성과 위대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말합니다. 사람은 절대 바닷속을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인간이 다 알 수 없습니다.

    7-8절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8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보배롭다고 합니다. 인자(헤쎄드)는 ‘선, 인자, 은총, 자비’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무한하신 분으로 그분의 사랑의 보호 아래 피하는 것이 가장 복되고 행복한 것입니다.

    3.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9-12)

    9절에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라고 합니다. 생명의 원천이 주님께 있다고 합니다. 생명의 원천(메코르 하임)은 ‘생명의 물, 생명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날 때 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바위를 터지게 하여 물을 주셨습니다. 그 물이 이스라엘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출 17:6). 이 반석에서 주신 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보여주십니다(고전 10:4).

    생명의 원천과 빛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상징입니다. 하나님만이 구원을 주시는 분이고,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10절에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라고 합니다. 주를 아는 자들(레요데에이카)은 단지 머리로만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아는 자들 즉 하나님을 믿는 백성, 구원받은 백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인자하심을 계속해서 베푸시고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것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11절에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이르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들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교만한 자와 악인들은 동일한 대상을 말합니다. 그들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로부터 다윗을 지키시고 보호해주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우리를 악인들에게서 보호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즉 하나님의 구원에서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끊어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존하시기 때문입니다. 롬 8:35-37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합니다.

    또한 롬 8:38-39절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합니다. 반대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거기서 넘어집니다.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12). 하나님의 심판에서 악인들은 벌을 받고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심판 중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구속해주시기 위해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되고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게 됩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사랑에서 그 누구도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믿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한 주일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생수로서의 하나님

    생수로서의 하나님 : 갈증을 해갈하시는 영원한 공급자

    광야와 비슷한 환경에 사는 이스라엘에서 생수는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사막과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언제나 목이 마릅니다.  인간 본연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생존의 갈망, 존재의 목마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이 갈증을 해갈하시는 "생수"로 소개합니다. 물은 고대 이스라엘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절대적 자원이었기에, 하나님을 생수에 비유한 상징은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시며 끊임없는 공급자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심오한 신학적 고백입니다. 성경신학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을 "생수"로 묘사한 상징의 의미를 살펴보며, 이 이미지가 우리의 신앙에 어떤 생기를 불어넣는지를 조명하고자 합니다.


    생수의 성경적 언어와 상징(언어적 뿌리와 배경)

    히브리어로 생수는 "마임 하임(מַיִם חַיִּים)"이라 하며, 직역하면 "살아 있는 물" 혹은 "움직이는 물"입니다.
    이는 고인 물이 아닌 흐르는 물, 즉 샘에서 솟아나는 물을 뜻합니다.
    이 개념은 죽은 물(웅덩이, 썩은 물)과 구별되며, 늘 생명과 정결함, 회복을 상징합니다.
    헬라어로는 "후도르 조온(ὕδωρ ζῶν)"이라고 하며,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생수'는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물은 생존의 필수 조건이며, 유대 광야 문화에서는 물의 유무가 곧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을 결정짓는 신학적 지표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생수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만이 우리의 삶을 유지하게 하시고, 메마른 땅에서 길을 여시는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구약에서의 생수의 하나님

    예레미야서 :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2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이 구절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스스로 터진 웅덩이를 파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대비시키며, 진정한 생명의 원천이 누구이신지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물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생수의 근원(히브리어 : "מקור מַיִם חַיִּים" 메코르 마임 하임) 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언제나 터진 웅덩이처럼 물을 간직하지 못하고 메말라갑니다.
    이 상징은 인간 존재의 영적 구조를 날카롭게 지적하며,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생명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음을 선언합니다.

    출애굽기의 반석과 마라의 쓴물

    출애굽기 17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르비딤에서 물이 없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반석을 치자 그곳에서 물이 솟아납니다.
    여기서 반석은 하나님이시며, 고린도전서 10장 4절은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생명수로 나타나며, 마른 땅에서 은혜의 근원으로 터져 나옵니다.

    또한 출애굽기 15장에서 마라의 쓴물이 나무 하나로 인해 단물로 변화되는 장면은, 하나님의 생수가 인간의 절망과 고통을 회복시키는 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하나님은 메마른 광야에서도 생수의 흐름을 시작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공급자이십니다.


    시편과 선지서 속 생명의 강

    시편의 고백

    시편 36편 9절은 "진실로 주의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생명의 원천(히브리어: "מְקוֹר חַיִּים" 메코르 하임)은 단지 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며, 그분 안에서만 빛과 생명이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동시에 유지자 되심을 노래합니다.

    에스겔서의 생수 환상

    에스겔 47장은 성전 문지방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점점 깊어져서 큰 강이 되는 환상을 보여줍니다.
    그 물은 사해로 흘러들어가며 모든 생명을 살리고, 양쪽 언덕에 있는 나무들은 매달 열매를 맺습니다.

    이 생수는 성전으로부터, 곧 하나님의 임재에서 비롯되며, 하나님의 통치와 회복, 치유의 사역이 온 세상으로 흘러가는 에덴 회복의 예표입니다.
    이 상징은 종말론적 회복을 말할 뿐 아니라, 오늘날 교회와 성도의 사명이 세상 속으로 흐르는 생수의 강이라는 점을 암시합니다.

    신약에서의 생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

    사마리아 여인과 생수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의 물은 단순한 생리적 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 안에서 주어지는 성령의 생명입니다. 헬라어로 '솟아나는'("ἁλλομένου" 할로메노우)은 샘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움직임을 뜻하며, 이는 예수님을 믿는 자의 내면에 자리잡는 영적 생명력의 지속성을 상징합니다.

    성령과 생수의 강

    요한복음 7장 37-38절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성령을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요 7:39).
    성령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능케 하며, 생수처럼 성도의 삶 가운데 역사하여 은혜를 흘려보내십니다.

    이 생수는 성도의 삶을 내면에서부터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세상을 향해 흘러가는 복음적 동력입니다.
    교회가 생수의 강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약속이 성령 안에서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종말론적 성취 : 새 예루살렘과 생명수 강

    요한계시록 22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이 장면은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강(창 2:10)의 완성을 상징하며, 에스겔의 환상이 현실로 성취된 장면입니다.

    이 생명수는 이제 다시는 마르지 않으며, 고통과 죽음이 없는 새 창조의 중심에서 흘러나옵니다. 하나님 자신과 어린양(예수 그리스도)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이 강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공급자이시며, 새 하늘과 새 땅의 중심이 되심을 상징합니다.

    결론 정리

    하나님은 생수이십니다.
    그분은 생명의 근원이시며, 영혼의 갈증을 해갈하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이 생수는 구약에서 출애굽의 반석으로, 예레미야의 고백으로, 에스겔의 환상으로 예언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성령 안에서 지금도 흐르고 있습니다.

    갈증은 은혜의 사다리입니다.
    하나님은 갈증 있는 자를 거절하지 않으시며, 그 영혼에 샘물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 생수를 마심으로 다시는 목마르지 않고, 생명의 강을 흘려보내는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의 영을 통해, 마른 심령에 생수의 은혜를 부으시며, 우리로 하여금 메마른 땅에 생명의 강을 이루게 하십니다.




    생명의 원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한 원천에서 생겨났습니다.

     

     

     성경은 첫 책부터 마지막 책까지 하느님을 영원히 살아계신 분으로 증언하면서 생명의 원천으로 제시합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하느님의 영이 감돌고 있었음'(창세 1,2)을 밝히고 하느님을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묵시 1,4)으로 선포합니다. 하느님이 모든 존재의 원천이신 이유는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신(창세 1장) 하느님의 창조활동이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육화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실현됐음을 요한복음서는 매우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1.3-4).

     

     하느님의 무상적 사랑으로 창조된 인간이 선을 거부하고 악을 선택해 죽음의 나락에 떨어지자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새 생명을 다시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인간이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도록 하시기 위해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깨닫고 믿을 수 있는 최고 방식인 아드님의 육화로 당신의 큰사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전해짐으로써 우리가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났음을 요한 1서의 저자는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1요한 1,1-2). 예수님의 공생활, 죽음 그리고 부활을 실제로 체험한 감동에서 나온 이 증언은 우리가 하느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들인지를 깊이 느끼게 합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인간을 살리는 구원의 도구로 내어주실 만큼(요한 10,10) 우리는 그분께 사랑받는 존재들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구약시대에 매우 설득력 있는 표현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보도한 이사야 예언자의 글이 여전히 유효한 현실이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이사야 예언자가 어머니와 갓난아기의 관계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로 비교한 것은 우리 각자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의 논리를 훨씬 넘어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께 대한 믿음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합니다.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앎으로써 우리 자신의 생명이 소중함을 깨닫고 타인의 생명 또한 존중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면서 체험한 고통을 기억해 훗날 자유인으로 살아갈 때 다른 이를 자비롭게 대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은 이기심과 무관심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매우 큰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탈출 22,22).

     

     주님은 생명을 살리는 분이십니다. 공생활 중에 육체적, 윤리적, 영적 차원에서 죽음을 체험하는 병자들에게 언제나 연민으로 다가가 치유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4,24).

     

     예수님께서 사람이 돼 세상에 오신 목적은 여러 죽음의 상황으로 인해 자유를 잃고 고통의 어둠속에 있는 인간에게 생명을 되찾아주시려는 것입니다. 곧 모두가 골고루 충만하게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려는 것이지요.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삶을 포기하고 싶은 때,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을 떠올리면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창1:3~5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이는 첫째 날이니라

    요1:2~4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이라

    호11:9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나 - 창조주, 예수, 생명의 원천// 네 - 사람, 인생, 생명)

    (그- 말씀, 지혜, 참빛, 생명의 빛,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

    요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시36:9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요1: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전11:7~8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날을 생각할지로다 장래일은 다 헛되도다

    욥10:15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올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목도함이니이다

    겔22:13 너의 불의를 행하여 이를 얻은 일과 네 가운데 피흘린 일을 인하여 내가 손뼉을 쳤나니(깜짝 놀랐으니)

    겔22:14 내가 "네게 보응하는 날"(선악간에 판단하시는 날)에 네 마음이 견디겠느냐 네 손이 힘이 있겠느냐

    생명의 원천(근본), 행복 추구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지향한다.
    여생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알고자 탐색한다.
    그러나 어두운 날, 수고의 날들에 비하여 '행복한 시간'(즐거운 날)은 매우 짧다. 
    이 세상에 행복과 즐거움의 방편이 있다면, 그 끝이(극락) 있거나 완벽한 휴양지가 있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짖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나약한 것으로 취급되는 세상이다. 니므롯처럼 강한 자도 결국은 태양신, 달신이라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던가.

    누가 과연 더 나약하고 무지한가. 도리어 헛웃음이나온다.

    사람들은 제가 다 세상의 주인이라 믿는다. 물론 자긍심, 자존감에 좋은 마인드 컨트롤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심리도 적정 수준에서

    멈춰야 할 것이다. 야망과 야심은 끝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갈구한다고 세상을 다 가질 수도 없고, 모든 것이 유한하다.

    생명의 원천, 영과 혼의 근본이며 그 지은 이가 있으시다. 마치 자신은 아무 연관이 없는듯 기고만장하여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진정 방탕한

    삶이다. 그것보다 어리석은 것이 있을까? 결코 멋지지 않다.

    사57:16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

    신은 태초에 빛을 만드셨다. 그리고 비유한다. 두 큰 광명. 항성과 행성이다. 우리 인간들의 내면 영과 혼은 신을 닮은 작은 광명이다.

    우린 죽음 후에 그 큰 광명 앞에 설 것이다.

    그가 인도하고, 굽은 것을 펴 고치시고, 안위하며 위로하실 것이다. 그가 펼치시는 장래가 정말 좋은 것이다. 지음 받은 자, 신의 자녀로

    이 세상에 내인 자들이 어디로 향해 갈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매우 근본적인 생각이다.

     생명의 원천이나 바른 길은 다 주께 있다. 우린 그 속에 있는 작은 빛들이다. 그는 큰 생명의 빛이다. 크신 참빛이다. 

     2. 험악한 세월을 보낸 인생들을 생각해 본다. 야곱, 요셉, 다윗, 욥... 이런 사람들을 생각한다.

     이런 별들(행성)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 발자취를 보면 큰 광명을 좇아간 삶의 흔적을 볼 수 있다.





    6월 24일(화) 시편 30-35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통회(痛悔)하는 자(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The LORD is close to the brokenhearted and saves those who are crushed in spirit.


    마음(레브)이 상한 자 3820.  7665

    마음(3820) 레브(
    lêb) לֵב   
    발음 [ lêb ]
    구약 성경 / 599회 사용
    1. 명사, 남성  마음[3824 참조].

    깨트리다(7665) 솨바르(shâbar) שָׁבַר

    1. 깨뜨리다.  2. 분사 שָׁבוּר :  깨어진. 3. 갈증을 깨뜨리다
    발음 [ shâbar ]
    구약 성경 / 148회 사용

    중심(루아흐)에 통회하는 자

    통회하는 자(다카. dakkâʼ) 1793  דַּכָּא  

    1. 심하게 뭉그러진.  2. 일그러진
    발음 [ dakkâʼ ]
    어원 / 1792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회 사용
    • 1. 형용사 심하게 뭉그러진, 산산조각난, 시90:3
    • 2. 형용사 일그러진, 깨진[영적으로], 사57:15,시34:19(18).
    • 관련 성경  /  통회하는(시 34:18, 사 57:15). [명] 파멸, 티끌(시 90:3).


    통회(痛悔) : 아플 통(通), 뉘우칠 회(悔) 

    • 1. 잘못을 매우 많이 뉘우침
    • 2.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는 행위
    • 1. 아프다.   2. 괴롭히다.   3. 괴로움.   4. 몹시.   5. 힘껏
    뉘우칠 회(悔)
    • 1. 뉘우치다.   2. 뉘우침.   3. 깔봄.  4. 주역의 외괘(外卦).  5. 얕봄

    시편 32: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말씀 :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34:18)

    이 말씀은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돌보심을 보여줍니다.
    세상은 종종 우리의 상처와 아픔을 외면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마음이 상한 자, 낙심한 자,
    눈물 흘리는 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우리는 상처받을 때 외롭고 고립된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이 구절은 우리가 가장 연약할 때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또한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란 단순히 죄책감이나 감정적인 슬픔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의 죄와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회개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주님, 저의 상한 마음을 아십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상처와 슬픔이 제 안에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가까이 다가오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저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제 진심 어린 회개를 기뻐하시는 주님,
    오늘도 주님의 품에서 쉼을 얻게 하소서.
    아픈 마음이 회복되고, 주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상한 마음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시 34:18-20)
    2001-12-08 16:46:50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시편 34편 18∼20절)

    1. 상한 마음, 마음의 상처

    간이 부은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간염에서 간경화로 악화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걱정이 되어 내과 의사를 찾아가서 진찰을 받기는 했지만, 결과는 뻔한 것이었습니다.
    “술을 끊고 안정을 취하십시오. 이대로 가다가는 간암으로 죽습니다.”
    그래서 이 남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내 병은 내가 더 잘 압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을 어떻게 술 없이 산단 말입니까?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어떻게 극복한단 말입니까? 나는 죽어도 술은 끊을 수가 없습니다.”
    요즘 들어 이 남자처럼 마음에 상처를 받아 고민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가해자도 상처를 받고, 피해자도 상처를 받습니다.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 ; 1828∼1910)는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인생을 살아간다”고 말했습니다. 겉으로는 좋아 보이고 근심·걱정이 없는 것 같아 보여도, 속을 들여다보면 실상은 저마다 다 고민과 걱정이 있고 마음에 상처가 있는 것입니다.
    가정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식이 없어서 고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식이 있어도 말을 안 듣고 속을 썩여서 고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부간의 갈등으로 고민하기도 합니다. 부부간의 갈등으로 이혼을 할까 말까 고민하기도 합니다.
    직장·사업장은 어떻습니까? 사업의 실패와 부도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다. 직장을 잃고 실업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이번에 대우 자동차에서 퇴직통고를 받은 사원들의 아내들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겠습니까?” 하고 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100만 명의 실업자들이 앞일을 생각하며 고통과 슬픔에 싸여 있습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적이 좋지 않아서 걱정하거나 시험에 낙방해서 낙심하는 학생, 질병으로 고통 당하거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몸부림치는 환자,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으로 고통과 허무를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죄의식에 빠져서 고민하는 사람, 열등감에 빠진 사람,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실연 당한 사람, 배신을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의 고민은 천태만상(千態萬象)이요, 백인백상(白人白象)입니다.
    각자 나름대로 고민과 고통이 있고 상처를 받았습니다.
    어느 누가 “나는 전혀 상처를 받지 않고 삽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이런 마음의 상처와 고통과 슬픔이 없다 할지라도, 조만간 생길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현재는 어렵다 할지라도 그것을 잘 극복하면, 미래에는 그 어려움이 축복이 되고 은총으로 임하기도 합니다.
    그 혹독한 IMF 이후, 암이나 고혈압 환자는 2배로 급증하고 사망률은 3배 이상이 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고혈압이나 심장병, 위장병, 신경쇠약 등 생각지 못했던 질병으로 고통과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잠언 18장 14절에는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육체의 병도 병이지만, 마음의 병은 더욱 심각합니다. 육체에 상처가 나면 치료하면 되지만, 마음에 상처가 나면 어떻게 치료를 하겠습니까? 우리의 심령이 치료받고 변화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을 통해서 ‘상한 심령을 치료하여 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전하고자 합니다.

    2. 본문 배경 설명

    본문 말씀의 저자인 다윗 왕은, 15세 때 선지자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여러 가지 고난과 고통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20세의 나이에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과 싸워 승리하여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이 되었고, 계속 전쟁에서 승리하고 큰 공적을 세워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여, 군사들을 풀어 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다윗은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도망을 가다가 적군이었던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기스 왕 역시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다윗은 침을 흘리며 미친 척을 하여 겨우 풀려나올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의 처지가 처량했습니다. 앞날도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었습니다. 죽음의 위협, 걱정과 근심 앞에서 그는 겸손히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눈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위로를 주시고, 상한 마음을 치료하시고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10여 년 동안 사울 왕으로 인하여 받은 고난이 좋은 훈련과 연단이 되어서, 30세에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믿음의 왕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그것을 잘 극복하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수 있습니다. 상처받은 마음도 치료를 받으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성공할 수 있습니다. 발전할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처럼 여러분도 ‘상한 마음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둘째,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셋째, ‘여호와께서 모든 고난에서 건지신다’고 하였습니다.
    넷째,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신다’고 하였습니다.

    B. 상한 마음을 치료하시는 하나님

    1.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신다
    - 마음의 상처, 위로, 가까이 하심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시 34:18a)

    여기서 ‘마음이 상했다’는 것은 ‘마음이 깨졌다’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브로큰 하트(broken heart)’라고 하는데, 마음이 산산조각이 난 것을 뜻합니다. 마치 큰 쇳덩어리나 망치로 바위를 내리쳤을 때 바위가 부서지듯이, 마음이 부서지고 깨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픔이 있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부서져서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상황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닥치면 포기합니다. 절망합니다. 낙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하나님 앞에 나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위로와 평안을 얻고 사랑의 치료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51편 17절에는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心靈)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痛悔)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상한 심령으로 나온다 할지라도, 상처받은 마음으로 나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마태복음 12장 20절에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 같은 우리 연약한 인생도 꺾어버리지 않으시고 위로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십니까? 간구할 때 가까이 하십니다(시 145:18). 겸손할 때 가까이 하십니다(사 57:15). 하나님을 사랑할 때 가까이 하십니다(요 14:23).
    영국의 시인이요, 소설가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ls Wilde ; 1854∼1900)는 “상한 마음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올바른 신앙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에 상처를 받고 어려움을 당하고 절망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든지 가족 중 한 사람에게 상처를 받아,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을 갖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미국 코넬대학의 의과대학 교수가 ‘환자들의 회복기’에 대해 연구를 했습니다. 똑같은 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두 환자가 있었습니다. 한 환자는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이 쓸쓸하게 병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다른 한 환자는 친구, 친지, 가족 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편의 환자가 더 빨리 회복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제 일어나야지요. 건강해야지요. 할 일도 많은데 힘내십시오. 용기를 가지십시오.” 하고 위로를 많이 받은 사람은 빨리 회복하는데,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이 ‘나에게는 찾아와 위로하는 사람도 없다. 인생은 본래 쓸쓸하고 외로운 것이다.’ 하고 절망하는 사람은 치료도 더디고 병도 오래 가더라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가족이나 친지 중에 병원에 입원한 사람이 있다면 찾아가서 위로를 해 주어야 합니다. 위로를 받은 사람은 빨리 회복되지만, 위로를 받지 못한 사람은 병이 오래 갑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인생이 고독하다고들 말합니다. 친구도 떠났습니다. 이웃도 떠났습니다. 가족도 없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고독을 누가 위로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위로와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결코 나 혼자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가나안 농군 학교에 가면 많은 것을 배우고 올 수 있습니다. 한 청년도 그곳에 가서 아주 위대한 진리를 배웠습니다.
    밭에서 고구마를 캤는데, 고구마가 수박처럼 컸습니다. 깜짝 놀라서 “어떻게 하면 이렇게 큰 왕고구마를 재배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무슨 비료를 주었기에 고구마가 이렇게 큽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가나안 농군 학교에서는 비료를 주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비료도 주지 않는데 어떻게 고구마가 이렇게 큽니까?”
    “다 비결이 있지요. 김을 맬 때마다 호미로 고구마를 찍어서 자극을 줍니다.”
    고의로 자꾸 고구마에 상처를 내면, 아물고 아무는 과정에서 고구마가 열을 받아 그렇게 커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사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다른 사람들보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위대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상처받은 조개에서 진주가 생기는 법입니다. 인생에서, 가정이나 사업에서 상처를 받고 고통을 당했다고 반드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극복하고 이겨 나가면 큰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미국 보스턴에 있는 한 정신병원에 불쌍한 소녀가 수용돼 있었습니다. 이 소녀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외롭게 지냈습니다. ‘회복불능’이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녀에게 한 나이 많은 간호사가 매일 과자를 들고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얘,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너는 결코 외톨이가 아니야. 내가 있잖니?”
    6개월 동안 한결같이 찾아와서 소녀를 위로하고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소녀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밝은 웃음을 되찾고 정상이 되었습니다.
    간호사의 사랑으로 회복이 된 이 소녀는 자신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신문에서,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어린 소녀를 돌볼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어린 소녀의 스승이 되어 그를 훌륭한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이 어린 소녀의 이름은 헬렌 켈러이고 그의 스승이 되었던 소녀의 이름은 바로 앤 설리번(Anne Sullivan Macy ; 1866∼1936)입니다. 후에 사람들이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해 낼 수 있었습니까?”라고 묻자, 설리번 선생은 “나도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을 줄 수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 은혜를 주고, 사랑 받은 사람이 사랑을 주고, 축복받은 사람이 축복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사랑을 받았습니까?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축복을 받았습니까? 축복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마음에 상처를 받고 고통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전해서 영혼을 구원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2.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 - 마음의 고통으로 기도함, 회개

    “중심(中心)에 통회(痛悔)하는 자를 구원(救援)하시는도다”(시 34:18b)

    ‘중심에 통회하는 자’란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는 자를 말합니다.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마음 아파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구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환난에서 구원하시고,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도록 도와주심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똑같이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절망하여 자살까지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장 10절에는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痛哭)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통곡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은 결국 낙심하고 절망하고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이사야 57장 15절에도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痛悔)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소성케 하는 역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새로운 마음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고 희망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절에도 “애통(哀痛)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출 2:23∼25). 소원을 이루게 됩니다(삼상 1:16∼17). 병에서 고침 받습니다(왕하 20:5). 죄 사함을 받습니다(시 32:5). 마음과 영이 새롭게 됩니다(겔 18:31). 축복을 받습니다(행 3:26).
    일본의 한 기업체에서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습니다. 전화를 개설해놓고 “욕을 들어준다”는 광고를 했습니다. 직원들의 화풀이를 받아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전화가 빗발치듯이 걸려 왔습니다. 미국에도 이와 같은 전화가 있는데, 돈을 받고 하는 것인데도 주문이 아주 쇄도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도 “누가 내 얘기 좀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내 원한과 불평을 좀 들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구태여 돈을 주고 사람을 사지 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의 원통한 문제, 나의 억울한 문제를 주님께서 들어 주시옵소서.’ 하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통곡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고통, 분노, 절망, 아픔, 실망, 마음속의 모든 찌꺼기를 다 토하면 하나님께서 평강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방법 중의 하나는 마음에 쌓인 것을 밖으로 토하는 것입니다.
    시편 62편 8절 말씀에도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하나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통곡하는 것이요, 내 마음을 토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기쁨과 평강과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현장 책임자로 일하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담벼락이 무너지는 바람에 허리를 심하게 다쳐서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직장에도 나가지 못하니까 생계를 부양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계속 집에서만 지내다보니 합병증이 생겨서 급성 폐결핵까지 걸리게 되었습니다. 몸은 점점 꼬챙이처럼 말라서 40킬로그램이 되었고, 입에서는 피가 넘어왔습니다. 그대로 있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장모님이 세상을 떠나면서 “여보게, 자네도 예수를 믿게. 예수를 믿어야 병 고침 받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네.”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장모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아내와 함께 교회에 나가기로 했습니다.
    아침 일찍이 교회에 나갔습니다. 새벽 기도 시간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웬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지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뒷자리에 앉아서 실컷 울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가서 울고, 또 가서 울고 하였습니다. 그 후 일주일이 지나고, 이 주일, 삼 주일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친구가 와서는 그를 보더니 혈색이 좋아졌다며 병원에 가서 다시 검진 좀 받아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재검진을 받았는데, 의사가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당신 몸에는 폐결핵균이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은 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본인도 놀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자신의 병을 고치셨는지 몰랐습니다. 그는 건강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건강 진단서를 직장에 제출하여 다시 일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 울기만 했는데도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3. 여호와께서 모든 고난에서 건지신다 - 고난으로부터 구원

    “의인은 고난(苦難)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 34:19)

    제멋대로 남에게 악을 행하고 방탕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 고난과 고통이 따르는 것은 물론이고,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고통이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죄짓지 않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고자 할 때 더 고난이 많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져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시고 은총과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아무리 세상이 악하고 죄가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오면 구원과 은총을 베푸시고 고난에서 건져 주십니다. 죄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의로운 삶을 살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며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당한 고난에서 구원과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39절에도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의인은 누가 도와주십니까?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원수의 목전에서 상도 베풀어 주십니다(시 23:5).
    또한 히브리서 2장 18절에는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시 34:18), 하나님을 의지할 때(시 44:6∼7), 기도하며(시 50:15), 성경 말씀대로 살 때(시 119:166), 인내하고(애 3:26),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갈 때(고전 15: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19세기 독일의 역사가 랑케(Leopold von Ranke ; 1795∼1886)는 “우리가 어떤 곳으로도 빠져나갈 길을 발견할 수 없을 때, 그때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놀라운 구원을 길을 보여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빛이 되시고 나아갈 길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보오미 거울이라는 거울 회사의 사장인 이용덕 집사의 간증입니다. 보오미 거울은 지금은 매출이 늘고 아주 큰 회사가 되었지만, IMF때는 부도를 맞았던 회사입니다.
    98년 1월 부도가 나기 전, 이 회사는 국내의 여러 건설 업체로 납품을 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거울 생산업체였습니다. 그런데 한 중소기업에서 받은 20억짜리 어음이 부도나는 바람에 연쇄부도를 맞았습니다. 회사가 망하고 공장이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이용덕 사장도 ‘내 인생은 이제 끝났구나. 회사는 망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교회 집사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 겁니까? 하나님께서는 시련을 주실 때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이 시련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공장 숙직실을 숙소로 삼고 직원들과 함께 먹고 자고 하면서, 밤과 새벽에는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나가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직원들도 자신들의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재산을 내놓고 공장 내부도 깨끗이 청소했습니다. 함께 다시 시작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는 채권자들이 나타나도 도망가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나에게 시간을 주면, 빚을 반드시 갚겠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각오로 일을 시작하자, 채권자들도 외상으로라도 물건을 대주겠다며 오히려 그를 위로를 해 주었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재기할 수 있습니다. 성공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세요.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해 부채비율을 400퍼센트에서 190퍼센트로 낮추고 특수 거울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이 어려운 위기를 통해서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며 ‘김 서림 방지 거울’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특수 거울을 일본과 미국으로 수출하여 수십, 수백만 달러를 벌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정면돌파로 파산의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까? 기도로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능력을 주십니다. 용기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사람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실패하지 않습니다. 승리합니다. 재기합니다. 칠전팔기(七顚八起)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4.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신다 - 안전, 보호, 건강

    “그 모든 뼈를 보호(保護)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시 34:20)

    뼈는 몸을 지탱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뼈가 몸을 지탱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탱하게 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몸만 보호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 우리의 삶, 우리의 직장까지도 보호하여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중에 하나라도 꺾이지 않도록, 하나라도 피해보지 않도록, 하나라도 손해보지 않도록,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십니다.
    마태복음 10장 29∼31절에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결코 꺾이지 않습니다.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실패하는 것 같으나 실패하지 않습니다. 망하는 것 같으나 망하지 않습니다. 죽는 것 같으나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나아가면, 반드시 보호하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58장 11절에도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堅固)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물 댄 동산처럼, 샘처럼, 기쁨이 솟아나고 축복이 넘쳐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6장 22∼24절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사자 굴 속에서도 해를 당하지 않은 다니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메대·바사 제국의 수석 총리였던 다니엘은 다리오 왕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시기한 동료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 사자 굴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사자의 입을 막으시고 다니엘이 머리털 하나도 해를 당하지 않고 구출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모함했던 동료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사자 굴에 넣었을 때는, 사자들이 저들을 움키어 뼈까지 부수뜨려 버렸다고 했습니다.
    어떤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치료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9절에도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보호하심 때문에 승리하고 재도전하고 앞으로 전진해 나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여러분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눈동자같이 보호하십니다(신 32:10). 어깨 사이에 거하게 하십니다. 즉 아버지가 아이를 목말을 태우듯이 우리를 보호하여 주십니다(신 33:12). 인자와 진리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시 40:11). 독수리가 새끼를 보호하듯이 보호하십니다(사 31:5). 목자가 어린양을 품에 안 듯이 우리를 품어 주시는 것입니다(사 40:11).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저버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안됩니다.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교회에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 1483∼1546)는 “당신은 인생의 짐을 혼자 질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짐을 져 주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내 인생, 내가 해결해야지.’ 하고 나서지만, 정작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당시, 그에게는 많은 적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위해 일하는 겁니까?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맡깁니다. 나는 자러 갑니다.’
    그러고는 쿨쿨 잤습니다. 그는 밤새도록 안달복달하며 걱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 편안한데,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면 걱정·근심만 되고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밤새도록 자기 무덤만 파는 꼴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 살고 죽는 것도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내 뜻대로 되지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맡기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빼앗아서 자기가 하겠다고 하면 결국 실패하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건실한 회사의 사장인, 어느 교회의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퇴근을 하려고 차를 타는데 웬 낯선 남자 셋이 오더니 “경찰서에서 왔으니 같이 가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그는 체포 영장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차에 탔습니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왔다는 사람들이 경찰서로는 가지 않고 천호대교를 지나서 서울 외곽도로로 달렸습니다. 이상해서 “경찰서로 가자고 하더니 왜 딴 데로 가느냐”고 했더니, “잔소리하지 말라”면서 “경찰서로 가면 될 것 아니냐”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도와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한 시간 정도 가니까 어느 깊은 야산에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차에서 내리라고 마구 윽박지르는 사이에도, 그는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차에서 절대로 내리지 마라, 내리면 너는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는 통에 1시간여 동안 차안에서 구타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잠시 실신하여 쓰러져 있는 동안, 납치범들은 차에서 내려 소주를 마시며 다음 작전을 짜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용기를 주옵소서.’ 하고 기도한 뒤 눈을 떴습니다. 눈앞에는 자동차 키가 보이고 그 옆에는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그는 옆 좌석의 사람을 밀쳐내고 문을 잠근 뒤 자동차를 몰고 달아났습니다.
    바로 경찰서로 가서 자신이 납치를 당했었노라고 신고를 했지만, 자신의 상처를 보고서도 아무도 믿어주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앞좌석의 가방 속에 있던 칼, 밧줄, 마스크, 반창고 등을 보여주었습니다.
    앞으로 살기가 어렵고 사회가 혼란해질수록 유괴범, 치기배, 강도, 도둑 들이 많이 늘어날 것입니다. 금전을 요구합니다. 때로는 청부살인까지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한밤중이든, 대낮이든, 길거리든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내 남편을 돌봐주시고, 자녀들을 돌봐주시고, 나도 지키고 보호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지만, 만약 여러분이 기도하지 않으면 큰일이 닥칠지도 모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 막 14:38)고 하셨기 때문에, 아침 일찍이 새벽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동행하셔서 신변을 보호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물질과 건강의 축복도 받게 하십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때, 하나님께 나아와 치료받고,
    고난에서 구원받는 성도가 되자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나를 위로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돌봐 주시고 이 어려운 역경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피할 길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나가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반드시 더 큰 은혜와 축복과 기적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낙심하고 주저앉고 절망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더 겸손하게 깨어져서 기도하여 전화위복의 복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사형통하시기 바랍니다. 복 있는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방법

    1. 깊은 회개와 마음의 정결함

    • 영적 침체는 종종 죄, 상처, 분노, 미움, 교만 같은 문제와 연결돼 있어요.

    • 먼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며 내 마음의 어두운 부분을 인정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 시편 51편처럼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는 태도로 나아가세요.

    • 매일 짧게라도 회개 기도를 하고, 내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2. 말씀과 기도로 새롭게 채워지기

    • 침체는 ‘영적 굶주림’ 때문에 심해져요.

    • 그래서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 특히 그냥 읽는 것보다 "하나님, 오늘 저에게 무슨 말씀을 주시나요?"라고 묻는 태도로 읽으면 말씀이 살아서 내게 다가옵니다.

    • 기도도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진짜 대화하는 시간으로 삼으면 서서히 영혼이 깨어나요.

    3. 실제로 행동하며 순종하기

    • 하나님이 감동을 주시면, 작고 사소해 보여도 ‘즉시 순종’하는 게 중요해요.

    • 예를 들어 "이 사람에게 용서를 구해라", "작은 섬김을 해라" 같은 마음이 들면 미루지 말고 실천하세요.

    • 순종하면 순종할수록 영적 생명력이 회복되고, 반대로 미루고 거부할수록 침체는 깊어집니다.

    • 작은 실천이 쌓이면서 하나님과 다시 깊은 관계가 회복돼요.

    "회개 → 말씀과 기도 → 순종"

    이 세 가지가 영적 침체를 뚫고 나오는 가장 강력한 길입니다.

    1993년 8월 9일이었습니다.
    |31살 된 “소피아 화이트”라는 여자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남가주대학교 대학병원 소속의 보육원을 난장판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여인은 손에 38구경의 권총을 들고는 “엘리자베스 스테튼”이라는 간호사를 찾았습니다.
    소피아는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남편을 유혹해서 남편이 자신을 떠났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엘리자베스를 발견한 소피아는 여섯 번 방아쇠를 당겼으며, 그 중 한 방은 팔목에 그리고 다른 한 방은 배에 맞았습니다.
    총을 맞은 엘리자베스는 피를 흘리면서도 응급실로 도망했으며, 그녀를 쫓아서 소피아 역시 응급실로 달려갔습니다.
    아무도 이들을 말릴 수 없는 초긴장의 상황이었습니다.

    흥분된 모습으로 엘리자베스를 찾는 모습으로 총을 들고 서있던 소피아에게 “죠앤 블랙”이라는 한 간호사가 과감하게 걸어갔습니다.
    죠안은 조용히 소피아를 안았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공포에 떨고 있었지만, 죠안은 당시 가장 떨고 있던 소피아를 자신의 품에 꼭 껴안았습니다.
    그리고는 속삭였습니다.
    “당신이 큰 고통 가운데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깝네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고통 가운데 있어요. 정말로 당신을 돕고 싶어요.”
    이에 소피아는 울면서 자신이 들고 있는 권총을 내려놓았습니다.
    후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죠앤은 이처럼 회고했습니다.
    “나는 한 병든 사람을 보았고, 그녀를 꼭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행하신 사역입니다.
    주님은 병든 자들을 보셨고, 그들을 돌보시기고 치유하시기에 주저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의 아픔과 상처, 상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남이 모르게 나만의 비밀로 묻어둔 채 살아갑니다.
    같이 한 집에 살고 한 솥 밥을 먹는 가족까지도 모르는 비밀로, 같은 이불을 덮고 자는 배우자 조차도 모르는 비밀로 마음 속에 묻어 버리고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떠한 것들은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다시 생각하기 싫지만 나의 무의식 속에 남아 때로는 꿈속에서 눌려져 있는 자신의 과거가 드러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과거의 상처나 아픔과 억압이 오늘날까지도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사실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눌린 자인지를 고백하게 됩니다.

    내가 내 스스로를 화장하고 옷을 잘 차려 입고, 남 앞에서 여유 있는 미소를 짓는 다 할찌라도, 내 속에 있는 상처와 아픔과 고통이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 나의 발목을 잡기도 합니다.
    이것으로 인한 죄책감, 좌절감, 절망감, 불안감, 두려움이 어느 새 내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에 빠집니다.
    이 시대를 살고 많은 사람들의 솔직한 모습이기도 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들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상한 마음을 누가 고칠 수가 있는가 하는 큰 물음을 우리가 던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놀라운 한 분, 주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개 되는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사야가 이 글을 쓰기 전에도 계셨던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은 주님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소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며, 나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슬픈 자를 위로하고 슬픔대신에 기쁨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나 마음이 상한 자나, 갇힌 자나 슬픈 자는 모두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갖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위해서 주님이 오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이 땅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는 강력하게 일어날 것이며, 일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것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강력하고 온전한 치유와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치유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로 시작합니다.
    주님께 주 여호와의 영, 성령이 임하고 성령의 기름을 부어실 때, 강력하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사역하실 때 성령이 기름붓듯 부어졌습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주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바로 주님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치유하시는 영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살리시는 영이십니다.
      로마서 8장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오늘도 성령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를 어루만지십니다. 우리를 치료하고 회복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를 치료하시도록 우리는 항상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서 치유를 하십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서 그들의 가난한 영혼과 심령과 육체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킵니다. 아름다운 소식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입니다. 말씀에는 치유와 회복의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 속에는 귀신과 어두움의 영을 물리치고 쫓아내는 권세가 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말씀으로 많은 병자들과 연약한 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은 치유와 회복을 일으키는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도디 오스틴 여사가 ‘암에서의 치유’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치유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이었습니다. 치유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매일 매일 고백하는 것이 제가 치유되는 결정적 요인이었습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서 선포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치유와 회복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가까이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말씀을 듣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눌림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1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과 불안과 절망감과 무력감에 눌려서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줄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질병까지 줍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것들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자유를 주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치유와 회복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우리가 주님께 나가기만 한다면 우리들의 모든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쉼을 주십니다.


    주님은 온전하고 완벽하게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단순히 상처가 아무는 그러한 정도의 치유가 아닙니다. 나은 그 상처에서 도리어 향기가 나는 완벽한 치유입니다. 슬픔이 가시는 그러한 정도의 회복이 아닙니다. 슬픔이 간 그 자리에 기쁨의 꽃다발의 씌워지는 그러한 넘치는 회복입니다. 근심이 사라지는 그러한 치유 정도가 아니라 근심하던 그 마음과 입에서 찬송이 쏟아지는 풍성한 치유입니다. 상처와 아픔 속에 몸부림쳤던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놀라운 회복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은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먹까지 휘두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목사님께 상담을 합니다. 그 안타까운 사정을 들은 목사님은 ‘남편과 별거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합니다. 별거를 하면서 두 아들은 부인이 맡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상처를 받습니다.
      혼자 별거해서 사는 것을 싫어하는 남편은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아무래도 내가 정신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하곤 합니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 부인의 질문에 남편은, 당신이 나에게 퍼부었던 그 끔찍한 말들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 남편은 가끔 ‘자기가 자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부인은 남편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렇다면, 그렇게 하세요. 그래야 제가 당신의 유산을 상속받지요.’라고 차갑게 말했습니다. 그 남편의 상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 때마다, 편지를 보낼 때마다 깊어지더니 마침내 그는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남편은 상처를 받기만 했지 그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한 채 죽어갔던 것입니다.
     ‘미안해요, 내가 진작 알았더라면...’  부인은 심한 죄책감에 몸부림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인은 괴로움과 외로움 때문에 이 남자, 저 남자를 만나는 불결한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자녀들은 또 큰 상처를 받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처속에서 뒹굴던 이 여인이 어느 날, 다음과 같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남편의 자살로 인한 상처, 남편과의 별거로 인하여 두 아들에게 준 상처, 그리고 그후 계속 정결치 못한 삶으로 인해 아이들에게 준 더 큰 상처 등.. 이러한 모든 저의 상처가 이제 모두 치유되었습니다.’

      겨우 치유되어, 마치 오랜 병상생활을 했던 사람이 겨우 활동을 조금씩 하는 그러한  삶을 사는 여인이 아니라, 자기와 같이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있는, 멋진 사역을 하는 여인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케이 아더’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상처를 치유하신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상처를 치유했다는 단순한 간증집이 아니라, 상처받은 자들이 어떻게 치유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명확한 성경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준 책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어느 상담학자의 책보다도, 어느 카운셀러의 책보다도 더 감동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엄청난 상처를 가진 이 여인을 이렇게 치유했는가? 
    상처에서 피가 나지 않도록, 곪지 않도록 꿰매어서 이제는 상처가 아물어 버린 그런 정도의 치유가 아니라 그 상처에서 도리어 향기가 나도록 만든 그 완전한 치유가 도대체 어디서 왔단 말입니까? 
    그렇게 치유하신 분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물론, 우리는, 바로 그분은 ‘예수님이다.’라고 너무나 쉽게 그리고 빨리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분으로부터 이런 완전한 치유, 넘치는 치유를 받고 있습니까? 라고 다시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주님은 슬픈 자를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로 꺽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우리의 의사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치유하시는 분이시요,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치유받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킬 것입니다.
    이러한 치유의 은총을 받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시편 34:18)

    개역개정 :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ESV : "The Lord is near to the brokenhearted and saves the crushed in spirit."

    🌟 서론 : 하나님은 상처받은 마음의 치유자이십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사람에게 실망하거나, 상황의 무게에 짓눌리거나, 자신에 대한 회의감으로 고통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런 순간, 우리는 어디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시편 34:18은 이런 우리의 질문에 분명한 답을 줍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34:18의 의미를 깊이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상처받은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치유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분께 나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 본론 : 하나님이 상한 마음에 가까이 하시는 이유

    1.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인생의 고난 속에서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정말 나를 보고 계실까?"라는 의문을 품곤 합니다. 그러나 시편 34:18은 분명히 말합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 마음이 상한 자: 이는 단순히 기분이 나쁜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이 상하다'는 것은 깊은 상처와 슬픔, 그리고 절망의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마음 상태의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 가까이 하신다: 이는 단순한 감정적인 위로를 넘어,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하심을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멀리서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라, 직접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 관련 구절: 이사야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구절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우리의 모든 어려움 속에서 힘을 주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2.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는 말씀은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에서의 구원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새로운 힘과 소망을 주시는 구원입니다.

    • 통회하는 자: 여기서 '통회'는 단순히 후회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자신의 연약함과 죄를 인정하며 돌이키는 마음을 말합니다.
    •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고통과 문제 속에서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이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그분 안에서 새 삶을 살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3. 상한 마음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 속에 있을 때조차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가장 약할 때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 상처와 고통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만듭니다. 우리의 한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의지하게 됩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헛되게 두지 않으십니다. 상처를 통해 우리는 더 강한 믿음과 소망을 얻게 됩니다. 이는 로마서 8:28에 나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과도 맥락을 같이합니다.

    🙏 결론 :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십시오

    시편 34:18은 단순한 위로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께 나아가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려줍니다. 여러분이 상처받은 마음으로 힘들어하고 계시다면, 하나님께 그것을 온전히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은 그 마음에 가까이 다가오셔서 위로하시고,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 기도 :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시는 하나님께

    "사랑의 하나님, 오늘도 우리의 상처받은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 나아갑니다. 세상의 고통과 문제 속에서 무너지는 마음을 붙들어 주시고, 충심으로 주님을 찾는 저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따뜻한 위로와 사랑으로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시고, 새 힘과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Q&A: 시편 34:18에 대해 자주 묻는 질문

    1. 왜 하나님은 상한 마음에 가까이 다가오실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며, 특히 상처받고 약한 상태에 있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2. 통회하는 마음은 어떻게 가질 수 있나요?

    통회하는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죄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 보세요.

    3. 상한 마음이 회복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치유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우리의 신뢰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시간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기다림입니다.

    통회 / 4구절

    시편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이사야 57:15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시편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이사야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 받을 것이요”(마 5:4)

    주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매우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위로와 격려라고 생각합니다.
    힘든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는 새 힘을 얻게 하고, 상황을 반전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먼저 심령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누가복음 6장 21절에서는 주님이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주변의 어려움을 마음에 품고 울며 애통할 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회개하고 주님 앞에 자복할 때, 우리는 역사하시는 주님 때문에 웃을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주님은 마음이 상한 자, 통회하는 자를 멸시하지 않으시고 함께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는 애통하는 자들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먼저 애통하는 자가 되어 세상과 구별된 모습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자신보다 먼저 이웃을 돌아보고, 주의 복음이 필요한 나라와 민족과 열방을 바라보고, 애통하며 기도할 수 있는 자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증거하며 기도할 때입니다.

    주님은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위로는 애통한 마음을 받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애통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구할 때 이루어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심령이 가난해지고 천국을 소유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이웃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며 위로를 받습니다.
    말씀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문제를 해결합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애국가(愛國歌)

    하나님께 영광을

    안익태,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교회에서 태극기를 걸고「올드랭 사인」을 부르는 교포들을 보면서 애국가를 만들 결심을 했다.
    안익태는 부다페스트 음악학교에 재학중이던 1935년 드디어 애국가를 완성했다.
    훗날 애국가가 불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는 이런 고백을 했다.
    "애국가는 내 작곡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감을 조국의 백성들에게 전했을 뿐입니다"


    번연이 두려워했던 것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전도자 죤 번연(John Bunyun)이 신앙 때문에 베드포드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에 그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의 몸이었습니다.
    그 때에 죤 번연은 죽는 것이 몹시 두려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더욱 두려웠던 것은 여러 사람이 자기의 두려워 하는 모습을 보고 복음에 대해 불신을 가지게될까봐,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될까봐 더욱 걱정스럽고 염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만일 그 사다리를 오를 때 내가 만일 떨고 있으면 그것으로 인해 적들에게 하나님의 길과 그 분의 백성들에 대한 비난의 기회를 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이것 때문에 더욱 걱정스러웠는데 그것은 내가 핼쓱한 얼굴을 지닌 채 무릎을 덜덜 떨며 죽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결국 죤 번연은 "천국이 오든지 지옥이 오든지" 주 예수께서 자기를 붙잡으리라고 하는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 앞에서도 위로를 받고 담대한 신앙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승리하면 누구에게 영광입니까?
    우리가 패배하면 누구에게 욕이 돌아갑니까?
    우리가 승리하면 하나님께 영광이요, 우리가 패배하면 하나님께 욕이 되는 것입니다.
    * 나의 삶으로 주님의 영광이 가리워지지 않기를...

    크니이두스의 망대

    고대의 숙련된 건축가였던 크니이두스는 애굽의 바로를 위해 한 망대를 지으라는 명을 받았다.
    그는 건축을 해 나가면서 자신의 이름을 벽의 한 돌 위에 큼지막한 글씨로 새겨 놓았다.
    역청으로 그것을 가리운 다음 겉에는 금으로 애급의 바로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그는 그런식으로 모든것이 바로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행해진 것처럼 가장해 놓았던 것이다.
    그는 오랜 풍상의 세월을 거치면 회반죽이 떨어져 나가서 자신의 이름과 공로가 미래 세대에 길이 길이 남으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와같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교회의 영광만을 구하는 척하지만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은 모든 동기를 아신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자아에 대해서 정직할 필요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지.
    왜냐하면 곧 우리는 책들이 펼쳐진 가운데 보좌 앞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יהוה

    (여호와, Yahweh) - 어원 분석, 성경 속 용례, 영적 의미 - 성경과 묵상

    1. 어원 분석

    히브리어 יהוה (YHWH)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신성하고 독특한 단어로, 여호와 혹은 야훼로 발음됩니다. 이 이름은 4개의 히브리어 자음인 י (요드), ה (헤), ו (바브), ה (헤)로 구성되어 있으며, 테트라그람마톤(Tetragrammaton)이라고도 불립니다.

    • Strong’s #H3068
    יְהֹוָה 스트롱번호3068
    1. 자존자. 2. 영원한 자 : 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발음 [ Yehôvâh ]
    어원  / 196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020회 사용
    • 1. 고유명사 자존자, 영원한 자: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 관련 성경 / 여호와(출 20:7, 레 24:13).

    어원 분석을 보면, יהוה는 히브리어 동사 “하야 (היה)”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는 “존재하다” 또는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존하는 존재임을 나타내며, 성경에서 하야 (Strong’s #H1961)라는 단어는 “I AM”으로 번역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אהיה אשר אהי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고 계시하셨는데, 이는 “I AM WHO I AM” 또는 “나는 나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존성과 영원성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에흐예 (אהיה, Strong’s #H1961)는 히브리어로 “I AM”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존재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걸쳐 변함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야
    에흐예는 같은 어원을 공유하고 있어,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유대 전통에서는 יהוה라는 이름을 너무 거룩하게 여겨 직접 발음하는 것을 피하였으며, 아도나이 (Adonai, Strong’s #H136)라는 단어로 대체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LORD라는 표기법으로 표현되어 약 6,800번 이상 등장합니다.
    이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본질과 그분의 권능을 강조하고, 그분의 절대적 주권을 나타내는 방식입니다.

    2. 구약 성경 속 용례

    여호와라는 이름은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나타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몇 가지 대표적인 구절을 통해 יהוה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출애굽기 3:14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에흐예 (אהיה)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자존적 존재임을 나타내며, 그분의 이름 יהוה가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관계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와는 하나님께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우리 삶의 기초가 되심을 나타냅니다.

    2) 창세기 2:4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라는 구절에서, יהוה는 창조주로서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여호와는 단순히 신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고 다스리는 주권적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3) 신명기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라는 구절은 유일신으로서 하나님의 위치와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는 신앙의 선언입니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신들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함을 나타냅니다.

    4)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에서, 여호와는 인간의 삶에 친밀하게 개입하시는 목자로 나타납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고 보호하시는 돌보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성품을 강조합니다.

    5) 이사야 42:8
    “나는 여호와라 이는 내 이름이라”라는 구절에서, 여호와는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으로서 다른 신과 구별되는 독특하고 거룩한 이름임을 보여줍니다.
    여호와는 자신의 이름을 통해 그분의 영광과 거룩성을 나타내며, 하나님이 유일하고도 전능한 분임을 선언합니다.

    3. 영적 의미와 교훈

    여호와의 이름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불변성을 상징하며, 그분의 존재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에 담긴 영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자존성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며, 다른 어떠한 존재에도 의존하지 않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주의 본질을 가진 분으로서 우리 삶의 절대적 의지처가 되심을 나타냅니다.
    그분의 이름은 우리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2) 영원한 임재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시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우르며, 시간 속에서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임재가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완전한 보호를 의미합니다.

    3) 신실하신 하나님
    여호와는 그분이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과 약속을 이루시며, 이를 통해 신실함을 나타내십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할 때 변함없는 신뢰를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4) 인격적 관계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적 관계를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이 단지 멀리 계신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깊이 개입하시며 친밀한 관계를 원하시는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통해 우리가 그분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초대하십니다.

    4. 여호와의 이름을 통해 배우는 교훈

    여호와라는 이름은 단지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명칭에 그치지 않고, 그분의 성품과 관계를 이해하는 데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경외와 존경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함
    여호와의 이름은 거룩하고 존귀하기에, 우리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유대 전통에서 하나님을 아도나이라고 부르며 그 이름을 거룩히 여긴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경배와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2)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것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변치 않는 신실한 분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분의 변치 않는 신실함은 우리가 그분의 약속을 붙들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확고한 기초가 됩니다.

    3) 하나님의 주권 인정하기
    여호와의 이름은 하나님이 온 우주와 인간의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심을 나타냅니다.
    이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 삶을 맡길 때,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4) 개인적인 관계와 신앙의 성숙
    여호와라는 이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개인적이고도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역사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우리의 신앙은 더욱 깊어지고,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 주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론 :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와 중요성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단순한 신적인 존재가 아닌, 영원히 살아 계시고, 자존하며, 우리와 관계를 맺고자 하는 분임을 나타냅니다.이 이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신실함을 깨닫고,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힘과 위로를 얻게 됩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돌보시는지를 상기시키며, 우리가 그분을 더욱 경배하고 신뢰하게 만듭니다.

    여호와, 야훼, 야웨는 신성사문자, 테트라그라마톤, 주(LORD)로 통일 
    야훼 (이스라엘 신화)  [Yahweh, 아도나이, YHWH]

    이 이름은 모세에게 4개의 히브리어 자음(YHWH)으로 계시되었다.
    바빌론 유수(BC 6세기)가 끝난 뒤, 특히 BC 3세기부터 유대인들은 2가지 이유에서 '야훼'라는 이름을 더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첫째, 유대교는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개종자들을 얻어 보편종교가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다른 모든 신들에 대해 보편적인 주권을 갖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신'이라는 뜻을 지닌 일반적인 명사 '엘로힘'을 '야훼'라는 이름 대신 사용하게 되었다.

    둘째, 야훼라는 이름은 너무 거룩하여 발언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회당 예배에서는 아도나이('나의 주')로 발음했는데, 〈구약성서〉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은 이 단어를 '키리오스'(주)로 번역했다.

    6~10세기경에 히브리어 성서 원본의 재간행 작업을 벌인 마소라 학자들은 'YHWH'라는 이름을 구성하는 모음들을 히브리어 '아도나이' 또는 '엘로힘'의 모음 부호들로 대치했다.
    이때문에 '여호와'(Jehovah, YeHoWaH)라는 인위적인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후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야훼' 대신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19~20세기 성서학자들은 다시 야훼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같은 초기 그리스도교 저자들은 '야훼'와 비슷한 음역형태를 사용했고, 이 4글자(YHWH)를 이렇게 발음하는 관행은 그뒤로도 없어지지 않았다.
    다른 그리스어 필사본들도 'YHWH'를 '야훼'로 발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느님이 지니는 이 고유한 이름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어왔다.
    많은 학자들은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존재케 한다'(Yahweh-Asher-Yahweh)는 것이 가장 정확한 뜻이라고 믿는다.
    〈사무엘 상〉에서 하느님은 야훼 테바오트(Yahweh Teva-⁽ot), 즉 '그는 만군(萬軍)을 존재케 한다'는 뜻으로 알려지는데, 여기서 '만군'은 하늘의 왕국 또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듯하다.
    하느님의 이 고유한 이름은 모세 시대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모세의 어머니 이름은 '요게벳'인데, 이것은 '야훼'라는 이름에 바탕을 둔 이름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속했던 레위 지파는 '야훼'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이 이름은 원래 'Yo, Yah, Yahu라는 짧은 형태로' 신비스럽고 두려운 광채에 압도되어 특별한 뜻없이 신을 부르는 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야훼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 문서는 하느님/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 또는 하느님입니다.

    야훼(야웨, 히브리어: יהוה) 또는 여호와(Jehovah)는 고대 히브리어 소리를 한국어로 옮긴 것이며, 이는 출애굽기 3:1-14에 근거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에 대한 호칭이다.
    이전에는 히브리 글자에 모음 표기가 없었기 때문에 4자음만이 남아 있고, 유대인들은 이 이름을 거룩하다 하여 발음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음이 잊혔다.
    현재, 야웨(יַהְוֶה)가 가장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읽기이다.[출처 필요]
    '야'에 대한 모음은 거의 확실한데, 여기에서 딴, 성경에 나와 있는 많은 이름이 -야 또는 -야후로 끝나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 문서에서 그리스어: Ιαβε라는 표기가 발견된다(당시 발음법에 따르면 IPA: [jave]라고 읽게 됨.).

    유대인들은 이 이름을 아도나이(Adonai : 주(主))라고 읽고, 이 이름을 지칭할 때 하솀(HaShem : 이름) 또는 솀 하메포라쉬(거룩한 이름), 또는 (거룩한) 네 글자(그리스어: τετραγράμματον Tetragrammaton[*])라고 말한다. 로마자로 표기할 대는 YHWH, YHVH, JHWH, JHVH라고 쓰고, 독일에서는 JHWH로 통일해서 쓴다.

    [편집] 발음에 대한 근거
    이 단어의 모음에 대하여 많은 제안이 있었고, 가장 많이 쓰는 것으로 יַהְוֶה 야웨(Yahweh)(IPA: [jah'we])가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딴, 성경에 나와 있는 많은 이름이 -야 또는 -야후로 끝나기 때문이다. 예: 이사야, 엘리야

    초기 기독교 문서에서 발견되는 번역도 대개 "Yahweh"와 비슷하다.
    사마리아 사제들은 현재까지 이 단어를 "Yahwe" 나 "Yahwa"로 발음해왔다.

    대개의 학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만 이는 관습이나 합의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모음을 확실하게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야훼로 읽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며 야웨나 야베(v발음과 유사)로 읽는 것이 정확하다고 주장되고 있다.[출처 필요]

    [편집] 모세오경에 사용된 하느님의 이름
    히브리 글자에 모음이 없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의도적인 면도 있다.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라에서는 이 거룩한 네자토라(모세오경)가 자체가 하느님의 이름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그리고 대변혁의 시기마다 모세오경의 내용이 새롭게 해석되므로, 가령 시나고그에서 경전을 읽을 때 모음을 넣어서 읽는 것이 금지되었다.

    [편집] 뜻
    이 이름을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는, 이 이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와도 관계있다.
    '야훼(야웨)'(Yahweh)의 본래의 뜻은 분명하지 않으나, “있다”를 뜻하는 동사 '하야'(hayah. 어두의 h를 강하게 발음하면 hayah가 되어 산다를 의미한다.[모호한 표현])가 변화한 말이며 '있게 하는 자, 살리는 자'라는 뜻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편집] 여호와
    '야훼'는 '여호와'라 칭하기도 한다.
    이는 마소라의 유대인 학자들이 자음으로만 구성된 히브리어에 모음표를 붙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유대인들은 출애굽기나 레위기 24장 11절의 계명에 따라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이것을 읽어야 할 때는 아도나이(Adonai 나의 주라는 뜻)라는 말로 대용해 왔다.
    후에 '야훼'를 나타내는 자음과 '아도나이'를 표시하는 모음이 합해서 '여호와'라고 발음되었다.
    즉 아도나이의 모음을 YHWH에 붙인 것이다.
    단, 제1모음은 제1자음, 아래서는 a로 읽지만 y 아래서는 e로 읽는다.
    따라서 그것이 16세기의 기독교 학자들에 의해서 '여호와'(Yehowah)라고 읽혔다.

    [편집] 한국에서 쓰임
    이 독법이 한글개역판에 들어오면서, 개신교 교인들이 구약성서를 읽을 때에 이것을 여호와라고 읽게된 것이다.

    한편 오랫동안 공동번역를 읽어온 천주교회에서는 '야훼'라고 표기해왔으며, 1977년 이래로 공동번역을 읽고 있는 성공회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호칭으로 '야훼'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근년의 여러 연구에서는 여호와(Yehowah)는 야훼(Yahweh)로 읽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한글개역판의 영향으로 개신교에서는 '여호와'라고 전면적으로 표기하고 사용하며, 한국 기독교 안에서 개신교의 비율이 높은 이유로, 실제 사용 빈도에서도 '야훼'를 능가한다.

    현재도 개신교는 계속해서 '여호와'와 '야훼'라는 표기를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최근에도 개신교측 번역인 개역개정판, 우리말 성경, 쉬운성경 등에서도 야훼를 주(LORD)로 번역한 표준새번역을 제외하고 모두 '여호와'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교황청 경신성사성에서의 결정(2008년 6월 29일자)으로, 천주교회에서는 더이상 '야훼'를 사용할 수 없다.
    이미 천주교 성경(2005) 번역부터 야훼를 '주'로 번역한 한국천주교주교의회는 2008년 10월 추계 총회를 통해 '야훼' 사용 금지를 결정하였고, 가톨릭 성가에 있는 '야훼'라는 표현도 '주'로 전부 수정되었다.

    한편, 개신교에서 이단으로 인정하는 기독교의 분파 중에서도 '여호와'의 사용을 지지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 전 세계에서 '여호와(Jehovah)'로 단어를 통일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성서침례교회의 경우, YHWH가 아닌 JHVH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편집] 주 또는 주님으로 번역
    70인역, 불가타를 비롯한 많은 성경 번역들은 이 단어를 번역하거나 그대로 쓰지 않고, '주님'(LORD)이라고 표기한다(따라서 이 단어 '야훼'와 원래의 뜻으로 쓰이는 '주님'은 구별되지 않는다).
    이 전통을 따라 많은 영어 성경들도 이 단어를 주님이라고 표기하는데, 대부분은 이 단어를 대문자만 써서 LORD나 Lord로, 원래의 뜻으로 쓰이는 단어는 소문자를 섞어서 Lord나 lord 등으로 구별하여 쓴다.
    한국에서는 개신교의 표준 새번역에서는 '주(主)'로, 천주교의 성경에서는 '주님'으로 표기한다.


    6월 23일(월) 시편 23-29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합당한 영광(29:2)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
    Ascribe to the LORD the glory due his name; worship the LORD in the splendor of his holiness.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하부 아도나이 케보드 쉐모) הָבוּ לַיהוָה כְּבֹוד שְׁמֹו הִשְׁתַּחֲווּ

    영광(榮光) : 영화 영, 빛 광
    파자(破字) / 불화(火) + 덮을 멱(冖) + 나무 목(木) = 사람 인(人) + 열 십(十)
                        빛광(光) 작을 소(小) + 한 일(一) + 어진사람 인(儿)

    영광이란 한자를 분해하면 어떤 사람이 모두가 놀랄만한 업적을 이루고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죽으셨던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때 빛나는 광채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빛이 되려면 나를 작게 여기는 세상에서 가장 어진사람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돌리며(3053) 예하브( yehâb) יְהָב   

    1. 주어진 것.   2. 짐.  3. 운명.
    발음 [ yehâb ] 
    어원  / 305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회 사용
    • 1. 명사  주어진 것, 짐, 운명.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 본 구절을 직역하면, `그의 이름의 영광을 여호와께 돌리라'이다. 여호와의 `이름'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가를 보여 주는 계시의 한 방편이며 그의 말씀과 사역 중에 주어졌다. 본절은 바로 그 이름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는 의미이다(Kidner).

    거룩한 옷을 입고
    - `거룩한 옷'이란 축제 때에 제사장들(또는 악사들)이 여호와께 경배하기 위해 입는 특별한 옷(대하 20:21)을 의미한다(Lange, Delitzsch).
    이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이 먼저 그 앞에서 거룩해야 한다는 예배의 원리를 강조한 시적(詩的) 표현이다(Craigie).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
    이름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지만 분명하게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복합적인 사례를 통하여 알려주며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사건들을 통하여 존재를 계시하셨습니다.
    여호와 이레(YAHWEH-JIREH) : 준비하시는 여호와(창 22:14)
    여호와 라파(YAHWEH-RAPHA) : 치료하시는 여호와(출 15:26)(시 103:3)
    여호와 닛시(YAHWEH-NISSI) : 승리하게 하시는 여호와(출 17:15) 
    여호와 살롬(YAHWEH-SHALOM)(삿 6:24)은 "평강을 주시는 여호와"
    여호와 로이(YAHWEH-ROHI) 라아(시 23:1)는 "목자가 되시는 여호와"(요 10:19)
    여호와 치드케누(YAHWEH-TSIDKENU) : 의가 되시는 여호와(렘 23:6)(고전 1:30)
    여호와 삼마(YAHWEH-SHAMMAH) : 거기 계시는 여호와(겔 48:35)(계 21:3)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문자로 기록된 이름마저도 입으로 부를 수 없었기에 그 문자가 나타나면 마음 속으로만 읽을정도로 두려워했습니다.
    이러한 전통이 후에는 그 이름을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음역으로 "아도나이"라고 불렀습니다.
    문자는 "야웨"라고 적었지만 발음을 할 때는 "아도나이"라고 읽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였던 것입니다.

    레위기 18:21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흠을 잡힌다면 그들은 사람의 잘못만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까지 욕합니다.

    레위기 21:6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생각과 삶의 모습이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언제나 거룩한 행실을 유지하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른 이름들은 무엇이며 그 의미들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가지신 각각의 많은 이름들은 하나님의 다면적인 특징들 중 각각 다른 측면을 보여줍니다. 성경에 나오는 잘 알려진 하나님의 이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엘 엘로하(EL, ELOAH): “강하고, 능하시고, 뛰어나신” 하나님 (창세기 7:1; 이사야 9:6) –어원학적으로 엘은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창세기 31:29)와 같이 “능력”을 의미하는 데 쓰입니다. 엘은 진실함 (민수기 23:19), 질투 (신명기 5:9), 긍휼 (느헤미야 9:31) 같은 다른 자질들과 연관되지만, 능력을 근본 개념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엘로힘 (ELOHIM): “창조주, 강하고 능하신” 하나님 (창세기 17:7; 예레미야 31:33) – 엘로하의 복수형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수용하는 이름입니다. 성경 첫 문장, 하나님(엘로힘)께서 세상이 있으라 말씀하실 때부터 하나님 능력의 우월성은 명백히 증거됩니다 (창세기 1:1).

    엘 샤다이 (EL SHADDAI): “전능자 하나님”, “야곱의 전능자” (창세기 49:24; 시편 132:2, 5) – 모두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궁극적 권능에 대해 말합니다.

    아도나이 (ADONAI): “주(Lord)” (창세기 15:2; 사사기 6:15) – 유대인들에 의해 죄 많은 인간이 입 밖으로 소리내기엔 너무도 신성한 이름이라고 여겨졌던 야훼 (YHWH)를 대신하여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야훼는 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다루실 때 사용되는 반면, 아도나이는 이방인들을 다루실 때 주로 사용됩니다.

    야훼/여호와 (YHWH / YAHWEH / JEHOVAH): “하나님 (LORD)” (신명기 6:4; 다니엘 9:14) –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의 유일한 참된 이름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주(Lord), 아도나이와 구분하기 위해 “LORD” (모두 대문자)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 이름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출애굽기 3:14)로 처음 밝혀졌습니다. 이 이름은 구체적으로 즉각성, 현재성을 나타냅니다. 야훼는 구원과 (시편 107:13), 죄 사함 (시편 25:11), 인도하심 (시편 31:3)을 구하는 자들 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곳에, 지금, 계십니다.

    여호와 이레 (YAHWEH-JIREH) :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것이다” (창세기 22:14) –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 제물로 바칠 양을 준비해주셨을 때 아브라함이 기념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여호와 라파 (YAHWEH-RAPHA): “치료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15:26) – “나는 너희를 [영육 간에]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육적으로는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고 치료하시고, 영적으로는 부당함을 용서하십니다.

    여호와 닛시 (YAHWEH-NISSI): “하나님 우리의 깃발” (출애굽기 17:15). 깃발은 전장에 세워지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 이름은 출애굽기 17장 아말렉과의 사막전 승리를 기념합니다.

    여호와 마카데쉬 (YAHWEH-M'KADDESH): “성스럽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 (레위기 20:8; 에스겔 37:28) –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아니라, 오직 당신만이 당신의 백성을 정결하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여호와 샬롬 (YAHWEH-SHALOM): “하나님 우리의 평화” (사사기 6:24) – 기드온이 하나님의 천사로부터 그를 본 이후에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답을 듣고 나서 자신이 지은 제단에 붙인 이름입니다.

    여호와 엘로힘 (YAHWEH-ELOHIM): “여호와 하나님” (창세기 2:4; 시편 59:5) – 하나님의 유일한 이름 여호와 (YHWH)와 포괄적인 “하나님”의 합성어로 여호와가 하나님 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여호와 트시드케누 (YAHWEH-TSIDKENU): “여호와 우리의 의” (예레미야 33:16) – 여호와 마카데쉬에서와 같이 하나님 한 분만이 사람에게 의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고 (고린도후서 5:21)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습니다.

    여호와 로이 (YAHWEH-ROHI): “하나님 우리의 목자” (시편 23:1) – 다윗은 목자인 자신과 자기 양과 의 관계를 숙고한 이후에 하나님과 자기의 관계가 정확히 그것과 같다는 것을 깨닫고, “여호와 로이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선포합니다 (시편 23:1).

    여호와 삼마 (YAHWEH-SHAMMAH):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다” (에스겔 48:35) – 예루살렘과 그곳에 있는 성전에 대해 주어진 이름으로, 한 때 떠났던 주님의 영광이 (에스겔 8-11장) 다시 돌아왔음을 나타냅니다 (에스겔 44:1-4).

    여호와 사바오트 (YAHWEH-SABAOTH): “만군의 하나님” (이사야 1:24; 시편 46:7) – 만군은 천사와 사람의 “무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무리뿐만 아니라 지상의 거주자들에 대해서도 , 또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주인과 종 모두에게 하나님 되십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과 권위를 나타내며 하나님께서 하시기로 결정한 것은 무엇이든 성취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엘 엘룐 (EL ELYON): “지극히 높은” (신명기 26:19) – “위로 가다” 또는 “올라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근어에서 파생된 말로 함축 의미는 지극히 높은 것을 의미합니다. 엘 엘룐은 승격을 암시하며 군주의 절대적 권리를 일컫는 데 사용됩니다.

    엘 로이 (EL ROI): “살피시는 하나님” (창세기 16:13) – 사라에 의해 광야로 쫓겨나 외롭고 절망적인 가운데서 하갈이 하나님께 붙여드린 이름입니다 (창세기 16:1-14). 하갈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직접 현현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하갈은 자신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엘 로이가 자신을 살피셨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을 살피신다고 증언했습니다.

    엘 오람 (EL-OLAM): “영원하신 하나님” (시편 90:1-3) – 하나님은 본래 시작도 끝도 없으시며, 시간의 제약으로부터도 자유로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안에 시간 그 자체의 원인을 가지고 계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엘 깁보르 (EL-GIBHOR): “전능하신 하나님” (이사야 9:6) – 이사야의 예언 부분에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이름입니다. 강력하고 전능하신 전사, 전능하신 하나님 메시아가 하나님의 원수를 멸하시고 철장으로 다스리시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15).





    오늘 본문 시편 29편 2절 상반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어떻게 돌려야 하는지 한 두 가지로 교훈을받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교훈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은 무엇인지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자는 “거룩한 옷을 입고”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29편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여기서 “거룩한 옷을 입고”란 말씀은, 거룩한 인격을 가져야 될 것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즉,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를 드림에 있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합당한 인격이란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합당한 인격은 바로 ‘거룩한 인격’이라고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거룩한 인격을 가진 예배자의 삶은 과연 어떠한 것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지닌 자로서 정결한 생활을 합니다(박윤선).

    우리는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세상과 짝지어 살지 않고 분리된 삶을 살면서 내재하시는 성령님의 거룩케 하심을 받아 하나님 보시기에 정결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과연 찬송가 332장 4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못된 행실 다 고치고 죄질 생각 다 버려도 주앞에서 정결타고 자랑”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 밖에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죄 씻음을 받은 저와 여러분들은 그의 피 공로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그를 경배해야 합니다(히4:16).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를 원하는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를 드리길 위하여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 앞에 헌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나실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뜻은 성결하다, 거룩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인 ‘나자르’라고 하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나자르란 단어의 뜻은 성별 되었다, 구별 되었다, 헌신된 자, 구분된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실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겠다고 자기 자신을 구별하여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나실인’ 예배자가 되야 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겠다고 헌신한 나실인처럼 이 죄악된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구별하여 헌신한 자들로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는 신앙의 표준을 목표로 삼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서 살아가는 예배자가 되야 합니다(레11:45; 벧전1:16).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나실인처럼 거룩한 삶을 살기로 결단하며 순종하며 헌신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경배를 돌릴 수 있길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자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29편 3-9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소리”라는 말을 일곱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의미한 반복이 아니라 자연 현상으로 나타난 우뢰소리를 영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음성으로 간주하는데 호응한 것입니다(박윤선). 하나님의 소리를 폭풍의 뇌성(the thunder of the storm)으로 표현하는 시편 기자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위엄스러운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자는 거룩한 옷을 입고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하나님의 위엄스러운 말씀을 듣습니다. 그 위엄스러운 말씀은 힘이 있어(4절) 백향목까지도 꺾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5절). 이러한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던 다윗은 9절 하반절에 가서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And in His temple everything says, “Glory!”)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의 찬송을 가리키고 있습니다(Calvin). 하나님의 영광을 천연계에서 인식하는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박윤선).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를 원하는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위엄스러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있는 하나님의 위엄스러운 말씀은 심판의 문맥에서 선포되고 있음을 우리가 인식할 때에 과연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는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한 네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스러운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있어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그 말씀을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됩니다. 그러므로 함부러 하나님의 말씀에 내 마음대로 추가하고 빼고 하는 등 말씀에 불경건한 행동을 마음으로도 죄를 범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힘있는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에 백향목같이 우리 강심장이라 할찌라도 부서지고 꺽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엄스러운 말씀을통하여 내 강팍한 마음이 부서지고 내 고집이 꺽어져야 합니다. 내 묵은 땅을 주님의 힘있는 말씀으로 하여금 기경해야 합니다.

    (3) 오늘 본문 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광야와 같이 메마른 마음이 진동해야 합니다.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메마른마음이 흥분 되야 합니다(학1:14).

    (4)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들으면서 영적으로 벌거 벗어야 합니다.

    9절 하반절 말씀을 보시길 바랍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너무나 포장된 모습으로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서는 아니됩니다. 경건의 모양을 너무나 추구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서는 아니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우리 자신의 깊은 곳에 숨겨져있는 모든 것들까지도 들어내어 보이면서 하나님 앞의 우리의 모습 그대로 겸손히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영적 벌거벗음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자는 예배자 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듣는 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위엄한 소리를 듣는 자입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자는 어떠한 축복을 받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릴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힘과 평강의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29편 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자는 참된 예배자요 또한 듣는 자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은 “힘”과 “평강”의 복입니다. 과연 성도들이 필요한힘은 어떠한 힘입니까? 한 두 가지로 생각해 봅니다:

    (1) 예배 가운데 주시는 힘, 그힘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8장 10절을 보십시오: “…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2)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의 삶 가운데서 주시는 힘은 말씀의 힘입니다.

    이 힘은 결국 공의 편에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도 용기와 위안을 줍니다 (박윤선). 예배의 삶과 말씀 듣고 순종하는 삶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누리게 하시는 축복은 바로 “평강”입니다.

    에스겔 36장 2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큰 거룩한 이름을 아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로 인하여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일 더렵혀 질찌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아끼시기에 우리로 인하여 그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23절). 비록 우리 크리스찬들이 예수 존귀하신 그 이름을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더럽혀질지라도 하나님의 그의 거룩하신 큰 이름을 아끼시기에 우리로 인하여 그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십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자라면 우리는 그의 거룩한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기 원하여 하나님께 “거룩한 옷을 입고” 경배를 드리며 또한 하나님의 위엄스러운 소리를 겸손히 들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힘과 평강의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장엄한 광경을 보면 저절로 탄성이 나옵니다. 웅장한 대자연을 바라보면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예배도 창조주 하나님의 장엄함을 맞닥뜨릴 때 저절로 나오게 되는 반응입니다.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뵐 때 찬양과 경배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모니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예배하라(1~2절)

    하나님을 뵙는 모든 존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1절의 ‘권능 있는 자들’은 천군 천사 등의 천상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천상적 존재들도 예외 없이 하나님께 영광과 능력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에 걸맞은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름은 그 존재의 본질과 가치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존엄하시고 공의로우시며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지극히 거룩한 모습으로 예배드려야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거룩하지 않은 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배자는 거룩한 삶이라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마치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이 거룩한 옷을 입었던 것과 같습니다. 신약시대의 거룩한 옷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아 거룩해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자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장엄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라(3~9절)

    3〜9절은 장엄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광’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는 가볍지 않고 묵직한 것, 무거운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존엄한 것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자연 만물의 장엄한 현상에 빗대어 묘사합니다. 거센 비바람과 천둥 번개가 휘몰아치는 광경, 엄청난 위용으로 덮쳐 오는 파도, 화산에서 솟아오르는 불기둥, 땅이 흔들리고 내려앉는 지진과 해일, 산사태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밀려 내려오는 흙더미들과 같은 자연현상은 인간이 지극히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 뿐만 아니라 자연의 장엄함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런데 이 모든 현상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위대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합니다.

    영원한 평강의 왕을 찬양하라(10~11절)

    놀랍도록 장엄하신 하나님은 천상뿐만 아니라(1절) 지상에서도 영원토록 왕으로 좌정하십니다(10절). 감히 접근하기도 어려운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평강을 주십니다(11절). 하나님은 샬롬의 왕이십니다. 너무 위대하셔서 인간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실 것 같은데, 친히 당신의 백성에게 힘을 주시고 그들이 평강을 누리도록 돌보십니다. 장엄하신 하나님을 그저 두려운 존재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영광스러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샬롬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진실하게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시는 샬롬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찬송 받기를 원하십니다{엡 1:6, 14). 당신의 위대하심에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통해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하지 못한 연약한 죄인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의가 되시고 우리의 거룩함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예배의 특권을 온전히 누리길 소망합니다.



    29편, 폭풍우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요절 : 10절,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29편은 자연계시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위엄을 노래한 시입니다. 지금 다윗은 가데스 광야를 지나 레바논과 시룐을 휩쓸고 있는 폭풍우와, 천지를 진동시키는 뇌성벽력을 바라보면서 영감을 받아 겸비한 자세로 하나님의 위엄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여호와”라는 말이 17번, “여호와의 소리”라는 말도 도표에 표시된 대로 7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이를 자연현상으로 여길 뿐이지만,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이를 통해서도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4) 하고, “여호와의 소리”, 즉 하나님의 말씀하심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폭풍우만이 아니라, 빈발하고 있는 진진, 전염병, 재난 등을 통해서도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첫째 단원(1-2)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둘째 단원(3-9) 여호와의 소리의 위엄

    셋째 단원(10-11)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

     

    첫째 단원(1-2)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①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 지어다”(1) 하고 촉구합니다.

    ㉠ 이점에서 “권능 있는 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천사들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여호와의 소리”, 즉 호령(號令)하시는 하나님의 엄위를 증거하고 있는 의미문맥으로 볼 때에 세상에서 권세와 능력을 누리면서 하나님 두려운 줄을 모르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 교만하고 자고하는 권세 있는 자들을 향해서,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 지어다” 합니다. 그런 자들은 “영광과 능력”을 자기(自己)에게 돌리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돌리고 돌릴 지어다” 하고,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여간해서 그렇게 할 자들이 아님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② 한걸음 더 나아가,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 지어다”(2) 하고 촉구합니다.

    ㉠ 이는 두 마디로 되어 있는데,

     

    ㉮ 첫째는,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 합니다. 세상 적으로도, 이름과 신분에 합당한 예우(禮遇)라는 것이 있습니다. 궁중 음악인 아악(雅樂)과, 농악(農樂)은 울리는 때와 장소가 다른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겠는가? 그래서 “합당한 영광”이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는 형식적으로 굴복하는 채 하지 말고 진심으로 복종하라는 뜻입니다.

     

    ㉯ 둘째는,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 지어다” 말씀합니다. 여기서 “거룩한 옷”이란 제사장의 옷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데, 궁중의 복장과, 시중의 복장은 다른 법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 지어다 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이, 2:10-12절입니다.

     

    그런즉 너희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 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 태풍과 홍수와 뇌성벽력이 치는 밤에 죄인의 간담이 콩알만 해진다고 말합니다. 본문은 죄인들을 하나님의 엄위 앞에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인 재난 앞에서, 잘난 채하던 인간의 왜소함과 무력함을 느끼게 하는 시편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경고가 둘째 단원(3-9)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둘째 단원(3-9) 여호와의 소리의 위엄

    둘째 단원에는 “여호와의 소리”라는 말이 7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본문을 관찰해보면 “여호와의 소리”가 회개(悔改)를 촉구하는 호령(號令)처럼 발하여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③ “여호와의 소리가 물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위에 계시도다”(3) 합니다.

    ㉠ 이 묘사를 통해서 하늘이 뚫린 양 쏟아 붓는 폭우와, 범람하는 홍수를 연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雷聲)을 발하심이여”(3하) 하고, “뇌성”을, “권능 있는 자들”(1)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호령으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4-6).

     

    ㉡ 이상의 묘사에서는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가는 무서운 태풍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를 통해서 시편 기자는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 5) 하고, 회개를 촉구하시는 여호와의 호령소리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④ 그리고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하시도다”(7-8) 하는 묘사는 태풍과 뇌성병력을 가리킵니다.

    ㉠ 태풍과 폭우와 뇌성병력이 휩쓸고 지나간 모습이 어떠한가?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8-9상) 합니다.

     

    50편에는 하나님께서 심판주로 강림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리니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50:3) 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살전 4:16) 합니다. 그 날에 죄인이 어디에 설 수가 있단 말인가?

     

    ⑤ 그러므로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榮光)이라 하도다”(9하) 하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결론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 어찌하여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가? 3-9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엄위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여호와”라는 말이 17번, “영광”이라는 말이 4번 등장하는데, 항거할 수 없는 자연계시를 통해서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 지어다”(4:4) 하는 셈입니다.

     

    셋째 단원(10-11)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

     

    ⑥ 다윗은 한걸음 더 나아가,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坐定)하셨음이여”(10상) 하고, 이를 통해서 홍수심판을 상기시킵니다. 29편을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중심점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둘째 단원을 통해서 하나님의 엄위(嚴威)를 보여주고는, 셋째 단원에서는 최후심판이 있음을 망각하지 말라고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 그래서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10하) 하는 것입니다. 핵심은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이시라는 말씀입니다.

    ㉮ 홍수심판 때에 좌정하신 하나님은,

    ㉯ 다윗 당시의 폭풍우 속에서도 좌정하시고,

    ㉰ 이제도 역사 속에서 좌정하시고,

    ㉱ 최후심판 때에 좌정하신다는 점을 알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는 “여호와의 보좌”가 항상 중심에 와 있어야만 합니다. 성도들의 마음중심에 와 있어야 하고, 가정의 중심에 와 있어야 하고, 교회의 중심에 와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⑦ 그러면 최후심판이 있다는 사실이 성도들에게는 어떻게 작용을 하는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11상) 합니다.

    ㉠ 태풍이 지축을 뒤흔들고, 천둥 번개가 치며 벼락이 떨어질 때에 산림의 짐승들도 두려움에 떱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자고하던 권세 있는 자들도 두려움에 떱니다. 이때에 성도들도 두려움에 떨게 됩니까? 아닙니다.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와 박해를 당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도리어 가슴을 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의 뜻입니다. 최후심판이 불신자들에게는 두려움의 절정이지만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임이러라”(계 7:17) 한, 최대한의 위로의 시간인 것입니다.

     

    ㉡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平康)의 복을 주시리로다”(11) 하는 것입니다. “폭풍우와, 성도의 평강”을 절묘(絶妙)하게 대조시키고 있다는 점이 이 시의 압권이요, 절정입니다.

    그렇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게 되었다”(막 5:39) 하고 말씀합니다. 이 “평강”은 자연계시를 통해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맛보게 되는 여호와의 선하심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많은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고 소망을 주었던가? 형제도 그러합니까? 만일 이 말씀이 무덤덤하게 들린다면, “권능 있는 자들”처럼 너무나 이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폭풍우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적용 : 형제의 마음 보좌에 좌정하신 하나님은,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충돌하는 폭풍과 같은”(사 25:4) 시련 속에서도 형제에게 힘을 주시고 평강을 주시는 여호와이십니다.

    묵상

    ㉠ 다윗은 무엇을 바라보면서 이 시를 읊고 있습니까?

    ㉡ 뇌성벽력을 통해서 무엇을 듣고 있습니까?

    ㉢ 이 시의 핵심이 어디에 있으며, 말씀하시려는 의도에 대해서.


    시편 23:1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 나오는데 그것은 "여호와 로이"(רֹעִי)로 "로이"는 "목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23편에는 목자 되신 하나님의 세 가지 모습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여호와 이레",
    [공급자 하나님]이 나오고,

    두 번째는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어 불안을 없애주시는 "여호와 샬롬",
    [평강의 하나님]이 나오며,

    세 번째는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이 나옵니다.

    이처럼 부족할 때 목자 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있고, 마음이 불안하여 힘이 없을 때 목자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과거부터 쌓인 마음 속 트라우마가 불쑥 튀어나와 힘들게 때에도 목자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 우리의 마음에 진정한 치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방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목자 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평강주심과 치료하심을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의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레트로, 빈티지, 아날로그

    이 세 단어는 각각 과거의 특정 시대를 연상시키는 스타일과 기술을 의미합니다.
    레트로는 과거의 디자인이나 트렌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
    빈티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가치가 높아진 오래된 아이템
    아날로그는 디지털이 아닌 연속적인 신호를 사용하는 기술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모두 현대 생활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레트로(retro)

    레트로는 과거의 유행이나 스타일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즐기는 경향을 의미합니다.
    이는 과거의 디자인, 음악, 패션 등을 현재의 기술이나 스타일과 결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현상을 포함합니다.
    레트로에 대한 사람들의 궁금증과 관심은 과거와 현재의 조화로운 결합이 주는 독특한 매력 때문입니다.
    과거에 대한 향수와 현재의 창조성이 만나 새로운 창작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죠.

    레트로의 특징과 예시

    • 디자인 : 과거의 디자인 요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제품들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 음악 : 70년대, 80년대의 음악 스타일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창조한 ‘시티팝’ 장르가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 패션 : 과거의 패션 스타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의류가 레트로 패션으로 불리며, 다양한 연령층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레트로는 단순히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을 넘어서, 과거의 가치를 현대적인 맥락에서 재조명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문화적 흐름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예술, 엔터테인먼트, 생활 방식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각 세대에게 고유한 경험과 감성을 제공합니다.
    레트로는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는 동시에 현재의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빈티지(vintage)

    빈티지라는 용어는 원래 포도주의 수확기나 특정 연도의 포도주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vendange’에서 유래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단어는 숙성된 와인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고, 더 나아가 과거의 특정 시대를 연상시키는 물건이나 스타일을 가리키는 용어로 확장되었습니다.
    현대에서 빈티지는 단순히 오래된 것을 넘어서, 과거의 특정 시대의 감성과 스타일을 담고 있는 제품이나 패션을 의미합니다.

    빈티지의 매력과 활용

    빈티지는 그 독특한 매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 매력은 다음과 같은 특징에서 비롯됩니다:

    • 독창성 : 현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하고 개성 있는 디자인
    • 품질 : 견고하고 오래 사용할 수 있는 품질
    • 희소성 : 대량 생산되지 않아 희소성이 높음
    • 감성 : 과거 시대에 대한 추억과 감성을 불러일으킴

    빈티지는 패션, 인테리어, 음악,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됩니다.
    예를 들어, 빈티지 의류나 액세서리는 개성을 중시하는 패션 애호가들에게 인기가 있으며, 빈티지 가구나 소품은 인테리어에서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사용됩니다.
    빈티지 LP나 팝송은 음악 애호가들에게 특별한 가치를 지니며, 빈티지 영화나 배우들은 영화 팬들에게 과거의 아름다움을 되새기게 합니다.

    빈티지 문화의 인기 이유

    빈티지 문화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대량 생산 문화에 대한 반감 : 개성을 추구하는 소비자들의 증가
    • 지속 가능한 소비 :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 증가
    • 독창적인 스타일 추구 : 뻔한 스타일보다 차별화된 스타일 선호

    빈티지 제품을 구매할 때는 상태 확인, 가격 비교, 진품 확인 등을 꼼꼼하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진정한 빈티지 제품을 발견하고 소장하는 것은 단순한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현대 사회의 대량 생산 문화에 대한 반감과 개성을 추구하는 트렌드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빈티지는 과거의 시간을 품은 채 현대에 이르러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통해 우리의 삶에 독특한 색채를 더하는 문화 현상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빈티지는 단순히 오래된 것을 넘어서, 시간을 초월한 아름다움과 스타일을 간직한 존재로서 우리에게 의미를 전달합니다.

    아날로그(analogue)


    아날로그(Analogue)는 원래 ‘비례하다’라는 뜻의 고전 그리스어 ἀνάλογος에서 유래한 단어로, 연속적인 신호나 값을 의미합니다.
    이는 어떤 물리적인 양이 시간에 따라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나타내며, 자연 현상을 표현하는 데 주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빛의 밝기, 소리의 높낮이, 온도 등이 아날로그 신호의 예시입니다.
    이러한 신호들은 디지털 신호와 대비되는데, 디지털은 정보를 0과 1의 이진 코드로 표현하는 반면, 아날로그는 연속적인 범위의 값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날로그 기술의 특징

    아날로그 기술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 연속성 : 아날로그 신호는 연속적인 값으로 변화합니다.
    • 자연스러움 : 자연에서 발생하는 많은 현상들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 감성적 가치 : 아날로그 기술은 종종 따뜻하고 자연스러운 감성을 전달합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비교

    아날로그와 디지털 기술은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가집니다:

    • 신호의 표현 : 아날로그는 연속적인 신호를, 디지털은 이산적인 신호를 사용합니다.
    • 정보의 저장 : 아날로그는 물리적인 매체에, 디지털은 이진 코드로 정보를 저장합니다.
    • 오류의 영향 : 아날로그는 노이즈에 민감하지만, 디지털은 오류 정정 기능을 통해 노이즈에 강합니다.

    아날로그의 현대적 활용

    아날로그 기술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다음은 아날로그 기술의 몇 가지 현대적 활용 예시입니다:

    • 음악 : LP 레코드와 같은 아날로그 음악 매체는 디지털 음원과는 다른 독특한 음질을 제공합니다.
    • 시계 : 아날로그 시계는 시간을 시침과 분침으로 표현하며, 클래식한 디자인으로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 사진 :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아날로그 사진은 특유의 질감과 색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날로그 기술은 디지털 기술이 가져올 수 없는 독특한 가치와 감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의 매력은 계속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FAQ

    Q : 레트로, 빈티지, 아날로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A : 레트로는 과거의 디자인이나 트렌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스타일을 말하며, 빈티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가치가 높아진 오래된 아이템을, 아날로그는 연속적인 신호를 사용하는 기술을 의미합니다.

    Q : 아날로그 기술이 여전히 선호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A : 아날로그 기술은 디지털과는 다른, 연속적이고 자연스러운 신호를 제공하기 때문에, 특히 음악이나 사진과 같은 분야에서 선호됩니다.

    Q : 현대 생활에서 빈티지 스타일을 적용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A : 빈티지 스타일은 패션, 인테리어, 액세서리 선택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적용할 수 있으며, 고유의 매력과 개성을 더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17편 / 다윗의 기도 - 나를 지켜주시고 건져주소서
    18편 / 다윗의 시 - 하나님은 나를 건지시고 붙잡아 주시며 인도하신다
    19편 / 다윗의 시 - 창조의 하나님
    20편 / 다윗의 시 - 왕을 위한 기도
    21편 / 다윗의 시 - 왕에게 승리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22편 / 다윗의 시 - 고통을 겪는 사람의 기도



    6월 21일(토) 시편 17-22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도(18:30)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As for God, his way is perfect; the word of the LORD is flawless. He is a shield for all who take refuge in him.

    하나님의 도(道)라는 것은 자존하신 하나님께서 영원 전 당신의 목적을 정하시고 그 목적 안에 우리를 하나님같이 거룩하고 온전한 자를 만드시려고 예택 하시고, 목적 안에 예택 하신 대로 예정하시고, 예정하신 대로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것을 주권 섭리하시고, 이위 하나님께서 신인양성일위로 도성인신 하사 십자가 사활대속의 구원을 주시고, 피와 성령과 진리로 우리의 구원을 완전하게 이루어 가시는 이 구원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도라고 말합니다.

    말씀은 완전(完全)하다

    완전하다(8549) 타밈(tâmîym) תָּמִים 

    1. 완전한.   2. 온전.   3. 건전한
    발음 [ tâmîym ]
    어원 / 여성 תְּמִימָה, 855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91회 사용
  • 관련 성경  /  정결한(겔 43:22), 흠 없는(출 12:5, 민 6:14, 겔 46:6), 완전한(창 17:1, 삼하 22:26, 시 101:2), 진실한(삿 9:16),
    안전한(삼하 22:33), 온전한(욥 12:4).
    [부] 종일토록(수 10:13), 진실로(욥 36:4), 정직히(시 84:11).
    [명] 진실(삿 9:19, 시 15:2), 실상(삼상 14:41).

  • 말씀은 정미(精美)하다

    정(精)이란 "정미할 정" "정할 정"
    미(美)는 "아름다울 미"
    따라서 정이란 정교하고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NIV 영어성경에서는 정미라는 용어를 이렇게 번역합니다.
    "the word of the LORD is flawless(주님의 말씀은 완벽합니다)"

    시편 12편 6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번 단련한 은 같도다."라고 설명합니다.

    정미(6884) 차라프(tsâraph
    צָרַף    

    1. 녹이다.   2. 시험하다.  3. 니팔형 : 정련되다
    발음 [ tsâraph ]
    구약 성경  / 22회 사용
    관련 성경  /  시험하다(삿7:4, 시17:3, 26:2), 단련하다(시105:19, 렘6:29), 연단하다(사48:10, 슥13:9, 말3:2), 연단되다(단11:35), 청결하다(사1:25), 새기다(삿17:4), 제하다(잠25:4), 완전하다(삼하22:31, 시18:30), 순전하다(잠30 :5).
    [명] 금장색(느3:32, 사41:7, 렘51:17), 장색(사40:19, 46:6, 렘10:9), 연단(단12:10).

    말씀은 방패(防牌)가 된다

    막을 방(防), 패 패(牌)

    방패란 전쟁 때 적의 칼, 창, 화살을 막기 위하여 사용하던 무기를 말합니다.
    방패에는 원방패(圓防牌)와 장방패(長防牌)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은 이미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탄의 영향력을 받고 있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이 세상에서는 불의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방패가 되어 믿음의 사람을 보호하고 지켜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18편 2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방패(4043) 마겐(mâgên
    מָגֵן  

    1. 방패.  2. 보호자로서의 하나님.  3. 세상의 방패
    발음 [ mâgên ]
    어원 /  159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3회 사용
    관련 성경  /  방패(창 15:1, 삼하 1:21, 사 21:5), 즐비한 비늘(욥41:15), 군사(잠6:11, 24:34).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精美)하니
    - 다윗은 앞에서 자신의 구원받음이 하나님의 도를 순종한 자연스런 결과임을 천명한 바 있다(20, 21절).
    이에 근거해 볼 때, 다윗은 구원의 조건이 되는 하나님의 도가 얼마나 믿을 만하고 정확한 것인가를 밝히고자 한다.

    저는...방패시로다
    - 방패는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수비용(守備用) 무기로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비유하고 있다.

    공격용(攻擊用) : 수비용(守備用) / 방어용(防禦用)

    하나님의 말씀은 공격용이 아니라 수비용이며 방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애가 전적으로 수비형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

    1. [사무엘하 22:31]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2. [시편 18:30]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3. [마태복음 22: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4. [마가복음 12:14]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5. [누가복음 20:21]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6. [사도행전 18: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여호와의 도

    1. [창세기 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2. [사사기 2:22]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3. [사무엘하 22:22]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하여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4. [역대하 17:6]
    저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도를 행하여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도 유다에서 제하였더라

    5. [에스라 7:6]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저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으므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더니

    6. [시편 18:21]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7. [시편 33:11]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8. [시편 138:5]
    저희가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

    9. [잠언 10:29]
    여호와의 도가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요 행악하는 자에게는 멸망이니라

    10. [예레미야 49:20]
    그런즉 에돔에 대한 나 여호와의 도모와 데만 거민에 대하여 경영한 나 여호와의 뜻을 들으라 양떼의 어린 것들을 그들이 반드시 끌어가고 그 처소로 황무케 하리니

    11. [예레미야 50:45]
    그런즉 바벨론에 대한 나 여호와의 도모와 갈대아인의 땅에 대하여 경영한 나 여호와의 뜻을 들으라 양떼의 어린 것들을 그들이 반드시 끌어가고 그 처소로 황무케 하리니

    12. [호세아 14:9]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모순의 유래

    楚人有鬻楯與矛者,譽之曰:『吾楯之堅,莫能陷也。』又譽其矛曰:『吾矛之利,於物無不陷也。』或曰:『以子之矛陷子之楯,何如?』其人弗能應也。夫不可陷之楯與無不陷之矛,不可同世而立。

    초나라 사람 중에 방패와 창을 파는 자가 있었다.
    그가 방패를 칭찬하며 말하였다.
    "내 방패는 견고해서 그 어떤 물건으로도 뚫을 수 없소."
    또한 그 창을 칭찬하며 말하였다.
    "내 창은 날카로워서 그 어떤 물건도 뚫지 못하는 것이 없소."
    누군가가 말하였다.
    "그럼 당신의 창으로 당신의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은 대답할 수 없었다.
    무릇 뚫을 수 없는 방패와 뚫지 못하는 것이 없는 창은 같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모순(矛盾)이란? 뜻, 한자, 해석

    모(矛) : 창 모
    순(盾) : 방패 순

    모순이란 무엇이든지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방패, 즉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을 뜻한다.

    모순 출전 / 한비자(韓非子) 난일편(難一篇), 난세편(難勢篇)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내용이다.
    모순은 일반적으로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방패로 많이 알려져 있다.
    창과 방패의 이야기는 한비자가 아래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적인 예를 든 것이다.

    먼저, 난일편(難一篇)에서 한비자(韓非子)는 중국을 덕으로 다스려서 태평성대를 일구었다고 알려져 있는 요임금과 순임금의 예를 든다.  법치주의자였던 한비는 순임금의 여러 분쟁 해결 일화를 소개하면서 이것이 모두 순임금의 덕이라는 유가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하며 유가의 덕치주의를 비판한다.
    한비는 순임금이 덕이 있었다면 그러한 분쟁자체가 없었을 것이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덕을 베풀 여지자체가 이라는 주장을 한다.

    또한 순임금이 덕을 베풀어서 분쟁을 해결했다는 것은 그 전의 임금인 요임금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분쟁이 생겼을 것이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요임금을 성인이라고 하면 순임금의 덕을 부정하는 것이고 순임금을 성인이라고 하면 요임금의 치세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를 설명하면서 무엇이든지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방패이야기를 한다.

    또한 난세편(難勢篇)에서는 무엇으로도 금지시킬 수 없는 현자의 길과 무엇이든 금지시킬 수 있는 권세의 길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면서 이 역시 양립할 수 없다면서 창과 방패의 예를 든다.

    이처럼 모순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사실,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을 뜻한다.

    모순 원문 /  한비자(韓非子) 난세편(難勢篇) 중에서

    人有鬻矛與楯者(인유육모여순자)   - 창과 방패를 파는 사람이 있었다.

    譽其楯之堅(예기순지견) -  그 사람은 방패가 견고하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物莫能陷也(물막능함야) -  방패를 뚫을 수 있는 물건은 없다고 했다.

    俄而又譽其矛曰(아이우예기모왈) -   그리고 또 얼마 되지 않아 창을 자랑하며 말했다.

    ※俄而(아이): 얼마 되지 않아, 금방

    吾矛之利(오모지리) -  내 창은 날카로워서

    物無不陷也(물무불함야) - 뚤리지 않는 물건은 없소.

    人應之曰(인응지왈) -  한 사람이 말했다.

    以子之矛(이자지모) -  당신의 창으로

    陷子之楯何如(함자지순하여) -  당신의 방패를 찌르면 어찌 됩니까?

    其人弗能應也(기인불능응야) -  그 사람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以爲不可陷之楯(이위불가함지순) -  절대 뚫을 수 없는 방패와

    與無不陷之矛(여무불함지모) -  어떤 것이라도 뚫을 수 있는 창은

    爲名不可兩立也(위명불가양립야) -  아무리 선전해도 양립할 수 없다.

    夫賢之爲勢不可禁(부현지위세불가금) -  무릇 현자의 길은 권세로 금지할 수 없으나

    而勢之爲道也無不禁(이세지위도야무불금) -  권세의 길은 금지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以不可禁之賢(이불가금지현) -  금지할 수 없는 현자의 길과

    與無不禁之勢(여무불금지세) -  금지할 수 없는 것이 없는 권세의 길,

    此矛楯之說也(차모순지설야) -  이것이 모순이다.

    夫賢勢之不相容亦明矣(부현세지불상용역명의) -  무릇 현자와 권세는 서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모순과 비슷한 사자성어(동의어, 유의어)

    자가당착(自家撞着)

     自(스스로 자), 家(집 가), 撞(칠 당), 着(붙을 착)

    자가당착 뜻: 스스로 부딪치기도 하고 붙기도 한다.

    자가당착 해석: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자기모순(自己矛盾)

    自(스스로 자), 己(몸 기), 矛(창 모), 盾(방패 순)

    자기모순 뜻: 자기 스스로에 대한 모순

    모순당착(矛盾撞着)

    矛(창 모), 盾(방패 순), 撞(칠 당), 着(붙을 착)

    모순당착 뜻: 창과 방패, 부딪치거나 붙다.

    =자가당착(自家撞着)

    이율배반(二律背反)

    二(두 이), 律(법칙 율), 背(등 배), 反(돌이킬 반)

    이율배반 뜻: 두가지 법칙이 서로 반대된다.

    이율배반 해석: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의 명제를 이르는 말이다.






    하나님님의 도(道)를 배우라(행18:24-26)

     

     

    (행 18:24) ○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행 18:25)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행 18: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

     

    아볼로는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였습니다. 오늘날에도 학문(박사들)이 많고 성경에 능한 주의 종들이 많습니다.

     

    아볼로는 일찍 주의 도(율법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했는데, 율법으로 말미암는 세상의 것을 들어 예수를 전하는 자들로 요한의 물세례만 알기 때문에...이들은 보이는 은사역사에 빠져...육신적 사람의 교훈 곧 주의 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볼로는 성령세례는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를 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자세히 풀어 가르쳐 주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도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사람의 세상 교훈(윤리 도덕)이고, 하나님의 도는 진리로 말미암는 오직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도(道)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시는 길(道)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고 구원의 길 곧 영생의 길입니다.


    (요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 것이니라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 주신 보혈의 공로인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아십니까?

    십자가에 죽어 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셔서 이루어 주신 새 언약인 십자가의 도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 주신 하나님의 도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두 나무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인 아담과 생명나무인 예수가 하나를 이룬 것으로서 이는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도(道)입니다.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의 도(하나님의 도)를 듣고 믿고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갑니다.(마 7:20)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지금까지 이와 같은 비밀을 알지 못한 것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아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데 있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는 말하면서 십자가의 도(道)를 알지 못함으로 결국 죄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하고...입으로는 예수 사랑을 말하나 분쟁을 일삼는 원인이 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하나님의 도)은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도뿐입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께서 친히 죽으심을 통해서 이루어 주신

    보혈의 공로인 십자가의 도(道)는 하나님의 도(道)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깨달아 알고 믿고 순종하는 자가 천국 백성입니다.

    주의 도와 하나님의 도를 분별합시다.

     

     

    ---그리스도=하나님의 능력=십자가의 도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

    (골 2:2)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골 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골 2: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그리스도의 비밀 곧 십자가의 도를 알지 못하면...교묘한 사람의 미혹에 속게 됩니다. 이제 새 언약인 십자가의 도(하나님의 도)안에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로 깨달아 알고 믿어 영생 천국의 복을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의인들

    성경은 사람을 의로 교육하는 데 유익한 책으로서(딤후 3장 16절), 하나님의 도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지면을 할애해 의인과 악인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악인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복종치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저버린 악인들에게는 마지막 날에 심판과 형벌이 예정되어 있습니다(살후 1장 7~9절).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성령 시대에 이 땅에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도(道)를 친히 알려주심으로, 악인의 위치에 있던 인생들에게 죄를 없이하고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그 길을 따라 행하면 영적 세계에서 의인이라 인정받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성경은 하나님의 도를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에 따라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호 14장 9절

    하나님의 도는 정직하여 아무나 행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의인이라야 행할 수 있고 죄인, 즉 악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져 절대 행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도입니다.

    성경은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죄 없다 하는 자들은 모두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했습니다(롬 3장 10절, 요일 1장 8절). 죄인으로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장 20절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지 여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하나님의 규례를 행치 않는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인의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도 원래 죄인이었고 악인의 무리에 속해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를 행함으로 거듭나 의인의 반열에 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의인들

    과거에는 죄인이었던 우리가 천국 들어가기에 합당한 의로운 행실을 하게 된 것은 우리의 의로 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율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장 21~23절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들어간다고 하시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게 “내게서 떠나가라”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불법을 행하는 자’를 영어 NIV 성경에서는 ‘악을 행하는 자(evildoers)’, 다시 말해 의인과 반대되는 악인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율례와 법도를 행치 않는 사람들이 ‘악을 행한다’, ‘불법을 행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많은 일을 행했다 해도 저들은 당신과 상관없는 악인으로 여기시고, 오직 당신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을 의인이라 인정하십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와 법도를 따르기보다 세인들의 기준과 관점에 동화되어 주위의 악한 환경에 물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짝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약 4장 4절). 우리는 모든 기준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하나님께 의롭고 옳다고 인정받아야 하겠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도를 온전히 따르지 못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을 더욱 온전히 준행하는 의인, 하늘 완성품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옷같이 좀 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 사 51장 7~8절

    의를 아는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실행하는 자들이 의인이라 칭함 받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와 법도대로 준행치 않는 사람들은 악인의 부류에 속해 있습니다. 제아무리 ‘주여, 주여’ 하며 하나님을 열심히 믿노라 하는 사람들이라도 천국은 결코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습니다.

    죄 사함의 약속이 담긴 새 언약의 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선과 악을 올바로 분별해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의인으로서 천국에 이를 수 있도록 율법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의인이 하나도 없는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쳐주실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미 4장 1~2절

    말일에 하나님의 도로 가르침받고 그 길로 행하는 무리가 등장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호세아서에 예언된,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의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악인의 굴레에서 벗어나 의인의 반열에 서도록 ‘사는 길’을 가르치시고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그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그대로 행하는 자들이 구원을 얻기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히 9장 28절). 말일에 오셔서 우리에게 친히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봅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31장 31~34절

    하나님께서 새 언약이라는 하나님의 법 안에서 백성들의 죄악을 사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새 언약은 악인들의 죄를 없이하고 의인으로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마음에 새 언약의 법을 심어놓으셨습니다. 죄인 된 인생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들의 죄를 다 대속해 주셔서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의인으로 변화시켜 주시고자 새 언약의 진리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최후 심판의 기준이 되는 새 언약의 율법

    오늘날 많은 교회가 있고 해변의 모래알같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지만 새 언약의 유월절과 안식일 등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의인이라야 하나님의 도에 행한다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아직 그들은 의인의 반열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시는 때에 악인의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 네 눈에 안정한 처소된 예루살렘이 보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치지 아니할 것이며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곳은 마치 노질하는 배나 큰 배가 통행치 못할 넓은 하수나 강이 둘림 같을 것이라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 그 거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 거하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 사 33장 20~24절

    죄 사함 받는 백성들이 거하는 곳이 시온입니다. 절기 지키는 시온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재판장이시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분이십니다. 법정에서 재판장이 국가에서 제정한 법률을 재판의 기준으로 삼아 판결하듯, 하나님께서도 친히 세우신 새 언약의 율법을 심판의 기준으로 삼으시고 이를 통해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십니다. 의인 되게 하시기 위해 세우신 법도인 새 언약의 규례를 따르지 않은 자들은 악인의 무리로 분류되어 심판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막연히 최후 심판의 날이 있을 것을 알고 그날에 천국 가기를 바라면서도 새 언약의 규례가 아닌 불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 줄 알면서도 의인의 신분을 얻지 못하고 악인의 무리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진리의 도, 새 언약 율법을 준행하고 지키는 자들만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생의 축복과 천국의 유업을 물려받게 될 것이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 9장 15절

    새 언약의 중보이신 ‘그’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세워주신 새 언약을 통해 악인의 세계에서 빼내심을 입고 의인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영원한 기업의 약속, 즉 천국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새 언약의 일꾼이 되자

    우리는 재림 그리스도이신 안상홍님과 하늘 어머니께로부터 새 언약 진리의 도로 가르침받고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고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 받고 죄 사함과 천국 기업을 약속받았습니다. 이는 우리의 지혜나 능력으로 된 일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 어머니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의인의 위치로 바꿔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면 아직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하지 못하고 있는 주위 사람들에게도 이 생명의 길을 알려주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바라고 원하시는 일입니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 3장 6절

    하나님께서는 악의 수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구원받아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어 부지런히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을 가장 복되고 의미 있는 일로 여기셨기에 2천 년 전 예수님께서도 전도하러 이 땅에 오셨고(막 1장 38절), 이 시대 하늘 아버지 어머니께서도 전 세계 자녀들을 새 언약 진리로, 의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 3장 10~13절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은 의인들이 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날에 악인들은 형벌을 받고, 의인들에게는 사망도 눈물도 고통도 없는, 평화와 기쁨이 날마다 새롭게 창조되는 천국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새 언약의 진리를 준행함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와 있는 우리는 얼마나 복 받은 사람들입니까!

    날마다 하나님의 도를 더욱 힘써 행해, 하나님의 의 안에서 살아가는 의인으로서 천국에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또한 전 세계 수많은 인류 인생들이 여전히 악인의 반열에 속해 있으니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기 전에 그들에게도 의를 행할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알려줍시다. 악에서 벗어나 의인의 세계로 돌아오고, 심판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천국 구원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 새 언약의 복음을 부지런히 전합시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비록 어렵고 힘든 일이 있다 해도, 하나님의 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신 엘로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해 새 언약 일꾼의 사명을 다하는 시온 가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비쿠스의 두루미 (Die Kraniche des Ibykus)

    프리드리히 쉴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의 시

    작품소개

    프리드리히 쉴러가 1797년에 쓴 발라드(담시)로, 자신이 발간한 잡지 <문예 연감>에 1798년 처음 발표되었다.
    쉴러의 대표적인 사상시로, 문학의 초자연적인 힘과 그것이 인간에 미치는 효과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이 시는 고대 그리스 코린트 섬의 이스트모스 지역에서 열리는 경연 대회에 참가하러 가는 도중 도둑들에게 살해당한 시인 이비코스의 전설적인 죽음을 다룬다.
    이 사건의 증인은 오로지 두루미 떼뿐으로, 시인은 두루미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복수해 달라고 당부한다.
    이스트모스 경연대회 동안 한 비극에서 분노의 여신들의 노래가 나오는 순간 두루미 떼가 극장 위의 하늘로 날아가자 범인 중 한 명이 무심코 “티모테우스, 저기 봐라, 저기. 이비쿠스의 두루미야”라고 외침으로써 모든 관객들이 순식간에 살인자들을 알아본다는 내용이다.
    두루미들의 기이한 현상에서 살해자들이 스스로를 드러냄으로써 복수는 극장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 시는 문학의 세 가지 기본형태, 즉 서정적, 서사적, 극적인 요소를 모두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2년 황윤석에 의해 처음 번역되었다(탐구당).

    이비커스의 학이여!

    주전 약 五세기에 산 사람인데 이비커스는 유명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고린도에 가까운 촌에 여행을 갔다가 어떤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나 있는 것을 다 빼앗기고 매를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너무 억울해서 죽기 전에 크게 외치기를 마침 그 주위를 빙빙 떠돌고 있던 학을 보고 하는 말이『너 학은 내가 이런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니 내가 죽은 다음에도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 말을 강도가 다 들었습니다.
    그 후 여러 달이 지나도 그 도적을 잡을 길이 없고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고린도의 노천 극장에서 연극을 하게 되어 많은 사람이 모여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학 몇 마리가 공중에 날아와서 빙빙 돌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은 어떤 사람에게 거의 머리에 닿게 날았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앉았던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외치는 말이『아 이비커스의 학이 여기 원수 갚으려고 오누나』하로 말을 했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알아보니 그 사람이 도적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왜 그런 소리를 질렸습니까?
    남이 다 가만있는데 학이 머리 위를 날아가면 어떻습니까?
    죄가 그 사람의 양심 속에서 그 사람의 죄를 찾아내서 그 사람의 양심 속에서 그 사람이 범한 무서운 죄를 대면하게 했습니다.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기라

    시편 7편은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라.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라.
    공의의 하나님께 맡기라.
    악인은 반드시 심판받고, 의인은 보호받는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여러분도 억울한 일을 겪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다윗처럼 하나님께 피하며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반드시 공의로운 심판을 하시고, 여러분을 의롭게 세우실 것입니다.














    9편 / 다윗의 시 / 공의의 하나님을 찬양하라, 피난처인 하나님
    10편 / 악한 사람이 왜 잘 되는가?  악한 사람을 벌하여 주옵소서
    11편 / 다윗의 시 / 여호와는 정의를 행하시며 악인을 벌하신다
    12편 / 다윗의 시 / 거짓말과 아첨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는 하나님
    13편 / 다윗의 시 / 여호와께서 내게 오셔서 은혜를 베푸신다
    14편 / 다윗의 시 /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무신론자들
    15편 / 다윗의 시 / 주의 장막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16편 / 다윗의 덕담 - 여호와는 나를 지킨다. 내게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다



    6월 20일(금) 시편 9-16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겸손한 자의 소원(10:1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You hear, O LORD, the desire of the afflicted; you encourage them, and you listen to their cry

    (새번역) 주님, 주님께서는 불쌍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주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여 주십니다.
    (현대인)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들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들을 격려하시며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공동번역) 야훼여! 당신은 미약한 사람들의 호소를 들으시고 그 마음 든든하게 해주시옵니다. 귀를 기울이시어.
    (개역개정)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새한글성경) 겸손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주님이 들어 주셨습니다, 오, 여호와여, 주님은 굳게 해 주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주의 깊게 들으십니다, 귀 기울여서.

    겸손한 자의 소원이라는 말씀을 여러 번역으로 살펴봅니다.
    새번역 - 불쌍한 사람의 소원
    공동번역 - 미약한 사람들의 호소
    새한글 - 겸손한 사람들이 바라는 것
    개역개정 - 겸손한 자의 소원
    NIV - the desire of the afflicted(고난받는 자의 소원)
    KJV - LORD, thou hast heard the desire of the humble: thou wilt prepare their heart, thou wilt cause thine ear to hear
    NASB - O LORD, You have heard the desire of the humble; You will strengthen their heart, You will incline Your ear

    겸손한 자의 소원(타아와트 아나윔) תַּאֲוַת עֲנָוִים

    겸손한 자(6035) 아나브(ʽânâvעָנָו  

    1. 억압된.  2. 유순한
    발음 [ ʽânâv ]
    어원 / 603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1회 사용
    • 1. 형용사 억압된, 비참한, 시9:13(12), 10:12,17,22:27(26), 25:9, 34:3(2), 37:11,69:33(32), 147:6, 149:4
    • 2. 형용사 유순한, 부드러운, 민12:3.
    • 관련 성경 / 온유한(민12:3).
      [명] 가난한 자(욥 24:4,시 9:12, 사 61:1), 겸손한 자(시 10:17, 사 11:4, 습 2:3), 온유한 자(시 25:9, 69:32, 76:9),
      빈곤한 자(잠 14:21), 가련한 자(사 32:7).



    소원(8378) 타아바(taʼăvâhתַּאֲוָה

    1. 갈망.   2. 시 10:17.  3. 시112:10
    발음 [ taʼăvâh ]
    어원 / 18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0회 사용
    • 1.명사, 여성 갈망, 소원.
      • a. 명사, 여성 [선한 자의] 시10:17, 21:3(2).
      • b. 명사, 여성 [악한 자의] 시112:10
    • 2. 명사, 여성 [나쁜 의미로] 정욕, 탐욕, 민11:4,34,35 시78:29,30.
    • 관련 성경  /  탐욕(민11:4), 별미(욥33:20), 욕심(시10:3, 잠18:1), 소원(시10:17, 잠13:19), 사모함(잠19:22, 사26:8), 탐하기(잠21:26), 원하는 것(잠10:24).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 시인은 본 시를 확신으로 마무리 짓고자 한한다.
    여기서 '겸손한 자'는 9절의 '가련한 자'와 원문상으로 같은 단어 '아니'이다.
    이 표현과 함께 본 시에 언급되는 '가련한 자'(2, 9절), '외로운 자'(10, 14절), '가난한 자'(12절), '압박당하는 자'(18절) 등은 궁극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의인에 대한 동의어이다.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 '예비하시며'(쿤)는 본 문맥에서 '확고하게 하다', '견고하게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의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만드셨다는 말로서(51:12;112:7, Lange) 악한 자가 사라졌으므로 겸손한 자는 아무런 두려움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는 뜻을 암시해 준다(Calvin).

    겸손한 자

    욥기 22:29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

    시편 10:1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시편 22: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찌어다.

    시편 147:6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시편 149:4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잠언 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잠언 11:2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16:19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사야 11: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이사야 29:19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사야 57:15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아모스 2:7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스바냐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야고보서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베드로전서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골로새서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

    빌립보서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한 자의 소원(the desire of the afflicted)
    고통받는 자의 요구

      우리는 "내가 최고다"라는 사상과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해 줄 것인가"라는 사상으로 가득찬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자기 피알(PR)의 시대'여서 기회만 있으면 사람들에게 자기를 알리고 자기능력과 자기 스팩을 자랑해서 주목을 받고 싶어합니다. 문제는 이런 강박관념에 빠지면 과장을 하게 되고 허위와 허풍과 거짓을 일삼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경우는 큰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고 세상으로부터 주목받아보고자하는 유혹에 빠지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겸손은 성장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이 시대에는 필요치 않는 성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한 경쟁력시대에도 겸손은 변함없는 가치를 가진 성품이며 축복받을 성품입니다.

    제임스 콜린스의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위대한 조직을 바꿔놓고 가장 큰 공헌을 한 영향력 있는 리더의 특성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극도의 겸손이다." 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찾아와 "신앙생활에 있어서 첫째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그는 "겸손이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둘째는요?"했더니 "겸손이오" "그러면 셋째는 무엇입니까?" 그는 다시 "겸손이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최고의 인물로 만드는 것은 겸손입니다. 

    알프스산맥의 눈 녹은 물로 만들어진 생수의 대명사인 에비앙(Evian)이란 생수가 있습니다. 이 회사의 슬로건은 "에비앙, 당신이 마시는 물은 당신이 숨 쉬는 공기만큼이나 중요합니다"이라고 합니다. 세계 최고의 품질의 생수를 추구하는 에비앙은 공기 없이 살수 없듯이 최고의 물 없이는 살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명성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공기, 좋은 물이 사람의 생존에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겸손은 성도와 교회의 생존에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그 성도와 교회는 건강하지 못하며 결국은 영적인 사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천사를 마귀로 만든 것은 교만이며 인간을 천사로 만드는 것은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겸손한 성품은 우리가 늘 관심을 가지고 살펴야 할 덕목입니다. 조금만 무관심하고 버려두면 교만이라는 잡초가 무성히 자라서 겸손을 덮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않다고 벌금을 내거나 감옥에 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겸손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겪게 되고, 잃게 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겸손하지 못할 때 사람은 자아에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저 사소한 기분 나쁜 일에도 나가떨어지게 되고 '스스로 나는 무시를 당했다. 내가 한 일에 인정을 받지 못했다. 나는 경솔히 취급을 받고 있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 '날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되면 오히려 자신의 권위가 회복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겸손은 예수님의 마음이요(마 11:29). 겸손은 사랑의 속성이고(고전 13:4). 겸손은 성령받은 인격의 열매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상받을 만한 아름다운 성도의 자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고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은 겸손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으로 자란 사람은 당연히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많이 받을 수록, 성령이 충만하면 충만할수록 자연히 겸손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겸손해질수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더욱주시고 성령충만을 더욱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오늘 읽은 본문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시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하였습니다. 그리고 베전 5:5 ".....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겸손의 옷을 입혀야 합니다.

    1. 겸손한 사람은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까?

    1)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겸손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예수님의 사람, 성령의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겸손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순종하는 자들은 겸손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알면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면 겸손해집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을 주님의 발 앞에 무릎꿇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자는 저절로 낮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겸손한 자는 언제나 하나님을 그 안내자로 삼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드지 자신의 힘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미국 흑인들의 애환을 그린 '뿌리'의 작가 알렉스 해일리(Alex Haley)는 자신의 사무실에 이상한 그림을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거북이가 높은 담장의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그림입니다. 사람들이 질문을 합니다. "왜 이상한 그림을 걸어 놓았소?" 해일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난 내가 쓴 작품을 볼 때 '어떻게 이런 위대한 글을 쓸 수 있었는가, 어디서 이런 영감을 얻을 수가 있었는가' 생각하며 스스로 교만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저 그림을 보고 생각합니다.'저 거북이가 제 힘으로 스스로 저 높은 담장에 올라갈 수 있었을까? 누군가의 도움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함으로써 스스로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2) 겸손의 사람은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습니다. 

    겸손한 사람의 특징은 무슨 일이 있으면 먼저 자기 자신을 봅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습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자신을 아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향기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문제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알고 누구에게든지 항상 배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약점을 알지 못하고서 누구든지 가르치려고만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귀가 열린 사람이요. 교만한 사람은 입이 열린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무례하기 짝이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먼저 사과하고 손을 내미는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먼저 미안하다,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무릎 꿇지 않습니다. 용서를 빌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의 눈은 말라있습니다. 회개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항상 마음이 아픕니다. 다 자기가 잘못해서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3) 겸손한 사람는 자만심을 버리며, 자화자찬이나 자랑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을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겸손한 사람이 아닙니다. 겸손을 자랑하는 것이니까요.
    누가 프란체스코를 향하여 "어떻게 그렇게 위대한 일을 하셨습니까? 라고 물으면 그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주께서 이 땅에서 가장 약하고 비천한 사람을 찾으시다가 나를 발견하신 모양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자기가 보잘 것 없기 때문에 자랑하지 못할 테니까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도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외로운 자는 겸손한 자의 다른 모습을 표현해주는 것입니다.  
    주여 나는 외로운 자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외로운 자입니다. 하는 이런 고백이 우리에게 살아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이런 탄식과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그리고 겸손한 자를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서 "벌써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십니다.

    우리는 다 눈이 높아졌습니다. 권력을 가진자가 되어버렸습니다. 학벌도 좋아졌습니다. 살만해졌습니다. 자만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화자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눈으로 그런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니 점점 상처받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2. 겸손을 가장한 마귀의 궤계를 분별해야 합니다.

       악한 세력인 마귀는 언제나 궤계를 씁니다. 본질을 숨기고 포장을 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합니다. 겸손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골 2:18에 보면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어 과장한다"고 했습니다. 꾸며낸 겸손은 거짓 겸손이며 억지 겸손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어 과장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열등의식과 열등감을 겸손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열등의식은 어쩌면 교만보다 더 무서운 마음의 병인 것입니다. 이것은 사단의 궤계입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으면 모든 것을 향하여 닫혀진 마음이기 때문에 같은 말도 왜곡해서 듣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을 하고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늘 당당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에서 하나님을 향한 겸손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보상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17절)  하나님은 겸손을 좋아하시며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잠 15:3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존귀를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벧전 5:5절 ".....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잠 29:23절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명예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사 29:19절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기쁨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잠 22:4절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재물과 영광과 생명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시 149:4절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까?
    행복한 교회, 행복한 가정,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까? 내 자신이 겸손한 사람이 되면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겸손한 자에게 영권을 주십니다. 겸손한 자와 함께하셔서 그와 함께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귀히 쓰십니다. '겸손의 그릇이 클수록 사랑을 많이 받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겸손함으로 살면 모든 일을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낮아지는 만큼 하나님께서 낮아짐을 도구로 하나님의 위로부터 주시는 능력을 채우셔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좀 더 낮아집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더 깊이 체험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며 겸손한 자의 예배를 받으시며 겸손한 자의 봉헌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도의 어떤 다른 형식은 인간에게는 매력적인 것이 될지 모르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영향력을 지니지 못합니다. 사람은 장엄하고 멋진 기도, 화려하고 웅장한 기도 크고 많은 봉헌등을 먼저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한 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높으신 하나님의 귀를 기울이게 하십니다. 겸손한 자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오늘 우리 하나 하나의 예배와 기도가 겸손한 예배가 되고 겸한 자의 기도가 되고 소원이 이루어지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겸손한 자의 소원(시 10:1-18)

    시편을 읽노라면 그 저자가 밝혀져 있지 않은 것이 더러 있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 내용상으로 보아서 시편 9편과 비슷한 것을 너무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시편 9편을 쓴 다윗의 작품으로 보는 데에 의견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어려운 처지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는 아무리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가 의지하는 하나님을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고 어려움이 심하면 심할수록 하나님을 안타깝게 찾습니다.

    이 시인은 환난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과 그의 은총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극심하다 보니까 하나님이 멀리 계시고 그의 자녀가 환난을 당하는데 하나님 숨으시는 것같이 느껴져서 부르짖는 말입니다. 마가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다가 갑자기 폭풍을 만나 아무리 자기들의 기술로 배를 저어 나아가려 해도 도저히 되지 아니하고 물결이 넘쳐 들고 자기들의 힘의 한계를 느낄 때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보시지 않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지만 어려움이 심해질 때, 정말 견디기 어려울 때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신 것 같고 숨으시는 것 같은 착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해할 수는 있는 일입니다. 더구나 우리를 괴롭히는 악인은 교만하고 의기양양해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도전하여 옵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멸시합니다.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가득하며 그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습니다. 전에 블레셋 사람이 골리앗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도전해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이 이런 일을 당할 때 그 의분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하여 싸우러 나아가 이긴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어려운 일에 직면하게 되면 11절 말씀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하며 실망하기가 쉽습니다.

    다윗에게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12절)

    그리고 그에게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14절에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7절에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10절에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신앙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이전에 이렇게 축복하셨으니까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축복하시리라는 것을 믿고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확신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신앙은 고상한 신앙이고 성숙한 신앙입니다.

    의심스러운 마음에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실만을 생각하고 당황하지마는 믿는 사람의 마음에는 이보다 더 보이지 않는 일도 과거에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며 담대하게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과거에 경험했기 때문에 기대할 수가 있으며 기대하고 있는 것을 이미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받지 못한 자비를 위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받지 못한 자비를 위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은 믿음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허망한 꿈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망상이 아니요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셨기 때문에 비록 지금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다고 해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지켜 주시며 캄캄한 골짜기에서도 우리의 일생동안 주님의 은혜와 자비가 우리를 따르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의 소망이 부끄럽게 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아니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찌할 바 몰라 할 때 우리의 도움이 되십니다. 주님은 선하신 분이시므로 앞으로도 선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성도들의 발을 지켜 실족치 않게 할 것이며 우리는 기쁨으로 그의 성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우리에게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궁핍한 사람은 그냥 있을 것이 아니라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간청해야 합니다. 기도가 이렇게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하는 사람에게 축복으로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은 허무한 일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힘이요, 위로요, 생명이십니다.

    여기 오늘 본문에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다”고 하였습니다. 기도의 어떤 다른 형식은 인간에게는 매력적인 것이 될지 모르나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영향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그 소원을 아뢰는 것은 하나님이 들어주십니다.

    시편 145:19절에도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라고 하였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높으신 하나님의 귀를 기울이시게 합니다.

    여기 “겸손한 자의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소원이란 말로 표현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너무 마음이 슬픈 경우도 있을 것이며 감정에 북받쳐서 말을 하지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표현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 듣기에 매우 아름다운 표현의 기도를 합니다. 사실 이런 기도들은 너무 장엄한 것이 되어서 이런 겉치레는 하늘에서 용인되지 아니합니다. 인간의 갈채를 받기 위한 기도는 결코 하늘 문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는 인간에게 하는 기도하므로 그들이 받게 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유창한 말로보다는 조용한 침묵 가운데서 보다 많은 기도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소리가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귀는 깨어 있으므로 사람 듣기에는 적당한 표현이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들으십니다. 침묵 속의 참된 기도는 하나님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의 소원과 꿈이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얻는 것은 조그마한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겸손하고자 하는데 교만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기를 원하는데 불신앙에 설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주님을 섬기려 하는데 미지근합니다.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는데 허물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기도를 드리기 원하는데 하고 나면 불완전하고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기도를 드린 적이 많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여러분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간절한 소원 말입니다. 이 소원을 주님께 가져가세요. 새찬송가 539장입니다.

    1.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 짐 내려놓고 주 십자가 사랑을 믿어 죄사함을 너 받으라

    2. 주 예수의 은혜를 입어 네 슬픔이 없어지리 네 이웃을 늘 사랑하여 너 받은 것 거저주라

    3. 주 예수를 친구로 삼아 늘 네 옆에 모시어라 그 영원한 생명샘 물에 너 마른 목 축이어라

    4. 너 주님과 사귀어 살면 새 생명이 넘치리라 주 예수를 찾는이 앞에 참 밝은 빛 비추어라

    후렴)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

    다윗은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하였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채워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에도 “네 소원이 무엇이냐? 네 소원대로 되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꼭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모든 기도가 상달되리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겸손한 탄식과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것으로 넘치게 채워 주시는 것을 보시고 놀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주시는 하늘의 양식으로 살쪄 놀라운 성장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신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교만한 자의 소원을 듣지 아니하십니다. 겸손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늘나라 가는 길에 있어서 굴복의 계곡보다 더 아름다운 곳은 없습니다.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은 꽃과 새들 사이에 거하며 목동들과 같이 노래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교만은 율법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율법을 행했으니’하면서 하나님께 대하여 교만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은 복음에서 나오는 자세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으므로 누구든지 그를 믿을 때 구원함을 얻는 것을 믿고 두 손 들고 앞에 와, 의가 없이, 공로 없이, 그저 십자가를 붙드는 자세입니다.

    누가복음 18:9-14절의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예수님은 비유로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바리새인의 기도는 교만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는 겸손한 기도였습니다. 교만한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이 듣지 아니하시고 겸손한 세리의 자복하는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5-8절 말씀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했습니다. 예수님도 자기를 비어서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주님도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겸손한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같이하셔서 그 마음을 소성케 하십니다. 우리가 구약을 읽으면 위대한 인물이 누구일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 모세일 것입니다. 신약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누구일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마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그는 겸손했습니다.

    자기는 그렇게 많은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죄인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자신의 부족과 허물을 깨닫게 되고 죄인시하게 되고 자연히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해질수록 큰 은혜를 받습니다. 낮은 골짜기엔 이슬이 많이 내립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산꼭대기 높은 곳에는 이슬이 내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십니다. 교만한 자의 기도는 물리치십니다.

    유명한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에 가서 설교사로 일하는데 병원을 처음으로 지을 때 손수 일을 하면서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흑인 청년 하나가 우두커니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슈바이처 박사가 청년더러 “여보시오 청년, 그렇게 서 있을게 아니라 나와 같이 일을 하면 어떻겠어요?” 그때 이 흑인 청년이 “나는 그런 일은 안합니다. 나는 공부한 사람인데 그런 일은 안합니다. 그런 일은 공부 안한 사람이나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슈바이처 박사가 “청년, 나도 학생시절에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그러나 공부를 많이 한 다음에는 아무 일이나 다해요.” 했다고 합니다.

    단테의 ‘신곡’ 가운데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연옥에 가서 구경을 하다가 한 구석에 여러 사람들이 등에 무거운 돌을 가득히 지고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물어 보았습니다. “아니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무거운 돌을 지고 서 있습니까?” 그때 대답이 “저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에 너무 교만해서 허리를 한 번도 굽혀 본적이 없어요. 그런데 낙원에 올라가는 문을 낮아서 허리를 굽혀야 하기 때문에 그 연습을 하느라고 저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마 낙원에 가기 전에 허리 굽히는 물리치료를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세상에 있을 때 미리 허리 굽히는 것을 배웠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미워하십니다. 물리치십니다.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십니다.

    우리 자신이 부족해서 소원하는 바를 모를지라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알고 계십니다. 엘리 선지는 한나의 소원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술에 취한 여자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겸손한 소원을 아시고 들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는 이 시간 우리의 소원을 읽고 계십니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혹 어떤 분은 마음속의 감정을 말하기 원치 않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비밀을 말하기에는 너무 가슴 아픈 일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듣고 계십니다.

    이 시간 우리의 소원이 마음에 가득해서 터질 것만 같고 영혼이 흐느껴 몸부림치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저들이 요구하기 전에 내가 응할 것이며, 그들이 말하기 전에 내가 듣겠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기도 가운데 심은 그대로 때가 이르면 축복의 수확을 거둘 때가 반드시 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이 여호와를 만날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이게 기도하도록 하시는 성령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거역하지 말고 이 말씀에 용기를 얻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을 준비케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소원이야말로 기도의 생명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전심으로 주님을 찾아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받겠다고 기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강한 소원으로 마음에 예비되어야 합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간절한 소원, 안타까운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음악가들이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그들은 악기의 줄을 점검하고 소리의 절대음에 맞춥니다. 이것은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악기의 음을 들어보기 전에는 아무런 음악도 연주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맞도록 예비해야 합니다. 악기를 조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을 예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소극적인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는 다 제거시켜 버려야 합니다. 세상 생각의 파리 떼들을 다 몰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바를 깊이 생각케 하는 것으로 예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에 따라 기도하면 틀림없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대로 제게 이루어 주십시오”하고 기도해 보세요. 이런 강한 믿음과 거룩한 인내와 큰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께 우리 마음에 응답 받도록 예비하시는데 우리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인도하시는 것은 반드시 기도의 응답을 받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주님께 외치도록 움직이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그는 우리 영혼의 가장 가냘픈 한탄을 들으시려고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믿으세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주님의 발 앞에 던집시다. 우리를 위해서 당하신 주님의 상처를 바라보십니다. 이 상처들이 우리를 주님 앞으로 나와서 믿고 그의 사랑스러운 발 밑에서 쉬게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원을 들으시고 축복하십니다.

    여러분, 감당키 어려운 일을 당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멀리 계시고 하나님이 숨으신 것같이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악한 자가 승리한 것처럼 생각되어 위축되거나 좌절되지는 아니합니까?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고 나를 영영히 돌보시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찾으십시다. 주님께 부르짖읍시다. “환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겠고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하신 약속을 내놓고 호소하십시다.

    “하나님, 일어나소서, 하나님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세요. 이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십니다. 오늘 우리 하나 하나의 기도가 겸손한 기도가 되고 소원이 이루어지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1편 / 의인의 복(1절)
    2편 / 하나님의 통치(12절)
    3편 / 환난 중의 기도(3절)
    4편 / 저녁 기도(8절)
    5편 / 아침 기도(4절)
    6편 / 고난 중의 기도(2절)
    7편 / 무죄를 호소하는 기도(8절)
    8편 /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9절)


    6월 19일(목) 시편 1-8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복 있는 사람(에쉐르)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인의 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Blessed is the man who does not walk in the counsel of the wicked or stand in the way of sinners or sit in the seat of mockers.


    복 있는 사람(아쉬레 하이쉬) אַשְׁרֵי־הָאִישׁ

    835. 에쉐르 [ ’esher] אֶשֶׁר
           

    1. 행복.   2. 시 1:1.  3. 2:12
    발음 [ ’esher ]
    어원  / 83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0회 사용
    • 1. 명사, 남성 행복, 시1:1, 2:12, 32:1, 2, 33:12.
    • 관련 성경  /  행복한 사람(신 33:29).
      [동] 복되다(왕상 10:8, 대하 9:7, 잠 28:14), 복이 있다(시 40:4, 단 12:12).

    1288. 바라크(bârak) בָּרַךְ   

    1. 무릎을 꿇다.  2. 하나님께 기원하다. 3. 피엘형 בֵּרֵךְ
    발음 [ bârak ]
    구약 성경 / 256회 사용
    관련 성경 / 문안하다(삼상13:10), 무릎을 꿇다(대하6:13, 시95:6), 찬송하다(창9:26, 왕상1:48, 시113:2), 복을 받다(창24:31, 삼하2:5, 시72:17), 축복하다(창27:33, 민23:11, 왕상8: 66), 칭찬하다(삼상25:33), 복이 있다(삼상25:33, 룻2:19,20), 찬양하다(삼하18:28, 왕상5:7, 시106:48), 송축하다(왕상8:15, 스7: 27), 복되다(출20:11, 잠5:18), 복을 주다(사19:25, 출20:24, 신15:6), 복을 얻다(창12:3, 시128:4), 복을 내리다(출23:25, 신28:8), 은혜를 베풀다(신7:13), 저주하다(왕상21:10,13), 욕되게 하다(욥1:5), 복을 빌다(욥31:20), 자랑하다(시10:3), 욕하다(욥2:9), 풍부히 주다(신14:24), 축사하다(삼상9:13), 인사하다(왕하4:29), 축하하다(시49:18), 꿇리다(창24:11),[명] 찬송(신33:20, 시135:21, 욥1:21), 복된자(사65:23), 축복(민23:20), 복(대상4:10), 안부(왕하10:15).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신명기 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Blessed are you, O Israel! Who is like you, a people saved by the LORD ? He is your shield and helper and your glorious sword. Your enemies will cower before you, and you will trample down their high places.

    마태복음 5:3-10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μακάριος, ία, ιον 스트롱번호 3107

    1. 복된.  2. 행 26:2. 3. 마 5:3
    발음 [ makariŏs ]
    관련 성경  /  복 있는(마5:3, 눅6:21, 고전7:40), 복된(눅14:15, 딤전6:15), 복이 되는(눅14:14), 복스러운(딛2:13), 다행한(행26:2), 복 받을(약1:25).

    창세기 2:3
    하나님이 일곱째 복(바라크. 1288)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안식하셨음이더라.

    1288. 바라크( bârak) בָּרַךְ      

    1. 무릎을 꿇다.  2. 하나님께 기원하다. 3. 피엘형 בֵּרֵךְ
    발음 [ bârak ]
    구약 성경 / 256회 사용


    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새번역,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엔 크리스토)
    - 혹자는 본문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J.A. Allan). 그러나 본서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배제할 수가없다(2:6, Lincoln).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짐을 시사한다(Bruce).

    하늘에 속한(*, 엔 토이스 에푸라니오이스)
    - 본문과 같은 전치사구가 본서에서는 다섯번 나타난다(3, 20절;2:6;3:10;6:12).이것은 본절의 '신령한'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Foulkes, Bruce).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늘의 영역과 연결시키는 구원의 축복이다. 그러나 이 축복은 미래에 맛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속하는 축복이다(Lincoln).

    신령한 복으로(*, 엔 율로기아 프뉴마티케)
    - 여기서 '신령한 복'은 성령시 현존으로 이루어진 결과를 가리킨다(5:19; 골1:9;3:16). 이 복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지상적이며 육적인 축복이 아니라 천상적이며 영적인 복이다(Foulkes, Lincoln, Bruce).







    376. 이쉬

    אִישׁ 스트롱번호376
    1.

    사람.

    2.

    남자

    3.

    남편

    발음 [ ’Îysh ]
    어원
    605에서 유래
    구약 성경
    2179회 사용
    관련 성경 /  남자(창2:23, 신22:22, 렘44:7), 사람(창4: 23, 삼상20:15, 겔9:2), 남편(창3:6, 신25:11, 삼상25:19), 농사(창9:20), 임자(창38:25, 출 22:14), 청지기(창43:19), 각 사람(창49:28), 양쪽(출18:16), 백성(출33:10, 삼하16:15), 아무(출34:3, 레21:9, 시49:7), 쌍방(신1:16), 노인(신32:25, 삼하19:17), 명(수7:3, 삿1:4), 하나(삼하16:5, 왕상18:40), 인생(욥12:10, 시4: 2, 렘52:7), 시체(왕하13:21). [부] 서로(창11: 3), 피차(창31:49), 아무든지(출16:19), 무릇 (출30:33, 레21:17), 균등하게(레7:10), 누구든지(레13:40, 17:3, 신22:13).

    * 605 아나쉬(’ânash) אָנַשׁ

    1. 병든.  2. 렘 15:18. 3. 사 17:11.
    발음 [ ’ânash ]
    구약 성경  /  8회 사용
    관련 성경  /  상처를 입다(욥 34:6), 낫지 아니하다(렘 15:18), 부패하다(렘 17:9), 고칠 수 없다(렘 30:12, 미 1:9), 앓다(삼하 12:15).
    [명] 재앙(렘 17:16).




    󰃨 복 있는 사람
    - 시편은 이처럼 서두(序頭)를 '복'이라는 말로써 시작한다. 히브리어 '아쉬레이 하이쉬'(*)는 직역하면 '그 사람의 복이여'이다.
    즉, '아쉬레이'는 '올바르다', '번영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아솨르'(*)에서 유래된 복수 명사의 연개형인데, 여기에서는 감탄사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히브리어에서는 어떤 명사가 뒤따르는 단어와 의미상 소유격 관계에 놓일 때 앞의 명사를 연계형으로 만들어 '...의'로 해석한다. 한편 구약 성경에서 '븍'이란 뜻을 가진 단어로는 '바라크'(*)와 '아솨르'(*)가 있다. 먼저 '바라크'는 파생어까지 포함하여 415회 정도 나오는데 주로 하나님이 누군가를 축복할 때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었거나(창 1:22;2:3;12:2; 17:16;22:17; 25:11;35:9;민 6:27;대상 13:14;말 3:10), 신적 권위를 가진 대리인에 의한 축복선포 때 사용되었다(창 27:4;47:9;출 39:43;신 1:11;삼화 19:39). 이 단어는 또한 복을 간구하거나 축원할 때에도 사용되었다(3:8;왕상 1:47;잠 3:33). 이처럼 '바라크'는 하나님의 축복을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로 인간의 선행과 관계없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큰 긍휼과 자비를 인하여 인간의 산업과 후손과 육체에 내려주시는 복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단어의 또 다른 특징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한편, 70인역에서는 이 '바라크'를 '율로기아'(*)로 번역하고 있다. 다음으로 '아솨르'는 거의 복수 연계형인 '아쉬례이'(*)로 사용되었는뎨 구약에 총 44회 중 시편에 26회, 잠언에 8회가 나오고, 유기와 전도서에서는 각각 1회씩 나온다(욥 5:17;전 10:17). 이 단어는신 33:29에서 맨 처음 나오는데 성문서 외에는 왕상 10:8;대하 9:7;사 30:18;32:20;56:2;단 12:12에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아솨르'는 대개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안에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 대한 보상으로 내리는 복에 대하여 인간이 고백 혹은 기원하는 형식으로 사용되었다(Weiser). 한편, 70인역에서는 이 단어가 '마카리오스'(*)로 번역되었다. 이 '마카리오스'의 독특한 특징은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를 통해 오는 특이한 즐거움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는 점이다(Kittle). 따라서 구약 지혜 문학의 첫 권인 시편의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말씀, 즉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자의 복에 대한 선언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의 복을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있다. 다음으로 '사람'의 히브리어 '이쉬'(*)는 원래 남성을 뜻하는 단어이다(창 2:23). 그러나 여기에서는 모든 인간을 가리키고 있는 바, 여성도 축복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Luther). 특히 사람이란 단어는 그 앞에 정관사 '하'(*, the)가 붙은 단수인 반면 복이란 단어는 복수임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이에는 누구든지 야훼의 율법에 따라 사는 그 사람만이 여러 형태의 복을 누릴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복을 기원하는 큰 탄성으로 시편이라는 대단원의 막을 열면서 그러한 복을 누릴 사람의 삶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악인의 죄를 좇지 아니하며
    - '악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사'(*)는 '유죄한 자', 곧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Kraus, Twot).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입증된 자를 말한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 대신에 자신의 삶의 원리가 있다. 이것이 바로 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차'(*)이다. 이 말은 의도, 도모 등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 없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 '죄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타임'(*)은 표적을 빗나가거나 또는 길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의 '하타'(*)에서 파생된 말로서 하나님의 율법에서 빗나간 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의 길(율법)을 가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간다.

    오만(傲慢)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만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침'(*)은 '조롱하다', '비웃다'는 뜻의 동사 '루츠'(*)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조롱하는자'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악한 말로 조롱하는 자를 의미한다(Kraus). 이들이 조롱하는 말들은 73:8-11;사 28:15;말 3:14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세 동사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즉, '좇다'(*, 할라크), '서다'(*, 아마드), '앉다'(*, 야솨브)는 말들은 죄의 점진적인 과정을 시사해 주고 있다(Weiser). 다시 말해서 죄의 성질이 점점 더 악화됨을 이 용어들의 배열을 통해 알 수 있다.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It is as if the dew of Hermon were falling on Mount Zion. For there the LORD bestows his blessing, even life forevermore.

    복(1293) 베라카(Berâkâh) בְּרָכָה   

    1. 축복.  2. 앞날에 대한 예언적 축복.  3. 번영의 결과로서의 복
    발음 [ Berâkâh ]
    어원 / 128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9회 사용
    관련 성경  /  복(창12:2, 신11:26, 말3:10), 축복(창27:41, 신11:29, 슥8:13), 예물(창33:11, 사36:16), 송축(느9:5).

    󰃨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케탈 헤레몬 쉐이레드 알 하르레 치온) - 직역하면 '시온 산들 위에 내린 헐몬의 이슬같이'이다. 직역을 보아 알 수 있듯이 본문의 초점은 '이슬'에 있다. 저자는 형제적 화합의 축복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이슬로부터 그 이미지를 빌리고 있다. 본 이미지가 강조하는 바는 이슬의 새롭게 만드는 특성이나 부드럽게 스며들어 풍요롭게 만드는 어떤 영향력뿐만 아니라, 높고 고상한 산 헐몬 위에 내리는 동일한 이슬이 낮고 작은 시온에도 내린다는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는 바, 형제적 화합이다(헐몬 산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즉, 사회적 신분 등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모든 형제 공동체 일원은 동일한 활력을 마시게 된다는 사실을 본 이미지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Kidner, Perowne). 아울러 본 비유는, 시온이 비록 외관상으로는 낮고 보잘것 없게 보이나 특별히 성별(聖別)된 곳이라는 점에서 다른 어떤 곳보다 귀하고 복되다는 사실도 암시한다.

    󰃨 거기서 - 시온에서 형제 화합의 축복된 열매를 볼 수 있는데, 그 까닭은 여호와 하나님께 그곳을 모든 축복과 모든 생명의 중심지로 정하셨기 때문이다





    복 있는 사람(복 받을 사람) 에쉐르

    이 시는 시편의 서론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시편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시편 기자의 관심사는 우리에게 축복받는 길을 가르치는 데, 그리고 죄인들이 반드시 멸망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하고자 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첫번째 시편의 주제이며, 어떤 측면에서 시편 전체는 바로 이 내용을 신성한 교훈으로서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한다 하겠다.

    구성

    이 시는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3절 경건한 자가 축복을 받는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 그의 과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여호와께로부터 어떤 축복을 받는지 등을 설명한다.

    4-6절 불경건한 자의 상태와 특성을 대조해 보이며, 그 장래를 계시하고, 또한 그의 궁극적 운명을 강한 어투로 묘사한다.

    [강 해]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1절. “복 있는.” 우리 주님의 유명한 산상수훈처럼, 시편 역시 축복으로 시작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복 있는”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으며, 그것이 형용사인지 아니면 명사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많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에게 주어질 축복의 다양성 및 그가 누릴 축복의 온전함과 위대함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그 내용을 읽고서 “오, 그 놀라운 축복들!”이라고 감탄하게 되며, 그것을 (에인즈워스가 그렇게 하듯이) 은혜받은 사람이 받을 놀라운 축복에 대한 즐거운 탄성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동일한 축복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기원한다!

    다윗은 은혜받은 사람에 대해 소극적인 표현(1절)과 적극적인 표현(2절)으로 묘사한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그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는 사람이다. 그는 더 지혜로운 조언을 받아들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행한다. 그에게 있어 경건의 길이란 평안과 즐거움의 길이다. 그의 걸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시를 받으며, 육욕적인 사람들의 교활하고 악한 계략을 따르지 않는다. 우리의 외적인 삶이 변화되고 불경건한 행동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내적인 은혜를 풍성하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그는 예전에 비해, 더욱 선별된 사람들과 더불어 동행한다. 비록 그 자신이 죄인이긴 하지만, 이제 그는 보혈로 씻음을 받은 죄인이며, 성령에 의해 소생함을 받았고, 또한 그 심령이 새로워졌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의인의 회중 가운데 서 있는 그는 악을 행하는 무리들과 감히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그는 금욕주의자들의 냉소 안에서 아무런 안식도 발견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죄와 영생, 지옥과 천국,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 등에 대해 비웃는다. 하지만 그는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철학을 배웠고,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는 까닭에 그분의 이름이 모독받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오만한 자의 자리는 매우 높아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지옥의 문에 아주 가깝다. 거기로부터 달아나자. 왜냐하면 그곳은 이내 공허해질 것이며, 멸망이 거기 앉는 사람을 삼킬 것이기 때문이다. 1절에서 사용된 점층법에 유의해 보라.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죄 가운데서 살아갈 때 그들은 점점 더 나쁜 길로 들어서게 된다.

    처음에는 단지 부주의하고 악한 자, 곧 하나님을 망각한 자의 꾀를 ‘좇는다’-그 죄악이 상습적이라기보다는 실리적이다. 하지만 후에 그들은 상습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게 되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의도적으로 어기는 죄인의 길에 ‘서게’ 된다. 또한 이를 그대로 방치하면, 그들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스스로 유해한 선생 혹은 다른 이들을 유혹하는 자들이 되며, 그리하여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된다. 그들은 죄악 가운데서 학위를 취득하고, 파멸 박사로 임명되며, 다른 이들에 의해 악마의 권위자로 높임을 받는다.

    반면에 복 있는 사람, 곧 하나님의 모든 축복들을 소유한 사람은 그러한 인물들과 더불어 아무런 교제도 나눌 수 없다. 그는 이 문둥병자들로부터 자신을 순결하게 지킨다. 그는 마치 더러워진 의복을 벗어 버리듯이, 자신에게서 악한 것들을 제거한다. 그는 악한 자들에게서 이탈하여 동지도 없이 홀로 걸어가며, 그리스도께 대한 비난을 스스로 짊어진다. 죄인들로부터 그처럼 격리된 자에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임하겠는가!

    이제 복 있는 자의 적극적인 특성에 대해 알아보자.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는 저주와 정죄의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 ‘안’에 있으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삼아 그 안에 있기를 기뻐한다. 더욱이, 그는 ‘날마다’ 그것을 읽고 ‘밤마다’ 그것을 묵상하기를 즐거워한다. 그는 성경 말씀을 취하여 하루 종일 지니고 다니며, 잠 못 이루는 밤에는 그 말씀을 곰곰이 묵상한다. 형통한 날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 중 시편을 노래하며, 역경의 밤에는 성경의 약속들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여호와의 율법”은 진실한 신자에게 매일의 양식이다.

    하지만 다윗 당시에는 영감을 받아 기록한 성경이 모세 오경 외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66권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우리 모두가 성경을 베뢰아인들처럼 열심히 탐구하고 있는가? 우리들 중 이 시에 제시된 축복을 누리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가? 아마도 우리 중에는, 악한 자의 길로 걷지 않고 있다는 식의 소극적 차원의 정결함을 주장할 수 있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묻고자 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가?” “여러분은 그것을 자신의 든든한 오른손으로 삼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최고의 동반자로, 그리고 훌륭한 안내자로 삼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축복은 여러분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3절. “저는……심은 나무가.” 그는 야생 나무가 아니라 “심은 나무”와 같다. 그것은 선택된, 소유물로 간주된, 재배된, 그리고 마지막에 끔찍스럽게 뽑히는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받은 나무이다. 왜냐하면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마 15:13)이기 때문이다.

    “시냇가에.”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시냇가”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원문에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역자 주). 만일 한 시내가 마르면, 다른 시내가 물을 공급한다. 용서의 시내와 은혜의 시내, 약속의 시내와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시내 등이 결코 마르지 않고 물을 공급해 준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것과 같다. 제 맛을 내지 못하는 때 이른 무화과처럼 시기 적절하지 못한 은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기뻐하는 자는 그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 고난의 때에 인내하고, 시련의 날에 믿음을 굳게 잡으며, 또한 번영의 시기에 거룩한 기쁨을 나타낸다. 풍성함은 은혜로운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본질적 특성이며, 그 풍성함은 시기 적절해야 한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가장 나지막하게 한 말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그가 베푼 자그마한 사랑도 역시 기억될 것이다. 그의 열매만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잎사귀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이나 풍성함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와 같은 약속을 지닌 사람은 복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자신의 시각으로 어떤 약속의 성취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의 연약한 감각으로 판단함으로써 “이 모든 일들이 나를 대적한다”고 말한 야곱처럼, 고통스러운 결론에 이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은 비록 우리가 약속에 대해 관심을 갖고는 있지만, 지치고 곤고하여 그 약속에 예고된 것과는 정반대의 시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에야 확실해지며, 믿음을 통해 우리는 모든 것이 자신을 대적하는 듯하여도 자신의 일이 번창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바라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외적인 번영이 아니다. 그가 갈망하는 것은 영혼의 번영이다. 우리는 종종 유다 왕 여호사밧처럼, 금을 구하러 다시스로 가기 위해 배를 만들지만, 그 배는 에시온게벨에서 파선당하고 만다(대하 20:35-37). 하지만 파선당하는 데에도 유익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종종 우리는 영혼의 건강을 위해 가난해지고, 사랑하는 이를 여의며, 또한 핍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최악의 형편이 곧 최선의 상황인 경우가 종종 있다. 악인의 행운 속에 저주가 들어 있듯이, 의인의 십자가와 상실과 슬픔 속에는 축복이 숨겨져 있다. 성도의 시련은 신성한 농사이며, 이를 통해 그는 성장하며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4절.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이제 우리는 이 시의 두번째 부분 첫머리에 이르렀다. 이 구절에서는 악인의 열악한 상태와의 대조를 통해 앞에 묘사된 아름답고 유쾌한 장면의 색조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불가타역과 70인역에는 다음과 같이 더욱 강렬한 어투로 번역되었다: “그렇지 않음이여,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이를 통해 우리는, 의인에 대해 묘사된 모든 좋은 것이 악인의 경우에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약속들에 대해 이중의 부정을 가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지만 이것은 단지 악인의 상태일 뿐이다. “악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실에 유의하라. 시편 서두에 대한 주해에서 살펴보았듯이, 악인이란 악행을 시작하는 자로서 초보적인 범죄자를 가리킬 뿐이다. 조용히 나름대로의 덕성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의 상태가 그토록 서글프다면, 공개적으로 죄를 범하는 죄인들과 수치를 모르는 불신자들의 상태는 어떠하겠는가? 첫 문장은 악인에 대한 소극적인 묘사이며, 두번째 문장은 적극적인 묘사이다.

    “바람에 나는 겨.” 악인들의 특성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이는 본질적으로 무가치한, 죽은, 쓸모 없는, 실체가 없는, 그리고 쉽게 옮기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의 운명도 역시 이와 같다. 죽음은 그들을 곧장 무서운 불 속으로 집어던질 것이며, 그들은 거기서 완전히 소진될 것이다.

    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5절.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그들이 심판대에 서는 것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징벌을 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거기서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그들은 땅에 서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멀리 달아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방어벽 안에서 견디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치를 당하며 영원한 경멸을 뒤집어쓸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하늘을 사모하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악인이 한 명도 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이 땅에서는 의인들의 회중에 죄인들이 뒤섞여 있다. 모든 교회에는 마귀의 자식들도 들어 있다. 같은 경작지 안에 독초가 밀과 함께 자란다. 잡초/가라지가 철저히 제거된 밭은 아직 없다. 불순물이 금과 섞여 있듯이, 죄인들이 성도들과 섞여 있다. 하나님의 귀중한 다이아몬드들은 아직 자갈과 더불어 같은 들판에 놓여 있다. 의로운 롯과 같은 자들이 하늘 이편에서 소돔의 아들들에 의해 계속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하늘에 있는 “맏아들의 교회”에는 중생하지 못한 영혼이 단 한 명도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기뻐하자. 죄인들은 하늘에서 살 수 없다. 하늘은 그들의 분수에 맞지 않는 곳이다. 악인이 낙원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은 물고기가 나무 위에서 살 수 없는 것보다 더 자명한 사실이다. 설령 회개하지 않은 자가 하늘에 들어가도록 허락받는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있어 하늘은 견딜 수 없는 지옥이 될 것이다. 물론 계속 불법을 행하는 자에게는 그러한 특권 자체가 결코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하늘 궁전들 가운데서 자신의 이름과 처소를 얻게 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6절.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고 계시나”로 되어 있다. 여호와께서는 의인의 길을 줄곧 보고 계시며, 비록 그것이 때로는 안개와 어둠 속에 싸여 있을지라도, 그분은 그것을 알고 계신다. 설령 그것이 재난의 구름과 폭풍우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그분은 그것을 이해하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닥치는 어떠한 해악도 그대로 놓아 두지 않으실 것이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그들 자신이 망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길 역시 망할 것이다. 의인은 자기 이름을 반석에 새기지만, 악인은 자신의 기억을 모래 위에다 쓴다. 의인은 땅의 경작지를 갈며 거기서 수확한 것을 씨로 뿌리고서 자신이 영원한 삶을 누리러 들어가기까지 그것을 줄곧 거두어들일 것이다. 하지만 악인은 바다에서 쟁기질을 한다. 그가 타고 지나간 배 뒤로 그 흔적이 반짝이는 듯하지만, 곧 물결이 그 흔적을 덮을 것이며, 그와 친숙했던 곳이 더 이상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악인의 “길” 자체가 망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악한 자의 기억 속에만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악인의 이름은 조롱을 당하게 하실 것이며, 선한 자의 코에 악취가 되게 하시고, 또한 그 부패성에 걸맞는 악인에게만 알려지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음과 길을 정결케 하사 우리로 하여금 악인의 운명을 피할 수 있게 하시며, 또 의인에게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하시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주해와 설명들

    시 1편 전체. 아가서가 히브리어 원문상 “노래 중의 노래,” 즉 가장 탁월한 노래로 불리는 것과 같이, 이 시는 “시 중의 시”라는 명칭에 부족함이 없다. 이 시 속에는 기독교의 진수와 본질이 포함되어 있다. 제롬이 바울 서신에 대해 언급했던 바가, 이 시를 묘사하기에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그 구성은 짧지만, 다루는 주제의 범위와 설득력은 넓고 강하다.” 이 시는 축복을 서두에서 언급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결론이 되기를 바라는 부분에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길잡이로 지칭되어도 무방하다. 그것은 악인이 빠져들어 가는 파멸의 유사(流沙)와 성도들이 영광을 향해 걸어가는 굳건한 땅을 밝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 Saints’ Spiritual Delight, 1660).

    시 1편 전체. 이 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대조적인 주제들로 요약된다: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비참해진다. 이는 선지자들에 의해 제시된 두 가지 도전들을 나타내는 듯하다. 하나는, 모든 이들 중 경건한 자를 존속시켜 축복의 금양털을 얻는 유일한 용사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불경건한 자들이 세상에서 행복을 과시하려 해도 그들은 모든 이들 중 가장 비참하다는 것이다. -리처드 베이커(Sir Richard Baker, 1640).

    시 1편 전체. 나는 고대의 주경가들(어거스틴, 제롬 등) 중 어떤 이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라는 설득을 들어 왔다. 그들에 의하면, 시 1편은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분이 받은 상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존 프라이(John Fry, 1842).

    1절. 시편 기자는 이 짧은 시 속에서 참된 행복에 관해 그 어떤 철학자, 혹은 모든 철학자들보다 더욱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들은 새를 잡기 위해 그물을 치지만, 하나님은 우리 손에다 새를 쥐어 주신다. -존 트랩(John Trapp, 1660).

    1절. “복 있는.” 우리가 “복 있는”이라는 푯말이 매달려 있는 곳에 이르면, 그 안에서 경건한 사람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리처드 베이커.

    1절. 주정뱅이의 자리는 오만한 자의 자리이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 1662-1714).

    1절. “좇지 아니하며······서지 아니하며······앉지 아니하고.” 부정적인 표현의 권고들이 어떤 경우에는 긍정적인 표현보다 더욱 절대적이고 단호하다. “경건한 자의 조언을 좇으며”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수가 있다. 그 이유인즉, 그는 경건한 자의 조언을 좇으면서 또한 악인의 꾀를 좇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 둘을 동시에 좇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그 둘을 번갈아 가며 좇는다는 것이다. 이 부정적인 표현을 통해 그가 항상 정결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리처드 베이커.

    1절. “하이쉬”(vyah)는 강조적인 표현으로서 ‘그 사람’을 뜻한다. 즉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님에 의해 지으심을 받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자를 가리킨다. -아담 클라크(Adam Clarke, 1844).

    1절.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그들의 서로 다른 성격과 행실을 보여주는 특정한 상황들에 주목해 보라. (1) 불경건한 자는 자기 나름대로의 분별력을 갖고 있다. (2) 죄인은 자신의 길을 걷는다. (3) 오만한 자는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악인은 종교에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의 구원이나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열심을 내지 않는다. 또한 그는 다른 사람들을 권고하고 조언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며, 기도나 말씀 공부, 회개 등의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그런 일들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정직하게 살고, 종교 문제로 법석을 떨지 말라. 그리하면 마침내 잘되어 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권고를 좇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그는 이런 사람들의 방법을 따르지 않으며, 그들의 계획에 따라 행동하지도 않는다.

    죄인이 범죄에 빠지는 구체적인 방식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주정뱅이이고, 어떤 사람은 부정직하며, 어떤 사람은 정결하지 못하다. 온갖 종류의 모든 죄악에 빠진 사람은 드물다. 탐욕에 빠져 있으면서도 주정뱅이를 혐오하는 자들이 많으며, 탐욕을 혐오하는 주정뱅이들도 많다. 각자에게는 자신이 쉽게 범하는 죄가 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악한 자로 하여금 자신의 길을 버리게 하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의 길에 서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오만한 자는 모든 종교와 윤리를 자신과는 무관하게 생각하고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그는 불경건함 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아 나름대로의 확신을 갖고 있으며, 또한 죄를 조롱한다. 그의 양심은 마비되었고, 그는 모든 불신에 대한 신봉자이다. 그러나 그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 -아담 클라크.

    1절. “복 있는.” 히브리어 원문에 “복”이라는 단어는 복수형 명사 “아쉬레이”(yrva)이다. 이는 모든 축복들이 탈선하지 않은 자의 몫임을 뜻한다. 그것은 마치, “······하는 사람은 범사에 형통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논쟁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공허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값비싼 진주를 발견했다면, 즉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악한 자로부터 분리되는 길을 발견했다면, 모든 축복들이 그의 것이 된다. 하지만 그가 이 보석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는 축복들을 찾아 헤맬 것이지만 결코 하나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순수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순수하듯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선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선한 법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은 당신 자신의 상태에 달려 있다. 비록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지만 피조물의 상태에 맞추어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분은 사악한 자에게는 악하게 대하시며, 거룩한 자에게는 거룩하게 대하신다.

    그러므로 악한 자에게는 선하거나 좋은 것이 전혀 없다. 하나님의 율법을 달콤하게 여기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달콤하지 않다. 여기서 “꾀”라는 단어는, 법령과 법률에 의해 구성 및 존속되지 않고서 존재할 수 있는 인간 사회란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법령과 교훈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윗은 이 용어를 통해 악인의 교만을 겨냥하며 그의 만용을 꾸짖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 안에서 행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지 않을 것이며, 자기 자신의 꾀를 좇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그것을 가리켜 그들의 “꾀”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이 사리를 분별하는 방법이며, 그것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듯이 보이는 길이기 때문이다. 악한 자가 멸망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신의 눈에, 그리고 자신의 사리 분별에 따라 옳은 길이라고 여기는 옷 속에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공공연하게 노출시킨다면, 우리가 그들과 함께 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토록 축복받는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윗은 여기서, “악인의 어리석음” 혹은 “악인의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옳은 듯이 보이는 것에 조심하도록, 즉 광명의 천사로 변장한 마귀가 우리를 간교하게 꾀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 또한 그는 악인의 꾀를 여호와의 율법과 대조시켜 우리로 하여금 양의 옷을 입은 늑대를 조심하라고 말한다. 악인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무자격자이면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조언을 하고 가르치며 도와주겠다고 준비하고 있다. “서지”라는 단어는 그들의 완고함과 완악함을 서술하는 용어이다. 그들은 스스로 매정해지며, 적의를 품은 말로 변명하고, 또한 자신의 불경건함 가운데서 교정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있다. 성경의 상징적 표현 방식에 있어 ‘선다’는 것은 굳건히 고정됨을 나타낸다:“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롬 14:4).

    그러므로 ‘기둥’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에 의하면 ‘서다’라는 동사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라틴어의 ‘상’(像)도 ‘서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하지만 악인이 서는 것은 자기 변명이요, 스스로 완고해지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옳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며,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난 일을 하여 영원토록 빛나는 듯이 보이고자 한다. “자리”라는 용어와 관련하여서는,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지도자와 선생으로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마 23:2)라는 말씀과 같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해악을 끼치는 자리에 앉아 있으며, 철학자들의 견해들과 사람들의 전승(傳承)들과 그들 자신의 두뇌에서 나온 권면들을 늘어 놓고,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성도들을 억압한다. 반면에, 그들은 영혼을 살리고 살찌우며 보존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1절. “오만한 자.” 악인은 깊은 죄악 가운데 빠지면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게 된다.

    히브리인들은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출 2:14)라고 모세를 경멸했다.

    아합은, 미가야가 자신에게 유리한 예언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를 핍박했다(왕상 22:18).

    벧엘의 모든 아이들은 엘리사를 비웃으며 “대머리여” 하고 함부로 조롱했다(왕하 2:23).

    조그만 독 한 방울이 증가되어 거대한 독의 바다를 이룬다.

    독사의 독 한 방울이 손에 묻어 혈관 속으로 들어가서 온 몸에 퍼지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바라크의 복과 아쉐르의 복(시편 1:1-6)

    시편 1편은 평생 읽어도, 다시 읽어도, 세월이 지나서 읽어도 은혜가 되는 귀한 말씀입니다. 시편 전체의 주제가 되는 장이기도합니다.

    흔히 옛말씀 틀린 것 하나 없다고들 하는데 어쩌면 시편 1편의 말씀이야말로 평범해보이지만 인생을 지탱해주는 신앙의 놀라운 은혜를 말하고 있음을 늘 발견하게 됩니다.

    복있는 사람을 말씀하십니다!

    복있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그런데 이 복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라크(ברך)의 복이요 하나는 아쉐르(rva)의 복입니다.

    바라크의 복은 물질적인 것을 포함한 현세적, 가시적 축복입니다.

    창세기의 생육(生育)의 복이 바로 바라크의 복이었습니다.

    [창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바라크)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도 바라크의 복이었습니다.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바라크)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러나 시편 1편의 복은 아쉐르(rva)의 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만난 사람의 영혼 깊은 곳의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의미하는 영적 복을 말합니다.

    헬라어로는 마타리오스라고 하는데 바로 예수님의 마태복음 5장의 마카리오스의 복과 같습니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즉 아쉐르의 복은 내면 깊은 곳의 복입니다.

    물론 바라크의 복도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오래 가고 영원한 것은 바로 아쉐르의 복! 내면의 복입니다.

    바라크의 복과 함께 결코 다함이 없는 에쉐르- 시편 1편의 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런데 그런 복을 받는 사람- 복있는 사람은 먼저 자기 선을 분명히하는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즉 1절에 나타난 '하지 않아야할 것' 대한 이해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기질과 경향을 스스로 알아 늘 조심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그러므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따르는 것은 생각이 기울어간다는 뜻입니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여호와 앞에 서라!고 성경은 수없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앞에 설만큼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호와 앞에 서야하는 우리들이 죄인의 길에 서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앉았다는 것은 이미 습관화되고 길들여져지고 익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그 방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그 죄인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생각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있는 사람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아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기울어지기 쉬운 존재임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알고 조심합니다. 경계합니다. 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나는 무엇이 가장 즐거운가!

    무엇보다 복있는 사람은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즐거움의 근원!

    이것이 그의 영성을 좌우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이 즐거우십니까?

    무엇이 즐거우십니까? 나는 무엇이 즐거운 것일까요?

    나는 무엇을 할 때 즐거워하는 성향인가요?

    진정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릴까요?

    지금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의 즐거움이 있다면 나는 이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한다는 말은 '말씀'에 사로 잡히도록 스스로를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악인들의 꾀가 아니기를, 내가 선택한 것이 죄인들의 길이 아니기를,

    내가 앉아 있는 곳이 오만한 자의 자리가 아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나의 영적 습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오직! 이라는 말은 그래서 자세와 태도에 대한 결단을 말합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오직!이라는 단어에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삶의 원리와 방식을 채택하는 단호함을 말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방법을 택하는 방식입니다!

    묵상하며 그 말씀이 체질화되고 인격화되고 언어화되고 습관화되고 드디어는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기쁨이 될 때까지 묵상하는 것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러면 그의 인생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될 것입니다.

    모든 생명있는 것은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 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있는 사람의 자세와 태도를 기뻐하시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열매를 맺게하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시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은 생산적인 삶을 살지만 악인은 생에 대하여 무의미만 남기고 부정적인 기록만 남기게 될 것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악인은 결국 불안정하고 무의미라고 무가치하고 순간성에 머무르고 말 것입니다.

    복있는 사람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다고 하십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뿌리가 지금 시냇가의 수액과 연결되어있는 것입니다.

    내 뿌리가 나아가 닿아있는 방향!

    그것이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이 늘 닿아있는 곳,

    내 무의식의 심연이 연결되어있는 곳,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내 영혼은 늘 아름답게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시냇가( 히브리어 페레그)는 운하運河 channel, canal 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냥 자연적으로 흐르는 강물이기도 하지만 운하, 즉 의도적으로 팠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가 어떤 곳에 심겼을지라도 그 뿌리 쪽으로 축복의 운하를 파주시기도 합니다.

    에쉐르의 을 먼저 누리면 바라크의 도 다가올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악인의 길을 따르기 쉬운 우리의 삶의 방향을 그 말씀이 힘있게 바꾸어줄 것을 믿습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


    스펄젼의 시편 1편 강해

    이 시는 시편의 서론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시편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시편 기자의 관심사는 우리에게 축복받는 길을 가르치는 데, 그리고 죄인들이 반드시 멸망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하고자 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첫번째 시편의 주제이며, 어떤 측면에서 시편 전체는 바로 이 내용을 신성한 교훈으로서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한다 하겠다.

    구성 /  이 시는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3절 경건한 자가 축복을 받는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 그의 과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여호와께로부터 어떤 축복을 받는지 등을 설명한다.

    4-6절 불경건한 자의 상태와 특성을 대조해 보이며, 그 장래를 계시하고, 또한 그의 궁극적 운명을 강한 어투로 묘사한다.

    [강 해]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1절. “복 있는.” 우리 주님의 유명한 산상수훈처럼, 시편 역시 축복으로 시작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복 있는”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으며, 그것이 형용사인지 아니면 명사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많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에게 주어질 축복의 다양성 및 그가 누릴 축복의 온전함과 위대함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그 내용을 읽고서 “오, 그 놀라운 축복들!”이라고 감탄하게 되며, 그것을 (에인즈워스가 그렇게 하듯이) 은혜받은 사람이 받을 놀라운 축복에 대한 즐거운 탄성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동일한 축복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기원한다!

    다윗은 은혜받은 사람에 대해 소극적인 표현(1절)과 적극적인 표현(2절)으로 묘사한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그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는 사람이다. 그는 더 지혜로운 조언을 받아들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행한다. 그에게 있어 경건의 길이란 평안과 즐거움의 길이다. 그의 걸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시를 받으며, 육욕적인 사람들의 교활하고 악한 계략을 따르지 않는다. 우리의 외적인 삶이 변화되고 불경건한 행동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내적인 은혜를 풍성하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그는 예전에 비해, 더욱 선별된 사람들과 더불어 동행한다. 비록 그 자신이 죄인이긴 하지만, 이제 그는 보혈로 씻음을 받은 죄인이며, 성령에 의해 소생함을 받았고, 또한 그 심령이 새로워졌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의인의 회중 가운데 서 있는 그는 악을 행하는 무리들과 감히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그는 금욕주의자들의 냉소 안에서 아무런 안식도 발견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죄와 영생, 지옥과 천국,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 등에 대해 비웃는다. 하지만 그는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철학을 배웠고,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는 까닭에 그분의 이름이 모독받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오만한 자의 자리는 매우 높아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지옥의 문에 아주 가깝다. 거기로부터 달아나자. 왜냐하면 그곳은 이내 공허해질 것이며, 멸망이 거기 앉는 사람을 삼킬 것이기 때문이다. 1절에서 사용된 점층법에 유의해 보라.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죄 가운데서 살아갈 때 그들은 점점 더 나쁜 길로 들어서게 된다.

    처음에는 단지 부주의하고 악한 자, 곧 하나님을 망각한 자의 꾀를 ‘좇는다’-그 죄악이 상습적이라기보다는 실리적이다. 하지만 후에 그들은 상습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게 되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의도적으로 어기는 죄인의 길에 ‘서게’ 된다. 또한 이를 그대로 방치하면, 그들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스스로 유해한 선생 혹은 다른 이들을 유혹하는 자들이 되며, 그리하여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된다. 그들은 죄악 가운데서 학위를 취득하고, 파멸 박사로 임명되며, 다른 이들에 의해 악마의 권위자로 높임을 받는다.

    반면에 복 있는 사람, 곧 하나님의 모든 축복들을 소유한 사람은 그러한 인물들과 더불어 아무런 교제도 나눌 수 없다. 그는 이 문둥병자들로부터 자신을 순결하게 지킨다. 그는 마치 더러워진 의복을 벗어 버리듯이, 자신에게서 악한 것들을 제거한다. 그는 악한 자들에게서 이탈하여 동지도 없이 홀로 걸어가며, 그리스도께 대한 비난을 스스로 짊어진다. 죄인들로부터 그처럼 격리된 자에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임하겠는가!

    이제 복 있는 자의 적극적인 특성에 대해 알아보자.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는 저주와 정죄의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 ‘안’에 있으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삼아 그 안에 있기를 기뻐한다. 더욱이, 그는 ‘날마다’ 그것을 읽고 ‘밤마다’ 그것을 묵상하기를 즐거워한다. 그는 성경 말씀을 취하여 하루 종일 지니고 다니며, 잠 못 이루는 밤에는 그 말씀을 곰곰이 묵상한다. 형통한 날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 중 시편을 노래하며, 역경의 밤에는 성경의 약속들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여호와의 율법”은 진실한 신자에게 매일의 양식이다.

    하지만 다윗 당시에는 영감을 받아 기록한 성경이 모세 오경 외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66권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우리 모두가 성경을 베뢰아인들처럼 열심히 탐구하고 있는가? 우리들 중 이 시에 제시된 축복을 누리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가? 아마도 우리 중에는, 악한 자의 길로 걷지 않고 있다는 식의 소극적 차원의 정결함을 주장할 수 있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묻고자 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가?” “여러분은 그것을 자신의 든든한 오른손으로 삼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최고의 동반자로, 그리고 훌륭한 안내자로 삼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축복은 여러분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3절. “저는……심은 나무가.” 그는 야생 나무가 아니라 “심은 나무”와 같다. 그것은 선택된, 소유물로 간주된, 재배된, 그리고 마지막에 끔찍스럽게 뽑히는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받은 나무이다. 왜냐하면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마 15:13)이기 때문이다.

    “시냇가에.”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시냇가”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원문에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역자 주). 만일 한 시내가 마르면, 다른 시내가 물을 공급한다. 용서의 시내와 은혜의 시내, 약속의 시내와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시내 등이 결코 마르지 않고 물을 공급해 준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것과 같다. 제 맛을 내지 못하는 때 이른 무화과처럼 시기 적절하지 못한 은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기뻐하는 자는 그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 고난의 때에 인내하고, 시련의 날에 믿음을 굳게 잡으며, 또한 번영의 시기에 거룩한 기쁨을 나타낸다. 풍성함은 은혜로운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본질적 특성이며, 그 풍성함은 시기 적절해야 한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가장 나지막하게 한 말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그가 베푼 자그마한 사랑도 역시 기억될 것이다. 그의 열매만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잎사귀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이나 풍성함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와 같은 약속을 지닌 사람은 복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자신의 시각으로 어떤 약속의 성취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의 연약한 감각으로 판단함으로써 “이 모든 일들이 나를 대적한다”고 말한 야곱처럼, 고통스러운 결론에 이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은 비록 우리가 약속에 대해 관심을 갖고는 있지만, 지치고 곤고하여 그 약속에 예고된 것과는 정반대의 시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에야 확실해지며, 믿음을 통해 우리는 모든 것이 자신을 대적하는 듯하여도 자신의 일이 번창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바라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외적인 번영이 아니다. 그가 갈망하는 것은 영혼의 번영이다. 우리는 종종 유다 왕 여호사밧처럼, 금을 구하러 다시스로 가기 위해 배를 만들지만, 그 배는 에시온게벨에서 파선당하고 만다(대하 20:35-37). 하지만 파선당하는 데에도 유익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종종 우리는 영혼의 건강을 위해 가난해지고, 사랑하는 이를 여의며, 또한 핍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최악의 형편이 곧 최선의 상황인 경우가 종종 있다. 악인의 행운 속에 저주가 들어 있듯이, 의인의 십자가와 상실과 슬픔 속에는 축복이 숨겨져 있다. 성도의 시련은 신성한 농사이며, 이를 통해 그는 성장하며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4절.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이제 우리는 이 시의 두번째 부분 첫머리에 이르렀다. 이 구절에서는 악인의 열악한 상태와의 대조를 통해 앞에 묘사된 아름답고 유쾌한 장면의 색조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불가타역과 70인역에는 다음과 같이 더욱 강렬한 어투로 번역되었다: “그렇지 않음이여,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이를 통해 우리는, 의인에 대해 묘사된 모든 좋은 것이 악인의 경우에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약속들에 대해 이중의 부정을 가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지만 이것은 단지 악인의 상태일 뿐이다. “악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실에 유의하라. 시편 서두에 대한 주해에서 살펴보았듯이, 악인이란 악행을 시작하는 자로서 초보적인 범죄자를 가리킬 뿐이다. 조용히 나름대로의 덕성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의 상태가 그토록 서글프다면, 공개적으로 죄를 범하는 죄인들과 수치를 모르는 불신자들의 상태는 어떠하겠는가? 첫 문장은 악인에 대한 소극적인 묘사이며, 두번째 문장은 적극적인 묘사이다.

    “바람에 나는 겨.” 악인들의 특성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이는 본질적으로 무가치한, 죽은, 쓸모 없는, 실체가 없는, 그리고 쉽게 옮기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의 운명도 역시 이와 같다. 죽음은 그들을 곧장 무서운 불 속으로 집어던질 것이며, 그들은 거기서 완전히 소진될 것이다.

    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5절.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그들이 심판대에 서는 것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징벌을 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거기서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그들은 땅에 서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멀리 달아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방어벽 안에서 견디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치를 당하며 영원한 경멸을 뒤집어쓸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하늘을 사모하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악인이 한 명도 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이 땅에서는 의인들의 회중에 죄인들이 뒤섞여 있다. 모든 교회에는 마귀의 자식들도 들어 있다. 같은 경작지 안에 독초가 밀과 함께 자란다. 잡초/가라지가 철저히 제거된 밭은 아직 없다. 불순물이 금과 섞여 있듯이, 죄인들이 성도들과 섞여 있다. 하나님의 귀중한 다이아몬드들은 아직 자갈과 더불어 같은 들판에 놓여 있다. 의로운 롯과 같은 자들이 하늘 이편에서 소돔의 아들들에 의해 계속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하늘에 있는 “맏아들의 교회”에는 중생하지 못한 영혼이 단 한 명도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기뻐하자. 죄인들은 하늘에서 살 수 없다. 하늘은 그들의 분수에 맞지 않는 곳이다. 악인이 낙원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은 물고기가 나무 위에서 살 수 없는 것보다 더 자명한 사실이다. 설령 회개하지 않은 자가 하늘에 들어가도록 허락받는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있어 하늘은 견딜 수 없는 지옥이 될 것이다. 물론 계속 불법을 행하는 자에게는 그러한 특권 자체가 결코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하늘 궁전들 가운데서 자신의 이름과 처소를 얻게 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6절.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고 계시나”로 되어 있다. 여호와께서는 의인의 길을 줄곧 보고 계시며, 비록 그것이 때로는 안개와 어둠 속에 싸여 있을지라도, 그분은 그것을 알고 계신다. 설령 그것이 재난의 구름과 폭풍우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그분은 그것을 이해하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닥치는 어떠한 해악도 그대로 놓아 두지 않으실 것이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그들 자신이 망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길 역시 망할 것이다. 의인은 자기 이름을 반석에 새기지만, 악인은 자신의 기억을 모래 위에다 쓴다. 의인은 땅의 경작지를 갈며 거기서 수확한 것을 씨로 뿌리고서 자신이 영원한 삶을 누리러 들어가기까지 그것을 줄곧 거두어들일 것이다. 하지만 악인은 바다에서 쟁기질을 한다. 그가 타고 지나간 배 뒤로 그 흔적이 반짝이는 듯하지만, 곧 물결이 그 흔적을 덮을 것이며, 그와 친숙했던 곳이 더 이상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악인의 “길” 자체가 망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악한 자의 기억 속에만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악인의 이름은 조롱을 당하게 하실 것이며, 선한 자의 코에 악취가 되게 하시고, 또한 그 부패성에 걸맞는 악인에게만 알려지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음과 길을 정결케 하사 우리로 하여금 악인의 운명을 피할 수 있게 하시며, 또 의인에게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하시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주해와 설명들

    시 1편 전체. 아가서가 히브리어 원문상 “노래 중의 노래,” 즉 가장 탁월한 노래로 불리는 것과 같이, 이 시는 “시 중의 시”라는 명칭에 부족함이 없다. 이 시 속에는 기독교의 진수와 본질이 포함되어 있다. 제롬이 바울 서신에 대해 언급했던 바가, 이 시를 묘사하기에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그 구성은 짧지만, 다루는 주제의 범위와 설득력은 넓고 강하다.” 이 시는 축복을 서두에서 언급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결론이 되기를 바라는 부분에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길잡이로 지칭되어도 무방하다. 그것은 악인이 빠져들어 가는 파멸의 유사(流沙)와 성도들이 영광을 향해 걸어가는 굳건한 땅을 밝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 Saints’ Spiritual Delight, 1660).

    시 1편 전체. 이 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대조적인 주제들로 요약된다: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비참해진다. 이는 선지자들에 의해 제시된 두 가지 도전들을 나타내는 듯하다. 하나는, 모든 이들 중 경건한 자를 존속시켜 축복의 금양털을 얻는 유일한 용사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불경건한 자들이 세상에서 행복을 과시하려 해도 그들은 모든 이들 중 가장 비참하다는 것이다. -리처드 베이커(Sir Richard Baker, 1640).

    시 1편 전체. 나는 고대의 주경가들(어거스틴, 제롬 등) 중 어떤 이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라는 설득을 들어 왔다. 그들에 의하면, 시 1편은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분이 받은 상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존 프라이(John Fry, 1842).

    1절. 시편 기자는 이 짧은 시 속에서 참된 행복에 관해 그 어떤 철학자, 혹은 모든 철학자들보다 더욱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들은 새를 잡기 위해 그물을 치지만, 하나님은 우리 손에다 새를 쥐어 주신다. -존 트랩(John Trapp, 1660).

    1절. “복 있는.” 우리가 “복 있는”이라는 푯말이 매달려 있는 곳에 이르면, 그 안에서 경건한 사람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리처드 베이커.

    1절. 주정뱅이의 자리는 오만한 자의 자리이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 1662-1714).

    1절. “좇지 아니하며······서지 아니하며······앉지 아니하고.” 부정적인 표현의 권고들이 어떤 경우에는 긍정적인 표현보다 더욱 절대적이고 단호하다. “경건한 자의 조언을 좇으며”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수가 있다. 그 이유인즉, 그는 경건한 자의 조언을 좇으면서 또한 악인의 꾀를 좇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 둘을 동시에 좇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그 둘을 번갈아 가며 좇는다는 것이다. 이 부정적인 표현을 통해 그가 항상 정결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리처드 베이커.

    1절. “하이쉬”(vyah)는 강조적인 표현으로서 ‘그 사람’을 뜻한다. 즉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님에 의해 지으심을 받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자를 가리킨다. -아담 클라크(Adam Clarke, 1844).

    1절.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그들의 서로 다른 성격과 행실을 보여주는 특정한 상황들에 주목해 보라. (1) 불경건한 자는 자기 나름대로의 분별력을 갖고 있다. (2) 죄인은 자신의 길을 걷는다. (3) 오만한 자는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악인은 종교에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의 구원이나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열심을 내지 않는다. 또한 그는 다른 사람들을 권고하고 조언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며, 기도나 말씀 공부, 회개 등의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그런 일들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정직하게 살고, 종교 문제로 법석을 떨지 말라. 그리하면 마침내 잘되어 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권고를 좇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그는 이런 사람들의 방법을 따르지 않으며, 그들의 계획에 따라 행동하지도 않는다.

    죄인이 범죄에 빠지는 구체적인 방식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주정뱅이이고, 어떤 사람은 부정직하며, 어떤 사람은 정결하지 못하다. 온갖 종류의 모든 죄악에 빠진 사람은 드물다. 탐욕에 빠져 있으면서도 주정뱅이를 혐오하는 자들이 많으며, 탐욕을 혐오하는 주정뱅이들도 많다. 각자에게는 자신이 쉽게 범하는 죄가 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악한 자로 하여금 자신의 길을 버리게 하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의 길에 서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오만한 자는 모든 종교와 윤리를 자신과는 무관하게 생각하고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그는 불경건함 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아 나름대로의 확신을 갖고 있으며, 또한 죄를 조롱한다. 그의 양심은 마비되었고, 그는 모든 불신에 대한 신봉자이다. 그러나 그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 -아담 클라크.

    1절. “복 있는.” 히브리어 원문에 “복”이라는 단어는 복수형 명사 “아쉬레이”(yrva)이다. 이는 모든 축복들이 탈선하지 않은 자의 몫임을 뜻한다. 그것은 마치, “······하는 사람은 범사에 형통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논쟁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공허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값비싼 진주를 발견했다면, 즉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악한 자로부터 분리되는 길을 발견했다면, 모든 축복들이 그의 것이 된다. 하지만 그가 이 보석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는 축복들을 찾아 헤맬 것이지만 결코 하나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순수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순수하듯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선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선한 법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은 당신 자신의 상태에 달려 있다. 비록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지만 피조물의 상태에 맞추어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분은 사악한 자에게는 악하게 대하시며, 거룩한 자에게는 거룩하게 대하신다.

    그러므로 악한 자에게는 선하거나 좋은 것이 전혀 없다. 하나님의 율법을 달콤하게 여기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달콤하지 않다. 여기서 “꾀”라는 단어는, 법령과 법률에 의해 구성 및 존속되지 않고서 존재할 수 있는 인간 사회란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법령과 교훈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윗은 이 용어를 통해 악인의 교만을 겨냥하며 그의 만용을 꾸짖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 안에서 행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지 않을 것이며, 자기 자신의 꾀를 좇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그것을 가리켜 그들의 “꾀”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이 사리를 분별하는 방법이며, 그것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듯이 보이는 길이기 때문이다. 악한 자가 멸망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신의 눈에, 그리고 자신의 사리 분별에 따라 옳은 길이라고 여기는 옷 속에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공공연하게 노출시킨다면, 우리가 그들과 함께 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토록 축복받는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윗은 여기서, “악인의 어리석음” 혹은 “악인의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옳은 듯이 보이는 것에 조심하도록, 즉 광명의 천사로 변장한 마귀가 우리를 간교하게 꾀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 또한 그는 악인의 꾀를 여호와의 율법과 대조시켜 우리로 하여금 양의 옷을 입은 늑대를 조심하라고 말한다. 악인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무자격자이면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조언을 하고 가르치며 도와주겠다고 준비하고 있다. “서지”라는 단어는 그들의 완고함과 완악함을 서술하는 용어이다. 그들은 스스로 매정해지며, 적의를 품은 말로 변명하고, 또한 자신의 불경건함 가운데서 교정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있다. 성경의 상징적 표현 방식에 있어 ‘선다’는 것은 굳건히 고정됨을 나타낸다:“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롬 14:4).

    그러므로 ‘기둥’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에 의하면 ‘서다’라는 동사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라틴어의 ‘상’(像)도 ‘서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하지만 악인이 서는 것은 자기 변명이요, 스스로 완고해지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옳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며,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난 일을 하여 영원토록 빛나는 듯이 보이고자 한다. “자리”라는 용어와 관련하여서는,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지도자와 선생으로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마 23:2)라는 말씀과 같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해악을 끼치는 자리에 앉아 있으며, 철학자들의 견해들과 사람들의 전승(傳承)들과 그들 자신의 두뇌에서 나온 권면들을 늘어 놓고,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성도들을 억압한다. 반면에, 그들은 영혼을 살리고 살찌우며 보존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1절. “오만한 자.” 악인은 깊은 죄악 가운데 빠지면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게 된다.

    히브리인들은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출 2:14)라고 모세를 경멸했다.

    아합은, 미가야가 자신에게 유리한 예언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를 핍박했다(왕상 22:18).

    벧엘의 모든 아이들은 엘리사를 비웃으며 “대머리여” 하고 함부로 조롱했다(왕하 2:23).

    조그만 독 한 방울이 증가되어 거대한 독의 바다를 이룬다.

    독사의 독 한 방울이 손에 묻어 혈관 속으로 들어가서 온 몸에 퍼지고...


    에쉐르(אֶשֶׁר) 복과 바라크(בָּרַךְ) 복

    시편 1편은 평생 읽어도, 다시 읽어도, 세월이 지나서 읽어도 은혜가 되는 귀한 말씀입니다.
    시편 전체의 주제가 되는 장이기도합니다.
    흔히 옛말씀 틀린 것 하나 없다고들 하는데 어쩌면 시편 1편의 말씀이야말로 평범해보이지만 인생을 지탱해주는 신앙의 놀라운 은혜를 말하고 있음을 늘 발견하게 됩니다.

    복있는 사람을 말씀하십니다!
    복있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그런데 이 축복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라크의 축복이요 하나는 에쉐르의 축복입니다.
    바라크의 축복은 물질적인 것을 포함한 현세적, 가시적 축복입니다.

    창세기의 생육(生育)의 축복이 바로 바라크의 축복이었습니다.
    창세기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바라크)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도 바라크의 축복이었습니다.
    창세기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바라크)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시편 1편의 축복은 아쉐르의 축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만난 사람의 영혼 깊은 곳의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의미하는 영적 축복을 말합니다.
    헬라어로는 마카리오스라고 하는데 바로 예수님의 마태복음 5장의 마카리오스의 축복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즉 아쉐르의 축복은 내면 깊은 곳의 축복입니다.
    물론 바라크의 축복도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오래 가고 영원한 것은 바로 아쉐르의 축복! 내면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그런 축복을 받는 사람- 복있는 사람은 먼저 자기 선을 분명히하는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즉 1절에 나타난 '하지 않아야할 것' 대한 이해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기질과 경향을 스스로 알아 늘 조심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그러므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따르는 것은 생각이 기울어간다는 뜻입니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여호와 앞에 서라!고 성경은 수없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앞에 설만큼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호와 앞에 서야하는 우리들이 죄인의 길에 서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앉았다는 것은 이미 습관화되고 길들여져지고 익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그 방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그 죄인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생각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있는 사람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아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기울어지기 쉬운 존재임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알고 조심합니다. 경계합니다. 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나는 무엇이 가장 즐거운가!

    무엇보다 복있는 사람은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즐거움의 근원!

    이것이 그의 영성을 좌우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이 즐거우십니까?

    무엇이 즐거우십니까? 나는 무엇이 즐거운 것일까요?

    나는 무엇을 할 때 즐거워하는 성향인가요?

    멋진 연애를 하는 것, 일류 레스토랑을 가는 것, 비싼 가방이나 옷을 입는 것, 멋진 여행지를 구경가는 것은 어쩌면 누구에게나 '즐거운' 본능적으로 '즐거운' 일일 것입니다. 그것 또한 지나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늘', '더' 즐거우면 아직 우리는 복있는 사람은 안 된, 아니 되고 있는 과정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 시절에는 텔레비젼 보는 것이 성경 읽는 것보다 즐거울 수 있습니다.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이 교회다니는 것보다 즐거울 수 있습니다.

    진정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릴까요?

    지금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의 즐거움이 있다면 나는 이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한다는 말은 '말씀'에 사로 잡히도록 스스로를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악인들의 꾀가 아니기를, 내가 선택한 것이 죄인들의 길이 아니기를, 내가 앉아 있는 곳이 오만한 자의 자리가 아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나의 영적 습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오직! 이라는 말은 그래서 자세와 태도에 대한 결단을 말합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오직!이라는 단어에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삶의 원리와 방식을 채택하는 단호함을 말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방법을 택하는 방식입니다!

    묵상하며 그 말씀이 체질화되고 인격화되고 언어화되고 습관화되고 드디어는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기쁨이 될 때까지 묵상하는 것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러면 그의 인생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될 것입니다.

    모든 생명있는 것은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 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있는 사람의 자세와 태도를 기뻐하시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열매를 맺게하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시편 1:3-6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은 생산적인 삶을 살지만 악인은 생에 대하여 무의미만 남기고 부정적인 기록만 남기게 될 것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악인은 결국 불안정하고 무의미라고 무가치하고 순간성에 머무르고 말 것입니다.

    복있는 사람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다고 하십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뿌리가 지금 시냇가의 수액과 연결되어있는 것입니다.
    내 뿌리가 나아가 닿아있는 방향.
    그것이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이 늘 닿아있는 곳,
    내 무의식의 심연이 연결되어있는 곳,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내 영혼은 늘 아름답게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시냇가(페레그)는 운하運河 channel, canal 라는 뜻도 있습니다.

    פֶּלֶג 스트롱번호 6388

    1. 시내.  2. 강. 3. 욥 29:6
    발음 [ peleg ]
    어원  /  21:1[흐르는 눈물을나타낼 때 사용], 애3:48, 638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0회 사용
    • 1. 명사, 남성 시내, 강, 욥29:6, 시65:10(9).
    • 관련 성경 / 시내(욥 29:6, 시 46:4(5), 애 3:48), 강(시65:9), 도랑(잠5:16), 물(잠21:1), 냇물(사32:2).


    자연적으로 흐르는 강물이기도 하지만 운하, 즉 의도적으로 팠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가 어떤 곳에 심겼을지라도 그 뿌리 쪽으로 축복의 운하를 파주시기도 합니다.

    에쉐르의 축복을 먼저 누리면 바라크의 축복도 다가올 줄로 믿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경 개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계획을 기록한 책입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되며, 총 66권(구약 39권, 신약 27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약
    은 창조, 타락,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과 하나님의 언약을 중심으로 하며,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사역, 죽음, 부활, 그리고 교회의 설립과 미래의 소망을 다룹니다.

    성경의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과 구속사역을 보여주고, 인간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도록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6에 따르면, 성경은 교훈과 책망,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저자는 약 40명으로, 왕(다윗, 솔로몬), 선지자(이사야, 예레미야), 제사장(에스라), 사도(바울, 베드로, 요한)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약 1500년에 걸쳐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 저자들을 통해 성령의 영감으로 쓰였기에 궁극적인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베드로후서 1:21).

    성경은 문학적으로도 풍부하여 역사, 율법, 시, 지혜문학, 복음서, 서신서, 예언서 등 다양한 장르를 포함합니다.
    성경의 중심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며, 이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내용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성경의 전체 구조 및 목록

    구약성경 (39권)

    1. 율법서 (토라)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2. 역사서 :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3. 시가서 :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4. 대선지서 :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5. 소선지서 :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신약성경 (27권)

    1. 복음서 :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2. 역사서 : 사도행전
    3. 바울서신 :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4. 일반서신 :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5. 예언서 : 요한계시록


    시편은 다섯 개의 책(권)으로 나뉘며, 각 권의 마지막에는 찬양으로 마무리되는 구절이 들어있습니다. 

    제1권 (1-41편) : 다윗의 시로 구성되어 있으며, 개인적인 기도와 탄원이 많습니다. 

    제2권 (42-72편) : 공동체적 기도와 왕에 대한 시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3권 (73-89편) :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건과 고난을 반영한 시편이 많습니다. 

    제4권 (90-106편) : 하나님의 영원성과 왕권에 대한 찬양이 중심을 이룹니다. 

    제5권 (107-150편) : 감사와 찬양,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시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편 전체 해석 요약 정리 

    본문 요약

    시편은 인간의 모든 감정과 삶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기도를 담고 있는 시가서입니다. 기쁨과 슬픔, 고통과 회복, 감사와 탄식, 회개와 찬양이 어우러져 있으며, 다윗을 포함한 다양한 시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솔직하고 깊이 있게 표현합니다. 시편은 단순한 종교 문서가 아니라 삶 그 자체에서 끌어올린 믿음의 고백이며,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심을 노래하며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시편은 고난 속에서도 찬양하고, 죄 중에서도 회개하며, 승리의 순간에도 겸손히 하나님을 높이는 경건의 중심을 이루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구조

    1. 찬양과 신뢰의 시편 (1~41편)
    2. 탄식과 회개의 시편 (42~89편)
    3. 감사와 예배의 시편 (90~150편)

    찬양과 신뢰의 시편 (1~41편)

    시편의 첫 번째 권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선포로 시작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라는 구절은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자의 삶이 얼마나 복된지를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시편들에서는 주로 다윗의 시편이 기록되며, 그는 도망자였고 왕이었으며 죄인이자 용서받은 자로서 다양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시편 3편에서 그는 도망 중에도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외적 상황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내적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시편 8편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얼마나 존귀하게 지음받았는지를 노래합니다. 시편 19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자연 계시가 함께 찬양되며,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하고 영혼을 소성케 한다고 선포합니다. 시편 23편은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하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신앙의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다윗은 삶의 어두운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확신하며 평안과 인도하심을 노래합니다.

    이러한 시편들은 전쟁 중에도, 배신과 공격 중에도, 하나님께 신뢰를 두는 자의 삶을 보여주며, 현실 속에서 믿음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드러냅니다.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신앙의 핵심이며, 그 믿음은 곧 찬양과 감사로 이어집니다. 첫 번째 권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드는 찬양의 기초를 놓습니다.

    탄식과 회개의 시편 (42~89편)

    두 번째 권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탄식, 그리고 회개의 노래가 주를 이룹니다. 시편 42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구절은 외적인 풍요 속에서도 내면의 영적 갈급함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이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부재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자신을 격려합니다. 이처럼 시편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마음의 몸부림이 그대로 담겨 있는 기도의 시입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 사건 이후 지은 회개의 시로,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고백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단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죄에 대한 깊은 인식과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않고 하나님 앞에 그대로 드러냅니다. 이러한 정직한 고백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이어지며, 우리가 회개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시편 73편에서는 아삽이 악인의 형통함을 보며 갈등하지만,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며 영적 균형을 회복합니다. 그는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세상 기준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인생의 전부이심을 깨달은 신앙의 고백입니다. 이와 같이 두 번째 권은 고통, 유혹, 절망의 순간에도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회개의 길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상한 자를 멀리하지 않으시며, 부르짖는 자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시편은 눈물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혼란 속에서도 말씀을 붙드는 자가 결국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가게 됨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마음은 흔들리지만, 하나님은 결코 흔들리지 않으시며, 그분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다는 신앙의 고백이 시편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감사와 예배의 시편 (90~150편)

    세 번째 권은 감사와 예배,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는 시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편 90편은 모세의 기도로 시작하며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대조합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크심과 우리의 유한함을 동시에 일깨워 줍니다. 시편 91편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피난처 되심을 노래하며, 주의 날개 아래 거하는 자의 안전함을 확신하게 합니다.

    시편 100편은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여호와께 찬송하라고 명령합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 감사와 예배의 이유를 선포합니다. 시편 103편에서는 다윗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노래하며,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갚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처벌하지 않으셨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은혜에 대한 깊은 감격의 찬양입니다.

    시편 119편은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176절에 걸쳐 노래하는 말씀 중심의 시편입니다. 말씀은 등불이 되고 길이 되며, 고난 중에도 소망이 됩니다. 말씀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삶이 곧 복된 인생이라는 진리를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이 시편은 단지 율법에 대한 형식적 찬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는 삶이 얼마나 깊은 만족과 자유를 주는지를 고백합니다.

    시편의 마지막 부분은 ‘할렐루야’라는 찬양의 외침으로 가득합니다. 146편부터 150편까지는 찬양의 절정에 이르는 노래들로, 모든 호흡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 것을 선포합니다. 마지막 시편은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로 마무리되며, 인생 전체가 찬양이 되어야 함을 선언합니다. 이는 시편 전체의 흐름이 고난과 회개, 갈급함을 지나 결국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론

    시편은 인간의 모든 상황 속에서 드리는 정직한 기도와 찬양의 모음입니다. 시인은 기쁠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슬플 때는 눈물로 부르짖으며, 죄를 지었을 때는 회개하고, 위로가 필요할 때는 하나님의 품을 찾습니다. 이 모든 노래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진솔하게 나오는 믿음의 반응입니다. 시편은 우리의 언어를 대신해 주고, 우리가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까지도 하나님의 품으로 가져가게 만듭니다.

    시편은 예배자의 마음을 일깨우고,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서게 하며,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로 돌려놓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믿음, 회개의 눈물 속에서도 소망을 품는 신앙, 말씀을 사랑하고 그 안에 거하는 기쁨은 시편 전체를 통해 계속해서 강조되는 메시지입니다. 시편은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의 노래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의 신앙 여정을 위한 가장 솔직하고 깊은 동반자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 시편의 고백들이 실제가 되어, 모든 계절 속에서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으로 가득하길 바랍니다.





    시편 (Psalms)은 구약 성경에서 가장 긴 책으로, 총 150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저자가 시편을 기록했으며, 그중 다윗이 가장 많은 시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약 73편). 그 외에도 아삼, 고라 자손, 모세, 솔로몬 등이 저자로 등장하며, 일부 시편은 저자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 시편의 개요와 특징

    시편은 예배, 찬야, 기도, 탄원, 감사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표현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또한, 히브리 시가의 특징인 평행법(비슷한 의미를 반복하거나 대조하는 구조)이 자주 사용됩니다. 

    시편은 다섯 개의 책(권)으로 나뉘며, 각 권의 마지막에는 찬양으로 마무리되는 구절이 들어있습니다. 

    *제1권 (1-41편) : 주로 다윗의 시로 구성되어 있으며, 개인적인 기도와 탄원이 많습니다. 

    *제2권 (42-72편) : 공동체적 기도와 왕에 대한 시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3권 (73-89편) :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건과 고난을 반영한 시편이 많습니다. 

    *제4권 (90-106편) : 하나님의 영원성과 왕권에 대한 찬양이 중심을 이룹니다. 

    *제5권 (107-150편) : 감사와 찬양,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시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 주요 시편의 내용과 주제

    1)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경배 

    *시편 8편 :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돌보시는 은혜를 찬양하는 시입니다. 

    *시편 19편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시편 150편 : "할렐루야!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시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찬양의 절정입니다. 

    2) 탄원과 간구

    *시편 13편 :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이니까?"

    다윗의 절망과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시편 22편 :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예언하는 듯한 내용입니다. 

    *시편 51편 :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다윗이 밧세바 사건 이후 회개하며 부른 시입니다. 

    3) 감사와 신뢰 

    *시편 23편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에 대한 신뢰를 표현합니다. 

    *시편 34편 : "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하며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하나님께서 고난 중에도 함께하신단ㄴ 감사의 고백입니다. 

    *시편 136편 :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반복적인 후렴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강조합니다. 

    4) 메시아 예언과 하나님의 왕권

    *시편 2편 :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메시아 왕국에 대한 예언입니다. 

    *시편 110편 :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메시아의 승리와 영원한 왕권을 예언합니다. 

    5) 하나님의 율법과 지혜 

    *시편 1편 :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의 복을 강조합니다. 

    *시편 119편 :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따르는 자의 고백입니다. 

    3. 시편의 메세지와 신학적 의미

    1)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 시편은 단순한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강조합니다. 

    2) 기도와 찬양의 본보기 : 다양한 감정 (기쁨, 슬픔, 분노, 감사 등)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모습을 통해 신앙인의 기도와 찬양의 모범을 제시합니다. 

    3)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탄원고 절망의 시편들도 결국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소망으로 마무리됩니다.

    4) 메시아 예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고난, 왕권을 예언하는 중요한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4. 결론 

    시편은 개인과 공동체가 하나님을 향해 어떻게 기도하고 찬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성경의 보석 같은 책입니다. 고난과 환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태도를 배우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도록 돕습니다. 

    150편 전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기도의 깊이를










    시편 요약

    시편은 제2 성전시대(스룹바벨 성전시대)의 찬송가였다. 시편을 다섯가지로 구분하여 나눌 수 있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탄원시, 공동체나 개인이 부르는 찬양이 담긴 찬양시, 하나님의 왕권이나 이스라엘의 왕을 찬양하는 제왕시, 교훈과 지혜를 가르치는 지혜시,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를 배경으로 하는 예배시로 나눌 수 있다.

    시편은 모두 5권으로 편집되어 있다. 제1권은 1편-41편까지, 제2권은 42편-72편까지, 제3권은 73편-89편까지, 제4권은 90편-106편까지, 제5권은 107편-150편까지 다섯권으로 세분할 수 있다.

    시편은 모세에서 베벨론 포로 귀환까지 1000여년의 세월동안 지은 것으로 그중에 다윗의 시편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시편에 나타난 여려가지 시의 형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미스모르 : 순수시] [쉬르 : 노래 가사 문학시] [마스길 : 교훈과 명상시]

    [믹담 : 풍자시] [테필라 : 기도와 간구시] [테힐라 : 찬양시]

    시편을 기록한 기록자들과 그 편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다윗의 시 72편] [아삽의 시 12편] [고라자손의 시 10편] [솔로몬의 시 2편]

    [모세, 헤만, 에단, 에스라의 시 각 1편] [필자 미상의 시]




























































































































































































































































































































    시편 장별 요점정리

     

    시편 요약
    시편은 제2 성전시대(스룹바벨 성전시대)의 찬송가였다.
    시편을 다섯가지로 구분하여 나눌 수 있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탄원시, 공동체나 개인이 부르는 찬양이 담긴 찬양시, 하나님의 왕권이 이스라엘의 왕을 찬양하는 제왕시, 교훈과 지혜를 가르치는 지혜시,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를 배경으로 하는 예배시로 나눌 수 있다.

    시편은 모두 5권으로 편집되어 있다.
    제1권은 1편-41편
    제2권은 42편-72편|
    제3권은 73편-89편
    제4권은 90편-106편
    제5권은 107편-150편

    시편은 모세에서 베벨론 포로 귀환까지 1000여년의 세월동안 지은 것으로 그중에 다윗의 시편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시편에 나타난 여려가지 시의 형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미스모르 : 순수시]
    [쉬르 : 노래 가사 문학시]
    [마스길 : 교훈과 명상시]
    [믹담 : 풍자시]
    [테필라 : 기도와 간구시]
    [테힐라 : 찬양시]

    시편을 기록한 기록자들과 그 편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다윗의 시 72편]
    [아삽의 시 12편]
    [고라자손의 시 10편]
    [솔로몬의 시 2편]
    [모세, 헤만, 에단, 에스라의 시 각 1편]
    [필자 미상의 시]

    주요 내용 및 요점 정리
      제 1 권 (시편 1편 ~ 41편)
    1 ◈ 복 있는 사람 <주의 복>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사람이다.
    •악한 사람은 망할 것이다.
    2 ◈ 주께서 택한 왕 <경외의 주>
    •세상의 민족이 헛된 일을 꾸며도 주께서 택한 왕이 모두를 부순다.
    •그러므로 세상의 통치자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주를 경외하라.
    3 ◈ 다윗의 시 <구원의 기도>
    •나를 대적하는 사람이 많으니 주께서 나를 구원하소서.
    4 ◈ 다윗의 시 <주를 의지하라>
    •내가 곤궁에 빠지고 부르짖을 때 기도를 들어 주소서.
    •나를 평안히 쉬게 하시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5 ◈ 다윗의 시 <도움의 기도>
    •나의 탄식과 신음 소리를 듣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악한 것을 싫어하는 주께서 원수들을 정죄하고 정의로운 자에게 복을 주소서.
    6 ◈ 다윗의 시 <환난 날의 기도>
    •어려운 때에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구원하소서.
    •내 탄식과 기도를 주께서 응답하여 주소서.
    7 ◈ 다윗의 시 <정의로운 주>
    •내가 주께로 피하오니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내가 폭력과 악을 행하였다면 나를 벌하여 주소서.
    •악을 행하는 자를 멸망시키시고 정의를 선포하소서.
    •하나님은 사람이 한 일에 대해 심판하신다.
    8 ◈ 다윗의 시 <주의 놀라운 이름>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위엄에 대하여 찬양하다.
    •부족한 자신을 돌봐주신 주 하나님을 찬양하다.
    9 ◈ 다윗의 시 <찬양>
    •악인과 이방 나라를 물리치시고 공정하게 판결하시는 주를 찬양하라.
    •주를 찾고 의지하는 자를 버리시지 않고 피할 길을 주시는 주를 찬양하라.
    •공의의 하나님을 찬양하라.
    10 ◈ 다윗의 시 <도움을 구하는 기도>
    •악한 사람들이 형통하게 되는 것에 대해 불평하다.
    •악한 사람을 내버려 두지 마시고 그 악함을 벌하여 주소서.
    11 ◈ 다윗의 시 <주를 신뢰하다>
    •여호와는 의와 정의를 사랑하시며 악한 이들을 벌하신다.
    12 ◈ 다윗의 시 <도움을 구하는 기도>
    •주는 거짓말과 아첨과 간사한 입술을 가진 자로부터 보호하신다.
    13 ◈ 다윗의 시 <주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
    •원수에게서 나를 보호하시고 굽어보시고 응답하소서.
    14 ◈ 다윗의 시 <아무도 주를 무시하지 말라>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무신론자들이 있다.
    •주를 찾지 않는 악한 자가 있으나 그들은 의인을 두려워한다.
    15 ◈ 다윗의 시 <거룩한 예배자>
    •주의 장막과 거룩한 산에 머무는 자들은 누구인지 설명하다.
    16 ◈ 다윗의 순금시 <최선의 선택>
    •여호와는 나를 지키시며 내가 피할 분이시다.
    •주는 내게 복을 주시고 나와 함께하시니 기쁨이 넘친다.
    17 ◈ 다윗의 시 <정직한 사람의 기도도>
    •내 기도를 들어 주시고 응답하여 주소서.
    •내 원수와 대적에게서 나를 지켜주시고 건져주소서.
    18 ◈ 다윗의 시 <감사 찬양>
    •하나님은 나의 요새, 반석, 바위 방패시며 나를 건지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져주시고 나를 붙잡아 주시고 인도하신다.
    19 ◈ 다윗의 시 <창조주 하나님>
    •우주 만물의 모든 것은 창조의 하나님을 드러낸다.
    •주의 교훈과 계명은 어리석음을 깨우쳐주고 지키면 상을 받게 된다.
    20 ◈ 다윗의 시 <승리를 위한 기도>
    •주께서 세우신 왕을 지켜주시고 도와 주소서.
    •왕의 이름 위에 승리하게 하시고 왕의 소원을 이루게 하소서.
    21 ◈ 다윗의 시 <승리의 노래>
    •왕의 소원과 복을 주시고 승리케 하신 주께 감사 찬양 드립니다.
    22 ◈ 다윗의 시 <고난과 찬양>
    •고난 중에 주께 도움의 기도를 드리니 주께서 응답하셨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기도에 주님은 응답하시므로 그를 찬양하여라.
    23 ◈ 다윗의 시 <선한 목자>
    •주께서 나를 인도하시고 보살펴 주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항상 내게 채워 주시는 주와 영원히 살겠다.
    24 ◈ 다윗의 시 <거룩한 성전>
    •거룩한 사람이 주께 인정받고 성전에 들어간다.
    •성전에 들어오시는 하나님을 기뻐하며 맞이하라.
    25 ◈ 다윗의 시 <도움의 기도>
    •나의 길을 보여 주시고 마땅히 갈 길을 가르쳐 주소서.
    •내 괴로움을 살펴주시고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지켜주소서.
    26 ◈ 다윗의 시 <정직한 자의 기도>
    •주를 올바르게 믿고 정직하게 살아온 나를 지켜주소서.
    27 ◈ 다윗의 시 <찬양의 기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니 원수들이 두렵지 않다.
    •주께 부르짖고 기도할 때 나를 도와주시고 나를 인도하옵소서.
    28 ◈ 다윗의 시 <도움을 구하는 기도>
    •주께 부르짖을 때 나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나를 도와 주소서.
    •악한 이들에게서 나를 보호하시고 그들에게 벌을 내려 주소서.
    29 ◈ 다윗의 시 <영광의 찬양>
    •주의 목소리를 듣고 모든 것을 주께 영광돌려라.
    30 ◈ 다윗의 시 <감사 기도>
    •죽음에서 나를 고쳐주시고 나를 회복하신 주께 찬양하여라.
    •내 기도에 귀 기울이사 은혜를 베푸시고 주께 찬양하게 하소서.
    31 ◈ 다윗의 시 <보호를 위한 기도>
    •나의 반석, 요새이신 주께서 나를 건져주시고 피할 길로 인도하소서.
    •나의 고난과 슬픔을 아시는 주께서 나를 보호하소서.
    •주께 피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은총을 베푸소서.
    32 ◈ 다윗의 교훈 <용서의 기쁨>
    •주께 죄를 고백하니 내 죄악을 용서하셨다.
    33 ◈ 찬양 <찬양의 노래>
    •악기와 노래를 하며 주를 찬양하여라.
    •하나님은 모든 이들을 살피시고 그 행위를 모두 아신다.
    34 ◈ 다윗의 시 <주를 공경하라>
    •주를 찾으면 응답주시고 구원과 복으로 함께 하신다.
    •주를 경외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면 모든 고난에서 건져주신다.
    35 ◈ 다윗의 시 <원수에게서 보호하신다>
    •나와 다투는 자, 나를 헤치는 자에게서 보호하소서.
    •나를 멀리하지 마시며 나를 도와주소서.
    36 ◈ 다윗의 시 <악함과 선함>
    •악한 사람들은 남을 속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며 변함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신다.
    37 ◈ 다윗의 시 <주님을 신뢰하라>
    •악함과 불의를 기뻐하지 말고 선하게 살며 주를 의지하여라.
    •악은 사라지고 겸손한 자들만 남게 된다.
    •악한 사람들은 이 땅에서 멸망하며 사라지게 된다.
    38 ◈ 다윗의 시 <환난 때의 기도>
    •내 죄로 인해 분노하지 마시고 나의 탄원을 들어 주소서.
    •악한 자들과 원수들로부터 보호하시고 나를 구원하소서.
    39 ◈ 다윗의 시 <용서의 기도>
    •덧없는 짧은 인생길 나의 희망은 주님이시다.
    •내 죄악을 용서하시고 내 기도와 내 눈물에 응답하소서.
    40 ◈ 다윗의 시 <도움의 기도>
    •주님께서 모든 어려움과 멸망에서 안전하게 지켜주신다.
    •주께서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들에게서 항상 도와주시는 분이시다.
    41 ◈ 다윗의 시 <질병 중의 기도>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복이 있다.
    •주님은 병들었을 때 치료 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제 2 권 (시편 42편 ~ 72편)
    42 ◈ 고라 자손의 마스길 <하나님을 사모하다>
    •내가 주를 찾고 갈망하며 주를 찬양한다.
    43 ◈ 기도 <환난 날의 기도>
    •악한 사람들에게서 나를 보호하시고 나를 변호해 주소서.
    44 ◈ 고라 자손의 마스길 <도움의 기도>
    •선조들을 인도하신 것은 주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민족을 버리시고 조롱거리가 되게 하신 주님 도와주시고 인도하소서.
    45 ◈ 고라 자손의 마스길 <사랑의 노래>
    •하나님이 왕을 세워주셨고 기름을 부어 주셨다.
    •왕과 왕후와 자손들에 대한 찬양.
    46 ◈ 고라 자손의 시 <피난처인 주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며 구원자시다.
    47 ◈ 고라 자손의 시 <다스리시는 주>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48 ◈ 고라 자손의 시 <시온성 찬양>
    •위대하신 하나님의 시온성에서 구원으로 인도하신다.
    49 ◈ 고라 자손의 시 <부를 자랑 말라>
    •부를 자랑하지 말라 돈은 어리석은 것이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사람의 생명을 속량할 수는 없다.
    50 ◈ 아삽의 시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
    •감사로 제사를 드리고 주를 찾으면 구원이 있을 것이다.
    •악인들의 죄를 잠잠하지 않으시고 그 죄를 밝혀 주겠다.
    51 ◈ 다윗의 시 <용서의 기도>
    •내 죄를 씻어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며 나를 용서하옵소서.
    •내 죄악을 없애주시고 내 심령에 깨끗함을 갖게 하옵소서.
    52 ◈ 다윗의 마스길 <이웃 사랑>
    •남을 헤치고 포악하고 넘어뜨리는 자는 주께서 벌하실 것이다.
    53 ◈ 다윗의 마스길 <어리석은 자>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지만 주께서는 하늘에서 바라보신다.
    54 ◈ 다윗의 마스길 <신뢰의 주님>
    •무법자 폭력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를 갚아주시고 나를 도와주소서.
    55 ◈ 다윗의 마스길 <친구의 배신>
    •나를 굽어보시고 나의 간구와 기도에 응답하여 주소서.
    •나를 비난하고 미워하는 친구에게서 나를 구하소서.
    56 ◈ 다윗의 믹담시(금언시) <신뢰의 기도>
    •가드에서 블레셋인에게 잡힌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다.
    57 ◈ 다윗의 믹담시(금언시) <환란때의 찬양>
    •사울을 피해 동굴로 도망하였을 때 주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다.
    •다윗이 만민들 중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다.
    58 ◈ 다윗의 믹담시(금언시) <잘못 되었을 때 기도>
    •정의롭지 않은 통치자와 재판관들을 징계하소서.
    59 ◈ 다윗의 믹담시(금언시) <보호를 구하는 기도>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킬 때에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기도하다.
    •나를 죽이려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져주시고 그들을 징계하소서.
    60 ◈ 다윗의 믹담시(금언시) <주를 의지하라>
    •에돔인과 싸울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다.
    61 ◈ 다윗의 시 <하나님의 보호>
    •나의 피난처인 주께 나의 기도를 드리며 주의 날개 아래 피하게 하소서.
    62 ◈ 다윗의 시 <강하신 하나님>
    •우리의 피난처시며 요새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63 ◈ 다윗의 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을 찾고 그리워하며 주를 한결같이 찬양하라.
    •가까이에서 힘이 되어 주시는 주를 붙잡아라.
    64 ◈ 다윗의 시 <주의 도움>
    •악인과 원수에게서 나를 숨겨주시고 나를 보호하소서.
    65 ◈ 다윗의 시 <기도 응답>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다.
    66 ◈ 찬양의 시 <주께 영광>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드려라.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67 ◈ 찬송시 <주께 찬양>
    •복과 구원을 주신 주께 감사의 노래로 찬양하라.
    68 ◈ 다윗의 찬송시 <승리의 하나님>
    •승리의 찬가와 나라를 구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다.
    69 ◈ 다윗의 시 <신뢰의 하나님>
    •고통당하는 자와 비난받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소서.
    •나를 짖누르는 자들이 주의 징계를 받게 하소서.
    70 ◈ 다윗의 시 <위대하신 주>
    •나를 조소하며 수치 당하게 하는 자들로부터 나를 도와주소서.
    71 ◈ 보호를 구하는 기도 <구원의 주>
    •악에서 건져주시고 원수와 고발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져주소서.
    •노년이 되어도 나를 버리지 마시고 구원하소서.
    •나를 살려주시고 은혜주신 주를 찬양합니다.
    72 ◈ 솔로몬의 시 <왕을 위한 기도>
    •왕이 정의와 공의로 판단하며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를 위해 도움주게 하소서.
    •왕 앞에 원수들이 물러가고 이방 나라가 섬기게 하소서.
      제 3 권 (시편 73편 ~ 89편)
    73 ◈ 아삽의 시 <하나님은 선하시다>
    •주는 정직한 자와 정결한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사악한 사람들의 끝은 멸망에 이르게 된다.
    74 ◈ 아삽의 마스길(교훈시) <나라를 위한 기도>
    •이방 나라들이 침략하여 그대로 두지 마시고 그들을 멸하소서.
    •택하신 나라 버리지 마시고 언약을 기억하사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75 ◈ 아삽의 시 <주께 찬양>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신다.
    76 ◈ 아삽의 시 <승리의 주>
    •항상 승리하게 하시는 주 하나님을 경외하라.
    77 ◈ 아삽의 시 <환난 중에 계신 주>
    •고난 당할 때 주께 기도를 드리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다.
    78 ◈ 아삽의 마스길(교훈시) <주께서 하신 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조들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하였다.
    •하나님을 거역한 백성들을 주님은 참고 또 참으셨다.
    •애굽에 재앙을 내려 이스라엘을 구했지만 여전히 거역하였다.
    •주께서 유다 지파를 선택하셔서 시온성에 세우셨다.
    79 ◈ 아삽의 시 <예루살렘에 베푸신 구원>
    •예루살렘을 더럽힌 이방 나라에 주의 진노가 임하소서.
    •예루살렘을 위한 백성의 소리를 들어 주옵소서.
    80 ◈ 아삽의 시 <나라의 회복을 위한 기도>
    •주께서 이스라엘을 도와주시고 회복하여 주소서.
    81 ◈ 아삽의 시 < 찬양과 노래>
    •주께서 주신 축제일에 주를 찬양하고 노래하라.
    •다른 신을 믿지 말라 했는데 너희는 다른 길로 갔다.
    82 ◈ 아삽의 시 <재판장이신 주>
    •약자들에게 공의를 베풀고 악인으로부터 구해주라.
    •주 하나님은 최고의 재판관이시다.
    83 ◈ 아삽의 찬송시 <이방족에 대한 기도>
    •이방 나라가 주님과 맞서는 것을 침묵하지 마옵소서.
    •주의 원수의 나라들에 대해 벌을 내려 달라는 기도.
    84 ◈ 고라 자손의 시 <예배의 기쁨>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다.
    •주가 계신 성전 안에 머물기를 소원하다.
    85 ◈ 고라 자손의 시 <평화의 기도>
    •백성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주의 진노를 내리지 마옵소서.
    •평화를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주의 구원을 배푸소서.
    86 ◈ 다윗의 기도 <도움을 구하는 기도>
    •나의 고난과 기도에 사랑과 용서로 응답하소서.
    •주를 경외하며 영광돌리며 주를 따르게 하소서.
    87 ◈ 고라 자손의 찬송시 <시온의 영광>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하나님, 시온의 영광
    88 ◈ 고라 자손의 찬송시 <고난 중의 기도>
    •고난 중에 낙담 가운데 부르짖는 내 기도를 들어 주소서.
    89 ◈ 에스라 사람 에단의 마스길(교훈시) <주께서 하신 맹세>
    •주께서 다윗에게 왕위의 이어짐을 맹세하시다.
    •만군의 주시며 이 땅을 다스리시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제 4 권 (시편 90편 ~ 106편)
    90 ◈ 모세의 기도 <영원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 주셨지만 우리의 일생은 끝이 있다.
    •주의 분노와 진노는 알 수 없으므로 주를 찬양하고 즐거워하라.
    91 ◈ 피난처이신 하나님
    •주께서 피난처가 되어 주셔서 우리를 보호하신다.
    •주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다.
    92 ◈ 안식일에 부르는 찬송시 <주께 찬양하라>
    •높으신 주를 노래하며 주의 크신 일을 깨닫게 하신다.
    93 ◈ 왕이신 주
    •위엄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왕으로 영원히 다스리신다.
    94 ◈ 악한 자를 징계하시는 주
    •주는 오만한 자들과 악한 자들을 심판하신다.
    •주의 법을 가르치는 자는 평안을 주시고 악에서 건져주신다.
    95 ◈ 주께 예배하라
    •주를 찬양하고 노래하며 경배하라.
    96 ◈ 새 노래로 찬양하라
    •위대하신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과 영광을 돌려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라.
    97 ◈ 정의의 하나님
    •정의와 공평으로 온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를 경배하라.
    98 ◈ 기적의 노래
    •기적을 일으키시고 정의로 심판하시는 주를 찬양하라.
    99 ◈ 왕이신 주
    •거룩한 왕이시며 공평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100 ◈ 감사의 시 <감사의 찬양>
    •감사와 찬양으로 주 하나님께 나아가라.
    101 ◈ 다윗의 시 <왕의 약속>
    •악을 멀리하고 거짓없는 마음으로 다스릴 것을 약속합니다.
    102 ◈ 환란 중의 기도
    •환란과 고난이 있는 자에게 도움 있기를 주께 기도드리다.
    •주의 사랑으로 백성들은 평탄하게 살 것이다.
    103 ◈ 다윗의 시 <주의 사랑>
    •생명을 주시는 주의 크신 은혜를 찬양하라.
    •티끌같은 인생을 영원히 사랑하는 주를 찬양하라.
    104 ◈ 피조물을 돌보시는 주
    •세상 창조하시고 피조물을 돌보시는 주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라.
    105 ◈ 인도하신 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찬양하라.
    106 ◈ 용서의 주
    •악행을 저지를 이스라엘에게 주님은 기회를 주시고 피할 길을 주셨다.
    •하나님을 잊은 후손에게 고난을 주셨지만 주는 언약을 기억하셨다.
      제 5 권 (시편 107편 ~ 150편)
    107 ◈ 선대하시는 주
    •고난이나 위험으로부터 구함받은 자들은 주께 감사하라.
    •베푸시는 주의 인자하심과 구원하심에 감사하라.
    108 ◈ 다윗의 찬송시 <승리의 기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언제나 승리의 길을 간다.
    109 ◈ 다윗의 시 <도움의 기도>
    •원수와 악한 자들에게 저주가 내리기를 바라는 기도.
    •악인들과 적들이 망하기를 바라는 기도.
    110 ◈ 다윗의 시 <승리의 주>
    •주께서 왕을 임명하시고 주께서 승리하게 하신다.
    111 ◈ 주께 찬양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112 ◈ 복 주시는 주
    •정직하게 의를 행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복이 있다
    113 ◈ 도움 주시는 주
    •높으신 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하라
    114 ◈ 행하시는 주
    •주하나님께서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지셨다.
    115 ◈ 찬양 받으실 주
    •이방 나라의 우상은 헛된 것들이다.
    •우리의 방패되신 주를 의지하고 경외하면 복을 내려 주신다.
    116 ◈ 구원하신 주
    •고통과 죽음에서 간구하니 주께서 나를 살려 주셨다.
    117 ◈ 찬양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에 찬양하다.
    118 ◈ 자비하신 주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감사하라.
    •주를 의지하며 승리를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다.
    119 ◈ 주의 말씀을 찬양 <여호와의 말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
    •주의 계명과 율법과 율례와 규례와 교훈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
    120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도움을 구하는 기도>
    •고난 받을 때 주께 기도하니 주의 은혜가 임하였다.
    121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보호하시는 주 하나님>
    •우리의 보호자이신 여호와께서 항상 우리를 돌보신다.
    122 ◈ 다윗의 시 <찬양의 노래>
    •예루살렘에 평화가 있을 것이다.
    123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자비의 기도>
    •멸시 받는 자들에게 주의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124 ◈ 다윗의 시 <승리를 주신 주>
    •주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구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하시는 주시다.
    125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안전케 하시는 주>
    •주님은 선한 주의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 주신다.
    126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수확하게 하시는 주>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게 된다.
    127 ◈ 솔로몬의 시 <가정에 복을 주시는 주>
    •사람의 모든 수고도 주께서 도우지 않으면 소용없다.
    •자식은 주께서 주신 복이다.
    128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주를 경외하면 받는 복>
    •주님을 경외하는 가정은 복을 받게 된다.
    129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보호를 구하는 기도>
    •이스라엘의 원수에게 구함을 받기 위한 기도.
    130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환난 날에 구함을 받는 기도>
    •주께 자비를 구하고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기도.
    131 ◈ 다윗의 시 <신뢰의 주>
    •어린아이처럼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한다.
    132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함께 하시는 주>
    •성전을 위한 다윗의 맹세와 찬양.
    •다윗과 여호와의 성전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
    133 ◈ 다윗의 시 <형제 사랑>
    •형제와 자매들의 살아가는 모습에 주께서 복을 주시다.
    134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찬양>
    •성전을 섬기는 자들아 주께 찬양하라.
    135 ◈ 주의 자비를 찬양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주 하나님을 찬양하라.
    •주께서 우상을 섬기지 않는 자를 구하신다.
    136 ◈ 주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은 영원하다.
    137 ◈ 시온을 향한 그리움
    •포로가 된 백성이 시온을 무너뜨린 자들을 향해 복수를 원하다.
    138 ◈ 다윗의 시 <찬양>
    •부르짖을 때 응답하신 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다.
    139 ◈ 다윗의 시 <함께 하시는 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
    •주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영원한 길로 인도하신다.
    140 ◈ 다윗의 시 <도움을 구하는 기도>
    •악한 자들에게서 나를 보호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다.
    141 ◈ 다윗의 시 <보호를 위한 기도>
    •죄를 짓지 않게 하시고 악인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142 ◈ 다윗의 마스길 <도움을 구하는 기도>
    •나를 핍박하는 자에게서 안전하게 하시고 나를 지켜주소서.
    143 ◈ 다윗의 시 <위험 속의 기도>
    •고통과 고난이 있는 내가 주께 피하니 나를 건져주소서.
    144 ◈ 다윗의 시 <복을 받은 이스라엘>
    •원수에게서 승리하게 하신 주 하나님.
    •백성을 보호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
    145 ◈ 다윗의 찬송시 <자비하신 주>
    •왕이신 주 하나님을 송축하고 찬양하라.
    •자비로우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 하나님을 찬양하라.
    146 ◈ 주를 찬양하라
    •약한 자를 도우시고 이끌어주시는 주를 찬양하라.
    147 ◈ 주를 찬양하라
    •택한 자를 도우시고 약한자를 도우시는 주 하나님을 찬양하라.
    148 ◈ 주를 찬양하라
    •모든 피조물과 만물을 지으신 주 하나님을 찬양하라.
    149 ◈ 주를 찬양하라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주 하나님을 온몸으로 찬양하라.
    150 ◈ 주를 찬양하라.
    •모든 만물과 악기를 이용해 노래하며 주를 찬양하라.
     













    시편 요약

    시편은 제2 성전시대(스룹바벨 성전시대)의 찬송가였다. 시편을 다섯가지로 구분하여 나눌 수 있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탄원시, 공동체나 개인이 부르는 찬양이 담긴 찬양시, 하나님의 왕권이나 이스라엘의 왕을 찬양하는 제왕시, 교훈과 지혜를 가르치는 지혜시,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를 배경으로 하는 예배시로 나눌 수 있다.

    시편은 모두 5권으로 편집되어 있다. 제1권은 1편-41편까지, 제2권은 42편-72편까지, 제3권은 73편-89편까지, 제4권은 90편-106편까지, 제5권은 107편-150편까지 다섯권으로 세분할 수 있다.

    시편은 모세에서 베벨론 포로 귀환까지 1000여년의 세월동안 지은 것으로 그중에 다윗의 시편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시편에 나타난 여려가지 시의 형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미스모르 : 순수시] [쉬르 : 노래 가사 문학시] [마스길 : 교훈과 명상시]

    [믹담 : 풍자시] [테필라 : 기도와 간구시] [테힐라 : 찬양시]

    시편을 기록한 기록자들과 그 편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다윗의 시 72편] [아삽의 시 12편] [고라자손의 시 10편] [솔로몬의 시 2편]

    [모세, 헤만, 에단, 에스라의 시 각 1편] [필자 미상의 시]

    주요 내용 및 요점 정리


    제 1 권 (시편 1편 ~ 41편)

    1

    ◈ 복 있는 사람 <주의 복>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사람이다.

    •악한 사람은 망할 것이다.

    2

    ◈ 주께서 택한 왕 <경외의 주>

    •세상의 민족이 헛된 일을 꾸며도 주께서 택한 왕이 모두를 부순다.

    •그러므로 세상의 통치자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주를 경외하라.

    3

    ◈ 다윗의 시 <구원의 기도>

    •나를 대적하는 사람이 많으니 주께서 나를 구원하소서.

    4

    ◈ 다윗의 시 <주를 의지하라>

    •내가 곤궁에 빠지고 부르짖을 때 기도를 들어 주소서.

    •나를 평안히 쉬게 하시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5

    ◈ 다윗의 시 <도움의 기도>

    •나의 탄식과 신음 소리를 듣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악한 것을 싫어하는 주께서 원수들을 정죄하고 정의로운 자에게 복을 주소서.

    6

    ◈ 다윗의 시 <환난 날의 기도>

    •어려운 때에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구원하소서.

    •내 탄식과 기도를 주께서 응답하여 주소서.

    7

    ◈ 다윗의 시 <정의로운 주>

    •내가 주께로 피하오니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내가 폭력과 악을 행하였다면 나를 벌하여 주소서.

    •악을 행하는 자를 멸망시키시고 정의를 선포하소서.

    •하나님은 사람이 한 일에 대해 심판하신다.

    8

    ◈ 다윗의 시 <주의 놀라운 이름>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위엄에 대하여 찬양하다.

    •부족한 자신을 돌봐주신 주 하나님을 찬양하다.

    9

    ◈ 다윗의 시 <찬양>

    •악인과 이방 나라를 물리치시고 공정하게 판결하시는 주를 찬양하라.

    •주를 찾고 의지하는 자를 버리시지 않고 피할 길을 주시는 주를 찬양하라.

    •공의의 하나님을 찬양하라.

    10

    ◈ 다윗의 시 <도움을 구하는 기도>

    •악한 사람들이 형통하게 되는 것에 대해 불평하다.

    •악한 사람을 내버려 두지 마시고 그 악함을 벌하여 주소서.

    11

    ◈ 다윗의 시 <주를 신뢰하다>

    •여호와는 의와 정의를 사랑하시며 악한 이들을 벌하신다.

    12

    ◈ 다윗의 시 <도움을 구하는 기도>

    •주는 거짓말과 아첨과 간사한 입술을 가진 자로부터 보호하신다.

    13

    ◈ 다윗의 시 <주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

    •원수에게서 나를 보호하시고 굽어보시고 응답하소서.

    14

    ◈ 다윗의 시 <아무도 주를 무시하지 말라>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무신론자들이 있다.

    •주를 찾지 않는 악한 자가 있으나 그들은 의인을 두려워한다.

    15

    ◈ 다윗의 시 <거룩한 예배자>

    •주의 장막과 거룩한 산에 머무는 자들은 누구인지 설명하다.

    16

    ◈ 다윗의 순금시 <최선의 선택>

    •여호와는 나를 지키시며 내가 피할 분이시다.

    •주는 내게 복을 주시고 나와 함께하시니 기쁨이 넘친다.

    17

    ◈ 다윗의 시 <정직한 사람의 기도도>

    •내 기도를 들어 주시고 응답하여 주소서.

    •내 원수와 대적에게서 나를 지켜주시고 건져주소서.

    18

    ◈ 다윗의 시 <감사 찬양>

    •하나님은 나의 요새, 반석, 바위 방패시며 나를 건지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져주시고 나를 붙잡아 주시고 인도하신다.

    19

    ◈ 다윗의 시 <창조주 하나님>

    •우주 만물의 모든 것은 창조의 하나님을 드러낸다.

    •주의 교훈과 계명은 어리석음을 깨우쳐주고 지키면 상을 받게 된다.

    20

    ◈ 다윗의 시 <승리를 위한 기도>

    •주께서 세우신 왕을 지켜주시고 도와 주소서.

    •왕의 이름 위에 승리하게 하시고 왕의 소원을 이루게 하소서.

    21

    ◈ 다윗의 시 <승리의 노래>

    •왕의 소원과 복을 주시고 승리케 하신 주께 감사 찬양 드립니다.

    22

    ◈ 다윗의 시 <고난과 찬양>

    •고난 중에 주께 도움의 기도를 드리니 주께서 응답하셨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기도에 주님은 응답하시므로 그를 찬양하여라.

    23

    ◈ 다윗의 시 <선한 목자>

    •주께서 나를 인도하시고 보살펴 주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항상 내게 채워 주시는 주와 영원히 살겠다.

    24

    ◈ 다윗의 시 <거룩한 성전>

    •거룩한 사람이 주께 인정받고 성전에 들어간다.

    •성전에 들어오시는 하나님을 기뻐하며 맞이하라.

    25

    ◈ 다윗의 시 <도움의 기도>

    •나의 길을 보여 주시고 마땅히 갈 길을 가르쳐 주소서.

    •내 괴로움을 살펴주시고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지켜주소서.

    26

    ◈ 다윗의 시 <정직한 자의 기도>

    •주를 올바르게 믿고 정직하게 살아온 나를 지켜주소서.

    27

    ◈ 다윗의 시 <찬양의 기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니 원수들이 두렵지 않다.

    •주께 부르짖고 기도할 때 나를 도와주시고 나를 인도하옵소서.

    28

    ◈ 다윗의 시 <도움을 구하는 기도>

    •주께 부르짖을 때 나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나를 도와 주소서.

    •악한 이들에게서 나를 보호하시고 그들에게 벌을 내려 주소서.

    29

    ◈ 다윗의 시 <영광의 찬양>

    •주의 목소리를 듣고 모든 것을 주께 영광돌려라.

    30

    ◈ 다윗의 시 <감사 기도>

    •죽음에서 나를 고쳐주시고 나를 회복하신 주께 찬양하여라.

    •내 기도에 귀 기울이사 은혜를 베푸시고 주께 찬양하게 하소서.

    31

    ◈ 다윗의 시 <보호를 위한 기도>

    •나의 반석, 요새이신 주께서 나를 건져주시고 피할 길로 인도하소서.

    •나의 고난과 슬픔을 아시는 주께서 나를 보호하소서.

    •주께 피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은총을 베푸소서.

    32

    ◈ 다윗의 교훈 <용서의 기쁨>

    •주께 죄를 고백하니 내 죄악을 용서하셨다.

    33

    ◈ 찬양 <찬양의 노래>

    •악기와 노래를 하며 주를 찬양하여라.

    •하나님은 모든 이들을 살피시고 그 행위를 모두 아신다.

    34

    ◈ 다윗의 시 <주를 공경하라>

    •주를 찾으면 응답주시고 구원과 복으로 함께 하신다.

    •주를 경외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면 모든 고난에서 건져주신다.

    35

    ◈ 다윗의 시 <원수에게서 보호하신다>

    •나와 다투는 자, 나를 헤치는 자에게서 보호하소서.

    •나를 멀리하지 마시며 나를 도와주소서.

    36

    ◈ 다윗의 시 <악함과 선함>

    •악한 사람들은 남을 속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며 변함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신다.

    37

    ◈ 다윗의 시 <주님을 신뢰하라>

    •악함과 불의를 기뻐하지 말고 선하게 살며 주를 의지하여라.

    •악은 사라지고 겸손한 자들만 남게 된다.

    •악한 사람들은 이 땅에서 멸망하며 사라지게 된다.

    38

    ◈ 다윗의 시 <환난 때의 기도>

    •내 죄로 인해 분노하지 마시고 나의 탄원을 들어 주소서.

    •악한 자들과 원수들로부터 보호하시고 나를 구원하소서.

    39

    ◈ 다윗의 시 <용서의 기도>

    •덧없는 짧은 인생길 나의 희망은 주님이시다.

    •내 죄악을 용서하시고 내 기도와 내 눈물에 응답하소서.

    40

    ◈ 다윗의 시 <도움의 기도>

    •주님께서 모든 어려움과 멸망에서 안전하게 지켜주신다.

    •주께서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들에게서 항상 도와주시는 분이시다.

    41

    ◈ 다윗의 시 <질병 중의 기도>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복이 있다.

    •주님은 병들었을 때 치료 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제 2 권 (시편 42편 ~ 72편)

    42

    ◈ 고라 자손의 마스길 <하나님을 사모하다>

    •내가 주를 찾고 갈망하며 주를 찬양한다.

    43

    ◈ 기도 <환난 날의 기도>

    •악한 사람들에게서 나를 보호하시고 나를 변호해 주소서.

    44

    ◈ 고라 자손의 마스길 <도움의 기도>

    •선조들을 인도하신 것은 주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민족을 버리시고 조롱거리가 되게 하신 주님 도와주시고 인도하소서.

    45

    ◈ 고라 자손의 마스길 <사랑의 노래>

    •하나님이 왕을 세워주셨고 기름을 부어 주셨다.

    •왕과 왕후와 자손들에 대한 찬양.

    46

    ◈ 고라 자손의 시 <피난처인 주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며 구원자시다.

    47

    ◈ 고라 자손의 시 <다스리시는 주>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48

    ◈ 고라 자손의 시 <시온성 찬양>

    •위대하신 하나님의 시온성에서 구원으로 인도하신다.

    49

    ◈ 고라 자손의 시 <부를 자랑 말라>

    •부를 자랑하지 말라 돈은 어리석은 것이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사람의 생명을 속량할 수는 없다.

    50

    ◈ 아삽의 시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

    •감사로 제사를 드리고 주를 찾으면 구원이 있을 것이다.

    •악인들의 죄를 잠잠하지 않으시고 그 죄를 밝혀 주겠다.

    51

    ◈ 다윗의 시 <용서의 기도>

    •내 죄를 씻어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며 나를 용서하옵소서.

    •내 죄악을 없애주시고 내 심령에 깨끗함을 갖게 하옵소서.

    52

    ◈ 다윗의 마스길 <이웃 사랑>

    •남을 헤치고 포악하고 넘어뜨리는 자는 주께서 벌하실 것이다.

    53

    ◈ 다윗의 마스길 <어리석은 자>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지만 주께서는 하늘에서 바라보신다.

    54

    ◈ 다윗의 마스길 <신뢰의 주님>

    •무법자 폭력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를 갚아주시고 나를 도와주소서.

    55

    ◈ 다윗의 마스길 <친구의 배신>

    •나를 굽어보시고 나의 간구와 기도에 응답하여 주소서.

    •나를 비난하고 미워하는 친구에게서 나를 구하소서.

    56

    ◈ 다윗의 믹담시(금언시) <신뢰의 기도>

    •가드에서 블레셋인에게 잡힌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다.

    57

    ◈ 다윗의 믹담시(금언시) <환란때의 찬양>

    •사울을 피해 동굴로 도망하였을 때 주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다.

    •다윗이 만민들 중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다.

    58

    ◈ 다윗의 믹담시(금언시) <잘못 되었을 때 기도>

    •정의롭지 않은 통치자와 재판관들을 징계하소서.

    59

    ◈ 다윗의 믹담시(금언시) <보호를 구하는 기도>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킬 때에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기도하다.

    •나를 죽이려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져주시고 그들을 징계하소서.

    60

    ◈ 다윗의 믹담시(금언시) <주를 의지하라>

    •에돔인과 싸울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다.

    61

    ◈ 다윗의 시 <하나님의 보호>

    •나의 피난처인 주께 나의 기도를 드리며 주의 날개 아래 피하게 하소서.

    62

    ◈ 다윗의 시 <강하신 하나님>

    •우리의 피난처시며 요새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63

    ◈ 다윗의 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을 찾고 그리워하며 주를 한결같이 찬양하라.

    •가까이에서 힘이 되어 주시는 주를 붙잡아라.

    64

    ◈ 다윗의 시 <주의 도움>

    •악인과 원수에게서 나를 숨겨주시고 나를 보호하소서.

    65

    ◈ 다윗의 시 <기도 응답>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다.

    66

    ◈ 찬양의 시 <주께 영광>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드려라.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67

    ◈ 찬송시 <주께 찬양>

    •복과 구원을 주신 주께 감사의 노래로 찬양하라.

    68

    ◈ 다윗의 찬송시 <승리의 하나님>

    •승리의 찬가와 나라를 구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다.

    69

    ◈ 다윗의 시 <신뢰의 하나님>

    •고통당하는 자와 비난받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소서.

    •나를 짖누르는 자들이 주의 징계를 받게 하소서.

    70

    ◈ 다윗의 시 <위대하신 주>

    •나를 조소하며 수치 당하게 하는 자들로부터 나를 도와주소서.

    71

    ◈ 보호를 구하는 기도 <구원의 주>

    •악에서 건져주시고 원수와 고발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져주소서.

    •노년이 되어도 나를 버리지 마시고 구원하소서.

    •나를 살려주시고 은혜주신 주를 찬양합니다.

    72

    ◈ 솔로몬의 시 <왕을 위한 기도>

    •왕이 정의와 공의로 판단하며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를 위해 도움주게 하소서.

    •왕 앞에 원수들이 물러가고 이방 나라가 섬기게 하소서.


    제 3 권 (시편 73편 ~ 89편)

    73

    ◈ 아삽의 시 <하나님은 선하시다>

    •주는 정직한 자와 정결한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사악한 사람들의 끝은 멸망에 이르게 된다.

    74

    ◈ 아삽의 마스길(교훈시) <나라를 위한 기도>

    •이방 나라들이 침략하여 그대로 두지 마시고 그들을 멸하소서.

    •택하신 나라 버리지 마시고 언약을 기억하사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75

    ◈ 아삽의 시 <주께 찬양>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신다.

    76

    ◈ 아삽의 시 <승리의 주>

    •항상 승리하게 하시는 주 하나님을 경외하라.

    77

    ◈ 아삽의 시 <환난 중에 계신 주>

    •고난 당할 때 주께 기도를 드리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다.

    78

    ◈ 아삽의 마스길(교훈시) <주께서 하신 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조들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하였다.

    •하나님을 거역한 백성들을 주님은 참고 또 참으셨다.

    •애굽에 재앙을 내려 이스라엘을 구했지만 여전히 거역하였다.

    •주께서 유다 지파를 선택하셔서 시온성에 세우셨다.

    79

    ◈ 아삽의 시 <예루살렘에 베푸신 구원>

    •예루살렘을 더럽힌 이방 나라에 주의 진노가 임하소서.

    •예루살렘을 위한 백성의 소리를 들어 주옵소서.

    80

    ◈ 아삽의 시 <나라의 회복을 위한 기도>

    •주께서 이스라엘을 도와주시고 회복하여 주소서.

    81

    ◈ 아삽의 시 < 찬양과 노래>

    •주께서 주신 축제일에 주를 찬양하고 노래하라.

    •다른 신을 믿지 말라 했는데 너희는 다른 길로 갔다.

    82

    ◈ 아삽의 시 <재판장이신 주>

    •약자들에게 공의를 베풀고 악인으로부터 구해주라.

    •주 하나님은 최고의 재판관이시다.

    83

    ◈ 아삽의 찬송시 <이방족에 대한 기도>

    •이방 나라가 주님과 맞서는 것을 침묵하지 마옵소서.

    •주의 원수의 나라들에 대해 벌을 내려 달라는 기도.

    84

    ◈ 고라 자손의 시 <예배의 기쁨>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다.

    •주가 계신 성전 안에 머물기를 소원하다.

    85

    ◈ 고라 자손의 시 <평화의 기도>

    •백성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주의 진노를 내리지 마옵소서.

    •평화를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주의 구원을 배푸소서.

    86

    ◈ 다윗의 기도 <도움을 구하는 기도>

    •나의 고난과 기도에 사랑과 용서로 응답하소서.

    •주를 경외하며 영광돌리며 주를 따르게 하소서.

    87

    ◈ 고라 자손의 찬송시 <시온의 영광>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하나님, 시온의 영광

    88

    ◈ 고라 자손의 찬송시 <고난 중의 기도>

    •고난 중에 낙담 가운데 부르짖는 내 기도를 들어 주소서.

    89

    ◈ 에스라 사람 에단의 마스길(교훈시) <주께서 하신 맹세>

    •주께서 다윗에게 왕위의 이어짐을 맹세하시다.

    •만군의 주시며 이 땅을 다스리시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제 4 권 (시편 90편 ~ 106편)

    90

    ◈ 모세의 기도 <영원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 주셨지만 우리의 일생은 끝이 있다.

    •주의 분노와 진노는 알 수 없으므로 주를 찬양하고 즐거워하라.

    91

    ◈ 피난처이신 하나님

    •주께서 피난처가 되어 주셔서 우리를 보호하신다.

    •주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다.

    92

    ◈ 안식일에 부르는 찬송시 <주께 찬양하라>

    •높으신 주를 노래하며 주의 크신 일을 깨닫게 하신다.

    93

    ◈ 왕이신 주

    •위엄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왕으로 영원히 다스리신다.

    94

    ◈ 악한 자를 징계하시는 주

    •주는 오만한 자들과 악한 자들을 심판하신다.

    •주의 법을 가르치는 자는 평안을 주시고 악에서 건져주신다.

    95

    ◈ 주께 예배하라

    •주를 찬양하고 노래하며 경배하라.

    96

    ◈ 새 노래로 찬양하라

    •위대하신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과 영광을 돌려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라.

    97

    ◈ 정의의 하나님

    •정의와 공평으로 온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를 경배하라.

    98

    ◈ 기적의 노래

    •기적을 일으키시고 정의로 심판하시는 주를 찬양하라.

    99

    ◈ 왕이신 주

    •거룩한 왕이시며 공평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100

    ◈ 감사의 시 <감사의 찬양>

    •감사와 찬양으로 주 하나님께 나아가라.

    101

    ◈ 다윗의 시 <왕의 약속>

    •악을 멀리하고 거짓없는 마음으로 다스릴 것을 약속합니다.

    102

    ◈ 환란 중의 기도

    •환란과 고난이 있는 자에게 도움 있기를 주께 기도드리다.

    •주의 사랑으로 백성들은 평탄하게 살 것이다.

    103

    ◈ 다윗의 시 <주의 사랑>

    •생명을 주시는 주의 크신 은혜를 찬양하라.

    •티끌같은 인생을 영원히 사랑하는 주를 찬양하라.

    104

    ◈ 피조물을 돌보시는 주

    •세상 창조하시고 피조물을 돌보시는 주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라.

    105

    ◈ 인도하신 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찬양하라.

    106

    ◈ 용서의 주

    •악행을 저지를 이스라엘에게 주님은 기회를 주시고 피할 길을 주셨다.

    •하나님을 잊은 후손에게 고난을 주셨지만 주는 언약을 기억하셨다.


    제 5 권 (시편 107편 ~ 150편)

    107

    ◈ 선대하시는 주

    •고난이나 위험으로부터 구함받은 자들은 주께 감사하라.

    •베푸시는 주의 인자하심과 구원하심에 감사하라.

    108

    ◈ 다윗의 찬송시 <승리의 기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언제나 승리의 길을 간다.

    109

    ◈ 다윗의 시 <도움의 기도>

    •원수와 악한 자들에게 저주가 내리기를 바라는 기도.

    •악인들과 적들이 망하기를 바라는 기도.

    110

    ◈ 다윗의 시 <승리의 주>

    •주께서 왕을 임명하시고 주께서 승리하게 하신다.

    111

    ◈ 주께 찬양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112

    ◈ 복 주시는 주

    •정직하게 의를 행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복이 있다

    113

    ◈ 도움 주시는 주

    •높으신 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하라

    114

    ◈ 행하시는 주

    •주하나님께서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지셨다.

    115

    ◈ 찬양 받으실 주

    •이방 나라의 우상은 헛된 것들이다.

    •우리의 방패되신 주를 의지하고 경외하면 복을 내려 주신다.

    116

    ◈ 구원하신 주

    •고통과 죽음에서 간구하니 주께서 나를 살려 주셨다.

    117

    ◈ 찬양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에 찬양하다.

    118

    ◈ 자비하신 주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감사하라.

    •주를 의지하며 승리를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다.

    119

    ◈ 주의 말씀을 찬양 <여호와의 말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

    •주의 계명과 율법과 율례와 규례와 교훈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

    120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도움을 구하는 기도>

    •고난 받을 때 주께 기도하니 주의 은혜가 임하였다.

    121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보호하시는 주 하나님>

    •우리의 보호자이신 여호와께서 항상 우리를 돌보신다.

    122

    ◈ 다윗의 시 <찬양의 노래>

    •예루살렘에 평화가 있을 것이다.

    123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자비의 기도>

    •멸시 받는 자들에게 주의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124

    ◈ 다윗의 시 <승리를 주신 주>

    •주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구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하시는 주시다.

    125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안전케 하시는 주>

    •주님은 선한 주의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 주신다.

    126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수확하게 하시는 주>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게 된다.

    127

    ◈ 솔로몬의 시 <가정에 복을 주시는 주>

    •사람의 모든 수고도 주께서 도우지 않으면 소용없다.

    •자식은 주께서 주신 복이다.

    128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주를 경외하면 받는 복>

    •주님을 경외하는 가정은 복을 받게 된다.

    129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보호를 구하는 기도>

    •이스라엘의 원수에게 구함을 받기 위한 기도.

    130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환난 날에 구함을 받는 기도>

    •주께 자비를 구하고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기도.

    131

    ◈ 다윗의 시 <신뢰의 주>

    •어린아이처럼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한다.

    132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함께 하시는 주>

    •성전을 위한 다윗의 맹세와 찬양.

    •다윗과 여호와의 성전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

    133

    ◈ 다윗의 시 <형제 사랑>

    •형제와 자매들의 살아가는 모습에 주께서 복을 주시다.

    134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찬양>

    •성전을 섬기는 자들아 주께 찬양하라.

    135

    ◈ 주의 자비를 찬양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주 하나님을 찬양하라.

    •주께서 우상을 섬기지 않는 자를 구하신다.

    136

    ◈ 주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은 영원하다.

    137

    ◈ 시온을 향한 그리움

    •포로가 된 백성이 시온을 무너뜨린 자들을 향해 복수를 원하다.

    138

    ◈ 다윗의 시 <찬양>

    •부르짖을 때 응답하신 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다.

    139

    ◈ 다윗의 시 <함께 하시는 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

    •주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영원한 길로 인도하신다.

    140

    ◈ 다윗의 시 <도움을 구하는 기도>

    •악한 자들에게서 나를 보호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다.

    141

    ◈ 다윗의 시 <보호를 위한 기도>

    •죄를 짓지 않게 하시고 악인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142

    ◈ 다윗의 마스길 <도움을 구하는 기도>

    •나를 핍박하는 자에게서 안전하게 하시고 나를 지켜주소서.

    143

    ◈ 다윗의 시 <위험 속의 기도>

    •고통과 고난이 있는 내가 주께 피하니 나를 건져주소서.

    144

    ◈ 다윗의 시 <복을 받은 이스라엘>

    •원수에게서 승리하게 하신 주 하나님.

    •백성을 보호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

    145

    ◈ 다윗의 찬송시 <자비하신 주>

    •왕이신 주 하나님을 송축하고 찬양하라.

    •자비로우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 하나님을 찬양하라.

    146

    ◈ 주를 찬양하라

    •약한 자를 도우시고 이끌어주시는 주를 찬양하라.

    147

    ◈ 주를 찬양하라

    •택한 자를 도우시고 약한자를 도우시는 주 하나님을 찬양하라.

    148

    ◈ 주를 찬양하라

    •모든 피조물과 만물을 지으신 주 하나님을 찬양하라.

    149

    ◈ 주를 찬양하라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주 하나님을 온몸으로 찬양하라.

    150

    ◈ 주를 찬양하라.

    •모든 만물과 악기를 이용해 노래하며 주를 찬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