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송 성구 자료(05-26-2024 /


파트리스 성구 암송 자료

05-26-2024(주일)
암송 성구 #. 1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06-02-2024(주일)
암송 성구 #. 2 사도행전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Salvation is found in no one else,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to men by which we must be saved.


06-09-2024(주일)
암송 성구 #. 3 에베소서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06-16-2024(주일)
암송 성구 #. 4 고린도후서 5: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So we make it our goal to please him, whether we are at home in the bodyor away from it.


06-23-2024(주일)
암송 성구 #. 5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having a form of godlinessbut denying its power. Have nothing to do with them.


06-30-2024(주일)
암송 성구 #. 6 고린도전서 9:16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Yet when I preach the gospel, I cannot boast, for I am compelled to preach. Woe to me if I do not preach the gospel!


07-07-2024(주일)
암송 성구 #. 7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07-14-2024(주일)
암송 성구 #. 8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Follow my example, 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t.


07-21-2024(주일)
암송 성구 #. 9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You diligently study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by them you possess eternal life. These are the Scriptures that testify about me.


07-28-2024(주일)
암송 성구 #. 10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08-04-2024(주일)
암송 성구 #. 11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What good will it be for a man if he gains the whole world, yet forfeits his soul? Or what can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08-11-2024(주일)
암송 성구 #. 12 베드로후서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Through these he has given us his very great and precious promises, so that through them you may participate in the divine nature and escape the corruption in the world caused by evil desires.

08-18-2024(주일)
암송 성구 #. 13  아모스 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But let justiceroll on like a river, righteousness like a never-failing stream!


08-25-2024(주일)
암송 성구 #. 14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Therefore, my dear friends, as you have always obeyed--not only in my presence,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with fear and trembling,


09-01-2024(주일)
암송 성구 #. 15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but of righteousness, peace and joyin the Holy Spirit,


09-08-2024(주일)
암송 성구 #. 16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09-15-2024(주일)
암송 성구 #. 17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Th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09-22-2024(주일)
암송 성구 #. 18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09-29-2024(주일)
암송 성구 #. 19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10-06-2024(주일)
암송 성구 #. 20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10-13-2024(주일)
암송 성구 #. 21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10-20-2024(주일)
암송 성구 #. 22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10-27-2024(주일)
암송 성구 #.23  고린도후서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For he says, "In the time of my favor I heard you, and in the day of salvation I helped you." I tell you,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11-03-2024(주일)
암송 성구 #.24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11-10-2024(주일) 구원의 확신
암송 성구 #.25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And this is the testimony: God has given us eternal life, and this lifeis in his Son.
He who has the Son has life; he who does not have the Son of God does not have life.

11-17-2024(주일) 기도 응답의 확신
암송 성구 #. 26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Until now you have not asked for anything in my name. Ask and you will receive, and your joywill be complete.

11-24-2024(주일) 승리의 확신
암송 성구 #. 27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No temptationhas seized you except what is common to man. And God is faithful; he will not let you be tempted beyond what you can bear. But when you are tempted, he will also provide a wayout so that you can stand up under it.


12-01-2024(주일) 사죄의 확신
암송 성구 #. 28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

12-08-2024(주일) 인도의 확신
암송 성구 #. 29  잠언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and lean not on your own understanding;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12-15-2024(주일)
암송 성구 #. 30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If a man remains in me and I in him, he will bear much fruit;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12-22-2024(주일)
암송 성구 #. 31  사도행전 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Now I commit you to God and to the word of his grace, which can build you up and give you an inheritanceamong all those who are sanctified.


12-29-2024(주일)
암송 성구 #. 32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because those who are led by the Spirit of God are sons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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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5-2025(주일)
암송 성구 #. 33  고린도후서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01-12-2025(주일)
암송 성구 #. 34  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But if we walk in the light, as he is in the light, we have fellowshipwith one another, and the bloodof Jesus, his Son, purifies us from all sin.


01-19-2025(주일)
암송성구 #. 35  베드로전서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01-26-2025(주일)

암송성구 #. 36. 고린도후서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Each man should give what he has decided in his heart to give, not reluctantly or under compulsion, for God loves a cheerful giver.

02-2-2025(주일)

암송성구 #. 37.  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y is a temple of the Holy Spirit, who is in you, whom you have received from God? You are not your own;


02-9-2025(주일)

암송성구 #. 38.  베드로전서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영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If you are insulted because of the name of Christ, you are blessed, for the Spirit of glory and of God rests on you


02-16-2025(주일)
암송성구 #. 39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The LORD bless you and keep you;
the LORD make his face shine upon you and be gracious to you;
the LORD turn his face toward you and give you peace.


02-23-2025(주일)
암송 성구 #. 40  요한복음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ask whatever you wish, and it will be given you.


03-02-2025(주일)
암송 성구 #. 41  고린도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Now the Lord is the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freedom.


03-09-2025(주일)
암송 성구 #. 42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03-16-2025(주일)
암송 성구 #. 43 역대상 16:11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찌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찌어다.
Look to the LORD and his strength; seek his face always.

03-23-2025(주일)
암송성구 #.44 에베소서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And pray in the Spirit on all occasions with all kinds of prayers and requests. With this in mind, be alert and always keep on praying for all the saints.

03-30-2025(주일)
암송성구 #.45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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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2024(주일)
암송 성구 #. 1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06-02-2024(주일)
암송 성구 #. 2 사도행전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Salvation is found in no one else,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to men by which we must be saved.

06-09-2024(주일)
암송 성구 #. 3 에베소서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06-16-2024(주일)
암송 성구 #. 4 고린도후서 5: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So we make it our goal to please him, whether we are at home in the body or away from it.


06-23-2024(주일)
암송 성구 #. 5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having a form of godliness but denying its power. Have nothing to do with them.

06-30-2024(주일)
암송 성구 #. 6 고린도전서 9:16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Yet when I preach the gospel, I cannot boast, for I am compelled to preach. Woe to me if I do not preach the gospel!

07-07-2024(주일)
암송 성구 #. 7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07-14-2024(주일)
암송 성구 #. 8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Follow my example, 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t.


07-21-2024(주일)
암송 성구 #. 9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You diligently study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by them you possess eternal life. These are the Scriptures that testify about me.


07-28-2024(주일)
암송 성구 #. 10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08-04-2024(주일)
암송 성구 #. 11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What good will it be for a man if he gains the whole world, yet forfeits his soul? Or what can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08-11-2024(주일)
암송 성구 #. 12  베드로후서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Through these he has given us his very great and precious promises, so that through them you may participate in the divine nature and escape the corruption in the world caused by evil desires.

08-18-2024(주일)
암송 성구 #. 13  아모스 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But let justice roll on like a river, righteousness like a never-failing stream!


08-25-2024(주일)
암송 성구 #. 14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Therefore, my dear friends, as you have always obeyed--not only in my presence,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09-01-2024(주일)
암송 성구 #. 15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but of righteousness,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09-08-2024(주일)
암송 성구 #. 16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09-15-2024(주일)
암송 성구 #. 17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Th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09-22-2024(주일)
암송 성구 #. 18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09-29-2024(주일)
암송 성구 #. 19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10-06-2024(주일)
암송 성구 #. 20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10-13-2024(주일)
암송 성구 #.21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10-20-2024(주일)
암송 성구 #.22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10-27-2024(주일)
암송 성구 #.23  고린도후서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For he says, "In the time of my favor I heard you, and in the day of salvation I helped you." I tell you,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11-03-2024(주일)
암송 성구 #.24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11-10-2024(주일) 구원의 확신
암송 성구 #.25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And this is the testimony: God has given us eternal life, and this life is in his Son.
He who has the Son has life; he who does not have the Son of God does not have life.


11-17-2024(주일) 기도 응답의 확신
암송 성구 #.26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Until now you have not asked for anything in my name. Ask and you will receive, and your joy will be complete.

11-24-2024(주일) 승리의 확신
암송 성구 #.27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No temptation has seized you except what is common to man. And God is faithful; he will not let you be tempted beyond what you can bear. But when you are tempted, he will also provide a way out so that you can stand up under it.

12-01-2024(주일) 사죄의 확신
암송 성구 #.28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

12-08-2024(주일) 인도의 확신
암송 성구 #.29  잠언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을 지도하시리라.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and lean not on your own understanding;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12-15-2024(주일)
암송 성구 #. 30 
12-15-2024(주일) 암송성구 #.30 그리스도 안의 생활(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If a man remains in me and I in him, he will bear much fruit;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12-22-2024(주일)
암송 성구 #. 31
12-22-2024(주일) 암송성구 #.31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생활(사도행전 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Now I commit you to God and to the word of his grace, which can build you up and give you an inheritance among all those who are sanctified.


12-29-2024(주일)
암송 성구 #. 32
12-29-2024(주일) 암송성구 #.32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생활(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because those who are led by the Spirit of God are sons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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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5-2025(주일)
암송 성구 #. 33

01-05-2025(주일) 암송성구  #. 33  믿음에 의한 생활(고린도후서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01-12-2025(주일)
암송 성구 #. 34  그리스도인의 교제하는 생활(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But if we walk in the light, as he is in the light, we have fellowship with one another, and the blood of Jesus, his Son, purifies us from all sin.


01-19-2025(주일)
암송성구 #. 35   증인으로서의 생활(베드로전서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01-26-2025(주일)
암송성구 #. 36. 후히 드리는 생활(고린도후서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Each man should give what he has decided in his heart to give, not reluctantly or under compulsion, for God loves a cheerful giver.

02-2-2025(주일)
암송성구 #. 37. 성령의 전으로서의 몸(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y is a temple of the Holy Spirit, who is in you, whom you have received from God? You are not your own;

02-9-2025(주일)
암송성구 #. 38.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베드로전서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If you are insulted because of the name of Christ, you are blessed, for the Spirit of glory and of God rests on you

2월 16일 /  금주 암송 성구  
 아론의 축복 기도(Aaron's Blessing Prayer)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The LORD bless you and keep you;
the LORD make his face shine upon you and be gracious to you;
the LORD turn his face toward you and give you peace.



2월 23일

요한복음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ask whatever you wish, and it will be given you.


3월 2일

고린도후서 3:17
주는 이시니 주의 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Now the Lord is the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freedom.


3월 9일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3월 16일
역대상 16:11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찌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찌어다.
Look to the Lord and his strength; seek his face always.

3월 23일
에베소서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And pray in the Spirit on all occasions with all kinds of prayers and requests. With this in mind, be alert and always keep on praying for all the saints.

03-30-2025(주일)
암송성구 #.45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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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경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사 그라페'(*)의 문자적인 뜻은 '모든 책'으로 구약성경을 의미한다.
그런데 '모든'의 헬라어 '파사'에 대한 견해는 두가지이다.
(1) '파사'는 '단일체로서의 전체'(all)를 의미한다(Lenski).
(2) '그라페' 앞에 관사 '헤'(*)가 없으므로 '각각의 개별 성경을 강조하는 모든'(Lenski).
(2) '그레페' 앞에 관사 '헤'(*)가 없으므로 '각각의 개별 성경을 강조하는 모든'(every)을 의미한다(Bernard, Simpson, Guthrie).
두 가지 견해의 차이는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으로 의미에는 별 차이가 없다(Calvin).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하나님의 감동'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오프뉴스토스'(*)는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호흡하시는'의 의미로 사람이 하나님의 생기로 생령(生靈)이 된 것같이(창 2:7) 성경의 말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성경의 절대 영감설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된다(벧후1:21).
이에 대하여는 딤후 3:16,17 주제강해 '성경 영감론'을 참조하라.

교육하기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데이아'(*)는 '모든 삶 가운데 어린아이를 올바로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교훈 -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딤전 5:17).

책망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레그몬'(*)은 '유죄 판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Lenski) 잘못된 교리나 행동의 오류를 바로잡고 이단자들의 거짓을 밝혀내는 것을 시사한다(엡 5:18;딛 2:15).

바르게 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노르도신'(*)은 '추를 바로 세우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성도들을 진리와 사랑으로 바로잡고 그들이그 길로 더욱 매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시사한다(단 12:3;요 21:15-17).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쉬네'(*) 는 법률적인 용어로 '엄격한 정의'(正義)를 뜻한다.



본절은 접속사 '히나'(*, '...하기위해')로 시작되는 문장이다. 이것은 본절이 앞절의 4개의 항목으로 교육한 결과임을 시사한다(Lenski).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 '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일반 신자들을 가리킨다(Hendriksen).
(2)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교사들을 가리킨다(딤전 6:11, Guthrie).
두가지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하나님의 사람'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선지자에게 적용되었다.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교사는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선포해야 한다(Scott).
한편 '온전케 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오스'(*)는 '아로'(*, '적합하다')에서 파생된 것으로 '완전히 적합한'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교사는 성경 즉 말씀을 통해서 그 사역에 완전히 적합한 일꾼으로 변화된다.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 본절은 성경으로 교육한 또 다른 결과이다.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의 헬라어 '엑세르티스메노스'(*)는 '완전히 구비된', '완전히 공급된'이란 의미로 '아르티오스'와 어원은 같으나 더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성경으로 교육을 받아서 '모든 선한 일'(2:21;딤전 5:10;딛 3:1)을 행하기에 충분히 준비된 사람으로 변화됨을 시사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세 가지 기도의 자세를 강조합니다.

첫째는 무시로 기도하라
무시로 라는 헬라 단어는 "엔 판티 카이로(εν παντι καιρω)"라고 합니다.
무시로는 "모든 시간에"라는 의미로 항상 기도해야 함을 의미합니다(살전 5:17)

둘째는 성령안에서 기도하라
성령안에서 라는 헬라 단어는 "엔 프뉴마티(εν πνευματι)"라고 합니다.
성령안에서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는 의미로 성령입니다.

셋째는 깨어 기도하라
깨어라는 헬라 단어는 "아그룹눈테스(αγρυπνουντες)"라고 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눅 21:36).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기도 생활은 늘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배가 파선되어 생명이 위태로울 때에도, 복음을 위하여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평안한 길을 걸을 때에도,....
세상의 거센 물결이 나라와 민족을 마구 흔들지라도 생명의 주가 되신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현장에서 기도하는 십자가 군병으로 굳게 세워지는 은혜의 한 주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 바울은 본절에서 두 가지 분사 즉 '기도하고'와 '깨어'를 통해 권면한다.
이 두 개의 분사는 전신 갑주의 종류는 아니나 14절의 '서서'와 연결된다(Lincoln, Bruce).
먼저, 바울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기'를 권면한다. '성령 안에서'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Kent, Foulkes,Bruce).
이러한 기도가 필요한 때에 대해서 바울은 '무시로'라고 기술한다.
'무시로'의 헬라어 '엔 판티 카이로'(εν παντι καιρω)는 문자적으로 '모든 시간에'라는 의미로 항상 기도해야 함을 의미한다(살전 5:17).
다음으로, 바울은 '깨어있기'를 권면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기도하기 위함이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으로(눅 21:36) 그리스도인들은 인내를 가지고 깨어 있어야 한다(롬 12:12; 골 4:2, Bruce, Lincoln).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성도라 불리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그들의 기도와 관심사를 확대시킬 것과 그들과의 연합을 통해 열매를 맺도록 권면하고 있다(1:15;3:18, Bruce, Lincoln).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구할지어다
- 여호와를 삶의 제일 원리로 삼고 그를 사랑하여 섬기라고 요구하고 있는 구절이다(신 6:5; 마 22:37).
여기서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시며 능력의 근원이 되시기를 간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얼굴을 항상 구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늘 함께 동행하시기를 간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간구에는 먼저 스스로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분의 말씀대로 신실되이 살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선행(先行)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얼굴(6440) 파님(pânîymפָּנִים   

1. 얼굴.  2. 활용 예 :  3. 대면㉠ פָּנִים אֶל פָּנִים
발음 [ pânîym ]
어원  / 643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038회 사용


능력(5797) 오즈(ʽôzעֹז    |

1. 강함.   2. 욥 12:16. 3. 시 29:11
발음 [ ʽôz ]
어원  / עוֹז로도 쓰임[잠31:17,25], 어미활용 עָזְּךָ ,עֻזְּךָ ,עָזִּי ,עֻזִּי. 5810에서 유래
구약 성경  /  93회 사용

구할지어다(1875) 다라쉬(dârash) דָּרַשׁ  

1. 문지르다.  2. 어떤 장소를 가다. 3. 구하다
발음 [ dârash ]
구약 성경  / 164회 사용

구할지어다(1245)  바카쉬(bâqash) בָּקַשׁ   

1. 찾다.  2. 추구하다.  3. 피엘형 בִּקֵּשׁ
발음 [ bâqash ]
구약 성경  / 225회 사용

항상(8548) 타미드( tâmîydתָּמִיד   

1. 계속성.   2. 속격이 명사 뒤에 와서 형용사로 쓰임.  3.  장기간의 사람들  אַנְשֵׁי תָמִי

발음 [ tâmîyd ]
어원  /  ‘펴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03회 사용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
본 구절은 본서의 여러 곳에 거듭 언급되는 내용으로(1:4; 3:1,13; 6:12,14)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초대 교회의 가르침의 초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본절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변화와 율법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신학적인 논증을 나타낸다.
실로 그토록 교만하고 자존심 강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유대교에 철저했던 그에게 있어 종래의 모든 삶과 사랑에 대한 부정이요 새로운 삶을 향해 전환(轉換)을 이루는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이 변화된 삶은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지고 고난 가운데서도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후에 그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고통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과 승리의 삶이었다(W.G.Coltman). 한편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스타우로마이'(*)는 성도가 그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에 영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본서에 처음 등장하는 '십자가'는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는 의미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 함이며(롬 8:4), 또한 실존적으로 구약의 모든 율법적 요구들을 완성한 역사적 사건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이제까지 자기가 메고 있던 율법의 요구들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


영적인 연합 - 영적 생활 <예수께서 못 박혀 죽으신 그 십자가에 나도 못 박혔다는 믿음>
개인적은 삶의 변화에서 시작 -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이 짧은 구절 안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모두 언급되고 있다.
바울은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시고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롬 6:4). 그리스도와 바울의 완전한 연합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것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옛 사람의 자기 교만과 바리새인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잠시 동안 자신에게 패배감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심으로 인하여 얻은 자유와 평화는 그 고통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롬 8:18).

󰃨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본절에는 세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1) '나' 대신에 '그리스도',(2) '율법' 대신에 '믿음',(3) 과거의 '옛 사람' 대신에 현재의 '새 사람'으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로 하여금 모든 변화를 경험하게 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의와 사랑의 종이 되었으며(롬 6:19), 비록 제한된 육체 가운데 살지만 더이상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으며, 성령을 좇는 삶을 살게 되었다(롬 8:4).

󰃨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 안에서'사는 것이다. 이는 과거에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애썼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예수께서는 '내 말이 너희 안에'(요 15:7)라고 말씀하셨지만, 바울은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라고 말한다. 이는 주께서 우리 안에 계실때에는 말씀으로 존재하시며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그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主는 靈이시다

바울의 성령론과 기독론을 올바로 이해하고 바울서신을 올바른 견지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후 3:17 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 (主는 靈이시다: Now the Lord is the Spirit. NASB)의 뜻을 알아야한다.

이 구절은 많은 주석가들의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구절이다.
우리들의 관심은 바울 사도가 어떻게 호 퀴리오스토 프뉴마를 본문에서 동일시 할 수 있었느냐하는 것을 밝혀내는데 있다.
그러나 호 퀴리오스와 토 프뉴마가 동일시 되어지는 이유를 밝히기 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두 가지 문제는
첫째로, 본문에서 퀴리오스가 그리스도를 가리키느냐하는 것
둘째로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키느냐 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 문제의 결과가 긍정적으로 나타날 때 우리들은 왜 바울 사도가 주님(호 퀴리오스)과 성령(프뉴마)을 동일시 하고 있는가 하는 이유를 밝히는데 착수할 수 있게 된다.
 
첫째는 퀴리오스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가를 연구하기로 하겠다.
일반적으로 이 문제에 있어서 두 가지로 견해를 달리한다.
퀴리오스가 그리스도를 가리키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본문의 퀴리오스는 여호와(Yahweh)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퀴리오스가 여호와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사도 바울이 출애굽기 34:29-35절을 그 자신의 시대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고 믿는데 있다.
Dunn은 사도 바울이 출애굽기 34:30절에 나타난 단어 독사(히. 카란, LXX: 엔 데독사스뭬네, 주:광채, 영광)을 취하여 고후 3:7-11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출애굽기 34:33에 나타난 칼륌마(히:미스베, 주:수건,너울)를 취하여 고후3:12-14에서 그 의미를 전개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두 개 용어(광채, 수건)는 출 34:34f의 중심된 귀절에 대한 준비적인 역할을 한다.
출 34;34f는 다음과 같다.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Dunn의 주장은 출애굽기 34;34f절 이전의 구절들이 출 34:34f을 설명하기 위한 준비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고린도후서 3장에 있어서도 고후 3:16절 이후의 구절들에 있어서 바울의 해석은 고후 3:16절을 설명하기 위한 준비적인 역할을 한 것이라고 한다.
즉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후 3:16)를 설명하기 위한 준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그 이전 구절들이다.
Dunn은 본문에 나타난 수건이 모세 당시에 유대인들의 눈을 어둡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세의 얼굴을 가리웠던 같은 수건(토 아우토 칼륌마)이라고 주장한다(고후 3:14).
그러므로 그 수건을 제거할 행위는 마땅히 같은 행위여야만 한다.
이와같이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이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16절)했을때 그 뜻은 모세 당시에 그 수건을 벗기기 위해 되어졌던 같은 행위임에 틀림이 없다.
이는 고후 3:16이 출34;34에서 인용한 것임을 설명하고 따라서 고후3:16절의 주(Lord: 퀴리오스)는 여호와(Yahweh)를 가리킴이 확실하다.

바울 사도는 그람마의 옛 계약과 프뉴마의 새로운 계약을 비교한 다음 출애굽기 34장의 중심된 구절이 그의 논리에 있어서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즉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주가 성령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호3:16,17절의 주(Lord)는 여호와(Yahweh)를 가리킴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Dunn의 논리는 구약(O.T)과 신약(N.T) 사이에 서로 상충됨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물론 구약과 신약은 그 사상에 있어서 상충될 수가 없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여주고자 노력한 사도 바울의 논리의 중요성은 두 계약 사이의 유사성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두 계약 사이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본문에서 퀴리오스가 여호와(Yahweh)를 가리킨다고 해석함으로 얻을 수 있는 유익함은 예수님과 성령을 동일시하는 이 어려운 진술(statement)과 부딪쳐 보지 않고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에 열거하는 몇가지 이유는 퀴리오스가 여호와(Yahweh)를 가리킨다고 하는 해석이 본문에서 적당한 해석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1. Dunn이 주장한대로 사도 바울은 출애굽기의 구절들을 기초로 새로운 계약의 사역을 해석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Dunn의 주장에서 결여된 점은 사도 바울이 구약의 본문을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바울이 구약과 신약을 비교할때는 언제든지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관점에서 신약이 취급되어진 것이다.(3절 이하; 14절).
이와같은 이해의 결핍은 고후3:17절을 문맥 안에서 다루지 못한데서부터 기인된다.
고후 3:17절은 결코 문맥에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이는 성경해석의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문맥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본문을 고찰하면, 사도 바울은 고후 3:1-4:6에서 사역(ministry)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고후 4:5절에서 바울은 명백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크리스토온 이에수은 퀴리온)을 전파한다고 말한다.
고후 3:14절은 또한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다”(엔 크리스토 카타르게이타이)라고 말하며 16절에서는 사람이“퀴리온(主)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라고 설명한다. 이와같이 문맥에 나타난 퀴리오스를 연구할 때 퀴리오스는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음이 명백하다.

이와같은 사상은 빌2:9 이하에 타나탄 사상과 일치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인 퀴리오스(主)라는 이름을 예수님에게 주시므로 모든 입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또한 베드로도 그의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主(퀴리오스)가 되셨다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主(퀴리온)와 그리스도(크리스톤)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라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 후에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본문을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관점에서 설명한다고 생각할 때 고후3:16,17에 나타난 퀴리오스는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킴이 확실한 것이다.

2. 출애굽기에서는 없어질 영광에 대해서 언급이 없지만 바울사도는 고후3장에서 의문의 사역이 없어질 영광과 의의 사역의 풍성한 영광(혹은 성령의 사역의 풍성한 영광)과 비교하고 있다. 

바울은 정죄의 사역(직분)과 의의 사역(직분)을 비교하고 있다(9절). 로마서 5:16절에서도 바울 사도는 아담으로 말미암은 정죄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칭의를 비교하고 있다. 이와같은 사상은 구약 자체가 진리의 완전한 뜻을 설명하지 못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완전한 뜻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의의 사역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면 본문의 퀴리오스는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본문 퀴리오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문맥을 통해서 증명을 하였다. 문맥의 뜻에 비추어 생각할 때 퀴리오스는 여호와를 가리키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제 우리들은 두 번째 질문을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질문은 고후3:17절의 프뉴마가

진정으로 성령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Hughes 박사는 고후3:17절의 토 프뉴마가 성령(the Holy Spirit)을 가리키지 않고 靈(spirit)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주는 영이시다! 즉 그리스도는 빛과 생명의 원천이시다. 그에게 돌아감으로 오해의 수건을 제거할 수 있게 되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 있게 된다”라고 했다. 따라서 Hughes는 고전15:45; 고후3:6; 롬8:15절에 나타난 프뉴마도 성령으로 해석하지 않고 靈으로 해석한다. Hughes는 또한 말하기를 “이 귀절 전체를 통하여 우리들은 대문자로 성령(the Spirit)을 쓰지 말고 소문자로 靈(spirit)을 써야한다. 비록 우리들의 판단으로 여기서 성령을 직접적으로 가리키지는 않지 --- 主는 靈이시다 32쪽 --- 만 그러나 바울의 논리 가운데 성령의 작용이 암시된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별히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성도들의 마음에 적용하는 것이 성령의 직무(office)라는 바울의 명백한 교훈을 생각할 때 성령의 작용이 암시된 것을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Hugghes 박사의 입장은 다음의 이유로 본문맥에서 타당하지 않다.


1) 바울은 고후3:3에서 먹(멜라니=ink)과 성령(프뉴마티 데오 조온토스)을 비교하고 있다. 또한 바울 사도는 의문(그람마=letter)과 성령(토 프뉴마)을 6절에서 비교하고 있다(cf. 롬2:29). 그러므로 본 6절에서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말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특히 프뉴마의 역할을 설명하기 위해 같이 사용된 조오포이에이(give life)는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이 사실은 바울서신 다른 곳에서도 명시된 것처럼 특히 생명은 성령으로부터 기인된다는 사상과 일치하는 것이다(롬8:2,6,11;cf.고전15:45). 바울은 다음으로 헤 디아코니아 테스 카타크리세오스(정죄의 직분=정죄의 사역)와 헤 디아코니아 테스 디카이오쉬네스(의의 직분=의의 사역)을 비교하고 있으며(9절), 이 헤 디아코니아 테스 디카이오쉬네스는 바로 헤 디아코니아 소우 프뉴마토스인 것을 말하고 있다(9절). 여기서 디카이오쉬네스와 프뉴마토스가 동격으로 사용되어졌다.(주: 의의직분과 영의직분에서 의와 영이 동격으로 사용되었다는뜻) 그런데 다른 곳에서 바울은 성령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전6;11)고 말함으로 성령과 의를 밀접하게 연관시킨다. 그러므로 고후3:8의 프뉴마토스가 성령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성령을 가리키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타당한 것이다. 17절 하반절의 토 프뉴마도 자유 개념과 관련하여 사용되어졌다. 이 사실은 토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서신에서 성령과 자유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참 자유는 성령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롬8:2; 고전12:13; 갈5:13ff.). --- 主는 靈이시다 33쪽 ---


이상에서 “主는 靈이시다”(호 데 퀴리오스 토 프튜마 에스틴-17a)를 둘러싼 가까운 문맥에서 투 프뉴마의 용법을 관찰해 볼 때 토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키고 있음이 명백해졌다. 그렇다면 고후3:17a의 토 프뉴마만 구태여 성령이 아니라고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2) 우리들은 이미 퀴리오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증명하였다. 퀴리오스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생각할 때 17절 하반절의 토 프뉴마 퀴리오나 18절의 퀴리오 프뉴마토스와 같은 표현들에 나타나는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표현들이 바울 서신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데 모두 성령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롬8:9; 갈4:6/ cf. 행5:9; 8:39; 16:7).


이상에서 증명한 대로 고후3:17a에 나타난 토 퓨뉴마는 Hughes의 주장대로 靈(spirit)을

가리키지 않고 오히려 성령(The Holy Spirit)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서 고후3:17a의 호 퀴리오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토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확증하였으니 이제 우리들은 바울 사도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다른말로 표현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하는 본질이 무엇인가? 이렇게 그리스도와 성령이 동일시 되어졌다는 사실은 본문이 뚜렷하게 증명하지만 무슨 의미로 동일시 되었는가 하는 것은 명백하지 않다. 고후3:17절은 교리적인 정의가 가득찬 머리를 가지고 바울 서신을 대하고 증거자료로서 확증을 찾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실로 극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광범위한 문백을 고찰할 때 바울 사도는 그의 사도직의 진실성을 옹호하고 있다. 바울의 소명은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거짓 사도들 보다도 훨씬 탁월한 것이다. 그러나 그 탁월성은 그의 개인 인격에 의존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진정한 문제는 그의 직무의 탁월성과 합법성에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의 직무(office)가 모세의 직무보다 탁월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 바울 사도는 그가 계약 역사에 있어서 더 탁월한 시대에 살고 있으며 또 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울 사도 --- 主는 靈이시다 34쪽 ---


는 옛 계약과 새로운 계약을 비교한다. 먹(ink=멜라니)은 성령과 비교되어졌고(3절) 그리고 성령은 다시 의문(토 그람마)과 비교되어졌다(6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6절). 이 명제가 뒤따라 나오는 구절들에서 더욱 확장되어 진다. 사도 바울은 새로운 계약의 영광(독사)의 초월성을 제시하면서 반면에 옛 계약의 영광(독사)은 사라져 갔다고 말한다(7,11절). 바울 사도는 분명히 여기서 기독교인의 사역의 본질과(3:3,4:1) 모세를 使者로 한 죽음의 사역(직분)을 비교하고 있다(3:7,12,13). 옛 계약은 정죄와 죽음의 사역(직분=ministry)으로서 모세와 관련이 되어졌고 반면에 새로운 계약은 의와 생명의 사역으로서 성령과 관련이 되어졌다(7절 이하 참조). Smedes는 말하기를 “여기 옛 계약과 새 계약이 있다. 그리고 후자는 전자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초월하다. 새 계약은 광대하게 초월한 영광을 가지고 있다. 새 계약은 생명이 사망에서 다르고, 자유가 속박에서 다르며, 확신이 공포에서 다른 만큼, 혹은 소망이 절망에서 다른 만큼, 옛 계약과 다르다. 새 계약은 세상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가져다주었다. 바울의 사도직은 계약 역사의 새 시대, (즉 새 계약 시대)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의 사도직은

더 초월한 사도직인 것이다”라고 했다.


바울의 전체적인 논리는 구속 역사의 실재(reality)에 의존되어 있다. 본문에서 제시된 대칭은 역사적이다. “그 대칭은 구속 역사에 있어서 구 질서와 새 질서 사이의 계속되는 국면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에 의해 구별된 것이 바로 새 질서인 것이다. 성령은 새 시대에 있어서 대단히 활동적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성령의 사역(ministry)이라고 말한다(8절).


고후3:12절 이하에서 바울 사도는 불신하는 유대인들의 마음에 덮여졌고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벗겨질 수 있는 수건(칼륌마)에 --- 主는 靈이시다 35쪽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 구절들은 옛 계약이 무슨 이유로 정죄와 죽음의 사역인지를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하고 있으며 반면 새로운 계약의 효력을 나타내고 있다. 옛 계약이 정죄와 죽음의 사역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완고하게 되었기 때문이며(14절) 그들의 마음에 수건이 덮여져 있었기 때문이다(15절). 그러나 새로운 계약의 효력은 그 수건이 그리스도 안에서 제거되어진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14절). 그 수건은 언제든지 사람이 주께로 돌아가면 제거되어진다(16절).


이상에서 명백한 사실은 사도 바울이 그의 논리 가운데 17절에 당도하기도 전에(3절 참고) 이미 성령과 그리스도와의 연관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관찰을 통해 확실해진 것은 새로운 계약의 유익은 넘치는 영광과 생명과 의로움이다. 이 사실은 바로 새로운 계약이 성령의 사역이라는 사실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성령이 새 질서안에서 사역하심으로 의와 생명과 영광과 같은 은사를 산출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이와같은 성취들을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돌릴 수 있겠는가하는 질문이 제기되어진다.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하여 바울은 새로운 계약의 효력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 기능을 고찰할 때 주와 성령을 동일시하여 “主는 靈이시다”(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17a)라고 말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바울이 “主는 靈이시다”했을때 퀴리오스가 완전하고 철저하게 프뉴마의 개념에 의해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주와 성령을 동일시 하는 것은 메시야 시대가 바로 성령의 시대라는 종말적인 의미로 동일시 하는 것이다. Hamilton은 말하기를 “여기에서 동일시하는 것은 본체론적이거나 존재에 있어서의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고 동력적(dynamic)이며 구속적 행위에서 발생된 동일함을 뜻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Hamilton은 계속해서 언급하기를 “성령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취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그의 직무를 효과적으로

이행하기 때문에 믿음의 모든 의지와 목적을 위해 주님 자신이 그의 백성위에 임재하셔서 은혜를 부여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라고 했다. 성령이 새 질서를 주관하시기 때문에 새 질서는

 바로 성령의 질서라고 불리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광범위한 문맥을 통해 관찰해 볼 때 “主는 靈이시다”(17a)라는 표현을 주관하고 있는 사상은 구속적 역사적 전망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성령과 그리스도를 동일시 하는 것은 본체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요 경륜적인 의미로 이해해야만 한다. 동일시 하는 것은 그 성격상 구속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신자들의 경험에 관한한 성령과 그리스도의 기능이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새 질서에서는 동일시 되어질 수 있다는 구속적 역사적인 의미로

“主는 靈이시다”(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


17절 하반절의내용도 성령과 그리스도를 동일시 하는 것이 본체론적인 의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자유(엘류데리아)의 개념이 17절 하반절에 언급되었는데 바로 이 사실이 바울이 경륜적인 면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갈5:1;롬8:2). 영광, 생명, 의, 평화 등의 개념과 더불어 자유 역시 새로운 계약의 특징들 중의 하나로서 성령의 사역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갈4:21과 5:1;5:13과 5:16ff 비교 참조). 18절에 기술된 대로 주와 성령 사이를 밀접히 연결시키는 것은 17절에서 이미 언급한 내용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결국 주와 성령은 구속의 사역을

적용하는데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종합해 보면 바울의 사상은 역사적이다. 새로운 시대는 옛 시대보다 탁월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신 분이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벗겨졌다. 성령은 창조적이고 활동적인 영으로서 새 시대를 주관하시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의 생활은 성령에 의해 조정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영으로서 계속해서 역사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인 것이다. --- 主는 靈이시다 37쪽 ---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主는 靈이시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신자들의 경험을 설명할 때 그리스도의 기능과 성령의 개념을 교대로 사용하는 예를 바울서신 내에서 찾아 비교함으로 지금까지의 증명이 더 확실해질 것이다.


신자들의 생명 - 죄의 결과는 죽음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 죽음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비결은 예수를 생명의 주로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성령을 통해 생명을 가졌다(롬 8:11)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가졌다(골로새서 3:4)
-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신자들의 소망
죄의 결과 에덴동산에서 쩣겨난 사람은 일을 해야하는 수고와 해산하는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고통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을 때 소망이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됩니다.

우리들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소망을 가졌다(롬 5:5; 15:13)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졌다(고전 15:19).

신자들의 성화 - 세속에서 거룩하게 되는 것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다(롬 15:16)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다(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신자들의 기쁨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기쁨을 가졌다(롬 4:17; 갈 5:22)
우리들은 主님 안에서 기쁨을 가졌다(빌 3:1; 4:4)

신자들의 자유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다(고전 12:13; 롬 8:2)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다(갈 5:1).

신자들의 칭의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의롭다 인정받았다(고전 6:11)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인정받았다(갈 2:17; 고전 6:11).


신자들의 인침

우리들은 성령안에서 인치심을 받았다(엡 4:30)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치심을 받았다(엡 1:13)

신자들의 교제

우리들은 성령의 교제로 축복을 받는다(고후 13:13)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교제 안으로 불리움을 받았다(고전 1:9)

신자들의 행위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행해야 한다(갈 5:25)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야 한다(골 2:6; 1:10).

신자들의 하나님께 대한 접근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간다(엡 2:18)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간다(엡 3:12)

신자들의 확신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굳게 서야 한다(빌 1:27).
우리들은 한 주님 안에서 굳게 서야 한다(빌 4:1).

신자들의 율법 이행

성령은 죄와 사망의 법을 대치시켰다(롬 8:2)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법을 대치시켰다(롬10:4)


이상에 열거한 병행 구절들은 신자들의 경험을 설명할 때 바울 사도가 성령과 그리스도를 교대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자들의 생활과 성령 안에서의 신자들의 생활 사이에 구분을 두지 않았다.
이와같이 성령과 그리스도를 신자들의 경험과 관련하여 교대로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의 현상으로서 공관복음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들에서 “성령 안에 있는 우리들”(롬 8:8a),
"너희 안에 있는 성령“(롬 8:9a;11c),
"너희 안에 있는 그리스도”(롬 8;10)등의 표현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하나님의 영”(롬 8:9b)이나
“그리스도의 영”(롬 8:9c)을 교대로 사용할 수 있으며
“주는 영이시다”(고후 3:17a)라고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해서 표현할 수 있었다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자유는 감옥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자유란 갇힌 곳에서부터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감옥에 갇힌 사람은 감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은 질병으로부터 건강을 되찾는 것입니다.
사람을 옭아매는 것들이 다양합니다.
예로부터 사람을 옭아매는 것을 "생노병사(生老病死)"라고 하여 태어나서 나이가 들어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으면서 가장 힘든 것은 죄에 붙잡힌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죄가 나를 흔들어댈 때 어느 누구도 그 고통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으로 나를 붙잡아 줄 때라고 하겠습니다.

오직 하나의 참된 기쁨은 자기라는 감옥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동시에 자유도 주셨다.(토마스 제퍼슨)





주는 영이시니
- 본절은 `의문(儀文)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는 6절 내용과 연관하여 바로 이해될 수 있다.
즉 바울은 '의문'과 '영', '옛 언약'과 '새언약', '율법'과 `복음'을 대조하면서 후자(後者)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많은 주석가들이 주장하듯이 본절의 내용이 삼위 일체론의 교리를 뒷받침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Bousset, Scott), 보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본절에서 관심을 두고 있는 초점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 및 대조에 있다는 사실이다(Hughes).
이렇게볼 때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빛과 생명의 원천이시므로 그분께 돌아오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운 바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유함이 있느니라
-
주의 영이 있는 곳, 그리하여 마음의 수건이 벗겨지고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난 곳에는 복음 즉 새 언약으로 말미암는 자유가 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옛 언약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을 '종의 자녀'로, 새 언약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을 '자유자의 자녀'로 비유한 적이 있다(갈 4:24-31).
여기서의 '자유'는 율법의 지배 하에서의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가리킨다.
고린도전서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졌던 '자비'에 대한 언급이(고전 9:1, 19;10:29) 후서에서는 이곳에서만 언급되고 있다.
자신들의 마음속에 새 언약이 영으로 새겨진 그리스도인들은 정죄와 구속의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는데 이 자유는 확신(4절)과 담대함(12절)을 주는 자유이다.
바울은 사도로서 이 자유의 영을 받았으므로 인간적인 추천서에 의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의 자유와 자기를 자랑하고자 하는 명예욕으로부터의 자유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1. 주는
2. 영이시니
3.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 주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셨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이것이 ‘주는’이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이것이 ‘주는’이다.

2장 영이시니

1.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살려 주는 영이 되셨다. 이것이 ‘영이시니’이다.

2.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셨다. 그러므로 역(逆)으로 말하면,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이것이 ‘영이시니’이다.

3장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1:7-13)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하셨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우리가 그 인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이것이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이다.

2.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기름을 부으시고(제사장 직책과 선지자 직책과 왕 직책을 세우시고) 보내사 ❶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육신의 연약한 자<롬5:6, 롬6:19>를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롬8:9> 생기 있는 자가 되게), ❷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는 죄인 된 자<롬5:8, 롬11:30>를 하나님께 순종하는<롬1:5> 의인이 되게), ❸눌린 자를 자유케(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롬5:10, 롬8:7>를 영의 생각<롬8:6>으로 하나님과 화목(동행)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눅4:18). 이것이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이다.

(문답)

문1: ‘주는’은 무엇인가?

답: ➊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1:14). ➋그리스도 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빌2:5-8).

문2: ‘영이시니’는 무엇인가?

답: ➊예수 그리스도는 살려 주는 영이 되셨다(고전15:45). ➋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다(롬8:9).

문3: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는 무엇인가?

답: ➊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우리가(엡1:7) 그 인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엡1:13). ➋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셨으니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신다(눅4:18).

(결론)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주는 영이시니(고후3:17)’ 하셨으니 그러므로 ‘주는 영이시다’라고 말하면 비성경적으로써 틀린 것이다. 그런 것은 주(主)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로 알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요1:14)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빌2:5-8)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그렇기에 ‘주는 영이시니(고후3:17)’ 하셨으니 그러므로 ‘주는 영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요1:14) 예수 그리스도’와 배치되는 것이며,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빌2:5-8) 그리스도 예수’와 배치되는 것이다.

(골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다. 그렇기에 ‘주는 영이시니(고후3:17)’ 하셨으니 그러므로 ‘주는 영이시다’라고 말하면 비성경적으로써 틀린 것이다.

(눅24:35-43)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하셨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영으로 생각할 때에 예수님께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셨다. 그렇기에 ‘주는 영이시니(고후3:17)’ 하셨으니 그러므로 ‘주는 영이시다’라고 말하면 비성경적으로써 틀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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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6-2025(주일)
암송성구 #. 36. 후히 드리는 생활(고린도후서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금주 암송 성구  
 후히 드리는 생활(고린도후서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헌금(獻金)이란 한자는 “드릴 헌(獻)” “쇠 금(金)이란 ”“훈(訓)”으로 “쇠 즉 엽전(돈)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돈이 필요해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육신으로 살아가야 할
연약한 인간이지만 돈을 바침으로 받은 사랑에 대한
고백이며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헌금은 얼마를 바쳤느냐 하는 그 양을 계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헌금은 아직도 얼마를 갖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부자는 연보궤에 많은 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한 고드란트)를 넣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가난한 과부는 모든 사람들보다 많이 넣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 넣었지만 과부는 구차한 중에 자고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막 12:41-44. 눅 21:1-4).
헌금은 얼마를 바쳤느냐 하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아직도
얼마가 남아 있느냐 하는 것에 따라 주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2025년 영적 무브먼트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는 거룩한 순례자가 되자!
나의 태신자(胎信者)를 찾으라!

02-2-2025(주일)
암송성구 #. 37. 성령의 전으로서의 몸(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4가지 구조로 구분하는 것(세포, 조직, 기관, 계통)은 과학적인 방법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몸을 3가지로 구분하는 것(영, 혼, 육)은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물론 사람의 구조에 대한 이분법(영혼, 육체)과 삼분법(영, 혼, 육)으로 설명하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의 기능과 혼의 기능과 육의 기능이 동일한 내용이라면 이분법이든지 삼분법이든지 서로 다른 주장이 아니라 이분법은 기능을 기준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존재론적 방법은 영혼과 육체로 구분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의 몸은 "성령의 전"이라고 강조합니다.
영혼육과 같은 삼분법으로 구분하든지 아니면 영혼과 육과 같은 이분법으로 구분하든지 그 안에 주의 영이 없다면 그것은 사람의 몸이 아니라 짐승과 같은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첫째, 세포는 생명을  이루고 있는 가장 작은 최소화 기능 단위라고 합니다.
인체는 60에서 100개의 세포로 이루어진다.

둘째, 조직은 공통의 기능을 수행하는 유사한 세포들의 집단으로 이루이져 신체는 상피조직과 그리고 근육조직, 신경조직, 결합조식 등 네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셋째, 기관으로 2개 이상의 조직으로 심장과 난소 그리고 위장 등이 있다고 합니다.

​넷째, 계통으로  유사하고 연관된 기능을 가진 다양한 기관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성막의 구조를

인체의 모든 계통은 유기적이며 서로 상호관계를 가집니다.

금주 암송 성구  
 성령의 전으로서의 몸(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4가지 구조로 구분하는 것은 과학적인
방법입니다(세포, 조직, 기관, 계통).
반면에 사람의 몸을 3가지로 구분하는 것은
성경적인 방법입니다(영, 혼, 육).
물론 사람의 구조에 대하여 이분법(영혼, 육체)과
삼분법(영, 혼, 육)으로 설명하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의 기능과 혼의 기능과 육의 기능이 동일한 내용이라면 이분법이든지 삼분법이든지 서로 다른 주장이 아니라 이분법은 기능을 기준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존재론적 방법은 영혼과 육체로 구분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의 몸은 "성령의 전"이라고 강조합니다.
영혼육과 같은 삼분법으로 구분하든지 아니면 영혼과 육과 같은 이분법으로 구분하든지 그 안에 주의 영이 없다면 그것은 사람의 몸이 아니라 짐승과 같은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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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2025(주일)
암송성구 #. 38.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베드로전서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2월 16일 /  금주 암송 성구  
 아론의 축복 기도(Aaron's Blessing Prayer)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축도(祝禱)”란 “축복기도(祝福祈禱)”라는 한자의 약자로 “빌 축(祝)”“빌 도(禱)”라는 훈(訓)입니다.

축도를 위한 기도문은 구약에서 대제사장 아론의 축도와
신약에서 사도 바울이 선포하는 바울의 축도가 있습니다.

축도란 하나님이 내리시는 선물과 축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기도는 성도가 하나님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아래서 위로 드리는 것이고, 축도는 하나님께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주시는 선물입니다. 축도는 하나님의 복을
회중에게 선포하는 귀중한 말씀이며, 영어로 'Benediction' 
즉 '복을 빌어주는 기도'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축도는 하나님이 지키시고 은혜 베푸시며 평강 주심을 알리는 것이고,
신약에서는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역사하심이 있음을
알리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2월 23일

요한복음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ask whatever you wish, and it will be given you.

기도(祈禱)의 재미는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닐까요?
만일 응답이 없는 기도를 계속하는 것은 형식(形式) 또는 습관(習慣)이 될 것입니다.
응답 받는 기도의 비결은 기도자가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예수님 안에 거하려면 예수님의 가르침 즉 그 말씀이 내 안에 새겨져야 합니다.
내 안에서 주의 말씀이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그 말씀에 따라 순종하면서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을 "내면적 경건이 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외면적 경건에는 관심을 갖지만 보이지 않는 내면적 경건에 대해서는 소홀(疏忽)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성구를 암송(暗誦)하는 것은 주의 말씀을 내 안에 새기는 것이며 동시에 내면적 경건을 강화(强化)하는 훈련이 됩니다.
이번 주간에 암송할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것을 찾아서 그것을 구하는 재미를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기도가 기도의 지경(地境)을 넓히는 것입니다.


거하다(메노. mĕnō) μένω 스트롱번호 3306

1. 남아있다.  2. 기다리다.
발음 [ mĕnō ]

관련 성경  /  머물다(마10:11, 요1:32, 행21:8, 딤후4:20), 유하다(막6:10, 눅24:29), 거하다(눅8:27, 요8:35, 요일2:27), 계시다(요1:38, 2:12, 히7:24), 머물러 있다(요3:36), 붙어있다(요15:4), 두다(요19:31, 행5:4), 붙다(행27:41), 지내다(고전7:8,40), 영존하다(히12:27), 계속하다(히13:1).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여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그 아래 말씀이 알려주는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 속에 가진 자이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란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의 왕좌를 점령하였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을 그의 대리(代理)로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 권위를 높이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살아 계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거한 생활의 유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약에 참여한 자로서 신종(信從)하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신분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쓸 수 있고, 또한 성령께서 그런 신자의 의지를 성화(聖化)시켜 주님의 뜻대로만 기도할 수 있게 하신다. 곧,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만 위하여 기도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할 진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상반절에서 벌써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생활이,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 되어 있다. 신자가 주님과 연합한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주님의 계약 행위, 곧, 선택이 그 기본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순종이 그 실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외부적 생활에서만 근근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얕은 경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깊은 계약과 생명에서 움직이는 내면적인 경건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무엇이든지 응답 받는다는 진리는, 요한이 그 시선에서도 말씀한 바 있다.
곧,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한 말씀이 그것이다(요일 5:14).
기도 응답을 받는자들은 저렇게 내면적인 경건의 소유자들이다.

기도 응답을 많이 받은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고(신 34:10),
히스기야는, 기도 하여 자기의 병을 고침 받았다(사 38:2-5; 왕하 20:5-6).
그는 기도하여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을 파멸시켰는데(왕하 19:14-19, 35),
하나님 앞에서 자백한대로,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할 만큼, 경건하였다.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사도들을 위시하여 일반 신자들 전체에게 허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짐을 져 주시는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이다.
히 4:14-16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다.

약 5:17에 말하기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비가 아니로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큰 죄인들도 회개하며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데, 구약 시대에도 그러하였고(대하 33:10-13), 신약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눅 18:13-14에 말하기를,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였고,

계 3:19-20에는 말하기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가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지침

12-15-2024(주일) 암송성구 #.30 그리스도 안의 생활(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If a man remains in me and I in him, he will bear much fruit;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12-22-2024(주일) 암송성구 #.31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생활(사도행전 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Now I commit you to God and to the word of his grace, which can build you up and give you an inheritance among all those who are sanctified.

그 은혜의 말씀 / 그 은혜의 그 말씀
토 로고 테스 카리토스(τω λογω της χαριτος)

호(3588)  로고스(3056)  호(3588)  카리스(5485)

λόγος χάρις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라는 구절을 직역하면 "그 은혜의 그 말씀께 부탁하노니"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사람의 모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바로 그 말씀 즉 세상에 내려오신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문자의 말씀은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려는 의도로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문자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믿는다는 것은 곧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라는 질문은 "주 예수께서 생명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믿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믿습니까?" 라는 질문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믿습니까?" 라는 질문은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셨던 예수님께서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것을 믿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따라서 '믿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아멘!" 이라고 화답하는 것은 신앙의 내용을 함축성 있게 묻고 답하는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
흉악한 이리들과 배교의 여러 세력들로 인해 갖가지 공격을 받게 될 교회의 어려움을 예견한 바울은 여러 권면으로 지도자들의 성실함을 촉구했지만 마지막에 바울이 부탁한 것은 바울의 모범도 지도자들의 충성스러움도 아니었다. 이런 것들은 교회를 세워가는 데 필요한 하나의 방도 도구일 뿐 근본적(根本的)으로는 교회를 배교의 세력에서 지키지 못할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한테 맡겨야 옳단 말인가? 바울은 안전의 원천을 알았으니 곧, 주와 그분의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인간 지도자들의 모든 수고를 쓰셔서 친히 교회를 세워가시는 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교회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몸된 교회를 친히 다스리고 계신 것이다. 이때 그 방법은 오직 말씀으로이다. 그 말씀이 능력이 있어서교회롤 모든 악의 세력에서 지켜주고 거룩하게 서 가게 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교회가 누구의 교회이며 무엇으로 교회가 거룩하게 서 갈 수 있는가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다. 한편 여기서 부탁한다는 '파라티데마이'(*)는 '넘겨주다', '위탁한다', '맡긴다', '의뢰한다'(딤후 2:2;벧전 4:19 등)는 뜻이다.

12-29-2024(주일) 암송성구 #.32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생활(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because those who are led by the Spirit of God are sons of God.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인 삶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핵심은 세상(땅)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소금과 빛이 될 수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해야만 합니다(롬 8:9).
그리스도의 영을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비결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의 가르침을 믿고 따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2025년에는 성경 일독을 위하여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요한계시록까지 함께 읽어가려고 합니다.
말씀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기둥의 성자 시므온처럼 삶의 현장에 우뚝 세워지는 은혜를 함께 사모하며 기도하는 2025년으로 기록을 세워갑시다.


하나님의 영으로...하나님의 아들이라

-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이기에 당연히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사랑'(9절)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께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가르치셨다.
성도는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

인도함을 받는(71) 아고(agō) ἄγω   

1. 인도하다. 2. 데리고 가다
발음 [ agō ]
  • 1. 인도하다.
    • a.  [문자적으로, 4격과 함께 쓰여] 인도 하다, 데려오다, 가져오다, 가져가다, 마21:7, 요8:3, 행20:12.
    • b.  데리고 가다, 가져가다, 행11:26, 딤후4:11.
    • c.  [상징적으로] 인도하다, 들어가게 하다, 롬2:4, 히2:10.
  • 2. 끌어넣는다, 잡아가다, 체포하다, 막13:11, 눅22:54, 요7:45, 행5:26.
  • 3. 인도하다[성령의 사역을 통해], 인도되다[수동태로], 롬8:14, 딤후3:6.
  • 4. [시간을] 보내다, 허비하다, 눅24:21, 행19:38.
  • 5. 가다, 마26:46, 막1:38, 14:42, 요11:16.
  • 관련 성경  / 끌려가다(마 10:18), 끌고 오다(마 21:2, 눅 19:30), 이끌리다(눅 4:1), 이끌다(눅 4:9, 히 2:10), 이끌다(눅 4:29), 데리다(요 19:4, 행 17:15), 끌어가다(행 9:21), 잡아오다(요 7:45, 행 5:21), 인도하다(요 10:16, 롬 2:4), 붙들다(행 17:19), 데려가다(행 21:34), 데려오다(행 25: 6), 들어가다(행 23:10).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베드로전서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성령,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 영

8장에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살펴봅니다.

I. 성령

1. 그리스도의 영 (9), 하나님의 영(9)

9절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 혹은 ‘하나님의 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하십니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꼭 집어 소개한 것은 초대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아닌 ‘다른 영’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1-3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서 ‘다른 예수’와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권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아닌 다른 영을 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영지주의라고 하는 이단이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다른 영, 적그리스도의 영을 전했습니다. 오늘날엔 알파코스, 신사도운동, 관상기도와 같은 영성 프로그램들을 통해 다른 영들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영적인 역사가 나타난다고 이를 다 믿지 말고 이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그리스도의 영” 또는 “하나님의 영”이라고 부른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주요한 사역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야 그리스도를 알 수 있고, “진리의 영”(요 16:13)을 받아야 진리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를 아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9)인 것입니다.

2. 양자의 영 (15)

15절부터는 성령을 “양자의 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15) 하십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아직도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면 ‘종의 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겁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항상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몰아갑니다. “이것저것을 행하고 지키지 않으면 지옥 간다.”라고 끊임없이 위협하고 협박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만족시킬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는 항상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종노릇하는 ‘종의 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a. 하지만 율법주의라고 하는 ‘종의 영’이 아닌,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 (15)

“아바 아버지”라 할 때, “아바”는 “아빠”라는 뜻입니다. 어린 아이가 처음 말을 배우면서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아바”입니다. 율법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경건한 행위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친근히 부르며 또 그렇게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아빠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 말씀을 묵상하면 사랑하는 자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이 양자의 영을 받은 성도들을 이와 같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b. 양자의 영을 받으면,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의 자격을 얻게 됩니다.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하십니다.

‘후사’란 상속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기 위해서는 주님과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17)하십니다.

예수님도 친히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제자의 길은 고난의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18)하십니다. 양자의 영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된 후사”로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성령의 역할

이제는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요, 양자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일들을 살펴봅니다.

1.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신다. 

지난 시간에도 살펴본 것처럼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십니다. 본문에서 율법을 ‘죄와 사망의 법’으로 묘사한 것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은 결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새 생명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겁니다.

2. 우리를 인도하신다(14, 28)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하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수님의 약속을 붙들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이 ‘성령 충만’(행 2:4)을 받았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령 충만(filled with the Holy Spirit)이 무엇일까요 ? 어떤 신학자는 ‘성령 충만’을 ‘성령에 붙들리는 삶’으로 표현합니다. 성령에 붙들려 성령의 인도하시는 데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이라는 겁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한 뒤, 스데반 집사는 성령에 붙들려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빌립 집사는 성령에 붙들려 광야로 나갔다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행 8:26,27) 사도 바울도 본래는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할 계획을 세웠지만, 성령께서 막으시자 드로아 지방으로 내려가 기도하다가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행 16:10) 유럽으로 발걸음을 돌려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고린도, 에베소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14)이라 하십니다. 내 욕심과 생각이 아니라, 날마다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는 자가 곧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과연 어떤 길로 인도하시는 것일까요? 28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하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하심은 과정 속에는 어려움이 있어도 그 결과를 아름답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사서 애굽 땅으로 팔려가 억울한 종살이 옥살이를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사건들을 통해 요셉은 바로 왕 앞에 설 수 있게 되었고, 바로왕의 꿈을 해석해 줌으로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요셉은 훗날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한 형제들을 만나 그가 꾸었던 꿈처럼 형제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요셉의 실패와 고난도 합력하여 하나님의 더 큰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삶에도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자들은 언제나 그 결과를 좋게 하시는 즉,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3.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26)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소개한 성령님의 또 다른 이름 ‘보혜사’(파라클레토스, 요 15:26)는 “옆에 서서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Counselor(NIV), Comforter(KJV) 혹은 Helper(NASB)라고 번역해놓았습니다. 상담자, 위로자,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온전한 믿음 생활을 할 수 없음을 아셨기에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하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믿음을 지키고 사명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데,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신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하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고, 또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생각과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27) 기도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모든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으로 구하는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을 근심케 만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 응답 받는 바른 기도를 드리려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결론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요 양자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시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이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날마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고” (13), “육신의 생각이 아니라 영의 생각을 좇으며”(6) 육체의 소욕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3,14절) 하십니다.





01-05-2025(주일) 암송성구  #. 33  믿음에 의한 생활(고린도후서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믿음으로 행하고...아니함이로라
- 본절은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친밀성이 재림 이후의 완전함에 못미친다는 현실적인 경험이기에 세상에서 육을 입고 사는 삶이란 그리스도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의 삶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세계의 삶인 것이다(고전 13:12).

고린도전서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Now we see but a poor reflection as in a mirror; then we shall see face to face. Now I know in part; then I shall know fully, even as I am fully known.



믿음이란 헬라어는 “피스티스(pistis. πίστις”라고 합니다.

πίστ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4102

1. 믿음.   2. 신실성. 3. 엄숙한 약속
발음 [ pistis ]
어원  / 3982에서 유래


περιπατέω
스트롱번호 4043

1. 돌아다니다.  2. 두루 다니다. 3. 나타나다
발음 [ pĕripatĕō ]

신약 성경에서는 “믿음(마 8:10, 롬 1:8, 히 10:22), 도(행 6:7),
충성(갈 5:22), 신앙(빌 1:27, 히 6:1).”이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믿음(信)이란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삶을 일컬어 믿음이 좋다고
합니다. 믿음을 사람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에도
합당하지 않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2025년을 맞이하여 매일 성경 읽기에 따라
말씀을 읽고 묵상의 주제를 내 삶에 적용하는
경건 훈련을 통하여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한 해를 마감할 때 착하고 충성된 일꾼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영적으로 도약하는 일에  헌신합시다.
2025년 영적 무브먼트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는 거룩한 순례자가 되자!

 
나의 태신자(胎信者)를 찾아라!





5. 사랑에 의한 생활(요한일서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 '이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는 9,10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현시된 방법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한편 '하셨은즉'의 헬라어 '에이'(*)는 사실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것으로 사실상의 이유나 근거를 의미한다. 이것은 본문이 이후에 언급되는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의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께서 주신 계명으로(요13:34,35; 15:12,17)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요한의 이 권면은 당시 사랑의 계명을 평가절하하는 이단적 교리가 수신자들 사이에 팽배해진 것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Smalley). 한편 '마땅하도다'로 번역된 헬라어 '오페일로멘'(*)은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시사한다. 물론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선택 사항은 아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당연히 나타나야 할 실천 행위이다.

01-12-2025(요한일서 1:7)
그리스도인의 교제하는 생활(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월 19일(베드로전서 3:15)
증인으로서의 생활(베드로전서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월 26일(고린도후서 9:7)
후히 드리는 생활(고린도후서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2월 2일(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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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생활 지침

12-15-2024(주일) 암송성구 #.30 그리스도 안의 생활(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구약에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소개합니다.
목자와 양(시 23:1), 포도나무와 농부(사 5:1-2), 왕과 백성(출 19:6), 남편과 아내(렘 3:14), 아버지와 자녀(신 32:6),
토기장이와 진흙(렘 18:6), 독수리와 새끼(신 32:11), 반석과 피난처(시 18:2), 빛과 백성(사 60:19), 의사와 환자(렘 30:17),
목자와 잃어버린 양(겔 34:11), 불과 쇠(슥 13:9).

이러한 다양한 비유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단순한 계약적 관계가 아닌, 사랑과 보호, 인도와 회복의 깊은 관계임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돌봄과 보호 속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을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표현됩니다.

신약에서 대표적인 관계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 가지(2814)
κλῆ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2814

1. 가지.  2. 포도나무가지. 3. 요 15:2, 4, 5, 6.
발음 [ klēma ]
어원  / 2806에서 유래
  • 1. 가지, 포도나무가지, 요 15:2, 4, 5, 6.
  • 관련 성경  / 가지(요 15:2, 4, 6).
2806. κλάω    
1. 떼다.   2. 뜯다. 3. 깨뜨리다
발음 [ klaō ]
1. 떼다, 뜯다, 깨뜨리다, 마 14:19, 15:36, 26:26, 막 8:6, 눅 22:19, 행 2:46, 고전 11:24.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

성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는 여러 은유와 비유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표현들은 하나님의 사랑, 보호, 인도, 심판, 그리고 이스라엘의 배반과 회복의 과정을 깊이 있게 설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은유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며, 동시에 그 관계의 영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최고의 선물

1. 목자와 양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양으로 자주 비유된다. 목자는 양들을 돌보고 보호하며,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양들은 목자의 보호 없이는 쉽게 길을 잃거나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목자로서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돌보심을 강조하는 은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보호자이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의 보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 은유는 하나님의 돌보심, 인도, 그리고 보호하심을 강조한다.

2. 포도나무와 농부

이사야 5:1-2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그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가 좋은 포도를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하나님은 농부로, 이스라엘은 그분이 심고 가꾸는 포도나무 또는 포도원으로 비유된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돌보아졌으나, 그들이 올바른 열매를 맺지 못할 때 심판을 받는 모습을 묘사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심하게 돌보고 키우셨지만, 이스라엘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불순종할 때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신다. 이 은유는 하나님의 기대와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책임을 상징한다.

3. 왕과 백성

출애굽기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의 신민(백성)으로 비유된다. 이 은유는 하나님께서 통치자이시며, 이스라엘은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존재임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고 지키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과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은 왕으로서 백성을 다스리시며, 이스라엘은 그분의 통치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이 비유는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충성, 순종,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강조한다.

4. 남편과 아내

예레미야 3: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의 남편임이라." 

하나님은 남편, 이스라엘은 아내로 비유된다. 이 은유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상징하며, 때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충실할 때 ‘배신’과 ‘간음’으로 묘사된다. 이 관계는 언약적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남편처럼 그들을 보호하고 돌보셨으나, 이스라엘은 종종 다른 신들에게 마음을 빼앗기며 불충실한 아내로 묘사된다. 이 은유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과 이스라엘의 불성실을 대비시킨다.

5. 아버지와 자녀

신명기 32:6 "너희는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그는 네 아버지시니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하나님은 아버지로, 이스라엘은 그분의 자녀로 비유된다. 이 은유는 하나님의 보호, 훈육, 사랑을 강조하며, 이스라엘은 그분의 아버지 같은 돌봄 속에서 살아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로서 그들을 사랑하고 돌보시며, 때로는 그들의 잘못을 훈계하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중하며 그분의 지시를 따르는 자녀로 비유된다.

6. 토기장이와 진흙

예레미야 18:6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너희에게 행할 수 없겠느냐?"

하나님은 토기장이, 이스라엘은 진흙으로 비유된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처럼 이스라엘을 원하는 대로 형성하고 빚어가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이스라엘을 빚으시며,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신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주권과 이스라엘의 순종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형성되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변화되고 완성된다.

7. 독수리와 새끼

신명기 32:11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하나님은 독수리, 이스라엘은 그분의 새끼처럼 비유된다. 독수리가 자신의 새끼를 보호하며 돌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그들을 위해 싸우시는 모습이 강조된다. 하나님은 강한 독수리처럼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그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도록 돌보시는 보호자의 역할을 한다.

8. 반석과 피난처

시편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반석 또는 피난처로 비유된다. 반석은 안전하고 견고한 보호처를 상징하며, 이스라엘은 그 반석 안에서 안전을 얻는다. 피난처는 하나님이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곳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모든 위험과 위기 속에서 보호하시는 피난처이시며,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안전을 얻는다. 이 비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주심을 강조한다.

9. 빛과 백성

이사야 60:19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하나님은 빛으로, 이스라엘은 그 빛 안에서 걷는 백성으로 비유된다. 빛은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역할을 상징하며, 이스라엘은 그 빛 안에서 길을 찾고 인도받는 존재로 묘사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빛이 되어 그들을 어둠에서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영광과 진리를 비추신다. 이스라엘은 그 빛을 따르며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10. 의사와 환자

예레미야 30:1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의 상처로부터 너를 고치며 너의 질병을 낫게 하리라." 

하나님은 치유자이시며, 이스라엘은 영적, 육적으로 상처를 입은 환자로 비유된다. 이스라엘이 병들고 연약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신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힘으로는 치유될 수 없는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치료자이자 회복자가 되신다. 이 비유는 하나님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임을 상징한다.

11. 목자와 잃은 양

에스겔 34:11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하나님은 목자, 이스라엘은 길을 잃은 양으로 비유된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끝까지 찾으시며, 돌아온 양을 기뻐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들을 찾으시고, 회복시키려는 은혜와 사랑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길을 잃은 이스라엘을 찾으시며, 그들이 돌아오도록 인도하신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돌아올 수 없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끝까지 찾아내신다.

12. 불과 쇠

스가랴 13:9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하나님은 불, 이스라엘은 그 불 속에서 연단되는 금속이나 쇠로 비유된다. 불은 이스라엘을 정결하게 하며, 그들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은 불처럼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고, 정결하게 하신다. 이 은유는 이스라엘이 고난을 통해 정결케 되고, 더욱 순수해지는 과정을 상징한다.

이러한 다양한 비유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단순한 계약적 관계가 아닌, 사랑과 보호, 인도와 회복의 깊은 관계임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돌봄과 보호 속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을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표현된다.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If a man remains in me and I in him, he will bear much fruit;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12-08-2024(주일) 인도의 확신
암송 성구 #.29  잠언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을 지도하시리라.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and lean not on your own understanding;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성도들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험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바른 길을 가도록 돕는 하늘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위하여 구원의 확신(요일 5:11-12)과 기도 응답의 확신(요 16:24)과 승리의 확신(고전 10:13)과 사죄의 확신(요일 1:9)과 더불어 인도의 확신을 갖고 생명의 길을 따라 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두운 바다에 등대의 빛이 방향을 찾아가도록 안내하는 것처럼 성도들은 진리의 말씀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발에 등은 현재의 길을 위한 것이며 내 길에 빛은 미래의 길을 위한 것입니다.
날마다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상에서도 올바른 길을 가도록 돕는 보혜사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여 예수 이름으로 승리합시다. 

12-01-2024(주일) 사죄의 확신
암송 성구 #.28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

흔들림이 없는 신앙생활을 위하여 다섯 가지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다섯 가지 확신이란 구원의 확신(요일 5:11-12), 기도 응답의 확신(요 16:24), 승리의 확신(고전 10:13)에 이어 사죄의 확신을 갖춰야 합니다.
사죄(赦罪)는 내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는 것을 말합니다.
용서(容恕)를 받으려면 먼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망각(妄覺)하기 때문에 내가 범한 모든 죄(원죄와 자범죄)를 고백하려면 하나님이 알고 있는 죄의 목록을 모두 고백해야 하므로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모든 것을 기억하도록 돕기 때문입니다(요 14:26).
"보혜사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자백이란 헬라 단어는 "호모로게오"라고 합니다.
'호모로게오'의 뜻은 "같은 말을 한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막연한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기억하게 하시고 그 죄를 온전히 고백할 때 용서받는 은혜를 경험할 때 비로서 사죄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11-24-2024(주일) 승리의 확신
암송 성구 #.27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No temptation has seized you except what is common to man. And God is faithful; he will not let you be tempted beyond what you can bear. But when you are tempted, he will also provide a way out so that you can stand up under it.


"시험(試驗)"이란 헬라어는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ός)'는 주로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하였으며, 의학적으로는 "실험한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신약에서 '시험(페이라스모스)'이란 "유혹(誘惑. Temptation)"과 "시련(試鍊. Trial)"으로 구분합니다.
'유혹'이란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에 빠지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마 6:13, 눅 11:4, 계 2:10).
'시련'이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연단하기 위하여 잠시동안 어려운 과정을 허락하신 것을 의미합니다(마 5:4. 10, 약 1:12, 벧전 4:12).
'시련'을 다른 말로 '테스트(Test)"라고 합니다.
테스트란 공장에서 상품을 세상으로 출고하기 전에 완전한 제품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으로 이 과정을 거쳐야만 소비자들이 안전하게 제품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의 품안에서 빼앗고자 할지라도 시련을 통하여 완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가시려고 잠시동안 흔들지만 그 결과는 반드시 이기도록 붙잡아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입니다.
미쁘시다는 헬라어는 "피스토스(πίστις)"라고 하며 "신실하다"는 의미로 "믿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길에 갑자기 닥쳐온 시험 때문에 시험에 빠지지 말고 항상 함께 하시는 미쁘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승리하는 길을 선택합시다.




'미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πίστις)는'신실(信實)하다'는 말로서 '믿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복음에 대한 지식이나 경건의 생활로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써만 그들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ός)는 종교적인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고 의학적으로는 실험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신약에서는 주로 '유혹'(temptation)이나 '시련'(trial)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유혹'이라는 것은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고(마 6:13;눅 11:4;계 2:10)
'시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연단하기 위하여 허락하시는 것을 의미한다(마 5:4, 10;약 1:12;벧전 4:12).

πειρασμός, οῦ, ὁ 스트롱번호 3986

1. 시험(Test).  2. 유혹(Temptation).  3. 눅 4:13.
발음 [ pĕirasmŏs ]
어원  / 3085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시험(마 6:13, 행 20:19, 계 3:10), 시험하는 것(갈 4:14, 히 3:8), 시련, 재앙, 재난, 불행(눅 22:28).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 '미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πίστις)는'신실(信實)하다'는 말로서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복음에 대한 지식이나 그들이 자처하는 경건의 생활로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는것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써만 그들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었다(Hendriksen).


πίστ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4102

1. 믿음.  2. 신실성. 3. 엄숙한 약속
발음 [ pistis ]
어원  /  3982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믿음(마 8:10, 롬 1:8, 히 10:22), 도(행 6:7), 충성(갈 5:22), 신앙(빌 1:27, 히 6:1).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 본절에서 나오는 '시험 당함'의 의미를 '유혹'(temptation)과 '시련'(trial)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나누어 양자 택일의 개념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의미가 복합된 일원론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Grosheide).

약 1:14의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 됨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욕심에 끌려 유혹을 받고 시련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러한 시련을 통하여 그들을 연단하시고 훈계하신다.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 이 말씀을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1. 시험이 임할 때 우리에게 회할 길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다는 의미로 하나님은 시험과는 무관한 분이심을 전제한다.
2.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실 때 피할 길도 함께 예비하신다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시는 주관자이심을 전제한다(Hendriksen).
그런데 본절에서는 '즈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쉰'(*,'...와 함께')이 사용되어 후자의 해석이 더욱 타당함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허락지 않으시며 또한 직면한 시험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시는 신실한 분이시다.












11-17-2024(주일) 기도 응답의 확신
암송 성구 #.26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Until now you have not asked for anything in my name. Ask and you will receive, and your joy will be complete.

기도한다는 것은 신앙생활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기도를 구하다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구하다는 헬라어는 "아이테오( aitĕō. αἰτέω)"라고 합니다.
'아이테오'라는 단어가 성경에서는 "구하다(마 5:42, 요일 3:22), 달라 하다(마 7:9, 눅 12:48), 달라다(마 14:7, 행 16:29), 청하다(행 25:3), 묻다(벧전 3:15)"라고 번역합니다.
'아이테오'라는 단어와 "에로타오(ĕrōtaō. ἐρωτάω)"를 구별해야 합니다.
'아이테오'는 "요구하다"라는 의미로' 에로타오'는 "질문하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구하라고 하였을 때의 기도는 내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요구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것과 일치하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해결하려고 구했으니 오히려 하나님은 육체의 가시를 그대로 갖고 지내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의 생각과 전혀 다른 길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내가 구하는 것이 하늘의 뜻과 일치할 때 응답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αἰτέω 스트롱번호154
1.

구하다

2.

묻다

3.

요청하다

발음 [ aitĕō ]
어원
명령 αἴτει, 중간태 αἰτοῦ, 미래 αἰ- τήσω, 제1부정과거 ᾔτησα, 완료 ᾔτη- κα, 요일5:15, 미완료중간태 ᾐτούμην, 제1부정과거 중간태 ᾐτησάμην, 제1부정과거명령법 αἴτησαι, 미래중간태 αἰτήσομαι, 불확실한 파생어에서 유래
  • 1.
    구하다, 묻다, 요청하다[능동태와 중간태의 구별 없이 사용됨], 마7:10, 18:19, 27:58, 막15:43, 눅23:52, 행12:20, 고전1:22.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구하다(마5:42, 요일3:22), 달라 하다(마7:9, 눅12:48), 달라다(마14:7, 행16:29), 청하다(행25:3), 묻다(벧전3:15).


ἐρωτάω 스트롱번호2065

1.

묻다

2.

요구하다

발음 [ ĕrōtaō ]
어원
미래 ἐρωτήσω, 제1부정과거 ἠρώ- τησα, 2046에서 유래된 듯
  • 1.
    묻다, 질문하다, 눅22:68, 요1:25, 8:7, 9:21, 16:19,30, αὐτὸν τὰς παραβολάς: 비유에 대하여 그에게 물어보다, 막4:10, 요16:30.
  • 2.
    요구하다, 간청하다, 마15:23, 눅14:32, 요14:16, τινὰ πε- ρί τινος: 누구에게 무엇을 간청하다, 눅4:38, 요16:26, 17:9등.

연관 단어

󰃨 지금까지는...구하지 아니하였으나 - 여기서 '구하다'로 번역된 '아이테오'(*)는 '구하다', '질문하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에로타오'(*)와는 달리 '요구하다'란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그리고 후반절의 내용이 기도와 관련된 것이 분명하므로 본절에서는 '구하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리고 특히 '구하다'란 말이 현재형으로 언급되어 '지속적으로 기도하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L. Morris). 그리고 이 지속적인 기도는 다른 이름으로써는 소용없고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 질 때 응답이 있을 것이다. 한편 '지금까지는...아니다'라는 구절은 미래적 시간에는 어떤 일들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증보자 개념은 본절에서 아직은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아직 십자가 상에서 피흘림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성전의 휘장은 그대로 드리워져 있었으며, 신성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다(Calvin). 그러나 그의 구속 사역이 완성될 그날 곧 '조금 있으면' 제자들은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11-10-2024(주일)
암송 성구 #.25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And this is the testimony: God has given us eternal life, and this life is in his Son.
He who has the Son has life; he who does not have the Son of God does not have life.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생활에 성공하려면 다섯 가지 확신(確信)을 가져야 합니다.
첫째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행하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를 믿음으로 은혜로 받은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것은 자랑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할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 받은 후에는 구원 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내 뜻을 세상에 펼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영접(迎接)"이란 한자는 " 맞을 영(迎)", "이을 접(接)"라는 뜻입니다.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맞이하여 연결한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내가 죄 가운데서 방황하며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내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내 마음을 비우면 그 빈 마음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이렇게 찾아온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합니다.

좀 더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높은 하늘에 맑은 태양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 태양 빛을 손바닥으로 가리면 태양빛이 내게 비추이지 않습니다.
다시 손바닥을 치우면 태양빛은 나를 비추게 될 것입니다.

내 손바닥이 태양보다 더 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태양빛을 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양처럼 크고 빛나고 아름답게 반짝입니다.
문제는 내 안에 감추어진 작은 손바닥과 같은 죄가 나에게 다가오는 태양빛을 멈추게 할 수 있고 가리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합니다.

먼저 나의 죄를 깨닫고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주님을 모셔들여야 합니다.
내 안에 주님을 모셔들이는 것을 "영접한다"고 합니다.
천재 수학자요 물리학자인 블레즈 파스칼(Pascal, Blaise 1623.6.19~1662.8.19).


수학자이며 철학자이었던 파스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로 올라가셨는가?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믿는다고 하는데 왜 나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을까?
이러한 의문을 갖고 기도하며 또 질문하기를 반복하던 중에 드디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파스칼이 남긴 유명한 작품이 "'팡세'(Pensées,"생각"이라는 뜻)"라는 명상록입니다.
파스칼은 '팡세'라는 그의 명상록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철학자와 수학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예수의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2:7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Are they not the ones who are slandering the noble name of him to whom you belong?

만약 저와 여러분이 입만 살아 있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예수란 이름은 사람들 가운데 조롱당할 것입니다.

2.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 받아야 합니다(베드로전서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비방을 받으면 행복한 자로다. 이는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심이라. 그분께서 그들 편에서는 비방을 받으시나 너희 편에서는 영광을 받으시느니라.


보혈(寶血) precious blood
성혈(聖血) holy blood


1. 예수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영화롭게 되도록 해야 합니다(행 19:17, 살후 1:12)

사도행전 19:17
이 일이 에베소에 거하는 모든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에게 알려지니 그들 모두에게 두려움이 임하고 주 예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니라.

데살로니가후서 1: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너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2. 예수의 이름으로 말해야 합니다(사도행전 4:16-18, 5:40-41)

사도행전 4:16-18

...그들을 불러 명령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결코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라.

사도행전 5:40-41
이에 그들이 그의 말에 동의하고 사도들을 불러서 때리고 명령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 하고 놓아 주니라. 

3.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행9:27-29).
[바나바가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마스커스에서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선포한 것을 밝히 말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그리스파 유대인들을 논박하매 그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하거늘](행9:27-29).


5. 예수의 이름으로 죽어야 합니다(행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슬피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죽는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노라, 하니](행21:13).

6.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요13:13-14,요15:26,요16:23).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3,24).

7.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야 합니다(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한 가운데 있느니라.]

8.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골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골3:17).





예수란 이름은....

예수란 이름은 신약 성경에서 935회나 나옵니다.
마리아가 처음으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이 이름을 들었습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1). 그 다음으로 요셉이 꿈에서 예수란 이름을 들었습니다. [이 일들을 생각할 때에, 보라, 주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녀에게 수태된 이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임이라, 하니라.](마1:20,21).

예수란 이름의 예(JE)는 여호와(JEHOVA)의 준말입니다.
예수는 여호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란 뜻으로 신성을 나타냅니다.
수(SUS)는 SAVIOUR의 준말입니다.
이는 주님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1. 예수란 이름은 구원의 근거(사도행전 4:12)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하늘 아래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느니라.]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among men, whereby we must be saved.
이 이름으로 우리는 구원받아야만 하리라.(직역)
MUST란 말에 주목하라.**

2. 예수란 이름은 설교의 주제(사도행전 8:35, 고린도후서 4:5)

오늘날 교회가 급속히 타락하는 것은 설교의 주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속화된 설교, 심리학적인 설교,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 설교,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설교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이에 빌립이 입을 열어 그 성경 기록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에게 예수님을 선포 하니라.](행 8:35)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다 정작 예수님을 선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전도의 주제, 설교의 주제는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선포하고 또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었음을 선포하노라.] 한글 성경에 오역이 되어 있어서 바로 잡았다.(고후4:5).

3. 예수란 이름은 사역의 목표(사도행전 15:26)

[이 사람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자들이니라.](행 15:26).  
우리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일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서 일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4. 예수란 이름은 모든 것을 굴복시키는 권위(빌립보서 2:9-1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들로 하여금 다 예수라는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빌 2:9-10)

5. 예수란 이름은 섬김의 동기(

[...이는 그들의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들에게서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하였음이라.](요삼 5-8). 사도 요한은  주님의 사역자들을 물질로 후원하는 이들을 칭찬하였습니다.

6. 예수란 이름은 기도의 힘(요한복음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3-14).

7. 예수란 이름은 모든 말과 행동의 기준(골로새서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



예수의 이름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예수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영화롭게 되도록 해야 합니다(행19:17,살후1:12).
[이 일이 에베소에 거하는 모든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에게 알려지니 그들 모두에게 두려움이 임하고 주 예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니라.](행19:17).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너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1:12).

2. 예수의 이름으로 말해야 합니다(행4:16-18,5:40-41)
[...그들을 불러 명령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결코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라.](행4:16-18),
[이에 그들이 그의 말에 동의하고 사도들을 불러서 때리고 명령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 하고 놓아 주니라.](행5:40-41)

3.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행9:27-29).
[바나바가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마스커스에서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선포한 것을 밝히 말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그리스파 유대인들을 논박하매 그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하거늘](행9:27-29).

4.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 받아야 합니다(벧전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비방을 받으면 행복한 자로다. 이는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심이라. 그분께서 그들 편에서는 비방을 받으시나 너희 편에서는 영광을 받으시느니라.](벧전4:14).

5. 예수의 이름으로 죽어야 합니다(행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슬피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죽는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노라, 하니](행21:13).

6.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요13:13-14,요15:26,요16:23).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3,24).

7.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야 합니다(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한 가운데 있느니라.]

8.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골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골3:17).

9. 예수의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약2:7).
만약 저와 여러분이 입만 살아 있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예수란 이름은 사람들 가운데 조롱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너희가 일컬음을 받는 그 귀한 이름을 모독하지 아니하느냐?](약2:7)
예화) 알렉산더 이야기- Change your name, or Change your ways.





고린도후서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For he says, "In the time of my favor I heard you, and in the day of salvation I helped you." I tell you,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이 구절은 이사야 49장 8절을 인용한 것으로 여호와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백성들이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의 의미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이다(Lowery).
둘째는 구원의 때가 도래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Harris, Barrett).
셋째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때가 도래했을 뿐만 아니라 그 때의 긴급성을 강조하는 것이다(Tasker).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이며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은혜를 받아야 할 시기는 바로 지금입니다.
왜냐하면 한치 앞을 모르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런 죽음을 알리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죽음이 점점 더 가깝게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를 확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이란 다섯 가지 내용을 갖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도의 응답과 영적 싸움에서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것과 모든 죄악을 용서받았다는 것과 알 수 없는 내일도 주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 이 구절은 이사야 49:8의 인용이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으로 바벨론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이 놓임을 받고 완전히 회복된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바울은 이 예언의 말씀을 복음 시대에 적용하고 있다.
바울의 이 인용이 뜻하는 바는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Lowery), 그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는 때가 도래(到來)했음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Harris, Barrett).
바울은 본절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때가 도래했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 때의 긴급성을 강조하고 있다(Tasker).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본절의 앞 부분에서 언급한 바, 구원의 때가 도래했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 구원은 바로 '지금'(*, 뉜) 바울이 전하는 화해의 복음을(5:18-21)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나 이 '때'는 항상 지속되지는 않는다.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없어지는 날 곧 주께서 재림하실 날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눅 12:40), 도적같이 임할 것이다(살전 5:2).
따라서 바울이 복음을 선포하는 그 순간은 곧 종말론적인 '결단의 때'라고 할 수 있다((Cullmann).
또한 이 '결단의 때'는 각 개인에게 올바로 선택해야 할 책임이 부과된 '책임의 때'이다.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라는 외침을 듣는 사람들이 그 메시지와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을 경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며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Hughes).






10-20-2024(주일)
암송 성구 #.22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영광(榮光) -

7. [요한복음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8. [요한복음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9. [요한복음 12: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10. [사도행전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16. [빌립보서 1: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께 영광(榮光)

영광(榮光) - 영화 영(榮), 빛날 광(光)

 불 화(火) + 불 활(火),
 덮을 멱(冖)
나무 목(木) = 사람 인(人) + 열 십(十)

* 영화 영자는 사람이 십자가와 같은 무거운 짐 또는어려운 짐을 짊어진 후에 내가 하였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리면
  그 후에 불꽃이 피어오르듯이 하나님께 희생 제물이 연기가 되어 올라가듯(번제, 올라)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빛 광(光) = 작을 소(小) + 어진 사람인 발(儿)

* 빛이 되려면 먼저 내가 작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작은 마음과 생각이 어진 사람의 흔적으로 새겨져야 합니다.
  사람은 욕망이 강하여 내가 무엇을 행한 후에 내가 하였다는 자기 의(義)에 도취되기 쉽습니다.

헬라어의 영광 - 독사(dŏxa) δόξα, ης, ἡ 스트롱번호 1391

1. 광명.   2. 눅 2:9.  3. 위엄
발음 [ dŏxa ]
어원  / 1380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광(마 4:8, 막 8:38, 눅 2:9), 광채(행 22:11), 영화(榮華)(요 17:5).
  • 1380. 도케오(dŏkĕō) δοκέω   

    1. 생각하다.
    2. ἐδό κουν πνεῦμα θεω- ρεῖν : 그들은 귀 신을 보는 것으로 믿었다
    3. εἴ τις δοκεῖ σοφὸς εἶνα ι: 만일 누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한다면
    발음 [ dŏkĕō ]
    관련 성경 / 
    생각하다(마 3:9, 눅 17:9, 요 11:13), 주관하다(막 10:42), 알다(눅 1:3, 요 20:15, 행 15:28), 가결하다(행 15:22), 유력하다(갈2 :6), 보이다(고전 12:22), 여기다(고후 11:16). [명] 생각(마 17:25, 21:28, 요 11:56), 의견(눅 10:36).


* 헬라어의 영광이란 스쳐가는 가벼운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깊은 생각 즉 묵상의 결과라고 하겠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를 당했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다쳤는가? 보험금이 얼마나 되는가? 이런 생각을 먼저 한다.
  그러나 영광을 돌리려는 사람은 어려운 사건과 사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가?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혹시 어긋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줄 아는 것이라고 하겠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어로는 ‘카보드’,
헬라어로는 ‘독사’

세상 모든 피조물과는 전혀 다른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완전성과 탁월성을 뜻합니다.
특별히 당신께서 신자에게 임재하실 때에 찬란한 빛이 동반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glory, 한글로는 영화로운 빛(榮光)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실체를 인간은 결코 상면할 수 없습니다.
추악한 것과는 단 일초도 공존하지 않으시는 완전한 선이신 그분의 존전 앞에 죄로 찌든 인간이 서면 당장 소멸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매개체를 통해서 혹은 천사를 대신 보내어서 인간을 만나주십니다.

대표적인 예로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또 시내 산을 덮은 구름이나 이스라엘의 성막위에 머문 구름을 통해 당신의 임재를 보여주시고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출 24:16, 40:35) 그러다 성자 하나님 예수는 사람이 직접 뵙고 만나도 죽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사랑을 받아 누릴 수 있도록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스데반이 순교할 때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회심시킬 때에 실제로 영광스런 빛 가운데 임재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실제적인 임재 앞에 서게 되면 엄청난 경외감에 사로잡혀서 아무 말도 못하고 얼어붙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그분께 내어드리며 그분의 처분만 기다리며 겸손히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자 자기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으로 망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듯이 말입니다.(사 6:3)
그런 고백을 받으신 하나님은 진노의 형벌 대신 은혜의 구원을 베푸시고 당신의 자녀와 종으로 세워주십니다.
그럼 넘치는 감격과 기쁨으로 저절로 그분을 향해 감사 찬양 경배를 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골고다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완전하게 실현되었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죄인들의 죄 값을 감당하시고 구원해주시는 은혜는 인간은 상상도 못할 하나님만의 완전한 의이자 탁월한 선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에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헬라어로 영광-‘독사’의 타동사형 ‘독사조’, 영어로 gloryfy로 번역됨)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라고 기도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주님이 이제 곧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서 성부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감당하심으로써 성부와 성자 모두가 영화롭게 된다고 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사실상 당신의 가르침, 섬기는 사역, 기적들, 그리고 십자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는데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그분이 자기 땅에 왔는데도 자기 백성들이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1:9-18) 사탄은 자기 종들을 충동시켜서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으나 사탄의 그 모략마저 당신의 영광을 온 천하에 완전하게 드러내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진리의 영, 성령님이 오셔서 제자들로 십자가에 드러난 그 영광의 실체에 대해 정확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셨던 천국 복음과 십자가 구원의 의미를 풀어서 성경으로 저작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의미를 밝힌 성경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기에 필요 충분한 영적 진리가 온전히 계시된 것입니다. 거기다 신자에게 그 진리를 잘 분별하여 자기 삶에 반영할 수 있도록 성령님이 평생토록 내주해주십니다. 신약시대에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하나님이 굳이 매개체나 천사의 모습으로 신자에게 영광 가운데 임재 해주실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사역이 이뤄지기 전이었고 성경도 완비되지 않았으며 성령님도 일시적 부분적으로만 역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통으로 계시하거나 직접 임재해서 당신의 뜻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던 때와 신약시대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 이후의 영광

바꿔 말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개념을 바꿀 필요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단순히 당신의 위엄과 권능을 과시하려고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서 보듯이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특별히 이 땅과 인간을 다스리는 뜻과 계획을 밝혀서 보여주기 위해서만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신약성경으로 당신의 뜻이 온전히 계시되었으니까 더 이상 가시적인 존재로는 거의 임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신약신자들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그 영광을 인식할 수 없게 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가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절감하면 바로 그분을 대면한 것이고 그분의 영광도 가시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영적으로 접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어떤 일이 하나님이 아니고는 절대로 행할 수 없는 그분의 역사라는 확신이 들면 사실상 그분을 대면한 것입니다. 맨 처음 성령으로 거듭날 때부터가 그러합니다. 신자는 인식하지 못해도 연약한 피조물인데도 그분의 주권적 택함을 받아서 거부할 수 없는 그분의 불가항력적인 구원의 은혜를 입는 것부터 그분의 영광이 강력하게 임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성령의 중생의 은혜를 입은 신자는 자연히 “어찌 나 같은 천하의 죄인에게 이런 구원의 크신 은혜를 베푸시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아주 뛰어난 업적을 쌓은 존경 받을 만한 인물을 대면해도 “제게 너무나 큰 영광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분이 나를 만나주어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그런 차원과도 비교조차 안 되는 너무나 고귀한 은혜이므로 자연히 감사 찬양 경배를 올리게 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배 중에 십자가 은혜를 감사하는 찬양을 부른 후에 성도들은 진심으로, 단순히 종교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만의 탁월함과 완전함입니다. 신약시대에는 눈에 안 보이지만 그분의 영광은 더 다양한 방식으로 더 빈번하게 신자에게 비춰집니다. 대표적으로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깨닫고 소름이 끼치도록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 깨달은 대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신다고 절감하면 감격은 두 배로 늘어납니다.

예배, 설교, 성경공부, 찬양, 기도, 성도교제, 전도나 선교, 교회와 지역사회에서 봉사, 이웃 사랑, 사회적인 선행 등등 신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면 반드시 그분이 함께 동행해주십니다. 신자도 지금 그분이 분명히 나와 함께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자신이 전혀 계획 의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내 인생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더 확실히 인식되고 그분의 뜻까지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그럼 그 자리에 엎드리고 눈물이 절로 흐르도록 감사와 경배를 돌리게 됩니다. 영광이라는 히브리어 카도사는 원래 ‘무게’나 ‘중압감’이라는 뜻인데 하나님이 신자에게 임재하면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기에 영광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고난 가운데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것입니까? 이 또한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통해서 당신다우심을 드러내신다면 그분의 영광이 함께 한 것입니다. 물론 전적으로 신자의 죄나 잘못으로 일어난 고난이라면 고난 자체에 그분의 영광은 없습니다. 죄 자체의 부작용과 폐해가 고난으로 닥쳤고 신자로서 그분의 징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 잘못으로 인한 고난 중에도 신자가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의 기도를 하면서 그 잘못을 고쳐나가면 하나님이 고난을 없애주고 더 거룩한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그런 구원을 인식하고 자신의 회개마저도 당신께서 간섭해주신 은혜라고 확신하면 그분의 영광을 대면한 것입니다. 그분께 한층 더 깊어진 감사 찬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욥처럼 믿음을 성숙시키기 위해서 또 아브라함처럼 열방 앞에 복의 근원으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의도적으로 신자에게 연단을 겪게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도대체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도 못하며 하나님께 원망만 하게 됩니다. 그러다 끈질기게 기도하며 그분과 영적인 씨름을 해나가면서 그 연단의 의미를 깨닫고 잘 순응하면 고난 중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대면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신자가 진정으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동행을 이어가면 그분의 영광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로 그분을 만나서 영광을 보려고 간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영광을 돌리는 방법

그럼 신약 신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접한 신자는 자연히 감사 찬양 경배를 돌리게 된다고 이미 말씀드렸지만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다 가르쳐주셨습니다.

마지막 만찬 때에 기도하신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었고 또 성자로서 성부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더러 전부 십자가에 죽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늘날 그런 정도의 핍박은 없으며 굳이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십자가에서 절정으로 드러났기에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을 자신의 삶에 구현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이 땅과 인간을 다스리는 목적과 방향은 오직 하나입니다.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베풀려는 것입니다. 창조 때부터 신구약시대를 거쳐서 마지막 날까지 인류의 전 역사는 십자가 구속사입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으면 온 동네에 잔치가 벌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이 한 명이라도 구원 받을 때에 하나님은 가장 영광스럽게 여기고 또 신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그 일에 기여하면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 개인의 인생이나 그가 속한 공동체에 현실적으로 풍요를 주던 고난을 겪게 하던 당신만의 구속역사를 이뤄나가는 것입니다. 신자가 겪는 어떤 고난이라도 그런 방향으로 그분의 역사가 임하면 그분의 영광도 함께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단지 현실적 축복을 받고 그에 상응한 감사헌금 혹은 교회봉사를 더 많이 한다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고난을 겪게 했으니 그분께 영광을 돌릴 것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틀린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이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10:31-33)

‘그런즉’이라고 시작하니까 바로 앞에서 설명한 내용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신자들이 시중에 파는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알다시피 당시에는 고기가 귀해서 우상 신전의 음란한 예배에 바쳐진 후에 판매되었습니다. 신자로선 그런 고기를 사먹기가 꺼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우상 자체는 실존하지 않으니까 그에 바쳐진 것도 아무 의미가 없으므로 신자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전제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믿음이 그 정도까지 확고하지 않는 연약한 신자나, 우상이 있다고 믿는 주변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가 자기들 계명을 위반한다고 비방할 가능성이 있다면 먹지 않는 것이 좋다고 권면했습니다. 신자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나 좋은 일을 다른 사람의 믿음을 위해서 또 복음 전파에 방해되지 않도록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스스로도 그런 위험이 있다면 평생 동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후에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라고 말했기에 바로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처럼”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종교적 관습이나 의식에 따른 경건한 행동보다는 오직 십자가 복음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가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행을 많이 하고 종교적 활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특별히 하나님께 헌금 헌물을 많이 바치고 종교적 행위를 열심히 뜨겁게 행한다고 해서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지는 모습이 드러나야만 합니다. 신자가 자신의 삶과 하는 일을 통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주변에 전파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신자부터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며 그분이 이 땅에서 살았던 삶대로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믿음이 연약한 신자는 그런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또 삶의 여러 측면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모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분의 탁월하심과 완전하심을 있는 그대로 순전하게 인정하면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 일은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라고 인식할 수 있다면 그분께 진정으로 감사하면 됩니다.

그런 인식이 안 되어 당장은 잘 이해할 수 없는 경우라도 반드시 그분만의 거룩한 뜻이 있을 것이라고, 최소한 그분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진리 하나라도 겸허하고도 확고하게 인정하면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난 중에 원망과 의심을 앞세우기 보다는 그분의 뜻을 묻고 또 묻는 것부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다섯 솔라 – 오직 하나님께 영광

Five Solas 다섯 솔라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다섯 솔라’ 시리즈의 마지막인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라틴어를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혹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차치하고, 최소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나는 내가 제일 중요해.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 하나님의 영광은 나하고 관계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고, 그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하시며 우리에게도 그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은 성경에서 우리가 놓칠 수 없는 분명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시작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선포합니다(창 1:1).
누구도 아무런 의미나 목적 없이 무언가를 만들지 않습니다.
더구나 인격체이신 하나님께서 또 다른 인격체인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창조의 목적은 시편을 비롯한 다른 말씀들에서 계속해서 나오는데, 이사야서에서는 특별히 하나님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동일합니다. 구원은 마치 ‘재창조’와 같아서, 성경은 구원을 새로운 창조로 말하기도 하고 창조에 사용된 언어를 그대로 구원에 적용하여 사용하기도 합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엡 2:8-10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목적도 창조의 목적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성경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이렇게 명령합니다.

시 96:1-3 [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2]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3]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 당시의 가톨릭 교회도 하나님의 영광을 표면적으로 부정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가르침과 실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져 있었고 다른 것들이 영광을 (하나님과 함께) 얻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교회의 믿음과 삶에 있어 가장 높은 권위의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황과 의회가 결정한 전통이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이신데, 마리아나 다른 성인들, 사제들이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구원인데, 우리가 무언가를 거기에 더해야 하고 더할 수 있다고 가르쳐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과 실천에는 공통으로 하나님과 그분께서 하시는 일에 사람과 사람의 행위가 더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결과적으로는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이 함께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오직’은 이런 것들을 바로 잡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쯤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완전하고, 다른 피조물과는 구분되고, 무한히 위대하신 하나님의 속성이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하고 구분되며 무한히 위대하신 속성, 즉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거룩이라고 말하고,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겉으로 표현되는 것을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잘 드러난 말씀은 이사야 6장 2~3절입니다.

사 6:2-3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스랍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분을 ‘거룩하다’고 선포했고, 온 땅에 충만한 그분의 거룩하심을 ‘영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어떤 면이 겉으로 드러나면 그것이 영광보다는 수치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완전하시고 무한히 위대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어떠하심이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그분께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결국,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혹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잘’ 혹은 ‘그대로’ 드러나게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말씀에 따라 모든 것을 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일입니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중보자가 되신 것을 인정하고 그리스도께만 나아가는 것이 그렇게 하는 일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내가 무엇을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믿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 구원임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시고, 하나님이 구원자시고, 하나님이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오늘날에 적용할 때, 두 가지 주의할 점을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첫째는, (당연한 얘기지만)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성취에 도취하여서 마치 내가 모든 것을 이뤄낸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말만 그렇게 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 생각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아름다움, 위대하심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더 말씀을 배우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그분께서 우리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중 단 하나라도 ‘내가’ 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합니다.

두 번째는, 마치 우리가 무언가를 성취해서 얻어낸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 쉽게 말해 “하나님 덕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약간은 생각의 방향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핵심은 우리가 무엇을 해냈느냐, 성취했느냐가 아닙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잘’ 드러나셨냐가 핵심입니다. 내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잘 드러났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직장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고백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니가 거기까지 가려고 얼마나 아부를 떨고 돈을 갖다 바쳤는지 내가 아는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어떨까요? 아무리 잘 포장해서 말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직장에서는 말단 사원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도 눈속임으로 일하지 않고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한다면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늘나라의 소망 가운데 기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분명 영광 받으십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이루었느냐, 앞으로 무엇을 이룰 것이냐가 아니라, 지금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모습을 드러내고 있느냐입니다.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길 원합니다. “내 생각, 말, 삶에서 하나님은 바르게 드러나고 계신가? 나를 통해 보여지는 하나님의 모습은 왜곡되어 있지 않은가?” 유명한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한 헨델은 악보의 끝에 “S. D. G.”라는 약어를 기록했습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입니다. 우리 삶의 매 순간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 우리 삶의 끝에 “S. D. G.”라는 세 글자를 힘차게 외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마음가짐이나 언행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우리를 대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말과 품행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도 있고 드러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장 16절

우리들의 착한 행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회개시키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동기가 된다면 그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흐뭇하시겠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성도들에게 선행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벧전 2장 12절

진리가 아무리 옳다 해도 성도들의 행실이 악하다면 복음의 빛은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도 옳고,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의 됨됨이도 아름답다면 복음의 빛은 더욱 밝아질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많은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고전 3장 16절). 하나님과 하나 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닮아갈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장 5절

“…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 1장 4~7절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이와 같은 아름다운 행실들을 교회 안팎에서 행한다면 믿음의 식구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선하다는 증거를 얻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본받지 말라 경고하고 있습니다(롬 12장 2절). 그러므로 이 악한 세대 속에서도 우리는 세상의 풍조에 동요될 것이 아니라 고운 말씨와 착한 마음씨, 아름다운 행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생각할 문제

1.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선한 행실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한 행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33)

유명한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쓴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유명한 논문이 있습니다. 
루터는 이 논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요점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자유로운 만물의 지배자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충성스러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이 말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에서 자유함을 얻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유롭게 된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만물의 지배자로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육신적으로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웃과의 관계에서 종처럼 그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러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교훈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본문에 앞서 성도는 자기의 신앙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자유가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부터 삶의 중요한 문제까지 결정하며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상의 문제들을 선택하고 결정하는데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31절 말씀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최종적인 결론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삶의 목적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참된 성도의 신앙과 생활을 정확하게 요약한 핵심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모든 행위의 기준, 전 인생의 기반 역시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아주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 즉 그것이 먹는 것이든지 마시는 것이든지 생업의 일이든지 봉사의 일이든지 무슨 일이든지 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급함과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오늘 중추절을 맞이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하나님이 영광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목적을 바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존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그 목적인 무엇인지 알아야 분명한 삶을 살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을 상실하고 있다면 존재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존재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치창조의 수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적을 상실하면 자연히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는 마치 땅만 허비하고 세월만 허송하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목사님은 말하기를 "실패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목적이 잘못된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가장 잘 인식한 사도 바울은 빌 1:20-2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이 고백을 통해 자신의 존재목적이 예수님을 존귀하게 해드리기 위함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존재목적도 역시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우리 한국교회에 ‘목적이 이끄는 삶’ 열풍이 불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새들백 교회 릭 워렌 목사님을 통해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열풍이 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우리 한국교회가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되었다면 지금쯤 우리 한국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아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세상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을 모든 사람들이 살기 좋은 천국, 즉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것이 교회의 소명이고 사명이며 교회의 존재목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그 목적을 잊었습니다. 
세상을 등졌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잊었습니다. 교회가 교회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부흥, 교회의 성장이 교회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성장이 목적이 되고, 교회의 부흥이 목적이 되어 온 교회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느 정도 그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세계에서 제일 큰 장로교회, 세계에서 제일 큰 감리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점점 커지는데 교회는 점점 그 생명력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는 점점 그 아름다움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의 존경을 받고 인정을 받던 교회는 점점 세상의 지탄을 받고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교회로 추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교회가 교회의 존재목적을 잃으면서 교인들도 존재의 목적을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자 되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은 목적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목적을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겠다고 하는 것만 달라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처럼 소중한 소명을 잊었습니다. 사명을 잊었습니다. 자신의 존재목적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잃어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의 능력은 상실한 사람들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삶의 목표와 목적을 수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성공만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과 소명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어리석은 삶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목적을 다시 한 번 세우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개념이 무엇인지는 잘 알아야 합니다. 영광의 개념을 생각할 때 항상 두가지 개념 즉, 하나님과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표현도 있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의 영광의 개념은 “하나님의 임재나 나타내심”의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2장에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행하실 때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11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갈릴리 가나의 한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드러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과 사랑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내고, 알려주고, 보여주며, 높이는 방편이 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신원 에벤에셀 박성철 회장은 장로님입니다. 20여 년 전 남의 건물 얻어서 조그맣게 봉제공장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물질의 복을 주시면 수입의 30%를 하나님 영광을 위해 쓰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오늘날 그 기업은 신흥재벌의 순위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사업을 하든, 운동을 하든, 공부를 하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일차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드러내고 보여주며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의 전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데 두었습니다. 

롬 14: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제일의 목적이 바로 인간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목표를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말씀합니다. 사 43:7절에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 목적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나타나는 중요한 열매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32-33절에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자유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성도든지 아니든지, 아니면 나와 관계있는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관계없이 그들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유익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거미같이 자기만 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손해나게 하며 해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개미와 같이 부지런히 살기는 하는데 전적으로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부지런히 일하는 꿀벌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꿀벌은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갑니다만 그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삶의 결과는 반드시 영혼을 구원하는 것으로 연결되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여 영생 얻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은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 6:39-40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구원받아 영생을 소유한 우리 성도들의 삶은 어찌하든지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일에 목표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믿기를 권하고, 예수 믿게 하여, 우리와 같이 영생을 얻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 생애의 최대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한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해 그들의 영혼을 건져야합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서 시간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고 재능을 바치는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실 때 복음을 위해 생명까지 바친다면 최고의 영광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무슨 일을 하든지 궁극적인 목표를 영혼구원에 두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무엇을 하든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과 박해와 핍박을 각오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내 가족, 내 친지,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혹 아직도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어둠의 세계에서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습니까? 






10-13-2024(주일)
암송 성구 #.21  고린도후서 5:17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호스테 에이 티스 엔 크리스토 카이네 크티시스 타 아르카이아 파렐덴 이두 게고넨 카이
ωστε ει τις εν χριστω καινη κτισις τα αρχαια παρηλθεν ιδου γεγονεν καινα τα παντα

신약 성경의 언어 헬라어에서 "새롭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는 "카이노스(kainŏs)"와 "네오스(nĕŏs)"라고 합니다.
'카이노스'는 질적으로 온전하게 새롭게 된 변화를 말합니다.
반면에 '네오스'는 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휴대전화의 새로운 제품이 소개될 때 그 신제품을 가리켜 '네오스'의 변화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후에 그의 삶이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면 그 사람의 변화를 일컬어 '카이노스'의 변화라고 합니다.

현대인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목회자가 목회자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을 때
둘째는 교회가 지역사회에 유익이 되지 못할 때
셋째는 교인들의 비신앙적인 삶

이러한 이유의 근본적인 원인은 '네오스'의 변화에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카이노스의 변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지는 카이노스의 변화'를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표현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의미한다. 이 연합의 비밀에 대해 사도 요한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관계로 설명했다(요 15:1-7).

새로운 피조물(크티시스. ktisis.  κτίσις)
- 새로운 피조물이란 외적인 모양이 아니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있는 내적 능력을 갖는 것이다.

2537. 카이노스  καινός, ἡ, όν 

1. 새로운.  2. 쓰지 않은.  3. 알려지지 않은
발음 [ kain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 1. 새로운.
    • a. 쓰지 않은, 써보지 않은, 마9:17, 막2:22, 눅5:38.
    • b. [전에는 없었던 이라는 뜻으로] 알려지지 않은, 낯설은, 놀라운, 막1:27, 요13:34, 행17:19, 계2:17.
    • c. [옛 것이나 낡은 것의 반대] 마26:28, 막14:24, 눅22:20, 고전11:25, 고후5:17, 갈6:15, 엡4:24, 벧후3:13, 계21:1.
  • 관련 성경 /  새(마9:17, 눅5:36, 계2:17, 마13:52, 막2:21, 고후5:17), 새로운(고후5:17, 계21:5), 새로 되는(행17:21).



카이노스 정의

    1. 형식에 관하여
      1. 최근에 만든, 신선한, 최근의, 사용하지 않은, 입지 않은
    2. 실체에 관하여
      1. 새로운 종류의, 전례 없는, 참신한, 흔하지 않은, 들어본 적이 없는

성경의 맥락에서 그리스어로 '카이노스'는 무엇을 뜻합니까?

Kainos는 종종 "새로운"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로 성경 본문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의 맥락에서 Kainos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뿐만 아니라 신선하고 질적으로 다른 것을 가리킵니다.
시간적 의미에서 단순히 젊거나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neos"라는 단어와 달리 Kainos는 더 큰 영적 갱신이나 변형을 의미합니다.

νέος, α, ον 스트롱번호 3501

1. 새로운.  2. 상징적으로 쓰일 경우. 3. ἐνδύσασθαι τὸν ν. : 새사람을 입다
발음 [ nĕŏs ]
관련 성경  /  젊은(요21:18, 행5:6, 딤전5:11). [명] 젊은 이(딤전5:1,14), 젊은 자(눅22:26).

성경에 나오는 언어의 중요성

언어는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됩니다.
신약의 원래 언어인 그리스어는 뉘앙스와 의미가 풍부합니다.
각 단어는 사용법, 맥락 및 역사적 배경에 따라 다른 측면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Kainos와 Neos와 같은 단어의 구별은 독자가 의도한 메시지를 더 충분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신약성경에서의 카이노스의 용법

1. 예수의 가르침 속의 카이노스

복음서에서 카이노스는 예수의 중요한 가르침에 등장하여 그의 메시지의 변형적 측면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9:17에서 예수는 새(카이노스) 포도주를 새(카이노스) 포도주 부대에 넣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은유는 단순히 기존 전통에 패치할 수 없는 새로운 신앙 접근 방식의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예수는 그의 언약이 모든 것을 바꾸는 새로운 관점을 가져온다고 강조합니다.

2. 바울서신의 카이노스

사도 바울은 그의 글에서 자주 카이노스를 사용했습니다.
고린도후서 2:5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 창조물(카이노스)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고 보라 새 것(카이노스)이 왔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믿음을 통해 일어나는 완전한 변화를 강조합니다.
그것은 옛 생활 방식에서 성령으로 활기차고 능력을 받은 생활 방식으로의 변화를 나타냅니다.

3. 새 언약 개념과의 연결

카이노스는 또한 새 언약에 대한 논의에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실 때, 그것은 카이노스 원칙을 낳습니다.
히브리서 8:13에서 저자는 옛 언약이 쓸모없게 되고 있으며, 암묵적으로 카이노스 언약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새 언약은 용서, 내적 변화, 그리고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제공합니다.

Kainos를 다른 그리스어 용어와 비교

Kainos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다른 그리스어 단어와 비교하는 것이 좋습니다.
Kainos는 신선함과 변화를 강조하는 반면, 시대나 시간에서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Neos는 그 변화의 깊이를 전달하지 않습니다.

Kainos가 Neos와 다른 점

Neos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것, 아마도 최신 자동차 모델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변형보다는 연대기와 더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Kainos는 심오한 갱신을 암시합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후 Kainos가 된 사람은 단순히 새로운 삶의 단계로 나이를 먹은 것이 아니라 영적 상태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카이노스

요한계시록은 카이노스의 궁극적인 표현을 요약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서 "나는 새(카이노스) 하늘과 새(카이노스) 땅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흥분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혁신이 아니라 창조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완전히 회복됩니다.
죄와 고통으로 점철된 옛 질서는 순수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자리를 내줍니다.

카이노스의 영적 의미

1. 갱신과 변형

성경의 카이노스 개념은 신자들이 변화를 받아들이도록 격려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갱신에 대한 부름이며, 믿음에 뿌리를 둔 새로운 정체성을 위해 오래된 습관과 사고방식을 벗어던지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개인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계와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2. 미래에 대한 희망

Kainos는 다가올 것에 대한 희망을 구현합니다. 신자들은 그들의 영적 삶의 궤적이 새롭게 되고 더 나은 것을 향한 길을 따른다는 것을 상기합니다. 이 희망은 시련과 고난 중에 인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3. 참여 초대

Kainos를 이해하는 것은 또한 신자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 성경 읽기, 영적 각성을 촉진하는 커뮤니티의 일원이 됨으로써 성장을 기르도록 격려받습니다. 매일 Kainos 경험을 위한 기회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힘을 드러내는 은혜의 순간입니다.

결론

Kainos는 성경 이야기에서 엄청난 깊이를 드러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요 성경에서 마주치는 용어로, 피상적인 방식으로 새로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완전한 개혁을 나타냅니다. 이 단어를 이해하면 신자들은 신앙의 변화시키는 힘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도록 격려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갱신이 절실히 필요한 세상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공합니다.

Q. 카이노스의 문자적 번역은 무엇입니까?
  A. Kainos는 종종 "새로운"으로 번역되며, 단순한 연대순의 새로움을 넘어 신선하고 질적으로 다른 것을 나타냅니다.

Q. 신약성서에서 카이노스는 어디에 자주 언급됩니까?
  A. 카이노스는 마태복음 9:17, 고린도후서 2:5, 요한계시록 17:21 등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Q. 카이노스는 새 언약의 개념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A. 카이노스는 쓸모없는 옛 언약과 대조적으로, 예수를 통해 확립된 새롭고 변혁적인 관계를 구현합니다.

Q. 카이노스는 신자들의 영적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나요?
  A. 카이노스를 이해하는 것은 신자들이 믿음과 행동을 통해 삶에서 개인적 변화와 갱신을 받아들이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

Q. 카이노스는 신약에만 나오나요?
  A. 카이노스는 주로 신약성서에서 발견되지만, 그 개념은 다양한 형태로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공명합니다.

Q. 카이노스는 신학적 토론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요?
  A. 카이노스는 새로운 삶, 재생, 그리고 신자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역의 본질에 대한 토론을 촉진합니다.

Q. 카이노스는 성경적 맥락 밖의 일상 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까?
  A. 네, 새로운 시작과 변화라는 개념은 일상적인 결정과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Q. Kainos는 성경의 죄 개념과 어떻게 관련이 있습니까?
  A. 카이노스는 죄에 지배받던 옛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의로움으로 능력을 얻은 새로운 삶을 소개합니다.

Q. Kainos와 Neos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차이점을 이해하면 독자는 기독교 신앙에서 요구되는 변화의 깊이를 인식하고 변화에 대한 오해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Q. 신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카이노스 생활을 추구할 수 있습니까?
  A. 신자들은 기도, 성경 공부, 지역 사회 참여, 그리고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반영하는 봉사 활동을 통해 Kainos의 삶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2937. 크티시스 κτί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2937

1. 창조.  2. 창조하는 동작. 3. 창조된 것
발음 [ ktisis ]
어원 / 2936에서 유래
창조(막 10:6, 히 9:11, 계 3:14), 피조물(롬 1: 25, 고후 5:17), 창세(롬 1:20), 제도(벧전 2:13), 지으신 것(히 4:13), 지음을 받는 것(갈 6:15), 만민(골 1:23).



- 인종과 성(性)을 초월하여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여(14절)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을 이루면(갈 2:19, 20)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여기서 '피조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티시스'(*)는 창조행위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롬 1:20).
즉 본 구절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영적인 교제를 갖게 되었을 때 그에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로운 창조 행위가 일어나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창조 행위를 오해하여 새로운 질료(質料)로 만들어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상상해서는 안된다.
그는 여전히 육의 몸을 입고 있고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육체의 욕망과 죄에 굴복당할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롬 6:12,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그가 그리스도와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16절).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사람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을 따라 살게 된다.
과거에는 그리스도를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 과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인정했으나 지금은 그런 차별을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만이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롬 2:28, 29; 고전 5:12, 13; 갈 3:28; 엡2:11-22; 골 3:11).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헬라어 직역 / 24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으니, 심판에 이르지 않고 반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 


αμην αμην λεγω υμιν οτι ο τον λογον μου ακουων και πιστευων τω πεμψαντι με εχει ζωην αιωνιον και εις κρισιν ουκ ερχεται αλλα μεταβεβηκεν εκ του θανατου εις την ζωην.
아멘 아멘 레고 휘민 호티 호 톤 로곤 무 아쿠온 카이 피스튜온 토 펨프산티 메 에케이 조엔 아이오니온 카이 에이스 크리신 우크 에르케타이 알라 메타베베켄 에크 투 다나투 에이스 텐 조엔.

듣고(아크온. ακουων) - 현재분사형

믿는(피스테우온. πιστευων) - 현재분사형

얻었고(에케이. εχει) - 현재형

옮겼느니라(메타베베켄. μεταβεβηκεν) - 현재완료형
 
현재완료 : 어떤 동작이 과거에 이미 완료되었으나 그 결과가 현재에 남아있는 시상


일으켜 세움 : 듣고 믿음

그렇다면,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들을 어떻게 일으켜 세우십니까? 24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다면 영생(ζωὴν αἰώνιον)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가 일어나기 위해서, 예수가 요구하시는 능동적 사건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그리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나를 위해 파견하신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두 동사 모두 현재 분사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듣고 있는, 믿고 있는 그 상태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것은 바로 일으켜 세움을 받은 상태를 뜻합니다.

듣는 것

“듣는다”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 백성에게 요구하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헬라어 ‘아쿠오’(ἀκούω)에서 번역되는 듣는 행위는 인간의 선택적 행위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은혜 안에서, 사람이 능동적이며 자발적으로 듣고자 하는 결단이며, 순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듣다’는 것은 그냥 소리가 귀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귀가 듣는 그런 뉘앙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한 의식이 있는 들음이며, 분별력을 가진 들음이며, 앎의 들음이며, 깨달음의 들음이며, 따라서 결단에 준거한 순종이 뒤따르는 들음입니다.

예를 들면,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무조건 들려오는 것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별하여 듣는 것입니다. 아쿠오, 알아서 식별하여 듣는 것입니다. 진짜와 가짜 음성을 분별하는 능력으로 듣는 것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과 삯꾼의 음성을 가려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 얼마나 깊이 내 영혼이 박혀있느냐에 따라서 들림과 그 들림에 의한 울림이 다릅니다. 잘 모르면서 들을 때에는 거역, 반역, 분쟁과 다툼만이 일어납니다.

믿는 것

또 하나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믿는다”(πιστεύω)는 어원적으로, 설득 당하여 믿게 되는 행위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에 의해서 주님을 믿도록 설득 당하여, 이제는 내가 주체적으로 믿겠다고 결단하는 자신의 능동적 행위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이란 당신을 설득하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와 함께, 그 은혜로 말미암아 당신 스스로가 의지적으로 결단하여 믿는 능동성이 오의적(奥義的)으로 결합된 구원적 사건입니다. 하여, 그곳에는 결단코 교만이 설 자리를 얻지 못합니다.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해서 인격적인 믿음 관계가 성립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죽은 자가 바르게 세워지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시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세움(듣고/믿음)은 영생의 현재성

그런데 믿고 들음으로 세움 받은 자들을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로 간주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생이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는 미래형이 아니라, 완료형을 사용하면서, 저자는 듣고 믿는 것은 죽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따라서 이미 영생에 거하고 있다는 구원의 현재성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옮기다”로 번역된 헬라어 ‘메타바이노’(μεταβαίνω)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는 실제적 공간 이동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동사입니다. 말하자면 소속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마치, 군인들이 자신들의 소속부대가 있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망 군대가 아니라, 생명 군대로 전속 배치받은 것입니다. 소속이 바뀌면 지휘관도 바뀌도, 생활 규칙도 바뀝니다. 즉, 인생관과 세계관이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메타바이노의 ‘메타’라는 접두어는 변화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적인 효과를 강조합니다. 즉, 육적 체질에서 성령 중심의 체질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 주님을 믿는 자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원리로 삶을 살아갑니다. 영생이란 시간적인 면보다도, 지금의 상태, 현재 소속되어 있는 어떤 상태가 강조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말씀을 듣고 믿는 그 상태(현재분사형)가 바로 영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생의 미래성

더욱이 요한복음은 영생 그 자체의 현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미래성으로 이어갑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을 듣고 주님을 믿는” 것이 영생이지만, 이러한 현재성은 미래로 향하여 열려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을 향해 열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29절 해석

29절에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구절은 해석의 의견들이 다양하고 주장들 또한 많습니다. 그러나 부산고백교회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 좋겠습니다.

실로, “선을 행한다”는 글귀에는 저자의 아주 중요한 신앙적 해석과 의도가 담겨져 있습니다. “행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포이에오’(ποιέω)는 단순히 뭔가를 행하다는 뜻을 넘어서, 어떤 원인이 있는 행위, 즉 창조적 행위를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특히 5장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역 관계를 표현할 때 사용되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누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하였는가?(5장11절), 여기에 포이에오가 사용되었습니다. 15절에서는, 자기를 고친(포이에오)이가 예수라로 하며, 16절 안식일에 행하는 일로 등장하며, 19절에서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포이에오)을 아들도 그와 같은 일 행한다(포이에오)고 합니다.

선한 일은 분명 아버지 하나님만이 하시는 사역입니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의미에서 “선”은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께만 있기 때문입니다(막 10:17-8). 따라서 하나님만이 선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29절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들은” 다름 아닌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행하는 일은 아들만 행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포이에오는 아들의 포이에오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방식으로

따라서 선을 행하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오로지 이 분만이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 “나오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포레우오마이(ἐκπορεύομαι)는 어떤 특별한 과정과 진행을 통과하여 나온다는 의미를 지닌 용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특별한 방식, 즉 십자가라는 고유한 방식으로 생명의 부활로 나오시는 것입니다.

더욱이 여기서 “선을 행한 자들”이라는 복수형이 사용된 것은 선을 행하시고 생명의 부활로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이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보내신 분을 믿는 우리 그분이 걸어가신 특별한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생명의 부활나오게 된다는 증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영생을 가진 우리에게 미래형으로 열려져 있는 축복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보내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은 영생의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언젠가 그분이 걸어가신 특별한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시고, 지금 당신에게 주어진 영생의 축복을 누리시는 삶을 살아내시길 소망합니다.


요한복음 5:24-29 / 사망에서 생명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 하시는 일들이 많지마는 그 중에서 두 가지, 즉 생명을 주는 일과 심판하는 일을 하십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일은 죄인들의 마음속에 거듭남으로 생명을 주시는 회개와 구원의 역사를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일은 종말의 때에 무덤에서 일어날 일입니다.
(요 5:28-29)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사람이 죽는다는 것만큼 가슴아프고 슬픈 일이 없습니다.
죽어 볼품 없이 시들어 버린 육체가 관속에 뉘어 차가운 흙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절망적인 것이 없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망이라는 말, 즉 죽음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사용되어지는 죽음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10-06-2024(주일)
암송 성구 #.20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성경은 사람이 죽는 것을 죄의 결과라고 합니다(롬 6:23).
그렇다면 성경은 죄(罪)를 무엇이라고 정의합니까?
성경은 죄를 네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불신(不信) 요 16:9"
둘째는 "불선(不善) 약 4:17"
셋째는 "불의(不義) 요일 5:17"
넷째는 "불법(不法) 요일 3:4"

죄로 인하여 흙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육체의 삶이 끝이 났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죄는 세 가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아도취와 현실만족에 따라 더 이상 노력하기를 싫어합니다.
둘째는 양심이 화인을 맞아 잘못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어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합니다.
셋째는 영적 무지로 인하여 육체적인 삶을 선호하여 신령한 세계를 찾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죄를 회개한 후에 비록 육신에 갇혀 있는 제한적인 삶을 살아갈지라도 영원한 소망을 갖고 날마다 노력하며 수시로 반성과 회개를 통하여 보다 더 높은 세상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죄(罪)
1. 불신(不信) 요한복음 16:9. 로마서 14:23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2. 불선(不善) 야고보서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3. 불의(不義) 요한일서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4. 불법(不法)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죄의 결과는 사망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무엇이 죽었는가?

1. 노력하는 것
- 현실만족, 자아도취

2. 느끼는 것
- 양심의 마비 / 죄와 고통에 대한 것
- 회개를 모른다

3. 생각하는 것
- 육은 죽이는 것, 영은 살리는 것
영의 생각


성경학자 바클레이에 의하면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은

첫째, 노력하는 것(effort)을 중단해 버린 것

자기의 현실을 만족히 여기면서 더 이상의 전진을 포기해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자아도취(自我陶醉)
실수와 실패는 더이상 조절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에베소서 4:13, 1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정지하거나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느낌(feeling)을 중단해 버린 상태

이 말은 죄에 대한 느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감정이 정지된 상태입니다.
고통에 대하여 무디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악을 보고 의분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입니다.
슬픈 일을 보고 마음에 연민의 정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느낌, 감정이 죽었을 때에 그 사람은 분명히 그 마음도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심마비(良心麻痺) - 삼 마, 저릴 비


셋째, 생각(thinking)을 중단해 버린 상태

사람의 정신이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어서 더 이상 다른 새로운 진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정신이 폐쇄되어 새로운 진리를 거부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심한 말로 하면 정신이상자와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어도 영적으로는 죽은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한 진리, 곧 구원에 이르는 복음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는 새로운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묵상을 하지 않습니다.

넷째, 회개하기를(repent) 중단한 상태

사람이 편안한 마음으로 죄를 짓는 그 날이 바로 영적으로 죽는 날입니다.
사람이 무슨 죄를 짓거나 짓지 않거나 간에 죄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 그 날이 바로 영적 죽음의 날입니다.
악을 행하고 죄를 지을 때 정상적인 사람은 두려워하고 고통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마음이 패역해지고 완악해짐으로 죄악에 대한 회개가 없어지게 됩니다.
오늘의 시대가 바로 사람을 무시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악한 시대를 살아가도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두 가지 조건을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 말을 듣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또 하나는 "또 나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자가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믿되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상은 인격체가 아닙니다.
돌부처는 인격이 없습니다.
커다란 바위나 나무, 광대한 바다가 인격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사랑하십니다.
때로는 죄악을 행할 때에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미국에서는 평생교회에 세 번만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세상에 태어나서 세례를 받기 위해서 교회에 가고,
두 번째는 결혼할 때 주례를 받기 위하여 교회에 가고,
세번째는 사람이 죽어서 장례식 때 교회에 간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름만 신자이지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신자가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거하므로 공포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주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열어놓으신 그 길이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또는 어떠한 희생이 따른다 할지라도 그 생명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예수의 길을 거부하는 것은 곧 죽음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게는 생명의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만 생명이 주어집니다.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도록 아들에게 권세를 위임하셨습니다.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복음 이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고난당하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아버지에게 있는 생명의 권한을 아들에게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심판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요 5: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심판의 권세를 아버지가 맡기셨습니다.
일을 하시되 아들을 통해 모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권세를 아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뿐만 아니라 무덤속에 있는 자들을 모두 깨워 일으키는 권세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승리의 부활이지만 인간의 부활은 심판의 부활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조금도 다를바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잠자는 우리들을 큰 소리로 깨우실 때 우리는 각자 행위대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주님은 심판하십니다.
이 모든 심판에서 그 기준은 "아버지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요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내 고집, 내 방식대로만 아닙니까?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오직 아버지께서 하시는 그대로 따라서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는 모든 권세를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For the Son of Man came to seek and to save what was lost.

*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자의 온 것은...구원하려 함이니라

-
삭개오에 대한 구원 선언 후 그 선언에 대한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즉 이미 앞절의 주석에서 밝힌 바 있듯이 잃어버린 자에 대한 구원이란 소외되고 비뚤어진 인간을 다시 공동체로 복귀시켜 당당하고 품위있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 말은 온갖 죄악과 허물로 말미암아 혼돈과 파멸에로 향하는 인간들을 구해내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로 인도하시는 것을 뜻한다.
이같은 선언은 사실 에수의 전체적 삶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병에 걸려 정상적인 인간 삶이 불가능한 귀신들린자(마 17:18), 문둥병자(17:14), 벙어리,귀머거리(막 9:25), 소경(막 8:23) 등과 같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며 삭개오와 같은 죄인들을 용서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는 모든 행위는 땅위의 평화(平和)를 위한 사랑의 치유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사람다와 질 수 있도록 하는 예수의 구원 행위는 오늘의 기독교가 우선적으로 따라야 할 과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의 선언이 이미 5:31, 32에서 언급되었는데 결국 삭개오는 이와 같은 선언의 실천적 모델(model)이 된 셈이다.


10-06-2024(주일)
암송 성구 #.20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은 죄의 결과 때문입니다(롬 6:23).
지식을 얻기 위한 과정을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배움의 단계
둘째는 경험의 단계
셋째는 신앙의 단계

배움으로도 경험으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단계가 곧 "죽음 이후의 세계"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죽음 이후의 세계는 학문적인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의 세계는 그 세계를 다녀온 사람에 의해서 알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경험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그가 경험했던 그 세계를 설명해야 합니다.
문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그 세계를 진실되게 알려준 사례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영역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고만 합니다.
유교에서는 효(孝)를 강조하여 생전에 지극정성으로 섬기지 못했기 때문에 제사(祭祀)로 모셔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듯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할 줄 아는 믿음을 다짐합시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의 최종적인 완전성을 증명하는 예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며 하나님의 섭리이다.
이 죽음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며 최종적인 것이다.
죽음 이후에 모든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



09-29-2024(주일)
암송 성구 #.19  요한복음 17:3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영생(헤 아이오니오스 조에. η αιωνιος ζωη) the eternal life.

영(166)

αἰώνιος, ον 스트롱번호166

1. 영원한.  2. 시작이 없는  3. 시작이나 끝이 없는.
발음 [ aiōniŏs ]
어원  / 16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원한(마 18:8, 계 14:6), 영생의(눅 18:30, 요 17:2).


생(2222)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명(마 7:14), 이 세상의 삶(고전 15:19), 생기(계 11:11).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앙 = 믿는 것(행 16:31) + 아는 것(요 17:3) + 행하는 것(약 2:26)
                   Believe         Know                                   Deed
                 πιστεύω           γινώσκω                         ἀκροατήριον
               신(信)               지(知)                                     행(行)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유월절, 무교절, 오순절, 초실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이시다
- 하나님과 본체가 되셨으나 땅으로 오시려면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셔야 하므로 사람의 몸을 잠시 입으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참 빛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은혜 언약(恩惠 言約) The Covenant of Grace
행위 언약(行爲 言約)


은혜의 언약 (The Covenant of Grace)

Soli Deo Gloria!

내가 너로 [뱀으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 3:15

네 [아브라함의]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창 22:17-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신 18:18-1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39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 8:56

믿음으로 모세는 […]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히 11:24,26,28

우리는 위에서 인용한 창세기 3장 15절이라든지, 창세기 22장 17-18절, 그리고 신명시 18장 18-19절 말씀들을 읽으면서 구약 성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여자의 후손’, ‘아브라함의 씨’, 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약속 되어 있고, 또한 약속의 그 자손이 우리의 구원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약속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위에서 인용한 요한복음 5장 39절과 8장 56절과 같은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성경(특히 구약성경)의 이 중요한 약속들이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있고, 예수님이 약속의 그 자손임을 증거하셨다.

이처럼, 타락 직후로부터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고 간직해 온 이 중요한 약속, 간단히 말해 하나님께서 구원의 자손을 보내시고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이 은혜로운 약속을 ‘은혜의 언약‘(covenant of grace)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은 이 은혜의 언약을 믿은 사람들과 그들에게 이 은혜의 언약이 점점더 구체적으로 계시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신약성경은 약속대로 오신 언약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 언약을 이루셨으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현실화 되어 나가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경은 약속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이며, 그에 대한 약속인 은혜의 언약을 이해하는 것이 성경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중요한 주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일한 언약을 여러번 확인하여 주심으로 새롭게 하심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은혜의 언약을 역사 속에서 여러번 재언급하시고, 그 때 마다 조금 더 살이 붙은 표현으로 계시해 주셨다는 것을 발견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약속의 자손에 대한 맨 처음 언급은 앞서 본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이다. 그 다음 창세기 18장 18-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사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따라 한 나라를 건설하시고, 거기서 천하 만민이 얻을 복이 흘러 나올 것임을 밝혀주셨다. 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건설하시려는 그 나라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도를 지키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또한 밝히셨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고 칭하실 하나님의 나라를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 후 창세기 22장 17-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시사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라고 하심으로 첫 조상 아담이 믿었던 “여자의 후손”이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나올 것임을 말씀해주셨다. 이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재확인시켜 주셨다.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지금 나열한 하나님의 약속들이 모두 똑같은 말씀들은 아니지만, 각 약속 속에 들어 있는 뼈대가 되는 내용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약속과 약속의 그 자손’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하나님께서 동일한 언약 곧 은혜의 언약을 여러번 확인하여 주심으로 새롭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은혜의 언약을 새롭게 확인해 주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장면이 출애굽기 19장에 나온다. 이집트(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시고 시내산 밑에서 공식적으로 하나의 나라로서 세워주시는 장면이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장면이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세운 언약 때문이라고,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때문임을 출애굽기 2장 2425절은 말한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것이 언약을 지키는 것임

앞서 우리는 아담 때 부터 믿어 온 동일한 은혜의 언약을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여러번 새롭게 하셨다는 것을 보았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신 것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새롭게 해주셨던 그 은혜의 언약을 이루어 나가시는 일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보았다 (출애굽기 2장 24-25절). 과연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밑에 모인 이스라엘 민족을 “야곱의 집”이라고 부르셨다 (출애굽기 19장 3절).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시내산에서의 언약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약속으로서 은혜의 언약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틀린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을 지킨다는 것과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똑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 출애굽기 19장 5-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지켜야 언약의 백성으로 살게해주신다고 하셨다.
  2. 같은 장 8절에 보면 이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겠다고 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언약공동체로 출범하게 된 것이다.
  3. 그런 후에 출애굽기 20장 이후에 나오는 계명들은 하나님의 언약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할 실정법을 내리시는 것이다. 계명을 지켜야 언약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약을 지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자체에 하나님께서 그 분의 은혜와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약속 만이 있지, 우리 보고 무엇을 하라는 내용이 없다. 즉 구원과 관련된 이 복된 약속을 우리로서는 그저 믿는 수 밖에 없지 달리 무엇을 할 것이 없다. 그렇다, 사도 바울은 은혜의 언약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로마서 4장 16절

구체적인 예로서 아브라함의 아들 중에 언약의 백성 가운데서 끊어진 예를 상기해 보자. 그것은 다름 아닌 이스마엘이다. 사도 바울이 그에 대해 성령으로 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갈라디아서 4장 22-31절). 이스마엘은 언약의 증표인 할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쫓겨났다.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 대로 이삭이 태어났을 때, 특히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사람들은 큰 기쁨 가운데 있었지만, 이스마엘은 이삭을 조롱했다. 이로 보건데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마음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러므로 믿을 수도 없었다. 이스마엘이 쫓겨난 것이 하나님의 어떤 명령을 어겨서가 아니었다.

물론 이것은 그리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는 약속이 무엇인지에 따라 결정된다. 약속이 일방적인 선언이냐, 아니면 쌍방간의 의무에 대한 것이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네가 시장에 가서 국거리를 사오면 내가 국을 끓이마”하는 식의 약속이라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자식이 해야 할 것은 국거리를 사오는 것이 되겠지만, 부모가 “내가 시장에 가서 국거리를 사와서 국을 끓여주마” 하는 일방적인 약속이라면 자식이 부모의 약속을 믿고 국을 끓여주실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 약속을 마음 속에 지키는 것이다. 즉 ‘지킨다’는 것에는 ‘명령을 따른다’는 식의 의미도 있지만, ‘믿고 간직한다’는 의미도 있다.

시내산에서 은혜의 언약을 새롭게 하신 이야기가 나온 김에, 모세 시대에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게하셨다는 이상한 이론도 돌아다니는데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잠시 적고 넘어간다.

  •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면 살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3장 20절)
  •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다 지켜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라디아서 3:21)
  • 오히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표준에 심히 못 미친다는 것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갈라디아서 3:24)
  • 과연 율법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죄 없이 함을 받으려면 나 자신의 그 무엇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을 가르친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위기 17:11) 이 말씀에는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서는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는 속죄의 법과,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그 속죄 제물을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다는 복음을 본다. 사람이 무엇을 준비해서 하나님을 만족케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을 사람이 의지하는 것임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 구약의 선지자들 역시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을 유일한 방법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임을 가르쳤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장 4절)

예레미아 31장의 ‘새 언약’ 역시 은혜의 언약을 새롭게 하신 것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은혜의 언약을 다시 선언하시고, 때로는 더 구체적인 내용을 담아, 언약을 새롭게 하신 것을 보았다. 그것의 한 예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임을 보았다. 그런데, 예레미아 3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또 다시 언약을 새롭게 하실 것임을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아 31:31-33

여기서 언급하신 ‘새 언약’의 핵심적 내용은 여전히 은혜의 언약임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알 수 있다:

  • 새 언약의 큰 내용은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의 내용이었다 (창세기 18장 18-19절).
  • 히브리서 8장에서 보듯이 이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맺어졌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 것이다.
  • 이 새 언약의 수혜자인 우리는 다름 아닌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의 상속자라고 로마서 4장 16절은 가르친다.

그러므로, 예레미아 31장에 언급된 새 언약은 은혜의 언약과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은혜의 언약을 새롭게 하신 것이라는 의미에서 “새 언약”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우에 조금 더 풍성한 내용을 덧붙여서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다름 아니라 예전 시내산에서 새롭게 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능력’의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히 하신 말씀이 없으셨는데,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기록하시겠다는 독특한 은혜를 말씀하셨습니다.

언약의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

이처럼 은혜의 언약은 첫 조상인 아담 때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유일한 구원의 언약이다. 그 언약을 믿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이룰 자손이 왕이요,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로서 하나님 앞에 영원히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다 (신명기 18:18-19, 삼하 7:12-16, 시 110:4).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약속된 그 자손임을 증거하셨다 (요한복음 5:39, 8:56). 성경 역시 수차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약속된 그 자손이라고 증거한다 (누가복음 1:72; 마태복음 1:1,21; 히 10:12-18). 특히 예수께서는 마지만 만찬의 자리,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그 분의 피로 그 분에게 속한 사람들의 죄를 씻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 되는 은혜의 언약을 이루실 것임을 선언하셨다 (고린도전서 11:25).

성경 전체를 통해 흐르는 유일한 구원의 언약

과연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를 위해 다시 살아나시사 영원한 왕, 제사장,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중보적 왕권을 행사하시는 새 시대를 여셨다. 그로써 그림자 역할을 하던 모세적 제도, 다시 말 해 예수님 오시기 전의 언약공동체에게 주셨던 여러가지 실정법과 제도에 종료를 고하셨다. 그렇다고 예수님 오신 이후 새롭게 된 언약공동체 곧 신약 교회가 구약 교회와는 전혀 다른 언약 아래 있는 것은 아니다. 신구약 교회는 형식만 다를 뿐 본질은 동일한 은혜의 언약 아래 있는, 한 백성, 한 몸이다 (로마서 4:16; 11:17-18; 갈라디아서 3:7).


행위언약이란 무엇인가? The covenant of Works

창세기 2:15-17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 대부분은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언약들을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구속 언약, 행위 언약 그리고 은혜 언약으로 칭하였습니다. 

     구속 언약(팍툼 살루티스, pactum salutis, covenant of redemption, covenant of salvation)은 영원 안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성부·성자·성령 사이에 맺어진 협약입니다. 구속 언약에서 성부는 택자들의 구속자가 되도록 성자를 주시고 성자에게 택자들의 구속을 위한 조건들을 요구하시며, 성자께서는 기꺼이 이 조건들을 이루시는 데 동의하시고, 성령께서는 기꺼이 성자의 구속 사역을 택자들에게 적용하시기로 협약하셨습니다. 이 구속 언약은 창세 전(시간 전) 곧 영원에서 성부·성자·성령 사이에 이루어진 ‘내재적 삼위일체의’(intratrinitarian) 언약입니다.

     행위 언약은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첫 사람이자 인류의 대표자로서의 아담과 맺은 언약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관하여) 2항에서 행위 언약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처음 맺은 언약은 행위 언약이었습니다. 이 언약에서는 완전하고(perfect) 인격적(개인적, 전인적, personal)인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에게 또한 아담 안에서 그의 후손에게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행위 언약’(covenant of works)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 언약의 조건이 완전하고 전인적(全人的) 순종이었기 때문입니다. 행위 언약의 원리는 ‘행하라 그러면 산다’는 것입니다. 이 행위 언약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2문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20문에서는 ‘생명의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2장과 3장에 ‘행위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언약의 특징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언약들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특징적 요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언약의 양 당사자가 있습니다. 둘째는 언약 내용에 약속이 있습니다. 셋째는 약속에 따르는 조건이 있습니다. 넷째는 조건을 어기고 파기한 데 대한 벌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3장에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언약을 성립하는 네 가지 특징적 요소들은 나타납니다. 언약의 당사자로는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인 첫 사람이자 모든 인류의 대표인 아담입니다. 언약의 내용으로 약속된 것은 생명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약속과 관련된 조건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고 전인적(全人的)인 순종입니다. 이 조건을 어길 경우에는 사망의 벌이 선포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 관계에 더하여 언약 관계를 가지게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어 언약 관계 안에 산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의 복되고 영광스러움을 성경에서는 종종 혼인 관계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성경은 언약의 하나님과 그의 언약의 파트너인 언약 관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과의 관계를 결혼 관계로 말씀합니다(에스겔 16장; 호세아 2-3장).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 3:19).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피조물 관계에 더하여 언약 관계를 가지고 살 수 있게 해 주신 것은 참으로 크고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 7장은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관하여 말해 줍니다. 2장에서는 행위 언약(covenant of works)에 관하여 말하고, 3항에서는 은혜 언약(covenant of grace)에 관하여 말합니다. 이에 앞서 1항에서는 이 언약들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에 근거한 것임을 알려줍니다. “비록 이성 있는 피조물들이 그들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마땅히 순종해야 할 의무를 지니지만,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간격이 심히 크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자신을 자발적으로 낮추어(voluntary condescension) 주시지 않으면, 피조물은 결코 하나님에게서 그들의 복과 상급으로 어떤 것도 경험할 수 없는데, 그것을 하나님은 언약의 방식으로(by way of covenant) 나타내기를 기뻐하셨습니다”(1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1항은 지극히 높으시고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 언약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하나님 편에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어 주시지 않으면 이 언약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려 줍니다. 언약 관계를 맺기 위하여 하나님 편에서 자발적으로 낮추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인자하심, 선하심)이 언약 관계의 배경에 있음을 잘 이해하고 명심해야 합니다. 은혜 언약뿐만 아니라 행위 언약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based on) 기초하고(grounded on) 있습니다.

     행위 언약은 하나님이 타락 이전의 아담과 맺은 언약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언약을 행위 언약(foedus operum)이라고 일컫는 데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 본문에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과, 행위라는 이름을 붙이면 이 언약에는 하나님의 은혜(또는 사랑)는 전혀 없고 인간의 행위만 강조함으로 이 언약을 순전히 율법적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순종 행위를 약속된 생명을 얻는 공로로 오해하기 쉽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1항에서는 2항에서 말하는 행위 언약과 3항에서 말하는 은혜 언약은 둘 다 하나님 편에서 그분 자신의 자발적인 낮추심(by some voluntary condescension on God’s part)에 근거(기초)된 것임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 언약과 행위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어 사람과 언약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에 근거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행위 언약을 “생명의 언약”(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20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2문)으로, 사랑의 언약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아담이 대표한 그의 모든 후손인 인류와)과 맺은 첫 언약을 일반적으로는 ‘행위 언약’으로 일컫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언약을 아담과의 언약, 율법 언약, 생명 언약, 자연 언약, 창조 언약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 아담과의 언약을 행위 언약이라고 하면, 이 언약에는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없고 인간의 행함만 강조한다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작성자들인 17세기 청교도 신학자들은 ‘은혜’라는 말은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곧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묘사하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타락하기 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나타내는 말로는 ‘은혜’라는 말 대신에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은혜’라는 말도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타락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 곧 구원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 구별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은혜 언약만이 아니라 행위 언약도 하나님의 자발적 낮추심(voluntary condescension)에 근거한 것임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1항에서 강조합니다. 지극히 높으시고 영화로우시며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피조물 관계(creator-creature relationship)에 더하여 언약 관계(covenantal relationship)를 가져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그의 언약 백성으로 살게 해 주신 그 자체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행위 언약(covenant of works)이란 첫 사람 아담(아담이 대표한 아담 안에 있는 그의 후손)과 맺은 언약인데, 완전하고 전인적인 순종에는 영원한 생명을, 불순종에 대해서는 영원한 죽음을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첫 아담과 맺은 행위 언약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빛을 비추어 줍니다. 성례(성찬과 세례)는 인류의 대표인 첫 아담이 실패한 것을 회복하여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구원을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우리를 위하여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성취하신 구속을 나타내고 보증하는 것입니다.


언약(행위언약, 구속언약, 은혜언약)

Ⅰ. 서 론

성경은 언약(言約)의 책이다. 성경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때 구약과 신약을 말한다. 이 구분을 언약적 관점에서 말하면, 구약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고 신약은 예언대로 오신 메시야에 대한 성취의 말씀이다. 그리고 다시 신약은 재림(再臨)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으며, 초대교회 이래로 인류의 역사를 포함하는 교회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언약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성취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언약과 성취의 역사로 해석할 수 없다면, 성경해석에 있어서 많은 난관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초대교회 이래로 종교개혁시대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경해석의 관심은 언약이 항상 그 중심을 이루어왔다.
 
교부(敎父) 시대에 터툴리안(Turtulian)이 신약(Novum Testamentum)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래로 성경이 언약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확증되었고, 오늘에도 성경의 이름을 구약과 신약이라고 사용하고 있으니 그 증거는 더욱 확실하다.
 
그런데 성경의 틀을 이루는 언약 중에서도 창세기를 배경으로 한 세 가지의 언약인 행위언약과 구속언약 그리고 은혜언약은 이후의 모든 언약의 원형(原形)이며 근거라는 데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언약은 장차 오실 완전하고 영원한 성취자이신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指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의 완전하고 영원한 성취자로서, 오늘의 우리뿐만 아니라 과거의 열조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기 위한 영적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히 11:13)
 
이러한 지식은 단순히 상상으로 얻어진 추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심으로 알려진 지식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뜻은 언약관계로서의 신(神)-인(人) 관계 안에서 유기적이고 점진적으로 인간 역사 속에서 드러내어지고 선명해진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와 언약의 관계는 구원과 구원의 역사 즉, 구속사(救贖史)를 이해함에 있어서 불가분(不可分)의 관계 속에 놓여지게 된다. 그러므로 언약은 창조- 타락- 구속으로 이어지는 구속 역사(구속사)에 있어서 중심에 놓여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 소고(小考)는 이 세 가지의 언약이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언약의 개념과 함께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 론

 언약은 구속역사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이어주는 연결체이다. 언약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과 피조물로서의 인간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격을 이어주는 다리와도 같다.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로서의 인간과 관계를 맺으신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과 언약 관계를 맺으신 그 관계 안에서 알려진다.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 관계를 맺으심을 통해서 그 자신과 그의 구원과 관계된 그의 뜻을 인간에게 계시하신다.

 1. 언약의 개념(槪念)

 1) 구약에서
 
언약, 「한국컴퓨터선교회」, 기독정보검색, 2005. 인용 편집
“언약”은 히브리어로는 베리트(????)인데 이 말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다. 통상적으로는 “자르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바라(???)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추측에 의거하면 창 15:17에 기록된 의식이 언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에서 언약은 어느 한 편이 다른 편에 부과하는 약정(約定)의 성격을 띤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세우실 때에는 일방적 성격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간은 동등한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법령을 인간에게 부과하시는 주권자이시다.
 
「신학사전」, 신학사전편집위원회,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 445
이런 점에서 볼 때 계약(testament)이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언약(covenant)이라고 함이 좋을 것이다. 즉 언약이란 신학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세우신 약속인데, 이를 세상 사람들이 상거래(商去來)에 많이 쓰는 계약이란 말로 쓰면 신학적 사상이 사실상 약해지기 때문이다.
 
2) 신약에서
 
70인역(LXX)에서 “베리트”는 신 9:15(μαρτυριον)과 왕상 11:11(εντολη)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서 디아데케(διαθ?κη)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일반적인 헬라어 용법에서 언약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지 않고 단지 하나의 약정 양도 계약서를 가리키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유언(遺言) 또는 유언장을 가리킬 뿐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이와 같은 용법은 좀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Ibid. p. 446
 
그러나 고전(古典) 헬라어에서는 두 집단 가운데 한 집단이 압도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어 그 다른 집단에게 자신의 요구 조건을 명령할 수 있는 그러한 두 집단 사이의 협정에 이 말이 쓰인 예가 가끔 있었다. 그러므로 신약에 쓰인 “디아데케(διαθ?κη)”는 구약에 쓰인 “베리트(????)”보다 훨씬 더 특수한 뜻을 가지며, 이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한 집단에 의해 일방적으로 제기되고, 다른 한 집단은 그저 순응할 뿐 거절할 수 없는 협약 또는 협정(agreement)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하여 디아데케(διαθ?κη)라는 단어는 많은 다른 단어들과 같이 하나님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 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았다. 많은 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어 왔지만 이 단어는 유언보다는 언약으로 번역되었다.
 
3) 태초 - 언약의 원형(原形)으로서 아담과의 언약
 
언약의 개념은 계시를 통해서 이 개념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전에 이미 역사에서 발전 되었다. 하나님께서 노아 및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기 전에 이미 인간들 사이에서 언약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태초의 에덴에서 맺은 아담 언약(창 1:28)의 발전이었다. 그 후로 인간들은 이 같은 준비과정을 거쳐서 죄로 분열된 세상에서 언약을 맺는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고, 하나님이 계시를 통하여 인간과의 관계를 언약관계로 제시할 때 그것을 곧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언약의 개념이 인간에게서 시작되었다거나 하나님이 자신과 인간의 상호관계를 서술하기 위하여 이 개념을 빌려다 쓰셨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언약 생활의 원형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존재 안에서 발견된다. 인간에게서 발견되어지는 것은 원형의 희미한 모형(模型)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인간의 삶을 이와 같은 언약 관계의 삶으로 제정하셨기 때문에 언약 개념은 사회생활의 여러 가지 기둥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언약 관계가 이미 발전된 이상 하나님은 공식적으로 이 관계를 자신과 인간과의 실존하는 관계의 표현으로 소개하셨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 관계는 아브라함과의 공식적인 계약 이전 곧 태초의 아담부터 존재 했었다.
 
4) 언약의 당사자(當事者) 언약,
 
「한국컴퓨터선교회」, 기독정보검색, 2005. 인용 편집언약의 당사자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된다. 어떤 학자들은 언약의 당사자를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으로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인간은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을 때도 있고 때로는 “죄인”, “선민(選民)”,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 이라는 한정어(限定語)가 붙을 때도 있다.
 
다른 학자들은 삼위일체를 대표하는 성부 하나님과 선민(選民)을 대표하는 그리스도를 언약의 당사자라고 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학자들은 두 개의 언약을 말한다. 곧 성부와 성자 사이에 채결된 구속 언약(Pactum Salutis)과 이 언약에 근거해서 맺어진 하나님과 선민 또는 택함을 받은 죄인 사이에 맺어진 은혜 언약을 구분한다.
 
조직신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언약의 당사자를 하나님과 인간이라고 보는 것보다 성부와 성자로 보는 것은 더 적합한 사실이다. 이 표현은 롬 5:12-21과 고전 15:21-22, 47-49의 지지(支持)를 받고 있으며 구속 언약과 은혜 언약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언약의 통일성을 말하고 있다.
 
구속 언약과 은혜 언약을 구분하는 이 같은 생각이 성경의 지원(支援)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행위언약에 대립되는 두 개의 별개의 독립된 언약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즉 은혜 언약과 구속 언약은 하나의 복음적인 긍휼의 언약의 두 양상(樣相)으로서의 메시야 언약인 것이다.

 2. 행위(行爲) 언약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맺은 언약 즉 선악과를 금지한 것에 관련된 언약을 16세기 말에 이르러 행위계약 또는 생명의 언약 혹은 법적 언약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말에 보다 체계적으로 나타난 행위 계약 교리의 역사적 연대기(年代記)를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행위 계약 교리가 언약신학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인(否認)할 수 없다. 「신학사전」, 신학사전편집위원회,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 448
 
그리고 이 언약 관계에서 하나님은 일정 기간 동안의 순종을 조건으로 미래를 완전하고 복되게 만드셨다.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7 장 -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관하여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해설, A.A.하지 著, 편집부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pp. 160-161
 
1절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는 멀어졌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낮추시사 은총의 계약을 인간과 맺으심으로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셨다. 비록 이성과 의지와 양심을 지닌 인간이 창조자로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과 보상을 받는 것은 이 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은혜의 계약이 순종을 가져온다.(사40:13-17, 욥9:32-33, 삼상 2:25, 시100:2-3,113:5-6, 욥22:2-3, 35:7, 눅 17:10, 행 17:24-25)
 
2절 - 인간과 맺어진 첫 번째 계약은 행위의 계약이다.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완전하고 개인적인 순종에 의하여 생명을 약속받았다.(갈 3:12, 호 6:7, 창 2:16-17)
 
2) 행위 언약의 성경적 근거
 
“행위 언약”이라는 용어는 성경에 없기에, 일부 학자들은 행위 언약을 부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행위 언약의 개념은 성경 전반(全般)에 걸쳐서 표현되어 있다.
 
① 창세기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먼저 계약을 체결하는 양측(兩側), 즉 하나님과 인간이 있다. 그리고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과하신 순종의 조건이다. 그리고 약속, 즉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이 있다. 「벌코프 조직신학개론」, 루이스 벌코프 著, 박희석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p. 117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신 것”(창 3:24)은 언약을 범한 자가 영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교시(敎示)하는 것이다.
 
② 로마서 5:12-21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對比)하여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이 많은 사람을 죄인 되게 한 것 같이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이 많은 사람을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였다고 가르치고 있다. 아담의 범죄는 자신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죽게 했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생명 안에서 왕 노릇(롬 5:17)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담이 인간을 대표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만일 아담 한 사람이 순종했다면 영생이 모든 사람에게 왕 노릇하게 되었을 것이다. Ibid. p. 117
 
그러므로 죄의 전가(轉嫁)와 다른 한편으로는 의(義)의 전가를 관련지어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한 내용은 아담이 그리스도처럼 언약의 머리였다고 생각해야만 설명할 수 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표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의를 공유(共有)하고 있다면, 우리가 같은 이유에서 아담의 죄책(罪責)을 공유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③ 호세아 6:7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는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행위언약이 맺어졌고, 아담이 이를 지키지 못함으로써 인류의 죽음이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행위 언약은 타락 후에도 유효한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알미니안주의자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했다는 의미에서 폐기되었고, 행위 언약은 영생을 얻기 위한 지정(指定)된 수단으로서 폐기된 것이다” -「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 문화사, 2004. p. 56 - 와 개혁주의자 사이에 상당한 견해의 차이가 있다.
 
알미니안주의자에 의하면 아담이 타락하여 계약을 범함으로 말미암아 이 계약은 완전히 폐기되었으므로 아담의 후손들은 그 계약을 지킬 능력도 없지만 지킬 의무도 없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행위 언약을 맺기 이전에 이미 정해진 창조의 질서 “본래 교의신학(조직신학) 아래 전통적으로는 인간의 타락을 기점으로 행위언약(타락 전)과 은혜언약(타락 후)으로 나누어 성경의 언약을 이해해 왔다. 그러다가 성경신학의 발전과 함께 타락 전 창조 당시에 맺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창조언약으로, 타락 후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을 구속언약으로 부르게 되었다.” -「구약성경과 그리스도」, 김두석, 칼빈대학교출판부, 2003. p. 93 - 에 속한다.
 
언약의 유무(有無)와는 관계없이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의 명령에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한 번 언약을 범한 후부터 어떤 인간도 행위 언약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기독교 교리개설」, 김성린,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p. 113-114
 
4) 행위 언약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다.
 
행위 언약은 영생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는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이 언약은 폐기된 것이다. 아담 이후 행위 언약의 조건을 충족시킴으로써 영생을 얻은 자는 한 사람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받은 자는 순종을 통하여 믿음을 증거 하게 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진정한 순종으로서의 금식령(禁食令)(창 1:17)을 성취하는 것이다. 첫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창 3:5)
 
그러나 둘째 아담은 광야에서 부딪친 사탄의 유혹에서 승리하셨다.(마 4:1-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빌 2:6-8) 이렇게 둘째 아담은 첫째 아담에게 주어졌던 금식을 온전한 “자기 비움”으로 성취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에게 주어졌던 행위 언약 또한 장차 언약대로 오셔서 성취하실 그 분 즉 메시야에 대한 언약인 것이다.

 3. 구속(救贖) 언약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7 장 -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관하여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해설」, A.A.하지 著, 편집부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pp. 165-166
 
3절 -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첫 번째 계약에 의해서는 생명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두 번째 계약을 맺으신 바 보통 우리는 이것은 은혜의 계약이라고 부른다.(갈 3:21, 롬 3:20-21, 8:3, 창 3:15, 사 42:6) 이 은혜의 계약이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과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을 말한다. 이때에 하나님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이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고(막 16:15-16, 요 3:16, 롬 10:6-9, 갈 3:11) 생명을 얻기로 정해진 모든 사람들에게(겔 36:26-27, 요 6:44-45, 5:37) 성령을 주시고 믿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시고 믿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4절 - 이 은혜의 계약은 성경에서 종종 유언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언자로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의 유언을 효과 있게 하였으니, 그는 그의 유언대로 영원한 기업을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상속해주셨다.(히9:15-17,7:22, 눅22:20, 고전11:25)
 
2) 구속 언약의 필요성 - 은혜 언약의 토대(土臺) 위에서
 
인간이 범죄 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영적 교류는 사실상 단절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언약을 맺음에 있어서 종전처럼 인간과의 직접적인 언약을 맺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은혜 언약을 맺기에 앞서서 구속의 언약을 맺을 필요가 생긴 것이다. 구속 언약은 은혜 언약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하나로 볼 수 있다. 다만 은혜 언약은 구속 언약의 토대 위에 세워진 언약이다. 「기독교 교리개설」, 김성린,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p. 132-133 편집
 
3) 구속 언약의 성경적 근거
 
성자께서는 자발적으로 범죄 한 인간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고, 성부께서는 그것을 조건으로 구속의 축복을 성자를 통하여 택한 자에게 주며 더불어 성자에게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시겠다는 성경적 근거이다.
 
① 구속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영원 전부터 있었다.(엡1:4, 3:11, 살후 2:13)
② 그 계획은 언약의 성격을 지녔다.(요5:30, 17:4-6)
③ 메시야 예언 가운데는 언약의 요소들인 당사자(시2:7-8)와 조건(시40:7-8)과 약속(요 17:5, 24)이 들어 있다.(삼하 7:12-13, 시 89:3-4)
④ 「벌코프 조직신학개론」, 루이스 벌코프 著, 박희석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p. 138
 
언약 개념을 메시야와 직접 연결하는 구절로서 여호와의 종에 관해서 말하는 시편 89:3과 이사야 42:6이 있는데, 이 연결은 여호와의 종이 단순히 이스라엘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더욱이 메시야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말하는 절들이 있는데, 이것은 언약적 용어이다.(시 22:1-2, 시 40:8)
 
4) 구속 언약의 당사자 - 메시야
 
성자(聖子)는 구속함을 받도록 영원 전부터 예정된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다.(엡 1:4)하나님은 아담의 범죄 직후 은혜의 언약을(창 3:15) 아담에게 하셨고, 그 후 아브라함과 족장들을 통해 계승시켜 왔다. 그리고 이 구속 언약은 장차 다윗의 자손으로(마 1:1)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구약과 신약 모두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은혜 언약인 것이다.
 
5) 보증인으로서 언약을 성취하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구속 언약에 있어서 선택함을 받은 자를 대표하여 성부와 언약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이 언약의 보증인이 되신다.(히 7:22)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범죄 한 인간의 신분으로 낮아지심으로써 마지막 아담이 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구속의 언약은 속죄함을 받은 죄인들에게 있어서는 은혜 언약의 근원이 되지만,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행위 언약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속 언약으로 말미암아 성자를 희생의 제물로 받으시는 것은 “공의(公儀)”의 속성 때문이다. 죄가 있음에도 아무 근거가 없이 죄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참으로 구속의 언약은 은혜 언약을 성취시키기 위한 법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개설」, 김성린,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p. 135-136 -
 
이처럼 성부 하나님과 구원 받을 자의 대표인 성자 사이에 설정(設定)된 인간 구원을 위한 언약이 구속 언약이다.
 
6) 선택으로 인한 구속의 제한(制限)
 
구속의 언약이 선택의 작정과 혼동되는 일이 가끔 있지만, 둘은 동일하지 않다. 선택의 작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의 후사(後嗣)들이 될 사람들의 수(數)를 결정하는 반면에, 구속의 언약은 은혜와 영광이 죄인들을 위해서 마련되는 길을 나타낸다. 논리적으로는 선택이 구속의 의논(議論)에 앞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보증이 되신 것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람들만 제한적 “특별한 구속 혹은 제한적 속죄 -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택자들만 구원하려는 것이며 또한 실제적으로 그들만이 구원을 획득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어떤 특정한 죄인들 대신에 당하신 형벌에 대한 대속의 인내였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는 것에 부가해서 자기와 그들을 연합하는 믿음을 포함하여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획득하셨다.
 
믿음의 은총은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가 위해서 돌아가신 모든 자들에게 빠짐없이 적용되며 그러므로 해서 그들의 구원을 보증하신다.”-「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D.스틸/C.토마스 共著, 김남식 譯, 도서출판 엠마오, 1992. p. 20 - 으로 구원하신다.
 
「벌코프 조직신학개론」, 루이스 벌코프 著, 박희석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p. 139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 17:6)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 17:12)
 
7) 구속 언약의 성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약속으로서의 예언
 
그러므로 언약의 당사자인 성부께서 언약의 또 다른 당사자인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고(요3:16), 성자로 하여금 언약의 조건에 따라 세속적인 고난과 죽음을 당하게 하셨고(롬3:26), 언약의 약속에 따라 부활케 하시고 승천(昇天)케 하여 성부 우편에 앉히시고(벧전3:22), 보혜사(保惠師) 성령을 보내어 교회를 교훈하시고, 지도하시고, 보호하시다가(요14:26) 마침내 성자의 재림과 심판을 통하여 성자와 택한 자를 영화롭게 함으로써(엡5:6,12) 구속 언약을 성취하신다.
 
과연 이로 보건대 구속의 언약은 은혜의 언약이다. 오직 죄 밖에는 지은 일이 없는 우리가 오직 구속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그저 “은혜”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더구나 “택(擇)함과 불택(不擇)함”이라는 “이중 예정” “이는 선택(Election)과 유기(Reprobation)로서, 인류 중 얼마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기로 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말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간과하기로 결정하시고 그들의 죄를 벌하기로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이다.” -「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문화사, 2004. p. 43 편집 - 의 일이 이미 창세전에 아버지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작정과 예정의 섭리(엡 1:3-14)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없는 감사와 소망과 위로를 주는 것이다.

 4. 은혜(恩惠) 언약

 은혜 언약의 사상은 종교 개혁 당시부터 거듭 강조되어졌다. 아담의 범죄 직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셨고, 그 후 아브라함과 족장들을 통해 재천명(再闡明)되어 왔고, 마침내 새 언약 “주께서 가라사대 볼찌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렘 31:31이하)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 8:13) - 에서 완전한 실현에 이른 것으로 간주하였다. “블링거”는 이를 “유일하고 영원한 계약” 또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중의 언약”이라 불렀다. 또한 칼빈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맺은 언약 관계의 대표적인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는 이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셨고, 그리스도의 성취가 새 언약을 이룬다고 하였다.「신학사전」, 신학사전편집위원회,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 449
 
1) 은혜 언약의 특징
 
은혜 언약은 구원에 관하여 인간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은혜로운 언약이며, 구원의 계획과 성취와 적용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이 모두 동원된 언약이다.(엡1:3-5, 요 19:30, 요 16:7-8) 또한 시간이 흘러도 효력이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언약이며(창 17:9, 삼하 23:5), 세상사람 모두가 아니라 택함을 받은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특수 언약이다. 그리고 신앙과 순종을 조건으로 하지만, 인간의 공로가 필수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조건적이며(엡2:8), 계약 당사자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방적인 호의(好意)로 성립된 편무(片務)계약이다(히6:17).
또한 은혜 언약은 시대에 따라 여러 형태로 주어졌으나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요, 너희는 내 백성”이라는 약속의 내용(창17:7, 출19:5-6, 렘31:33)과 약속의 조건이 “믿음”이라는 사실(창15:6, 롬4:9-11) 그리고 중보자가 언제나 동일하다는(딤전2:5,갈3:19-20,히13:8) 일치점을 갖는다.
 
2) 은혜 언약의 계약 당사자「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 분화사, 2004. p. 65제 1 당사자는 하나님으로서 제 2 당사자인 인간이 당신에게 대해 가지실 관계를 솔선하여 은혜롭게 결정하시는 당사자이다. 인간은 목적 자체(생명의 교통의 언약)로 볼 때는 피택자이다. 그러나 목적에 대한 수단(합법적 관계의 언약)으로서 넓은 의미의 언약에서는 객관적 협약(協約)이므로 언약의 생명을 받지 못하는 자들도 포함된다. 그렇지만 구원의 실현이라는 수단적 의미에서는 신자들과 그 자녀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은혜 언약의 약속과 요구
 
은혜 언약의 약속으로서는 하나님과 백성의 참된 관계 회복, 영적 상징으로서의 현세적 축복의 약속, 죄의 사유(赦宥)와 양자(養子), 칭의(稱義)의 약속, 최종적 영광의 약속(영생) 등이 있다. 또한 은혜 언약에는 믿음과 순종의 요구가 있다. 믿음으로 언약과 그 약속들을 받아 언약의 생명에 들어가고, 새 생명의 원리에 따라 새로운 순종으로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 Ibid. p. 65
 
그러나 이 요구는 약속 이행(移行)의 조건으로서가 아니고 약속의 결과인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자에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언약의 약속이 이루어지면 새로운 생의 원리에 따라서 힘주시는 자 안에서 하나님께 복종하며 헌신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까지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엡 1:8)
 
4) 은혜 언약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리스도는 언약의 중보자이다. 그리스도는 특별한 중보자이신데, 그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개재(介在)하셔서 중재(仲裁)만 함이 아니라 실제적인 능력을 가지고 보증인과 율법의 완성자로서 그가 대표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정상(正常) 관계를 갖도록 회복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말로써 우리의 죄를 변호하시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 지불해야 할 죄책을 대신 지불함으로써 율법의 의를 완성시키신 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리신다.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속한 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며 진리에 따라서 생활함으로써 구원을 완전하게 하도록 인도하며 촉구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그를 대신하여 사신(使臣) “바울의 직책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화해의 메시지를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환이요, 증인으로서의 직책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QA시스템 성경연구시리즈」, 강병도, 기독지혜사, 1991. p. 213 - 을 세워서 봉사하게 하심으로 이 일을 계속하신다.(고후 5:20)
 
5) 언약 안에 있는 회원(會員)
 
① 성인(成人)
성인은 신앙과 신앙 고백을 통해서 합법적 협정으로서의 언약에 들어갈 수 있다. 신앙은 유일한 방법이다.
 
② 신자의 자녀들
신자의 자녀들은 합법적 관계로서 언약에 들어간다. 그 자체가 생명의 교통으로서의 언약관계가 아니고 조만간 현실이 되리라는 합법적인 관계이다.
 
③ 비중생자(非重生者)
합법적 협약으로서 언약에 참여된 비중생자는 회개하고 신앙을 가진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언약의 파기자(破棄者)로서 심판 받게 된다. 「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문화사, 2004. p. 66
 
은혜 언약 안에 있는 회원에 대하여 논의할 때, 명심해야 할 것은 단순히 법적인 협정으로서의 언약과 하나님과의 친교를 통하여 실현되는 언약과를 구별하는 것이다. 저들의 믿음이 참 믿음이 못되고 고백이 진실 되지 못할 때는 진정한 의미에서 언약 관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신앙고백을 하지 않거나 언약에 수반(隨伴)하는 책임을 감당하기를 거부한다면 이는 언약을 파기한 자로 간주(看做)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민이나 교회 안에 끝까지 중생하지 않다가 언약의 대열에서 이탈하는 자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무조건적 선택 -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을 위하여 특정한 개인들을 하나님이 선택하심은 다만 그 자신의 주권적 의지일 뿐이다. 특정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믿음, 회개 등과 같은 이런 예지(預知)된 반응이나 그들 편에 대한 순종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그가 선택하신 각 개인에게 믿음과 회개를 주신다.
 
이러한 행위들은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택은 인간에게 있는 어떤 덕성(德性)이나 예지된 행위에 의해서 결정되거나 제약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가 주권적으로 택하신 자들을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죄인을 택하심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의 원인이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D.스틸/C.토마스 共著, 김남식 譯, 1992. p. 19 -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약속한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된다.
 
6) 여러 경륜(經綸) 시대의 언약
 
은혜언약은 본질상 하나이다. 그러나 은혜 언약은 시간 속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계시되었다. 그 형태를 크게 나누면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된다.
 
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7 장 -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A.A.하지 著, 편집부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pp. 171-172
 
5절 - 이 계약이 맺어지는 방법에 있어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는 서로 다르다.(고3:6-9)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의 계약은 약속들, 예언들, 희생제사들, 할례, 유월절 어린 양 및 다른 유형들과 제정들에 의해서 특징 지워졌으니, 이 모든 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것으로서(히 8-10장, 롬 4:11, 골 2;11-12, 고전 5:7)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피택자(被擇者)들에게 약속된 메시야(고전 10:1-4, 히 11:13, 요 8:56)를 신앙하도록 교훈하고 세우는 일에 있어서 그 당시로는 충분하였고 효과적이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이 약속된 메시야에 의하여 충분한 속죄와 영원한 구원을 얻었으니, 이 계약을 우리는 구약이라 부르는 것이다.
 
6절 - 신약에는 구약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되었는데, 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이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와 세례와 성만찬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제도에 의하여 맺어지게 되었다.(갈 2:17, 골 2:17, 마 28:19-20, 고전 11:23-25, 고후 3:7-11) 이 제도는 수적으로 구약에서보다 더 적고 외견상으로 구약에서보다 덜 화려하게 보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제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백성들에게 보다 충만히, 보다 명백히, 그리고 보다 효과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틀림없다.(마 28:19, 엡 2:15-19, 히 12:22-28, 렘 31:33-34) 우리는 이 계약을 신약이라 부른다.(눅 22:20, 히 8:7-9) 그러므로 본체(本體)가 다른 두 은혜의 계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본체를 지닌 은혜의 계약이 있을 뿐이지만 그것이 집행되는 방법에 있어서만 구약과 신약이 다른 것이다.
 
② 아담과의 원시(原始) 언약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꺾을 것이라는 원(源)복음(창 3:15). 그러나 더 근원적으로는 타락 이전에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하셨다.(창 1:28) 이 언약의 주로서 하나님은 전능자의 자리에서 아담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는 주(the Lord)가 되시고 여호와가 되셨다. 바로 이 사람의 하나님 되시고 언약의 주가 되심을 표시시하기 위하여 창세기 2장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기명(記名)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첫 언약 체결 후에도 사람과 관계를 맺으실 때 이 여호와 이름으로 일하셨고, 그 언약에 근거해서 그 언약의 약속들을 이행하실 때에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타나시고 일하셨다. 또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실 때에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타나시고 일을 시작하시고 결말(結末)하셨다.(출 3장 이하)「하나님의 구속경륜」, 서철원, 성문당, 1993. pp. 25-26
 
③ 노아와의 이중(二重) 언약
홍수 이전에 택한 자의 구원에 대한 암시가 깃들인 언약을 맺으셨고(창 6:18), 홍수 후에 다시 땅을 침몰시키는 홍수가 없으며(창 9:8-10) 일반 은총적인 언약을 주셨다. Ibid. pp. 28-29이는 첫 언약이 하나님의 백성 됨이 그 목표였음이, 이 목표 달성을 위한 갱신된 언약 체결에서 분명히 계시되었다. 이 진리는 노아에게 주신 말씀과 언약에서 분명히 나타났다.(창 9:1) 노아와의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다 회복되는 역사의 끝에까지 지속(持續)되고 유효할 것이다.
 
④ 아브라함과의 언약
가나안에 대한 현세적(現世的) 축복과 메시야에 대한 영적 축복을 받았으며(창 15:4-5), 믿음으로 의롭다 여겨졌다(창 15:6). 이는 신약의 성도들도 창대(蒼大)하여지며 영적 가나안, 즉 천국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을 보여준다(롬 4:12). Ibid. pp. 30아브라함과의 언약체결은 낙원에서의 첫 언약체결의 목적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언약의 주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임이 분명하고 확실함을 나타낸다.
 
⑤ 시내산 언약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덕적, 의식적, 국가적 율법을 주었다(출 20장 이하). 이는 인간에게 죄의식을 갖게 하는 것으로서(롬 3:20, 4:15, 5:13, 갈3:19)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몽학(蒙學) 선생의 역할을 한다(갈 3:24).
 
⑥ 신약시대의 언약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세워진 새 언약으로서 구약시대의 언약이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것인데 반(反)하여 이는 모든 국가, 모든 백성에게 확대되는 보편성과 성령의 강림(降臨)으로 인한 충만을 지닌다.
 
7) 은혜 언약의 완성자로서의 메시야「계약신학과 그리스도」
 
팔머 로벗슨 著, 김의원 譯,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p. 278아담 이후로 이스라엘이 비록 계약적 책임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은 한 위대한 백성을 일으켜 그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위대한 나라를 이룩하는 그의 목적에 실패하지 않으실 것이다. 타락한 인간 가운데에서 백성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목적은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멸망을 뛰어넘는 이런 희망어린 기대는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예언자들은 약속의 땅으로의 복귀, 받아들여질 예배로의 회복, 메시야적 왕의 혈통의 재생 등에 대하여 가장 빈번히 말하였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 계약적 약속의 다양한 흐름들을 한데 모으는 독특한 역할 때문에 이 마지막 하나님 계약은 “완성의 계약”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계약은 하나님의 이전(以前) 계약 사역들을 대신한다. 동시에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들 역사를 통해 경험했던 다양한 계약들의 핵심을 총괄적으로 실현하게 된다. 완성은 이 마지막 계약의 내용을 특징 지운다.
 
이 완성하는 실현의 중심은 한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약속들(행위, 구속, 은혜)의 성취자로서 그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렘 31:33)라는 계약 원칙의 핵심을 친히 이루신다. 그러므로 그는 언약을 완성하는 그리스도로 나타나실 수 있다.

 Ⅲ. 결 론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어 노아를 거쳐서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그리고 이삭과 야곱을 거쳐서 계승(繼承)된 언약들은 모세에 이르러 시내산 언약으로 구체화 되었다. 이 언약들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신학자들에 의해)그 이름들을 달리 했지만, 결국 본질은 모두 은혜 언약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약속의 당사자는 인간이 아니라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언약은 사실 인간이 행함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언약을 하신 당사자인 여호와 하나님이 스스로 이루어 내실 언약이었다. 그래서 은혜 언약인 것이다. 또한 이 언약은 택자들에게서 반드시 하나님 스스로 이루어 내실, 인간이 조금이라도 기여(寄與) “불가항력적 은총 -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 구원을 위한 외적 소명에 부가해서 성령은 택자들을 필연적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특별한 내적 소명을 계속하신다.
 
외적 소명(구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은 거부될 수 있고, 또 종종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내적 소명(택자에게만 하시는)은 거부되어질 수 없다. 그것은 항상 회개를 초대한다. 이러한 특별한 소명에 의하여 성령께서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 그는 인간의 의지에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사역에 있어서 제한을 받지 않으며 또한 성공을 인간의 협동에 의존하지도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은헤스럽게도 택한 죄인을 협동하게 하시며, 믿게 하시며, 회개시키시며, 자유롭게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에게로 오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도무지 거부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이 미쳐지는 사람들의 구원을 반드시 이루신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D.스틸/C.토마스 共著, 김남식 譯, 1992. p. 21 - 할 수 없는, 은혜의 언약으로서 내적(內的)인 것이다.
 
장차 오실 메시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실 언약은,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율법으로(바울의 표현대로 “몽학선생”) 그림자적인 역할을 수행해낸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의 견고하고 화려한 왕국의 성취도 은혜 언약의 결과였지만,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모형에 불과했다. 이렇게 구약의 언약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이루어지고 통치가 이루어지는 외적 모습이었지만, 이제 그 언약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속사람 혹은 생각과 마음)안에 내적 모습으로 성취되었고 또 성취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은혜 언약 안에 행위 언약과 구속 언약이 있는 것이고, 이들 언약 모두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몫이었으며, 이제 우리는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소망 중에,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영원천국의 맛들을 보고 있는 현세천국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앞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의와 능력을 손톱만큼이라도 내세울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약을 통하여 당신만을 의지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意圖)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하게 그리고 영원히 성취되었다. 이 성취 아래서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성도의 견인 - 하나님에 의해서 택정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고 성령으로부터 믿음을 얻은 자는 모두 영원토록 구원을 받는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을 유지하여 끝까지 인내한다.”- Ibid. pp. 21-22영원천국을 향하여 가는 발걸음을 쉬지 않게 될 것이다.

  < 참고 도서 >
 
1. 「벌코프 조직신학개론」, 루이스 벌코프 著, 박희석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2. 「기독교 교리개설」, 김성린,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3. 「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문화사, 2004.
4.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D.스틸/C.토마스 共著, 김남식 譯, 도서출판 엠마오, 1992.
5. 「계약신학과 그리스도」, 팔머 로벗슨 著, 김의원 譯,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6. 「QA시스템 성경연구시리즈」, 강병도, 기독지혜사, 1991.
7. 「구약성경과 그리스도」, 김두석, 칼빈대학교출판부, 2003.
8.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해설」, A.A.하지 著, 편집부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9. 「하나님의 구속경륜」, 서철원, 성문당, 1993.
10.「신학사전」, 신학사전편집위원회,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출처 : 블로그 >반석위에기쁨





영생은...아는 것이니이다

- 십자가의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을 바라보며 예수는 '영생'에 대하여 정의를 내린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어 왔었다(Bernard).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호 6:3)
예레미야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다'(렘 9:24)

'안다'(기노스코.  ginōskō. γινώσκω)는 것은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하며 본절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수식하는 말로 사용됨으로 예수와 하나님의 인격적 하나 됨을 증거한다(Lenski).

γινώσκω 스트롱번호 1097

1. 알다.  2. 신비를~  3. 하나님을~
발음 [ ginōskō ]

관련 성경 /
알아보다(막 6:38), 알다(마 6:3, 12:5, 7, 막 5:43, 8:17, 눅 20:19, 요 1:40), 알게 하다(마 9:30, 요 19:4), 알려지다(마 10:26, 눅12:2), 깨닫다(마 24:39, 막 5:29), 알리다(막 9:30, 요 7:17), 동침하다(마 1:25), 주다(막 4:11)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인생들에게 가장 쉽게 그리고 충분하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앎으로써 행복과 영생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주인으로서 영생의 주체(主體)가 되신다(11:35; 행 3:15).
한편 기도중에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저희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식하는 것'이란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Lenski) 그렇게 해석하면 헬라어 원문에 무리가 따르게 된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시기 위해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이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이 견해는 무난하게 채택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표현은 메시야의 자기 증거인 셈이다(Godet).
(3)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예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표현이라고 하는 주장이었다(Westcott, Hegnstenberg). 예수께 대한 요한의 고백은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반복 기록되었다(요일 1:3;2:22;4:3;5:20 등). 그러나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그날밤의 기억들을 잊어버렸다고 구태여 가정할 필요는 없다.







09-22-2024(주일)
암송 성구 #.18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ἐκτενής, ές 스트롱번호 1618

1. 열심 있는.  2. 진지한. 3. 행 12:5
발음 [ ĕktĕnēs ]
어원  / 161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간절한(행 12:5), 뜨거운(벧전 4:8).


καλύπτω 스트롱번호 2572

1. 덮다.  2. 마 8:24. 3. 덮어 버리다
발음 [ kaluptō ]

관련 성경 /
덮이다(마 8:24), 숨다(마 10:26), 덮다(눅 8:16, 약 5:20, 벧전 4:18), 가리다(고후 4:3).

- '무엇보다도'는 어떠한 일보다 사랑을 먼저 할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열심으로'(에크테네. 1618)는 '힘껏 노력하는', '전심 전력하는'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 힘써서 할 사랑은 감정적으로 하는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을 가지고 행동을 수반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을수 있다.
즉 피차간에 있는 허물을 덮어 주고 서로를 세워주고자 하는 사랑은 죄를 가리운다(잠 10:12).

'죄를 덮느니라'에 대해서 혹자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친절한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그 보상으로 자신의 잘못이 가리워질 수있다고 주장하나(Tertullian, Origen) 여기서의 사랑은 친절한 행위를 함으로 오는 반대급부를 바라는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을 하고 있는 주체자의 죄가 가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있는 객체자의 죄가 가리워짐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무조건적으로 용서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헬라어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아가패(ἀγάπη), 필리아(φιλία), 에로스(Έρως), 스토르게" 사용합니다.

사랑의 종류 4가지: 에로스(Eros), 스토르게(Storge), 필리아(Philia), 아가페(Agape)


. "인간은 <에로스>에 의해 태어나고 <스토르게>에 의해서 양육받으며, <필리아>에 의해서 다듬어지고, <아가페>에 의해서 완성된다"

1. 에로스(Eros)

Eros is the god of love and lust whose other name is Cupid. 에로스는 큐피드라고도 불리는 사랑과 정욕의 신이다.

Eros, the sex drive, and Thanatos, the death instinct. 에로스는 성적 본능이고, 타나토스는 죽음의 본능이다.

 EROS was the mischievous god of love, a minion and constant companion of the goddess Aphrodite.

The poet Hesiod first represents him as a cosmic who emerged self-born at the beginning of time to spur procreation. (See the Protogenos Eros and Phanes, for more information.) The same poet later describes two love-gods, Eros and Himeros (Desire), accompanying Aphrodite at her birth from the sea-foam. Some classical authors interpreted this to mean they were born of the goddess at her birth, or alongside her in the sea-foam. The scene was particular popular in art, where the pair flutter around the goddess seated in her floating conch-shell.

Eventually Eros was multiplied by ancient poets and artists into a host of Erotes or Cupids, as they are commonly called in English. The one Eros, however, remained distinct in myth. It was he who lighted the flame of love in the hearts of the gods and men, armed either with a bow and arrows or else a flaming torch. He was also the object of cult. Eros was often portrayed as a child, the disobedient, but fiercely loyal, son of Aphrodite.

In ancient vase painting Eros is depicted as either a handsome youth or as a child. His attributes were varied: from the usual bow and arrows, to the gifts of a lover--a hare, a sash, or a flower. Sculptors preferred the image of the bow-armed boy, whereas mosaic artists favored the figure of a winged putto (plump baby).

2. 스토르게(Storge)

스토르게는 혈족애(血族愛)를 말한다. 
부모 자식 사이의 피로 얽힌 사랑이다.

피는 물보다도 짙고 호르몬보다도 강하다. 그러므로 부모 자식간의 혈족애(血族愛)는 어느 사랑보다도 강(强)하다.

친자(親子)간(間)의 사랑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

그것은 인륜(人倫)을 넘어서 천륜(天倫)이다. 우정이나 애정은 상대방의 장점이나 매력(魅力) 때문에 생긴다.

만일 장점(長點)이나 매력(魅力)이 없어지면 사랑은 소멸(消滅)하거나 약화(弱化)된다. 

아름답던 애인(愛人)이 추악(醜惡)한 불구자(不具者)가 되면 그 애정(愛情)은 고갈(枯渴) 된다.

그러나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그렇지 않다. 자식이 불구자가 되어도 부모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자식을 측은(惻隱)히 여기는 마음은 더욱 강(强)해진다.

자식이 불명예와 죄과(罪過)를 범하여도 부모의 사랑은 변(變)하지 않고 한결같다.

가장 확실하고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부모의 사랑이다.

가장 순수하고 이기적(利己的) 욕망을 떠난 사랑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의 사랑"이 사랑 중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

3. 필리아(Philia)

-philia: (명사에서) (특히 섹스와 관련하여 비정상적으로) …에 대해 갖는 이상 성욕[성애]  <참고 -phobia> paedophilia: 소아성애.

Philia: Brotherly love, closer than that based on principles, denotes affection, close friend or family.

'PHILIA'는 그리스어로 친구간의 우정 혹은 사랑을 의미한다. 

그 어원에서 출발하는 는 특히 사춘기 시절의 열정과 불안, 순수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친구관계, 그리고 그 관게에서 묻어나는 이야기들을 더듬어 가며 지나간 기억을 떠올린다. 

4. 아가페(Agape)

아가페(그리스어: αγάπη)은 사랑을 뜻하는 여러 개의 그리스어 낱말 가운데 하나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지금까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여 왔지만, 보통 거룩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한다. 아가페라는 용어는 고대 사본에서는 드물에 쓰이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용어를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으로 부르고 있다. 또, 아가페는 수많은 기독교 작가들이 기독교적인 상황에서 서술해왔다. 아가페(agape)는 쉽게 말해 '절대적인 사랑 '을 뜻한다.


1. 에로스(Eros)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활과 화살을 가진 나체의 어린이로 나타나는데, 

그가 쏜 금화살을 맞으면 사랑에 빠지고 납 화살을 맞으면 증오하게 된다고 한다. 

로마 신화의 큐피드와 아모르에 해당한다.

<네이버 국어사전 출처>

 

 - 열정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2. 플라토닉(Platonic love)

- 플라톤의 '대화'<향연> 편에 따르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올바른 방법은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즉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진정한 플라토닉 러브란 마음과 영혼을 고무시키고

정신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위키백과 출처>

 

- 순수하고 강한 형태의 비성적(非性的)인 사랑을 말한다.

 

 

 

3. 아가페(Agape)

- 신약성경에서 사랑을 가리키는 두 단어 중 대표적인 말.

- 절대적인 사랑을 뜻하는 말.

 

아가페 사랑은 절대적이라는 말, 성격적인 의미가 있다 보니

성경에 나와있는 사랑에 대해 설명되어 있는 글을 더 적어볼게요-

 

사랑을 뜻하는 헬라어에는,

에로스 - 남녀 간의 육정적이고 성적인 사랑. ‘열정’이 내포되어 있는 단어.

필리아 - 친구 간의 사랑. 우정이나 우애(약 4:4).

스트로게 - 가족 간의 사랑, 부모 자식 간의 사랑. 특히 자식을 향한 부모의 다함없는 사랑.

아가페 -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롬 5:5)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 아가페 [Agape] (라이프 성경사전) 출처>

 

 

 

4. 루두스(Ludus)

 

루두스는 라틴어 사전에 찾아보면 장난, 경기, 대단치 않은 일로 검색이 됩니다.

그래서 루두스에 사랑에 대해 검색을 해보면 연인보단 친구 같은 사랑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가벼운 관계를 뜻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5. 스토르지(Storge)

 

- 형제자매 사이나 친구 간에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무르익는 사랑의 감정을 뜻한다

- 고대 그리스어 Storgay(스토르게이)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 가족 간의 사랑을 뜻한다고 한다. 

- 스토르게 사랑은 우정이나 연민을 생활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느끼고 사랑의 감정으로 발전한 경우이다.

-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의 사랑은 아니지만 서서히 진행되고 깊고 오래가는 사랑을 표현한 것 같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랑을 하고 계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6. 마니아(Mania)

 

Mania를 사전적 검색을 해보면 1. 열광 2. 조병, 조광증이라고 검색이 됩니다.

풀어져 있는 정의를 정리하자면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강한 집착 및 소유욕을 가진 사랑이라고 표현되는 거 같습니다.

보통 마니아층이 있다 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많이 사용하는 것 같아요

 

가볍게는 마니아, 마니아층이라고 표현할 수 도있지만 

마니아 사랑의 찾아보면서 마니아의 타입의 사랑을 하시는 분들은

의존성이 강하고 불안해하는 일이 잦으며,

사랑받고 있다는 걸 자주 확인하고 싶어 하고 외로움을 많이 타며,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고 정리한 글도 보이네요

<출처 : 연애의 과학 >

 

 

 

 

7. 프라그마(Pragma)

 

pragma의 사전적인 검색을 해보면 나라마다 조금 다르게 나오긴 하지만

실제적인, 실용적인 등의 사전적 의미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하면서, 하게 되면서 마음도 중요하지만 현실을 직시하며,

사랑을 하시는 분들을 표현하게 되는 사랑의 유형인 거 같습니다. 

 

- 현실적인, 합리적인, 가슴보단 머리로 가 먼저 생각나는 사랑의 유형인 거 같네요

 

 

 

이 사랑의 유형을 찾아보다가 너무 잘 보게 된 블로그가 하나 있어 블로그 작성자분께

허락을 맡고 글을 조금 더 끄적여봅니다-♡

 

에로스, 루두스, 스토르게는 일차적인 사랑

마니아, 프라그마, 아가페는 이차적인 사랑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러면서 

마니아의 사랑은 에로스와 루두스가 합쳐진 사랑

프라그마는 스토르게와 루두스가 합쳐진 사랑

아가페는 에로스와 스토르게가 합쳐진 사랑

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09-15-2024(주일)
암송 성구 #.17 마태복음 16:24
 
참조 / 마가복음 8:34.  누가복음 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Th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따른다'는 것은 스승의 삶과 가르침에 온전히 순복하는 참 제자가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참된 제자의 조건을 전제한 것은 당신의 임박한 수난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그와 유사한 수난과 고초를 당하게 될 것을 익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직은 예수님을 따르기에는 너무 미흡한 제자들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며 수난당할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려면 내적으로는 자기 부인과 외적으로는 역경 가운데서도 적극적인 순종이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요구되는 소극적 측면으로서 자기의 이기적 욕망과 생각과 주장, 그리고 부패한 옛자아, 옛사람을 철두철미 굴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육신(사르크스)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죄인됨 인간 그 자체(롬 7:14, 18)가 됨으로써 그의 이성, 감정, 의지 등이 완전히 부패되었다(참조, 렘 17:9; 롬 1:18-32).
바로 이러한 본성적 존재로서는 예수의 제자로 결코 따라 나설 수 없다.
한편 이러한 제자의 요건을 망각(妄却)했던 베드로는 훗날 자기를 부인하는 대신 예수를 부인하고야 만다.

부인하다(아파르네오마이) ἀπαρνέομαι 스트롱번호 533

1. 부정하다.  2. 부인하다. 3. 마 26:34, 35, 75. 막 14:30, 31.  눅 22:61
발음 [ aparnĕŏmai ]
어원 / 미래 ἀπαρνήσομαι, 제1부정과거 ἀπηρνησάμην, 완료수동태 ἀπήρνημαι, 미래수동태 ἀπαρνηθή- σομαι, 575와 720에서 유래

자기 십자가

-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살던 팔레스틴의 유대인이라면 십자가 형벌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야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27:32).
더불어 유다의 대반란으로 인해 수많은 십자가 형틀을 목격해야 했던 그들로서는(Josephus, 행 5:37) 죽음의 짐이요,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를 메라는 참의미가 무엇인지를 뼈 속 깊이 이해했을 것이다(10:38).
한편 예수께서 친히 골고다 험한 언덕에서 이 십자가 형을 당하신 이후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엄숙한 제자로서의 결단의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신 일은 인류 구속의 대업을 완성하시는 유일, 단회적인 행위였으나 제자들의 십자가 짐은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 생겨나는 다양하고도 지속적인 행위일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제자들은 각자의 십자가를 거룩한 기쁨과, 무한한 감격과 감사로, 그리고 가장 가치있는 일로 받아들이며 끝까지 지고 예수의 발자취를 좇아가야 할 것이다(빌 3:12-14).

지다(아이로)  αἴρω 스트롱번호 142

1. 들어올리다.  2. 돌을 올리다. 3. 뱀을 집어 올리다
발음 [ airō ]

좇을 것이니라(아코루데이토)

- 시제는 현재 명령형으로서 한두 번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좇아오라는 강한 명령이다.
실로 주의 제자된 자는 억지로, 이따금씩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심전력으로 부단한 노력과 헌신을 통해 계속 좇아가야만 한다.




09-08-2024(주일)
암송 성구 #.16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강조한 까닭은 빌립보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겸손"을 권면했습니다.(3절)
그리고 그와 같은 실제적인 증거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제시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번역된 단어는 "프로네오( phrŏnĕō) φρονέω)" 라고 하는데 '프로네오'의 의미는 "생각하다" "에 몹시 마음을 두다" "생각을 가지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예수님처럼 생각하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나의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생각의 전환이라고 합니다.

생각의 전환은 우리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변화시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할 때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가능성을 제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그러나 생각의 전환을 통해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어려운 상황에서 "절대로 해결할 수 없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이것은 도전적이지만 극복할 수 있어: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것은 우리의 자신감과 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1. 자기를 비우는 마음

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 자기를 낮추는 마음 

8절상=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3.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

8절하=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본절은 앞에서 빌립보 교회의 일치를 위해 '겸손'을 권면한 것에 대한 예증으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전환절이다.
그리스도는 궁극적인 모델로서 이 땅에 오셔서 '겸손'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인들에게 모델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권면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자기를 부정하심으로 십자가를 지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서로가 겸손하고 자신을 부정할 때 다툼이나 허영은 사라지고 '교회의 일치'를 낳게 될 것이다(Martin, Kent, Hawthorne).

마음을 품으라(프로네오. phrŏnĕō) φρονέω 스트롱번호 5426

1. 생각하다.  2. ~에 몹시 마음을 두다. 3. 생각을 가지다
발음 [ phrŏnĕō ]
어원 / 미완료 ἐφρόνουν, 미래 φρονήσω, 제1 부정과거 ἐφρόνησα, 542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생각하다, 의견을 가지다, 판단하다, 롬12:3, 고전13:11, 빌1:7.
 2. ~에 몹시 마음을 두다, ~에 전념하다, ~에 몰두하다, 롬12:16, 빌3:16, 골3:2.
 3.생각을 가지다, 태도를 가지다, 빌2:5.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생각하다(롬8:5, 빌1:7, 골3:2), 여기다(롬14:6), 뜻이 같게 하다(롬15:5),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이다(롬12:16, 빌2:2,5), [명] 사상(행28:22).


09-01-2024(주일)
암송 성구 #.15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but of righteousness,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義)와 평강(平康)과 희락(喜樂)이라고 합니다.
의(義)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 상태를 의미합니다(디카이오수네)
평강(平康)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 상태를 계속적으로 유지하는 힘을 말합니다(에이레네)
희락(喜樂)은 의와 평강을 이 세상에서도 마음껏 누리며 즐기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카라)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 한글 개역 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가르'(*, '왜냐하면')가 사용되어 본절이 15절 하반절과 16절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논거(論據)를 변화시켜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본질을 언급하고 있다(Sanday and Headlam). 강한 자들이 특정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것을 먹지 못한 약한 형제의 영적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 그리고 그로 인해 서로 판단하고 나아가 거룩한 믿음의 공동체가 좋지 않은 평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비쳐볼 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 바실레이아 투 데우,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는 먹는 것과 마시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즉, 이 땅위에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臨在)를 입증하는 것은 어떤 특정 음식을 먹느냐 못 먹느냐의 시시비비를 가리며 또한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외고집적으로 주장하는데 있지 않음을 책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는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바울은 여기서 전체의 논의를 단순히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다.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의 특징적인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성격으로 나타나는지를 진술한다.

'의'(*, 디카이오쉬네)는 속죄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부름받은 올바른 행동, 즉 '도덕적 의'를 말한다(Godet, Murray, Meyer, 6:13, 16, 18).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활 헌장으로 선포하신 산상 수훈(山上垂訓)의 결론에서도 나타난 '의'이다.
그리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나란히 취급한 데서 더욱 확인된다.

'평강'(*, 에이레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을 믿을 때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Calvin, 5:1;빌 4:7).

'희락' 또는 '기쁨'(*, 카라)은 '의'를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의 관계를 누리는 성도의 정서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영혼의 기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Calvin, Hodge) 성령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모든 관계에서 오는 사귐의 기쁨도 포함한다(Godet, Meyer, Murray).

따라서 성도의 삶에서 누리는 총체적인 기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기쁨은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반드시 다른 성도와의 참다운 사귐에서 오는 기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즉 구원의 기쁨과 다른 사람과의 정상적인 교제에서 오는 기쁨과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는 것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보이는 형제인 다른 사람과의 진실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이처럼 '의'와 '평강'과 '기쁨'의 공동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 알라 엔 프뉴마티 하기오)만 가능하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오직'(*, 알라)이란 접속사가 '...만', 또는 '...외에는'이란 뜻으로서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서는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2)의, 평강, 기쁨 세 명사가 모두 '엔 프뉴마티 하기오'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Kasemann).
(3) 갈 5:22, 23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에 '평강과 기쁨(희락)'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Harrison).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는 누구든지 성령을 의지하여 적극적으로 의와 평강과 기쁨의 열매를 나타내야 한다.
본절을 통해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로 형제끼리 서로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얼마나 거리가 먼 어리석은 모습인가를 알 수 있다(본장 주제 강해 '아디아포라' 참조).






08-25-2024(주일)
암송 성구 #.14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Therefore, my dear friends, as you have always obeyed--not only in my presence,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구원을 이루라(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구원을 계속 이루어 가십시오(현대인)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새번역)
구원을 위해 힘쓰십시오(공동번역)

사도 바울은 이미 구원을 받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합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을 받은 것을 유지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구원의 은혜를 확산시키라는 것입니다.
개인 구원에 만족하지 말고 개인 구원을 공동체 구원으로 확산시켜야 합니다.
공동체 구원을 사회 구원을 넓혀가야 합니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성도들은 개인 구원의 은혜에 만족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개인 구원의 차원에서 공동체 구원 즉 가족 구원, 친족 구원,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의 구원 그리고 이러한 은혜를 세상을 더 넓게 확장해야 합니다.
사회 구원이란 의미가 사회를 향한 투쟁으로 반복되어 마치 정부를 향한 쓴소리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사회 구원이란 개인 구원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구원을 이루라

- '사랑하는 자들아'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목양하는 자로서 친근감있게 부르는 호칭이다.
친근한 호칭과 더불어 바울은 본절에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한다.
이 '구원을 이루라'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차원에서 본절을 이해한다(Muller, Kent).
 칭의 이후에 오는 성화의 과정에서 신인협동(神人協同)의 차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미 구원의 확증은 얻었지만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구원의 증거들을 실증하며 살아가야 함을 시사한다고 한다.

2. '그리스도인의 연합적인 차원'에서 본절을 이해한다(Hawthorne, Martin, Michael, Gnilka, Collan-ge).
바울은 4절에서 이미 개인적인 삶만 집착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돌보아 주라고 권면하고 있으며 본절 이하에서 개인적 구원의 문제를 생각한 종말론적인 분위기가 전혀 나타나지 않기에 교회 전체의 집합적, 공동체적 권면으로 볼 수 있다고 한(Hawtho-rne).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Lenski).
왜냐하면 '구원'에있어서 '개인'과 '교회'는 분리할 수 없는 불가 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완성을 향해 계속해서 성숙해가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협력하여 나아가야 한다(엡 4:1-6).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 구원을 이루어가는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전적으로 의지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명령에 늘 순종하는 것이다(Martin, Kent).

이루라(카테르가조마이) work out

κατεργάζομαι 스트롱번호2716

1. 성취하다
2. 가져오다
3. 억누르다
발음 [ katĕrgazŏmai ]
어원  / 디포넌트. 제1부정과거 κατειργασάμην, 제1부정과거 수동태 κατειργάσθην, 2596과 2038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성취하다, 완수하다, 행하다, 롬1:27, 2:9, 7:15, 15:18, 고전5:3, 고후12:12, 엡6:13, 벧전4:3.
2. 가져오다, 이루다, 산출하다, 창조하다, 롬4:15, 5:3, 7:8, 고후4:17, 7:10,11, 9:11, 빌2:12, 약1:3.
3. 억누르다, 압도하다, 정복하다, 엡6:13.

관련 성경
행하다(롬 1:27, 고후 12:12, 엡 6:13), 이루다(롬 7:8, 고후 7:10), 만들다(롬 7:13, 약 1:3), 역사하다(롬 15:18).


08-18-2024(주일)
암송 성구 #.13 아모스 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자유대한민국이란 나라가 무너지기 일보직전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동안 자유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일들을 생각해보자!
첫째, 선교의 짧은 역사속에서 교회가 급성한 나라
둘째, 피선교국가에서 선고국가로 발돋움한 나라
셋째, 한강의 기적을 일으켜 선진대국으로 발전한 나라
넷째, 자유민주의가 아름답게 꽃을 피운 나라
다섯째, 훌륭한 정치 지도자가 배출된 나라(이승만대통령, 박정의대통령)
여섯째, 한류의 바람을 일으킨 나라
그런데 이런 자랑스런 나라가 붕괴되려고 한다.
그것도 자유민주주의 체재에서 김일성주의 체재로........
문제는 이러한 변화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급작스런 변화는 공법과 정의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선지자 아모스와 같은 외침을 강조해야 한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

사회기강이 흔들리고 있는 까닭은 교회의 예배가 신령과 진정의 자리를 버리고 영광과 축복으로 변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라도 의식이 있는 교회와 성도들을 통하여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그루터기를 만들어야 솟아날 수 있는 자리가 다듬어지기 때문이다.




 
- 본절에 의하면, 백성들의 잘못된 예배는 공법과 정의의 결여라고 볼 수 있다.
'공법'과 '정의'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기도 하지만(사 10:22), 아모스는 인간 사회에 구현되어야 할 원리로 보았다(7,15절.  6:12).
즉, 사회 질서와 관계있는 것으로 율법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 사회구조 속에서 구현되고 정직하게 이웃을 대할 때에야 비로소 그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흘릴지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이갈'(*)은 '굴리다'(roll)는 뜻의 '갈랄'(*)에서 온 나팔형 동사로 굽이치는 강물처럼 격렬하게 흐르게 하라는 명령형이다(BDB).
또한, 히브리어 원문에는 '끊임없는'(perpetual)이라는 뜻을 가진 '에이탄'(*)이라는 형용사가 있어서 그 강도를 더해준다.
그러므로 공법과 정의가 적극적이고도 계속적으로 흘러야만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사가 의미있고 가치있음을 보여준다.

공법(公法) 4941 미쉬파트[ mishpâṭ ] מִשְׁפָּט 스트롱번호 4941

1. 판단.  2. 레 19:15. 3. 욥 9:32
발음 [ mishpâṭ ]
어원  / 819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24회 사용

레위기 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찌며.

욥기 9:32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정의(正義) 6666 여성명사  체다카 [ tsedâqâh ] צְדָקָה 스트롱번호 6666

1. 올바름.  2. 정의. 3. 의로움
발음 [ tsedâqâh ]
어원 / 666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57회 사용

☞의(창 15:6, 삼하 8:15, 잠 11:5), 의로움(신 6:25, 24:13, 사 5:7), 공의(신 33:21, 왕상 3:6, 사 10:22), 권리(느 2:20), 정의(암 5:7, 6:12, 슥 8:8).
[형] 의로운(삿 5:11, 대하 6:23, 시 11:7),옳은(삼하 19:28), 적당한(욜 2:23).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잠언 11:5
완전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그 이 곧게 되려니와 악한 자는 그 악을 인하여 넘어지리라.



08-11-2024(주일)
암송 성구 #.12 베드로후서 1:4

신의 성품
베드로후서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성품은 타고난 성격이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성격과 성품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신의 성품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삼위로 존재하는 다양성과 온전한 하나로 존재하는 신비한 현상은 마치 다양한 성격의 그리스도인들이 한 영으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고 또한 다양한 지체들로 각자의 맡은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고유한 신분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신의 성품이란 성령의 지배를 받아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삶을 통하여 드러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아직도 성령화되지 못한 나의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습관을 성령의 지배를 받아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덕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의 일들 즉 그리스도의 재림(3:4,9,12), 새 하늘과 땅(3:13)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11절)에 참여케 되는 것을 가리킨다.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 '피하여'의 헬라어 '아포퓌곤테스'(*)는 부정 과거 분사로서 '피한 이래로'라는 의미이다(Bigg, Blum).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침례를 받은 후부터 죄와 정욕과 거리가 멀어지며 피하게 된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스데데이아스 코이노노이 퓌세오스'(*)에서 헬라어 '데이아스'(*, '신에게 속한')는 성경적 용어라기보다는 헬라 사상에 따른 이교적 표현이다(Richardson). 베드로는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그의 논쟁을 전개시키고 있다(Kasemann). 그러나 본문은 이교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내면에 본래부터 신과 같은 거룩한 성품이 있어서 이것을 잘 계발하면 성인(聖人)이 되고 거스리게 되면 악인(惡人)이 된다는 사상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참된 연합을 통해서 성령의 교제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됨을 시사한다(Bigg, Green).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 거듭나게 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된 영적 교제를 나누며(요 14:16,17,26), 장차 나타날 영광과 축북에 참여하게 된다(롬 8:18).



08-04-2024(주일)
암송 성구 #.11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What good will it be for a man if he gains the whole world, yet forfeits his soul? Or what can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목숨의 소중함(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신약 성서는 종말론적 관심이 옥중에서 해방을 기다리고, 밤중에 새벽을 기다림같이 열망적입니다.
재림에 관련된 곳이 318번이나 썼고 천국과 지옥과 부활과 영혼 구원문제는 백주의 태양처럼 강렬한 현실이었습니다.

"온천하를 얻고도 네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현세주의자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하시고 말세에 사람들이 노아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마 24:38)하는 현세가 전부이며, 유물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가치관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말세 인간들은 예수 재림을 기롱합니다(벧후 3:3).
복음적 신앙을 오히려 반사회, 반문명, 반지성, 혹은 피안주의니 현실도피니 하는 낙인을 찍어 냉소하는 풍조를 만듭니다.
그것도 진화론 공작과 함께 악마의 반성서적, 반내세적, 반종말적정신 풍토 조성을 위한 고등공작의 가장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오늘도 영적인 세계를 알고 깨어 근신하며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숨(5590. 프쉬케)

ψ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5590

1. 영혼.  2. 생명력. 3. 혼
발음 [ psüchē ]
어원 / 5594에서 유래

뜻풀이부 / I. 영혼, 목숨, 생명
관련 성경 /  목숨(마 2:20, 막 8:35, 롬 11:3), 영혼(마10: 28, 눅12:20, 고후12:15), 마음(마11:29, 막14: 34, 행14:22), 생명(막3:4, 요12:25, 행20:10), 힘(막12:33), 뜻(행4:32), 인(행27:37), 영(고전15:45), 혼(살전5:23, 히4:12), 명(벧전3:20), 심령(벧후2:8), 사람(행7:14, 롬13:1).




얻고도...잃으면

- 여기에서 '잃으면'(제미오데)이란 '해를 입히다' '손해 보다'는 뜻의 '제미오오'(*)의 부정과거 가정법으로서 아직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는 표현이다.
이는 '얻고도'(*, 케르데세)라는 말이 능동태를 취하고 있는데 비해 수동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고 할 것이다.
즉 비로소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얻는다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어떤 유익이 있겠느냐는 역설적 대구인 것이다(눅 9:25).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 이는 인간 영혼(생명)의 최고 가치성과 유일성 및 단회적 생명성을 강조한 말이다.
즉 예수께서는 비록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온갖 부와 명예는 잃고 난 뒤에도 다시 취할 수 있지만 인간의 영혼은 한번 상실하면 도무지 회복할 수 없는 고귀한 것임을 강조하셨다.
이제 현존하는 모든 사람들은 '온 천하'냐 '자기 목숨'이냐 라는 종말론적 선택을 해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선택하기 원하신다(룻 1:16, 17; 왕상 18:21; 히 11:25).




07-28-2024(주일)
암송 성구 #. 10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카이 엔뒤사스다이 톤 카이논 안드로폰 톤 카타 데온 크티스덴타 엔 디카이오쉬네 카이 호시오테티 테스 알레데이아스.
 και ενδυσασθαι τον καινον ανθρωπον τον κατα θεον κτισθεντα εν δικαιοσυνη και οσιοτητι της αληθειας

엔두오 호 카이난 안드로포스

입으라 (1746) 엔두오 [ ĕndüō ] ἐνδύω 스트롱번호 1746

1. 입히다.  2. 옷 입다. 3. 마가복음 6:9(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발음 [ ĕndüō ]
입다(마 6:25, 막 1:6, 계 1:13), 입히다(마 27: 31, 막 15:17, 눅 12:22), 붙이다(엡 6:14, 살전 5:8).


그(3588)

ὁ, ἡ, τόpl. οἱ, αἱ, τά 스트롱번호3588

1. 이 사람
2. τοῦ γὰρ καὶ γέ νος ἐσμέν : 왜냐하면 우리도 그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3. ὁ μὲν..
발음 [ hŏ ]


새(2537) καινός, ἡ, όν 스트롱번호 2537

1. 새로운.  2. 쓰지 않은.  3. 알려지지 않은
발음 [ kain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새(마 9:17, 눅 5:36, 계 2:17, 마 13:52, 막 2:21, 고후 5:17), 새로운(고후 5:17, 계 21:5), 새로 되는(행 17:21).

사람(444)

ἄνθρωπος, ου, ὁ 스트롱번호444

1. 인간.  2. 강 막 9:31.  3. 마 4:19
발음 [ anthrōpŏs ]
어원 / 435와 ὤψ ‘안색’에서 유래
사람(마 4:4, 막 1:17, 고후 4:16), 남(눅 6:31, 남에게 마 7:12), 인자(마 8:20, 막 2:28, 눅 1:25), 인간(행 4:12), 범인(행 4:13, 고전 15:32).




새 사람(the New Self)이란 누구인가?

하나님을 따라...지으심을 받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카타 데온 크티스덴타'(*)는 문자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창조된'이란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되었음'을 시사한다(골 3:10, Bruce,Lincoln).
하나님은 죄로 잃어버렸던 그의 형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현시켰고 그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심으로(Bruce, Wood)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하셨다(Lincoln).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디카이오쉬네 카이 호시오테티 테스 알레데이아스'(*)는 문자적으로 '진리로부터 나온 의와 거룩함 안에서'를 의미한다.
'의와 거룩함'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함을 받는 새사람의 윤리적 덕목이며 자질(資質)이다(Lincoln).
'의'는 모든 생활 가운데 올바르고 충실하게 사는 것을 의미
'거룩함'은 세상으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속한 삶으로 악에 물들지 않는 성결한 삶을 의미

두 가지 덕목은 '진리'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진리'는 복음과 사도적 전승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실재다(21절;1:13).

새 사람을 입으라

본절은 22절의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와 대조된다.
'새 사람'은 문자적으로 '갓 만들어낸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2:15)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통해 재창조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이러한 '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된 자에 합당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4)

입는다는 동사는 주로 옷을 입을 때 사용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마치 무슨 탈을 뒤집어 쓰는 것이 아닙니다.

1930년대 미국의 대경제공항 때에 경제적인 위기가 점점 심각해지므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이 동물원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도 먹고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때에 동물들을 제대로 먹이는 것에 많은 재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도 살리고 동물원도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던 관계자들은 한 가지 좋은 생각을 제시했습니다.
동물의 탈을 쓰고 마치 살아있는 동물처럼 하루 종일 우리 안에서 지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숭이 우리에는 원숭이의 탈을 쓴 사람이 원숭이처럼 지내고 있었고 그 옆에 호랑이 우리에서는 호랑이 탈을 쓴 사람이 호랑이 흉내를 내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동물원의 관리인은 탈을 쓴 사람들에게 절대로 다른 우리로 넘어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한 번은 원숭이 우리에서 원숭이의 탈을 쓴 사람이 원숭이처럼 재롱을 부리다가 그만 호랑이 우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호랑이 한 마리가 어슬렁 어슬렁 원숭이 곁으로 다가옵니다.
절대로 사람의 소리를 내지 말라는 관리인의 주의사항을 기억한 원숭이는 다가오는 호랑이를 두렵게 바라봅니다.
이때 호랑이가 원숭이 곁에 와서 속삭이더랍니다.
"너도 나처럼 하루종일 원숭이 탈을 쓰고 고생하는구나!" 하며 원숭이 주위를 한 바퀴 돌더나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예수 탈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겉은 예수처럼 성자와 같은 흉내를 내고 있지만 그 속에서는 온갖 추하고 더러운 것들이 득시글 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예수의 탈을 쓰고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온전한 예수의 생각과 마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처럼 무장할 수 있을까요?

어느 날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매우 심각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결론으로 예수님의 대답은 "거듭나라!"고 하셨습니다.

거듭나다는 헬라 단어는 팔링게네시아()라고 합니다.
팔링게네시아는 "거듭남" 이란 명사형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첫째, 다시 시작하라

새 출발이란 의미는 새로운 사람이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결혼한 후에 서로 헤어졌습니다.
그런다가 각자 헤어진 후에 살아보니 그래도 예전에 함깨 하였던 사람이 더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직도 혼자서 지내던 두 사람이 다시 결합하기로 약속하면서 함께 생활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새 출발이라고 합니다.

비슷한 사례이지만 두 사람이 헤어진 후에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지냈습니다.
역시 구관이 명관이라는 옛말이 맞구나! 하고 느낄 때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현재 살고 있는 두 사람이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도 새 출발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새 출발보다 더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혼자사 쓸쓸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했었는데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이제부터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그 이전의 사람을 위하여 잘 살아야 한다고 중보기도도 합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먼저 생각하고 기도할 수 있을 때 이것도 새 출발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더 높은 것을 생각하라

사람들은 현재의 위치에서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러한 삶은 육체에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육체에 붙잡혔다는 증거가 육신적인 기준에 의해서 판단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반차 투정, 신발 투정, 옷 투정, 자동차 투정......
그러나 육신의 가치가 아니라 보더 한차원 높은 정신적 차원에서 생각해 봅니다.

반찬이 싱겁구나 내가 소금을 더 먹어야지
옷이 더럽구나 내가 손으로 직접 빨아어 입어야지
왜 나는 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시킵니까?


그런데 이것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고 상대방 중심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월남전이 한창 치열하게 전개될 때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이 월남 전선을 방문하여 장병들을 위로하는 위문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맨 앞줄이에 앉은 두 사병에 눈길이 쏠렸습니다.
한 사람은 오른 손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왼손이 없습니다.
다른 장병들이 손뼉을 치며 즐거워 할 때 두 사람은 서로 완손과 오른손을 마주치며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παλιγγενε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3824

1. 중생.  2. 마 19:28. 3. 딛 3:5.
발음 [ palingg ĕ- nĕsia ]
어원 / 3825와 1078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중생, 재생, 거듭남.
 a. [세계에 대해서] 마 19:28.
 b. [구속받은 사람의 재생에 대해서] 딛 3: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중생(딛 3:5), 새롭게 됨(마 19:28).

* 3825.  πάλιν 스트롱번호 3825

1. 다시. 2. 돌아가다. 3. 요 4:13
발음 [ palin ]
어원 / 3823과 동일어에서 유래한 듯

뜻풀이부

1. 다시, 돌아, 도로.
 a.  [가다, 보내다, 돌아서다, 부르다 등의 동사와 함께] 돌아가다, 막11:3, 요6:15, 11:7, 갈2:1.
 b.  [전에 있던 상태로 다시 떨어지거나 전에 하던 동작으로 돌아가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 요4:13, 고전7:5, 갈2:18.

2. [이미 한 일을 반복하거나 어떤 일이 전에 생겼던 것과 같은 식으로 생긴다 든가, 어떤 존재 상태가 전과 같이 다시 일어날 때] 다시, 또 한 번, 또 다시, 새로, 막2:13, 눅23:20, 요1:35.

3. 그 위에, 더욱이, 더군다나, 거기서, 마5:33, 13:45, 19:24, 눅13:20, 롬15:10-12, 고전3:20.

4. 반면에, 차례로, 마4:7, 요12:22, 고전12:21, 고후10: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또(행 10:15), 다시(갈 1:9), 또한(고전 12:21).

* 1078. 게네시스  γένε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1078

1. 기원.  2. 존재. 3. 마 1:1의 βίβ- λος γενέσεως는
발음 [ genesis ]
어원 / 1074와 동일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기원, 태초, 족보, 혈통, 탄생, 마 1:18, 눅 1:14.
2. 존재, 약 1:23.
3. 마 1:1의 βίβ- λος γενέσεως는, 창 2:4, 5:1에서 온 것이다. 기원의 역사, 족보, 역사의 책.
4. ὁ τροχὸς τῆς γενέσεως : 인간 기원의 수레 바퀴, 인생 여정, 약 3:6.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계보(마 1:1), 출생(생긴)(약 1:23), 삶(약 3:6).







07-21-2024(주일)
암송성구 #.9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You diligently study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by them you possess eternal life. These are the Scriptures that testify about me.

상고(詳考)라는 헬라 단어는 "에류나오(ĕrĕunaō. ἐρευνάω)" 라고 하여 사도행전 17:11에서 소개한 "상고(아나크리노. anakrinō) ἀνακρίνω)"와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나크리노'는 "탐색하다, 조사하다, 체로 쳐서 골라내다" 라는 의미로 사용하였고, '에류나오'는 "찾다, 추적하다, 조사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상고한다는 것은 예전부터 전해오는 것에서부터 찾아내고 밝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상고하는 방법은 말씀을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말씀과 연결되는 37-38절을 읽어봅시다(개역 개정판으로 소개합니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성경에서 영생을 얻으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께 친히 증언하신 말씀을 찾고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곧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언이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미리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장차 메시아가 이 세상에 임하실 것이라는 예언(預言)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말씀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신약의 말씀은 구약의 예언에 대한 성취(成就) 및 응답(應答)을 말합니다.


상고하다(에류나오. ĕrĕunaō)  ἐρευνάω 스트롱번호 2045

1. 204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 찾다.  2. 추적하다.  3. 조사하다
발음 [ ĕrĕunaō ]

뜻풀이부

1. 204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 찾다, 추적하다, 조사하다, 탐구하다, 살피다, 요 5:39, 7:52, 롬 8:2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생각하다(요 5:39), 상고하다(벧전 1:11), 살피다(롬 8:27), 통달하다(고전 2:10).

* 2046.
ἐρέω 스트롱번호 2046

1. 4483의 보다 완전한 형태 : 언급하다.  2. 대화하다.  3. 말하다
발음 [ ĕrĕō ]

뜻풀이부
1. 4483의 보다 완전한 형태 : 언급하다, 대화하다, 말하다, 부르다, 요 4:18, 계 17:7등.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말하다(마 7:4, 눅 23:29, 롬 3:5), 명하다(마 17:20), 묻다(마 21:24, 눅 19:31), 이르다(막 11:29, 고후 12:9, 계 17:7), 말씀하다(눅 2:24, 요12:50, 행 2:16).

* 4483.

ῥέω 스트롱번호4483

1. 말하다.  2. 지시하다
발음 [ rhĕō ]

뜻풀이부

1. 말하다, 마 3:3, 5:21.
2. 지시하다, 명하다.

참고 정보/  문법설명 / 미래 ῥεύσω, 4482와 유사

관련 성경
말하다(마 2:15, 5:21, 12:17, 24:15), 이르다(롬 9:12).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 이 말씀은, 윗 귀절들(37-38)의 정당성을 증거한다.
곧, 구약 성경은 영생을 주는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는데, 유대인들이 그 성경을 상고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그와 같은 행동은 성경을 바로 앎이 아니다.
곧,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과 같다.





07-14-2024(주일)
암송성구 #.8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Follow my example, 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t.

미메타이 무 기네스데 카도스 카고 크리스투
μιμηται μου γινεσθε καθως καγω χριστου.

본 받는자(3402) 미메테스(mimētēsμιμητής, οῦ, ὁ 스트롱번호 3402

1. 모방자.   2. 본받는 사람.  3. 고전 4:16
발음 [ mimētēs ]
어원 /  340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모방자, 본받는 사람, 고전 4:16, 엡 5:1, 살전 1:6, 히 6:12.

연관 단어 관련 성경
본받은 자(고전 4:16, 엡 5:1, 살전 2:14), 행하는 자(벧전 3:13).

* 3401.
μιμέομαι 스트롱번호 3401

1. 모방하다.  2. 본따다.  3. 본받다
발음 [ mimĕŏmai ]
어원 / 명령 μιμοῦ, 미완료 ἐμιμοῦμην, 미래 μιμήσομαι, 제1부정과거 ἐμιμησάμην, ‘흉내내다’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모방하다, 본따다, 본받다, 따르다, 살후 3:7,9, 히 13:7, 요삼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본절을 10장에 속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1. 2절에서부터 새로운 주제 즉 교회의 예배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2. 문맥상 본절은 10:3과 상관성(相關性)을 갖는다.
바울은 10장에서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와 우상의 제물을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으며 그 권면의 모델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즉 바울은 8장의 경고와 권면에 대한 결론으로 본절에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본받는 그리스도는 유일하고도 완벽한 모델로서(Godet) 그분의 삶은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이었다(빌 2:4, 5).
그러나 그리스도나 바울의 삶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이타적인 삶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이타적인 삶이었다(10:33).

오늘 본문에서 ‘본’이라는 말이 영어 단어로는 두 가지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example’이라는 말과 다른 하나는 ‘pattern’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인데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나서 하신 말씀입니다. 조금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길 수 있습니까? 아니 단순히 선생이 아닌 “주님”인데 말입니다. 당시의 풍습에 의하면 하인이 주인이나 손님의 발을 씻는 것이 관례였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기를 원하시는 새로운 ‘pattern’입니다.

모든 경기에는 rule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도 새로운 룰이 적용됩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것은 ‘본’이 되는 삶을 산다는 것이 우리가 가진 기존의 관념을 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는 관념도 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를 잘 믿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조금은 유별나게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남들이 뭐라고 해도 식사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도 성경을 묵상합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닮고 싶어 하느냐? 아니면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하고 심지어는 혐오하느냐? 하는 것이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우리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유익이 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닮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점점 더 혐오하게 될 것입니다.

“본”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가 “거룩함”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생활에서 적어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는 가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교인들과 선교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것입니다. 선교팀들이 여기저기서 기도하는 모습을 봅니다. 식당에서도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은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신앙에 관한 한 열정적인지를 드러내야 합니다. 좀 “유별나다!”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제가 좀 믿음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저는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으면 개인 기도를 하고 먹거나, 작은 소리로 기도를 하고 식사를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식사 기도하는 것이 본이 되어야지, 다른 사람들의 식사를 방해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닌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터기에 성지순례를 하면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에베소의 원형극장에 갔을 때, 얼마나 울림이 좋은지 화음을 넣어서 성가를 부르면 사람들이 손뼉을 칩니다. 그래서 자꾸 노래를 더 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 소리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가이드가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합니다. 가이드 소리에 집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 찬양 소리 때문에 하나님이 손가락질을 당한다면 우리의 행동을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싶어 하셨던 새로운 삶의 스타일이 있다면 “섬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요한복음 13장 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때가 언제냐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것을 아시고, 바로 죽음을 앞에 놓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때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마지막까지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 끝까지 사랑하시던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오늘 본문을 가리켜 “때를 가리지 않는 섬김”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힘이 들어도 섬기지 못할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조금만 돈을 벌고 권력을 잡아도 섬기지 못할 이유가 됩니다. 가진 것 없어서, 지위가 없어서, 가진 것이 많아서 그 모든 이유가 섬기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데, 예수님은 가장 힘든 순간에 섬김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의 가장 진지한 모습이 드러나는 때가 극한 상황이라고 하지요.

제가 조금 무모한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던 광야를 실제로 체험하면서 설교 준비를 해 보려고 합니다. 제가 직접 애급에서부터 출발해서 시내 광야를 머물며 광야 체험을 하고 가나안까지 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나눠보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을 나누는데, 누가 함께 가야 할까? 추운 밤, 더운 낮 물도 없이 지나야 하는데, 건강한 남자들로 팀을 모으고, 12 지파의 모습들을 성경을 보면서 철저하게 재현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여자들도 데려가서 정말 현실감 있게 불평하는 모습도 담아야 합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아야 하니까요.”

여행사를 하시는 권사님이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광야 체험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렇게 온전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하루 코스에 하이라이트가 있는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무장한 강도들에 의해 납치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끌고 다니다가 호텔에 데려다 줍니다. 그러면 그 과정 중에 리얼하게 사람들의 본 모습이 다 드러납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그분이 누구이신지 우리가 분명히 압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신 것, 수없이 많은 기적을 행하신 일들이 결국은 섬기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섬김의 본이 위대한 것은 섬김의 대상에서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롯 유다도 예수님이 발을 씻기시는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에게 예수님을 팔려는 계획을 마음에 감춘 가롯 유다 앞에도 수건을 들고 대야를 놓고 발을 씻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섬김에서 누구도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을 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가장 강력한 크리스천의 영향력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은 늘 자기편과 반대편을 갈라놓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도 그런 나뉨이 존재합니다. 진리 때문에 나뉘는 것이 아니라 내 성향에 따라 갈라지는 것이죠. 나눠진 우리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라는 주석가는 "예수님은 겸손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마디로 말하면 겸손할 필요가 없는 시간에 겸손하셨습니다. 겸손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겸손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이 보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것이 무엇인가요? 오늘 본문에 다시 한 번 집중합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고 우리가 따라 하기를 원하셨고, 그렇게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우리를 보고 따라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한 번 상상을 해보세요. 우리가 상황에 관계없이 대상에 관계없이 섬기기를 시작했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또 다른 가치관을 누군가 보여 줄 수 있다면, 또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연히 읽게 된 책이 있습니다. 데이빗 케이프가 쓴 [주님의 음성에 그대로 순종한 예수를 위한 바보]입니다.

그가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백인과 흑인이 딱 갈라져서 서로 싸우고 죽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현장에서, 그것도 석탄 연기 가득한 빈민들과 깡패들이 사는 ‘소웨토’라는 곳에서 “예수님이 씻긴 발은 행복한 발입니다!”라는 문구를 새긴 티셔츠와 반바지, 두꺼운 고무 깔창을 댄 운동화에 양말을 발목까지 접어내리고, 등에는 큰 장비를 지고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라는 음성 말입니다.

자신의 모습이 너무 우습기도 하고, 정말 바보 같은 모습 실현 가능성이 없는 그 모습임에도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소웨토에서 만난 4명의 건장한 폭력배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이 발을 내놓았고, 그 중 한 명이 데이빗과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일어난 변화의 스토리 기적의 이야기가 그 책에 나와 있습니다.
그의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속도로에서 또는 샛길에서 만나 그들의 발을 씻겼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족히 수천 명은 될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성공이나 실패가 없고 오직 순종만 있을 뿐이다. 내가 하루에 이삼십 명의 발을 씻기면 그날은 성공적인 날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찾는 단 한 가지는, 우리가 그분의 신실한 자녀로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다.”

새로운 패턴의 삶을 살기 위해 순종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 세상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절대로 이 세상의 가치를 가지고 세상이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죠.

오스트리아의 애들러라는 의사는 자기를 찾아오는 우울증 환자를 치료할 때 이런 처방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가서 2주일 동안 매일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할까 그것만 골똘히 생각하고 한번 실천해 보세요. 2주일 동안만 그렇게 살면 당신 병은 깨끗이 낫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새롭게 하고, 세상을 치유할 유일한 길이 있다면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셨던 그런 삶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믿음을 본받기 원합니다. 적어도 제 생각에 세상 사람이 우리를 보고 본받기를 원하고 감동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을 볼 때입니다. 평상시의 삶에서 우리의 신앙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모습”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반대로 평상시에는 예수를 잘 믿는 것 같은데 위기 가운데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면 우리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평상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성경을 읽거나 전도하는 우리의 모습보다, 불합리하게 진급에서 떨어졌을 때 대응하는 우리의 모습, 부당하게 꾸지람을 듣거나, 누가 봐도 힘들게 하는 못된 상사를 만났을 때 처신하는 우리의 모습, 모두가 실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회사가 위기에 처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보이는 신앙인의 의연한 모습과 소망으로 인내하는 모습 말입니다.

자녀의 진로문제를 놓고 안달하고, 입시의 당락을 가지고 일희일비할 때,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자녀에 대한 소망의 끈을 놓지 않으며 기도하는 모습, 군대에서 진급 철이 되면 교회와 절과 성당에 사람들이 모이고 진급 발표가 나면 사람들이 쫙 빠져나가고 기뻐하거나 실망할 때,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며, 진급되었을 때, 그렇지 못한 사람을 위로하는 모습과 반대로 내가 실패했을 때에, 선한 길을 인도하실 하나님을 굳게 믿으며 잘 된 사람을 축복할 수 있는 모습 말입니다.

내가 목사고, 장로고, 권사고, 집사인데, 예수를 잘 믿는데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일이 잘 안 풀릴 때, 우리를 주목해 보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어려운 일이 찾아올 때,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우리의 행동을 바라보지 않겠습니까?

임은미 선교사가 쓴 [최고의 날 최고의 그리스도인]이란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 잘 믿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예수님을 잘 믿지 않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면 하나님을 떠나버리지 않을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친하게 여겨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주님, 이 고통을 저와 함께 나누기로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친구가 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주님의 고통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을 품는다. 어려움이 찾아온다면, 당신도 이런 마음으로 감사하며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어찌 보면 참 쉬운 일들 같은데 이런 모습이 세상이 바라는 모습입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본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받은 축복보다, 의인이 넘어졌을 때 일어나는 모습입니다.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넘어져서 일어나는 사람, 시험 가운데 견디는 사람, 죄 가운데서 용서받은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완전함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완전함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크리스천의 모습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의 [주님과 동행하십니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볼만한 묘기 가운데 하나는 공중그네 타기입니다. 우리는 숨을 죽여가면서 곡예사들이 한 그네에서 다른 그네로 옮겨가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천막의 가장 높은 곳에서 묘기를 펼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 사람을 다른 곳으로 밀어 보냅니다.

그러면 당신은 "저러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하며 조마조마합니다. 한 번은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그처럼 완벽하게 공연을 할 수 있습니까? 한 번도 떨어지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떨어집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공연마다 떨어집니다. 하지만 눈치를 못 채시는 거죠. 왜냐하면 우리는 떨어졌을 때 어떻게 만회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거든요. 우리는 떨어졌을 때 재빨리 다시 뛰어 오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도 공연의 일부라고 생각하지요."
그들은 밑에다 그물을 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될 때, 우리는 절대로 완전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안전합니다. 이 안전하다는 신뢰감이 모든 일을 성공하게 하는 힘이 되어줍니다.


교회가 본이 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요, 그 하나님의 우리의 행동을 바라보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시고 그대로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믿음 안에서 우리의 행동이 결정되고, 교회의 모습이 결정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더 큰 도전이 되는 것은 우리 개인의 삶의 문제일 뿐 아니라 크리스천들이 모여 있는 교회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보인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교회를 보면 세상 사람이 용서하시는 하나님,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싸우시는 하나님, 정죄하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용서하거나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조바심내고 안달하며 자기 것을 차지하려는, 섬기는 본이 아니라, 죽어도 자신의 것을 희생하지 않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기적인 교회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운동을 하며 기독교 TV를 보다가 포항중앙교회 서임중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축복과 저주의 부메랑”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우리가 잘 아는 어떤 교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서울에 있는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 담임목사님이 재임 당시 쓰러지셨을 때, 교회당회원들의 사랑과 배려는 온 세계를 감동시킨 위대하고 아름다운 역사로 지금 남아 있습니다.

1988년에 ○○○ 목사님이 뇌출혈로 쓰러지셨습니다. 3년 동안 말씀을 못 하셨습니다. 몸은 절반만 사용되는 불구가 되었습니다.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는 치명적으로 기억과 모든 의식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얼굴은 뒤틀려서 의사도 돌아올 확률이 없다고 진단을 내린 상황이었습니다. 웬만하면 포기할 법 한데, 그 교회 장로님들은 포기하지 않고, 3년 동안 목사님을 병원에 눕혀놓고, 매일 24시간 기도하면서 조를 짜서 병원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장로님들이….

목사님이 스스로 견디기 어려워 죽고 싶다고 하니까 장로님들은 그 목사님을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그렇게 죽고 싶은 것이 소원이시면 저하고 손잡고 한 번이라도 일어섰다 죽으십시오.”

그렇게 하면서 강권하여 담임목사를 운동시키는 조를 짜서 3년을 뒷바라지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목사님을 회복시킬까?’ 이것만 생각했습니다.

그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한 번은 제주도로 목사님을 모시고 가서 만장굴 앞에 세워놓고 이쪽으로 걸어와 보라고 합니다. 비실비실하면서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목사님이 사모님 손을 잡고 몇 발자국 움직여 장로님 앞으로 오게 될 때, 장로님들은 “우리 목사님 만세!” 하면서 울고 또 울며 그렇게 기뻐했다는 이야기는 잊을 수 없는 감동스토리가 되었습니다.

노회는 교회가 강단을 너무 오래 비운다고 설교 목사를 파송하려고 결의합니다. 그때 ○○○○교회 장로님들은 “누구도 우리 교회에 오지 못한다. 만약 노회가 설교 목사를 파송하면 우리는 ○○○○교회는 노회를 탈퇴한다고, 우리 목사님이 회복되어서 이 강단에 설 때까지는 누구도 ○○○○교회 강단에 설 수 없다.”라고 노회를 향하여 항거하기도 했습니다. 노회도 이 장로님들의 행위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습니다.

장로님들은 목사 지키기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드디어 3년 만에 목사님이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반신불수의 몸으로 어눌하지만 처음 설교를 하게 되었을 때 교회는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 목사님은 우리 한국교회사에서 설교 잘하기로 유명한 목사님이셨습니다. 말이 빠르면서도 발음이 정확하게 전달되는 어른이셨습니다. 그러나 병중의 설교는 알아듣기도 어렵고 어눌한 말이었지만, 그 소리를 듣는 교인들은 행복해했습니다.

뇌출혈 당시에 모든 기억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성경을 읽다 보니까 “태초”라는 말이 뭔지 몰랐습니다. 사전을 펴보니까 “맨 처음”이라고 되어 있었답니다. 창조라는 말이 뭔 말인지 몰랐답니다. 사전을 펴보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 이런 식으로 새롭게 어린아이같이 글을 익혀가는 가운데 너무 속이 터져서 “이게 사는 길이냐고, 죽자고” 포기를 하려고 했답니다. 그때 하나님이 소리치셨습니다.

“이놈아, 너는 살아있지 않느냐? 반은 쓸 수 있지 않느냐? 책은 읽을 수가 있지 않느냐? 밥은 먹을 수가 있지 않느냐? 남아 있는 것 붙들고 감사하지 못하고 없는 것 때문에 왜 불평을 하느냐고” 거기서 목사님이 깨어집니다.

어눌하게 성경을 읽기 시작하여 두 주일에 성경을 한 번씩 읽어내니까 1년에 25번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 읽는 어느 날, 갑자기 뇌 경이 마치 전기 스파크가 팍! 팍! 일어나듯이 온 뇌를 흔들더니만 기억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잃어버렸던 모든 언어가 회복되었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옛날에 암송해 두었던 성경구절이 다 회복이 되어 생각이 났습니다. 교인들은 행복했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예배당이 건축되었습니다. 쓰러질 때 교인 수가 1,500명이었는데, 3년 동안 교인 수가 불어나지 않았습니다. 강단에 선 목사님이 3년 동안 교회가 침체되었으니 오늘부터 하나님, 3년 만에 교회가 배가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정말로 출석교인 3,000명으로 부흥시켜 주셨습니다.

당시 예배당 좌석 수가 600석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설교를 다섯 번, 여섯 번 하니 장로님들이 목사님 설교 한 번만 하시라고 했더니 목사가 설교를 해야지 하면서 계속하니까 장로님들이 놀라운 결정을 합니다.

“우리 목사님 살리려면 여섯 번 설교할 것이 아니라 한번만 설교하게 하자. 그러려면 3,000명 들어가는 예배당을 짓자.”

그렇게 해서 세운 성전이 지금 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목사로 하여금 설교 한 번 하게 하기 위하여 시작한 성전이 잘 지어져 3,000석 좌석의 예배당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다가 2005년 2월 13일, 미국 남가주 안디옥 교회에서 집회 인도하시다가 마지막 부분에 성도들 얼굴도 보이지 아니하는 희미해져 가는 가운데, 마지막 설교를 끝내고 강단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열흘 후에 23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이게 단순히 어느 잘된 교회의 이야기, 쓰러진 목사님께 잘해라! 이런 이야기로 들리시나요? 이제는 싸우는 교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런 훈훈한 교회의 이야기가 들려야 합니다. 교회가 축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경험이 서로 섬기게 하여 줍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이 이런 일들을 경험하고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본을 보아야 배우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본을 보여줘야 세상이 배우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배운 것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Nachfolge”라는 독일어의 단어입니다. ‘제자’란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섬김을 받았기에 우리도 섬길 수 있습니다.

[고통이라는 선물]이라는 책을 쓴 폴 브랜드는 나병 환자를 치료하는 전문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생을 나병환자를 위해 살아온 분이었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나병환자를 치료하는 전문의가 된 것이죠.
그는 사람들에게 나병환자와 접촉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을 설득했고, 많은 사람이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참여하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자리에 들게 되었습니다.
순간 자신의 한쪽 발에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폴 브랜드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바늘을 가지고 찔러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는 나병을 치료하다가 나병 환자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바늘로 발뒤꿈치를 찔러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통으로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너무 피곤해서 잠시 마비현상이 왔던 것 같았습니다.
그는 그 순간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하나님, 고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폴 브랜드가 감사했던 것은 나병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나병환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들이 왜 자신들의 신체 일부분을 뜨거운 불에 넣는지, 신체 일부를 칼로 자르려고 하는지를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폴 브랜드는 일평생 나병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에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을 잘 섬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본을 보여주셨는지 이해가 가십니까?
그래야 제자들이 섬기는 자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으십니까?
이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고 싶으십니까?
이런 섬김의 본이 경험되고 반복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선한 영향력이 나를 통해 이 세상에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07-07-2024(주일)
암송성구 #. 7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악에게 지지 말고
- '
악에게 진다'는 것은 원수의 악한 행위로 번민하거나 원수에 대해 악으로 갚으려고 악한 행위를 계획하는 것이다.
즉 원수의 악한 행위로 인해 선한 상태를 떠난 것을 의미한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 이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삶으로 곧 선행 구절에서 말한 겸손(3, 16절), 봉사(6-8절), 평화를 유지하는 것(18절)을 가리킨다.
또한 20절의 원수에게도 친절을 베푸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는 현재 삶에서 승리하는 생활을 말한다.
이 승리는 자신의 노력, 열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는 믿음과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의 힘으로 이뤄진다.

* 악(256)

* 선(18)

* 이기라(3528)


06-30-2024(주일)
암송성구 #. 6 고린도전서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Yet when I preach the gospel, I cannot boast, for I am compelled to preach. Woe to me if I do not preach the gospel!

06-23-2024(주일)
암송성구 #. 5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having a form of godliness but denying its power. Have nothing to do with them.


06-16-2024(주일)
암송성구 #. 4 고린도후서 5:9-10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So we make it our goal to please him, whether we are at home in the body or away from it.
For we must all appear before the judgment seat of Christ, that each one may receive what is due him for the things done while in the body, whether good or bad.


06-09-2024(주일)
암송성구 #. 3 에베소서 4:4-6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게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There is one body and one Spirit--just as you were called to one hope when you were called--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one God and Father of all, who is over all and through all and in all.




06-02-2024(주일)
암송성구 #. 2 사도행전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Salvation is found in no one else,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to men by which we must be saved.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암송 송구 설교 자료

05-26-2024(주일)
암송성구 #. 1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 본 구절은 17세기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논쟁의 주요 쟁점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본절을 두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 구원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의 보편 구원론적 해석은 타당치 않다.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해 예비되었지만 그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만 구원을 얻는다(Earle).
그래서 칼빈(Calvin)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사실은 '구원을 받으며'의 헬라어 '소데나이'(*)가 수동형으로서 구원의 주체는 오직 '우리구주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일 때 구원을 얻는다는 점을 시사한다는 것에서 지지를 받는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본절을 통해 어떤 계층이나 종족의 특성 때문에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지는 않음을 말하는 것이지 개별적으로 모든 인간이 구원받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Lenski).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진리에 대한 지식은 구원의 뿌리요, 열매이다.
이러한 지식은 인간의 자의적(自意的)인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획득된다(마 16:17; 딤후 2:25).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겔 33:11)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마태복음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디모데후서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에스겔 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와 칼빈주의(Calvinism)의 비교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는 예정론, 자유 의지, 하나님 주권의 본질과 같은 교리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개신교 내의 두 가지 신학 체계입니다. 칼빈주의는 16세기 프랑스 신학자이자 개혁가인 존 칼빈(John Calvin)의 신학적인 가르침을 따르는 개신교의 한 분파이고, 알미니안주의는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자 야코부스(Jacobus Arminius)의 신학사상에 기초하여 17세기 초에 시작된 개신교 운동입니다.

칼빈과 알미니우스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 둘 사이의 몇 가지 주요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정론과 선택론

칼빈주의는 무조건적인 선택을 주장합니다. 즉, 하나님은 창세 전에 구원을 위해 특정한 개인을 선택하셨으며, 이는 그들이 행할 어떤 일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근거하여 선택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알미니안주의는 조건부 선택을 고수합니다. 즉, 하나님의 선택은 누가 자유롭게 그분을 믿기로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은혜에 응답할 사람을 미리 아시고 그들을 선택하십니다.

2. 속죄의 범위

칼빈주의는 제한 속죄를 가르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속죄 희생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선택하신 자들, 즉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알미니안주의는 무제한 속죄를 옹호하며, 그리스도의 희생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며 누구든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3. 구원

칼빈주의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은혜는 택하신 자들에게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하나님께서 먼저 허락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알미니안주의는 저항할 수 있는 은혜 사상을 지지하며,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죄가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4. 성도의 인내

칼빈주의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도 알려진 성도의 견인 교리를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선택하시고 거듭나게 하신 사람들은 믿음을 견지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알미니안주의는 배도의 가능성을 주장하며, 신자들이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함으로써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구원은 지속적인 믿음과 순종을 조건으로 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상은 단순화된 설명이며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내에서도 다양한 해석들이 있습니다. 둘 다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의 신비를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차이


알미니안주의 : 칼빈주의

1. Sinner, Can do good & respond to God.
죄인은 선을 행하고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습니다.

Sinner, Can do good & respond to God.
God elects on basis of foreseen faith.
Christ died for all.
Man can resist God.
Believer may lose.

죄인은 선을 행하고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견된 믿음에 기초하여 선택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잃을 수도 있습니다.

Man unable of self to respond to God.
God elects according to His good pleasure.
Christ died for elect.
Irresistible election.
Elect can never lose.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응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기쁘신 뜻에 따라 선택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선택된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선택.
선택된 사람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질문 /

칼빈주의 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견해가 옳은가?

답변 /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계를 설명해 보려는 두 가지 신학 체계입니다.
칼뱅주의는 프랑스 신학자 존 칼뱅(1509-1564)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고, 알미니안주의는 네델란드 신학자 야코뷔스 아르미누스(1560-1609)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두 체계는 다섯 가지 핵심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칼뱅주의는 인간의 완전한 타락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부분적 타락

완전한 타락을 고수하는 칼뱅주의 교리는 인간의 모든 면이 죄로 말미암아 부패되어 사람은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부분적인 타락을 말하는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모든 면이 죄에 오염되어 있지만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정도까지 오염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타락의 정도와 의미는 알미니안주의 진영 내에서도 논쟁이 되고 있지만) 고전적 알미니안주의는 부분적인 부패를 거부하고 칼뱅주의의 “전적 타락”과 매우 유사한 견해를 고수한다는 사실입니다.
대체적으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완전한 타락과 구원 사이에 어떤 ‘중간’ 상태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죄인들이 선행적 은총에 의해 그리스도께 이끌리는 것이 가능하며, 또한 하나님이 주신 능력에 의해 구원을 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칼뱅주의는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적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선택은 조건적

무조건적인 선택은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타고난 어떠한 가치와는 상관없이 자신만의 전적인 뜻에 근거하여 구원할 사람들을 택하신다는 견해입니다.
반면에 조건적 선택은 누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를지 미리 아심으로 그 예지에 근거해서 구원 받을 사람을 택하신다고 말합니다.

칼뱅주의는 속죄를 제한적이라고 보지만 알미니안주의는 무제한적이라고 봅니다.
이 점이 다섯 가지 쟁점 중에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입니다.

제한적 속죄는 예수께서 오직 택자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믿습니다.
무제한적 속죄는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나 사람이 믿음으로 그분을 영접하기 전까지는 그분의 죽음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칼뱅주의는 하나님의 은혜는 거부될 수 없다
알미니안주의는 개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

거부될 수 없는 은혜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부르시면, 그 사람은 필연적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거부할 수 있는 은혜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부르시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부름을 반대하고 거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칼뱅주의는 성도의 견인
알미니안주의는 조건적 구원

성도의 견인이란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은 사람은 믿음 안에서 인내하며 영원토록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그분으로부터 돌아서지 않는다는 개념을 말합니다.
조건적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도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리스도로부터 돌아설 수 있고 따라서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견해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많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조건적인 구원”을 부인하고 그 대신에 “영원한 보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의 논쟁 가운데 누가 옳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의 다양성 안에서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혼합된 온갖 종류의 견해들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다섯 가지 칼뱅주의 핵심을 전부 고수하는 칼뱅주의자들이 있고 다섯 가지 알미니안주의를 고수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 가지 핵심만 고수하는 칼뱅주의자들도 있고 두 가지 핵심만 고수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도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 두 견해가 혼합된 유형에 동조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입장은 두 체계 모두가 각각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러한 개념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주권적이며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인간은 구원을 얻기 위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결정을 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이 두 사실은 우리에게 모순되어 보일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는 완벽하게 이치에 맞습니다.


Calvinism vs. Arminianism - which view is corr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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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wer


Calvinism and Arminianism are two systems of theology that attempt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God’s sovereignty and man’s responsibility in the matter of salvation. Calvinism is named for John Calvin, a French theologian who lived from 1509-1564. Arminianism is named for Jacobus Arminius, a Dutch theologian who lived from 1560-1609.


Both systems can be summarized with five points. Calvinism holds to the total depravity of man while Arminianism holds to partial depravity. Calvinism’s doctrine of total depravity states that every aspect of humanity is corrupted by sin; therefore, human beings are unable to come to God on their own accord. Partial depravity states that every aspect of humanity is tainted by sin, but not to the extent that human beings are unable to place faith in God of their own accord. Note: classical Arminianism rejects “partial depravity” and holds a view very close to Calvinistic “total depravity” (although the extent and meaning of that depravity are debated in Arminian circles). In general, Arminians believe there is an “intermediate” state between total depravity and salvation. In this state, made possible by prevenient grace, the sinner is being drawn to Christ and has the God-given ability to choose salvation.

Calvinism includes the belief that election is unconditional, while Arminianism believes in conditional election. Unconditional election is the view that God elects individuals to salvation based entirely on His will, not on anything inherently worthy in the individual or on any act performed by the individual. Conditional election states that God elects individuals to salvation based on His foreknowledge of who will believe in Christ unto salvation, thereby on the condition that the individual chooses God.

Calvinism sees the atonement as limited, while Arminianism sees it as unlimited. This is likely the most controversial of the five points. Limited atonement is the belief that Jesus only died for the elect. Unlimited atonement is the belief that Jesus died for all, but that His death is not effectual until a person receives Him by faith.

Calvinism includes the belief that God’s grace is irresistible, while Arminianism says that an individual can resist the grace of God. Irresistible grace argues that when God calls a person to salvation, that person will inevitably come to salvation. Resistible grace states that God calls all to salvation, but that many people resist and reject this call.

Calvinism holds to perseverance of the saints while Arminianism holds to conditional salvation. Perseverance of the saints refers to the concept that a person who is elected by God will persevere in faith and will not permanently deny Christ or turn away from Him. Conditional salvation is the view that a believer in Christ can, of his/her own free will, turn away from Christ and thereby lose salvation. Note: many Arminians deny "conditional salvation" and instead hold to "eternal security."

So, in the Calvinism vs. Arminianism debate, who is correct? It is interesting that in the diversity of the body of Christ, there are all sorts of mixtures of Calvinism and Arminianism. There are five-point Calvinists and five-point Arminians and three-point Calvinists and two-point Arminians. Many believers arrive at some sort of mixture of the two views. Ultimately, it is our opinion that both systems fail in that they attempt to explain the unexplainable. Human beings are incapable of fully grasping a concept such as this. Yes, God is absolutely sovereign and knows all. Yes, human beings are called to make a genuine decision to place faith in Christ unto salvation. These two facts seem contradictory to us, but in the mind of God they make perfect s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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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 -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비교

알미나안주의의 탄생 배경은 네덜란드 정부가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쿠른헤르트(Coornhert)에 대항하기 위해서 아르미니우스를 시켜 쿠른헤르트의 신학사상을 반론하라 한 것에 기인합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는 오히려 쿠른헤르트의 신학사상에 동조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아르미니우스와 고마르 사이에 신학논쟁이 있었는데, 논쟁의 내용은 '타락 전 예정론'과 '타락 후 예정론'이었습니다.

1608년 아르미니우스 사후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신학사상을 더욱 체계화하여 발전시켰고 마침내 40여명의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은 종교적 관용을 강조하는 네덜란드의 정치인 올덴바르네벨트의 요구에 따라 Remonstrance(항의서)라 불리는 신앙성명을 작성하였으며, 이에 대한 도르트회의(1619년)의 신학적 응답이 바로 칼빈주의의 5대 강령입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그 내용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분       칼빈주의                     알미니안주의

인성      전적 타락                  자유의지 인정
예정    무조건 예정                예지하여 예정
속죄    제한된 선택 구원       무한 선택 구원
은총    불가항적 은총               가항적 은총
성도  성도의 견인(보호)       성도 보호 불확실

결국 1618년 11월 13일-1619년 5월 9일까지 도르트회의가 열려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 승리하여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편 알미니안주의는 네덜란드를 벗어나 영국교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유니테리언주의와 침례교,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논쟁은 5세기경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을 연상시킬 정도로 17세기 초를 뜨겁게 달구었던 개신교 역사상 가장 거대한 신학 논쟁의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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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주일 설교 / 암송 성구를 중심으로

1월 7일(주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1월 14일(주일)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만(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시편 33:12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Blessed is the nation whose God is the LORD, the people he chose for his inheritance.

시편 144:15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Blessed are the people of whom this is true; blessed are the people whose God is the LORD.


사도행전 20:24
나의 달려갈 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However, I consider my life worth nothing to me, if only I may finish the race and complete the task the Lord Jesus has given me--the task of testifying to the gospel of God's grace.


고린도전서 3:16-17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Don't you know that you yourselves are God's temple and that God's Spirit lives in you?
If anyone destroys God's temple, God will destroy him; for God's temple is sacred, and you are that temple.

고린도전서 6:19-20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광을 돌리라.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y is a temple of the Holy Spirit, who is in you, whom you have received from God? You are not your own;
you were bought at a price. Therefore honor God with your body.

고린도후서 13:13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May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God, and the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be with you all.

신명기 7:6-7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For you are a people holy to the LORD your God. The LORD your God has chosen you out of all the peoples on the face of the earth to be his people, his treasured possession.
The LORD did not set his affection on you and choose you because you were more numerous than other peoples, for you were the fewest of all peoples.
































































‘독생자’에 대한 바른 쓰기와 의미는 무엇인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언제 태어나서 얼마 동안 살다가 어느 시점에 죽는다. 즉 인간의 출생과 생존과 사망 이 세 가지는 인생의 불가피한 사실이거니와, 그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말할 것도 없이 출생이다. 왜냐하면 생존과 사망은 또한 출생의 상황 계속이요, 그 결과와 마침이기 때문이다. 동양 역학(易學)에서 보면 인간의 삶(생존)과 죽음 등이 사주 팔자 (四柱 八字) 즉 출생의 년, 월, 일, 시에 좌우된다고 하는 것만 보아도 출생의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출생은 모두가 부모의 결혼(남녀 양성의 결합)에 의한 결과이거니와, 단 한 번의 예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이다. 성탄은 그 역사적인 사실로서도, 그 의미에 있어서도 유일 무이(唯一 無二)한 사건이며, 그것을 나타내는 어휘에 있어서도 독특하다. 역사적인 사실로서 유일무이하다는 것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어머니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신 사실을 가리키며, 그 의미에 있어 독특하다고 하는 것은 성육신 즉 본질상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요한복음에서의 태초의 ‘로고스’)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요 1:14), 따라서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마 1:18-23)이라는 사실이다. 흔히 인류 역사상 특출한 위인이나 성현의 전기에서는 그들의 출생에 얽힌 전설로 큰 별이 나타나고 하늘로부터 무슨 음성이 들렸다는 등의 기록이 있으나, 그것은 거의가 전설에 그칠 뿐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에 관해서는 복음서에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로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는 그것을 나타내는 어휘 자체부터 독특성을 가진다. 즉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만 ‘성탄’(聖誕)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성’(聖) 자를 붙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사항에 적용되는 것 중의 한 가지일 뿐이다. 예를 들면, 성일(聖日), 성전(聖殿), 성회(聖會), 성민(聖民), 성경(聖經), 성서(聖書), 성구(聖句), 성직(聖職), 성당(聖堂), 성물(聖物), 성수(聖水), 성가(聖歌), 성부(聖父), 성모(聖母), 성자(聖子), 성녀(聖女), 성도(聖徒), 성도(聖都), 성전(聖典) 성전(聖戰), 성례, 성묘(聖廟) 성빈(聖貧) 성소(聖所), 성소(聖召), 성시(聖屍), 성야(聖夜), 성언(聖言), 성업(聖業), 성역(聖域), 성지(聖地), 성찬(聖餐), 성체(聖體), 성품(聖品), 성화(聖畵), 성호(聖號), 등 많이 있다.

‘독생자’에 대한 원어(헬라어)는 ho monogenes huios 로서, 신약성경 요 1:14, 18; 3:16, 18등 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독특한 관계를 나타내는 어휘이다. 이 어휘는 구약에 그 배경을 두고 있는 바, 곧 시편 2:7의 “너는 내 아들이라 ... ”라는 문구에 기초해 있다고 본다. 유대교에서는 이 문구를 하나님과 메시야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데,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ho monogenes huios 는 여기에 사상적인 유래를 가지는 것으로 본다.

그러면 이 어휘의 핵심부분인 monogenes 란 낱말의 뜻은 무엇인가? 이 말은 고전 헬라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데, 그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독특한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서 특별히 쓰인 어휘임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이 낱말을 어원적으로 풀어보면 monogenes 는 monos(유일한) 와 genos(종류) 의 합성어로서 흔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출생을 뜻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유래(derivation)을 뜻하는 말이다. 먼저 genos 라는 말에는 1) 후손, 2) 가족 또는 친족, 3) 민족, 백성, 4) 종류(kind, class) 등의 뜻이 있는데, 이 중 monogenes 의 어원으로서는 넷째 것이라 이해된다. 다음, mono- 는 어떤 유래의 성격 (the nature of derivation) 을 뜻하는 말로서, 결국 monogenes 의 중요한 뜻은 유일성(only) 과 독특성(unique) 을 나타내는 데 있다.

신약에서 monogenes 는 두 가지 용법으로 쓰인다. 하나는 신성(divinity) 에 관련해 쓰이는 것으로,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요 1:14, 18, 3:16, 18, 요일 4:9). 다른 하나는 인성(humanity) 에 관련해 쓰이는 것으로서, 이 경우는 형제자매 없는 유일한 자손(sole descendant) 이란 뜻이며, 신약의 용례로는 눅 7:12의 나인성 과부의 아들, 눅 8:42의 야이로의 딸, 눅 9:38의 간질병 든 아이, 히 11:17의 이삭에 관하여 쓰이고 있다. 이제 이 낱말의 전자의 용법을 그것과 유사한 개념을 가진 다른 낱말과 비교해 본다.

1) 바울서신 히브리서 요한계시록 등에서 그리스도의 신분에 관하여 요한복음의 monogenes 에 대응되는 낱말은 prototokos (first born, 처음 난 자)로서, 롬 8:29, 히 1:6에서는 ‘맏아들’로, 골 1:15, 18; 계 1:5에서는 ‘먼저 나신 자’로, 히 11:28, 12:23에서는 ‘장자’로 번역되었는데(개역본), 이 말은 요한복음에서의 monogenes 와 뜻에 있어 다소간 차이가 있다. 즉 monogenes 는 그리스도(성자)가 하나님(성부)과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유일하고 독특(unique)하다는 뜻인데 대해, prototokos 는 그리스도가 우주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라는 뜻이며, 전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를 피조물과 구별할 때 강조점이 있는데 대하여, 후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가 피조물 이전의, 또는 최초의 존재라는 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2) 요한복음에서 monogenes 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tekna 라는 말과 구별된다. 이 구별은 요한복음 본문에서 분명히 보이는 바, 하나님의 자녀 (tekna tou theou, children of God) 는 어떠한 때에 그렇게 되는 데 (genesthai, become) 대해서 (요 1:12),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en arche) 유일하고 독특하게 존재했던 (en, was) 것이다(요 1:1, 2). 따라서 monogenes 는 성육신 (incarnation, 요 1:14)의 범주 안에서 이해될 것이 아니고 그의 존재의 영원성(nature of eternal being, 요 1:1, 2)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요한의 ho monogenes huios 는 공관복음에서의 ho huios mou ho agapetos (나의 사랑하는 아들) 와, 하나님의 유일하신 메시야적인 아들이라는 점에서 의미상 관련된다. (마 3:17, 17:5, 막 1:11, 9:7, 눅 3:22). 다만 전자가 요한의 증언인 데 대해서 후자는 하나님 자신의 선언이라는 데 서술상의 차이가 있다 (단 요 3:16이 요한의 증언이냐 예수 자신의 말씀이냐에 대해서는 학자 간에 논란이 있다).

이상과 같은 독특한 의미를 가진 monogenes 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origin)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독생자’(獨生子; 오직 한 분으로 출생한 아들, the only begotten Son)라고 한다. 따라서 ho monogenes huios 는 단지 ho huios tou theou 의 특별한 표현양식의 하나라고 본다. 그리고 monogenes 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출생을 뜻하는 것은 요한일서 5:18에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 (ho gennetheis ek tou theou) 에 비추어 이해된다고 본다.

그러나 요일 5:18의 gennetheis 가 gennao (낳는다)에 유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 3:16의 monogennes 는 gennao 와 결합한 형이 아니기 때문에 어원적으로 보면 ‘독생자’로 번역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우리말 번역에서의 ‘독생자’는 영어역 King James Version 의 the only (독) begotten (생) Son (자) 의 직역이고, 중국어역 ‘獨生子’와는 문자적으로 일치하는데, 우리말 번역은 영어역이나 중국어역 성경으로부터의 중역(重譯)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 낱말의 의미에 대해서 성경사전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은 King James Version 의 ‘the only begotten Son’ 이 헬라어 ‘monogenes’ 에 대한 오역이라고 분명히 지적한다(Vol. III. 604면 참조). ‘독생’(獨生)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monogenes’가 아니라 ‘monogennetos’(monos+genao)이다. King James Version(1611년) 은 라틴어의 권위본인 Vulgata의 영향으로 요 3:16, 18의 ‘unicus’(유일한)을 ‘unigenitus’(독생한)로 바꾼 것이다. 그러나 King James Version 이후의 영어성경에서는 ‘begotten’(생)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대개가 ‘the only Son 만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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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테 호 예수스 에이펜 토이스 마데타이스 아우투 에이 티스 델레이 오피소 무 엘데인
아파르네사스도 헤아우톤 카이 아라토 톤 스타우론 아우투 카이 아콜루데이토 모이




마태복음 16:2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자부(自不) 자십(自十)  :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어려서 숨바꼭질 놀이를 할 때 "여기 없다!" 하고 소리친다.
내가 여기 있으면서도 내가 여기 없다고 외치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표현이다.
숨어야 하는 놀이를 하면서도 인간은 철이 없을 때부터 나를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에 익숙한 성인이 되면 무슨 일에든지 자기를 드러내야만 마음이 편하다.
이런 나를 없다고 하려면 철저하게 나를 낮춰야 한다.
내가 낮아져서 뭇 사람들에게 짓밟힐지라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그 아픔을 몸으로 받으드릴 수 있을 때 자기 부인이 가능하다.

유명한 일화를 생각해 봅시다.
길선주목사가 평양의 난봉군으로 살아오던 중 미국 선교사의 전도지를 받고 회개한 후에 옛날 같으면 너는 벌써 죽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 있는 길선주는 그 옛날의 길선주가 아니다.

자기 십자가

나의 십자가는 무엇일까?
우선은 내가 나를 부인하는 것을 바르게 감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먼저 나를 부인한 후에 비로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자기 부인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십자가를 얹어주면 당장 튀어오를 것이 분명하다.
왜 내게 이런 무거운 짐을 주느냐?
그런데 죽은 사람위에 아무리 무거운 바위를 올려놓아도 죽은 사람은 그 무게를 느낄 수 없다.
나의 십자가는 먼저 내가 죽는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 자기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다.
예수 십자가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죽음이 없는 십자가는 장식품이 될 것이다.

호주머니 속의 십자가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짤막한 영문으로 출판된 소책자를 기억합니다.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멋으로 생각한다.
얼마나 멋이 있으면 목걸이, 반지, 금뱃지 등으로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그런데 십자가는 결코 멋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너무 고통스럽고 무겁고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를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아직도 온전하게 나의 십자가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 여기서 '따른다'는 것은 스숭의 삶과 가르침에 온전히 순복하는 참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참된 제자의 요건을 전제한 것은 당신의 임박한 수난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그와 유사한 수난과 고초를 당하게 될 것을 익히 아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 당신을 따르기에는 너무 미흡한 제자들에게 당신을 전적으로 순종하며 수난당할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힘주어 가르치셨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를 따르는 데는 내적으로는 자기 부인과 외적으로는 역경 가운데서의 적극적 순종이 수반되어야 한다.

󰃨 자기를 부인하고 - 이는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요구되는 소극적 측면으로서 자기의 이기적 욕망과 생각과 주장, 그리고 부패한 옛자아, 옛사람을 철두철미 굴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사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육신(*, 사르크스)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죄인됨 인간 그 자체(롬 7:14,18)가 됨으로써 그의 이성, 감정, 의지 등이 완전히 부패되었다(참조, 렘 17:9;롬 1:18-32). 바로 이러한 본성적 존재로서는 예수의 제자로 결코 따라 나설 수 없다. 한편 이러한 제자의 요건을 망각(妄却)했던 베드로는 훗날 자기를 부인하는 대신 예수를 부인하고야 만다.

󰃨 자기 십자가 -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살던 팔레스틴의 유대인이라면 십자가 형벌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야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27:32) 더불어 유다의 대반란으로 인해 수많은 십자가 형틀을 목격해야 했던 그들로서는(Josephus, 행 5:37) 죽음의 짐이요,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를 메라는 참의미가 무엇인지를 뼈 속 깊이 이해했을 것이다(10:38). 한편 예수께서 친히 골고다 험한 언덕에서 이 십자가 형을 당하신 이후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엄숙한 제자로서의 결단의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신 일은 인류 구속의 대업을 완성하시는 유일, 단회적인 행위였으나 제자들의 십자가 짐은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 생겨나는 다양하고도 지속적인 행위일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제자들은 각자의 십자가를 거룩한 기쁨과, 무한한 감격과 감사로, 그리고 가장 가치있는 일로 받아들이며 끝까지 지고 예수의 발자취를 좇아가야 할 것이다(빌 3:12-14).

󰃨 좇을 것이니라(*, 아코루데이토) - 시제는 현재 명령형으 로서 한두 번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좇아오라는 강한 명령이다. 실로 주의 제자된 자는 억지로, 이따금씩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심전력으로 부단한 노력과 헌신을 통해 계속 좇아가야만 한다.




자기 부정

 

저가 집회 할때에 사람들이 은혜를 받을 때면 때때로 성령의 임재(臨在)를 느낍니다. 제 자신의 부족한 설교의 톤에도 대단한 확신으로 가득 차며 듣는 교인들도 지나칠 정도로 집중하여 듣고 은혜로 감동한 표정들로 진지해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집회 후 집에 돌아와서도 받은 감동과 인상은 한 동안 여운으로 가동으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 때 마음의 다른 쪽에서부터 자신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자부심과 자긍심이 갑자기 생기며 자신이 마치 설교에 대단한 능력을 가진 목회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 때 황홀할 정도로 재 자신을 다시 보게 됩니다. 자신감과 확신 그리고 이에 따라 동반하는 기쁨이 제 자신을 사로잡으려 합니다. 순간적으로 이런 것들 속에 감추어진 영적 위험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황급하게 나의 능력과 자부심과 자긍심을 부인하고 모든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나옴을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온전히 말씀가운데 행하시는 은혜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열정으로, 하나님의 열심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이 집회에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거짓 확신과 자긍심을 부정하며 집회를 끝날때마다 물리쳐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며 그리고 병자들을 고쳤다(마4:23-25절). 이렇게 예수님은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자신을 감추었다. 자신을 밝히려는 귀신을 막고 잠잠하라고 명했다(막1:24-25절). 그리고 이적들을 행한 후에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고 성전의 제사장을 찾아가 받은 은혜를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요구했다(마8:4절). 왜 자신을 알리지 말라고 요구하였을까?

 

성경을 보면 헤롯에 대한 기사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화려한 옷을 입고 두로와 시돈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들은 청중들은 신의 소리라고 말하며 그를 높였습니다.
헤롯은 이 연설에 자부심과 자긍심으로 충만하였습니다.
헤롯은 모든 영광을 자신이 취하고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주의 사자의 침을 받아 갑자기 죽었습니다(행 12:20-23).

우리는 이러한 거짓에 사로잡히는 영적 체험이 목회 성공에 엄청난 위험으로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설교를 잘하는 목회자일수록 이러한 유혹에 쉽게 빠지기 쉽습니다.
아무리 경건한 목회자라도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대신 자신을 높이며 사단이 주는 시험과 유혹에 얼마든지 떨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외형적인 결과를 보면서 목회자도 자신의 능력으로 이 모든 결과가 나온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며 자긍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함으로 서서히 파멸에 이르는 잘못된 시험에 자신도 모르게 빠질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에서 느브갓네살 왕은 자신의 엄청난 왕국을 바라보며 자긍심에 빠졌습니다.
자신이 위대하여 위대한 제국을 세웠다고 생각하며 우월감과 교만에 빠졌습니다(단 4:30-31).
이런 일은 역사상 대제국을 세운 모든 왕들과 황제들에 그대로 반복되었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은 느브갓네살에게 꿈과 이상을 주어 그가 무력한 자이며 모든 일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작정되고 진행됨을 깨닫게 했습니다(34-35).

성공과 형통을 열망하며 지독히 노력하는 자의 소원대로 성공을 하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성공과 형통을 관리할 수 있는 신앙적 그리고 정신적 성숙이 그에게 없다면 성공과 형통이 오히려 파멸의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낙원으로 이끌려 올라가 그곳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계시들을 들은 사도 바울에게 고쳐지지 않는 가시를 하나님이 허락한 것은 축복 자체입니다(고후12:1-9절). 그러므로 구원 받고 난 이후에도 우리에게 짊어져야 할 멍에는 반드시 필요합니다(마11:29-30절). 이것이 없으면 우린 은혜를 받은 후 교만해지며 스스로 파멸의 길로 걸어갈 것입니다.

우린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거룩한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파멸에 이르는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존재임을 다시 한번 더 깨닫습니다. 예수님과 3년 넘게 함께 한 제자들도 이런 유혹에 빠졌는데(마 16:23)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하나님께로 간다는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믿으면서도 타락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지만 눈에 안 보이기에 쉽게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2025 새벽 묵상 / 창세기


창세기 장별 요약

창세기 개요

구약의 첫 성경이자 모세 오경의 시작인 창세기를 장별 요약한 것입니다. 창세기는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시하며 권위있게 생각하는 모세 오경에 속하며 ‘토라’로 불리는 성경입니다. 창세기를 읽을 때는 연대기적으로 읽어서는 안 되며 출애굽으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즉 출애굽의 이유와 목적, 기원을 조명하기 위해 창세기가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후에 창세기 개론에서 좀 더 깊이 다루고 오늘은 창세기를 간략하게 장별로 요약하도록 합니다. 각장 강해가 완성되면 제목 아래에 강해 링크가 추가됩니다.

창세기 구조

창세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아브라함의 이전의 시대로 창조와 타락, 노아의 홍수와바벨탑 사건까지를 다룹니다. 12장부터 50장까지는 족장 시대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요셉의 생애까지 다룹니다. 더 세분화 할 수는 있지만 여기서는 이 정도로 넘어갑니다.

  • 1-11장 창조에서 바벨탑까지
  • 12-50장 족장 시대

창세기 장별 요약

창세기 1장 요약

  •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다.

하나님께서 육일동안 천지를 창조하신다. 첫날에 빛을, 둘째 날에는 궁창을, 셋째 날은 땅을, 넷째 날은 광명체를, 다섯째 날은 새와 물고기를, 여섯째 날은 땅 위에 거하는 동물과 사람을 창조하신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어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신다.

창세기 2장 요약

  • 창조 7일째 안식하시고,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 여자를 만드신다.

창조 7일째 안식함으로 창조가 완성된다. 7일째 되는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신다. 사람의 창조 내력이 소개된다. 아담을 먼저 창조하셨고,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창조하신다. 아담에게 모든 나무의 실과는 임의대로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금하신다.

창세기 3장 요약

  • 3장은 뱀의 유혹으로 사람이 타락한다.

하나님이 만드시 가장 간교한(지혜로운) 동물인 뱀이 하와를 유혹하여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도록 한다. 하와는 자신도 먹고 같이 있던 남편에게도 준다. 결국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다. 뱀은 평생 기어 다니고, 여자는 남자의 지배를 받으면 아이를 낳은 고통을 더한다. 남자는 땅이 저주 받아 일한대로 얻지 못하게 된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란 예언을 하시고 그들을 동산에서 쫓아 내신다.

  • 창세기 3장 강해

창세기 4장 요약

  • 아담과 하와의 첫 아들인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인한다.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가인과 아벨을 낳는다. 가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양을 친다. 어느날 둘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사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는다. 시기한 가인은 아벨을 들로 불러내어 그를 돌로 쳐 죽인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땅에서 유리하는 저주를 내린다. 하지만 가인은 유리하기를 거절하고 놋(유리하다) 땅에 아들 에녹의 이름으로 성을 짓고 산다. 아담의 후손들이 번창한다. 그 중에 라멕은 두 아내를 두고 많은 사람을 살인한 것을 자랑한다. 아담과 하와가 다시 동침하여 셋을 낳는다. 셋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

창세기 5장 요약

  • 아담부터 노아까지의 족보가 소개된다.

아담부터 시작하여 노아까지 이어지는 족보가 소개된다. 족보는 태어나고 낳고 살다가 죽는다는 규칙으로 되었다. 에녹만이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다. 마지막으로 노아가 소개되고, 노아의 죽음은 9장 28-29절로 이어진다. 5장의 족보 안에 6-9장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창세기 6장 요약

  • 사람들이 번성하지만 악을 행하자 홍수로 심판할 계획을 세우시고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명령하신다.

사람들이 번성하며 악을 행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여 타락한다.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여 그들을 심판하시려 한다.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명령하신다. 노아에게 방주를 어떻게 지을 것인지를 설명하신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대로 행한다.

창세기 7장 요약

  • 방주가 완성되고 노아의 가족이 방주로 들어가자 홍수가 시작된다.

방주가 완성되자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로 들어가라 하신다. 정결한 짐승 7쌍과 부정한 짐승 한쌍이 함께 방주 안으로 들어간다. 방주의 문이 닫히고 칠일 후에 40일 동안 홍수가 일어난다. 홍수로 물이 불어나고 땅에 있던 코로 호흡하는 짐승들과 사람들이 모두 죽는다. 비가 오는 동안 노아는 방주에 계속 거한다.

창세기 8장 요약

  • 홍수가 그치자 노아는 까마귀로 비둘기를 통해 사정을 알아본다. 방주에서 내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드디어 홍수가 그친다. 방주는 아라랏산에 머문다. 홍수 후 열째 달 초하루에 산 봉우리들이 보인다. 사십 일이 지나 까마귀를 내 보내고, 이후에 비둘기를 내 보낸다. 비둘기가 감람잎을 물로 들어온다. 육백일 년 둘째 달 27일에 방주에서 나온다. 노아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한다.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 인류를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창세기 9장 요약

  • 하나님은 노아와 무지개 언약을 맺으신다. 노아는 포도주 농사를 짓는다.

하나님은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가족들에게 다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1절) 축복하신다. 고기를 먹 되 피째 먹지 말라 하신다. 무지개를 통해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야속하신다. 노아는 땅에 내려와 포도주 농사를 짓는다. 포도주를 마시고 옷을 벗고 누운 모습을 함이 발견한다. 셈과 야벳이 가려 준다. 노아는 함의 행동을 알게 되어 그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한다. 노아는 홍수 후 350년을 살고 950세에 죽는다.

창세기 10장 요약

  • 야벳, 함, 셈의 족보가 소개된다.

홍수 이후 세 아들의 후손들이 소개된다. 야벳의 후손들은 고멜, 마곡, 마대, 야완, 두발, 메섹, 디라스다. 함의 아들은 구스, 마스라임, 붓과 가나안이다. 셈의 아드은 엘람, 앗수르, 아르박삿, 룻, 아람이다. 이들에게서 많은 족속으로 갈리고 후손들이 일어난다.

창세기 11장 요약

  • 사람들이 동방으로 가다 시날 평지에 머물며 바벨탑을 쌓는다. 하나님이 내려와 그들을 흩으신다.

11장은 창조시대의 마지막 장이다 족장 시대로 넘어가는 관문이다. 노아의 후손들이 번성하여 일부의 사람들이 동방으로 옮겨 간다. 시날 평지를 만나 그곳에서 도시를 건설한다. 그들은 성을 쌓으면서 하늘 꼭대기까지 쌓자고 한다. 하나님이 보시고 강림하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흩으신다.

창세기 12장 요약

  •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소명을 주신다. 아브람은 말씀을 쫓아간다.

12장은 족장 시대가 시작되는 첫 장이다. 바벨탑 공동체 안에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언약하신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순종한다. 하지만 가나안에 기근이 일어나 애굽으로 내려가고 사래를 바로에게 빼앗긴다. 하나님께서 바로 궁에 저주를 내리시고, 다시 사래를 찾아 많은 재물을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간다.

창세기 13장 요약

  • 애굽으로 돌아온 아브람과 롯은 가축이 불어나 서로 다툼이 일어나고 결국 롯은 요단들을 선택하고 아브람과 헤어진다.

애굽에서 많은 재물을 얻은 아브람과 롯은 가나안에 도착해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은 불어난 가축으로 인해 목자들이 서로 초장을 얻기 위한 다툼이 일어나고 결국 아브람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롯을 부른다. 롯에게 원하는 곳을 선택하라고 하고 자신은 그 반대로 가기로 한다. 롯은 요단들을 보니 애굽과 같고 하나님의 동산 같이 아름다워 보여 그곳으로 향한다. 안타깝게 그곳은 하나님 보시기에 큰 죄인이었다.(13절) 롯이 떠난 하나님은 아브람을 찾아와 동서남북을 보라하시고 모두 주겠다고 위로하신다. 아브람은 헤브론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는다.

창세기 14장 요약

  • 가나안에 전쟁이 일어나 그돌라오멜 연합군이 소돔에 살던 롯을 붙잡아 가자 아브람이 가서 구출한다.

롯은 아브람을 떠난 후 소돔에 살게 된다.(13:12) 그런데 하필이면 그돌라오멘 연합군이 소돔과 주변을 공격한다. 소돔에 살던 롯과 가족들이 붙잡혀 간다.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동맹한 사람들과 사병들을 이끌고 추격하여 급습한다. 롯과 그의 재물, 사람들을 구출해 데려온다. 그때 살렘(후에 예루살렘)왕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찾아와 축복한다.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다.

창세기 15장 요약

  • 전쟁 후에 두려워하던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와 햇불 언약을 맺으신다.

전쟁 후 걱정에 쌓인 아브람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찾아와 ‘두려워하지 말라 나느 ㄴ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1절)이라 말씀하신다. 아브람에게 후손을 재차 약속하신다. 아브람에게 삼년 된 암소, 암염소,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를 바치라 하신다. 밤이 깊을 때 하나님이 햇불 사이로 지나면서 언약을 맺으신다. 후손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 사백 년 후에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라 약속하신다.

창세기 16장 요약

사래는 자신이 출산하지 못하자 자신의 몸종인 애굽 사람 하갈을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다. 아브람은 하갈과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부른다. 하갈이 임신을 하자 하갈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주인 사래를 조롱한다. 화가 난 사래는 하갈을 핍박한다. 하갈은 사래를 피해 도망을 가게 되고 결국 광야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다.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하갈에게 후손이 번성할 것을 약속한 다음으로 다시 사래에게 돌아가라 명한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아이를 낳으면 ‘이스마엘'(하나님께서 들으신다)로 짓도록 한다. 하갈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 샘의 이름을 브엘라해로이라 부른다.

창세기 17장 요약

아브람의 99세에 하나님께서 나타나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바꾸러 주신다.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명한다. 할례는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행하도록 하신다. 할례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표징이 되게 하신다. 이에 아브라함은 자신과 종들, 이스마엘에게도 할례를 행한다. 이때 이스마엘의 나이는 13세(25절)였다.

창세기 18장 요약

아브라함의 집에 세 사람이 찾아온다. 그들은 천사들과 하나님이시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집 근처를 지나자 아브라함이 가서 집에 초대한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많은 음식으로 대접한다. 손님들은 아브함에게 내년 이 맘 때에 아들이 있을 것이라 말한다. 사라가 뒤에서 듣고 속으로 웃는다. 하나님이 사라가 웃었다면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말씀하신다.(14절) 두 명이 떠나고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대화한다. 소돔을 멸하는 가는 길이라 말하자 아브라함은 롯을 위해 간구한다. 결국 의인 10명이 없어 소돔을 멸망하게 된다.

창세기 19장 요약

두 천사가 소돔을 찾아간다. 롯이 성문에서 보고 나그네를 대접한다. 하지만 저녁이 되자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에 찾아가 두 사람을 내어 놓으라 한다. 롯은 자신의 딸들을 줄테니 손님에게 손대지 말라 한다. 두 천사가 소돔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롯에게 빨리 소돔성을 빠져 나라가 말하며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 경고한다. 하지만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나 소금 기둥이 된다. 소돔과 고모라 근방에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멸망당한다. 롯과 두 딸은 산의 동굴로 피신한다. 두 딸은 롯에게 술을 먹기고 동침하여 아이를 낳는다. 이들은 모암과 암몬의 조상들이 된다.

창세기 20장 요약

아브라함이 그랄에 거할 때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간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꿈이 현몽하여 사라로 인하여 죽을 것이라 경고하신다. 깜짝 놀란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불러 책망하고 사라를 놓아 준다. 아브라함에게 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냐고 묻는다. 아비멜렉은 많은 가축을 상으로 주고 아브라함을 보낸다. 아브라함이 기도하자 아비멜렉의 집에 자녀가 생긴다.

창세기 21장 요약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던해 사라가 임신하여 아들을 출생한다. 이름을 이삭(웃음)이라 부른다. 이삭이 자라자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고 괴롭힌다. 화가 난 사라는 아브라함을 찾아가 하갈과 그의 아들을 쫓아 내라고 한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 낸다. 쫓겨난 하갈은 광야에서 죽을 지경에 이르지만 천사가 나타나 도와 준다. 이야기는 다시 아비멜렉으로 돌아간다. 아비멜렉의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을 찾아가 언약하고 그곳 이름을 브엘세바라 한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나무를 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

창세기 22장 요약

어느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지시살 땅으로 가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명령한다. 아브라함은 아무런 말도 없고 다음 날 일찍 일어나 이삭을 데리고 삼일삼야를 지나 지시할 산에 도착한다. 산 밑에서 종을 두고 이삭에게 번제할 나무를 지게하고 산으로 올라간다. 산에서 제단을 쌓고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할 때 천사가 나타난 막는다. 아브라함이 주변을 둘러보다 숫양을 발견하고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린다. 아브라함은 이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부른다.

창세기 23장 요약

사라의 나이 127세에 숨을 거둔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무덤을 헷 족속의 에브론에게서 은 사벡 세겔을 주고 산다. 막벨라 굴에 사라를 장사한다. 후에 이곳에 아브라함과 이삭 야굽이 묻힌다. 마므레 앞 막벨라 굴이다. 마므레의 다른 이름은 헤브론이다.

창세기 24장 요약

사라의 장사를 마친 아브라함은 이삭을 장가 보내기 위해 종을 하란에 보낸다. 그곳에서 리브가를 만나 데려 온다. 리브가가 헤브론에 도착할 때 묵상하고 온 이삭을 보고 얼굴을 가린다. 둘은 결혼하여 사라의 장막에 거한다.

창세기 25장 요약

아브라함은 노년에 그두라와 결혼하여 자녀들을 낳는다. 그두라는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를 낳는다. 175세에 아브라함이 숨을 거두고, 이삭이 막벨라 굴에 장사 한다. 리브가가 아이를 낳지 못하가 이삭이 20년 동안 기도해 쌍둥이를 낳는다. 형은 에서이고 동생은 야곱니다. 야곱은 사냥을 하고 돌아온 에서에게 밭죽을 팔아 장자권을 얻는다.

창세기 26장 요약

이삭의 때에 기근이 찾아 온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 명하신다. 이삭은 그랄 땅에 거주한다. 이삭은 리브가는 누이가 속인다. 아비멜렉이 데려갔다 하나님이 벌하셔서 다시 데려 온다.

이삭이 그곳에서 농사를 지어 백 배를 얻는다.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우물을 막아 버린다. 그곳 이름을 다른 곳에서 우물을 팠으나 또 막는다. 다시 옮겨 우물을 파서 거한다. 다시 막자 다른 곳으로 옮겨 우물을 판다. 그곳은 오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삭에게 나타나 복을 줄 것이 말씀하신다. 얼마 후에 아비멜렉이 찾아와 사과하고 화해한다.

창세기 27장 요약

이삭이 에서에게 사냥하라 요리하라 한다. 요리를 먹고 장자의 축복을 할 것이라 한다. 밖에서 리브가가 듣고 야곱을 꼬드겨 대신 축복을 받게 한다. 후에 에서가 들어가 통곡하며 분해 한다. 에서가 야곱을 죽이겠다고 말한다. 밖에서 리브가가 듣고 야곱을 하란으로 보낼 생각을 한다.

창세기 28장 요약

이삭은 야곱을 불러 축복하고 밧단아람(아람의 들)인 하란으로 보낸다. 루스 즉 벧엘에 도착하여 돌을 베개하여 꿈을 꾼다. 꿈 속에서 천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하늘에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본다. 사다리 끝에 하나님께서 서서 야곱에게 함께 하시겠다 약속의 말씀을 하신다.

창세기 29장 요약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인 하란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이는 여인 라헬을 발견한다. 라헬이 라반의 딸임을 알고 야곱은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라헬이 아버지 라반에게서 가서 고하고 야곱을 집으로 데려 온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여 칠년을 봉사하고 결혼하지만 아침에 보니 그의 언니 레아였다. 야곱이 라반에게 따지 칠 년을 더 봉사하라 하여 14년을 봉사하여 라헬과 결혼한다. 레아에게서 자녀들이 태어난다.

창세기 30장 요약

라헬이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자신의 몸종 빌하를 주어 아이를 낳게 한다. 레아도 자신의 몸종 실바를 야곱에게 주어 아이를 낳게 한다.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구해 어머니 레아에게 주고 야곱을 데려 간다. 잇사갈, 스불론, 디나를 낳는다. 라헬이 임식하여 요셉을 낳는다.

야곱이 라반의 양을 키우다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자 라반이 품삭을 정하고 야곱을 붙잡는다. 점박이 양들을 야곱이 가져간다. 하지만 라반이 다시 조건을 바꾸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이 선택한 가축들만 새끼를 잘 낳게하여 야곱의 가축이 엄청나게 불어난다.

창세기 31장 요약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이 자신의 아버지의 가축을 도둑질한다고 생각하여 시기한다. 꿈에 하나님 나타나 야곱에게 고향 가나안을 돌아가라 한다. 드디어 라반이 양털을 깎을 때 모든 가족과 가축을 데리고 야반도주한다. 라반이 소식을 듣고 쫓아가 만나다. 야곱을 만나기 하루 전 밤에 하나님이 라반의 꿈에 나타나 야곱을 건드리면 죽을 것이라 경고하신다. 라반과 야곱은 언약을 맺고 각각 되돌아 간다.

창세기 32장 요약

가나안 접경에 다다를 때 두 진영의 천사가 야곱의 앞을 지나친다. 야곱은 그곳 이름을 두 진영이란 뜻으로 ‘마하나님’이라 부른다. 에서를 만날 것이 두려운 야곱은 밤새워 기도한다. 밤에 천사와 씨름하고 축복해 달라고 한다. 천사에게 허벅지 관절을 맞아 어긋난다. 그곳으 이름을 하나님이 얼굴이란 뜻의 ‘브니엘’이라 부른다.

창세기 33장 요약

날이 밝자 얍복강은 건너 에서를 만난다. 에서에게 엎드려 절을 하고 준비한 제물을 바친다. 에서는 거절하지만 강요하여 갖게 한다. 가족들을 소개한다. 에서가 호휘하겠다고 하지만 거절하고 에서는 먼저 앞서 간다. 야곱은 숙곳에 도착하여 장막을 친다.

창세기 34장 요약

레아의 딸 디나가 세겜 성에 놀라 다니다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다. 이 소식을들은 야곱은 분노하고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를 받게하여 세겜 성의 남자들을 모조리 학살한다. 이 일로 죽음의 위기를 느낀 야곱은 두려워하며 레위와 시므온을 책망한다.

창세기 35장 요약

야곱이 가족들에게 우상을 제하게 하고 벧엘로 올라간다. 벧엘에 올라가 자신의 맹세를 따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벧엘을 떠나 에브랏(베들레헴) 길을 가다 라헬이 산통으로 괴로워하며 아이를 낳고 그의 이름을 베노리라 하지만 야곱이 베냐민으로 바꾼다. 베냐민을 낳고 라헬은 숨을 거둔다. 라헬은 베들레헬 길에 장사하고 비를 세운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소개되고, 이삭이 죽고 장사 된다. 이삭은 180세에 숨을 거둔다.

창세기 36장 요약

창세기 36장은 에서의 족보와 그의 자손들이 세운 에돔 민족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가나안을 떠나 세일 산지에 정착하였고, 그의 자손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에돔 족속을 이루었습니다. 이 장은 에서의 아내들, 자녀들, 족장들, 그리고 에돔 땅의 왕들에 대한 목록을 상세히 나열하며, 하나님의 약속이 야곱과 에서 모두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37장 요약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이 꿈을 꾼다. 하늘의 별들과 들의 곡식단에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다.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야곱의 심부름을 올때 요셉을 애굽에 팔아 버린다. 요셉의 애굽의 바로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린다.

창세기 38장 요약

유다는 가나안 여인과 결혼해 세 아들 엘, 오난, 셀라를 낳았다. 큰아들 엘이 악하여 죽자, 둘째 아들 오난도 다말과 결혼했으나 후사를 잇지 않으려 해 죽었다.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가 성장할 때까지 다말을 기다리게 했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다말은 창녀로 변장해 유다를 속여 그의 아이를 임신했고,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 이는 예수님의 족보에 중요한 사건이다.

창세기 39장 요약

창세기 39장은 요셉이 이집트에서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가는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셔서 그는 모든 일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보디발은 그의 집과 재산을 모두 요셉에게 맡겼다.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으나, 요셉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그녀는 요셉이 자신을 범하려 했다고 거짓으로 고발했다. 결국 요셉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요셉과 함께하시며 감옥에서도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창세기 40장 요약

요셉이 아직 옥에 있을 때 바로의 술관원장과 떡관원장이 옥에 들어온다. 그들이 꿈을 꾸고 요셉에게 해몽을 부탁한다. 요셉이 그들의 꿈을 해몽한다. 해몽대로 술관원장은 복직하고, 떡관원장은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요셉은 다시 잊혀진다.

창세기 41장 요약

사건 후 만 이 년이 지난 후 바로가 두 번의 불길한 꿈을 꾸고 술사들에게 해몽을 부탁하지만 아무도 풀지 못한다. 그때서야 술관원장이 나서서 자신의 옥에서 요셉을 만난 이야기를 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서서 꿈을 해몽한다. 먼저는 7년 풍년이 들 것이고, 후에는 7년 흉년이 들 것이다. 바로는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임명한다.

창세기 42장 요약

요셉의 형들이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가 곡식을 산다. 요셉이 형들을 발견한다. 그들을 정탐꾼으로 몰아 옥에 가두고 심문하는 척 하면서 캐 묻는다. 그들의 곡식 자루에 그들이 지불한 모든 돈을 다시 넣어 둔다. 시므온을 볼모로 잡아 가두고 다른 형들은 가나안으로 돌려 보낸다. 다시 내려올 때 베냐민을 데려 오라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므온을 죽일 것이라 말한다. 가나안으로 돌아간 형들이 야곱에 모든 사정을 아뢰자 야곱이 고통스러워 한다.

창세기 43장 요약

곡식이 떨어진 형들이 두 번째 애굽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요셉의 청대로 베냐민을 데려가야 한다. 야곱은 어쩔 수 없이 베냐민을 함께 보낸다. 요셉은 형들을 만나고 옥에 갇힌 시므온을 풀어 준다. 집으로 초대해 식사 대접을 한다. 베냐민을 보고 안방으로 몰래 들어가 운다.

창세기 44장 요약

요셉을 청지기를 불러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게 하여 형들을 시험에 빠뜨리게 한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형들을 추격한 요셉의 신하들이 각자의 배낭을 뒤져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을 발견한다. 다시 요셉에게 붙잡혀 와서 베냐민을 옥에 가두려 한다. 이때 유다가 베냐민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변론을 한다.

창세기 45장 요약

유다의 목숨 건 변명을 들은 요셉은 그제서야 형들이 베냐민을 얼마나 아끼는지를 알게 된다. 형들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자 형들이 두려워 떤다. 서로 입맞추고 화해한다.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식들은 바로가 축복하고 자신의 수레를 내어주며 아버지를 모셔오라 말한다. 가나안으로 돌아간 형들이 아버지 야곱에 요셉 이야기를 전하지만 믿지 못한다. 그러자 바로가 보낸 마차를 보고 기뻐한다.

창세기 46장 요약

야곱이 모든 가족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약속의 땅을 떠난다는 것이 불안해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가라 말씀하시며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라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상시키신다. 애굽에 있던 가족까지 합하면 모두 70명이다. 요셉은 바로를 만나기전 바로에게 자신들을 목축하는 자라 소개하도록 한다. 애굽에서 목축 업자는 비천한 자들로 여긴다.

창세기 47장 요약

야곱의 가족들은 바로에게 가서 인사하고 축복해 준다. 야곱의 가족들은 고센 땅에 머문다.(바로는 라암셋을 주었다고 말한다. 11절) 기근이 더욱 심해지자 애굽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축과 곡식을 바꾼다. 하지만 기근이 멈추지 않자 결국 자신의 토지를 팔아 곡물을 산다. 이후 모든 토지는 바로의 것이 되어 새로운 토지법이 만들어 진다. 수확의 1/5을 바로에게 마치게 한다. 하지만 제사장들의 토지를 빼앗지 않는다.

창세기 48장 요약

야곱이 나이들이 병이들자 요셉이 자신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려간다. 야곱은 요셉에게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양자로 입양한다고 밝힌다. 둘을 축복하는데 장자인 므낫세는 왼손을, 차남인 에브라임에게는 오른손으로 얻자 요셉이 바꾸려 하지만 야곱이 알고 있다면 그대로 축복해 준다. 이후 에브라임은 장자와 같은 권한을 갖게 된다.

창세기 49장 요약

야곱이 나이들어 조상들에게 돌아갈 때가 되자 아들들을 불러 축복해 준다. 르우벤은 장자권을 빼앗기고 유다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역대상 기자는 장자권이 요셉에게 넘어갔다 말한다. 역대상 5:1-2)

  •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축복을 마친 야곱은 자신을 아브라함이 샀던 막벨라 굴에 자신을 묻어 달라 부탁하며 숨을 거둔다.

창세기 50장 요약

야곱이 죽자 바로는 슬퍼하며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한다. 애굽의 병거와 기병이 따르고, 요단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서 요셉이 칠일 동안 애곡한다. 가나안 백성들이 듣고 ‘아벨 미스라임’이라 부른다. 야곱은 마므레 앞 막벨라 굴에 장사된다.

장례를 마치고 애굽으로 내려오자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어 요셉이 자신들에게 복수할까 두려워하며 종들을 보내 용서해 달라고 부탁한다. 요셉이 그 소리를 듣고 울자 깜짝 놀란 형들이 직접 찾아와 요셉에게 용서를 구한다. 요셉은 걱정 말라며 자신이 돌보겠다 말한다. 요셉은 죽으면서 후손들에 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내어 가실 때 자신의 뼈를 가지고 가 달라고 부탁하며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11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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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n, Professor Jackson explains the four relationships that dominate the Book of Genesis: God and creation, God and man, man and man, and man and creation.

These relationships are explored in the narratives of Adam and Eve, Abraham and Sarah, Abraham and Isaac, Jacob and Esau, and finally, Joseph.

잭슨 교수는 창세기를 지배하는 네 가지 관계, 즉 하나님과 창조,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창조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아담과 이브, 아브라함과 사라,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셉의 이야기에서 탐구됩니다.

족장(族長)

נָשִׂיא 스트롱번호 5387

1. 방백.  2. 특정한 지파의 지도자. 3. 창 17:20.
발음 [ nâsîyʼ ]
어원  / 537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29회 사용

  • 관련 성경 / 두령, 고관(창 17:20. 방백, 겔 32:29), 추장(창 34:2), 지도자(출 22:28), 어른(출 34:31), 족장(출 35:27, 민 27:2, 대하 5:2), 귀족(수13:21), 총독(스 1:8), 구름(잠 25:14, 렘 10:13), 족속(겔 12:10), 왕(겔 12:12, 39:18, 48:21), 통치자(겔 45:9).

창세기 36:15
에서 자손중 족장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의 자손에는 데만 족장, 오말 족장, 스보 족장, 그나스 족장과.

אַלּוּף  스트롱번호 441

1. 친밀한.  2. 황소.
발음 [ ’allûwph ]
어원  / 50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9회 사용

관련 성경 / 족장(창 36:15, 대상 1:51, 54), 두령(출 15:15), 친우(시 55:13), 수소(시 144:14), 짝(잠 2:17), 벗(잠 16:28, 17:9), 보호자(렘3:4), 우두머리 (렘 13:21), 이웃(미 7:5), 지도자(슥 9:7, 12:5, 6).

성경 속 '족장 이야기'의 역사를 찾아서

창세기 1~11장은 워낙 오래된 이야기로 역사성을 증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기에 12장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데라의 아들 아브람이 조상 대대로 살던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우르(Ur, 오늘날 유프라테스 강 하류 서쪽으로 약 16㎞)를 떠나면서 족장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창세기 14장에는 평원에 있는 다섯 도시(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벨라 혹은 소알)의 왕들이 메소포타미아 동쪽에 있던 엘람의 왕 그돌라오멜이 이끄는 네 왕의 연합군에 대항하여 싸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돌라오멜, 시날 왕 아므라벨의 이름은 메소포타미아 기록에서 찾을 수 없으며 살렘 왕 멜기세덱 역시 성서를 벗어나면 흔적도 없습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창 20장, 26장)도 마찬가지일 뿐만 아니라 헤브론의 유지였던 헷 사람 에브론(23장), 세겜의 지도자인 하몰(34장), 보디발(39장), 그리고 창세기 36:31~39의 에돔의 왕들도 찾을 수 없습니다.

족장 이야기의 '역사성'을 찾아서

족장 이야기는 적어도 3단계의 기록 층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장 이른 것은 기원전 10세기이며 가장 늦은 것은 바벨론의 예루살렘 함락(기원전 587년~6년) 이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모든 기록의 층들은 제2성전 시대(기원전 538년 이후), 또는 일러야 바벨론 포로기(기원전 587~6년~538년)에 한데 모아져서 오늘날의 형태로 편집되었습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족장 이야기가 비록 후대에 쓰인 것이기는 해도 이러한 자료들이 더 이른 시기(족장 이야기의 실제 배경이 되는 시기)부터 유래하는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전승들에 기초하고 있다고 봅니다.

올브라이트 학파

탁월하고 위대한 신학자인 윌리엄 F. 올브라이트(William F. Albright)와 그의 제자들은 족장 이야기에 나오는 세부 자료(사람 이름, 사회적 관습, 법적 절차, 생활 풍속)는 기원전 2000년대의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가나안 등의 문화 특징과 잘 들어맞는다고 보았습니다.

"전반적으로 창세기의 묘사는 역사적(historical)이다. 전기적 세부 사항의 일반적인 정밀도와 족장들의 생생한 삶의 묘사는 의심할 이유가 없다." -올브라이트

올브라이트의 수제자인 G. 라이트(G. Ernest Wright)에 따르면,

"아브람이 실존 인물이라거나, 이런 저런 일을 했다거나, 이런 저런 말을 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마도 결코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에 관한 이야기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그의 삶과 시대가 제2000년대 초기와는 완벽하게 들어맞지만, 그 이후의 다른 시대와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은 증명할 수 있다." - 라이트

성경은 이스라엘이 모압, 암몬, 에돔(창 19:30~38, 36장)만이 아니라 미디안과 아라비아 부족들(25:1~5, 12~18)과도 혈연관계가 있다고 묘사합니다. 이스라엘은 특히 아람인들(기원전 2000년대에 메소포타미아에서 대규모로 이집트로 이동)과 강한 혈연관계가 있는데, 그들의 메소포타미아 친척들의 고향은 아람-나하라임이나 밧단아람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라반은 거듭 아람 사람으로 불립니다(창 25:20, 28:1~7, 31:20, 24). 창세기 22:20~24에는 아람 사람과 갈대아 사람이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홀의 후손으로 나와 있습니다. 신명기에서도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신 26:5)"라는 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이를 근거로 해서 학계에서는 성서의 족장들을 아모리 사람(아람 사람)과 같은 인물들로 보며 이것을 '아모리 가설(Amorite hypothesis)'이라고 합니다. 올브라이트는 자신이 기원전 2100~1900년으로 잡은 이 시기를 중기 청동기 시대(Middle Bronze I: MB I)로 불렀습니다.

라이트의 제자인 존 브라이트는 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첫째,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예언 형상과 유사한 현상들이 마리 문서(시리아, 유프라테스 강 중류의 '마리' 지역 유적에서 발견된 2만 장 이상 되는 점토판 문서. 대부분 기원전 18세기의 야스마하 아다드 왕 시대와 짐릴림 왕 시대의 것으로, 외교·의식·역사·상업·행정 문서 등)에서도 나온다. 이러한 문헌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관습과 제도들이 이스라엘 선조들의 그것과 비슷한 점이 많다. 마리(Mari) 문서에서도 볼 수 있는 예언 제도는 이스라엘에서 사사 시대(드보라, 사무엘 등)에는 이미 확립되어 있었고, 처음부터 이스라엘 종교 생활의 특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곧 비슷한 문화 환경으로부터 이주해 온 선조들에 의해서 이스라엘에 전해졌을 것이다.

둘째, 계약 법전(출 21~23장)으로 알려진 이스라엘의 판례법이 에쉬눈나(Eshnunna)법전과 함무라비 법전을 통해 잘 드러나는 메소포타미아의 법률 전승과 비슷하다. 따라서 기원전 2000년대에 메소포타미아의 사법 전승들을 알고 있었던 이들이 이주해 오면서 팔레스타인지역으로 전해졌다고 추론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셋째, 창세기 2장의 창조 설화와 6~9장의 홍수 이야기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온 자료와 놀랄 만큼 비슷하다. 이런 이야기는 가나안이나 이집트의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메소포타미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창세기 시원사(창세기 1~11장) 배후에 있는 전승들은 기원전 2000년대 전반에 이주해 온 집단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물론 이를 입증할 방법은 없지만, 이스라엘의 선조들도 끼어 있었던 일부 아모리인들이 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족장들이 2000년대에 그 지역으로부터 이주해 왔다는 성경 전승의 역사성은 근거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브라이트는 성경 자체에서 나오는 증거 자료가 지닌 여러 가지 한계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인정합니다. 그러면서도 브라이트가 창세기 족장 이야기의 역사성을 주장하는 강력한 이유는, "고고학 역시 족장 이야기의 실제성을 부정하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폅니다.

또 다른 시도들

많은 학자가 올브라이트처럼 엄격하게 족장 시대의 아브라함 단계를 MB Ⅰ(중기 청동기 Ⅰ)로, 야곱 단계를 MB ⅡB(중기 청도기 ⅡB)로 추정하지 않고 좀 더 포괄적인 연대를 제시합니다. G. E. 라이트는 "간단히 말해, 족장 이야기는 제2000년대 초의 배경에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올브라이트가 주장한 MB Ⅰ시대에는 실제로 '도시'와 연관된 고고학 유적이 나오지 않는 난감한 상황을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성서의 아브라함 시기에는 몇몇 도시 이야기가 나온다. 요단 계곡의 여러 도시들(창 14:2), 블레셋 도시 그랄(창 20:1), 요새화 된 도시 헤브론(창 23:2)). 그러므로 그것보다는 더 나중 시기인 MB ⅡB로의 재도시화 시대와 족장 시대를 동일시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중심 도시들 가까운 곳에서 장막 생활을 한 것으로 나오는데요, 이는 MB ⅡB의 마리(Mari)나 다른 도시들에서 볼 수 있는 유목민과 도시민의 공존 생활과 비슷한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기에 타당한 듯 보입니다.


연대-기원전
 
고고학적 시대
 
올브라이트의 분류
 
올브라이트의 연대
 
2250~2000
 
EBⅣ(Early Bronze)
 
MBⅠ(아브라함?)
 
2100~1900
 
2000~1800
 
MBⅠ(Middle Bronze)
 
MBⅡA
 
1900~1750
 
1800~1630
 
MBⅡ
 
MBⅡB(야곱?)
 
1700~1600
 
1630~1550
 
MBⅢ
 
MBⅡC
 
1600~1550
 

그들은 성서의 족장들과 제2000년대(특히 MB ⅡB)의 연관성을 보여 주기 위해 특히 창세기 12~50장에 나오는 "사람의 이름이 비슷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첫째, '야곱'이라는 이름은 제2000년대 초기 자료에 일곱 번 나타나며 '아브람'이라는 이름도 같은 시기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삭'이나 '요셉'과 같은 예는 남아 있지 않지만 두 이름 모두 '모리어 형태'이므로 이 주장은 족장 시대에 나오는 성서 인명이 제2000년대 초의 역사적 맥락과 잘 맞아떨어진다는 주장이죠.

둘째, 올브라이트나 에프레임 A. 스파이저(E. A. Speiser)는 제2000년대의 성서 이외의 문서에 나오는 사회, 법률 관행들이 족장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보았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누지(Nuzi)에서 나온 설형문자 문서들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겼는데, 누지 토판은 제2000년대 중기에 동 티그리스 지역에서 번영했던 민족인 후리 사람들(Hurrians)의 관행과 관습을 반영하고 있는 토판입니다. 족장들을 후리 왕국 미타니(Mitanni)와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려는 학자는 없었지만 이 시기에 후리 사람들이 시리아와 가나안 지역까지 널리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보수적인 학자들은 후리 사람들과 족장들 사이에 수많은 연결 고리를 제안했습니다. 누지의 결혼 계약서에 보면 자녀를 낳지 못하는 부인은 남편에게 여종을 주어 자녀를 낳도록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이것은 창세기 16:1~4의 하갈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이렇게 태어난 아들은 나중에 쫓아낼 수가 없으며 이는 창세기 21:10~11의 이스마엘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주장입니다.

"실질적인 혈연관계와 무관하게 아내를 남편의 누이로 동시에 인정하고 있는 법을 보면, 후리 사회에서 한 남편의 아내는 특별한 지위와 보호를 누리고 있었다…. 이러한 이중 역할은 아내에게 사회적 지위를 부여했다." -스파이저

그에 따르면 창세기에서 아브라함(12:10~20, 20:1~18)이, 그리고 나중에 이삭(26:6~11)이 자기 아내를 누이로 소개하는 일화들의 배경에 이 관습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전반적으로, 창세기에 나오는 많은 사회‧법률 관습이 제2000년대 중기나 초기의 관행과 비슷하지만, 그 후대의 관행과는 유사점이 없기에 성서 전승이 제2000년대의 '실질적 역사성'을 담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어떤 학자는 창세기 14:14의 히브리어 '하닠'(훈련된)과 14:23의 '미후트 베아드 쉐록-나알(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과 같은 낱말이 기원전 15세기에 쓰인 표현이기에 창세기 14장이 고대의 것임을 입증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히브리어 נשיא 나시/지휘관. 족장의 뜻


민 7:2. 이스라엘 지휘관들 곧 그들의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들이요 그 지파의 지휘관으로서 그 계수함을 받은 자의 감독된 자들이 헌물을 드렸으니(개혁개정)

민 7:2. 이스라엘 족장들 곧 그들의 종족의 두령들이요 그 지파의 족장으로서 그 계수함을 입은 자의 감독된 자들이 예물을 드렸으니 (개혁성경)

민 7:2. 이스라엘의 대표자, 각 가문의 어른들이 예물을 바쳤다. 이들은 각 지파의 대표로서 등록하는 일을 맡아보던 사람들이다.(공동번역)

נשיא 나시 = 방백, 특정한 지파의 지도자, 족장, 종족의 두령, 왕, 치리자, 지휘관, 감독, 지파의 대표

복수형 נשיאים 네시임 : 땅으로부터 올라온 증기, 구름

유래 נשא 나사 = 들어 올리다, 쳐들다, 깃발을 세우다, 맹세하다

נשא 나소 = 총계하다, 계수하다

토라의 깃발을 높이 들자들입니다(시 20:5)

여호와의 깃발을 높이 들자들입니다(시 60:4)

이스라엘 지파를 대신하는 자들입니다(민 7:2)

땅을 갈아엎어서 옥토로 만들 자들입니다(롬 8:22)

주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에 동참하는 자입니다(롬 8:17)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입니다(계 1:2)

나라와 제사장을 삼아 땅에서 왕노릇할 자들입니다(계5:10)

하나님의 종들로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서 인맞을 자들입니다

어린양의 피와 예수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이기는자(계 12:11)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입니다(계 12:17)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베임을 받은자들(계 20:4)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왕노릇 할 자(계 20:6)

1. 지휘관들은 이스라엘 자손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들의 족장들입니다

민 4: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민 7:2. 이스라엘 지휘관들 곧 그들의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들이요 그 지파의 지휘관으로서 그 계수함을 받은 자의 감독된 자들이 헌물을 드렸으니

민 7:3. 그들이 여호와께 드린 헌물은 덮개 있는 수레 여섯 대소 열두 마리이니 지휘관 두 사람에 수레가 하나씩이요 지휘관 한 사람에 소가 한 마리씩이라 그것들을 장막 앞에 드린지라

144,000의 인맞은 종들(지휘관, 족장)을 유추 할 수 있습니다(히브리뿌리 관점)

1) 이스라엘 지휘관 12명

덮개 있는 수레 여섯

소 열 둘(12)

족장 둘에 수레가 하나 = 2x6(수레 여섯) = 족장 12명(12지파)

족장 12명(12지파) x 소 열 둘(12제자) =144

144 x 1,000(완전) =144,000(열방을 대표하는 족장들, 왕 같은 제사장)

2) 이스라엘의 집의 하나님의 종들

계 7: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계 7: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천년왕국은 열방에서 택한자 중에 제사장을 세웁니다

이사야 66:2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열방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약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이사야 66:21. 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왕 같은 제사장들

벧전 2: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3) 계수함을 받은 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들어 올리는 자입니다

“נשא나소/총계하다” “운반하다”“들어올리다”와 어원이 같다

총계하다 = 운반하다(나사) = 원형(들어올리다, 깃발을 세우다)

레위자손을 총계하여 성막을 이동하는 일을 맡겼으며, 성막의 이동은 바로 하나님을 높이 들어 올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자”

민 4:27. 게르손 자손은 그 모든 일 곧 멜(나사) 것과 처리할 것에 아론과 그 아들들의 명대로 할 것이니 너희는 그들의 멜(나사) 짐을 그들에게 맡길 것이니라

결국 레위인들이 총계함을 받아 짐을 메는 궁극적인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 들어 올리는자,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는자 에 있습니다

민 4:49. 그들이 그 할 일과 멜 일을 따라 모세에게 계수함을 입었으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들이 계수함을 입었더라

12지파의 지휘관, 족장들 나시נשיא의 뜻은 “올림을 받은자” 입니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2. 진 밖으로 쫒겨난 자가 있습니다

민 5: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모든 문둥병 환자와 유출병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케 된 자를 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되

진 안에는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장소로 거룩한 곳입니다

민 5:3. 무론 남녀하고 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어 그들로 진을 더럽히게 말라 내가 그 진 가운데 거하느니라 하시매

진 밖으로 내어보냄을 받은 자는 “잃어버린 이스라엘”입니다

문둥병환자, 유출병이 있는자, 주검으로 부정케 된자

3.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회복

눅 17:11~17은 본문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눅 17: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눅 17: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눅 17: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눅 17: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눅 17:16.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눅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 예슈아께서 잃어버린 이스라엘 집의 양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마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열 명의 문둥병자는 열방에 잃어버린 이스라엘입니다

예슈아를 만난 자는 이스라엘의 집으로 돌아올수가 있습니다

2)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이방인이라 말합니다

이방인이 예슈아를 만났다면 이스라엘로 돌아와야 합니다

3) 예슈아를 만나 고침 받은 열 명중에 한명만이 진 안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방인이 예슈아를 만난 것은 고침 받은 것입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이스라엘로 돌아와야 합니다

4) 이스라엘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이 없으면 아직은 소경입니다

눅 17: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분명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가지고 토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사야 55: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예레미야 3: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예레미야 25:5
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





1월 17일(금) 창세기 49-5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입관하였더라(50:24)

요셉이 일백 십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So Joseph died at the age of a hundred and ten. And after they embalmed him, he was placed in a coffin in Egypt.

요셉의 입관으로 창세기가 막을 내립니다.
더 이상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관심을 갖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세기는 막을 내린 것이 아니라 요셉이 입관한 후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관심을 갖는 인물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창세기 51장의 주인공으로 살아야 합니다.
창세기 51장의 주인공이 되려면 사람은 영화 혼과 육으로 구분된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영과 혼과 육이 온전한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마감하면서 두 개의 히브리 단어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창조하시니라에 해당하는 "바라"
둘째는 입관하였더라에 해당하는 "아론"
아론이란 단어

바라와 아론



창조(創造)  בָּרָא 스트롱번호 1254

1. 새기다.  2. 창조하다. 3. 창 1:1.
발음 [ bârâʼ ]
구약 성경  / 48회 사용


입관(入棺)(727)하였더라(3455)

입관(아론. ’ârôwn)  אָרוֹן 스트롱번호 727

1. 궤,  2. 왕하 12:10, 3. 창 50:26.
발음 [ ’ârôwn ]
구약 성경  / 201회 사용
  • 1.명사 궤, 상자
    • a. 명사 [돈 상자를 나타내는 경우] 왕하12: 10(9), 11(10).
    • b. 명사 [시체를 넣는 관을 나타내는 경우] 창50:26.
    • c. 명사 [그러나 대부분 율법이 기록된 두 돌판을 담고 있는 언약궤를 나타냄], 출 25:22, 26:33, 신10:8, 31:9,25, 수 3:6, 4:9, 삼상5:3,4, 6:8.
  • 문법설명
    혼성[남성, 삼상 6:8, 여성, 삼상 4:17, 대하 8:11]
  • 관련 성경 /  궤(출 25:10, 민 4:5, 신 10:1), 언약궤(삼하 11:11).

모세의 형 "아론"과 발음이 비슷하지만 히브리어로는 구별이 됩니다.
모세의 형 아론은 "아하론"이라고 발음합니다.


אַהֲרוֹן 스트롱번호 175

1. 모세의 형 ‘아론’   2. 출 6:20.  3. 7:7.
발음 [ ’Ahărôwn ]
어원  / 아람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구약 성경  / 347회 사용
  • 1. 고유명사 모세의 형 ‘아론’, 출6:20, 7:7.
  • 관련 성경  /  아론(출 6:20, 7:7).


    야삼(yâsam) יָשַׂם 스트롱번호 3455

    1. 놓다.  2. 놓여지다
    발음 [ yâsam ]
    구약 성경  / 3회 사용
    • 1. 원형 놓다, 두다, 배치하다, 삿 12:3
    • 2. 원형 놓여지다, 두어지다, 배치되다.
    문법설명  / 미완료형 יַיִּישֶׂם, 창 50:26, 24:33
    • 관련 성경  /  베풀다(창 24:33), 입관하다(창 50:26).



    󰃨 몸에 향 재료를 넣고 - 요셉의 시신(屍身)을 미이라로 만든 것을 가리킨다.

    󰃨 입관하였더라 - 요셉의 장례 행사는 야곱의 장례행사에 관한 기록과는 달리 매우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업적을 남긴 애굽의 총리였으므로 성대한 장례 예식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미이라 관에 안치된 유해는 약 400년 후 가나안 땅 세겜에 완전히 묻히게 된다(수 24:32).

    성경 첫 번째 책은 창세기입니다.
    창세기의 시작은 천지창조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건을 기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창세기의 끝은 한 인간의 죽음과 입관으로 마무리됩니다.
    태어날 때, 자랄 때, 한창 잘 나갈 때가 있었지만 죽고 나면, 입관 즉 관속에 들어가게 한 줌의 흙으로 남는 것이 인간입니다.

    ​창세기 마지막에 등장하는 요셉은 야곱의 아들로서 이집트의 국무총리였습니다.
    이집트는 요셉이 살던 시대는 세상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였습니다.
    고대의 대제국 이집트의 국무총리라고 할지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임종의 때가 가까운줄 알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24절에 보시면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창 50:24).

    ​그 땅은 요셉의 증조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약속받았던 땅입니다.
    가나안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4대가 지난 요셉이 믿고 있었고, 또 그 약속을 그 후손들의 때에 이루게 될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즉,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지킬 것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은 곧 언약입니다.
    성경에는 언약이라는 말이 무려 294번이나 사용됩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목숨을 담보로한 약속을 의미합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신뢰를 잃지만,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목숨을 잃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맺은 언약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실 때, 그 약속을 유업으로 받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또한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잠간이고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인생은 말 그대로 신속히 날아갑니다.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합니다(전 9:5).
    산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죽을 죽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입니다.
    모든 분들은 살아있기 때문에 언젠가 죽을 때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생각보다 빨리 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끝나는 그 시점이 있을 것을 기억하고 그날을 위하여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 김은신님은 하늘에 나 아갈 소망을 끝까지 간직하고 살았습니다.
    파트리스교회 권사님으로서 긴 시간 수고와 봉사로 교회를 섬기셨고, 또한 믿음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이제 김은신권사님께서 잠들었다는 사실이 슬픔을 주지만 동시에 소망가운데 잠드셨기에 저와 파트리스교회 성도들 그리고는 말할 것도 없고 여러분에게도 큰 위로가 될 줄로 확신합니다.
    혹시 이자리에 예수님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분이 계신다면 김은신권사님이 누리신 복을 함께 누리시도록, 예수님을 믿어 이 확신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입관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삶이 잠깐임을 말해줍니다.
    영원할 것 같아도 영원하지 않고, 늙지 않을 것 같아도 곧 늙고,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아니겠습니까?
    안개 같은 인생임을 기억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은총이 유족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길 바라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으로 가신 고인의 영정 앞에서 그동안 신앙생활을 같이 해 왔던 성도들이 함께 모여 남겨두신 유족들을 위로하며 예배로 모였습니다.
    장례의 절차에 은혜를 구하옵고 또 슬픈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머리 교우들과 자녀와 가족분들에게 무한한 위로와 긍휼을 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_______님은 눈물 많고 근심 많던 이 세상길을 마치고 주님의 품안에 안기셨음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우리들 또한 그 안식을 바라며 소망가운데 있게 하시고, 우리 _______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과 헌신을 본받아 자녀들의 삶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게 하옵시고, 남은 장례 절차 가운데 안전으로 보살펴 주시고, 남은 절차가운데 은혜를 주시되, 부활의 소망을 품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여 생명 길로 인도하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요셉의 영성(창세기 50:15-21)

    성경의 인물 중에서 예수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 요셉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셉은 가나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마치 왕자처럼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 중에서 요셉에게만 특별한 사랑을 주었습니다.
    채색옷을 입혔다는 것은 가장 좋은 옷을 입혔다는 의미보다 더 강한 "상속자"로 인정하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셨습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내려가서 고난을 당하고 애굽과 주변 국가들을 7년 흉년으로부터 구원했습니다. 
    이는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인류의 구원자가 되시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요셉은 은 20냥에 상인들에게 팔렸는데 우리 주님은 은 30냥에 팔렸습니다. 
    요셉을 판 형의 이름이 유다인데 예수님의 제자 중에 예수님을 판 사람이 유다입니다. 
    우리는 그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요셉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영성입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에베소서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야 하지만 요셉이 예수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기 때문에 오늘 설교는 요셉을 통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순종의 영성 

        창 37:12 이하에 보면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야곱과 요셉은 헤브론에 살고 있었고 요셉의 형들은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양을 치고 있는 아들들과 양떼가 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양을 치고 있는 형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보고오라고 명합니다. 

    야곱의 말을 들은 요셉은 아버지에게 순종해서 세겜으로 갑니다. 헤브론에서 세겜까지의 거리가 약 100km입니다. 100km의 거리를 걸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룻길이 30km이고 요셉은 어린 나이였으니 족히 4일은 걸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겜에 가보니 형들이 없습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명한대로 순종해서 세겜까지 갔으나 형들이 없다고 그냥 돌아가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아버지가 보낸 목적을 알기 때문에 들에서 적극적으로 형들을 찾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요셉에게 무엇을 찾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형들이 도단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도단은 세겜에서 약 30km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요셉은 나흘을 걸어서 세겜에 왔으니 많이 피곤하고 지쳤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30km가 떨어진 도단까지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형들을 만납니다. 지금이야 웬만한 사람들은 자동차가 있고 또 대중교통이 발달해서 130km 거리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걸어서 130km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서 100km를 걸어서 세겜까지 가고 세겜에서 형들을 만날 수 없으니 또 30km를 걸어서 도단까지 가는 적극적인 순종의 모습을 보입니다.

        요셉이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셔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빌 2:7에 보면 종의 형체를 가지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그분이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종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의 극치는 십자가입니다. 주님도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앞두고 고민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넷 동산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이 잔’은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분명히 아셨기 때문에 자신의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편을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결국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쏟으시며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두 가지를 잘 하면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아느냐로 영성을 측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얼마나 순종할 수 있느냐가 그 사람의 영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운전을 잘하는 사람은 자동차에 대해서 잘 알고 교통법규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동차의 용도에 맞게 그리고 교통법규를 따라서 안전하게 자동차를 몰 줄 아는 사람이 운전을 잘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기록한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중요합니다. 하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무슨 일인가를 판단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올바른 판단과 올바른 선택이 우리를 복된 길로 인도합니다. 잘못된 판단을 내리거나 올바른 판단을 내렸지만 육신을 따라 형편을 따라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그 잘못된 판단과 잘못된 선택이 우리를 저주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내적인 갈등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가야 되는지 가지 말아야 하는지, 만나야 하는지 만나지 말아야 하는지 등등의 갈등이 끊임없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 갈등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힘든 상황이 벌어져도 그리고 물질적으로 손해가 되어도, 심지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제가 오금동에서 목회 할 때 일입니다. 한 달 월세가 530만원이었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교회 빚도 좀 있는 상태였고 그 달에는 교회 재정이 400만 원 정도 마이너스였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제게 예배당 인테리어와 지역노인을 위한 제주도 무료효도관광을 명하셨습니다. 저희 형편으로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단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을 했습니다. 예배당 인테리어를 새로 하고 지역노인 80분을 모시고 무료효도관광을 제주도로 다녀왔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빚을 져야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은혜로 인테리어 비용도 채워졌고 효도관광도 잘 다녀왔고 교회 재정은 오히려 400만원이 남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울 왕이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했습니다. 그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이스라엘이 아말렉을 물리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울은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의 마음에 욕심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병들과 약한 짐승들은 죽였지만 건강한 짐승들은 남겨두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남겨두었다고 말했지만 그 불순종 때문에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여러분들은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내 뜻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 갈등 속에서 내 뜻을 선택하면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여 순종하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영성은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2. 성장하는 영성 

        요셉은 여러 면에서 성장했습니다. 육체적인 성장이야 당연한 것이고 신앙적인 성장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에게서 나타나는 성장 중에 중요한 것이 관계의 성장입니다.

        오늘 요셉의 영성을 설교하면서 제가 창 50:15-21을 분문으로 잡은 이유가 있습니다. 창 37장에 보면 요셉은 아버지에게 사랑은 받았지만 관계적인 면에서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보면 그것을 아버지에게로 달려가서 고자질을 했습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상인들에게 팔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관계의 영성이 부족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형들은 그의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기꺼이 형들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때 형들에게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과거에 자기들이 요셉에게 행했던 일을 생각하니 요셉이 복수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이 요셉을 만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을 팔아가면서 자신들의 안전을 위하여 요셉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아버지가 죽더라도 요셉이 형들에게 원수를 갚지 말라고 유언을 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요셉은 형들이 거짓을 말하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형들을 위로합니다. 본문 19-21절을 보겠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 하였더라” 

    요셉은 원수를 사랑으로 갚았습니다. 아버지 곁에 있을 때 요셉은 이 정도로 넓은 마음의 소유자는 아니었습니다.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는 속 좁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내면이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후에는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성장의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눅 2:52에 보면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키도 자라셨고 지혜도 자라셨고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도 성장하셨습니다. 성경이 당연히 자라야 할 예수님의 키 까지 언급하면서 예수님의 성장을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신앙이 자라야 함을 교훈하기 위함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교회생활을 몇 십 년 씩 했지만 신앙성장 전혀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다보니까 세례도 받고 직분도 받고 교회에서 사역도 하지만 여전히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중생은 했으나 영적인 어린 아이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전 3:1-3에서 사도 바울은 영적인 어린아이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영적인 어린 아이들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소화력이 약합니다. 바울은 영적인 어린아이들의 특징은 밥을 먹을 수 없고 젖만 먹는다고 말했습니다. 젖 먹는 어린아이에게 어느 날 밥을 먹이면 어떻게 될까요? 소화하지 못하고 토해버립니다. 갑자기 고기를 먹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일 납니다. 소화력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영적인 어린아이는 소화력이 약하기 때문에 설교를 듣다가 시험에 잘 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화해내지 못해서 생명의 말씀을 듣다가 시험에 듭니다.

        또 영적인 어린아이는 사람들을 잘 소화해 내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서 영적인 어린아이가 소화해내지 못하는 A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는 A가 시험거리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을 잘 소화해냅니다. 전혀 시험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차이는 그가 A를 소화해 낼만큼 성장하지 못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영적인 어린아이의 특징 두 번째는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이 말은 그의 생활은 영이 중심이 되어 영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중심이 되어 육신이 끄는 대로 끌려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대한 사인(sign)을 보내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은 하나님께 받은 사인을 우리의 혼에 전달을 합니다. 그러면 혼이 육체에게 명령해서 영이 받은 하나님의 사인을 육체가 행하게 합니다. 이것이 신령한 생활이고 영중심의 생활입니다. 그런데 육신에 속한 자들은 영이 받은 하나님의 사인이 혼을 통해 몸에 전달이 될 때 순종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영이 받은 사인과 반대되는 몸이 원하는 일들을 합니다.

        고전 3:3에서 육신에 속한 자의 특징을 두 가지 말합니다. 시기와 분쟁입니다. 시기심은 분쟁을 일으키고 결국은 자기를 죽이게 됩니다. 잠 14:30에 보면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죽이려고 하다가 상인에게 팔아버린 것입니다.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도 시기심 때문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도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시기심은 상대를 괴롭게 하는 것만 아니라 결국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영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을 따라 살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이죠. A팀과 B팀이 줄다리기를 합니다. 두 팀 다 이기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어느 팀이 이길까요? 당연히 힘이 좋은 팀이 이기는 것입니다. 영과 육의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이 약하면 영이 육에게 끌려 다니기 때문에 육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영이 강하면 영이 육을 끌고 다니기 때문에 영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이 강해지는 비결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딤전 4:5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날마다 밥을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고 날마다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영적인 근육이 풍성해지고 강해지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영혼에 힘이 생기게 되면 육신이 원하는 일들을 부인하게 되고 영이 육을 끌고 다닐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 3:3에 보면 영적인 어린아이의 특징이 하나 더 나옵니다. 사람을 따라 행합니다. 진리를 따라 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지 않고 사람을 따라 행합니다. 능력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고 행하거나 다수를 따라 행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어린아이의 특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 오직 성경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의 은혜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성 

        요셉의 영성 중에 가장 알려진 부분이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창 39장에 보면 4번이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동행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했다’고 말씀 합니다.

        요셉을 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면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형통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형통합니다. 여러분! 형통하기를 바랍니다. 모두 형통하기를 원하시죠? 형통의 비결이 뭔지 압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창 39:2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창 39:3입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 39:23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과 하나님은 항상 함께 계십니다. 사 41:10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구속 받은 자기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승천하시기 직전에 주님께서는 마 28:20에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요 14:17에서는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 말씀을 근거로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에녹이나 요셉 등 몇 사람들에게만 사용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표현이 적은 이유는 사람의 입장에서 표현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요셉에게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모든 믿는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동행한다고 표현하신 이유는 요셉이 하나님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편에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창 39에 보면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상처 입은 요셉, 외로운 요셉을 보디발의 아내가 동침하자고 유혹합니다. 9절에 보니 그 때 요셉은 하나님이 그곳에 계심을 인정합니다. 요셉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은 그 집에 보디발의 아내와 자기 둘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창 40장에 보면 요셉이 감옥에서 두 관원의 꿈을 해석해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두 관원은 요셉의 해몽대로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요셉의 해몽대로 3일 만에 복직이 되어 왕을 섬기게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요셉의 해몽대로 3일 만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 때도 요셉이 꿈을 해몽할 때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창 40:8입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요셉은 꿈을 해몽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능력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 41장을 보면 요셉이 애굽의 왕인 바로의 꿈을 해몽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요셉의 해몽대로 애굽에 7년 풍년이 들었다가 다시 7년 흉년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요셉이 꿈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창 41:16입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역시 요셉이 여기서도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창 45장을 보면 요셉이 애굽의 총리인 자기가 요셉이라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하는 형들 앞에서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창 45:5,7,8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창 50장에 보면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형들이 자기를 두려워하여 살기 위해서 비굴하게 아버지를 팔고 있을 때 요셉은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창 50:19,20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내 편에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인정해드릴 때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시고 언제나 무엇을 하든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잠 3:6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음식을 먹으면 조미료가 들어간 것과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것의 맛의 차이를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주님이 들어간 일과 주님이 들어가지 않는 일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윤리적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 없이도 선한 생각을 할 수 있고, 사랑도 할 수 있고, 좋은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주님이 빠지면 모든 것이 짝퉁에 불과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최근에 천주교의 교황이 된 프란시스 교황은 하나님 없는 평화의 시대를 열겠다고 설교했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신앙인이 하나님이 배제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네,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골 3:17에 보니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없는 선한 생각, 주님이 없는 사랑, 주님이 없는 좋은 일, 주님이 없는 평화는 가짜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요셉처럼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요셉의 영성의 특징 세 가지를 살펴봤습니다.

    첫째, 순종(順從) 

    • obey, be obedient (to)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שָׁמָע 스트롱번호8091

    1.

    순종하는: 한 이스라엘인 ‘사마’

    2.

    대상11:44.

    발음 [ Shâmâʽ ]
    어원
    8085에서 유래
    구약 성경
    1회 사용
    • 1.
      고유명사 순종하는: 한 이스라엘인 ‘사마’, 대상11:44.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사마(대상11:44).



    둘째, 성장(成長) Growth 
    영도 성장하고 관계도 성장하고 인격도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רָבָה 스트롱번호7235

    1.

    증가하다

    2.

    확대되다

    3.

    위대해지다

    발음 [ râbâh ]
    구약 성경
    176회 사용



    צְמִיחָה


    셋째, 동행(同行)  accompany, go with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인정해야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과 동행하기를 바랍니다.


    הָלַךְ 스트롱번호1980

    1.

    가다

    2.

    ㉠ 창7:18.㉡ 대하26:8.㉢ 수16:8.㉣ 느6:17.

    3.

    ㉠ אֶל

    발음 [ hâlak ]
    구약 성경
    1549회 사용






    요셉 생애

    대흉년 2년차이자 요셉 나이 39세였을 때, 요셉의 형들은 이집트에 오자 얼굴을 땅에 대고 백성에게 곡물을 파는 이인 요셉에게 절한다. 졸지에 과거에 꿨던 꿈이 현실이 된 셈이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 때 요셉은 아직 형들이 과거에 자신을 노예로 판 일이 생각나 형들이 잘못을 뉘우쳤는지 아닌지 시험도 하고 아버지 야곱과 친동생 베냐민의 생사도 알고 싶었기에, 정체를 밝히지 않고 형들을 가리켜 "너희들은 이 땅의 약한 곳을 살피러 온 첩자"로 몬다. 형들은 "우리는 첩자가 아니며, 고향에 계신 아버지와 동생을 위해 곡물을 사러 온 것뿐"이라며 해명하나, 요셉은 "그렇다면 그 막내를 데리고 와 보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돌아갈 수 없다"라며 사흘 간 전부 옥에 가두어 버린다. 사흘 뒤 요셉은 형제들을 풀어주며 "내가 이집트의 총리이지만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이니 너희가 살 방법을 말해주겠다. 너희 중 한사람은 볼모로 남고 나머지는 식량을 사서 일단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후에 식량을 다시 사러 올 때 그 막내를 데려와 내게 보여준다면 모두 살게 될 것이다"라고 지시한다. 형제들은 "우리가 요셉에게 못된 짓을 해서 벌을 받는 것"이라 불안해하며 르우벤은 '내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이 하더니 결국 그 핏값을 치르는 것이다'하고 동생들을 야단치는데, 사이에 통역관을 세워뒀던지라 요셉이 자기들의 말을 알아듣는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요셉은 자리를 피해 혼자서 몰래 통곡한 뒤 다시 돌아와서 시므온을 체포해 데려간 뒤 나머지 형제들에게 식량을 팔아서 돌려보내고, 시종을 시켜 그들의 식량자루에 곡식 값을 도로 넣어두도록 몰래 지시한다. 이집트를 떠나고 얼마 후 자루 속에서 곡식 값을 발견한 형제들은 '하느님이 진짜 벌을 내리시려는가보다'하고 두려워하며 고향에 돌아가 아버지 야곱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장남 르우벤은 '만약 제가 베냐민을 무사히 데려오지 못한다면 제 두 아들을 죽이셔도 좋습니다'라는 선언까지 하며 약속했으나 야곱은 "너희들이 아주 형제들을 다 말아먹으려고 작정했느냐? 전에는 요셉을 잃어버리더니 이번에는 시므온을 잃어버리고, 그 다음은 베냐민까지 빼앗아가겠다고?"라고 노발대발하며 거부한다.

    고향에 돌아오고 얼마 후, 사 온 식량이 다 떨어져 다시 이집트에 곡물을 사러 가게 된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를 다시 한 번 설득한다. 야곱은 "대체 왜 그 사람에게 베냐민 얘기를 해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느냐?" 고 한탄하는데, 넷째 유다가 "베냐민을 보내주셔야 우리가 다 살 수 있습니다. 제가 담보가 될 테니 만약 제가 베냐민을 데려오지 못하면 제가 아버지 앞에 영원한 죄인이 되겠습니다." 라며 간곡히 호소했다. 형제들로서는 이집트에서 사온 곡식 자루들마다 지불했던 돈이 그대로 들어있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가진 것도 있고, 무엇보다 야곱은 과거 요셉을 잃었던 아픔도 있었기에, 또 다시 자식을 잃기 무서웠던 것도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사온 곡식도 전부 소진되고,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시므온은 죽은 목숨이기 때문에 야곱은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베냐민을 함께 보내기로 한다. 야곱은 그 총리에게 성의를 보여야 할 테니 꿀, 향품, 몰약, 유향나무 열매, 감복숭아 등을 선물로 들려보내며, 자루에 들어가있던 곡식 값은 2배로 챙겨 사죄비로 다시 지불하도록 한다.

    이집트에 도착한 형제들은 약속대로 요셉에게 베냐민을 제시한다. 요셉은 시종을 시켜 형제들을 자기 집으로 들인 뒤 연회를 열어 형제들과 호화로운 점심식사를 함께 한다. 형제들은 관리인에게 지난번 곡식자루에서 나온 돈을 돌려주며 상황을 설명하자, 미리 요셉에게 지시받은 관리인은 "그것은 하느님의 선물일 것이다. 나는 지난번 곡식값을 벌써 받았다."고 하며 돈을 받지 않으며 시므온을 데려온다. 시므온도 그간 감옥에 갇히지 않고 방에서 편히 지내고 있었다. 요셉은 형들에게 '너희 아버지는 잘 지내시냐'고 아버지의 안부를 묻고, 특히 친동생 베냐민을 보고 '네게 하느님이 은혜 베푸시길 바란다'고 축복까지 하며 총애한다.[20] 그리고 형제들 순으로 자리를 앉힌 후 식사를 하게 했다.[21] 요셉은 형제들의 곡식자루에 가져갈 수 있을 만큼 곡물을 채워 주지만 막내인 베냐민의 곡식자루에는 몰래 자기 은잔을 집어넣도록 지시한다. 형들이 옛날에 자신을 팔아버린 것처럼 막내 베냐민도 버리고 가는지 시험해보고 싶어서였다.

    형제들은 기분 좋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집트 병사들이 따라와 "너희가 어째서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냐? 총리께서 술 잡수시거나 점 칠 때 쓰시는 은잔을 훔쳐가다니!" 라고 호통을 친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던 형제들은 "은잔 같은 걸 훔칠 거였으면 우리가 지난번 자루에 들어가있던 곡식 값을 두 배나 챙겨서 돌려드리러 가져왔겠습니까? 만약 우리 중에 그런 자가 있다면 그는 죽어 마땅하며, 우리가 모두 총리의 노예가 되어도 좋습니다." 라고 역설한다.[22] 이에 대장이 좋다고 하며 각자 짐을 풀도록 시키는데, 당연히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자 형제들은 절망하고, 결국 또다시 요셉 앞에 끌려가게 된다. 물론 사실은 위에 나온대로 요셉이 형들을 상대로 옛날 자신이 당했듯 베냐민을 버릴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바뀌어 베냐민을 지켜주려 할 지 우애를 시험해 본 것. 다행히 형들은 예전과는 달리 베냐민을 팔지 않았고, 넷째 형 유다가 나서 "변명할 여지조차 없습니다. 베냐민 뿐 아니라 우리들도 베냐민과 같이 종이 되어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요셉은 "그럴 것 없고 잘못한 베냐민만 남고 나머지는 아버지께로 돌아가라." 고 명한다. 그러자 유다는 자신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유독 아끼시던 한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죽고 그 동생인 베냐민이 남아 아버지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었고, 그 형이 죽었을 때 아버지가 '나도 죽어 저승에서 아들을 만나겠다.' 라고 슬퍼하셨는데 베냐민마저 잃는다면 이번엔 정말 그리될 것이니 베냐민을 보내주시고 차라리 자신이 베냐민 대신 종으로 남겠다고 간청한다.[23]

    결국 견디지 못하고 감정이 폭발해버린 요셉은 고함을 질러 주위의 모든 이를 물린 후 파라오가 있는 편전까지 들릴 정도로 목놓아 울면서 마침내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형들은 경악하며 요셉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하고 애굽으로 팔아 넘기기까지 했던 형들을 차례차례 포옹하며 기꺼이 용서한다. 이후 요셉은 아버지를 모셔와서 이집트에 살게 하겠다고 말한다. 자초지종을 들은 파라오는 매우 기뻐하며 형들을 불러와 '좋은 수레들을 빌려 줄테니 가져가서 너희 가족과 재산들을 챙겨 이집트로 데려오라'며 요셉의 가족들을 이집트로 이주하도록 장려한다. 요셉은 형들에게 각각 좋은 옷을 한 벌 씩 선물하고,[24] 그들이 가나안 집으로 갔다가 다시 오면서 먹을 양식과 선물까지 넉넉히 챙겨서 형제들을 돌려보낸다. 돌아온 형제들은 앞다투어 아버지에게 요셉이 살아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요셉이 아버지를 태워 모셔오게 한 좋은 가마까지 보여주자 야곱은 다시 기력이 되살아났으며, '이제 됐다.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요셉을 다시 만나고야 말겠다.' 고 마음먹는다.

    곧 가나안에 있던 야곱의 부족들이 모두 막사를 정리하고 짐을 챙기고 가축들을 몰아 이집트로의 대이주를 시작한다. 가던 도중 브엘세바에 도착한 야곱은 문득 불안했는지 밤에 제사를 드리는데, 이에 응답한 하느님은 '이집트로 가는 걸 무서워할 것 없다. 너의 일족이 이집트에서 대성할 것이고, 네가 거기서 편안히 죽어 요셉이 네 눈을 감겨줄 것이다.' 라고 야곱을 위로한다. 이윽고 이들이 이집트에 도달하자 요셉은 고센 땅까지 마중을 나오러 달려와 꿈에도 그리워하던 아버지와 얼싸안고 울며 재회한 뒤 아버지와 형제들과 둘러 앉아서 '이제 파라오를 만날건데, 이집트인들은 목축업을 천시하니 직업이 목축업이라고 하면 이집트인들에게 크게 엮이지 않고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조언한 뒤 형들 중 다섯을 데리고서 파라오를 알현한다.

    형들은 요셉의 조언대로 파라오에게 자신들을 목자라 소개했고, 파라오는 이들을 배려해 이집트 고센 땅에 머무르게 하며, 그들 중 실력 좋은 자를 뽑아 자신의 가축들도 관리하게 한다. 이어서 아버지 야곱도 파라오에게 소개한 이후 요셉은 파라오의 명을 받아 비옥한 라암세스 지역을 받아 가족들이 살게 했다.

    파란만장했던 가족사가 이렇게 마무리가 되고, 요셉은 업무로 복귀한다. 자신이 예견했던대로 흉년이 점점 심해지고, 백성들이 매년 대량의 곡식을 사 가다 보니 국가의 경제력이 왕실 재정으로 몽땅 몰리기 시작했다. 끝내 백성들이 곡식을 살 돈조차 없어지고 마는데, 이에 백성들이 찾아와 호소하자 요셉은 '그렇다면 돈 대신 각자 가축들을 끌어오면 그 가축 값대로 곡식을 대신 팔겠다'고 선언하고 덕분에 백성들은 다시 기근을 넘겼다. 하지만 이 또한 1년뿐이었고 이듬해 다시 식량이 떨어진 백성들은 다시 찾아와 '이제 남은 건 몸과 밭밖에 없으니 차라리 우리 몸을 파라오에게 팔아 종이 되고 식량을 받겠다'고 한다. 이에 요셉이 수락하여 '이제 여러분의 토지는 공식적으로 파라오의 소유가 될 것이며, 여러분은 파라오의 소작농이 될 것입니다. 씨앗과 모를 나누어줄테니 밭을 일구어 식량을 얻고, 추수 때마다 수확물의 1/5을 떼어 파라오께 세금으로 납부하시고 나머지를 쓰도록 하십시오'라고 선포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야곱은 사망하기 전 자신의 열두 아들을 불러 각자에게 축복을 내려줘야 했는데, 이때 형제들 모르게 요셉과 요셉의 두 아들을 따로 불러내고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들여서 야곱의 다른 아들들과 같은 몫을 차지하게 해준다. 야곱의 임종이 다가오자 요셉은 두 아들을 데리고 야곱에게 가는데, 야곱은 남은 기력을 쥐어짜내 일어나 두 손자에게 축복의 입맞춤을 하고 포옹한 뒤 나란히 세우고, "내가 살아서 요셉 너를 다시 만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는데, 하느님께서는 한 술 더 떠서 너의 아들들까지 내 눈으로 살아서 보게 해주셨구나"라고 기뻐하며 팔을 X자로 펴서 오른손을 둘째 에브라임에게, 왼손을 장남 므낫세의 머리에 올린다. 이를 본 요셉은 '아버지, 얘가 장남 므낫세입니다. 오른손을 므낫세에게 얹으시죠'라 했지만[25] 야곱은 '나도 안다. 므낫세도 잘 되어 크게 번성할 것이다. 하지만 에브라임이 형보다 더 크게 될테고 이 아이에게서 수많은 핏줄들이 갈라져 나올 것이다'라고 예언하며 두 손자를 축복한다. 어쨌든 이로써 이집트 여인과의 혼혈인 요셉의 아들들 역시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인정받았고, 요셉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12지파 중 두 지파의 선조가 된 셈이다. 이후 형제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축복할 때에 요셉은 "무성한 가지"라는 표현으로 축복을 받았고 그 후 야곱은 아들들이 둘러모여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사망한다. 요셉은 아버지의 시신을 40일에 걸쳐 방부처리하고, 이집트의 지인들이 70일간 애곡하는 기간을 가진 뒤, 파라오의 윤허를 받아 요단강의 동쪽으로 운구해 가는데, 왕실의 문무백관, 궁중 장로, 가문 사람들, 대규모 호위 군사들까지 붙어 왕의 장례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의 형들은 "이제 아버지가 없으니, 요셉이 아버지 생전에 애써 숨기던 적개심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라 여겨 요셉에게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며 위로하였다.

    이 말은 즉, 요셉이 자신의 가문을 통해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라는 언약을 잡고 자신의 모든 힘들었던 여정이 언약의 여정이었음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실제 예수 그리스도는 요셉의 넷째 형 유다족속을 통해 탄생하셨다.

    외경 중에 요셉의 언약에서는 요셉이 꿈에서 유다 지파의 여자와 어린 양에 대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후 요셉은 110세까지 살게 되는데, 죽기 전 "언젠가 자손들이 고향에 돌아가면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리하여 죽을 때는 이집트에 묻히나,[26] 후손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가나안 땅으로 옮겨진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나중에 세월이 지나 탈출기의 시대로 가면 요셉의 공적이 잊혀져서, 요셉과 형제들의 후손들은 단순한 이방인에 노예 취급을 받는다. 탈출기 후기설을 채택하여 해석하면, 이것은 요셉이 총리로 있을 때 파라오가 외부 유목민인 힉소스 계통의 혈통이었는데[27] 이집트인들이 요셉이 죽은 후 힉소스인들을 몰아내면서 지배층이 바뀌어 그렇게 된 것이었다.[28]

    팔레스타인의 나블루스에는 실제 요셉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은 20세기 들어와서 수난을 겪었는데 6일 전쟁 이후 이 지역은 이스라엘의 소유가 되었지만 오슬로 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의 소속으로 하되 유대인들이 계속 현장 방문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 나블루스를 재관할하면서 무덤 참배객들이 계속 총격을 받는가 하면 훼손 또한 자주 일어났다.

    [1] 참고로 요셉이 입은 색동옷은 이름처럼 여러 색으로 되어있다는 뜻이 아니라 소매가 길고 술이 달린 외투/겉옷을 말한다.[2] 철장은 우리말로 하면 쇠 막대기 또는 쇠 지팡이.[3] 말이 좋아 꿈쟁이지 좀 거칠게 말하자면 꿈이나 꾸는 자식 같은 멸칭에 가깝다.[4] 성경에서는 '이스마엘의 사람들(미디안인)'이라고 언급하였다.[5] 정확한 직책은 가정 총무이다.[6] 고대 노예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노예 제도와 조금 다르다. 노예 신분이라도 전문직에 종사한 사례가 많다. 일반 가정에서도 막일하는 노예부터 가정교사나 집사를 담당하는 노예 등 다양한 일을 했다. 로마의 경우 자유민이 된 노예에게 부모가 없다면 옛 주인이 법적인 부모 역할을 해야 하는 법도 있었다.[7] 성경에도 매일 요셉을 유혹하였다고 기록한다.[8] 이 부분은 고대 이집트에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 '두 형제 이야기'와 유사성을 보인다.[9] 이를 보면 보디발도 요셉이 그러지 않았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감옥행으로 끝낸 것 같다[10] 북한에 있는 것 같은 그런 살인 수용소라기보다는 소위 말하는 '범털' 전용 감옥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만일 북한의 수용소 수준이었다면 요셉은 죽거나 최소한 그런 전개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어차피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보호해주시긴 했겠지만...[11] 다만 성서 원문에서는 그냥 투옥시킨 게 아니라 분노해서 투옥시켰다고 언급되므로 문맥상 아내의 모함을 믿고 요셉한테 분노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아니면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려고 했고 총애하던 요셉을 모함함으로 분노했을 수도 있다.[12] 주류 역사학계는 이 당시의 파라오를 상이집트(제 17왕조)의 파라오였던 세누스레트 4세로 본다.[13] 소의 암컷[14] 皮骨, 살가죽과 뼈.[15] 相接, 살가죽과 뼈가 맞붙을 정도로 몹시 마르다[16] 성경에서는 '파리한'이라고 쓰여 있다.[17] 파라오는 신분만 높을 뿐, 통치권은 거의 모두 요셉에게 위임하였다. 성경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 내가 너보다 높은 이유는 그저 이 옥좌 하나 때문이다"라는 파라오로서는 놀라운 발언을 했다. 전근대시대에 왕이 직접 의전과 집무실을 빼면 나와 동급이라고 공인한거다.[18] 재물을 다 바치고도 식량을 충분히 구하지 못해 나중엔 가축을 바쳐야 했고, 그것마저 떨어지자 나중엔 땅까지 내야 했다. 땅을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수확의 1/10를 바쳐야 했기에 사실상 소작농 신세가 되어버린다. 다르게 보면 지방 귀족들을 몰락시켜서 왕권을 강화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역사적으로 토지를 가진 지역 귀족들이야말로 왕조교체의 주역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지방 귀족들의 경제 기반이 붕괴되어서 중앙집권을 성사시킨 것.[19] 최초의 마이너스 금리 시행자로 보는 주류 역사학자들도 있다.[20] 그를 만났을 때 감격하여 뒷방으로 가서 한참 조용히 울기도 했다.[21] 형제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겼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식사를 맛있게 했다고 하며, 베냐민에게는 다른 형제들보다 5배의 음식이 제공되었다.[22] 요셉이 점치는 데 쓰는 잔이라고 하는데 요셉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말로 점을 쳤을 리는 없고, 형들을 상대로 자신의 신분을 위장할 겸 형들을 시험하기 위해 꺼낸 말일 것이다. 이집트에는 그릇에 기름을 넣어 퍼지는 모양으로 점을 치는 미신이 있었다. 그래서 레위기 19장 26절에서는 점을 치는 미신을 금하고 있다. 천주교 주교회의, 창세기, 154쪽[23] 이집트로 오기 전 유다가 아버지께 "만약 베냐민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평생 그 죄를 짊어지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24] 베냐민에게는 다섯 벌을 주었고 덤으로 은 삼백 냥까지 얹어준다.[25] '오른쪽'이 '서열 1위의 권위, 권력자의 권력'을 상징하기 때문이다.[26] 이때 요셉의 유해 역시 미라로 만들어졌다. 창세기 50장에서도 해당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27] 기원전 1600년경 제15왕조 말기 무렵.[28] 그러니까 빗대자면, 마치 원나라 시기에 고려양 전파나 기황후 처럼 요셉도 힉소스 궁중이었기에 고관으로 기용이 가능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실제로 명나라는 중기부터 의도적으로 고려식 복색을 규제해간다.)


    아름다운 마무리(창세기50장)

    본문은 야곱의 죽음 후에 요셉에게 있었던 일과 요셉의 죽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죽음을 맞이하자 요셉은 아들로서 의무를 다하는데 아버지 야곱의 유언에 따라 장례를 치릅니다. 요셉이 장례를 치르는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장례를 치르는 기간과 그 규모입니다. 시신이 썩지 않도록 40일에 걸쳐서 향으로 처리를 하고 슬퍼하며 곡을 하는데, 애굽 사람들이 곡을 하는 기간이 무려 70일입니다. 바로가 죽었을 때 애곡하는 기간이 72일인 것과 비교하면 요셉의 아버지는 바로의 애도 기간보다 불과 2일이 적은 기간입니다.

    장례 기간뿐만 아니라 요셉이 바로의 허락을 받아 가나안으로 떠나는데 규모를 보면 그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7~9)

    장례의 기간이나 규모를 통해 애굽에서 요셉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만큼 높은 위치에 있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성대하게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브라함이 구입했던 매장지에 아버지를 장사합니다. 아버지를 장사하기 위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요셉, 열일곱 살에 떠나 대략 39년 만에 고향 땅을 밟는 겁니다.

    야곱의 장례를 보면서 또 하나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슬픔입니다. 애굽에서 70일의 애도의 기간이 지나고 요셉은 가나안 땅으로 와서 다시 7일 동안 슬퍼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면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고 부릅니다. 요셉은 자신의 체면이나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슬픔을 표한 것이 아니라 정말 큰 슬픔에 빠져 울면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것입니다.

    이렇게 슬퍼하는 요셉을 보고 있으면 상대적으로 요셉의 형들은 별로 슬프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슬퍼하는 요셉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요셉의 형들에 대해서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요셉은 큰 슬픔에 빠졌지만, 요셉의 형들은 슬픔보다 다른 것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두려움에 빠져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15)

    그들이 행한 악을 요셉이 되갚을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요셉은 두려움에 빠진 형들을 건져내기 위해서, 반복해서 두려워하지 마소서”(19, 21)하고 말해야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죽이려했고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동생에게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열일곱 살이었던 요셉이 당한 충격과 괴로움은 당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보통 기대하는 이야기는 어떤 걸까요?

    밑바닥까지 떨어진 주인공이 이를 악물고 복수를 다짐해서 치밀한 계획과 준비를 마치고 통쾌하게 갚아주는 것, 그런 걸 기대합니다.

    이제 요셉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때가 왔습니다. 요셉과 형들의 입장은 완전히 바뀌었고 요셉의 말 한 마디면 형들은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자신을 외면했던 형들에게 자신이 당했던 고통을 돌려 줄 수 있습니다. 곁에서 요셉을 말릴 수 있는 아버지는 안계십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형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셨던 말씀을 요셉에게 전합니다. 야곱이 죽기 전에 한 말입니다.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17) 형들은 아버지가 남긴 말씀을 전하고 요셉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합니다.

    죄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렇게 어렵게 만듭니다.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자신을 애굽으로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그들을 받아주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형들에게는 죄책감이 남아있었고 불안했던 겁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또 다시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대가 없이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그냥 혼나면서 그에 대한 대가를 조금이라도 치르고 나면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니까 불안하고 언제라도 터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들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라면 이렇게 할 거 같으니까 상대방도 이렇게 할 거라 생각합니다. 내가 요셉이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지금이 기회인데 분명 복수할거야! 당한 만큼 돌려줄 거야!‘ 이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는 겁니다.

    사람들의 당연한 반응이 아닙니까? 내가 당한 만큼 갚아주고 싶고, 나를 아프게 한 사람 그 사람도 아팠으면 좋겠고,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은 더 힘들었으면 좋겠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래 하나님은 살아계셔!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야,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고 마음에 불만과 원망이 생깁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악한 본성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악한 본성을 나 혼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들 가지고 있고 그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데 어떻겠습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미움과 다툼이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요셉처럼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요셉이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19)

    하나님을 대신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상황을 아시고 나의 어려움을 아시고, 나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악을 행했을 때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 사이에 죄로 인해 어려움이 생겼을 때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않고 그 모든 상황을 통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가능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20)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해치려고 했지만, 그들은 요셉에게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요셉은 그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믿음으로 행할 수 있었습니다.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않고, 그들에게 복수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상황은 우리를 속입니다. 그 상황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요셉이 처했던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나를 미워해서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 자유를 빼앗긴 나의 상황, 거짓말로 나를 비참하게 만든 그 여자,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힌 나의 상황, 상황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답답한 상황들은 우리를 속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러니 그런 속임에 넘어가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내 상황 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 문제보다 더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 어려움을 모두 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복수하고픈 마음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 속삭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에 내가 뭐라고 반대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나에게는 어려움 일 수 있지만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뜻을 이루신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만족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내가 도구로 사용된다면 감사한 일 아닙니까?

    하나님이 요셉을 사용하셔서 수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하셨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큰 민족이 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요셉 입장에서 그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괴로웠지만, 아픔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그 과정을 통과했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놀라운 일을 이루셨고, 그 일에 요셉을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상황은 어떠십니까? 어떤 상황이 여러분을 속이려고 합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돼!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 말 못할 아픔으로 가슴앓이를 하기도 하고, 앞뒤에 꽉 막힌 상황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고, 남들과 비교되는 나의 처지 때문에 낙심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와 계획안에서 여러분의 인생을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그 뜻대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가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 과정에서 그림을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구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했습니다. 복수하는 것, 어떻게든 다른 사람의 죄를 심판하는 것,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을 갚아 주는 것, 요셉은 이런 것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그분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요셉의 믿음은 그의 마지막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그의 자손들에게 유언의 말을 전합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24~25)

    요셉의 유언은 두 가지 내용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그들을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여 주실 거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땅에 이를 때에 자신의 뼈를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하나님 약속에 대한 요셉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요셉의 유언에서 반복되는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표현입니다. 요셉은 특별히 강조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돌보신다는 단어의 원래 의미는 방문한다’, ‘찾아온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반드시 그들을 찾아오실 거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오셔서 약속하신 것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킬 것이니 하나님이 오시기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그 약속의 말씀을 자손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라 명하며 자신의 삶을 마무리합니다.

    이와 같은 요셉의 삶을 우리는 아름다운 삶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셉의 삶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어려움을 이기고 총리가 되어 성공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요셉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그가 삶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을 신뢰했고,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요셉이 자신의 삶을 믿음으로 아름답게 가꾼 결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요셉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요셉의 삶이 하나님이 빚으신 작품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빚어 가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KBS 다큐에 방영된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채팅방에도 공유된 적이 있는데 교회오빠라는 제목의 다큐입니다.

    젊은 한 부부가 나오는데 남편이 어느 날 배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습니다.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하며 투병 생활을 하는데, 다음해에는 아내가 산후 조리를 마치고 나와서 검사를 받았는데 림프종 혈액암 4기 판정을 받습니다. 남편의 항암치료가 끝나자 마치 릴레이 경주를 하듯이 아내의 항암치료가 시작됩니다.

    남편은 그 과정 속에서 이런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주님 살려주세요. 이러다 저희 가정 다 죽겠습니다.’ 그러면서 부부는 서로가 그 아픔을 알기에 배우자가 투병 중에 있을 때 어떤 마음인지 서로를 이해하며 격려합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되었고 치료는 종료됩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14개월 만에 남편의 암은 재발되었고 상태는 아주 심각합니다. 복막에서부터 여러 장기에까지 전이된 것입니다. 의사의 표현으로 모래를 뿌려 놓은 것과 같다는 겁니다.

    제가 이 영상을 보는데, 그냥 눈물이 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렇게 고생하다가 죽으면 어떡하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안 좋게 생각할 텐데 걱정이 되는 겁니다. 암에서 나아서 건강해져야 될 텐데

    그런데 남편이 이런 말을 합니다. 그 말이 제 마음을 울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어리석은 생각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보면 내가 이 질병에서 완치되어야지 기적이라고 생각할거야 그런 기적들만을 바라고 있으니까, 우리가 질병을 만나서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이고 은혜인지 우리는 암이라는 질병을 통해서 깨달았잖아. 그래서 암 자체는 축복은 아니지만, 암을 통해 우리가 얻은 유익인거 같아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저보고 하루라도 더 살아야 되냐고 물어봤을 때는 하루라는 시간을 통해서 제가 조금이라도 더 온전해지는 기회를 얻고 싶은 거예요

    하루하루 눈뜨고 호흡하고 있음에 감사하고 잠자리에 들 때는 오늘 하루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있음을 감사하고 우리 부부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명, 그렇게 사명을 잘 감당하고 죽는 죽음이라면 삶에 대한 후회가 없을 것 같고

    그의 아내가 대답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수명을 살지 못하고 부르심을 받는다 해도 하고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남은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아닌 걸 우리는 알잖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가 우리에게 펼쳐질 영원한 하늘나라를 기다리며 삽니다. 약속을 기다립니다. 주님이 우리를 돌보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믿음으로 약속을 바라보고 주어진 상황 속에서 주님을 신뢰하며 산다면, 그 때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을 만날 날을 기다리며 산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내가 조금 더 성숙하는 기회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기회로,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간다면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요셉의 입관(창세기 50:24~26)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창세기의 하나님의 역사는 50장에서 요셉의 죽음과 입관으로 끝이 난다.
    하나님은 태초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이 땅에 계획과 목적이 있으셨다.
    특별히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그 기대와 마음은 매우 특별하다는 것을 창세기를 보면서 본다.
    아브라함을 보면서, 이삭을 보면서, 야곱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그 사람 일생의 작고 어두운 일까지도 때론 매우 섬세하게 때론 매우 역동적으로 기술하며 보여준다.

    오늘 5~6,000년이 지나서까지 우리 모두는 그들이 어떻게 태어나고, 자라고 하나님의 손안에 무엇을 체험하고 배우고 잃으면서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로 살았는지를 보고 있다.
    이 두꺼운 성경책에 하나님은 사람의 일생에 대해 계속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이 무슨 책인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디모데후서에서는 말한다.

    하나님이 관심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의 일생을 관심하신다.
    우리의 일상을 관심하신다.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감사하고, 체험하는 지를 관심하신다.
    이제 하나님은 그분의 역사와 계획과 완성이 사람안에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창세기의 끝은 요셉의 입관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이 땅에서 역사가 요셉의 죽음과 입관으로 끝난다는 것은 매우 인상이 깊다.

    창세기(Genesis)는 창조에 관한 기록이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하신 역사이다.
    그 역사가 오늘날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사람의 일생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삶을 관심하시며, 기억하시며, 간섭하신다. 당신의 근심에서, 당신의 원함에서, 당신의 기쁨과 만족에서, 당신의 두려움에서, 당신의 간절함에서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신다. 당신의 창세기는 아마도 당신이 죽고 입관하게 될 때 끝날지 모른다. 책이 끝날때는 그 책의 주제와 흐름과 방향이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책이 시작될 때 거기엔 이미 다른 주제와 내용과 흐름이 있는 것이다. 창세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창세기의 주인공은 하나님이 아니다.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의 인도와 역사와 돌보심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도 우리 사람의 인생을 통해 그분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구보다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을 응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응원하시지 않겠는가? 누구는 응원하고 누구는 저주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한 사람에 대한 사랑과 긍휼을 넘치도록 갖고 계신다.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요한복음에서 말하지 않는가? 그분은 우리를 응원하고 계신다. 다만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을 위해 제물을 드리는 가인을 본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장자권을 가볍게 여긴 에서를 본다. 그리고 하나님의 꿈을 우습게 여기는 요셉의 형제들을 본다. 가인과 아벨의 차이가 무엇이겠는가? 에서와 야곱의 차이는 무엇이겠는가?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차이는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만을 받으시고, 야곱만을 사랑하셨고, 요셉에게만 꿈을 주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왜 그럼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했는가? 왜 다른 이들은 성경에 기록하지 않는가?

    그 차이를 성경에서는 ‘믿음’이라고 말한다. 제물을 그냥 드리면 되지 않는가? 내가 잘 준비해서 드리면 되는 것이지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이 바로 가인이다. 아벨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마음으로 감동하고 감사하고, 고민하여 드린 것이다. 제물을 드리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아직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가? 보이지도 않는 ‘장자권’이 보이는 팥죽보다 가치가 있는가? 이것이 에서의 생각이다. 내가 첫째인데, 내가 열심히 사냥하고 노력하고 수고하면 되는것이지, 넌 무슨 ‘장자권’... 그래 그것을 네가 가진들 무엇이 달라지는데? 그것을 네가 어떻게 쓸건데? 기집애같이 약하고 팥죽이나 만들지 사냥도 못하면서 뭘 어떻게 할건데? 야곱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싶었다. 그가 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축복 만큼은 받고 싶었다. 어쩌면 에서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장자권이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하지만 그러한 사모함과 간절한 믿음이 야곱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왜 이러한 마음이 있었겠는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신것과 분명 그분이 축복하심을 받기를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꿈을 요셉에게만 주었겠는가? 요셉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형들이 그를 미워했는지도 모른다. 너는 왜 그런생각을 하니? 너는 왜 그런 것을 바라니? 하나님께 그런 것을 바란다고 이루어질 것 같니? 사람들은 자기와 같지 않으면 무시하고 조롱하고 심지어 미워한다. 요셉은 하나님과 함께 꿈을 꾸었다. ‘요셉아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건데, 너 나를 믿고 따라올수 있겠니? 네가 포기하지 않으면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이 있는데, 네가 순종할수 있겠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씩씩하게 반응하였을 것이다. ‘하나님 주님이 주신다면 제가 순종하며 따라갈께요’.

    하나님은 오늘 사람을 관심하신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관심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관심을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을 관심하시기에, 누군가 하나님을 관심하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창세기가 사람의 일생을 기록했다는 것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오늘 하나님은 당신을 관심하신다. 당신이 반응한다면, 당신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다면 하나님은 오늘 다시 그분의 창세기를 기록하실 것이다.

    창세기가 요셉의 죽음과 입관으로 끝난다는 것은 슬픈일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아무도 하나님을 관심하거나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음책인 출애굽기를 보면 430년간 애굽에 있으면서 그들은 이제 애굽의 종이 되어버린다.
    요셉이 있을 때 그들은 왕과 같은 지위를 가졌지만 이제 430년이 흐를 때 그들은 노예의 신분으로 변해버렸다.
    이것이 무엇인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의지하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때 우리의 신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도, 능력도 없는 세상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가운데 하나님의 창세기가 이어질수 있기를 원한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하는 책이다.
    다시말하지만 이제 하늘과 땅을 만드는 그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우리의 삶가운데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이 땅에 보여주고 싶어하신다.
    그일을 위해 오늘 이 땅에 있는 것이다.
    창세기는 끝나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역사와 그분의 움직임은 계속되어야 한다.

    오늘 요셉의 죽음과 입관을 가장 슬퍼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찾지 못할 때 그 때가 바로 창세기가 끝나는 것이다.
    오늘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창세기가 계속되기를 소망한다.





    1월 16일(목) 창세기 46-4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고센 땅(46:28)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Now Jacob sent Judah ahead of him to Joseph to get directions to Goshen. When they arrived in the region of Goshen,


    고센(Gôshen) גֹּשֶׁן 스트롱번호 1657

    1. 히브리인들이 야곱 때부터 모세 때까지 거주하던 애굽의 땅 ‘고센’
    2. 유다 지파의 영역과 이웃하고 있던 성 ‘고센’
    발음 [ Gôshen ]
    어원 / 애굽어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5회 사용
    • 1. 고유명사 히브리인들이 야곱 때부터 모세 때까지 거주하던 애굽의 땅 ‘고센’, 창45:10, 46:28,34, 47:27, 50:8, 출9:26
    • 2. 고유명사 유다 지파의 영역과 이웃하고 있던 성 ‘고센’, 수10:41, 11:16, 15:51.
    • 관련 성경  /   고센(창 45:10, 46:28, 34, 47:27, 50:8, 출 9:26, 수 10:41, 11:16, 15:51).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 2차 애굽 방문 때의 공적(44:18 -34)으로 인해 야곱은 유다를 매우 신임하였으므로 가족을 대표하여 그를 요셉에게 보낸것 같다.


    고센(Goshen) 야곱과 요셉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터전으로 삼은 애굽땅

      "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의 며느리들 외ㅇ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태어난 자이며   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두 명이니 야곱의 집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 (창세기 46:26-27) 



    고센 땅의 위치는 애굽의 국경지대로서 야곱의 고향인 가나안 땅과 가까운 지역으로  야곱과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며 생활터전을 좋은 땅-고센으로 정한다.
    고센은 나일삼각주에 위치해 비옥하고 강우량이 양호하며 나일강이 가까워 관개가 용이한 풍요의 땅이요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다. 

    모세의 출애굽시기까지 430년간 애굽에 거하며 번성하여 전쟁나갈 수 있는 장성한 남자만 60만(603,550명)이 넘고 온 백성은 250~300만에 이른 대민족이 되어 애굽을 두렵게 한다.


     *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지역의 7년 기근으로 요셉의 아버지 야곱과 그의 형제들은 팔려간 요셉이 총리가 되어 있는 애굽으로 온다.

    애굽으로 이주했던 야곱의 가족 수는 70명인가 75명인가?

    성경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숫자는 1이 2가 될 수 없고 2가 1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애굽으로 이주했던 야곱의 가족 수는 70명(창 46:27)이 옳은가? 아니면 75명(행 7:14)이 옳은가?
    아니면 둘 다 옳은가?
    70명이 옳고 75명은 틀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 기록이 잘못이라는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성경은 거짓이 없고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만 사도행전 7장에서 말하는 75명의 숫자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니, 스데반 집사의 개인 설교 내용 중 잘못된 부분이 있을 뿐이다.
    만약 성경이 스데반 집사의 설교 중 실수한 부분을 올바로 고쳐서 기록했다면 성경이 잘못(유오) 된 것이다.
    성경은 스데반 집사의 설교 내용 중 그가 실수(mistake)한 부분도 그대로 인용했기에 전혀 거짓이 없고 무오한 것이 된다.
    성경은 많은 믿음의 조상들의 장점을 기록해 줄뿐만 아니라 단점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사도 바울도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고 말해주고 있으며, 유명한 모세, 다윗, 사울(바울)도 살인하는 죄를 범하였고, 아브라함도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성경은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에 더욱 우리 자신을 점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한다.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자세히 살펴본 결과 그의 설교에 다음과 같은 실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코 스데반 집사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전혀 아님을 이해하여 주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이 글을 쓴다.

    스데반 집사 설교 내용 중에 잘못(mistake) 된 것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갈대아에 있을 때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 명했는가? Not Sure.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 즉 갈대아에 있을 때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고 하셨다고 했는데, 구약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다. 구약에는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가 가족과 함께 갈대아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에 하란에 머물게 되었고 거기에서 정착했다고 말한다. 그러면 왜 데라는 갈대아를 떠나려 했을까? 성경엔 기록이 없으나 필자의 견해로는 데라가 자기 아들 하란이 죽은 충격으로 가나안으로 가려 했다. 가던 도중 머물게 된 곳의 이름을 자기 아들 이름인 ‘하란’이라 지어서 정착했을 것이다. 하란에서 오랫동안 머물게 되자,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종)들, 아내와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떠나게 된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지시할 땅으로 떠나라고 하셨던 때와 장소는 갈대아에서 아브라함이 젊은 청년의 때가 아니라 하란에서 가장으로 부요하게 되었을 때라고 보여진다.



    둘째, 아브라함이 그 아비 데라가 죽으매 가나안으로 떠났다? No.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는 아브라함이 ‘그 아비가 죽으매’(행7:4) 떠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의 사건들의 숫자 계산을 해보면 분명히 그의 아비 데라가 살아 있을 때 떠났다. 왜냐하면 데라는 70세에 아브라함,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창11:26),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향해 떠난 때는 아브라함의 나이 75세(출 12:4)였다. 그 당시 데라는 145세 였고, 데라가 죽은 때는 205세(창11:32)이므로 데라가 죽고 나서 떠난 것은 아니다.
    데라가 70세에 세 쌍둥이를 낳았다고 보지 않는다. 만약 아브라함이 큰아들이었다면,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떠날 때 아버지 데라는 살아 있었으며 그 후에도 하란에서 데라는 60년을 더 살았다는 것이며, 아브라함이 큰아들이 아니고 둘째나 셋째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그 형제들의 나이 차이가 60살이 된다고 하는 것은 납득하기 아주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향해 떠날 때 그의 아버지가 죽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아브라함이 아비집을 떠났다는 것이 더욱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셋째, 야곱과 그 가족들이 애굽에 이주한 숫자가 75명이었다? No.

    창세기 46장 26절에는 야곱과 함께 애굽에 내려간 숫자는 야곱의 자부를 제외하고 66명이며, 27절에는 야곱과 요셉, 그 아들 둘 모두 4명을 합하여 정확하게 70명이었다고 말해 준다. 그러니 이 70명은 야곱을 포함한 직계 가족의 숫자가 분명하며 며느리들과 손자 며느리들까지 모두 합하면 필자의 견해로는 100여명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75명이란 숫자는 스데반 집사가 잘못 알고 설교했던 것이다.

    넷째, 야곱과 그 조상들이 세겜에 장사되었다? No.

    창 23장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127세에 죽었을 때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 마르레 앞 막벨라 굴을 에브론에게서 사서 그곳에 장사지냈다. 그후 아브라함, 이삭과 그 아내 그리고 야곱과 그 아내 레아도 그곳에 장사 되었다(창49:30-33). 그러므로 야곱과 그 조상들이 세겜에 장사 되었다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는 틀린 것이며 세겜은 그 당시에 사마리아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요셉의 후손들이 차지한 땅에 속하며 이 세겜에는 요셉이 장사됐다(수24:32).

    스데반 집사의 이러한 잘못된 언급은 공회원들의 큰 반감과 분노를 갖게 되었고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다. 왜냐면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아주 업신여겼으며 상종도 하지 않았는데, 야곱과 그 조상들이 세겜 즉 사마리아 지역에 장사되었다고 하는 잘못된 말에 공회원들은 악감을 갖게 된 것이다. 당시에 유다지역과 갈릴리 지역을 통행하던 사람들이 중간에 위치한 사마리안 지역의 땅을 밟지도 않으려고 우회해서 요단강 동편의 길을 통해 왕래했던 상황인데 자기 조상들이 그러한 땅에 묻혔다고 말했으니 얼마나 분개했겠는가?

    다섯째, 야곱과 그 조상의 장지는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샀다? No.

    아브라함이 산 땅은 세겜이 아니요, 마므레 앞 즉 헤브론이며, 에브론에게서 은 400세겔을 주고 샀던 땅이다(창23:15). 세겜 땅은 야곱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 100개로 샀던 땅이다(창33:19). 그러므로 스데반 집사는 야곱과 그 조상의 장지도 틀리고, 누구에게서 구입하였던 땅인 것도 틀리게 말한 것이다.

    모든 인간들의 설교에는 실수가 있을 수 있다. 첫 순교자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도 실수가 발견된다. 이와 같은 인간들의 과오나 실수를 통해 “성경은 거짓 없고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이 더욱 증명된다. 그리고 그 기록된 숫자들을 통해 성경이 진정 하나님의 말씀임을 우리는 더욱 깨달아가게 된다.

    베드로는 믿음으로 물위를 걸었으나 곧 물에 빠진다. 어부 출신인 베드로는 수영을 잘할 수 있었지만 손을 내밀어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고, 주님의 손에 붙잡힌 베드로는 다시 물에 빠지지 않는다.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의 능력과 영광은 더욱 나타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스데반 집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스데반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과 그 우편에 예수께서 나타나 보여 주셨다. 스데반 집사는 주님의 영광이 모든 자들에게 선포하며, 기쁨으로 순교의 길을 걷게 됐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말하며 잠을 자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부지 중이건 무지 중이건 말에 실수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겸손(Humble)하고 정직(Honest)한 믿음(Faithfulness)의 사람들에겐 저들의 실수마저 아름답게 만들어 자기(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 보이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고백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1〕

    나일 강의 삼각주의 동쪽 지역이다.  야곱의 애굽 이주로부터 출애굽까지 이스라엘 사람이 살은 목축에 적합한 땅이었다(창 45:10,46:28,29,34,47:1, 4, 6, 27,50:8, 출 8:22,9:26).

    범위는 분명치 않은데, 구약 외전 유디드서(Book of Judith) 1:9에는 다바네스와 라암셋을 고센 땅에 포함하고 있다(창 47:6의 `고센 땅'과 11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세스'는 이름은 다르나 같은 땅이다).

    유다계 문서에 의하면,

    이스라엘 사람은 이 지방에 살면서 애굽인과의 접촉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에브라임계 문서와 제사전(祭司典)에 의하면, 고센은 목축생활의 최적지로서 농경지로서는 대체적으로 부적합한 곳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고센은 나일 강 본류로부터 멀고 관개에 불편한 곳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는 경작되고 있었음이 민수기 11:5로 짐작된다. 헬라역(LXX)은 창세기 45:10,46:34을 Gevsm jArabivas(아랍의 게셈)이라고 하였다.

    이 아랍은 희랍, 로마 시대의 하부 애굽의 정치적 분할 23개 도의 하나인 nomosArabia(아라비아 도)를 가리키고 고대의 상형문자의 도표(舊柰)에는 하부 애굽의 제 20도셉드(Sept)라 불리우고 있던 것이다(고대에는 20도로 분할되어 있었지만, 희랍,로마 시대에는 23도로 늘었다).  아랍도는 하부 애굽의 동단을 이루는 도인데, 스트라보(Strabo)는 이것을 나일과 펠루시움(Pelusium), 그리고 고호(苦湖, Bitter Lake) 사이에 두고 도레미는 부바스틱(Bubastic), 즉 펠루사익(Pelusaic) 지류의 동쪽에 두고 있다.

    또 헬라역(LXX)은 창세기 46:28에서는 헤오른 볼리스(`Hrwvwn povli)를 그 도성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 헤오른 볼리스는 이스마리아의 서쪽 20㎞, 와 디 두밀랏(wady Tumilat)에 있는 오늘날의 델마슈구다(Tell-Mashkuta=像丘)와 동일시된다. 그리고 1883년과 85년에 나빌(E. Naville)에 의해 조직적으로 발굴되었다.그러나 지리학자 톨레미(Ptolemaeus)에 의하면, 아라비아도의 서울은 바쿠사(Fakou'ssa,Phacussa)였다고 한다.

    이것은 애굽어의 `市'를 의미하는 바(pa)를 같이 읽는 것으로서 게셈(kes^em)의 음역(音譯)이라고 생각된다. 게셈은 상형문자의 도표(道表)에는 바소보드(Pa-Sopt)라 기록되고 소브드도의 서울인데, 자가직그(고대의 부바스데스)의 동쪽 13㎞, 운하의 우안에 있는 오늘날의 사프텔헨나(Saftel-Hennah)에 옛 그림자를 남기고 있는데, 이유적과 동일시된다.

    나빌은 여기서 람세스 Ⅱ세(Ramesses Ⅱ)의 화강암의 거상(巨像)을 발굴했다. 가장 흥미있는 것은, 제 30왕조의 넥타네보 Ⅱ세(Nec-tanebo Ⅱ, C. 350 B.C.)에 의해 소프트(Sopt) 신에게 헌납된 신전의 유물이다.  그 비문의 하나에는 왕은 게스(Qes)에행차 후 게스 제신의 영광을 위해 이같은 것들을 하라고 명했다라고 되어 있다. BC 350년 경에는 이 성읍의 이름이 `게스'(Qes=K ^esem)라고 불리웠다는 것올 알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바 소프트'(PaSopt)라고 불리웠을 것이다.

    스테인돌프(Steindorff)는, 애굽에서도의 서울이 종종 한 성읍에서 다른 성읍으로 옮겨지곤 하였다는 관례를 생각한다면, 이 곤란은 설명되리라고 믿는다고 말한다. 여하튼 고센의 땅은 대략 부바스데스의 동쪽에 있는일대인데, 서쪽은 사프트 엘헨나(Saft el-Hennah), 남쪽은 벨베스(Belbes), 동쪽은델 엘 게빌(Tell el-Kebir)을 잇는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면적 155-207㎢였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2〕

    유대의 남부(네게브)의 성읍 또는 그 지방이다(수 10:41,11:16). 아납의

    동쪽 2㎞, 에다하 리예(ed-Dahariyeh)와 동일시된다.

    〔3〕

    헤브론의 남쪽에 있던 성읍인데, 위치는 불명이다(수 15:51)


    고센 땅(אֶרֶץ גֹּשֶׁן, ʾEreṣ Gōšen)히브리어 성경에서 요셉파라오가 히브리인들에게 준 이집트의 장소로 명명되었다(창세기, 창 45:9~10). 그들은 나중에 출애굽할 때 이집트를 떠났다. 이 지역은 이집트 하류의 나일강 삼각주 동부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힉소스 왕들의 권좌인 아바리스(Avaris)나 그 근처일 것으로 추정된다.

    고센 땅은 성경의 창세기출애굽기에 언급되어 있다. 창세기의 마지막 장을 구성하는 요셉의 이야기에서 족장 야곱은 기근에 직면하여 곡식을 사러 그의 아들 열 명을 이집트로 보낸다. 야곱의 또 다른 아들인 요셉은 이집트의 고위 관리였으며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이집트에 정착하도록 허락했다. 창세기 45장 10절에서는 고센을 바로의 궁정에 사는 요셉과 가까운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창세기 47장 5절에서는 고센을 이집트 땅의 “가장 좋은 곳”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요셉이 그의 가족에게 가축을 지키는 자로서 파라오에게 나아와 '너희가 고센 땅에 거하게 하리니 이는 모든 목자를 가증히 여기기 때문이라'라고 한 것처럼 이는 이집트의 나머지 사람들과 어느 정도 구별됨을 암시하기도 한다. 창세기 47장 11절은 "라암셋 땅"을 고센과 바꾸었다. "요셉이 그 아비와 형들에게 바로의 뜻과 같이 이집트 땅의 가장 좋은 라암셋 땅에서 그 아비와 형들에게 땅을 주어 기업을 주게 하였느니라"라고 지시했다.

    출애굽기에서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해서 애굽에 거주하며 번성한다.
    고센이라는 이름은 출애굽기에서 애굽의 재앙에 대한 이야기에서 단 두 번만 등장한다.
    여기서 고센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는 곳으로서 이집트인들을 괴롭히는 파리 재앙과 우박 재앙을 면했다.



    고센의 뜻은 ‘땅의 언덕’으로 교회(기독교)에 대한 예표

    성경 말씀을 보면 생명(生命)과 사망(死亡), 영생(永生)과 영사(永死) 등 대조되는 극단적 두 개념이 있습니다.
    생각이나 믿음은 여당 야당, 보수 진보처럼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완전히 생각은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8: 44- 45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나님은 진리이시므로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것은 진리가 아니고 진리가 아닌 것은 마귀로부터 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사람의 생각으로 가는 길은 영생과 영사의 T형 갈림길에서 생명이 아닌 사망의 길이 됩니다.

    그런데 총론 불변의 진리의 틀(거울)로 보면 어떤가?

    택자와 불택자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따라서 복음교실은 누가 주어인가?
    즉 누가 자신의 주님인가를 깊이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체(실상)가 아닌 그림자(예표, 허상)에 소망을 두고 그림자를 붙들고 가서 그 결국은 영사에 이르게 되고 썩을 씨와 썩지 않을 씨(벧전 1:23)를 분별하지 못하고 본향(히 11:14-16)을 향해 가는 삶이 아닌 나그네(행인. 벧전 2 :11)의 삶을 살면서 그것이 본향인 것으로 착각하는 나그네 믿음의 삶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생명과 사망의 T형 갈림길은 중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을 해서 광야로 인도하신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유교병이 아닌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름다운교회 복음교실은 총론 불변의 진리와 성경의 주제인 구원과 심판을 거울에 비춰보는 분별을 할 것을 계속 말씀드립니다.

    복음교실 첫째 틀 :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진리로 알려주시는 총론 불변의 진리.

    1. 생각 ;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참고 : 하나님이 말씀만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생각할 것.

    2. 속성 : 온전성은 오직 하나님(창조성, 전지성, 전능성, 주권성, 거룩성 등등)과 예수님(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속성만 온전성이 있고,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진 3차원 물질로 된 현재의 세상이나 피조물은 온전성 속성은 있을 수 없다.

    3.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4. 천국은 조금 간다.

    복음교실 둘째 틀 : 성경 전체로 구원과 심판.

    이렇게 분별할 기준에 대한 말씀을 드려도 분별과 깨달음은 사람의 영은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오직 성령이 몸에 들어와 깨닫게 하셔야만 깨달을 수 있고‘ 성령이 몸에 들어오시려면 죄 사함을 얻어야 하고, 죄 사함을 얻으려면 죄 사함의 비밀을 하나님이 깨닫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성경말씀이나 사건 지명 등등을 아무로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알려주시는 총론 불변의 진리만이 진정한 참 진리인 것입니다.

    막 4 : 9-13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13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그리고 성령으로 거듭난 바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갈 2 : 9-14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성경지명 강해 - 고센(Goshen)

    고센(Goshen)은 뜻이 ‘땅의 언덕’입니다.
    고센은 어떻게 땅의 언덕이 되는가?
    땅은 본체가 아닌 잠시 있다 사라질 신천신지 그림자(예표)입니다.

    성경지명에서 고센은 세 곳이 있는데 애굽에 속한 고센이 성경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애굽은 세상에 대한 예표입니다.
    이것을 머리에 두고 고센을 생각합니다.

    첫째 고센은 여호수아가 점령한 고센 땅(여호수아 10:41-42)

    여호수아가 또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사까지와 온 고센 땅을 기브온에 이르기까지 치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고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과 그 땅을 단번에 취하니라

    둘째 고센은 하나님의 백성인 열두지파 중 유다가 받은 기업 (여호수아 15:20, 51)

    20. 유다 자손의 지파가 그 가족대로 얻은 기업은 이러하니
    51. 고센과 홀론과 길로니 모두 십일 성읍이요 또 그 촌락이었으며

    셋째 고센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 아닌 세상을 예표하는 애굽의 고센

    애굽에 있는 고센은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고센이 땅의 언덕이 되는 성경적 과정

    1.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난 사기꾼 야곱

    야곱은 '뒤를 쫓는 자', 혹은 '발뒷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에서 뒤를 따라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아버지 이삭이 눈이 어두워지자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죽 한 그릇으로 사기를 쳐서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은 사기꾼이 야곱입니다.
    이런 사기꾼 야곱이 비슷한 사기꾼인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이런 저런 훈련과정을 거친 후 다시 가나안으로 되돌아오면서 하나님이 언약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 얍복강 가에서 어떤 사람과 밤새 씨름을 합니다.
    그리고 환도뼈가 위골이 되면서 겨루어서 이겼는데 이때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과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는 뜻인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리고 이런 야곱의 열두 자녀들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됩니다.

    창세기 32: 22-28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2. ‘땅의 언덕’ 고센(Goshen)

    성경에서 땅은 애굽과 함께 세상의 예표입니다.
    이런 세상에 속한 애굽에 있는 땅인 고센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환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피난처로 머물게 됩니다.

    창세기 46:24-34

    24 납달리의 아들 곧 야스엘과 구니와 예셀과 실렘이라.
    25 이들은 라반이 그 딸 라헬에게 준 빌하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니 합이 칠 명이라.
    26 야곱과 함께 애굽에 이른 자는 야곱의 자부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며.
    27 애굽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 명이었더라
    28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29 요셉이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아비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 목을 어긋맞겨 안고 얼마 동안 울매
    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
    31 요셉이 그 형들과 아비의 권속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비의 권속이 내게로 왔는데
    32 그들은 목자라 목축으로 업을 삼으므로 그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33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34 당신들은 고하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게 되리이다

    요셉은 야곱의 막내아들로 야곱이 막내인 요셉만을 예뻐하자 야곱이 낳은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합니다.
    그러면서 요셉을 죽이려고 들판에 데리고 나가서 구덩이를 파서 구덩이 속에 빠뜨렸는데 지나가던 대상들이 요셉을 발견을 해서 애굽에 있는 애굽 사람에게 노예로 팝니다.
    그런데 요셉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꿈 해몽을 잘 해서 애굽 왕 바로에게 신임을 받고 애굽 왕 바로 밑에서 승승장구 출세를 해서 총리까지 되었는데 이런 와중에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서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이루는 야곱의 자손들이 먹고 살기 힘이 들어지면서 애굽 땅 고센에 들어가고, 애굽에서 바로의 신임을 받아서 승승장구한 요셉이 아버지 이스라엘과 자기 형제들을 맞아 모두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었다는 성경 말씀입니다.
    그래서 고센은 땅의 언덕이 되었다는 지명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과 사건이나 지명 등을 진리의 일관성으로 마지막 때를 맞는 오늘의 기독교에 적용을 하면 이 세상에서 형편없고 부족한 나(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계획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에 따라 자기 백성을 저희 죄들에서 구원하기 위해 친히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서 오셔서 십자가 대속을 하심으로써 죄 사함을 얻게 해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이땅의 교회를 땅의 언덕을 삼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살게 하신 것은, 세상을 예표하는 애굽의 고센이 왜 땅의 언덕인 것인지 고센을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경적 및 기독교 진리와 복음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지체로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강해가 중요한 것은 성경의 주제인 구원에서 구원은 협의의 구원과 광의의 구원으로 크게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전하는 진리와 복음에서 협의적 구원의 핵심이 죄 사함이라면 광의의 구원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금의 시간과 공간에서 구원을 해서 영원으로 들어가는 구원하는 구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적 및 기독교 진리와 복음으로의 구원은 지금의 시간과 공간에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구원을 해서 하나님의 재창조로 시간과 공간이 없는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재창조되는 다시는 죽음이 없는 생명의 부활로 신천신지에서 이루어지는 예수가 친히 그리스도가 되는 왕국입니다. 마지막 심판은 영원한 그리스도의 왕국과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지는 분리가 예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오늘 고센 2 강해는 대단히 중요한데 문제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많은 내용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겨우 A4 용지 몇 장으로 이런 내용을 설명을 하려고 하니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예표적으로)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야곱 등으로 이어지면서 신천신지(새 하늘과 새 땅)의 예표인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있었던 일이 야곱의 얍복강 사건입니다. 야곱의 얍복강 사건은 간교한 외삼촌 라반에게 야곱이 많은 일을 당한 후 다시 고향 땅 가나안으로 되돌아오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얍복강에서 야곱이 날이 새도록 어떤 사람과 씨름을 하며 겨룹니다. 그리고 환도 뼈가 위골이 되는 불구의 몸으로 그 사람을 이기는데 하나님은 이때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인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리고 야곱 즉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야곱의 열두 자녀들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열두지파가 되는 야곱의 자녀들이 이스라엘(야곱)의 막내인 요셉을 미워해서 광야에 데리고 가서 죽이려고 구덩이에 빠뜨려놓고 왔는데 이곳을 지나가던 대상이 요셉을 구해서 애굽 사람에게 노예로 팝니다. 그리고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하나님이 꿈 해몽을 잘 하도록 지혜를 주셔서 애굽 왕 바로가 꾼 꿈 해몽을 잘해 애굽 왕 바로의 신임을 받고 승승장구를 하면서 애굽의 총리가 되고 가나안 땅에 살던 이스라엘 가족들이 기근이 들어 먹고 살기 힘들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백성을 예표하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이루는 아스라엘(야곱) 자손들이 애굽의 고센으로 갔는데 형들이 죽이려고 했던 요셉이 애굽에서 바로 왕에게 신임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고센에서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는 기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렇게 있습니다.

    창 45 : 1-11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2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

    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 하더라 하소서

    따라서 이 말씀과 사건을 통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지명 고센을 통해 땅의 언덕이 되는 것에 대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복음교실은 이런 것으로 강해를 합니다.

    성경 기록의 3단계.

    1단계 구약단계 - 구약시대 -  예표(그림자) 단계

    2단계 신약단계 - 성령시대 - 예표와 본체의 혼재 단계

    3단계 영원단계 - 생명의 부활과 신천신지로 이루어지는 예수가 그리스도로 통치하는 왕국 -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완전한 본체로 구원의 완성을 이룸

    예표와 본체를 이렇게 3단계로 나누어 생각하면 기독교시대는 성령시대로 예표와 본체가 혼재한 뒤섞여 있는 단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47장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창 47 : 23-27

    23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날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전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24 추수의 오분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사분은 너희가 취하여 전지의 종자도 삼고 너희의 양식도 삼고 너희 집 사람과 어린아이의 양식도 삼으라

    25 그들이 가로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26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까지 이르니라

    27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하며 거기서 산업을 얻고 생육하며 번성하였더라

    성경지명으로 나오는 세 곳 고센은 하나님이 택하신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열두지파와 신약시대 예수님 열두제자로 이어지는 기독교에 대한 예표로서 예수님과 동일한 성령이 오셔서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시대지만 3차원 물질로 된 육을 가진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진 상태로는 구원의 완성은 이루어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마지막 심판이 있은 후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하나님의 재창조에 의한 생명의 부활과 신천신지(새 하늘과 새 땅)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 왕국과 둘째 사망으로 표현되는 무저갱과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지는 심판이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기독교에 기복신앙, 율법신앙, 신비주의신앙이 만연해 있는 것은 창세기 47장에서 예표로 알려주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2. 하나님 언약의 결국 신천신지에서 완성이 되는 구원.

    계 21 : 1-4 ; 12-14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14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3. 애굽의 고센은 하나님의 재앙이 임했을 때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지 않고 간과된 성읍.

    출 8 : 20-32

    2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직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로 나오리니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21 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과 네 집들에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의 거하는 땅에도 그러하리라

    22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23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두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24 여호와께서 그와 같이 하시니 무수한 파리 떼가 바로의 궁에와 그 신하의 집에와 애굽 전국에 이르니 파리 떼로 인하여 땅이 해를 받더라

    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26 모세가 가로되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의 미워하는 바이온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희생을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27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28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모세가 가로되 내가 왕을 떠나가서 여호와께 기도하리니 내일이면 파리 떼가 바로와 바로의 신하와 바로의 백성을 떠나려니와 바로는 이 백성을 보내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일에 다시 거짓을 행치 마소서 하고

    30 모세가 바로를 떠나 나와서 여호와께 기도하니

    31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사 파리를 바로와 그 신하와 그 백성에게 몰수히 떠나게 하시니라

    32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마음을 완강케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세상을 예표하는 애굽의 고센을 오늘의 기독교에 이 말씀을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간과는 히브리어에서는 ‘파스카(Pascha)’이고 헬라어로 원형이 ‘파레시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을 시키실 때 하나님의 사자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죽지 않는다고 해서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파스카 즉 간과되어 지나감으로서 하나님이 내릴 재앙을 받지 않고,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애굽 사람은 그들의 맏아들을 모두 하나님이 죽여 버립니다. 맏아들은 대표성 원리로 세상에 속한 사람들(백성들, 자손들)입니다.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서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지 않게 한 ‘파스카’는 우리말 ‘간과’로 번역된 것인데, 히브리어 파스카가 헬라어 ‘파레시스’로 번역이 된 것은 ‘페레시스’는 ‘옆에서’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파라’와 ‘보내다’라는 뜻을 가진 ‘헤미’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우리말 간과로 번역된 페레시스는 ‘옆으로 보냄’라는 뜻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에 대해 이렇게 증거합니다.

    롬 3 : 19-28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4. 성경적으로 하나님의 간과(파스카=페레시스)하심이 연결되는 하나님이 죄를 기록하는 곳 두 군데.

    성경전체의 주제는 구원이고 구원의 결국인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이 지금의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져 창조된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구원을 해서 영원한 생명의 부활과 신천신지로 재창조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로 통치하는 영원한 그리스도 왕국이 구원의 완성인 구원의 결국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핵심에 죄 사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어디에 기록해 놓는가에 대해 이렇게 성경에서 알려줍니다.

    레 17 : 1, 11

    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

    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의 예표가 되는 유다의 죄를 절대로 잊을 수 없도록 금강철필로 새겨서 두 군데에 새겨놓는데 마음 판과 단 뿔에 두 군데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첫째, 예표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가 죄를 지었을 때 단 뿔에 기록해 놓은 것은 죄와 죄 사함의 방법을 율법으로 정해서 짐승을 대속 제물로 죽여서 그 피를 발라서 안 보이게 함으로써 죄를 간과하심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한 것이고,

    둘째, 본체적으로는 마음 판에 새겨놓은 죄들은 본체이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피로 죄를 덮으셔서 하나님이 그 죄를 없다고 간과하심으로써 죄 사함을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띠라서 이런 하나님을 예표적이 아닌 본체적으로, 모든 죄가 사해지는 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을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서 예수님은 새 언약으로 하신 언약이 신약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으면 하나님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을 따른 의롭다 칭하시는 칭의인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이 기쁜 소식이 복음인 것입니다. 온전히 율법을 지키고 행해서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칭함을 받을 육체는 없기 때문입니다.





    1월 15일(수) 창세기 41-4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이 그 하실 일(41:25)

    요셉바로에게 고하되 바로은 하나이라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Then Joseph said to Pharaoh, "The dreams of Pharaoh are one and the same. God has revealed to Pharaoh what he is about to do.


    요셉이 바로에게 고하되

    -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감히 대국의 왕인 바로와 이런 방식으로 대면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만 의지한 요셉은 신적 권위로서 바로와 대면하고 있다.
    즉 요셉은 종의 신분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스승의 자격으로 제국의 왕 바로를 대면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보이심이니이다
    - 요셉은 먼저 바로의 두 가지 꿈이 같은 의미임을 밝혔다.
    또한 이 꿈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시되 그 사실성을 확신시킬 목적으로 반복해 주셨다는 증언을 첨가하였다.

    바로의 꿈은 하나이라
    - 비록 꿈을 두 번 겹쳐 꾸었기는 하나 그것들은 모두 동일한 사실을 강조하여 나타내고 있는 것이란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 일하심으로써 그의 하나님되심을 보이시기를 기뻐하시며,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일하시는 것은 항상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 이전에도 있고 그 아래에도 있고 그 안에도 있다는 진리는 나를 참으로 큰 기쁨에 사로잡히게 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고 하면, 자칫 우리를 높이고 하나님을 비하하는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것이 마치 고용인이 고용주를 위해 일하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 (이사야 64:4)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신다는 표현에 담긴 의미를 적절하게 이해하면 이렇습니다. 이는 내가 파산선고를 받아 긴급구제가 필요한 상황과 같습니다. 내가 위험에 처하여 보호해 줄 분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내가 어리석기에 지혜로운 분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길을 잃었기에 구조해 줄 분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즉,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신다"는 말은 내가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로 인해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나에게는 아무 영광이 없습니다. 베푸는 이께서 영광을 얻습니다. 능력있는 이께서 찬양을 얻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표현한 성경구절들을 기념하면서, 아래에 요약한 목록을 읽고, 각자 저마다의 짐으로부터 자유케 되기를 바랍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시편 55:22). 하나님이 그 일을 하게 하십시오.

    1.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이사야 64:4)

    2.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사도행전 17:25)

    3.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10:45)

    4.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역대하 16:9)

    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편 50:15)

    6.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이사야 46:4)

    7.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10)

    8.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시편 127:1)

    9.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베드로전서 4:11)

    10.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12–13)

    11.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린도전서 3:6-7)

    하나님이 하시는 일(요한복음 9:1-7)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숱한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간단한 문제를 만나서 가볍게 해결하게 될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도무지 이해하기도 힘든 문제에 직면해서 고민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 마음속에 하나의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주어지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도무지 풀 길 없는 문제에 직면해서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내가 이 다음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긴히 여쭈어 볼 말씀이 너무나 많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우리들은 숱한 문제들을 안고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얼마 전에 흉악한 택시 강도에게 화를 당한 어떤 여인의 어머니가 "왜 하필 내 자식인가, 세상에는 악한 사람도 많고 죄인도 많은데, 그렇게 착하던 내 딸이 왜 그들의 손에 무참하게 죽어야 했는지 나는 모르겠다"하고는 탄식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 이유를 모릅니다.
    흉악한 사람의 손에 목적 없이 죽어야 한다면 이 땅에 값없이 죽을 사람도 많고 죄인도 많은데 왜 죄없는 어린 아리들이 죽어야 하고, 죄 없는 선한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이유가 있고 혹시 거기에 하나님의 어떤 섭리가 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첫 번째는 이 사람이 왜 소경으로 태어났느냐?

    이 사람이 병을 앓다가 시력을 잃었다면 이해가 가겠는데, 또 사고로 눈을 다쳐서 소경이 되었다면 납득이 가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아예 태어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났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이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

    히브리인들은 어떤 사건을 보며 그 원인을 꼭 묻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은, 어떤 불행을 당하게 되면 그것이 누군가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것은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들도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다가 일이 잘 안 되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 그리고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졌길래" 그러면서 한탄을 합니다.
    모르긴 해도 여러분들도 이렇게 생각해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 응보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불교를 믿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불교 문화권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들 역시 자연스럽게 이런 발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되는 수도 없지 않아 있기는 합니다.
    아이에게 어떤 불행이 닥치고, 불치의 병을 얻게 되는 것이 부모의 죄 때문인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자신의 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문란하게 외도를 하고, 방탕 생활을 하다가 병을 얻어서 마침내 시력을 상실하고 눈이 멀었다고 하면 그것은 물론 자신의 죄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생활이 문란하고 무질서하고, 외도를 해서 성병을 얻은 부모가 아이를 낳았을 때 어떤 아이는 기형아로 태어날 수도 있고, 또 어떤 아이는 시력을 잃은 채 소경으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부모의 죄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모가 임신중인데도 술을 과음하거나, 담배를 많이 피우고, 마약을 복용하고 그러면 그 아이가 온전하게 태어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불구아가 태어났다고 하면 그것도 분명 부모의 죄 때문입니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은 하나님의 징계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부모의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께 그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제자들의 물음에 예수님은 제3의 원인을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것은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의 죄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어서 그가 소경된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적어도 이 사건 속에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어떤 섭리가 들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를테면 이 사건에는 세상적인 어떤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좀더 높은 차원의 섭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일하십니다.
    그 방법은 사람들이 하는 방법과 다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이사야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은 너희 과 달라서.
    하늘이 보다 높음 같이 내 은 너희 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For my thoughts are not your thoughts, neither are your ways my ways," declares the LORD.
    "As the heavens are higher than the earth, so are my ways higher than your ways and my thoughts than your thoughts.

    성경적 사고는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을 생각할 줄 아는 것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

    - 하나님의 생각
    - 하나님의 길(방법)


    첫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그 뜻이 미래적이라는 것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의 특징

    첫째, 미래적 - 목적, 결과
    둘째, 소망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원인이나 목적이나 결과가 모두 미래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소망적입니다.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모든 일의 원인을 과거에 둡니다.

    예를 들면 내가 병들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병 문안하러 와서 그 병의 원인을 한결같이 과거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왜 병들었느냐, 어쩌다가 그랬느냐"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대답하기를 "내가 죄가 많아서" 그렇게 대답합니다.
    지금 이 사람도 병든 원인을 과거에 두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질문했던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은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고, 자신의 죄 때문도 아니고,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은 미래에 어떤 뜻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마 이 소경이 살면서 한을 많이 품고 살았을 것입니다.
    "나는 왜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었을까?"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한 사람일까?"
    이 사람이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을 하고 살았을테니 얼마나 불행한 세월을 살았습니까?

    그런데 오늘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에게 미래를 위한 어떤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게 어떤 특별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 자신에게서 풀리지 않던 문제를 풀었으니 얼마나 기쁘고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지금까지 자기 자신의 문제가 풀리지 않아서 고민을 하면서 살아왔는데 오늘 비로소 그 해답을 깨닫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난 후에 이 소경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신앙인은 모든 문제를 미래에 두고 해석해야 합니다.
    모든 문제를 미래에 두고 해석을 하면 모두가 소망적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그 결과가 이렇게 소망적이고 미래적입니다.

    가끔 약혼 주례를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 약혼식은 결혼식과는 그 뜻이 조금 다릅니다.
    약혼식을 집례하다 보면 결혼식보다 더 소망적이다 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약혼하는 두 사람은 결혼해서 살면 분명히 싸우게 될 것입니다.
    또 다투게도 될 것이고, 미워하기도 할 것이고, 때로는 결혼한 것을 후회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함께 몇 년을 살면 덤덤해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약혼할 때 보면 그런 것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에게 있어서 미래에 대한 소망이 현재보다도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신 좋아합니다.
    예물을 서로 교환할 때 보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부끄러워할 줄도 모릅니다.
    계속 싱글 벙글합니다.
    땀흘리고 당황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이 젊은이들이 그렇게 기뻐하는 것은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이 미래가 있어야 합니다.
    삶은 오늘에 초점을 맞추어 놓고 살고, 뜻은 언제나 미래에 초점을 맞추어 놓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미래적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 나온 소경을 통해서 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목적이 모두 선하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두 번째 특징입니다.
    여기 이 소경의 일생을 보면 잠시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그런 후에 엄청난 결과를 보게 됩니다.
    그 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예수가 메시아인 것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이렇게 소망적으로 발전하고, 결과가 유익함으로 주어집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젊은 나이에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들이 슬퍼하고, 동네 사람들이 애도하고, 예수님도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런데 일은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나중에는 나사로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 나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11을 보면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특징입니다.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도 손해를 보지 않고 나사로도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결국 그 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다른 차원의 생각과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을 통해서도 이렇게 일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죽을 병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그 본인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큰 시련이고 불행한 일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래서 본인은 물론 온 가족이 함께 심각한 기도를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가서 기적같이 병이 나았습니다. 정말 깊은 기도를 하는 중에 하나님의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병이 감쪽 같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건강해졌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은 그때부터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소위 간증입니다. 이 간증이 잘만 되면 아주 좋은 전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돌아다니며 하나님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는 일은 그 결과가 모두 유익한 것입니다.
    내가 지금 가난한 것도 거기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부한 것도 거기에 하나님의 어떤 계획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약한 것도 거기에 그럴 만한 이유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그 일 후에는 반드시 유익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이 같은 이유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그 어떤 처지에 처해도 삶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경에게서 이것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대부분 이런 과정을 거쳐서 옵니다. 또 하나님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나 세상을 전체에서 한 부분을 보려고 하지 말고 한 부분으로 전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주 무익한 사람 같아 보이는 사람이 세상을 오래 사는 경우를 보게 될 때입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오래 살아 있을 이유가 없는 사람 같은데도 오래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모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심각한 병 중에 있어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아직도 내게 할 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필요로 하시기 때문에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어떤 분이 임종할 때가 되었는데도 숨을 거두지 못하고 죽지를 않습니다.
    그러다가 멀리 떨어져 살고 있던 아들이 오면 그때서야 아들의 손을 잡고 한마디 하고는 편안히 눈을 감습니다.
    그분은 그 한마디를 못했기 때문에 눈을 감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은 이렇게 해야 할 일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모습을 모두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보고, 해석하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나의 인생이 소중하고 값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소경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눈도 멀고, 거기다 거지이고, 보잘것없은 그의 인생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지만,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비한 인생입니까?
    이것이 바로 나의 이야기고, 나의 인생입니다.
    이렇게 나에게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섭리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소경을 통해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보고 값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도 이 같은 하나님의 신비한 은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1월 14일(화) 창세기 37-4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형통한 자(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The LORD was with Joseph and he prospered, and he lived in the house of his Egyptian master.


    형통한 자(6743.  376)

    찰라흐(tsâlachצָלַח 스트롱번호 6743

    1. 돌진하다.  2. 침범하다. 3. 잘되어가다
    발음 [ tsâlach ]
    구약 성경  / 65회 사용
    • 1. 원형 돌진하다, 통하여 가다, 삼하19:18(17)
    • 2. 원형 침범하다, [עַל을 수반하여] 여호와의 영이 사람에게 내리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삿14:19, 15:14, 삼상10:10, 11:6,[אֶל을 수반하여] 삼상16:13, 18:10,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게 스스로 나타나심에 사용되어, 암5:6.
    • 3. 원형 잘되어가다, 번영하다, 성공하다, 시45:5(4), 사53:10, 렘22:30, 식물이 번성하다, 겔17:9,10, [לְ을 수반하여]~에 적당한, 알맞는, 렘13:7,10.
      • a. 원형 히필형
      • b. 원형 번영하다, 성공하게 하다. ㉠ [~의 일에] 창24:21,56, 39:3,23. ㉡ [인칭대명사의 목적격을 수반하여]대하26:5, [לְ를 수반하여] 느1:11,2:20
      • c. 원형 잘 성취하다, 끝내다, 신28:29, 삿18:5,왕상22:12, 대하7:11, 시37:7, 잠28:13, 렘2:37, 단8:12.

    미완료형 יִצְלַח

    • 관련 성경  /  ☞임하다(삿14:19, 15:14, 삼상10:6), 건너다(삼하19:17), 건너가다(삼하19:18), 형통하다(대하20:20, 렘12:1, 겔17:15, 대하20:20), 감동되다(삿14:6, 삼상11:6, 16:13), 힘있다(삼상18:10), 성취하다(사53:10), 쓸데없다(렘13:10), 번성하다(겔17:9,10), 평탄하다(창24:21,40), 행하다(단11:36), 윤택하다(렘5:28), 승리하다(렘32:5), [명] 소용(겔15:4).


    אִישׁ 스트롱번호 376

    1. 사람.   2. 남자. 3. 남편
    발음 [ ’Îysh ]
    어원  / 60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179회 사용

    관련 성경 /  ☞ 남자(창2:23, 신22:22, 렘44:7), 사람(창4: 23, 삼상20:15, 겔9:2), 남편(창3:6, 신25:11, 삼상25:19), 농사(창9:20), 임자(창38:25, 출 22:14), 청지기(창43:19), 각 사람(창49:28), 양쪽(출18:16), 백성(출33:10, 삼하16:15), 아무(출34:3, 레21:9, 시49:7), 쌍방(신1:16), 노인(신32:25, 삼하19:17), 명(수7:3, 삿1:4), 하나(삼하16:5, 왕상18:40), 인생(욥12:10, 시4: 2, 렘52:7), 시체(왕하13:21). [부] 서로(창11: 3), 피차(창31:49), 아무든지(출16:19), 무릇 (출30:33, 레21:17), 균등하게(레7:10), 누구든지(레13:40, 17:3, 신22:13).


    אִשָה 스트롱번호 802

    1. 연계형 נְשֵׁי
    2. 여자
    3. 여성
    발음 [ ’ishshâh
    구약 성경  /  782회 사용
    관련 성경  /  ☞ 여자(창2:22, 출21:28, 느8:2), 아내(창2:24, 20:7, 스2:61), 여인(창12:14, 출21:22, 욥14:1), 첩(창16:3, 삿19:1), 부인(창24:36), 시집(민 36:8), 기생(수2:1, 6:22), 과부(삼하14:5), 계집(잠2:16), 어머니(왕하8:5, 사45:10).

    אָנַשׁ 스트롱번호 605

    1. 병든.  2. 렘 15:18. 3. 사 17:11.
    발음 [ ’ânash ]
    구약 성경  / 782회 사용
    • 1. 원형 병든
      • a. 원형 [거의 치료불가능한 병이나 상처에 대해 쓰임], 렘15:18, 미1:9, 욥34:6.
      • b. 원형 [고통에 대해 쓰임], 사17:11.
      • c. 원형 [재난을 당한 경우에 쓰임], 렘17:16.
      • d. 원형 [악한 마음에 대해 쓰임], 렘17:9.
      • e. 원형 니팔형: 몸이 매우 약하다, 삼하12:15.
    • 관련 성경  / 
      ☞상처를 입다(욥34:6), 낫지 아니하다(렘 15:18), 부패하다(렘17:9), 고칠 수 없다(렘 30:12, 미1:9), 앓다(삼하12:15). [명] 재앙(렘 17:16).



    형통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찰레아흐’입니다.

    형통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찰레아흐’입니다.
    이 말은 ‘번성한’(prosperous)이란 뜻입니다.
    영어성경에는 ‘번성한’ 또는 ‘성공적’(successful)이란 말로 번역돼 있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삶을 형통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써 형통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성실하여 그의 형통함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보게 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또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인정하면서 살았습니다. 

    로리 베스 존스는 ‘주식회사 예수’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성공에 대한 정의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형통의 뜻이 성공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형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 

    ‘형통한다’는 국어사전적 의미는 ‘온갖 일이 뜻과 같이 잘되고 번영함’을 가리킵니다. ‘목적한 바를 이룬다’는 ‘성공’의 의미가 강합니다. 예를 들어 ‘뼈대있는 가문’ ‘인품이 있고 덕망 있는 자’ ‘적당히 베풀 줄도 알고 돈과 명예를 소유한 자’를 세상 사람들은 형통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경적 형통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 그 자체가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형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축복의 땅으로 믿음의 전진을 할 때 형통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원해내시고 광야의 유랑생활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 즉,형통의 복을 허락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 여호와께서 주신 땅으로 가야 형통합니다. ‘마이 웨이’가 아닙니다 

    . 하나님께서 정한 길,하나님을 위한 길을 믿음으로 전진할 때 형통하게 됩니다. 둘째,머무르거나 후퇴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전진할 때 형통합니다.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라” “내가 주는 땅으로 가라”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주리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행동강령을 수반합니다. 

    ‘건너라,가라,밟으라’는 신앙생활의 3대 명령은 광야에 머물러 있지도 말고,애굽으로 되돌아갈 생각도 말고,오직 하나님이 예비하고 준비하신 땅으로 전진할 때 형통한다는 뜻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형통한다는 뜻은 무슨 의미일까요? 목적 없이 되는 대로 가도 형통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오직 여호와께서 주신 땅으로만 걸어가야 함을 말합니다.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요 14:6)만 따라가야 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전진해야만 형통할 수 있습니다. 오른편의 물질을 볼 것 없고 왼편의 명예도 볼 것 없습니다. 오직 치우치지 말고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향해 믿음으로 전진하면 누구든지 형통할 수 있습니다.


    주어진 환경이 어떠하든지 그 자리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 가운데 믿음의 역사가 주어집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형통은 성공입니다. 소위 잘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다릅니다.

    요셉을 보면 ‘형통’이란 단어의 성경적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꿈을 가지고 살다가 그 꿈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타국에 종으로 팔려갑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애굽으로 팔려가 종살이를 하고 있는 요셉을 두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니 형통하다’고 합니다.

    또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순결을 지키려다가 자신의 주인이자 애굽 왕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부인에게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도 성경은 ‘하나님이 감옥에 있는 요셉과 함께하시니 요셉이 형통하다’고 합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바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환경과는 상관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셨던 전체적인 그림 안에서 보면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고 감옥에 갔기 때문에 훗날 애굽의 국무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시련들이 없었다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순간, 요셉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상황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전체적인 그림 안에 있지만 세부적인 순간순간들이 너무나 힘들고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속에 여전히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그것이 형통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삶을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생은 좋지 않지만 하나님은 좋으시다.” 요셉의 인생이 어땠습니까? 이렇게 억울하고 아픈 일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의 인생은 결코 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세부적인 상황 속에 여전히 함께하시며 그 순간순간들을 모아 큰 그림을 그려나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가 처한 환경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상황을 본 것이 아니라 위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 다음 요셉의 할 일은 그 자리에서 충성되게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충성되게 일했고, 감옥에 있을 때에도 그 자리에서 충성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주어진 자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자리가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자리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환경을 바라보거나, 우리 자신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자꾸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고, 주변을 바라보며‘이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살필 때 그 자리에서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 믿음의 역사가 회복되기를, 더 영광스럽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 이후 애굽에서의 요셉의 성공은 족장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15:13-16;  26:4; 28:14)이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성취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언약의 신을 강조하는 여호와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Quarry).

    형통한 자(*, 이쉬마츠리아흐)
    - '사람'을 뜻하는 '이쉬'와 '번성하다'란 뜻을 지닌 동사 '찰레아흐'의 사역형 분사가 합쳐져 '번영의 사람'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요셉이 하는 일마다 눈에 띄도록 현저하게 나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그 주위 사람들에게 분명히 요셉과 함께 하는 어떤 신적 축복과 가호가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감지케 했다.

    요셉이 형통했다는 의미는?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3)

    보디발(비신자)이 여호와께서 요셉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다고 했는데 문득 그 형통은 무엇일까 궁금해졌습니다.
    매순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그 자체가 형통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신자)와 달리 비신자는 매사에 내가 잘 되는 것 즉, 출세하고 성공해 부자가 되는 것이 형통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보디발이 여호와가 요셉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다면 비신자가 생각하는 그런 형통하는 모습이 요셉에게 보였다는 것일 텐데 과연 그런 뜻일까요?

    또 만약 요셉의 형통이 그런 것이라면 현재의 믿음의 자녀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텐데,  제 짧은 생각으로도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요셉에게만 주신 특별한 형통인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에게 현재에도 그런 형통을 주시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말하자면 저도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고 있다고 믿기에 스스로는 제가 형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제 주위사람은 저를 형통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질문의 내용에 대해서 좀 더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비신자가 신자의 어떤 모습, 또는 신자가 행해서 나타나는 어떤 결과를 보고 하나님께서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고 말할 수 있는가가 정확히 정리되지 않아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삶이 예배가 되게 또 삶으로 주의 증거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정작 주의 증거가 되는 일들이 저에게는 아주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나는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창세기 39:2-6)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세기 39:21-23)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하게 했다는 성경기록 둘을 인용했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성경의 모든 사건과 진술은 반드시 관련 문맥 안에서 뜻을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두 기사 안에 형통의 구체적인 의미가 사실상 부연 설명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상기 두 기사를 자세히 묵상해보면 성경이 말하는 형통이 어떤 것인지 추정해 낼 수 있습니다.  

    불법 동남아 노동자보다 못한 요셉

    두 기록에 사용된 ‘형통’의 히브리어 ‘짜라흐’는 ‘돌발하다’, ‘(세차게)오다’, ‘건너가다’, ‘좋다’, ‘적당하다’, ‘유익하다’, ‘번영하다’ 등의 뜻을 가졌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인 용례는 ‘번영하다’입니다. 본문에서도 3절과 23절에선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케”(prosper) 하셨다는 사역동사 용법으로, 또 2절 “형통한(prosperous) 자”에선 형용사 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럼 그 번영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현실적으로 세상에서 출세하여 재물, 권력, 명예를 남들보다 더 많이 가졌다는 것입니까? 본문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와 정반대입니다. 첫 번 형통은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의 신분이었고, 두 번째 형통은 감옥에 갇힌 죄수 신분이었습니다. 그것도 애굽인도 아닌 이방인으로서 말입니다.  

    쉽게 비유하면 한국에 돈 벌러 온 불벌체류 동남아 노동자보다 더 못한 신분입니다. 그들은  비록 불법체류 신분이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족쇄가 되지만 일상적으로는 자기 뜻대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또 언제든 한국생활이 싫어지면 고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며, 만약 단속에 걸리더라도 국외추방의 벌만 받으면 됩니다.

    반면에 요셉은 노예이자 죄수이기에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재량권을 행사할 자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고대사회에선 언제든 주인이나 왕의 말 한마디로 목숨이 날아갈 수 있습니다. 부모 형제가 있는 가나안으로 자의로 돌아갈 수는 절대 없습니다. 설령 탈출에 성공한다 해도 애굽에선 외국인 청년인지라 금방 들켜 잡혀서 처형당할 것입니다.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더러 어느 누구도 형통했다고 평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가 오히려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성경은 그보다 훨씬 못한 처지에 있는 요셉을 형통하다고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형통케 했다고 선언합니다.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될 큰 꿈(vision)을 품고서 고난을 감수하고 있기 때문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요셉을 믿음으로 큰 꿈을 실현한 자로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성경해석입니다. 이에 대해선 [잘못 가르쳐진 성경] 사이트의 #3 “요셉은 꿈꾸는 자가 아니었다.”의 글도 참조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 저자가 인간의 상황을 기록했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생각이 담겨있습니다. 세상에선, 심지어 21세기 현대교회 내에서조차 요셉의 처지를 형통했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여길 텐데도 성경은 두 번이나 그렇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는 분명 형통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당신께서 그를 그런 모습으로(?) 형통케 했다고 확정적으로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신자의 형통과 인간이 이해하는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문맥에서의 의미  

    상기 두 기사에서 요셉이 사람들에게 보여준 가장 큰 특성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이 볼 때에 요셉이 자기들과 가장 다르다고 여겨지는 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두 기사가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초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추정하기 힘들면 두 기록의 결론을 보면 됩니다. 참고로 성경의 진술과 사건의 의미가 애매모호할  때에는 결론이 어떻게 내려지는지 유심히 살피면  바로 그것이 핵심 주제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6절)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23절) 두 사람 다 요셉에게 일상적인 사무를 전부 맡기고 전혀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할 일을 완전히 대신하게 했습니다. 요셉은 주인과 전옥으로부터 무한한 신뢰를 얻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하는 일 마다 다 번창, 형통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은 물론, 경영의 귀재가 아니었기에 하는 일마다 성공했을 리는 없습니다. 물론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5절)고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모습이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요셉이 경영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감옥에선 특별히 번창할 즉, 경영을 해서 이익을 낼 일이 없지 않습니까?

    주인이 전 소유를 맡겨 대신 관리하도록 한 것은 요셉이 그전부터 하던 행사를 죽 지켜보고 나서 결정한 것입니다. 그의 관리 혹은 장사 수완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장점을  보고 가정 총무로 맡겼던 것입니다. 또 그랬더니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아주 잘해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좋게 평가한 그의 특성은 앞뒤 문맥의 흐름 상 아무래도 성실성, 특별히 정직성일 개연성이 가장 높습니다. 주인의 재산 관리나 감옥의 사무 처리를 전적으로 맡길 수 있으려면 이 두 요소가 절대적 전제입니다. 절대로 주인을 속일 사람이 아니며, 게으름부리지도 않는다는 확신이 든 것입니다. 주인이 자기 식료(食料) 외에는 챙기지 않은 것도 자신의 기호, 감정, 기분은 본인만이 알기 때문이지 요셉을  못 믿어서가 아닙니다.

    그런 확신을 가지기까지 틀림없이 그 주인과 전옥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요셉을 시험해 봤을 것이며, 요셉은 어떤 경우도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아내를 범하려 했다는 물증(物證)까지 있음에도 보디발이 그를 죽이지 않고 옥에 가두기만 했던 이유가 강간 미수에 그쳤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요셉을 그간에 아주 좋아했었고 또 그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 때문에 오히려 아내의 말을 완전히 수긍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실성과 정직성의 근원

    요셉이 그 시대에는 도무지 없는, 지금도 눈 닦고 찾아보기 힘든 그런 성실성과 정직성을 가지게 된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그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성실히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인생은 형들의 시기를 불러일으켜 광야 구덩이에 빠졌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정반대로 바뀌었다고 봐야 합니다. 자기 자랑만 하던 철부지에서 하나님만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로 말입니다.  

    당시 상황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살아날 수 없는 광야의 구덩이에 빠졌었습니다. 그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이유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할 재간이 없습니다. 마침 바로 그 때에 미디안 상고가 그 곁을 지나고 있었던 것(창37:25)과 그 일행을 본 형 유다의 마음이 움직인 것(창37:26)이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 마련해 놓은 계획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반면에 요셉 개인적으로는 틀림없이 구덩이에 빠져있던 그 잠시 동안에 평생에 할 수 있는 기도를 다 했을 것입니다. 기도의 시간적 양이 아니라 철저한 회개가 동반되는 간절함을  볼 때 말입니다. 자기가 형들을 무시하고 설쳤던 것이 너무나 큰 잘못이니 한번만 살려달라고, 그럼 정말 주님의 뜻대로만 살겠다고 헌신하며 눈물로 매달렸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비록 노예로 파려가는 모습이었지만 그 기도에 응답하여 살려주었습니다. 아니 반드시 노예로 보디발에게 팔려가야만 하나님의 이미 마련되어 있는 원대한 계획에 쓰임 받는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새롭게 바뀐 인생은 보디발의 집에서부터 믿음의 열매를 활짝 맺었을 것입니다. 엄청난 사건을 겪었고 여전히 노예로서 척박한 여건에 처해 있는데도, 무엇보다 모든 것이 낯선 이방 땅에서 혈혈단신 고아로 살아야 함에도, 그는 틀림없이 전혀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와 기쁨으로 생활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죽었다 살아났는데 더 이상 무엇이 힘들고 두렵겠습니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기에 날마다 순간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 기도, 경배했을 것입니다.  

    보디발이나 주위 애굽 사람들이 그런 그를 신기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들과 분명 뭔가 다르다고 여기면서 호기심을 갖다가, 차츰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기쁨으로 성실하게 일하고 또 절대로 남을 속이지 않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환경 가운데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를 위해 여호와께 기도해주고 성심껏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3절) 성경은 기록한 것입니다. 주인이 그에게서 여호와의 형통함을 보았던 것은 분명히 가정총무를 맡기기(4절) 전이며, 또 주인의 모든 소유에 여호와의 복이 미치기(5절) 전이었습니다. 감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에게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21절)는 3절의 의미를 다르게 표현한 것뿐입니다. 또 그 일도 전옥이 감옥의 사무를 그에게 맡기기(22절) 전이었습니다.

    여호와가 주인의 소유에 복을 내린 형통의 의미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우선 요셉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즉,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가정의 일과 사업을 경영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만약 개인적 욕심을 가지고 주인의 재산을 부정한 방법으로 빼돌리려 들었다면, 속이지는 않아도 주인의 일이니까 게으름 부리며 대충 건성으로 했다면 하나님이 결코 복을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goodwill, 기쁘고 친절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엡6:5-8) 노예 요셉은 그때 이미 신약의 계명대로 살고 있었던 것이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신구약 시대에 동일하신 오직 한 분 하나님인 것입니다.  

    거기다 요셉은 온갖 우상들을 음란하게 숭배하는 당시의 세계 최강국 애굽에서 참 하나님 여호와를 알고 따르는 오직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다른 이들의 눈에는 흠모할 것 하나 없는 연약하고 비천한 모습이었지만, 그 사악한 도성에 비취는 한 줄기 빛이었고 참 생명의 호흡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기도하며 정직하게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총무 일을 하는데 하나님이 번영케 해주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라도 요셉을 형통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그 이방의 땅에서도 상천하지에 범사를 주관하는 오직 한분 하나님만 계심을 스스로 보이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신자는 이미 형통한 자

    그런데 성경은 더욱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순전함과 성실함과 정직함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보이기도 전에 그를 이미 “형통한 자”라고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2절) 보디발의 집에 팔려갈 때에 이미 형통한 자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그렇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를 믿는 모든 신자가 이미 형통한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럼 우리가 과연 형통합니까?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니 도무지 형통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까? 또 하나님은 요셉을 형통케 해주셨는데 그분이 나를 형통케 해주신 적이 거의 없습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형통과 우리가 이해하는 형통을, 특별히 기복신앙을 강조하는 목사님들의 가르침과 혼동해선 안 됩니다.

    신자는 요셉처럼 되었기에 형통한 자가 된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또 그래서 신자의 기도에 응답하여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번영케 해주시니까 형통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옛 자아가 완전히 깨어져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성령의 씻음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거듭난 자에게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 즉, 형통한 자입니다. 단순히 기독교 교리를 객관적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교회 생활에 충성한다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또 그래서 이제는 오직 나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살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만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세상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그분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며 살고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온전한 정직함과 순전함과 성실함을 갖고 세상의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뒤바꾼 자는 비록 그 실천이 더딜지라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직도 연약하여 수시로 실패하더라도, 그럴수록 영적으로 애통해하며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 쪽으로 살아가는 목적과 방식을 완전히 바꾼 자는 이미 형통한 자요,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면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면 요셉 같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정말로 요셉 같은 인생을 산다면, 백 프로 순전하고 정직하게 세상을 대한다면 현실적 번영에 대해서 욕심 아니 관심조차 갖겠습니까? 또 하나님이 그런 자를 보호 인도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인생이 오직 하나님의 의로운 손에 잡혀 있고 그분의 뜻대로 이끌고 있음을 확신한다면 더 이상 세상의 어떤 문제, 고난, 상처, 멸시,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요셉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즉,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신자의 형통은 하나님 당신의 뜻대로 그 인생이 이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쓰임 받는 것 외에 신자의 형통을 찾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자의 소원도, 그 인생의 목적도 전적으로 하나님 뜻대로 따라가게 되는 바로 그것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불신자나, 일부 신자가 자기 뜻대로 인생이 번영하며 잘 풀리는 것을 형통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아예 다르게 말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바울의 이 고백이 단순히 절제하며 검소하게 사는 비결을 배웠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풍족할 때도 있었습니다. 또 기도했더니 무슨 일이든 이뤄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반대로 분명히 배고프고 궁핍할 때도 있었습니다. 자기 믿음과 능력으로 큰 비전을 달성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뜻대로 쓰임 받기를 원하고 어떤 여건에서든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순종했더니 그분이 자기에게 맡기신 일을 그분이 다 이루시더라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세상을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회심 후로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기로 헌신한 즉, 여호와가 함께 하는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처럼 순전함으로 주님 뜻대로만 행했더니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당신의 일을 형통케 했던 신약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남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을 겪었고(고후11:23-27), 마지막을 로마 감옥에서 비참하게 지내다 처형당했습니다. 신자가 가장 형통한 대표적 예입니다.  

    신자의 형통에 진짜 중요한 모습

    요셉의 형통하는 모습에서 진짜로 중요한 사항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살펴본 대로 요셉 개인적으로 번영해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주인과 전옥의 신임을 얻었다 하더라도 개인 재물, 권력, 명예가 늘어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형통케 하셨는데도 그는 여전히 노예와 죄수의 신분이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은 훨씬 다른 의미입니다. 서두에 인용한 그 글을 잘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 대신에 주인과 전옥이 형통했습니다. 주인의 소유가 늘어났을 것입니다. 최대한 양보해도 그전처럼 가정 총무에게 속아서 뒤로 빠져나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전보다 훨씬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에게 모든 사무를 맡겨 놓은 전옥도 아주 편하게 지내며 남는 시간을 개인적으로 활용했을 것입니다. 정작 바쁘고 힘들게 고생했던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미 형통한 자”가 되어 있는 요셉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1-3)

    믿음의 조상이자 요셉의 증조부인 아브라함이 또 다른 형통한 자의 예입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케 된 것 즉, 현실적 번영 때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그 이름만 창대케 되어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 뿐이지, 죽을 때에 자식은 하나였고 얻은 땅도 무덤뿐이었습니다. 그의 형통의 실체는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요셉처럼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이 복을 받은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되는 것이 그의 후손으로 부름 받은 모든 신자의 인생에 하나님이 주신 목적이자 소명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들은 다 복을 받았습니다. 당시 가나안과 애굽 땅에서 전혀 생소한 인물이었던 그의 어떤 점을 보고 축복했겠습니까? 바로 요셉처럼 그가 의롭고 신실하고 정직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아무 존경할 만한 요소가 없는데도 외국인을 축복할 리는 없습니다. 또 그의 흔들림 없고 경건한 신앙 때문 아니겠습니까? 비록 서로 믿고 있는 신의 이름과 그 믿음의 내용은 달라도 아브라함이 믿는 신과 그의 신앙이 뭔가 권능이 있고 의롭다는 점은 인정했을 것 아닙니까?

    오늘날의 신약 신자의 형통도 그래야 합니다. 요셉과 아브라함처럼 신자로 인해 다른 이에게 하나님의 지복을 나눠주는 통로가 되는 것, 자기는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더라도 불쌍하고 미혹된 이웃이 살아나는 그것이 바로 형통입니다. 또 그러려면 그 전에 실제 삶에서 정말로 성실하고 정직하고 순전하게 살아야 합니다. 다른 이에게서 언제든 무엇이든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어져야 하고, 또 어떤 기막힌 고난도 털어놓고 상의할 수 있을 정도로 신뢰 받아야 합니다. 고충 토로나 현실적 충고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기도를 받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도록 이웃들 앞에 신자는 신령하고 경건해져야 합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4-16)

    성경이 말하는 신자의 형통은 그래서 바울의 바로 이 고백과 같은 모습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는” 것 이상의 신자의 형통이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가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서 드러나게 하는 것이 신자의 형통입니다. 신자는 자신은 궁핍에 처하든 부요에 처하든 아무 관계없이 말입니다. 또 그래서 남들로 어떤 멸시, 비방, 반발, 핍박을 받더라도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서 주님의 긍휼을 간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위 사람이 상식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심정적으로 바라는 대로 현실이 술술 풀려져나가는 것이 결코 신자의 형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기대하고 인도하는 그대로 살고 있는 것만이 신자의 형통입니다.

    성서에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형태의 생애와 삶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될 사람으로 살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을 대립하거나 대적하는 모습으로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징벌의 대상으로 살았고 많은 사람에게 피해와 고통을 안겨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 가룟 사람 유다에게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고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무의미한 삶을 살아간 사람도 있습니다. 뚜렷한 삶의 목적이나 특성 없이 주어진 일상성의 그대로의 삶을 산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거나 피해를 주지도 않고, 도움을 받거나 도움을 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안에서 안주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는 없어서는 안될 사람으로 누구에게나 소중한 자로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을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대상으로 산 사람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러한 삶의 선두자로 사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예수님을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가리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마17:5)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서 400년간 생활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보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애굽에 살게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주도하여 이끌어간 야곱의 아들 요셉입니다. 우리는 이 요셉의 생애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창세기 39장 23절의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39장 2절에서는 요셉을 '형통한 자'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형통한 사람이었으며, 범사를 형통케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형통한 삶이란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았다는 표현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꼭 귀중하고 필요한, 없어서는 안될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형통한 자의 삶은 아브라함과 같이 모든 사람에게 축복의 근원자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범사를 형통케 하는 자는 그가 있는 곳에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일들이 나타나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변화의 역사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형통은 어떤 투기나 우연한 사건으로 횡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형통은 어떤 고난이나 역경이 없는 좋은 환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난과 역경 중에도 그 사건에서 나타나는 가치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삶이었습니다. 요셉의 생애 중에 그 어렵고 힘든 과정이 모두에게 귀하고 유익하게 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형통한 삶이었습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39:5)
    그런데 성서본문은 요셉의 형통한 삶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39:2)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39:23)
    그렇다면 하나님게서 요셉을 형통케 하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성실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에 대하여 하나님을 향한 요셉의 믿음은 성실하였습니다. 그는 매사에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생활은 어떤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 성실함이 생활의 성실함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 진실함이 생활의 성실함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요셉의 행복했던 환경은 불행한 환경으로 바뀌었습니다. 야곱의 12 아들 중 가장 큰사랑을 받았던 아들에서 노예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형들의 시기와 미움으로 애굽의 미디안 상인에게 팔려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가정에 노예로 팔려 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불행하고 억울한 환경 중에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성실함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 성실함의 자세는 주어진 불행한 환경을 비관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 고난의 환경을 하나님께서 주신 과정으로 받아드리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성실함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보디발에게 신임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보디발은 그의 모든 소유를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보디발의 가정에 요셉으로 인하여 더 큰복이 성취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요셉에게는 더 큰 시련의 고난이 찾아 왔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반하여 요셉을 성적으로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요셉을 모함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옥에 갇혔습니다. 노예에서 죄수로 전락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곳에서도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성실함에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이러한 믿음의 성실함은 형통케 하는 자의 삶을 이룬 것입니다.

    금발 미녀 제인이 왼쪽 젖가슴을 내 놓은 채 급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경찰관이 호루라기를 불며 달려왔습니다. "아가씨, 당신의 왼 쪽 젖가슴이 노출됐다는 것을 아십니까? 노출 죄로 당신을 체포할 수도 있습니다. "오 마이 갓! 너무 서두르다가 아기를 버스에 내려 놓았어요"
    우리의 현재의 삶은 바쁜 세속의 삶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성실함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차에 내려놓고 부끄러움을 드러내면 사는 불성실한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성실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실함에서 나오는 진실함으로 주어진 자기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투자가 아닙니다. 믿음은 최선을 다하지 않고 얻어지는 도박의 횡재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최선의 모습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축복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노동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성실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성실함이 주어진 환경에 성실함으로 드러나게 하십시오. 그곳에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시는 삶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죄악에 대하여 단호하고 분명한 태도입니다.
    죄악은 하나님과 분리됨에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등진 행동이 죄악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는 더욱 큰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을 따라가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이 죄악입니다.
    요셉의 용모의 준수함과 성실함에 반한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유혹하였습니다. 요셉에게 동침하기를 요구하는 여인에게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치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39:8-9)

    요셉은 죄악에 대한 분명하고 단호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죄악의 유혹에 대하여 주저하거나, 망설이거나, 기웃거림이 없었습니다. 요셉은 계속되는 죄악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옷을 잡아당기며 동침하기를 요구하는 보디발의 아내에게서 자신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죄악의 유혹을 단호히 거부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죄악의 즐거움 보다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요셉에게 보디발의 아내의 요구를 물리친 것이 패배를 안겨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감옥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에게 감옥의 생활로 애굽을 지배하는 총리가 되는 길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죄의 뿌리침은, 결국 더 큰일을 만드시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계획에 참여하도록 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범사를 형통케 하는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심은 죄의 능력에 패하신 것 같지만 하나님은 십자가 다음에 부활의 영광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죄악에 대하여 단호하고 분명한 태도를 가지는 사람이 되십시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이러한 생활이 형통한 삶의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주어진 조건을 하나님의 섭리에 비추어 사는 삶이었습니다.
    인간 삶의 전문가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생애를 다루십니다. 모든 사람의 생애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치 있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애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과정인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그 섭리안에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향한 고백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애굽이 총리가 되어 식량을 얻으러 온 형들과 만났을 때 말했던 것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45:5-8)
    또한,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이 혹시 자신들을 미워하여 과거의 자신들의 죄악에 보복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형제들에게 같은 표현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50:19-20)

    요셉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야곱의 자손들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자손인 언약의 백성과 수많은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요셉이 7년 흉년에 앞서 노예로 팔리는 과정과 죄수가 되는 과정이 필요했던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후손가운데서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가 태어나시게 하기 위해 약속의 백성들을 7년 흉년의 어려움 속에서 보호하셔야 했고, 거기에 요셉을 필요로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불행한 환경 중에도 원망하지 않고 감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러한 사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중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는 사람이 현실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소중한 생애의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비추어 살아가는 사람이 범사를 형통케 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골 가난한 농부의 아들인 한 젊은이가 사진기술을 배우고자 도시의 큰 책방에 우편으로 사진술교본을 주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서점의 착오로 복화술에 관한 책이 배달되었습니다. 가난함으로 반송할 수도 없고 하여 복화술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고 복화술에 대하여 흥미를 갖게되어 복화술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 젊은이는 후에 유명한 복화술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에드가 베른'입니다. 그가 자신이 조각하여 만든 인형으로 복화술을 구사하며 연기할 때,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폭소를 터뜨리며 즐거워하며 삶의 시름을 잊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사건들은 그 어느 하나라도 우연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역사에 의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많은 삶의 사건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에 비추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속에 나의 삶의 의미와 함께 가치와 형통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각자의 생활의 정황은 어떻습니까? 어렵고 힘든 모든 과정을 감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삶의 과정을 어떻게 걸어가고 있습니까? 감사의 사건으로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모두에게 유익함을 전해주는 삶의 역사로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바로 형통케 하시는 역사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에서 비롯됩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의 역사는 믿음의 성실함을 가짐으로서 입니다. 죄악에 대한 단호한 태도의 생활에서입니다. 주어진 조건을 하나님의 섭리에 비추어 보는 지혜로움에서입니다. 바로 여러분 모두가 범사를 형통케 하는 자의 삶으로 승리하십시오. 아멘.


    형통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이 세상에서 형통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았으므로 장차 누려야 할 은혜를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사형통을 강조하는 이유는 사람을 유혹하는 세속적인 미끼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육체가 요구하는 것을 만족시킬만한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만사형통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통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믿음 좋은 사람들의 뜻을 성취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일하시기 때문에 결코 개인의 뜻과 목적이 성취되는 만사형통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기독교 신앙이 세상에서의 형통을 지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고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현대 기독교의 신앙형태는 자본주의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믿음에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고난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랄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대로만 살면 모든 일이 잘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목적이 이끄는 삶’(릭 워렌)이나 ‘긍정의 힘’(오스틴)과 같은 서적들이 교회 안에서 신앙필독서로 변모되어 권장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 과연 신자를 ‘만사형통’으로 이끌어 갈까?
    성경을 아무리 봐도 그러한 형통은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 ‘믿으면 형통한다’는 주장은 비성경적이며 반기독교적인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혹 필자의 이러한 말이 개인의 복을 부정하는 것이어서 반발심이 일어난다면 조용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한다.
    예수님이 과연 현세의 복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그러한 십자가는 존재하지 않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 신자가 아니다.

    형통을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요셉을 예로 들지만 그것이 현대 기독교가 말씀에 관심이 없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왜냐하면 요셉의 형통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39:2을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23절에서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는 말을 한다.

    성경은 분명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이 형통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지만 중요한 것이 여기서 말하는 ‘형통’의 의미는 세상에서의 형통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다는 것 때문에 여호와가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성공한 형통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긴 하였지만 어쨌든 애굽 왕인 바로의 신하다. 그렇다면 누가 더 복을 받았으며 형통한 사람인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정말 세상에서의 형통의 복을 주신 것이라면 이왕이면 국무총리가 아니라 애굽의 왕이 되게 했어야 맞지 않는가?

    이것만이 아니다. 요셉이 형통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의 인생은 그의 뜻대로 된 것이 아니다. 요셉은 하나님에 의해서 꿈을 꾼 것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사서 결국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고, 유다의 개입으로 인해서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으나 미디안 사람 상인에게 팔리는 처지가 되었다. 이것이 요셉의 형통인가?

    또한 요셉이 보디발의 신임을 받아서 그의 가정총무가 되긴 하였지만 이것을 형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종으로 팔린 요셉이 주인의 신임을 받아 가정총무가 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형편에서는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형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쨌든 요셉은 형들로 인해 종의 신분이 되어 타국에서 고생을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통한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다. 그리고 역시 옥에서도 간수장의 신임을 받아 옥중의 죄수를 관리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것 역시 옥에 갇힌 당시 형편에서는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디발의 가정총무로 있던 것에 비하면 형통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이 심하게 꼬인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성경은 이러한 요셉을 두고 형통한 것으로 말한다.  

    이렇게 요셉의 인생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갈수록 꼬여만 갔는데도 불구하고 종이지만 가정총무가 되었고, 옥에 갇혔지만 죄수를 관리하는 직책을 맡아서 편하게 지냈으니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하게 한 것이 아니냐? 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인도하신다고 해도 과연 형통의 복으로 간주하며 기뻐할지 묻고 싶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통하게 하셨다는 의미는 창 45:4-8절의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는 구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셉은 자신의 지금까지의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여 계셨음을 깨닫는다. 꿈을 꾼 것이나 형들에 의해서 상인들에게 팔린 것 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애굽으로 보내시기 위한 조치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야곱과 형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결국 요셉에게 있어서 형통이란 하나님이 인도하신 삶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 자체가 신자에게는 형통이라는 뜻이다.

    제자 베드로는 형통한 삶을 살았지만 가룟 유다는 형통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베드로가 세상에서 안락하게 살았다고 할 수 없지만 형통한 삶을 살았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도하신 삶이라면 그 삶은 분명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향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을 형통으로 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형통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가치없게 보기 때문이다.

    신자는 분명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 삶을 살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어코 자기 백성을 영원한 생명의 자리로 인도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재의 삶이 원하는 것과는 달리 고난과 고통이 계속되는 현실이라고 해도 신자가 믿을 것은 하나님은 그러한 고난과 고통을 동원하여 나를 생명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가 이것이 진정한 현실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을 때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만사형통을 말하는 현대 기독교는 분명 비성경적이며 비신앙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주어진 영원한 생명에 가치를 두지 않고 세상의 형통에 가치를 두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피를 값없게 여기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타인보다 형편이 나아진 것을 가지고 형통이라고도 복받았다고도 말할 수가 없다. 신자의 참된 복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형편이 나아진 것을 형통한 것으로, 복받은 것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는 것 밖에 안된다. 이것은 결국 형편이 나아진 것으로 인해 오히려 저주에 이를 자임이 증거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있고 성경을 외면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피보다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고, 십자가보다는 돈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기 때문에 만사형통이라는 말이나 ‘믿는자에게 불가능은 없다’ ‘하면 된다’는 말이나 ‘믿으면 복받는다’는 말들이 난무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 교회에 필요한 것은 성경의 바른 해석이다. 청중들의 귀를 만족시켜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계시하시는지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가감없이 그대로 전달되어야 한다.



    만사형통(萬事亨通) 소개

    '만사형통(萬事亨通)'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다'라는 의미로, 모든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길 바라는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인생의 여러 길에서 발생하는 도전과 어려움을 극복하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 성어는 희망과 응원의 메시지로 전달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꿈과 목표가 있더라도, 그 길은 항상 순탄치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사형통'의 마음가짐으로 장애물을 극복하고, 성공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만사형통의 의미와 유래, 그리고 이 성어가 사용되는 실제 사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만사형통(萬事亨通)의 뜻과 유래

    ‘만사형통(萬事亨通)’은 고대 중국 문헌에서 유래한 성어로, 직역하면 '만 사물이 형통하다'는 뜻입니다.

    이 성어는 모든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 말은 인생의 다양한 분야에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기원하거나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보통 사업, 관계, 학업, 가정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거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사업을 시작하면서 모든 계획이 순리에 따라 진행되고 성공하는 상황에서 "만사형통"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개인의 인생에서도 모든 일이 원만하게 풀리는 것을 기원할 때나, 친구나 지인에게 긍정적인 에너지와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할 때 사용되곤 합니다.

    "만사형통"이라는 말은 중국의 고사성어로서 고대로부터 인간의 삶과 세상의 동향에 대한 이해를 깊게 담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활력 넘치는 에너지를 상징하며, 부정적인 장애물이나 어려움 없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각자의 목표와 꿈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그 과정에서 얻는 성공과 만족감을 상징하는 긍정적인 성어로, 현대에 와서도 이를 기원하는 말로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만사형통은 인생의 길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이 어려움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길 바라는 진심어린 기원이자,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과 의지, 그리고 희망을 담은 성어로 여겨져 현대인들에게도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한자풀이

    각 한자의 뜻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萬(만): 만, 많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모든'을 의미합니다.
    • 事(사): 사물, 일을 의미합니다.
    • 亨(형): 원활하다, 순조롭다는 뜻입니다.
    • 通(통): 통하다, 관통하다는 의미로 여기서는 '순조롭게 진행되다'를 의미합니다.

    실생활 예시

    1.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지금은 만사형통이다."
    2. "그는 학업과 운동, 인간관계까지 만사형통으로, 정말 부러워할 만하다."
    3. "결혼 초반엔 많은 충돌이 있었지만, 서로를 이해하게 된 후에는 만사형통이 되었다."
    4. "회사 프로젝트가 처음에는 험난했지만, 팀원들의 노력 덕분에 만사형통으로 마무리되었다."
    5. "처음엔 거침없던 그는 성격 개선 노력 덕분에 사회생활이 만사형통이 되었다."
    6. "어려운 시기를 극복한 후, 그의 삶은 이제 만사형통이다."
    7. "학교 선후배와의 관계가 만사형통인 그는 모두에게 사랑받는다."
    8. "우리 팀은 처음부터 만사형통이었으므로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9. "건강을 회복한 후로는 일도, 가정도 만사형통이다."
    10. "그녀의 디자인 능력 덕분에 회사의 판매는 만사형통이 되었다."
    11. "자신의 노력을 통해 실력을 키운 그는 이제 직장에서 만사형통이다."
    12. "신입사원 시절 힘들었던 그가 이제는 회사에서 만사형통으로 일하고 있다."
    13. "어린 시절 교육의 기회가 없었던 그는 노력으로 학문과 직업에 만사형통하게 되었다."
    14. "가족들의 도움과 응원 덕분에 그의 사업은 만사형통이 되었다."
    15. "그는 인생의 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이제는 만사형통의 삶을 살고 있다."

    마무리

    오늘은 '만사형통(萬事亨通)'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 성어는 '만사' 즉 모든 일이 '형통' 잘 풀리는 것을 의미하며,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무엇이든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상황을 가리키며, 비즈니스나 개인의 삶에서 흔히 사용됩니다.

    이 성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노력과 능력을 믿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며,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게 합니다.

    긍정적인 마인드와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루어진 성공은 '만사형통'의 가장 큰 특징이며, 그로 인해 얻어진 성취감과 만족감은 개인과 팀, 그리고 조직 전체에 큰 자부심을 안겨줍니다.

    이 성어는 긍정의 힘을 강조하며, 힘든 상황에서도 지속적인 노력으로 성공을 이끌어내는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고대의 지혜와 현대의 열정이 만나 탄생한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오늘 배운 '만사형통'을 일상에서 활용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향해야 할 긍정적인 마인드와 지향점을 제시합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성어와 그 뜻을 소개하며 여러분과 함께 배워가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
    단지 그 일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릴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 벤저민 프랭클린 -


    성공은 준비와 기회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제이슨 크리스 -

    이 표현은 《주역(周易)》이라는 고대 중국의 철학서에서 유래합니다. 《주역》은 음양과 오행의 이론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사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 책인데, 그 안에서 "亨通"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주역》의 '형통': 《주역》에서 '亨(형)'은 '흉통'이 아니라 '형통'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잘 풀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불통하지 않고, 길이 열리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형통'은 《주역》의 64괘 중에서 '건(乾)' 괘와 '태(泰)' 괘에서 나오는 중요한 개념으로, 특히 사람이 자수성가하고 모든 일에서 번영을 이루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亨通"이란 말은 '사방이 막히지 않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상태'를 상징하는 개념입니다.


    ◇ 문화적 배경


    "만사형통"은 중국의 명절이나 중요한 행사에서 축복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 특히 새해를 맞이하거나 사람들의 사업이나 개인적인 성공을 기원할 때 자주 사용됩니다. 이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기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새해 인사나 출사(出仕) 또는 승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종종 사용되며, 어려운 일이 많을 때, 모든 것이 잘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쓰입니다.

    3. 만사형통(萬事亨通)의 현대적 해석


    만사형통

    ① 문제 해결과 순탄한 진행


    현대적 해석에서 "만사형통"은 단순히 일이 잘 풀린다는 의미를 넘어, 어려운 문제들이 원활하게 해결된다는 의미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특히,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때 "만사형통"은 문제 해결능력이나 위기 극복을 잘 해내고 결과적으로 순조로운 상황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② 개인적인 성장과 발전


    현대에서는 사람들이 자아실현이나 개인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만사형통"은 개인의 목표 달성과 관련하여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의 승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의 성공, 또는 개인적인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만사형통"은 자신이 설정한 목표가 계획대로 잘 풀린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③ 사회적 관계와 협력


    현대 사회는 사람들이 협력과 소통을 통해 성공을 이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 "만사형통"은 개인 간의 갈등이나 소통의 문제 없이, 협력과 조화를 통해 모든 일이 잘 풀린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팀워크가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서로 잘 협력하고, 원활하게 소통하여 목표를 달성하는 상황에서 "만사형통"이 사용될 수 있습니다.

    ④ 행복과 평화로운 삶


    "만사형통"은 또한 행복과 평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바람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의 만족과 심리적 안정을 기원하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스트레스와 불안을 많이 겪는 가운데, "만사형통"은 내면의 평화와 균형을 이루어, 삶이 안정적이고 순조롭게 흘러간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⑤ 디지털 및 글로벌 시대에서의 의미


    디지털화된 현대 사회에서 "만사형통"은 글로벌 네트워크와 기술 발전을 통해 사업이나 개인적인 일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연결되고,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국제적인 사업 확장, 원활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통한 문제 해결 등에서 "만사형통"은 빠르고 효율적인 연결과 진행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4. 만사형통(萬事亨通) 한자풀이


    만사형통

    萬 (만): '많을 만', 즉 '많다', '무수하다'라는 뜻입니다.

    事 (사): '일 사', '일', '사건', '일어난 일'을 의미합니다.

    亨 (형): '형통할 형', '길하다', '잘 풀리다'라는 의미입니다.

    通 (통): '통할 통', '통하다', '원활하다', '잘 연결되다'는 뜻입니다.

    만사형통


    ▣ 형통한 축복

     

    성경: "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단 6:28)

     

    형통이란 ‘처음보다 끝이 좋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은 처음 포로생활 동안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철저한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자굴에 들어가는 위협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다니엘은 남들보다 형통한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비록 처음에는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끝은 형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다니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은혜로 인해 범사가 형통한 축복을 받게 될 줄로 확신합니다.

    형통한 삶 / 

    형통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찰레아흐’입니다.
    이 말은 ‘번성한’(prosperous)이란 뜻입니다.
    영어성경에는 ‘번성한’ 또는 ‘성공적’(successful)이란 말로 번역돼 있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삶을 형통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써 형통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성실하여 그의 형통함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보게 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또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인정하면서 살았습니다.

    로리 베스 존스는 ‘주식회사 예수’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성공에 대한 정의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성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형통의 뜻이 성공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형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형통한 삶(여호수아 1:1-8) /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7절)

    "형통한다"는 국어사전적 의미는 "온갖 일이 뜻과 같이 잘되고 번영함"
    "목적한 바를 이룬다"
    성공의 의미가 강합니다.
    예를 들어 뼈대있는 가문, 인품이 있고 덕망 있는 자, 적당히 베풀 줄도 알고 돈과 명예를 소유한 자를 세상 사람들은 형통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경적 형통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 그 자체가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형통의 뜻이 성공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형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형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축복의 땅으로 믿음의 전진을 할 때 형통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원해내시고 광야의 유랑생활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 즉, 형통의 복을 허락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 여호와께서 주신 땅으로 가야 형통합니다.
    마이 웨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길, 하나님을 위한 길을 믿음으로 전진할 때 형통하게 됩니다.

    둘째, 머무르거나 후퇴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전진할 때 형통합니다.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라.
    내가 주는 땅으로 가라.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주리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행동강령을 수반합니다.

    건너라, 가라, 밟으라는 신앙생활의 3대 명령은 광야에 머물러 있지도 말고, 애굽으로 되돌아갈 생각도 말고, 오직 하나님이 예비하고 준비하신 땅으로 전진할 때 형통한다는 뜻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형통한다는 뜻은 무슨 의미일까요?
    목적 없이 되는 대로 가도 형통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오직 여호와께서 주신 땅으로만 걸어가야 함을 말합니다.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요 14:6)만 따라가야 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전진해야만 형통할 수 있습니다.
    오른편의 물질을 볼 것 없고 왼편의 명예도 볼 것 없습니다.
    오직 치우치지 말고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향해 믿음으로 전진하면 누구든지 형통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축복의 땅으로 믿음의 전진을 하게 하옵소서.
    때로는 힘들고 어려워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오직 형통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의인의 형통(잠언 11:10)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공격하던 당시 세계 역사학자 회의가 있었는데 그 때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 토인비 박사와 일본의 역사학자가 함께 식사를 하며 서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토인비 박사가 일본의 역사학자에게 “일본이 대동아 전쟁을 일으킴으로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하자, 일본 학자는 “대동아 전쟁을 통해 온 아시아 사람들이 더 잘살게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토인비 박사는 그 사람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일본이 행한 침략적 악행은 일본 패망의 씨앗을 심은 것으로, 그 열매로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후 일본은 대동아 전쟁을 통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평화를 파괴했습니다.
    그러나 토인비의 말과 같이 그렇게도 흥왕하던 일본의 제국주의는 곧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사람들 사이를 이간하고 중상하며, 가정을 불화하고 파탄케 하며, 사회와 국가에 불신과 멸망을 가져다주는 사특한 자를 싫어하고 그들이 잘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패망하면 온 성읍 사람이 기뻐 환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온 성읍에 덕을 쌓아 그 형통으로 이웃의 기쁨이 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악인이 형통할 때(시편 73편)  /  악인의 형통함이 의인의 실족함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 주변에서 악인이 오히려 건강하게 살고, 재물을 얻고 번영하는 것을 봅니다.
    악인이 더 출세하고 승진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의롭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병들고 재산을 잃고 인생의 싸움에서 패배자로 밀려나는 것을 목격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렇다면 그는 공평하신 분이십니까?

    시편기자는 이 질문으로 인하여 그가 거의 실족할 뻔하였다고 말합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가해성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하나님을 향한 질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직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직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질문을 끌어안고 성소에 들어가 엎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해답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이 다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악인이 자랑하던 것들이 졸지에 소멸하는 진리를 깨우친 것입니다.
    인생이 아무리 길어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 순간 한 바탕의 꿈인 것을 깨우친 것입니다.
    그리고 꿈이 깨이면 우리는 더 이상 간밤의 꿈을 인하여 고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이 형통해 보일 때 그로 인하여 질시가 내 안에 일어날 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지각해야 합니다.
    그의 영원하신 임재와 실재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악인의 번영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가를 깨움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악인의 번영을 시기하거나 구함이 아니요, 주를 가까이 함인 것입니다.

    주여, 악인의 번영이 부러워 보일 때 오히려 예배에 힘쓰게 하시고 주안에 거하는 행복을 더욱 충만히 누리는 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유태영 박사의 형통  /  유태영 박사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들은 형편 때문에 교육시킬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유 박사는 어릴 때 동네 사람들로부터 똑똑하다는 인정을 받아 겨우 국민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5학년 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하나님께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신다는 교회학교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는 중학교를 다니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통신중학교를 다녔으며 그 후에 서울로 올라와서 낮에는 구두닦기를 하면서 저녁에는 야간 고등학교를 다녀 졸업했습니다.

    그는 여러 번 굶어 보았으며 남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을 것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한강이 얼어 붙은 추운 겨울에는 냉방에서 내의도 없이 있어야 했는데 너무 추워 잠을 못 자고 방안을 돌아다니다가 새벽에는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햇볕이 나면 교회 담 밑에서 몸을 녹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믿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의지하자 비록 과정은 힘들었지만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미국, 이스라엘, 덴마크로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유 박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꿈을 가지고 기도에 힘쓴 것이 형통의 비결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행사가 형통하려면(이사야 14:24-27)  /  우리의 행사가 형통하려면
    첫째,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잘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시각에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를 때에는 우리의 행사가 형통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맞추기 위해서는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가운데 기록된 대로 지키려고 힘쓸 때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될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의 모든 행사를 야웨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일을 우리의 일로 만들지 말고 하나님의 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길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형통으로 인도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생각을 성경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셨사오니 늘 묵상하게 하시고 모든 경영을 맡겨 드림으로 형통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심은 대로 거둔다 / 레오나르도 킬러 박사거짓말 탐지기를 발명하고 25,000명을 시험한 후, 인간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성경은 정직하고 진리는 단순하다.
    내 손이 수고할 때 먹고 복되고 형통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를 속이면서 겉으로 그렇게 사는 척만 한다면 결코 그 열매를 맛볼 수 없다.

    프랑스 혁명 때 로베스피에르는 사람들을 처단하기 위해 단두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이 만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은 무엇을 말하는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성경 말씀을 그대로 증명하는 것이다.

    당신이 성숙하고 싶다면 셈 레벤슨의 말에 귀 기울여라.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다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다면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다면 너희 음식을 배고픈 사람에게 나눠 주고, 아름다운 머릿결을 갖고 싶다면 어린아이에게 하루 한 번씩 네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다면 결코 혼자서는 걷지 말라.”

    이제 영적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경건의 시간을 심고 경건의 습관을 갖고 눈물로 씨를 뿌리라.
    그러면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둘 수 있다.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이승엽 선수가 국민타자라는 별명에 걸맞지 않게 2할 4푼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역대 선수 중 타이거브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통산 타율은 3할6푼7리입니다.
    세계 최강의 타자도 평균 3타수 1안타에 불과합니다.
    만약 모든 야구선수의 타율이 5할대 이상이라면 무슨 재미로 야구를 하고 또 야구 구경을 하겠습니까?
    인생도 야구와 같지 않나 생각합니다.
    모자람 속에서 세상을 사는 의욕과 재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케 하셨습니다.
    인생에는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습니다(전 3:4).
    순탄한 날과 험난한 날 등이 번갈아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일생 동안 성공만 거듭하는 사람도 없고 실패만 거듭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공했다고 자만할 것도 없고 실패했다고 좌절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3분의 1이라도 이루어졌다면 그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쉽게 성취된다면 그것은 참 재미없는 인생입니다.



    무병장수(無病長壽) 소개

    '무병장수(無病長壽)'라는 표현을 오늘 소개하겠습니다.

    이는 '병이 없이 오래 사는 것'이라는 의미로, 건강한 삶을 오래 누리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목표와 소망을 설명할 때 사용됩니다.

    장수와 건강은 인간의 고대부터 바라던 가치로, 이 성어는 건강하게 살아감에 있어 올바른 생활 습관과 균형 잡힌 식단, 마음의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합니다.

    건강한 생활습관, 균형 잡힌 식사, 적절한 운동 등으로 이루어지는 무병장수는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가치입니다.

    무병장수의 이상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이며, 건강한 삶의 기반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무병장수를 위한 다양한 노력과 실천, 그리고 이 표현이 사용되는 실제 사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무병장수(無病長壽)의 뜻과 유래

    '무병장수(無病長壽)'라는 표현은 병 없이 오랫동안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가치를 나타냅니다.

    이는 오래 살되 질병이나 건강 문제 없이 튼튼하게 생활하는 것을 표현하는 성어입니다.

    유래를 보면, 동양 문화에서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왔으며, 건강과 장수에 대한 중요성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철학, 의학, 영양학과 심리학을 접목시켜 무병장수의 이상을 달성하려 했습니다.

    기원전의 동양 의학에서는 몸과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졌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건강한 삶의 기반으로 간주됩니다.

    예로, 중국의 고대 의학인 도인은 신체, 마음, 영혼의 조화를 통해 무병장수를 추구했습니다.

    무병장수는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번영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건강한 국민은 강한 나라를 만든다는 신념이 있었으며, 여러 왕조에서는 무병장수를 국가의 목표로 삼기도 했습니다.

    무병장수의 개념은 요가, 명상, 올바른 식습관, 일상적인 운동 등을 통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는 현대의 건강 추구와도 연결됩니다.

    건강과 웰니스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현재, 무병장수의 철학은 다양한 분야에서 반영되고 있습니다.

    또한 무병장수는 질병이나 노화로 인해 삶의 질이 저하되는 것을 방지하고, 인생을 최대한 즐기고 활용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목표로 여겨집니다.

    이는 모든 세대와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의 꿈입니다.

    결론적으로 '무병장수'는 병 없이 오래 살아가는 것을 넘어서 인생의 질을 높이고, 개인과 사회가 함께 번영하고 발전하는 길을 제시하는 현명한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는 오늘날의 건강과 웰니스 추구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와 꿈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한자풀이

    각 한자의 뜻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無(무): 없다를 의미합니다.
    • 病(병): 병, 질병을 의미합니다.
    • 長(장): 길다, 오래를 의미합니다.
    • 壽(수): 장수, 수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무병장수'는 병 없이 오랫동안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가치를 나타냅니다.

    마무리

    오늘은 '무병장수(無病長壽)'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것은 병 없이 오래 사는 것을 의미하며, 건강한 삶과 오래 사는 데 중요한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무병장수는 우리 생활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며, 규칙적인 운동, 올바른 식습관, 스트레스 관리 등을 통해 추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활 습관은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더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즐길 수 있습니다.

    오늘 배운 '무병장수'의 의미를 일상에서 찾아보고, 실천해보시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성어와 그 뜻을 소개하며 여러분과 함께 배워가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1월 13일(월) 창세기 34-3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벧엘로 올라가자(35: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Then come, let us go up to Bethel, where I will build an altar to God, who answered me in the day of my distress and who has been with me wherever I have gone."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let us go up to Bethel)

    벧엘(
    Bêyth-ʼÊl) בֵּית־אֵל 스트롱번호 1008

    1. 하나님의 집 : 팔레스타인의 한 장소 ‘벧엘’.  2. 수 16:1
    발음 [ Bêyth-ʼÊl ]
    어원  / 1004와 410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0회 사용
    • 1. 고유명사 하나님의 집 : 팔레스타인의 한 장소 ‘벧엘’ [가나안 족의 고대 도시였으나 훗날 베냐민 지파에 부속되었다], 수16:1,2, 삼상13:2.
    • 관련 성경  /   벧엘(수 16:1, 2, 삼상13:2).

    기둥 - 기둥 주(柱) / 열 십(十) + 사람 인(人) + 주인 주(主)

    올라가자( ʽâlâh) עָלָה 스트롱번호 5927

    1. 올라가다.  2. 사 14:14. 3. 출 24:13
    발음 [ ʽâlâh ]
    구약 성경  / 890회 사용
    관련 성경  /  ☞동트다(창19:15, 삼상9:26), 치솟다(창19:28, 삿20:38), 새다(창32:26), 피다(창40:10), 오르다(창49:4, 신5:5), 올라가다(창49:9, 수2:8, 암9:2), 가다(출1:10, 수18:11, 호8:9), 올라오다(출8:3, 삿12:3, 아8:5), 나오다(출13:18, 아4:2), 뽑다(레16:9), 메다(민19:2, 삼상6:7), 나아가다(신25:7, 삿4:5), 닿다(수8:20, 욥20:6), 이르다(수15:6, 삿21:5), 대다(삿16:18), 일어나다(삿20:40, 호13:15), 들리다(왕하19:28, 사37:29), 들어오다(삼상14:21), 기록하다(대상27:24), 중수되다(느4:7), 나타내다(시78:31), 퍼지다(잠24:31), 들다(잠26:9,슥14:13), 뛰어나다(잠31:29), 기어오르다(렘4:29), 덮다(사8:7), 생각하다(렘7:31), 두다(렘32:35), 치료받다(렘8:22), 뜻하다(렘19:5), 넘치다(렘51:42), 올리다(왕상10:29, 에1:14), 솟아오르다(사34:3, 암8:8), 상달하다(출2:23, 욘1:2), 돌다(수6:15), 드리다(왕상18:29, 왕하3:20), 미치다(대하36:16), 달다(시62:9), 움돋다(암7:1), 솟아나다(민21:17), 타다(창31:10, 렘46:4), 달리다(렘46:9),치다(렘49:31), 올려 보내다(창44:33), 마르다(출16:14), 떠오르다(출19:18, 사34:10), 행하다(출33:5), 입다(레19:19, 겔44:17), 지나가다(민20:19), 높아지다(신28:43), 사무치다(삼상5:12), 물러가다(삼하23:9), 맹렬하다(왕상22:35, 대하18:34), 승천하다(왕하2:11), 떠나가다(왕하12:18, 렘34:21), 진척되다(대하24:13), 일으키다(전10:4), 날리다(사5:24), 자라나다(사53:2), 떠나다(렘21:2, 겔11:24), 날아오다(렘49:22), 들이다(겔14:7), 자라다(겔47:12), 강성하다(단8:8), 뛰다(암3:5), 가리다(욘4:6), 통하다(대상26:16), 품다(겔20:32), 지존하다(시47:9), 초월하다(시97:9), 머물러 있다(민9:22), 데리고 오다(스1:11), 인도하다(창50:24, 출17:3), 가지다(출13:19), 켜다(출27:20, 민8:3), 이끌어내다(민16:13, 수24:32), 나오게 하다(민20:5), 주다(삼상2:19), 메어올리다(대상15:12),데리다(대하8:11), 가지고 오다(스1:11), 기도하다(욥42:8), 끌어내다(시30:3, 겔29:4),인도하여내다(출32:4, 삿6:8, 렘16:15), 인도하여 올리다(민21:5, 왕상12:28, 암3:1), 무릅쓰다(애2:10, 겔27:30), 입히다(겔37:6), 거느리다(겔23:46), 굽이치다(겔26:3), 옮기다(삼상7:1, 렘27:22), 옮겨가다(삼상6:21), 가져오다(삼상19:15), 불러올리다(삼상28:8),몰아오다(렘51:27), 새기다(대하3:5), 쌓다(대하32:5), 고치다(렘30:17), 키우다(겔19:3), 건지다(욘2:6), 새김질하다(레11:3,5, 신14:7),채우다(삼하1:24), 제사하다(렘48:35), 충돌하다(나3:3), 기록되다(대하20:34), 끌려가다(나2:7), 서다(렘51:3).



    벧엘 & 루스

    벧엘 ㅡ 하나님의 집

    히브리어로 '집'을 뜻하는 '벳(Beth, 혹은 Beit)'과 '하나님'을 뜻하는 '엘(El)'을 합쳐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

    역사

    야곱이 형 에서/에사오의 칼부림을 피해 도망다니다가 루스/루즈 지역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는데, 꿈 속에서 하늘까지 닿은 층계가 보였고 이를 통해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야곱이 그 모습을 보고 있자 하나님인 야훼가 그의 옆에 나타나 이렇게 계시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하나님이 계신 집이니 진정 두려운 곳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음 날 아침 베개 삼던 돌을 세워 단을 쌓고 기름을 부어 기도를 올려 그곳을 벧엘/베델이라고 불렀다.

    여호수아 8:12, 8:17

    ㅡ이스라엘 족속이 아이와 "벧엘"의 사람들과 전쟁을 하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기원전 1240-35년 사이에 강성한 도시였던 벧엘은 무참히 파괴되었으며,

    이스라엘 핀켈스타인을 포함한 학자들은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인들의 소행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나무위키)

    ​벧엘 / 베델(Bethel)

    ㅡ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지명

    ㅡ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17~19km 지점

    본래 ‘루스’로 알려졌던 성읍(창 28:19). 예루살렘 북쪽 세겜 방향으로 약 17~ 19㎞,

    실로 남쪽 약 29㎞, 아이 성의 서쪽 약 3㎞ 지점에 위치한 곳.

    가나안 정복 전쟁 후 에브라임 지파가 차지하게 되었고(삿 1:22-25; 4:4-5)

    사사 시대 말기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길갈에서 이곳 벧엘로 옮겨져 성막이 세워짐으로써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지기 되기도 했다(삿 20:18, 26-28).

    사무엘은 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있는 동안 이곳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하면서 이스라엘 전역을 치리하였다(삼상 7:15-16). 그리고 훗날 엘리야 시절에는 이곳에 선지자 학교가 있었으며(왕하 2:1-3),

    또 이곳 젊은 아이들이 엘리사를 조롱하다가 42명이 암콤에게 죽임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왕하 2:23-25).

    한편, 이곳은 아브라함 이후(창 12:8) 구약 족장들이 일찍부터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경배했던 곳이다.

    특히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가던 길에 꿈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본 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벧엘’이라 이름하였다(창 28:19).

    왕국 분열 후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이곳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워 범죄의 온상으로 만들어 버렸다(왕상 12:29-33; 13:1-22; 왕하 10:29). 그러자 아모스 선지자와 호세아 선지자는 이곳의 우상 숭배 행위를 엄하게 지적하면서 회개치 않을 경우 당할 멸망을 경고하였다(암 3:14; 5:5-6; 7:10-13; 호 4:15; 5:8; 10:5, 8).

    특히 호세아는

    ㅡ ‘벧엘’(하나님의 집)을

    벧아웬’(사악한 집, 우상 숭배의 집)이라 고쳐 불러 그 죄악상을 고발하기도 했다(호 4:15).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남유다의 요시야 왕은 이곳에 있던 우상 제단을 부수고 여호와 예배를 회복시켰다(왕하 23:15-23). 신구약 중간 시대에는 수리아의 바키데스(Bacchides) 장군이, 신약 당시 유대 전쟁 때에는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장군이 점령하였다.

    이후 벧엘은 비잔틴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며 도시가 매우 발달하였는데, 이슬람 제국의 침공 이후 폐허화되었다.

    ​성경에는 이외에도 일명 ‘브둘’(수 19:4), ‘브두엘’(대상 4:30)이라 일컬어지는 시므온 지파에 속한 벧엘(삼상 30:27)이 있는데 그 위치는 분명치 않다.(라이프성경사전)

    ■ 루스(Luz) ​

    뜻 : 편도나무(살구나무)​

    1.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도피하던 중 하나님을 만난 장소. ‘벧엘’이라고도 한다(창 28:11-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창28/19

    가나안 정복 후 영토 분배시 베냐민 지파의 북쪽 경계지가 되었다(수 16:2; 18:13). 수 16:2에는 벧엘과 루스가 별개 지역으로, 루스는 벧엘에 속한 남쪽 산맥에 위치한 가나안 성읍이었는데,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두 지역을 합쳐서 벧엘로 부르게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벧엘은 야곱에게 신앙적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특별한 장소이었습니다.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치듯 집을 떠났을 때 노중에서 하룻밤을 보내려고 길가의 돌을 취하여 베개를 삼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언제 다시 부모님을 뵈올 지 알 수 없는 막막한 밤이었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지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잊혀졌던 벧엘의 기억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두 개의 자리가 분명해야 합니다.
    첫째는 기도의 자리
    둘째는 말씀의 자리

    왜냐하면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전투를 벌일 때 모세는 지팡을 들고 아론과 훌과 더불어 산위로 올라갔습니다.
    여호수아는 칼을 들고 아말렉과 싸우려고 나갔습니다.
    지팡이는 기도를 상징합니다.
    칼은 말씀을 상징합니다.

    기도의 자리와 말씀의 자리를 갖는 사람을 일컬어 교회의 기둥이라고 합니다.
    기둥 주(柱)자를 보세요.
    사람이 어려운 십자가를 내 몫이라고 믿음으로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기둥이 모여서 맡은 자리를 지킬 때 기둥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큰 건물을 세울 수 있습니다.

    왜 벧엘로 올라가야 할까요?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이 삶의 환경으로는 아주 적합한 곳이며 만족할만한 지역일지라도 벧엘로 가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지난 날 야곱을 믿음으로 세웠던 은혜의 자리이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만족에 도취한 삶이 아니라 영적으로 새롭게 변화될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을 향하여 나가야 합니다.

    벧엘 회복을 위해 필요한 조치 세가지가 제시됩니다. 
    이것을 "영육간의 회개"라고 하겠습니다.

    첫째, 이방 신상을 버리라

    여호와 이외의 다른 신들과 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형상화된 신상(神像) 뿐 아니라(사 45:20; 렘 10:5; 행 17:29; 롬 1:22, 23) 유일신 여호와를 배척하는 모든 세력과 사상까지(범신론, 샤마니즘, 애니미즘 등)를 포함합니다.

    한편 어떻게 우상 숭배가 야곱의 집안에 행해질 수 있었던 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1. 라헬이 자기 부친의 드라빔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31:19)
    2. 야곱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얻은 노비(30:43)중에 우상 숭배자가 있었을 가능성
    3. 세겜 성의 약탈물 중 이방 신상이 섞여 있을 소지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을 정결케 하라

    몸과 마음의 동시적 정결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과 관계 맺는 자에게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레 11:45).
    이것은 모세 때 결례 의식으로 표현된(출 19:14; 민 19:12-13; 레 14:8) 헌신과 순종을 상징하는 행위를 말합니다(벧전 1:22).

    세째, 의복을 바꾸라

    출애굽 직후 모세에게도 내려진 이 명령은(출 19:10) 영적, 도덕적 정결상태를 외형적으로도 나타내라는 뜻으로 '회개'를 상징합니다(겔 36:25; 히10:22; 유 1:23; 계 19:2).
    사실 의복은 그 사람의 신분과 삼의 양태를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서 의복을 바꾸는 것은 곧 현재의 삶과 신분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삶에로의 전진을 위한 결단이라고 하겠습니다(고후 5:17).

    하나님이...이르시되 - 자신들의 힘으로 선민의 명예 회복을 추구하다가 끝내 피의 복수자와 약탈자라는 오명을 쓰게 된 야곱 가정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를 죄악과 위경의 올가미로 묶어버린 야곱 가정에 찾아오셔서 그들의 허물을 정확히 지적하시고 그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셨다. 태초부터 선포되고(1:3), 택한자에게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들려주시는(6:13;12:1;26:2) 창조주 하나님(엘로힘)의 말씀만이 죄악의 진흙속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며 새 삶을 살게 하신다.

    일어나( 쿰)
    - 큰 일을 앞에두고 그것을 향하여 떠날 것을 촉구할 때 발(發)하시는 하나님의 의미 심장한 분부이다(신 17:8).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제 일 조처로 절망적인 현실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을 명하신다(12:1;출3:10-12).

    벧엘로 올라가서
    - 벧엘은 야곱에게 있어 자신의 생애중 (1) 가장 괴로울 때 가장 뜨겁게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한 장소이자 (2) 가장 순수한 심정으로 가장 진실되게 신앙을 고백하였던 서원의 장(場)이었다(28:10-22).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바로 그곳으로 올라가라고 명한 것은 야곱이 벧엘에서 서원했던 내용들(28:20-22)을 이제 이행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다. 더우기 하나님은 언약 후손의 가문이 세속에 휩쓸려 당신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을 더이상 좌시하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바른 관계 정립을 위해 은혜의 처소 벧엘로 부르셨다. 이처럼 인간의 구원과 변화의 주도권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다.

    거하며( 웨쉐브)
    - '야사브'(체재하다)의 명령형으로 서원했던 '단'(28:22)을 쌓기까지 그곳에 머물라는 말씀이다.

    단을 쌓으라
    - 옛날 벧엘에 하나님의 전(집)을 건축키로 서원한(28:22) 야곱에게 제단 수축을 명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전에서 가장 핵심되는 부분이 바로 이 제단이기 때문이다. 제단은 회생의 피를 통해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복된 곳이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 이 외침은 파란 만장했던 야곱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온갖 괴로움 속에서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그 은혜, 그 언약을 되새기며(신 32:7; 욘 2:7) 다시 한번 신앙 결단을 촉구하는 말이다.
    과거 야곱의 때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숱한 세월 동안 이것은 성도들의 신앙 회복 운동의 모토(Motto)가 되어왔던 의미깊은 구호이다.
    한편 벧엘은 숙곳보다(33:17) 해발 300m이상의 고지대이기 때문에 '올라가자'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다.

    단을 쌓으려 하노라
    - 하란에서 돌아온 지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야곱은 자신의 집안을 번창케 하는데 전력한 나머지 아직까지 벧엘 서원(28:22)을 이행치 않고 있었다. 아마 세겜 성의 비극적인 사건(34:25)의 원인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영력있는 그리스도인(출애굽기 17:8-16)


    기둥 주(柱), 버틸 주(柱) : 나무 목(木) + 주인 주(主)
                                             나무 목(木) = 열 십(十) + 사람 인(人)

    1. 기둥, 2. 기러기발(거문고, 가야금, 아쟁 따위의 줄을 고르는 기구), 3. 줄기,  4. 풀의 이름, 자운영(紫雲英), 
    5. 버티다, 괴다,  6. 막다,  7. 비방하다(誹謗--), 헐뜯다,  8. 어기다(지키지 아니하고 거스르다), 순종(順從)하지 않다

    柱자는 ‘기둥’이나 ‘줄기’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柱자는 木(나무 목)자와 主(주인 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主자는 촛대에 불이 켜져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주인’이라는 뜻이 있다.
    柱자는 이렇게 ‘주인’이라는 뜻을 가진 主자에 木자를 결합한 것으로 ‘중심이 되는 나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즉 柱자는 방 중앙에서 불을 밝히던 촛대처럼 집의 중심을 잡아주는 ‘기둥’이라는 뜻이다.


    영력(靈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성(靈性)이라고도 합니다.
    영력은 영적인 능력, Spiritual Power를 말합니다.
    좁은 의미에서의 영력은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능력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능력이 있어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말씀의 권위와 능력이 있어서 말씀을 선포하기만 해도 역사가 일어납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영력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능력을 말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 하나님이 주시는 영력으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영력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영력이 있어야 합니다.
    교인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력이 있어야 신앙생활을 잘할 수가 있고, 영력이 있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고, 영력이 있어야 기도도 할 수가 있고, 영력이 있어야 세상에서 힘있고 능력있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인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성도는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의 학문이나 재물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지식,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 하나님이 주시는 재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을 공격해 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말하지요.
    "나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산에 올라가 기도할테니 장정들을 뽑아서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시오"
    이스라엘 백성의 아주 특별한 전투방법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말대로 전쟁터로 나가고 모세는 아론과 훌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모세는 산에 올라가서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기고, 모세의 손이 내려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론과 훌이 모세 곁으로 다가가서 모세를 돌 위에 앉히고 양쪽에서 팔을 붙잡습니다.
    모세의 팔이 해가 질 때까지 내려오지 않습니다.
    결국은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됩니다.

    모세가 손을 높이 들어 기도한 것 - 기도의 자리
    여호수아가 칼로 싸운 것 - 삶의 자리

    11절에 "모세가 그의 팔을 들면 이스라엘이 더욱 우세하다"
    13절에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그 백성을 칼로 무찔렀다"

    손을 높이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했다는 말
    여호수아의 칼은 무기의 칼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칼입니다.
    기도와 말씀이 전쟁을 이기는 유일한 무기였던 겁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기도해야 승리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기도하는 동안에만 승리합니다. 그 이상하지요. 하나님은 능력있는 분이지만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주시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가 있을 때에만 역사하시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해야 영력을 얻고 기도해야 신앙생활을 근사하게 할 수가 있고, 기도해야 능력있게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오래 전에 이스라엘의 베긴 수상이, 지금은 고인이 된 레이건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서 미국에 왔었습니다.
    베긴 수상이 White House에 와서 보니까 전화기가 세 대가 있는데, 붉은 색 전화기, 은색 전화기, 금색 전화기가 있는 겁니다.
    베긴 수상이 이상하다 싶어서 물었습니다.
    "이 세 대의 전화기가 각기 다른 색깔인데 무슨 특별한 뜻이라도 있습니까?"

    레이건 대통령이 하는 말이 "예, 뜻이 있지요. 여기 붉은 색 전화기는 소련과 전화할 때, 지금 러시아지요, 소련과 전화할 때에 사용하는 것이고, 은색 전화기는 일반적인 전화 통화를 할 때 사용하는 것이고, 금색 전화기는 하나님과 대화할 때 사용하는 전화기입니다."

    베긴 수상이 다시 물었어요.
    "하나님과 통화하시려면 전화비가 많이 나오겠네요?"
    그러자 레이건 대통령이 미국의 국력을 은근히 자랑하는 의미로 말합니다.
    "네, 많이 나옵니다. 한 통화에 1만 달러 정도가 됩니다."

    얼마 후에 베긴 수상이 레이건 대통령을 이스라엘로 초청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가서 보니까 베긴 수상의 집무실에도 색깔이 다른 세 대의 전화기가 있는 겁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이유를 물었더니 베긴 수상이 설명합니다.
    "붉은 색은 공산 국가와 통화할 때 쓰는 전화기고, 은색은 우방이나 업무 관계로 통화할 때 쓰는 전화기고, 금색의 전화기는 하나님과 통화할 때 쓰는 전화기입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다시 묻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통화하려면 요금은 얼마나 냅니까?"
    베긴 수상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전화하면 미국 돈으로 1센트 정도 나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깜짝 놀랐어요.
    "아니, 전화 요금이 왜 그렇게 쌉니까?"
    베긴 수상이 의미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미국의 하나님은 장거리에 계시기 때문에 한 통화에 1만 달러씩 나오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가까운 곳에 계시기 때문에 요금이 아주 쌉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동행하십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동행하십니다.
    오늘부터 가까이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영력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 영력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영력으로 직장 생활하고, 그 영력으로 공부하고, 그 영력으로 자녀를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그 영력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영력은 성경을 가까이 할 때에 생기는 겁니다.
    에베소서 6장 17절에 보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검이에요.
    오늘 성경에 나오는 여호수의 칼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한 거예요.
    베드로처럼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하는 자세를 여호수아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 하나님의 영감을 얻어서 영력이 생기는 겁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 칼보다도 더 날카롭다고 했습니다.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내고,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낸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경을 믿고 가까이 하면 하나님의 살아계신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우고 나가면 언제든지 승리했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앞세우고 영력이 생겨서 세상에 나아가면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확실하게 승리하게 된다는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어린이 동화 가운데 "개미들의 사랑"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자 청년 개미 하나가 길 건너편에 사는 여자 청년 개미를 사랑했습니다.
    어느 날 남자 청년 개미가 용기를 내서 애인을 만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개미가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더니 아버지는 길다란 지푸라기 두 개를 등에 업혀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도로가 오래되고 위험하니까 이것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게다. 꼭 가져가거라."
    염려되었던 거지요.
    아들 개미는 왜 이렇게 무거운 것을 지고 가야만 하느냐고 불평했지만, 아버지의 명령이라서 어쩔 수 없이 등에 업고 집을 떠납니다.

    청년 개미가 조금 가다가 보니까 도로에 틈새가 났는데, 얼마나 깊이 파였는지 개미가 보니까 그랜드 캐년의 계곡 같더랍니다.
    애인을 만나러 가던 청년 개미는 깊은 벼랑 때문에 좌절하게 됐습니다.
    개미는 낙담하여 땅에 주저앉습니다.
    순간 등에 업고 있던 두 개의 지푸라기가 떨어졌습니다.
    청년 개미는 두 개의 지푸라기를 계곡 위에다 놓고선 다리를 만들고 계곡을 무사히 건너갔습니다.
    애인을 만나서 데이트하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승리하며 힘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말씀과 기도의 두 기둥 밖에 없어요.
    말씀과 기도의 두 기둥이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이길 수 있는 무기가 되는 거예요.
    개미가 지푸라기로 계곡을 무사히 건너간 것처럼, 성도에게는 말씀과 기도가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는 거예요. 때로는 말씀과 기도가 힘들고 부담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말씀과 기도 때문에 우리가 살게 됩니다. 말씀과 기도가 우리 삶에 있어서 구원의 다리가 되는 거예요. 언제 어디서나 말씀과 기도로, 기도와 말씀을 지니고 살아서 영력을 얻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력을 주셔서 능력있게 살아가게 하시고 능력있는 신앙 생활하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언제 어디서든지 기도와 말씀을 지니고 살아서 영력을 얻고 세상에 나가서 승리하는 모든 교우들이 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벧엘로 올라가자(창세기 35:1~8)

    레이건이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시절, 당시 이스라엘의 수상이었던 베긴이 백악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레이건 대통령의 집무실에 들어가 보니 붉은 색 은색 그리고 금색 전화기가 있었습니다.
    베긴 수상이 물었습니다.
    “이 세 대의 전화기를 각각 어떤 용도를 쓰십니까?”
    “예, 여기 붉은 색 전화기는 소련과 전화할 때 쓰는 것이고, 은색 전화기는 일반적인 통화를 할 때 사용합니다. 
    특별히 이 금색 전화기는 하나님과 통화할 때 쓰는 전화기입니다.”

    농담으로 한 얘기이지요.
    베긴 수상이 다시 물었습니다.
    “하나님과 통화하시려면 전화비가 많이 나오겠네요?”
    그러자 레이건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그렇지요. 한 통화에 1만 달러 정도는 될 것입니다.”

    얼마 후 베긴 수상이 레이건 대통령을 이스라엘로 초청했습니다.
    베긴 수상의 집무실에도 색깔이 다른 세 대의 전화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레이건 대통령은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저기 금색의 전화기는 하나님과 통화할 때 사용하시겠군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과 통화하려면 요금은 얼마나 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베긴 수상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1 센트밖에 들지 않습니다. 
    미국의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시기 때문에 한 통화에 1만 달러가 나오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아주 가까운 곳에 계시기 때문에 요금이 싼 것이지요.”

    두 지도자들은 진담 섞인 농담을 서로 주고 받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느 정도 멀리 떨어져있나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 하나님의 숨소리가 느껴지나요?
    아니면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잊고 사나요?
    그러다가 주일이면 화들짝 놀라 성경 찾아들고 부랴부랴 나오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본문의 표현을 빌리면, 여러분은 벧엘로부터 어느 정도 멀리 떨어져있나요?

    벧엘에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벧엘은 여러분에게 낯선 곳입니까?

    삶을 살다보면, 열심히 살아보려고 무진장 애를 쓰지만 일이 이상하게 꼬일 때가 있습니다.
    문제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기나긴 날들이 있습니다.
    마치 수렁에 빠진 사람처럼 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싶으면 사업에 문제가 생기고, 사업이 어느 정도 굴러간다고 싶으면 종업원들이 문제를 일으켜 힘들게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무수한 인물 중에 야곱만큼 악착같이 산 사람이 없습니다.
    요즘 말로 한다면 야곱은 ‘악발이’입니다.
    그런데 그의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요.
    평안한 날이 없어요.
    오늘 우리가 취급하려고 하는 사건은 그 중의 하나입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모든 문제는 벧엘로 올라가라는 신호이고, 벧엘은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라는 것입니다.(함께 따라하자)

    1. 야곱이 당한 어려움은?

    야곱이 세겜성에 이르러 그곳에서 장막을 치고 정착을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곳에서 큰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야곱이 만난 위기는 이렇습니다.
    창 34장에 나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바깥출입을 했다가 그 땅 추장의 눈에 들었습니다. 
    디나가 얼마나 예뻤는지 그 추장은 디나에 대한 연모가 지나쳐 그만 강제로 욕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디나의 오라비들이 들에서 이 얘기를 듣고 화가 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희들이 우리 누이 디나를 욕보였어! 어디 두고 보자!’ 
    그래서 형제들이 꾀를 냈습니다.
    “너희가 우리의 누이 디나를 가지려면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할례 지 않은 족속과 혼사를 맺을 수 없다.”

    세겜의 아들들이 할례를 받고 삼 일째 되는 날, 고통이 가장 심하여 움직일 수조차 없는 그날에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가지고 뛰어들어 그 모든 남자들을 죽였습니다.
    디나의 강간사건을 순리대로 신앙으로 풀어야 하는데 ‘욱’ 치미는 감정으로 복수를 해놨으니까 이게 될 일입니까? 
    복수는 복수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입니다.
    그 본토 사람들이 이런 일을 당하고 “이 웬 뜨내기들이 남의 땅에 와서 행패를 부려! 싹 쓸어버리자!” 이렇게 나온 거예요. 
    기껏해야 야곱의 숫자는 한 가족에 불과합니다. 

    우선 숫자적으로 열세입니다. 
    야곱가족이 몰살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야곱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만난을 겪었습니다. 
    형 에서로부터 쫓겨보기도 했고,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해보기도 했고, 이런 저런 시련을 다 겪어 보았지만 전 가족이 몰살당할 위기는 당해보지 않았습니다. 

    정말 처음입니다! 
    야곱은 아찔했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근심이 태산 같습니다.
    창 34:30을 보세요! 야곱의 심경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 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야곱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있었을 수 있겠지요.
    하나는, 밤에 도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 가족을 이끌고, 많은 짐승을 몰고 정처도 없이 도망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얘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선제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원래 공격과 방어는 1:3 비율이니까 적이 세 배정도라면 해볼 만한 싸움입니다.
    그러나 몇 안 되는 야곱의 가족이 가나안 부족들과 싸운다는 것은 애당초부터 말이 되지 않습니다.
    꾀 많고 약삭빠른 야곱일지라도 그에게 마땅한 묘책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방법이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동서남북이 꽉 막혔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은 이런 삶의 위기를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2. 야곱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벧엘로 올라가자!”
    객관적으로 볼 때 전혀 해결책이 되지 않을 듯한 결심을 했습니다.
    창 35:3절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갑니다.
    사실 야곱의 생애를 살펴보면 문제가 터질 때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몇 군데 살펴보겠습니다.
    창31:13절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창35:1절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벧엘’이란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집’을 말합니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더 쉬운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전인 교회로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교회에 나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나름대로 한번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던 사람입니다. 
    형 에서의 장자권을 가장 배고팠을 때를 노려 팥죽 한 그릇으로 낚아챈 사람, 
    자기 몸에 털을 붙여 형처럼 꾸민 다음 늙어 안력이 좋지 않은 아버지를 속여 축복기도를 받은 사람,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교묘한 방법으로 얼룩진 양과 염소를 낳게 하여 자기 재산을 불려간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야곱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산 인생의 결론이 무엇이냐 이겁니다. 
    일가족이 몰살당할 위기에 봉착한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 위기의 순간에, 모든 것을 다 잃을 그 순간에, 야곱은 인생살이의 기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기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벧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을 읽는 우리 모두가 마음 속 깊이 새겨야할 말씀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른 곳을 두리번거리지 말고, 머리 싸매고 누워있지 말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야곱은 두 마디로 그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3절) 
    야곱은 염치없는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은 한결 같이 이런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고백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①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환난을 당하면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겠어요? 
    그때 하나님은 모른 체하시는 분이 아니라, 들어도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분이 아니라 ‘내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언젠가 곽선희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소개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삶이 너무 힘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 심호흡을 하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라고 세 번만 불러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②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 말씀보다 더 좋은 말씀이 어디 있겠어요? 
    Wesley 목사형제의 기념비에는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라는 말과 함께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새벽기도회 때 한 적이 있는 얘기입니다.
    사우디의 왕이 유명한 프로골퍼를 초청하여 골프 라운딩을 했습니다.
    왕은 골프 선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시간이 돈인 프로선수가 시간을 내서 왕에게 서비스를 했으니까........
    “무슨 선물을 받고 싶습니까?”
    “골프채 한 세트를 부탁드립니다.”
    “ 아, 그래요.”

    기다리고 기다려도 골프채가 오지 않던 어느 날 편지 봉투가 날아왔습니다.
    골프 선수는 실망했습니다.
    “왕이 꽤 쩨쩨하구먼. 기껏 감사장이야?”
    뜯어보았더니 골프선수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선물이 들어있었습니다.
    그것은 골프장 한 곳을 통째로 선물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골프선수의 스케일과 왕의 스케일은 다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스케일과 하나님의 스케일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믿습니까?
    그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데 어찌 좋지 않겠어요?
    하나님께 돌아가십시오.

    3. 그 결과로 받은 축복은?

    야곱이 벧엘로 올라간 결과로 받은 축복은 무엇입니까?
    우리도 하나님께 나아왔을 때 이런 축복을 기대합니다.

    1) 평안히 길을 갔습니다.
    5절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누가 사람들을 두렵게 하여 야곱의 아들들이 평안히 길을 갔다고 했습니까? 
    하나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봐주시는 데 누가 감히 시비를 걸겠습니까?

    2) 참된 예배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7절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하나님은 기어이 야곱을 예배자로 부르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야곱 스토리의 중심 주제입니다.
    지금까지 야곱과 관련된 크고 작은 일들은 사실 부차적인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라는 한 인간이 그 무엇보다도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원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찾으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요4:23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바로 예배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돈 많은 사람도 아니고, 인격 높은 사람도 아니고, 권력 있는 사람도 아니고, 인물 잘난 사람도 아니고.......

    참되게 예배하는 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우리를 참 예배자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미국 캘빈 신학교의 로저 그린웨이(Roger S. Greenway)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선교는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예배가 궁극적인 목표이다. 선교는 예배가 없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수많은 회심자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그들의 얼굴을 숙이게 되면 선교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됩니다.
    선교는 단기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축복은 언제나 예배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와 땅의 기름진 축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참 예배자가 되십시오.
    이런 은혜는 언제나 예배를 통하여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배를 양보하지 마십시오.
    예배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3) 이름을 바꿔 불러주셨습니다.

    10절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이름을 바꿔 불러주셨습니다.
    ‘붙잡는다.’라는 뜻의 야곱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꿔 불러주셨습니다.
    우리의 이름도 바꿔졌습니다.

    우리의 옛 이름은 죄인, 사탄의 종, 마귀의 자녀였습니다.
    그래서 이름대로 죄를 범하고, 사탄의 종노릇하다가 멸망 받는 것이 우리의 정해진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우리의 이름을 바꿔주셨습니다.
    우리의 새 이름은 의인,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신부,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이 이름 속에는 우리를 향한 현재의 축복과 미래의 축복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러주시면 우리의 현재와 미래는 그렇게 됩니다.

    모든 문제는 벧엘로 올라가라는 신호이고, 벧엘은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입니다.
    야곱은 문제를 만나 벧엘로 올라갔고, 벧엘에서 문제를 풀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문제는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신호입니다.
    문제를 만나거든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꼭 그렇게 하십시오.
    그 때 문제는 엄청난 축복으로 변하게 될 줄 믿습니다.


    "르까프"라는 상표의 신발이 있지요.
    "르"는 전치사인데 "....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까프"는 "발"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르까프'라는 신발의 상표는 "발에" 또는 "발의"라는 의미의 히브리어로 만들 상표라고 하겠습니다.

    야곱이란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발음하면 "야콥"이라고 하지요.
    '야'는 "잡다"는 뜻
    "콥"은 "까프"라고 합니다.
    그래서 야곱이란 이름은 "발 뒤꿈치를 붙잡다"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야곱이란 인물은 태어날 때부터 복잡했습니다.
    에서와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서로 먼저 나오려고 하였는지 야곱은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나왔다고 합니다.


    사람의 인생이 원래 다사다난하지만, 야곱 또한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을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창세기 25장 22절부터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형과 싸우기를 시작했구요, 결국은 먼저 나오고 있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따라 나왔습니다.  
    야곱은 태어나기 전부터 형과 싸우고, 태어날 때는 형의 발을 잡고 따라 태어난 사람입니다.  
    욕심이 참 많은 사람이죠.  
    그리고 이어지는 그에 관한 이야기는 팥죽 사건입니다.  
    배고픈 형에게 떡과 팥죽을 주면서 장자권을 달라고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보면 욕심이 많을 뿐만 아니라 잔꾀, 잔머리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창세기 27장을 보면 야곱의 잔머리는 어머니 리브가에게서 유전된 것 같습니다.  
    27장 3절에 이삭은 늙어 언제 죽을 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에서를 불러 사냥하여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그것을 들은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다가 염소를 잡게 하고,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리브가가 직접 만듭니다.  
    눈이 어두운 남편 이삭을 속이기 위해 염소 새끼 가죽으로 둘째 아들 야곱을 꾸며 털이 많은 첫째 아들 에서처럼 꾸미고 또한 에서의 옷을 입혀 냄새도 속입니다.  
    이삭은 잔꾀 많은 모자에게 속아 넘어가서 맏이 에서에게 빌어 줄 복을 막내인 야곱에게 주게 됩니다.  
    급기야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을 죽이고자 했고, 그래도 아버지 이삭이 살아 있을 동안에 하기보다 돌아가신 뒤에 실행하려 했습니다.  

    남편 이삭의 말을 엿들었던 리브가는 이번에는 아들 에서의 이런 계획도 듣고 야곱을 자기 친정, 하란으로 도망가게 합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들어오기 전 머물던 바로 그 땅, 메소포타미아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도상으로 확인해보니까 약 500마일, 8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한국으로 치자면 부산에서 평양까지의 거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27장 28절부터 보시면 이삭이 야곱에게 빌어 준 아주 멋진 복의 내용이 나옵니다.  
    사실 이 복은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에게로 이어져오던 복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거의 백 년 전에, 아브람이 저 메소포타미아 지방 우르라는 곳에 살고 있을 때부터 큰 나라와 민족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늙을 때까지 자식이 없다가 귀한 외아들 이삭으로 간신히 연결되었고, 이제 이삭대에서는 쌍둥이가 태어나서 좀 나아지나 했는데 아우는 아버지와 형을 속이면서 축복을 가로채고, 형은 그러한 동생을 죽이려고 하고,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있는 어머니는 결국 막내 아들을 자기 친정으로 피신시킵니다.  
    그리고 이러한 축복을 받은 야곱은 지금 도망가고 있습니다.

    28장 10절 이하를 보시면, 만민이 너를 섬길 것이라는 축복을 받은 야곱은 도망가다 어느 한 곳에서 노숙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꿈에 여호와 하나님을 만납니다.  
    13절부터 1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복, 아버지 이삭이 빌어주었던 그 복을 이번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직접 해주십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지금 도망가는 막막한 여정을 앞에 두고 너무나 감사한 약속을 받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너를 지켜 줄 것이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부모, 친척, 고향에서 도망치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약속이 어디 있습니까?  
    ‘너를 무사히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하겠다.’  

    16절에서 19절을 보겠습니다.  
    이 곳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보려고 하는 곳 벧엘입니다.  
    ‘벧’은 ‘집’이라는 뜻이구요, ‘엘’은 ‘하나님’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그러니까 ‘벧엘’은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전’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서원합니다.  
    20절부터 22절입니다.  
    의식주가 잘 해결되고, 안전하게 돌아오면 꿈에 나타난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그 여호와라는 신을 곧 나의 신으로 섬길 것이고, 내가 십일조를 바치겠습니다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말의 뜻은 아직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은 아니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외삼촌 라반의 집입니다.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결혼도 하고 일가를 이루게 됩니다.  
    잘 아시는 내용이지만 이 외삼촌 라반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야곱의 잔머리를 능가하는 사람이죠.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를 닮은 것 같다고 했는데, 라반은 바로 어머니 리브가의 오빠입니다.  
    여기에서 야곱은 아버지의 어두운 눈을 속였던 대가를 한 번 치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하여 7년을 하루같이 여기며 라헬을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 봉사합니다.  
    그러나 첫 날밤에 외삼촌 라반은 라헬의 언니 레아를 들여보냅니다.  
    야곱은 그것도 모른 채 첫 날밤을 보내고 날이 밝은 다음에야 라헬이 아니라 레아인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소설적 상상력을 조금 발휘해서 생각해볼까요?  
    어두운 사막의 밤, 신혼 장막 안으로 술이 거나하게 취한 신랑 야곱이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7년을 기다려 온 자기의 사랑, 라헬에게 온갖 사랑의 고백을 하며 첫 날밤을 보냅니다.  
    그리고 행복한 단 꿈을 꾸고 아침에 일어나 옆을 돌아보니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였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제 밤에 한 모든 고백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일어나서 외삼촌에게 가서 따지지만, 너무나 태연하게 해결책을 제시하고 1주일 후 약속했던 둘째 딸 라헬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 대가로 다시 7년의 봉사를 약속합니다.  
    그 1주일 동안 집안 분위기 참 안 좋았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라헬을 두고 마음에도 없는 레아와 잠을 자러 들어갑니다.  
    레아는 어떻게 하든 그러한 야곱의 마음을 얻어보고자 하고, 라헬은 또한 질투가 납니다.  
    레아와 라헬의 질투는 결국 아들 낳기 경쟁으로 이어지고 열 두 아들과 한 딸이 태어납니다.  
    인간의 모든 것들, 심지어 이런 질투마저도 결국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데에 쓰여지는 것을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31장 13절을 봅시다.  
    벧엘의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이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외삼촌 라반이 순순히 보내 줄 것 같지는 않고 라반이 멀리 떠나 있을 동안 도망치듯 나옵니다.  
    고향에서도 도망쳐왔는데 이제 20년을 살아온 하란에서 온 가족과 함께 다시 도망칩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외삼촌에게 추격을 당합니다.  
    29절입니다.  라반은 너무나 아쉬워하면서 야곱일가를 떠나보냅니다.  

    야곱 입장에서 보면, 조금 치사한 외삼촌 라반에게서 도망나와 이제 가야할 곳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 에서가 있는 곳입니다.  
    20년이 지났기 때문에 화가 풀렸는지 아니면 여전히 야곱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형이 거주하고 있는 땅 세일이라는 곳에 먼저 사람을 보냅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소식은 형이 400명을 이끌고 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세일이라는 곳은 원래 야곱이 살았던 곳보다 
    한참은 더 남쪽 지방입니다.  

    세일에서 지금 야곱이 있는 마하나임까지는 부산에서 만주보다도 더 먼 거리입니다.  
    차라리 조금 속으면서 외삼촌에게 있는 게 낫지 400명을 이끌고 저 먼 곳에서부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 오고 있을 형의 모습은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그냥 세일에서 기다리면 되지 아니면 몇 명과 함께 오면 덜할텐데 무슨 전쟁을 치를 것도 아니고 400명이나 함께 오는 건 또 뭡니까?  

    야곱은 다시 잔머리를 굴리면서 가축을 여러 떼로 나누어 선물로 바치면서 에서의 마음을 녹이려고 합니다.  
    가족들도 먼저 보냅니다.  
    그리고는 혼자 얍복강 나루에서 밤을 보냅니다.  
    거기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로 이 야곱의 열 두 아들을 기반으로 열 두 지파가 되는 것이고, 야곱대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하나의 민족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에서와의 재회는 야곱이 걱정했던 것 보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33장 16, 17절입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에는 의미가 조금 확실하지 않은데 다른 번역본을 보면16절과 17절 사이에 ‘그러나’가 있습니다.  에서는 세일로 함께 가자고 하고 야곱은 곧 따르겠다고 하고 그래서 에서는 먼저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숙곳, 세겜 땅 근처에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곳에 정착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렸듯이 에서가 사는 세일 땅과 현재 야곱이 거주하려고 하는 세겜 땅은 부산과 만주만큼이나 떨어져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단을 쌓고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이제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20년만에 고향 땅으로 무사히 그것도 열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걱정했던 형과의 만남도 무리없이 해결되었습니다.  치사한 외삼촌 라반도 없고, 무서운 형 에서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두 다리 뻗고 행복하게 살 날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34장에 바로 엄청난 비극이 일어납니다.  애지중지 하나 뿐인 딸 디나가 그 동네 추장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추장 아들 세겜은 그래도 신사적이라 정당한 절차를 밟아 아내로 맞아들이겠다고 합니다.  야곱은 아들들이 가축들을 먹이러 멀리 나갔기 때문에 아들들이 돌아올 때까지 잠잠히 기다립니다.  잔머리 좋은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를 조건으로 내세워 세겜 땅 남자들을 다 할례받게 하고, 둘째 아들 시므온과 셋째 아들 레위가 그 틈을 타 잔인한 복수극을 펼칩니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어떻게 한다고, 남의 나라에 온 하 가족이 한 성을 완전히 몰살시켜 버린 엄청난 사건입니다.  34장 3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산전수전을 겪은 야곱도 놀랍니다.  바로 이러한 배경 아래 오늘의 본문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를 언급하십니다. 야곱이 일촉즉발 위기의 상황이 닥치자 하나님은 야곱을 다시금 벧엘로 부르시고, 그들이 벧엘까지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게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보호해 주셨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이고 도망나올 때나, 야곱의 두 아들의 심한 복수극으로 일가족의 몰살 위기에서나 야곱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야곱을 부르십니다.  야곱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세겜은 벧엘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레딩과 옥스포드보다 가깝습니다.  여기서 비스터보다 조금 먼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왕 돌아온 거, 조금만 더 가면 되는 그 벧엘인데 왜 가지 않고 굳이 세겜에서 머물렀을까요?  궁금한 일입니다만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미루어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두 가지 대비가 나옵니다. 2절에서 너희와 함께 하는 이방신을 버리고, 3절에서 내가 어디를 가든 나와 함께 한 하나님께 단을 쌓자로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자기 집안의 신앙을 책임져야 합니다.  지난 20년간 대가족을 이루었는데 그 가족들이 이방신을 섬기고 있는 것을 방치해 왔습니다.  심지어 라헬은 아버지의 드라빔, 일종의 우상을 훔쳐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한 가족들의 신앙상태를 쇄신해야 했습니다.  2절, 3절입니다.  이방신상을 버려라, 스스로를 정결케 하라,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돌아가자입니다.  가장 힘들고 급박했던 순간에 만나주신 하나님이 다시 부르십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다윗이 지은 시편의 많은 부분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적들이 저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수 많은 전쟁터를 누볐고, 사울왕에게 쫓겼고, 노년에는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기도 했습니다.  그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외쳤습니다. 물론 노래의 마지막들은 나의 피난처시오, 바위시오, 반석이신 하나님을 찬양했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 하면서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 또한 지금 온 가족의 몰살의 위기 앞에서 20년전 그 벧엘, 형 에서의 손아귀에서 도망가던 그 벧엘의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부르시기 때문에 너무나 반갑고 감사합니다.  여러분에게 생명을 걸만한 사건이 없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세월 가장 급박하게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던 순간이 없었습니까?  우리가 먼저 찾았던 것 같은 그 때,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찾고 기다리고 계셨던 곳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의 벧엘, ‘하나님의 집’에 대한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정말 이것만 해 주시면 제가 이렇게,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면서 야곱이 에서로부터 도망갈 때 서원하듯 그렇게 기도하신 적도 있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곳이 바로 여러분의 벧엘입니다.  그 벧엘!  자주 찾아가십니까?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꼭 맞아야 정신 차리는게 보통의 사람입니다만, 그러기 전에 벧엘로 올라갈 수 없을까요?  물론 평안할 때 지금 야곱이 가진 절박한 심정처럼 벧엘로 올라가기는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는 말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세겜 땅과 벧엘은 그야말로 지척입니다.  야곱은 애써 애면하고 세겜에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기만 가면 벧엘인데… 내가 20년전 도망가던 길에 하나님을 저기서 만났었는데… 하면서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바쁜 일이 끝나면 다음 주에 한 번 가볼까하면서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해야 되는데, 말씀 읽어야 되는데 하면서 하루, 이틀 보내고 있는 저희들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이번 바쁜 일만 끝나면, 시험 끝나면 혹은, 이번에 영국 가면 말씀 많이 읽어야겠다, 신앙생활 다시 해야겠다라고 생각하시다가 그냥 하루, 이틀 보내고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영국에 가기만 하면, 비자만 무사히 나오면 어떻게, 어떻게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신 적 없습니까?  영국에 가기만 하면 열심히 공부해서 영어는 네이티브처럼 하리라 그런 생각 없었습니까?  학교에 합격만 하면, 아니면 학위만 무사히 끝낼 수 있다면, 직장만 잡으면 등등 여러 가지 만약에 어떻게 하기만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야곱이 20년 전 벧엘에서 했던 그런 기도를 하신 적이 없으십니까? 하나님이 무사히 돌아오게 해 주셨는데 세겜에 눌러 앉아 있는 야곱처럼, 그 일들을 해결해 주셨는데 내일부터 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벧엘이 아닌 세겜에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런 기도를 했는데 기억조차 못하는 겁니다. 

    야곱은 자금 급박하게, 정신 바짝 차리고 벧엘로 올라갑니다.  20년만에 돌아왔습니다.  진작 올 것을 꼭 사고가 나고 옵니다. 지난 20년간의 생활을 정리하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벧엘입니다.  지난 20년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겁니다.  나를 이곳에서 만나주시고, 나를 다시금 이곳으로 안전하게 인도하여 주신 벧엘의 하나님을 이제 나의 주로 섬기리라 다짐하고 내렸왔을 겁니다.  이젠 정말 모든 게 안정되는 줄 알았습니다.  형과의 문제도 해결됐고, 벧엘의 하나님도 만났고, 이제 정말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벧엘에서 고향 땅으로 가는 길에 사랑하는 아내 라헬은 막내 베냐민을 낳다가 죽습니다.  이어서 큰 아들 르우벤은 자신의 첩 빌하와 동침합니다.  약간 웃기는 이야기입니다만, 20년 전 곧 죽을 것 같다던 이삭은 야곱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죽게 되고 에서와 야곱은 함께 장사지냅니다.  여하튼 다시금 신앙을 점검하던 벧엘에서 내려온 야곱은 아내를 잃고, 장남은 자신의 첩과 동침하고, 장수하긴 했지만 아버지의 장례를 치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 아들은 요셉을 시기해서 죽이려다 팔아버립니다.  

    레아와 라헬의 질투가 얼마나 강했는지, 아버지 편애가 얼마나 심했는지, 여하튼 요셉은 배다른 형들에 의해 팔려갑니다.  많은 유산을 놓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왕위를 위한 다툼도 아니고 배 다른 동생 요셉을 죽일만큼 미워했습니다.  여기에서 야곱은 다시금 아버지를 속이던 장면대로 아들에게 속임을 당합니다.  눈 먼 아버지를 속이던 장면처럼 어두운 밤에 라반에게 동생과 언니를 바꿔치기 당했습니다.  짐승과 옷으로 아버지를 속이던 야곱은 이번에는 아들들에게 짐승의 피가 묻은 요셉의 옷으로 속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넷째 아들 유다는 며느리와 동침해서 아들을 낳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태어난 베레스가 결국 다윗과 예수님에게로 연결되는 왕통라인이 됩니다만 야곱은 현재 정말 험악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어느 누구의 이야기보다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욕심 많고, 꾀 많은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이스라엘로 만들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그 중심에 오늘 이 벧엘로 올라가자는 야곱의 외침이 있습니다.  
    35장 전까지는 야곱이 자신의 뜻대로, 어쩌면 하나님보다 한 발 앞서서 움직이는 듯 합니다.  
    팥죽으로 장자권을 사려고 했고, 아버지의 어두운 눈를 속여 축복도 가로채는 등 기도하며 기다리는 사람이기 보다는 자기의 계획대로 온갖 머리를 굴리며 움직이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35장 이후 야곱은 자신이 저질렀던 일들을 되갚음 당하면서 또한 사랑하는 이들, 아내 라헬, 아버지 이삭, 아들 요셉을 차례로 떠나보내면서 점점 하나님의 손 아래서 다듬어지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이 벧엘의 하나님이 새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가족의 큰 아픔 앞에서 신앙의 아버지로 굳건히 서게 되는 것입니다.  
    48장, 49장에서 야곱의 유언은 이 모든 삶을 담은 신앙고백입니다.  

    48장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무지막지한 인생여정이라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결국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나의 고비고비마다 벧엘에서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기근 때문에 현재 우리가 잠시 애굽, 이집트에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라고 확신에 차 있습니다.  
    자신의 지난 삶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은 항상 신실하게 지켜져 왔었다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요셉 또한 그 약속을 굳게 믿어 자신의 시신을 보존하여 이 땅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으로 가게 될 때 꼭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사실 총리 요셉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이집트 국립묘지에 묻힐 수도 있을 정도였을 겁니다.  
    하지만 요셉 또한 야곱 못지 않게 힘든 세월을 살면서 하나님의 손에 다듬어진 사람입니다.  
    그러는 동안 요셉도 하나님의 약속을 누구보다 강하게 믿게 된 것 같습니다.  
    50장 24절에서 26절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400여년이 지나 모세를 통해 성취됩니다.  출애굽기 13장 18절부터 19절입니다.  그리고 땅 분배가 끝나는 여호수아 마지막 24장 32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과정을 간략하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중심에 벧엘의 하나님이 서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야곱을 길러가셨습니다.  야곱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겠지만 동시에 믿음이 단련되어지는 필수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욥의 고백도 기억납니다.  욥기 23장 10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리고 조금 밑에 14절을 보시면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일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고 고백합니다.

    나의 벧엘은 어디인가?
    내가 이곳에 오기 전 혹은 아니면 어려웠던 지난 어느 날 나를 만나주셨고, 그에 따라 내가 다짐했던 그 벧엘, 그 벧엘의 하나님을 기억하십니까?  
    신앙의 많은 선배들, 평안하다고 외치던 그 많은 선배들, 하나님을 찬양하던 그 선배들은 사실 이러한 하나님의 손 아래서 힘든 길들을 걸으며 다듬어져왔습니다. 
    그 길이 욥처럼 하나님에게서부터 왔을 수도 있고, 야곱처럼 자신의 욕심으로 빚어진 일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을 통해 결국은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빚어나가십니다.  
    그리고 그 길들을 지나며 신앙의 선배들은 결국 그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벧엘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찾고, 만나시고, 회복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월 11일(토) 창세기 31-3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벧엘의 하나님(31:13)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I am the God of Bethel, where you anointed a pillar and where you made a vow to me. Now leave this land at once and go back to your native land.' "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I am the God of Bethel)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아노키 하엘 벧엘)   אָנֹכִי הָאֵל בֵּית 

    - '나'를 강조하는 일인칭 대명사 '아노키'와 '하나님'인 '엘'에 정관사 '하'가 붙어 '나는 벧엘의 그 하나님이다'란 뜻이다.
    이는 시간을 초월한 연계성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말로서 도피 중인 야곱에게 나타나 언약을 맺은 장소인 그 벧엘을(28:19) 2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으로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불변의 신실성을 확증해 주는 선언이다.

    지금 일어나
    - 신앙적인 결단은 항상 지금 이 순간이어야 함을 촉구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생은 언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뜰지 모르는 그림자이자 안개이기 때문이다(전 6:12; 약 4:14)

    칼 야스퍼스의 한계상황

    한계 상황이란 말그대로 인간이 한계에 부딪힌 것을 느끼는 순간이다.
    죽음, 질병, 가난, 그 외 여러가지 극단적인 어려움의 상황들.
    이러한 한계상황에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좌절이야 초월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은 실존주의의 대가 중 한 명인 칼 야스퍼스의 한계상황에 대해 알아보고 실존과의 관계를 탐색해 본다. 

    한계상황의 정의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상황. 한계상황은 죽음, 고통, 우연, 죄책, 투쟁 등과 같은 상황을 의미한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한계상황은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직면하게 하는 상황이다.
    한계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과 무능력을 경험하게 되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즉, 한계상황은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인식하고, 실존적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한계상황의 숨은 정의는 인간의 한계와 무한한 가능성이 교차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존재가 한계와 무한한 가능성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는 개념으로 해석된다. 한계상황은 인간이 자유로움과 책임, 불확실성과 불안에 직면할 때 나타나는 특별한 상황으로 간주된다.


    한계상황에 대한 대처 방법

    1. 자유로움과 책임의 수용 /  야스퍼스는 자유로움이 책임을 수반한다고 강조했다.
    한계상황에서는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자유로움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이를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2. 불확실성과 불안의 이해 /  한계상황에서는 불확실성과 불안이 더욱 두드러진다.
    야스퍼스는 이를 통해 진정한 존재적 경험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불확실성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한계와 존재의 무한한 가능성을 인식하게 되며, 이를 통해 성장과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다.

    3. 존재적 자기극복과 창조적 행동 / 한계상황에서는 존재적인 자기극복이 필요하다.
    야스퍼스는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창조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봤다.
    어떤 어려운 상황이라도 인간은 자신의 존재적 자원을 동원하여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4. 타자와의 상호작용과 소통 /  다른 이들과의 상호작용과 소통은 한계상황에서의 대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야스퍼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인간은 자아를 발견하고 확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상호작용과 소통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를 찾을 수 있다.

    5. 존재적 선택의 중요성  /  야스퍼스는 존재적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선택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자아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봤다.
    한계상황에서도 선택을 통해 인간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칼 야스퍼스의 관점에서, 한계상황은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를 이해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자유로움과 책임, 불확실성과 불안을 이해하며, 이러한 상황에서 자아를 찾아낼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살면서 열심히 해도 무언가가 너무너무 안되고 힘든 시기를 맞이한다.
    단순히 죽음이나 질병 이런것보다는 일적으로 혹은 인간관계적으로 바닥을 치는 힘든 때가 누구에게나 온다.
    바로 그것이 한계 상황이라할 때 인간은 한 번쯤 진지하게 자신과 삶, 존재 자체에 대해 심오한 탐색을 하게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러한 심오한 탐색은 곧 자유이며 또 자유로 가는 길이다.
    그 자유를 통해 한계에서 가능성으로의 전이가 일어나는 순간을 경험해 보고 싶다면 야스퍼스의 한계상황을 생각해보고 그에 대한 자신만의 대처법으로 한계상황에서의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역설을 맛보기 바란다.


    ‘한계상황(Grenzsituation)’은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인데, 극한상황이라고도 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변화시키거나 만들어가는 여러 가지 현실적 상황과 달리, 변화시킬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예를 들면 우리가 매일의 생활세계에서 겪는 꿈과 젊음의 좌절∙ 질병∙ 타인으로부터의 거절 등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스퍼스는 사람들이 한계상황을 맞아 어쩔 수 없는 벽에 부딪쳐 좌절함으로써 진정한 자기 자신을 각성하고 초월에 닿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존주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입니다.
    2차 세계대전을 겪기 전 까지 사람들은 인간의 합리성과 존엄성을 신뢰하여 인류가 계속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여 나갈 것으로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인간의 집단적인 광기와 야만성을 체험한 후 인류의 미래에 대한 그동안의 희망과 낙관이 무너지게 되었고 그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된 철학이 바로 실존주의 철학입니다.

    야스퍼스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정권으로부터 유태계 출신인 아내와 헤어지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기 때문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직을 박탈당했습니다.
    반면 자신의 친구인 하이데거는 나치에 적극 협력하며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총장으로까지 출세하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야스퍼스는 친구인 하이데거를 통해 ‘학자의 절개 혹은 변절’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상황’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실존의 과제’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사람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 즉 한계상황을 다음의 다섯 가지라고 합니다.

    1. 생로병사(生老兵死)
    . Birth, aging, illness, and death
    2. 고독(孤獨) Loneliness
    3. 방황(彷徨) Wandering
    4. 투쟁(鬪爭) Struggle
    5. 죄악(罪惡) Sin

    첫째, 생로병사
    -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다는 것, 사람인 이상 누구나 이 생로병사의 벽을 넘어 설 수 없습니다.

    둘째, 고독
    -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해도 고독하고, 자식을 낳아 길러도 고독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아도 고독합니다.
    인간인 이상 고독감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셋째, 방황
    - 실존주의에서는 끊임없는 방황도 인간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한계상황이라고 보았습니다.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거나 분명한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인간 내면의 모습을 지적한 것입니다.
    한 가지에 만족할 수 없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 방황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넷째, 투쟁
    - 인간은 둘만 만나도 다툼이 일어나는데 그것도 한계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에서 그리고 이 지구상에서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다섯째, 죄악
    - 모든 사람은 죄를 짓고 삽니다.
    인간은 숨을 쉬고 있는 한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성자처럼 산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역시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상황인 것이지요.

    칸트와 헤겔에 의하면 ‘이성’이 비록 시행착오를 반복하기는 하지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이성은 계속된 진보를 통해 완전에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야스퍼스는 “인간은 한계상황에서 비롯된 ‘좌절’을 통해서 비로소 이성의 진정한 한계를 자각하며, 그 좌절을 직시함으로써 ‘초월자의 세계’로 나아가 존재 실현의 길을 열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이 한계상황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가운데서도 초월자(절대자)를 향해 마음을 열고 나아감으로써 진정한 자기 존재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인간존재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왜 한계상황이 존재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한계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가?
    실존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휴머니즘적인 정치 저술가로이며 정신과 의사로도 활동했던 독일의 실존철학자인 칼 야스퍼스(1883-1969)는 자신의 철학을 <키에르케고르>와 <니체>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응답으로서 이해한다.

    ​그는 나치 정권이 자기 아내가 유태계 출신이라는 이유로 헤어질 것을 요구하자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직을 박탈당한다.
    그런데 자신의 친구 하이데거는 오히려 나치에 적극 협력하며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총장으로까지 출세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신과 하이데거의 경우에서처럼, 학자의 절개 혹은 지식인의 변절이라고 쉽게 속단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상황>이 있음을 절감하고 이를 <실존의 과제>로 발전시키게 된다.

    1. 한계상황(Grenzsituation)  /  야스퍼스가 지적한 <한계상황 Grenzsituation>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앞에 섰을 때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일종의 벽 같은 것이다.
    그 구체적인 예로는 <죽음>과 <투쟁>, 그리고 이에 관한 <고뇌> 등을 우선 생각할 수 있다.
    아울러 우리가 매일의 생활세계에서 겪는 꿈과 젊음의 좌절, 질병, 타인으로부터의 거절 같은 것 등도 그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한계상황 앞에 섰을 때, 인간은 대체적으로 도피하려 하거나 현실에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자기 존재가 상실되는 길로 빠져든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이 그와 같은 한계상황 가운데서도 진지하게 그 과정을 성찰하면, <하나 뿐>이며 <한 번 뿐>인 <자기 존재의 자각>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야스퍼스의 개인적 삶에서, 확실히 한계상황에 처한 인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나치에 협력하기를 거절하고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유태계 부인과 결별하지 않았다는 삶의 진지함이 그가 말하는 한계상황의 전부를 의미하거나 그의 실존철학의 내용을 확실히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한계상황>은 이런 상황에서의 좌절을 직시함으로써 <초월자의 세계>로 나가려는 태도이다. 야스퍼스는 이 세계에는 결코 합리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며 <초월자>를 강력히 요청한다.

    잘 알려진 대로 20세기에 인류가 겪은 대부분의 비극은 <이성의 기획>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나치의 유태인 대량학살은 <가스>를 통한 살상이라는 과학적 산업 형태가 주조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원자폭탄은 태평양의 군도에서 일본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는 미군 병사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과학적 성과의 주도하에 기획, 투하되었다. 즉 지난 세기의 중요한 결정들이, 이와 같이 합리적인 결정이라는 이성의 테두리 안에서 비롯되었다.

    원래 칸트에 의해 시작되고 헤겔에 의해 완성된 <독일관념론>은 <이성>이 시행착오를 반복하더라도 이런저런 식으로 지식의 진보를 이룩해 가다 보면 진리의 최종 형태인 객관적인 <물 자체 Dinge an Sich>까지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즉 이성은 진보를 통해 완전에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반해 야스퍼스는, <이성적 세계>와 <비합리적인 세계>는 서로 단절되어 있어서 나치시대와 같은 <부조리>와 <비합리적인 존재>의 해명을 위해서는 다른 차원의 학문적 작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인간이 이성을 통해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전제이다. 오히려 인간은 한계상황에서 비롯된 좌절을 통해서 비로서 이성의 진정한 한계를 자각하며, 아울러 존재 실현의 길을 열 수 있다.

    야스퍼스는 자신의 실존사상 전체를 나타내는 첫 번 저서인 <철학 1932>에서 <세계가 모든 것>이며 <과학적 인식이 확실성의 전부>라고 하는 소위 <세계 내재적>인 기존의 학문적 인식이 가지는 한계를 통렬이 비판한다.

    2. 실존(Existenz) / “나는 학문을 통해 나 자신의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의 내부에서만이 나 자신에 대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철학의 과제는 그것 보다 <세계>로부터 <초월자>에게로 초월해가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야스퍼스의 주장은 <실존>의 과제로 파악된다.

    야스퍼스에게서 <실존>은 우선 <자기 존재>로서 본질적으로 자아를 형성하는 모든 것이다. <인간 실존>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죽음>, <투쟁>, <고통> 그리고 <죄>와 같은 <한계상황>에 인간을 가두어 두고 스스로 절망하게도 하지만 아울러 <초월자>에게 시선을 돌리게 함으로써 <본래적 자기존재>가 되살아나게도 한다.

    < 초월>은 실존적 자유의 근원이자 가능성이다. <실존>은 <초월>에서 방향을 찾는다. 즉 인간은 한계 상황 가운데서 <외적 생활 조건>에 전면적으로 의존해 있는 자신을 깨트려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올 수 있음이 명백하다.

    인간은 <현존재>로서 자신이 설정하지 않은 자연적, 문화적, 역사적인 기존의 제약에 묶여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자기 자신이 본질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 결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야스퍼스가 말하는 <실존>은 혼자서는 자기 실현에 도달하지 못하고 <타자>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 <인간의 의사소통>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실존의 의사소통> 양태 중의 하나가 <사랑의 투쟁 Liebender Kampf>이다. <투쟁>은 인간이 겪을 수 밖에 없는 한계상황이어서 누구를 막론하고 그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적대적 투쟁>을 <사랑의 투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자유가 부여되어 있으며, 이의 실현을 통해서 보편적 진리 형태가 드러난다. 즉 <실존간의 내적 평화>를 통해서 <외적 세계평화 조건>의 달성도 가능한 것이다.

    3. 포괄자 Umgreifende

    인간은 원래 칸트가 말한 대로, 세계 안에서 주관일 뿐만 아니라 아울러 객관적 존재이기도 하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주관으로서의 인간은 실존으로서, 현존재로서, 의식일반으로서, 정신으로서, 또한 현존으로서의 <포괄자>의 양태로 존재한다. 아울러 이 인간에 맞서 있는 대상으로서의 <세계>와 <초월>이 객관적 <포괄자>로 상정되어 있다.

    포괄자의 양태는 다음과 같다.

    1. <현존>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 내에서의 나의 삶이다.
    <존재>를 위해서는 <현존>이라는 <경험 공간>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2. <의식 일반>은 보편 타당하고 객관적인 사유의 매체이다.

    ​3. <전체>로서 이해되는 <정신>은 <나 자신>이기도 하다.

    ​4. 존재하는 모든 것이 드러나는 <대상 공간>으로서의 <세계>가 <정신>에 맞서 있다.

    ​5. <포괄자>의 이 같은 내재적 양태들은 <실존>과 <초월>로 채워진다.

    ​6. <초월>은 <포괄자의 포괄자>로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고 부른다.

    ​7. <초월>은 <실존>에 의해서만 경험될 수 있고 <내재>는 <초월>을 향해 더욱 자신을 드러낸다.

    ​이 모든 통합된 진리를 추구하는 힘은 여전히 <이성>에게서 비롯된다.

    ​이와 같은 <포괄자>의 모든 양태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즉 각 양태들은 다른 양태들에 의존하는 데서 진리를 생산한다.
    그러나 여러 양태 중의 하나가 고립되면 그 가운데 <비진리>가 생겨난다.

    4. 마무리하며 /  야스퍼스가 이와 같이 인간이 한계상황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가운데서도 초월을 향해 마음을 열고 나아감으로써 진정한 자기 존재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언뜻 보아 <케에르케고르>와 <니체>의 정태적인 <실존 조명>과 유사한 주장을 펴는 것 같지만 이미 언급한 실존의 사귐형태(의사소통)와 적대적 투쟁을 사랑의 투쟁으로 바꿀 수 있는 자유가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다고 강조하는 데서 그의 철학은 사변이 아니라 즉 실존에 대한 탐구 를 사회변혁과 인간 구원의 역동적인 에너지로 승화하려 했음을 확신하게 된다.

    벧엘의 하나님(창세기 27:15∼17)

    모태신앙인 야곱이 벧엘에서 겪은 경험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다신에서 유일신 사상으로 가치관이 바뀌게 되는 중요한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죽이려고 하자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다 광야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됩니다.
    강도의 위험, 맹수의 위험, 그리고 장래에 대한 두려움과 부모를 떠난 어린 청년이 쉽게 잠들 수 있었을까요?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겨우 잠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돌베개는 바로 고난의 인생여정을 의미합니다.
    돌이 얼마나 딱딱합니까?
    물론 성경에서 돌은 하나님, 혹은 예수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보다 바로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며 겪는 고난과 시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며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절망의 나락, 즉 앞이 안보이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위기들을 겪게 됩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은 밤에 잠이 오지 않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다고 고백합니다.
    목회자인 저 역시 살아오며 너무 고민하고 슬퍼하여 위출혈을 여러 번 경험하고 정말 잠 못 이루는 밤을 여러 번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야곱이 처한 상황은 바로 그걸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어두움의 정점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말했듯 신을 만날 수 있는 ‘한계상황’인 것입니다.
    이처럼 한계상황에 이를 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어쨌든 야곱도 바로 그런 상황에서 힘들게 잠들다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가 잠든 곳으로부터 하늘에 사닥다리가 닿았고 하늘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천사는 오르락내리락하며 자신과 하나님 사이를 교통하였습니다.
    야곱은 깜짝 놀랐습니다.
    꿈속에서 보니 하나님이 고향 동네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계속 따라오셨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신관은 각 민족마다 지배하는 신이 있고 그 신들은 그들의 영토를 통치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말로만 들었던 자신들의 부족신 여호와가, 바알의 영토까지 따라오셨고 바로 그곳도 통치하신다는 것을 꿈속에서 보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러면 바알은 가짜인가? 아니면 우리 여호와 하나님에게 쫓겨났나?’ 바로 그 순간 야곱의 신관과 신앙이 바뀌게 됩니다. 다음의 고백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창 28:15∼17)

    야곱은 잠에서 일어나자 그곳 이름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엘’은 바로 히브리어 ‘알렙’에서 왔으며 알렙은 힘센 자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을 말하고 그분이 바로 우주의 가장 힘센 분이십니다.
    그래서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따라다니시며 눈동자처럼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국경이 없습니다.
    바로 전 우주가 바로 그분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28: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오늘은 가나안 땅에서 하란 땅으로 가는 야곱에 관하여 성경 말씀을 풀어 보겠습니다.
    이 사건의 내용은 창세기 28장 10~22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말씀인데 대략 적인 줄거리를 요약하면 야곱이 가나안 땅에서 형에서의 장자의 명분을 어머니 리브가와 합동하여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가 받아야할 축복을 동생 야곱이 받아 형 에서에게 쫓겨서 하란 땅 라반 외삼촌의 집으로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보내는 사건이며 리브가가 에서의 분이 사그라질 때 까지 피신시키는 내용이 기록 되어있습니다.

    야곱이 하란 땅으로 가는 도중에 날이 저물어 벧엘 (하나님의 집) 이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유숙 하게 되는데 그 밤에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셨고 야곱이 아침에 자고일어나 자기가 베고 잤던 돌을 아침에 기둥으로 세워 기름을 붓는 사건입니다. 이정도만 성경을 보지 않고 줄거리를 설명하면 아마 성경을 많이 알고있는 사람으로 평가 받을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이런 원리로만 야곱의 벧엘 사건을 알고 있는 것이 신앙인들의 일반적인 상식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신구약 성경 말씀은 이 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중심되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벧엘 사건이 야곱이 주체가 되어 있을지라도 반드시 우리는 예수그리도와 연관을시켜 깨달아야 이사건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알게되고 이 사건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는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말씀을 많이 들어도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이 말씀이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 전체에 하신 말씀입니다. (요5:39) 너희가(현재 신앙인들)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성경 말씀이 예수그리스도로 깨달아지지 아니하면 영생 얻지 못함) 성경을 상고하거니와(아무리 연구해도 예수님을 모르면 허사라는 것)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성경 전체의 기록된 말씀은 예수님 자신에 관한 내용 이라는 것)

    그럼 오늘 본문 말씀을 한 단어 한단어를 해석하여 풀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세상 해석과 완전히 다른 방향의 신비한 내용의 말씀을 경험 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럼 본문말씀을 한 번 더 인용 하겠습니다. (창28: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성경에 등장하는 우리가 말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세 사람은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상징적인 그림자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그림자는 바로 하나님의 상징적인 그림자입니다.

    아브라함은 구약 하나님을 상징하고 이삭은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실 예수님의 그림자이며 야곱은 오순절날 다시 오실 성령님의 예표적인 그림자입니다. 세 사람을 다 설명 할려면 엄청난 시간이 소비될 것입니다. 이 내용에 관하여는 다음에 시간이 나는대로 자세하게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야곱이 성령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면 야곱이 벧엘에서 유숙하는 이 사건속에 예수님과 직접적인 사건이 연결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야곱은 예수님을 예표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야곱이 가나안 땅 아버지 이삭의 집에서 하란으로 가는 사건은 가나안땅은 하늘나라를 상징하며 이삭은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상징이며 어머니 리브가는 성령님을 상징하며 야곱은 하늘나라에서 이 세상으로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이삭에게 축복의 안수를 받는 내용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축복의 말씀을 가지고 이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하나님의 장자는 마리아 몸속에서 먼저나신 율법의 예수님이 아니시고 두 번째 하나님의 몸으로 거듭나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장자이기 때문에 뒤에 태어난 야곱이 장자의 축복인 성령 세례를 이삭에게 받는 것입니다. (마12:18)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한 곳을 더 참고 하겠습니다. 아래 구절에 육신의 율법의 예수님과 복음의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습니다.
    (롬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럼 결론적으로 하란땅은 이 세상을 예표 한 것이고 라반은 사단의 상징이며 라반의 두 딸과 딸들의 종 실바와 빌하 네 여자가 야곱의 아내가 됩니다. 이 뜻은 넷 숫자는 동서남복 사방에 있는 신부 믿음을 지킨 처녀들이 마지막 심판날 성령 그리스도의 아내가 되어 가나안땅인 하늘나라로 데리고 들어가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20년 동안 종살이는 두 딸을 위하여 십 사년은 성령이 오시기전 율법시대 칠칠절 49일의 상징이며 짐승들을 위한 6년 또한 성령이 오시전 율법의 숫자인 천지 창조의 숫자인 것입니다.

    넷 아내들은 결론적으로 오늘날 이 땅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을 신부로 예표하신 것입니다. 이정도 해석이 되면 어느정도 사건의 윤곽이 영적으로 잡혀지질 않습니까?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문맥적으로 이 말씀을 그대로 해석하면 우리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내용이 되어버립니다. 성경이 이 세상에 남아있는 이유는 우리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말씀이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본문 첫 단어입니다. 아침에 일찍이 성경이 증거하는 아침은 무덤 속에서 새벽 아침에 부활하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아침에 일찍 부활 하셨습니다.

    다음단어입니다. 일어나 일어났다는 단어는 누워 죽어 계시든 율법에 예수님이 주일날 새벽에 부활하셔서 일어나실 것을 상징 하신 것입니다. (계22:16)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계속해서 성경은 우리에 증거합니다. (베후1: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위에 구절들이 아침에 일찍 부활하실 예수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증거 하신 것입니다. 베개 하였던 돌을 가져 신비한 내용이 숨겨져있는 비밀입니다. 야곱이 베개한 돌은 무덤속에 죽어계시는 율법의 예수님이 십니다 베게는 누워 있습니다 벤엘의 어두운 밤은 예수님이 해가 질 무렵에 죽은 시신이 무덤속에 들어가 캄캄한곳에 누워 장사되어 있는 장면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돌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시 118: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여기 소개하는 건축자의 버린돌은 야곱이 베고잔 베개를 상징합니다.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에게 합동하여 십자가에 버려진 예수님이십니다. (행 4: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계속해서 다음 소절입니다.
    기둥으로 세우고 기둥으로 세웠다는 것은 죽어 계시든 예수그리스도께서 아침에 부활하셔서 기둥으로 세워지는 장면입니다.
    구약성경 출애굽기와 신명기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두 돌판을 깍아 다듬어가지고 아침에 일찍 시내산으로 가지고 올라오라는 사건이 바로 예수님 부활사건입니다.
    결론적으로 버려진 돌은 십자가에 못박은 율법의 예수님이 십니다.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예수님이 삼 일날 새벽에 무덤 속에서 성령 세례를 받는 사건입니다.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붓는 것은 기둥은 예수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구약시대 때에 광야생활 사 십년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 하신분이 바로 오순절날 오실 성령의 말씀이 이 땅에 성령 받은 사람들을 말씀으로 인도 하실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상으로 우리들에게 미리보여 주신 것입니다.
    광야는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있는 이 세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모세는 율법의 예수님의 상징이고 모세를 대신한 두 번째 인도자인 여호수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모세는 가나안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론이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율법에 장사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하늘나라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오직 여호수아의 실체가 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데리고 가나안땅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위에 라는 뜻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무덤속에서 성령세례 받으실 장면을 미리 보여 주실 때에성령이 비둘기 형체로 그 위에 임합니다.
    그리고 오순절날 성령도 일백 이십명 위에 임합니다.
    돌 기둥 위에 야곱이 기름과 전제 부은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무덤 속에서 기름부음을 받는 장면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기름은 성령의 말씀입니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인류 최초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이 말씀이 기름부음을 받는 것입니다 (눅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이 내용의 말씀은 오순절 성령 사건입니다.
    저녁 먹은 후 라는뜻은 오순절 성령이 저녁때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신 그 장소에 저녁때에 오실 것을 미리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은 피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계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흘리신 피는 오순절날 오실 성령의 말씀에 그림자입니다. 성령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서 깨달아 질 때에 내 속에 사단이 바깥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하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바로 피의 실체이신 성령에 말씀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참고(엡2:13) 이제는(복음시대) 전에(율법시대) 멀리 있던 너희가(율법시대는 성령이 오시지 않았기에 말씀과 만날 수 없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성령의 말씀과 함께)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리스도는 부활하신분이 십니다. 여기에 신비한 비밀이 숨겨 져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는 2019년 동안 하늘나라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시는 또 채찍 맞고 고통 속에 다시 피흘러 죽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 그럼 여기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피는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이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피의 근본이 되는 말씀으로 사람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깨닫지 못하면 다 비밀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피가 말씀으로 관련되는 성경말씀을 참고 하겠습니다.
    (마26:27) 또 잔을 가지사 (잔은 성령을 가지신 예수님 자신) 사례하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심) 저희에게 주시며(오순절날 제자들 일백이십명 에게 주실것)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인류전체 중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성령의 말씀을 다 마시라는 뜻)

    (26:28) 이것은(포도주는 성령의 말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성령의 말씀이 사단의 죄를 이김) 많은 사람을 위하여(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전체)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오순절날 오실 언약의 성령의 말씀 새 언약) 야곱이 하란으로 가는 사건이 우리들이 단순한 세상적인 사람이 알고 있는 원리의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야곱을 통해서 예수님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장사 되셨다가 다시 부활하시는 사건에 관하여 말씀을 풀어 보았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1월 10일(금) 창세기 27-3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전(창세기 28: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and this stone that I have set up as a pillar will be God's house, and of all that you give me I will give you a tenth.

    고린도전서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בַּיִת 스트롱번호 1004

    1. 집.  2. 장막. 3. 왕하 23:7.
    발음 [ bayit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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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도서 5:1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하나님의 전
    - 이는 솔로몬 왕이 지은 예루살렘 성 안의 성전을 말하는 것 같다(왕상 6:1-38).
    성전을 본절처럼 '하나님의 전'(the house of God) 또는 '여호와의 전'(the house of the Lord, 왕하 6:37; 7:48) 등으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전의 지성소에 임재하시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고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같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시는 상징적인 처소를 정하신 것은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성막을 짓도록 계시하신 데에서부터 엿볼 수 있다(출 25:8, 2).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창 28:21~22)

    3.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꿈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음(창 28:10~22).

    21절.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게게 하시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거이요는 그렇게 하시면 라는 조건이 아니다.

    “평안”은 히브리어로“샬롬”인데“온전하다, 건전하다, 안전하다”을 뜻하는“샬람”에서 유래한 것으로“안전함, 건전함, 충분함, 평화, 평강, 친목, 화평, 형통, 건강, 안녕”등등을 말한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의 번영을 구하거나 빌 때(창 43:27, 출 4:18, 삿 19:20) 혹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화친할 때(수 9:15, 왕상 5:12). 또 누군가가 어떤 도시나 어떤 나라의 평안을 구할 때(시 122:6, 렘 29:7)사용했다.
    물질적인 번영이나(시 73:3) 육체적인 안전(시 4:8), 육체의 쉼, 근심 걱정 없음(창 15:15)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영적인 안녕도 배제하지 않는다.
    한편 이 말은 의와 진리와 항상 연합 한다(마 27:29, 28:9, 막 15:18, 요 19:3).

    본문에서 야곱의 이 간구는 문자적으로는“그리고 나에게 하나님이 되시고”로서 야곱의 상호 교환식 서원을 지지한 듯하나 전체 문맥으로 보아 야곱이 어떤 조건으로 하나님과 값싼 흥정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따라서 본절을 부연 설명으로 보아“여호와께서 내게 하나님이 되시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Hengstenberg).
    이 서원은 여호와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평생 섬기며 살겠다는 의지의 발로(發露)이자 신앙 고백이다.

    22절.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내가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야곱은 자기가 무사히 귀환 하게 된다면 이후에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이곳에 제단을 쌓겠다는 뜻으로 훗날 이 서원을 지킨다(35:7). 따라서 이곳 벧엘(5:14, 15)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임재하심을 뜻하는 기념 처소가 될 뿐만 아니라, 오는 세대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영적 예배의 장소를 상징하는 영원한 모형이 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역사적 사건을 교회와 연관지어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와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5)고 묘사하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십분 일”은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이란 전제가 붙어 있다.
    즉 내게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겸허한 신앙 고백의 행위이다.
    비록 야곱이 십일조를 바쳤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지만, 후에 세운 제단과 헌물이 그의 십일조 헌납을 암시한다(35:1~7).
    한편 야곱의 십일조 서원은 조부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른 것 임에 분명하며(14:20).
    후에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삯으로 율법에 명시되어 있다.

    “반드시”는 우리말로 틀림없이, 기필코, 또는 꼭 한다는 말이다.
    영어로 surely(슈얼리)는“분명히, 확실히, 물론, 정말로, 틀림없이, 반드시, 거짓이 없이, 정녕히, 진실하게 대하는 태도가 친절하다”을 말한다.
    히브리어에서는 한 단어를 강조할 때 같은 말을 반복하는 말을 뜻하는“슈브”인데 문자적으로나 상징적으로 반드시, 기필코, 시작했던 지점으로“방향을 돌리다, 돌아서다, 돌이키다, 회복한다”을 뜻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벧엘의 사닥다리(창세기 28:10~22)

    이스라엘의 족장 야곱은 살던 곳 브엘세바에서 외가가 있는 하란으로 가다가 벧엘 들판에서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쓸쓸한 광야에서 밤이슬을 맞으며 곤하게 잠이 들었을 때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닥다리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 위로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광경을 보았고 그 위에서 제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펼치게 될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입니다.

    야곱이 본 벧엘의 사닥다리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나타내 주시는 계시의 환상이며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곳을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하였습니다(17절).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닥다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 한 것은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신령한 교제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 교회의 참모습입니다.

    이 후 야곱은 중동 천지를 유랑하는 나그네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언제나 그곳 벧엘의 환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곧 벧엘의 사닥다리 환상은 야곱 인생의 초점이었고 삶의 구심점이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삶의 원리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언약의 현장

    야곱이 벧엘 광야에서 본 환상 곧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닥다리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 자리에서 사닥다리 위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고 동시에 하늘로부터 선포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본문 13절에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약속에 앞서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셨던 것을 야곱을 통하여 실현하시겠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자손의 번성을 약속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시조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창 1:28).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선민의 조상으로 삼으시고 그들에게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자손이 번성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창 15:5).

    지금 야곱은 혈혈 단신으로 방랑자의 길을 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장래와 후손들에 대한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가 누운 벧엘을 중심으로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도 백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후손을 약속하셨고(창 15:4), 이삭도 결혼 후 이십 년 동안 자식이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쌍둥이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창 25:21). 야곱도 역시 하나님의 축복으로 열두 명의 아들을 두어 족장이 되게 하였습니다.

    2. 복의 기관이 될 것을 약속

    14절에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자손의 복을 약속하실 때 수적으로 많게 하는 것과 질적으로 우수한 민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2:17에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땅의 티끌」이나 「바닷가의 모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자손을 뜻하지만 다른 면으로는 사람들에게 밟히고 박해를 받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별」은 숫적으로도 무한대이지만 질적인 면에서 존귀하고 뛰어나게 된다는 축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14절). 창세기 12:2-3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 중에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약속은 그의 후손을 통해서 세상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게 하는 축복의 통로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훗날 모세가 율법을 반포할 때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고 하였습니다.

    3. 언제까지나 함께 하실 것을 약속

    15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집을 떠난 야곱이 가족이나 이웃과 격리된 채 삭막한 광야에서 홀로 내동댕이 처져있는 상태이고 보면 가장 절실한 것이 외로움과 내일의 불안을 해소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사닥다리 환상과 함께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지키시고 언제까지나 함께 하시겠다는 언약을 주셨으니 그로서는 최상의 기쁨이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후 야곱이 가는 길에는 수없이 많은 어려움과 난관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서가시며 그의 길을 열어주셨고(창 29:9-14), 그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저를 위험에서 건져내시며 더 안전한 길로 인도하여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창 31:42, 33:4, 35:1).

    Ⅱ. 서원의 현장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시고 장래의 비밀한 계획을 알려주실 때 이를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무한한 은혜요 축복이 됩니다. 그렇다면 자신도 하나님께 자기의 뜻을 나타내며 감사와 헌신의 서원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기 사닥다리의 환상이 있는 벧엘의 현장에는 야곱과 그 후손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고 이어서 하나님을 향한 야곱의 기도와 서원이 있었습니다.

    1. 감사와 감격의 표현

    16절에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고 하였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뜻밖의 장면을 목격하고는 너무나 큰 감격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17절에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그 사닥다리의 현장을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요, 하나님과 교통하는 관문이라고 믿었습니다. 18절에 보면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어떤 경우이든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와 환상의 은혜를 받게 되면 가장 먼저 감사하는 마음과 감격의 표시가 있어야만 됩니다. 그것이 때로는 찬송으로 기도로 또는 여러 가지 모양의 헌신으로 나타나지게 됩니다. 이와 같은 감사와 감격이 있는 사람이 언제나 자기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게 됩니다(롬 12:1). 이것이 성도의 예배적 삶이 되는 것입니다.

    2. 기도와 소원을 아뢰다

    20-21절에는 야곱이 자기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이나 구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신약의 야고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였습니다(약 1:5).

    여기 야곱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을 보면 지금 당장 자기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것들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시며 그의 가는 길을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의식주(衣食住) 문제는 가장 시급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요소입니다. 셋째는 저를 평안히 아비 집에 돌아올 수 있도록 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성도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역대상 4:10에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고 하였습니다.

    3. 헌신의 약속

    야곱은 하나님께 간곡한 소원을 아뢰면서 자기가 하나님께 할 수 있는 헌신의 약속을 드렸습니다. 21-2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때나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아버지께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와 같은 태도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의 신앙적 자세이기도 합니다. 여기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삶의 목표를 밝히는 것으로써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겠다는 뜻입니다(고전 10:31).

    또한 그가 하나님의 전을 짓겠다고 하는 약속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삶의 의지입니다. 야곱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로 가든지 항상 성막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제단 쌓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훗날 솔로몬에 의하여 건축된 예루살렘 성전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서약한 것도 역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약속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고 하므로써 하나님께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십일조가 율법으로 제정되기(레 27:30)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행위로 시행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Ⅲ. 은혜의 현장

    성도가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마주 대하게 되면 어떤 형태로든지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되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를 하게 됩니다.

    친구의 권유에 못이겨 따라 갔던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요 1:49). 이때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요 1:51).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과 만남의 체험을 가지게 되는 것과 그 순간의 감격은 평생을 두고 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잊혀질 수 없는 은혜의 추억이 됩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도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고 하면서 그곳을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불렀습니다(16-17절).

    1. 시은소(施恩所)

    옛날 모세가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 때 십계명의 돌 비가 들어 있는 증거궤를 안치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을 지성소(至聖所)라고 부르는데 거기서 하나님이 모세와 만날 수 있도록 구별해 놓았습니다(출 30:6).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 거룩한 곳이며(출 3:5), 하나님과 대면하고 만나게 되는 것은 최상의 축복입니다.

    구약시대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성소를 사모하며 그 은혜를 그리워하였습니다. 시편 84:3에는 하나님의 성소를 참새의 집과 제비의 보금자리로 비유하였습니다. 그것은 저희가 항상 주의 얼굴을 뵈옵고 찬송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84:5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고 하였습니다.

    2. 회복의 은혜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던 야곱이 숙곳에 머물다가 그곳 추장의 아들에게 딸 디나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창 34:7). 이때 야곱의 아들들이 칼을 가지고 가서 세겜성 사람들을 도륙해 버렸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야곱은 눈앞이 캄캄하여 큰 공포에 떨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35:3에 보면 야곱이 가족을 모아 놓고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극심한 환난과 죽음의 고통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저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며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시 17:6).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속에 품어 주듯이 세상사에 지치고 피곤해진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은혜의 날개 아래 품으시고 새 힘을 얻도록 회복시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룻기 2:12에 보면 보아스가 룻을 향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룻은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모압 땅에서 가족과 재산을 잃고 패가 망신한 나오미의 가정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것을 하나님의 날개 아래 들어왔다고 보았고 그 결과 상상할 수 없는 축복으로 회복되었습니다(룻 4:18-22).

    3.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삶의 중심

    벧엘의 사닥다리는 이상적인 그리스도 교회의 모형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 곧 교회를 뜻하며 거기 나타난 사닥다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계시와 축복의 언약이 주어집니다.
    동시에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와 찬양과 예배로 헌신을 약속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신령한 삶이요 비길 데 없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비록 광야 같은 세상에서 방랑자의 생활을 할지라도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성소가 있고 주님과 만남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눈물 골짜기를 통과하면서도 깊음의 샘과 이른 비의 은택을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시 84:5).

    이런 것이 이상적인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삶의 중심이요 이상향(理想鄕)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시편 84:4)

    여기에 나오는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인가?
    하나님의 성전에 나가 경배하는 모든 백성들인가?
    둘 다 가리키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복되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주의 성전에 나가는 자들만 복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복이 있는 자들은 주의 성전에 나가는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들은 복된 자들이고, 이런 자들은 주의 성전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늘 하나님을 찬송할 것입니다.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늘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억지로 찬송을 불러서는 안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자기 자신을 뽑내기 위해서 찬송을 불러서도 안됩니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찬송을 불러도 안됩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이고 신앙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가수처럼 잘 부르지 않아도 됩니다. 음정 박자가 틀려도 상관없습니다.
    물론 음정 박자를 잘 맞춘다면 더 아름다운 노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 신앙에서 드리는 찬송이면 됩니다.
    성도는 항상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을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복을 노래합니다(5-12)

    이제 시인은 하나님과 동행한 자의 복을 노래합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5)

    원문은 ‘복이 있다 주님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이 있는 자는 주님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을 사모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구원받은 자들의 태도입니다.
    신앙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은 주의 성전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사고방식, 생활 방식을 그리스도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 신앙의 태도입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제 시인은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고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준다고 고백합니다(6).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날 것입니다(7).

    눈물 골짜기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주어지는 고난과 고통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장소를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샘이 있다는 말은 1차적으로 빗물을 저장해 두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작은 웅덩이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여행자들의 샘이 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고난의 인생 여정 중에서도 진정한 기쁨을 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지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무한한 은총입니다.

    이른 비는 가나안 땅의 파종기인 9-10월 경에 내리는 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복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길을 가는 자들에게 신령한 복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힘을 얻는다는 말은 영적인 힘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면 영적인 힘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날 것이라는 말은 당시 순례자들이 긴 순례의 여행을 하여 성전에 도달하게 되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기쁨을 말합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하나님 앞에서 얻는 기쁨, 영생의 기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시 84:8-9)

    만군의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자, 통치자라는 의미이고,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유다의 조상 야곱을 부르시고 그에게 언약을 주시고 신실하게 그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방패이신 하나님은 전쟁에서 자신의 목숨을 보호해주는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보호해주시는 생명의 보호자라는 의미입니다. 주의 기름 부으신 자는 왕을 의미하는데 이는 장차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얼굴을 살펴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주의 궁정, 다른 곳은 대조를 나타냅니다. 또 한 날과 천 날은 대조를 이룹니다. 또 악인의 장막과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도 대조를 이룹니다. 이는 비록 눈에 보기에 비천해 보이나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것이 기쁘고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성전의 문지기는 가장 비천한 신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11-12절에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11-12)

    다시금 강조합니다.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합니다. 원문은 ‘만군의 여호와여 복이 있다 주님께 의지하는 자는’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복이 있는 자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이것이 참 구원받은 복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받은 복된 자는 하나님을 늘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의지하는 자는 분사형입니다. 즉 계속해서 의지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결론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복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리스도만 신앙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 믿음이 변함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이사야 2:1-4)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세상은 가치 있는 것은 환영을 하고 가치 없는 것은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해서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가치 있고 없고의 판단 기준이 자신을 중심으로 되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가치 있는 것이고, 이익이 되지 않고 손해가 되는 것은 가치 없는 것이고 버려야 할 것으로 간주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치관 속에서 교회를 바라보고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교회도 진리의 판단 기준을 내 교회에 이익이 되고 안되고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나를 유익 되게 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진리가 세상적인 가치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교회에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진리를 따르고 진리대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접해야 하고, 무시를 당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더욱 어려운 것은 진심으로 진리를 깨닫고 그 말씀대로 세상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찾아보기가 힘들고 대다수의 교회가 진리 아닌 것을 진리로 내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약하고, 비진리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강하다는 것입니다. 약자는 강자에게 눌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기 때문에 결국 이 땅에서는 진리가 비진리에 눌리고 공격당하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진리임을 알기 때문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곧 참된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생각합니다.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내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싫어하고 멀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참된 신자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에 눌린다고 해도 결코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에게만 모든 가치를 두고 사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가치가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에게 가치를 두게 되면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해야 하고, 눌려야 하고, 어렵고 힘들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에 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하는 것이 잘하는 일인가에 대한 의심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가치 없는 인간이다.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지옥갈 인간이었는데 남들이 욕한다고 그것을 못참고 원망을 하는가?'하면서 모든 것을 견디어 갈 때 그리스도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포기하여도 결코 버릴 수 없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는 모든 것이 판가름 날 것입니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였는가가 드러나게 됩니다. 참된 것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무너지고 사라지게 됩니다. 그때를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힘들다고 진리를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절에 보면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 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고 합니다. 말일이라는 것은 마지막 때라는 의미입니다. 마지막 때에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서고 작은 산 위에 뛰어난 것이 있는데 그것을 여호와의 전의 산이라고 합니다. 즉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만이 모든 산위에 굳게 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가 피해야 할 곳은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입니다. 이곳으로 피할 자는 이곳을 아는 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것을 알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는 자가 따로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만이 여호와의 전의 산으로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전의 산이란 오늘날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3절을 보면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전을 야곱의 하나님의 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이삭을 속여서 축복을 받고 에서를 피하여 도망을 칠 때 꿈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곳을 '하나님의 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때 야곱은 하나님의 전에 대해서 오해를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며 자기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어 주실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신 것은 그에게 참된 복이 무엇인가를 알리고 장자란 섬기는 자임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야곱은 자기 인생에 개입하셔서 간섭하신 하나님을 통해서 복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에서에게 절함으로 장자의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전이란 우리에게 세상에서 참된 것이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해서 가르치는 말씀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은 성전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성전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성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을 때 그것을 성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전이 있는 여호와의 산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지고 말씀이 다스리고 있는 그 자리를 여호와의 산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산에서 마지막 때까지 남는 신자는 세상의 다른 것에는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말씀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을 향해서 올라가며 '이것이 진리의 말씀입니다'하면서 참된 말씀을 증거하는 자입니다. 여호와의 산은 참된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다스림 받는 그 자리가 여호와의 산입니다.

    신자가 여호와의 산에서 말씀에 의해서 다스림 받을 때 다른 산은 작은 산으로 보여져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마지막 때에 여호와의 산이 모든 작은 산 위에 굳게 선다고 합니다. 여기서 작은 산은 무엇을 말합니다. 말씀에 의해서 다스려지지 아니한 모든 것을 작은 산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이 없는 것을 작은 산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아니한 모든 것은 마지막 때에는 모두 작은 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작은 산에 불과한 것은 아주 큰산으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씀에 의해서 다스려지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큰산인지를 판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높은 자리에 앉는 모든 것이 작은 산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을 큰산으로 여기며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고 헌금이 많아지고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작은 산에 불과한데 말씀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큰산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근심과 걱정으로 살아가는 이유도 큰산을 보지 못하고 작은 산을 큰산으로 여기며 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 모든 작은 산 위에 곧게 설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작은 산에 서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못견뎌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 있는 자들을 작은 산에 서 있는 자들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힘을 자랑하고 돈을 자랑해도 마지막 때에는 말씀 위에 서 있는 자가 굳게 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에 서서 세상을 바라봅시다. 작은 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생의 전부가 시집가고 장가가고 돈벌고 잘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산에 서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인생의 전부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작은 산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것을 자랑하고 내세운다고 그것 때문에 기가 죽거나 낙심하겠습니까? 오히려 작은 산에서 그것이 최고인줄 알고 자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사는 사람은 세상이 부럽지가 않습니다. 신자는 언제나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4절의 말씀과 같이 경쟁과 다툼이 아니라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보여주며 살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이 은석교회가 말씀이 다스리는 여호와의 산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도 여러분 각자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전(역대상 22:1- )

    성전을 건축할 장소가 정하여졌습니다(1절).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그리고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고백으로써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이라” 고 다윗은 말하였습니다.
    만일 성전이 하나님을 위해 세워지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친히 장소를 택하는 것이 합당한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땅이 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택하신 그 터전은 이방사람들 사이에도 복음의 교회를 세우게 되리라는 것을 나타낸 행복한 전조가 되었습니다(행 15:16-17).
    그 땅은 타작마당입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는 바로 그의 마당이며 그의 타작물이며 또한 “그의 마당의 곡식”이기 때문입니다(사 21:10).
    그리스도는 그의 마당을 온전히 정결케 하기 위해 그 손에 키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집은 바로 제단을 위해 세워질 집이었습니다.
    성전이란 바로 제단을 위해 세워진 집입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오래전부터 이미 제단은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이미 다윗 때부터 조직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장차 이스라엘의 수도가 될 예루살렘으로 옮겨다가 장막에 모시고(대상 16:4) 그 앞에서 섬기기 위해 제사장들, 레위인들, 성가대 악대를 조직했습니다(대상 16:4, 25:1-7).
    그러나 나단에게 성전 지을 의사를 표시하자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그것을 짓게 하려고 했습니다(대상 17:1-12). 다윗은 성전을 위해 많은 돈과 재물을 그 아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대상 18:5-13, 22:6-17).
    아버지의 유물과 자기의 모든 것으로 솔로몬(주전 960-922)은 그의 치세 제4-11년간에 아담한 성전을 건립했습니다.
    그것은 헤롯 성전보다 적으나 아름답고 화려한 건물로 처음에는 작은 예배당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일반의 예배처소는 아니었고 대제사장도 1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지정소에 들어갔습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도 기름, 향, 떡을 보급하는 정도였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에게는 성전 구내가 전부 집이었습니다(시 66:13).
    솔로몬의 성전은 400년을 못갔습니다.
    주전 587년에 느부갓네살이 성전을 불살랐습니다.
    11년 후 유다의 젊은 왕 여호야긴과 예루살렘 시민들을 바벨론으로 잡아갈 때(왕하 24:10-16) 성전 보물도 (25:13-17)다 옮겨 갔습니다. 시바의 여왕도 솔로몬의 성전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놀랐습니다(왕상 10:4).
    솔로몬 성전은 베니게 직공들이 지었는데 베니게, 가나안, 애굽, 신전들의 영향을 맡이 받았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좁은 정방형으로 동편에는 문이 있고 서편에는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길이가 약 33.33m, 넓이가 9m 가량이요 약 3m 높은 지대 위에 서 있었습니다.
    히브리, 베니게 노동자 수천명을 풀어 흰 석회석을 갈아서 아름답게 지었습니다(왕상 5:6, 6:7).
    내부는 레바논 백향목으로 목수들을 시켜서 아름답게 장식했습니다(6:5-36, 5:6).
    출입구로 올라가는 층계는 10계단이 있었고 층계 좌우에는 상징적인 두 기둥(야긴과 보아스)이 벽과 따로 서있었습니다.
    좁은 출입문(10×4.5m)은 백향목으로 짰고 그 위에 그룹,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핀 꽂은 금으로 박았습니다(왕상 6:18-35).
    문지기가 있었습니다(시 84:10).

    1. 성전은 3부로 나누었습니다(울람)
    (1) 울람-제사장이 들어오는 입구의 홀
    (2) 헤칼-본관 곧 성소인데 붙박이 교창에서 빛이 스며듭니다(왕상 6:4).
    성소는 높이가 약 13.63m 넓이가 약 9m 길이가 18.2m였습니다.
    돌로 마루를 깔고 그 위에 백향목으로 덮었습니다.
    성소 내부는 백향목으로 두르고 지붕은 백향목 서까래에 마루로 덮었습니다(왕상 6:9).
    백단목 벽기둥들이 운치를 더 했습니다(10:12).
    기둥에는 생명나무를 조각하고 금으로 입혔습니다(16:21).
    (3) 드빌 - 지성소로 올라가는 층계 앞에 백향목으로 만든 작은 향단이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창도 없고 굴 같은 9m정방형 방인데 주님의 거하시는 방이었습니다(대하 3:8-13).
    지성소는 성소보다 마루가 높으며 4.5m 높이 감람나무로 만들고 금으로 장식한 두 그룹이 법궤 위에 마주 섰습니다.
    그룹은 베니게에서 들어온 날개 돋힌 스핑크스(여자 머리에 사자 몸)거나 베니게화한 천사신이었습니다(겔 9:22-25).
    성전 남서북삼면에 있는 이층방들은 창고실로 썼는데 올라가는 문들과 좁은 충계가 안과 밖에 있었습니다.

    2. 성전 비품 성전 비품은 두로의 건축 기술자 허람(그 어머니는 출애굽 납달리 족속)이 많이 만들었습니다.
    성전 앞 마당 우편에는 큰 번제단이 있었는데 어떤 이는 그것을 큰 바위 위에 만들어진 것이라 합니다(겔 43:14).
    또 어떤 이는 대하 4:1에 묘사한대로 만든 것인데 층계있는 거룩한 탑 모양이었다 합니다.
    제단 4귀에 뿔이 있었습니다.
    제단 남쪽에는 큰 놋으로 부어만든 “바다”가 있었는데(대하 4:1) 그 두께가 1m 직경이 4.5m 고가 약 2.25m 되었습니다.
    그 가장자리는 백합꽃처럼 아름답게 굽었습니다(왕상 7:23).
    놋으로 만든 12마리의 황소등에 놓였는데 3마리씩 4방(춘하추동의 암시)을 향했습니다.
    그 황소들은 모양 뿐 아니라 생식력의 상징인 동시에 비를 주는 신으로 중동에서 널리 믿는 바알에도 관련되었습니다.
    거룩하게 생각한 동물들이 왕의 보좌나 거룩한 것을 바친 것은 옛적 철시대에 흔히 있던 일이었습니다.
    그 놋바다는 원래 제사장들이 깨끗케 하는 의식에 쓰려한 것보다 물이나 바다는 생명의 근본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3. 성전 안에 불박이로 놓여 있던 것은
    (1) 후대 제사 규칙에 의한(레 24:1-4, 민 8:1-4) 7촛대의 전신인, 10개의 금촛대 (왕상 7:49, 대하 4:7) 이 촛대란 사실, 3다리 달린 동경(등잔)으로 그 위에 불심지 7있는 등잔을 놓은 것이었습니다.
    성막에는 촛대가 하나뿐이었습니다(출 37:17).
    제 2성전에도 하나였는데 안디오커스 에피피네스에게 도적맞고 마카비 시대에 다시 만들었더니 주후 70년에 로마군대가 가져갔습니다. 그 모형만은 티도 개선문 조각에서 볼 수 있습니다.
    (2) 진설병 상을 12개 만들어 떡 12개를 차례로 놓을 때 상도 차례로 하나씩 썼습니다.
    이 떡상은 왕상 6:20-22의 제단과 일치하며 안식일마다 새 떡으로 바꾸어 놓고, 전 것은 제사장들이 먹었습니다.
    (3) 움직일 수 있는 향단은 금으로 장식했으며 뿔이 있었습니다.

    4. 솔로몬 성전은 초막절에 봉헌되었습니다(왕상 8:12)
    솔로몬의 기도는 넉줄의 시였으나 주전 550년경의 포로 후의 부연하여 봉헌기도를 유창하고 가장 높은 것이었습니다.
    그 내부는 때를 따라 변했을 것입니다.
    르호보암 때(주전 922-915) 애굽 왕 시삭이 노래했으며 (왕상 14:25) 악한 여왕 아달야(주전 842-837)가 바알 예배를 성전에서 행했습니다.
    아하스(주전 735-715)는 성전 내부를 개조하고 제단도 고쳤습니다(왕하 16:10-18).
    히스기야(주전 715-687)는 모세의 율법의 놋뱀을 버렸습니다(왕하 18:4).
    므낫세(주전 687-642)가 앗수르 방식을 따라 성전을 주력했더니(왕하 21:4) 요시야(주전 640-609) 왕이 연보궤에서 율법책을 찾은 후 그것을 폐지했습니다(대하 34:14).
    솔로몬 때 시작한 예루살렘성전 중심주의를 강화하여 지방성소들을 폐지하고 그 제사장들에게 예루살렘에서 할 일을 주었습니다(신 12:2-28).


    하나님의 전(God's house)과 십일조(tenth)는 야곱의 서원이었습니다.

    왜 야곱이 이런 서원을 했을까요?

    십일조는 구약의 산물이므로 은혜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의무가 아니라고 강조하는 주장을 자주 듣게 됩니다.
    그러나 나는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야곱처럼 내가 받은 은혜가 너무 귀하기 때문에 그 은혜에 대한 감사와 믿음을 위한 최소한의 고백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지만 육체의 몸을 유지하며 살아야 할 연약함 때문에 모든 것을 바치지 못하고 최소한의 것을 드림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간다는 고백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가족을 이루었고 가족들과 많은 가축을 몰고 고향 땅으로 돌아갈 때 예전에 형으로부터 빼앗은 장자의 축복을 생각하면 초조하고 불안했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던 길에 노숙하려고 돌을 베개로 삼아 자리에 누웠을 때 땅위에 세워진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는 신기한 꿈을 꾸게 됩니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난 후에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곳은 하늘의 문이며 하나님의 전" 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배게로 삼았던 돌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땅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루스(편도나무, 아몬드나무)"라는 땅에서 하룻밤을 잔 후에 신비한 꿈을 통하여 야곱은 그곳을 '벧엘'이라고 블렀던 것처럼 오늘날도 믿음의 사람은 두려움의 자리에서 능력의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만나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 야곱 이후에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이곳에 제단을 쌓겠다는 뜻으로 훗날 이 서원을 지킨다(35:7).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따라서 이곳 벧엘(5:14, 15)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임재하심을 뜻하는 기념 처소가 될 뿐만 아니라, 오는 세대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영적 예배의 장소를 상징하는 영원한 모형이 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역사적 사건을 교회와 연관지어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와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고 묘사합니다(딤전 3:15).

    십분 일
    -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겸허한 신앙 고백의 행위이다.
    비록 야곱이 십일조를 바쳤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지만, 후에 세운 제단과 헌물이 그의 십일조 헌납을 암시한다(35:1-7).
    한편 야곱의 십일조 서원은 조부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른 것임에 분명하다(14:20).





    1월 9일(목) 창세기 24-2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장자의 명분(창세기 25: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Then Jacob gave Esau some bread and some lentil stew. He ate and drank, and then got up and left. So Esau despised his birthright.

    장자의 명분(1062)

    베코라(bekôwrâh)  בְּכוֹרָה 스트롱번호 1062

    1. 초태생.   2. 느 10:37. 3. 창 4:4
    발음 [ bekôwrâh ]
    구약 성경  / 7회 사용
    관련 성경  /  첫 새끼(창4:4), 장자의 명분(창 25:31, 27:36, 대상 5:1), 처음 난 것(신 12:17, 14:23, 느10:36).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장자의 명분(베코라. bekôwrâh)"이란 "태를 열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로 사람이나 짐승의 '초태생'을 말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장자의 상속권"을 말하기도 합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의 처음 출생한 자가 갖는 특권과 책임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외적 특권(外的 特權)

    1. 아비의 뒤를 승계하여 가장이 되어 가문의 대소사(大小事)를 처리할 수 있는 주도권(창 27:1-45. 대하 21:3)
    2. 다른 형제에게 할당된 유산의 두 몫을 분배받을 수 있는 자격(신 21:15-17)

    둘째, 내적 특권(內的 特權) 

    1.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한 가정의 대표자로서 모든 일을 수행
    2. 언약 관계에서 영적 축복의 후계자가 되며, 또한 책임도 병행하는데 그것은 부친의 노후나 사후, 모친과 미혼 자매들을 부양해야 할 의무를 갖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대하여 "신앙의 명분(The responsibility of faith)"을 가진 자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향하여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본분과 책임과 의무를 바르게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명분이 무엇일까요?

    1.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라(고후 2:15-16)
    2.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라(고후 3:3)
    3. 세상의 본이 되라(벧전 2:9)
    4. 천국의 시민으로 살아가라(빌 3:20)

    이러한 명분을 바르게 감당할 때 비로서 하나님의 자녀된 본분을 드러낼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나를 세워가는 삶에 성공하는 승리의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리스도인의 명분(마태복음 5:13-14)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it be made salty again?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by men.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on a hill cannot be hidden.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라고 하셨을 때 세상이란 헬라 단어는 "게"라고 합니다.
    "게"라는 헬라 단어는 "땅" "지면"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땅의 소금, 지면의 소금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시대가 어지러운 것은 땅의 소금으로 지면의 소금으로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이 된 것처럼 신앙생활과 생활신앙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땅(게)의 소금

    γῆ, γῆς, ἡ 스트롱번호 1093

    1. 땅.   2. 흙  3. 지면
    발음 [ gē ]
    • I.  땅.
      • 1.  흙, 땅, [씨를 받아들이는~] 마13:5,8, 23, 막4:5,8,20,26,28,31, 요12:24, [비에 젖은~] 히6:7. [열매맺는~] 약5:7. [낭비된~] 눅13:7.
      • 2. 지면, 땅, 마10:29, 15:35, 25:18,25, 막8:6, 9:20, 14:35, 눅22:44, 24:5, 요8:6,8, 행9:4,8, 계12:16.
      • 3. 육지[바다의 반대로서], 막4:1, 6:47, 눅5:3,11, 요6:21, 21:8,9,11, 행27: 39,43,44, 지역, 나라, 행7:3,4,6. 지역적 의미에서 이스라엘, 마2:20,21. 게네사렛, 마14:34. 미디안, 행7:29. 유다, 마2:6. 스불론과 납달리, 마4:15. 유다, 요3:22. 가나안, 행13:19. 에집트, 행7:36,40, 13:17, 히8:9. 조국, 행7:3. ἡ γῆ [독립적으로] 팔레스 타인, 마27:45, 막15:33, 눅4:25.
      • 4. 지구.
        • a. 하늘과 대조되는, 마5:18,35, 6:10, 19, 16:19, 눅2:14, 21:25, 골1:16, 히1:10, 11:13, 벧후3:5,7,10. 땅에 있는 것들, 골3:2,5, 벧후3:13, 계21:1.
        • b. 사람이 거주하는 지구, 눅21:35, 행10:12, 11:6, 17:26. 사람, 인류, 마5:13, 10:34, 눅12:49,51. ἐπὶ τῆς γῆς: 세상에서[지상의 사람들 중에서], 눅18:8, 요17:4, 롬9:28, 엡6:3, 약5:5. ἀπὸ τῆς γῆς: 세상에서 부터[땅에서부터] 행8:33, 22:22, 계14:3.
    • 관련 성경 /  땅(마 2:6, 막 2:10, 행 1:8), 세상(마 5:13, 9:6, 막 9:3), 흙(마 13:5, 막 4:5), 뭍(막 6:47), 육지(마 4:1, 눅 5:3, 요 21:8),
                         지구(눅 21:35), 지면 (계 20:9), 천하(계 16:14).



    땅의 소금, 세상의 빛(마태복음 5:13-16)

    역사적으로 애굽에서 나온 히브리 민족들은 가나안 땅에서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이 되려면 반드시 언약을 지켜야 합니다.
    문제는 가나안 땅이 우상 숭배가 가득한 땅이었는데 그 백성들이 언약을 지키지 않고 우상 숭배에 깊이 참여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시대에 장자는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장자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지요.

    출애굽기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레위기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 

    민수기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

    역대하 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것이 아니냐

    땅의 소금은 맛을 잃어 버렸고 거룩한 땅을 더럽혔다(렘 2:7, 3:9). 
    땅의 소금은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짓밟혔다(렘 52).
    땅의 소금 /  이스라엘의 남은 자(롬 9:6, 27, 11:5).

    로마서 9:27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로마서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세상의 빛. 예수님은 세상의 빛, 생명의 빛, 참 빛이시다(요 1:4, 5:9:5).

    요한복음 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이라.
    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이로라.

    크리스천들은 세상의 빛이다(엡 5:8, 살전 5:5).

    에베소서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이라 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5
    너희는 다 의 아들이요 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장자의 명분(장자 상속권)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맏아들이 누리는 권리를 ‘장자의 명분’ 또는 ‘장자 상속권’이라 부른다.

    특별한 권리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장자는 형제들 중에서 특별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맏아들은 평소의 식탁에서도 아버지를 이어 높은 자리에 앉았고 일상 생활에서도 다른 형제들에 비해 주도적인 위치를 누렸다.

    아버지가 죽을 때에는 장자에게 특별한 축복이 주어졌고 유산상속도 다른 형제들 보다 두 배 많은 몫을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를 이어 가문의 대표가 되며 왕족의 경우 당연히 왕위 계승권을 가졌다.

    당시의 장자 상속권은 성경에 기록된 족장들뿐만 아니라 바빌론, 앗수르에서도 정착된 제도였다. 이미 발굴된 고대 바빌론, 앗수르의 기록물들에서도 이런 사실이 확인된다.

     

    특별한 책임

    장자에게 주어진 책임도 크다. 부친이 사망할 경우 어머니는 물론이고 다른 형제나 결혼하지 않은 여자 형제들도 부양 할 책임이 있었다.

     

    장자권의 이동

    장자의 권리는 심각한 죄를 저지르면 박탈될 수 있었다. 성경에 기록된 사례로는 르우벤이 있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였으나 아비의 침상을 더럽힌 죄로 장자의 명분을 누리지 못했다.

    장자의 권리는 매매를 통해서 다른 형제에게 넘겨질 수 있었는데 흔한 일은 아니었고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있을 수는 있는 일이지만 손가락질 받는 행위였다(에서의 경우). 첩이나 종의 자식들에게는 먼저 태어났어도 장자의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이스마엘의 경우).

    • 출애굽 이후 주어진 율법에서는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초태생, 곧 장자는 하나님의 소유였다.

    에서의 장자권과 가나안

    에서는 이삭의 맏아들로서 장자의 명분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장자 상속권을 ‘가벼이’ 여겼다.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은 당장의 배고픔 앞의 죽 한그릇 보다 못한 것이었다. 장자의 명분을 팔라는 야곱의 제안을 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삭의 하나님”이 에서의 하나님이 아닌 야곱의 하나님이 되는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에서가 물려 받을 장자의 명분에서 가장 크고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물려 받는 것이었다. 후손에 대한 약속, 그 후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은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게서 이삭의 장자권을 가진 아들에게로 이어질 것이었다. 에서는 억울할지 모르지만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구입한 것은 절차에 있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은 속여서 받았지만 훗날 장자의 명분을 소유한 아들로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고 에서는 가나안을 떠나 세일산에 정착한다.


    장자의 명분이란 무엇인가. 먼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장자의 명분이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상속권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약속이란 무엇인가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주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속권이다. 야곱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에 결국 복의 자손이 되었고, 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없었기에 결국 복을 빼앗겼다.

    사실 에서가 원하던 복은 하나님 나라와 정반대였다. 아래의 대화를 보면 이것을 좀더 면밀하게 살필 수 있다. 에서는 이생에서의 축복, 즉 부와 권력을 원했다. 야곱이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뒤 에서가 분노를 하는데, 이때 에서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조금이라도 축복을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축복은 번영에 대한 축복이었고, 이것을 얻을 수 없자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한다. 또한 에서가 결혼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보면 에서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볼 수 있다. 에서는 자신의 번영을 위해 결혼한다.

    그런데 성경을 제대로 살펴보면 결국 에서는 원하던 것을 얻는다. 야곱과 에서의 부유함을 비교하면, 야곱이 자신의 재산 절반을 에서에게 주었기 때문에 부유함에서만큼은 에서와 야곱이 같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 에서는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즉, 에서는 자기가 원했던 이 땅에서의 부귀 영화를 얻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잃어버린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된 하나님 나라란 무엇인가? 이것을 여기서 다루는 것은 글이 너무 비대해질 것 같기에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겠다. 간단하게만 다루자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을 하셨다. 약속된 땅 위에 아브라함과 이삭의 후손들이 살게 될 것인데, 그들로 인해 이방 민족들이 복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간단하게 세 가지로 구분하자면, 1) 자손에 대한 약속, 2) 땅에 대한 약속, 그리고 3) 이방의 복이 될 거라는 약속이다.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은 이방의 복이 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약속에 대한 이야기는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부터 여러 번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나온다.

    과연 야곱은 장자권에 대해서 알았을까? 에서는 장자권의 의미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야곱은 확실히 이 약속에 대해 알고 있었다. 최소한 그의 말년에는 그렇다.

    [1]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2]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창세기 46장 1-4절

    창세기 46장을 보면, 죽은 줄 알았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성공에 대해서 들은 야곱이 두려워하고 있다.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는가, 바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왜냐하면 약속된 땅은 애굽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인도하여 올라올 것이라는 확신을 주신 뒤에야 야곱은 기쁜 마음으로 성공한 아들을 만나러 떠난다.

    즉, 말년의 야곱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이 어려서부터 원하고 바랐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속권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야곱은 어려서부터 이 사실을 알았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약간의 추측이 필요하다.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창세기 25장 20절

    아브라함이 100세 때 이삭이 태어났으니, 이삭이 40세 때 아브라함은 140세였다. 그리고 이삭은 40세 때 결혼하였다. 그리고 아래의 말씀을 보면 야곱과 에서가 태어난 것은 이삭이 60세였을 때였다. 곧, 이 당시 아브라함은 160세였다. 즉, 아브라함 160세, 이삭 60세, 야곱과 에서 0세이다.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창세기 25장 26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175세에 사망하였다. 즉, 이때 이삭은 75세, 에서와 야곱은 15세였다.

    [7]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8]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창세기 25장 7-8절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은 창세기 26장에서 나타난다. 26장에 아브라함이 아직 살아 있다. 그리고 이때 가장은 이삭이었다. 그 사실은 그랄로 이사를 간 주체가 아브라함이 아니라 이삭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하나님이 이삭에게 나타나 약속을 주신다.

    [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3]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창세기 26장 1-4절

    여기서 이제 우리는 추측을 해야 한다. 25장에 에서와 야곱의 탄생이 등장하고, 그 뒤 야곱이 에서의 장자의 명분을 산다. 26장, 아직 아브라함이 살아 있을 때 이삭이 온 가족을 데리고 애굽 땅으로 가려는 계획을 세우는데, 하나님이 이 계획을 막으시고 그랄 땅에 남아 있게 하신다. 그뒤 에서의 결혼을 언급하는데, 이때 에서의 나이 40이다. 그리고 27장에 야곱이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창세기 26장 34절

    즉, 우리는 야곱과 에서의 탄생(25장)과 야곱이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사건(26장) 사이에 두 가지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죽었고, 다른 하나는 이삭이 이사를 가려다가 가지 않았다.

    먼저 이사(moving)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온 가족이 그랄 땅으로 갔다가 애굽으로 가려다가 가지 않았던 일. 갑자기 왜 이사를 가려다 말았을까? 이에 대한 이유, 곧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주셨던 새로운 약속을 야곱과 에서가 듣지 않았을까? 어떤 가장이 사업을 하던 중에 그것을 접고 목회자가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온 가족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미칠 이 사건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장성한 자녀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사건을 말이다.

    두 번째는,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은 에서와 야곱이 열다섯이 될 때까지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자기가 받았던 소명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아마 최소한 야곱은 나이가 들어 장막 밖으로 잘 나가지 못하는 아브라함의 장막에 종종 방문하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하면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라 장막에 거주했기 때문(창세기 25장 27절)이다.

    결국 아브라함과 이삭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약속을 야곱이 알았을 거라는 사실은 있음직하다. 특히 야곱이 어렸을 때 가정의 중대사를 결정하게 만든 "땅과 자손에 대한 이 약속"을 전혀 듣지 못했을 거라고 가정하는 것이 좀 무리가 있게 느껴진다.

    물론 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과 상반된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서가 이 약속에 대해 전혀 듣지 못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에서가 이 약속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약속의 방향과 정 반대로 나아가는 에서를 보고 근심하는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34]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35]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창세기 26장 34-35절

    에서의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가 근심만 하고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서는 이 약속을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 오늘날 (*, 카욤) - 직역하면 '오늘처럼'이나 여기서는 '빨리' '우선적으로'를 뜻한다(삼상 2:16; 왕상 1:51).

    󰃨 팔라 (*, 마칼) - '팔다' '양도하다'의 강조 명령형이다. 야곱이 이런 장자권의 소유를 위한 흥정을 하게 된 배경에는 (1) 그가 평소에 장막에 머물때 장자권의 영적 축복을 부모로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반면, 에서는 장자권의 가치에 관해 무지하므로 가능했고 (2) 과거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기는 언행을 자주하는 것을 눈여겨 보아 왔었고 (3) 사전(事前)에 이 문제를 놓고 농담조의 대화가 빈번하여 에서의 경계심이 해이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행위에 있어서 굶주림에 처한 형의 처지를 이용해 장자권을 흥정한 처사는 정당시될 수 없다. 이 사실은 향후 그의 고달픈 인생의 여정이 잘 반증해 준다.


    󰃨 내가 죽게 되었으니(*, 히네 아노키 호레크라모트) - 직역하면 '보라 나는 죽음의 지경에 이르렀으니'이다. 에서의 이 대답에 대한 해석들로서는 에서가 (1) 너무 굶주려 죽어가는 급박한 위경에 도달했다는 것과(Calvin) (2) 사나운 짐승을 쫓음으로 인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말과 (3) 삶의 종국적 결과가 죽음이니 장자권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란 견해 중 에서가 평소 취했던 경박한 태도를 보아 지금 당장 배고파 죽게 되었는데 장자권이 무슨 소용이냐는 식의 현실 지상주의의(Keil) 세째 견해가 타당성이 있다.

    󰃨 무엇이 유익하리요(*, 라마 제) - 직역하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이다. 에서가 한 이 말의 의도는 (1) 지금 아사(餓死) 직전에 있는데 장자권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2) 내가 죽으면 야곱이 대신 장자권을 차지할텐데 장자의 명분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는 순간적 욕망을 추구하는 두 의중이 복합된 듯하다.

    주제2: [사고 판 장자의 명분]

    󰃨 맹세하고 (*, 솨바) - 완전 수인 '일곱'이란 명사에서 유래하여 '일곱번 말하다' 즉 '서약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맹세는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 아래 쌍방간에 맺은 약속을 신실히 이행할 것을 서약하는 성스러운 의식으로서 그 약속한 바에 대한 신뢰성을 높이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출22:11; 민5:19).

    󰃨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 구약 당시 장자권의 상실은 (1) 본절처럼 본인의 의사로 맹세를 통하여 직접 양도할 때 (2)서자가 장자일 경우 합법적인 아내가 그후 아들을 낳아 장자의 명분을 요구할 때(21:10) (3) 아비의 직권으로 다른 아들을 선택할 때(48:22, 대상 26:10) (4) 중죄에 대한 징벌로 박탈당할 때(49:3, 4 ;대상 5:1) 합법적으로 가능했다. 성경 기록과 유사한 풍습이 기록된 아카드어 토판인 누지서판(Nuzi Tablets)에는 한 형제가 상속받은 숲을 다른 형제에게 세 마리의 양을 받고 팔고 있는 상속권 거래에 관한 실례가 소개되어 있다.

    󰃨 떡(*, 레헴) - 어근 '먹다'에서 유래하여 식량, 곡물, 빵 등을 포괄하는 말이나 여기서는 죽과 함께 먹는 빵을 의미한다.

    󰃨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와야칼 와예쉐트 와야캄 와예라크) -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먹었다. 그리고 그가 마셨다. 그리고 그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갔다'. '와우'(*, 그리고) 용법으로 계속 이어지는 본절은 자신의 행동에 관하여 생각할 여지를 두지 않고 일을 해치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목전의 욕심만 채우기에 급급한 육적 사람의 상태를 생생히 묘사했다.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바자)
    - '업신여기다' '경멸하다'는 뜻이다.
    본절에서는 와우 용법으로 앞의 문장인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에 연결됐다.
    어리석은 행위에 대하여 전혀 뉘우치는 빛이 없는 에서의 강퍅한 태도를 보여 준다.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영생을 금단의 열매와 바꾼 이래(3:6)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지정의(知情意)가 마비되어(엡 2:1-3; 4:8) 무분별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히12:16은 에서를 가리켜 '망령된'(*, 베베로스)자라 일컫는데 이는 '속된' 혹은 '불경건한'이란 뜻으로 속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축복의 기회를 하찮게 다루는 자란 뜻이다.






    1월 8일(수) 창세기 21-2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말씀대로(창세기 21:1)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Now the LORD was gracious to Sarah as he had said, and the LORD did for Sarah what he had promised.


    창조를 뜻하는 네 가지 히브리 단어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와 관련하여 한글 성경에서는 모두 창조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히브리어로 쓰여진 원어 성경을 보면 창조라는 단어가 네 가지로 구분되어 상황에 맞게 쓰이고 있다.

    바라 בָּרָא Bara

    자르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곧 이전에 있는 것을 완전히 잘라낸 상태를 의미한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창조행위를 나타낸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

    아사 עָשָׂה Asah

    바라와 비슷하지만 과거에 있던 재료들을 써서 새로운 생명이나 물질을 만들어 내는 느낌을 강조할 때 쓰인다.
    영어 단어로는 'make'와 뜻이 비슷하다.
    넷째 날에 해, 달, 별을 창조하실 때 아사가 쓰였는데, 이들이 첫째 날에 만들어진 빛을 이용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지으실 때도 흙을 이용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사가 쓰였다.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창 1:1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 1:26)

    야차르 יָצַר Yatsar

    토기장이가 흙을 빚어 만드는 느낌을 떠올리면 된다.
    영어 단어로는 'form'과 뜻이 비슷하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몸을 창조하실 때 쓰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 2:7)

    바나 בָּנה Bana

    재료를 이용해서 성을 쌓아가듯 세밀하고 점진적으로 만들어 가는 의미를 강조한다.
    영어 단어로는 'build'와 뜻이 비슷하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를 이용해 하와를 창조하실 때 쓰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인간이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인 이유

    네 가지의 창조의 표현이 모두 쓰인 것은 오직 인간을 창조하실 때 뿐이다.
    바꿔 말하면 그가 만드신 것 중에서 최고로 정성을 들인 걸작품이 바로 나, 너, 우리인 것이다.
    한글 성경으로는 쉽게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정교함과 세밀함을 히브리어 원어들을 통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고영민. 『히브리어·헬라어 원문 번역·주석 성경(구약)』. 쿰란출판사, 2018.


    פָּקַד 스트롱번호 6485

    1. ~에게 가다.   2. 방문하다.  3. 찾으러 가다
    발음 [ pâqad ]
    구약 성경  / 225회 사용


    עָשָׂה 스트롱번호 6213

    1. 노동하다.  2. 만들다.  3. 생산하다
    발음 [ ʽâsâh ]
    구약 성경  /  2627회 사용


    말씀이 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입니까? 말씀이 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0%이어야 합니다. 오늘 내가 왜 살고 있습니까? 말씀이 살라고 하시니 사는 것입니다. 내가 회사에 갑니다. 왜 갑니까? 말씀이 가라하시니 가는 것입니다. 말씀은 빛입니다. 말씀으로 비추지 않은 삶은 어둠이요 거짓이며, 말씀으로 비춘 삶은 진리가 됩니다. 우리의 삶을 말씀으로 비추고 있습니까?

    그 말씀대로에서 그는 지시대명사, 말씀은 명사, 대로는 조사라고 합니다.
    그 말씀은 막연한 내용이 아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에게 하나님이 하셨던 말씀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래에게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내년 이 때쯤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셨을 때 사래는 그 말씀을 듣고 헛웃음을 웃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래는 이미 경수가  멈추었고 남편 아브람은 나이가 많아 노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래는 자기의 몸 상태와 남편 아브람의 몸 상태가 어떤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년에 아들을 얻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에게는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엘 샤다니)"고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고, 말씀을 따라 사는 아브라함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말씀이 드디어 21장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더욱더 말씀에 따라 삽니다.
    말씀이 이루어지고, 말씀의 열매를 맺는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우리도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며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말씀대로 

    객관적 사실(Objective facts)과 주관적 사실(subjective facts)
    절대적 사실(
    Absolute facts)

    객관적 사실은 사래는 아들을 낳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객관적 사실을 믿고 따라갑니다.
    그러나 신앙은 특히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은 객관적 사실보다는 절대적 진리를 신뢰합니다.

    가장 쉬운 예가 처녀 마리아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객관적 사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절대적 진리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1절에는 “말씀대로”라는 구절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1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역사하셔서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객관적인 상황으로 볼 때 사라는 아들을 낳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말씀하신 대로 사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됩니다.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보편적 진리(Universal Truth)와 창조적 진리(Creative Truth)
    - 보편의 반대어는 특수라고 합니다.


    세상은 보편적 진리에 의해서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그러나 세상보다 더 크고 광대한 우주적 진리(Cosmic Truth)는 세상의 진리를 능가합니다.
    우주적 진리를 다른 말로 창조적 진리라고 합니다.

    어떻게 경수가 끊긴 사래가 아들을 낳을 수 있습니까?
    기력을 잃어버린 아브람이 어떻게 아들의 씨를 아내 사래에게 줄 수 있습니까?
    이러한 진리는 보편적 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주적 진리 창조적 진리는 아파르와 같은 흙먼지에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너무 쉬운 일입니다.
    신앙이란 보편적 진리의 틀에 갇혀 있으면서도 창조적 진리를 확신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믿습니까?
    문제는 나에게 그 말씀이 들려졌는가?
    아니면 내게 그 말씀이 주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을 읽으세요!
    그리고 읽던 말씀 중에서 이 말씀을 나를 위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기도하세요!
    주님, 이 말씀은 곧 나를 위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주여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일시적인 것(temporary)과 영원한 것(eternal)

    세상의 가르침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영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진리는 시대에 따라 그 가치와 본질이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참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철학의 명제는 희랍의 철학의 아버지가 만물의 아르케는 "물" 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헬라 철학자들은 "물" 아니라 "불" 또는 "공기" 이렇게 주장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르침은 언제 바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살아서 승천한 에녹과 엘리야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주으셨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어떤 학문에서도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리를 계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대로 라는 교훈은 절대적 사실, 창조적 진리, 영원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분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그 마음속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들을 얻었다는 기쁨보다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더욱더 크게 놀라며 기뻐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우리는 모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깊이 깨달아야합니다. 말씀 하나가 이루어지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면 나머지 모든 말씀도 그래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말씀을 믿습니다.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합니다. 순종할 때 말씀의 복이 임합니다. 말씀대로 복을 얻는 사람은 말씀에 순종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하신 복이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말씀이 나의 생각과 기분에 맞고 나에게 유익할 때는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 쉽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나의 생각과 기분에 맞지 않고 나의 유익에 상치된다고 여겨질 때는 어렵습니다. 순종이라는 것은 그렇게 맞지 않을 때 순종해야 순종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이 젖을 뗀 날 잔치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삭이 3살쯤 되어 젖을 떼던 날 이삭의 어머니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데리고 희롱하며 장난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그를 집에서 쫒아낼 것을 요구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매우 고민을 합니다. 이스마엘도 엄연히 그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 사라의 말대로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마엘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을 하시며 보내라 하셨지만 그래도 아브라함의 마음이 이스마엘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에 순종하여 이스마엘을 즉시 보냅니다. 말씀을 믿는다면 어떻게 할까요? 말씀을 더 알기 위해 노력하고,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보기에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무엇이든지 이루어지기 전에는 별 볼일 없어 보입니다) 말씀을 믿기에 그것을 중요하게 여겨 마음속으로 깊이 사랑하고, 말씀이라 하면 무조건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믿는 사람은 말씀대로 복을 받을 것입니다. 살다보면 근심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근심의 일이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아니라 그 때 말씀대로 하였느냐 그렇지 못하였느냐 입니다. 자신을 돌아볼 때 무엇을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말씀을 이루었느냐를 보십시오. 말씀대로 살고 있다면 그럼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라도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기준이 되고 중요합니다.

    말씀을 믿기에 더 알고자 노력하고 있고, 순종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까?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화가 임하고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는 오늘 더욱더 말씀을 알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지금 당장 내가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할지를 잘 판단해야합니다. 무엇보다 매일 말씀을 읽으십시오. 묵상하십시오. 순종하십시오.   

    말씀의 열매

    나의 뜻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고 말씀의 열매를 맺으십시오.
    그것이 믿음의 결정체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은 후 더욱더 지속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아비멜렉 왕이 아브라함에게 와서 군사동맹을 맺기를 청합니다. 전에는 아비멜렉이 강자였습니다. 지금도 강자입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보면서 아브라함이 이후에 강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약정 맺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22절)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았기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가 하는 모든 것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크고 분명하여 믿음이 없는 아비멜렉도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을 실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말씀의 열매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성경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오늘을 사는 우리 삶 안에서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말씀도 그냥 헛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말씀을 들을 때 그 어떤 것도 허튼 것으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내 안에서 자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자라서 큰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자라서 큰 나무가 되듯이 말씀이 우리 안에 떨어져 자라 나무가 됩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다른 사람이 먹고 그들이 행복하고 건강해집니다. 말씀의 씨앗이 우리 안에 떨어져 죽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러려면 기도와 묵상을 잘해야 합니다. 들은 말씀, 깨달은 말씀을 묵상해야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자라고 열매를 맺게 해야 합니다. 말씀을 많이 들으십시오. 농부가 씨앗을 뿌릴 때도 많은 씨앗을 뿌립니다. 그래야 때로는 어떤 것은 죽어도 어떤 것은 살아나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말씀의 실현을 위해 존재합니다. 인생은 말씀 실현의 자리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삶은 구체적으로 말씀의 어떤 것을 실현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삶이 얼마나 많이 말씀이 실현될 수 있는 현장이며, 우리가 얼마나 많이 말씀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한참 조개를 캐러 다녔던 적이 있습니다. 바다에서 호미로 갯벌을 긁으면 조개가 나오는 것이 신기하고 좋았습니다. 작은 수고로 그렇게 조개를 얻을 수 있으니 기뻤습니다. 저는 조개를 먹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조개를 얻는다는 것이 마냥 좋았습니다. 그렇게 열매를 얻어야 행복합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우리의 삶속에서 열매로 맺어지는 것을 볼 때 행복합니다. 삶을 말씀으로 긁으면 말씀의 열매라는 열매를 얻습니다. 말씀의 열매는 말씀을 더 깨닫게 되고, 말씀이 더 깊어지고, 말씀이 이루어지며, 말씀에 감사하고, 말씀이 힘이 되고, 말씀이 위로가 되며, 말씀이 빛이 되는 것 등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말씀의 열매를 얻으십시오. 그러면 행복해집니다. 삶이 행복해집니다. 말씀 읽기가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이 행복이 될 때 그 사람의 삶은 말씀의 열매가 가득한 복된 삶이 됩니다. 세상 속에는 말씀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습니다. 그것을 따십시오.

    말씀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다른 열매는 필요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말씀이 실현되어 열매를 맺을 때 그것이 진정한 열매입니다. 그것이 천국까지 이어지는 열매입니다. 말씀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구체적으로 내 삶에서 말씀의 어떤 것을 더 깨닫고 실현하는지 그것을 아는 삶이 되십시오. 어느 한 날 특별히 은혜를 발견하는 것을 배우고, 은혜를 더 발견하는 열매를 맺었으면 또한 그 다음날은 은혜 위에 은혜를 발견하는 그 위에 더 추가적으로 무엇을 배우고 열매를 맺을지 기대되는 삶을 사십시오.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세상 모든 것이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 땅을 살고 있는 우리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진실로 믿으며 그 말씀대로 살아야합니다. 말씀대로 살면 말씀대로 복을 받습니다. 말씀은 신실하신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필연코 이루어집니다. 커다랗게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기에  오늘 말씀대로 사십시오.

    말씀의 열매를 맺으십시오. 지금 세상은 별의별 말들이 많고,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말씀을 깨달으며, 말씀을 실현하는 일에 마음을 쏟으십시오. 구체적으로 매일매일 말씀의 열매를 맺으십시오. 살다가 말씀이 생각나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그것이 복입니다. 말씀이 생각나면 화내지 못하고 인내하여야 하기에 손해인 것 같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이 힘든 것이기에 괜히 손해 보는 것 같으나 실상은 그것이 가장 복입니다. 말씀을 알기 위해 씨름하고, 말씀을 지키기 위해 씨름하는 것이 복입니다. 말씀이 내 손에서, 머리에서, 내 가슴에서 떠나지 않게 하십시오.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여 말씀의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할 때는 성령의 예리한 바늘로 온 몸과 마음을 찔러 깨닫게 하옵소서
    이전 보다 더 주님 사랑하는 일에 열중하게 하시고 흔들림이 없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더구나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율법서를 읽을 때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타나면 그 단어를 발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회중들은 침묵하는 그 순간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율법서에서 나타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만큼 하나님의 명칭을 거룩하고 존중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말씀으로 인식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언약의 하나님" 또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그 말씀대로"라고 하겠습니다.
    첫번째 그 말씀대로에서 말씀은 "아마르"라는 히브리 단어를 사용합니다.
    두번째 그 말씀대로에서 말씀은 "다바르"라는 히브리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 말씀대로"라는 신앙은 주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처녀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게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씀이며 또한 당시 풍속에 의하면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위태로운 사건입니다.
    어떻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마리아는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눅 1:38).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인물이었습니다.
    어느 날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니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을 때 요셉과 마리아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려고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때 시므온은 그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눅 2:29).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지금 나에게 닥쳐온 고통과 시련이 있습니까?
    그 고통과 시련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이 고통과 시련을 통하여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간구하며 성경에서 답을 얻기까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내게 약속된 말씀을 집중적으로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어느 순간 그 말씀이 나로 하여금 내 안에 참된 평안을 회복하고 그 평안에 따라 말씀이 성취되는 과정을 겪으며 마리아처럼 시므온처럼 믿음의 선진들이 누렸던 그 은혜와 복을 직접 경험하고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었구나!
    이것이 나를 향한 주님의 계획이었구나!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렇게 간구하며 믿음으로 고난과 시련과 역경을 넘어서는 그 날을 기다려 봅시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그 말씀(아마르. 559)

    אָמַר 스트롱번호559

    1. 말하다.  2. 소명하다. 3. 권고하다
    발음 [ ’âmar ]
    구약 성경  /  5298회 사용



    그 말씀(다바르. 1696)

    דָּבַר 스트롱번호1696

    1. 정돈하다.  2. 안내하다. 3. 뒤따르다
    발음 [ dâbar ]
    구약 성경  / 1137회 사용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 여기서 '그 말씀'이란 일전에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셨던 언약(17:19-22; 18:9-15)을 가리킨다.
    이제 예고하셨던 기간이 이르자(2절) 그 언약을 말씀대로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성을 증거해 준다.

    권고하셨고(*, 파카드)
    - 문자적인 뜻은 '방문하다'. 이 말은 종종 특별한 인물에 대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혹은 호의의 행동을 가리키기도 하고(50:24; 롯 1:6; 삼상 2:21), 반대로 심판의 행위(사 24:21; 렘 9:25; 호 12:2)를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전자의 의미로 사용되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잊지 않고 사라를 돌보신 것을 뜻한다.

    행하셨으므로
    - 사라가 잉태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히 배후에서 역사하신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생명의 잉태와 죽음 등과 같은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테(사 44:2) 특히 90세에 이르는 사라가 단산(斷産)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같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히 11:11).


    그 말씀대로 라는 말씀에서 "대로"라는 단어를 문법에서는 "조사"라고 합니다.
    조사를 우리말로 설명하면 "토씨"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말씀대로, 믿음대로, 행하는대로......
    영어로 번역하면 어코딩 투(according to)라고 하겠지요.

    "...대로"라고 하면 앞에 있는 단어가 기준이 되는 것이고, 영어로는 국어와 순서가 반대로 ’according to‘라고 하면 뒤에 나오는 단어가 기준이 됩니다. 그러니까 '...대로‘는 기준을 나타내는 조사입니다.
     
    신앙생활의 기준은 성경입니다.
    성경 기준에 맞추어 신앙생활을 하면 잘하는 것이고, 이 성경 기준에 맞추지 않고 자기 멋대로 신앙생활을 하면 못하는 겁니다.
     

    그 말씀대로
    창세기 21장 1절을 여러 번역으로 살펴봅니다.


    개역개정,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새번역,1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다. 사라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님께서 그대로 이루시니,

    우리말성경,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아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사라에게 이뤄 주셔서 

    가톨릭성경,1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라에게 해 주시니,



    1. ‘믿음대로’입니다.

    특히 신약성경에 보면 ‘믿음대로’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 ‘믿음대로’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 믿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행함대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거 아닙니다. ‘믿음대로’입니다. 그리고 병 고침을 받을 때도 ‘믿음대로’라는 법칙이 적용됩니다.

    로마의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와 고백합니다.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마8:8) 이에 대해 예수님이 그를 크게 칭찬하시면서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8:10)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느니라.“(마8:13) 아멘! 여러분들도 백부장처럼 믿음의 고백을 하시므로 그 믿음대로 병이 낫는 기적이 반드시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다른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실 때에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9:27) 예수님이 그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주여, 그러하오이다.”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의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마9:29-30) 아멘!

    즉 병 고침을 받는 방법은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나의 병이 나았다(사53:5)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야고보도 언급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약5:15) 혹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을 믿고 병을 고치는 것을 미신이라고 하며, 혹은 그런 일은 예수님 시대 때나 일어난 것이고 오늘날에는 안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렇게 말하는 신학자도 자기 자녀가 몹시 아파서 다 죽어갈 상황이 되면 “하나님, 우리 아들 좀 제발 고쳐주세요.” 하고 아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니 왜요? 그렇게 병 고치는 기적은 오늘날에는 안 일어난다면서요. 그건 미신이라면서요.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성경은 오늘날에도 믿는 자에게는 병 고침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 병 고침의 기적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16:17-18) 아멘!

    2. ‘행함대로’입니다.

    이전부터 많은 목사님들이 외치는 아주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구원은 믿음대로, 축복은 행함대로”입니다.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받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주시는 선물 즉 은혜입니다. 그러나 더 큰 축복과 상급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땅에 있을 때에 주님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즉 행한대로, 수고한대로, 헌신한대로, 노력한대로, 일한대로, 심은대로, 뿌린대로 보답해 주시겠다는 것도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사상입니다. 로마서 2:6-8에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또한 예수님도 말씀합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마16: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주리라.”(계22:12) 세상 격언들 중에도 이와 똑같은 의미의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즉 자기가 심은대로, 뿌린대로, 행한대로 그 열매를 자기가 먹게 된다는 겁니다. 이에 대한 성경 말씀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여러분, 우리가 여기 캐나다 캘거리에 와서 종종 밤중에나 혹은 새벽에 무심코 하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탄성이 저절로 나옵니다. “와- 여기 하늘엔 별들이 참 많이 있구나!“ 캐나다 땅에 와서 누리는 축복의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한국처럼 미세먼지와 황사 혹은 공해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늘도 참 맑습니다.

    이곳 캐나다 땅에 와서 이렇게 하늘의 별들을 보고 산다는 것이 건강은 물론이고, 낭만스럽기도 하고, 내가 캐나다에 와서 산다는 것에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특권을 받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고로 밤중에 혹은 새벽에 종종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시면서 그 특권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거 압니까? 별도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이 있고,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태양은 스스로 빛을 내는 별입니다. 이를 가리켜 ‘항성’이라고 합니다. 반면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별들이 많습니다. 태양계를 중심으로 일정하게 움직이는 ‘수금지화 목토천해’ 즉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은 ‘행성’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단지 태양빛을 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어느 별의 주위를 맴도는 별을 가리켜 ‘위성’이라고 하는데, 지구를 맴도는 달도 지구의 위성입니다. 또한 인공적으로 로켓을 쏘아 올려 지구 주위를 돌면서 각종 자료를 보내는 것을 가리켜 ‘인공위성’이라고 합니다. 지구의 위성인 달도 우리 눈에는 밝게 보이지만 사실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태양 빛을 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소행성이나 혜성과 같은 다른 별들도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별들입니다. 이에 대해 혹 어떤 분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니, 별이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면 그거 이상하다. 너 진짜 별이 맞아?” 그래서 어떤 분은 우스갯소리로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별을 가짜별이라고 하고,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을 진짜 별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12:3) 즉 저와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행한대로 하늘에서 차별적으로 갚아주겠다는 겁니다. 같이 예수님을 믿어도 옳은 일, 바른 일, 선한 일을 많이 한 사람, 특히 전도를 많이 한 사람은 영원토록 찬란하게 빛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은 받았지만 이 땅에 있을 때 하나님 속을 지지리 썩인 사람은 그날에 반딧불처럼 잠시 반짝하고 금방 사라지는 것처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순복음 교회의 특징은 예수님을 아주 열심히 믿는다는 겁니다. 제가 처음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집이 이사를 해서 순복음 교회에 가니까 아- 이것들이 얼마나 미친 듯이 열심히 믿는지 저와 저의 어머니가 크게 쇼크를 받았습니다.

    장로교에 있을 때에는 저의 어머니가 여전도회 전도부장이었고, 제가 청년회 전도부장으로 가장 전도를 잘했습니다. 그런데 아- 순복음 교회에 오니까 저와 저의 어머니가 등수에도 못 드는 겁니다. 그래서 “이거 안 되겠다. 더 열심히 전도하자.” 하고 미친듯이 전도에 애를 쓰다 보니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왜요? 아- 하나님이 행한대로 갚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곳 우리 캘거리 순복음 중앙교회에 오신 여러분들 한분 한 분이 하나님을 열심히 믿을 뿐만 아니라, 기왕이면 바른 일, 옳은 일, 착한 일, 주의 일, 특히 전도의 일, 영혼 살리는 일에 보다 열심히 하므로 그 행한대로 더 큰 축복과 상급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말씀대로‘입니다.

    작년(2023년) 10월 7일에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여 1200명을 살해하고, 251명의 인질을 잡아갔습니다. 그때 제가 수요예배 때에 이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해 예언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때에 전한 말씀은 하마스가 완전히 박살이 나고, 이스라엘 위에 있는 헤즈볼라를 비롯해 이스라엘 주변의 적들이 박살이 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말씀처럼 지금 그대로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예언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은 뭐- 제가 특별히 하나님께 예언의 능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이에 대해 성경에 기록이 되었기 때문에 그 기록된 성경 말씀을 그대로 전해준 것뿐입니다.

    에스겔 38:8에 보면 말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약속한 땅에 다시 돌아와 그 땅에서 평안히 거하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38:11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도 없고 문이나 빗장이 없어도 염려 없이 다 평안히 거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에스겔 38:14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평안히 거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이스라엘 상황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밑에는 하마스가 있고, 위에는 헤즈볼라가 있어서 툭하면 미사일이나 로켓이나 드론이 날아옵니다. 도저히 평안하지 않습니다. 잠도 제대로 평안히 잘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예언대로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평안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래에 있는 하마스나, 위에 있는 헤즈볼라나 그 어떤 세력들도 이스라엘을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적들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무너져야만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 여러 번 기록이 되었기에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기록한대로, 작정한대로 되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이 밖에 말세에 대한 성경의 예언이 참 많습니다. 옛날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됩니다. 그 옛날 노아 시대에 죄악이 관영하자 홍수가 갑자기 들이닥쳐서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물로 멸망을 당했듯이, 앞으로의 세상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불로써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우리들은 심판 전에, 환난 전에 예수님의 공중 재림과 함께 부활이 되고, 공중으로 휴거가 되어 예수님과 더불어 하늘나라에 가서 예수님과 같이 24보좌에 앉아 세상을 같이 심판하고, 7년 동안 혼인잔치를 하게 됩니다. 이런 예언들은 어느 용하고 신령한 점쟁이의 말이 아닙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그대로 됩니다. 그리고 말세에는 인간들의 성적 타락이 극도로 심해지고, 특히 동성애가 만연하는 롯의 때와 소돔과 고모라의 때가 오며, 사람들의 인성이 매우 안 좋게 변하므로 심히 고통 하는 때가 온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딤후3:1-5)

    결론입니다. 여러분, 요즘 살기가 좀 어떻습니까? 많은 분들이 아- 살기가 참 힘들다고 합니다. 특히 사람 간의 관계가 아주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요? 성경은 말세로 가면 갈수록 더욱 살기가 힘든 고통의 세상이 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로 이 고통 하는 때에 사는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위로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 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도저히 살기가 힘들어지는 세상이 옵니다. 그리고 말세가 되면 마귀와 귀신들이 자신들의 심판 날이 가까워지므로 인간들을 더욱 괴롭히려고 합니다. 고로 우리는 마귀를 이기고 귀신들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철저히 무장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과 병 고침을 받으시고, 바른 행함으로 말미암아 축복과 상급도 많이 받으시고, 말씀대로 되는 이 말세의 고통의 시기를 하나님의 도움으로 잘 극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행복하시고, 더욱 더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성경의 기준인 “믿음대로, 행함대로, 말씀대로”의 법칙을 배웠습니다. 이 법칙을 잘 실천하고 적용하므로 약속한 하나님의 구원과 병 고침과, 축복과 상급을 확실히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기록된 말씀대로 되는 이 말세의 고통의 세상을 바라보며 더욱 깨어 기도하며, 한 영혼이라도 더 전도할 수 있도록 계속 힘을 쓰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의 말씀대로 삽시다(시 119:25-32)

    그리스도인의 가장 아름다운 삶은 어떤 삶일까요?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일까요?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제일 아름답고 존귀한 삶은, 주의 말씀대로 사는 삶일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나, 또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가 주의 말씀대로 산 사람들입니다. 물론 주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무척 어렵습니다.

    주의 말씀은 어떤 경우에는 꿀처럼 달콤하지만, 또 쓴 뿌리처럼 쓸 때도 있고, 비단결처럼 부드럽게 우리를 감싸고 어루만져 줄 때도 있지만, 비수처럼 날카롭게 우리를 찌르고, 우리 가슴을 후벼 댈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1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신앙은 병든 신앙일 뿐만 아니라, 그 병을 고칠 수도 없습니다. 또 성경을 많이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그러나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오늘 주시는 이 말씀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가끔 설교를 하다보면, 열심히 설교를 들으면서도, 곁에 있는 사람의 표정을 살피는 분이 있습니다. 그 설교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곁에 있는 사람이, 듣고, 깨닫고, 회개했으면 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는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언제든지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이 말씀은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라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하는 말씀이다. 다른 사람이 은혜 받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듣고 깨달아야 한다” 혹시 이러한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면, 모두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나는 지금 은혜 받아야 한다. 나는 지금 축복받아야 한다”

    이런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고, 복 주실 줄 믿습니다.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마트 시식코너에서, 지나가면서, 음식 하나 집어 맛보듯이, 말씀을 대충 맛보지 말고, 하나하나 직접 요리하여 먹고 소화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맛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한 자리에 앉아 입에 넣고 씹으면서, 소화를 잘 해야,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고, 성장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주의 말씀대로 살았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풍성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12: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만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가서 살아야 할 땅에 대하여도 정확하게 그 위치를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여기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까? 여기 있으면 복 안 주십니까? 꼭 떠나야만 복 주실 것입니까? 아버지랑 함께 가면 안됩니까? 아버지가 함께 가야지 가겠습니다. 아니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때 떠나면 안되겠습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왜 떠나야 하는지, 정확한 장소가 어디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떠나라는 말을 듣고, 정든 고향을 그대로 떠났습니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떠나라는 말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2:2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준 모리아 땅으로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따랐습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럴싸한 핑계를 대고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불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왜 아들을 바쳐야 합니까? 건강한 소 열 마리 정도 바치면 안됩니까? 잘 생긴 종 바치면 안됩니까? 다른 것 바치라고 하면 쉽게 바치겠는데, 밤새도록 생각해 보았지만, 이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엄마인 사라 생각도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바치고 싶어도 엄마인 사라가 바치지 말라고 하면 어쩔 도리가 없네요. 내 마음 아시지요.”

    아브라함은 따지지 않았습니다. 쉽게 따를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주의 말씀대로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그가 받은 축복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었고, 그 후손이 번영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되었으며, 세계 민족 구원의 은총을 받았고,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친한 친구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비록 가난했지만, 항상 가정이 화목했고, 또 한 사람은 생활은 넉넉했으나, 늘 가정이 화목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늘 가정 불화로 속이 상하던 사람이, 친구에게 가정 화목의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집에 가서 가르쳐 주겠다”며, 그 친구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두 사람이 그 집에 도착하자, 아들, 며느리, 손자 모두 나와서 인사를 하는가 하면, 밥상을 차려 오는 것이었습니다.

    식사가 끝난 후 아버지가 아들 내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얘야, 마당에 있는 송아지를 지붕 위로 올려라”고 하자, 온 가족이 총동원하여 사다리를 걸치고, 지붕 위로 올라가 멍석을 펴더니, 송아지를 끌어올렸습니다.

    아버지가 “다시 끌어내려라”고 하자, 온 가족은 다시 달라 붙어, 지붕에 올려 놓은 송아지를 끌어내렸습니다.

    그 수고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만, 어느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시 아버지가 “얘야, 엊그제 사온 소금 가마 있지 않느냐? 그것을 내어다가 냇가에 담가라”고 하자, 그 아들은 그 자리에서 지게에 지고, 냇가로 나가 담그고 돌아왔습니다.

    그런 후에 그 친구는 “이것이 우리 집에 화목한 비결일세”라고 말했습니다.

    따라갔던 친구가, 그 정도라면 자기 자식들도 해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 친구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기침을 하고 들어서도, 어느 누구 하나 나와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녁 상을 억지고 차리게 해서, 먹고 난후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 “얘야, 마당에 있는 송아지를 지붕 위로 올려라”고 말하자, 온 식구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아직 노망들 나이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면서 삿대질을 해대는 것이었습니다.

    기가 꺾인 아버지가, 그러면 그보다는 좀 쉬운 것을 해보라며 “엊그제 사 온 소금을 강에 내다 담가라”고 하자, “김장 소금으로 사 온 것을 미쳤다고 버리느냐, 소금 한 가마는 흙 퍼 주고 사는 줄 아느냐”면서 정신이 돌았다고, 마구 다그쳤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옛 이야기 속에서 행복과 불행의 기준과 성공과 실패의 비결이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부모 말씀대로 순종하는 집안은 잘되는 집안입니다.
    어른 말씀을 존중하고 따르는 가문은 행복한 가문입니다.

    라디오의 다이얼이 맞지 않을 때, 잡음이 나고, 맞을 때 제 소리가 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다이얼을 정확하게 맞추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행복한 교회가 되고, 아름다움 신앙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은 사울왕입니다. 처음으로 왕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였습니다. 보통 왕이 죽으면 그 아들이 자연스럽게 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처음으로 사울을 왕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아무렇게나 뽑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서, 사울을 왕으로 뽑으셨을 것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까? 말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최고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그런데 왜 그 큰 사랑과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왕은 버림을 받게 되었을까요? 왜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게 되었을까요? 신중하게 고르고 골랐던 사울을 왜 하나님은 버리셔야만 했을까요?

    사무엘상 15:23절을 보면,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사울왕을 버린 이유를 말씀해 주시는데, 사울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시고, 그의 아들도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이, 복의 근원입니다. 받은 복을 계속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 때,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신명기 10:13절을 보면,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을 버리지 마시고, 언제나 주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주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책망하고, 우리를 억압하고자,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의 말씀대로 살면, 어떤 행복을 우리에게 주실까요?

    첫째, 주의 말씀대로 살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25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아멘.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며칠간 먹지 못해, 배가 고프다 못해, 배 가죽이 달라 붙어 있는 사람이 뭔가 먹고 난 다음에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제 좀 살 것 같다”는 말이 아닙니까?

    한 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장시간 일을 하다보면, 목이 마르고, 더 나아가 목이 타지 않습니까? 그때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시게 되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제 좀 살 것 같다”는 말이 아닙니까?

    히브리서 4:1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죽은 책이 아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활력이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수없이 많은 책들이 발행되어 왔지만, 대부분은 나왔다가 사라졌고, 알려지지 않고, 죽은 책들도 있습니다. 살아서 활력이 있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의 말씀이 아닙니다. 죽은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았던 성경의 위대한 사람들만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다시 태어났습니다.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거듭났습니다. 육적인 삶밖에 몰랐던 사람들이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23절 말씀에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변화 받는 것도 모두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27살이 되었을 때, 신경쇠약증에 걸렸습니다. 그는 더 이상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어, 정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낙담과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그의 병은 오히려 더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정신병으로 죽을 것을 생각하자, 겁이 났습니다.

    그는 자신을 도와 줄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며,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읽어나가다가 요한복음 11:25-26절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는 말씀을 읽고, 호흡을 하듯, 약을 먹듯, 그 말씀을 복창하며 외웠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서 정신병에서 서서히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회고하기를 “내가 성경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완전히 미치광이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의 자신의 정신병에 대한 고통을 책으로 써서,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과 죄악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현대의학이 치료할 수 없는 질병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귀신이 쫓겨갔습니다. 육체가 살아 났을 뿐만 아니라 영혼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한 놀라운 역사는 과거에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방송에서 간증하는 것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음 문턱에서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모든 질병을 치유받고, 건강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실패하고 다시 일어설 수 없었는데,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수없이 많습니다.

    여러분!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믿고 순종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해가 되기 때문에 믿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믿고 순종하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의 말씀대로 살면 어떤 행복을 우리에게 주실까요?

    둘째, 주의 말씀대로 살면,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28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아멘.

    “나를 세우소서”

    “세운다”는 말은, “뿌리를 깊게 한다. 든든하게 한다. 흔들리지 않게 한다. 일하게 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이 되려면, 주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 다니다가 시험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5-6절을 보면,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다”고 했습니다.

    밭에 씨앗을 뿌리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싹이 나오기는 나왔지만, 해가 돋은 후에는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라 버렸다고 했습니다.

    왜 씨앗이 타 버리고 말았습니까? 뿌리가 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 다니다가 시험에 듭니까? 말씀에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단이 어떻게 접근합니까? 최근에 어떤 교회에서 편지 한 장이 왔습니다. 그 교회를 다녔던 여자 집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신천지에 빠져서 도저히 회복불능 상태여서, 그 교회에서 “출교 정지”를 시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법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벌이 무엇인줄 압니까? 출교정지입니다. 교회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습니다. 즉 예수 믿고 하늘나라에 갑니다. 그러데 교회 나오지 말라는 소리는 무엇입니까? 예수 믿을 필요 없이 하늘나라 말고 다른 데 가라는 소리입니다. 한 마디로 지옥가라는 소리입니다. 도저히 예수님께 돌아올 가망이 없을 때, 큰 죄를 지어 회복불가능하다고 판단할 때, 출교정지를 시킵니다. 이러한 법이 교회법에 분명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교회에서 이 법을 시행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교회에 나오지 말고, 차라리 지옥이나 가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교회에서 출교정지를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교회에 가서는 그 교회 집사라고 하면서, 신천지 성경공부하러 가자고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여자를 조심하라고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여러분! 대부분 이단들이 성경공부 하는 대로 데리고 갑니다. 여호와의 증인들도 성경 말씀 가르쳐 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보여 주면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이상한 책 가지고 오지 않습니다. 성경책 들고 와서, 성경책 펴 보여주고, 성경책에 기록된 말씀 찾아가면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뿌리가 깊게 내려 있지 않으면, 무너지고 맙니다. 이단에 빠지고 맙니다.

    여러분! 성경공부는 어떠한 경우라 하더라도 본 교회에서 하여야 합니다. 다른 데 가서 성경공부 하자고 누군가 말한다면, 절대로 따라가지 마십시오. 혹시 그런 사람이 주위에 있으면, 즉시 신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세워 줍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사람이 사람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세워 주는 그 사람도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은 나를 세워 줍니다. 주의 말씀은 나를 사람답게 세워 주고, 나를 성도답게 세워 주고, 나를 주의 종답게 세워 줍니다.

    베드로전서 5:10절을 보면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 80%가 요통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허리가 아파서 길게 고생을 했든지, 아니면 잠깐 동안 아팠든지간에, 요통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통의 원인 중 60%가, 본인의 자세 때문이라고 합니다. 평상시 본인이 취하는 자세 때문에, 요통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방바닥이나 의자에 앉을 때, 정좌하지 않고, 비뚤어진 자세로 앉는다든지, 다리를 꼬고 앉는다든지, 옆으로 비스듬히 앉는 따위의 자세가, 반복되고 습관화되면서, 요통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의학 상식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영적인 자세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앙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말씀을 듣는 마음의 자세라든지, 말씀을 먹는 영적인 자세가 비뚤어져 있으면, 요통환자가 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사모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은혜를 갈급해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어디 앞뒤가 안맞는 곳은 없나, 의심의 눈초리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비판의 눈초리로 뚫어지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비뚤어진 마음을 가지고 들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 있습니까? 말씀은 하나님께서 내게 들려주시는 음성입니다. 말씀을 대할 때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모하는 마음,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깨닫고, 놀라운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어린이들이 있는 집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머니가 정성껏 마련한 밥상 앞에 앉아서, 반찬 투정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밥 먹어가면서 꾸중 들을 것은 뻔한 이치 아닙니까? “그래 맛 없으면 먹지 마. 밥 먹지마” 엄마의 화난 목소리만 더욱 커질 것입니다. 그러나 반찬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 없이 잘 먹어 주면, 얼마나 고맙습니까? 맛있게 차려 주었는데, 반찬 투정하면, 성질 좋은 엄마라도, 나중에는 잘 안 차려 줍니다. “너가 알아서 차려 먹어”

    그러나 없는 반찬에도 잘 먹어 주면, 부모는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될 수 있으면, 더 잘 차려 주려고 하지 않습니까? “뭐 해 줄까? 뭐 먹을래. 말해. 다 해 줄께”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더하거나 빼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더하거나 뺄 계획도 없습니다. 2천년전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던 말씀 그대로 우리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들었던 말씀 그대로 우리도 듣고 있습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병든 사람일수록 잘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빨리 회복할 수 있습니다.
    먹지 않고 계속 음식 투정만 한다면, 병은 더욱더 깊어만 갈 뿐입니다.
    잘 먹어야 합니다. 음식을 잘 먹어야 육체적으로 건강할 수 있는 것처럼, 말씀도 잘 먹어야 영적 건강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밥은 밥상에 차려 놓을 수는 있습니다. 병든 사람에게는 억지로 먹여 줄 수도 있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억지로 먹일 수는 없습니다. 먹는 것은 각자 개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 강제로 먹일 수도 없고, 내가 대신 먹어 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억지로 먹여 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 것은, 각자 개인이 할 일입니다. 밥상은 차려져 있습니다. 먹고 건강한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먹지 않고 병든 삶을 살 것인가는, 밥상 앞에 앉은 각자 개인이 할 일입니다. 열심히 먹으면 있던 병도 사라지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으면, 은혜를 받게 되고, 날 향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깨닫게 되고, 날마다 믿음이 잘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흔들리거나 요동함이 없이 바르게 세워지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말씀으로 찾아오시며 다가오시는 하나님 아버지!
    갈급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된 길을 걸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월 7일(화) 창세기 18-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브라함을 생각하사(창 19: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So when God destroyed the cities of the plain, he remembered Abraham, and he brought Lot out of the catastrophe that overthrew the cities where Lot had lived.

    아브라함을 생각하사(he remembered Abraham)
    하나님이 롯이 거주하는 성을 불로 심판하실 때 아브람의 조카 롯을 그 성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그 이유를 아브라함을 생각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교회라는 헬라단어 "에클레시아(ĕkklēsia)"를 기억하십니까?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전치사 "에크(ἐκ)"와 동사 "칼레오(καλέω)"가 합성하여 만든 아주 특별한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에크'라는 전치사는 "밖으로" 라는 뜻이며, '칼레오'라는 동사는 "불러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교회(에클레시아)"는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죄악으로 인하여 불의 심판을 받아야 할 때에 아브라함은 그의 조자를 그곳에서 불러내는 일을 감당하였기 때문에 교회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사명은 죄 가운데 머물던 인생을 죄 밖으로 불러내는 곳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파크리스교회의 시대적 사명은 "불낙지교회"로 발돋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불신자(不信者)들을 찾아내어 믿음의 영역으로 불러내야 합니다.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이 세상에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불신자(고린도전서 10:27. 디모데전서 5:8)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둘째는 낙심자(落心者)들을 찾아내어 희망의 영역으로 불러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또는 교인들과 직분자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곧 낙심자라고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3: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데살로니가후서 3: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히브리서 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셋째는 지체(遲滯)하는 사람을 찾아내어 결단의 영역으로 불러내야 합니다.

    지체라는 한문자는 "더딜 지(遲)" 와 "막힐 체(滯)"라는 문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황하는 인생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지체자(遲滯者)"라고 하겠습니다.

    창세기 19:16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세상에서 소망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곧 지체하고 있는 인생입니다.

    대분의 교회들은 지방에서 도시로 이동한 교인들에 의해서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때로는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이동한 교인들에 의해서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바람직한 교회는 불신자들과 낙심자들과 지체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을 복음의 자리로 은혜의 자리로 진리의 자리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매우 중요한 믿음의 사명을 갖고 모였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힘을 모아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조카 롯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자에게 요청하기를 만일 그곳에 의로운 사람 오십 명이 있다면, 45명이 있으면, 40명이 있으면, 30명, 20명, 10명으로 그 수를 줄여가며 조카를 위하여 몸부림을 쳤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하여 롯을 그 성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파트리스교회 성도들도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아 불신자와 낙심자와 지체하는 사람을 찾아내어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은혜의 2025년이 되기를 함께 기도하며 영혼 구원을 위한 일에 기꺼이 참여하셔서 하늘의 위로와 땅의 보람을 함께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온 세상 위하여



    ἐκκλη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1577

    1. 회.   2. 모임, 운집.  3. 행7:38
    발음 [ ĕkklēsia ]

    교회(마16:18, 행2:47, 롬16:4), 모인 무리 (행19:32), 민회(행19:39), 모임(행19:41).

    ἐκ 스트롱번호1537

    1. 모음 앞에서는 ἐξ.   2. 마 2:15.  3. 요 15:19
    발음 [ ĕk ]

    καλέω 스트롱번호2564

    1. 부르다.  2. ㉠ ~라고 부르다. 3. 초대하다
    발음 [ kalĕō ]


    창세기 20:6
    아브라함은 선지자(나비. 5030)

    아비멜렉의 행위는 그의 도덕 양심과 당시의 윤리 기준으로 볼 때에는 악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신성한 섭리에 누(累)를 끼쳤기 때문에 선지자의 중재를 통해서만 죄 용서 받을 수 있었다.

    선지자(*, 나비)
    - 원뜻은 '쉬임없이 말하다'로 신적 영감을 받아 말하는 '대언자'(출 7:1)를 가리킨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는 일차적 사명 외에 하나님과 사람을 중재하는 역할도 맡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칭하신 까닭은 하나님의 뜻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또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 아브라함이 선지자인 이상, 아비멜렉이 그의 아내를 취하려고 한 것은 선지자의 거룩성과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범죄 행위였다.
    따라서 이러한 아비멜렉의 죄는 아브라함의 중재 기도를 통해서만 용서받을 수 있었다.
    한편 이 같은 아브라함의 선지자적 기능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이미 소돔에 사는 조카 롯을 위한 중재 기도에서 발휘된 적이 있었다(19:29).

    נָבִיא 스트롱번호 5030

    1. 선지자.   2. 선지자의 직분을 하도록 뽑힌 자들.  3.  בְּנֵי הנְּבִאִים
    발음 [ nâbîyʼ ]
    어원   / 아람어
    구약 성경  / 315회 사용
    • 관련 성경  /  선지자(창20:7, 신18:22, 왕상18:4), 대언자(출7:1), 예언자(렘28:9), 예언(단9:24), 예언하는 자(겔13:2,3).


    창세기 18:2

    사람 셋
    - 13절과 19:1에 의거할 때 이 중 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나머지 둘은 천사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과 천사가 이처럼 가시적(可視的)인 사람의 형상을 입고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까닭은 어디까지나 계시 내용을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무형상적이며 시.공간을 초월하는 초월자이시므로 그 본연의 모습으로서는 뜻하는 바 계시 내용을 유한한 인간에게 적절하게 전달할 수 없으므로 이처럼 사람의 형상을 입고 나타나신 것이다.

    달려나가
    - 생면 부지의 나그네들에 대하여 적극적이고도 진실된 사랑으로 영접한 행위이다.
    여행 중에 지친 나그네를 대접하며 그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당시 히브리인들의 관례로 굳어진 아름다운 풍습이긴 하지만(출 22:21;욥 31:32; 마 25:35; 딤전 5:10) 이처럼 아브라함이 그들을 보자마자 달려나가 따뜻하게 영접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친절이자 그의 삶이 항상 나그네 대접하기를 힘쓰는 삶이었음을 드러내 준다.

    몸을 땅에 굽혀
    - 귀한 방문자에 대하여 갖추는 근동의 인사 양식이다.
    야곱이 에서를 맞이할 때(창 33:3), 요셉이 그의 아버지를 환영할 때(창 48:12) 또한 선지 생도들이 엘리사를 맞이할 때(왕하 2:15)에도 이러한 인사가 행하여졌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의 신분이나 연령 등을 묻지도 않고 이러한 예우를 표한 것은 그의 인격이 평소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증명해 준다.




    체험적 신앙(體驗的 信仰)

    기독교 신앙은 ‘체험적’이라는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사도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중간에 부활의 예수를 만나는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 사도들은 부활의 예수를 체험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도 역시 일종의 체험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영적인 체험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들이 예수에게서 어떤 절대적인 사건을 경험했다는 사실에서도 그렇고, 그 뒤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지금도 많은 교회의 설교자들이 신앙의 체험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면, 사과가 있습니다.
    사과를 아무리 설명해준다고 하더라도 직접 먹어보지 않는다면 실제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아무런 설명이 없다고 하더라도 직접 먹기만 하면 사과의 실체를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오렌지를 가져와서 사과라고 하면서 먹어보라고 하면 그것을 먹은 사람은 실제로는 오렌지를 먹었지만 말로는 사과라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사과와 오렌지는 쉽게 구별되기 때문에 이런 착각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종교적인 경험에서는 이런 착각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납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믿는 것을 어떻게 체험하는가?
    술 담배를 즐기다가 완전히 끊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은 기독교 신앙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삶의 평화를 체험했다면 그것은 예수를 잘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평화를 경험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다양한 체험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부수적인 것이 전체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병을 고침 받았다. 문제가 해결 되었다. 등등

    상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방언을 한다. 예언을 한다.  등등

    부활 생명을 확신한다면 이것보다 더 귀한 체험은 없습니다.

    18세기의 훌륭한 목회자인 요한 웨슬리는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건전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머리 둘째 가슴 셋째 손입니다.
    머리는 지식을 말하고 가슴은 체험을 말하며 손은 실천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과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결단이 있게 되면 체험적 신앙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체험되어지면 신앙의 힘은 굉장한 것이 됩니다.

    웨슬리 이야기를 더 해 보겠습니다.
    웨슬리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 선교지인 미국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만 배가 파선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존 웨슬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여기서 죽는구나’하는 생각을 하니까 눈앞이 캄캄하고 죽음의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 한 모퉁이에서 몇몇이 모여 이런 와중에도 아주 담대하게 찬송을 하며 기도를 드리는 무리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생사를 초월한 저들의 행동에 웨슬리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목사인 나도 이런 와중에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떨고 있는데 저들을 전혀 두려움 없이 찬송과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 무리들은 바로 모라비안 형제단들 이였습니다.
    이 모라비안 형제단은 침례교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웨슬리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이 모라비안 지도자인 스팽킹버거를 찾아갔습니다.
    물론 모라비안 경건주의자의 아버지는 진젠도르프이지요.

    스팽킹버거를 찾아간 웨슬리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하면서 어떻게 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웨슬리의 말을 듣고 있던 스팽킹버거목사는 웨슬리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모르십니까?’‘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또 그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풍랑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신앙으로 자라났고 명문대인 옥스퍼드대학 신학부를 졸업했습니다.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독실한 신자라고 자부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여름철 신앙인 이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웨슬리는 좋을 때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쁜 때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팽킹버거목사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들의 신앙은 겨울신앙입니다. 어떤 두려움과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만 향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스팽킹버거는 다시 웨슬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정말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아십니까? ’이제 긍정적인 질문을 합니다. ‘그거야 모든 인류를 구원하신 구세주 아닙니까?’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세 번째 묻기를 ‘당신은 예수그리스도를 체험했습니까?’이 질문은 당신은 지금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지식으로 믿는 신앙이지 체험적 신앙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대화에 충격을 받은 웨슬리는 모든 신앙을 백지로 하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미국선교를 실패하고 도망하다시피 영국으로 다시 돌아오지요. 그리고 가끔씩 모라비안 형제단의 모임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러든 어느 날 이였습니다. 자세히 말씀드리면 1738년 5월 14일 모라비안 교도의 모임에 참석을 했는데 그날 간증이 있는 날 이였습니다. 어떤 성도가 간증을 하는데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더니 온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순간 웨슬리에게 깊은 깨달음이 왔던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예수를 개념적으로 믿었는데 이 순간에는 나 같은 흉악한 죄인이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가 된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런 극적인 영적체험이 새로운 선교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된 것이지요. 그는 영적체험을 통한 강력한 능력으로 영국의 잠자는 신앙을 깨었고 부패한 사회를 정화했든 것입니다.

    요엘3장17절을 보면 ‘너희가 내 성산 시온에 거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인 줄 알리라’이제는 너희가 알리라고 합니다. 그 동안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너희들이 나를 잘 모른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존 칼빈은 안다고 하는 이 부분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요 또 하나는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저가 ‘알다’하는 이 단어가 굉장히 중요하기에 성경공부시간에 몇 번이고 말씀드린 것이 있습니다. 이 알다는 헬라어로 ‘디다스코’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그냥 우리가 아는 것의 의미와는 좀 다릅니다. 우리가 노무현대통령을 아는 것과 노무현대통령 어머니나 부인이 아는 것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니까 ‘알다’ 라고 쓴 이‘디다스코’의 단어의 뜻은 본질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제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성탄절 날이 어떤 날인지는 세상 사람들도 다 잘 압니다. 그러데 그들이 알고 있는 성탄의 의미와 우리가 알고 있는 성탄의 의미는 틀립니다. 그들은 어떤 행사로 여기며 놀고먹고 즐기는 날로 볼 수 있지만 우리는 그 날만이라도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축하며 경건한 예배와 삶으로 이 날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 이 ‘알다’는 것이 이론적인 앎이냐 아니면 주님의 본질을 아는 앎이냐는 것입니다.

    본질에 대한 앎은 체험에서 나오는 앎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이렇게 공부 안하고 빈둥빈둥 놀면 장차 커서 아무 일도 할 수없을 것이다’ 는 것을 알고 계속 노는 학생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있다면 누가 진정으로 알고 있는 학생입니까? 알면서 실천을 하지 않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후두암에 걸려서 담배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 담배를 피운다면 이것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앎이란 실천을 동반한 앎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디다스코’의 앎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창조과학회가 많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노아가 홍수 후 머물렀던 아라랏산의 방주조각을 탄소측정 방법으로 연대를 측정해 보니까 몇 천 년 전의 나무 조각이 분명하여 그렇다고 하면 노아의 방주가 틀림없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대 유적을 발굴하다가 당시의 기록 속에서 성경의 인물들의 이름이 소개될 때 ‘그래, 성경은 진실이고 역사적인 뒷받침이 분명해...’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확정하는 일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지금도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등의 지역도 고고학적인 발굴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 하란을 통해 가나안땅으로 들어왔던 것을 성서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리아지역에서 아브라함 시대에 그 지역의 이름과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성서고고학의 쾌거를 이룬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들이 입증될 때마다 기쁨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과학적인 입증은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계속해서 연구되고 발굴되면서 성경의 말씀을 과학적으로 입증되어 질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발굴 작업과 과학적인 근거로 객관적인 경험을 가지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꾸 객관적인 증거를 대라고 말합니다. 보여 달라는 것이지요. 보면 더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다 요구하는 사항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먼저 믿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욱 복 되도다’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객관적인 증거를 보여 달라는 말에 쇄기를 박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깨닫고 실천할 수 있도록 지금도 성령께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매일 보는 사람이나 성경공부를 통해 체계적으로 배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말씀을 보고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꼬마가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할아버지, 할머니 나를 누가 만들었어요?’ 하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 그야 하나님이 만들었지,’그래서 이 꼬마는 나를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꼬마 아버지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본 꼬마가 하는 말이 ‘하나님 들어오신다. 그러더랍니다. 우스개 소리지만은 저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정리 되지 않은 지식은 잘못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단으로 빠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리되지 않은 성경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알고는 있지만 그것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웨슬리처럼 여름신앙이 될 수 도 있고 어렵고 힘들거나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공부가 체계적으로 필요한 것이지요.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가면 나 되신 성령이 오실 것이다. 그러니 그 성령을 받으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시다시피 다락방에서 120명이 기도할 때 그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 발짝도 밖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그들만이 모여 기도하며 찬양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성령이 임하니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밖으로 뛰쳐나가 복음을 전했지요.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은 자들 앞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면서 잘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이 참 많지 않습니까? 물론 안다고는 하지만 ‘디다스코’의 앎이 아니란 말도 했습니다. 본질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성탄절을 알듯이 겉의 이론을 아는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알지만 실천하는 능력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알지만 체험되어지지 않는 앎이란 말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확인되어지지 않은 앎이란 말이지요. 그래서 성령이 확인시키는 작업을 지금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이 하는 일은 많습니다. 그 중에 우리를 예수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이나 깨닫게 하는 일들을 하고계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데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성령님을 초청하십시오. 성령의 충만을 받기위해 간구 하십시오. 성령을 받을 때 증인이 되듯이 성령을 받아야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해 낼 뿐만 아니라 말씀을 깨닫게 되며 우리가 아는 지식이 체험적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리니’여기서 믿는 것과 아는 것은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 아는 것이란 말이지요. 그러면 믿음이란 야고보서에 의하면‘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믿음이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체험적 지식과 믿음을 말하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아는 것 즉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에 믿음을 가지는 행함으로 체험적 신앙을 소유하는 복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체험적 신앙이란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이 땅에 임했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개념적인 지식은 절대로 능력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적용시키지 못하는 신앙은 실천의 능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체험적인 신앙으로 성화되기도 굉장히 힘들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예를 들어 제자들은 객관적인 지식은 많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수 없는 기적과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한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자들에게는 개관적인 지식으로 끝나니까 어떤 현상이 나타났습니까?  예수님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아무도 항거하지 않았습니다. 다 그 현장에서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체험이 없는 지식은 무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알고 믿고 체험해야합니다. 체험은 깨달음입니다. 말씀을 현장에 늘 놓아보십시오. 그러면 세상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원리를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주관적인 체험을 가지니까 다 나가서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는 것 아닙니까? 제자들은 다락방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는 속수무책 이였지만 모여서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기다리고 인내했기에 성령의 뜨거움을 체험할 수 있었든 것이지요.

    우리가 실천하지 못하는 지식이 있습니다. 이런 개념적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은 모여서 기도로 성령을 초청하고 예배를 통해 주님의 말씀에 집중한다면 성령의 뜨거운 깨달음이 있을 것입니다. 개념적 말씀이 체험적 말씀으로 확실히 믿는 역사를 맛볼 것입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잠언서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하면 체험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알아야 그 앎에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지식이 나무라면 믿음은 불입니다. 나무가 있어야 불을 붙일 수 있고 나무는 있는데 불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먼저 말씀을 알아야합니다. 체계적인 말씀을 공부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 개념적 지식이 성령을 통해 깨달아지고 체험되어져서 우리의 인생이 주님을 붙들고 승리하며 축복의 역사를 이루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믿음 없는 지식은 돌덩이처럼 굳어서 냉혹합니다. 지식 없는 신앙은 마른 풀과 같아서 오래 가지 못합니다. 신앙 없는 지식은 무능합니다. 지식 없는 신앙은 미신에 빠지거나 이단에 빠져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신앙 없는 지식은 이웃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신앙 없는 문명은 시들고 말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총각사공이 교수한분을 태우고 갑니다. 둘이서 말없이 가는 것이 적적했던지 교수가 사공에게 묻습니다. ‘결혼을 했는가?’아니요. 교수가 다시 묻습니다. ‘철학을 아는가?’ 사공이 대답합니다. ‘뱃사공이 무슨 철학을 알겠습니까?’그러니까 교수가 하는 말이 ‘자네는 인생의 1/4을 잃어 버렸네.’ 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묻습니다. ‘심리학이 무엇인지 아나?’‘저 그런 것 모릅니다.’‘그러면 인생의 1/2을 잃어 버렸네.’ 교수가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천문학을 아는가? 사공이면 천문학 정도는 알아야지?’‘그런 것 잘 모릅니다’‘그러면 인생의 3/4을 잃어 버렸네.’그러면서 교수가 하는 말이 ‘사람의 인생의 3/4을 잃어버리면 죽음목숨이나 다름없네.’

    그런데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는 것입니다. 갑자기 거센 바람에 못 이겨 배는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 다 물에 빠졌습니다. 대학교수는 당황하면서 허우적거립니다. 그 모습을 본 사공이 대학교수에게 물었습니다. ‘교수님 헤엄칠 줄 아십니까?’그랬더니 교수가 ‘아니 이 사람아 내가 헤엄을 칠 줄 알면 이렇게 허우적거리고 있겠는가?’그 말을 들은 사공이 한마디 던집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전부를 잃어버렸습니다.’

    신앙 없는 지식, 신앙 없는 문명, 신앙 없는 과학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19세기에 낙관주의자들이 판을 쳤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지식과 과학 기술을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H.D 월슨은 낙관주의의 대표인물입니다. 그가 나이 들어 인생의 지친 모습으로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허무하다’

    하나님 없는 재물, 하나님 없는 권세, 하나님 없는 육체는 오래 못갑니다. 마태복음 7장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집은 연속성의 문제입니다. 이 연속성을 위해서는 기초가 중요한데 이 기초가 믿음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아는 것을 개념적으로 이해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고 행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말씀은 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알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개념적으로만 알고 있고 그것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알고 있는 것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언제든지 무너지고 만다는 말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동떨어진 생활을 한 것을 성경을 통해 봅니다. 형인 에서의 장자권을 교묘한 방법으로 빼앗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냥을 하고 돌아온 형이 배가 고프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야곱이 팥죽으로 유혹해서 거래를 한 것이요. 아버지인 에서를 속여 축복 권을 빼앗았습니다. 라반 외숙집에서 외숙를 속여 재산을 축척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속인 대가로 집을 떠나 외숙집으로 향할 때 벧엘에서 꿈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께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속에게 주리니 제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펀만 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그런데 이 말씀을 개념적으로 듣고 맙니다. 순간적인 위로에 불과했지 이 말씀이 야곱을 따라다닌 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이 후로의 삶을 보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계속 속이는 인생이였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라반외숙을 속이고 도망 나오게 될 때 뒤에서는 외숙이 쫓아오고 앞에서는 형인 에서가 야곱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삼백용사를 거느리고 죽이러 오고 있습니다. 이제 야곱은 오갈 때 없이 사방으로 둘려 쌓여 포위되다 시피한 사건을 맞이 하게됩니다. 이때 얍복강의 씨름이 나오게 되지요.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야곱에게 씨름을 겁니다. 이것을 우리는 기도로 알고 있는데 기도라기보다 야곱과 하나님의 고집 싸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 ‘내 말대로 살래 아니면 네 고집대로 살래’하는 싸움이지요. 여기서 야곱이 끝까지 자기 고집을 버리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환도뼈를 부러트립니다. 환도뼈를 맞고 난후에 그는 하나님을 재대로 본 것이지요. 그는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개념적인 지식에서 체험적인 지식으로 바뀐 것입니다. 얍복강의 사건 이후에 야곱이 고난당한 일은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그로 인해 오빠들이 세겜족속들의 남자들을 다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고 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야곱은 인간적인 방법을 강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시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서 단을 쌓은 모습을 봅니다. 그러니까 그가 어떤 어려움을 당하면 그 어려움을 자기 지혜로 풀려고 한 삶에서 이제 하나님께 맡기고 예배의 삶을 통해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이 이후의 야곱의 삶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왕이 바로를 만날 때도 그 바로 앞에 축복을 합니다. 감히 왕 앞에 축복할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쉽게 이야기하면 애굽에 얻어먹기 위해 와 놓고 요셉 때문에 바로를 볼 수 있는 영광을 얻었는데도 왕 앞에 축복하는 이유는 네가 아무리 왕이지만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면 삶에 평화를 얻을 수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기독교인들이 힘을 잃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모이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고 성도의 숫자도 줄어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성도 침체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을 지식으로만 개념적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믿고 행하는 성도가 됩시다. 그래서 체험적인 신앙 증명된 신앙 확고한 신앙으로 주의 뜻을 이루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체험적 신앙을 가지려면(누가복음 7:11~17)

    함께 “길을 가던 세 사람이 뱀을 보았는데, 첫째 사람은 조금 놀랐지만 침착하게 멀리” 피했습니다.
    둘째 사람은 “과거 뱀에 물린 상처 때문에, 비명을 치며 줄행랑을” 칩니다.
    셋째 사람은 “땅꾼이어서! 뱀의 종류가 무엇인지 보고, 손으로 뱀을” 잡았습니다.
    이를 보면 “어떤 상황에 대한 반응은 사람이 겪은 체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을 체험했는가! 이는 현재와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삶에서 “성장은 배움과 학습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경험과 체험을 통한 배움이 더” 확실합니다. 이는 “죄인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례로 “교회 마당만 밟는 영혼과 주님을 체험적으로 만난 영혼의 신앙생활이 어떻게” 같겠어요? 말만 “하는 신앙생활과 직접 고생하며 은혜를 체험한 영혼의 신앙생활이 같을 수” 없습니다. 결국 “영적 성장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 나를 사랑하심을 직접 체험함에서 시작”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나인 성에서 이미 죽었던 과부의 독자를” 살리셨습니다. 과거 “주님은 야이로 딸과 나사로를 살리셨기에, 이 청년은 세 번째 살린 경우가” 됩니다. 구약의 경우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자를 살렸지만, 이는 본문과 무려 900년 시차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16절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말씀합니다. 본문에서 “주님 주변에 세 부류의 사람들, 제자와 무리, 나인 성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주의 은혜를 누가 가장 깊이” 체험했을까요? 제자와 “많은 무리도 죽은 자가 살아남을 보고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하나님 은혜를 가장 깊게 체험한 영혼은 나인 성 과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은혜를 보고 듣기보다, 오히려 내 것으로 깊이 체험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영혼이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보고 듣지만, 깊은 영적 체험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과거 “우리 선조들은 성경에 기록된 능력을 직접 체험하며 신앙생활” 했습니다. 선교지에서도 “주께서 상식을 깨고 일하심을 직접 체험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존재하는 은혜를 직접 체험하는 영혼이 점점” 줄어갑니다.

    하나님께서 “변하거나, 성경의 교훈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 영적 태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고 은혜받으려면, 보고 들음을 넘어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체험은 “성경의 이야기,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내 삶에 들어와서, 내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체험! 간증은 악한 세상에서 내 믿음을 굳게 붙들어주는 힘이” 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체험적 신앙을 가지려면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픔을 아신다는 확신 

    본문에서 “주님의 일행과 장례 행렬이 우연히! 들어가고 나가는 중 만나게” 됩니다. 당시 “나인 성 과부는 독자를 잃은 상실감으로, 어쩌면 아무것도, 누구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과부가 독자를 잃고, 또한 자신의 기구한 처지를 생각하고 얼마나 서럽게” 울었겠어요? 그런데 “주께서 먼저 그런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특히 “불쌍히 여기다! 원어는 창자가 뒤틀리듯 함께 아파하는 모습을” 뜻합니다.

    주님은 “과부의 아픔을 보시고, 창자가 뒤틀리듯 아파하시며 먼저 다가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14절에서, 관에 손을 대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말씀합니다. 율법은 “죽은 자를 만지면 부정하다! 여겨서, 시신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주님도 “이를 잘 아셨지만, 과부를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파서, 율법까지 깨며 다가가셨던 것”입니다. 과부는 “누구보다, 자신의 아픔을 깊이 아시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함이 큰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어른들이 “우리 자녀에게, 과거에 겪은 6.25와 보릿고개를 말하면 그 반응이” 어떨까요? 많은 경우 “피자 먹으면 된다. 물이 없으면 음료수를 마시면 된다! 기막힌 말을 할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과거 어른 세대의 아픔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상상도 못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누군가 내 아픔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함부로 말할 때! 큰 상처가” 됩니다. 반면에 “내가 당하는 아픔을 공감하고, 같이 아파할 때!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제한적 존재이기에! 내 아픔을 전부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알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 주님은 내 창조주시기에! 나의 모든 사정과 아픔, 눈물과 기도 제목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낱낱이” 아십니다. 또한, “주님은 만왕의 왕이지만, 낮고 낮은 구유에 오셔서! 가난한 자와 부한 자, 천민과 귀족, 모두의 아픔을 가장 잘 아시는 분”입니다. 게다가 “주님은 그 아픔을 불쌍히 여기고, 친히 나를 도우시려 십자가까지!” 지셨습니다.

    우리가 “체험적 신앙을 가지려면, 주께서 내 모든 아픔을 다 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주께서 내 아픔을 다 알기에! 절대로 낙심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영혼이 나를 아는 주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지” 못합니다. 말은 “주께서 나를 가장 잘 아신다 인정해도! 실제 삶은 반대로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신앙생활은 “어떤 경우에도! 주께서 나를 가장 잘 아시고 도우심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학생 때! “어떤 교수님이 예배 시간에 하신 말씀이 참 많이” 아팠습니다. 설교 중! “바르게 목회하려면! 반드시 세 가지 중보 기도 그룹이 필요한데! 첫째! 생명 걸고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중보 기도자! 부모와 배우자를” 언급했습니다.

    둘째! “시간을 정해서, 나를 위해 기도할 수십 명이 필요하다!” 말했습니다. 셋째! “기도할 때마다, 나를 빼놓지 않고 기도하는 그룹 백 명은 넘어야 한다!” 말했습니다. 당시 “저는 불신 가정에서 신학교에 입학했기에! 세 가지 중 어느 중보 기도 그룹도” 없었습니다. 불신 “가정에서 믿음의 개척자였기에! 그 말씀은 제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날 “예배 후! 모두가 예배당을 빠져나간 후! 혼자 남아서 참 많이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정말 어렵게 신학교에 왔는데! 저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때 “주님께서 제게 주신 답변이 지금도 제 귀에” 쟁쟁합니다. “내가 있잖아! 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니!” 그 후 “저는 불신 가정에서 목회자가 되었다는 열등감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내 아픔을 가장 잘 아시고, 이해하시고, 나를 가장 따뜻하게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문제는 “이 체험을 한 영혼보다, 영적 체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영혼이 더” 많습니다.

    영적 “성장은 내 아픔과 내 기쁨도 아시는 주님! 나와 동행하는 주님을 만나는 깊이와” 비례합니다. 또한 “내 아픔을 아는 주의 사랑을 체험하면, 악한 세상에서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내 아픔을 아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얼마나 깊이” 체험하셨나요? 힘들다고 “나와 함께 하는 하나님을 외면함은 가장 큰불 신앙”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떤 경우에도, 내 아픔을 아는 주님을 깊이 체험해서 항상 승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회복시킬 것을 확신하라

    본문 12절은 “죽은 자가 과부의 독자이다! 많은 이가 장례 행렬에 함께 있었다!” 말씀합니다. 당시 “장례 행렬에 함께한 많은 사람이 독자가 이미 죽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과부에게 울지 말라! 말씀하고 관에 손대며, 본문 4절에서” 말씀합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마침내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게” 되었습니다. 의사인 “누가는 죽었던 영혼이, 아네카디센! 일어나서 똑바로 앉았다!” 말했습니다.

    이는 “주께서 애달프게 울었던 과부의 아픔, 장례 행렬의 아픔을 온전히 치유하셨음을” 말합니다. 실제로 “죽었던 독자를 살리셔서! 일어나 앉았고, 말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이처럼 놀라운 은혜를 직접 체험한 과부의 신앙은 더 깊어졌을 것”입니다. 또한 “죽었다가 살아난 이 청년이 체험한 은혜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삶도 “마치 죽은 독자처럼, 이제는 가망 없다. 끝났다. 좌절하고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이룬 것도 없고, 게다가 더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사에 자신감을 잃고, 얼굴이 어두워지고, 상처로 소극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내가 정말 없어서 힘들었다는 그것이 채워지면, 내 삶이 더” 나아질까요? 일례로 “물질로 고생한 영혼이, 물질이 차고 넘치게 되면, 모든 문제가 다” 회복될까요?

    인간은 “천하보다 귀하기에! 천하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온전한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내 삶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 어려움, 눈물과 절망은 오직 하나님만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루만지심, 회복하게 하심, 긍휼히 여겨주심만이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이 회복의 “은혜는 개인은 물론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한 소망교회 “모든 교인은 누구나 교회가 더 나아지고 회복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회복은 일부 중직자와 당회의 희생과 수고로만 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회복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루만지고, 은혜를 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신앙인조차 하나님의 위로보다 세상의 위로를 더 사모하며” 삽니다. 실제로 “연약한 인간은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누가 문제야! 누구 때문이야! 원망부터” 많아집니다. 그러나 “정말 회복을 원한다면! 사람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 은혜만 구해야!” 합니다.

    죄인인 “인간은 주께서 나를 일으켜 세워준 체험이 깊을수록 누리는 은혜도” 커집니다. 문제는 “모든 영혼이 주님께서 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내 믿음, 평안함, 기쁨과 감사는 모두 하나님께서 내게 회복의 은혜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회복된 체험을 깨닫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기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살기등등함으로 기독교인을 박해했기에! 자신을 죄인 중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주님을 만난 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박해자 바울을 버리지 않으시고, 회복의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인 중 괴수를 “용서하셨고, 덮어주셨고, 위로와 은혜로,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온전한 회복의 체험이 있었기에, 신실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나도 바울처럼 많은 영혼을 넘어뜨리고 아프게 한 죄인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아십니까?

    그런데도 “주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회복시켜 주셨지만, 우리는 이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재철 목사의 “새 신자반!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주께서 가시관을 쓰심은 내가 머리로 지은 죄를 씻어주기 위함이다. 주께서 로마 군인의 채찍으로 가슴을 맞음은 우리 마음의 죄를 씻어주기 위함이다. 주께서 손에 못이 박힌 이유는 내 손이 범죄 한 것을 씻어주기 위함이다. 주께서 두 발에 피를 흘린 이유는 가서는 안 될 곳을 간 내 발의 죄를 씻어주기 위함이다. 주께서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심은 내 모든 죄를 다 씻어주기 위함이다.”

    놀랍게도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모든 사역은 죽어가는 나를 살리고, 은혜로 회복시켜 주심에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해도! 이 회복의 은혜를 체험하면 절대로 영적 곁길로 빠지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삶의 모든 순간마다 주님 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체험해서, 영적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체험적 신앙인 도마(요한복음 20:24-29)

    체험의 함정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F.Bacan)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편견과 망상을 우상이라고 표현하고, 대표적인 네 가지 우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그는 참된 경험과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이 네 가지 우상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종족의 우상’이란 맹목적인 습관, 감정, 신앙에서 오는 편견을 뜻합니다.
    ‘동굴의 우상’이란 개인적인 취미, 성격, 환경에서 오는 편견을 뜻합니다.
    ‘시장의 우상’이란 인간의 접촉, 언어에 의하여 나타나는 편견을 뜻합니다.
    ‘극장의 우상’이란 전통, 역사, 권위를 무비판적으로 믿는 편견을 뜻합니다.

    철학자들은 쉬운 말을 어렵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이 네 가지 우상도 말이 어려워서 그렇지 그 내용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말 공감이 가는 내용들입니다. 지금 네 가지 우상을 다 설명할 시간은 없고 이 가운데 두 번째 우상인 ‘동굴의 우상’만 생각해 봅니다. 이 ‘동굴의 우상’은 오늘날 우리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마치 동굴 속에 묶여 있는 포로들처럼 자기가 있는 좁은 세계만 바라보고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뜻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말에 아주 이 ‘동굴의 우상’과 딱 들어맞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뭘까요? 바로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입니다.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는 우물이 세상의 다인 줄 알고 삽니다. 하늘도 자기가 보는 우물 입구의 둥그런 부분만 하늘인 줄 알고 삽니다. 그래서 이 ‘동굴의 우상’이나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은 모두 자기의 경험과 지식만 의존해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편견, 넓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 ‘동굴의 우상’이나 ‘우물 안 개구리’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중세의 사람들은 모두 지구가 평편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평편한 지구 끝을 지나면 낭떠러지로 떨어진다고 생각했고 자기네가 사는 유럽대륙만이 세계의 전부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갈릴레이가 지구가 둥글다는 말을 했을 때 이단으로 몰아붙여 재판을 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 뿐 아니라 자기가 체험한 것만 인정하고 자기 경험에 비추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은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절대 믿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지금부터 살펴보려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 도마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경험만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으로 자신이 직접 보지 않고 만져보지 않으면 믿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흔히 우리가 도마를 ‘의심 많은 제자’라고 부릅니다만 엄밀하게 따지면 이 도마는 의심이 많다기보다 자기 체험에만 의존하는 편협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체험주의자에서 체험신앙으로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면서 자신이 제자들을 떠나 천국으로 가야하지만 영원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는 것이므로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도마는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요 14:5)라고 묻습니다. 한 마디로 그 길이 어디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이 도마는 ‘디두모’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요즈음도 이 도마와 쌍둥이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천국이라는 것이 어디 있느냐, 못 믿겠다, 있다면 한 번 보여줘 바라. 그래서 천국에 가봤다는 사람들이 뭔가 천국의 증거를 대보려고 이런 저런 책을 많이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책이 뭐가 필요합니까? 안 가 보면 없는 것입니까? 저는 중국이나 영국은 한 번도 안 가봤지만 당연히 있는 줄 압니다. 어떻게 아나요? 있다고 배웠으니까 있는 줄 아는 것입니다. 솔솔 부는 바람은 눈으로 본 적이 없지만 분명 있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안 봤어도 바람을 몸으로 느끼고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 봐도 얼마든지 느끼고 믿을 수 있는데도 어리석게 천국은 내가 안 가봤으니 있는지 없는지 못 믿겠다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것입니다. 도마와 쌍둥이 벌 되는 사람들이지요.

    또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이 때 하필 도마라는 제자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도마가 나중에 나타나자 제자들은 기쁜 마음에 우리가 주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도마가 어떤 사람입니까? 안 보면 절대 안 믿는 사람이라고 했지요? 그러니 도마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

    교회에서 보면 꼭 이런 분이 있습니다. 소위 ‘당당한 결석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모임에 안 와서 중요한 말 할 때 못 듣고 나중에 와서 “왜 나 없을 때 그런 중요한 말 했느냐?”고 따지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서 모처럼 선물을 줬더니 “왜 하필 나 없을 때 선물 주느냐?”고 따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결석은 왜 했습니까? 그 자리 지키고 있었으면 받을 것 다 받고 아무 문제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합니다. “저는 예수 믿은 후 교회에 한번도 빠져본 적이 없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나 없을 때 은혜 받으면 어떻게 하나, 나 빼놓고 전부 다 은혜 받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어서입니다.” 재미있는 이유지만 건전한 신앙인 것 같습니다. 이 정도는 돼야 은혜도 받지요.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 나타나셨을 때 결석하고는 남이 하는 말 안 믿고 우기는 것입니다. 사실 하필 자기 없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말씀도 가르치고 성령도 주셨는데 얼마나 손해가 막심합니까? 그런데 도마는 이 사실을 안타까워하지는 않고 난 못 봤으니 못 믿겠다고 우기기만 합니다. 정작 받을 은혜는 못 받은 채 내 눈으로 안 보면 못 믿겠다니 참 답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오늘 본문 26절을 보니 그로부터 8일이 지난 후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한번 나타나십니다. 왜 다시 한번 나타나신 것일까요? 특별히 도마를 만나기 위해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27절부터 보면 도마하고만 대화를 나누신 것입니다. 어떤 대화입니까? 27절을 보세요. 예수님이 도마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네가 못 보고 못 만져보면 안 믿겠다고 하니 한번 직접 보고 직접 만져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이 말씀 속에 왜 주님이 다시 나타나셨는지, 왜 특별히 도마를 만나기 위해 오신 것인지 이유가 나타납니다. 맹목적인 경험주의자 도마를 변화시켜서 주님의 사람으로 쓰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이와 같이 각기 다른 성격, 다른 특성을 지닌 제자들을 이렇게 하나하나 만나 설득하고 변화시켜 각자 위대하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생깁니까? 28절을 보세요.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에게 어떤 변화가 온 것입니까? 여전히 도마는 체험을 중요시 합니다. 자기가 직접 보고 직접 만져보더니 그제야 “당신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입니다.”하고 고백합니다. 체험을 중요시하는 자세는 별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그의 태도는 변합니다. 어떻게 변하는가? 자기 체험만 믿던 맹목적인 체험주의자,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기 경험만 믿던 어리석은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후 건전한 체험신앙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도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체험신앙’입니다.

    체험의 힘

    이와 같이 영적인 세계에서 체험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도마는 자기 눈으로 직접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자기 손으로 직접 예수님 손의 못자국, 허리의 창자국을 만져본 후 그 놀라운 체험을 바탕으로 열정적인 사도가 됩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신앙은 체험입니다! 체험이 없는 신앙은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체험이 없는 신앙은 그저 머리로만 믿는 것이기 때문에 뿌리가 없고 조금만 시련이 와도 금방 무너집니다.

    우리도 체험신앙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세계를 직접 체험해야만 은혜를 진심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체험은 말로 설명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도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도 도마를 제외한 나머지 열한 제자는 다 예수님을 직접 보았는데 그 열한 명이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다고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해도 도마 한 사람 설득하지 못합니다. 체험해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이런 경험 해보셨을 것입니다. 부흥회 가서 은혜 받았는데 부흥회 안 간 남편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를 못 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는데 내가 만난 주님에 대해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상대방은 고개만 갸우뚱,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답답해도 할 수 없지요. 이 체험이라는 것이 말로 설명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체험만 하면 아무리 의심 많고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반드시 믿게 됩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손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만져보는 체험만 하면 제 아무리 도마 같은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 많을 것입니다. 본디 이 ‘벤허’라는 영화는 루이스 월리스라는 퇴역군인이 쓴 소설을 영화화 한 것입니다. 월리스는 1827년 미국 인디애나 주지사의 아들로 태어나 변호사를 거쳐 남북전쟁 때에는 북군의 장군으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월리스가 어느 날 한 친구와 대화하던 중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 아들임을 밝히는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메시아니 초능력적인 인물이니 하는 허구를 다 벗기고 순수한 인간 예수를 조명하는 것이 그의 집필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저 “기독교는 얼마 후에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출 것이다.”는 친구의 말만 믿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소설을 쓰는 동안에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소설을 쓰면서 예수님의 생애를 추적하고 연구하며 그 배경을 알려고 성경을 읽는 동안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게 되었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시인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믿게 되었습니다. 월리스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고스란히 소설의 주인공에게 투영시켜 1880년 ‘벤허’라는 제목으로 출판합니다. 이 소설이 1959년 영화화돼 많은 이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특히 불신자들 중에서도 이 영화를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식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월리스는 성경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의 사랑과 구원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체험이 담긴 소설과 영화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고 그들의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체험에서 우러러 나온 힘, 이것이 바로 체험신앙의 능력입니다.

    나만의 체험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영적 체험을 가지고 계십니까?

    체험이라고 하면 다들 겁부터 먹습니다. “체험은 무슨 체험, 난 그런 거 없어. 남들은 죽을 병 걸렸다가 살아난 체험도 하고, 완전히 망했다가 다시 일어난 체험도 있다지만 난 그런 체험 없다구. 그냥 교회 나가고 그냥 믿는 거지 뭐.” 맞습니다. 우리에게 거창한 체험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간증할만한 거리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도 누구에게 간증할만한 큰 체험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목사님들 보면 죽을 병 걸렸다가 기도하면서 나았다는 분도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분도 많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참 신기합니다. 하지만 저에게 이런 체험은 없는지 몰라도 나름대로 참 귀한 체험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주님의 은혜를 뜨겁게 느낀 일, 말씀을 읽다가 마음이 뜨거워진 일, 어렵고 힘들 때,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 주님이 까마귀를 보내주셔서 도움을 주고 힘을 주신 일들 등등 비록 초자연적이고 남에게 자랑할만한 대단한 체험은 아니지만 이 모든 것이 저만의 체험, 제 나름대로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체험입니다. 그리고 저는 무엇보다 주님을 만난 체험을 했습니다. 영적으로 주님을 만났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고3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영적으로 십자가를 체험했습니다. “거기 너 있었는데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하는 찬송가 136장 가사처럼 저도 영적으로 그 십자가의 현장에 서있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 손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만져보았습니다. 나를 위해 찔리신 그 못자국과 창자국을 만져보고 나를 위해 흘리신 그 보혈의 피를 느껴보았습니다. 이만큼 소중하고 귀한 경험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영적인 체험이 어찌 죽을 병 나은 체험보다 못하다고 하겠습니까?

    이런 체험들이 차곡차곡 쌓여 오늘의 제가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저 자신의 성격을 보면 감성적인 면보다 이성적인 면이 더 발달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빌립이나 오늘 본 도마처럼 이성적이고 차분하고 때론 냉정하며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편입니다. 자칫하면 차가운 이성주의자나 체험주의자가 될 위험이 많은 성격이지요. 그런데 이런 저의 성격이 이 작은 체험들을 통해 뜨거움을 경험하고 변화된 것입니다. 목회에 열정을 가지고 뜨거운 은혜와 체험을 경험할 수 있는 목회자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체험이 꼭 있어야 합니다. 체험이 없는 신앙은 연약합니다. 체험이 없는 신앙인은 정말 불행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신앙은 체험입니다. 도마처럼 체험주의자가 되어 자신의 좁은 경험만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체험이 없는 신앙 또한 정말 위험합니다. 건전한 신앙적 체험을 통해 우리 신앙이 탄탄해지고 뜨겁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고 자기 체험만 믿다가 체험적 신앙인으로 변화된 도마는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도마는 성령강림 이후에 페르시아를 지나 인도까지 가서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인도가 힌두교 국가라고만 알고 있지만 인도 남부지방에 가면 소수의 진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이 세운 교회가 있습니다. 다 도마의 후예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도마는 열두 제자 중 가장 멀리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 사람입니다. 정말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순종해서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된 사람이 도마입니다. 그는 마지막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창에 찔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주님이 허리에 창을 찔리신 것처럼 자신도 창에 찔려 순교한 것입니다. 내 삶으로 예수님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하고, 또 내 죽음으로 주님의 고난을 그대로 체험한 사람이 도마입니다. 오늘날 인도 마드라스의 케나이 공항 근처에 도마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자그마한 언덕도 있고 그를 기념한 성 도마 교회도 세워져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체험적 신앙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저 머나먼 인도까지 복음 들고 가서 순교까지 당할 수 있는 능력은 그의 특별한 체험 때문에 가능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머리로만 믿지 말고 체험적 신앙인이 되기 바랍니다. 다른 어떤 체험보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 예수님 손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만져보는 체험, 나도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서 보혈의 피를 느껴보는 경험을 하기 바랍니다. 이런 체험을 하면 어떤 근심이나 두려움도 사라지고, 어떤 제약이나 장애물도 걱정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체험신앙의 힘인 것입니다.




    결혼 - 결국은 혼자
    이혼 - 이제부터 혼자


    1월 6일(월)
    본문 / 창세기 14-17장
    주제 / 나는 전능한 하나님(17:1)
    성구 /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When Abram was ninety-nine years old, the LORD appeared to him and said, "I am God Almighty ; walk before me and be blameless.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I am God Almighty)
    전능한 하나님을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el Shadday. שַׁדַּי אֵל)"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등장되는 하나님의 이름은 다양합니다.
    주로 야훼(Yhwh)와 엘로힘(Elohim)이 사용되었는데, 야훼가 약 6700회, 엘로힘이 약 2500회 정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엘 샤다이 (El Shaddai)(창 17:1, 출 6:3), 엘 엘리욘 (El  Elyon)(창14:19), 엘 로이 (El Roi)(창 16:13)와 같은 "엘"이 들어간 복합적인 명칭을 사용합니다.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이란 의미를 소개합니다.
    "엘(El)"은 "유일신 하나님"을 의미하고 "샤다이(Shaddai)"에 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엘 샤다이'는 주로 "전능하신 하나님(God Almighty)"로 번역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샤다이(ShaDai)"가 "파괴하다", "압도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리슈도드(leShDoD)"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도둑, 강도를 뜻하는 히브리어 "쇼데드-ShodDeD" 역시 같은 어근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엘 샤다이(El Shdai)의 ShaDai는 문법적으로 봤을 때 "가슴"을 뜻하는 ShaD와 더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히브리어에서는 어미에 "i"나 "ai"가 오게 되면  대부분 "나의"라는 의미가 됩니다.
    위와 같이 해석했을 때, 엘샤다이는 "하나님은 나의 가슴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어머니의 가슴 즉 어머니의 품을 생각해 보면 그 가슴은 따뜻하고 정감이 넘치는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전능하신 하나님 즉 엘 샤다이는 하나님의 따뜻한 가슴으로 세상에서 실패한 인생이 찾아올 때 반갑게 맞아주실 것입니다.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고 온갖 어려움과 힘든 모든 것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은혜가 눈폭풍이 쏟아지듯 퍼부어주시기를 소망합시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창세기 17:1
    아브람
    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출애굽기 6:3
    내가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엘 엘리욘 (El  Elyon) - 창14:19
    엘 로이 (El Roi) - 창 16:13
    등의 엘(El)이 들어간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엘(’el) אֵל  스트롱번호 413

    1. 어떤 것을 지향하다.  2. ~으로. 3. 사 38:2.
    발음 [ ’el ]
    구약 성경  / 5464회 사용
    • 1. 전치사 [전치사] 어떤 것을 지향하다, 어떤 곳을 향하다.
      • a. 전치사 [한 장소로의 운동: ‘가다’는 동사와 함께 쓰임] ~으로, ~을 향해, 삼상 6:11.
      • b. 전치사 [어떤 것에 대한 전환] ~으로, 사 38:2.
      • c. 전치사 [운동이나 전환이 적대적일 때] ~에 반하여, 창4:8.
      • d. 전치사 [어떤 점이나 표시까지 도달할 경우] ~까지, ~까지도, 렘51:9.
      • e. 전치사 [어떤 경계 안으로 들어갈 때] ~안으로, 신23:25(24).
      • f. 전치사 ~이외에도, 레18:18.
      • g. 전치사 ~에 관하여, 출14:5.
      • h. 전치사 ~에 따라서, 수15:13.
    • 2. 전치사 [어떤 사람이 바라는 한 장소에 머무를 때 사용]
      • a. 전치사 ~곁에, ~근방에, 삼상17:3.
        b. 전치사 ~안에서, ~가운데, 신16:6.

    • 관련 성경 /  ~에게, ~향하여, ~안으로, ~으로, 대하여(창 30:40, 삼상 3:12, 렘 22:11), 때문에(삼상 4:21), [부] 서로(렘 36:16).
    샤다이(Shadday) שַׁדַּי  스트롱번호  7706

    1. 가장 능력있는 자.  2. 전능자. 3. 창 17:1
    발음 [ Shadday ]
    어원  / 770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8회 사용
    • 1. 명사, 남성 가장 능력있는 자, 전능자, 창17:1, 28:3, 출6:3, 욥5:17,6:4.
    • 관련 성경  /  전능자(민 24:4, 욥 37:23, 사 13:6), 전능(출 6:3), 전능하신 이(욥 8:3, 5). [형] 전능하다(창 17:1, 48:3, 겔 10:5).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שַׁדַּי אֵל

    엘 샤다이( ’el Shadday) שַׁדַּי אֵ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시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1-3) .

    이 때 아브람은 75세였고, 그의 아내 사래는 65세이었습니다. 
    더 이상 자녀를 얻을 수 없는 육체의 한계에 부딪친 나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여서 이내 자식이 생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속절없이 가는 세월에 점점 늙어만 가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아브람이 후손에 대한 기대가 점점 희미해져갈 때,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지키고 너에게 큰 상을 주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에게 주의 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께서 나에게 자식을 주시지 않았으므로 내 집안의 종이 내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라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고 말씀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이 말씀을 믿었습니다.(창 15:1-6) 

    이후 10년이 지난 아브람 나이 85세 때에, 사래가 10년이 넘도록 자식이 생기지 않자 남편 아브람에게 말합니다. “(창16:2) 
    여호와께서 나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시니 당신은 내 여종과 함께 잠자리에 드세요. 
    아마 그녀를 통해서 자식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사래가 자기 몸종을 첩으로 내준 것입니다. 
    아브람은 아내의 이러한 요구가 분명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어긋나는 것으로 철저히 인간적인 방법임을 알고서도 아내에게 한 마디 반대도 없이 아내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인 방법과 잔꾀로 성취해보려는 아내와 그 뜻을 같이 한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신의 뜻과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한 인격체인 여종 하갈을 생산의 도구로 이용한 죄악,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질서인 일부일처제를 파괴한 죄를 범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지 못하고 스스로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섣부르게 행동하므로 장차 큰 비극의 씨앗을 뿌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브람의 기대와는 달리 아브람 가정은 하갈의 몸을 통해 태어난 이스마엘로 인해 긴장과 불화가 생겨났고, 아브람과 사래와 하갈 이 세 사람 모두 심각한 갈등과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스마엘이 잉태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창 16:12)

    이 말씀대로 훗날 첩의 소생 이스마엘은 오늘날 아랍 민족의 시조가 됨으로 해서 중동 전쟁의 뿌리 깊은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인간의 얄팍한 지혜로 이뤄보고자 하는 것은 교만일 뿐 아니라 이웃을 고통에 빠지게 하는 악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라고 약속한 자식은 아브람과 한 몸인 사래에게서 태어난 자식입니다. 
    첩의 자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래가 낳은 자식과 여종 하갈을 통해 낳은 자식을 분명히 분별해서 말씀하십니다. 

    갈라디아서 4:22-23을 보겠습니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 9:7-8)

    사래의 뜻을 따라 하갈이 낳은 자식은 ‘육체를 따라 낳은 자식’이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사래가 낳은 자식이 “하나님의 자녀”, ‘약속의 자녀’입니다. 아브람의 상속자는 ‘약속의 자녀’라야만 합니다. 

    2. 오늘 본문은 아브람이 종의 자식을 낳은 후 13년이 지난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새롭게 확신케 하시는 말씀입니다. 후손에 대한 약속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자 끝까지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조급하게 하갈과 동침하여 가정 분란의 갈등과 고통을 초래했던 아브람에게, 그의 나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창17:1-2)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아브람은 ‘육체를 따라’ 태어난 이스마엘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문제아로 자라가는 것을 볼 때마다 자신의 믿음 없었던 행동에 대해 후회되기도 했지만 지난 13년 동안, 즉 나이 100세가 다 되어가는데도 하나님께서 후손에 대해 한 마디 말씀이 없었던 것이 불안했습니다. 몸은 날로 노쇠해져 가고 마음 역시 가정 갈등으로 인해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지난 날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고자 했던 자신의 생각, 그리고 아내 사래의 뜻에 따라 종의 자식을 낳은 일 등으로 하나님께서 혹시 자신을 버리신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으로 좌절하고 낙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후손에 대한 모든 소망을 접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백수(白壽)의 나이 99세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 el shad·dai)으로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언약을 다시 한 번 확신시켜 주신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제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며 절망할 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며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새롭게 하시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라.”(창 12:3)는 언약을 확실하게 이루시겠다는 뜻으로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창17:4-5)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한 가정의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람’을 ‘열국의 아버지’, 곧 ‘모든 민족의 아버지’라는 ‘아브라함’으로 개명(改名)하신 것입니다. 이는 아브람을 단순히 한 가문의 존경받는 조상이 아니라, ‘모든 믿음을 가진 사람의 조상’,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을 받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갈3:7-9)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이름도 언약에 걸맞는 이름, 즉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뜻의 ‘사라’로 개명하셨습니다. 분명히 90세의 할머니 사라의 몸을 통해 아들을 낳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7:15-16을 보겠습니다. 

    (창17:15-16)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그리고 정확히 1년 후,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가 되었을 때 ‘약속의 자녀’, ‘이삭’을 낳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 나이 99세에 찾아오셔서 언약을 재확인하시고 그 이름을 ‘아브라함’, 즉 ‘모든 민족의 아버지’라고 개명해주셨을 때, 아브라함은 온전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약속의 자녀’, 이삭을 낳았습니다. 로마서 4:19-22을 보겠습니다. 

    (롬4:19-22)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들을 이루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입니다. “엘”(EL)은 ‘전능하신 하나님’(The Strong One)이란 뜻이고, “샤다이”(Shadday)는 ‘어머니의 젖가슴’(the breast)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엘 샤다이”는 ‘어머니 젖가슴처럼 따뜻한 가슴으로 기적을 행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1) 먼저, “샤다이”(Shadday)는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셔서 우리 인생들을 얼마든지 풍족하게 양육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따라 나왔던 이방인들이 광야에서 날마다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었음에도 애굽에서 살던 때 먹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괜히 나왔다며 이렇게 원망불평을 터트렸습니다. ‘애굽에서 생선을 공짜로 먹던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그 밖에도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에 선한데,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입맛마저 떨어졌도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이같은 원망불평이 금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염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영양 실조되어 죽어가는 것처럼 소리쳐 울며 모세에게 대들어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가 견디다 못해 하나님 앞에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어찌하여 주께서는 주의 종을 이렇게도 괴롭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주님의 눈 밖에 벗어나게 하시어, 이 모든 백성을 저에게 짊어지우십니까? 이 모든 백성을 제가 잉태하기라도 했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했습니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저 혼자서는 도저히 이 모든 백성을 짊어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 무겁습니다.”(민11:1-14) 

    이러한 모세의 간구에 하나님께서 ‘이제부터 백성들을 돌보는 짐을 너 혼자 지도록 하지 않고 장로들 중 70명을 세워 함께 지도록 하겠노라. 그러면 너 혼자서 애쓰지 않아도 될 것이니라. 그리고 또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라. 내일 너희가 고기를 먹게 될 것이니라. 하루만 먹고 그치지는 아니할 것이니라. 이틀만도 아니고, 닷새만도 아니고, 열흘만도 아니고, 스무 날 동안만도 아니라, 한 달 내내, 냄새만 맡아도 먹기 싫을 때까지, 줄곧 그것을 먹게 될 것이니라.’ 

    그러자 모세가 되물었습니다. ‘장정만 60만명입니다. 애들과 노인들, 여자들을 모두 하면 200만명이 넘습니다. 그들을 먹이려고 애굽에서 나올 때 끌고 나온 양과 소를 다 잡는다 해도 턱도 없이 부족합니다. 바다에 있는 고기를 모두 잡은들,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나의 손이 짧아지기라도 하였느냐? 이제 너는 내가 말한 것이 너에게 사실로 이루어지는지 그렇지 아니한지를 볼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람을 일으켜 바다 쪽에서 메추라기를 몰아, 진을 빙 둘러 이쪽으로 하룻길 될 만한 지역에 떨어뜨리시어, 땅 위로 두 자쯤 쌓이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왠 떡이냐며 정신없이 주워 먹는데 씹지도 않고 삼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원망불평을 일삼았던 무리들을 진노하시자 그들이 고기를 입에 문채 죽음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땅에 묻고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습니다. ‘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원망불평하다 식탐(食貪)으로 죽음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을 양육하시되 하나님 말씀으로 양육하시고자 때로 광야 길을 걷게 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면 부족함이 없이 양육하시는 분이십니다.

    신명기8:1-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인생들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엘 샤다이”, 모든 인생들의 ‘양육자’이심을 믿고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샤다이”(Shadday)는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셔서 우리 인생들에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강한 힘을 베풀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 유명한 삼손이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힘의 상징인 머리털이 밀리고 말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들이닥쳐 삼손을 결박하자 과연 힘을 전혀 쓸 수 없었습니다. 

    삼손은 그 길로 블레셋에 끌려가 감옥에서 멧돌을 돌리는 비참한 노예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마치고 축제를 시작할 때 삼손을 불러 재주를 부리게 하기 우상숭배 신전에 세웠습니다. 
    삼손이 믿는 하나님보다 자기들이 숭배하는 우상 ‘다곤’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하나님을 조롱하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삼손이 신전 기둥 사이에 세워졌습니다. 
    그 신전에는 블레셋의 모든 지도자들과 수많은 백성들로 가득했는데 신전 지붕에만 3천명이 있었습니다. 

    이때 삼손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그리고 신전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자 신전이 한 순간에 무너져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전부 압사당했습니다. 그 때 죽은 자들이 삼손이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습니다.(삿16:1-31) 

    삼손은 자기 민족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 힘을 구하고 장렬하게 전사(戰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앙망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을 이기는 ‘새 힘’을 주십니다. 이사야 40:28-31을 보겠습니다.

    (사40:28-31)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전능하사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에게 베푸시는 ‘새 힘’이 날마다 충만하여 모든 일에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샤다이”(Shadday)는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셔서 우리 인생들을 만족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He is the Satisfier, who pours himself into believing lives). 
    ‘만족케 하신다.’는 것은 ‘풍족하게 하신다’(sufficiency), 
    ‘충만하게 하신다’, ‘부요하게 하신다’(enrich),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하신다’(fruitful) 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2:16-18을 보겠습니다. 

    (창22:16-18)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그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히 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이처럼 ‘엘 샤다이’는 구하고 생각하는 것에 더 차고 넘치도록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에베소서 3:19-21을 보겠습니다. 

    (엡3:19-21)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B.C.853년경 모압과 암몬, 마온이 연합군을 만들어 유다를 공격하고자 했습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은 즉시 전 백성에게 금식명령을 내려 기도에 동참하도록 하고 성전에 나가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주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세계 만민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분이 아니십니까? 권세와 능력이 주께 있으니, 아무도 주께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 이 땅을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시지 아니하셨습니까? 이 땅에 주의 이름을 위해 주의 성전을 건축하고 만일 전쟁이나 전염병이나 기근과 같은 재난이 닥쳐온다면, 하나님 앞, 곧 주의 이름을 빛내는 이 성전 앞에 모여 서서, 재난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겠고, 그러면 주께서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고 말씀하셨나이다. 이제, 암몬과 모압과 마온이 우리를 저렇게 공격하려고 하나이다. 우리를 치러 온 저 큰 대군을 대적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고, 어찌할 바도 알지 못하고, 이렇게 주님만 바라보나이다.’ 

    이같은 기도에 즉각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셨습니다. 

    “너희는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이러한 하나님 말씀에 찬양드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가 여호사밧이 백성들에게 외칩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그리고 거룩한 찬양대를 만들어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소리높여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며 감사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연합군으로 하여금 서로를 공격하도록 만들어 전멸시켜버렸습니다. 연합군 중 살아남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백성들을 데리고 가서 전리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전리품 가운데는 상당히 많은 재물과 옷과 보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자가 마음껏 탈취했는데, 전리품이 너무 많아서 운반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리품이 이처럼 많아서, 그것을 다 거두어들이는 데만 사흘이나 걸렸습니다. 

    나흘째 되던 날, 그들은 그 골짜기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브라가’ 골짜기라 불렀습니다. ‘찬양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적군을 이기심으로 유다 백성을 기쁘게 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연합대군을 치셨다는 소문을 주변 국가들이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사밧이 다스리는 동안 나라가 태평성세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에게 구하는 것 이상으로 축복하셔서 전승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전리품을 거두게 하시고 나라의 태평성세를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뜻대로 잘 통치할 수 있도록 지혜와 지식을 구했을 때, 지혜와 지식뿐만 아니라 구하지 아니한 부귀영화까지 베풀어주시되 전무후무할 정도로 축복하셨습니다.(대하1:9-12)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에게 ‘엘 샤다이’의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므로 온갖 구하고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베풀어주시는 은총과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엘 샤다이(El Shaddai)는 하나님의 히브리어 이름 중 하나입니다. 

    구약에서 등장되는 하나님의 이름은 다양한데요, 주로 야훼(Yhwh) 엘로힘(Elohim)이 사용되는데, 야훼가 약 6700회, 엘로힘이 약 2500회 정도 등장한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엘 샤다이 (El Shaddai) - 창 17:1, 출 6:3

    창세기 17:1
    아브람
    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출애굽기 6:3
    내가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엘 엘리욘 (El  Elyon) - 창14:19
    엘 로이 (El Roi) - 창 16:13
    등의 엘(El)이 들어간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1월 4일(토)

    본문 / 창세기 10-13장
    주제 / 복의 근원(창 12:2)
    성구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복의 근원이 될지라(You will be a blessing)
    사람들은 누구나 복을 받기를 원하며 복을 주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복은 무엇인가?
    어떻게 복을 받을 수 있는가?
    이 두 가지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바라크의 복
    복을 히브리어로 “바라크(bârak)라고 합니다.
    바라크라는 단어는 "무릎을 꿇다" "하나님께 기원하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복이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기원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물질의 복과 육체의 강건이 우선이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참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복을 영생이라고 선언합니다(133:3).
    따라서 영생의 복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요 17:3).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복은 무엇일까요?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일곱 가지 복을 살펴보겠습니다(창 12:2∼3)
    1. 자손의 축복: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2. 물질의 축복: 복을 주어
    3. 명성과 명예의 축복 :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4. 복된 존재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5. 하나님 편에 서는 것: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6. 보호를 받는 축복 :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리니
    7.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으로부터 우리가 받아야 할 복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그 복을 누리기 위하여 순종해야 합니다.
    복을 주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순종한 후에 복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아브람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옛 생활의 정든 곳을 포기할 때 복을 받을 수 있는 순종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은 먼저 내가 즐기던 세상의 것들을 포기하고 버려야만 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은 내가 포기하고 버려야 할 것들을 살필 줄 아는 믿음으로 하루를 시작해 봅시다.
    ♪ 찬송 / 예수 따라 가며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바라크(bârak) בָּרַךְ  스트롱번호 1288

    1. 무릎을 꿇다.  2. 하나님께 기원하다.  3. 피엘형 בֵּרֵךְ
    발음 [ bârak ]
    구약 성경  / 256회 사용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종류의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존재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는 사람이 이에 속합니다.
    두 번째 종류의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재앙을  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하고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만 하면 하던 일도 잘 안되고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세기 12:1-4)

    예로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은 복 받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래서 수저에도 ‘복(福)’자를 새기고, 사람 이름에도 ‘복’자를 넣습니다.

    복(福) : 복 복(福) / 시(示) 보일 시. 한 일(一). 입구(口). 밭 전(田)


    또 어떤 사람은 대문에다 ‘복’자를 써서 붙였습니다.
    ‘개문복래(開門福來)’라 해서 대문을 열면 복이 들어온다고, 다들 잠자는 이른 새벽에 문을 활짝 열어놓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복 받기를 원하는 것은 정상적인 것입니다.
    성공하고, 행복하고, 장수하며, 자손이 번창하는 것, 이런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복 받기 원치 않는 다면 저주가 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을 받겠습니까, 아니면 저주를 받겠습니까?
    우리는 마음속에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가지고 우리 개인적인 삶이나 직장, 사업,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 자체가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과, 복에 대한 약속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하나님은 과연 우리에게 어떻게 복을 주실 지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체적인 예를 들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아서 아브라함 같이 복 받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은 B.C. 2241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데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75세 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러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거부가 되었고, 100세에 자식을 얻었으며, 175세까지 살다가 평안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족보를 보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에서와 야곱을 낳고, 야곱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축복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게 되었고 온 인류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말씀에 기록된 대로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만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봉독한 성경말씀을 네 가지로 분류해서 축복 받는 비결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둘째,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셋째,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넷째, 아브라함이 그 말씀에 순종해서 따라갔다. 

    1.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 과거의 죄악된 삶에서 떠나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창 12:1a) 

    여러분, 이 말씀은 결코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본토’는 무엇입니까? 갈대아 우르 지역은 달의 신 ‘난다(Nannda)’와 그의 아내 ‘닌갈(Ningal)’여신을 숭배하는 도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살던 그 지역은 우상을 숭배하는 죄악의 도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본토’를 떠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우상과 죄를 버리고 떠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친척들’로부터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친척들로부터 떠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 당시는 친족 공동체였습니다. 친척들이 모여서 함께 일하고 생활하며, 그 공동체 안에서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친척들이 모여서 기득권을 행사하고, 서로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여태까지는 이렇게 친척을 의지하고, 친척의 도움을 받고 살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도움보다 하나님의 도움이 더 크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알게 하셨습니다. 

    게다가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유산, 상속, 이 모든 것도 버리고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더 큰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부모의 유산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부모가 주는 유산보다 몇십 배 더 많이, 더 풍족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토도 떠나고, 친척도 떠나고, 아비 집을 떠나면, 직접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쉽습니까? 여러분, 정말 이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아마 이 말씀을 듣고 갈등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정말 고향을 떠날 것인가? 친척을 떠날 것인가? 아버지의 집을 떠날 것인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세상을 택할 것인가 선택하는 과정에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택했습니다. 

    역대하 7장 14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악한 길에서 떠나 하나님의 전에 나와 겸비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땅을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악한 길에서 떠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겸손한 삶이요, 의로운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 말씀에도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나쁜 것, 좋지 않은 것, 도움이 되지 않는 것, 버릴 것은 버리고 새 것을 추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떠날 때는 떠나고, 버릴 때는 버려야 합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버려야 되겠습니까? 

    우상숭배를 버려야 됩니다(왕하 10:29). 돈이 우상입니까? 돈을 버려야 합니다. 명예가 우상입니까? 명예를 버려야 합니다. 권세가 우상입니까? 권세의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분노를 버리고(시 37:8), 거짓 행위를 버리고(시 119:29), 속이는 것을 버리고(잠 4:24), 악한 행동을 버리고(사 1:16), 악한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사 55:7). 욕심도 버리고(엡 4:22), 불의도 버리고(딤후 2:19), 세상 정욕도 버려야 합니다(딛 2:12). 

    순종하는 삶, 세상 것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가는 삶이 축복의 시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사람은 돌아설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올바른 길로, 의의 길로, 하나님께로 향할 줄 아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회개한 사람입니다. 

    한사람이 간증을 했습니다. 교회는 다니면서도 신앙생활은 별로 열심히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몸에 병이 걸렸습니다. 발에 딱지가 생겨 처음에는 ‘괜찮겠지’하고 생각했다가 나중에 병원에 가보니 피부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의사는 암이 퍼질지도 모르니 수술을 해야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마음에 두려움과 공포가 생겼습니다. 

    평소에는 기도하지 않다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수요예배, 금요일 예배, 주일 예배는 물론 새벽예배까지 나가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몸에서 암 증세가 다 떠나게 하시옵소서.” 

    그런데 한 번은 새벽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온 몸에 샤워를 하는 것 같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나니 마음속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나는 병에서 고침 받았다. 하나님께서 내 병을 고쳐주셨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병원을 다시 찾았습니다. 암 증상이 다 사라졌음을 확인했습니다. 기적적으로 병을 고침 받게 된 것입니다. 

    평소에 신앙이 좋지 않았다 하더라도 병에 걸리고,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을 당하면, 다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하게 됩니다. 그 때라도 겸손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죄악을 버리고, 불신앙을 버리고,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이젠 하나님 앞에 손들고 나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박대하시면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제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내 기도에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나가면 하나님께서 사랑과 은총으로 영접하시고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병을 고쳐주십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의 갈 길을 비춰 올바른 길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2.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나아가라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b) 

    가고 싶은 대로, 제멋대로 아무 데나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땅’은 앞으로 가서 살 땅, 비전(vision), 미래를 말합니다. 과거를 통해서 역사 하셨던 하나님은 현재도 역사 하시고, 미래에 앞으로 일어날 일도 말씀하시고 인도하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2000년대 하나님의 지시대로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은 과거의 죄악된 우상, 또 과거에 의존하던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삶을 향해서 신앙의 개척자요, 인생의 모험가로서 새로운 축복을 기대하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창세기 26장 2절 말씀에 이삭이 흉년이 들어 그랄 지역을 떠나 애굽으로 가려고 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그곳을 떠나지 말라고 지시 하셨습니다. 그곳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그 말씀에 순종한 결과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축복을 주셔서 백 배의 수확을 거두게 하시고, 창대하고 왕성하여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은 거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마다 축복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나와서 믿는다고 하면서도 가난하고 병들고, 어려움 당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습니까? 순종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영적인 축복, 물질적인 축복을 주시고, 환경과 생활을 통해서 역사 하시고 복의 길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잠언 3장 6절 말씀에도 솔로몬 왕이 말했습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내 생각, 내 지식보다도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문제나 큰 문제나 하나님 앞에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 뜻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뜻대로 행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결재를 받고 움직여야 합니다. 종이 상관의 허락 없이 제 멋대로 하면 나중에 어떤 결과가 옵니까?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결재를 받고, 인정을 받고, 허락을 받고, 하나님의 계시대로,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시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하시길 원하십니다. 꿈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창 20:6), 음성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왕상 19:12), 마음의 소원으로(시 21:2), 또는 환상을 통해서(시 89:19), 평강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교를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롬 8:16)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경시하거나 경홀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비록 내가 해 보지 않은 새로운 분야라 할지라도 희망과 꿈을 가지고, 비전을 가지고,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기 위해서 앞서 나가야 되겠습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Aquinas, Thomas ; 1225∼1274)는 “완전한 축복은 하나님의 비전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가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삶을 책임지시고 인도하여 주십니다. 

    어떤 청년이 신경쇠약을 앓고 있었습니다. 의사도 병명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청년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희망을 가지세요. 만약, 희망을 갖지 않는다면 당신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간곡하게 말했는데 청년은 ‘희망을 가지라’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죽는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이 청년은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죽을 거야. 나는 죽을 거야. 나는 죽을 거야.” 

    그런데 정말 몸이 점점 더 수척해 지고 눈이 퀭해지더니 자기가 말한 대로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하여 만족케 되느니라”고 했습니다(잠 18:20).
    ‘행복하다, 행복하다’하는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있지만, ‘아!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한가?’하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공한다’하는 사람은 성공하지만 ‘실패한다’하는 사람은 실패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하는 사람은 사랑 받지만,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해. 나는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거야.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셔.’하는 사람은 미움밖에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꿈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나가야 됩니다. 땅을 쳐다보지 말고, 하늘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는 사람은 땅을 쳐다봅니다. 그러나 땅을 쳐다보지 말고 하늘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인간들만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 인간 역사만 바라보면 낙심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을 쳐다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우리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새시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희망을 주십니다. 천국이 임박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셔서 부르짖는 자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승리를 허락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 7가지 축복을 받는 복된 존재가 된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2∼3) 

    창세기 12:2∼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일곱 가지 축복

    1. 자손의 축복 -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2. 물질의 축복 - 복을 주어,
    3. 명성과 명예의 축복  -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4. 복된 존재 -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5. 하나님은 나의 편이 되는 축복  -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하나님이 내편이 되고 내가 하나님 편이 되는, 하나님과 한편이 되는 축복입니다.
    6. 보호를 받는 축복 -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리니,
    하나님께서 모든 저주를 막아주시고 또, 보호하시는 축복입니다.
    7.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면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시고, 내편이 되신다면, 우리는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자 요셉은 가는 곳마다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보디발의 집에 팔려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을 축복하시니까 보디발의 집도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9장 5절 말씀에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고 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축복이 따라옵니다. 회사를 가면 그 회사가 잘 됩니다. 집안에 있으면 그 집이 잘 됩니다. 나라도 형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여러분이 복 있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꾸 남편에게 의존해서 복을 받겠다고 하지 말고, 여러분 자신이 축복을 받아서 남편을 도와주고, 부모에게 효도하시고, 많은 사람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신명기 28장 2∼6절 말씀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즉 조건부입니다. 무조건이 아닙니다. 축복은 조건부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물질로 순종하면 물질의 축복을 주시고, 몸으로 순종하면 건강의 축복을 주시고, 시간 드려 예배를 드리면 구원을 베풀어주시고, 기도하면 응답을 주십니다. 축복은 조건부입니다.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축복을 받느냐 안 받느냐는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1900년대는 어렵게, 가난하게, 궁핍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이제 2000년대는 하나님 앞에 풍족한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에 사도 베드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유업으로, 상속으로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모든 종류의 축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번성케 하시는 복(창 1:28), 자녀의 복(창 49:25), 대적으로부터 승리하는 복(출 23:22), 건강의 복(출 23:25), 형통케하시는 복(왕상 2:3), 구원의 복(시 3:8), 평강의 복(시 29:11), 장수의 복(시 34:12∼14), 물질의 복(시 132:15), 영생의 복(시 133:3), 지혜의 복(잠 19:8), 이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으로 풍족하게 채워 주십니다.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은 내가 복을 받아서 다른 사람도 축복 받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도 성공하고 당신도 성공하고, 나도 행복하고 당신도 행복합니다. 내 복을 타인에게,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그런 역사를 베풀어야 합니다. 

    기독교 국가는 많은 나라들을 도와줍니다. 기독교 회사도 많은 회사들을 도와줍니다. 우리도 교회에 나와서 집사, 권사, 장로 되어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으면,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많은 사람을 도와주고, 전도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인간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항상 현실보다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자기 계획보다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택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기적적인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충남 부여에서 한 교회 장로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간증했습니다. 그는 포도 농사를 지었는데 그 포도나무들 중에서 한 나무를 정해 놓고 ‘이 포도나무는 하나님 것입니다. 여기서 열리는 포도는 교회에 바쳐서 성찬식을 하겠습니다. 이 포도나무는 성찬식 하는 포도나무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드릴 포도나무를 정해놓고 포도농사를 시작했는데 얼마나 포도농사가 잘 되는지 풍작일 뿐 아니라, 질도 좋아서 포도농사로 아주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TV에 출연하게 되고, 일본연수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린다고 정해놓았던 그 포도나무 한 그루 때문에 온 포도원이 다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수박농사도 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교회 가기 전에 수박밭을 돌아보니 수박꽃이 만발하였습니다. 이럴 때 인공수정을 시켜야 하는데 교회는 가야 되겠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집사 시절에 ‘나는 꼭 주일성수 하겠다.’고 선포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장로가 되었으니 ‘성도들에게, 제직들에게 더욱 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게다가 주일 학교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수박농사를 망친다 하더라도 먼저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내 사명을 감당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수박은 하나님께 맡기고 교회로 갔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부랴부랴 수박밭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수박밭에 웬 개미떼가 그렇게 많은지 사방이 다 개미떼였습니다. 동태를 가만히 살펴보니 개미가 수박꽃에 붙어서 수정을 시켜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먼저 예배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개미를 통해서 수정시켜주시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수박농사, 포도농사가 모두 다 잘 되니 여기저기서 강의 요청이 오고, TV, 라디오에도 출연하고, 300개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간증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믿어도 올바로 믿으면, 진짜로 믿으면,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축복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믿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순종하는 척하면서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과 물질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브라함같이 하나님 말씀에 진정으로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 주시고, 많은 축복을 받게 하셔서 사람들 앞에 간증하도록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4.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다 - 말씀에 순종하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창 12:4)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아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어느 때라도 하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나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 물질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 중심, 자아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 순종했습니다.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고, 가라면 가고, 있으라면 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도 하나님의 역사 하심에 순종했습니다. 불기둥이 움직이면 자기도 움직이고, 불기둥이 멈추면 자기도 멈췄습니다.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자기도 움직이고, 구름기둥이 멈추면 자기도 멈췄습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는 대로, 역사 하시는 대로 따라서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약속과 축복을 성취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었고, 아브라함은 큰 축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 이름이 창대케 되어서 하나님의 벗, 믿음의 조상, 선지자, 열국의 아비, 그리스도의 조상, 여호와의 종 등 각종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을 통해서 예수께서 나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인류가 구원받고, 천국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축복 받았으니 우리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서 복의 근원이 되어야겠습니다. 

    신명기 15장 4∼5절에 모세는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강남교회에는 가난한 자 한 사람도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서 1장 19-20절 말씀에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순종 아니면 배반밖에 없습니다. 순종하려면 끝까지 순종하십시오. 

    어떤 사람은 한번 순종했다가 한번 배반하고, 다시 순종했다가 또 배반하고 그러니까 만날 제자리걸음입니다. 될 듯 될 듯 하면서도 안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안되고 현상유지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단 순종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역사 하십니다. 

    시몬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그러자 누가복음 5장 5절 이하에 보면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역사 하시면 차고 넘치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순종하는 자에게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는 자손의 축복을 받고(창 26:4∼5), 질병에 걸리지 않고(출 15:26), 은혜를 받습니다(출 20:6; 신 5:10). 장수합니다(신 4:40). 물질의 축복을 받습니다(신 15:4∼5).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만들어 주시고(신 28:1), 형통케 만들어 주십니다(신 29:9). 가정이 행복하고 잘 되고(왕상 11:38),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나며(요 14:23), 성령으로 충만함받고(행 5:32), 또한 순종하는 사람의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십니다(요일 3:22). 

    그러나 불순종하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합니다(신 28:15). 재앙과 질병이 닥칩니다(신 28:58∼59), 번영하지 못합니다(신 28:62), 하나님께 버림을 당합니다(삼상 15:23). 교회에서도 버림을 당합니다. 가진 것도 빼앗깁니다(삼상 28:18∼19). 죽음을 당합니다(왕상 20:36), 곤고에 들어갑니다(시 107:10∼11).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요 3:36). 그 사람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살후 1:8∼9). 

    하나님 앞에 순종한다는 것은 축복을 받는 특권입니다.
    여러분, 이 특권을 버리지 말고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순종할 줄 몰라서, 순종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탐욕과 욕심과 교만과 거짓과 도적질과 속임수로 그들은 복을 받은 척하지만, 그러나 오래가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만이 영원한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1월 3일(금)

    본문 / 창세기 7-9장
    주제 / 방주로 들어가라(창세기 7:1)
    성구 /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The LORD then said to Noah, "Go into the ark, you and your whole family, because I have found you righteous in this generation.

    방주로 들어가라(Go into the ark)

    방주로 들어간 노아의 가족들은 모두 여덟 명이었습니다.
    노아와 아내, 세 아들(세, 함, 야벳) 그리고 자부들(세 며느리들)

    한자의 "배 선(船)"자를 파자(破字)하면 "배 주(舟)" "여덟 팔(八)" "입 구(口)"라는 세 문자가 결합된 문자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여덟 명의 입이 배에 올랐다는 뜻으로 노아의 가족 여덟 명이 방주에 들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상형문자(象形文字)는 문자 자체에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문자인데 그 대표적인 문자를 "한문자(漢文字)"라고 합니다.
    따라서 어떤 학자는 한문자에 나타난 의미가 성경적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믿음의 가족들이여!
    만일 지금 노아 홍수 때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면 나의 가족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의 방주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는지 가늠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사건은 이미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이지만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나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믿음의 눈으로 헤아려 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시대에 방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느 교회를 선택해야 할까요?
    어느 목사를 따라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안으로(In Christ)"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는 입으로 예수를 구세주로 시인하라!(빌립보서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둘째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하라!(로마서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셋째는 온 몸과 마음으로 예수님처럼 살아가라!(디도서 1: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행 2:21).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로 들어가서 물로 심판을 하실 때 구원을 얻었다면 오늘의 시대는 오직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의 방주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직 구원의 방주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가족은 없는지요?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들도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나서야 하겠습니다.

    날 구원하신 예수를














    마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눅17: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히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벧전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후2: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창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방주(方柱) 테바(têbâh) תֵּבָה    

    1. 궤.  2. 방주. 3. 상자
    발음 [ têbâh ]
    구약 성경 / 28회 사용
    • 1. 명사, 여성  - 궤, 방주.
      • a. 명사, 여성 [노아가 만든] 방주, 창 6:14이하
      • b. 명사, 여성 [갓난 모세를 두었던] 상자, 출 2:5.
    • 관련 성경 / 방주(창 6:14, 7:1, 9:10), 갈 상자(출 2:3), 상자(출 2:5)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1백 20년 동안 신실하게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칭찬과 이해를 받을 수 있는 일을 하기는 쉽습니다.
    누가 들어도 상식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방주는 배가 아니었습니다.
    이상한 모양의 방주를 1백 20년 동안 짓고 있는 노아를 어느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고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말 중에 가장 이해되지 않는 말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이해되지 않는 말입니다. 2천년 전에 죽은 어느 한 청년의 이름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은 상식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7장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방주를 다 지은 노아에게 하나님은 ‘너와 네 집은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복입니다. 날이 좋고 심판이 없을 때에는 방주안에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류에 심판이 임할때에는 방주에 들어가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방주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장 1절을 보면 노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신앙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6장에서는 노아를 가리켜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7장 1절에서 또 다시 하나님은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보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는 변함이 없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여러분도 변함없는 신앙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폭풍과 비바람이 치고, 회사가 망하고, 자녀들에게 어려움이 생길지라도, 건강에 위기가 올지라도 여러분의 믿음이 변함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내가 너의 의로움을 보았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언젠가 하나님앞에 설 때 ‘너는 내 앞에서 의로왔다’고 평가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드디어 노아는 자기가 지은 방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다는 말은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신다는 의미입니다.

    6장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하나님이 1백20년 전에 노아에게 ‘내가 세상을 심판하리라’고 약속했습니다. 세상에 죄가 관영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는 방법입니다. 옛 것을 버려야 새 것이 나옵니다. 노아시대에는 물로 심판을 받았지만 노아시대 이후 인류가 쌓은 죄는 불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노아를 통해 구원을 계획하시고 방주를 지어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약속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인간은 배신합니다. 아무리 신실하고 착한 사람일지라도 한 두 번은 배신하고 몇 번씩은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몇천년을 지나도 배신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 부릅니다. 구약은 옛 적의 약속을 말하며 신약은 새로운 약속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모든 약속은 신약에서 모두 성취되었고 신약의 약속은 앞으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라는 사람을 택하여 구원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이 지금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곧 불의 심판이 올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로운 사람이 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노아입니다. 노아와 그 가정이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자신도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그 가족도 구원받습니다.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가정이 구원받을 줄 믿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심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속과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변함이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3장 19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하나님은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 적도 없고 만져본 적도 없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약속은 여러분에게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 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 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공중의 새도 암 수 일곱씩을 취하며 공중의 새도 암 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
    6장 19절을 보십시오.
    혈육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하나님은 동물의 모든 종을 보존케 하기 위하여 암수 한 마리씩 남겨 두었습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정결한 짐승은 일곱마리씩 들어가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방주는 광야와 같은 곳입니다. 방주는 그리스도인의 현주소입니다. 방주 안은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방주에 들어가는 자만이 은혜를 받고 복을 받으며 구원을 받습니다.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마리씩을 데리고 들어가라고 말했습니다. 정결한 짐승은 번식을 더 많이 시키려고 하는 것일까요? 짝을 지어 데리고 들어간 이유는 종족보존을 위한 것이었지만 정결한 짐승 일곱쌍은 제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정결한 짐승이란 제사를 드리기에 합당한 짐승을 의미합니다. 제사는 방주안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제사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 갖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그분에게 영광과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림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광 가운데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예배는 제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우리의 몸을 정결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하신 산제사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피의 제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 필요한 제사는 피의 제사입니다. 그래서 아벨이 동물의 피로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참 제사는 아벨은 비록 에덴동산을 쫓겨난 죄인이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죄인으로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복과 영광이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곳은 감옥도 영광의 자리로 변합니다. 예배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과 영광과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할 수 있는 정결한 짐승을 하나님이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여러분도 눈치챘을 것입니다. 좋을 것 같아 보였던 결혼생활도, 아이가 태어나는 일도, 돈을 버는 일도 죽을 때까지 고생입니다.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병에 걸릴 수도 있고 우리가 하는 사업은 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현실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예배드리는 자는 아무리 세상이 험해도 천국처럼 승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라는 사실을 이 험악한 세상 한복판에서 소리높여 외칠 수 있습니다.
    방주는 광야와 같습니다. 광야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듯이 방주 안에는 노아가 드리는 예배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과 기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 영혼이 소생하고 육체가 새로와지고 여러분의 삶에 풍성한 복이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그 열쇠는 바로 예배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지금부터 칠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에게는 기적의 7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믿는 여러분에게도 놀라운 기적의 7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적을 예배하는 7일입니다. 이 7일동안 하나님께서는 약속한 혈육있는 모든 동물들을 노아의 방주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용이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그 많은 짐승들이 어떻게 7일 동안 방주안으로 모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 많은 동물을 모두 방주안에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자연법칙이나 상식과 이성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의심하게 됩니다. 상식과 이성으로는 심판이 온다는 말을 믿을 수 없고 일주일안에 모든 동물들을 방주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영적인 법칙과 믿음의 법칙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쉬운 일입니다. 개미떼를 보면 먹이를 물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줄을 잘 맞추어서 지나갑니다. 하늘에 날아가는 기러기떼도, 꿀을 따는 벌도 정확히 자신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짐승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동물들이 한 순간에 짝을지어 쌍쌍의 모습으로 나타나 줄을 지어 방주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만일 노아가 동물을 잡아 방주안으로 넣겠다고 시작했다면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이와같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쉽게 해결됩니다. 그 많은 동물들이 때가 되자 방주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노아가 한 일은 그저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면 모든 일이 그저 힘이 들고 어려울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면 기쁘고, 쉽고,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동물들은 제각기 방주 안으로 들어왔고 무게의 균형을 맞추어 1층과 2층과 3층으로 나누어 자리잡았습니다. 기온이 낮고 햇빛도 없고 산소가 부족하면 동물들은 동면을 취합니다. 방주 안의 동물들은 1년동안 동면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방주안의 동물들을 다스렸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아주 쉽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생애에 하나님이 간섭하게 되시기를 원합니다. 8장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권념했다’라는 단어는 ‘기억했다’ 혹은 ‘간섭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안의 동물들을 간섭했다는 말입니다. 자녀를 키우기가 힘이 듭니다. 사춘기를 겪는 아이들도, 결혼한 자녀들도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돌봐주시면 스스로 알아서 성장합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복받고 살 수 있는 비밀입니다. 방주는 은혜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기 때문에 방주 안이 복받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방주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이 마지막시대에 노아의 방주와 같은 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교회를 떠나지 마십시오. 방주 안이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이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납니다.

    사실 방주안은 그렇게 행복한 장소는 아닙니다. 창도 없이 동물과 살아야 하는 곳입니다. 재미도 없고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 방주 안에 있는 기간은 고작 1년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일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광야의 삶은 40년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곳입니다. 방주는 노도 없고 돛도 없습니다. 방주는 의지대로 갈 수 없습니다. 그저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임의로 빠르게 혹은 늦게 가게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방주는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키가 없습니다.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갈 수 없습니다. 방주 안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믿는 것 뿐입니다. 만일 방주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다면 한 순간도 생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인생을 살아본 사람들의 결론은 ‘내 인생을 산 적이 없이 끌려 다녔다’라는 고백입니다. 인생 여정동안 회사에 의해, 어떤 사람에 의해 평생 노예처럼 끌려다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마칠 때 우리가 하는 말은 ‘허무하다’ 입니다. 자신이 인생을 운전한 것 같지만 계획한 대로 된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속고 있습니다. 인생의 결론은 죽음외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뢰할 때에만 인생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배를 운전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을 믿고 경배하며 찬양하며 그 분앞에 나아갈 때 자연의 법칙과 이성의 법칙을 넘어서서 초자연적으로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근심과 걱정이 내앞을 우겨쌌더라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만나도 답답하지 아니합니다. 홍해가 갈라집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 만나를 주십니다. 물이 없을때 바위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해주십니다. 절망이라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해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의 간섭하심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직장문제도, 자녀문제도, 이웃간의 문제도 하나님이 간섭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돈을 따라 다니지 말고 따라오게 하십시오. 이것이 방주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기준과 전혀 다른 새로운 기준, 영적인 법칙과 놀라운 믿음의 세계가 여기에 있습니다. 6-9절을 보십시오.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세라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대로 암 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7일동안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는데 비가 올 징조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억울하게 들어갔을 때에도 요셉에게 미리 총리대신이 되기 위한 각본이라며 미래의 일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믿음을 보십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기도할 때 사환에게 지중해 저편에 구름이 있는지 몇번이고 확인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일을 하지만 많은 갈등과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섬기면서 갈등과 의심이 나는 것은 정상입니다. 엘리야가 포기하지 않고 일곱번 기도했을때 지중해 저편에 손바닥만한 구름이 보인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 구름은 폭풍과 비바람을 몰고오는 하나님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갈등과 고민 속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일인가’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성에 순종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말하는 사람인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말하는지 확인해 보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칠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비 한방울도 오지 않더니 정확히 7일후에 홍수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사는 동안 의심과 갈등도 있고 사람들로부터 비판의 소리가 있을 지라도 여러분이 선택한 것을 의심하지 마시고 뒤돌아서지 마십시오. 그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여러분이 선택하신 일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기뻐하는 길인지 확신이 있다면 고난이 따르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이라면 사람의 박수소리가 없을지라도 그 길을 계속 가십시오. 11-12절을 보십시오.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하늘이 창을 열고 물을 쏟아 부었고 바다와 땅의 경계가 흐트러졌습니다. 사십주야동안 비가 내렸습니다. 방주를 짓는 1백20년동안 이 사실을 믿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홍수는 인간의 이성과 자연법칙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성의 속삭임이나 세상사람들의 이론에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역사는 곧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전도입니다. 이 세상을 구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이루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불의한 세계를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고, 깨어있어 게으르지 말고, 방관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같이 여러분을 통해 방주를 예비하시고 구원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2천/1만비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렵고 힘들어도, 환율이 올라도 선교사를 보내는 것입니다.


    방주로 들어가라(창세기 7:1—24)

    네피림의 시대

    1. 사람들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6:2)
    2.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6:2)
    3.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6:3)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6:4)
    5. 그들은 용사라(6:4)
    6. 고대 명성이 있는 사람이었더라(6:4)

    우리의 유일한 방주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1. 영세전에 그리스도(창 1:1-3)
    2. 성육신한 그리스도(요 1:14. 빌 2:5-9)
    3. 부활하신 그리스도(행 1:2, 고전 15:3-4)
    4. 재림하실 그리스도(행 1:11. 마 24:14)
    5. 심판주 그리스도(히 4:1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되는 것(마 16:16-20)

    인생의 근본문제

    1. 옛 뱀 - 만왕의 왕(요일 3:8)
    2. 원죄 - 대제사장(롬 8:1-2)
    3. 하나님 떠난 지옥배경 - 참 선지자(요 14:6)
    4. 성삼위 하나님의 비밀(마 28:18-20)

    방주의 특징

    1. 2절 - 모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것을 네게로 데려오며
    2. 10절 -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3. 16절 -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4. 18절 - 물이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5. 23절 -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자들만 남았더라.

    방주로 들어가라(누림)

    신앙의 본질 - 누림

    복음이해(방주를 만들라) - 복음화(방주로 들어가라)

    복음화(롬 1:1, 갈 2:20)

    복음화된 증거 - 문제, 위기, 갈등이 문제가 되지 않으며 소화시킴

    1. 방주의 열쇠(요 14:13-14)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2. 성삼위 하나님의 비밀(마 28:18-20) - 예배와 말씀 회복
    3. 보좌의 축복 -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일(9가지) - 기도회복
    4. 3시대 증인 - 현장회복

    방주로 들어가라(창세기 7:1—24)

    창세기에는 크게 네 사건과 네 인물이 나옵니다.

    창 1장 창조
    창 3장 타락
    창 6장 네피림과 노아홍수
    창 11장 바벨탑

    그리고 그 이후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창 3장은 하나님을 믿지 말고 네 스스로 하나님이 되라는 것입니다.
    창 6장은 나의 것을 찾으란 것입니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고 철학입니다.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어 스스로 생불, 부처가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진짜 불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메혹적이고 좋은 말입니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네 눈이 밝아져 깨달음을 얻어 하나님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3단체는 더 나아가 너 안에 다른 세계가 있다.
    다른 힘이 있다.
    다른 내가 있는데 그것을 찾으라 합니다.
    전부 네피림의 가르침들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정말 과연 가능할까요?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떠났는데 인간이 과연 눈이 밝아져 선악과 깨달음을 얻어 하나님이 되었습니까?
    파멸이었습니다.
    저주입니다.

    여러분 공산주의 사상이 이론상 얼마나 좋습니까?
    다 같이 생산하여 공평하게 나누어 똑같이 살자 얼마나 메혹적이 이념입니까?
    그러나 공산주의 이론대로 되면 정말 지상낙원이 되어야 합니다.
    단 한번도 그렇게 된 적이 없습니다.
    창 3. 6. 11장 나, 나의 것, 나의 성공, 네피림에 각인된 인간은 그런 존재가 절대 될 수 없습니다.

    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떠난 가인이 후예들이 나, 나의 것. 나의 성공을 주장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고 전쟁을 하여 네피림의 문화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네피림의 문화는 어떤 것일까요?

    서론-네피림의 시대

    네피림이란 말은 나팔이란 말로서 ‘위에서 떨어지다’ 동사가 명사화된 말입니다. 위에서 떨어져 공중권세를 잡고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세상 어둠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악한 영을 부리며 인생을 끊임없이 도적질하며 죽이며 멸망으로 끌고 가는 존재가 과연 누굽니까? 사단입니다. 이 사단이 나, 나중심, 성공중심의 문화를 깊숙이 심어 놓았는데 이 사단의 문화를 가르켜 ‘네피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대를 조금만 주목해 보세요. 완전히 네피림의 시대입니다.

    전부 ‘인권’이란 미명하에 극단적 이기주의 팽배하여 그 어느 시대보다도 나, 나의 것, 나의 성공중심의 시대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시대가 없었습니다.

    특히 요즘 MZ 세대들은 심각합니다. 비혼주의 청년들이 60%가 넘습니다. 페미니즘에 빠져 결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대용으로 애완동물을 키웁니다. 그래서 지금 온통 세상이 개판입니다. 자녀를 내 마음대로 결정하기 위해 정자은행, 난자은행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일단 살아 보고 결정하자는 동거 문화가 자연스럽게 정착 되었습니다. 결혼해도 아기를 낳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구 역사상 전쟁이나 큰 전염병의 재앙시대보다도 인류 역사상 출산율이 가장 낮아졌다는 것입니다. 기성세대는 이런 MZ 문화를 응원하는 사회적 분위기입니다. 여러분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참사랑이 아닙니다. 참 가정이 아닙니다. 전부 네피림의 문화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부패하고 포악한지 보험을 타기 위해 자기 친자식조차도 다치게 만들어 사고로 위장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이 시대를 보고 한탄하시고 근심하사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게 멸하리라(창6:12-13) 다 썩어 그 부패함이 온 땅에 가득합니다. 다치고 부러지고 생채기가 것은 치료하면 되지만 부패하여 썩어 문들어지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단호하게 잘라버려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네피림의 문화는 어떤 것일까요?

    (1)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6:2)

    언약가진 하나님의 아들들 셈의 후손들이 네피림의 문화 속에서 가인의 후손들이 낳은 딸들이 아름다움은 보고 매력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재앙의 시작입니다. 재앙 막을 언약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들이 네피림의 문화에 동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2)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6:2) 네피림의 절대 가치는 전부 나, 나의 것, 나의 성공입니다.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물질만능주의입니다. 최고의 우상이 맘몬, 돈입니다.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살아도 그 수준이 영적어린 아이들입니다.

    바울은 이 네피림의 시대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는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한 자들을 눈여겨 보라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은 자기 영광의 몸의 형제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3:20-21)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네피림이란 말속에는 위에서 떨어지다 라는 말도 있지만 거인, 장부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네피림의 모든 가치들은 물질의 크기와 양이 기준입니다. 남 들보다 더 크게 웅장하게 멋있게 만들어 이것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게 하여 문화를 만들고 흐름을 주도하여 세상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프리메이슨이 아닙니까?

    (5) 그들은 용사라 네피림의 정의는 힘이 기준입니다. 힘의 논리입니다. 약육강식입니다.

    (6) 고대 명성이 있는 사람이었더라. 자기 이름을 드러내어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피림의 문화입니다. 재앙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노아야 너를 위하여, 네 가문과 가정을 위하여, 생명보존을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 하였습니다.

    오늘은 이제 방주를 만들었으면 ‘방주로 들어가라.’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더니 이 방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 우리의 유일한 방주(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배경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일까요?

    (1) 영세 전에 그리스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태초에 ‘베레쉬트’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로부터 계신 하나님, 생명의 빛이십니다.

    (2) 성육신한 그리스도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을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게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예수 그리스도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기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2:5-9)

    (3) 부활하신 그리스도

    ‘데텔레스타’이 내가 다 이루었다(요19:30) 그가 고난을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1:3)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증거로 아무도 따라 할 수 없는 유일한 증거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 생명입니다.

    (4) 재림하실 그리스도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 이 천국 복음의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도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예수 그리스도는 세계복음화 되는날 반드시 재림하실 것입니다.

    (5) 심판주가 되시는 그리스도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3) 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방주가 되시며 피난처가 되시며 온전한 배경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방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중에 주 안에서. 그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되는 것(마16:16-20)

    인생의 근본문제는 하나님을 떠나 죄와 사단에 장악된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다른 것으로 절대 해결이 안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해결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마귀의 일을 멸한 만왕의 왕이십니다.(요일3:8)

    크라쉬-박살내다. 가루로 만들다. 흔적도 없게 하다.하는 뜻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단번에 완전히 영원히 해방시키신 대제사장이십니다. (롬8:1-2)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떠난 지옥배경 속에 살던 우리에게 하나님 만날 수 있는 새롭고 살 길을 여신 참 선지자이십다. (요14:6)

    (4) 예수 그리스도는 성삼위 하나님의 비밀을 누리는 열쇠, 키입니다.(마28:18-20)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말씀이 성취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좌의 능력 천군천사가 동원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좌의 권능 모든 흑암이 결박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좌의 배경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좌의 증인 땅끝까지 증인되는 것입니다.

    3. 방주의 특징

    (1) 2-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만약 제가 하나님이라면 부패하고 패역한 세상를 멸하기로 작정한 이상 이참에 모든 부정한 짐승은 아예 씨를 말려야겠다. 하겠는데 방주 안에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함께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정결한 짐승이든 부정한 짐승이든 무조건 방주 안에 들어가면 삽니다. 구원의 기준이 선행, 열심, 노력, 공로가 아니라 방주가 유일한 구원의 기준입니다.

    (2) 10-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저는 이 구절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자마자 홍수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방주 안에 들어간 후 칠 일 뒤에 시작되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제 생각인데 노아가 이런 생각을 한 번쯤은 했을 것 같아요. 혹시 홍수가 나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한편 멀쩡한 날이 산꼭대기에 방주를 짓고 그 안에 7일 동안 들어가 있는 노아를 보고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저 미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받드시 성취됩니다. 묵묵히 언약을 붙잡고 남은 자. 순례자, 정복자의 길을 우리는 가야 합니다.

    (3) 16-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마지막 방주의 문을 노아가 닫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문을 닫으셨습니다. 그래서 한 번 닫힌 방주의 문을 아무도 열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번 닫히면 더 이상 구원의 기회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을 다해 전도해야 합니다. 살려야 합니다.

    (4) 18-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드디어 홍수가 나서 물난리가 난 것입니다. 방주를 예비한 노아에게 물은 구원의 수단이 되었지만, 방주를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물은 멸망이요

    (5) 23-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자들만 남았더라. 여러분 오늘 말씀을 그냥 대충 들으시면 안됩니다. 이 방주의 특징은 ‘오직’입니다. 유일성입니다. 절대입니다. 다른 것으로 절대 안됩니다. 그냥 물에만 뜨면 되지 그래서 패타이어 주부나 고무보트를 만들면 안됩니다. 반드시 방주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특징입니다. 성경은 오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이 아닌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오직이 아니면 네피림을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방주로 들어가라

    1. 방주로 들어가라
    이것은 중요한 복음의 본질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종교의 본질은 노력과 열심이지만 복음의 본질은 피난처와 배경이요 그래서 누림입니다.
    방주 밖에 사람은 발부치고 오만 수고를 다 하지만 방주안에 있는 사람은 그 방주를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두 번째 중요한 메시지는 방주를 만드는 것은 복음 이해를 말하는 것이요 방주로 들어가란 복음화를 말씀합니다.

    ③ 복음화가 되었다는 말은 방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노예가 됨을 말합니다.(롬 1:1, 갈 2:20)

    ④ 복음화가 된 증거는 모든 문제, 위기, 갈등을 다 소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주되신 그리스도를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요?

    (1) 방주의 열쇠(요 14:13-14)-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2) 성삼위 하나님의 비밀을 누리는 것입니다.(마 28:18-20)-예배와 말씀의 키는 성삼위 하나님의 비밀을 누리는 것입니다.

    (3) 보좌의 축복-하나님의 나라와 그 일(9가지)

    (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현장을 회복하여-3시대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치명적 함정은 3가지는 무엇인가?

    2. 네피림의 문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하나님은 왜 노아시대에 홍수심판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4. 네피림의 시대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 방주는 어디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5.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되는 것은 무엇인가?

    6. 방주의 특징을 말하라

    7. 신앙의 본질은 무엇이며 어떻게 누려야 하는가?


    사람의 딸들과 결혼한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일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가?
    그동안 제기된 주장들을 정리하면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 상대적으로 급이 낮은 신들
    둘째, 왕족이나 귀족 등 지체 높은 집안의 청년
            이 경우 ‘사람의 딸’들은 천민 출신의 후궁들을 가리킨다.
    셋째, 타락한 천사들
          이 경우 ‘사람의 딸들’은 인간 여인들이다.
    넷째,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인 셋의 후손들
         이 경우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들이다.

    첫 번째 견해는 성경을 로마나 그리스 신화와 같은 내용으로 보지 않는 한 해당되지 않는 견해이다.
    성경은 다신론 신화에서나 볼 수 있는 신들의 계급 개념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두 번째 견해는 유대인 랍비들이 가장 선호하는 해석으로 천사들은 성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확신에서 출발하였다.
    그런 주장의 근거로는 시편 82편 1절에서 재판장들이 신들이나 지존자의 아들들과 동일시되고 있다는 사실, 또 다윗 혈통의 왕은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삼하 7:14; 시 2:7), 그리고 우가리트(Ugarit)의 왕 케렛(Keret)을 엘(El)의 아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 등이 제시된다.
    이 해석은 왕들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음으로써, 즉 백성의 아내와 딸들을 강제로 후궁을 삼음으로써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역사 이래 부도덕한 정치가들의 폭력에 분노하는 대중의 구미에는 맞지만 통치자들의 그런 죄가 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이 되는지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왕들의 죄와 인류에 대한 심판인 대홍수와는 인과관계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세 번째 견해는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지지를 받고 있다.
    필로(Philo)나 요세푸스(Josephus)와 같은 유대인 학자들, 클레멘트(Clement)나 오리게네스(Origenes)같은 유수한 초기 기독교 학자들, 심지어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까지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그런 주장의 근거로는 구약에서 하늘의 영적 존재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욥 1:6; 2:1; 38:7; 시 29:1), 베드로후서 2장 4~5절에서 ‘범죄한 천사들을 심판하신 것’과 ‘홍수로 세상을 심판한 것’을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 유다서 6절에서 천사의 타락과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을 나란히 언급한다는 사실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
    여호와의증인이나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등에서는 현재에도 그들의 중요한 교리 중의 하나로 가르치고 있다.
    특히 여호와의증인들은 이 창세기 6장 2절을 인용한 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천사들은 육체를 입었으며 아름다운 여자들과 성적 관계를 갖기 위하여 땅으로 내려왔던 것입니다…이들 천사들과 그들의 아내에게서 아기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아기들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거인이 될 때까지 그것도 악한 거인이 될 때까지 성장하였습니다…천사들은 익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버리고 영물로서 하늘로 돌아갔습니다”(「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93~94).
    그들은 네피림도 곧 천사와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나온 반신반인(半神半人)적인 거인으로 본다.
    그러나 이 견해는 다음과 반론들을 직면하고 있다.

    1. 창세기 6장의 본문은 문제 당사자들이 ‘인간임’을 분명히 한다.
    2절에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문제가 언급된 다음, 3절에서 여호와는 그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한다.
    문제 당사자인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라면 왜 하나님은 그 책임을 ‘사람’에게서만 찾으시는가?
    이어지는 홍수 기사는 인간에게 내린 심판의 내용이다.

    2. 비록 구약에서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린 희미한 증거들이 있지만 히브리서 1장 5절은 선명하게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하셨느냐”고 묻는다.
    이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천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조하여 강조하는 것이다.

    3. 예수는 천사들은 본질적으로 성관계를 맺는 존재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결혼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대답하셨다(마 22:30).
    같은 내용을 누가복음 20장 35~36절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라고 대답하였다.
    어떤 이들은 여기 천사와 같다는 말은 ‘죽지 않는다’는 말을 받는다고 하지만 본문은 분명히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도 없고’ ‘죽지도 않는 것’이 ‘천사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4. 예수께서는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무절제한 식욕과 성욕에 탐닉할 것을 예언하시면서 그것이 “노아의 때와 같이”(마 24:38) 되는 일이라고 하셨다.
    만일 노아의 때의 범죄를 천사들과 사람 사이의 범죄로 이해한다면 결국 예수께서는 재림 전에 또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 된다.
    예수는 마지막 때에 있을 사람들의 식욕과 성욕의 타락을 홍수 때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네 번째 견해는 어거스틴, 제롬, 칼뱅 등이 지지하는 전통적인 기독교 견해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은 그의 백성들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표현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아들 내 장자”(출 4:22)라고 불렀으며, 또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른다(신 14:1; 32:5; 시 73:15; 호 1:10).
    이들의 죄가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 일부다처주의인데 가인의 후손인 라멕에게서 바로 그 죄가 시작되었다(창 4:19~23).

    이러한 이해는 지금 이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신학적 메시지 즉, 하나님께서 홍수를 통해 세상을 멸할 수밖에 없다는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과 일치된다.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대홍수의 심판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 즉 ‘사람들의 도덕적인 타락’에 관한 것이다.
    창세기 4장 26절에 기록된 대로 마치 그리스도를 섬기기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것처럼 여호와를 섬기기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던 셋의 자녀들이 어떻게 타락해 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사람들을 존재케 하는 것은 거룩한 그의 백성을 통해 그분의 뜻을 실현하기 위함인데 그 일을 감당할 그의 백성이 타락했기 때문에 세상을 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여 에덴에서 추방한 것처럼 셋의 후손이 타락하여 세상을 멸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경우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을 의미한다.
    엘렌 G. 화잇도 이 이해를 지지하였다.

    “셋 자손이 가인의 후손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미혹하여 그들과 통혼함으로 여호와를 불쾌하게 하였다”(부조, 81).

    이들의 죄는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 것이었다.
    여기에 사용된 ‘보았다(saw)…아름다움(good)…삼는지라(took)’는 창세기 3장 6절에 묘사된 하와의 범죄, 즉 금단의 나무를 ‘보았다(saw)…직 하고(good)…따 먹고(took)’와 밀접한 평행을 이루고 있다.

    4절 하단에 이 결혼으로 탄생한 후손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그 후에도’라는 부사는 이러한 결혼이 지속적으로 이어졌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용사’란 단지 ‘용기 있는 자’란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폭력을 행하는 힘 있는 자’라고 보는 것이 문맥과 어울린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문장에서 홍수를 내릴 수밖에 없는 근본원인으로 제시된 것이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6:11, 13)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왜 셋의 후손의 경우는 늘 아들들이고 가인의 후손의 경우는 늘 딸들인가?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즉, 셋의 후손의 딸들이 가인의 후손의 아들들의 ‘멋진 모습’을 보고 그들과 통혼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을 주어로 삼은 것은 셋의 후손들이 수동적으로 유혹당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그런 선택을 하였음을 강조하는 표현기법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것은 죄가 될 수가 없다.
    문제는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 행위였다.
    그야말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성적 문란의 범죄 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1월 2일(목)

    본문 / 창세기 4-6장
    주제 /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창 6:2)
    성구 /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the sons of God saw that the daughters of men were beautiful, and they married any of them they chose.

    대한성서공회에서 발행한 인명 사전에 의하면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수가 대략 1,888명이라고 합니다.
    만일 사람들의 이름만 기록하여도 지금의 성경책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대에 따라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필요한 사람의 이름과 그들이 행한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것을 계시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등장한 이후 수 많은 사람들이 땅(아다마)에 번성하였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만 구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이렇게 구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참 복잡합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성도들 중에서도 서로 생각이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생각이 비성경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주장에 몰두하는 성도들을 하나님을 좋아하실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요즈음처럼 교회안에서도 좌파의 주장을 옹호하는 성도들도 있고 우파의 주장에 동조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단지 생각의 차이가 아니라 그 생각의 결과를 예측한다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의 차이가 세상을 어지럽힐 때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이라는 용어가 더 심각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면 이러한 현상은 불행한 사례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이해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복잡한 해석 보다는 이해를 돕는 결과를 중심으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사람의 딸들'이란 "경건하지 못한 가문의 딸들"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경건한 가문의 아들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나는 어떤 계열의 가문에 속할까를 생각하며 오늘도 경건한 믿음의 가문을 형성하는 일을 위하여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예수 따라가는 십자가의 군병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경건한 계열의 남자들
    사람의 딸들이라는 불경건한 계열의 여자들로 구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대표적인 해석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1.
    지체 높은 집안의 아들들이라는 유대 랍비들의 해석
    히브리어의 일반적인 용례로 볼 때 비성서적이라고 하겠습니다.

    2. 성경의 일반적 용례에 따른 천사라는 해석
    본문의 전후 문맥 관계상 합당하지 않습니다.

    3. 셋 계통의 경건한 자녀들이라는 해석 
    가장 유력한 해석으로 경건한 신앙인들을 지칭할 때에도 사용되었기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합니다(신 32:5. 시 73:15. 80:17. 호 1:10).

    사람의 딸들에 대한 대표적인 해석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1. 지체 낮은 천민 계층의 딸들이라는 해석
    2. 인간의 딸들이라는 해석
    3. 가인 계통의 불경건한 자녀들이라는 해석
    세 가지 해석 중에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자연스럽게 대응하는 세번째 해석이 가장 많이 선호하는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세기 6:1-4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체에 대한 세 가지 주요 견해
    1. 타락한 천사들
    2. 힘 있는 인간 통치자들
    3. 사악한 가인의 후손들과 결혼한 거룩한 셋의 후손들

    첫 번째 가설에 비중을 두는 것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어구는 항상 천사들을 지칭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욥 1:6; 2:1; 38:7).
    이 견해의 잠재적 문제는 마태복음 22장 30절에서 천사들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지적입니다.
    성경은 천사들이 성별을 지녔거나 또는 자녀를 생산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다른 두 견해들은 이 문제를 만들지 않습니다.

    2와 3의 견해의 약점은 평범한 남성들이 평범한 여성들과 결혼하는데 왜 그들의 자손이 “거인” 혹은 “고대에 유명한 용사들, 명성이 있는 자들”이 되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힘있는 남성들이나 셋의 후손들이 평범한 여성들이나 가인의 후손들과 결혼하는 것을 결코 금한 적이 없으셨는데 왜 이 땅에 홍수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셨냐는 것입니다(창 6:5-7).
    창세기 6장 5-7의 다가오는 심판은 창세기 6장 1-4절에서 발생한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직 타락한 천사들과 인간인 여성들의 음란하고 비뚤어진 결혼만이 그러한 가혹한 심판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첫 번째 견해의 약점은 마태복음 22:30에서 선언한 내용입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하지만 본문은 “천사들은 결혼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단지 천사들은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할 뿐입니다.

    둘째, 마태복음 22:30은 “천국에 있는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이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관해 신경 쓰지도 않고, 하나님의 계획을 훼방할 방법들을 적극적으로 찾는 타락한 천사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천사들이 결혼 및 성적인 관계들을 맺지 않는다는 사실이 사탄과 그의 마귀들도 그렇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첫 번째 견해가 가장 나은 것 같습니다.
    천사는 성별이 없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로부터 자식을 얻었던 타락한 천사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흥미로운 ‘모순’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영적인 존재인 반면에(히 1:14), 그들은 인간의 육체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막 16:5).
    소돔과 고모라의 남성들은 롯과 함께 있었던 두 천사와 성관계를 갖기를 원했습니다(창 19:1-5).
    천사들이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심지어 성적인 존재로 변해서 자녀까지 낳을 가능성은 있다는 견해는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왜 타락한 천사들은 이런 일을 좀 더 자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이런 악한 죄를 저질렀던 타락한 천사들을 옥에 가두심으로 말미암아 다른 타락한 천사들은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유다서 1:6에 묘사된 것처럼).
    초기 히브리 해석자들과 외경, 그리고 위경은 타락한 천사들이 창세기 6:1-4에 묘사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데 전부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로 결코 논쟁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창세기 6:1-4을 타락한 천사들과 인간 여성들과의 관계로 보는 견해는 강력한 문맥과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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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피림,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딸은 각각 누구인가요? (창세기 6장 4절)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1. 네피림 (Nephilim) : 성경의 이 부분에서는 "네피림"이라는 단어는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의 결합으로 인해 네피림이 탄생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네피림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성경에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적인 전통과 학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해석이 이뤄져 왔습니다. 이는 초자연적인 존재, 권력이 강한 사람들, 혹은 다른 종류의 신화적인 존재 등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아들들 : 이 부분은 종종 천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을 지칭하는 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신성하고 영적인 신하로 간주되며, 종종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자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3. 사람의 딸들 : "사람의 딸들"은 인간 여성을 나타냅니다.
      이 문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결합하여 네피림을 낳았다고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성경의 비유적이거나 상징적인 내용일 수도 있으며, 여러 해석이 가능한 복잡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종교적인 전통과 학문적인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제시될 수 있습니다.

       네피림이 거인인지에 대해서는 성경 자체에서 명확한 답변이 제시되지 않아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합니다.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네피림은 거인"이라고 기술되는 부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에 관한 해석들이 존재하며, 종교적인 전통과 학자들 간에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일부 종교적인 전통과 학자들은 네피림을 거인으로 이해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네피림을 그저 권력이나 영향력이 강한 사람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종교적인 신화나 상징으로 해석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창세기  6:1-8)

    1.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본문이 중요한 이유는 본문의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로 모든 생명을 심판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5: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말씀대로 재림 전의 마지막 심판 때에도 (벧후 3:6-7) 노아 때에 있었던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그래서 노아 때에 있었던 일들이 어떤 일들이었는가를 아는 것이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은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난해 구절이다.

    ① 하나님의 아들들이 어떤 자들이길래 자기들이 좋아하는 대로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을 수 있었을까?

    ②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들이 낳은 자식이 네피림 (거인족 또는 포악한 사람들)이 되어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4절)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에 대한 해석에는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

      기독교 전통적 해석

          셋의 경건한 후손(남자들)

               가인의 불경건한 후손 (딸들)      

       유대교 전통적 해석

              타락한 천사들

                      인간의 딸들

    기독교 전통적 해석

    하나님의 아들들을 셋의 경건한 후손, 사람의 딸은 가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 하나님의 백성 (성도)을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다(출 4:22-23 갈 3:26, 롬 8:19, 롬 9:25-26)

    출애굽기 4:22-23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갈라디아서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로마서 8:1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9:25-26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둘째. 예수님께서 천사는 결혼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에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마 22:30, 눅 20:34-36)

    마태복음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누가복음 20:34-36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셋째. 하나님은 경건한 셋의 후손들끼리 결혼하여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셨는데, 셋의 후손 남자들이 자신의 정욕이 이끄는 대로 가인의 후손들 (요즘 말로 불신자들)과 결혼하여 타락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유대교 전통적 해석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사람의 딸들은 인간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욥기에서는 천사를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다. (욥 1:6, 2:1, 38:7)

    욥기 1: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욥기 2:1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욥기 38: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② 창 19장에서 나오는 천사들은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롯과 함께 식사를 하였으며. 소돔 사람들이 천사들에게 성관계를 시도했다.
    그래서 천사들이 땅으로 내려와서 여자들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이다.

    ③ 경건한 남자와 불경건한 여자가 결혼한다고 네피림 (거인, 장수)이 나올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를 지칭한다.

    ④ 당시 세상의 지배층은 가인의 후손들이다(창 4:20-24).
       
    그런데 어떻게 사회적 약자인 셋의 후손들(남자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대로 지배층인 가인의 후손(딸들)을 아내로 삼을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천사와 관계를 맺으면 아주 특출한 자식(네피림)을 낳아 세상의 권력과 부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으므로 어떤 여자도 천사의
        청혼을 거부하지 않고 천사의 아내가 되었다.

    창세기 4:20-24
    아다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⑤ 사람과 천사가 결합함으로써 더 이상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 수 없는 (DNA가 완전히 변질되어버린) 별종의 인간이 나왔기 때문에, 홍수로 심판하셨다는 주장이다.

    ​2. 본문의 교훈

    안타깝게도 기독교 안에서 위 두 주장이 자신의 해석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상대방을 사단이라고 비판하면서 논쟁을 벌이고 있다.
    두 주장 다 일리가 있지만, 동시에 시원한 해석을 주지는 못하고 있다.
    따라서 말씀 앞에서 '나는 잘 알지 못합니다'라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벧후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오늘 본문이 주는 메시지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네피림이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 때 임했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저 세상에서 뛰어나고 위대하고 똑똑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 살 때 바로 그때가 마지막 때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주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노아 때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 장가가는 것이 그들 삶의 목적이었다'라고 표현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이유는 당신의 생명을 주어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는 삶의 목적이 완전히 바뀐 자들이다. (고후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믿는 자의 가장 간절한 소원은 예수님과 사랑 가운데 온전히 하나가 되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엡 1:4, 롬 8:29)

    에베소서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나 크리스천들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똑같이 산다면 (네피림이 되어 내 이름 내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 한다면) 그것이 바로 영적 간음이고, 그것이 바로 현대판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합일 것이고 마지막 때의 징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십자가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한 곳인가?

    ①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신 곳이요

    ② 네피림이 되고 싶어 하는 나의 옛사람을 못 박은 곳이다.

    ​십자가에서 네피림이 되고 싶어 하는 나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이미 함께 죽었음을 알 때 내 안의 옛사람의 본성이 힘을 잃게 되고 예수님의 생명이 자라기 시작한다(롬 6:6).

    로마서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교회만 다닌다고 마지막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네피림이 되고 싶어서 선악과를 먹었던 아담의 본성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처리되어야 한다.
    이때 예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심판이 지나간다.
    물론 내 노력과 결단으로 옛사람의 본성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처리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네피림이 되고 싶어 다들 미쳐있을 때 노아 한 사람은 바보처럼 살았다.

    노아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목표로 살았더니(9절) 심판으로부터 구원받는 은혜를 입었던 것이다(8절).

    창세기 6:8-9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이 세상은 네피림을 요구한다.
    실력과 능력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도 이 땅 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능력과 실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세상에서 잘 먹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 다른 사람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실력을 갖추는 것이다.

    ​크리스천의 인생 목표는 네피림이 되어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과 마음을 가져서 내가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되어 삶의 목표가 바꾸어진 자만이 참 크리스천이고, 그때 심판이 지나가게 되고(요 5:24), 참 안식과 참 평강을 누리게 된다(히 4:10)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히브리서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주님!
    네피림이 되어
    내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는 아담의 본성이
    날마다 십자가에서 처리되고,
    살든지 죽든지 우리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인지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1)지체 높은 집안의 아들들이라는 유대 랍비들(Onkelos, Symmachus, Aben Ezra)의 견해
    (2)성경의 일반적 용례(욥1:6; 2:1; 38:7; 단3:25)에 따른 '천사'란 견해(Lxx, Josephus, Tertullian, Luther, Baumgarten, Kurtz, Alford)
    (3)셋 계통의 경건한 자녀들이란 견해(Augustin, Calvin, Lange, Keil, Wordsworth).
    이 중 (1)은 히브리어의 일반적 용례로 볼 때 비성경적이며
    (2)는 본문의 전후 문맥 관계상 상치된다.
    그리고 구속사적으로 보더라도 이들을 천사들로 볼 경우, 향후 전개되는 타락사는 인간의 타락사가 아니라 천사의 타락사가 된다는 견지에서도 이 견해는 합당치 못하다.
    따라서 세번째 견해가 가장 유력시되는데 이는 신학적 의미와도 부합되며 또한 이와 유사한 표현이 경건한 신앙인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성경 관례(신 32:5; 시 73:15;80:17; 호1:10)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는다.

    사람의 딸들
    -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에 대해서도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지체 낮은 천민 계층의 딸들
    (2)인간의 딸들
    (3)가인 계통의 불경건한 자녀들.
    이 중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과 자연스레 대응을 이루는 견해는 역시 세번째 것이다.

    아름다움(*, 토브)
    - '좋은', '선한', '아름다운' 등의 뜻을 지닌 단어로 성격상에 있어서의 사랑스러운 면을 뜻할 수도 있으나 여기선 외견상의 '미모'를 의미한다(24:16; 단 1:15).

    보고(*, 라아)
    - 단순히 보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세히 주목하거나 인지하는 것을 의미한다(왕상 20:7; 시 31:7).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신앙과 선한 행실, 아름다운 마음씨 등과 같은 응당 주의를 기울여야 할 내면적 아름다움은 외면한 채 인간의 외모에만 관심을 집중하였다는 것은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곧 하나님을 아는 자든 모르는 자든 간에 당시의 모든 사람이 전도된 가치관을 갖고 있었음을 증거해 주는데 이처럼 온 사회가 타락 일변도로 흘러갈 때 그 결국은 필연적으로 패망일 수밖에 없다(7절).

    좋아하는
    - '선택하다', '지정하다'는 뜻.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들의 안목의 정욕을 좇아 고르는 것을 의미한다(고후 10:7).

    아내(*, 나쉼)
    - '이솨'(2:24; 3:20; 4:17)와 교체하여 쓸 수 있는 단어로 '아내' '부인'(4:19; 삿 8:30)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여인'(신 20:14; 느 8:3)을 뜻하기도 한다.

    삼는지라(*, 라카흐)
    - 4:19에서는 '취하였으니'로 번역되었다. 일반적으로 결혼하는 것을 뜻하는 관용적 표현이다(출 6:25; 민 12:1).



    창세기 3:1 / 그런데 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Now the serpent was more crafty than any of the wild animals the LORD God had made. He said to the woman, "Did God really say, 'You must not eat from any tree in the garden'?"

    간교하니라 - עָרוּם 스트롱번호6175

    1. 교묘한.  2. 신중한
    발음 [ ʽârûwm ]
    구약 성경  / 11회 사용
    • 1. 형용사, 남성 교묘한, 창3:1, 욥5:12, 15:5
    • 2. 형용사, 남성 신중한, 잠12:16,23.
    • 관련 성경 /  간교한(창3:1), 간사한(욥15:5), 교활한(욥5:12), 슬기로운(잠12:16, 22:3), 지혜로운(잠14:8).




  • 창세기 2:7(개역 개정) /  여호와 하나님이 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 땅의 흙으로(עָפָר מִן־הָאֲדָמָה - 아파르 민 하아다마)

    여기서 '땅'(아다마)은 '붉다'(애 4:7; 나 2:3)란 뜻이 있는 '아담'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땅이 붉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표현이다.
    또한 '흙'(아파르)은 '재'(민 19:17), '진토'(삼상 2:8), '가루'(왕하 23:15)로도 번역되며, 동사로 사용될 때는 '부스러지다'(왕상 20:10)는 뜻도 지닌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가 없다면 흙과 같이 부스러지기 쉬운 보잘것 없는 존재이며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존재이다.

    * 사람(הָאָדָם - 하아담)

    성경에서 히브리어 '아담'이라는 단어는 약 560회 가량 나온다.
    그런데 이 단어는 본절에서와 같이 '사람'(man)을 뜻하기도 하고,
    19절 이하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과 같이 최초의 사람인 '아담'(Adam)이란 특정한 인물의 이름을 뜻하기도 한다. 

    이 단어의 어원과 거기 담긴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아담'이 '땅'을 의미하는 '아다마'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본절의 기록과 일맥 상통하며,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이다. 

    둘째, '만들다'(make), '짓다'(build)란 뜻을 지닌 앗수르어 '아다무'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즉 아담이란 뜻은 사람이 '지음을 받는 존재' 즉 피조물임을 강조하는 이름이라는 견해이다.  

    셋째, 히브리어 첫번째 알파벳인 '알렙'과 '물' 혹은 세계의 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바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알파벳 '멤' 그리고 두 글자 사이에 '중심'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알파벳 '달렛'을 사용하여, 처음과 끝이 의미하는 모든 피조 세상의 중심에 사람이 위치함을 보여 준다는 견해이다.  

    넷째,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로힘'의 히브리어 알파벳 '알렙'과 짐승이란 뜻을 지닌 '베헤마'의 히브리어 알파벳 '멤'사이의 존재가 사람임을 보여 준다는 주장이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신적 요소를 지닌 반면 육체의 정욕대로 살 때는 짐승과 같은 존재로 타락할 수도 있다는 견해이다.  

    다섯째, '빛이 나다'라는 의미가 있는 아람어에서 유래하여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존귀한 존재임을 나타낸다는 견해이다.

    여섯째, '결합시키다'라는 의미가 있는 아람어에서 유래하여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살았던 전 인류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자임을 나타낸다는 견해이다.  

    일곱째, '붉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사람의 피부 빛을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이다.  

    이 중에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첫 번째 견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견해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창세기 1:26-27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전인격적인 창조에 관한 기술이라면 본문은 특별히 사람의 육신의 창조에 관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 생기를(נִשְׁמַת חַיִּים - 니쉬마트 하임)

    본문의 '생기'는 '숨'(왕상 17:17), '호흡'(신 20:6), '기운'(욥 4:9), '영혼'(잠 20:17) 등으로도 번역되는 '네솨마'의 연계형 '니쉬마트'와 '살다'(23:1), '활발하다'(시 38:19) 등에서 유래해 '생명'(1:30; 신 28:66)으로 번역되는 '하이'의 복수형인 '하임'이 결합된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생명들의 기운'이며, 곧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방법으로 부여하신 '생기'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 생령(לְנֶפֶשׁ חַיָּה - 레네페쉬 하야)

    '숨', '호흡'을 뜻하는 '네페쉬'와 '생존', '존재'를 의미하는 '하야'가 합해서 된 말로 '살아 있는 존재'란 뜻이다. 물론 '네페쉬'가 다른 곳에서 '혼'(Soul) 또는 '영혼'(Spirit)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였으나 여기서는 '호흡'(breath)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생령'이라는 말은 사람이 '영혼'을 지닌 존재임을 직접적으로 증거하는 구절은 아니다. 사람의 영혼은 오히려 1:26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란 말에 강력히 암시되어 있다. 그런데 번역 성경에서는 왜 동일한 단어를 일반 짐승을 가리킬 때는 '생물'(RSV, living creature)로, 사람을 가리킬 때는 '생령'(KJV, living soul)으로 번역했을까? 이러한 차이는 히브리어 단어 때문이 아니라 문맥의 차이를 반영하여 번역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짐승들은 말씀을 통하여 육체와 생명을 동시에 창조하신 반면 특별히 사람만은 그 육체를 흙으로 지으시고 그 생명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있게 하셨다. 이러한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여 창조된 사람은 살아 숨쉰다는  점에서 '네페쉬 하야'인 다른 동물들과 차이가 없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애정으로 그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생령'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1:27).


    *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לֹא־טֹוב הֱיֹות הָאָדָם לְבַדֹּו - 로 토브 헤요트 하아담 레바도)

    이 말씀은 분명히 1:31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하나님의 최종 평가가 있기 전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즉 본문은 인간의 자연 발생적인 고독과 완전한 만족의 결핍을 나타내 보인 것으로,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아직 창조 사역을 완성하기 전의 상태를 나타내 주고 있다.
    실로 하나님은 인간의 아직 채워지지 않은 내적 갈망을 만족시킬 '돕는 배필'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Yates).
    그리고 여기서 '좋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토브'는 상대적으로 '더 낫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신 뜻을 좇아 지으신 피조물 중에 보시기에 좋지 못한 것은 본래 하나도 없었다(1:31). 
    따라서 이 말은 다만 아담이 혼자 지내는 것보다 하와와 함께 거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낫다는 의미이다.

    창세기 1:31 /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이니라.
                          (God saw all that he had made, and it was very good. And there was evening, and there was morning--the sixth day.)

    * 돕는 배필(עֵזֶר כְּנֶגְדֹּו - 에제르 케네그도)

    '조력자', '반려자', '응답하는 자'(one who answers)라는 뜻
    성품과 신분에 있어서 남자와 같고 언제나 그 곁에 살면서 상호 위로와 기쁨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라는 뜻. 
    동시에 이 말은 남편과 책임을 나눠 지며, 이해와 사랑으로써 남편의 본성에 대응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섬기는 데 남편과 혼연일체가 되어 협조하도록 지음을 받은 존재란 의미도 지닌다.
    더불어 남편에 대한 아내의 역할을 암시하는 말로, 곧 아내의 일반적 기능이 '조력'에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말이 남성 우위론의 근거로 오용(誤用)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남녀의 차이는 신체적, 기능적 차이이지 인격적 차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다 그분의 성품을 함께 나눠 받은 동등한 인격체일 뿐이다(고전 11:11).

    고린도전서 11:11 /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In the Lord, however, woman is not independent of man, nor is man independent of woman.)


    1월 1일(수)

    본문 / 창세기 1-3장
    주제 /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창 2:7) - 아다마와 아파르
    성구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生氣)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

    이제까지 대부분의 성도들이 사람을 흙으로(아다마) 만들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을 기록한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합니다.
    이때 땅은 "아다마"라고 하며, 흙은 "아파르"라고 합니다.
    따라서 사람은 흙(아마다)으로 만든 존재가 아니라 아파르(먼지, 티끌)로 만든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는데 이때 흙은 아파르(먼지, 티끌)를 말합니다(창 3:19).
    "필경은 흙으로(아다마)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아파르) 흙으로(아파르) 돌아갈 것이니라."

    사람은 먼지와 같은 티끌로 만들어진 존재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생의 결말은 아파르 즉 티끌과 같은 먼지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대한성서공회에서 발행하는 인명 사전에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을 1,888명이라고 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2025년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에 모두 성공하기 위하여 “말씀따라 살고 말씀따라 순종”하는 신앙적으로 발돋움 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 못하면 그 결말은 ‘아파르’로 만들었으니 ‘아파르’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면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천국 백성이 될 것입니다(빌 3:20).

    "형상"이란 히브리 단어는 "체렘"이라고 합니다.
    체렘이란 거대한 돌덩어리가 조각가의 손에 의해서 어떤 모양의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작품이 될 수 없는 떨어져 나가는 조각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내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내가 갖고 있었던 잘못된 버릇과 행실과 언어와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모두 벗겨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회복하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 오롯이(모자람이 없이 온전하게) 세워지는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일에 성공하는 복된 2025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송 /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형상(체렘. tselem) 스트롱번호צֶלֶם 6754

    1. 그림자.  2. 형상
    발음 [ tselem ]
    어원 / ‘그늘지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7회 사용
    • 1. 명사, 남성  - 그림자, 시 39:7(6), [은유적으로] 헛된 것, 시 73:20
    • 2. 명사, 남성  - 형상, 창 1:27, 5:3, 9:6, 우상, 형상, 왕하 11:18, 암 5:26.
    • 관련 성경 / 형상(창 1:26, 삼상 6:5, 시 73:20), 석상(민 33:52), 우상(왕하 11:18, 겔 7:20, 암 5:26), 그림자(시 39:6).




































































     

























































































    John(요한복음) 2 - 11 / 28 / 2024(목) 추수감사절 / 12장 - 21장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일 2:1.  3. 요 14:16, 26
    발음 [ paraklētŏs ]
    어원  /  3870에서 유래
    •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 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2:1.
      • b.  [성령을 가리켜서] 요14:16,26, 15:26, 16:7.
    •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 26, 16:7), 대언자(요일 2:1).


    παρά  스트롱번호  3844

    1. ~에게서.  2. 막 14:43.  3. παρὰ κυρί- ου ἐγένετο αὕτη: 이것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었다
    발음 [ para ]

    καλέω 스트롱번호 2564

    1. 부르다.  2. ㉠ ~라고 부르다. 3. 초대하다
    발음 [ kalĕō ]
    • 1.  부르다.
      • a.   ㉠ ~라고 부르다, 이름하다, 일컫다, 마21:13, 눅20:44, 롬9:25, 약2:23. ㉡ 이름을 주다, 명명하다, 눅1:59. ㉢ [수동] 이름을 받다, 이름을 가지다, 일컬음을 받다, 눅1:60, 행1:19. ㉣ ~라고 한다, 마2:23, 눅1:32, 고전15:9, 히3:13.
      • b.  초대하다, 마22:3, 눅14:8, 고전10:27.
      • c.  불러모으다, 마20:8, 22:3, 25:14, 눅19:13.
      • d.  부르다, 마2:15, 행3:11, 히11:8.
      • e.  호출하다, 마4:21, 막1:20, 행4:18, 24:2.
    • 2.  [비유적] 부르다, 마9:13, 막2:17, 롬4:17, 고전1:9, 벧전5:10.
    문법설명  / 미완료 ἐκάλουν, 미래 καλέσω, 제1부정과거 ἐκάλεσα, 완료 κέκληκα, 완료 수동태 κέκλημαι,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κλήθην, 미래 수동태 κλη- θήσομαι, 2753의 어간과 유사
        관련 성경  / 부르다(마2:7, 막2:17, 행4:18), 일컬음을 받다(마5:19), 청하다(마22:3, 눅14:10, 12), 칭하다(마22:43, 눅20:44, 행3:11), 일컫다(마27:8, 눅1:32, 요일3:1), 이름을 짓다(눅1:62), 청함을 받다(눅14:8, 요2:2), 부르심을 받다(고전7:18,22, 엡4:1, 골3:15, 딤전6:12), 부르심을 입다(갈5:13).








    παρακαλέω 스트롱번호 3870

    1. ~곁에서 부르다.  2. 행 28:20. 3. 청하다
    발음 [ parakalĕō ]
    • 1.  ~곁에서 부르다, 옆으로 부르다, 호출하다, 소집하다.
      • a. [τινά+부정사가 따르는 경우] 행28:20.
      • b. 청하다, 이끌다, 권하다, 눅8:41, 행8:31.
      • c.  ~의 도움을 청하다, 마26:53, 고후12:8.
    • 2. 호소하다, 강권하다, 역설하다, 권면하다, 격려하다, 행16:40, 고후10:1, 히3:13.
    • 3. 요구하다, 간청하다, 마8:5, 막1:40, 눅8:31, 행28:14.
    • 4. 위로하다, 격려하다, 마5:4, 눅16:25, 고후1:4, 엡6:22.
    • 5. 위로해보다, 정답게 말하다, 눅15:28, 행16:39, 고전4:13, 살전2:12, 딤전5:1.
    • 관련 성경 /  위로받다(마2:18, 5:4, 고후13:11), 간구하다(마8:5, 눅8:31, 몬1:10), 빌다(마18:32), 구하다(마26:53, 막5:10, 눅7:4), 권하다(눅3:18, 행11:23, 빌4:2), 청하다(행8:31, 13:42, 28:14), 간청하다(행9:38), 권면하다(행15:32, 고전4:13, 살전2:11), 위로하다(행16:40, 고후7:6, 엡6:22), 여쭈다(행24:4), 원하다(히13:19), 위로하다(롬12:8), 위안받다(골2:2).




    화냥년, 병자호란과 환향녀(還鄕女)

    병자호란 때 잡혀간 우리 조상 여인들이 되돌아 올 때  홍제천에서 더럽혀진 몸을 깨끗이 씻고 들어 오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화냥년이라고 돌팔매질을 해 대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화냥년’은 ‘화냥을 비속하게 이르는 말’로, 그리고 ‘화냥’은 ‘서방질을 하는 여자’로 풀이되어 있다.
    ‘화냥질, 화냥기, 화냥데기’ 등의 단어들로 보아서 ‘화냥년’은 ‘화냥’과 여자를 낮잡아 이를 때 쓰는 말인 ‘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화냥’은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화냥’에 대해서는 여러 어원설이 제기되어 왔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화냥년’을 ‘환향녀(還鄕女)’에서 왔다는 설이다.
    즉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붙잡혀 갔던 여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그 여인들이 몸을 버린 여자들이어서 그들을 지칭하던 ‘환향녀’가 오늘날의 뜻을 가진 ‘화냥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발음도 비슷하고 민족적 설움도 끼어 있어서 일반인들에게 그럴 듯하게 들렸던지, 오늘날은 이 설을 믿는 사람도 꽤나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설은 어디까지나 민간어원설일 뿐이다.

    ​또 한 가지는 만주어 ‘hanyang’ (음탕한 여자)에서 왔다는 설이다.

    이 단어가 병자호란 때 중국 심양에 끌려갔던 여자들이 돌아오면서 같이 들어와 우리나라에 퍼졌다는 것인데, 증거가 없어서 믿기 어렵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화냥’이 만주어 ‘hayang'으로 부터 온 ’화랑(花娘)‘에서 유래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그 근거가 불분명하다.

    ​‘놈을 기르다’의 뜻인 ‘한양(漢養)’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옛 문헌에 ‘화냥’을 ‘양한(養漢)’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고 ‘양한(養漢)’의 뜻을 몰라 ‘한양(漢養)’으로 잘못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설은 남자 무당을 ‘화랑이’라고 했는데, 떠돌이 남자 무당은 이 여자 무당 저 여자 무당을 찾아 다녔기 때문에 행실이 좋지 않은 사람을 ‘화랑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여자의 경우에 적용되면서 ‘화냥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훈몽자회에 ‘격(覡)’을 ‘화랑이 격’이라고 하고 또 ‘화냥’을 ‘화랑’(花郞)이라고도 한 문헌이 있어서, 여기에 암시를 받아 해석한 것이지만, 이제 이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 ‘화냥’이란 단어는 아무래도 그 의미로 보아 ‘화냥’의 ‘화’가 ‘꽃 화(花)’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왜냐하면 여성에게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냥’도 한자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냥’에 해당하는 한자가 없으니 ‘화냥’과 연관된 단어를 찾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화냥년’의 ‘화냥’과 같은 여자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어떤 단어를 썼을까?
    먼저 발견되는 단어는 ‘화랑(花娘)’이다.
    이 ‘화랑(花娘)’은 일찍부터 우리나라에서 쓰인 단어이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20년(1489년) 3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 이제 유녀(遊女)라 칭하고 혹은 화랑(花娘)이라 칭하며 음란한 짓을 제멋대로 하니, 이를 금제(禁制)하는 조목을 뒤에 자세히 기록합니다.
    ○ 화랑과 유녀가 음란한 짓을 하여 이득을 꾀하고, 승려와 속인(俗人)이 서로 즐겨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니,
    ○ 모든 업자[色人]가 화랑과 유녀를 숨기고 사람과 통간(通奸)하게 하고 인하여 이익을 얻는 자는, 범인(犯人)과 같은 죄를 주고 재리(財利)는 관(官)에 몰수하소서.

    ​결국 ‘화랑(花娘)’은 이 기록에 보이는 대로 ‘음란한 짓을 제멋대로 하는 유녀(遊女)’를 말한다.
    그렇다면 ‘화랑’(花娘)은 원래 무슨 뜻일까?
    중국 원말 명초의 학자인 도종의(陶宗儀, 호는 남촌(南村))가 지은 ‘철경록’(綴耕錄) 권14에 ‘창부를 화랑이라고 한다’
    (娼婦曰花娘)는 기록이 있어서 ‘창녀’를 ‘화랑’이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화랑’의 중국어 발음이 ‘화냥(huániãng)’이어서 이를 차용한 것이 바로 ‘화냥’인 것으로 보인다.

    ​‘화냥’이 최초로 등장하는 문헌은 ‘박통사언해’(1677년)다.
    ‘이 도적 화냥년의 난 나괴 야 (這賊養漢生的小驢精)’에서 ‘화냥년’이 등장하는데, 이것과 같은 계통의 박통사신석언해(1677년)에는 ‘네 이 도적 養漢여 나흔 져근 나귀아’로 나타난다.
    여기의 ‘양한’(養漢)은 ‘남자와 통간하는 여자’를 말한다.
    그리고 이 ‘양한’이 바로 ‘화랑’(花娘)과 동일한 뜻이다.
    역어유해(1690년)에 ‘養漢的’을 ‘花娘’으로 풀이하고 있어서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재삼이 편찬한 ‘송남잡지’에 ‘지봉유설’(1614년)에 ‘양한’에 대해 기록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즉 이수광이 말하기를 ‘창녀’를 ‘양한적’(養漢的)이라고 했다 (芝峯曰 今中朝號娼女爲養漢的)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기록으로 보아 ‘화냥’과 ‘화랑’(花娘)과 ‘양한(養漢)’은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화랑’(花娘)의 중국어 발음이 ‘화냥’과 같은 것에 주목하게 된다.
    따라서 ‘화냥’은 그 어원이 ‘화랑’(花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화랑’(花娘)이 ‘화랑’(花郞)과 발음이 같고 또 실제로 ‘花娘’을 ‘花郞’으로도 표기한 예들이 있어서 ‘화냥년’을 무당이나 신라 화랑과 연관시켜 풀이한 것도 나오게 된 것이다.

    ​‘화냥년’의 ‘화냥’은 여러 형태로 쓰이었다.
    ‘화냥, 화냥이, 화랑, 환양년, 화랑년, 화낭, 하냥년, 한양년’ 등이 등장하는데, 이중에서 ‘화낭’과 ‘화랑’은 한자 ‘花娘’을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듯하다.

    ​화냥이(慣嫁人) <몽어유해보(1768년)> 화냥이(養漢的) <1778방언유석(1778년) > 화냥이(慣嫁人) <한청문감(1779?)> 화낭(養漢的) <화어유초(1883년> 년긔가 젹고 기미 아름다오믈 인여 져 분슈 모로 사들은 모다 그릇 화랑의 류로 알더라 <홍루몽(19세기)> 환양년(歡兩女) <한불자전(1880년)>

    화랑년(花嫏女) <국한회어(1895년)> 뎌 화낭이 뎌의 부친이 뢰횡에게 마져 즁샹엿슴을 보고 (那花娘見父母被雷橫打了, 又帶重傷)<수호지(20세기)> 온 동리에서 판박어 노흔 화냥년이니 한 번 화냥이나 두 번 화냥이나 <뽕(1925년)> 무슨 일이 그렇게 바쁘냐, 이 하냥년 같으니 <어머니(20세기)> 내가 딴 서방을 했꺼나 한양년의 짓을 했거나 <어머니(20세기)> (놈) 쌩 화냥년의 죵 지금 야동ㅅ집은 두 발을 동동 굴으며 를 쓰는 <목단화(1908년)>

    ​예나 이제나 직업적으로 몸을 파는 여인이 있었음을 앞의 성종실록의 기록(모든 업자[色人]가 화랑과 유녀를 숨기고 사람과 통간(通奸)하게 하고 인하여 이익을 얻는 자는)에서 알 수 있는데, 오늘날의 ‘화냥년’은 행실이 좋지 않은 여인을 말하기는 해도, 직업적으로 몸을 파는 여인을 지칭하지는 않는 것 같다.
    남녀관계가 방정치 못한 여인을 일컫는 말로 ‘논다니’란 단어도 쓰이었는데, 이 단어는 남자 ‘건달패’에 대응되는 여인을 일컫는 어휘인 것 같다. 19세기 말부터 ‘갈보’란 말도 쓰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한자어는 ‘창녀’(娼女)와 ‘유녀’(遊女)일 것이며, 그 이후에 직업적으로 국내 남자를 대하는 여인은 ‘창녀’로, 그리고 외국인을 상대하는 직업여성을 ‘양공주’(洋公主)로 부른 적도 있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모두 ‘윤락녀’(淪落女)로 통일되어 부르게 되었다.

    ​건달패와 논다니들이 어우러져서 약물이 아닌 누룩국물을 마시고 그 심부름을 하는 모양이다.

    <상록수(1935년)> 혜쥬 창녀 별악을 쳐 쥭으니 <태상감응편도설언해(1852년) 갈보(娼女)<국한회어(1895년)> 어떤 특별한 뜻을 나타내는 단어가 이렇게 다양하게 분화되어 변천하는 것을 보면서 언어는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화냥년의 어원은 환향녀(還鄕女)라고 한다.

    ​출세해서 비단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오면 이 것을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고 하듯 환향(還鄕)은 고향으로 돌아옴을 의미한다.
    즉, 화냥년의 본뜻은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還鄕女)라는 얘기가 된다.
    물론 욕도 아니며, 우리가 알고 있는 바람피는 여자와는 완전히 무관하다.

    ​왜 환향녀(還鄕女)가 화냥년으로 바뀌었을까?

    호란이나 왜란처럼 이땅이 전쟁터가되면 문화재뿐만 아니라 힘없는 백성까지 수탈의 대상이되었다.
    물론 이러한 수탈이 남성보다 여성에 집중된다는 것은 전쟁의 주체가 남성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호란이나 왜란에 잡혀간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 일종의 평화협정을 맺을때 상당수는 우리나라로 되돌려 보내진다.
    이렇게 되돌려 보내진 여자가 환향녀(還鄕女)이다.

    ​금의환향(錦衣還鄕)처럼 환대받지 못하는 환향(還鄕)이기, 조선조 최대의 덕목인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자의 환향(還鄕)이기에 환향(還鄕)에 년(女ㄴ)이 붙어 화냥년이된 것이다. ​

    자기나라도 지키지 못해 죄없는 백성을 침탈의 대상이 되게하고, 자신의 여자도 지키지 못해 환향녀(還鄕女)가 되게한 우리의 슬픈 역사, 그러한 역사의 주체였던 우리 남성이 붙여준 슬픈 이름이 화냥년인 것이다.

    ​화냥년이라는 얘기를 들으면 슬퍼진다.
    화냥년이라는 말, 화냥년이라는 말을 만들 수 밖에 없는 역사도 슬프다.
    그러나 이러한 뜻도 모르고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슬프기보다는 안타깝다.

    ​화냥년은 우리의 슬픈 역사이다.
    이러한 슬픈 역사를 다시 반복되지않게 하는 일, 이 것이 슬픈 역사를 만들어온 우리 남성들의 업이 아닐까?


    12-31-2024(화) 요한복음 14:27-3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의 평안(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you. I do not give to you as the world gives.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and do not be afraid.

    평안(1515) 에이레네(ĕirēnē) εἰρήνη    

    1. 평화.  2. 눅 11:21
    발음 [ ĕirēnē ]
    • 관련 성경  / 평안(마 10:13, 눅 2:29, 행 9:31), 화평(마 10: 34, 눅 12:51, 행 10:36), 평강(눅 1:79, 요 20:19, 롬 1:7), 평화(눅 2:14, 19:42), 안전(눅 11:21), 화친(눅 14:32), 화해(행 7:26), 태평(행 24:3).


    근심(5015) 타라쏘(tarassō) ταράσσω    스트롱번호5015

    1. 뒤흔들다. 2. 뒤끓게 하다
    발음 [ tarassō ]

    • 관련 성경  /  소동하다(마2:3, 행17:8, 벧전3:14), 놀라다(마14:26, 막6:50, 눅1:12), 두려워하다(눅 24:38), 움직이다(요5:7), 불쌍히 여기다(요11:33), 괴롭다(요12:27, 13:21), 근심하다(요14:1,27), 괴롭게 하다(행15:24), 교란하다 (갈1:7), 요동하게 하다(갈5:10).

    두려움(1168) 데이리아오(dĕiliaō) δειλιάω 
    1. 비겁하게 되다. 2. 겁을 먹다.  3. 요 14:27.
    발음 [ dĕiliaō ]
    ασα, 1169에서 유래
    • 1. 비겁하게 되다, 겁을 먹다, 요14:27.
    • 관련 성경  /  두려워하다(요 14:27).
    평안(1515) 에이레네(ĕirēnē)  εἰρήνη

    1. 평화. 2. 눅 11:21(안전하되)
    발음 [ ĕirēnē ]
    • 관련 성경 / 
      평안(마10:13, 눅2:29, 행9:31), 화평(마10: 34, 눅12:51, 행10:36), 평강(눅1:79, 요20:19, 롬1:7), 평화(눅2:14, 19:42), 안전(눅11:21), 화친(눅14:32), 화해(행7:26), 태평(행24:3).

    누가복음 16:19-31 /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한 부자 : 자색 옷, 고운 베옷,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
                   부자도 죽어 장사되어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거지 나사로 :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다,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더라,
                          죽어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세상의 평안 - 육신적인 평안 / 부자
    하늘의 평안 - 신령한 평안 / 거지 나사로 


    오래 전에 어느 화랑에서 "평안"이라는 주제로 그림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다양한 화가들의 뛰어난 솜씨에 의해서 작품들이 전시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동양화 한 점이 있었습니다.
    거대한 폭포가 끊임없이 쏟아지는 폭포의 뒤편 작은 나무 가지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이 그림이 대상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작은 새가 거대하고 웅장한 폭포가 떨어지는 그 환경에서도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 참 평안이라고 화가에 의해서 표현된 것입니다.

    성경이 주는 평안은 이러한 평안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서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씀을 주셨습니다.

    가상칠언(架上七言)

    1.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모든 인류에 대한 용서는 사랑의 출발점

    2.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누가복음 23:43)

    개인에 대한 용서의 무죄 선언

    3. "여자여 보소서 아들 이니이다 ··· 보라 네 어머니라"(요한복음 19:26~27)

    부모 공경을 위한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 : 46, 마가복음 15:34)

    시편 22:1절을 인용

    5. "내가 목마르다" (요한복음 19:28)



    6.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7.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 23:46)

    A.D. 33년 4월 초순 금요일 일기 화창한 어떤 봄날 예루살렘성 밖으로 세 사람의 십자가의 죽음 행렬이 엄숙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목적지는 히브리말로 골고다요, 아람어로 된 말을 해석하면 해골이란 동산인데 여기까지 와서 각자가 메고 온 십자가에 이 세 사람을 달았습니다.
    그 중에 중앙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제 1언의 말씀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예수님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입니다.
    구약에는 아버지란 말이 없으나 예수님은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우리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주기도문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도는 아버지가 두 분이십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영혼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은 사랑의 인격적 참여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게 될 때 내 모든 문제는 해결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① 죄 많은 여인의 죄를 속죄하여 주실 때 그는 구원을 받고 평안히 돌아갔습니다. (눅7:36-50)
    ② 중풍병자의 죄를 사죄하여 주실 때 곧 건강하여 졌습니다. (마9:1-8, 요5:14)
    ③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만 속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26:28)

    2. 예수님은 원수들의 죄까지도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모든 인간들을 위한 죽음 이셨습니다.
    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눅23:34)
    ② 빌라도와 종교 지도자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요19:6-23)
    ③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마26:15-69)

    3. 우리에게도 용서하라고 친히 말씀 하셨습니다.
    ①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골3:13)
    ② 주기도문에서 명령 하셨습니다. (마6:12)
    ③ 일흔 번씩 일곱 번 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마18:21-22)

    제 2언의 말씀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우리는 양쪽에 달린 두 강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양쪽에 십자가에 달리고서도 그 죄를 깨닫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림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진심이면 얼마나 다행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에 보면 비방하였다고 했습니다. 객관적이요, 비판적이요, 야욕적인 말이었으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현재도 십자가를 신앙적으로, 주관적으로, 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강도처럼 비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지금도 강도처럼 죽어가면서도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비방하는 자가 많습니다. 고난과 십자가에서는 선한 말이 나오기 힘든 모양입니다만 중앙에 계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고 구세주임을 알았다면 구원을 호소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강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1. 예수님은 낙원의 주인이심을 의미합니다.
    ① 낙원을 예비하러 가셨습니다. (요14:1-6)
    ② 영원한 천국의 주인이십니다. (계22:1-6)
    ③ 하나님이 지으신 집은 세상의 집과는 다릅니다. (고후5:1-3)

    2. 낙원에 제일 먼저 간 사람은 강도입니다.
    ① 회개와 기도함으로 낙원에 갔습니다 (눅23:41-42)
    ②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눅23:40)
    ③ 예수가 의인이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함으로 낙원에 갔습니다. (눅23:42)

    3. 주님이 가시고 우리가 갈 낙원입니다.
    ① 거기서 세세토록 왕노릇 합니다. (계22:5)
    ② 세상 끝까지 함께 계십니다. (마28:20)
    ③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삽니다 (요14:3)

    제 3언의 말씀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27)

    세 번째 주님의 눈동자가 집중된 것은 여기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계신 곳입니다. 25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클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등 네 여인이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울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면서 부탁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격은 여인입니다.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게 되어 남편에게 송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제 예수님을 먼저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한없는 슬픔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친히 효도의 계명을 지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어려서는 부모님과 함께 성전에 예배하러 갔습니다. (눅2:41-51)
    ② 예수님이 효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엡6:1)
    ③ 십자가상에서도 어머니를 생각하셨습니다. (요19:26-27)

    2.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입니다.
    ① 십계명 중에 인간에게 주신 첫 계명이 효도입니다. (출20:12)
    ② 고르반의 진리를 설명하셨습니다. (막7:11)
    ③ 효도하는 자에게 장수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신5:16)

    3. 가상칠언중에 3언의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산 교훈입니다.
    ① 부모님에게 순종을 해야 합니다. (마21:28-31)
    ② 부모는 타락과 실패의 자식이라도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눅15:11-24)
    ③ 스승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요, 성도는 주 안에서
    한 형제요, 부모입니다. (막3:31)

    제 4언의 말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고뇌에서 비롯된 절규였습니다.
    죄 없는 자가 정죄를 당하고 허물없는 자가 박해를 받으며 은혜 베푸는 자가 잔인하게 죽어가는 일이 역사상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홀로 지시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시는 순간 주님으로서는 매우 심각한 세 시간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주님은 세상에 대하여는 더 할 말씀이 없고 성경에 응하기 위한 말씀을 하실 뿐이었습니다.
    이런 절규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

    1. 예수님의 이 순간은
    ① 흑암의 권세가 잠깐 이기는 모습입니다 (마27:46)
    ② 하나님이 얼굴을 돌이키신 순간입니다 (시22:1)
    ③ 하나님과 인간의 담을 허시는 순간입니다. (엡2:14-18)

    2. 4언의 산 교훈
    ① 버림받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십자가의 최고봉의 순간입니다. (딤전2:4)
    ② 죄인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다는 산 교훈입니다. (계21:8)
    ③ 예수님이 인간 대신 버림을 받으시는 순간입니다.  (사 53:4-6)

    3. 엘리, 엘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요8:29) ② 예수님의 전폭을 하나님께 맡기시는 고백입니다. (대하20:20) ③ 충성과 봉사의 순종으로 끝까지 맡기시는 모습입니다. (사53:7)

    제 5언의 말씀 : "내가 목마르다!"(요19:28)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입증하고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심은 곧 목마른 인생을 부르시는 뜻도 있습니다.
    인생은 어디서 무슨 물을 마셔도 그 심한 갈증을 해소할 길 없으나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한 갈증을 해소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1. 목마른 우리 인생을 위하여 주님이 목말라 주셨습니다.

    ① 우리의 심령이 목마릅니다 (사 55:1)
    ② 우리의 애정이 목마르고 있습니다. (요일 3:16)
    ③ 경제적으로 목마르고 있습니다.  (신 28:15-19)

    2. 목마름을 해갈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① 하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사 55:1-3)
    ② 예수님을 철저히 믿어야 합니다. (요 4:14)
    ③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행 2:1-4)
    3. 세상엔 목마른 사람이 많습니다.
    ① 생명수를 주어야 합니다. (마 10:40-42)
    ② 사모하게 해야 합니다 (마 5:6)
    ③ 예수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요 7:37-38)

    제 6언의 말씀 : "다 이루었다!"(요 19:30)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가죽 채찍으로 서른 아홉 대의 매를 맞으셨습니다.
    가죽 채찍 끝에는 다섯 갈래의 가지가 있고 그 가지마다 낚시와 같은 쇠고리가 달려 있어서 가죽 채찍이 살에 닿을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터져 엉켜 붙었습니다.
    또한, 가시관을 쓰신 머리와 대못에 박힌 양손과 양발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무지한 군병의 창에 옆구리를 찔리셔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의 옷은 군병들이 제비 뽑아서 나누어 가졌고, 벗기운 채로 주님은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계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죄도 없으시면서 가장 죄 많은 자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입니다.
    그가 하실 일을 이제 다 이루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완성자 이십니다.

    ① 순종을 완성하셨습니다. (빌 2:6)
    ②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마 5:44)
    ③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요 19:30)

    2. 인간은 다 이루고 갈 수가 없습니다.
    ① 자기의 계획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② 자녀나 부부가 가진 꿈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③ 교회나 국가의 꿈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3. 못다 이루는 우리 인생은 다 이루신 주님을 믿고 가야 합니다.(벧전2:24)
    ① 마귀는 우리의 완성을 방해합니다. (마4:1-10)
    ② 예수님은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다 이루셨습니다. (요16:33)
    ③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와 확신의 말씀이 됩니다. - (계20:1-3)

    제 7언의 말씀 :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예수님은 아버지란 말씀을 즐겨 사용하셨으니 산상설교 가운데서 17번, 유월절 다락방에서 45번(요 14, 16장), 요한복음 17장에서 6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에서 마지막 말씀을 아버지로 끝맺으셨습니다. 아버지란 명칭은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자신을 갖게 하는 이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들은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해도 아버지 손에 맡기고 부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체로부터 분리되려는 찰나에 있는 그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1. 사람은 세 가지 형태로 창조되었습니다(육, 혼, 영).
    ① 육으로 지어진 몸은 물질과 교제하고 (갈 5:19-21)
    ② 혼은 사람의 정신으로 자기를 담고 있습니다. (살전 5:23)
    ③ 영은 하나님이 임하시매 신령한 세계에서만이 통합니다.  (롬 8:10-11)

    2.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① 예수님의 아버지이십니다 (눅23:46) ②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엡1:3)
    ③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의 아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롬 8:15-17)

    3.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내 영혼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① 천하보다 귀한 것은 생명(영혼)입니다 (마 16:26)
    ②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성도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요1:12)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께 인도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요 14:6)










    요20: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요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눅24: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골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엡2: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빌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딤후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 이 말씀이 윗절까지 계속되던 성령론과 어떤 관련을 가지는가?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이 귀절이 위의 모든 말씀의 결론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곧, 26절에 말한대로 성령님의 하시는 일은 사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사건("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깨닫게 하신다고 하였고, 그 뒤에 이 귀절은 평안의 선물을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사건을 깨닫고 믿을 때에 비로소 참다운 평안을 누린다. 어떤 학설에, 평안에 대한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단순한 작별 인사라고 하나, 이 말씀을 그렇게 보는 것은 잘 못이다. 그 이유는, 이 귀절에 말한대로 그 평안은 그리스도께서 선물로 주신다고 하였고, 또한 그것이 세상의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 평안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므로 신자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며(28 절), 또한 그 평안이 그들의 영원한 기업이 된다. 예수님의 평안은, 그가 하나님과 평화롭게 지내시는 관계를 말함이다. 그는 구속 사업의 완성으로 신자들에게도 그런 평안을 주신다. 그의 주시는 평안이 세상의 그것과 다른 특성은, 그 가장 위험한 때에도 심령이 평안할 수 있는 것이다(Barrett)


    평안(平安) : 평평할 평(), 편안 안()
    - 무사히 잘 있음
    - 무사하여 걱정이 없음

    1515. 평안 에이레네()  εἰρήνη 스트롱번호1515

    1. 평화.  2. 눅 11:21
    발음 [ ĕirēnē ]

    관련 성경  /  평안(마 10:13, 눅 2:29, 행 9:31), 화평(마 10: 34, 눅 12:51, 행 10:36), 평강(눅 1:79, 요 20:19, 롬 1:7), 평화(눅 2:14, 19:42), 안전(눅 11:21), 화친(눅 14:32), 화해(행 7:26), 태평(행 24:3).




    지미 핸드릭스(James Marshall Hendrix) 1942. 11. 27-

    록 음악의 기타 연주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마약 중독자가 되어 무대 위에서나 밖에서 난폭하게 행동하며 문란한 삶을 살았습니다.
    1970년 어느 공연의 마지막에 가서 그는 자기의 기타를 부숴버렸습니다.
    로버트 맥기와 도날드 사포가 쏜 [평안을 찾아서]라는 글에 의하면, 어느 날 지미 핸드릭스의 공연이 마치자 관중들은 소리치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열광하던 박수갈채가 갑자기 그쳤습니다.
    지미 핸드릭스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이윽고 고요한 정적을 깨며 그는 관중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 누구 참된 평안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무대 뒤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갑작스런 초청에 응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며칠 후, 그는 약물과용으로 죽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여러분은 하나님과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영국의 종교 개혁자 리들리는 메리여왕 1세의 즉위와 함께 화체론적 성찬을 부정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런던탑에 투옥되었다가 뒤에 옥스퍼드에서 레티미와 함께 화형(火刑)되었는데, 그 전날 밤의 일이다.
    그의 동생은 찾아와서 그 밤동안 위로하며 같이 지내자고 했다. 그때 리들리는 그것을 거절하면서 말했다.
    "나는 오늘 밤 평안히 자고 내일 순교하겠다."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왜 그는 그렇게 평안하게 죽을 수 있을까?
    그것은 주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빌 3:7-8)
    예수 믿는 사람은 환난이나 죽음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는다.(요 16:33, 행 12:7)






    12-30-2024(월) 요한복음 14:25-2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보혜사(保惠師) 26절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All this I have spoken while still with you.
    But the Counselor,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will teach you all things and will remind you of everything I have said to you.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행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고전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요일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요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 여기"너희"란 말은 사도들만 가리킨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직접 들은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여 주시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자들은 사도들이다. 성령의 일은, 예수님의 교훈을 되살려 해설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예수님의 전날 교훈을 사도들의 기억에 되살려 깨닫게 하시는 운동이다.


    보혜사(保惠師) : 지킬 보(), 은혜 혜(), 스승 사(사)
    - 신자를 보호하여 돕는다.

    3875. 보혜사. 파라클래토스()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스트롱번호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일 2:1. 3. 요 14:16,26
    발음 [ paraklētŏs ]
    어원 / 3870에서 유래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 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2:1.
    • b. [성령을 가리켜서] 요14:16,26, 15:26, 16:7.
    • 관련 성경 /  보혜사(요14:16,26, 16:7), 대언자(요일2:1).
    “보혜사(保惠師)”란 무엇인가?
    -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

    보혜사란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가르치시는 선생님”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를 영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NIV에서는 “상담자(the Counselor)”,
    KJV에서는 “위로자(the Comforter)”,
    NASB에서는 “돕는자(the Helper)” 라고 합니다.

    보혜사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étos)” 라고 합니다.
    1. 옹호자(an advocate), 중보자(intercessor),
    2. 위로자(a consoler), 위로자(a comforter), 돕는자(helper),
    3. 변호사(Paraclete)

    예수님께서 언제 누구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셨습니까?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날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불세례도 함께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자세히 관찰하면 성령과 불이라는 용어가
    마태복음 3장
    누가복음 3장에서는 사용하였으나
    마가복음 1장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성령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라고 모든 복음서에서 말씀하셨다면 불세례도 오순절 날 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가르치고(1321) 디다스코()  διδάσκω 스트롱번호1321

    1. 마 4:23.   2. ~을 가르치다.  3. 마 15:9
    발음 [ didaskō ]
    관련 성경  /  가르치다(마4:23, 막1:21, 눅4:15), 배우다 (갈1:12), 교훈을 받다(골2:7). [명] 가르침 (엡4:21, 골1:28).


    생각나게(5279) 후포밈네스코() ὑπομιμνήσκω 스트롱번호5279

    1. 회상시키다. 2. 기억하다
    발음 [ hüpŏmimnēskō ]
    • 1. [능동]
      • a.  회상시키다, 상기하게 하다, 깨우치다, 생각나게 하다, 요14:26, 딛 3:1, 벧후1:12, 유1:5.
      • b.  회상하다, 상기하다, 내놓다, 딤후2:14, 요삼1:10.
    • 2. [수동] 기억하다, 생각하다, 눅22:61.
    • 관련 성경  /  생각나다(눅22:61, 유1:5), 기억하다(딤후2:14), 기억하게 하다(딛3:2), 잊지 아니하다(요삼1:10).


    성령에 대한 이해를 크게 두 영역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순복음 교회와 성결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특징은 성령을 은사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와 같은 이해의 현상은 성령을 받으면 "방언"을 해야 하고 "병을 고쳐야 한다(치유)"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반면에 장로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특징은 성령을 이론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와 같은 이해의 현상은 누구든지 예수를 구세주로 시인하고 믿는다는 것은 이미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하여 방언과 병을 고치는 은사적인 것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바람직한 성령의 이해는 은사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 양면을 모두 겸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믿음에 따라 사도 바울은 사람을 세 종류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체적인 사람(자연인)
    육체적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둘째는 육신적인 사람(초신자)
    육신적인 사람은 예수를 영접하였으나 아직도 세상의 것에 만족을 좋아하며 즐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러한 사람은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 어린아이와 같이 성숙하지 못한 신앙생활에 머물고 있습니다. 

    셋째는 신령한 사람(영적인 존재)
    신령한 사람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환경에 따라 신앙이 요동치는 것이 아니라 환난과 기근과 적신과 고통이 닥쳐올지라도 두려움이 없이 천국 소망을 갖고 인내하며 믿음을 지킵니다.

    고린도교회의 분쟁의 원인은 신령한 믿음으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분열하여 서로 자기들의 의를 고집하고 주장하므로 발생한 문제라고 합니다.

    따라서 오늘의 시대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온전히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는 믿음으로 섬김에 열중할 때 발생하는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온전한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온전한 지배를 받을 때 두 가지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가르침을 받는 은혜
    둘째는 깨닫는 은혜

    가르침을 받게 됨으로 모르던 것도 알 수 있고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죄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죄
    이러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은혜의 사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깨달음을 주시는 성령


    유치원 선생님들의 가장 큰 애로점은 아이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모든 말을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까지 낮춰서 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들려 줘도 듣는 사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럴 때는 정말 답답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천국 복음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려 깨닫지 못한다면 세상에 의미 없는 다른 말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님께 간구하면 천국 말씀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우리는 이제 간절함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령님께 무릎을 꿇으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말씀을 들려주실 때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님이 그 마음속에 있는 자는 들을 수 있는 귀와 깨달을 수 있는 머리를 가진 자입니다. 겸손함과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오면 성령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천국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듣지만 말고 깨닫는 자가 되십시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마13:19)


    1. 성령의 충만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길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물로 세례를 받았지만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후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l20명이나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하루, 이틀, 사흘… 열흘 동안이나 기다리면서 열심으로 기도하던 중 열흘째 되던 날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여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뜨거워지더니 이상한 말을 하고 능력을 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 기도하며 사모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자들이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히 받는 것입니다. 교회가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히 받는 것입니다. 목회하는 데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십시오. 성령 충만해 진다는 말은 마치 돈을 많이 가지고 있거나 또는 물을 많이 가지고 있듯이 성령을 많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도 내 힘으로 하려고 할 때에는 예수를 믿는 생활이 힘들고 괴롭기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은혜를 받으면 기쁨으로 하게 되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성령이 충만해지면 모든 의심과 부조리가 해결됩니다. 과거에는 설교를 들어도 성경을 읽어도 의심이 자꾸 생겨납니다.

    그러나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그러한 의심이 다 사라지고 부조리하게 생각되었던 것이 믿음 안에서 다 해결되고 완전해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중생하지 못하고 영생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좇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육체적으로 사는 사람은 영에 대해서는 중생도 못하고 구원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일에는 깜깜하고 도무지 깨닫지를 못합니다. 육체대로만 살고 영적으로 영의 눈이 뜨이지 않으면 아무리 영의 일을 이야기해도 알지 못합니다. 천국? 지옥? 하나님의 계심? 심판?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영적인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을 말합니다.

    2. 육신적(Carnal man)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를 정말 믿기는 하나 영적으로 성숙하여 신령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어린 아이와 같이 육신의 소욕대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구원은 받았어도 아직 육체의 소욕을 버리지 못하고 영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남이 먹여 주어야지 스스로는 성경도 제대로 읽을 수 없고, 또 은혜를 받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시기, 분쟁, 다툼이 많습니다. 모든 교회에서 일어나는 시끄러운 문제들도 바로 이런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육적인 사람들 때문에 말썽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3. 신령한 신자(Spiritual man)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하고 장성하여 분별력이 있고 영적인 힘이 있는 장성한 교인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5절에 보면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성숙한 교인은 잘못된 교리, 잘못된 신학, 잘못된 영의 역사 등을 다 분별할 수가 있어서 이단사설에 현혹되거나 매혹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심령에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어서 모든 것을 알게 해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한1서 2장 20절과 27절에 보면 "너희는 거룩한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우리 마음속에 오면 자연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너희는 주께 맡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오면 자연히 깨달아지고 알아지는 것입니다.

    신령한 교인 중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갈라디아서 6장 1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시험받는 사람이 있을 때에 자기를 반성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 잡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 중에 어떠한 사람에게 속했습니까? 분명히 예수님은 나의 구주가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내 죄를 대신해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 충만의 중요한 한 가지 목적은 능력과 권능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구원받은 후에는 반드시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① 이 능력은 죄를 이기는 능력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죄와 싸울 것도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도 충만하지 못한 사람은 육신의 소욕에 지고 맙니다.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서로 거슬리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7장에도 보면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 힘으로 신앙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실패했지만, 8장부터 보면 성령의 능력으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승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도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슬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슬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소욕을 이기고 죄를 이기는 능력은 성령을 따라 사는 생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② 전도와 봉사의 능력입니다.

    육은 영적인 일에 무능합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봉사에 쓰여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의 목적은 영적인 봉사의 힘을 얻는 것입니다.

    무디(D.L. Moodv) 같은 이는 초등학교 3학년 밖에 못나온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키도 작고 목소리도 나빴다고 합니다. 배운 것이 없고 훌륭한 체모를 가지고 있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무디와 같은 부흥사는 없다고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고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될 때에 어떠한 상황과 조건에 처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은 나타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4장 31절에 보면 "빌기를 다 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나 기도나 봉사나 무엇이든지 성령을 받아야 그 능력이 오는 것을 믿으시고 아무쪼록 열심히 기도하고 사모하고 기다려 성령 충만히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2-28-2024(토) 요한복음 14:21-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버지의 말씀(24절)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Whoever has my commands and obeys them, he is the one who loves me. He who loves me will be loved by my Father, and I too will love him and show myself to him."
    Then Judas (not Judas Iscariot) said, "But, Lord, why do you intend to show yourself to us and not to the world?"
    Jesus replied, "If anyone loves me, he will obey my teaching. My Father will love him, and we will come to him and make our home with him.
    He who does not love me will not obey my teaching. These words you hear are not my own; they belong to the Father who sent me.

      * 지키다(5083) 테레오(tērĕō) τηρέω   

      1. 지켜보다.  2. 지키다. 3. 유지하다
      발음 [ tērĕō ]
      어원 / 미완료 ἐτήρουν, 미래 τηρήσω, 제1부정과거 ἐτήρησα, 완료 τετήρηκα, 미완료 수동태 ἐτηρούμην, 완료수동태 τετήρημαι,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τηρήθην, τηρός ‘감시’에서 유래
      • 1. 지켜보다, 감시하다, 파수하다, 마28: 4, 행12:5.
      • 2. 지키다, 간직하다, 보존하다, 보호하다, 요2:10, 행25:21, 고전7:37, 딤전6:14, 벧전1:4.
        3. 유지하다, 붙들다, 엡4:3, 딤후4:7, 유1:6.
      • 4. 보호하다, 요17:15, 계3:10.
      • 5. 준수하다, 준행하다, 지키다, 유의하다, 마23:3, 요14:15, 계12:17, 22:7.
      • 관련 성경 / 지키다(마 19:17, 마 28:4, 딤전 5:22, 계 3:3), 지키게 하다(마28:20), 두다(요2:10, 12:7), 보전하다(요17:11,15), 갇히다(행12:5), 간직 하다(벧전1:4), 구류하다(행25:4), 지켜주다 (행25:21), 그대로 두다(고전7:37), 조심하다(고후11:9), 보전되다(살전5:23), 예비되다(유13).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아버지의 말씀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말합니다.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앙은 아버지를 사랑할 때에 드러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사랑이란 행동하는 언어로 표현될 때 그 진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도 바칠 것이라고 사나이답게 호언장담(豪言壯談) 했습니다.
      그런데 용감한 것 같았던 베드로이었지만 하녀들의 말을 듣는 순간 그의 결단은 철저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무너진 후에 허탈한 심정으로 예전에 물고기를 잡던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 것도 잡을 수 없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합니다.
      그 말씀에 따라 그물을 오른편으로 옮겼을 때 그물을 잡고 있던 손의 감각에 많은 물고기가 잡혔음을 알고 내가 모른다고 부인했던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은 나를 깨닫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왜 나를 깨닫게 할까요?
      아버지의 말씀은 죄인을 거룩하게 다듬기 때문입니다(요 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더러운 죄인을 어떻게 거룩하게 다듬어주실까요?(엡 5:26)
      "이는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더러운 것을 물로 세탁하듯 거룩한 말씀으로 더러워진 인간의 몸과 혼과 영을 씻어 거룩한 존재로 세워주시는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거룩하게 된 사람을 사용합니다.
      주님의 도구로 쓰임받기를 원하신다면 먼저 거룩해지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주님의 도구로 받아주시옵소서

      오 주님,
      더럽고 추한 인생을
      거룩한 말씀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의 보혈로
      정결하게 다듬어 주옵소서

      내 주의 보혈은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나의 계명."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13:34) "새 계명"을 가리키는데, 신자들이 서로 사랑할 계명이다.
      13:34 해석, 요일 2:7-11 참조.
      형제를 사랑한다 함은 무엇으로 성립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내포한 신약 윤리(예수의 계명)에 순종하는 생활이다.
      이 모든 윤리는 사랑을 목적한 것이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신약 윤리가 모세의 십계명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그 완성이라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도 이런 사고 방식으로 관설하였다(롬 13:8-10).
      그런데, 기독자가 계명을 실행함에 있어서 구약 시대 성도보다 더욱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관철하게 된다.
      그 이유는, 신약 시대의 성도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그 성취 형태에서 누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어 주신 그 큰 사랑을 받은 것이, 언제나 그의 윤리 생활의 동기를 이룬다.

      요일 4:19에 말하기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계명은, 신자들로 하여금 무슨 일을 행할 때든지 사랑의 동기로 행하여 모든 의(義)를 이루라는 것이다.
      그들이 사랑의 동기를 가짐에 있어서 구약 성도들보다 명확하고 철저하고 일관성을 가지게 되어야 한다(마 22:37-40).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나타나실 것을 가리킨다.
      그 나타나심은, 우리의 육신에 나타나심보다 더욱 근거 깊이 우리의 심령에 나타나심이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니까
      - 여기 "유다"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이다(눅 6:16).
      그의 물어본 말은 세상 영광을 생각한 것이다.
      곧, 예수님이 자기를 제자들에게 나타내시리라(21 절)고 하신 말씀을, 유다는 이름낸다(명성을 떨친다)는 뜻으로 오해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묻기를, "왜 널리 세상에는 이름을 나타내시지 않으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그의 말씀을 지킴보다 앞선다.
      사랑없이 계명을 지킬 수 없으며, 지킨다 해도 생명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 성부(聖父)와 예수님이 함께 신자에게 오셔서 거하신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내주(內住)를 가리킨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신 동시에 아들의 영이시다(고전 6:19; 고후 6:16; 엡 3:17; 살전 4:8).
      이와 같은 연합은 내세에 이르러서 더욱 완전히 이룬다(계 3:20, 21:3).
      현세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거하시며, 내세에는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거한다(Godet).


      요한복음 5:19-29 / 요약

    1.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를 설명하는 예수님의 말씀 (19-23절)
    2. 생명과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24-27절)
    3. 부활과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 (28-29절)
    4. 서론

      오늘은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29절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권위와 그 분이 선포하신 생명의 말씀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한 안식일에 행하신 기적 이후에 이루어진 논쟁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기적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동시에 유대인 지도자들로부터 비난과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했다고 비난하며,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사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밀하게 설명하십니다.

      1. 예수님과 아버지의 완전한 일치 (요한복음 5:19-23)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과 완전히 일치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며, 아버지가 행하는 것을 아들도 동일하게 행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뜻과 권위 아래 행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더 큰 일들을 보고 동일하게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분의 사역이 지극히 놀랍고 초자연적인 것임을 암시하십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권위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능력도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아버지가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것처럼, 예수님도 원하시는 자를 살리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이 단순한 치유의 차원을 넘어 생명을 부여하는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 생명의 말씀과 심판의 권위 (요한복음 5:24-27)

      이 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생’과 ‘심판’에 대한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선언은 모든 신앙인들에게 큰 희망과 위로를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말씀과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자는 현재 영생을 소유하고 있으며, 내세에서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신앙인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확신을 줍니다. 여기서 ‘영생’은 단순한 연속적인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심판하는 권한도 받았다’고 설명하십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생명을 주신 것과 더불어, 심판의 권한도 주셨다는 뜻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계신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고 동시에 구원하시는 권위자이십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느니라’는 선언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영적인 부활이 가능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3. 부활과 최후의 심판 (요한복음 5:28-29)

      요한복음 5장 28절과 29절에서는 예수님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모두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일어날 때가 올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 사건은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행위가 최후의 심판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한 일’이란 우리의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 믿음이 진정한 것이라면 반드시 선한 행실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는 야고보서 2장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마지막 날, 예수님의 권위 아래 모든 인류는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과 심판 앞에서 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살아간 자들은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현재 신앙생활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듭니다.

      결론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29절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완전하게 일치된 사역을 하시는 분이며, 그분이 생명과 심판을 주관하시는 권위자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것이며, 그분을 믿는 자는 심판에서 벗어나 영생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진리를 가지고, 예수님을 더욱 깊이 믿고 따르며, 우리의 일상에서 그분의 생명의 말씀을 살아내야 합니다. 마태복음 28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는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묵상과 나눔

    5. 내 삶에서 예수님의 권위를 어떻게 인정하고 있습니까?
    6. 예수님께서 주신 영생의 약속을 믿으며,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7. 내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기 위해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은 무엇입니까?
    8. 기도문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요한복음 5장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사랑을 깊이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완전히 일치된 사역을 하시며, 생명과 심판을 주관하는 권위자이심을 우리 마음 깊이 새깁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듣고 믿게 하시옵소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생명의 길을 여신 그 사랑을 하루하루의 삶에서 살아내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의 믿음이 행함으로 드러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그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영생의 약속을 소망으로 삼게 하시고, 이 소망을 아직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
      이 귀절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함이 얼마나 중대한 잘못임을 지적한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악이다. 그 이유는, 그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말씀을 받은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과 당시 제자들의 차이가 하나 있다면 아버지의 말씀을 받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말씀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말씀을 받은 여러분은 그들과 다르다. 하나님 말씀을 받은 영혼들인 여러분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저희들의 마음 속에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며, 또 이 세상에서 악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 주님의 간절한 기도이다. 그렇지만 이 세상은 악으로 충만하다. 악으로 충만한 이 세상에서 저들을 아예 데려가 버리면 좋을텐데, 주님은 그것이 아니라 저들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악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라고 기도하셨다.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분별됨과 거룩함

      악에 빠지지 않는 것은 소극적인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저희를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린다.
      즉 13절에서 기쁨을 말한 뒤에 나아가 거룩으로 전진하고 있다.
      거룩은 죄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이라는 성경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을 위해 나는 감옥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오직 한 가지 죄를 두려워한다.”
      이는 성도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이다.
      성도로서 가장 괴로운 것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것도 아니고 가난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병이 드는 것도 아니다.
      죄를 짓는 것이다.
      죄를 지으면 악에 빠지고, 그러면 기쁨이 사라지며 거룩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성도들과 하나를 잃어버린다.
      거룩하게 되어야, 세상에서 분별될 수 있어야, 성도들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의 경계선은 세상’이라는 것이다.
      세상과 분리되지 않아 교회에 분열이 생긴다.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지 않기 때문에 분열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를 철저하게 심판하지 않고 십자가로 처리하지 않기 때문에 분열이 생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주 말씀하셨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거룩하지 않으면 성도로서 소용이 없다. ‘성도’라는 자체가 거룩한 무리라는 뜻이다.

      거룩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가져야 하는데, 세상을 떠나야 거룩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이 거룩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거룩은 음란이나 세속에 물들지 않음을 말하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거룩은 ‘분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분별되는 것이다.
      원래 시장에 있는 금은 거룩하지 않다.
      그런데 그것이 성전에 놓이면 거룩해진다.
      이는 주님이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을 위해 분별되었을 때 거룩한 것이다.
      다만 깨끗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분별되었는지, 온전히 하나님께 쓰이도록 드렸는지가 거룩함의 척도라는 말이다.

      19절을 보라. 주님이 자신을 거룩케 한다고 하신다.
      주님은 원래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고 거룩한 분 아닌가?
      그러므로 이 뜻은 ‘저희를 위해 내가 십자가로 가서 제물이 되어 죽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드리겠다는 뜻이다.
      이것이 거룩케 한다는 뜻이다.
      오늘 여러분이 모든 세상적인 것에서, 자신을 위한 삶에서 자신을 분별해 ‘하나님 오늘부터는 내가 아버지 뜻을 위해서만 살겠습니다.
      나는 주님 뜻만 위해 이 땅에 존재하겠습니다.
      주님 뜻대로 나를 사용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해보라.
      그런 마음을 가져보라. 그렇게 헌신해보라. 그때 당신은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거룩함을 드러냄

      중세에 ‘기둥 성자’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한복음 4:24은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기 위해서 물리적인 장소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요 1:1, 14) 하나님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독특한 형태입니다(마 1:23).
      민수기 23:19는 하나님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과 대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참되심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떤 이들은 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마치 몸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지 의문을 가집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59:1에는 하나님의 “손”과 “귀”를 언급합니다.
      역대하 16:9에는 하나님의 “눈”에 관해 말합니다.
      마태복음 4:4에는 하나님의 “입”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신명기 33:27에는 하나님의 “팔”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 모든 구절은 하나님을 의인화시킨 예로, 인간이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하도록 만들기 위해 해부학적이거나 감정적인 용어로 하나님을 묘사한 것입니다.
      비유적인 말의 한 형태인 의인화를 사용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실제 몸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골로새서 1:15에서는 하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디모데전서 1:17에서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살아계시며 인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3:10에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라고 말합니다.
      시편 84:2에서는 “…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라고 선포합니다.

      철학적으로 생각해봐도, 하나님이 무한하시기 위해서는 영이어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육체에 제한되어 있다면 (한 번에 모든 곳에서) 편재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피조물과 같이 차원적인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한 번에 모든 곳에 편재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되지 않은 제1 원인이시며, 이것이 다른 모든 피조물을 창조한 능력입니다.

      요한복음 4:24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과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연관시켜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진리 안에서) 바르게, 또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해) 영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전통이나 의식, 물리적인 장소에 의존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생각입니다.

      기둥 위의 첫 사람 / 기둥 위의 성자 시므온(St. Simeon the stylite, 389-459)

      영어에 ‘스타일라이트’(stylite)라는 단어가 있다.
      기둥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스툴리테스’(στυλιτη?)에서 유래한 말로 ‘주상 성자’(柱上聖者), ‘주상(柱上) 수도자’, 곧 ‘기둥 위의 수도자’라는 뜻이다.

      동굴의 수도자, 사막의 수도자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기둥 위의 수도자’는 무슨 말일까?
      이는 말 그대로, 기둥 위에서 고행하며 살았던 수도자를 말한다.
      지금은 생소하게 보이지만 4세기 이후 동방 교회에서는 이러한 봉헌 생활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그 가장 앞줄에 선 인물이 ‘기둥 위의 성자’ 시메온 성인이다.

      개종한 양치기 수도자

      4세기 말 시리아에서 이교도로 태어난 시메온은 양치기였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양치기들의 삶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도시 생활에 지친 많은 이가 전원생활을 꿈꾼다.
      그들은 시골에 가기만 하면 산과 들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는 유토피아적 삶이 펼쳐지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농촌 생활, 산촌 생활은 생각처럼 목가적이지 않다. 낭만적이지도 않다. 나는 강원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래서 안다.
      시골의 산과 들판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말이다.

      시메온이 처한 환경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양치기들은 여유롭게 전원생활을 한 이들이 아니다.
      도둑과 들짐승들로부터 양 떼를 지키고자 밤에도 들에서 야영했다.
      양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늘 긴장을 유지해야 했다.
      자신의 양을 뺏으려는 사람이나 짐승이 나타나는 비상 상태에 이르면 극도로 공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험한 일을 하다 보면 대체로 완력이 세지고 성격도 거칠어지기 마련이다.
      양치기들은 아마도 턱수염 덥수룩한 산적 같은 외모였을 것이다.
      이 점에서 당시의 양치기 시메온은 거친 세상에 맞서 거칠게 살아가야 하는 오늘날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실제로 우리는 양치기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가진 양을 빼앗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우리와 쏙 빼닮은, 눈을 뜨면 일어나 움직이고 눈을 감으면 자는 의미 없는 일상을 반복하던 양치기 시메온에게 어느 날 계시가 찾아들었다.
      봉헌 생활에 대한 열망이 그것이다.
      예수님께 경배한 목동들이 하느님께도 찬양했다면, 시메온은 이를 봉헌 생활로써 실천했다.
      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 규율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한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곳의 규율마저 싱겁다고 느낀 그는 죽음까지 각오하고 밧줄로 자신을 꽁꽁 묶어 단식하는 등 극도의 고행을 실천했다.

      그런데 수도원은 ‘함께’ 봉헌 생활을 하는 곳이다.
      유독 혼자서 과하게 고행하는 시메온을 품기란 어려웠다.
      수도원을 나온 시메온은 인근 오두막에서 잠시 살다가, 다음에는 작은 동굴을 찾아 들어가 노숙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눈에 기둥 하나가 들어왔다.
      시메온은 무릎을 쳤다.
      기둥 위야말로 자신이 꿈꾸던 완벽한 고행처였다.

      기둥 위의 고행

      그는 그렇게 사막이나 동굴로의 수평적인 탈출이 아닌, 수직적인 탈출을 감행한다.
      처음에는 3m 높이의 기둥에 올라가서 생활했는데, 곧 6m 기둥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다시 더 높이 옮겨 갔다.
      마지막 기둥의 높이는 자그마치 18m나 되었다.
      더 높은 기둥의 선택은 불가능했다.

      첫째, 사다리를 댈 수 없으니 식량을 공급받을 수 없었으며

      둘째, 기둥 아래 있는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기둥 꼭대기에는 난간을 둘러친 가로세로 각각 2m의 공간이 있었다.
      시메온은 이 작은 공간에서 햇빛과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노숙했고, 잠잘 때 외에는 앉거나 눕지 않았다.
      하루에 한 번 소박한 식사만을 했는데, 음식은 자발적으로 제자가 되기를 청한 이들이 기둥 아래에서 일일이 챙겨 주었다.

      위대한 성자가 기둥 위에서 고행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수많은 사람이 그를 구경하러 몰려들었다.
      기둥은 순례지가 되었고 스페인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순례객들이 시메온에게 청하는 기도는 하나둘이 아니었다.
      질병, 고통, 불임, 죄악, 심지어는 자연재해까지 시메온이 나서서 해결해 주길 바랐다.
      신기하게도 시메온의 기도는 바로 효과를 보여,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시메온의 유산

      시메온의 일과는 사도직 수행으로 빡빡했다.
      그는 새벽 세 시부터 기도했고 기둥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론했다.
      그러고 난 뒤 찾아온 이들의 고충을 듣고 상담했으며 병자를 치료했다.
      이교도를 개종시켰으며 전염병과 기근, 각종 재해의 해결사가 되었다.
      신학 논쟁이 벌어졌을 때는 주교가 직접 시메온을 찾아와 조언을 듣기도 했다.
      그렇게 일흔을 조금 넘긴 459년에 눈을 감았는데, 그때서야 오랜 고행을 마치고 기둥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시메온이 선종한 뒤 기둥 위 수도자의 수는 급격히 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도자였던 다니엘은 시메온과 면담한 뒤 곧바로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33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이스탄불) 변두리의 기둥 위에서 산 다니엘은 84세에 죽었다.

      기둥 위에서 봉헌 생활을 하는 전통은 서방 교회에는 전해지지 않았지만 동방 교회는 1800년대 말까지 간헐적으로나마 그 명맥을 유지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기둥 위 수도자들의 삶은 극단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 시대의 맥락에서 이를 바라보아야 한다.
      욕정과 세속의 유혹이 지금보다도 강했던 시절이었다.
      사람들 대부분이 매우 방탕히 생활했다.
      수도자들은 그처럼 죄악이 만연한 세상으로부터 피하기를 원하였다.
      그들이 보기에 세속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을 때에야 하느님께 오롯이 봉헌하는 삶을 살고 더 나아가 그분과의 유대를 회복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봉헌 생활 전통은 오늘날의 이집트, 이란, 이라크, 터키, 시리아, 그리스 등 동방 교회 지역에서 생겨났고 그곳에서 성행하였다.
      처음에는 사막이나 기둥 위에서 홀로 봉헌 생활을 하다가, 차츰 같은 생활을 원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공동생활 형태가 생겨났다.
      사람들이 사막으로 가서 생활한다는 소문은 곧 유럽 서방 교회에 퍼졌고 그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동방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유행은 흐른다.
      동쪽 발원지에서 넘쳐 난 봉헌 생활 전통의 거센 물결은 이제 새롭게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달마는 동쪽으로 갔고, 동쪽의 중국에서 불교의 화려한 꽃이 피어났다.
      동방 교회 수도자는 서쪽으로 갔고, 서쪽의 유럽에서 이제 그리스도교 봉헌 생활의 화려한 꽃이 피어난다.

      당시에는 거룩하게 살려는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에 들어갔다.
      거룩해지고 싶은 이들끼리 따로 생활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는 상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곳에 있을 때는 거룩한 것 같다.
      항상 기도하고 항상 말씀 읽고 항상 찬송 부르니 거룩한 것 같은데, 그런 생활을 10년쯤 한 후 내려와 사람들을 만나 보면, 그것은 시험을 거치지 않은 거룩함,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의 무죄 상태(innocent) 같음을 알 수 있다.
      주 예수님의 기도는 그런 뜻이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면서 악에 빠지지 않고, 거기서 거룩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은 시험된 거룩이고 능력 있는 거룩이다.
      생명의 능력이 그들 가운데 있어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성도들끼리만 모여 있으면 별로 시험에 들지 않는다(물론 우리는 성도들과 많이 교제해야 한다).
      또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항상 만나는 한두 사람과만 만나면서 자신이 거룩하다고 확신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것은 시험이 되지 않은 거룩인 것이다.

      소금이란 무엇인가?
      야채나 여러 가지 재료 속에 집어넣으면 녹아 없어져 버린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소금의 기능은 살아 있다.
      그래서 음식이 부패하지 않는다.
      이러한 거룩함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이 세상에 성도들을 두심으로 세상의 부패를 막고 이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소금이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야, 우리 참 짜다’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
      ‘이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불을 켜서 통 속에 넣어두고 ‘우리끼리 얼마나 밝은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마 5:14,16).
      주님은 이렇듯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악에 빠지지 않고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사람들이 그들의 연합, 하나됨, 서로 사랑함을 보고 ‘아, 하나님은 살아 계시구나, 하나님을 믿어야겠구나’ 하는 느낌을 갖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진리로 거룩하게 됨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거룩하게 되는가?
      우리 주님은 ‘진리로 거룩케 하옵소서’라고 하셨다.
      진리가 있어야 한다.
      진리의 종국이란 지혜가 아니다.
      ‘나는 많이 배워 이렇게 많이 안다’ 자랑하라고 진리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진리의 말씀을 받은 성도들은 그 종국이 거룩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삶이 성결케 된다는 것이다.
      진리의 종국이란 우리가 배운 뒤에 우리의 삶이 진정 거룩케 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온유함과 겸손함과 그리스도의 미덕들을 나타냄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며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 수 있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있게 하고 복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지, 지식이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은 잘못된 진리이다.

      기묘한 것은 여러분이 참으로 성결하게 되었다면 주님은 다시 여러분들을 세상으로 보내신다는 것이다.
      18절 말씀을 보면, 주님은 거룩하게 된 성도들을 세상에 보낸다고 하신다.
      ‘주님, 제 주변에는 왜 이렇게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서 나를 괴롭힙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보내신 이유이다.
      거기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와 거룩과 생명과 그 아름다운 것을 나타내라고 보내신 것이다.
      거룩한 생명은 여러분들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게 되어 있다.

      거짓 신앙으로는 거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행동으로 나타나는 거룩은 여러분 마음 속 깊이 있는 참된 신앙을 세웠을 때에서야 오는 것이다.
      선한 행위, 거룩한 행위는 참된 신앙의 결과이다.
      진리를 참되게 믿었을 때 그 모든 진리는 여러분의 삶 속에서 거룩함을 낳게 되어 있다.
      반면 잘못된 교리는 간접적·직접적으로 여러분을 죄로 인도한다.
      편협하게 만들고 인생의 발걸음을 바르지 못하게 만든다.
      참된 진리는 자연스러움 속에서 거룩을 산출하는 것이다.

      지금은 마지막 시대이다.
      주님은 거룩한 교회를 얻기 원하신다.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우리가 가야할 곳은 성경이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여러분이 말씀 자체를 사랑하고 말씀으로부터 영양분을 얻고 가르침을 받고 감동을 받고 새롭게 함을 받고 거룩하게 되기를 원한다.
      성경의 증거에서 떠나지 말고 성경을 사랑하되 끝까지 이 경주에서 낙오하지 않기 바란다.
      특정한 사람들만 거룩하게 된다고 오해하지 말라.
      진리의 말씀을 부지런히 배울 때 여러분의 삶 가운데 거룩함이 이루어진다.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아버지에 의해 아들이 이 세상에 보내심 받은 것처럼, 아들은 제자들을 보내신다.
      주님은 원래 거룩하시다.
      하늘에 계실 때부터, 또 이 땅에 태어나실 때부터 거룩하시다.
      그런데 여기서는 주님이 ‘저희들을 위해 내가 나를 거룩케 한다’고 하셨으니, 거룩이라는 말에는 한 가지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무언가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자신을 바쳐 순종하시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거룩하게 되려면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거룩케 하셨듯 우리도 거룩케 해야 한다.
      우리가 온전히 자신을 분별하여 주님께 드리지 않으면 거룩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체험적으로 여러분들이 진정 주님의 거룩하게 함을 입으려면 첫째는 먼저 배워야 한다.
      많이 배웠을 때, 은혜를 많이 얻었을 때, 비로소 보내심을 받는다.
      그 때부터 여러분은 거룩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우리 주님도 거룩한 분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이 증명되셔야 했다.
      그럴 때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실로 거룩한 분이심을 알게 되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주 예수님은 제자들을 삼 년 이상 교육하셨다.
      그들은 많이 배웠다.
      발 씻어주는 것도 배우고 말씀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은 떠나려고 하신다.
      제자들의 거룩함이 증명되어야 할 단계이다.
      나는 여러분도 이런 단계에 도달하기를 원한다.
      어느 날 주님께서 여러분을 보내실 것이다.
      주님이 당신을 거룩하게 하셨듯이 말이다.
      주님은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얼마나 죄인을 사랑하며 절대적으로 구별된 사람인가를 증명하셨다.
      이것이 바로 거룩이다.

      세상에서 입증되어야 하는 거룩

      거룩은 세상에 있는 속된 것이나 평범한 것과 구별되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함을 나타내는 길은 세상 속에 있을 때라야 입증될 수 있다.
      오해가 없기 바란다.
      스스로 거룩한 것이 다 거짓이 아니라, 참되게 증명되는 곳은 바로 세상이라는 것이다.
      거룩이란 세상과 절대로 다른 방식과 속성, 본질의 어떠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이 배경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성도의 거룩함이 세상과 대비되어 나타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문제를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다.

      여러분도 주님의 음성과 명령을 듣고 가야 한다.
      여러분 주위에 있는 것이 다 세상이다.
      그곳에서 결국 우리 주 예수님이 그러하셨듯 미움을 받고 핍박을 당해야 한다.
      그러나 주님이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죄를 위해 자신을 버리고 피를 흘리셨듯 그분과 같은 생명을 가진 여러분 역시 세상 속에 그 거룩함을 나타내게 되어 있다.
      여러분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받은 진리이다.
      진리가 여러분 속에서 역사해 여러분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


      12-27-2024(금) 요한복음 14:18-2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희에게로 오리라(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I will not leave you as orphans; I will come to you.
      Before long, the world will not see me anymore, but you will see me. Because I live, you also will live.
      On that day you will realize that I am in my Father, and you are in me, and I am in you.

      "너희에게 오리라(I will come to you.)"
      이 말씀에 대한 이해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재림의 예수(살후 1:10, 에르코마이. 강림하다)
      둘째는 부활의 예수(눅 14:18, 에르코마이. 오리라)
      셋째는 성령의 임재(마 3:16. 에르코마이. 임하심을)

      문맥상으로 살펴보면 세번째 성령의 임재가 가장 바람직한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19절에서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재림의 주로 다시 오실 때는 모두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기 때문에 두번째 해석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번째 성령의 임재로 인하여 항상 우리 안에서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좀 더 확장하여 말씀을 읽어보면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참조 / 요 14:18-27)

      1. 신자들을 거듭나게 하여 살리신다(19 절)
      2. 그리스도와 신자를 연합하게 하신다(20 절)
      3.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신다.
      4. 사도들로 하여금 진리(예수님의 업적과 말씀)를 깨닫게 하신다(26 절)
      5. 신자들에게 평안을 주신다(27 절)

      물론 마지막 때에는 분명히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때에도 "에르코마이"라는 단어로 말씀하셨습니다(살후 1:10, 강림하신다).
      '너희에게 오리라'고 하셨을 때에도 "에르코마이"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단어일지라도 그 용례와 문맥을 고려할 때 본문에서 강조하는 의미는 "성령의 임재"라고 하겠습니다.

      땅(아다마)의 흙(아파르)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생명이 멈추면 반드시 땅(아마다)의 흙(아파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성령(보혜사)이 없는 존재는 "먼지" 또는 "티끌"과 같은 허무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령이 임재한 영의 사람이 될 때에 거룩한 백성으로 생명이 있는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영원한 생명의 삶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주 성령으로
      날마다 새롭게 하옵소서

      성령이여 강림하사


      * 오리라(2064) 에르코마이(ĕrchŏmai)  ἔρχομαι     

      1. 오다.  2. ㉠ 돌아오다. 3. ㉠ 눅 23:29
      발음 [ ĕrchŏmai ]

      관련 성경 오다(마 2:2, 막 13:36, 눅 1:59), 가다(마 2:8, 막 5:38, 요 3:26), 들어가다(마 2:11, 막 1:29, 11:27), 임하다(마 3:16, 24:39, 골3:6), 나아 오다(마 7:15, 8:2), 이르다(마 9:1, 27:33, 막 2: 20), 나오다(막1:45, 요 7:42, 계 7:14), 내려오다(눅 6:17), 나아가다(눅 7:7), 가서 보다(눅 11:25), 돌아오다(눅 12:36), 따르다(눅 14:27), 돌이키다(눅 15:17), 강림하다(살후 1:10), 내리다(히 6:7).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 여기서 갑자기 "내가"란 말씀으로 시작된 것은, 위(16-17)의 논제(성령)와 달라진 느낌이 있다.
      즈안(Zahn)은 이것을 논거로 하여, 이 귀절 말씀은 재림을 취급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서 "내가"란 말을 사용하신 이유는,
      위(16-17)에 관설된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 자신의 속죄 사업의 연장이요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 뿐만아니라, 예수님은 삼위 일체 안에서 성령과 일체이기 때문에 그가 여기서 "내가"란 말을 기탄 없이 사용하셨다.
      위의 16-17절은 성령의 오심을 약속하신 것 뿐이고, 이 귀절(18 절)부터는 성령의 역사와 예수님 자신과의 관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내가"란 말로 가르치신 것은, 자연스럽다.

      여기 "내가...너희에게로 오리라"하신 말씀은 재림을 가리키는가? 그의 부활을 가리키는가? 혹은 성령의 강림을 가리키는가?
      (1) 재림을 가리킨다는 학설이 옳지 않은 이유는, "조금 있으면"이란 말(19절 초두)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온다는 것은 미구에 오심을 의미한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오심을 세상이 보지 못한다는 말도 재림설에 맞지 않는다.
      재림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보리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계 1:7).
      (2)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켰다는 학설도 여기 맞지 않는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땅에 계신 기간은 길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그것이 18절의,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성취시킬 수 있겠는가 함이 문제 된다(Smide).
      (3) 많은 주석가들이, 이것을 성령 강림에 관한 말씀으로 여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성령 강림 사건에 주님의 부활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페인(Fein)은 말하기를, "부활절과 오순절은 일체(一體)로 합류한다"라고 하였다(Ostern und Pfingsten fliessen zu einer Einheit zusammen. - Theol., S. 383).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
      이 말씀은, "내가 사는고로 너희도 살게 되리라"고 번역하신 것이 헬라 원문과 부합한다.
      그리고 우리 한역의 "이는"이란 말은 잘못된 번역이다.
      그러므로 이 문구는, 위의 말씀에 직속하는 이유 문구가 아니고 하나의 독립 문구이다.
      "내가 사는고로"란 말씀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으나(Lange, Barrett).
      다른 학자들은 이것이 예수님의 고유하신 생명 근원을 의미한다고 한다(Grosheide).
      어쨌든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영적으로 살려 주시는 근원이 되심을 보여준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점에 있어서 상반절의 "나를 보리니"란 말씀이, 살게 하여 주는 원인을 나타낸다고 한다.
      곧, 산다는 것(영생의 생명)은 실상 우리 심령이 하나님을 봄으로(앎으로) 생기는 것이다.
      요 17:3 참조. 18절부터 27절 까지는 보혜사의 하실 일에 대하여 말한다.
      곧, (1) 신자들을 거듭나게 하여 살리심(19 절),
      (2) 그리스도와 신자를 연합하게 하심(20 절),
      (3)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심.
      (4) 사도들로 하여금 진리(예수님의 업적과 말씀)를 깨닫도록 하심(26 절),
      (5) 신자들에게 평안을 주심이다(27 절).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 이 말씀은, 신자와 그리스도의 연합한 관계를 가리킨다.
      신자와 그리스도와 연합에는 여러가지 방면이 있으니,
      (1) 신자가 선택 관계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엡 1:3-4).
      (2) 신자가 구원사상(救援史上)의 그리스도 행적에서 그와 연합함.
      곧, 그의 죽으심, 그의 부활, 그의 승천의 복된 사실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롬 6:3-11; 엡 2:4-6; 골 3:3-4).
      (3) 신자가 중생(重生)과 성화(聖化)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연합함(엡 2:10).
      (4) 신자가 그의 행위와 생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와 연합함(롬 6:4; 고전 1:4-5).
      (5) 신자가 죽음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와 연합함(살전 4:14,16).
      (6) 신자가 부활할 때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다(고전 15:22; 롬 8:17). 이렇게 이 연합은 영원하며, 죽음도 그것을 파괴 시키지 못한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 여기서 갑자기 "내가"란 말씀으로 시작된 것은, 위(16-17)의 논제(성령)와 달라진 느낌이 있다.
      즈안(Zahn)은 이것을 논거로 하여, 이 귀절 말씀은 재림을 취급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서 "내가"란 말을 사용하신 이유는, 위(16-17)에 관설된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 자신의 속죄 사업의 연장이요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 뿐만아니라, 예수님은 삼위 일체 안에서 성령과 일체이기 때문에 그가 여기서 "내가"란 말을 기탄 없이 사용하셨다.
      위의 16-17절은 성령의 오심을 약속하신 것 뿐이고, 이 귀절(18 절)부터는 성령의 역사와 예수님 자신과의 관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내가"란 말로 가르치신 것은, 자연스럽다.
      여기 "내가...너희에게로 오리라"하신 말씀은 재림을 가리키는가?
      그의 부활을 가리키는가?
      혹은 성령의 강림을 가리키는가?

      1. 재림을 가리킨다는 학설이 옳지 않은 이유는,
      "조금 있으면"이란 말(19절 초두)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온다는 것은 미구에 오심을 의미한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오심을 세상이 보지 못한다는 말도 재림설에 맞지 않는다.
      재림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보리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계 1:7).

      2.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켰다는 학설도 여기 맞지 않는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땅에 계신 기간은 길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그것이 18절의,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성취시킬 수 있겠는가 함이 문제 된다(Smide).

      3. 많은 주석가들이, 이것을 성령 강림에 관한 말씀으로 여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성령 강림 사건에 주님의 부활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페인(Fein)은 말하기를, "부활절과 오순절은 일체(一體)로 합류한다"라고 하였다(Ostern und Pfingsten fliessen zu einer Einheit zusammen. - Theol., S. 383).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

      이 말씀은, "내가 사는고로 너희도 살게 되리라"고 번역하신 것이 헬라 원문과 부합한다.
      그리고 우리 한역의 "이는"이란 말은 잘못된 번역이다.
      그러므로 이 문구는, 위의 말씀에 직속하는 이유 문구가 아니고 하나의 독립 문구이다.
      "내가 사는고로"란 말씀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으나(Lange, Barrett).
      다른 학자들은 이것이 예수님의 고유하신 생명 근원을 의미한다고 한다(Grosheide).
      어쨌든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영적으로 살려 주시는 근원이 되심을 보여준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점에 있어서 상반절의 "나를 보리니"란 말씀이, 살게 하여 주는 원인을 나타낸다고 한다.
      곧, 산다는 것(영생의 생명)은 실상 우리 심령이 하나님을 봄으로(앎으로) 생기는 것이다.
      요 17:3 참조. 18절부터 27절 까지는 보혜사의 하실 일에 대하여 말한다.
      곧, (1) 신자들을 거듭나게 하여 살리심(19 절),
      (2) 그리스도와 신자를 연합하게 하심(20 절),
      (3)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심.
      (4) 사도들로 하여금 진리(예수님의 업적과 말씀)를 깨닫도록 하심(26 절),
      (5) 신자들에게 평안을 주심이다(27 절).


      내가 너희에게로 오리라(요한복음 14:18-24)

      주님은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부모 없는 고아가 얼마나 불행할까요? 
      저는 어느 책에서 고아였던 김 호걸 씨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유년기에 부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싸리문 있는 시골 집에서 친구들과 논두렁으로 뛰어 다니면서 즐거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투고 가정불화가 생겼습니다. 
      부모의 갈등이 마침내 자식을 버리는 결과가 됐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데려다 딴 사람 손에 맡겼습니다. 
      처음에는 가끔 와 보더니 마침내 발길을 끊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데리고 있던 사람에게도 버림받고 고아원 신세가 됐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보호자 없이 뛰놀던 그는 어느 겨울날 사고를 당해 두 눈을 못 보는 장님이 됐습니다.
      나이 들면서 맹인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늘 외톨이였습니다. 
      사람이 싫어졌습니다. 
      자신을 버린 부모가 원망스럽고, 앞까지 못 보는 자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면 가족이나 있든지, 가족이 없으면 눈이라도 보였으면 하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가끔 그리워지는 것은 부모가 아니라 어려서 기어 다니던 누이동생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주변 장애인 가운데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교회도 부모 갖춘 사람이나 다니는 것으로 생각하고 멀리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는 피아노 조율을 배웠기 때문에 조율하러 다니다가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어느 날 찬송가를 귀로 듣고 피아노를 치는데 목사님이 이 소리를 듣고 그에게 반주를 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마침내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혼자 성경을 읽던 중에 놀라운 말씀을 대하게 됐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편 27:10) 

      정말로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 내 부모는 나를 버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는 구나!” 
      그는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지금도 늘 기도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만은 나를 버리지 마소서!”

      18절 말씀에서 주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주님이 떠나시면 인생은 고아라는 뜻입니다. 
      육신의 부모가 없으면 육신의 고아가 되듯이, 영적인 부모가 없으면 영적 고아가 됩니다. 
      세상에서 부모 없는 불행은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헐벗고 굶주립니다.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마음의 고통입니다. 항상 외롭고 방황합니다. 
      자기의 형편을 하소연할 데가 없습니다. 
      위로받지 못하고, 넘어져도 격려 받지 못합니다. 

      영적 고아는 육신적 고아보다 훨씬 더 비참합니다. 자기가 온 곳을 모르고 갈 곳도 모릅니다. 인생이 뭔지 모릅니다. 고독합니다. 평생토록 안식처를 찾아 헤매다가 불현듯 죽음이 다가 오면 준비도 안 된 채로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고아는 될 수 있을지언정 영적 고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생들의 아버지이신 그리스도의 품으로 들어오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와 함께 사시는 하나님

      그러면 주님은 부모로서 우리 삶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실까요?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18-20) 

      평생 가족, 영원한 가족이 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지상 생애뿐만 아닙니다. 영원히 함께 사십니다. 여름에 해수욕장에 가면 안전 요원이 높다란 망대에 앉아 사람들을 살핍니다. 혹시 물에 빠진 사람이 보이면 뛰어들어 구조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식으로 하늘 의자에 앉아 우리를 관찰하실까요? 성도들에게 긴급한 문제가 생기면 멀리서 달려오실까요? 하나님은 긴급 시에만 나타나는 안전 요원이 아닙니다. 매 순간, 항상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십니다.  

      야곱은 형과 원수지고 도망쳐서 밧단아람으로 가는 도중 길가에서 홀로 노숙을 했습니다. 어느 곳인지도 모르는 낮선 땅에서 홀로 지새워야 했습니다. 몹시 외롭고 두려웠습니다. 들짐승이 물어갈 수도 있습니다. 강도나 도적에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걱정 속에 잠을 청했는데 꿈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3-15) 

      아무도 없는 빈들에서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결혼 문제에 깊이 관여하셨습니다. 자녀 출산에 개입하셨습니다.(창29:31) 야곱의 20년 머슴살이에 함께하셨습니다. 야곱의 품삯을 찾아 주시고 재산을 모아 떠나게 하셨습니다.(31:11-13) 아무도 야곱을 해치지 못하게 하시고(31:24),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함께하셨습니다.(32:1,30) 야곱이 노숙하면서 처음 서약했던 벧엘까지 함께하셨습니다.(35:1) 하나님은 야곱의 전 생애에 매 순간 참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 생애 전반에 참여하십니다. 전쟁터에서 골리앗과 싸우는 소년 다윗에게 이길 힘을 주셨습니다. 파사의 왕실에서 다니엘의 식탁과 건강을 지키셨습니다. 꿈을 해석하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고아로 자란 에스더가 왕비로 간택되도록 함께하시고, 유대인 모르드개가 하만의 음모에서 벗어나도록 함께하셨습니다. 풍랑 속에 바다를 건너는 바울과 시종 함께하시고, 독사에 물려도 죽지 않게 하시고, 감옥에 갇혀도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요셉의 생애에 참여하시되, 형제들과의 관계 중에 관여하시고, 종으로 팔려가는 일에 개입하시고, 시위대장의 집에서 종살이 하는 중에 개입하시고, 감옥에서 죄수로 있는 동안에 개입하시고,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하시고, 총리가 되게 하시고, 총리 직을 수행하는 일에 개입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성도들 속에 임하시는 방식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차이점은 외형적인 것과 내재적인 차이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주로 눈에 보이게 임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보이지 않게 심령 성전에 임하십니다. 두 번째 차이점은 집단과 개인의 차이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민족 단위의 공동체에 임하셨지만, 신약 시대에는 집단이 아닌 각 사람 속에 개별적으로 임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과 생존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과 성도들 사이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나타낸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는 예수님을 포도나무 줄기로 성도들은 가지로 비유하셨습니다. 나무 가지가 줄기에서 떨어져 나오면 영양분을 받지 못해 말라 죽습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야만 생존합니다. 생존적인 관련성입니다. 

      요한계시록 3:20에는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 오셔서 함께 먹겠다고 하셨습니다. 매일같이 한 식탁에 참여하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가족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가족이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는 주님은 목자요 우리는 양이라고 하셨습니다. 양은 목자의 보살핌이 없으면 다 잡혀 죽고 맙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이런 인격적인 관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가장 고민하는 문제가 뭡니까? 하나님은 지금 그 문제 중에 임하여 계십니다. 오늘 내 인생의 문제를 주님과 함께 풀어가세요. 주여,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님은 지금 내 삶 속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알려 주세요! 신앙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은 아버지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 삼위 하나님이 우리와 거처를 함께 하십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20)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23하) 

      마치 혼자 사는 듯이 괴롭게 살지 마세요.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답게 능력 있고, 힘 있는 모습으로 사세요.  

      세상에는 숨기고 성도에게는 나타내시고

      주님께서 임마누엘을 말씀하셨을 때, 유다(다대오)는 주님께 질문했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22) 

      주님은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우리와 거처를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좀 나타내 보이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위력을 세상 권력자들 앞에 나타내 보이시면 얼마나 효과가 클까요? 

      첫째, 세상 나라는 본질상 예수를 왕으로 모시지 않습니다.

      세상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세상 나라는 돈이 지배합니다. 권모술수가 지배합니다. 위선, 사기, 자기 과시, 폭력, 강압이 지배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이 다 그렇습니다. 정의보다는 불의가 지배합니다. 

      매스컴이란 괴물이 사람들의 허영심을 자극하고, 잘못된 가치관을 만들고 전파합니다. 이 세상은 판이 더럽습니다. 놀자 판, 먹자 판, 춤 판, 과시 판, 욕망과 자극의 판, 살인강도 판, 도적질 판, 사기꾼 판. 한 마디로 개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제아무리 신령한 능력을 보인다 해도 결코 왕으로 받들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얼마나 많은 이적을 보이셨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들이 있습니까? 세상도 예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주님도 이런 나라의 왕이 되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주님은 빌라도 앞에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6) 

      주님은 세속 권세를 지배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더러운 이 세상은 종말에 사라지고 멸망합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요란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않으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2:1-5,10-12) 

      세상 나라는 없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의롭습니다. 선합니다. 사랑의 나라입니다. 질서와 화목의 나라입니다. 유다가 기대한 것은 유대 민족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세우시고자 하신 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둘째, 세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없습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으니 주님을 왕으로 섬기지 못합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19) 

      조금 있으면 세상이 주님을 다시 못 본다고 하셨습니다. 가까이는 육신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장사될 모습을 가리킵니다. 또한 부활 승천하셔서 사람들 곁을 떠나실 주님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보이지 않는 주님이 제자들에게는 계속 보이리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보리니”(19) 

      이 말씀은 현재형 동사로서(qewrei'tev) 확실히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 그대로 부활하신 주님을 두 눈으로 목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보리라는 말씀은 단순히 부활하신 육신을 보리라는 말씀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항상 보리라는 말씀인데, 이것은 영적인 눈으로 계속 본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주님을 계속 볼 수 있게 된 까닭을 주님은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19) 고 하셨습니다. “내가 살았고”(19) 하신 말씀은 현재형이고, “너희가 살겠음이라”(19) 하신 말씀은 미래형입니다. 

      육으로 죽으신 주님은 부활하셔서 영원히 계십니다. 그리고 육으로 살아 있는 제자들은 주님의 살리는 영을 받아서 영원히 살 것이니 주님을 영원히 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셔서 제자들의 마음에 임하셨을 때, 제자들은 부활의 능력을 가지게 됐고 영의 눈을 뜨게 됐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변화입니다. 처음 갈릴리에서 제자들이 부름을 받았을 때, 그들은 3년 6개월 동안이나 주님과 숙식을 함께 했어도 주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성령을 받음으로 오히려 마음 깊이 주님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주님은 눈에서 사라졌지만 영적으로 그들은 주님을 더욱 확실히 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육신의 주님을 볼 때 실족했지만 오히려 승천 후에 성령을 받고나서, 영으로 주님을 보게 된 후에는 더욱 담대한 증거자가 됐습니다.

         유다는 왜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을 나타내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도 때때로 구약시대처럼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실상 주님이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나타나셨지만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 뿐입니다. 

      또한 그들의 영안이 어두워서 주님의 신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왕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다른 왕들은 다 버리고 예수님만 왕으로 모셔 들이세요. 세상은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영의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봅니다. 성령을 받고 영의 눈을 떴습니다. 임마누엘의 주님을 육안으로가 아닌, 영의 눈으로 매일매일 보고 따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생은 영적 고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들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은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는 감독자가 아닙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사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사는 곳에 함께 계십니다. 
      형통의 때에든지 고난의 때에든지.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무리 자신을 나타내도 믿지 않습니다. 
      왕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 못합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은 영의 눈이 닫혀서 그리스도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남은 생애를 영적 고아로 살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곁에 계신 주님, 우리와 함께 사시는 주님을 왕으로 모셔 들이세요. 
      그리고 성령을 받아서 매일매일 신령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시면서 주님의 가족으로 따라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가시던 길을 따라가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그때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내가 가는 곳을 너는 따라 올 수 없다. 하지만 후에는 따라올 것이다’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 왜 따라 갈 수 없는지 그리고 열정과 열심을 갖고 있는데 왜 갈 수 없는지 마음이 불편 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반발이라도 하듯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이와같이 신앙의 길은 열심과 열정으로도 따라 갈 수 없는 길, 목숨을 버리고도 갈 수 없는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모여드는 군중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 일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을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열정으로 가려는가, 목숨을 버릴만한 각오로 가려는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닭이 세번 울며 자신의 의지와 열정이 무너졌듯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정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예수님이 가신 길을 영원히 따라 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요 14:18)
      우리가 도저히 갈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찾아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생(生)과 사(死)

      영적인 고아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성경에 이들을 언급할 때는 주로 같이 언급을 하고 계십니다.
      조금 다른 말로 하면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을 한 묶음으로 기록합니다.
      그들이 바로 고아, 과부, 나그네입니다.
      이들은 정상적인 기준에서 모자라는 사람들입니다.
      고아는 부모가 없는 사람이며,
      나그네는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사람이고,
      과부는 남편이 없는 사람입니다.
      부모가 없고 집이 없고 남편이 없어 정상적인 기준에서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돌보아주십니다.

      고아는 육적인 고아와 영적인 고아로 나누어집니다.
      성경에서 주로 말하고 있는 고아는 육적인 고아를 말합니다.
      육신의 부모가 없는 육적인 고아도 불쌍한 사람이지만 더더욱 불쌍한 것은 영적인 아버지가 없는 영적인 고아임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68:5에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고아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영적인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요?

      사울은 육신적으로 베냐민 지파 사람이며 기스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고아입니다.
      삼상 16:14에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날까지는 여호와의 영이 사울과 함께 했는데 떠났으니 이제부터는 여호와의 영이 함께 하지 않기에 영적인 고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삼상 18:12에서도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셨다”고 하였으니 사울은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 영적인 고아가 된 것입니다.
      사울이 영적인 고아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며 이제부터는 광활한 사막과 같은 세상에서 나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울을 도우실 그 어떠한 분도 계시지 않으니 육신의 고아에 비하면 더 없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과거에는 고아를 도우시는 일을 하지 않다가 오늘에 와서 갑자기 고아를 도우시는 분이 아니라 옛날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일을 해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사람의 도움을 작은 도움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도움은 큰 도움이십니다.
      사울이 큰 도움이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게 되었으니 더더욱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런 영적인 사실을 몰랐기에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떠남을 알면서도 육신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산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적인 고아로 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어 하나님과 함께 살면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다윗을 말할 때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삼상 18:12),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14),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28)라고 말씀하심으로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 살았고,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셨음을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함께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심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 것은 교회를 오래 다니고 직분을 받고 성경공부를 많이 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막연하게 교회 다니고 직분을 받으면 자동으로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줄로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려면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어야 하고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신 아들 예수님이 내 안에서 나를 다스리고 계시며 나를 거처로 삼으시고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심이 성령으로 믿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에 우리는 영적인 고아가 아니며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과 긍휼이 여김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12-26-2024(목) 요한복음 14:16-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또 다른 보혜사(16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 And I will ask the Father, and he will give you another Counselor to be with you forever--
      2. the Spirit of truth. The world cannot accept him, because it neither sees him nor knows him. But you know him, for he lives with you and will be in you.

      * 보혜사(3875) 파라클레토스(paraklētŏs)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일 2:1. 3. 요14:16, 26
      발음 [ paraklētŏs ]
      어원  / 3870에서 유래
      •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 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 2:1.
        • b. [성령을 가리켜서] 요14:16, 26, 15:26, 16:7.
      •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 26, 16:7), 대언자(요일 2:1).



      * 또 다른 보혜사(και αλλον παρακλητον)

      보혜사라는 용어가 신약 성경 요한복음에서만 4번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보혜사에 관한 의미를 살펴보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1.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요한일서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대언자(3875) 파라클래토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 '죄를 범하면'이 헬라어 '하마르테'(*)는 상반절의 '하마르테테'(*, '죄를 범치')와 마찬가지로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는 범죄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된 행위들'을 나타낸다.
      한편 '대언자'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위로자 또는 옹호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요 14:16, 26;15:26;16:7)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중보하심을 시사한다.
      이와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과 본절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행 16:7; 롬 8:9; 빌 1:19), 요 14:16에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되어 있어 예수께서 '파라클레토스'이심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중보하시는 분이시며 '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 존전에서 그리스도인의 죄를 중보하신다(Stott).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예순 크리스톤 디카이온'(*)은 문자적으로 '의로운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디카이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존전에서 주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셔서 흠이 없고 깨끗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다.
      예수의 이러한 의로움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게 되며 그것을 근거로 하나가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롭지 못한 모습을 깨끗하게 하신다(롬 3:26, Smalley).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부정하던 예수의 인간되심을 강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이심을 나타내어 죄인들을 중보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드러낸다


      2. 성령을 가리킬 때(요한복음 14:16, 26, 15:26, 16:7)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한복음 14:26
      보혜사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요한복음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은 성령과 하나(요한일서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따라서 삼위일체가 되는 신앙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 여기 이른바 "구하겠다"는 말의 헬라 원어(*)는, 상대방을 향하여 동등 처지를 취하고 구하는 태도와 과히 틀림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혜사"란 말(*)은 "대언자"를 의미한다.
      요일 2:1에 예수님을 "대언자"라고 하였으니, 성령을 가리켜 "다른 대언자"라고 함이 적당하다.
      성령은 우리를 위하여 도고하여 주시는 대언자이시다(롬 8:26).
      그 뿐 아니라, "보혜사"란 말을 위로자란 의미도 가진다.
      그가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음과 마찬가지의 힘과 평안과 기쁨과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실 그의 역사를 가리킨다.
      여기 약속된 보혜사의 오심은, 오순절 임하실 성력을 가리킨다.
      그가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하셨으니,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단 한 번 있을 것이지만, 그 역사의 영구할 것이 알려진다(마 28:20).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저는 진리의 영이라."
      이 말씀은, 진리(그리스도의 인격과 속죄 사업에 대한 설명 계시)가 성령님의 것이라는 뜻이다.
      세상이 그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은 육안에 보이는데로만 무엇을 믿는 까닭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그를 받는 이유는, 그가 그들 속에 거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까닭이다.
      그것이,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하신 말씀이 의미한 바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구속 사역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

      구약 시대는 성부 하나님을 통한 구속 사역
      신약 시대는 성자 예수님을 통한 구속 사역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한 이후에는 성령님을 통한 구속 사역

      따라서 오늘의 시대는 구속 사역을 감당하는 성령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라고 하셨습니다.

      "보혜사"란 한자어로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 자라는 훈으로 "지키고, 은혜를 베풀고, 가르치는 역할"을 합성한 뜻입니다.

      신약 성경을 기록한 헬라에 의하면 "보혜사"를 "파라클래토스(paraklētŏs. παράκλητος)"라고 합니다.



      '파라클래토스'란 "다른 사람을 위해 나타난 자"라는 뜻으로 신약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소개 됩니다.
      "파라칼래토스"란 "곁으로(파라. παρά)" "부른다(칼래오. καλέω)"라는 두 단어가 합성하여 만든 단어로 "켵으로 부른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단어를 성경에서는 "보호자, 변호자, advocate(JB, NEB)", "협조자, helper(NASB, 공동)", "위로자, comforter(위클맆, AV)", "상담자, counselor(NIV)" "대언자(요일 2:1)" 등으로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성경에서 소개한 '파라클래토스'의 사용법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대언자(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둘째는 도고하는 자(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셋째는 위로자(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머물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남은 예언은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이 땅의 사람들은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고 믿는 일에 열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또 다른 보혜사의 도움을 받아 영적생활을 승리로 이끌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하며 축복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성령은 우리 인생들의 변호인이십니다. 
      그러나 성령을 세상 변호사처럼 대하면 안 됩니다. 세상 변호사와는 전혀 다른 분입니다. 

      첫째로,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세상 변호사는 돈만 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억만금을 주어도 살 수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 속에만 찾아오십니다. 성령님의 변호를 받고 싶으시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셔야만 됩니다.  

      둘째로, 인생의 모든 문제를 변호하십니다. 
      세상 변호사는 의뢰받은 문제만 다룹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도와주십니다. 영혼의 문제나, 육신의 문제나, 재산 문제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죽고 사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의뢰 받은 일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인생의 모든 문제를 도와주십니다. 앞서서 말씀드린 것처럼 ‘보혜사’란 말은 다양하게 번역됩니다. 성령님은 모든 인생 문제의 보호자요 변호자요 협조자요 위로자요 상담자요 대언자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내 인생 문제에 돕지 못하실 일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셋째로, 성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사십니다. 
      세상 변호인은 돈 받고 맡은 사건에 한해서만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사시면서 우리 인생에 만나는 모든 일에 관해서 도움을 주십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하든지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실 준비를 하고 곁에 계십니다.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metav) 있게 하시리리...저는 너희와 함께(parav)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ejn) 계시겠음이라”(16-17) 이것은 성령님이 우리와 교제하시고(metav, with), 우리 삶 속에 임재하시고(parav, from, with), 우리 인격 속에 내주하심(ejn, in)을 의미합니다.(롬8:26) 이렇게 성령님이 함께 사시는 것은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합니다.  

      우리 인생은 도움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삶의 벽에 부딪치면 누군가 내편에 서서 도와주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인생에 진정한 도우미는 없습니다. 사람은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사람을 의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운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이사야 31:1-3) 

      사람 의지하지 마세요. 사람은 진정한 도움이 못됩니다. 우리 인생을 도우실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보내신 보혜사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믿는 자에게 임하심

      다음으로 말씀드릴 것은 성령이 오시는 경로입니다.  성령이 어떤 사람들에게 어떻게 임하실까요?  성령은 예수님의 요청으로 성부께서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임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16)

      성령을 엉뚱하게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8:19에 보면, 사마리아 성의 마술사 시몬은 성령을 돈으로 살려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안수하면 귀신이 쫓겨 가고, 불치병자나 불구자가 일어나고, 방언을 하니까, 베드로 사도에게 돈을 바치면서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노발대발 하면서 이렇게 저주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19:20) 요즘도 성령을 돈으로 사고, 인간의 노력으로 얻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단련하고 연습한다고 임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믿음의 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 속에 성령은 오십니다.  

      성령은 예수님 때문에 오셨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청하시고 보내셔서 예수님 대신 오신 분입니다.  16절에 보면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원래의 보혜사가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원래부터 계시는 제1의 보혜사가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요한1서 2:1에 보면, “나의 자녀들아...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했습니다. 여기서 ‘대언자’란 말은 헬라어로 ‘보혜사’와 같은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예수님은 사형 선고 받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시는 제1의 변호사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역할을 하십니다. 선한 목자요(10:11), 양의 문이요(10:8), 생명의 떡이요(6:48), 빛이요(8:12),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14:6) 때로는 근엄하고 자상한 아버지시요(14:18), 형님이시요(20:17),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우리의 친구십니다.(15:15) 

      이러한 예수님이 잠시 제자들 곁을 떠나게 되셨을 때 제자들은 낙심했습니다. 누가 이러한 주님을 대신해서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인가? 주님은 이렇게 걱정하는 제자들을 안심시키면서 제2의 보혜사를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16) 성령님은 바로 ‘예수님 대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요청하신 결과로 예수님과 똑 같은 역할을 하시기 위해서 오신 제2의 보혜사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떠나서 성령을 구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해야만 성령님이 그 마음에 오십니다.  

         성령께서 모든 성도들 속에 강림하신 시기는 오순절입니다. 이 오순절은 매우 의미 있는 절기입니다.  신약의 오순절은 주님의 부활 승천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지 50일째 되는 날, 감람산에서 승천하신지 10일째 되는 날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때에 주님을 부활을 목격했던 500여 명의 무리들 중에 약120여명의 제자들이 주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를 시작한지 열흘째 되던 날 갑자기 공중에서 바람 소리가 들리면서 불이 혀같이 갈라져서 각 사람 위에 임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성령은 영이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실 때 불의 모양이 보이고 바람 소리가 들린 것은 신성을 지니신 성령이  임재하신 표식입니다. 과거 시내산에서 혹은 광야 시절에도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불과 구름 기둥, 혹은 천둥과 번개와 광채가 나타났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임재를 육안으로 느끼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날에 성령이 오신 것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입니다. 

      본래 성령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각 사람 속에 임하여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떠날 때에 성령님은 인간들 속에서 떠나셨습니다. 홍수 심판에 앞서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6:3) 

      그런데 그 아주 떠나셨던 성령께서 다시 인간 속에 영원히 거하고자 오셨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신 날은 구약의 오순절입니다. 구약시대 오순절은 첫 열매 드린 날부터 50일째 되는 날로 대량 추수가 이루어지는 절기입니다. 성령이 오신 신약의 오순절은 예수님이 부활하신지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이 살아나신지 50일째 되는 날, 모든 성도들을 부활시키시는 성령이 임하셨으니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성령님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오셨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성령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도 성령은 예수 믿는 자 속에 임하십니다.  교회 다닌다고 성령이 임하시지 않습니다. 교리를 안다고 성령이 임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성령이 임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영접한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믿음이 많든 적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인생을 맡기세요. 그러면 성령이 임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성령 받기를 원하십니다. 가이사라에 주둔하던 로마군의 백부장 고넬료는 집에서 가족들을 모아 놓고 베드로의 설교들 듣다가 성령을 받았습니다.(행10:44)  

      사마리아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 사도의 말씀을 듣고 기도할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다.(행8:14-16) 에베소 교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다.(행19:5-6)  우리도 이 성령을 받아야 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19:2)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령을 알고 그 분이 바로 내 인격 속에 살아 계심을 알아야합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약속하셨고, 예수님이 구하셨고, 예수님 대신 아버지께서 보내신 보혜사십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 속에 임하여 계십니다.  

      삼위 일체 하나님과의 동거

      이제까지 보혜사 성령과 오시는 경로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다음은 성부 성자 성령과 성도가 함께 동거하는 상황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부분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앞서 빌립과의 대화를 통해서 주님은 자신 속에 아버지가 계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의 일체적 관계입니다. 여기에 이제 성령님과의 관계, 나아가서 성도들과의 관계가 나타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6-20) 

      이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자세히 보세요. 주님이 아버지께 구하셔서 성령님이 오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은 성도들과 함께 있습니다.  장차 육체로 떠나셨던 주님도 다시 오셔서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아버지는 주님 안에 계십니다. 성도들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주님은 성도들 안에 계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과 성도가 인격적인 동거 안에 영원히 함께 살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도들의 영원한 동거! 이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성도들의 최종적인 삶입니다. 할렐루야!  

         다시 성령님의 임재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성령님이 성도들 안에 계심으로써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성령의 역할이 뭡니까? 성령님은 주님을 대신한 “또 다른 보혜사”이십니다. 적어도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는 육체적으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리에게 가장 큰 역할을 하실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의 역할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본문은 성령님의 칭호 앞에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17) 성령님 칭호 앞에 “진리”(ajlhvqeia)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26절 말씀에서는 두 가지 중요한 역할을 언급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26) 

      첫째는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둘째는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무슨 새로운 것을 가르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회개하게 만드십니다.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믿게 하십니다. 바른 판단을 하게 하십니다. 죄를 이기게 하십니다. 마귀와 싸우게 하십니다. 때로는 지혜를 주시고, 때로는 능력을 주십니다. 병을 고치게 하시고, 귀신을 쫓아내게 하십니다. 마음에 결단하고 순종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도로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셨지요? 그러면 지금 성령님이 내 마음에 와 계십니다. 주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도록 모든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거룩하게 만들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항상 삼위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하십니다. 지상에서나 천상에서나 우리의 최고 축복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나오라

      이 세상 사람들은 두 가지 영적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사탄의 세계 아니면 성령의 세계,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제3의 영적 세계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 싫든 좋든 국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얻을 영적인 국적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아니면 사탄의 나라!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사탄의 나라에 태어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태어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굴복하지도 않고, 그 분의 뜻을 따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17절 말씀을 보세요.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거짓된 곳에 임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죄가 지배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탈출하여 성령의 통치 안으로 들어와야만 됩니다. 악한 영의 지배 아래 있는 한 결코 의롭게 살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정의가 불의를 이기고 선이 악을 이긴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의 보다는 불의를 좋아합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따라가고, 일신상의 안락함을 따라갑니다. 

      역사를 보세요. 독재자 한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나요? 그래도 여전히 지구상의 대부분 나라들이 악한 지도자 아래 신음합니다. 근면 정직하면 돈 번다고 주장하지만, 거짓말 안하고 수단부리지 않은 자가 재벌 된 적 있나요?  겸손하고 온유하면 대접받는다 하지만 온유 겸손한 사람이 정말 높은 자리 차지한 적 있습니까? 없어요. 그러면 이 세상에 다소나마 정의가 존재하고, 선이 존재하고, 사랑과 인정이 존재하는 이유가 뭔가요? 사람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모든 인간들을 간섭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인 말로 “일반은총”이라고 합니다. 선인과 악인,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내리십니다.(마5:45) 

      또한 악한 인간들을 부단히 심판하시고 더 악해지지 않도록 보존하십니다. 사회 정의를 지키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 사회에서 손을 떼신다면 당장 죄로 멸망합니다. 우리는 이 죄악 세상에서 성령의 영역으로 들어왔습니다. 사탄의 세상에서 탈출했습니다. 비록 세상에 몸 담고 살지만 이제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다스림 속으로 들어오려면 세상 죄를 버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오순절날 설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8) 

      먼지 묻은 유리창으로는 빛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죄로 가득한 마음에 성령님은 임재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단히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1) 
      중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줄 알며 고백하고 예수님의 속죄를 받으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각양 도우심 속에 살게 하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신 모든 분들이 새 인생으로 태어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 안에서 성령을 받으셔서 소속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탈출하세요. 사탄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세계로, 악한 영의 지배에서 성령의 지배로, 죽음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리라(요한복음 14:16-21)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다락방 강화’라고 합니다.

      그 첫 번째 메시지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고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하신 후에 다시 데리러 오실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을 알았다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아버지를 알았고 또 보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세 번째 메시지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
      우리가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신 것을 믿는다면 두 가지 기적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할 수 있고 그보다 큰일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예수님께서 시행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면 모든 것이 끝장나고 수포로 돌아갈 것인데, 제자들에게 기적과 축복을 약속하시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 기적과 축복이 계속 된다고 말씀하시는 결정적인 비밀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믿는다고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말씀에 굉장한 충격을 주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아주 새롭고 놀라운 진리가 나타나 있습니다.
      16, 17절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간구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란 헬라어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 ‘우리를 위해 대언하시는 분’,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
      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에 대해 요한일서 2장 1절에서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서 대언해 주시는 분이 바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도우시고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보혜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보혜사’라는 말은 인격이 다른 예수님, 다른 대언자, 다른 위로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똑같은 역할을 하시는 보혜사께서 오신다는 뜻입니다. 그 모습은 다르지만 보혜사는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기적과 축복 그리고 약속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는 곧 성령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성령님은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이 16절 말씀을 통해 정확하고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또 다른 형태인 예수님께서 영으로서 다시 오시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굉장한 충격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실에 대해 성령님을 체험하기 전에는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죄 문제와 부딪히게 될 때 굉장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죄 문제, 성격 문제, 인생 문제 하나 해결하시지 못한다면 우리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개인의 삶에 아무런 변화를 주실 수 없다면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신이라면 우리에게 변화가 있어야 하고, 개인적 제(諸)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선 권능자이십니다.

      또 다른 예수님이신 보혜사 성령
      16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 예수님의 또 다른 형태로 오시는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의 요청에 의해 영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둘, 하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세상으로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요청하신 분은 예수님이시고 보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보내심을 받은 성령님은 보혜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서 절묘하게 하나를 이루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단적으로 말해 보혜사 성령님의 덕분입니다. 사람이 똑똑하고 유능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아닙니다. 개인의 수양이나 득도를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믿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성령충만을 힘써야 합니다.
      셋, 보혜사 성령님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다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님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영이시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영원히 계시는 것입니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동일하게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시지만, 인간은 한시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선 시공을 초월하시지만 인간은 시공의 제약을 받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 수천, 수만, 수백만 명을 동시에 믿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구의 멸망도 순식간에 일어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경험으로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껍데기를 벗겨놓고 보면 모든 현상이 동시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17절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 진리의 영 
      인간은 오류와 모순투성이지만 성령 하나님께선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오류와 모순이 전혀 없으십니다.

      둘, 세상은 능히 보혜사 성령님을 받지 못한다
      박사 학위를 받거나 인생의 경험이 풍부하다 해도 사람의 이성, 지성, 지식 등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은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 보지도 알지도 못하지만 우리는 알고 믿게 된 것을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2,000년 전에 유대 땅에서 33세 된 한 청년의 죽음이 나의 구원으로 믿어진다는 사실은 바로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셋, 영원히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것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과 상관없이 개인의 안에 계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입니다.
      또 좋은 메시지를 듣게 되면 기쁨이 솟아나는 것도 성령님의 역사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와 영원히 동행하시는 성령님
      세상은 능히 성령님을 받지 못하고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성령님을 받아 알고 믿습니다.
      예수님과 똑같은 성령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며 그분은 우리 안에,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크리스천들은 신앙생활을 통해 크게 세 번 놀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깊이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 문제 해결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사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영원히 함께 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게 됩니다.
      우리는 각자의 가슴에 손을 얹어 보면 그 속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분명히 성령님께서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고 기도를 들으시며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며 위기를 넘기게 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실체를 느끼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을 하게 되면 그 사랑은 가까운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저는 성령님 안에 있고 성령님께서 제 안에 계시기 때문에 개인적인 근심과 걱정을 모두 털어버리고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이며 이런 방법으로 주님의 기적과 축복은 찾아오는 것입니다.

      딘 셔먼(Dean Sherman)은 믿음으로 선포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신 것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보혜사 성령님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에 대해 충분히 알고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미한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성령님의 음성 듣기를 고대할 때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경건한 마음가짐도 없이 그 사실마저 믿지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축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과 성령 체험의 실례(實例)
      성령님을 체험한 후에 저는 놀랍게도 예수님께 대한 깊은 애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삼위일체에 대해 무감각했는데 지금은 삼위일체의 진리가 가슴을 저리게 만듭니다.
      진리에 대해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성과 육체의 본능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한계와 불완전함과 연약함과 질병과 죽음에 대해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약하고 미숙하며 불완전하지만 그 사실이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제 안에 성령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모든 것에 안심이 됩니다.
      예를 들어 실수하더라도 주님의 일을 밀고 나간다는 담대함마저 생겼습니다.
      이것도 성령님의 역사라고 믿습니다.
      18절 말씀을 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더 이상 고아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우주의 고아처럼 살고 있습니다.
      마치 우주의 모든 고민을 혼자 지고 있듯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고독이나 외로움 등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불안, 소외, 허무함도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오직 기쁨, 감사, 찬양, 승리, 축복, 믿음 등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제자들을 떠나시지만,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셔서 친구가 되어 주시고 위로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9절 말씀을 읽습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잠시 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니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살아있는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20절 말씀입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날’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를 말합니다. 즉 오순절에 보혜사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후를 말합니다. 그때 성령님과 접속하는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안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접속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켜라’
      포도나무에서 가지가 떨어져 나가면 곧 말라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결론으로 21절 말씀을 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계신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14장 15절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과 하나님의 말씀은 비례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말씀에 순종하는 말씀의 사람이 돼야 합니다.
      오늘 예배 후에 나누게 될 성만찬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에 접속되는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는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시길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아니면 하나님 자신이신가?

      예수님은 기도의 통로인가 아니면 기도를 받는 분이요 기도의 응답자인가?
      성령님은 제3위의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예수님의 또 다른 자기자신인가?
      이와같은 질문에 대한 응답이 이번주와 다음주의 말씀 속에 들어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아니면 하나님이신가에 대해 살펴봅니다.
      요 14장의 말씀은 예수님의 다락방강화(요13-17장)의 한 부분이다. 특히 요14장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하루 전 날 세족식과 성만찬 후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이다. 그때에 이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곁을 떠나신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근심에 쌓여 있었고 그리고 두려워했다. 그때 주님께서는 두려워 떨며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은 평강을 주시면서 그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그것이 바로 요14장이다.

        그때 그들의 곁을 떠날 것을 알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주님은 3가지 것을 약속하심으로 그들을 위로하시고 평강으로 인도하신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곁을 떠나시는 것은 아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잠시동안 떠나는 것인데, 그 목적은 천국에 장차 제자들이 들어가서 살 처소(맨션)을 준비해놓기 위함이요, 그후에는 다시 와서 제자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갈 것이라고 하셨다.

      둘째는 예수께서 하늘에 계시면서 제자들이 비는 기도에 반드시 응답해주실 것임을 약속하신다.

      셋째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어, 성령께서 자신을 대신하여 제자들과 영원토록 함께 있으면서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상담해주고 변호해주고 주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고 그 뜻을 가르쳐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다시 말해, 보혜사 성령이 오심은 곧 자신의 변형된 오심으로 알라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3위의 하나님이시지만 원래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성령이 오심은 곧 예수님의 오심이라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우리 인간의 머리로서는 다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말씀을 우리는 그대로 믿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예수님은 아들인가 아버지인가?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들이 그동안 하나님을 믿어왔다면 이제는 나를 믿으라.
      왜냐하면 나는 너희들이 믿어왔던 아버지 자신이기 때문이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버지이면 아버지이고, 아들이면 아들이었지, 어찌 아들이 아버지이며, 아버지가 아들일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700년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사야선지자를 통해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임을 가르쳐주셨다.
      사 9:6을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아기를 주실 것인데 그 아기는 아들일 것이며, 그 아기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는 제자 빌립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요 14장의 말씀을 정리해 보자.
      하나님께서 아들이란 이름으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곧 아버지의 말씀이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그분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자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것이다. 
      이렇게 믿는 것이 제대로 믿는 것이다.
      지금 당신의 믿음은 어떠한가?





      12-25-2024(수) 요한복음 14: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5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If you love me, you will obey what I command.

      21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Whoever has my commands and obeys them, he is the one who loves me. He who loves me will be loved by my Father, and I too will love him and show myself to him.


      https://ko.wikipedia.org/wiki/613_%EA%B3%84%EB%AA%85

      계명(엔토래. ĕntŏlē) ἐντολή, ῆς, ἡ     

      1. 계명.   2. 요 11:57. 3. 눅 23:56
      발음 [ ĕntŏlē ]
      어원  / 1781에서 유래
      • 1.  계명, 명령.
        • a. [사람의] 요11:57.
        • b. [하나님의] 눅23:56, 롬7:8, 고전14: 37, 엡6:2, 딤전6:14, 벧후2:21.
      • 관련 성경 / 계명(마 5:19, 막 7:8, 눅 1:6), 명(눅 15:29), 명령(막 10:5, 요 11:57, 딤전 6:14), 명하신 것 (벧후 3:2), 말씀(마 15:6).

      1781. 명령하다(엔톨레마이. ĕntĕllŏmai) ἐντέλλομαι 

      1. 명령하다.   2. 마 4:6. 3. 15:4
      발음 [ ĕntĕllŏmai ]
      어원  / 디포넌트. 미래 ἐντελοῦ- μαι, 제1부정과거 ἐνετειλάμην, 완료 ἐντέταλμαι, 1722와 5056의 어간에서 유래
      1. 명령하다, 마 4:6, 15:4, 히 11:22.

      (예) 김익두목사 / 야 임마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네가 받았다.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이후의 삶

      김익두(金益斗) 1874. 11. 3 ~ 1950. 10. 14. 조선 황해도 안악군 출생
      일제 강점기와 광복 이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 활동한 한국 초기 개신교 목사

      청년 시절에는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900년 미국인 선교사 W. L  스왈렌의 설교에 감동하여 개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년 후 스왈렌에게 세례를 받고 재령교회의 전도사가 된 김익두는 황해도 신천 지역의 개척 전도사로 파견되어 개척교회 활동을 하였다.
      1910년에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신천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919년 강동 염파교회에서 사경회 도중 신적인 치유 능력을 얻어 이것이 소문나기 시작하면서 그가 주최하는 부흥집회에는 치료를 받고자 많은 인파들이 찾아왔다.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 거부로 고문을 받기도 했다.
      광복 이후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에 남아 김일성 정권에 협력을 가장하면서 반공연대를 조직하는 등 우익 인사들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활동을 하다가 1950년 10월 14일, 한국 전쟁조선인민군의 총에 맞아 7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이때 함께 있다가 저지에 나선 5명의 성도 또한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다.


      * 지키다(5083) 테레오(tērĕō) τηρέω   

      1. 지켜보다.  2. 지키다.  3. 유지하다
      발음 [ tērĕō ]
      • 관련 성경 / 지키다(마19:17, 마28:4, 딤전5:22, 계3:3), 지키게 하다(마28:20), 두다(요2:10, 12:7), 보전하다(요17:11,15), 갇히다(행12:5), 간직 하다(벧전1:4), 구류하다(행25:4), 지켜주다 (행25:21), 그대로 두다(고전7:37), 조심하다(고후11:9), 보전되다(살전5:23), 예비되다(유13).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사도들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신자가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되는 것은, 이 말씀이 앞절과 관계를 가지는가 혹은 독립적인 말씀인가?
      또 혹은 이것이, 16절 이하에 나오는 보혜사 약속과 관련된 말씀인가?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몇몇 학자들의 의견을 생각해 보고저 한다.

      1.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귀절의 말씀이 독립적인 언사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보기에는 그런 것 같지 않다.

      2. 렌스키(Lenski)와 핸드릭슨(Hendriksen)은, 이 귀절 말씀이 위에 있는 많은 말씀과 관련되었다고 생각한다.
      곧, 그들은, 여기 "사랑"이란 것을 믿음(11절끝)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계명"이란 것을 기도하라는 부탁과 같이 생각하여 윗말과 연결시킨다. 

      3. 버나드(Bernnard)는, 이 말씀을 16절 이하의 보혜사 약속과 관련시킨다.
      곧, 그는 생각하기를, 신자가 계명을 지켜야 되는데, 그것은, 16절 이하에 약속된 성령의 은혜로만 성립된다는 것이다.

      4. 다른 학자들은 역시 이 귀절을 16절 이하와 연락시키면서도 위의 버나드(Bernnard)와 달리 취급한다.
      이들은, 이 귀절(15 절)과 아랫 말씀을 연락시켜서 다음과 같은 뜻을 찾는다.
      곧, 신자들의 계명을 지켜야 보혜사가 오신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계명이란 것은 신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과(34 절), 또한 합심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신약 교회를 창립하는 오순절 성령 운동은 물론 구원사(救援史)에 속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약속 성취이다.
      이 약속 성취는 인간의 주관적 조건에 매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약속 성취를 내다 보시면서 사도들과 그 때 신자들의 주관적 준비를 명하시기는 하셨다.
      예컨대, 그들더러 예루살렘에 유하며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이다(행 1:4).
      그들의 기다리는 일은 바로 기도에 전력함이었다(행 1:14).

      5.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계명을 지키라"는 주님의 말씀은, 14절에 나온 기도하라는 부탁과 관계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15:7).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귀절의 말씀이 그 아래 나오는 말씀, 곧, 성령이 오시리라는 약속과 관계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그들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기도하는 결과로 성령님이 오시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행 1:12-14, 2:1-4).
      "계명을 지키리라." "지킨다"는 말은, 보배를 지키며 보관함에 대해 쓰는 말이다.
      이것은 계명을 중심에서부터 사랑하여 지킴이다.
      계명 지킴과 기도 응답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은, 마술적 의미에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 윤리적 내용을 가진 것이다.
      그것은, 그 기도자가 주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는 사실이 있어야 그의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이다.
      불건전한 신비주의는 계명과 율법을 무시하는 경향에 있다.

      예를 들면, 재세례파에 속하는 란텔파(rANTERS)는, 자기들이 모든 계명을 초월한다(계명의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뜻)고 하였다(R.A. knox. Enthusiasm, p. 173).
      그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자기 자신을 신격화(神格化) 하는 참람한 행동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어떻게 사랑합니까?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면 먼저 하나님이 계시하여 주신 계명을 지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구약에서는 열 가지 계명으로 계시하셨습니다(출 20:1-17).
      하나님의 계명은 신약에서는 두 가지로 요약하여 말씀하기기를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마 22:34-40).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기 전에 먼저 형제를 사랑하라고 합니다(요일 4:21).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먼저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은 직접 대면하고 만날 수 없지만 이웃과 형제들은 항상 대면할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요일 4:12).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이웃이나 형제를 사랑하는 비결은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만일 허물을 덮어주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허물을 전달하는 것은 친한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잠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축하하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모두에게 하늘의 은총이 차고 넘치도록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Merry Christmas!"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1989년 12월 24일
      루마니아 "차우셰스쿠"를 무너트린 혁명의 날


      12-24-2024(화) 요한복음 12:13-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가 시행하리라(13-14절)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And I will do whatever you ask in my name, so that the Son may bring glory to the Father.
      You may ask me for anything in my name, and I will do it.

      예수는 중보자

      이사야 38:14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갈라디아서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갈라디아서 3: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히브리서 8:6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히브리서 9: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브리서 12: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무엇이든지(5100)  Tὶς, τὶ   

      1. 어떤 사람.   2. 마 12:29.  3. 어느 사람
      발음 [ tis ]

      구하다(154)  αἰτέω   

      1. 구하다.   2. 묻다.  3. 요청하다
      발음 [ aitĕō ]

      구하다, 묻다, 요청하다[능동태와 중간태의 구별 없이 사용됨], 마7:10, 18:19, 27:58, 막15:43, 눅23:52, 행12:20, 고전1:22.


      중보(3316)  μεσίτης, ου, ὁ 

      1. 중재자.   2. 갈 3:19, 20.  3. 딤전 2:5
      발음 [ mĕsitēs ]
      어원  / 3319에서 유래
      • 1.  중재자, 갈 3:19, 20, 딤전 2:5, 히 8:6, 9:15, 12:24.
      • 관련 성경  /  중보자(갈 3:19, 딤전 2:5, 히 12:24).




      * 시행하다(4160) 포이에오(pŏiĕō) ποιέω   

      1. 하다.   2. 제조하다.  3. 행하다
      발음 [ pŏiĕō ]
      관련 성경 /  행하다(마1:24, 몬1:21), 맺다(마3:8, 7:18), 짓다(마17:4, 막9:5, 눅9:33), 만들다(눅11:40, 요4:46), 베풀다(마22:2, 눅10:37, 14:13,16), 얻다(마23:15), 남기다(마25:16), 지키다(마26:18), 시키다(마26:19), 세우다(막3:14, 히8:9), 행하다(요14:13,14), 피우다(요18:18), 이루다(행4:28), 실행하다(행11:30), 떠나다(행18:23), 가지다(행24:17), 지내다(고후11:25), 머물다(약4:13), 일으키다(계11:7), 지어내다(계22:15).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신자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위의 12절에서 독립된 것인가?
      혹은 그것의 연속인가?
      이것은 하나의 난제이다.

      1. 핸드릭슨(Hendriksen)은, 이 부분 말씀이 12절 내용을 더 설명해 주는 부속 문구라고 한다.
      고데이(Godet)와 즈안(Zaln)도 역시 같은 해석을 취한다.

      2. 크로솨이데(Grosheide)와 버나드(Bernard)와 렌스키(Lenski)등은, 이 부분 말씀을 또 하나의 독립적인 약속으로 간주한다.
      특히 버나드(Bernard)는, 13절 초두에 있는 "또한"(*)이란 헬라원어에 근거하여 이와 같은 주장을 세웠다.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1. 예수님의 권위(權威), 혹은 공로(功勞)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
      2. 그의 계명을 지키며, 그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

      "내가 시행하리니"란 말씀은, 아버지께서 기도 응답하심이 아들로 말미암아서 실행됨을 가리킨다(Barrett).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기도응답은 언제나 인간의 사욕을 채우려 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그에게 영광이 돌아가게 하려 함이다.
      이런 기도 응답은 그리스도의 중보적 역사로 인하여 실시되는고로, 여기서 "아들을 인하여"란 말이 쓰여 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내가 시행하리라(에고 포이에소. εγω ποιησω) I will do it.

      인간은 "기도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호모 오란스(homo orans)"는 "기도하는 인간"이란 뜻입니다.
      세상 모든 종교는 기도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하신다"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해야만 응답하시는가?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죄인이었던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직접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중재자가 되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남이 가능하지요.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12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이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의 자격과 특권에 힘입어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일 제자들과 계속 이 땅에 계신다면 그런 말씀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약속은 하셨지만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구하는 내용의 범위를 제한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지 않는 일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려면 먼저 철저한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순종의 길은 걷지 않으면서 내게 있어야 할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을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지라도 반응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혹시 나의 기도에 응답이 없었다면 먼저 내가 어느 길을 가고 있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먼저 순종의 길을 선택하고 그 길에서 철저한 순종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몰두할 때 구하지 않은 것 까지도 채워주시고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수님이 신적능력으로 큰 이적을 일으킨 겉모습만 보고서 우리가 구하는 모든 일에 그 능력이 함께 해달라고 간구해선 큰 잘못입니다.
      먼저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순종한 후에 아버지가 인도하시는 길에서 구하는 즐거움과  구하는 보람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깊은 곳에서


       

      이 약속의 꼬리도 당연히 바로 뒤의 15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2절에서 제한을 가한 무엇이든 구하는 기도의 범주를 다시 확인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또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구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행했던 일보다 더 크게 구하라고 했습니다.
      문맥에서만 따지면, 우리로선 현실적으로는 아예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가 정말로 주님이 성부 하나님을 사랑했던 것보다 더 뜨겁게 사랑하고, 또 주님이 성부의 계명을 지켰던 것보다 더 성실하고 열심히 준행하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16절)도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하늘 보좌의 영광으로 복귀하시니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어서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내주토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보혜사는 진리의 영이라고 합니다.(17절) 말하자면 기도할 때에 과연 “무엇이든 구할 수 있는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잘 분간이 안 될 수 있으니 가르쳐 주는 영으로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겨우 바로 앞뒤 한절씩만 보지 않았는데도 전혀 다른 해석과 적용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다시 코끼리로 비유하면 가장 중요한 기다란 코와 꼬리, 큰 귀는 물론 기둥 같은 다리까지 다 없애고 그냥 드럼통 같은 몸통만 들고 끝까지 코끼리라고 우깁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엇이든 구하면 다 시행해 준다고 해놓고 왜 아직 이 모양 이 꼴입니까?” 또 무엇이든 주님보다 더 큰 일을 구하라고 하니까 자기가 정한 아주 큰 계획을, 물론 종교적 도덕적 겉치장은 조금 합니다만, 약속과 달리 이뤄주지 않는다고 떼를 씁니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해석 적용해야만 뜨겁고 좋은 믿음이라고 칭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33)

      “의”는 도덕이나 윤리적으로 올바른 행실이나 선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죄와 관계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문자적인 해석으로 “의”는 “정의”나 “공의”로 해석합니다.

      우리는 의인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지만 의인이라고 인정을 한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

      구약에서는 율법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대표적으로 노아, 욥, 다니엘 (겔 14:14).

      에스겔 14:14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은 죄인을 말합니다(롬 1:17).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의(義)”는 관계(relation)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셨다면 내가 의식주의 문제를 걱정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식주의 문제를 갖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로마서 14:17)와 하나님의 의(로마서 3:22)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로마서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자녀는 부모님이 계시므로 그런 의식주 걱정은 하지 않는 것과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성경에서의 의(義)

      1. 공의
      2. 정의
      3. 관계

      어느 것을 사용할지는 문맥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예를 들자면 로마서 1:17은 유명한 이신칭의(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구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에서도 ‘의’란 ‘관계’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이걸 공의나 정의로 해석하면 이상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서 실수하거나 오해하여 복음에는 공의/정의가 나타났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복음은 사랑입니다.
      복음에는 공의나 정의가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내가 새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과의 나와의 관계가 자녀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 됩니다.
      최소한 이 두 구절(마 6:33, 롬 1:17)만큼은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로 해석하고 적용하여야 합니다. 
      히 12:11도 "관계"로 해석하여 전체적으로 올바른 해석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속에서 정의와 평강과 희락이 이루어짐)와
      “의”(하나님이 내 아버지시고 나는 그의 아들이요 딸이다)를 구하고 찾으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공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루라는 겁니다.
      먼저 내 마음에, 그리고 가족, 교회, 회사, 사회에 이뤄가라고 명령하시는 겁니다.

       
      기독교 영성가 오스왈드 챔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도의 목적은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에서 하나님과 이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이곳에서의 현실은 우리에게 이상적인 조건을 제공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챔버스는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과는 먼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이 주님과의 관계를 촉진시키고, 우리의 기도의 목적 또한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인 현실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 속에서 실현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기도는 현실적이지만, 현실을 초월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가부장적 유교 문화 때문에 침묵이 금이라고 세뇌되어진(?) 한국인들은 대화나 토론에 아주 미숙합니다.
      거기다 이성보다 감성이 앞선 기질 때문에 사고에 논리성, 합리성, 객관성이 상당히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정이나 사회나 건전한 토론으로 의사결정이 이뤄지기보다는 상명하달이 아니면 끝없는 시비 둘 중 하나로 그칠 때가 많습니다.

      국가 장래와 국민 복지를 책임지는 정책을 결정해야 하기에 건전한 토론이 가장 절실한 정치판이 오히려 더 그러합니다.
      자기주장만 일방적으로 끝까지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면서 그에 동조하면 동지요, 반대하면 원수로 편 가름합니다.
      논쟁의 당사자들은 화자가 말한 전체 대의는 물론, 강조코자 하는 주제는 아예 무시하고 오직 말꼬리 잡는데 혈안이 됩니다.

      예컨대 코끼리의 머리와 꼬리를 거두절미(去頭截尾)하면 몸통 밖에 남지 않기에 누가 봐도 도무지 코끼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장님은 그나마 자기가 만진 것에 대해선 정확하게 표현이라도 합니다.
      멀쩡히 코끼리를 전부 다 보고나서도 몸통만 코끼리이고 나머지는 아니라고 우기니 차라리 장님보다 즉, 아무 것도 안 보느니 못한 것입니다.

      지금 정치가들을 비평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바로 그 대표적 경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다락방 강화 때에 제자들에게 하신 권능의 약속인데 신자들에게 큰 은혜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기도하면 그대로 시행하겠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 이해로 그치면 그야말로 거두절미한 해석이 됩니다.
      아니 오랜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그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한다고 다 응답되는 법이 없음을 실감했는데도 여전히 그렇게만 이해합니다.
      나아가 이 말씀을 기도 응답의 가장 확실한 근거로 하나님께 들이대며(?) 열심히 뜨겁게 기도합니다.  

      원래 성경은 장과 절로 나눠지지 않았습니다.
      훨씬 후대에 빨리 찾아서 서로 대조 연구하기 편리하게 편의상 붙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중단 없이 죽 이어진 글입니다.
      다른 말로 성경은 절대로 거두절미해서 읽어선 안 되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이 어쩌면 누구에게나 성경에서 가장 은혜가 되는 말씀인데도 현실에선 실제 적용이 가장 안 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말씀이 아주 심오한 영성을 지녀 어려운 탓도 아니요, 예수님이 크게 과장했거나 공수표를 발행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이유는 신자들이 머리와 꼬리 모두 잘라내고 읽고, 해석,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머리는 무엇입니까?
      바로 앞의 12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이제 우리의 해석과 적용의 잘못이 무엇인지 조금 감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우선 이제 아버지께로 가니까 당신의 이름으로, 즉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신자)의 자격과 특권에 힘입어 구하라고 한 것입니다.
      제자들과 계속 이 땅에 남아 계실 것 같으면 그런 말씀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약속은 하셨지만 특정한 범주(範疇. category)로 제한했다는 것입니다.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셨던 일과 동일한 범주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심지어 같은 범주라면 얼마든지 더 큰 일도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하는 “무엇이든”과 주님이 뜻하는 “무엇이든”의 범주가 과연 같은지 따져보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지 않는 일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어긋나는 일은 아무리 사소해도 단 한 건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간, 물론 그럴 리는 만에 하나도 없었지만,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지 않음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그런데도 단순히 주님이 신적능력으로 큰 이적을 일으킨 겉모습만 보고서 우리가 구하는 모든 일에 그 능력이 함께 해달라고 간구해선 아주 큰 잘못이지, 최소한 어긋난 적용이지 않습니까?
      주님이 일으키신 모든 이적의 목적 또한 모든 이로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만 죄인을 구원하시고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려는 뜻이었지 않습니까?
      역으로 따져 우리 기도에 그런 목적만 있다면 얼마든지 큰 기적을 구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이 약속의 꼬리도 당연히 바로 뒤의 15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2절에서 제한을 가한 무엇이든 구하는 기도의 범주를 다시 확인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또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구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행했던 일보다 더 크게 구하라고 했습니다.
      문맥에서만 따지면, 우리로선 현실적으로는 아예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가 정말로 주님이 성부 하나님을 사랑했던 것보다 더 뜨겁게 사랑하고, 또 주님이 성부의 계명을 지켰던 것보다 더 성실하고 열심히 준행하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16절)도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하늘 보좌의 영광으로 복귀하시니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어서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내주토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보혜사는 진리의 영이라고 합니다.(17절) 말하자면 기도할 때에 과연 “무엇이든 구할 수 있는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잘 분간이 안 될 수 있으니 가르쳐 주는 영으로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겨우 바로 앞뒤 한절씩만 보지 않았는데도 전혀 다른 해석과 적용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다시 코끼리로 비유하면 가장 중요한 기다란 코와 꼬리, 큰 귀는 물론 기둥 같은 다리까지 다 없애고 그냥 드럼통 같은 몸통만 들고 끝까지 코끼리라고 우깁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엇이든 구하면 다 시행해 준다고 해놓고 왜 아직 이 모양 이 꼴입니까?” 또 무엇이든 주님보다 더 큰 일을 구하라고 하니까 자기가 정한 아주 큰 계획을, 물론 종교적 도덕적 겉치장은 조금 합니다만, 약속과 달리 이뤄주지 않는다고 떼를 씁니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해석 적용해야만 뜨겁고 좋은 믿음이라고 칭찬합니다.

      말꼬리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 정치인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새벽마다 울며불며 하나님에게마저 몸통만 들고서 코끼리라고 우기는 신자들을 하늘에서 그분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내려다보겠습니까?
      물론 우리 모두는 정말 구해야할 것을 모를 때가, 사실은 이런 원리는 알면서도 잊어버리는 일이 너무 잦습니다.
      그래서 일단 무엇이든 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자신이 기도하는 내용을 점검해야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신 일만 하셨던 주님처럼 구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또 그런 범주 안이라면 정말로 무엇이든, 아무리 큰일이라도 담대하게 구하고 있는지도 말입니다.
      자신의 영혼이 거룩해지고, 주변에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가 자기를 통해 전해지는 바로 그 일 말입니다.
      나아가 그런 간구라면 마땅히 응답될 것을 확신하기에 미리 감사하며 기도하는지도 말입니다.

       

      기도는 무엇인가?

      첫째, 인간의 욕망과 욕구에 대한 갈망
      인간의 욕망과 욕구는 끝이 없기 때문에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 기도를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인간의 불완전함은 완전함을 추구하고, 인간의 유한함은 영원을 추구하게 하면서 종교와 기도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 들이 과거에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는 상당부분 맞는 말인 것 같다.

      기독교 안에서 기도에 대한 정의는 단 한 가지가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정의에 공감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기독교는 오랜 역사동안 다양한 하나님과의 대화 방법들을 발견하고 실천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도의 정의, 기도의 방법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 삶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자리를 만들고 기도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기도는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으나 막상 기도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참된 기도(독백이 아닌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는 일상의 삶을 멈추고 하나님께 집중해야만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삶의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이때 기도의 길이, 기도의 질, 지식의 수준은 기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러한 것들에 신경을 쓰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 만남 보다는 자기 만족을 추구하기 쉽다.
      시작하는 기도의 기도는 실재로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고, 자기의 솔직한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은 없다.
      기도를 지속함으로 친밀함은 발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색하더라도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기도를 위한 시간을 찾아라.
      기도에 도움이 되는 음악, 성경본문, 그림(헤겔에 따르면 상징은 인간의 종교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표현 형태이다.
      이러한 상징에 집착하는 ‘상징주의’는 참된 영적 깨달음을 방해한다.
      헤겔은 상징을 통해 얻어지는 상징적 지식과 하나님과 친밀한 만남을 통해 얻어지는 직접적 이해(통찰)를 날카롭게 구분한다.
      그러나 상징자체를 부정하는 것 또한 ‘문자주의’의 위험을 안고 있다.
      전문 독자라면 상징에 대한 헤겔의 견해를 두고 로마 가톨릭의 신학자 칼 라너, 개신교 신학자 폴틸리히, 그리고 고대 교부 아타나시우스의 상징에 대한 논의들을 참고하라.
      칼빈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등을 활용해도 좋다.
      관건은 규칙성에 있다.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기도가 습관이 되는 것은 중요하다.  

      기도가 습관이 되면서 영적인 성장이 일어나고 영적인 성장을 통해 기도의 방식도 성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침묵을 통한 기도로 들어간다.
      즉, 듣는 기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깊이 들어가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 의식을 집중하여 응시하는 ‘관상’(관상에 대해 개신교는 약간의 오해가 있다.
      뉴에이저들이 사용하는 기법이라 하여 이교도적 행위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관상은 집중하여 응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시험 문제를 풀거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중하여 응시하는 것 또한 관상적 방법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관상에 대해 무조건적 반감은 자제가 필요하다.)적 자세를 통해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관상은 하나님을 향해 시선과 의식을 집중하는 것으로,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집중하도록 인도한다.

      여기서 깊은 기도에 대한 오해 또한 풀어야 한다. 깊은 기도에 들어가면 신비한 것을 보거나 체험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실재는 그렇지 않다.
      깊은 기도로 들어가는 과정은 사막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새로운 미지의 세계는 온갖 보화들로 가득차 있는 것이 아니라 황량한 사막과 같은 느낌을 받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황량함은 그곳에서 다가오시는 주님께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칫 하면 지루함을 느끼게 되고 기도에 흥미를 잃을 수도 있는 기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시 현실적이고 외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음도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이 시간들을 기도로 잘 극복해 나가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총명함을 통해 통찰력들이 생기게 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 깨달은 바들을 행동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기도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답들을 제시하고 있다.
      ‘과학 법칙이 지배하는 우주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기도할 때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떻게 해야 기도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평생에 걸친 여정 

      인간을 구분하는 관점과 기준들은 매우 다양하다.
      ‘기도하는 인간’과 ‘기도하지 않는 인간’으로 구분해서 생각해 보았다.
      물론 기도에 대해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들은 여기서 배제된다.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인간이 왜 있을까?
      분명 그들은 기도를 미루거나, 기도를 못하는 분명한 변명거리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서를 읽어보라.
      기도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눈을 감고 할 수도 있고, 눈을 뜨고 할 수도 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할 수있고, 일을 하면서도 할 수 있다.
      기도는 언제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향해 언제 어디에서나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고, 언제 어디에서나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평생동안 하나님을 믿는다면 기도 생활은 평생의 여정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하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존 프리처드 (John Pritchard)
      1948년생. 성공회 성직자이자 문필가. 옥스퍼드 세인트 피터 갈리지, 케임브리지 리들리 홀에서 공부한 뒤 1973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지역 교회 사목 활동과 동시에 잉글랜드 성공회에서 진행하는 그리스도교 교육 활동과 관련하여 여러 직책을 맡았다.
      2002년에는 주교 서품을 받았으며 2006년부터 2014년까지 옥스퍼드 교구의 주교로 활동했다.
      현재 SPCK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성숙과 영성 생활을 돕는 다양한 저작을 썼으며 주요 저서로 『기도하는 법』How to Pray(2002), 『교회에 가다』Going to Church(2009) 등이 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할 뿐 아니라 또한 이보다 큰일도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큰일이 바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의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이다.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14:13)라고 말씀하심으로 너희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 이름으로” 구하며, 구하는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여야 하며, 그 기도는 ‘무엇이든지 내가 시행한다’고 말씀하심으로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심을 확실하게 정의하여 주신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일은 예수님이 하실 것이며 그 일에 우리를 동참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그 일을 시행하시는 분은 예수님 자신이기에 반드시 “아들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영광을 얻는” 일로 바꾸어 내시겠다는 약속이다.

      기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도는 육신이 호흡해야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호흡으로 생명을 유지하게 됨으로 기도를 ‘영적 호흡’ 혹은 ‘생명줄’이라고 부른다.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단절된 상태이기에 생명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는 영적 호흡이기에 오직 택함을 받은 당신의 백성에게만 주시는 하늘나라의 특권이기에 반드시 예수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증거를 낳는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반드시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사귐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되며, 우리에게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며,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게 되며,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의 숨결을 매일 체험하면서 매일 그분의 생명력으로 살아가게 됨을 확신하게 된다.
      때문에 기도는 말씀과 같이 성도의 존재 양식이며 살아가는 생명력이다.

      ​우리 주님은 모든 질고와 아픔과 고난과 멸시와 고통과 죽음을 우리를 위하여 겪으셨다.
      무시당하고, 핍박당하고, 맞고 찢기고,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으시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체휼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치른 대가는, 우리의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심으로 영원한 지옥 의 혈별에 합당한 우리를 사망의 권세에서 끌어내어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올리기 위함이었으며, 죄인으로 살던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 생명으로 거듭나 이제 아버지와 하나이고 아들과 하나인 영원한 연합을 이루어주시기 위함이었다.
      이 놀라운 은혜와 특권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통해 우리에게 오직 사랑으로 선물로 부여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깨닫게 하며 증거하는 역할이 바로 기도와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적 호흡을 통하여 매일 그분의 은혜와 사랑과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마음에 되새기며 매일 매순간마다 체험함으로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없는 영원한 하나임을 확신하게 된다.
      또한 이 세상 권세 마귀의 유혹과 시험과 박해와 멸시와 같은 모든 악의 세력 속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시며 믿음을 잃지 않고 굳세게 서서 하나님의 아들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자랑할 수 있도록 기도로 붙들어 주시며, 그 어떠한 고난과 시련과 절망과 실패와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와의 영적 사귐으로 지탱할 수 있고 이길 수 있고 감사와 기쁨으로 화답하는 사랑의 힘으로 넉넉히 이기게 하여 주신다.
      그리하여 기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기도의 위력으로 기쁨과 성령 충만으로 순교를 자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능력과 위대함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14:13)라고 “내 이름으로 구하는” 제한성과 “무엇이든지”이루어주시는 무제한 능력을 동시에 약속 하셨다.

      지금까지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아니 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의도,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뜻과 생각에 일치한 기도를 하게 되며 그 기도를 인도하시는 분은 곧 성령님이심을 뜻한다.

      즉 기도는 내 자의로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계시하여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6:24)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주님이 육신으로 있을 때는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기에 성령님이 아직 오지 않은 상태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고 하여도 그 기도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음으로 “구하지 아니 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즉 육신적 욕망과 탐심에서 나오는 기도는 ’내 이름‘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예수님의 뜻과 일치할 수가 없기 때문에, 너희가 구한 것은 ”내(예수) 이름으로“ 구한 것이 아니기에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비록 육신으로는 예수님과 함께 3년을 동고동락하였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기에 온통 자신들의 유익만 계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지막 성찬에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셔야하는 그 힘든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서로 누가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이 되는 가를 놓고 다툼을 벌인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로마군에게 잡혀가는 주님을 보고 두려움으로 배신하고 뿔뿔이 도망하여 숨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성령의 인도 없이 자의로 구하는 기도는 이 세상 것을 구하는 육신을 위한 기도이기에 들어줄 수가 없음으로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육신의 기도를 부정하시고, 이내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16:24),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14:12-13)라고 확실하게 명하신다.
      이제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면 그때 비로소 성령님의 인도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뜻과 일치된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기도는 “무엇이든지” 예수님이 친히 시행하실 것이며 그로 인하여 아버지에게는 영광이 되고, 제자들에게는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고 확실하게 말씀하여 주신다.

      ​이와 같이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의 삶을 근원적으로 바꾸어 놓게 되는 성령강림과 기도, 이 두 가지를 약속하신다. 즉 주님이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승천하신 후, 보혜사 성령으로 제자들 마음에 뚫고 들어오셔서 매일 그들과 동행함을 기도를 통하여 현실로 실감하게 됨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제 제자들은 매일 기도로 주님과 교통하게 됨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없으며, 그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아무런 방해가 없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수시로 주님과 영적으로 만나고 교제하는 현실을 체험하게 됨으로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16:24).
      동시에 성령의 권능으로 땅 끝까지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됨으로 ‘너희는 나의 하는 일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14:12)라고 확신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반드시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부터 출발하여 내 마음에 영접하여 그분을 믿게 됨으로 나의 모든 것을 그분에게 내려놓고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그 믿음은 나의 의지와 나의 원함에서 발동되어 내가 먼저 그분을 알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이 나를 찾아와 주셔서 나를 부르시고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 눈을 뜨게 해 주심으로 나의 티끌 같은 존재 가치를 인식함으로 그분 앞에 내 자신을 내려놓는 항복으로 그분의 도움을 청하는 애통이 터져 나오게 된다.
      즉 기도는 바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깨달음이며, 그 자아인식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라는 애통이 터져 나오게 된다.
      자신이 바로 티끌과 같은 ‘없음’이었으며, 죄로 인하여 한없이 부패한 존재이며, ‘죄와 허물로 죽은 자’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철저히 깨닫게 되는 가난한 심령에서 외치는 애통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은혜는 오직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하는 자에게 임하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애통함의 기도로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을 내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으며, 이제 그 무엇으로도 떨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되었으며, 그분의 믿음으로 매일 교제하는 사귐을 통하여 그분의 마음에 합당한 자녀로 지어져가고 있다.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믿는 예수는 고난과 수모와 죽임을 당한 십자가 예수이지,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영광을 취하려 오신 세상 왕으로 오신 분이 아니시며, 또한 인간에게 이 세상 부귀영화를 주어 이 세상의 삶을 형통케하여 주는 인간이 원하는 세상 임금으로 오신 분도 아니시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무엇이든지”는 육신의 욕망과 탐심과 정욕으로 이 세상의 것들을 구하는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내용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은 “무엇이든지”라는 무제한을 “아버지께서 영광을 얻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내용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말씀하신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25-34). 이와 같이 주님은 기도의 진의를 상세히 가르쳐 주시고 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즉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육신이 필요로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구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우리의 필요대로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있기 때문에, 육신을 위한 세속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초월하여 먼저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다. 즉 우리가 마땅히 구하여야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잠깐 살다가 없어지는 육신의 원함이 아니라,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 하늘나라 백성의 의무라는 말씀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인 하늘나라에 돌아가기 위한 발판으로 주신 곧 없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에 허무한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영원한 하늘나라와 영생을 위한 하나님의 의를 소망하는 그 기도를 원하시며 그 기도만이 기쁨이 충만하게 됨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리면 우리가 구하여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주님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하늘나라의 왕이시며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도 이루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그리하여 그분은 굳이 이 죄악 된 세상에 종의 형체를 입고 어린 아기로 처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잉태하시고, 굳이 이 세상의 더러움과 추악함과 죄로 가득 찬 죄인들이 사는 곳을 상징하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으며, 굳이 구유에 눕히심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먹게 하셨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굳이 세상 죄인들로부터 온갖 수모와 매를 맞는 고난과 조롱과 수치를 다 당하셔야 하셨으며, 저주의 사형들인 십자가에 못을 박아 피를 흘리는 죽임을 당하셨다. 이사야의 말씀대로, “그가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짓밟힌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며 그가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고 그가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사 53:5).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 안에 뿌리박고 있는 모든 죄의 유전을 송두리째 뽑아서 자신에게 전가시키고 죄를 짊어진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의 뿌리를 깡그리 철저히 도말하여 주셨다. 동시에 영으로는 자신의 본체이신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히 함께 사는 영생을 주실 수가 있었다.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 피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시기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삶이었다.

      ​그러므로 기도는 “무엇을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만물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 피조물의 육신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게 하신 그 위대한 사실을 마음으로 깨닫게 됨으로 그분의 한없는 아가페 사랑에 나의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의탁하는 내려놓음과 항복과 신뢰이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자기를 낮추어 우리의 육신을 입고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이 세상 원리와 가치관과 완전히 대립되는 방법으로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살려 내시는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빌 2:6-8).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임하여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는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육신의 원함이 아니라, 반대로 나의 과거 현재 미래까지도 계획하신 하나님께 나의 인생 전체를 맡기고 그분의 의로운 인도에 나를 쳐서 복종할 수 있도록 내 ‘자아’가 죽음으로 내 안에서 그분의 의가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항복과 순종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에 ‘시행하시는’ 그 이유는 바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밝히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4:13). 즉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우리에게 주시는 그 응답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기에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 합당한 기도를 하게 하시며, 그 기도는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말씀이다. 우리 주님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렸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함과 같이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 수난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수시로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이 들어주시는 기도는 바로 우리 주님이 살아내신 그 십자가 자기부인과 자기죽음의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여야 함을 계시하고 있다.

      거듭난 성도는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야 하는가?

      거듭난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예수그리스도의 신부이기에 육신이 원하는 이 세상의 것을 구할 수가 없다.
      신랑의 뜻을 헤아리게 됨으로 신랑의 뜻과 일치하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를 하게끔 내안에서 성령님이 인도하여 주신다.

      그리하여 내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듭나 또 다른 이의 생명을 태동시켜 생명의 열매를 맺는 복음에 관한 기도는 “무엇이든지” 다 들어 주실 것이며, 반드시 “내 이름으로 구하라”는 조건을 붙이고 있다. ‘우리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육신을 위한 탐심에서 출발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는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기도이기에 무엇이든지 몽땅 이루어짐으로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즉 예수 이름으로 구하는 제한 하에서 그분의 의와 그분의 뜻을 구하는 기도는 무제한으로 시행하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내가 주체가 되어 나의 요구 사항을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포기하는 항복으로 전적으로 그분의 뜻에 맡기는 순종이다. 기도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깨달음에서 시작한다. 자신이 바로 죄와 허물로 패역한 죄인으로 죽어있는 실체임을 투명하게 깨닫는데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은혜만을 구하게 되는 철저한 자기 부인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게 나의 영적 가난함을 인지하는 가난한 심령과 자신을 부인하는 애통으로, 진리를 갈망하는 굶주림과 의에 대한 목마름을 호소하는 그 기도는 반드시 시행하신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구원받은 성도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정복되지 못한 내 옛사람의 성품들이 남아 있다. 미움, 시기, 질투, 욕심, 정욕, 교만, 이기심, 거짓과 위선 등등 수많은 세상 것들이 우리 육신 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죄들을 여전히 우리 안에 남기게 하신 이유는, 그렇게 끈질기게 뿌리박고 있는 내 속 마음의 탐심과 야망들을 경험하면서, 여전히 기회만 있으면 자신의 의와 가치를 챙기기 위해 열심을 부리는 외식적인 악행들을 경험하면서, ‘나는 어쩔 수 없는 도저히 깨끗한 것이 나올 수 없는 패역한 죄인이 맞구나’, ‘죄인중의 괴수가 바로 나’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만을 꼭 붙들라고 우리에게 항상 쉬지 말고 오직 기도로 숨 쉬는 순간마다 아버지만을 의지하며 신랑의 사랑으로 악에서 벗어나는 도움을 요청하게 하신다. 세상을 향하여서는 굶어서 목말라 죽게 하심으로 필사적으로 먹을 것과 마실 물을 찾는 그 절박한 갈증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로 인도하신다. 오직 하나님의 의만이 구원과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님과의 영적 사귐과 교제를 통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로 내려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자각으로 애통하며, 주리고 목마름으로 진리를 간구하며, 내 안에서 당신이 거할 처소를 만들고 계시는 주님의 열심에 항복하여 이 세상의 것들이 잘려나가고 부서지고 삭제되어 내 ‘자아’가 죽기를 소원하게 되며, 그 기도가 바로 주님의 뜻과 일치되는 기도이기에 주님이 시행하여 주신다.

      모든 일은 주님이 이루시는 사역임에도 왜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시는가?

      “내 이름으로 구하라”는 주어도 예수님
      구하는 내용도 예수님의 것
      시행하시는 분도 예수님이라는 말씀이다.
      다만 당신의 십자가 복음 사역에 우리를 동참시키기 위하여 우리에게 “구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고후 6:1), “하나님의 동역자”(고전 3:9) 라고 즐겨 부른다.
      ‘동역’이란 같은 목적을 향하여 같은 일을 함께 하는 사역을 의미한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요소는 "기도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매일 기도를 하면서도 내가 기도한 것에 대한 응답을 헤아려 보셨는지요?
      때로는 너무 오랫동안 응답이 없으므로 기도를 포기한 적은 없었는지요?

      육체적인 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이 그의 장애를 해결하려고 일생동안 기도했지만 응답이 없다고 생각할 때 과연 그의 기도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기도가 잘못되었다고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육신의 장애는 여전히 나를 힘들게 할지라도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구현하실는지 또 나를 통하여 드러내려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복음서를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꼼꼼히 살펴보십시오. 역사상 이보다 큰일을 하신 분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능력이 많으신 분을 의지하는데 어찌 우리가 나약한 사람들입니까? 도리어 강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예수님을 나약한 종교 교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은 우람한 육체를 가지거나 혹은 격투기 선수처럼 강인한 모습을 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 53:2에 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가끔 화가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영화배우처럼 잘 생기고 건장한 육체를 가지신 분으로 그리는데 이는 성경에서 묘사한 예수님의 모습하고는 사뭇 다릅니다. 물론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찌하든지 좋게 묘사하려는 마음은 이해가 되는데 그러다가 사실까지 곡해하면 안 됩니다.

      죄송하지만 예수님의 육체의 모습은 그리 잘나지 않았습니다. 그 분에게는 고운 모양이 없었습니다. 성경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피부는 좋지 않았습니다. 때깔도 좋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잘 상상이 안 가시는 분들을 위해 어떻게 하면 쉽게 이해를 해드릴까요?

      북한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살찌고 포동포동한 김정은이나 공산당 간부들을 생각하지 말고 못 먹고 못사는 저 불쌍한 이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못 먹어서 삐쩍 말랐습니다. 누가 봐도 때깔이 좋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육체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사실 크리스천으로서 부활과 천국의 소망을 놓치고 살면 그때가 가장 불쌍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이민생활, 유학생활, 학교생활, 직장생활, 가정생활, 교회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부활과 천국의 소망을 붙잡고 힘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바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고 주님의 명령을 지키며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내 힘으로 잘 안됩니다.
      내 힘으로는 빛의 자녀로 살아갈 힘도 없고, 남에게 빛을 비추는 사명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고로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달을 보십시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합니다. 태양 빛을 받아서 반사시키므로 비로소 빛을 비추게 됩니다. 우리도 빛 되신 예수님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인생 살면서 빛의 자녀로 살 수 있고, 남에게 빛을 비출 수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 없으면 불 꺼진 항구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3-14)

      “내가 시행하리라.”

      물론 그렇게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한다고 교회에서 여러분에게 월급 주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반주자들, 주일 학교 교사들, 각 부서를 맡아 수고하시는 분들 굉장히 열심히 수고하시는데 죄송하지만 월급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나에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못하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느끼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젊었을 때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지만 나이가 들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자주 생각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느낄 때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입니다.
      나의 소원을 성취시킬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너희는 내게로 와서 나에게 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기도입니다.
      이것이 일상생활이 되면 즉 나는 구하고 예수님은 실행하고, 그렇게 늘 인생을 살다보면 예수님을 향해 고백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오- 나의 주님!” 아무쪼록 오늘도 각자는 기도하고 주님은 실행하시므로 하나님께는 영광이고, 우리에게는 기쁨이 되는 복된 자리에  머물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자력종교와 타력종교

      불교를 '자력종교'라 하고 기독교를 '타력종교'라고 합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해탈과 구원에 이르는 과정에 의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불교는 해탈에 이르려면 수행과 깨우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본성인 죄성으로 인하여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죄를 사하는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야만 구원을 얻습니다.

      자력구원은 자기의 의와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고, 타력구원은 하나님의 섭리로 무조건 선택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자력구원은 전적으로 자기의 피나는 고행과 수행으로 남의 도움 없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고, 타력구원은 자기 노력 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속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공짜로 구원을 얻는 일종의 선물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창조주이신 반면 인간은 불완전하고 죄성이 가득 찬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절대로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과 같은 완전성과 거룩성의 신성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12-23-2024(월) 요한복음 14: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의 하는 일(12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I tell you the truth, anyone who has faith in me will do what I have been doing. He will do even greater things than these, because I am going to the Father.

      불교를 '자력종교'라 하고 기독교를 '타력종교'라고 합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해탈과 구원에 이르는 과정에 의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불교는 해탈에 이르려면 수행과 깨우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본성인 죄성으로 인하여 그 죄를 사하는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야만 구원을 얻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신앙은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는 말씀을 믿는 것
      둘째는 행하신 일을 믿는 것

      본문에서 예수를 믿는 자는 예수의 하는 일도 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요한복음은 두 가지 내용으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표적과 같은 놀라운 일(세메이온)

      요한복음 1장부터 12장은 표적에 관한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로서 일곱 가지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표적이란 용어가 다른 복음에서는 "기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표적을 인간으로서는 행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표적이란 놀라운 사건을 통하여 그 안에 감추어진 메시야의 능력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인으로 어떻게 표적과 같은 일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일은 나 같은 죄인이 주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가장 놀라운 일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인생이었지만 예수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약속받은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아갈 때 나를 통한 표적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십자가를 통한 영광스러운 일(스타우로스)

      요한복음 13장부터 21장은 표적을 행하셨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무겁고 고통스런 짐을 즐겁게 짊어지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십자가와 같은 고통스런 일을 멀리하려고 합니다.
      나에게만은 이런 고통이 임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릴 때는 믿음으로 잘 견디라고 쉬운 말로 권면합니다.
      그렇지만 내게 그와같은 고통이 닥쳐오면 원망과 불평과 더불어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하며 울부짖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는 믿음으로 견디라고 말하면서도 내가 받는 고통에 대해서는 원망과 불평으로 항변하는 믿음을 과연 바람직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영광만 즐거워하는 신앙이 아니라 때로는 영광을 위한 고통과 아픔을 기꺼이 받아드릴 수 있는 믿음으로 무장하고 거듭나야 하지 않을까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잘못된 나의 생각을 부인하고 버린 후에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말없이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사모합시다.

      거룩하신 주님
      나를 위한 표적은 없을지라도
      표적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기적같은 일을 베푸소서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고백하던
      여호수아와 같은 믿음으로
      주님만 믿고 바라보게 하옵소서.

      주를 앙모하는 자


      * 일(에르곤. 2041) 에르곤( ĕrgŏn) ἔργον, ου, ὁ 
      1. 행위.  2. 히 4:3, 4, 10. 3. 표시

      발음 [ ĕrgŏn ]
      관련 성경 /  행실(마5:16, 딤전5:10, 벧후2:8), 행위(마11:2, 요3:19, 롬2:15), 일(마26:10, 눅24:19, 롬13:12), 사무(막13:34), 역사(요5:36), 소행(행5:38), 사업(롬14:20, 계2:19), 공적(고전3:13,14), 실천함(약1:25), 이룸(약1:4), 지음(히1:10), 행함(롬2: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 이 말씀은 사도들을 상대로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이 일반 신자들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1. 14-17장의 말씀이 사도들의 사명에 대한 주님의 임종유언(臨終遺言)과 같은 까닭(26,17:18),
      2. 이 부분 교훈의 마감이라고 할 수 있는 17장의 기도에, 주님께서 사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면서 후대의 신자들을 사도들에게서 구분하신 까닭이다(17, 20).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곧, 사도들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능에 의하여 이적을 행하며, 기타 위대한 일들을 하되, 예수님 자신이 행하신 것과 같은 정도의 것도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이보다 큰 것."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므로 성령이 오서서 이루실 만국 전도와 구령(救靈) 사업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땅 위에서 행하신 일들은 미래의 이 큰 일들을 위한 준비였다.
      신비가들은 이 귀절에 근거하여, 신자들이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보다 더 큰 이적을 행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땅 위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일과 승천하신 뒤에 그의 하시는 일과 이 구분을 모르는 가운데서 일어난 오해이다.

      "이보다 큰 일"
      외부적인 육신 상대의 이적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시므로 완성된 구원을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실시함이다.

      외부적 이적은 "비유로 말씀하신" 계시(啓示)라고 할 수 있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구원 실시는 "밝히 말씀하시는" 계시라고 할 수 있다(16:25-28).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성령이 오셔서 사도들을 통하여 만국에 복음을 전하시는 것은, 저렇게 큰 일이다(시 27:8; 사 42:6; 슥 9:10).

      시편 27: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이사야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이 되게 하리니.

      스가랴 9: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끝까지 이르리라


      나의 일을 찾기 위한 5가지 질문

      Q1. 세상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일반적으로 소명(calling)이란 천직, 신에게 부여받은 사명이라고 해석한다.
      천직은 자발적으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부여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 올 때 신으로부터 특별한 재능, 달란트를 부여받았고, 그 각자의 쓸모를 가지고 쓰임을 다하고 가는 것이 생애의 과정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준 사명을 발견하는 것은 내가 이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첫번째 중요한 단계이다. 

      ‘세상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가?’는 질문은 나의 욕망을 넘어서 삶을 이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사랑은 나의 유익이 아닌 남의 유익을 바라는 것’이라는 성경 말씀과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루크 버기스의 ‘너 자신의 이유로 살라’에서도 궁극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타인이 욕망하는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타인의 충족에 더 책임감을 두는 ‘두터운 욕망’으로 살라고 했다.

      세상이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지에 대해 답을 찾는 것, 이것은 무작정 찾게 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행위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내가 가진 강점,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것, 내가 무엇을 내어놓을 수 있을지에 대한 성찰로 연결된다.
      세상이 내게 바라는 것, 그것은 내가 존재의 이유이자 나의 가치를 발현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Q2. 이 일은 나의 코나투스를 높이는가?

      *코나투스 : 자신다운 자신으로 있으려는 힘

      라틴어 "코나투스(conatus)"
      코나투스의 원의는 노력, 충동, 경향, 성향, 약속
      심리철학 또는 형이상학에서 용어로 사물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고 스스로를 계속 높이려는 경향을 말합니다.

      자기 몸에 맞지 않은 옷은 아무리 비싸고 좋은 것이라해도 어울리지 않다. 일이란 내가 세상에 쓰이는 방식의 아주 큰 부분이며, 내 인생의 시간을 잘 보내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내 성향과 잘 맞는일,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은 일을 선택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나의 코나투스를 높이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영업 업무(보험영업과 같은 대면 세일즈 업무)와 같이 사람을 만나 직접적인 판매 행위를 하는 이런 성격의 업무는 내게 너무 맞지 않는다.
      하다못해 CEO들 끼리 만나 네트워킹을 하는 조찬 미팅을 하다가 너무 내 적성에 맞지 않아 집어치운 적도 있었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일은 내 나름대로 나에게는 ‘나쁜 일’로 규정되었고, 이런 일을 하느라 내 정신적 에너지를 더이상은 소진하지 않게 되었다. 

      그동안 경험을 통해 깨달은 ‘나를 나답게 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 주체적으로 시간과 자원을 활용하는 것
      -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게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는 것
      -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일하는 것
      - 사람과의 관계보다 일 중심으로 일하는 환경과 구조들
      - 꼼꼼하고 분석적 사고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 등등

      그래서 이제는 일을 할 때 이런 상황과 환경이 주어지는지에 대해 집중한다.

      Q3. 적어도 3년은 해봤는가? 

      일이란 시켜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아무리 내 소명이라 생각되고, 내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어도 실제로 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다. 
      게다가 아무리 재능이 있다해도 노력으로 지속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꾸준하고 착실하게 계속 할 수 있는지가 이 일이 나의 일인지 아닌지 판가름해준다. 
      해보기 전과 해봤을때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해봐야 성취감이 있는지 없는지 어떤 만족감이 있는지 알 수가 있다. 
      바위 위에 3년이라(차가운 돌도 3년 앉아있이면 따뜻해진다는 일본 속담)고 3년도 지속할 수 없으면 그걸 과연 나의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속할 수 있는지, 내 노력을 들일 수 있는지, 몰입할 수 있는지, 기다릴 수 있는지, 인내할 수 있는지, 꾸준함으로 결국 잘하는 일이 될 수 있는지…적어도 일정 시간은 지나봐야 그 일이 내게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일의 즐거움이란 어느 정도 해봐야 알 수 있다.
      그러니 어느 정도..최소 3년도 버틸 수 없다면 그 일에 대해 판단하지 말자.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차라리 결정을 미루면서 어느 정도 해보면 환난이 인내가 되고, 인내가 연달이 되어, 연단이 소망을 이루는 것을 경험해본다.

      Q4.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는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렸을때부터 무엇이 되고 싶은지, 즉 장래희망을 묻고 답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면 미래에 대한 고민도 없는 사람 취급이 되니 ‘되고 싶은 멋진 나’에 대한 ‘상’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나의 ‘일’을 찾는데에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가 아닌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자기 업을 정의할 때 명사가 아닌 동사로 정의하는 것과 같다. 

      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 나는 누군가에게 내가 아는 것을 알려주고 가르치고 싶다. 

      다행히 나는 주어진 일을 하다보니 ‘무언가 얽힌 일을 정리하고, 처리하고, 개선하고, 이루어내 결과를 보는 것을 좋아하고 흥미를 느낀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런 성향이 컨설턴트직과 잘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나는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고 성취하는데 만족감을 느끼고, 희열을 느낀다. 그래서 지금 나는 나는 무슨 “일”을 하느냐에 대한 답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단순한 컨설턴트가 아니다. 

      나는 고객이 자기다움(소명)으로 성공하게 돕는다.(내가 가진 경영학, 브랜드,마케팅 지식을 바탕으로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는 문제해결자이자 성취가이다)

      Q5. 재밌는가? 행복감을 느끼는가?

      일이 성향적으로 나에게 잘 맞고, 능력이나 역량면에서도 내가 잘한다 할지라도 이 일을 하면서 행복감을 느낄 수 없다면 과연 이 일을 하며 살 수 있을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일을 통해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그건 결국 자신의 가치관과 맞는 일이어야 한다. 
      가치관과 맞지 않아 매번 판단과 결정을 할때마다 가치관의 충돌이 일어난다면 일 자체가 고역이 된다.
      나는 무엇은 양보할 수 있고, 무엇은 양보할 수 없는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절대로 희생하고 싶지 않은 가치관이나 욕구가 있다면 이 ‘일’이 그것을 지키는 일인지 아닌지 분별해야 한다.

      자신의 앵커를 알지 못하면 결국 보수나 직함 등과 같은 외부적인 요인으로 일을 선택하게 되고, 그것은 곧 후회와 불만을 일으키게 되어 정착하지 못하고 환경에 따라 회피형 이직을 하는 등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렇기에 자신의 앵커를 알면 나의 가치관을 지키면서 겪는 불편하거나 힘들게 만드는 외부적인 요소 등은 충분히 버텨낼 수 있게 된다. 나는 성장하는 것,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 정직함을 지키는 것 등 이런 것들이 나의 중요한 가치관이었기에 이 가치관을 지킬 수 있는 일터에서는 힘든 일도 버텨낼 수 있었고, 아이러니하게 힘들었던 만큼 더 큰 성취감과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 5가지 질문에 답을 찾는 과정에서 나는 내 일이 나와 잘 맞고 잘 하는 일, 주변에 좋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 돈이 되면서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의 교집합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귀한 시간을 경험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일로서 나를 증명한다는 것은, 나를 더 사랑할 수 있게 됬기에 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행복은 내가 가진 것(소명,가치)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고(기여), 그로 인해 나와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내 존재를 인정받는 것, 그것이 바로 일로서 행복하게 사는 길이 아닐까?

      12-21-2024(토) 요한복음 14:8-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를 믿으라(11절)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Believe me when I say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me; or at least believe on the evidence of the miracles themselves.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I am in the Father)
      아버지께서 내 안에(the Father is in me)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는 하나가 된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하나가 되실까요?

      부부(夫婦)를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하지요.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아주 친밀하고 목표가 같고 방향이 같고 삶이 같아야만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와 예수님은 서로 안에 거하므로 하나가 됨을 계시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가 됨을 믿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그 일을 인하여 하나됨과 안에 거하심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안에(엔. ĕn. ἐν)"라는 헬라 단어를 살펴보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엔'이란 단어가 다양한 의미로 성경에서 사용되지만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밀접한 관계(막 8:38, 롬 1:12, 갈 1:14)" 또는 "가까운 관계(요 10:38, 갈 2:20, 골 2:9)"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활동하던 때에는 예수를 믿고 따르지 않았지요.
      그런데 어떻게 바울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내가 예수님 안에(ἐν)
      예수님이 내 안에(ἐν) 거하시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었으며 그 깨달음은 곧 예수님과 함께 거하게 하신다는 것을 확신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 안에,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므로 하나가 된 것처럼 우리들도 예수를 믿음으로 온전히 하나됨의 은혜를 확신할 뿐만 아니라 그 은혜의 열매를 맺는 일에 진력하는 은총의 하루가 펼쳐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부탁합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 여기 "믿으라"는 부탁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저 그의 말씀에 의하여 그런 줄 믿으라는 뜻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그의 말씀대로 믿으라는 명령이다.
      이렇게 함이 최고의 신앙이다(Hendriksen).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이렇게 믿는 것이 둘째로 가는 신앙이다.
      그저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음이 첫째인데, 그것은 상반절에 보여 주었다.
      "그 일"이란 것은 그의 이적과 기사들을 가리킨다. 10:25, 37-38 참조.




      요한복음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0: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이사야 43: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안에(1722)  엔(ĕn) ἐν    

      1. 장소를 나타내는 경우.  2. 안에,  3. 목적 고전 9:15
      발음 [ ĕn ]
      • 1. 장소를 나타내는 경우].
        • a. 안에, 마2:1, 눅7:37, 가까이, 요8:20.
        • b. 목적[인격, 물건] 고전9:15, 갈1:24.
        • c. 사람 앞에, 마21:42, 눅4:21.
        • d. 밀접한 관계, 막8:38, 롬1:12, 갈1:14.
        • e. 가까운 관계, 요10:38, 갈2:20, 골2:9.
        • f.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 [안에] 눅9:46, 계11:11.
      • 2. 시간을 나타내는 경우.
        • a. 기간, 동안, 마27:40, 요2:19.
        • b. 때에, 시점, 요6:44, 행7:13.
      • 3. 기타, 인간관계 소개, 막9:50, 눅14: 34, 방법, 이유, 갈1:6, 살후1:11, 히10:10.


      예를 들면 은혜 안에 머문다고 한다면
      내가 은혜로운 장소에 머물러 있다는 것
      내가 은혜로운 시간에 존재하는 것
      내가 은혜로운 사람과 가까이 있는 것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의 희생 제물로 바치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들과 더불어 약속된 장소로 삼일 길을 걸었습니다.
      - 작심삼일(作心三日) / 지을 작(作), 마음 심(心), 석 삼(三), 날 일(日)

      ‘단단히 먹은 마음이 사흘을 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결심(決心)이 굳지 못함을 이르는 말.



      아들을 약속된 장소에서 칼을 들어 목숨을 끊는 시간에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 혼연일체(渾然一體) / 흐릴 혼(渾),  불탈 연(然), 한 일(一), 몸 체(體)

      사람들의 행동(行動)ㆍ의지(意志) 따위가 조금도 차이(差異)가 없이 한 덩어리가 됨.



      드디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나와 함께 한다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 각골낙망(刻骨難忘) / 세길 각(刻), 뼈 골(骨), 어려울 난(難), 잊을 망(忘)

      • 유래 : 뼈에 새겨질 만큼 잊기 어렵다는 뜻
                  누군가에게 받은 큰 은혜나 도움을 평생 잊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비롯된 말.

      • 의미 : 누군가에게 큰 은혜를 입었고, 이를 잊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할 때 사용.










      12-20-2024(금) 요한복음 14:5-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길과 진리와 생명(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λεγει αυτω ο ιησους εγω ειμι η οδος και η αληθεια και η ζωη ουδεις ερχεται προς τον πατερα ει μη δι εμου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여기 "길", "진리", "생명"이란 말이, 헬라 원문에는 모두다 "그"라는 관사()를 가지고 있어서, "그 길(the Way)", "그  진리(the Truth)", "그 생명(the Life)"을 의미합니다.

      "그 길(η οδος)"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그 진리(η αληθεια)"는 죄에서 자유를 얻게하는 진리(요 8: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 생명(η ζωη)"은 육체적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종교다원화주의와 같은 거짓된 풍조가 세상을 흔들지라도 온전한 믿음은 오직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 된다는 것을 확신하며 이성적인 주장과 합리적인 사고가 사람들을 미혹할 때에도 목표를 향하여 힘차게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겉으로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다고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며 질서를 파괴하고 법을 무시하며 편가르기에 열중하는 거짓된 무리들을 향하여 참된 진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을 굽히지 말아야 합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났기 때문에 건강하게 살기 위하여 온갖 좋은 것을 몸안에 담으려고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않고 절제와 나눔과 용서를 위한 삶을 통하여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일에 게으름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영지주의라는 사상이 여전히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이원론적인 사상이 지배할 때에도 유일한 것은 오직 주님을 따르는 믿음뿐이라 확신하며 흔들림이 없었던 믿음의 선각자들처럼 주님을 본받아 살아가는 일에 승리하는 즐거움을 함께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주 믿는 사람 일어나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다른 종교 사상과 타협하시지 않은 사실이다. 그 당시에는 영혼이 자기 힘으로 하늘에 간다는 영지파(노시스)의 사상과 기타 사상이 유행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과 타협하는 혼합주의(Syncretism)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용납될 수 없었다. 그는, 그 자신이 독일 무이(獨逸無二)하신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라고 그는 메시야적인 자아 주장을 세우신다. 선지자들은 진리와 생명에 대하여 길을 가리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그 길" 자체요, 더욱이 그 길의 목적인 "그 진리", "그 생명"자체이시기도 하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이르도록 하시는 중보자이시지만, 그 자신이 하나님 자신이시기도 하다. 이 사실은 그가 절대적인 구주이심을 성립시킨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천당 가는 길을 알려는 도마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천당 가는 길보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가리켜 주신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천당이 하나님 중심한 곳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 외에 별도로 천당을 생각하려는 이원론적(二元論的) 사상으로 흐른다. 그것은 잘못된 사상이다. 하나님을 떠난 독립적인 선(善)이나 진리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처소를 예비하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러 나간 뒤에, 베드로가 주님 앞으로 나서서, 자신은 주님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칠 것이라는 그런 결연한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른 많은 제자들도 있는데, ‘네가 정말 나를 위해 죽겠느냐? 너는 닭 울기 전에, 정녕 세 번을, 나를 부인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망신을 주셨어요.

      유다와 베드로를 한 곳에 등장시킴으로 해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유다나 베드로나 똑같은 인간이다.’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하나님나라에 입성을 하게 되고, 다른 한 사람은 그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유기(遺棄)가 되어서, 창자가 터져 죽게 되는 그런, 완전히 다른 운명에 처해지게 되는, 그런 두 종류의 사람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 될 사람 베드로와 안 될 사람 가룟 유다
       
      그것이 바로 두 갈래로 갈리는, 전체 인류의 운명이에요.
      그것을 신학은 ‘이중예정’ 이라고 합니다. 

      칼뱅주의 예정론은 이중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이라고도 합니다.
      은혜로 어떤 사람들을 영원한 구원으로 선택한 반면, 다른 이들은 자신들의 죄와 원죄로 인해 영원한 심판을 받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두셨다는 것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선택이라고 부르고 후자에 대해서는 유기(reprobation)라고 부른다.

      칼뱅주의에서는 전자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믿음으로 중생하도록 유효적인 소명으로 예정받았다고 한다.
      저주받은 자들에 대한 유기를 말하지 않은 것을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견해가 될수 없다고 보기도 한다

      주님은 14장 1절에서, 그러한 은혜의 수혜자들에게 말씀하시죠.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나를 믿어라!’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세요.
      그 말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온갖 핍박과 억압 속에서도, 메시아를 기다렸던 거와 같은, 바로 그 믿음으로, ‘이제 내가 다시 올 거니까, 나를, 예수를, 확신 속에서 기다리라’는 선언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을 믿고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그렇게 온갖 핍박과 억압을 견뎌낸 것처럼, 내가 다시 올 때까지도, 그러한 일들이 너희들에게 반복되어질 거라는 거죠.
      그러니까 ‘근심하지 말라! 확신 속에서 기다려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2절에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 거할 곳(3438. 모네. mŏnē) μονή, ῆς, ἡ    

      1. 체류.  2. 거처
      발음 [ mŏnē ]
      어원 / 3306에서 유래
      • 1.  체류, 요 14:23.
      • 2.  거처, 자리, 요 14:2.
      • 관련 성경  /  거하는 곳(요 14:2), 거처(요 14:23).

      그리고는 내가 너희를 위해서,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여기서 ‘처소’가 뭘까요.
      우리 성도가 죽은 뒤에 가게 될 ‘그 하나님나라 안에서의 주택? 우리가 살 곳? 그곳을 이야기하는 건가요? 아니면 그냥 하나님나라를 이야기하는 건가요?

      * 처소(5117) 토포스(tŏpŏs) τόπος, ου, ὁ   

      1. 장소.  2. 마 14:35. 3. 지점
      발음 [ tŏpŏs ]
      관련 성경 /  곳(롬9:26), 빈들(마14:13,15, 눅9:12), 곳 곳(마24:7, 막13:8), 자리(눅14:9,22), 땅(요11:48), 거처(요14:2,3), 처소(행7:49), 지역 (행16:3), 기회(행25:16), 틈(엡4:27), 토지 (행28:7), 처지(고전14:16), 평지(눅6:17), 끝 자리(눅14:10).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는데 왜 처소를 예비하러 가셔야 합니까?
      장차 아버지 집에 들어올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처소가 부족하기 때문일까요?

      하나님의 집에 처소는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에서 하늘이란 단어가 복수형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삼층천에 해당합니다.

      아버지의 집은 창조 때에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셨습니까?
      처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처소를 공간적이며 장소적인 것이 아닙니다.
      처소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요한복음 13장을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떠났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일사각오의 결의를 다짐했지만 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져야 할 예수님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예비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 나라 즉 성도의 처소는 무엇일까?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거하게 될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들의 죄를 말끔하게 씻어내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들 속에 들어가서 함께 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완성하시겠다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제자 베드로와 가룟 유다가 모두 주님을 떠났습니다.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제자 즉 아버지의 집에 거할 수 있는 사람을 세우려면 처소를 예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 안에 임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너희 안에 있느니라.

      처소는 성도들과 하나님이 함께 거할 수 있는 곳을 말합니다.
      처소를 예비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이미 완성된 그곳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처소를 예비해야만 합니다.
      그 처소는 곧 나와 더불어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가야 할 곳을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곳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17:9-10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사람의 마음이에요)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죄인은 하나님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거처를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더러운 죄인들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서,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청결한 마음으로 만들어 내어,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들이 함께 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처소 예비라고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예레미야 17장 9절 이하의 그 마음과는 다른 마음이에요. 이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대요. 복 있는 자들은! 바로 요 상태로 만들어 내시는 거예요. 이게 처소를 예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보고도 그분의 돌격을 면하게 되는 거예요. 죄인인 상태에서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이 돌격하여 죽여야 됩니다. 하나님이 못 때서가 아니라, 죄는 거룩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어떻게 만물 중에 제일 더럽다는,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청결한 마음이 될 수 있는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입니다. 에스겔서 36장 24절 보세요.

      에스겔 36:24-28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더러운 마음을, 당신의 물로 깨끗이 씻어서, 그들을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거처로 만들어 내시겠다는 새 언약을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씻김을 받은 성도의 현실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에베소서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영광스러운 교회는, 하나님이 물로 씻으시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신, 그런 존재를, 교회라고 한다는 뜻이에요. 이렇게 교회가 바로, 더러운 마음을 씻김을 받아서,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수 있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처소가 된 자들의 무리인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한 방법으로, 만물 중에 가장 더러웠던 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씻으셨는가? 예수님의 발 씻김의 에피소드 뒤에, 이 이야기가 붙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어떻게 우리가 깨끗하게 씻긴 거예요? 어떻게 처소가 된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보세요. 계시록 7장 13절.

      요한계시록 7:13-14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어디에? 어린양의 피에! 깨끗하게 씻어서, 맑은 세마포 옷을 입은 자들을, 교회(敎會)라고 해요. 그런데 그들이, 환란 속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죠? 그러니까 여러분의 삶은, 환란이 맞는 거죠?

      이렇게 성도는, 어린양의 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 의해서 말갛게 씻기고, 드디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 된 거예요. 그래서 급기야, 더럽고 추한 마음이 제해지고, 청결한 마음이 심어진 그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좌정할 수 있게 된 거죠.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계세요? 안 계세요? 성령이 계세요? 안 계세요? 성령은 누구의 영? 그리스도의 영! 어떻게? 그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들어오게 됐죠? 옛날 같았으면, 돌격하여 죽여 버려야 되는 그 더러운 마음 안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세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죠? 고린도서에서 뭐라 그래요? 성령이 아니 계시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 그러니까 여러분 안에 지금 성령이 계신다 말이에요. 하나님이 계신다 말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되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여러분의 더러운 마음을 전부 가져가셔서, 거기에서 싹 제해버리셨어요. 없애 버리셨단 말입니다.

      내가 처소를 마련하러 간다는 것은 유다가 나를 팔러 갔기 때문에 이제 곧 십자가를 지러 가야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그곳을 하나님나라 곧 천국(天國)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처소! 즉 하나님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 떠나신다고 하는 것이고, 그 말은 이제 곧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게 될 것이라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를 내가 처소로 만들어 낼 것이고, 지금은 안 된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를 지고, 거기에서 나의 피로 너희들의 죄를 말갛게 씻어내면, 너희는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땅에서, 역사 속에서, 현실 속에서는, 차근차근, 차근차근 성화의 모습으로 진행되어져 가는 거죠, 그죠?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그 일을 하는 거예요. 지금 우리 안에 하나님이 사신다는 게 이게 말이 돼요? 우리가 우리를 볼 때! 그런데 하나님이 이미 그렇게 만들어 놓고, 그 선언적으로, 운명적으로, 신분적으로, 만들어 놓고, 그렇게 우리를 지금, 이 가시적인 역사 속에서 만들어 가고 계시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많이 힘들죠.

      나는 ‘나’라는 우상이 원하는 대로, ‘나’라는 우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오고 있었는데, 그 ‘나’라는, 우상을 내려놓고 비워내고, 심지어, 심지어 비워내고,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곳으로 변화되어져 가는 그 삶이, 어떻게 쉽겠습니까? 어렵습니다! 여러분의 뼈와 살과 피에 녹아있는 옛 사람을, 솎아 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참으로 힘들어요. 어렵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나라의 개념정리를 잘 하고 계셔야 돼요.
      하나님나라는, 공간적이며, 장소적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은하계 뒤편에 어딘가에 마련되어 있는 그러한 곳!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돼요.
      하나님나라는 고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안 된다.
      어디에 그냥 콱 붙박이로 박혀있는 그런 곳! 그런 곳은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나라는 통치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됩니다.
      통치권 즉 왕국과 같은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실레이아!
      하나님의 통치가 있고, 그 통치에 순복하는 하나님나라 백성이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나라죠?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는, 그런 마음과 그런 행위를 하고 있으면, 거기가 하나님나라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죄와 악이 싹 제해지게 되면, 거기야말로 가장 행복한 곳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 하나님나라에, 죄와 악이 섞여 있단 말이에요. 이 세상에서는! 그래서 이 세상에 그런 사망의 증상들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믿음으로 느끼고, 자각하고, 인식하며 사는 자들을, 성도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어느 날 죄와 악이 싹 사라진 그곳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통치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백성들만 오롯이 남는 것을, 천국(天國)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땅에서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맛볼 수 있다? 없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자주 일어나진 않아요. 그죠? 왜냐면 죄라는 것이 너무 어둡고 무섭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가 쉽사리 그 하나님나라를 경험할 수 없어요. 그게 참 안타까운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천국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천국을 발견하는 거예요. 아! 제가 이야기하고도, 참 굉장히 흐흐 이런 거는 명언 집에다 하나 써 놔야 되는 건데, 그죠? 천국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자들이, 그 하나님 안에서, 천국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는 곳이, 천국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라면, 하나님과 함께라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초가삼간도, 판잣집이라도, 거기가 감옥이라 할지라도, 아니, 지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계신 곳이라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고백을, 우리가 할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 고백을 우리 안에서 끌어내시기 위해서, 여러분의 삶 속에, 때로는 지옥을 허락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너, 이런데도 나로 말미암아 천국을 이야기할 수 있어?’라고 물어보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결국에는, ‘네!’라고 대답할 수 있는, 그런 자로 성숙이 되고 완성이 되는 거죠.

      예수님은, ‘너희들 죽고 나서, 꼭 천국가라!’ 이렇게 말씀하신 적 없어요. 예수님은 언제나, ‘천국이 지금 너희 가운데 있다. 그리고 지금 천국이 너희에게 임했다.’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게 처소란 말입니다. 우리의 처소! 그러니까 천국은 죽고 나서 가는 곳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경험하고, 누리고, 살아갈 수 있는 곳이란 뜻이에요.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너희를 위해 처소를 마련하러 간다라고 하신 것은, 내가 이제 십자가를 지고, 너희의 더러운 마음을 씻을 피를 흘리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너희의 죄가 해결이 되고, 성령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거하시게 되는, 하나님나라! 즉 처소가, 너희가 처소로 완성이 될 것이라는 그런 말인 거예요.

      그리고 다시 오셔서, 당신이 준비하신 처소로, 우리를 영접하셔서, 당신이 계신 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해주시겠다는 그 말씀은, 단순히 먼 훗날에 재림하셔서,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영접을 하시겠다는, 그런 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런 의미도 있긴 있어요. 그러나 그런 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 강림과, 예수님의 가시적 재림의, 이중적 상징인 거예요.

      그 예수님은 여러분 안에 이미 오셨죠? 그러나 가시적으로 또 오신단 말입니다.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상징하고 있는 거예요. 올레디 낫 옛(already not yet) 그죠? 예수님은 언젠가 가시적으로 재림을 하실 거예요. 그러나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시는, 그런 식의 재림은 아니에요.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라는 그 말은, ‘볼지어다. 구름과 함께 오실 것’이라는 뜻이라 그랬죠?

      그런데 그 구름은 뭐라 그랬어요? 손오공이 타고 다니는, 근두운 같은 그런 구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그랬잖아요?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오실 것이다.’지, 절대 구름을 타고 저 꼭대기에서, 성화(聖畫)를 너무나 많이 봐서, 그런 모습으로 오실 거라고 착각하는 거예요. 아니에요.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셨을 때는, 성육신 하셔서,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연한 순처럼, 이 땅에 오셨지만, 이제 가시적으로 우리 눈에 다시 나타나실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그 영광에 모습으로 나타나실 것이다가, 바로 ‘볼지어다. 구름과 함께 오시리라!’라는 뜻인 거예요.

      그 성경에서 말하는 ‘재림(再臨), 파루지아’라는 단어는, ‘구름을 타고 멀리에서 내려오다’는 뜻이 아니라, ‘안 보이던 것이 나타나다’란 뜻이에요. ‘파루지아’는! 그러니까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여러분 안에 계시잖아요? 그런데 여러분이 눈으로 볼 수는 없어요. 그런데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이제 나는 지금 믿음으로 예수를 보는데, 내 눈으로 보게 되는 그 날을, 재림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재림을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지 않아도 돼요. 내 안에서 지금 이미, 재림이 일어났다니깐요. 영적으로는! 그 영적인 재림이 가시적으로 나타나서, 이제 영원히 지속되는 그 곳! 거기가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지만, 이 땅에서도, 그 예수의 재림을, 우리가 자각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자, 그 예수님이, ‘내가 처소를 마련해서, 너희들에게 내려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들을 영접할 거야!’라고 말씀하신 거는,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오순절 날 성령으로, 성도의, 교회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들의 마음속에 이미 하나님의 거처! 지성소를 완성해 놓으신, 그 일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정말 가시적으로 다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가시적인 하나님나라를, 확 완성해 놓으시는 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러한 모습! 문화도 있고, 자연도 있고, 여러분 직업도 가져야 될 것이고, 각자 다른 모양의 몸! 육신도 서 있어야 되는 이런 모습! 이런 모습에서, 죄와 악과 썩어짐과 더러움만, 싹 빠진 그런 것!

      그런 거! 예 고런 것처럼, 지금 이 세상은요, 죄로 말미암아 많이 왜곡되어져 있고, 뒤틀려 있어요. 그리고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고, 후패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 죄와 악이 싹 빠져 버리고, 깨끗한 하나님나라만 남는 거예요. 지금 우리 안에 있는 요 하나님나라가 있는데, 죄와 함께 공존하고 있잖아요? 고것들이 싹 사라진 그곳! 거기가 하나님나라란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실 때에는, 그 나라가 인제 완성이 되는 거예요. 가시적으로!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성도들은 그렇게 이미, 예수님과 함께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영적으로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살아요.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가시적으로 재림을 하실 때에는, 가시적 하나님나라에서, 우리 주님과 영원한 안식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빨리 그 날이 왔으면 좋겠죠, 그죠?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 여러분은 시간을 벗어나서, 바로 거기로 한 번에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이 땅의 역사 속에서 보면, 역사 속에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에, 많이 기다려야 되잖아요? 그래서 때때로 성경이, 성도들이 죽어서 잠자고 있다고들 이야기를 하는데, 땅 속에서 잠자고 있다가, 수천 년 후에 다시 이렇게 부활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시간 속에서, 확 나가는 게, 죽음이란 말이에요. 시간 속에서 나가면, 거기는 영원이란 말입니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곳!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눈을 감는 그 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우리 다 만나요. 기다림이 없어요. 거기는요.

      그래서 제가 가끔 임종을 하게 될 때, 그런 분들의 손을 잡고 그러는 거예요. 가시면 저 있나 꼭 확인해 주세요! 흐흐흐 예, 맞습니다. 가면은 우리는, 그 시간 밖의 영원 속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그곳에 있는, 우리 모두를 만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나라는 이미 완성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영원 속에서!

      그런데 이 시간 속에서 우리가, 그 하나님나라를 배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의 추악함을 배우고, 그러느라, 이렇게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것뿐이죠. 그러니까 여러분은 다 이긴 싸움을 싸우고 있는 거예요. 어떤 면에서 보면, 참 재미없는 싸움이에요. 이 싸움은요! 다 이긴 게임을 뭐 하러 또 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이김을 안고, 한발 한발 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그러니까 영적 처소는 창세전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언약 속에서, 이미 완성이 된 거고, 그것이 역사 속에서, 골고다에 십자가로 나타났으며, 그 영적으로 완성이 된 처소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처소로 완성이 되어져 가는 모습이, 성도의 신앙생활인 거죠. 그걸 성화라고 하잖아요? 생티피케이션(Sanctification)!

      사실은 지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처소의 완성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기도 해요.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서, 창조를 하신 거예요. 하나님이 창조를 해 놓으셨는데, 어떤 피조물의 훼방으로 말미암아, 지금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러워 진 게 아니에요. 사실은요! 그러면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니죠? 실수도 할 수 있고, 누군가로 부터 방해도 받을 수 있다면, 그분의 전지전능함은, 훼손이 되죠, 그죠?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기 위함이었어요. 하나님의 백성들과 거하기 위함이었어요.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라고 너무 피곤해서, 일을 마치시고 쉬셨다는 말이 아니라, 그랬습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하에 잘 지어지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 움직이는 상태! 그 상태를 싸베스(Sabbath), 안식이라고 한다, 그랬죠? 그죠? 그것은 천지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그분께 항복하여 있는 상태를 말하기도 해요. 절대 타락할 수 없고, 영원히 그러한 상태로 유지되는 그곳을 만들기 위해, 일차적으로 타락이 가능한 것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히 타락하지 않는, 하나님나라를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주는 게 역사에요. 그게 성경인 것입니다.

      자, 고 상태를 성경이, 예배(禮拜)라 부른다, 그랬죠? 가치부여 행위! 월십(worship)! 어떤 것이 정말 참 가치인지를, 올바로 인식하고 깨달아서, 그 가치에 올인해 버리는 거예요. 그걸 예배라고 하는 것이죠, 그죠?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올인을 하죠. 나 자신을 위해 살죠. 모든 것을 다 걸어요. 나 자신을 위해서!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와, 하나님에게 온전히 순종하는 거예요. 그게 예배인 겁니다. 월쉽(worship)! 하나님만이 참 가치이시며, 하나님만이 영광의 주인이심을, 모든 만물이 인정하고, 그 앞에서 순종하고, 의존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뜻과 합일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 그 상태! 그걸 하나님과 연합(聯合)이라고 이야기해요. 다 같은 말이에요.

      그 연합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뮤추얼 인드웰링(mutual in-dwelling)이에요. 상호내주(相互內住)! 하나님이 인간 안에 들어오고, 인간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걸 연합이라 그러고, 그걸 ‘상호내주’라 그러고, 그걸 ‘처소삼기’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창조의 목적이었단 말이에요. 그 상호내주, 뮤추얼 인드웰링(mutual in-dwelling)이라는 것은, 인간과 하나님!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서만 가능한 거예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자, 그것을 하나님이 어떻게 완성해 내시는지를, 인제 보여주는 거죠. 주님께서,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죠?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고도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게 바로 연합이잖아요? 그 연합이 바로, 뮤추얼 인드웰링(mutual in-dwelling), 상호내주, 처소란 말이에요. 그걸 뭐라 그런다? ‘안식(安息)’이라 그런다 말이에요. 하나님의 안식이, 이 우주의 안식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에 목적이었잖아요? 그걸 안식이라 그런다 말이에요.

      따라서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그 안식을, ‘하나님의 거처 삼으심!’ ‘하나님의 처소 삼으심’으로 해석을 할 수도 있어요. 안식이 바로 거주의 개념이니깐요. 그렇게 상호 거주가 될 때, 그 상태를 연합(聯合)이라고 하는 거고, 그 연합의 상태에서, 쌍방의 뜻이 하나가 되는 거고, 거기에서 예배가 나오고, 거기에서 참된 안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세요? 연결이 되십니까? 왜 주님의 처소 예비가, 창조의 목적이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는지, 이제 아시겠죠?

      자,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자, 하나님은 인간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셨어요. 이제 하나님의 안식은, 깨어져 버린 거예요. 물론 상징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깨질 수가 없어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안식은 어떻게 깨져요? 피조물 때문에 깨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안식은 그 무엇으로도 깨질 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다시는 깨어지지 않는 안식을 마련하기 위해, 혼돈의 과정을 통과하게 하신다는 의미에서, 안식이 깨졌다라고 말씀을 드리는 거지, 하나님의 안식을 깨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영원히 깨어지지 않는 안식의 처소를 마련하시는 일을 시작하셨어요. 구속사를 설명해 드리는 거예요. 그게 바로 새 언약과 새 창조잖아요?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을 부르시고, 야곱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시죠.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출발이 돼요. 그게 지금 새 창조의 과정인 거예요.

      그 민족적 이스라엘은 바로 누구다? 누구를 상징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교회! 영적인 이스라엘은 바로 성도를 상징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께서 거하실 처소를 준비한 것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거죠.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처소 예비와, 하나님의 구원은, 같은 이야기란 말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세요. 출애굽기 15장 13절 보세요.

      출애굽기 15:13, 17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는 것은, 그들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어요. 잘 기억하세요. 그런데 17절에 보면, 바로 그 일이, 이스라엘 백성을 주님의 처소를 삼기 위함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어요.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원한 처소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처소로 삼는다는 말과, 동의어라는 거예요. 그걸 뭐라 그런다, 그랬죠? 뮤추얼 인 드웰링(mutual in-dwelling), 상호 내주라 그랬어요. 그걸 염두에 두시고 신명기로 가보세요. 

      신명기 33:27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지금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고, 그들을 가나안에 넣으시는 것을, 하나님이 마련하신 처소를 주심이라고 하셨는데, 출애굽기 15장 17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주님의 처소를 삼기 위함이라고도 그러고, 신명기에서는 그 처소가 또 하나님이래요.

      가나안! 이스라엘! 하나님! 하나님의 처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처소를 우리에게 예비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죄에서 건져 내셨다는 것은, 어디로 우리를 끌고 가는 거예요? 하나님 안으로 우리를 확 끌어 드리는 거예요. 삼위일체 속으로! 우리를 이 더러운, 만물 중에 가장 더러운, 우리를 확 끌어 당기셨다가, 하나님의 삼위일체 속으로, 그분의 신의 성품 속으로 우리를 확 참여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나라에서 우리는 어떻게 산다? 하나님처럼 살아요.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처럼 살겠다고 했을 때, 이런 더럽고 지저분하고 추악한 것들이, 막 주렁주렁하고 맺혔어요. 그러나 하나님나라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처럼, 진짜 하나님처럼 살게 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살겠다고 나서서, 우리가 열심히 애를 쓰고, 우리의 꾀를 짜내면, 이 지경 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는, 내가 만들어 낸 그 하나님나라에, 그 나라에 은혜로, 믿음으로 들어와라! 이것이 신앙생활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단 하나의 목적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알아라! 은혜로 들어와라! 믿음으로 들어와라! 시편 90편 1절로 가볼게요.

      시편 90:1. 9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표준새번역 / 네가 주님을 네 피난처로 삼았으니, 가장 높으신 분을 너의 처소로 삼았으니

      시편 132:13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표준새번역 / 주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그 곳을 당신의 처소로 삼으시기를 원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온은 누구예요?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여기도 하나님이 우리의 처소다. 우리가 하나님의 처소다. 하나님이 우리의 처소다. 우리가 하나님의 처소다. 계속 혼용해서 쓰고 있죠? 그게 상호내주(相互內住)라는 거예요. 연합(聯合)이라는 거예요. 그게 창조의 목적이에요.

      그런데 그 온전한 연합이 되기 위해서는, 한쪽에서 완전한 순종을 해버려야 된다 말이에요. 절대 자기 주장이 요 만큼도 남아있으면 안 된다 말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이성과 인격을 갖고 있는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는 거예요. 경험케 해주시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래서 우리는 그거 배우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요, 교회를 예수라고도 불러요. 벌써부터! 여러분은 예수예요. 작은 예수!

      고린도전서 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지금 이거 교회를 설명하는 거거든요.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그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교회도 예수라는 머리를 두고, 많은 지체로 거기에 붙어 있는 것이다. 그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뭐라 그래요?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교회도 그러하니라가 아니라,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그래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누구라는 거예요? 예수로 벌써, 하나님이 부르시는 거예요. 내 아들로 부르시는 거예요.

      예수라는 안경을 끼고, 우리를 보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 예수라는 안경을 끼고 보면, 빨간 색 안경을 끼고 보면, 온 세상이 빨갛고, 노란색 안경을 끼고 온 세상을 보면, 온 세상이 노랗듯이, 예수라는 안경을 끼고 하나님이 우리를 내려다 보시면은! 그 법궤 안에 인간들의 실패가 가득 들어 있잖아요?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맛나 항아리! 십계명 돌판! 그건 인간의 실수와 실패를, 죄악을 상징하는 거거든요. 그것을 예수의 피가 싹 덮으니까,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다보는데, 인간의 실패와 죄악이 하나도 안보이고, 예수의 피만 보이는 거예요. 아들의 피만! 마찬가지로 우리를 예수로 보시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예수만, 하나님이 구원하실 수 있어요. 예수만 의인(義人)이고, 예수를 확 끌어 올렸더니, 그 안에 연합되어 있는 교회가 따라 올라오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모세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왜냐하면, 모세만 길을 알았거든요.

      모세는 이미 애굽에서 한번 나왔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가 홍해를 먼저 건너갔다는 뜻이 아니라, 에굽에서 먼저 나왔던 그 존재에게, 다른 백성들을 연합을 시켜서, 하나님이 모세만 확 끌어올리는 거예요. 그랬더니 모세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이 주렁주렁 매달려 올라오더라는 것이죠. 그거는 왜 굳이 그런 표현을 쓴 거냐 하면, 예수 안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방법이, 바로 그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만 구원하세요. 예수를 구원했는데, 그 예수가 우리를 꼭 품어 안고 있는 거예요. 흘리지도 않고, 하나도 안 흘리고! 그 요한복음에 나오잖아요? 내가 하나도 안 흘렸다. 그러지 않습니까? 다 끌고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예수를 통하여 우리를 보기에,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거예요. 예수가 머리이고 우리가 지체라는 건, 우리가 예수란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가 공동상속자가 된 거예요. 로마서에! 여러분, 우리에게 그런 것이 주어져 있어요. 이게 안 믿기니까, 지금 이 땅에서 엉뚱한 것으로, 자기의 공허를 채우고 있는 거예요. 이게 안 믿겨지니까!

      거기가 얼마나 좋고, 얼마나 아름답고, 그 죄악이 없는 곳이, 얼마나 평안하고 기쁜 곳인지를,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너무 못 배운 거예요. 그 동안에요! 헌금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하고, 선교 많이 하면, 우리에게 주어질 그런 복에 대한 것만, 너무 많이 배워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 것만 연구했어요. 그래서 하나님나라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우리가 힘이 없는 거예요. 소망도 없고, 기대도 없고, 죽음은 두렵고,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게 뭐가 있어요? 우리가요?

      그 하나님의 새 언약의 내용이, 다윗의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반복이 되는지 한번 보세요. 사무엘하 7장 5절.

      사무엘하 7:5-7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다윗이 여호와의 처소!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언제 사람이 만든 곳에, 거하는 거 봤냐?’ 그러면서 다윗에 성전 건축을 막으시죠. 하나님의 처소 건축을 막으세요. 나는 인간들로 부터 무엇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8절부터 다윗에게 언약을 하세요. 

      사무엘하 7:8-9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하나님께서, 다윗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 위에 분명히 말씀하시잖아요? ‘내가 살 집을 네가 어떻게 만든다, 그래?’ 말씀해 놓고, 축복을 막 부어주고 계세요. 그의 행위와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은 지금 다윗에게, 아니,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줄 복은, 너희들의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내가 너희들에게 베푸는 것이다.’라는 은혜의 언약을 하시는 장면이에요. 이것이요!

      그런데 공의의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에게, 거저 그냥 그렇게 하실 수는 없다 말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다윗에게, 그 무시무시한 죄를 지었던, 그리고 죽는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그런 엉터리 같은 삶만 살았던 다윗에게, 이렇게 축복을 하실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그게 바로 사무엘하 11장과 12장에 나오죠?

      다윗과 밧세바가 죄를 졌어요. 간음을 해서 애를 뱄어요. 애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애를 죽여요. 애가 무슨 죄예요? 무죄한 자가 죽고, 솔로몬! 하나님의 자손을 대표하는, 솔로몬이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 은혜의 언약의 근거로, 바로 다윗과 밧세바의 사건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다윗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봐라!’ 이게 아닙니다. 여러분! 구속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을 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사무엘하 7장의 다윗 언약을 보세요.

      사무엘하 7:11-13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1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이루시겠다고 이야기를 하세요. ‘다윗아! 너는 내가 거할 처소! 그런 거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네 집 져줄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네 집 져줄 거야!’ 그게 구원인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 짓는 거 아니에요. 성전이 어디 있어요? 오늘날 성전은? 있긴 있죠? 어디 있어요? 여러분이 성전이잖아요? 내가 성전이잖아요? 그런데 무슨 뭐, 성전 건축이니 뭐니, 해서 말이죠? 예, 성전은 바로 여러분인 거예요. 그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러는 거죠. ‘얘들아! 너희들이 나를 위해 무슨 집을 져줄 수 있다고 생각해? 집은 내가 너희들에게 지어주는 거야!’라고 말씀하세요. 여기서 ‘집’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바이트’는 가문(家門)! 가족(家族)! 이런 것을 함께 이야기하기도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다윗에게 약속하시는 것은, 다윗의 후손으로 말미암는 한 가문을 약속하시는 거예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14대 14대 14대가 나오잖아요? 14, 14, 14는 뭐예요? 7, 7, 7, 7, 7, 7이라고 그랬어요? 14, 14, 14는 D(달렙: 4) V(바우: 6) D(달렙: 4) 당시에 아라비아 숫자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모음도 없었으니까, 자음으로 다윗이, 14란 말이에요.

      그래서 일부러 14, 14, 14로 맞춰 놓고,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족보가 되려면 7, 7, 7, 7, 7, 7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14, 14, 14 여섯 개 밖에 없다 말이죠? 그리고 그 14, 14, 14의 마지막 족보가 누구예요?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로 끝나죠, 그죠? 그러면 마지막 일곱 번째 세대는, 누구예요? 그 족보를 완성할,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밑에, 줄줄이 딸려오는 우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을, 내가, 너의 후손을 통하여 집을 짓겠다고 표현을 하시는 거예요. 집을 지어 너에게 주겠다는 거예요. 그 말은, 그 가문을 다윗을 위하여 이루시겠다는 것은, 다윗을 그 안에 넣어주시겠다는 것이죠? 네 후손으로 그 집을 만들겠다는 것은! 너를 내가 거기에 넣어주는 거지, 네가 내가 거할 집을 짓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우리가 돈을 벌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일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여러분이 가진 여러분의 실력이나, 여러분의 돈으로,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도구로 쓰이는 거지, 하나님이 일하시는데, 도움이 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갖고 쓰는 도구라니깐요.

      그런데 그걸 갖고 하나님한테 자꾸 생색을 내는 거예요. 그래놓고 요만큼 했으니까, 좀 더 주셔야 이치에 합당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여러분 오늘날, 신앙이라는 게 얼마나 우스워졌어요?

      그런데 문제는, 12절과 13절이에요. 하나님은 분명 다윗에게, 내가 사람 없는 집에 거하는 것을 봤냐? 그러면서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하게 하겠다고 하잖아요? 왜 다윗이 지은 성전 안 받으시겠다고 하시고, 다윗에 후손에게는 성전을 짓게 하시겠다고 할까요?

      그 성전은 무슨 성전이에요? 우리 요한복음 이미 공부했기 때문에, 너무 싱거워 졌어요. 나! 예수가, 내가 성전이다! 그랬잖아요? 그 성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안에서, 성전으로 지어지게 될 바로, 하나님의 백성! 교회! 예수를 시켜서, 다윗의 후손 예수를 시켜, 바로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짓겠다고, 지금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의 언약에서,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단순히 다윗이 죄를 많이 지었고,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다윗에게 집 못 짓게 한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이 말은 솔로몬은, 다윗보다 괜찮으니까, 솔로몬에게는 내가 성전 짓게 할 거야! 그 말도 아니에요. 솔로몬이 성전을 짓긴 지었어요. 그러나 그건 또 다른 메시지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거하시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도 안 거하세요. 사도행전 7장 46절 보십시오.

      사도행전
      7:46-53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지었어요.)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하나님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도 거하지 않으셨대요. 그러면 네 후손이,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지을 것이라는 말은, 무슨 말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거하실 거처! 처소인, 성전인 교회를 만드실 것이다.’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물론 여기에는 이중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죠. 다윗의 후손! 솔로몬은, 분명히 성전을 지었어요. 그런데 그 성전은요, 얼마 있다가 파괴됩니다.

      그리고 그 솔로몬의 왕위! 그게 영원했어요? 사무엘하에서는 분명히 영원할 거라 그랬잖아요? 아니요. 바로 솔로몬 아들 때에서 갈라지고, 얼마 있다가, 북이스라엘, 남유대, 홀랑 망했어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분명히 하나님이 내 이름을 위하여 짓게 하겠다고 했는데, 그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어떤 의미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지어졌던 걸까요?

      이 세상에서,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지은 성전은, 이렇게 파괴된다. ‘내가 내 힘으로 지은 성전만이 영원할 것이다.’를 보여주는, 하나의 파괴되는 성전으로 지어진 거예요. 우리의 육신이 그렇기 지어진거처럼! 우리의 육신은, 이거 파괴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 육신은 후패되어져요. 썩어져 가게 됩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완성하신 온전한 새 성전으로 싹 입혀 줄 때, 그때 하나님과 우리가 온전한 연합이 되는 것이죠.

      그거처럼, 솔로몬이 짓고, 학개가 재건하고, 헤롯이 중건하고 한, 이런 성전들은, 하나님이 그래서 때마다 부셔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나중에 타이터스 시켜서 돌 위에 돌 하나도 안 남게 사그리 부셔 버렸죠. 지금까지도 없어요. 그래서! 인간이 만든 성전은 이런 것이다. 바로 인간이 만든 성전이, 지금 이 우주의 과학 문명이며, 역사인 거예요. 이거 완전히 부셔버릴 거예요. 하나님이요!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시는 것이, 바로 이 구속사인 거예요. 성경은 그 이야기 하나만 하고 있어요.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그걸 이해를 잘 못하시니까, 제가 반복하여 계속 설명을 해드리는 거죠. 너무 반복해 주니까, 또 반복하겠지! 그리고 잘 듣지도 않아요. (하하하하) 그래도 계속 하는 거죠. 여러분 성경은 그 이야기한가지 밖에 없어요. 그것만 알고 있으면 여러분은 제 설교! 어떤 설교를 들으셔도, 다 충분하게 이해를 하실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성전은, 하나님께서 지으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지, 인간이 지어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닌 거예요. 그게 바로 은혜 언약인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공력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모든 것은 다 불타버릴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솔로몬의 성전이 지어진 거예요.

      반면에, 그 다윗의 후손에 의해 지어지게 될, 집이라는 것이 담고 있는 두 번째 상징은, 여호와의 처소! 여호와께서 거하실 참 성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지어질 교회를 이야기하는 거라 그랬어요. 그렇게 하나님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 안에 거하시겠다고 말씀을 하세요.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을 처소로 제공하시겠다고 그렇게 이야기하세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그래요. 그리고 오늘 본문 조금 밑에 가면, 뭐라고 나와 있는지 보세요. 거기에 분명하게 설명이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14장 20절 보십시오.

      요한복음 14:20-23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뮤추얼 인듀웰링(mutual in-dwelling)이에요. 상호내주(相互內住)! 연합(聯合)! 안식(安息)! 예배(禮拜)! 이거예요. 이게 우리 인생의 목적이에요. 역사의 목적지예요. 이것이!)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나중에, 우리가 이 상태가 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키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 거예요. 그러나 그것을 목적지로 하여, 우리의 삶을 지향시켜야 되는 거예요. 그 쪽으로! 22절)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보세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그를 나의 처소로 삼으리라.’ 지금 주님이 그거 예비하러 가신다, 그랬죠? 그런데 그를 나의 처소로 삼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상태가 되어야 돼요? 그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돼요.

      그러니까 지금 이 역사 속에서, 인생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처소! 처소로, 지금 예비시켜 가시고, 완성시켜 가신다는 건 뭐예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로, 지금 철장으로 두들겨 패면서, 만들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길에, 여러분의 사업이 망하기도 하는 거고, 여러분이 병에 걸리기도 하는 것이고, 그 길에, 여러분의 희로애락이 사용되는 것일 뿐이에요.

      그래서 성도의 삶에는, 모든 것이 합력되어, 선을 이루는 거예요. ‘아! 그래도 나는 옛날에 너무 파렴치한 죄를 지어서, 그거는 용서받지 못 할 거예요.’ 아니에요. 그거 때문에 예수가 오셨다니깐요. ‘아니, 저 인간은, 정말 용서받지 못할 그런 못된 죄를 저질렀는데, 저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이 징계를 하셔야 돼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예수가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런 것들을 상처로 품고 계시지 마세요.

      ‘아! 내가 옛날에, 어렸을 때, 뭐 학대를 당하고, 뭐 십대 때 강간을 당하고…’ 물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역사와 우리의 육신은, 잠시, 구속사 속에서 도구로 쓰이는 것뿐이라니깐요. 이 껍데기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그걸 왜 더렵혀졌다고 생각합니까? 뭐가 더러워요? 그게? 우리의 마음이 정말 더러운 거라니깐요. 만물 중에 가장 더러운 게 마음이라 그러잖아요? 그 걸로는 마음 아파하지 않으면서, 그 따위 걸로, 상처라고 하면서, 죽는 날까지 가지고 가요. 그거를 갖다가! ‘내가 어려서 당한 그 일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았어!’ 예수님이 그거 때문에 오셨단 말입니다. 그런 걸 상처로 갖고 있지 말란 말이에요.

      뭐 ‘저 옛날에 마약했는데요.’ 커피중독이나 마약중독이나 똑같아요. 하나님 앞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집착과 중독 속에서, 나의 행복과 쾌락을 채우기 위해서만 존재하던 나를, 하나님이 건지셔서, 하나님께 중독 시켜버린 그 하나님의 은혜를, 더 찬양하실 수 있어야지, 왜 자꾸 자기 뒤를 돌아보면서, 그런 거 가지고 자기를 폄훼하세요? 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누구 하나 잘난 인간 없고, 누구하나 못난 인간 없어요.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다 똑같아요. 다 똑같아요. 살인마! 김대두가 나중에 예수 믿고 전도하다가, 천국 갔다고. 어떤 사람이, ‘그런 인간이 간 천국이면, 난 안 간다.’ 그랬다 그러는데, 그 인간과 자기가 뭐가 달라요? 그래서 사람 열 몇 명 죽인 거, 죽였어요. 여러분은 입으로 수십 명 죽이잖아요? 하나님은 그거 살인이라 그랬어요. 분명히! 살인으로 여길 거다. 간주할 거다도 아니고, 그거 살인이다! 그랬단 말입니다.

      그런데 김대두는 나쁜 놈이고, 나는 칼로 쑤시지 않아서, 좋은 놈이에요? 아니라니깐요.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죄가 동일해요. 다 사형(死刑)이에요. 그 분이 너무 크신 분이기 때문에, 범죄의 대상이 너무 크게 되면, 모든 죄가 다 동일해요. 사형이에요. 여러분, 오바마 뒤에 가서, 꿀밤 한 대 때리고 도망가면 바로 사살(射殺)이에요. 거기서 그게 무슨 큰 죄라고? 그러나 대상이 미국 대통령이기 때문에 사형이에요. 그 대상이 하나님이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누구를 가리켜서, ‘저런 못돼 먹은, 엉덩이에 뿔난 인간!’ 뭐 그렇게 어떻게 우리가 평가를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왜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너는 안 돼! 너는 구제불능이야!’ 왜 그러시냐 말이에요?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면서! 그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죽으셨는데! 괜찮습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어떤 죄를 짓고, 어떤 과정을 통과해서 자라왔든, 그거는 하나님의 의해 도구로 쓰인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거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신 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근거로, 우리의 더러운 죄를 다 씻어버림으로, 당신이 우리 속에 거하실 수 있게 하시는, 성도의 구원 이야기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망을 이기신 부활로 이어지고, 그 부활은 하늘로의 승천으로 결론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셔서, 죄의 대한 완전한 승리를 인정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건, ‘그래, 네 제사가, 완전하게 나에게 흠향이 되었다.’ 인정하신 거란 말입니다.
      완전한 승리를 인정받으셨고, 성령! 즉 그리스도의 영의 모습으로, 자기가 완성해 놓으신, 청결한 마음의 성도들에게, 내려 오셨어요. 그게 우리예요.

      여러분, 전부 청결한 마음을 갖고 계신 분이에요. 사실이에요. 지금 여러분이 어떻게 청결한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 그 더러운 마음을 함께 가지고 가면서, 잠시 어떤 한 과정을 겪고 있을 뿐이지, 여러분은 전부 청결한 마음 갖고 계신 분이에요. 청결한 마음을 갖고 있는 자만, 하나님을 본다, 그랬으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이요.’ 그랬잖아요?

      여러분은 믿음으로 하나님 보시잖아요? 여러분은 마음이 청결해 지신 분이에요. 그 상태에서, 마음이 청결한 상태! 하나님의 백성으로, 처소로 완성이 된 상태에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처소로 완성이 되었는가를, 여러분이 미래에서 과거를 이렇게 바라보시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여러분의 인생인 거예요.

      그래서 ‘근심하지 말라’가 1절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처소로 만들고 있는데, 누가 그걸 방해할 거야? ‘근심하지 말아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하나님을 믿고 기다린 것처럼, 그날이 분명히 올 거니까, 근심하지 말고 기다려! 믿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게 1절, 2절, 3절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모습을 보면서, 너무 너무 고통스러워하거나, 너무 부끄러워하거나, 너무 절망하거나, 그러시면 안 돼요. 물론, 우리가 후회하고 뉘우치고 회개하는 건, 참 좋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마저도, 어디 구석으로 처박아 놓고, 그냥 절망만 하시면 안 된다 말입니다. 그때에 은혜를 더 꼭 붙드시는 거예요. ‘맞아! 나는 그런 사람이 맞아! 그래서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시러 오셨잖아?’하고 꼭 붙드세요. 그러면요, 나중에는 사탄이, 그런 방법으로 더 이상 여러분들 미혹 안 해요.

      그럴 때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더 꼭 꼭 붙드는데, 재미없어서 더 그렇게 공격 안 해요. 지금은 자꾸 거기에 휘둘리니까, 재미있으니까, 장난을 치면은, 누가 깜짝 놀라줘야 계속 장난칠 맛이 나잖아요? 저같이 누가 장난을 쳐도, 그냥 한번 쳐다보고, 말고 뭐 이러면은, 저희 집사람이 재미가 없어서 못 살겠대요. 장난을 치면은, 깜짝 놀라는…, 안 놀라운데 어떡해요? 흐흐 재미 하나도 없는데…. 매일 하고 있어요. 그런 거를! 그냥 흐흐 지겨워 죽겠어! (하하하하)

      마찬가지예요. 여러분이 거기에 격동되지 않으면요, 사탄이 재미없어서 안 해요. 그런데 우리가 그것들이 정말 헛것이고, 허상이고, 마귀의 속임수라는 걸 자꾸 놓치고, 거기에 자꾸 이리저리 흔들리니까, 마귀가 재미있어서, 자꾸 여러분 흔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은 이미, 완성된 자리에서 과거를 보는 분들이라니깐요. 그냥 어떻게 내가 여기까지 왔는지를, 내가 경험을 하면서, 이렇게 오는 거예요. ‘야! 네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비디오로 한번 볼래?’ 보고 있는데, ‘야! 그래도 더 실감나게 네가 한번 들어가서, 여기까지 와봐!’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화면 속으로 들어와서, 거기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를, 지금 가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쓰인 모든 것은, 여러분을 이 자리에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안다면, 어떤 것에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 확고한 목표지점! 잘 붙들고 하루하루를 잘 이기십시오.






      12-19-2024(목) 요한복음 14: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처소를 예비하면(3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And if I go and prepare a place for you, I will come back and take you to be with me that you also may be where I am.

      * 처소(5117) 토포스(tŏpŏs) τόπος, ου, ὁ   

      1. 장소.  2. 마 14:35. 3. 지점
      발음 [ tŏpŏs ]
      관련 성경 /  곳(롬9:26), 빈들(마14:13,15, 눅9:12), 곳 곳(마24:7, 막13:8), 자리(눅14:9,22), 땅(요11:48), 거처(요14:2,3), 처소(행7:49), 지역 (행16:3), 기회(행25:16), 틈(엡4:27), 토지 (행28:7), 처지(고전14:16), 평지(눅6:17), 끝 자리(눅14:10).

      * 거할 곳(3438) 모네(mŏnē) μονή, ῆς, ἡ 스트롱번호 3438

      1. 체류.  2. 거처
      발음 [ mŏnē ]
      어원 / 3306에서 유래
      • 1. 체류, 요 14:23.
      • 2. 거처, 자리, 요 14:2.
      • 관련 성경  /  거하는 곳(요 14:2), 거처(요 14:23).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것은 우리가 죽은 후에 가서 살게 될 어떤 곳을 예비하려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예비하시겠다고 하신 처소는 무엇일까요?

      처소는 어떤 장소와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할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곳으로 가신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를 깨뜻하게 씻음받은 주의 백성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생들은 마음이 부패하고 거짓되어서(렘 17:9-10)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부패한 마음을 청결한 마음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마 5:8).

      이미 부패한 인생이 자기의 힘으로 부패한 것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직접 해결하시려고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17:9-10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내가 너희들의 마음을 볼 때, 나는 너희들에게 보응할 수밖에 없는, 그런 더러운 마음을 너희들이 갖고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렇게 아담 안에서 타락을 한 모든 인간들의 마음은, 거짓되고 부패해서, 하나님의 보응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예요.
      거기에는 하나님이 들어가실 수가 없어요. 죄와 하나님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실 때도, 성막에 숨으셔서, 그들을 끌고 가실 수밖에 없으셨던 거예요. 하나님이 성막에 숨으셨던 것은, 하나님이 뭐 성막 안에 이렇게 갇혀 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죄인과 하나님은 공존할 수 없다. 동행할 수 없다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숨으시는 하나님으로, 성막에 숨어 버린 것이란 말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모세에게도 자신을 드러낼 수 가 없었죠. 그래서 아름다운 뒤태만 살짝 보여주시고, 마셨단 말이죠? 못 본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모세도!

      죄인은 그렇게 하나님과 공존할 수가 없어요. 거처를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더러운 죄인들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서,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청결한 마음으로 만들어 내어,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들이 함께 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처소예비인거예요. 마태복음 5장 8절 보십시오.

      (마태복음 5:8)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예레미야 17장 9절 이하의 그 마음과는 다른 마음이에요. 이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대요. 복 있는 자들은! 바로 요 상태로 만들어 내시는 거예요. 이게 처소를 예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보고도 그분의 돌격을 면하게 되는 거예요. 죄인인 상태에서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이 돌격하여 죽여야 됩니다. 하나님이 못 때서가 아니라, 죄는 거룩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어떻게 만물 중에 제일 더럽다는,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청결한 마음이 될 수 있는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입니다.

      에스겔 36:24-28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더러운 마음을, 당신의 물로 깨끗이 씻어서, 그들을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그러한 거처로, 처소로 만들어 내시겠다는, 이런 새 언약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셨단 말이에요.
      이것을 새 언약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씻김을 받은 성도들의 현실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에베소서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영광스러운 교회는, 하나님이 물로 씻으시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신 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이렇게 교회가 바로, 더러운 마음을 씻김을 받아서,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수 있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처소가 된 자들의 무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한 방법으로, 만물 중에 가장 더러웠던 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씻으셨는가?
      예수님의 발 씻김의 에피소드 뒤에, 이 이야기가 붙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어떻게 우리가 깨끗하게 씻긴 거예요?
      어떻게 처소가 된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7:13-14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어디에?
      어린양의 피에 깨끗하게 씻어서, 맑은 세마포 옷을 입은 자들을, 교회(敎會)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환란 속에서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된 성도들의 삶은 환란입니다. 

      이렇게 성도는, 어린양의 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 의해서 말갛게 씻기고, 드디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 된 거예요.
      그래서 급기야, 더럽고 추한 마음이 제해지고, 청결한 마음이 심어진 그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좌정할 수 있게 된 거죠.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계세요? 안 계세요? 성령이 계세요? 안 계세요? 성령은 누구의 영? 그리스도의 영! 어떻게? 그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들어오게 됐죠? 옛날 같았으면, 돌격하여 죽여 버려야 되는 그 더러운 마음 안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세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죠?
      고린도서에서 뭐라 그래요? 성령이 아니 계시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 그러니까 여러분 안에 지금 성령이 계신다 말이에요. 하나님이 계신다 말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되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여러분의 더러운 마음을 전부 가져가셔서, 거기에서 싹 제해버리셨어요. 없애 버리셨단 말입니다.

      내가 처소를 마련하러 간다는 것은 가룟 유다가 나를 팔러 나갔기 때문에 이제 곧 십자가를 짊어지로 가야한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그곳을 하나님 나라! 천국(天國)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처소 즉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 떠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제 곧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를 내가 처소로 만들어 낼 것이다.
      지금은 안 된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를 지고, 거기에서 나의 피로 너희들의 죄를 말갛게 씻어내면, 너희는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땅에서, 역사 속에서, 현실 속에서는, 차근차근, 차근차근 성화의 모습으로 진행되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그 일을 하는 거예요. 지금 우리 안에 하나님이 사신다는 게 이게 말이 돼요? 우리가 우리를 볼 때! 그런데 하나님이 이미 그렇게 만들어 놓고, 그 선언적으로, 운명적으로, 신분적으로, 만들어 놓고, 그렇게 우리를 지금, 이 가시적인 역사 속에서 만들어 가고 계시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많이 힘들죠.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여기 "거할 곳"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모나이(*)인데, 이것은 영구한 저택(邸宅)을 의미하는 바, 하반절의 "처소"(* )라는 말과 다르다.
      아버지의 집에 있는 모나이 곧, "거할 곳"은 구약 시대에도 늘 있어오는 것이니, 신약 시대에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시설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가 예비하실 "처소"는, 본래부터 있던 아버지 집의 "거할 곳"에 신자들을 수용할 자리이다.
      그 곳에 갈 수 있도록 하시는 방법은, 그의 죽었다가 다시 살으심 곧, 구속 사업의 완성인 것이다.
      그렇지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이 번역은, 원문의 문구를 괄호구로 취급하고 번역한 것이다.
      그 뜻은, 만일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없었더라면, 그가 그 사실을 그들에게 벌써 말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이 문구를 그 아래 호티(*)로 시작되는 문구와 연속시켜서 의문(疑問)의 말씀으로 읽음이 더욱 문법적이다.
      그렇게하면 그 문구는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곧,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라고 일찌기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있을 곳을 예비하시겠다고 한 말씀은, 12:26, 32에 포함되었다.
      어째든 이 말씀은, 신자들에게 천당 신앙을 강조함이다.
      무디(Moody)는 말하기를, "준비된 천국을 믿고 바라보는 신자는, 벌써 천국에 들어가 있는 듯한 생활을 한다"라고 하였다(Those who look for a heaven made ready will live as though they were already in heaven-Notes from my Bible, p. 141).
      우리가 내세에 들어가 영원히 살 것을 생각할 때에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에 조급하거나 당황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영원토록 살 사람들이다.
      볼트만(Bultmann)은, 여기 관설된 내세 소망이 유대적 기독교의 색체를 가지지 않고, 개인 본위로 말하는 노시스주의(靈智派)의 신화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Johannes Evangelium p. 465).
      곧, 요한복음의 내세관(來世觀)이 노시스 사상에서 말한 것(영혼이 하늘 세계에 올라간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물론 요한복음의 말씀이 물론 신자의 별세 후 그 영혼이 하늘 세계에 감을 말하지만, 노시스 사상에 있는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노시스의 내세관은 범신론적이며, 유출설에 속한다.
      한스 조나스(Hans Jonas)는, 노시스 사상이 말하는 영혼에 대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떨어져 내려온 부분이라"고 하였다(Gnostic Religion p. 44)
      헬미티즘(Hermetism) 문헌에서도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분산된 것이니 이는 마치, 광선이 태양에서 분산된 것과 같다고 한다(Libelius, p. 12 ).
      따라서 노시스 사상에서 말하는 영혼의 승천은, 그것이 질적으로 하나님과 다시 연합을 의미하는데, 점차 성화되어 올라간다는 것이다(Hans Jonas, The Gnostic Religion. pp. 45, 166).
      이같은 사상이 헬메티즘(Hermetism)문헌에 있다(Libelius 1:25-26).
      거기 있는 말을 보면, 별세한 영혼이 7 층 세계를 통과하여 결국 하늘에 이르러 성화 되어 신화(神化)된다고 한다.
      그 말을 소개하면 이렇다.
      곧, "승천에 대하여 내게 말하시요"하니 포이만드레스(Poimandres)가 대답하기를 "내 몸이 용해되면 나는 하늘들을 통과한다.
      첫째 하늘은 일이 증가되기도 하고 감손되기도 하는 곳이요,
      둘째 하늘은 모든 악한 계획들이 있는 곳이요.
      세째 하늘은 사람을 속이는 정욕이 있는 곳이요,
      네째 하늘은 교만이 다스리는 곳이요,
      다섯째 하늘은 거룩지 못한 용기와 담력이 다스리는 곳이요,
      여섯째 하늘은 부하기를 원하는 악한 욕심이 있는 곳이요,
      일곱째 하늘은 사람을 해하려고 하는 거짓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이다.
      영혼이 이 모든 하늘들을 지나서 여덟째 하늘에 있는 본체에 올라가 그 본래의 능력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완성이다"라고 하였다.
      위와 같은 노시스 사상은 인간의 자력 구원을 말하는 그릇된 사상이다.
      그러나 요한의 구원론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단독 역사(役事)로 말미암는 구원론이다.
      요 14:2 이하는, 실상 구약 사상(시 49:15, 73:24)에 근거한 것이다.
      볼트만(Bultmann)의 신환 제거(Demythologizierung)주의는, 실존주의적인 해석 방법으로서 하나님께 대하여 사람의 쓰는 말은 대부분 신화(神話)라고 잘못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에 의하여 사람의 언사로 표현될 수 있다.



      12-18-2024(수) 요한복음 13:36-3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36절)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Simon Peter asked him, "Lord, where are you going?" Jesus replied, "Where I am going, you cannot follow now, but you will follow later."

      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36. Simon Peter asked him, "Lord, where are you going?" Jesus replied, "Where I am going, you cannot follow now, but you will follow later."
      37. Peter asked, "Lord, why can't I follow you now? I will lay down my life for you."
      38. Then Jesus answered, "Will you really lay down your life for me? I tell you the truth, before the rooster crows, you will disown me three times!

      이 부분의 말씀은, 베드로의 결심과 예수님의 예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가신다"는 것(33 절), 그가 죽어서 하나님 계신 하늘 나라에 가실 것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을 오해하고 질문하기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하였다(36 절).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가시는 곳에 목숨을 버리기까지 따르겠다고 맹세하였다.
      그것은, 진리대로 움직인 신앙의 용기가 아니고 하나의 육적인 용기였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육적인 용기를 꺾어 겸손하게 하시려고 예언의 말씀으로 경고하셨으니, 곧,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다(38 절).
      그가 이렇게 경고하신 이유는, 육적 용기는 도리어 주님께 대한 신앙과 충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주여 어디로가시나이까?(Lord, where are you going?)
      이 말씀을 라틴어로 "도미네 쿠오 바디스?(Domine, quo vadis?)" 라고 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로마 집정관이었던 아그립바에게는 네 명의 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첩들이 어느 날 베드로의 "순결"이란 설교를 듣고 잠자리를 거부합니다.
      또 다른 집정관이었던 알비누스의 아내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잠자리를 거부합니다.

      이때부터 집정관 알비누스아그립바가 베드로를 증오하고 죽이기로 공모하였는데 그 비밀이 사전에 누설되어 이 첩들과 믿음의 형제들이 베드로에게 로마를 떠나라고 종용해서 베드로는 마침내 위협을 느껴 변장을 하고 조용히 로마를 떠나게 됩니다.
      베드로가  로마성을 벗어났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로마로 들어오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분이 예수님인 것을 발견하고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를 라틴어로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다시 달리려고 로마로 간다.”고 합니다. 
      그 순간 베드로의 눈이 번쩍 뜨였고 정신을 차린 후에 그 길로 다시 로마로 들어가서 끝내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합니다.

      베드로행전 35장

      그 공모를 알게 된 크산티페베드로에게 알려주고는 로마를 떠나라고 권고했다.
      마르첼로를 비롯한 다른 형제들도 그에게 떠나라고 말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형제 여러분, 우리가 배신자처럼 달아나도 되는 것입니까?”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런 게 아니지요. 다만 로마를 떠나면 당신은 계속해서 주님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베드로가 형제들의 말에 복종하여 혼자 로마를 떠나면서 “아무도 따라오지 마십시오. 나는 변장을 하고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로마 성문을 벗어나자, 베드로는 로마로 들어가는 주님을 보았다.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려고 로마로 가는 길이다.”라고 대답하셨다.
      베드로가 “주님, 십자가에 다시 못박히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라고 물었다.
      주님께서는 “그렇다, 베드로야. 나는 다시 십자가에 못박힐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다.
      그제서야 베드로가 제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시는 주님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베드로는 기쁨에 가득 차서 주님을 찬미하면서 로마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십자가에 못박힐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일이 베드로에게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베드로행전 36장

      형제들에게 돌아가서 베드로는 자기가 본 환시를 전해주었다.
      슬픔에 잠긴 형제들이 울면서 “젊은 저희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다시 떠나가십시오.”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이라 해도, 주님의 뜻이라면 그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신앙을 더욱 굳세게 만들어주실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오래도록 살려두시겠다면 난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나를 데리고 가시겠다면 역시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로마 군사 네 명이 와서 그를 잡아다가 아그리파에게 데리고 갔다.
      아그리파베드로를 독신죄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명령했다.

      가난한 자와 부자, 과부와 고아, 건강한 사람과 불구자 가릴 것 없이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베드로를 바라보고 또 그를 구출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한 목소리로 “아그리파여, 베드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이오? 그가 죽으면 주님께서 우리를 멸망시키실까 두렵소.”라고 고함쳤다.

      베드로가 조용히 하라고 진정시킨 뒤에 “나를 통해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기적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분께서 다시 오셔서 각자의 행실에 따라 보상하실 때까지 그분을 기다리십시오.

      아그리파는 자기 아버지의 하인이니 그에게 화내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그대로 지금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가는 것을 왜 꾸물거려야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베드로행전 37장

      십자가에 가서 베드로가 “오, 십자가의 이름! 숨겨진 신비여! 십자가의 이름으로 표현된 형언할 수 없는 자비여!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인성이여! 오, 형언할 수 없고 분리할 수 없는 사랑이여! 지상의 경력을 끝내는 자리에서 나는 당신을 붙잡고 있습니다.
      사형 집행자들이여, 내 머리를 아래로 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베드로행전 38장

      그들이 베드로의 말대로 거꾸로 매달았다.

      베드로행전 39장

      형제들이 아멘으로 응답할 때, 그가 숨을 거두었다.


      외경 베드로행전 3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내용을 소재로 1951년 머빈 르로이(Mervyn LeRoy, 1900년 10월 15일 ~ 1987년 9월 13일)가 “쿼바디스”라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후 초월적 능력이 있음에도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를 합니다.
      로마의 핍박 앞에서 예수처럼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죽기 위해 십자가 앞에 섰을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오 십자가의 이름,
      숨겨진 신비여 십자가의 이름으로 표현된 형언할 수 없는 자비여,
      지상의 경력을 끝내는 자리에서 나는 당신을 붙잡습니다.
      사형집행자들이여 나의 머리를 아래로 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주시오."

      그리고 베드로가 죽어갈 때 예수님처럼 찬미하며 기쁨으로 죽어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용감하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습니다.

      그 후 베드로가 순교하던 모습에 감동을 받아 아이들의 이름을 "피터(베드로)"라고 작명하였다고 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내가 가야 할 그 자리를 버리고 세상으로 향할 때 주님은 다시 내가 가야 할 그 자리를 찾아 십자가를 짊어지시려고 합니다.
      내가 외면한 그 십자가를 붙잡기 위하여 돌아설 수 있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풀어주옵소서!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가도록 날 붙들어 주옵소서.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베드로의 모습에서 감화를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활소망이 있다.
      1967년 6월 30일 열일곱 살의 운동 선수 조니 에릭슨체사피크 만에서 다이빙을 하다 사고를 당했다.
      그로 인해 목 아래부터 전신이 마비된 그녀는 쓰라림, 좌절, 원망, 분노, 심지어 자살하고 싶은 침체까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감정에 휩싸였다.
      하지만 재활 훈련 및 치료 기간을 통해, 그리고 부모님, 자매들과 친구들의 열렬한 후원을 통해 점차 깊은 블랙홀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후원하는 모임도 만들었다.
      그녀의 변화의 중심에는 성경을 재발견한 일이 있었다.
      그녀는 자기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무력하며 마비된 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환상을 보면서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부활이었다.

      “나는 이제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하늘에서 ‘영화롭게’된다고 말한다. 
      그때는 내가 여기에서 죽은 후 내 발로 춤을 출 때다.
      손가락은 오그라들어 구부러지고, 근육은 쇠약해지고, 무릎은 비틀리고, 어깨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는 내가, 언젠가는 가볍고 밝으며 강력하고 눈부신 의로 옷 입은 새로운 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나처럼 척추를 다친 사람에게, 뇌 손상을 입은 환자 혹은 조울증 환자에게 어떤 소망을 주는지 상상할 수 있는가?
      다른 어떤 종교나 철학도 새로운 몸과 정신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 안에서만, 상처 입은 사람이 이처럼 놀라운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
      -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 존 스토트

      십자가는 부활이 있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만을 강요하는 종교라면 모두 의인이 되기를 요구하는 슈퍼맨의 종교일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영광이 있기에 고난을 달게 받을 수 있습니다.
      부활이 있기에 고난의 의미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지 36년 만이었는데, 베드로가 예수에게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Quo vadis, Domine?)"라고 묻자,
      예수는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러 로마로 간다.(Venio Romam iterum crucifigi.)"라고 대답한다.
      이 구절을 "네가 나의 어린 양들을 버리고 로마를 떠나려고 하니까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십자가를 지고 죽으러 간다."라고 의역하기도 한다.
      혹은 "너는 너의 사명을 완수하였다. 이제 천국으로 오너라."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베드로가 주님을 만났다고 전해지는 장소에 "도미네 쿠오바디스 성당"으로 불리는 "팔미스의 산타마리아 성당"이 세워졌다.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Κύριε, ποῦ ὑπάγεις

      마가복음 11:6-14, 마태복음 26:6-13, 요한복음 18:33-38

      라틴어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3:36에서 시몬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던 질문입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합니다(요한 13:33).
      시몬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라고 대답하시며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리라고 예고 하셨습니다(요한 13:36).

      「베드로행전」이라는 외경(外經 - 성서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책)에 다시 이 질문이 나옵니다(베드로행전 35장).
      먼 훗날 로마에서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혼자 로마를 빠져나가던 베드로가 로마 성문을 벗어날 때 거꾸로 로마로 들어가시는 주님을 뵈었습니다.
      베드로가 다시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자, 주님은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러 로마에 들어간다' 대답하십니다. 그제서야 베드로는 정신을 차리고 기쁨으로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갑니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폴란드의 작가 헨리크 솅키에비치가 장편소설 『쿼바디스』를 썼습니다.
      이 작품은 190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12년, 1951년 그리고 2001년에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이 영화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벤허>와 <십계> 다음으로 TV에서 많이 방영해줍니다.
      로마의 네로 황제 시절, 정복 전쟁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비니키우스가 기독교인 리지아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진정한 크리스천이 된다는 내용이지요.
      영화 속의 명장면은 박해를 피해 급히 로마를 빠져나가는 베드로 앞에 예수께서 나타나시는 장면입니다.
      빛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가 묻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네가 내 양들을 버린다면 내가 다시 십자가에 매달리러 로마에 가리라!"

      '쿼바디스 도미네.'
      베드로는 이 질문은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몰라서 물은 게 아닙니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았기에 꼭 그 길로 가야만 하시냐고 물은 것입니다.
      왜 그 길로 가야만 하시냐고 물은 겁니다.
      그 길 말고 다른 길은 없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처음 가르치셨을 때부터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였고", 예수께서는 이런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꾸짖으신 적이 있었습니다(마가 8:31-33, 마태 16:21-23).
      그래서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가 결국 묻고야 말았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죽는 줄 알면서 왜 이 길로 가십니까!'
      '꼭 이리로 가셔야만 합니까!' '이 길 말고도 딴 길이 있지 않을까요!'

      닉 페이지(Nick Page)의 책 『가장 길었던 한 주 The Longest Week: The Truth about Jesus' Last Days』(포이에마, 2011)는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일주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성서의 사복음서와 바울서신,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와 필로의 저작, 유대의 랍비 문학 <미슈나 Mishna>, 그리고 외경 복음서들을 가지고 2천 년 전 그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요일별로, 시간대별로 치밀하게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전적으로 변화시킨 그 일주일에 관한 책입니다.
      실패처럼 보이지만 영광스러운 승리를 담은 이야기입니다.
      저자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비폭력적 사랑 이야기"라고 이름 붙인 이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간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죽음의 여행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서기 33년 3월 29일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종려주일로 지키는 바로 그 일요일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베다니에서 감람산 등성이를 넘어 기드론 골짜기를 거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한 번도 사람을 태워본 적이 없는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모습이 우스꽝스럽습니다.
      마치 다 큰 어른이 어린이용 자전거를 탄 모양새입니다.
      주님은 구약성서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일부터 이런 모습을 연출하셨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스가랴 9:9)

      '연출'이라 했습니다.
      허튼 말이 아닙니다.
      학자들은 예수께서 '일부러' 재미와 풍자가 있는 행진을 정교하게 기획하셨다는 데 동의합니다.
      또 다른 행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언제나 로마의 군사들이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했습니다.
      그들의 반짝이는 갑옷과 윤나는 가죽을 상상해보십시오.
      보무당당하게 높은 말 위에 탄 기병들과 어깨 위 제국의 독수리가 행진을 이끕니다.
      로마의 황제를 대표해 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시위하는 행진이었습니다.
      총독 빌라도 언제나 서쪽에서 군사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예루살렘의 동쪽에서 입성하셨습니다.
      말이 아니라 일부러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고 '전쟁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평화의 임금'으로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스가랴 9:10)
      전쟁과 폭력에 찌든 예루살렘 백성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가 11:9)라고 환호했습니다.
      평화의 연호(連呼)였습니다.
      지금 온 세계 교회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맞서 외치는그 평화와 연호와 같은 연호였습니다.
      이 평화의 바람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이를 보고 한 말에서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요한 12:19) 그렇게 첫날이 갔습니다.

      서기 33년 3월 30일 월요일,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 날 예수님은 느닷없이 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마가 11:12-14) 듣고 보니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무의 잘못이 아닙니다. 성서도 기록합니다. 그때는 무화과나무가 열리는 철이 아니었습니다. 무화과는 5~6월에 한 번, 또 8~10월에 두 번째 과실을 맺습니다. 그때는 3월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까요? 무화과나무는 예루살렘 '성전'의 상징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고대 세계에서 아주 큰 건물 중 하나였습니다. 이 건물의 규모가 얼마나 거대한지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서쪽의 벽, 곧 '통곡의 벽'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룹바벨이 중건(重建)한 성전을 헤롯 대왕이 두 배로 규모를 키웠습니다. 얼마나 웅장하게 재건축했는지 사람들은 이 성전을 '성전 산'(Temple Mount)이라 불렀습니다. 이 성전은 로마 제국 전체에서도 가장 부유한 조직 중 하나였습니다. 매년 로마 제국 전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성전세를 거둬들였습니다. 수천 명의 순례자에게 날마다 희생 제물을 판매하여 막대한 이윤을 남겼습니다. 농산물의 십일조도 거둬들였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은 단지 제사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경제의 핵심이었습니다.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기계였습니다. 이 덕에 성전귀족들은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권세를 누렸습니다. 얼마나 사치와 낭비가 심했냐 하면 대제사장의 의복을 만드는 데 1만 데나리온이나 썼습니다.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치 일당입니다. 그러니까 평범한 노동자 하나가 1만 일, 즉 약 27년을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큰돈을 대제사장 의복 만드는 데 탕진했습니다. 게다가 가난한 사람들이 제사 드리기 위해서도 큰돈이 필요했습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택하는 제물인 비둘기는 1데나리온이었습니다. 새끼 양은 4데나리온, 숫양은 8데나리온, 송아지는 20데나리온이었습니다. 부자들은 한 마리에 100~200데나리온 하는 소를 바쳤습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백성이 성전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의 이 둘째 날, 주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습니다]."(요한 2:15)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누가 19:46) 질타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사용하신 '강도'(lestes)라는 단어는 좀도둑이 아닙니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강탈자'를 뜻합니다. 돈 바꾸는 사람이나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 배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로 '하난(Hanan) 가문'의 사람들입니다. 하난은 당시의 실권자 '안나스'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주후 6~15년까지 10년 동안 로마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된 안나스는 자신의 '대제사장 왕조'를 세웠습니다.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실권을 행사하며 자기의 다섯 아들과 사위가 대제사장직을 돌아가며 맡게 했습니다. (이중 사위 가야바는 예수님의 처형을 주장한 장본인이고, 막내아들 아나누스는 나중에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를 처형한 장본인입니다.)

      제사장직은 대개 사두개인이 맡았습니다. 사두개인은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날 토요일에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은 이미 신학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화요일에 예수님은 성전의 상을 뒤엎음으로써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대제사장 하난(안나스) 가문에 채찍을 가하셨습니다. 우리는 대제사장 가야바가 왜 그렇게 확고히 예수님의 처형을 주장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전의 큰 건물을 보고 감탄하는 제자에게,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가 13:2)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다음 날 예수께서 저주한 '성전 산'의 상징인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것을 보고 베드로가 묻자, "하나님을 믿으라. [성전이 아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마가 11:23)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조금씩 이해가 됩니다. 왜 베드로가 물었는지.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님 꼭 이 길로 가서야 합니까!' '이 길 말고 다른 길이 있지 않습니까!'

      서기 33년 3월 31일 화요일, 드디어 반격이 시작됩니다. 마가에 의하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지 셋째 날,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총공세를 폅니다. 그들은 군대를 보내어 예수님을 체포하는 대신 먼저 그분의 신뢰도를 무너뜨려 대중과 분리시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네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가?" "형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 "부활 때 그중 누구의 아내가 되는가?" 그리고 "모든 계명 중에 제일가는 계명은 무엇인가?" 이 네 가지입니다. 이중 마지막 질문만 진짜 질문이고 나머지 셋은 정교한 덫이고 함정입니다. 주님은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 바리새인, 헤롯당원,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똘똘 뭉쳐 던지는 이 도전들을 다 물리치시고 질문한 자들의 자기모순과 위선을 폭로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체포되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서기 33년 4월 1일 수요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주일의 넷째 날, 급기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기]"(마가 14:1) 시작합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이날 수요일에는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아시고 그냥 베다니에 머무신 것 같습니다. 그날 저녁 주님은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십니다. 요즘엔 나병을 한센병이라 부르는데, 고대의 나병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나병이 아니라 피부 발진, 상처, 외관 손상 등을 포괄하는, 흉터가 남은 유전적 피부 질환을 가리킵니다. 이 질병에 걸리면 사회에서 추방되거나 공동체에서 제명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런 '나병환자' 집에서 식사하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얼마나 당시의 사회적, 종교적 경계를 쉽게 허무셨는지 보여줍니다. 그분은 나병환자에게 먼저 다가가셨고 그들을 친히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엄격히 금지된 일입니다. 죽음도 불사한 일입니다. 지금 도대체 주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신 겁니까! 주님은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왜 자꾸 그리고 가십니까! 쿼바디스 도미네!

      예수께서 식탁에 계실 때 한 여인이 다가와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그분에게 부었습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 여자를 비난했습니다. 차라리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게 더 낫다는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을 변호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한 12:8)라고 말씀하시며 그 여인이 영원히 기념될 일을 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사실 이 여인은 당시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엄격히 금지된 일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당시 여성은 '지각없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논쟁하고 토론하고 배우는 것은 남자들의 몫이었습니다. 여성들은 그 틈에서 요리를 해야 했습니다. 여성들은 권리도 거의 없었습니다. 남편의 부정(不貞)이 아니면 이혼을 청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반면에 남자들은 사실상 아무 이유로든 아내와 이혼할 수 있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주목할 점은 당시 종교인들이 '하나님은 결코 여성에게 말을 걸지 않으신다'라고 확신했다는 점입니다. 엘리에제르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전능자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제외하고는 어떤 여성에게도 말씀하신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나아가 여성은 '위험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랍비들은 여성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유대인의 랍비 문학 <미슈나>는 "만약 여자가 머리카락을 묶거나 틀어 올리지 않고 길거리에 나가 아무 남자와 이야기하면" 이혼 사유가 된다고 했습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이런 행동을 한 여인과 이혼하는 것은 남편의 종교적 의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기록한 향유 사건이 당시 얼마나 충격적인 반향을 일으켰을지 가늠하게 됩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누가 7:38) 그렇게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한 12:3) 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지정된 자리에서 이탈하고 경계를 넘었습니다. 여성은 남자와 함께 논쟁에 참여할 수 없기에, 식사하는 동안 조용히 시중을 들어야지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야기를 해야만 했습니다. 또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고, 듣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인이 이야기에 참여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유일한 길은 항아리를 깨뜨려 온 집을 향기로 진동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행동은 사려 깊거나 품위 있는 행동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로부터 침묵을 강요당한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여인은 말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언권(言權)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말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촉각과 후각의 언어가 되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소리 없는 아우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겁니다. 절규하고 있는 겁니다. 멀리 네팔에서 수입된 진귀한 나드 향유 전체를 깨뜨려 자신의 고통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제자들은 이 여인을 비난했습니다. 심하게 책망했습니다. 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인의 언어를 구사할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그 언어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습니다. 남에게 짓밟혀 본 사람은 압니다. 여인은 예수께서 어떤 형벌을 받게 되실지 알 수 있었습니다. 사회적, 종교적 금기를 깨뜨린 결과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높은 분들은 절대로 자기들의 질서와 이권에 도전하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억압을 경험했기에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 지 알았습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알았기에 아무 말 없이, 눈물로, 사랑으로, 향기로 그분의 마지막 여정을 축복했습니다. 그는 베드로처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리로 가시지 않으면 안 되겠냐고 막지 않았습니다. 메시아의 길을 알았기에 눈물로, 향기로 그의 길을 예비했습니다. 주님은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항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태 26:12)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마가 14:8)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이 가시는 길을 알고 그 길을 예비한 여인을 가리키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마가 14:9), 마태 26:13) 축복하셨습니다. 이 일이 예수님의 지상 마지막 일주일의 넷째 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다음 날, 서기 33년 4월 1일 목요일,
      주님은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게 하시고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알다시피 유대 도시들은 매우 불결했습니다.
      길을 걸을 때마다 오물과 먼지, 배설물과 쓰레기, 타고 남은 재와 썩은 음식물을 비껴갈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발을 씻는 것은 기본적으로 위생의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정결법 규정이 있었습니다.
      바로 성전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나 자기 발을 씻어야 하고 최소한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자유민은 누구도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지 않았습니다.
      이런 역할은 노예들이나 아내와 자녀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발을 씻기시려는 예수님에게 베드로가 그렇게나 놀랐던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여 주께서 [노예가 아니라!]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요한 13:6) 베드로는 충격으로 앞뒤가 안 맞는 소리를 웅얼거립니다. "주님, 아니... 세상에나!"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잘 이해했기에 충격으로 웅얼거립니다. 주님은 인간으로서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낮은 지위인 노예의 신분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 가장 천한 인간의 역할을 자임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당신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주님의 교회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초대교회가 배운 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가장 천대받는 사람들을 대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28)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로마 제묵에 사는 어떤 사람도 이 급진적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바울의 이 사상은 다름 아닌 예수님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이 없었다면 초대교회도 없고 지금 이 교회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은 유대의 관습에 따라 목요일 자정이나 다음 날 금요일 새벽 2시쯤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마치고 새벽 이른 시간에 제자들을 데리고 성 밖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달빛이 형형했습니다.
      보름달이었습니다.

      서기 33년 4월 3일 금요일,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주님은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꼭 그 길로 가셔야 하시겠습니까!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아시면서 왜 자꾸 그리로 가십니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한 12:24-25)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바꾼 '가장 길었던 한 주'를 주님이 가신 "Via Dolorosa"(십자가의 길)을 따라 함께 가시기 바랍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의 길을 함께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는 우리에게 오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네가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니 내가 다시 십자가에 매달리러 골고다 언덕으로 간다!'


      12-17-2024(화) 요한복음 13:34-3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새 계명(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A new command I give you: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so you must love one another.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By this all men will know that you are my disciples, if you love one another.

      엔톨렌 카이넨 디도미 휘민 히나 아가파테 알렐루스 카도스 에가페사 휘마스 히나 카이 휘메이스 아가파테 알렐루스
      εντολην καινην διδωμι υμιν ινα αγαπατε αλληλους καθως ηγαπησα υμας ινα και υμεις αγαπατε αλληλους  

      새 계명(New Command)이란 옛 계명(Old Command)에 대한 새로운 계명을 말합니다.
      옛 계명의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력(自力)으로 애급에서부터 탈출한 것이 아니라 전적(全的)인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후에는 다시는 애굽의 노예로 살아가지 않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이란 세상을 상징합니다.
      또한 애굽은 영적으로는 소돔과 같은 곳이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하셨습니다(계 11:8).

      하나님의 백성들이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열되었습니다.
      분열된 나라가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남유다왕국은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이때에도 극적으로 바벨론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잠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듯 하였으나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율법을 준수(遵守)할 만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언약을 계시하셨습니다.

      새 언약의 대상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열방의 사람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계명을 말합니다.
      새 계명(New Commandment)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 주신 계명입니다.
      '새 계명'을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언약"이라고 하였고 누가복음에서는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새 계명은 지켜야 할 계명이며 언약입니다.
      언약은 율법처럼 돌비에 새겨진 약속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약속입니다.
      믿음이란 내 안에 새겨진 약속을 확신하며 그 약속을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도 나의 삶의 현장에서 언약을 실천하는 믿음의 흔적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일에 성공하는 은총의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옛 계명 - 돌비 - 율법 - 행함, 의 <제사> / 천사, 모세 

      새 계명 - 마음 - 은혜 - 믿음, 의 <용서> / 예수


      고린도후서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사도행전 7: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야고보서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새 계명에 담긴 사랑의 원리

      새 언약 유월절을 지킴으로써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킬 수 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새 언약 유월절에 담긴 사랑의 원리를 깨달았을 때 실천할 수 있다. 예수님은 성도들이 새 언약 유월절을 통해 예수님의 살과 피를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이 되게 하셨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 고린도전서 10:16–17

      성도들이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이 되면 자기 몸이 된 형제자매를 미워할 수 없다. 또한 유월절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고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깨닫게 되는 예식이다. 타인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도 새 언약 유월절을 통해 자신을 살리기 위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한 몸이 된 형제자매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게 된다. 이것이 새 언약 유월절에 담긴 사랑의 원리다. 그래서 새 언약 유월절을 지킬 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도 준수할 수 있다.



      새 계명(A new command. 엔톨렌 카이넨. εντολην καινην)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새 계명"이란 말에 대하여 우리가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1. "새 계명"이란 명칭의 이유, 창조 질서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천하만민을 한 혈맥으로 지으셨다고 하였는데(행 17:26),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남들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될 근거를 성립시켰다.
      그러므로 구약에도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이 있다(레 19:18).
      구약의 계명도 사랑 중심의 것이다(롬 13:8-10).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은 독특한 동기들을 제공한다.

      종말관적 동기
      .
      그것은, "사랑하라"는 계명이면서도 구약의 예언적인 것이 성취된 종류이다.
      그것이야말로 종말관적인 것이다(요일 2:8).
      예수님의 보혈로 이루신 속죄를 믿는 자들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심 같이(34절 하반), 다른 신자들을 위하여 희생하며, 필요하면 그들을 위하여 죽을 처지에 있다.
      영원한 기업의 동기.
      같은 혈맥에 속한 자들 중에서(행 17:26)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마침내 영원히 나누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하여 구원 받은 형제들은 영원히 나누이지 않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한 자리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서로끼리 위하여 희생할 처지에 있다.

      2. 새 계명을 지키는 방법

      그것은 물론 위에 관설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34절 하반에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그는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시는 것으로써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것이 바로 13장의 제목이 되어 있으니, 곧바로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실이다.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지극한 사랑이라고, 1절은 말하고 있다.
      그가 그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겸손이지만(겸손도 사랑임 - 고전 13:4), 그가 그들의 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10-11).
      그는, 희생의 정신으로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대속의 희생은 될 수 없으나, 남들의 짐을 자신이 걸머지게 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그것은 큰 사랑이다(갈 6:2).
      우리가 이 진리를 이론으로 배유면서도 실제로 남들을 위해 희생할 줄은 모른다.
      우리가 남들에게 대하여 이렇게 무관심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가?
      내가 계명을 지켜야만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 나 자신이 머물게 됨을 모르기 때문임.
      요 15:10에 말하기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고 하였다.
      내가 남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일을 해 보지 않기 때문임.
      자식을 기르노라고 온갖 희생을 한 어머니는, 그 기른 자식을 잊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그 자식을 위하여 희생한다.
      그러나 어머니를 위하여 희생해 본 일이 없는 그 자식은, 어머니를 쉽게 잊어 버린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사랑하려면 먼저 그를 위한 희생으로 시작해야 된다.
      천국 운동의 필요성을 뜨겁게 느끼지 못한 까닭임.
      신자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마치, 양 몇 마리가 많은 이리들 가운데 있음과 같고, 몇 백만 군대에게 포위된 것과도 같다.
      이 세상엔 불신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가?
      우리는 그 세력을 복음으로 이겨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서로 시기하거나 험담하지 말고 서로 아끼고 도와 주어야 된다.
      신자가 영원한 나라를 기억하지 못한 까닭.
      그리스도께서도 그 백성을 그렇게 사랑하시게 된 동기가 그의 가실 영광의 나라를 생각하심에 있었다(1,3).
      32-34절의 문맥도 이 내용을 보여준다.
      곧, 그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영광(내세에 들어가심)을 받으시게 될 것을 염두에 두시고(32 절) 이 새 계명을 주셨다.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자는, 이 세상의 것은 그 무엇이든지 초개와 같이 생각하고 희생한다.
      한 번은, 구세군 사관들 109명이 아일란드의 황후(Empress of Ireland)란 배를 타고 가다가 파선되어 다 물에 빠졌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함께 빠진 자들의 구명대(救命袋) 없음을 보고 자기들의 것을 벗어 주면서, "나는 당신보다 잘 죽을 수 있다"라고 하면서 희생하였다.
      그들은 내세를 확신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죽기까지 사랑을 베풀었다.
      내가 남을 위하여 희생할 의용이 끝까지 생기지 않으면, 한 가지는 해야 됨. 그것은, 내가 남들을 위하여 죽기까지라도 희생할 책임감은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임감을 가진 자는 그대로 행치 못한 처지에도 극도의 겸손을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3.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신 목적. 예수님의 새 계명은 모세의 10계명을 폐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와 그의 사도들은, 모세의 10계명을 그대로 세워 나가셨다(마 22:37-40; 롬 13:8-10). 그는 진리이시니,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계시된 구약의 계명들을 폐지하실 리가 없다. 하나님의 계명은 선(善) 자체이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곧, 선은 피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적 의지이다. 종교와 도덕(선과 관련된 것)은, 서로 달라도 서로 독립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함께,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된 방면이다. 하나님의 의지 자체인 선의 표현 곧, 계명은 어느 시대으 것이든지 페지되지 않는다. 모세의 율법 중 유대인들만을 위한 제도들은 신약 시대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인류 전체를 위한 도덕적인 십계명은 폐지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십계명 중 제 4 계명에, 쉬라고 한 것은 보편적 도덕 요소이다. 쉬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을 위한 것이며, 또한 사람과 집승의 피곤과 쇠약을 막는 자비를 위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 계명은 창조 질서에 속한 선한 제도이다. 곧, 이것은 모세 이전에 온 인류를 위하여 제정된 것이었다. 다만 안식일을 지키는데 관계된 벌칠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므로 변동되었다. 구약 시대에 안식일을 범한 자를 죽인 것은, 신정 국가(神政國家)의 시대, 곧, 정교 일체(政敎一體) 새대에 속한 것이었다. 안식일과 날자 순서도 본질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신약 시대에 그 날자가 변한 것으로 보아서 알 수 있다. 구약 시대에는 제 7일(토요일)이었던 것이, 신약 시대에는 7일 중 첫날(주일)로 변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창조(創造)를 기념했으나, 기독자는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을 기념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여기 이른바,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인도주의(人道主義)에 속하는 사랑이 아니고 주님을 믿으며 사랑하는 일의 열매이다.
      모든 사람들(세상)이 이 사랑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를 실별한다는 것은,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한 말씀이다.
      이것은,
      1. 예수님의 제자된 표가 사랑이라는 말과 같고,
      2. 또한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불신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게 된다는 뜻도 있다. 17:21-23 참조



      요한일서 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Dear friends, I am not writing you a new command but an old one, which you have had since the beginning. This old command is the message you have heard.

      아가페토이 우크 엔톨렌 카이넨 그라포 휘민 알 엔톨렌 팔라이안 헨 에이케테 앞 아르케스 헤 엔톨레 헤 팔라이아 에스틴 호 로고스 혼 에쿠사테.
      αδελφοι ουκ εντολην καινην γραφω υμιν αλλ εντολην παλαιαν ην ειχετε απ αρχης η εντολη η παλαια εστιν ο λογος ον ηκουσατε απ αρχης

      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요한이 수신자들을 부를 때 즐겨 사용하는 호칭으로 새로은 단락이 시작될 때 자주 나타난다. 요한은 이 호칭을 사용하여 두 가지를 암시하고 있다. (1) 하나님 안에 내주하여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삶에는 사랑이 드러나야 함을 암시한다. (2)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고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증거로 사랑을 제시함으로써 도덕폐기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공격하고자 한다.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 요한은 상호 보완적인 본문의 두 개의 절을 이용해서 이제부터 언급할 '사랑의 계명'이 수신자들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라 잘 알려진 계명임을 밝히고 있다.
      즉 '새 계명...이 아니라'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은 동일한 내용을 가리킨다.
      여기서 '처음부터 가진'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롬 2:14; 13:8-10) 동시에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사하는 자들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엡 5:2; 약 2:8; 벧전 2:17).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
      본문에서 '계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헤 안토레'(η εντολη)는 단수이다.
      '엔토레'가 단수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옛 계명이 의미하는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완성한 계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십계명을 하나의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고 계신다(마 22:37-39).
      한편 '들은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사테'(ηκουσατε)는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는 사랑의 계명이 이미 선포되었으며 수신자들이 사랑의 계명에 대해 과거에 들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사랑의 계명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요 13:34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임을 암시한다.
      요한의 수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부터 예수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이며 따라서 사랑의 계명은 수신자들에게 결코 생소하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부터 알고 있었던 익숙한 계명이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 (19절) : 약속된 분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가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천사들이 전해준 것을 사람이 받아 공포한 것이다. 본문에서 '약속하신 자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의 차이점 (20절) 율법은 중재인이 필요하므로 두 당사자 (율법에 어긋나는지 판단하는 사람 & 판단받는 사람) 가 있어야 했지만, 약속을 하는 데는 하나님 한 분이면 된다.

      갈라디아서 3장 19절-29절 큐티: 율법을 주신 이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 (19절) :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디모데전서 1:9-10
      알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 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사도행전 7: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약속된 분(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가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천사들이 전해준 것을 사람이 받아 공포한 것이다.
      본문에서 '약속하신 자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의 차이점 (20절)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율법은 중재인이 필요하므로 두 당사자 (율법에 어긋나는지 판단하는 사람 & 판단받는 사람) 가 있어야 했지만, 약속을 하는 데는 하나님 한 분이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님 (21절)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하나님께서 만약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율법을 주셨다면, 우리가 '의인'이 되는 일이 율법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21절 뒷부분)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을 살릴 수 없는 율법'을 주셨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율법을 주셨다면'의 예시로 무엇을 들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예루살렘에 있는 산의 정상에서 절을 세 번 하면 의인으로 인정받고 구원받는다 이런 법을 정해두셨다면?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그 산의 정상에 살아있는 동안 한번은 꼭 가서 절을 세 번 하고,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레위기 규정을 보면 알 수 있듯...
      도저히 우리가 지킬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다양하고 엄격한 율법들...
      그 율법을 다 지킨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로 인해 모든 세상 사람들은 이 율법을 통해 '죄의 포로'가 되었다.

      율법을 기준으로 해서 '죄'인지 죄가 아닌지가 결정되는데,
      우리가 이걸 다 지킬 수 없으니 무조건 우린 다 죽은목숨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만드셨는가?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이 주어지도록 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22절)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믿음의 때'가 도래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의 때가 오기 전까지, 모든 인류는 율법으로 인해 죄의 포로가 되어 갇혀 있었다. (23절)

      여기에 율법의 역할이 있다. 

      율법의 역할 : 우리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가정교사(초등교사) 역할을 해서, 

      우리가 믿음으로 (다른 무언가를 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

      왜 율법의 역할이 초등교사 / 가정교사 라고 하였을까? (24절)

      그것은 바로, 초등교사가 하는 일을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초등학교 선생님은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하나 하나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초등학교 때 '바른생활'이라는 교과서 과목이 있었다.

      율법은 바로,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생활'인지를 가르쳐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율법을 초등교사에 비유한 것 같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죄를 짓도록 설계되어 있는 우리는

      엄청나게 두꺼운 바른생활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다.

      이건 마치 바른생활 교과서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무려 5000개 정도의 시험문제를 주관식으로 내서, 

      단 한개도 틀리지 않고 100점을 받아야만 학교를 졸업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이런 방법만 있다면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대안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교장선생님이 그 시험을 이미 치루었고, 

      그분께 이미 치루었던 그 과제 완성의 효력을 내게도 적용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죄 없이 사셨고, (율법의 시험을 통과하심)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형벌은 받으셨다.

      우리가 할 일은, 나를 대신해서 죄값을 치루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자녀 삼아달라고 요청하는 것 뿐이다. 

      예수님이 오셨고, 믿음의 시대(24절)가 왔으므로, 이제는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26절)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사람이 되었다. (27절)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모든 믿는 사람들은 다 하나이며, 국적과 신분, 성별을 막론하고 차별이 없다. (28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이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를 받을 상속자들이다. (29절)

      적용 -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 상속자로서의 정체성 발견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왜 주셨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뭐가 옳은지 그른지 알긴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고, 

      결국 못지키라고 주신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선택지가 결국 예수님 한 분밖에 없도록... 

      감사한 것은, 대안적 방법이 '믿음'으로, 단순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하나님의 대안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오히려 의심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지 '믿음'만을 요구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적용된다.

      만약 내가 상상해본 대로, 산 정상에 올라 절을 세번 해야 했다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뜻을 좇아 사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산에 오르는 것을 시도했을지는 모르지만, 모두에게 온전히 열려있는 방법은 아니게 된다. 몸이 불편한 사람/장애인/ 그 산으로부터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 등... 






      새 계명과 옛 계명(New command & Old command)


      새 계명 (New Commandment)이란 예수 그리스도최후의 만찬을 마친 후에 제자들에게 교훈으로 준 "서로 사랑하라"(love one another)로 기존의 구약의 중요 계명을 넘어선 기독교인에게 새로운 명령이며 새로운 계명이다.[1] 신약성경의 요한복음서(13장)에 등장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실천해야 하는 사항이다.

      요한복음서에서 가룟 유다가 배신하려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예수가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제자들에게 말한 전언이다. 자신의 제자들을 어린 자녀로 묘사하며, 어린 자녀가 아니가 진정한 제자가 되려면 실천해야 할 사안으로 '서로 사랑하라'(아가페의 사랑)을 전한다. 서로에게 아가페 개념의 사랑을 해야 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가페 사랑을 실천해서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새 계명에 대하여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새 계명은 인간의 반역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렘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새 계명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주어졌다.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새 계명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하나님께로 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히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오직 새 계명을 통하여 죄에 대한 용서가 있다. 히 9:14-15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옛 계명 아래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하기로 약속하였는가? 출 24: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새 계명 아래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기로 약속하셨는가? 히 8:10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12-16-2024(월) 요한복음 13:31-3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31절)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When he was gone, Jesus said, "Now is the Son of Man glorified and God is glorified in him.

      위기(危機) = 위험(危險) + 기회(機會)

      인자(人子. 호 휘오스.  ο υιος.  the son)의 영광이란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합니다.
      어떻게 십자가의 죽으심이 영광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늘의 지혜와 믿음이 없으면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처참한 형벌이며 고통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되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늘의 지혜를 온 몸에 채운 후에 밤을 새워 그 십자가를 짊어지시기 위한 믿음의 기도를 마치셨기 때문에 이제는 고통이 아니라 영광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간암 말기로 사경을 헤맬 때 아버지의 간을 내어줌으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간이식을 받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아버지의 간을 몸에 담은 아들은 죽음의 고비를 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몸에는 간을 떼어내는 고통의 흔적이 뚜렷하지만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아들을 향한 사랑의 흔적이 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영광을 얻게 될 때 하나님과 예수님을 이미 일체가 되셨기에 인자가 받은 영광은 곧 아버지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라는 말씀에서 "인자"란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영광을 얻었다"는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합니다.
      첫째는 부활 승천
      둘째는 십자가의 죽으심

      두 가지 해석 중에서 문맥상 바람직한 해석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저가(유다) 나간 후에 곧 이어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나가서 사탄의 계획대로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겨야만 십자가 사건이 전개될 것입니다.
      유다가 나간 것은 곧 이어 예수님에게 고난이 닥칠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 다음 구절에서 "영광을 주시리니"라는 말씀은 "미래사(未來詞)"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신 후의 일(부활, 승천)을 의미한 것입니다.
      따라서 "영광을 얻었고"란 과거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실 고난을 가리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받으실 고난을 영광으로 인식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가장 비참한 죽음의 십자가로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메시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그 십자가로 인하여 모든 사람을 죄 가운데서 구속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이 해결할 수 없었던 구속의 은혜를 십자가로 해결할 뿐만 아니라 완성할 수 있는 사랑의 대로를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선택하였기에 오늘도 험하고 어그러진 세상에서 꿋꿋하게 믿음으로 그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라는 말씀에서 "인자를 인하여"라는 말은 "인자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과 일체이심으로 아들이 영광을 얻으심에 따라서 그 자신도 영광을 얻으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흉악한 죄인를 처형하는 사형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은 영광이 아니라 처형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은 처형이 아니라 구속을 위한 완성이었기에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드러난 사랑의 완성에 의한 것입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죽어갈 때 대신 아플 수 없고 죽을 수 없어 몸부림을 치며 아들을 위하여 울부짖을 때 그 부모의 모습을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은 모두 눈시울이 뜨거워 집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향한 최고의 사랑의 몸부림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형수를 처형하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고통을 당하실 때 그 고통으로 인하여 내가 생명을 얻었고 그 생명을 힘입어 오늘도 이렇게 살아서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어 그 사랑 앞에 감격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행위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영광 즉 십자가의 영광을 을 경험함으로써 영광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영광으로 자신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만이 신자됨의 행복이고 정체성입니다.

      하나님 영광으로 연합되는 구원의 절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과 공의, 능력과 지혜가 들어 있는 하나님 최고의 영광입니다.
      천지창조 속의 능력과 지혜, 홍해의 갈라짐, 만나 등 구약의 표적과 기적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있지만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는 데 실패했습니다.
      우리의 죄는 그만큼 깊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하나님과 연합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표적 중의 표적이고 영광 중의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기도 후 주님은 십자가로 향하십니다. 십자가만이 그가 기도하신 대로 우리와 연합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최고의 사랑과 능력이 십자가라면 성도가 지상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영광된 삶과 복된 삶도 십자가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랑의 자기부인’입니다.
      하나님 영광을 경험함으로써 오는 자기 부인입니다.

      선교란 운동이나 행정,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탁월한 영광을 맛보았을 때 마땅히 열방을 향해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 그 영광의 탁월함을 전하여 그들과 연합하려고 하는 경향성입니다. 한국교회는 성공과 부유, 권세, 높아짐 등으로 십자가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세속의 영광으로 배부르고자 하나 영혼의 기갈 속에 그리스도인들은 살고 있습니다. 십자가로부터 오는 하나님 영광 앞에 배부르고 십자가의 영광을 그리스도인의 최고 미덕으로 여기는 삶이 회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같은 죄인과 연합하시려는 그리스도의 요한복음 17장 기도는 부활하신 주님의 중보기도 속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가 있기에 한국교회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When he was gone, Jesus said, "Now is the Son of Man glorified and God is glorified in him.


      31.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1. When he was gone, Jesus said, "Now is the Son of Man glorified and God is glorified in him.
      32. If God is glorified in him, God will glorify the Son in himself, and will glorify him at once.
      33. "My children, I will be with you only a little longer. You will look for me, and just as I told the Jews, so I tell you now: Where I am going, you cannot come.

      가룟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님께서는 영광을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예수님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다고 합니다.

      가룟 유다가 나간 것은 사탄이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주었고 그 생각을 실천하기 위하여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 일어나 나간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팔아넘기려는 의도를 아시면서도 그 의도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도 아시면서도 영광을 얻었다고 하신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의 배신 행위는 더구나 가장 가깝게 지내던 사람의 배신 행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배신행위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게 된다는 것은 역설적인 생각입니다.



      인자(人子. 호 휘오스.  ο υιος.  the son)의 영광이란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합니다.
      어떻게 십자가의 죽으심이 영광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늘의 지혜와 믿음이 없으면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처참한 형벌이며 고통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되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늘의 지혜를 온 몸에 채운 후에 밤을 새워 그 십자가를 짊어지시기 위한 믿음의 기도를 마치셨기 때문에 이제는 고통이 아니라 영광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간암 말기로 사경을 헤맬 때 아버지의 간을 내어줌으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간이식을 받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아버지의 간을 몸에 담은 아들은 죽음의 고비를 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몸에는 간을 떼어내는 고통의 흔적이 뚜렷하지만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아들을 향한 사랑의 흔적이 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영광을 얻게 될 때 하나님과 예수님을 이미 일체가 되셨기에 인자가 받은 영광은 곧 아버지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라는 말씀에서 "인자"란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영광을 얻었다"는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합니다.
      첫째는 부활 승천
      둘째는 십자가의 죽으심

      두 가지 해석 중에서 문맥상 바람직한 해석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저가(유다) 나간 후에 곧 이어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나가서 사탄의 계획대로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겨야만 십자가 사건이 전개될 것입니다.
      유다가 나간 것은 곧 이어 예수님에게 고난이 닥칠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 다음 구절에서 "영광을 주시리니"라는 말씀은 "미래사(未來詞)"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신 후의 일(부활, 승천)을 의미한 것입니다.
      따라서 "영광을 얻었고"란 과거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실 고난을 가리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받으실 고난을 영광으로 인식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가장 비참한 죽음의 십자가로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메시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그 십자가로 인하여 모든 사람을 죄 가운데서 구속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이 해결할 수 없었던 구속의 은혜를 십자가로 해결할 뿐만 아니라 완성할 수 있는 사랑의 대로를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선택하였기에 오늘도 험하고 어그러진 세상에서 꿋꿋하게 믿음으로 그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라는 말씀에서 "인자를 인하여"라는 말은 "인자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과 일체이심으로 아들이 영광을 얻으심에 따라서 그 자신도 영광을 얻으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흉악한 죄인를 처형하는 사형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은 영광이 아니라 처형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은 처형이 아니라 구속을 위한 완성이었기에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드러난 사랑의 완성에 의한 것입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죽어갈 때 대신 아플 수 없고 죽을 수 없어 몸부림을 치며 아들을 위하여 울부짖을 때 그 부모의 모습을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은 모두 눈시울이 뜨거워 집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향한 최고의 사랑의 몸부림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형수를 처형하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고통을 당하실 때 그 고통으로 인하여 내가 생명을 얻었고 그 생명을 힘입어 오늘도 이렇게 살아서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어 그 사랑 앞에 감격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행위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영광 즉 십자가의 영광을 을 경험함으로써 영광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영광으로 자신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만이 신자됨의 행복이고 정체성입니다.

      하나님 영광으로 연합되는 구원의 절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과 공의, 능력과 지혜가 들어 있는 하나님 최고의 영광입니다.
      천지창조 속의 능력과 지혜, 홍해의 갈라짐, 만나 등 구약의 표적과 기적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있지만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는 데 실패했습니다.
      우리의 죄는 그만큼 깊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하나님과 연합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표적 중의 표적이고 영광 중의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기도 후 주님은 십자가로 향하십니다.
      십자가만이 그가 기도하신 대로 우리와 연합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최고의 사랑과 능력이 십자가라면 성도가 지상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영광된 삶과 복된 삶도 십자가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랑의 자기부인’입니다.
      하나님 영광을 경험함으로써 오는 자기 부인입니다.

      선교란 운동이나 행정,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탁월한 영광을 맛보았을 때 마땅히 열방을 향해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 그 영광의 탁월함을 전하여 그들과 연합하려고 하는 경향성입니다.
      한국교회는 성공과 부유, 권세, 높아짐 등으로 십자가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세속의 영광으로 배부르고자 하나 영혼의 기갈 속에 그리스도인들은 살고 있습니다.
      십자가로부터 오는 하나님 영광 앞에 배부르고 십자가의 영광을 그리스도인의 최고 미덕으로 여기는 삶이 회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같은 죄인과 연합하시려는 그리스도의 요한복음 17장 기도는 부활하신 주님의 중보기도 속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가 있기에 한국교회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지도자가 갖춰야 할 4가지 덕목

      ​-  아우렐리우스의 지도자론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 혹은 덕목(德目)으로 무엇이 중요한가?
      로마제국을 통치한 현군(賢君)이며 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가 쓴 명상록에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네 가지로 소개하였다. 

      1. 지혜(wisdom)
      2. 정의감(justice)
      3. 강인성(fortitude)
      4. 절제력(temperance)

      당대의 대철학자였으며 직접 군대를 지휘한 사령관이었고, 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아우렐리우스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지도자였다.
      따라서 그가 꼽은 지도자의 덕목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1. 지혜(wisdom) 智慧(슬기 지, 슬기로울 혜), 知慧(알 지, 슬기로울 혜)

      지도자는 조직의 안정과 발전을 위하여 미래를 기획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서 지적(知的)인 능력,즉 '지혜'를 필요로 할 것이 분명하다.
      지도자는 조직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판단과 조직의 앞날을 위한 필요를 결합시켜서 최적의사결정(optimal decision making)을 내리는 데 필요한 지적능력을 필요로 할 것이다.

      2. 정의감(justice) 正義感(바를 정, 옳을 의, 느낄 감)

      조직을 다스리는 지도자는 옳고(正義), 그름(不義)을 가려서 옳은 것을 택하고 그른 것을 잘라낼 수 있는 도덕적 판단력과 실천력이 필요하다.
      조직 지도자의 이러한 능력을 아우렐리우스는 '정의감(justice)'이라고 부른 것 같다.
      조직의 지도자가 정의롭지 못하면 그 조직은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어 내부로부터 스스로 붕괴될 수 있다.

      ​도전(挑戰,challenge)과 응전(應戰,response)의 개념으로 역사 속의 흥망을 설명하는 토인비는 조직을 위태롭게 하는 도전을
      1. 자연으로부터의 도전
      2. 외부세력으로부터의 도전
      3. 조직내부로부터의 도전
      이와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토인비는 이들 셋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조직내부로부터의 도전이라고 규정하면서 로마제국이

      멸망한 근본적인 원인도 (외부세력의 침공 때문이 아니라)로마제국 내부로부터의 분열과 부패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타락하기 쉽고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것이 인간의 속성인 이상, 조직 지도자는 조직의 가장 무서운 적, 내부로부터의 붕괴를 막기 위해 정의의 칼을 휘둘러야 할 것이다.
      주역(周易)의 오행(五行)사상에 의하면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의(義)는 금(金)이고, 금은 칼, 가위, 도끼 등 생명을 자르는 쇠붙이를 상징한다.
      한편 5행(水火木金土)중 생명을 가진 것은 목(木)이고 따라서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상, 즉 인(仁)은 목(木)이다.
      따라서(잘라내야 할)생명을 자르는 의(義)는 생명존중 사상인 인(仁)과 상치될 수 밖에 없고 이런 의미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일은 고뇌(苦惱)를 수반한다.

      ​서양문화에서도 정의의 여신은 왼손에는(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한) 저울을, 그리고 오른손에는 생명을 자르기 위한 칼을 들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있다.

      이처럼 정의에 대한 사상은 동서양이 본질적으로 같다. 서양의 경제평론가들은 동아시아의 경제위기가 부정부패에서 왔다고 평함으로써 지도자들의 정의실천력이 빈곤함을 지적했다.

      3. 강인성(fortitude) 強靭性(강할 강, 질길 인, 성품 성)

      랜덤하우스 사전은 '강인성'을 어려움, 역경, 위험 등을 극복하기 위한 정신적(mental), 정서적(emotional)인 힘(strength)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에서 백제의 계백(階伯)장군은 자기 가족 모두의 목을 친 후 나당(羅唐)연합군을 맞으러 나갔다.
      그의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 주는 역사의 한 대목이다.
      그러나 계백은 인간의 심리세계를 이해하는 지혜(wisdom)면에서는 부족함을 보였다.

      신라의 어린 화랑 관창(官倉)이 단신으로 백제 진영을 계속 침범하자, 그의 목을 친 후 그것을 말에 메달아 신라 진영으로 돌려보내는 실수를 범했다.
      관창의 목을 본 신라군은 살기등등해져 백제군을 향해 돌진해왔고 백제군은 결국 최후를 맞았다.
      우리 민족이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라는 누명을 벗고 세계를 놀라게 하는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도 우리의 강인성 덕이었다.
      그러나 소위 압구정동 세대로 상징되는 우리의 차세대들이 과거 세대와 같은 강인성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4. 절제력(temperance) 節制力(마디 절, 절제할 제, 힘 력)

      랜덤하우스 사전에 의하면 '절제력'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여 균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다.
      지혜, 정의감, 강인성이 남을 다스리기 위한 향외적(向外的) 능력이라면 절제력은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향내적(向內的) 능력인 것이다.

      ​지도자가 도덕적, 정신적 차원에서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조직 구성원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하여 결국 통솔력을 잃고 말 것이다.지도자가 절제력을 발휘해야 할 주요영역의 하나로 검소한 생활을 들 수 있다.
      아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고(故) 호치민(胡志明)대통령을 들 수 있다.
      그가 대통령으로서 기거했던 주택은 방 2칸 짜리 10평 정도의 허술한 건물로 이 집은 지금(하노이 시의)관광명소가 되어 있다.
      이러한 지도자에 대한 국민의 존경과 사랑이 가난한 나라 베트남(Vietnam)이 세계 최강국 미국과 싸워서 이기게 만든 힘이었을 것이다.

      ​* 통찰력(洞察力) 사물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 /  골 동, 살필 찰, 힘 력 - insight
      - 영력(靈力)
      spiritual power 

      최고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질과 덕목

      동양에서는 최고지도자의 덕목을 다루는 분야를 "제왕학(帝王學)"이라 하였다.
      서점에 가면 지금도 제왕학이란 제목의 책이 서너 종류는 서가에 꽂혀 있다.
      제왕학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책을 들자면 당태종이 쓴 '정관정요'가 있고,
      조선의 태조가 남긴 '경국대전'이 있다.
      서양에서는 제왕학에 해당되는 분야를 대통령학이라 부른다.
      물론 대통령이 갖추어야 할 자질과 덕목, 능력 등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대통령에 한하여서만이 아니라 모든 최고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전체를 포함한다.
      미국 대통령학의 대표格인 한 학자가 대통령과 최고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질과 덕목을 다섯 가지로 손꼽았다.

      ​첫째는 건강(健康) 
      이 점은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은 부분이라 하겠다.
      최고지도자가 위기의 시기에 지도력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건강과 체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건강과 체력을 관리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고도로 절제된 상태에서 건강을 관리하지 않으면, 지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둘째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
      비전이란 나라나 기업이나 교회에 속한 구성원들이 함께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미래의 목표이다.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뜻을 모으고 힘을 모으고 정성을 하나로 모아 나가야 할 공동의 목표이다.
      특별히 난세(亂世)의 지도자들은 비전을 제시하는 능력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지도자는 공동의 목표를 분명히 제시하여 그 목표를 달성함에 모든 자원과 역량을 하나로 모아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셋째는 설득력(說得力)

      ​아무리 고상한 비전도 국민들에게 설득할 수 없으면 허사가 된다.
      좋은 목표임에도 국민들에게 제때에 효과적으로 설득하지 못하여, 국론이 분열되고 소모적인 정쟁에 휩쓸려 국력을 낭비하고 마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나 자주보아왔다.
      그러기에 민주주의 국가와 사회에서 설득력은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에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설득력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피알(PR)능력이다.
      피알이란 무엇인가?
      "피가 나도록 알리는 것"
      "피할 것은 피하로 알릴 것은 알리는 것"
      지금은 피알시대이다.
      피알하는 능력이 없이는 정치도 기업도 심지어 목회까지도 지도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렵다.

      ​네번째는 도덕적 일관성(道德的 一貫性)
      도덕적 일관성을 영어로는 Moral Integrity로 표현한다.
      요즘 같이 도덕성이 허물어져 가는 시대에 지도자가 될 사람은 반드시 도덕적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
      도덕적 일관성을 한마디로 쉽게 표현하자면 정직함이요, 본질을 추구하는 순수함이다.
      정직함과 순수함이 없는 사람이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그 공동체는 불신과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어떤 사람이든 실수는 하게 마련이고, 弱点도  역시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수는 언제나 스스로 인정하고 다시 시작하면 되지만, 정직성과 순수함을 잃고 술수나 권모를 사용하게 되면 그 병폐는 마치 독가스처럼 조직 전체에 스며들어 조직을 병들게 한다.
      나이 들어가면서 실감케 되는 것이 깨끗하게 사는 것이 힘이요, 축복이라는 점이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최고지도자들의 도덕성이 높아진다.
      선진사회에서는 일관된 도덕성을 요구하는 기준이 높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하고 도덕적 일관성을 지켜나가게 된다.

      다섯째는 열정(熱情)
      열정 혹은 정열은 영어로는 Passion이다.
      열정 있는 사람이 일을 성취시킨다.
      사람들이 지닌 능력은 비슷비슷하다.
      그런데 어디에서 달라지는가?
      열정, Passion에서 판가름이 난다.
      열정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지도자가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가 결정된다.
      그 열정은 인간에 대한 열정이요, 비전을 이루려는 열정이요,  사람을 돕고자 하는 열정이다.
      그런 열정을 지닌 사람이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열정이 사람을 감동시키고, 따르는 者들을 모이게 하고, 모인 무리가 大業을 성취하게 한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쓴 <역사철학>이라는 名著가 있다.
      그 책의 말미에 이런 구절이 있다.
      著者인 헤겔이 인류의 길고 긴 역사를 살펴볼 때에 역사를 이끌고 변화시킨 인물은 바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었다고 하였다.
      모름지기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善한 일을 이루겠다는 열정을 품는 데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 판단력(判斷力)과 실천력(實踐力)
      건전한 판단력과 과감한 실천력은 지도자가 지녀야 할 덕목의 필수 조건입니다.

      어떤 지도자들은 판단력은 뛰어난데 실천력이 떨어집니다.
      반면에 어떤 지도자들은 실천력은 탁월한데 판단력이 흐려서 사태를 그르칩니다.
      판단력과 실천력 양면을 갖춘 사람이 지도자의 자리에 올라야 합니다.

      * 자신감을 기르는 다섯 가지 방법​
      - 나폴레옹 힐

      1. 나에게는 훌륭한 인생을 구축할 능력이 있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중도에서 그만두지 않는다.

      ​2. 무엇이든지 내가 마음속으로 강렬히 원하는 것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매일 30분 이상씩 성취한 모습을 상상한다.

      ​3. 나는 자기 암시의 위대한 힘을 믿고 있다.
          그래서 매일 10분간 정신을 통일하여 자신감을 기르기 위한 '자기 암시'를 건다.

      ​4. 나는 인생의 목표를 명확하게 종이에 쓴다.
          다음은 한 걸음 한 걸음 자신감을 가지고, 전진해 가는 것이다.

      ​5. 정도(正道)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는, 富도 지위도 결코 오래 가지 않는다.
          그래서 이기적이거나 비열한 방법으로는 성공하지 않겠다.

      리더가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 열 가지

       

       

      ① 덕목 1 : 성실

       

      성실이라고 답한 사람들은 이것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도 중요하다고 답했다.
      이 항목에 포함된 답변으로는 정직, 신의, 도덕, 공평, 솔직, 성실, 믿음 등이 있었다.
      모두 지도자들이 직접 한 말과 행동에 관련된 결과라고 하겠다.

       

       

      ② 덕목 2 : 비전

       

      좋은 리더라면 조직에 대한 비전이 있어야 하고, 그 비전을 명확하게 전달해서
      조직원들의 행동을 유발해야 한다.

      비전은 리더십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 중 하나다.
      물론 비전만으로는 사람이나 프로젝트를 관리할 수 없지만, 진정한 리더십은
      사람들이 그 비전을 ‘볼’수 있게 해 조직원들이 그 방향으로 따라갈 수 있게 만든다.
      리더가 되고 싶은 사람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③ 덕목 3 : 듣기 (경청)

       

      리더가 남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도 포함되어 있다.
      리더는 접근하기 쉬워야 하고, 다른 제안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마음이 열려 있고, 융통성이 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피드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④ 덕목 4 : 피드백 제공

       

      칭찬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적절한 칭찬을 해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을 잘했을 때 사람들 앞에서 칭찬을 해 주는 것 등 말이다. 긍정적인 피드백을 준다거나 직원의 공로를 인정하는 것도 이 항목에 포함되었다.

       

       

      ⑤ 덕목 5 : 정서적인 현명함

       

      정서적으로 현명하다는 것은 공감한다거나 동정하는 것, 사람들을 잘 대하고 인간 대 인간으로 교감을 나누는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처신하는지도 크게 작용한다.

       

       

      ⑥ 덕목 6 : 명확함

       

      사람들은 당신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명확하게 전달하고, 또 설득시키는지 예의 주시한다. 만일 그 생각이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다면, 조직원들은 리더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⑦ 덕목 7 : 지식과 지혜

       

      진정한 지도자라면 해당 분야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더 나가가서 관련 분야를 망라하는 지혜도 갖추어야 한다.

       

       

      ⑧ 덕목 8 : 관리 능력

       

      리더들은 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대리인을 설정하거나 금전적, 인적 자원을 배분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꼽았다. 직원들의 사기를 높여서 직원 스스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 다시 말해서 조직원들을 고무 시킬 수 있는 능력

       

       

      ⑨ 덕목 9 : 일관성

       

      진정한 리더들은 자신이 하는 말을 그대로 실천한다. 자신이 믿는 바를 실행에 옮기며, 조직원들은 이를 주시한다. 리더들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해 한 단계씩 전진한다. 리더들은 사람들이 나태해지지 않게 한다. 그들은 일을 어떻게 시작했느냐 하는 데만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일을 어떻게 진행하느냐 하는데도 집중한다.

       

       

      ⑩ 덕목 10 : 겸손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듯이, 리더들은 역시 마찬가지다. 진정한 리더일 수록 겸손하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배우려고 한다. 리더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도 알고 남의 조언을 받아들일 줄도 안다. 또 그들은 적절한 위험을 감수하려고 한다. 일이 잘못되었을 때 남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며, 그것에 따른 대가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설문조사를 통해 밝혀진 내용을 살펴보면, 리더들은 남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 그리고 존경받기 위해서 여러 가지 자질을 보여 주어야 한다. 말이나 행동을 통해 이런 자질들을 보여주는 것은 그 사람의 직책이 무엇이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사람들은 성실성비전지혜를 갖춘 리더를 바랐다. 그들은 현실적이고 자신과 조직에 솔직한 진정한 리더들을 찾고 있었다.

       

       

       

       

       

       

       

      CEO의 성공10훈(十訓)

       

       



       

      갈수록 치열해지는 기업환경 속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갖춘 기업 경영자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와 관련, 이코노미스트지는 성공적인 기업 경영자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덕목 10가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첫째, 도덕성이다.
      만약 기업 총수의 도덕적 기준이 낮다면 기업 전체의 도덕성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대다수 사람들은 도덕성이 결여된 기업에서 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재 유치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둘째, 과감성이다.
      가끔씩 원치않는 의사결정을 과감하게 내릴 수 있는 역량을 갖출 필요가 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해결해야 하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때는 경영자의 담력이 필요하다. 남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적으로 만드는 위험을 감당할 수 없거나 의사결정을 위해서는 꼭 명 확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예 기업 경영자가 되기를 포기해야 한다.


      셋째, 선별능력이다.
      어려운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내리기 위해서는 문제의 핵심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기업 경영자는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고 꼭 필요한 것만 추려내는 선별능력을 갖춰야 한다.


      넷째, 야망이다.
      기업 경영자는 야망을 가져야 한다. 이기주의적인 개인적 야망을 넘어서 후대까지 영속될 수 있는 기업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최고를 지향하는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다섯째, 의사소통이다.
      기업 경영자는 효과적인 의사소통자가 돼야 한다. 언론 애널리스트 주 주 등 외부 입김이 거세지면서 이 같은 소통능력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 기업 비전을 효과적으로 제시해 직원들에게 일하고자 하는 동기를 설득력 있 게 불어넣어 주는 것도 중요하다.


      여섯째, 판단력이다.
      누가 어떤 자리에서 최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 판단하는 것도 리더십 요건이다.


      일곱째, 전수능력이다.
      부하직원의 재능을 살려주는 것도 기업 경영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다. 뛰어난 리더는 특정인의 재능이 어디에 가장 적합하게 쓰일 수 있을지 파악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노하우를 부하직원들에게 전수하는 데 적극적이어야 한다 .


      여덟째, 자신감이다.
      기업 경영자는 자신감이 충만해야 한다. 자신있는 리더는 자신의 약점 을 인정하고 외부의 도움을 떳떳하게 받는다. 부하직원들에게조차 질투심을 느 끼는 지도자는 부하직원의 충성심을 유발할 수 없다.


      아홉째, 적응력이다.
      적응력도 중요하다. 시장변화를 감지하는 것과 신속하게 종전과 완전히 다른 접근방식을 택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열번째, 자신만의 매력이다.
      리더는 부하직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자신만의 매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리더가 가져야 할 7가지 마음가짐

       

      1. 원리, 원칙을 중시한다.
      2. 나쁜 정보를 숨기지 않는다.
      3. 민첩하게 행동한다.
      4. 회의는 최소한으로 한다.
      5. 스스로 일을 만들어낸다.
      6. 상벌을 규정대로 분명하게 한다.
      7. 파벌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현장의 리더가 갖춰야 할 5가지 덕목

      <회사로 말하면 PM과 같은 존재>

       

       

      1. 지혜와 실전 경험을 마탕으로 하는 실력 => 대안제시능력 중요

      산전수전 ,택(늪)전 ,평지의 육전 등을 다 격어본 장수만이 리더로서 실력이 있다할 수 있다. 그만큼 실무를 해보지 않고 떠드는 리더는 실력이 없다는 뜻이다.


      2. 소신

      실력으로 다져지면 자신만의 판단과 관점이 생겨나고 소신이 있어야 한다. 특히 싸움에서 물러날때는 후퇴해서 조직을 보호할 줄도 알아야 한다. 백전백승을 하겠다는 자세는 자신의 군대를 모두 죽이겠다는 자세라고 한다. 백전백태(안전)하겠다는 자세가 필요


      3. 인격

      인간적으로 끌려야 부하들이 따라온다.


      4. 용기


      5. 엄격함


      제갈공명이 자신의 오른팔인 마속을 울면서 칠 수 있었던 공과 사를 구분하는 엄격함이 필요.
      [읍참마속(

       

       

       

       

       

       

      경영자로서 갖추어야 할 윤리덕목

       

      “Virtue is own reward!”

       

      어떤 리더든지 휘하에 쓸 만한 수하(手下)들을 거느리고 싶어한다.

      하지만 ‘용장(庸將) 밑에 약졸(弱卒) 없다’고 하지 않던가.


      “나를 따르라”고 자신있게 외칠 수 있는 용장의 리더십은 과연 무엇일까.
      신세대를 바라보라.‘잔소리꾼 구세대’로 전락하기 싫다면 그들의 사고를 읽어라.
        
      지식 산업을 ‘주름 잡는’ 지식 기업. 정보화 사회를 맞이하면서 그 중요성이 한층
      강조되고 있다. 본지도 이미 여러 번 지식 기업 및 지식 자산들이
      이끄는 국면의 변화들을 소개한 바 있다.

      특히 우리 나라에선 지식 사회에 각광받을 만한 능력을 지닌 이들을 일컫는
       ‘신지식인’이라는 용어가 한창 유행하기도 했다. 신지식인의 개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know what),
      어떻게 하는 것이 세계 최고인지(know how),
      필요한 정보와 지식이 어디에 있는지(know where),
      누구에게 맡기면 가장 잘할 수 있는지(know who)를 아는 사람’을 의미한다.
       
      때문에 신지식인의 자격 요건에는 학력 등 소위 ‘간판’이 필요 없다.
      빌 게이츠도 신지식인이지만, 파출부나 막노동판의 일당 근로자,
      농부 등 몸으로 때우는 직업인들 및 월급 받는 회사원들도 신지식인이 될 수 있다.

      앨빈 토플러의 예측은 이제 더 이상 충격이 아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정보화 사회라는 ‘제3의 물결’ 속에서 패러다임의
      대변혁(Paradigm Shift)을 맞고 있는 것이다.
      신지식인은 과거의 지식 계급(The Intellectual Class)을 대치하며 새로운
      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다.
      아울러 많은 이들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성취 목표로 자리잡았다.

      신지식인의 특징은 과연 무엇인가.
      끊임없이 자신의 일과 환경, 여건 등을 개선하고 개발하며 혁신해내는 이라면
      신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비단 ‘완성형’뿐만 아니라 ‘진행형’도 신지식인에 포함된다.
       
      이 글 말미의 박스에 신지식인의 여러 가지 특성들을 나열해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모든 특성들이 결국 한 가지로 귀결된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바로 이번호에 얘기하고자 하는
      ‘하인 리더십(Servant - Leadership)’이다.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인 리더십’이란 개념은 ‘청교도 국가’임을 자처하는 미국에서 생겼다.
      우리는 그 말이 본디 기독교에서 일컬어졌던 용어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인 리더십(Servant Leadership, 두 단어 사이에 하이픈이 붙으면 ‘경영자의 리더십’이 된다)이라는 말을 기독교에서는 ‘종(종복[使徒]의 의미일 것이다)으로서의
      리더십’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원래 이 말은 ‘섬기는 자의 마음으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주었던 예수의 리더십’을 뜻하는 말이다.
      예수는 마가복음(마르코복음) 10장 43~45절을 통해 그의 지도자 철학을 밝혔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속세의 권력 쟁탈은 필연적으로 적과 중상모략을 부른다. 명예욕에 사로잡힌 이들이
      서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날뛰기 때문이다.

      하인 리더십은 ‘숭고한 인생 철학’이다.
      예수의 12제자는 대부분 세속적 출세의 기회를 벼르고 있었다.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마가복음 9:34)”라고 전해진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가복음 9:35)”였다.

      우리 나라의 ‘유교적 기독교’를 개탄하는 기독교인들에게 하인 리더십은 단골 메뉴다. 선교사들 가운데
       “목사 섬길 줄 모르는 선교지 사람들에게 한 수 가르쳐줘야겠다”는
      말을 내뱉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양심적인 기독교인’들은
       “한국에서 목사란 어느덧 ‘섬김을 받는 직분’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었다”며
      핏대를 올린다.

      ‘부정과 세속적 음모에 찌든 일부 교회 지도자들’에 대해 일갈할 때에도
      하인 리더십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교회 지도자는 ‘(덕망과 인격을 갖춘) 섬기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참뜻 구현’을 부르짖는 이들의 공통된 얘기다.

      다소 장황한 얘기였지만 사실 결론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다.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본래의 취지를 잊지 말자는 것.

       

      “먼저 하인이 되어라!”

      경영학적 측면의 하인 리더십이 최근 지식인들의 화두에 종종 오르내리고 있다.
      기자는 지난 한 달 동안 세 명의 취재원으로부터 이 단어를 들었다.
      모 최고 경영자 조찬 모임에서는
      ‘경영학에서의 하인 리더십(Servant-Leadership and Business)’이라는 주제로 강연이 열린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실용적 의미의 ‘하인 리더십’ 또한
      본질적으로는 앞서 살펴본 기독교에서의 하인 리더십과 다를 바 없다.

      자, 기독교에서의 하인 리더십을 마지막으로 한번 되새겨보자.
      ‘복음의 전파’와 ‘사랑의 실천’ 등 기본적인 목표에 접근하기 위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찾다 보면 하인 리더십에 접근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이제 시야를 좀더 ‘현실적인’ 방향으로 돌려본다.
      자본주의사회의 대표적 계층은 ‘장사꾼’이다. 장사꾼 최대의 목표는 무엇인가.
       
      이윤의 극대화일 것이다. 이때의 이윤 극대화란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측면에서
      생각해야 한다. 장사는 신용이 생명이고 신용은 곧 고객 만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객 만족을 극대화시킬 경우 이는 곧 장기적 측면에서의 이윤 극대화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고객 만족은 어떻게 극대화시킬 것인가.
      고객과의 관계는 어떤 형태로 이루어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한가.

      영화 <배트맨과 로빈>의 충직한 집사 ‘알프레드’를 떠올려보자.
      주인의 모든 욕구를 이해하고 최대한 만족시키면서
      한점 흐트러짐 없이 품위를 유지하는 꼬장꼬장함, 고상한 인격,
      한없이 따사로운 마음…. 충직한 하인이야말로 대 고객 관계의 귀감으로
      가장 적합한 것이다. 하인 리더십은 이런 발상에서 출발한다.

      궁극적인 목표에 일관적으로 다가가고 싶은가?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싶은가?
      조직의 리더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하인’이 되어라.

       

      추종자들 없이는 리더도 없다

       

      하인 리더십 연구의 대표적 인물을 꼽으라면
      로버트 그린리프(Robert K. Greenleaf, 1904 ~ 1990)를 들 수 있겠다.
      1970년 그는 ‘Servant-Leadership’의 개념을 처음 소개한 <The Servant As Leader>라는 에세이를 발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처음 하인 리더십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AT&T에서 교육 개발 운영직에서
      은퇴한 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강의를 나가면서부터였다.
       
      떠들썩한 1960년대를 보내면서 왜 수많은 젊은이들이 미국의 제도 및 공공기관,
      특히 대학에 그토록 강렬히 항거했는지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조사를 마친 그는 ‘문제는 제도와 기관에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특히 학교는
      당연히 제공해야 할 서비스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학생들을 제대로 이끌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얘기하는 ‘섬기는 지도자(Servant-Leader)’란 스스로의 노력과 비전 제시 능력,
      하인으로서의 윤리를 모두 갖추고 있는 새로운 리더 상이다.
      그는 섬기는 지도자가 사회를 질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린리프는
       “진정한 지도자란 추종자들이 선택하는 것
      (True leaders are chosen by their followers)”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섬기는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인식(awareness), 선견지명(foresight), 경청(listening)을,
      버려야 할 악습으로는
      강압-속임수-말재간(coercive-anipulative-ersuasive power)을 지목했다.

      그린리프 센터의 현 CEO인 래리 스피어즈(Larry Spears)는 그린리프의 글을 취합,
      하인 리더십의 덕목을 10가지로 나열하고 있다.
      경청(Listening),
      개념화(Conceptualization),
      공감(Empathy),
      선견지명(Foresight),
      치유(Healing),
      책임감(Stewardship),
      인식(Awareness),
      커뮤니티 구축(Building Community),
      설득(Persuasion), 신장의 보증(Commitment to the Growth of People)이 그것이다.

      그린리프의 저서 < Servant - Leadership(New York: Paulist Press, 1977) >은
      지금껏 리더십 연구의 교재로 각 대학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 위치한 ‘그린리프 센터(Greenleaf Center)’는
      범세계적인 지부망을 통해 하인 리더십의 보급 및 교육에 힘쓰는 비영리 단체다.

      고객이 시장을 완벽하게 장악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기업은 품질, 코스트, 스피드, 차별화 등의 향상 추구를 끊임없이 거듭해야 한다.
      당연히 해당 사업에 대한 이해, 전반적 성공을 거두기 위한
      나름의 계산, 필요한 사항에 대한 결정권, 전반적인 운영 능력 등을
      확보하고 있어야 조직력과 체질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보았을 때 이런 능력은 오로지 조직의 리더나 실질적 매니저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하인 리더십을 이해하는 이라면
      시장에서 조직의 탄탄한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이런 힘이
      모두에게 고루 분배되어야 함을 알고 있다.
       
      가장 실질적이고 바람직한 하인 리더십의 실천 방법은 ‘대화’다.
      대화는 조직 내 각 성원의 머리와 가슴, 두 손을 한데 모아준다.
       대화는 협력의 기반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모든 조직을 구성 및 유지하는 데에는
      끊임없는 변화와 도전이 따르는 법이다.
       
      이런 끝없는 일들을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는 리더십에 대해
      단순히 일련의 상황 및 사람들을 처리하는 방법론 정도로 여겨서는 안 된다.
       
      물론 그런 구체적 방법도 숙지할 필요는 있지만 그 외에
      성실한 ‘의견 수렴(listening)’, 협조와 팀워크, 적절한 반향 등도 필수적인 덕목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리더 본인의 가치, 강점과 약점 등 총체적인 자신의 모습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혹독한 자기 수련과 더불어
       ‘부드러운’ 대인 관계를 겸비한다면 파워풀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하인 리더십의 기본은 곧 ‘외유내강(外柔內剛)’의 리더십인 셈이다.

      하인 리더십은 개인적인 성숙을 통한 리더십의 향상을 추구한다.
      아울러 상하 구분 없이 원만한 인간 관계를 강조한다.
      때문에 우리의 모든 일상 생활, 즉 직장, 가정, 내적 충만에 도움이 된다.
       
      ‘밑바닥’에 있다면 더 나빠질 게 뭐 있겠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하인 리더십을 전반적으로 훑어보았다.
      그린리프의 생각이 너무 ‘부드럽다’고 느끼는 이도 있을 것이다.
      지금껏 들어왔던 ‘전통적인’ 조직 장악의 지혜와는 조금 방향이 다른 면도 있다.
      하지만 하인 리더십은 매우 실용주의적인 사고다.
      그린리프는 “경영이란 일련의 일들이 이루어지는 상황에 대한
      고찰(Management is the study of how things get done)”이라고 말한다.

      그는 오로지 대접을 ‘받기만’ 하는 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과연 소위 ‘특권층’들은 ‘하인이 되기를 자청한 이들’에 비해
      더욱 건강해지고, 현명해지고, 자유로워지고, 자율적으로 살 수 있을까?
       
      반면 사회에서 가장 특권과 거리가 멀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뭔가 이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최소한 상황이 더 나빠질 리는 없지 않겠는가.”
       
       
      자료-The Robert K. Greenleaf Center for Servant-Leadership

       

       

       

       

       

       

      임원이 되기 위해 갖춰야 할 10가지 자질

       

       

      1.  리더십
      2,  열정
      3.  추진력
      4.  뛰어난 전문지식
      5.  원만한 대인관계
      6.  성실성
      7.  폭넓은 네트워크
      8.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평판
      9.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언변
      10. 뛰어난 외국어실력


      김소연,김병수,정광재의 '그들은 어떻게 임원이 되었을까?' 중에서 (아인북스, 32p)


      임원은 기업의 꽃이다. 언제 그만둘지 모르기 때문에 '임시 직원'의 줄임말이라는 자조도 들리지만, 직장인이라면 한번 해보고 싶은 성공의 '척도'이기도 하다.

      매경이코노미 기자 3명이 25명의 임원들을 취재해, 임원이 되기 위해 갖춰야 할 10대 자질을 정리했다.
       
      리더십, 열정, 추진력, 뛰어난 전문지식, 원만한 대인관계, 성실성, 폭넓은 네트워크,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평판,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언변, 뛰어난 외국어실력...

      10가지 자질 모두 좋은 내용이고 필요한 것이겠지만, 숫자가 너무 많으면 '집중'이 안되는 단점도 있다. 이 중 세가지만 꼽는다면 열정, 전문지식, 그리고 리더십을 들 수 있다.

      가슴 설레였던 '초심'을 항상 간직하며 적극적으로 일에 임하고 항상 자기계발에 노력하는 '열정'은 비단 임원승진 뿐 아니라 모든 성공에 필수적인 덕목인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지식을 쌓고 시대의 트렌드에 안테나를 항상 세우려 노력하는 자세, 부하직원과의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성과를 만들어내는 리더십도 중요한 자질이다.

      조직에서 성과를 내고 인정을 받기 위한 덕목 10가지. 이중 몇가지를 갖추고 있는지 점검해보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 이 10가지 외에 더 필요한 덕목이 있다면 다른 가족들에게 알려주는 것도 좋겠다.

      (예병일의 경제노트, 2006.12.11)

       

       

       

       

       

       

       

      21세기 지도자가 갖춰야 할 조건

       

       

      세계화의 기치아래 경쟁이 가속화 되고 시대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입니다.

       

      가치가 상실되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불확실한 시대입니다. 이런 불안정한 시대에 우리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도자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입니다. 양극화가 심화되고 노령화가 급속하게 이뤄지고 단일 민족 국가에서 다민족 국가로 바뀌고 남북분단이라는 특수상황 속에 놓여 있는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우리 나라는 더욱더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이육사 시인의 말처럼 백마 타고 오시는 초인 같은 지도자가 우리는 필요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우리 나라를 이끌 지도자는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와야 하는지 공론화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청문회를 통한 지도자의 상을 구할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도출함으로써 우리는 지도자를 양성해야 합니다. 21세기를 이끌어 가야 할 지도자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미래를 희망차게 맞이할 권리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21세기 지도자는 현실에 바탕을 둔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실현 가능한 삶의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 리더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오바마 대통령도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를 통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일본의 민주당도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를 통하여 정권을 창출했다는 것입니다. 케네디 대통령 연설문에서 보듯 희망이 보일 때 즐거워하고 고난 속에서 참으면서 독재와 빈곤과 질병과 전쟁을 없앨 때까지 고난을 짊어지라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이 있기에 현재의 고통을 참으며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도자는 희망찬 비전을 제시하면서 국민의 통합을 이끌어 내야 합니다. 평화적 통일을 통한  희망찬 미래를 제시하는 것이 우리 나라의 지도자가 갖춰야 할 첫번째 덕목인 것 같습니다. 북한의 점진적 변화를 통한 평화적 통일을 이끌어 내는 민족의 지도자가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입니다.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지도자는 철학적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런 철학적 안목을 갖추기 위해서는 고전을 통한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석가모니 등 우리에게 삶의 지혜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현인들의 철학적 덕목을 꾸준하게 독서를 통하여 체화함으로써 지도자는 정신적 소양을 갖춰야 합니다. 그런 철학적 안목을 가지고 현실에 바탕을 둔 실현 가능한 미래를 제시하는 지도자를 우리는 맞이할 권리가 있습니다.

       

      21세기 지도자는 인재를 발굴하여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해야 합니다.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리더가 모든 것을 할  수 없습니다.

       

      리더 곁에 있는 참모들에게 많은 권한을 위임하여 그 참모들이 모든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고 격려를 하는 것이 21세기 리더입니다. 위대한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업적 중에 가장 잘한 부분이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했다는 것입니다.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그 사람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함으로써 문화 창달을 이뤄다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분야에 능력을 가진 분들이 최대한 능력을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리더의 두번째 덕목입니다. 세계화의 경쟁 속에 리더는 우리가 앞으로 살아 남기 위해서는 문화와 과학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대전제 하에 그 분야의 전문가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사회적 여건을 조성해야 합니다. 제2의 빌 게이츠가 나올 수 있도록 지도자가 끊임없이 후원해야 하고 해리포터 같은 문화를 육성함으로써 먹고 살 수 있게 지도자는 문화와 과학 분야의 전문가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합니다. 인사가 만사라고 했습니다. 그 인사는 지도자가 합니다. 앞으로  먹고 사는 길은 문화와 과학이라는 것을 지도자는 인지하고 문화와 과학에 대한 기초적 소양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21세기 지도자는 이성보다는 감성의 리더가 되었으면 합니다. 메마른 감정에 감동을 줄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남에게 따뜻한 정을 베풀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따뜻한 인간애를 지닌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다소 허물이 있더라도 우리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정이 많은 리더였으면 좋겠습니다. 경쟁이 격화될 수록 세상은 사람 냄새가 없어지는 세상으로 급변하고 있습니다. 이런 메마른 현실하에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같이 울고 웃고 하는 격의없는 리더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내 가슴에 있는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그런 리더를 우리는 원합니다. 소수의 1%를 위한 리더가 아니라 다수의 99%를 위한 리더가 우리는 필요합니다. 리더가 상처 많은 다수를 안아줄 수 없다면 행복한 소수도 안아줄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의 작은 이야기를 들어 주고 같이 어울려 음악도 듣고 노래도 부르고 막걸리도 한잔 같이 하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서로 이야기하고 토론할 수 있는 그런 포근하고 편한 아줌마 같은 리더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우리 위에서 군림하는 리더가 아니라 큰형같은 자세로 우리 상처를 감싸줄 수 있는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감성의 리더가 우리는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커다란 산으로 멀리 있는 리더가 아니라 언제나 내가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눈물이 많은 리더가 우리는 필요합니다.

       

      21세기 리더는 카리스마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의견 속에 강력하게 모든 일을 추진할 수 있는 불굴의 의지와 끈기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당장은 욕을 얻어먹더라도 미래의 발전을 위하여 소신있게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철학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의 인기에 부합하는 리더가 아니라 후손을 위해서 전체의 대의를 위해서 소신있게 자신의 철학을 견지하는 그런 리더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지역 간의 갈등이 상존하는 현실에서 리더는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수록 리더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카리스마가 있어야 합니다. 부드러움 속에서도 칼을 가는 외유내강형의 리더가 요구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 떨 때, 불굴의 의지로 이끌어 나가는 카리스마가 리더에게는 필요합니다. 이순신 장군처럼 풍전등화 속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불굴의 의지를 지닌 리더였기에 우리 나라를 전쟁에서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국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불굴의 카리스마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카리스마가 리더가 갖춰야 할 네번째 덕목입니다.

       

      21세기 리더는 겸손하게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다양한 국민들을 통합시킬 수 있는 조정적 리더였으면 좋겠습니다. 퓨전의 시대, 다양성의 시대에 모든 의견을 통합하여 모든 사람이 윈윈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믿음을 부여를 할 수 있는 리더였으면 좋겠습니다. 리더의 제시안에 갈등의 당사자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존경받는 조정적 리더를 보고 싶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리더는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통합을 이끌어 내는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지녔으면 합니다. 많은 현안의 문제들은 통합의 문제입니다. 통합과 조화를 강조한 원효 대사의 화쟁 사상을 실천할 수 있는 조정 능력이 뛰어난 리더가 우리 시대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덕목입니다. 지역 간의 갈등을 치유하고 세대간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기부를 통하여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도록 하고 다양함 민족의 문화를 융합하여 산업으로 연결시킬 수 있고 평화적 통일을 통하여 전세계 인류 평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퓨전의 리더, 통합의 리더를 우리는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런 비전을 제시하고 적재적소에 인물을 배치하고 사람 냄새 물씬 풍기며 카리스마를 지닌 조정적 리더가  21세기에 필요한 리더입니다. 독수리 5형제가 지구를 구했듯이 이런 5가지  덕목을 갖춘그런 리더가 우리 삶을 이끌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리더는 특정한 인물이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 누구나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에게 의존하는 그런 속성을 버리고 스스로 21세기 리더가 되도록 각자 최선을 다합시다. 그래서 정상에서 웃으면서  아름다운 세상,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케네디 대통령처럼 리더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요구하지 말고 내가 리더가 되어 이 세상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를 자문해 보는 주체적 리더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리더입니다. 역사는 소수의 리더의 시대에서 다수의 리더 시대로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다수의 리더를 확보한 국가만이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런 리더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노력을 통하여 쟁취하는 후천적 리더입니다. 오늘부터 우리 모두 리더가 되기 위하여 준비합시다. 준비된 리더만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리더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리더를 갖추기 위해서는 질책보다는 칭찬과 격려를 통하여 리더를 배출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합니다. 사돈이 땅을 사면 내 삶이 행복해진다는 사고의 전환이 요구됩니다. 칭찬과 격려를 통하여 자란 리더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 것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든 리더들이여!

       

      사랑했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할 것입니다.

       

       

      최고지도자 리더십의 8대 덕목 [HS-way (40)]

      HS 2020. 2. 27. 22:07
      ~3분

      국가, 대학, 기업의 발전에 있어서는 대통령, 대학 총장, 기업 CEO 등 최고지도자의 리더십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패러다임 전환기나 위기 상황에서는 최고지도자의 리더십이 국가나 조직의 운명을 가른다.

      최고지도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리더십의 주요 덕목은 무엇인가? 나는 VIP(지도자의 자질)-PTR(지도자의 책무)-PT(위기관리 능력)를 최고지도자 리더십의 8대 덕목으로 제시한다. 지도자의 기본 자질은 비전(Vision Provider), 혁신(Innovation Driver), 열정(Passion)이고, 지도자의 기본 책무는 인사(Personnel), 신뢰(Trust), 책임(Responsibilities)이고, 지도자의 위기관리의 핵심은 우선순위(Priority), 타이밍(Timing)이다.

      최고지도자는 비전을 제시하고(Vision Provider),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혁신 역량(Innovation Driver)이 있어야 하고, 이를 추진할 수 있는 열정(Passion)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인재들이 역량을 최대한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인적자원관리(Personnel)를 잘 해야 한다. 지도자는 신뢰(Trust)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결과에 대해 항상 책임(Responsibilities)을 다해야 한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는 일이나 자원배분에 있어서 우선순위(Priority)를 결정하는 능력이 뛰어나야 하고, 의사결정의 타이밍(Timing)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개인의 성공은 개인 자신의 성장에 의해서 평가되지만, 대통령의 성공은 국가 발전에 의해서 평가되고, 대학 총장 등 지도자의 성공은 조직의 발전에 의해서 평가된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가 발전을 실현해야 하고, 성공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직의 발전을 실현해야 한다.

      - 남천 이효수 -

      In the development of the nation, university and enterprise, the leadership of top leaders, such as the national president, university president and corporate CEO, is very important. Especially in times of paradigm shift and times of crisis, the leadership of the supreme leader determines the fate of the nation or organization.

      What are the main principles of leadership that the supreme leader must have? I present VIP-PTR-PT as the eight principles of supreme leader leadership. Vision Provider, Innovation Driver, Passion, Personnel, Trust, Responsibilities, Priority, Timing, etc.

      Top leaders should have the ability to present a vision (Vision Provider), the ability to innovate to realize the vision, and the passion to pursue it. In addition, they should hire talented people. Top leaders must be able to be trusted and always be responsible for the consequences. Especially in times of crisis, the ability to determine priorities in work or resource allocation should be excellent, and the timing of decision-making should be well matched.

      While individual success is judged by individual own growth, the president's success is judged by national development, and the success of the leader, such as the university president, is judged by the development of the organization. To become a successful president, you must realize national development, and to become a successful leader, you must realize the development of your organization.

      Prof. Hyo-Soo Lee, Ph.D.


      위기를 당하면 그 위기에 걸맞은 지도력이 요청된다. 위기를 맞았으면서 평소와 같이 우유부단한 지도력으로는 그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다. 위기에서 그에 걸맞은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면 그 공동체는 그 자리에 주저앉게 되고 만다.위기를 극복하는 지도력으로 8 가지 덕목을 지적한 글이 있다.

      첫째가 예측하라다. 지도자는 언제나 앞을 내다보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측하여 그에 적합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둘째는 바닥을 살펴라다. 민초(民草)들의 마음을 잘 읽어 바르게 지도함이 지도력의 근본이다. 세번째는 지도자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부하들에게 시키려 들어서는 안 된다. 앞장서서 위험을 온몸으로 부딪쳐야 한다. 네번째는 공격하라다. 이 말은 공격 정신이 없이는 위기를 정면 돌파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는다. 다섯째는 사기를 올려 주라다. 자신의 주장대로 국민이나 사원을 선동하지 말고 국민들을 정직하게 대하고 스스로 모범을 보이라는 말이다. 선동으로 움직이는 대중은 판단력을 잃을 뿐 아니라 도덕성까지 잃게 된다.

      여섯째는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라다. 대상을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말은 상대의 자질을 잘 파악하여 그 자질을 구체적으로 북돋워 주라는 말이다. 조직원의 숨은 자질을 잘 찾아내어 그에 적합한 대우를 해 줄 때 열린 공동체가 되어지고 생산성이 높아진다.일곱째는 진심으로 설득하라다. 강제적인 억압이나 권력 행사가 아니라 진실함과 진지함으로 공감대를 이루어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도자의 설득력은 솔선수범에서 드러난다. 여덟 번째는 위기일수록 원칙으로 돌아가라.다. 어려울 때일수록 잔재주를 부리지 말고 편법을 쓰려들지 말고 명분을 지키고 원칙에 충실하여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평생 쌓은 업적과 평판이 허물어지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도자의 올바른 자세와 판단이 역경을 극복하고 결국 승리하게 된다.

      [출처] 경기신문 (https://www.kgnews.co.kr)



      지도자의 두 가지 조건, 다섯 가지 덕목

      jinokorea
      ~4분

      경향신문을 보고 알게 된 것_2017년 4월 25일

      - [ 지도자의 두 가지 조건, 다섯 가지 덕목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덤불 속’은 하나의 시체에 대한 세 사람의 진술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한 사람은 범인으로 의심되는 도둑, 나머지 두 사람은 아내와 죽은 남편의 혼령. 기이한 것은 이들 셋이 모두 자신이 범인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을 영화화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도 이 셋의 진술대로 사건을 재현할 뿐, 어떤 것이 진실인지에 대해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문화평론가 정은경씨는 “한 나라의 지도자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 일단 법의 경계 안에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둘째, 어른이어야 한다. 어른은 스스로를 통제하고 책임지는 주인을 의미한다. ‘내가 누구입니까’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남에게 묻고 확인받으려는 자는 아직 어른이 아니다. 그리고 어른은 삐지거나 토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모욕과 비난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또 지도자는 다음과 같은 덕목을 갖춰야 한다. 첫째, 타인과 진정으로 소통할 줄 알아야 한다. 소통(communicate)은 함께(com) 나누는(municate) 것이다. 둘째, 자신의 철학과 언어가 있어야 한다. 셋째, 곤혹과 딜레마를 알아야 한다. 넷째, 지도자의 대타자, 즉 그가 눈치 보아야 하는 대상은 국민이어야 하지 어떤 특정인이거나 권력이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지도자는 그가 이끄는 국민들을 모두 다 데리고 가야겠다는 원대한, 불가능한 꿈을 꾸는 자여야 한다”고 말한다. https://goo.gl/WawTqF 

      - [ 간절히 바라는 것은 어떻게든 이루어진다는 ‘줄리의 법칙’ ] 별똥별이 떨어질 때, 아니 그 꼬리가 채 사라지기 전에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하지만 별똥별은 찰나와 같은 시간에 덧없이 실낱같이 사라진다. ‘줄리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어떻게든 이루어진다는 법칙이다. 행운이란 건 아무 노력 없이 우연히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갈망하는 이가 알게 모르게 한 사소한 행동과 변화들이 쌓여 이루어진 결과라는 뜻이다. ‘우리말 절대지식’의 저자 김승용씨는 “진실로 자기 꿈을 꾸는 이는 다른 별을 보지 않습니다. 내 별 하나만 바라보고 그 별을 향해 꿈길을 걷습니다. 밤하늘 수많은 별들 모두가 내 꿈은 아닐 것입니다. 탐나는 모든 별을 꿈꾸는 이가 꾸는 꿈은 그저 허망한 ‘개꿈’일 것입니다. 오늘밤 우리, 저기 저 많은 별들 가운데 내 삶과 꿈의 별 하나쯤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요?”라고 말한다. https://goo.gl/7E8sq4 

      - [ 대선 토론이 남긴 것 “세탁기” “설거지” “이보세요”… ] 19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TV토론에서 ‘스탠딩’ 방식 등 난상토론을 유도하기 위한 룰이 도입됐지만, 정책·비전보다는 네거티브 공세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취지가 퇴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기 대선으로 기간이 압축되면서 TV토론의 관심도와 영향력은 눈에 띄게 높아졌다. 3차 토론의 7개 채널 합계시청률(닐슨코리아 기준)이 38.5%에 육박했다. 토론 긴장도는 높아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내용면에선 많은 과제를 남겼다. 새로운 형식과 후보자들의 낡은 토론 관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노출됐다. 기억나는 것은 “세탁기” “설거지” “이보세요” “버릇없이” 뿐이다. https://goo.gl/sma4Fq 

       - [ 세월호 학생 가방 속 한 푼도 못 쓴 용돈 5만원 ] 세월호 탑승자들의 소지품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다. 희생된 안산 단원고 한 남학생의 낡은 지갑에는 “수학여행지에서 쓰라”며 부모가 준 5만원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하루에 많게는 30여점 넘게 발견되고 있는 유류품은 신발, 옷가지, 여행용 가방, 휴대전화 등이 대부분이다. 지난 4월22일에는 단원고 2학년8반 고 백승현군의 여행용 가방이 가족에게 인계됐다. 3년간 바닷속에 잠겨있던 백군의 가방에는 학생증과 함께 쓰지 못한 용돈 5만원, 옷가지 등 소지품이 들어 있었다. 백군의 어머니 임현실씨(51)는 “수학여행 가서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용돈 5만원을 줬는데 한 푼도 쓰지 않고 물에 젖어 돌아와 마음이 더 아프다”고 말했다. 세월호 수습본부는 백군의 가방처럼 소유자를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물품은 세척 등을 거친 뒤 가족들에게 연락해 인계하고 있다. 침몰 당시 상황 등이 녹화됐을지도 모르는 휴대전화와 디지털카메라 등 디지털기기는 발견 즉시 선체조사위원회로 넘겨진다. https://goo.gl/pRQoUZ 

      - [ 데뷔 40년 ‘도라지 위스키’ 가수 최백호, 미술전? ] 올해 데뷔 40주년을 맞은 가수 최백호씨(67)가 그림 전시회를 열었다. 가수뿐만 아니라 2009년부터 미술작가로도 활동한 최씨는 날마다 조금씩 그려둔 그림 중에서 ‘나무’란 이름의 작품 20여점을 선별해 데뷔 40주년 기념 개인전을 열게 됐다. 그는 “나무를 보면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 같아서 나무를 주제로 작품을 그려 나간다”고 말했다. 1977년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로 데뷔한 최백호는 ‘입영전야’(1977), ‘영일만 친구’(1979) 등을 히트시키며 톱가수 반열에 올랐다. 40대 중반에 내놓은 자작곡 ‘낭만에 대하여’(1995)가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아이유, 에코브릿지, 스웨덴세탁소 등 젊은 후배 가수들과 협업하며 꾸준히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 최씨는 지난 3월 데뷔 40주년 기념 앨범 <불혹>을 발표했다. 같은 달 서울 LG센터에서 이틀간 진행된 40주년 기념 콘서트를 전회 매진시키며 성황리에 마쳤다. https://goo.gl/hiUOIf 

      - [ 불황에 유커 급감…서울 주요 상권 임대료 뚝↓ ] 월세가 전국에서 가장 비싼명동에 중국인 관광객들이 발길을 끊다시피 하면서 매출이 절반가량 빠진 곳들이 많다. 작년 봄만 해도 명동 곳곳을 활보하던 중국인 관광객들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여파로 요즘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어려움을 겪는 상권은 명동뿐만이 아니다. 경기침체에 따른 소비 위축이 계속되는 데다, 중국인 관광객까지 감소하면서 서울 주요 상권이 위축되고 있다. 이에 따라 상가 임대료도 하락세로 돌아섰다. 부동산114가 이날 발표한 ‘2017년 1분기 상권임대 동향’을 보면, 서울에 위치한 상가의 월평균 임대료는 1㎡당 3만2700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4분기(3만3700원)보다 3.0% 떨어진 수치다. 서울의 상가 월평균 임대료가 내림세를 보인 것은 지난해 1분기 이후 1년 만이다. 서울에서 임대료 하락폭이 가장 큰 상권은 합정역(홍대 일대·3만2200원)으로, 전 분기보다 12.5%나 떨어졌다. 북촌 상권 임대료도 12.2% 하락했다. https://goo.gl/KxMxao 













      12-14-2024(토) 요한복음 13:21-3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를 팔리라(2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After he had said this, Jesus was troubled in spirit and testified, "I tell you the truth, one of you is going to betray me."

      팔리다(파타쏘. patassō) πατάσσω 스트롱번호 3960

      1. 치다.  2. 때려눕히다
      발음 [ patassō ]
      어원  /  미래 πατάξω, 제1부정과거 ἐπάτα- ξα, 3817에서 유래
      • 1.  치다, 때리다, 마 26:51, 눅 22:49, 50, 행 12:7.
      • 2. 때려눕히다, 죽이다, 마 26:31, 막 14:27, 행 7:24.
      • 관련 성경  /  치다(마 26:31, 막 14:27, 눅 22:49).

      마태복음 26:51
      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그 귀를 떨어뜨리니.

      누가복음 22:49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하고.

       
      사도행전 12: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마태복음 26: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

      마가복음 14: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사도행전 7:24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어떤 부인과 남편의 대화다.
      “여보 당신은 내 인생에 로또야”
      “정말, 그렇게 내가 좋아?”
      “그게 아니라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잖아?”
      이 부부에게 배신감은 그래도 애교 수준이지만 대중들의 인기가 높았던 시저의 권력이 계속 커가는 것을 시기한 원로원은 시저의 심복이었던 브루투스를 보내 그를 살해했다.
      그때 믿었던 신복에게 찔린 시저는 죽어가면서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가장 신뢰했던 신복으로부터 배신당한 자의 절규, 이 말은 믿었던 상대에게 배신당했을 때 흔하게 사용되는 대표적인 인용문이 되었다.

      본문에 다시 한 번 유다로 인해 빚어지는 비극이 고개를 든다.
      11절에도 언급하고 18절에서 또 언급한 것을 보면 그에게 엄청 충격이었던 것 같다.
      예언이 점점 더 구체화 된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21절)라고 하셨다.
      요한복음의 독특한 강조 어구인 ‘진실로 진실로’를 쓰며 유다의 배신에 대한 언급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을 말씀하시는 주님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배신자가 누군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가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마지막으로 식사하시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이라는 명작이다.

      배신자 유다는 주경학자 레온 모리스(Leon Lamb Morris)가 “마태복음 26장의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25절)는 대화를 다른 동료들은 듣지 못하는 둘만의 대화였다며 회계 담당인 가룟유다가 예수님 우편 영광의 자리에 앉았을 것”으로 해석한 것을 보면 예수님이 배신자에게 마지막 만찬에서 특별히 곁에 앉혔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마 사색을 한 유다가 바로 오른쪽 사람인 것 같다.
      다빈치는 그의 손에 돈주머니를 그렸다.
      그리고 그 앞에 소금통이 넘어져 있는데 소금은 쌍방 간에 맺은 계약이 영원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 다빈치는 유다 앞의 소금을 뒤엎었다.

      그리고 요한의 얼굴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일까?
      마치 여성 같다.
      예수님 바로 오른쪽에 있지만 반대편으로 약간 기울인 편안한 모습이지만 다른 제자들은 당황한 모습이다.
      마치 손으로 자기 가슴이나 하늘을 가리키며 “저는 아닌데요” 그러는 것 같다.
      평화롭기는커녕 배신과 놀람, 그리고 무지로 가득 찬 만찬장, 이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만찬장 분위기이다.

      요한복음의 만찬장 분위기는 그림이 좀 다르다.
      요한복음의 만찬장에서 두드러지는 사람은 두 사람이다.
      유다와 ‘사랑받는 제자’라는 익명의 사람, 익명으로 다룬 사람은 사도 요한이 거듭 그를 ‘사랑받는 제자’라고 표현한다.
      학자들은 그를 별 이견없이 사도 요한으로 해석하는데 요한은 그 제자가 베드로보다 예수님과 더 친밀한 관계임을 강조한다.
      말씀으로 추정해볼 때 유다와 요한은 둘 다 예수님 가까이에 앉았던 것 같다.
      어쩌면 다빈치의 그림과 달리 예수님 좌우편에 하나씩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다빈치의 그림은 마치 1자 테이블 위에서 식사를 한 것처럼 표현했지만 실제 유대나 로마식 식사 때 테이블 세팅은 원형이나 반원형이었고, 공간이 좁을 경우에는 서로 포개어 왼쪽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했다. 그래서 예수님 오른쪽에 있던 사랑받은 제자는 마치 예수님 품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26절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라 하시며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라는 말씀도 당사자들만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유다의 자리를 예수님과 가까웠을 것으로 추측한 것이다.

      떡 조각을 나누는 식사, 가족적이고 친밀한 분위기처럼 보이지만 주고받는 대화는 심각하다. 예수님은 같이 떡을 먹는 자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라는 엄청난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는 범인을 색출하려고 사랑받는 제자에게 누군지 알아내라고 사인을 보낸다. 결국 사랑받은 제자가 묻는다. “주여 누구니이까”(25절), 좀 은밀하긴 하지만 예수님도 이제는 직접 누군지 밝히신다. 지금까지 암시만 하시던 것과는 다르다. 떡 조각을 주면서 “내가 이 떡 조각 주는 사람이 그”라고 하신다. 아마 다른 제자들은 잘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 같다. 아니 들었어도 무슨 소린지 몰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공관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주여, 내니이까?” 그러고 있다.

      한편 유다는 들통났다고 생각하고, 떡 조각을 받자마자 밖으로 나간다. 요한도 제자들도 유다가 다른 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유다는 행동을 결행할 타이밍으로 생각한다.

      배신 결행, 열두 명을 택하여 함께 동고동락하며 가장 신뢰했던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신다.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18절), 시편 41편을 인용한 말씀이다. 다윗의 시편인데 여기서 생략된 말씀이 그 상황을 더 뼈 아프게 한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41:9), 함께 떡을 먹던 친구가 배신했다는 말씀이다. 그가 바로 늘 곁에 두고 중요한 결정에 자문을 구했던 최고의 책사 아히도벨이다. 다윗은 친아들 압살롬에게도 배신당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발꿈치를 들었다고 표현했다. 발로 마치 자기 얼굴을 밟듯 모욕적 행위를 행했다는 말이다. 축구장에서도 엘로 카드감, 심하면 레드 카드까지 받을 수 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를 밝힌 시편에 보면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시55:4-5)라고 했다. 상처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받는 것, 배신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유다만 배신자인가? 유다는 하나의 상징, 구원의 방주라는 교회공동체에도 마귀가 도사리고 있다. 성경은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다고 표현했다. 끊임없는 신앙 검증이 필요하다. 우리 안에 유다와 같은 배신과 탐욕과 야망의 욕구가 섬김과 하나됨과 사랑의 마음과 공존하기 때문이다. 같은 자리에서 떡과 말씀을 먹고 있지만 유다가 있고 사랑받는 제자가 있다.

      유다는 마귀다

      난해한 구절이 있다.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27절),
      이 말씀은 마치 유다의 배신을 알면서도 예수님이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는 방관의 혐의를 피할 수 없게 된 말씀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교회사에 아예 가롯 유다를 옹호하는 이단이 있었다.
      2-3세기 기독교 최대 이단으로 찍혔던 영지주의자들이 만든 위경 중 하나인 ‘유다복음서’에 보면 유다가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나머지 제자들이 깨닫지 못한 비밀한 계시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영적인 비밀을 안 유다는 빈껍데기에 불과한 예수님의 육신을 푼돈에 팔아넘겼다는 것이다.
      다른 제자들은 육적인 것을 붙잡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안 유다가 억울하게 정죄를 당했다는 것이다.

      공감이 가나?
      이 유다에 대한 옹호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첫째는, 결과만 중시하고 과정 을 간과하는 오류다.
      예수님의 대속 사역만 강조했다고 할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속죄론의 핵심이고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인데 결과론적으로 보면 유다가 배신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 성취에 공헌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논리가 로마서에서도 나온다.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롬 3:5),
      이스라엘의 불의로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고, 이방인이 구원받게 된다면 이스라엘의 불의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것인데 아니다.
      현실은 배신일 뿐이다.
      하나님이 악을 선한 결과로 바꾸셨을 뿐인 것, 그래서 유다에 대한 옹호는 변명에 불과하다.

      요셉이 결과적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고 해서 동생을 핍박하고 팔아넘긴 그의 형제들이 공로자 되나?
      아니다. 형제들은 심판받을 짓 했다.
      그들의 악을 바꾸어 요셉을 높이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악인들의 변명에 동조할 필요 없다.
      결과가 선하다고 악행을 용서할 수는 없다.

      두 번째 오류는 영웅화의 오류다.
      인간에게는 악마를 영웅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실제 역사나 현실을 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알렉산더나 칭기스칸이나 나폴레옹을 영웅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얼마나 광대한 땅을 빼앗았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지만 현실은 피의 역사다. 수많은 젊은이들과 대중이 그들의 칼날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수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가족이 붕괴 되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이 러시아에서 지지도가 더 높아졌다고 영웅이 될 수 없듯이 유다는 영웅이 아니라 배신자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성경인데 성경은 유다를 가차 없이 마귀라고 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27절), ‘사탄’이란 이름이 요한복음에서는 여기에만 나오는데 사탄이 유다의 속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무슨 뜻인가?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이전에 예수님은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70절)라고 예수님은 유다를 마귀라고 하셨다. 사탄이 유다의 행동을 주장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기억하라. 마귀 짓하면 마귀이다. 마귀가 어떤 존재이고, 인간에게서 어떤 현상을 일으키는가에 예수님은 관심이 없다. 다만 그 행동에 관심이 있고, 행동이 악하면 마귀이고 어둠의 자식이다. 그래서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30절) ‘밤’은 단순한 시간만 의미하지 않는다. 요한에게 밤은 빛과 어두움의 싸움에서 어두움으로 넘어가는 때, 캄캄한 암흑이고, 또 유다의 영혼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유다가 지금 마귀 짓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말씀의 핵심은 유다의 배신을 예수께서 미리 아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셨을 뿐만 아니라 이것은 시편 말씀의 성취라고 하신다.
      그래서 유다에게 “속히 그 일을 하라”고까지 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미리 다 아셨다면 가룟 유다를 12제자 중 한 명으로 선택하신 것부터가 잘못이었고, 예수님의 안목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너무 단순한 의문이고 불신이다.
      예수님은 이것은 말씀의 성취라고 하셨다.

      요한이 단순히 예수님의 예지력을 강조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보다 효과에 주목해야 한다.
      악은 통제되고 있다. 댐에 갇힌 물처럼 통제된 악은 위험하지 않다. 악이 발버둥을 쳐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일 뿐이다. 우연이나 우발적이 아니라 모든 것은 계획 아래 진행된다. 그렇다면 배신, 실패에도 좌절할 필요 없다. 예측되는 것은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것, 모르기 때문에, 신뢰가 없기 때문에 불안할 뿐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신뢰하기에 예수님은 충실히 오늘을 사신다. 그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다. 유다에게도 똑같았다. 유다의 발도 씻어주셨다. 떡 조각을 찍어 주기도 하셨다. 떡 조각을 받았던 유다가 그것을 사랑의 표현으로 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유다는 그걸 버림의 사인으로 해석한 것 같다. 결국 예수님은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배신이 아니라 회개였어야 한다. 그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기회도 놓쳤다. 마귀의 손을 붙잡힌 것, 전적으로 유다의 선택이었다. 요한은 예수님이 유다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자극하셨지만 유다가 끝내 듣지 않았음을 드러내고 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안타깝게 이 말씀을 하시면서도 끝까지 유다를 사랑하신 예수님, 결국 제자들 모두에게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실 수밖에 없다.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19절), ‘일이 일어나기 전에’라고 하셨는데 이 일이 바로 유다의 배신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귀결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다. 곧 이 일련의 일이 일어나더라도 제자들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끝까지 믿게 하기 위해 미리 예고하실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심령이 괴로워”(21절), ‘타랏’이란 단어인데 나사로 죽음 앞에서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울 때 지으셨던 표정, 십자가를 앞두고 그 길로 인해 고통스러우셨을 때 지으셨던 표정을 표현할 때 사용한 단어다. 그 괴로움은 배신할 자를 제자로 삼고 다 알면서도 그와 3년간 삶을 나누셔야 했던 고뇌, 나머지 제자들도 다 주님을 부인하거나 버리고 흩어질 일에 대한 연민의 정, 무엇보다도 곧 당하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말미암는 두려움, 이런 것을 종합한 표현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져야 할 죄와 괴로움의 짐을 대신 지셨기에 겪으신 괴로움, 그래서 우리가 평안과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끝없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끝까지 믿음으로 충성해야 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그의 심령에 민망하시게 된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 특별히 생각되는 것은,
      (1) 그의 제자가 그를 팔아 먹는 일이 너무도 그에게는 고통이 된다는 것
      (2) 그런 일에 대하여 이제 공적으로 지적하여 말하기가 역시 괴로운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이 일을 지적하여 말씀하시지 않으면 안될 단계였다.
      그것은 너무도 확실한 일이기 때문에, 그는 엄격한 법정 선언과 같이 "증거하여" 말씀하셨다.
      여기 "증거"란 말이 법정 용어의 의미를 가진다고 하는 것이, 일반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성경 말씀 요약

    9. 예수께서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심(18-21절)
    10. 제자들이 누가 배신할지 의심함(22-25절)
    11. 예수께서 유다에게 떡을 건네심(26-27절)
    12. 유다가 떠남(28-30절)
    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13장 18-30절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의 배신과 그로 인한 예수님의 심정을 깊이 있게 묵상하려 합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사역과 그분의 구속 사역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히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오늘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깊은 진리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예고와 제자들의 의심(요한복음 13:18-2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배신할 자가 있다고 예고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1절).
      예수님의 이 예고는 곧 다가올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배신의 고통을 느끼는 인성을 엿보게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서로 의심하고, 도대체 누가 예수님을 배신할지 궁금해 합니다.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2절).
      그 중에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 있었고, 시몬 베드로가 그를 통해 누가 배신할 것인지를 묻습니다.

      2. 유다의 배신과 사탄의 역사(요한복음 13:26-27)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의문에 답하시면서 자신을 팔 자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밝히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서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6절). 예수님께서 떡 한 조각을 적셔 유다에게 주신 후, 사탄이 유다의 마음에 들어갑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27절).
      여기서 우리는 유다가 단순히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사탄의 역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은 유다의 탐욕과 감정적인 약점을 이용하여 그를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영적인 전쟁에서 항상 깨어 있어야 함을 경고합니다. 우리의 약점과 감정적인 통로를 통해 사탄이 역사할 수 있음을 유다의 예를 통해 분명히 보게 됩니다.

      3. 예수님의 상처와 사랑 (요한복음 13:28-30)

      유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떡을 받아 나가게 됩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라’ (30절). 이 짧은 구절 속에는 예수님의 상처와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알고도 받아들이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랑이 끝까지 변함이 없고, 심지어 배신자에게도 베푸는 극진한 사랑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종종 타인의 배신이나 예상치 못한 상처로 인해 마음에 고통을 느낍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도 상대방을 용서하고 사랑을 베풀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결론

      오늘 요한복음 13장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깊은 사랑과 배신에 대한 아픔, 그리고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사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예고와 유다의 배신은 단순히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중요한 영적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타인의 배신 앞에서 어떻게 사랑과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사탄의 역사를 경계하고 우리의 영적 상태를 항상 점검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고, 이를 통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나를 팔리라"
      예수님께서 유월절 식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이란 예식을 진행할 때 "나를 팔리라"는 충격적인 말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서 제삼자의 입장에서 지켜보고 있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첫째, 예수님은 제자 중 한 사람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할 사람은 빵을 찍어 주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빵을 찍어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을 팔 사람입니까?
      ‘가룟 유다’ 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왜 가룟 유다에게 빵을 주셨는지 알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요 13:28-29).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제자들은 왜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빵을 주셨는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을 잘 믿고 따르는 우리들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얼마든지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아니할 가룟 유다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 중요합니다.
      가룟 유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평상시 좋을 때는 주님 따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믿음을 배신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평상시에는 세상과 다른 것 같이 행동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세상 사람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그리스도인이 바로 가룟 유다와 같은 배신자 입니다.

      오히려 평상시에는 세상 사람들과 비슷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우리의 믿음을 잘 다듬어야 합니다.
      늘 기도와 말씀으로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자, 27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빵을 찍어 유다에게 주시며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심부름을 시키시는 것으로 오해 했습니다. 왜냐하면 열두 제자 중 제자가 돈 관리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나가서 앞으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해 오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잘못 이해 했습니다. 유월절 저녁에는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당시의 관습으로 인해, 어떤 제자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물건을 사오라는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분명 예수님은 지금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아 넘길 배신자라는 사실을 모든 제자들에게 나타내신 것이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빵 조각을 찍어 가룟 유다에게 주시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2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 13: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30절 말씀을 봅시다. “(요 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유다는 예수님께서 주신 떡 조각을 받은 후, 드디어 예수님을 팔아 넘길 계획을 실행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목소리, 그리고 다른 제자들의 목소리는 들립니다만, 가룟 유다의 목소리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은밀하게 악을 도모하는 죄인의 음흉함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사랑에 등을 돌렸습니다. 과연 이 세상에 예수님만큼 가룟 유다를 사랑하신 분이 있을까요?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에도 함께 했고, 예수님은 세족식을 거행하며 가룟 유다의 발까지도 씻어 주셨습니다. 안타깝게도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같은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이용하려고만 했고, 자신의 뜻이 관찰되지 않자, 예수님을 배반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끝까지 사랑하셨고,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사명의 길을 걸어가시기 위해 가룟 유다에게 빵을 찍어 주시며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지난 3년간 예수님을 따라다닌 가룟 유다도 한 순간에 무너져 예수님을 등 지고 돌아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주님을 끝까지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 안에 예수님께 받은 은혜를 날마다 묵상합시다. 날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으로 살아갑시다. 사망과 어둠을 이기신 빛이신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만이 어두움을 물리치는 방법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고통 중에도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까지 목숨 바쳐 사랑한 제자가 스승을 팔아 버리다니요. 마귀가 유다의 마음을 지배하자 곧 그는 마귀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을 앎에도 왜 주님은 가룟 유다를 내치지 않았을까요. 왜 끝까지 사랑했을까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어쩔 수 없어서? 주님의 사랑의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유다는 매우 간교한 자였습니다. 그는 계속하여 돈을 훔쳤고, 다른 제자들은 그것은 몰랐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속였기에 수년 동안 도둑질을 하고도 제자들이 알지 못할까요?

      내 발꿈치를 들었다를 인용한 구분은 시편 41:9입니다.

      • 시편 41: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시편 41에서 발꿈치는 이간질하는 자를 말합니다. 화자가 병에 걸렸을 때 앞에 와서는 부드러운 말고 걱정하는 척 하지만 돌아가서는 사람들에게 악담을 퍼붓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발꿈치는 지체의 가장 아래에 있어서 뒤로 뒤쳐지다. 더럽다. 약하다. 의 뜻인 동시에 발이 몸을 움직이는 기능을 갖기에 의지를 행사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본다면 가룟 유다를 향한 예수님이 표현은 겉으로는 예수님의 제자 인척 하지만 뒤로는 더럽고 추한 자로 살아가는 배신자의 속성을 드러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고통스러워하며 내뱉으신 것입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제자가 자신을 배신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배신자의 종말을 보고 계십니다. 한 번 마귀에게 사로잡힌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더욱 아프게 한건 그가 '내 떡을 나눠 먹는 자'(시편 41:9)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 '설마' 하며 놀랐던 것입니다. '의심하더라'의 아포레오는 '당혹스러워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 '혼란스럽다'는 뜻입니다. 아마 주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우리 중에 주가 주님을 판단 말인가?'라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 주의 품에 기댄 자(그는 요한이다)에게 베드로가 직접 물어보라 눈치를 보냅니다. 그러자 당돌하게 '주여 누구이니까'(25절) 묻습니다. 주님을 떡을 떼어 주었고, 그때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갑니다. 유다가 나가자 그때는 이미 밤이었습니다. 너무나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그는 밤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제자들은 서로 의심하고, 유다는 마귀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 버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은 죽음으로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 심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 논쟁합니다. 이게 공생애 3년의 결과일까요? 예수님의 가르침도, 수고도 허사가 되었습니다.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유다의 배신이 치명적인 이유는 그가 돈 궤를 맡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즉 가장 머리가 좋고, 신임하는 자였다는 것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것입니다. 사탄도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모신 천사장이었으니... 유다가 그렇게 한 것도 무리가 아닌 듯합니다. 사랑을 가장 많이 준 자가 배신하는 것입니다. 귀신의 거처가 되어버린 가룟 유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자멸의 길로 걸어갑니다.

      우리는 유다의 선택과 삶의 경로를 따라가면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인간은 지식과 이성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영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처음 사단이 속살일 때 단호하게 뿌리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받았고 간직했습니다. 결국 싹이 나고 줄기가 나고 유다의 마음에 가득 채워 버렸습니다. 시편 1:1과 너무나 닮아있습니다.

      •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반했는가?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이유를 몇 가지로 살펴봅니다.

      첫째, 유다는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선택되었지만(요 6:64)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았던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는 심지어 예수님이 메시아 (유다가 이해하는 메시아)라고 확신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유다는 결코 예수님을 향해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고, 그 대신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며 선생 이상으로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때때로 믿음과 충성을 드러내는 위대한 고백을 하였지만(요 6:68, 11:16), 유다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고 침묵하였던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믿음의 부족은 아래 열거된 다른 모든 고려 사항의 근간이 됩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즉,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으로, 그리고 죄 사함과 함께 영원한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시각으로부터 비롯되는 수많은 다른 문제들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유다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도 거의 없거나 전혀 갖지 못했습니다.
      공관 복음서가 열두 제자 명단을 나열할 때, 조금씩 변화는 있지만 항상 똑같은 일반적인 순서로 열거됩니다 (마태복음 10:2-4; 마가복음 3:16-19; 누가복음 6:14-16). 일반적인 순서는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있어서 상대적인 친밀감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약간의 변화는 있더라도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야고보와 요한은 언제나 가장 먼저 나열되어 있으며, 이것은 예수님과의 관계와 일치합니다.
      유다는 항상 마지막으로 열거되어 있는데,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게다가, 예수님과 유다 사이의 대화 가운데 유일하게 문서화된 대화는 유다가 마리아에게 탐욕적인 동기를 가지고 말한 것 때문에 예수님께 책망 받은 것 (요 12:1-8), 배신에 대해서 유다가 부인한 것 (마 26:25), 배신 그 자체 (눅 22:48) 입니다.

      셋째, 우리가 요한복음 12:5-6에서 볼 수 있듯이, 유다는 탐욕에 사로 잡혀서 예수님 뿐만 아니라 동료 제자들의 신뢰를 배신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유다는 단지 예수님에게 많은 추종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단체를 위해 거둬지는 모금으로부터 이익을 취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했을 수도 있습니다.
      유다가 그 그룹을 위한 돈 가방을 맡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관심이 돈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요 13:29).

      또한 유다는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메시아가 로마의 식민지배를 전복하고 이스라엘 국가를 다스릴 권력을 행사할 지위를 취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유다는 새로운 지배 정치 세력으로 부상할 그분과의 연관을 통하여 이익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랐을 수도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혁명 이후 자신이 지배 엘리트 중 한 사람이 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유다가 배반할 무렵에 예수께서는 로마에 대한 반란을 시작하지 않고 오히려 죽을 것을 계획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가 로마를 전복시키지 않는다면 자신이 기대했던 메시아가 결코 아니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이 배신을 가리키는 성경 구절들이 몇 있는데, 어떤 구절들은 다른 구절들보다 더욱 구체적입니다.
      다음은 두 구절입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편 41:9; 마태복음 26:14, 48-49 에 나오는 예언 성취 참조).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스가랴 11:12-13; 스가랴의 예언 성취는 마태복음 27:3-5 참조).
      이러한 구약의 예언들은 유다의 배반이 하나님께 알려져 있음을 나타내며, 그 배반은 예수님이 죽임을 당할 수단으로 주권적으로 미리 계획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만일 유다의 배신이 하나님께 알려져 있었다면, 유다에게 선택권이 있었습니까? 또한 배신에 대하여 그에게 책임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유 의지”의 개념과 미래의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를 조화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는 주로 직선의 방식으로 시간을 지나는 우리의 제한된 체험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모든 것을 창조하신 시간 밖에 계시는 하나님을 본다면, 하나님은 모든 순간을 현재처럼 보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직선적인 방식으로 시간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시간을 직선으로 보고,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점차적으로 움직입니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과거는 기억하지만, 우리가 접근하고 있는 미래를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을 지으신 영원한 창조주이시므로, “시간 안”이나 시간의 선 상에 계시지 않고 시간 밖에 계십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시간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원으로 생각하고 모든 점이 그 중심과 동등한 거리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무튼, 유다는 적어도 사탄이 그에게 들어가는 시점 (요한복음 13:27) 까지는 주어진 선택을 맘껏 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예지 (요한복음 13:10, 18, 21)는 결코 유다의 선택 능력을 대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다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선택할지 하나님은 마치 현재를 보는 것처럼 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선택에 대해서는 유다에게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마가복음 14:18). 예수님이 유다가 배신에 참여하는 것을 분명하게 한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이 배반에 대한 책임에 관해서 예수께서는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마가복음 14:21)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 26-27에서 볼 수 있듯이, 사탄도 이 부분에 참여했으며, 그는 또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그러하신 것처럼, 그분의 지혜 가운데 인류의 이익을 위해 사탄의 반란까지 다스릴 수 있으셨습니다. 이에 사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보내고, 십자가에서 죄와 죽음이 패배하게 하고, 이제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허락되도록 하는 일을 도왔을 뿐입니다.

      12-13-2024(금) 요한복음 13:16-2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알고 행하면(17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Now that you know these things, you will be blessed if you do them.

      알고(에이도) 1492  εἴδω  스트롱번호1492

      1. 보다.   2. ㉠ 별을 보다.  3. 눅 7:22
      발음 [ ĕidō ]

      보다(마2:2, 막1:10, 요1:39), 알다(마2:16, 막10:42, 요9:25), 뵙다(마28:17), 보이다(막12:15), 당하다(행2:31, 13:36), 시인하다(딛 1:16), 알리다(눅2:15), 의논하다(행15:6).


      기노스코(γινώσκω) - "알다" / 체험. 경험하다

      마태복음 1: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기노스코) 아니하더니.

      누가복음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기노스코)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오이다 / 에이도 / 호라오 -  "알다" / 이 단어는 "보다"는 뜻에서 출발한 단어

      세 단어 중에서 호라오(ὁράω)는 (눈으로)보다는 뜻으로 많이 쓰입니다.
      환상과 같은 것을 볼 때 이 단어가 주로 쓰이는데 은유적으로나 영적으로 본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이도 / "보다"는 뜻인데 "알다"는 의미로도 사용합니다.
      영어로는 see에 해당합니다.
      호라오와 에이도(εἰδῶ)를 같이 취급하는 이유는 호라오의 과거(aorist)는 εἴδομεν(에이도멘, we saw)
      “보라/볼찌어다”는 Ἰδοὺ(이두, 2인칭 과거명령)일 정도로 에이도와 호라오는 의미와 어미변화가 같기 때문입니다.

      ​영어로 I know 와 I see 의 차이는?

      모두 "알다"는 의미이지만 전자는 "충분히 잘 알았다"이고, 후자는 단순히 알았다는 뜻입니다.
      후자는 단순한 정보를 알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전자는 정확히 알게 되었을 때를, 후자는 약속 시간과 같은 가벼운 사실 등을 알게 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헬라어 오이다/에이도/호라오는 영어의 I see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세 단어가 보다/알다는 의미가 된 것은 헬라어 동사 변형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변형이나 의미가 서로 비슷하고 그래서 그런지 변화된 형태도 같습니다.

      ​호라오라고 하지만 (역 숨표 ( ̔ ) rough breathing) 때문에 호라오라고 발음할 뿐 낱말로 하면 오라오입니다. 예수를 브라질에선 "헤수스"라고 발음하는 것처럼, 토트넘 선수 Richardson을 히알리송이라고 발음하듯이.
      오이다(οἶδα)는 에이도의 현재완료형인데 워낙 많이 쓰이다 보니, 이형(variant)이 기본형이 된 경우입니다.

      ​영국 철학자 베이컨의 유명한 말이 있는데 "아는 게 힘이다"입니다.
      Knowledge is power라고 하지요.
      여기 "날리지"는 기노스코라는 헬라어 "알다"(know)라는 동사의 명사입니다.
      영어로 헬라어로는 그노시스(γνῶσις)라는 명사입니다.
      헬라어로는 지식, 앎이 g(그) 발음으로 되는데, 영어로는 그것이 k(크)로 바뀝니다.

      ​베이컨은 영국의 경험주의(empiricism) 철학자입니다.
      "경험주의"는 모든 지식의 기원이 경험에 있다는 것입니다. 경험주의라는 영어 단어(-pir-)는 πεῖρα(페이라)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했는데, 시험하다, 검증하다는 "페이라조"에서 유래했습니다. 경험주의는 탁상공론이 아니라 실험실과 현장에서 검증된 것을 우선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프란시스 베이컨, 그는 일개 철학자가 아닙니다.
      그는 영국의 대법관이고 과학자였습니다.
      그는 "과학 혁명의 아버지"라는 칭호로 불릴 정도로 현장 지식과 첨단 지식의 선구자였습니다.
      경험주의는 오직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실과 사물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인데, 사도 도마와 같이 만져봐야 믿겠다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이런 철학이지요.
      그는 시무언도 언젠가 한 번 말씀하신 우상(idola)을 없애야 한다고 했지요.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따라서 베이컨이라는 과학적 지식이 풍부한 철학자가 말하는 것은 경험이 힘이라는 것이지요. 아는 게 힘이라는 것은 경험이 힘, 현장이 힘이라는 말인데, 한국에서는 이 경구가 공부를 하라는 말로 많이 사용되지요. 공부를 많이 하면 권력자가 된다는 의미가 아닌데 말입니다.

      당시 영국은

      나침판이 도입되면서 섬 나라에 날개가 생기는 새 시대를 맞이합니다. 해양과 과학 시대를 맞이하여 이런 경험주의 사상으로 전세계를 정복하는 대영제국이 되었지요. 당시 다윈의 진화론이 인기였던 이유는 이론이 특이하다는 것도 있겠지만 그가 그보다 놀라운 것, 즉 해외에서 새로운 지식을 영국사회에 가져왔기 때문이지요. 새로운 경험 시대에 새로운 지식.
      당시 지식은 이탈리아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 이성주의가 휩쓸었지요.
      그 원조는 중세 스콜라주의이지요. 현장은 없고 이론만 있는, 폐쇄형 사회에서 일어난 학문이었지요.
      아무튼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꼬지또 에르고 쑴, cogito ergo sum)"
      이 문구는 생각/이성에 방점을 둡니다. 경험이나 행동에는 특별한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이론 위주라 할 수 있지요.
      이런 지식주의, 교리주의를 버린 영국의 경험주의 세계관은  현장 중심, 체험적 지식 존중으로 발전하여 전세계를 정복하여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대영제국을 만든 것이지요.
      에이도는 원래 "보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see 에 해당합니다.
      영어로 I know 와 I see 는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두 문장 모두 “나는 알아”이지만 전자는 "충분히 잘 알아"이고, 후자는 단순히 알다는 뜻입니다.
      단순한 정보를 알았다는 것이지요. 만져보거나 확인하지 않은 지식, 눈으로만 본 것과 같은 지식이라는 말입니다.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경험적 지식은 기노스코, 머리와 이성으로 이해하는 지식은 에이도입니다.
      따라서 전자는 정확히 알게 되었을 때를, 후자는 약속 시간과 같은 가벼운 사실을 인지했을 때를 의미한다.
      에이도는 변형이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헬라어 에이콘/영어로 아이콘입니다.
      핸드폰에 어플 그림이 아이콘이지요.
      형상이라는 말인데 보이는 형상이라는 의미입니다.
      만질 수 있는 게 아니라 볼 수 있는 형상.
      성경에 보라, 볼찌어다, 보소서 등의 말이 많이 나옵니다.
      영어로 하면 lo, behold, look입니다.
      헬라어로 이두(ἰδού) 혹은 이데(ἴδε)입니다.
      철학용어 플라톤의 이데아(IDEA)를 "형"(形)이라고 하지요. 형이상학, 형이하학에서 형은 보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이다 / 에이도와 기노스코의 차이를 말해주는 성구 :
      요한복음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오이다)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기노스코)"

      ​성령을 받기 전에는 알아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이지요.
      보아도 보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을 보게 되고 알게 되고 체험한다는 것이지요.
      제자들은 3년간 최고 스승이신 예수께 교육과 훈련을 받았어도 기노스코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성령 받기 전과 후는 차이가 분명합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듣고 보고 주목하고 손으로 만지게 되기 때문이지요.



      행하면(포이에오. pŏiĕō) 4160  ποιέω 스트롱번호4160

      1. 하다.  2. 제조하다. 3. 행하다
      발음 [ pŏiĕō ]

      관련 성경  /  행하다(마1:24, 몬1:21), 맺다(마3:8, 7:18), 짓다(마17:4, 막9:5, 눅9:33), 만들다(눅11:40, 요4:46), 베풀다(마22:2, 눅10:37, 14:13,16), 얻다(마23:15), 남기다(마25:16), 지키다(마26:18), 시키다(마26:19), 세우다(막3:14, 히8:9), 행하다(요14:13,14), 피우다(요18:18), 이루다(행4:28), 실행하다(행11:30), 떠나다(행18:23), 가지다(행24:17), 지내다(고후11:25), 머물다(약4:13), 일으키다(계11:7), 지어내다(계22:15).

      복(3107) 마카리오스(makariŏs) μακάριος, ία, ιον 스트롱번호 3107

      1. 복된.  2. 행 26:2. 3. 마 5:3
      발음 [ makariŏs ]
      관련 성경  / 복 있는(마5:3, 눅6:21, 고전7:40), 복된(눅14:15, 딤전6:15), 복이 되는(눅14:14), 복스러운(딛2:13), 다행한(행26:2), 복 받을(약1:25).

      요한복음 13장 1절부터 11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던 선생이 제자를 주가 종을 섬기는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12절부터 20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의미와 이에 대한 적용을 말씀합니다.

      12절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묻습니다.
      이 질문은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긴 진정한 의도,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라는 말씀이고, 더 나아가서 이렇게 묻는 것은 "너희들의 삶 가운데 나의 행한 것과 같은 모습으로 행하여야 할 것" 이라는 의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내가 행한 것처럼 너희들도 행하라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17절에서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긴 의도와 의미를 잘 알고 행하면 복이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

      알고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율법 속에 담긴 하나님의 깊은 뜻을 바로 알지 못하고 행하는 모습에 대한 책망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도 율법을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바로 알지 못했기에 예수님께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본보기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의도하셨고,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보면 우리의 행할 길, 우리의 갈 바, 우리의 할 바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하셨던 그 말씀 속에 담긴 의미를 통해서 우리에게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소금이 되라!

      소금은 귀금속이 아닙니다.
      실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귀금속은 없어도 음식을 만들 수 있지만 소금이 없으면 음식의 맛있게 조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란 음식에 소금이 녹아들지 못하여 세상은 점덤 더 깊은 수렁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라!

      빛은 형체가 없습니다.
      형체가 없지만 빛이 들어가면 모든 형체를 드러나게 보여줍니다.
      세상이 어지러운 이유는 빛이 세상에 들어가 그 기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결과 거짓 지도자들이 자기 정체를 볼 수 없어서 마치 자기가 옳은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나는 옳지만 다른 사람은 부정하다고 소리칩니다.
      자리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선동질을 합니다.
      빛이 없으므로 그 아우성은 점점 더 크게 울려퍼집니다.

      기본이 무너진 세상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공의를 실현하는 길은 믿음의 사람들이 먼저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소금과 빛으로 일어납시다!

      하나님의 진리 등대




      독일의 메르켈(Angelika Merkel) 전 총리를 기억하나?
      2021년 12월 7일 퇴임했지만 여전히 존경받는 최고의 지도자다.
      왜냐하면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섬기는 리더십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메르켈은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였다. 무려 4번 연임하고 16년 동안이나 재임했고, 4년 연속 포브스(Forbes)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였다. 종교에 냉담한 공산주의 사회에서 목사의 딸이었으니 얼마나 불리한 조건이었나? 원래 전공도 물리학이었다. 양자 화학 분야의 박사였는데 헬무트 콜에게 발탁되어 여성청소년부 장관, 환경, 자연보호, 원자력부 장관을 지냈고, 2005년 11월 22일부터 독일 총리가 되어 독일을 이끌었다. 그에게 따라다닌 별칭은 ‘엄마(Mutti) 리더십’, 철저히 양극단을 배제하면서 화합과 포용으로 나라를 이끌었기에 붙여진 별칭이다. 이게 바로 발을 씻어주는, 섬기는 리더십, 그녀의 리더십은 이념 따지고 편 따지고 과거 따지는 권위적 리더십이 아니었다.

      메르켈은 총리 재임 중에도 늘 동네 아줌마 같았다.
      옷도 항상 똑같은 옷, 사람들이 왜 매일 같은 옷을 입냐고 물으면 “나는 패션모델이 아니고 공무원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전혀 권위적이지 않았다.
      돋보이려고 기 쓰지도 않았고, 경직되지도 않았다.
      그저 타인의 발을 씻어주겠다는 열린 마음을 가진 섬기는 리더였다.

      메르켈은 예수님을 본받은 삶을 살았다.
      아마 목사의 딸로 자라며 그렇게 배웠을 것이다.
      예수님은 몸소 섬김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를 살리셨다.
      우리를 높이셨다.
      그리고 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하셨다. 단순히 섬기는 삶이 아니라 살리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안다는 것과 행하는 것은 별개이기에 제자들은 물론 우리도 알고 있는 일을 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복된 삶을 살기 때문이다.

      앙겔라 도로테아 메르켈(Angela Dorothea Merkel. 1954. 7. 17- 현재)
      2005년부터 2021년까지 재임했던 독일의 제8대 연방총리.
      독일 역사상 최초로 연방총리직에 오른 여성.
      동독에서 물리학자로 활동한 후 통일 과정에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헬무트 콜 내각에서 환경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2000년에 독일의 보수 정당인 기독교민주연합의 의장직에 취임한 이후 2005년 총선에서 제1당을 차지했지만 어느 세력도 과반을 점하지 못한 헝 의회가 발생하자, 메르켈은 사회민주당과 대연정을 구성하여 총리직에 올랐다. 2009년 총선에서는 더 보수적인 성향의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했지만, 2013년 총선에서는 다시 헝 의회가 발생하여 대연정을 구성하였다.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그리스 경제 위기와 우크라이나 분쟁, 시리아 난민 사태 등 국제적 현안이 제기되었으며,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메르켈은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2006년부터 2015년까지 2010년을 제외하고, 포브스는 메르켈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에 선정하였으며[1], 2015년 '타임'은 '자유 세계의 총리(Chancellor of the Free World)'이라는 이름으로 '올해의 인물'에 선정하였다.[2]


      어떻게 하면 복이 있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잘 알고 행하면 너희에게도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을 닦아주시는 일입니다.
      “세족식”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없고 오직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의 사랑은 이런 사랑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쳐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

      사도행전 20:35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고 했잖아요?” 

      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 딸이 시집갈 때 가르치는, 지혜로운 아내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딸아 만일 네가 남편을, 왕처럼 존경한다면, 그는 너를 ‘여왕’처럼 대우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자존심’을 내세워서, 남편에게 봉사하기를 싫어하면, 그는 힘으로 너를 하녀같이 부릴 것이다.
      남편을 극진히 대접하라. 그러면 남편은 네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워 줄 것이다.”

      “21세기를 이끄는 경영철학”이 뭘까요?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랍니다.
      “서번트 리더십”? servant-머슴, 하인, 즉 종입니다.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 바로 예수님께서 실천하신 발을 닦아주는 봉사헌신입니다.

      “포춘”이라는 미국의 경제전문지에서, 세계 100대 기업의 회장, 사장, 리더들, CEO들에게 물었습니다.
      “회사에서 리더, 사장, 회장, 지도자들, CEO들은 무엇입니까?”
      “리더, 사장 회장 CEO 종이다. 종이라는 마음으로 회사를 경영하고 사원들을 대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Servant leadership, 예수님께서 실천하신 섬김의 정신, 종의 정신, 봉사의 정신으로 회사를 경영하고 사원들을 대하고 있더랍니다.

      서번트 리더의 특성

      • 인내

      위기상황일수록 인간은 여러 가지 충동을 억제하기 힘들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동이 아닌 원칙에 따른 대응을 할 수 있는 인내심을 함양하는 것은 리더십의 본질이다. 서번트 리더는 그 중에서도 특히 인간관계에서의 인내와 자제를 중시하며 분노를 잘 참을 줄 아는 사람이다. 조직 구성원들은 리더가 마음대로 대해도 되는 대상이 아니다. 서번트 리더는 직원들의 존엄성을 존중하면서 감정을 앞세우지 말고 올바른 방식으로 직원들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야 한다.

      • 친절

      친절의 사전적 의미는 ‘타인을 향한 관심과 이해, 격려의 표현’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타인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친절을 베풀기 위해서는 관심을 표현해야 하며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원만한 관계는 타인을 인정하고 격려하며 예의를 갖추는 데서 비롯된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숨어있음으로 친절은 이러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중요한 속성이다.

      • 겸손

      겸손이란 진실하고 가식이 없으며 거만하거나 뽐내지 않는 것이다. 겸손한 리더는 자신의 가치관과 도덕성에 부합하거나 옳은 일이라고 판단될 때에는 주어진 임무나 목표를 향해 강한 열정과 추진력을 보인다. 겸손한 리더는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러한 자신의 실체를 비하하기 보다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열등감을 갖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한 리더는 언제나 타인의 견해에 귀를 기울이고 반대 의견도 폭넓게 수용한다. 또한 겸손한 리더는 타인의 가치를 인정하고 스스로를 부각시키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존중

      훌륭한 서번트 리더는 언제 어떤 경우든 주변 사람들을 소중한 존재로 대한다. 상대방에게 존중을 표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을 위임함으로써 그들의 성장과 자기계발을 돕는 것이다. 적정 수준의 위임은 당사자의 능력과 기술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서번트 리더에게 있어 모든 사람은 소중한 존재로 다만 직무와 책임의 차이, 그리고 그 책임의 달성 여부에 따른 시장의 보상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 무욕

      무욕이란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서번트 리더는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해야 하며 우리의 기대와 욕구보다 타인들의 최선을 기꺼이 추구하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서번트 리더십은 타인을 고치고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변화,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 집 앞마당부터 깨끗이 치울 때 비로소 아름다운 거리가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용서

      용서의 정의는 적대감을 극복하는 것이다. 리더의 주변 사람들은 예외 없이 실수를 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리더는 타인의 한계와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인내하는 기술(습관)을 배양해야 한다. 아울러 사람들로 인해 상처받거나 낙담하면서 생겨나는 적대감을 극복하는 기술도 배워야 한다. 용서란 그릇된 행동이 낳은 결과를 당사자들과 충분히 이야기하면서 적대감을 조금씩 극복하는 과정을 말한다.

      • 정직

      정직은 속이지 않는 것이다. 정직은 신뢰를 형성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정직한 리더와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도 무거운 책임의식을 느낀다. 직원들에게 책임의식을 부여하는 것은 리더의 몫이다.

      • 헌신

      헌신은 선택에 충실한 것으로 정의되어 있다. 강한 의지와 헌신적인 노력 없이는 지금껏 언급한 모든 자질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 최고의 서번트 리더는 자신의 선택을 충실히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서번트 리더십은 개인과 조직 모두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헌신과 열정을 요구한다. 약속을 준수하고 시작한 일을 마무리하려는 열정, 올바른 일을 추구하고 최선의 존재가 되려는 열정, 이 모든 것들이 서번트 리더십의 필요조건이다. 팀원들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서번트 리더십의 본질이다. 헌신이란 올바른 길을 추구한다는 도덕적 용기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도덕적 용기란 내면의 양심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를 듣겠다는 의지, 생소하고 개인적인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올바른 일을 하겠다는 의지를 말한다. 또한 직원들이 올바른 행동을 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제거해주겠다는 단호한 결의도 여기에 포함된다.

      • 타인의 욕구 충족

      서번트 리더는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킬 줄 알아야 한다. 이 때 주의할 점은 타인의 욕구와 욕망을 명백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번트 리더는 일종의 봉사자이다. 그러나 타인의 욕구가 아닌 욕망을 충족시키는 리더는 봉사자 보다는 노예에 가깝다. 욕구는 'Need'의 개념으로써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요구되는 물질적 또는 심리적 요구 조건’을 뜻한다. 욕구의 예는 ‘자아실현의 욕구’, ‘의미와 대의를 향한 욕구’, ‘존중 받고 싶은 욕구’, ‘뛰어난 조직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 등으로 정신적 가치와 관련과 깊다. 반면 욕망은 'Want'의 개념으로써 ‘물질적 또는 심리적으로 특별한 중요성이 없는 단순한 바람 또는 희망’을 의미한다. 욕망의 예는 봉급, 승진, 휴가 등으로써 물질적 가치와 관련된다.

      권력의 정의는 ‘타인의 선택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지위나 힘을 이용하여 타인이 자신의 의도대로 행동하도록 강요 또는 강제하는 능력’이다. 반면 권위는 ‘자신의 개인적 영향력을 통해 타인이 자신의 의도대로 기꺼이 행동하도록 하는 기술’을 뜻한다. 따라서 권력과 권위는 엄연히 다른 개념인데 서번트 리더십은 이 중 권위에 기반하여 형성된다. 권력은 직함이나 지위 등으로부터 형성된다. 리더가 권력을 통해 조직 구성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권위가 결여된 이러한 영향력은 일반적으로 오래 유지될 수 없다. 권력을 통해 장기간 지속되는 영향력은 리더와 조직 구성원 간의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저해시키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권위는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봉사’와 ‘희생’의 정신으로부터 형성된다. 권위를 바탕으로 한 리더는 조직 구성원의 건설적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이를 통해 조직 구성원은 리더의 인격체 자체에 대한 존경심을 갖게 된다. 따라서 권위를 매개체로 한 리더와 조직 구성원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며 이러한 권위로부터 생성된 서번트 리더십은 조직 구성원에 대해 강하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갖는다.

      전통적 리더십과의 비교

       

      그래서 세계 100대 기업이 된 것입니다. 그런 기업이 ‘복’을 받더라는 것입니다.

      미국에 씨어스(Sears department store)라는 백화점은 창립해서 100년 동안 미국 내, 2350개 백화점 매장과, 그리고 1천1백개 할인 소매 점포를 소유한 대기업입니다.
      이 거대한 기업체가 가지고 있는 경영철학이 뭘까요? “손님을 왕으로 섬긴다”
      1세기에 들어 우리나라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섬기는 리더쉽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손해냐, 이익이냐 그것을 따지지 않고, 종의 자세로, 섬김의 자세로 일하는 개인과 기업이 성공을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조건 먼저 섬기고, 헌신하는 사람이,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경에서 우리 예수님의 Servant leadership 입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예수님은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마태복음 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발 씻김의 의미(요한복음 13:1~20)

      요한복음 13장은 요한복음 전반부(1~12장, 표적의 책)가 끝나고 후반부(13~20장, 영광의 책)가 시작되는 부분에 있습니다.
      후반부는 다시 13장~17장까지가 예수님의 고별사이고, 18~20장까지가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2:1~12:50절의 표적들의 책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와서 사람들에게 많은 표적들과 강론을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했는가?
      그러나 빛보다 암흑을 선호한 대다수 사람과 유대인에 의해서 거절이 되었는가를 말씀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37절을 보면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였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셔서 하나님을 계시했으나 그들이 그를 믿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서론에 해당하는 1:11절의 의미를 다시 한번 확인한 셈입니다.
      즉, 요한복음 1:11절을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의 책(13장~20장)은 표적들의 책(1장~12장)이 말씀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표적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표적들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그를 믿게 된 소수의 사람에게 예수께서 말씀을 하신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광의 책의 주제는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돌아감이 주제입니다.

      반면 표적들의 책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온 표적과 계시로 하나님을 계시함이 주제였습니다.
      영광의 책의 아버지께로 돌아감은 요한복음 12:32절에 예언된 대로 그 사람의 아들이 들림 받으심입니다.
      들림 받음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 이끌게 되는데(요한복음 12:32), 그것은 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지표(地表)에서 들림 받음을 시작으로 해서 부활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높임을 받으심과 성령을 통해서 부활하시고 영광 받으신 주는 그의 백성 가운데 주로 임재하심으로 절정에 도달하게 됩니다.

      특별히 영광의 책(13~20장)은 십자가에 못 박힘을 그의 영광 받으심이라고 지칭합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구원의 사랑을 계시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인류를 위해서 내어 주심을 나타냅니다.
      곧 하나님의 사랑이심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힘은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내어 주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나타냅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계시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 됨을 나타내는 사건입니다.
      수난의 사건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나타냅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계시자, 하나님과 같은 분으로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영광 받음입니다.

      요한복음 13~17장까지는 긴 예수님의 고별사로 되어 있습니다.
      고별사를 시작하기 전에 13:1-30절에 하나의 표적이 소개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는 Sign 행위로 시작이 됩니다.
      이 표적이 유월절 잔치 때 일어납니다.
      상황은 지금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의 장면입니다.

      요한복음은 최후의 만찬의 장면은 있고, 또 최후의 만찬의 의미가 요한복음 13장, 15장, 특별히 요한복음 6장에 집중적으로 강해 되어 있지만, 최후의 만찬을 성만찬으로 되풀이하라는, 즉 그것을 계속 기념하라는 말씀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떡의 말씀과 잔의 말씀이 이곳저곳에 나타나고, 그 말들의 의미가 요한복음 6, 13, 15장 등에서 해설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그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함의 표징으로 식탁을 대하고 둘러앉은 이들의 발들을 씻기는 장면입니다.
      당시 유대 종들은 상전의 발을 씻기는 의무를 갖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귀한 손님이 왔을 때는 노예, 그것도 이방인 노예에게만 손님의 발을 씻기는 일을 시켰습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예수님이 식사 전이 아니라 식사 도중에 발을 씻겼다는 것입니다(3절).
      예수님께서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었다는 것은 바로 유대 상전에 대한 종의 위치보다 더 낮아진 행위입니다.
      한 마디로 낮아진 행위입니다.

      ​“카타바시스”(catabasis)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입니다.
      "카타바시스”(catabasis)는 낮아진 행위, 낮아짐의 극치입니다.
      예수께서 위 세상에서 내려오신 분인데 내려오심의 극치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연극으로 이루어집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상태, 이제는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κατάβασις 스트롱번호 2600

      1. 비탈.   2. 비탈길. 3. 눅 19:37.
      발음 [ katabasis ]
      어원  / 2597에서 유래
      • 1.  비탈, 비탈길. [명사]  눅19:37.
      • 관련 성경  /  내리막길(눅 19:37).

      그의 아버지께로의 돌아감, 곧 그의 영광 받음, “아나바시스”(anabasis)가 시작되려는 가장 낮아짐의 상태는 십자가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발 씻김은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해설입니다.
      극이요 드라마입니다.
      이 발을 씻긴 극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론적인 의미가 있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 모범의 범주로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ἀναβαίνω 스트롱번호 305

      1. 올라가다.  2. 마 5:1. 3. 마 17: 27
      발음 [ anabainō ]
      • 관련 성경  /  올라오다(마3:16, 막1:10), 올라가다(마5:1), 자라다(마13:7), 오르다(막3:13), 향하다(눅19:28), 넘어가다(요10:1), 보내다(행15:2), 생각하다(고전2:9), 일어나다(눅24: 38), 상실하다(행10:4), 들어가다(행21:4), 들리다(행21:31), 널리 퍼지다(계20:9).




      카타바시스(catabasis)와 아나바시스(anabasis)

      예배의 본질은 독백 (monologue)이 아니라, 쌍방의 대화 (dialogue)이다.
      즉 예배에 참여하는 두 인격체의 “대화적 행위”를 의미한다.
      예배 인격체는 예배를 받으시는 삼위하나님과 예배를 드리는 그의 백성인 사람이다.
      이 두 인격체 사이에서 예배 가운데 일어나는 일체의 의미 있는 인간행위(actus humanus)들은 모두가 예배적 행위이다.

      예배에 있어서 이 두 측면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카타바시스와 아나바시스”라고 부른다.

      카타바시스(Catabasis: God’s Decent to Man)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내려오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의미한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계시 행위로 구현되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 행위는 말씀과 행위로 나타났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기 위해 말씀 계시를 주시고 그리고 실제 행동으로 성취하셨다.
      한마디로, 카타바시스는 하나님의 ‘아래를 향한’(downward) 행위이며, 구원론적 행위 (divines salvific action)이다.

      아나바시스(Anabasis: Man’s Ascent to God)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응답행위를 의미한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받아들임으로 인간 내적 행위인 믿음과 외적 응답 행위인 예배 행위가 발생한다.
      아나바시스는 인간의 ‘위를 향한’(upward) 행위이며, 예배적 행위 (human liturgical action)를 의미한다.

      카타바시스와 아나바시스는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 둘은 하나의 통일체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구원론적 통일체’(salvific unity)이며, ‘예배학적 통일체’(liturgical unity)이다.
      물론 이 말은 신적인 행위가 부족하여 인간의 행위로 완성되고 보충되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
      어떤 인간의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의 존재를 규정할 수는 없다.
      우리가 예배적 영광(human liturgical doxa)을 돌리지 않더라도 그 분은 스스로 신적 존재론적 영광(divine ontological doxa)을 가지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예배자로 부르셔서 교회를 삼으셨다.
      이 구원론적이고 예배학적 통일체가 된 교회 공동체의 예배 안에서 의미 있는 다양한 방법과 상징과 언어와 표현들로 구현된다.
      이런 점에서 예배는 매우 신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공예배는 바로 이러한 신학적 미학을 담고 있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존재하는, 하향의 카타바시스와 상향의 아나바시스의 커뮤니케이션은 예배의 정의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지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해준다.
      그리고 이것은 예배의 두 방향과 요소를 결정하고 규정한다.






      1절을 보면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끝까지”라는 말은 “에이스 텔로스”로서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시간상으로 텔로스는 “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끝까지 자기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강조의 의미에서 “최종 목적”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경우, 자신의 구속 사역의 목적을 완성하기까지 자기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그 목적(텔로스)을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라고 하십니다. 텔로스의 두 가지 의미 모두 십자가 사건을 그 정점에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그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기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신, 구원 사적인 의미와 윤리적인 범주로서의 의미를 다 가진 것이 세족식입니다.

      본문의 구조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은 크게 4~11절과 12~17절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전자는 세족식의 교리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고, 후자는 세족식의 윤리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윤리적인 모범의 범주에 집착을 해왔습니다. 예수님의 겸손, 섬김의 도를 보라는 윤리적 모범의 범주로만 해석하였는데, 사실은 이것은 이차적입니다. 일차적인 것은 예수님이 백성을 죄로부터 깨끗이 씻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치는 일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자기는 씻지 않겠다고 할 때 예수님께서 씻지 않으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상관(헬리어 : 메로스)이 없다는 말은 종말론적으로 받을 몫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속,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씻는다는 말은 제의적 용어입니다. “깨끗한”(카타로스)이라는 말이 요한복음에서 세 번 사용됩니다(10, 11, 15:3). 요한복음 15:3절을 보면 예수님의 말로 제자들이 깨끗하여졌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그의 백성이 예수님으로부터 죄 씻김을 받아서 그들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됨에 참여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언제, 어떻게 백성의 죄를 깨끗이 씻깁니까?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에서입니다. 그래서 발을 씻김은 내일 다가오는 자기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아주 극적으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을 사랑해서 그들을 씻기는 행위이고,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해서 그들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그들의 죄를 깨끗이 씻기는 행위, 죄를 속하는 행위임을 미리 설명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통 사랑의 행위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백성을 사랑해서, 그들의 죄를 씻어 가지고 속죄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함입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영생입니다. 그렇게 하는 일이 사랑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발을 씻기는 행위로 나타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윤리적, 모범의 범주로서 발을 씻김입니다.
      본문 14~15절을 보면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세족식에서 본을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본”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휘포데이그마”라는 말의 기본 뜻은 “복사”입니다. 휘포데이그마는 마카비 시대, 다른 사람이 본받아야 할 순교적 삶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휘포데이그마”와 같은 어원의 단어인 “파라데이그마”는 구약에서 성전의 모형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출애굽기 25:9, 역대상 28:11). “파라데이그마”는 성전 건축을 위한 일종의 건축 모형인 셈입니다. 성전 건축가들은 이 모형을 보고 성전을 짓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새 성전의 모델이 되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새 성전으로, 성전 된 그의 제자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서로 섬김, 사랑입니다.

      유대 전통에서 “세족”은 크게 두 가지 경우에 시행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 들어갈 때, 자기의 손과 발을 깨끗이 씻어야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회막에 들어가기 전, 물두멍에서 자기의 손과 발을 정결하게 하였습니다(출애굽기 30:17~21, 40:30~32). 일반 유대인들은 제물을 제단에 드릴 때, 자기의 손과 발을 씻어 정결하게 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정결 예식은 성전 출입의 필수 요소였습니다. 세족의 또 다른 전통은 가정 방문 정결 예식입니다. 어떤 방문객이 한 집을 방문할 때, 집주인은 발 씻을 물을 제공하며 환대합니다(창세기 18:4, 19:2, 24:32, 누가복음 7:36~50).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 십자가에서 속죄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입니까? 새 언약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입니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는 새 언약의 공동체입니다. 새 언약의 공동체 교회에 언약이 구체적으로 어떤 표현으로 성립이 되느냐면 새 계명으로 됩니다.

      옛 시내산 언약은 모세율법으로 표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속죄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사랑을 통해서 이제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 자녀들의 공동체로서 예수 십자가의 죽음은 속죄의 죽음이면서 동시에 새 언약의 제사입니다. 새 언약의 공동체에 주어지는 새 언약은 무엇으로 표현이 됩니까? 새 계명으로 표현이 됩니다. 그래서 새 계명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 ”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서 탄생 되는 새 언약의 공동체는 온통 사랑으로 특징 지워지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그들을 위한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그들을 위한 사랑이 서로 간에 사랑으로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발을 씻김의 두 번째 의미, 즉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을 보이셨는데 사랑은 서로를 섬기는 것이라는 모범의 범주가 이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 하나는 자신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통한 관계 회복을, 그리고 자녀가 됨으로 하나님의 부요함. 즉 구원과 영생을 누리게 됨을 보이십니다. 철저한 낮아짐, 사랑의 극치를 보이심으로, 이 모든 구원의 행위가 사랑임을 강조합니다. 다른 하나는 새 언약의 공동체가 사랑의 공동체인데, 예수님의 자신들을 향한 사랑이 서로 사랑함으로 모범의 범주로서 계속 이루어지는 일이어야 함을 보이십니다. “카타바시스”(catabasis)일 때 비로소 “아나바시스”(anabasis)가 시작이 된다는 귀한 교훈을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발을 씻기는 극, 드라마를 통하여 일깨워주십니다. 왜 십자가의 죽음이(낮아짐의 극치, 카타바시스) 영광의 사건(높이심, 높아지심, 아나바시스)인가를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행위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역설적인 삶을 살아내는 자임을 강조합니다.

      1. 예수님을 선생으로, 주님으로 믿고 따라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

      14절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앉으신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는데, 너희가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 옳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자신을 <내가 너희 선생이다, 내가 너희들의 주다> 라고 확증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가 닮아가야 할 모범으로써 선생님, 내 삶의 가치와 기준이 되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잠시 좋은 감동을 받기 위해, 일시적인 위로를 얻기 위해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일시적인 감정이나 일시적인 의지를 따라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예수님은 내가 앞으로 남은 인생을 걸어감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안내자로써의 선생이십니다.

      지난번 제가 어디를 가는데, 핸드폰 네비게이션을 켜고 갈때, 바로 앞에서 좌회전 하라 해서 좌회전하고 들어갔는데, 따라 들어가 보니 막다른 길인 것입니다.
      인생의 네비게이션이 만약 이렇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네비게이션은 가장 확실하고 정확한 네비게이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우리의 선생이시며 또한 내 인생의 모든 방향과 길을 인도하실 가장 믿을만한 분으로써 주님이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윗사람에게 예의상 선생, 주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선생, 주라는 호칭은 결코 예의상 불러주는 그런 호칭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가르침 받기 원한다는 의미에서 <선생>이요,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기 원한다는 의미에서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선생이나, 주로 부르는 것이 맞다, 옳다 그렇다면 <내가 너희에게 주와 선생으로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 역시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 내가 <섬김의 모범>으로 발을 씻겼으니 너희 역시 나처럼 섬김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마태복음 11:28-29절에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리>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부모들은 부모대로, 자녀들은 자녀대로, 사장들은 사장대로, 종업원들은 종업원대로…. 이 쪽에는 이 쪽 입장이 있고, 반대쪽에는 그쪽 입장이 있습니다. 그렇게 수고를 하면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뿐만 아니라 각자 각자의 개인적인 짐들이 있습니다. 죄의 짐, 고민의 짐, 괴로움의 짐, 또한 병으로 인한 짐… 실패로 인한 짐등… 이런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인생들입니다.

      그들 가운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들의 수고를 안다, 너희들의 무거운 짐을 안다, 그 무거운 짐을 지고 휘청 휘청 걷는 것을 안다..> 하십니다. 너희 짐이 그렇게 무거우니 <내게로 와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어떻게 내가 너희들을 쉬게 할 수 있느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이다>

      쉼은 어디서 얻습니까? 부드러운 곳, 따뜻한 곳,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에서 얻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부드러운 안식, 따뜻함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리고 겸손하십니다. 교만하고 높은 곳에 쉼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느 집에 갔을 때 교만하고, 아래로 내려다 보는 곳에 평안이, 쉼이 있습니까? 불편한 곳에 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겸손하십니다.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신 분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까지, 죄인으로써 가장 낮은 자리 십자가의 자리로 낮아지신 분입니다. 그러니 그 분 안에 쉼이 있습니다.

      그리고<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짐을 지고 가면 무겁지만 주님께 내려놓고 주님께서 메어주신 멍에, 주님께서 이끄시는 멍에를 메고 주님의 이끄심을 따를 때, 주님께 배우며 따라 갈 때 그 때 우리 마음이 쉼을 얻습니다. 세상의 짐, 죄의 짐은 무겁지만 우리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습니다.

      진정한 복은 우리 예수님을 나의 평생의 인도자, 나의 평생의 삶을 이끄실 선생이요, 주님으로 믿고 그 분을 따라 행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내가 선생으로 주님을 본을 보였으니> <너희 역시 섬김의 삶을 살라 하십니다>

      주님의 본을 따라 <섬기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가장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 섬기는 자가 되셨습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는 것을 행복을 느끼신 것이 아니라 섬김으로써 행복을 누리셨고 우리 역시 이런 행복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주님을 만나 쉼을 누리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쉼에 만족하지 않고 주님의 길을 따르면서 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만족을 내려놓고, 세상의 기쁨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새로운 기쁨을 누립니다.

      오직 예수님을 여러분 인생의 안내자인 선생으로, 주님으로 믿고 따르시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분을 믿고 따른다면 그 분의 섬김의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가장 큰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자신의 위치를 알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

      16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예수님은 제자들에 간곡히 말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간곡히 너희들에게 부탁하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다는 것을 꼭 명심해라><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다는 것을 꼭 명심해라>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의 종들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종들이다,너희가 결코 주인 된 나보다, 하나님보다 크거나 앞설 수 없다" 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보냄을 받고 나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보냄은 받은 자가 어찌 보낸 자보다 클 수 있겠느냐? 사신이 왕보다 결코 크지 못하고 앞서지 못하듯이, 너희는 나의 보냄,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결코 주님보다 크지 못하고 앞서지 못한다… 이것을 진실로 진실로, 꼭 명심하도록 하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로써,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들로써 복 받는 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자세는 <나는 결코 주님보다 크지 못하며 결코 주님보다 앞서지 않으리라> 하는 자세입니다.

      한 여자 게스트의 체험적 고백

      언젠가 TV에 한 게스트가 체험적 고백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한 리조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멋있게 차려 입고 하이힐을 신은 한 여자가 그만 잘못하여 넘어지게 됩니다. 화가 난 이 여자가 웃었다는 이유로 이 사람의 뺨을 때리고 심지어는 무릎을 꿇리고 빌라고 했다고 합니다. 소위 말하는 갑질을 한 것입니다. 더군다가 상급 직원을 불러서 빌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릎을 꿇고 빌게 되었답니다. 너무나 억울해서 뛰어서 직원 숙소로 돌아와 통곡하며 울었답니다.

      그렇게 통곡하고 울고 나서 그 순간 결심을 하였답니다. "그래, 손님은 왕이다. 서비스 하는 사람도 전문가이다"

      대학 졸업후 그 회사에 면접을 보았답니다. 면접하는 사장 앞에서 이 회사를 지원하게 된 동기를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채용되었다고 합니다.

      긍정적으로 이겨내서 다행이고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경우지만, 세상에는 참 갑질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만함 때문입니다.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런 자의 인생이 복된 인생이라 할 수 있을까요? 돈이 많거나 혹은 권세가 있어 거들먹거린다고 그 사람의 인생이 복된 인생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참 섬김의 삶을 살아간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종이며, 주님의 보내신 자일 뿐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였던 이기풍 목사님의 복음 사역 뒤에는 윤함애 사모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선교는 유창한 설교나 심오한 신학강의나 놀라운 이적이나 화려한 프로그램보다는 사랑의 섬김과 사랑의 봉사로 이루어지는데, 윤함애 사모님은 사랑의 섬김과 봉사로 제주도 복음화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녀는 항상 머리맡에 약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도민들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한 그늘진 곳에서 울고 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떼들로 낮에는 한센병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손이 떨어진 한센병자들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고 합니다. 한센병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그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손양원 목사님의 사모님이었는데, 그분의 하나님 섬김과 남편 섬김과 한센병자들 섬김은 매우 귀중하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하나님을 향한 순교적 신앙을 가지게 된 데는 정양순 사모님의 기도와 격려와 섬김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여수경찰서에 수감된 지 10개월 후 손양원 전도사는 광주형무소로 이송되었는데, 이송되던 날 정양순 사모님은 자녀들을 데리고 여수경찰서 앞에서 잠시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 짧은 만남의 순간 정양순 사모님은 남편의 신앙을 격려하는 단 한 마디의 말을 전했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딸 손동희 권사님은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어머니는 성경 한 구절을 손으로 가리키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여기 이 말 아시지요? 신사참배에 응하면 내 남편 될 자격 없습니다. 영혼 구원도 못 받습니다.’ ‘염려 마오. 걱정 말고 기도나 해 주구려.’ 형사가 걸어와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잠깐 동안의 상면, 그리고 또 다시 긴 이별 … 아버지는 광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때 어머니가 펼쳐 보인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 10절이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때는 내 나이 어리고 생각이 짧아 그 상황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되어 그때 일을 찬찬히 되짚어 볼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들곤 한다.”

      손양원 목사님도 후에 그 사실을 자녀들에게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네 어머니 신앙이 오늘날 나를 있게 했단다. 감옥에 있을 때도 네 어머니가 신앙의 보조를 맞춰 주었기에 이기고 돌아 올 수 있었던 거야. 신앙도 손발이 맞고 호흡이 맞아야 함께 정진할 수 있는 거지, 혼자서는 어렵단다. 아무렴, 대학 열 군데 나오면 뭐해. 믿음이 중요하지.”

      정양순 사모님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섬긴 분이었고, 그 다음 남편을 섬긴 분이었고, 그리고 한센병자들을 섬긴 분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2주일간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9월 28일 밤 11시쯤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하여 48세에 순교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남편의 순교 소식을 접한 정양순 사모님은 남편의 시신 앞에서 비통해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 당신 소원대로 됐군요. 평소 주기철 목사님을 그렇게도 부러워했는데… 하나님, 감사합니다. 평생 동안 주의 일을 하게 하시고, 손양원 목사가 소원하던 순교를 허락해 주신 은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마지막까지 한센병자들의 친구로 살다가 1977년 11월 26일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는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가 운명하기 전 가슴에 꼬깃꼬깃 간직했던 돈을 꺼내어 딸에게 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돈을 밀양교회에 전해 주어라.” 밀양교회는 건축 중에 있던 한센병자 교회였습니다.

      보냄 받은 자, 종임을 알고 사신 분들입니다. 목회자만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누구든지 우리의 위치는 결코 주님의 보다 앞설 수 없고, 주님보다 더 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이요,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이 위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섬김의 기쁨을 누리기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내가 어떤 위치에 설 자인지 알고 사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3. 주님의 택한 자들임을 알고 행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

      18절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내가 택한 자들>이라고 하신 말씀은 처음부터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을 사도로 삼기 위해서 부르신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야고보와 요한을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역시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배와 자신들의 아버지 세베대를 남겨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렇게 모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자신들이 원해서 제자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셨습니다. <누구인지 앎이라>고 하심은 택하신 자 한 명 한 명의 성격과 기질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의 결과까지도 다 알고 계신다는 예수님의 전지 전능성을 보여주십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없이 우리가 어찌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었겠습니까? 부르신 주님은 12제자들의 한 명 한 명의 성격과 기질과 그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알고 계시듯이 전지전능하신 우리 주님은 우리 모두를 이렇게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누구인지 앎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요6:70)에서 보듯이 예수님을 배반할 가롯 유다까지도 그를 부르실 때부터 이미 그의 배반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보았듯이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 모두가 도망할 것과, 특히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은 30에 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 시 41:8의 인용이며 시55:12-14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 이 시편들은 압살롬의 반역을 배경으로 지은 다윗의 비탄 시입니다. 예수님은 가롯 유다의 모습을 다윗이 너무나 총애하던 모사 아히도벨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이 총애했던 인물이지만 압살롬이 자신의 아버지 다윗을 반역하고 다윗을 쫓아냈을 때, 이 압살롬과 함께 했던 인물입니다. 다윗으로서는 자신을 너무나 고통스럽게 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배반했던 아히도벨은 나중에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고향 집에 돌아가 목메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룟 유다 역시 예수님을 배반한 후 목매어 죽습니다. 가룟유다의 배신에 대해서도 다 알고 계십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확신시킵니다. 결코 <나의 택함 받은 자들임을 의심치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

      "나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나를 영접하는 것은 곧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보낸 자들을 영접하는 자들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메시야이시며 그분 예수님께서 복음을 위해 보낸 자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제자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주님의 보냄을 받은 자라는 확신과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말씀이, 주님의 뜻이 전해진다 라고 하는 사실에 결코 부끄러워 여기지 말고 확신하며 담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택함을 받고,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것을 알고 행하는 사람은 정말 복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을 선생으로, 주님으로 믿고 따라 행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자신의 위치가 종이며, 보냄 받은 자란 사실을 알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자신이 택함을 받아 주님을 증거하라 보냄을 받은 자임을 확신하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12-12-2024(목) 요한복음 13:12-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본을 보였노라(15절)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I have set you an example that you should do as I have done for you.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윈스턴 레너드 스펜서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영국의 61대(1940. 5. 10 ~ 1945. 7.26) 63대(1951. 10. 26 ~ 1955. 4. 7) 총리 역임

      처칠이 어쩌다 운전사에게 차를 급히 몰게 했습니다.
      그런데 교통 경찰관이 수상을 태운 자동차가 과속으로 달리는 것을 보고 재빨리 차를 세우도록 했습니다.
      "수상께서 타셨소."
      면허증 제시를 요구하는 경찰관에게 운전사가 말했습니다.
      "알고 있소. 그러나 과속은 과속이오. 딱지를 떼겠으니 벌금을 물도록 하시오."
      경찰관이 끄떡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처칠이 직접 나섰습니다.
      "이봐! 내가 누군 줄 알아?"
      처칠이 그 특유의 여송연을 입에 문 채 언성을 높였습니다.
      "예, 얼굴은 우리 수상 각하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법을 지키는 것은 비슷하질 않습니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결국 처칠은 딱지를 떼였습니다.
      처칠은 의회에서 업무를 마치고 올라와 경시총감을 불렀습니다.
      그 딱지뗀 경찰관을 격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그 경찰을 찾아 특진시킬 것을 명했습니다.
      그러나 경시총감은 과속차를 적발했다고 특진시키라는 규정은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규정을 준수하는 본을 지도자가 보여주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오늘도 이러한 아름다운 신앙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주 어렸을 때에 요즈음처럼 놀이기구도 없고 장난감도 별로 없던 시절에 동네 아이들이 모이면 함께 놀이하는 방법 중에 "나 따라하기"라는 놀이가 있었습니다.
      가위 바위 보를 하여 이긴 사람이 첫번째가 되고 그 뒤로 여러 명의 아이들이 순번을 정하여 첫번째 아이가 하는 행동을 따라하며 온 동네를 돌아다니는 놀이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아이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첫번째 아이가 하는 행동과 전혀 다른 행동이 마지막 아이에게서 나타납니다.
      그러면 모든 아이들이 크게 웃으며 서로 즐거워했던 놀이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던 이유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주는 본보기가 된 것처럼 너희들도 서로 발을 씻겨주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을 가리켜 "제2의 성경" 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의 삶이 거짓과 교만과 게으름으로 보여지면 세상 사람들이 그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이 나타난다면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한반도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좌파의 지도자를 선택하여 거짓의 지배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올바른 지도자를 세워 정의를 실현할 것인가 하는 심각한 대립 구도에 놓여있습니다.

      이와 같은 중요한 시점에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될 것입니다.
      거짓과 범죄로 가장한  철면피의 지도자를 선호하는 사람들 중에 성도들도 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진리편에 서는 것입니다.
      심지어 나의 골육일지라도 거짓으로 선동하고 잘못을 정당화 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면 냉정하게 끊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언제나 진리편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거짓을 버리고 진리를 따라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일시적인 즐거움보다 영원한 기쁨을 붙잡아야 합니다.
      때로는 영원한 기쁨을 얻기 위하여 당장의 아픔과 고통과 시련을 견딜 수 있는 인내와 소망의 깃발을 높이 들고 천성을 향하여 앞으로 전진해야 하겠습니다.

      어느 민족 누구게나

      https://www.youtube.com/watch?v=8JapP73XGr0


      본(5262)  후포데이그마(hüpŏdĕig- ma) ὑπόδειγ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5262

      1. 본.  2. 모방
      발음 [ hüpŏdĕig- ma ]
      어 원/ 5263에서 유래
      • 1. 본, 모형, 원형, 견본, 요13:15, 히4:11, 약5:10, 벧후2:6.
      • 2. 모방, 복사, 모사, 히8:5, 9:23.
      • 관련 성경  /   본(요13:15, 히4:11, 벧후2:6), 모형(히8:5, 9:23).

      보였노라(1325) δίδωμι 스트롱번호 1325

      1. 주다.  2. ~을 ~에게 주다. 3. 막 2:26
      발음 [ didōmi ]
      관련 성경  /  주다(마4:9, 막2:26, 눅1:32), 보이다(마12: 39), 허락되다(마13:11), 보여주다(마16:4), 타고나다(마19:11), 바치다(마22:17, 막12:15), 내다(마24:29), 제사하다(눅2:24), 내밀다 (행9:41), 베풀다(행2:19, 딤후1:16), 끼치다 (엡4:29), 세우다(행20:32), 직고하다(롬14:12), 드리다(고후8:5), 맡기다(요5:22), 허락 받다(계6:4), 허락하다(계19:8).


      베드로전서 2:20-21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But how is it to your credit if you receive a beating for doing wrong and endure it? But if you suffer for doing good and you endure it, this is commendable before God.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To this you were called, because Christ suffered for you, leaving you an example, that you should follow in his steps.

      세상에서 교회와 성도들을 부르신 이유는?
      잘 살아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8-9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Finally, all of you, live in harmony with one another; be sympathetic, love as brothers, be compassionate and humble.
      Do not repay evil with evil or insult with insult, but with blessing, because to this you were called so that you may inherit a blessing.

      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지날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를 바짝 뒤따라 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 길은 고난의 길이지만,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바울과는 다른 접근과 이해를 보입니다.
      바울의 경우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라는 권고는 하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라’라는 표현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자신을 드렸다’라고 표현합니다.
      베드로는 ‘그가 고난을 받으셨다’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베드로는 역사적인 예수를 강조하며 그분의 고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셨다는 교리적이고 결과적인 사실보다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걸어가기를 촉구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나를 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고난과 죽으심의 십자가가 동시에 ‘내가 따라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나, 주저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오신 길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께 이르는 길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만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이 길이 하나이며, 다른 길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가 반드시 좇아가야 할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22절에서 예수님께서 죄를 짓지 않으셨음을 말합니다.
      ‘죄가 없다’ 하지 않고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가진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으실 수 있는 자유가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마치 예수님의 삶과 사역이 이미 세팅된 기계 같은 과정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길은 자유의 길이었고, 순간순간 선택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분은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시며,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씨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죽기까지 순종한 모든 과정은 자동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온전한 자유를 드렸습니다.
      기꺼이 자신을 드렸습니다.
      자유롭게 순종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자유에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자유로 기회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볼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죽음과 죄와 허무의 문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을 마음껏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본을 보였노라(요한복음 13:12-20)

      13장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밤, 제자들을 모아 놓고 마지막 만찬을 하시며 말씀하신 일들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하신 모든 일이 계시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공생활 3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겠느냐고 분량적으로 묻는다면 적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행하신 한 사건 한 사건이 계시적 의미가 있다고 할 때, 거기에는 대단히 큰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신 말씀만이 말씀이 아니고 행동 하나하나가 말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마지막 밤에 행해진 성만찬 예식과 말씀은 더욱더 소중한 계시적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발을 씻기신 사건은 바로 앞장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되풀이하지는 않겠습니다.
      어쨌든 제자들은 질투로 인해 눈이 어두워져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여 자기들끼리는 물론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리는 일 조차 잊어 유월절 잔치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발을 씻기신 후의 일입니다.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요 13:12)
      주어진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13:7에서는 "너희들이 지금은 알지 못하나 후에는 알리라"고 지금 모르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만, 그러나 12절의 질문에서는 그래도 알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아니, 점점 더 깊은 뜻을 알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이란, 어떤 의미에서든지 그 뜻을 모르면 무효입니다.
      물질을 주고 받았다는 물리적 현상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것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물질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물질이 상징적일 때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에 사랑을 담아서 주고, 사랑으로 받아들일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적인 유익만 가지고 사랑이라고 할 수 없고 정신적으로 유익을 줄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가령, 돈을 쓸 줄 모르는 어린 자식에게 무작정 많은 돈을 주어서 이 자식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돈을 준 그것이 과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었다고 결코 사랑은 아닙니다.
      문제는 받는 자가 그 물질 속에 담겨진 의미를 받고 소화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사랑이 의미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알아야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함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육체적인, 물질적인, 구체적인 사건들이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야 그 의미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행한 것을 아느냐고, 모르는 줄을 아시지만 그래도 다소라도 알기를 원하시며, 점진적으로 깊이 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발을 씻겼다고 하는 사건 그 자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이웃을 알고, 나를 아는, 즉 모든 것을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건을 놓고 볼 때에 베드로는 얼마나 초라해졌습니까?
      베드로 입장에서 본다면, 베드로 자신을 알아야 함은 물론, 제자들끼리의 관계도 다시 알아야 하며,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도 알아야 했습니다.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묻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다음날 아침, 주님은 배를 타고 건너가시는데, 그 배 안에 떡이 없었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바리새 교인들의 누룩을 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숙덕거리며 예수님이 시장하신 줄로 잘못 알고 서로 책임을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가룟 유다에게 회계를 맡으면서 왜 진작 떡을 준비하지 않았느냐고, 또 가룟 유다는 수제자 베드로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책임을 전가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떡이 없음에 대해 서로 시비가 벌어졌습니다.
      이것을 지켜보시던 예수님은 어이없어 하시며 오천 명을 먹이고 떡이 얼마나 남았느냐, 아직도 떡이 없음을 가지고 염려하느냐고 그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십니다.
      누룩이라는 말에서는 오직 떡만을 생각하는 미련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직접 보았고 들었고 먹기까지 하는 경험을 했었지만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마찬가지로 이 본문에서도 발을 씻기신 그 의미를 물으셨지만, 제자들은 대답을 못했습니다.
      깨달음이란 참으로 중요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머리로 깨달아야 할 것이 있고 가슴으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은 이론적이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나아가서는 실천하면서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직접 사건 속에 부딪쳐서 몸이 닿아야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사랑이란 사랑을 받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라도 사랑하고서야 사랑받은 것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예수께서 "내가 너희들에게 행한 것을 아느냐"고 물으셨지만, 끝내 그 뜻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베드로서에 볼 것 같으면) 저들이 한 가지 두 가지씩 깨닫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은 다시 물으십니다.
      "오늘 네가 당한 일이 무엇인지 아느냐?"
      이제 우리는 깊이 생각하고 가슴으로 벅차게 깨닫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15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고 본을 보였노라."(요 13:15)
      본보기로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지금 열 두 제자들은 질투로 팽팽히 맞서서 서로 먼저 발을 씻겨 주지 못하고, 씻김을 받은 후에야 씻기겠다고 눈치보다가 결국 씻기 않고 잔치에 임했습니다.
      이런 순간에 누군가가 먼저 씻기는 일을 시작하는, 즉 주도권을 잡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가령, 우리 모두가 먼저 사랑 받고 사랑하겠다든지, 용서받고 용서하겠다고 기다린다면, 사랑 받거나 용서받을 자가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은 교회 문에 들어서면서, "이 교회에는 사람이 없구나"하고 불평을 합니다.
      교회에서 사랑하는 자가 누구이며 사랑 받는 자가 누구입니까?
      도대체 주는 자가 없는 친절을 누가 받을 수 있습니까?
      받을 생각만 하지 말고 먼저 주는 자의 입장에 서자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사랑하면 해결되는 것입니다.

      "친절한 교회를 찾아서 방랑의 길을 떠난 한국 교인들"이라는 설교가 생각납니다.
      보따리를 싸들고 이 교회 저 교회를 기웃거려 보십시오.
      누가 나를 사랑하며 알아주겠습니까?
      그러나, 방향을 돌려 내가 먼저 사랑해 보십시오. 어디서나 먼저 본을 보이면 여기저기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미움받았다고 미워하고 사랑 받았다고 사랑한다면 그는 인격자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존재(being)가 아니라, 다만 되어진 바(becoming)로서 벌레와 같은 환경의 동물일 뿐 아무 의미가 없는 삶입니다.
      미움받았다고 미워하고, 도둑맞았다고 도둑질하며, 나쁜 말 들었다고 욕하는 식으로 악순환하면 어디서 언제 끝이 나겠습니까?
      누군가가 미움받고도 사랑하고 악을 선으로 대하는 주도적인 본보기가 있어야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열 두 제자들 그대로 두면, 시기와 질투가 점점 심화되어 서로 악수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이 분위기를 깨뜨려 본을 보여야 합니다. 누군가가 사랑의 지도자가 되어서 시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본보기가 되어 보십시오. 화목의 본, 사랑의 본이 되어 보십시오. 대체적으로 앞장서기는 힘들어도 뒤따라가기는 좋아합니다. 즉, 닮기를 좋아한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디나 본이 필요합니다. 본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요, 편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본을 보이시되, 본문에 보면 주(註)를 달았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 : 14-15) 받지 못하고 주는 주도적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고도 받지 못하는 자가 있어야 공짜로 받는 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었다고 되돌려 받는 것이 아니라, 받은 자가 또 다른 사람에게 주고 그는 또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사과나무를 심었고, 다음 사람은 그 사과를 따먹고, 나는 또 다른 사람이 심은 사과를 먹는단 말입니다. 내가 심었다고 반드시 내가 먹어야 한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 말씀은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긴 것은 너희들이 다시 내 발을 씻으라는 뜻이 아니고 너희들이 발을 서로서로 씻기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으니 우리가 예수님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하라는 깊은 뜻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본입니다. 우리는 내가 사랑을 베풀었으면 즉각적으로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되돌려 받기를 원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을 베푼 것으로 만족하고 되돌려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본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 17절에 보면,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 13:17)고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대개 모르고 행하기 때문에, 중간에 문제가 생기면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알고 행하면 낙심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본래 배신도 있고, 거짓도 있고, 선한 일에도 나쁜 소리를 듣는 것을 충분히 알고 출발하면 무슨 문제입니까? 아무 생각 없이 덜컥 출발을 하고 보니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가령, 젊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사랑에 빠져 그 기분으로 모든 것이 그렇게 좋은 줄만 알고 결혼했다가 얼마 후에야 아닌 것을 알고 후회하는 것과 같습니다.

      미리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 즉 미리 지식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 후회의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분명히 말씀하기를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본을 보이신 이 사건에서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첫째, 스승으로서 제자의 발을 씻겼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주인이 종의 발을 씻겼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사입니다.
      당연히 섬김을 받아야 할 자가 낮추어서 종을 섬겼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 모릅니다.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기고, 종이 주인의 발을 씻겼다는 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치와 논리를 따져서 사랑을 논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때로 논리를 무시하고 초월합니다.
      아랫사람, 윗사람 가리는 일반적인 질서가 아닌 또 다른 질서가 존재한단 말입니다.
      종이 주인의 발을 씻기는 것은 율법이요, 주인이 종의 발을 씻기는 것은 은혜입니다.
      섬겨야 할 자가 마땅히 섬기는 것을 공로라고 하거나 선행이라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섬김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태복음 20:28에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섬김의 뜻은, 당연히 섬김을 받아야 할 자가 낮추어서 섬긴다는 말입니다.
      아직도 내가 크냐, 네가 크냐고 따지겠습니까?
      당연히 섬기기만 하면 됩니다.
      윗 자리, 아래 자리 없이 섬기자는 것입니다.

      언젠가 본이 되게 섬기는 좋은 분을 만난 기억이 있습니다.
      그는 뉴욕의 한 은행장인데, 교회에서는 회계도 아닌 회계보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에서는 큰 은행장이었지만, 주일이면 오후 3시까지 돈을 맞추고 계산하는 것을 보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교회란 바로 이런 곳입니다.
      아래 자리, 윗 자리 없이 서로 봉사하고 섬기는 곳입니다.

      당연히 섬김을 받아야 할 자가 허리를 굽혀서 종의 발을 씻기는 것이 섬김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제자의 발을 닦으시며 너희도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문적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는 희생적 권위입니다.
      어머니가 훌륭하다는 것은 바로 이 희생의 권위 때문입니다.
      희생의 권위를 인정하기 전에는 어떤 말을 해도 가슴이 열려지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참 섬김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발 씻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씻겼으니 너희들도 서로 씻어 주라"
      즉 내가 씻김을 받았기 때문에 받았다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씻어 주라는 것입니다.
      흔히 받고서도 받지 않았다고 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많이 받았고, 너무나 많은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은혜가 넘칩니다.
      내가 준 것은 없고 받은 것만 많다는 그 마음이 바로 사랑입니다.
      반대로 나는 한 번도 섬김을 받은 일이 없고 섬기기만 하고 주었다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불평만 하게 되어 피곤하기만 합니다.
      다윗처럼 항상 받은 자의 마음으로, 어찌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다 보답할까 하고 받은 마음으로 꽉 차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자입니다. 결국, 겸손한 사람은 무자격한 자기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다고 가슴벅차 하며 살아가고, 교만한 사람은 받은 것이 없다며 계속해서 투정하고 피곤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은 "빚진 자"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세째로, 그 속에 가룟 유다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에 가룟 유다가 걸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 깨끗지는 아니하니라,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다",
      즉 마귀에 씌였다는 것을 아시면서 비장한 마음으로 그들 모두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봉사입니다.
      봉사할 때에 베드로 가리고, 야고보 가리고, 가룟 유다 가려서는 안 됩니다.
      선한자의 발이나 악한 자의 발을 가리시지 않고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의 발까지 씻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낙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흔히 나의 사랑을 알아 줄 만한 사람만 사랑하고, 되로 주고 말로 받을 사랑만을 골라서 계산적으로 하다 보면, 여기에는 낙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발까지 예수께서 씻기셨다는 사실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습니다.
      대상에 대해서나, 보답에 대해서 전혀 관심 없이, 섬기는 자의 자세로 봉사하면, 즉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하면 절대로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 대해 성경적인 해석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요 13:18)
      성경적으로 해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려오시다 저들에게 체포당하실 때도(요 18:11)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고 말씀하셨고, 또한 마태복음 26장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에게 칼을 빼어 귀를 치자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 26:53-54)고 예언의 말씀을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적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봉사, 선교가 성경의 어느 말씀에 의해 하고 있느냐가 분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일하는 도중 무슨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도 보면, 베드로가 가룟 유다 사건을 설명하는 가운데 "저는 제 갈 곳으로 가니라"고, 즉 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안에서 해답을 얻고 있습니다.
      또한, 잠언 16:4에 보면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악한 자에 대해서도 적당하게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배신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신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사건 속에 있는 신비로운 뜻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불쌍히 여겨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하필이면 너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에서 사건을 풀이하고 이 모순 속에서도 하나님의 큰 뜻이 이루어질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배반자를 불쌍히 여기시며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이렇게 알고 행하면 복이 있습니다.

      섬겨야 합니다.
      당연히 섬김을 받아야 할 예수님도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나는 너무나 받은 것이 많기에 말없이 다만 섬길 뿐입니다.
      나아가서는 악인과 모순을 극복하는 초월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적으로 해석을 얻고, 모순을 넘어서는 믿음을 가져야 선행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요한복음 13:14-1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일평생 배우며 삽시다. 바르게 가르치며 삽시다"
      믿음으로 가지는 꿈은 막연한 희망사항과는 달라요. 믿음의 꿈을 꾸세요. 사업도, 직장도, 앞날도, 행복도 초점을 주님께 맞추어 나가면 영육간에 더 풍성한 열매를 거둘 때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씨를 뿌려야 거둘 것이 있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생각하는 대로 안 되는 자녀문제, 염려하고 한숨쉬어 보아도 별 도리가 없어요. 걱정하는 그 시간에, 염려하는 그 시간에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여 오늘을 살면 주님께서 앞날을 열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될 날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에스겔의 마른 뼈와 같은 상황이라도 낙심하지 마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니 생기가 들어가서 다시 살아나고, 큰 군대가 되었던 것처럼,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의 믿음의 살아나고, 용기가 살아나고, 생활이 살아나고, 경제가 살아나고, 건강이 회복되어 가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바라보는 믿음의 꿈을 가지고 어려운 이 시대를 이겨 나가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눈물의 자녀는 결단코 망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내 생각과 달라도 잘 인내하는 곳에, 포기하지 아니하고, 흔들리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끝까지 가는 곳에 결국은 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내가 먼저 믿음준비, 기도준비, 생활준비 잘 하셔서 역사의 주인공이 되거니와 가까이 있는 내 자녀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더욱 믿음의 자리로 인도하는 복된 도구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은 말한 대로 행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만큼 영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도자나 교사는 물론이고, 부모나 기성세대는 알게 모르게 이미 자녀들이나 차세대들의 본이 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좋은 본인가? 나쁜 본인가? 자녀들은 가르치는 대로 배우는 게 아니라 보는 대로 배웁니다. 안 가르친 것도 배워요. 어느 초등학교 수업시간에 선생님은 한참 흑판에 글을 쓰고 있는데 아이들이 고개를 좌우로 길게 빼며 열심히 따라 적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선생님, 안 보여요. 대가리 좀 비켜 주세요? 왜 그렇게 된지 아세요? 이 아이는 머리를 대가리라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거예요. 평소 집에서 부모가 늘 하는 말이 ?아이고, 이놈의 돌대가리야, 도대체 이 대가리 속에 뭐가 들어 있길래 이렇게 공부를 못 하는 거야? 이 아이의 마음속에는 ?머리는 대가리다? 자연스럽게 박혀버린 거예요. 어머니의 가르침은 어린 아이 때로 끝나지 않아요. 무덤까지 갑니다. 가장 좋은 스승은 어머니예요. 수산나는 가난한 집에 19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말하기 전부터 주기도문을 듣게 해서 제일 먼저 주기도문 외우게 하고, 사도신경 외우게 하고, 십계명 외우게 했어요. 잠 잘 때는 머리마다 기도해 주어서 잠들게 했어요. 이 사랑을 받고 자란 자녀들이 다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어요. 가정은 단순히 먹고 쉬는 곳이 아니에요. 부모는 먹을 것, 입을 것, 학비나 용돈을 주는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한국 사회의 비극은 부모가 더 이상 교사이기를 포기한 데 있습니다. 어머니보다 더 많은 영향을 주는 스승은 없습니다. 어머니는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사람을 만드는 위대한 스승입니다. 아이들의 가슴에 가장 뚜렷한 자국을 남기는 것은 어머니예요. 행복은 특별한 곳에 있지 않아요. 내 가정에서 내가 할 일을 묵묵히 다 할 때 복이 있고, 보람이 있는 거예요. 어머니의 행복은, 어머니의 아름다움은 자녀를 잘 길러 내는 거예요. 

      토스토예프스키는 말하기를 "좋은 기억처럼 훌륭한 교육이 없다"
      최대의 교육은 좋은 기억을 자녀들에게 우리가 가르치는 심령들에게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아이를 안고라도 새벽제단을 쌓는 것, 내가 가르치는 제자들과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하는 것이 귀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구하는 믿음, 하나님 보시기에도 귀한 일이기에 복을 주시거니와 자녀의 가슴에, 제자들의 가슴에 깊이 박힌 좋은 기억이 됩니다.
      나중에 다른 길로 가려고 하다가도 어머니의 품에 안겨 기도하는 그 기억이, 선생님의 손을 붙잡고 기도하던 그 기억이 바른 길 가게 붙들어 주더라는 거예요.
      거창한 것으로 이 나라가 좋아지는 것 아니에요. 내가 자녀를 믿음의 자녀로 만들면 우리 가정이 좋은 가정되어지고, 내게 맡겨진 어린 영혼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면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나라 이 민족에게 새로운 소망이 보일 줄로 믿습니다.
      내가 먼저 이 귀한 일에 제물 되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눈에 보이는 이유 때문에 신앙 교육을 미루지 마세요. 청년 시절에 열심히 믿고 집사까지 하던 사람이 의사가 되어 병원을 개업하고 나더니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친구가 안타까워서 권면을 하니까 "나 자가용 산 다음에 나갈께" 차를 산 다음에도 안 나와요.
      "병원 빌딩 하나 짓고 나갈께" 얼마 후에 만났더니 안색이 안 좋더라는 거예요.
      왜 건강이 안 좋아 보이느냐고 물었더니 "소화가 좀 안 되어서 그래" 몇 달 후에 이 친구가 좀 와 달라고 해서 달려가 보니 벌써 간암 말기가 되어 복수가 차 있더랍니다.
      의사이면서도 자기 몸을 모르는 것이 사람이에요.
      결국은 물질도, 건강도, 생명도, 하나님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내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 자녀들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가르치는 제자들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공부 할 때니까, 지금은 돈 벌어야 하니까, 아니에요. 믿음의 결단은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부모의 가슴에서, 교사의 가슴에서 기도를 듣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 자녀를 사랑합니다. 좋은 것 있으면 자녀에게 주고 싶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고 내게 맡겨주신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여러분의 기도로 표현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자녀 문제입니다. 철들 때가 되었는데도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실망시키는 자녀가 있는가 하면,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부모에게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자녀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부모의 눈물의 기도가 있다면 그 자녀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가슴에서 나오는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축복의 손을 활짝 펴실 줄로 믿습니다. 자녀들에게 우리가 가르치는 어린 생명들에게 기도와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시는 복된 부모, 복된 교사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성숙해 질수록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고, 성숙한 자녀는 부모의 심정을 헤아릴 줄 알아요. 그래서 철들고 나면 칭찬보다 책망이 귀한 줄 알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더 성숙한 자리로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무엇인가 주님이 내게 깨달음을 주십니까? 해야 할 일거리를 보여 주십니까? 봉사하고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까? 먼저 주님의 뜻을 깨닫는 자가 복있는 자요, 깨닫는 대로 헌신하며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리고 정성을 드리는 자가 참된 축복의 사람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뿐만 아니에요. 시간에 맞추어서 차량 봉사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에요. 몇 백명이 먹는 식사를 준비하는 식당 일에 몸을 드리는 일도 귀한 일입니다. 집안 청소하기도 어려운데 넓은 본당과 교회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을 청소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에요. 찬양대로 봉사하는 분도 귀해요. 찬양하는 시간은 한 3분 정도, 준비하는 일에는 많은 수고가 따르잖아요? 매주 안내로 봉사하는 손길도 귀하고, 구역에서 충성하고, 각 기관 각 부서에서 말없이 충성하는 손길들이 다 귀하고 복된 손길들입니다. 사람은 혹 모를지라도 하나님은 알아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 상급을 예비해 놓으셨거니와 이 땅에서도 좋은 것들로 갚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다른 것 기대하지 마세요. 주님이 알아주시면 되는 거예요. 주님 인정하시면 되는 거예요. 우리 교회에 부름받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필요하고 요긴한 존재들이에요. 중직자들만이 아니에요. 어린 생명 하나라도 하나님이 필요하셔서 부르셨고, 세우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는 다 요긴한 존재들이고, 각기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주님께서 주신 다양한 기질과 은사들을 주님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하고, 주님의 도구로 쓰임받는 것이 복입니다. 내가 주님의 좋은 도구로 쓰임받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 시대에 할 일을 주셨다는 것이 축복이에요. 일하지 않고 편안하게 사는 게 복이 아닙니다. 일 할 수 있는 건강이 있다는 것이 축복이오. 일할 거리가 있다는 것이 복입니다. 더욱 마지막 시대에 주님의 일을 위하여 쓰임받는 복된 성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주신 일하면서 자기에게 은혜가 되고 다른 사람이 나를 볼때도 은혜를 받는다면 대단한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지 않으면 결국 마귀가 써요. 내 시간을 하나님께서 쓰지 아니하면 마귀가 빼앗아 갑니다. 내 재능을 하나님께서 쓰지 아니하면 사탄이 쓰게 됩니다. 내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아니하면 사탄의 노예가 되고, 죄의 종노릇하게 되는 거예요. 주님께 쓰임받는 복된 길을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즐겁게 헌신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른 것 조금 부족해도 내가 믿음으로 살고, 우리 자녀와 차세대를, 믿음으로 바로 가르치고 길러 놓으면 세상을 위하여도 요긴한 도구가 됩니다. 링컨을 보십시오. 하나님도 잘 믿고, 나라를 위해서도 큰 일을 했어요. 아이젠하워나 루즈벨트도 주일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는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세계를 위해 큰 인물된 거예요. 잘 안 믿고도 큰 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인류 역사에 위대한 지도자의 80%가 예수 믿는 사람이고, 노벨상 받은 사람의 80%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헬렌 켈러는 태어난지 1년 9개월부터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설리반이라는 한 여자가 이 사람을 사랑하고 용기를 주고 기도해 주고 도와서 세계적인 명문 하버드를 졸업하고 20세기 인류 역사에 최고의 인물이 되게 했고, 록펠러는 세계적인 거부인데, 16살에 주급 5달러를 받을 정도로,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어요. 그런데 자신의 개인 수입만으로, 대학을 24개, 교회를 4,928개를 세워 헌납을 했습니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큰 일을 이룬 거예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결국 좋은 사람, 위대한 사람으로 쓰임받게 되는데, 이런 복이 언제 임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헛되지 않아요. 이사야 55:10,11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가르치고 들려지는 말씀이 결코 헛되지 아니하고, 갈급한 심령을 적시고, 마른 심령에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만이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어요. 말씀만이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말씀이 선포 될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때 믿음으로 듣는 자의 심령 속에서 이런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말씀 듣는 시간마다 놓치지 마십시오. 나 자신 뿐 아니라 자녀를 말씀듣는 자리를 귀하게 여기도록 기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이 자라납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돌짝 밭 되지 아니하고, 가시덤불에 뿌린 씨앗 되지 아니하고, 길가에 떨어진 씨앗 되지 아니하고, 부드러운 밭에 떨어진 씨앗 되어서 100배, 60배, 30배 열매맺는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은 아닐지라도, 현실은 아닐지라도 눈에 보이는 환경과 세상, 그 너머를 보는 지혜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멀리 바라보며 살아서 크게 이루고, 크게 남기는 축복의 길 걸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잠간의 고통 때문에 꿈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부하는 고통은 잠간이지만 못 배운 고통은 평생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인생의 길에는 시기가 있습니다.
      은혜 주실 때 은혜 받아야 역사가 나타나고, 뿌릴 때 뿌려야 거둘 것이 있어요.
      다른 사람 다 거두는 시기에, 다른 사람 거두는 풍성한 열매를 보고 씨를 들고 나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주안에서 큰 꿈을 갖는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디모데전서 4:12)

      아무도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너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

      메데이스 수 테스 네오테토스 카타프로네이토 알라 튀포스 기누 톤 피스톤 엔 로고 엔 아나스트로페 엔 아가페 엔 피스테이 엔 하그네이아.
      μηδεις σου της νεοτητος καταφρονειτω αλλα τυπος γινου των πιστων εν λογω εν αναστροφη εν αγαπη εν πνευματι εν πιστει εν αγνεια.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 '연소함'(*, 네오테토스)이란 '젊음'을 뜻하는 '네오스'(*)에서 온 말로서 유대 사회에서 군대를 갈 만큼 자란 나이에서부터 40세까지 달하는 사람을 가리켜 사용하였다(Lock). 많은 학자들은 디모데의 나이가 매우 어렸을 것으로 추측(推測)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연소함'은 장로들이나 교인들 틈에서 경륜이 적은 디모데가 상대적으로 지도자 역할을 감당하기에 어려운 점을 의미하는 것이지 나이에 대한 연소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Guthrie).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연륜과 경륜 때문에 업신여김을 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가 가지고 있는 상대적인 연소함을 행동의 진지함으로 보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것은 장로들과 나이 많은 교인들에게 연소함으로 업신여김을 받는다면,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서 권위를 지니라는 말이다(Calvin). 그리스도의 사역자로서의 권위는 외부적인 치장이나 장식, 그리고 연령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가르침과 거룩한 생활에서 오는 것이다.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 '말'이란 공개적인 연설뿐만 아니라 사적인 대화까지도 포함한다. '행실'(*, 아나스트로페)은 다른 사람과 관계되는 행동을 의미한다. 또한 다음으로 언급되고 있는 세 가지 '사랑', '믿음', '정절'은 그리스도인의 내면적인 성품이며, 이것들도 결국 타인과 관계된 생활과 연결된다. '사랑'은 말과 행위로 표현되고 '믿음'은 사랑에 근거를 둔다. '정절'의 헬라어 '하그네이아'(*)는 '순결한 양심을 지키다'라는 뜻을 가지는 헬라어 동사 '하그뉴오'(*)에서 유래된 말로, 생활에 있어서 죄가 없는 것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철저한 순결을 의미한다(5:2, Robertson). 한편 '본'에 해당하는 헬라어 '튀포스'(*)는 '상처를 내다'는 뜻인 '튀프포'(*)로부터 나온 단어로서 어떤 것을 만드는데 필요한 '양식' '모델', '본보기'라는 뜻이다(빌 3:17; 살전 1:7; 살후 3:9). 바울은 본절에서 디모데가 비록 젊은 사람이었지만 경험(經驗)이 충분한 인생을 산 사람처럼 말과 행실에 있어서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보살펴줌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믿음직한 행동을 할 것을 권하고 있다.



      연소함(3503) 네오테스() νεότης, τητος, ἡ 스트롱번호3503

      1. 젊음.  2. 막 10:20.  3. 눅 18:21
      발음 [ nĕŏtēs ]
      어원  / 3501에서 유래
      • 1.  젊음, 막10:20, 눅 18:21, 행26:4, 딤전4:12.
      • 관련 성경  /  어림(막10:20, 눅18:21), 젊음(행26:4), 연소함(딤전4:12).

      “연소함”이라는 것은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들처럼 여기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디모데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나이로 여겨졌고, 당시 에베소교회의 목회자로 주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리고 젊은 나이에 목회자가 된 디모데에게 사도 바울이 이렇게 권면의 말씀을 기록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도 네가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무시하지 못하게 하고”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본이 되라

      아무도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너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

      어떻게 하면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이 구절을 읽어보니 뒷부분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오직 너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
      내가 어린애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서 눈에 힘을 주고 어깨에 힘을 주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내가 어른처럼 존중받고 대접을 받기 위해서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고, 어른들이 알고 있는 소식을 옆에서 엿듣는다고 해서 어른과 같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누가 보더라도 “아 저 사람은 믿음이 있구나. 내가 보고 배울만한 믿음의 본보기가 되는구나.”라고 느낄 만큼 말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저는 연소함 때문에, 즉 나이가 어린 것 때문에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이 싫어서 이 구절을 좋아했지만, 나중에는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는 말씀을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어린 소년일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다니엘도 어린 소년일 때, 바빌론 왕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두려워하고 순종하였습니다. 다윗도 어린 소년일 때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이삭은 청소년의 때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제단에서 죽이려고 할 때 순종하였습니다. 설교의 황태자라고 불리는 찰스 스펄젼 목사님은 16살 때부터 교회에서 매주 설교하는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나이를 많이 먹는다고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읽고, 공부하며 묵상하고, 기뻐하고 순종하는 만큼 멋지고 거대하게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디엘 무디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고 사람들을 초청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나이가 40대 정도 된 어른 한 사람과 십대 초반의 어린이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디엘 무디 목사님은 기도를 하던 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오늘 한 사람 절반의 인생이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그 표현에 관해 물었습니다. “한 사람 절반의 인생이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디엘 무디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어린 소년의 인생은 한 사람분의 인생이고, 어른의 인생은 이미 자신을 위해 절반을 낭비하였으니 절반의 인생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아직 어린 나이에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길을 가게 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께 한 사람분의 온전한 인생을 드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절반을 낭비한 뒤에 나머지의 인생을 드리시겠습니까? 믿음은 선택입니다. 믿음은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나이가 어린 디모데에게 믿음의 본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과 행실(3056 & 391)

      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3056

      1.

      말하기.

      2.

      3.

      ㉠ 너의 말

      발음 [ lŏgŏs ]
      어원
      3004에서 유래
      행실() ἀναστροφή, ῆς, ἡ 스트롱번호 391

      1. 삶의 방식.  2. 행동 양식. 3. 처신
      발음 [ anastrŏphē ]
      어원  / 390에서 유래
      • 1. 삶의 방식, 행동 양식, 처신, 품행, 갈1:13, 엡4:22, 딤전4:12, 히13:7, 약3:13, 벧전2:12, 3:2, 벧후2:7, 3:11.
      • 관련 성경  /  행한 일(갈1:13), 구습(엡4:22), 행실(딤전4:12, 히13:7, 벧전1:18, 3:1,2), 선행(벧전3:16).

      특별히 오늘 말씀은 디모데에게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 있어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두 여섯 가지 항목이 등장하였습니다.

      말, 행실, 사랑, 영, 믿음, 순결  

      말과 행실이라는 것은 빙산의 일각처럼 사람들 앞에 드러나 보여 지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믿음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들에게 보여 지는 부분의 두 배만큼 보이지 않는 항목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바로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빙산의 물속에 잠긴 부분이 얼마나 거대한지 안다면 물 밖에 나온 부분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 알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여 지는 말과 행실은 사실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이라는 보이지 않는 기초에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우선 말과 행실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평가할 때 그의 말을 들어보고 또 행동하는 것을 지켜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얼마나 진실한 사람인지,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지를 판단하게 됩니다. 내가 돈을 빌려줘도 되는 사람인지, 정말 중요한 나의 일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인지, 멀리해야 하는 사람인지 등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자들의 본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기분대로 말하고 감정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믿음의 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내 생각대로 말하고 내 뜻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믿음의 본보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리대로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진리에 어긋난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쓸데없는 말, 더러운 농담,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말, 뒤에서 남을 헐뜯는 말은 믿음의 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과 행실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는 인생인 것입니다.

      사랑(26)

      ἀγάπη, ης, ἡ ἀγάπη 스트롱번호26

      1.

      사랑.

      2.

      인간의 사랑.

      3.

      사랑의 대상이 없는 경우

      발음 [ agapē ]
      어원
      25에서 유래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아는 뛰어난 지식은 믿음의 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본은 먼저 사랑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부모님을 존경하고 또 선생님을 존경할 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분들이 힘이 세고 능력이 뛰어나서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존경할 때 그 이유는 대부분 나를 사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나와 성격이 맞지 않거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시키실 때에도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을 떠올리며 존경하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또 선생님에 대해서도 때로는 선생님이 실수하거나 잘못하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선생님께 순종할 수 있는 이유는 나를 향한 선생님의 사랑을 기억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 모두가 믿는 자들의 모범이 되는 귀하고 자랑스러운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많은 것에서 부족하다 할지라도 사랑에서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사랑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수고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목숨을 주셨습니다. 사랑은 조건을 걸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계산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조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에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십시오. 오늘날 이기적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이상하게 취급을 받는 그런 시대에 여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당당하게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영(4151)

      πνεῦ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4151

      1.

      불기

      2.

      바람

      3.

      숨 내쉬기

      발음 [ pnĕnuma ]
      어원
      4154에서 유래

      우리는 사랑뿐만 아니라 영에 대해서도 본이 되어야 합니다.
      영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어질 수 있겠지만, 성령 충만한 삶이야말로 영에 있어서 본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자존심, 나의 욕심, 나의 의견으로 충만한 삶은 절대 성령 충만의 삶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의 뜻과 나의 주장이 강하게 서있을 때 그것은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의 삶은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삶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감정이 상할 때 누구에게 굴복하십니까?
      나의 감정에 굴복하고, 죄에게 굴복하여 말하고 행동하십니까?
      아니면 성령님께 굴복하여 사랑의 말과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자존심의 삶입니까?
      아니면 성령님께 순종하는 삶입니까?

      믿음(4102) 피스티스() πίστ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4102

      1. 믿음.  2. 신실성. 3. 엄숙한 약속
      발음 [ pistis
      어원  / 3982에서 유래

      우리는 또한 믿음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도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대해 나누기 원합니다.

      누군가가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무엇으로 구별하겠습니까?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돈을 선택하는지, 자기 명예를 선택하는지, 자기 뜻을 고집하는지, 자기 자존심을 선택하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집트의 보물을 내어놓고, 자기 자존심을 내려놓고, 손해를 볼지라도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였다면 우리는 그 선택을 보고 믿음이 있는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순결(47) 하그네이아(hagnĕia) ἁγνεία, ας, ἡ 스트롱번호47

      1. 순진한 마음의 순결.  2. 사상이나 감정의 청순함. 3. 정조의 순결
      발음 [ hagnĕia ]
      어원  / 53에서 유래
      • 1. 순진한 마음의 순결, 사상이나 감정의 청순함, 정조의 순결, 딤전 4:12, 5:2.
      관련 성경  / 정절(딤전 4:12), 깨끗함(딤전 5:2)

      순결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순결이란 것은 순수하고 청결한 것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다른 아무것도 섞이지 않고 깨끗한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가 결혼하기 전까지 다른 남녀로부터 더럽혀지지 않은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믿음의 순결이란 완전히 깨끗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보상도 바라면서 이집트의 보물도 바라는 것은 순결한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영광과 칭찬을 기대하면서 동시에 사람들로부터 받는 영광과 칭찬을 바란다면 그것은 순결한 믿음이 아닙니다. 순결한 믿음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도 붙잡고, 돈도 붙잡고, 죄도 붙잡으면서 동시에 하나님도 붙잡으려 하는 것은 순결한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많은지 몰라도 순결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찾아보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여러분. 만큼은 순결한 믿음으로 믿는 자들의 본이 되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초청

      여러분 잠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반응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배움을 주는 믿음입니까? 사무엘, 다니엘, 다윗, 이삭과 같은 사람들은 어린 나이 때부터 주님을 기쁘시게 했고, 여전히 오늘 우리에게도 배움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이 감정이 있고 자존심이 있고 고집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과 행실,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은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온전한 한 사람분의 인생을 드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절반의 나머지 인생을 드리시겠습니까? 믿음은 선택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영원하신 하나님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2-11-2024(수) 요한복음 13:1-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후에는 알리라(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Jesus replied, "You do not realize now what I am doing, but later you will understand."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의 구성은 1장부터 12장까지를 전반부라고 하며 그 내용은 표적에 관한 말씀이 핵심 내용입니다.
      표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음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에 소개된 일곱 가지 표적을 정리해 봅시다.
      1.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2:1-11)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 표적(4:46-54)
      3.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표적(5:1-9)
      4. 오병이어의 표적(6:1-15)
      5. 바다 위를 걸으신 표적(6:16-21)
      6.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쳐주신 표적(9:1-12)
      7.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11:17-44)

      요한복음 13장부터 20장까지는 십자가를 통한 영광의 말씀이 주제가 됩니다.
      마지막 21장은 에필로그(Epilogue) 즉 결론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유월절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사건을 말씀합니다.
      이때 사탄은 가룟 유다에게 예수를 팔아넘길 생각을 갖게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할 것을 미리 아시면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부 크리소스톰은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가룟 유다의 발을 씻겨 주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당시 유대 풍속은 하인이 주인이나 손님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었는데 선생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다른 제자들은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어떻게 선생님이 제자의 발을 씻겨주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대답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 후에는 알리라(Later you will understand)

      민수기 19:20
      사람이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총회 중에서 끊쳐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케 하는 로 뿌리움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

      누가복음 7:44
      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이제까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는 사건을 "섬김의 본" 또는 "겸손의 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특별한 분위기에서 "구속의 은혜"를 보여주신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왜 이런 주장이 가능할까요?
      예수님은 그의 몸을 일컬어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성전이 되신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는 것은 성전으로 들어오기 전에 반드시 자기 몸을 정결케해야 합니다.
      이미 목욕을 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될 것이라고 하셨기에 발을 씻음으로 정결케 되는 과정을 거쳐가게 하신 것입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 유대인의 풍속에는 보통 식사 전에 손님의 발을 씻어 주는 법인데, 이 때에는 식사 도중에 그 일을 행하셨다.
      그것은, 아마도 그 때에 이 일을 할 종이 없어서 그렇게 된 듯하다.
      "겉옷"은 저고리를 말함이 아니고 그 위에 입는 옷을 가리킨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이러한 차림은 종이 취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종의 자리로 내려가셔서 일할 준비를 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의 겸손의 극치(極致)이다.
      그가 최종의 행동 교훈으로 식사 도중에 이런 일을 하신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그의 별세 후에 제자들이 언제나 지켜야 할 겸덕을 고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은, 저렇게 계급을 초월하시고 영광의 주님을 사랑의 발 씻는 종으로 삼으셨다.
      고데이(F. Godet)는 추측하기를, 이 발 씻는 일이 아마도 제자들의 서로 다툰 사건(눅 22:24-27)을 동기로 하고 있은 듯하다고 하였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봉사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1)이것으로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시고 서로 낮아지기를 힘써야 한다고 설교하신 셈이다(12-16).
      실행으로 본을 보이는 설교자는 그 설교로써 사람들의 심령을 아주 점령해 버린다.
      (2)이것은, 그가 그의 백성을 사랑하셔서 속죄하시는 중보(中保)의 역사를 비유로 가르치시는 지극히 크신 사랑의 행동이시다.
      그가 피를 흘려서 그의 백성의 죄를 씻으신 일도 지극한 사랑이면서 역시 지극한 겸손을 나타낸다.

      유명한 변증 학자 스킬더(Schilder)는,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위하여 물을 휘저으신 주님의 손은 죄에 속한 자에게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그의 못 박히신 손에서 흐르는 피가 죄에 속한 자에게 이해되지 못함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그는 또 말하기를, "주님께서 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뜻은, 그의 몇 제자들에게만 그의 친절과 겸손의 모본을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행위로써 온 세계를 찾으시는 그의 속죄의 역사를 비유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13: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이 귀절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겸손한 봉사의 표본인 사실을 보여 준다.
      이 일로써 예수님이 나타내신 것은, 위 사람으로서 아랫 사람을 겸손히 봉사하신 고상한 정신이다.
      아랫 사람으로서 윗 사람에게 대하여 겸손하기는 쉬우나, 윗 사람으로 아랫 사람에게 대하여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이 말씀에 기준하여, 톨레도(Toledo)회의에서 발 씻는 것을 하나의 교회 의식으로 세웠다(694 A.D.).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이 그것을 폐지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고 부탁하신 것은, 다만 제자들더러 서로 겸손하게 봉사하라는 것 뿐이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이것은, 예수님을 본받아 자진하여 형제를 겸손히 봉사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 크게 간주될 것을 가리킨다(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요한복음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요한복음 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겉옷(2440) ἱμάτι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2440

      1. 옷.  2. 일반적으로 모든 옷을 가리킴: 마 9:16. 3. 겉옷
      발음 [ himatiŏn ]

      • 1.  옷.
        • a. 일반적으로 모든 옷을 가리킴: [단수로] 마9:16, 막2:21, 5:27, 눅5:36, 히1:11등. [복수로] 마27:35, 막5:28, 9: 3, 15:24, ἱ. μαλακά: 부드러운 옷, 눅 7:25.
        • b. 겉옷, 외투, 마9:20, 24:18, 눅8:44, 요19:2, 계19:16등.
      관련 성경  /  겉옷(마 5:40, 24:18, 눅 6:29), 옷(마 26:65, 요 19:23, 계 19:16), 속옷(행 9:39).

      요한복음 13: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 입으시고(2983)  λαμβάνω 스트롱번호 2983

      1. 취하다.  2. 손에 들다. 3. 가져가다.
      발음 [ lambanō ]


       

      * 장막(4636) σκῆνος, ους, τό  

      1. 천막.  2. 거처. 3. 집
      발음 [ skēnŏs ]
      어원  / 4633에서 유래
      • 1. 천막, 거처, 집[사람의 몸을 영혼의 거처로 비유함], 고후 5:1, 4.
      • 관련 성경  /  장막집(고후 5:1), 장막(고후 5:4).



      * 집(3614)  οἰκ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3614

      1. 집.  2. 건물.  3. 영혼의 거주지로서의 몸
      발음 [ ŏikia ]
      어원  / 3624에서 유래
      • 1.  집.
        • a.  [문자적으로] 건물, 마2:11, 7:24- 27, 24:43, 막10:29이하, 요12:3, 행10:6.
        • b. [상징적으로] 영혼의 거주지로서의 몸, 고후 5:1.
      • 2. 가족, 집안, 마 12:25, 13:57, 막 3:25, 6:4, 요 4:53.
      • 3. [1)과2)의 중간형태] 마10:12, 빌4:22.
      • 관련 성경  /  집(마 2:11, 막 3:25, 눅 22:10, 고전 11:22), 가산(막 12:40).



      σκήνωμα.  1. 장막

      고린도후서 5:1-5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우리의 장막 집
      - '장막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케누스'(*)는 천막을 가리키는 말로서 본문에서는 천막(天幕)이 일시적인 것이듯이 인간의 육신도 영구적이지 못하고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육체의 한계성을 천막에 비유한 것은 아마 그가 천막 만드는 일을 했던 경험에서 얻은 지혜에서 기인했을 것이다(행 18:3).

      무너지면
      - 이 표현은 (1) 육신의 죽음, 또는 (2)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데, 전자의 의미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혹자는 바울이 이렇게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한 말을 한 것은 글을 쓰는 당시 심경(心境)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본다.
      즉 바울은 살아서 주의 재림을 경험할 성도들 가운데 자신도 포함되리라고 기대했었는데, 최근에 겪은 아시아에서의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경험을 통해서(1:8-11), 재림 전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견해이다(Harris).
      그러나 이견해도 어느 정도 타당하지만 그보다는 주의 재림 이전에 죽음으로써 재림을 경험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는 성도들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주려는 의도가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 바울은 하나님이 지으신 집의 영원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본 구절의 표현을 사용했다.
      우리가 사는 집이 쉽게 썩고 낡아지는 것처럼 인간의 육체 역시 마찬가지 운명이다.
      그러나 그렇게 사라질 인간의 육체에 대해서 실망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육체가 썩어 없어진다 해도 주께서 재림하실 때성도들은 영원히 썩지 않을 부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고전15:38-54).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 이에 대해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바 성도들을 위해 예비된 하늘의 처소(處所) 즉 하늘나라(요 14:2)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고(Hodge, Harris, Tasker), 또한 집단적인 몸 즉 고전 3:16; 6:16에 언급된 '성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E.E. Ellis).
      이 두 견해에 대해 혹자는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유한한 인간의 육체를 가리키므로 본 구절의 '집'도 사람의 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artin).
      그러나 본절에서 강조되는 것은 일시적인 집과 영원한 집의 비교이지 몸과 몸의 비교가 아니다(Hodge).
      성도들은 현재 유한한 장막에 거하나 나중에는 영원한 장막에 거하게 된다는 것이 본절의 강조점이다.


      죽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옷을 벗고 죽는 것인데 이 죽음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겪게 되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들에게는 죽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로 옷 입고 죽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고 죽는 죽음을 성경은 세례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라디아서 3:27)

      바울은 이 죽음을 가리켜 “죽을 육신이 생명에 삼킨 바가 되는 것” 이라고 표현합니다.
      종종 삶의 무게에 짓눌릴 때면 우리는 충동적인 천국소망에 사로 잡힙니다.
      이렇게 사느니 그냥 빨리 죽어 천국에 가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참 복음의 내용은 성도가 죽어 이 땅을 떠나 만나는 하나님에 대한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 그리스도로 옷 입어 죽는 순간(세례 받는 순간)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 즉 천국생활이 시작되는 것에 대한 소식입니다.

      만일 바울처럼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몸으로 덧입기를 날마다 사모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때가 되어 이 육체의 장막을 벗는 날에 벌거벗은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발견될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죽음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임금의 잔치 자리에 예복을 입지 않고 참여했다가 쫓겨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마태복음 22:11~13)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는 임금의 질문에 그가 아무말도 못한 이유는 입어야 할 예복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또 입어야 할 예복을 받지 못한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만 그는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그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예수를 영접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나는 죽고 그 분으로 옷 입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로 옷 입기를 불편해하고 싫어합니다.
      자녀들이나, 배우자를 대할 때,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 분의 방식과 길로 행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그것을 매우 불편해하고 손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그 분의 방식 (그리스도라는 옷)으로 행하지 않고, 세상의 방식(세상의 옷)으로 행합니다.

      예복이 있음도 알고, 입어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입지 않고 잔치 자리에 앉아있다가 쫓겨난 사람의 이야기는 정확히 오늘날 우리들의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당신은 정말 하늘로부터 오는 새로운 장막이 있음을 믿습니까?
      성도는 썩어질 이 몸을 벗어버리고‘자연사’하기를 기다리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썩을 이 몸이 날마다 생명의 성령에게 삼켜져 죽기를 사모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것이 마땅한 성도의 죽음이며 그 죽음에만 영생의 약속이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고 죽는 그 죽음만이 우리를 삼키려는 모든 두려움에서 자유케하는 능력이 됩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으려거든 날마다 그리스도로 옷 입어 죽는 죽음을 죽으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세 가지 요소를 말한다면 의식주(衣食住)입니다.
      주(住)는 물론 인간의 육신의 생활을 영위하는 집을 가리킵니다.
      육신이 사는 집도 임시로 판자를 두르고 천막 조각을 걸치는 가건물이 있는가 하면 화려 찬란하며 견고하게 만든 주택이 있습니다.
      이는 집을 지은 재료나 모습에 따라 분류할 수 있습니다.

      장막집은 임시로 거처하는 곳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제외한 모든 세상 만사는 장막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신 뿐 아니라 육체의 건강이나 인간의 지식이나 인간의 영화 등은 모두가 장막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요, 집의 재산, 전답, 살림, 냉장고, 세탁기, T.V, 아파트, 고급 주택들도 장막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임시적인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다 사라져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입니다.
      이 집에 거할 자는 예수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고, 몸과 마음과 예복이 깨끗하게 되어 있는 자만이 거할 수가 있습니다.
      그곳은 결코 변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곳입니다.

      장막집과 영원한 집의 비교
      (1) 장막은 임시요 영원한 집은 항구적입니다.
      벧후 1:14에 “내가 장막을 벗을 날도 멀지 않았다”고 하였고,
      벧전 1:24에는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화는 풀의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모두 이 땅의 삶이 얼마나 유한한가를 보이는 것입니다.
      옛날 유목민들은 장막을 치고 살았는데 아침에는 풀따라 동편 언덕에 치고, 낮에는 그늘따라 북쪽 기슭에 치고. 밤에는 맹수를 피해 남쪽 골짜기에 치는 것이었으니 어느 것이나 임시적인 장막생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생의 육신의 생활도 이러한 장막과 같아 일시적이요 잠깐인 것입니다.
      안개와 같은 인생이요, 풀잎과 같은 인생이며, 하루살이와 물거품같은 인생입니다.

      어느 청년이 미국의 대통령 아담스 각하와 기차에서 한자리에 알게 되었습니다.
      청년이 대통령임을 알아보고 “아담스 대통령 안녕하십니까” 하며 인사를 했더니 대통령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평안치 못하군”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청년은 의아해서 “아니 대통령도 평안치 않으세요”라고 반문했더니 하시는 말이 “이 사람아. 지금 기왓장이 다 벗겨지고, 벽은 무너져가고, 창문에는 빛이 잘 들어오지 않고, 기둥은 힘이 없어 넘어지려고 하여 받치고 있는데 편안할 리가 있겠는가”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청년은 점점 더 궁금해졌습니다.
      “아니 백악관의 기왓장이 벗겨졌나요 수리해야지요. 또 벽이 무너지고 빛이 들어오지 아니하고 기둥이 넘어질 정도로 백악관이 헐었나요 아니 국민의 세금을 어떻게 하길래 각하의 저택 백악관을 그렇게 두었습니까 이는 국민의 수치입니다”라고 흥분했습니다.
      아담스 대통령은 이 사람을 진정시키면서 “아, 이 사람아. 보게나 기왓장이 벗겨지듯 내 머리는 백발이 되어가고, 벽이 무너지듯 가슴 에는 갈비뼈가 보이고, 눈이 어두워 빛이 보이지 않고, 기둥이 무너질듯 내 두 다리가 힘이 없어 지팡이로 바치니 편안할 리 있겠나”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도 장막집이 점점 노쇠하는 것은 막질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합병원에 가 보십시오.
      장막집이 고장나고 썩어가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현대공원의 묘를 보면 1년이 지나기 무섭게 온 산이 무덤으로 변합니다.
      어떤 스물 세살의 신랑이 결혼한 첫날밤에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장막집이 삽시간에 무너져 버린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집을 위해 준비하여 사는 자가 지혜있는 자입니다.
      물질과 재능을 최대한으로 선용하며 선하게 살다가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그 순간부터 영원한 집의 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거기는 하나님의 축복과 칭찬과 평안이 있고, 그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성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장생불로, 영원한 장생불로만이 있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습니다.
      흡족한 흑자인생의 결산서를 내어 놓을 수 있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 장막은 연약하여 무너지나 영원한 집은 견고하여 무너지지 않습니다.
      고전 3:10에서 건축재료를 말하는 중에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것은 썩어지기도 쉽고 불타기도 쉽고 오래가지 못하나 금, 은 같은 재료로 지은 집은 썩지도 않고 불타지도 않고 견고하여 오래간다고 하였습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십시오.
      성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벽옥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고 했습니다.
      또 그 성곽의 기초석은 각각 보석으로 꾸미었는데 벽옥, 남보석, 옥수, 녹보석, 홍마노, 홍보석, 황옥, 녹옥, 담황옥, 비취옥, 청옥, 자정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열 두 진주문의 그 화려함은 혀로 다 형언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뉴욕, 동경과 같은 대도시도 세월이 흐르면 무너져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쑥대밭이 될 것이요, 모스크바에 즐비한 고루거각도 소돔 고모라와 같이 멸망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영원한 집은 영원무궁, 영광충만하여 구원 받은 성도들이 가서 영주하여 영원토록 즐거워 할 것입니다.
      (3) 장막집은 누구든지 되는대로 살 수 있으나 영원한 집은 하나님의 자녀의 믿음으로라야만 가서 살 수 있습니다. 공개된 공원에는 온갖 잡인이 얼마든지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어도 잠긴 동산에는 주인만이 거닐 수 있는 곳입니다(잠 4:12).
      공개된 창기의 방에는 난봉꾼, 건달, 잡류들이 다 출입할 수 있어도 신부의 신방은 오직 신랑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곳입니다.
      마찬가지로 장막에는 누구든지 되는대로 살 수 있으나 천국집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만 이 믿음으로 가서 살 수 있는 곳입니다.
      스데반은 전도하다가 원수들의 돌에 맞아 죽게 되는 마당에도 “주 예수여. 나의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입천하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외롭게 있으면 쓸쓸하고 잠깐이며 그 후에는 섭섭할 터이나 영원한 집에서는 예수님과 영원히 동거할 것이므로 완전하고 참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원한 집을 가졌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5절에 “우리에게 이것을 이루게 하시려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으면 하늘나라의 영원한 집이 보증됩니다.
      천국의 보증서를 가진 자는 평안히 생을 살든지 죽든지 마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많은 고난 중에도 찬송과 기도를 할 수 있었고, 로마 옥중에서나 순교하는 순간까지도 편안히 하나님 품에 갈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칼날에 목베임을 받아 순교했고,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하였습니다.
      그런 순간에서도 그들은 편안히 그의 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빌 1:20-23에서 “내가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것은 육신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합께 있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바울처럼 영원한 집에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땅에 있는 장막집이 있습니다. 

      본문 5장 1절에 『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 』라고 했습니다. 
      여기 『 장막집 』(스케누스,  σκῆνος)은 일시적으로 필요에 따라 치는 천막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육체를 가리켜 장막집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영구적이지 못하고 일시적인 천막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인간의 육체를 가리켜 천막에다 비유한 것은 그가 천막 짓는 일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비유를 어렵지 않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장막 집은 무너지는 장막집입니다. 
      여기 『 무너진다 』는 말 '카타뤼에인()'은 개인적인 종말에 따르는 죽음을 말합니다.
      인간은 살아서 주의 재림을 경험할 수도 있지만 주의 재림 전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염려하는 성도들에게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장막을 초라한 인생으로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 4장 20절에 『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천막은 홀연히 파멸되며 나의 휘장은 잠시간에 열파되도다 』라고 했습니다. 
      마치 유목민들이 장막을 쳤다가 옮길 때에는 다시 걷어서 옮기듯이 우리 인생도 일시적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우리가 장막을 치고 살듯이 이 땅에서 일시적 삶을 사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장막처럼 일시적인 처소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13절에 『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라고 했습니다. 

      잠시 영혼이 머물다가 때가 되면 떠나는 것이 장막 집 곧 우리가 가진 육체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육체는 영혼이 머무는 집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아무 것도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지나가는 것이고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엄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30-31절에 『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고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0-11절에 『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모두가 없어지고 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결코 이 땅에 있는 물질은 인간들이 의지할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모든 육체는 필연적으로 이미 종말의 한 날을 받아놓고 태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죽음 앞에 예외나 특례는 존재하지 아니합니다. 
      시편 103편 15절에 『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라고 했습니다. 

      시편 89편 47-48절에 『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셀라)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시 146:3). 이사야 2장 22절에 『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가치가 어디 있느뇨 』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본문 5장 1절에 『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지으신 집의 영원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집이 쉽게 낡아지고 썩는 것처럼 우리 육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가 썩는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체가 썩어도 주님의 재림과 함께 영원히 썩지 아니할 부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54절에 『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 』라고 했습니다. 
      육체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육체 밖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욥기 19장 26절에 『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유한한 인간의 육체를 가리킨다고 해서 여기서 말하는 이 집도 사람의 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실존하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지으신 영원한 집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하늘의 처소, 즉 하늘나라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에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히 천국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천국에는 손으로 지은 장막 집과는 전혀 다른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확신 있게 전하는 메시지는 하늘의 집은 사람에 의해 인공적으로 시공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지으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것은 
      첫째는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이미 약속한 자기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부활 신앙에 따른 개연성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이 땅에 사는 보잘 것 없는 생활환경과 고난당하는 자신의 삶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내다보고 있는 것은 천국에 있는 영원한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 했습니다. 

      이 땅에 있는 장막 집에 사는 자들의 생활 수칙이 있습니다. 

      1.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본문 5장 2절에 『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여기 『 탄식 』은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토해지는 자유와 희망의 몸부림에서 나오는 본능적인 것입니다. 썩어질 육체를 벗어 버리고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덧입기를 소망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영원한 집을 사모한 나머지 빨리 이 땅의 삶을 끝내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5장 4절에 보면 분명히 벗고자 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탄식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애원의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 속에서 재림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살아서 그 몸을 덧입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남아서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의 '주님 고대가'에서 "낮이나 밤이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를 기다립니다."는 가사도 주의 재림을 갈망하는 노래 가사입니다. 이 노래 가사에서 손양원 목사의 신앙과 신학이 잘 정돈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과 신학이 잘 정돈되지 아니하면 절대 순교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신앙과 신학이 정돈되지 아니하고도 어느 정도의 교회생활을 할 수 있으나 순교적 신앙생활은 할 수가 없습니다.

      2.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담대해야 합니다. 
      본문 5장 6절에 『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천국을 생각할 때는 흔히 그 장소의 복락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주님 자신입니다. 모세는 시편 90편 1절에 『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천국을 사모하는 자는 주님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천국을 주님과 관계없이 그냥 천국으로 만족하고 동경하는 사람은 이원론(二元論)자입니다. 
      고(故) 정암 박윤선 박사는 그의 주석에서 "주님에게서 유래하지 않는 또 하나의 진선미와 복락의 근원체가 있는 줄로 생각하는 것은 우상숭배에 가까운 사상이다. 의례히 그 복락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성립되었고 또한 주님이 거기 계신 것 때문에 그 복락이 보존되는 줄 알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3.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해야 합니다. 
      본문 5장 7절에 『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고(故) 정암 박윤선 박사는 "『 이는 』(가르, )이라는 말은 물론 이유 접속사(理由接續詞)이다. 몸에 거할 때는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 곳을 사모하는 마음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그런데 이제 그 이유를 여기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믿음에 의하여 아직 보이지 않는 천국을 바라볼 뿐이라는 의미로 표현되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믿음으로만 관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천국에 대해서는 앞서간 자들의 증거에 의해서 체험이 아닌 역사적 사실로 우리는 믿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증거를 받아 믿게 되는 하늘의 사실들은 지상(地上)의 보이는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절에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감히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없는 거룩하고 고상한 것들입니다. 

      4.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본문 5장 9절에 『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고 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그리스도인들의 존재의의요 삶의 목적입니다. 사람의 첫째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온전히 즐거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대요리 문답 1문). 
      여기 『 힘쓰노라 』는 말은 우리의 목표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21절에 『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4절에 『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5. 주의 일에 미쳐버려야 합니다. 
      본문 5장 13절에 『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라고 했습니다. 
      주의 일에 집중하게 될 때 비보통한 상태처럼 보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6-17절에 『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고 했습니다. 
      베스도가 사도 바울을 미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26장 24-25절에 『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인생들은 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일에 미치든지 세상일에 미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두 곳에 다 미칠 수 없고 두 곳에 다 안 미칠 수도 없는 것입니다. 

      6. 오직 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본문 5장 14-15절에 『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롬 12:1).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인의 값을 해야 합니다. 
      요한1서 3장 16절에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수단이 되고 하나님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고전 6:19). 
      우리의 육체는 영원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육체는 썩어버립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흙으로 만든 육체로는 천국에 갈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몸이 되어야만 가능합니다. 
      그것이 곧 부활체입니다. 
      우리의 육체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육체 밖에서 부활의 몸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는 곧 하늘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은 이미 이 땅에 하늘의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0-21절에 『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심령천국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 
      이 땅에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자들의 영적 집합체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늘의 영원한 집을 제공받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이 지상 교회는 하늘의 영원한 집과 병행선상에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장막 집(육체)에 있을 때는 땅에 있는 교회가 우리의 집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의 집입니다. 

      땅에 있는 교회도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나님이 친히 지으신 하늘의 영원한 집입니다. 
      땅에 있는 교회나 하늘에 있는 집은 모두 우리의 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한 우리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집이 있다는 사실은 집의 구성원으로써 자신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분명한 책임과 의무가 따라야 한다는 당위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된 우리는 아버지의 명예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에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처럼 아버지의 말씀에 의해 그 수칙과 규범대로 힘써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어른들이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때 "너도 이 다음에 너하고 꼭 닮은 자식을 낳아서 길러보면 내 마음을 알 것이다"라고 타이르던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기이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이한 행동을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예를 들면 유월절을 맞이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왜 나귀를 타셨는지 주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당시 풍속에 따르는 종이 발을 씻어주는 것인데 하물며 예수님께서(스승)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이때는 이미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를 아시면서도 그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왜 내 발을 씻겨주십니까? 하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네가 모르지만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라고 일러주셨습니다.

      지금은 모를 수밖에 없지만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
      철이 없을 때는 몰랐지만 철이 든 후에는 그 때의 행동에 대해서 부끄러운 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을까요?

      첫째는 섬김의 도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둘째는 겸손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셋째는 사랑의 덕을 깨우치신 것입니다.
      넷째는 믿음의 삶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본을 보여주셨던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들도 발을 씻어줄 수 있는 여유있는 믿음과 지혜로운 행실을 갖춰야 하겠습니다.

      ♪ 찬송 / 후일에 생명 그칠 때

       





      알리라(1097) γινώσκω 스트롱번호 1097

      1. 알다.  2. 신비를~.  3. 하나님을~
      발음 [ ginōskō ]
      관련 성경  /  알아보다(막 6:38), 알다(마 6:3, 12:5, 7, 막 5:43, 8:17, 눅 20:19, 요 1:40), 알게 하다(마 9:30, 요 19:4), 알려지다(마 10:26, 눅 12:2), 깨닫다(마 24:39, 막 5:29), 알리다(막 9:30, 요 7:17), 동침하다(마 1:25), 주다(막 4:1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 이것은, 그 현재에 베드로가 죄로 인하여 어두워서 깨닫지 못하나, 후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을 날이 있을 것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발을 씻기심은, 그의 속죄의 고난으로 신자들의 죄 씻을 것을 비유한 것이다(11절).
      베드로는,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본 뒤에야 그의 발 씻기신 뜻을 깨닫게 될 것이었다.



      이후에는 알리라(요한복음 13:1-11)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나 행하신 일들은 대부분 기이했습니다. 
      그래서 따르는 무리들도, 심지어는 동행하는 제자들도 오해하는 일들이 종종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알고서 말씀하시고, 알고서 행하셨기 때문이고, 그것을 듣고 보는 사람들은 모르고 듣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시시해도 모르고 보면 신비할 수 있습니다.  

      우수광스럽게도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기행이 따로 없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겉옷을 벗으시더니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씩 한사람씩 씻어주시고 수건으로 그들의 발을 닦아주신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세상을 떠나실 때가 다가왔고 마귀는 벌써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집어넣었을 때였습니다(1-2절). 

      이 위험하고 긴박한 때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놀랍고 아름다운 행동 한 가지를 제자들에게 또 보이셨습니다. 
      그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입니다. 
      원래 손님의 발을 씻어주는 일은 종들의 몫이었고 아랫사람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그 일을 하신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생각도 없이 영문도 모르고 그냥 발을 내밀어 씻음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베드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발 대신에 의문을 내 밀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했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해볼 때 예수님이 자신의 발을 씻어주시고 닦아주시는 것은 인간 도리에 합당치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겨드리고 닦아드리는 경우는 있을지 몰라도 이것이 거꾸로 되는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7절 말씀에  예수님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고 말씀하시며 달래셨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베드로는 자기의 발을 예수님께서 씻어주시는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베드로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Ιωάννης ο Χρυσόστομος 349년경 - 407년)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초기 기독교의 교부이자 제37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이었다.
      "황금의 입을 가진" 이라는 뜻인 그리스어 "크리소스토모스(Χρυσόστομος)' 라는 별칭이 붙었다

      교부 크리소스토무스는 예수님께서 맨 먼저 가룟 유다의 발부터 씻기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발을 내놓아라'하시며 차례차례 열두 제자들을 씻기셨습니다.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들을 그 순간까지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 자신으로 보더라도 이제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이 자기 처지, 자기 앞에 있는 이 무거운 십자가를 생각하고 여기에 집착한다면, 지금 누구를 사랑할 경황이 없습니다.
      지금 이 처지에 누구 발 씻기게 되었습니까? 지금 이 처지에 누구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누구 생각하게 되었느냐고요.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까지도 저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고로 내 처지가 어떻게 곤두박질을 하든, 가난하든 부하든, 병들든 죽든 상관없습니다. 그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대개 사람을 보면 자기 처지에 매여서, 자기 기분에 매여서 남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내가 지금 누구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누구 생각하게 되었느냐고 따집니다. 그것은 사랑의 본질을 잃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심하고 어리석은 제자들에게 실망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놀라운 사랑의 신념이 여기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오늘의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소중한 결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입니다.
      모든 지식에 다 통달하고, 모든 사랑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겸손으로 묶을 때에 소망이 되고, 소망으로 굳게 설 때에 인내가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으로는 오늘의 성경에 보는 바와 같이 사랑의 뜻도 모르는 사람, 허영에 들떠 있는 사람, 배신자 가룟 유다까지 포함합니다. 행동적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큰 역사 안에서 이 사건을 소화하고 계십니다.

      「회남자(淮南子)」에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운명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쓸데없이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자기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남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있는 자기 모습을 아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겸손할 수 있다."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사랑으로 듣고, 사랑으로 보고, 사랑으로 섬깁니다. 사랑으로 들을 때에 여유가 있고, 사랑으로 보기 때문에 소망이 있고, 사랑으로 섬기기 때문에 신뢰가 있습니다.

      참사랑을 하는 자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보입니다.
      끝난 것이 아니예요.
      아직도 몇 번은 바뀔 수 있습니다.
      계속 소망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 --얼마나 여유 있고,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이래서 주를 따르고, 이래서 주의 본을 따라 증인이 될 것입니다. *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많은 난관과 문제들을 만납니다. 
      그 문제들이란 경제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건강의 문제일 수도 있고, 자녀들의 문제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 어떤 재난과 재앙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개인적이고 가정적인 문제가 있는가하면 또한 공동체적이고 국가적이고 국제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많은 문제 앞에서 때때로 우리는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또한 낙심합니다. 
      그리고는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하나님께 의문을 표시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왜 이런 슬픔이 우리 가정에 있어야만 합니까?" 
      "왜 이렇게 비참한 재난이 이 땅위에 존재해야만 합니까?" 하나님께 따져 묻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은 우리들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 구약성경에 나오는 많은 선지자들도 그랬고 훌륭한 하나님의 종들도 그랬습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문제 앞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나님, 왜입니까?" 
      "어찌하여 그랬습니까?" 
      "하나님, 언제까지입니까?"........ 

      인생의 문제와 그 의미를 다 깨닫기에는 우리가 늘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서두른다고 앞당길 수도 없는 일입니다.
      결국 때가 되어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수준의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제자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알고 있었지만 베드로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1절 말씀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하셨고,  3절에서도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라고 하셨으며, 10절과 11절에서도 ".....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셨고, 이 일을 위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할 가룟유다의 배신도 이미 알고 행한 일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입니다. 

      예수님이 알고 있는 일을 제자들이 몰랐던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알고 행하신 일을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아멘'

         지금은 모를 수 있습니다.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의미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아서 모르고 있는 일도 때가 차면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다 지나갑니다. 그리고 지나가면 그떄서야 알게 됩니다. 
      왜 모릅니까? 우리 수준 때문입니다. 영적 이해력이 약해서입니다. 좀더 지니서 자라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이 놀라운 행동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그 영적 지각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점점 더 자랄수록, 우리가 영적으로 점점 어른이 되어갈수록 우리는 지금 알지 못하던 것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잘 알지 못하는 일도 이후에는 반드시 알게 될 것입니다. 결국에는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모든 것을 깨닫게 해주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후에는 알게 될 날이 반드시 오게 됩니다.

         1.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당장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알아주지 않더라도 이후에는 알게 되리라는 생각을 가지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조급하지 않으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쩝니까? 지금 당장 알수 없기 때문에 놀라고 두려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이제 당장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하고 불안하고 미움이 솟아오르고 그래서 대적자가 되고 배신자가 되고 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인내하시고 소망을 품고 멀리 내다보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 일은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겸손의 본을 보여주시면서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주신 교훈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어떤 교훈일까요? 바로 "지금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이후에는 알게 된다"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당장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필요없는 일이 아닙니다. 당장 깨닫지 못한 일이라고 해서 함부로 이러니 저러니 불평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면 이후에는 알게 되리라 믿고 기다려보아야 합니다. 언젠가는 알게 되고 깨닫게 될 시간이 반드시 오게됩니다.  

      우물가에서 승늉 구한다는 말이 있는데 서둔다고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바늘 허리에 실 메달아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너무 조급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후에는 알리라"는 주님의 마음과 같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인내하고 소망을 품고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더 멀리 내다보는 미래적인 안목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2. 주님께서 이처럼 너그러우실 수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는 이 사랑이, 지금은 알지도 못하면서 투정이나 하고, 불쑥 불쑥 나서기나 하는 제자들, 사탄이 그 마음에 들어가서 예수를 팔 생각이나 하고 있는 가룟유다, 스승이 눈믈을 삼키면서 자신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곧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을 당해야 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의미도 모르는체 철없이 발을 맏겨놓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 후에는 알게 될 것이라"고 믿어주는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허물을 몰라서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참아주시고 사랑해주신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발을 씻음 받은 사건의 경험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데 엄청난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해주셨는데 내가 왜 이러나 하면서 곧 다시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주시고 사랑할 가치가 없는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우리들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알게 될 것을 믿고 참고 인내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을 가지고 소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사랑이든지 "후에는 알리라"는 심정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장 몰라준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 마세요. 
      뿐만 아니라 고난과 시련을 당할찌라도 "지금 당장 시련의 의미를 알지 못할찌라도 언젠가는 알레 되리라. 이후에는 알게 해 주시시리라"는 심정으로 믿고 기다리고 인내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릉으로 축원합니다. 

      3. 지금 알지 못할지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주여 왜 주님이 내 발을 씻어주십니까?"하는 베드로의 물음에 주님은 "내가 너의 발을 씻겨주지 않으면 그리고 베드로 네가 나에게 발을 씻음받지 아니하면 너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아직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내게 발을 내밀어 씻음을 받지 않으면 너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 관계가 된다 하시면서 선택을 명하셨습니다. 설득과 이해보다는 선택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순종하라하신 것입니다. 지금 머리로는, 지금 영적 상태로는 아무리 설득을 하고 이해를 시키볼려고 해도 되지 않음을 에수님께서 아셨기에 받아들일 것이냐 말것이냐를 선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깜짝놀라 "주여 그렇다면 내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처럼 쉽게 감동하고, 쉽게 낙심하고, 쉽게 결정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러한 성품이 꼭 단점으로만 작용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설득과 이해보다는 순종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베드로의 장점이기도 한 것입니다. 

      인생살다보면 지금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어디 한 두가지 뿐이겠습니까? 머리로 납득된 일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인생살이가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당장 이해할 수 없다고, 당장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은 다 모릅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다 모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왜 그런 일이 있어야만 했는지 무엇 때문에 그런 재난이 닥쳐왔었는지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 의미를 다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하고도 안심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의 의미를 이후에는 다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처럼 "이후에는 알게 될 줄로 믿는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시고 조금더 미래를 바라보고 소망을 가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2-10-2024(화) 요한복음 12:44-5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는 하나님(44-45절)

      44.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Then Jesus cried out, "When a man believes in me, he does not believe in me only, but in the one who sent me.
      When he looks at me, he sees the one who sent me.

      믿는 것(4100)  πιστεύω 스트롱번호 4100

      1. 믿다.  2. 신뢰하다. 3. 목적어를 가진 경우
      발음 [ pistĕuō ]
      관련 성경  /  믿다(마8:13, 눅1:45, 벧전1:8), 맡기다(눅 16:11, 갈2:7, 딛1:3), 의탁하다(요2:24, 딤후1:12), 맡다(롬3:2, 고전9:17).



      보는 것(2334)  θεωρέω 스트롱번호 2334

      1. 구경하다.  2. 깨닫다.  3. 요 14:17,19
      발음 [ thĕōrĕō ]
      관련 성경
      바라보다(마27:55, 막15:40), 보다(막3:11, 눅10:18), 구경하다(눅23:35, 계11:12), 생각하다(히7:4).



      유대인들의 믿음 - 여호와 하나님
      요한의 믿음 - 예수를 믿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
                          - 예수를 보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보는 것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은 예수가 여호와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기독교 교리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삼위일체(삼위일체.)"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서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없는 용어를 사용하여 삼위일체 신앙을 강조하고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특이한 것이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부분적으로 삼위일체 신앙을 계시합니다.

      요한복음 12장 44절과 4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

      이 말씀에서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를 보는 자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는 곧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곧 예수님이시라고 합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과 예수님은 동등하시며 하나가 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이시라는 증거가 되는 말씀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16)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계시록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하나님은 빛(요일 1:5)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사랑을 십자가로 증거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마태복음 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13: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누가복음 10: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5: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이외에도 더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인간의 언어로 정확하고 쉽게 설명할 수 없지만 삼위의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사역하시며 동시에 하나가 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지혜와 깨닫는 마음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다 나와 찬송 드리세

      요한복음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I and the Father are one.


      에고 카이 호 파테르 헨 에스멘
       εγω και ο πατηρ εν εσμεν

      엔(1520) εἷς, μία, ἕν ἑνός, μιᾶς, ἑνός 스트롱번호 1520

      1. 하나.  2. 마 5:41.  3. 마 5:19
      발음 [ hĕis ]
      관련 성경  /  하나(마 5:29, 18:10, 막 14:10), 한(마 8:19, 막 10:7, 눅 10:42), 낱낱이(요 21:25), 일년(약 4:13), 일(마 5:18), 유일(막 12:29), 일일이(눅 4:40), 각(행 2:3), 각각(행 2:6), 각기(살후 1:3).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입니다

      어떤 승객이 여객선을 탔습니다.
      갑자기 선장을 부르면서 다급하게 요청을 합니다.
      “선장님! 좀 멈춰주세요! 제가 사랑하는 강아지가 바다에 빠졌어요!”
      그러나 선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듭니다.
      “안됩니다. 개 한 마리 때문에 이 배를 멈춰 설 수는 없습니다.”
      그랬더니 승객이 다시 말합니다.
      “선장님, 사람이 빠진 경우는 어떠합니까?”
      “물론 멈춰야지요! 그 사람을 구해야지요!”
      이 승객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모든 것을 제쳐놓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 강아지를 껴안았습니다.
      그러자 선장은 배를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승객과 강아지를 구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죄악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허물이 많습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적대행위를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 내가 저들의 고통을 대신 나누겠습니다.
      저들이 받을 징벌을 내가 대신 받겠습니다.
      저들이 당해야할 죽음을 내가 대신 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가 인간이었다면 그의 죽음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바로 사실 때문에 우리는 구원의 역사를 얻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풍요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넉넉하게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진리 안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한 남자가 아내를 잃었습니다.
      이 남자는 무덤가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옆에 다가섰습니다.
      그는 흐느끼면서 말합니다.
      “제가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무척 사랑했습니다.”
      옆에 있던 목사님은 고개를 끄덕여줬습니다.
      그런데 더 흐느끼면서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살아있는 동안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은 표현하지 못하면 비극이 됩니다.
      사랑은 표현해야 축복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해야 합니다.

      시편 18:1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 창세기 1장 1절로 2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아멘!

      오늘부터 하나님의 ‘성령’에 관한 말씀을 함께 공부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 가지로 기록이 되어있다. 그중에 특별히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우리가 조금 더 깊이 느끼고 경험할 수 있도록 주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여러 표현 가운데 ‘영’이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요한복음 4장 24절“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씀하신다. 또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도 “주는 영이시니”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볼 수 있겠고,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나타난 주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당연히 성령님도 영이시기 때문에 세분을 가리켜서 다 영이라고 말할 수 있고, 세분이 다 거룩하다, 거룩하신 분들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다 인정할 수 있다.

      이사야서 6장 3절에 스랍천사들이 부르는 찬양은 ‘거룩하다’는 말을 세 번 반복하고 있다. 또 요한계시록 4장 8절에도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룹천사들이 부르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똑같이 거룩하다는 찬양을 세 번 반복한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당신의 이름 아들과 성령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신 것이 마태복음 28장 19절에 기록되어 있다. 분명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이름이, 그 세 분의 하나님들의 인격적인 이름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실 때, 아버지라고 직접 부르신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이 이름은 우리가 집에서 사랑하는 아빠를 부를 때 아빠라고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이 가지신 독특한 성격, 아버지로서의 성격을 잘 나타내는 이름이라고 본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와 아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랑의 관계를 표현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에스멘(2070)  ἐσμέν 스트롱번호2070

      1. 우리는 ~ 이다.  2. 요 9:40.
      발음 [ ĕsmĕn ]

      1. 우리는 ~ 이다, 요 9:4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 28절에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서 29-30절 말씀이 나왔다.
      그들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은 일체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심은, 본질적으로 그가 아버지로 더불어 일체로서 영원하신 하나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아버지의 계시자(啓示者)로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순종하시는 것 만큼, 그의 모든 행동은 곧바로 아버지의 행동과 완전히 일체(一體)였다.

      요한복음 14:8-11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요한복음 5:19~29)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 것은 유대교의 두 기둥, 율법(안식일)을 어기고 성전을 헐라는 가르침 때문이었지만 더 근거에는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선언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자기 친 아버지라 부르시고, 자기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유대인들의 반응에서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으로 선언하심이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근거를 세 가지로 정리해보자.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께로서 나신 분이다(요 1:14)

      이것은 예수님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시란 표현이다(요 1:1)
      아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시고(출생)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신다(출래) 이는 영원토록 자존하시는 성삼위 하나님의 신적 존재방식이며, 이러한 신인동형론적 표현은 예수님에게서 나왔다.
      예수님은 자신을 아들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셨다.
      한마디로 성자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자존하시던 하나님이셨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바 되셨다(요 7:24)

      성경은 출생과 출래를 통한 성삼위 하나님 간의 존재방식과 함께 성삼위 하나님의 사역방식을 표현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일하신다(요 14:10).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주셨고,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뜻을 따라 보내심을 받고 구속주로서 이 땅에 오셨다.

      셋째,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하시며 아버지의 것을 말하신다(요 8:29).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하는 방식이 성령 안에서다.
      예수님은 일생동안 성령으로 충만하셨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요한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의 담지자가 되시고 부활승천 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사 성령의 파송자가 되셨다.

      요한복음 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요 10:38)

      - 사건중심으로 기술된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일곱 표적과 일곱 선언을 기록하되 그 근본에는 예수님이 성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권위가 있다.
      이 권위의 근거는 앞에서 정리한 것처럼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그중 하나님과 예수님의 성삼위일체 존재방식 사역방식을 기억함이 중요하다.
      아버지와 아들은 언제나 성령으로 연합되어 있으며 이 연합의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동참하면 그리스도께서 성령께서 그의 안에 내주하신다.
      성육신 이전 예수님은 영이셨으므로 성부 성자 성령의 일체됨이 쉽게 이해되나,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육체가 되셨기에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하심을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 아버지는 아들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으로 아버지와 하나 되게 하신다(요 3:34) 아버지는 아들을 혼자 두지 않으시고 항상 함께하신다(요 8:29).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 성령님은 영이신 하나님과 육체가 되신 예수님을 하나 되게 하시고 항상 함께 있게 하신다. 성령님은 우리가 첫 창조 피조물의 존재방식대로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하고 하나되게 하신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시듯, 우리들도 성령님으로 인해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된다. 성삼위 하나님과 동행하며 순종하는 에덴에 있었던 본래인간의 모습이다. 이것이 생명이다(창2:7)


      어떻게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하나”인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은 그의 동족 ‘유대’인들을 노하게 하였다.
      그들은 그의 말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돌로 치려하였다(요 10:31-33).
      왜 그랬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 자신이며 자기 아버지와 동등하다고 주장하셨는가?

      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의 문맥을 보면, 그의 말씀의 의미를 명확히 알게 된다.
      한 집단의 ‘유대’인들이 그를 에워싸고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지를 숨김없이 말하라고 요구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요한복음 10:25-30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나이지 동등이 아님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아버지와 동등하다고 주장하지 않으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동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아버지의 우월한 지위와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양”을 주셨음을 인정하셨다.
      그는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크시다’고 명백히 말씀하셨다.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은 “양”을 구원하시는 목적에 있어서 “하나”라는 것이다.
      즉, 두 분이 “양”에 관하여 동등하게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아무도 그들의 손에서 양을 빼앗아가는 것을 허용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신성에 있어서 동등함을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목적과 행동에 있어서 하나임을 지적하셨다는 것은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기도로 확증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6-11

      예수께서 이 기도 가운데서 표명하신 사상이 요한복음 10장에 기록된 그의 말씀과 비슷하다는 것에 유의하라.
      예수께서는 17장에서 다시 그의 제자들 즉 그의 “양”을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셨다.
      그러므로 이 두 개의 장에서 지적된 하나라는 의미는 동일하다.
      예수의 기도를 보면, 예수와 그의 아버지가 하나인 것은 그의 참다운 추종자들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의미와 동일하게 “하나”임을 알 수 있다.(요 17:11)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부가 결코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목적과 활동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
      예수께서 그의 기도 가운데서 그의 아버지를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고 부르시고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신 사실은 예수께서 자기 아버지와의 동등성을 결코 주장하지 않으셨음을 더욱 증명한다.(요 17:3, 8)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라” 하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가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말한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예수께서는 이것을 부인하지 않으셨다’고 이의를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이 그러한가?
      기록을 조사하여 보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하나님을 모독, 새번역]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2-38) 

      그러면 왜 믿음없는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으로 삼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는가?
      분명히,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아버지께만 속하였다고 믿은 능력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그가 “양”에게 “영생”을 준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어떠한 인간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빠뜨린 것은 예수께서 모든 것을 그의 아버지로부터 받았음을 인정하셨고 그가 하고 있던 선한 일이 그가 아버지의 대표자임을 증명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분이 자신을 하나님으로 삼아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릇된 결론이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논리가 그릇되었다는 것은 또한 다른 사건으로 볼 때 분명하다.
      예수께서는 ‘산헤드린’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에 ‘아들 하나님’이라고 자처해서가 아니라 ‘메시야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하였다는 거짓 비난을 받으셨다.(마 26:63-68. 눅 22:66-71)
      또한 이보다 앞서 어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자로 높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그를 신성 모독자로 죽이기를 원하였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으 5:18은 이렇게 우리에게 알려 준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음에 유의하라.
      그러나 예수의 믿지 않는 동족 ‘유대’인들은 그가 아버지와 이러한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특별한 아들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하고 있다는 누명을 씌운 것이 잘못이었던 것과 같이 그들이 예수께서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고 불렀’기 때문에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자로 삼았다는 주장도 그릇되었다.

      그의 아버지와 같이 영원하지 않음

      물론 예수와 그의 아버지와의 하나이심 곧 그분들의 연합은 어떠한 인간 부자 관계에서의 연합보다 크고 웅대하다. 물질적인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도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였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인간 이전 존재에 대하여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I Am, 예루살렘 성서]” (요한 8:58)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자신을 여호와라고 밝히셨는가?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who I Am, 예루살렘 성서]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I Am]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출애굽기 3:14)
      많은 번역자들은 요한복음 8:58과 출애굽기 3:14에서 다 같이 “I a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두 귀절은 동일한 사상을 표현하는가?

      아니다.
      출애굽기 3:14이 희랍어 칠십인역(기원 제1세기에 사도들이 자주 인용한 번역판)에는 ‘에고 에이미 호온’ 즉 “나는 존재자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 8:58에 있는 ‘에고 에이미’(I am)라는 말의 단순한 사용법과 아주 다르다.
      요한복음 8:58에 있는 동사 ‘에이미’는 분명히 역사적 현재형이다.
      왜냐 하면,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의 과거와 관련시켜 자신에 관하여 말씀하시고 계셨기 때문이다.
      많은 번역자들은 그들의 번역에서 이것을 암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역」에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내가 존재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인간 이전 존재를 지적하신 예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은 놀랄 필요가 없었다.
      여러 세기 전에 ‘미가’의 예언은 메시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기 때문이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가 5:2)
      그러므로 ‘아브라함’보다 오래 전에 존재하였지만 예수는 시작이 없는 분이 아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그의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근본”이 있다.(시편 90:2)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운 사실 자체가 그분이 아버지에 의하여 산출되었으며 따라서 그의 맏아들이자 독생자임을 나타낸다.
      예수 자신은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산다고 말씀하셨다.(요 6:57).
      아들은 존재하게 된 후에 만물을 창조하는 데 사용되었다.(요 1:1-3. 골 1:15-17. 히 1:2)
      독생자로서 이분은 아버지와의 특별한 친교를 즐기셨다.
      성경에서 그는 “아버지 품 속”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요 1:18)

      예수께서는 그의 아버지의 형상—개성과 길—을 매우 완전하게 반영하셨으므로 ‘빌립’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아들을 통하여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와 같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눅 10:22)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는 참으로 광대한 의미에서 하나이다!
      그분들은 항상 목적활동에 있어서 “하나”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명백히 알려 주는 바와 같이 그들은 동등하지 않다.
      아들은 항상 아버지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하셨고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순복하였으며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셨다.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말씀하셨다.(요 8:29. 고전 11:3).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참으로 ‘아들 하나님’ 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다.(요 20:31).





      믿는 것(4100)  πιστεύω 스트롱번호 4100

      1. 믿다.  2. 신뢰하다.  3. 목적어를 가진 경우
      발음 [ pistĕuō ]
      관련 성경 / 믿다(마8:13, 눅1:45, 벧전1:8), 맡기다(눅 16:11, 갈2:7, 딛1:3), 의탁하다(요2:24, 딤후1:12), 맡다(롬3:2, 고전9:17).

      보는 것(2334)  θεωρέω 스트롱번호 2334


      1. 구경하다.  2. 깨닫다.  3. 요 14:17, 19
      발음 [ thĕōrĕō ]
      관련 성경  /  바라보다(마27:55, 막15:40), 보다(막3:11, 눅10:18), 구경하다(눅23:35, 계11:12), 생각하다(히7:4).

      이 귀절들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믿음을 권고하신 말씀이다.
      이 권고의 내용은 그가 바로 신인 간(神人間)의 중보자란 것이다.
      곧, 그를 믿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과 같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중보자)라는 것이, 요한 복음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중보자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영적으로 보게)하시니, 그런 의미에서 그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는 누구신가?(마가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The beginning of the gospel about Jesus Christ, the Son of God.

      예수는 누구신가요?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예수님께서도 이처럼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를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해 평합니다.
      다원주의 시대에는 이런 예수님에 대한 평가가 더욱 다양해졌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다양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누가복음 1장 3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히브리어 1장 2절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요한복음 1장 역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만드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셔서 영원한 구원을 이뤄주신 분입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위해 역사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감사함으로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대상 16:25~26)
      우리는 이런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나를 이렇게 지어주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아름다운 성도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함에 대해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 주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간조한 곳, 건전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렘 17:5~7)

      셋째, 새롭게 하시는 재창조의 주님
      주님은 오늘도 창조주로서 만물을 새롭게 하고 계십니다.
      내 삶을 새롭게 할 수 있도록 주님께 인생을 맡깁시다.
      주님께 인생을 맡길 때 내 심령과 삶이 새로워지는 은혜를 누립니다.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합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읍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도록 합시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심으로 내 삶이 새로워지는 회복의 은혜와 새 길이 열리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와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호칭


      구약에서의 하나님 아버지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진흙, 창조주와 피조물, 주관자와 복종자의 관계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도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희미하게나마 구약 성경에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은 민족적인 처지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신명기에는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묘사된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시편 기자는 보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시 68:5).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에 비유하였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 103:13).

      유대인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호칭으로 부르기를 꺼렸고, 다른 편으로는 아버지 호칭을 집단적인 의미 내지 비유로 사용해왔다. 이러한 유대교의 하나님 “아버지” 호칭에 대하여 나사렛 예수는 새로운 의미, 즉 신약적인 독특성을 부여하였다.

      첫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족관계로 표시하였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부자의 관계로서 하나님의 부성을 강조한 것은 바로 유대의 전통적 사상이 의미하는 바를 보다 분명히 설명해 준다.
      예수의 아버지 호칭은 유대교가 의미하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를 부자(父子)관계로 끌어 올리는 혁명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호칭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한다.

      그것은 아들로서 아버지에 대한 인격적인 관계와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 이 호칭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더 이상 주인과 종 사이의 비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자녀에 대해 베푸는 아버지의 무한한 긍휼과 인자에 대한 신뢰가 담겨져 있다.

      호칭 ‘아버지’의 함축성

      나사렛 예수가 사용한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아람어로는 abba)라는 호칭은 유대교적인 하나님 상(像)의 틀을 깨뜨리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격적인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아버지’ 호칭은 다음의 함축성을 지닌다.

      첫째,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깊으신 관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와 같이 보살피신다.
      우리에게 의식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부모가 자녀들의 의식주를 돌보아 주시는 것 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의 기본을 돌보아 주신다.
      예수는 어떤 조건을 제시하며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에 대하여 근본적인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소박한 믿음을 말한다.
      마치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심정을 지니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르치시고 계신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둘째, 자녀 하나 하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하나 하나를 눈동자 같이 머리털까지 세고 계시는 세밀한 사랑이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30).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우리에 두고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과 같다고 예수는 설교하신다.
      그 양을 찾으면 목자가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즐거워하며 집에 돌아와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눅 15:6)라고 말하듯이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
      누가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셋째, 하나님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계: 직접성과 단순성을 나타낸다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이다. 단지 형식이나 의식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아직도 종교적 차원이다. 하나님은 자유스러운 마음, 자발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배와 찬양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애원하는 심령에서 나오는 자녀의 단순한 기도를 들어 주신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하나님께 기도하고 요구하는 데는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라 직접적이고 단순성이 요구된다.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다. 자식이 아버지 앞에서 주저한다면 그것은 참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신앙의 자연스러운 관계로 나타내고 계신다.

      넷째, 자녀의 고통에 함께 하시는 분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시고 참여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고통은 율법적인 인과응보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고통이란 단순히 하나님의 징계로만 생각해서도 않된다.
      우리의 고통에는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자의 목적이 있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당하는 이 세상의 고통과 박해에는 하나님의 의미와 목적이 들어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선으로 바꾸시고 좋은 것으로 갚아주신다.
      우리의 고통은 우리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통이다.
      이 하나님의 고통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가장 잘 드러나 있다.

      다섯째, 아버지로서 자녀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신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에게 구약의 율법학자들이 생각했듯이 단지 준엄한 재판관이나 율법집행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아버지시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녀에게 어느 계명을 지켰는지 보시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를 가졌는지에 대해 우선적으로 보신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예수의 설교는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탕자의 비유)(눅 15장)에서 나타난다.
      탕자는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 라고 아버지에게 참회의 고백을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게의치 않고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온 사실 자체를 기뻐하신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2-24).
      아버지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아들을 즐겨 맞이해주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 비유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아낌없이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교훈해 주고 있다.

      여섯째,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한 형제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한 형제가 된다.
      여기에는 백인, 황색인, 흑인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 남자와 여자, 노인과 어린이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없으며, 지식인과 비지식인의 차이가 없으며, 권력자와 서민의 차이가 없다.
      모든 인간의 계층의 구별이 사라진다.
      그것은 형제 자매가 아버지 앞에서 하나인 것 처럼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하나의 형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계 21:26).

      예수의 영 안에서 정립되는 하나님의 부성(父性)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부성)이란 나사렛 예수 안에서만 정립되고 그 안에서 드러난다.
      혈과 육이라는 자연적인 관계로는 정립되지 않는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가능하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오늘도 예수를 믿고 그의 자녀가 될 때 우리에게 아들의 영인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영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abba,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5-16).
      오늘날에도 신자인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친히 “아빠!”라고 불렀던 예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역사적 예수의 실재에 대한 연속성을 체험하게 된다.

      12-09-2024(월) 요한복음 12:36b-4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의 영광을 보고(41절)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Isaiah said this because he saw Jesus' glory and spoke about him.

      요한복음 12:43
      저희는 사람의 영광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현대인의 성경>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보다 세상의 영광을 더 사랑했던 것이다.
      <공동번역>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보다도 인간이 주는 영광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새번역>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다.

      고린도후서 12:1-2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린도후서 12:5
      <현대인> 이런 경험이야말로 큰 자랑거리가 되겠지만 나는 나의 약한 것만을 자랑하기로 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주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으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한 것을 본 것을 말합니다(사 6:1).

      하늘 보좌에 앉아계신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았을 때 선지자 이사야는 놀라운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때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사 6:8).

      주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은 신앙적으로 굉장한 체험이며 놀라운 간증입니다.
      대부분 은혜를 체험한 간증자들은 그 은혜로 인하여 내가 어떻게 되었다는 자기 중심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예를 들면 죽을 병에서 고침을 받았다는 것과 경제적 파탄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회복할 수 있었다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들 입니다.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는 극적인 드라마와 자기 자랑과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보고도 볼 수 없고, 듣고도 듣지 못함며, 깨닫지 못하는 무지목매한 백성들을 향하여 바르게 가르치고 깨우쳐서 보는 눈과 듣는 귀와 깨닫는 마음을 갖도록 헌신하는 신앙적 결단을 갖게 된 것을 고백합니다.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받은 은혜를 바르게 사용하고 관리하여 열매를 맺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내가 받았던 은혜를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어떤 은혜를 받았습니까?
      물론 사람마다 받은 은혜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에게 공통된 은혜는 지금 우리가 같은 시간대에 같은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지만 어떤 사람은 질병으로, 어떤 사람은 사고로, 어떤 사람은 경제적 파산으로, 어떤 사람은 정신적 고통으로 시달리는 크로노스적 삶에 지쳐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건강한 몸과 마음과 신앙으로 카이로스적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해야 할 일은 크로노스적 삶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에게 보는 눈과 듣는 귀와 깨닫는 마음을 갖도록 권면하고 가르쳐서 카이로스적 삶의 자리로 옮겨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나의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과거에 일어난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지속적인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란 사람을 내면에서부터 새롭게 변화시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충성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나 맡은 본분은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 이사야는, 묵시 중에서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영광을 본 일이 있었다(사 6:1).
      그는 그 때에 주님의 말씀, 곧,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심을 들었다.
      그 때에 겸허하여 받은 말씀이 앞질러 인용된 내용이었다(사 6:9-10).







      보고(호라오. hŏraō)  ὁράω 스트롱번호 3708

      1. 보다.  2. 마 28:7.  3. 눅 1:22
      발음 [ hŏraō ]
      관련 성경  /  보이다(마 8:4), 알리다(마 9:30), 주의하다(마 16:6), 보다(눅 1:22, 요 1:18, 고전 9:1).

      영광(1391) 독사(dŏxa) δόξα, ης, ἡ 스트롱번호 1391


      1. 광명.  2. 눅 2:9. 3. 위엄
      발음 [ dŏxa ]
      어원  / 1380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광(마 4:8, 막 8:38, 눅 2:9), 광채(행 22:11), 영화(榮華)(요 17:5).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 이사야는, 묵시 중에서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영광을 본 일이 있었다(사 6:1).
      그는 그 때에 주님의 말씀, 곧,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심을 들었다.
      그 때에 겸허하여 받은 말씀이 앞질러 인용된 내용이었다(사 6:9-10).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사람의 영광이란 사람으로부터 내가 인정을 받고 존경받는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영광이란 사람이 오직 하나님에게만 존귀와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영광에 도취되면 하나님의 영광은 구름에 태양이 가리워져서 그 찬란한 빛이 드러나지 않는 것과 흡사합니다.

       


      사람을 영적 존재라고 하는 이유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영이 선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동물을 만들었을 때 그 재료는 동일한 "흙"이었습니다.
      단 한가지 차이는 사람에게는 생기를 불어넣어주셨습니다.
      그 결과 동물은 육체적인 생명만 소유하였지만 사람은 영적 생명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영적 존재라고 합니다.

      사람의 영광은 영이 회복된 상태에서 사람답게 될 때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언제나 영광 그 자체라고 하겠습니다.


       

      36절에 예수님께서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고 했는데, 예수님 말씀을 듣고도 그 많은 표적을 보고도 사람들이 도무지 믿지 않고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37절)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영적으로 마음이 길가같이 굳어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감사할 일입니다. 은혜를 주시는 것을 느낄 수 있고 말씀과 찬양을 통해서 내 마음에 감동이 되는 것 자체가 정말 놀라운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이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사람들 못지 않게 안타까운 사람이 또 있습니다.
      예수님를 믿지만 드러내지 않고 믿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42절 43절에 말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42절에 ‘관리 중에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여기서 관리들이란 당시 유대인의 최고 종교회의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회원들을 가리키는데 요즘 우리나라로 말하면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를 다 통괄하는 기구와도 같습니다. 그 당시 최고 권력층입니다. 고위 사제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지도자급 원로들로서 71인으로 구성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부와 권세가 막강한 사람들입니다. 그 관원들 중에 마음으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믿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심정이 이해되십니까? 성경은 그 이유를 “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고 했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 믿는다고 고백하면 산헤드린 공회의에서 출회를 당하고 그 동안 누렸던 특권을 빼앗길 것이 두려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공회의원으로 누리는 권력이 막강했습니다.
      그들이 왜 이렇게 두려워해서 예수님을 드러내서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43절에서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들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해가 안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그 사람들이 그럴 수가 있는가?’ 하고 이해가 안되어야 하는데, 안타까운 것은 이해가 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니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괴롭지만 하나님께서는 통탄할 일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는 것을 시인을 해서 설혹 산헤드린 공회 회원이라고 하는 막강한 권력과 특혜를 다 포기하게 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땅한 일이지. 나라면 당연히 그렇게 할 거야.’ 그렇게 해야 되는데 우리 마음 속에는 ‘ 충분히 이해가 되네. 예수님을 그들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해서 산헤드린 공회 회원이라고 하는 엄청난 권력 다 잃어버린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을 거야. 진짜 갈등이 많았을 거야.’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관리들은 지금 얼마나 통탄하고 괴롭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믿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때는 세상 권세, 사람의 영광을 포기하는 것은 죽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럴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크신지 이제는 보고 사람의 영광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지금은 보았을 그들은 ‘내가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가슴을 칠 것입니다. ‘내가 왜 그 때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의 영광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복을 놓졌을까? 왜 나는 그 때 그렇게 바보같았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지금은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순간에 사람의 영광이 훨씬 커보였습니다. 그가 공직자로서 누리는 권력과 특혜와 사람들로부터 받는 모든 존경을 다 잃어버린다는 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죽는 것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밖에 행동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얼마나 후회가 되고 원통하겠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찌 사람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이 저울질되고 비교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비교가 되는데 안타깝습니다. 관리들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드러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숨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까?
      사업하고 장사하다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감추고 거짓의 영을 따라 살지 않았습니까?
      성공하려다 보니 예수님 믿는 것을 감추고 미움의 영, 분열의 영을 따라 살지는 않았습니까?
      세상 재미 쾌락을 좇다가 음란의 영을 따라가지는 않았습니까?

      마태복음 10장 32-33절에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꼭 입으로 부인해야 부인하는 것입니까? 입으로는 시인하면서 삶으로 부인하는 것이 더 마음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드러내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싶은 유혹이 예수님 당시 관리들만이 아니고 우리에게도 실제로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사람의 영광만 알지 하나님의 영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사람의 영광과 세상 영광에 대한 미련이 너무 강한 것입니다. 이것 잃어버리면 어떻게 할까? 그 문제에 대한 정확한 답이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얻고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일에 대해서 아직 눈이 뜨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심심찮게 입시 실패로 자살한 학생들의 소식을 듣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자살을 할 만큼 심각했을 것입니다. 도무지 더 살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유는 사람의 영광, 세상 영광 밖에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대학 들어가지 못하고 또 대학에 가지 못한다면 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평생 그 손가락질 받고 어떻게 사느냐?’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의 영광은 아무 것도 아니지요. 세상 영광과 비교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누구에게서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만 시험 잘못 보면 죽을 생각부터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안에 계신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셨습니까?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여러분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 사이에서 망설여집니까?
      이제는 망설여지지 않아야 합니다.
      찬송하며 좁은 길을 가야 합니다.
      생명과 멸망의 갈림길인데. 망설여지면 큰 일이지요!
      그러나 길이 좁으면 마음이 힘든 것이 사실이니 어떻게 합니까?
      넓은 길, 모두가 가는 길이면 유혹이 되니 어떻게 합니까?
      왜 그렇습니까?
      사람의 영광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나면 망설여지지 않습니다.
      갈등이 없어지게 됩니다.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 안타깝지 좁은 길로 가는 자신이 안타깝지 않습니다.
      그런지 안 그런지는 여러분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살펴 보면 압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마음이 길 가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오늘 이 자리에 오지도 않았을테니까요. 그러나 마음이 돌밭이나 가사떨기인 사람은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진단해 보면 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어려울 것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손해 볼 것이다.
      솔직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 때 당하게 될 고난이 두렵습니다. 마음이 돌밭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로 걱정과 염려가 가득합니다. ‘어떻게 먹고 살까? 애들은 어떻게 공부시킬까? 집은 어떻게 마련할까? ’ 세상 재리로 마음에 걱정과 염려가 많은 사람은 가시덤불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지금 현재는 말씀에 은혜를 받는 것 같아도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다. 곧 길가와 같은 마음이 될 가능성이 많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상태에서 그냥 머물러있으면 큰 일납니다. 사람의 영광 세상 영광에 그만 마음이 흔들려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는 일에 대해서 결단하지 못하는 관리들과 똑같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이야기가 기록이 된 것입니다.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 영광보다 더 사랑하여 우리 마음 상태가 그렇다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드러내지 않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큰 일 납니다. 결국 예수님을 떠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영광’을 버리는 것을 너무나 두려워합니다. 꼭 죽을 것 같습니다. 다 잃어버릴 것 같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조롱당할 것 같습니다. 진짜 복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고, 오직 사람의 영광 세상의 영광만 전부인줄 알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의 영광 버려도 절대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의 영광을 버릴 수 있을 때, 비로서 진정한 영광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하다가 이 부분에서 심한 영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을 이렇게 나누는 것은 너무 2분법적인 생각이야!’ ‘사람의 영광을 포기하라는 것은 너무 극단적인 태도야!’ ‘성도들은 이런 메시지를 들으면 다 떠나갈 거야!’ ‘성도들이 세상에서 낙오하게 만드는 것이야!’  ‘세상 영광도 하나님이 주신 복일 수 있잖아?’ 설교할 담대함을 잃어버릴 정도로 휘청거렸습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너는 계속 가야 한다. 절대 여기서 멈추면 안된다.’ 하시면서 ‘십자가에서 보아라! 십자가에서 보아야 한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묵상했습니다.

        제가 처음 십자가의 실상을 보았을 때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었다고 했지만 십자가의 실상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장애인이 될 절박한 처지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이 뜨였습니다. 그 날 저는 나 자신이 철저한 죄인인 것을 비로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저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을 알았습니다. 그 때 저는 ‘사람의 영광’의 실체도 보았습니다! 소위 성공이라는 것, 사람들의 평판이라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비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도 보았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성공은 주님 앞에 설 때 ‘내 종아! 수고하였다.’ 한 마디 듣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 때, 제가 장애인이 되기를 스스로 원했습니다. 장애인이냐 아니냐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는 말은 들었어도 머리로는 그러리라 생각했어도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세상이 좋은 것을 어떻게 합니까? 여전히 사람들 평판이 신경 쓰이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십자가를 알고 나니 그까짓 사람의 영광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겼는지 너무나 원통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사람의 영광, 세상의 영광’ 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여러분, 배설물을 어떻게 버리는지 말을 안 드려도 다 아실 것입니다.
      (빌 3:7-9)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다면 결코 세상 영광을 배설물처럼 버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니 다시 한번 사람의 영광, 세상 영광의 실체가 뚜렷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실상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고백했습니다. “주여, 종이 이 진리를 피해가지 않겠습니다. 계속하여 나아가겠습니다!”

      십자가는 세상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이 갈라지는 경계선에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보면 세상 영광의 실상도 보이고 하나님의 영광 실상도 다 보입니다. 십자가에 서서 그 영광의 실체를 본 사람은 세상의 영광을 버려야 할 때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할 수 없이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면 그 양쪽이 다 보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도 축복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광이 주님 보다 앞설 때 주님을 따라가지 못하게 할 때,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큰 일 나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 말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많은 민족 지도자들이 일본에 협력하여 전국 마을 마다 다니면서 시국 강연을 했습니다.
      태평양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라고 심지어는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이 전쟁에 나가서 죽는 것은 마치 순교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한국 젊은이들을 독려해서 무서운 다시 못 돌아오는 전쟁터로 내몰았습니다.
      그 자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일제 말 민족 반역자들의 명단이 계속 발표되고 있습니다.
      후손들이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결혼도 떳떳하게 못합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이야기입니까?
      어째서 그 똑똑한 사람들이 일본에 붙어서 반 민족적인 어처구니없는 일을 했을까요?
      세상 영광만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영광을 모르는 성도는 시대 분별도 못합니다.
      일본이 그렇게 빨리 망할 줄 알았으면 그러고 다녔겠습니까?
      당시 형편을 잘 알면 알수록 더욱 일본이 오래 갈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죽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 영광을 버리기 힘들었습니다.
      민족에게 욕을 먹을지언정 일본에 협력하지 않았을 때 당할 어려움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신앙도 내동댕이치고 세상 영광 사람의 영광을 좇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언젠가는 사람의 영광 세상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결정적으로 붙잡아야 할 때가 옵니다.
      그 때를 위한 준비가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는 순간 순간 이 훈련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크고 작은 문제를 경험을 할 때 마다 명심해야 합니다.
      거기서 준비된 사람이어야 결정적인 때 여러분이 성도의 반열에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의 반열에 서실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일제 시대와 같은 때가 온다면 여러분은 ‘나는 이미 결론이 내려졌다.’ 그렇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나는 더 이상 세상 영광 때문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십자가를 분명히 붙잡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두 영광의 실상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삶은 특별한 사명자만 가는 길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복입니다.
      절대로 고난의 길도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이 누릴 축복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세상 이기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43절)
      사람들 속에 부대끼며 살면서 ‘사람의 영광’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참 어려울 것 같다.







      12-07-2024(토) 요한복음 12:31-3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빛을 믿으라(36절)

      너희에게 아직 이 있을 동안에 을 믿으라 그리하면 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Put your trust in the light while you have it, so that you may become sons of light." When he had finished speaking, Jesus left and hid himself from them.

      * 빛(포스. phōs)  φῶς, φωτός, τό   스트롱번호  5457

      1. 빛.  2. 마 17:2. 3. 빛을 내는 물건
      발음 [ phōs ]
      어원  / φάω ‘반짝이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빛(마4:16, 눅8:16, 딤전6:16), 불(막14: 54), 불빛(눅22:56), 등불(요5:35, 행16:29), 광채 (행12:7), 광명(고후11:14).




      하나님은 빛이시라(요일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빛"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빛이시요, 예수님도 빛이시므로 하나님과 예수님은 동일하십니다.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사람들을 향하여 진리를 선포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것보다 지금 당장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것이 더 바람직한 신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잘 알고 가르친다는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율법에는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한다고 하십니까?
      도대체 인자가 누구입니까?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좁은 사람의 특징은 "선택적 지각"에 의해서 사물을 인식하고 받아드립니다.
      그러나 시야가 넓은 사람은 "종합적 지각"에 의하여 잘못된 것을 수정한 후에 올바른 것을 인정합니다.

      메시야가 바로 눈 앞에 있지만 그 메시야를 알아 볼 수 없는 무지한 사람들처럼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생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듣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보는 눈이 있어도 볼 수 없습니다.
      깨닫는 마음이 있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득시글거리는 세상에서 진리의 빛을 드러내야 합니다.
      믿음의 빛을 밝혀야 합니다.
      생명의 길을 열어야 합니다.
      소망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랑으로 그들을 품어 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준비합시다.
      그리고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하여 밤을 새웠던 목자 예수님처럼 내가 찾아야 할 양을 둘러봅시다.
      애타게 나를 기다리는 방황하는 양을 위하여 어두운 밤에 빛의 등대가 되어 어두운 세상을 향하여 빛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리 등대


      시편 90: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가운데 두셨사오니.

      요한일서 1:7
      저가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한다(요한일서 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요한일서 2:9 /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하나님은 빛이시라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5절을 보면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4절을 보면 사도들이 소식을 전하는 이유는 사도의 기쁨이 충만케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가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소식을 쓰고 있는 것은 이 소식을 듣는 자들에게 사도의 기쁨이 충만케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소식 자체가 사도들에게는 기쁨이었고, 또한 이 소식을 듣는 우리에게도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뜻인데 과연 그렇습니까?
      5절을 말씀을 들었을 때 여러분에게 기쁨이 되어집니까?
      아마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소개의 말 정도로 여겨지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사도들에게는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소식이 기쁨이었는가 봅니다.
      그래서 그 기쁨을 우리에게 나누기 위해 이같은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 자체만을 가지고는 쉽게 기쁨의 의미를 알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구절이 담고 있는 내용을 아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무한한 기쁨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 때 왜 이 말이 기쁨이 되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빛이시며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다면 하나님은 어두움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악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오늘 우리의 실수는 바로 이것을 잊고 사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신 분임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말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해서는 몽땅 용서하신 분으로만 여깁니다.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단지 자신의 구원만을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날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만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할 정도로 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심판하시는 분임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대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만을 말합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아들을 죽이신 사랑만을 말하기에 어떤 상황에서는 ‘사랑의 하나님이 왜 이러 일이 있게 하시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악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할 때 세상의 어떤 일에 대해서도 ‘왜’라는 물음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앞에서 비춰볼 때 세상에 존재해야 할 가치를 가진 피조물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나에게 어떤 고통이 있다 해도 거룩 앞에서는 할말이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 고통을 당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죽어야 할 이유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지 않게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사건에서 드러나는 것은 당연히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고 대신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분이 죽는 것을 통해서 죽어야 할 자가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무조건 우리를 잘해주는 것이 아니라 죽어야 할 자를 살리기 위해서 죽을 이유가 없는 분을 죽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신자는 이미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마음껏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하찮게 여기고 세상의 것을 크게 봄으로서 날마다 사랑을 원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도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에서 이해하면 좋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실 때 그분과 동행하고 그분과 사귄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현상이 있겠습니까?
      빛이 올 때 빛을 아는 자는 자연히 자신의 어두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교제인 것입니다.
      거룩하신 분과 사귄다고 하면서 자신의 잘못됨에 대해 전혀 인식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사귐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둠의 존재로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오직 멸망의 자식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습니다.
      새로운 생명이고 크나큰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에 담겨 있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는 기쁨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시각에서 자신을 보면 다만 멸망을 받아야 할 어둠의 존재일 뿐입니다.
      죽어야 할 존재에게는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함이고 기쁨입니다.
      왜 이런 일이 있게 합니까?라는 불평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시각에서만 생각하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해야 마땅하고 그렇기 때문에 조그만 일에서도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이 있게 하는가?’라는 의심만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기쁨은 사랑받을 자격도 없는 내가 사랑을 받았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만약 이 기쁨을 누리지를 못하고 상실된 채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기쁨보다 더 크게 여기지고 중하게 여겨지는 무엇인가가 내 속에 자리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현재적인 세상이 것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우리의 눈과 관심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입술은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도 마음에서 하나님은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있는 쓸데없는 것들을 제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앞에서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이 과연 가치있는 것인가를 묵상하고 바울의 고백처럼 그러한 것은 배설물에 불과할 뿐임을 자각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며 큰 선물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가치는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더욱 크게 빛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 앞에 결코 나올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길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수고와 희생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또 욕심낼 수 있겠습니까?
      이미 가장 큰 것을 주셨는데 무엇을 달라고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주신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신자다움일 것입니다.

      나의 가치 없음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가치없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시고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 마음 그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십시오. 이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서 숨으시니라

      - 여기서 "빛"은 윗절에서 말한 것과 같이, 예수님을 비유한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빛이신 만큼, 그도 빛이시다(요일 1:5; 요 8:12). 예수님이 육신으로 세상에 계심은 그 때 팔레스틴에만 한 번 있었던 사실이다. 그런데, 그때의 유대인들은 그를 배척하는 중에 있었다. 그것은 천재 일우의 귀한 기회를 놓치는 불행이었다. 그 기회를 놓친 뒤에는, 그가 육신으로 세상이 계실 수는 영원히 없을 터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그 기회를 붙잡아 그를 믿어야 될 것이었다. 예수님의 별세 후에는 그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될 기회도 없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육신으로 세상에 계시던 주님을 오랫 동안 보면서도 그렇게 완강하게 끝까지 배척하던 자들로서는 그렇게 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두 번이나 역설(力說)하신 것이다(35절 참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다른 말로 빛을 믿는다고 설명합니다.
      왜 예수를 믿는 것이 빛을 믿는 것이라고 하셨을까?
      빛이 아니라 불은 왜 아닌가?
      빛이 아니라 물은 왜 아닌가?
      고대 헬라 철학자들은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설명한 철학자 탈레스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존경합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만물의 근원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설명한 사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으라 나를 믿는다는 것은 빛을 믿는 것이라고 아주 간단 명료하게 깨우치셨습니다.



      빛의 성질?

      직진, 반사, 굴절, 분산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의 설득(31-36) 이제 예수님은 둘러선 사람들을 설득하십니다. 땅에서 들리시는 일 즉,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신 거지요. 그리스도가 이루실 구원의 일(사역)을 위해 떠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일러주신 겁니다. 그러자 율법을 좀 안다는 무리가 그리스도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율법에는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고 하는데 어째서 인자가 들려야 한다고 합니까? 도대체 인자가 누굽니까?" (34) 답답한 노릇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물었으니 말입니다. 이들은 영적 까막눈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답답한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낮이니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될 것이다.” (36) 빛이신 자신을 빗대어 지금 자신이 계실 동안에 자신을 보고 믿으라고 설득하셨던 겁니다. 하지만 그들 중의 많은 이는 끝내 믿지 못하고 자기 길로 돌아갑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예수님을 코앞에 두고도 깨닫지 못했던 그들의 답답한 모습이 내게는 없을까요? 주님의 뜻이 분명하고, 주님이 분명히 원하시는 일임에도 모른 척, 아닌 척하며 외면한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요한일서 1:5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합니다.
      빛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비유입니다.

      잠언 4:18에는 의를 “돋는 햇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빌립보서 2:15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늘에서 빛나는 “순전하고 흠 없는” 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마태복음 5:16 예수님은 빛을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시편 76:4에서는 하나님에 관해 “주는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라고 말합니다.
      주는 영화로우시며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도다.

      하나님이 빛이라는 사실은 어둠과 자연스럽게 대조를 이룹니다.
      빛이 의와 선을 말한다면, 어둠은 악과 죄를 의미합니다.

      요한일서 1:6에서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라고 말합니다.
      5절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불빛 하나가 아니라 빛 자체라고 말하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빛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본질입니다(요일 4:8).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숨김이 없으시며, 온전히 거룩하시고, 어떤 죄도 없으시며, 죄악도 없으시며, 불의도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빛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있으며 빛 가운데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며”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벧후 1:4).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의 아들도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12).
      “따른다”는 것은 진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거룩하게 성장하고 믿음 안에서 성숙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믿는 자들에게 그분의 빛을 비추어 그들이 매일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만들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살전 5:5). 하나님은 물리적인 빛의 창조자이시며 또 우리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영적인 빛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빛은 어둠 속에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며 그 모습 그대로 보여줍니다. 빛 가운데 걷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이해하며, 의롭게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잘못을 포함하여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어둠에 대해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 모든 어둠에 빛을 비추시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만히 앉아 다른 사람들이 죄의 어둠에 빠져 있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어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될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은 어둠을 쫓아내고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나누어야 합니다 (사 9:2; 합 2:14; 요 1:9). 복음의 빛을 세상에 전할 때 우리는 사람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것들을 드러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빛은 어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것입니다 (요 3:20).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참 빛”이십니다 (요 1:9).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신 우리는 죄로 어두워진 세상에 그분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증거할 때 우리의 목적은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예수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행 26:18).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1~10)

      요한일서의 첫 부분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사이의 참된 교제에 대해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리스도인들이 빠지기 쉬운 거짓말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1서의 말씀은 어려운 말씀이어서 말씀을 전하는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고, 말씀을 듣는 성도님,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하시면서 이 말씀을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새롭게 하는 성도들이 되셨으면 합니다.  

      I. 요한 일서의 서언 

      1. 서신의 주제: 생명의 말씀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1절의 말씀은 원문의 어감을 충분히 살리지는 못했습니다. 원문에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 우리가 들었던 것, 우리 눈으로 보았던 것, 자세히 보고 우리 손으로 만졌던 것, 생명의 말씀”으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 1절의 말씀을 통해서 사도 요한은 이 편지의 주제가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주제는 바로 생명의 말씀입니다. 

      2. 생명의 말씀에 대한 요한의 두 가지 강조점 (2절)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2절) 이 생명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설) 우리에게 나타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보았고 너희에게 이 영원한 생명을 선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주제가 되는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한 가지는 그 분은 먼저 계신 분이시다가 성육신하셔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분이시다는 것과, 또 한 가지 사실은 이 생명의 말씀은 요한이 상상하거나 그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 아니고 생명의 말씀, 영원한 생명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그리고 주목해서 만졌던 것을 너희들에게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요한의 선포의 목적 (3-4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그리고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하는 목적은 너희(복음의 2세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복음의 다음 세대)로 하여금 우리(사도 요한으로 대표되는 복음의 1세대)와 사귐이 있어서 주님의 교회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사도적인 믿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눈으로 목격했던 이 사도들의 믿음을 그들이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3a절) 

      이 글을 쓰고 있을 때에 요한은 80세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유일한 생존자로 그의 삶을 마무리하는 노년의 시절에 이 글을 쓰면서 기대했던 것은 그 다음 세대 역시 사도적 신앙을 견지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3b절) 이 구절은 이전 번역이 조금 더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개역한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귐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명절 때 부모님을 중심으로 온 가족이 모이듯이 요한이 설명하는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시고 모든 성도들이 함께 둘러앉아 있는 것, 함께 이야기하며 교제를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귐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 중심에 계시는 것입니다. 

      저는 요한1서의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다시 한 번 우리 교회가 하나님과 예수님이 중심에 앉아계시고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함께 모이는 곳이 되고,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교제를 새롭게 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가운데 성도님들 서로 간에 사귐과 교제가 풍성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4절) 편지를 쓰는 목적을 한 번 더 설명합니다. 이 구절은 이 편지를 쓰는 것이 사도 요한과 복음의 1세대가 기쁨에 충만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런데 많은 영문 번역을 보면 ‘우리’라는 표현을 ‘너희’라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본에서는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고, 다른 어떤 사본에서 우리가 이것을 씀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도 합니다. 둘 다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것을 통해서 복음의 1세대도 기쁨이 충만하고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고 성도들과의 사귐도 회복하는 우리 성도들, 다음 세대들까지도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쓴다고 사도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1서의 말씀을 설교를 통해서 함께 나누게 되는데, 제가 마음에 소망하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성도님께서 저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던 요한, 교회의 터가 되고 기초가 되었던 사도들의 말씀을 귀로 듣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성도님들 신앙의 본질이 회복되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성도님들 서로 간에 사귐이 풍성하여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설교를 통해서 나누게 될 때 설교자와 듣는 성도님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기쁨이 충만하여지기를 원합니다. 

      II. 예수님에게 듣고 전하는 소식(5절):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1. 내용: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로움과 거룩함과 참됨을 강조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5절) 사도 요한이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듣고 성도들에게 전해주는 첫 번째 소식은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분이며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분이시며 절대적으로 참된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 그 분의 속성에는 여러 가지 있음. 

      그런데 사도 요한이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소개하는데 조금 이상한 것이 없습니까? 만약 제가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한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먼저 소개할 것 같습니다. 지금 교회에서 가장 널리 선포되는 하나님의 모습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온유하시며 은혜가 한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들이 먼저 선포되어지며 우리는 그 말씀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사랑받던 제자였고 사랑의 사도였던 요한, 요한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가 요한이 노년에 몸이 거동할 수 없었을 때 설교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요한을 들것으로 옮겼을 때 요한은 모였던 성도들을 향해서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잠간 쉬다가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로 사랑하십시오.”라고 설교를 마무리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요한이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께 듣고 하나님에 대해서 전하면서 사랑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먼저 가르치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깨닫게 될 때에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도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알 때에만 그들 역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본받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생각보다 많이 무기력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만 편파적이고 이기적인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먼저 기억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사실입니다. 

      III.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위해 넘어서야 하는 세 가지 거짓말 (1:6-10)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말씀을 전한 후에 6절부터 10절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너무 쉽게 빠질 수 있는 세 가지 거짓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빛이신 하나님과 바른 교제를 누리기 위해서 꼭 극복해야 되고 넘어서야 되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거짓말을 6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첫 번째 거짓말 (6-7절)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6절) 오늘날 말로 표현하면, 예수님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에 다니지만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자기의 고집과 이 세상의 풍속을 쫓아서 살아간다면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믿으면서 여전히 어두움에 살아가는 것은 결단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던가, 하나님을 믿으면 빛 가운데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귐이라는 것은 코이노니아, 공동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의로우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는 것은 의로우신 하나님과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의로움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실제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면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어서 올바른 삶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7a절) 성경에서 빛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표준, 기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붙잡고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으로 삼아서 걸어가면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 서로 간에 사귐이 있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가운데 한 가지 염려스러운 것은 성도들 사이에 사귐, 성도들의 교제가 조금씩 피상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통해서는 은혜를 받는다고 이야기하지만 성도의 교제를 누리는 일에는 게을리 하시는 분이 많이 있고, ‘믿음은 내 혼자 잘 하면 되지 무슨 사람들과 교제할 필요가 있나’라고 성도간의 교제 자체가 필요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청년 시절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내 삶을 하나님의 빛된 말씀에 비추어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조금씩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았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잘못을 하더라도 양심의 가책도 없는데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그 삶을 살아가려고, 빛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다보니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외롭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했던 것은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빛으로 삼아서 빛 가운데 살아가기로 결심했던 순간부터 가장 보고 싶어지기 시작한 사람은 성도들이었습니다. 저와 같이 하나님의 빛된 말씀을 붙잡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이 세상의 가르침과 이 세상의 가치관과는 거스르면서 살아가는 많은 믿음의 성도들이 너무 보고 싶어졌습니다.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시 16:3) 저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 겪는 모든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성도들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으로 삼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시도하다보면 그때부터 성도들의 사귐이 풍성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 성도들을 만나고 싶고 그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기쁨이 되고 그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다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됩니다. 성도님들 빛 가운데 살아갈 때 우리는 서로 사귐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7b절) 이것도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예수의 피로 씻김을 받은 후에 빛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요한은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예수님의 피가 너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의 법도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로 결심하게 될 때 그때서야 우리는 보혈의 능력을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이여 어쩌면 우리가 마음에 결심은 했지만 또 넘어지고 넘어졌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붙잡고 일어나십시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우리들의 타락한 성품까지도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빛 가운데 살아가기로 결심할 때 이 보혈의 능력이 얼마나 우리를 새롭게 했는지를 체험하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꼭 극복해야 되는 첫 번째 거짓말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 한 분 한 분이 바로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바로 내일부터, 오늘 당장 성전 문을 나가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에 빛으로, 표준으로, 기준으로 삼아서 빛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 두 번째와 세 번째 거짓말 (8-10절)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시면 두 번째 거짓말이 나오게 되는데,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8절). 그리고 세 번째 거짓말이 나오는데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10절) 

      8절 말씀처럼 죄에 대한 성향,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말하는 것도 거짓말이고, 10절 말씀처럼 행동으로 구체적으로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는 것도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며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않다고 요한은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위해서 꼭 우리가 넘어서야 하는 것이 우리가 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이며 우리는 범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가르침을 주는 것은 영지주의자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영지(靈知)주의자는 하나님과 신비적인 체험을 추구했던 사람들입니다. 
      신령한 지식, 신령한 비밀, 하나님과 신비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신령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과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만남을 가졌기 때문에 나중에 그들이 하나님과 신비적인 만남을 가졌고, 하나님과 신비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는 비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저 어렵습니다. 힘듭니다. 도와주십시오.”라는 기도는 날마다 해왔지만 주님 앞에 하나씩 자백한 것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어느새 네가 이제 죄 없는 사람처럼, 범죄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렇게 행동하고 있구나.’ 
      저를 책망하셨는지 모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9절) 
      여기서 자백이라는 말은 ‘confess’ 즉 함께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와 함께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 내 삶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내 삶을 돌아보는 것이 자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해주십니다. 죄를 범하고 나면 그 죄에 대해 형벌이 따라 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죄에 따른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죄와 허물에는 책임과 형벌이 따라오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 앞에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 분이 우리를 사해주십니다. 이 죄에 따르는 형벌과 책임의 무거운 짐을 벗겨주십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우리들로 하여금 죄의 무거운 짐을 벗겨주실 뿐만 아니라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들의 영혼을 깨끗케 씻어주십니다. 우리를 씻어주시고 허물과 죄에서 돌이킬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불어 넣어주십니다. 

      제가 난지도를 섬길 때의 이야기를 가끔 말씀드렸는데, 1984년 처음 난지도에 갔을 때 난지도에 있는 아이들이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교사 선생님들이 한 달에 한번씩 아이들을 데리고 목욕탕에 데리고 갔습니다. 목욕탕에 가서 씻고 나면 깨끗하여져서 아이들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정말 씻기 전과 씻고 난 후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육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님들 우리 영혼에 때가 많아서 우리 영혼이 무감각하여서 무엇이 좋은 것인지 무엇이 선한 것인지 무엇이 빛 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우리의 허물을 보여주시고 그 죄를 예수님과 함께 하나씩 고백하고 예수님의 피로 용서함을 받고 예수님의 피로 씻겨지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되게 됩니다. 그러면 목욕을 하고 사람이 달라지는 것처럼 예수님의 피로 씻김을 받게 되면 옆의 사람을 힘들게 했던 사람들도 상상 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우리 옆에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바른 교제를 누리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 어떤 실존적인 결단을 해야 되겠습니까? 빛 가운데 행하기를 결단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그 말씀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표준에 합당하게, 순간 순간 빛 가운데 걸어가기를 선택하셔야 됩니다. 그 때 우리 가운데 하나님과 성도간의 사귐이 풍성해지게 됩니다. 보혈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 한 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개신교의 유명한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감리교와 장로교의 차이점이 이것입니다. 유명한 존 웨슬레는 너무나 은혜를 많이 받아서 이 땅에서도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죄의 영향력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난 그 완전한 삶에 이 땅에서 도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장로교는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는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이 땅에서 완전함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날마다 우리 자신을 고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의 허물을 자백하고 그리고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을 받아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날마다 자신을 고치고 새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최선입니다. 이것이 우리 장로교의 신앙고백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배우고 알아갈 때 하나님과 바른 교제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 사이에 풍성한 사랑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 마음속에 하늘의 기쁨, 하늘의 능력이 넘쳐날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 한번 보십시오. 
      성도님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열망이 일어나셔야 됩니다. 
      우리가 다른 것보다 오늘도 생명의 말씀을 듣게 되기를 원합니다.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되는 빛 된 말씀을 통해서 오늘도 이 하루 빛 가운데 살아가게 되기를 원합니다. 

      빛이신 하나님과 바른 교제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두 가지 노력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어제까지 실패하셨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면 주님께서 다 용서해주십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힘입어서 날마다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완전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구체적으로 우리 죄를 자백하고 날마다 자신을 고치시는 성도님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자백이란 무엇인가?

      자백은 인간의 심리와 사회적 관계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개인이 자신의 죄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자백은 법적, 도덕적, 심리적 측면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자백은 종종 범죄와 관련된 경우에 가장 많이 언급되지만,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볼 수 있다.
      친구에게 잘못한 일을 사과하거나, 가족과의 갈등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 또한 자백의 일환이 될 수 있다.

      자백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그 과정에서 진실을 드러내는 데 기여한다는 점이다.
      자백은 개인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반성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의지를 나타낸다.
      이는 단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진정한 자아를 마주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깨닫게 되며, 이는 자아 발전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자백은 관계 회복의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거나 갈등을 일으킨 경우, 자백을 통해 상대방에게 진심을 전하고, 회복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다.
      이는 개인의 도덕적 성장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더욱 깊고 의미 있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자백은 이러한 관계의 복원력을 높이며, 상호 신뢰를 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백의 과정은 종종 두려움과 불안이 동반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법적인 문제나 사회적 비난을 동반할 경우, 자백은 더욱 어려운 선택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과 마주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개인의 성장과 변화를 위한 필수적인 단계로 볼 수 있다.
      자백은 단순한 고백을 넘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용기가 필요한 과정이다.

      자백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또한, 자백은 상대방에게도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행위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자백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회복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자백이 이루어질 때, 개인은 자신의 내면의 불안을 해소하고,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자백의 마지막 단계는 용서이다.
      자백이 이루어질 때, 상대방은 그에 대한 반응으로 용서를 선택할 수 있다.
      이는 자백이 단순히 개인의 행위에 대한 인정에 그치지 않고, 관계의 회복과 더 나아가 사회적 화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는 자백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는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결론적으로, 자백은 개인의 심리적 성장, 사회적 관계의 회복, 그리고 도덕적 책임을 다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자백은 두려움과 마주하는 용기이며, 진실을 받아들이고, 상대방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따라서 자백은 우리 모두가 경험해야 할 중요한 인간의 삶의 일부로, 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 성숙한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




      요한계시록 10:4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아버지의 이름

      민수기 27:4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 가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요한복음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한복음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요한복음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요한복음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한복음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12-06-2024(금) 요한복음 12:27-3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늘의 소리(28절)

      아버지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Father, glorify your name!" Then a voice came from heaven, "I have glorified it, and will glorify it again."

      이 말씀은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들과 말씀에 의하여 자기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으나, 앞으로는 그의 죽으심으로 그것을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내려보내신 목적을 온전히 이루는 것으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우리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을까요?

      먼저 선(善)이란 성경적 정의를 정확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선'이란 하나님을 찾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착한 행실을 하라(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리스도인들은 착한(καλῶς) 행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때 착하다는 것은 다른 무엇과 비교하여 조금 더 착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착함을 말합니다.

      둘째는 용서받은 삶을 회복하라(마가복음 2: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어느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그의 침상채로 들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신 집으로 도저히 들어갈 수 없으므로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내고 중풍병자의 침상을 지붕위에서부터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내려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데리고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Son, your sins are forgiven)"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때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죄를 사한다는 말을 듣고 이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분노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오직 한 분이심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하시며 그러나 인자가 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는 것이라고 깨우치셨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풍병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침상을 들고 일어나 가는 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하며 놀랐다고 합니다.

      중풍병자는 스스로 예수님 앞으로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의 안타까운 모습을 지켜 본 네 사람이 그가 누워있던 침상을 들고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으로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믿음의 부모로부터 육체적 생명을 받았고 또한 주님을 알 수 있는 믿음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목사가 되었고 주님을 증거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여
      지금 내가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있다면 그 은혜가 어떻게 내게 임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모두에게 알려지고 드러남으로 모두 함께 구원의 주 하나님을 찬양하므로 영광을 돌려보내야 하겠습니다.

      영광을 받으신 만유의 주여


      영광스럽게하다(도카조. dŏxazō) δοξάζω
      스트롱번호 1392

      1. 찬양하다.  2. 마 5:16.  3. 막 2:12
      발음 [ dŏxazō ]
      어원  / 미완료 ἐδόξαζον, 미래 δοξάσω, 제1부정과거 ἐδόξασα, 제1부정과거명령 δόξασον, 제1부정과거수동 ἐδο- ξάσθην, 완료수동 δεδόξασμαι, 1391에서 유래.
      • 1. 찬양하다, 존경하다, 영예를 주다, 찬미하다, 영광돌리다.
        • a. [아버지께] 마 5:16.
        • b. [하나님께] 막 2:12. ㉠ ἔν τινι, 갈1:24, 벧전4:16. ㉡ ἐπίτινι, ~때문에 찬양하다, 행4:21. ㉢ διά τινος와 ἐπίτινι, 롬1:21, 11:13, 고전12:26, 고후9:13.
      • 2. 찬란하게 입히다, 영광스럽게 하다[내세에 올 영광으로], 요7:39, 12:16,23, 28, 13:31,32, 17:1,5,10, 행3:13, 롬8:30, [요한이 즐겨 사용한 단어] 고후3:10, 살후3:1, 벧전1:8 등.
      • 관련 성경 /  영광 돌리다(마5:16, 막2:12, 눅2:20), 영광얻다(마6:2, 요11:4, 12:16), 칭송받다(눅 4:15), 영광스럽다(요12:28), 영화롭게 하다 (요17:1,4, 행3:13), 찬송하다(행13:48), 영광되다(고후3:10). [명] 영광(고전6:20, 갈1:24).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들과 말씀에 의하여 자기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으나, 앞으로는 그의 죽으심으로 그것을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라고 소개합니다.
      거룩한 이름이므로 사람의 입으로 부를 수 없었기에 문자로 기록할 때는 "야웨"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야웨'라는 거룩한 이름을 "여호와"라고 하여 부를 때는 "아도나이"라고 읽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문자로 적은 것을 "테트라그람마톤(Τετραγράμματον. Tetragrammaton)"이라고 하여 "사자신명(四字神名)"이라고 번역합니다.
      테트라그람마톤은 히브리 문자로 "야훼(야흐웨)"를 가리키는 네 글자를 말합니다.
      테트라(τετρα)는 "넷"이란 뜻으며, 그람마톤(γράμματον)은 "글자"라는 뜻입니다.
      테트라그람마톤(tetragrammaton) 히브리 4개의 문자이지만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한 문자라고 하여 그 문자를 특별하게 구분하는 방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약에서 아버지의 이름은 "예수"라고 합니다(요 17:6, 11, 12, 26. 5:43. 10:25. 12:28).
      '여호와'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존자를 의미합니다.
      '예수'는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합니다.

      구성

      히브리문자 야훼(Yahweh) / 요드(י),  헤(ה),  바브(ו),  헤(ה)의 네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히브리 문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기에 요드(י)가 제일 오른쪽에 있다.
      라틴 문자로 표기할 때는'YHVH', 'YHWH', 'JHVH', 'JHWH' 등이 있다.
      이렇게 자매품이 많은 것은 별다른 이유가 아니고, 원래 라틴 문자 U와 W는 V에서 파생된 글자이고, J는 반자음 I를 가리키고자 중세 유럽 때 나온 글자며, Y는 본디 그리스어 발음[1]을 표시하고자 라틴인들이 도입했으나 후대에 음가를 상실하고 그냥 /i/처럼 발음하게 되었기 때문으로 라틴 문자를 어떤 식으로 운용하느냐에 따라 달린 문제. 독일어식으로 하는가 라틴어식으로 하는가 등에 따라 다르다. 히브리 문자에서 역시 첫 번째 글자인 요드, 세 번째 글자인 와우는 각각 반자음 y와 w에 해당한다. 히브리 문자를 라틴 문자로 전사하는 단계에서 이런저런 방법이 생겨난 것. 후대에 생겨난 문자를 완전히 배제해서 고전 라틴 문자로만 표기하면 'IHVH'가 되는데 고대 문자임을 반영해서 이렇게 표기하는 곳이 있다.

      셈어파 문어체가 흔히 그러하듯이 히브리엉 문서도 자음만 적었다.
      모음 없이도 발음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셈어파의 3근 자음 특성상 단어를 알면, 자음자만 보고도 모음이 뭐가 들어갈지 대충 안다.
      그래서 자음으로만 적어도 문서를 쓰고 읽을 수 있다.
      물론 모음자가 없이는 문법적으로 좀 다르게 해석할 수 있기에 나중에는 모음자도 만들었지만 일상적으로는 사용되지 않고, 오독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성경, 사전, 어쩌다 외국어 고유 명사나 외국인용 교재에나 쓰인다.
      현대 히브리어, 같은 셈어파에 속한 아랍어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이런 문자의 특성상 신의 이름 역시 당연히 자음으로만 적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 이름을 직접적으로 발음하는 것을 꺼렸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가도 신의 이름이 언급되는 부분에서는 אֲדֹנָי(adonay. 아도나이) '주님'이란 뜻으로 읽었고, 유대인들의 경우 일상생활에선 הַשֵּׁם(ha Shem. 하 솀), 즉 '그 이름'이라고만 치환해 부르기도 한다.
      이게 계속되다 보니 아예 신의 이름에 들어갈 모음자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그저 문서상으로 자음자만 남게 되었다.
      심지어는 모든 글자를 쓰지 않고 앞 두 글자만 딴 יָהּ(yah; 야)로만 써서 완곡하게 표현하는 경우도 많았고 '신이 ~을 하신'이라는 뜻이 포함된 몇몇 인명의 경우 יְהוֹ־(y'ho-; 여호-), ־יָהוּ(-yahu; -야후) 등으로 축약해서 표현하기도 했다.


      ἀγαθός, ἡ, όν 스트롱번호 18

      1. 선한.  2. 적합한.  3. 완전한
      발음 [ agathŏs ]
      • 1.  [기본형] 선한, 착한, 좋은.
        • a.  [외적인 의미에서] 적합한, 유능한, 유용한, 마25:21, 23, 눅19:17, 23:50, 행11:24, 엡4:29, 딛2:5, 벧전3:10.
        • b.  [내적 가치, 특히 도덕적 가치로서] 완전한, 마19:17, 막10:18. 선한, 친절한, 마20:15, 벧전2:18.
      • 관련 성경 /  선(마5:45, 롬2:7), 물건(눅12:18,19), 선행(행9:36), 양심(행23:1). [형] 선한(마12:34, 19:16, 눅6:45, 골1:10), 좋은(마7:11, 눅1:53, 요7:12), 착한(마25:21, 고후9:8).

      καλῶς 스트롱번호 2573

      1. 잘.   2. 알맞게.  3. 흠잡을 것 없이
      발음 [ kalōs ]
      어원  /  2570에서 유래
      • I.  잘, 아름답게.
        • 1.  알맞게, 적절하게, 바로, 훌륭하게, 막7:37, 눅6:48, 고전14:17, 갈5:7.
        • 2.  [도덕적] 훌륭하게, 흠잡을 것 없이, 갈4:17, 히13:18.
        • 3. 선하게, 받을 만하게, 마12:12, 눅6:27.
        • 4. 잘, 바로, 바르게.
          • a.  고전7:37, 약2:8,19.
          • b.  [말하다, 듣다, 깨닫다 등의 동사와 함께] 바로, 잘, 마15:7, 막7:6, 눅 20:39, 요4:17.
          • c.  [감탄사로] 옳다!, 막12:32, 롬11:20.
        • 5. [빈정대는 말로] 잘도, 막7:9, 고후11:4.
        • 6. [비교급] κάλλιον: 매우 잘, 행25:10.
      • 관련 성경  /  사랑하여(마5:44, 눅6:27), 옳게(막12:32, 벧후1:19), 낫게(막16:18), 잘(요18:23, 행10: 33, 고전14:17), 선하게(히13:18), 합당하게 (요삼1:6). [명] 선(마12:12). [부] 잘(마15:7, 막7:9, 행25:10).


      '아가도스'와'칼로스'

      '착한'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는 헬라어로 '아가도스'와'칼로스'입니다.
      둘은 혼용해서 쓰이기도 하지만 '칼로스'라는 단어가 훨씬 폭 넓고 깊은'선'을 가리킬때 자주 쓰이는 단어입니다.

      (칼로스는 선과 악 구조의 내용을 품은 선으로 그 칼로스로 아가도스의 참 선으로 이해 되어 진다면 선도악도 아닌 그 참 선으로 하나되는 그 깊은 '선'을 의미합니다.)

      (요 10:11) 나는 선한(칼로스 G2530-가치있는)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빌 1: 6) 너희 속에 착한(아가또스 G18)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니

      * 예레미야스에 의하면 그 두단어는 서로 혼용해서 쓰였던 단어입니다.
      성도의 착한 일, 성도의 착한 행실은 세상의 선악 기준에 의한 착한 일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착한 행실, 혹은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서 기인한, 성도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착한 행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착한 행실은 이 세상 속에서 순종으로 비움으로 자기 부인으로 십자가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 의해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 바로 그 새 창조의 행위 자기 부인과 순종으로 지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과정 그게 하늘나라 백성들의 세상 속 착한 행실입니다.

      (행 10:38)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바로 이 예수의 착한 일이 성도에게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빛과소금의 삶,착한 행실은 자기를 부인하고,수난의 삶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의 착한 행실,순종의 착한 행실,십자가의 착한 행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지면,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상태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의 삶 속에서 가입을 하여 세상은 도처히 감당해 낼 수 없는

      인내와 수고와 섬김과 순종의 삶이 성도의 삶에서 드러나게 될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세상에 증거 되는 것입니다.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드러나는 삶,그 삶이 바로 착한 행실이고 빛과소금의 삶인 것입니다

      (마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토브 (히 2896, טוֹב : good 562회)
                    아가도스 (헬 18, ἀγαθός : good 101회)

      "Ἀγαπητέ, μὴ μιμοῦ τὸ κακὸν, ἀλλὰ τὸ ἀγαθόν.

       ὁ ἀγαθοποιῶν, ἐκ τοῦ Θεοῦ ἐστιν; ὁ κακοποιῶν, οὐχ ἑώρακεν τὸν Θεόν."

       (Ἰωάννου γ 1:11 Greek)

      "아가파테, 메 미무 토 카콘, 알라 토 아가돈.

       호 아가도포이온, 에크 투 데우 에스틴; 호 카코포이온, 우크 헤오라켄 톤 데온."

       (이오안누 감마 1:11 한글음독)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요한3서 1:11 개역개정)

                                                 I
      ※ '선한 또는 선'이라 번역된 히브리어 형용사 또는 명사

         '토브' (2896, טוֹב : good)와 '선함, 좋은 것'이라 번역된 남성 명사

         '투브' (2898, טוּב : goodness 32회)는 '선하다, 보기에 좋다'라는 동사

         '토브' (2895, טוֹב : to be good 25회)에서 유래한다.

      ※ '선'이라 번역된 헬라어 여성 명사

         '아가도쉬네' (19, ἀγαθωσύνη : goodness 4회)는 '선한'이라 번역된 헬라어 형용사

         '아가도스' (18, ἀγαθός : good)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선을 행하다'라 번역된 동사

         '아가도포이에오' (15, ἀγαθοποιέω : to do good 10회)가 있다.

         동의어로 '선한'이라 번역된 형용사 기본어

         '칼로스' (2570, καλός : good 101회)와 '선을 행하다'라 번역된 동사

         '칼로포이에오' (2569, καλοποιέω : to do good 1회)가 있다.

                                                  II
      아래에서는 히브리어 '토브'그리고 헬라어 '아가도스'와 '칼로스'의 용례를 

      살펴봄으로써 성경이 말하는 이들 원어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상고해 본다.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2896, 토브)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창세기 1:4 개역개정)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2896, 토브)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사무엘하 2:6 개역개정)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2896, 토브)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역대상 16:34 개역개정)

      "또 주의 '선한'(2896, 토브) 영을 주사 그들을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가 그들의 입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그들의 목마름을 인하여 그들에게 물을 주어"(느헤미야 9:20 개역개정)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2896, 토브)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2896, 토브)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편 14:1-3 개역개정)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2898, 투브)으로 하옵소서

       여호와는 '선하시고'(2896, 토브)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시편 25:7-8 개역개정)

      "주는 '선'(2896, 토브)하사 '선을 행하시오니'(2895, 토브)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2896, 토브)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68, 71 개역개정)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2896, 토브)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개역개정)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4190, 포네로스)하니

       어떻게 '선한'(18, 아가도스)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18, 아가도스) 사람은 그 쌓은 '선'(18, 아가도스)에서

       '선한 것'(18, 아가도스)을 내고 '악한'(4190, 포네로스) 사람은

       그 쌓은 '악'(4190, 포네로스)에서 '악한 것'(4190, 포네로스)을 내느니라"

       (마태복음 12:34-35 개역개정)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18, 아가도스)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18, 아가도스)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태복음 19:16-17 개역개정)

      "나는 '선한'(2570, 칼로스) 목자라 '선한'(2570, 칼로스)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한복음 10:11 개역개정)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18, 아가도스)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2570, 칼로스)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18, 아가도스)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2556, 카코스)을 행하는도다"

       (로마서 7:18-19 개역개정)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선'(19, 아가도쉬네)과 '의'(1343, 디카이오쉬네)와

       '진리'(225, 알레데이아) 안에 있느니라"(에베소서 5:8-9 원문직역)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2569, 칼로포이에오) 낙심하지 말라"

       (데살로니가후서 3:13 개역개정)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18, 아가도스)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3:15-17 개역개정)

      "'선을 행함'(15, 아가도포이에오)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2554, 카코포이에오)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베드로전서 3:17 개역개정)

                                                
      위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히브리어 '토브'와 '투브' 그리고 헬라어 '아가도스'와 '칼로스'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선이요아는 것이 선이요 기쁘시게 하는 것이 선이다.

      이는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선악(칼로스와 카코스)을 분별한다는 것과 착한 행실에 대하여

      선악을 분별한다고 할 때의 선악은, 아가도스파울로스를 말하는 게 아니고, 칼로스카코스(히 5:14)를 일컫는데, 이는 선악과는 조금 다른 의미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선악을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오로지 생명을 좇아서 사는 삶이 기름부음을 따라 사는 삶이라고 여깁니다.
      생명에 적합한가 아니면 적합지 않느냐를 분별하는 게 칼로스와 카코스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저것이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를 나누는 능력이 아니라, 저것이 생명을 따라서 적합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칼로스와 카코스의 관계입니다.

      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 착한 행실(호 칼로스 에르곤)

      '타 카라 에르가'를 착한 행실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번역하는 분들이 선악의 뿌리깊은 사상에 기초하여 번역한 예 중 하나입니다.
      착한 행실이라는 마법에 걸려 모범생컴플렉스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도리어 전혀 착하지도 모범적이지도 않습니다.
      거기에 이러이러한 것은 착한 것이고, 이러 이러 한 것은 악한 것이라는 이분법적 구분(토브와 라아)은  비록 잠시 인생에 유익을 줄런지는 몰라도 궁극을 지향하는 삶의 관점에서보면 해롭기 그지 없습니다.

      타 카라 에르가는 착한 행실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칼로스는 '아름답고 좋은 것'입니다.
      헬라어에 '아가도스'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도  '선한'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선 혹은 착한으로 번역되는 것은 실로 생명의 사상에 기초하기보다 선악의 지식에 사로잡혀 있는 인생들이 바라보는 어쩔 수 없는 관점이 반영된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토브'가 영어에서 good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창세기 1장에보면 우리말로 '좋았더라'는 번역은 참으로 좋습니다.

      하나님의 7일 창조에서 어떤 창조물을 보며 참으로 '선하구나'라고 한다면 이상하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토브를 '착하더라' 혹은 '선하다'로 번역하고 있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토브에 상응하는 헬라어 단어는 '아가도스'입니다.
      '아가도스'는 좋은 것이며, 비록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그것에 적합할 때 아름답습니다.
      좋다고 해서 반드시 칼로스한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어린아이가 잘 먹는다는 것은 매우 좋은 것(아가도스)입니다.
      영아기에는 모유가 '칼로스'하고 이유기의 아이에게는 이유식이 '칼로스'합니다.
      성인이되면 단단한 음식이 '칼로스' 합니다.
      여전히 젓이나 먹고 있다면 이는 '카코스'합니다.
      그럴 때 '칼로스와 카코스'를 사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가도스와 칼로스의 뉘앙스 차이를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그것에 적합한 것은 아름답고 좋은 것이지만, 그것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해롭고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좋거나 해롭거나 입니다.
      따라서 착한 행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무슨 구제, 전도, 봉사, 사랑 등),

      너희 안에 있는 빛을 말합니다.
      빛이 무엇일까요?
      그 빛을 착한 행실에 연관하여 정의하고 규정하려고 하는 것에서 미혹에 빠집니다.

      너희에게 있는 빛이 과연 무엇이며, 등경위에 등불이 무엇이며, 산위의 동네가 숨기지 못할 빛이 무엇인지 먼저 고심해보는 게 순서일 것입니다.

      이미 앞서 마태복음 5장 3절에서부터 다 언급되어 있습니다.

      에르가(일)란 다른 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과 그 마음의 청결과 애통과 온유와 의에 주리고 목마른 목마름 ...
      이런 상태는 생명을 비춰주는 빛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나누거나 분리하거나 무엇을 베풀려는 애씀이 없어집니다.
      생을 비추는 아름다운 빛이 비추입니다.
      이것이 곧 영혼에서 발산되는 '타 카라 에르가'입니다.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을 앞세우기보다는 

      우리 속에 있는 상태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바라보는 것이 먼저 필요할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봉사와 구제를 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으며,

      그게 무슨 착한 행실이겠습니까?

      혹여 사람들이 감동하고 거기에 착한 행실이라는 명찰을 달아준다 한들

      영혼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얘기입니다.

      빛이란 어떤 이들에겐 선(악)이 빛이 되고

      어떤 이들에겐 생명이 빛이 됩니다.

      처음 사람 아담은 선(착한 행실)을 빛으로 삼다가 절망(결국은 악으로 드러나게 마련)하고,

      모든 인생은 그렇게 시작하고 생을 마감하는게 대부분이지만,

      그 절망의 터널을 지나서 새로운 빛을 만나게 됩니다.

      하여,

      두 번째 사람은 생명을 빛으로 삼게 됩니다.

      생명의 빛을 교리적인 지식으로 규정하려는 미혹이 여전합니다. 

      소금이란 '세상의 소금'이 아니라 '땅의 소금'입니다. 
      '토 할라스 테스 게스'에서 게스는 세상이 아니라 땅입니다.
      소금 언약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소금언약은 단순히 무슨 방부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맛을 낸다는 것 뿐만 아니라, 땅에 소금을 뿌리면 가시와 엉겅퀴를 내던 땅을 황폐케 합니다.
      선악을 먹는 인생에게는 소유한 지식이 찌르는 가시역할을 하고 끝없는 소유욕의 덧에 걸려 욕망이라는 엉겅퀴를 내고 사는 게 인생입니다.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이들은, 땅의 소금 역할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찌르는 가시를 소멸하는 불이며,

      엉겅퀴를 내는 땅을 황폐케 하는 소금역할을 하게 됩니다.

      흔히 소금의 방부제 속성만을 강조하여,

      착한 행실로 소금의 역할을 규정하려는 것 역시 선악의 세계관이 반영된 소산의 하나입니다.

      소금에서 방부제와 짠맛의 속성을 통해 소금의 역할을 살피려면 

      착한 행실로 규정하기보다는 생명의 속성을 썩히지 않는 역할의 관점에서

      살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성경에서의 이칭

      1. 야훼(여호와) : 항상 살아계시며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출 3:14)
      2. 엘 올람 : 영원하신 하나님 (사 40:28)
      3. 엘 로이(רֳאִי) : 감찰하시는 하나님 (창 16:13)
      4. 엘로힘 : 전능하신 하나님 (세상을 창조할 때에 부르던 이름)
      5. 아도나이 : 주인 되신 하나님 (유대인들의 호칭)
      6. 야훼 나케 : 벌하시는 하나님 (겔 7:9)
      7. 야훼 닛시 : 야훼는 나의 깃발 (출 17:15)
      8. 야훼 라파 : 치료하시는 하나님 (출 15:26)
      9. 야훼 로이(רֹעִי) : 야훼는 나의 목자 (시 23:1)
      10. 야훼 메카디쉬켐 :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 (출 31:13, 레 20:8)
      11. 야훼 사바욧 : 만군의 야훼 (시24:10)
      12. 야훼 샬롬 : 야훼는 나의 평강 (삿 6:24)
      13. 야훼 삼마 : 야훼가 거기 계신다 (겔 48:35)
      14. 야훼 엘 게물로트 : 보복의 하나님 (렘51:56)
      15. 야훼 이레 : 야훼께서 준비하신다. (창 22:13∼14)
      16. 야훼 치두케누 : 야훼는 우리의 의 (렘23:6)
      17. 야훼 체바오트 : 만군의 하나님 (삼상 1:3)



      하늘에서 들린 소리(요한복음 12:26~33)

      미국 워싱턴시에서 가장 붐비는 어느 지하철역 근처에서 허름한 옷차림의 한 청년이 쓰레기통 옆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상이 바쁜 도시 사람들은 그 청년에게 관심이 없는 듯 무심히 지나쳤습니다.
      다음날, 신문을 펼친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어제 지하철 쓰레기통 옆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 청년은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Joshua Bell)"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조슈아 벨'은 30억원짜리 바이올린으로 40분간 최고 수준의 연주를 했습니다.
      하지만 바이올린 케이스에 모인 돈은 고작 35달러였다고 합니다.
      현장을 오가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값비싼 연주를 지나쳐 버렸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재능이 있다는 바이올리니스트의 훌륭한 연주를 단지 소음 정도로 여기면서 말입니다.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내가 접하는 수많은 정보들 중에서 필요한 부분만 골라 인지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머리는 저장용량처리용량에 한계가 있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여지없이 버립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칵테일 효과(cocktail party effect)라고도 부릅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과 반대되는 정보를 접해도 쉽게 자신의 생각을 고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정치계에서 일어나는 진보와 보수의 갈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진보나 보수나 같은 정보를 접하지만, 양쪽 모두 자신들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합니다.
      내 성향과 다른 정보에는 아예 귀를 닫아 버리고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지요.
      심지어 그것은 거짓이며, 가짜라고 치부해버리면서 말입니다.
      이런 태도를 두고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 부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같은 공간, 같은 시간대에 살고 있음에도 서로가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선택적 지각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바로 빌라도입니다.
      그는 예수를 눈앞에 둔 재판석에서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정보, 곧 소리를 들었습니다.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마 27:19)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마 27:23)

      이 두 소리를 들은 빌라도는 어떠한 선택적 지각을 했을까요?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마 27:26)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선택을 내렸습니다.
      빌라도가 이렇게 결정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눅 23:23)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라는 말은 빌라도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소리를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는 왜 군중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이러한 선택을 내렸을까요?
      누가복음 23장 12절은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눅 23:12)

      빌라도와 헤롯은 본래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23장 12절은 그들의 관계가 마치 원수와도 같았다고 증언합니다.
      당시 시대적인 정황을 봅시다.
      빌라도는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이었으며, 헤롯은 로마가 이스라엘의 자치권을 인정하여 선출된 유대왕이었습니다.
      이 둘은 아마 정치적으로 정적 관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죽이는 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있어서는 헤롯과 빌라도의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둘 모두 여론의 소리, 곧 군중의 목소리 앞에서 민감하게 반응할 줄 아는 노련한 정치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빌라도와 헤롯은 자신들에게 정치적으로 이익이 되는 쪽을 선택하는 인지체계에 있어서는 동일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날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던 것이죠.

      한편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 날, 하늘에서는 또 다른 소리가 있었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28절)
      이 소리는 앞서 군중의 소리와는 전혀 다른 십자가 형틀을 눈앞에 둔 예수, 그의 기도에 응답하는 하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때 이 소리를 예수님과 함께 들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소리 앞에서 어떠한 반응을 보였던가요?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요 12:29)

      그날 하늘에서 들렸던 소리는 당시 무리들이 사용하는 언어였기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합니다.
      어떤 이는 마른하늘에 천둥이 쳤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천사가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늘의 방언을 했다고 말합니다.

      분명히 예수님과 무리들은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소리를 들었고, 그 곁에 있던 무리들은 단순한 천둥소리 또는 천사의 소리로 들었을까요?
      그것은 결국 관심과 집중의 차이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선택적 지각, 확증편향의 차이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무리들은 도대체 무엇에 집중하고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들이 무엇에 집중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첫째, 그들은 세상 영광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 12:43)

      둘째, 그들은 세상 권세, 자리만을 탐내고 있었습니다. (마 20: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셋째, 그들은 누가 크고 높은가로 다툼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눅 22:24)

      넷째, 그들은 예수를 팔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요 13:2)

      다섯째,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요 11:53)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마 27:1~2)

      그래서 이런 그들에게는 하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의미 없는 소리 정도로 들릴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 음성을 들었던 예수님은 무엇에 관심을 두며 어디에 집중하고 계셨던가요?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7)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뜻, 때, 그리고 영광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언제나 하나님이셨습니다.
      한마디로 위에 것을 찾고 계셨습니다.(골 3:1)
      그렇기에 예수님은 하늘소리를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고, 그 소리가 어떤 뜻인지 알아챌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끊임없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과 사람, 환경을 통해서, 심지어 내 몸 안에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들을 통해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언어는 없는 듯합니다.
      말씀도 없는 듯합니다.
      들리는 소리도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지금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은 세상 끝까지 이르고 있습니다.(시 19:1~4)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분이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지고 있습니다.(롬 1:20) 그러므로 세상에 뜻 없는 소리는 하나도 없습니다.(고전 14:10)

      오늘 나는 과연 하늘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아니, 지금 나의 관심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빌라도처럼 노련한 정치꾼의 셈법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무리들처럼 온통 세상 영광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까? 혹은 가룟 유다처럼 ‘은전’을 손에 꽉 쥐고 있습니까? 분명한 것은 이런 그들은 모두 영적 귀머거리였다는 사실입니다. 정치 셈법에 능통하고 세상 이치, 재리에 재빠르게 반응했을지라도 하늘나라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께서 먼저 우리의 눈과 귀를 깨끗하게 씻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눈과 귀를 열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한 해 동안 삶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극히 세미한 소리를 통해서도 하늘의 음성을 똑똑히 듣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

      혹시 이런 경험들 있지 않으신가요?
      똑같은 이야기를 동시에 듣고도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 엄청 복잡하고 시끄러운 상황에서도 내가 필요한 말을 잘 들리는 경우 등등

      1. 개념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이란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보지 않게 되는 경향을 의미합니다. 심리학 용어 중 '칵테일파티 효과(cocktail party effect)'와도 비슷한 말입니다. 주변이 시끄럽지만 내가 필요한 단어(내 이름, 내 관심사 등)들은 희한하게 잘 들리게 되는 현상입니다. 즉 전체 정보가 주어져도 자신이 가진 인지체계, 신념, 가치와 일치하는 정보나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선택적 지각은 다시 지각적 탐색(perceptual vigilance)와 지각적 방어(perceptual defense)로 나뉩니다.
      즉 주어진 정보에 대해 더 잘 탐색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반대로 더 인식하지 않으려고(회피) 하는지 2가지 방향으로 작동됩니다.
      우선 지각적 탐색은 내 의견, 태도, 신념 등에 일치하고 유리할 경우에 더 잘 지각이 되는 현상입니다.
      반대로 지각적 방어는 내 의견, 태도, 신념 등에 불일치하기 때문에 회피하고 인식하지 않으려는 현상입니다.

      2. 주요 사례들

      ​1) Hastorf and Cantril(1954)의 연구를 살펴볼까요.
      1951년 프린스턴 대학과 다트머스 대학 간 미식축구가 있었는데 이 두 연구자들은 그 경기를 촬영해 똑같은 내용을 각각 두 학교 학생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반칙 횟수를 물어봤는데 서로 타 학교 선수들이 더 많이 반칙을 했다고 보고합니다.

      이 연구의 결과는 사람들은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 통해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2) 온라인 (특히 정치적 이슈 있을 때)

      - 온라인은 사실상 익명의 공간, 내 이름 대신 닉네임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라 정치, 사회 이슈에 있어 극단적인 현상이 벌어집니다. 즉 온라인에서는 '우리=(우리 편)'와 저들(=적)'으로 나눠지게 되고 상대방에 대해 원색적인 비난과 욕설이 난무합니다. 이 역시 선택적 지각으로 벌어진 결과입니다. 결과 같은 집단에 대한 소속감, 의견 일치는 더 견고해지고 또 우호적 태도는 더 강화됩니다. 한편 반대 집단에 대해서는 더 배척하고, 이질감이 더 강화되게 됩니다.

      - Hart et al(2009)에 따르면 정보 이용에 있어 선호하는 결론에 대해 방어적 목적 혹은 지향적 목적이 강할 경우 내가 생각하는 편향이 더 강해진다고 합니다.

      3) 부동산 사이트

      - 마찬가지로 지각적 편향이 여기저기 발생됩니다. 제가 가입해있는 카페에서 이런 현상이 잘 발견됩니다. 즉 같은 이슈(예: 부동산 8.2대책)에 대해 내가 보고 싶은 측면만 강조합니다(예 : 앞으로 더 오른다 vs 떨어진다). 이 또한 선택적 지각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4) 소비자 행동에서의 선택적 지각

      - 평소 관심이 없는 물건인데 갑자기 큰 폭의 할인을 한다고 하면 없던 관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또 세일을 하게 되면 할인된 가격이 확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브랜드를 더 잘 인식하고, 싫어하는 브랜드는 회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애플빠'와 '삼성빠'들의 끝없는 공방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광고에 더 집중하면서 타사 제품 광고는 별로라고 폄하합니다. 신제품 출시 때마다 서로 좋다고 난리 나기도 합니다.

      - 자동차 동호회에서도 현대차 애호가(현빠), 르노삼성차 애호가(르삼빠), 쉐보레자동차 애호가(쉐슬람) 등으로 나눠 서로 좋아하는 브랜드 칭송하고, 싫어하는 브랜드는 폄하하는 현상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3. 시사점

      ​사람들은 아무리 다양한 정보를 제시해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사자성어로 견강부회(牽强附會), 아전인수(我田引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정보가 있어 일상의 의사결정할 때는 시간과 노력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 조직, 기업, 정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렇게 선택적 지각이 발생되고 있습니다.

      이런 선택적 지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유연성과 반대 사고를 활성화하고, 조직 차원에서는 반대를 위한 반대, 소수의견 중시 등이 필요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선택적 지각을 방지하려고 하는 노력과 훈련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잘못을 인정하기도 하지만 행동을 수정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지요.

      ​한편 선택적 지각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 사람, 사물, 단어 등에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마케팅, 광고, 스피치, 소통, 영업 등에서 적극 활용해볼 수 있습니다.
      즉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호감, 설득, 주의, 관심 등이 더 올라갈 수 있게 됩니다.

      ​□ 참고문헌

      Hart, Albarracín, Eagly, Brechan, Lindberg,and Merrill(2009), Feeling validated versus being correct: A meta-analysis of selective exposure to information, Psychological Bulletin, Vol 135(4), 555-588.

      Hastorf, A. H., & Cantril, H. (1954). They saw a game; a case study. The Journal of Abnormal and Social Psychology, 49(1), 129-134.


      12-05-2024(목) 요한복음 12:2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귀히 여기시리라(26절)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Whoever serves me must follow me; and where I am, my servant also will be. My Father will honor the one who serves me.

      섬기다(1247) 디아코네오(diakŏnĕōδιακονέω

      1. 식사시중을 들다.  2. 섬기다. 3. 돌보다
      발음 [ diakŏnĕō ]
      어원  / 미완료 διηκόνουν, 미래 διακονή- σω, 제1부정과거 διηκόνησα, 제1부정과거 수동태 διηκονήθην, 1249에서 유래
      • 1. 식사시중을 들다, 눅10:40, 12:37, 17: 8, 22:26,27, 요12:2.
      • 2.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을] 섬기다, 시중들다, 봉사하다, 마4:11, 8:15, 막1:13,31, 눅4:39, 요12:26, 행19:22, 딤후1:18, 몬1:13, 벧전1:12, 4:10,11. 수동, 마20:28, 막10:45, 고후8:19,20.
      • 3. 돌보다, 간호하다[사물의 여격과 함께], 행6:2, 고후3:3.
      • 4. 돕다, 부양하다[+여격], 마25:44, 눅 8:3, 롬15:25, 히6:10.
      • 5. 집사일을 보다, 딤전3:10,13.
      • 관련 성경 /  수종들다(마4:11, 막1:31, 눅4:39), 섬기다 (마20:28, 막15:41, 눅8:3), 공양하다(마25: 44), 일하다(눅10:40, 요12:2), 맡다(고후8: 20), 돕다(행19:22), 봉사하다(벧전4:10, 11), 일삼다(행6:2),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하다 (딤전3:3).



      따르다(190) 아코루데오(akŏlŏuthĕō) ἀκολουθέω  

      1. ‘함께 같은 길에 있다’.  2. 뒤따르다.  3. 동반하다
      발음 [ akŏlŏuthĕō ]
      어원  / 명령법 ἀκολούθει, 미완료 ἠκο- λούθουν, 미래 ἀκλουθήσω, 제1부정과거 ἠκολούθησα, 완료 ἠκολούθη- κα, 막10: 28, 1[연합을 나타내는 불변사]과 κέλευθ ος ‘길’에서 유래
      • 1. ‘함께 같은 길에 있다’
        • a.  [문자적으로] 뒤따르다, 뒤쫓다, 따라가다, 마21:9, 9:19, 26:58, 막11:9, 14:13, 눅22:10, 요10:4, 11:31.
        • b. 동반하다, 함께 가다, 마4:25, 8:1, 12: 15, 14:13, 막5:24, 눅7:9, 요6:2, 계6:8.
        • c. [상징적으로] 제자로서 따르다, 마9:9, 막1:18, 2:14, 8:34, 눅5:11,27.
        • d. [일반적으로] 따르다, 복종하다.
      • 관련 성경 /  따르다(마4:20, 21:9, 막1:18, 고전10:4), 따라가다(막5:24, 눅22:54), 따라오다(요10: 4, 행12:8).


      귀히 여기는 사람이 됩시다!
      귀히 여기다라는 헬라 단어는 "티마오(timaō. τιμάω)"라고 합니다.
      '티마오'는 "값을 치다" "존경하다"는 뜻입니다.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과 나무그릇 등 다양한 그릇들을 사용합니다.
      그릇을 만드는 재료에 따라 그릇이 결정되는 것같지만 실상은 그릇은 깨끗해야 사용됩니다.
      금으로 만든 그릇일지라도, 은으로 만든 그릇일지라도, 나무로 만들 그릇일지라도 먹지 못할 음식을 담으면 그 음식을 누가 먹겠습니까?
      아무리 재료가 값비싼 것일지라도 그릇이 깨끗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맛있는 음식이 담겨져야 합니다.

      성경은 귀히 여겨야 할 것을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첫째는 말씀을 귀히 여기라!(욥기 23: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둘째는깨끗한 그릇이 되라!(디모데후서 2:21)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셋째는 혼인을 귀히 여기라!(히브리서 13: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넷째는 예수만을 섬기라!(요한복음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만을 섬기는 신앙은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킵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율법을 지키려는 것입니다.
      신약의 주일은 받은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만을 섬기는 신앙은 거룩한 예배를 회복합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 즉 성령의 감동에 따는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어 감동과 감격이 흘러넘쳐야 합니다.

      예수만을 섬기는 신앙은 철저하게 죄를 회개합니다.
      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은 거룩한 믿음을 사랑합니다.
      거룩한 믿음의 전제조건은 철저하게 자기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는 심령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십자가의 고통이 닥쳐올 때에 온 밤을 새워가며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하며 기도하셨던 예수님처럼 간구의 자리를 확보하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시대의 큰 흐름을 역류할 줄 아는 영원한 생명을 따라 세상을 이기도록 돕는 귀히 여김을 받는 믿음의 사람으로 당당하게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베드로전서 3:7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귀히여기시리라(5091)

      귀히 여기다(티마오. timaō) τιμάω 스트롱번호 5091

      1. 값을 치다.  2. 존경하다
      발음 [ timaō ]
      어원  / 미래 τιμήσω, 제1부정과거 ἐτίμη- σ α, 제1부정과거중간태 ἐτιμησάμην, 완료 수동태 τετίμημαι, 완료수동분사 τετιμημένος, 5093에서 유래
      • 1. 값을 치다, 평가하다, 값을 정하다, 마 27:9.
      • 2. 존경하다, 공경하다, 마 15:8, 막 7:6, 요 5:23.
      • 관련 성경 /  공경하다(마 15:4, 막 7:6, 요 5:23, 벧전 2:17), 가격 매기다(마 27:9), 귀히 여기다(요 12:26), 대접하다(행 28:10), 존대하다(딤전 5:3).


      귀히 여겨야 할 것

      말씀을 귀히 여기라!(욥기 23: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귀하 사용하는 그릇이 되라!(디모데후서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혼인을 귀히 여기라!(히브리서 13: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베드로전서 3:7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 이것은, 위의 말씀에 이어서 참된 신자 되는 원리를 더 자세히 가르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해설된다.
      곧, 사람이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25절 하반), 여기서 주님을 따른다(믿는다)는 말로 바뀌었다.
      주님을 따르는 자가 주님을 섬기는 자이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자는, 고난도 주님과 함께 받게 된다.
      그렇게 하는 자는, 장차 주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하반절).
      딤후 2:11-12 참조.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신자의 구원을 내세의 장소와 관련시키는 사상은, 특별히 요한 복음에 많다(14:2, 17:24). 8:21, 33 참조.
      그러나 이와 같은 내세 사상도 그리스도의 인격을 중심하고 있다.
      곧, 그 장소가 그리스도의 계신 곳이라는 것이다.
      "나 있는 곳", "나의 가는 곳"이란 말씀들이 그 뜻이다.
      공관 복음도 내세의 장소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마 19:28; 눅 23:43), 주로 "천국"이란 말에 내세(來世)를 포함시킨다.
      천국이란 말이 내세의 장소성(場所性)도 포함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주로 운동의 경역(곧, 하나님의 통치 경역)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이 말하는 내세적 구원은,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혹은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는 사실을 그 중심 요소로 가진다는 것이다.
      여기 예수님과 및 그를 섬기는 자들이 동일한 곳에 들어감에 대하여, 볼트만(R. Bultmann)은 다음과 같이 잘못 말하였다.
      곧, "여기에 나타난 교훈은 노시스(露智派) 신비의 구속 교리와 부합한다.
      노시스는 우주적 관련에서 그런 구속자의 구원 받는 자들의 연합을 가리키고, 여기 요한 복음은 역사적 관련에서 그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26).
      그는, 특별히 32절의 모든 사람을 이끄는 "들리움"이란 말 해석에서도 이와같은 견해를 표시하면서 말하기를, "예수님은 다시 여기서 신비(노시스 신비)의 술어로써 말씀하신다"라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30).
      그러나 예수님의 돌리우심은, 노시스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우주 전쟁을 통과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구원사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들리우심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아버지 하나님에게 순종하신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사 부활 승천케 하신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사람(사무엘상 2:30)

      효도란 부모를 존중히 여기는 일이며, 신앙이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히 여겨야 할 이유는
      첫째, 창조주에게 대한 피조물의 당연한 예법이기 때문
      둘째, 하나님은 완전무결하신 절대자이시기 때문
      셋째, 내가 주를 존중히 여기는 것만큼 주께로부터 나도 존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
      사실 하나님께서 경멸히 여정을 받는 사회에서는 인권의 존중이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기도 서두에 “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오며 ” 라고 기원하고 있습니다.
      주를 존중히 여긴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1. 주를 존중히 여기는 자는 주님의 날을 존중히 여깁니다.

      주일은 주님께 경배하기 위해 성별된 주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하나님께만 바쳐지고 쓰여져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성도 중에는 주일에 세상의 여러 곳에 모임으로 나가는 자가 많습니다. 동창회, 산악회, 종친회, 군민회, 야유회 등등 주일을 성수하지 않고 산으로 강으로 들로 가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는 주일을 경멸히 여기는 행위이며 주일을 경멸히 여김은 곧 주님을 경멸히 여기는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존경하는 자는 마땅히 주일도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로써 우리를 죄와 사명과 저주와 지옥에서 건져주신 축복의 날이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감사하며 주님을 위해 사는 날입니다. 엿새 동안은 육신의 날이라면 주일은 우리들의 영을 위한 날입니다. 영혼을위한 날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나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이 주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는 주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님의 날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온 가족, 온 국민이 주일을 지키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요, 주를 높이는 백성은 하나님께서 존귀케 해 주실 것입니다.

      2. 주를 존중히 여기는 자는 주께 드리는 예배를 존중히 여깁니다.

      주님을 존중히 여기는 신자가 되려면 예배를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드리는 예배를 존중히 여기는 신자야말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히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예배 기피증에 걸려 있습니다. 예배 기피증 신자는 예배 시간보다 늦게 예배에 참석하고 예배 시간을 다 마치기 전에 일찍 나갑니다. 자신이 주님보다 더 귀하신 몸처럼 행세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존중히 여기는 생활이 아닙니다. 요즘 주일되면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와 오락 등의 놀이와 게임을 즐기며 하루를 보냅니다. 예배에 대한 관심보다 세상일에 더 관심 두는 분이 계십니다. 그것은 주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존중히 여 기지 않는 자세는 주님을 경멸히 여기는 일입니다. 사 58:13-14에 “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 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날을 존귀히 여기고 즐거운 날로 살고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쓰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쏟아 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일을 멸시하는 개인과 나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빠지게 됩니다. 신자들이 언제 타락합니까 주일을 범하고 교회 출석을 게을리 할 때요, 주의 날을 다른 일을 위해 쓸 때가 바로 타락의 시작입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님께 예배할 줄 아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께 예배할 줄 모른다면 다른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 인간이 일주일에 한 번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원하시는데 그 하루마저도 자신의 향락과 안일을 위해서 살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섭섭해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예배를 통해서 영광 돌리면, 하나님도 여러분을 귀중히 여기시고 돌보시며 축복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을 회개하는 자를 존귀히 여기시고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되 죄는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하박국에 보면 “ 너희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 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므로 악인을 형통하게 오래 놓아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암 4:6에 “ 죄를 두고 회개하지 않으면 일거리가 없어서 실직하게될 것이라 ” 고 했습니다. 잠 28:13에 “ 사람이 죄를 회개치 않으면 만사가 이루지 못하리라 ” 고 했습니다.

      사 1:5에 “ 죄를 범하고 회개치 않으면 매를 때린다 ”
       (1) 하나님 께서 죄 짓고 회개하지 않은 자에게 매를 계리시는데 어떻게 때리십니까
        1) 물질에 매를 때리십니다.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없고 살림은 점점 궁핍해져 갑니다.
        2) 죄를 회개치 않으면 건강에 매를 때립니다.
        3) 그래도 지를 회개치 않으면 자녀에게 매를 때립니다. 부모의 죄 때문에 죄 없는 자녀가 매를 맞습니다.
        4) 그래도 안되면 육신의 생명을 거두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무서운 것은 죄요 주님은 죄를 두고는 존귀하게 여김을 받지않습니다.

      (2) 그런데 죄는 병마와 같이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죄는 부착성이 있습니다. 한 번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2) 죄는 번식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전염병처럼 퍼져 나갑니다. 그래서 한 번 죄를 짓게 되면 자꾸만 더 죄를 짓게 됩니다.
        3) 성장합니다. 죄는 끝장 볼 때까지 자랍니다. 그리고 우리 영을 흐리게 하여 하나님과의 모든 교통을 끊어버립니다. 그래서 기도문이 막히고 찬송문이 막히고 은혜문이 막힙니다.
        4) 죄는 파괴성이 있습니다.

      (3) 그리면 죄를 어떻게 회개합니까
        1) 차례대로 죄를 내놓으라고 하였습니다(시 50:21). 신앙의 양심에 걸리는 것이 죄인 것이므로 그 죄를 차례대로 찾아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 찾아 낸다 ” 는 말의 원문은 “ 대차대조표 ” 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이나 사업을 하는 사람은 경리 장부를 하는데 장부를 할 때는 수입과 지출이 정확하게 대차대조가 잘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리원이 대차대조가 안맞으면 단 10원, 100원 때문에 몇 시간 며칠이 걸려서라도 찾아내고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도 그렇게 차례대로 찾아내서 하나님과 막히고 사람과 막힌 것을 찾아내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 오 아버지시여! 내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혀 있는 죄를 발견하여 해결해 주시음소서 ” 라고 기도함으로 회개할 때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존귀히 여겨서 축복하시는 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회개란 마음을 찢으라는 말입니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면서 “ 주여 ! 지난날은 무지해서, 환경 때문에 죄를 지었으나 이제는 죄를 짓지 않겠나이다 라고 하면서 마음을 찢는 것이 회개입니다. 3) 180도 방향전환이 회개입니다. 죄라고 생각하면 일단 돌아서야 합니다. 또 내가 죄 지을 가능성이 있는 장소에 있다면 일단 “ 돌아가자 ” 라고 하며 죄 짓는 장소나 환경을 피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죄를 멀리하지 못하고 연약하여 지은 죄일지라도 차례를 찾고 마음을 찢으면서 죄를 멀리하면서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심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6절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편지하는 중에 디모데후서 2장 20-21절을 보면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큰집에는 그릇이 많습니다.
      그 많은 그릇 중에는 금으로 만든 금그릇, 은으로 만든 은그릇, 나무로 만든 나무그릇, 흙으로 만든 질그릇 등이 있습니다.
      주인이 귀히 쓰는 그릇도 있고, 천히 쓰는 그릇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된다고 바울 사도는 덧붙였습니다.
      이 큰집을 교회라고 하면 교회는 그릇 노릇하는 교인들 중에 귀히 쓰는 교인도 있고 천히 쓰는 교인도 있습니다.
      그런데 귀히 쓰는 그릇은 질이 좋아야 합니다.
      금으로 만든 그릇과 흙으로 만든 그릇은 질이 다릅니다.
      사람도 보면 똑같이 교육을 받았는데도 아주 질이 좋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질이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 날 한 시에 예수 믿고 10년 동안 교회에서 교인 노릇하면서도 질이 좋은 집사가 있고 질이 나쁜 집사도 있습니다.
      믿음도 질이 좋은 믿음이 있고 질이 나쁜 믿음이 있습니다.

      I. 예수님을 보여주는 사람(20-22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아합 임금 때 너무 노여워서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이유는 아합 임금이 이방 여자 이세벨을 왕후로 맞아들였는데, 이세벨이 아합의 왕궁으로 바알 신을 가지고 와서 바알 종교를 열심히 퍼뜨리니 모든 백성들이 바알 신에게로 넘어 갑니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이 비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기다리던 주의 종 엘리야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임금을 찾아가 바알신이 참 신인지 우리가 조상 대대로 믿어 오던 여호와가 참 신인지 한 번 내기를 해보자 하고 정한 날 정한 시에 갈멜산에 제단을 쌓고장작 올려놓고 송아지를 잡아 각을 뜨고. 기도할 때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이 나왔습니다.
      아마 자신이 있었나 봅니다.
      그런데 아세라 신의 선지자 400명은 나오지를 않고 일찌감치 포기를 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제단을 쌓아 놓고 송아지를 잡고 얼마나 바알 신을 애처롭게 부르는지 애간장을 녹이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제 몸을 상하게 하면서 까지 바알신의 긍휼을 입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했습니다.
      그리고 제단 주위를 뛰놀았는데 응답이 얼자 포기를 했습니다. 뛰놀았음이 신의 역사는 아닙니다.

      이번에는 엘리야가 제단을 쌓고 장작을 벌려 놓은 다음에 송아지를 잡아 각을 떠서 제물로 올려놓고 물을 분 다음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모두 태웠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바알이 하나님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믿어온 여호와가 하나님이라고 분명하게 고백했는데 이것은 불을 체험했기 때문에 일어난 자발적인 고백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돌아갔는데 엘리야가 보니 하나님이 이쯤 되었으면 축복의 장마비를 주실 텐데 왜 안 주시나 생각하며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갑니다.
      일곱 번을 기도하며 사환을 보내고 또 보냈더니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조금 후에 큰비가 내렸습니다.
      기도하는 종이 귀합니다.

      이것 보십시오 여기 7천 명의 맡은 사람들은 엘리아 선지자를 만났습니다.
      주의 종을 잘 만났습니다.
      주의 종을 만날 때 주의 종 엘리야가 자기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하고 하나님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엘리야를 만났고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보실 때 7천명이 귀합니까?
      엘리야가 귀합니까? 하나님을 보여준 사람,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사람을 귀하게 여 기십니다.
      여러분도 믿지 않는 내 식구, 내 이웃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고 예수님을 보여 주고 만나게 해 주는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그릇이 되시기를 바합니다.

      본문 20절에서 22절을 보면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애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여짜온대" 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명절은 유월절을 가리킵니다.
      유월절에는 유대 땅에 사는 유대인 남자들은 모두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인이 온 것은 유대인으로서 헬라 말을 쓰고 사는 헬라파 유대인이 있으나 본문의 헬라인은 그런 유대인은 아닙니다.
      헬라 사람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을 왜 지키러 왔느냐?
      이 사람들은 할례를 받고 개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인이 개종하여 기독교인이 되려면 세례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 와서 예수님을 뵙고 싶은데 직접 만날 수 없어서 빌립에게 청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빌립이 안드레에게 말하고 빌립과 안드레가 함께 예수님께 가서 이 사람들을 소개하고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싶어 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고 찾아 나오는 사람도 귀하지만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을 보여 주고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는 사람은 하나님이 더 귀하게 여 기십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보여 주고 만나게 해주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귀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Ⅱ.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사람(23-25절)

      예수 믿고 잘된 사람은 바울보다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배운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력서를 쓴다면 별로 볼 것이 없을 정도로 무식한 편입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내놓을 것도 얼을 뿐 아니라 가문도 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님께 3년 4개월을 배웠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배웠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세계적인 인물이 되고 역사적인 인물이 된 것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닮았고, 예수님처럼 살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면 예수를 많이 닳는 사람이 되게 하면 됩니다.
      내 아들 딸들이 훌륭한 사람 또는 역사적인 인물이 되기를 원하시면 예수를 닳아가게 하면 됩니다.
      베드로가 그런 사람입니다.

      본문 23에서 25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회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쓸어 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빌립과 안드레 그리고 찾아 온 헬라 사람 몇을 앞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 나는 영광받을 때가 됐다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영광받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심을 가리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어서 죽으면 많은 열매 맺지만 밀알이 땅에 심기어져 썩지 않고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신 것은 자기가 죽으므로 만민의 죄를 속하여 사람에게 부활의 생명,영생하는 생명을 주실 것을 가리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아파트 한 채를 가졌습니까?
      저금 통장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관공서에서 취직해 월급 한 번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으면 족하게 여기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생명이 있는데 하나는 육신의 생명으로 육신의 아버지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육신은 개나 돼지처럼 먹여주고, 입혀 주고 좋은 잠자리 주면 좋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켜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고린 도전서 2장 14절에서 3장 1절에 보면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나오는데 하나는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개나 돼지가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자리만 있으면 좋다고 하는 동시에 하나님은 내가 알 바 아니라고 합니다.
      개나 돼지와 다름이 없습니다.

      두 번째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안다 하고 제법 교회도 나오는데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좋아합니다.
      주일 예배 드리는 것보다 설악산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영에 속한 사람 즉. 신령한 사람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그리고 금덩어리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찾고 하나님만 섬기고 찬양하는 즐거움으로 삽니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을 찾아야 살게 되어 있고 찬송하고 영광 돌리고 높여야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들도 육신의 생명만 생각하고 육신의 욕망만을 추구하면 결국멸망을 당할 뿐이라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나를 본 받아 영적인 삶, 영에 속한 삶을 살아야 영원한 생명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죽고, 예수님 닮아 가는 삶을 사는 이런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선생 중에 가장 훌륭한 선생은 예수님이십니다.
      말하는 것도, 마음 쓰는 것도. 생활하는 것도 예수님을 닮아 가면 하나님께 귀히 여기는 사람이 된다는 것 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Ⅲ.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26절)

      운동하는 경기장에는 선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경꾼도 있어야 합니다.
      역시 영화관에도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구경꾼이나 관객은 필요 없습니다.
      교회는 경기장도. 영화관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겨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아 가고 예수님을 높이고 섬겨야 합니다.
      본문 76절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에서는 섬기는 사람이 귀한 사람입니다.
      섬기지 않는 사람은 말이 많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말 많은 사람은 섬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열심을 내어 봉사하는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헌금하는 사람은 헌금에 대해서 말이 없습니다.
      안하는 사람들이 말이 많습니다.
      사랑을 주는 사람은 말이 없지만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은 말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섬기는 사람을 귀하게 보십니다.
      여기에 섬긴다는 말은 집사라는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집사 노릇을 잘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신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낮아져야 하는 사람이 집사요, 더 많이 봉사해야 하는 사람이 집사입니다.
      집사가 되면 더 올라가는 줄 알고 목에 힘을 주고, 장로가 되면 더 이상 올라 갈 것이 없는 줄 알고 어디 가든지 대접만 받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목사가 같이 가서 냉면 간 내는 것 보았습니까?
      목사는 꼭 대접받아야만 되는 사람입니까?
      목사가 되면 더 낮아져야 하고 남을 대접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집사 노릇 잘하는 사람, 권사 노릇 잘하는 사람, 장로 노릇 잘하는 사람, 목사 노릇 잘하는 사람, 즉 봉사를 많이 하고 더 많이 섬기는 사람을 하나님이 귀하게 여 기십니다.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평생을 도적질만 한 사람을 귀히 여길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여주고, 자랑하고, 높이고, 만나게 해 주는 사람은 귀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가서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사람을 하나님은 귀히 여기십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닮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이 귀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καιρός, οῦ , ὁ 스트롱번호2540

      1. 때.  2. 달가운 때. 3. 옳은 때
      발음 [ kair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 1. 때, 시점, 기간, 시기.
        • a. [일반적으로] 달가운 때, 고후 6:2, 어려운 때, 딤후 3:1, 열매 맺는 때, 행 14:17, 때때로, 정규적으로, 요 5:4.
        • b. 옳은 때, 알맞은 때, 좋은 때, 제때에, 마 24:45, 눅 12:42, 행 24:25.
        • c. 정한 때, 마 13:30, 21:34, 막 1:15, 행 17:26, 갈 4:10, 6:9, 딤전 2:6, 딤후 4:6, 딛 1:3.

        • . [종말론적 숙어] 마 8:29, 16:3, 눅 21: 8, 고전 4:5, 엡 1:10, 계 1:3, 22:10.

        • 관련 성경 /  때(마 8:29, 눅 8:13, 딤후 3:1), 날(마 16:3, 눅 1:20, 고후 6:2), 세월(골 4:5), 연대(행 17:26), 틈(행 24:25), 현재(롬8:18, 히 9:9), 기회(갈 6:10), 항상(엡 6:18).

      χρόν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5550

      1. 시간.  2. 유예
      발음 [ chrŏnŏs ]
      어원 / 불확실한 파생어에서 유래
      • 1. 시간, 때, 마 25:19, 눅 8:27, 요 7:33, 행 8:11.
      • 2. 유예, 지체, 계 2:21, 10:6.
      • 관련 성경 /  때(마2:7, 행1:7, 벧전4:2), 시대(행17:30), 얼마간(행19:22), 시간(11:32), 기회(계2:21), 동안(막2:19), 기한(눅1:57), 시대(행17:30), 항상(행20:18), 날(행27:9), 영세(롬16:25).


      때(5610) 호라(hōra) ὥρα, ας, ἡ    

      1. 때.  2. 시간. 3. 시간의 한토막
      발음 [ hōra ]
      • 1.  때[낮의], 막 11:11, 마 14:15, 눅 12:39, 40, 계 3:3.
      • 2. 시간.
        • a. 시간의 한토막, 계 9:15, 요 11:9, 마 20:12.
        • b. 짧은 시간, 잠깐, 계 18:10,17,19, 요 5:35, 고후 7:8, 막 15:25, 행 2:15, 23:23, 마 20:5, 막 15:33, 눅 23:44, 요 4:6.
      • 3. [어떤 일이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날] 시점, 마 8:13, 막 13:11, 눅 7:21, 행 16:33, 계 11:13.
      관련 성경  /  시(時)(마 8:13, 막 15:33, 계 3:3), 때(마 14:15, 요 4:53, 요일 2:18), 시간(마 20:12, 눅 1:10, 14:17), 날(마 24:42), 한때(요 5:35), 잠시(고후 7:8), ~시(마 8:23).


      크로노스(Κρόνος)와 카이로스(Καιρός)

      헬라어는 '때'(시간)를 표현하는 단어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가 있다.
      이 두 표현을 이해하는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것 뿐만아니라 우리의 때와 시간을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이된다.

      '크로노스'(Κρόνος)는 규칙적인 시간적 흐름을 가리키고,
      '카이로스'(καιρός)는 시간의 어떤 특별한 시기를 뜻한다.
      “때가 벌써 되었으니”(ὥρα ἡμᾶς ἐγείρω 호라 헤나스 에기로)라는 표현(은유)은 하나님의 구속적 계획 안에서 어떤 특별한 때(카이로스와 비슷함)를 가리킨다(종종 요한복음에서 사용됨/ 참조, 요 16:25, 3:26; 고전 7:29; 10:11; 약 5:8; 벧전 4:7; 벧후 3:9-13; 요일 2:18; 계 1:3; 22:10).

      •'카이로스'에 대한 몇가지 예문

      마가복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때가 찼고" - 이는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구속사의 결정적인 시점을 맞았음을 시사해준다(갈 4:4; 엡 1:9).
      다시 말해 본문의 '때'(카이로스)라는 말은 단순히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변화되는 시기를 뜻하는 '크로노스'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호기(好期,opportunity), 즉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일어날 결정적 기회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드디어 구원의 약속들을 성취하시고 그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절호의 기회를 맞으신 것이다. 이에 대해 슈바이쩌(Schweizer)는 말하기를 '그는 역사상 유래없는 특정한 구원의 때를 성취하신 것이다'라고 묘사하였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때가 가까움이라."
      - 본문은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이다.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로스'는 보편적인 시간을 나타내는 '크로노스'와는 달리 결정적인 섭리를 나타내는 종말론적 시각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승천한 이후부터 다시 오실 재림의 때까지는 인간 편에서 볼 때 항상 임박한 긴장(緊張)의 시간이며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정한 시간이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마 24:3-51; 요 21:22).

      누가복음 20: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때가 이르매" - '때'(카이로스)는 시간(time) 또는 어느 한 시점(point of time)이나 시기(period of time)를 뜻한다.
      이 비유에서는 포도를 따 들이는 추수의 때 곧 종말적 심판의 때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때는 성도에게는 풍성한 결실과 완성의 때이지만 불신자에게는 파멸의 때이다.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언제라도 오실 것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살아야만 한다.

      로마서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카이로스)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이 시기를 알거니와"
      - 본문의 '시기'(카이로스)는 연대기적으로 흐르는 '시간'(크로노스)이 아니라 '계절'(season)과 같이 어떤 특성을 가진 개념의 시간이다. 여기에서 '이 시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카이론'('그 시기를')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주의 재림으로 오게 될 역사의 종말을 그 시기의 성격이나 현상들을 통해 깨닫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깨달음은 주의 가르침(마 24장)에 근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가 주는 의미를 바로 깨달으라고 하는 바울의 촉구가 담겨있는 표현이다.

      우리의 구원이
      - 본문의 '구원'은 현재의 고난으로부터의 탈피 또는 점진적인 구원의 과정에 참여함이 아니라 종말론적이고 최종적인 완성으로서의 구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주의 강림 때 일어날 미래적 구원의 정점(定點)이 더 가까와지고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 '때를 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카이론'은 '좋은' 혹은 '옳게'를 뜻하는 '유'와 '시기'를 뜻하는 '카이로스'가 합쳐진 합성어로서 '적절한 시기'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불완전하여 수시로 죄의 유혹에 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본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자비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때를 아실 뿐만 아니라 시기 적절하게 베풀어 주심을 나타낸다.

      카이로스(Kairos)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와 반대의 뜻을 가집니다.
      우리는 크로노스보다는 카이로스로 가득찬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냥 밥 먹고, 자고, 출근하고, 게임하는 시간으로 보내는 건 크로노스로 가득찬 인생입니다.
      내가 달성하려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하루에 무엇을 해야할지 결정하고 하루하루 목표를 이루기 위한 행동들을 매순간 자각하며 실천하는 것. 이것이 카이로스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서핑을 할 때, 서핑에 가만히 서서 파도를 맞는 건 크로노스입니다.
      파도를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죠. 하지만 파도의 힘을 이용해 서핑을 하는 것이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파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활용해야 합니다.
      헛되이 보내서는 안됩니다.
      지금 우리가 보낸 시간들이, 우리가 열심히 최선을 다해 보낸 시간들이 우리에게 성과라는 달콤한 열매로 돌아올 것입니다.

      크로노스(Chronos)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리적인 시간.
      쉽게 말해 크로노스는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지금 우리는 크로노스라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모두가 똑같이 흘러갑니다.
      어떻게든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크로노스가 흘러가는 건 멈출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붙잡을 수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카이로스라는 시간은 붙잡을 수는 없지만, 함께 갈 수는 있습니다.




      12-04-2024(수) 요한복음 12:20-2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광을 얻을 때(2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Jesus replied, "The hour has come for the Son of Man to be glorified.

      때(5610) 호라(hōra) ὥρα, ας, ἡ    

      1. 때.  2. 시간. 3. 시간의 한토막
      발음 [ hōra ]
      • 1.  때[낮의], 막 11:11, 마 14:15, 눅 12:39, 40, 계 3:3.
      • 2. 시간.
        • a. 시간의 한토막, 계 9:15, 요 11:9, 마 20:12.
        • b. 짧은 시간, 잠깐, 계 18:10,17,19, 요 5:35, 고후 7:8, 막 15:25, 행 2:15, 23:23, 마 20:5, 막 15:33, 눅 23:44, 요 4:6.
      • 3. [어떤 일이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날] 시점, 마 8:13, 막 13:11, 눅 7:21, 행 16:33, 계 11:13.
      • 관련 성경  /  시(時)(마 8:13, 막 15:33, 계 3:3), 때(마 14:15, 요 4:53, 요일 2:18), 시간(마 20:12, 눅 1:10, 14:17), 날(마 24:42), 한때(요 5:35), 잠시(고후 7:8), ~시(마 8:23).


      상징적 의미: “호라 종종 신이 일하는 특정한 계절이나 시간을 상징합니다.
      성경 문헌에서 특정 시간은 신의 개입에 결정적인 순간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 영광을 얻을 때를 위하여(헤 호라 히나 돜사스데.  η ωρα ινα δοξασθη)

      영광을 얻을 때(호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져야 할 때를 말합니다.
      영광을 생각할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개인적인 영역에 속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그 때를 말합니다.


      때(time)

      때를 가리키는 성경 단어들 그 자체로는 성경적 때의 개념들에 관한 성찰의 확고한 기반이 되지 못한다.
      때를 가리키는 성경의 단어들이 사용되는 맥락으로부터 성경적 때의 개념들을 모아보는 길밖에 없다.

      1. 때와 절기

      히브리인들은 시간의 경과를 헤아리는 나름대로의 방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때'와 '절기'로 번역되는 단어들의 대부분의 맥락들은 정해진 때, 적당한 때, 어떤 사건이나 행동의 기회에 대한 관심을 시시한다. 가장 흔히 쓰이는 단어는 히브리어 '에트'(전 3:1이하)이며 '제만'이란 단어도 에트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모에드'는 '정하다'는 뜻을 지닌 어근에서 온 단어로 초승달(예. 시 104:19)과 같은 자연적 시기나 정해진 절기(예. 민  9:2)에 사용된다.
      특히 이 모든 단어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 그가 주신 기회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예. 신 11:14; 시 145:15; 사 49:8; 렘 18:23).
      신약에서 헬라어 '카이로스'라는 단어는 그 자체가 '결정적 순간'을 뜻하는 것은 아니면서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흔히 나타난다(참고. 눅 19:44; 행 17:26; 딛 1:3; 벧전 1:11).

      이렇듯 성경은 시간의 추상적 연속이 아닌, 하나님이 역사의 일정 순간에 부여하신 내용을 강조한다.
      이 시간관은 고대 세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순환적 시간관과 대조되는 '직선적' 시간관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목적은 완성을 향해 움직인다.
      사태는 그냥 진행되는 것이나 처음 시작된 지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시간관을 '직선적'이라 한다고 해서 시간과 역사가 불가피한 사건들의 예기 속에서 계속 흘러가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세계에 그의 목적들을 진척시키는 '때'를 강조한다. 

      * 참조 / 여호와의 날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이 '때'를 정하신다. 아들조차도 그의 사역 초기에는 완성의 날과 시간을 알지 못하였다(막 13:32; 행 1:7).
      하나님의 주권은 개별 인생의 때에까지도 확대된다(시 31:5).
      다니엘서에 나오는 아람어 '이단'은 연대기적인 일정한 기간을 가리키며(예. 단 2:9; 3:15), 흔히 일년을 가리키기도 한다(예. 단 4:16; 7:25, 물론 이런 해석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여기서도 강조된다(단 2:21). 

      '크로노스'라는 단어는 세속 헬라어에서와 같이 신약에서도 때로는 단순한 시간의 경과를 가리키기도한다(예. 눅 20:9; 행 14:28).
      문맥에 따라 크로노스는 '지체', '머무르거나 기다리는 시간'의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예. 행 18:20, 23).
      계 10:6에 '크로노스'라는 단어가 쓰이는데, 이 경우에도 시간이라 해석하기보다 '지체'(delay)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시간이라 해석할 경우, 현세대가 끝나면 시간도 끝난다는 의미가 된다.
      한글개역이 '지체하지 아니하리라'고 번역한 것은 타당해 보인다).


      에트(6256)  עֵת 스트롱번호6256

      1. 시간.   2. 정한 시간. 3. 어떤 시간
      발음 [ ʽêth ]
      어원  / 어미활용 עִתִּי, 복수 עִתּוֹת ,עִתִּים,570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94회 사용

      제만(2164) זְמַן  

      1. 정하다.  2. 힛파엘형 :  הִזְדַּמֵּן: 동의하다
      발음 [ zeman ]
      어원  / 아람어
      구약 성경  /  1회 사용

      모에드(4150) מוֹעֵד   

      1. 정한 때.   2. 시간의 한 점.  3. 시간의 공간
      발음 [ môwʽêd ]
      어원  / 325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23회 사용

      2. 영원

      히브리어 '아드'와 '올람'은 사람의 한평생에 해당하거나(참고. 삼상 1:22, 28) 산이 한없음과 같은(참고. 창 49:26) 오래고 요원한 시간을 가리킨다.
      무엇보다도 이 단어들은 하나님에게 적용된다.
      하나님은 시간의 제약이 없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다(시 90:2).
      이 시간의 무제약성은 또한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에도 해당되며, 그 백성을 향한 그의 사랑은 영원무궁하시다(참고. 렘 31:3; 32:40; 호2:19).
      하나님은 어떤 고정된 기한에 제약받지 않으신다는 확신을 보다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시적인 강한 복수형(예. 시 145:13; 단 9:24)이 사용되거나 이중 형식(예. 시 132:14)이 사용되기도 한다.

      신약의 '아이온' 용법도 이와 비슷하다. '아이온'이란 단어는 평생의 시간(고전 8:13)이나 과거(눅 1:70)나 미래(막 11:14)의 요원한 시간에 사용될 수 있다.
      '아이온'이란 단어는 '세세토록'(갈 1:5), '영영하며'(히 1:8)라는 뜻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하나님은 또한 '만세 전에'(고전 2:7) 지혜를 미리 정하신 분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구약과 신약의 이런 용법들은 우리 말의 '영원한, 영원'의 용법에 상응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늘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늘 존재할 것을 가리킨다.
      성경에 사용된 언어 자체가 우리가 논의하는 시간과 영원에 관한 철학적인 문제들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형용사 '아이오니오스'는 하나님을 가리킬 때의 아이온의 용법과 일치하기 때문에 '영원하다'는 시간적 의미 이외에도 '신적인', '불후의'란 의미를 함께 풍긴다.
      이런 경향으로 인해 히브리어 '올람'이 '상'의 공간적 의미로 사용되어 금세(이 세상)와 내세(오는 세상)로 표현되기도 한다(예. 막10:30). 

      3. 두 시대

      신약은 하나님에 의해 결정적인 것으로 정해진 한 때를 지적한다.

      예수의 설교의 제 일성은 "때가 찼다"는 것이었다(막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The time has come," he said. "The kingdom of God is near. Repent and believe the good news!"

      예수의 삶과 사업은 하나님의 목적들의 결정적 시기를 나타낸다(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to be put into effect when the times will have reached their fulfillment--to bring all things in heaven and on earth together under one head, even Christ.

      이 때는 기독교인들이 완전히 장악해야 할(엡 5:16; 골 4:5) 대기회이다(고후 6:2).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making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because the days are evil.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Be wise in the way you act toward outsiders; make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For he says, "In the time of my favor I heard you, and in the day of salvation I helped you." I tell you,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예수의 초기 사역 시기에 그의 죽음과 부활의 때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참고. 마 26:18; 요 7:6).

      가라사대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
      He replied, "Go into the city to a certain man and tell him, 'The Teacher says: My appointed time is near. I am going to celebrate the Passover with my disciples at your house.'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Therefore Jesus told them, "The right time for me has not yet come; for you any time is right.

      미래에 대한 유대교인과 그리스도인의 희망의 차이는 결정적인 때가 과거에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유대교인은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결정적 개입을 찾는다.
      그리스도인은 결정적 순간이 과거에 '단번에' 이루어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만물의 완성을 더욱 예민하게 기대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 때(말세)는 이미 우리와 함께 있다(행 2:17; 히 1:2; 벧전 1:20; 요일 2:18).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Utterly amazed, they asked: "Are not all these men who are speaking Galileans?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but in these last days he has spoken to us by his Son, whom he appointed heir of all things, and through whom he made the universe.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He was chosen before the creation of the world, but was revealed in these last times for your sake.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Dear children, this is the last hour; and as you have heard that the antichrist is coming, even now many antichrists have come. This is how we know it is the last hour.

      신약은 현세(금세)와 내세에 대한 당시의 유대인의 시간 구분을 크게 수정한다.
      '현세'(이 세상)와 '내세'(오는 세상) 사이의 전환점이 여전히 미래에 있으나(막 10:30; 엡 1:21; 딛 2:12-13)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미 결정적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완성이 선취된 일면이 있다.

      성령의 은사는 이 선취의 표시이며, 이것은 오는 세상의 권능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엡 1:14; 히 6:4-6. 참고. 롬 8:18-23; 갈 1:4).

      이에 따라 요한은 지금 우리가 영생을 지닌다는 점을 일관되게 강조한다(예. 요 3:36).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에 의해 완전하게 들어가게 될 생명을 '지금'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요 11:23-25). 바울이 고전 10:11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이 두 시대의 '중첩'(overlapping)일 가능성이 있다.

      4. 시간과 영원

      많은 기독교 철학자들은 성경의 강력한 시간 언어는 철학에서의 시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영원으로 표현될 하나님의 존재의 측면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해 왔다.
      이와 다른 철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간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여긴다.
      우리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시간과 관련되기 때문에 무시간적 존재(timeless being)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면 세상으로부터 추상화시키게 되고 따라서 세상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생각할 수 없게 될 위험이 따른다고 본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 행동하시는 기독교의 신관을 견지하려면 우리는 '이승'의 시간의 세계와 '저승'의 영원의 세계를 대립시키는 플라톤 철학의 용어를 사용하기보다 성경의 언어를 고수하여야 한다.
      신약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 '현재'와 '미래'의 단순 대립을 선취의 교리(doctrine of anticipation)로 초월하고 있다.
      철학적 논의의 결과가 어떠하든 성경의 일관된 주장은 하나님은 우리와 달리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난 '만세의 왕'(딤전 1:17. 참고. 벧후 3:8)이시라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1: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Now to the King eternal, immortal, invisible, the only God, be honor and glory for ever and ever. Amen.


      베드로후서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But do not forget this one thing, dear friends: With the Lord a day is like a thousand years, and a thousand years are like a day.




      영광을 얻을 때라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개인적인 영광이 아니라 메시야 구원 사역을 완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 사역의 완성을 위하여 죽으셔야 합니다(십자가 신앙).
      구원 사역의 완성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셔야 합니다(부활 신앙).
      구원 사역의 완성을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셔야 합니다(승천 신앙).
      구원 사역의 완성을 위하여 심판의 주로 다시 오려야 합니다(재림 신앙).

      이 시대에 예수를 믿고 예수를 증거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 사역에 동참하려면
      첫째는 희생하는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둘째는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셋째는 부활의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넷째는 심판대 앞에서야 합니다.

      훗날 심판대 앞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인가를 잊지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양심의 심판대와 역사의 심판대와 최후의 심판대가 항상 열려있습니다.
      그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분명한 사실을 잊지맙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내가 맡은 직분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포기하면 세상을 어지럽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 이 말씀은, 그의 개인적인 영화를 말함이 아니고 메시야의 구원 역사의 완성을 가리킨다.
      그것은 물론 그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을 내포한 것이다.
      구원의 갈증을 느낀 헬라인들이 찾아 온 마당에 있어서, 이 말씀은 적절한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의 동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곧,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뵈옵고자 한 것은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방인들로 말미암아 그에게로 돌아올 영광은,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야 실현된다는 의미로, 그는 여기서 말씀하신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먼저 찾아 오는 원리에 따르지 않고 그가 저희를 부르심으로 되는 원리에 따른다.
      곧,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셔서 저희에게 복음을 전하심으로만 된다"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 1950, PP. 215-216).
      12장은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가 그에게 기름을 부어서 그를 영화롭게 함(1-8)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에 무리들이 그를 왕으로 영화롭게 함(12-19) 헬라인 몇이 그를 베옵고 영화롭게 하려 한 것이다(20-33).
      그러나 이 일들이 모두 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실 사건을 보여 줌과 관련되었다.

      영광을 얻을 때(요한복음 12:20-28)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 잎을 꺾어서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하여 맞은 것에서 유래합니다.
      그리고 종려주일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맞이하던 그 사람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기념하면서 예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오시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은 대대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거리에 있는 종려나무 가지 잎을 꺾어서 흔들고,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이 오시는 길에 깔고서 예수님을 환영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 외치면서 맞습니다.
      사람들이 외쳤던 ‘호산나’라는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큰 기대가운데서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그 모습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오는 장군들을 환영할 때의 사람들이 행하던 일인데, 거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줄 장군과 같은 존재로 믿고 기대하면서 열렬히 환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환영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들의 소원대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떠한 모습으로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지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며, 또한 구원받은 자들에게 원하시는 주님의 뜻은 무엇인지를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에 예수님을 만나고자 찾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헬라 사람들이었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그리스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헬라인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 사람들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헬라인 몇 명이 빌립에게 가서 예수님을 뵙고자 원한다고 전해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으로부터 헬라 사람들이 자신을 찾는 다는 말씀을 들으신 후에 하시는 말씀이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하십니다.
      갑자기 영광의 때를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때”에 대해서 수 차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어머니로부터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 예수님의 첫번째 대답은,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도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드디어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헬라인이 오는 것을 보고서 이제 그 때가 다다랐음을 깨달으셨습니다.
      이 때는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에 따라 모든 사람들을 구원할 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적대시 하는 사마리아 땅에 가셔서도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유대인들이 아닌 헬라인들, 곧 이방사람들이 예수님께 온 것을 보시고, 이제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실 영광스러운 순간이 오셨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 그 동안 “영광을 얻을 때”를 기다리시면서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얻으실 영광은 누구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예수님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영광을 얻을 때를 기다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인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으로부터 인정함을 받고 높임을 받는 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삼고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출세해서 높아지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많은 인기를 통해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로부터 구한 영광은 사람들이 유한한 것처럼, 유한하고 헛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을 만한 많은 순간들이 있었지만 사람들로부터의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모든 영광을 자신이 받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얻을 영광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영광된 일이고, 또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고 예수님을 영광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영광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스스로 영광을 받고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모든 영광된 일들은 하나님께서 돌려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하신 소명을 따라서 살아갈 때에 영광을 받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다른 이들을 살리는 일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는 일입니다. 성도가 영광되게 여겨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존재로 사용받는 것 자체가 영광된 일인 줄로 믿습니다.

      2.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알의 밀알과 같이 자신이 죽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얻게 될 방법을 밀알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대로 죄인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은 영광된 일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이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는 다는 말을 쉽게 합니다. 날씨가 조금이라도 추우면 “추워 죽겠다.” 더우면 “더워 죽겠다.” 고 합니다. 몸이 아프면 “아파 죽겠다.” 누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속상하게 하면 “너 때문에 내가 못살아” 합니다. 심지어는 너무 좋은 일이 있어도 뭐라고 말합니까? “정말, 좋아 죽겠다.””우스워 죽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죽을 일이 널려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죽는 사람은 없더라고요. 죽는 것이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그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으로서도 자기 자신을 한 알의 밀알과 같이 죽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27절에도,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하였습니다. 죽음에 임박했을 때에 예수님의 마음도 심한 갈등과 괴로움 속에 있으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힘드셨든지 그 동안 이 영광을 얻을 때를 기다리셨는데,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다른 이들을 위해서 죽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고 싶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이를 방해하는 가장 강한 적이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죽지 못하고 혼자 살고자 하기 때문에 많은 열매를 하나님께 돌려드리지 못하고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25절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 버리고, 도리어 자기 생명을 이 세상에서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께 영광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음을 깨달게 되는 것입니다. 내 생명보다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 더 귀하고, 내 생명보다 다른 이들의 생명이 더 귀한 것임을 깨달을 때에 비로서 나의 생명을 미워하여 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한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 아내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 늘 불신자인 남편 때문에 불만이었습니다. 남편한테 교회에 가자고 그렇게 권면을 하고 애를 써봤지만 남편은 한번도 아내의 말을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자고 할 때마다 요지부동하지 않는 남편으로 인해서 화가 나서 싸우기 일수였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그러냐? 다 당신을 위해서 이러는데 한 번 정도는 그냥 따라와 줄 수 있잖아”그러면 남편은 “나는 이대로 살다가 죽으려니까 제발 내버려 둬”라면서 대꾸를 합니다. 남편을 전도하려다가 마음만 상하고 남편이 더욱 미워졌습니다. 남편이 미우니까 남편이 신는 신발만 봐도 화가 나서,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발로 밟아 버립니다. 자기 자신도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해서 사사건건 반기를 들고 남편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남편에 대한 상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데 아내의 마음속에서 남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고, 그 남편의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이후부터 아내는 자신의 자존심을 살리고자 남편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을 위해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남편이 신는 신을 품에 안고서 제발 이 신을 신고서 교회에 다닐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죽이고자 애를 썼습니다. 남편이 그 아내의 변화를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변화된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남편도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한 알에 밀알이 되어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밀알들에게 요청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따르라고 26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나와 같이 죽자는 말씀입니다.

      곧 나를 따르기 위해서는 너희도 다른 이들에게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생명을 주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9:2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내 목숨을 버리는 것도 힘들지만,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 또한 내 자신을 죽이는 것만큼 힘든 일입니다. 나 자신이 멀쩡히 살아있는데 없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니 그것처럼 힘든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살아있다고 내 자존심을 살리고 내 입장을 살리려다가, 하나님의 뜻을 죽이고 다른 이들을 죽이기 십상인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내 뜻을 죽이고,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내 자신을 죽일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를 통해서 드러나는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영광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 앞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가 죽을 수 있는 것이 영광입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그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서 하나님의 나타나고, 내가 죽어서 내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다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삶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을 주실 때에 나 자신을 사랑하여서 그 생명을 끝까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주신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한 알의 밀알과 같이 죽고,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한 알의 밀알과 같이 죽을 것을 기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 죽으면 보통 4개월 후에 열매를 맺게 되는데, 보통 100-125알을 맺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확한 밀알을 뿌리고 수확하고를 5년 정도하게 되면, 100-125억 알을 맺게 되는데 그 양은 200명의 사람이 34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엄청난 양의 양식이 된다고 합니다.

      한 알의 밀알 안에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엄청난 생명력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명력은 그 한 알이 썩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질 때에 그 많은 양의 생명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로 죽으셨기에,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생명을 이어받은 밀알로 여기에 살아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과 같이 누군가에게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죽어주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들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때가 있습니까?
      그 때는 나를 통해서 누군가를 살리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내 자녀를 살리고, 내 배우자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이웃을 살리고자 나로 하여금 나를 부인하고 나를 죽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때가 있습니까?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다 죽이고 나 혼자 살아있는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나를 죽이고 다른 이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내 생명을 주셨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많은 영혼을 살리는 일을 “영광을 얻을 때”라고 하셨습니다.
      나 자신을 부인하고 죽이는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을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처럼 존귀한 자가 없고 영광된 자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죽이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이루셔서 영광을 받으셨던 것처럼, 내 자신을 더욱 더 죽이고 부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귀하게 여김받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1. 당신은 누구에게 인정받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까?
      2.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행하셨던 자기 부정과 죽음은 어떠한 것들이 있습니까? (자존심,억울함, 무시당함, 육신의 생명 등)
      3. 당신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어떠한 자기 부정의 모습을 행하고 있습니까?  




      12-03-2024(화) 요한복음 12:12-1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호산나 찬송하리로다(13절)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They took palm branches and went out to meet him, shouting, "Hosanna!"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Blessed is the King of Israel!"

      호산나라는 외침은 오랫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렸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 시편에서 예언된 것이기 때문입니다(시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가 오시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며 또한 형통케 하실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으로 온갖 고난과 시련과 핍박을 견뎌온 민족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기대를 이루어주실 놀라운 능력을 갖춘 예수께서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수많은 사람들은 손에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심지어 그들의 겉옷을 길에 깔고 예수를 환영하며 영접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하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갖고 오천명을 배부르게 하셨고 남은 것을 거두었더니 열 두 광주리가 되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삼십 팔년 된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이러한 기적들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그들이 고대하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가 분명합니다.

      왕들은 말을 타고 등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무리들이 말과 나귀를 구분하지 못하고 오직 그들의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이스라엘 왕이시여 하고 외칩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절제(節制)"를 배워야 합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절제해야 할까요?

      시간의 절제(moderation of time)
      물질의 절제(moderation of matter)
      재능의 절제(moderation of talent)
      인터넷의 절제(moderation of the Internet)

      하루의 일과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칠 줄 아는 믿음과 지혜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말씀이 내 손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씀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내 삶의 나침판이 되어 천성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의 길에 올바른 이정표로 세워가시기 바랍니다.

      주의 진리위해 십자가 군기


      호산나의 뜻과 용례

      호산나는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입니다.
      성경에는 모두 5번에 걸쳐 사용되지만 시간적 배경은 예수님이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기 위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들어가시는 날 사람들이 환영하며 외친 것입니다.

      마태복음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 21:15, 막 11:9, 막11:10, 요 12:13에 사용되지만 모두 동일한 사건 속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던 용어가 갑자기 등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의 원출처는 구약성경이며, 시편 118:25에 사용된 히브리어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시편 118: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시 118:25 히브리어

      אנא יהוה הושיעה נא אנא יהוה הצליחה נא׃

      여기서 호산나는 ”이제 구원하소서’의 부분을 그대로 읽은 것입니다.

      나나 야훼 호쉐아 나 난나 야웨 하치리하 나

      나는 구한다 야훼께 구원하소서 지금, 나는 기도한다 야훼께 형통을 지금

      형통은 ‘짤라(צָלַח)’이며, 구원하다는 ‘아샤(יָשַׁע)’입니다.
      호산나는 ‘아샤(יָשַׁע)’ 그대로 발음한 것입니다.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사용된 언어는 아람어(히브리어 방언 정도)였으며,
      성경으로 기록할 때 당신 공용어인 헬라어로 적으면서 ‘호산나’가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21:9을 헬라어로 그대로 옮겨 봅니다. 사용한 성경은 NA28 최신판입니다.

      οἱ δὲ ὄχλοι οἱ προάγοντες αὐτὸν καὶ οἱ ἀκολουθοῦντες ἔκραζον λέγοντες·

      ὡσαννὰ τῷ υἱῷ Δαυίδ·

      εὐλογημένος ὁ ἐρχόμενος ἐν ὀνόματι κυρίου·

      ὡσαννὰ ἐν τοῖς ὑψίστοις.

      호산나(ὡσαννὰ)는 아람어인 ‘아샤(יָשַׁע)’를 그대로 헬라어로 적은 것입니다.

      종려가지를 흔다는 것은 제2성전기의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호산나는 샬롬이 목적이며, 샬롬은 평안의 히브리어입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달라는 간절함은 메시아를 통해 회복하게될 이스라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곧 평안으로 가는 방법이기에 구원과 평안이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호산나(5614)  [ hōsanna ] ὡσαννά 

      1. 호산나.  2. 지금 구하소서. 3. 부디 도와주소서
      발음 [ hōsanna ]
      어원 / 히브리어 3467과 4994에서 유래
      • 1. 호산나, 지금 구하소서, 부디 도와주소서, 구해 주소서, 마 21:9, 막 11:9,10, 요 12:13.
      • 관련 성경  /  호산나(마 21:9, 막 11:9, 요 12:13).

      히브리어 3467

      יָשַׁע 스트롱번호 3467 야사(yâsha)

      1. 넓다.  2. 히필형 הוֹשִׁיעַ. 미완료형  יוֹשִׁיעַ  3.  3. 3해방하다
      발음 [ yâshaʽ ]
      구약 성경 / 205회 사용
      관련 성경  /  구원하다(민 10:9, 삼하 22:42, 렘 17:14), 구원을 얻다(렘 8:20, 삼하 22:4, 렘 4:14), 구하다(렘 30:7), 돕다(삼하 10:19, 대상19:12), 보복하다(삼상25:26,31), 건져내다(삿2:16), 이기게 하다(대상18:6), 보호하다(시36:6), 도와주다(신28:31). [명] 구원(사 45:17, 신32:29, 습 3:17), 구원자(삿 3:9, 왕하 13:5, 시 106:21).



      히브리어 4994 나(nâʼ) נָא   

      1. 명령이 포함되지 않는 애원.  2. 미완료에 덧붙여지는 경우. 3. 특히
      발음 [ nâʼ ]
      구약 성경  / 404회 사용
      관련 성경  /  원하건대(창 12:13, 출 33:18). [동] 청하다(삿 9:38).


      호산나(Hosanna) 뜻과 용례

      호산나의 뜻은 '우리를 구원하소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유월절 행사차 예루살렘에 왔던 사람들이 외쳤던 구호입니다. 

      호산나 유래

      호산나는 히브리어로 시편 118:25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안나 아도나이 오쉬아 나 안나 아도나이 하츨리하 나
      אָנָּא יְהוָה הֹושִׁיעָה נָּא אָנָּא יְהוָה הַצְלִיחָה נָּא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 이는 미래 사건에 대한 호소로 해석할 수 있다.
      즉, 과거에 이스라엘 군대를 승리로 인도하신 주께서 앞으로도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들에게 보여달라는 것이다(Weiser, Dahood).
      한편 '이제'에 해당하는 '나'(*)가 이 어구 끝에 쓰이고 있는데, 이 말은 '이제'와 같은 시간 부사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구하옵나니'에 해당하는 '아나'(*)와 상관적 의미로 쓰이는 간구 형식으로보는 것이 더 적절한 것 같다(Calvin, 창 33:14 참조).
      칼빈(Calvin)은 '나'를 이런 의미로 해석하면서 이 구절이 전형적인 기도문 형식이란 견해를 제시한다.

      형통케 하소서
      - 이에 해당하는 '하첼리하'(*)는 '전진하다', '번영하다'란 뜻을 가진 '찰라흐'(*)의 히필형인데 '번영케 하다', '성공으로 인도하다'란 의미로도 쓰인다.
      한 예로서 아브라함의 명령으로 이삭의 배우자를 선택하러 간 늙은 종이 리브가를 만나는 과정에서 이 말이 '평탄한 길을 주다'란 의미로 쓰인 바 있다(창 24:21).

      호시아나이며, 아람어로 오샤나입니다. 
      신약 기록자들은 이것을 헬라어로 음역하여 호산나(ὡσαννά)로 기록했습니다.

      시편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호산나가 정치적인 색을 지니게 된 것은 이스라엘이 중간기를 거치면서 독립전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헬라인들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지배하면서 이스라엘을 헬라화 시킵니다. 
      특히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는 악랄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더립히며 조롱한 지도자였습니다. 
      결국 마카비 가문에 의해 혁명이 시작되고 결국 독립을 쟁취하게 됩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그들을 추앙하면서 '호산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호산나 / 지금 구하소서, 부디 도와주소서, 구해 주소서
      마태복음 21:9, 마가복음 11:9-10, 요한복음 12:13.

      마태복음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태복음 21: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마가복음 1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마가복음 11: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요한복음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호산나 외침에 담긴 의미(마태복음 21:1-11)

      종려주일을 맞이할 때마다 자주 언급되는 단어는 "호산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3년간의 공생애를 마치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겸손을 상징하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수많은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고 찬양을 부르며 예수님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종려나무를 꺾어 호산나를 부른 것을 기념하여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장면을 상상해 보면 생생한 그림들이 그려집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행진합니다. 그들은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고 찬양을 부르며 쫓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 위에 깔았습니다. 
      군중들의 찬양과 함성이 얼마나 컸던지 오늘 본문에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지진이 난 것과 같았다는 말입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비우스는 유월절이면 예루살렘에 이백만 내지 삼백만의 사람들이 모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약 이백만 명의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찬양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상상만 해도 대단합니다. 
      예루살렘 성이 곧 무너질 것처럼 울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이 떠날 것처럼 환호하는 군중들을 뒤로 하고 나귀 새끼를 타고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의 지금의 환호가 조금 후에는 어떻게 변할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신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예루살렘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같은 지명인데 ‘예로솔루마’라고 헬라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단어에서 ‘예루’는 ‘도시, 도읍’이라는 뜻입니다.
      ‘살렘’은 샬롬에서 온 말로 ‘평화’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다윗 왕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중심으로 만들어 주신 평화의 도시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우월의식을 가지고 다른 도시와 나라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예루살렘만이 하나님의 거룩한 도시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우월의식이 얼마나 강했던지 이스라엘 백성들 말고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부를 때 빈정대는 어투로 불렀습니다. 

      그들은 ‘살렘’이라고 부르지 않고 ‘솔루마’라고 불렀습니다. 
      솔루마는 평화는 평화인데 빈정대는 의미의 말입니다. 
      즉 ‘평화라고?’ 그런 뜻입니다. 
      ‘평화라고 웃기지마!’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이라고 불렀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고, 하나님이 거룩한 백성들이 거하는 평화로운 곳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방의 다른 나라 사람들은 ‘예로솔루마’라고 불렀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하는 곳이라고? 웃기지 마라!’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마태복음을 기록하고 있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 ‘예루살렘’이라고 번역을 해 놓았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예로솔루마’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시는 곳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평화가 가득한 예루살렘이 아닌 ‘평화의 도시라고?’하는 이방인들이 조롱이 섞인 위선과 거짓,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도시로 예수님께서 들어가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을 숙청하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제물을 사고 팔며, 돈을 환전하면서 폭리를 취했습니다.  
      제사장들이 장사꾼들과 뒷거래를 통해 부정과 부패를 일삼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라고 외치시면서 성전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사 56:7. 마가 11:17).

      ‘예루살렘’이라는 ‘평화의 도시’가 아닌 ‘예로솔루마’ ‘평화의 도시라고?’라고 말씀하시며 그 평화와 거룩함으로 위장된 예루살렘의 허상을 그대로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금요일까지 예루살렘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선과 위장된 신앙을 그대로 지적하셨습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해 말라 버리게 하시면서 겉모습만 거룩하게 꾸미고 속은 썩어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랄하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부패와 부정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성전이 돌 하나 돌 위에 남겨지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여인들이 울 때 ‘나를 위해 울지말고 예루살렘을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시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평화가 있는 ‘예루살렘’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장사꾼으로 가득 차 있고, 기도는 없고 자신의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의 소리로 가 차 있는 ‘예로솔루마’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시지는 것은 흠과 허물이 없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흠과 허물이 많은 ‘예로솔루마’를 구원하기 위해 그곳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로솔루마’의 모습을 진정한 ‘예루살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예로 솔루마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 온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며 외쳤던 외침은 ‘호산나’였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유월절에 모여 제사를 드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보면서 ‘호산나’ 즉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예루살렘 성이 지진으로 흔들리는 것 같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며 맞이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분명히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호산나’ 찬양의 환호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라’는 분노의 함성으로 바뀝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깔아드렸던 모습은 침 뱉음과 조롱으로 바뀝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했던 모습은 채찍으로 내리치고 가시관을 씌우는 모습으로 바뀝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예루살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 ‘예로솔루마’였습니다. 종려주일을 맞이해 우리들의 신앙 내용을 한 번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예루살렘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예로 솔루마의 모습입니까?

      고난주간이 되면 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너는 누구냐?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는 질문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현장에 네가 있었다면 어디에서 무슨 역할을 했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그 현장에 여러분이 있었다면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 것 같습니까? 
      자신의 직분 때문에 불의를 정의로 둔갑시키는 빌라도 총독이었을까요? 
      자신들의 악과 죄를 숨기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군중들을 부추겨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유대지도자들이었을까요? 

      이기적인 욕망을 중심으로 군중심리에 휩쓸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라고 소리쳤던 대다수의 군중들이었을까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잔인한 역할을 했던 로마 병사였을까요? 
      스승으로, 주님으로 섬겼다가 죽을 것이 두려워 숨어 버린 제자들이었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죽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로 지켜 본 몇 명의 여인들이었을까요? 
      여러분은 어떤 역할을 했을 것 같습니까? 
      몇 명의 여인들을 빼놓고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신들이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 욕망의 내용이 조금씩은 다르지만 이기적인 욕망이었습니다. 
      그 욕망을 채워달라고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향해 우리의 이기심으로 가득 찬 ‘호산나’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을 향해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감사와 경배의 찬양을 드리는 ‘호산나’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파티를 열어놓고 계십니다.
      그것은 의의 파티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를 가지고 오면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받아 주십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모든 행복과 기쁨을 누리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영생할 수 있는 축복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파티에 들고 갈 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만드신 의를 접시에 담아 우리에게 건네주시며 하나님 나라의 파티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희생을 통해 만들어 주신 선물인 의의 접시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만들어주신 의의 접시를 가지고 들어오는 우리를 기쁨으로 맞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손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고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느냐, 늦게 믿었느냐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무조건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의를 소유하고 있지만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깨닫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는 것 같습니다.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상식일 뿐, 가슴으로 그 은혜에 감격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거룩한 부담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부담 때문에 절제가 가능합니다.
      음식의 절제, 취미의 절제, 시간의 절제, 유투브의 절제, 인터넷 절제, ........

      내 욕심과 욕구를 절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언어를 절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감정을 절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 앞에 내 욕구와 욕심의 호산나가 아닌 진정한 감사와 감격으로 호산나를 외치며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종려 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 "호산나"란 것은 히브리 말(*)의 음역(音譯)이니, 그 뜻은, "도와 주소서", 혹은 "구원하소서"란 뜻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란 것은 시 118:25에서 나온 말씀이나, 메시야를 가리킨 것이다.

      * 호산나의 적용 / 절제(節制) - 마디 절(節), 절제할 제(制)
        1. 알맞게 조절(調節)함.
        2. 방종(放縱)하지 아니하도록 자기(自己)의 욕망(欲望)을 이성(理性)으로써 제어(制御ㆍ制馭)함.

        moderation, self-control, restraint, control, restrain, be moderate (in)

      무엇을 절제해야 하는가?
       1. 물질(돈),  2. 시간,  3. 재능,  4. 인터넷(유투브),  5. 습관


      호산나(Hosanna) 역사와 현대적 해석

      호산나는 기독교 전통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단어로, 원컨대 구원하소서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호산나 역사적 배경과 의미, 그리고 이 단어가 시대를 거쳐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알아보고, 현대 사회에서의 해석과 적용에 대해서도 탐구해보겠습니다.

      호산나의 뿌리부터 현대적 해석까지, 이 단어가 지닌 깊은 의미와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를 함께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호산나의 뿌리와 역사적 의미

      호산나(Hosanna)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원컨대 구원하소서 또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강렬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때, 유월절을 맞이해 모인 군중들이 그를 맞이하며 사용했던 구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118:25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며, 이 시는 구원을 갈망하는 간절한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구절에서 호산나는 절박한 상황에서의 구원호소로서의 역할을 명확히 합니다.

      호산나의 변화와 정치적 의미

      시간이 지나며 호산나는 단순한 구원의 호소를 넘어 정치적, 메시아니즘적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전쟁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을 거치며, 이 단어는 독립과 구원의 염원을 상징하는 구호로 변모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 메시아로서 기리는 찬양의 말로 사용되면서, 호산나는 깊은 종교적,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되었습니다.

      엑셀시스의 호산나

      엑셀시스의 호산나 표현은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가장 높은 곳에 구원하소서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신성과 그의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찬양하는 데 사용되는 문구로, 종려주일과 승리의 입성, 주님에 대한 숭배 등을 상징합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관련된 성경 구절에서 군중들이 사용한 찬양의 말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현대적 해석과 적용

      오늘날 호산나는 여전히 기독교 음악, 예배, 기도 등에서 널리 사용되며, 그 의미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됩니다.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단어는 현대 사회에서도 인간의 깊은 갈망과 신앙의 표현으로 여겨집니다.
      최신 연구나 해석에서 호산나에 관한 직접적 내용을 찾기는 어렵지만, 그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변화를 통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해석과 사용은 호산나가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신앙의 언어임을 보여줍니다.

      호산나 단어를 통해, 우리는 고대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간절한 구원의 호소부터 현대 사회에서의 다양한 해석과 적용에 이르기까지 그 깊이와 너비를 탐구해 보았습니다.

      역사적 문맥과 신앙적 의미를 품고 있는 이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시 군중들의 찬양과 메시아로서의 인식을 반영하는 동시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독교 음악, 예배, 기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갈망과 희망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호산나의 여정을 따라가며, 우리는 단순히 과거의 유산을 넘어, 살아있는 신앙의 언어와 그 의미를 다시금 발견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이로써 호산나가 담고 있는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 각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깊이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호산나의 유래는 구약 시편 118편 25절에서 출발합니다.
      시편 118편은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감사의 시에 해당합니다.
      무엇에 대한 감사일까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메시야에 대한 감사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호산나의 의미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호산나라는 의미는 역사속에서 억압받고 핍박을 당하는 사람들을 구원해 달라고 간절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무리들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 "호산나, 호산나" 하며 크게 외쳤습니다.

      이러한 외침에는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간절함이 함축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호산나에서 강조하는 내용은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에 잘 나타났습니다.  

      정치적인 자유와 해방을 갈망하는 백성들의 환호성처럼 오늘날도 믿음의 사람들은 좌파와 우파의 갈라짐에서 예수님께서 어느 편에 계실 것인가를 찾게 됩니다.


      말씀을 이루시는 주님(28-36)
      나귀를 마련하는 방법이 특이합니다.
      제자들에게 지시하십니다.
      “맞은 편 마을로 가면 매여 있는 어린 나귀가 있을 텐데 풀어 오라. 나귀의 주인이 항의하면 딱 한 마디만 하라”,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신다"(31)
      주님은 지금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제자들 앞에서 선언하십니다.
      나귀의 주인도 주님이십니다.
      우리 생명과 인생의 주인도 주님이십니다.
      우리 인생의 어느 순간, 주인께서 쓰시겠다고 할 때 우리는 주저 없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가 우리 인생의 전성기입니다.
      신앙의 전성기를 누리고 싶습니까?
      주님이 쓰시겠다고 할 때 드리십시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부르는 찬송의 내용은 무엇입니까?(38)
      찬양 받으셔야 할 주님 (37-40)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행진이 초라해 보이지만, 누가가 "제자의 무리"라고 표현한 자들, 즉 그 시점에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의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니 좀 위안이 됩니다(37).
      예수님이 환영 받는 모습을 보면서 바리새인들은 배 아파합니다.
      청중의 함성을 멈추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합니다(39).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누구도 찬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찬양 받으셔야 할 분이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의 찬송을 뒤로 하고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41)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는주님(41-44)

      주님은 군중의 함성을 뒤로 하고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십니다(41).
      얼마 후에 무너질 성, 그 멸망의 성에 사는 영혼들이 불쌍해서 우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닷새 후에 그 불쌍한 인생들을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이 대신 죽으십니다.
      주님은 긍휼의 눈물만 흘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긍휼을 자신의 생명으로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 주님의 긍휼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그 주님이 나의 주님, 우리 주님이십니다.
      일상에서 주님의 긍휼을 만납니까?
      주님께 시간을 내어드리십시오.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Rejoice greatly, O Daughter of Zion! Shout, Daughter of Jerusalem! See, your king comes to you, righteous and having salvation, gentle and riding on a donkey, on a colt, the foal of a donkey.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는 이유는 무엇인가?(30, 35절)
      어린 나귀를 타신 왕(28-36)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자신이 예언된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을 말로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시는 행동을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스가랴 9:9의 성취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갑자기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시는지 제자들도 처음에는 영문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차츰 그 이유를 알아차리고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펼치곤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나귀를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들이나, 자기들의 겉옷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왕 되심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내 삶의 왕으로 기쁘게 맞이해야 합니다.
      나는 내 삶의 왕으로 임하시는 주님 앞에 무엇을 드려서 맞이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 영광 돌리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39절)
      찬양하는 무리와 시기하는 무리 (37-40)

      예수님의 행동 언어는 대단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깨닫는 사람들은 행동으로 반응합니다.
      제자들은 겉옷을 길 위에 펼칠 뿐만 아니라 나귀 뒤를 따르면서 기쁨으로 소리를 지르고 찬양을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반응은 때로 우리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듭니다.
      이런 행동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전혀 없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입니다.
      제자들과 무리들은 기쁨을 주체 못하고 있는 반면 바리새인들은 평소보다 더 냉정해져 있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이 못마땅해서 견딜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부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이들을 말리라고 강하게 어필합니다. 그러나 말릴 수 없습니다. 그들이 잠잠하면 돌들이라도 소리 지를 것입니다. 진실은 거짓을 이기며 기쁨은 비판을 이기는 법입니다.

      나는 어떻게 구원받은 기쁨을 삶과 행동으로 표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이는 예수님이 평화의 왕이신 것을 나타낸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메시야에 대한 약속의 성취로 여기고 찬양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정치적인 부담과 예수님에 대한 적의감 때문에 무리들의 찬송을 비난했다.
      예루살렘 가까이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파괴될 성을 보고 우셨다.
      예루살렘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이는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거절한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첫째, 평화의 왕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은 예수님이 평화를 위해 오셨음을 드러내는 행위였습니다.
      이 세상은 죄로 인해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평화가 없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평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강력한 힘이 있어야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어떤 강력한 사람이나 나라도 평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평화를 파괴한 것은 죄이기 때문에 죄 문제를 해결해야 참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하늘 영광을 두고 겸손히 낮아지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그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도 무너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평화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님께서 주시는 이 평화의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둘째, 심판의 주 

      ​예수님이 예루살렘 가까이에서 갑자기 우셨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완전히 파괴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대적하고 박해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 체계에 빠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부정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가르치신 구원과 평화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부하며 회개하기도 거절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심판 받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던 성전이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심판의 주님으로서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거절한 사람들은 자기 죄에 대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심판의 주님을 두려워하며 회개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며 심판의 주님이기도 하십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회개하고 주시는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주님의 긍휼을 전달하는 하루 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증거
       
      첫째,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서 8:14-15)

      무릇 하나님의 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둘째, 기쁨이 충만합니다(요한복음 15:11. 16:22, 17:13, 사도행전 2:46)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셋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그 말씀에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베드로전서 2: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넷째,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요한복음 21:15-17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다섯째, 십자가의 길을 선택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고난과 핍박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들은 영원한 것에 관심과 가치를 두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핍박과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언제나 영원한 것, 천국의 것으로 판단 기준을 삼으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자를 모두 죽은 자로 취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무익할 뿐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지 못하지만 영적인 사람은 알고, 육적인 사람은 세상의 것이 삶의 기준이 되지만 영적인 사람은 하늘의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됩니다.
      육적인 사람은 허무함과 공허에 쌓여 있지만 영적인 사람은 기쁨과 만족함이 있고 육적인 사람은 세상에 쌓으려고 노력하지만 영적인 사람은 하늘에 쌓으려고 애씁니다.
      뿐만 아니라 육적인 사람들은 대속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만 영적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서 대속함을 받습니다.

      육적인 면과 영적인 면 중에서 어떤 면이 더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항상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천국의 것에 관심을 가지셨고 천국의 것으로 기준을 삼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육적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오래 잘 산다고 하여도 반드시 죽지만, 천국을 소유한 영적인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생명을 이어받은 모든 사람의 생명은 한시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기 때문에 영원한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께서는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심으로 영생을 얻어 주님과 함께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몸(빌립보서 2:5-11)

      스승이 벽돌을 갈고 있었습니다.
      제자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벽돌을 왜 가십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그런다.”
      제자는 어이가 없어 반문했습니다.
      “벽돌을 간다고 거울이 됩니까?”
      그러자 스승이 대꾸했습니다.
      “이놈아, 눈 감고 가부좌 튼다고 다 부처가 되냐?”

      아무리 가부좌를 틀고 앉아 도를 닦는 모양새를 갖추더라도 깨달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선문답입니다.

      기독교인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외적으로나 형식적으로 갖출 것 다 갖추고 있어도 알맹이가 빠지면 안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강조합니다(딤 3:5).

      사실 오늘날 교회는 거의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세계 십대 교회에 든다는 교회만도 서울에 서넛 된다 하고, 교회시설이나 설비도 최고급 최신으로 갖추고 있으며, 인적 물적 자원은 넘쳐나고, 각종 프로그램과 이벤트와 행사는 끊이질 않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이 마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불미스러운 일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처럼 가난한 마음이 없으니 신앙은 한낱 욕망충족의 도구로 전락하고, 그리스도 예수처럼 섬기는 마음이 없으니 감투 얻으려고 수십 억 쓴다하고, 그리스도 예수처럼 사랑하는 마음 없으니 멱살잡이에 법정다툼 마다하지 않고, 예수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이 시대의 강도 만난 사람들에게 인색한 것이지요.
      가장 부족한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야말로 삶의 큰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있으면 삶의 시름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있으면 미래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있으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있으면 깨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있으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있으면 열정을 갖고 일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으면 무기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있으면 불굴의 의지로 난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있으면 기다리며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있으면 삶의 정수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있으면 생명시스템을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마음의 두 종류

      마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부 현실이 만들어내는 마음이요 다른 하나는 내면의 영이 빚어내는 마음입니다.
      마음이라는 벗들의 내적 현실을 바라보십시오. 벗들의 마음은 삶의 경험과 외부환경과 여러 관계들 곧 외부 현실이 만들어낸 마음 아닌가요? 그 마음에 휘둘리면서 지나치게 욕심 부리고 쓸데없이 감정을 드러내고 헛된 일에 삶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벗들의 존재의 중심에서 샘솟는 마음이나 벗들의 영이 빚어내는 마음은 얼마나 되나요? 바라기는 벗들! 영이 빚어내는 마음이 벗들의 내면을 가득 채웠으면 합니다.


      조금 전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처럼 큰 삶의 자산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덧붙여 그리스도의 마음은 가장 아름다운 삶의 자산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영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세상의 환경과 현실과 경험이 빚어낸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그리스도의 영이 빚어낸 마음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려면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의 마음은 항상 생명과 평안과 관계된 일을 생각할 것입니다. 사랑하고, 배려하고, 관용하고, 자비를 베풀고, 측은지심을 갖고, 섬기고, 나누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공중 권세 잡은 자, 곧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엡2:2) 사탄과 세속의 영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면 우리의 마음은 항상 죽음과 관계된 일을 생각합니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요…”(롬8:6) 이것은 비교와 경쟁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사람들을 미워하고, 지배하고, 부리고, 누르고, 빼앗고, 이용하게 합니다. 요즘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아동학대가 왜 일어나나요? 그것은 사탄과 세속의 영에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마음이 저지른 끔찍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까요? 당시 정치 지형과 관련하여 유대 기득권층과 로마 총독 빌라도의 음험한 마음이 야합했기 때문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로마 정부의 비호가 필요했고, 총독 빌라도는 식민통치를 위해 유대 기득권층의 협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선동했고, 총독 빌라도는 수하에 있는 병사들을 이용했습니다. 세상의 일과 권력과 기적에 혈안이 된 당대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광기가 한데 뭉쳐서 예수님을 처형했습니다. 마음이 세속의 영에 지배를 받았기에 순수하고 여린 하나님의 어린양마저 끔찍한 방법으로 죽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합법적으로 말이지요.


      우리는 어떤가요?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영에서 나온 마음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 역시 외부 현실이 만들어낸 마음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외부의 자극으로 형성된 마음은 강력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이 빚어낸 그리스도의 마음은 맥을 못출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만족이 없고, 사랑의 윤리를 실천하지 못하고, 생명과 평화를 위해 일하지 못합니다. 삶은 점점 팍팍해지고 현실은 점점 각박해집니다.



      [어떻게]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첫째, 그리스도의 영은 교회 공동체를 통해 우리 안에 임재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까요. 몸이 없으면 영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몸과 영은 따로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두 차원입니다. 몸은 영의 보이는 차원이고, 영은 몸의 보이지 않는 차원입니다. 따라서 영을 무시하는 몸의 살림이 짐승의 그것과 같다면, 몸을 무시하는 영의 살림은 유령의 그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은 교회라는 신비체를 통해 우리에게 현존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골1:18) 고린도전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여기서 “너희”는 고린도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적 활동이 아주 중요합니다. 특히 교회라는 공동체는 예배와 성도의 사귐과 사역 세 가지를 통해 세워집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머리인 교회의 세 가지 거룩한 활동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경험합니다. 물론 교회 공동체의 활동이 언제나 만족스럽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많은 일로 지칠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인간관계로 인해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때조차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며, 그때 그리스도의 영은 임재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영은 성찬을 통해 우리 안에 임재합니다. 성찬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습니다. 이때 믿음으로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임합니다. 우리는 가톨릭교도들처럼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화체설)고 믿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일 뿐이다(상징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그리스도의 영이 임재한다고 믿습니다.(임재설) 그리고 영적 감수성이 있는 사람에게 언제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벗들, 매월 1회 하고 있는 연합성찬예배를 귀중하게 생각하십시오. 성찬예배를 통해 그리스도의 영을 모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말입니다.


      셋째, 관상기도에 힘쓰십시오. 관상기도란 그리스도의 영을 내면에 모시는 기도입니다. 온갖 생각의 홍수나 분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동안 우리 내면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임재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임재할 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귀결입니다. 그래서 관상기도를 하면 하기 전과 하고 난 후의 마음이 다른 것이지요.


      저는 이것을 매번 경험합니다. 어수선한 마음은 고요해지고, 흥분했던 마음은 평온을 되찾으며, 분노하던 마음은 온유한 마음으로 바뀌며, 걱정하던 마음은 새로운 희망으로 빛납니다. 갈피를 못 잡던 마음에는 영감과 통찰이 주어지고, 서운한 마음은 이해하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은 살아갈 힘과 생명과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벗들! 그리스도의 영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언제나 사랑과 생명과 평화를 위해 일합니다. 이 마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이 왕 노릇합니다. 이 마음을 통해 생명시스템이 힘차게 작동합니다. 마침내 이 마음이 벗들을 삶의 만족과 행복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언제 어디서든 그럴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이 마음을 얻고 이 마음을 통해 삶을 빚는 예술입니다. 멋진 삶입니다. 이런 삶으로 벗들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12-02-2024(월) 요한복음 12:9-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사로 까닭에(11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for on account of him many of the Jews were going over to Jesus and putting their faith in him.

      까닭에(1223) by reason. for on account of

      여러분,
      죽어서 무덤에 안장된 후 사일이 지났습니다.
      유대는 더운 지방이라 사람이 죽으면 그 날 즉시 무덤에 안장합니다.
      더구나 사일이 지났기 때문에 시체가 썩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 무덤에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덤의 돌문을 치우라고 하신 후에 소리쳤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나사로가 온 몸을 붕대로 감은 그대로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 장면에서 무엇을 느끼셨고,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나는 이 장면을 다시 읽고 묵상하면서 죽은 나사로가 들었던 예수님의 음성을 왜 나는 듣지 못하는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죽은 사람도 들었는데 살아있는 나는 왜 듣지 못하고 있었나?

      여러분 이 시간 살아있다면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어야 하겠습니다.
      나사로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놀라운 일이 펼쳐졌습니다.

      나사로에게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죽은 사람이 살아났습니다(소생)

      둘째는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 죄의 무덤에서 온전히 나와야 합니다.

      셋째는 온 몸을 감고 있는 붕대를 풀어야 합니다
      - 기도하지 못하는 것, 말씀을 읽고 묵상하지 못하는 것, 전도하지 못하는 것, 봉사하지 못하는 것.....

      "나사로 까닭에"라는 구절은 "나사로 때문에" 라고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왜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게 되었을까요?

      나사로가 행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나사로는 죽어서 장사되었고 무덤에 안장되어 사흘(4일)이 지났습니다.
      나사로의 몸에서(屍體)는 썪은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덤의 돌문을 옮기라고 하셨고 돌문이 옮겨진 후에 무덤 안을 향하여 선포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Lazarus, come out!)"
      이때 나사로가 온몸에 붕대를 감은채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도 듣지 못했던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죽은 나사로가 그 말씀을 듣고 나왔습니다.

      나는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는 나사로와 같이 영적으로 완전히 죽었던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은 나는 죄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울림이었습니다.
      그 울림이 내게 임하기 전에는 주님이 살아계시다면 내게 한 번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 음성이 나를 무너트렸습니다.
      나와 같은 더럽고 추한 죄인이 어찌 거룩하고 아름다운 주님을 오라고 하였는지......

      믿음이란 선포되는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은 나사로가 말씀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을 때 흙덩어리가 살아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될 때마다 놀라운 능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능력이 드러나도록 온전하게 믿고 따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예수님께서 나오라고 선포하셨던 말씀을 듣고 나왔던 것처럼 우리들도 예수님 때문에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라는 복음송 가사를 소개합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너무 아픈데
      내가 노래할 수 있는건
      예수님 때문에
      살아있는 것 보다 죽음이 아름다울만큼
      지쳐도 일어설 수 있는건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날 위해 죽으신 십자가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지금도 날 위한 그 기도 때문에





      * 까닭에(때문에) -  의존명사
      어떤 일의 원인이나 까닭.

      1. on account of.  2. because of.  3. owing to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
      내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나로 인하여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나사로가 행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죽었던 나사로가 나사로야 나오라 하는 예수님의 말씀(음성)을 들었을 뿐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살아있는 나는 지금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영음(靈音) - 영적인 음성

      4 Ways To Hear God’s Voice In Your Life

      많은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과 더 깊이 연결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여전히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바쁜 일정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여유를 주지 못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조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고 그분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배우는 데 시간을 할애하면 그분의 음성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4가지 주요 방법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여정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여정은 어디에서 시작되나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로마서 10장 9~10절은 여러분이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구원을 받으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이제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고린도후서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All this is from God, who reconciled us to himself through Christ and gave us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


      아직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 바로 받아보세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그분의 영을 보내주셔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나신 후 진리의 영을 보내셔서 그들과 함께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안에. 신자는 내 안에 성령이 계시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신자로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3절에서 양들이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그분이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요한복음 10장 4절에서 양들이 그분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그분을 따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낯선 자의 음성을 거부하고 그를 따르지 않고 그에게서 도망칩니다(요 10:5).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인식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바쁘면 하나님의 음성을 거의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조용히 그분의 음성을 식별하고 원수나 우리의 육신의 생각과 구별해야 할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고,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고, 심부름을 할 때에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특정 시간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시지만 항상 기록된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여러분이 듣는 음성을 항상 말씀의 말씀으로 확인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명확하게 식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여전히 작은 목소리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실 준비를 하고 계실 때 강한 바람이 불더니 지진이 일어났고, 그 후에는 불이 났으며, 마지막으로 고요한 작은 음성이 들렸습니다(열왕기상 19:11-13). 많은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강하지 않고 확고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시간을 가지지 않으면 놓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음성은 우리 마음이나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정신없이 하루를 시작하기 전 아침입니다. 시끄러운 환경에 있다면 낮 동안 휴식을 취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가슴에 남는 강렬한 인상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다릴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강한 인상을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인도하시거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논리로 설명하려고 너무 바쁘지 않다면,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이 바로 우리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시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강한 느낌'이 있었는데 이를 무시하고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던 때를 떠올려 보세요. 그러다가 나중에 자신이 실수했고 무시했던 강한 느낌이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이런 식으로 우리는 때때로 우리에게 실제로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꿈을 통해 우리에게 많은 말씀을 하시고 요엘서 2장 28절에서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아들과 딸들은 예언할 것이며 너희의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의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꿈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며 일부는 마귀로부터 온다는 점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꿈을 꾸면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꿈인지 알아보고, 꿈과 관련된 성경 구절을 검색하여 잠자는 동안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아보세요. 인터넷에 떠도는 꿈의 상징 사전은 속임수에 빠질 수 있으므로 서두르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먼저 찾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배우에 대한 꿈을 꾼다고 가정하고 배우나 연기에 관한 성경 구절을 찾아보세요. 예를 들어 에스겔 4장에서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포위 공격을 역할극으로 연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포위 공격이 일어나기 전에 포위 공격을 연기하고 있었습니다. 이 경우 꿈속의 배우가 어떤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사람들, 특히 예언자들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오늘날 교회에 침투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지, 반대되는 영으로 말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1절은 모든 영을 믿지 말고 하나님의 영인지 시험해 보라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예언할 때 그 사람이 말하는 영을 시험해 보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대해 기도하고 성경을 통해 확인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당면한 문제에 관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말씀과도 일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다른 방법들

      하나님은 우리 개인에게 말씀하실 때 다른 많은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분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분은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자연에 대한 비유, 누군가의 티셔츠에 적힌 메시지, 노래, 설교, 간증, 환상, 성경 가르침 등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성경을 더 많이 읽으면 일상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분의 음성을 듣고 지혜를 구하세요.

      떠오르는 생각, 아이디어, 인상을 일기로 쓰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방식을 가리키는 패턴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음성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Meanwhile a large crowd of Jews found out that Jesus was there and came, not only because of him but also to see Lazarus, whom he had raised from the dead.
      So the chief priests made plans to kill Lazarus as well.
      for on account of him many of the Jews were going over to Jesus and putting their faith in him.

      나사로(Lazarus. 돕는 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던 인물입니다.
      성경에는 두 명의 나사로가 등장합니다.
      첫번째 나사로는 거지로 부자의 집에서 버려지는 음식물을 먹으며 지내다가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사람입니다.
      두번째 나사로는 베다니에 살던 인물로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셨던 사람입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도우셨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던 나사로처럼 오늘날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떤 도움을 원하십니까?
      거지 나사로를 통하여 비참한 현실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오직 소망을 하나님 나라에 두고 살아야만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베다니의 나사로처럼 이미 죽어서 송장 썪는 냄새가 진동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그 말씀을 듣는다면 소생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들어야 합니다.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믿음(로마서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로마서 8:24)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믿음(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설교를 듣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나사로 까닭에

      이스라엘의 최대 명절은 유월절입니다.
      이 날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430년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끝낸 해방 기념일입니다.
      그래서 1주간 온 민족이 거나하게 축제를 벌이는 기간입니다.
      1월 14일부터 1주간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또 잊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베다니는 기억해야 할 사건이 있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곳입니다.
      이를 고맙게 여긴 동리 사람들이 큰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때에 마르다가 그 시중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아주 값진 나아드 향유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향유를 예수님이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온 집안이 향유 냄새로 가득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제자이자 예수님을 팔아넘길 가룟 유다가 이것을 보고 버럭 화를 냅니다.
      이런 어리석은 사람 보라.
      이 귀한 향유를 허비 하다니, 이것을 팔면 300 데나리온은 넘게 받을 값진 것인데, 차라리 예수님께는 적당하게 하고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하는 것이 훨씬 나을 텐데라고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그는 예수님의 돈을 맡아 있었습니다.
      그는 자주 돈 궤의 돈은 훔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버려 두어라.
      그녀가 이 향유를 간직해 둔 것은 내 장례를 위한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나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뿐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난 나사로도 보려고 온 것입니다.
      그러나 대 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그들은 떠나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I.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됩시다

      나사로의 사건은 정말 대단 했습니다.
      시체가 썩어 냄새가 난 때 예수님이 그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도 나흘이 지난 뒤였습니다.
      그러니 이 소문이 얼마나 대단 했을 것인가는 우리가 짐작이 가능 합니다.
      이 베다니는 하루 아침에 유명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나사로 까닭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가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자세를 보세요.
      그야말로 그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는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은 근본이 문제입니다.
      근본이 잘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존귀성과 자유를 사랑 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당장의 유익을 위해 부정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장의 위기를 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온 나라가 뒤죽박죽이 된 것이 누구의 책임입니까.
      그건 한 사람의 잘못만 아닙니다.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사회, 교육, 문화, 윤리, 경제가 다 내 잘못인 줄 알면 됩니다.
      부모에게 대들고, 마약, 부정, 이런 사회를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여기 한 사람 때문에 베다니는 정말 좋아 졌습니다.
      세상에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여기 마리아는 정말 감사를 아는 신앙인입니다.
      그는 향유 한 병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는 향유 보다 더 귀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을 드렸을 것입니다.
      향유가 몇 병이 있었다면 그걸 다 드렸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진정한 감사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감사를 해야 할 사람이 누굽니까. 바로 나입니다. 예수님께 병 고침 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그 많은 사람은 다 어디 갔습니까. 그런데 이 마리아는 그 귀한 나드 향유를 예수님께 다 부어드렸습니다. 이런 것이 감사를 아는 행동입니다.

      물론 몇 방울이라도 냄새는 납니다. 몇 방울이라도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정말 마리아를 배야 합니다. 그는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시골 아가씨입니다. 그는 자기가 결혼은 위해 준비한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께 드린 것입니다.

      사람은 늘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소나무, 참나무를 보세요, 그 나무들은 키가 굉장히 크게 자랍니다. 그런데 분제를 보세요. 그 나무는 기껏 70,80cm정도만 자랍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조경사가 나무의 꼭대기를 정기적으로 잘라 냅니다. 뿌리도 정기적으로 잘라내고, 나무를 매년 다른 화분에 옮겨 심습니다. 그래서 뿌리가  안정된 활동을 못하도록 정지를 시킵니다. 이렇게 해서 나무를 난장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은 분재된 나무처럼 문명이라는 화분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중에 스스로 “나는 연약해 ” “나는 배운 것이 없어”  “나는 돈이 없어” “ 나는 배경이 없어” “나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야” “나는 나 혼자 교회 나오는데” 하는 식으로 늘 성장 잠재력의 가지와 뿌리를 잘라내 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 아니고도 사람이 많은데 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마리아는 배경이 없어도 잘 했습니다. 그는 재벌이 아닙니다. 그는 학벌이 뛰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도 그는 그 귀한 향유를 바친 것입니다. 정말 대단하지요. 물론 우리는 내가 마리아라도 그렇게 하겠다고 하시는 분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합니다. 믿음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헌신은 반드시 이런 용기가 필요 합니다. 어떤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감사를 정성껏 한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주저하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늘 망설이다 보면 그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사람 누구에게도 그런 기회가 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다 기회가 지나가고 나면 후회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늘 감사하는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 정말 위대한 사람이 바로 마리아입니다. 그는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린 것입니다. 이런 것이 정말 바른 헌신입니다.

      II. 좋은 일에도 방해자가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정말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름이 아닌. 이 일이 정말 비난 받아야 할 일입니까. 자기가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 뻔뻔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는 다짜고짜로 이 여인을 무안하게 했습니다. 거기서 다른 사람들은 놀라서 이 일을 칭찬 했습니다.갈수록 황폐해지는 이 땅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너무 이기적입니다. 욕심이 많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정말 곤란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은혜 받으면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시기하고 놀리고 비웃는 사탄의 작용이 있습니다. 그러니 늘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에는 반드시 마귀가 역사하는 법입니다. 저가 신학교 다닐 때 목회학 교수님이 이런 강의를 하셨습니다. 교회가 부흥 할 그 때 늘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배가 아파서 못 견딘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 읽고 전도하고 교회를 봉사하는 것을 너무 싫어합니다. 괜히 말을 만들어 냅니다. 엉뚱한 소문을 일으킵니다. 그리고는 더 나아가서 이런 선한 일을 못하게 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교회가 잘 성장 할 무렵 사탄은 가장 잘 이해 할 사람이라고 믿었던 그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본 것입니다.

      예부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동냥은 못줄지언정 쪽박은 깨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쪽박을 때는 사람입니다. 나사로 때문에 그 동리는 온통 큰 잔치가 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왜 그가 판 깨는 일을 합니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은 그런 사람이지요. 우리가 좀 더 잘 살아 보려면 반드시 이런 일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내 가족이 방해를 합니다. 비가와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늘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베다니에는 온 동리가 잔치였습니다.
      얼마 전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난 것은 예수님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동리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동리에서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때에 마리아가 귀한 향유 나드 한 근은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온 방은 향유냄새로 가득 합니다.
      예수님도 기분이 정말 좋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성이 나서 그 여인에게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웃으면서 나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가룟 유다 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를 크게 꾸짖은 것입니다.
      그는 도적이어서 남을 생각하는 척 하면서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항상 사람은 그렇습니다.
      자기는 슬쩍 빠지고 남이 무슨 말을 하드라 하는 식입니다.
      요즈음 카드라는 식입니다.
      우리도 늘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약해지지 말고 늘 진리 안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나사로 까닭에 이런 좋은 일이 있은 것처럼 나 까닭에 이런 신나는 일들이 늘 있으시기 바랍니다.





      베다니란 말은 괴로움의 집, 혹은 슬픔의 집을 뜻합니다. 나사로 까닭에 베다니 에 잔치가 베풀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사로 까닭에 괴로움의 집, 슬품의 집 이 기쁨의 집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의 괴로움이 변하여 우리 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복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참으로 귀합니다. 나사로 가닭에 베풀어진 베다니 잔치집에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서 "도대체 나는 누구냐"하는 교훈을 주고 있습 니다. 이 잔치에는 어떤 사람들이 등장합니까

      1.매사에 구경하는 사람들입니다. 9절"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나 이는 예수만 위 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씨름판에 가면 홍샅바, 청샅바 두 선수가 맞붙어서 옥신각신하며 씨름하는 것을 신나게 구경할 수 있습니다. 선수들은 지땀을 뺍니다. 어떻게 하면 이길까하며 다리를 꼬기도 하고, 상대방을 허리를 조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공하까 하며 머리를 짜고 힘을 다하여 온갖 몸부림을 다칩니다. 그런데 구경하는 사람은 어떠합까 편안하게 앉아서 부채질하며 땀도 흘리지 아니합니다. 그러면서, "홍선수가 잘 하네, 선수는 기술이 부족하네" 각기 나름대로 심판자가 됩니다. "왜 이 모양이 냐"고 비판도 합니다. 권투시합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선수가 지름 얻어맞아 코피를 흘리면서 금방 쓸어질 지경인데도 도리어 "롤려쳐라, 혹을 쳐라"합니다. 나사로 까닭에 베푼 베다니 잔치집에 모여든 구경꾼들도 예수님을 구경했을 것 입니다. "예수님 나이가 얼마쯤 되었을까 어느 학교출신일까" 그리고 곁에 앉 은 나사로를 보고는 "저 친구 운수대통한 놈이야"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잔치 의 구경꾼들만 아닙니다.

      더러는 성도들도 마찬가집니다. "전도합시다."하면 그 일에 동참하지는 않으면 서, 전도하기 위해서 기도하지는 않으면서 구경은 잘합니다. "전도는 이렇게 해 야 한다."고 이론은 좋습니다. "아무개는 방법이 틀렸다. 아무개는 너무 한다." 비판도 잘합니다. 이것이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하면 기도를 구경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구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합시다."하면 함께 진땀을 빼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구경꾼 인생은 한번도 일하거나 호 주머니에서 돈을 내놓지 않으면서 비판하는 화살은 마구 쏘아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을 살아 갈 때에 함께 동참하고 함께 울 고 함께 땀흘리면서, 함께 기뻐하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2.매사에 모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0절"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이것이 무엇입니까 믿지 않 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가령 정치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여당, 야당을 무론하고 끼리끼리 수군수군 이러쿵 저러쿵 온갖 권모수술을 동원하면서 상대방 을 넘어뜨릴 모의를 하지 않습니까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고, 진리를 위해서 세례 요한처럼 순굘르 각오하는 사람도 없잔아 있습니다. 그런데 모의꾼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요 11:53"이날부터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들은 "나사렛 예수 저 자가 문제다."고 했을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다니. 그렇다면 그가 메시 야란 말인가 아니 결코 그럴 수 없다. 그자를 죽이자"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했고, 심지어 나사로까지 죽이려했습니다. 한번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간음중 에 잡힌 여인을 끌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시렵니까" 살기가 등등했고 그들의 손에는 돌 맹이가 쥐어졌습니다. 그때 주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러자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린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흩어졌 습니다. 여기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없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도 좋을 만한 인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형제를 고발하기 전에 자신을 고발해 야 하고,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를 빼기 전에 먼저 내 눈 속에 있는 들볼르 빼 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롬1:17"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여기 믿음으 로" 이것이 성도가 살아가는 길이고 방법입니다. 우리 성도는 어떻게 예수님을 괴롭힐꼬가 아니라 어떻게 하여야 예수님을 기쁘게 할꼬 이렇게 살아야 합니 다. 도대체 예수님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나사로 까닭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 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도리어 나사로 까닭에 요11:4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 광이 드러났습니다. 얼마나 선한 일리고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 마귀는 어떻게 모의합니까 어떻게 방해할까 어떻게 흠을 잡을까 를 생각합니다. 성 도 여러분, 우리는 마귀의 잔꾀를 역이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선을 행 할까 어떻게 믿음으로 살까 어떻게 주님의 뜻대로 살까를 생각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3.매사에 헌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3절"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근을 가져다가 예수님 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마리아는 자기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죽어서 장사 지냈는데, 예수님께서 "나사로 야 나오라" 말씀하시므로 얼굴을 수건으로 동인 채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뚜벅뚝벅 걸어나오는 광경을 친히 보았습니다. 얼마나 놀라고 감격스러운 광경 입니까 이것을 체험한 마리아는 주의 은혜에 감사하여 지극히 값진 향유, 곧 나드 한근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또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그리고 감 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따라서 향유 냄새가 잔칫집에 가득했습니다. 그렇습니 다. 우리 가정에서 무엇으로 가득하게 하여야 합니까를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사랑의 향유냄새가 가득하여야 하고, 기도의 향유 냄새로 가득하여야 하고, 봉 사의 향유가 가득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모 습에서 아름다운 것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마리아의 헌심입니다.

      헌심은 나의 마음을 주님께 드림을 의미합니다. 사람마다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의 왕좌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 니다. 사람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의 변화가 인생의 변화를 뜻하고, 마음 이 새로워져야 인생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누구를 향한 것이냐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해바라기는 태양을 향해 있을 때 열매를 맺습 니다. 요15:4"내 안에서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 습니다. 내 마음을 주님께 드릴 때 주님은 내 마음을 곱게 만들어주실 것입니 다. 향유 냄새로 가득하게 할 것입니다. 내 강퍅한 마음과 오만한 마음을 온유 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2)마리아의 헌물입니다.

      헌물은 나의 물질을 주님께 드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막14:3절에 보면 마리 아는 향유 담은 옥합을 깨뜨렸다고 했습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것은 예수님께 그것을 드린 후 다시는 기억조차 아니하겠다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소중 한 헌물, 곧 지극히 값진 나드 향유를 주님께 드릴 때 옥합을 깨뜨려 버렸습니 다. 왜냐하면 절반 남은 것은 도로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겨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옥합을 주님 앞에서 깨뜨리십시다. 십일조의 옥합을 주님께 깨뜨리는 성도가 됩시다. 감사헌금의 옥합을 주님께 깨뜨립시다. 주일헌금의 옥합을 깨뜨립시다.

      3)마리아의 헌신입니다.

      유대 풍속에 여인이 머리를 푸는 일은 치욕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소중한 자기의 머리를 풀어 눈물을 적시어 그것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눈물은 감사와 사랑과 참회를 뜻합니다. 우리 모두도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습니 다. 그 은혜를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귀한 사랑입니까 감격해야 합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우리 모두도 헌신해야 합니다.

      4.베다니 잔치집에는 가룟유다가 있었습니다.

      유다의 인본주의 믿음을 보십시오. 본문4-5"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 게 주지 아니하였으냐" 스스로 의로운 자 되어 마리아를 책망한 내용입니다. 그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그는 마리아의 선한 일을 물질적인 것으로 평가했습니 다. 사랑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찌 마리아의 지극히 선한 일을 돈만으로 평가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주님을 향한 마리아의 열심! 그것은 결코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향유를 열배로 주님께 드려도 그저 아쉬운 마음밖에 없 는 마리아입니다. 가렷 유다의 잘못은 첫째로 선한 일을 물질적인 것으로 평가 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유다의 잘못은 동기가 불순했습니다. 6절에 보면"이렇게 말함은 간 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가룟 유다는 간난한 사람을 위한 척 했습니다. 그는 자기 주머니에 들어올 돈을 생각하였습니다. 동기가 너무도 불순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두번째 잘못입니다.

      또 유다의 잘못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아니했습니다. "나는 가난한 자를 돕 는 자이다." 이것은 유다의 구호며 나팔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가난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 불탔더라면 그의 삶 가운데 구제의 열매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 까 언행이 맞지를 않았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유다의 삶속에는 구 제의 열매가 없습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습니다. 자기 호주머니를 비운 일이 없습니다. 자기의 것은 아끼면서 남더러 구제 안한다고 나팔만 물어제쳤습 니다. 우리는 유다처럼 안되기를 기도하고 찬송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청장년회원 여러분, 우리는 본 문에 나오는 여러 사람 가운데 어디에 속합니까 구경꾼은 아닙닌 매사에 핑개 하고 비판하는 모의꾼은 아닙니까 가룟 유다처럼 거짓된 인생은 아닙니까 오 늘 우리의 모습은 마리아처럼,헌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헌물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헌신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마리아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 이 되로독 합시다.

      잠언 16:1-3

      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To man belong the plans of the heart, but from the LORD comes the reply of the tongue.
        All a man's ways seem innocent to him, but motives are weighed by the LORD.
        Commit to the LORD whatever you do, and your plans will succeed.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 여기서 '경영'(*, 마아르)은 원어상 '제어하다', '다스리다'란 뜻인 바, '마음의 경영'은 곧 자신의 생각이나 지식 등 모든 것을 동원하여 총력을 다해 생각하고 꾸미는 계획이나 사상들을 가리킨다.

      말의 응답을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 여기서 '말의 응답'은 문자적으로 '혀의 응답'이다.
      혹자는 이를 '듣는 것'으로 해석하여 상반절에 대한 모든 계획이나 사상들의 최종적인 응답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것이라고 읽는다(Elster, Umbreit,Bertheau).
      그러나 본 구절에 있어서 '혀'는 상반절에 언급된 계획에 대한 표현의 수단으로 나타나는 바(Delitzsch, Zockler), 제아무리 인간이 탁월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적절히 표현하는 수단인 혀를 적당한 시기와 감동적인 움직임으로 만드시는 것은 여호와께 달려 있다는 의미이다(15:23; 마 10:19; 롬 8:26; 고후 3:5).

      자기 보기에는(*, 베에나)
      - 문자적으로는 '자신의 눈 안에는'이란 의미로 눈이 그 사람의 전인격을 대변하는 곳이란 점에서 여기서는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에 따른 편협된 판단을 가리킨다.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 여기서 '심령'(*, 루아흐)은 상번절의 '행위'와 대조되는 말로 외적 행위의 동인(動因)으로서의 내면을 가리킨다.
      또한 '감찰하시느니라'(*, 타칸)는 원어상 '무게를 달다', '공평하게 평가하다'란 뜻을 가지는 바,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외적 행위는 물론 그 내면의 은밀한 모든 부분까지도 보시고 당신의 공의의 속성에 준거해 판단하신다는 의미이다(히 4:12).

      맡기라(골. גֹּל) 1556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 본 구절에서 '맡기라'는 동사 '골'(גֹּל)은 원어상 '굴리다', '던지다' 등의 의미로서 '전폭적인 의뢰와 위탁'을 가리키는 말인 바(시 22:8; 37:5), 이는 1, 2절에 나타난 바대로 모든 내적, 외적 측면의 동인과 과정과 그 결과를 곧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할 것을 지시하는 말이다(벧전 5:7).

      시편 22: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He trusts in the LORD; let the LORD rescue him. Let him deliver him, since he delights in him."

      의탁하니(골.) 1556  גָּלַל 스트롱번호1556

      1. 구르다.  2.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파생어로 사용된다. 3. 바퀴
      발음 [ gâlal ]
      구약 성경  / 16회 사용
      관련 성경  /  옮기다(창 29:3,8), 떠나가다(수 5:9), 의탁하다(시 22:8), 굴리다(수 10:18, 삼상 14:33, 렘 51:25), 맡기다(시 37:5, 잠 16:3), 떠나게 하다(시 119:22), 말리다(사 34:4), 흘리다(암 5:24), 묻다(사 9:5), 끌려들다(창 43:18), 달려들다(욥 30:14).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 여기서 `의탁하니'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골'(*)은 `굴려버리다'는 뜻으로 이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짐을 맡김을 의미한다.
      그러나 악인들은 다윗을 조소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악인들은 그들 안에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와같은 사실은 다윗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을 것이다(Craigie).

      시편 37:5
      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Commit your way to the LORD; trust in him and he will do this:

      맡기라(골. ) 1556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 '맡기라'는 '갈랄'(*)로서 문자적인 뜻은 '옮기다','굴리다', '흘러 내려오다', '신뢰하다' 등이다(22:8 ; 잠 16:3 ; 벧전 5:7). 그리고 '길'은 삶의 모든 여정뿐만 아니라 그 여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것. 즉 계획들이나 행동들, 그 계획에 따르는 잇슈(issue)들이나 결과들을 가리킨다(10:7) 한편, 세상 사람들은 이것들을 운명이라고 부르지만(Anderson), 신앙인에게는 오직 이것이 여호와께만 있음을올 믿는다.

      저를 의지하면
      -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너의 전생애를 하나님의 방법들에 맞추면'(잠 16:20 ; 28:26)이다.

      저가 이루시고
      - '이루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아세'(*)로 문자적인 뜻은 '...에게로 돌리다'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살면 그에 따른 혜택을 그에게 돌리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혜택이란 복된 결과의 보장, 유익을 지켜줌, 해받지 않음 등을 가리킨다고 본다(Barnes).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Cast all your anxiety on him because he cares for you.


      맡겨버리라(1977) 에피립토() ἐπιῤῥίπτω 스트롱번호 1977

      1. ~위에 던지다.  2. 눅 19:35.
      발음 [ ĕpirrhipt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πέριψα, 제2부정과거수동태 ἐπερρίφην, 1909와 449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걸쳐놓다(눅 19:35), 맡기다(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 본절은 시 55:23(LXX)의 인용이다.
      '염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림난'(*)은'나누다'라는 의미의 '메림나'(*) 에서 유래한 단어로 악한 자들로부터 받는 핍박 뿐만 아니라 내면에 있는 여러 가지 걱정이나 고민 등을 의미한다(마 6:25 - 34).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염려를 다 그리스도께 맡겨야 한다.
      '맡겨 버리라'의 헬라어 '에피립산테스'(*)는 '던져버리다'라는 의미로 부정 과거 분사형이나 본절에서는 새로운 명령형 형태를 취하지 않고 6절의 명령법과 연결되어 강조되고 있다(Kelly).
      이것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는 자들이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항상 보호하시는 손에 염려를 맡겨야함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을 권고하시기 때문이다.
      '권고하심이니라'의 헬라어 '멜레이'(3199)는 '돌보다', '관심을 갖다'라는 의미로 '염려가 그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돌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걱정과 외부로부터 오는 위험을 맡겨야 하며 그때만이 평강을 소유하게 된다.

      권고하심이니라(3199) μέλω  

      1. 관심을 가지다.  2. ~와 상관있다
      발음 [ mĕlō ]
      • 1. 관심을 가지다.
      • 2. ~와 상관있다[현재 직설법에서 비인칭 동사로 사용], 마 22:16.
      • 관련 성경  /  꺼리다(마 22:16, 막 12:14), 돌보다(막 4:38, 요 10:13, 벧전 5:7), 생각하다(요 12:6), 상관 하다(행 18:17), 염려하다(고전 7:21, 9:9).



      골”(לוֹג) 알 아도나이” (주께 굴려버려라) (잠언 16:3)’ Show us your way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

      성경 여러 곳에는 우리의 행사를 하나님께 맡기라는 당부가 나옵니다.
      특히 지혜서인 시편과 잠언에서 반복 말씀하십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편 37:5).
      깊이 묵상해 보면 실로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이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하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가슴을 졸일 때가 많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주님은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고 말씀하시며 성공의 비밀, 약속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고 하십니다.
      여호와께 맡김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도 이 말씀을 인용하여 “해도 해도 안 될 때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판단하여 이뤄 주실 것입니다”하고 권면하였습니다.

      우리 말이나 영어에서 “맡기다”는 말은 “다시 찾아온다”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은행에 돈을 맡기거나또 어떤 곳에 물건을 맡기면 다시 찾아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염려를 하나님께 맡겼다고 말을 하면서도 실제로보면 맡긴 지 얼마 후,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찾아와서 다시 염려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 가운데 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다고 하면서도 조금 지나면 다시 근심에 쌓여 무엇인가 스스로 도모하며 모든 것을 다시 “내가” 맡아 주관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당혹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맡기다”라는 말씀은 히브리어 원어로 “골”(לוֹג)입니다.
      히브리어 단어인 “골” 은 “다시 찾아온다”는 개념이 완전히 배제된 표현입니다.
      “골”은 “굴려 버린다”는 뜻입니다.

      “골 알 아도나이”(주께 굴려버려라)는 마치 군인이 전쟁에서 승리를 얻기 위해 돌아갈 길인 다리를 끊는 것처럼 배수진을 치고 주님께 완전히 자신의 모든 행사를 “던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우리가 쓰는 표현으로 “올인(all in)”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골”은 맡겼다가 찾아오고 다시 맡겼다가 찾아오는 계산된 행위가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무엇을 맡기는 것인가라는 명제입니다. “행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말씀합니다. 여기에는 타이밍(때)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행사도 맡기고 타이밍도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때에 역사하십니다.
      맡김은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말씀이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우리의 심령을 덮어갈 때 가능해집니다.
      말씀이 조용하게 점진적으로 우리의 영혼을 송두리째 뒤덮는 조용한 혁명입니다.

      오 주여,
      오늘도 우리의 모든 행사를 맡깁니다.
      Show us Your way!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11월 29일(토) 요한복음 12:7-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장사할 날(7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Leave her alone," Jesus replied. " It was intended that she should save this perfume for the day of my burial.

      장사할 날(The Day of my burial)
      장사할 날이란 나의 장례식 날을 말합니다.
      나의 장례식 날을 위하여 이런 준비를 예비하면 어떨는지요?!

      첫째는 입관 예식을 위하여 부를 나의 찬송
      둘째는 발인 예식을 위하여 부를 나의 찬송
      셋째는 하관 예식을 위하여 부를 나의 찬송

      자녀들을 위한 기도문
      교회를 위한 기도문
      나의 신앙고백문
      - 내가 만난 예수님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일의 우선순위(優先順位)가 중요합니다.
      만일 일의 순서가 잘못되면 모든 일이 망쳐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방을 수리하려고 할 때 싱크대를 고치려고 하는데 싱크대를 뜯었더니 그만 그 안에 보이지 않던 배수관과 수도관이 파열되어 예상밖의 일이 더 확대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300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나드 향유를 붓게 된 것에 대하여 가룟 유다는 그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가만 두어라 이것은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사 할 날을 위한 것에 대한 전통적인 두 가지 해석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지금 향유 붓고 남은 것을 보관하여 후일에 나(예수님 자신)의 장례 때에 사용하게 하라.
      "이를 두게하라"는 의미를 남은 향유를 보관하라고 이해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그 여자의 향유 붓는 행동을 중단시키지 말라.
      그녀의 행동이 나(예수님 자신)의 장례를 예비하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제 견해는 두번째 해석이 바람직한 해석이라고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 칼빈(Calvin)은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위하여 이렇게 귀한 행위를 취한 것"이라고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동행(同行)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운동경기를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혼자서 경기에 임하는 것 단독 경기
      예를 들면 권투, 단식 탁구, 100m 달리기, 마라톤과 같은 경기라고 하겠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여러 사람이 한 팀이 되어 경기에 임하는 단체 경기(운동)
      예를 들면 축구, 농구, 럭비, 야구 등과 같은 경기를 말합니다.

      그런데 신앙이란 두 경기를 모두 갖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경건의 생활과 모여서 함께 해야하는 예배와 봉사는 공동체가 함께 활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음악회의 경우에는 독주와 합주가 있습니다.
      독주는 혼자서 열심히 하면 됩니다.
      그러나 합주는 혼자서만 잘 한다고 훌륭한 연주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따라서 신앙이란 음악회의 경우 합주와 같으며 운동 경기로 비유하면 단체 경기와 흡사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경건을 위한 개인 기도와 말씀 묵상과 같은 신앙적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여러 사람들이 힘을 모아 협력해야만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나보다 남을 더 존중하고 이해하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께 바친 것은 개인적인 결단과 더불어 당장 눈으로 볼 수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장차 다가올 공동체를 위한 헌신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신앙은 의미있는 누군가와 동행하는 삶의 여정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친밀한 동행이어야 합니다.
      가족과 친밀한 동행이어야 합니다.
      교회와도 친밀한 동행이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고난받는 이웃과 동행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과 교회와 친밀하게 동행할 때, 이 시대에 강도 만난 이웃의 동행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의 동행자가 될 때, 세상에서 주님이 빛나고  우리도 빛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와 동행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 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가족과 이웃, 그리고 교회와 늘 동행하게 하옵소서.
      친밀한 교제 속에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 주의 빛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성자의 귀한 몸




      동행하다

      הָלַךְ 스트롱번호 1980

      1. 가다.  2. ㉠ 창 7:18. ㉡ 대하 26:8. ㉢ 수 16:8. ㉣ 느 6:17.  3. ㉠ אֶל
      발음 [ hâlak ]
      구약 성경  / 1549회 사용
      관련 성경 /  동행하다(창 14:24, 5:22), 가다(창 19:2, 민 32:41, 삼상 23:13), 오다(창 26:29, 왕상 13:17), 돌아가다(창 31:30, 신 16:7), 길을 가다(창 32:1), 행하다(출 14:29, 신 28:9), 돌아오다(레 26:23),쓰다(민 24:1), 떠나다(삿 6:21), 따르다(신 4:3, 수 3:3, 룻 2:9, 삼상 8:5, 17:14), 나가다(신24:2, 삿9:8, 룻1:21), 가게 하다(삼상6:8), 순회하다(삼상7:16), 이르다(대하8:17), 따라가다(욥31:7), 흐르다(시105:41, 겔31:4), 그치다(아2:11), 나아오다(사60:3,14), 뒤따르다(렘8:2), 없어지다(렘9:10), 지나다(렘9:12), 도망하다(렘50:3), 돌아다니다(렘50:6), 사로잡히다(겔25:3), 멀리하다(호11:2), 왕성하다(창26:13), 행진하다(수6:13), 다니다(사3:16, 시73:9), 달리게 하다(출9:23), 주다(창15:2), 배회하다(창24:65), 보내다(창32:20), 왕래하다(삼상17:15), 불다(전1:6), 돌다(전1:6), 오르다(렘3:6), 걷다(렘10:23, 시115:7), 사라지다(호13:3), 흉용하다(욘1:11,13), 놀다(애5:18), 밟다(잠6:28), 날다(합3:11), 섬기다(창48:15), 일어나 걷다(출21:19), 출입하다(삼상12:2), 상종하다(삼상25:15), 다녀오다(욥1:7), 두루 다니다(슥1:10, 6:7), 거닐다(삼하11:2), 유랑하다(대상16:20), 날뛰다(시12:8), 다니다(시39:6), 걸어가다(시119:45), 내려가다(잠23:31), 걷다(신1:31, 욥31:5, 미2:7).[명] 공상(전6:9), 일행(창13:5), 행인(삿5:6), 행실(잠2:7). [부] 점점(창 8:3, 12:9, 삿 4:24), 반드시(렘 37:9), 속히(슥 8:21).

      창세기 5:22 /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세기 14:24 /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에스골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


      חָבַר 스트롱번호 2266

      1. 호 4:17.  2. 모으다. 3. 구속하다
      * 호세아 4:17 /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
      발음 [ châbar ]
      구약 성경  / 26회 사용
      관련 성경  /  모이다(창 14:3), 연결하다(출 26:3, 겔 1:11), 연합하다(호 4:17), 잘 짜여지다(시 122:3), 교제하다(대하 20:35,37), 들어있다(전 9:4), (그럴 듯한 말을) 치다(욥 16:4), 약조하다(단 11:23), 단합하다(단 11:6), 능숙하다(시 58:5).

       



      신앙은 동행하는 것이다(잠언 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연주회는 독주와 합주가 있지요.
      독주는환자서 열심히 하면 됩니다.
      그러나 합주는 혼자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잘 할 수 없습니다.
      서로 맞춰야 합니다.

      신앙은 독주가 아니라 합주라고 하겠습니다.
      나하고 예수님, 성령님과 함께 해야만 잘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모른 채 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그저 질주를 위한 질주를 하기도 하고, 남이 달리니까 덩달아 달리기도 합니다. 남들을 모두 제치고 혼자 이기려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이 홀로 지내는 것이 안쓰러워서 하와를 만들어 짝을 지어 주셨습니다. 본래 누군가와 동행하도록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동행하는 삶은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누구와 동행하는지에 따라 그 향기는 다릅니다.
      오늘 본문은 누구와 동행해야 하는지, 그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 다니면 지혜를 얻지만, 미련한 사람과 사귀면 해를 입는다 (20,새번역).”라고 했습니다. 옳고 지혜로운 사람과 동행하면 삶이 의미있고 행복하지만, 그릇되고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하면 악을 행하여 결국 손해를 입는다는 뜻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 나랏일(왕상 5:12)을 경영하는 영민한 사람, 영적으로 신령한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등을 포함합니다. 본문에서 ‘동행’이 뜻하는 것은 단순히 ‘함께하다’가 아닌 ‘깊은 교감 속에서 교제를 나눈다’라는 의미입니다. 전인격적인 만남과 교제를 가리킵니다. 단순히 ‘함께 걷는다’라는 뜻을 넘어서 전인격적으로 친밀한 관계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와 친밀하게 동행해야 할까요? 첫째, 지혜로운 사람은 먼저 하나님과 친밀합니다. 언제나 주 안에서 살아갑니다. 둘째, 지혜로운 사람은 가족과도 친밀합니다. 부부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셋째, 지혜로운 사람은 신앙의 벗들과 친밀하고, 이웃과도 기쁨으로 동행합니다.

      동행이 곧 신앙입니다. 신앙은 의미있는 누군가와 동행하는 삶의 여정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친밀한 동행이어야 합니다. 가족과 친밀한 동행이어야 합니다. 교회와도 친밀한 동행이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고난받는 이웃과 동행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과 교회와 친밀하게 동행할 때, 이 시대에 강도 만난 이웃의 동행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의 동행자가 될 때, 세상에서 주님이 빛나고  우리도 빛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와 동행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 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가족과 이웃, 그리고 교회와 늘 동행하게 하옵소서. 친밀한 교제 속에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 주의 빛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요한복음 12:7-8)

      베다니는 무덤에서 살아난 나사로의 사건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을 뿐 아니라 복음 사역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짐승 같은 마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과연 그럴 수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사실 이것은 주님의 영광에 도전하는 마귀의 교만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다른 제자들까지 동조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마 26:8-10).

      가룟 유다는 양심에 화인 맞아서 성물을 도둑질하였고 또 훔치기 위해서였는데 마귀의 바이러스가 다른 제자들에게까지 퍼졌던 것입니다.

      일생일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일보다 더 값지고 의미 있는 일이 있을까요?
      거룩한 봉사로 열매 맺는 일에 시험 드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값진 물건이라도 제 용도에 따라 쓰임을 받았다면 족할 것입니다.
      과연 자신을 위해서 쓰는 것은 당연하고, 주님을 섬기는 일은 허비요, 낭비라고 하면 그것을 참믿음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 26:12).

      가룟 유다의 눈에는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돈만 보였지만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아름다운 정성이 보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6).
      그것도 부족해 가룟 유다는 제사장들에게 가서 은 삼십을 받고 주님을 팔았습니다.
      그 결과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돈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죄 많은 여인에게서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정성을 받으시고 영원한 존귀와 영광의 복을 내려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마26:13).

      그것은 돌비에 새긴 것이 아니라 진리에 새겨졌고, 성도들의 마음에 새겨져서 복음과 함께 영원토록 향기를 풍기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복되고 귀한 일입니까?
      마귀의 시험을 조심하십시오.
      혈육과 의논하지 말고 성령이 기뻐하실 때에 즐겨 헌신하여 열매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과 구제

      구제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또 주님께 드리는 복이 됩니다.
      마태복음 25:35-40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유다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8절).

      이 말씀은 가난한 자를 외면해도 무방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가난한 자가 항상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은 단 한 번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돌아올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또 항상 보장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서 섬기는 성도들의 손길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는 주의 사역을 활성화하기 위한 여러 부서와 조직이 있습니다.
      기억할 일은 모든 기관이 모체를 중심으로 하는 활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 여 전도회가 교회 안에 있는 지체요, 모든 교육 기관을 비롯하여 위원회 활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몸된 교회에 향기를 풍기는 손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하는 자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교회를 가까이하는 것은 주님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귀히 여기는 것이 주님을 귀히 여기는 것이요, 교회를 유익되게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며,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은 복음 사역이 왕성하도록 하는 것이요, 교회에 충성하는 모든 것은 주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일에 가룟 유다와 같이 비판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마리아와 같이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의 고난을 욕되게 하지 말고 거룩한 예물로 향기 풍기는 손길이 됩시다.
      우리 모두 주의 날에 영광이 더하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세 번의 유월절을 지내셨는가?

      첫 유월절은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셔서 ‘장사하는 집’으로 바뀐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이어 니고데모를 만나셔서 거듭남에 대한 비밀을 가르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4-15)
      위 두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예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두번째 유월절,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 머무셨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요 6:1,4)
      이 때 행하신 일이 오병이어의 기적이었다.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5천명의 무리를 먹이셨던 것이다.
      그 기적의 의미는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의 희생이 되실 예수님 자신에 대한 계시였다.
      아, 예수님 당신께서 스스로 오병이어가 되어 나를 먹이겠다는 말씀이시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말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48, 51, 54, 55)

      세번째 유월절, 베다니를 방문(12:1)

      이야말로 클라이막스였지 않은가?
      예수님의 유월절 사역은 유월절 엿새 전에(요 12:1)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심으로 시작한다.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림으로 ‘장사할 날’을 미리 예비했다.
      이어 예루살렘에 오셔서 마지막 유월절 식탁을 준비하셨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요 13:1)
      이 유월절 식사는 예수님이 정말 원하셨던 것이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
      이어서 예수님의 고별설교 말씀이 13장부터 17장까지로 이어진다.
      18장과 19장에서는 예수님이 잡히시고 십자가 형에 처해지며, 십자가의 고난을 친히 당하셨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나를 대신한 희생 제물’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유월절 양으로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벧전 3:17)
      베드로 사도는 나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두가지를 가르쳐 준다.
      첫째, 예수님은 ‘죄’를 위하여, 즉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죽으셨다.
      둘째,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다른 말로, 예수님은 나의 죄를 짊어지시고,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와 관련, 고린도후서5장 후반부에는 ‘대신하여’라는 단어만 여섯번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라는 찬송가 가사는 고쳐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를 위하여’와 ‘나를 대신하여’는 엄밀한 의미상의 차이가 있지 않은가?

      유월절 양은 어떻게 준비가 되며, 어떻게 쓰여졌을까?
      출애굽기12장이 이를 말해준다.
      유월절 어린양은 흠 없고 일년된 수컷이어야 한다.(5절)
      양을 잡아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려야 한다.(22절)
      (피를 뺀) 고기는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불에 구워 먹어야 한다.(9절)
      뼈는 꺾지 말아야 한다.(46절)
      고기는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10절)
      아, 이 모든 구절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그대로, 정확히 이루어짐을 본다.

      출애굽기 12장 요한복음 19장을 대비해 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감격의 눈물로 만난다.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매일의 삶에서 묵상토록 하겠습니다.
      나를 위한 죽음을 넘어서, 나를 대신한 죽음이기에 더 감격스럽습니다.
      ‘여호와의 유월절’을 완벽히 성취하시고 이루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 유월절 어린 양께서 또한 나의 어린 양 되어주심에 감사합니다.
      이제 주님을 따라 나도 나의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내 옛사람을 못박고 새사람을 지어 가겠습니다.

      기도 / 세상 죄를 짊어지신 어린 양으로 오셔서
                유월절 절기 때마다 죄를 짊어지신 어린 양의 참 모습을 보여주시며
                믿음의 본이 되셨던 예수님처럼
                저희들도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신앙의 흔적을 바르게 새기며 남길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1월 28일(금) 요한복음 12: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향유 냄새와 도적(3, 6절)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Then Mary took about a pint of pure nard, an expensive perfume; she poured it on Jesus' feet and wiped his feet with her hair. And the house was filled with the fragrance of the perfume.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쳐 감이러라.
      He did not say this because he cared about the poor but because he was a thief; as keeper of the money bag, he used to help himself to what was put into it.

      사람의 행동을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는 선행(先行) Good Deeds

      진정한 선행 / 선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궁전이 있었다. 한 소녀가 궁전에 들어가고 싶어 매일 몸을 단장했으나 궁전의 열쇠는 주어지지 않았다. 하루는 궁전의 문지기가 소녀에게 귀띔해 주었다. “남을 위해 사랑을 실천한 사람에게 열쇠가 주어진단다” 소녀는 그날 늙은 거지를 도와주었다. 그리고 궁전으로 달려가 열쇠를 요구했다. 그렇지만 열쇠는 주어지지 않았다. 소녀는 낙심해 힘없이 집으로 걸어갔다. 그때 강아지 한 마리가 덫에 걸려 신음하는 모습을 보았다. 소녀는 정성을 다해 강아지를 풀어주었다. 소녀의 손과 발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그때 궁전의 문지기가 나타나 열쇠를 주었다. 소녀가 놀라며 말했다.

      “저는 열쇠를 얻기 위해 강아지를 구해준 것이 아닌데요” 그러자 문지기가 말했다. “자신이 지금 선행을 베풀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잊은채 남을 돕는 사람에게 열쇠가 주어진단다” 진정한 선행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아름다운 선행은 감추어질 때 더욱 빛난다.


      둘째는 시비조(是非調) Aggressive Attitude

      마리아가 값비싼 순수한 나드 한 근을 예수님께 부어드린 것은 선행이라고 합니다.
      가룟 유다가 마리아의 행동을 본 후에 차라리 그 비싼 향우를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한 것은 시비조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는 진심으로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 많은 돈을 한순간에 소비하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고, 꽃을 싼 종이에서는 향기가 난다.
      같은 종이라 할지라도 무엇을 그 안에 담느냐에 따라 전혀 냄새를 풍기듯이 무엇을 생각하는냐에 따라 그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따라서 어떤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는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 인간의 죽음이 종말이 아니며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 마리아와 가룟 유다의 행동을 통하여 어떤 길을 선택하며 무슨 생각을 가져야 하는가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마리아는 비싼 향유 나드 한 근을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뭇고 그녀의 머리털을 예수의 발을 씻었다고 합니다.

      한편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행한 일을 보고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판매하여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합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살펴보면 마리아가 행한 것은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가룟 유다의 생각은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사랑의 행위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동기(動機. motive)와 목적(目的. purpose)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드 순전한 향유 한 근의 가치가 일반 노동자들의 일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300 데나리온)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결코 작은 금액은 아닙니다.

      가룟 유다의 발상이 아주 현실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선택한 행동은 머지않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건을 이해할 때 외적으로 드러난 것만 살필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것들도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선행(先行)이란 착하고 어진 행실을 말합니다.
      Good Deed

      시비조(是非調)란 트집을 잡아 시비하는 것으로 집흔(執釁. 트집을 잡음)이라고도 합니다.
      Aggressive Attitude

      인간의 본성은 다른 사람이 행한 것에 대하여 좋은 의견을 제시하는 것보다 뭔가 부족한 것을 들추어 흠을 잡으려는 습성이 강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시비조의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다른 사람의 눈에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던 아주 조용한 성격의 인물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그 비싼 순전한 나드 한 근의 향유를 예수님에세 쏟아 붓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결단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만큼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였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존재와 소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는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습니다.
      아무리 소유가 중요할지라도 사람보다는 월등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소유가 사람을 짓밟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소유의 가치가 너무 크게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소유 이전에 존재가 중요합니다.
      올바른 존재는 올바른 소유를 갖지만 거짓된 존재는 거짓된 소유에 붙잡혀 물질의 노예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주의에 사로잡힌 많은 사람들이 소유에 집착하므로 세상이 어지럽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도 올바른 정신 즉 자유시장경제라는 틀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외침이 완전히 땅속으로 꺼지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소망을 품어봅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마리아(Mary)

      1.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일찌기 창세로부터 계시되어온 하나님의 구원은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다. 그러나 이와같이 구원의 정점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는 데에는 한 여인의 희생적인 순종이 있었다. 한때는 세상을 풍미하던 다윗 가문 출신으로 벽촌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순박한 수천년 동안 모든 사람들이 열망하며 기다리던 메시야를 잉태하게 된 것이다.

      한 남자와 장래를 약속하고 새로운 생활에 대한 꿈에 부풀어 있는 마리아에게 있어 임신이란 모진 수모와 불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우기 간음 한 자는 돌로 쳐 주이는 율법의 시대에 처녀가 잉태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각오하여야 함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을 알면서도 마리아는 자신의 잉태 사실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마리아의 겸손한 태도는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확고한 신앙의 결단이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마리아는 무사히 약혼자 요셉과 결혼하고 아기 예수를 낳아 평범한 생활을 하게 된다.

      예수가 메시야 이심을 알고 있던 마리아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인간적인 요구를 하는 조급함을 보인다. 또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건강을 돌보 지 않고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예수를 염려하여 집으로 데리고 가려는 불신앙의 모습도 보인다. 육신에 속한 자로서의 본능적인 모성과 메시야에 대한 신앙이 교차하고 있는 마리아의 마음에 갈등과 혼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세상 만민을 구원할 메시야를 낳았지만 마리아 역시 율법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러한 마리아에게 일생 최대의 사건이 발생한다. 사랑하는 아들 예수가 사형을 당하게된 것이다. 삶의 한 기둥이었던 아들이 처형되는 광경을 지켜보는 그 시간은 마리아에게 가장 처절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최악의 상황은 최상의 축복의 문으로 들어서는 첫걸음이었다.

      갈보리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는 마리아의 마음에는 자신의 아들이 아닌 구세주의 모습이 새겨진다. 그녀의 아들 예수의 육신은 처참하게 죽어갔지만 그녀의 심령 속에 영원한 메시야로 살아있게 된 것이다. 그후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마리아는 성령 충만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되어 참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을 위하여 믿음으로 선택한 고난의 길은 영광으로 이어진다. 선한 것이라고는 날 것 같지 않던 나사렛에서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묻혀 있던 마리아가 선택한 고난의 길은 영생의 문으로 들어서는 입구였다. 겸손한 자들 높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리아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랐듯이 오늘날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도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실천할 때 생명책에 그 이름이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2.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성경에 그 이름을 남긴 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은 물론 명단 속에서 그의 온 집안까지 구원으로 인도한 신앙인들이 있다.
      그들의 명단 속에서 우리는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성경에는 마리아에 대하여 오직 한 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행 12:12).

      그러나 우리는 단 한 군데에 농축되어 있는 마리아의 신실한 삶을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다.
      마리아는 그녀의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구원의 장을 제공하고 아들 마가를 주님의 종으로 키움으로써 초대 교회의 숨은 공로자 역할을 한 여인이다.
      바울의 동역자인 바나바의 누님이기도 한 마리아는 남편과 사별하고 예루살렘에서 홀로 자녀를 키우며 살았다.

      재산은 많았으나 과부로서 쓸쓸히 살 수 밖에 없는 처지인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심으로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또한 마리아에게는 무엇 보다도 주 안에서 신앙으로 양육하는 아들 마가가 있었기에 오히려 보람과 기대에 찬 나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 경건한 마리아는 일찍이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활용하여 드리기를 자원하였다.

      집을 개방하고 손님 접대하기에 인색하지 않은 마리아의 [실천하는 신앙]은 예수님의 방문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마리아의 집의 큰 다락방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시는 장소가 되었다.
      마리아 스스로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예수님께 장소를 제공하고 후하게대접하던 그녀의 행위가 주님의 성만찬을 예비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또한 그 다락방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성령 강림이 실현된 역사적인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 마리아의 집은 모일 장소가 없던 성도들에게 예배처로 제공되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믿음과 용기는 모든 이해타산과 생사를 초월할 수 있었다.

      마리아의 집에는 서도들은 물론 사도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아들 마가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집안 일을 돕는 하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접하게 함으로써 식구들 모두가 구원받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드러내지 않고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생활 가운데 실천하며 주님께 모든것을 드린 마리아의 헌신은 믿음의 결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의 아름다운 믿음에 축복하시어 마리아 자신은 물론 그 자녀와 온 집을 영화롭게 하셨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 집의 주인이 되시어 함께 하시고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마리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여 주신 모든 것을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 드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로 내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막달라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명의 마리아 가운데 예수님의 사역을 도운 막달라(Magdalene)출신의 마리아를 일컫는다.
      갈릴리 호수 서쪽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막달라는 염색업과 직물업이 발달한 도시로서 특히 다른 지역들보다 도덕적으로 부패한 곳이었다.
      이러한 곳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마리아의 생활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날 당시 일곱 귀신에 들린 채 교향을 떠나 방랑하던 그녀의 처지를 통해 그녀의 생활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많은 괴로움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마리아의 영혼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장을 펼치게 된다.
      그녀를 방탕한 길로 몰아 넣던 일곱 귀신이 다 떠나가고 육신의 병은 물론 정신적인 이상까지 깨끗이 고침을 받아 순수하고 온전한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마귀의 종에서 해방되어 주님의 종으로 충성을 다하는 마리아의 헌신적인 새 삶이 시작된 것이다.
      큰 은혜를 받고 많은 용서받은 사람은 진실 한 사랑으로 보답한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마리아는 늘 주님의 곁을 따르며 자신의 소유를모두 바쳐 그 사역을 돕는다.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로서 기업이 있을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3년 반 동안 계속되는 예수님의 사역을 도왔다는 것은 주님을 향한 그녀의 사랑과 충성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준다.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일관된 사랑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마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한 위기의 상황에서 마리아는 아무 두려움 없이 죽음의 자리에 동참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아직 마리아에게는 사랑하는 한 인간의 죽음이었을 뿐이다. 그 후 예수님의 묘를 지키던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목격하는 영광을 누린다. 다시 살아나시어서 자신의 이름을 정답게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마리아는 놀라움과 기쁨에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나 죄 중에 잉태되어 죄악 중에 출생한 한 죄인일 뿐인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본순간 랍오니(선생이라는 뜻)라고 부른다.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육에 거한 인간은 자신을 구원해 주실 메시야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로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보인 마리아가 오순절날 성령 강림을 기다리며 기도하던 여인들 가운데 함께 있을 것임을 우리는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여인으로서의 평범한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는 좁고 험난한 생명의 길로 택한 마리아의 이름은 예수님을 따르던 여성들 가운데 항상 첫번째로 언급된다. 마리아가 경험한 것처럼 오늘날도 귀신을 쫓아내고 병고침을 받는 신유의 역사는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

      영혼이 잘 되고 강건해지는 축복을 믿는 자들 모두가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그의 변화된 삶을 통해 보어주듯이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된 우리들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주님께 헌신하고 사랑을 실천할 때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4. 베다니의 마리아

      예루살렘에서 약 3km 떨어져 있는 베다니는 문둥병자와 소외된 사람들이 격리되어 사는 강림산 기슭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이처럼 사회로부터 냉대받은 베다니 마을에서 마리아는 마르다와 나사로와 함께 단촐하게 살고 있었다.

      언니인 마르다는 실제적이고 활동적이었던 반면 사려깊고 내성적인 성격을 소유한 마리아는 영적으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집안 일을 도우며 마음 속에 항상 메시야를 소망하던 마리아의 생활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급격히 변화되기 시작했다.
      베다니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마리아는 메마른 심령에 생명의 생수를 공급받게 된 것이다.

      능력있는 천국 복음을 증거하시고 많은 이사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리아에게 인간의 걱이 아닌 메시야의 말씀으로 받아 들여졌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영적인 제자로서 신앙을 성숙시켜 가고 있던 마리아에게 그 믿음을 흔들어보는 일이 발생하였다.
      집안의 생계를 맡고 있는 오빠 나사로가 중병이 들어 죽은 것이다.

      가장 역할을 하던 나사로의 죽음은 마리아게게 큰 충격일 수 밖에 없었다.
      비탄에 잠긴 채 눈물을 토해내는 마리아의 호소는 예수님의 마음에 깊 은 감동으로 다가가서 마침내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낳았다.
      이 사건을 통하여 마리아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과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생겼다. 마리아의 마음 깊이 뿌리내린 믿음은 현실적인 행동으로 표출된다.
      자신의 삶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펼쳐 보여주시는 주님께 마리아는 가장 귀중한 소유를 아낌없이 드림으로 감사와 믿음을 나타내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베다니에 오신 예수님께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주님의 머리와 발에 부음으로써 신앙고백을 대신한 것이다.
      결혼 지참금으로 사용할 향유를 부은 것은 곧 여자로서의 행복한 미래를 포기하고 주님만을 사랑하며 헌신하겠다는 의지였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기도 했다.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 영적 통찰력이 개발된 마리아는 주님의 제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한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마리아의 행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제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한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마리아의 행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마태복음 26:13)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소외받는 비천한 여인 마리아가 그 이름이 영원토록 기억되는 존귀한 신앙으로 남게 된 것은 믿는 자 모두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영의 양식인 생명의 말씀을 늘 대하고 이를 통하여 주님과 끊임 없이 교제하여야 함을 깨닫게 한다.
      또한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리고 범사에 감사의 향기를 발하는 생활을 해야 함을 가르쳐준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치는 성도를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는 기쁨으로 칭찬하며 맞아 주실 것이다.




      가룟 유다(Judas Iscariot)





      뜻 : 찬양받다, '가룟'은 '케리옷의 사람'이란 뜻(한글개역성경에서는 "그리욧"으로 나와있다).

      1) 예수님의 열두 제자중의 하나로 예수를 판 제자(마27:5).2) 그 이름은 제자중에 언제나 맨 끝에 적혀 있다(마10:4,막3:19,눅6:16).3) 회계를 맡아 보았다(요12:6,13:29).4)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여인을 책망하였다(요12:4).

      5) 귀신을 쫓아 내고 병을 고친 일도 있다 (마10:1, 눅9:1).

      가롯유다는 가롯 시몬의 아들이며 (요6:7) 주께서 택한 열두 사도 중에한 사람이다. 가롯 유다는 복음서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가장 불가사의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의 뜻과 배경, 성품 그리고 예수님을 배반한 동기와 죽은 방법등 모든 것들이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가롯이라는 이름에는 다양한 설명들이 제시되어 왔다. 즉 그리욧 사람 암살자 가짜, 거짓말장이, 위선자 등의 여러가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이 가운데 일반적인 설명은 두 가지이다. 첫째, 그롯사람이란 견해로12사도 중에 11사도가 갈릴리지방 사람인데 반해 유일하게 가롯유다만이 유다 지방의 사람이라는 것을 근거로 삼고 있다. 둘째는 가장 가능성있는 견해로는 가롯이라는 말이 가짜, 거짓말장이,위선자를 뜻하는 세케르라는 아 람어의 어근에서 나온 것으로 이 말이 당시 아람어를 사용하던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배반자를 부를 때 사용한 별명이었다는 견해이다.

      막3:14,요6:70을 미루어 보면 예수님은 복음을 전도할 사도를 신중히 선택하심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요6:64를 보면 유다를 택한 것은 매우 곤혹스 러움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예수가 속죄적 죽음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계획에 의식적으로 복종한 것이라고 하여 이를 설명하려고 하는 바도 있지만 공관복음은다른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예수께서 유다를 제자로 선택하신 것은 그를 유망하게 보고 또 그의 성격을 통찰하고 크게 쓰여질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여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또 이 무리안에 배신자가 있으면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여하튼 그의 성격을 생각하여 볼 때 아마 그리스도의 왕국이 건설될때 지상에 있어서 어떤 이들일 얻게 되리라고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가롯 유다는 예수의 제자단의 회계일을 보면서 일행의 전대를 맡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호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부정을 행했다. 베다니의 마리아 집에서 그녀가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표시로서 지극히비싸고 순수한 나도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을 때 제자들 특히 유다는[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서 주지아니하였으냐]라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의 본심은 그 돈으로 자신의주머니를 채우러는 생각이었다.

      이에 예수께서 부드럽게 충고한즉 그는 오히려 분격하여 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팔아 넘길 것을 제의했다. 제사장들은 이에 동의하여은 30개를 지불했다. 그것은 당시 노예한 사람의 시세인데 약 9달러 50센트에 달한다고 한다. 이때부터 유다는 예수를 넘겨주려고 기회를 엿보고있었다.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했다. 마귀가 그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던 것이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예수게서 조용히 말씀했을 때 제자들은 모두 근심하면서 저마다 [내니이까?] 라고 반문하였다. 베드로는 예수의 품에 기대어 누워있는 요한에게 머릿짓를 하며[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고 졸랐다. 그러자 예수께서는[나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요13:26)라고 말씀했다. 그것은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라고 한 성경말씀의 성취였다 (요13:18,시41:9) 그리고 예수께서는 한 조각을 찍어서 유다에게 주었다. 유다가 그것을 받자마자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다.

      뻔뻔스럽게도 유다는 시치미를 뚝 떼고 [랍비여 내니이까]라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다(마26:21-25) 네 하는일을 속히 하라(요13:27). 제자들까지도 예수께서 왜 유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요13:28) 어떤 자는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쓸 문건을 사라고 하시는 것으로 혹 무엇을 나누어주라고 하시는 줄로 생각하였다. 이에 유다는 곧 나가서 제사장들에게달려갔다. (요13:28-30)

      최후의 만찬이 끝나자 예수께서는 11제자와 같이 겟세마네 동산으로갔다(마26:36). 기도가 끝났을 때 유다의 선도검과 몽둥이를 들고왔다. 야암이 기 때문에 누가 예수인지 알리는 신호로서 유다는 예수에게 입맞추었다. 이리하여 예수께서는 체포되었다.(마28:47-50)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동기가 무엇인지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사도들 중의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토록 악명높고 수치스러운 일화를 인위적으로 지어냈을 리는 없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이름은 더욱더 더럽혀져 제4복음서는 그를 사탄이나, 적그리스도와 동일시하고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이런 유다에 대한 적개심이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사건 자체의 사실성을 왜곡시켰다고는 보기 어렵다.

      앞에서도 약간 언급되었지만 유다는 아마 단순히 욕심이 많고 부정직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예수를 배반했을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흉악한 반역으로 얻게 되는 돈이란 하찮은 소액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를 배반한 동기를 전적으로 이런식으로 생각 하기에는 조금 무리인 것으로도 여겨진다. 오히려 유다자신이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기대를 한 것에 대한 실망과 거짓예언자들과 거짓메시야를 공격하는 유대교의 율법 및 제도에 대한집착으로 그러한 행동을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튿날 아침 어느 정도 냉정해진 유다는 예수께서 정죄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다는 것, 자기가 죄없는 사람의 피를 판 것을 알고 후회하면서 제사장 과 장로들에게 가서 은 30개를 돌려 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라고 말했다. 그의 양심은 제자들의 양심처럼마비되어 있지 않았다. 제사장들은 그에게 말했다. [그것이 우리에게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리라] 그래서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놓고나가서 목매어 죽었다. 제사장들은 [피값]을 성전 재정에 넣는 것을싫어하여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다.

      이 밭은 [피밭]으로 알려지게되었다 (마27:3-5). 사도행전에서는 이 부분을 상당히 다르게언급하고 있다. (행 1:18,19) 즉 사도행전에 따르면 유다 자신이 그 밭을샀으며, 그의 몸이 곤두박질하여 (혹 부풀어 올라?) 배가 터져 창자가다 흘러나왔다고 한다. 유다의 비참한 죽음은 초기 기독교 설교자들과 저자들에 의하여 수없이 인용되곤 하였다. 그리고 또 유다의 죽음이 보다 무섭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소름이 끼치는 종류의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유다의 죽음에 관한 신약의 두 기사는 유다가 배신행위의 결과로 횡사를 당했다는 것과 예루살렘에 있는 작은 땅을 샀으나 배신행위의 결과로 인하여 [피밭]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은 서로 일치한다. 구약 시편 109편을 보면 유다의 죽음에 대한 것이 예시되어 있다. 이것은 원리 작자와 동시대에 된 일에 대하여 노래한 것이었으나 사실은 가롯 유다에게서 이루어진 예언 이었던 것이다.(시109:8,행1:20)그리고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만이 멸망했다(요17:12). 이 두 장을 살펴보면 그는 하나님에게 강요되어 멸망의자식이 된 것이 하나님의 긍휼을 거부해서였으며 그리고 그것을 구하지도 않아서 멸망했음을 알 수 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 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는, 나드(nard) 향유인데, 인도에서 나며 파사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특별히 술을 향기 있게 하는데도 사용되었던 것이다.
      흑설에 이 향유는, 나사로 죽었을 때에 그 시체에 바르고 남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기사(記事)의 내용은 마리아의 특별한 사랑 표시를 말한다.
      위의 학설은 이런 사랑 표시와 조화되지 않는다.
      그가 쓰다 남은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었다면, 그것은 지극한 사랑 표시의 선이 될 수 없다.
      막 14:8비교. 마리아는 예수님을 극히 존경했으며, 자기 오라비를 다시 살리신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향유를 그의 발에 붓는 봉사를 하였다.
      마리아의 이 행동은, 예수님을 경배하는 의미와 존귀히 여기는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은 그 일에서 그것 외에 또 다른 것을 더 보셨다.
      그것은, 그의 장례를 예비하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었다(7 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만 하고 발에 부었다는 기사는 없다.
      그러나 문제 될 것은 없다.
      라그랑지(Lagrange)는 이 난제를 다음과 같이 해결하였다.
      곧, "머리에 기름을 부었을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으니 만큼, 요한은 그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마태와 마가는 발에 기름 부은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 것 뿐이고,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 다른 제자들이 마리아를 비평한 것(마 26:8; 막 14:4)은, 부주의로, 혹은 피동적으로 그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이 귀절에 나타난대로 자기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위선자(僞善者)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계획적인 악행이었다. 유다는 저렇게 탐심이 강하였고, 그것 때문에 자기 선생을 파는 무서운 죄악까지 범하였다(눅 22:3-6). 평소에 그의 마음 속에 자라나던 죄악(탐심)이 결국 그로 하여금 큰 일을 저지르게 만들었다.




      예수님 당시 유대 민족이 살았던 팔레스타인 땅은 지역에 따라 3부분으로 나누입니다.
      남쪽 유대와 중간 사마리아와 북쪽 갈릴리.
      그런데 유독 남쪽 유대사람들과 인접해 있는 사마리아사람들은 그 시작이 야곱의 12아들로 형제지간이긴 했지만, 솔로몬 왕 이래 남 유다 왕국 북 이스라엘 왕국으로 갈린 이후 서로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 있었고, 북 왕국 이스라엘이 강대국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그들의 지배 정책에 의해 다른 민족들과 피를 섞이게 되고 이로 인해 이방신들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예루살렘 성전 제사와 정결법에 충실하였던 남쪽 사람들은 북쪽 사람들을 이제는 단순한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이 아닌 일종의 하느님의 거룩함을 더럽힌 사탄으로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와 사마리아는 로마의 지배 아래 정치적으로는 같은 민족으로 분류되고 있었지만, 실제 주민들의 접촉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는 종교가 사회체제를 받드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굳어질 때 종교는 사람을 죽이는 독약이 될 수 있다는 하나의 좋은 본보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마리아 보다 더 북쪽에 있었던 갈릴래아는 실상 지역적으로는 북왕국에 속하여 있었기에 사마리아의 일부분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으로는 남쪽 유대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유대사람들의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분명하지만, 갈릴래아 사람에 대한 태도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무시하는 정도의 태도였지 적대적 태도는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논술적으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긴 한데, 그것은 아마도 오랫동안 변방의 소수계로 짓눌려 살면서 자연적으로 갈릴래아 사람들이 갖게 되었던 민중해방정신과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정치종교적 독립을 원하고 있었던 남쪽 유대사람들의 정치적 이해가 함께 맞물린 것이 아닌가 하는 개연성이 하나이고 경제적으로는 비옥한 갈릴래아 지역에서 나오는 농산물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지주로서 땅을 확보하고 있었던 예루살렘의 지주 계층과 갈릴래아 소작인과의 이해 관계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의 민족의 삼각이해관계는 오늘 우리 한민족이 남쪽의 대한민국 북쪽의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 그리고 중국 연변의 조선족으로 크게 갈리어지 오늘의 현상을 주시하면 훨씬 그 이해가 쉬워집니다.
      남과 북은 적대관계이지만 동시에 상대방이 죽으면 나도 함께 죽을 수밖에 없는 상생의 관계입니다.
      연변사람들은 지역적으로나 사회주의 정치 이념체제로 볼 때는 남한보다는 북한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실제 모습을 보면 연변의 조선족은 남한과 훨씬 더 교류가 많고 경제적 유대관계를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당시의 사회정치의 묘한 삼각관계를 전제하고 요한복음 4장의 이야기를 읽으면 그 흥미로움은 결코 연속극 이순신에 못지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선산이 남쪽에 있고 태어나기를 남쪽에서 태어나 남쪽 출신으로 분류가 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자라기는 연변에서 자랐기에 연변 출신이었던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남쪽 유대를 갔다가 갈릴래아로 가기 위해 올라가는데 사마리아 지방을 관통하여 가고자 합니다.
      지금도 남한 사람들이 연변을 가려면 3.8 철책선이 있어 직접 관통을 못하고 중국이나 일본으로 우회를 하여야 하였듯이 당시에도 우회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남쪽사람들의 종교 이데올로기라는 3.8 철책선 때문이었습니다. 이 이념적 3.8 철책선이란 처음에 언급한대로 유대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만나면 더러워진다는 관념입니다.

      지금 이 얘기는 2천년 전 팔레스타인이라는 지구상 조그마한 곳에서 있었던 얘기를 하는 것인데 묘하게도 오늘의 우리 상황과 일치합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한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철책선과 거대한 방벽은 남쪽에만 있는 것입니다. 전 70년대 군생활을 철책선에서 했고 중부전선에는 철책선 뒤로 거대한 방벽을 쌓았는데 그때 일조를 했던 사람입니다. 최근까지 저는 북쪽에도 똑같은 철책선이 있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년 금강산을 가면서 보니까 남쪽은 삼중의 철책선이 있었고, 북쪽에는 초소는 있었지만 철책선은 없더군요. 하여간 2천년 전에도 담을 쌓은 건 남쪽이지 북쪽이 아니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남쪽 유대사람들이 저 북단의 갈릴래아를 가려고 할 때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오른쪽 요단강을 건너 북쪽으로 올라가서 다시금 요단강을 건너오든가 아니면 왼편 해변가의 오래된 상용도로를 통해서 가는 것이 통례였고 당시의 관습법이었고 그리고 사회안전 보안법이었다는 것입니다.

      [위험한 만남]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 일행은 그 사회보안법을 깨고 종교이데올로기의 철책선을 넘어서 사마리아를 관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매우 의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아는 대로 수가성을 통과할 정오쯤에 예수님은 배가 고프니 잠시 쉬워야겠다고 하고는 제자들로 하여금 먹을 것을 구해오도록 마을로 보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그런 깨끗하니 더러우니 하는 당시의 사회종교적 관념 곧 제자들 마음속에 쌓아 올려있어 그 인간성을 좀 먹는 이데올로기의 담을 부수고자 의도적으로 제자들을 사마리아 마을로 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예수님은 누구를 기다리라도 하는 듯이 우물가 버드나무 그늘에 앉아서 쉬고 계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으니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옵니다.

      한낮 정오 남들 다 논밭으로 일하러 나간 시간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우물가에 오는 이 여인은 어떤 여인일까요? 요즘은 마을공동체가 깨어지고 우물이 사라져 이런 경험을 할 수가 없지만, 제 기억 속의 마을은 우물이 중심입니다. 특히나 해가 뉘옄뉘옄 서산을 넘어가는 오후부터는 밭일을 마친 아낙네들이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물을 길러오거나 빨래하러 오는 여인들로 소란법석해지는 법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물을 길으러 온 것인지, 얘기를 하러 온 것인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특히나 하루 종일 아이들의 뒷바라지와 집안의 일과 밭일의 노동이라는 삼중고와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누이들의 눈총을 벗어난 어린 아낙네들의 떠들썩함과 생동성이란 오늘 아파트와 핵가족으로 살아가는 도시인들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럼에도 굳이 비슷한 경우를 생각하자면, 지난 주 수요일 정오에는 남편 이창희교수님을 따라 안식년을 미국에서 보내게 되어 한 일년넘어 떨어지는게 섭섭타하여 십여 명의 청녀신도회 아낙네들이 십여명 모여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앞에서 모인 모임이라 자연히 담임목사도 한자리 앉았습니다. 뭐 그리 남의 눈총을 받을 만큼 떠들썩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조용한 모임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집안 일손에서 벗어나 함께 만난다고 하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저도 함께 어울려 흥겨웠지요. 그런데 밥을 먹고 나오면서 자기네들끼리는 더 할 얘기가 있다고, 저보고는 들어가랩니다. 눈치없이 머뭇거리니까 들어가 일보랍니다. 나오랠 때는 언제고 들어가랄 때는 언제고. 하여간 목사는 눈치가 빨라야 합니다. 목사(牧師)가 눈치가 빠르면 눈이 네 개인 목사(目四)가 되지만, 죽으면 넉 사가 죽을 사로 변해 또 다른 목사(目死)가 됩니다.

      하여간, 우물로 다시 돌아오면, 그리하여 대낮 정오에 물 길러 오는 법은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한 여인은 항상 정오에 물을 길으러 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사람들과 만나기 싫다는 것이지요. 아니 애초부터 사람 만나기 싫은 사람은 없는 법입니다. 언제부터 모르게 싫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한데 그것은 사람들이 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떠들썩하던 소란함이 갑자기 잠잠해지고 모두들 고개를 돌리거나 돌아앉고 그리고는 들릴랑말랑 수군수군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저 여자 뻔뻔하기도 해. 지금 남편이 여섯 번째라며, 애도 못 나는 석녀라며. 소문에 과거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며, 아니 저 옷 입은 꼴 좀 봐, 아니 지가 뭐 패션쇼의 주인공이라도 되는지 아는가봐, 손톱의 빨간 메니큐어 색깔하며 야 못 봐주겠다 못 봐줘.’ 그리하여 이 여인네들 꼴 보기 싫어 정오에 물 길러 오는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보았을 때는 저 우물가 버드나무 밑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서 있는 줄 알았더니 가까이 오면서 보니 사람입니다. 그것도 남자입니다. 아마도 지나가는 길손인 모양입니다. 사람 부딪히는게 싫은 이 여인,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다시 돌아설 수도 없는 일, 모르는 길손이니 마주치지 않으면 괜찮으리라 생각하고 조심스레 우물로 다가갑니다. 역시 전혀 못 보던 이방 나그네입니다. 그런데 그분에게서 풍기는 자태나 흘끗 쳐다본 얼굴 모습이 범상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 고장 사마리아 사람이 아닌 타지방유대인입니다. 지금까지 유대인을 만나본 경험이 거의 없습니다, 더구나 남자 유대인하고는 말 한번 나눠본 적이 없습니다. 그건 그들이 자기 사마리아 사람들을 더럽다고 피해왔기 때문입니다. ‘흥, 지 놈들만 구원받겠다고, 그래 우리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한다지. 나쁜 놈들.’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어른들의 얘기가 생겨나면서 괜한 증오심이 그 나그네를 향해 솟아오릅니다. 그런데 저 남자는 뭐가 중하고 급한 일이 있어 자기네 율법을 어기고 이 사마리아 땅에 왔을까?“ 이생각저생각에 외간남자 앞에 섰으니 한편으론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도 하지만 애써 무시하며 머리에 이고 온 항아리를 내려놓고, 그 안에서 두레박을 꺼냅니다. 그 찰나 아까부터 자기를 유심히 바라보던 그 나그네가 말을 던집니다. ‘여보시오 거 아낙네 물 좀 주시오.’ 이 여인 화들짝 놀라며 첫마디 한다는 말이 ‘아니, 어찌 유대 남자가 사마리아인 저에게 물을 달라는 것입니까? 우리끼리는 말은커녕 얼굴도 서로 쳐다보지 않는 관습법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당신네들에게는 사회안전보안법이라는게 있지 않습니까?’ 지나가던 나그네가 목이 말라 물 한 모금 달라 하면 말없이 물 한바가지 퍼주는 것이 인지상정 사람됨의 마음이거늘, 이 여인 처음부터 시비조입니다. 아마도 그간 유대인에 대해 마음속에 가졌던 한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어긋난 대화 속에 담긴 숨은 해석]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예수님은 엉뚱한 얘기를 하십니다. ‘네가 물을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말을 애 둘러 하셨지만, 내용이야 분명합니다. ‘야- 너- 내가 누구인줄 알아 보통사람 아니여. 내가 너에게 물을 달라고 했지만, 난 너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줄 수 있는 사람이여.‘ 듣자하니 이 남자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습니다. 공손히 한 번 더 청했으면 물 한바가지 떠 줄라고 했는데, 뭐 생수가 어쩌고저쩌고 이 사람 주제를 모르는 사람이구만.’ ‘주여!’ 사실 여기서 주여!라고 예수님을 향해 불렀지만, 이는 통상 외간 남자를 부르는 칭호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아저씨! 당신은 물길을 그릇도 없고, 줄이 달린 두레박은 더더구나 없는데, 이 깊은 우물에서 물 한 모금 뜰 수 없는 사람이 무슨 생수를 준다는 말이요?’ 이쯤 되면 두 사람의 대화는 한쪽은 영산포로 다른 한쪽은 삼천포로 완전히 어긋난 셈입니다.

      여기서 잠깐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우물가의 대화를 중단하고 다시금 이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얘기를 다른 쪽에서 접근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이 사마리아 여인을 저는 행실이 좋지 않은 여인으로 일단 묘사하였고 대부분의 오늘의 사람들은 지금의 남편이 여섯 번째라는 말 속에서 이를 매우 당연시여깁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면 오히려 정반대의 여성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여성은 사람을 세는 숫자에 포함되지 않을 만큼 여권상실의 시대입니다. 그 시절에 여섯 번이나 결혼을 했다고 하는 것은 요즘같이 미모와 재력이 갖추어진 어떤 여성이 자의로 남성을 바꾼 것을 말한 것은 아닌 남성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든지 아니면 어떤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남성들로부터 채임을 당한 불우한 여성일 경우가 훨씬 더 실제에 가깝습니다.

      하여간 이 여인은 깨어진 자아의 모습입니다. 물 한 모금 나누기를 거부하는 이 여인의 박절함은 어디에 기인하고 있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또 다른 해석을 찾아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저자는 언제나 단어 선택이나 이야기를 함에 있어 매우 비유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고 사건 배열에 있어 공관복음서 기자의 경우보다 훨씬 심하게 매우 의도적으로 배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해복음서라는 별칭도 있습니다만, 당시의 최고의 지식계층을 대상으로 씌어졌기에 상당한 이해를 갖고 접근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서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남녀간의 결혼은 인간과 하느님간의 관계로 이해됩니다. 그러니까 여섯 번이나 바뀐 남편은 다름 아닌 이방신을 섬겼다는 것을 말함이고 이방신을 섬겼다는 말은 곧 이방 나라의 지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전부터 이 사마리아 지역을 지배했던 강대국들은 에집트와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와 페르시아와 헬라제국 그리하여 다섯 나라이고 지금은 여섯 번째 로마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향해 ‘네가 이전에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 살고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하는 말씀의 의미는 보다 분명해집니다. 다시금 우리는 성서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정치적 테두리를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만 제대로 성서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 사마리아 여인의 깨어진 자아상을 외세에 의해 지배당한 민족의 아픔으로 보면서 오늘 우리 남한 민족의 깨어진 자아상과 상처를 바라봅니다. 예를 들면 지난 주 신문을 보면서 분당의 63평 아파트가 불과 3,4년 전 8억원하던 것이 14억원이 되었다는 기사를 보면서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우려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부동산규제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 남한 민족의 자아상이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세계안의 자유를 표방하고 자본주의체제를 갖고 있는 나라가 다 이런 현상을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아는 한 유독 남한에서 그것도 오늘 새로운 세기의 문턱에서만 보여지는 기이한 현상입니다. 십 몇 억짜리가 아닌 수 억짜리 아파트만 해도 일반 서민에게는 그림의 떡입니다. 부부가 평생을 수고하여도 정상적인 벌이로는 1억마저 저축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는 뭔가 우리 사회 안에 비정상적인 돈벌이가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이고 이 비정상적인 길은 바로 비정상적인 인간성에서 나옵니다. 우리 주위에 부자는 많지만 진정한 부자가 없습니다. 통장에 29만원밖에 없다는 어떤 전직 대통령의 아들과 며느리와 그들의 아들까지도 각기 액수 미상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기사를 볼 때는 일종의 시샘을 넘어서 뭔가 마음속으로부터 쿵-- 하고 무너지는 찐한 아픔을 경험합니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인간이란게 본래 이런 것인가? 누가 알까 창피하고 부끄럽기 한량 없습니다. 공동체라는 민족성 자체가 고갈되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자신할 수 있는 고유한 것을 상실한데서 오는 정신착란적 사회현상입니다. 무엇 때문인가? 수천 년간 외세에 시달려온 피지배역사 때문입니다. 제가 명명하여 부르기를 반도정신착란증후군입니다. 처녀가 여러 남자들에 의해 강간을 당하면 죽거나 미치지나 둘 중의 하나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명나라 원나라 청나라 일본 러시아 미국에 점령당하여 오는 가운데 우리도 모르게 미쳐버린 것입니다.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일본군의 장교이자 죽지 않았으면 평생을 군림하였을 독재자 박정희에 대한 향수는 무엇을 말합니까? 자유보다는 빵을 택하겠다는 정신병자의 증후군입니다.

      전 여기서 우리가 살기 위해서 바로 살기 위해서 오늘 예수님께서 외치시는 ‘목마른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하는 메시지에 더욱 귀를 기울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의 진리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려야 할 때라는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외친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되는 것을 얻으려고 배부르게도 하지 못하는 것을 위하여 돈을 쓰느냐?’는 책망은 2,600년 전 바벨론의 신자유주의에 정신을 빼앗겼던 유대인들을 향한 외침이 아닌 오늘의 우리를 향한 책망인 것입니다. 한미정상회담의 결과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의 동향과 주식의 주가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계속하여 이사야 선지자와 예수님은 외치시시를 ‘귀를 기울리고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말을 들어라 너희에게 생기가 솟으리라.’

      [존재 그리고 소유]

      미국의 사회학자 에릭 프롬이 30년 전에 말한바 To be or To have? 존재냐 소유냐? 하는 질문에 빗대어 얘기할 수 있습니다.
      아니 30년 전에야 To be or To have?가 바른 질문이 되었겠지만 지금은 To be and To have가 보다 바른 질문과 해답이 될 것입니다. 존재와 소유는 둘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선 취해야 할 것이 먼저 있습니다. 존재가 먼저 서면 그의 소유도 바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소유가 먼저 서면 그의 존재마저도 소유화되어 그 인간은 피폐함을 면치 못합니다. 그리하여 물 한 모금 달라는 나그네의 요청에 당신은 유대인 남자로서 어찌 나에게 물을 달라 할 수 있는가? 하는 깨어진 자아의 울림이 울려나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외치신 말씀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는 말씀의 해석도 중요하지만, 이 말씀의 시점인 ‘그 명절의 고비가 되는 마지막 날에’라는 때의 해석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그 명절이란 초막절을 말합니다. 초막절은 유월절 오순절과 더불어 유대인 3대 절기 중 하나이지만, 가장 크게 지키는 절기이기에 그냥 명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절기는 본래 자신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느님의 인도하심 따라서 살아온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일주일동안 집 앞 마당에 얼기설기 나뭇가지와 잎사귀로 대강의 초막을 짓고 거기서 지내었기에 초막절이라 불리웠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때는 모든 곡식과 올리브와 포도를 수확하여 장막에다 보관하는 추수의 절기였기에 때로는 장막절이라고도 불리웁니다. 기쁨과 수확의 절기에 그냥 즐기지만 하지 않고 부려 초막을 짓고 그 안에 들어가 살았다는 이 말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초막 속에서 살면서 조상들의 어려웠던 시기를 기억하였는데 그 때는 풍성한 추수를 얻고 난 때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유대인들과 한국인들의 차이입니다. 아까 14억짜리 아파트 얘기를 하였습니다만, 그 아파트를 사시는 분이 여기 계시면 그 마음이 매우 불편할 것입니다. 내가 언제 남의 돈을 훔쳤는가? 제가 말하는 요점은 그게 아닙니다. 유대사람들의 경험에 비추어 말하면, 그 14억짜리를 산 이후 참으로 감사하여 예전 내가 어려웠던 시절을 기억하며 그 판자촌을 한번 가본다든가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감사함을 잊지 않기 위해 그런 누더기 같은 천막을 실제로 지어놓고 그 안에 가족이 들어가 며칠을 보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느냐? 는 마음의 태도를 묻는 것입니다. 아니면 20억짜리 아파트를 찾지는 않았느냐?는 질문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유대인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재벌 유대인들은 지금도 21세기를 넘어선 지금도 초막을 짓고 살아가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스라엘에서는 호텔에서도 그 앞에 초막을 지어놓습니다. 그리하여 원하는 숙객들은 잠은 거기서 자고 돈은 호텔비용을 지불합니다.

      편한 집을 두고 초막에서 지내면 자연히 아이들이 왜 여기서 잠을 자야하는지에 대해서 묻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출애굽에 나오는 얘기를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으로 시작하여 이삭 야곱의 이야기 요셉의 에집트의 총리가 된 이야기 그리하여 그 형제들이 모두 에집트로 내려간 이야기 이후 이들이 강성하여 히브리 민족을 형성하였지만, 노예로서 살아가야만 했던 불행한 이야기 거기서 모세가 등장하고 파라오 왕과 대결하여 끝내는 홍해를 건너고 에집트의 군사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는 이야기 속에서 아이들은 모두 박장대소를 하며 좋아합니다. 그리곤 이후 40년의 광야에서 살아간 조상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인생을 배웁니다. 수없이 들어왔던 얘기이지만 유대인 자녀들은 들을 때마다 그들의 눈총은 빛이 납니다. 더구나 학교에서 책으로 배웠을 때와는 달리 아버지를 통해 초막 속에서 밤하늘의 별과 달을 바라보면서 듣는 지금 그 얘기는 눈으로 보는 듯이 실감이 납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진정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고 민족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느님의 능력의 위대함을 깨닫고 감사가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저는 우리 민족에게도 이러한 훈련이 가정에서 이루어지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잘 먹고 잘사는 것만을 가르치는 곳이 아닌 낮아짐의 훈련이 있는 곳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럴려면 우리 부모세대부터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부모부터 훈련에 참가를 해야 하는데, 그저 쉽게쉽게 편하게편하게 믿으려고 합니다.

      [샘솟는 물]

      하여간 이게 초막절을 지키는 일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또 다른 특이한 예식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매일 아침 제사장은 금주전자를 들고 예루살렘 성전 남동쪽에 있는 기혼샘으로 내려갑니다. 그 기혼샘은 성전안의 실로암 샘물을 채우는 물의 근원지입니다. 곧 예루살렘 성전 사람들의 생명의 근원지이기도 합니다. 거기서 제사장이 금주전자에 물을 채워 높이 들면 성가대가 찬양의 노래를 힘차게 부릅니다. 그 가사는 이러합니다. 이사야 12장 3절 이하의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그날에 너희는 야훼께 감사 하여라 그의 이름을 외쳐 불러라 그가 하신 큰일을 만민에게 알려라 그 높으신 이름을 잊지 않게 하여라. 야훼를 찬양 하여라 그가 큰일을 하셨다.’ 성가대의 힘찬 찬양에 백성들 또한 화답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 화답의 노래는 시편 113편에서 118편까지의 할렐루야로 시작하는 찬양입니다. 이 찬양을 부르며 ‘수문(水門)’이라 불리우는 예루살렘 성전 대문을 통하여 법궤가 놓인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이때 백성들은 오른손에는 초막의 재료인 나뭇가지와 종려잎사귀를 들고 있고 왼손에는 추수의 상징인 레몬 하나를 들고 있습니다. 그리곤 마침내 제단에 도착하면 제단 주위를 돌면서 118편 25절을 반복하여 부릅니다. ‘주소서 야훼여 구원을 주소서. 주소서 야훼여 승리를 주소서.’ 그리하여 찬양이 절정에 오르면 제사장은 금주전자를 들고 제단 위로 올라가 은으로 된 깔대기에 그 물을 붓습니다. 그러면 그 물은 깔대기를 타고 내려와 제단 아래 대지를 흠뻑 적십니다. 목마른 대지 목마른 영혼에 하느님의 은혜 혹은 하느님의 영이 하느님의 말씀이 충만히 임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렇게 하여 하루의 아침 예식이 끝납니다. 이렇게 하기를 일주일 일곱 번을 반복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목 마른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고 외치신 그 때는 바로 이 일곱 번의 반복이 있어 그 예식이 가장 최고조로 오른 그날 제사장이 주전자로 제단에서 땅으로 물을 붓는 바로 그때에 외치신 것입니다. 그냥 외치신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외치신 것입니다. 그간 성전 안에서 앉아서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칠 일째 되는 그 절정기에 일어서서 외치신 것입니다. 그냥 일어서서 외치신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 본문은 ekraxen이라 하여 아주 큰 소리로 온 몸을 쥐어짜는 듯한 격정적인 큰 소리로 외치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어 표현에 cried out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절박한 심정으로. 지금 바로 7장 초두에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그 위기의 순간에 큰 소리로, 떠들썩한 군중들의 찬양소리를 잠재울만큼 큰 소리로... ‘들어라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성전 뜰에 모인 백성들아 거기에 생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있다. 목마른 사람들아 나에게로 오너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예수님이 외치신 샘솟는 물 곧 생수. 이는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수가성의 여인이 달라고 했던 그 생수. 다시는 샘물에 물을 길러올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그 생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런데 이 여인은 그래서 그 생수를 마셨나요? 마셨나요 마시지 못했나요? 마셨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요. 이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나서 크게 깨달아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곤 외쳤습니다. ‘마을 여러분, 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나의 과거를 다 알고 내 속영혼의 갈급함을 알고 이를 채워준 한분을 만났습니다. 이분을 만나보세요.’ 과거가 부끄럽다고 사람들을 피해 다니던 이 여인이, 자아상이 깨어져 열등감 속에서 애궂은 자기의 가슴만 쳐대며 살아왔던 이 여인이 동네 안으로 들어가 소리를 쳐대었으니 이게 생수를 마신게 아니고 무엇입니까? 물 뜨러 왔다 물동이 버려두고 갔으니 변화를 받아도 단단히 받은 것입니다.

      그간 이 여인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남편 다섯을 바꾸었지만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남편을 데려오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남편이 없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의지의 대상입니다. 지금 있는 남편은 의지할 수 없는 허구라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참 남편이 누구냐? 예수님은 외치십니다. 나에게로 와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그는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또 다른 곳에서 요한복음은 외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예수의 참 생명을 접한 사람은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나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속이라는 본래의 희랍어 단어는 kailias라는 배라는 말입니다. 뱃속에서 생수가 나올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의미입니까? 뱃속에서. 배는 위가 있고 창자가 있고 똥이 만들어지는 곳입니다. 자고로 서양인들은 인간의 근본이 심장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더러운 피가 모여 깨끗해져 온 몸 사방으로 보내는 곳이 심장이기에 당연히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이스라엘 민족은 심장이 아닌 배로 보았습니다. 히브리어로 인간의 생명 '네페쉬’는 배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음식논쟁을 하실 때에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사람의 배속에서 나오는 시기와 욕심이 더러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각의 근원지로 보신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성서의 히브리적 사고와 동양적 사고가 근본적으로 일치하고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배는 단순한 위가 있는 창자를 일컫기 보다는 동양에서 말하는 단전(丹田)입니다. 동양은 사람의 생명은 단전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자연의 생명력은 단전을 통해 들어온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도 물론 심장을 감정의 근원지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흥분하면 가슴이 두근두근거린다고 말하지 단전이 두근두근거린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한(恨)이라는 감정 저 너머의 깊은 감정을 생각해보면 이 한은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 보다 더 깊은 가슴 곧 단전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서의 히브리적 인간 이해는 본질적으로 서양적 보다는 동양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동서양의 분기점에서 시작해 서양으로 먼저 전해진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저는 아직 판단은 서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본문은 이 샘물처럼 흐르는 생수를 성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누구이십니까? 성령은 하느님 예수그리스도와 더불어 삼위일체 하느님 중의 한분이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이는 동격이신 성자 하느님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얘기이지만, 피조물인 인간이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개미가 지네들끼리 부흥회를 하면서 인간의 영을 받으라! 웃기는 얘기입니다. 개미라고 하니까 조금 감이 안오는 것 같은데 강아지가 지네들끼리 모여 부흥회를 하면서 인간의 영을 받으라! 웃기는 것입니다. 성령은 곧 하느님의 영이시자 곧 하느님 자신이십니다.

      예수께서 외치신 말씀은 진정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들은 그 뱃속에서부터 샘물같은 생명력이 넘쳐 나오게 될 것인데, 이는 바로 그 안에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어 흥분한다고 해서 다 성령 안에 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 이하로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열매가 맺혀지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가 우리의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너희 몸이 성령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 몸 안에 거하십니다. 그 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려보시기 바랍니다. 내 밖의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고 내 안의 영의 소리에 귀를 기울려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리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수가성의 여인처럼 이러 저리 안식을 찾아 남편을 바꾸면서 살아왔습니다.
      아파트를 바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를 바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브랜드를 따라 옷과 핸드백과 신발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이 사회는 자녀들에게 대학의 졸업장이 일류회사의 고용계약서가 네가 의지해야 할 남편이라고 가르칩니다.
      더 크게 민족적으로는 강대국의 외세가 네가 의지해야 할 남편이라고 믿어왔습니다.
      시대를 따라 중국이 러시아가 일본이 그리고 미국이 우리의 남편 노릇을 대신하여 왔습니다.
      바벨로니아에서 생산되는 브랜드 제품에 마음을 빼앗긴 유대 백성을 향해 제2이사야 선지자는 외칩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들을 위해 돈을 지불하느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
      떡도 중요하겠지만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붙들어라.
      외세도 중요하겠지만, 먼저 하느님의 능력을 붙들어라.
      이 하느님의 능력은 우리 민족의 뱃속에 우리 한반도의 단전 속에 있습니다.
      밖을 보지 말고 우리 안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 이 민족을 살리는 생명의 물이 샘물처럼 솟아나오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물은 끝내 차고 넘쳐 온 세상을 적실 것입니다.

      단전호흡(丹田呼吸)
      체육 단전으로 숨을 쉬는 정신 수련법의 하나.



      • 1. 삼단전의 하나. 도가(道家)에서 배꼽 아래를 이르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배꼽 아래 한 치 다섯 푼 되는 곳으로 여기에 힘을 주면 건강과 용기를 얻는다고 한다.
      • 2.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상, 중, 하의 세 단전. 상단전은 뇌를, 중단전은 심장을, 하단전은 배꼽 아래를 이른다.

      김익두 목사는 깡패가 회심하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친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한국 교회 역사상 가장 능력을 많이 행한 신유의 은사자로 유명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김익두 목사는 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한 난치병 환자를 2만여 명이나 안수 기도하여 고쳤으며 280여 개의 교회를 세웠고 200여 명의 신학생들을 공부시켰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6.25사변 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하였습니다.

      전도사 시절, 그는 길을 가다가 앉은뱅이 거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앉은뱅이 거지를 보자 갑자기 사도행전 3:1-10 절 말씀, 곧 베드로가 미문 앞에서 행한 이적이 생각이 나면서 자기도 앉은뱅이를 낫게 하고픈 마음이 불현듯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는 ‘한번 해 보자.’ 는 결심하고 한적한 과수원 돌담 밑으로 그 거지를 업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대뜸 그 거지를 향하여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이름으로 일어나라!”하면서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나기는커녕 앉은뱅이 거지가 아파서 죽겠다고 “살려 달라고” 난리를 쳤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김익두 전도사는 크게 좌절하고 하나님께 몸부림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왜 나는 성경대로 안 됩니까?” 몸부림치며 기도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큰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큰 문제가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김익두 전도사는 사도행전3:1-10 말씀에 대한 자신의 관심이 온통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에만 있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 말씀의 초점이 기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를 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높이고 예수님의 마음만 품기로 결단을 하였습니다.

      김익두 전도사는 다시 그 앉은뱅이를 찾아갔습니다. 이번에는 그를 교회로 업고 가서 예배당에 그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거지 앉은뱅이에게 진심으로 지난번 자기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주님의 마음을 품고 진정으로 앉은뱅이의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를 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앉은뱅이가 일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지도 않았는데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이후로 김익두 목사는 병자의 병을 고치려고 하기보다는 그 가운데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김익두목사는 이후 난치병 환자 2만 여명을 낫게 하는 수많은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는 귀한 종으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행 3:6-8)”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로 향하십시요. 내 속에 성령으로 내주, 역사하시는 예수님에게 시선을 집중하십시다. 세상을 향하던 세상을 의지하던 시선을 주님께로 시선을 집중하는 순간부터 역사는 일어납니다.
































































































































































































































































































































































































































































      2025 새벽묵상 사무엘상


      4월 5일(토) 사무엘상 30-3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를 힘입고(삼상 30:6)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David was greatly distressed because the men were talking of stoning him; each one was bitter in spirit because of his sons and daughters. But David found strength in the LORD his God.

      여호와를 힘입고(strength in the LORD his God)






      4월 4일(금) 사무엘상 27-2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접한 여인(삼상 28:7)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Saul then said to his attendants, "Find me a woman who is a medium, so I may go and inquire of her." "There is one in Endor," they said.

      신접한 여인(a woman who is a medium)

      개역개정 / 신접한 여인
      현대인 / 영매
      공동번역, 새번역 / 무당

      KJV. a woman that hath a familiar spirit,

      NASB. a woman who is a medium

      새한글 / 7사울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죽은 사람의 영을 불러내는 여자를 나를 위해 찾아 보세요. 내가 그에게 가서 물어봐야겠소.” 신하들이 그에게 말했다. “저기, 죽은 사람의 영을 불러내는 여자가 엔돌에 있습니다.”








      4월 3일(목) 사무엘상 24-2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삼상 25:26)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계시거니와 내 주의 으로 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Now since the LORD has kept you, my master, from bloodshed and from avenging yourself with your own hands, as surely as the LORD lives and as you live, may your enemies and all who intend to harm my master be like Nabal.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Jehovah has stopped it)













      4월 2일(수) 사무엘상 21-2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천천 만만(삼상 21: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But the servants of Achish said to him, "Isn't this David, the king of the land? Isn't he the one they sing about in their dances: " 'Saul has slain his thousands, and David his tens of thousands'?"

      천천만만(thousands & tens of thousands)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1-30)

      사무엘상 18장 설교말씀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말하면서 백성이 다윗을 칭송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오자 백성이 다윗을 사울보다 칭찬했습니다.
      사울왕은 이런 다윗에게 시기하여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울은 사람이 원해서 세운 왕이기에 시기가 많습니다.
      자기보다 칭찬을 받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원해서 세운 왕입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함(1-3)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그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 아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였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왔을 때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의 생명과 같이 사랑하였다.
      그것은 다윗이 여호와의 백성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놓고 싸움에 나아가 원수 골리앗을 쳐 물리치고 이스라엘에 승리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요나단은 자기가 하지 못하던 그 일을 다윗이 해 주었으니 다윗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가장 존귀히 여길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일 다윗이 아니었더라면 이번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패하고 모두 블레셋 사람의 종이 될 뻔하였다.
      요나단은 모든 것을 바로 보고 판단하여 이스라엘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워 준 다윗이 고맙고 사랑스러워 자기의 생명과 같이 귀히 여기고 사랑한 것이다.

      다윗이 군장이 됨(4-5)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다윗이 사울의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로 군대의 장을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요나단이 다윗을 생명과 같이 사랑하므로 무엇이든지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원수가 다 빼앗아 갈 뻔하였는데 다윗으로 인하여 빼앗기지 않았으니 다윗에게 그것들을 다 준다고 하여도 아까울 것이 없는 것이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생명을 건져 준 까닭에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의 생명같이 사랑하여 자기의 겉옷, 군복, 칼, 활, 띠를 다 벗어 다윗에게 주었다.

      새 것으로 만들어 주어도 될 것인데 왜 자기의 것을 주었을까?
      요나단이 자기의 군복, 칼, 활, 띠를 벗어서 다윗에게 준 것은 자기의 지위와 직무를 다윗에게 물려주는 의미가 있다.
      다윗이 나타나기 전에는 요나단이 사울왕 다음의 지위를 가졌었다.
      이스라엘 군대를 두 부대로 나누어서 한 군대는 사울이 거느렸고 한 군대는 요나단이 거느렸었다(13:2).

      요나단은 실제로 군대 장관으로 큰 전공(戰功)을 세우기도 하였다(14:1-15).
      요나단이 지금 왕의 다음 가는 자리에 있고 자기 아버지가 죽으면 자기가 왕이 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귀중한 자리를 다윗에게 양보한 것은 요나단이 훌륭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요나단은 자기의 지위나 영광보다 이스라엘 나라가 잘되기만 바라고 자기가 하는 것보다 다윗이 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다면 아까운 생각 없이 자기 자리를 다윗에게 물려주려는 신앙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번에 골리앗과의 싸움으로 다윗이 자기보다 유능한 것을 확실히 깨달은 요나단은 자기의 지위, 직무, 권한을 다윗에게 넘겨주었다.
      이것은 양심적이고 원리 원칙에 맞는 일이다. 세상에서는 자기의 능력이 부족한 줄 알면서도 자기의 명예와 유익을 위하여 기어코 자기가 해야 한다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많이 있다.
      나라는 잘되든지 말든지 자기만 좋은 자리를 차지하여 권세와 영광을 누리려고 한다.
      그리하여 자기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남을 비방하며 윗사람에게 아부하여 여러 가지 죄악이 판을 친다.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일이야 잘되든지 말든지 자기만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자가 있다.
      자기가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높은 직분을 맡겠다고 하며, 자기보다 유능한 사람이 나와도 그 자리를 내어 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맡아 가지고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고 앉아 있으려고 하므로 정작 일을 할 사람이 일을 못하고 전체(국가, 교회, 단체)에 큰 손해를 끼치게 된다.

      자기보다 나은 다윗을 사랑하고 아끼며 그에게 자기의 자리를 내어 주는 요나단의 행동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상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하다.
      다윗이 맡아서 하나님의 일만 잘되면 자기도 축복에 참여할 줄 아는 요나단이야말로 참으로 지혜 있는 자요 참으로 자기를 위할 줄 아는 사람이다.
      요나단의 너그러운 마음가짐과 자기 개인보다 전체를 위하는 마음, 자기의 권세나 명예, 영광보다 하나님의 뜻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열매인 것이다.

      다윗이 사울의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지혜롭게 행동하고 믿음으로 하므로 모든 것이 성공되어 이스라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가는 곳마다 승리하게 되었고 사울은 이러한 다원에게 귀한 직분(군대의 장)을 맡겼다.
      온 백성과 신하들도 그것을 합당하게 생각하였다. 사울이 다윗에게 요직(要職)을 맡긴 것은 잘한 일이다.
      사울왕이 끝까지 다윗을 잘 사용했다면 이스라엘을 위하여서나 사울 자신을 위하여 크게 유익했을 것이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함(6-19)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하고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이스라엘 각 성에서 여인들이 나와 환영하며 기뻐서 춤도 추고 노래하기를 “사울이 죽인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라고 하였다.
      여인들의 노래 내용이 좋지 않았다.
      똑같이 “만만이로다”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사울은 천천이라고 하여 사울을 시험에 들게 하였다.
      자기에게는 천천을,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니까 사울왕이 온 백성이 자기보다 다윗을 더 좋게 생각하는 것으로 알고 나라가 다윗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염려하여 시험에 든 것이다.

      여인들이 너무 경솔하게 노래를 하였다.
      마음속으로는 다윗을 사울보다 더 좋게 여길지라도 그렇게 표현하면 안 된다.
      또 아무리 다윗의 공로가 크지만 왕보다 더 높이는 것은 왕으로서 불쾌한 일이다.
      여자들이 경솔하여 왕과 다윗에게 큰 손해를 주었다.
      여인들이 다윗을 볼 때 다윗이 참 훌륭하고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더라도 왕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다윗 위에 왕이 있으니 왕을 존경하고 나서 다윗을 존경해야 한다.

      누가 무엇 하나 잘해 놓으면 다른 사람이 시기 할만큼 칭찬하고 높여 주는 것은 도리어 시험거리가 된다.
      사람을 자주 칭찬하고 높여 주면 그것이 마귀의 역사인 줄 알아야 한다(눅 6:26).
      가정에서도 아이가 둘이 있다면 둘 다 잘한다고 해야지 한 아이만 잘한다고 하면, 한 아이는 마귀의 시험에 들어 마음속에 불만이 생기고 불만이 시기로 변하고 마지막에는 큰 죄를 짓게 될 수 있다.

      • 18:10-11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성경에서 천사가 '만만이요 천천'의 의미는? - 비밀이 있습니다.

      내가 또 보니, 그 보좌와 짐승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들의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kjv)(개역)(계5;11)


      사단의 지상군대(아마겟돈)

      "기병대의 수는 이억이니 내가 그들의 숫자를 들었노라."(kjv)(계9;16)(이만만; 개역) 

      예수님의 지상 재림시,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유1;14)


      “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단 7:9-10)(kjv; 수백만, 수천만)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시68;17)(kjv;병거 이만,천사 수천)

       "내가 그에게 경배하려고 그의 발 앞에 엎드리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삼가 그리하지 말라. 나는 예수의 증거를 가진 네 형제들과 같은 동료 종이니, 하나님께 경배하라. 이는 예수의 증거가 예언의 영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계19;10)

      "또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정결한 세마포를 입고 흰 말들을 타고 그를 따르더라. "(계19;14)

      저가 내게 말하가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된 종이니(KJV.  나도 선지자들인 네 형제들과 이 책의 말씀들을 지키는 자들과 같은 너희 동료 종이니 ) 그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계22;9)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으니, 이는 그들이 천사들과 동등하며 또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라.(눅20;34-36)

      참조;

      "그때 여인들이 뛰놀며 서로 화답하여 말하기를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수만이라.” 한지라."(kjv) (삼상18;7)(천천,만만;개역)

      시종하는 자 천천(1,000,000명)이요,  시위하는 자 만만(1,00,000,000명)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돌아온 다음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렸다. 사울이 본격적으로 마귀에게 걸려들었다. 사울이 집 가운데서 날뛰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수금을 타는데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두 번이나 창을 던지므로 다윗이 두 번 피하였다. 이것은 사울이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않으며 사람의 뜻만 생각하고, 또 자기의 지위를 지키는데만 급급하고 그것만을 귀중히 여기므로 마귀가 그 속에 들어가 번민하게 하고 야료하게(소리지르고 떠들게) 만든 것이다.

      사울이 다윗을 볼 때 자꾸 미운 생각이 들고 마침내는 죽여야겠다고 결심하여 단창을 던진 것이다. 다윗을 자기보다 잘했다고 칭찬하더라도 그런 것에 마음 쓰지 말고 다윗을 잘 이용했더라면 이스라엘 나라가 잘될 것이고 사울에게도 아주 유익하였을 것인데 어리석게도 다윗을 이용하지 못하고 죽이려고 하여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이다.

      사울이 자기의 왕위를 빼앗길까 보아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다. 사울이 왕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다윗이 아무리 잘해도 자기에게 일생동안 수종만 들었을 것이고 또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기가 다윗을 죽이려고 하여도 죽이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자기가 손해를 볼 것인데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뜻만 생각하여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된 것이다. 사울은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였고, 하늘 나라(이스라엘)가 잘되는데 목표를 두지 않고 어떻게 해야 자기가 왕 노릇을 오래 하겠느냐에 목표를 두었다. 목표 설정을 잘못하였으므로 일은 비뚤어지게 되어 있다.

      • 18:12-19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이 그로 자기를 떠나게 하고 천부장을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사울이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함을 인함이었더라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맹을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말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비의 집이 무엇이관대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하였더니 사울의 딸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흘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준 바 되었더라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고, 보호하셔서 죽지 않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막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므로 사울이 두려워하여 다윗을 천부장으로 삼아서 멀리 보냈다.

      그러나 다윗은 백성 앞에 출입하며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였으므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든 족속이 다윗을 사랑하였다.

      사울은 자기의 맏딸 메랍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어 왕에게 충성하게 하고 그 충성심을 이용하여 전쟁터에 내어 보내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나 자기의 가문을 볼 때 왕의 사위가 될 만한 자격이 없다고 사양하였다. 여기에서도 다윗이 겸손하고 자신을 바로 보는 지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울의 딸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줌(20-30)

      • 18:20-25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혹이 사울에게 고한지라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 스스로 이르되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리라 하고 이에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오늘 다시 내 사위가 되리라 하니라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명하되 너희는 다윗에게 비밀히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왕이 너를 기뻐하시고 모든 신하도 너를 사랑하나니 그런즉 네가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가하니라 하라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로 다윗의 귀에 고하매 다윗이 가로되 왕의 사위 되는 것을 너희는 경한 일로 보느냐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로라 한지라 사울의 신하들이 사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여차여차히 말하더이다 사울이 가로되 너희는 다윗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왕이 아무 폐백도 원치 아니하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원하신다 하라 하였으니 이는 사울의 생각에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리라 함이라

      사울의 작은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였고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그것을 말해 주었다. 사울은 그것을 좋게 여겨 다윗에게 미갈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고 그것을 올무로 삼아 블레셋 사람과 싸우게 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다원을 죽게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사울은 신하를 시켜 왕이 자기의 딸 미갈을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니 왕의 사위가 되라고 다윗에게 권하게 하였다. 다윗은 이 말을 듣고 왕의 사위가 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며 자기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인데 어떻게 왕의 사위가 되겠느냐고 말하였다. 이에 사울 왕이 다시 신하를 시켜 왕은 아무 폐백도 원치 않으시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원하신다고 전하게 하였다. 이것은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려고 한 것이다.

      • 18:26-27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로 다윗에게 고하매 다윗이 왕의 사위되는 것을 좋게 여기므로 만기가 되지 못하여서 다윗이 일어나서 그 종자와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 그 양피를 가져다가 수대로 왕께 드려 왕의 사위가 되고자 하니 사울이 그 딸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다윗이 왕의 사위 되는 것을 좋게 여겨 그 종자와 함께 나아가서 원수를 이백 명이나 죽여 양피를 베어 수(數)대로 왕에게 주니 왕은 자기 딸 미갈을 주어 다윗의 아내가 되게 하였다.

      사울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 백 명을 죽일 동안에 전사할 줄 알았는데 이백 명이나 죽이고도 죽지 않았으므로 이제는 딸을 주어 차차로 죽이려고 생각하였다. 사울의 딸이 아주 불쌍하다. 사울이 자기 중심으로 나아가면서 자기 딸의 앞길도 생각하지 않고, 딸은 불행하게 되든 말든 자기의 목적만 달성하려고 하였다. 권력에 욕심이 끌리면 자기 자녀도 돌보지 않는 법이다. 자기 아들을 죽이고 왕이 된 사람, 자기의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된 사람이 인류 역사에 많이 있다. 왕의 자리라는 것은 부자간 부부간도 없다. 세상 권세는 이렇게 악하고 추잡한 것이다.

      사울이 이렇게 악하고 더러운 죄악 가운데 빠졌으니 참으로 불쌍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세운 다윗을 막으려고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절대로 막지 못한다. 아무리 수단 방법을 다 써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아 보려고 하여도 막을 수가 없고 자기만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망하게 된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막는 자는 다 이렇게 어리석은 가운데 빠지게 되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협력하고 나아가는 자가 복을 받는다.

      하나님의 나라만 잘되게 만들어야겠다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고, 자기중심에 빠져서 자기가 잘 되야겠다고 하는 사람은 사울왕과 같이 비참한 가운데 빠진다. 성도는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만 잘되게 하고 하나님의 의만 이루어 가려고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만 잘되면 자기는 낮아져도, 멸시를 받아도, 환난과 궁핍을 당해도 좋다는 생각으로 나가야 한다. 이것이 신앙의 길이요 복을 받는 길이다.

      • 18:28-30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사울이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나오면 그들의 나올 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 이름이 심히 귀중히 되니라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는 것을 사울이 보고 알았으며 사울의 딸 미갈도 다윗을 사랑하므로 사울의 인간적인 모든 계획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므로 사울이 더욱 다윗을 두려워하였고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는 것을 면서 사울이 다윗의 대적이 되는 것은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블레셋 사람의 방백이 나오면 그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였고 그로 인하여 다윗의 명성은 점점 더 높아가기만 하였다.




      여호와의 구원

      신명기 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사무엘상 14:6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사무엘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열왕기하 13:17
      가로되 동편 창을 여소서 곧 열매 엘리사가 가로되 쏘소서 곧 쏘매 엘리사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예레미야애가 3: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4월 1일(화) 사무엘상 17-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All those gathered here will know that it is not by sword or spear that the LORD saves; for the battle is the LORD's, and he will give all of you into our hands."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the battle is the LORD's)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정신은 무저항 ․ 비폭력입니다. 
      누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라, 악으로 악을 이기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구약성경에는 왜 이렇게 전쟁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느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전쟁을 하게 하시는 것뿐만이 아니고 전쟁이 하나님께 속했다라고 까지 말씀하시지 않느냐. 
      신약과 구약은 다른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느냐?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이 하나님은 다르시냐.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서 오신 것이냐. 

      우리는 어떤 것을 믿어야 되느냐. 
      이것은 이 시대에 아주 신학적인 질문이고 제가 거기에 대한 모든 답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에게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행위에 대하여 다 사람들의 양해를 구하셔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그것이 필요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단계적으로 계시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다 똑같은 수학이라도 초등학생을 위한 수학과 대학생을 위한 수학이 같을 수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 옛날에 초보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에 대하여 다 계시하실 수도 없었던 것이고 다 계시하실 필요도 없었던 것이고 또 다 계시하셨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말씀 중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이 많으시고 하나님은 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같은 성품과 같은 의도와 같은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계시라고 보는 것입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했습니다. 
      군대에서도 가장 최근의 명령이 그 이전의 어떤 명령보다도 우선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령에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면 가장 최근 것을 따르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장 최근이고 가장 최우선입니다. 

      히브리서 1장 1절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의 마지막 날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가장 최근의 계시요 가장 최종적인 계시요 예수님 이후에는 더 이상의 선지자나 더 이상의 계시가 없습니다. 

      또 하나 알 것은 구약성경은 여러모로 신약성경의 모형이요 그림자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구약 성경을 읽고 해석해야 됩니다. 구약에서의 가나안땅은 천국에 대한 모형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나 가나안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저 중한 짐을 벗어버렸네’라고 찬송을 부를 때 이스라엘 땅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찬송가가 되는 것입니다. 

      또 구약 성경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게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주셨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기업이라 하면 영적인 것이고 또 하늘나라에 속한 것이고 성령에 속한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와 축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사건과 많은 말씀과 인물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될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관점에서 구약을 읽을 때에 그 모든 것을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성품을 제대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알아야 면장이라도 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멸망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시대는 정보화시대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가 믿는바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기독교의 교리에 대하여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어야 신앙을 대적하고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답변을 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모든 면에 있어서 지식이 넘칩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정보가 넘칩니다. 

      그런데도 오로지 기독교인들만이 자신들이 믿는 신앙에 대해서 은혜라는 명목으로 또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명목으로 공부하려고 하지 않고 배우려고 하지 않고 성경말씀을 연구하려고 하지 않고 신학적인 깊이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 그것을 물리쳤습니다. 

      그랬더니 마귀가 이제는 성경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 91편에 ‘하나님이 천사로 너를 받쳐서 상하지 않게 하리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마귀도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당신의 백성을 넘어뜨리려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마귀보다도 더 성경을 잘 알아야 되고 성경의 신학적인 안목을 갖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인용한다고 해서 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요 성경을 그릇된 목적으로 왜곡된 목적으로 잘못 이용하는 사람도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과거에 차범근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으로 있을 때 한국 팀이 골을 넣으면 감사기도를 드렸지요. 
      그것을 보고 어떤 지성인이 성경말씀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공격했습니다. 
      인용한 말씀은 ‘예수님이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하느냐.’ 
      그 성경구절을 인용한 사람이 평소에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한다면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성경구절은 인용한 목적은 자기가 평소에 골방에서 기도하기 때문이 아니고 누가 사람들 보는 앞에서 자기의 기독교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퍼뜨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더 많이 받아들이고 인기를 얻을까 싫어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외국에 나갔을 때 누가 대한민국을 욕하고 대한민국을 흉보고 업신여길 때 당연히 우리 마음속에 울분을 느끼고 분노를 느낍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닙니다. 
      그러나 왜 누가 기독교 신앙을 욕하고 교회를 흉볼 때 우리는 동일한 울분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까. 
      왜 누가 신앙에 실족하고 교회를 멀리하고 또 죄를 짓고 또 멀어질 때 왜 우리가 마음속에 염려하지 않고 거기에 대해서 마음속에 어떤 번민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것은 결국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결국 예수님의 복음에 대하여 내가 예수님 편에 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소속감과 충성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고 믿던 사람이 실족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그는 히브리백성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 심히 고민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충성이 있고 복음에 대한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변에 예수를 안 믿는 사람 뿐만이 아니고 예수님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 욕하는 사람, 기독교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속에 아무런 자극도 아무런 충동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 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이고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이고 결국 나의 소속이 불확실한 것입니다. 

      소속이 불확실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부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대한민국을 욕해도 우리가 울분을 느끼는데 왜 하나님을 욕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욕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까. 

      의로운 분노라는 것이 있습니다. 
      의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국의 스펄전 목사는 나는 화가 났을 때 설교를 더 잘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화가 났을 때 설교를 더 잘할까?
      그러나 다윗이 골리앗에 대해서 화가 났기 때문에 나가서 싸운 것입니다. 
      골리앗이 싸움 돋우는 자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champion이라고 했는데 챔피언이라는 말이 원래는 싸움을 돋우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시작한 게 아니고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에 싸움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그가 나와서 ‘너희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군대여 너희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라면 너희 중에 한 사람을 보내어 나와 싸우게 하라’고 도전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도전에 응하지 않고 다 두려워하고 다 위축되고 다 숨기 바빴습니다. 
      유일하게 소년 다윗이 골리앗이 하는 말을 듣고 마음속에 울분을 느꼈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저 할례 없는 자가 누구관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느냐’ 그래서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간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방법과 마찬가지에요. 

      골리앗이 물리적인 전쟁을 하기 이전에 심리적으로 이스라엘을 위축시키려고 했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시험하려고 할 때 먼저 우리의 신앙을 위축시키려고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을 위축시키려고 합니다. 
      우리의 내면에 두려움을 가져다주고 우리 내면에 의심을 가져다주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축소시키려고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는 방법이에요. 
      그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시험에 굴복해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믿음이 넘어지고 마음속에 절망하고 이렇게 되면 결국은 마귀가 들어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욥기를 보면 욥이 환란을 당했을 때 욥의 아내가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 이것은 그 아내의 입을 통하여 마귀가 욥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말대로 욥이 이 환란 중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었다면 욥은 패배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물질적으로 사업적으로 건강적으로만 패배한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패배하는 것이 모든 패배의 근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패배하지 않았어요. 
      우리도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시험에 대처하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세 가지 단계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직접 나가서 물맷돌을 던져 이기기 이전에 먼저 자기의 마음의 차원에서 이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마음속에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이 골리앗을 내게 넘겨주실 것이다. 

      오늘 블레셋 군대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계신 것을 온 땅이 알게 할 것이다.’ 마음속에 믿음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믿음으로 하면 믿음대로 됩니다. 믿음이 있기 전에는 움직이면 안됩니다. 두려움에 의해서 움직인다든가 흥분해서 움직인다든가 미움에 의해서 움직인다든가 그러면 패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오직 나의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무엇을 행할 때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입으로 그 믿음을 시인해야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의 말에 당당히 맞서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소위 예절 또 겸손의 명분으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자꾸만 우리를 낮추려고 합니다. 우리를 과소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누가 ‘잘 지내느냐’고 물어보면 ‘죽지 못해서 삽니다.’ 이러고 ‘장사는 잘됩니까.’ 그러면 ‘겨우 먹고 삽니다,’ 그러고. 그게 예절인줄 알아요. 그게 겸손인줄 알아요. 그러다보니까 우리의 입술로 믿음을 부정합니다. 우리의 입술로 두려움을 말하고 우리의 입술로 패배를 말하고 우리의 입술로 의심을 말합니다. 그래서는 믿음의 능력이 나타날 수가 없어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물맷돌을 던지기 전에 입으로 그의 믿음을 풀어놓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마음으로 믿지요. 그러나 입으로 그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에게 간다 오늘 하나님이 너를 나에게 넘겨주어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하여금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리라’ 얼마나 멋있습니까. 다윗은 싸움을 잘해서 영웅이 된 게 아니고 영적인 영웅입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다 신앙이 위축되고 다 하나님에 대한 담대함을 잃어버린 그 상황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서 이김으로써 하나님이 과연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영적인 영웅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입으로 시인해야 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기가 힘들다고 말합니까. 그 이유는 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시인하는 훈련이 안 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하면 하소연하는 줄로 압니다. 넋두리 하는 줄로 압니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신실함을 고백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족함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고 우리의 믿음을 입으로 풀어놓음으로써 기도의 문이 열리고 기도할 수 있는 영력이 생기고 영감이 오고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입으로 믿음을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시지 않습니까.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을 네가 믿느냐. 내가 네게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자기 입으로 믿음을 고백하게 하시고 그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대로 하신 것입니다.

      셋째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것이 물맷돌입니다. 물맷돌을 던져야죠.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지만 사람은 물맷돌을 던져야 됩니다. 전쟁이 하나님께 속했다고 사람이 그냥 앉아있으면 안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만을 말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의지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둘 다 함께 역사합니다. 수소와 산소가 합해서 물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와 사람의 믿음의 실천이 합해서 능력이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고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지만 사람이 자기 할 일을 할 때 약속하신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물맷돌을 던져요. 
      물맷돌을 던지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그 물맷돌을 골리앗의 이마를 향해 날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유도무기입니다. 
      인류 최초의 스마트 무기입니다. 
      사람이 던졌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유도해서 유일하게 노출된 부분이 골리앗의 이마에요. 
      다윗이 십대 소년이었을 때 이와 같은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어른을 쓰는 게 아니에요. 반드시 남자를 쓰는 것도 아닙니다. 반드시 유대인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 반드시 성직자를 쓰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그래서 다윗이 뭐라고 말했느냐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을 알게 하리라’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도 버거운데 그러나 다윗은 당당하게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리라’ 그렇게 됐어요. 이스라엘뿐만이 아니고 블레셋도 블레셋 군대도 ‘와, 하나님이 저 소년과 함께 하는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구나!’ 온 땅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오늘날 나와 내 집뿐만이 아니고 온 땅이, 내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던 자들마저도 과연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전쟁적승패재우야화화(战争的胜败在于耶和华)

      战争的胜败在于耶和华。他必把你们交在我们手中!”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

      다윗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에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함며 담대하게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외치기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은 “마음은 천국도 만들고 지옥도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쉽게 낙심하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문제가 다가올 때 마음에 두려움이 들어오는데, 이 두려움은 죄의 결과로 생겨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숨었다고 했습니다(창 3:10).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인생의 “골리앗”은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과거의 상처, 실패했던 경험이 “골리앗”이 되어서 다가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때 문제의 골리앗을 바라보지 말고, 골리앗보다 크신 문제의 해결자 예수님만 바라보십시오.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외치는 다윗을 통해 기적을 일으키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 사울이 이스라엘 왕이면서도 하나님께 말씀하신 사무엘상 15장에서의 아말렉을 진멸 명령을 불순종하고 그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전체에 전쟁이 찾아옵니다.
      블레셋이 쳐들어와서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두 나라 군대가 대치하게 됩니다.
      이 때에 골리앗이 나와서 조석으로 40일 간 싸움을 걸어옵니다.

      사무엘상 17장 4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 키가 여섯 규빗 한뼘 이라고 했는데 한 규빗이 약 45센치이므로 키가 약 2미터 90센치미터 정도 됩니다.

      골리앗의 신장(키) - 6규빗 한 뼘 / 1규빗은 45cm
      45 X 6 = 2m 90cm

      또 사무엘상 17장 5~6절에 또 보면, 얼마나 이 골리앗 장군이 무시무시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장군은 놋 투구를 썼고 물고기 비늘 갑옷을 입었는데 무게가 오천 세겔 57킬로그램 정도 나갔으며 두 어깨에는 짧은 단창을 메고 허리에는 긴 칼을 차고 있었습니다.
      이런 거인이 40일 간 아침저녁으로 나와서 모욕하며 싸움을 청하니 어떻게 누가 나서겠습니까?
      당연히 아무도 나가서 맞붙지를 못합니다.

      영화 트로이나 그리스 로마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주로 보듯이, 예전엔 각 군대의 지도자들이 나와서, 쓸데없는 희생을 막기 위해 싸워서 이긴 쪽이 전쟁에서 이기는 것으로 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누구도 싸워서 이길 용기가 없었고 일대일로 싸워서 지게 되면 자기만 지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군 전체가 지는 것이었으니 참으로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그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때 아버지 이새의 명령으로 소년 다윗이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 세 명의 형들을 면회 옵니다.
      볶은 곡식과 떡 열 덩이 치즈 열 덩이를 가지고 와서 형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골리앗이 하나님의 군대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에 의분을 느끼고 사울에게로 가서 자신이 골리앗을 죽이겠다고 합니다.

      다윗이 사자와 곰을 죽일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상대는 골리앗이고, 골리앗은 갑옷과 놋 투구와 창과 단창과 칼과 방패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가진 무기로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객관적 전력의 열세에서도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이길 수 있도록 조금 도와주십니다.

      그 당시 목자들은 물매와 막대기와 지팡이를 지녔는데, 물매는 가죽천에 두 개의 줄을 연결해서 돌을 넣어서 빙글빙글 돌린 후에 한쪽 줄을 놓아서 짐승이나 적을 공격하는 무기였는데 다윗이 물맷돌 무기에 상당히 익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물맷돌 전담 병사가 있었는데 열 번 던지면 열 번을 모두 맞춘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막대기는 70센티 정도의 길이에 앞에 뾰족한 쇠붙이나 칼날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팡이는 90센치 정도 길이에 앞부분이 둥글게 굽어서 양들이 웅덩이나 절벽에 떨어지면 털에 걸거나 목에 걸어서 구해내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다윗이 막대기와 물맷돌을 가지고 골리앗에게 나아갑니다.
      그리고 다윗이 당당히 말합니다. 45~47절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여기서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지 그대로 나옵니다.

      첫째, 그런데도 믿는 신앙(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골리앗의 몸이 크고 힘이 장사라고 할지라도, 어마어마한 무기를 가지고 나올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상황이 너무나 절망적이고 도저히 나아 보이지 않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만 믿음의 눈으로 보여주시는 그 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넉넉히 이기고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나아가느냐의 결과는 엄청난 것입니다. 즉 내가 가진 믿음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구원과 멸망이 결정됩니다. 골리앗이 너무 크기에 이길 수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향해 충고하였습니다. '골리앗은 너무 크고 강하다' 그러나 다윗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몸집이 너무 커서 돌팔매가 빗나갈 수가 없다'. 사람들은 골리앗의 큰 몸집에 겁을 먹었지만 다윗은 큰 체구가 오히려 좋은 타겟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믿었습니다. 과연 다윗의 물맷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명중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는 주의 이름을 앞세우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둘째, 그리하므로의 신앙
      역경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입니다.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다윗은 골리앗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위기이기도 했고 민족의 위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양칠 때에 함께 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담대하게 칼과 단창 앞에 어리디 어린 소년이 설 수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 신뢰가 승리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고 외치며 당당히 승리를 향해 나아갑니다. 하나님 신뢰를 선택함이 곧 승리였습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일지라도 신뢰의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어떤 순간이라도 믿고 살아가라는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66권에 흐르는 모든 내용은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라”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구약에도 신약에도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에 올랐습니다. 아브라함의 시련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승리하였습니다.

      우리도 수없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다윗도 그랬고, 아브라함도 그랬던 것처럼 믿음으로 당당히 이겨내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미래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
      무엇이라고 다윗이 말하고 있습니까?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지금 상황은 이스라엘 군대에게 참으로 안좋은 상황입니다. 블레셋 군대는 아주 강합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지금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와서 지금 군사를 급히 모아서 이스라엘 군대들이 왔기는 했는데, 준비도 안되었고, 마음적으로도 당당히 준비가 잘되어 나온 블레셋군대가 두렵기만합니다. 전략적으로도 이스라엘은 지게 되어있습니다. 40일동안 어마어마하게 강하게 생긴 골리앗 장군을 통해서, 심리전을 벌이는데, 이런 식으로 했다가 싸움이라도 붙으면, 이스라엘 군대는 다 도망가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쟁은 네가 조롱하는 하나님께 속하였다! 우리가 이긴다!”라고 당당히 말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경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48~49절에 보면,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했습니다. 돌이 이마에 박힌다는 것은 놋 투구를 벗었다는 이야기입니다. 40일 동안 한 번도 벗지 않았던 그 놋 투구를 하나님께서 벗기셨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물맷돌을 던져서 골리앗의 머리를 깨는 것인데 투구를 쓰고 있다면 그것마저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주 조금 다윗을 도우셨습니다. 골리앗의 투구를 머리에서 벗기신 것입니다.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

      우리가 일을 계획하고 능력을 기르고 힘을 길러도 이기게 하고,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한 고난과 역경에서 “왜?”라고 묻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커다란 문제인, ”골리앗”을 극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이름으로 인생의 역경과 어려움을 극복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다윗과 같은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들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우리 앞에 서 있는 무시무시한 골리앗과 같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고비고비 하나님께서 능력의 손을 펼치셔서 우리가 온전히 의지할 때 크신 능력을 나타내실 줄 믿습니다.
      주 안에서 늘 승리하게 하옵시고,
      우리가 흔들릴 때마다 주께서 우리를 붙들어주시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큰 축복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역대하 20:15-17)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그들에게로 내려가라 그들이 시스 고개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그들을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역대하 20장은 모압, 암몬, 미온 사람들이(사해 남쪽에 위치한 '마안'이라는 곳에 사는 사람들, '암몬인'이라고도 함.)
      유다 왕 여호사밧을 치러할 때에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전 앞에서 온 백성이 합심하여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하나님의 응답으로서 매우 즉각적인 기도 응답 내용이다.

      여호사밧의 통치를 보면

      1.  대하 17:3-4 그는 바알을 버리고 다윗왕처럼 하나님을 신실히 섬기는 왕이었다.
      2.  왕상 22:43 산당을 제거하지는 않았지만,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
      3.  왕상 22:5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었다.
      4.  대하 17:7-9 방백과 레위인과 제사장을 유다 성읍에 보내어 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러므로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그는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전쟁의 승패는 너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모든 전쟁의 승패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좌우되며, 이러한 모든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

      출애굽기 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가만히 서서'는 '놓다', '두다', '확고하게 서다', '당당히 자리를 고수하다' 는 뜻이다.
      즉, 상황이 위급하다고 하더라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침착하라는 뜻이다.

      '구원'은 '해방하다', '돕다', '승리하게 하다'는 뜻. 도움, 안전, 구원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면서 홍해에 섰을 때 앞에는 홍해 바다가 뒤에는 애굽 군대가 뒤쫓아오는 진퇴양난에 처하게 된다.

      10가지 재앙 앞에서 애굽과 싸우시는 모습을 본 이스라엘 민족은 여전히 하나님보다 뒤쫓아오는 애굽군대가 더 크게 보였다.

      그러자 이스라엘 민족은 원망과 공포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 모세는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라고 외친다.

      믿음의 확신에 찬 지도자는 자신뿐만 아니라 민족을 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에 내미니 바다 가운데 육지가 생겨 이스라엘이 건너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사무엘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투 자체보다는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신앙과 불신앙을 통한 일화 속에 드러나게 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이스라엘의 진정한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울왕의 군대는 골리앗이라는 거인에 대한 공포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온 다윗의 무기는 물매와 돌 다섯 개로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이다.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다윗에겐 너무 무모한 싸움이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볼때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임마누엘 하시는데 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승리로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새 지도자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여 가는 과정에서 세상의 모진 풍파와 거센 파도에 휩싸인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어떠한 위협도 하나님으로부터 막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며, 역사의 주역으로 자리 잡는다.

      여호수아 10:14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기브온을 공격하는 아모리 동맹군과의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참전하게 되며 전쟁이 구체화된다.

      8절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두려워 말고 가라 하시고 그들을 네 손에 붙였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을 보내신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서는 큰 우박을 내려 그들을 죽이시니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많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니라' 하니 그대로 되었고 야살의 책(성경에 나오지 않는 성경 속 이야기)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 내려오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다.
      하나님은 믿음의 확신에 서 있는 자들의 편에 서서 싸우신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의 응답이 얼마나 구체적이며 실제적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로써 유다 백성들은 승리를 확신할 수 있게 되었고, 확실한 기도의 응답에 감동되어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찬양하였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지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로 해결하여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선한 방법에 따라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성도에게는 가장 하나님께 나아가는 값진 길이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47절b,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 본문은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신앙적 차원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는 말씀이다. 본문에 기록된 전쟁은 단순히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 이야기가 아니다. 전쟁의 뒤안길에는 하나님의 영적인 개입이 있다. 역사는 하나님의 이야기라는 입장에서 접근하고 해석해야 한다.

      *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싸우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와 ‘하나님이 싸우신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면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싸워주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면 하나님은 전쟁, 기근, 전염병을 이용해 그들을 대항하여 싸우신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쟁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셨다(출17장).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11절)라고 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철기문명이 발달한 블레셋을 이길 수 없었다. 또한 블레셋은 훈련된 군사들이 있었으나 이스라엘은 오합지졸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승리하였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승리의 깃발이시다.

      전쟁에서 무기가 전부가 아니다.

      47절a,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 골리앗은 철저하게 무장하고 나아왔다. 그는 방패를 든 사람을 앞세우고 있었다(41절). 그는 칼과 창과 단창을 가지고 나아왔다(45절). 그러나 다윗은 오직 막대기와 돌 다섯 개와 물매를 준비하고 여호와의 이름 곧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다(45절). 무기가 전부가 아니다.

      * 금송아지 사건 이후 하나님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출33:3)라고 하셨는데 모세가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출33:15)라고 간청하여 동행을 약속받았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후에 여호수아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주셔서 승리하였음을 선포하였다(수23:3).

      * 아람의 왕이 엘리사를 잡으려고 군대를 보냈다. 아람의 군사와 말과 병거가 엘리사가 기거하고 있던 성읍을 에워쌌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불말과 불병거 또한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쌌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으로 보호를 받고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왕하6장 참조).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맹을 맺으라.

      45절b,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 다윗은 갑옷도 입지 않았고 창이나 칼도 들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다. ‘여호와의 이름’이 그의 힘이었다. 사무엘이 다윗을 택하여 기름을 부으신 이후 다윗은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되었다(삼상16:13). 다윗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를 온전히 의지하고 나아갔다.

      *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의 도움을 받으려면 그와 동맹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는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8:10)라는 언약과 같은 개념이다. 그런데 언약이나 동맹은 상호주의 원칙에 의해 성립한다.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 편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 동맹관계는 가치를 공유함으로 유지된다. 하나님은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라고 하셨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온전히 충성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따라 공의와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기적을 만든다.

      49절,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 골리앗을 대항했던 다윗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다윗이 물매로 던진 돌이 골리앗의 이마를 정통으로 맞추어 쓰러뜨렸다. 이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기적이었다. 다윗이 이런 큰일을 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을 아무도 없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기적을 만들었다.

      * 하나님은 기드온의 삼백 명의 용사로 미디안의 대군을 물리치게 하셨다. 보리떡 한 덩어리와 같은 기드온이 미디안의 장막을 무너뜨렸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한 것이다. 기드온의 삼백 명의 용사도 훌륭하지만 그들을 사용하여 대군을 물리치신 하나님은 더욱 위대한 분이시다(삿7장 참조).

      * 하나님과의 연합이 관건이다. 강한 경제력에 따른 튼튼한 국방력이 나라를 지키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무기가 전부는 아니다. 나이 많은 갈렙은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서 ‘헤브론’을 얻었다. 헤브론은 ‘연합’(헤베르)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갈렙은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헤브론은 쟁취했던 것이다.

      아셀트선교사 이야기

      아셀트 선교사는 식인종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그분이 선교 활동을 하는 중에 식인종들이 선교사를 잡아먹으려고 여러 번 밤마다 아셀트 선교사의 집을 침입했다.
      그런데 밤중에 찾아갈 때마다 선교사 집의 대문 앞에는 창칼을 들고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을 수차례 목격한 후 식인종들은 이상히 여기며 낮에 선교사에게 찾아가 물었다.
      “낮에 가보면 없는데, 이상하게 밤에 가보면 누군가가 칼과 창을 들고 너를 지키고 있다. 그 사람 이 누구냐?”
      식인종들의 물음에 아셀트 선교사가 대답했다.
      “우리 집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다.”
      그러자 식인종들은 “거짓말 마라, 한두 번이 아니고 우리가 너를 끌어다 잡아먹으려고 여러 차례 왔었는데, 밤만 되면 창칼을 들고 지키는 자가 있어서 무서워서 너한테 갈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때 아셀트 선교사에게 번쩍 스치는 영감이 있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쓸모없는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켜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저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이런 오지에서 나를 지켜주는 자가 없다고 말했던 불신앙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아셀트 선교사는 순간적으로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마가복음 3:13~15)

      카자흐스탄은 우리 나라보다 큰 데 인구는 몇 백만에 불과하였습니다. 
      겨울이면 영하 40도에서 50도까지 내려 갑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벌판입니다.
      그 벌판을 달릴 때 빨리 가려고 혼자 자동차를 몰아 달립니다. 
      아직 미개발국이라 자동차 생산이 없습니다. 
      모두 중고차입니다. 
      만일 빨리 가려고 혼자 가다가 벌판에서 자동차가 고장나면 거의 다 얼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가 겨울마다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멀리 가려면 두 세 대가 모여서 같이 가야 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합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더 드리려고 합니다. 

      썬 다씽 이야기입니다. 
      눈이 엄청나게 많이 온 어느 날 썬다씽은 전도하기 위허여 험악한 산 길을 혼자 걷고 있었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산 넘어 동네로 복음을 전하러 가는 썬다씽의 발걸음은 사명의 발걸음이었습니다. 
      그 때 산 길에서 마침 모르는 이를 만나 친구삼아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의지가 되었습니다. 
      가다보니 한 사람이 눈길을 걷다가 지쳐서 쓰러져 있었습니다. 
      썬다씽이 말했습니다.
      <우리 이 사람을 업고 가십시다.>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내 몸 하나 가기도 힘든 데 이 사람을 업고 가다가는 같이 죽어요.> 
      그리고 거절하였습니다. 
      썬다씽은 그가 거절한다고 그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전도자 양심에 죽는 사람을 그대로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다가 같이 죽더라도 업고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사람을 등에 업었습니다. 
      천근만근이었습니다. 
      온 몸에 진 땀이 흘렀습니다. 
      한참을 걸었습니다. 
      지쳐서 같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등에 업힌 사람은 얼었던 몸이 녹기 시작하였습니다. 
      썬다쌍의 몸이 뜨거워졌기 때문입니다. 
      서서히 의식이 돌아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가다 쉬고, 쉬다가 갔습니다. 
      드디어 등에 업히지 않고 같이 걷게 되었습니다. 
      친구가 되었습니다. 한참 가다보니 한 사람이 길거리 쓰러져 있었습니다. 
      얼굴을 들치고 보니 빨리 가겠다며 혼자 가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얼어 죽어 있어 있었습니다. 
      추워서 얼어 죽은 것이었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일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신 일은 12 명 제자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혼자서도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내가 12 영이나 되는 천사를 동원시키지 못 할 줄 아느냐?>
      12영은 12만명입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로 천사 군사도 동원시키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실 때 배가 없어도 건너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갈길리 바다를 걸서어 건너녔습니다. 
      어느 관광객이 갈릴리 바다에서 배를 타려고 요금을 물으니 엄청나게 비쌌습니다. 
      관광객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걸어서 건너셨구나!>
      예수님은 사람의 도움없이도 하시고 싶으신 일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12명 제자를 부르셔서 같이 일하셨습니다.
      이유가 분명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 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이 12명 제자를 부르신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12명 제자를 부르신 이유를 분명히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2. 또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며
      3. 귀신을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12명 제자를 부르시고 예수님과 같이 일하자고 하셨습니다.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귀신도 내어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에게 우리끼리 같이 가라고 명하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이 같이 있어줄 테니 예수님과 같이 일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처음에 제자들은 둘씩 둘씩 짝지어 같이 다니며 전도하고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후에는 12명 제자들이 모두 한 명씩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같이 가면 멀리 갑니다. 예수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12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멀리 갔습니다. 온 세계를 복음을 염색하였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오늘 제목을 다시 외치려고 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주님과 같이 가면 됩니다.

      주님같이 가면 다음과 같은 유익이 있습니다.

      1.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철사를 가지고 바늘을 만들면 하루 종일 25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이 같이 만들면 625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말 한 마리가 마차를 끌면 1톤을 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마리 말이 같이 끌면 5톤을 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10을 쫓으면 두 사람이 같이 쫓으면 20명을 아니라 1000명을 쫓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시너지 효과라고 합니다. 같이 걸으면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같이 한 마음으로 일하는 것은 큰 힘이 됩니다.
      예수님이 12명 제자들과 같이 일하려고 하셨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면 됩니다. 예수님은 빨리 가려 하지 않으시고 멀리 가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2000년을 달려 왔습니다. 온 세계로 달려 갔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일이 있을 때마다 같이 하면 큰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특별히 주님과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시너지 효과가 그 어느 누구와 같이 가는 것보다 큽니다.
      제자들을 부르셔서 같이 있자고 하신 말씀이 본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 시너지 효과가 큽니다.

      돌아가신 김우영 목사님이 하셨던 말씀이 설교 도중 문뜩 떠올랐습니다.
      식인종들에게 선교하셨던 아셀트 선교사 이야기입니다.
      아셀트 선교사는 생명을 걸고 식인종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여 주신다는 말씀 하나 확실하게 믿고 선교에 임하였습니다. 식인종들이 여러 번 아셀트 선교사를 끌고 가서 잡아먹으려고 시도하였습니다. 밤마다 기웃거렸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찾아오기만 하면 어김없이 창칼을 들고 무서운 눈초리로 지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서워서 떨다가 그냥 가곤 하였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식인종들이 아셀트 선교사를 낮에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낮에는 없는 데 밤이면 지키고 있는 사람이 무누입니까?>
      아셀트 선교사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대답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습니다.>
      식인종들이 말했습니다.
      <거짓말 마시오.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한 두 명이 본 적이 아닙니디. 우리가 당신을 잡아먹으려고 여러 차례 왔지요. 그러나 무섭게 지키고 있는 그 때문에 접근하지 못 하고 돌아 
      그 때에 아셀트 선교사에게 떠오르는 영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쓸모 없는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켜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저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했던 불신앙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아셀트 선교사는 순간적으로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같이 가십시오. 나는 설교 하러 강대상에 올라 올 때도 주님을 초청합니다.
      <주님 같이 올라가시지요.>
      TV 녹화를 할 때에도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입으로 소리내어 외칩니다. 
      <주님 같이 녹화하시지요.> 지금 설교 준비하면서도 외칩니다.
      <주님 옆에 같이 계셔 주세요.>

      지난 주간 시카코 중북부 목사님 수련회를 인도하고 돌아 왔습니다. 정반대 시차였습니다. 그러나 가서 내리자 말자 첫 시간을 일도하고, 마지막 시간을 딸리 끈내고 비행기륽 탔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4일간 시차를 느끼지 못 하였습니다. 주님께 그렇게 기도하였더니 주님이 그대로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1분도 시차를 느/끼지 못 하였습니다. 정말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주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2. 같이 가면 격려가 됩니다.

      홀로가다가 절망하면 누가 위로하여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둘이 가다가 한 명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일으켜 줍니다. 상처가 나면 상처를 싸매 줍니다.
      그렇기에 혼자가지 않고 같이 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9-12)

      신학교 동창 목사님 중에 한 명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혼자 필리핀 여행을 떠났습니다. 당뇨가 심하였던 친구인 데 혼자 가서 갑자기 저혈당이 되어 길거리에 쓰러져 버렸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아는 이도 없습니다. 길거리에 쓰러져 있다가 간신히 누가 병원으로 옮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하여 주지 않았습니다. 죽었습니다. 여권을 보고 대사관에서 연락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신을 한국을 가지고 왔습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누가 옆에 있으면 안 죽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중에 윤 용일이라는 친구가 카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가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배재 동창회가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끈끈한 동문의식으로 늘 서로 도와주며 외국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 친구 사업체에 불이 났습니다. 배재인들이 돈을 모아 주었습니다. 그는 이제 완전히 이민생활이 끝난 줄로 알았는 데 동창들의 도움으로 다시 사업을 시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런 동문들 은혜를 갚기 위하여서라도 죽을 힘을 다 하여 일 하자”라고 결심하였습니다. 슈퍼를 개업하였는 데 얼마나 잘 되는 지 마트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내가 그 곳에 들렀더니 “가지고 가고 싶은 만큼 가지고 가라”라고 시원스럽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같이 가면서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같이 가면 멀리 갑니다. 그리고 격려가 됩니다.
      하물며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때 주님의 격려는 가장 큰 격려가 됩니다.

      인생길읅 걸어가다 보면 정말 어려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누구애게 말할 수 없어서 혼자 고민할 때 나는 주님의 사진 곁으로 갑니다. 그리고 주님을 물끄러미 쳐보 봅니다. 그리고 애절하게 불러 봅니다.
      <주님!>
      주님은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내가 대신 대답합니다.
      <오냐!> 나는 또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종 강 문호 가 왔어요.>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여 주시면 좋은 데 아무 말 없으십니다. 내 입으로 내가 말합니다.
      <그래. 왔구나! 너 무슨 문제로 고통당하는 지 내가 알지.> 그리고 내 입으로 주님이 해답을 막 말씀하여 주십니다. 내가 내 입술을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 입술을 주장하여 주십니다. 놀라운 지혜가 나옵니다.. 주님의 격려가 나옵니다.
      <강 문호야! 내가 세상을 이긴 것같이 너도 세상을 넉넉히 이실 수 있느니라.>
      나는 이 글을 시카코에서 돌아 오는 길에 비행기에서 정리하였습니다. 주님이 격려하시는 음성을 얼마나 세밀하게 들었는 지 한참 넋을 잃고 눈물을 닦았습니다.
      <강 문호야! 내가 네 진심을 알아. 내가 네 중심을 알아. 네가 얼마나 갈보리 교회를 사랑하는 지 알고 있지. 전기 한 등을 얼마나 아끼고, 종이 하나 아끼려고 편지지 이면지까지 사용하는 것을 내가 보았다. 갈보리 교회를 만명 교회로 이룰 려고 발버둥치는 네 심정을 내가 알지. 내가 같이 할 거야. 누가 몰라 주는 것같아도 알아 주는 이가 있단다.>
      혼자 가면 빨리가요. 그러나 주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 전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포레옹이 프랑스 사관학교 시절이었습니다. 친구들은 그를 왕따 시켰습니다. 세 가지 별명을 불렀습니다.
      <촌놈! 가난뱅이, 땅딸보.>나폴레옹은 너무나 괴로워서 학교를 포기하려고 하면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머니의 답장은 이런것이었습니다.
      <내 아들 나폴레옹아! 비굴해지지 말아라. 좋은 환경에서 영웅이 탄생한 적이 없다. 네게 무서운 적이 있다. 바로 허영과 사치다. 가장 귀한 친구는 독서다. 책을 읽거라. 나는 절대 낙심하지 않는다. 너를 믿는다. 내가 함께 하마.>

      나폴레옹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장군의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
      오늘 지금 이 시간 주님이 여러분에게 외치는 말씀을 나는 확싫히 들었습니다.
      <가롭리 성도들아! 용기를 내라. 나와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다. 어떤 문제에도 해답이 있다. 어떤 강에도 다리가 있다. 어떤 장글에도 길이 있다. 헤쳐 나가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갑니다.

      3. 같이 가면 공격당하지도 않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합니다. 
      같이 가면 격려가 되고 누가 감히 공격하지도 않습니다. 
      같이 있는 사람을 공격하다가는 자기가 오히려 당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동물의 왕국을 가끔 봅니다.
      사슴은 연약합니다.
      사슴과 호랑이가 싸우면 백번 싸워도 백번 다 사슴이 이깁니다. 
      그런데 호랑이 사슴을 잡아 먹으려고 할 때 숲속에 숨어 한 마리를 노립니다. 
      같이 있는 사슴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습니다. 
      홀로 떨어져서 풀을 뜯고 있는 사슴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같이 있는 사슴에게 대들면 다른 사슴들이 한꺼번에 공격하면 아무리 호랑이라도 도망치게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같이 계셨습니다. 그러면 마귀들이 공격하지 못 합니다. 

      큰 구렁이가 병아리를 잡아 먹으려고 따라갑니다. 잡히면 한 입에 들어갑니다. 병아리라 도망치다가 엄마 품속으로 쏙 들어갑니다. 그러면 구렁이는 감히 덤벼 들지 못 합니다. 어미 닭은 새끼를 보호하려고 생명을 걸고 싸우기 때문입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덤빕니다. 무섭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면 그 어떤 적도 벌벌 떨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같이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떨어지면 사고가 납니다.
      주님과 같이 걸어가는 길은 멀리 가는 길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 공격을 막아 주십니다.

      한 목사님께서 부흥회를 인도하시러 여수행 기차를 탔습니다. 
      잠을 자려고 하였지만 잠은 오지 않고 옆 노인에게 전도하라는 성령의 감동이 자꾸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서로 말문을 연 후 예수를 믿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노인은 화를 내면서 말했습니다.
      <이제 보니 예수쟁이로구만. 내가 뭐가 답답해서 예수를 믿어>
      그래도 전도를 게속하자 노인은 순찰중인 안내원을 불렀습니다.
      <이봐요. 내 돈 내고 편히 가려고 일등칸에 탔는 데 이 예수쟁이가 날 보고 자꾸만 지옥에 간다고 공갈을 하니 더는 못 참겠소. 차비를 물어주든지 이 예수쟁이 입을 막아 주든지 하시오>
      창피를 당한 목사님이 얼굴을 숙이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자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소주를 사오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까는 미안했소. 소주나 한 잔씩 하며 이야기 하십시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할아버님. 그렇게 술만 좋아하시면 지옥 갑니다>
      그러나 노인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쯤 흘렀습니다. 
      얼마 전 호통을 치던 안내원이 목사님께 다급하게 달려와 물었습니다.
      <아까 그 노인을 아시나요?>
      <아니요 모르는 분인데 그냥 전도를 했지요?>
      안내원이 말했습니다.
      <그 노인은 술에 취해서 화장실로 갔어요. 승강구에서 시원한 공기를 마신다고 하다가 비틀거리더니 떨어져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십시오. 
      그러나 멀리 가려면 우리 같이 가야 합니다. 
      특별히 주님과 같이 가야 합니다. 
      그러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그려면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격려하여 주십니다. 주님이 공격을 막아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 전라도 광주에서 일어 났던 사건 하나를 소개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 네 명이 에레베이터를 탔습니다. 
      그런데 고장이 나서 그 속에서 67시간을 갖혀 있었습니다. 
      4명은 잠바 두 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추웠습니다. 
      그래서 꼭 끼어 안고 잠바를 덮고 추위를 견디고 살았습니다. 
      같이 살아야 합니다. 
      서로 어울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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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하나님과 큰 하나님

      한 이교도가 어거스틴에게 자기가 섬기는 작은 나무 우상을 보이며 질문하였다.
      “나의 신은 여기에 있는데 당신의 신은 어디에 있소?” 어거스틴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하나님은 보일 수 없소.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오!”

      하나님의 눈

      고대 그리스에 키소이테스파라시우스라는 두 화가가 있었다.
      사람들은 두 화가의 우열을 시험했다.
      먼저 키소이테스가 포도 그림을 나무에 걸어놓았다.
      그러자 새가 날아와 그것을 쪼았다.
      다음은 파라시우스가 엷은 커튼 그림을 창문에 걸고 키소이테스를 초청했다.
      진짜 커튼으로 안 키소이테스가 걷으려고 손을 댔다.
      아테네 사람들은 "사람의 눈을 속인 파라시우스가 새의 눈을 속인 키소이테스보다 뛰어나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가 없다.





      유명한 설교가인 존 허프먼 목사는 프린스턴 신학교를 나와 12년 동안 목회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목사직을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할 만큼 좌절하고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그는 모교에서 실시하는 목사 연수 교육에 참가했습니다.
      그곳에서 존경하던 노교수 로버트 윌슨 박사를 만났습니다.

      제자의 상담을 받은 노교수는 "자네는 12년간 작은 하나님을 믿었군. 큰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게."라고 충고을 했다고 합니다.
      노교수의 표현인 "작은 하나님을 믿는 자"와 "큰 하나님을 믿는 자"의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작은 하나님을 믿는 자란 나의 지식과 나의 요구에 하나님을 맞추어 하나님을 나 정도로 작게 만드는 신자입니다.
      반면에 큰 하나님을 믿는 자란 하나님의 권능과 요구에 나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도로 크게 만드는 신자입니다.

      작은 믿음은 하나님의 권능과 역사하심을 나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며,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과 역사하심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실은 민수기 13장에서 가나안을 정탐했던 이스라엘과 여호수아 6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성을 돌던 이스라엘을 대조하여 볼 때에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는 민수기 13장에 머물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호수아 6장을 이루어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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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성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하이든은 창세기와 죤 밀턴이 쓴 『실락원』을 근거로 『천지창조』라는 위대한 곡을 작곡했습니다. 비엔나에서 『천지창조』 공연이 있던 날, 그는 갑자기 몸이 아파 객석에 앉아 자신의 곡이 연주되는 것을 구경해야 했습니다. 이윽고 곡이 연주되자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벅차올랐습니다. 마침내 곡이 끝나자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공연장을 뒤흔들었습니다. 이때 지휘자는 객석에 있는 하이든을 가리켰습니다. 그리고는 "저 분이 바로 이 위대한 곡을 작곡하신 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청중들은 일제히 일어나 하이든을 향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이때 하이든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당신의 초점은 당신의 영광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하늘에서보다 지상에서 더 영광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심보다 당신이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사람으로 신앙이 성장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돌린 그에게 한 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천국은 영광을 돌릴 줄 모르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할렐루야! 아멘'은 그냥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천국에 가면 알게 될 것입니다.하나님께 쓴 감사의 편지화요일 / 시 92:1 / 찬송가 82장담임인 위버 선생님은 반 학생들에게 누구에게든지 감사하는 내용의 편지를 쓰도록 했습니다. 짐은 자기를 제일 사랑해주며. 자기를 위해서 가장 큰 일을 하셨던 분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안 되어 짐과 다른 모든 반 친구들이 편지쓰기가 끝나자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에게 각자의 편지내용을 소개하도록 했습니다. 학생들은 순서대로 일어나서 자기들이 쓴 편지를 읽었습니다. 끝으로, 짐이 일어서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저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저를 매우 사랑하신다는 사실도 압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으므로 저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늘 저와 동행해주세요. 제가 잘못을 행하지 않도록 지켜주세요. 사랑하는 짐으로부터" 짐이 앉았을 때 교실은 아주 조용해졌습니다.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편지를 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담임 선생님은 반 학생들의 편지에 대해 만족하셨으나 특별히 짐의 편지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준 선물들과 은혜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하기를 잊지 않고 있었어요. 그러나 짐의 편지는 하나님께도 우리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도록 잊지 않게 상기시켜주었어요. 성경은 '여호와께 감사함이 좋은 일이다'(시92:1)말하고 있어요."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결코 큰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부가 드린 두 렙돈, 벳세다에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드렸던 한 소년' 이들은 평상시에 감사한 마음이 있었기에 자기가 가진 것 모두를 드린 것 뿐입니다. 많은 기적을 베푸셨던 예수님은 많고 적음을 떠나서 작은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정성껏 드린 그들의 마음 중심을 보시고 기뻐하셨던 것입니다.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으려면...수요일 / 마 28:18-20 / 찬송가 337장식인종들에게 선교하셨던 분들 중에 아셀트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선교 활동을 하는 중에 식인종들이 여러 번 아셀트 선교사를 끌고 가서 잡아먹으려고 아셀트 선교사 집을 밤에 침입했었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찾아갈 때마다 대문 앞에서 창칼을 들고 지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낮에는 아무도 없는데, 밤에만 오면 창칼을 들고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서워서 떨다가 그냥 가고 또 그 다음 번에도 왔다가 그냥 돌아가곤 했습니다. 어느날 식인종들이 아셀트 선교사를 낮에 찾아갔습니다. "낮에 가보면 없는데. 이상하게 밤에 가보면 누군가가 칼과 창을 들고 너를 지키고 있다. 그 사람이 누구냐?" 식인종들의 물음에 아셀트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우리집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다." 그러자 식인종들은 "거짓말 마라, 한두 번이 아니고 우리가 너를 끌어다 잡아먹으려고 여러 차례 왔는데도 밤만 되면 창칼을 들고 지키는 자가 있어서 무서워서 너한테 갈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에 아셀트 선교사에게는 퍼뜩 떠오르는 영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쓸모없는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켜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저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했던 불신앙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아셀트 선교사는 순간적으로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가장 크게 느낄 때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놀고 있을 때에는 전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피부로 느끼려면 당장 밖으로 나가서 전도하십시오. 베드로는 성령충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깨달았지만 실은 그가 전도하였을 때에 자기의 손길로 기적이 일어났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천사의 손길로 구출받게 되었을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누가복음 17장 5절에서 제자들이 믿음을 더 해 달라고 할 때에 예수님은 7-10절에서 종의 의무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자 원한다면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십시다. 창조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목요일 / 시편 138:13 / 찬송가 40장런던대학의 우주 물리학자인 보이드 박사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약 10만개이며, 최신 전자 망원경을 가지고 한 은하안에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2,000억개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신 망원경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그 전체 우주 속의 별들의 수는 2,000억×1,000억 개라는 천문학적 숫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지 못한 별의 수는 얼마나 더 많겠습니까? 또한 지금 반짝거리는 별빛은 10만 광년전에 반짝였던 빛이 오늘 밤 우리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저녁 별빛이 유난히 반짝이지?" 하는 말은 얼마나 큰 거짓말인지 모릅니다. 이런 것을 공부하는 우주 물리학자인 보이드 박사는 전공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깊이 깨닫고 찬송가 40장을 자기 신앙의 간증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양수에 감싸여 있는데 그것은 바깥에서 충격이 와도 물이 출렁출렁하기 때문에 태아를 보호하고 또 아이가 계속 성장을 하면서 운동을 해야 하는데, 물속에 있어야 운동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 후 열 달이 되면 양수가 터져서 아이가 나와야 할 길을 깨끗하게 청소해 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배꼽을 통해서 먹고, 배꼽을 통해서 배설하고, 배꼽을 통해서 숨을 쉬던 수중 아기가 어머니 배에서 나오는 순간에 수술도 하지 않았는데 순간적으로 어떻게 해서 입으로 먹고, 코로 숨쉬고, 밑으로 배설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성경공부 모임에 나오는 어느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 때 그 분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목사님! 그렇기 때문에 제가 성경공부 모임에 나오죠." 시편 기자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함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 138:13)⊙ 이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섭리하심을 모른다고 하거나 부인한다면 그는 무엇인가 모자란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속에서 분명히 살아계심을 나타내셨고 오늘 날에도 우리와 함께 하심을 여러 가지 징조로 보이십니다. 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내가 믿는 하나님금요일 / 민수기 13-14장 / 찬송가 382장한 이교도가 어거스틴에게 자기가 섬기는 작은 나무 우상을 보이며 질문하였습니다. "나의 신은 여기에 있는데 당신의 신은 어디에 있소?" 어거스틴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보일 수 없소.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오."







      "기도하세요. 지금..."토요일 / 마 7:7-11 / 복음성가 "기도하세요 지금..."전기가 지극히 가까운 곳까지 접근해 와있지만 스위치를 누르지 않으면 어둠은 물러가지 않고 불빛은 밝혀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도 이와같이 항상 우리의 생활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여!'하고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기도가 없을 때에는 언제든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작은 막이 생겨서 어려운 현실에 접하게 됩니다. 만일 어두운 방에 앉아서 스위치를 누를 생각을 하지 않고 어둡다고 불평하고, 나에게만 이 어두움이 유독히 기습한다고 실의에 빠져 남을 원망하며 시간을 보낸다고 하면, 얼마나 우매한 일이 되겠습니까? 전기는 아주 가까운 데까지 미쳤고 스위치만 누르면 빛이 방안에 가득히 비치도록 구조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을 운명으로 체념해버리는 것은 그 자신에게 원인이 있습니다. 전기가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듯이,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은 지금도 풍성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능력을 내 생활 속에 영향력으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기도'라고 하는 스위치를 눌러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문을 열게 되고, 기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내 생활 속에 이끌어 오게 되며, 기도만이 우리 삶의 허다한 문제를 하나님의 소관으로 넘겨드릴 수 있는 방법이 되기 때문에,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해서 전기의 스위치를 누르듯이 우리 생활 속에 광명이 있게 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마 7:9-11)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그냥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될 것이라고 하시지 않고 9-11절을 더 말씀하신 것일까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구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매우 답답해 하시면서, 예수님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주셨던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도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식인종에게 복음을 전하던 아셀트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식인종들이 아셀트를 잡아먹으려고 밤에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칼을 들고 지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낮에는 아무도 안 보이는데 밤에는 그 사람이 칼을 들고 지키는 것입니다 식인종들은 무서워 떨다가 가고, 다음에도 그냥 돌아갔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식인종들이 아셀트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밤이면 누군가 칼을 들고 너를 지키고 있다. 그 사람이 누구냐?” 아셀트 선교사가 대답합니다. 우리 집에 나를 지키는 사람이 없다“ 식인종들은 ”아니다 우리가 너를 잡으려고 여러 번 왔는데 칼을 들고 지키는 자가 분명히 있다“ 라고 말합니다. 그 순간 아셀트 선교사에게 떠오르는 영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쓸모없는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를 보호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불신앙을 용서하옵소서“ 아셀트 선교사는 회개하였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떠한 일을 만나도 하나님이 지키시고 일하시니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본문은 15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님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20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님들아 내 말을 들을 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자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21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22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찬송할 자들을 택하여 찬송이 시작될 때 하나님께서 찬송을 들으시고 복병을 세워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주민들을 쳐 패하게 하시며 또한 23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찬송할 때에 암몬과 모압이 합세하여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습니다. 참으로 신기하지 않습니까?

       
      기드온의 300용사를 볼찌라도 미디안을 칠 때 신기하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많은 수를 다 걸러내고 300명을 통하여 전쟁을 하게 만드십니다.

      삿7:16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17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영 근처에 이르러서 내가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18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하니라

      22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23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답리와 아셀과 온 므낫세에서부터 부름을 받고 미디안을 추격하여 그들을 쳐부셔 버립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미디안을 칠 때 많은 수를 원치 안으시고 개같은 기드온 용사 300명으로 치게 하실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전쟁은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때 어떻게 했습니까? 사울이 준 갑옷을 벗어버리고 삼상17:40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43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44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 45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48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본문 15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우리의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16:7b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耶和華卻對撒母耳說、不要看他的外貌和他身材高大、我不揀選他、因為耶和華不像人看人、人是看外貌、耶和華是看內心。



      인시간외모(人是看外貌)
      야화화시간내심(耶和華是看內心)


      3월 31일(월) 사무엘상 14-1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구원(삼상 14:6)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Jonathan said to his young armor-bearer, "Come, let's go over to the outpost of those uncircumcised fellows. Perhaps the LORD will act in our behalf. Nothing can hinder the LORD from saving, whether by many or by few."

      새한글 / 요나단이 그의 무기를 들고 따르는 젊은이에게 말했다. “자, 할례받지 않은 이 사람들의 초소로 건너가자. 아마도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나서 주실 거야. 그 어떤 것도 여호와를 막을 수 없어. 병사의 수가 많든 적든 우리를 도와주실 거야.”

      여호와의 구원(Jehovah's Salvation)

      인위무논인다인소(因为无论人多人少)
      인할 인(因), 할 위(爲), 없을 무(無),  논의할 논(論), 사람 인(人), 많을 다(多), 적을 소(少)
      인위무논인다인소(因爲無論人多人少)

      십요야불능조애야화화증구(什么也不能阻碍耶和华施行拯救)

      什幺也不能阻碍也화화증구
      열사람 십, 작을 요, 어조사 야, 아닐 부,  능할 능, 험할 조, 거리낄 애, 어조사 야, 빛날 화, 꽃 화,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서로 진을 치고 대적하고 있을 때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그의 부하에게 우리가 블레셋으로 건너가자고 하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며 만일 블레셋 사람이 우리가 너희에게 가기를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릴 것이며 만일 브레셋 우리에게로 올라오라고 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침 브레셋 사람이 요나단에게 올라오라고 하므로 요나단과 그의 부하는 반나절 동안 20여명을 죽였습니다.
      배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숫군이 블레셋 진영을 살펴본즉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흩어지는 것을 보고 군사를 점고한 즉 요나단과 그의 부하가 나갔다는 것을 알고 블레셋으로 총공격을 시도하여 큰 승리를 얻었습니다.

      요나단의 용기에 의해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던 비결이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려면 요나단과 같은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어느 누구도 블레셋과 싸우기 위하여 나서지 않았을 때 요나다는 당당하게 그의 부하와 함께 블레셋 진영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스라엘은 남쪽 베냐민 게바 : 블레셋은 북쪽 믹마스


      이스라엘과 블레셋 군대가 서로 대치했던 상황에서 펼쳐진 사건입니다.
      사무엘상 13장 16절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쪽 베냐민 게바에 진치고 있었고, 블레셋 군사들은 북쪽 믹마스에 진치고 있었습니다. 한데 블레셋의 군사력은 병거가 삼만 명이었고, 마병이 육천 명이었으며, 백성은 해변의 모래같이 많았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형편없었습니다. 처음에 3,000명의 결사대가 모였지만, 그나마 다 도망가고, 600명만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36,000명대 600명, 6대 1의 상황입니다.
      이보다도 한심 한 것은, 그 6백 명 중에 칼이나 창을 가지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직 사울과 요나단에게만 칼이나 창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도무지가 말도 안되는 싸움입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모두가 죽는 것과, 나라가 망하는 것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했다는 사실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어지십니까?
      마치 중학생 한명이 맨손으로, 칼을 든 조직폭력배 6명과 싸워 이긴 것과도 같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그런데 본문 6절에 보면, “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는 요나단의 고백이 나오는 것을 봅니다.
      이어 10절과, 12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셨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23절에서 마침내, “여호와께서 그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일하신고로-, 하나님께서 매사 간섭하시고, 마침내 승리케 해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느냐?’ 에 따라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 교훈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 절망이 오고, 죽을 것 같은 어려움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우리들도 능히 승리하게 되고,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런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기까지는, 반드시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 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기적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하나님께서 그냥 하늘에서 벼락을 내려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하는 원동력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누구이며, 무엇이었을까요?

      믿음의 주역(主役) 임금 주(主), 부역 역, 부릴 역(役) - 주된 역할

      믿음의 주인공(主人公)
      임금 주(主), 사람 인(人), 공평할 공(公) - 중심이 되는 인물

      요나단(Jonathan) / 요나단((Jonathan) - 여호와가 주심

      사울왕은 수만의 블레셋 대군이 쳐들어오고, 군사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당황한 나머지,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번제를 자기가 드렸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 선지자는 자기를 떠났고, 남은 군사는 600명이고, 무기는 두개뿐인 상태였습니다.
      그냥 블레셋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이 분연히 일어난 것입니다. 절망하고 낙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블레셋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일어났습니다. 본문 6절이하를 보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니라” 하며, 함께 적진으로 공격하자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단 둘이서 블레셋 군대의 진영을 몰래 습격을 해서, 적진을 혼돈에 빠트리게 하였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용기를 얻게 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요나단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도 함께 하시고, 승리케 하는 기적을 일으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요나단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첫째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요나단은 주위 환경을 보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버지 사울왕은 36,000명이라는 대군의 블레셋을 보았다가 실패하였지만-, 지금 요나단은 사람을 본 것이 아닙니다. 환경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을 하시면, 단 두 명만으로도 능히 그들을 이길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요나단이 만용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고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기에, 담대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환경은 어떠합니까? 마치 블레셋 대군에게 둘려 싸인 것같이, 답답한 현실에 놓여 있습니까? 자녀문제, 남편문제, 결혼문제, 물질문제, 장래문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문제들이 여러분을 둘러싸여, 숨도 쉴 수없을 정도에 처해 있습니까? 이때, 요나단의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요나단은 세상을 보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환경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눈이 없어서 못 본 것이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그도 보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어진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 - 하나님만을 의지

      두 번째는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요나단은 무기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의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게 붙이셨음이라” 오직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랬기에 몰래 자기 병기든 소년과 둘이서, 적진 속으로 들어 갈 수가 있었습니다. 원래 기습공격이란 상대방이 모르도록, 몰래 숨어서 가는 법인데, 요나단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11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에게 자기의 모습을 보이면서, 정면으로 쳐들어 간 것입니다. 이것은 무식한 방법이요, 미친 사람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자기 손에 그들을 붙이셨음을 믿고, 담대히 나간 것입니다. 이것이 승리의 비결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상황과 같은 일을 요즘 저희가 하고 있습니다. 조전도사와 함께 새 성전 자리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돈도 없고, 움직일 수 있는 여력도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었기에, 믿음으로 성전자리를 보려 다니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성도 20명인데, 6-70평 자리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전할 비용이 없는데도, 이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는 600명밖에 없는 초라한 형편이요, 상대방은 36,00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적군이 버티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도무지 말도 안되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믿음을 가지고 나아갔고-, 환경을 보지 않고, 나아갔듯이-, 저희들도 믿음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분명히 6절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하신 것처럼-, 우리 제자교회에도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기적이 일어나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믿는 자에게 그대로 되게 하는 기적을 베푸신다는 것을 믿고, 교회를 위해,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하는 일을 위해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협력자(協力者)

      병기든 소년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요나단이 자기 병기든 소년에게,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고 말하자, 이 소년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였습니까? 7절에,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하여 따르리이다” 하였습니다. 36,000명의 블레셋 대군이 쳐들어 왔기에, 3,000명이나 있던 군사들이 다 도망가고, 겨우 600명만이 남아 있는 형편입니다. 그나마도 그들과 맞서 싸울 무기도 없어, 저들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는 비참한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가 기껏 한다는 짓이-, 어린 소년에게 단 둘이서 수만의 대군이 있는 적진 속으로 들어가자고 하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철부지 같은 생각입니까? 하지만 이 어이없는 제안에 놀랍게도, 이 소년은 순종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요나단의 말이 끝나자, 병기든 자가 요나단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죽음의 위협이 눈앞에 뻔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병기든 소년은 요나단의 계획에 전적으로 동조해 주었습니다. “당신의 마음대로 행하소서. 내가 따르니이다”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겠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위대한 조력자의 모습입니다. 이 장면에서 병기든 소년의 후원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요나단에게는 600명의 군사보다-, 이 한사람의 협조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어떤 특정인 한사람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에게 아론과 홀이 있었기에-, 위대한 출애굽의 역사가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도 디모데와 바나바와 실라, 브리스길라, 아굴라같은 동역자가 있었기에-, 로마를 비롯 아시아 지역에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한사람의 힘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군가 날 성원해준다!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 사실 하나 때문에, 세상 살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게 됩니다. 요즘 교회 개척하기가 얼마나 힘들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 성공률이 1%도 안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 제자교회가 세워지고, 날로 든든히 되어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기도와 협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 혼자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듯이, 목회자만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들의 기도와 헌신이 없었다면-, 지금까지의 목회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요나단에게 병기든 소년이, “당신의 마음대로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하여 따르니이다” 하였던 것처럼-, 지금껏 여러분이 이 소년이 고백한 대로, 목회자를 믿어주고, 따라와 주고, 같이 협력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지금까지 기도하고, 헌신 하였듯이-, 앞으로도 주님오시는 그날까지, 주의 종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훌륭한 동역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비젼을 가지고 나아갈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 병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하고, 그 아비에게는 고하지 아니하였더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요나단은 자기의 계획을 자신의 아버지 사울에게 알리지 않았고, 최후까지 남은 6백 명의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사울에게 말했으면, “이러이러해서 안 된다!”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백성들도 “이러이러해서 안 된다! 무모한 일이다!”라고 말하며, 요나단의 계획에 찬물을 끼얹었을 것입니다. 단 둘이 가서는 안되고, 600명을 2편으로 나눠서, 어쩌니 저쩌니, 군사전략을 짜라고, 그들은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단은 그들에게, 심지어 자기 아버지에게도 자기의 비젼을 이야기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입니까? 그들은 사람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니, 안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이전도 그러합니다. 앞으로 선교센터를 건축하고, 세계선교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획을 가지시고, 일을 행하시면-, 능치 못한 것이 없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서산에 충성교회라고 있습니다. 너무 어려운 교회라, 우리교회가 후원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월세는 고사하고, 교회 보증금도 낼 수 없는 형편이라 무대뽀로 눌러있는 형편이었는데, 이 교회에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면, 이 목사님이 매일 근처 산에 가서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오로지 교회이전과 부흥을 위해서 말입니다. 산 속에 아예 정자를 만들어 놓고, 힘써 기도한지 만 1년이 되자-, 교회가 그냥 공짜로 생긴 것입니다. 그 산 속의 교회 겸 기도원 하는 목사님이, 이 목사님이 매일같이 와서 기도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그 교회를 이 목사님에게 넘겨 준 것입니다. 돈 한푼 받지 않고, 그냥 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 아닙니까? 어찌 이 기적이 이 충성교회에만 일어납니까? 아닙니다. 우리 제자교회에도 일어날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려면, 비젼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복을 받으려면, 비젼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나하나 잘 먹고 잘 살려고 그러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 교회 크게 잘 짓고 많은 성도가 있는 것을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하기 위해서, 물질이 많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비젼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위대한 동역자가 되게 하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교회를 세우고, 세계 오대양 육대주에 선교사를 보내고, 후원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최후까지 남은 6백 명도 훌륭한 사람들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훌륭한 사람들은 요나단과 또한 그와 함께 하였던 무기를 든 소년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제 2의 요나단과 병기를 든 소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저와 여러분 때문에, 가정이 살아나고, 교회가 부흥하고, 이 나라가 더욱 든든케 되는 기적의 주인공들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요나단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과 환경을 보고 좌절하고 원망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젼을 보고,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확신도 있어야 합니다.

      또한 병기든 소년처럼, 믿음으로 가지고, 따르는 동역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나단이 있었더라도, 병기를 든 소년이 따라가지 않았다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자 해도, 함께 일할 사람이 없다면-, 기적을 일으킬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제2의 병기 든 자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고-, “함께 주의 일을 하자”고-, 여러분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때, 소년이 대답한 것처럼,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대답하며,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와 여러분 하는 일위에, 기적이 일으키는 위대한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홍배 목사)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의한 것이 아니다(사무엘상 14:1~23)

      하나님의 역사(役事)는 우리의 능력에 좌우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악해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승리를 거두게 되고, 아무리 우세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패배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나단은 자기의 무기를 든 병사와 단 둘이서 블레셋의 진영으로 넘어가 20여 명의 블레셋 병사들을 죽입니다(13절, 14절).
      14절에 나오는 반나절 갈이 땅이란 약 2㎢의 면적을 의미하며, 무기를 든 병사란 왕이나 장수 휘하에서 부관(副官)이나 비서처럼 수행하는 병사를 의미합니다.
      요나단과 요나단의 무기를 든 병사가 종횡무진(縱橫無盡)하며 블레셋 진영을 휘젓고 다닌 것입니다.

      사울은 약 600명의 병사들과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동안에(2절) 요나단은 블레셋 진영으로 담대히 진격한 것입니다.
      블레셋 진영은 매우 험준한 지역이었습니다.

      4절과 5절을 보면 험한 바위가 자리하고 있었고, 요나단이 손발로 기어 올라가야 할 정도로(13절) 험악한 지형이었지만 요나단은 그러한 지형적인 난관과 블레셋의 강력한 군사력은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단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면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는 말은 확신에 차지 않은 모습이 아니라 표준새번역 성경의 번역처럼 “주께서 도와 주시면 승리를 거둘 수도 있다”는 표현입니다. 군사력이나 상황보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8절부터 10절의 말씀을 보면 블레셋 진영으로 가서 싸울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에 대한 것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Sign)에 의해 하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요나단의 굳은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부분입니다.

      반면 사울 왕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고 있는 장면이 기록됩니다.
      사울의 진영에는 엘리 제사장의 증손인 아히야가 제사장으로 함께하면서 에봇을 입고 있었습니다(3절).
      그리고 사울은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오라고 하였는데(18절), 사울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종교적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사무엘상 4장에서 이미 하나님의 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나왔다가 낭패를 경험한 적이 있었는데, 사울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서라기보다는 종교적 힘을 빌리려는 얄팍한 술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절은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와서 전쟁에 대해 하나님께 물으려고 하였지만, 블레셋 진영에서 혼란이 일어나는 상황을 보고는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궤를 이용했다가, 거두었다가 하는 모습입니다.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마무리됩니다(20절~23절).
      “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21절), 즉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블레셋 병사에 소속되어 이스라엘과 싸우던 히브리 사람들이 돌이켜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 시작했고, 블레셋 군사력을 두려워하여 숨어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속속들이 나와서 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블레셋 군사들을 물리친 것입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날에 이스라엘을 구원”(23절)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 매우 열악한 이스라엘 군대였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인해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6절)라는 요나단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은 상황이나 주어진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한다면, 상황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으로 오늘도 승리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3월 29일(토) 사무엘상 11-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라를 새롭게 하자(삼상 11:14)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Then Samuel said to the people, "Come, let us go to Gilgal and there reaffirm the kingship.

      나라를 새롭게하자를 NIV 영어 성경에서 "왕권을 재확인하다(reaffirm the kingship)" 라고 번역합니다.
      KJV. NASB / 왕국을 새롭게 하다(renew the kingdom there).

      현대인, 새번역 / 사울이 우리 왕이라는 것을 새롭게 선포하자
      공동번역 / 즉위식을 몰리자
      새한글 / 왕국을 새롭게 합시다

      자유대한민국을 새롭게 세우자!
      전환점(轉換點) / 구를 전(轉), 바꿀 환(換), 점 점(點)
      어떤 시기(時期)나 상태(狀態)로부터 다른 시기(時期)나 상태(狀態)로 전환(轉換)하는 계기(契機)나 시점(時點).

      전환점을 영어로 turning point. watershed

      확실히 아는 것과 바라는 것

      영적 생활에 대한 안내자로 존경받는 존 카바나가 오래 전에 캘커타에서 3개월 동안 봉사 활동을 하러 갔었다.
      그는 자신의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착한 첫 날 아침에 그는 테레사 수녀를 만났다.
      테레사 수녀가 물었다.
      "제가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존은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수녀가 되물었다.
      "무엇을 기도해 드릴까요?"
      존은 대답했다.
      "확실하게 알고 살아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자 수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 기도해 드릴 수 없습니다."
      예기치 않은 대답을 듣고 놀란 존을 보고 수녀가 말을 이었다.
      "확실한 것은 당신이 추구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존이 수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저에게 수녀님은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고 또한 믿고 있는 분처럼 보입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테레사 수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한 번도 확실하게 알고 믿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늘 가지고 사는 것은 신뢰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세 가지 길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지난 100년만 봐도 일제강점기와 한국동란을 통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습니까?
      지금도 여러 가지 위험이 나라 안팎에 산재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에는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 불린 사람이 둘 나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나라를 지켜준 국방력과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나라를 지켰습니까?

      이들은 모두 위대한 예언자였지만 사역의 모습은 전혀 달랐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나라의 왕을 꾸짖고 심지어 저주까지 했습니다.
      왕과 백성에게 바른 믿음과 바른 삶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엘리야는 온 나라가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갈멜산에서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바른 믿음을 가르쳤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을 때도 아합과 이세벨을 꾸짖으며 바른 삶을 가르쳤습니다.
      바로 이것이 나라를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을 잘 믿고 바르게 사는 나라를 지켜주십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백성의 믿음을 지켜주고 바르게 살도록 해준 것이 바로 나라를 지킨 일이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엘리사는 왕과 백성을 많이 도와줬습니다.
      아람 군대가 어디로 쳐들어올지 미리 왕에게 알려줘서 방비하도록 돕기도 했습니다.
      여러 가지 기적으로 어려운 백성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엘리사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기적적인 하나님의 도움을 받게 해줌으로써 나라를 지킨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나라를 지키는 두 가지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엘리야의 방법 

      이 방법은 나라를 바른 믿음과 정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정부가 잘못할 때는 비판합니다.
      사회의 부정부패를 꾸짖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회를 바로 세우면 하나님이 나라를 보호해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엘리사의 방법

      이 방법은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백성을 돕는 것입니다.
      나라의 안전과 발전을 위해 기도합니다.
      정부의 사업에 협조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백성이 잘 살게 해줍니다.
      그러면 나라가 부강해지고 보존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의롭게 살아가는 방법

      소돔성이 왜 망했습니까?
      백성이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돔성에 의롭게 사는 사람이 10명만 있었어도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예레미야 시대에는 예루살렘에 의인이 1명만 있었어도 나라가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5:1을 보십시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한 사람이 바르게 사는 게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며 바른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게 당장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 혼자만이라도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거짓과 부정부패를 멀리하고 이웃을 도우며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나 한 사람 때문에라도 나라를 지켜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른 믿음과 바른 삶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나라를 지키는 고귀한 삶을 살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가 나라를 새롭게 하자(사무엘상 11:1-15)

      사사 시대를 지나오는 동안 이스라엘은 주변의 이방 민족들에게 있어서 정말 '만만하기' 짝이 없는 상대로서 그야말로 그들의 '밥'이고 '동네 북'이었습니다.
      그들은 걸핏하면 이스라엘의 외곽 지역에 있는 지파들을 침략하여 소중한 추수양식을 비롯하여 온갖 재물을 약탈해 갔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없고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무정부 상태의 이스라엘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맞기만 하던 이스라엘이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났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때려누이기까지 하는 이변을 일으킵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사울의 리더십 덕분에 이스라엘은 실로 오랜만에 통쾌한 승리를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 사무엘은 바로 그런 상승무드를 놓치지 않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길갈에 모아서 "우리가 나라를 새롭게 하자"라고, 새 조국 건설을 위한 전환기로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북한 공산독재자가 이처럼 우리를 '만만한' 상대로 깔보고 걸핏하면 거의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도발'을 일으켜 와도, 우리나라는 계속 당하기만 하는 '약골'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히려 '북한을 자극하면 안 된다.'고 벌벌 떠는 '겁쟁이'들로 변해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도대체 이런 창피하고 무력한 꼴을 언제까지 계속하겠다는 것입니까?
      우리 대한민국이 모든 면에서 더 '발전'하고 전 민족이 함께 '우리나라 만세'를 외칠 수 있게 되기를 진정 원한다면, 북한 공산주의자들 따위에게 이렇게 농락당하는 처지부터 속히 벗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저 악한 북한 공산독재자의 도발 앞에 당하기만 하는 약골처럼 되어 가고 있는 조국 대한민국을 과연 어떻게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당당한 나라'로 새롭게 세울 수 있을지를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원수의 위협' 앞에 떠는 대신에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11장 1절로 8절에 기록하기를 "1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를 대하여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2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눈을 다 빼어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3야베스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에게 이레 유예를 주어 우리로 이스라엘 온 지경에 사자를 보내게 하라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네게 나아가리라 하니라 

      4이에 사자가 사울의 기브아에 이르러 이 말을 백성에게 고하매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더니 5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가로되 백성이 무슨 일로 우느냐 그들이 야베스 사람의 말로 고하니라 6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 7한 겨리 소를 취하여 각을 뜨고 사자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경에 두루 보내어 가로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아니하면 그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8사울이 베섹에서 그들을 계수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이요 유다 사람이 삼만이더라"고 했습니다.

      암몬은 이스라엘의 동쪽에 살던 민족으로서 서쪽에 있던 블레셋과 함께 수시로 이스라엘을 좌우에서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그 암몬의 왕 나하스가 이스라엘을 또다시 침공해 왔는데, 당시 요단강 동쪽 경계 부근에 위치하고 있던 성읍 "길르앗 야베스"가 제일 먼저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던 야베스의 거민들은 암몬 왕에게 "우리와 조약을 맺어 주시면 우리가 당신을 섬기겠습니다."라고 일종의 '조건부 항복'을 제의했습니다.

      하지만 나하스는 "내가 너희들 모두의 오른쪽 눈을 다 빼버리고 나서 너희와 조약이고 뭐고 맺겠다."라고 위협하면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해 왔습니다. 

      더욱 난감해진 야베스 사람들은 "우리에게 칠일 간의 시간을 주면 이스라엘의 다른 모든 지파 사람들에게 연락해 보고 그래도 아무 도리가 없으면 두 손 들고 당신에게 나가겠습니다."라고 사정했습니다. 

      암몬 왕 나하스는 그들에게 칠일의 여유를 주더라도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로부터 아무런 군사적 도움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까닭에 그 요구를 수락했습니다.

      그래서 야베스의 전령들이 기브아로 와서 그 소식을 전해 주게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모두가 당장 울음바다에 빠졌습니다.
      나라가 외적의 침략을 당했는데도 무슨 국가적인 대책을 세운다든지 전쟁 준비를 한다든지 할 엄두도 내지 않고 그저 대성통곡만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암몬 왕 나아스가 예상했던 그대로였습니다. 

      그때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면서 그 자리를 지나가다가 그 소식을 듣게 되자 다른 백성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는 즉시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되는" 즉 '성령께서 밀어붙이는 강력한 충동'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 노가 크게 일어난" 것 즉 의로운 분노가 솟구쳐 오른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사람이 '의분'을 느낄 줄 알아야만 하는 것은 그래야만 악한 일에 대항할 큰 힘과 단호한 결단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그처럼 울기만 하는 약한 백성들을 정신 번쩍 들게 하기 위하여 일종의 극약 처방을 하게 됩니다.
      자기가 몰고 오던 "소 한 겨리" 즉 소 두 마리를 그 자리에서 죽이고 토막들을 내어 이스라엘의 다른 모든 지파에 보내면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 출전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 집의 소도 이 모양 이 꼴이 되도록 해 주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입니다. 

      이 기상천외의 '소집영장'을 받았던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암몬 사람을 겁내는 두려움에만 사로잡혀 있던 울보요 겁쟁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이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보다 더 겁나는 두려움,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을 일깨워 주자, 그들은 당장 사람이 싹 바뀌어 일사각오로 전투대열에 모여들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순식간에 33만 명의 병력을 갖추게 된 것이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부산의 어느 지하철역에서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에 대하여 이모 씨와 박모 씨 사이에 시비가 붙었습니다.
      탈북자인 이 씨가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게 매번 쌀만 퍼주고 너무 어리석다. 북한과 전쟁하면 반드시 남한이 이긴다."라고 말하자, 박 씨가 "북한과 전쟁하면 모두 죽는다."라고 반박하면서 이 씨를 '간첩'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 말에 격분한 이 씨가 박 씨를 따라가서 주먹을 휘두른 바람에 폭행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것입니다.
      물론 그 탈북자가 폭행을 가한 것은 정말 잘못한 일입니다.
      하지만 진짜 '간첩'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북한 공산주의 사회를 싫어해서 탈북한 사람을 두고 '간첩'이라고 비웃는 바람에 그만 울분이 폭발했을 것입니다.

      '전쟁이 나면 다 죽는다.' - 이것이야말로 '겁쟁이'의 소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니, 그 소리야말로 북한이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퍼뜨리고 있는 공갈협박이 아닙니까?
      원래 '공포'란 것은 정말 순식간에 확산되는 최악의 전염병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못난 백성들은 원수의 위협만 듣고도 벌벌 떠는 '졸장부'요 '울보'들이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대체 뭐가 약하고 모자라서 저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겁내는 것입니까?
      군사력, 경제력, 국민의 애국심, 세계적인 우방의 지원 등 그 무엇을 보더라도 우리 대한민국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교회와 신자'들이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새벽마다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계수'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원수의 위협에 떨기만 하는 울보와 졸장부에게는 끝내 패배자와 종이 될 일밖에 남지 않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백성은 담대한 용기와 새 힘을 얻을 뿐 아니라 위로부터 내리는 완벽한 안전보장을 받을 수 있음을 꼭 깨닫고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은 '비류들의 비난'에 개의치 말고 '국가안보를 위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11장 9절 이하 15절 말씀에 "9무리가 온 사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얻으리라 하라 사자들이 돌아가서 야베스 사람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기뻐하니라 10야베스 사람들이 이에 가로되 우리가 내일 너희에게 나아가리니 너희 소견에 좋을대로 우리에게 다 행하라 하니라 11이튿날에 사울이 백성을 삼대에 나누고 새벽에 적진 중에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12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13사울이 가로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 14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15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 사울로 왕을 삼고 거기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앞의 10장 25절로 27절의 기록에 보면, 사무엘은 미스바에서 공식적으로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출한 후에 "나라의 제도" 즉 이스라엘을 어떻게 '신정국가'로 세워야 할지를 책에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이 그때부터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어떤 비류"들은 "이런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왕이 되겠는가?"라고 사울을 "멸시"하면서, 새로 선출된 왕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예물을 바치기를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처럼 자기를 정면으로 비난하는 화살에 대하여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암몬이 이스라엘을 침공해 왔으며, 바로 그때 앞서 11장 5절 이하에서 보았던 대로 사울이 나서서 두려워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추스르고 모든 국력을 한데 모아 적군을 맞서 싸우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일단 군사 모집이 이루어지자 사울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다음날 원병이 도착할 것이라고 전달해 주었습니다.
      기대하지 않고 있던 그 반가운 구원 소식에 야베스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면서, 암몬 왕 나하스에게는 "내일 우리가 항복하러 가겠다."라고 약속하여 시간을 벌어 두었습니다.
      그러고 바로 그날 밤에 사울은 자기 군대를 "삼 대"로 나누어 적군을 포위하면서 "새벽에 적진 중에 들어가는" 기습작전을 펼쳤고, 그 결과 다음날 낮이 될 무렵에는 암몬 군사들을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을" 정도로 완전히 소탕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었습니다. 

      일단 전쟁에 승리하자 백성들 중에서 나온 첫 마디가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냐? 당장 끌어내어 죽이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적군에게 항상 당하기만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의 단호한 대처와 지도력 때문에 통쾌한 승리의 맛을 보게 되자 '사울 이 사람, 그렇게 볼 사람이 아니었구나.'라고, 한순간에 그의 열렬한 옹호자로 돌아섰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런 정치보복 행위를 금지시키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셨다"라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무엘과 함께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는" 새 출발의 의미로서 정식 대관식을 올리고 또한 하나님께 감사의 화목제를 드림으로써 실로 유종의 미를 장식했던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비류들이 자신의 지도력에 대하여 비난을 퍼부어 왔을 때에는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백마디의 말 대신에 위기상황을 대처하는 단 한 번의 행동으로써 자신의 리더십을 백분 발휘했으며, 그럼으로써 모든 억측의 여론을 잠재우고 분열되었던 국론을 통일시켰습니다.
      그처럼 사울은 조국 이스라엘의 영토와 백성을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냄으로써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서의 신임을 받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을 본격적인 왕정국가로 출발시키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북한의 무력도발이 있을 때마다 그랬지만 이번에도 '비류'들의 망언은 여지없이 튀어나왔습니다.
      모 정당의 대표는 "연평도에서 군인이 사망하고 주민들이 불길 속에 두려움에 떨었다"면서 "북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언급한 후에 이어서 "남북관계를 악화시킨 결과를 정부는 똑똑히 봐야 한다"며 "대결로 생겨나는 것은 비극뿐"이라고 모든 비난의 화살을 현정부에 쏟아 부었습니다.
      정말 입에서 나오면 다 말입니까?
      그렇다면 민간인 거주 지역에까지 대포를 쏘아댄 쪽은 '남북관계를 정상화시키려고' 그랬다는 소리입니까? 

      "정부는 즉시 단절된 핫라인을 복구하여 평화적 조처를 해야 할 것"이라고요?
      좌파들이 정권을 잡고 온갖 '평화적' 노력이라는 것을 다 기울였을 때에는 북한이 얌전했습니까?
      1차 및 2차 연평해전을 일으키고 금강산의 관광객을 사살하고 원자폭탄까지 실험한 것은 '도발'이 아니고 무슨 '애 장난'이었다는 말입니까?

      지금 그처럼 저 공산독재자가 행하는 모든 악한 짓들에 대하여 철저히 변호해 주고 그 대신에 자국 정부를 비난하는 그런 정치인들이야말로 김정일로 하여금 더욱 기고만장하게 악랄한 도발을 일으키게 만들고 있는 장본인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저질적인 '비류'들을 국회의원석에 버젓이 앉혀 두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 국민들은 도대체 왜 이런 '매국노'들에게 혈세의 세비를 꼬박꼬박 갖다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까?

      저는 이명박 대통령께서 소위 '중도실용주의'를 표방하는 것에 대하여 실망을 금치 못하는 사람입니다.
      좌파가 이렇게 설치고 있으면 우파가 그것을 견제해야 어떻게 '중도'라도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우파가 집권을 해도 그저 '중도'로만 나간다고 하니 전체적으로는 '중도좌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좌파가 집권하면 우파는 아예 '쪽을 못 쓰고' 온통 '좌파 천국'이 되고 마는 현실인 것입니다.

         좌파 정권 10년에 신물이 난 국민들이 절대다수의 표를 모아 선출해 주었으면 좀 그 뜻을 반영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무슨 정치 보복을 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이 대한민국의 국시 자체를 부인하고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는 '정치꾼'들이 더 이상 날뛰지 못하도록 어디까지나 '반공 민주주의의 법치(法治)'를 좀 더 철저히 수행해 달라는 바람인 것입니다.
      우리 조국의 위정자들이 이런 매국적인 '비류'들의 권모술수와 선동에 끌려 다니지 말고 진정 국가안보와 국민복지를 위한 리더십을 책임 있게 발휘할 수 있도록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얼마 전 '서울 G20 정상회담' 기간 중에 그것을 홍보하는 공익광고 가운데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동화를 패러디한 것이 나왔었습니다.
      예쁘장한 외국인 소녀가 한국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가 '처음 보는 아주머니도 이모라고 부를 정도로 이웃끼리 다정하고, 국가적인 경제위기 중에도 서로 격려하고 협동하는' '참 이상한 나라'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그 광고에서 '이상하다'는 말은 '경탄스럽다(wonderful)'는 뜻입니다.
      실로 우리 대한민국은 경제뿐 아니라 예술, 스포츠 등등 각 분야에서 이미 세계 정상급에 도달해 있는 정말 '놀라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딱 하나, 정치에서만은 아직까지 '민주주의 초보' 수준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도 우리나라는 정말 '이상한', 아주 '괴상한(ridiculous)' 나라인 것입니다.

      일전에 '천안함 격침 사태' 이후에도 개성공단의 북측 관계자들은 우리 기업주들에게 '개성공단은 절대로 폐쇄시키지 않을 터이니 제발 나가지 말라.'고 사정했었습니다.
      북한은 아예 한술 더 떠서 이번 '연평도 포격 사건' 바로 다음날에도 '금강산 관광 재개'를 뻔뻔스럽게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그 두 곳을 자진철거하기는커녕 이처럼 자국민을 총과 대포로 쏘아 죽이는 나라에 가서 돈을 벌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상한 나라' 아닙니까?

      자국 함선이 침몰당하고 자국 영토가 포격을 당하고 자국 병사가 적군의 조준사격에 쓰러지고 자국 국민들까지 사상자가 생기는 판이면, 이것은 비록 국지전이라 할지라도 사실상 '전시 상황'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4대강 사업'하는 곳곳에는 그렇게도 농성 데모 잘하는 이 나라의 국민들은 그 흔한 '촛불 시위' 하나도 할 줄 모릅니다.
      장례식장에서 자국 대통령까지 욕할 정도로 흥분 잘하는 이 나라의 정치가들은 북한을 향해서는 '이래서는 안 됩니다.'라고 무슨 '애 타이르는' 듯한 한 마디로 끝내고 그 대신에 국회를 현정부를 비난하는 규탄대회장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실로 '어처구니없게 이상한 나라', 아니 정말 '기똥찬 나라'입니다.

      이번 '연평도 포격'은 김정은에게 정권을 물려주려 하는 김정일이 '남조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한번 실전 시범을 보여 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봐라. 우리가 이런 식으로 무력도발을 일으키면 저 겁쟁이 남조선 국민들은 더 벌벌 떨고 남조선의 정치가들은 저희들끼리 나누어져 서로 싸우지? 게다가 그 남조선 안에 우리 북조선을 찬양하고 동조하는 세력들까지 점점 더 늘어만 가고 있지 않느냐?"라고 김정일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김정은을 교육시키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저는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입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제발 '안보 불감증'에서 좀 깨어나세요.
      '연평도'는 여러분하고는 별 상관없는 '작은 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까?
      그 곳은 여러분의 주거지와 똑같이 '대한민국'으로 시작되는 주소가 있는 우리의 영토입니다.
      그 주민들은 여러분과 똑같이 '주민등록번호'를 가진 우리 국민들입니다.
      그 섬에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처자식들과 같이 먹고 자는 집이 있으며, 여러분의 밥상에 조기를 올려 주기 위하여 고기잡이를 하는 생계 활동이 있으며, 여러분의 생명과 자유를 지켜 주기 위하여 대한민국의 해병대원들이 불철주야 경계근무를 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연평도에 떨어진 포탄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집 지붕'에 떨어진 포탄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 집 아이들이 있는 학교와 놀이터'에 갑자기 수십 수백 발의 포탄이 터진 것입니다.
      그런 일을 당해도 여러분은 '북한이 이래서는 안 되는데.'라고 태연자약하고 '왜 대북관계를 좀 더 평화적으로 유지하지 못했나?'하고 우리나라 정부를 비난하겠다는 것입니까? 
      도대체 얼마나 더 심하게 나와야 이들이 우리의 '주적'이며 이들의 행패가 '적대적인 공격'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까?

      이미 우리 국민들은 북한과 좌파 정치가들에 의하여 세뇌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앞으로 북한공산군이 진짜로 '2차 한국전쟁'을 도발하고 휴전선 일대를 포격해 와도 '국군의 사격훈련에 대하여 반발한 것'이라고만 생각할 것입니다.
      저들이 위협한 그대로 서울시를 '불바다'로 만들 포탄들을 쏟아 부어도 이 나라의 좌파 정치꾼들은 '현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공식선언부터 먼저 발표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이런 식으로 북한공산군의 '동네북'이 되고 우리 5천만 국민이 독재자 김정일의 '밥'이 되어서야 하겠습니까?
      정말이지 우리는 '나라를 새롭게 해야' 할 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구국운동에 앞장 설 사람은 바로 조국의 '파수꾼'인 교회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의인 십인'인 기독신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수 '암몬 족속'을 두려워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함'으로써 용기와 새 힘을 얻고, 매국적인 '비류'의 비난과 간계를 타파하고 오직 '국가안보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위정자들이 되도록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소중한 조국 대한민국을 진정 '새롭게 세우고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라를 지키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라를 위한 기도와 정의롭게 살아가는 것
      개인주의를 벗어나야 하는 것
      자기 맡은 일에 성실한 것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로마서 13:1~7)

      독일의 한국 대사관 문화홍보원이 운영하는 웹사이트(www.Koreaheute.de)에 쉬테판 뮐러라는 독일 사람이 기고한 글이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 일이 있습니다.

      이 글의 주요 내용을 발췌해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어느 여름날 우연히 사진 한 장 때문에 한국, 아니 한민족에 얽힌 엄청난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두 명의 일본인이 1등과 3등을 차지한다.
      하지만 시상대에 오른 두 일본인의 표정은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슬픈 표정이다.
      왜 두 사람은 슬픈 표정으로 시상대에 서있는 것일까?

      그들은 바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코리아의 ‘손’과 ‘남’이라는 젊은이었다.
      시상대에 오른 그들의 가슴에는 일장기의 붉은 원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일본 국기가 게양되었다.
      두 사람은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그들은 부끄러움과 슬픈 얼굴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왜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와 동메달을 딴 남승룡 선수가 저렇게 고개를 숙여야 하며,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까?
      이 사진 한 장은 우리에게 나라의 소중함을 깊이 생각하게 해 줍니다.

      나라는 마치 울타리와 같습니다.
      양이 울타리 안에 있을 때 보호를 받고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나라 안에 있을 때 보호를 받고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나라를 잃어버린 민족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 중국에만도 57개나 되는 민족들이 나라를 잃어버린 채 중국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대표적으로 티벳족, 만주족, 회족, 위글족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마음 놓고 자기들의 뜻을 펼칠 수가 없습니다.
      비전을 잃어버린 채 남의 눈치만 살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종교마저도 자기들 뜻대로 지켜갈 수가 없습니다.
      울타리를 잃어버린 양들처럼 불안한 나날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개인의 성공과 출세도 나라가 있고 나서입니다.
      가정과 가문의 번창도 나라가 있고 나서입니다.
      기업의 부흥과 발전 역시 나라가 있고 나서입니다.
      나라가 없다면 그 모든 것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슈테판 뮐러는 이어서 또 다른 사진 하나를 소개하면서 글을 이어갑니다.

      52년 후 88서울 올림픽.
      개회식 세레모니에서 백발이 성성한 손기정씨가 세 살배기 아이처럼 덩실덩실 춤을 추며 손에 성화를 들고 달린다.
      그 당시 모든 한국인들은 이 노인에게 그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빚을 갚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왜 손기정 옹이 올림픽 성화를 들고 달리면서 그렇게 춤을 추었을까요?
      이 사진은 우리가 나라를 지켜야 할 이유를 깊이 생각하게 해 줍니다.

      중국선교 여행을 하면서 우리 국력 신장을 실감합니다.
      지난 5000년 동안 우리는 계속 중국의 지배를 받거나 중국의 도움을 받아왔습니다.
      복음도 저 중국 땅을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토마스 목사가 중국을 통해 들어왔고, 번역 성경도 중국을 통해서 들어왔고, 최초의 교회인 소래 교회도 중국을 통해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중국에 가서 선교를 합니다. 신학교를 세웁니다. 교회를 세웁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국력이 과거와 달리 신장됐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계속 중국에 선교를 하려면 우리 국력이 중국이 무시하지 못할 수준을 유지해야 합니다. 만약 방글라데시나 저 아프리카 콩고 같은 나라에서 선교한다고 선교사가 왔다면 우리가 그 선교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전 세계에 선교하려면 우리 국력이 선진국으로 더욱 발돋움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국가는 선교나 개인의 삶을 위한 후견인입니다. 후견인이 든든하면 정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국가가 힘이 있어야 우리가 정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나라가 부강한 나라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의 한 앙케이트 조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선우’라는 결혼정보회사에서 미혼 남녀를 대상으로 한 앙케이트 조사를 했습니다. 결혼 조건으로 이민 가능여부를 내 건 사람이 무려 56%나 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 후에 이민 의향을 내 비친 사람이 무려 71%나 됐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이 할 수만 있으면 이민을 가 보려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일제 하에 우리 선조들은 나라를 잃어버려 어쩔 수 없이 이 땅을 떠나 저 만주로 하와이로 이민 길을 떠났습니다. 외국으로 나가 나라를 되찾으리라는 결심을 하고 이민 길을 떠났습니다. 나라를 되찾고 나면 반드시 돌아오리라 굳게 마음  먹고 이 땅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오늘 젊은 사람들은 나라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이민 길에 오릅니다. 나라가 자기들의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이 땅을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자기 삶에 거추장스럽고 걸림돌이 된다고 나라를 버리고 이 땅을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우리나라의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가 바로 나라사랑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 나라 대한민국을 누가 사랑할 것입니까? 자신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 나라를 버린다면 이 나라 대한민국을 누가 지킬 것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나라 사랑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 메시지를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나라는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위정자들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어서 때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을 다해서 따를 수 없는 점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경하며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자기가 맡은 일을 선하게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조국 대한민국도 여러 가지 면에서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대외적으로 북한의 핵문제로 안보상황이 여간 위태로운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인 상황도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10년 째 성장을 위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대외적으로 이렇게 어려운 때 대내적으로 갈등과 대립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망국적인 지역 갈등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세대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386세대라는 새로운 세대가 참여의 정부에 들어와 힘을 얻으면서 이런 세대간의 갈등은 점점 권력 다툼으로 비화되고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 사이의 갈등, 노와 사의 갈등 온통 나라 안이 대립과 갈등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대내외적인 위기 상황 속에서 국가 리더십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지지도가 10%대로 추락하고 있고, 대통령의 리더십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안정적인 리더십을 펼쳐 보이지 못하고 있고, 여기저기서 대통령의 리더십을 흔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미우나 고우나 하나님께서 대통령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를 믿고 따라주어야 합니다.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문제를 누구 탓으로 돌리고, 그를 비방하고 그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면 일단 속은 후련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만 더욱 키우게 됩니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해결할 수 없게 만듭니다.

        청와대가 언론에 대해, 코드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적대감을 버려야 합니다. 언론도 국민도 청와대에 대한 원망과 적대감을 버려야 합니다. 보수와 진보 진영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적대감을 버려야 합니다. 모두가 이길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를 이 위기에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제 보다 차분하게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의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도 애국자여야 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믿음의 조상들은 한결같이 애국자들이었습니다.

        구약을 보면 모세는 진정한 애국자였습니다. 나라 없이 애굽에 종살이하던 민족을 위해 자기 한 목숨을 던졌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보장된 희망찬 미래를 나라를 위해 포기했습니다. 출 32:32을 보면 심지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으려면 차라리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신약을 보면 바울도 진정한 애국자였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해 사도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사명은 목숨을 다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롬 9장을 보면 이방인을 위한 사명을 감당하면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한 마음이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실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9:3에 보면 자기 민족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자기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느 1:4를 보면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고국에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고국 소식을 들었습니다.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저가 나라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한 병사가 가슴에 총탄이 박혀서 그것을 빼내는 수술을 받는 중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좀 더 깊이 째 보십시오. 내 가슴 속 깊이 조국이 들어있습니다”

      시인 브라우닝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마음을 열어보면 마음 깊이 새겨진 한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은 바로 조국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슴 속에 조국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아! 대한민국” 이 소중한 이름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어야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 79 /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시

      1. 하나님이여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으로 돌 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2. 저희가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며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 짐승에게 주며
      3.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면에 물 같이 흘렸으며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4.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운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5.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6.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7. 저희가 야곱을 삼키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함이니이다
      8. 우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가 심히 천하게 되었사오니 주의 긍휼하심으로 속히 우리를 영접하소서
      9.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10.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주의 종들의 피 흘림 당한 보수를 우리 목전에 열방 중에 알리소서
      11. 갇힌 자의 탄식으로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12.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훼방한 그 훼방을 저희 품에 칠배나 갚으소서
      13. 그러하면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리이다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79편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의 시입니다.
      이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진정한 이 나라와이 민족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기르시는 양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짐은 국가다”라는 말로 유명한 프랑스의 독재자 로이 14세 장례식 때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유언에 따라 시신은 황금으로 만든 관에 누워 대성당 중앙 앞에 안치되었습니다.
      대성당 내부의 등불은 다 꺼진 채 오직 한 자루의 큰 초만이 황금관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루이 14세야 말로 가장 위대한 왕이었음을 나타내고자 함이었습니다.

      드디어 유럽의 각국에서 왕들과 귀족들이 모여들었고 장례 의식은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 돌연 집례 하던 사제가 그 초를 끄고는 이렇게 외쳤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에 빛나는 위대한 왕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섬길 때만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점을 철저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 열강들이 우리 민족의 장래를 책임져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위정자들 지도자들 저들이 이 나라를 책임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잠시 쓰일 뿐입니다.
      이 나라의 오늘과 내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이런 철저한 신앙고백 위에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79:9을 보면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시지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바로 이런 기도가 나라를 지키는 것입니다.

      1980년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하셨던 일가 김용기 장로님이 책 한권을 출판하여 주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 어려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 책의 제목입니다.
      “조국이여 안심하라!” 입니다.

      막사이사이 공공 봉사 상
      라몬 막사이사이필리핀 대통령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아시아 지역에서 사회 공헌 등 업적을 남긴 개인이나 단체에게 수여된다.
      정식 명칭은 '라몬 막사이사이상'이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막사이사이상'으로 수록되었다.

      1963년 김활란
      1966년 김용기

      이 책의 제목은 실제로 김용기 장로님께서 자기 기도실에 친필로 써 붙였던 휘호였습니다.
      이 분은 매일 나라를 위해 4시간씩 기도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면서 이분은 자기가 나라의 파숫군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기가 기도하는 한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외면하시지 않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며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조국이여 안심하라!”
      바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최고의 애국인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나라 꼴이 말이 아니라”고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나라에 대한 걱정을 한다고 대통령을 욕하고, 정치 지도자들을 욕하고, 우리 현실을 원망하는 소리로 시끄럽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나라를 위해 한 평생 헌신하셨던 김구 선생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할 일을 찾는 백성은 흥하고, 원망할 것을 찾는 백성은 망한다”

      우리가 이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말보다 묵묵히 나라를 위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위해 앞장 서야하겠습니다.

      1967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벌어진 제 3차 중동전쟁을 ‘7일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인구는 300만이었고, 이집트는 1억이 넘는 대국입니다.
      놀랍게도 300만의 이스라엘이 1억의 이집트를 불과 7일 만에 항복을 시키고 만 세계 전쟁사에 유래가 없는 전과였습니다.

      한번은 이집트의 대공포가 이스라엘의 전투기 한 대를 격추시켰습니다.
      추락한 비행기에 가보니 놀랍게도 조종사가 만삭된 임산부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인과 어린 아이만을 제외하고는 만삭된 임산부까지도 전투에 참가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나라에도 이런 임산부들이 필요합니다.
      개딸 부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개딸'"개혁의 딸" 의 줄임말로 정치인 이재명의 극단적 여성 지지자들을 일컫는 신조어이다.
      '냥아들' "양심의 아들"을 줄임말로 이재명을 지지하는 남성 지지층을 일컫는 신조어이다.
      2022년 중반까지만 해도 둘을 합쳐서 "개딸. 냥아들"이라고 지칭하는 효현이 유행되었으나 현재는 "개딸"외에는 전부 사장되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4. 19혁명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기에 진심으로 나라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나라 없이 진정한 나 개인의 성공도 행복도 없습니다.
      나라 없이 가문의 번창도 영광도 없습니다.
      특별히 나라 없이 교회도 없습니다.
      일제시대 나라를 잃어버리자 교회도 문을 닫았던 기억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 속에 나라 사랑이 가득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3월 28일(금) 사무엘상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왕의 만세(삼상 10:24)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
      Samuel said to all the people, "Do you see the man the LORD has chosen? There is no one like him among all the people." Then the people shouted, "Long live the king!"

      왕의 만세(예히 함 메렉) 예히 함메렠 <יְחִי הַמֶּלֶךְ׃ ף>
      God save the King


      "택하다"(בָּחַר, bachar, 바하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강조하며, 사울의 외형은 백성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도어맨 조셉 조렌티니의 행복한 53년의 비결

      조셉 조렌티니는 그는 뉴욕에 있는 플라자 호텔에서 도어맨으로 53년 동안 근속한 사람이었다.
      그는 53년 동안 3일만 결근한 정말 충성스런 직원이었다.
      그가 78세로 은퇴를 하게 되자 기자들이 찾아와 물었다.
      “당신은 그런 단순한 일을 어떻게 53년 동안이나 계속할 수 있었습니까?”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지요. 호텔 도어맨은 날마다 새 사람을 만나는데, 이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손님을 맞이할 때 예수님을 맞이하듯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예수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므로 이 호텔 현관은 53년 동안 제게 천국이었습니다.”



      왕의 만세(Long live the King)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 되었지만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사울은 기브아로 내려가 이전에 했던 소를 몰며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러던 중 길르앗 야베스에 큰 어려움이 발생한다.
      암몬이 길르앗 야베스를 치러 올라와 이스라엘을 모욕한 것이다.
      아베스 사람들이 항복을 하려 하지만 암몬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을 빼지 않으면 그들의 백기를 절대 받아 드릴 수 없다고 엄포를 놓는다.
      다급해진 길르앗 야베스 장로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령을 보내 그들의 어려운 상황을 전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 하고 있던 그때 소를 몰던 사울이 도착한다.
      사울이 이 소식을 듣자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되어 분노하기 시작한다.
      그가 몰던 소를 잡아 열두 조각을 낸후 각 지파에 보내며 소집을 명령한다.
      만약 이 소집에 응하지 않는 지파는 조각난 소처럼 그들의 가축을 이렇게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이때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사울을 두려워 하여 소집 명령에 응한다.
      사울은 야베스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야베스 사람들은 기뻐하며 암몬 사람들에게 내일 그들의 요구대로 하겠다고 기만한다.
      사울 왕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군사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암몬 사람을 쳤다.
      두려움에 흩어진 암몬 사람들은 둘 이상 짝을 이루지 못하고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위기에서 왕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모두 기쁨의 잔치를 즐기는 그때 백성들이 “사울 어떻게 우리의 왕이 될 수있느냐고 떠들던 자들이 누구냐” 외치며 그들을 끌어내어 죽이자고 한다.
      사울은 기쁨의 날에 이런 살육이 잘못된 것임을 가르치고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는 왕의 미덕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쁨의 날에 확신을 갖게 된 사무엘은 길갈로 가사 사울을 다시 새롭게 할 왕으로 선포하고 모든 백성이 이를 즐거워한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위기에서 빛나는 사울의 리더십을 보게 된다.

      왕의 어떤 리더십을 가져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도자는 나라가 위기일 때 잘 대처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신앙은 평안 할때 보다 위기에 처했을 때 신앙의 진 면목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울의 리더십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울은 자신을 배척한 사람들을 끌어내어 죽이자고 하는 백성들을 말리며 오히려 용서하는 덕목을 보여준다.
      이 모습을 본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을까?
      사무엘은 이때다 싶어 길갈로 가서 사울을 다시 왕으로 새롭게 새운다.

      ​사울이 어떻게 이런 리더십을 가질 수 있었는가?

      그것은 사울 자신에게서 찾으면 안된다.
      6절에 보면 그 원인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세차게 내리니”… 새번역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임하니까? 사울 안에 있는 두려움이 사라졌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니까 고통 당하는 백성을 불쌍히 여기게 된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담대해졌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니까 자신을 배척했던 사람들을 용서 할 수 있었다.
      오늘 사울이 보여준 모든 리더십의 핵심은 하나님의 영이 세차게 내린것에서 찾을 수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담대함은 어디서 오는가? 성령 충만이다.
      우리는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가? 성령 충만이다.
      우리는 어떻게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가? 성령 충만이다.
      사울을 다시 일으킨 원동력은 단 하나 하나님의 영이 세차게 임한 결과이다.

      이 땅에 교회들이 언제부턴가 성령 충만을 사모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기도가 사라졌다.
      우리는 오늘 사울의 모습을 보며 다시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할 것이다.

      사무엘상 1~7장 / 사사 사무엘에 관한 이야기
      사무엘상
      8~15장 / 사울왕의 재위기 
      사무엘상 15~31장 / 다윗의 이야기 

      사무엘상은 사무엘 – 사울왕 – 다윗왕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상 10장은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사울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신정체제에서 왕정체제로 넘어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1. 하나님의 기름부으심 (1, 6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웁니다.
      그러자 세 가지 징표를 예언하고 그 징표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암나귀를 찾게 되고, 세사람에게 떡 두덩이와 문안인사를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산에서 선지자 무리를 만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의 예언대로 사울에게 그 일이 그대로 일어납니다.
      정말 하나님이 하셨구나 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입니다.
      사무엘의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을 몸으로 체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들으면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삶 속에 체험하게 되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이러한 기름 부으심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나타난 현상이 바로 6절 말씀입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여호와의 영이 임하는 것은 오순절 강림 사건만의 일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도 여호와의 영, 성령님께서 활동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성령님도 함께 창조사역을 하셨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기름부으심은 성령님이 크게 임하는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까?
      성령 충만함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게 되면, 사람이 새로워집니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 자신감이 생겨나고, 겁 많은 사람이 담대해지게 됩니다. 능력 없는 사람이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말한 것이 긴가 민가 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이스라엘의 작은 지파 베냐민 지파출신이라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기름 부으심이 있으면 가능할 줄 믿습니다. 우리 한국도 줄이 중요하고, 배경이 중요합니다. 출신과 학력이 좌지우지합니다. 지연, 학연, 혈연으로 다 얽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입니다. 성령님이 붙잡아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경에 나온 사람들을 보십시오. 사도들을 보십시오. 다 엘리트고, 잘 배운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붙들리니까 능력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붙들리면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어디서든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소년이 내민 오병이어를 통해 수천명이 배불리 먹고 열두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역사는 그렇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성전건축도 그러한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줄 믿습니다.

      2. 왕으로 뽑힌 사울(17~24절)

      이제 사무엘이 왕을 뽑기 위해 지파별로 천명씩 미스바로 모이라고 명령합니다.
      지파 중에 베냐민 지파가 뽑힙니다.
      지파의 가족들 중에서 마드리의 가족이 뽑힙니다.
      가족 내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힙니다.
      지파가 열두지파니까 12지파 곱하기 1000명 하면 몇 명이에요?
      12000명, 그 중에 사울이 뽑힌 것입니다.
      12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뽑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울이 뽑혔습니다.
      그런데 사울을 불러봐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묻자 하나님께서 짐보따리 사이에 숨었다고 알려주십니다.
      사람들이 가서 그를 데리고 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된 것이 자신의 뜻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왕의 대관식에 끌려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이끌어주십니다.
      우리의 능력은 안되지만, 하나님이 높은 자리에 앉혀주실 수 있습니다.
      그 때 사울을 생각하십시오.
      자신의 교만과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갈 때 아무리 하나님이 높은 자리에 앉혀주시더라도 우리는 수치의 구렁텅이로 떨어질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우리 안에 교만이 머리를 들려고할 때 마다 이 말씀을 되새기며 납작 엎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총알이 빗발칠 때 머리를 들면 죽습니다. 그러나 납작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하나님이 살려주십니다.

      3.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자들과 불량배...(26, 27절)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꼭 동역자를 붙여주십니다.
      사울이 왕으로 뽑히자.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을 붙여주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사울을 대놓고 멸시하는 불량배가 등장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불량배같은 방해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말로 설득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비웃고 듣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삶으로 보여주고, 능력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삶 속에 성령으로 변화된 모습, 하나님을 기뻐하는 모습, 절망 중에도 소망을 잃지 않는 모습, 죽음 앞에서도 담대한 모습, 남들과 구별된 모습.. 이러한 삶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한다면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변화될 줄 믿습니다.


      성경 : 66권

      예수님 이전 (기원전, BC, Before Christ)에 기록된 구약성경
      예수님 이후 (기원후, AD, Anno Domini)에 기록된 신약성경
      구약성경은 39권이고, 신약성경은 27권이다.


      유대인들의 성경 구분

      토라(모세오경)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느비임(선지서) /
       전 선지서 -  여호수아, 사사기(+룻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후 선지서 -  이사야 예레이먀(+애가) 에스겔, 12 선지서

      케투빔
      (성문서)  / 시가서, 오축, 역사서
       시가서 - 시편, 욥기, 잠언
       오축 - 아가서, 전도서, 에스서(+룻기)
       역사서 - 다니엘, 에스라-느헤미야, 역대기


      성경의 구조

      성경의 구조,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총 66권으로 되어 있다.
      저자는 약 40명이며, 기원전 1500년경부터 기원후 96년경까지 약 1600년에 걸쳐 기록됐다.
      구약(Old Testament)은 하나님의 옛 언약(약속)이 담겨 있으며 당시 백성들은 옛 언약을 지켰을 때 축복을 받았다.
      신약(New Testament)은 하나님의 새 언약이 기록돼 있으며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새 언약을 지켜야 축복을 받는다(누가복음 22:20, 고린도전서 11:25, 히브리서 8:13, 9:15, 12:24).

      성경의 구조 – 구약성경

      언어

      구약성경의 대부분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극히 일부는 바벨론에서 사용하던 아람어(갈대아어)로 기록되었다(에스라 4:8~6:18, 7:12~26, 예레미야 10:11, 다니엘 2:4~7:28). 그 이유는 바벨론 포로 이후 유대인들이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함께 사용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은 기원전 3, 4세기에 이르러 팔레스타인 이외의 지방에서는 거의 히브리어가 쓰이지 않게 되자 당시의 국제 공용어라고 할 수 있는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이 번역에 참여한 70여 명의 사람 수를 따서 이 번역본을 ‘70인역’이라 부르고 있다.

      ※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같은 셈족의 언어로서 어형 변화는 다르지만 글자 모양은 같다.

      배열

      ① 모세 5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② 역사서(歷史書)→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③ 시가서(詩歌書)→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④ 예언서(豫言書)→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 성경은 연대 순서대로 배열되지 않고 특성에 따라 배열되었다. 예를 들면, 예언서인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 직전과 포로 시기에 기록된 글로서 예언서 그룹에 편성되어 있는데,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후에 기록된 ‘역대하’는 역사서이므로 앞부분에 배열되어 있다(예레미야 25:11, 역대하 36:21 비교). 또 다른 예언서인 ‘이사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 약 100년 전에 기록된 글이지만 예언서 그룹인 23번째에 편성되어 있고,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온 이후에 기록된 ‘에스라’는 역사서로 분류되어 15번째 배열되어 있다(이사야 45:1, 에스라 1:1 비교).

      성경의 구조 – 신약성경

      언어

      신약성경은 기록될 당시부터 헬라어를 사용하였다. 헬라어는 로마 이전 헬라제국 시대에 지중해 일대의 여러 나라에 전파된 언어로서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도 로마제국의 통용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이천 년 전 초대교회 사도들이 신약성경을 기록할 때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아닌 헬라어로 기록한 이유는 이방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배열

      ① 4복음서(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성경) →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 마태, 마가, 누가의 3복음서에 비해 요한복음은 20~30년 뒤에 기록되었다.
      ② 역사서(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성경)→ 사도행전
      ③ 편지서→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 전도여행서신(바울이 전도여행하면서 보낸 편지):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후서
      – 목회서신(바울이 목회자들에게 보낸 편지):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 옥중서신(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보낸 편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④ 일반서신(특정한 수신자가 정해지지 않은 서신)→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 1∙2서, 유다서
      ⑤ 예언서→ 요한계시록

      ※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도 연대순서가 아닌, 특성에 따라 배열되었다.
      예를 들면 베드로후서는 신약성경 가운데 22번째 배열되어 있지만 네 번째 배열된 요한복음보다 먼저 기록된 책이다(베드로후서 1:14, 요한복음 21:19 비교).

      장절의 구분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장절(章節)을 구분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성경에 장(Chapter)을 표시해 읽은 사람은 11세기 랑 프랑(Lan franc)이었으며, 그의 구분법을 받아들여 현재의 형태처럼 장을 분할해 완성시킨 사람은 영국교회의 주교이자 소르본대학 교수였던 스티븐 랭턴(Stephen Langton)으로 추정하고 있다.
      절(Verse)의 구분은 15세기 말경 도미니크수도회의 수사가 구약성경에 절을 표시한 것이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한편, 종교개혁의 열기가 한창 뜨겁던 1551년에 프랑스의 인쇄기술자였던 로베르 에티엔느(Robert Estienne)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장절이 구분된 성경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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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상 9장에서 베냐민 지파의 기스가 아들인 사울과 사환을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으러 보내고, 그 과정에서 사울이 라마의 사무엘을 만나게 되는 극적인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사울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우실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울의 이름은 ‘구하다’인데, 이스라엘 자손이 구했던 왕의 이름이 사울이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떠나 보내기 전에 “너는 이제 잠간 서 있으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네게 들리리라.”(삼상 9:27)라고 했습니다. 이제 사무엘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사울에게 알려주었습니다.

       

      1. 사울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다.

      하나님께서는 이틀 전에 사무엘에게 한 사람을 보내면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삼상 9:16).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무엘은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 기업의 지도자를 삼지 아니하셨느냐.”(삼상 10:1).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이 암나귀를 찾으러 왔던 무명의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은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기름을 부으사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았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비록 사무엘이 기름을 부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섬기는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기름부으신 것입니다.
      사무엘이 그 기업이라고 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표현한 것입니다.

      기업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전가될 수 없는 소중한 소유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부르신 후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 19:5)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된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되었던 것에서 구해내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무엘이 기업이라고 한 것은 비록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그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을 인도하는 목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소유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열방의 나라들은 왕이 그 나라를 소유했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섬기는 하나님의 종일 뿐입니다.

      신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분의 자녀와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전에는 우리는 사탄의 권세 아래 있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사셔서 그 분의 자녀가 되게 하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삶이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2. 하나님이 부르신 세 가지의 징조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울에게 전달하면서 앞으로 일어날 세 가지의 징조에 대하여 예언했습니다.
      사울에게 일어날 세 가지의 징조는 사무엘의 말이 단지 지어낸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임을 확증하는 증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징조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오늘 나를 더나가다가 베냐민 경계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삼상 10:2).

      사울이 라헬의 묘실 곁에서 하나님이 주신 징조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라헬은 야곱의 두 번째 아내이며 요셉과 베냐민의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야곱이 낳은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민족이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라헬은 베냐민의 어머니로서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의 기원이기도 한 것입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다음과 같이 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창 35:9-12).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고 많은 국민이 나올 뿐만 아니라 왕들이 나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땅을 야곱과 그의 후손에게도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야곱의 둘째 부인인 라헬에게서 태어난 베냐민의 후손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울이 라헬의 묘실 곁에서 만난 두 사람은 사울에게 그들이 찾된 암나귀들은 찾았고, 도리어 사울의 아비인 기스가 암나귀들 보다는 아들을 더 염려하고 있음을 알려줄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에게 보여줄 첫 번째 징조였습니다.

      두 번째 징조는 다볼 상수리 나무에서 세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께 뵈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이 너와 만나리니 ...”(삼상 10:3).

      사울은 암나귀를 찾으러 가는 과정에서 음식을 모두 소진해 버렸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양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 그들은 다볼의 상수리 나무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염소 새끼 셋과 떡 세 덩이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울에게 떡 두덩이를 줄 것입니다.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 손에서 받으리라.”(삼상 10:4).

      세 사람이 염소새끼 세 마리와 떡 세 덩이와 포도주 가죽부대를 가지고 벧엘로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 제사하러 가는 것입니다.
      이때 사울에게 떡 두 덩이를 주는 것은 사울을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로서의 거룩한 자임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시는 자는 제사장과 선지자, 그리고 왕이었습니다.
      기름을 붓는 것은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예배하는 자가 거룩한 떡을 사울에게 준 것은 사울의 특별한 부르심을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벧엘은 야곱과 무척이나 관계된 지명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받은 곳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게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창 28:16-19).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곳에서 사울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입은 것은 무척이나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벧엘은 어디인가요?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곳 또는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곳,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새롭게 된 곳, 그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산에서 선지자의 무리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곳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에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삼상 10:5).

      사울은 라마에서 돌아오는 길에 라헬의 무덤 근처에서 두 사람을 만나고, 벧엘로 올라가는 다볼 상수리나무에서 세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산에서 선지자 무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산은 히브리어로 기브아 엘로힘으로서 사울의 고향인 기브아를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이 곳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라 블레셋 군대의 요새라는 의미입니다.
      그 만큼 사울의 시대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영토에 들어와 이스라엘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울을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의 산에 이르면 그곳에서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삶이 되리라.”(삼상 10:6).
      사울이 선지자의 무리가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때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여 그들과 함께 예언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기름을 부으신 후에 하나님의 신을 크게 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새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삼손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한 후에 삼손은 변하여 큰 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도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고 변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담대하게 블레셋 사람이었던 골리앗을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임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행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러한 징조가 임하거든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사울과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삼상 10:6).
      사울이 하나님이 보여주신 징조를 보게 되면 이제 용기를 내어 기회를 따라 행하는 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셔서 능력을 주셨고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울은 더 이상 평범한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인도할 지도자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은 이것이었습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7-49).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인 성령을 먼저 임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제자들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사도행전에서 승천하시기 전에 다시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면 그들은 기회를 얻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구원받아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기회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기회를 따라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자신보다 길갈로 내려가면 그곳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앞으로 행할 것을 가르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그곳에서 칠일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길갈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온 이후에 처음으로 진을 친 곳으로 광야의 생활을 마친 장소가 되었고, 가나안에서의 새로운 여정의 시작인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곳에서 사울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어떻게 행할지를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왕으로서의 첫 번째 직무임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3. 하나님의 부르심을 위하여 새사람이 되다.

      사울이 사무엘을 떠나려고 하자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고 그날 징조도 다 응하였습니다.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삼상 10:9). 사울은 이제 하나님께서 새롭게 변화시킨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언급한 세 가지의 징조도 그 날에 다 응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임하자 사울도 선지자의 무리 가운데서 예언을 하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이 놀라게 되었습니다.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의 당한 일이 무엇이뇨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삼상 10:11).

       

      사울을 알던 자들이 사울이 선지자들 중에서 예언을 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던 것입니다. 사울의 숙부가 사울에게 찾아와 어디로 갔다 왔냐고 묻자, 사울은 암나귀들을 찾다가 얻지 못하여 사무엘에게 갔었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의 숙부가 사무엘이 한 말을 고하라고 하자, 사울은 암나귀들을 찾았다고 한 말만을 전하고 나라의 일은 고하지 아니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잃어버린 암나귀를 통하여 사울을 기브아에서 부르셔서 라마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을 만나게 하셨고,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서 새로운 마음을 얻어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제 사울은 기회를 따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은혜를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놀라운 일을 감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기름 부으셔서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셨기에 사울은 기회를 따라 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소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울의 부르심은 블레셋에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산이 있는 곳에는 블레셋의 영문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하나님의 신이 임했기에 삼손과 같이 일어나 블레셋 군대를 물리쳤다면 사울은 더욱 크게 하나님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부르신 것에 대하여 숙부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찌보면 사울은 자신의 부르심에 대하여 자신이 없거나 확신이 없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회를 따라 행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더욱 큰 은혜와 능력을 따라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울이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는다.

      기름부음이란 옛사람과의 단절을 뜻한다.
      이제 사울은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 전체를 통치하는 왕이다.
      하나님은 사울을 위해 왕이되었다는 표징 세 가지를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첫번째 표징은 사울이 찾지 못했던 아버지의 암나귀 셋을 찾은 것이다.
      두번째 표징은 다볼 상수리나무에서 하나님을 봬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사람, 염소새끼 셋과 떡 세덩이, 포도주 한가죽부대를 가진 자들을 만나는 것이다.
      세번째 표징은 그들이 사울에게 떡을 두덩이 주는 것이다.

      암나귀 셋을 다른사람이 찾았다는 것은 사울이 왕이된 것이 결코 스스로의 힘에 의한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써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물어 통치해야 한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올라가는 세사람에게서 떡을 받는것은 하나님께 드릴 떡을 대신 받는 것으로,
      백성들로부터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 추대받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표징을 통해 사울이 변화되어 예언하며 새사람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사무엘상 10:1~16)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 여호와께서 그를 이스라엘을 다스릴 지도자로 세우셨으며,
      이 일을 위하여 그날에 사울에게 보이시는 세 가지 징조가 있을 것임을 알립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길갈로 내려가 7일간 기다리고 있으라고 명합니다.
      사무엘이 알려준 대로 그날에 사울에게 세 가지 징조가 다 일어났고,
      그 징조대로 사울에게도 성령이 크게 임하여 사울도 춤을 추며 예언을 하였습니다.


      [25-27절] 사무엘이 나라의 제도를 백성에게 말하고 책에 . . . .

      사무엘은 나라의 제도를 백성에게 말하고 책에 기록하여 여호와 앞, 곧 성소에 두고 모든 백성을 각기 집으로 돌려보내었다.
      사울도 기브아 자기 집으로 갈 때에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베네 카일), 즉 용사들은 그와 함께 갔지만, 어떤 ‘비류들’(베네 벨리야알), 즉 ‘벨리알의 아들들’(KJV) 혹은 ‘무가치한 자들’(NASB)은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고 그를 멸시하며 그에게 예물을 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잠잠하였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예비하신 일꾼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일꾼을 준비시키시며 세우셨다. 그는 선지자를 보내어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고, 징조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확신케 하셨고, 성령을 허락하셔서 새 마음을 주셨고 새 사람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작정하시고 준비시키시고 이루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준비시키신 일꾼들을 많이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하자.

      둘째로, 우리는 교회의 봉사자들을 선택하려 할 때 회중 전체의 뜻과 합법적인 방식을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예비하신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백성 중에서 합법적 방법으로 선택되었다. 모든 회중이 모여 그를 선택하였다. 물론 교회의 봉사 후보자들은 회중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감독들을 세우려 할 때 우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를 세워야 할 것을 분명히 교훈하였다(딤전 3:2).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은 인격적 온전함을 내포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불평하고 반대하는 자가 되지 말고 즐거이 협력하는 자가 되자.

      사울이 왕으로 선택되었을 때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자들은 그와 함께 갔으나, 어떤 자들은 그를 멸시하였다. 하나님의 일이 합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반대하는 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멸시하고 불평 반대하는 자가 되지 말고, 한 마음, 한 뜻, 한 사랑으로 협력하는 자가 되자.


      3월 27일(목) 사무엘상 4-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에벤에셀(삼상 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Then Samuel took a stone and set it up between Mizpah and Shen. He named it Ebenezer, saying, "Thus far has the LORD helped us."

      에벤에셀(Ebenezer)
      뜻 : 돕는 돌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곳에서 첫번째 전투에서 4,000명의 목숨을 잃었고 두번째 전투에서 30,000 명의 목숨을 잃었다.
      두번째 전투에서 블레셋 인들은 언약궤를 탈취해 갔다(삼상 4:1-11).
      나중에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싸울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와 이긴 기념으로 사무엘 선지가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운 비석인데 후에 지명이 되었다 이 싸움에서 패한 블레셋은 사물엘이 생존중 다시 침범치 못하였다 (삼상 7:12-13).

      단순한 방법과 복잡한 방법

      소련과 미국이 서로 우주개발경쟁을 한참 하던 때였다.
      미국 나사에서는 비밀 프로젝트 하나를 개발 중이었다.
      그것은 우주에 가서도 사용할 수 있는 볼펜의 개발이었다.
      볼펜의 잉크는 중력 때문에 아래로 내려와 글이 쓰여지는 데 중력이 없는 우주에서는 볼펜을 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우주인들에게는 볼펜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주에서도 중력 없이도 쓸 수 있는 볼펜 개발을 위해서 수백만 달러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걸려서 드디어 나왔다.
      우주 펜(혹은 우주 볼펜, Space pen)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폴 피셔(Paul C. Fisher)가 발명하였다.
      무중력 펜이라고도 하는데 이 펜에는 압축질소가 들어있는 잉크카트리지가 장착되어 있으며, 무중력 상태에서는 물론 위쪽으로도 쓸 수 있고, 어떠한 각도에서도 잉크가 공급되며 심지어 물속은 물론 극한 온도환경(섭씨 -35 ~ +120 도)에서도 사용가능하고 젖은 종이에도 쓸 수 있다.

      이렇게 미국 쪽은 수십억을 들여서 볼펜을 개발했지만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던 소련은 더 좋은 방법을 사용했다.

      그것은 바로 그냥 연필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한쪽은 수십억을 들여서 고민할 때 한쪽은 단순하게 연필 한 자루로 문제를 해결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복잡한 것이 아니라 아주 간단명료하다.




      1. 에벤에셀의 의미

      에벤에셀(Ebenezer)은 히브리어로 "도움의 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두 단어의 결합으로, "에벤"은 돌을 의미하고, "에젤"은 도움을 의미합니다.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념하는 기념비로 세워진 돌을 의미합니다.

      돌(에벤. ’eben) אֶבֶן 스트롱번호 68

      1. 돌.  2. 하나의 돌
      발음 [ ’eben ]
      어원  / [중성과 여성이 혼용됨]. 어미활용 אַבְנוֹ, 복수 אֲבָנִים, 복수 연계형 אַבְנוֹ 112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70회 사용
      관련 성경  /  호마노(창2:12, 출35:9,27), 돌(창11:3, 수 4:3, 슥12:3), 반석(창49:24), 돌판(출24:12, 34:1), 보석(출28:10, 삼하12:30, 단11:38), 목석(신4:28), 추(신25:13,15, 잠11:1), 덩이(수 10:11), 석수(삼하5:11), 에벤(에셀)(삼상7:12), 바위(삼상20:19, 삼하20:8), 저울(삼하14:26), 물매(대상12:2), 성벽(느4:3), 광석(욥28:3), 저울추(잠16:11), 우박(사30:30), 에바(슥5:8).

      도움(에젤. ʽêzer) עֵזֶר 스트롱번호 5828

      1. 원조.  2. 여성 조력자
      발음 [ ʽêzer ]
      어원  / 582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1회 사용
      • 1. 명사, 남성 원조, 도움, 원조자, 조력자, 시33:20, 70:6(5), 115:9.
        • a. 명사, 남성 [주]여성 조력자, 창2:18,20.
      • 관련 성경  /  돕는 배필(창2:18, 사30:5), 도움(시20:2,33:20, 115:9, 호13:9), 호위하는 자(겔12:14).

      2. 에벤에셀의 역사적 배경

      에벤에셀은 주로 사무엘상 4장과 7장에서 언급됩니다.

      사무엘상 4장

      에벤에셀은 처음에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한 장소로 언급됩니다.
      이 전투에서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언약궤를 빼앗아갔습니다.

      사무엘상 4:1-3: "이스라엘이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들이 싸움에서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이스라엘의 큰 살육이 있었으니, 거기서 이스라엘 군사가 엎드러진 자가 사만 명가량이라."

      사무엘상 7장

      이후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시키고, 그들이 다시 블레셋과 싸워 승리한 후,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신 것을 기념하여 에벤에셀이라 불리는 기념비를 세웁니다.

      사무엘상 7:10-12: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밑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3. 기독교적 의미

      에벤에셀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 중요한 신앙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도우신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돌을 세우고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선언한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도우심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의 백성을 돌보시고 도우신다는 신앙을 강조합니다.

      회개와 구원

      사무엘상 7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의 인도 아래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섰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블레셋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이는 회개와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보여줍니다.

      기억과 감사

      에벤에셀 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기념물로 세워졌습니다.
      이는 신앙생활에서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떻게 도우셨는지를 상기시켜주고, 현재와 미래의 도우심을 신뢰하도록 합니다.


      4. 현대 기독교에서의 적용

      에벤에셀의 의미는 현대 기독교 신앙 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기념의 중요성
      :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도우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믿음을 강화하고 감사의 마음을 유지하게 합니다.

      회개와 순종
      : 하나님께 돌아서는 회개와 순종이 구원의 핵심입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회개와 순종의 삶을 살도록 독려합니다.

      믿음의 증거
      : 에벤에셀과 같은 기념물은 우리의 믿음을 증거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신실하심을 상징하는 중요한 기념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념하는 에벤에셀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신앙 생활에서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태도, 회개와 순종의 삶을 강조하는 에벤에셀의 의미는 모든 신앙인에게 큰 영감을 줍니다.

      에벤에셀 :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 되심을 고백하는 신앙의 표현

      ‘에벤에셀’은 성경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단어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 되심을 고백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특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어려움을 돕는 역할을 하셨음을 상기시키는 고백으로 사용됩니다. 본 글에서는 ‘에벤에셀’의 의미와 성경적 배경, 그리고 신앙 생활에서 이 단어가 어떻게 활용되는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에벤에셀’의 어원과 해석

      ‘에벤에셀’은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에벤’은 ‘돌’을, ‘에셀’은 ‘도움’이나 ‘도움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합쳐서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 또는 ‘하나님이 도우신 곳’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신 기념물로, 하나님의 구속과 도움을 상징하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기념하는 의미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어려운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신 순간을 기념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의 구속과 인도하심을 기억하는 신앙적 고백으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뢰하고 의지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함을 나타내는 고백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함을 나타내는 고백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신실하게 그 백성을 도우셨음을 기억하고 고백하는 표현으로,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믿음직한 성품과 약속의 신뢰를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입니다.

      성경에서의 에벤에셀 등장

      사무엘상에서의 ‘에벤에셀’

      ‘에벤에셀’은 성경에서 사무엘상 7장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큰 위기에 처했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셔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이 승리를 기념하며 사무엘은 그곳에 ‘에벤에셀’이라는 돌을 세우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신 사실을 기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승리와 기념물로서의 ‘에벤에셀’

      ‘에벤에셀’은 이스라엘 백성의 승리의 기념물이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승리를 주셨을 때, 사무엘은 그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에벤에셀’이라는 돌을 세웠습니다. 이 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상기시키는 중요한 기념물로,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에벤에셀’이 의미하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

      ‘에벤에셀’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 승리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에벤에셀’ 돌을 세웠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신앙의 고백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 모든 순간을 기억하며 믿음을 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에벤에셀의 신앙적 의미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는 고백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를 도우신 순간을 기억하는 고백입니다. 신자들은 이 단어를 통해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어떻게 개입하셔서 구원과 보호를 주셨는지 되새깁니다. 과거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함으로써, 신자들은 현재와 미래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지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신앙의 기념물로서 ‘에벤에셀’

      ‘에벤에셀’은 신앙의 기념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신자들이 일상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고 고백할 때, 그것은 단순한 기념이 아니라, 신앙을 다지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도우시고, 그들을 인도하시며, 구속하심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적 상징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의지의 표현

      ‘에벤에셀’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의지의 표현입니다.
      신자들은 이 단어를 통해 하나님께서 과거에 도우셨음을 인정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를 의지하고 신뢰할 것임을 고백합니다.
      이는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하며, 하나님을 삶의 모든 순간에서 의지하도록 격려하는 고백입니다.

      에벤에셀과 기독교 예배

      예배 중 ‘에벤에셀’의 의미

      기독교 예배에서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도우신 순간을 기억하고 고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배 중 ‘에벤에셀’을 고백하며, 신자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감사하고, 그 도우심을 기대하는 마음을 다짐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며, 예배를 통해 신자들의 믿음을 강화시킵니다.

      ‘에벤에셀’과 찬양

      ‘에벤에셀’은 찬양에서도 중요한 고백으로 사용됩니다. 예배 중 찬양을 통해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도우신 모든 순간을 기념하며, 그 도우심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에벤에셀’이 포함된 찬양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되새기게 하며, 그들의 신앙을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됩니다.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고백

      예배에서 ‘에벤에셀’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깊이 묵상하고 기념하는 시간이 됩니다. 신자들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 속에서 행하신 기적과 도우심을 감사하고, 그 도우심을 기념하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마음을 다짐합니다.

      에벤에셀의 현대적 의미

      개인 신앙에서의 ‘에벤에셀’

      ‘에벤에셀’은 개인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신자들은 자신이 겪은 삶의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며, 이를 ‘에벤에셀’이라는 고백으로 표현합니다. 개인적인 어려움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되새기며, 신자들은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새롭게 합니다.

      ‘에벤에셀’을 통한 공동체 신앙의 강화

      ‘에벤에셀’은 개인적인 신앙의 고백을 넘어서, 공동체 신앙을 강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교회에서 ‘에벤에셀’을 함께 고백하며,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공동체를 도우신 모든 순간을 기념합니다. 이를 통해 믿음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함께 고백하고, 공동의 신뢰를 다지게 됩니다.

      ‘에벤에셀’을 통한 감사와 소망

      ‘에벤에셀’은 감사와 소망의 고백입니다.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도우신 모든 순간을 감사하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고 의지하는 마음을 다짐합니다. 이 고백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그 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하게 합니다.

      결론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도우신 것을 기념하는 중요한 고백입니다.
      신자들은 이 단어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고, 그 분에 대한 신뢰와 의지를 다집니다.
      ‘에벤에셀’은 신앙의 기념물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감사하며, 그 도우심에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오늘날에도 ‘에벤에셀’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더욱 견고히 하며,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을 새롭게 하는 고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에벤에셀 뜻
      - 도움의 돌 의미, 지명

      에벤에셀 유래

      사무엘상 7장 12절은 사무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음을 기념하기 위해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셨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에벤에셀은 종교, 정치,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종교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셨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됩니다. 정치에서는 국민을 도와주었던 위대한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사회에서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단체나 기관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셨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는 에벤에셀을 기억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에벤에셀라는 용어는 성경 이야기에서 유명세를 얻었지만, 그 영향력은 종교적 문헌의 영역을 넘어 확장되었다. 역사를 통틀어, 그것은 그것의 중요성과 지속적인 유산을 더하면서, 다양한 문화적, 문학적 작품들로 길을 찾았다.

      1843년 출간된 이 소설은 과거, 현재, 미래의 크리스마스 영혼을 만나 변화를 겪는 구두쇠이자 냉혹한 인물인 에벤에셀 스크루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디킨스는 자신의 주인공에게 구원과 개인적 성장의 가능성을 상징하기 위해 "에벤에셀"라는 이름을 교묘하게 선택했다.

      디킨스가 에벤저 스크루지를 연민과 관대함, 그리고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정신을 재발견하는 인물로 묘사한 것은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에벤저"라는 이름은 긍정적인 변화의 동의어가 되었고, 개인들에게 사랑, 친절, 그리고 공감의 변화하는 힘을 상기시켰다.

      문학 이외에도, 에벤에셀는 지리적 위치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 전 세계의 수많은 마을, 교회, 랜드마크들은 "에벤에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이 용어의 지속적인 유산과 영향력에 대한 증거로 작용한다.

      에벤에셀의 기독교적 의미

      "에벤에셀"라는 용어는 기독교 신학과 예배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히브리어, 특히 성경의 구약성경에서 유래했다. 사무엘 1장 7절 12절에 "사무엘이 돌을 가져다가 미스바와 심 사이에 세우고 그 이름을 에베네셀이라 하였더라 그가 말하기를 주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도우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에벤에셀'라는 단어 자체가 히브리어의 합성어로, '돌'이나 '바위'를 의미하는 '에벤'과 '도와준다' 또는 '도와준다'를 의미하는 '에제르'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번역될 때, 에벤에셀는 "도움의 돌" 또는 "도움의 돌"로 이해될 수 있다."

      성경적인 맥락에서 예언자 사무엘이 에베네셀 돌을 세운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그들을 인도하는 데 신의 개입과 도움을 기념했다. 그러므로, 에벤에셀는 주님의 변함없는 지지에 대한 감사와 감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에벤에셀라는 용어는 신자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제공과 인도, 도움을 인정하고 인정하는 개념을 대표하게 되었다. 그것은 받은 축복에 감사를 표하고 도전과 역경의 시기에 믿음을 굳건히 유지하는 것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오늘날의 에벤에셀의 중요성

      현대 담론에서 에벤에셀라는 용어는 종교적, 세속적 맥락 모두에서 계속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독교인들에게,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감사와 신뢰에 대한 호소의 강력한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교회들은 종종 이 용어를 예배에 포함시켜 신자들의 영적인 여행에 영감을 주고 격려하기 위해 사용한다.

      게다가, 에벤에셀라는 이름은 개인들에게 주어진 이름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이 용어와 관련된 지속적인 호소력과 긍정적인 의미를 반영한다.
      그것은 감사와 믿음,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더 높은 권력으로부터 받은 지지를 인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결론적으로, "에벤저"라는 용어는 심오한 의미와 풍부한 역사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 성경 이야기에 뿌리를 둔 기독교적 의미에서부터 문학과 문화에 대한 영향까지, 에벤에셀는 감사, 신의 도움, 그리고 개인적 변화의 가능성의 상징으로 서 있다. 우리가 이 용어의 깊이를 탐구할 때, 감사의 힘, 믿음, 그리고 우리가 삶에서 받는 지지를 인정하는 것의 지속적인 영향을 상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돌을 취하여...세워
      - 구약 성경에서 '돌을 취하여 세우는 일'은 특별한 사건을 후대에까지 기념 혹은 기억케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창 31: 44-47; 수 4:6-7).

      미스바와 센 사이
      - '미스바'(Mizpah, '망대' 또는 '파수대'란 뜻)는 예루살렘 북쪽 약 13km 지점에 위치한 베냐민 지파의 땅이다.
      7: 5 주석 참조. 한편 '센'(*,Shen)은 '치아'(齒牙)란 뜻으로서, 그 지역이 불쑥 불쑥 날카롭게 튀어 나온 바위들이 많은 험준한 곳이었음을 시사해 준다(Fay, Keil).
      한편 이곳은 미스바 북동쪽 약 13km지점의 '여사나'(대하 13:19)와 동일한 지역으로 주장되기도 한다(Reed).
      그러나 블레셋 족속들은 이스라엘의 반격을 받아 서쪽으로 도주하였을 것이므로, 위의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Klein).
      사무엘과 이스라엘은 패주 하는 블레셋을 추격하여 미스바의 서쪽으로 향했고, 그리고 그들이 진격해 간 곳 근처 어디에 돌을 세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돌이 세워진 곳은 '벧갈'(11절)과 가까운 곳으로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우리를 도우셨다
      -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된 말이라 할 수 있다. 즉 (1)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대한 감사, (2)계속적인 은혜 공급의 간절한 요청, (3) 하나님의 은혜 안에만 계속 머물겠다는 전적인 헌신의 각오 등이다.

      여기까지
      - '여기'(*, 헨나)는 구체적으로 그때 사무엘과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추격해 갔던 서쪽 한계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실 근 40년간 블레셋의 압제에 시달리던(삿 13: 1) 이스라엘이 싸움에 이겼을 뿐만 아니라, 블레셋 족속의 영역권인 가나안 서쪽까지 막강한 블레셋 군대를 공격하면서 쫓아갈 수 있었던 것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 '에벤에셀'('도움의 돌'이란 뜻)은 미스바 전투의 승리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오고오는 세대에 증거하기 위해 세운 기념석(記念石)으로서,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대를 추격해간 장소에 세워졌다.
      한편, 그런데 여기 '에벤에셀'(Ebenezer)은 4:1의 에벤에셀과는 다르다.
      그 이유는 (1) 그 위치에 있어서 다르며<4:1 주석 참조>
      (2) 4:1의 에벤에셀은 한 지역의 명칭인 반면, 여기의 에벤에셀은 다만 '돌'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 쳤더니.


      에벤에셀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두 주 동안 (삼상 7:1-11)의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블레셋에 빼앗겼던 언약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20년을 지냈습니다.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삼상 7: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삼상 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스바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삼상 7:5)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은 미스바에 모여 하나님 앞에 물을 길어 붓고 종일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하며 회개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듣고 블레셋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왔습니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고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셨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 앞에 패하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놓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불렀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에벤에셀”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에벤”(돌)이라는 말과, “하에쩰(그 도움)이란 말이 합쳐진 말입니다.

      도움의 돌”,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입니다.

      (삼상 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습니다.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블레셋을 물리치고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하는 그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돌을 세우곤 했습니다.

      특별한 사건을 후대에까지 기념 혹은 기억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돌을 세우곤 했습니다.

      (창 31:45)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수 4:1)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가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수 4:2) 백성의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수 4:3)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 곳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가 유숙할 그 곳에 두게 하라 하시니라

      (수 4:5) 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로 들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 가져다가 어깨에 메라

      (수 4:6)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하신 역사(役事)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블레셋을 굴복시키셨습니다(13).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삼상 7: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와 센 사이에 “에벤에셀”의 돌비를 세운 후 그들에게 일어난 첫 번째 하나님의 역사는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블레셋이 굴복했다고 하는 말은 이스라엘 편에서는 블레셋에게 승리했다고 하는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하는 것은 가장 큰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은 무려 40년 동안이나 블레셋의 압제 가운데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상 블레셋만큼 이스라엘을 괴롭힌 나라도 많지 않습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살면서 이스라엘을 가장 많이 괴롭힌 나라입니다.

      블레셋은 전쟁을 아주 좋아하는 나라입니다.

      수시로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괴롭혔습니다.

      잊을 만하면 쳐들어오고 또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첫 시간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사무엘상 4장)을 보시면 이미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두 차례의 전쟁을 치렀습니다.

      첫 번째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사 4,000명가량이 죽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전쟁에서 블레셋에게 패한 진짜 중요한 이유를 잘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만 가지고 나가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번에는 승리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두 번째 전쟁에서는 더 큰 패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무려 30,000명이나 죽고 말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가지고 나갔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같은 본문을 여러 번 설교했는데,

      이번에 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하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에벤에셀"이 본문(7:12)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삼상 4:1)을 보시기 바랍니다.

      (삼상 4:1)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첫 번째 전쟁과 두 번째 전쟁에서 패전한 곳이 바로 “에벤에셀”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늘 본문(삼상 7:12)의 “에벤에셀”은 (삼상 4:1)의 “에벤에셀”과는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①그 위치가 다르며(4:1 주석 참조)

      ②(삼상 4:1)의 에벤에셀은 한 지역의 명칭이지만, 본문(삼상 7:12)의 “에벤에셀”은 다만 ‘돌’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무엘이 왜 유독 첫 번째 블레셋과 싸워서 패전했던 곳(에벤에셀)의 이름을 따서 기념비의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했을까 하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삼상 4:1)의 “에벤에셀”은 블레셋과 싸워서 패전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긴 수치스러운 곳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물을 길어 하나님께 부으며, 종일 금식하며, 회개하며 기도할 때,

      그 수치스러웠던 “에벤에셀”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승리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때로 세상을 살다 보면 수치스러운 일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께 물을 쏟아부으며, 종일 금식하며, 회개하며 기도하고,

      온전한 번제를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가 당한 수치를 변하여 승리가 되게 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감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운 기념비 때문에 그들을 도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념비는 글자 그대로 기념비에 불과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잊지 않겠다는 것입니다(돌비).

      지금부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들을 굴복시키셨습니다.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막아주셨습니다.

      (삼상 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삼상 7: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2. 빼앗겼던 성읍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14上).

      이어지는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삼상 7:14)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에벤에셀에 기념비를 세우고 감사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셨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굴복시키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제 그동안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던 성읍을 다시 되찾게 해주셨습니다.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아오게 해주셨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여러 번 지고 말았습니다.

      전쟁에서 졌다는 것은 전쟁에서 졌다는 것 외에 모든 것을 빼앗겼다 것을 의미합니다.

      (벧후 2: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그동안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땅을 빼앗겼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물질도 빼앗겼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언약궤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것을 모든 것을 다시 되찾아오게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회복에 관한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욥에 대한 말씀입니다.

      (욥기 1장)에서 욥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10남매를 하루아침에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 많던 재산도 하루아침에 다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는 건강까지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욥을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욥을 도와주셨습니다.

      욥기 마지막 장인 (욥기 42장)을 보시면 하나님은 욥에게 그 전보다 더 좋은 열 남매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정확히 욥기 1장보다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창 3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에덴동산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다시 되찾게 해주셨습니다.

      에덴동산보다 몇백 배, 몇천 배 더 좋은 천국을 주셨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되찾게 해주셨습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많은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마치 맛 잃은 소금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그러나 이제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물을 쏟아붓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쏟아붓고,

      종일 금식하며 회개했던 이스라엘백성들처럼 회개하며,

      온전한 번제(온전한 예배)를 다시 드리면,

      하나님께서 잃어버렸던 한국교회의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새해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회복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올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든지(그것이 물질이든지, 혹 자녀의 문제이든지, 혹 건강의 문제이든지, 혹 가장 중요한 영적인 것이든지)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믿고 고백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다 회복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3.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14下).

      이제 (14절 下)을 계속 보시기 바랍니다.

      (삼상 7:14)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평화” שָׁלוֹם (샬롬 shalom)= ‘평화, 복지, 번영, 행복, 건강, 완전, 안전’등을 의미합니다.

      그동안 계속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그들의 삶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전쟁으로 잃었습니다.

      일 년 동안 열심히 농사한 것도 하루아침에 다 빼앗겨야만 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백성들의 삶은 날마다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의 연속이었습니다.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우상을 다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에벤에셀”,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라고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그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는 평화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블레셋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모리 사람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에게 평화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에 평화가 임했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생겼습니다.

      그 평화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모든 근심. 걱정, 염려, 불안 대신 하나님을 향해 감사와 찬송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도 이러한 평화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오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지금까지 산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도우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실 것을 믿습니다.





      성경에서 "에벤에셀"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성경에서 "에벤에셀"이라는 단어는 두 개의 히브리어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돌"을 의미하는 "에벤"과 "도움" 또는 "도우미"를 의미하는 "에제르"입니다. 따라서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로 번역됩니다. 이 용어는 도움이 필요할 때 하나님의 섭리와 도움을 가시적으로 상기시켜 줍니다.

      "에벤에셀"이라는 용어는 사무엘상 7장 12절에서 선지자 사무엘이 신성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돌을 세우는 장면에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으로부터 구출된 후 사무엘은 "지금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셨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선언과 실제 돌은 모두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백성을 대신하여 개입하신 것을 기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에벤에셀'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역사적 유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앙의 상징입니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도움을 인식하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도움을 표시하기 위해 돌을 세운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우리를 도우셨던 순간을 인정하도록 초대받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깊은 감사의 마음을 키우고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여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니며 하나님의 도움은 항상 함께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요약:

      • "에벤에셀"은 히브리어로 "도움의 돌"이라는 뜻입니다.
      • 이는 하나님의 섭리와 도우심을 가시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을 상징합니다.
      • 이 용어는 사무엘상 7장 12절에 특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 이 개념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도움을 인식하고 감사하도록 격려합니다.

      성경에서 '에벤에셀'이라는 용어의 역사적 맥락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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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에서 "에벤에셀"이라는 용어의 역사적 맥락은 이스라엘 민족의 갈등과 쇄신으로 특징지어지는 사무엘상 7장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은 블레셋이라는 강력한 적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고,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정복하기 위해 수시로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사무엘상 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벤에셀이라고도 불리는 곳에서 블레셋의 손에 처참한 패배를 당합니다. 언약궤가 탈취당하고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임을 당합니다. 이 패배는 이스라엘에게 깊은 절망의 순간으로, 군사력과 정신적 안정을 모두 잃은 것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사무엘상 7장에서 우리는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사무엘의 지도력 아래 이스라엘은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들은 미스바에 모여 금식하며 죄를 고백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러는 동안 블레셋은 다시 공격할 준비를 합니다. 이에 사무엘은 주님께 번제를 드리고 신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주님은 극적으로 응답하십니다. 주님은 강력한 소리로 천둥을 쳐 블레셋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을 결정적으로 물리칠 수 있게 하십니다. 이 승리의 여파로 사무엘은 돌을 세워 에벤에셀이라 이름 짓고 "지금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셨다"고 선언합니다. 이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의 은총과 새로운 신실함의 새로운 장이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이 순간은 이스라엘의 영적 여정에도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에벤에셀 돌을 세우는 것은 한 번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이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절망과 패배의 장소에서 희망과 신성한 확신의 장소로 옮겨갔습니다. 에벤에셀 돌은 하나님의 개입과 집단적 회개와 기도의 힘을 보여주는 역사적 표식으로 서 있습니다.

      요약:

      • '에벤에셀'이라는 용어는 사무엘상 1장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분쟁을 배경으로 합니다.
      • 처음에 에벤에셀은 이스라엘에게 패배와 절망의 장소였습니다.
      • 사무엘의 지도력 아래 이스라엘은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 하나님은 블레셋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하시고 에벤에셀 돌을 기념비로 세우게 하십니다.
      • 이 행사는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회개와 신의 개입의 힘을 상징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에벤에셀"이라는 용어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히브리어로 '에벤에셀'이라는 용어는 신학적, 문화적으로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돌"을 뜻하는 "에벤"(אבן)과 "도움" 또는 "도우미"를 뜻하는 "에제르"(עזר)가 그것입니다. "도움의 돌"이라는 이 조합은 단순한 명칭을 넘어 하나님의 신실한 도움과 보호에 대한 심오한 증거를 담고 있습니다.

      기념물로 돌을 사용하는 것은 히브리 문화와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모티브입니다. 돌은 종종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행동하신 중요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예를 들어 야곱은 하늘에 닿는 사다리를 본 환상을 기념하기 위해 벧엘에 돌기둥을 세웁니다(창세기 28:18). 마찬가지로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넌 것을 기념하기 위해 길갈에 열두 개의 돌을 세웁니다(수 4:20-24).

      "에제르"라는 용어는 의미가 풍부하며 성경의 다른 중요한 문맥에도 등장합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서 하나님이 "내가 돕는 배필을 만들겠다"고 말씀하신 구절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ezer 그에게 적합하다"는 뜻으로, 아담과의 관계에서 이브의 역할을 가리킵니다. 가장 심오하게는 시편 121:1-2에서 "내가 눈을 들어 언덕을 바라보니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와 같이 '에제르'는 하나님 자신을 묘사하는 데 자주 사용됩니다. 나의 도움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주님에게서 오나이다."

      따라서 "에벤에셀"이라는 용어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표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와 도움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신학적 진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와 도움의 보이지 않는 실체를 가시적으로 상징하는 역할을 합니다. 모든 '에벤에셀'에는 신의 도움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 즉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우리는 길을 잃는다는 깊은 인식이 담겨 있습니다.

      요약:

      • 히브리어로 "에벤에셀"은 "에벤"(돌)과 "에제르"(도움)를 결합한 단어입니다.
      • 이 용어는 신성한 행위를 기념하기 위해 돌을 사용하는 관습을 반영합니다.
      • '에제르'는 조력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설명할 때도 사용되어 이 용어의 신학적 깊이를 강조합니다.
      •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와 도움을 상징합니다.
      • 이는 신의 도움과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을 인정합니다.


      에벤에셀 돌을 세우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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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상 7장에 나오는 에벤에셀 돌을 들어 올린 이야기는 회개, 신의 개입, 감사에 대한 강력한 내러티브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중요한 순간을 강조합니다.

      블레셋의 손에 큰 패배를 당하고 언약궤를 잃어버린 이스라엘은 슬픔과 반성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무엘의 영적 지도력 아래 백성들은 미스바에 모여 회개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금식하며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께 새롭게 헌신했습니다.

      미스바에 모여 있는 동안 블레셋은 취약한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할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이 임박한 위협에 대응하여 사무엘은 젖먹이 어린 양을 잡아 통째로 주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대신해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신의 개입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극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제사를 드리고 있을 때 주님께서 강력한 우레와 함께 블레셋을 치셨고, 블레셋은 당황하여 흩어졌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추격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기적적인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의 분명한 표징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이 신성한 도움을 감사하고 기념하기 위해 미스바와 쉔 사이에 돌을 세웠습니다. "지금까지 주께서 우리를 도우셨다"(사무엘상 7:12)라고 말하며 에벤에셀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이 베푸신 구원을 물리적으로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에벤에셀 돌을 들어 올리는 것은 희망과 쇄신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회개와 기도의 힘을 보여 주며,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향할 때 하나님의 백성을 돕고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삶에서 하느님의 도움의 이정표를 인식하고 축하하도록 격려하며, 하나님의 지속적인 인도와 지원을 신뢰하도록 영감을 줍니다.

      요약:

      • 사무엘의 지도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스바에서 회개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했습니다.
      • 블레셋 사람들이 공격했지만 하나님께서 우레와 같은 소리로 개입하셔서 블레셋 사람들이 패닉에 빠졌습니다.
      • 이스라엘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이 사건을 신의 개입으로 기록했습니다.
      • 사무엘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신실하심을 기념하기 위해 에벤에셀 돌을 세웠습니다.
      • 이 이야기는 회개와 기도의 힘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지속적인 인도하심에 대한 신뢰를 불러일으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에벤에셀"에 대한 해석은 어떻게 발전해 왔나요?

      '에벤에셀'에 대한 해석은 기독교 신학에서 발전하여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하심과 도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 뿌리는 구약성서의 특정 역사적 사건에 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적용 범위가 넓어지고 깊어졌습니다.

      초기 기독교 해석:

      초기 기독교인들은 에벤에셀 돌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신실함의 상징을 보았습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종종 구약 성경의 이야기와 기독교 공동체의 경험 사이에 유사점을 찾았습니다. 신이 개입한 순간을 상징하는 에벤에셀 돌은 인류를 위한 궁극적인 '도움의 돌'이신 그리스도의 한 유형으로 여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적들로부터 구원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십니다.

      중세와 종교개혁 사상:

      중세 시대에는 에벤에셀 돌의 상징성이 설교와 신학 저술에서 자주 사용되어 신자들이 하나님의 과거 신실하심을 기억하여 미래의 공급에 대한 신뢰의 기초로 삼도록 독려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중요성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억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에서도 에벤에셀 돌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일관된 도움과 그분을 지속적으로 의지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최신 애플리케이션:

      현대 기독교 사상에서 '에벤에셀'은 개인적 맥락과 공동체적 맥락 모두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인식하는 은유가 되었습니다. 많은 기독교 찬송가와 노래에 이 용어가 포함되어 있어 예배자들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상기시켜 줍니다. 가장 유명한 찬송가 중 하나는 "모든 축복의 근원 오소서"로, "여기 내 에벤에셀을 일으키니 주의 도우심으로 내가 여기 왔나이다"라는 가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8세기에 로버트 로빈슨이 작곡한 이 찬송가는 기독교 신앙의 집단 의식에 "에벤에셀"이라는 용어를 살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신학적 성찰:

      신학적으로 '에벤에셀'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인정하는 실천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간증으로 문자적이든 은유적이든 자신만의 '도움의 돌'을 세우도록 독려합니다. 이러한 기념물은 특히 시련이 닥쳤을 때 "지금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믿음을 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에큐메니칼 및 종교 간 관점:

      에큐메니칼 및 종교 간 대화에서 '에벤에셀'의 개념은 성경적 기원을 넘어 희망과 신성한 도움의 보편적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이 개념은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친 순간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다양한 신앙 전통 간의 일체감과 상호 감사하는 마음을 키우도록 초대합니다.

      요약:

      • 초기 기독교인들은 에벤에셀 돌을 하나님의 섭리의 상징이자 그리스도의 한 유형으로 여겼습니다.
      • 중세와 종교개혁 사상가들은 과거의 신실하심에 근거한 하나님의 미래 공급에 대한 신뢰를 장려하기 위해 이를 사용했습니다.
      • 현대에서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도움을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 신학적으로는 시련의 시기에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기념비를 세우는 관행을 장려합니다.
      • 이 용어는 에큐메니칼 및 종교 간 맥락에서 신의 도움과 희망을 상징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독교 교단마다 '에벤에셀'의 의미를 어떻게 바라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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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벤에셀'의 중요성은 다양한 기독교 교단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각 교단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신학적, 전례적 관행에 통합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가톨릭 교회는 '에벤에셀'을 하느님의 섭리와 신실함을 나타내는 강력한 상징으로 여깁니다. 가톨릭의 가르침에서 이 용어는 역사에 개입하신 하느님을 기념하는 추모라는 개념을 구체화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에 대한 '기념'으로서 성사와 전례를 강조하는 교회의 가르침에서 잘 드러납니다. '에벤에셀'의 개념은 제단, 성상, 성지 등 신성한 행위를 기념하고 신자들이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와 도움을 신뢰하도록 격려하는 물리적 기념물을 설치하는 가톨릭의 관습과도 일치합니다.

      개신교 교회:

      개신교 전통에서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개인적, 공동체적으로 기억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설교와 찬송에서 자주 언급됩니다. 이 용어는 종종 신자의 삶에서 영적 이정표 또는 표식이라는 개념과 연관되어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 및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에벤에셀'을 심오한 영적 쇄신이나 신적 개입의 순간을 의미하기 위해 호출하여 신자들이 미래의 신뢰와 희망의 기초로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돌아보도록 독려할 수 있습니다.

      감리교 전통:

      개인 경건과 공동체 예배를 강조하는 감리교인들은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비유할 때 종종 "에벤에셀"을 사용합니다. 감리교 교회에서 널리 불리는 찬송가 '모든 축복의 샘이여'에는 에벤에셀을 키우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어 영적 여정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오순절 운동과 카리스마 운동:

      오순절 및 카리스마주의 교단에서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과 지속적인 인도를 이야기하고 기념하기 위해 간증과 예배에서 "에벤에셀"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파는 종종 신앙의 체험적 측면을 강조하며 '에벤에셀'을 신자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임재를 보여주는 증거로 간주합니다.

      동방 정교회:

      동방정교회는 '에벤에셀'을 하나님의 행동과 임재를 가시적으로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아이콘과 유물의 광범위한 전통 안에서 바라봅니다. 일반적으로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에벤에셀'의 원리는 중요한 신의 개입과 기적을 기념하는 성물과 장소를 숭배하는 정교회 관습과 공명합니다.

      요약:

      • 가톨릭 교회: '에벤에셀'을 성례전 및 전례 관행에 반영된 하나님의 개입을 기념하는 기념의 상징으로 간주합니다.
      • 개신교 교회: "에벤에셀"을 사용하여 영적 이정표를 표시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도록 격려하세요.
      • 감리교 전통: 찬송가와 개인 경건에서 '에벤에셀'을 강조하여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정합니다.
      • 오순절 운동과 카리스마 운동: 간증과 예배에서 '에벤에셀'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적극적인 임재를 찬양합니다.
      • 동방 정교회: 신성한 개입을 상기시키는 아이콘과 유물을 숭배함으로써 '에벤에셀'의 원리와 공명합니다.


      에벤에셀의 이야기는 어떻게 현대 크리스천의 실천에 영감을 줄 수 있을까요?

      사무엘상 1장에서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상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승리를 허락하신 후, 사무엘 선지자는 "도움의 돌"이라는 뜻의 "에벤에셀"이라는 이름을 붙인 돌비를 세운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무엘은 "지금까지 주께서 우리를 도우셨다"(사무엘상 7:12)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단순하지만 강력한 행위는 우리의 영적 삶에서 감사와 기억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섭리를 상기시키는 우리 자신의 '에벤에셀'을 세우기 위해 잠시 멈추나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매일 우리를 지탱하고 인도하시는 수많은 방법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감사하는 마음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감사일기를 쓰면서 매일의 크고 작은 축복을 기록해 보세요. 또는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의 도움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으로 집 안에 특별한 공간을 만들어보세요. 이러한 실천은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과 신뢰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또한 에벤에셀은 우리에게 신앙의 공동체적 본질을 알려줍니다. 사무엘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보고 기억할 수 있도록 이 돌을 세웠습니다. 개인주의 문화 속에서 우리는 신자 공동체로서 함께 모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예배를 위해 모이거나 소그룹으로 모일 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도우신 방식에 대해 간증하는 시간을 만들어 봅시다.

      마지막으로 에벤에셀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앞을 바라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도 우리를 도우셨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확신은 우리가 사랑과 봉사의 사명을 감당하는 데 용기를 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주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가신다는 것을 신뢰하면서 주변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용기 있게 나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쁨과 감사로 '에벤에셀'을 키우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상기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지금까지 우리를 도우신 분이 반드시 우리를 집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으며 희망으로 전진합시다.



      에벤에셀 이야기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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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도 교회는 에벤에셀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돌보심에 대한 강력한 확신을 봅니다. 이는 인류 역사에 친밀하게 관여하시는 사랑스럽고 인격적인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교리문답은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자신의 피조물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존재와 존재감을 주실 뿐만 아니라, 매 순간마다 그들을 붙드시고 지탱해 주십니다."(CCC 301항). 에벤에셀은 이러한 지속적 존재의 증거로 서 있습니다.

      또한, 기념비를 세우는 행위는 성례와 유사하며 교회의 중보기도를 통해 얻은 영적 효과를 나타내는 성스러운 표징인 성사물에 대한 가톨릭의 전통과도 일치합니다. 성찬과 같은 수준은 아니지만 성수, 축복받은 메달 또는 벽에 걸린 간단한 십자가와 같은 성찬은 사무엘의 돌과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가 그분께 의존하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상기시켜 줍니다.

      교회는 또한 에벤에셀이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전승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선물하는 전례 축하의 풍부한 전통을 반영합니다.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자신의 에벤에셀을 일으켜 세우며 "지금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셨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또한 에벤에셀의 공동체적 측면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도 일치합니다. 사무엘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을 위해 이 돌을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은 고립된 삶이 아니라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에벤에셀에게서 하느님의 지속적인 돌보심에 대한 희망과 신뢰에 대한 소명을 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미사 때마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주님의 이름으로"라고 기도할 때 고백하는 진리, 즉 우리의 도움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에벤에셀의 교훈을 마음에 새겨 봅시다. 사무엘처럼 우리도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기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로서 우리 모두가 에벤에셀을 계속 키워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신실하심을 세상에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에벤에셀 이야기에 대한 심리적 해석은 무엇인가요?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에벤에셀 돌을 들어 올리는 행위는 심리학자들이 "인지적 재구성"이라고 부르는 강력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사건이나 현재 상황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의식적으로 조정하는 과정입니다. 사무엘은 돌의 이름을 "도움의 돌"이라는 뜻의 "에벤에셀"로 명명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실패나 두려움보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렌즈를 통해 자신들의 경험을 바라보도록 격려했습니다.

      이러한 재구성은 정신적, 정서적 웰빙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도우신 방식에 집중하기로 선택할 때,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으며, 심리학자들은 이를 행복감 증가, 우울증 감소, 스트레스에 대한 더 나은 대처와 연관시킵니다. 따라서 에벤에셀 이야기는 현대 심리학에서 정신 건강에 유익하다고 인정하는 관행에 대한 성경적 선례를 제시합니다.

      또한 이 행위의 공동체적 특성은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데 있어 사회적 지지와 공유된 내러티브의 중요성에 대해 심리학자들이 알고 있는 것과 일치합니다. 사무엘은 공개적으로 돌을 들어 올리고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의 도움을 선포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집단적 정체성과 희망을 강화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심리적 안녕을 지원하는 데 있어 신앙 공동체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줍니다.

      에벤에셀 돌은 심리학자들이 '외부 단서' 또는 '환경적 트리거'라고 부르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이는 특정 생각이나 행동을 유발하는 물리적 사물이나 환경적 요인을 말합니다. 이 경우, 이 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돌을 보거나 생각할 때마다 안정감, 감사, 희망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또한, 돌을 물리적으로 세우는 행위는 기분과 전망을 개선하기 위해 긍정적인 활동에 참여하는 치료 기법인 '행동 활성화'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물리적 기념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수동적으로 받는 사람에서 기억하고 기념하는 적극적인 참여자로 변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발달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에벤에셀에서 공유된 이야기와 상징이 여러 세대에 걸쳐 집단적 정체성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보여주는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돌은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이야기를 전수할 수 있는 교구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이러한 심리적 통찰은 가치 있는 것이지만, 에벤에셀의 진정한 힘은 어떤 정신적 기술이 아니라 그것이 기념하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실체에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방법을 찾고, 그러한 기억이 영적 성장과 심리적 안녕을 모두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교부들은 에벤에셀의 이야기에 대해 뭐라고 말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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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ile the Ebenezer account is not one of the most extensively commented upon passages by the Fathers, several did offer meaningful reflections on its significance. St. Augustine, in his work “On Christian Doctrine”, uses the story of Ebenezer as an example of how physical objects can serve as signs pointing to spiritual realities. He writes, “Things are perceived by the bodily sense, and transferred to the intellect… Thus Samuel, when he had anointed Saul king, set up the stone of which we read, and called its name Ebenezer, saying, ‘Hitherto hath the Lord helped us.’”

      어거스틴의 해석은 보이지 않는 은총의 가시적 표징인 에벤에셀 돌의 성사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이는 성사에 대한 가톨릭의 이해와 물질적 실재가 영적 진리를 매개할 수 있다는 신앙의 성육신적 본질과 잘 맞아떨어집니다.

      성 제롬은 그의 "이사야 주석"에서 에벤에셀 돌과 그리스도 자신을 비유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진정한 에벤에셀이시며, 교회가 세워지는 도움의 돌이십니다."라고 썼습니다. 이 유형학적 독서는 에벤에셀에서 우리의 궁극적인 도움과 구원이 되시는 우리 신앙의 초석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를 보도록 초대합니다.

      동방의 위대한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사무엘상 강론에서 에벤에셀의 교육적 측면을 강조합니다. 그는 사무엘이 이 돌을 사용하여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가르치는 데 어떻게 사용했는지 언급하며, "그[사무엘]가 어떻게 하느님의 은총을 그들의 마음에 새기고 그 기억을 항상 새롭게 유지하도록 돌보는지 보라"고 썼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이 행동에서 모든 시대의 영적 지도자의 모델, 즉 하나님의 선하심과 도우심을 백성들에게 지속적으로 상기시켜야 한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오리겐은 전형적인 우화적 스타일로 에벤에셀을 영적 진보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우리도 영적 여정의 각 단계마다 에벤에셀을 세워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멀리 인도하셨는지 표시하고, 주님께서 다음에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실지 소망으로 기대해야 한다"고 썼습니다. 이 글은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우리의 성장의 지점을 표시하는 일련의 '에벤에셀'로 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교부들의 이러한 통찰은 단순해 보이는 성경 이야기에도 풍부한 깊이가 담겨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교부들은 에벤에셀을 역사적 사건으로만 보지 말고 우리 자신의 영적 삶에서 살아 있는 현실로 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사무엘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에벤에셀'을 키우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상기시켜 줍니다. 어거스틴처럼 우리도 이러한 알림에서 더 깊은 영적 진리를 가리키는 표징을 볼 수 있습니다. 제롬처럼 우리도 에벤에셀에서 우리의 궁극적인 도움이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를 볼 수 있습니다. 크리소스톰처럼 우리는 이러한 알림을 사용하여 서로를 가르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리겐처럼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하고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희망을 품으며 우리의 영적 진보를 표시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은 사사시대의 연장선에서 읽어야 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는 사대

      제사장 - 엘리
                    엘리의 두 아들 / 홉비, 비느하스 - 불량자 < 제사를 무시>



      3월 26일(수) 사무엘상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지식의 하나님(삼상 2: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찌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Do not keep talking so proudly or let your mouth speak such arrogance, for the LORD is a God who knows, and by him deeds are weighed.

      지식의 하나님(the Lord is a God who knows)

      엘 데오트(אֵל דֵּעֹות)

      엘(410)(’êl) אֵל     

      1. 강한.  2. 힘.  3. 신.
      발음 [ ’êl ]
      구약 성경  / 235회 사용
      • 1. 명사, 남성 강한[형용사], 영웅.
      • 2. 명사, 남성 힘, 능력, 창 31:39.
      • 3. 명사, 남성 신.
        • a. 명사, 남성 [항상 어떤 종속어가 수반됨], 창33:20.
        • b. 명사, 남성 [종속어가 쓰이지 않는 경우: 시어로 자주 쓰이는데 이 때는 종속어가 쓰이지 않음], 시18:3(2).
        • c. 명사, 남성 [1인칭 접미어가 붙는 경우], 시18:3.
        • d. 명사, 남성 [일반적인 신을 나타내는 경우: 우상도 포함], 사44:10.
        • e. 명사, 남성 복수 אֵלִים:
        • f. 명사, 남성 영웅들, 강한 자들.
        • g. 명사, 남성 신들, 출15:11.
      • 관련 성경 /  하나님(창14:18, 삼하22:31, 사45:14), 능력 (창31:29), 엘엘로헤이스라엘(창33:20), 신 (출15:11, 34:14, 신3:24), 힘(신28:32, 느5: 5, 잠3:27), 권능자(시29:1), 임마누엘(사7: 14, 8:8), 강한 자(겔32:21), 벧엘(렘48:13, 슥 7:2). [형] 능하다(겔31:11).



      데오트(1844)
      데아(
      dêʽâh)  דֵּעָה   

      1. 지식.  2. 앎.  3. 욥 36:4
      발음 [ dêʽâh ]
      구약 성경 / 5회 사용
      • 1. 명사, 여성 지식,앎, 욥36:4, 시73:11, 사11:9, 28:9.
            복수 דֵּעוֹת, 1843의 여성형

      • 관련 성경  /   지식(삼상2:3, 시73:11, 렘3:15).


      하나님의 속성에서 전지(全知), 전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 - 전재(全在)

      전지의 하나님 - 엘 데오트(삼상 2:3)
      전능의 하나님 - 엘 샤다이(창 17:1)
      무소부재의 하나님 -

      교만한 말...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 '교만한 말'과 '오만한 말'은 한나의 대적 브난나가 그랬듯이(1:6), 하나님의 심오한 경륜이나 섭리를 무시한채 자신의 소견대로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멸시하며, 또한 자신을 높이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은 마음이 슬픈자의 마음을 더욱 짓밟으며,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의 심령에 못을 박을 뿐 아니라, 나아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고 훼방하는 말이므로 마땅히 금지되어야 했다.
      한편 '교만한 말'과 '오만한 말'은 동의어인데, 여기서 이처럼 두 단어가 반복 사용됨으로써 그 의미가 한결 강조되고 있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 이시라
      - '지식의 하나님'(*, 엘 데오트)은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연 법칙과 인간 사회의 이성적 법칙, 그리고 그 법칙들에 따라 벌어지는 원인. 과정. 결과까지도 완전히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분임을 시사해 주는 말인 것이다.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 이말은 전지(全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행한 어떤 행동의 내변적 특성까지도 철저히 파악하고 계심을 가리키는 말이다(Klein).
      사실 한나의 대적 브닌나는 한나의 불임(不姙)을 그녀의 사악성 내지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증거로 오판하여, 그녀를 얕잡아 보고 격동시켰다<1:6, 7>.
      또한 브닌나는 자신의 의도대로 한나가 격동됨을 보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교만한 말을 사람들에게 늘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브닌나의 그러한 사악한 속 마음과 행도의 성격을 파악하셔서, 당신의 공평하고도 의로운 기준에 따라 그녀를 판단하셨을 것이다(잠 16:2; 21:2; 24:12).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시편 139:7-18)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뜬금없는 질문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느냐 모르느냐, 안다면 얼마나 많이 아느냐에 따라 신앙의 컬러와 수준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그리고 믿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시조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무지해져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계시’(啓示 Revelation)를 통해서입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비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계시를 의미하는 ‘revelation’은 ‘보여주다’ ‘드러내다’를 의미하는 ‘reveal’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만큼만 알 수 있는 겁니다. 

      이런 계시를 기록해 놓은 게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그만큼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종교’라 부르는 겁니다. 
      반대로 다른 종교들은 ‘자연종교’입니다. 
      자연종교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신을 찾습니다. 
      인간이 이성을 갖고 있지만 영적으로 무지한데 어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어불성설이죠. 

      물론 성경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알 뿐이죠. 
      하지만 성경 계시를 통해 최대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속성(屬性, Attribute)을 아는 겁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공유적 속성(共有的 屬性, Communicable Attribute)과 비공유적 속성(非共有的 屬性, Incommunicable Attribute)입니다. 

      공유적 속성이란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인간과 공유되는,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도 부분적으로 나눠주신 속성입니다. 
      예를 들면, 지혜, 선, 사랑, 거룩, 의 등입니다. 
      하나님만큼은 아니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은 이런 속성들을 조금씩 갖고 있는 것입니다.

      비공유적 속성은 인간에게는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전지성(Omniscience)
      전능성(Omnipotence)
      무소부재성(Omnipresence)  / Ubiquity

      인간이 공유할 수 없는 속성이죠. 비공유적 속성은 자존성, 불변성, 무한성 등입니다.

      무한성의 속성에 해당되는 게 여럿 있죠. 
      영원성이나 전지전능(全知全能 Omniscience and Omnipotence)도 무한성입니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나 계십니다. 
      이런 속성을 가리켜 ‘편재’(遍在 Omnipresence/Ubiquity) 혹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부릅니다. 

      전지전능한데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얼마나 놀라운 분이십니까? 
      그런 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게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시편 139편은 다윗이 지은 시편인데,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하나님을 만나시고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험한 세상 살지만,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통해 승리하는 복된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1] 무한하신 하나님 : 전지전능, 무소부재

      본문을 보면, 다윗은 먼저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속성을 노래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무한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입니다. 시139:2~4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언행심사,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알고 계십니다. 내 생각조차, 심지어 입을 뻥끗도 하지 않았는데 말 할 것을 미리 아십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이시죠. 

      13절~14절을 보면 또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노래합니까? 창조주 하나님!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오장육부를 만드셨는데 인체가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의학의 발달로 인공 심장, 인공 혈액, 시험관 아기, 복제 인간, ... 별의 별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흉내 내는 수준에 불과하죠.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전능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편재! 무소부재! 다윗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7절~8절에서 노래합니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인간은 본질상 죄인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피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창세가 3장을 보면, 아담이 타락한 후 하나님을 피해 숨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피로 속죄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게 최선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부드러운 손길과 따스한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가 승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손길과 시선이 부담스럽습니까? 피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반갑고 좋습니까? 당연히 반갑고 좋아야 합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부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역사 : 인도, 보호, 감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면서 여러 가지로 역사들을 행하십니다. 본문에 나타난 3가지를 소개해 드리죠. 

      ① 인도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9절~10절(상).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 ” 

      비유법인데, 새벽에 동녘에 해가 떠오를 때 햇살이 얼마나 강렬합니까? 그 빛이 빠른 속도로 가는 것처럼, 아무리 빨라 바다 끝으로 가버린다 해도 하나님은 이미 그곳에 계시며 그의 손으로 나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도망가도, 아무리 멀어진 것 같아도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12절.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에게는 어둠이나 빛이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빛이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우리를 다 찾아내십니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장비 중 야간 투시경이 있습니다. 야간 사격이나 수색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어둠 속에서도 신기하게 사물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간 투시경보다 더 확실하게 우리 인생을 인도해 주십니다. 앞이 캄캄해도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물론 그렇다고 항상 우리의 인생길이 탄탄대로인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왜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그만큼 우리를 존중해 주시는데, 우리가 범죄하면 길을 막으십니다. 때로는 매를 드십니다. 두번째 이유는 우리를 정금처럼 귀한 사람으로 연단하시기 위함입니다. 욥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탈북자 피아니스트 김철웅 교수(한세대)의 간증입니다. 
      그는 북한에서 당 간부 자제로 8세에 뽑혀 평양 음대에서 피아니스트로 훈련 받았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러시아 유학까지 갔습니다. 
      유학 시절 한 카페에서 음악을 들은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재즈 피아노곡인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가을의 속삭임」이었는데, 청춘의 마음을 흔들어놓았습니다. 
      유학을 마친 후 북한에 돌아갔는데, 음악에 많은 제한을 받기 시작합니다. 

      평양국립교향악단에서 「가을의 속삭임」을 연주한 게 문제가 되어 시말서를 쓰고 금지 조치를 당했습니다. 
      실제로 북한 당국은 20세기 이후 음악은 불순하다며 19세기 이전 음악만 연주하도록 제한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민 끝에 중국으로 탈북을 결행합니다. 
      탈북 후 여러 가지로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피아노를 칠 수 없는 게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 있을 때 극동방송을 몇 번 들은 기억이 있는데, 교회에 가면 피아노를 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찾아갔고 한국인 선교사를 만납니다. 
      선교사 도움으로 한국행을 시도했으나 공항에서 체포되어 공안에 끌려가 취조를 당하고 북한으로 압송됩니다. 
      도중에 탈출하고, 또 잡히고 ...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하다가 마침내 북한으로 압송됐습니다. 
      그런데 취조 도중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수사관이 묻습니다. 
      너 아무개 아냐? 
      평양 음대 출신 맞지? 
      아버지가 아무개지? 
      그래서 이젠 모든 신원이 밝혀졌으니 죽었구나 싶었습니다. 
      수사관이 자기가 최근에 전근 왔다며, 아버지의 후배인데 과거에 은혜를 많이 입었다며 풀어 줍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한국으로 오개 됐습니다. 
      그 후 서울대 음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한세대 교수가 된 겁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랍습니까? 
      물론 이 간증은 특별한 사람의 아주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그렇다고 남의 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 각자를 특별한 사람으로 대우하십니다. 
      여러분의 특별한 상황에 맞게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인생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해 주십니다. 
      앞이 캄캄할 때는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② 보호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시139:5절.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나를 호위하듯이 보호해 주십니다. 강한 손으로 붙잡아주십니다. 10절(하). “ ...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your right hand will hold me fast)” 오른손은 전능자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 능력으로 붙잡아주십니다.

      여러분, 중력(重力 Gravity)의 법칙을 아시죠. 지구가 그 표면의 물체를 잡아당기는 힘입니다. 지구본을 놓고 생각해 보세요! 둥근 지구 위에 옆으로 비스듬히, 거꾸로 서 있어도 떨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서고 걷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중력 때문입니다. 한국은 북위 37도쯤 되니까 비스듬히 서 있는 격입니다. 그래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게다가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합니다. 그 속도가 엄청납니다. 자전 속도는 위치마다 다른데, 적도가 가장 빠른 1,674km/h입니다. 

      한국은 1,337km/h입니다. KTX 시속의 5배쯤 됩니다. 얼마나 빠릅니까! 공전 속도는 107,532km/h입니다. 이렇게 쌩쌩 달리는데도 미동도 없다니!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정해 놓으신 중력의 법칙을 통해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겁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중력으로 우리를 꽉 붙잡아 주십니다. 

      또 18절 보십시오! “ ...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자나 깨나 보살펴주십니다. 잘 때 보호해 주시지 않으면 큰일이죠. 다윗은 다른 시편 23:4에서 뭐라고 노래합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보호해 주심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처럼 위험한 상황에서도 안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 인생은 마치 전쟁터와 같습니다. 얼마나 경쟁이 심하고, 사건과 사고가 많습니까? 얼마나 위험한 일들이 많습니까? 그런 와중에 그나마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 때문입니다. 

      월남전 참전 용사의 간증입니다. 
      1970년 맹호부대 통신병으로 참전했는데, 전투를 하던 중 네 군데 총탄을 맞고 신실했습니다. 
      군의관이 관통으로 판단하고 급히 상의를 벗겼습니다. 
      상의의 상태로 보면 분명히 관통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런데 옷을 벗겨 보니 심장 부위에 아무런 상처의 흔적도 없습니다.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니까, 총탄이 상의 주머니에 있던 포켓성경을 관통하다가 포켓 성경과 그 뒤에 있던 파월장병수첩 사이에서 멈추어 있습니다. 
      이게 화제가 되어서 국내외에 크게 보도됐습니다. 
      그 주인공은 수년전(기독교 잡지에 간증이 실린 때) KBS 제주방송총국 이영진 부장입니다. 
      포켓성경은 파병 직전 군 동료이며 교회 친구였던 이흥부 이병이 선물로 준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신기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인생 가운데 신기하고 놀라운 역사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붙잡아주심 보호하심을 확신하시고, 늘 기도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③ 감찰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십니다. 시139:1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you have searched me) 나를 아시나이다” 살핀다는 말이 바로 ‘감찰’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불꽃같은 눈입니다.(계1:14 참조)

      하나님은 우리 언행심사를 훤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인간이 하나님을 싫어하고 기피할까요? 죄인이기 때문에 양심이 찔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사실은 하나님이 뻔히 보고 계신데 죄악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도 아무 일도 없으면 하나님이 모르시는 줄 알고 회개치도 않고 습관적인 죄악으로 고질화됩니다. 그러면 나중에 한꺼번에 얻어맞는 겁니다. 이런 이치를 알고 미리미리 십자가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바로 서야 합니다. 그럴 때 담대한 용기가 생깁니다. 인간이 죄를 품고 있으면 부지불식간에 쫓깁니다. 그러니까 인생이 잘 풀릴 수가 없죠. 기도도 담대하게 할 수 없습니다. 

      어느 수박 장수가 봉고 트럭에 수박을 싣고 이면도로와 골목길을 다니며 장사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좁은 도로에 신호등이 있는데, 사람도 많지 않고 경찰차도 없으니까 위반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뒤에 경찰차가 나타났습니다. 혹시 봤나 걱정됐지만 시치미를 떼고 갔습니다. 뒤를 보니까 계속 따라옵니다. 그래서 골목길로 들어갑니다. 그래도 따라옵니다. 겁이 났습니다. 경찰차가 바짝 따라오더니 서라고 손짓합니다. 큰일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경찰관이 차에서 내리더니 소리칩니다. “아저씨! 왜 도망치는 것처럼 달려요? 수박 한 통 사기 되게 어렵네!” 

      죄를 짓고는 못 사는 겁니다.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않든지 처리하지 못한 죄가 있으면 영혼을 짓누릅니다. 그런 가운데 무슨 기도를 하며 무슨 일이 잘 풀리겠습니까? 안 되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 죄를 고백하고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절대 죄악을 숨기거나 방치해서는 해결이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렘23: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심지어 시130:3~4은 뭐라고 합니까?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If you, O LORD, kept a record of sins)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감찰하시되 아예 죄악의 기록을 갖고 계시다는 겁니다. 참고 기다려주실 뿐, 결국은 회개하지 않으면 터져 버립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오래 참아주시지만, 공의로우신 분이라 영원히 참지는 않으십니다.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역시 완전한 사람이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그때 죄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속죄의 은혜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성화의 노력을 기울었습니다. 결국 ‘성군 다윗’이란 칭호를 얻었습니다. 시139:19절,23절~24절을 보십시오. “19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 23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Search me)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결백했습니다. 그러니까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악한 자들을 심판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나를 보고 계심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긴장하고 경직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삽니다. 

      지난 주간 끔찍한 사건이 있었죠. 
      경찰 간부라는 사람이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입니다. 보험금을 노리고 그랬다는데, 기가 막힙니다. 그래도 감시 카메라는 의식했는지, 헬멧을 쓰고 범행을 했습니다. 감시 카메라에 찍힌 그 모습을 보면서 제가 마구 욕했습니다. 한참 욕을 해대고 있는데,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러는 너는? 그리고 한국교회 교인들은 어떻고?”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감시 카메라만큼도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요즘 한국교회 일각에서 벌어진 추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관련자들이 감시 카메라 앞에서 살았다면 과연 그런 지저분한 짓들을 해겠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날마다 바르게 살고, 혹 잘못되면 얼른 회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을 닮은 성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담대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정말 믿습니까? 그러면 그분을 늘 의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 경외’의 신앙이 있으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당당해집니다. 아무쪼록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꼭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무소부재(omnipresent)하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접두사 omni- 는 “모든”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존재하신다는 말입니다. 많은 종교에서 신은 무소부재하다고 간주하지만,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관점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으로 세분화됩니다. 하나님은 창조물의 모든 결마다 스며있지는(범신론) 않으시지만, 어디에서 항상 계십니다.

      비록 어디에서든지 같은 시간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시지는 않지만, 모든 창조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존재하십니다. 때때로 어떤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당신을 나타내실 수도 있지만, 다른 지역 다른 환경에서는 당신의 존재하심을 드러내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분명한 방법으로 한 사람에게 나타나실 수도 있고(시편 46:1; 이사야 57:15) 상황에 따라 어떤 주어진 시간에 모든 창조물들에게 나타나실 수도 있다고 알려줍니다 (시편 33:13-14). 하나님께서는 시공의 모든 영역에 무소부재의 방식으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시지만, 그렇다고 어떤 시간이나 공간에만 지협적으로 제한을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또 매순간의 현재마다 계십니다. 어떤 분자와 원자 입자도 하나님께서 온전히 존재하시기에 너무 작다 할 수 없으며, 어떤 은하계도 하나님께서 제한하시기에는 너무 광대하다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창조물을 제거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가능성들까지도 알고 계시므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여전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사물의 모든 자연적 질서 안에, 모든 방법, 모든 시간과 장소 안에 존재하십니다 (이사야 40:12; 나훔 1:3). 하나님께서는 인간 사건의 안내자로서 역사 속의 모든 사건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존재하십니다 (시편 48:7, 2; 역대하 20:37; 다니엘 5:5-6).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다른 이들을 위해 탄원하는 자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들, 간청하는 자들,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진정으로 기도하는 자들에게는 특별히 세심한 방법으로 존재하십니다 (시편 46:1). 더할 나위 없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된 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시며 (골로새서 2:19), 지상을 덮고 있으며 지옥 문이 이기지 못할 온 교회들 안에 신비롭게 존재하십니다.

      인간 정신의 한계로 인해 하나님의 전지하심이 역설적인 질문들에 시달리듯이,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역설 중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즉 지옥에도 하나님이 계신가 하는 것입니다. 지옥은 악인이 가는 곳으로, 악인들이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한하고 끝없는 분노 아래 고통 받는 장소입니다. 많은 이들이 지옥은 하나님과 분리된 장소라고 주장합니다 (마태복음 25:41).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이 당신과 분리된 곳에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4:10이 어린양 앞에서 고난 받는 악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지옥에 있는 악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분노를 견뎌야 합니다. 악인을 따로 떼어 놓은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니 좀 놀랍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당신의 존재로 채우시며 (골로새서 1:17) 당신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기 때문에 (히브리서 1:3), 위의 역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되 반드시 축복해야 할 곳에만 존재하시지는 않는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당신의 자녀들과 떨어져 계신 것처럼 (이사야 52:9), 악인을 멀리 하시고 (잠언 15:29) 마지막 때에는 어둠에 매여 있는 불신자들에게 영원한 형벌이 가해지는 곳으로 가라고 명령하시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 가운데에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 어떻게 고통 당하는지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들이 자신들이 처한 영원한 상태로 인해 괴로워하고, 구원을 바라며 울부짖고, 눈물 흘리고 슬퍼하는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의 죄, 즉 죄가 없었다면 그들이 누렸을지도 모를 모든 축복으로부터 깊은 단절을 만든 그 죄를 끊임 없이 상기시켜 주시는 자로서 언제나 그곳에 존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항상 존재하시지만, 진노 외에 어떤 속성도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또한 천국에도 존재하시며, 우리가 여기서는 감히 이해할 수 조차 없는 모든 축복들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여러 가지 모양의 축복, 여러 가지 모양의 사랑, 여러 가지 모양의 친절, 그야말로 진노 외에 그 모든 것을 보이시며 천국에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도 하지만 (시편 139:11-12), 우리가 움직이지 않고도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믿으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이사야 5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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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속성

      1.  거룩하신 하나님
      2.  영원하신 하나님
      3.  전능하신 하나님
      4.  전지 하신 하나님
      5.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6.  의로우신 하나님
      7.  사랑의 하나님
      8.  영원하신 하나님
      9.  진실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 10  자비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 11  선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 1 -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하다(카도쉬)

       '거룩'이라고 하는 개념 속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반영되어 있다.
      하나는 분리, 즉 세속적인 것으로부터의 구별이며,
      다른 하나는 영적인 능력이다.
      즉 하나님의 거룩함에는 여러 신적인 세력들이나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어떤 힘이 부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함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숭배와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성서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임을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고 있다.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고백할 때, 그것은 이 세계를 완전히 초월해 있다는 의미에서의 거룩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그는 불가침의 존재이며, 분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분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전적인 타자로서 존재한다. 그의 거룩성은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그분의 본질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거룩성은 정적인 것이 아닌, 역동적인 힘으로서 심판과, 사랑의 형태로 인간에게 다가와서 인간으로 하여금 거룩한 생활에 참여하라고 요구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1:44,45;레19:2;레20:7;레20:26;민15:40)

      거룩하신 하나님
       선지자 이사야가 활동을 개시한 주전 739년 경의 유다 왕국은 그야말로 부정과 불의가 판을 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무시되고 이방의 우상 숭배 풍조가 횡횡하고(참조; 사2:6-8), 정치가들은 하나님 대신 이방의 군사력을 의뢰했으며 종교 지도자들은 관원들과 결탁하여 '악법'을 제정하여 백성들의 재산을 수탈하기에 급급했었습니다(참조; 사1:23). 이에 선지자 이사야는 비분 강개하여 성전에서 기도를 하던 중 '하나님의 영광'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 하나님은 유다 민족의 부정과 불의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큰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참조; 사6:5).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들의 불의와 죄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신 '거룩하신'분으로 성경은 증언을 합니다. 함께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거룩의 뜻

      '거룩'에 대해 구약에서는 '카도슈', 신약에서는 <하기오스> 말로 표현되었는데 이에 대한 원뜻은 '불의와 부정에서 분리된 상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고유하신 속성을 뜻하는 것으로서 첫째, 죄와는 관계가 없으신 '하나님의 윤리, 도덕적인 완전성'을 뜻하는 것이며 둘째, 적극적인 의미로는 본질적으로 피조물들과는 구별된 '신의 속성'을 지니신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부 하나님도(참조; 레11:44, 45; 요17:11) 성자 예수님도(참조; 막1:24; 요6:69)또 성경 하나님도(참조; 마3:11; 눅3:22)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있는 사물이나 사건, 그리고 인간(성도)도 '거룩함'을 입은 것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참조; 출26:33; 레1, 8장; 고전1:2).

      2.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

       그렇다면 '거룩성'을 지니신 하나님은 세상 만물과 어떤 관계로 계시는가?

      1) 존재적으로 구별되신 분이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위엄스러우신 분'(출15:11)이 누가 있겠느냐고 모세는 고백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거룩'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피조물인 만물과 인생들과 '구별'된 '창조주'요 '섭리주'로서 계시는 분이십니다. 즉 '인간'과 '곤충'과는 엄연히 '존재적'으로 구별되듯이 하나님은 절대적인 거룩한 '신'으로서 우리 인생들과 구별된 분이심을 뜻합니다.

      2) 완전 무흠하신 분이심
      '거룩…거룩…거룩'(사6:36)이라고 천사들이 찬양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전 무흠'하다는 사실을 시사해 줍니다. 아무리 의로운 인생일지라도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또 그 삶에서 도덕적으로 '흠집'이 없는 이들도 없을 것입니다. 민족의 불의와 부정에 비분 강개한 '이사야'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6:5)라고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은 인간들과는 달리 존재적으로는 '신'이시요 윤리 도덕적으로는 '완전 무흠'하신 존재로서 '절대적'으로 인간과 인간 세계와는 '분리되신'분으로 계심을 인식합시다.

      3. 거룩하신 하나님의 특성

      1) 죄악을 행치 않으심
      '그러므로…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불의를 행치 아니하시며'(욥34:10). 하나님은 인생들이나 창조하신 만물들에게 결코 '악이나 불의'를 행치 않으십니다. '죄악'을 불인정하시고, 용납하지 않으시는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참조; 사59:1,2 ;합1:13).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이 시험받을 때에…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약1:13)고 원망 불평하지 말 것을 주의 시켰습니다.

      2) 거룩하심을 요구하심
       소극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의 죄악을 원치 않으시고 적극적인 면으로는 인생들의 '거룩한 행위'를 기뻐하십니다(참조; 20:26; 잠15:9). 그리고 필연적으로는 하나님을 닮아 '거룩함에 이르라'고 요구하십니다(참조; 레11:44,4; 히12:14; 벧전1:15,16).

      3) 거룩한 희생을 치루심
       그런데 이 하나님의 '거룩성'이 온전히 계시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사건이요, 십자가의 대속 사건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만일 그와 같은 '적극적인 거룩적 행동'이 하나님께 없었더라면 기독교의 하나님도 인간들이 지어 낸 신화적인 신과 다를 바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스스로 거룩하신 분이시요 또 인생들에게 거룩을 요구하시는 분으로만 머무르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거룩을 행하셨으니 바로 불의한 인생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성품'을 선물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속죄를 해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절대 불의한 인생들의 죄값을 몸소 담당하신 '희생'인 셈입니다. 이 십자가의 희생 앞에서 인생들의 '진정한 거룩'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4.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1) 그리스도의 속죄 은혜를 힘입음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그 요구를 반영해 줍니다. 그 율법안에서 인생들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는 '절대적 간격'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참조; 롬7:12-15). 그러므로 오직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은총을 힘입어야만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참조; 롬3:21,22; 히4:16). 바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성을 인정하는 것이되는 셈입니다(참조; 롬3:25-27).

      2) 겸손함과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함
       성도들은, 하나님은 언제나 절대적 거룩자요 우리는 항상 상대적 불완전자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허'한 자의식을 지니고, 늘 회개하여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 삶을 구현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a.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모든악에서 떠나 계시다는 의미임(히7:26)
       b. 하나님은 성도를 거룩하게 하심(레11:45)

      1.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뜻

      a. 하나님의 속성이 거룩하심
       스스로 거룩하다 선언하심(렘11:45), 육과 영의 더러운 것이 없으심(고후7:1), 영광을 지니시며 위엄을 지니심(출15:11), 사람이 가미 다가설 수 없는 존재이심(삼상6:20), 마땅히 경배의 대상이 되심(시99:9)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함(사6:3), 만국에 의로운 일을 펼치심(계15:4), 강포와 궤사가 없으심(사53:9), 악이 없고 흠이 없으심(히7:26)

      b. 하나님의 사랑이 거룩함
       하나님은 자신의 종을 사랑하심(민12:8),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심(대하20:7)
      믿음이 돈독한 자를 사랑하심(약2:23)

      c. 하나님의 요구하심이 거룩함
       성도에게 거룩할 것을 요구하심(레11:45), 어린이와 같은 심령 상태를 요구하심(마18:3), 더러운 죄를 회개할 것을 요구하심(눅13:2,3), 영혼의 의로움을 요구하심(마5:20), 신령한 제사를 요구하심(요4:24) 신실한 믿음을 요구하심(요8:24)

      d. 하나님이 성도에게 거룩한 목표가 되심
       성도는 더욱 큰 은사를 목표로 함(고전12:31),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상을 목표로 함(빌3:13,14)  세상을 이김(고전9:24)
      e. 하나님이 경배의 대상이 되심
       우상에게 하는 경배는 잘못됨(레26:1), 사탄에게 하는 경배는 잘못됨(마4:9), 피조물에 대한 경배는 잘못됨(롬1:25), 오직 하나님께서 경배해야함(사6:1-5)

      2.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역

      a. 거룩한 약속을 주심

       ㉠ 믿음의 사역자에 대해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한 자는 별과 같이 비취게 하실 것을 약속하심(단12:3), 구제하는 자에게 큰 상을 약속하심(막9:41), 선을 행하는 자에게 존귀와 평강을 약속하심(롬2:10), 율법을 실행하는 자에게 복을 약속하심(약1:25)

      ㉡ 회개하는 자에 대해
       회개를 기뻐하심(눅15:7), 죄를 다시는 기억지 않으심(욜2:13), 성령을 주심(행2:38), 구원하심(시34:18)

      ㉢ 고난 중에 있는 자에 대해
       밝은 날을 주심(시30:5), 구출하심(시34:19,20), 보호하심(시41:3), 위로를 주심(사43:2), 평안한 길을 예비하심(요14:1,2), 슬픔과 고통에서 구원하심(계21:4)

      ㉣ 시험받는 자에 대해
       능력을 주심(눅10:19), 안전함을 주심(눅22:31,32),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심(롬16:20), 피할 곳을 주심(고전10:13), 시험을 받을 때에 도우심(히2:18), 최후에 승리하게 하심(약4:7)

      ㉤ 모든 성도에 대해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심(시37:3), 축복을 주심(막9:23), 기도의 응답을 주심(막11:24), 영원한 생명을 주심(요3:14,15), 영적인 은혜를 주심(요6:35), 구월을 주심(롬1:16)

      b. 거룩한 부르심
      ㉠ 거룩한 음성으로 부르심(사30:30)
      ㉡ 하나님이 성도를 세우기 위해 부르심(롬8:29)
      ㉢ 거룩케 하시려고 부르심(살전4:7)
      ㉣ 사랑을 통해 부르심(롬12:1,2)


      하나님의 속성 2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엘로헤-올람 예호와)

      하나님의 영원성은 먼저 그가 만물과 모든 생명이 있기전에 계셨고 또한 행동하셨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분은 세계가 있기 전에 계셨으며, 모든 피조물이 없어진 후에도 계실 분이시다. 그는 알파와 오메가, 곧 이 세상, 이 역사의 시작과 마지막을 초월해 계시며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그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시다. 그는 피조물처럼 시간을 한계로 삼고 존재하는 분이 아니다. 그래서 '주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벧후3:8). 하나님의 영원성에 비하여 인간의 일생은 너무나 불안정하다. 하나님의 영원성 앞에서의 인간의 삶은, 무상(無常) 그 자체이다(참조;시103:15). 기독교 신앙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말할 때 그것은 피조물로서 시간의 한계에 지배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불확실성 속애서 하나님을 향한 의지를 고백하는 것이다.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존재의 궁극적인 한계들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젊은'(시103:5)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주권아래 복종하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기독교 신앙은 잊지 않는다.

      시편 기자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다'(시90:2)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여러 속성 가운데 그의 영원성을 드러낸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과 시간의 연결 속에서 끊임없이 존재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에도 계시며 미래에도 계실 영원한 하나님에 대하여 상고해 봄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 영원하다는 말의 뜻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속성에 속하는 문제인데, 이 속성이란 말의 뜻은 어떤 사물의 성질 혹은 어떤 것의 유일한 특징을 나타내는 말로 쓰입니다. 하나님은 변치 아니하시고 영원하시다라는 사실을 성서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참조; 요8:58; 딤전1:17;딤전6:16;히1:12;히13:8;계1:4).

      1) 시작과 끝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년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욥36:26). 욥은 광대무변하신 하나님께 대해 인간은 무지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합니다(계22:13). 또한 요한은 주님은 시작과 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로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기에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를 알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우상은 어떤 사람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만들어진 시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상은 반드시 마지막이 있는 법입니다. 이렇듯 세상 사람들은 이미 존재하여 있는 재료에서 물건을 만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존재해 있지 않은 재료에서 우주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항상 완전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시간을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라는 말은 시간과 관계해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영원성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 즉 시작과 종말이 없는 하나님은 시간 그 자체의 원인이 되십니다(참조; 요1:3;벧후3:8). 다시 말하면 모든 창조물 안에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모든 만물을 영원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시간은 결국 영원하신 하나님의 권한하에 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이 한정된 지식 혹은 지성을 갖고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올바로 볼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들 모두를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3) 영으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물질적인 외형을 지니신 분이 아니라 영적인 실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4:24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본질이 영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거울 속에 나타나 있는 자기의 얼굴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이난 속성을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영원성의 본질

       하나님은 자존자이시기 때문에 영원하십니다(참조; 출3:14). 성경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창21:33),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시102:27), '지존 무상하시며 영원히 거하신다'(사57:15)라고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원성의 본질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불변하시는 속성을 가지고 계시는데(딤전6:16)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신적 속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영원하신 하나님

      1) 성경의 증거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은 성서로부터 얻을 수 있는데 시93:2에 보면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역대상16:34; 시106:1) '자비하심이 영원하시다'(역대상1:41; 역대하5:13)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해 증거해 주고 계십니다.

      2) 교회사적인 증거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시점인 사도 후 시대를 살펴보면 네로 황제 이후, 이백오십년에 걸친 박해 속에서 폴리갑, 키프리안 같은 교부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들은 살아 계신 영원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참조; 행7:59,60).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순교했던 많은 순교자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행동으로 실천했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영원은 '하나의 현재'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오늘날'도 말씀하고 계십니다(참조; 시2:7;시90:4;벧후3:8). 하나님께서 현재를 살피시고 계시듯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과거와 미래를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람의 행동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두려움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참조; 행5:5;행6:10,11). 에녹과 동행하신 그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시는 축복받는 인생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참조; 창5:22;고후13:13).


      하나님의 속성 3 -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파라…데오 판타 뒤나타 에스티)

      이 구절은 부자와 천국에 관한 교훈 중에 한 부분으로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내용이다. 사람이 재물에 집착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한 하나님을 섬기는 일, 곧 '예수를 따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사람이 재물을 포기한다는 것은 사실상 난처한 일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재물은 일상적인 생활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사람이 재물을 완전히 포기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자기의 생명의 근거, 삶의 근거를 오직 하나님께만 두는 것이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만을 자신의 안전과 행복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데 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고백하는 이유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신을 찾고 의지하는 요인 중 가장 비중이 큰 이유가 있다면 그 신의 '전능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도 인간의 구원 문제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고 하십니다. 이처럼 성경이 계시해 주는 하나님은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참조; 창28:3;겔1:24;계4:8). 그 '전지성'이 있기에 그 사랑도, 그 공의도 자유롭게 행사하실 수 있으시며, 인생들을 죄와 죽음과 허무에서 구원하실 수가 있으신 것입니다. 함께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전능성의 특징

      1) 모든 속성들과 조화를 이룸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지만 결코 그분의 거룩한 소성들과 상치되는 일은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결코 '악'은 행하실 수 없으시며(참조; 약1:13),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결코 '거짓'도 행치 못하십니다(참조; 히6:18).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성은 항상 그분의 영원, 사랑, 거룩 공의의 속성들 안에서만 발휘됩니다. 만일 악과 거짓까지 하나님께서 행하신다면, 그분은 결코 '전능자'라고 볼 숴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통제할 능력'이 결여 된 존재이며, '사랑'을 행할 '능력'이 결여 된 '신'이 되시기에 참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의지'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에 의해 제한되어 있으며 그 진리 되신 속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인식합시다.

      2) 창조 원리와 조화를 이룸
       하나님은 세상과 우주를 창조하시되 물질은 물질의 고유한 성품대로, 영적 세계는 영적 세계의 성품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만물은 '피조물'로서의 제한성을 지니도록 창조하셨으며, 하나님과 계속 교제를 해야만이 생존, 발전, 번영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창조적 원리에 모순 되는 일까지는 하시지 않으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전능성'은 그 거룩하신 속성과 또 창조 원리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좇는 인생들만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총을 입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불신하면서도 전능하신 축복을 누리기를 원할 수는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창17:1)고 요구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역

      1) 천지를 창조하셨음
      '주 여호와여 주께서는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렘32:17). 우리가 하나님을 '전능자'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분이시기에 '무에서 유'를 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세상을 통치하심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19:6). 요한 사도가 이 고백을 할 때에는 '밧모' 섬에 유배되었을 때였고 교회도 역시 '로마'로부터 모진 핍박과 환란을 당할 때였습니다(참조; 계1:9). 한마디로 불의의 권세가 난무하고 정의로운 하나님의 교회는 '풍전 등화'격이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때에도 요한 사도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역사를 통치하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요한이 하나님께서 '전능자'라고 믿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어떤 환경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세상과 교회를 그 거룩하신 뜻대로 통치하고 계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3) 인생들을 구원하심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36). 이 대답은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는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 내용입니다. 인생이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믿는 실존적 이유는 하나님이 바로 죄인 된 인생을 죄와 사망과 형벌에서 구해 주시는 유일한 '구원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불신하기에 자신의 의에 대한 무능과 연약함과 모순성에 실망과 좌절을 하기도 합니다(참조; 롬7:24). 그러나 신앙이란 '나'를 바라보는 신념을 초월하여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통해 나 같은 죄인 까지도 능히 구원하실 수가 있음을 감사합시다(참조; 눅3:8)

      3.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성도들의 자세

      1) 성경 말씀을 신뢰해야 함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그의 뜻을 오류 없이 종들을 통하여 '성경'으로 기록하게 하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이러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전능성을 인정하는 첩경이 됩니다(살전2:13).

      2)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해야 함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죽음과 악도 주관하실 수가 있으십니다. 선한 일, 평탄한 길에서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할 것이 아니라, 내게 악하고 두려운 일이 닥칠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4).

      3) 하나님의 권세를 의뢰해야 함
       현세에는 얼핏보면 사탄과 불의가 득세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장자 '새 하늘과 새 땅'을 재창조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모든 불의한 자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며(참조; 시43:13; 계6:15-17) 성도들은 의의 보상을 누릴 것입니다. 그 전능하신 권세를 의뢰하고 악한 세대 속에서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합시다.

      a 전능함은 인간의 힘이 큰 것을 나타냄(왕상11:28)
      이 사람 여로보암은 큰 용사라 솔로몬이 이 소년의 부지런함을 보고 세워 요셉 족속의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더니

      b. 전능함은 위대한 것을 나타냄(사28:2)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같이, 파괴하는 광풍같이 큰 물의 창일함같이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1.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
      a. 하나님의 이름 - 아브라함에게 스스로 선언하심(창17:1)
       b. 천지 창조 - 모든 것을 다 이루심(사44:24)
       c. 자연 만물을 제어하시는 역사(암4:13)
       d. 인류 열방을 통제하심(암1:1,2:3)
       e. 만물 질서를 통제하심(시115:3)
       f. 죽은 자를 살리심(롬4:17,24)
       g. 하나님은 피곤치 않으심(사40:28)
       h.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으심(창18:14)
       i. 그리스도의 전능하심
           질병을 치유하심(마8:3), 귀신을 내어쫓으심(막1:23-27), 사탄과의 시험에서 승리하심(마4:1-
           11), 죽음의 권세를 이기심(요10:17,18), 심판의 권세를 이기심(마25:31-33)
       j. 성령의 전능하심
           그리스도 위에 강림하심(사11:2), 복음 위에 역사하심(롬15:18,19)

      2. 하나님의 전능성의 본질

       의로움(욥8:3). 멸시함이 없음(욥36:5). 큰 권능임(욥37:23). 공의임(계16:7). 힘이 큼(욥24:22). 완전함(고후6:18)

      3.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역

      a. 창조하심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심(히11:3), 모든 만물을 창조하심(엡3:9), 질서를 창조하심(창1:2-
           19), 헛되게 창조하지 않으심(사45:18),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창조하심(시19:1),
            생명과 호흡을 친히 주심(행17:25)
       b. 통치하심
           영원히 통치하심(출15:18), 의롭게 통치하심(삿5:11), 만유를 통치하심(시103:19),
            인간 나라를 통치하심(단4:17), 이방 국가를 통치하심(대하20:6)
       c. 복 주심
           현세에 복 주심(창24:35), 병을 없게 하심(출23:25), 백성 위에 임하심(신23:5), 다양한 은사로
           축복하심(마25:15), 성도의 길을 완전케 하심(시18:32), 성도의 길을 완전케 하심(시18:32),
            대적하는 자를 치심(시18:32), 큰 구원을 주심(시18:49, 50), 총명을 주심(욥32:8),
            생명을 주심(욥33:4)
       d. 경책하심
           ㉠ 때에 따라 경책하심(시103:9)
                   항상 경책치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 죽기까지는 하지 않으심(시118:18)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
            ㉢ 하나님을 떠난 자를 괴롭게 하심(룻1:20,21)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
                   게 하셨느니라…
             ㉣ 사람의 경책은 아첨보다 귀함(잠28:23)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
             ㉤ 전도자는 말씀을 전파할 때 경책하기를 힘씀(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4. 전능하신 하나님을 일컬은 실례

            축복 기도 때에(창28:3), 사람의 맹세에(욥27:2), 하나님을 찬양한 때(계4:8
           

      하나님의 속성 4 - 전지 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는(기노스케이 판타)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지는 무엇일까? 이 말 속에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예지만을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앞으로 되어 질 모든 일들(특히 신앙과 구원에 관련된)일 이미 알고 계시다'는 측면만을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전지 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이유 중 핵심은 그런 문제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을 나타내고, 만사를 내다보되 남김없이 똑똑히 내다보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전지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어질 것이 없음을 알고 있다. 그는 사람의 마음속 깊이까지 보시는 분이시다(참조; 요2:25).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는 하나도 숨김없이 낱낱이 드러나게 된다. 어둠 자체도 그 앞에서는 이미 어둠이 아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 앞에서 무엇을 감추려고 하는 일은 모두 실패하고만다. 이것이 바로 전지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139:5,6).

      이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 고백한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 언급하였는데(삼상2:3;욥12:13등), 우리 인간들은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이해하려는 오류를 범해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잘못으로 인해 '전지하신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지적 속성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과 믿고자 했던 자들에게 많은 오해를 낳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전지하신 하나님'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여 믿음에 굳게 서는 신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1.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심

      '전지하신 하나님'의 첫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지식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은 한정되어서 과거의 한 부분과 현재의 한 부분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또한 현재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은 전 우주 안에서, 과거와 현재에 있었고 미래에 있을 전체 지식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이렇듯 이 인간의 지식은 그 범위와 양이 너무 적으며, 인간의 기억력은 너무 약하며, 미래의 일에 대해서도 인간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처럼 이러한 제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과거나 미래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언제나 현재만이 있을 뿐입니다. 만일 하나님에게 과거가 있다면, 그 과거는 하나님의 지배권의 범위를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에게 미래가 있다면 그 미래는 아직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하나님에게는 생소한 시간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일어날 사건들의 내용을 하나님은 알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현재만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에게 현재만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과거와 미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즉 시간의 양과 질 모두를 자신의 지식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 전에 대해서도 모두 아시는 동시에, 창조된 시간이 그 때부터 그 시간이 계속될 영원까지도 모두 알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결단이지만 하나님에게는 모두 현재적인 결단이며 그 믿음은 모두 동일하게 귀한 것들입니다.

      2.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심

      '전지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의 지식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인간의 지식은 시간의 제약을 받으며, 또한 공간의 제약도 받습니다. 인간은 현재 자기 주변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간에 자신의 몸 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지구 반대 편에서 일어나는 일, 그리고 우주 저편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 수 없습니다.

      즉 인간의 지식은 그 범위에 있어서 제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간의 제약성을 초월하여 인간의 몸 안에서 모두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통찰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이같은 사실에 대해 바울은 롬8:22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우리가 아나니'. 바울의 이같은 고백은 바울이 자신의 지식만으로 이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믿음으로 '전지하신 하나님'께 의지했을 때 바울은 각 피조물이 당하는 고통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공간에 의해서 제약받는 분이 아니라 그러한 공간의 제약 없이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이 일어나던 간에 모두 아시는 '전진하신 하나님'입니다.

      3. 모든 피조물에 관심을 갖고 계심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지 않는 전지하신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지식의 대상인 모든 피조물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참조; 롬8:22). 특별히 하나님은 인간의 머리털의 수를 아실 정도로 인간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는데(참조; 마10:30),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하나님의 전지하신 신적 속성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구속하시게 된 것도 죄 아래서 신음하는 인간의 비참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지하신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피조물을 단지 아는 것으로만 끝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실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깊은 관심을 두고 살피시며 그들이 완전히 회복될 날을 예비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 알아보았지만 아직도 우리는 부분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계약을 받은 피조 된 인간 이성으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영적 지혜를 사용하여 성경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깨달을 수 있으며 또한 피조 된 세게의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곡된 인간 이성을 의지하기보다는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의 음성에 귀를 귀울여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오류 없이 파악하고 이해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의 역사를 알고 진행하심(행2: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은 극히 작은 것도 아심(마10: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1. 전지하신 하나님
      a. 하나님은 별의 수효까지 세심(시147:4,5)
       b. 하나님은 음부와 유명도 아심(잠15:11)
       c. 인간의마음과 행사를 아심(시33:13-15)
       d. 인간의 계획과 걸음을 아심(욥14:16)
       e. 인간의 머리털까지도 세심(마10:30)
       f. 미래의 일을 아심(사44:28)
       g. 영원 전부터 아심(렘1:5)
       h. 심령을 감찰하심(잠21:2)
        i. 사람의 의식주를 아심(마6:8)
       j. 최후의 날과 때를 아심(마24:36)
       k. 그리스도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것을 가지심(골2:2,3)

      2.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

      시간을 초월하심

       ㉠ 시간을 만드심(창1:15)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그대로 되니라)
      ㉡ 과거의 역사를 주관해 오심(행14:15-17)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 인생의 미래는 불확실하나 하나님은 영원하심
      ① 하나님의 역사가 영원함(전3:4)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② 하나님의 미쁘심이 영원함(딤후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③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함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공간을 초월하심

       ㉠ 하나님은 성도의 가까이에 계심(렘23:2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 데 하나님이요 먼 데 하나님은 아니냐
       ㉡ 천지에 충만하심(렘23:24)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 성도 가운데 계심(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성도는 하나님을 피할 수 없음(시139:7-12)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
            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3. 모든 피조물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

      a. 모든 인생을 돌보심(시33: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b. 사람의 마음속의 생각을 감찰하심(대상28:9)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c. 만물을 새롭게 하심(계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나님의 속성 5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먼 데 하나님은 아니냐(웨로 엘로헤이 메라 호크)

      본문의 질문은 수사적인 질문으로 긍정을 강조하고 있다. 먼 데 하나님임을 주지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 계셔서 그의 피조물들의 행위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그로부터 숨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이 지역적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 계셔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기독교 신앙은 일찍부터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이야기해 왔다. 이 '무소 부재'는 만물 가운데 하나님이 편재한다는 범신론적인 개념을 뜻하지 않는다. '무소 부재'라는 뜻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공간의 제한에도 구애받지 않으며, 어디서든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의 능력에 대하여 그 어디에도 닫혀진 장소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소 부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다.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십니다. 즉 환경, 시간, 공간에 제한받지 아니하시고 초월적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말할 때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 혹은 '편재'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그와 같이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되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139:7)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은 그 사실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큰 힘이 되어 주시고, 불신자들에게는 엄중한 '심판주'가 되십니다. 그 사실을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께 대한 그릇된 생각들

       하나님께서 어느 곳, 어디에서도 활동하고 계심을 증거하는 성경의 증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그릇된 신관을 지적해 줍니다.

      1) 이상주의적 신관.
      이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은 오직 '하늘 보좌'에만 계시는 지고하신 분으로만 여기는 생각입니다. 이와 같은 이상주의적 신관은 자칫하면 하나님을 '비인격적'이며 '비윤리적'인 '우상'으로 격하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즉 오직 '자기 세계'에만 머무는 하나님, 그래서 인간의 세계와 그 문제에는 냉담하며, 인간들이 울부짖어도 일언 반구의 대답도 없는 하나님, 바로 '모리아' 산에서의 '바알' 신과 같은 하나님입니다(참조; 왕상18:26-28). 또 '하늘 세계'에만 계시는 하나님을 주장하는 자들 중에는 초대 교회에서 '영지주의'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인간 세계'는 '악'이요, '하나님 세계'는 '선'이기에 선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 세계와 직접 연관을 가질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이라고 했던 것입니다(참조; 요일4:1-3). 그러나 성경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증언할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은 '사랑'의 인격자로서 창조하신 만물과 인간 세계의 문제에도 동참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으로 증언합니다(참조; 창28:15; 신20:1;마28:20)

      2) 범신론 주의적 신관.
      즉 이상주의적 신관과는 아주 반대의 생각으로서, 하나님께서 '무소 부재'하신다면 모든 사물이나 사람 속에도 천래적으로 임재해 계시다는 신관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나무나 바위 속에도 '신'들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인간의 깊은 영혼 속에도 '신'이 있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심', 혹은 철학 세계 속에서 나타나는 '순수이성'도 이 범신론의 신관의 일종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상주의적 신관 및 범신론주의적 신관은 성경의 '무소 부재' 하신 하나님과는 배치되는 극단적 신관임을 기억합시다.

      2.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이해

       그렇다면 성경의 '무소 부재'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어떤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유의해야 합니다. 즉 인간의 '유한성'과는 달리 '전능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환경, 시간, 공간을 초월하심을 강조한 말입니다.

      1) 환경에 무소 부재하십니다(참조; 욥11:7-10; 시145:3).
      인간은 환경에 따라 제약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악한 세력이나 환경에도 제한받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실수 있는 분이십니다.

      2) 시간에 무소 부재하십니다(참조; 시90:2;시102:12).
      인간은 '시간'에 제한받는 존재이기에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인간적 시간'은 의미가 없습니다. '영원자'이시기에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시간에 제약받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3) 공간에 무소 부재하십니다(참조; 왕상8:27;사66:1;렘17:27,28).
      이와 같은 무한성을 '편재성'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보좌'에서 자신의 '신적인 본질'을 '고수'하시면서도,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고전 15:28)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 또한 '신비'에 속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비'는 인간 편에서 볼 때나 신비이지 하나님 편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일 뿐입니다.

      3.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과 인생들

      1) 불신자들에게는 엄중하신 섭리주요 심판주가 되심
      '하늘, 음부, 바다 끝, 흑암'(시139:8,9)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피하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오직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길밖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롬1:20)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소 부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예입니다. 그리스도는 환경과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셔서 만유와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나님'의 '실체'요 '증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정하신 사람으로…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17:30,31)고 했습니다. 이 때 인생들은 '불가지론'이나 '범신론'을 주장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2) 성도들에게는 보혜사가 되어 주심
       하나님께서는 '네가 물 가운데…불 가운데'(슥2:10) 지날 때도 함께 하사 보호해 주신다고 하셨으며,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마18:20) 곳에도 함께 계실 것이며, '세상 끝날까지'(마28:20) 곁에서 지켜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고집쟁이 '야곱'처럼 '루스 광야'에서 고난의 '돌베게'를 베고 공포와 슬픔에 젖어 있을 때 바로 그 환경과 장소마저도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의 전'(창28:17)임을 고백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은 편재하심(시139:7-12)
       * 하나님은 성도 가까이 계심(렘23:23)
       
      1. 하나님이 계시는 곳

      a. 높고 거룩한 곳에(시57:15)
      …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b. 음란과 더러운 것이 없는 곳에(겔43:9)
      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거하리라
      c. 시온에(슥2:10,11)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d. 성전에(삼하7: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e. 성도가 어디 있든지(시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f. 하늘과 땅에(시66: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성도의 곁에 계시는 하나님

      a. 성도의 우편에 계심(시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b.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심(시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c. 먼데 계시지 않음(렘23:2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 데 하나님이요 먼 데 하나님은 아니냐
      d. 성도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음(히7:19)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e. 하나님은 가까이 계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음(행17: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f.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를 가까이 하심(약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g. 성도는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갈 수 있음(히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3.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

      a.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언제나 임재하심(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b. 하나님의 눈이 어디나 있음(잠15: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c. 하나님의 성령이 어디나 있음(고전2:10-13)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d. 사람은 하나님이 경자를 벗어날수 없음(시139:9-12)

      하나님의 속성 6 - 의로우신 하나님

      주는 의로우시며(차띠크아타)

      본문에서 '의로운'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형용사는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사람에게 사용되는 경우이다. 의로운 사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다. 하나님에게 궁극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그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사람들에 대해 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다. 둘째는, 하나님께 대해 사용되는 경우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에게 적용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준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규범과 판단들은 의로우며, 그 의는 영원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확신을 준다. 하나님의 사람을 악인들의 손아귀에서, 그의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을 적들의 손에서 건지시는 분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로우심'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환난 속에서 승리를 확신케 해주신다. 또한 그 '의로우심'으로 죄에 빠진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참조; 시97:1,2). 하나님은 모든 행사와 그가 만드신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직?간접적으로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자체이시며, 모든 피조물을 그의 '의'의 개념과 종류를 살펴봄으로써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의(義)'의 개념

      1) 구약의 개념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니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느9:8). 구약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참조; 스9:15; 렘12:1; 단9:14). 이 '의'는 히브리어로 '체데카혹은 '체데크'로 이 단어의 뜻은 표준, 방정(方正), 정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두 가지 차원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는 그 '의'를 소유한 자의 '본질적 의'이며, 하나는 그 '의'를 소유한 자의 '행동적 의'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가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관한 용어로 사용될 때 전자는 하나님은 스스로 의롭다는, 즉 '하나님의 거룩함'을 의미하며, 후자는 하나님이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의롭다는, 즉 '하나님의 공의'를 의미합니다.

      2) 신약에서의 개념
       신약에서 '의'를 나타내는 헬라어는(디카이오스)와 (디카니오수네)이며 이 단어는 '어떤 기준에 일치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 단어는 신약 시대 당시에는 주로 사회에 있어서나 하나님 앞에 있어서 올바른 행동을 의미하는 윤리적 개념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단어였으며 동시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구약 성경 속에서의 '의'의 개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의'가 그의 피조물, 특히 인간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따라 '하나님의 의'를 두 종류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2. 두 종류의 '의'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피조된 세계의 통치주임을 의미하는 '주재적(主宰的)의'와 심판주임을 의미하는 '분배적(分培的)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주재적 의
      '주재적 의'는 그 명칭이 뜻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피조된 세계의 통치자로서 선악 간의 모든 판단을 공정하게 하시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판단에 있어서 차별이나 불의하게 판단하시지 않고 그의 신적인 속성에 따라 모든 것을 공평하게 결정하십니다. 시7:11의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볼 때 때로는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 의혹을 지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욥8:3)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판단하시고 집행하심에 있어서 언제든지 공정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한 순간을 살다 가는 인간의 좁은 지식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의가 왜곡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으나,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계신 하나님은 언제나 '의'로써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다스리는 분입니다.

      2) 분재적 의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2:6). 이 '분재적 의'는 하나님이 현세에 있어서나 최후 심판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영생 또는 영벌로 결정하실 때 매우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이 '분배적 의'에 대한 설명은 성경 마25:31-46에 보면 잘 나와 있는데, 여기에 보면 마지막 날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앉은 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세상에서 나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도와 주었으니 내 상을 받아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자신들에 대한 임금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설명을 들은 후 그들은 임금의 판단이 옳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판단은 그의 '의'에 기초한 것으로, 모든 사람들의 행위를 심판하시며, 그들의 행위에 따라 상?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받을 때, 그리고 가난한 자들이 더욱 비참해지고, 악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은 자들이 더욱 부요해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이런 의문은 갖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늘도 의로우신 하나님이 세상을 살피시며, 자신의 의로써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지시지 않으시는 분으로 세상의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을 살펴보고 계십니다. 단지 심판이 잠시 지체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함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로운 일들을 굳게 세우기 위해 계속 힘써야 할 것입니다.

       * 의는 사람의 온전한 상태임(욥22:3)
       * 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짐(롬3:24,26)
       * 하나님의 의는 재판 과정에서의 공정함임(사11:4)

      1. 의의 개념

      a. 구약 시대의 의

      ㉠ 개인의 상태에
      ① 성결함(욥4:17)  ② 행위의 온전함(욥22:3) ③ 판단이 공정함(사11:4) ④ 정직함(렘4:2) ⑤ 진실됨(시15:2-4) ⑥ 평강(시72:7) ⑦ 화평(시85:10) ⑧ 고아를 도움(욥29:12-15) ⑨ 소경과 과부의 어려움을 대신함(욥31:16-19) ⑩ 가난한 자에 대한 자비(잠29:7)
      ㉡ 사회적 상태에서
      ① 공동사회의 화목을 유지하는 힘(시15:2-5), 바른말을 함(사59:4), 사회 관계의 요구를 다함(창38:26)
      ㉢ 법적 관계에서
      ① 재판을 공정하게 함(신16:18) ②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베푸는 공의(시82:3) ③ 억울한 일이 없게 함(사29:21) ④ 고아나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않음(렘22:3)

      b. 신약 시대의 의

      ㉠ 윤리적인 의
             ① 인간적인 욕망을 이겨냄(롬1:26-32) ② 율법대로 행함(롬2:13)
      ㉡ 영적인 의
      ①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지는 인간의 상태(롬3:24,26) ② 율법대로 행함(롬2:13) ③ 율법에서 풀려난 상태(롬2:27) ④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상태(롬:22) ⑤ 하나님을 경외함(행10:22) ⑥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후에 얻어짐(롬6:13) ⑦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쳐야 할 단계임(마6:33)

      2. 하나님의 두 가지 의

      a. 세상을 통치하시는 의

      ㉠ 그 백성을 인도하심(시5:8)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심(시65:5)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께서 의를 좇아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 의로 소성케 하심(시119:40)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 피난처가 되어 주심(시31:1)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 유일한 구원주이심(사45:21)
      너희는 고하여 진술하고 또 피차 상의하여 보라 이 일을 이전부터 보인 자가 누구냐 예로부터 고한 자가 누구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b. 세상을 심판하시는 의

       ㉠ 만민을 심판하심(사51:5)
      ㉡ 공의로 심판하심(사11:4)
      ㉢ 행위대로 심판하심(왕상8:32)
      ㉣ 악인에 대해 분노하심(시7:11-13)

      c. 성도의 의

      ㉠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시는 자
      ① 하나님을 믿는 자(롬4:2,3) ②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시103:11) ③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시37:39,40) ④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롬6:18,19)

      ㉡ 성도가 의롭게 되지 못하는 이유
      ①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사48:18) ② 범죄함으로(겔33:12) ③ 자기의 의만을 세움으로(롬10:3) ④ 화평을 도모하지 않음으로(약3:18)

      ㉢ 의롭다 함을 얻은 자의 축복
      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음(시17:15) ② 몸은 죽으나 영혼이 삶(롬8:10) ③ 구원을 얻음(잠11:6)

      하나님의 속성 7 -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호 데오스 아가페 에스틴)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할 때, 이사랑은 다른 여러가지 속성중의 하나로 분리되어 있는것이 아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향하신 모든것을 충분하고도 궁극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포괄적 개념인 것이다. 여호와의 사랑은 자기 백성을 위해서 그 백성의 역사에 간섭하심으로 나타나고, 표현되고, 계시된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사랑은 적극적인 것이다. 또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은 사랑이라' 고 말할때, 이것은 사랑의 본질 자체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주장은 하나의 정의(定義)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문장을 뒤집어서 '사랑이 하나님이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활동을, 즉 인간을 향한 그의 행위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신 것을 인식한 사람, 또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요한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하나님은 빛이시고'(요일1:5), 영이시며(요4:24), '사랑이시다'(요일4:7,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우리는 '소유와 사랑'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사랑은 우리 삶의 주요 부분이 아니라 장식품에 불과하며 돈과 권력과 명예와 더불어 인간의 이기적인 소유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어느 누구가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인 줄 모르겠습니까? 그 누구도 하나님이 '사랑'이 아니라고 반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사랑의 의미와 하나님의 사랑과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어느 지혜로운 자를, 힘 있는 자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를 섬기는 종교가 아닙니다. 수백 년 된 나무와 돌을 경외하여 하나의 영으로 믿는 미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 관계로부터 우리는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자녀가 된다 함은 자녀 될 자가 자신의 수태 시기, 성의 구분, 부모에 대한 선택 등을 할 수 없는 속성을 가집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의해 그의 자녀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성령의 증거를 통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됩니다. 즉 다시 오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된 그 자리를 차지할 자녀로서의 권리를 부여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아무 공로 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시작인 것입니다(참조; 롬8:16).

      2) 우리는 하나님을 따릅니다.
      가장 훌륭한 교육은 부모나 스승이 몸소 바른 행위를 함으로써 그의 자녀나 제자들이 그들을 본받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악이나 선에 대해서 도무지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는 소경과 같은 존재입니다. 때로 우리 신앙의 양심은 너무도 무디어져서 죄로 인하여 우리 영혼의 상처가 악화되어가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마음은 강팍하게 되어 마비된 양심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음으로 그의 자녀가 되며(참조; 롬8:14), 이로써 우리의 무디어진 양심은 치료를 받고 생명을 건질수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가능한 것이며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은 희생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희생적인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 전체에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은 조건적이고 순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1)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창세기 18장에는 소돔 성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게 하기 위해 의인의 수를 헤아리는 아브라함의 노력이 나타나 있으며, 요나서에는 니느웨 성을 멸망시키기 전에 요나를 통해 구원하고자 하는 니느웨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수많은 불법을 보면서도 진노보다는 용서를 하려 하시는 그의 참으심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은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참으심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으로 완전한 뜻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극치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한 참으심을 진노와 멸망으로 나타내지 않으시고 그의 독생자를 내어 보내 주시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취하셨습니다. 만물을 다 그의 손에 두시고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셨으며 아들에게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를 내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요3:35,36).

      3)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의 증거는 바로 우리의 사랑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라고(참조; 요4:11) 성경에는 분명히 못박고 있습니다. 사랑의 완전한 표현은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통과 함께 내 놓은 그 생명은 전쟁터에서 조국을 위해, 혹은 명예를 위해, 의리를 위해 생명을 내 놓는 것과는 또 다른 높은 차원의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들의 순간적 안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게 위한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그 누구도 남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진 못합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이 많은 듯하나 그것은 참음이 없는 사랑이요, 희생이 없는 사랑이요, 행함이 없는 사랑일 뿐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꾸준히 참고 더 나은 안위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지만 오로지 사랑을 위해 진실되게 살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오늘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엄숙히 경종을 울려 주십니다.

      사랑의 어원적 의미
       ㉠ 즐거워하고 만족하게 여김(잠5:18,19) ㉡ 특별한 대상을 소중히 여김(신33:3) ㉢ 은혜를 베풂(출3:21) ㉣ 악을 행치 않음(롬13:10) ㉤ 벗이 되어 친함(약4:4) ㉥ 아끼고 사랑함(요12:25)

      사랑의 성경적 정의
       ㉠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되는 것(마22:40) ㉡ 형제를 근심하거나 실망하게 하지 않는 것(롬14:15) ㉢ 수고와 인내로 봉사하는 것(살전1:3) ㉣ 죽음과 같이 강한 것(아8:6) ㉤ 두려움을 이기는 것(요일4:18) ㉥ 허물을 가려 주는 것(잠10:12) ㉦ 거짓됨이 없는 것(롬12:9) ㉧ 마음을 같이하는 것(빌2:2)
      사랑의 표준이 되시는 하나님
       ㉠ 하나님의 사람을 사랑하심(엡5:1) ㉡ 그리스도의 성도를 사랑하심(엡5:2) ㉢ 성령의 돌보시는 사랑(롬8:26)

      사랑이 초월하는 것
       ㉠ 거짓(롬12:9) ㉡ 율법(롬13:8) ㉢ 방언이나 예언(고전13:1,2) ㉣ 믿음이나 소망(고전13:13) ㉤ 죄(벧전4:8) ㉥ 시간의 한계(고전13:8)

      1.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

      a.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이유
       ㉠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하여(요일4:10) ㉡ 하나님이 작정하신 구원 사역을 실행하시기 위하여(요3:16) ㉢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요5:20)

      b.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 그리스도를 사랑하심
      ① 창세 전부터 사랑하심(요17:23,24) ②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임(요5:20) ③ 하나님은 자신의 역사를 아들에게 보이셨음(요5:20) ④ 만물을 아들의 손에 붙이셨음(요3:35)

      ㉡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심
      ① 특별히 기뻐하시고 택하셨음(신7:7) ② 친히 애굽의 손에서 인도해 내심(신4:37) ③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심(신7:13) ④ 기업과 자손을 복으로 주심(신7:13) ⑤ 이스라엘을 잠잠히 사랑하시고 기뻐하심(습3:17) ⑥ 환난에서 구원하실 것임(사63:9)

      ㉢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를 사랑하심
      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심(잠8:17) ② 고아와 나그네를 더욱 사랑하심(신10:18) ③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사랑하심(시103:13,14) ④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녀된 자를 사랑하심(요일3:1) ⑤ 의인을 사랑하심(시146:8) ⑥ 부르신 성도들을 사랑하심(유1,2)
      c.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내리시는 축복
       ㉠ 천 대까지 은혜를 주심(신7:9) ㉡ 위험에서 건지시고 높이심(시91:14) ㉢ 멸망에서 건지심(사38:17) ㉣ 하나의 특별한 백성으로 삼으심(말3:17) ㉤ 인생을 평안케 하심(시119:165) ㉥ 영원한 위로를 주심(살후2:16)

      2.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

      a. 희생적인 사랑의 내용
       ㉠ 당신의 아들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심(마20:28)
      인자가 온 것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사람과의 화목함을 회복하심(롬5:10,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1절). ㉢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심(갈3:13)

      b.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성도의 자세

       ㉠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마22:37) ㉡ 부모나 자식보다 더 사랑함(마10:37) ㉢ 목숨을 다해 그리스도를 사랑함(요13:37,38)
      우리는 사랑을 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본분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가장 훌륭한 보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행하는 자녀의 모습을 가장 기쁘게 여기십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약2:20)고 외쳤던 야고보의 교훈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행함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인가?' 라고 묻는다면 '누가 더 많은 사랑을 행하고 있는가?'라고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8  영원하신 하나님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아니 예호와 로 솨 니티)

      원문에서 '변화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솨나)이다. 이 동사는 성격이나 방법의 변경, 또는 삶에 나타나는 변화를 묘사하는데 쓰인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말해 주는 동사로 쓰여 지난날 야곱의 자손을 향해 지녔던 그 모든 것들이 변하지 않았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즉 그가 말씀하신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완고함이나 틀에 꽉 짜인 상태로 이해하여서는 안 된다. 이 말은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인해 소위 하나님의 '초연성'을 강조하는 영향으로 인해 소위 하나님의 '초연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는데 그렇게 될 경우 하나님은 역사의 영역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불변성을, 하나님의 뜻의 요동치 않는 방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러시아 속담에 '변치 않는 친구를 구하려거든 무덤으로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혹은 이웃에게 실망을 느끼는 점 중에 한 이유가 있다면 '변덕'일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변덕은 사회에 '불신, 위선' 풍조를 만드는 제 일 원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본질과 사상과 의지에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약1:17) 없으신 '불변의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하나님을 '미쁘시며 신실하신 분'(고전1:9; 살전5:24)으로 증언하며, 인생들의 영원한 '의지자'로 권하고 있습니다. 함께 그와 같은 내용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이 변치 않으시는 이유

      1) 절대자이시기 때문임
       불변한다는 것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조금도 변동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변동'은 그 스스로의 내적 요인과 외적인 힘에 '영향'을 받을 때 발생합니다. 가령 인간의 변덕의 원인을 살펴보면 그 자신의 내적인 강박성, 혹은 외부의 압력 등을 다 수용하는 '허약성'에서 기인되기도 하며, 더 중요한 원인은 자기 스스로 어떤 일에 흥미를 잃는 데서 '변덕'이 생기는 것이 통례입니다. 그 '변동'이 발전을 위한 긍정적인 의미를 포함할 때 '변혁'이라 하고, 무지와 이기심에서 기인한 것은 '변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은 어디까지나 유한하며 '상대적인 존재'이기에 환경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출3:14) 이십니다. 창조주요, 절대자요, 자존자이시기에 어떤 외적인 요인과 영향력에도 전혀 자유로우시며,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2) 완전자이시기 때문임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잠19:21). 인생들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본질적으로 변화와 변혁은 필수적입니다. 인간이 성장, 발전해 나가는 데는 '긍정적인 변화'가 필요하며 그 변화 과정에서 그 사람의 인생관, 가치관이 수시로 바뀔 때도 있습니다. 역사의 가치관, 시대의 풍조도 사람의 변화에 따라 바뀝니다. 그리고 그 변화에 따라 시행 착오도 속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태초 이전부터 영원까지 '동일'(히13:8)하신 '완전자'이시기에 본질적으로 '변화'가 필요 없으신 분이십니다. 또 그 사상과 의지도 그러하며 그 행사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창조 섭리, 그리고 뜻 중에 '변화'가 있는 듯이 보여지는 부분도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과 관계된 '인간'들의 '변화'에 상대적으로 맞추신 것이지 그 궁극적인 뜻과 행사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으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2. 변치 않으시는 내용들

      1) 본질과 성품
       하나님은 '신'으로서의 본질, 그 능력과 거룩하신 성품들이 변치 않으십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이 땅에서 육신과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인간들의 죄악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품위와 능력과 성품에는 조금도 흐트러 짐도, 또 침해도 당하지 않으시고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롬1:4) 하심으로써 그 '신성'이 재확인되셨으며, 그 인생 구원의 의지도 불변하심을 입증하지 않으셨습니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도 그럴진대, 성부, 성령 하나님이야 그 무엇에 의해 변함을 받으시겠습니까?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니'(말3:6).

      2) 사상과 뜻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시33:11). 하나님의 사상은 그 '창조 사역'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즉 '영생, 번영, 행복'을 제공하시기 위해 만물과 인생을 창조하신 것으로(참조; 창2:9,16,28), 이 사상은 인간의 타락, 죄의 오염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으십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 보면, 창세기에 언약하셨던 그 창조 원리가 모두 인생과 만물에 적용되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상을 고수하기 위하여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구세주로 정하시고(참조; 창3:15) 보내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참조; 엡1:10,11). 오늘도 그 뜻 역시 변치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결코 '다른 구세주'(참조; 행4:12), 다른 '구원의 방법'(참조; 갈1:7-9)을 제시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만물과 인류를 창조하신 '원의'에 대해 '후회'(참조; 삼상15:11,35) 하시며 '한탄'(창6:6)하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 볼 수도 있지만 그 '후회와 한탄'은 '창조 원의'에 대한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변심과 타락'에 대한 창조주의 동정심과 긍휼심을 묘사한 것뿐입니다. 예를 들면 자녀의 실수와 실패에 대한 어버이의 걱정과도 같은 것이니, 결코 자녀에 대한 어버이의 뜻과 사랑에는 변함이 없는 것과 동일합니다. 다만 이러한 하나님께서도 그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는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죄인의 회개'일 것입니다(참조; 욘1:2; 욘3:4,10). 그 '자비의 변화' 또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구속원의'의 변치 않는 언약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참조; 사14:24).

      3. 하나님과 인생

      1) 하나님의 공의가 불변함을 유념합시다.
       '너희의 사망으로 더불어 세운 언약…그것에게 밟힘을 당하리라'(사28:18). 이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피조물' 들을 '신'으로 삼은 죄에는 필경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범죄자에게 '정녕 죽으리라'(창2:17)고 하신 맹세는 세상 끝날 '백보좌 대심판'에서 이루어지고 말 것입니다(참조; 계20:11-15).

      2) 하나님의 사랑이 불변함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하나님이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성도들에게 큰 안위가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와 '왕'으로 섬기는 자들에게 언약하신 '영생'은 기필코 주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추호도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참조; 롬8:37-39).

       ☆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시102:26,27)
       ☆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1.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a. 스스로 계신 분이심
       ㉠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스스로 선언하심(출3:14)
      ㉡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신 자이심(요8:58)
      ㉢ 세세토록 살아 계신 자이심(계1:18)

      b. 결코 후회함이 없으심
       ㉠ 하나님의 부르심은 후회함이 없으심(롬11:29)
      ㉡ 하나님의 통찰하심이 후회 없으심(롬11:29)
      ㉢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심이 후회 없으심(롬11:29)
      ㉣ 약속하신 뜻이 후회없으심(히6:17)

      c. 변함이 없으심
       ㉠ 하나님의 꾀하시는 일이 영원함(시33:10)
      ㉡ 하나님의 자비가 영원함(대상16:41)
      ㉢ 항상 동일하심(시102:25-27)
      ㉣ 변역함이 없으심(말3:6)
      ㉤ 거짓 됨이 없으심(딛1:2)
      ㉥ 변동이나 변화가 없으심(약1:17)
      ㉦ 알파와 오메가이심(계1:8-18)

      d. 유일하심
       ㉠ 참하나님이심(요17:3,22)
      ㉡ 구원의 유일한 주관자이심(요14:6)

      2. 하나님의 변치 않는 것들

      a. 뜻이 변치 않음

      하나님의 뜻은 광대하므로(사28:29)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난 것이라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됨(엡1:9,10)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b. 하나님의 말씀이 변치 않음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임(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서로 합치됨(행15: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성도에게는 신앙의 원동력이 됨(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c. 하나님의 약속이 변치 않음

      모두 성취됨(눅1:32,33)
      저가 큰 자가 되도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정한 때에 성취됨(행7:6)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해 약속이 폐하지 않음(사54:10)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고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d.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변치 않음

      하나님의 인자는 영원함(시103: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하늘과 땅에 충만함(시108:4)
      대저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위에 광대하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나이다
      성도의 삶의 근거가 됨(애3:22,23)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하나님의 인자는 죄를 사유함(엡2:4,5)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나님의 속성 9  진실하신 하나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에메트-레올람)

      본문에는 구약성서에서 아주 핵심적인 두 개의 명사가 나온다. 그 하나가(헤쎄드)이고, 다른 하나가(에메트)이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이 인간을 돌보시는 내용이다. 인간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향하여 하신 약속에 근거한 사랑, 그 사랑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사랑 처럼 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다. 그의 사랑의 진실함은 영원하다. 원문에서 '진실'이란 뜻으로 사용된(에메트)의 어근이 되는 (아만)의 기본 개념에는 '지지하다, 버티다, 지탱하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따라서 (에메트)라는 말 속에는 변치않고 지속되는 확실성, 신뢰성이라는 기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품성의 한 특징으로서 하나님께 자주 적용된다. 출34:6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구성하는 특징들 가운데 하나로 제시되고 있다. 이 하나님의(에메트)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 가운데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 가운데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성서적 의미의 진실. 즉 참된 진실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며, 하나님에게만 찾을 수 있다.

      성경에서 '진실'이라는 말은 구약은 '에메트', 신약은 '알레데이아'로 묘사되어 있으며 이 뜻은 대략 '진실, 참, 진리, 정말'이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진실'이라는 이 말은 오직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과 관계된 사물'에 국한시켜 사용되었는데, 성경상의 '미쁘신 하나님'(참조; 시3:5; 살전5:24; 벧전4:19)에 대한 뜻이 바로 '진실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도(참조; 딤전1:12) 성경도(참조; 계19:9) 진실이요, 진리요, 미쁜 것이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진실하시기에 우리 인생들이 의지하고 헌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실성'은 '신(^)'과 '인생'의 '교제의 기반'입니다.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근거

      1) 참된 '신(神)'이심을 그리스도 안에서 입증하심
       하나님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우상'과 비교하여 유일하고 참된 살아계신 '신'이라는 의미에서 진실하십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 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주가 있으나…우리에게는 한 하나님…께서 계시니'(고전8:5,6) 하나님만이 유일하고 진실하신 '신(神)'이 십니다. 인간들이 만든 '우상'과는 달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체'로 구체적으로 인생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참조; 요일1:1).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통해 그 사랑을,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그 신적 능력을,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그 권세와 의로우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우상들과 신화의 인물 중에 어느 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진실성을 흉내라도 낼 수 있겠습니까?

      2) 참된 능력으로 입증하심
       하나님은 성경으로 말씀하신 내용과 '일치'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행사하시기에 '진실'하십니다. '내 입에서나가는 말도 헛되이…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형통하리라'(사55:11).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조화를 이룬 사람을 우리는 '진실'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태초부터 말씀하신 '성경'을 그 신적인 능력으로 이루어 오시고 있기에 '진실'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 대로 구세주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 그리스도는 온갖 방해와 유혹과 핍박을 물리치시고 속죄 사역을 단행하시며, 끝내는 부활하심으로써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인간들이 조작해 낸 목석의 우상, 사상의 우상, 정치의 우상, 희망의 우상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우상들의 법과 교리, 이데올로기, 그리고 언약들이 거짓과 기만과 시행 착오를 범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2. 진리이신 하나님의 특징

      1) 거짓을 미워하심
       이처럼 '진실 무망하신 하나님'(신32:4)은 절대적으로 '거짓'을 미워하시고 대적하십니다. 이와 같은 성품의 특징이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데 그 일례로 십계명을 살펴보십시오. 한 마디로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이웃에게 거짓을 버리고 진실로 행하라'는 것이 십계명의 의의입니다(참조; 출20:16). 특히 성경은 '죄'를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경배하고 섬기는 것'(롬1:25)으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이는 진리 되신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인본주의적 삶이 '죄'요 '거짓'된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불인정하고 불신하는 인생들은 모두가 '거짓된 존재요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하에 있는 불행한 존재들입니다.

      2) 거짓을 이기심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는 거짓을 이기시는 분이십니다.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롬3:4). 일례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음미해 보십시오. 그 사건은 진실이 거짓을 제압한 사건입니다. 즉 하나님이 악마와 세상의 거짓을 이기신 사건입니다. 처음에는 진실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엔 사탄의 거짓 권세가 못박힌 결과가 되었습니다(참조; 골2:14,15). 진실하신 하나님은 이처럼 언제나 세상의 거짓을 제압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느 환경, 어느 처지에 있든지 '진리의 복음'을 의뢰하고 그 복음의 진리 안에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하나님의 진실의 '결정체'이기에 그 진리안에서 행하는 자는 항상 악과 불의에 대해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참조; 고전15:55-58).

      3. 진실하신 하나님과 인생

      1) 진실을 사랑해야 함
       하나님의 '진실성'을 온전히 나타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참된 '사랑의 증거'(롬5:8)요, 참된 '인생 구원의 방법'(요14:6; 롬3:21-26)이요, 인생의 참된 '시금석'(눅2:34,35)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인본주의의 '거짓'된 상태로부터 구출받는 것이됨을 기억합시다(참조; 벧전1:22)

      2) 진실 안에서 행해야 함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13). 즉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의 교훈을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고 지키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진실하신 하나님과 '교제'를 유지하는 삶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3) 그 진실성을 의뢰해야 함
      '에메트'라는 말의 원뜻은 '든든한 기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실성은 '신앙의 기반'입니다(참조; 히11:1,2,6).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실하셔서 '거짓말을 하실 수 없'(히16:18)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하신 그 '구원의 약속'을 의뢰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실성이 '영혼의 닻'(히6:19)이 되어 줍니다. 세상의 거짓, 불의의 풍랑이 드세게 휘몰아치는 때에도 진실하신 하나님을 의뢰하십시오. 그 안에 삶의 닻을 드리운 인생은 복됩니다.

      ☆ 진실의 의미
       견고함(시12;2) 신실함(민12:7) 믿을 만함(사49:7) 틀림없음(호5:9) 신임할 만함(욥4:18) 참됨(욥9:2; 사37:18) 영구적임(수2:12) 말과 행동이 순수함(습3:9) 깨끗케 함(사52:11) 진리임(단4:34)
      단순함(골3:22) 너그러움(롬12:8; 고후8:2)
      ☆ 진실한 것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신32:4)
      ☆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하심(시146:6)

      1. 하나님이 진실하시다는 증거

      진리의 근원들이 증거함
       하나님의 법임(시119:142-160) 그리스도의 진리임(요14:6) 성령이 진리의 영임(요14:17) 복음이 진리임(갈2:5,14) 하나님의 교회가 진실됨(딤전3:15) 하나님이 진실의 근원이심(시57:3)

      참되신 하나님이 증거함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신이심(요17:4)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참되게 하심(요8:13-18) 사람에 의해 증거함(요10:41) 사람이 핑게치 못함(롬1:20)

      2. 진실하신 하나님

      진실함은 하나님의 속성임
       진실이 많으심(출34:6) 거짓이 없으심(딤1:2) 성실하심(시100:5) 하나님의 길이 참됨(계15:3)
      하나님의 행사가 진실함(시33:4)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함(요17:17)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에서 나타남(미7:20) 하나님의 구원이 진실함(시57:3) 하나님의 심판이 참됨(계16:7) 진실로 성도를 보호하심(시61:7) 왕위를 보호하고 견고케 하심(잠20:28) 진리로 공의를 베푸심(사42:3) 진실로써 판단하심(롬2:2)

      거짓을 미워하심

      거짓말
       사탄이 유혹하는 말(창3:4,5) 책임을 미루는 말(창3:12,13) 자기 죄를 부인하는 말(창4:9)
      불순종하는 말(마21:29)
      거짓의 이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사57:11) 사람이 자기의 정욕대로 행함(롬1:24,25) 양심에 화인맞았음(딤전4:2) 미혹의 영과 사탄의 지시임(딤전4:1)
      거짓된 자를 치시는 하나님
       거짓 증인을 패망케 하심(잠19:9) 거짓말하는 자는 형벌을 당케 하심(행5:4,5) 하늘나라에 들이지 않으심(계21:27)

      3. 진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성도의 자세

      진실해야 함
       말씀을 진실로 사모함(벧전2:2) 선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을 가짐(딤전1:5) 성도를 진실로 사랑함(고후8:8,24) 진실로 예배를 드림(요4:23,24) 말씀을 전파함(고후2:17) 생활을 진실하게 삶(롬9:12) 거짓말을 하지 않음(롬9:1) 간사한 생각을 품지 않음(요1:47) 참된 말을 함(고후7:14) 주의 일을 진실하게 함(엡6:21) 성도의 사정을 진실하게 생각해 줌(빌2:19,20) 참된 증거를 함(요삼12) 신실함(벧전5:12)
      진실하신 하나님을 의뢰함
       사람이 의뢰해서는 안 되는 것
       무기(시44:6) 물질(시49:6,7) 사람(렘17:5) 자기의 의로움(겔33:13) 사람의 능력(렘48:7)
      사람이 의뢰할 하나님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시33:2) 하나님의 말씀(시119:42) 하나님의 약속(시31:19)
      하나님의 의뢰하는 자의 복
       기쁨을 얻음(시5:11) 승리함(시22:4,5) 하나님의 보호를 받음(잠3:5,6) 기업을 받음(사57:13)
      요동치 않음(시125:1) 평안함(사26:3) 구속받음(시34:22) 안전함(잠29:25)


      하나님의 속성 10  자비로우신 하나님

      1) 큰 긍휼로(우베라하밈 께돌림)

      본문에서 '긍휼'로 번역된 단어(라하밈)은 '자궁'이라는 뜻의 명사(레헴)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말할 때에 그들은 생명을 잉태하고 보호하여 출산하는 어머니의 자궁을 연상한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출생하였다(참조; 욥31:15).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임신에서 출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참조; 사46:3). 따라서 하나님(라하밈)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양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거져 주시는 그의 사랑과 은혜에 근거한 것임을 믿게한다.

      2) 영원한 자비로(우베헤세드 올람)
      오랫동안(헤세드)란 단어는 '자비, 친절, 사랑'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고대 근동 문헌에 대한 활발한 연구의 결과로 그 단어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히타이트의 계약들이난 다른 계약 문서들에서처럼, 이스라엘은 계약에 의해서 하나님에게 구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헤세드)는 '자비'가 아니라, '계약 의무들에 대한 충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의 하나님에게 보여야 하는 충성이기도 하다.

      구약성경 호세아서를 읽어 보면 음란한 아내 '고멜'을 용서해 주는 호세아의 사랑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배반한 이스라엘을 찾아서 사유하시고 구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으며(참조; 호2:19;호11:8), 또한 제사보다 자비를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도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참조; 마9:13). 초대 교회의 예배에서 축복의 권면에는 반드시 자비하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참조; 딤전 1:2;요이1:3). 이제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대해 살펴봄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 '자비'의 성서적인 고찰

      1) 자비하심의 본질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영원 무궁하시며(참조; 시103:17), 한량없이 땅에 충만하며(참조; 시108:4;시119:64), 배역한 자식들을 돌아오게 만들어 생명을 연장시키며(참조; 애3:22-23), 죄를 회개하도록 백성들의 마음을 고무시키며(참조; 욜2:13)죄를 용서하여 주시며(참조; 눅1:50), 사람을 거듭나게 만드십니다(참조; 딛3:5)

      2) 자비하심의 약속
       구약성경은 특히 자비하신 하나님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출34:7;시89:28;렘3:12)

      3) 자비하심의 권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비를 베풀 것을 분부하십니다. 눅10:30-37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강도한테 맞아서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제사장도 보았고 레위인도 보았지만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불쌍히 여기어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주막으로 데려가다 치료시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참조; 마5:7;눅6:36).

      2. 하나님의 자비

      1) 인간의 창조 사역에서 나타남
       창1:26,27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려고 계획을 세우셨을 때 성부, 성자 성령님이 함께 참여하신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즉 '우리'라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말해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나타남
       마3:13-17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세례에서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고, 하나님 아버지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3) 선교의 현장에서 나타남
       마28:19,20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강조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 주심으로 그들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신 사역이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심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자비의 종류

       하나님께서는 그 택하신 백성을 언제나 사랑하사 그들이 범죄하였을지라도 그들을 사랑으로 다루십니다. 또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기억하시고(참조; 합3:2) 택한 백성에 대하여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혜는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하시면서 시편 기자를 통하여 주님의 자비를 선포케 하십니다. 이제 무궁하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세 가지만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충만한 자비하심
       주님께서는 죄에 대한 형벌로 사망과 고통을 주는 대신에 자비와 많은 축복들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를 들면 구원받게 해주시고 잃어 버린 영혼들에게 건강과 위로와 참된 기쁨들을 주십니다(참조; 시103:8)

      2) 영원한 자비하심
       하나님의 자비는 유한한 인간들에게 영원토록 무한하게 임하시는 자비입니다. 창8:21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노아 시대에 내렸던 홍수를 다시는 내리시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표명하고 계십니다.

      3) 측량할 수 없는 자비하심
       하나님의 자비는 얼마나 클까요? 하나님의 자비를 측량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히 높고 깊고 넓어서 측량할 수 없음을 말해 주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회개한 죄인이 용서받기 위하여 예수님에게 돌아올 때 그는 공로를 주장하지 않고 다만 자신을 주님의 자비 앞에 맡길 뿐입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회개의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였는데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쫓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시51:1)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이러한 그에게 하나님의 자비는 임하였습니다. 갈보리 산 위에서의 십자가는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죄함을 받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영원하신 하나님. 자비하신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과 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성도의 죄에 대해 자비를 베푸심(사54:7,8)
       ☆ 자비는 도움과 위로를 이웃에게 베푸는 행위임(잠14:21)
       ☆ 자비의 대상은 대적하는 자까지도 포함됨(눅6:34,35)

        1. 자비의 성서적인 의미
       
      하나님의 속성임
       패역한 백성을 버리지 않으심(느9:17)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긍휼히 여기심(사64:7,8) 사람을 사랑하심(딛3:4)
      성령의 열매로 주어짐(갈5:22,23)
      빈곤한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임
       과부를 도움(왕상17:9,10) 가난한 성도를 도움(잠14:21) 어려움을 당하는 자를 도움(눅10:30-37) 여인이 갖추어야 할 성품임(잠31:20)
      하나님의 일꾼이 갖추어야 할 성품임(고후6:6)
      정직한 자의 성품임(시112:5)
      이웃에 대한 사랑임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임(롬13:8-10) 원수도 사랑해야 함(마5:44) 지속적으로 사랑해야 함(히13:1)
      자비를 베푼 성서 속의 사람
       모세를 건져 내어 기른 바로 왕의 딸(출2:6-10) 정탐꾼을 영접한 기생 라합(수2:1-3) 요나단의 아들에게 자비를 베푼 다윗 왕(삼하9:1-3) 압살롬을 도운 요압(삼하14:1-24) 수넵 여인을 도운 엘리사(왕하8:1)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구한 여호사브앗(대하22:11) 에스더를 양육한 모르드개(에2:7) 예레미야를 선대한 느부갓네살(렘39:11,12) 마리아를 참아 준 요셉(마1:19) 예수의 어머니를 선대한 사도요한(요19:27) 바울을 도운 총독 벨릭스(행24:24) 바울을 도운 오네시보로(딤후1:16-18)

      2. 하나님의 자비하심

      그리스도 안에서 자비를 베푸심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허물을 없이하셨음(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자비가 나타남(엡2:7,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8절)
      차별 없는 자비를 베푸심(눅6:35,36)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35절)
      영원한 자비를 베푸심(사54:8)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크신 자비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심(욘4:2)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성도의 의무로서의 자비

      자비를 베풀어야 할 대상
       고아 된 사람(욥29:12), 궁핍한 형제(요일3:17) 약점을 가진 사람(롬15:1) 성도를 핍박하는 사람(롬12:14,15) 시험에 처한 사람(갈6:1,2) 타국인(레19:34) 신앙을 같이하는 성도(엡4:32) 모든 사람(눅6:34,35)
      자비를 권면한 사람
       모세가 종에 대해 자비를 베풀 것을 권면함(신15:12,13) 지혜자의 권면임(잠25:21) 선지자 이사야의 권면임(사58:7) 그리스도의 권면임(마5:42) 바울 사도의 권면임(롬12:13)
      자비를 베푸는 방법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음(빌4:1-3)
               내가 유오디아을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2절)
      비판을 금함(마7:1-3)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2절)
      고통을 서로 나눔(가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용서하고 위로함(고후2:10)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하나님의 속성 11 - 여호와의 선하심

      여호와의 선하심(키-토브 예호와)

      성서는 선의 본질이 무어라고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서에서 이 선은 독립적인 실재가 아니며, 또한 그 자체로서는 본질상 다른 어떤 개념이나 실재와 더불어 비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이 선이며, 이 선은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뜻한 바가 곧 선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 하나님을 체험한 자는 다만 찬양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이다. 역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계시는 그의 선하심을 나타내 준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하시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은 선하다. '우리는…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2:10).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는 한 선을 이룰 수 없다. 그리스도는 모든 선한 것의 집약인 동시에 성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라 부르면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 질문의 대답에 앞서 먼저 그 청년의 '선'에 대한 시각을 바로 잡아 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선'이란 수식어가 붙은 많은 사물들이 있지만 참으로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심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을 선하게 다스리시는 '선의 근원'이시며 또한 모든 피조물이 바라보아야 할 '최고 선'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에 대해 함께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1. 일반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선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시145:9,16). 일반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자선은 창조주되신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인 모든 생물들에 대하여 가지시는 애정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선은 자연의 전구조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더 많은 하나님의 자선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찬양을 받으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관심에 따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하나님의 선이 인간들을 향해서 베풀어 질 때 성경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그의 독생자의 죽음으로 인간에게 베풀어진 것으로 이 사랑을 힘입어 구원받은 자들은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참조; 요16:27). 또한 현재 회개치 않은 죄인일지라도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에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완전히 철회하시지 않으시고 그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언제까지 기다리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선하신 속성을 잘 나타내 준다고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은혜

       성경에서 '은혜'는 중요한 용어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은혜'는 하나님의 속성일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총애를 의미하기도 합니다(참조; 창33:8; 룻2:2). 그러므로 보통 은혜는 '청구권 없는 사람에게 값없이 인자를 베풀어 줌'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하지만 이 은혜가 '하나님의 은혜'로 쓰일 때는 그 의미가 좀더 강화됩니다. 즉 이 때 은혜는 '사랑을 상실했거나 또는 본래부터 정죄의 선고 아래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상으로 베푸시는 선 또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같이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모든 영적 행복의 원천인 것입니다(참조; 엡1:6,7; 딛2:11). 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죄인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었으며(참조; 롬3:24), 구원의 소식이 전파되었고(참조; 행14:3), 죄인들이 의롭게 되었으며(참조; 롬4:16; 딛3:7), 마침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참조; 엡2:8).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노력이나 요구로 주어진 것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주어진 인간의 구원을 위한 선물입니다.

      4.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긍휼은 다른 말로 '불쌍히 여김' 혹은 '민망히 여김'으로 표현되는 선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한 면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바탕이 되는 것으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가 지은 피조물들의 고난에 대하여 동정을 느끼게 하고, 마침내는 구원을 계획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긍휼은 구약에서는 크고 영구한 것으로(참조; 시57:10;대하7:6;스3:11),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언급되었으며, 특히 서신서의 인사말에서 많이 나타납니다(참조; 딤전1:2;딛1:4).

      5.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부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86:15).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그의 '선함'의 또 다른 방편입니다. 이것이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으로 하나님은 구약 여러 곳에서 죄인들의 악을 당장 벌하시지 않으시고 그들이 회개할 때를 기다리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왔습니다(참조; 욘4:2;욜2:13). 그리고 이 오래 참으심은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으로 나타났습니다(참조; 딤전1:16). 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 된 우리도 당장 멸망당하지 아니하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선'이란 수식어가 붙은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이 수식어는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나 피조물은 유한한 존재이며, 죄로 물든 존재이기 때문에 이 단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인간은 단지 선하신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 긍휼, 오래 참으심으로 인해 구원받을 때 비로소 선해질 수 있으며, 선을 베풀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선은 인간에게 항상 풍성히 임함(시31:19)
       ☆ 하나님의 선은 죄사함에서 나타남(시86:5)

      1. 일반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선

      하나님의 선
       사람에게 만족스러움(시65:4,5) 자비와 은혜로 인간에게 베푸심(출3:46,7) 세상 모든 것을 선대하심(시145:9) 인간에게 크게 임하심(시31:19) 항상 있음(시52:1)
      하나님의 선이 나타난 증거
       인간에게 결실하게 하심(행14:17) 영적인 은혜로 나타냄(시31:19) 죄를 사하심(시86:5)
      하나님의 선에 대한 성도의 태도
       기뻐함(출18:9) 찬양함(시145:7) 하나님의 은혜를 만족함(렘31:14)

      2.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
       그리스도인(살후2:16)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요3:35)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증거
       이스라엘을 무궁한 사랑으로 인도해 내심(렘31:3) 죄인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심(요8:42) 죄인을 위해 독생자를 희생시키심(롬5:8) 하나님의 역사가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드러남(요5:20) 성도를 위해 성령을 보내어 주심(롬5:6)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신7:9)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함(신19:9) 하나님을 경외하며 모든 도를 행함(신10:12)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께 엎드려 축복함(신30;20) 마음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함(신6:5) 교회와 성도 간에 덕을 세움(고전8:1)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에게 내리는 축복
       천대까지 은혜를 입음(신7:9) 위험에서 건짐을 받음(시91:4) 하나님의 성산으로 인도됨(사56:6,7)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됨(롬8:28)

      3.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의 범위
       신자에게(빌4:19) 불신자에게(행14:15)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성도의 결과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음(롬3:24)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얻음(롬3:24) 하나님의 일꾼이 됨(엡3:7) 즐겨 구제함(고후9:8) 그리스도의 영광을 사모하게 됨(딛2:13)

      4. 하나님의 긍휼

      긍휼에 대한 성경의 묘사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애3:22) 멸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 긍휼이 크심(느9:31) 긍휼이 사랑으로 나타났음(엡2:4) 선민에 대한 긍휼이 불붙듯하심(호11:8) 영원부터 있는 긍휼임(시25:6)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자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시72:13) 포로된 자(렘33:26)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실 자(롬9:15-18) 고아된 자(호14:3)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잠28:13)

      5. 하나님의 인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이유 - 멸망에 이르는 자를 적게 하시려고(벧후3:9) 사람을 사랑하시므로(고전13:4) 능력을 보이시려고(롬9:22)
      오래 참으시는 때
       진노를 오래 참으심(롬9:22) 구원의 때를 기다리심(벧전3:20) 성도의 회개를 기다리심(롬2:4)
      성도의 인내
       성령의 열매로써 가능함(갈5:22) 그리스도인의 미덕임(엡4:2)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필요함(고후6:4-6) 하나님의 약속하신 기업을 받기 위해 필요함(히6:12,15)
























































      2025 새벽 묵상 룻기


                                                     엘리멜렉                  +                   나오미 (1:2)    마라(1:20)
                                        
            (하나님은 나의 왕이다)                           (나의 즐거움)      (괴로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말론          +     룻(4:10)                                                           기룐 + 오브라
                                      
        (병약자)



      3월 25일(화) 룻기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의 백성 나의 하나님(룻기 1:16)

      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But Ruth replied, "Don't urge me to leave you or to turn back from you. Where you go I will go, and where you stay I will stay. Your people will be my people and your God my God.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Your people will be my people)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your God my God)

      로득설(路得說)
      불요최아근타니(不要催我回去不跟隨你)
      니왕나이거(你往那裡去)
      와야왕나이거(我也往那裡去)
      니재나이주숙(你在哪裡住宿)
      아야재니주거(我也在那裡住宿)
      니적국 취시아적국(你的國 就是我的國)
      니적신 취아적신(你的神 就是我的神).

      路得說、不要催我回去不跟隨你、你往那裡去、我也往那裡去.你在哪裡住宿、我也在那裡住宿.你的國就是我的國、你的 神就是我的 神.

      사사기를 통해서 사사 시대가 얼마나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이었는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룻기서를 통하여 이방 여인 룻을 통하여 어려운 환경에서도 오직 시어머니의 백성을 나의 백성으로,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려는 모압 여인 룻의 결의에 찬 믿음을 만나게 됩니다.

      환경에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환경에 무너지는 사람도 있지만 그 환경에서 꿋꿋하게 믿음을 찾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이와 같이 환경을 극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1: 15. 돌아가라.

      나오미는 룻의 동행에 대하여 다시 돌아가도록 촉구하였다.
      다른 사람의 이목 때문이라면 염려하지 말고 너의 갈 길로 가라는 것이다.
      너와 함께 고락을 하였던 오르바도 나를 떠나지 않았느냐?
      또 네가 떠난다고 할지라도 누가 너를 비웃겠는가?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오르바의 선택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육의 눈으로 살펴보면 나오미를 따라가면 겹겹이 놓인 불가능의 조건들을 헤쳐 가야 한다.
      최후로는 가는 세월에 청춘을 붙잡아 둘 수 없는 처지에 암울하기만 했다.
      조금이라도 더 젊었을 때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 남편의 집을 찾아 나서는 일이 현명한 처사였다.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결과적으로 볼 때 오르바는 단순히 그의 시어머니의 품을 떠난 것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그모스(삿 11:24) 또는 바알브올(민 25:3, 5) 신을 섬기는 우상의 땅으로 돌아간 것이다.
      따라서 본 절에서 나오미가 룻에게 이 말을 한 것은 13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시모(媤母)에 대한 애정을 초월하여, 여호와를 향한 룻의 신앙을 시험해 본 것으로 이해한다.

      고대 세계에서는 자기 종족이 섬기는 신을 버리는 것은 본토나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 것 이상으로 극히 어려웠다.
      특히 부족 국가를 이루며 살던 당시에는 부족 신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이 흔하지 않았으므로, 나오미는 이것으로 룻의 신앙을 시험해 보았다.

      풀러(Thomas Fuller)박사는 야곱과 비교하여 역설적으로 묘사했다.
      즉 "마치 하나님이 얍복 강가에서 야곱의 신앙을 꺾기 위해 애쓰신 것처럼, 나오미는 자부 룻의 올바른 결심을 좌절시키기 위해 노력했다."(Pulpit Commentary)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동서가 결단을 내린 것처럼, 룻도 너의 백성과 너의 신(神)에게로 돌아가라는 의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오미의 이 말속에는 다분히 여호와를 향한 룻의 신앙을 시험코자 한 의도가 엿보인다.

      여기서 나오미(Naomi)가 오르바(Orpah)의 행동을 비난하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사실 일반적인 도덕 수준에서 볼 때, 오르바도 나름대로 시모 나오미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룻(Ruth)의 각오와 신앙이 더욱 뛰어나고 위대했을 뿐이다.

      나오미가 룻에게 오르바가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갔다고 말한 것은 결과만을 언급한 것이다.
      이것은 이스마엘은 떠나가고 이삭은 남았고, 에서는 떠나가고 야곱이 남은 것처럼 하나님의 심오한 구속사적 경륜과 섭리의 결과였다.

      창세기 25: 6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물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국으로 가게 하였더라.

      창세기 36: 6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얻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 동생 야곱을 떠나 타처로 갔으니

      1: 16. 강권하지 마소서

      룻은 나오미와 생활하면서 신앙을 전수받았다.

      마태복음 10: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누가복음 18:29-30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1)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룻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시어머니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다. 지금은 고통 가운데 살고 있지만 내세에 영생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시어머니를 떠날 수 없었다.

      (1) 어머니를 떠나며

      따라서 어머니를 떠난다는 것은 어머니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떠나는 것으로 터득하였다. 육신의 부모로는 부족함이 많지마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여호와의 긍휼하심은 무한하다는 것을 알았다.

      (2)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감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인간이 헤어지게 할 수 없다. 어머니를 따르지 않고 모압으로 돌아가는 일은 생각할 수 없는 참혹함이라는 것을 알았다.

      (3) 강권하지 마소서.

      그러므로 강권하여 떠나도록 하지 말아달라고 나오미에게 고백한다.

      2)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 하겠나이다. 

      룻은 나오미가 가는 곳은 어디라도 따라가겠다고 선언한다. 그곳이 비록 고난의 연속이라고 할지라도 따르겠다는 선언이었다. 엘리사가 엘리야 보다 갑절의 은사를 받았던 것은 그를 붙좇았기 때문이다.

      * 왕하 2: 2 -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룻도 육신적으로는 보잘 것 없는 시어머니지만 그를 보호하고 계시는 여호와를 발견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녀를 붙좇았다.

      (1) 어머니가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룻은 구체적으로 나오미를 설득하였다. 어머니가 어디로 가든지, 그곳에 어떤 고난과 궁핍이 있던지, 때론 견딜 수 없는 어떤 환난이 임한다 할지라도 어머니가 가시는 곳이라면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따라 가겠다고 말한다.

      (2) 어머니가 유숙하는 곳에 유숙하겠다.

      어머니가 머무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라도 머물겠다는 선언이다. 어머니가 쉬는 곳이라면 어떤 곳이라도 유숙하여 생사고락을 함께하겠다는 긍지에 까지 이르렀다.

      야곱이 빈들에서 잠들었지만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은 것처럼 우리가 어디에 있던지 하나님과 교제하며 생활하면 그곳이 천국임을 고백하도록 하자.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 어머니 백성은 나의 백성

      룻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형제자매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알고 어머니의 백성은 곧 룻의 백성이라는 고백에 이른다.

      * 마 12: 50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2) 어머니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룻의 고백은 진실로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 되신다는 올바른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면 재혼하여 남편의 집에서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무엇보다도 안식처를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9절) 자기의 부모, 친척, 그리고 신을 떠나 아무 희망이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가겠다는 룻의 결심은 단순한 효성이나 애정을 초월하여 자기희생을 감수한 위대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17절).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사실은 나오미가 이방 우상의 나라에서도 그 신앙의 빛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여호와 신앙을 물려주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신앙적으로 며느리들을 교훈시켰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전하거나 가르치는 자가 없었다면, 이처럼 룻이 훌륭한 믿음의 고백을 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10:14,15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 17. 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

      1)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룻은 시어머니와 생사를 함께하여 죽은 일까지라도 동행할 것을 서약한다. 어머니가 죽는 곳이라면 룻도 어머니를 따라 죽고, 어머니가 묻히는 곳이라면 룻도 어머니를 따라서 묻힐 것을 다짐한다.

      * 삼하 15: 21 -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우리 주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무론 사생하고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

      * 롬 14: 8 -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2)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죽음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기 전까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함께 할 것을 약속한다. 룻의 신앙은 여기서 가장 확실하게 입증된다. 즉 룻은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보여주기 위해 그녀는 이스라엘 사회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서약의 형태로 '여호와'의 이름을 들어 맹세했다.

      * 삼상 3: 17 - 가로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 삼상 25: 22 -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중 한 남자라도 아침까지 남겨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 왕상 2: 23 -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서약에는 어떤 표적이나 의식이 동반되지만, 여기서는 말하는 사람 자신이 그 서약을 범할 경우 스스로 벌을 받겠다는 형식으로 표현했다.

      특히 여기서 룻이 맹세를 할 때 '여호와'(Jehovah)라는 신 명칭을 사용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란 성호는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 사회에서만 사용하는 고유한 신 명칭이기 때문이다.

      * 왕상 19: 2 -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이방인이었던 룻이 여기서 이 명칭을 사용했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확신

      룻은 나오미의 신앙을 따라 자기 나라 모압의 신을 떠나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확실히 지니고 있었다.

      (2) 신뢰

      룻은 자신이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성호로 맹세함으로써 이미 언약의 백성에 속해 있음을 고백했다.

      (3) 믿음

      이러한 룻의 신앙에 근거하여 진정 그녀는 여기서 언약을 어긴 자에게 반드시 벌을 내리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엄숙히 맹세했다고 볼 수 있다.

      1: 18. 결심에 대한 확신

      1)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나오미는 여러 가지 현실을 들춰 가며 룻이 동족에게로 돌아가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룻의 의지는 단호하였다.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믿음에 의한 신앙으로 승화된 룻을 보고 나오미의 권유는 단순한 이유에 불과하였다.

      * 시 16: 8-11 -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9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 이다. 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2) 굳게 결심함을 보고

      룻이 나오미를 따라가려는 진술을 듣고 그녀의 결심이 확고부동함을 확인하였다.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항변하는 룻에게 더 이상의 권고가 무익함을 알았다. 심지어 여호와의 징계라도 달게 받겠다는 의지는 더 이상 권고 할 수 없게 하였다.

      * 단 9: 3 -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다니엘의 굳은 결심으로 70이레의 비밀을 깨닫게 되었다.

      * 단 10: 12 -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결심하던 첫날부터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천사로부터 말일에 될 이스라엘 백성이 당할 이상을 깨닫게 되었다.

      3)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홀로 된 나오미 역시 그동안 정든 두 며느리들을 떠나보내는 것을 진정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두 자부의 현세적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욕심은 접어두고 그들을 돌려보내려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시험적 형태를 띠게 되었고, 결국 룻만이 통과하게 되었다. 

      반면 두 자부는 나오미의 의도대로 각자 자신의 행복의 길을 추구했다. 즉 오르바는 모압 땅 자신의 아비 집으로 돌아가고, 룻은 시어머니를 통한 여호와의 돌보심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나오미는 그들의 선택을 기쁘게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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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룻기에 나오는 룻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 땅으로 와서 살다가, 그만 남편도 두 아들도 잃고 홀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유다 땅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나오미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과부가 된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를 그들의 어미 집으로 보내고자 했습니다.
      이에 오르바는 입을 맞추고 작별을 고했습니다.
      하지만 룻은 나오미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이에 나오미는 룻의 결심이 굳음을 보고 더 이상 그녀를 말리지 않았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룻의 말을 자세히 보면 그녀가 단순히 나오미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이 말은 룻과 나오미의 관계가 단순한 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룻이 나오미를 사랑하는 기초에는, 나오미의 뿌리가 되는 그 백성들과 또 나오미의 하나님이 되시는 여호와께 대한 사랑이 깔려있습니다.
      이 사랑은 매우 큰 사랑이며 견고한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개인 대 개인”의 인격적인 관계를 중시합니다.
      예를 들어, “난 네가 무엇을 믿든 상관하지 않아. 너만 나를 사랑해준다면……”
      이런 사랑은 보기에 순수하며 조건 없는 사랑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룻이 나오미를 따를 때, “어머니 저는 어머니의 종교가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을래요. 저는 그냥 어머니가 좋아요!”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하였습니다. 또 룻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말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룻과 시모 나오미 사이의 관계는 단순히 두 개인의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 같은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 안에서 맺어진 관계였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하나님 안에서의 인간 관계는 “Face-to-face”의 관계가 아니라 “Side-by-side”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Face-to-face”의 관계는 서로를 마주 대하고 바라보며, 서로에게 충실한 관계입니다. “나는 너만 바라볼 테니까 너도 나만 바라봐야 해!” 이런 관계입니다. 반면에 “Side-by-side”는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곧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통해서 관계를 맺고 연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Side-by-side”의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늘 “Face-to-face”의 관계를 소망하며, 또 이를 잘 맺어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Face-to-face”의 관계, 곧 서로에 골몰하는 관계는 결코 건강하거나 아름답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자신에게 그만큼 잘해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며 제 삼 일에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6:21).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는 말에 놀란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말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할 것입니다.”
      아마 베드로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주님! 나를 두고 어디를 가신다는 말씀입니까?”였을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16:22,23).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심지어 그를 “사단”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되, 먼저 예수님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자신도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베드로의 “Face-to-face” 사랑은 오히려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는 걸림이 될 뻔 했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거의 “사단” 노릇을 할 뻔 했습니다.

      하나님이 빠진 개인들끼리의 인간 관계는 사랑을 이루기보다는 오히려 분열과 다툼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늘 누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지를 경쟁했습니다.
      예수님 옆자리를 두고 다투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관계 맺기를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이기적인 욕심과 경쟁심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일은 초대 교회에서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3:3, 4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이와 같이 책망합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고린도 성도들은 유명한 사도들과의 개인적 친분을 내세우며 자랑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3-15절 말씀을 통해 볼 때, 어떤 사람들은 “나는 사도 바울님으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은 사람이야!” 하고 떠벌리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들이 “육신에 속하였다”
      그리고 “사람을 따라 행한다” 책망합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3:9절에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사도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을 묶어주는 끈은 그들 사이의 “끈끈한 인간 관계”가 아닙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이들이 서로 만났으며, 하나님 안에서 자라가며,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좋은 인간 관계를 사모합니다.
      인간 관계를 잘 맺고 유지하기 위한 책들, 강의들, 프로그램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좋은 인간 관계”는 오히려 해로울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사단”의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나만 봐! 나도 너만 볼께!” 하는 식의 관계는 결코 건강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기보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부터 나오는 “경건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룻과 나오미의 사랑은 “두 과부의 처량한 사랑”이 아니라, 모든 이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사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이 축복하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관계에 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경외하는 그런 관계를 맺어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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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의 주인공 룻은 우리에게 믿음의 결단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이스라엘의 관습과 문화에 대해 익숙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선택하는 결단을 했습니다. 이 결단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그녀의 믿음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새해를 맞아 룻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어떤 믿음과 결단으로 한 해를 살아가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1대지: 룻의 결단은 헌신과 사랑에서 시작되었다

      룻기 1장은 흉년과 고난으로 가득 찬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나오미와 그녀의 가족은 흉년을 피해 이스라엘 땅을 떠나 모압 땅에 정착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모두 죽습니다. 룻은 말론의 아내로서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있던 젊은 과부였습니다.

      나오미는 모든 것을 잃은 상태에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녀는 두 며느리에게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새 삶을 시작하라고 권했습니다. 오르바는 눈물을 흘리며 떠났지만, 룻은 나오미를 떠나지 않겠다는 굳건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라는 룻의 고백은 단순한 동정이나 의무감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는 룻이 나오미를 향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그녀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결단이었습니다.

      룻의 결단은 헌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헌신은 우리의 신앙과 결단의 출발점입니다. 새해를 맞아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헌신을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은 단순한 감정적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이어지는 결단이어야 합니다.

      2대지: 룻의 결단은 믿음에 기반한 선택이었다

      룻의 결단은 단순히 나오미와의 관계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표현합니다. 이는 그녀가 단순히 시어머니를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의탁하는 믿음의 결단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나오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보았고, 그분의 인도하심과 신실하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모압 땅의 우상을 떠나, 참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룻의 믿음은 환경을 초월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직면할 어려움과 낯선 환경을 예상했지만,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단했습니다.

      우리도 새해를 맞아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믿음의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하고, 바라는 것들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3대지: 룻의 결단은 하나님의 역사로 이어졌다

      룻의 결단은 그녀의 인생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간 후, 그녀는 보아스를 만나게 됩니다. 보아스는 룻을 구속하여 그녀와 결혼하였고, 그들의 후손은 다윗 왕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룻의 헌신과 믿음의 결단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는 놀라운 축복으로 이어졌습니다(마 1:5).

      이는 우리의 결단이 단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결단을 사용하셔서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룻은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그녀의 결단이 위대한 역사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우리의 결단이 사용되기를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매일의 삶을 믿음의 결단으로 시작하라

      룻은 헌신과 믿음의 결단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했습니다.
      그녀의 결단은 단순히 나오미를 따라가는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분의 백성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날마다 룻의 결단을 본받아야 합니다.

      헌신의 결단
      :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과 헌신으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십시오.
      믿음의 결단 :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결단 : 우리의 결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오늘도 저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곳에 저도 가고, 주님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저도 머물겠습니다.
      주님의 뜻이 저의 삶에 이루어지도록 저를 사용해 주옵소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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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룻기 1:6-14)

      오늘 본문을 소개해 드릴 것 같으면 베들레헴에 살던 나오미라고 하는 여인이 흉년을 만나게 되자 남편인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룐이라는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땅으로 내려갔다가 10년만에 남편 죽고 두아들 죽고 병들어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효성스러운 작은 며느리 룻이라는 여인이 따라와 모든 삶이 회복되어지는 내용으로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룻기서를 통하여 귀한 진리들을 발견 할 수 있는데 본문을 자세히 볼 것 같으면 나오미라고 하는 여인이 살던 곳은 베들레헴이요 그 땅을 치리 하던 사람들은 사사들이 였다고 하고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해석해 보면 "베들레헴"은(떡집이라는 뜻으로 생명의 떡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만세 전에 보내시기로 예정해 놓으신 거룩한 땅입니다) "나오미"는(은혜를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사들은"(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400년을 국가 정상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며 백성을 다스리는 기도의 사람들이요 임시정부의 수반이였습니다) "그 땅에 살던 사람은 유다 백성인데"(유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하는데(이것이 바로 룻기서의 문제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징계는 몇 가지가 있는데 전쟁이 징계요 흉년이 징계요 유행병이 징계요 천지 지변이 진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종합해 보면 땅은 거룩한 성지요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민족이요 다스리는 사람들은 기도의 사람이요 나오미는 은혜를 입은 자인! 데 그 땅에 하나님의 진노인 흉년이 작년에도 들고 올해도 들었습니다

      상황을 보아서는 하나님이 진노하실 곳이 아닌데 흉년이 들었다 그 이유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보여집니다 본문을 볼 것 같으면 "사사들이 치리 하던 때에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문제의 원인은 사사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사사기를 보아야 합니다

      사사기2:11-15절의 내용을 보면"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을 섬기며 애굽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신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을 쫓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돗을 섬겨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자의 손에 붙여 그들이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른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의 원인을 보게 되는데 그들이 1)하나님을 버렸습니다 2)바알이 복주시는 신이라고 바알을 택했습니다 3)바알만 택한 것이 아니라 아세라 목상을 깍아 세워놓고 복을 달라고 싹싹 빌었어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디를 가던지 저주를 내리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신앙의 위치를 보면 복을 받을 만 한데 하는 일마다 안 되는 경우를 보게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나오미의 생애에다가 자신의 생애를 맞추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문제를 만난 나오미의 두 가지 생활모습이 나옵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흉년이라는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나름대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모암이라는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볼 것 같으면 모압에 내려가서 문제가 해결 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가족이 흉년을 피해 잘 살아 보겠다고 내려갔는데 내려간 가족중에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 마는 엄청난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흉년이라는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내려간 모압 땅은 저주의 땅에 되어 나오미를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이미 위에서 들으셔서 아시듯이 나오미는 문제 해결을 위하여 모압으로 내려갔다가 남편 죽는 고난 두 자식을 죽이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몸은 병들고 내려간 10년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였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모압 땅은 문제 해결의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저주의 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올라가기로 결심을 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은 모압 땅에서 베들레헴으로 올라가는 나오미의 모습을 살펴 보며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나오미는 모압으로 내려간 10년동안 남은 것이라고는 3명의 과부와 자기의 몸은 병들어 거동이 불편한 것 뿐이였습니다 이때쯤 되자 나오미는 자신을 바로 보게되는데 그제서야 모압으로 내려온 것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기력이 없어요 그때 효성스러운 며느리 룻이 그를 도와 베들레헴으로 올라갑니다 베들레헴에 올라가니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모든것이 회복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올라가는 모습과 축복이 있습니다

      첫째:깨달을 때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룻기서1장7-13절을 보면"나오미가 10년이 지나 남편 죽이고 두 자식 죽이고 난 후에 자기의 입지가 바로 되지 못한 것을 깨닫고 베들레 헴으로 돌아가려고 마음을 먹습니다"특히13절에 보면"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라고 실컷 얻어 터지고나서 깨닫습니다 나오미는 10년만에 여호와의 손이 자기를 치신 것을 깨닫았습니다 남편 죽을 때까지도 명이 짧아서 그런줄 알았을 거시고 두아들 죽었을 때도 며느리 때문이라고 생각 했을런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문제가 자기에게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닫는 자는 망하지 않습니다* 고로 우리는 내 신앙생활에 왜 기쁨이 없는가를 깨닫아야 하며 내 가정에 왜 우환이 있는가 깨닫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깨닫을 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하나님의 축복은 시작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돌아가려고 하니 하나님이 돕는 자를 붙여 주셨습니다

      나오미가 마음을 베들레헴으로 돌리고 돌아가려고 하지만 몸은 병들고 늙어서 돌아갈 기력이 없습니다 그때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작은 며느리 룻을 붙여 주시어서 시어머니를 돕도록 하셨습니다

      룻기1:16-17절에 룻이 고백 하기를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 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 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룻이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 여자는 남편이 죽으면 자유라고 했습니다 롯의 처지를 생각해 보십 시요 남편과 함께 정을 나누며 재미있게 살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자식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시어머니가 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요즘 세상은 남편 두고도 남편을 떠나려고 하는 여자들도 있다는데 타국 시어머니 무엇이 좋다고 따라나서겠습니까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땅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깨닫고 돌아서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요 축복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오미라는 은혜입은 여자가 하나님께로 돌아서니까 하나님께서 룻의 마음을 감동 시키셔서 시어머니를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셨으니 오늘도 우리가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돕는 자를 붙여 주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모두 이 시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삶으로 하나님과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께서 돕는 자를 붙여 주시는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 합니다

      셋째:돌아가니 때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룻1:22절을 보니"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 왔는데 그들이 보리추수 시작 할 때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고 했습니다 나오미가 돌아간 때가 언제 라고요 "보리추수 시작 할 때라"그들이 만약 보리 고개에 왔더라면 어찌 했을까요? 보리고개가 뭡니까? 보리고개는 양식은 떨어지고 보리 이삭은 아직 덜 익어서 먹을 수도 없는 때가 보리고개 입니다 이런 것으로 볼 때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갔을 때가 보리고개 였더라면 굶어 죽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10년 만에 고향땅을 밟았을 때가 보리추수 시작 할 때였으니 얼마나 때를 잘맞춘 것입니까 뭐니 뭐니뭐니해도 시골 인심은 추수때가 제일 좋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깨닫는 자는 발걸음이 닫는 곳에 때가 맞아 돌아 가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을 해도 때가 맞아 돌아가야 하고 정치를 해도 때가 맞아 돌아가야 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으로 부터 때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올라가 집에 있고 며느리인 룻이 바구니를 들고 이삭을 주으러 밭에 나갔는데 그 밭이 보아스의 밭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엘리멜렉의 며느리임을 알고난후 일꾼들에게 이삭을 단 사이에서 줍도록 하여 양식의 풍족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깨닫고 돌아서면 모든 일에 때가 맞아 돌아가는 축복이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까지의 내용이 룻기서의 내용입니다 내용을 다시 종합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나오미가 흉년이라는 문제가 생기자 문제를 앉은자리에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려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모압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결과 남편 죽고 두 자식 죽고 과부 3명만 남는 불행을 당했습니다 그 후에 나오미가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니까 하나님께서 돕는 자를 붙여 주시고 발걸음이 닫는 곳에 때가 맞아 돌아가고 마음먹은 것에 인도의 손길이 나타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서있는 위치는 어디입니까 모압인가요? 베들레헴인 가요? 내중심으로 살고 있으신 가요? 아니면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계신 가요? 깨닫고 돌아서서 말씀안에 살아가시므로 하나님의 인도의 축복 도와 주시는 축복 발걸음이 닫는 곳마다 때가 맞아 돌아가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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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오미 가족의 모압땅 이동 경로

      성서의 땅을 통해 성서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것은 마치 3D 영화를 보는듯 그 재미가 특별하다. 예를 들어, 엘리멜렉과 나오미, 말론과 기론이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지방으로 들어가 기거하였다 라고 룻기서 저자는 설명하는데, 과연 어떤 길을 통해 모압땅으로 갔고 돌아왔을까? 성서는 엘리멜렉 가족의 구체적인 이동 경로를 말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길을 따라 모압으로, 그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흔히 이스라엘은 광야 여행자들의 천국이라 불릴만큼 "걸어서 광야의 세계속으로"의 길들이 많이 있다.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가는 광야의 길도 있을까? 물론 성서 시대의 모압이 현재는 요르단 땅이기 때문에 직접 베들레헴에서 모압 땅까지 걷는 체험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가는 광야의 길을 어느 정도 따라 걸을 수는 있다.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길들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1. 베들레헴(주황색) - 예루살렘 - 마알레 아둠밈 길 (아둠밈 비탈길 - 수 15:7, 본 블러그의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 참조) - 여리고 - 요단강 도하 - 사해 남쪽으로 이동 - 모압 지방 (아래 사진 파란색 선)

      2. 베들레헴(주황색) - 드고아 - 엔게디 (사해) - 사해 도하 - 모압 지방. (아래 사진 노란색선)

      사진: 엘리멜렉 가족의 모압땅 이주

      이 두개의 길들중 어느 길을 선택해서 엘리멜렉은 그 가족을 이끌고 모압으로 갔으며 나오미는 그 자부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까? 모압과 요단강 건너 이스라엘 땅 사이의 이동과 관련된 다른 성서 이야기들을 통해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추정할 수가 있다. 

      A. 다윗의 피난 경로 (삼상 22장) 

      다윗이 사울을 피해 여기 저기를 떠돌아 다닐때, 아둘람 굴로 도망을 하였다가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삼상 22:3). 아둘람 굴은 예루살렘에서 서남쪽 광야 지역에 위치해 있다. 아둘람 굴에서 모압으로 가기 위해서는 사울이 살고 있던 기브아 (예루살렘 북쪽)에서 남쪽에 있는 베들레헴 - 드고아 - 엔게디 - 사해 도하 - 모압으로 가는 것이 가장 짧은 루트이다. 

      만약, 다윗이 예루살렘 - 마알레 아둠밈 - 여리고 방향으로 가려 하였다면 그는 죽음을 자초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루트는 사울의 기브아와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사진: 엔게디 

      사진: 엔게디의 사반 (잠 30:26)

      B. 여호사밧과 아람 사이의 전쟁 (대하 20장) 

      모압, 암몬, 마온, 그리고 아람의 연합군이 사해 건너편 엔게디 (하사손다말 -대하 20:2)에 주둔지를 만들고 여호사밧을 공격하려 할때,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여호사밧은 백성들과 함께 드고아 들로 나아간다 (대하 20:20). 드고아 들은 엔게디로 내려가는 광야 길에 위치해 있다. 이방의 연합군은 사해를 건너 엔게디로 이동하였는데 사해 중간에는 리숀 반도라고 해서 물의 깊이가 아주 낮아 배를 이용하지 않고도 건널 수가 있었다. (오늘날에는 사해의 수위가 낮아져서 사해가 리숀 반도를 중심으로 사해가 두개로 나누어져 있다) 만약 아람 군대가 사해의 리숀 반도를 건너올 수 없었다면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방향으로 진격해 올라왔을 것이다. 

      사진: 엔게디의 산양

      이 두가지 예들은 엘리멜렉 가족이 1번 루트보다는 2번 루트를 따라 모압 지방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지지한다. 오늘날 베들레헴에서 출발해서 광야 길을 따라 엔게디까지 걸으면 약 12-15 시간 정도 걸린다. 물론 광야의 길을 걷는 것이 어렵지만 이 광야 계곡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기드론 시내의 물이 흘러 사해로 유입되기에 물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사진: 예루살렘-베들레헴- 광야 - 엔게디 - 사해로 빠져나가는 계곡의 물 

      사진: 마르샤바 수도원 

      엘리멜렉 가족은 잠시 우거하기 위해 모압으로 떠났다. 아마 당시 모압 지방에는 흉년이 들지 않았을 것이고 베들레헴에서 내려다 보이는 모압 땅은 과거 아브라함을 떠나 요단을 건넜던 롯이 찬양하였던 그런 땅이었을 것이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 13:10)

      오늘날도 요단 동편은 물이 풍부하고 늘 푸르다. 베들레헴에서 바라봤던 그 풍요로운 땅에 잠시 머물기 위해 떠났던 엘리멜렉 가족은 그 뒤 1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그 땅에서 죽음의 슬픔을 끌어 안고 살았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서의 삶을 결코 헛되지 않게 하셨다. 반전이 있는 인생 드라마를 쓰신 하나님의 자비가 곳곳에 배어 있는 이야기가 룻기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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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력서(履歷書)
       밟을 이(履), 지날 력(歷),  글 서(書)
      발자취를 적은 문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룻기 1:6~14)

      룻기 전반부에 보면 네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엘리멜렉, 나오미, 룻, 오르바 이들이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이 흉년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같은 상황에서 선택하는 방법과 길은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묘한 대조를 이루며 각각의 발자취를 남기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중요한 두 지명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베들레헴이요, 또 하나는 모압입니다.
      서로 대조적인 땅입니다. 베들레헴은 이름 그대로 떡집입니다.
      하나님의 집, 말씀의 집, 신앙의 고향, 하나님을 경외하는 장소, 가나안, 메시야가 탄생하신 축복의 땅을 상징합니다.
      반대로 모압은 이방세계, 우상숭배, 음란과 부도덕, 불신앙, 신앙에서 멀어지는 그 어떤 곳을 상징합니다.
      이 베들레헴과 모압 사이에 좁다란 길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서 한 가족이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이주를 합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엔 똑같은 그 길을 따라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그 가족이 이동합니다.
      그들이 이동경로를 통해 남긴 발자취들을 살펴보면서 지금 나는 내 인생길에 어떤 발자취를 남기며 걸어가고 있는지를 확인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엘리멜렉을 보십시오.
      그는 흉년이 나자 베들레헴을 출발하여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죽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의 발자취를 남기고 인생의 종지부를 모압에서 찍습니다. 즉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의 직진입니다.

      둘째, 오르바는 어떻습니까? 그녀는 모압을 출발하여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했다가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다시 돌아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르바는 모압에서 출발하여 베들레헴으로 떠나기는 했지만 가다가 다시 모압으로 되돌아 간 것입니다. 즉 모압에서 다시 모압으로의 유턴입니다. 셋째, 나오미는 처음에 남편을 따라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베들레헴으로 방향을 돌려 그곳에 이릅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모압에서 다시 베들레헴으로 유턴입니다.

      그러면 룻이 남긴 발자취는 어떠한가요? 룻은 이방 땅 모압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자신의 본토,친척, 아비집인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향한 후 그녀는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직진을 합니다. 마치 법궤를 싣고 벧세메스로 향하던 암소처럼(삼상6:12), 푯대를 향하여 믿음의 경주를 다 했던 바울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의 길에서 엘리멜렉과 룻, 그리고 오르바와 나오미가 남긴 발자취는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멜렉(베들레헴→모압), 오르바(모압⊃베들레헴), 나오미(모압⊂베들레헴), 룻(모압→베들레헴), 그렇다면 이들은 도대체 오늘날 누구를 상징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믿는 자요, 구원받은 자 즉 하나님의 자녀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오르바와 룻은 이방사람들이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보면, 전에는 이방인이었을지라도 할례를 받거나, 일단 결혼을 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됩니다. 그러므로 오르바와 룻은 처음에는 모압인이었지만 결혼한 이후이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 모두는 택한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한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각각 서로 다른 발자취를 남겼을까요? 베들레헴과 모압 사이를 잇는 길에는 '슈브'(돌아간다)라는 동사로 깔려있습니다. 그런데 이 동사는 모압과 관련하여 6번, 유다와 관련하여 6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모압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이 6번, '유다로 돌아가라'는 말이 6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섯번씩 대등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판단하기가 결코 쉽지 않고 또한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라는 것인지, 아니면 모압으로 돌아가라는 것인지, 좀처럼 분간하기 어려운 말들이 마치 스테레오처럼 귓전을 두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돌아가라'는 음성앞에서 각자 판단과 결정을 내리고 각각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혼돈스럽게 만드는 것은 두 자부를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나오미조차도 오르바와 룻을 향해 모압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나를 진실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의 충고, 말이라고 해서 다 옳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판단도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예외 없이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베들레헴과 모압, 모압과 베들레헴 사이에 펼쳐진 길을 걸어가는 노중에 있습니다. 그 노중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돌아가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 음성이 누구의 음성인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잘 들어야 합니다. 누가 하는 말인지, 어디로 돌아가라는 것인지 잘 판단해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 사건을 앞에 놓고 재판장인 빌라도가 결정을 내리려 할 때 그의 아내가 사람을 급히 보내어 충고를 했지만(마 27:19), 그는 다수의 소리를 (눅23:23) 들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사형언도를 내리는 빌라도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18:37) 후회 없는 발자취를 남기기 위한 방법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길 자체이신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주님은 길과 말씀 자체이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따르느니라'(요1:14) 따라서 길이요, 말씀 자체이신 그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주님을 따라 갈 때에 결코 후회함 없는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디를 출발하여,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엘리멜렉과 같이 모압으로 직진하고 있나요?
      아니면 오르바와 같이 어느정도 가다가 다시 모압으로 유턴하고 있나요?
      되돌리십시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나오미처럼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발자취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아니 룻과 같이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직진하는 발자취를 남기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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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압과 베들레헴(룻기 1:1~18)

      돈 좇아 하나님 버리는 ‘시대의 덫’ 조심해야룻기는 베들레헴에 살던 나오미의 가정이 모압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모압으로 내려가므로 만난 고통 그리고 베들레헴으로의 귀환을 통한 회복이 보여주는 의미를 살피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모압으로 간 사람들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는 흉년을 만나자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1,2절) 그런데 이들은 영적 위험을 간과했습니다. 베들레헴은 조상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으로 그곳에서 그들은 예배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흉년을 만난 이들은 당장 그들의 배를 채워줄 떡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신앙의 위기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압이 영원히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23:3). 이스라엘이 그들과 가까이 하지 않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 가정은 모압으로 내려갔습니다. 양식을 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일에 손상을 입을 수 있는 바로 그곳으로 말입니다.
      모압에 내려간 이 가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과연 잘 먹고 잘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이들은 더 중요한 것을 잃습니다. 2,3절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먼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여기서 나오미는 깨닫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어야 하는데 오히려 서둘러 두 아들을 모압 여인들과 결혼시킵니다. 모압에 더 깊이 빠져들었습니다(4절).
      그랬더니 더 큰 문제가 생깁니다. 4,5절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년쯤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베들레헴 사람이 모압에 먹을 것을 위해 내려간 결과, 집안의 모든 남자를 잃고 맙니다. 그곳에서 밥은 먹었는지 몰라도 너무나 소중한 것을 잃고 만 것입니다.   

      모압과 베들레헴의 의미


      6절에 보면 하나님이 때가 되니 흉년이 들었던 백성들을 돌아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돌보셔서 양식을 주실 텐데 그 베들레헴을 떠났던 것입니다.
      룻기가 보여주는 모압은 경제 위주의 삶, 베들레헴은 신앙 위주의 삶으로 구별할수 있습니다.
      떡을 위해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간 나오미의 가정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신앙을 우선으로 하지 않는 한, 많이 갖고 많이 먹은들 행복과 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을 떠나고 예배를 떠나는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을 잃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유혹을 받습니다. 돈 몇 푼을 위해 양심도 신앙도 버리도록 권유를 받습니다. 조금 더 많이 갖기 위해 예배를 뒤로 하게 만듭니다. 경제를 살려야 선교도 하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나라는 가난하고 어려울 때 선교를 시작했고 그때 선한 일들에 힘 써왔기에 경제적으로 일어서고 이만큼 살게 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베들레헴을 향하여


      결국 모든 것을 잃은 초라한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것을 결심합니다(6절). 떡을 찾아 모압으로 가서 인생의 쓴 맛을 본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므로 회복되어 다시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나오미를 좇아 베들레헴으로 올라가는 룻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가난한 시어머니, 따라가 봐야 고생이 뻔한 시어머니의 고향 베들레헴, 그러나 룻은 이런 시어머니를 따라 갑니다. 그는 떡을 좇은 것이 아닙니다. 떡을 추구했다면 가난한 시어머니를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16절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그렇습니다. 룻이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에 간 것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섬기기 위함일 뿐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시어머님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선택입니다.
      14절에서 동서 오르바는 모압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모압의 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임을 15절이 밝혀줍니다.
      죽을지언정 꼭 붙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룻은 그것을 붙들었습니다. 룻의 선택은 가난해진 시어머니와 함께 가서 고생할 것이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지 않습니다. 굶지도 않습니다. 그의 인생에 행복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손길을 보게 됩니다.
      그로 말미암아 나오미의 가문에 복이 임합니다. 룻은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고(4:13) 다윗의 증조할머니로 성경에 이름을 남깁니다(4:22).  

      이 세대의 흐름은 모압


      모압은 먹을 것을 좇아 하나님도 신앙도 사랑도 놓아 버리는 삶을 보여줍니다. 베들레헴은 죽을지언정 하나님만 붙드는 삶을 보여줍니다. 모압에 가니 살 것 같은데 죽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흐름을 조심합시다. 떡을 좇는 흐름, 경제가 우리를 살릴 것으로 착각하는 이 시대의 덫에 걸리지 맙시다.
      베들레헴에 거하십시오. 먹을 것을 위해 모압으로 내려가지 마십시오. 예배하며 사십시오. 먹을 것, 입을 것을 위해 예배를 떠나지 마십시오.
      결국 하나님의 백성인 나오미는 떡을 위해 하나님을 등지고 모압에 내려가므로 모든 것을 잃었지만, 모압 여인인 룻은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해 떡을 버리므로 모든 것을 얻는 삶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모압을 좇습니까, 아니면 베들레헴을 좇습니까? 떡을 위해 베들레헴을 등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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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 요상상희락(要常常喜樂).
      2. 불주적도고(不住的禱告).
      3. 범사사은(凡事謝恩).因為這是 神在基督耶穌裡向你們所定的旨意。
      4. 不要銷滅聖靈的感動.
      5. 不要藐視先知的講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