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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 껍질 벗기기. 양파를 썰 때. 랩 포장 비닐 자르기
고등어 굽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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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장성교회 정연수원로목사
밭을 갈다가 천사를 보고 일을 멈추고 냇가에서 목욕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와 두루마기를 입고 내가 죽을테니 장례를 하지 말라
9일 후에 다시 일어나서 왜 그렇게 시끄럽게 우느냐?
제발 울지 말라
그리고 다시 죽은 후 3일 후에 다시 깨어났다.
12일만에 살아난 후에
천국에서 너는 영수가 되라
나는 술과 담배를 끊을 수 없어 도저히 못하겠노라
그래 내려가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보라
술을 한모금 마시니 토하고
담배를 한모금 피우니 다시 포하고.....
이런 아버지 때문에 아들이 약사로 일을 하다가 결국 목회자가 되었다.
선교사가 그 이야기를 듣고 찾아와서 영수로 임명하였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and whoever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네가 믿느냐?(Do you believe this?)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중대하고 비범하신 메시야 권위에 대하여 알려 주시는 자아 주장이다. 곧, 이것은 "나는 그 이"라는 장엄한 선포이다. 주경 신학자들이 이런 문투로 나온 말씀을 가리켜 예수님의 "자아 주장" 언사라고 한다. 하이트뮬러(Heitmuller)는 이 귀절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기 요 11:25의 말씀은, 요한 복음의 특징으로 나타난 자아 주장의 말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Es
ist das groste und erhabenste "Ich bin" in der Reihe der
wirkungsvollen, "Ich bin", die den Jesus unseres Evangeliums
Kenzeichen). 여기 "부활"이란 말과 "생명"이란 말에 각각 관사가 있어서 (*), "그 부활이요 그 생명"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라는 관사는, 여기서 예수님 자신께서만 독일 무이(獨一無二)하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사실을 밝혀 준다. 볼트만(R. Bultmann)은, 여기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존재 형태를 말함이 아니고, 신자들에게 선물 주시는 그의 의의(Bedeutsamkeit)를 가리킨다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07). 그렇다면, 볼토만(Bultmann)의 이 말은, 부활과 생명이 예수님의 본질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영생 개념과 다른 사상이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과 예수님 자신만이 인간에게 영생이 된다고 말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딤전 6:16), 그 자신이 바로 인생의 구원이 되신다고 한다(사 12:2).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나니(전 3:11), 하나님 외에는 아무 다른 것도 그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신자의 영생 얻는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물과 그리스도 자신을 분리시킨 볼트만(Bultmann)의 사상은 그릇된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의 영생 얻는 방편이 믿음 밖에 없음을 강조하신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영생이 하나님의 계약 체제(혹은 약속 체제)에 속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계약자는 그 상대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법이다. 롬 4:16 참조. 은혜 계약은, 그것을 받은 첫 사람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인간 편의 믿음을 요구하였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통해지도록 하는 심리적 통로로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것이 신인 계약(神人契約)을 성립시키는 구성요소로서 필요한 것이다. 기독자들은 믿음에 의하여 하나님의 계약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가 되어진다(고전 15:23). "죽어도"란 말의 헬라 원어 칸 아포다네(*)는, "그가 죽은 후에"란 뜻이 아니고, "그가 죽을지라도"(though he dies)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 "죽어도 살겠고"란 문구는, "그가 죽을지라도 계속하여 살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신자의 받은 영생이 그 육신의 죽음 때문에 중단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구는, 신자의 육신이 죽은 후에도 그에게 계속되는 역적 생명을 가리킨다(Feine,
Hier wird also von einem Leben gesprochen, das der Glaubige schon
unmittelbar nach dem physischen Tode leben wird. - Theol., S. 440).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 여기 이른바, "살아서...믿는 자"란 말(*)에 있어서 "살아서"란 말은, 육신의 생명을 가리킨 것(B. Weiss)이 아니고, 영적 생명 곧, 구원론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 이유로서는, (1) 요한 복음에 있어서 산다는 말이 일률적으로 구원론적이며(5:19 이하 참조), 특별히 11:25-26의 말씀이 그러하다는 것, (2) "살아서"란 말과 "믿는 자"란 말이, 함께 하나의 관사(*)로 결속되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다신 산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그러므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란 말씀은, 성령으로 거듭 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위의 25-26절에 기록된 두 가지 말씀은, 각각 다른 것을 설명하지 않고 같은 말을 두 번 거듭하는 것 뿐이다. 25 절의 것("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죽음이 해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26절의 것("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은, 좀 더 사세한 말로써 위의 것을 재확인 한 것 뿐이다. 곧, 살아서(거듭나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But I know that even now God will give you whatever you ask."
이 두 귀절은, 마르다의 태도가 신앙적인 듯하면서도 단순히 그렇지도 않은 사실을 보여 준다. 그가 단순히 신앙으로만 일관하였더라면, 거기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던 사실을 유감스럽게 생각했을 이유가 없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신앙은 변동성(變動性)이 있었다. 그가,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다"라고 말하고도(22 절), 다시 말하기를 나사로가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하였다(24 절). 그러면,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주님의 하시는 일에도 유감스러운 일이 있는 듯이 말하고, 또 그의 신앙 사상에 변동성을 가져왔다. 마르다의 이 태도는 확신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신자에게 확신이 있어야 어려운 때에 쉽사리 동요하지 않는다. 촬스 다윈(Charles Darwin)의 말에 의하면, 대서양(大西洋)에는 200 척 깊은 바닥에 뿌리를 박고서 수면에까지 나와 있는 풀이 있는데, 파도가 일어도 그 풀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이 그렇게 굳센 이유는, 깊은 바다 밑에 고요히 뿌리 박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신자도 하나님 안에 고요히, 또 깊이 믿음을 가지면, 이 세상 파도 앞에서 동요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위대하신 사실을 알 때에, 그를 의뢰함이 얼마나 든든한 줄 알 수 있다. 그는, 우리를 반대하는 모든 자들보다 크시다. 하나님을 의뢰함이 얼마나 든든한 것을 성경이 증거한다. 또한 구름 같이 많은 증인들도 증거한다. 고래(古來)로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진실히 믿고 그의 도우심과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그 사실을 생각하고 얼마든지 안심할 만하다. 어떤 사람이, 어름이 덮인 미시시피(Mississipi)강을 건널 때 어름이 깨질까 두려워서 기어서 절반을 건넜다. 그 때에 그는, 자기 뒤로 흑인이 석탄 수레를 끄는 네마리 말을 몰고 오면서 노래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제야 안심하고 확신을 가지고 건넜다고 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건너 가기가 위태하나, 믿음으로 앞서 건너 간 성도들을 생각하고 용기와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After he had said this, he went on to tell them, "Our friend Lazarus has fallen asleep; but I am going there to wake him up."
청년들을 지도할 때 한번은 어느 대학생이 집안의 어른이 돌아가셨는데 본인이 반드시 살려낼 것이라며 시신을 놓고 열심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몇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결국 집안 어른들에 의해서 미친놈이라는 소리만 듣고 쫓겨났다고 합니다.
착각하는 믿음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과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김하성, 당시 울산대학교 CCC)
하나님이 계시를 주셨다고 할지라도 그 계시가 정말 올바른 계시인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일상적인 감추어진 비밀의 기도
어느 양반집으로 출가한 새댁이 몸에 이상이 와서 아무리 치성을 드려도 해결되지 않아 고생하는데 어느 지나가던 사람이 성경책을 구입하여 읽어보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창고에 있던 쌀을 팔아서 성경을 구하여 몰래 읽는데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새벽마다 몰래 숨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남편이 밭에서 일을 하던 중 흰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서 무슨 말을 전하는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듣지 못하고 볼 수도 없는데 갑자기 일을 멈추라고 하므로 몸이 아픈가 아니면 정신이 이상해졌는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깨우러 가노라( I am going there to wake him up.)
신앙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죽은 것도 잠들었다
병든 것도 죽을 병이 아니다
이렇게 역설적인 사고를 갖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육신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나사로가 죽은 것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잠들었다고 표현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을 자는 정도의 아픔이면 깨우면 되지만, 죽은 것이면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속단한 것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는 죽음이 잠을 자는 것과 같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이 잠자는 자를 깨우는 것과 같다는 것을 믿지도 못했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그리고 될 수 있는 것과 될 수 없는 것을 미리 구분해 놓고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세상의 것에 의해서 이미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과학이라고 하는 것과 전통적인 방식과 습관적인 사고는 주님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점(God's eye of view)을 회복하려면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정말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
정말 단념할 수밖에 없을 때,
완전히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죽은 나사로를 깨우러 가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야 하겠습니다.
죽음은 두 가지로 설명한다면 하나는 육체적인 죽음입니다.
육체적인 죽음은 누구나 호흡이 멈추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영적인 죽음은 육체는 활동을 하지만 영적인 상태는 활동을 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육체와 더불어 영적인 활동이 조화를 갖추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때로는 그 육체가 병들 수도 있고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질병과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영적으로 깨어있다면 분명히 소망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지금 내가 직면하고 있는 나를 괴롭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내가 주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을 갖추고 있는가를 살펴봅시다.
그리고 나의 믿음 없음을 용납하여 주시고 새 힘을 주시옵소서 라며 간구할 때 이전에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영역의 세계로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성경이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죽음은 마치 잠.과 같아서 시간과 공간과 주변 사물을 전혀 의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죽음이라는 잠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죽은 자들은 부활의 순간까지 무덤 속에서 어떤 상태로 있을까요?
성경은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잠”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가장 적합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죽은 자를 가리키면서 “잠자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24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다니엘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흙으로 돌아간 죽은 자들이 잠에서 깨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니엘 12:1-2
그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성경의 저자들은 왜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했을까요?
몹시 피곤에 지쳐서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눕자마자 깊이 잠들게 되는데,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면 긴 밤이 마치 한순간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자기가 잠든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깊은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죽음은 마치 잠과
같아서 시간과 공간과 주변 사물을 전혀 의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죽음이라는 잠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죽는 순간부터 부활하는 때까지를 “순간”처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은 자의 상태
자식이 잘되고 못 되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욥기 14:21)
일체의 감정과 의식이 없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전도서 9:5),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plan, 계획)가 소멸하리로다”(시편 146:4)
무활동의 상태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나니”(전도서 9:10)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다.
“사망 중에서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무덤, grave)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시편 6:5)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시편 30:9)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 편
115:17)
“음부(무덤)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이사 야 38:18-19)
죽음은 이런 상태로 들어가는 것인데, 어떻게 영혼이 살아있어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까?
눈을 떠서 성경을 읽고, 성령의 음성을 들을 귀가 있는 성도들은 죽음과 영혼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의 상태를 “잠”(sleep)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표현은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를 풀어줍니다.
오늘날 기독교뿐 아니라 여타의 종교계에 공존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상은 “죽음 이후에도 생각하고 대화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도서 9:5-6,10)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분명한 말씀이 있는데 누가 감히 죽은 자의 영혼이 살아서 느끼고 생각하고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죽음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이 너무나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분명한 성경 말씀을 눈앞에 보여줘도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마치 성경에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있다”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믿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교와 불교와 미신에서 가르치는 “죽은 자의 영혼은 살아있다”는 교리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의인들이 죽는 순간에 하늘나라로 인도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큰 소리로 찬양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다윗은 죽은
사람에게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 편
115:17)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시편 6:5).
사도 바울의 장례식 설교
신문에 가끔 실리는 장례 광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게 됩니다. “000님께서는 향년 89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가셨기에 이에 부고합니다.” 또한 장례식장에서 “성도님의 영혼이 훨훨 날아서 하늘로 올라갔으니 후에 하늘에
가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로하는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정말로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과 딸들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는 것으로 장례 설교를 끝마쳤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유가족을 위로했을까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데살로니가전서 4:16-18)
이 말씀에서 바울은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장례 설교에서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쉽게 넘기면 안 됩니다. 언제부터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까? 성도들이 부활해서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할 때부터 “항상 주님과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유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소망입니다. 죽은 가족의 영혼이 연기처럼 몸을 떠나서 천국에 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식의 설교는 유가족들에게 아무런 위로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부활신앙과도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별했을 때, 그가 하늘나라에 가서 지상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이 세상에서 겪는 마음 아픈 상황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유가족들에게 참된 위안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바울은 죽음과 무덤이 끝이 아니라는 영광스러운 진리를 설교했습니다. 바울은 유가족들에게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는 부활을 말하면서 위로했습니다. 부활의 날에 의인들은 불멸의 몸을 선물로 받을 것인데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린도전 서 15:51-53)
모든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자다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종 선고를 듣기 위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이 1,000년 전에 잠들었든지 또는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하루 전에 잠들었든지, 그들에게 있어서 부활하는 순간까지의 시간은 0.01초도 안되는 “찰나”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썩어서 부패하여 흙으로 돌아간 시체들을 어떻게 회복시키실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염려합니다. 물론, 어떤 시체들은 폭탄에 맞아서 흩어지고, 어떤 시체들은 불에 타고, 어떤 사람들은 깊은 바다에 빠져서 수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씀 한마디로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께서 각 사람의 모습과 개성을 완전하게 회복시키는 데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을 완전하게 부활시키는 데에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성경은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속에서 부활의 시간까지 “잠”을 자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제 독자들이 대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흔히 죽음을 ‘잠’에 비유한다.
어느 묘비명에는 ‘아무개가 여기에 잠들다’ 같은 글귀가 쓰여 있기도 하고, 사람의 죽음을 이르는 말 중 하나인 ‘영면(永眠)’은 길 영(永), 잠잘 면(眠) 자를 써서 ‘영원히 잠들다’라는 뜻이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도 죽음을 잠에 비유하셨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알리실 때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요한복음 11:11~14)
죽은 사람과 잠든 사람. 겉으로 보면 유사하다.
둘 다 의식 없이 눈을 감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눈에 보이는 모습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께서 죽음을 잠으로 비유하신 것은 아니다.
통상적으로
죽음은 신체의 모든 생명 활동이 중지된 상태를 의미하고, 잠은 눈이 감긴 채 의식 활동을 쉬는 상태를 말한다.
잠과 죽음의 큰
차이점은 ‘생명’의 존재 여부다.
죽은 사람은 깨어날 수 없지만, 잠든 사람은 몇 시간 뒤 반드시 깨어난다. 살아 있어서다.
육신적으로
보자면 나사로는 생명 활동이 완전히 멈춘 상태였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표현하셨다.
이유가 무엇일까?
간단하다. 비록 그의 육신은 죽었지만 나사로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었다.
육신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살아서 존재하는 것, 바로
영혼이다.
모든 것을 영적인 관점으로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영혼이 살아있기에 그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여러 말씀을 통해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살아 있음을 가르쳐 주셨다.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새번역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한다는 말씀은,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즉 죽음이란 육체의 영멸을
가리키거나,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가리킨다.
구약시대 선지자였던 욥도 같은 내용을 성경을 통해 증거했다.
내 육체의 가죽이 썩은 후에는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볼 것이며 (현대인의성경 욥기 19:26)
여기에서
‘나’는 욥(Job)이다.
욥은 자신의 가죽이 썩은 후, 즉 육체가 죽은 이후에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존재는 무엇일까?
영혼이다. 영혼은 육체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욥의 증거 외에도 성경은 『창세기』, 『전도서』, 『에스겔』, 『누가복음』 등 여러 구절을 통해 육신과 별개로 영혼이 존재함을 알려주고 있다(창세기 2:7, 전도서 12:7, 에스겔 37:14, 누가복음 12:20).
육체의 몸으로 묻히지만 영의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의 몸이 있으면 영의 몸도 있는 것입니다(현대인의성경 고린도전서 15:44)
육신이
존재하면 육신의 삶이 있듯,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은 영혼의 삶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영혼의 존재를 인지하고, 영혼의 삶
역시 준비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당장 눈앞의 현실을 살기도 바쁘다. 잘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또 다른 삶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영혼의 삶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이유는 영혼이 곧 내가 존재하는 이유, 본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성경 속 엘리야와 아이 일화를 통해 확인해보자.
엘리야는 몸을 펴서 그 아이 위에 세 번 엎드리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이 아이의 영혼이 돌아오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였다.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 주셨으므로 그 아이의 영혼이 몸으로 돌아와 그가 되살아났다.(현대인의성경 열왕기상 17:21~22)
선지자 엘리야가
사르밧 지역에 사는 한 과부의 아이를 살리는 장면이다.
성경은 죽었던 아이가 “영혼이 몸으로 돌아와 되살아났다”고 기록한다.
사람의 삶과 죽음을 결정 짓는 것은 그 육체 안에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영혼이 없는
몸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벗어놓은 옷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영혼이 떠난 육체다.
그렇다면 육신의 삶과 영혼의 삶 중, 우리는 어떤 삶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할까. 순간과 찰나에 불과한 삶보다 영원한 시간의 삶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하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누가복음 12:16~20)
죽음과 잠
마태복음 9:23-26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지더라.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흔히 영원한 잠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그 비유가 단지 문학적인 상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종교적 표현입니다.
모든 인간은 마지막 때의 부활 혹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심판을 믿든 안 믿든 간에 영생 자체는 소원합니다. ‘잠’이라고 말한 것은
깨어났으면 좋겠다는 불사의 염원을 나타낸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소원일 뿐 실제로는 이뤄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영원히 잠”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시는 장면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신 말씀은 그런 인간적 소망이나 종교적 믿음을 수사학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예수님에게만은 죽음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딸이 육신적으로 죽지 않았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잠시 혼수상태에 빠진 것을 두고 죽었다고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닙니다.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자들이 모였는데 그들은 요즘으로 치면 장의사와 그 직원들입니다.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최고 전문가들로서 호흡과 심장의 박동을 정밀하게 확인 한 후입니다. 아마도 관공서에 사망 신고까지 접수한 후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웬 젊은 랍비가 나타나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니까 비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쳇말로 식모 앞에 행주 빠는 격이 되었습니다. 미친 사람이라고 쫓아내지 않은 것만도 다행입니다. 상주가 데려온 랍비라서 격식을 차려 주었기에 비웃는 것으로 그친 것입니다.
그들이 이미 죽었다고 얼마나 확신했는가 하면 예수님이 나가달라고 부탁하니까 순순하게 비켜준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그들에게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남아 있었다면 이 젊은 랍비가 혹시 마술을 사용해 살려내려는 것이 아닌지 곁에서 지켜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수를 써도 다시 살린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래 네 마음대로 해봐!” 하고 비켜준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야이로의 딸이 되살아 난 것은 인간 세상에선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해는커녕 상상도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신자라고 예수님이니까 당연히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라고 단순하게 이해하고 넘어갈 문제도 아닙니다. 인간의 죽음은, 특별히 믿는 자의 죽음은 하나님에게는 잠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력이 미치는 범위는 오직 물질계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물질의 형태를 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 기관도 물질계를 향해 열려 있고 또 그 안에서만 작동하게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내면의 지정의가 하는 역할도 그 감각기관들이 외부로부터 인지한 자료들을 수집, 정리, 보관, 해석, 적용하는 일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인간 이성은 자신의 감각 기관과 지정의를 동원해 인식이 가능한 이 땅의 현상들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이 그 한계입니다.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 딸은 물질계의 영역에선 확실히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계의 영역까지 연장해서 그 현상을 파악하신 것입니다. 나아가 당신께서 생명의 근원이시라 영계에서부터 생기(生氣)를 가져와서 그녀에게 불어 넣어 물질계로 소생시킬 것을 작정하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품 안에선 어느 누구도 도저히 깨어날 수 없는 죽음 혹은 영원한 잠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잠이라고 표현한 의미는 언제 어디서라도 다시 깨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아니 신자가 항상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언제 어디에서 깨어 있느냐 뿐입니다.
신자로선 인간 이성이 파악할 수 있는 물질계 안에서 깨어 있으면 이곳의 생(生)이고 인간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영계에서 깨어 있으면 저곳의 생(生)일 뿐입니다. 불신자 입장에선 전자만이 인생이고 후자는 완전한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선 전자는 당신이 인간을 보내신 바요, 후자는 당신이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인간더러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불신자에게는 죽음이 끝이지만 신자에게는 천국에서 다시 깨어나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한 것뿐입니다. 신자에게 육신의 죽음은 더 좋은 영원한 본향으로 가는 길목일 뿐입니다.
그럼 그 영원한 본향으로 어떻게 해야 갈 수 있습니까?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했으니 자동으로 갑니까? 교인으로 평생을 성실히 살다가 언제 어디에서 죽어도 잠시 후 눈을 뜨면 천국일까요? 신자가 죽어 천국을 갈 수 있는 여부를 점검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도 실제적인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현재 겪고 있는 환난이나 고통이 그것으로 전부이자 실체(實體)라고 보느냐, 아니면 그것은 결코 전부나 실체가 될 수 없다고 보느냐에 달렸습니다. 다른 말로 자신의 지정의 한도 내에서 모든 일들을 분석, 판단, 적용하느냐 아니면 그것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고 오히려 오류로 이끌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인정하고 매번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엎드리느냐에 달렸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인간의 영이 아닌 하나님의 영입니다. 인간 이성의 판단 범위는 물질계가 한도이므로 천국 보좌에서 세상만사 특별히 자신의 신자 된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는 성령으로만 교통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 영과 영으로 교통한 자라야 죽어서도 천국 보좌 앞에서 깨어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현재 이런 저런 환난 가운데 힘들어 하십니까? 그 시커먼 터널이 도저히 끝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그렇게 여겨질지라도 하나님 안에선 영원한 잠이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선 결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환난도 없습니다. 이미 당신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다 감당하시고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사망의 쏘는 것마저 정복하셨는데 이 땅에서의 인간적 환난이 그분에게 더 이상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 부분에 진심으로 확신을 하면 영원한 본향은 보장되어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글쎄 예수 믿은 것부터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베드로전서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베드로의 말은 그 당시 죽어있던 시람들에게 생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유앵겔리스데,
단순과거형)는 것을 의미한다.
”육체로는 시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한다는 것은, 죽음으로 한번 심판을
받았으나 소망으로는 계속 살아 있음을 가리킨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잠"이라고 부른다.
죄된 육신으로는 사람을 따라 죽었으나, 살아 생전에 복음을 받아들였으니 영적으로는 심판 시에 하나님을 따라 불멸의 몸으로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전도서 3:21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고 되어 있다.
”누가 알랴’는 말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공동번역은 ”사람의 숨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숨은 땅 속으로 내려간다고 누가 장담하랴’라고 번역했고,
현대어 성경은 ”인간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저 깊은 땅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번역하였다.
여기 ”혼”은 ”루아흐”인데 공동번역이 ”숨”으로 번역한 것은 잘한 것이다.
만일 죽은 시람의 혼이라면 짐승도 혼이 있다는 말이 되고 땅 속에는 짐승의 혼이 가득하다는 말이 되어 어리둥절하게 된다.
문맥을
잘 살펴보면 18절에서 사람이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하심이라”고 하였고,
20절에는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 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라고 한 후, 위의 성경절이 나온다.
이것은 사람과 짐승의 숨이 각기 다른 곳으로
간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죽기는 일반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 잠들다(2837) κοιμάω
스트롱번호 2837
관련 성경 / 자다(마 27:52, 행 12:6, 살전 4:13), 잠들다(눅 22:45, 요 11:11, 행 13:36), 죽다(고전 7:39), 잠자다(고전 11:30, 15:18).
* 깨우다(1852) ἐξυπνίζω
스트롱번호 1852
관련 성경 / 깨우다(요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 "잠들었다"는 것은 성도의 죽음을 의미한다.
잠들었다가 깨는 것처럼, 성도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때가 온다.
벵겔(Bengel)은 말하기를, "경건한 자의 죽음은 하늘 나라의 방언으로는 잠듬이다"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셨던 사례가 세 가지로 소개됩니다.
첫째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마가복음 5:35-43)
41.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둘째는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요한복음 11:1-57)
42. 나사로야 나오라!
셋째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누가복음 7:11-17)
14. 청년아 내게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야이로의 딸은 어린이를 살리신 것
과부의 아들을 청년을 살리신 것
나사로는 장년을 살리신 것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와 청년과 장년을 살리셨다는 것은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차별화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랍비라거나, 선지자라거나, 능력이 많은 분이라는 등 말들이 많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위대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시각입니다.
그러나 죽은 자를 살리시는 모습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게 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의 작은 마을인 나인성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성문 앞에 이르렀을 때 한 장례행렬과 마주치셨습니다.
한 과부의 아들이 죽어서 장사지내러가는 행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슬퍼하는 과부를 찾으셨고, “울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장례행렬 안으로 들어가셔서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 말씀이후 죽었던 과부의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리고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고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통 선지자가 아닌 큰 선지자라고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식이 두루 퍼졌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불쌍히 여기사”
13절을 보면 “불쌍히 여기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이 과부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글자 그대로 ‘과부’입니다.
이미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없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과의 사별의 슬픔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홀로 아들을 키우며 고생스럽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들마저 죽었습니다.
그것도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남편과 사별할 때보다 그 슬픔은 훨씬 컸을 것입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 슬픔은 이 여인이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남편 죽고 겨우
아들 의지하고 살아왔는데, 그 아들마저 곁을 떠나게 되자 더 이상 살아갈 힘을 잃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울었을까요?
지금 아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지 않을 수 없어 장례 행렬을 따라가고는 있지만, 제대로 걸을 수는 있었을까요?
아마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이 보다 더 슬프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이 과부를 주목해 보셨습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은 성경원어 스프랑크니조마이”(σπλαγκνίζομαι)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의 원 뜻은 ‘창자가 뒤틀리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과부를 보시며 창자가 뒤틀릴 정도의 슬픔을 느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말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바로 “애끊다.”라는 말입니다.
너무 슬퍼서 창자가 다 끊어질 것 같다는 것입니다.
유행가 중에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미아리고개만 생각하면, 공산당에게 끌려가 소식이 없는 남편 생각에 단장 즉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이 밀려온다는 노래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과부를 보실 때 단장의 슬픔을 느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애 / 어원 <애(腸)<두시-초>
‘연민’(憐憫)과 ‘공감’(共感)이란 말이 있습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다릅니다.
고통을 겪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을 보며 마음속에 생기는 감정이라는 면에서는 같습니다.
그러나 느끼는 감정의 깊이나 질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연민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sympathy’라는 말입니다.
“함께”라는 뜻의 ‘sym’과 “느낌” 또는 “고통”을 뜻하는
‘pathos’가 합해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옆에서 누군가의 고통이나 슬픔을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고통과 슬픔을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이에
비해서 공감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empathy’라는 말입니다.
“안에”라는 뜻의 ‘em’과 “느낌” 또는 “고통”을 뜻하는
‘pathos’가 합해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누군가의 안으로 들어가 고통이나 슬픔을 함께 느끼고 겪는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함께 가슴 아프게 느끼고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겪는 다는 말입니다.
장례 행렬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 과부의 고통와 슬픔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바로 이 과부를 연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과부를 보시고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고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 과부의 슬픔을 당신의 슬픔으로 느끼시며 공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힘든 일을 겪을 때 보고 아십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 주목해 보시고 그 슬픔을 아십니다. 그런데 그 뿐이 아닙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으로 우리의 고통을 함께 겪으시고 또 함께 슬퍼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슴 아파하시며 우리를 공감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공감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울지 마라”
본문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부의 슬픔을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으로 함께 느끼시면서 이 여인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상을 당한 가정을 위로 차 방문합니다. 가서 조문도 하고 예배도 드립니다. 그러면서 늘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큰 슬픔으로 눈물 짓는 유족들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울고 있는 분들에게 “울지 마십시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울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아무 말 없이 손만 꼭 잡아드리고 옵니다. 만일 말해야 한다면 “주 안에서 위로 받으십시오.”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에 본문에 나오는 주님께서 울지 말라고 하신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왜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는지 그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하며 성경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이야기가 성경에 세 번 나옵니다. 그런데 이 세 번 모두 예수님께서 슬퍼하며 울고 있는 유족들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조금 뒤에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니 울지 말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고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유족들은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주님의 위로, 저 하늘로부터 임하는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한 번은 미국 시카고 구세군센터에서 부흥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부스 터커(Booth Tucker)목사님이 “하나님의 위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았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배 후 한 남자가 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따지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로요? 만일 당신의 아내가 죽고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부르면서 칭얼대고 있다면, 그래도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 후 기차 탈선사고가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의 사모님이 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아내의 장례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며칠 전 누군가 저에게 아내를 잃는다면 그 때도 위로에 대해서 설교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만약 그분이 여기 계시다면 이제 그 답을 드리고자 합니다. 보시다시피 제 아내가 이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제 아이들은 울부짖으며 엄마를 찾고 있습니다. 저는 이 순간 그분과 마찬가지로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겪고 있습니다. 그 누구의 말도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위로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로 이 슬픔을 견뎌내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위로하십니다.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주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실 분은 오직 주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위로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저 하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일어나라”
본문 14절을 보면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보고 슬퍼하고만 계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신 것입니다. 이 사건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 과부가 예수님께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이 과부를 도와주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당시 관에 손을 대는 일은 율법을 어기는 일입니다. 율법에 시체나 무덤이나 주검과 관련된 것을 만지는 일은 부정한 일이기 때문에 금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율법의 금기를 깨시고 지금 관에 손을 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결단하시고 나서신 것입니다. 율법의 금기에도 불구하고 개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사람을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개입하셔서 그 인생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어나라.” 이 말씀이 놀라운 것은 그 말씀을 하신 대상 때문입니다. 말씀하신 대상이 바로 죽은 시체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벌써 죽은 뒤 며칠 됐고, 염을 하여 관에 넣어놓은 시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른 두 번의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에서도 똑같이 하셨습니다. 막 5:41을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그리고 요 11:43을 보면, 나사로를 살리실 때 무덤 밖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시체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수 없는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음의 강을 넘어가서 되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병원에 가보면 의료진들이 환자를 살려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특히 응급환자인 경우 골든타임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시간 안에 병원으로 이송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앰뷸런스 안에서도 의료진이 응급처치를 하며 죽음을 막아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연락을 받고 대기하고 있던 병원에서는 응급환자가 도착하자마자 발 빠르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는데도 심박이 멈추면 끝입니다. 의사가 사망 진단을 내리고 흰 천을 덮습니다. 그리고 모든 의료행위를 중단합니다. 진료하던 의료진들이 다 떠납니다. 가족들도 더 이상 곁에 있지 못하고 슬픔 가운데 그 곁을 떠나게 됩니다.
사람에게 죽음은 한계입니다.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한계입니다. 일단 죽음이 찾아오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무엇인가 몸부림치며 하던 노력도 이 한계 전까지만 합니다. 희망을 가져도 이 한계 전까지만 갖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이 한계를 알고 이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안 될 거야. 그것은 기도해도 소용없을 거야. 마음으로 넘지 못하는 한계가 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한계가 점점 더 좁아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기도할 수 있는데도 포기하고, 믿고 나갈 수 있는데도 주저 않고 있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지라.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어떤 믿음으로 순종했는지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은 자기가 이삭을 죽여 번제로 바쳐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려내실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을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실제 칼로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줍니다.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바로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한계가 어디까지 여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일으키실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런 능력의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저앉아있는 영혼들, 죽어가고 있는 영혼들을 향해 일어나라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침체되고 있는 한국교회를 향해 일어나라 말씀하여주시옵소서.”
“우리 가정, 우리 사업, 우리나라를 향해 일어나라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Then he said to his disciples, "Let us go back to Judea."
요한계시록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 처음(4413) 프로토스(prōtŏs) πρωτος, η, ον
처음이란 하나 둘 셋의 순서가 아니라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좋습니다.
물론 차례와 순서라는 의미도 있지만......
마태복음 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must be your slave.
마가복음 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must be slave of all.
처음 사랑(요한계시록 2:4) 사랑이 으뜸이다 - 서로 사랑하는 것
처음 믿음(디모데전서 5:2) 믿음이 으뜸이다 -
처음 말씀(요한일서 2:7)
디모데전서 5: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요한일서 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돈, 명예, 권력일 수도 있다. 행복, 사랑, 건강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의미 있기 위한 필수조건이 하나 있다.
바로 ‘기억’이다.
전 세계를 정복해도, 내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결국 무의미하다. 나에 대한 기억이 있기에 내가 존재한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에 나는 ‘나’일 수 있다. 인간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점점 흐릿해진다.
인간은 한 사건을 접한 후 단 10분 만에 42%, 1시간 후 50%, 하루가 지나면
70%, 1개월 뒤엔 80%가 잊힌다.
‘기억은 시간에 반비례한다’.
그 유명한 Hermann Ebbinghaus의 ‘망각의
곡선’ 이론이다.
그러나 오래되어도 잊지 않는 것이 있다.
자전거 타는 법이다.
익숙한 악기 연주다.
치매나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주로 측두엽이 손상된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는 바이올린 켜는 법을 잊지 않는다.
에베소 교회의 회복을 위한 그리스도의 음성이다.
처음 사랑이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라’고 말씀한다.
‘생각하고’에 해당하는 ‘μνημονεύω’(므네모뉴오)는 ‘기억하다, 언급하다’ 뜻이다. KJV, NASV, NIV, NRSV
모두 ‘remember’번역하고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하신 일은 찬송과 고백으로 기억된다(비교, 시 6:5). 절기는 기억을 위해 제정되었다(출 13:3). 기억하는 것은 현실화하는 것이다. 과거 사건이 동시대화되는 과정이다. 기억을 통해 절기를 지킬 때 그 순간은 과거와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잃어버린 처음 사랑은 과거다. 기억을 통해 현실화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대대로 기억될 것이다(출 3:15). 말씀과 기록이 기억을 돕는다(출 17:14). 기억은 사람을 사람답게 떠받치는 기둥이다. 기억이 사라지면 사람다움도 함께 사라진다. 나와 가족과 이웃은 서로에 대한 기억으로 연결돼 있다. 기억의 다리가 끊기는 순간 우리는 인격적·사회적 존재로서 낭떠러지에 서게 된다.
‘기억하다’는 LXX에서 중요한 단어 중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자비 가운데서 사람을 기억하신다(창 8:1; 19:29). 엄청난 사건이다. 언약(창 9:5; 출 2:24)과 족장들(출 32:13)을 기억한다. 백성들도 하나님의 과거 행위와 계명들을 기억한다(민 15:39-40). 처음 사랑을 기억하고 회복하는 것은 자신이 품꾼이 아니라 지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도와준다. 기억은 그리스도인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거주할 수 있는 끈이다. 공동체 안에서 산다는 것은 공동기억을 구축하는 행위다.
1. 처음 사랑을 기억하라
장석주의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의 첫 시구다.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어보리라.”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렘
2:2. 겔 16:8).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는 세 줄짜리 단시(短詩)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시인은 사그라져가는 연탄을 통해 뜨거운 사랑의 회복을 노래했다. 연탄이 비록 그
열기를 모두 세상에 내주었다고 하더라도 연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어떤 존재가 쓸모를 상실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존재는
변함이 없다. 에베소 교회는 박해 속에서 옳은 교리를 지켜낸 교회다. ‘처음 사랑을 잃었다.’ 거짓 사도에게 진리를 수호하는 일도
긴요하다. 판단만 하는 무서운 교리주의자가 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처음 사랑을 기억하라고 현재 명령형으로
말씀하신다. 단순히 추억을 떠올리라는 것이 아니다. 처음 사랑을 행하라는 것이다. 기억하는 것은 종종 원래의 경험의 ‘현실화’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교회 가운데를 거닐고 있다. 할 일이 너무 많아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다. 비극적인 역설이다. 하나님이나 서로에 대한 사랑보다 진리를 파수하는 일에 더 매진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신자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수고와 인내로 칭찬받은 교회다. 처음 사랑은 냉각되고 정통성에 대한 잘못된 열정으로 대체되었다. 기억이란 무엇일까? 정체성은 기억을 전제로 한다. 신생아의 기억은 저장되지 않는다. 기억을 만들어내는 해마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숨을 멈추는 순간 해마 역시 파괴된다. 우리의 죽음 역시 기억되지 못한다. 에베소 교회는 신생아도 아니다. 죽은 교회도 아니다.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기억해야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이 뜨거웠던 날들을 기억하라고 요청받는다. 이 버림은 감정적 열정의 상실이 아니다. 믿음의 실제적 실천의 문제다. 회개에는 지름길이 없다. 처음 사랑에서 빗나가게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초인적 노력을 요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처음 사랑을 기억하고 회복하는 것은 온고지신과 다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은 논어 ‘위정(爲政)’에 나온다. ‘옛 것을 익혀서 새 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온(溫)은 옛 것의 부활이 아니다. 이전의 질서를 가열하고 변형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처음 사랑을 기억하라는 것은 새로운 것이나 색다른 것을 담고 있지 않다. 도덕적 권고를 되풀이하는 개념이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은 하나님의 과거 행위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위는 복음과 함께 기억되어야 한다(마 26:13; 막 14:9).
2. 처음 사랑을 기억하고 회복하라
에베소 교회는 회중 가운데 사랑이 충만했던 이전의 날들을 기억하라고 요청받는다. 사랑의 대상으로 하나님과 이웃 모두 가능하다. 니골라 당의 행위에 대한 미움과 ‘처음 사랑’의 상실이 강하게 대조된다. 후자를 포함하는 것이 분명하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에게 편리한 것을 위주로 기억한다. 자기에게 유리하고 좋은 지표를 먼저 기억한다. 이걸 '선택적 기억'이라고 한다. 에베소 교회는 거짓과 싸움이 강하게 각인된 기억만 남겼다. 사랑은 가치가 없다고 여기고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교회는 예수님(딤후 2:8)과 교회 지도자들(히 13:7)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처음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가난한 자들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건이 있다.
‘무화과’는 번영과 심판의 상징이다.
첫 믿음의
회복을 촉구하는 ‘기억의 식물’이다.
유월절 즈음에 맺히는 첫 열매는 히브리어로 ‘파게(Phage)’다.
이후에 차례로 열리는
무화과는 ‘테에나(Thaena)’다.
무화과처럼 신앙의 첫 열매, ‘파게’를 맺어야 한다.
다시 그 가지에 잘 익은 ‘테에나’를
맺어야 한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할 의무가 있다.
기억은 더 나은 관계로 돌아가도록 하는 데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
‘기억하라’는 현재 명령형이다.
‘회개하라’는 부정과거 명령형이다.
대조를 이룬다. 분명한 단절에 대한 지속적인 태도임을 보여 준다.
에베소 교인들은 무엇이 옳은
것이 무엇인지 구별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회개하여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이다.
용서한 사람과 처음 사랑을 나누었다.
그 사랑을 지속해야 한다. 우리에게 초청한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십자가로 돌아가라고
초청한다.
생명나무는 문자적으로 ‘죽은 생명의 나무’ 또는 ‘십자가’다.
독일의 신경생물학자 Hannah Monyer와 철학자 Martin Gessmann이 함께 쓴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에서 기억은 과거 경험을 보존하는 것만이 아니라 항상 새롭게 재처리해서 미래에 유용하게 쓰이도록 만들어 놓는다고
한다.
기억은 더 나은 관계로 돌아가도록 하는 데 강력한 에너지가 될 수 있다.
탕자는 아버지 집에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많음을 생각했다(눅 15:17-18).
청중들에게
‘기억하라’는 지난날 받았던 가르침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전의 도덕적, 영적 규범을 따라 생활하라는 요구다.
그 규범들을
되찾으라고 격려하는 초기 그리스도교 본문들에서 자주 사용된 방법이다.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차별 없는 친절함’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스스로 표현되는 형제에 대한
태도다.
처음 사랑을 유지하지 못하면, 소기의 성과를 낼 수 없다. 맹자는 말했다.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은 우물을 파는 것과
같다.
우물을 아홉 길을 파도 샘에 이르지 않으면, 그것은 쓸모없는 우물이 된다(有爲者辟若掘井, 掘井九軔而不及泉, 猶爲棄井也).”
그리스도인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다.
오실 때까지 오래 기다려야 한다. 처음 사랑이 식어지면, 결국 못 만나게 된다.
회복의 단계는 마음이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표류하기 시작한 출발점을 기억하는 것이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세 개의 동사가 나온다.
생각하라
회개하라
가지라
처음 사랑을 찾는 과정이다.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것이
잘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행위를 하는 니골라는 미워하는 것은 다르다.
이단의 교훈은 미워해야 한다.
이단에 빠진 자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바리새인의 교훈은 미워해야 한다.
원수는 사랑하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지 않는가(마 5:44).
회복에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어떻게 상처 주었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에베소 교회의 실패는 하나님에 대한 실패가
아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다. 미움이 커서 사랑이 머물 곳이 없어진 것이다.
본문은 에베소 교회의 책망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 세 가지를 명령어를 사용하여 제시한다.
이러한 세 가지 명령은 에베소 교인들을 보호하시려는 그리스도의 단호한 명령이며 권고이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3421)
- 이것은 죄의 원인을 깊이 생각하되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생각하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생각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므네모뉴에'(*)는 현재 능동태 명령형으로 '계속하여 생각하고 회상하라'는 의미이다.(눅 15:17-22). 에베소 교인들은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그것을 어디에서 무엇으로 인해서 상실하게 되었는가를 상고해야만 한다.
μνημονεύω 스트롱번호 3421
회개하여(3340)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노에손'(*)은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 단번에 결정적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다(마 3:2; 눅 15:20).
μετανοέω 스트롱번호 3340
처음 행위를 가지라(4160)
- 에베소 교인들은 특별히 회개하여 돌아가되 무분별한 사랑이 아닌 그들이 가졌던 처음의 사랑으로 돌아가야 한다(Kiddle, Moffatt).
여기서 '가지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에손'(*)은 '행하다'는 의미를 가진 '포이에오'(*)의 부정 과거 능동태 명령형으로 '지금 즉시 행하라'는 말이다(마 3:8, Robertson, Johnson, Mounce).
에베소 교인들은 지금 즉시 처음에 그리스도에 대해 가졌던 사랑으로 형제들에게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ποιέω 스트롱번호4160
하다
제조하다
행하다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 본문은 그리스도의 권면을 외면했을 때 초래할 결과에 대한 진술이다.
'내가 네게 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코마이 소이'(*)는 미래적인 현재 능동태로 예언적인 사실의 확실성을 나타낸다(22:20; 요14:13; 요일 2:18).
그러기에 혹자가 주장하는 대로 '그리스도의 재림'때의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보다는(Clarke), 오히려 회개치 않을 경우 맞게 될 현재적 심판을 선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Morris, Charles, Alford, Plummer).
한편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에베소 교회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라고 해석한다(Ramsay).
2. 당장 있게 될 지금의 심판을 말하는 것으로 에베소에서 교회가 없어지고 그 도시 전체가 황폐화할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요 15:6; 엡 1:22, Mounce, Greijdanus, Charles).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문맥상 현재에 임할 그리스도의 심판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유대로 다시 가자(Let us go back to Judea.)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신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며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흥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위험한 곳으로 다시 가자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처음 믿음으로 돌아가자!"
"처음 은혜를 회복하자!"
"처음 사랑으로 다시 시작하자!"
이러한 의미로 적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시 가시겠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서 왜 그곳으로 가시려고 합니까? 하고 반문하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빛이 있을 동안은 낮이라고 하시며 낮이 밤을 이길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세상은 평안히 살아가여 할 장소가 아니라 싸워야 할 전쟁터와 같은 곳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싸움을 선한 싸움이라고 합니다(딤전 1:18. 6:12. 딤후 4:7).
더구나 예수님도 세상에서 싸워서 이기셨다고 하셨습니다(요 16:33)
따라서 믿음의 사람들을 십자가 군병이라고 합니다.
군병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훈련을 받아야만 합니다.
성경공부는 말씀을 위한 훈련입니다.
기도는 말씀으로 공격할 수 있는 훈련입니다.
봉사와 섬김은 지친 영혼들을 주님의 편으로 이끄는 훈련입니다.
그런데 훈련을 마치 지식 정보센터와 같이 운영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갖습니다.
철학자 하이덱거는 사람을 가르켜 "내던져진 존재(Geworfenheit. 被投性 存在)" 라고 합니다.
사탄이 권세를 잡은 세상에 던져졌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Birth) 죽을 때까지(Death) 매순간 선택하며(Choice) 살아야 할(Living) 사명을 갖고 세상에 던져진 존재(Das Ding)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던져진 존재로서 "나그네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저 천성(파트리스)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와 같습니다.
순례자의 특징은 이 세상에 거주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 계신 곳에서 함께 살아갈 그 날을 기다립니다.
육체의 죽음은 그 날의 시작입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일어서는 그 날에 비로서 완성된 천국의 삶을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 하루가 순례자들에게는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우리는 나그네의 길을 정처없이 걷는 인생이 아니라 저 영원한 나라를 향하여 가는 거룩한 순례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순례자의 길에서 승리하는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디모데전서 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디모데전서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디모데후서 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인간은 기존의 어떠한 본질에 지배되는 존재가 아니며 자기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실존적 존재'라며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를 만들었다. 여기서 실존이란 '존재한다'는 뜻이고, 본질이란 '이미 정해진 운명'을 말한다.
여기에 의자가 있다고 하자. 의자는 일정한 구조로 만들어진 물체인 동시에, 일정한 용도를 지니고 있다. 의자는 '앉는
도구'라는 본질이 있다. 의자처럼 구조와 용도가 미리 정해진 존재는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 반대로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
실존이 먼저 등장하고 난 뒤에 무엇이어야 한다는 본질을 만든다. 스스로 존재하면서 만들어 낸 본질이 삶의 성공 여부를 결정한다.
따라서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태아나 죽을 때까지 무한한 가능성 안에서 매 순간 자유롭게 인생의 길을 끊임없이 무언가 선택하지 않으면 앞으로 전진할 수
없다. 그래서 샤르트르는 '삶이란 B(Birth, 탄생)와 D(Death, 죽음) 사이의 C(Choice, 선택)'이라며 '사람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진다'고 분명히 말한다. 샤르트르의 이 말은 우리는 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며,
선택하며, 행동한다는 뜻이다.
삶이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고 선택하여 만들어가는 것으로, 사람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처한 현실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심하며 스스로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말이다. 사람은 다른 생명체와 달리 사유하는 까닭에 주어진
대로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살아간다는 인간의 존엄성이 있다. 우리가 불평불만 하는 사회도 결국 우리가 만들어낸 사회이기 때문에
계속 불평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샤르트르는 이를 논증하기 위해 사람을 사유하는 주체와 그렇지 않은 주체로 구분한다. 끊임없는 자신과의 대화, 즉 사유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삶을 늘 달리 만들어가는 힘 있는 주체를 대자적(對自的) 존재라 하고, 사유하지 않고 그냥 살아가는 자연적
존재를 즉자적(卽自的)존재라 했다. 대자적 존재야 말로 의식을 통해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참된 존재, 즉 실존이라 했다.
샤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졌다라고 표현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무한한 가능성 안에서 매순간마다 자유를 어떻게 실천했는지에 따라 인간의 삶의 가치는 결정된다.
그는 '인간은 자기 스스로 실현하는 한에서만 실존한다'는 말로 실존주의의 정의를 마무리하면서 어찌할 수 없는 남의 판단과 결정 그리고 환경에 책임을 돌리지 말라고 경고한다.
대체로 인간은 근거가 없는 것을 근거로 하여 실체, 자기, 주체, 사실, 진리, 정의 등이 무엇이라고 믿는다. 그런 것들은 무한광대한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그조차 변화하므로 형상도 없고 실체도 없다. 이처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생사소멸(生死消滅)을 반복하면서 쉼없이 변화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모든 존재는 무상한 것이고 무상하기 때문에 허무한 것이다. 하지만 무상하기 때문에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자기 존재를 깨우치는 한편 진정한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 모든 존재가 공(空)하면서 공하지 않다는 중도론(中道論)에서 보면 오히려 무상하기 때문에 세상을 비극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정면에서 응시하고 정진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이런 무상함을 깨우치는 것을 넘어서서 적멸의 상태, 즉 니르바나(Nirvana)의 열반으로 나가서 더 이상의 윤회가 없는 완전한 무(無)의 상태를 지향한다.
불교에서는 존재의 특성을 세 가지로 설명하는데 그 삼법인은 무상(無常) 무아(無我) 고(苦)다. 이 중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첫번째 팔정도(八正道)가 올바로 본다는 정견(正見)이다. 제행무상의 이론에 의하면 모든 존재, 모든 행위, 모든 인식, 모든 감정은 허무하고 공허할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허무한 것을 허무하지 않다고 믿으며, 공허한 것을 공허하지 않다고 착각하면서 없는 실체를 찾아 헤맨다. 여기서 일체의 고통이 생겨난다. 이것을 석가모니(釋迦牟尼 BC 563? - BC 483?)는 ‘인간은 고통의 바다에 빠져 있다’라는 뜻의 고해(苦海) 즉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하고 그 고(苦)를 없앤 궁극을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 했다.
제행무상 사상은 동물성을 가진 인간을 고상하고 고결한 존재로 설정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즉, 대다수의 인간은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집멸도(苦集滅道)에 빠지는 것이고 욕망의 주체이기 때문에 욕심과 집착과 어리석음의 탐진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 또한 한 인간의 업보일 것이므로 카르마(karma)가 작용하는 인과율(因果律)과 인연설로 이해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이 사상은 철학, 역사, 예술은 물론이고 여러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령 소동파는 ‘인생이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비슷한 것(人生到處知何似) 날아온 기러기가 눈밭을 밟은 것과 같을 뿐(應似飛鴻踏雪泥)’이라고 하여 무상한 인간존재를 시로 표현하고 있다. 인도철학에서 유래하여 힌두교, 불교, 도교 등에 큰 영향을 미친 제행무상이라는 개념은 존재론과 인식론의 기본 주제였다. 한편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그리고 실존주의적 허무에서 보듯이 불확실한 존재로서의 인간과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생각은 인류의 보편적인 사유이다.
- 끝 - (충북문화예술연구소장 / 충북대교수 김승환, 2010년 5월 20일 목) *참고나 인용을 했을 경우에는 정확하게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표절은 범죄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When he heard this, Jesus said, "This sickness will
not end in death. No, it is for God's glory so that God's Son may be
glorified through it."
죽을 병이 아니라(This sickness will
not end in death.)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을 때 이미 결론을 알고 읽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은혜를 스쳐 지나가는 경향이 비일비재(非一非再) 합니다.
그 좋은 예가 나사로의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몇일만에 살아났습니까?
예수님께서 삼일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삼일만에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은 후 나흘이라고 합니다.
또한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부활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부활이 아니라 소생(蘇生)이라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지만 영원히 살아난 것이 아니라 다시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가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왜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셨습니까?
이러한 것을 "하나님의 관점(God's Perspective)"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구약에서는 율법의 관점이라고 합니다.
신약에서는 복음의 관점이라고 합니다.
율법의 관점은 그 핵심이 십계명입니다.
복음의 관점은 그 핵심이 십자가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관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복음이란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죽은 사람을 일컬어 잠을 자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죽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날에는 모든 죽었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서 심판대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읽어야 하겠습니다.
나사로의 경우 하나님의 관점으로 읽는다면 세 가지 놀라운 은혜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하셨던 이 말씀은 세 가지 큰 뜻을 계시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전지 전능하신 신성(神性)
둘째는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일체(一體)
셋째는 나사로가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죽어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
천성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복음의 관점으로 십자가의 관점으로 읽고 묵상하며 나를 향한 새로운 깨우침을 찾는 즐거움을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신앙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죽은 것도 잠들었다
병든 것도 죽을 병이 아니다
이렇게 역설적인 사고를 주장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 이 말씀은 세 가지 큰 뜻을 보여 준다.
(1) 예수님의 전지 전능하신 신성(神性)을 보여 주고,
(2)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일체(一體)이신 사실을 보여 주고,
(3) 또한 이 말씀은 나사로가 죽지않으리라는 것이 아니고, 그가 죽어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곧, 그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게 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여기 있다.
* 죽음(2288)
*병(769)
하나님의 관점에는 율법의 관점과 복음의 관점으로 구분합니다.
율법의 관점은 십계명이 핵심이 됩니다.
복음의 관점은 십자가가 핵심이 됩니다.
율법의 관점은 행위가 중심이며, 복음의 관점은 은혜가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경적 사고라고도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잡으려고 하나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를 지나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던 곳으로 가십니다.
신이라 하였노라(34-38)
예수께서는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라는 말씀을 인용하십니다(시 82:6).
'너희는 신들이며'라는
말은 '재판하는 자'를 가리킵니다(시 82:1).
하나님은 '신들'이라고 부르는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이 신들은 재판을 위해
임명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공정한 심판을 행하지 않았고 단지 백성 위에 군림하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심판을 받습니다.
만일
시편 82편에 나오는 자들이 신들이라면 실제로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고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성모독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보냈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페스테일렌'입니다.
이 단어는 분명한 공식적 임무를 맡기거나 권위를 주어 보낼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곧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냄받은 분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있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아도 관계없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면 그들은 예수를 거부할 명분을 잃게 됩니다.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던 곳(39-42)
궁지에 몰린 유대인들은 예수를 다시 잡으려 합니다.
그들은 이미 돌로 치려할 정도로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던 곳으로 가십니다.
공생애 초기에 요한을 찾아가서 세례를 받은
곳입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소리가 들렸던 곳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곳에서 얼마동안 지속되었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냅니다.
어쩌면 예수께서는 중요한 결단을 앞두고 마음의 준비를 했을 겁니다.
결코 유대인들을 무서워했거나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 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예수에 대해 증거한 것과 예수께서 행하신 권능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에 비해 권능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예수를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영성이 그 땅 가운데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일까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1446 BC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이집트에서 나왔다. 그러나 불순종의 결과로 바로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광야에서 방황하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훈련을 받는 시기를 갖는다. 여호수아의 인도로 1406 BC 요단강을 육지처럼 건넌 이스라엘은 신천지 약속의 땅에 정착했으나 항상 불순종으로 고난을 겪기도 한다.
사사 시대에는 하나님의 종들이 나타나서 백성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시간을 보냈고, 사무엘에 이르러서 왕정(王政, 1050 BC)으로 이행하게 된다. 왕정은 직접적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패륜(悖倫)이지만, 순종을 요구하셨다. 왕이 다스리던 시대 대부분 패륜을 저질러서 항상 하나님의 징계가 있었다. 물론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현군(賢君)도 있었지만 대체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했다.
통일 왕국은 솔로몬의 불순종(왕상11:1-13)으로 남북(南北)으로 나뉘게 되고 민족 간의 전쟁과 약탈이 끊이지 않았다. 불행한 역사이다. 다윗의 후손들은 남조(南朝) 유다(Judea)가 되었고 나머지 10지파를 중심으로 한 북조(北朝) 이스라엘(Israel)이 형성됨으로 분단국가(分斷國家)가 되었다.
이들은 모세의 유언을 무시했다(신8:11-20). 폐역한 민족이었다. 그 결과 북조 이스라엘은 722 BC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게 되고, 남조 유다는 586 BC 북방의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하고, 솔로몬의 성전이 불타고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는 수모를 당한다. 그 백성은 북방으로 끌려가고 민족적 이산(diaspora)이 이루어진다. 불순종이 가져온 결과이다.
설두화는 전체로 볼 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 2024 J. K. Kim패역한 민족에게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 주셨다. 왕정 시대 선지자들은 죄에 대해, 불순종으로 인한 징벌에 대해 선언하고 회개를 촉구하게 된다. 이런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 주는 선지자도 말라기를 끝으로 문을 닫으셨다. 그 이후 예수님이 오시기 까지를 중간 시대(400 BC-4 BC)라 하는데 영적으로 암흑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중간 시대 이스라엘을 지배한 국가는 페르시아(549 BC-331 BC),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336 BC-323 BC), 알렉산더 사후에 그의 봉신(封臣)들에 의해 세워진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323 BC-30 BC)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세워진 셀레우코스 왕조(321 BC-64 BC), 그리고 이스라엘의 자치 정부인 하스몬 왕조(142 BC-63 BC), 하스몬 왕조를 멸망시킨 로마제국(63 BC-AD 135)에 의해 지배되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즈음에는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고 수백 년간을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정복자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이 세계를 지배하는 위대한 국가를 이루는 초능력자일 것이다. 이스라엘 땅에 이루어질 가시적인 정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연은 스스로 조화를 이루나 인간은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 2024 J. K. Kim하스몬 왕조 시대 종교적 새로운 분파들이 생겨났다. 하스몬 왕조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만행에 저항한 마카비(Maccabean) 항쟁(166 BC-142 BC)의 결과로 태어난 이스라엘 자치 정부이지만 세속화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종교적 정파가 생겨났는데 이들은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들이다. 이들은 2세기 BC에 새로 생겨난 종교 세력들이다. 이들은 예수님 사역 시기에 예수님에 대항하는 기득권 세력으로 등장한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율법사 그리고 바리새, 사두개, 에세네 파 등에 저항을 받았다. 이들은 기득권 세력이고 당시 사회의 지도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본질적 문제를 외면하고 형식적 면에 치우친 사람들이다. 백성을 위한 사람들이 아니고 무거운 짐을 지게 한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한 사람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무리이다.
자연은 우리의 스승이다.이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살려둘 수 없는 사람이라 보았다.
그들에게는 진리가 없고, 생명력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따라서 예수님은 이들을 회칠한 무덤으로 표현하신다.
예수님은 생명의 역사를 통해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진리를 선포하셨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안식으로 초대하신다.
짐은 지고 있는데 무게가 없는 짐, 멍에를 메었는데 아주 쉬운 멍에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행위는 이에 정면으로 반대되었다.
예수님은 이들을 강하게 질타하셨고 그들은 깊은 반감을 보이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하게 된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은 그들의 모의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으로 진행되었고, 예수님은 세속적 지상의 메시아 왕국이 아니라, 영적 메시아 왕국을 이루시어 만인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성취하신다.
예수님은 참 사람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다(요한복음 1:14, 20:28)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요한복음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Thomas said to him, "My Lord and my God!"
예수님의 탄생은 마치 4성 장군이 부하 군인들의 생활상태가 어떤가를 알아보기 위해 별 네 개를 떼어버리고 어깨에
일등병 계급장을 달고 말단 부대에서 근무하다가, 어느 날 다시 별 네 개를 달고 시뻘건 별판을 붙인 자동차를 타고 원 위치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무릎 꿇고 고백한 그 신앙고백은 최고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8절에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My Lord My
God)라고 한 것은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분입니다. 역사와 시간을 초월해
계시던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시간과 역사 속으로 찾아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창조 이래 가장 큰 사건이며 가장 놀라운
사건입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통틀어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탄생보다 더 큰 사건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상한 별이 나타났고
이스라엘 나라도 아닌 먼 매데와 파사 나라에서 동방박사들이 하늘에 나타난 징조를 보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찾아 와서 경배했고, 밤중에
목자들이 양떼를 지키고 있을 때 허다한 천군과 천사들이 나타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라고 찬송했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보면 천사가 나타날 때 보통 하나나 둘, 셋 나타났지 이렇게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천군과 천사들이 나타난 일은 없습니다. 아람군대 18만 5천 명을 진멸할 때에도 천사 하나(an angel)로 되어 있지 이렇게 많은 천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신비 중에 최고의 신비는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 되시고 참 사람이 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가장
중요한 교리이지만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 되시고 참 사람(God-Man)도 되신다는 이 진리는 제일 중요한 교리이면서도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Webster사전을 쓴 유명한 Daniel Webster씨에게 어느 분이 묻기를 “Webster씨 그리스도가 하나님도
되시고 사람도 되신다는 것이 이해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까 대답하기를 “아니요, 나는 그것을 이해(comprehend)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것을 이해했다면 그는 나보다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초인적인 구세주(superhuman savior)가 필요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진리는 피조물 인간의 두뇌로는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역점을 두어 “그리스도교”라고 하지 성부교 혹은 성령교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을 때 하나님도 바로 알 수 있고 성령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못 알면 거기서 이단이 생겨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 되시고 참 사람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인하면 이단입니다. 요한일서 4장 2~3절에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참 크리스천이요,
구원 받은 성도입니다.
붉은색 병에 하얀 우유를 담아 놓으면 포도주인지 우유인지 모릅니다. 쏟아보면 우유인 것을 아는 것처럼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인지 아닌지를 잘 모르지만 부활승천하실 때에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1. 초대교회의
그리스도론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God-Man)이신데 초대교회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었습니다. ◎ 4세기경
Arius(Alexandria 교회의 장로)는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logos)일 뿐이다”라고 했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
아폴리나리스(Appolinaris-Laodicea교회의 감독)는 “인간의 몸을 가졌으나 인간의 영을 가지신 분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 5세기경 네스토리우스(Nestorius-Constantinople교회의 장로(patriarch))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다. 두 인격을 가진 분이다”라고 했는데 한 인격이 아니라 두 인격을 가졌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 또 5세기경
유티키스(Eutyches-Constantinople의 수도사)는 Nestorian주의를 열심히 배격했습니다. 주님의 성품의 또 다른 학설을
주장했는데 “그리스도의 인성(human natrue)은 그리스도의 신성(divine nature)에 흡수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즉 그리 스도의
인성은 잠시 있었다가 없어진 것이라는 뜻이 되므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성(divinity)은 강하게 견지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논쟁을 거듭하다가 간단히 네 단어로 정의를 지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것은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참으로(truly), 완전히(perfectly), 나눌 수 없게(undividedly), 섞인 것이 아닌 상태로(unmixedly) 연합된
것이다”라고 간단하고 편리하게 정의를 내렸습니다. 여기서 “참으로(truly)”라고 하는 것은 Arian주의를 배격한 것이고
“완전하게(perfectly)”는 Appolinarian을 배격한 것이고 “나눌 수 없게(undividedly)”란 것은 Nestorian을
배격한 것이고 “섞인 상태가 아닌(unmixedly)”라고 한 것은 Eutyches를 배격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God-Man)이신 분이라는 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2.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는 사실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되시고 사람이 되신 분인데 예수님의 인성(human nature)보다 신성(divine nature)을
증명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봅니다. 요한복음 20장 28절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말씀에서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① 그의 생활에서 신성이
나타남
⒜ 동정녀 탄생
마태복음 1장 20절에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라고 천사가 일러주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결혼관계를 통하여 태어나셨다면 아담의 후손, 죄인으로 태어나신 분이므로 하나님도 될 수 없고 우리의 구세주도 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장 35절에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라고 하고 37절에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 죄가
없으신 분
베드로전서 2장 22절에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라고 하시고, 히브리서 4장 15절에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전대미문의 기적을 행하신 분
예수님은
35번의 기적을 행하셨는데,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3:2)라고 한 니고데모의 말대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전대무문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 희생물로 죽으심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죄 없는 피를 다 쏟아주셨을 때 백부장이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다가 “진정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했습니다.
⒠ 죽음에서 부활하심예수님은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신
절정입니다.
⒡ 하늘로 승천하심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계시다가 감람산에서 500여 명의 신자들이 보는 데서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습니다(행1:9-11).
② 그의 주장하신 말씀에 신성이 나타남
⒜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고 하심
요한복음 17장 5절에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했고,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했습니다.
⒝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을 하심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시자 그가 일어나 걸었습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 인간의 삶 속에서 첫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하심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라 하시고 우리의 마음에서 첫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
심판주가 되실 것이라고 하심
창조, 보존, 심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인데 예수님은 최후 심판주가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십니다.
③ 하나님께 대한 이름이 예수님께 사용됨
이사야 44장 6절에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6절에는 “…나(예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계22:13등)라고 했습니다. 시편 24편에 하나님을 “영광의 왕”이라고
했는데, 고린도전서 2장 28절에 예수님을 “영광의 주”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9장 5절에 “…저(예수)는…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했습니다.
④ 하나님의 다섯 가지 속성을 가지심
⒜ 하나님과 같이
무소불능(omnipotent)하신 분입니다. 질병을 고치시고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 하나님과 같이
무소부지(omniscient)하신 분입니다. 수가성 여인의 비밀을 아셨고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밑에 있었던 것과 그의 진실함을 다
아셨습니다.
ⓒ 하나님과 같이 무소부재(omnipresent)하신 분입니다. 예수님도 동시에 어디에나 계신분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라고 하셨습니다.
ⓓ 하나님과 같이
영원하신(eternal) 분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했는데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3:14)라고 하셨는데 요한복음 8장 58절에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 하나님이 하신 일을 예수님도 하셨습니다. 창조, 보존, 죄 사함 등 하나님이 하신 일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 하나님이 받으실 예배, 믿음, 충성을 그리스도께서도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일시적으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다가 헌옷 벗듯이 몸을 벗어버리고 하늘나라로 올라가셔서 신성만 남으신 분이 아닙니다.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창 자국, 못 자국을 만져본 것처럼 이다음에 우리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도 그 못 자국, 창 자국은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 되시고 참 사람이 되신 것은 영원한 변화입니다.
그가 이렇게 되신 것은 죄로 말미암아 멸망 받을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고 지옥에 갈
우리를 천국에 보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우리는 다 상상을 할 수가 없고 영원히 감사하고 찬송해도 다 못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천상의 계시를 보았을 때의 장면이 요한계시록 5장 9~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또 12절에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라고 천천, 만만의 성도들이 찬송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시간이 없고 다만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님이 계셨고 목마르기도 하셨고 울기도 하시고 불쌍히 여기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 생존시에 로마의 퍼블리우스
렌트루스(Publius Lentlus)라는 하원의원이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보고 로마 하원에 써 보낸 서한이 있습니다.
“요사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높은 덕망을 지닌 사람이 우리 가운데 나타났는데 그는 지금 우리 가운데 생존해 있고 이방인들은 그를 진리의 선지자라 하고 그의 제자들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는 죽은 자를 살리고 여러 가지 질병을 고쳐주고 있습니다.
약간 큰 키에 자색이 고우며(comely) 대단히
존경스러운 용모를 가진 분이며 사랑과 두려움을 함께 지닌 분입니다.
그의 머리칼은 잘 익은 밤색깔이며 귀에까지는 직선이며 아래로 내려와
동양적으로 보이는 굽실굽실한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왔습니다. 앞머리의 중간에서 머리칼이 반으로 갈라졌고 나사렛 사람들의 풍습을 가졌고 앞이마는
반듯하고 고상해 보이며 그의 얼굴은 점이나 주름이 없이 아름다우며 고운 붉은 색을 띠었고, 그의 코와 입은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이 날카롭게
보이며 수염은 머리칼과 같은 색깔에 짙으며 너무 길지는 않습니다.
그의 모습은 순진해 보이면서도 성숙해 보이며 그의 눈은 회색이며 빠르고 깨끗해
보입니다.
비판할 때는 무섭고 훈계할 때는 예의 바르고 공평하게 말을 하며 대화할 때는 쾌활(pleasant)하면서 끌어당기는
힘(gravity)이 있으며 누구도 그가 웃는 것을 본 기억이 없으나 우는 것을 본 사람은 많습니다.
그의 몸은 균형이 잡혔으며 훌륭해
보입니다.
그의 손과 팔은 유쾌해 보이고 말할 때에는 온건하고 겸손하며 지혜로우며 독특한 미와(singular beauty) 보통사람을 능가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 되신 분이며 인성과 신성을 영원히 갈라놓을 수 없는 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면 예수님은 인간 형상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 되십니다.
예수 - 참 하나님(신성), 참 사람(인성)
사람 -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
예수 - 인간의 형상을 입고 오신 하나님
염치(廉恥) : 청렴할 렴(염), 부끄러울 치(치)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and many people came to him. They said, "Though John
never performed a miraculous sign, all that John said about this man was
true."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므로 세례 요한이 처음 세례를 주던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않았으나 요한이 이 사람에 대하여 말한 모든 것이 참이라고 칭송합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언행심사(言行心思)"를 일컬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와 행동하는 자세 그리고 마음의 생각이 진실한가 아니면 거짓인가에 의해 그 사람이 평가합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다 참이라(This man is true)"고 하는 것은 평소에 예수님의 인품이 어떠하였는지를 가늠케 합니다.
사(思)는 참된(眞)생각
언(言)은 착한(善)말
행(行)은 아름다운(美) 삶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聖徒)들도 예수님처럼 "사언행(思言行)"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믿음이란 예수를 믿고 천당에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믿음의 열매를 드러내야 합니다.
믿음의 열매는 두 가지 성품을 갖춰야 합니다.
첫째는 정직(正直)입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항상 성실하고, 진실하며, 속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높은 도덕율(道德律)입니다.
도덕율이란 세상 사람들이 이익을 얻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갈지라도 믿음의 사람은 십계명의 가르침을 원칙으로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엄격한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거짓이 팽배한 세상은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정직과 높은 도덕율이 지배하는 세상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여
오늘의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성경은 이러한 것을 거룩한 생각과 구별된 언어와 진솔한 행실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내가 맡은 그 자리에서 땅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아름답게 세워지기를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진리 등대
참 알래데스(alēthēs) ἀληθής, ἑς
사(思)는 참된(眞)생각
언(言)은 착한(善)말
행(行)은 아름다운(美) 삶
마음과 생각, 말과 행동은 인격의 사대요소이므로 우리는 십자가로 심사언행(心思言行)을 삼가야 한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여기서 사람은 무엇보다 첫째로 마음을 지켜야
한다.
사람은 마음의 바탕에서 생각이 떠오르며 생각에서 말이 나오고 말한 대로 행동하게 되므로 “심사언행”이라 본다.
하와가
마귀의 유혹으로 금단의 열매 선악과를 쳐다보니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마음에 먹고 싶은 생각대로 따먹고 아담도 함께 범죄케 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7~38)라고 첫 번째 계명을 말씀하셨고, 바울사도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히 3:8)라고 권면했다.
다윗
왕은 궁궐에서 건너편에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마음에 음심이 생겨 우리아 대장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아를 최전방에 보내어 죽게
했으니 모세의 십계명의 5, 6계명 곧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인륜의 첫 두 계명을 범했으므로 마땅히 죽어야 했다.
다음으로, 마음에서 생겨나는 생각이 중요하다.
마귀는 먼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고(요 13:2) 이어서
사단이 마음에 들어가(요 13:27) 돈을 받기로 대제사장과 약속한 후 원수들에게 스승 예수를 노예 몸값에 팔아넘기고 목매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번 말하기 전에 열 번 생각하라.
의식과 인식의 중요성은 말과 행위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 17:32)고 경계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라고 사도 바울은 마음의 생각을 경계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라고 다윗은
기도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 신앙고백에서 말의 경고를 제자들에게 많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솔로몬도 말의 경고를 들려준다.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잠 4:13)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잠6:2) 옛 말에 말이 적은 사람은 거리낌도 적다고 했다.
또한 토해낸 말의 심판을 주님은 엄중히 경고하셨다. 한번 입으로 토해낸 말은 날아간 화살이요 총알이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4~36)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사도는 말의 결과를 경고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2~6)
사랑의 사도 요한도 말의 실행을 권면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말은 씨앗이라는 속담이 있지만 바울 사도는 말의 고백은 구원을 약속했다.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니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9~10,13)
넷째로 말한 대로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여 듣기만 하고 실천이 없는 오늘 나와 성도들과 한국교회에게 주는 귀한 말씀을 명심하여 실천하자,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4:17)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2~27)
우선 예수님께서 말 만하고 행치 아니하는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눅 6:46~48)
'언행일치(言行一致)'란 말과 그에 따른 행동이 같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주변에 보면 말과 행동이 같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말이란 어떤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말로 나타내는 것이며, 글이란 어떤 일이나 생각을 문자로 나타낸 기록이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고자하는 언행(言行)은 말이나 글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어떤 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글을 읽어 보면
어디서 주어왔는지 그럴 듯한 사자성어 같은 것을 베껴다가 내놓고 독자들을 현혹시키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말한
사람이나 글을 쓴 자기는 실천하지도 못하면서 독자들에게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오만이며 방자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잘난
체하여 건방진 행위에 해당되며 그럴듯하게 가면을 쓰고 거짓말을 한 것과 같기 때문에 속임수에 불과한 기만이다.
간혹
보면 “거리를 깨끗이 합시다!”라는 구호가 새겨진 어깨띠를 메고 길거리에 나와 주변 정화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그런데 이런 보람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만약에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다시 그 쓰레기를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말과 실제의 행동이 다른 사람은 이런 부류에 해당하는 속임수를 쓰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요즘 와서
정치판을 향해 유행하는 말 중에 ‘웃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쓴 소리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특히
정치인들은 입후보하면 당선부터 되고 보자는 식으로 실천 불가능한 공약을 유권자들에게 속임수로 많이 내놓았다가 당선만 되면
모르쇠로 변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정치인들은 ‘아는 것이나 모르는 것이나 다 모른다.’고 하기 때문에 신뢰도가 더
떨어진 것이다.
누구든지
글을 쓰는 사람이나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부터 실천가능한가’라는 자기반성과 각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언행일치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이나 말은 자기부터 실천이 가능해야 하며 무엇보다 논리에 맞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생활하면서 생각을 많이 하고 그 생각을 말이나 글로써 표현하고 있다.
그 때 마다 되도록 옳은 생각을 많이 하고 잘 못된 생각을
줄일 수 있게끔 노력해야 한다.
누구든지 오류는 범할 수 있지만, 거짓말이나 고의적인 실수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기억이
안 난다' '죄송하다.'는 등으로 얼버무리고 넘어 가서는 안 된다.
어떤 목사님이 하신 이야기입니다.
점심때가 되어서 추어탕을 잘 하는 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습니다.
추어탕을 잘 한다고 소문이 나서인지 손님들이 많이 왔습니다.
저와 집사람이 한 테이블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옆에 세분이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앉으면서 윗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흘렸습니다.
그때까지는 담배가 쏟아 졌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식사를 하는데 낮인데도 불구하고 소주 한 병을 시켜서 드셨습니다.
한 병을 다 드시지 않고 제가 보니 1/3을 드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식사를 하는데 얼마 후에 전화벨 소리가 들리는데
이것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소리가 들려요.
복음송가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갑자기 복음송가소리가 들리는데 이것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가 유심하게 들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나는 전화의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바로 그분이에요.
주머니에는 담배, 점심에는 반주로 소주를 드시는 그 분.
여러분, 저는 그분을 처음 보았습니다.
이름도 모릅니다.
그러나 전화벨소리가 복음송가가 나온다는 것은 그분이 누구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까?
여러분, 제발 이러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어두운 이 때, 침체된 이 때, 빛을 발하려고 하면 우리의 <언, 행, 심, 사>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자로서의 의로운 삶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손에서 벗어난 예수님께서 어디로 향하셨지 40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여기서 요한은 ‘세례자 요한’이고, ‘세례 베풀던 곳’은 ‘요단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를 받으신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으로 가셔서 한동안 머무셨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심을 불과 4개월 정도 남겨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결코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공생애를 시작할 때, 세례를 받았던 곳으로 가심은 십자가를 지시는 그리스도의 삶을 온전하게 걸어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초심(初心)'이란 "처음 마음"을 말합니다.
처음 마음, 처음 정신, 처음 사랑을 잃지 않는다면, 가정, 일터, 교회,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바르게 세워져 있을 것입니다.
부부가 결혼할 때의 첫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가정이 오늘날처럼 오염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직장인이 처음 출근할 때의 마음,
기업인이 처음 출발할 때의 마음을 갖고 있다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부정부패로 얼룩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회자가 부르심을 받고,
안수받을 때의 마음을 잃지 않았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정결하고도 신실한 통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의 은총을 잊지 않았다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삶과 믿음이 성숙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막이 내리고 있습니다(41-42).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예수님께서 요단강 강가에 계실 때, 세례자 요한의 증언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증거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던 것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나, 그 입에서 나오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갈릴리 호수를 걸으며,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모습을
보고서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이 모든 표적을 다 합친 것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표적이고,
그것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도 말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크고 화려하게 보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이신 하나님을 향하는 한, 그 무엇도 우리를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또한, 세속적 가치관이 아무리 범람해도, 뉴노멀(new normal)들이 아무리 파도쳐도, 그것이 우리를 살리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립니다.
그 말씀이 영원한 노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의 손과 그분의 말씀
속에서 사시는 한 날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설교하신 것 중에 중요한 것만 뽑아 말할 때 7대 강화라고 합니다.
이중에 요한복음 10장은 마지막에 설교하신
것입니다.
이 설교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10장 1절 “아멘, 아멘”으로 시작하신 예수님의 언어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아멘은 예수님의 언어적인 도장입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목자와 양의 비유, 선한 목자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선한 목자란 양을
위해 목숨을 주고 거짓 목자는 양을 늑탈하고 헤친다고 하셨습니다.
몹시 추운 겨울날 어린 소녀가 발을 동동 구르며 유리창 너머로 가게 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푸른 목걸이 참 예쁘네요. 이것 싸주세요.”
“누구에게 선물하려고 그러니?”
“우리 언니요.
저는 엄마가 없어서 언니가 저를 키워 주셨어요.
언니에게 줄 선물을 찾고 있는데 이 목걸이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언니도 좋아할 거예요.”
“돈이 얼마나 있니?”
“제 저금통을 털었어요. 여기요. 이것이 전부예요.”
소녀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모두 쏟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목걸이의 가격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돈이었습니다.
소녀는 목걸이 가격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슬그머니 소녀 몰래 정가표를 떼고는 예쁘게 포장해서 주었습니다.
“집에 갈 때 잊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라.”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음날 젊은 여인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서 푸른 목걸이를 내어놓으며 말했습니다.
“이 목걸이 이곳에서 파신 물건이 맞나요? 진짜 보석인가요?”
“예 저희가게 물건이 맞습니다.
그리고 아주 좋은 것은 아니지만 진짜 보석입니다.”
“누구에게 파셨는지 기억하시나요?”
“물론입니다. 예쁜 소녀였지요.”
“그 아이에게는 이런 보석을 살 돈이 없었을 텐데요.”
그러나 가게 주인은 젊은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 소녀는 누구도 지불할 없는 아주 큰돈을 냈습니다. 자기가 가진 전부를 냈거든요.”
주님은 우리가 가지고 잊지 않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놓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더 큰 것으로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하시자 유대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19).
그 중에 많은 사람은 예수님이 귀신들렸다고 생각했습니다(20).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고합니다(31).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40절에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는 피신해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이제 그 결실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또 요한이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지금 이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된 것인지는 마태복음
3:5-9에 보면 나옵니다.
“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불편한 장소로 오세요.
당시 유대광야는 모이기에 편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루살렘, 온 유대, 요단강 사방에서 몰려들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병고치는 은사집회를 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귀신을 쫓는 능력을 보여준 것도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흔히 했던
축복성회를 한 것도 아닙니다. 아니면 성경공부나 강해 설교를 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세례요한이 외친 소리는 논리성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단순하면서도 정직하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토해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전한 말씀은 자력 있는
쇠붙이처럼 무섭게 사람들의 영혼을 끌어당겼습니다. 아모스가 예언한 것처럼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말라기, 스가랴 선지자를 마지막으로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영적인 기갈 상태와 더불어 정치적, 경제적 갈등을 겪고있었습니다. 지금 장소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사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예수님의 예언대로 A.D 70년이 되어서 성전이 다
무너졌습니다. 남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껍데기를 남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남겨놓아야 합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마 3:6)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더러운 것이 얼마나 묻었는지 보려면 거울에 비쳐보아야 합니다. 또 밝은 빛에 비쳐보면 됩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죄를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비추이니까 자신들의 죄가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 다 드러나게 됩니다. 로마서
6:23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들어가지 않으면 죄를 모릅니다. 마치 빛이 없어 더러운 것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이 남들 앞에서 죄라고 고백하는 것은 극히 가벼운 것들입니다. 내놓아도 별로 부끄럽지 않은 것만 죄라고 인정할
뿐입니다. 진짜 깊은 죄들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도 끄집어 내지 못하고 본인 자신도 무서워서 꺼내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지없이 우리의 죄를 노출시킵니다. 그리고 이 죄는 깊은 뉘우침과 아울러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고백과 더불어 지난날의 죄에 메여있던 죄를 눈물 콧물 흘리면서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게 합니다.
진정한 영적 부흥은 죄의 고백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속에 깊이 박혀있는 죄가 빠져 나오지 않고는 아무리 은혜 받고 싶어도
은혜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어도 만나지지 않습니다. 죄가 노출되면 씻을 수 있습니다. 이 죄는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이 자연적으로 물러가듯이 하나님을 말씀을 받는 순간 물러갑니다.
가라지가 섞여있습니다.
세례요한에게 나온 사람들 중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온 사람도 있지만 이중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세 그룹의 종교집단이 있었습니다. 엣세네파, 바리새파, 사두개인입니다.
엣세네파는 결혼하지 않고 은둔과 경건주의 삶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자를 두었고, 사해 근방에 모여 집단
생활을 하면서 주로 성경을 필사하는 사본 작업을 했습니다. 이 그룹은 예수님때 제일 예수님과 충돌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은둔과
성경필사에만 매달린 결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과는 달리 자주 예수님과 충돌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바리세파와 사두개파입니다. 바리새파는 엣세네파와 달리 도시에 살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누구보다도 잘 지키기 위해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분리주의자’입니다. 이들의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육체의 부활도 천사의 존재도 믿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교리적으로는 완벽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형식과 교만에
빠져있었습니다.
또 한 그룹은 사두개파입니다. 이들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 ‘사독’에서 그 이름을 땄습니다. 이들은 제사장 그룹이면서
공회원 그룹으로 종교적, 정치적으로 최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적인 입장은 바리새파와 아주 다른 입장을 보였습니다. 모세
오경만 믿고 천사도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타락한 집단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사람들 틈에 끼어 세례요한에게 나왔습니다. 이들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지금 세례요한의 인기가 높고 이 시대의 인물이기 때문에 그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인지 구경나온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이런 식으로 나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또 장사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솔직히 표현한다면 “나도 하나님을 믿으니까 가봐야지! 이것들이 모여서 뭐하나?”생각하고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잘 다녀야 합니다. 나도 성경을 믿으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교회는 다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솔직히 교회에 왜
다녀야 되는지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모일 필요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경은 가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세례요한은 강한 어조로 이들을 질책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합니다. 예수님 외에 이렇게 외친 사람은 세례요한뿐입니다. 경력한 메시지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타락한 이유가 있다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에서 활개를 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순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 있는 유머입니다.
1등급 암소집사 : 교회의 짐을 다 짊어지고 가며,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사람
2등급 양 집사 : 목사님이 이끌면 이끄는 대로 순종하는 사람
3등급 막대기집사 : 자기 할 일은 다 알아서 하지만, 넘치는 충성은 하지 않는 사람
4등급 비행기집사 : 띄워주고 칭찬하면 좋아하지만, 아니면 교회를 떠나는 사람
5등급 미꾸라지집사 : 요리조리 잘도 핑계 대며 빠지는 사람
6등급 개구리집사 : 아무 데나 퐁당퐁당 끼여들고 간섭하구, 구설수를 만드는 사람
7등급 염소집사 : 질투하는 자 잡아당기며 갈라놓고 흩어놓고, 높은 곳에만 올라가려는 사람
8등급 서서잡사 : 술도 잡수고, 담배도 잡수는 사람
여러분은 몇 등급?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여러분! 사람이 본질이 변해야 합니다.
아무리 화장을 바꾸고, 옷을 바꿔 입어도 안됩니다.
본질이 변하지 않는 한 언제든지 그 본성 나올 수 있습니다.
요한의 이 강력한 메시지를 듣고 난 후에 사람들은 누가복음 3장 10절 이하에 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어떻게 하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입니다.
이 때 세례요한이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눅 3:11)
이 말을 듣고 있다가 당시 유명한
세리들이 또 질문합니다.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요한이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눅 3:13)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억압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군인들이 또 묻습니다.
군인들에게는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눅 3:14)고 했습니다.
“강포하지 말라”는 힘으로 다른 사람의 것을 억지로 빼앗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말씀입니까?
사도 바울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행 26:20)고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세례요한이나 바울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목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까지가 할 일입니다. 더 할 수도 없으며 더 한다고 말해도 큰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한계는 분명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사도바울이 위대하다는 것은 자신들이 한 일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 세례요한은 매우 훌륭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똑 같지는 않을 수 있지만 비슷한말을 다른 성인들도 했습니다. 타종교에도 사람의 근본과 윤리에 대해서 한 말이 있습니다.
41절 …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위대한 것입니다. 예수께 대해서 세례요한이 무슨 말을 했습니까?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 바로 이 장면 때만에 세례요한이 위대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께 사람을 인도하면 그것이 최선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르치고 교육시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최종적인 선은
예수께 사람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쫓겨 세례요한이 처음 세례 주던 곳으로 피신 오셨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오래 전에 세례요한에 의해서 뿌려졌던
복음이 있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동네에서 예수님이 지금 하신 어떤 설교나 능력 행하심이 없습니다.
본문
42절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는 바로 마 3:11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내 죄를 사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만이 나에게 성령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국 더블린의 홀튼씨 부부에게 샴 쌍둥이(Siamese twins, 몸은 하나에 머리는 둘, 팔은 넷, 다리는 둘, 내장은
모두 각기 가지고 있으나 간과 골반은 하나인 기형아), ‘아일리쉬’와 ‘캐티’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1992년, 그들이 세 살
반되었을 때, 분리 수술하다가 캐티는 사망하고 아일리쉬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소아과 전문의사들과 여러 전문의사들이 1년 동안
연구 조사한 결과 분리 수술하여 둘 다 살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수술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수술 후 혼자만 살아남은 왼쪽의
‘아일리쉬’는 옆에 늘 함께 얼굴을 맞대고 있었던 ‘캐티’가 보이지 않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하셨습니다. 우리 옆에 늘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눈만 뜨면 아일리쉬 옆에는 캐티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제일 큰 충격이 있다면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항상 내 옆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머리요 나는 몸입니다. 주님이 생각하시면 우리는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와 네가 샴 쌍둥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6. 중보자는 왜 참인간이고 의로운 분이셔야 합니까?
하나님의 의는 죄지은 인간이 죗값 치르기를 요구하나, 누구든지 죄인인 사람으로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값을 치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17. 중보자는 왜 동시에 참하나님이셔야 합니까?
그의 신성(神性)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 그의 인성(人性)에 짊어지시며, 또한 의와 생명을 획득하여 우리에게 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18. 그러나 누가 참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인간이고 의로우신 그 중보자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신 분입니다.
19. 당신은 이것을 어디에서 압니까?
거룩한 복음에서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처음에 낙원에서 친히 계시하셨고, 후에는 족장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하셨으며, 또한 율법의 제사들과 다른 의식(儀式)들로써 예표하셨고, 마지막에는 그의 독생자를 통해 완성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새번역)
“이 경건의 비밀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분은 육신으로 나타나시고, 성령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셨습니다.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 전파되셨습니다. 세상이 그분을 믿었고, 그분은 영광에 싸여 들려 올라가셨습니다“
*
하이델 베르크 요리 문답 제 2부 ‘우리의 구원(구속. 救贖)에 대하여’
’참 하나님, 참 사람‘에 관한 16-19문의
내용입니다.
질문 16. 왜 중보자이며 또한 구원자이신 그 분이 참 사람이면서 또한 의로움이 완전한 분이어야 합니까?
답 : 그 까닭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를 때, 죄를 범하였던 사람의 본성과 동일한 본성이 죗값을 치러야 하며(겔 18:4,20; 롬 5:12-18; 고전 15:21; 히 2:14-16; 벧전 3:18; 사 53:3-5, 10-11). 죄인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죗값을 치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히 7:26-27; 시 49:7-8; 벧전 3:18).
세부질문 g. 인간을 구원할 중보자가 참 사람이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죗값을 요구하시는 것은 인간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 언약을 파기한 당사자인 사람이 그것을 갚아야 됨. 동물X. 천사X. 중보자는 참된 인간이어야 함. 죄가 없는 의로운 사람이어야 함. 왜냐하면, 물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는 사람이 물에 빠진 다른 사람을 구하겠다고?. 두 사람 모두 물에 빠져서 죽게 됨.
** 참된 인간이면서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롬 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사람은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과 동정녀 탄생은 어떻게 관련됩니까?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사람은 사람이지만 아담의 후손이 아닌 분. 처음 사람 아담의 범죄에 속하지 않은 사람. ‘인간이시되 아담에 속하지 않은 인간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질문 17. 왜 중보자이며 또한 구원자이신 그 분이 또한 참 하나님이어야 합니까?
답 : 그것은 그의 신성의 능력으로(사 9:6, 63:3; 롬 1:4; 히 1:3), 그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람의 본성 안에서(사 53:4,11; 요 10:17-18) 하나님의 진노의 무게를 짊어지시고(신 4:24; 나 1:6; 시 130:3) 또한 의와 생명을 우리를 위하여 획득하시고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사 53:5,11; 벧전 3:18; 요 3:16; 행 20:28; 요 1:4)
세부질문 h. 인간을 구원한 중보자가 참 하나님이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자기 뒤에 오는 많은 사람들의 죄까지 다 짊어지려면 그는 시간 안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존재이어야 함. 피조물X. 하나님이셔야 함.
** 하나님의 진노의 짐은 어떠한 것입니까? 영원함. 하나님의 형벌과 모든 시대 사람들의 죄를 다 짊어지시려면 그 분은 하나님이셔야 함.
** 누가 그 짐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 우리의 중보자가 하나님이셔야 할 두 가지 이유는 무엇입니까?
1)그의 신성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 그의 인성에 짊어지시기 위함. 2) 의와 생명을 획득하여 우리에게 돌려 주시기 위함.
** 부활이 예수님의 칭의라는 사실을 설명하여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다 만족시키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려내심으로써 예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심. 부활시켜 주심. 딤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 3:16). ---> 부활의 때: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심.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성결의 영: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영’ 곧 ‘생명의 영’이 되신 것. 참조: 고후 3:17; 고전 15:45;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살려 주는 영’이 되셨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
** 믿는 사람의 칭의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내가 믿으니까 의롭다. 부활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신 그리스도를 믿으니까 그 분 안에서 내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 그리스도께서 부활로써 의롭다 하심과 생명을 얻으셨고, 그 얻으신 것을 우리에게 돌려 주시고 입혀 주시는 것. 부활하여 의롭다 함을 얻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그의 백성인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면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그 큰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계시는 것. 의와 생명을 획득하여서 우리에게 돌려 주시는 그 일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질문 18 : 그런데 누가 참 하나님이시면서(요일 5:20; 롬 8:3, 9:5; 갈 4:4; 사 9:6; 렘 23:6; 말 3:1) 동시에 참 사람이면서(눅 1:42, 2:7; 롬 1:3, 9:5; 빌 2:7; 히 2:14-17; 히 4:15) 또한 참으로 의로운 분이신(사 53:9, 11; 렘 23:5; 눅 1:35; 요 8:46; 히 7:26; 벧전 1:19, 2:22; 3:18) 그와 같은 중보자이겠습니까? 답: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한 중보자이십니다(마 1:21-23; 눅 2:11; 요 1:1, 14, 14:6; 롬 9:5; 딤전 2:5, 3:16; 히 2:9). 주님은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 분(고전 1:30; 고후 5:210) 즉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세부질문 i. 그러면 누가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고 또 의로우신 중보자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이 되셨으며, 또한 죗값을 대신하여 치러 주셨음. 이 사실을 깨달아 알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음. 이것이 복음.
** 하나님의 지혜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고전 1:30. 복음의 요약.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심. 그 지혜의 내용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
의로움: 죄인을 의롭다고 하는 것. 우리를 다시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도록 회복시켜 주는 것.
거룩함: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것.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 있으면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면서 사는 것. 자기의 자질은 사명을 위하여 주신 것이므로 자기의 자질을 자랑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신 모든 것으로 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감. 변화, 생각, 말, 행동.
구속함: 값을 치르고 다시 삼. 복음:예수님께서 보혈로 나의 죗값을 치르고 나를 사서 나를 주님의 것으로 삼으셨다.
** 그것을 고린도 교회의 형편에서 설명하고 우리의 상황에도 적용하여 보십시오.
** 이단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이단: 파악의 태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함.
사복음서 <5> 기독교는 유대교의 완성
마태복음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태복음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태복음의 구조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주제적 구조와 연대기적 구조이다. 주제적 구조 중 대표적인 것은 일찍이 벤자민 베이컨이 연구·발표한 모세오경적 구조이다. 연대기적 구조란 잭 딘 킹스베리가 주장한 것으로, 주제적 구조의 단점을 보완하여 마태복음을 연대기적 흐름을 따라 분석한 것이다.
마태복음 이해에 널리 사용되는 모세오경적 구조는 마태복음이 모세오경과 같이 다섯 권의 말씀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는 이론이다. 마태복음에 예수님의 설교, 혹은 강화가 다섯 편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첫번째 강화는 5~7장의 산상 설교, 두번째 강화는 10장의 제자(사도) 파송 설교, 세번째 강화는 13장의 천국 비유 설교, 네번째 강화는 18장의 교회 공동체의 질서에 관한 설교, 다섯번째 강화는 24~25장의 종말론 설교다. 이렇게 주님의 설교를 다섯 편으로 구분하는 것은 매 설교 끝에 반복되는 종결 후렴 문구를 근거로 한다.
첫번째 강화 /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7:28). ·
두번째 강화 / "예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11:1a).
세번째 강화 /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13:53).
네번째 강화 /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19:1a).
다섯번째 강화 /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26:1).
이처럼 동일한 종결 후렴 문구가 반복되는 것은 저자 마태가 의도적으로 이 다섯 강화를 다섯 권의 책으로 묶으려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모세가 기록한 다섯 권을 모세오경이라 부르듯,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이 다섯 권의 강화를 일컬어 ‘마태오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마태는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주님의 말씀을 다섯 권으로 묶어 마치 모세오경과도 같이 제시하려 했을까? 여기에는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의 마태 교회, 혹 공동체의 상황이 반영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상황이란 회당과의 갈등이 고조된 상태를 말하는데, 회당으로 대변되는 유대교에서 최고의 권위자는 모세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태는 회당 유대교의 공격과 도전에 직면하여, 모세보다 더 위대하고 권세 있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나타내기 위한 유력한 증거로, 예수님의 말씀을 모세오경적 형태로 제시했던 것이다. 또 이것을 통해 유대교의 완성이 바로 기독교임을 드러내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세오경적 구조만으로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무리이고, 따라서 마태는 구약의 많은 예언들의 성취를 소개하고, 또 옛 사람의 글(모세오경)과 예수님의 말씀을 대조해 주님 말씀의 권위를 부가시킴으로써(마 5:21~48; 5:21~22a), 예수님이 모세보다 위대하고, 기독교가 유대교의 아류가 아니라 완성임을 증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모세오경 <5> 가인과 아벨
창세기 4장에 소개되고 있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제사 행위에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려진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되고, 땅의 소산으로 바쳐진 카인의 제물은 열납되지 않는다.
혹자는
양의 첫 새끼를 바친 아벨의 희생제사가 카인이 바친 곡식제물(素際)보다 더 잘 하나님께 열납된 것으로 이해한다.
또 어떤 이들은
카인과 아벨의 갈등을 농부들과 유목민과의 대립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레위기 2장 1절 이하의 기록에 의하면, 소제(素際)는 번제(燔際)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제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음을 보여준다.
결국 희생제물과 곡식제물 사이의 질적인 차이는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자기가 바친 제물이 열납되지 못하자 이것을 본 카인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한다.
한번 생각해
보자. 만일 카인 혼자서 야훼께 제사를 지내는 도중 자신의 제물이 열납되지 않았다면 그가 그렇게도 분개(憤慨)했을까?
그곳에 자기 혼자만 있었다면 카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제물이 열납되지 않은 이유를 물어 본다든지 다시 제물을 바쳤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자기 옆에 아우 아벨이 있었다는 점이다.
자신의 제물은 열납되지 않고 아우의 제물이 열납된 사실 앞에서 카인은 이성을 잃고
동생을 죽이는 끔직한 일을 저지르고 만다.
예수 그리스도의 7대 강화 중 그 첫번째 에 깨당한다. 이 강화는 하나님 나라와 거듭남이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본장은
거듭남의 교훈(1-8절),
예수의 자기 증거(9-15절),
믿음으로 얻는
영생(16-21절),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22-30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증거(31-36절)
성경 속의 예수님 교훈
1. 예수님의 30대 강화
번 |
장 소 |
대 상 |
주 요 내 용 |
스 타 일 |
성 구 |
1 |
예루살렘 |
니고데모 |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 |
대화체 |
요 3:1-21 |
2 |
야곱의 우물 |
사마리아 여인 |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 |
〃 |
요 4:1-30 |
3 |
〃 |
제자들 |
성도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
〃 |
요 4:31-38 |
4 |
나사렛 |
추종자들 |
선지자는 고향에서 배척당한다. |
설교체 |
눅 4:16-31 |
5 |
갈릴리 한 동산 |
제자와 군중 |
산상 수훈 |
〃 |
마 5-7장 |
6 |
베데스타 연못 |
우대인들 |
예수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
대화체 |
요 5:1-47 |
7 |
예루살렘 근처 |
바리새인들 |
안식일에도 선한 일을 할 수 있다. |
〃 |
눅 6:1-11 |
8 |
나 인 |
군중들 |
세례요한은 예수의 선구자였다. |
선언문 |
마 11: 2-29 |
9 |
가버나움 |
바리새인들 |
성령을 거스리는 자는 용서 받지 못한다. |
대화체 |
마 12:22-45 |
10 |
〃 |
제자들 |
제자의 길.. |
〃 |
마 10:1-42 |
11 |
〃 |
주의 가족 |
예수의 말씀을 행하는 자가 예수의 가족이다. |
〃 |
막 3:31-35 |
12 |
〃 |
군중들 |
예수는 생명의 양식이다. |
설교체 |
요 6:22-71 |
13 |
〃 |
서기관,바리새인 |
인간을 더럽게 하는 것은 그 속에서 나온 것이다. |
비판과책망 |
막 7:1-23 |
14 |
〃 |
제자들 |
겸손하고 남을 실족 시키지 말라. |
예화 설교 |
마 18;1-14 |
15 |
예루살렘 성전 |
유대인들 |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
훈 계 |
요 7:11-40 |
16 |
〃 |
〃 |
나를 따르는 자는 빛에 행하라. |
〃 |
요 8: 12-59 |
17 |
〃 |
바리새인들 |
나는 양들의 문이다. |
〃 |
요 10:1-21 |
18 |
가버나움 |
70인 사역자들 |
세상은 주의 사역자들을 요청한다. |
격 려 |
눅 10:1-24 |
19 |
베다니 |
제자들 |
열심 있는 기도는 능력이 있다. |
훈 계 |
눅 11:1-13 |
20 |
〃 |
군중들 |
믿지 않는 자는 어리석고 비참하다. |
대화체 |
눅 11:14-36 |
21 |
바리새인의 집 |
바리새인들 |
오직 내적 순결이 요구된다. |
책 망 |
눅 11:37-54 |
22 |
요단 동편 |
군중들 |
탐욕, 외식, 불 경건을 조심하라. |
위 로 |
눅 12:1-21 |
23 |
베레아 |
제자들 |
하나님의 나라가 가장 중요하다 |
예화 설교 |
눅 22:22-34 |
24 |
예루살렘 |
군중들 |
영생을 얻는 길 |
위 로 |
요 12:20-50 |
25 |
〃 |
바리새인들 |
외식을 금하라 |
책 망 |
마 23 ;1-39 |
26 |
감람산 |
제자들 |
예수 재림의 징조들 |
예 언 |
마 24: 1-51 |
27 |
예루살렘 |
〃 |
겸손과 섬김 |
위 로 |
요 13:1-20 |
28 |
〃 |
〃 |
재림 예수를 기다리는 제자의 삶 |
〃 |
요 14:16 |
29 |
감람산 근경 |
〃 |
복음을 전파하라 |
약 속 |
마 28; 18-20 |
30 |
밧모섬 |
사도요한 |
내가 속히 재림하리라 |
〃 |
계 22;6-16 |
2 . 예수 교훈의 주제들
가까운 수난의 때 마 26 : 45-46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막 12 : 43-44
가난한 자들을 청하라 눅 14 : 12-14
가장 큰 계명 마 22 : 37-40
각기 다른 재능 마 25 : 14-15
간절한 기도 눅 11 : 5-8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 26 : 40-41
거룩함을 얻게 하는 진리 요 17 : 17-19
거짓그리스와 선지자의 활동 막 13 : 22
거짓된 칭찬의 화 눅 26 :6
건축자들의 버린 돌 마 21 : 42
계명을 지키고 가르치는 자 마 5 : 19
공평하신 하나님의 사랑 마 5 : 45
교회의 말을 듣지 않는자 마 8 : 17
구원 얻을 때까지 견디라 마 10 : 22
구원을 얻는 길 요 10 ; 7-9
구하는 자에게 주라 마 5 : 42
국가에 대한 의무와
하나님에 대한 의무 마 22: 15-22
그 날까지 깨어 있으라 막 13 : 35-36
금식의 바른 자세 마 6 : 16-18
기도의 모범 마 6 : 9-13
기도하는 집 마 21 : 13
기도할 말을 가르치는 성령 눅 12 : 12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요 14 : 6
낙원의 존재 눅 23 : 43
남을 함부로 바판하지 말라 마 7 : 1-2
남을 헤아리지 말라 막 4 : 24
낮에 일하라 요 9 : 4
내 안에 거하라 요 15 : 4-10
내 증인이 되라 행 1 : 8
너희도 온전 하라 마 5 : 48
누가 큰 자 눅 22 : 24-30
대속의 피를 흘리신 예수 막 14 : 24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 마 12 : 28
독신주의에 대한 가르침 마 19 ;11-12
뒤 돌아보지 말라 눅 9 : 62
마음으로 지은 죄 마 5 : 27-28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 눅 16 : 15
마음의 악한 생각들 막 7 : 21-22
마지막 날의 부활 요 6 : 40
말세의 징조 마 24 : 7-12
말씀에 순종하는자의 복 요 14 : 23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의 결과 마 13 : 18-22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 마 13 : 19
말씀의 결실을 맺으라 막 4 ; 18-19
맡은 일에 충성하라 눅 12 : 47-48
맹세에 대한 권면 마 5 : 33-37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사랑 마 10 : 30
먼저 남을 대접하라 마 7 : 12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리라 마 20 : 16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 마 6 : 30, 33
명령 받는 대로 다 행하라 눅 17 : 10
목숨보다 더 귀한 예수 마 16 : 25-26
몸의 등불은 눈 눅 11 : 34-35
미혹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마 24 : 4-5
믿고 의심치 말라 마 21 : 21
믿는 자들의 표적 마 16 : 17-18
믿음으로 구원 받은 여인 마 9 : 22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눅 18 : 9-14
반석 위에 지은 집 눅 6 : 47-49
보지 않고 믿는 믿음 요 20 : 27-29
보혜사 성령의 사역 요 14 : 16
복음 전파의 필연성 막 16 : 15-16
복 있는 종 눅 12 : 42-43
불신앙으로 인한 두려움 막 4 : 40
불신에 대한 경고 마 11 : 21-23
비유된 천국 비밀 막 4 : 12-13
빛 가운데 다니라 요 11 : 9
사람을 낚는 어부 마 4 : 19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마 15 : 11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눅 5 : 37-39
생명의 떡이신 예수 요 6 : 32-25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 요 4 : 10
서로 화목하라 막 9 : 50
목자이신 예수 요 10 : 11-13
선행에 대한 보상 마 10 : 42
선행의 바른 자세 눅 6 : 34-35
섬기러 오신 예수 마 20 : 28
성도가 기뻐해야 할 것 눅 10 : 20
성도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 요 17 : 9
성도의 역할 마 5 : 13-15
성도의 연합 요 17 : 20-21
성자와 동행하시는 성부 요 8 : 29
세상에 검을 주러 오신 예수 마 10 : 34-36
세상을 책망하러 오실 성령 요 16 : 8
세상의 미움을 받은 이유 요 15 : 18-19
세상적인 염려는 버리라 눅 12 : 22-31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마 15 : 14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지혜 마16: 2-3
심판의 기준과 근거 마 25 : 34-40
악하고 게으른 종 마 25 : 26-30
안식일의 주인 마 12 : 5-6
안식일의 참 의미 요 7 : 22-23
어리석은 다섯 처녀 마 25 : 7-12
어리석은 부자의 교훈 눅 12 : 16-21
영생에 이르는 열매 요 4 : 36
영생을 얻을 자 마 19 : 29
영원한 죄 마 3 : 29
영원히 멸망치 않을 영생 요 10 : 27-29
영접 자가 받을 상 마 10 : 40-42
예고된 배반 마 26 : 21
예고된 성도에 대한 핍박 요 16 : 1-3
예수가 오실 날까지 경건하라. 눅 21 : 34
예수를 시인하는 자의 상급 마 10 : 32-33
예수를 영접하는 방법 막 9 : 37
예수를 좇는 자의 각오 마 8 : 22
예수 권세의 근원 마 21 : 23-27
예수의 길은 희생과 고난의 길 마 8 : 20
예수의 길을 예비한 세례요한 눅 7 : 24-28
예수의 본을 따르라 요 13 : 15
예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얻는 영생
요 6 ; 35
예수의 수난과 부활 예고 눅 9 : 22
예수의 이름을 위한 고난 마 24 : 9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눅 14 : 33
예수의 초대 마 11 : 28-29
예수의 최후 명령 마 28 : 28-29
완악한 백성들의 두려움 마 13 : 15
외모로 판단치 말라 요 7 : 24
외식자의 결국 눅 12 : 1-3
외식하는 자에게 내려질 화 마 23 :23-28
외식하는 자의 추악함 마 23 : 27-28
요나의 표적 마 12 : 39-41
용서 받지 못할 죄 마 12 : 31-32
원수를 사랑하라 마 5 : 43-44
위선자와 외식주의자들 마 23 : 2-33
은밀히 구제하라 마 6 : 2-4
의로운 예수의 심판 요 5 : 30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의 복 마 5 : 10-11
의원이신 예수 마 9 :12
의인과 죄인의 구별 마 25 : 46
이미 심판을 받은 불신자 요 3 : 18
이웃과의 화해 명령 마 5 : 25-26
이혼에 대한 가르침 마 5 : 31-32
이혼의 불가함 마 19 : 4-6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 눅 15 : 4-7
잃은 양 한 마리 눅 15 : 4-7
자기 눈 속의 들보부터 먼저 빼라 마 7 : 3-5
자기 십자가를 지라 마 10 : 38
작은 일에 충성하라 마 25 ; 21
재물과 소유 마 6 : 24
재물에 우선하는 예수 섬김 막 10 : 21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 눅 12 : 33-34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 요 13 : 12-15
제자직의 어려움 마 10 : 34-39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 7 : 13-14
죄 사함 얻는 믿음 마 9 : 2
죄 없는 자는 누구 요 8 : 7-9
죄의 근원은 마귀 요 8 : 44-45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막 2 : 17
죄인의 친구 예수 요 15 : 15
주라! 그리하면 받으리라 눅 6 : 38
주 안의 새 가족 마 12 : 48-50
주의해야 할 누룩 마 16 : 6
중생의 비밀 요 3 : 1-21
지옥의 존재 마 23 : 33
지옥 형별의 고통 막 9 : 43-48
지혜롭고 순결하라. 마 10 : 16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요 8 : 31-32
진리의 성령 요 16 : 13
진정한 이웃 눅 10 : 30, 37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 마 5: 16
참된 증거 요 8 : 14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 마 25 : 34
천국에서 복 있는 자 눅 6 : 21
천국에서 큰 자의 권세 눅 22 ; 25-30
천국에 이르는 의 마 5 : 20
천국의 비밀 마 13 : 11
추수할 일꾼 마 9 : 37-38
충성에 대한 교훈 눅 19 : 13-27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바리새인 눅 11 : 39
택함 받은 자는 소수 마 22 : 14
팔복의 가르침 마 5 : 3-11
포도원 품꾼 비유의 교훈 마 20 : 1-15
풍성한 삶의 근원 요 10 : 10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지 못함 마 6 : 24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자 마 21 : 31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 마 19 : 17, 26
하나뿐인 선생 예수 마 23 : 8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마 10 : 28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자들 마 15 : 3-6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라 요 5 : 42-44
한 말씀이라도 다 이루리라 마 5 : 18
합심기도의 힘 마 18 : 19
헛된 경배 막 7 : 6-8
혈통에 우선하는 믿음 요 8 : 37, 56
형제 권고의 3단계 마 18 : 15-17
형제에게 노하는 자의 형벌 마 5 : 22
혼인 잔치비유를 통한 교훈 마 22 : 2-14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But if I do it, even though you do not believe me,
believe the miracles, that you may know and understand that the Father
is in me, and I in the Father."
그 일은 믿으라(believe the miracles)
그 일이란 예수께서 행하셨던 표적(세메이온)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이심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표적은 이미 많은 유대인들이 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 일(2041) ἔργον, ου, ὁ 스트롱번호 2041
신앙의 걸림돌(요한복음 10:30-42)
대형
수해가 나거나 온 국민이 누군가를 도울 일이 생기면 방송이나 신문에서 모금운동을 하는데, 그때 사람들은 TV가 생중계하는
현장으로 봉투를 들고 줄을 서서 기부금을 넣습니다.
그리고 신문마다 1면에 어느 회사 사장은 몇 억을 하고 어느 단체 대표는 몇
억을 기부했다고 액수에 따라 활자를 달리하면서 보도를 해줍니다.
구호물품을 가지고 현장으로 가는 사람들도 구제물건을 쌓아놓고
현수막을 걸고 사진을 찍어서 신문에 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름과 얼굴 내는 보람에 착한 일을 합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어쩌다 선한 일을 하고는 자기가 무슨 일을 했다고 그 일을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물론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일반 국민들이 하는 구제와 봉사 전체보다 교회들이 모르게 하는 구제와 봉사가 훨씬 더 많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주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이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면 하나님께 받을 것이 없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은 자기는 작은 일을 하고도 큰 칭찬과 격려를 받기를 원하면서도 이름 없이 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얼굴 없는 천사” 라고 부르며 존경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신 뒤에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선한 일을 하고는 내가 이런 일을 했다고 드러내지만, 주님은 자신이 하신 일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고는, 자기의 능력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고, 나는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룰 뿐이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시고는 그가 행하신 위대한 일 보다는 자기가
누구이며,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 지를 더 적극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보내서 온 하나님의 아들이고, 내가 행하는
능력이 그 증거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을 미워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덤비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여주었는데 그중에 어떤 일이 문제가 되어서 나를 돌로 치려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대답하기를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은 네가 행한 선한 일 때문이 아니라 신성모독을 했기 때문이다. 네가 사람이면서 어떻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너희가 신봉하는 율법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한 사람들에게도 신적권위를 부여했는데, 하물며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온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이 신성모독이 된단 말이냐, 내가 만약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나를 믿지 않아도 되지만,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거든 나를 믿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를 드러내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선전하기 위하여 선한 일을 했습니다. 마6장을 보면 당시 유대인들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에 검정을 바르고 금식을 하고, 기도를 해도 네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는 그들의 좋지 않은 관습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셨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이 주목받는 기회가 오면, 그
기회를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드러내는데 활용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도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할 때마다 “아버지”라고 하셨고, 심지어 오늘 본문에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에, 누가 착한 일을 하고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좋았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하게 하셨다고 주장하는 것도 상관없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다면서, 하나님이 내게
이런 능력을 주셨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선을 넘었습니다.
“내가 한 이 큰 일을 봐라. 내가 창조주 아버지를
닮지 않았느냐,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아버지와 나는 똑같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안색이 변하면서 돌을 들어
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죽이려고 까지 분노한 이유는,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문제에 왜 그렇게 발끈 했을까요?
유대인들이 반발하였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문제가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문제에 걸려 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상이 좋아서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서 내 곁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믿지 못하는 반쪽
신자들이 오늘 교회안에 많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나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좋아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생각지 않게 어떤 큰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일어났고
인정합니다.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이건 정말 신이 도우신거야,”라고 고백할 때가 있습니다.
45년 갑자기 광복을 맞이했을
때가 그랬습니다.
온 국민은, 신 불신 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고백했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만세~” 라고 애국가를 지어 부를 때는, 왜 우리나라국가에 하나님이 들어가느냐고 토 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분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으며
영생을 얻는다.
그분이 지금도 우리의 삶을 주관하신다.”라고 말하면 금방 안색이 변하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우리더러
믿으라고 하는 거냐고 반발을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대하는 일반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은,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 일에도 목적이 있었지만,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과,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 더 큰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의 은혜는
좋아하면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에는 발끈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믿고 있는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나도 하나님이라고 하시니까 그것이 성경과
맞지 않아서 그랬을까요?
표면적 이유는 그렇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중심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했지만, 하나님은 말로만 공경했지 사실은 자기들의 유익과 취향에 따라서
생활했습니다.
그들의 종교도 겉은 성경을 중심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의 안위를 위한 도구로 전락한지 오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 곁에 등장하시면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동안은 정치나 경제나 종교생활에서 자기들이
주인노릇 해 왔는데, 만약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다면 그분의 간섭과 지도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를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가진 것을 자기들의 것으로 삼고 자기들의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갑자기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났으니 이제는 그렇게 살지 못하겠다는 걱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을 듣는 유대인들이 느꼈던 감정은 특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주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어떤 문제도 함께 상의해서 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계획과 비밀을 아들은 다 알고 있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기만의 특별한
지식과 경험과 기술을 아들에게 모두 전수해 준답니다.
그래서 어떤 기술을 보면, “아, 이 사람이 누구의 아들이구나” 하고 금방
알았다고 합니다.
유대인의 부자관계는 서로 얼굴 표정만 보아도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알아차렸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이라면 도무지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시고는, 이것이 내 아버지에게서 전수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유대인들이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술과 능력을 전수받은 아들이 아니고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표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공경할 마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을 인정하면, 이제는 자기 생각과 욕심대로 살 수가 없고,
그분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존경하지도 않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복종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일부러 부정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와 망대를 건설한 다음에 농부들에게 세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들이 때가 되어도 주인에게 세를 내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이 자기의 하인을 보내어 세를 내라고 하자, 세는 내지 않고 심부름 간 종만 때려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더 많은 종을 보냈더니, 농부들이 이번에는 그 종들을 때리고 죽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자기의 아들을 보내면서 내
아들은 존중하리라고 생각했더니, 농부들은 반대로 했습니다.
마가복음 12:7에 보면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들만 없애버리면
이 포도원은 영영 우리의 것이 될 것인데 왜 아들의 말을 듣겠느냐, 아들을 죽여 버리자.”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자기를 배척할 것을 미리 비유로 예고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유대인들의 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면 우리 마음대로 못사니까 저를 죽여 버리고, 계속해서 우리 마음대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살자는 속셈이었습니다.
이것은 2000여년 전에 유대인들에게나 있었던 옛날 이야기일까요?
오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축복이 자기에게 임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신앙을 갖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고자 하는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계시다는 정도를 인정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섬기고 따르는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날마다 아버지께 모든 것을 상의할 수 있으며, 아버지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하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먼데 계시면서
우리가 찾아갈 때마다 축복이나 주시는 것은 좋아하지만, 내 삶의 현장에 가까이 오셔서 내 삶을 간섭하시는 것은 두려워합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과 친밀한 부자관계가 되어 매사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면, 내 모든 재산과 취미와 인생계획을 그분이
마음대로 하시지 않을까, 그래서 내 인생이 불행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면서 믿음의 깊은 데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신 이유는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아주 비밀스런 지혜와 세상을 이기는 기술을 전수해 주시려고
부르신 것이고,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가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까?
바로 그 복을 주려고
찾아와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할 것 같은 생각만 들어서 아버지와 가장 친밀한 아들로
살아갈 결심을 못합니다.
매사를 내놓고 아버지와 상의하고 순종할 결심을 못합니다.
그 대신에 세상에서 보고 들은 방식으로
성공해보려고 하니까 계속해서 문제가 생기고 절망스런 환경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싸우기는 싸우되 세상의 방법으로가
아니라 아버지가 주시는 지혜와 기술로 싸워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와 힘을 주시고 도와주셔서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큰일을 하려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가진 것에서 조금이라도 빼앗길까 봐서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도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은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도 어느 정도까지는 받아들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이 하셨다고 좋아하고 자랑도 간증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듣는 순간,
너무 부담스러워합니다.
혹시 내 생각과 계획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대인들처럼 태도가 돌변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에게서 보호와 도움만 받기 원했지, 하나님이 자기의 주인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왕이고 싶은데 왜 남이 나를 간섭하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 말고도 우리를 얽어매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슬에
매인 채로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염려와 걱정과 불안이 그것이고, 남들이 내게 한 말들도 우리를 얽어맵니다.
누구는 어떤 사람의
협박에 묶였고, 누구는 어떤 사람의 비난과 저주에 묶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뭐라고만 하면 마치 그것이 절대적인 것처럼
그 말이 마음을 묶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꿈쩍도 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생각 없이 쏟아놓은 말 한마디에는 벌벌 떱니다.
누구에게나 신앙의 걸림돌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자기 욕망이 걸림돌이 되고 누구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이유없는 반항감정이 걸림돌입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 자신이 걸림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떤 점이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첫째 걸림돌은 예수님의 초라한 인성(이사야 53:2-3)
예수님의 가난한 삶, 그의 온유한 모습, 그의 겸손, 모든 것이 걸림돌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은 이런 외모를 가진 분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53:2-3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유대인들은 갈릴리의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란 예수님을 보고 ‘저렇게 약한 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야, 나와 똑같잖아’하며 하면서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는 데는 걸림돌들이 많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예수가 어떻게 나의 하나님이야’ 라는 생각이 걸림돌이 되어
2000년 전에 유대 나라에서 십자가를 진 예수와 오늘 이 시대에 살며 죄지은 내가 무슨 상관이나 있겠냐고, 그의 죽으심을 믿는
것이 어떻게 내 죄사함이 되겠느냐고 하는 합리성이라는 것을 걸림돌로 삼기도 합니다.
또한 이 시대 교회가 존경스럽지
못한 점도 걸림돌이 작용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원래 기독교는 새롭고 신선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보지 못했던 신선한
모임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이런 곳이라고 소개해 주기만 해도 오랜 구습에 찌든 사람들이 이 새로운 삶을 사는 단체에 관심을
가졌고 돌아왔습니다.
구한말에 짐승을 잡아서 고기를 파는 사람을 백정이라 하여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들을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구박받던 여자들의 인권도 인정하였고, 축첩도, 노름도 못하게 하고 술 담배도 금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신선한 모임인 교회에 충격을 받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교회가 진실하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한 사람들의
단체처럼 취급받게 되었습니다.
한 건물에 몇 개씩 들어서 있는 교회의 종탑을 보면 교회가 영업장소라고 오해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신자들은 도처에 깔려있지만 불신자와 다를 바 없는 타락한 생활을 욕심껏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이 시대의 사람들이 그 교회가
소개하는 그리스도를 시시한 분으로 보이게 만들어서 바른 신앙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내 외모를 보고서 나를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나를 통해서 일어나는 일을 보아라.
소경인 채로 태어난
사람이 눈을 뜨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나면서부터 40년이 넘도록 일어서 보지 못한 사람이 일어나 뛰고, 나병환자가 즉석에서
깨끗함을 받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누가 주신 능력이겠느냐?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아니시면 이 놀라운 능력을 누가 전수해
주셨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그 놀라운 일 때문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둘째 걸림돌은 내 인생의 주인은 예수님(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면 그동안 내가 주물렀던 내 인생을 주인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
포도원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알아보고 죽인 이유와 같았습니다.
이
걸림돌에 걸리는 사람들은, 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이미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긴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축복만 사모했지, 하나님이 내 삶 전체를 주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모든
것을 아버지와 상의하자고 하시니, 자기 것을 빼앗길까봐서 두려워하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걸림돌에 걸려 넘어져 있나요?
아니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이 걸림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혹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처럼 지금까지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살아왔는데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면 내
마음대로 못 살 것 같으니까, 그래서 순종하는 신앙,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걸림돌을 뛰어 넘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부자관계를 누리며 날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지혜와 방법으로 담대하게 오늘을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형상(체렘. tselem) צֶלֶם 스트롱번호 6754
이사야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everyone who is called by my name, whom I created for my glory, whom I formed and made.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God blessed them and said to them, "Be fruitful and increase in number; fill the earth and subdue it. Rule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creature that moves on the ground.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We are not stoning you for any of these," replied the Jews, "but for blasphemy, because you, a mere man, claim to be God."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의 정체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요 10:36)
둘째는 나는 생명이라(요 11:25)
유대인들에게 이와 같은 선언은 매우 불경스러운 것으로 들렸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시며 생명이 되신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선언에 대하여 참람하다고 외쳤습니다.
참람(僭濫)이란 헬라어는 "블라스패미아(blasphēmia. βλασφημία)"라고 하며 그 의미는 "비방" 또는 "신성모독"이라고 합니다.
'블라스패미아'라는 헬라 단어에서 "신성모독"이라는 영어 단어 "블라스퍼미(blasphemy)"가 유래합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는 것을 참람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유대인들의 입맛에 맞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을 참람하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희는 땅의(gē. γῆ) 소금이며, 세상의(kŏsmŏs. κόσμος) 빛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agapē. ἀγάπη) 하셨는데 서로 사랑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aphiēmi. ἀφίημι) 하셨는데 단 한 번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어두움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빛의 자녀들이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서 허덕이고 방황하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참람한 모습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가르침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벧전 4:7).
왜냐하면 성경은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눅 13:3, 5)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계 2:5)
촛대(교회)를 옮기기 전에, 망하기 전에 회개합시다.
그리고 기도합시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주여, 자유대한민국을 붙잡아 주옵소서!"
내 기도하는 그 시간
성경에서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죄
동영상
성령 모독죄(마 12:31-32)
은혜 받고도 타락한 십자가 욕되게 하는 죄(히 6:4-6)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요일 5:16)
아담의 원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죄 - 예수 내 구주
주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정죄되고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들은 무슨 죄로 주님을 사형에 처했는가?
바로 신성모독죄이다.
즉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선하고 거룩한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느냐 악하고 더러운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고 단지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는 사실 자체가 죄로 여겨졌다.
물론 더러운 죄인이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한다면 더 큰 모독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오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주님이 심문을 받는 자리에서 자리에서 처음 표명된 것이 아니고 그 전에 이미 표명된 바 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 10:30-33)
그렇다면 주님은 이런 관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을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4-38)
주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것은 성경에도 나와 있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왜 그런가?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어째서 잘못이며 어째서 죄가 되느냐 하는 것이 주님의 입장이었다.
유대인들이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거나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컫는 것을 죄라고 생각한 것은 그러한 행동을 사람이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하나님을 사람의 자리로 끌어내려 낮추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종교적 관념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주님은 외형을 보지 않고 속을 보았다. 그는 사람의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마귀의 생명이 있으면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라
본질(생명)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종자인 것이다. 흙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냐 어떠냐 하는
것은 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과 주님의 시각은 이렇게 달랐다. 유대인들은 모든 것을 형식적으로 판단했다. 사람을 판단할 때도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판단할 때도 오직 껍데기를 가지고 판단했다. 그들의 눈에는 한 손으로 피를 묻히며 죄를 짓으면서 동시에 다른 손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아무 문제도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의 눈에는 38년간 앉은뱅이로 고생하던 사람이 안식일에 나아서 걸어가는 것이 죄로 보였으며 그를 고쳐준 예수님도 죄인으로 보였다. 이 얼마나 표면적인가! 이러한 거짓된 관념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어이없는 죄로 정죄를 받고 죽음을 당했다.
오늘날에는 이런 문제가 없는가?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유대인들이 익숙하게 생각하지 않던 몇 가지 용어들에 오늘날의
신자들이 익숙해졌다는 사실을 빼고는 사실상 달라진 것이 없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거나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참람하다고 생각하여 감히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들은 이러한 용어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실제 관념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로 생각하며
가까이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긴다면 결국 그것은 자기를 하나님(의 씨)으로 생각한다는 것인데 이것을 감히
받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유대인들의 관념 곧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이고 종교적 관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실제로 자기를 스스로 높여서 하나님처럼 행세하려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이르겠다고
스스로를 높이며 교만하게 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분명히 교만하고 망령된 생각이며 그 기원은 타락한 천사
마귀에게서 온 것이다. 사람이 자기를 높여서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멸망할 교만한 생각이다. 그래서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칭하는 자들을 정죄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일리가 있다.
그러나 자기를 스스로 높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아들의 자리로 이끄실 때 거기에 순종하여 따라가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주님은 자기를 하나님 아버지라고 한 것이 아니고 단지 그의 아들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억지로 자기를 높이신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는 언제나 아버지 앞에서 자기를 낮추셨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복종해야 할 아들로서 행했고 실제로 아버지의 뜻을 위해 죽음까지 불사했다. 이것은 자기를 스스로 높인 것이 아니요 도리어 스스로 낮춘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은 자기 인생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쓰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쓰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희생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한 것이며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보시는가?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 교만과 일탈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섬김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보시며 어떤 관계를 가지고 싶어하시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은 사람을 기뻐하시며 사랑하시며 그의 아들로 보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의 형상으로 지으셨으며 항상 그와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지으셨다. 그래서 아담을 만드실 때 하나님은 그 속에 당신의 생명을 불어넣으셨고 또한 그로 생명과를 먹게 하셨으며 그로 천하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땅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며 그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이익을 위해) 일하도록 정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뜻이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차질을 빚게 되자 하나님은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그가 택하신 한 무리를 불러 다시 자기 아들(백성)을 삼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처음 뜻을 이루게끔 역사하셨다.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것이 바로 아브라함이고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아들이라고 부르셨으며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출4:22,23)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호11:1)
이스라엘은 그 생명의 실상으로 볼 것 같으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 없는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안에서 아들로 조성(회복)되어가는 중에 있었기 때문에 아들로 간주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 안에서 그리고 약속 안에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거나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당연히 합당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서로를 그렇게 격려하며 거기에 맞게 살았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영원한 뜻에 대해 알지 못했고 관심이 없었다. 주님이 성경(시82:6)을 인용하셔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라는 지적을 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마땅히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았어야 했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하여 아버지의 길과 생명 안에서 행하게 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로 연합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사소하거나 희미한 계획도 아니고 감추어진 비밀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의
핵심이다. 이 하나님의 뜻은 세상 끝에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1장은 그것을 보여준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1-7)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사실에 전혀 몰랐을까?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자신들을 전혀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8:43-47)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진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렇게 생겼기 때문에 그것이 안 맞는 것이다. 눈이 어둡고 귀가 어두워 하나님의 말씀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며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은 더욱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길을 가고 있다고 고백하며 증거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주님 때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후로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감히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고 그렇게 말하지 못했으며 그렇게 행하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라는 생각에 항상 갇혀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하지만 인간은 죄나 짓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과 겸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불신앙과 진리에 대한 무지, 육신대로 편하게 살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사실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요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참 아들이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아서 하나님의 아들로 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명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살지 못한 것이다. 그들 안에 있는 생명이 마귀의 생명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생명)을 받은 사람들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거나 그렇게 표현하기를 주저했다. 그것은 세상의 종교적 관념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리보다 인간의 종교적 철학적 관념이 득세한 경우이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관념에 따라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이 무엇인지 보아야 한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그대로 보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롬8:14)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좇는 자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면 아버지의 모든 것은 우리 것이다. 그가 거룩하면 우리도 거룩할 수 있으며 그가 의인과 악인에게 꼭 같이 비를 내리고 해를 비추시는 분이면 우리도 원수를 용납하며 축복할 수 있다.
신성
모독이 무엇인가? 진짜 신성모독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을 좇지 않고 자기 욕망대로 사는 것이다.
진짜 신성 모독은 주님이 하신 것이 아니라 유대교 지도자들이 했다. 그들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육신의 욕망을 위해 그것을 어기며 그것을 교묘하게 위장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진짜 신성모독인 것이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2:24)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하나님을 거룩히 여긴다는 것은 종교적 의식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어떤 인격과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삶을
사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58:1-9)
금식을 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경건과 섬김이 아니요 하나님의 심정으로 행하는 것이 경건과 섬김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겉과 속이 다른 자는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이사야의 꾸지람을 들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겉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속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며 조롱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4:31-3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5-19)
누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그를 섬기는 것을 자기 양식으로 삼는 그 사람이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그 사람이다. 주님은 다른 사람들이 다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함에 있어서) 아직 여유가 있다고 할 때 벌써 때가 찼으며 시간이 촉급하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때 이스라엘의 죽어가는 죄인들을 그런 시각으로 보고 계셨기 때문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5:39-44)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속에 있으면 자연히 하나님을 말하게 될 것이고 그 뜻을 말하게 될 것이고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자기를 하나님의 권속으로 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때 반가워서 그를 보고 자연히 '형제여' 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법적 문제도 아니고 다른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오직 생명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레위기 24장 10절 말씀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의 어머니가 이스라엘 여인이요 그의 아버지는 애굽 사람인 어떤 사람이 나가서 한 이스라엘 사람과 진영 중에서 싸우다가”
βλασφημ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988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구원에 대하여 분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언제까지 우리를 의심하게 하겠느냐고, 분명히 말씀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 돌을 드는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유대인들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원하는 어떤 내용을 마음속에 정해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말씀해 주지 않으시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분명하게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분명하게 제시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아무도 주님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 번 이 내용을 강조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모든 것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받았다고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 조건은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는 말은, 결코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는 말은, 어떤 일이 있어도 멸망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영어로 보시면, they shall never perish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확신할 수가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었기 때문에 그들이 절대로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두 번이나 강조해서, 아무도 내 손에서, 그리고 내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한 번 주님의 손을 잡았을 때, 이제 주님께서는 아무도 그 손을 놓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놔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가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잡은 것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 손을 잡으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Then came the Feast of Dedication at Jerusalem. It was winter,
수전절(修殿節, Feast of Dedication)은 유대인들이 우상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정결케 한 역사를 기념하여 지키는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를 말합니다.
수전절은 유대력 기슬르월 25일부터 8일간 지키는 절기이며, 기슬르월은 오늘날 그레고리력으로 11~12월에 해당합니다.
수전절은 부림절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유대인의 민족 절기일 뿐 하나님의 계명이나 하나님의 절기는 아닙니다.
수전절을 "봉헌절"(공동번역) 또는 "성전 봉헌절"(표준새번역)이라고도 하며, 유대교에서는 하누카(Hanukkah, חֲנֻכָּה)라고 합니다.
'하누카'는 '봉헌'과 '헌신'을 의미합니다.
2024년 하누카의 절기는 2024년 12월 25일 수요일 저녁부터 2025년 1월 2일 목요일까지라고 합니다.
수전절의 기원은 기원전 2세기경 유대인들은 헬라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헬라 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이 메대·바사(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중동 지역의 패권을 차지했던 대제국을 말하며,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그의 부하였던 네
장수(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가 유대를 분할 통치했습니다.
초기에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지배했으나, 100여 년 뒤에는 시리아를 포함해 아시아 지역을 다스리던 셀레우코스가 팔레스타인 통치권을 빼앗았습니다.
이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 역시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재위 B.C. 175-B.C. 163)는 헬레니즘 문화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으려
했고 그 대상에 유대인도 포함되었습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유대인들에게 헬라 신앙을 강요하며 수많은 핍박을 가합니다.
심지어 할례와 안식일 및 절기 등을 지키지 못하게 하고 예루살렘 성전 뜰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신상에 경배하지 않는 자들을 사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이 같은 핍박에 일부 유대인들이 항거했습니다.
그중 유다 마카베오는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며 기원전 165년경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성전에서 모든 우상과 도구를 치우고 깨끗하게 정리한 뒤 기슬르월(양력 11-12월) 25일에 새 번제단을 하나님께 봉헌한 것에서 시작한 것을 기념하는 날을 수전절이라고 합니다.
성전을 청결케한 사건을 기념하듯이 오늘날은 그리스도인들의 몸이 곧 성전입니다.
따라서 내 몸을 항상 정결케하여 성령께서 내주하는 거룩한 몸으로 관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자의 귀한 몸
학자들은 수전절에 대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친히 명하신 절기보다 중요성이 떨어진다고 설명한다.
유대인들은 가지가 아홉 개인 촛대 '하누키아(hanukkiyah)'에 불을 밝히며 민족 명절인 수전절을 기념한다.
수전절은 유대인들이 우상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정결케 한 역사를 기념해 기슬르월 25일부터 8일간 지키는 절기다.
기슬르월은 오늘날 그레고리력으로 11~12월에 해당한다.
수전절은 부림절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유대인의 민족 절기일 뿐 하나님의 계명이나 절기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키라 명하신 절기로는 주간 절기인 안식일과 연간 절기인 7개 절기가 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성경에서 수전절은 단 한 차례 등장하는데, 예수님이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신 시점이 수전절이 된 겨울임을 설명할 때 언급됐다.
'수전절'은 이방신 숭배로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시켜 봉헌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그래서 이 절기의 히브리어 명칭은
'봉헌'을 의미하는 '하누카'이다.
수전절이 우리들에게 특별한 이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직접 올라가 지키신 절기이기
때문이다(요 10:22).
수전절은 유대력으로 '키스레브' 월 25일에 시작하여 8일 동안 지켜지는데, 이때는 12월경으로 비가
내리는 겨울철이다.
이스라엘에서 우기인 겨울철은 통행하기가 매우 불편한 계절이다.
더구나 수전절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하는 순례
절기가 아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수전절을 지키셨다.
그렇게 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내용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성전 정화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시킨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주전 334년부터 시작된 알렉산더대왕의 동방정복으로 이스라엘은
그리스제국의 통치 아래에 놓였다.
헬라문화와 종교를 강력하게 추진하였던 셀루커스왕조의 제8대 왕 안티오커스 4세는 주전 168년
예루살렘성전에 제우스신상을 세우면서 제물로 돼지고기를 바치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격분한 모디인 지역의 제사장 마타티아스는 다섯
아들과 함께 헬라제국을 향한 저항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저항운동은 마타티아스의 아들이었던 유다 마카비가 주도하였다.
이 저항운동을
'마카비전쟁'이라고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마카비 저항군은 주전 164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방신 숭배로 더렵혀진 성전을
정화시켜 봉헌하였다.
수전절 기간이 8일인 이유는 저항기간 동안 유보되었던 초막절을 겸하여 지켰기 때문이다(마카비 상
4:56-59).
예수께서도 두 차례나 예루살렘성전을 정화시키신 적이 있으셨다(요 2:13-22; 마 21:12-13).
예수께서는 소, 양,
비둘기를 파는 자들을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면서 성전을 장사하는 집 곧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책망하였다.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제2의 수전절 사건을 일으키신 분이시다.
그것이 통행이 불편한 겨울철임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수전절을 지키신 이유이다.
둘째, 빛의 축제
수전절은 '빛의 축제'이기 때문이었다.
37년에서 100년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그의 저서 「유대고대사」에서 수전절을 '빛의 축제'라고 명시하였다.
이는 마카비시대부터 수전절이 8일 동안 매일 하나씩 추가하여
8개의 등잔에 불을 밝히는 절기였음을 의미한다.
수전절에 사용하는 촛대인 '하느키야'는 9개의 등(기본 등 + 8개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 기본 등은 '샤마쉬'라고
부르는데, '봉사자' '시중드는 자'라는 뜻으로 다른 8개의 등을 밝히는 역할을 한다.
빛의 축제로서의 수전절과 관련된 탈무드
내용이 있다.
마카비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성전을 회복하였을 때, 이방신으로 더렵혀진 성전 안에는 7곱 촛대(메노라)를 밝힐
정결한 기름이 하루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기름이 8일 동안 꺼지질 않고 계속 유지가 되었고, 그 사이에 정결한 기름을 제조할
수 있게 되었다.
그와 같은 '기름의 기적'이 수전절을 더욱 즐거운 빛의 축제로 만들었다.
예수께서는 이 땅의 빛으로 오신 분이시다(요 8:12; 9:5).
그분은 또한 우리들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마 5:14).
우리들은 하나님의 제사장나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불을 붙여주는 수전절의 '샤마쉬'가 되어야 한다(출
19:6; 사 61:6; 벧전 2:9).
빛으로 오신 예수께서는 빛의 축제인 수전절을 지키심으로 자신의 빛 되심과 우리들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함을 행동으로 직접 강조하신 것이다.
셋째, 세 때를 가르치셨다(형벌의 날, 이방인의 때, 재림의 날)
수전절을 통해 감람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치신 '세 때' 곧 '형벌의 날(징벌의 날)(눅 21:22)'과 '이방인의 때(눅 21:24)'와 '재림의
날(눅 21:27)'을 강조하셨다.
마카비군대의 예루살렘 점령과 성전회복으로 100여 년간 지속된 하스모니아 왕조가 세워졌다.
이를 통해 수전절은
유대인들의 개척과 독립정신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누가복음 21:24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누가복음 21:22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누가복음 21:27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요세푸스는 70년 예루살렘 멸망으로 끝난 유대인전쟁의 배경에 수전절 속에 담긴 마카비의 저항정신이 있음을 증언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징벌의 날'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수전절에 참석하신 것은 곧 다가올 멸망의 그 날을 슬픈
마음으로 예시하시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면서 장차 닥칠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늑 19: 41). 그 자리에는 '눈물교회'라는 이름의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마카비정신은 19세기 말 헤르츨에 의해 시작된 시온주의운동에서 다시 부각되었다.
5차례에 걸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온
유대인들은 맨 손으로 불모의 땅을 가꾸는 불굴의 개척자들이었다.
이들에게 용기를 안겨준 것 역시 수전절 속에 담긴 마카비
개척정신이었음이 분명하다.
그에 대한 증거가 유대인올림픽으로 알려진 '마카비아'에서 찾을 수 있다.
국제올림픽과 월드컵과 함께
삼대 국제스포츠대회인 '마카비아'가 처음 제안된 것은 1929년이었다.
3년 뒤인 1932년 첫 대회가 텔아비브에서 개최되어 오늘날까지 매 4년마다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17년에 개최된
제20회 '마카비아'는 85개국으로부터 45개 종목의 10,000여명 선수가 참가하였다.
불리한 여건 속에서 독립을 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마카비아'는 새로운 에너지를 결집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마카비아'라는 명칭 자체가 수전절 속에 담긴 독립정신을
보여준다.
1948년 5월 14일에 이루어진 이스라엘독립은 '이방인의 때'가 끝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수전절 참석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방인의 때'가 끝날 것임을 미리 알려주신 예언적 행동이시기도 하다.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At these words the Jews were again divided.
분쟁(分爭) 4978. 스키스마(schisma) σχίσμα, ατος, τό
* 4977 σχίζω
984. βλάπτω 스트롱번호 984
5345. φήμη, ης, ἡ 스트롱번호5345
*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 이 선언은 하나님의 자비가
예수의 대속 사역에 어떤 결함이나 불충분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더욱이 성삼위 하나님의 위상(位相) 중 제 3위에 해당하는
성령의 탁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한편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란 성령의 이지적 사역을 사단의 능력으로 간주하는
것이라 보는 학자들이 있다(Broadus, Chafer, Gebelein). 그런 점에서 바리새인들은 이미 그 죄를 범하고
말았는데,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덧입은 예수의 이적을 바알세불의 소치(result)로 매도했던 것이다(24절).
이와 대조적으로
본문을 단순히 예수를 헐뜯고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일 뿐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성령의 독특한 사역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 발생하신
분으로서(요 15:26 ; 16:7 ' 롬 8:9 ; 갈 4:6) 창조와 구속을 완성하는 사명을 맡으셨다.
그런 까닭에 그분은
죄인들에게 죄를 자각케 하고, 예수의 초청을 수락(acceptance)케 하며, 영원한 진리를 깨닫게 함으로써 더 성숙한 신앙
인격체로 자라나게 하신다.
그러므로 비록 성부를 경원(敬遠)시 하고 성자를 미워한 자라 할지라도(딤전 1:13), 이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역사로 인해 참회(懺悔)의 자리를 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성령이 역사를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비방,
모독하는 것은, 곧 참회와 중생에 이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遮斷)해 버리는 일로서 결국 심판에 회부될 수밖에 없는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된다(요 3:36). 한편 신.구약을 통틀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한 규정한 것이 있다.
그것은 '짐짓 범한
죄', 곧 의지적 결단에 의해 자행한 죄이다(민 15:30 ; 히 6:4-6 ; 10:26-32 ; 요일 5:16).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며, 은혜의 빛이 어떻게 비취는가를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그것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부지중(不知中)에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의 경우(고전 15:9)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범죄이다.
이같은 범죄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과 긴밀한 관련성이 있다.
즉 예수가 행하시는 놀라운 사역들(치유, 금식, 부활하심 등)이 분명히 하나님과 성령의
능력안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충분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완강하게 부인하는 것은 결단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분명한 것임을 인지하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성령께서 인간의 내면에 들어오셔서 감동, 감화하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의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곧 용서의 가능성을 완전히 막아버리는 일아 된다.
결국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란 어떤 특수한
경우에만 적용시킬 수 없는 일로서, 죄를 깨닫게 하고 참회케 하는 성령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거나 고의적(故意的)으로 성령에
대항하려는 고집스럽고도 악의에 찬 심령과 그 모든 활약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Alford, Plummer, Robinson
등).
귀신 들린
요한복음 8:4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요한복음 8:52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요한복음 10:21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 귀신(1140) δαιμόνι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1140
* 들려(2192) 에코(ĕchō) ἔχω
누가복음 4:33
더러운 귀신들린 - 귀신 '들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코'(*)는 '가지다', '소유하다', '잡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귀신들린 상태에 관해서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할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간혹 목격되는 바이다. 이 상태는 '전혀 이질적인 타인격이 사람 속에 들어와서 그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지배하는 상태'라고 정의내려질 수 있다. 따라서 귀신들린 자가 귀신이 되는 것이아니라 다만 그 귀신에 의해 인격이 지배당하게됨을 의미한다. 귀신이 어떤 특정한 사람의 죽은혼인 것처럼 나타날 때가 있지만 이는 속임수에 불과한다. 인간의 영혼이 귀신의 형태로 활동한다는 것은 비성경적 견해이기 때문이다. 한편 귀신들린 자의 상황은 완전히 미친 상태, 병걸린상태, 혹은 귀신을 빙자한 주술적 능력을 지닌상태 등이다. 귀신은 세상 끝날까지 잠시 동안은 인간보다 영적 능력이 더 우월한 상태로서 인간을 괴롭힐 수 있지만,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써 귀신을 추방하고 정복할 능력과 특권을 지니고 있다(약 4:7). 그런데 축사 신학에서 주의할 사항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귀신을 쫓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귀신이 축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마가복음 1:23
마침(*, 유뒤스) - 긴박감을 더해 주는 마가의 표현 기법이다. 곧 예수께서 가르치신 교훈으로 회당 내(內)가 놀라움과 감동으로 가득차 있던 바로 '그 시점'에라는 뜻이다.
더러운 귀신(*, 프뉴마티 아카다르토) - 본서에서 이 말은 11회 나오며, 누가는 이 말에 '귀신' 혹은 '마귀'라는 뜻을 가진 '다이모니온'(*)을 부가하여 사용하고 있으나(눅 4:33;8:27;10:17등), 의미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여기서 마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귀신'이라는 존재에 '더러운'이라는 형용사를 첨가한 데 있다. 이 '더러운 영'은 선한 의지와 도덕성이 완전히 상실된 그야말로 악의 실체가 되어버린 영의 상태를 의미한다. 실로 예수의갈릴리 사역 초두(初頭)인 바로 이 안식일에 진리 전파 장소 한 가운데로 돌진해 온 자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자로서 이는 구속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악한 영, 곧 마귀의 일을 파괴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요일 3:8). 한편 더러운 귀신들린 자의 첫반응은 '소리질러'(*, 아나크라조)란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의 진리 전파 사역을 '방해하고'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한 것이다(눅 4:33). 현대 의학이나 심리학, 심지어는 현대 신학자들 중에서도어떤 이들은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농후(濃厚)하다. 즉 그들은, 귀신이란 정신병을 가진 어떤 사람이 정서적 불안 상태에서 충격을 받은 경우 혹은 정신이상자와 간질병자의 경우로 나타나는 증세를 가정(假定)해서 칭한 이름이라고 한다.그러나 본 구절은 귀신의 존재와 성격에 대해 명백히 규명해 주고 있다(마 4:1-11, 주제 강해 '사단'(마귀)과 '귀신'참조). 이러한 귀신은 그리스도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방해하며 사람들에게 극한 공포심을 안겨주는 것이다(벧전 5:8).
마가복음 5: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 무덤 사에에서 나와. - 배가 도착하고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자 곧 귀신들린 자를 만났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 장면은 마치 배가 도착한 장소가 무덤 가까이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즉 무덤 사이에서 나오는 귀신들린 사람을 예수께서 막 만나는 장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6절을 보면 멀리서 예수를 보고 귀신들린 사람이 달려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배가 닿은 곳이 무덤 근처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한편 4:35의 상황으로 볼 때 이미 날이 저물었을 때였으므로 호수를 횡단(橫斷)한 후 거라사인의 지방에 도착했을 때에는 어두움이 짙게 깔려 있던 때였음이 분명하다.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 - 여기서 “귀신”(프뉴마티)은 문자적으로 숨, 바람, 기운, 생명, 영혼, 영(spirit), 유령, 귀신, 성령(the Holy Spirit) 등의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더러운”(아카다르토)은 “불순한”, “더러운”, “부정한” 등의 뜻으로 쓰인다. 직역하면 “부정한 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는 선한 의지가 완전히 결여되어 버리고 오직 약령의 지배하에서 자기 파괴적인 우울 증세를 보이는 상태를 의미한다(1:23 주석 참조). 이에 대해 공동번역은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한편 눅 8:27과 본문에서는 악령들린 사람이 단수이다(안드로포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두 사람으로 묘사된다(마 8:28). 아마도 이같은 차이점은 마태는 그 보고가 상세한데 비해 마가와 누가는 그 둘 중 가장 대표될 만하고 특징적인(치명적인) 한 사람을 강조하고자 했던 차이일 것이다(Calven). 나머지 한 사람은 여기 소개된 자의 휘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Lenski).
마태복음 8:16
귀신들린 자를 많이 - 성경은 육체적 질병과 뚜렷한 구별을 두고 '귀신들린 자'를 취급하고 있다(4:24; 12:22;
17:18). 따라서 이는 정신적 질환의 일반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성경은 정신 질환의 발병 원인을 사단의 역사로 보는
경향이 짙다(Weiss). 여하튼 예수 당시 유대 지방에는 귀신들린 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현상은 두 가지로 설명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1)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도 지적한 바 있듯이 그 당시 유대인들은 대단히 사악하였으며 도덕적
신앙적인 면에서 불경건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2) 그들은 괴상한 마술에 심취하여 악령을 부르고 또 그들과 자주 접촉했기
때문이다(Dr. Lightfoot).
마가복음 7:25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 - 예수를 찾아왔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방인 여인에 대한 배경
설명이다. 확실히 그녀는 예수께 대한 소문, 그중에서도 그분의 탁월한 신유의 은사에 관한 소문을 듣고 찻아왔을 것이다. 그녀는
예수의 오신 소문을 듣자 마자 '곧'(*, 유뒤스)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겸손과 절대 신뢰의 자세를 취했다. 한편 그
여인의 딸은 '더러운 귀신'에 들렸는데(1 :23;5:2 주석 참조). 평행 본문인 마 15:22에서는 '흉악한 귀신'이 들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공동번역에서는 '악령'과 '마귀'로 표현하고 있다. 이 병은 육체적 압박과 두려움을 동반한 심한
정신적(精神的) 질환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러한 딸을 두고 있던 그 여인의 한숨과 눈물, 그리고 고통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을 것이다. 마가는 그 여인은 헬라인(a Greek)이면서 수로보니게 족속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당시의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그녀의 국적이 분명 헬라 곧 그리이스가 아닌 점을 생각할 때 여기서'헬라인'(Greek)은 유대인콰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이방인'(Gentile) 에 해당하는 말이거나,'헬라어를 상용하는'(Greek-Speaking) 사람이라는 의미일 것이다(행
18:4;롬 3:9;10:12). 한편 그녀는 '수로보니게' 출신이었는데, 여기서 '수로보니게'는 '수로' 지방의 '보니게'라는
뜻이다. 즉 지금의 '시리아'에 야한 '뵈니게'(Phoemicia)지방을 말한다(24절 주석 참조). 당시 '보니게'는 행정상
시리아에 복속되어 있었다. 어쨌든 마가는 아프리카에 있는 '리비오 보니게'(Liobyo-Phoemicia)와 혼돈을 피하기 위해
'수로'라는 지방 이름을 붙여 '수로 보니게인'(SyroPhoemicia)이라 이름하였을 것이다. 실로 여기 언급된 여인은 분명
헬라화된 이방사람 이었다. 당시 이들 이방인들은 민족적 우월성에 도취되어 있던 유대인들에게 심한 적대감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Josephus).
사도행전 16:16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 누가는 거듭하여 우리에게, 기독교 복음이 싸워 나가야 했던 그리이스-로마의 미신적 배경을 상기시키고 있다(8:9;13:6). '귀신'(*, 프뉴마 휘도나)의 '퓌돈'(*)은 고린도만 북부 파르나소스산 남쪽 언덕에 위치한 아폴로 신전에서 신탁을 지키는 신화 속의 뱀 또는 용을 가리키는데 퓌돈은 결국 아폴로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퓌돈은 나중에 복화술사(腹話術師)까지도 의미하게 되었는데, 그 내부에는 퓌돈의 영이 들어있는 것으로 여겨졌다(Plutarch).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 여종은 점을 쳐 사람들의 앞날을 알아 맞히고 많은 돈을 벌었으나, 수입금의 대부분은 주인들에 의해 착취되었다. 이러한 주인들의 태도는 약자들의 병을 치유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약함을 이용하여 이윤만을 챙기려는 불의한 정치인들과 악덕 기업주 그리고 적게는 이기주의에 젖어있는 우리의 태도와 다를 바 없다.
1. 귀신(鬼神, demon, evil spirit)
원어로 다이몬(daimon)이라 하며, 악한 영(devil)을 가리킨다(마 10:1, 8; 행 16:16).
2. 귀신의 정체(正體)
1) 타락한 천사이다(벧후 2:4; 유 6).
2) 사단을 우두머리로 하는 조직과 계급을 가진 악한 영들이다(엡 6:12).
3) 세대주의자들은 홍수 이전에 천사와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종족으로 보기도 한다(창 6:1-4).
3. 귀신에 대하여 여러 견해
1) 아담 이전의 인류의 영혼이라는 견해아담 이전에도 인류가 있었는데 그들이 타락하여 저주를 받아 죽은 영혼이 귀신이 되었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최초의 인간이 아담이라는 성경의 기록을 부정하는 결과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2) 천사와 결혼한 후손들의 사후 영혼이라는 견해창세기 6장 1-4절을 근거로 하늘의 천사가 내려와 세상 여자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네피림'인데, 네피림이 죽은 후에 귀신이 되었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하나님의 아들은 셋의 후손을,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이라는 신학자들의 해석이 받아들여져 설득력이 없습니다.
3) 노아 홍수 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라는 견해노아 홍수 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음부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도는 귀신이 되었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누가복음 16장 31절 말씀을 부정하는 결과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4) 불신자 사후의 영혼이라는 견해불신자가 죽으면 음부에 들어가야 하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들어가지 못하여 지상에서 방황하는 영혼이 귀신이라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음부는 죽은 자의 거처로서, 사후 모든 인간의 영혼이 예외 없이 가는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창42:38;전9:10;눅16;23;행2;27)는 성경의 기록을 부정하는 결과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5) 타락한 천사라는 견해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사였지만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교만 때문에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대항하는 죄를 짓고 타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사14:12-14;겔28:11-19). 타락한 천사들이 영으로 이 땅에 던져져 활동하고 있다는 견해로 대다수 한국 교회가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 사단을 귀신의 왕으로 불렀으며, 귀신은 사람을 통제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4. 귀신의 정체에 대한 오류
1) 귀신은 죽은 자의 영혼이 아니라 사단을 우두머리로 하는 집단이다
(1) 귀신의 왕을 '바알세블'이라고 성경에 분명히 밝히고 있다(눅11:15;마12:24).바알세불(Baalzebul)은 사단의 별명이다(눅11:18,19).
(2) 귀신들린 사람을 사단에게 매여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눅13:11-16;행10:38).
(3) 귀신이 죽은 자의 영혼이라면 바울을 알 수 없어야 하는데 잘 알고 있다(행19:15).
2) 귀신은 천사와 여인의 후손이 아니다.
천사들은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마22:30).
5. 귀신의 속성(屬性)
1) 영적 존재이다. 더러운 영으로 불리우고(마10:1;막9:25;계16:14).수천이 동시에 한 사람에게 들어갈 수 있다(막5:9).
2) 지적 존재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다(눅4:41;막1:24,3:11).
3) 부도덕한 존재이다. 악하고 거짓말을 한다(삼상16:14;딤전4:1,2;요8:44;대하18:21).
6. 귀신의 종류(種類, kind)
① 마귀(신32:17).
② 사신(시106:37),
③ 염소(레17:7),
④ 온역(합3:5),
⑤ 번갯불(시78:48),
⑥ 흡혈귀(잠30,15의 거머리),
⑦ 폐렴, 염병, 열병(신28장)
7. 귀신의 능력(能力)
1) 수천이 동시에 한 사람에게 들어갈 수 있다(막 5:9).
2) 운명을 알고(눅 8:31; 마 8:31,32), 강한 자를 안다(행 19:13).
3) 예수 그리스도께는 복종하도록 되어 있다(마 8:16-17; 막 16:17;행 19:15).
8. 귀신의 활동(活動)
1)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려 한다(단10:10-14;계16:13-16).
2)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 수행에 이용되기도 한다(삼상16:14;고후12:7).
3) 하나님의 자녀의 영적인 성장을 저해하고 사단의 권위를 확장하려 한다(엡6:11,12).
4) 인간(마4;24)과 동물(막5:13)을 사로잡아 병들게 한다(미9:33;눅13:11,16;행10:38).
5)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게 그릇된 교리를 유포한다(딤전4:1).
6) 복음을 방해하며(행13:10), 믿지 못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도둑질한다(마13:19).
7) 죄 짓도록 올무를 놓는다(딤전3:7;창3:4,5).
8) 의심과 불신앙이 일게 하고(창3:4,5), 분쟁이 있게 한다(고전3:1-3).
9) 제사를 지내게 한다(고전10:20).
10) 점을 치게 한다(행16:16).
11) 어떤 귀신은 감금을 당했으나(벧후2:4;유1:6), 어떤 귀신은 매이지 않고 사단의 일을 하고 있다.
12) 귀신들은 광야나 황무지에 산다고 여겼으며, '아사셀'(레16:8,10)을 대표격으로 꼽을 수 있다.
9. 귀신들림의 특징
'귀신들림'이란 귀신의 권세와 능력에 사로잡힘을 말한다(마9:32).
귀신들린자의 정신 상태는 정신병자의 상태와 비슷하다(막5:15;눅8:35).
육체적인 질병과 귀신들린의 질병이 다른 점은 육체적인 질병은 안수니 기름부음으로 치료되나 귀신들림의 질병은 귀신을 꾸짖거나 명령하여야 치료되었다(마10:8;막6:13;눅13;32;행8:7,19:12)
1) 사람의 병들게 한다(마12:22;눅13:11)
2) 사람을 사납게 한다(마8:28).
3) 사람을 괴롭힌다(마12:45;눅6:18).
4) 사람을 죽이려고 한다(막9:22;롬3:23)
5) 사람을 부르짖고 미치게 한다(막1:26,9:26;눅9:39)
6) 경련을 일으키게 한다(막1:26;눅9:39,42)
7) 옷을 벗게 한다(눅8:27) 8) 광야로 내보낸다(눅8:29)
* 모든 병의 원인이 귀신에 의함은 아니다(딤전5:23). 육체적인 질병과 귀신들림의 질병이 있는데, 육체적인 질병은 안수나 기름부음으로 치료되나 귀신들림의 질병은 귀신을 꾸짖거나 명령하여야 치료되었다(마10:8;막6:13;눅13;32;행8:7,19:12)
10. 성경에 귀신 들린 자
1) 사울왕(삼상16;14)
2) 가버나움 회당의 귀신 들린 자(막1;24)
3) 거라사 지방의 군대 귀신 들린 자(마8;29;막5;15)
4) 벙어리 귀신 들린 자(눅11:25,26)
5)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마15:22-28;막7;25-30)
6) 귀신 들린 소년(마17:18)
7) 빌립보 성의 여자 노예(행16:16-18) 8) 스게와의 아들(행19:15,16).
11. 귀신의 운명(運命, fate, destiny)
1) 일시적 운명
(1) 성령의 이름으로 쫓겨난다(마12:28).
(2) 갇힌 어떤 귀신들은 환난 때에 놓임을 받기도 한다(벧후2:4;계9:1-11).
(3) 훗날 무저갱에 던지움을 받는다(눅8:31).
2) 영구적 운명
궁극적으로 모든 귀신은 사단과 함께 불못에 던지움을 당한다(계20:14).
12. 귀신에 관한 관용어
1) 귀신의 영(계18:2) : 사단의 추종 세력. 더러운 영을 가리킨다.
2) 귀신의 왕(마9:34) : 귀신들의 우두머리인 '사단'을 지칭한다.
3) 귀신의 처소(계18:2) : 영원한 형벌의 장소 곧 '지옥'을 가리킨다.
4)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 : 악한 영들도 하나님의 권위 앞에서 떠는데, 그런 귀신들의 믿음과 다름없이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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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그리스도인이 귀신 들릴 수 있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성경의 진리를 살펴보면,
그리스도인은 귀신들릴 수 없다는 것을 매우 분명히 합니다.
귀신들리는 것과 귀신에게 억눌리거나 영향을 받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귀신들리는 것은 귀신이 사람의 생각과 행위를 직접적으로/완전히 조종하는 것을 말합니다((마 17:14-18; 눅
4:33-35; 8:27-33).
하지만 귀신의 억누름이나 영향은 귀신 또는 마귀들이 영적으로 사람을 공격하여 그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고무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 전쟁을 다루는 신약 성경의 모든 본문 중에는 신자에게서 귀신을 내쫓으라는 가르침이
없습니다(엡 6:10-18).
신자들에게는 귀신을 내쫓으라는 말씀보다는 마귀를 대적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약 4:7; 벧전
5:8-9).
신자들 안에는 성령께서 거하십니다(롬 8:9-11; 고전 3:16; 6:19).
분명히 성령께서는 자신이 거하시는 동일한 사람이
귀신들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셔서(벧전 1:18-19)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그분의 자녀들 중 한 사람이라도 귀신 들려서 귀신에 의해 조종 받도록 허락하신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믿는 자들로서 사탄 및 그를 따르는 귀신들과 전쟁을 치르지만 우리 속에 있는 귀신들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선언합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우리 안에 계신 이는 누구입니까?
성령이십니다.
세상에 있는 이는 누구입니까?
사탄과 그를 따르는
귀신들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귀신의 세계를 이기었고 이에 신자의 귀신들림은 성경적으로 볼 때 이루어질 수 없는 사건입니다.
어떤 성경 교사들은 그리스도인은 귀신들릴 수 없다는 강력한 성경적 증거를 염두에 두고 “귀신처럼
되다”(demoniz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마귀가 그리스도인들을 조종하는 상태를 언급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귀신들릴 수는 없지만, 귀신처럼 될 수는 있다고 주장합니다.
일반적으로, 귀신처럼 된다는 묘사는 사실상 귀신들림의 묘사와
동일합니다.
따라서 결국 똑같은 문제가 됩니다.
즉, 용어를 바꾸는 것이 귀신이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거나 완전한 조종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귀신의 영향이나 억압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실제적으로 발생하지만 그리스도인이
귀신들리거나 귀신처럼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신자의 귀신들림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그리스도인이 귀신에 의해 조종되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는 개인적 체험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개인적인 경험이 우리의 성경 해석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을 걸러내야 합니다(딤후 3:16-17).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여겼던 어떤 사람이
귀신들린 행동을 드러내는 것을 목격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믿음이 진짜였는지 의심해야 합니다.
그러한 목격이 그리스도인이
귀신들릴 수 있고 귀신처럼 될 수 있는 것으로 우리의 견해를 달라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진정한 그리스도인도 심하게 귀신에게
억압을 당하고 또는 심한 심리적 문제로 인해 고통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확신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성경의 검증을
받아야 하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귀신 들림의 특징
귀신 들린 상태는 악령의 인격체와 함께 악령의 에너지가 그 사람의 몸 가운데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성경의 예로는 마가복음 5장의 거라사인 광인이 있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살고 있었으며 사람들이 여러 번 쇠고랑과 쇠사슬로 그를 매어 놓았지만 언제나 쇠사슬과 고랑을 끊어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막 5:4).
성경은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하여 그가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막 5:2).
귀신이 들렸을 때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 중에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미움과 훼방이다.
성경에서 훼방이라는 단어가 상위 권위나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는 ‘욕’을 의미한다.
계시록 16장을 보면, 하나님께 심판을 받으며 고통 당하는 자들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그들은 악령으로 가득찬 상태이다.
이때 그 특징이 하나님을 향하여 욕하는 것이다.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 (계 16:9, 참조 계 16:11, 21).
사탄이 사람들을 유혹하는 긍극적인 목적이 성경에 자명하게 나와 있는데 바로 욥기 2장 5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사람이 악령이 들 때 그의 마음과 입술은 하나님을 향하여 더러운 욕을 하게 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악령들이 사람들에게
들어가려는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철저한 원수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악령이 들리면 하나님처럼 자신을 신으로
높이려 하거나, 무서운 죄악들을 범하거나, 하나님을 미워하며 멸시하고 무시하는 마음과 말을 하거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온갖
악행을 저지르거나 일반 은총 및 특별 은총을 무너뜨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게 된다.
악령이 들게 되면 그 사람은 악령의 지.정.의를
따르게 된다.
지적으로는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대항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철저하게 멸망할 것을 안다.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본능으로 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방도 밖에 없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지만 그러나 동시에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 하나님께 욕을 하며
대항한다(약 2:19).
여기서 주의할 것은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버리시지 않았는데, 그는 귀신이 들려 귀신에게 속은
상태로 귀신하고 똑 같은 처지의 생각을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감정적으로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특히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와
보혈을 미워한다.
또한 복음의 사람들을 증오하고 시기하는 것은 당연히 나타나는 증상이다.
악령들은 사람보다 더 지능이 높은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과 지능은 전지하지 않다.
인간에 비하여 높을 뿐이다.
그러므로 악령들의 왕인 사탄마저도 모르는 것이 많다.
대신 그는 수억의 악령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 악령들은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그
정보를 나눈다.
주의 백성들은 결코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섭리 하심이 없다면 사탄과 악령들의 궤계와 조작들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지혜와 도움을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악령들의 공격에 날마다 쓰러져
패배하게 된다.
또한 귀신들은 잔인하다.
따라서 귀신들린 사람들은 잔인하여진다.
자비가 없어지며 지독히 이기적인 존재가 된다.
정도가 도를 넘는다.
특히 난폭함은 극을 달린다.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멸망하게 하면서 말할 수 없는 악한 희열을 느낀다.
따라서 귀신들린 사람들은 정신 병자처럼 보일 때가 많다.
실제로 귀신들린 상태로 정신병자가 되기도 한다.
귀신이 들려고 하는 초기에는 보통 우울증에 빠진다.
도에 지나친 자기 연민에
빠진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통곡과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귀신이 들면 그의 감정은 하늘과 땅을 왔다 갔다
한다.
너무 좋아서 펄쩍 뛰기도 하며 황홀경을 체험하기도 하다가 갑자기 견딜 수 없는 슬픔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 몸을 뒹굴 정도로
아파한다. 발광하는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갑자기 벽이나 전봇대 등, 아무 물체에 자신을 부딪혀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에게 욕설과 폭행을 일삼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신병과 귀신 들린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이를 구별하지 못할 경우 한 영혼의 마음에 평생 상처를 줄 수 있는 실수를 범하기 쉽다.
사실 많은 이단들이 정신병과 귀신들림,
일반 병과 귀신 들림을 구별하지 못함으로 의사를 만나게 하면 쉽게 고쳐질 평범한 사람 하나를 악령의 자녀나 마귀 새끼로 만들어
놓기 쉽상이다.
영적 무지로 인하여 이단들이나 어리석은 목회자들이 여러 연약한 사람들에게 범하는 상상도 못할 무서운 피해들은
무지기수이다.
귀신이 들렸을 때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그의 말하는 내용이 거짓이란 점이 중요하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이다(요 8:44).
따라서 매우 심한 거짓의 '의도'가 나타난다.
쉬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
감쪽 같이 속을 수
있는 거짓말을 한다.
정신병 같은 경우는 실체에 대한 오해를 정직하게 말한다.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오해한다.
이러한 경우
일반인들은 그의 의식이 허상에 있음을 쉽게 본다.
그러나 귀신 들린 경우는 그 사람이 아닌 전혀 다른 인격체가 그를 통하여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뚜렷하게 보인다.
특히 말을 할 때 그 말을 들어보면 내용과 표현 방법에 있어서 정신병과 귀신들린 사람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난다.
귀신이 들린 경우 심지어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나는 경우도 많다.
또한 방언이나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들을 하며, 귀신의 이름과 정체를 토설하는 때도 많다.
따라서 이러한 차이를 분명이 인식한 가운데 의사를 만나게 해야
하는 신체의 병 및 정신 병인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그 영혼을 귀신 들린 상태로부터 구출해야 하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귀신 들림과 신체의 병이 반드시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정신적인 병이 귀신 들림과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귀신 들림으로 인한 병이 있고 같은 종류의 병이라도 귀신
들림과 상관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병을 보며 귀신이 들렸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한국의 김기동 베뢰아 신학의 경우가 이러한 문제에 빠져 있다.
감기마저도 귀신의 역사라고 생각하여 귀신을 내어 쫓는다.
모든 병이 다 귀신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때 “무좀 귀신 물러가라”는 농담도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의 돌팔이 이단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데 거의 획일적으로 모든 병을 귀신의 역사로 치부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병을 치유하러 오시 것이 주 목적이 아니시다.
그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소식과 함께 회개를 촉구하고 나아가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실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 복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가장 깊은 지혜가 담겨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복음대로 믿고
자신의 마음을 드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죄사함과 함께 영생을 얻도록 되어 있다.
마가복음 1장 36-38절은 예수님께서
오신 주된 목적은 전도인 것을 분명하게 하셨다.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귀신 들린 상태의 병과 귀신이 들리지 않은 상태의 병을 잘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마가복음 1:32-34절을 보면 성경은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를 뚜렷하게 구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병은 귀신을 내쫓지 않으시고 고치시고 어떤 병은 귀신을
내쫓으시면서 고치신다.
또한 병이 없어도 귀신이 들린 상태가 있다.
이러한 경우는 귀신만 쫓아내신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들림은 몸과 마음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몸에 병이 들 수 있고,
정신적으로도 병이 들 수 있다.
귀신이 들릴 경우 일반적으로 정신적으로는 우울증 및 정신병 증상이 동반되며 귀신이 말하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환청) 귀신이 이야기 해 주는 내용 때문에 헛것을 보기도 한다 (허상).
한편 마음은 악으로 가득차서 일반인이
저지를 수 없는 무서운 죄악들을 저지르게 된다.
분명하게는, 귀신 들림의 목적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려 죄를 짓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귀신에 들린 자는 쉬지 않고 반복되는 죄악을 범하게 되며 그리고 점점 더 무서운 죄악으로 치달리게 되어
있다.
그 중 가장 무서운 죄악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악으로서 복음을 막는 죄악이다.
이를 위하여 귀신 들린 사람들은 모든 거짓말과
거짓을 동원한다.
신접한
사람들은 귀신이 들린 상태의 사람들인데 이들은 영적인 차원의 거짓을 행한다.
거짓중에 첨단의 거짓은 마술이다.
따라서
이들은 마술과 요술을 통해 거짓 기적과 거짓 기사를 나타내며 이를 통해 사탄을 선전하고 사탄을 숭배한다.
21세기에 사탄의 전략은
'거짓' 평화이다.
거짓 하나됨이다.
온 인류가 거짓에 속아서 하나가 될 것이다.
거짓 복음과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등장할
것이다.
신접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평범하게 보일 것이다.
너도 나도 신접하는 운동을 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참된 메시야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적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착각한 가운데 온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의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귀신들림’(‘다이모니조마이’)에 대한 영어번역, 분명 문제가 있다.
δαιμονίζομαι
스트롱번호 1139
δαιμόνι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1140
그리스도인의 귀신들림을 반대하는 이들은 귀신들림을 '귀신이 그리스도인을 완전히 지배하는 상태‘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해는 귀신들림에 해당하는 헬라어 ’다이모니조마이‘(daimonizomai)에 대한 영어 번역(demon possession)에서 기원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귀신들림’(demon possession)이란 표현에 소유 그리고 통제라는 개념이 들어있다고 믿는다.
마귀에 의해서 소유가 된다는 것은 마귀에 의해 소유가 되었으며 완전히 그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이다.
귀신들렸다는 것은 사람이 무능하게 되었으며 더 이상 그 자신의 그리고 그녀의 의지에 기초하여 더 이상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귀신들림은 비행기가 납치된 것과 같다.
Clinton E. Arnold, 3 Crucial Question about Spiritual Warfare (Grands Rapids, Michigan: Baker Books, 1997), 79.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인의 귀신들림을 반대하는 이들은 ‘이미 하나님의 소유가 된 그리스도인이 동시에 귀신의 소유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아놀드(Clinton E. Arnold)가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본래 ‘귀신 소유’(demon possession)로 번역한 헬라어 ‘다이모니조마이’(daimonizomai)에는 이러한 ‘소유권’ 혹은 ‘소유’라는 개념이 없다.
이러한 번역은 3세기 동안 가장 대중적인 성경인 킹제임스역(KJV)에 의해 표준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가장 이른 라틴어 역본인 라틴 벌게이트(Latin Vulgata)는 헬라어 ‘다이모니조마이’를 ‘소유’로 번역하지 않고 단순한 표현인 ‘귀신을 가졌다’(to have a demon, habeo with daemonia)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귀신들림을 지지하는 이들은 ‘다이모니조마이’를 ‘귀신소유’(demon possession)로 번역하기보다 ‘귀신침입’(demonization)으로 번역하기를 제안한다.
전 세계 복음주의 진영의 귀신론에 성서적 기초를 제공한 엉거(M. F. Unger) 역시 ‘귀신소유와 ‘귀신들림’ 개념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는 ‘귀신소유’는 귀신의 완전히 사람을 지배하는 상태, 즉, 가장 심각하고 가장 심하게 귀신들린 상태를 말하며 대표적인 실례가 ‘거라사 귀신들린 남자’(막 5:1-20)다.
반면, ‘귀신들림’(demonization)은 가벼운 귀신들림, 보통 귀신들림, 심각한 귀신들림으로 단계를 구별한다.
결국 엉거는 ‘귀신들림’(demonization)이란 개념을 가장 거친 상태의 귀신들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귀신의 모든 침범의 경우를 총칭하는 개념이라 본다.
디카슨(C. F. Dickason)은 귀신은 그리스도인들을 실제적으로 소유하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소유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귀신소유’와 '귀신들림'을 개념적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보고, 일반적으로 귀신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침입하는 것은 ‘귀신들림으로 보아야 한다고 본다.
이 외에도 그리스도의 귀신들림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이들은 대체적으로 ‘귀신소유와 ‘귀신들림’을 구분하며, 이 가운데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의 귀신이 침입한 상태를 ‘귀신침입’(demonization)으로 보려고 한다.
배본철은 실제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영혼 속에는 성령께서 거주하시기에 심각한 귀신들림의 상태 즉, 귀신들림(demon possession)으로부터 보호를 받지만 귀신들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볼 수 없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거듭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귀신들림보다는 약간 단계인 ‘귀신의 억압’(demon oppression) 즉, 인간의 지정의와 몸과 환경이 귀신의 영향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멀쩡한 사람들로 보이는 사람들 중에 귀신의 영향을 받고 있는 이들이 대단히 많다는 점입니다.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 귀신들이 얼마나 가깝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는 귀신들의 정체가 드러나고 나면 곧 밝혀집니다.
저는 그 동안의 성령사역을 통해 멀쩡하게 보이는 사람들에게서 귀신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수 없이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이라 할지라도 늘 깨어 성령 충만한 삶을 살지 않으면 얼마든지 귀신의 억압이나 영향을 받는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 배본철, “귀신들림과 정신병, 무엇이 다른가,” 크리스챤투데이 2010년 7월 20일자.
배본철은 ‘귀신들림’과 ‘귀신억압’으로 구분하되, ‘귀신억압’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일상적으로 경험될 수 있다고 본다.
심지어 매우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깨어 있지 않고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귀신억압(demon oppression)이 상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귀신 들렸다’는 헬라어 ‘다이모니조마이’의 적절한 영어번역은 ‘귀신 소유’(demon-possession)보다는 ‘귀신 침입’(demonization)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사료된다.
질문 / 귀신 들림을 어떻게 봐야 하나요?
어떤 분은 삶의 어려운 부분을 얘기하실 때 마다 ‘악한 영’ ‘어둠의 영’ 등으로
얘기하면서 대부분 삶의 어려운 부분을 악한 귀신과 연관해서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귀신 들림 혹은 마귀의 역사
등을 어떻게 보는 것이 성경적일까요?
답변 / 성경은 분명히 귀신의 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죽은 자가 귀신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적으로는 사람이
죽으면 천국 혹은 지옥을 가게 된다고 말합니다.
즉, 귀신은 죽은 자의 혼령이 아니라, 사단(즉 마귀)의 부하들입니다.
* 귀신을 죽은 자의 넋이라고 보는 것은 민속신앙의 결과이다.
사단의 존재가 분명히 있듯이, 귀신의 존재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주권과 질서로
창조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반적인 창조 영역을 무시한 채, 모든 세계를 영적인 측면으로만 보고, 부정적인 삶의
요소들(병걸림, 정신이상적 상황, 우울증, 관계의 어려움 등 등)을 모두 귀신과 연관해서 보는 자세는 옳지 못한 자세입니다.
김기동의 귀신론을 주장하는 베뢰아 아카데미를 이단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일반 자연 영역이
있습니다.
그 영역은 일반적인 원리와 방법을 따라서 살아가고 적용해야 합니다.
모든 잘못된 것을 귀신의 작용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정으로 영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학생이 공부를 하지 않고, 기도만 하면서 성적 올려 달라고 하나님께 조르는 것은 신앙이 깊은 것이 아니라, 신앙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과도 마찬가지 입니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건강이 약해 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식사와 운동을 잘 겸해서 조절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적인 자세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존재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모든 영역을 일반 이성적, 경험적 자세로만 살아가는 것 또한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힘으로 귀신을 내어 쫓으셨습니다(마 12:28).
예수님은 간절히 기도의 삶을 규칙적으로
사셨습니다(막 1:35).
이는 사람의 지혜로 이기지 못하는 사단의 영역이 반드시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존재, 귀신의 존재 등을 늘 기억하고, 예민하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귀신의 존재에 대한 올바른 자세는 삶의 잘못된 전 영역에 영향을 주는 존재를 귀신과만 연관시켜서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자세입니다. 그렇다고 귀신의 존재에 대해서 너무 둔감해서도 안됩니다.
극단적인 자세는 버려야 합니다.
정신 분열 증세와 귀신 들림의 경우는 외견상 구분이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일 경우
‘귀신 들렸다’라고 단정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신병의 증상인 경우는 ‘말의 조리가 없고, 횡설 수설 한다거나, 자기가
정신병자가 아니라고 한다거나, 약물 투여 등으로 인해 효과를 본다거나, 육체적으로는 나약하다거나, 자신의 목소리로 말한다거나,
치유가 장기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귀신들린 부분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갖습니다.
이는 정신 분열 증세와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뚜렷한 의식이 있고, 합리적인 말을 하는 경우가 많으며, 빛나고 사악한 광채나 음침한 눈빛을 발하며, 발작시 진정제나 약물투여가
효과가 없는 경우도 있고, 불가사의한 큰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있으며, 남의 목소리를 내거나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급속하게 치유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구분의 기준 등을 통해서 적절하게 구분하고, 그에 따른 올바른 접근을 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동일하게
보이는 증상이라도,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정신 분열과 귀신들림은 다른 원인에 의한 것으로 구분되며, 그에 따른 적절한 접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귀신에 대한 논의 중 가장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빛이 오면
어두움은 저절로 없어집니다.
어두움을 어떤 다른 노력으로 없애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빛이 오면 어두움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귀신은 아무런 존재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귀신을 없애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모시는 것이 가장 올바른 방법입니다.
어두움인 귀신은 빛 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저절로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뢰아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김기동의 귀신론은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타락한
천사(사탄)를 멸망시키기 위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그 어떤 존재 위에 유일하게 뛰어난 존재로 계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두기 보다는, 귀신의 존재에 더 많은 초점과 민감함을 보였던 것입니다.
귀신의 존재와 활동에 대해서 깨어 있으십시다.
그러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그 분만 앞세우고 나아가면,
어둠의 영인 귀신은 자연스럽게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에게까지 낮아지시고, 자신의 몸을 주기까지 하신
참 사랑, 그리고 부활의 능력, 천국을 준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연약함과 부조리함을 다 해결할 수
있는 참된 해결과 참된 능력이 온전히 담겨져 있습니다.
분쟁(分爭)이란 서로 의견이 대립되어 내 주장이 옳다고 다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유대인들은 이것이 옳다 아니라 하며 서로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충돌을 일컬어 분쟁 곧 서로 나누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divided).
성경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 12:31. 막 3:29).
유대인들의 분쟁은 에수께서 메시야가 되신다는 것과 메시야가 될 수 없다는 것으로 시작하여 심지어 귀신들린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 성령으로 잉태하여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곧 성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귀신들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곧 성령 훼방 죄와 같습니다.
말하는 것이 자유라고 하여 말을 감정에 그대로 실어서 표현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문제의 발단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소경을 고쳐주셨습니다.
안식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율법의 전통에 따라 안식일 규정을 만들고 대략 39가지를 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안식일에 소경을 고쳐주신 것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이므로 예언된 메시야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또 다른 의견은 메시야가 아니라면 어떻게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겠는가?
그로므로 그 사람은 메시야가 분명하다는 의견입니다.
이렇게 두 의견이 대립하여 서로 분쟁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란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채워가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실천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박과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는 예수님께서 드디어 로마의 권력을 부수고 유대인들이 원하는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선택하므로 이에 대한 반감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기대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우선이라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줄 아는 믿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것을 부인하는 믿음과 나를 위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추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섭리에 감격하는 은총의 사람으로 회복하는 즐거움을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
사탄은 분쟁케 한다!
예수님이 메시아란 사실이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메시아는 전적으로 정치적 메시아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유대나라와 민족을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킴은 물론, 통일왕국의 다윗처럼 번영케 하는 자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갖 고초를 당하고, 친히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언덕에서 맥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라는 자가 자기를 ‘선한 목자’라고 주장합니다.
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아버지께서 자기를 아시고 자기가 아버지를 안다”합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합니다. 그 뿐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자기를 사랑한다”며, “그 사랑을 자기에게서 빼앗는 자는 없고, 자기가 스스로 버린다”며,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주장은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고 있다’고 자부하며, 살아온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는 아주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하지만 유대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 중에는 예수님의 주장에 동조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기들 간에 분쟁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분쟁은 이번뿐이 아닙니다.
벌써 여러 차례 그들은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부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배격하는 사람들이었고요.
또 다른 일부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만 인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한 사람들이 조금 낫기는 하나 전적으로 배격한 자들과 예수님을 배척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일점일획의 남김도 없이 100% 받아들이고, 믿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안타까운 현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믿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잘 신봉하고, 가르치고 있다’고 자랑하는 유대인 공동체가 대부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고, 배격하고 있다”는 겁니다.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는 장차 메시아가 오실 것이란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틈만 나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메시아를 보내 줄 것이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셨는데도 그들은 도리어 예수님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제아무리 우리가 성경을 많이 읽고, 가르치며, 잘 알고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는 성경을 많이 읽어 잘 알고, 열심히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함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오직 우리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앞에 나 자신이 전적으로 죽느냐 죽지 않느냐의 문제만 있을 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 앞에 전적으로 죽어야 비로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실제로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려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각별히 유의해야 할 부분이며, 하나님께 늘 기도해야 할 부분입니다.
본문 20-21절 말씀을 보면 유대종교지도자들 간의 분쟁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보십시오.
대부분의 유대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귀신 들려 미쳤다”면서, “왜 귀신 들려 미친 예수의 말을 듣느냐”라며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귀신 들렸다고 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7:19-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 중에 모세가 준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라고 말씀하실 떼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8:44-48에도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기 때문에 내가 진리를 말해도 너희가 나를 믿지 않는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 때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우리가 너를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않으냐”고 말했습니다. 또 있습니다.
요한복음 8:51-52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에 유대인들이 똑 같은 말을 예수님에게 했습니다.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지 않습니까?
결국, 나중에는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이 합세하여 예수님께서 귀신 쫓아내신 사건을 두고 “네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냈다”고 힐난합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그런 와중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합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이 귀신의 말이 아니란 사실을 증명할만한 사건을 덧붙입니다.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라며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신 사건을 증거로 들고 나와 예수님의 입장을 대변했습니다.
요한복음 9:1-7에 있는 사건으로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일이 가능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자신이 세상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사건은 구약에서 하신 예언을 예수님께서 몸소 성취시킨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35:4-5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예수님도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누가복음 7:17-22을 보십시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질 때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요한에게 가서 알려줍니다.
그 때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침 그 때 예수님은 각종 질병과 귀신 들린 자들을 많이 고치시고, 맹인의 눈을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보낸 제자에게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를 미뤄볼 때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이는 예수님뿐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결코 귀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요즘도 무당이 귀신의 힘을 빌어서 병을 고친다고 합니다만 일시적인 고침일 뿐입니다.
사단이 사람을 미혹하여 자기 자녀를 삼기 위해 눈속임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귀신이 육신의 병을 일시적으로 고칠지는 모르나 영혼의 병을 고치지는 못합니다.
사람의 질병을 근본적으로 치유하실 수 있는 이는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육신의 질병과 함께 영혼의 병까지 고치시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치료불가능한 병에서 고침 받는다 해도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면 병 고침이 도리어 해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차라리 자신의 질병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해할 수 없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영혼이 변하지 않는데 육신의 질병이 고쳐진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질병이 고쳐지지 않는 것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8:11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이 돌에 맞아 죽을 뻔한 현장에서 구해 주고, 권면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뭐라고 하십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의 질병과 함께 영혼의 병까지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후에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귀신 들려 미쳤다’고 합니다.
그와 같은 전혀 사실의 근거가 없는 음해입니다.
그들이 그처럼 예수님을 음해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현재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예수가 빼앗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말을 믿고 백성들이 예수를 귀신 들려 미친 자로 여긴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들은 현저하게 줄어들 거고요.
자기들의 기득권은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판단해 그처럼 예수님을 음해한 것입니다.
소위 유대인들의 영적지도자라고 하는 자들의 행태가 이 모양입니다.
자기들의 권위와 기득권이 조금이라도 위협 받으면 무슨 말이든 지어내어 사람들의 영혼과 육신을 다 죽이려는, 무서운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죠.
본문 21절을 보면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신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성취되지 않습니까?
그 사실을 누구보다 율법을 신봉하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이 모를 리 없겠죠?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람처럼 행동했던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유대종교지도자들 가운데 일부와 소수의 백성들이 그들의 주장에 반감을 가졌습니다.
자연히 자기들 간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일반적으로 분쟁이 일어나면 쌍방이 다 피해자가 됩니다.
분명히 분쟁을 야기한 자들에게 책임을 물려야 하는데 분쟁에 휘말린 사람들이 자기들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한 나머지 무리수를 두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분쟁이 터지면 쉽게 해결되겠습니까? 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분쟁이 나면 서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며 싸울 게 아니라 분쟁이 일어나는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야 합니다.
더욱이 분쟁은 사단이 일으키기 때문에 더 이상 발전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단은 분쟁케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분쟁이 나면 해결이 어렵습니다.
본문 19절의 분쟁을 보십시오.
여기서 분쟁의 헬라어원문은 ‘스키스마’인데, ‘분열이나 불화’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사단은 사람들을 분열케 하고, 불화케 하는 못된 존재인 것입니다.
혹자는 반문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마태복음 10:34-36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글자대로 해석하면 이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이 말씀은 은유입니다.
여기서 ‘검’은 ‘세상의 모든 죄악들과 불신앙에 대해 적극적이고 신앙적으로 복음을 들고 싸우는 수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심지어 부모자녀들 간에도 일어나는, 온갖 죄악들과 불신앙적인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제거되면 부모자식 간에 또, 사람들 간에 분쟁은 사라지고, 평화가 깃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말세지말이라고 탄식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물론 특히 성도들 간에 분쟁이 없어야 합니다.
교회들 간에도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두 다 사단이 분쟁케 하는 것입니다.
잘 잘못을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분쟁 속으로 깊이 들어가 버립니다.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 분쟁하도록 부추기기 때문에 깊이 들어가 버리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오늘날 왜 교회들과 성도들이 분쟁에서 자유하지 못합니까?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처럼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기 싫어서입니다.
그런 생각은 결코 예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모든 것을 다 버리는 것입니다.
기득권, 권위, 권세, 권리, 자기주장, 특히 옳고 그름 등등을 다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주장이 옳다 그래도 그것 때문에 분쟁하면 사단이 좋아할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심으로써 분쟁의 소지가 없으십니다.
예수님을 본받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도 마땅히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버러야 합니다.
특별히 옳고 그름에 대한 분쟁의 소지를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모든 사람들과도 화평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분쟁케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여 이제부터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들과 예수님 안에서 화평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10:19-21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듣는 자들이 두 편으로 갈렸다.
언제나 진리는 이 세상에서 전적으로 환영 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있는 반면에 마귀에게 속한 자도 있기 때문이다(창 3:15).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분쟁이 생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귀신들려 미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양들이 있어(16-18)예수께서는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이 내게 있다고 하십니다.
다른 양들은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려고
하십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해야 다시 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버림으로써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런 자기희생과 헌신은 자발적인 의지였습니다(18).
예수께서는 결코 힘이 없거나 마지못해 고통을 겪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하신 고난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의 자발적인 인내와 사랑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동의가 없었다면 그 누구도 머리털 하나라도 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 예수께서는 얼마든지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통해서 앞에 있는 무리들을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성경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예수의 생명과 삶은 오직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존재했습니다. 그것은 양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가 귀신들려 미쳤다(19-21)
예수의 말씀이 증거 되자 유대인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져 그들 가운데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향해 귀신들렸다,
미쳤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7장과 8장에서 예수께서는 이미 귀신 들렸다고 몇 번이나 비난받으신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수의 어떤 사람들은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라며 오히려 예수의 말씀을
신뢰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비록 소수의 어떤 사람들이었지만 영적으로 들을 귀와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소수의 사람들 중에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같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처럼 분쟁이 일어납니다.
예수로 인해 가족들이 불화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하셨습니다(마 10:34).
그러나 불화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케 됩니다.
말씀이 증거되는 곳에는 언제나 분쟁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나와 내 주변의 삶이 너무 평안하다는 것은 어찌보면 말씀이 증거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겁니다.
전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나누어 봅시다.
어둠에
휴식이 들어가면 빛이 움직이기 시작한다〈황금꽃의 비밀중〉혼란이나 슬픔, 장애물에 뒤엉킨 상태에서 벗어나 어떻게 내일로 가는 길을
찾아가는가?
어둠이 일으키는 동요는 언제나 우리를 뒤덮는다.
목자들이 양들 가운데 뿔로 박아 고통을 주는 염소 몇 마리를 함께
키우는 것은 양이 건강하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과 같이, 주님의 관심은 이 땅의 가치기준이 아닌 우리 영혼입니다.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의 인도하심대로 따라가면 우리는 건강한 믿음의 자녀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I am the good shepherd. The good shepherd lays down his life for the sheep.
나는 선한 목자라(I am the good shepherd)
에고 에이미 호 포이멘 호 칼로스
εγω ειμι ο ποιμην ο καλος
목자(4166) 포이맨() ποιμήν, ένος, ὁ
선한(18) 아가도스(agathŏs) ἀγαθός, ἡ, όν
선한(2570) 칼로스(kalŏs) καλός, ἡ, όν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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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牧者)
1. 지키는 역할(보호자. 保護者) Guardian
2. 이끄는 역할(인도자. 引導者) Leader
3. 먹이는 역할(양육자. 養育者) Rearer
목자라면 양을 맹수로부터 지키고,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 가로 이끌고,
또 먹이를 먹도록 해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께서 친히 우리의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이시라는 것은 그분이 목자의 세 가지 역할을 감당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이끄시며, 우리를 먹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지키십니까?
이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문제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도 인생의 시련이 찾아오고 여러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신실한 성도인데, 집에 불이 나서 자기 집은 물론 이웃집까지 많은 피해를 줍니다.
교회에서 아주 충성스러운 일꾼인데, 자동차 사고가 나서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일이 생깁니다.
열심히 믿으며 봉사하는 사역자인데 갑자기 사랑하는 어린 아들이 백혈병에 걸립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양이고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면, 날마다 좋은 것으로 풍성하게 먹여주지는 않으신다 해도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셔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이해가 안 가기도 합니다.
특히 자신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면, 잘 믿다가도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이나 바울 사도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도 이해가 안 갑니다.
왜 그토록 신실한 스데반이 그런 끔찍한 죽임을 당해야 합니까?
왜 그토록 헌신되어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고난을 당하고 비참한 죽임을 당해야 합니까?
그 외에도 신앙으로 해석이 안 되는 상황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이 우리를 지켜 주시는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기 아주 힘들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겠다고 말씀하시고서는 안 지켜주시는 겁니까, 아니면 능력이 안 되어 못 지켜주시는 겁니까?
당연히 둘 다 아닙니다.
우리에게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주님께서 지켜주시려는 것과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지켜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지켜주시기를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로 우리의 성공과 건강과 재물과 편안한 삶과 자녀가 잘되는 것과 안락함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지켜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잠언 4:23).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기를 원하십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에 꽉 붙어 있도록 지켜주기를 원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잘못되면 생명을 잃게 되고, 마음이 바르면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는 우리의 마음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주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어 하십니다.
지킨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무엇인가 지킬 것이 있다는 것은 소중한 것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어 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입니다.
로마제국에 의해 핍박을 받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카타콤 생활을 무려 300년간이나 했습니다.
이것을 세대로 따지면 13대 정도 되는데, 이 긴 시간 동안 그들이 그 어두운 카타콤을 고집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들이 지킬 가치가 있는 복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들로 하여금 평생 땅속에서 생활하게 할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카타콤에서 지킨 복음으로 인해 대제국 로마가 무너졌습니다.
주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고자 하십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은 우리의 마음이 다른 것들에 의해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주고 싶어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어떤 것도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아주 시시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생명을 간직하고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 이유로 주님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지켜주십니까?
그 방법을 알면 무엇이 생명을 얻게 하는 가장 소중한 마음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누가 선한 목자인가?
1. 삯군 목자
2.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12-13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사람들이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로 구분할 때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기준은 교회와 교인들을 향한 관심일 것입니다.
교인들과 언제나 함께 있어주고, 교인들이 뭔가를 필요로 할 때 함께 기도해주고, 교회를 위해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고, 교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목사를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반면, 교인들과 함께 하지 않고, 교인들의 사정을 전혀 모르고, 돈과 명예를 좋아해서 총회 같은 데에 자주 가고, 교회보다는 자기 가정의 일이나 교회 밖의 일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목사를 가리켜 삯꾼 목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기준이 아주 틀리지는 않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정확한 기준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준으로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를 구분하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정확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선한 목자는 무엇보다 마음을 지켜주는 목자를 말합니다.
요한복음 10:14-16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 있도록 마음을 잡아주는 목자가 선한 목자입니다.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14)이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함께 있어 주거나 양의 사정을 잘 아는 정도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15)라고 하신 것을 보십시오.
단순히 시간적으로 함께 있는 것이나 양의 사정을 잘 아는 정도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완벽한 하나 됨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됨을 의미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무엇을 합니까?
서로를 지켜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 있도록 서로 지켜주며 도와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반대로 삯꾼은 어떤 사람입니까?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12). ‘삯꾼 목자’라고 하지만 삯꾼은 사실 목자도 아닙니다.
삯꾼은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 있지 못하도록 하는 자를 말합니다.
이리에게 물려가도록 그냥 놔두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붙어 있던 마음이 “이리”로 표현된 세상의 가치관에 공격당하고 끌려가도 그냥 방치하고 놓아두는 사람이 삯꾼입니다.
삯꾼도 양들과 함께 하면서 양들을 칩니다. 양들의 사정도 어느 정도 압니다. 그런데 선한 목자와의 차이점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나 몰라라 하며 양을 버리고 도망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들은 물려가고 흩어지게 됩니다(12). 그럼 삯꾼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볼 때 왜 달아납니까?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13절, 새)
삯꾼이 도망가는 이유는 “양들을 생각하지(돌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함께 있는 시간과 상관이 없습니다. 사정을 잘 아는 것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빼앗기도록 놔두는 목자는 아무리 양들과 함께 있고 양들의 사정을 알고 있어도 결코 선한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삯꾼일 뿐입니다.
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합니까? 왜 예배를 드립니까? 왜 기도를 합니까? 왜 큐티를 합니까? 건강하기 위함입니까? 성공하기 위해서입니까? 자녀가 좋은 학교에 가고 잘되기 위해서 기도합니까? 사업이 잘 풀리기 위해 기도합니까?
우리가 하루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 읽고 봉사한다 해도, 우리의 관심이 온통 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뿐이라면, 그것은 이리에게 물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만 신앙생활을 하도록 지도한다면, 그것은 이리와 같은 세상에 물려가도록 방치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삯꾼인 것입니다.
선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기준이 아닙니다. 사정을 조금 더 아는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양의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렇게 도움으로써 마음을 지키도록 해주는 것이 선한 목자입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을 때 우리는 생명을 얻으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켜준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목숨을 버림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7-18절)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양들 곁에서 지켜주다가 무서운 맹수가 오면 싸워다가 목숨을 버릴 수도 있는 것이 선한 목자의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해 또 교인들을 위해 너무 열심히 사역하다가 병을 얻은 목사를 선한 목자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1절)
여기서도 ‘목숨을 버린다’고 하시고, 15절에서도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17절에서도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예수님은 권세를 가진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남자만 5천 명(여자와 아이들까지 수만 명)을 먹이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여러 환자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리셨습니다(야이로의 딸, 나인 성 과부의 아들, 베다니의 나사로). 또 풍랑을 잔잔하게 하셨고, 물 위를 걷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저런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이야말로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틀림없고, 그래서 로마를 물리치실 분이며, 배고픈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환영했습니다. 열두 제자들도 그러한 예수님의 힘으로 2인자가 되어 권력을 누려보겠다고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것은, 왕으로 오시는 분에 대한 예의를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왕으로 보좌에 앉기만 하시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예수님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님이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강력한 힘과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너무나 무기력하게 잡혀가서 심문을 받고 아무 저항도 못한 채 그 끔찍한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분께 기대하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날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주님의 비밀이 있습니다. 이것이 선한 목자의 비밀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죽으심으로써 이리에게 물려가는 우리를 구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힘과 기준을 따라가려 했던 우리를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구해주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던 마음이 세상의 가치관에 물려가게 되었는데, 예수님은 그런 마음이 다시 하나님께 온전히 붙어 있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갖게 하시려고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더 이상 세상의 논리, 힘의 논리로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예수님을 따르면 한 자리 할 수 있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 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을 죽음 앞에 내놓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만 붙어 있도록, 하나님 나라의 기준만을 가지고 살도록, 오직 주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도록,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않도록 지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생명을 지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 그리고 자신에게는 그렇게 “버릴 권세” 즉 죽을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권세가 있으신 분인데, 그 권세란 요즘 권력자들처럼 자기 자신을 위한 권세가 아니라, 스스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권세였던 것입니다.
삯꾼이 아닌 선한 목자로 살기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선한 목자는 우리의 마음이 늘 하나님께 붙어 있도록 해주심으로써,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물려가지 않도록 우리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선한 목자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어떤 목사를 선한 목자라고 해왔습니까? 지금까지는 주로 이런 목사를 선한 목자라고 불렀습니다.
연약한 교인들에게 새 힘을 주어 다시금 세상에서의 경쟁에서 이길 힘을 북돋워주는 목사,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어 하는 욕심을 꿈과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헛된 욕망을 마음에 심어준 목사,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여 물질적인 축복을 약속해준 목사,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하고 성공하고 싶어 하는 교인들을 위해 축복을 빌어주며 기도해주는 목사...
이런 목사들이 지금도 선한 목자라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교회의 경우를 보아도, 우리 내면의 죽어 있는 열정을 깨워 “할 수 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라고 외치며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인도하는 교회를 선한 목자라고, 좋은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정말로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누가 선한 목자이고 누가 삯꾼인지 제대로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온통 성공과 재물과 건강과 편안함과 안락함이 복의 개념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이리에게 물려가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신앙생활에 열정을 내더라도, 세상의 성공을 부추기는 가르침을 받는다면 우리는 삯꾼에게서 이리에게 물려가도록 방치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세상의 가치관에 물려가도록 놔두는 자들은 다 삯꾼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만 선한 목자나 삯꾼이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관계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서로에게 선한 목자가 될 수도 있고 삯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섬기거나 목자로 섬기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가정에서의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이나 사업체에서도 남을 속인다면 삯꾼이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저와 여러분 모두는 선한 목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가정에서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시오. 부모라면 자녀의 마음이 이리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세상의 기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신앙을 저버린 채 얻는 세상의 성공이 축복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혹시 세상에서 실패하고 생명을 잃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사는 것이 선한 목자의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
생업(직장, 사업체)에서도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시오. 남을 속이거나 누르고서라도 내가 잘되고자 하는 이리의 공격과 유혹을 물리치고, 내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섬기는 사람이 되어 주십시오.
또한 교회에서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시오. 지금 맡은 직분과 섬기는 사역을 통해 대충 하거나 내가 섬기는 지체들에게 이리의 공격이 오면 나 몰라라 도망가는 삯꾼이 아니라, 내 생명을 내어주더라도 양들을 지키고 섬기는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시오.
선한 목자로 살았던 사도 바울의 고백을 소개합니다.
디모데후서 4:7-8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참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로서, 우리도 바울과 같이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매일 가정과 생업과 교회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 나라의 기준대로 살며 또 그것을 전하는 선한 목자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만약
목자들이 자기 양들을 다 찾아간 이후까지 들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이 있다면, 그 양은 주인이 없는 양이거나 길을 잃어버린 양일
것입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종종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에 들어오지 않은 양 비유를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사람들 중에는 이런 양들이 너무 많다고 보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양보다도 우리 밖에서 전혀 목자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방치된 양들이 더 많다고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목자의 음성을 듣고 우리 안으로 들어가 쉬고 있는 양은 몇 마리가
되지 않았고, 거의 대부분의 양들은 아직도 늑대들이 득실거리는 빈들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
예수님께서 우리에 들어오지 않고 들판을 헤매는 양떼를 걱정하시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란 무엇일까요?
‘우리’란 밤에 소나 양을 재우는 곳으로, 사람이 만들어 놓은 가축의 집, 혹은
보호용 울타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양으로 비유하시면서 ‘우리’안에 들어오지 않은 양들이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어떤 것을
인생들의 ‘우리’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는 어떤 집이나 성전 같은 건물이나 공간을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떤 건물을 소유하신 적이 없었고, 사람들을 어떤 건물로 오라고 초청하신 적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하셨지만, 그 말씀은 어떤 장소나 건물을 두고 그리로 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로 오라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장소로 가거나 어떤 건물이나 어떤 조직에 가야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우리’는 어떤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우리’를 공간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그 어떤 곳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자기들의 예배당이나 자기들이 지정한 장소로 옮겨야 구원을 받는다고 선전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업을 정리하고, 아이들 학교도 중퇴시키고 집을 팔아서 어디론가 들어갑니다. 과거에 신앙촌이라는 곳이 그런 곳이었고, 계룡산 어디가 그런 곳이었고, 요즘에는 과천에 있는 장막성전에 와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공간적인 의미로 ‘우리’를 말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누가, 어디로 가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따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이 ‘우리’에 들어와야 한다고 하신 것은 유대교에 들어와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종교를 만드실 의사도 없으셨고, 이방인들에게 유대교에 가입해야 한다고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말씀하신 우리는 어떤 특정한 종교를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교파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교파를 주장하신 적이 없습니다. 교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른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우리란 무엇을 가리킨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구약과 신약 전체가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인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2) 에베소 사람들은 본래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밖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지적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리스도 안으로, 하나님과의 언약 안으로 들어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본문에서 말씀하신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관계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언약안으로 들어와야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집을 사거나 팔 때 계약을 맺습니다. 어떤 계약이든지 일단 계약서를 쓰고 나면 상호간에 의무가 생깁니다. 집을 산 사람은 약속한 기한 내에 집값을 내야하고, 판 사람은 약속한 기한 내에 집을 비워주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일에도 쌍방 간에 의무가 생기는데, 사실 하나님은 우리를 잘 만들어 주셨는데 우리가 타락해서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와 다시 어떤 계약을 맺어주실 필요가 없으시고, 우리도 하나님과 대등한 입장에서 계약을 맺을 상대가 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구원하려고 일방적인 언약을 발표하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우리의 구주로 보내주시고는, 우리가 그 아들을 우리의 구주로 믿기만 하면, 하나님과의 언약이 체결되는 것으로 하셨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이 보내주신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영원히 당신의 품에 품어 보호하고 책임지신다는, 아주 일방적이고 특혜적인 언약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과 언약관계가 되는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하며 섬겨야 할 의무가 생기고,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고 책임져 주실 책임이 생기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 지켜주셔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는 약속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언약관계로 태어났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근로하며, 납세를 하고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국민의 의무입니다. 반면에 국가는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과 자유와 인권을 보호해줄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다가 어떤 권리의 손상을 입었으면 국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땅에서 살면서도 아무런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법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노동을 하거나 장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권익에 손해를 입어도 호소할 데가 없습니다. 대한민국과 언약관계를 맺지 않아서, 권리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것은 국가가 울타리가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불법 입국자는 언제라도 추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국민은 어떤 상황에서도 추방할 수가 없습니다. 한상열씨가 북한에 들어가서 제 나라에 적대행위를 하고 판문점으로 돌아왔지만 정부가 그를 가로막지 못하고 허용한 이유는 그가 대한민국의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내가 대한민국에 소속되었다는 것은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같은 나라는 자기 국민 보호에 더욱 철저합니다. 지난주에도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에 들어갔는데, 이유가 곰즈라는 미국청년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미국은 북한에 압력을 넣는 중이고, 카터가 북한에 가면 압력행사에 차질이 빚어지지만, 그래도 외교적 전략보다는 자국민 보호가 우선이라고 보고 한 명의 국민을 구하러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국가가 국민에게 져야 하는 의무입니다.
하지만 이 나라가 영원할까요? 우리나라는 100년 전에 나라를 잃어버린 일이 있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간신히 되찾아 이만큼 자랐지만, 앞으로는 그런 일이 절대 없을까요? 만약 나라가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요? 월남처럼 나라가 망해버리게 되면, 그 나라에 소속했다는 사실처럼 그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망한 나라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나라가 망할 때마다 그 나라의 국민들은 참혹한 고난을 당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한 나라의 국민이 되는 것만으로는 영원한 것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만약 우리 사회가 무너진다면, 우리는 비참한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나 가정이라는 울타리 외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우리’, 진정한 양의 ‘우리’에 들어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영원한 언약 안으로 데려가시려고 오셨습니다. 요 5장24절에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그 언약 안으로 옮겨진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의무를 짊어지십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시고, 최종적으로는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게 책임지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고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고, 믿는 사람을 보호하고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확실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일단 그 안에만 들어와 머물기만 하면, 생명을 잃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하나 지키지 못할 만큼 약한 분이 아니고, 우리에게 해주신 약속을 어길 만큼 진실 되지 않은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 6장40절에서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증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많은 양들이 우리 밖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는 말씀에 힌트가 있습니다. 그들이 아직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해서 그렇게 밖에 서성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양의 목자이신 주님은 아직도 우리 밖에서 서성이는 양들을 못된 양으로 취급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직 몰라서 목자가 부르는 우리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는 말은,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체험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우리 안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많은 의심과 오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아주 나쁘게 보았습니다. 독선적이고 이기적이고 자기들만 잘났다고 하면서 남을 도무지 인정하지 않는 종교적 위선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이기주의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안식일에는 남들이 죽는다고 해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면서도 자기 이익은 철저하게 챙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우리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을 때, 예수님도 그 유대인중의 한명으로 보고, 그렇게 숨통 막히는 유대인 공동체 속으로 들어오라는 말로 오해하고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시 이방인들은 로마세계의 타락 때문에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 관심이 많아지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폐쇄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은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한 유대인이 자기네 유대인 공동체로 들어오라는 권면으로 이해하고 주님의 우리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말씀이 갖는 능력과 위로를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해만 잔뜩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에도 기독교에 대한 너무나 많은 오해와 편견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의 기독교가 당시의 유대교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아름답지 못한 부분들이 너무나도 폭넓게 인식되어서 아무리 열심히 전도를 해봐야 믿지 않던 사람이 교회로 돌아오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불신자가 생각하기에 자기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가장 성실하지 못한 사람들 틈에 끼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이고,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이익만 무섭게 챙기고 남은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비열한 인간이 되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기독교가 이 사회에서 나쁜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주저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예수 믿는 것은 교회라는 명망이 좋지 않은 단체에 소속되어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하는 정도로 이해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것처럼 오늘도 예수님 믿는 것을 주저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해와 편견 때문입니다.
왜 오해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나의 모든 자유와 행복을 빼앗고 위선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며 언약의 품안에 안으시는 것임을 들어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얼마나 세심하게 나를 책임져 주시는지를 들어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해 주셨고 자연 환경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힘이 들고 아쉬울 때에는 하나님을 찾다가도 제 형편이 나아지면 하나님을 귀찮아하면서 하나님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한 두 명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그런 길을 걸어왔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존경하기는커녕 무시하고 비난하고 욕을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으로 갚았습니다. 하나님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큰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그런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진노를 쏟아 부으셔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바꾸어 사랑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에게 구원과 평안과 영생의 길을 만들어 놓으시고 내가 제시한 언약을 받아들여서 내 언약 안으로 들어와 혜택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 언약을 우리가 들어가야 할 ‘우리’라고 하셨으니, 예수 믿는 것은 그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자유와 행복을 빼앗고 어떤 종교의 틀 안으로 끌어들여서 위선자를 만드시려고 부르시는 게 아닙니다. 그동안 알지도 누리지도 못하였던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고,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진정으로 가슴에 와 닿는 사람은 말씀이 고마워서 눈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의 입에서는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제 맘대로 살아온 삶은 자유로운 것 같았으나, 외롭고 두려움이 가득한,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제가 멸망에 빠지기 전에 저를 불러주신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저에게 두 번째 인생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저도 주님께 약속합니다. 이제부터 저는 주님만 모시고 주님 사랑하며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준비하신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아직도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양들을 통해서 우리 안으로 이끄십니다.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은 의심을 잘합니다. '우리 안으로 들어가면 자유를 잃게 되고 꼼짝 못하게 될거야, 자유를 빼앗기고 억눌린
생활을 해야 할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운명을 자기 힘으로 개척해 보겠다고 몸부림치지만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들어온 양들은 두 가지의 경험을 다 갖고 있습니다. 과거 우리 밖에서 살아본 경험과, 지금 우리 안에서 사는 경험입니다. 이들은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 밖에서 자기 욕심대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때의 삶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얼마나 두려웠고 추했고 방황했는지를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를 믿고 변화된 경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평안과 행복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 밖에서 서성대는 양들을 볼 때 불쌍한 마음을 갖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품이라는 것을 알 뿐 아니라, 저들이 왜 아직도 망설이고 서성대고 있는지도 압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 밖에 있는 불신자들을 어리석다고 비난하지도 않고,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자만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더 겸손하게 그들에게 다가가서 자기에게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아무 자격도 없는 나에게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언약을 맺어주시고 그 언약 때문에 책임져 주셨다고, 하나님의 과분한 은총을 알려줍니다.
이렇게 은혜를 전하는 사람의 눈에는 눈물이 젖어 있습니다. 그는 이미 두 세계를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자기가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고마워서 눈물을 흘리고, 아직도 밖에서 서성이는 사람의 종말의 비참함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이런 사람은 정말로 주님이 만드신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안에 들어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우리 근처에서 빙빙 돌고 있는 사람인지를 구분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밖에 있는 양에 대한 관심으로 압니다. 만약, 하나님의 품안에 있는 은혜와 사랑의 풍성함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 밖에서 사는 삶의 공허함도 알지 못하면서 교회를 계속 다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근처에 서성이는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우리 가까이에 있으니 다행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우리 밖에 있는 영혼들에 대하여 무한한 관심과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이들은 우리 밖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교만하지 않습니다. 자기도 얼마 전까지는 우리 밖에 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정신 차린 양들을 통하여 우리밖에 있는 양들을 불러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다른 양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넘쳐나기를 원합니다. 오늘 한국사회에 비쳐진 이상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벗고, 매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아름답고 깨끗한 모습으로 살면서, 주님이 부르시는 참 뜻을 우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줍시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이 해야 할 책임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성도들이 됩시다.
마틴 루터(M. Luther)는 ‘성경을 짜보면 피가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구약성경을 짜면 양의 피가 나오고 신약성경을 짜면 예수님의 피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이고 십자가는 피 흘림의 사건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이고, 신약은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성경의 주인공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의 예수님 이야기는 세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왜 세상에 보내셨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수님을 통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바 은혜를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 들었던 말씀을 이야기했습니다.
셋째는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는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베드로전서 2: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 순전한(아돌로스) ἄδολος, ον
스트롱번호 97
1. 속일 수 없는. 2. 순수한. 3. 성실한
발음
[ adŏlŏs ]
* 신령한 (로기코스) λογικός, ἡ, όν
스트롱번호 3050
* 젖(가라) γάλα, γάλακτος, τό 스트롱번호 1051
관련 성경 / 간절히 사모하다(고후5:2, 벧전2:2), 심히 원하다(롬1:11), 원하다(딤후1:4), 사모하다 (고후9:14)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Therefore Jesus said again, "I tell you the truth, I am the gate for the sheep.
나는 양의 문이라(I am the gate for the sheep)
헤 뒤라 톤 프로바톤
η θυρα των προβατων
예수님께서는 양과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표현하셨습니다.
첫째는 양의 목자(2절)
둘째는 양의 문(7절)
셋째는 선한 목자(11절)
오늘은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양의 우리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번째 우리는 마을의 공동 우리
가난한 사람들은 마을에 공동 우리를 설치하고 교대로 돌아가며 양의 문을 지킵니다.
이때 여우가 있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우리를 설치합니다.
둘째는 야외 우리
양을 치려고 마을 밖에서 양을 관리할 경우 설치합니다.
야외 우리는 양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담을 쌓고 야간에는 양을 그 우리 안에 넣고 관리합니다.
양의 문은 양의 우리에 문을 만들어 설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돌로 양이 넘어갈 수 없도록 담을 쌓고 양이 드나드는 곳에서 목자가 문이 됩니다.
악성 근시의 양은 발레 무엇이 걸리기만 해도 그 위를 넘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양의 우리가 사람이 넘나들 수 없는 높은 담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야간에 들짐승이 공격하면 목자가 즉시 일어나서 들짐승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은 보호자가 됩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은 관리자가 됩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은 영양사가 됩니다.
양떼를 위한 양의 문이 되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9절)
예수님만이 세상의 구원자(행 4:12)
* 문(2374) 두라(thüra) θύρα, ας, ἡ 스트롱번호 2374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 여기서는, 윗부분(1-5)의 말씀을 해설하는 것 뿐이다.
1-6절 해석에 대한 머리말을 참조하여라.
버나드(Bernard)에 의하면, 여기 "문"이란 말이 사히딕(Sahidic) 사본에는 "목자"란 말로 읽게되어 있는데, 모판트(Moffat)는 그것을 지지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버나드(Bernard) 자신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양의 문"이란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가리킨 것이다.
그것은 곧바로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인도하는 통로를 의미한다(14:6).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시 118:19-20을 해석하면서 말하기를, 문은 의(義)의 문, 곧, 그리스도라 하였고,
익나디오(Ignatius)는,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가는 문, 곧, 그리스도라 하고, 그것을 통하여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선지자들, 사도들, 또는 교회가 들어간다고 하였다.
슐라텔(Schlatter)에 의하면, 예수님은, 시 118:20의 예언("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대로 오신 분이다.
그는 말하기를, "시 118:20에 있는 '이는'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그가 하나님의 문이시다.
거기 '의인들'이란 말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양들을 의미한다."라고 하였다.
(dieser, namlich der Christus, ist das Tor Gottes. Die Gerechten des
Psalms sind bei Joh. die dem Christus gehorenden Schafe.-Der Evangelist
Johannes, p. 235)
첫째, 나는 생명의 떡이라(6:35)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남자 장정만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그 부수러기를 열 두 광주리에 가득차게 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육신과 영혼의 필요한 생명의 떡을 공급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면서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성도라면 오늘 내 모든 삶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둘째, 나는 세상의 빛이라(8:12)
예수님은 소경들의 눈을 볼 수 있도록 고쳐 주셨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해 준 사람이 없습니다.
이는 오직 예수님만이 영적으로 소경된 자들의 눈을 열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나는 양의 문이라(10:7)
양으로서 믿는 성도들에게 그 문을 통과하여 새로운 차원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 생명의 세계,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시는 유일하신 분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넷째, 나는 선한 목자라(10:11)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양들의 죄악을 대신 해서 담당하시기 위해 죽어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양은 목자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의지해서 살게 됩니다.
다섯째, 나는 부활과 생명이라(11:25)
이 선언을 하시고 실제적으로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신 분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 예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도 언젠가 예수님처럼 이 몸이 영화로운 부활체를 입고 영생에 들어갈 것으로 믿고 삽니다.
여섯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14:6)
그를 참으로 믿는 모든 양무리들에게 길이 되어 주심으로 방황치 않게 하시고, 진리가 되어 주심으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시고, 생명이 되어 주심으로 그 에너지로 살게 하십니다.
일곱째, 나는 참 포도나무라(15:1)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열매를 자동적으로 맺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분을 믿고 그 분과 함께 동행할 때 삶의 신적인 열매가 맺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에는 두 종류의 "양 우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사는 마을에 있는 "공동 우리" 입니다.
부유한 사람은 개인 우리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을의 공동 우리에 양을 넣은 후 관리합니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목자들이 문지기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산이나 들판에 있는 "야외 우리"입니다.
목자가 마을에서 먼 산이나 들판에서 양을 칠 때, 밤에 양들을 보살피기 위해 야외 우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산이나
들판에 있는 우리는 제대로 지어진 우리가 아니기 때문에 울타리는 있어도 문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면 양들을 우리로 불러들인
후 목자가 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누워 쉬면서 문 역할을 합니다.
이 우리의 문이 되는 목자가 곧 양의 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양의 목자이심과 동시에 양의 문이 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실까요?
1. 자신이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9절)
2. 예수님만이 세상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행 4:12)
3.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1. 자신이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9절)
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들은 목자를 통해서만 양의 우리를 출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의 문이 되시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10절은 그 의미를 조금 더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10절,“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생명을 얻게 한다'는 말은 '구원을 얻게 한다'는 말을 쉽게 표현한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예수님은 우리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는 구원자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 치고 구원이 필요하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대부분 칠 팔십 년이면 다 소진해서 없어지고 말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육신의 생명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육신의 생명은 일시적인 생명이요, 불완전한 생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영원히 사는 영혼이 있습니다.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 넣어주셔서 창조된 인간이 왜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까?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명확합니다. 죄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은 이 진리를 간결하고 또 확실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한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되었고, 그 결과 모든 사람 위에 죽음이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씨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에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의 씨를 안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한 사람의 예외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구원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못 속입니다.
제 아무리 죄인이 아닌 것처럼 가장해도 속이지 못합니다.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아 놓고 있다고 해도, 성자나 위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다 해도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은 절대 숨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죄가 지금 온 세상을 뒤엎고 있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살기 좋은 시대가 되었어도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더욱 지능화되고 더욱 잔인해지고 더욱 노골화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만일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면 단순히 육신의 생명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값을 하나님 앞에서 받아야 되는 무서운 형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나이가 얼마인지 상관이 없습니다.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상관이 없습니다. 재물이 많고 적은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한 사람의 예외없이 다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구원 못 받으면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 힘으로 받을 수 있습니까? 노력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노력하면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다시말하면 우리의 노력으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는 이미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입니다(엡2:5).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입니다.
시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시체가 스스로 몸부림친다고 살아납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구원받습니까? 천만에요. 우리가 노력한다고 영적 생명을 얻습니까? 천만에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만나야 됩니다. 구원의 문이 되신 예수님 앞으로 와야 됩니다. 그리고 그문을 들어가야 합니다.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영적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를 믿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고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생명의 씨를 심어 주십니다.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자리를 잡음과 동시에 우리 눈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의 귀가 열려 드디어 우리의 구원자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게 됩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는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우리를 부활하게 하실 때 이 생명으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문이 되십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로 확실히 믿지 못하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께서 오늘 귀한 말씀을 바로 여러분에게 들려주셨다고 봅니다. 예수님을 지금 이 시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요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그렇습니다. 진정으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늘도 사랑하는 여러분들을 오라고 부르십니다. "나에게 오면 내가 영생을 주겠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놀라운 구원을 주시는데 여러분이 돌아서면 안됩니다. 우리 모두 다 구원을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중에 예수믿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도제목입니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권면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 생명의 복음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그것을 안다면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그들도 값없이 얻는 축복을 누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만이 세상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행 4:12)
(행 4: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이 세상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양의 우리에는 문이 하나밖에 없습니다.(요 10: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만일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담을 넘어가면 그는 강도요 절도입니다.
(요 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자기보다 앞에 온 모든 사람은 강도요 절도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예수님 당시에 자칭 '메시야'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던 사람들을 두고 강도요 절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우리의 문은 하나 뿐입니다. 누구든지, 심지어 목자라 해도 그 문으로 들어와야 됩니다. 양이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문 말고는 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담을 넘어가는 자는 참 목자가 아니라 강도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을 보십시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믿고 따르는데, 세상사람들은 바로 이것 때문에 독선주의니 배타주의니 하며 기독교를 비방합니다.
그들 생각에는 다원주의 사상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이 종교에도 구원이 있고 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따라서 어느 종교를 믿든, 그 종교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면 좋겠는데, 기독교는 유달리 타종교를 배척하고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구원자라고 주장하니 독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인들 중에는 이런 독선이 싫어서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리는 하나입니다. 타협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각 종교에는 나름대로의 훌륭한 가르침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수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억지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나 말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양보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독선이 아닙니다. 바른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말하는 것이 바른 진리라면 설혹 그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이나 미움을 받는다 해도, 심지어 순교를 당하게 된다 해도 우리의 주장을 굽히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훌륭한 장로였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유대 당국자들에게 체포되어서 재판을 받을 때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가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 솔직하게 말하라." 이에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라 뜻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 못된 놈, 참람하고 건방진 놈."하고는 야고보를 끌어다가 저 높은 벼랑에서 집어 던졌습니다. 야고보는 그렇게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라고 하는 것은 그것 때문에 순교를 당한다 할지라도 굽혀서는 안될 진리라는 것을 여러분이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만이 구원자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상하는 분이 계십니까? 관용이 많고, 너그러운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타협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하인간에게 구원을 얻은 말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영생의 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신 구원자이십니다. 이것은 변함이 없는 지리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이 사실에 대해서 확신이 없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신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3.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9절)
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 그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구원 곧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꼴을 얻는다"는 말은 쉽게 말해 푸른초장으로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께로 출입하는 자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좀 더 다른 비유로 설명하는 것이 10절입니다.
10절 중간을 보십시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예수님은 우리를 구원시켜 줍니다. 하늘의 생명을 주십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그 생명을 더 풍성히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려놓고 손을 떼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에서 건져 주고는 "이제 당신 맘대로 하시오."하고는 일어나지도 못하는 사람을 그대로 눕혀 둔 채 그 자리를 떠나는 냉혹한 구조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두들겨 맞고 다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의 몸에 포도주와 기름을 붓고 싸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당신이 알아서 집으로 돌아가시오."하고 일어나지도 못하는 사람을 그대로 내 팽개치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약대에다가 그 환자를 싣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간호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공무상 부득불 떠날 수밖에 없게 되자 그는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어 자기 대신 건강을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간호해 달라고 신신당부하고 떠났습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곧 예수님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는 손을 털고 나 몰라라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풍성하도록 계속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마음속에 양의 문을 드나들면서 목자를 따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함을 받는 양의 행복한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다윗은 그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그가 나를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2). 날마다 목자를 따라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으며 생명의 풍성함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날마다 풍성한 은혜가운데로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신다는 말을 오해하고는 예수님께서 만사형통케 하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십시오. 예수를 믿었다고 만사형통한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현실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고 만사형통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어리석은 짓은 절대 안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나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만사형통하게 되면 영적인 생명이 건강해지기보다 병들어 버릴 가능성이 십중팔구로 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사형통하게 해 주시지는 않으시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보십시오. 그렇게 권능있는 사역자로서 순교적 신앙을 가지고 선교사사명을 감당하셨지만 육체의 가시라고 하는 질병이 늘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기도했지 않았습니까? 그 응답은 이것이었습니다. 고후 12:7-9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좋으니까 만사가 형통하다는 말은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시험은 감당할 수 없는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자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환란이 와도 찬송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코 환경에 눌린 자가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영권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의 빛되신 예수님이 너희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는 것입니다.
또 주님은 우리가 그 문으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면 그 생명의 풍성함을 맛본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에서 은혜의 말씀을 열심히 받아먹고 성령의 생수를 맘껏 들이키며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날마다 받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활력이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저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처럼 영적인 식물일 수 없습니다. 바드시 교회생활이나 하고 아무런 영적인 생명을 누리지 못하면 그는 영적으로 병든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생명이 과연 풍성한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불안이 있습니까? "주여 믿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불안이나 두려움이 떠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자유함이 없습니까? 번번이 죄의 유혹에 넘어가 죄에게 끌려 다닙니까? 그런대로 살고 있는데도 만족함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생명은 아직 어린 생명입니다
영적 생명이 어리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얻어야만 평안과 자유와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생명이 더 풍성해지면 우리는 젊은이들과 같이 약동하는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생명과 더불어 우리의 믿음 역시 매우 풍성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설혹 내가 원하는 대로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도 우리 마음에서 평안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만족합니다. 어떻습니까? 영적 생명이 풍성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원하는 것이 손에 다 들어오지 않아도, 바라는 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아도, 어떤 경우에는 고통이 떠나지 않아도 그것이 그 사람을 억압하지 못합니다. 그 생명의 불을 끄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는 늘 평강이 가득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고 믿으니까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절대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서 모자라는 것도 많지만 자족합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이 그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많이 받아 먹으시기 바랍니다. 순간순간 주님을 생각하면 영적 교제를 통해 성령의 생수를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우리가 매일매일 받다보면 주님이 나에게 심어주신 생명이 점점 더 풍성해집니다. 그러다 보면 이제 보이는 세상의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 나를 다스리게 될 때 진정한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강이 내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누가 범하겠습니까?
그 사람을 누가 꺾어 놓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데도 기뻐하고, 찬송하고, 감사하고, 자유하는 사람을 누가 감히 범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그 사람만큼 강한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 모두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좀 더 풍성한 삶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1절)."
이 구절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양의 우리에 들어가고 나오는데 드나드는 문이 있다.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그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방법은 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고 또 다른 방법이 있는데 다른 데로, 그러니까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다.
그 말은 양을 가두어 놓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는 사람이 쉽게 넘어갈 정도로 낮다는 말이 되기도 하지요. 생각해 보면 그 우리는, 그 우리를 둘러싼 울타리는 양이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니까, 사람이 넘어가는 데까지는 대비를 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이러한 일은 비일비재 일어나게 되어 있지요. 예수님은 그러한 양의 우리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면서, 문을 통하여 드나들지 않는 목자 아닌 다른 사람들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은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지만, 양은 그렇지 못하고 오직 우리에 있는 문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양은 울타리를 넘어다닐 수 없고, 오직 문으로만 다닐 수 있다. 자, 이런 기초 지식을 가지고 그다음을 읽어 보십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7절)."
1절에서는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문을 언급하시고는,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만이 목자다, 라고 말씀하시더니 7절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양의 문이라 직접 밝혀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양의 문이라. 양의 문이라니요? 양의 문이라는 말을 듣고 무슨 말인지 개념이 바로 떠오르십니까? 문이란, 우리가 문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어느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때에 거쳐 가는 장치, 시설을 말하니까 양의 문이라는 말은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동물인 양으로 들어가는 문,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문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우리 흔히 이렇게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의 문, 차의 문….병원의 문…. 그래서 우리가 흔히 그것을 말할 때엔, 집 문, 차 문, 병원 문, 이런 식으로 줄여 말하는데 양의 문이라면 무슨 뜻일까요? 물론 양의 문을 병원의 문을 병원 문이라고 줄여 말하는 것처럼, 양 문이라 줄여 말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이름을 지을 때에 양문 교회, 이런 식으로 짓습니다. 아마 전주에도 양문교회가 있겠지요.
그렇다면 왜 양의 문이라 할까요? 양이 어떤 장소나 공간이 아닌데, 또 양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일까요. 더군다나 예수님이 나는 양의 문이다, 하셨으니 분명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데…. 그래서 우리 성경으로는 양의 문이라, 되어 있지만 다른 번역을 찾아보면 무언가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먼저 영어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양의 문이란 말에, gate for the sheep이라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양을 위한 문이지요. 양을 위한 문이라 함은, 양의 문, 양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 아니라, 양이 들어갈 수 있게 하여 놓은 문, 양을 위하여 만들어 놓는 문이라는 말입니다.
곧 1절에 나오는 양의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강도요 절도이지만, 우리의 문으로 드나드는 사람은 목자라 했는데, 바로 그 문, 목자가 드나드는 문, 그 문을 7절에서는 예수님이 그 문의 의미를 조금 더 확대해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 문은 목자만 드나드는 것이 아니라, 양도 드나드는데, 내가 바로 그렇게 양이 드나드는 양의 문이다, 그것을 표준 새번역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따라서 양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양으로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양이 안전한 우리에 들어가기 위해서 사용하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양이 드나드는 문, 그렇다면 양이 드나드는 문이 있으니까 당연히 그 문을 통하여 양이 들어가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양이 어디로 들어갑니까? 당연히 양이 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곳은 '양의 우리'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제 양이 양 문을 통하여 들어간 곳,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것,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떤 일이 생기느냐? 바로 9절과 10절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게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실제적인 필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10절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양의 문을 열고 들어가 양 우리에 들어가게 되면 먼저 생명을 얻게 되며, 두 번째로 풍성히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니다.
우리를 벗어난 양은 산골짜기를 헤매다가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겨우 목자의 손에 이끌려 다시 양의 우리로 돌아온 사건… 그때 돌아온 양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 밖을 나가서 맨 처음에는 좋았는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자와 늑대의 호시탐탐 노리는 죽음의 위협에 어찌 한순간인들 편할 때가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하다가 겨우 살아나와 이제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그 양의 목숨은 이제 부지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었던 목숨이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잃어버린 양이 다시 우리에 돌아온 사건, 그것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에 가장 적합한 사례라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풍성하다는 말을 다 아실 줄 믿습니다. 넉넉하고 많다는 의미이지만, 풍성하다는 말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하여 지난번 묵상 내용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 묵상에서 계시록 3장 20절을 본문으로 하였는데, 계시록 3장 17절에 의미 있는 말이 등장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부족한 것이 없다는 말과 반대되는 말들, 곤고하다 가련하다, 벌거벗었다, 가난하다, 그런 말들이 바로 풍성하다는 말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하신 다음에 지난주 본문 말씀인 예수님이 문밖에 서서 두드리면서 하시는 말씀, 계시록 3장 20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들어가서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을 저는 해석하기를 기쁨에 겨워, 그 기쁨을 같이 나누기 위해 잔치를 벌이는 그러한 장면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잔치를 벌일 만큼 기쁨이 충만했으며 또한 그래서 잔치를 벌이는 것이니만큼 음식이 얼마나 풍성했겠습니까? 그 풍성함이 바로 오늘 본문인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오늘 본문 10절 말씀, 내가 온 것은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이 비교급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비교급이니까 단순히 '풍성히'가 아니라 '더 풍성히'가 되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더, 지금까지 얻었던 것보다 더, 양들이 지금까지 우리 안에 있어서 먹고 있던 꼴 그것보다 더, 더 많이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이 목자가 되어 주시는 양의 우리에 들어가면 생명을 얻게 되며, 꼴 또한 더 많이 더 많이 풍성하게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습니까?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우리를 뛰쳐나갔다 다시 우리에 돌아온 양을 기뻐하면서 잔치를 벌이는 주인처럼 그리고 그 양을 애지중지 거두며 보살피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목자로서 양들에게 어떠한 것이 유익한 것인지, 어떻게 해야 양이 생명을 얻고, 어떻게 해야 풍성한 꼴을 먹일 수 있는지 아시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양의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양의 문이란 개념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것, 기억하십니까? 1절을 해석하면서, 사람은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지만, 양은 그렇지 못하고 오직 우리에 있는 문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다는 것 오직 양의 문을 통해서만 우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이 그래서 우리가 양의 우리에 들어가 푸른 초장을 만끽하며 더 풍성한 꼴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지난번에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문이라는 것은 여닫는 데 소용되는 것이지, 만일에 그것이 결코 열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문이 아니라, 벽에 불과한 것이다. 문이란 말 자체에 이미 여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그래서 우리 앞에 보이는 문은 열려야 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이 마련해 놓으신 푸른 초장, 풍성한 꼴이 넘치는 그곳으로 들어가십시다.
지난 두 주간, 이번까지 세 번에 걸쳐서 우리 앞에 놓인 문을 보면서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문을 열어 주시며, 또한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을 보여 주시고 강조하시기 위해, 또한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기억하도록, 우리 곳곳에 문을 마련해 놓으시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문을 여닫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주님의 음성에 응답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요한복음은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계속해서
밝혀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어떤 존재로 말씀하셨는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목자로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절도나 강도에
대비되는 의미로 자신을 목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양과의 관계에 있어서 목자와 절도 혹은 강도 사이의 차이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비유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6절).
그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을 보게 해주신 예수님께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말씀하시자 “우리도 맹인인가?” 하며 냉소하며 반발했던 그 바리새인들입니다(요 9:39-40). 그들은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귀로 들으면서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말씀의 뜻을 친히 설명해주셨습니다.
본문 7-10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 설명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새로운 표현 하나를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은 “양의 문”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본문 7절).
예수님께서 자신을 목자라고도 하시고 양의
문이라고도 하신 말씀은 잠시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문이면 문이고 목자면 목자지 어떻게 동시에 둘 다일 수 있는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양의 우리는 도둑이나 맹수나 악천후로부터 양들을 보호하는 장소입니다.
옛 팔레스타인에서는 그것이 동굴이거나
아니면 돌로 쌓은 벽이나 혹은 나뭇가지로 엮은 담으로 둘러싸인 공간이었습니다.
그 우리에는 단 하나의 출입문이 있었습니다.
목자들은 그 문을 통해 양들을 우리 안에 몰아넣기도 하고 밖으로 불러내기도 합니다.
또 목자는 밤에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
문을 가로막은 채 잠을 자기도 합니다.
목자가 그렇게 문을 막아 지키고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목자는 곧 문이나 다름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목자가 양의 문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질 수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목자이며 또한 양의 문이라 하신 이 비유말씀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사실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
“양”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게 맡기시고 그를 통해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시며 인도하시기 위하여 세우신 유일하신 목자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예언자 에스겔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34:23-24).
에스겔은 남왕국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이 많은 유다 백성을 바벨론으로
끌고 갈 때 같이 잡혀간 사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 속에서의 다윗은 옛 통일왕국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일 수 없습니다.
여기서의 다윗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새 이스라엘을 위하여 세우신 유일하신 목자십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양만이 구원받을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3-5절을 보면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하셨으며, 9절에 보면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구원받을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참되신 주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알고 그 말씀만을 따르는 양 무리입니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절도나 강도를 따르는 것은 멸망하는 길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서 구세주인양, 메시야인양 양 무리에게 접근하는 모든 자들은 영혼을 훔치려는 절도요 강도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닌 그 누구의 말도 우리를 구원과 영생에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성경의 진리와 다른 이념이나 교리나 주장은 다 우리를 멸망으로 끌고 가는 사설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 하셨습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란 그에 앞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상관없고 그를 부인하거나 배척하는 모든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등 유대교의 지도자들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오시기에 앞서 자칭 메시야라 주장하며 유대인들을 로마제국의 통치에
맞서 무장봉기하도록 선동해서 수많은 사람을 로마군의 무자비한 무력진압에 희생되게 한 자들을 가리키신 것일 수 있습니다. 본문
10절에서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 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자칭 메시야로
접근하는 자에게 현혹되는 것은 죽음과 멸망의 길을 가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려 하지 않던 바리새인들이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다가 예수님의 의해 고침을 받고 보게 된 사람이 그 사실을 증언하자 그를 공회에서 출교시킨 일이 있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시며 말씀하실 때 그 “너희” 속에는 바리새인들뿐 아니라 그들에 의해 출교를 당한 사람도 들어있었을 것입니다. 유대교의 문밖으로 쫓겨난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게로 오라. 내가 참 문이다.” 말씀하신 것이며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놀라운 생명과 복락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살다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따돌림을 당하고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주님의 이 말씀을 통해 위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1-12).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모두가 들어가야 할 참 문으로 알고 그리로 들어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를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영원하신 말씀으로 믿는 것입니다(요1:1-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를 세상의 참 빛으로 알고 따르는 것입니다(요1:9, 3:19, 8:12, 9:5). 그를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로 믿는 것입니다(요1:14, 18, 34, 49). 그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요1:29, 36).그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요3:16-17, 36). 그를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해줄 영생의 샘물을 주시는 이로 믿는 것입니다(요4:14). 그를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요:25-26). 그를 우주만물과 모든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모든 권세를 부여받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입니다(요2:7-10, 3:35, 4:46-53, 5:2-9, 6:19). 그를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의 양식, 우리로 하여금 영생하게 하시는 참 떡으로 알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요6:35, 47-51, 53-58). 그를 우리로 하여금 죄로부터 참으로 자유롭게 하실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요8:31-32, 36).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과 영생과 복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믿고 그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목자로 받아들이고 평생 그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온갖 이단과 사이비들이 창궐하는 이 시대의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특별히 귀하고 귀한 말씀으로 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목자시고 우리의 문이시며 우리가 듣고 따라갈 음성이십니다. 우리 가운데 여기저기에서 소근거리는 엉뚱한 인간들의 음성을 듣고 이리저리 따라다니는 길 잃은 양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혹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지체하지 말고 속히 돌아와야 합니다. 모든 이단과 사이비들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의 영혼을 훔치는 절도이고 그 생명을 빼앗는 강도입니다.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우리 안에 들어오는 자는 절도요 강도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본문 1절). 그들이 교회에 침투하는 목적과 그 결과가 무엇인지도 주님께서 일찍이 우리에게 일러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단이나 사이비들에게 넘어간 사람들에게서 공통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재산을 다 털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파탄 나고 패가망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 영혼이 피폐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돌이켜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부인하거나 왜곡하며 이상하게 해석하는 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그의 구속사역의 완전성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과는 즉시 결별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머리이시고 문이신 교회의 우리 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님에게서만 참 생명이 있고 생명의 풍성함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해서 거지일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은 예수님을 주로 영접함으로써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생명의 풍성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떠나면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흔들림 없이 머무름으로써 참 생명을 얻고 풍성한 삶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 10:8).
양들이 목자를 알아본다는 말입니다.
목자 아닌
사람들이 양을 불러도 자기를 보살펴 주는 목자가 아닌 줄 알고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양들이 어떻게 목자와 다른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 까요?
목자는 늘 자기들 곁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산으로 들로 유목을 위해 길을 나섰을
때, 목자는 종일토록 양들과 함께 합니다.
한 밤 중에도 야외 우리의 문이 되어 자기들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기억합니다.
목자의 냄새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목자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목자가 늘 자기들 곁을 지키며
보살펴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목자가 한 밤 중에도 양
우리의 문이 되어 양들과 함께 하는 것처럼,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들과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목자가 늘 양들 곁을
지키며 양떼를 보살피는 것처럼,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들 곁을 지키시면서 주님의 백성들을 보살피신다는 것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주님의 눈에 주님 앞에 모여온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이 땅에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험한 인생길을 외롭게 홀로 걷고 있습니다. 두렵고 불안하지만 그 곁에 아무도 없습니다. 바로 목자 없는 삶입니다.
한
미식축구 감독이 있었습니다.
2년 째 계속 성적이 부진합니다.
매스컴도 외면하고 인기도 떨어집니다.
“도대체 성적이 그게
뭐냐?”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저 사람 곧 해고 될꺼야!”라며 비난을 퍼붓습니다.
친구들도 떠나가고 주변에 그 누구도 격려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너무 비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 보니
자기를 반겨주는 것이 꼭 하나 밖에 없더랍니다.
새끼 때부터 길러온 개만이 여전히 꼬리를 치면서 자기를 환영하고 있더랍니다.
자기
부인까지도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부인에게 자기 마음을 알아달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인생에서 나는
정말 내 마음을 알아주고 외로움을 알아주고 함께 할 수 있는 친구, 그 친구 하나를 발견했소.
내가 이런 일을 당해보니까 정말 이
개 밖에는 나의 친구가 없소.
내가 이런 친구를 또 하나만 더 얻을 수 있다면 나는 내 인생에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도 극복해
나갈 수가 있을 것 같소.”하면서 부인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부인이 웃더니 “알았어요. 알았어요.” 그러더랍니다.
아내가 밖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왔답니다.
외로운 남편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아내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글쎄 아내가 개 한 마리를 더 사가지고
왔더랍니다.
사실 오늘
현대인들에게 마음의 병이 많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중에‘은둔형 외톨이’가 많답니다.
불안해하며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답니다.
이런 사람들이 10-30대에 무려 20만-30만 가량이나 된답니다.
일본은 이런 마음의 병이 우리 보다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말로 이런 사람들을 ‘히키코모리’라고 한답니다.
이들이 120만 명이나 된답니다.
곁에 그 누구도 없어서
외로움에 지친 사람들입니다.
성경적으로 고생하며 기진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들이야 말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은둔형 외톨이들로 살아가는 불행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답니다.
돈이 많아도 힘이 있어도 은든형
외톨이가 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지치고 힘든 세상을 살면서 불안하고 초조해 하면서 외롭고 고독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은둔형 외톨이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 그들 곁에 주님께서 계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지친 손을 잡아주시고, 그들의 기진한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양의 문 안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안아주시고 함께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너희를 보호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요 10:9)
양의 문이신 예수님의 인도를
받아 양의 우리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주님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그 옛날 노아 홍수 때 방주 안에 들어온
노아 가족들과 동물들이 특별한 보호를 받은 것처럼, 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양은 정말 연약한 동물입니다. 자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무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말이나 사슴처럼 잘 도망치지도 못합니다. 카멜레온처럼 보호색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눈에 잘 띱니다. 바늘처럼 생긴 털이 있는 고슴도치나 고약한 냄새를 가진 스컹크처럼 자기를 보호할 방어수단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눈이 좋거나 냄새를 잘 맡아 맹수들을 먼저 발견하여 숨지도 못합니다. 양은 모든 동물 중에 약한 동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런 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너무도 연약하여 쉽게 쓰러지고 쉽게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사탄에 공격에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양의 문이 되셔서 보호해 주시고 돌봐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미국의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인디 안과 싸움을 할 당시의 일입니다.
워싱턴은
선두에 나서서 싸움을 지휘했습니다.
이때 인디언 추장이 부하들에게 “맨 앞에 나오는 워싱턴을 향하여 집중 사격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모두 워싱턴을 향해서 집중사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워싱턴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그 인디언이
전투에 져서 추장이 잡혀왔습니다.
그 때 그 추장이 워싱턴에게 “우리가 집중사격을 해도 총에 맞지 않은 당신은 신입니까?
사람입니까?” 라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워싱턴은 “나를 위해서 밤이나 낮이나 기도해 주시는 어머니가 계셔서 그 어머니의
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셨기 때문에 나는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라고 분명히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사람은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도 우리 사는 날
동안 우리 평생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심령도 보호해 주시고, 우리의 건강도 보호해
주시고, 우리가 가정도 보호해 주시고, 우리의 사업과 직장도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양의 문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문안에 들어가면 생명의 안전이 있습니다.
주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광야와 같은
거친 인생길에서 주님 안에 들어가서 주님의 보호를 받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양들이 양의 문 안에 거하게 되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문안에는 생명의 양식이 있습니다. 야외의 양 우리에서 아침이 되면 목자는 양들을 방목합니다. 목자는 우리 밖으로 나간 양들을 이끌고 푸른 초장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갑니다. 그래서 마음 놓고 풀도 뜯고 물도 마실 수 있게 해 줍니다. 양들은 먹을 것 마실 것 걱정 없이 살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목자가 좋은 곳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목자만 따르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양의 문은 입구임과 동시에 출구라는 것입니다. 양의 문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안에서 보호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제 목자를 따라 양의 문 밖으로 나가게 되면 거기서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양의 문이라는 말씀이 주는 또 하나의 약속입니다. 양의문 안에 거하는 양들에게 생명을 누리게 해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양의 문을 통해 출입하는 양들에게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사람들은 양의 문으로 들어가면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도 손해이고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는 것도 물질의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잘하는 나라와 가정들이 더욱 인간다운 삶을 살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통계적으로 나와 있는 증거들입니다.
창26장에 나오는 이삭의 이야기처럼 하나님께서 그 삶에 복을 주시기 때문에 그 삶이 더욱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남들이 볼 때 물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곳에 우물을 팠는데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곳으로 가서 우물을 팠는데 거기서도 또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의 문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인도를 따라 무엇인가 땀 흘려 수고할 때 풍성하게 얻게 됩니다. 주님 주시는 복 안에서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닭 시리즈”
1. 세상에서 제일 빠른 닭은? 후다닥
2. 제일 섹시한 닭은? 홀딱
3. 제일 망한 닭은? 쫄딱
4. 죽은 닭은? 꼴까닥
5. 그럼 미친 닭은? 헷가닥
6. 가장 멋진 닭은? 토닥토닥
세상에
이런 닭 저런 닭이 많이 있다 해도 역시 최고의 닭은 “토닭 토닭”입니다.
살다보면 최고로 멋진 사람은 늘 곁에서 격려해주며
토닥토닥 격려해주는 사람입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토닥 토닥 멋진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양(286) 암노스(amnŏs) / 4회 요 1:29. 36. 행 8:32. 벧후 1:19
ἀμνός, οῦ, ὁ
스트롱번호 286
요한복음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 양(721) 아르니온(어린양)(arniŏn) ἀρνί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721
주제2: [내 양을 먹이라]
요한의 아들 시몬 - 이 이름은 1:42에 나오는데 그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게바(베드로)라는 이름을 새로 주셨었다. 그렇게 하신것은 그에게서 수제자(首弟子)로서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는 예수를 세번 부인함으로써 '반석'이라는 의미의 이름에 걸맞는 행동을 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아직 그는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질 수 없었다 하겠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와 같은 호명은 단지 베드로의 자격을 박탈하거나 그의 나약함을 들추어 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겸손을 유도해내고 그에게 다시 새로운 소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본문에서 '이 사람들'은 개역성경의 난하주(註)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것들'로도 해석될 수 있다(RSV에서는 these로 되어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본문은 세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네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2)'네가 이 사람들(함께 있던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3)'네가 이것들(배와 기타 기잡는 도구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모든 해석이 다 가능하며 타당성을 갖는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현재의 문맥에서 가장 타당한 해석은 첫번째 것이라고 본다. 비록 예수를 사랑하는 제자들의 열성에 우열(優劣)을 가린다는 것이 어색해 보이긴 하지만,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의 뛰어난 충성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막14:29) 그러한 결론은 무리가 되지 않는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사용한 단어는 '아가파오'(*)였는데 베드로는 '필로'(*)를 사용하여 대답하였다. 흔히 전자는 하나님의 사랑, 신적인 사랑, 숭고하고 헌신적인 사랑, 완전히 이타적인 사랑을 가리킨다고 보며 후자는 인간적인 사랑, 조건적인 사랑, 친근하고 우정에 가까운 사랑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런데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위의 두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아니면 위에서 구분한 대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는가이다. 혹자는 두 단어가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물었는데 비해 베드로는 자신이 실패한 경험도 있고 해서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고 단지 그보다는 다소 차원이 낮은 사랑 즉 인간적인 우정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대답했다고 해석한다(Lenski). 그러나 다른 학자는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 두 단어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3:16;5:20;14:21;16:27)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이렇게 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의 물음에 대해 '그러하외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질문에 대해 변경된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두 견해가 다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갖는다. 그런만큼 하나의 견해가 전적으로 옳고 다른 하나의 견해가 전적으로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절에서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베드로가 비록 실패를 하기 했지만 아직도 예수에 대한 애정과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7절 주석 참조).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본절에서부터 17절에 이르기까지 '먹이라', -'치라' - '먹이라'는 명령이 연속되고 있는데 혹자는 첫번째와 세번째는 양들응 목초지로 인도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두번째는 양들의 모은 활동을 돌보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구분하기도 한다(Tenney). 그러나 이처럼 뚜렷이 구분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며 먹이는 것과 돌보는 것이 크게 보아 같은 범부에 든다고 할 때 오히려 같은 의미의 반복으로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한편 '어린 양'에서 '어린'이라는 표현은 베드로에게 부여된 소명은 힘이 들고 많은 사랑을 요하는 것이다.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양(4263) 프로바톤( prŏbatŏn ) πρόβατ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4263
두번째 가라사대...내 양을 치라
- 두번째 질문은 다른 것과 비교하지 않고 다만 사랑하는가의 여부를 묻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첫번째 질문은 다른 제자들보다 우월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 베드로의 호언장담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자 했던 것같다.
이제 예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예수 자신과 베드로 사이의 관계를 묻고있다.
문제의 핵심은 다른 것과의 비교 차원이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냐 하는 일대일 차원의 관계에 있었다.
베드로의 대답은 앞의 것과 동일하다.
적어도 베드로는 이 시간 매우 진지하고 솔직하게 그리고 과장없이 대답하고 있는 듯하다.
베드로의 대답은 세번 모두에 걸쳐 '주께서 아시나이다'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주께서 아십니다'가 구절로,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말이 종속절의 형식으로 진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양(4263) 프로바톤
사랑하느냐
- 앞의 두 번의 경우와 달리 여기서는 '사랑'을 '필레오'(*)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읕 베드로가 계속해서 사용한 단어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진실성과 주님에 대한 그의 사랑을 수용(受容)하겠다는 마음의 표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주님께서 베드로의 친근한 사랑을 확인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이것과 관련하여 Living Bible은 본절을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진정 나의 친구이냐?" (Simon, Son of John, are you even my friend?)로 번역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15절 주석을 참조하라.
근심하여 가로되 - 베드로는 예수의 세번째 질문을 받고는 근심에 빠졌다. 베드로가 근심하게 된 이유는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번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인 바 어쩌면 자기가 세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 생각났는지도 모른다. 예수께 대한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으나 그는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예전처럼 자신있게 호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아시오매...아시나이다 - 그러나 베드로는 허위가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를 사랑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아시오매'는 하나의 기독론적(基督論的) 고백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이말 속에는 예수께서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신적 통찰력을 갖고 계시다는 고백이 들어 있다(2:25;16:30). 베드로는 이것을 알고 있고 그런 만큼 그분 앞에서는 오직 진심을 이야기해야 함을 악고 있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베드로의 세번에 걸친 대답 가운데 세번째의 '아시나이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원어상 바뀌고 있는 점에 주목한다. 즉 앞의 두 '아시나이다'는 헬라어 '오이다'(*)의 번역으로서 어떤 사실에 대한 직관적인 앎을 의미한다는 것이며 그에 비해 세번찌의 '아시나이다'는 헬라어 '기노스코'(*)의 번역으로서 이 말은 '오이다'보다 더 갗한 의미를 가지며 경험을 매개로 하여 얻어지는 지식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이 옳다고 한다면, 베드로는 비록 근심으로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대답을 했지만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인정받을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으며 그것을 담대히 그러나 교만하지 않게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내 양을 먹이라 - 예수는 베드로의 사랑을 세번 확인하였고 그에게 동일한 사명을 세번 반복하여 주셨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하나는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써 실추된 명예를 회복해 주는 의미가 있고(Barrett), 다른 하나는 교회에서의 베드로의 지도권이 다시 위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가 있다(Bultmann). 특히 여기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권위는 교회 바깥으로 향하는 전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의 지도권과 목회적 돌봄에 초점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본서의 분뷰는, '우리 밖'의 잃어버린 양떼에게 관심을 갖는 공관복음의 선교 지향적 분부(마28:19, 20;막 16:15-18;눅 24"46-48)와 비교된다.
1. 양은 스스로 길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자기 집을 쉽게 찾아갑니다.
예를 들면 제비, 연어, 진도개.....
본능에 의한 직감이 발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양은 시력이 3미처 앞도 잘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쉽게 길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목자가 필요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방향 감각을 상실한 상태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2. 양은 스스로의 방어능력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습니다.
고슴도치는 온 몸에 가시를 갖고 있습니다.
카멜레온은 자신을 위장하는 대표적인 동물입니다.
스컹크처럼 가스를 내뿜는 다는가, 빨리 도망갈 수 있는 다리가 있던가 아니면 덩치가 있던가 합니다.
그런데 양은 특별한 무기가 없습니다.
공격할 수 있는 무기도 피할 수 있는 빠른 달리기도 상대에게 치명적을 가할 수 있는 독도 위협을 줄 수
있는 덩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양은 평안한 가운데서 살며 번식도 합니다.
그 이유는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사단과 맞서서 싸울 수 있는 특별한 무기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비무장입니다.
그러므로 선교할 때의 방법이 총칼을 앞세우고 가면 안됩니다.
그러나 목자이신 주님이 지켜주시고 함께 하십니다.
3. 양은 무리를 지어 다닙니다.
양은 스스로의 방어능력이 없는 만큼 겁이 많은 짐승입니다.
그러다 보니 함께 무리를 지어 살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무리도
얼룩말처럼 다른 짐승으로부터 특별한 방어수단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저 겁이 많기 때문에 모여있을 뿐입니다.
이리가 한 마리만 양
우리로 뛰어들어와도 양들은 힘을 합해서 물리칠 생각은 하지 않고 모두 흩어지고 맙니다.
돌봐 주는 목자가 없다면 결국 죽고
맙니다.
사람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양의 특징은 항상 목자와 연관됩니다.
4. 양은 깨끗하지 못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자신들의 몸을 혀로 핥아서 씻든지 풀에 구르든지 물로 씻든지 하면서 나름대로 청결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양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물이 몸에 묻으면 그대로 더러운 채로 있습니다.
목자가 씻어줄 때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죄에서 사하여
주십니다(요일 1:7).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8)
5. 양은 양식이나 물을 스스로 찾지 못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스스로의 먹이를 찾는데 비해 양은 돌봄이 없으면 독초도 해로운 줄 모르고 뜯어먹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의 돌봄 없이는 스스로 살아갈 아무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도는 여러 가지 세상적인 교훈 이단의
유혹과 타종교의 호기심으로부터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면 구분하지 못합니다.
양은 이처럼 부족한 것이 많은
동물입니다.
양에 대한 문화적 인식에 차이가 있는데 우리 한국에서는 좋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순하고, 인간과 가까이 생활하고,
깨끗한 동물, 하얀 털을 갖고 있는 호감 있는 짐승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동지방에서는 생각이 모자라는 놈, 고집이세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줄 모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심한 욕이 ‘개새끼’라면 중동에서는 ‘양 같은 놈’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53:6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갈 길로 갔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양은 고집이 세고 성질이 급한 동물입니다. 우리보다 오래 전부터 양을 치며 살아온
중동의 사람들이 양에 대해서는 더 정확하게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양이 잘하는 것 하나 있습니다. 양에게 발달된 것이 있다면 귀뿐입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The man who enters by the gate is the shepherd of his sheep.
"양의 목자(the shepherd of sheep)"
동물을 관리하는 다양한 호칭이 있습니다.
목동(牧童), 마부(馬夫), 사육사(飼育師), 조련사(調練師), 수의사(獸醫師), 관리사(管理使) ........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양(羊)의 목자(牧者)"라고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짐승들을 몰고 갈 때는 짐승의 뒤에서 몰고갑니다.
그러나 양을 몰고 갈 때는 반드시 양의 앞에서 먼저 걸어가야만 양이 따라갑니다.
그 이유는 양의 시력은 악성 근시가 되어 바로 앞에 있는 것만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의 앞에서 목자가 걸어가면 양들은 바로 앞을 보며 뒤 따라간다고 합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를 말씀을 읽어봅니다(요 10:3-5).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양과 목자의 관계를 표현한 말씀에서 몇 가지 특징을 살펴봅니다.
첫째, 목자는 양의 문이 됩니다.
둘째, 목자는 양의 이름을 부릅니다.
셋째, 목자는 양을 위하여 앞장 서서 걸어갑니다.
넷째,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믿음의 사람은 항상 목자가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앞으로 나아갈 때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은총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선한 목자되신 우리 주
첫째로, 양들이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분별할 만 한 관계입니다.
H. V.
Morton이라는 분이 자신의 체험담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나는 베들레헴 근처에서 매우 신기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목자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양떼들과 함께 동굴에서 밤을 새운 게 틀림없었습니다.
양들은 모두 섞여 있었고
목자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갈 시간이 됐습니다.
둘 중의 한 목자가 양 무리로부터 얼마쯤 떨어진 곳에 서서 양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둘째, 셋째, 이름을 부르니까 댓 마리의 양이 그들 향해 달려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기의 양들을 다
불러냈습니다.”
George Adam Smith란 사람도 서너 명의 목자가 이런 방식으로 양들을 구별해 내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고 있습니다.
양떼들은 서로 섞여 있다가도 자기 목자가 부르면 그
음성을 알아듣고 나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 줍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까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이름을 불러냅니다.
이것은 목자와 양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내셨고,
양들은 각자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서 모시고 교통하기 때문에 피차 모르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하면, 예수님을
모르고도 단체로 천국에 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라도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맺지 않고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의 옷자락을 잡고 천국의 일원이 되려는 생각은 당장에 버려야만 합니다.
부모형제가 교회 장로 권사라고 덩달아
천국 가는 일은 없습니다.
혹시 천국문을 지키는 천사들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실수로 천국에 들여보내는 일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과 개별적인 교제 관계가 없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각 사람이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받아 들여야 됩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서로 알고 대화 할 수 있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각자 내가 속한 교회의 목자와도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만 합니다.
요즘은 상업주의 물량주의의 흐름에 따라서 교회도 대형화의 추세를
밟고 있습니다.
담임목사와 교인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성도 사이의 횡적인 유대관계도 없고, 목자와
양 사이의 유대관계도 없는 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일이 천국에서도 있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성도를
모르고 성도가 예수님을 모르는 경우가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천국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목사는 ‘설교꾼’이
아닙니다.
교인들 역시 설교의 ‘청취꾼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마다 목회 철학이 있고, 인생관이 있고, 가치관이
있습니다.
양들을 돌아보는 방식이 있습니다.
내 교회의 목자가 어떤 사상과 어떤 목회관을 가지고 목회를 하는지 알고 따르면
복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설교와 좋은 훈련을 다 받고도 배반자가 돼버린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설교자와 청취자의 관계에 있었을 뿐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위치에 계십니까?
먼저 예수님과 일대 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그 음성을 다른 사상가들의 음성과 구별해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속한
목자와 이름을 주고받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그 음성을 분별하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지상에서 양이 누리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둘째로, 목자는 앞서 가고 양은 뒤따라오는 관계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가면 수만 마리의 양떼들을 개를
동원하여 뒤에서 몰고 가는 목동들이 보입니다.
그러나 팔레스틴의 목자들은 그렇게 많은 양들도 없거니와, 양떼를 뒤에서 몰고
다니지도 않습니다.
양들의 이름을 외울 만큼의 양들을 내어 놓고 목자가 앞서 가면 양들이 뒤따라갑니다.
목자가 양떼들의 길을
안내하는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이 가는대로 따라가지 않고 목자가 원하는 곳으로 인도해 갑니다.
요즘은 전반적으로
목자보다는 양이 앞서갑니다.
간혹 잘 나가는 교회가 있어서 보면 개가 양 몰 듯이 몰아가는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모든
것이 알려지고 공개되어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 목회 방식, 교회 형편 등등. 교인들은 얼마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교회를 선택할
기회가 있습니다.
상업주의, 소비자 중심 사회에 익숙해진 교인들은 교회도 얼마든지 쇼핑할 수 있습니다.
설교도 쇼핑하고, 교회도
쇼핑합니다. 좋으면 택하고 싫으면 떠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교인들은 아주 똑똑합니다.
목자보다 잘난 양들이 많아요. 사실대로
말한다면 목회자는 전반적으로 좀 모자라는 사람들입니다.
저나 제 동역자들이나 다 모자랍니다. 두뇌도 모자라고, 지식도 모자라고,
인품도 모자라고, 능력도 모자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자라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진리를 믿는다면 모자라는 목회자에게 순종하며 따를 수 있겠지요?
하나님은 얼마든지 모자라고 부족한
지도자를 통해서, 모자라는 방벙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문제는 양의 똑똑함이 아닙니다.
양이 아무리 똑똑하다고
양을 목자 위에 세우시지는 않습니다.
교회의 원리를 바로 알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앞서가는 목자를 따라가는 교회, 그것이 양들의
축복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유일한 길, 오직 유일한 진리, 오직 유일한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강력한 선언의 진실을 뒷 바침해 주는 증거와 표적도 함께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에만 7번이나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포이멘 에스틴 톤 프로바톤
ποιμην εστιν των προβατων
양(4263) 프로바톤(prŏbatŏn) πρόβατ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4263
목자(4166) 포이멘
[ pŏimēn ]
ποιμήν, ένος, ὁ
스트롱번호 4166
πρόβατον, ου, τό 4263 [prŏbatŏn]
4260의 파생어로 추정됨: 어린 양, 양, 요21:16,17.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πάσχα, τό 3957 [pascha]
유월절 양, 막14:12, 눅22:7, 고전5:7.
유월절.
유대인의 명절, 막14:1, 요2:23.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ἀρνίον, ου, τό 721 [arniŏn]
양, 어린 양[계시록에서는 그리스도의 명칭], 계 5:6,8, 12, 6:1, 7:9,14,17 등.
기독교 공동체, 요21:15.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ἀμνός, οῦ, ὁ 286 [amnŏs]
어린 양, 새끼 양[그리스도나 그에 관련되어 사용되거나 흠 없는 희생 양을 의미], 행8:32, 벧전1:19.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프로바톤(Homer이래)는
프로바이노(4260: 앞에 가다)에서 유래했으며, 고전 헬라어에서는 드물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프로바톤은 헤엄치거나 기는 것들과 다른 네 발 달린 동물(짐승), 특히 길들이고 사육하는 가축, 말, 황소, 희생 동물을
나타낸다.|그리고 몸집이 작은 가축(특히 양)에 대하여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작은 가축은 다른 동물들보다 연약하면서도 앞서
간다. 이 단어는 복수로만 사용되었으나(양떼나 소떼), 후대에 이르러 특정하게 '양'을 의미하는 단수 용법이 생겼다.||
(b)
프로바톤은 단순한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는 이 단어를 욕설의 용어로 은유적으로
사용한다(Nubes,1203). 그는 무엇이든 열등하거나 우둔한 것은(예: 얼간이) 양에 비유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단어에는
누군가에 의해 안내를 받아야 하는 사람에 대한 은유로서 사용되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Epictetus,
Dissertationes, 3, 22, 35).||(c) 프로바톤은 '물고기'(Oppianos Depiscatione등)에 대해
사용되었다(참조: H.Preisker; S.Schulz).||#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프로바톤은 70인역본에서 약
300회 나오며, 주로 촌(작은 가축, 양, 염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프로바톤은 구약성경에서 주로 유용하며 또한 떼지어 사는
동물인 양을 의미하며(창 30:38; 사 7:21; 암 7:15) 그리고 희생 제물로서의 양의 의미로는 매우 드물게 사용된다(레
1:2). 프로바톤(거의 항상 복수 프로바타)은 은유적으로 '백성'(삼하 24:17), 특히 '하나님의 백성'(시 74:1,
회중; 시 77:20; 시 78:52)에 대해 사용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요지는 양에게는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목자의 인도가
없으면 양떼는 흩어지며(겔 34:5, 겔 34:6) 양은 각기 제 길로 가며(사 53:6), 양들은 방랑하다가 광야의 위험의
희생이 되기도 하며(겔 34:5이하), 그러므로 그들은 목자에 의해 올바른 초장으로 인도되어야 한다(시 23장). 광야에서
지도자가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것이다(민 27:17). 개인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잃은 양
같이 유리"한다(시 119:176). 여호와께서는 그의 흩어진 양떼를 위하여 메시야 왕이나(렘 23:1이하; 겔 34:23)
모세(시 77:20; 사 63:11)와 같은 목자들을 지명하거나, 친히 자기 백성의 목자로서 행동하심으로 목자를 확보하여
주신다(시 78:52이하; 시 80:1; 사 40:11).|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양이라고 부름으로써 첫째로
자신들의 힘만 갖고는 자신들을 보호할 수 없음을 인정하였으며, 둘째로 그들의 선한 목자이신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시 23장; 시 95:7; 시 100:3).||#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프로바톤은 신약성경에서 37회
나오며, 마태복음(11회)과 요한복음(17회)에 자주 나온다.||(a) 예수님께서는 비유에서 양을 들어 교훈하였다. 양은 목자의
돌보는 것 없이 홀로 내버려 두면 잃게 된다(눅 15:4). 따라서 양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사랑이요, 비이기적
보호이며(마 12:11; 눅 15:4) 이 기본적인 사실이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은유의 배경을 이룬다.|목자 없는 양은 고생하고
유리하며(마 9:36), 길을 잃고(벧전 2:25) 잃어버린 바 된다(마 10:6; 마 15:24).|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의 용례를
따라 자기 백성을 목자 없는 양떼로 비유하신 것은(막 6:34; 참조: 민 27:17; 왕상 22:17) 그들이 구원 받지
않으면 어떤 파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케 하신 것이다. 벧전 2:25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개종 이전에 그들이 양과 같이 길을 잃었으므로, 즉 희망없이 잃어버린 바 되었으며 거짓 목자들에게 이용당했음을 상기한다(참조: 겔
34: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심 받은(마 15:24) "양의 큰
목자"이시다(히 13:20).||⒝ 마 26:31에서 양은 예수님께서 모으신 제자들에게 적용된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병행구, 막
14:27). 이 인용 구절은 다음의 슥 13:7의 예언을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게 적용하는데, 마소라 본문은 "목자를 치라,
그러면 양 떼(촌)가 흩어지리라"로 읽고 70인역본은 "목자를 치고 양들을(프로바타) 흩으라"라고 읽는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참 이스라엘이요, 예수님을 치실 이는 하나님이심을 적용하여 복음서에서 기독론적으로 해석된다. 스가랴서의 문맥은 이
구절이 목자에 대한 심판임을 시사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나님의 뜻을 행한 "양"은 대심판의 날에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리할 때에 비로소 마침내 염소와 분리될 것이다(마 25:32이하).(참조: R.Tuente).|스가랴의 예언이 달리 어떻게
성취되었든 간에 예수님은 여기서 그의 예언을 그 자신의 죽음과 제자들에 대한 그 효과(결과)를 가리키기 위해 인용하셨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는 여호와께서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주심을 뜻한다. 그러면 제자들은 이 시련을 면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함정에
빠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본다. 즉 제자들이 심히 낭패 당한 나머지 그들이 예수를 버릴 것이며, 목자 없는 양 떼처럼,
사방으로 도망가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슬프고 무서운 일이 지금 일어나려고 하긴해도 예수님 자신이 이 일을 제자들에게 미리
사전에 알려주셨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가진다. 이 사전 경고는 이 흩어진 양떼를 다시 모을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R.C.H.Lenski).||(c) 요한복음에서 프로바톤은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즉 그의 백성을 뜻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 10:14). 양들은 그들의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를 따른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아시고, 그들을 부르시고, 이리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다(요 10:1-요 10:11).|마태복음에서는 목자와 양떼의 관계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왕의 관계인 반면에
요한복음에서 목자는 하나님을 계시하려고 하나님께로서 오신 아들이요 양떼는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교회이다. "한 양떼와 한
목자"가 있을 때(요 10:16; 참조: 요 17:20이하), 즉 마침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주님 밑에서 한 교회 안에서 모일 때
그 때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목적이 성취되는 때이다.||(d) 프로바톤은 매우 드물게 희생 동물에 대해 사용되었다(요
2:14; 행 8:32; 롬 8:36). 하지만 이 사상은 신약성경에서 주로 암노스와 아르니온으로 표현된다.|(참조:
J.H.Thayer; Walter Bauer; J.Gess).
양과 목자의 관계
양과 목자,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3-5)
첫째로, 양들이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분별할 만 한 관계입니다.
H. V.
Morton이라는 분이 자신의 체험담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나는 베들레헴 근처에서 매우 신기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목자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양떼들과 함께 동굴에서 밤을 새운 게 틀림없었습니다. 양들은 모두 섞여 있었고
목자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갈 시간이 됐습니다. 둘 중의 한 목자가 양 무리로부터 얼마쯤 떨어진 곳에 서서 양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둘째, 셋째, 이름을 부르니까 댓 마리의 양이 그들 향해 달려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기의 양들을 다
불러냈습니다.” George Adam Smith란 사람도 서너 명의 목자가 이런 방식으로 양들을 구별해 내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고 있습니다. 양떼들은 서로 섞여 있다가도 자기 목자가 부르면 그
음성을 알아듣고 나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 줍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까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이름을 불러냅니다. 이것은 목자와 양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내셨고, 양들은 각자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서 모시고 교통하기 때문에 피차 모르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하면, 예수님을 모르고도 단체로 천국에 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라도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맺지 않고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의 옷자락을 잡고 천국의 일원이 되려는 생각은 당장에 버려야만 합니다. 부모형제가 교회 장로 권사라고 덩달아 천국 가는 일은 없습니다. 혹시 천국문을 지키는 천사들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실수로 천국에 들여보내는 일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과 개별적인 교제 관계가 없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각 사람이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받아 들여야 됩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서로 알고 대화 할 수 있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각자 내가 속한 교회의 목자와도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만 합니다. 요즘은 상업주의 물량주의의 흐름에 따라서 교회도 대형화의 추세를 밟고 있습니다. 담임목사와 교인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성도 사이의 횡적인 유대관계도 없고, 목자와 양 사이의 유대관계도 없는 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일이 천국에서도 있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성도를 모르고 성도가 예수님을 모르는 경우가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천국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목사는 ‘설교꾼’이 아닙니다. 교인들 역시 설교의 ‘청취꾼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마다 목회 철학이 있고, 인생관이 있고, 가치관이 있습니다. 양들을 돌아보는 방식이 있습니다. 내 교회의 목자가 어떤 사상과 어떤 목회관을 가지고 목회를 하는지 알고 따르면 복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설교와 좋은 훈련을 다 받고도 배반자가 돼버린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설교자와 청취자의 관계에 있었을 뿐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위치에 계십니까? 먼저 예수님과 일대 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그 음성을 다른 사상가들의 음성과 구별해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속한 목자와 이름을 주고받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그 음성을 분별하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지상에서 양이 누리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둘째로, 목자는 앞서 가고 양은 뒤따라오는 관계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가면 수만 마리의 양떼들을 개를
동원하여 뒤에서 몰고 가는 목동들이 보입니다.
그러나 팔레스틴의 목자들은 그렇게 많은 양들도 없거니와, 양떼를 뒤에서 몰고
다니지도 않습니다. 양들의 이름을 외울 만큼의 양들을 내어 놓고 목자가 앞서 가면 양들이 뒤따라갑니다. 목자가 양떼들의 길을
안내하는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이 가는대로 따라가지 않고 목자가 원하는 곳으로 인도해 갑니다.
요즘은 전반적으로
목자보다는 양이 앞서갑니다.
간혹 잘 나가는 교회가 있어서 보면 개가 양 몰 듯이 몰아가는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모든
것이 알려지고 공개되어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 목회 방식, 교회 형편 등등. 교인들은 얼마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교회를 선택할
기회가 있습니다. 상업주의, 소비자 중심 사회에 익숙해진 교인들은 교회도 얼마든지 쇼핑할 수 있습니다. 설교도 쇼핑하고, 교회도
쇼핑합니다. 좋으면 택하고 싫으면 떠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교인들은 아주 똑똑합니다. 목자보다 잘난 양들이 많아요. 사실대로
말한다면 목회자는 전반적으로 좀 모자라는 사람들입니다. 저나 제 동역자들이나 다 모자랍니다. 두뇌도 모자라고, 지식도 모자라고,
인품도 모자라고, 능력도 모자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자라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진리를 믿는다면 모자라는 목회자에게 순종하며 따를 수 있겠지요? 하나님은 얼마든지 모자라고 부족한
지도자를 통해서, 모자라는 방벙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문제는 양의 똑똑함이 아닙니다. 양이 아무리 똑똑하다고
양을 목자 위에 세우시지는 않습니다. 교회의 원리를 바로 알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앞서가는 목자를 따라가는 교회, 그것이 양들의
축복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유일한 길, 오직 유일한 진리, 오직 유일한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강력한 선언의 진실을 뒷 바침해 주는 증거와 표적도 함께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에만 7번이나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첫째, 나는 생명의 떡(6:35)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남자 장정만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그 부수러기를 열 두 광주리에 가득차게 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육신과 영혼의 필요한 생명의 떡을 공급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면서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성도라면 오늘 내 모든 삶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둘째, 나는 세상의 빛(8:12)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소경들의 눈을 볼 수 있도록 고쳐 주셨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해 준 사람이 없습니다.
이는 오직 예수님만이 영적으로 소경된 자들의 눈을 열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나는 양의 문(10:7)
이는 그의 양인 믿는 성도들에게 그 문을 통과하여 새로운 차원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 생명의 세계,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시는 유일하신 분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넷째, 나는 선한 목자라(10:11)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양들의 죄악을 대신 해서 담당하시기 위해 죽어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양은 목자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의지해서 살게 됩니다.
다섯째, 나는 부활과 생명(11:25)
이 선언을 하시고 실제적으로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신 분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 예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도 언젠가 예수님처럼 이 몸이 영화로운 부활체를 입고 영생에 들어갈 것으로 믿고 삽니다.
여섯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
그를 참으로 믿는 모든 양무리들에게 길이 되어 주심으로 방황치 않게 하시고, 진리가 되어 주심으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시고, 생명이 되어 주심으로 그 에너지로 살게 하십니다.
일곱째, 나는 참 포도나무라(15:1)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열매를 자동적으로 맺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분을 믿고 그 분과 함께 동행할 때 삶의 신적인 열매가 맺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기적의 삶입니다.
종교생활은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종교생활은 여러분들의 자유를 억압합니다.
믿는 자들에게 참으로 자유와 평안과 구원을 주고, 그 은혜에 대한 감사와 보은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의무감으로 구속하여 기쁨이 없는 종교생활을 하게 됩니다.
'양의 문’을 통과하여 이 깨달음과 축복을 얻는 양들은 누구인가?
1.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양
본문 3절에,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목자와 양에 대한 자료를 보면 대게 소규모로 양을 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섯 마리, 어떤 사람은 열 마리 어떤 사람은 삼십 마리.....
그래서 각각의 양의 우리가 없고 공동우리에다가 자기 양들을 다 몰아 둡니다.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이 되면 다 그 공동 우리 속에 몰아두고 그리고 거기에 문지기가 있습니다.
다음날 아침 목자들이 자기 양을 찾으러 옵니다.
그래서 문지기에게 확인을 받은 다음에 우리 안에 많은 양들 가운데 자기 양을 찾아 끌고 가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목자가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르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고 문밖으로 걸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최근의 이스라엘 여행기에 나오는 글 가운데도 이런 내용들이 소개됩니다.
여러 명의 목자가 한 곳에서 양들을 모아 놓고 밤에 자고 다음날 아침에 섞어 있는 양들을 향해 목자들이 한 사람씩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르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목자의 양들만 따로 뛰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고침을 받은 맹인은 그의 사실적 증언으로 인해 쫓겨났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예수께서 이를 찾아오셔서 자신을 소개하시고 믿으라 하십니다.
이에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구원받는 은혜의 자리에
이르고 반면에 이를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심판의 자리를 예고하십니다.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35) 과거 맹인이었던 자는 바리새인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예수께서 '자신의 눈을 뜨게하셨다'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직접 찾아오셔서 만나주십니다. 오늘도 세상이 주는 고난으로 인한 우리의 작은 신음과 탄식에도 응답해주시고 만나 주시며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왜냐하면 믿음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히 11:6).
주여 내가 믿나이다(36-38)
찾아오신 주님께서 네가 인자를 믿는냐는 질문에 그는 “그가 누구시오니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선지자(17)이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자(33)라고는 이해했지만, '인자'라고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
인자가 바로 네가 보았고 지금 너와 말하는 자기 자신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이에 고침을 받은 맹인은 즉시 “내가 믿나이다”하고
절했습니다.
이는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이제 그는 완전히 주님을 시인하며 영접합니다.
우리에게 여러 모양으로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완전하게 받아들이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원하고 바라는 모양이 아닌 말씀일지라도, 그의
신실하심을 믿고 따르는 성숙한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39-41)
맹인의 치유 사건을 통하여 예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결론적 내용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권한을 물려받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을 심판 하실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은 맹인이 치유 받았던 것처럼 은혜를 입는 자가 되지만,
이를 믿지 아니하고 영접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본다고 하는 이들이므로 구원에서는 멀어져 심판 받을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도
소경인가”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자문하고 그 진실을 찾아야 할 중요한 주제입니다.
적용 : 믿음
까닭에 생기는 세상에서의 배척은 주님에게 더 가까이 서게 합니다.
이는 주님이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속삭이시듯 '내가
너의 주님이며 구원자이라'라고 하시는 말씀을 일상에서 듣기 원합니다.
은혜에 은혜를 더하고 믿음에 믿음을 더해 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신 때부터 피조물인 생명체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은 산소, 물, 흙, 햇빛, 바람을 주셨습니다.
만일 생명체가
햇빛을 받지 못하고 산다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질병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구촌에는 가시광선, x선, 감마선, 코발트선
등 여러 가지 광선(ray)이 존재하며 그것들을 이용해 최첨단 암 치료기들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같이 치료의
광선은 복음의 기쁜 소식일 뿐만 아니라 복음의 능력처럼 병든 영혼과 육을 치료하는 의술의 도구가 됨을 예언하였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인자’란 ‘son of man’(사람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지칭하는 ‘인자’의
의미는 다릅니다.
‘the Son of man’입니다.
구약을 잘 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알아듣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리는 ‘인자’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종말에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찾아오실 메시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인자’에 관하여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서기관들이 시비를 걸어올 때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하려 하노라”(마9:6)고 하셨습니다. ‘인자’는 신적권위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께 특별 부탁하여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하고, 제자들은 우편 좌편 빼앗기면 뒤편에 앉아야 한다며 누가 크냐고 서로 다툴 때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눅10:46)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람으로 온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자신을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인자’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을 때에도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대제사장은 일평생 가장 큰 분노로 화를 내며 옷을 찢었습니다. ‘인자’는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 외에도 90번 정도 더 나오는 단어이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자에 대해서 아주 잘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전에 맹인이었던 자에게 묻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절,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이 사람은 ‘인자’를 기다려온 사람입니다. 그가 누군지만 알면 당장 달려가서 엎드릴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목소리만 들었을 뿐 아직 만난 경험이 없습니다. 만나보고 싶었는데, 예수님을 신뢰한다는 이유로 유대인에게 끌려가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이 사람의 신앙은 고난 가운데서 점점 더 성숙되었습니다. 처음엔 “예수님은 선지자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논쟁하면서 말씀을 더 기억했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자다” 이 정도까지 성숙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하늘의 왕권을 가지고 계신 분을 소개받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당장에 만나러 갈 태세입니다.
3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얼마나 감동이 있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눈앞에 계신 것입니다. 하늘의 왕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보는 것과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것, 이것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을 만날 때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한 가지 유일한 소망의 불씨가 있다면 “그리스도! 그분이 오시면 이 지옥 같은 세상을 벗어나 나 같은 인생에게도 하나님을 예배할 날이 올 것이다.” 이 소망뿐이었습니다. 버림받은 땅 사마리아 한 복판에서 부르짖는 이 절규가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마음에 들렸습니다. 주님께서 이 여인의 작은 신음소리를 듣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녀 앞에 서 계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그토록 가다렸던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이 여자의 눈앞에 서 계십니다. 세상의 가치에 중독되어 끌려가던 인생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 순간입니다. 열등감의 감옥, 수치심의 감옥이 일시에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생명의 빛을 향하여 꼭꼭 걸어 잠갔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순간입니다. 가치가 바뀌고, 관심이 바뀌고,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전에 맹인이었던 이 사람도 동일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출교당하여 외로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꺼져가던 불씨와 같던 인생이 활활 타오르는 인생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는 즉시 엎드려 고백합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38절,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얼마나 가슴 벅찬 고백입니까? 유대인들에게 출교 당할 때는 망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하늘의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십니다. 나를 사랑하시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실 주님입니다. 이제 선한 목자가 되어서 그분을 따르는 양떼를 목숨으로 지켜줄 주님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이 영적 눈을 활짝 드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양떼를 만나는 것이 영적 눈을 활짝 뜨는 것입니다.
3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 심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늘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심판 받아야 할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합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백부장, 니고데모, 요한, 주님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똑똑히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구나.” 거기서 울었습니다. 눈이 활짝 떠졌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그 가슴에 은혜 위에 은혜로 밀려왔습니다.
이틀 전에 정신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사회복지사 한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기독교인들이 말하길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베풀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채워주신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그때 제가 대답했습니다. “예, 베풀면 채워주시지요. 그러나 채워주시기 때문에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나누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고 나서 제 마음에 큰 은혜가 밀려와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렇게 받은 은혜가 크고도 큰데, 가끔 이 은혜를 망각하고 힘들다고 하는구나.” 죄송해서 울었습니다.
40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맹인인가?”라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렇다. 율법은 잘 알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누구보다도 탁월하지만 자신들의 죄악을 보지 못하고 율법의 잣대로 남을 정죄하는데 열심을 내는 너희!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도 모르는 너희! 너희가 맹인이다”
십자가를 바라보셨습니까?
거기는 죄인인 내가 심판받아야 할 자리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이 사랑을 경험하셨습니까?
우리는 이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나누고
베풀면 채워주시는 은혜가 있지만, 이미 우리는 받은 사랑이 너무 큽니다.
받은 은혜가 너무 큽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님께 어떻게 헌신해야 하겠습니까?
혹시 힘들고 어렵다고 헌신을 뒤로 미루는 일은 하지 않습니까?
힘들고 어렵다고
나누고 베푸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주저하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더불어 살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빚진 자로서 서로 나누며
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전부다. 나의 왕이다. 나의 주인이다.”
이러한 신앙을 주장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결단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작은 신음소리에도 응답하시고 다가오실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경험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Jesus heard that they had thrown him out, and when he found him, he said, "Do you believe in the Son of Man?"
네가 인자를 믿느냐?(Do you believe in the Son of Man?)
사람의 눈을 어둡게 만드는 것은 욕심과 염려와 미움이라고 합니다.
시력을 잃은 사람은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쳤나?" 하며 분노합니다.
더구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고 염려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고쳐주신 후에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인자(son of man)'란 사람의 아들이란 뜻이지만 예수님께서 질문하신 것은 구약에서 예언된 "그 인자(the Son of Man)"를 의미합니다.
눈을 뜨게 된 사람은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고 일러주셨습니다.
그러자 소경되었던 사람은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을 했습니다.
육신의 눈이 어둡던 사람이 육신의 눈이 열리면서 영의 눈도 열렸습니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눈은 떴지만 영의 눈이 어두웠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나의 영의 눈이 열렸는지 아니면 닫혔는지를 점검해 보시기바랍니다.
영의 눈이 열려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즐기는 재미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성경을 읽는 즐거움
둘째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즐거움
셋째는 시대를 분별하는 즐거움
새로운 피조물에 의해서 새로운 세상의 질서를 되찾아 가실 것입니다.
혼돈과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이제부터는 땅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당당하게 일어나 힘차게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황무지가 장미 꽃같이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 주님은, 불법하게 출교 당한 신자를 가까이 하신다.
주님은 그를 만나서 더 깊은 신앙으로 인도하신다.
곧,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하시어, 그의 신앙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신다.
이 때까지 소경 되었던 자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또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로 알 뿐이었다.
물론 그만한 신앙 지식에 강력한 신념이 함께 하였던 것만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념은 좀 더 명백한 진리 지식이 필요하였다.
곧, 예수님을 인자로 아는 지식이 필요하였다.
"인자"란 말 뜻은 메시야를 의미한다.
이런 친절한 주님의 계시 앞에서 그는 신앙하고자 하는 태도를 가졌다.
신앙은 무한히 장성할 수 있게 하는 그리스도의 영적 부요(富饒)를 상대하고 있다.
확신의 소유자도 또 다시 더 깊은 신앙에 들어가기를 원해야 된다.
고침 받은 소경은 그것을 원하였고, 또한 그 소원을 구체화하여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하였다.
① 성경 보는 눈입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 보일 때 성경 보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② 사람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사람의 외모만 보이다가 눈이 떠지면 이 사람을 통해서 어떤 귀한 일을 이룰 것인지, 그것을 위해 내가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탁월한 리더는 앞으로 이루실 일을 보면서 현재를 봅니다.
③ 시대를 읽을 줄 아는 눈입니다.
이 시대의 흐름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추수할 영혼이 많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떤 눈을 가졌습니까?
9장 16절에 보면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면 모든 사람이 기뻐해야 할텐데 바리새인들은 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했는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영혼구원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섭섭하게 한 것만 눈에 들어오면 영적인 맹인이 되어가는 건 아닌지 잘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상처 받은 것만 생각하고 상처 준 것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상처가 오면 버리십시오. 상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신앙생활 하기가 힘듭니다.
영안이 열려서 주님이 보는 것을 보는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안이 열릴 수 있을까요?
내가 영적인 맹인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39-41절)
빛이 오면 내가 맹인인 것을 압니다.
그러나 41절에 바리새인들은 본인들이 다 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맹인입니다.
반면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은 육적인 눈도 떠지고, 영적인 눈도 점점 밝아졌습니다.
11절에 보면 소경은 “예수”라고 하는 사람이 눈을 뜨게 하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17절에는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보는 눈이 조금 더 밝아진 것입니다.
30절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영적인 눈이 감긴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38절에는 예수님을 믿고 절을 하였습니다. 영안이 열린 것입니다.
본인이 맹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영안을 뜨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크게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십시오.
전체 그림을 보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 가족, 교회, 나라를 통해서 이루실 전체 일을 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앞의 일만 보고 급급해집니다.
멀리, 곧 죽을 때까지 내다봐야 합니다.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인가,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죽어서 주님 앞에 섰을 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안이 열립니다.
영적인 눈이 뜨인 사람에게 안수 기도를 받으십시오.
사도행전 9:17-18절에 보면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먼 사도바울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평신도인 아나니아를 통해 사도바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조금 전까지 사울을 원수로 생각했으나 예수님의 말씀을 받고 “형제 사울”이라고 얘기합니다.
사도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서 영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비늘은 선입견을 말합니다.
내가 살아 온 것만큼 내 눈에 비늘이 끼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비늘이 벗겨진 후 즉시 하나님을 증거 하였습니다.(20절)
그러나 안수 받을 때 주의하십시오. 아무에게나 받으면 안됩니다.
음란의 영, 욕심의 영, 명예욕, 거짓의 영이 많은 사람에게 안수를 받으면 그것들이 나에게 들어옵니다.
성경을 보면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하는지,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사람인지, 그 시대에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영안이 떠져야 영혼을 살릴 수 있고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세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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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보면 특별한 기사와 능력을 힘입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평범한 일상 중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시간이나 장소가 아닌 어제와 다를 것 없는 동일한 공간과 시간에서 갑자기 일어난 것입니다.
목사의 모든 일과와 숙제는 거의 주일에 맞추어집니다.
기도하며 하나님께 말씀을 구하는 이유도 주일 때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소원하는 바는 그 주일이 특별한 날이 될 것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전 주에도, 그리고 그 전주에도 그래도 오늘 만큼은 평범한 날이 아니라 특별한 날이 될 것을 기대합니다.
설령 오늘 특별한 만남과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분명히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 날 것입니다.
이왕이면 오늘이 그날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인생 문제가 시원하게 해결되는 그 날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읽은 본문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거지가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다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 일어난 특별한 사건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4장 22절에 보면 나이를 40여세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이를 말해주는 그가 지난 40 여 년 동안 한 일이라고는 그 곳에 앉아 구걸하는 것이 전부였고 또 앞으로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일도 그것뿐이라는 절망적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성전에 들어가는 여러 개의 문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문 앞이었습니다.
당대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전하길 미문은 황동으로 겉 문을 하고 금과 은으로 덧씌운 2 중문의 구조였다고 합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문이었습니다.
이토록 화려한 성전 문 앞에 앉은 앉은뱅이거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극과 극을 보여주는 구조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경건한 몸가짐과 깨끗한 옷을 입고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큰 복을 기대하며 그 문을 통과해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죄 사함의 기쁨과 응답하심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미문의 화려함과 함께 그 곳은 이 세상에서 가장 생명의 활기와 기쁨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거기에 앉은뱅이는 40 년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40 년 동안 가장 아름답고 복된 장소에 있으면서도 그는 가장 비참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는 미문을 들어 가본적이 없습니다.
병자들은 저주 받은 사람들로 성전에 들어갈 수 없다는 유대의 율법에 따라 그는 그 자리에 고개를 쳐박고 세월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아름다운 미문은 결코 아름다운 미문이 아닌 고통의 문이요 저주의 문이었을 뿐입니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활력과 생명의 장소지만 그는 그곳에서 아무런 희망 없이 40 여 년 동안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 날도 별 다를 것이 없이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아침 시간부터 누구가가 던져 줄 돈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일상적인 날이었습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었습니다.
3시와 9시 기도가 지나고 해가 중천을 넘긴 오후 제 9 시 기도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 시간으로 9시면 오후 3시입니다.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3절을 봅시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에이도) 구걸하거늘.
거지가 먼저 봤습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동사는 원어로 에이도입니다.
에이도는 see 그냥 보다는 뜻입니다.
그냥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의미없이 목적없이 본 것입니다.
흐리멍텅한 눈을 뜨고 늘 하던 대로 “ 불쌍한 사람에게 한푼 주십쇼 ” 하고 구걸하기 위해 본 것입니다.
이 앉은뱅이 거지의 요청에 대해 베드로와 요한도 그에게 시선을 줍니다.
4절입니다.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아테니조. 816) 가로되 우리를 보라(블레포. 991) 하니.
보라 - 블레포(look straight). 집중하라, 경험하여 알라
주목하여 - 아테니조
ἀτενίζω
스트롱번호 816
거지는 베드로를 건성으로 봤지만 베드로는 거지를 응시했습니다.
에이도는 보지만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상태요 블레포는 대상을 확실히 보고 그것을 틀림없이 경험하여 알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블레포 할 때에 드디어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사람의 눈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눈 앞의 것만 보는 육신의 눈(肉眼)
또 하나는 마음의 눈(心眼)
그리고 영적인 눈인 영안(靈眼)
그냥 씨하면 마음의 눈은 열리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블레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라( look at)말합니다.
이것도 블레포 하라는 말입니다.
블레포의 또 다른 뜻은 ‘마음의 눈으로 보다 ’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자신들을 보라는 것은 단순히 육신의 눈을 보라는 것이 아닌 마음의 눈을 뜨라는 말인 것입니다.
사람이 성공하고 불행하게 되는 것은 좋은 환경이나 조건보다는 마음의 문제요, 바라봄의 문제에서 영향을 받는다 합니다.
유명한 헨델의 메시야라는 곡은 두시간 짜리의 대작입니다.
그 엄청난 곡을 헨델은 병상에서 죽어가며 열흘 만에 썼습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병석에서 하나님께 블레포했을 때 음악사에 길이 남는 대작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역사 드라마 왕건에서 보면 궁예가 애꾸눈이었습니다.
영국의 해군 제독 닐슨도 애꾸였습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하니발도 애꾸눈이었습니다.
이들은 애꾸눈으로 천하를 호령하던 명장들이었습니다.
세계 3 대 서사시를 쓴 호메로스와 밀턴과 단테, 이 세 사람은 모두 맹인들었습니다.
육신의 눈이 잘 보이거나 조건이 좋아 이른 업적이 아닙니다. 육신의 눈과 상관없이 마음의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블레포하면 소중한 것이 보입니다. 블레포하면 사랑이 보입니다. 부모를 향해 블레포하면 부모님의 은혜가 보입니다. 부부가 블레포하면 남편이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 아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삶의 위기는 환경보다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진짜 위기는 영적 침체요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 어느 시대보다 번쩍 거리며 발전하고 삶은 윤택해졌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은 멀어졌습니다. 아름다운 황금 빛 문에 소중한 것들이 가려졌습니다. 그래서 늙은 부모들이 버려지고 소중한 가정들이 깨지고 있습니다. 결국 원망도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 부모와 자괴감으로 고통받는 이혼부부와 비관하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은 줄 모릅니다. 영적 앉은뱅이요 거지가 널려 있습니다. 육신의 배부름 속에 사랑의 배고픔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거지 앉은뱅이의 근본적인 문제는 육신의 장애가 아니었습니다. 감동과 소망이 꺼져버린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으로부터 기대가 없습니다. 기대라고 한다면 오직 한푼 얻어 목구녁에 빵 몇 조각 밀어 넣는 창자가 채워지는 것 뿐입니다. 베드로는 정확하게 이런 마음의 장님인 그를 블레포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눈으로 자신을 블레포 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자동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디입니까 ? 엔진입니다. 다른 것은 조금 부족해도 엔진은 잘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의 엔진이 어디입니까 ? 마음입니다. 마음의 엔진이 잘 돌면 뜨겁습니다. 마음이 식어진 예배는 곤욕입니다. 마음이 식어진 기도는 미신입니다. 마음이 은혜로 뜨거워졌을 때 모든 기도가 응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은 마음의 뜨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외쳤습니다. 블레포 마음의 눈을 뜨라, 나를 쳐다보라 , 마음으로 기대하라!
그러자 5절을 봅시다.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프로스도카오. 4328) 보거늘(에페코. 1907)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돈밖에 기대할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 베드로와 소경 사이에는 굉장한 간격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를 쳐다보라는 것은 돈 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거지 앉은뱅이는 돈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서로의 요구와 필요가 다릅니다. 이것도 극과 극입니다.
베드로가 보라 그랬는데 무엇을 보라는 것일까요 ? 베드로 자신의 행색일까요 ? 그도 가난한 어부였습니다. 베드로가 요구하는 블레포는 자신 안에 계신 어마 어마한 분이셨습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여러분 저를 보세요, 어마 어마한 분이 저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늘 기대하세요, 하나님 주실 은혜를 기대하세요, 하나님을 기대하세요, 속상한 모든 것 내려놓고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요. 엄청난 은혜를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상도 못한 굉장한 역사가 여러분의 삶에 일어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베드로가 블레포한 것은 이거였습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전혀 다른 것을 기대하고 눈을 들었습니다. 어째든 두 사람의 시선이 블레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 기대하고 눈을 들었던 거지에게 베드로는 돈부터 없답니다. 기대하고 쳐다봤는데 “ 나 돈 없다 ” 약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딴게 있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니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무조건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돈은 없지만 내가 어떤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은 얼마 전에 죽은 예수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으로 걸으라 명령하고는 자신의 손을 잡아 일으킬 때에 발과 발목에 힘이 생기고 걷고 뛰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났는지 자신도 모를 일입니다. 다만 시선이 블레포하고 짧은 말이 선포된 것뿐인데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앉은뱅이였던 그가 증언할 수 있는 사실은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할 때 일어났다는 사실 뿐입니다.
20 년 전 군에 입대했을 당시 훈련소에서 친척중에 군대나 정부기관에 고위직이 있으면 적어 내라고 합니다.
고위직의 줄이 있는 사람들은 좋은 곳으로 자대 배치받고 비교적 군 생활이 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날 동기 하나가 적어 내지 않고 머뭇거리며 소대장에게 ‘이런 분의 이름도 적어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군대나 정부의 고위직하고는 상관없지만 소대장님이 아실만한 분이라서 적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소대장이“ 누군데 ”그랬더니 저희 큰 아버지 성함이 “ 최규하 쓰십니다. ”
그 날부터 훈련도 안시킵니다.
얼 차례도 다 빼주고 훈련병 때는 면회도 안 되는데 가족 면회까지 시켜 줍니다.
그리고 더 기막힌 것은 제가 대대 선임이어서 훈련 마치면 받기로 되어 있던 29 연대 연대장 상을 그에게 빼앗겼습니다.
그 상 받으면 자대 배치 받고 2박 3일 포상휴가거든요.
전직 대통령의 이름은 강력한 힘이었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이름보다 예수의 이름은 비교할 수 없는 파워가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생사를 가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실력있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절대적인 이름입니다.
이 이름이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먹히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예수 이름은 하늘과 땅의 모든 세계가 복종하며 영적 세계도 굴복하는 위대한 이름입니다.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 중 세상 살기가 너무 어려워서 냉냉한 심령으로 이 곳에 오신 분이 계십니까?
오늘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믿음과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길 축복합니다.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려우십니까? 사업이 어려우십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업아 일어날지어다. 몸이 병들어 있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병의 고통에서 일어날지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열정이 살아나고 우리 가정들과 사업이 이 일을 위해 일어날지어다.
우리는 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5절을 보면 앉은뱅이가 바라보았습니다.
보라 해서 본 것입니다. 블레포 하라 했으면 블레포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 바라보거늘 ” 이 단어는 불레포가 아닙니다. 룩 엩이 아닙니다. 블레포가 아닌 다른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원어로 에페코라는 단어가 쓰여졌고, 영문으로 보면 give attention으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에페코라는 단어의 의미는 못 떠나게 굳게 붙잡는다는 뜻입니다.
이제 용어를 확실하게 정리를 해 보십시다.
헬라어에서 본다라는 단어가 3가지가 있는데
그냥본다는 에이도가 있고
집중해서 본다는 블레포,
그리고 마음안에 꽉 붙잡아 둘 정도로 본다는 에페코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우리를 블레포하라는 것은 베드로와 요한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거지는 돈을 얻을까하여 블레포했습니다. 바로 그 때입니다. 짧은 순간입니다.
그 순간 앉은뱅이는 베드로의 시선 속에서 지금까지 보았던 시선과는 전혀 다른 시선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시선은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찬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시선이었습니다. 거지 앉은뱅이에게 마음의 눈이 열린 정도가 아니라 또 다른 눈인 영안이 열려 버린 것입니다.
생명의 시선을 발견한 앉은뱅이는 그 짧은 순간 예수님의 시선을 블레포한 것이 아니라 에페코 한 것입니다.
주목한 정도가 아니라 굳게 붙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못 떠나게 굳게 붙잡다’는 에페코를 써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 보거늘’ 예수님의 시선을 절대로 놓칠 수 없도록 자기의 마음에 꽉 붙들어 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베드로에게 잡힌 오른 손도 더 이상 베드로의 손일 수 없었습니다. 그 손은 앉은뱅이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린 손이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과 그 분의 피 묻은 손에 잡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먼저 한없이 따뜻한 생명의 시선을 주지 않았던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앙은 주님의 선행된 시선에 인간이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 시선이 떠나지 않도록 꽉 붙잡는 것입니다.
따스한 햇볕같이 쏟아지는 주님의 시선에 인간이 에페코 할 때 평범한 일상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설교 때 마다 저를 블레포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베드로 만큼이나 허물이 많습니다. 그러니 저를 블레포 하지 마시고 저를 통해 말씀하고 계신 예수님을 에페코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평범한 예배가 여러분 각자에게 놀라운 체험과 기적을 만드는 역사를 이룰 것입니다. 복잡한 인생길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해결의 열쇠를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능키는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신 주님께 에페코하면 그것으로 인생은 승리하게 되어있습니다.
요즘 다 차를 몰고 다니는데요. 차를 다 아는 사람만 운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도 운전 잘합니다.
저희 아내는 자동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시동키면 가는 줄 알고 브레이크 밟으면 서는 줄만 압니다.
자동차의 원리나 구조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운전을 기가 막히게 잘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인생을 잘 모릅니다. 인간관계도 잘 하지 못합니다. 말 주변도 없습니다. 소심합니다. 믿음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대속이 뭐고 삼위일체가 뭐고 은혜 언약이 뭔지 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예수님께 에페코 하면 받드시 복을 받는다. 믿음 생활 잘하면 복을 받는다.’ 이것만 붙들면 됩니다.
대구 서부 교회에 아멘 교수로 불리는 조동식 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신답니다.
그 분의 어머니께서 큰 며느리를 보시던 해가 마흔 다섯 이었답니다.
구역 예배를 드리면서 목사님께서 며느리에게 축복하기를 “ 다윗같이 신앙 좋고 다니엘처럼 뛰어난 아들 낳기를 축원합니다. ”하더랍니다.
그럼 아멘해야 잖아요.
그런데 이 며느리가 아멘을 안 합니다.
시어머니가 자꾸 눈짓을 하는데도 안하는 겁니다.
그러자 다급한 시어머니께서 대신“아멘“해 주었는데 그만 시어머니가 임신을 해 가지고 늦동이를 나았답니다.
그 목사님이 축복한데로 다윗같이 신앙 좋고 다니엘처럼 뛰어난 머리를 가진 교수 조동식 집사가 태어난 겁니다.
신앙을 머리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무슨 말씀을 주시든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에페코 하면 그대로 되는 줄 믿습니다.
앉은뱅이가 눈을 뜨자마자 한 일이 무엇입니까 ?
8절을 보세요. 성전으로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하나님을 찬미하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성전에 들어갑니다.
그에게도 드디어 미문이 아름다운 문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건축물인 성전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는 뜻입니다.
이 시간에 주께서 이곳에 계신 여러분을 뜨거운 사랑과 생명의 눈으로 응시하고 계십니다.
자기 욕망과 감정에 휘둘리며 마음의 눈이 먼채 밥그릇만 쳐다보고 있는 우리에게 블레포 할 것을 요청하시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밀려나 영적 앉은뱅이로 주저앉은 그 다리를 일으켜 세워주시려고 피 묻은 손으로 우리 손을 잡으려 하십니다.
그 분을 향해 에페코 하고 싶지 않습니까 ?
그 분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고 싶지 않습니까 ?
활짝 열린 축복의 성전을 향해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며 찬양하며 나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
참된 생명도 , 참된 사랑도, 참된 능력도, 참된 위로도, 참된 소망도, 참된 성공도 오직 그 분께만 있습니다.
이 시간 나를 위해 피흘려 주신 주님의 뜨거운 사랑의 시선에 에페코 하고 싶지 않습니까 ?
저를 블레포 하십시오.
look at me , 믿음의 눈을 열어 저를 보십시오.
그리고 저를 통해 찾아오신 예수님을 에페코 하십시오.
굳게 잡아 결코 놓치지 마십시오. 잡으셨습니까 ?
이제 선포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날 지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가정과 사업이 불 같이 일어날 지어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To this they replied, "You were steeped in sin at birth; how dare you lecture us!" And they threw him out.
31.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4.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적반하장(賊反荷杖)이란 도리에 어긋난 자가 도리어 스스로 성내고 업수이 여긴다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예언된 메시야(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고 강조합니다.
태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불러 네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누구냐?
이렇게 반복하여 추궁합니다.
그러자 소경되었던 사람은 내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전에는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두 눈으로 분명하게 본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가 선지자이심을 확신한다고 주장하며 이르기를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그들의 생각을 바꾸지 않고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려느냐 하며 소경되었던 사람을 쫓아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적반하장이라고 합니다.
소경으로 태어났던 사람은 그의 눈이 회복된 후에 눈을 밝히 보게하신 그 분이 바로 선지자가 되심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준수할 뿐만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을 믿는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그 분이 죄인이라고 단정하고 메시야로 오신 것을 부정합니다.
메시야를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이 메시야를 통하여 두 눈을 밝히 떠서 세상을 환하게 보게 된 사람의 증언을 거부하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공산주의를 신봉하던 나라들이 지구촌에서 거의 사라지고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공산주의 잔재를 희망의 끈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붙잡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자유민주주의를 흔들려는 불손한 세력들이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엉뚱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진리를 이 땅에 실현하시려고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시대적 사명을 바르게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온 세상 위하여
성경에서 적반하장과 같은 대표적인 사례는 갈보리 언덕 위에 세워진 세 개의 십자가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운데 십자가에는 예수님께서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외경에 의하면 두 강도 "디스마"와 "게스다"는 좌우에 못 박힌 죄인들이었습니다.
오른편의 강도는 '디스마'라고 합니다.
왼편의 강도는 '게스다'라고 하며 그가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부탁합니다.
만일 당신이 구세주가 되신다면 당신이 먼저 십자가에서 뛰어내리고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이 구세주가 되심을 믿겠습니다.
이때 오른 편의 강도 디스마가 게스다를 꾸짖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 값으로 십자가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이 사람은 전혀 죄가 없음에도 이런 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디스마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
두 강도 디스마와 게스다의 경우
게스다는 적반하장 또는 주객전도라는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잠언 30:21-23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주객전도(主客顚倒)라는 말은 주인과 손님의 역할이 거꾸로 되었다는 뜻으로 경우가 바르지 않거나 어이없는 상황을 설명할 때 쓰이는 말이다.
도둑이 오히려 매를 든다는 뜻의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말도 비슷한 경우를 설명하는 말이다.
사람이 자신의 위치와 본분을 망각한 체로 행동하는 것은 좋지 않다.
손님이 주인인 체 하거나 종이 주인인 체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손님은 손님이고, 종은 종이고, 주인은 주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를 주라 부르는 것은 자신의 신분을 종으로 인식하는 자각을 담고 있다.
불행한 것은, 입으로는 주님을 주님으로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이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다.
마치 자신이 창조주인 것처럼, 자신의 모든 일의 주권자인 것처럼, 마치 자신의 삶은 자신이 평가할 수 있는 심판주가 된 것처럼 허세를 부리며 사는 것이다.
주님은 거짓된 인간의 위선에 속지 않으신다.
누가복음 6: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아니하느냐.
주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진정한 주인이시다.
자신의 피 값으로 우리를 영원한 죄와 심판으로부터 건져 주신 우리의 주인 이시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 살 이유도, 권리도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며 우리 주님의 종이다.
우리 삶 속에서 어이없는 주객전도를 버리도록 하자.
고린도전서 6:19-20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2:17 절에는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느냐고 묻는 첫 번째 적반하장이 나옵니다.
7절 이하에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합니다.
세 번째 적반하장은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고도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했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런 태도는 모두 처음 관점이 어긋난 것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내 사자를 보내리라(2:17~3:6절)
자, 그럼 첫 번째 부작용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를 내는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17절을 요약하면 그런 의미가 됩니다. 과거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문제를 제기하면서 “하나님 세상이 도대체 왜 이 모양입니까?”하고 질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뜻밖의 답변을 듣고 성문에서 지켜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다시금 은혜를 회복하고 없어도 인하여 감사를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따졌던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무지나 영적인 불감증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께 묻습니다.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공의의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게 뭡니까? 적반하장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들의 문제는 첫째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비틀어진 시각으로 역사를 보려고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러자 당연히 하나님의 공의가 의심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은 스룹바벨 성전을 짓고 뭔가 획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했지만, 여전히 열강들은 승승장구하고 자신들은 되는 일이 없는 것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런 비틀린 시각으로 인해 영적 생활이 형편없는 수준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하나님은 대접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껍데기만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생활도 엉망, 성적인 방종도 서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과 통혼도 자유로웠습니다. 그런 이들의 모습은 하나님을 괴롭게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도대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해는 갑니다. 기다림의 세월이 길어짐으로 인한 이들의 고통이 이해가 간다는 말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도 고통의 세월의 무게 때문에 너무 힘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요? 그럴 때 잘못된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영적 생활을 등한히 하면 상황이 더 좋아집니까?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위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음성,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버립니다. 그래서 종래는 이들처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내 시간과 같지 않으며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고난의 시간들 동안에 견고하고 꿋꿋한 모습으로 훈련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들어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은 이렇게 적반하장으로 도리어 하나님의 공의를 묻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사자를 보내겠다.”라고 하십니다. 함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3:1절 이하입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뭐라고 하십니까? 내 사자를 보낼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을 볼 때 이 사자는 세례 요한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세례 요한의 사역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희의 구하는 바 주,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분이 어떻게 임하신다고 하십니까? 홀연히 임하신다고 하십니다. 갑자기, 예기치 않은 날에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항상 재난과 파멸과 함께 사용되었던 말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여기 “너희가 구하는바 또 너희의 사모하는바”라는 표현에서 이들이 간절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런데 이들이 사모하는 메시아는 어떤 메시아입니까? 계속되는 외세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줄 힘 있고 강력한 메시아, 다윗의 영화를 회복할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내시겠다는 메시아는 지금 이들이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와는 다른 메시아입니다. 따라서 17절에 이들이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탄식하자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신 것입니까? 내가 메시아를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가 어떤 메시아입니까?
2절입니다.
어떤 메시아입니까? 은과 금을 연단하는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은 메시아입니다. 불은 흔히 심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 4:24 절에서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라고 합니다. 고전 3:13 절에는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때 불은 정화의 불입니다. 연단의 불입니다. 깨끗하게 불순물을 걸러내는 불입니다. 없애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깨끗하게 회복하는 것입니다.
중동지방을 가면 지금도 길거리에서 은장색들을 만난답니다. 그들은 서방 여행객들이 주고 간 주화를 이동 용광로에 넣어 녹여서 은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여행객들에게 파는데, 그 방법이 주화나 광물을 용광로에 넣은 다음에는 계속은 도가니를 바라보면서 찌꺼기를 퍼내고, 또 들여다보고 찌꺼기를 퍼내는데, “왜 자꾸 들여다보느냐?”고 물으니까 대답하기를 “은에서 나온 찌꺼기가 다 없어지고 순수한 은만 남으면 거기에 자기의 얼굴이 거울처럼 선명하게 비친다.”라고 대답합니다.
이게 무슨 과정입니까? 정화의 과정입니다. 마치 알곡과 가라지를 걸러내는 것처럼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골라내는 것처럼 불순물들을 걸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단하는 자의 불입니다. 심판의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연단의 불입니다. 성도를 깨끗하게 제련하기 위한 정화의 불이라는 말입니다.
표백하는 잿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같이 비누가 나오기 전에는 우리나라도 잿물로 빨래를 빨았습니다. 표백하는 자의 잿물은 천을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깨끗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회복하심에 대한 은혜는 3~4절에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3절입니다.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같이 그들을 연단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 있습니까?”라는 고통스러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뭡니까?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기간, 하나님이 충분히 고통스러운 그들을 그냥 놓아두시는 기간 그 기간이 뭐라는 것입니까? 은을 연단해서 깨끗하게 하는 것처럼 성도들을 연단하는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말세에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구원 받은 이후의 이 기간은 근본적으로 연단과 훈련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해 가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신다는 말씀이 바로 왕 같은 제사장들인 성도들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배가 회복됩니다. 3절 하반 절에는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4절에는 그때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하나님께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배가 형식화되고 번폐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제물이 어떤 제물을 드리게 되었습니까? 저는 것, 눈먼 것 병든 것으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병들게 되면 가장 먼저 예배에 문제가 생깁니다. 예배는 늘 제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감사가 사라집니다. 감사가 사라지고 나면 인색한 마음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럴 때 구약처럼 저는 것 병든 것은 아닐 테지만 그와 똑같은 자세로 헌금하게 됩니다. 다 쓰고 남은 것, 어쩔 수 없어서 드리는 것으로 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메시아가 오셔서 하는 일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정화하고 연단해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불로 정화하고 잿물로 씻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처음부터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처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창조 사역의 아름다운 동역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던 것처럼 하나님을 온 인격과 마음을 다해 예배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회복되는 것에 모든 관심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오랜 시간 기다리게 만들어서 지치고 힘들게 만드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그 연단의 기간, 그 훈련의 기간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참된 예배자로 기쁨의 예물을 드리는 회복된 사람들로 만들어 가시는 것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틀어져 있는 시각과 하나님의 사랑이 만나는 지점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이 회복하시려는 것과 다른 메시아, 다른 영광을 기대했기 때문에 실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과 잿물로 회복하시는 것은 그들의 그런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온 마음과 생각을 집중함으로 이 땅에서 섬기고 낮아지는 종으로서 삶을 살아내는 백성들을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높은 곳에 마음을 두고 다윗의 영화와 같은 번영과 영광만을 찬양하는 승리주의 기독교는 어쩌면 주님이 바라보시는 곳과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이며 다른 것을 추구하는 기독교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회복되기를 가장 원하십니다. 내가 의로운 제물과 여호와께 기쁨이 되는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회복되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소멸되지 아니하리라(6절)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복되는 것에 관심이 있다고 말씀하신 후에 이렇게 위로하십니다. “나 여호와는 변역치 아니하나니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뭐라고 위로하십니까? 나는 인생이 아니기에 식언치 않고, 인자가 아니기에 후회가 없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야곱의 자손들 누굽니까? 성도들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회복된 예배를 드리기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성도의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느냐? 여기 너희의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뭡니까? 나는 변하지 않는 여호와! 나는 처음과 나중이 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불과 잿물로 씻어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야곱의 자손들을 소멸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심판 주로 오심(5절)
그런데요? 주님의 오심은 야곱의 후손, 레위 자손들에게는 분명히 은혜입니다. 이들을 구약적인 표현으로 한다면 남은 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 고난의 시기를 인내로 경주하며 믿음으로 살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바로 회복된 예배를 드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많은 사람, 특히 경건의 모양을 가졌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심판 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면 알곡들에게는 영원한 천국으로 향하는 축복의 시간이지만 그렇지 않은 가라지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의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시간인 것처럼 주님의 오심은 심판하러 오심의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심판을 받을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지금 불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말라기 선지자가 하나님의 경고를 선포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믿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제사장들입니다. 가장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믿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내용적으로는 경외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술수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마술이나 무당들을 의미하는 말로 혼합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순전한 기독교가 아닙니다. 섞여버린 기독교입니다. 세상 정신을 본받지 말아야 하는데 세상 정신과 기독교를 섞어 버린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이런 기독교는 가장 인격적인 주님을 마술적이고 주술적인 하나님으로 바꿔 버립니다. 그래서 성도가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부분들을 다 빼앗아 버립니다.
간음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미 2:10절 이하에 말씀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혼과 잡혼을 일삼는 궤사를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구역질 난다고 하시는 그런 가증한 사람들입니다. 생활이 성결하지 않은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한순간의 실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라기의 제사장들, 성도들은 이방 신의 딸들과 통혼했습니다. 고의로 아내를 버렸습니다. 궤사를 행했습니다. 잠자리를 거부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거짓 맹세하는 사람, 품꾼의 삯을 떼어 먹는 사람,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사람 즉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술수, 마술적인 종교를 따라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간음하지 말아야 합니다.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짓 맹세, 품꾼의 삯을 떼어먹는 못된 고용주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추상적인 무엇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것은 구체적인 생활입니다. 과부와 고아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일은 성도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구체적인 일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이런 모습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은 이렇게 양면적인 것입니다. 필경 알곡과 가라지,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시겠습니까? 주님의 연단의 불과 표백의 잿물을 통해서 날마다 거룩한 열정을 가지고 살다가, 삶의 고난과 어려움에도 더욱 심령이 가난해지고 애통해져서 주님을 닮은 성품으로 자라가다가 주님 다시 오시는 날 거룩한 형상으로 변화되어서 영원히 주님과 찬양하며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과 다른 세계관 다른 시간관, 다른 욕구들로 삶의 채우고 주님이 내 욕구에 응답해 주지 않는다고 타성에 젖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다가 가라지로 분류되어 지옥의 영벌을 상속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기위해, 유다와 예루살렘이 여호와께 기쁨이 되기를 원하셔서 오늘 우리를 연단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로 거룩한 삶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게 할 것입니다. 우리로 살아 있는 예배, 역동적인 예배, 감격, 감사, 찬양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고난은 위장된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변역치 않으십니다. 고난의 시간들은 연단의 시간들입니다. 나를 모세처럼 온유하게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훈련과정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성품으로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 이것을 믿고 힘을 내십시다. 감사를 회복합시다. 찬양을 회복합시다.
내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 확연하게 깨닫는 진리는 하나님은 우리를 풍성한 삶으로 이끄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즐겨 하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것은 성경을 알면 알수록 주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 확연해지는 분명한 진리입니다.
2. 어떻게 도적질했습니까? (7~12절)
이 단락은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답답해지는 본문입니다. 뭡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오라, 돌아오라. 간절히 불렀더니 백성들이 어떻게 해야 돌아가는 것입니까? 하고 묻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돌아오라는 말은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의미입니다. 그간의 잘못된 생활에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저는 것, 눈 먼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예배에서 돌아서고, 아! 예배가 너무 번폐스럽구나 하고 있는 타성에 젖은 예배로부터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합니까? 어떻게 돌아섭니까? 그럽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우리가 그렇게 원하는 것들은 응답도 해주지 않으시면서 뭘 잘못했다고 그러십니까?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단락은 돌아오는 것이 무엇이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온다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십일조를 예화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끔 운동을 하다보면 자세가 지나치게 기형적인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보기에도 혐오스러울 뿐 아니라 몸에도 무리가 많이 갑니다. 그래서 자세를 교정하려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대부분 이렇게 말합니다. “에이, 뭐 그냥 취미로 치는데요. 그냥 놓아두세요. 내 맘대로 치게”, 또는 “나 편하면 되지요. 뭐가 문젭니까? 이걸로 밥 먹고 살 것도 아닌데...” 그럽니다. 그러면 참 말한 사람이 머쓱해집니다. 문제가 심각한데 그게 문제인지도 모르고 그냥 자기 멋에 사로잡혀 사는 것입니다. 전혀 고칠 의사도 없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너희가 도둑질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면서도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했습니까?”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도둑질했다는 말은 하나님을 상대로 사기 친다는 말입니다. 원래 이 말은 “덮다”라는 말입니다. 거짓말을 슬쩍 덮어버리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의미로는 속여 빼앗는 것을 말합니다.
뭘 도둑질했습니까? 십일조와 헌물을 가지고 사기를 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더 이야기를 진행하기 전에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헌금의 원리를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의 헌금의 원리
우선 우리는 최초의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있는 창세기로 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14:20절입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그럽니다.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도저히 승산이 없는 그돌라오멜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야간 습격을 통해 대승을 거둡니다. 그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의 마중을 받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칩니다. 이때 십일조의 의미는 감사와 찬양, 기쁨과 감격이었습니다. 멜기세덱이 십일조를 바치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너무 이길 수 없는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드린 것입니다.
창 28:22절에는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가던 중에 노숙하다가 꿈을 꾸고 그 꿈에 감격해서 예배하고 이름을 벧엘이라고 하면서 십일조를 서약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야곱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때에도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처음 십일조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한 사람들의 자발적인 은혜의 표현이요 하나님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로운 모습은 아마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듯이 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범법함으로 율법이 더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율법이 되고 맙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을 가르치는 일이 필요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레 27:30절에는 “땅의 십분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영이시고, 모든 것을 소유한 분이시기 때문에 실제로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는 하나님이 가져다 쓰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십일조의 참된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당신께서 쓰시지도 않으시면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성물로 구별하라고 하십니까? 일단 그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십일조는 그것에 대한 감사를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일조로 실질적으로 무엇을 했습니까?
민 18:24 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무슨 말씀입니까? 십일조는 성도가 드렸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첫 번째는 레위인들, 즉 하나님의 성막, 혹은 성전을 섬기는 사람들의 생활비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신 14:28~29절을 보시겠습니다.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축복을 주시리라” 그럽니다. 그래서 십일조의 정신은 기업이 없는 레위인, 객과 고아와 과부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는 사랑의 섬김이요 실천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십일조가 율법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사를 가르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가르쳐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칠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에 대한 감사를 표현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용도에 있어서는 사랑의 실천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신 14:29절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축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헌금의 원리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특히 십일조는 레위인들의 생활과 직결되어있는 소중한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풍성한 은혜 가운데 살 때는 이런 것들이 잘 지켜졌지만, 후대에 와서는 대체적으로 십일조가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안식년만 해도 바벨로 포로기 70년을 안식년이라고 말씀할 정도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사사기에는 레위인이 방황하는 일들이 생기게 됩니다. 에스라서에는 레위인들이 돌아오기를 꺼립니다.
그러다 보니 또 다른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레위인들도 타락하는 것입니다. 특히 성읍에 매 3년마다 저장했던 그 십일조는 온갖 부패와 부정의 온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이 고아와 과부들의 위한 것까지 다 착복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말라기 처음 시작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6절 이하에 제사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 가운데 더러운 떡을 드린다. 눈먼 희생으로 드리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렸다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지고 타성에 젖을 때 제사장들이 깨어서 그들을 일깨운 것이 아니라 그들은 더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가져온 제물 가운데 좋은 것은 자신들이 착복하고 저는 것, 병든 것으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이 번폐스럽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제사장들의 도적질에 대한 실질적인 그림은 말라기와 동시대 선지자인 느헤미야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 13:4절 이하에는 제사장 엘리아십과 도비야의 비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 14:29절의 3년마다 드리는 십일조가 성읍에 저장되었다고 했는데 대하 31:10~12절에는 이것이 성전 곳간에 모아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할 때 고아와 과부 어려운 사람들을 돕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 골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큰 방을 마련했습니다. 그 방이 어딥니까? 바로 이런 십일조의 곡물을 두는 방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공공연하게 비리가 저질러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도비야가 누굽니까? 얼마나 집요하게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방해했던 사람입니까? 암몬 사람인 도비야가 어떻게 성전에 그것도 가장 깊숙한 심처에서 성도들이 내는 십일조를 먹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게 당시의 타락상이었습니다. 그러자 느13:10절에는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이 그 직무를 포기하고 도망쳤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꼴을 보고 백성들이 십일조 내기를 중단했습니다. 그 결과 레위인들이 전리로 도망치는 악순환을 낳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전에 남아 있는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이 사랑과 섬김의 십일조를 착복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도망쳐서 더 이상 레위인으로 살기를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이게 말라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도적질은 일차적으로 누구 이야기입니까? 제사장들 이야기입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드린 사랑과 고아와 과부들, 객을 위한 사랑의 실천을 착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도둑질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나라가 이렇다고 하십니다. 단순히 제사장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죽하면 레위인들이 도망쳤겠습니까?
이게 뭡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총체적인 위기 상황입니다. 부작용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대의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의 탐욕스러운 물질 사랑이나 우리 시대의 목회자들이 돈만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나, 성도들이 은혜와 사랑,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에 대한 감사가 사라져서 인색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헌금하고 그나마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도 없어서 그냥 지나쳐 버리는 상황은 다 뭡니까? 부작용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헌금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그 원리입니다. 십일조 해야 합니까? 하지 말아야 합니까? 본 교회에 해야 합니까? 등등의 질문은 전부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 중심에 있으면 “십일조 해야 합니까?”라고 물을 수 없습니다.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다른 교회에 해야 합니까 하고 묻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사랑과 섬김의 마음이 사라지고 나면, 목회자가 돈에 욕심을 내고 명예에 욕심을 내게 마련입니다. 성도가 주일이고 예배고 별 상관없이 그저 돈의 노예가 되어 살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고사하고 날마다 더 채우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영적 생활을 가장 심각한 대적이요 부작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더 알기 원한다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사랑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
본문의 답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여 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마음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는 마음으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아와 과부, 어려운 사람들이 성전에 찾아오면 그래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일이 없도록 양식을 채워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예배당을 살찌우고 예배당에 최고 좋은 집기를 들여놓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는 말씀은 건물이 아닙니다. 성전 곡간에 곡식들은 고아와 과부, 객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 시대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연장 선상에 십일조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그 십일조를 통해 공동체가 어떻게 어려운 사람을 돕고, 또 여기서 애쓰는 목회자가 생활하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험해 보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이 말씀이 그렇게 한 번 투자해 보고 하나님이 어떻게 배로 두 배로 세배로 축복해 주시는지 테스트해 보라는 말씀입니까? 이것이 바로 기복신앙이요 세속적 세계관에 입각한 기독교입니다. 주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 과도한 욕심을 내고 부정해서 사업하고 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지 환경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이 부자만 되면 되겠습니까? 따라서 모든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본문의 시험해 보라는 말씀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나를 증명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test 해보라는 말씀이 아닌 것은 이어지는 15절에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들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이 말씀을 이렇게 보고 싶습니다. 너희의 타성에 젖은 마음, 하나님이 내 시간, 내 의도대로 움직여주시지 않는다고 상한 너희 마음! 그 마음에 하나님 사랑을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원리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너희를 보호하고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축복하시고 싶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풍성한 삶을 살게 하고 싶어서 마음이 타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보호받고 최소한 먹을 것 때문에 애타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레위인들이 먹을 것 입을 것에 대한 걱정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헌금을 통해 나타나 평균케 하는 원리가 실현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사랑하는 마음이요 자원하는 원리였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자꾸 바벨 정신에 입각한 방법으로 살아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타락하고, 백성들이 나태해지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법대로 역사하시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방종해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돌아서라고 하십니다. 그런 생활에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이게 단순히 십일조의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십일조는 그런 돌아선 마음의 지극히 작은 결과일 뿐입니다. 오히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내 삶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더 섬길 것이 없는가? 더 드릴 수 없을까를 가지고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십일조입니까? 아닙니다. 사랑의 문제입니다. 마음의 방향이 문제입니다. 잘못된 세계관이 낳은 부작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돌아서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돌아서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주님은 인간의 중심을 꿰뚫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물질이 어디에 주로 사용되고 있는가는 분명히 나의 마음의 방향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시간 대부분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습니까? 그 시간이 사용되는 곳에 내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그곳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기도하고 마음을 쓸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사랑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공동체와 이웃을 말씀의 원리에 따라 사랑하십시오. 그 사랑만이 우리를 모든 시험으로부터 이기도록 넉넉한 힘을 줄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십일조에 담긴 의미입니다.
말로 하나님을 대적함(13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했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졌다고 했을 때 사용했던 말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돌같이 단단해졌으며 악의로 가득하게 되었는가를 잘 드러내 주는 말입니다. 주님은 입에서 나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들이 말로 하나님을 탄압하고 말이 강퍅할 대로 강퍅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 놓고는 우리가 무슨 말로 하나님을 대적했느냐고 묻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마 25장에 보면 주님 다시 오셔서 양과 염소를 골라내실 때 우리가 언제 주님을 돌보았느냐고 묻는 사람들과 언제 주님을 모른 척했느냐고 묻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주님이 하셨던 말씀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저 평범한 일상 가운데 가장 작은 소자 하나, 고아와 과부들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둘 다 그것에 대해서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완악한 말을 하고도 무슨 말로 하나님을 대적했느냐고 묻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떠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마음이 상한 사람들이 말로 저지르는 부작용이 무엇입니까? 14~15절입니다.
3. 너희는 말하기를(14~15절)
1)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하는 것이 유익이 없다.
무슨 말로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마음을 강퍅하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하는 것이 유익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슬프게 행하는 것이”라는 말은 주로 애도하는 사람들이 입는 복장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행사가 있을 때는 회개의 복장으로 베옷을 입거나, 재를 뒤집어쓰고, 또는 금식을 하며, 철야기도를 하며, 스스로 자기 몸을 괴롭게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보상을 받아내려고 했습니다. 내가 철야하고, 금식하고, 새벽기도를 안 빠지고, 열심히 봉사하니까 하나님께서 합격을 주시고, 승진을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좋은 사람 만나게 해 부실 것이라고 하는 보상주의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총칭해서 “슬프게 행하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을 보십시오.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 말은 우리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했는데도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원망입니다. 예수 믿어봐야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백날 예수 믿고 고생했는데 얻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말합니까? 그들이 바라는 보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바라는 보상이 무엇입니까? 다윗의 영화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잘 먹고 잘사는 부강한 나라를 이루는 것에 있었습니다. 2:17절에 이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버림과 탄압을 받고 환란을 받는 것은 공의의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마음을 괴롭게 하며 살아보았더니 별 소용없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진심으로 순종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온전하게 괴롭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다른 것을 원하고,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것과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시대에 한 번도 변변하게 복음을 올바르게 배워보지도 못하고 그저 교회 언저리에 세상 정신이 가득한 모습으로 머물다가 내가 교회 다녀보니까 별 것 없더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 보려고 정말 노력했는데 그래보니 별 것 없더라는 말입니다. 또 뭐라고 말했습니까?
2) 교만한 자가 복되고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고 합니다.
마음이 상한 상태에서 세상을 보니까 어떻습니까? 오히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더 잘되고,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이 회사가 커지더라는 말입니다.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교만한 자가 복되다,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하는 것을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나 마음을 애통하게 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혀는 불의 세계입니다. 길들여지지 않는 악입니다.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그의 속사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보십시오.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교만을 끔찍하게 싫어하십니다. 교만은 넘어짐의 앞잡이요 패망의 선봉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교만한 자를 낮추십니다. 그런데 마음이 잘못된 것을 구하고 비틀어진 눈으로 보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시는 교만한 사람들이 복된 것처럼 느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 잘되는 것 같은데 예수 믿는 나는 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복입니까? 주님과 함께 동거하며 잔잔한 물가와 푸른 초장에서 심령의 평안을 구가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소망 때문에 이 땅에서 잠시 누리는 낙보다 고난을 택하는 것입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것이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것이며 교만한 자의 길을 따라 걷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말하는 복되다는 말은 성경이 말하는 복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들이 교만한 자들이 복되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복의 기준으로 볼 때 그들은 다 잘되는 것 같더라는 말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뇌물을 주고, 불의한 방법을 동원하고 교활하게 행동하는 자가 번영하더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살아보니까 안 되더라는 말입니다. 그런데요? 십자가에서 온갖 조롱 가운데 침묵하셨던 주님은 우리의 성공주의를 지지하시면서 그것이 축복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다 보너스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덤으로 주시는 것들입니다. 이들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와 인과 신이 아닌 번영만을 꿈꾸면서도 자신들이 명령을 순종했다고 믿고 있고, 마음을 슬프게 했다고 믿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이들을 더욱 심각한 부작용으로 인도하는 어려움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고까지 합니다. 여기서 시험한다는 말은 심판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 없다는 전제 가운데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아무 이상이 없더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모든 것이 뒤틀려 보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처럼 보입니다. 중세 기독교의 타락한 시대를 지나던 사람들이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잘못된 신에 의해 붙잡혀 있던 인간 이성을 불을 밝힌다고 했습니다. 신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은 사람들이 잘못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리고 신을 버렸습니다. 그 결과 세상이 좋아졌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상한 마음 그대로, 잘못된 세계관 그대로 사는 것은 그것 자체로 저주입니다. 그 삶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그래서 원망과 불평의 말들로 삶을 더 황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이 상한 사람들, 잘못된 세계관으로 잘못된 신앙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빠지게 되는 이중적인 어려움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마음에 말하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였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가증한 악을 행하였으니 선을 행하는 자가 아무도 없도다』(시편 53:1).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건만,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큰소리치며 만용을 부리던 사람, 자기 편할
대로 생각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 죄인이 오히려 하나님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건에 대해 법원 판사가 기각하는 해프닝이 소송천국으로
알려진 미국에서 벌어졌다.
미국 네브래스카 주 상원의원인
‘어니 체임버스’가 하나님을 대상으로 제기한 소송을 네브래스카 주의
한 판사가 기각시켰다고 한다.
뉴스에 의하면, 네브래스카 오마하에
있는 더글러스 카운티 디스트릭 법정의 ‘말론 포크’ 판사는 지난 14일 주 상원의원인 어니 체임버스가 지난 2007년에 접수시킨 하나님에 대한 소송을 기각시켰다.
포크 판사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고소 통지서 집행을 할 수 없다’면서
‘소장에 명시된 피고인에 대한 효과적인 법 집행이 불가능하므로 이
고소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체임버스 의원은 고소장에서
‘하나님은 지구상의 수백만 인류에 대한 수백만 건의 파괴, 테러, 죽음의
원인을 제공했으므로 법적으로 규탄 받아야 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체임버스는 포크 판사의 기각에 의문을 제기하며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이 소송을 알고 계셨다.’고 말했다고 한다.
세상이 막바지를 치닫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곤 한다.
억울한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탄원하는 일은 있어 왔으나 하나님을
상대로 고소하는 일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한 본성을 통해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들이 가끔씩 하나님께
그 화살을 돌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 세상에는 참으로 어이없는 소송들이
많음을 본다.
어떤 자료에 보면, 캐나다에서 어느 공공장소에서
술에 취한 판사가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벌금형을 선고해놓고는
다시 정상을 참작해 벌금을 다시 면제해 주는 웃지 못할 판결을 내린
사례도 있었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띠는 것은 루마니아에서 하나님을
상대로 한 소송이었는데, 살인죄로 20년간을
복역한 ‘페블’이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의 시련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으로 믿고 세례까지 받았지만, 여전히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하나님이 계약을 위반했다’며 소송을 제기한 일이다.
이 정도면 말 그대로 적반하장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이라고
정죄한 죄인들이 되레 하나님을 고소하다니!
『네 소송을 변호할 자가 아무도 없나니 너를
싸매 줄 자도 없을 것이요, 너를 치유해 줄 약도 없으리라』(예레미야 30:13).
구원받지 않은
자연인들, 특히 하나님을 찾고 선을 행하는 것을 멀리하는 죄인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탄원이나 항변이다.
그런데도 죄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이나 무지를 탓하지 않고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같이 주를 비난하더라』(마태복음 27:44).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변론하자고 제의하신다.
『이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주가 말하노니 너희 죄들이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게 될 것이요, 진홍처럼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야 1:18).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향해서 얼마든지 송사를 하되 너희들이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그것을 입증해 보이라고 도전하신다.
『나를 기억하라. 함께 변론하여 네가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하라』(이사야
43:26).
그러나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자신의
결백함을 입증할 수 없다.
그런데 두려움을 모르고 수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처럼 어리석게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했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얼굴을 바꾸어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다.
심지어 땅 위에 사는 교회 목사에 대한 송사도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라고 하셨거늘(디모데전서 5:19) 하나님을 고소하는 데 있어서 그 누가 증인으로
설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 이 세상의 부조리와 폭력 그리고 자연재해 등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 사건은 불효자가 부모에게 자신을 왜 낳았느냐고
따지는 것과 같은 삼류 코미디에 지나지 않는 해프닝이다.
그가 미국의
상원위원일지라도 그의 지식이나 지혜가 하나님께는 전혀 쓸모가 없음을
입증하고 만 것이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학자가 어디 있느냐?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드신 것이 아니냐?』(고린도전서 1:20).
옛날 물건을 훔치려 남의 집에 들어간 도둑이 주인에게 들켰다.
주인은 큰 소리로 “도둑 이야”하며 도움을 청했고, 곧이어 이웃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자 도둑은 몽둥이를 들고 “도둑을 잡아라”하며 피해자인 척하며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는 도둑이 오히려
몽둥이를 든다는 뜻의 ‘적반하장’의 유래로 추측되는 이야기다.
비슷한 성어로, 주인과 손님의 위치가 뒤바뀐다는 뜻으로 사물의 경중(輕重) 선후(先後) 완급(緩急) 등이 서로 바뀐다는 ‘주객전도(主客顚倒)’가 있다.
‘적반하장’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아예 인식을 못하는 경우, 잘못을 인정하기 싫을 때, 잘못을 인정할 수 없을 때, 알아도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기 싫거나 되레 덮어씌우는 경우 등 뻔뻔함이 극치에 달한다.
어쨌든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속담이 잘 맞는 것 같다.
조선 인조 때의 학자이며 시평가(時評家)인 홍만종(洪萬鍾)의 문학평론집 <순오지(旬五志>에 ‘적반하장’의 해석이 나온다.
<순오지>에는 ‘도리를 어긴 사람이 오히려 스스로 성을 내면서 업신여기는 것’을 비유한 말로 풀이되고 있다.
이처럼 ‘적반하장’은 잘못한 사람이 잘못을 빌거나 미안해 하기는 커녕 되레 화를 내면서 잘한 사람을 나무라는 경우에 ‘기가차다’는 뜻으로 흔히 쓰는 말이다.
적반하장(賊反荷杖)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로 다른 것은 different이고 틀린 것은 wrong이니까 같이 쓰지 않는데, 한국말로는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쓸 때가 많습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삶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보며 나와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되면 ‘저건 틀렸다.’라고 하니까 관계가 나빠집니다.
부부간에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렇고 성도간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즘 뉴스에 보면 전부 그런 것을 봅니다.
한쪽에서 다른 쪽을 보며 다르니까 틀렸다고 하고, 그쪽에서도 이쪽을 보며 자기와 다르니까 틀렸다고 합니다.
다른 것인데 틀렸다고 하니까 문제가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자기들과 생각이 다르다고 다 틀렸습니까?
그게 아닌데, 자기들과 다르고 자기들의 방식이 아니면 다 틀렸다고 하는 독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과 갈등이 많이 생겼던 것입니다.
계속되는 바리새인들의 심문 (24~29절)
이전에 9장 1~23절까지 살펴보았는데, 9장에서 우리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오랫동안 살펴보는가 하면, 이 사건이 주님의 회복하시는 은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 고침을 받고 본의 아니게 종교지도자들, 특히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 휘말리면서 위기를 맞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고침을 받은 후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통해 점점 예수님의 제자로 변화가 되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보았듯이, 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는 더 이상 아들의 인생을 책임지고 싶지 않았고, 이제 눈을 떴으니 스스로 살아가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이제 눈을 막 뜬 아들이 성인이었기 때문에 아들 때문에 자기들이 불이익을 당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들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은 냉정하게 보이는데, 그 당시 출교를 당하게 되면 어디서도 발붙이고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아주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너무나 두려워 그것을 회피하고 아들이 책임지도록 한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막 눈을 뜨게 된 아들에게 부모가 이런 식으로 한다는 것은 상당히 매정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부모의 그러한 책임회피성 매정함을 통해서, 또는 바리새인들의 강퍅함을 통해서, 오히려 이런 어려움 때문에 맹인이었던 이 사람에게 스스로 신앙의 선택을 내리고 회복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24절)
그의 부모로부터 그가 날 때부터 맹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받았지만 바리새인들은 처음부터 그것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믿지 않기로 결정한 자신들을 합리화할 수 있는 어떤 근거나 이유나 구실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맹인이었던 사람을 다시 부릅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늘 어떤 구실이 있고 핑계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 핑계는 그의 부모의 주저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불러 추궁하는 겁니다. 그리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라고 합니다.
사실 이 말은 맹인이었던 사람의 삶에 이루어진 치유 사건에 대해 정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들은 이미 어떻게 된 것인지 다 알고 있으니까 사실대로 실토하라는 위협입니다. 지금 위협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이 부분이 여호수아 때 여리고 성을 정복하고 거기서 아간이라는 사람이 물건을 훔치고 제비뽑기를 통해 나오게 되었을 때 여호수아가 그에게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수 7:19)라고 한 것을 염두에 두고 바리새인들이 이 사람에게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은 여호수아와 같은 위대한 인물이고 죄를 추궁할 수 있는 인물이며, 상대방은 죄를 범한 죄인이라는 태도를 갖고 있는 겁니다. 자기들이 정말 그렇고 상대방이 정말 죄인인 겁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넘겨짚었을 뿐이지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몰랐습니다. 그러면서도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면서 안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까, 나중에 나오는 것처럼 그들은 영적인 맹인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눈은 뜨고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못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알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자기들은 안다고 스스로 믿었던 것뿐입니다.
요즘도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안 믿는 분들 가운데도 여러 경로를 통해 지식을 갖게 되는데, 실제로 정말 자기가 성경을 연구해보고 여러 가지 책도 공부해본 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제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대부분은 들은 풍월이나 자기 생각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어떤 학문적 연구 결과로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믿고 싶지 않은 겁니다. 정말 지적으로 학문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실 사람이 굉장히 지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아도 많은 결정들을 감정에 따라 내립니다. 그냥 기분 나빠서 안 하겠다는 겁니다. 아니면 기분이 좋아서 하겠다는 겁니다. 남들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너무 그게 좋아서 푹 빠집니다. 또 남들이 보면 정말 좋은 일인데 자기는 기분 나쁘다고 안 하는 경우가 참 많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을 보아도 많다고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정말 연구하고 부인하는 경우는 못 보았습니다. 그냥 믿고 싶지 않은 겁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겁니다.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이야기해도, 아무리 진리를 이야기해도 진리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믿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에 비해 맹인이었던 사람은 아무런 꾸밈도 기교도 없이 그냥 단순하고 진솔하게 대답을 합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25절)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이것이 바로 “I was blind but now I see.”라는 <Amazing Grace>(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의 가사입니다. ‘내가 이전에는 못 봤는데 이제는 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모르면서 안다고 했지만, 그는 알면서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가 이전에 예수님을 뭐라고 했습니까? “선지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엄청난 기적들을 행하던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종교지도자들의 말을 거스르면서까지 예수님을 철저히 변호할 만큼 그분에 대해 분명히 알거나 확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순간에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의 대답 속에는 그가 은근히 바리새인들의 견해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먼저는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여호수아가 아간을 추궁한 것처럼 자기들이 볼 때는 예수가 죄인이라고 이야기한 것인데,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가 죄인인지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말이 아닙니까? 이것은 논쟁을 할 게 없습니다. 예수가 죄인인가 아닌가는 논쟁할 거리가 되지만, ‘내가 날 때부터 맹인이었는데 지금은 보고 있습니다.’라는 것은 누가 봐도 사실이기 때문에 논쟁할 여지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간증의 파워입니다. 간증은 논쟁할 거리가 없습니다. 나에게 주님이 해주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맞다, 틀리다 논쟁할 것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난 기적이 사실이라고 확인합니다. 이 말에는 ‘이런 엄청난 일을 한 분이 어떻게 죄인일 수 있단 말입니까?’ 하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를 완전히 옹호하지는 못하지만 간접적으로 이런 일을 하신 분이 어떻게 죄인일 수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영적인 눈이 열린 다음과 그 전의 자신의 변화를 압니다. 몸가짐과 마음가짐과 삶의 방식이 달라진 것을 스스로 깨닫는데, 자기도 뭐가 변했는지 모른다면 정말 믿은 것인지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면으로든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처럼 설사 예수님과 성경에 대해 지식적으로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전할 때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바로 이겁니다. ‘주님이 나를 구원해주셨다.’ 내게 일어난 일을 간증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믿고 이렇게 변화되었다.’ 하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삶에 별로 변화가 없으니까 부끄러워서 잘 이야기를 못합니다. 그래서 전도가 잘 안 되는 것이지, 복음에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의 부모가 출교당하는 게 두려워서 ‘우리는 모르니까 아들에게 물어보십시오.’라고 대답했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또 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6절)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물어보는 것은 윽박지르는 겁니다. 위협하는 겁니다. 뭔가 안 좋은 말을 하도록 강하게 밀어붙이는 분위기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다 안다고 했는데 또 물어보는 걸 보면 이것이 유도 심문이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는 두려워했지만 이 사람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참 놀랍습니다. 그러니까 간접적으로 체험한 사람과 직접 체험한 사람은 이렇게 다릅니다. 주님의 능력을 직접 체험하면 이렇게 담대함이 생깁니다. 어느새 그는 영적 어린아이가 아닌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의 대답을 보십시오.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27절)
마치 선생님이 몇 번을 가르쳐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를 꾸짖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보통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야, 너는 왜 한 번 말해서 알아듣지를 못하니?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니?” 요즘에는 자녀도 부모에게 이야기합니다. “너 아까 그거 했니?”라고 하면 “아까 이야기해줬잖아? 왜 또 물어봐?” 제 경우입니다. 요즘은 제가 아들에게 혼나고 있습니다. ^^
이 사람은 지금 너무 당당하게 ‘아니, 당신들은 내가 얘기해주었을 때는 뭘 듣고 있다가 또 물어봅니까?’라고 조롱조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겉으로만 영적 지도자이지 실제로는 영적 맹인이었던 바리새인들이 눈을 떴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눈이 밝아지고 있는 이 사람에게 오히려 배우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이 말한 것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들을 귀도 없었고 들을 의지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를 오래 다니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큰 함정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를 포함해서 교회를 몇 십 년 또는 평생 다닌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실수가 바로 이런 겁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도대체 설교를 몇 번 듣습니까? 매주 안 빠지면 1년에 50번 이상, 수요예배와 토요새벽예배도 나오면 1년에 150번 이상 설교를 듣습니다. 게다가 스스로 성경도 읽고 큐티도 하고 성경공부도 하는 등,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빠지기 쉬운 함정이 ‘그건 뭐 다 아는 거야. 다 아는 이야기를 뭘 또 하나?’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아주 큰 위험입니다. 진짜 아는 것은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지는 않으면서 머리로 안다고 자기는 다 아는 거라고 하며 시시하게 아는 이야기를 또 하느냐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함정에 빠진 겁니다.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 아는 게 아닙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바리새인들을 책망할 뿐 아니라 조롱도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이 정도 표적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정상인데, 바리새인들은 영적 맹인이어서 여전히 깨닫지 못한다고 지적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두려워하기는커녕 아주 여유만만 합니다. 그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맹인이었던 사람은 이미 인간의 상식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구약 이사야에서 맹인이 눈을 뜬다는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자기에게 이루어졌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렇기에 용감하고 단순하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고쳐주신 예수가 선지자라고 믿었으니까 복잡하게 생각할 게 없는 겁니다. 따질 게 없는 겁니다. 그냥 단순하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못 보았는데 이제는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말 하나가 눈에 띄지 않습니까? 그것은 “당신들도”에서 ‘도’입니다. 이 말이 뭡니까? ‘나는 그분의 제자입니다. 당신들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예수님을 변호하는 중에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드러내게 된 겁니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그가 언제인지는 몰라도 ‘나는 나를 고쳐주신 그분의 제자다. 나는 이제 그분을 따라가겠다.’ 하고 결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바리새인들을 아주 자극하고 기분을 나쁘게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하고 약이 올라 있는데 이 말을 듣자 곧바로 속에 있던 진심이 나오게 됩니다.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8절)
이게 그들의 진심입니다. 그런데 말을 하기 전에 뭘 했습니까? 욕부터 했습니다. 이게 진짜입니다. 화가 나오니까 확 욕이 나옵니다. 이게 그 사람입니다. 여러분, 혹시 화가 나면 확 욕부터 나오십니까? 고상하고 아름다운 게 내 진짜 모습이 아니고 욕이 나오는 그게 내 진짜 모습인 겁니다.
이 사람들이 논리로 당할 수 없게 되니까 일단 욕부터 합니다. 무슨 욕을 했는지는 차마 기록할 수 없어서 안 한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이 사람의 말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지금 기분이 나쁩니다. 그래서 일단 욕부터 하고, 자기들의 종교적 무기를 사용하면서 그를 저주하는 겁니다.
“너는 그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라는 말은 ‘너는 모세의 제자가 아니다.’라는 말이 아닙니까? 이제 그들은 가면을 벗고 본색을 드러냅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에게는 예수님에 관한 간증이 있었지만, 바리새인들이 가진 것은 권력밖에 없었습니다. 모세의 제자라는 근거 없는 자부심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놀랍게도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비아냥거리듯 말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알면서도 ‘그’의 제자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헬라어 원문의 분위기를 살려서 번역하면 ‘너는 그 치의 제자이나’ 또는 ‘너는 그 놈의 제자이나’라고 하는 겁니다.
그 대신 자기들의 스승은 모세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살아 있었다면 뭐라고 했겠습니까? ‘나는 너희 같은 제자를 둔 적이 없는데?’라고 했을 겁니다. 그들은 모세를 오해했습니다. 모세를 정말로 알았다면 그들은 지금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있어야 옳습니다. 모세가 일관되게 선포했던 것이 바로 메시야(그리스도), 즉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모세의 말을 오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그들이 받았던 율법과 믿었던 하나님은 자기들이 만들어낸 신이지 진짜 하나님을 믿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아는 지식을 갖고 있더라도 자동적으로 좋은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존경하는 어떤 목사님도 이전에 그것을 계속 강조하셨습니다. “좋은 말을 한다고 좋은 사람인 것은 아니다.” 물론 진짜 좋은 사람이면 좋은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속여서 좋은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속에 좋은 것이 들어 있으면 좋은 말이 나오지만, 좋은 말을 살짝 했다고 그 사람이 진짜 좋은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하더라도 우리 안에서 그것이 체험되고 삶에 드러나지 않으면 효과가 없습니다. 세상에 좋은 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도 찾아서 이메일, 메시지, 카톡 등에서 얼마나 좋은 말들을 서로 주고받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5장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모세가 말한 모든 율법과 선지서들도 다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모세가 살아 있었다면 그는 바리새인들을 제자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고발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가짜 제자다. 나를 사칭하고 있다.’라고 했을 겁니다.
예수님과 모세의 관계는 요한복음에서 5장에도 잘 나와 있고, 처음인 1장부터도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16-17)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모세의 가르침에 있어서 전문가라는 사실에 만족하며 살았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귀한 특권이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오히려 그들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게 만들고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연구하고 진리를 깨닫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면서 ‘저것들은 율법도 모르는 것들이다.’라고 했고,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죄인’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세리나 창녀 같은 사람들과는 상종하지 않으며 정죄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제자라고 자처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29절)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았습니다. 모세는 직접 하나님께 말씀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모세가 힘주어 전했던 ‘메시아’(그리스도, 구원자)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전했는데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맹인이었던 사람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아마 모세가 살아 있었다면 바리새인들에게 똑같이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말씀을 받은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그것이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바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이실 뿐 아니라 말씀을 들으셨고 또 하나님을 보신 분입니다(8:38).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여러 번 가르치셨지만(6:46, 8:42; 13:3, 16:30 등)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처럼,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지 않았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이 제시하는 증거(30-34절)
맹인이었던 사람은 바리새인들의 저주와 위협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태도가 당당하다 못해 당돌해집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이 쩔쩔 매는 것을 보면서 신이 나서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는 세 가지 증거를 들어 예수님이 죄인이 아니시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첫째는 자신의 경험(30절)
둘째는 성경에 나온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31절)
셋째는 역사적인 증거(32-33절)
첫째 증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0절)
이 사람이 이 말을 할 때의 표정을 상상해보십시오.
“참 이상하네?” 하고 조롱하는 표정을 말하는 겁니다.
믿지 않는 세상을 볼 때 우리도 놀랍니다.
어떻게 안 믿는지 안타깝습니다.
예수라는 분은 역사에 실제로 존재했고, 그분의 말과 행적이 기록으로 남아 있고, 무엇보다 그분의 부활을 보고 듣고 믿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시작한 교회가 2천 년 이상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왕성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 안 좋은 모습들도 있지만, 지금도 복음은 계속 전파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복음 때문에 인생이 변화되고, 삶의 목표가 달라지고, 성품이 바뀐 사람들의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예수님을 거부하는 모습은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한 것은 단지 경험적인 증거만이 아니었습니다.
둘째 증거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1절)
그는 어느새 자기가 들어서 알고 있던 성경(구약) 지식을 통해 예수님이 자기에게 하신 일을 평가하고 선포합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얻은 경험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맞는지를 봐야 합니다.
내가 경험한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다르다면 맞지가 않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서 일관되게 말하는 하나님의 모습과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모습이 다르다면 내가 뭔가를 잘못 경험한 겁니다.
미혹 당했을 수가 있습니다.
사탄도 얼마든지 우리로 하여금 신비적인 체험을 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신 13:1-5).
예수님이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능력도 행하고 귀신도 쫓아냈다는 사람들에게 “나는 너를 모른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1-23) 하신 것과도 같습니다.
그가 맹인이었을 때는 회당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성경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죄인이 아니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는 심오한 지식이 필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신다.”라는 것은 신앙의 상식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이 성경 어디에 나와 있는지 지식적으로 정확히 짚어 낼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할 줄은 몰랐습니다.
요즘도 성경의 무슨 내용이 어디 있는지는 척척 잘 알지만, 정작 그 말씀이 내 생활과는 아무 관계가 없이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눈을 뜬 사람과 영적 맹인의 차이입니다.
세 번째, 역사적인 증거를 제시하며 결론을 내립니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2-33절)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예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다.’(16)라고 했는데, 맹인이었다 나음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참 놀라운 말입니다.
이런 세 가지 증거를 또박또박 이야기할 때 그것을 들은 바리새인들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을 겁니다.
정말 겸손한 지도자라면 누가 말했는가와 상관없이 그 말씀이 진리인가를 보고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러지 못합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34절)
이걸 보십시오.
맹인이었던 사람을 만나자마자 죄를 실토하라고 윽박지르더니(24), 아는 대로 솔직히 말하니까 ‘너는 그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라고 저주하고(28), 이제는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증거까지 말하며 예수님을 두둔하니까 아예 쫓아내버립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이게 진리와 상관이 있습니까?
‘너의 말은 틀렸다. 그러니까 나가라.’ 하고 쫓아낸 게 아니라, ‘네가 감히 우리를 가르치느냐?’
즉,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다.
기분이 나빠서 쫓아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진리, 말씀, 율법을 다 말해도 결정적으로는 기분이 나빠서 그러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우리도 사실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정적일 때 기분이 나빠서 또는 기분이 좋아서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 바리새인과 같은 태도라는 겁니다.
기분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이것이 사실인가, 진리인가를 잘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것이 바로 불의한 권력이 자기 체제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쓰는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진리를 따지고 설명하는 게 아니라 윽박질러서 힘으로 쫓아내는 그런 것입니다.
지금도 세계 어디에나 그런 모습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말을 잘 보면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즉 ‘너는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라는 것을 바리새인들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9장 첫 부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했던 것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1-2).
누군가의 죄 때문에 그가 맹인으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죄 가운데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3).
실제로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결국 그는 쫓겨났습니다.
부모가 두려워 피했던 일을 아들이 당한 것입니다.
앞을 볼 수 없을 때는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했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죄인이 되어 또다시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어둠의 세상에서 빛 되신 예수님의 제자로 살겠다고 결단하며 나아가면,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음을 생각해야겠습니다.
기쁠 때도 있지만 고난이 올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고난을 회피할 것인가, 아니면 정면으로 돌파할 것인가?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일에 세상과 충돌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을 잘못 해석해서 안 믿는 사람이나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나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러셨습니다.
‘너희들의 선한 행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라.’
선한 행실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지,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행실로 드러내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를 거스르는 삶을 우리가 선택하게 되면 고난이 오고, 반면 그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들과 함께 흘러 떠내려가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순간이 우리 삶 속에 매일 올 수가 있습니다.
아주 작은 순간부터 큰 결정을 내릴 때까지 항상 우리 앞에는 도전이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라서 살 건지, 아니면 그것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주님을 따라 살 것인지?
맹인이었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은 사실 엄청난 위기상황, 위협을 당하는 상황, 저주를 받는 상황 속에서도 당당하게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하면서, 고백하는 과정에서 점점 더 믿음이 자라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도 두렵고 힘든 상황, 믿음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 믿음을 선택하며 나아가면, 당장은 힘든 것 같아도 놀랍게 그 안에 점점 더 예수님의 제자로 자라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역사를 풍성하게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He replied, "Whether he is a sinner or not, I don't know. One thing I do know. I was blind but now I see!"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것입니다!"
날 때 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하였을 때 그의 고백입니다.
"내가 전에는 죄인이었으나 지금은 목사가 되어 주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나의 고백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은 이러한 고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의 출발은 무엇인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오직 예수의 피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예수의 피는 점진적 계시로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아담과 하와 입었던 가죽옷
둘째는 노아의 홍수 때 방주 안밖으로 칠한 역청
셋째는 금송아지가루를 물에 풀어서 마시게 했던 사건
넷째는 속죄제의 제물
다섯째는 갈보리 언덕 위에 예수님의 십자가
이러한 점진적 계시로 말미암아 피로써 정결케 된다는 히브리서의 선언으로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정말 이 찬송을 아멘으로 화답하십니까?
이제부터는 예수의 피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삶의 현장에서 믿음을 보여주고 증거하는 일에 선두주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죄인이었을 때 나를 위하여 죄 값을 지불하신 그 은혜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고백이며 신앙의 근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나의 한 가지 아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됩니다.
예수의 피,
이것만이 나의 간증이며 나의 찬송이며 나의 일생 다가도록 주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예수의 피를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일편단심 민들레(꽃말, 행복 . 감사하는 마음), 일편단심 예수님
일편단심 민들레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우리나라 토종 민들레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나
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혀서 만신창이가 되어도 기어이 잎과 꽃대를 다시 내밀고 꽃을 피우며 씨를 날려 보내는 꽃이 바로 우리나라
토종 민들레랍니다.
그런데 왜 민들레에게 일편단심이란 별명이 붙었냐하면, 토종민들레 아가씨는 서양민들레의 꽃가루 총각이 찾아와
애걸해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오직 토종민들레 신랑이 날아오기를 일편단심으로 기다리다 토종민들레의 꽃가루 총각이 날아오면
받아들이고 끝내 오지 않으면 급기야는 처녀임신을 해버리고 만답니다.
발아가 되지 않는 무정란과 같은 씨를 퍼뜨려 순수하게 동족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일편단심 민들레처럼,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증거하고, 예수님만 굳게 믿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소경 거지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일편단심 예수님”을 외치는 소경 거지의 믿음을 만나보시고, 여러분도 “내가 아는
한가지, 일편단심 예수님”을 외칠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거지를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환경을 탓하며 일말의 동정심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낮이니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자고 초청해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심을 통해 ‘믿음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란
것도 가르쳐주셨습니다. 또한 소경 거지는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정말 당신이 그 소경 거지요?
그런데 눈을 뜬 소경 거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습니다. 그를 알아보고 그가 눈을 떴다는 사실에 놀란 사람들과 그럴
리가 없다며 극구 그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경 거지가 눈을 떴다는 사실은 정말 축하해줄 일입니다. 이제까지의
동정의 감정을 버리며 축하하고 함께 기뻐할 일입니다. 그러나 슬픔을 나누는 것보다 기쁨을 나누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 인간의
죄인된 본성입니다. 기쁘고 놀라운 일을 보며 잔치를 벌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뻔히 아는 사람을 놓고 ‘누구냐?’며 모른 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저렇게 잘 되어야 할 사람이 바로 나인데’ 하는 데서 출발하는
‘시기심’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동정을 베푸는 것은 쉽지만 진정으로 함께 기뻐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형제가 잘되면 박수를 쳐주고 더 잘되도록 격려해주고 기도해주는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실한 사랑과 진실한
축하와 진실한 격려와 진실한 위로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사건을 보는 눈이 달라질 때, 진심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축하해주며 함께 기뻐하고 더 놀라운 일을 위해 전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영암교회가 함께 박수치며
전진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내가 바로 그 소경 거지요!
이렇게 사람들이 ‘소경 거지’가 ‘눈을 떴다 안떴다, 그다 아니다’ 할 때 그는 오히려 담대하게 자신에 대해 말합니다. ‘내가
바로 그 소경 거지였다. 그러나 이제는 보게 되었다. 나의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은 바로 예수이다. 그가 내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고, 그가 시킨 그대로 했더니 내가 보게 되었다.’(9-11) 참으로 놀랍습니다. 소경 거지가
하는 한마디 한마디를 보십시오. 모두다 진실입니다. 한마디 한마디에 진실이 배어 있다. ‘내가 그이다’는 사실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며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경 거지의 증거를 듣고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바리새인들에게로 데리고 갔습니다. 왜냐하면 이 소경 거지가 눈을 뜬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고, 그의 눈을 뜨게 한 방법이 안식일 법에 위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경이 눈을 떴다면 참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아버지께로부터 온 자를 믿음으로 영접하며,
자기들의 영의 눈도 떠지게 해주시기를 간구해야 할텐데... 시기심에 눈이 멀어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전혀 보지도 못하고 영광도
돌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교회 안에, 성도 안에 다양한 일을 행하십니다. 그 일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이는 것이 커다란 영적 축복입니다. 지금 우리 영암교회에 영적인 일들이, 하나님의 복음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져가고
있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일을 믿음 안에서 바로 해석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동참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세상 일에 눈이 멀어서도 안되고, 잠에 취해 있어서도 안되고, 깨어서 주님을
기대하며, 말씀으로 이 시대를 분별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목자를 통해 문자적
율법만을 주입받고 사람들 정죄하는 훈련만 받은 무리들은 참빛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이렇게 소경 거지를 정죄하기 위해 거짓
심판자에게 끌고 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쟁론
16절.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소경 거지의 증거를 들은 바리새인들 사이에 쟁론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온 분인가 아닌가에 대한 쟁론이었다. 한쪽은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쪽은 ‘그가 만약 죄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있느냐’며 의아해 합니다.
‘안식일 법이냐 표적이냐’ 이렇게 바리새인들은 티격태격하다가 소경 거지에게 다시 묻습니다. 17절에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그런데 헛갈리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소경 거지의 대답이 일품입니다. 문제의 핵심을 바로 찔러 버립니다.
뭐라고 대답합니까? ‘그는 선지자이니이다’ 당당하게 내가 만난 주님, 내가 믿는 주님을 ‘선지자이니이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하고 분명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와 권위주의로 ‘있는 사실’조차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지만, 소경 거지는 그 있는 사실을 통해 ‘그분이 누구인가’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소경이라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면 이쯤에서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예수님이 선지자이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분인 것을 인정해야 할 텐데, 그들은 전혀
반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소경이었던 사실 마저 부인하며 그 부모를 호출하여 심문합니다. ‘그가 정말 소경이었냐?’ 얼마나
바보같은 질문입니까! 자기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서 하는 말이 그가 정말 소경이었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에게 당신들이
소경 아니냐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부모의 대답을 보십시오. 20-21절.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부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무슨 태도입니까? ‘오리발’을 쑥 내미는 것입니다. ‘내 자식은 맞는데 우린 모르겠다!’
그의 부모는 진실을 진실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어떻게 보는지, 누가 그 눈을 뜨게 했는지는 모르쇠로 딱 잡아뗍니다. 오히려
‘그가 장성했으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 부모들이 정말 몰랐을까? 설령 부모가 그 현장에 없었다 할지라도
아들이 부모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까요? 부모라면 아들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들은 지금 모른다고 딱
잡아떼고 있습니다.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현실적으로 손해보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22절.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부모들은 이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때문에 출교당할 일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출교란
율법을 범한 자에게 가해지는 최고의 형벌이었습니다. 출교당한 자는 동족과의 접촉마저 금지되었기에 유대 사회에서 영구히
매장됩니다. 그러니 소경 거지를 둔 것도 억울한 데, 이제까지도 그놈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했는데, 이제 그가 보게 되어 근심
걱정 면하나 싶었는데, 이제는 그놈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위기에 놓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순간 얼마나 자식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을까요? ‘이 놈이 끝까지 애비 속을 썩이는구나...’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분명히 불신앙의 결과입니다. 아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았다면, 예수님이 참빛이신 것을 알았다면, 믿음으로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그 빛을 쫓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 믿음을 저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 속에서,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과연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려하지 않고 환경 탓만 하고 있는 제자들인지, 율법으로 눈이 멀어 이 사람 저 사람 정죄하는 바리새인인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지만 현실적으로 손해보고 싶지 않아서 대충 오리발 내밀며 믿음을 저버리는 부모와 같은지, 아니면 당당하게 진리를
붙들고 믿음을 고백하는 소경 거지인지! 이렇게 말씀은 여러 사람들의 여러 모습을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죄인이다!
이렇게 소경 거지의 부모가 두려움에 믿음을 저버리며 책임을 회피하자 바리새인들은 소경 거지에게 더 힘을 주어 말합니다. 24절.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며 그를 따르면 너도 죄인으로
정죄하여 출교시키겠다는 엄포를 놓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라는 권위주의와 율법이라는 칼을 들이밀며 이제 막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어린양의 마음에 의심과 불신과 두려움을 심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교가 무서워서라도 예수를 부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때문에 눈을 뜬 자가 예수를 부인하며 죄인이라고 정죄한다면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신나고 기고만장해 지겠습니까!
‘봐라! 기적을 체험한 자가 아니라고 하지 않느냐!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저가 빼앗아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며 가로채고 있다!’
그리고는 예수님에 대한 정죄의 칼날을 더 높이 들 심산이었습니다.
이처럼 거듭난 자에게는 빛의 역사를 삼키려는 어두움의 역사가 반드시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며 믿음의 삶을 진실되게
시작하려 하면 어두움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 마음을 낙심하게 하고, 나는 예수를 믿으면 안된다는 거짓을 심으려고
두려움과 회의와 불신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이럴 때, 우리가 예수님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려고 할 때 오는 두려움과
의심과 불신을 어떻게 몰아낼 수 있습니까?
한 가지 아는 것은
25절.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왜 내가 하는 말을 믿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아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전에는 내가
소경이었는데 지금은 본다는 사실이다!” 소경 거지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 자기 속에 이루어진 능력의
역사 한 가지를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그 한 가지 구원의 사실을 꼭 붙들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나는 말씀도 모르고 신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날 때부터 나는 소경이고 거지로 살았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나를 보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런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에 대해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내가 아는 한 가지’ 언제 어떤
상황에 어떤 두려움이 나를 엄습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 그것이
있습니까? 오늘밤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꼭 이 한 가지를 붙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되신다”는 것을 결코 흔들지
못하는 한 가지가 나에게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붙드십시오. 그것을 붙들면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저도 ‘내가 아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중학교 3학년때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지만, 대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이리 저리 도망치며,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될 수 있으면 안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예수님은
1997년 나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가 아니라 병원 침대에 누이시고, 육신의 질병을 먼저 치료해 주시고, 영혼의 질병인 불신과
회의도 말끔히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쳐도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시고 고쳐주시고, 목자의 길로 초청해 주신 예수님! 바로
이 사실이 내가 목자의 길을 가야하는 단 한 가지 이유입니다. 어떠한 어려움과 두려움과 불신과 회의가 든다 할지라도 이것은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내 신앙의 원동력은 바로 내가 아는 한 가지입니다.
결국 소경 거지는 출교를 당하고...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한 가지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오히려 소경 거지를 욕하며 꾸짖었습니다. 28절.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그러나 소경 거지는 자기가 아는 것을 더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31절.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참으로 확실하고 분명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경건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시고, 창세 이후 한 번도 없었던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감격스러운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자칭 율법에 정통하다는
바리새인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소경 거지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아는 한 가지
때문입니다.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
그리고 소경 거지는 그것 때문에 쫓겨났습니다. 출교당한 것입니다. 이제 그는 또 다시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부모도 그를
버렸습니다. 눈을 뜬 기쁨은 잠시였고, 이제는 또 다시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어두움에 갇혔습니다. 이제는 거지 생활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내가 아는 한 가지’를 고백한 결과 얻게 된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을 고백하고 암담한 현실을 직면한 이 소경 거지가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35절.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서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아멘. 사람들이 소경 거지를 쫓아냈다는 말을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찾아가 주시고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올바른 믿음을 심어 주십니다. 이전에 소경 거지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은 불완전한 고백입니다. 이제는 인자, 곧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소경 거지는 그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37절.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소경 거지는 실로암 못에서 눈을 씻고 육신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영의 눈을 뜨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본
것입니다. 38절.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여러분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러면 그의 믿음이 여기까지 자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입니까? “내가 아는 한 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소경 거지가 출교 당했을 때 그를 찾아가 동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현실 문제를 안타까워하며 해결해 주시려고 노력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의 궁극적인 근원은 바로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직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소경 거지를 찾아가셔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말씀해 주시고,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소경
거지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빛을 볼 뿐만 아니라 빛을 따르는 자가 된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지만 사회 단체가 아니며, 친목단체도 아니고, 자선단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믿음을 심어 생명을 거두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해 오셨고, 바로 우리가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출발점은 “내가 아는 한 가지”입니다.
나의 모든 불신과 회의와 두려움을 몰아낼 “내가 아는 한 가지” 여러분은 무엇입니까?
그
“한 가지”를 붙들고, 내 신앙을 말씀에 뿌리내리기 위해 현실과 싸우며, 기도의 무릎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고, 복음을
전하여 제자삼고,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에, 일편단심 충성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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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않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39가지 금지 사항을 갖고 있다(미쉬나, shabbat 7:2).
1. 바느질
2. (밭)가는 일
3.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일
4. 곡식단 묶는
일
5. 타작
6. 곡식 등을 까부는 일
7. 곡식이나 거두어들인 것들 가운데서 좋은 것과 버릴 것을 고르는 일
8. 곡식
등을 가는 일
9. 체질
10. 반죽
11. 빵을 굽는 일
12. 양털 깎는 일
13. 그것을
빠는 일
14. 그것을 치는일
15. 그것에 물들이는 일
16. 실을 잣는
일
17. (실 따위를) 엮는 일
18. 두개의 고리를 만드는 일
19. 두 개의 실을 엮는 일
20. 두 개의 실을 푸는
일
21. 묶는 일
22. 푸는 일
23. 두 조각을 꼬매는일
24. 두 조각을 꼬매기 위해 찢는 일
25. 사슴을 덫으로 잡는 일
26. 그것을 도살하는 일
27.
사슴의 거죽을 벗기는 일
28. 그것에소금을 치는 일
29. 그 가죽을 가공하는 일
30. 그것을 반반하게 만드는 일
31.
그것을 자르는 일
32. 두 글자를 쓰는
일
33.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두 글자를 지우는 일
34. (건물을) 짓는 일
35. 그것을 부수는 일
36. 불을 끄는 일
37. 불을 켜는 일
38. 망치질
39.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일.
이러한 금지 사항들을 공공연하게 어기는 사람들은 우상숭배자로 여겼으며, 반대로 우상숭배자라도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면
그 죄를사함받는다고 가르쳤다(탈무드, shabbat 118b).
이밖에 더 자세한규정들에 대해서는
미쉬나의\"안식일\"(shabbat) 부분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한편, 엣세네파들은 안식일을 바리새인이나 보통 유대인들보다 더
엄격하게 지켰다. \
"다마스커스계약\"(Covenant of Damascus) 은 자세하게 안식일에 지켜야 할규정들에 대해서 기록하고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500m 이상 움직여서는 안되었다(당시의 랍비들은1Km까지는
허용하고 있었다. 참조.행 1: 12).
엣세네파들은 마실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붓는 것, 무엇을 집에서 밖으로 내가거나 밖에서 집으로 들여오는 것, 닫힌 항아리를 여는 것, 새끼를 낳는 짐승을도와주는 것, 집안 청소, 아이를 안아 주거나 업어 주는
것도 금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일을 시키지 않았고, 그들 가까이
머물러 있지도 않았다. 엣세네 종파는 다만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금지 조항들을 어겨도 되도록 허락하였다. 이러한 금지 조항들을 어겼을 때에는 7년동안 가두도록 규정하였다.
위에서 언급 한대로,안식일을거룩히 지키기 위하여 금지사항들은 범하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생명의 위협이 있는 경우에는 안식일
규례들을 범하는 것이 용납되었다(미쉬나, Yoma 8:6).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셨던것이 문제가 된 일이 있었다(마 12:9-14, 막
3:1-6, 눅 6:6-8).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은 원칙적으로 허락되었다.
다만 그사람의 생명이 위험하거나 아니면긴급한
치료를 요하는 경우에는그를 치료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예수의 경우에는 환자(손 마른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거나 긴급한
치료를 요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다음날까지기다렸다 치료를 받아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를 안식일에 고쳐 주심으로 해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랍비 유다(Judah the Prince) 와 메이어(Meir)는 안식일에 치료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하여, 양이 구덩이에 빠졌으면 안식일이라도 그 양을 꺼내 주지 않겠느냐 라고
반문하시면서 \"하물며\" 안식일에 아픈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반박하셨다.
그러나 랍비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에 양을
구덩이에서 들어올려 구해 주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다든지 아니면 그 동물이 스스로 나올 수 있도록 매트레스 같은 것을 그 구덩이에 넣어 주도록 했다.
예수께서는 또한 안식일에 18년동안 귀신에 잡혀 있던 여자를 고쳐 주셨다(눅 13:10-17).
이에 대해 회당장이 일할 날이
엿새가 있는데 안식일에 병을 꼭 고쳐 주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비난하였다.
여기에서도 문제가 된것은 안식일에 응급 환자가 아닌
사람을 고쳐 주었다는 데 있다.
이에 예수께서는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끌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반박하셨다(15-16 절).
이러한 예수의 논리에는 모순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되기도 한다). \"소는
매일마다 물을 주어야 하며, 이는 안식일이라도 마찬가지다. 만일 소에게 물을 먹이지 아니하면, 그 소는 큰고통을 당할 것이다.
동물들에 대한 학대는 랍비들이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8년동안 류머티스에
시달리던 이 여인은 다음 날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랍비들의 전형적인 성서 해석 방법인 kal
va-homer
(\"작은 전제에서 큰 전제로\")을 사용하셨다). 즉 동물도안식일에 풀어
주는데 \"하물며\" 사람을 풀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 방법에 기초해서
예수는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옹호하셨던 것이다.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 주셨을 때에도 예수는 똑같은논리를 사용하셨음을 우리는 위에서
보았다.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1-12). 한편, 예수께서도
말씀하신것처럼 미쉬나와 탈무드는 안식일에 어떻게 동물들을 돌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또한 예수께서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쳐 주면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다(요 5:12).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의 금지 사항 가운데 마지막으로 제시한 것을 어겼다고 그를 못마땅히 여겼다.
한편,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 이삭을 까서 먹은
것때문에 예수께서 안식일을 어겼다고 비난받으시기도 했다(마
12:1-8; 막2:24-28, 눅 6:1-5).
이러한 제자들의 행위는 바리새인들의
눈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일임과 동시에 그것을 까부는 일로 비쳤다.
이러한 행위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안식일에 금지된 일들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예수께서는 안식일 규례를 범하지않았다.
다만
제자들이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범하는 것을 내버려 둔 것에 대하여 예수를 비난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윗이 안식일에 성전에 들어가서 그에게 금지된 거룩한 떡을 먹은
것(삼상 21:1-6)을 예로 들면서 제자들을 변호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때에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떡을
먹었으나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이삭을 잘라먹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는 안식일 규정을 범해도 죄가 없다고율법에서 말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으나 토라(율법서)에서는 그러한 명백한 규정을 찾을 수가
없다.
예수께서는“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막 2:27).
예수의 이 말씀을 안식일 규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선언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랍비들도 이렇게 가르쳤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만든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Mekilta Exodus 31:13, 14; 탈무드, Yoma
85b).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신 것에 대하여 이렇게 자신을 변호하시기도 했다.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데,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온 몸을 성하게 해주었다고 해서, 어찌하여 너희가 나에게 분개하느냐?"(요 7:23).
이러한 규정도 역시
랍비들의 가르침 즉 전통의 하나였다.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잘 알려진 랍비들의 결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모세의 법을 따라서
아이들은 8일만에 할례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할례 받는 날이 안식일이 되게 되면, 이런
경우는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할례를 주도록 랍비들은 결정을 했다.
안식일에 할례받는 것 자체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가 된
것은 할례를 주기 위해 할례에 사용될 도구를 운반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위에서 본대로 금지 조항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예외 사항으로 허락을 했던 것이다(미쉬나, Shabbat
19:1).
그러나 아이의 건강 때문에 8일째에 할례를 받을 수 없을 경우는 아이가 회복된 다음에 받도록 했다(미쉬나,
shabbat 19:5).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해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할례도 베풀거늘 “하물며” 사람의 전신을 온전케 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하고 반박하셨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랍비들의 보편적인 해석 방법이었던
kal va-homer("작은 전제에서 큰 전제로")를 사용하셔서 토라와 구전법을 해석하셨다.
예수께서는 한번도 당시의
유대인들이 지키는 안식일
규정을 부정하거나 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으셨다.
그는 한번도 고의적으로 안식일을 어기신 적이 없다는 사실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한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전통(구전법)에 근거해서 자신이 안식일에 병고치는 일이 그들의 안식일 규정의 정신에 어긋나지
않음을
보여주셨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His parents said this because they were afraid of the
Jews, for already the Jews had decided that anyone who acknowledged
that Jesus was the Christ would be put out of the synagogue.
출교(黜敎) 656.
아포수나고고스[ apŏsünagō- gŏs ] ἀποσυνάγωγος, ον
스트롱번호 656
어원 / 575와 4864에서 유래
1. 회중에서 추방된, 출교 당한, 회당에서 쫓겨난, 저주받은, 요 9:22, 12:42, 16:2.
관련 성경 / 출교하는(요 9:22, 16:2).
* 575. ἀπό
스트롱번호 575
* 4806. συζωοποιέω 스트롱번호 4806
자유(데로르. derôwr) דְּרוֹר 스트롱번호 1865
바리새인(유대인들) -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소경 - 선지자니이다
바리새인(유대인들) - (소경이 눈을 뜬 것을 믿지 않았다)
그 부모를 불러 네 아들이냐?
그 부모 - 우리 아들인 것은 맞다.
그러나 어떻게 되어 보는지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알지 못한다.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할 것이다.
예수님 당시 회당에서 출교는 두가지 종류로 시행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다두이
10일 간 회당 출입이 금지되고 사람들 곁에 4규빗(약 1.8m) 이상 가까이 갈 수 없었던 출교이다.
공회원 1인에 의해 단독으로 결정되었다.
둘째는 헤렘
회당 출입이 무기한 금지되고 사람들과의 교제가 허용되지 않았던 출교이다.
공회원 10인의 동의에 의해 결정되었다.
헤렘(חֵרֶם)은 히브리어의 단어로, 현대 히브리어에서는 "파문", "추방", "몰수", "억제" 등을 뜻한다.
성경에서는 일반적인 용도로의 사용을 금하고 성별(聖別)하는 것, 봉헌된 것, 저주받은 것 등을 뜻한다.
오늘날 사회가 혼돈 가운데 술렁이는 까닭은 교회가 교인들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자유대한민국이 수립되고 의회가 구성되었을 때 회의를 하는 방법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총회를 구성하고 매년 회의를 진행하였으며 매월 교회에서는 제직회로 모여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교인들은 회의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였고 도처에 교회가 세워지고 교단이 분열되어 다양한 교회들이 세워지면서 교인들이 잘못했을 때에 잘못을 시정할 수 있도록 권징하는 규정을 있어도 치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교회에서 치리를 받으면 다른 교회로 옮기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회 정치제도가 이제는 세상으로 흘러들어가서 정치인들도 아무리 잘못을 하여도 자기 주장과 이익을 위하여 자리 바꿈과 각종 이유를 주장하며 교묘하게 법망을 요리조리 피하고 있습니다.
만일 교회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바르게 가르치고 권징하였다면 이것이 거울이 되었을텐데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합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입법과 사법과 행정이 서로 견제하며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없도록 규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나타나는 현상은 입법이(국회) 사법을(법원) 마음대로 주무르고 자기 입맛에 맞도록 끌고 가려고 합니다.
힘으로 질서를 무시하고 파괴하는 현상을 바른 길로 이끌고 세워가려면 먼저 교회와 총회와 교단이 바른 정치와 권징을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잘못을 회개하고 본래의 목적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보라
이타적(利他的)
사전적 의미 : 타인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보다 앞세우는 태도나 행동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보다 타인 또는 집단의 필요와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 자신 보다 < 타인, 집단
사회적 의미 :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이익을 초월하여 타인이나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경향을 지칭합니다.
이타적인 사람들은 공동의 선을 추구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타적인 행동은 공동체 의식과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며, 이는 결국 사회적 조화와 집단의 번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예시문장
1. 자원봉사자들의 이타적인 노력이 지역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2. 이타적인 행위는 종종 사람들 사이에 신뢰와 협력의 기반을 마련합니다.
3. 비록 작은 기부였지만, 그녀의 이타적인 결정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4. 직장에서 이타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은 동료들 사이에서 큰 존경을 받는다.
5. 이타적인 사랑은 조건 없이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전적 의미 : 특정 집단이나 개인만을 위한 것으로,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제외하는 태도나 행동을 의미합니다.
이는 자신의 이익, 신념, 문화 등을 우월하게 여기며, 다른 이들과의 교류나 협력을 배제하는 경향을 가리킵니다.
개인 > 다른사람, 집단
사회적 의미 : 배타적인 태도는 사회적 분열을 초래하고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는 요소입니다.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배제하거나 차별할 때, 이는 공동체 내에서의 불신과 대립을 조장합니다.
배타적인 사회는 다양성과 포용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이는 결국 사회적 발전을 저해할 수 있습니다.
예시문장
1. 배타적인 정책은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더 많은 어려움을 야기한다.
2. 그는 다른 의견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배타적인 태도로 유명하다.
3. 배타적인 사회 분위기는 창의성과 혁신을 저해합니다.
4. 회사 내의 배타적인 문화는 새로운 직원들의 적응을 어렵게 만든다.
5. 배타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종종 변화와 발전을 두려워합니다.
(Greenberg 1971:344) 어떤 것 또는 어떤 사람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뒤집거나 취소할 수 없다는 개념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까닭에, ‘헤렘’은 “궁극적인 봉헌”을 의미한다(Milgrom 1990:428). 그것은 어떤 물건을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한 채 하나님께 드리는 행동을 가리킨다. 또한 ‘하람/헤렘’이 구약성서 전체에 걸쳐서 몇 가지 다양한 의미들을 드러내고 있기는 해도, 신명기로부터 열왕기하까지의 모든 사례들을 종합해 보면 그 중심 개념이 전쟁과 파멸의 행동을 가리키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구약의 신명기적 역사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는 이름하여 "쉐마"(신명기 6:4-5)로 성서 속의 이스라엘이 역사를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바탕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
(또는 주 우리의
하나님, 주님은 한 분이시다. 또는 주 우리의 하나님은 한 주님이시다. 또는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오직 주님만이).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신 6:4-5).
성공에 이르는 열쇠가 무엇인가?
그 열쇠는 다름 아닌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그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밤낮으로 묵상하며, 율법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일이다(예, 수 1:5-9;
삿 2:11-23; 삼상 12:19-25; 왕상 2:2-4; 왕하 17:1-41).
가나안 땅으로 나아가는 자는, 가나안 땅에서
사는 자는, 누구나 이 열쇠를 그 수중에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유일신 신앙(monotheism)을 가르치는 계명으로 이해되는 쉐마는 여호수아에서
열왕기하서에 이르는 역사서의 기조를 인과응보적으로 이끌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펼치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복과 은혜를 그 땅에 더하게 하셨다고 본다. 반면,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며,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을 존중히 여기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칼과 기근과 재앙과 염병으로" 그 땅을 치셨다고
본다.
신명기적 역사서를 이끌어가는 한 사상이 쉐마라면 또 다른 사상은 히브리어 "헤렘"이다.
쉐마와 헤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유일신 신앙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 신앙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야웨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 대한 "배타적 거부"이다.
이 거부가 신명기의 히브리어에서는 "헤렘"("진멸," "전멸"이라는
뜻)이라는 말로 묘사되었다.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가 들어가 차지할 땅으로 너희를 이끌어 들이시고, 너희 앞에서
여러 민족 곧, 너희보다 강하고 수가 많은 일곱 민족인 헷 족과 기르가스 족과 아모리 족과 가나안 족과 브리스 족과 히위 족과
여부스 족을 다 쫓아내실 것이다.
주 너희의 하나님은 그들을 너희의 손에 넘겨주셔서, 너희가 그들을 치게 하실 것이니, 그 때에
너희는 그들을 전멸시켜야 한다.
그들과 어떤 언약도 세우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아라.
그들과 혼인관계를 맺어서도 안
된다.
너희 딸을 그들의 아들과 결혼시키지도 말고, 너희 아들을 그들의 딸과 결혼시키지도 말아라.
그렇게 했다가는 그들의 꾐에
빠져서 너희의 아들이 주를 떠나 그들의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주께서 진노하셔서, 곧바로 너희를 멸하실 것이다(신
7:1-4).
신명기적 역사서의 바탕에는 헤렘 사상이 깔려 있다(신 7, 20장; 수 1-12장).
가나안적인 요소는 철저히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헤렘이란 말이 사용되는 맥락은 이스라엘이 수행하는 하나님의 전쟁에서 등장한다.
헤렘이란 하나님이 싸우시기에 모든 것을 진멸해야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하나님이 싸우시기에 이스라엘은 전장에서 그 어떤
전리품도 얻을 수 없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그것을 드러내는 표시가 모든 전리품을, 그것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다 진멸해야만 되었다.
전리품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이스라엘은 전쟁 중 그 어떤 경제적 이익도 얻고자 해서는 안
된다.
여호수아를 비롯한 사사들, 사울이나 다윗 같은 군사 지도자들은 모두 이 헤렘에 철저해야만 되었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다(비교, 삼상 15:1-9, 17-23; 삼하 8:2-14).
사실
헤렘은 이스라엘의 건강한 영적 삶을 위한 예방조치이다.
헤렘은 신학적 선언이다.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것은 가나안적인 것에
이스라엘이 동화되었기 때문이라는 반성이 여기에 깔려 있다(우리는 이 역사서가 사건이 흐른 한참 뒤에야 글로 기록되게 되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헤렘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패배에 대한 반성으로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겪은 재앙은 순전히 가나안 적인 요소를
이스라엘이 벗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약의 전쟁과 헤렘에 대하여"
구약의 역사서에 소개된 헤렘은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그 해석이 어떠한 것이든, 헤렘은
여전히 오늘날 우리에게 도덕적, 윤리적 문제를 안겨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해서 이방인들을 무참히 진멸하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신명기는 가나안 땅의 여러 원주민들을 "진멸하라"는 것을 그토록 간절히 가르치고 있을까?
왜 신명기는 하나님을
전쟁 용사로, 이스라엘이 수행하는 전쟁을 거룩한 전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이스라엘이 수행했던 전쟁기를 읽어보면 사실 이민족들의 탄성을 무시해 버리는 누(累)가
저질러지고 있다.
다른 민족을 정복하고 진압하는 무참한 행동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추진하는 모순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편에서는 이스라엘을 억압과 집 없음에서 구출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그 이스라엘에게 이방인들을 억압하고 진멸하며 쫓아내라고
명령하시고 있다면 이것은 모순이다.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야웨 하나님이 다른 민족들을 파멸로 몰아놓는 역설을 자행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물어보자. 하나님은 정녕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나님이신가?
물론 야웨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주님이시다.
하지만 하나님은 온 민족, 온 세상의
주님이시다.
하나님을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으로 간주해버리고 만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온 세상을 정의와 공평으로, 사랑과 샬롬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성서적 믿음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요나가 겪었던 갈등이 바로 이것이었다.
요나의 하나님은
유다사람들뿐만 아니라 니느웨 도성의 사람들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이셨는데 요나는 그 하나님을 자기 민족의 신이라는 울타리 속에
가두어두고자 하였다.
만약 요나처럼 구약성서의 하나님을 민족주의와 배타주의로 채색해버린 신으로 간주한다면, 모든
자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성서적 믿음은 벽에 부딪치게 된다. 우리가 믿는 야웨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드시고, 모든 생명을
다스리시며 지키시는 정의와 공평, 평화와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의 짐을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오른 것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구약성서의 전쟁 이야기는 평화와 구원을 전하시는 하나님 말씀의 빛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그 한 예가 이사야의 예언에 있다.
자 올라가자, 주님의 산으로 야곱의 하나님께서 계신 전으로!
사는 길을 그에게 배우고 그 길을 따라 가자 ......
그가 민족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2:3-4)
이사야의 예언은 야웨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수염소와 함께 딩굴며, 어린 아기가 새끼사자를 몰고 다니며, 젖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겁 없이 손을
넣으며, 서로 헤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는"(이사 11:6-8) 날은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날" 이루어지리라고 예언한다.
예수께서 걸은 길은 바로 이 이사야의 예언을 구현하시기 위해서이다. 그 도상에서 그는 구약 신명기의 쉐마(신 6:4-5)를 재해석하신다. 쉐마와 함께 "이웃 사랑"(레 19:18)을 가르치는 계명을 토라의 완성으로 정리하였다(마 22:37-39).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9:18, 개역).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 뜻이 달려 있다(마 22:36-40).
구약 역사서의 전쟁 이야기는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평화 이야기에서 상대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갈등과 분쟁, 전쟁과 싸움은 그 어떤 이유로도 진리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진리는 정의와 평화, 진실과 구원이 입맞춤하는 곳에서 나온다(시 85:10-13). 우리는 평화를 "만드는" 자들,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인내하는 자들, 샬롬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 손의 "낫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사 2: 4; 마 5:9).
(구약성서 이해 열마당 새길 왕대일 지음 2003)
1. 문제의 성격
구약에서 전쟁중에 내려지는, 원수를 '진멸하라' (herem)는 명령은 오늘날 우리가 가장 해석하기 힘든 주제 중 하나이다. 무차별하게 모든 원수를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는 어떻게 우리 교인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그 끔찍한 전쟁을 승인하시고 명하실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헤렘 전쟁과 연관된 성경의 몇몇 구절만 인용해보아도, 문제가 정말 심각해 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면서,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별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별하니 라"고 말한다(수 6:21).
(2)선지자 사무엘은 이스라엘 첫 왕이 된 사울이 왕권을 확립하자, 및 출애굽 때의 상황을 회고하면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을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하셨나이다'(삼상 15:3)고 말한다.
(3)위의 두 본문이 말하는 진멸하는 전쟁에 대한법적인 근거는 신명기에 나타난다.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첫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신 20:16-17).
어떻게 한민족과 여러 족속들을 대량 학살하는 일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고백하며, 남자와 여자, 어른과 어린아이와 나아가 젖먹이까지 불문하고 죽일 수 있을까? 만약 베트남 전쟁이나 보스니아전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학살을 명한 자와 집행한자는 모두 전시 재판감 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헤렘 전쟁은 '구약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라는 문제뿐 아니라, "구약의 신앙은 어떤 신앙이었는가"하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2. 문제의 범위
그러나 문제는 윈수를 전별시키는 본문이 구약의 주류에서 벗어나 격리된 하나의 단편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구약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출애굽기 32장 26-28절에서는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을 따라 금송아지를 만든 우상숭배자들을 다 칼로 처형한다. 마치 주님께서 자신의 친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헤렘 전쟁을 집행하시는 것 같다. 역사적으로 보면, 십자군 전쟁이 이런 본문에 근거하여 일어났다. 그러나 역사는 십자군 전쟁이 온갖 세속적인 욕심과 죄악으로 물든 전쟁이었을 뿐 아니라, 아람과 유럽을 영원히 갈라놓는 상처를 남긴 전쟁이었음을 말해준다.
엘리사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직후 여리고에서 벧엘로 올라갈 때에, 그 동네
아이들의 “대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이들을 저주하였다. 이때,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42명을 및어버렸다고 한다(왕하 2:23-25). 엘리사가 선지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어린아이들에게 헤렘 전쟁을 선포했는지, 혹은"대머리여 더욱 올라가고 올라가라”는 말에 대한 그의 격노가 무죄한 아이들을 죽였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어했든 갓 부름받은 선지자가 자신을 놀리는 아이들을 저주하여 암곰에게 찢겨 죽게 했다는 사실을 들으면서,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한 우리는 페르시아 수산 성에 살고 있던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미워하는 아각 족속 하만의 음모에 빠져 학살을 당할 뻔 하다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결단을 내린 에스더의 헌신으로 구원을 받은 후, 하만을 20미터 정도의 나무에 달아 죽인 것까지는 좋게 생각한다. 그러나 수산 성 뿐만 아니라 각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그들을 미워하는 자 75,000명을 도륙한 이야기(에 9:16)를 들으면서는, 피와 복수에 굶주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몸서리치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전쟁을 거부하는 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여호수아서와 에스더서를 자녀들에게 읽어주지도 않는다.
시편으로 넘어가면, 원수들에 대한 분노가 마치 지옥불에서 올라오는 것같은 격렬함으로 타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시인은 자신의 원수를 향해, "그년수를 단축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백나 빌어먹게 하쇼(시 109:8-10)라고 저주한다. 또 한 시인은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시 137:8-9)라고 선언한다.
원수를 진멸하는 헤렘 전쟁은, 결국 오경과 역사서와 선지서와 시가서를 관통하고 있으며 구약에 가장 중요하게 나타나는 구원, 심판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헤 렘 전쟁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구약 전체에 대한 설교를 어떻게 하느냐하는 문제가 결정될 것이다. 우리는 '거룩한 전쟁의 이름으로 집행된 헤렘 전쟁에서 어떤 적극적인 신학을 형성해낼 수 있을까?'를 묻게 된다.
3. 헤렘 전쟁의 의미, 법주 그리고 규칙
(1) 헤렘 전쟁의 의미
개역성경에서 "진멸하라”는 전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헤렘(herem)은 '일반적인 용도에서 분리되어 접촉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그것이 하나님께 가증하거나 혹은 바쳐졌기 때문이다' (EnclopaediaJudaica 8指). 어근으로 보면, 헤렘이란 단어는 셈어에서 ‘분리하다. 금하다’ 혹은 '성별하다’는 뜻을 가진다.
TDOT 5:188).최근에 성경의 헤렘을 연구한 스턴(p.Stern 1991:16)은, 이 단어가 '파멸을 위해 봉헌함, 혹은 파멸에 봉헌함' (consec-ration to destruction)이 라는 뜻으로 성경에서 사용되었다고 결론지으면서, 히필형(사역 형)에서는 '진멸을 통한 성별'(consecrate through destruction)이란 뜻이라고 말한다. 전쟁 밖의 맥락에서 헤렘은 '주께 바친 것' (heherim leyhwh,레27:28)으로, 전쟁 상황에서는 '주께 바쳐진 것'(미 4:13;수 6:17)으로 나타난다.
(2) 헤렘 전쟁의 범주
(S다른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인은 주님께 가증한 자가 되며, 이러한 사람은 죽이고 물건은 태운다(겨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벌할 지니라', 출22:20/히브리 원문상으로는 22:19; 신7:25-26, 13:13-19).
(2)약속의 땅에 살고 있던 일곱 족속들은 진멸되며(신 7:1-2, 20:17),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라’ (20:16).왜냐하면,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할까 함이라 (20:18).
(3)한 개인이 주님께 헤렘으로 바쳐진 것은 가장 거룩한 것이다(qodesh qodas-him). 이것은 철회가 불가능하다. 이것들은 성전에서 활거나, 혹은 바친 자에 의해 속량될 수 없다(레 27:28).
헤렘의 규칙을 깨뜨리는 것은 곧 신성모독이며 전쟁의 패배를 겪게 된다.
(3)헤렘 전쟁의 규칙
헤렘의 규칙은(D생존자를 남기지 않는 다(신 2:34, 3:3;수 10:28, 37, 39-40,11:12, 22; 대하 20:24; 렘 50:26;왕상9:21 참조). 사로잡은 왕과 지도자들은 대부분 죽인다. 남자들은 완전히 제거하며(왕상 11:15),때로는 음의 일부를 자르거나(삿 1:6, 아도니베섹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른다),때로는 종으로 취한다(신 20:11).여자와 아이들은 전쟁의 노획물이며, 가끔 임신한 여인은 배를 갈랐다(왕하8:12, 15:16;암 1:13).
(D많은 경우에는 육축과 노획물을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D가끔 도시 와 노획물을 불태운다(신7:5, 25, 13:17;수 6:24, 7:15, 25; 8:28,11:11,13).
@헤렘의 규칙을 깨뜨리는 것은 신성모독이며, 그 결과 군사적인 패배(수 7장)를 겪고 자신을 주님께 바치게 된다. 이것은 아간의 경우에 가장 잘 드러난다.
4. 구약에 나타난 헤렘 전쟁의 용례들
물론 구약성경에는 세속적인 의미의 헤렘전쟁(왕하19:11;대하32:14)과 헤렘이라는 용어는 나타나지 많지만, 헤렘 전쟁으로 사용된 경우도 있다. 여기서는 명백하게 헤렘으로 나타난 경우들을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사 :2; 렘 25:9;슥 14:11;말3:24참조).
아래의 용들을 살펴볼 때, 헤렘 전쟁은 구약 전쟁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치룬 모든 전쟁이 다 헤렘 전쟁은 아니었다. 가나안 전쟁에서도 성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불태워 주님께 바친 경우는 극히 소수였음을 알 수 있다.
(1)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침공하려다 아랏 왕에게 폐한 후 온 이스라엘은 아랏을 헤렘으로 바치길 서원하며, 승리 후에는 이 성과 성에 있는 사람들을 진멸하여 바친다(민 21:1-3).
(2)요단 동편에 있는 시혼(신 2:)과옥(3:6),그리고 요단 서편의 막게다. 에글론, 헤브론, 드비르, 리브나와 남방 동네들(10:28-40)과 북쪽 동네들◎ 1:10이하)을 진멸하여 바칠 떼, 생축과 노략물은 취하나 동네는 그대로 둔다.
腦)헤렘 전쟁 중 가장 독특한 것은 여리고이다. 사람과 동물을 모두 칼로 죽이고 성은 불태우며, 전리품은 은이나 금이나 동이나 철로 된 그릇 모두 성전에 바친다(수 6:17이하). 이 바쳐진 물건을 탐내고 취 한 아간과 그의 가족과 생축과 재산은 모두 돌로 치고 불사른다(수 7:24-26).아이 성과 하솔 성도 여리고와 함께 불태우나, 전리품은 미리 취한다(수 8:26, 10:39,10:8, 11:13).
(4)네게브에 있는 스밧 사람들은 모두 진별된다(삿 1:17).
(5)사사 시대에 베냐민 지파와의 성전에 참여하지 않은 모든 자를 사형에 처한다는 공적인 명세를 한 후, 여기에 참여하지 않은 야베스 길르앗사람들, '모든 남자와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한 학 (딘 21:11).이런 헤렘 법은 레위기 27장29절을 따른 것이다.
(6)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아말렉을 멸하라는 명령을 하신다. 아말렉 족속이 출애굽 때 무방비 상태의 이스라엘을 기습적으로 쳤기 때문이다(삼상 15;대상 10:13).
(7)후에 솔로몬은 그 당대까지 살아남은 가나안 백성들을 '진멸하지 않고 노예로 역군을 만드는' 정책적 전환을 하였다(왕상9:21;수 15:63,17:12;삿 1:19-35).
(8)성경에서 마지막으로 헤렘이 나타나는 곳은 에스라가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을 성전에 불러모을 때이다. "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를어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 재산을 적몰하고
위의 헤렘 전쟁 중 가장 두드러진 두 본문은 여호수아의 여리고 전투(수 6장.)와 사울의 아말렉 전삼상 15:3)이다. 이 두 전쟁에서 주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친히 싸우신다. 여리고의 파멸은 너무나 독특하다. 여호수아6장 24절에서는 여리고의 완전한 파멸이 묘사된다. 여리고 성은 불로 태워져 사람들의 기억에서 없애버렀다. 이성은 완전한 멸망을 당해야 했다. 이 전쟁은 문자 그대로 철저하게 '진멸하는 전쟁'이었다. 여리고에 대한저주는 절대적이다. 이리하여 가나안의 도시와 땅이 완전히 멸망당하는 신명기 13장 16절의 규례가 이루어진다.
가나안 전쟁에서 완전히 불태워버린 성은 소수이지만, 여리고 멸망은 독특하다. 아브라함으로부터 400년간 가나안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는 가나안족속의 죄악이관영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계는 가나안에 죄악이 관영하였으므로 이 약속의 땅을 주고 있다. 따라서 이는 이스라엘이 생존권차원에서 자기의 땅을 차지하는 것과는 다르다.
동일한원리가 열왕기하에 나온다. 이제는 심판받는 쪽이 이스라엘이다. 이들이 하나님의 땅에서 부패했기 때문이다. 신명기와 여호수아서에 따르면 가나안 땅아 그 거민을 토해낸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가나안정복으로부터 다윗 왕조가 끝날 때즈음에는, 그 땅이 이스라엘 백성을 토해내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제는 바벨론사람이 거룩한 전쟁의 도구가 된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칼을 빼고 이스라엘을 향해 전쟁을 벌이시는 것이다. 즉 거룩한 전쟁이 역전된다. 이제 당하는 자는 소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여리고의 멸망은 죄로 가득 찬가나안족속의 멸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 이 성은하나님께 완전히 바친바 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취할 수 없었다. '이 가운데서 무엇을 취하면 너희가 바친 바 될 것이다 (수6:18)는 것이다.
5. 더 넓은 맥락 : 구속사적 맥락에 나타나는 구약의 전쟁
원수를 하나님께 바쳐 진멸하는 전쟁은보다 더 넓은 '성전' (holy war)의 맥락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전쟁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이때, 하나님이 '만군의 주님'으로 나타나며, 전쟁을 친히 치루신다.
출애굽기 15장 3절에서는 구약성경에서 처음으로 주 하나님이 '용사'로 불려진다. 모세는 주께서 애굽 군대를 홍해에서 수장시키시는 것을 보면서, "주는 용사 시니 야웨는 그의 이름이시다'라고 찬양한다. 용사로서 주님은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서 심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주했다. 용사로서 주님은 오른손을 높이 들고 원수를 치고 있다(출 15:6, 12,16린.주님에 대한 '용사' 라는 칭호는 출애굽기 15장에서 처음 나타나지만, 용사로서의 모습은 이미 창세기 3장에 나타난다. 주님은 아담과 하와가 실낙원을 한 후, 그룹과 두루도는 화염검으로 에덴동산을 지키도록 하신다. 주님은 용사로서, 이 거룩한 장소에 죄인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도록 하나님 자신이 용사로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신다.
노아 홍수는 하나님께서 우주적인 스케일로 모든 창조계를 동원하여 타락한 노아시대 사람들을 다 진멸하시고, 노아의 가족을 보호하신 사건이다.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 라"(창7:11).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하나님이 불로 심판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예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분한으로 훼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말할 것이요"'(신 29:23).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최후의 심판 때, 주님께서 다시 거룩한 용사로서, 불로 온 세상을 멸하실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구약의 전쟁은, 냉정한 흡혈귀 같은 전쟁의 신이 남녀노소를 무차 적으로 혹은 한 민족을 모조리 죽이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시고 의로운 자를 구원하시는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제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6. 결론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은 구약의 전쟁에 대해 침묵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영해해버림으로써, 옛 언약의 백성들이 얼마나 치열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현실 속에서 살며 '용사이신 하나님' 을 섬겼는지에 대해외면하고 있다. 구약에 나타나는 전쟁에 대해 침묵하고 외면하는 것도 하나의 설명이 될 수 있지만,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좋은 대안이 아니다. 중요한 문제에 침묵하면, 후에 같은 유형의 문제가 나을 때에도 대안을 만들 수 가없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상황 속에서 구약의 성전 개념으로 현재 자신의 전쟁을 정당화시킨다. 지난걸프 전쟁에서, 미국은 이 전쟁을 '성전'이라고 말하고, 이라크도 '성전' 이라고 말한다. 정치가들은 자신이 치루는 전쟁의 정당성을 말하기 위해 다 '북한전쟁' 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백성들의 지지를 호소한다. 월남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유명한 성서신학자 에른스트라이트(G. Ernest Wright)는 "야웨는 평화주의자가 아니며, 나도 아니 볼라고 말했다고 한다(Hanson 342).
한국의 상황도 성전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에겐 국방의 의무가 딘성한 것' 이므로, 이것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 이 신성한 의부 는 어떤 사회적, 윤리적 가치보다 우월한 것이다. 나라를 위해 죽은 자는'순국장병' 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쟁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면, 모든 전쟁이 신성한 것이 되고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며 신성한것' 자체가주판적이 되어버리고 말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분리시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말시온으로부터 불트만에 이르기까지, 구약의 하나님은 전쟁의 하나님이며 신약에 나타난 사랑의 하나님보다 저급한 신으로 여겨졌다.
말시온은 결국 구약의 하나님을, 물질계를 만든 저급한 창조의 신이며 피를 좋아하는 전쟁의 신으로서, 신약이 말하는 및의 하나님보다 저급한 신으로 만들고 말았다. 불트만은 구약성경이 현실 세계에 밀착되어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초월적인 종말론적 실체로 넘어가지 못하고'유관 으로 끝났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구약의 전쟁신학에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배울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임종 직전, 심각한 병에 걸려 있었을 때 여호수아 주석을 마친다. 그의 건강은 갈수록 약화되었지만, 그는'더욱 크고 밝은 빛 속에서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Hen Beveridge).
칼빈은 '교회에 대한 유언으로,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간절하게, 그렇게 성공적으로 선포한모든 교리 체계를 엄숙히 비준하는 작업' 으로 여호수아 주석을 썼다고 한다. 그는 여리고의 멸망에 대해,"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행된 것이 아니었다면, 이것은 비인간적인 학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사를 주관하시는 그 분께서 공의롭게 이 나라들을 별하시도록 정하셨으므로 이것은 모든 토론을 끝내준다"고 말한다.
우리는 구약의 전쟁과 송두리째 원수를 주님께 바치는 헤렘 전쟁을 보며,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최후의 심판이 역사 속에 먼저 침범해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노아 홍수, 소돔과고모라의 멸망, 가나안 일곱 족속의 진멸, 그리고 여리고와 아말렉의 진별은 죄에 대한 주님의 최종적 심판이 역사 속에서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최종적인 심판을 믿는다면, 구약에 나타난 저 비참하고 냉혹하게 보이는 '진멸하는 전쟁'도 담대히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주의적인 아집과 욕심에 이끌려 이음나라들과 '거룩한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성전과 헤렘 전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인용 및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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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D. Stem, The Biblical Herem: A 'Windon on israel's Religious Expenence.BrownJuic Studies 211, Atlanta: Scholars Press, 1991, PP. 227-34에 있는 인용논 문을 보라._,'*Ihe Herem in 1 Kgs 20:42 as an Exegetical Problem." Btbltca 71, 1990, PP.43~47._, "ISamuel 15: towards an Ancient View of the War-Herem" UF21, 1989, PP. 413-20.
[출처] 구약의 헤렘-김정우|작성자 moses3100
관련 성경 구절
(창세 15,13-16)
13 그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잘 알아 두어라. 너의 후손은 남의 나라에서 나그네살이하며 사백 년 동안 그들의 종살이를 하고 학대를 받을 것이다.
14 그러나 네 후손이 종이 되어 섬길 민족을 나는 심판하겠다. 그런 다음, 네 후손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다.
15 너는 평화로이 네 조상들에게로 갈 것이다. 너는 장수를 누리고 무덤에 묻힐 것이다.
16 그리고 그들은 사 대째가 되어서야 여기로 돌아올 것이다. 아모리족의 죄악이 아직 다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탈출 23,20-33)
가나안 땅 입주에 관한 약속과 경고
20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21 너희는 그 앞에서 조심하고 그의 말을 들어라. 그가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으리니, 그를 거역하지 마라. 그는 내 이름을 지니고 있다.
22 너희가 그의 말을 잘 들어 내가 일러 준 것을 모두 실행하면, 나는 너희 원수들을 나의 원수로 삼고, 너희의 적들을 나의 적으로 삼겠다.
23 나의 천사가 앞장서서 너희를 아모리족, 히타이트족, 프리즈족, 가나안족, 히위족,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나는 그들을 멸종시키겠다.
24 그러면 너희는 그들의 신들에게 경배해서도 그 신들을 섬겨서도 안 되고, 그들이 하는 짓을 따라 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의 기념 기둥들을 부수고 깨뜨려 버려야 한다.
25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 그러면 나는 너희의 빵과 물에 강복하고, 너희에게서 질병을 없애 주겠다.
26 너희 땅에는 유산하는 여인도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도 없을 것이며, 나는 너희의 수명을 채워 주겠다.
27 나는 나에 대한 공포를 너희보다 앞서 보내어, 너희가 쳐들어가는 모든 민족을 혼란에 빠뜨리고, 너희의 모든 원수가 등을 돌려 달아나게 하겠다.
28 나는 또 말벌을 너희보다 앞서 보내어, 히위족과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게 하겠다.
29 그러나 땅이 황폐해지고 들짐승이 많아져서 너희를 해치는 일이 있을까 염려되므로, 일 년 동안은 그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않겠다.
30 나는 너희가 번성하여 그 땅을 차지할 때까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조금씩 조금씩 몰아내겠다.
31 그리고 너희 땅의 경계를 갈대 바다에서 필리스티아 바다까지, 광야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로 정하여, 그 땅의 주민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겠다. 그러면 너희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32 너희는 그들이나 그들의 신들과 계약을 맺어서는 안 된다.
33 그들이 너희 땅에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들이 너희를 유혹하여 나에게 죄를 짓게 할 것이다. 너희가 그들의 신들을 섬길 경우, 그것이 너희에게 덫이 되고 말 것이다.’”
안타깝게도 구약성경의 야훼 하느님을 ‘고대의 전쟁신’으로 폄하하는 오해를 접하곤 한다.
아마도 ‘전멸’로 번역되는 ‘헤렘’의 의미를 잘 이해하면 이런 오해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자료출처 / 주원준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 언어를 공부
출교(黜敎, Put out of the synagogue)
기독교에서 잘못을 저지른 교인을 교적에서 삭제하여 내쫓는 것을 말한다.
유대 공동체에서 출교는 회당 출입을 금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유대 공동체에서의 추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교인에게 행하는 가장 최고의 형벌이었다.
출교를 당한 사람은 회당 모임에 나갈 수 없었고 출교당한 사람에게는 2m 이내의 접근이 금지되었다.
또 그와 교제하는 것을 금하였으며 출교당한 사람에게 물건을 팔거나 함께 앉아서 음식을 먹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가 죽으면 우는 것도 금하였으며 시체에 돌을 던졌다.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아들을 둔 부모가 자기 아들의 눈을 고쳐주신 예수님에 대해 말하기를 꺼린 것은 그 당시 유대 공동체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가혹한 형벌인 출교를 내리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이었다(요 9:22).
출교, 견책, 근신 : 출교보다 약한 징벌로는 견책과 근신이 있었다.
견책은 7일에서 30일 동안, 근신은 최소 40일 간 공중 교제가 금지되었다.
근신은 이 40일 기간이 지나면 다시 30일 동안 훈계를 받고 원상 복귀되었다.
출교(黜敎)
"제명과 출교" 논란 -같은 의미? 다른 의미?
사소한 실수나 착오라도 오랫동안 굳어지면 통설이 되어 바로잡기가 어렵다. 더욱이 장로교 치리회가 권징하기 위해 참조하는 법조항들은 문장의 표현은 물론이고 낱말 하나 구두점 의 유무(有無)가 전혀 다른 판단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한국 장로교 헌법 안에는 이와 같이 오래된 논쟁 하나가 있다. 이미 심정적으로는 수정(사실상 교정에 가깝다)하는 데 동의하는 분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첫째, 오랫동안 굳어져 온 관행는 점 둘째, 수정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점 셋째, 중대 사건에 대한 애매한 관용의 근거로 오용되는 사례들이 있기 때문이다.
장로교 치리회는 교회 안에 범죄 사건에 대하여 기소하여 재판을 하지 않고는 권징(처벌)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장로교는 권징에 관한 모든 적법한 절차와 내용을 ‘권징조례’에 담았다. 이중 문제가 된 부분은 권징의 종류에서 “제명”과 “출교”를 하나로 볼 것인가 두 종류의 권징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각 장로교 교단 헌법마다 차이가 발생하고 있다. 본 글은 이러한 착오가 발생하게 된 과정과 바로잡아야 할 필요성 그리고 현 상황에 대해서 간단히 약술하겠다.
1. 한국 장로교 헌법의 유래
한국장로교의
시초는 1907년 독노회가 설립되면서 실질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때 1905년에 작성된 간단한 규칙을 임시로 채택하여 노회록에
수록했다.
그러나 임시로 채택한 규칙은 미비한 점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설립되면서 장로회정치
헌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제4회 총회(1915년)는 교회정치, 권징조례 등을 출간하기로 하고 선교사 곽안력씨에게 번역을
위임했다(한국목사 참여 : 함태영, 차상진, 함율).
곽안련 선교사가 번역한 원서는 미국장로교회가 교회정치로 원용한 J.A.핫지의
“장로교회법이란 무엇인가?”(원제:What is Presbyterian Law?)이다.
본서가 『예수교장로회정치문답도례』
(조선예수교서회)라는 제목으로 1917년 출판되었고 제11회 장로회 총회는 이를 근거로 1922년 원헌법이라 불리는 교회정치와
권징조례 등을 담은 헌법을 채택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나라의 모든 장로교회 헌법의 근간이 되었다.
2. 문제의 발단과 과정에 대해서
위에
밝힌 바와 같이 우리나라 장로교 헌법의 실질적 기원은 미국장로교 헌법의 기원이 되었던 J.A.핫지의 책이다.
그리고 1922년
원헌법이 그것을 번역하여 수정 채용한 것이라면 논란이 되는 문구에 대한 해결책은 당연히 이 두 책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두 책
모두 권징의 종류에서 “권면, 견책, 정직, 면직, 성찬참여금지, 출교(Excommunication)”와 같이 여섯 개 뿐이며,
‘제명’ 항목은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
권징의 종류에 변화가 발생한 시점은 1930년 헌법이다.
여기서 교회정치에 “제명, 출교”(쉼표)로 권징조례에는 “제명
출교”(띄어쓰기)로 사용되었다.
이후 1934년 판, 1954년 판, 1957년 판, 1960년 판(합동), 1966년 판(합동)
헌법에서 제명과 출교사이에 일관되지 않은 표기 방식들이 혼용되었다.
이러한 혼돈은 출교(Excommunication)가
‘제명’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는 점을 오해한 데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혹자는 인쇄 과정의 실수로 굳어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여섯 개의 권징이 일곱 개로 수정 삽입되었다고 가정할 때, 권징의 순서를 보아 제명은 출교의
직전 단계의 중한 책벌이다.
이 같은 수위의 권징이라면 당연히 수정 청원 헌의안이 제출되어야 한다.
그러나 제11회
총회(1922년)에서 교회정치와 권징조례등 원헌법을 채택한 후 1930년 총회까지 총회록에 ‘제명’을 권징의 한 종류로 삽입
청원한 헌의안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수정 청원 없이 권징조례가 수정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별도로 제12, 13, 14회
총회록(1923,1924,1925년)에 “명부 제명”이 등장하는 데 이 사안은 재판하여 권징한 것이 아니라 단순 행정처리로서 회원
명부에서 삭제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례로 보건데 행정처리로서 ‘제명’을 권징의 ‘제명’으로 잘못 적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삽입
과정도 불분명하였음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일제강점기에 장로교 총회(1938년)가 신사참배 가결을 하였다.
총회는
신사참배 가결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목회자들에게 ‘제명’의 조치를 취한 사례들이 발견된다.
이것은 변절한 총회가 저항하는
목사들에게 ‘면직’ 이나 ‘출교’로 책벌하기에는 부담을 느끼고 애매한 판결로 ‘제명’을 선택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비슷하게 오용되고 있는 사례로 볼 수 있다.
한 편, 정직, 면직, 출교와 같은 중한 책벌은 당연히 시벌과 해벌 조항에 따로 명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1922년 원헌법 이후로 지금까지 모든 장로교단 헌법에는 시벌과 해벌에서 “제명”에 대한 항목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권징으로서 ‘제명’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반증이며 수정된 과정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오랫동안 잘못된 부분이 지속되어 왔다는 것을 말한다.
3. 각 장로교단의 상황과 변화
1922년
원헌법에 나와 있는 권징의 종류를 채택하고 있는 교단은 고신측이며, 통합측은 많은 변화를 가했지만 “출교 : 교인명부에서
제명하여...”로 유지하고 있고, 합동측은 당회재판에서는 “제명, 출교”로, 직원재판에서는 “출교”로 달리 병기하고 있고,
합신측은 “제명, 출교”로만 기록하고 있다.
이 문제는 오래 전에 제기되었으나 최근에 합동 측에서 “제명”과 “출교”를 하나로
묶어 “제명출교”로 수정하는 헌법수정안이 상정되어 있고 합신 측에서도 같은 이유로 수정 청원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늦었지만 그동안
잘못 적용되었던 부분을 이제 바로 잡는다는 의미가 있다.
4. 정리
권징의
종류에 대한 이와 같은 논란은 신학적으로 큰 이슈가 될 만한 일이 아니다.
또한 많은 논의를 거쳐서 수정해야 할 만큼 복잡한
사안도 아니고 단순히 ‘교정’해야 할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삽입의 과정이 불분명하고 근거도 희박했으며 그 용도는 과거
일제강점기나 현재도 남용 혹은 오용되는 사례들을 낳고 있다.
면직이나 출교에 해당되는 범죄라고 판단했음에도 ‘제명’이라는 미명아래
사실상 가벼이 처리하는 사례들이 있다면 이는 더 큰 잘못을 범하게 만든다.
이러한 사례가 앞으로 발생하지 않도록 차제에 반드시
교정해야 한다.
행정처리는 ‘제명’ 혹은 “명부삭제”로 표기하고 권징조례는 ‘제명출교’로 할 것이 아니라 ‘출교’라고 명확한
표기를 함으로써 엄중한 교회의 판결에 오남용과 혼돈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미국 워싱턴대학의
엘머 게이츠 교수는
사람의 감정분석을 위해
특이한 실험을 했습니다.
여러 감정이 섞인 말의 숨결을
시험관에 모아 침전물을 걸러냈는데
각각 색깔이 달랐다고 합니다.
사랑의 감정일 때는
분홍색이었지만
화를 내거나 욕을 할 때는
갈색이었습니다.
그 갈색 침전물을
실험용 쥐에게 투여하자
몇 분 안에 쥐가
견디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분노할 때나
심한 욕을 할 때 사람의 침은 이처럼
강한 독성이 있다고 해
‘분노의 침전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와 정반대의 침전물이나
농축된 액기스를 생각해본다면
예수님의 보혈이 아닐까 싶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에는
온 세상 사람의 죄를
충분히 씻을 만큼의 사랑이 담겨있으니까요.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Some of the Pharisees said, "This man is not from
God, for he does not keep the Sabbath." But others asked, "How can a
sinner do such miraculous signs?" So they were divided.
쟁론(爭論)이란 한자의 훈(訓)은 "다툴 쟁(爭)" "논할 론(論)"으로 "서로 다투어 토론 함" 또는 "서로 다투는 이론"이라는 뜻입니다.
쟁론의 반대를 "확신(確信)"이라고 하겠습니다.
확신이란 한자는 "굳을 확" "믿을 신"으로 굳게 믿는다는 뜻입니다.
πληροφορ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4136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확신(살전 1:5), 풍성함(골 2:2, 히 6:11), 온전함(히 10:22).
1. 구원의 확신(요한일서 5:11-12)
2. 기도응답의 확신(요한복음 16:2)
3. 승리의 확신(고린도전서 10:13)
4. 사죄의 확신(요한일서 1:9)
5. 인도의 확신(잠언 3:5-6)
왜 서로 자기 생각이나 의견이 옳다고 주장합니까?
만일 확실한 것이 제시되면 쟁론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쟁론"의 반대어를 "확신"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예수께서 메사야가 된다 될 수 없다는 쟁론이 일어났으므로 예수께서 메시야가 되신다는 것을 증명하면 쟁론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는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 양이라는 것을 확증하면 됩니다.
첫째, 가죽옷(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둘째, 역청(창세기 6: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셋째, 금송아지가루(출애굽기 32:20)
모세가 그들의 만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
다섯째, 속죄제(레위기 4:13-21)
13.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14.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찌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15. 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16.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17. 그 제사장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18. 또 그 피로 회막 안 여호와 앞에 있는 단 뿔에 바르고 그 피 전부는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19. 그 기름은 다 취하여 단 위에 불사르되
20. 그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것 같이 할찌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얻으리라.
21. 그는 그 수송아지를 진밖으로 가져다가 첫번 수송아지를 사름 같이 사를찌니 이는 회중의 속죄제니라.
다섯째,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여섯째, 영원한 속죄(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바리새인들이 쟁론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메시야가 맞는가?
아니면 메시야가 맞지 않는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구원을 위한 것이 분명합니다.
구약에서는 구원을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공산주의에서 경제 기초는 노동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에서 경제 기초는 자본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경제 기초는 "토지(土地)" 즉 "땅" 이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땅에 대한 개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레위기 25:23-25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찌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The land must not be sold permanently, because the land is mine and you are but aliens and my tenants.
Throughout the country that you hold as a possession, you must provide for the redemption of the land.
" 'If one of your countrymen becomes poor and sells some of his property, his nearest relative is to come and redeem what his countryman has sold.
무를 것 - 리뎀션(redemption)
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In him we have redemption through his blood, the forgiveness of sins, in accordance with the riches of God's grace.
골로새서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in whom we have redemption, the forgiveness of sins.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And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of God,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에베소서 1: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
who is a deposit guaranteeing our inheritance until the redemption of
those who are God's possession--to the praise of his glory.
redeem
1. 동사
(결함 등을) 보완[벌충/상쇄]하다 (=compensate for)
2. 동사
(실수 등을) 만회하다
3. 동사
(죄악으로부터) 구하다[구원하다]
redemption
1. 명사
격식
구원, 구함
2. 명사
금융
(주식) 상환(相換)[현금화]
성경에서는 기드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바알의 단을 헐었을 때 성읍 사람들은 기드온을 '바알이 더불어 쟁론할 것'이라는 뜻으로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고 불렀습니다(삿 6:25-32).
본문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소경을 고쳐준 일로 인하여 바리새인들 사이에 쟁론이 일어난 사건을 말합니다.
안식일에 소경을 고쳐준 것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또 다른 주장은 만일 저 사람이 죄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있겠느냐? 하며 서로 의견 대립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안식일에 대한 규정은 십계명 중 제4계명으로 출애굽기 20:8-11, 신명기 5:12-15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실 때 처음 제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마치신 후 “일곱째 날” 안식하셨는데 이때에 이미 안식일이 제정된 것입니다(창 2:3).
기억하라는 히브리어는 "자코르" 라고 합니다.
'자코르'는 '자카르(지키다)'의 명령형으로 "반드시 기억하라, 언제나 유념해 두라, 깊이 뚫으라, 마음 깊은 곳에 되새기라"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려면 먼저 안식하는 날을 마음 한가운데 깊은 감동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거룩히 지키라”는 것은, 안식일은 다른 부정한 것과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리기에 합당한 날, 성별된 날이라는
뜻입니다.
특별한 목적으로 다른 날과 구별하여 따로 떼어놓으신, 가장 으뜸가는 날, 귀중한 날, 영광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기억하는 자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면 먼저 엿새동안 힘써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더구나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안식일을 맞이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눈을 뜨게 된 것은 모두가 함께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전통적으로 지킨다는 사람들로부터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는 것은 창조의 질서를 무시하는 어리석은 행위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시대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은 주님의 날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배하러 가는 길에 어느 노숙자가 구걸을 한다면 그 노숙자를 외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가 내민 손에 얼마를 쥐어주는 것이 바람직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한반도 땅에 좌파와 우파의 바람이 뒤섞여 자기 주장을 실현하려고 거짓 선동과 거짓 뉴스가 사람들을 혼돈케합니다.
심지어 교회안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진리가 자유케 할 것이라는 말씀을 바르게 읽고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믿음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 따라가며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중 네 번째 계명을 가장 길게 말씀하셨습니다.
글자 수로는 전체 십계명의 3분의 1 이상 되는
분량으로, 장차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십계명 중에 안식일 계명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가늠하게 합니다.
제 4계명은 다른
계명을 잘 지킬 수 있게 하는 신앙생활의 기초 원리요 중심입니다.
1. 제 4계명의 해석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실 때 처음 제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마치신 후 “일곱째 날” 안식하셨는데 이때에 이미 안식일이 제정된 것입니다(창 2:3).
1)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기억하여”는 히브리어 ‘자카르’의 명령형 ‘자코르’로 ‘반드시 기억하라, 언제나 유념해 두라, 깊이 뚫으라, 마음 깊은 곳에 되새기라’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은 항상 성도의 마음 한가운데 깊은 감동으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거룩히 지키라”는 것은, 안식일은 다른 부정한 것과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리기에 합당한 날, 성별된 날이라는
뜻입니다. 특별한 목적으로 다른 날과 구별하여 따로 떼어놓으신, 가장 으뜸가는 날, 귀중한 날, 영광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기억하는 자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2)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7일을 안식일로 지키기 위해서는, 엿새 동안 힘써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힘써”는 히브리어로 ‘아바드’(섬기다, 경작하다,
봉사하다)의 미완료형이 쓰였는데, ‘아바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엿새 동안
열심히 일을 하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마음가짐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과 그 후손들에게
명하신 인간 본연의 사명입니다.
엿새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신성한 노동과 사명 감당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한 자만이 안식일의 축복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3)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하신 것은, 안식일이 하나님께 속한 날, 하나님만을 위해 존재하는 날, 하나님만을 향하여 바라보아야 하는 날임을 뜻합니다.
4)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본인과 자녀와 종들은 물론 심지어 부리는 짐승들과 문 안에 머무는 이방 나그네까지도 안식일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안식일의 축복이 모든 피조 세계 전체에 미치게 될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롬 8:19-23).
5) “아무 일도 하지 말라”
구약성경에 기록된 안식일의
별칭은 모두 히브리어로 ‘샤바트 샤바톤’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반드시 안식하라’라는 의미의 강조 어법으로 안식일이 ‘반드시,
그리고 온전히 쉬는 날’이라는 미입니다. 이처럼 안식일에는 철저히 안식해야 할 것과 안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적 이유가
있음을 선포합니다.
2. 제 4계명의 세부 율법
제 4계명에 대한 세부 율법이 기록된 곳은 출애굽기 21:1-11, 23:10-12, 신명기 15:1-16:17입니다.
1) 안식일 규례
첫째, 육신에 관한 일은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①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레 23:32).
② 엿새 동안 힘써 모든 일을 행해야 합니다(출 20:9, 신 5:13).
③ 어떤 상황에도 나무를 하러 가서는 안 됩니다(민 15:32-36).
④ 모든 처소에서 불을 피워서는 안 됩니다(출 35:3).
⑤ 무역하지 못합니다(느 13:15-21).
⑥ 사고 팔지 못합니다(느 10:31, 암 8:5-6).
⑦ 술틀을 밟는 것과 물건 운반을 금합니다(느 13:15, 렘 17:21-22).
⑧ 밭을 갈 때나 거둘 때에도 쉬어야 합니다(출 34:21).
⑨ 발을 금하여 오락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사 58:13).
⑩ 일정 거리 이상 움직이면 안 됩니다(행 1:12).
⑪ 안식일에 바칠 제물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대로 별도로 준비해야 합니다(민 28:9-10).
이렇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이유는 출애굽기 20:11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의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쉬셨다는 것은 그 결과를 보고 흡족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는 상태를 말합니다(창
1:31).
따라서 일곱째 날인 안식일을 축복하셨다는 것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철두철미하게 빈손 들고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반드시
복을 받고 번창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둘째, 안식일에 일이 허용된 경우가 있습니다.
▶ 안식일에 선지자(하나님의 사람)를 찾아가는 여행(왕하 4:8-37)
▶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전쟁하는 일(수 6:12-15, 왕상 20:1-30, 왕하 3:9-27, 11:5-12)
▶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와 관련되는 일(제사장과 레위인, 대상 23:24-32)
▶ 생후 8일 만에 할례 주는 일(요 7:22-23)
2) 안식년 규례
안식년은 안식일 개념이 확대된 것으로 7년을 주기로 맞이하는 제 7년째 되는 해입니다.
제 7년에는 땅을 쉬게 해야 하고(출 23:10-11, 레 25:1-7), 채무 변제를 유보해 주어야 하며(신 15:1-2), 히브리 종을 해방하여야 합니다(출 21:2-6, 신 15:12-18).
3) 희년 규례
희년은 안식년이 더 확대 강화된 것으로, 안식년이 7년마다 지켜졌다면 안식년이 일곱 번이 지나고 그 다음 50년째에 지켜졌습니다. 희년은 티쉬리월(7월) 10일에, 대속죄일의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시작됩니다(레 25:9-10).
희년에는 남의 집에 있던 동족이 각각 자기 기업과 가족에게 돌아가야 하고(레 25:10), 땅과 가옥이 원주인에게 돌아가야 하며, 땅을 쉬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희년과 관련된 이자에 대한 규례가 있습니다.
희년의 규례를 볼 때, 희년의 정신은 모든 부채가 탕감을 받는 것입니다.
3. 예배에 대한 교훈
제 4계명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시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예배의 시간은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대대의 표징’, 곧
영원한 표징입니다(출 31:13, 17).
구약 시대에 수많은 제사가 안식일에 드려졌듯이, 오늘날 주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드려져야 합니다.
‘주일’은 어떤 다른 요일로도 결코 대체될 수 없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이 바로 주일이기 때문입니다(마 28;1, 막 16:2, 눅
24:1, 요 20:1).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일을 공적 예배를 드리는 날로 지키기
시작하였습니다(행 20:7, 고전 16:2).
4. 제 4계명을 범한 자의 최후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범할
경우, ‘사형’이라는 극형으로 처벌하도록 규정하셨습니다(출 31:14).
실제로 광야 생활 중에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하다가
발각되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온 회중이 그를 돌로 쳐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민 15:32-36).
성전이 파괴되고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유수의 징벌을 받은 것은, 안식일과 안식년 계명을 지키지 못한 죄에 대한 보응이었습니다(대하 36:21, 느
13:17-18, 레 26:34-35).
5. 제 4계명의 구속사적 교훈
아담이 안식하시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 것은, 하나님의 안식으로부터 도망친 죄입니다(창 3:8).
아담과 여자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안식은 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열심히 지켰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선한 안식일 규례를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고 규제하는
악법으로 변형시켰으며, 완전히 형식주의로 전락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참뜻과 근본정신을 망각한 자들을 향해
근심하시고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안식일에 손이 마른 자를 회당에서 고쳐주시면서(마 12:9-13, 막 3:1-5, 눅
6:6-10)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입법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모든 주권은 예수님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안식일에 모여서 드리는 모든 예배와 교제, 헌신과 봉사 등
무엇이든지 오직 예수님만을 중심해야 합니다. 또한 참안식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통해서만 온다는 의미이며,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안식일 준수에 해당된다는 의미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심령 속에 모시고 예수님 안에 사는 자는, 언제나
안식일과 안식년, 희년의 축복 속에 사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기념하기 위하여 안식일을 지켰다면, 이제 신약 시대 이후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구속을 기념하기 위하여 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안식일 계명이 안식일의 주인으로 오신 예수님을 예표하였듯이 주일은 주님께서 재림하심으로 주어질 참안식의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음을 알려 줍니다(히 4:4-9). 주일을 지키며 진정한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주일뿐만 아니라 모든 날을 주의 날로 지킬 때, 마침내 남아있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롬 14:5-6, 히 4:9-11, 요 5:17, 히 4:3).
쟁론(爭論) 4978 스키스마(schisma) σχίσμα, ατος, τό
관련 성경 / 쟁론(요 7:43), 분쟁(고전 1:10, 12:25), 해어짐(마 9:16, 막 2:21).
4977. 스키조() σχίζω 스트롱번호4977
이 구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능력의 본질과 출처에 대해
논쟁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맹인을 치유한 사건은 유대 법에 따라 이 거룩한 날에 일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어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이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의 행동의 기적적인 성격에 혼란스러워하며,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경이로운 일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바리새인들 사이의 이러한 내부 갈등은 복음서에서 더 넓은 주제를 강조합니다.
나 기대에 맞지 않는 하나님의 일을 인식하는 도전입니다.
이 구절은 독자들에게 법과 은혜, 전통과 혁신 사이의 균형을 고려하도록 초대합니다.
우리는 종교적 관습의 경직된 해석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는 변혁적인 능력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또한, 표면적인 판단을 넘어서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신앙과 일상에서 신의 작용을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합니다.
만약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뜨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 얼마나 놀랍고 감격할 일인가?
더구나 우리 주 그리스도의 사랑의 손에 의해 눈을 뜨게 되었다면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눈을 뜨게 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전 할 것이고 찬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아쉽게도 이런 감격의 장면을 전혀 볼 수 없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의 시비 거리만 기록 되어 있다.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에 놀라고 감격하기에 앞서 "네가 진짜 나은 것이냐? 왜 하필 안식일에 소경의 눈을 뜨게 했느냐?"
안식일을 어긴 것을 보니 이런 일 한 예수는 죄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죄인이 어떻게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느냐?" 등으로 떠들고 있다.
눈을 뜨게 한 분이 누구 인지도 알지 못하고 율법주의에만 관심이 있는 바리새인들이 불쌍하게 여길 뿐이다.
참된 신앙은 이런 신앙은 이런 시비의 신앙에서 벗어나 주님을 가슴에 모신 감격의 생활이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바리새인과 같은 성경의 문자 주의와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감격의 신앙에서 벗어나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고 주님으로 인한 기쁜 감격과 감사가 가득한 삶을 살아야 한다.
신앙은 놀라움과 감격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 자체가 놀라움이요, 하나님이 이 땅에 33년간 사셨다는 자체가 놀라움이요, 십자가에 달려 우리대신 십자가를 지셨으며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피 흘리시고 죽으셨다는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사셨다는 자체가 감격의 연속인 것이다. 이를 더욱 확실히 보장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주신 것 또한 감격이다.
이 세상 마지막 날 재림주로 오시는 것과 교회를 세우시고, 66권 말씀의 약속을 주시고, 이 말씀을 통해 만나를 먹이시기 위해 보이지 않는 손으로 보이는 주의 종을 세워 일하시는 그 자체가 또한 감격일 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놀라움과 감격이 없나? 혹시 오늘 우리도 주님 주변에서 바리새인 같이 시지비조로 종교인으로 타락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것은 우리가 이런 종교인으로 타락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고, 급강한 바람과 불길같이 타 오름으로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시던 성령을 보내셨다.
그가 나를 증거 하게하실 것이요(요15장26절) 성령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주님께로 인도하신다. 우리가 만약에 성령을 모시되 전혀 기도에 힘쓰던 초대교회 성도와 사도들처럼 놀라움과 감격에 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취하지 말고, 성령의 새 술에 취하여 주님의 사랑에 황홀하고 놀라며, 감격을 경험하게 되어 질 것이다.
저는 은퇴 후 다문화 센터를 설립하여 운영하며, 교회를 설립하여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피곤하고 지칠 때도 많았지만, 한편 생각해 보면 마른 막대기 같은 자를 택하여 주님께 적게나마 쓰임 받게 된 것을 생각하면, 감격 할 뿐이다.
그럴 때 마다 성령께서 오셔서 저를 붙드시고, 나에게 은밀한 위로와 평화를 주심으로 황홀한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새 힘과 능력을 공급받기 때문에 너무도 고마워 눈물이 쏟아지는 감격이 있기에 기쁘게 감당하고 있다.
미국의 욕 중에 "성령 안 받고 목사나 해 먹어라."는 욕이 얼마나 심한 것인가를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디 목사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성령 충만한 감격을 교회 안에서만 통하는 특정 신앙인들의 전유물로 생각하면 오해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 뇌가 오른 쪽 뇌와 왼쪽 뇌로 되었는데, 오른 쪽 뇌는 황홀한 감격을 추구하고, 왼쪽 뇌는 이성과 질서를 추구 한다"고 말한다.
논리와 이성만을 추구하는 왼쪽 뇌의 편향에서 벗어나, 오른쪽 뇌도 만족시켜 주어야만 정상적인 인간, 정상적인 자녀 교육, 정상적인 부부의 삶이 가능 하다고 한다.
나라와 민족의 해결도 그렇습니다.
독일은 19세기 초에 망했을 때 피히테가 '독일 민족에게 고함' 이라는 글에서 독일 민족은 감성이 예민하고 감격할 줄 아는 민족이기 때문에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용기를 주므로 독일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
지금 나라가 우와 좌가 갈라져서 심각한 진통을 격고 있다.
증오와 국론 분열과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왼쪽 뇌에만 몰입되면 나라의 운명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이제 오른쪽 뇌에 치우쳐 있다면 왼쪽으로, 왼쪽으로 치우 쳤으면 우 쪽을 보충해야 한다.
그러할 때 민족의 미래가 밝게 다가오게 될 것이다.
이제 너무 치우친 논리에서 벗어 날 때 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의존적 단계
please help me,
둘째 독립적 단계
I can take care my self,
셋째는 봉사적 단계
please lett help you
다시 말하면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단계 그리고 예수 믿고 확신을 가지는 단계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단계이다.
그런데 이 소경이 예수를 만났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그 신앙은 성숙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감격의 신앙을 누리려면 첫째 예수를 만나야 한다.
오늘 본문의 맹인도 얼마나 부모를 원망하고 절망 속에 살아 왔겠는가?
생각하건데 자살 할 생각도 여러 번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예수를 만났다.
예수 믿고 변화 받으면 제일먼저 나타나는 증상은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우러나오게 된다.
삭개오는 여리고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새사람이 되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예수님을 만나고 모든 의심을 풀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으며, 사마리아 여인은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바울이 되어 위대한 복음의 증거 하였다.
이것은 새로운 변화 즉 체험인 것이다.
이 소경은 두 눈을 뜨게 되자 자기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보지 못하던 내가 보게 되다니 이 얼마나 감격스럽겠는가?
예수 믿고 변화 받으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상은 감격의 눈물과 생의 벅찬 감격이다.
또한 자기를 고쳐 주신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우러나오게 된다.
나를 고쳐 주신 그분을 만나 볼 수 없을까?
어떻게 이 은혜를 갚을까 생각 했을 것이다.
자기가 눈을 뜨게 된 것을 생각하면서 찬송과 영광을 돌렸을 것이다.
그 후에 그는 자기를 고쳐주신 예수님을 증거 했다.
나는 잘 모르나 내가 아는 것은 그 분이 내 눈을 뜨게 했다는 것이다.
주후 165년 로마에서 순교한 '유스티누스'란 분이 예수를 믿게 된 기록이 있다.
그가 쟁쟁한 청년 시절에 한번은 에베소에서 해변을 산책하고 있을 때 한 노인이 나타나서 예수에 관해 말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 노인의 말을 듣던 그는 갑자기 감동으로 뜨거워지고 회개하여, 그때부터 주님께 헌신하는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소경은 일평생 소경 되었다가 갑자기 세상을 보게 되니까 이웃사람과 이 세상을 보게 되었다.
이 소경은 두 눈을 뜨게 되자 자기 자신의 확실한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다.
놀라운 변화의 기쁨 즉 감격이다.
예수로 인하여 감격하는 신앙생활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떻게 예수로 인하여 감격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1. 평범한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신앙
2. 부족한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신앙
3. 응답될 것을 기대하며 소망하는 신앙
이 감격을 소유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쟁론은 두 가지 논의 모두에 적용될 수 있는 판단 규칙의 결여로 인해 공정하게 해결될 수 없는, 두 당사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한 경우이다.
이러한 쟁론을 계쟁인 양 간주하여 동일한 판단 규칙을 양쪽에 적용한다면, 둘 중 적어도 한 쪽에 대해 잘못을
범한 게 된다.
잘못은 우리가 판단의 준거로 삼는 어떤 장르의 담론 규칙들이, 판단되는 담론/들의 장르 또는 장르들의 규칙들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앞에서 친구들이 욥을 교훈하려 한 바 있거니와 여기서는 도리어 욥이 그들에게 충고와
교훈을 베풀려는 의도를 타나낸다.
또한 본절과 12절에는 12:7-13에 나타난 모티브들이 엿보인다.
즉 자연 세계를 통한
'가르침'(12:7), '하나님의 손'에 관한 진술(12:9) 등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
- 원문에는 '하나님의 손에 대하여'(*,베야드엘)로 되어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손은 욥의 생애에 하나님의 고난으로써 개입하신 사실을 암시한다(10:7; 12:9; 13:21; 19:21).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요
- 즉, 인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방법이나
숨겨진 뜻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 내용은 13절 이하에서 언급되거니와, 욥은 친구들과는 달리 원칙론과 현실 사이의
모순점을 은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지적하며 아울러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리라는 소망을 드러내고 있다(J.
E.Hartley).
하나님이 ... 아름답게 하셨고
-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보실 때 '좋았더라'(창 1:31)고 하신 말씀을 생각케 한다.
그러나 본 구절에서는 문맥상 하나님이 2-8절에 암시되어지는 모든 일들을 당신의 뜻과, 섭리대로 하실 때 아름답고 흠이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에게 ... 주셨느니라(*, 하올람 나탄 벧리밤)
- 이는 '그가 그들의 마음에 영원을 두셨다'(He has also set eternity in the heart of men, NIV; He has also set eternity in their heart, NASB)의 뜻이다.
이는 죄악된 인생의 유한성과 연약성 및 그로 말미암는 허무 의식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서 전체의 사상과 일맥 상통한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사(창 1:27) 당신과 더불어 영원히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던 것이다.
한편 혹자는 여기서 '영원'이란 말을 '세상'(the world, KJV)을 뜻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며(Luther), 다른 사람은 '무지'를 뜻하는 것으로 번역하기도 하나(G.A. Barton) 그 근거는 불분명하다.
일반적으로 대부분 주석가들은 이를 한글 개역 성경처럼 '영원' 또는 '영원을 나타내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Delitzsch, Nowack, Ginsburg, Wangeman, Wright).
그러나 ...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두셨으되, 인간은 제한적인 피조물인 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온전히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더더욱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 마음과 생각이 부패되고 왜곡된 바(렘 17:9; 롬 1:21) 그런 상태에서는 하는 일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십상이다.
'인과응보(因果應報)'는 세상에는 무작위로 일어나는 일이 없으며, 모든 현상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르면, 좋은 행동은 좋은 결과를, 나쁜 행동은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원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근본적인 질서를 이해하게 하며, 그로 인해 우리는 삶에서 더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인과응보는 단순히 윤리적인 가르침이 아닌, 우리 삶의 경험과 지혜로운 삶을 위한 중요한 지침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인과응보의 의미와 유래, 그리고 이 고사성어가 어떻게 실제 삶에 적용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는 '원인과 그 결과가 서로 대응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은 모든 행동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보편적인 원칙을 나타냅니다.
즉, 선한 행동은 좋은 결과를, 악한 행동은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인과응보의 원리는 동양 철학과 종교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이것은 모든 존재와 사건이 원인과 결과의 연쇄에서 발생하며, 이러한 연쇄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동과 그에 따른 결과, 심지어 생명과 죽음의 사이클까지도 이 원리에 의해 설명됩니다.
인과응보의 이해는 개인과 사회, 심지어 자연과 우주의 관계까지도 포괄하며, 모든 것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인과응보는 불교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각 한자의 뜻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따라서 '인과응보'는 원인과 결과가 상호 대응하며, 행위와 그 결과가 서로 일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원칙은 인간의 도덕과 윤리, 삶의 지혜와 철학에 깊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운명론에 빠진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역경(逆境)을 만났을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순간을 만나면, 많은 사람들이 그 일의 원인을 찾습니다.
제자들이 소경을 보면서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라고 묻는 것처럼 과거의 행적 때문에 지금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운명론에 빠지게 되면, "내가
하나님을 믿는데, 어떻게 나에게 어려운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정말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신가?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가?"하고 한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이 어려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확인할 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바르게 통과하시기 바랍니다.
이 고난과 풍랑으로 인하여 이전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일에 성공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주 믿는 사람 일어나
역경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누구에게 오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는 우리에게 고난을 주는 수많은 원인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역경의 원인을 살펴보면,
첫째,
하나님께서 주시는 역경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육체적인 질병을 주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찾아오는 역경
사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은 자신의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입니다.
셋째는 사단이 주는 역경
사단은 우리가 고통받는 수많은 사건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욥입니다.
고통을 받게 되는 원인을 덧붙여 말한다면, 집단적인 죄악으로 인해 고통받는 경우-즉 미국과 아프가니스탄과 있었던 전쟁을 통해서 무고한 국민들이 목숨을 잃고 난민이 되는 경우입니다. 또한, 고의적 혹은 무의식적인 실수로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와 같은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연재해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이 이외에도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경우는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고통의 원인을 알기는 하면서도 치유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은 역경을 겪을 때 힘들어하고, 어떤 사람들은 역경을 겪으면서도 인생의 성공을 맛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앙드레 세니에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평온한 얼굴 모습으로 고뇌를 숨기고 있다. 때문에 누구도 다른 이의 고뇌를 가늠할 수 없다. 그가 번민을 숨기듯 다른 사람도 모두가 고뇌를 감출 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각자 자기만을 측은하게 여긴다. '나만 빼놓고 다른 사람은 행복하지'"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유독 자신만이 지금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나무꾼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잘못해서 그늘에서 잠자고 있던 호랑이의 꼬리를 잡아 당겼습니다.
잠자던 호랑이를
건드린 나무꾼이 놀라 나무 위에 올라갔는데 호랑이가 나무를 흔들어 떨어지게 되었는데, 마침 호랑이 등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힘껏 호랑이 등을 끌어안았는데 호랑이가 이 나무꾼을 떨어뜨리기 위해 몸부림쳐도 떨어지지 않게 되자, 이 사람을 등에 얹고
힘껏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나무꾼은 떨어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다하며 호랑이를 꽉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농부가 무더운
여름 밭에서 일하다가 이 광경을 보고 '나는 평생 땀 흘려 일해도 사는 게 이 꼴인데 어떤 사람은 팔자가 좋아서 호랑이 등만 타고
다니니 어디 살맛이 나겠는가?'라며 탄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사람은 누구나 다 어려운
처지에 있음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유독 자신만 더 힘든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통의 원인만을 찾고 자기
자신만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고통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역경은 어떻게 이겨낼 수 있습니까?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역경의 원인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역경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역경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럼으로, 성경은 역경의 원인을 찾는 일에 중점을 두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역경의 원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경을 대하는 우리의 반응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역경의 원인을 찾는 일에 급급한 나머지, 하나님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은 소경이 당하는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까? 보지 못하는 이 소경을 보게 했습니까? 제자들에겐 그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하나님을 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이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실까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미래에 있을 일에 더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이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분명히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성도라면, 적어도, 역경의 원인,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삶의 문제의 원인에 너무 얽매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역경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경의 원인을 파악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역경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역경이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도록 반응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를 받아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보디발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노예가 된 요셉은 성실하게 맡겨진 일을 수행하여 보디발로부터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또 다시 역경이 찾아왔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다 실패하자, 요셉이 자기를 범하려고 했다고 누명을 씌우는 바람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모든 역경을 이겨내어 결국에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후에, 요셉은 오랜 가뭄으로 식량을 구하러 온 형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요셉이 형제들에게 한 말이 무엇입니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나를 먼저 이곳에 보내어 우리 가족과 민족을 구원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과 역경은 믿음의 사람 요셉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고난과 역경을 바라보는 시각만큼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키케로는 '고난이 크면 클수록 그 영광도 크다'고 말했고, 베네트는 "역경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보석들을 가공하시는 다이아몬드 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허버트는 "큰 배는 깊은 바다를 필요로 한다"고 했으며, 아논은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은 역경을 지치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요셉과 같은 고백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바울과 같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육체적인 질병이 하나님께서 교만치 않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타내는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고백하는 성도
찰스
스탠리 목사는 현재와 미래의 삶에 대해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있는 자는 언제나 승리한다고 말하면서, "만약 당신이 역경을 겪고
있다면, 먼저 자기 연민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역경을 만나면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됩니다.
"아, 나는 이제 어떻게 하지?
더 이상 나를 도와 줄 사람도 없고.
내 처지를 봐. 난 가망이 없어. 머지않아 친구들도 떠나고,
나 홀로 남겠지..."
성도 여러분, 왜 자기 연민에 빠지는 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아닌 자신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자신과 환경 사이에 하나의 가상적인 영역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공감해 주는 사람들에게만 그 세계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종종 혼자 있게 되고 결국에는 고독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쉽게 낙심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일수록 오히려 분노와 독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데, 결과적으로는 분노와
독한 마음으로는 역경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성도가 역경 중에 처해있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사용하셔서 긍정적인 결과를 낳게 해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실망하거나 낙심해 자포자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고통을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⑴ 먼저, 역경의 원인이 죄에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①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탓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시인해야 합니다.
②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범했다고 고백해야만 합니다.
우연한 사고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죄를 지었다면 그것을 죄라고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동의해야만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똑같은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청산해야만 합니다.
③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나의 행위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원망할 자격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사람들로부터 동정심을 얻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낭비하면서까지 원망하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성도
여러분, 원망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을 위해서만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④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반복해서 죄를 짓는 원인은 연약한 신앙 때문입니다.
신앙이 약하면 약할수록 사단을 우리를 유혹해서 죄를 짓게 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나의 연약한 부분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잘못된 생각은 없는가?',
'혹 성경의 교훈과
정반대가 되는 인생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내 안에 결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불안전한 영역은 없는가?',
'나를
끌어내리는 친구는 없는가?',
'내 삶 가운데 계속해서 미혹하는 사람은 없는가?',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봄으로써, 우리는
나의 삶 가운데 죄가 들어와 자리잡게 된 정확한 원인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⑤ 하나님께서는 내 삶 가운데 역경을 사용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역경은
그것의 원인과 상관없이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 맡겨질 때 언제나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소경도 그랬고,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홍해 앞 바다에서 뒤쫓아 오는 애굽
군사에 의해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그 장소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지
않습니까?
⑥ 죄의 결과를 피할 수 없도록 하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진정한
감사로부터 나옵니다.
우리가 나의 죄를 있는 그대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무서운 해를 당하지 않도록 우리의 삶에 역경을 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죄가 역경의 원인이 아닐 때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죄가 역경의 원인이 아니고 하나님이나 사단에 의한 역경일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①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위치를 재확인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안다.
나는 구원받은 자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다.
나는 성령으로 인친 자다. 주님께서는 결코 나를 혼자 두거나 방치하지 않으신다. 거룩하신 아버지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도 나를 해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르심 받은 내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라는 확신만 있다면, 역경은 극복된 것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② 우리의 삶에서 역경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역경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는 유치한 기도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 자기의 고통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그같은 기도에 대해 그를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 역시 하나님께
대한 의지와 믿음의 표현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③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의 약속을 재확인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께 역경을 제거해 달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그 방법을 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고통을 감당하고자 하는 자는 그것에 완전히 짓눌려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힘으로는 고통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우리 하나님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은혜를 매순간 충분하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
④ 영적으로 자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역경의 순간은 고통을 참는다고 해서 극복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역경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의도를 찾아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의 신앙은 점점 더 성숙해질 것입니다.
⑤ 역경을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겪는 역경이 사단에게서 온 것이든 그렇지 않든 그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역경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역경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차라리 이것이 유익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성도 여러분, 역경이 사단에게로부터 왔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싸울 힘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싸워 이길 힘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계속해서 싸우게 되고, 그 싸움이 오래 지속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역경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 역경을 극복하기란 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만 의지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분에게는 그것을 극복할 힘이 있습니다.
⑥ 성경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겪은 역경에 대해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읽어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느꼈을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별로 원하지 않는 땅을 갖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예비하신 것을 보십시오. 노아는 방주를 만들고 있을 때 자신에 대해 얼마나 어리석게 느꼈을 것인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성도 여러분,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신실함만은 변치 않았습니다. 이들의 삶을 역경 가운데서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이러한 인물들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할 수 있도록 그들의 인간적인 면에 대해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을 돌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역경을 겪을 때 자신만이 겪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역경을 겪을 때, 그 원인만을 찾으려고 하지 미래를 보지 못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역경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할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역경을 담대히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역경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더욱 강하게 될 것이며, 넘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깊이 역시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부디 바라기는 역경의 성격이나 원인을 찾는데 급급한 삶에서 벗어나 역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의 삶 가운데 무엇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지를 깨닫는 축복된 삶,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 3절 말씀은, 마치 나면서 소경 된 것이 하나님의 하실 일을 위하여 계획된 불행인 듯이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사람의 불행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다는 의미까지는 아니다.
그것은 그 불행에 대하여 이러니 저러니 이론을 붙이는 것보다, 불행을 상대하고 하나님의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다행한 일들만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인간의 불행을 고쳐서 복이 되게도 하시는 사랑과 능력을 가지셨다.
인간들은 불행한 것을 보고 피하며 저주하기에 급급하나, 하나님은 그런 것을 상대하셔서도 자비를 베푸신다.
여기 "일"이란 말의 헬라 원어는 복수명사(*)로서 "일들"이란 뜻이다.
이 "일들"은,
(1) 이제 예수님의 고쳐주시는 은혜(그것도 하나님의 일)로 나타났고,
(2) 그 고침 받은 자가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일로도 나타났다.
말쿠스 다즈(Marcus Dods)는 말하기를, "불행(고통)은 하나님의 일을 증진시킨다. 곧, 그것을 극복하는 데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낮"이란 말은 예수님이 땅에 계신 기간을 가리킨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어서 영원토록 선을 행하신다.
그러나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국한하여 하셔야 될 일들이 별도로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런 의미의 사명 실행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셨다.
그는, 사명 실행의 때가 지나간 다음에는 밤과 같은 일할 수 없는 때가 온 줄 아셨다.
사람들이 땅 위에 있는 시기는, 낮과 같이 귀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금보다 귀한 시간인 것이다.
기회는 귀하다.
"기회는 오직 한 번만 문을 두드린다"(Opportunity knocks the door only once).
맹인과 예수님의 만남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
실로암의 기적
사람들의 반응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발병원인에 대해서 제자들이 주님께 한 질문입니다.
그렇게 물은
것은 당시 유대인들은 모든 사고와 불행과 질병의 원인을 죄에서 찾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욥의 경우 고난과 질병은 그와는 아무 상관이 없게 일어났습니다.
물론 모든 것의 근본원인은 인간의 타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질병이나 장애의 원인을 전적으로 죄에 대한 징계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회개하여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전혀 다른 답변을 하셨으므로 그것은 잘못된 편견이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영적인 맹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주께서 답변하신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말을 자칫 잘 못 받아 들이면 마치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계획된 불행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우리말로 해석해서 그런 뉴앙스를 풍기는 것이지, 원문을 보다 정확하게
번역한 라틴어성경이나 그것을 다시 번역한 영어성경을 보면 보다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보지 못함으로 인해 너희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일으키시는 기적을 볼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분의 일을 보이는 것이지, 결코 그분의 목적을 위해 사람을 불행하게 하실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암시되는 말입니다.
여기서
낮은 주님이 세상에 있을 때를 말하고, 밤은 세상에 계시지 않을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있는 여부가 낮과 밤의 기준이 되는 것이지요.
주님은
세상의 빛으로 왔기 때문에 세상에 있을 때를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낮 시간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빛으로, 이제 그 바통은 우리에게 넘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맹인 된 원인을 죄라고 단정하고 그의 죄인지
아니면 부모의 죄인지 밝혀달라고 주님께 주문했습니다.
분명한 흑백논리이며 철저한 인과응보의 원칙에 따른
말입니다.
매사 상관관계를 갖고 그것에 따라 결과를 해석하는 사고를 갖고 있는 그들입니다.
주님과 동고동락하면서도 여전히 그들의 시각은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관점을 갖고 사물을 보고 판단하였습니다.
주님은 그의 죄도 아니고 그의 부모의 죄도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시며 다만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비뚤어진 시각을 교정해주며, 사고의
전환에 동력을 점화시키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극과 도전이 왔을 때 반응하는 것이 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심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서 해석과 적용이 달라지는 법이지요.
바둑에 미친 사람은 모든 보이는 물건들이 다 바둑돌이라고 합니다.
한참
당구 치는 재미에 빠진 젊은이는 돈과 시간이 없을지라도 어떻게 되는지 당구장에 갑니다.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을 보고 사람마다 그 보는 이미지가 다른 것은 평소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삶을 사는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관점과 시각을 갖고 성경을 보고 묵상하며 삶에 적용한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의 발상 배경도 그렇습니다.
윤회 사상은 인도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고대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고 그리스까지도 편만하게 퍼져있었던 환생의 교리라고 합니다. 그것에
따르면 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그 다음 세대에 그 대가를 치러 불행하게 산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 교리가 유대인 민간인들에도 슬그머니 침투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랍비들은 극구 반대했지만, 이미 백성들 사이에는 사고와 질병은 전생의 죄 때문이라고 상식화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점을 시정하고자 강하게 부정했습니다.
왜곡된 시각과 관점은 진리를 가리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흙을 이겨 눈 먼 사람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아주 특이한 치료법입니다.
마가복음에서도 그와 비슷한 사건이 나오지만
이처럼 구체적이고 특별한 것은 오직 요한복음에게만 나옵니다.
그냥 말씀만 해도 될 것입니다.
죽은 사람도 일어나라고 하면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주님의
겉옷만 만져도 병 나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독 그에게는 흙에 침을 뱉어 그의 눈에 부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이고자 함입니다.
흙(인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능력을 나타나기를 원해서이지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이기에 그의 아들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진흙은 사람을 살리기를 원하시는 생명의 안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진흙이 우리 눈에도 부쳐지기를 바랍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상식화되어 뿌리가 깊이 내려진 하나님 아닌 사고와 생각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다 벗겨지기를 소원합니다.
눈에서 그런 비늘 같은 것들이
벗겨져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다시 탄생되길 원합니다.
맹인이 눈을 떠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며, 생명의 빛입니다.
그 빛을 받아 빛 된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태양 빛을 반사하는 달도 밝습니다.
참스승
그리스의 역사 철학자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기록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아테네 군관학교를 갓 졸업한 풋내기 청년 장교가 소크라테스를 찾아와서 자기가 공부한 지식을 장광설로 늘어놓으며 자랑했다.
"우리 선생님이 '언제든지 좋은 사람은 행렬의 앞과 뒤에 세우고 나쁜 사람은 가운데 세우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매우 좋은 가르침일세. 그러나 너희 선생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어떻게 분간하는지를 가르쳐 주더냐?"
이 말에 당황한 청년 장교는 "그것은 안 가르쳐 주셨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돌아가서 네 월사금을 도로 찾아 가지고 오거라."고 했다.
이처럼
선과 악의 구별과 그 판단의 표준을 가르쳐 주지 않은 교육은 어떤 종류의 교육을 불문하고 기본적인 인간교육에 실패한 교육이다.
그런 교육은 사람을 얼치기 바보가 아니면 회의주의자를 만들어 내는 이상의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참 스승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참 배움의 자리로 초대하신다.
미켈란젤로의 스승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켈란젤로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지만, 보톨도 지오바니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Are you greater than our father Abraham? He died, and so did the prophets. Who do you think you are?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Who do you think you are?)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미 아브라함은 죽었는데 예수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는 가르침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당신이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을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고 하므로 군중들은 돌을 들어 치려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나가셨습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테레오( tērĕō. τηρέω)"라는 단어는 십자가 정신으로 말씀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테레오'는 말씀의 동일화(同一化) 또는 육체화(肉體化)라고 하여 그 최종 결과는 성육신(成肉身)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면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킬 때는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 간음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마 5:28).
"퓔라쏘(phülassō. φυλάσσω)"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으로 명령식 방법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킴을 '휠라쏘'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는 지킴은 '테레오'라고 합니다.
테레오는 율법을 문자화하여 율법의 조항들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감추어진 정신까지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면 현장에서 간음하던 여자를 끌고 와서 돌을 들고 치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치라"고 하심으로 "퓔라쏘"에서 "테레오"로 군중들을 돌이켰던 것처럼 오늘날도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 퀴즈에 정답을 말하고 성구를 암송하는 것에서 한걸음 더 발전시켜 성경을 생활화 할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생활화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성육신 사건으로 계시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중심의 신앙에서 삶의 현장으로 말씀의 가르침을 바르게 적용해야 하는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예언된 메시야로 이 세상에 육신의 몸을 갖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예언된 메시야는 신적 권위와 왕과 같은 권위와 힘을 갖고 오셔서 억압받는 백성들을 자유케 하는 놀라운 사건을 일으키는 주인공으로 기대하고 기다렸습니다.
유대인들의 기대에 어긋난 예수님을 생각할 때 어떤 때는 메시야와 같고 어떤 때는 전혀 메시야가 아닌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는 방법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반대하고 예수님에게 돌을 전지려 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무려 천년 동안 불교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씨 조선 시대가 시작하면서 주자 성리학을 도입하여 사당과 제사를 강요하면서 오백년 동안 제사문화가 지배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기독교가 전래되면서(1885. 4. 5) 전혀 새로운 방식의 신앙이 사람들의 관심을 갖게 되었고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땅에 복음이 전래되고 139년이 지나면서 교회와 신앙에 대한 사회적인 비난이 물끓듯 일어나는 때에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초대교회와 같은 믿음의 공동체로 바르게 세워지는 일에 마음과 뜻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주 예수 크신 사랑
ㄱ
요4: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요한복음 5장 : 안식일 배경
6장 : 유월절 배경
7-8장 : 초막절 배경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너희 아비는 마귀다”라고 하는 말에 “너는 사마리아인이다, 귀신이 들렸다!”라고 받아치고 있습니다.
이는 사실 논리적인 반발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인 반발입니다.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은 혈통이 의심스럽다는 의미이면서 또한 이단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귀신이 들렸다”는 미쳤다, 제 정신이 아니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 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이라는 비난에 대해서는 굳이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혈통 따위에는 관심이 없으시다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그러나 “귀신이 들렸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라는 의미가 되기도 하기에 이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반박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을 공경하고,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이는 반대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마귀에게 속한 자”란 결국 자기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파는 자, 그럼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대적인 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행위를 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유대인들과의 논쟁 가운데에서 상당히 중요한 말씀을 덧붙이시는데, 이처럼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며 사시는 모범을 보여주셨듯이,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살면 영원한 생명이 보장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영생에 대한 약속을 놓고 비웃고 있습니다.
다시 아브라함이 언급되면서 아브라함을 비롯한 모든 선지자들이 다 죽었는데 안 죽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하는데, 이는 “네가 뭔데?”라는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는 묘한 말씀을 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 곧 유대인들도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 하나님이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으로 말씀하시지 않지만, 아버지 하나님께서 결국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 주실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그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실 것을 미리 말씀하고 계십니다.
7~8장의 결론이며, 또한 5~8장의 결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수천 년 전에 죽은 아브라함을 50년도 살지 못한 네가 어떻게 보았겠느냐고 조롱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여기서 “내가 있다”는 말은 헬라어 “에고 에이미” 영어로는 “I AM”이라 번역되는 여호와 하나님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게다가 시제조차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는 부정과거시제이고, “내가 있다”는 현재형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언제나 족보의 시작은 아브라함인데, 그 족보의 시작보다 더 이전에 있었다는 말은 결국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예수님이 “나는 ~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이 때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무슨 의도로 하신 말씀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은 ‘숨어’ 성전에서 나가셨는데, 여기서 ‘숨었다’(헬. 에크리베)는 말은 ‘묻혀서’(7:4)와 ‘은밀히’(7:10)에 해당하는 말(헬. 크륍토)과 어근이 같습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을 맞아 은밀한 모습으로 성전에 오심으로써 성육신의 신비를 보여주셨고, 또 마지막에 은밀한 모습으로 성전을 떠나심으로써 더 이상 성전에 임재하시지 않고 심판하실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천지창조 이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부족한 이해력으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깨달을 수 없지만,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지니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 순종하시고, 오직 아버지의 영광만을 드러내려 하시며, 그것을 위해 자기 손으로 지음을 받은 자들의 오만불손한 태도를 참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오직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을 닮고,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기 위함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은 예수님을 닮는 것이고, 예수님을 닮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나의 이득을 챙기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자기 영광은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을 통해 나는 과연 어떻게 주님을 닮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죽음”이란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때 영벌에 처하게 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해 강하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시각에서 예수님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보다도 더 큰 자라고 말하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본문 53절에서,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유대인들이 이렇게 다시 예수님께 묻자,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의 영광을 취하지 않는다고 대답해주셨습니다(54절).
그리고 본문 55절에서,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고 잘 지킨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말씀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종교개혁 시대에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 성경으로 번역했을 때 많은 성도가 루터가 번역한 책이 성경책인지 몰랐던 것과 같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에 바른 이해가 있어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 56절에서, 예수님의 때가 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영화롭게 해주시고, 유대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조차도 ‘예수님의 때’를 기다렸다고 말씀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당시 유대 랍비들 사이에서도 아브라함이 메시아의 때를 본 것에 대하여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나의 때’가 ‘메시야의 때’라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인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구원자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아브라함에게 먼저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100세에 낳은 귀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던 곳으로 가서 번제로 제단에 바쳐야만 했습니다(창 22장).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치려고 했을 때 하나님은 막으시고, 예비하신 숫양 한 마리를 제사의 제물로 드리도록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중한 아들까지도 희생시키려고 했기에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죄인들을 위해 내어주셔야 했던 하나님의 마음을 아브라함은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이삭을 바치려 했던 모리아 산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골고다와 동일한 장소였습니다.
30세 초반의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니까 유대인들은 크게 반발했습니다.
본문 57절에서,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직설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58절 하반절에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아멘.
“내가”라는 영어(I AM)은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I AM WHO I AM)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표현하셨던 말씀을 그대로 사용하심으로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보다도 먼저 계셨고,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주장과도 같은 발언이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유대인들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님의 신성모독 발언들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돌을 집어서 예수님을 향해 던지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셨던 예수님은 재빠르게 성전을 빠져나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함으로 하나님을 거절했던 겁니다.
하나님을 거절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냈던 겁니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죄의 종으로 사탄의 거짓 진리를 믿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은 무조건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게 만드는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갔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이러한 거짓 진리로 사람들을 속입니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자는 무조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속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속입니다.
세례를 받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사탄은 우리를 속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마음을 잘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줄 믿습니다.
집 안에서 주인과 종이 같이 살아도 종은 상속권도 없고 혈통을 이을 자격도 없습니다.
죄의 종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비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하신 보혈의 피를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고,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믿음을 갖고 오늘 하루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과 인격적인 친밀한 교제 속에서 마음의 평강과 기쁨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도 비켜 가지 못했던 외모 지상주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1495~1498년
위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
식당에 그린 너무도 유명한 벽화, '최후의 만찬'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수의 이미지는 그림에서처럼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긴 머리와 녹갈색, 혹은 파란 눈을 가진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백인이다.
몇 년 전, 영국 BBC 다큐멘터리 '신의 아들(The Son of God)'이
공개한 전혀 예상치 못한 예수의 얼굴은 사람들에게 적잖이 충격을 주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귀티나게 잘생긴 얼굴이 아닌 농민이나
노동자 계층의 서민적인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영국의 법인류학자와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이 재현한 예수는 키 153㎝,
몸무게 50㎏의 검고 짧은 머리카락과 까무잡잡한 피부색을 가진 거칠고 투박한 생김새의 남성이었다.
신약성서 기록을 참고하고 1세기
이스라엘 갈릴리 지방의 셈족(유대인) 유골과 고대 시리아 프레스코화를 컴퓨터 이미지로 합성, 분석한 결과라고 한다.
현대 법인류학적 분석과 컴퓨터 합성에 의해 재현된 예수의 얼굴(출처 Wikipedia)
이 이미지를 따른다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예수의 외모는 완전한 허구다.
사실 2,000년 전 중동지역 유대인은 어두운 올리브색 피부, 갈색 눈, 검은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고, 당시 유대사회에서 남자의 긴
머리는 수치로 여겨졌다.
예수 역시 짧은 헤어스타일에 그 시대의 보통 유대인 외모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직업이
목수였으므로 육체 노동자의 다부진 체격을 가졌을 가능성도 많다.
귀족같이 기품 있고 부드러운 모습은 오랫동안 그림과 조각을 통해,
최근에는 상업영화들을 통해 심어진 이미지일 뿐이다.
물론 재현된 예수의 얼굴이 진짜 그의 모습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동안 수많은 미술가들이 그리고 조각해온 미술작품 속 예수보다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예수의 이미지는
어디에서 왔을까?
왜 이렇게 오랫동안 왜곡된 모습이 받아들여졌던 것일까?
2세기경 로마시대 모각 벨베데레 아폴로(출처Wikipedia)와 3세기 로마 산 칼리스토의 카타콤베 벽화의 예수(오른쪽)
초기 기독교 교회는 우상숭배를 엄격히 금지했다. 예수의 형상 대신 그를 뜻하는 물고기나 십자가, 빵과 포도주 등의 상징물을 사용했다. 그러나 3세기경에는 지하 공동묘지 카타콤베 벽화에서 양을 어깨에 매고 있는 '선한 목자'로 표현된 예수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기서 예수는 수염이 없는 젊은이로 나타나는데, 이는 그리스 로마 미술의 아폴로 형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인물이 몸무게를 한쪽 다리에 싣고 다른 쪽 다리는 무릎을 약간 구부리고 있는 자세)라든가 로마의 토가를 연상시키는 옷 주름에서도 고대 조각상의 영향이 엿보인다.
2세기경 로마 시대 제우스상(출처 British Museum)과 6세기 이집트 시나이 산의 성 가타리나 수도원의 벽화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오른쪽)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된 4세기경부터 조각상을 통해 신을 숭배하는 고대 그리스 로마 전통이 점차 비잔틴제국의 동방교회에서 뿌리를 내렸다. 비잔틴 예술가들은 예수를 묘사하기 위해 로마 판테온 신전의 주피터나 넵튠같이 더 강력하고 성숙하며 권위 있는 신들의 모습을 차용했다. 세상을 지배하는 위엄있는 제왕, 혹은 우주의 지배자로 표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젊은 아폴로의 모습에 긴 머리와 턱수염을 가진 좀 더 나이 든 신들의 이미지가 덧붙여졌다. 6세기경에는 어깨 길이의 장발과 수염이 있는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Christ Pantokrator)’가 등장했고, 이후 비잔틴제국과 서유럽의 중세미술에서 관습적인 예수의 도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는 ‘전능한 그리스도’라는 뜻으로 오른손으로는 하늘과 땅을 축복하고 왼손에는 복음서를 들고 있는 이콘(Icon: 도상)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공식적인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의 딱딱한 도상에서 벗어나 인간적이고 개성 있는 예수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간적 가치를 중시한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배경으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의 남성미가 넘치는 근육질 예수,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의 우아하고 이상적 아름다움을 지닌 예수가 등장한 것이다. 여전히 르네상스 미술가들의 예술적 영감의 근원도 고대 그리스 로마였다. 예외도 있었지만, 예수 역시 고대신화 속 올림포스 신들의 조각상을 본뜬 수려한 남성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여기에다 당대 유럽인 자신들의 외모가 일부 투영된 것은 물론이다. 서구에서 르네상스 문화예술은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에, 르네상스 미술작품 속 예수의 이미지 역시 이후 미술사에서 면면히 이어졌다.
워너 샐먼의 ‘그리스도의 머리’(왼쪽)와 영화 ‘나사렛 예수’의 이미지(출처 Wikipedia)
20세기 미국의 상업 미술가 워너 샐먼이 그린 흰 피부, 긴 머리, 푸른 눈을 가진 예수의 초상도 이런 미술사의 배경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샐먼의 그림은 개신교, 가톨릭교회와의 파트너십 속에서 카드, 스테인드글라스, 달력, 유화작품 등의 매개체를 통해 상업적으로 대박을 터트렸다. 결과적으로 이전보다 훨씬 친근하고 달콤한 예수의 이미지가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심지어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나사렛 예수',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등 영화에서는 늘씬한 훈남 예수들이 등장하면서, 패션쇼 런웨이에 나타날 듯한 팔등신 꽃미남으로 변신했다.
BBC 다큐멘터리가 보여준 예수의 외모는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실망(?)을 안겨주었지만, 합리적으로 추론해 볼 때 역사적 개연성이 높다. 성서의 이사야 53장에도 그의 용모에 대해, ‘아름다운 모습이나 위엄있는 풍채가 없어서 흠모할만한 것이 없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멋진 외모를 가졌든 작은 키에 볼품이 없었든 간에, 그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성인이자 스승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 않은가.
사람들이 떠올리는 예수의 전형적인 모습은 우리가 원하고 보고 싶은 형상이며, 이것이 미술에 반영되어 왜곡된 이미지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신의 아들 예수도 집요한 외모 지상주의를 피해갈 수는 없었던 것일까?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욕망은 물욕, 권력욕, 명예욕과 함께 인간이 가장 버리기 힘든 우상숭배의 한 유형인지도 모른다.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현재도 전 세계 가장 많은 지지자를 거느린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그를 직접 목격 했거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말보다는 눈빛이 먼저라는 메라비언의 법칙과는 달리 작금의 예수를 따르는 지지자들은 그의 이미지보다 그의 말과 가르침에 매료된 사람들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전무후무한 인물인 생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어떠했을까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수많은 화가들이 예수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붓을 휘둘렀다.
이들 중 사랑받는 예수의 그림을 그린 몇몇의 화가를 간단히 소개해 보고자 한다.
요한 마이클 페르디난도 하인리히 호프만
독일 출신 화가인 ‘하인리히 호프만(John Michael Ferdinando Heinrich Hoffman 1824-1911)’는 또 다른 독일 화가 루트비히 폰 호프만의 삼촌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그린 예수는 물론이고 1889년에 그린 ‘그리스도와 부자 청년’은 성서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카를 하인리히 블로흐 예수에 관한한 가장 많은 그림을 그려온 덴마크의 ‘카를 하인리히 블로흐(Carl Heinrich Bloch 1834년-1890년)’.
그는 렘브란트의 미술 작품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예수의 모습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는 성화를 그렸다.
그의 미술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1865년부터 1879년 사이에 제작,
프레데릭스보르 성의 예배당에 전시된 예수의 생애를 소재로 총 23편의 작품이 있다.
하인리히 블로흐가 그린 예수 그리스도
델 파슨
델 파슨(Del' Parson 1948년 출생)은 미국의 화가로서
1983년에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Latter-day Saint)로부터
그의 첫 번째 예수 초상화인 "붉은 로브의 그리스도"를 그리도록 의뢰받아
3차례에 걸쳐 비로소 완성된 그림을 내놓았다.
그가 그린 예수 그림이 공식 이미지로 인정받아 널리 활용되고 있다.
그는 교회의 요청을 지속으로 받아들여 성경뿐만이 아니라
몰몬경에 나오는 내용을 묘사한 그림 240여점을 그리기도 했다.
델 파슨이 그린 예수 그리스도(미소지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후기성도
화가였던 델 파슨에게는 특별한 스토리가 있었다.
그는 십이사도 정원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임무를 받게
되었다.
그는 임무에 전율과 영예로움을 느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안에 그는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그는 큰 만족을 느끼며 그림을 포장해서 십이사도 정원회에 보냈다.
몇
주 후 파슨형제는 십이사도 중 한 분으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었다.
그 편지에는 그림을 보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내용이
있었으며, 또한 그 그림이 그리스도의 실제 모습과 다르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려 달라는 임무를 받게
되었다.
이전
경험으로 인해 그 형제는 겸손해 졌으며, 자신을 더욱 잘 준비 시킬 수 있었다.
많은 기도와 함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두
번째 초상화도 곧 끝마칠 수 있었다.
그림을 보낸 몇 주 후 십이사도로 부터의 연락이 있었다.
이번 작품이 더욱
훌륭하며,구세주의 실제모습과 더욱 비슷하지만 역시 충분치 못하다는 내용이었다.
파슨형제는
더욱 겸손해졌으며, 많은 금식과 기도를 했다.
그는 가능한한 영과 구세주에게 가까와 질 수 있기를 희망했다.
파슨 형제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그리고싶지 않았지만 그와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영을 갖기를 원했다.
이전에는 영예로운 임무를 받은
것에 대한 명예, 자랑으로 여겼었지만, 이제 그는 그 일에 대한 중요성과 책임감으로 자신을 가득채웠다.파슨 형제는 세번째 구세주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 초상화는 십이사도 정원회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모습으로써 받아 들여 졌으며, 이 그림은 모든 공식 교회 간행물에 사용되고 있다.
파슨
형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에서의 경험들을 교회의 여러 모임에서 소개했다.
처음 임무를 지명받았을 때의 느낌과 첫
번째 그림을 발송하기까지의 일들을 전해 주었다.
또한 어떻게 첫 번째 그림이 거절되었는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그림에 관한 이야기도 역시 전해 주었다.
이런
경험이 전해졌다.
한 특별한 노변의 밤 모임에 14세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
그 소녀는 7살때 교통사고로 부모가 사망하는 무서운
교통사고의 경험이 있었다.
그 소녀와 부모는 어느 늦은 날 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차가 도로를 이탈하는 사고를 당하였다.
앞
좌석에 앉아 있던 그 소녀의 부모는 그 즉시 사망을 했다.
그 소녀는 다음날 아침 뒷좌석에 혼자 앉아 있는 채로 발견 되었으며,
단지 가벼운 상처만 있을 뿐이었다.
이
사고는 그 소녀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 소녀는 자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다는것을 발견했다.
소녀는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하지 않았으며, 말도 거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소녀는 한 후기 성도 회원의
가족에 입양 되어 있는 중이었다.
파슨
형제가 세 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을 때 그 소녀는 초상화 앞으로 달려 나갔으며, 그 초상화를
가리키며 “ 바로 이 사람이야!, 바로 이 사람이야!”라고 소리쳤다.
그 갑작스런 소리에 놀란, 그 소녀를 입양했던 어머니가 달려
나가 그녀를 안으며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어 보았다.
그 소녀는 대답했다.
“나는 이 사람의 이름을 모르지만, 이 사람은 나의
부모님이 죽던 날 밤 차 안에서 나와 함께 있던 사람이예요.”
또
다른 이야기는 솔트레이크 시 한 와드 간증모임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한 자매님은 그녀가 가르치던 초등협회에서 있었던 경험을
말했다.
몇 년 전에 그녀의 조카는 다섯 살 때 그의 아버지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는 어머니를 목격했다.
그는 아버지가 총을
꺼내어 어머니를 살해할 때 그 곳에 같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갑자기 죽음을 당한 그의 어머니와 함께 방안에 가두고 방을 잠가 버렸다.
한 이웃집 사람이 어머니의 실종에 관해 의문을
갖게 되었을 때, 그 둘은 발견 되었고 그 때에서야 그곳을 나올 수가 있었다.
그 어린 소년을 그 경험으로 인해 마음에 깊을
충격을 받았다.
그 소년은 비록 교회 회원은 아니었지만 그 자매와 그의 보모에 의해 그녀가 가르치는 주일학교에 참석하게 되었다.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그 자매는 아이들을 둥그렇게 모이게 해놓고 개개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을 보여 주며, 이 분이 누구인가를
물어보았다.
그 자매가 그 소년에게 다가왔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번 째 질문을 했을 때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자매는 그 소년이 그림속의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세 번째 질문을 하였다.
소년은 대답하기 시작했다 “
나는 그의 이름을 모르지만,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였을 때, 나를 팔로 안아주고 있던 사람이예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I tell you the truth, if anyone keeps my word, he will never see death.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죽음이란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내 말을(로고스) 지키면(테레오)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내 말을 지키다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첫째는 내 말을 지키라
둘째는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게 되리라
내 말을 지키라는 말씀에서 지킨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내 말을 지키라는 말씀은 내 말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기 때문에 그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지키려면 말씀의 가르침따라 살아야 합니다.
내 삶을 내가 살아가는 것같지만 내 삶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내 말을 지키라는 말씀은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라는 교훈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명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게 되리라는 말씀은 생명의 주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 몸이라고 말하지만 내 몸이라면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 것이 나의 몸입니다.
예를 들면 내 손톱과 발톱이 자라서 정리해야 할 때마다 손톱과 발톱아 자라지 말아라 이렇게 명령하면 내 것이므로 내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손톱과 발톱도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는 죽을 수밖에 없지만 반드시 영적으로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 죽음은 없다는 뜻입니다.
죽음을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사망의 그늘이 짙은 이 세상에서도 평강의 삶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길은 짧은 생명을 걸고 긴 생명 즉 영생을 얻는 과정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삶을 포기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헌신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웃습니다.
한번 뿐인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살수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미래를 준비하고 인도하시는 분은, 인생을 만드신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께 의탁하고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보다 더 지혜로운 길이 없습니다.
유대인의 말씀 지킴 vs 예수님의 말씀 지킴
분명한 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그 지킴이와,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지킴이 사이에는 뭔가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51절에 말씀하시는 “너희가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의 “지키다”라는 것에 방점을 찍고 이것의 의미에 관하여 먼저 생각을 하고자 합니다.
51절. 지키다(테레오), 보다(쎄오레오)
52절. 지키다(테레오), 죽음을
맛보다(게우오마이, 경험, 즐기다),
55절. 지키노라(테레오),
56절. 보다(호라오), 볼 것을(호라오),
57절. 보다(호라오)
7장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께서 초막절 설교를 하시면서, “믿음” 나를 믿으라는 사실을 강조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그
믿음이 이제 8장 마지막에 와서는 “내 말을 지키고 보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9장으로 가면서 “보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믿음 - 지킴 - 봄
7장의 예수를 믿는 믿음
8장에 의하면, 말씀을 지키는 것이며,
9장에서는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란, 영적으로 그 말씀을 보는 것이을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기를 소원합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지켜왔습니다.
그래서 손에 돌을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여기서 “내 말을 지키는 자는” 이라고 말씀합니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지키는 것과, 예수님이 말씀을 지키라고 하시는 것 사이에는 뭔가 차이가 있다는 것이며, 뭔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부자 청년 이야기를 생각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말합니다.
선생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행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9장 17절에서“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을 지키라(테레오, τηρέω).” 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자 청년이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계명을 말씀하십니까? 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사랑하라.
이러한 것들이라. 청년이 예수의 말을 듣고, 선생님, 제가 당신께서 말씀하신 이 모든
것을 지켰습니다(19:20, 퓔라쏘, φυλάσσω).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러자 예수께서“네가 온전하여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러자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테레오(τηρέω) vs 퓔라쏘(φυλάσσω)
τηρέω 스트롱번호 5083
φυλάσσω 스트롱번호 5442
θεωρέω 스트롱번호 2334
이
대화 내용을 정리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 계명을 지키라고 하니까, 청년은 네 저는 이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합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동일합니다.
그런데 원문에 보니까, 예수께서 원하는 지킴은 테레오 였고, 청년이 지킨 것은 퓔라쏘 였습니다.
두 사람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 그것을 지키는 방식이 서로 달랐다는 것입니다.
젊은 유대인 청년이 생각한 “지킴(퓔라쏘) 방식”은 말하자면 군대식 지킴 방식입니다.
전투적 지킴 입니다.
눈으로 감시하는
것입니다.
보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눈으로 감찰하는 것입니다.
상황을 감찰하고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에게
손해가 가지 않도록,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소극적으로 보호하고, 감시하는, 그래서 복종하고 순종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퓔라쏘의 방식은 시키면 시킨 것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으니, 그 율법만을 바라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통해서
율법을 묵상하고 읽어야 하는데,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바라보기 보다는 율법 그 자체만을 소중히 여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퓔라쏘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부정적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7절에서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퓔라쏘)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여기에 나오는 지키다는 “퓔라쏘” 입니다.
즉, 퓔라쏘 안 한다고
해서 내가 그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말씀을 테레오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하나님 말씀 지킴이 방식은 “테레오” 였습니다.
이것은 주의 깊게 살피고, 관찰하여 묵상하여 저장하고,
조심스럽게 섬기고 시중들고 돌보는, 그래서 바라보면서 끝까지 보호하는 의미까지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 상대와의 만남이
있는 지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τηρέω),
테레오 한다는 의미는 말씀을 주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그 주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관찰하고, 묵상하여 내 마음에 저장하여, 말씀 그분의 정확한 뜻을 읽어내어 섬기고 시중들며 끝까지 보호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테레오’하는 것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품는다는 것이며, 내 삶으로 그 말씀을 온전히 담아내는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테레오. τηρέω)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요 14:21).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지(τηρέω)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다’(요일 2:4)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τηρέω)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τηρέω)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테레오’(τηρέω)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샤마르’(שמר)인데 ‘울타리 치다, 지키다, 보존하다, 지키다, 보관하다, 축하하다, 책임지다,
구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솨마르’(שמר)를 파자하면 ‘분석된 진리의 말씀으로 시작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창세기 2장
15절에 등장.
타락하기 이전에 그들에게 부탁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שמר) 하시니라’(창 26:5)는
말씀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항목 하나 하나를 모두 지켰다는 말이 아니라, 그 말씀을 마음에 두었고 자기 마음으로
품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שמר)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
예수님
역시 하나님 말씀을 지켰습니다.
그 분의 하나님 말씀 지킴 방식은 십자가 방식이었습니다.
퓔라쏘하여 소극적으로 하나 하나
따지면서, 그대로 기록된 그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었으니까, 기록된 대로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 당신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십니까?
묻는 태도에서 시작합니다.
그 분은
하나님과의 매일의 교제 가운데서 그 말씀 지켜내는 방식으로 말씀을 지켜 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자기 내부에, 마치 자기 자신의 것으로 동일화 즉, 육체화시켜가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육의 사건입니다.
성육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하나님 말씀 지킴은 십자가에 달려 자신의 모든 영적 재산을 내어주기까지 하면서, 남을 살리는 방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말씀 지킴 방식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신적 사상을 단순히 전달하는 말이 아닙니다.
윤리 도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 성육하는 말씀이며, 또한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본다, 지킨다,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 속에서, 그리고 역사 속에서 육화 되어가는 것을 의미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의 현실과 세상이 요구하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 삶이 우리 교회가 답하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세상에 담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퓔라쏘 하기를 원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니까 말입니다.
당장 경건한 것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 당장 예수 잘
믿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지금 예수를 향해서 돌을 든 사람들은 자기들은 정말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 퓔라쏘 하는 사람들로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퓔라쏘 식으로 보고, 믿고, 지키고자 한다면, 그 사람의 손에는 분명 돌이 들려져 있을 것입니다.
퓔라쏘 식의 교회는 군대식으로 일사불란하게 잘 움직이며, 뭔가 성공한 것 같고, 부흥한 것 같고, 자기들만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잘 진행되어 가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곳에서 떠나십니다.
우리는 퓔라쏘해서는 안됩니다.
테레오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테레오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께서도 51절에 말씀하시지만, “내 말을 테레오” 하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말” 예수의 말로 테레오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말씀, 십자가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테레오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라는 방식입니다.
사람을 정죄하기 이전에, 나에게도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이웃을 정죄하기 이전에, 나를 살피고, 이웃을 살피는 일입니다.
돌을 내려놓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돌을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 방식의 하나님 말씀 지킴이가 없는 곳에는 십자가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8장 59절에, 두 개의 동사에 주목 하시길 바랍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숨기십니다.
또 하나는 성전에서 나가시더라. 즉 떠나가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숨기는 것과 성전에 떠나가는 것은 다른 동사이지만, 숨기는 것은 떠나는 것이고, 떠나는 것은 숨기는 일입니다.
회당에서 나가다,
즉 하나님의 백성의 성전에서 나갑니다.
이가봇의 사건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사무엘상 4장에 나오는이가봇 사건을 기억합니다.
습관적인 제사 예배 생활과 하나님 말씀 지킴이는 이가봇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방식으로 말씀을 지키며 십자가로 살아가는 영혼들을
기뻐하시는 삶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며”(유 24).
저자는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백성들을 향하여 위로와 기도로 권면합니다.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다”는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신다”(공동번역)는 뜻입니다.
보호하다, 지키다는 군사적으로 경계하여 안전을 지키다, 따라서 눈동자같이
지키고 보호하는 것을 의미하는 ‘퓔라소’(φυλάσσω)를 번역한 것이며, “거침이 없다”는 비실비실하여 넘어지지 않는, 또는
엇나가서 실수와 죄를 범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아쁘따이스또스’(ἄπταιστος)를 번역한 것입니다.
세상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는 것 같습니다.
비틀거리며 아슬아슬한 길을 걸어가는 것 같아서, 우리의 마음이 더욱 작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자들을 향하여, 저자는 용기와 위로 가득한 권면의 말을 심어 줍니다.
결단코 넘어짐이 없도록 지금도 경계 보초를 서시고 계신
주님께서 마침내야 우리를 “기쁨으로 설 수 있게”(24) 하여 주실 것이라는 믿음에 찬 소망입니다.
이 희망 가득한
기쁨으로, 오늘도 질병으로 신음하는 이웃들과, 그들을 보살피는 의료진들과, 안전과 평안을 위해서 수고하는 모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음을 보지 않는다!
예수님이
구원자시며, 신성을 지니신 분이심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제압하신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신분을 헐뜯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다, 귀신 들렸다!
주님은 이들에게 반박하십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나를 믿으면 죽음을
보지 않아!
나는 너희의 죽음을 해결하러 온 구세주야!
나는 너희를 죽음에서 구원할 메시아야! 51절을 보세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51)
‘진실로 진실로’의 귀절입니다.
본문 중에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구원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로, ‘내 말을 지키면’
지킨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지킨다는 말과 믿는다는 말을 거의 동의어로 사용합니다. 내 말을
지킨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내 말’(τον εμον λογον)의 뜻은 ‘주님의 모든 말씀’ 곧, 구원
도리인 복음과 윤리적 교훈들을 총칭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주님이 전하신 말씀 전체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요한이 쓴 글에 보면 ‘지킨다’는 동사가 많이 나옵니다. 요한복음에 18번, 요한1서에 7번, 요한계시록에 11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믿음이란, 곧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14:15,23)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 종교 개혁자 죤 칼빈은 본문에 “지킨다”는 말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가르침에 대하여 당나귀처럼 목이나 꺼떡거려 찬성을 표시하거나, 혀로 공언하는 것만이 아니라, 보물처럼 그 가르침을 지키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기는 것은 곧 주님을 믿는 증거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면 당연히 그의 말씀을
생명처럼 귀중히 여기고 지킬 것입니다. 말로만 믿는다고 선전하는 사람이나, 주님의 말씀이 다 옳다고 찬성하는 사람이 참 신자가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그 말씀을 지키는 자가 참 신자입니다.
둘째로, 죽음을 보지 않는다(never see death)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을 보지 않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는다? 표현이 좀 색다릅니다. 죽는다는 말입니까?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죽음을 보지 않는다 하니까 당장 유대인들이 대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52) 유대인들은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말을 죽지 않는다는 의미로 알아들었습니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죽었고, 위대한 선지자들도 죽었는데 예수 당신이 누구기에 감히 죽지 않는다고 하는가? 예수 자신이 죽지 않는 것도 이상한 데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보지 않는다’ 하니 무슨 말인가? 다른 사람들까지 죽지 않게 한다는 말이 아닌가?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말의 첫 번째 의미는 영적 죽음을 겪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즉시 그 영혼은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모든 형벌을 면합니다. 지옥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영적 신분의 회복입니다.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영혼 구원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육신적인 죽음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잘못 된 질문을 합니다.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53) 주님은 영적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영적
죽음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에 비록 육신이 죽음을 당할지라도 영혼은 살아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죽음에 집중하지 않고 생명에 집중하고 산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내다보고 안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never see death)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never taste of death)는 말로 오해했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을 볼 필요도 없고, 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장차 다시 사는 부활만 보고 기뻐하며, 영혼은 하나님의
품에서 안식만을 누리면서 삽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 두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죽음을 보지 않게 하시고, 영생을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먹으면 어떤
사람이든지 영원히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먹고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갈등이 생기는 것은 작은 머리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해하시는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으로 무한하고 영원하신 창조주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머리와
이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분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지구의 자전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지구가 돌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는 것만 진리가 아닙니다.
세상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것이 세상입니다.
내가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손바닥뿐입니다.
만지지 못하고 느낄 수 있는 세계는 무궁무진합니다.
자연 세계보다 더 넓은 것이 영적 세계입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육의 존재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인간 육체의 한정된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지키다(5083) 테레오(tērĕō) τηρέ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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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I am telling you what I have seen in the Father's presence, and you do what you have heard from your father.
내 아버지와 너희 아비란 말씀은 내 아버지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너희 아비는 너희 육신의 아버지를 말합니다.
아버지어와 아비라는 헬라 단어는 "파테르(patēr. πατήρ)" 라고 합니다.
'파테르'라는 단어는 "아버지" 또는 "조상"이란 뜻으로 성경에서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본 것(호라오. hŏraō. ὁράω)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들은 것(아쿠오. akŏuō. ἀκούω)를 이야기 합니다.
본 것과 들은 것의 차이를 "호라오"와 "아쿠오"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호라오와 아쿠오의 차이에 따라 증인의 자격이 결정됩니다.
증인이란 들은 것이 아니라 본 것이 분명한 사람을 말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참된 것도 들을 수 있지만 소문에 의한 거짓된 것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 것은 정확하고 분명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위로부터 온다는 것은 만물 위에 계신 것을 말합니다(요 3:31).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습니다(약 3:17).
그러나 땅에서 난 것은 시기와 다툼으로 나타납니다(약 3:14).
이러한 것들은 세상적이며 정욕적이며 마귀적이므로 요란하고 악한 일이 자주 일어날 뿐입니다(약 3:16).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합니다.
이와 같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아브라함의 후손답게 행동하라고 깨우치셨습니다.
육신적으로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고집하지 말고 온전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기 위하여 영적으로 깨어나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선택하셨던 예수님처럼 영광과 번영의 휘황찬란한 길이 유혹할지라도 그 길을 떠나 고난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 물욕에 눈이 어두워진 선지자 발람처럼 당나귀에게 책망을 받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 비록 좁은 길과 좁은 문을 지날지라도 착하고 충성되다는 칭찬을 듣는 믿음의 사람으로 꿋꿋하게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우리의 눈을 들어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하시갖추시줄이쉬그것을 내 아버지와 너희 아비하면서도 아브라함처럼 믿고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부라함
본 것(3708) 호라오(hŏraō) ὁράω
들은 것(191) 아쿠오(akŏuō) ἀκούω 스트롱번호 191
아버지, 아비(3962) 파테르(patēr) ατήρ, πατρός, ὁ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 이 말씀도,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사실을 지적한다.
이 사실은, 역시 그들과 예수님과의 영적 차이점에서 나타난다.
그들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더면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셨던 예수님과 일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불일치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현재에도 하나님 아버지 곁에 계셔서 그의 보시는 것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계시하여(말씀하여) 주신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아버지(곧, 마귀)에게 들은 것을 행하였다.
예수님의 역사는, 모두 다 계시를 목적한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언행이 "말씀하심"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언행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그 모든 것이 다 죄악이다.
이스마엘(하나님께서 돌보신다)
그 천사가 "사래의 종 하갈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고 물었다.
"나의 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치는 길입니다."
하갈이 이렇게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는 주인 곁으로 돌아가, 고생을 참고 견디라면서 이렇게 일러주는 것이었다.
"내가 네 자손을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불어나게 하리라."
야훼의 천사는 다시 "너는 아들을 배었으니 낳거든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여라.
네 울부짖음을 야훼께서
들어주셨다." 공동번역 창세기 16:8-11
구약성서 창세기와 쿠란에 등장하는 인물로 아브라함의 서장자이다.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돌보신다"이다. 쿠란에 기록된 바에 따라 이슬람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를 이스마엘의 자손이라고 여기며 아랍인의 시조로 불리는 인물이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종교개혁자 루터가 당시 부패하고 타락한 로마 교회의 회개를 외치며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의 정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붙인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16세기 종교개혁의 출발점이 되었는데, 개혁교회는 이 날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말씀’으로 교회가 새로워지기를 다짐하는 기념일로 삼았고,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주신 말씀도 부패한 유대교를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종교개혁의 의미를 되새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7장으로부터 시작된 초막절 전후에 있었던 예수님의 행적 중에서 열한 번째 단락으로,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에 있었던 ‘아버지 논쟁’에 대한 기록입니다.
1. 먼저, 37절의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유대인들은 누구에게든지 자랑할 만큼 훌륭한 믿음의 사람인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이었습니다(창 12:1-3).
그리고 믿음을 의로 인정받았습니다(창 15:6, 롬 4장).
선한 일을 하거나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여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신 첫 사람이었습니다(갈 3:6-9).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롬 4:16).
그리고 유대인들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모세, 다윗, 다니엘과 같은 주옥같은 믿음의 조상들을 둔 믿음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당시는 ‘화려한 성전’, ‘끊이지 않는 제사’, ‘수많은 종교지도자들’ 등 그 어느 시대보다도 신앙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들이 이처럼 탄탄한 신앙 전통을 가졌음에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은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오늘 본문의 그들은,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거부하며 대적하고,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율법, 곧 성경을 함부로 왜곡하여 수많은 신앙의 전통과 규례를 만들었고, 그렇게 왜곡된 전통과 규례를 맹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지자 사탄이 그들의 육체적인 욕구를 제물 삼아 그들의 영적인 눈을 흐리게 했고, 그들의
영적인 눈이 멀어지게 되자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죄인으로 몰아 죽이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이 유대인들의 영안을 멀게 한 도구는 다름이 아니라 그들의 조상 때부터 계속해서 만들어 온 ‘신앙의 전통’이었습니다.
사탄은 유대인들의 탐욕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보다는 형식적인 신앙의 전통에 집착하게 만들었고, 그를 통해 교만한 마음에 빠지게 했습니다.
자신들은 회개할 죄도 없고, 죄사함을 받을 필요도 없다고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사탄에게 깊이 미혹 당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앞서 회개를 선포한 ‘세례 요한’을 외면했고, 오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믿음의 권고에도 귀를 막았습니다(마 11:12-19).
여러분, 신앙의 전통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지켜야 할 매우 중요한 유산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러한 신앙의 전통이 외적인 형식에 머물게 될 때에는 “사탄이 강력하게 역사하여 오히려 멸망의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훌륭한 신앙 전통을 지닌 가문 출신도 있고, 또 교회를 위해 큰 헌신을 하고 계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런 점이 성경의 가르침을 넘어서서 자신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면, 그러한 복된 일들이 오히려 자신을 넘어뜨리는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먹잇감은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입니다.
가진 것이 많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깊은 사람일수록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기도로만 영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죄”라고까지 고백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삼상 12:23)
그리고 사도 바울도 로마서 1:9에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라고 고백했고, 데살로니가전서 5:17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지난 과거의 신앙의 자랑거리, 지금 가지고 있는 많은 은혜의 선물이 참으로 소중하지만, 그러나 더 소중한 것은 “오늘 이 순간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전통이나 받은 은혜를 가슴 깊이 품고 감사하되 “나는 과연 진리 안에 거하는 참된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가?” 스스로를 점검하며 하나님의 뜻에 더욱 순종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38절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이려고 하는 원인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여기서 ‘너희 아비’는 유대인들의 조상들을 지칭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유대인의 조상 중에는 휼륭한 믿음의 조상이 있었던 반면,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상숭배를 일삼고 온갖 죄에 물든 조상들이 더 많았습니다(마 24:29-36).
그들은 율법, 곧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악행을 저질렀는데, 특히 ‘신·구약 중간기’ 또는 ‘침묵기’라고 칭하는 주전 400년경부터 성경 해석과 주석에 대한 많은 책들을 임의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성경보다 종교지도자들이 가르치는 인본주의적인 종교 규례를 하나님의 뜻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아가 고난받는 종으로 오신다”는 성경의 예언도 모르고 있었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믿지 못했습니다(사 53장).
그들은 인본주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들은 것으로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대에도 성경보다는 성경을 해석한 글들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각 교단들 마다 자신들의 신학을 가지고 있고, 강조하는 부분이나 해석도 조금씩 다릅니다.
더군다나 너무나도 많은 성도들은 성경을 직접 읽는 것보다 그렇게 해석된 말씀을 듣고 읽는 것을 더 좋아하고 신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넘쳐나는 교리와 신앙 서적 중에는 인본주의에 물든 글들이 너무나도 많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와 다르지 않을 만큼 ‘풍요의 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의 푯대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여 자신의 평안과 풍요를 이루기에만 급급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공로를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누리려고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제자 삼으신 것은,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구원받은 자로서 믿음의 삶을 살게 하심인데, 예수님의 공로를 누리기만
할 뿐, 예수님께서 주신 자기 십자가가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성도들이 넘쳐나는 것이 바로 이 시대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성도로서 자신의 삶의 자리가 어디이고, 그 삶을 통해 어떠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는 성도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복을 누리기에만 급급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땅에서의 복을 추구하고 누린 자들은 하늘나라에서의 상급이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마 6:1-21).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의 복을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사용함으로 ‘하늘의 복을 쌓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42, 마 19:21, 마 28:18-20).
그런데
이러한 복음이 사탄의 달콤한 미혹에 빠진 목회자들에 의해 교묘하게 왜곡되어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처럼 ‘풍요의 신앙’으로 성도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이 시대의 신앙의 척도로 자리 잡고 말았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여러분, 만일 이 땅에서의 복을 받는 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이라면, 믿음의 본이 되시는 우리 예수님은 왜 그렇게 사시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세상의 복을 조금만 인정하고 받아들이시면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배척당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지도자가 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조금도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셨기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말씀하신 것 아니겠습니까?(마 8:20)
그러나 그럼에도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모든 복을 버리고 고난의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마음껏 누리되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마귀의 미혹에 빠져 죄의 도구로 삼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면 우리는 물론이고, 우리 자녀들은 더욱 마귀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가슴에 품되,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에 힘씀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삶,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는 축복된 삶을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39-43절에 유대인들이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라고 반박하자, 예수님께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를 사랑하였을 것이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44절에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그리고 47절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너무나 분명하고 단호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알든 모르든 사탄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했던 당시 유대인들을 향해 ‘마귀의 자녀’요 ‘마귀에게 속한 자’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아니라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었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천국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6:60 절의 말씀처럼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했습니다(요 6:66).
그런데 그들은 반대로 사탄의 말은 매우 잘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려던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 수많은 인본주의적인 규례들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탄의 미혹에 아무런 저항없이 따랐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율법도 잘 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을 능력은 없었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이미 사탄에게 속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탄의 미혹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잘 이해하고 듣는가에 따라 그 소속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요 10:4-5).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들은 누구의 말을 더 잘 이해하고 따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불의와 죄와 불신앙을 조장하는 사탄의 미혹입니까?
자신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 반대로 사탄의 미혹에 빠져 살고 있는지 살펴보면 현재 자신의 영적인 소속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사탄에게 미혹되어 타락한 원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자신들은 무조건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고 천국으로 인도해 주신다고 맹신하며, 조상들로부터 시작된 인본주의적인 종교 규례를 신앙의 근거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사탄을 대적할 힘을 상실하고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님을 믿기에 무조건 천국으로 갈 것이며,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보호해 주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오늘 본문의 유대인의 오류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도 하지 않고 예수님의 계명도 불순종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탄으로부터 지켜주실 줄 믿는다면 이 또한 유대인들의 맹신과 다름이 없습니다(요 14:21).
고린도후서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린도전서 4장에서 예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세상 죄악에 물든 고린도 교회의 몇몇 성도들을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고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여러분, 사탄은 오늘도 끊임없이 성도를 타락시키려고 온갖 술수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 한순간도 육체의 정욕과 교만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교훈의 말씀을 기억하고, 매일 같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사탄의 미혹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고전 10:12).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한 발자국만 벗어나도 사탄의 덫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유념하고, 예수님의 계명과 언약의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사탄과 싸워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깨닫고 그 가르침만을 따름으로써 하나님께 속한 참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난 과거 누렸던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소중하지만, 그러나 더 소중한 것은 “오늘 이 순간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임을 가슴 깊이 깨닫습니다.
받은 구원에 안주하며 주신 복을 누리기에만 급급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힘씀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삶,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는 축복된 삶을
사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To the Jews who had believed him, Jesus said, "If you hold to my teaching, you are really my disciples.
한글개역성경에서 "구원"이란 단어가 사용된 말씀은 530구절입니다.
반면에 "번성"이란 단어가 사용된 말씀은 64구절입니다.
이러한 사례를 살펴볼 때 성경이 우리들에게 강조하려는 것은 세상적인 번성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참 내 제자는 세속적인 번성을 추구하는 일군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어가는 일군이라고 하겠습니다.
제자가 되려면 "내 날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거하다는 헬라 단어는 "메노(mĕnō. μένω)"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메노'가 사용된 말씀을 소개합니다.
마태복음 10:11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거하다(메노. mĕnō) μένω 스트롱번호 3306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마태복음 10:11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히브리서 13: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히브리서 12:27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 "자기를 믿은"이란 말은, 아직 구원 받는데 이를 수 없는 자들이다.
이 사실은, 여기 나타난대로 그들이 예수님과의 변론에 있어서 여러가지 좋지 못한 언행을 취한 것을 보아서도 알려진다.
40,48,52,59 절 참조. "내 말에 거하면" 이란 말은 계속적으로 신앙함을 가리킨다.
제자가 되려면 가르침의 말에 거해야 합니다.
거한다는 헬라 단어는 "메노(mĕnō. μένω)"라고 합니다.
'메노'라는 단어의 속 뜻은 "그 안에서 살아간다"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의 말씀안에서만 살아야 합니다.
만일 말씀 밖으로 나가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불순종을 말합니다.
따라서 순종하는 신앙은 제자가 되려는 믿음이지만 불순종하는 것은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제자가 되는 과정을 시간적으로 계산해 보면 얼마나 어려운가를 짐작케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3년 동안 함께 생활하며 가르치고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3년을 날 수로 환산하면 1,095일 입니다.
3년을 시간으로 환산하면 26,280시간 입니다.
일주일 동안 몇 시간을 예배와 기도와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지내고 있습니까?
만일 하루에 한 시간이라고 하면 일주일에 일곱 시간입니다.
일주일에 7시간은 일년동안 364시간이 됩니다.
26,280시간을 364시간으로 나눈다면 대략 72년이 소요됩니다.
72년 동안 단 한번도 단 한 시간도 실수하지 않고 정확하게 말씀대로 순종해야 겨우 제자가 될 수 있는 시간의 양을 채울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았고 가르침과 삶을 배웠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듣고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강력한 도움이 필요합니다.
예수 안에 거하는 제자가 되려면 먼저 성령의 도움을 절실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도 주 성령의 이끄심을 받기 위하여 끈질기게 간구하며 부족함을 채워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 "자기를 믿은"이란 말은, 아직 구원 받는데 이를 수 없는 자들이다.
이 사실은, 여기 나타난대로 그들이 예수님과의 변론에 있어서 여러가지 좋지 못한 언행을 취한 것을 보아서도 알려진다.
40, 48, 52, 59 절 참조. "내 말에 거하면" 이란 말은 계속적으로 신앙함을 가리킨다.
파스칼, 공아(空我)와 진아(眞我)
147. 우리는 자신 안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 안에서 영위하는 생활에는 만족하지 않는다.
남의 관념 안에서 어떤 가공적인 생활을 하려고 생각하며, 그러기 위해서 사람들의 눈에 띄려 노력한다.
우리는 부단히 자신의 가공적인 존재를 장식하고, 그것을 지니려고 애를 쓰며 참된 존재를 등한시한다.
만약 우리에게 평정이라든가 관용이라든가 충실 같은 것이 있으면, 그러한 미덕을 우리의 가공적인 존재에 결부시키기 위해 남에게 알려지기를 열망한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가공적인 존재에 결부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서 떼어 팽개쳐버리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용감하다는 평판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자진해서 비겁자가 된다.
공아(空我)가 없는 진아(眞我)에 만족하지 않고, 진아와 공아를 때에 따라서 바꾸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가 허무라는 명명백백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왜냐하면 자신의 명예를 보존하기 위해 죽으려 하지 않는 자는 불명예스러운 자가 되고 말 테니까.
아이러니(irony)란 말과 행동이 서로 모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이러니에는 언어적 아이러니와 상황적 아이러니 그리고 구조적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30절).
그런데 본문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리.
아이러니의 세 가지 종류는 언어적 아이러니, 상황적 아이러니, 구조적 아이러니라고 합니다.
본문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1-38절을 다시 한번 해석하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이 놓인 상황은 초막절의 하이라이트, 클라이맥스 때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민족의 해방을 축하하고 기념하였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마이크를 잡으시고 설교를 행하셨는데, 의외로 상상할 수 없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예수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었다"라는 것입니다. 30-31절에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었던 유대인들이 여전히 예수를 돌로 쳐 죽이고자 하였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에 관하여 지난주 묵상하였습니다.
예수를 믿지만, 예수의 말씀을 듣고 믿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죽였던 유대인들,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예수를 믿었을까? 궁금하여집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믿는다고 하면서도, 때때로 믿는 사람을 배신할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여차하면 바로 배신할 수 있는, 즉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예수를 죽일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을 가진 유대인들에 예수께서 먼저 던지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31절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입니다.
너희가 나를 믿느냐? 그렇다면 이제 “내 말에 거하라"라고 하십니다. “거하라!”, 명령형입니다. 아주 강하게 명하고 계십니다. 메이네테,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믿는 것에서 이제는 거하는 것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거하다”(메노)는 단어는 우리가 이미 몇 번이고 만났던 용어로서, 요한복음을 이해하는데 정말 중요한 키워드 가운데 하나입니다.
μένω 스트롱번호 3306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는 아주 유명합니다. 알기 쉽게 풀이된 말씀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15:4).
15장은 “내 안에, 즉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라고 나오지만, 오늘 본문은 “내 말에 거하라"라고 합니다. 똑같은 동일한 이야기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거하듯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안에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안에서 생활한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먹고살고 생활한다면 무엇이 바뀌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삶의 스타일이 바뀝니다. 그 말씀
안에 걸맞은 생각과 행동이 당연히 뒤따라야 합니다. 마음, 생각, 판단 기준, 삶의 양식, 삶의 행동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만약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한다면, 내 말투, 내 행동, 내 생각, 내 판단 기준이 자동적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사고방식이 바뀌어 간다는 것입니다. 행동양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하기 때문에, 그 말씀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결정하는 것이 바로 그분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거함으로써 예수님은 먼저 제자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다.” 말씀이 왕성하여지면, 교인 숫자가 늘어나고, 그래서 교회가 커져간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성경의 논리대로 하자면, 제자 수가 늘어납니다. 한국교회가 바른 역할을 못하는 것은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많은데, 제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원하시고 계시는 것은 말씀 안에 거하고,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그래서 그 생각과 행동이 말씀 중심으로 변화된 제자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께서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라고 하십니다. 말씀 안에 머무는 삶, 말씀 안에서 생활하는 제자가 되었을 때, 진리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머문다는 것은 이론적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천적으로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현재형이 사용되다가, 여기서는 미래형이 사용됩니다. 말씀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고, 생활할 때 제자가 되고, 제자가 될 때, 진리를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계시를 꽉 붙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는 지적인 지식이 아니라, 실제적이며, 현실적이며, 실존적인 것입니다. 내가 그분의 말씀 안에 생활하며 살아갈 때, 마침내 보여오고, 깨닫게 되고, 느껴질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머리만으로는 알 수 없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하심 안에 생명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너희가 말씀 안에서 생활함으로써 진리를 깨달을 때, 진실로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성경 구절은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암송하며, 자주 간증의 말씀으로도 사용하실 것입니다. 실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아주 자유롭게 통용되는 귀한 말씀입니다.
외국의 유명한 대학교 도서관에 가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문장을 커다랗게 해서 걸어 놓고 있습니다.
하물며
일본 국회 도서관도 걸어 놓았습니다.
그만큼 좋은 말이라는 것이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진리를 발견하라! 그리하면 너희 인생이 참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뭐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성도님들 가운데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시는 분들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세계의 유명한 대학 도서관들과 사람들이 오늘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의도를 본문에 충실하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일차적으로 일반 계시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의적인 해석은 주의를 요합니다. 우리는 보다 본문에 충실하게 해석을 해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에 진리와 자유에 관한 논리가 있었는데, 그것을 먼저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논리도 이와 비슷한데, 그들에게 진리는 율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율법 안에 거하는 자들, 율법을 엄격하게 지켜 행하는 자들은 그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써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주석에 이러한 설명이 있습니다. 율법의 멍에를 스스로 짊어지는 자는 세상의 모든 멍에가 그에게 살아지게 될 것이다. 즉
자유롭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논리는 동일한 구조이지만, 조금 다릅니다. “내 말에 거하라, 생활하라, 그리하면 제자가 되고, 진리가 보여 올 것이다.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해 줄 것이다.”입니다.
말하자면,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나를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너희들은 율법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 율법 안에 거하고 생활할 때, 참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율법이 아니라, 내 말에 거하여야 한다. 내 안에 거하라. 내 안에서 생활하라, 그리하면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고, 그 진리로 말미암아 너희가 참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자유와, 예수가 주장하는 자유가 무엇이 다른지를 명확하게 분간하여야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우리는 간음한 여인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요한복음 8장 1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 왔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근거하여(즉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녀를 정죄하고,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그때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즉, 유대인들은 율법이 진리이며, 그 율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참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여인을 죽일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말하는 자유, 율법이 가져다주는 자유란 “율법에 근거하여 사람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자유”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말하는 자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간음한 여인을 살리는 자유였습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동일한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며 생활하는 자들이, 한쪽은 죽이는 자유로, 다른 한 쪽은 살리는 자유로, 나누어졌던 것입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돌을 던지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살아졌다는 것은 비록 그들이 잠시 동안이지만 예수의 말씀에 거함으로서, 살리는 자유를 경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계속해서 머물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계속해서 그 안에 거하면서 생각의 철저한 변화, 행동의 철저한 변화, 기준의 철저한 변화까지 맛보는 "머묾"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머무르다’, meno, 메노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잠시나마 분명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 말을 듣는구나!!! 그래이제는 내 말에서 떠나지 말고, 그 말 안에 머물기를 바란다!!! 꼭 내 제자가 되어라. 마음으로 그렇게 바랬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기 이전에 먼저, 그 말씀으로 너희 자신을 둘러 보고, 너 자신을 먼저 밝히 까발리고, 그래서 먼저 너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죄하여 보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남을 죽이려는 생각, 남을 비방하려는 생각, 남과 싸우려는 생각이 살아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것은 남을 살릴 수 있는 자유이며 더 나아가 자신을 살리는 자유입니다.
여러분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하니까, 유대인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고 하느냐.” 반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유대인들은 스스로는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전혀 자유롭지 않은데, 본인들은 정작 자유롭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왭니까? 율법을 가지고 있고, 율법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이웃을 정죄해서 그 이웃을 죽일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참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율법에 근거해서 사람을 자유롭게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 그래서 자기들이야말로 참 자유인이라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죽일 수 있다는 자유로 인생을 살아갔던 자들이었습니다.
율법을 남을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면 남을 죽이는 자유로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율법을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로 삼아서, 언제나 그 말씀의 채찍질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그 말씀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게 된다면 이웃의 영혼을 살리는 자유, 더 나아가 자신을 살리는 자유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살리는 자유입니다. 그 자유를 깨닫게 해주는 진리는 당신이 말씀 안에 거할 때입니다.
“자유롭게 하다.”
set free, ἐλευθερόω, 엘레위테로, 엘레위테로사이, 속박에서 건져내다, 의무에서 건져 자유롭게 하다. 마치,
구약의 모세가 그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살리는 자유로 건져 내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설움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집 없는 설움입니다.
집이 없어 남의 집을 살면 아이들이 마음껏 놀지도 못합니다.
큰소리도 내지 못합니다.
언제나 주인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다가 나가라면 언제든지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집 없는 설움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나라 없는 설움입니다.
나라 없이 사는
민족들을 보십시오.
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인들이 왜 저렇게 싸우고 있습니까.
내 나라 때문입니다.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 집과 내 나라는 자기가 지켜야 합니다.
내 나라는 그만큼 소중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자유함이라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 자유함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다시는 죄의 멍에를 메지 말라.”
3,1절 때 모두 자유를 잃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자유를 잃은 민족은 몸부림을 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자유를 잃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내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매일같이 당파싸움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그 나라가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일본은 벌써 명치유신으로 나라의 근대화를 이루어 세계로 눈을 뜨고 군대를 육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는 안으로 문을 잠그고
쇄국정치를 했습니다.
미래에 대해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안에서 싸움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남으로부터 지배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국가나 미래에 대해서 준비가 없으면 마침내 퇴보하고 망하고 지배당하게 됩니다.
탈무드에
보면 사람이 꼭 해야 할 일이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나무를 심고, 책을 쓰고, 후손을 낳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탈무드라는 책은 유대인들에게는 성경 다음가는 교훈서입니다.
유대인들은 3500년 동안 압박당하며 살았던 민족입니다.
그리고
2500년 동안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생활한 민족입니다.
그런 고난을 당하며 살아가는 동안 선조들이 얻은 뼈저린 교훈들을 모아
엮어놓은 책이 탈무드라는 교훈서입니다.
그러니 그 교훈의 내용이 얼마나 심오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유대인들이 그토록 중요시 하는
책이 탈무드입니다.
그 책에서 말하기를 자신이 경험한 것을 후손에게 정신적 유산으로 물려주라고 했습니다.
뭘 물려주어야 하는가
하면 그것이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심는 일입니다.
심는다는 말은 내일을 생각하는 삶입니다.
심는 삶은 오늘 당장
결과를 얻는 삶이 아닙니다.
심는 삶은 오랜 시간동안 무조건 수고하고 땀 흘리고 인내하는 삶입니다.
그래야 그 삶에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열매가 빨리 맺으면 나도 먹을 수 있습니다.
늦게 맺으면 그 대신 내 후손들이 먹게 됩니다.
그것이 심는 자의 삶의
철학입니다.
그래서 조상이나 선배나 부모는 후손들을 위해서 오늘 열심히 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책을 쓰는
일입니다.
인생의 경험은 참 소중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실패하면서
발전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바로 서게 됩니다.
그 시행착오들을 통해서 얻은 지혜를 모두 후손들에게는 교훈으로 주라는 것입니다.
선조나 부모 그리고 선배나 연장자는 후손들에게 그 경험담을 들려줄 책임이 있습니다.
인생의 삶의 깊은 방정식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젊어서 마시고 취하고 방황하고 돌아다녔는데 돌아다녀보아도 별 것이
아니더라, 오히려 인생에 오점만 남기게 되더라 하는 시행착오의 교훈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가 들려주어야 할 말이고
어른들이 다음 세대에게 들려주어야 하는 교훈입니다.
오늘 책들이 참 많습니다.
책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참 좋은
책들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 책들은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자녀들에게 참 좋은 영향을 미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아들아
머뭇거리기에는 시간이 없다”,
“오늘 방황하는 아들들에게”,
“아들아 당당하게 부자로 살아라”.
참 좋은 마음의 양식과 정신적
힘과 지혜를 주는 책입니다.
또 노아 벤샤(Noah Benshea)가 쓴 “빵장수 야곱의 영혼의 양식”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말들이 나와 있습니다.
“신이 우리의 두 팔을 길게 만든 것은 서로 안으라는 것이다”,
“사람은 두려움과 씨름하면서 더
강해진다.”
“당신 자신이 자식들이 커서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되라”,
“배고프면 밥을 먹고 다 먹었으면 그릇을 씻으라.”
모두
소중한 경험들을 내 후손들을 위해서 써 놓은 책들입니다.
내 삶의 경험은 모두 내 후손들에게 참 소중한 교훈들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쓰라고 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강조하시기를 후손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역사속의 인간의
발자취를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발자취를 더듬어보면 그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흔적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후손을 낳아 기르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농사는 사람을
키우는 일입니다.
부모는 재산을 아끼지 말고 자녀를 교육시켜야 합니다.
땅, 재산, 집 여러 채 간직하고 자식으로 농사짓게 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부모는 자식을 길러 그 집안에 미래가 있게 하고 희망이 있게 하고 장래가 있게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곧 사회 발전으로 이어지고 국력의 발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무지하게 되면 늘 남에게 빼앗기고
지배받고 살아가게 됩니다.
지배받고 억압받고 사는 것은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나 불행한 일입니다.
자유함은 하나님이 보장하신
개개인에게 주어진 권한이고 은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너희는 자유하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사람이
규모 없이 살면 빚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빚을 지면 마음도 정신도 생각도 온통 얽매이게 됩니다.
빚은 잠도 안자고
늘어납니다.
그래서 빚진 사람은 하루도 마음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얽매이는 생활입니다.
요즘 카드 빚 때문에
강도로 돌변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마침내는 죽음을 택하기도 하는데 사람이 오죽하면 그런 길을 걷겠습니까. 카드를 긁을 때는 참
신나게 긁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도 없이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허황되게 살면 빚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자유를 잃게
됩니다.
일본에 침략당할 때 우리나라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때 삶에 무슨 규모가 있었습니까.
궁중에서는 날마다
싸움뿐이었고 누가 백성들을 돌보며 나라의 미래에 대해서 염려했습니까.
그러니까 이웃 사람들이 이런 백성 그런 나라는 지배해도
되겠구나 하고 지배한 것입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규모 없이 살면 남으로부터 지배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이렇게 규모
없이 살면 악습에 물들게 됩니다.
술에 얽매이는 것도 악습입니다.
술에 얽매이면 모든 자유를 박탈당합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폐인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것이 노예입니다.
악습입니다.
옛날에는 집집마다 술을 담가 먹었습니다.
겨울에 마시기 위해서
가을이면 집집마다 술을 담갔습니다.
그리고 긴긴 겨우내 술에 취하고 노름에 젖어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 사회가 건강하고 그
나라가 튼튼하겠습니까.
거기에 일본은 이 나라에 화투를 장려했고 아편을 장려했고 유곽을 전국 읍내마다 지어놓고 사람들을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이 백성들이 얼마나 잘 타락했겠습니까.
그래서 이 나라가 힘을 잃어버렸을 때 빼앗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타락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술의 타락이 오늘 얼마나 위험수위를 넘고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술 소비량은 세계
최고수준입니다.
모두 이 술로 인해서 우리사회가 알게 모르게 몸도 정신도 타락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음란문화는 어떻습니까.
인터넷만 열면 음란화면이 자유스럽게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니 이 땅의 젊은이들의 정신이 얼마나 망가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이
타락문화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시는 죄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진리가 자유하게
해 주는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나라나 규모 없이 살게 되면 이렇게 약화되고 건강성을 잃어 마침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Who are you?" they asked. "Just what I have been claiming all along," Jesus replied.
21절. 예수의 떠남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절. 유대인의 오해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23-24절. 위에서 오신 예수님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5절. 예수님의 정체
26-27절.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분
28절. 높이 들려질 인지
29-30절.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자니라"이 말씀에 대하여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 1. 그리스도는, 옛날부터 모든 족장들이나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되신 내용이란 뜻이라고 함.
유대인들은 그를 모를 수 없으리 만큼 겹겹이 계시(啓示)를 받아 왔고, 계약도 받아 왔다.
* 2. 예수님께서 그 성역 초기부터 자기가 누구라고 주장하여 오시던대로의 "그 이"란 뜻이라고 함.
3. 나는 너희에게 말하는 "그 처음"(곧, 만물을 지으신 영원하신 자)이라는 뜻이라고 함(Augustine).
그러면, 이 해석에 의하면, "그 처음이신 분이 너희에게 말씀도 하신다"(계시하신다)는 뜻을 이 문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4. 고데이(Godet)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곧, "처음부터"란 말을, "절대로"란 뜻이라고 하며, "나는 절대로 내가 선언하는 그대로이다"라는 말씀이라고 한다.
곧, 그가 선언하시는대로 메시야란 뜻이라는 말이겠다.
5. 본질적으로는 나는 너희에게 말하는 그 내용과 같다는 뜻이라고 함(J.H.Bernard).
곧, 예수님의 말씀이 계시하는 바 내용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뜻이다.
위의 모든 해석들 중에서 첫째나 둘째가 옳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이 해석들이 그 아래 문맥에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네가 누구냐?(Who are you?)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실 것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놀라운 여러 가지 일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신비한 능력에 대해서는 호기심을 갖고 있지만 아직 그가 기디리던 메시야라고 믿지 못하기 때문에 "네가 누구냐?" 라고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깨우치셨습니다.
"너희는 메시야를 찾기만하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올 수 없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 때문에 자기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하므로 이 사람이 자결하려는가 하고 의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결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두 눈을 뜨고도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을 일컬어 "눈 뜬 소경"이라고 합니다.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백성들에게 인자가 십자가에 달린 후에야 메시야를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신앙을 갖는 동기가 다양합니다.
첫째는 고난을 경험한 후에 예수를 만나는 사람
둘째는 고난을 모르지만 일찍부터 예수를 믿는 사람
셋째는 고난의 댓가를 치루고도 예수를 찾지 못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을 선물로 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뿐입니다.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처럼 고난을 경험하지 않고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고 날마다 주와 동행하는 믿음의 여정에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의 은혜가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나를 위하여
톨스토이의 단편 중 “세 가지 질문”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한 왕이 인생을 살아가다가 세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 질문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가 언제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한 현자에게 가서 묻자 그가 답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답을 얻지 못하고 나가는 길에 한 부상당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를 치료해 줍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왕을 죽이기 위해 매복해 있다가 친위대의 공격에 부상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현자가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 이 순간’이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지금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일’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얼마나 많은 헌신을 드렸는지, 얼마나 큰 체험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바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가 집중 하십니다.
오늘 말씀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받기는 받았는데 헛되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쓰인 단어는 “비어있는, 공허한”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받았는데, 그것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고 공허한 외침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으면 모합니까?
지금 그 은혜가 내 삶에서 나를 이끌어가는 능력이 되지 못한다면… 값없이 주신 그 은혜가 내 눈물이 되면 모합니까?
지금 내 안에 그 은혜를 나눌만한 기쁨이 없다면…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면 모합니까?
역경이 다가오면 한없이 절망의 나래로 떨어지고 있다면…”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보시며 한탄하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2절에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과거의 죄를 용서받은 것으로 천국을 가는 확신을 얻은 것으로 끝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누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사울 왕은 처음에는 겸손한 사람으로 누구보다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그것을 누리기 못하고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아들을 피 흘려 죽이기까지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은 값없이 주신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허비하고 살아가는 것은 죄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매일 우리의 통장에 86,400원을 넣어주는데 하루에 다 쓰지 않으면
사라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밤늦게 달려가서라도 다 쓰려고 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일 86,400초의 시간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것은 하루가 지나면 없어집니다.
하나님께 받은 이 은혜를 더 사랑하고 더 나누는 일에 사용하여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의 주신 은혜를 헛되이 받는 자가 아니라 가장 가치 있는 일에 사용하며 그 은혜를 누리는 하루가 되길 소원합니다.
–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여전히 불안하고 공허한 부분이 있다면, 받은 은혜를 누리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주님! 주님은 나에게 매일 은혜를 부어주시는데, 받은 것에만 만족하고 누리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은 믿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나에게 선물로 주신 하루를 불안한 마음에 헛되이 보내는 것인 아니라
믿음으로 가장 가치 있는 일에 사용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자동차 보험에 가입하는 이유는 자동차 사고가 일어났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동차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하겠습니다.
고 건강하게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의 부름을 받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아닐간강하게
상대방의 정체성을 알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입니다.
나는 내가 믿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나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예수님은 나의 그림자!
이것이 나의 대답입니다.
해가 맑게 빛날 때에는 그림자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어두운 밤이 되면 그림자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림자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내가 없는 것이 아니며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떠난 것도 아닙니다.
내가 존재한다면 나의 그림자는 항상 나와 함께 따라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나와 늘 함께 하십니다.
꿈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는 꿈을 꾸면 아침이 상쾌합니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주님이 없는 방황하는 꿈을 꾸고 맞이하는 아침은 어수선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그림자와 같이 때로는 보이게 때로는 보이지 않게 늘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실체가 분명해야 합니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그림자를 판 사나이> 또는 <피터 슐레밀의 기묘한 이야기> 라고도 한다.
줄거리
이 책은 피터 슐레밀의 기묘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피터 슐레밀은 어느날 파티에서 회색인과 조우합니다.
이 인물은 토마스 존의 하인으로 보였고, 토마스 존이 원하는 물건을 작은 주머니에서 꺼내어주곤 했습니다.
이 주머니가 탐이 났으나, 알 수 없는 거북함이 들어 파티를 벗어나다 회색인물과 마주칩니다.
회색인은 그에게 아름다운 그림자를
준다면, 금화가 나오는 주머니를 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그 주머니가 탐났던 슐레밀은 이를 수락합니다.
회색인은 즉시 주머니를 주고
그림자를 돌돌 말아 가져갑니다.
당장은 금화를 무한으로 가질 수 있어 기뻐했지만, 그림자를 잃은 그를 받아줄 세상은 없었습니다.
그림자가 없는 그를 세상은 등졌으나 그에게는 금화가 있었고, 충직한 하인 벤델이 있었습니다.
그는 벤델의 도움을 받아 한 마을에
정착하여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서 결혼까지 생각했으나, 결국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마을 사람에게 들켜 마을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이때 회색인은 다시 나타나 그에게, 영혼을 내게 준다면 그림자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그가 악마임을 깨달은 슐레밀은
이를 거부하여 그에게서 도망을 다닙니다.
악마는 계속해서 그를 유혹하지만, 금화를 주는 주머니를 던져버리고(주머니를 사용할 때마다
악마가 위치를 알게 되기 때문), 길에서 만난 상인에게서 장화를 구매하여 도망갑니다.
우연히도 이 장화는 마법 장화로, 한걸음에 동서양을 뛰어넘을 수 있었고, 그는 이를 계기로 동서양을 건너다니며 생물을 탐구하는 생물학자가 됩니다.
그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면서도 어리석은 선택을 했던 지난날을 후회하며 그의 절친한 친구인 샤미소(책의 저자)에게 이 일련의 이야기를 편지로 갈음하며 마지막 말을 남기며, 책을 마무리 합니다.
사랑하는 친구 샤미소, 나의 환상적 이야기를 간직해줄 사람으로 나는 자네를 선택했네. (중략)
친구야, 자네가 만약 사람들 가운데 살고 싶다면, 부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그림자를 중시하고 그다음에 돈을 중시하라고 가르쳐주게나.
출처 / 그림자를 판 사나이(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저, 138p)
감상평
이 책은 독특하게도 실존인물의 편지로 시작합니다.
1800년대를 풍미한 낭만주의 시인인 푸케에게 샤미소(작가)가 먼저 원고를
보여주었는데, 감명을 받은 푸케는 당시 이 원고를 편집장에게 보낼 때, 편집장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처럼 하여 이 이야기가 실제
인물의 이야기인 것처럼 각색을 했습니다.
이런 배경지식이 없던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뭐지?
이야기가 시작된건가?
그냥 편지인가? 했는데, 이 편지가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에필로그 격이었으며 현실과 소설의 구분을 허물어트려 이야기를 몰입하게 해주는 장치가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허무는 장치는 중간중간 등장합니다.
소설속 주인공은 종종 작가를 부르는데, "사랑하는 벗 샤미소"라
언급하며 실제 인물이 작가에게 편지를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이런 독창적인 소설기법이 19세기에 쓰여졌다는
점에서 또 한번 놀라웠습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라미제라블>이 생각이 났습니다.
라미제라블 속 장발장은 빵을 훔쳐 감옥살이를 했고, 전과가 있던
그는 사회에 섞이지 못해 정체를 숨기고 먼 타지에 정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줄곳 자신의 전과기록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까 매번
전전긍긍했죠. 소설 속 슐레밀 또한 많은 금화를 가지고 있으나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날까 전전긍긍합니다.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사회적 통념을 어겼다>라는 것으로 치환해서 이 책을 읽었고,
조금 더 편하게 해석하기 위해 <인간의 양심을 버렸다>로 해석했습니다.
즉, 그림자를 버리고 금화를 택한 그는 인간의
양심을 포기하고 물질을 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아마도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배척과 그보다 더 중요한
<그림자> 즉, 제 해석대로라면 사회적 통념의 준수를 강조합니다.
이 글이 쓰여진 시기는 1813년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난 19세기 초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부적 성장 속에서도 "부"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잃지 않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 책을 읽으며 생각이 난 <라미제라블>은 산업혁명 직후 발생한
프랑스혁명을 담고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를 관통하는 두 소설이 제 머릿속에서 이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흥미로웠습니다.
산업혁명 속에서 재화보다 가치있는 그 무언가를 강조한 <그림자를 판 사나이>.
그리고 이 책을 읽다보면 생각나는,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의미를 보여주는 <라미제라블>.
이 두 혁명기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문학적 전성기가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 페터 슐레밀은 사업 투자를 제안하기 위해 찾아간 토마스 융의 집에서 신비한 능력을 지닌 그레이맨을 만나게 된다.
그레이맨의 제안으로 페터는 그림자를 팔고 금화가 마르지 않는 주머니를 얻는다.
부를 얻은 페터는 호화스러운 생활을 누리려 하지만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도시에서 추방당한다.
그림자를 되찾기 위해 그레이맨을 찾아나서는 페터.
하지만 그레이맨은 일 년 후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떠난다.
하인 벤델과 함께 여러 도시를 떠돌며 살아가던 중 과거의 연인이었던 리나를 만나게 되고 다시 사랑에 빠진다.
일 년 뒤, 페터는 다시 만난 그레이맨에게 그림자를 돌려달라 요구하고 그레이맨은 그림자를 되찾을 수 있는 두 번째 거래를 제안하는데...
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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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
오늘 읽을 말씀 |
묵상 주제 |
10 |
27 |
주일 |
성령강림 후 제23주 / 설교 묵상 및 봉사와 섬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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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28 |
월 |
요한복음 8:21-30 |
네가 누구냐(25절) |
10 |
29 |
화 |
요한복음 8:31-36 |
참 내 제자(31절) |
10 |
30 |
수 |
요한복음 8:37-44 |
내 아버지와 너희 아비(38절) |
10 |
31 |
목 |
요한복음 8:45-51 |
내 말을 지키면(51절) |
11 |
1 |
금 |
요한복음 8:52-59 |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53절) |
11 |
2 |
토 |
요한복음 9:1-12 |
하나님의 하시는 일(3절) |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When Jesus spoke again to the people, he sai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Whoever follows me will never walk in darkness, but will have the light of life."
* 빛(포스. phōs) φῶς, φωτός, τ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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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I am the light of the world)"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산상복음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4).
나는 세상의 빛이라.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제자들을 말합니다.
제자들도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 되려면 먼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오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려면 먼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지 않은 믿음으로 세상에 나갔기 때문에 많은 교회가 있고 성도들이 있을지라도 세상이 변화되지 않고 점점 더 어둡다고 탄식하는 절망의 아우성이 크게 울리고 있습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물체를 "발광체"라고 합니다.
반면에 스스로 빛을 낼 수 없기 때문에 빛을 받아서 반사하므로 빛을 내는 물체를 "비발광체"라고 합니다.
태양은 발광체라고 하며 달은 비발광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빛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달이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태양빛을 받아서 그 빛은 반사하는 것이 마치 달빛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죄인은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없으므로 먼저 의로운 태양빛과 같은 세상의 빛이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빛을 반사하는 일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에베소서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착함(19) ἀγαθωσύνη, ης, ἡ 스트롱번호 19
의로움(1343) δικαιοσύνη, ης, ἡ
스트롱번호 1343
진실함(225) ἀλήθεια, ας, ἡ
스트롱번호 225
성경은 '빛'이라는 주제를 통해 하나님의 속성, 구원, 인도, 계시 등의 다양한 의미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빛은 성경
전반에 걸쳐 깊이 있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며,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빛의
히브리어적 배경, 성경 내에서의 상징적 의미, 그리고 빛이 가진 특징을 어떻게 묵상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찰하겠다.
성경에서 빛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오르' (אור)이다.
이
단어는 물리적 빛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영적, 도덕적 깨달음이나 진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히브리어의 '오르'는 문자적으로는 해나
불과 같은 물리적인 빛을 의미하지만, 성경에서 사용될 때는 하나님과 그의 본성, 그리고 그가 제공하는 영적인 지식, 진리, 구원을
의미하는데 자주 사용된다.
성경에서 빛은 창세기 1장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 가운데 첫 번째로
"빛이 있으라" (창세기 1:3)고 명령하신 후, 세상에 빛이 생겨난다.
이 사건은 빛이 창조 질서의 근본적인 요소임을
보여주며, 빛이 혼돈과 어둠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한다.
창세기 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이 구절에서의 빛은 단순히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창조 세계를 질서 있게 만들고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낸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혼돈과 질서 사이의 경계를 확립하는 역할을 한다.
성경에서 빛은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몇 가지 주요 의미를 살펴보고, 각각이 어떻게 우리의 묵상 주제로 연결될 수 있는지 살펴보겠다.
첫째로, 빛은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을 빛으로 자주
묘사하신다.
예를 들어, 시편 104편 2절에서 "주는 옷을 입듯 빛을 입으시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영광과
권능을 나타내시는 방법으로 빛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편 104:2: "주께서 빛을 옷처럼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이 구절은 하나님의 영광과 빛을 연결하며, 빛은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내는 도구로서 사용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본래 영광스럽고 순결하시며, 세상에 계시되실 때 그 영광의 빛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둘째로, 빛은 진리와 계시를 상징한다.
하나님은 빛을 통해 우리에게 진리를
계시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빛으로 비유되는 구절들이 이를 증명한다.
시편 119편 105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적인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자 빛임을 가르쳐 준다.
우리의 인생이 어둠 속에 있을 때, 말씀의 빛이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 주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빛은 우리 삶에서 진리와 지혜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계시를 상징한다.
셋째로, 빛은 구원과 생명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 (요한복음
8:12)고 말씀하신 구절은 그분이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인류에게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빛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 빛은
영적인 어둠을 몰아내고, 죄와 죽음에서 자유하게 하는 구원의 상징이다.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스스로를 빛으로 묘사하심으로써, 그분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가르치신다.
이 빛은 어둠 속에 있던 영혼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구원의 빛이다.
넷째로, 빛은 도덕적 선과 의를 상징한다.
빛과 어둠은 성경에서 선과 악, 의와 죄의
대조로 자주 사용된다. 빛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운 삶을 의미하며, 어둠은 죄와 타락, 악을 상징한다.
요한복음 3장
19-21절에서는 빛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진리 안에서 행하지만, 어둠을 사랑하는 자들은 악을 행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 3:19-21: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라..."
여기서 빛은 하나님의 공의와 선함을 상징하며, 그 빛 안에서 사는 사람은 의롭고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이다. 반면, 어둠 속에 사는 자들은 그들의 죄와 불의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빛을 피하려 한다.
성경에서 빛은 앞서 본 여러 가지 상징을 통해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 가진 속성을 표현한다.
이제 빛의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묵상과 연결해 보자.
빛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어둠을 물리치는 것이다. 어둠은 빛이 없을 때 존재하며, 빛이 비추면 어둠은 사라진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구원은 영적 어둠 속에 있는 우리를 밝혀주며, 죄와 죽음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어둠 속에서 벗어나 참된 길을 발견할 수 있다.
묵상: "하나님의 빛이 내 삶 속에서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가? 나는 말씀의 빛 속에서 내 삶의 어둠과 싸우고 있는가?"
빛은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고, 진리를 비추는 역할을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빛으로 표현되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통해 참된 진리와 지혜를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진리는 숨겨지지 않고, 빛을 통해 온전하게 드러난다.
묵상: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고 있는가? 말씀의 빛으로 내 마음을 비춰보고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있는가?"
빛은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성경에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는 표현처럼, 빛은 우리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돕고,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기능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보호하시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묵상: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 내 인생의 길을 찾고 있는가? 말씀의 빛이 내 삶을 인도하고 있는가?"
빛은 생명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식물들이 빛을 통해 광합성을 하며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빛은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유지하고 소생시키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우리에게 영적 생명을 불어넣어,
우리는 그 안에서 새롭게 거듭나게 된다.
묵상 :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영적인 생명을 얻고 있는가?
말씀의 빛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는 경험을 하고 있는가?
성경에서 빛은 하나님의 존재, 구원, 진리, 도덕적 선 등을 상징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우리는 이 빛을 통해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그 빛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빛은 우리를 어둠에서 인도하여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고, 우리의 발을 인도하는 등불이 되어 준다.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 빛을 발견하고, 그 빛이 우리 안에서 더 크게 밝아질 수 있도록 기도하며, 말씀의 빛으로 우리 삶의 어두운 곳을 밝히는 데 집중해야 한다.
빛은 그 어떤 피조물보다 가장 포괄적이며 중요한 하나님의 상징물이다.
성경 속에 나타난 빛을 잘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존재적 속성을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빛을 통해 하나님을 은유하고 비유한다.
때로는 하나님 자신이 빛이시며, 예수님 또한 빛이시며, 생명과 회복에 관련된 수많은 의미들을 갖는다.
창세기 1:1을 창조가 아닌 서론으로 이해한다면 빛은 최초의 피물이 된다.
또한 계시록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은 빛으로서 온 세상에 비추신다. 성경은 빛으로 시작으로 빛으로 마무리한다.
1. 피조물로서의 빛
빛은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3-5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이곳에서 드러난 빛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
둘째, 하나님께서 보시고 좋아하셨다.
셋째,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
넷째, 빛을 낮이라 부르고 어둠을 밤이라 불렀다.
다섯째, 빛은 첫째 날에 창조된 피조물이다.
그러나 어둠은 창조했다는 표현이 없다. 그러나 이사야서로 가면 하나님께서 어둠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이사야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빛은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피조물로서의 빛은 몇 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ㄱ. 피조물로서 빛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시편 148편에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들을 찬양의 의무를 지닌다.
1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2 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3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4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5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피조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ㄴ.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 대신 경배해서는 안 된다.
빛은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빛을 숭배하는 행위는 우상숭배와 같다.
ㄷ. 빛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선한-토브) 존재이다.
빛이 악하거나 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 자체로 그대로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은 빛을 아름답다고 인정하셨다.
ㄹ. 빛은 불가피하게 어둠을 갖는다.
그러나 분리되어 있다. 빛과 어둠은 서로 같지 않으며, 대립적이다. 요한사도는 요한일서에서 빛과 어둠에 대한 대립적 구도를 잘 설명한다.
고린도후서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요한1서 2: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2. 빛으로서의 하나님
하나님은 빛이시다. 하나님이 빛이라고 할 때, 그 빛은 하나님의 존재적 속성을 뜻한다. 빛은 진리이고 말씀이고 생명이다.
-하나님은 빛 자체이시다.
요한일서 1: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얼굴의 빛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 또는 빛에 대한 언급은 적지 않다. 얼굴의 빛을 비춘다는 뜻은‘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얼굴의 빛을 비춘다는 말을 돌아보신시고 보호하시고 살핀다는 의미다.
시편 67:1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시편 80:3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빛이 비췸으로 구원하심
이러한 의미들은 다시 빛이 하나님의 구원으로 치환된다. 하나님은 빛에 거하심으로 구원하신다.
이사야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마태는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복음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다고 말한다.
마태복음 4장16절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빛으로서의 하나님
하나님은 빛이시다.
빛은 진리이고 말씀이고 생명이다.
피조물로서의 빛
빛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빛은 낮을 주관한다.
빛은 만물을 드러낸다.
빛과 어둠
빛은 진리이다. 어둠은 악인들의 숨을 곳이다. 죽음이며 사망이다.
구원과 생명의 빛
빛은 깨달음이며, 생명이다.
빛을 통해 알고 행한다.
빛의 공동체
교회는 빛의 공동체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했습니다(롬 2: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그러나 진정한 빛은 고난받는 종 단 한 사람 뿐입니다(사 42:6. 49: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그리고 이것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요1: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에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비취는 새 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엡 5:8, 9; 빌 2:15).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한편 빛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적 상징이다.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빛이 부정함에 대립되는 순수함, 거짓이나 무지와 대조되는
진리와 지식,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13절에서와 같이 '너희'가 강조된다.
너희, 즉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하였지만(롬 2:19) 진정한 빛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 고난받는 종 한 분뿐이다(사 42:6;49:6).
그리고 이것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요1:9).
그에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비취는 새 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엡 5:8, 9; 빌 2:15).
한편 빛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적 상징이다.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빛이 부정함에 대립되는 순수함, 거짓이나 무지와 대조되는
진리와 지식,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산 위에 있는 동네
- 이 문구는 어떤 면에서 의미가 매우 분명하다.
고대의
마을은 흔히 흰 석회암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태양속에서 빛나는 것이 많은 사람들 눈에 보이고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다.
밤에는 동네
주민들이 켜놓은 등불이 주변 지역에 빛을 드리우게 한다(Bonnard).
그런데 '산 위에 있는 동네'에 대한 말씀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의 산 또는 시온의 세계 속에서 뛰어나게 되고 모든 족속(族屬)이 그리로 몰려 올 때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사 2:2-5;42 장;49장;54장;60장;Grundmann, Trilling, K.M.
Campbell).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추측은 아니며 산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사야서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어쨌든 만일 전자의 주장이 옳다면 본문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참된
모임이고,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의 전초기지이며, 그리스도의 참 빛을 세상에 비추는 순결한 반사체인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모두
마태복음에서는 중심적인 것들이다(Carson).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No one, sir," she said. "Then neither do I condemn you," Jesus declared. "Go now and leave your life of sin."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Go now and leave your life of sin)
요한복음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 이 귀절에 대하여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 고침 받은 자의 병들었던 원인이 그의 어떤 특별한 범죄에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죄를 다시 범치 말라는 뜻이라고 한다(Luther).
이 해석에는 난제가 있으니, 그것은, 성경말씀이 한편, 어떤 질병의 원인을 특수한 죄악에 돌리지 않은 사실이다(요 9:1-3).
그러나 성경은 다른 한편, 어떤 질병의 원인이 사람의 특수한 죄악이라고 하므로(민 16:46), 우리는 이 해석을 옳게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보다는 다음 해석을 더욱 적합하다고 본다.
2.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의 헬라 원어(*)는, "이 이상 더 범죄를 계속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필 그의 38년 전의 범죄(처음에 그가 병든 원인)를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니고, 38년 동안 병 중에서도 계속 범죄 하던 것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것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지 않는 그의 죄악을 가리킨다고한다(Maar
de man leefde nu in zonde, had zich niet aan den Heiland gegeben.-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352).
그렇다면, 여기 "더 심한 것"은 영적 형벌을 가리켰을 것이다.
마 12:43-45 참조.
위의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중대한 뜻을 보여준다.
1. 예수님께서 친히 38년 된 병자의 과거의 죄악들을 모두 다 용서하여 주신 사실,
2. 그가 그 고침 받은 자의 성화(聖化)를 요구하신다는 사실,
3.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성화를 힘쓰지 않는 자는, 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히 2:2-3).
그러므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심장하다.
그 고침 받은 자는 그 말씀에서 살아야 되며, 그 한 마디 말씀이 늘 그의 심령에 살아 있어야 된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것을 권장한다.
곧, 사람이 마땅히 그리스도의 충족성을 믿어야 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dass man an die Genugtuung Christi glauben soll.-Evangeliem Auslegung, 4,P.206).
요한복음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 예수님은, 회개자에게는 사죄를 선고하시는 사명을 가지셨다.
그러니 만큼, 그가 그 여자에게 회개를 권고하실 뿐이고 정죄하지 않으셨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은 만일 간음하는 사람은 그 현장에서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끌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군중들의 의도는 율법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로 충돌을 일으킬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돌로 쳐 죽여야 한다.
원수도 사랑하라.
어느 가르침이 옳은 것인가를 찾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올가미를 씌워 죽이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방법을 제시합니다.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돌로 치라!"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이려고 몰려왔던 사람들은 그들이 들고 왔던 돌을 내려놓고 모두 물러갔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줄 알았던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입니다(요 3:17. 12:47).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율법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려는 것입니다(마 5:17).
어떻게 율법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습니다(롬 13:10).
돌을 던질 것인가?
아니면 사랑으로 덮어줄 것인가?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것은 법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본문에 기록 된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실 때 일어난 일입니다.
요한복음 7:53-8:2을 보면 전날에도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 감람산에 가셔서 밤을 지내시고 아침에 성전에 오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누가복음 9장 말씀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눅 9:58).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주무실 곳이 없어서 새벽이슬을 맞으면서 감람산에서 지내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풍요롭고 편안하게 사는 것만 추구하는 우리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시는데 한쪽에서 여러 사람들이 한 여자를 끌고 옵니다.
요즘 TV에서 자주 보는 장면
같습니다.
경찰들과 기자들, 여러 시민들 앞에 얼굴을 가리고 서 있는 범죄인 말입니다.
간음한 이 여인은 그보다 훨씬 비참한
모습으로 서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간음하다 잡힌 사람은 돌을 쳐서 죽이라는 율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형장에 끌려 나온 죄수의
모습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그녀는 간음 중에 현장에서 잡인 여자입니다.
서기관은 성경을 필사하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들이었습니다.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인쇄술이 없었기에 성경을 일일이 필사하는 일을 하였고,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해석해서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은 거룩하며 죄에서 구별된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열심히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 대해 누가복음 18:10-14에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정죄하고 무시하며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주님의 평가를 들어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마
23:1-5).
이들은 외식자들이었습니다.
말과 행동이 달랐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3-25).
겉으로는 깨끗한척하나
속에는 더러운 것이 가득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는 잘 밝혀내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죄는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의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타인의 눈에 티를 빼겠다고 합니다.
더러 믿는 성도들 중에도 이런 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주님은 죄인의 친구가 되시고 그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데, 자신의 죄는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만 비판하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인을 잡아온 이유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시험하려고 했습니다(6).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어겼다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니 하나님을 모독하는 죽을 죄를 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 5:18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이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처하도록 하여 죽일 방도를 찾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간음 중에 잡힌 이 여인을 살려 주라고 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게 됩니다.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는 간음한
남녀는 반드시 돌로 쳐 죽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간음이란 결혼한 부부가 아닌 남녀가 성적으로 관계하는 것을 말합니다.
결혼한 부부 이외의 모든 성적관계는 하나님께 미워하시는 죄입니다.
출애굽기 20:14의 십계명에도 “간음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신명기 22:22, 24에는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면 간음한 남녀는 반드시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이라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메시아가 아니라고, 백성들을 선동할 것입니다.
반면에 돌로 치라고 말한다면 당시 유대인들을 다스리던 로마 정부의 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도록 압력을 넣습니다.
이때 빌라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요 18:31)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죽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로마 정부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가르친 예수님의 가르침에 맞지 않으며 무자비한 자라 트집을 잡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병들고 멸시 받는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트집 잡는 안식일에도 병자들을 고치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보고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종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증언했습니다.(마 12:1-21).
이들은 예수님이 궁지 몰아넣으려고 합니다.
진퇴양난입니다.
죽이지 말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요.
죽이라고 로마정부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7절에 그들이 계속 질문 공세를 합니다.
마치 오늘날 기자들처럼 말입니다.
“신명기 말씀을 아십니까?”
“증인들이 여기 다 있습니다.”
“보세요. 이 여자는 얼굴도 못 들고 죄를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돌로 칠까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 죄를 깨닫게 하심
6, 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땅에다 손가락으로 무엇을 쓰고 계십니다.
그리고 일어나셔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다시 손가락으로 땅에다 무엇을 쓰시고 계십니다.
이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신명기 17:5-7에 범죄자들에 대한 사형 집행절차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그 남자나 여자를 돌로 쳐죽이되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확실한 두세 증인이 있어야 하고 증인이 먼저 돌을 던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돌을 던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웬일일까요?
9절에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에스겔 18:4에는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간음죄 뿐 아니라 어떤 하나님의 계명도 어기면 죽을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은 하나님만 섬기지 않는 것, 우상숭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 안식일에 일하는 것,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 탐심 모두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중 하나만 어겨도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 말씀에 비춰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해 줍니다.
그들은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니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없었습니다.
7절에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다 떠나갔습니다.
여인을 끌고 온 자들도 다 떠났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이 죄인임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슬픈 사실은 이들이 주님 앞을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하나님, 구원자 예수님을 몰라보고
떠나갔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생수를 달라는 수가성 여인에게 주님께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
남편을 두고 부도덕하게 살던 여인에게 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앞에 엎드려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들은 반드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양심의 가책은 받았지만 주님 앞에 무릎 꿇지 않고 떠나갔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이 아직 죄인이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첫 설교제목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라”였습니다(막 1:14,15).
아직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저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랬습니다. 우리 엄마도, 동네 분들도 다 착하다고 하셔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부모님 모르게, 교회 사람들 몰래 지은 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욕하는 것,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이 죄옥 갈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를 보고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는 것은 간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모든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죄인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10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너를 고발 하던 자들이, 정죄하던 자들이 없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여인이 “주님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주님은 11절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죄가 없으십니다.
고후 5:21에 예수님을,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을 돌로 칠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정죄 하지 않으셨을까요?
요한복음 3:17에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하셨으며
누가복음 19:10에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17에는 이렇게 기록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주님께서 이
여인에게 “내가 너의 간음 죄 대신 죽으러 왔다”
“너를 구원하러 왔다”
“죄를 회개하고 나를 믿으면 너의 모든 죄를 용서 해
주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은혜로우신 말씀입니까?
여러분 가운데 죄 때문에 괴로워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다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 나오는 모든 이들을 하나님은 용서해 주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얼마나
은혜로우신 말씀입니까?
11절 뒤 부분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주님은 우리 죄를 용서 해주실 뿐 아니라 주님을
만난 후에는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죄에서 떠나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믿기 전에 지은 죄로 충분하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4:3에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6:9-11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죄를 계속 짓는 것은 구원 받지 않은 자들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구주이십니다.
구원 받으려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를 회개 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한 연회장 앞에 어린 소녀가 울고 있었습니다.
직원이 왜 여기서 울고 있냐고 물었더니 저 연회장에 들어갈 수
없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왜 들어갈 수 없냐고 물었더니 이 연회장에는 장애인 어린이들을 위한 파티를 하고 있는데 자기는
건강해서, 장애가 없어서 들어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죄 없는 사람인 척 하지 맙시다.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들만 비난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맙시다.
오히려 자신을
바로 보고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 하고 용서를 구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믿는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짓지 맙시다.
죄는 구원 받기 전에 지은 죄로 충분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이 늘 우리 마음속에 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6세기에 폴란드의 유명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라고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자기의 묘비를 자기 자신이 썼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바울이 가졌던 특권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베드로에게 주셨던 능력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옆에 있었던 강도에게 베푸신 그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
"존 오웬"은 17세기 청교도이자 목사였습니다.
그는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인물입니다.
존 오웬은
학문과 영적인 깊이가 매우 훌륭한 사람으로서 청교도의 황태자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쓴 책들 중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느 주제는 바로 "죄"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존심과 이기심이 가득하며, 자기 자신을 성찰하기 보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는 사람의 특징은 "죄"의 문제을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실한 신자,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적인 성장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존 오웬의 책들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적인 성장과 더불어
영적인 성장을 이끌어주기도 합니다.
로마서 1~11장에는 '죄'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죄가 있다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죄 아래에 있지 말고, 구원과 은혜
안에 머물라는 권면을 강조하기 위해 죄와 관련된 내용이 지속적으로 등장하죠.
그래서 죄와 관련된 내용의 핵심은 로마서 6장
14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이런 죄인이 회심과 거듭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기쁨은 무었일까요?
구원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롬 12:1).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로마서 12장 2~21절에 구체적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만약 로마서
12장에 나온 구체적인 실천 사항들을 삶과 가정과 교회에서 드러내지 못한다면, 12장 1절에 나오는 영적 예배자가 될 수 없겠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요 6:48)"라는 말에 걸려 넘어져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12제자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권세가 있었기에 또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이 가르치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논의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잡기보다, 함정을 파서 예수님을
빠뜨리려 합니다.
그들은 음행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옵니다.
그리고 말씀 그 자체이신 분에게 율법을 말하며 음행한 여인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옳은지 시험합니다.
율법은 간음에 관에 크게 2가지를 말해줍니다.
하나는 결혼한 여자가 간음하면 죽여야 했습니다(레 20:10; 신 22:22).
다른 하나는 정혼한 여인이 간음했을 때는 돌로 쳐서 죽여야 했습니다(신 22:23~24).
남자도 같은 법을 적용받았고, 만약
여자가 창녀일 경우에는 그 사람을 처형하라는 구체적인 지시 사항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끌고온 여인의 경우 아마도 신명기 22장
23~24절에 나온 정혼한 여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정혼하는 나이는 주로 14~15세 정도였다고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사람을 예수님께 끌고 가면, 예수님은 당연히 율법을 무시하고 그 사람을 용서하라든지
아니면 율법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사람들의 '분노'를 이끄려 내려 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모습은 늘 가난한 자,
억울한 자, 약자, 죄인과 함께 했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죠. 율법대로 사형에 처한다고 말하면 예수님은 순식간에 잔인한 사람이
되고, 로마법을 어긴 사람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은 예수님께 향합니다.
예수님은 땅에 손가락으로 무엇을 씁니다.
많은 학자가 예수님이 쓴 글이 무엇인지 밝혀내려
했지만, 모두 가정일 뿐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요한이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쓴 글의 내용을 적기 보다, 예수님의 행동을
묘사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쓴 장면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언약의 돌판에
글을 새긴 장면을 떠올립니다(출 32:16).
요한복음 1장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이며, 말씀이 이 땅에 오셨다는 전제를 통해 예수님의 행동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과 동등한 모습으로 드러내고 계시며, 새로운 언약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와 같은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심판을 선언하셨지만, 동시에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용서와 사랑, 그리고 회복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와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 사실을 잊으니 사람들을 정죄(죄 있다고 지적하는 것)하는 것에 집중한 것이죠. 예수님은 진짜 돌에 맞아 죽어야 할
대상은 음행하다 잡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이 진리라고 믿고 행했던 종교지도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죄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죄 없는 예수님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을듯합니다.
하나는 자신들이 '음행'과 관련된 죄를 지었다는 것이죠.
로마 시대에는 음란함이 자연스러운
문화와 같았기 때문에 그런 문화에서 자유로웠던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라 예상해 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죄'는 음행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성애를 죄라고 말합니다.
동성애자가 교회에 출석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차별과 혐오로 내
쫓아야 할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저질렀다면 교회에서 쫓겨나는 것이 당연한 일일까요?
성경은 모든 '죄'를
동일하게 바라봅니다(동성애 옹호가 아닙니다. 이런 문제에만 민감하게 반응하지 마세요).
여인과 예수님만이 남은 장소에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재판관의 모습으로 말씀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11절)" 여인에게 던지려 했던 돌은 결국 예수님에게 향합니다(59절).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주님의 온전하심과 거룩함,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해 힘쓰지 않는다면, 우리가 돌에 맞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돌을
던지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피와 살을 먹었다면, 내 안에 있는 전통과 관습을 중요하게 여기는 음란함을 몰아내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모습을 몰아내고 회칠한 무덤이 아닌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지금 세상에는 하나님이 기록하신 두 가지 법이 효력을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공의에서 오는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오는 십자가의 대속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전한 합의점을 찾은 것이죠.
더 이상 의혹을 갖지 말고 믿고 구원받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내 죄로 인해 예수님이 달리신 끔찍한 십자가를 바라보며 똑같은 죄를 반복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그동안 죄로 어지러웠던 불행한 삶을 계속 할 수는 없잖아요?
주일에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전투력이 상승해서 돌아가는 것예요.
상승된 전투력으로 세상과 내 옛사람의 죄와 잘 싸워서 이번 주도 평안과 복을 누리며 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영국에서 거짓말 대회가 열렸는데,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 사람이 일등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거짓이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임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거짓은 무질서를 만들어 내고 무질서는 예측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그
어떤 계획도 세울 수가 없고 따라서 모든 사람은 불안 가운데 당면한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어 거짓의
악순환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거짓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아무도 행복할 수가 없고 서로를 불신하고 경계하며 미워하고 증오하게
됩니다.
거짓은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짓을 싫어합니다.
이를테면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그 자신과 그의 주변 사람들이 모두 행복할 수 있다는 보편적 믿음이 있습니다. 이 같은 이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이들이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J. 벤덤, J.S. 밀 같은 이들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개인이
정직하게 행동해야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행복해야하는가, 불행 하면 어떤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모든 인간은 자연적으로 행복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이고 착하고 정직해야 하는 도덕은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착하고 정직한 것은
도덕적 가치 이지만 행복은 도덕적 가치가 아닙니다. 이를테면 비도덕적 가치를 위해 도덕적 행동을 해야 합니다.
도덕적
가치가 비도덕적 가치의 수단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 사람이 임마누엘 칸트입니다. 칸트는 행복하기 위해 정직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정직한 것이 옳기 때문에 정직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칸트의 의무주의입니다. 의무주의에 의하면 인간은 직관적으로
무엇이 악하고 선한가를 안다고 합니다. 그의 주장은 거짓말이라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나쁜데, 거짓말을 하면 그 사회가 불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거짓말 자체가 나쁘기 때문에 하면 안 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그의 정언명령입니다.
그의 여러 정언명령 중 중요한 한 가지를 소개하면, “너 자신의 준칙(準則)이 보편적(普遍的)인 자연법칙(自然法則)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할 때 그대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준칙이란 개인의 행동원칙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필요하면 거짓말을
한다.”라는 준칙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준칙이 보편적인 자연 법칙이 되어도 좋다면 필요할 때 얼마든지 거짓 말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칸트의 생각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제를 하였습니다.
“나는 필요하면 거짓말을 하는데 세상 모든 사람이 필요할
때 거짓말을 해도 괜찮으냐?”라고 했을 때 이에 동의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전제입니다.
거짓말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다른
모든 사람은 정직해야 합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데 다른 사람들 모두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고 한다면 거짓말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됩니다. 도둑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둑질 하는 도둑의 입장에서는 다른 모든 사람은 도둑질을 하면 안 됩니다. 모두가 도둑질 해도
된다고 하면 내가 애써 훔쳐다 놓은 것을 다른 사람이 또 훔쳐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칸트의 도덕 의무론은 도덕이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되는 앞선 이들의 주장보다는 한층 발전한 이론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명확합니다.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위해서도 아니고 의무 때문만도 아닙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정직해야 그 자신과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된다는 이론도 일리가 있고, 도덕은 수단이 아니라 의무라는 칸트의 주장도 나름 기여하는 바가 있지만 성경은 그런 가르침들과 차원을 달리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절대 전제로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고 거짓말에 속지도 말아야 하고 거짓된 말과 생각과 정책과 선동을 분별하고 멀리하고 미워해야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정치인들의 거짓말로 인하여 사회가 큰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3일 서울 광화문 집회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조국 법무부 장관을 규탄하였습니다. 조국을 규탄하는 주요 이유는 불법과 거짓말 때문입니다. 검찰이 혐의를 잡고 조사하고 있는 그의 불법과 거짓은 한두 가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검찰이 그의 불법과 거짓을 조사하고 있는데 청와대와 여당과 혐의를 받고 있는 당사자와 그를 지지하는 몇몇 지식인들이 검찰을 개혁해야한다면서 검찰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검찰을 개혁한다면 개혁할 가장 중요한 내용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정부는 검찰을 개혁하여야 한다면서 개혁되어야 할 방법으로 검찰에 대한 정치적 개입을 노골적으로 하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과 학계와 종교계와 온 사회가 가치 질서의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정치인들의 거짓말도 용납 되어서는 안 되지만 몇몇 지식인들의 상식을 무시한 조국 지지 발언들은 지식인들에게 걸었던 일반 국민들의 일말의 기대 마져 무너져 내리게 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멘토로 알려져 있는 한완상 씨가 지난 1일 CBS 라디오에 출연하여 조국 법무부 장관의 문제에 대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조국을 조사하고 있는 검찰과 조국 사퇴를 부르짖는 국민을 비난하였습니다. 그리고 검찰청 앞에 모인 친문지지 집회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촛불 세력이 건재한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서울대학교의 교수와 부총리까지 지내신, 학자이고 정치 사회의 원로인 그가 지금의 대한민국의 정치 안보 경제 등의 총체적 위기 상황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다면 조국 사태를 일벌백계로 조사하도록 검찰을 독려하는 것이 마땅할 텐데 검찰을 비난하고 조국을 두둔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유대교 지도자들이 간음 현장에서 잡아 온 여인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으냐고 묻는 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조국을 지지하고 검찰을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렇게
적용하는 이들이 교회 안에도 적지 않습니다. 한완상 씨는 지금까지 조국씨가 얼마나 많은 돌을 던져 온 사람인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
것입니다. 조국의 그 수많은 돌팔매질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던 그가 조국을 역성들기 위해 성경을 인용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사랑으로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데 이 말씀이 종종 오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렇게 적용하는 것은 성경을 빙자하여 성경을 왜곡하는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한 여자를 간음 현장에서 체포하여 예수님께 끌고 와,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여기 유대교 지도자들이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인데, 서기관이란 율법을 지키기 위한 모든 규칙을
창안한 자들이고, 바리새인이란 그 규칙들을 지키기 위하여 평생의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끌고 온 여인은 간음의
현장에서 덜미를 잡혔습니다.
남녀가 같은 방에 은밀히 있었다는 것만으로는 송사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던칸 데렛(J. Duncan
M. Derrett)의 설명에 의하면 증인들은 이 여인과 남자가 교합하는 중에 목격하고 체포 하였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유대인의
정리(定理)에 의하면 사전 경고가 없이는 처벌을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건의 정황에는 저들이 그 여인을 송사 하면서 그러한
정리를 그 여인에게 공정하게 적용하였다는 그 어떤 암시도 없습니다.
그 여인이 범행 중에 잡혔다면 엄격한 율법에 비추어 볼 때 그
여인의 간음 행위의 상대 남자도 이 자리에 잡혀 왔어야 합니다.
본문의 저자 요한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정의를 지키고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걸려 넘어지게 하려고 덫을 놓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남자는 놓아 보내고 여자만 끌고 와서 많은
군중 앞에 그녀의 신분과 처참한 몰골을 노출 시켰다는 것도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지나칩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은 하나님의 정의와 율법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여인을 간음 현장에서 예수님 앞에까지 끌고 온 모든
과정에서 드러나고 있는 사실은, 죄를 지은 사람은 그 여자 뿐만이 아니라 그녀를 끌고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나아가 그들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 걸려 돌을 던지려 했던 군중들 모두가 범죄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에게 벌을 주는 것이 불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막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조치는 결국 범법자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불법으로 법이 집행되는 것을 막으신 것이지 죄인을 죄가 없다고 하거나 무조건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저지른 행위가 죄라는 것을 아셨고 또한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사건을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와 교회 시대에는 구약의 신정정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초림 이후로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가 새로운 하나님 나라 원리에 의해 작동되고 통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형식과 조직을 갖지 않지만
교회는 형식과 조직을 갖추게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원리를 따라 세워져 가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이 주신 권세로 바른
신앙고백을 통하여 사람을 받아들이고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자를 출교합니다. 그 외에 교회가 죄를 지은 자에게 여러 단계의
제제를 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게는 물리적 강제력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출교를 했는데도 교회를 나오는 자를 교회는 강제로 막을 수 있는 물리력을 주님으로부터 받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사람을 체포하거나 구속하거나 물리적 폭력으로 벌을 줄 수 없습니다. 매우 중요한 사실은 교회에게는 사형을 집행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중세 교회는 천년에 걸쳐 이러한 가르침을 오해하여 수많은 사람을 처형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범법자에게 합법적인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권세는 국가에게 주었습니다. 교회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자에게 더 이상 돌을 던질 수 있는 권세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간음하는 여인을 끌고 와서 사형을 집행 하려는 자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그러한 자를 책망하고 회개를 권고하고 죄인이 회개하면 용서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출교까지는 할 수 있어도 구속하거나 사형을 집행할 수는 없습니다.
교인 중 한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고 회개한다면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하는 용서가 국가법의 처벌까지 면제 받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용서하지만 국가 법에 따라 공정한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말씀은 죄를 지은 자라도 무조건 용서 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교회의 권징과 용서, 그리고 엄격한 사회법의 따른 처벌을 받아야 할 것까지를 명하신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 같은 가르침을 잘 이해하여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롬 13:1-4)
『 암흑기의 중세 여행 』
사람들은
중세를 암흑기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계관시인(桂冠詩人)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Francesco Petrarca)라고 합니다.
암흑기라는 말을 중세의 별칭처럼 사용하는 것이 중세에게는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암흑기라는 말은 르네상스 이후의 관점에서 붙여졌습니다. 르네상스 이전 시대를 통칭해서 암흑기라고
부르지만 중세시대 중에서도 어두운 면만을 강조할 경우에 그렇게 불렸습니다. 즉 유럽문화의 전성 시절을 이끌던 로마제국이 멸망함과
동시에 야만족들의 침략과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와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서유럽은 암흑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이것을 가리켜 중세
암흑기라는 것으로 통칭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중세는 곧 기독교 역사입니다. 로마제국은 망했지만 기독교가 망한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가 망하지는 않았지만 중세가 암흑기로 불러지는 것은 곧 기독교의 불명예입니다. 중세를 일컬어 암흑기라고 하는 것이 자칫 지나치게 오용되거나 남용되는 일이 있다는 학계의 자성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암흑기라는 말은 개인이나 국가나 역사의 한 시기 가운데 불가피하게 겪었던 비극적이고 불행한 기간을 가리키는데 사용됩니다. 1536년 제네바 인들이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만든 주화에는 “어둠 뒤에 빛이 있으라.”(Post Tenebras Lux)라고 새겨 넣었습니다. 결국 교회사적으로도 중세는 어둠의 시기였고, 종교 개혁 시대는 빛이라는 역사관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중세를 암흑기라고 부르게 됨으로서 천년의 중세를 어두운 창고에 처박아 넣고 문을 잠가버린 꼴이 되어버려 중세에 묻혀 있는 보석까지 외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시대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너무나 어둡기 때문에 암흑기라고 불리는 중세를 여행해 보는 것도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중세를 공부하려고 할 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중세로 볼 것인가 부터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중세”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1469년의 교황청 도서관 사서였던 지오반니 안드레아 (Giovanni Andrea)입니다. 그는 르네상스의 색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이 사는 시대가 과거와 다름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역사적 통찰은 17세기에 이르러 독일 지식인들에 의해 고대, 중세, 근대라는 시대 구분을 하게 하였습니다. 자크 르 코프 (Jacques Le Goff)는 중세의 4-9 세기까지를 중세 초기로, 10세기에서 14세기를 중세 중기로,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를 중세 말기로 보는 넓은 연대 구분을 하였습니다. 코플스톤 (Frederick Copleston)은 철학사의 관점에서 교부 시대를 중세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정치적으로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기점으로 5세기를, 교회 사적으로는 마지막 교부이자 첫 번째 교황인 그레고리 1세를 기점으로 6세기를 중세의 출발점으로 보았습니다. 움베르토 에코 (Umberto Eco)는 중세를 476년에서 1492년까지라고 못 박기도 하였습니다.
일반적 역사는 주로 로마의 멸망에서 르네상스 시대까지를, 곧 5세기에서 15세기까지의 1,000 년을 중세로 봅니다. 그러나 중세는 기독교의 역사이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에서 국교로 인정받은 313년, 즉 4세기를 시작으로 종교 개혁이 일어난 16세기까지로 봅니다. 결국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중세는 그 절반에 해당하는 천년이라는 긴 역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를 단순히 암흑기였다는 말로 특징 지워 버리기엔 그 역사가 너무나도 유구합니다.
현대는 중세의 자궁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현대가 중세로부터 나왔으면서도 중세를 캄캄한 창고에 처박아 넣어놓고 문을 굳게 잠가 놓아서 중세를 잘 모르고 중세를 잘 모르기 때문에 현대를 잘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온갖 오해와 진부함이 중세를 억누르고 있어서 움베르토 에코는 그의 대작 「중세」의 서문에서 중세는 무엇이다라고 하기보다 차라리 중세는 무엇 무엇이 아니라고 열거하는 편이 낫다고 하면서襬가지의 중세는 아니다.’라는 논리를 전개하였습니다. 심지어 자크 르 코프는 중세의 천 년을 암흑이 아닌 “위대한 천 년”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필립 샤프 (Philip Schaff)는 중세를 평가하면서, 중세의 빛은 성경 말씀이 발산하는 태양 빛 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전승이라는 별빛과 달빛이었다고 하였고, 이 빛이 야만성과 이교성의 암혹을 뚫고 들어가 어둠을 몰아냈고, 위대한 종교 개혁의 광명한 빛 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무지한 민족을 비추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평가하여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었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중세는 그 천 년의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미스터리와 혼돈, 무지와 맹신, 그리고 광기로 얼룩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인들 중에는 어린 아이처럼 조금의 의심도 없이 신앙을 받아들인 이들이 많았습니다. 신앙이 모든 학문과 정치와 문화까지 지배하였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주도하였고, 대학을 설립하며, 엄청난 학문과 건축과 예술과 문화를 이루었습니다. 기독교 세계의 모든 나라와 민족이 하나의 언어로 된 성경을 읽고, 하나의 언어로 예배드리며, 모든 사람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교회를 통해 살았던 천년의 세월이 중세입니다. 중세는 바로 기독교 신앙의 시대이자, 기독교 문명의 시대였습니다. 천 년 동안 사람들은 하나의 언어로 된 성경과 교회 음악을 사용했습니다. 건축은 고딕 양식으로 통일 돼 있었고, 지붕은 붉은 색으로 통일 되어 있었습니다. 마을 중심 높은 곳에는 교회당이 있었고, 도시 중심에는 대성당의 첨탑이 멀리서도 바라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교회당의 종소리에 따라 사람들은 일어나고 잠들었으며, 교회당 묘지는 천국과 영생을 의미했습니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마녀의 존재를 믿었고, 심지어 연옥이라는 가상의 사망 후 세계를 수용했고, 마리아를 비롯한 성자들의 중재를 믿고 미사라는 개혁교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예배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수사들이 야만족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개인적 회심뿐 아니라 한 도시와 한 민족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집단적 회심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설교나 교리 교육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세례 시 신앙고백의 뜻조차도 모른 채 라틴어로 된 그것을 암기했습니다. 켈트족과 튜턴족, 슬라브족이 복음을 받아들였는데, 이들은 기독교와 함께 문자, 학문, 농경, 법, 예술도 받아 들였습니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까지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과학과 예술도 기독교 신앙에 동의했고, 심지어 황제마저도 기독교 앞에 무릎을 끓었습니다.
중세는 정치, 경제, 사회가 봉건제라는 튼튼한 사회 구조 속에서 숨 막히는 지경의 경직성과 또한 해학성을 지녔습니다. 중세 인들을 세 부류, 즉 성직자, 기사, 농노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성직자는 기도하는 사람이고, 기사는 싸우는 사람, 농노는 일하는 사람이었으며, 이는 곧 세 개의 신분이자 계급이었습니다. 중세를 떠받치는 두 기둥 같은 그룹이 기사와 학자였습니다. 박사에게는 기사의 작위와 같은 특혜를 부여했습니다. 기사가 가장 중세적인 이미지를 지닌 집단이었습니다. 당시 기사단은 사제와 귀족을 보호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천상의 천사 기사단을 지상에 복제 해 놓은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상 기사단은 금욕과 절제, 이타심, 충성심 외에도 로맨스와 결투정신, 기사 서약과 맹세 같은 인간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기사단은 예루살렘 기사단, 스페인 기사단, 신전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이었는데, 이는 수도자들의 종단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후 셀 수 없이 많은 기사단들이 생겨났습니다. 황금 양털 기사단, 성모 기사단, 황금 방패 기사단, 심지어 고슴도치 기사단, 심지어 사냥개 기사단까지 등장 했습니다. 기사 계급은 사제와 농노 계급 사이에서 경직된 중세 사회를 해학과 상상으로 이끌며 종교와 문학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중세를 특징짓는 두 세력인 교황과 황제는 언제나 지배권을 두고 긴장과 갈등과 불화와 투쟁의 역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특히 1075년 교황 그레고리 7세는 교황 칙서를 통해 “로마 교황 만이 보편적 교황으로 불려야 마땅하다”라고 했고, 이후에 교황은 성 베드로의 대리자,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교황의 수위권을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이런 권력의 갈등은 영적 권력과 세속적 권력의 대결구도를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이 샤를마뉴(Charlemagne) 시대에 와서는 황제-교황이라는 제왕적 사제직으로 발전했고, 1077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으로 가서 관용을 구걸한 저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중세 교회는 언어의 다양성을 원죄의 결과들 중 하나라고 말하면서 중세 문명의 동일성, 나아가 유럽 문명의 통일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방법으로 라틴어를 고집했습니다. 라틴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자는 야만인으로 짐승 취급을 했습니다. 당시 라틴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특권을 가진 집단에 속하였음을 의미했습니다. 로마 교회는 라틴어만을 사용했고. 모든 나라와 민족은 라틴어로 번역 된 불가타 성경만을 사용했으며, 라틴어로만 예배를 드리고, 모든 종교 음악은 라틴어로 불렀습니다. 다중 언어 사용은 타락의 결과이기 때문에 단일 언어로 라틴어만을 사용하도록 통제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중세를 형성 한 주요 요소로 수도원과 대학을 들 수 있습니다. 중세 인들은 천상과 지상이 혼재 한 시대를 살면서 세속을 경멸하여 세속으로부터의 도피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러한 경향이 수도원 제도를 만들었고, 불행하게도 대표적인 도미니크 교단과 프란체스코 교단은 민중에게 위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수도사들이 교황청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 때 수도원은 지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이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장 타락한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수사들의 수도복은 유럽의 의복 문화에, 수도원의 식단은 유럽의 보편적인 음식문화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수도원은 수도원 학교와 주교좌성당학교를 운영했는데, 이것이 학교와 교육의 발전을 촉진했고 마침내 이탈리아에 볼로냐 대학과 파리에 파리대학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중세 대학은 3학(문법학, 논리학, 수사학)과 4과(산술학, 기하학, 음악, 천문학)의 자유학예에서 의학, 법학, 신학의 상위 학부가 설립 됐고, 토마스 아퀴나스와 스콜라 철학의 집대성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중세의 역사에서 누구나 반드시 만나게 되는 것은 십자군 원정과 도시와 상업의 발전입니다. 기독교는 외적 팽창을 시도하면서 십자군 원정을 시작하지만 유대인 대량 학살과 약탈 등의 부정적 이미지를 남겼습니다.
또한 상업의 부활과 함께 중세 도시가 탄생했고, 농촌에서는 토지 소유의 한 형태인 장원이 생겨났습니다. 더욱 끔찍한 것은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종교 재판을 통해 마녀 사냥에 미쳤고, 중세 인들은 여행을 즐기는가하면 인육을 먹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중세에는 성경보다는 전승에 의존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중세는 성경이 닫혀서 어두웠습니다. 성경을 소유하지 못하고 읽지 못하고 배울 수 없는 교회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보여 준 시대가 중세입니다. 그 결과 중세의 교회는 계시 의존적 종교가 아니라 인문학의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중세 인들은 성경의 종교가 아닌 상상의 종교를 믿었고, 그 결과 중세는 판타지로 넘쳐났습니다. 중세는 소름이 돋을 섬뜩 할 정도의 단일성과 통일성을 강조하였는가하며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 통제 받지 않고 드러나는 해학성을 보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여행에 대한 동경과, 세속으로부터의 도피, 로맨스와 에로스가 혼재했습니다. 성경의 언어, 강단의 언어, 종교의 언어는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기호에 불과하였습니다.
중세는 온갖 상상과 무지와 왜곡이 판을 치기도 하였지만 또 한 편 성경 시대와 종교개혁시대와 더불어 신학과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이 하나님 중심이었던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시대이고, 거짓과 왜곡을 걸러내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중세에서 부정적인 것들을 잘 가려내면 아주 귀한 보화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세는 이 시대에 비하면 보화가 감추어진 밭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10-13-2024(주일)
암송 성구 #.21 고린도후서 5:17
10-20-2024(주일)
암송 성구 #.22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10-27-2024(주일)
암송 성구 #.23 고린도후서 6:2
11-10-2024(주일) 구원의 확신
암송 성구 #.25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And this is the testimony: God has given us eternal life, and this life is in his Son.
He who has the Son has life; he who does not have the Son of God does not have life.
11-17-2024(주일) 기도 응답의 확신
암송 성구 #.26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Until now you have not asked for anything in my name. Ask and you will receive, and your joy will be complete.
11-24-2024(주일) 승리의 확신
암송 성구 #.27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No temptation
has seized you except what is common to man. And God is faithful; he
will not let you be tempted beyond what you can bear. But when you are
tempted, he will also provide a way out so that you can stand up under it.
12-01-2024(주일) 사죄의 확신
암송 성구 #.28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
12-08-2024(주일) 인도의 확신
암송 성구 #.29 잠언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and lean not on your own understanding;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구하다
묻다
요청하다
ἐρωτάω 스트롱번호2065
묻다
요구하다
지금까지는...구하지 아니하였으나 - 여기서 '구하다'로 번역된 '아이테오'(*)는 '구하다', '질문하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에로타오'(*)와는 달리 '요구하다'란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그리고 후반절의 내용이 기도와 관련된 것이 분명하므로 본절에서는 '구하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리고 특히 '구하다'란 말이 현재형으로 언급되어 '지속적으로 기도하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L. Morris). 그리고 이 지속적인 기도는 다른 이름으로써는 소용없고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 질 때 응답이 있을 것이다. 한편 '지금까지는...아니다'라는 구절은 미래적 시간에는 어떤 일들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증보자 개념은 본절에서 아직은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아직 십자가 상에서 피흘림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성전의 휘장은 그대로 드리워져 있었으며, 신성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다(Calvin). 그러나 그의 구속 사역이 완성될 그날 곧 '조금 있으면' 제자들은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2. 예수의 이름으로 말해야 합니다(사도행전 4:16-18, 5:40-41)
사도행전 4:16-18
...그들을 불러 명령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결코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라.
사도행전 5:40-41
이에 그들이 그의 말에 동의하고 사도들을 불러서 때리고 명령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 하고 놓아 주니라.
3.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행9:27-29).
[바나바가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마스커스에서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선포한 것을 밝히 말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그리스파 유대인들을 논박하매 그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하거늘](행9:27-29).
5. 예수의 이름으로 죽어야 합니다(행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슬피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죽는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노라, 하니](행21:13).
6.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요13:13-14,요15:26,요16:23).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3,24).
7.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야 합니다(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한 가운데 있느니라.]
8.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골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골3:17).
예수란 이름은 신약 성경에서 935회나 나옵니다.
마리아가 처음으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이 이름을 들었습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1). 그 다음으로 요셉이 꿈에서 예수란 이름을 들었습니다. [이
일들을 생각할 때에, 보라, 주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녀에게 수태된 이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임이라, 하니라.](마1:20,21).
예수란 이름의 예(JE)는 여호와(JEHOVA)의 준말입니다.
예수는 여호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란 뜻으로 신성을
나타냅니다.
수(SUS)는 SAVIOUR의 준말입니다.
이는 주님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1. 예수란 이름은 구원의 근거(사도행전 4:12)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하늘 아래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느니라.]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among men, whereby we must be saved.
이 이름으로 우리는 구원받아야만 하리라.(직역)
MUST란 말에 주목하라.**
2. 예수란 이름은 설교의 주제(사도행전 8:35, 고린도후서 4:5)
오늘날 교회가 급속히 타락하는 것은 설교의 주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속화된 설교, 심리학적인 설교,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
설교,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설교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이에 빌립이 입을 열어 그 성경 기록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에게
예수님을 선포 하니라.](행 8:35)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다 정작 예수님을 선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전도의 주제, 설교의 주제는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선포하고 또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었음을 선포하노라.] 한글 성경에 오역이 되어 있어서 바로 잡았다.(고후4:5).
3. 예수란 이름은 사역의 목표(사도행전 15:26)
[이 사람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자들이니라.](행 15:26).
우리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일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서 일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4. 예수란 이름은 모든 것을 굴복시키는 권위(빌립보서 2:9-1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들로 하여금 다 예수라는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빌 2:9-10)
5. 예수란 이름은 섬김의 동기(
[...이는 그들의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들에게서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하였음이라.](요삼 5-8). 사도 요한은 주님의 사역자들을 물질로 후원하는 이들을 칭찬하였습니다.
6. 예수란 이름은 기도의 힘(요한복음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3-14).
7. 예수란 이름은 모든 말과 행동의 기준(골로새서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
1. 예수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영화롭게 되도록 해야 합니다(행19:17,살후1:12).
[이 일이 에베소에 거하는 모든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에게 알려지니 그들 모두에게 두려움이 임하고 주 예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니라.](행19:17).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너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1:12).
2. 예수의 이름으로 말해야 합니다(행4:16-18,5:40-41)
[...그들을 불러 명령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결코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라.](행4:16-18),
[이에 그들이 그의 말에 동의하고 사도들을 불러서 때리고 명령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 하고 놓아 주니라.](행5:40-41)
3.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행9:27-29).
[바나바가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마스커스에서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선포한 것을 밝히 말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그리스파 유대인들을 논박하매 그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하거늘](행9:27-29).
4.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 받아야 합니다(벧전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비방을 받으면 행복한 자로다. 이는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심이라. 그분께서 그들 편에서는 비방을 받으시나 너희 편에서는 영광을 받으시느니라.](벧전4:14).
5. 예수의 이름으로 죽어야 합니다(행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슬피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죽는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노라, 하니](행21:13).
6.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요13:13-14,요15:26,요16:23).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3,24).
7.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야 합니다(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한 가운데 있느니라.]
8.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골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골3:17).
9. 예수의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약2:7).
만약 저와 여러분이 입만 살아 있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예수란 이름은 사람들 가운데 조롱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너희가 일컬음을 받는 그 귀한 이름을 모독하지 아니하느냐?](약2:7)
예화) 알렉산더 이야기- Change your name, or Change your ways.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이며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은혜를 받아야 할 시기는 바로 지금입니다. 왜냐하면 한치 앞을 모르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런 죽음을 알리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죽음이 점점 더 가깝게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를 확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이란 다섯 가지 내용을 갖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도의 응답과 영적 싸움에서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것과 모든 죄악을 용서받았다는 것과 알 수 없는 내일도 주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본절의 앞 부분에서 언급한 바, 구원의 때가 도래했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 구원은 바로 '지금'(*, 뉜) 바울이 전하는 화해의 복음을(5:18-21)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나 이 '때'는 항상 지속되지는 않는다.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없어지는 날 곧 주께서 재림하실 날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눅 12:40), 도적같이 임할 것이다(살전 5:2).
따라서 바울이 복음을 선포하는 그 순간은 곧 종말론적인 '결단의 때'라고 할 수 있다((Cullmann).
또한 이 '결단의 때'는 각 개인에게 올바로 선택해야 할 책임이 부과된 '책임의 때'이다.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라는 외침을 듣는 사람들이 그 메시지와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을 경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며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Hughes).
10-20-2024(주일)
암송 성구 #.22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영광(榮光) -
7. [요한복음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8. [요한복음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9. [요한복음 12: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10. [사도행전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16. [빌립보서 1: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영광(榮光) - 영화 영(榮), 빛날 광(光)
불 화(火) + 불 활(火),
덮을 멱(冖)
나무 목(木) = 사람 인(人) + 열 십(十)
* 영화 영자는 사람이 십자가와 같은 무거운 짐 또는어려운 짐을 짊어진 후에 내가 하였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리면
그 후에 불꽃이 피어오르듯이 하나님께 희생 제물이 연기가 되어 올라가듯(번제, 올라)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빛 광(光) = 작을 소(小) + 어진 사람인 발(儿)
* 빛이 되려면 먼저 내가 작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작은 마음과 생각이 어진 사람의 흔적으로 새겨져야 합니다.
사람은 욕망이 강하여 내가 무엇을 행한 후에 내가 하였다는 자기 의(義)에 도취되기 쉽습니다.
헬라어의 영광 - 독사(dŏxa) δόξα, ης, ἡ 스트롱번호 1391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어로는 ‘카보드’,
헬라어로는 ‘독사’
세상
모든 피조물과는 전혀 다른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완전성과 탁월성을 뜻합니다.
특별히 당신께서 신자에게 임재하실 때에 찬란한 빛이
동반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glory, 한글로는 영화로운 빛(榮光)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실체를 인간은 결코 상면할 수 없습니다.
추악한 것과는 단 일초도 공존하지 않으시는 완전한 선이신 그분의 존전 앞에
죄로 찌든 인간이 서면 당장 소멸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매개체를 통해서 혹은 천사를 대신 보내어서 인간을 만나주십니다.
대표적인 예로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또 시내
산을 덮은 구름이나 이스라엘의 성막위에 머문 구름을 통해 당신의 임재를 보여주시고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출 24:16,
40:35) 그러다 성자 하나님 예수는 사람이 직접 뵙고 만나도 죽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사랑을 받아 누릴 수 있도록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스데반이
순교할 때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회심시킬 때에 실제로 영광스런 빛 가운데 임재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실제적인 임재 앞에 서게 되면 엄청난 경외감에 사로잡혀서 아무 말도 못하고 얼어붙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그분께 내어드리며 그분의 처분만 기다리며 겸손히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자 자기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으로 망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듯이 말입니다.(사 6:3)
그런 고백을 받으신 하나님은 진노의 형벌 대신 은혜의
구원을 베푸시고 당신의 자녀와 종으로 세워주십니다.
그럼 넘치는 감격과 기쁨으로 저절로 그분을 향해 감사 찬양 경배를 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골고다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완전하게 실현되었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죄인들의 죄 값을
감당하시고 구원해주시는 은혜는 인간은 상상도 못할 하나님만의 완전한 의이자 탁월한 선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에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헬라어로 영광-‘독사’의 타동사형 ‘독사조’, 영어로
gloryfy로 번역됨)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라고 기도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주님이 이제 곧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서 성부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감당하심으로써 성부와 성자 모두가 영화롭게 된다고 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사실상 당신의 가르침, 섬기는 사역, 기적들, 그리고 십자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는데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그분이 자기 땅에 왔는데도 자기 백성들이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1:9-18) 사탄은 자기 종들을 충동시켜서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으나 사탄의 그 모략마저 당신의 영광을 온 천하에 완전하게 드러내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진리의 영, 성령님이 오셔서 제자들로 십자가에 드러난 그 영광의 실체에 대해 정확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셨던 천국 복음과 십자가 구원의 의미를 풀어서 성경으로 저작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의미를 밝힌 성경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기에 필요 충분한 영적 진리가 온전히 계시된 것입니다. 거기다 신자에게 그 진리를 잘 분별하여 자기 삶에 반영할 수 있도록 성령님이 평생토록 내주해주십니다. 신약시대에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하나님이 굳이 매개체나 천사의 모습으로 신자에게 영광 가운데 임재 해주실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사역이 이뤄지기 전이었고 성경도 완비되지 않았으며 성령님도 일시적 부분적으로만 역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통으로 계시하거나 직접 임재해서 당신의 뜻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던 때와 신약시대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 이후의 영광
바꿔 말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개념을 바꿀 필요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단순히 당신의 위엄과 권능을 과시하려고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서 보듯이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특별히 이 땅과 인간을 다스리는 뜻과 계획을 밝혀서 보여주기 위해서만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신약성경으로 당신의 뜻이 온전히 계시되었으니까 더 이상 가시적인 존재로는 거의 임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신약신자들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그 영광을 인식할 수 없게 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가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절감하면 바로 그분을 대면한 것이고 그분의 영광도 가시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영적으로 접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어떤 일이 하나님이 아니고는 절대로 행할 수 없는 그분의 역사라는 확신이 들면 사실상 그분을 대면한 것입니다. 맨 처음 성령으로 거듭날 때부터가 그러합니다. 신자는 인식하지 못해도 연약한 피조물인데도 그분의 주권적 택함을 받아서 거부할 수 없는 그분의 불가항력적인 구원의 은혜를 입는 것부터 그분의 영광이 강력하게 임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성령의 중생의 은혜를 입은 신자는 자연히 “어찌 나 같은 천하의 죄인에게 이런 구원의 크신 은혜를 베푸시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아주 뛰어난 업적을 쌓은 존경 받을 만한 인물을 대면해도 “제게 너무나 큰 영광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분이 나를 만나주어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그런 차원과도 비교조차 안 되는 너무나 고귀한 은혜이므로 자연히 감사 찬양 경배를 올리게 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배 중에 십자가 은혜를 감사하는 찬양을 부른 후에 성도들은 진심으로, 단순히 종교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만의 탁월함과 완전함입니다. 신약시대에는 눈에 안 보이지만 그분의 영광은 더 다양한 방식으로 더 빈번하게 신자에게 비춰집니다. 대표적으로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깨닫고 소름이 끼치도록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 깨달은 대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신다고 절감하면 감격은 두 배로 늘어납니다.
예배, 설교, 성경공부, 찬양, 기도, 성도교제, 전도나 선교, 교회와 지역사회에서 봉사, 이웃 사랑, 사회적인 선행 등등 신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면 반드시 그분이 함께 동행해주십니다. 신자도 지금 그분이 분명히 나와 함께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자신이 전혀 계획 의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내 인생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더 확실히 인식되고 그분의 뜻까지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그럼 그 자리에 엎드리고 눈물이 절로 흐르도록 감사와 경배를 돌리게 됩니다. 영광이라는 히브리어 카도사는 원래 ‘무게’나 ‘중압감’이라는 뜻인데 하나님이 신자에게 임재하면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기에 영광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고난 가운데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것입니까? 이 또한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통해서 당신다우심을 드러내신다면 그분의 영광이 함께 한 것입니다. 물론 전적으로 신자의 죄나 잘못으로 일어난 고난이라면 고난 자체에 그분의 영광은 없습니다. 죄 자체의 부작용과 폐해가 고난으로 닥쳤고 신자로서 그분의 징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 잘못으로 인한 고난 중에도 신자가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의 기도를 하면서 그 잘못을 고쳐나가면 하나님이 고난을 없애주고 더 거룩한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그런 구원을 인식하고 자신의 회개마저도 당신께서 간섭해주신 은혜라고 확신하면 그분의 영광을 대면한 것입니다. 그분께 한층 더 깊어진 감사 찬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욥처럼 믿음을 성숙시키기 위해서 또 아브라함처럼 열방 앞에 복의 근원으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의도적으로 신자에게 연단을 겪게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도대체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도 못하며 하나님께 원망만 하게 됩니다. 그러다 끈질기게 기도하며 그분과 영적인 씨름을 해나가면서 그 연단의 의미를 깨닫고 잘 순응하면 고난 중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대면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신자가 진정으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동행을 이어가면 그분의 영광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로 그분을 만나서 영광을 보려고 간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영광을 돌리는 방법
그럼 신약 신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접한 신자는 자연히 감사 찬양
경배를 돌리게 된다고 이미 말씀드렸지만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다 가르쳐주셨습니다.
마지막 만찬 때에 기도하신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었고 또 성자로서 성부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더러 전부 십자가에 죽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늘날 그런 정도의 핍박은 없으며 굳이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십자가에서 절정으로 드러났기에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을 자신의 삶에 구현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이 땅과 인간을 다스리는 목적과 방향은 오직 하나입니다.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베풀려는 것입니다. 창조 때부터 신구약시대를 거쳐서 마지막 날까지 인류의 전 역사는 십자가 구속사입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으면 온 동네에 잔치가 벌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이 한 명이라도 구원 받을 때에 하나님은 가장 영광스럽게 여기고 또 신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그 일에 기여하면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 개인의 인생이나 그가 속한 공동체에 현실적으로 풍요를 주던 고난을 겪게 하던 당신만의 구속역사를 이뤄나가는 것입니다. 신자가 겪는 어떤 고난이라도 그런 방향으로 그분의 역사가 임하면 그분의 영광도 함께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단지 현실적 축복을 받고 그에 상응한 감사헌금 혹은 교회봉사를 더 많이 한다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고난을 겪게 했으니 그분께 영광을 돌릴 것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틀린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이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10:31-33)
‘그런즉’이라고 시작하니까 바로 앞에서 설명한 내용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신자들이 시중에 파는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알다시피 당시에는 고기가 귀해서 우상 신전의 음란한 예배에 바쳐진 후에 판매되었습니다. 신자로선 그런 고기를 사먹기가 꺼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우상 자체는 실존하지 않으니까 그에 바쳐진 것도 아무 의미가 없으므로 신자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전제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믿음이 그 정도까지 확고하지 않는 연약한 신자나, 우상이 있다고 믿는 주변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가 자기들 계명을 위반한다고 비방할 가능성이 있다면 먹지 않는 것이 좋다고 권면했습니다. 신자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나 좋은 일을 다른 사람의 믿음을 위해서 또 복음 전파에 방해되지 않도록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스스로도 그런 위험이 있다면 평생 동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후에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라고 말했기에 바로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처럼”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종교적 관습이나 의식에 따른 경건한 행동보다는 오직 십자가 복음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가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행을 많이 하고 종교적 활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특별히 하나님께 헌금 헌물을 많이 바치고 종교적 행위를 열심히 뜨겁게 행한다고 해서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지는 모습이 드러나야만 합니다. 신자가 자신의 삶과 하는 일을 통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주변에 전파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신자부터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며 그분이 이 땅에서 살았던 삶대로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믿음이 연약한 신자는 그런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또 삶의 여러 측면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모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분의 탁월하심과 완전하심을 있는 그대로 순전하게 인정하면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 일은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라고 인식할 수 있다면 그분께 진정으로 감사하면 됩니다.
그런 인식이 안 되어 당장은 잘 이해할 수 없는 경우라도 반드시 그분만의 거룩한 뜻이 있을 것이라고, 최소한 그분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진리 하나라도 겸허하고도 확고하게 인정하면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난 중에 원망과 의심을 앞세우기 보다는 그분의 뜻을 묻고 또 묻는 것부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Five Solas 다섯 솔라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다섯 솔라’ 시리즈의 마지막인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라틴어를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혹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차치하고, 최소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나는 내가 제일 중요해.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 하나님의 영광은 나하고 관계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고, 그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하시며 우리에게도 그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은 성경에서 우리가 놓칠 수 없는 분명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시작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선포합니다(창 1:1).
누구도 아무런 의미나 목적 없이
무언가를 만들지 않습니다.
더구나 인격체이신 하나님께서 또 다른 인격체인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창조의 목적은 시편을 비롯한 다른 말씀들에서 계속해서 나오는데, 이사야서에서는 특별히 하나님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동일합니다. 구원은 마치 ‘재창조’와 같아서, 성경은 구원을 새로운 창조로 말하기도 하고 창조에 사용된 언어를 그대로 구원에 적용하여 사용하기도 합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엡 2:8-10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목적도 창조의 목적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성경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이렇게 명령합니다.
시 96:1-3 [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2]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3]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 당시의 가톨릭 교회도 하나님의 영광을 표면적으로 부정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가르침과 실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져 있었고 다른 것들이 영광을 (하나님과 함께) 얻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교회의 믿음과 삶에 있어 가장 높은 권위의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황과 의회가 결정한 전통이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이신데, 마리아나 다른 성인들, 사제들이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구원인데, 우리가 무언가를 거기에 더해야 하고 더할 수 있다고 가르쳐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과 실천에는 공통으로 하나님과 그분께서 하시는 일에 사람과 사람의 행위가 더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결과적으로는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이 함께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오직’은 이런 것들을 바로 잡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쯤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완전하고, 다른 피조물과는 구분되고, 무한히 위대하신 하나님의 속성이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하고 구분되며 무한히 위대하신 속성, 즉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거룩이라고 말하고,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겉으로 표현되는 것을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잘 드러난 말씀은 이사야 6장 2~3절입니다.
사 6:2-3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스랍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분을 ‘거룩하다’고 선포했고, 온 땅에 충만한 그분의 거룩하심을 ‘영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어떤 면이 겉으로 드러나면 그것이 영광보다는 수치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완전하시고 무한히 위대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어떠하심이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그분께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결국,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혹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잘’ 혹은 ‘그대로’ 드러나게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말씀에 따라 모든 것을 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일입니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중보자가 되신 것을 인정하고 그리스도께만 나아가는 것이 그렇게 하는 일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내가 무엇을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믿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 구원임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시고, 하나님이 구원자시고, 하나님이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오늘날에 적용할 때, 두 가지 주의할 점을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첫째는, (당연한 얘기지만)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성취에 도취하여서 마치 내가 모든 것을 이뤄낸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말만 그렇게 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 생각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아름다움, 위대하심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더 말씀을 배우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그분께서 우리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중 단 하나라도
‘내가’ 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합니다.
두 번째는, 마치 우리가 무언가를 성취해서 얻어낸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 쉽게 말해 “하나님 덕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약간은 생각의 방향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핵심은 우리가 무엇을 해냈느냐, 성취했느냐가 아닙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잘’ 드러나셨냐가 핵심입니다. 내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잘 드러났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직장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고백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니가 거기까지 가려고 얼마나 아부를 떨고 돈을 갖다 바쳤는지 내가 아는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어떨까요? 아무리 잘 포장해서 말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직장에서는 말단 사원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도 눈속임으로 일하지 않고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한다면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늘나라의 소망 가운데 기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분명 영광 받으십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이루었느냐, 앞으로 무엇을 이룰 것이냐가 아니라, 지금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모습을 드러내고 있느냐입니다.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길 원합니다. “내 생각, 말, 삶에서 하나님은 바르게 드러나고 계신가? 나를 통해 보여지는 하나님의 모습은 왜곡되어 있지 않은가?” 유명한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한 헨델은 악보의 끝에 “S. D. G.”라는 약어를 기록했습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입니다. 우리 삶의 매 순간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 우리 삶의 끝에 “S. D. G.”라는 세 글자를 힘차게 외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마음가짐이나 언행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우리를 대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말과 품행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도
있고 드러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장 16절
우리들의 착한 행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회개시키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동기가 된다면 그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흐뭇하시겠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성도들에게 선행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벧전 2장 12절
진리가 아무리 옳다 해도 성도들의 행실이 악하다면 복음의 빛은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도 옳고,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의 됨됨이도 아름답다면 복음의 빛은 더욱 밝아질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많은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고전 3장 16절). 하나님과 하나 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닮아갈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장 5절
“…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 1장 4~7절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이와 같은 아름다운 행실들을 교회 안팎에서 행한다면 믿음의 식구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선하다는 증거를 얻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본받지 말라 경고하고 있습니다(롬 12장 2절). 그러므로 이 악한 세대 속에서도 우리는 세상의 풍조에 동요될 것이 아니라 고운 말씨와 착한 마음씨, 아름다운 행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유명한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쓴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유명한 논문이 있습니다.
루터는 이 논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요점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자유로운 만물의 지배자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충성스러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이 말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에서 자유함을 얻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유롭게 된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만물의 지배자로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육신적으로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웃과의 관계에서 종처럼 그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러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교훈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본문에 앞서 성도는 자기의 신앙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자유가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부터 삶의 중요한 문제까지 결정하며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상의 문제들을 선택하고 결정하는데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31절 말씀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최종적인 결론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삶의 목적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참된 성도의 신앙과 생활을 정확하게 요약한 핵심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모든 행위의 기준, 전 인생의 기반 역시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아주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 즉 그것이 먹는 것이든지 마시는 것이든지 생업의 일이든지 봉사의 일이든지 무슨 일이든지 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급함과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오늘 중추절을 맞이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하나님이 영광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목적을 바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존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그 목적인 무엇인지 알아야 분명한 삶을 살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을 상실하고 있다면 존재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존재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치창조의 수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적을 상실하면 자연히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는 마치 땅만 허비하고 세월만 허송하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목사님은 말하기를 "실패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목적이 잘못된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가장 잘 인식한 사도 바울은 빌 1:20-2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이 고백을 통해 자신의 존재목적이 예수님을 존귀하게 해드리기 위함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존재목적도 역시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우리 한국교회에 ‘목적이 이끄는 삶’ 열풍이 불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새들백 교회 릭 워렌 목사님을 통해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열풍이 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우리 한국교회가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되었다면 지금쯤 우리 한국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아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세상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을 모든 사람들이 살기 좋은 천국, 즉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것이 교회의 소명이고 사명이며 교회의 존재목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그 목적을 잊었습니다.
세상을 등졌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잊었습니다. 교회가 교회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부흥, 교회의 성장이 교회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성장이 목적이 되고, 교회의 부흥이 목적이 되어 온 교회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느 정도 그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세계에서 제일 큰 장로교회, 세계에서 제일 큰 감리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점점 커지는데 교회는 점점 그 생명력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는 점점 그 아름다움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의 존경을 받고 인정을 받던 교회는 점점 세상의 지탄을 받고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교회로 추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교회가 교회의 존재목적을 잃으면서 교인들도 존재의 목적을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자 되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은 목적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목적을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겠다고 하는 것만 달라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처럼 소중한 소명을 잊었습니다. 사명을 잊었습니다. 자신의 존재목적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잃어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의 능력은 상실한 사람들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삶의 목표와 목적을 수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성공만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과 소명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어리석은 삶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목적을 다시 한 번 세우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개념이 무엇인지는 잘 알아야 합니다. 영광의 개념을 생각할 때 항상 두가지 개념 즉, 하나님과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표현도 있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의 영광의 개념은 “하나님의 임재나 나타내심”의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2장에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행하실 때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11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갈릴리 가나의 한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드러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과 사랑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내고, 알려주고, 보여주며, 높이는 방편이 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신원 에벤에셀 박성철 회장은 장로님입니다. 20여 년 전 남의 건물 얻어서 조그맣게 봉제공장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물질의 복을 주시면 수입의 30%를 하나님 영광을 위해 쓰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오늘날 그 기업은 신흥재벌의 순위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사업을 하든, 운동을 하든, 공부를 하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일차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드러내고 보여주며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의 전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데 두었습니다.
롬 14: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제일의 목적이 바로 인간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목표를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말씀합니다. 사 43:7절에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 목적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나타나는 중요한 열매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32-33절에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자유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성도든지 아니든지, 아니면 나와 관계있는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관계없이 그들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유익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거미같이 자기만 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손해나게 하며 해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개미와 같이 부지런히 살기는 하는데 전적으로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부지런히 일하는 꿀벌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꿀벌은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갑니다만 그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삶의 결과는 반드시 영혼을 구원하는 것으로 연결되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여 영생 얻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은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 6:39-40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구원받아 영생을 소유한 우리 성도들의 삶은 어찌하든지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일에 목표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믿기를 권하고, 예수 믿게 하여, 우리와 같이 영생을 얻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 생애의 최대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한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해 그들의 영혼을 건져야합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서 시간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고 재능을 바치는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실 때 복음을 위해 생명까지 바친다면 최고의 영광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무슨 일을 하든지 궁극적인 목표를 영혼구원에 두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무엇을 하든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과 박해와 핍박을 각오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내 가족, 내 친지,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혹 아직도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어둠의 세계에서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습니까?
10-13-2024(주일)
암송 성구 #.21 고린도후서 5:17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호스테 에이 티스 엔 크리스토 카이네 크티시스 타 아르카이아 파렐덴 이두 게고넨 카이
ωστε ει τις εν χριστω καινη κτισις τα αρχαια παρηλθεν ιδου γεγονεν καινα τα παντα
신약 성경의 언어 헬라어에서 "새롭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는 "카이노스(kainŏs)"와 "네오스(nĕŏs)"라고 합니다.
'카이노스'는 질적으로 온전하게 새롭게 된 변화를 말합니다.
반면에 '네오스'는 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휴대전화의 새로운 제품이 소개될 때 그 신제품을 가리켜 '네오스'의 변화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후에 그의 삶이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면 그 사람의 변화를 일컬어 '카이노스'의 변화라고 합니다.
현대인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목회자가 목회자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을 때
둘째는 교회가 지역사회에 유익이 되지 못할 때
셋째는 교인들의 비신앙적인 삶
이러한 이유의 근본적인 원인은 '네오스'의 변화에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카이노스의 변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지는 카이노스의 변화'를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표현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의미한다. 이 연합의 비밀에 대해 사도 요한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관계로 설명했다(요 15:1-7).
새로운 피조물(크티시스. ktisis. κτίσις)
- 새로운 피조물이란 외적인 모양이 아니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있는 내적 능력을 갖는 것이다.
2537. 카이노스 καινός, ἡ, όν
Kainos는 종종 "새로운"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로 성경 본문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의 맥락에서 Kainos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뿐만 아니라 신선하고 질적으로 다른 것을 가리킵니다.
시간적 의미에서 단순히 젊거나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neos"라는 단어와 달리 Kainos는 더 큰 영적 갱신이나 변형을 의미합니다.
νέος, α, ον
스트롱번호 3501
언어는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됩니다.
신약의 원래 언어인 그리스어는 뉘앙스와 의미가 풍부합니다.
각 단어는
사용법, 맥락 및 역사적 배경에 따라 다른 측면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Kainos와 Neos와 같은 단어의 구별은 독자가 의도한
메시지를 더 충분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복음서에서 카이노스는 예수의 중요한 가르침에 등장하여 그의 메시지의 변형적 측면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9:17에서 예수는 새(카이노스) 포도주를 새(카이노스) 포도주 부대에 넣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은유는 단순히 기존
전통에 패치할 수 없는 새로운 신앙 접근 방식의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예수는 그의 언약이 모든 것을 바꾸는 새로운 관점을
가져온다고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글에서 자주 카이노스를 사용했습니다.
고린도후서 2:5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 창조물(카이노스)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고 보라 새 것(카이노스)이 왔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믿음을 통해
일어나는 완전한 변화를 강조합니다.
그것은 옛 생활 방식에서 성령으로 활기차고 능력을 받은 생활 방식으로의 변화를 나타냅니다.
카이노스는 또한 새 언약에 대한 논의에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실 때, 그것은
카이노스 원칙을 낳습니다.
히브리서 8:13에서 저자는 옛 언약이 쓸모없게 되고 있으며, 암묵적으로 카이노스 언약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새 언약은 용서, 내적 변화, 그리고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제공합니다.
Kainos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다른 그리스어 단어와 비교하는 것이 좋습니다.
Kainos는 신선함과 변화를 강조하는 반면, 시대나 시간에서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Neos는 그 변화의 깊이를 전달하지 않습니다.
Neos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것, 아마도 최신 자동차 모델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변형보다는 연대기와 더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Kainos는 심오한 갱신을 암시합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후 Kainos가 된 사람은
단순히 새로운 삶의 단계로 나이를 먹은 것이 아니라 영적 상태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카이노스의 궁극적인 표현을 요약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서 "나는 새(카이노스) 하늘과 새(카이노스)
땅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흥분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혁신이 아니라 창조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완전히 회복됩니다.
죄와 고통으로 점철된 옛 질서는 순수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자리를 내줍니다.
성경의 카이노스 개념은 신자들이 변화를 받아들이도록 격려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갱신에 대한 부름이며, 믿음에 뿌리를 둔 새로운 정체성을 위해 오래된 습관과 사고방식을 벗어던지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개인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계와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Kainos는 다가올 것에 대한 희망을 구현합니다. 신자들은 그들의 영적 삶의 궤적이 새롭게 되고 더 나은 것을 향한 길을 따른다는 것을 상기합니다. 이 희망은 시련과 고난 중에 인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Kainos를 이해하는 것은 또한 신자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 성경 읽기, 영적 각성을 촉진하는 커뮤니티의 일원이 됨으로써 성장을 기르도록 격려받습니다. 매일 Kainos 경험을 위한 기회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힘을 드러내는 은혜의 순간입니다.
Kainos는 성경 이야기에서 엄청난 깊이를 드러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요 성경에서 마주치는 용어로, 피상적인 방식으로 새로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완전한 개혁을 나타냅니다. 이 단어를 이해하면 신자들은 신앙의 변화시키는 힘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도록 격려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갱신이 절실히 필요한 세상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공합니다.
Q. 카이노스의 문자적 번역은 무엇입니까?
A. Kainos는 종종 "새로운"으로 번역되며, 단순한 연대순의 새로움을 넘어 신선하고 질적으로 다른 것을 나타냅니다.
Q. 신약성서에서 카이노스는 어디에 자주 언급됩니까?
A. 카이노스는 마태복음 9:17, 고린도후서 2:5, 요한계시록 17:21 등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Q. 카이노스는 새 언약의 개념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A. 카이노스는 쓸모없는 옛 언약과 대조적으로, 예수를 통해 확립된 새롭고 변혁적인 관계를 구현합니다.
Q. 카이노스는 신자들의 영적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나요?
A. 카이노스를 이해하는 것은 신자들이 믿음과 행동을 통해 삶에서 개인적 변화와 갱신을 받아들이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
Q. 카이노스는 신약에만 나오나요?
A. 카이노스는 주로 신약성서에서 발견되지만, 그 개념은 다양한 형태로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공명합니다.
Q. 카이노스는 신학적 토론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요?
A. 카이노스는 새로운 삶, 재생, 그리고 신자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역의 본질에 대한 토론을 촉진합니다.
Q. 카이노스는 성경적 맥락 밖의 일상 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까?
A. 네, 새로운 시작과 변화라는 개념은 일상적인 결정과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Q. Kainos는 성경의 죄 개념과 어떻게 관련이 있습니까?
A. 카이노스는 죄에 지배받던 옛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의로움으로 능력을 얻은 새로운 삶을 소개합니다.
Q. Kainos와 Neos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차이점을 이해하면 독자는 기독교 신앙에서 요구되는 변화의 깊이를 인식하고 변화에 대한 오해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Q. 신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카이노스 생활을 추구할 수 있습니까?
A. 신자들은 기도, 성경 공부, 지역 사회 참여, 그리고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반영하는 봉사 활동을 통해 Kainos의 삶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2937. 크티시스 κτί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2937
- 인종과 성(性)을 초월하여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여(14절)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을 이루면(갈 2:19, 20)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여기서 '피조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티시스'(*)는 창조행위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롬 1:20).
즉 본 구절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영적인 교제를 갖게 되었을 때 그에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로운 창조 행위가 일어나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창조 행위를 오해하여 새로운 질료(質料)로 만들어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상상해서는 안된다.
그는 여전히 육의 몸을 입고 있고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육체의 욕망과 죄에 굴복당할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롬 6:12,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그가 그리스도와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16절).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사람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을 따라 살게 된다.
과거에는 그리스도를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 과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인정했으나 지금은 그런 차별을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만이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롬 2:28, 29; 고전 5:12, 13; 갈 3:28; 엡2:11-22; 골 3:11).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헬라어 직역 / 24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으니, 심판에 이르지 않고 반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
αμην αμην λεγω υμιν οτι ο τον λογον μου ακουων και πιστευων τω πεμψαντι με εχει ζωην αιωνιον και εις κρισιν ουκ ερχεται αλλα μεταβεβηκεν εκ του θανατου εις την ζωην.
아멘 아멘 레고 휘민 호티 호 톤 로곤 무 아쿠온 카이 피스튜온 토 펨프산티 메 에케이 조엔 아이오니온 카이 에이스 크리신 우크 에르케타이 알라 메타베베켄 에크 투 다나투 에이스 텐 조엔.
듣고(아크온. ακουων) - 현재분사형
믿는(피스테우온. πιστευων) - 현재분사형
얻었고(에케이. εχει) - 현재형
옮겼느니라(메타베베켄. μεταβεβηκεν) - 현재완료형
현재완료 : 어떤 동작이 과거에 이미 완료되었으나 그 결과가 현재에 남아있는 시상
일으켜 세움 : 듣고 믿음
그렇다면,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들을 어떻게 일으켜 세우십니까? 24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다면 영생(ζωὴν αἰώνιον)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가 일어나기 위해서, 예수가 요구하시는 능동적 사건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그리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나를 위해 파견하신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두 동사 모두 현재 분사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듣고 있는, 믿고 있는 그 상태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것은 바로 일으켜 세움을 받은 상태를 뜻합니다.
듣는 것
“듣는다”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 백성에게 요구하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헬라어 ‘아쿠오’(ἀκούω)에서 번역되는 듣는 행위는 인간의 선택적 행위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은혜 안에서, 사람이 능동적이며 자발적으로 듣고자 하는 결단이며, 순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듣다’는 것은 그냥 소리가 귀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귀가 듣는 그런 뉘앙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한 의식이 있는 들음이며, 분별력을 가진 들음이며, 앎의 들음이며, 깨달음의 들음이며, 따라서 결단에 준거한 순종이 뒤따르는 들음입니다.
예를 들면,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무조건 들려오는 것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별하여 듣는 것입니다. 아쿠오, 알아서 식별하여 듣는 것입니다. 진짜와 가짜 음성을 분별하는 능력으로 듣는 것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과 삯꾼의 음성을 가려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 얼마나 깊이 내 영혼이 박혀있느냐에 따라서 들림과 그 들림에 의한 울림이 다릅니다. 잘 모르면서 들을 때에는 거역, 반역, 분쟁과 다툼만이 일어납니다.
믿는 것
또 하나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믿는다”(πιστεύω)는 어원적으로, 설득 당하여 믿게 되는 행위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에 의해서 주님을 믿도록 설득 당하여, 이제는 내가 주체적으로 믿겠다고 결단하는 자신의 능동적 행위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이란 당신을 설득하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와 함께, 그 은혜로 말미암아 당신 스스로가 의지적으로 결단하여 믿는 능동성이 오의적(奥義的)으로 결합된 구원적 사건입니다. 하여, 그곳에는 결단코 교만이 설 자리를 얻지 못합니다.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해서 인격적인 믿음 관계가 성립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죽은 자가 바르게 세워지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시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세움(듣고/믿음)은 영생의 현재성
그런데 믿고 들음으로 세움 받은 자들을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로 간주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생이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는 미래형이 아니라, 완료형을 사용하면서, 저자는 듣고 믿는 것은 죽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따라서 이미 영생에 거하고 있다는 구원의 현재성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옮기다”로 번역된 헬라어 ‘메타바이노’(μεταβαίνω)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는 실제적 공간 이동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동사입니다. 말하자면 소속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마치, 군인들이 자신들의 소속부대가 있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망 군대가 아니라, 생명 군대로 전속 배치받은 것입니다. 소속이 바뀌면 지휘관도 바뀌도, 생활 규칙도 바뀝니다. 즉, 인생관과 세계관이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메타바이노의 ‘메타’라는 접두어는 변화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적인 효과를 강조합니다. 즉, 육적 체질에서 성령 중심의 체질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 주님을 믿는 자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원리로 삶을 살아갑니다. 영생이란 시간적인 면보다도, 지금의 상태, 현재 소속되어 있는 어떤 상태가 강조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말씀을 듣고 믿는 그 상태(현재분사형)가 바로 영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생의 미래성
더욱이 요한복음은 영생 그 자체의 현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미래성으로 이어갑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을 듣고 주님을 믿는” 것이 영생이지만, 이러한 현재성은 미래로 향하여 열려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을 향해 열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29절 해석
29절에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구절은 해석의 의견들이 다양하고 주장들 또한 많습니다. 그러나 부산고백교회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 좋겠습니다.
실로, “선을 행한다”는 글귀에는 저자의 아주 중요한 신앙적 해석과 의도가 담겨져 있습니다. “행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포이에오’(ποιέω)는 단순히 뭔가를 행하다는 뜻을 넘어서, 어떤 원인이 있는 행위, 즉 창조적 행위를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특히 5장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역 관계를 표현할 때 사용되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누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하였는가?(5장11절), 여기에 포이에오가 사용되었습니다. 15절에서는, 자기를 고친(포이에오)이가 예수라로 하며, 16절 안식일에 행하는 일로 등장하며, 19절에서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포이에오)을 아들도 그와 같은 일 행한다(포이에오)고 합니다.
선한 일은 분명 아버지 하나님만이 하시는 사역입니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의미에서 “선”은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께만 있기 때문입니다(막 10:17-8). 따라서 하나님만이 선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29절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들은” 다름 아닌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행하는 일은 아들만 행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포이에오는 아들의 포이에오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방식으로
따라서 선을 행하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오로지 이 분만이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 “나오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포레우오마이(ἐκπορεύομαι)는 어떤 특별한 과정과 진행을 통과하여 나온다는 의미를 지닌 용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특별한 방식, 즉 십자가라는 고유한 방식으로 생명의 부활로 나오시는 것입니다.
더욱이 여기서 “선을 행한 자들”이라는 복수형이 사용된 것은 선을 행하시고 생명의 부활로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이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보내신 분을 믿는 우리 그분이 걸어가신 특별한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생명의 부활나오게 된다는 증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영생을 가진 우리에게 미래형으로 열려져 있는 축복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보내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은 영생의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언젠가 그분이 걸어가신 특별한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시고, 지금 당신에게 주어진 영생의 축복을 누리시는 삶을 살아내시길 소망합니다.
요한복음 5:24-29 / 사망에서 생명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 하시는 일들이 많지마는 그 중에서 두 가지, 즉 생명을 주는 일과 심판하는 일을 하십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일은 죄인들의 마음속에 거듭남으로 생명을 주시는 회개와 구원의 역사를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일은 종말의 때에 무덤에서 일어날 일입니다.
(요 5:28-29)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사람이 죽는다는 것만큼 가슴아프고 슬픈 일이 없습니다.
죽어 볼품 없이 시들어 버린 육체가 관속에 뉘어 차가운 흙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절망적인 것이 없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망이라는 말, 즉 죽음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사용되어지는 죽음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10-06-2024(주일)
암송 성구 #.20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성경은 사람이 죽는 것을 죄의 결과라고 합니다(롬 6:23).
그렇다면 성경은 죄(罪)를 무엇이라고 정의합니까?
성경은 죄를 네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불신(不信) 요 16:9"
둘째는 "불선(不善) 약 4:17"
셋째는 "불의(不義) 요일 5:17"
넷째는 "불법(不法) 요일 3:4"
죄로 인하여 흙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육체의 삶이 끝이 났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죄는 세 가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아도취와 현실만족에 따라 더 이상 노력하기를 싫어합니다.
둘째는 양심이 화인을 맞아 잘못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어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합니다.
셋째는 영적 무지로 인하여 육체적인 삶을 선호하여 신령한 세계를 찾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죄를 회개한 후에 비록 육신에 갇혀 있는 제한적인 삶을 살아갈지라도 영원한 소망을 갖고 날마다 노력하며 수시로 반성과 회개를 통하여 보다 더 높은 세상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죄(罪)
1. 불신(不信) 요한복음 16:9. 로마서 14:23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2. 불선(不善) 야고보서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3. 불의(不義) 요한일서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4. 불법(不法)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죄의 결과는 사망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무엇이 죽었는가?
1. 노력하는 것
- 현실만족, 자아도취
2. 느끼는 것
- 양심의 마비 / 죄와 고통에 대한 것
- 회개를 모른다
3. 생각하는 것
- 육은 죽이는 것, 영은 살리는 것
영의 생각
성경학자 바클레이에 의하면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은
첫째, 노력하는 것(effort)을 중단해 버린 것
자기의 현실을 만족히 여기면서 더 이상의 전진을 포기해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자아도취(自我陶醉)
실수와 실패는 더이상 조절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에베소서 4:13, 1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정지하거나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느낌(feeling)을 중단해 버린 상태
이 말은 죄에 대한 느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감정이 정지된 상태입니다.
고통에 대하여 무디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악을 보고 의분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입니다.
슬픈 일을 보고 마음에 연민의 정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느낌, 감정이 죽었을 때에 그 사람은 분명히 그 마음도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심마비(良心麻痺) - 삼 마, 저릴 비
셋째, 생각(thinking)을 중단해 버린 상태
사람의 정신이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어서 더 이상 다른 새로운 진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정신이 폐쇄되어 새로운 진리를 거부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심한 말로 하면 정신이상자와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어도 영적으로는 죽은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한 진리, 곧 구원에 이르는 복음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는 새로운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묵상을 하지 않습니다.
넷째, 회개하기를(repent) 중단한 상태
사람이 편안한 마음으로 죄를 짓는 그 날이 바로 영적으로 죽는 날입니다.
사람이 무슨 죄를 짓거나 짓지 않거나 간에 죄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 그 날이 바로 영적 죽음의 날입니다.
악을 행하고 죄를 지을 때 정상적인 사람은 두려워하고 고통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마음이 패역해지고 완악해짐으로 죄악에 대한 회개가 없어지게 됩니다.
오늘의 시대가 바로 사람을 무시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악한 시대를 살아가도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두 가지 조건을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 말을 듣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또 하나는 "또 나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자가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믿되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상은 인격체가 아닙니다.
돌부처는 인격이 없습니다.
커다란 바위나 나무, 광대한 바다가 인격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사랑하십니다.
때로는 죄악을 행할 때에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미국에서는 평생교회에 세 번만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세상에 태어나서 세례를 받기 위해서 교회에 가고,
두 번째는 결혼할 때 주례를 받기 위하여 교회에 가고,
세번째는 사람이 죽어서 장례식 때 교회에 간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름만 신자이지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신자가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거하므로 공포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주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열어놓으신 그 길이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또는 어떠한 희생이 따른다 할지라도 그 생명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예수의 길을 거부하는 것은 곧 죽음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게는 생명의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만 생명이 주어집니다.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도록 아들에게 권세를 위임하셨습니다.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복음 이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고난당하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아버지에게 있는 생명의 권한을 아들에게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심판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요 5: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심판의 권세를 아버지가 맡기셨습니다.
일을 하시되 아들을 통해 모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권세를 아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뿐만 아니라 무덤속에 있는 자들을 모두 깨워 일으키는 권세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승리의 부활이지만 인간의 부활은 심판의 부활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조금도 다를바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잠자는 우리들을 큰 소리로 깨우실 때 우리는 각자 행위대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주님은 심판하십니다.
이 모든 심판에서 그 기준은 "아버지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요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내 고집, 내 방식대로만 아닙니까?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오직 아버지께서 하시는 그대로 따라서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는 모든 권세를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For the Son of Man came to seek and to save what was lost.
*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자의 온 것은...구원하려 함이니라
- 삭개오에 대한 구원 선언 후 그 선언에 대한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즉 이미 앞절의 주석에서 밝힌 바 있듯이 잃어버린 자에 대한 구원이란 소외되고 비뚤어진 인간을 다시 공동체로 복귀시켜 당당하고 품위있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 말은 온갖 죄악과 허물로 말미암아 혼돈과 파멸에로 향하는 인간들을 구해내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로 인도하시는 것을 뜻한다.
이같은 선언은 사실 에수의 전체적 삶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병에 걸려 정상적인 인간 삶이 불가능한 귀신들린자(마 17:18), 문둥병자(17:14), 벙어리,귀머거리(막 9:25), 소경(막 8:23) 등과 같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며 삭개오와 같은 죄인들을 용서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는 모든 행위는 땅위의 평화(平和)를 위한 사랑의 치유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사람다와 질 수 있도록 하는 예수의 구원 행위는 오늘의 기독교가 우선적으로 따라야 할 과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의 선언이 이미 5:31, 32에서 언급되었는데 결국 삭개오는 이와 같은 선언의 실천적 모델(model)이 된 셈이다.
10-06-2024(주일)
암송 성구 #.20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은 죄의 결과 때문입니다(롬 6:23).
지식을 얻기 위한 과정을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배움의 단계
둘째는 경험의 단계
셋째는 신앙의 단계
배움으로도 경험으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단계가 곧 "죽음 이후의 세계"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죽음 이후의 세계는 학문적인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의 세계는 그 세계를 다녀온 사람에 의해서 알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경험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그가 경험했던 그 세계를 설명해야 합니다.
문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그 세계를 진실되게 알려준 사례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영역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고만 합니다.
유교에서는 효(孝)를 강조하여 생전에 지극정성으로 섬기지 못했기 때문에 제사(祭祀)로 모셔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듯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할 줄 아는 믿음을 다짐합시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의 최종적인 완전성을 증명하는 예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며 하나님의 섭리이다.
이 죽음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며 최종적인 것이다.
죽음 이후에 모든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
09-29-2024(주일)
암송 성구 #.19 요한복음 17:3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영생(헤 아이오니오스 조에. η αιωνιος ζωη) the eternal life.
영(166)
αἰώνιος, ον
스트롱번호166
생(2222)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2222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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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 믿는 것(행 16:31) + 아는 것(요 17:3) + 행하는 것(약 2:26)
Believe Know Deed
πιστεύω γινώσκω ἀκροατήριον
신(信) 지(知) 행(行)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유월절, 무교절, 오순절, 초실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이시다
- 하나님과 본체가 되셨으나 땅으로 오시려면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셔야 하므로 사람의 몸을 잠시 입으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참 빛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은혜 언약(恩惠 言約) The Covenant of Grace
행위 언약(行爲 言約)
Soli Deo Gloria!
내가 너로 [뱀으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 3:15
네 [아브라함의]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창 22:17-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신 18:18-1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39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 8:56
믿음으로 모세는 […]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히 11:24,26,28
우리는 위에서 인용한 창세기 3장 15절이라든지, 창세기 22장 17-18절, 그리고 신명시 18장 18-19절 말씀들을 읽으면서 구약 성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여자의 후손’, ‘아브라함의 씨’, 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약속 되어 있고, 또한 약속의 그 자손이 우리의 구원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약속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위에서 인용한 요한복음 5장 39절과 8장 56절과 같은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성경(특히 구약성경)의 이 중요한 약속들이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있고, 예수님이 약속의 그 자손임을 증거하셨다.
이처럼, 타락 직후로부터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고 간직해 온 이 중요한 약속, 간단히 말해 하나님께서 구원의 자손을 보내시고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이 은혜로운 약속을 ‘은혜의 언약‘(covenant of grace)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은 이 은혜의 언약을 믿은 사람들과 그들에게 이 은혜의 언약이 점점더 구체적으로 계시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신약성경은 약속대로 오신 언약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 언약을 이루셨으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현실화 되어 나가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경은 약속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이며, 그에 대한 약속인 은혜의 언약을 이해하는 것이 성경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중요한 주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은혜의 언약을 역사 속에서 여러번 재언급하시고, 그 때 마다 조금 더 살이 붙은 표현으로 계시해 주셨다는 것을 발견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약속의 자손에 대한 맨 처음 언급은 앞서 본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이다. 그 다음 창세기 18장 18-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사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따라 한 나라를 건설하시고, 거기서 천하 만민이 얻을 복이 흘러 나올 것임을 밝혀주셨다. 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건설하시려는 그 나라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도를 지키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또한 밝히셨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고 칭하실 하나님의 나라를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 후 창세기 22장 17-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시사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라고 하심으로 첫 조상 아담이 믿었던 “여자의 후손”이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나올 것임을 말씀해주셨다. 이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재확인시켜 주셨다.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지금 나열한 하나님의 약속들이 모두 똑같은 말씀들은 아니지만, 각 약속 속에 들어 있는 뼈대가 되는 내용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약속과 약속의 그 자손’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하나님께서 동일한 언약 곧 은혜의 언약을 여러번 확인하여 주심으로 새롭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은혜의 언약을 새롭게 확인해 주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장면이 출애굽기 19장에 나온다. 이집트(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시고 시내산 밑에서 공식적으로 하나의 나라로서 세워주시는 장면이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장면이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세운 언약 때문이라고,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때문임을 출애굽기 2장 2425절은 말한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앞서 우리는 아담 때 부터 믿어 온 동일한 은혜의 언약을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여러번 새롭게 하셨다는 것을 보았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신 것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새롭게 해주셨던 그 은혜의 언약을 이루어 나가시는 일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보았다 (출애굽기 2장 24-25절). 과연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밑에 모인 이스라엘 민족을 “야곱의 집”이라고 부르셨다 (출애굽기 19장 3절).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시내산에서의 언약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약속으로서 은혜의 언약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틀린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을 지킨다는 것과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똑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약을 지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자체에 하나님께서 그 분의 은혜와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약속 만이 있지, 우리 보고 무엇을 하라는 내용이 없다. 즉 구원과 관련된 이 복된 약속을 우리로서는 그저 믿는 수 밖에 없지 달리 무엇을 할 것이 없다. 그렇다, 사도 바울은 은혜의 언약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로마서 4장 16절
구체적인 예로서 아브라함의 아들 중에 언약의 백성 가운데서 끊어진 예를 상기해 보자. 그것은 다름 아닌 이스마엘이다. 사도 바울이 그에 대해 성령으로 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갈라디아서 4장 22-31절). 이스마엘은 언약의 증표인 할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쫓겨났다.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 대로 이삭이 태어났을 때, 특히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사람들은 큰 기쁨 가운데 있었지만, 이스마엘은 이삭을 조롱했다. 이로 보건데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마음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러므로 믿을 수도 없었다. 이스마엘이 쫓겨난 것이 하나님의 어떤 명령을 어겨서가 아니었다.
물론 이것은 그리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는 약속이 무엇인지에 따라 결정된다. 약속이 일방적인 선언이냐, 아니면 쌍방간의 의무에 대한 것이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네가 시장에 가서 국거리를 사오면 내가 국을 끓이마”하는 식의 약속이라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자식이 해야 할 것은 국거리를 사오는 것이 되겠지만, 부모가 “내가 시장에 가서 국거리를 사와서 국을 끓여주마” 하는 일방적인 약속이라면 자식이 부모의 약속을 믿고 국을 끓여주실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 약속을 마음 속에 지키는 것이다. 즉 ‘지킨다’는 것에는 ‘명령을 따른다’는 식의 의미도 있지만, ‘믿고 간직한다’는 의미도 있다.
시내산에서 은혜의 언약을 새롭게 하신 이야기가 나온 김에, 모세 시대에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게하셨다는 이상한 이론도 돌아다니는데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잠시 적고 넘어간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은혜의 언약을 다시 선언하시고, 때로는 더 구체적인 내용을 담아, 언약을 새롭게 하신 것을 보았다. 그것의 한 예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임을 보았다. 그런데, 예레미아 3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또 다시 언약을 새롭게 하실 것임을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아 31:31-33
여기서 언급하신 ‘새 언약’의 핵심적 내용은 여전히 은혜의 언약임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레미아 31장에 언급된 새 언약은 은혜의 언약과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은혜의 언약을 새롭게 하신 것이라는 의미에서 “새 언약”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우에 조금 더 풍성한 내용을 덧붙여서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다름 아니라 예전 시내산에서 새롭게 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능력’의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히 하신 말씀이 없으셨는데,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기록하시겠다는 독특한 은혜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은혜의 언약은 첫 조상인 아담 때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유일한 구원의 언약이다. 그 언약을 믿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이룰 자손이 왕이요,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로서 하나님 앞에 영원히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다 (신명기 18:18-19, 삼하 7:12-16, 시 110:4).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약속된 그 자손임을 증거하셨다 (요한복음 5:39, 8:56). 성경 역시 수차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약속된 그 자손이라고 증거한다 (누가복음 1:72; 마태복음 1:1,21; 히 10:12-18). 특히 예수께서는 마지만 만찬의 자리,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그 분의 피로 그 분에게 속한 사람들의 죄를 씻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 되는 은혜의 언약을 이루실 것임을 선언하셨다 (고린도전서 11:25).
과연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를 위해 다시 살아나시사 영원한 왕, 제사장,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중보적 왕권을 행사하시는 새 시대를 여셨다. 그로써 그림자 역할을 하던 모세적 제도, 다시 말 해 예수님 오시기 전의 언약공동체에게 주셨던 여러가지 실정법과 제도에 종료를 고하셨다. 그렇다고 예수님 오신 이후 새롭게 된 언약공동체 곧 신약 교회가 구약 교회와는 전혀 다른 언약 아래 있는 것은 아니다. 신구약 교회는 형식만 다를 뿐 본질은 동일한 은혜의 언약 아래 있는, 한 백성, 한 몸이다 (로마서 4:16; 11:17-18; 갈라디아서 3:7).
창세기 2:15-17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 대부분은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언약들을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구속 언약, 행위 언약 그리고 은혜 언약으로 칭하였습니다.
구속 언약(팍툼 살루티스, pactum salutis, covenant of redemption, covenant of salvation)은 영원 안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성부·성자·성령 사이에 맺어진 협약입니다. 구속 언약에서 성부는 택자들의 구속자가 되도록 성자를 주시고 성자에게 택자들의 구속을 위한 조건들을 요구하시며, 성자께서는 기꺼이 이 조건들을 이루시는 데 동의하시고, 성령께서는 기꺼이 성자의 구속 사역을 택자들에게 적용하시기로 협약하셨습니다. 이 구속 언약은 창세 전(시간 전) 곧 영원에서 성부·성자·성령 사이에 이루어진 ‘내재적 삼위일체의’(intratrinitarian) 언약입니다.
행위 언약은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첫 사람이자 인류의 대표자로서의 아담과 맺은 언약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관하여) 2항에서 행위 언약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처음 맺은 언약은 행위 언약이었습니다. 이 언약에서는 완전하고(perfect) 인격적(개인적, 전인적, personal)인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에게 또한 아담 안에서 그의 후손에게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행위 언약’(covenant of works)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 언약의 조건이 완전하고 전인적(全人的) 순종이었기 때문입니다. 행위 언약의 원리는 ‘행하라 그러면 산다’는 것입니다. 이 행위 언약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2문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20문에서는 ‘생명의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2장과 3장에 ‘행위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언약의 특징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언약들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특징적 요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언약의 양 당사자가 있습니다. 둘째는 언약 내용에 약속이 있습니다. 셋째는 약속에 따르는 조건이 있습니다. 넷째는 조건을 어기고 파기한 데 대한 벌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3장에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언약을 성립하는 네 가지 특징적 요소들은 나타납니다. 언약의 당사자로는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인 첫 사람이자 모든 인류의 대표인 아담입니다. 언약의 내용으로 약속된 것은 생명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약속과 관련된 조건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고 전인적(全人的)인 순종입니다. 이 조건을 어길 경우에는 사망의 벌이 선포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 관계에 더하여 언약 관계를 가지게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어 언약 관계 안에 산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의 복되고 영광스러움을 성경에서는 종종 혼인 관계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성경은 언약의 하나님과 그의 언약의 파트너인 언약 관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과의 관계를 결혼 관계로 말씀합니다(에스겔 16장; 호세아 2-3장).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 3:19).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피조물 관계에 더하여 언약 관계를 가지고 살 수 있게 해 주신 것은 참으로 크고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 7장은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관하여 말해 줍니다. 2장에서는 행위 언약(covenant of works)에 관하여 말하고, 3항에서는 은혜 언약(covenant of grace)에 관하여 말합니다. 이에 앞서 1항에서는 이 언약들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에 근거한 것임을 알려줍니다. “비록 이성 있는 피조물들이 그들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마땅히 순종해야 할 의무를 지니지만,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간격이 심히 크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자신을 자발적으로 낮추어(voluntary condescension) 주시지 않으면, 피조물은 결코 하나님에게서 그들의 복과 상급으로 어떤 것도 경험할 수 없는데, 그것을 하나님은 언약의 방식으로(by way of covenant) 나타내기를 기뻐하셨습니다”(1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1항은 지극히 높으시고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 언약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하나님 편에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어 주시지 않으면 이 언약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려 줍니다. 언약 관계를 맺기 위하여 하나님 편에서 자발적으로 낮추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인자하심, 선하심)이 언약 관계의 배경에 있음을 잘 이해하고 명심해야 합니다. 은혜 언약뿐만 아니라 행위 언약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based on) 기초하고(grounded on) 있습니다.
행위 언약은 하나님이 타락 이전의 아담과 맺은 언약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언약을 행위 언약(foedus operum)이라고 일컫는 데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 본문에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과, 행위라는 이름을 붙이면 이 언약에는 하나님의 은혜(또는 사랑)는 전혀 없고 인간의 행위만 강조함으로 이 언약을 순전히 율법적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순종 행위를 약속된 생명을 얻는 공로로 오해하기 쉽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1항에서는 2항에서 말하는 행위 언약과 3항에서 말하는 은혜 언약은 둘 다 하나님 편에서 그분 자신의 자발적인 낮추심(by some voluntary condescension on God’s part)에 근거(기초)된 것임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 언약과 행위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어 사람과 언약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에 근거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행위 언약을 “생명의 언약”(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20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2문)으로, 사랑의 언약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아담이 대표한 그의 모든 후손인 인류와)과 맺은 첫 언약을 일반적으로는 ‘행위 언약’으로 일컫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언약을 아담과의 언약, 율법 언약, 생명 언약, 자연 언약, 창조 언약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 아담과의 언약을 행위 언약이라고 하면, 이 언약에는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없고 인간의 행함만 강조한다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작성자들인 17세기 청교도 신학자들은 ‘은혜’라는 말은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곧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묘사하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타락하기 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나타내는 말로는 ‘은혜’라는 말 대신에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은혜’라는 말도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타락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 곧 구원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 구별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은혜 언약만이 아니라 행위 언약도 하나님의 자발적 낮추심(voluntary condescension)에 근거한 것임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1항에서 강조합니다. 지극히 높으시고 영화로우시며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피조물 관계(creator-creature relationship)에 더하여 언약 관계(covenantal relationship)를 가져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그의 언약 백성으로 살게 해 주신 그 자체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행위 언약(covenant of works)이란 첫 사람 아담(아담이 대표한 아담 안에 있는 그의 후손)과 맺은 언약인데, 완전하고 전인적인 순종에는 영원한 생명을, 불순종에 대해서는 영원한 죽음을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첫 아담과 맺은 행위 언약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빛을 비추어 줍니다. 성례(성찬과 세례)는 인류의 대표인 첫 아담이 실패한 것을 회복하여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구원을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우리를 위하여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성취하신 구속을 나타내고 보증하는 것입니다.
Ⅰ. 서 론
성경은
언약(言約)의 책이다. 성경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때 구약과 신약을 말한다. 이 구분을 언약적 관점에서 말하면, 구약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고 신약은 예언대로 오신 메시야에 대한 성취의 말씀이다. 그리고 다시 신약은 재림(再臨)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으며, 초대교회 이래로 인류의 역사를 포함하는 교회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언약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성취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언약과 성취의 역사로 해석할 수 없다면, 성경해석에 있어서 많은 난관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초대교회 이래로 종교개혁시대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경해석의 관심은 언약이 항상 그 중심을 이루어왔다.
교부(敎父)
시대에 터툴리안(Turtulian)이 신약(Novum Testamentum)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래로 성경이 언약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확증되었고, 오늘에도 성경의 이름을 구약과 신약이라고 사용하고 있으니 그 증거는 더욱 확실하다.
그런데
성경의 틀을 이루는 언약 중에서도 창세기를 배경으로 한 세 가지의 언약인 행위언약과 구속언약 그리고 은혜언약은 이후의 모든
언약의 원형(原形)이며 근거라는 데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언약은 장차 오실 완전하고 영원한 성취자이신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指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의 완전하고 영원한 성취자로서, 오늘의 우리뿐만 아니라 과거의 열조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기 위한 영적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히 11:13)
이러한 지식은
단순히 상상으로 얻어진 추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심으로 알려진 지식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뜻은 언약관계로서의 신(神)-인(人) 관계 안에서 유기적이고 점진적으로 인간 역사
속에서 드러내어지고 선명해진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와 언약의 관계는 구원과 구원의 역사 즉, 구속사(救贖史)를 이해함에 있어서
불가분(不可分)의 관계 속에 놓여지게 된다. 그러므로 언약은 창조- 타락- 구속으로 이어지는 구속 역사(구속사)에 있어서 중심에
놓여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 소고(小考)는 이 세 가지의 언약이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언약의 개념과 함께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 론
언약은 구속역사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이어주는 연결체이다. 언약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과 피조물로서의 인간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격을 이어주는 다리와도 같다.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로서의 인간과 관계를 맺으신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과 언약 관계를 맺으신 그 관계 안에서 알려진다.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 관계를 맺으심을 통해서 그 자신과 그의 구원과 관계된 그의 뜻을 인간에게 계시하신다.
1. 언약의 개념(槪念)
1) 구약에서
언약, 「한국컴퓨터선교회」, 기독정보검색, 2005. 인용 편집
“언약”은
히브리어로는 베리트(????)인데 이 말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다. 통상적으로는 “자르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바라(???)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추측에 의거하면 창 15:17에 기록된 의식이 언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에서 언약은
어느 한 편이 다른 편에 부과하는 약정(約定)의 성격을 띤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세우실 때에는 일방적 성격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간은 동등한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법령을 인간에게 부과하시는 주권자이시다.
「신학사전」, 신학사전편집위원회,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 445
이런
점에서 볼 때 계약(testament)이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언약(covenant)이라고 함이 좋을 것이다. 즉 언약이란
신학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세우신 약속인데, 이를 세상 사람들이 상거래(商去來)에 많이 쓰는 계약이란 말로 쓰면
신학적 사상이 사실상 약해지기 때문이다.
2) 신약에서
70인역(LXX)에서
“베리트”는 신 9:15(μαρτυριον)과 왕상 11:11(εντολη)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서 디아데케(διαθ?κη)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일반적인 헬라어 용법에서 언약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지 않고 단지 하나의 약정 양도 계약서를
가리키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유언(遺言) 또는 유언장을 가리킬 뿐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이와 같은 용법은 좀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Ibid. p. 446
그러나
고전(古典) 헬라어에서는 두 집단 가운데 한 집단이 압도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어 그 다른 집단에게 자신의 요구 조건을 명령할 수
있는 그러한 두 집단 사이의 협정에 이 말이 쓰인 예가 가끔 있었다. 그러므로 신약에 쓰인 “디아데케(διαθ?κη)”는 구약에
쓰인 “베리트(????)”보다 훨씬 더 특수한 뜻을 가지며, 이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한 집단에 의해 일방적으로 제기되고,
다른 한 집단은 그저 순응할 뿐 거절할 수 없는 협약 또는 협정(agreement)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하여 디아데케(διαθ?κη)라는 단어는 많은 다른 단어들과 같이 하나님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 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았다. 많은 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어 왔지만 이 단어는 유언보다는 언약으로 번역되었다.
3) 태초 - 언약의 원형(原形)으로서 아담과의 언약
언약의
개념은 계시를 통해서 이 개념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전에 이미 역사에서 발전 되었다. 하나님께서 노아 및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기
전에 이미 인간들 사이에서 언약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태초의 에덴에서 맺은 아담 언약(창 1:28)의 발전이었다. 그
후로 인간들은 이 같은 준비과정을 거쳐서 죄로 분열된 세상에서 언약을 맺는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고, 하나님이
계시를 통하여 인간과의 관계를 언약관계로 제시할 때 그것을 곧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언약의 개념이 인간에게서 시작되었다거나 하나님이 자신과 인간의 상호관계를 서술하기 위하여 이 개념을 빌려다 쓰셨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언약 생활의 원형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존재 안에서 발견된다. 인간에게서 발견되어지는 것은 원형의 희미한
모형(模型)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인간의 삶을 이와 같은 언약 관계의 삶으로 제정하셨기 때문에 언약 개념은 사회생활의 여러 가지
기둥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언약 관계가 이미 발전된 이상 하나님은 공식적으로 이 관계를 자신과 인간과의
실존하는 관계의 표현으로 소개하셨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 관계는 아브라함과의 공식적인 계약 이전 곧 태초의 아담부터 존재
했었다.
4) 언약의 당사자(當事者) 언약,
「한국컴퓨터선교회」, 기독정보검색, 2005. 인용 편집언약의
당사자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된다. 어떤 학자들은 언약의 당사자를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으로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인간은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을 때도 있고 때로는 “죄인”, “선민(選民)”,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 이라는
한정어(限定語)가 붙을 때도 있다.
다른 학자들은 삼위일체를 대표하는
성부 하나님과 선민(選民)을 대표하는 그리스도를 언약의 당사자라고 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학자들은 두 개의 언약을
말한다. 곧 성부와 성자 사이에 채결된 구속 언약(Pactum Salutis)과 이 언약에 근거해서 맺어진 하나님과 선민 또는
택함을 받은 죄인 사이에 맺어진 은혜 언약을 구분한다.
조직신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언약의 당사자를 하나님과 인간이라고 보는 것보다 성부와 성자로 보는 것은 더 적합한 사실이다. 이 표현은 롬
5:12-21과 고전 15:21-22, 47-49의 지지(支持)를 받고 있으며 구속 언약과 은혜 언약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언약의 통일성을 말하고 있다.
구속
언약과 은혜 언약을 구분하는 이 같은 생각이 성경의 지원(支援)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행위언약에 대립되는 두
개의 별개의 독립된 언약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즉 은혜 언약과 구속 언약은 하나의 복음적인 긍휼의 언약의 두 양상(樣相)으로서의
메시야 언약인 것이다.
2. 행위(行爲) 언약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맺은 언약 즉 선악과를 금지한 것에 관련된 언약을 16세기 말에 이르러 행위계약 또는 생명의 언약 혹은 법적
언약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말에 보다 체계적으로 나타난 행위 계약 교리의 역사적 연대기(年代記)를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행위 계약 교리가 언약신학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인(否認)할 수 없다.
「신학사전」, 신학사전편집위원회,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 448
그리고 이 언약 관계에서 하나님은 일정 기간 동안의 순종을 조건으로 미래를 완전하고 복되게 만드셨다.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7 장 -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관하여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해설, A.A.하지 著, 편집부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pp. 160-161
1절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는 멀어졌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낮추시사 은총의 계약을 인간과 맺으심으로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셨다. 비록 이성과 의지와 양심을 지닌 인간이 창조자로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과 보상을 받는 것은 이 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은혜의 계약이 순종을
가져온다.(사40:13-17, 욥9:32-33, 삼상 2:25, 시100:2-3,113:5-6, 욥22:2-3, 35:7, 눅
17:10, 행 17:24-25)
2절 - 인간과 맺어진 첫 번째 계약은 행위의 계약이다.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완전하고 개인적인 순종에 의하여 생명을 약속받았다.(갈 3:12, 호 6:7, 창 2:16-17)
2) 행위 언약의 성경적 근거
“행위 언약”이라는 용어는 성경에 없기에, 일부 학자들은 행위 언약을 부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행위 언약의 개념은 성경 전반(全般)에 걸쳐서 표현되어 있다.
① 창세기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먼저
계약을 체결하는 양측(兩側), 즉 하나님과 인간이 있다. 그리고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과하신 순종의
조건이다. 그리고 약속, 즉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이 있다. 「벌코프 조직신학개론」, 루이스 벌코프 著, 박희석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p. 117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신 것”(창 3:24)은 언약을 범한 자가 영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교시(敎示)하는 것이다.
② 로마서 5:12-21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對比)하여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이 많은 사람을 죄인 되게 한 것 같이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이 많은
사람을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였다고 가르치고 있다. 아담의 범죄는 자신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죽게 했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생명 안에서 왕 노릇(롬 5:17)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담이 인간을 대표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만일 아담 한 사람이 순종했다면 영생이 모든 사람에게 왕 노릇하게 되었을 것이다. Ibid. p. 117
그러므로
죄의 전가(轉嫁)와 다른 한편으로는 의(義)의 전가를 관련지어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한 내용은 아담이 그리스도처럼 언약의
머리였다고 생각해야만 설명할 수 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표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의를 공유(共有)하고 있다면,
우리가 같은 이유에서 아담의 죄책(罪責)을 공유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③ 호세아 6:7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는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행위언약이 맺어졌고, 아담이 이를 지키지 못함으로써 인류의 죽음이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행위 언약은 타락 후에도 유효한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알미니안주의자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했다는 의미에서 폐기되었고, 행위 언약은 영생을 얻기 위한
지정(指定)된 수단으로서 폐기된 것이다” -「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 문화사, 2004. p. 56 - 와
개혁주의자 사이에 상당한 견해의 차이가 있다.
알미니안주의자에 의하면
아담이 타락하여 계약을 범함으로 말미암아 이 계약은 완전히 폐기되었으므로 아담의 후손들은 그 계약을 지킬 능력도 없지만 지킬
의무도 없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행위 언약을 맺기 이전에 이미 정해진 창조의 질서 “본래
교의신학(조직신학) 아래 전통적으로는 인간의 타락을 기점으로 행위언약(타락 전)과 은혜언약(타락 후)으로 나누어 성경의 언약을
이해해 왔다. 그러다가 성경신학의 발전과 함께 타락 전 창조 당시에 맺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창조언약으로, 타락 후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을 구속언약으로 부르게 되었다.” -「구약성경과 그리스도」, 김두석, 칼빈대학교출판부, 2003. p. 93 - 에
속한다.
언약의 유무(有無)와는 관계없이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의
명령에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한 번 언약을 범한 후부터 어떤 인간도 행위 언약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기독교 교리개설」, 김성린,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p. 113-114
4) 행위 언약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다.
행위
언약은 영생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는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이 언약은 폐기된 것이다. 아담 이후 행위
언약의 조건을 충족시킴으로써 영생을 얻은 자는 한 사람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받은
자는 순종을 통하여 믿음을 증거 하게 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진정한 순종으로서의 금식령(禁食令)(창 1:17)을 성취하는
것이다. 첫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창 3:5)
그러나
둘째 아담은 광야에서 부딪친 사탄의 유혹에서 승리하셨다.(마 4:1-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빌 2:6-8) 이렇게 둘째 아담은 첫째 아담에게 주어졌던 금식을 온전한
“자기 비움”으로 성취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에게 주어졌던 행위 언약 또한 장차 언약대로 오셔서 성취하실 그 분 즉 메시야에
대한 언약인 것이다.
3. 구속(救贖) 언약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7 장 -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관하여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해설」, A.A.하지 著, 편집부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pp. 165-166
3절
-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첫 번째 계약에 의해서는 생명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두 번째 계약을 맺으신
바 보통 우리는 이것은 은혜의 계약이라고 부른다.(갈 3:21, 롬 3:20-21, 8:3, 창 3:15, 사 42:6) 이
은혜의 계약이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과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을 말한다. 이때에 하나님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이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고(막 16:15-16, 요 3:16, 롬 10:6-9, 갈
3:11) 생명을 얻기로 정해진 모든 사람들에게(겔 36:26-27, 요 6:44-45, 5:37) 성령을 주시고 믿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시고 믿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4절
- 이 은혜의 계약은 성경에서 종종 유언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언자로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의 유언을
효과 있게 하였으니, 그는 그의 유언대로 영원한 기업을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상속해주셨다.(히9:15-17,7:22, 눅22:20,
고전11:25)
2) 구속 언약의 필요성 - 은혜 언약의 토대(土臺) 위에서
인간이
범죄 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영적 교류는 사실상 단절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언약을 맺음에 있어서 종전처럼 인간과의
직접적인 언약을 맺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은혜 언약을 맺기에 앞서서 구속의 언약을 맺을 필요가 생긴 것이다. 구속 언약은
은혜 언약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하나로 볼 수 있다. 다만 은혜 언약은 구속 언약의 토대 위에 세워진
언약이다. 「기독교 교리개설」, 김성린,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p. 132-133 편집
3) 구속 언약의 성경적 근거
성자께서는 자발적으로 범죄 한 인간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고, 성부께서는 그것을 조건으로 구속의 축복을 성자를 통하여 택한 자에게 주며 더불어 성자에게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시겠다는 성경적 근거이다.
① 구속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영원 전부터 있었다.(엡1:4, 3:11, 살후 2:13)
② 그 계획은 언약의 성격을 지녔다.(요5:30, 17:4-6)
③ 메시야 예언 가운데는 언약의 요소들인 당사자(시2:7-8)와 조건(시40:7-8)과 약속(요 17:5, 24)이 들어 있다.(삼하 7:12-13, 시 89:3-4)
④ 「벌코프 조직신학개론」, 루이스 벌코프 著, 박희석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p. 138
언약
개념을 메시야와 직접 연결하는 구절로서 여호와의 종에 관해서 말하는 시편 89:3과 이사야 42:6이 있는데, 이 연결은
여호와의 종이 단순히 이스라엘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더욱이 메시야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말하는 절들이 있는데, 이것은
언약적 용어이다.(시 22:1-2, 시 40:8)
4) 구속 언약의 당사자 - 메시야
성자(聖子)는 구속함을 받도록 영원 전부터 예정된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다.(엡 1:4)하나님은
아담의 범죄 직후 은혜의 언약을(창 3:15) 아담에게 하셨고, 그 후 아브라함과 족장들을 통해 계승시켜 왔다. 그리고 이 구속
언약은 장차 다윗의 자손으로(마 1:1)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구약과 신약 모두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은혜 언약인 것이다.
5) 보증인으로서 언약을 성취하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구속 언약에 있어서 선택함을 받은 자를 대표하여 성부와 언약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이 언약의 보증인이 되신다.(히 7:22)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범죄 한 인간의 신분으로 낮아지심으로써 마지막 아담이
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구속의 언약은 속죄함을 받은 죄인들에게
있어서는 은혜 언약의 근원이 되지만,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행위 언약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속 언약으로 말미암아 성자를
희생의 제물로 받으시는 것은 “공의(公儀)”의 속성 때문이다. 죄가 있음에도 아무 근거가 없이 죄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참으로 구속의 언약은 은혜 언약을 성취시키기 위한 법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개설」,
김성린,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p. 135-136 -
이처럼 성부 하나님과 구원 받을 자의 대표인 성자 사이에 설정(設定)된 인간 구원을 위한 언약이 구속 언약이다.
6) 선택으로 인한 구속의 제한(制限)
구속의
언약이 선택의 작정과 혼동되는 일이 가끔 있지만, 둘은 동일하지 않다. 선택의 작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의
후사(後嗣)들이 될 사람들의 수(數)를 결정하는 반면에, 구속의 언약은 은혜와 영광이 죄인들을 위해서 마련되는 길을 나타낸다.
논리적으로는 선택이 구속의 의논(議論)에 앞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보증이 되신 것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람들만
제한적 “특별한 구속 혹은 제한적 속죄 -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택자들만 구원하려는 것이며 또한 실제적으로 그들만이 구원을
획득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어떤 특정한 죄인들 대신에 당하신 형벌에 대한 대속의 인내였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는 것에 부가해서 자기와 그들을 연합하는 믿음을 포함하여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획득하셨다.
믿음의
은총은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가 위해서 돌아가신 모든 자들에게 빠짐없이 적용되며 그러므로 해서 그들의 구원을
보증하신다.”-「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D.스틸/C.토마스 共著, 김남식 譯, 도서출판 엠마오, 1992. p. 20 - 으로
구원하신다.
「벌코프 조직신학개론」, 루이스 벌코프 著, 박희석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p. 139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 17:6)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 17:12)
7) 구속 언약의 성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약속으로서의 예언
그러므로
언약의 당사자인 성부께서 언약의 또 다른 당사자인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고(요3:16), 성자로 하여금 언약의 조건에 따라
세속적인 고난과 죽음을 당하게 하셨고(롬3:26), 언약의 약속에 따라 부활케 하시고 승천(昇天)케 하여 성부 우편에
앉히시고(벧전3:22), 보혜사(保惠師) 성령을 보내어 교회를 교훈하시고, 지도하시고, 보호하시다가(요14:26) 마침내 성자의
재림과 심판을 통하여 성자와 택한 자를 영화롭게 함으로써(엡5:6,12) 구속 언약을 성취하신다.
과연
이로 보건대 구속의 언약은 은혜의 언약이다. 오직 죄 밖에는 지은 일이 없는 우리가 오직 구속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그저 “은혜”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더구나 “택(擇)함과 불택(不擇)함”이라는 “이중 예정” “이는
선택(Election)과 유기(Reprobation)로서, 인류 중 얼마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기로 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말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간과하기로 결정하시고 그들의 죄를 벌하기로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이다.” -「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문화사, 2004. p. 43 편집 - 의 일이 이미 창세전에 아버지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작정과 예정의 섭리(엡 1:3-14)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없는 감사와 소망과 위로를 주는 것이다.
4. 은혜(恩惠) 언약
은혜
언약의 사상은 종교 개혁 당시부터 거듭 강조되어졌다. 아담의 범죄 직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셨고, 그 후 아브라함과 족장들을
통해 재천명(再闡明)되어 왔고, 마침내 새 언약 “주께서 가라사대 볼찌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렘 31:31이하)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 8:13) - 에서 완전한 실현에 이른 것으로 간주하였다. “블링거”는 이를 “유일하고 영원한 계약” 또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중의 언약”이라 불렀다. 또한 칼빈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맺은 언약 관계의 대표적인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는 이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셨고, 그리스도의 성취가 새 언약을 이룬다고 하였다.「신학사전」,
신학사전편집위원회,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 449
1) 은혜 언약의 특징
은혜
언약은 구원에 관하여 인간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은혜로운 언약이며, 구원의 계획과 성취와 적용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이 모두
동원된 언약이다.(엡1:3-5, 요 19:30, 요 16:7-8) 또한 시간이 흘러도 효력이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언약이며(창
17:9, 삼하 23:5), 세상사람 모두가 아니라 택함을 받은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특수 언약이다. 그리고 신앙과 순종을
조건으로 하지만, 인간의 공로가 필수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조건적이며(엡2:8), 계약 당사자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방적인
호의(好意)로 성립된 편무(片務)계약이다(히6:17).
또한 은혜 언약은 시대에 따라 여러
형태로 주어졌으나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요, 너희는 내 백성”이라는 약속의 내용(창17:7, 출19:5-6, 렘31:33)과
약속의 조건이 “믿음”이라는 사실(창15:6, 롬4:9-11) 그리고 중보자가 언제나
동일하다는(딤전2:5,갈3:19-20,히13:8) 일치점을 갖는다.
2) 은혜 언약의 계약 당사자「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 분화사, 2004. p. 65제
1 당사자는 하나님으로서 제 2 당사자인 인간이 당신에게 대해 가지실 관계를 솔선하여 은혜롭게 결정하시는 당사자이다. 인간은
목적 자체(생명의 교통의 언약)로 볼 때는 피택자이다. 그러나 목적에 대한 수단(합법적 관계의 언약)으로서 넓은 의미의 언약에서는
객관적 협약(協約)이므로 언약의 생명을 받지 못하는 자들도 포함된다. 그렇지만 구원의 실현이라는 수단적 의미에서는 신자들과 그
자녀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은혜 언약의 약속과 요구
은혜
언약의 약속으로서는 하나님과 백성의 참된 관계 회복, 영적 상징으로서의 현세적 축복의 약속, 죄의 사유(赦宥)와 양자(養子),
칭의(稱義)의 약속, 최종적 영광의 약속(영생) 등이 있다. 또한 은혜 언약에는 믿음과 순종의 요구가 있다. 믿음으로 언약과 그
약속들을 받아 언약의 생명에 들어가고, 새 생명의 원리에 따라 새로운 순종으로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 Ibid. p. 65
그러나
이 요구는 약속 이행(移行)의 조건으로서가 아니고 약속의 결과인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자에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언약의 약속이 이루어지면 새로운 생의 원리에 따라서 힘주시는 자 안에서 하나님께 복종하며 헌신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까지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엡 1:8)
4) 은혜 언약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리스도는
언약의 중보자이다. 그리스도는 특별한 중보자이신데, 그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개재(介在)하셔서 중재(仲裁)만 함이 아니라
실제적인 능력을 가지고 보증인과 율법의 완성자로서 그가 대표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정상(正常) 관계를 갖도록 회복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말로써 우리의 죄를 변호하시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 지불해야 할 죄책을 대신 지불함으로써 율법의 의를
완성시키신 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리신다.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속한 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며 진리에 따라서 생활함으로써 구원을 완전하게 하도록 인도하며 촉구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그를 대신하여 사신(使臣) “바울의 직책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화해의 메시지를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환이요, 증인으로서의 직책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QA시스템 성경연구시리즈」, 강병도, 기독지혜사, 1991. p. 213 - 을 세워서
봉사하게 하심으로 이 일을 계속하신다.(고후 5:20)
5) 언약 안에 있는 회원(會員)
① 성인(成人)
성인은 신앙과 신앙 고백을 통해서 합법적 협정으로서의 언약에 들어갈 수 있다. 신앙은 유일한 방법이다.
② 신자의 자녀들
신자의 자녀들은 합법적 관계로서 언약에 들어간다. 그 자체가 생명의 교통으로서의 언약관계가 아니고 조만간 현실이 되리라는 합법적인 관계이다.
③ 비중생자(非重生者)
합법적
협약으로서 언약에 참여된 비중생자는 회개하고 신앙을 가진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언약의 파기자(破棄者)로서 심판 받게 된다. 「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문화사, 2004. p. 66
은혜
언약 안에 있는 회원에 대하여 논의할 때, 명심해야 할 것은 단순히 법적인 협정으로서의 언약과 하나님과의 친교를 통하여 실현되는
언약과를 구별하는 것이다. 저들의 믿음이 참 믿음이 못되고 고백이 진실 되지 못할 때는 진정한 의미에서 언약 관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신앙고백을 하지 않거나 언약에 수반(隨伴)하는 책임을 감당하기를 거부한다면 이는 언약을 파기한 자로
간주(看做)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민이나 교회 안에 끝까지 중생하지 않다가 언약의 대열에서 이탈하는 자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무조건적 선택 -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을 위하여 특정한 개인들을 하나님이 선택하심은 다만 그 자신의 주권적
의지일 뿐이다. 특정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믿음, 회개 등과 같은 이런 예지(預知)된 반응이나 그들 편에 대한 순종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그가 선택하신 각 개인에게 믿음과 회개를 주신다.
이러한
행위들은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택은 인간에게 있는 어떤 덕성(德性)이나 예지된 행위에 의해서
결정되거나 제약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가 주권적으로 택하신 자들을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죄인을 택하심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의 원인이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D.스틸/C.토마스 共著, 김남식 譯, 1992. p. 19 -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약속한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된다.
6) 여러 경륜(經綸) 시대의 언약
은혜언약은 본질상 하나이다. 그러나 은혜 언약은 시간 속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계시되었다. 그 형태를 크게 나누면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된다.
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7 장 -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A.A.하지 著, 편집부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pp. 171-172
5절
- 이 계약이 맺어지는 방법에 있어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는 서로 다르다.(고3:6-9)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의 계약은 약속들,
예언들, 희생제사들, 할례, 유월절 어린 양 및 다른 유형들과 제정들에 의해서 특징 지워졌으니, 이 모든 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것으로서(히 8-10장, 롬 4:11, 골 2;11-12, 고전 5:7)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피택자(被擇者)들에게 약속된 메시야(고전 10:1-4, 히 11:13, 요 8:56)를 신앙하도록 교훈하고 세우는 일에 있어서 그
당시로는 충분하였고 효과적이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이 약속된 메시야에 의하여 충분한 속죄와 영원한 구원을 얻었으니, 이 계약을
우리는 구약이라 부르는 것이다.
6절 -
신약에는 구약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되었는데, 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이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와 세례와 성만찬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제도에 의하여 맺어지게 되었다.(갈 2:17, 골 2:17, 마 28:19-20, 고전 11:23-25, 고후
3:7-11) 이 제도는 수적으로 구약에서보다 더 적고 외견상으로 구약에서보다 덜 화려하게 보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제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백성들에게 보다 충만히, 보다 명백히, 그리고 보다 효과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틀림없다.(마 28:19, 엡 2:15-19, 히 12:22-28, 렘 31:33-34) 우리는 이 계약을 신약이라
부른다.(눅 22:20, 히 8:7-9) 그러므로 본체(本體)가 다른 두 은혜의 계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본체를
지닌 은혜의 계약이 있을 뿐이지만 그것이 집행되는 방법에 있어서만 구약과 신약이 다른 것이다.
② 아담과의 원시(原始) 언약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꺾을 것이라는 원(源)복음(창 3:15). 그러나 더 근원적으로는 타락 이전에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하셨다.(창 1:28) 이 언약의 주로서 하나님은 전능자의 자리에서 아담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는 주(the Lord)가 되시고
여호와가 되셨다. 바로 이 사람의 하나님 되시고 언약의 주가 되심을 표시시하기 위하여 창세기 2장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기명(記名)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첫 언약 체결 후에도 사람과 관계를
맺으실 때 이 여호와 이름으로 일하셨고, 그 언약에 근거해서 그 언약의 약속들을 이행하실 때에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타나시고
일하셨다. 또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실 때에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타나시고 일을 시작하시고 결말(結末)하셨다.(출 3장
이하)「하나님의 구속경륜」, 서철원, 성문당, 1993. pp. 25-26
③ 노아와의 이중(二重) 언약
홍수 이전에 택한 자의 구원에 대한 암시가 깃들인 언약을 맺으셨고(창 6:18), 홍수 후에 다시 땅을 침몰시키는 홍수가 없으며(창 9:8-10) 일반 은총적인 언약을 주셨다. Ibid. pp. 28-29이는
첫 언약이 하나님의 백성 됨이 그 목표였음이, 이 목표 달성을 위한 갱신된 언약 체결에서 분명히 계시되었다. 이 진리는 노아에게
주신 말씀과 언약에서 분명히 나타났다.(창 9:1) 노아와의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다 회복되는 역사의
끝에까지 지속(持續)되고 유효할 것이다.
④ 아브라함과의 언약
가나안에
대한 현세적(現世的) 축복과 메시야에 대한 영적 축복을 받았으며(창 15:4-5), 믿음으로 의롭다 여겨졌다(창 15:6).
이는 신약의 성도들도 창대(蒼大)하여지며 영적 가나안, 즉 천국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을 보여준다(롬 4:12). Ibid.
pp. 30아브라함과의 언약체결은 낙원에서의 첫 언약체결의 목적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언약의 주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임이 분명하고 확실함을 나타낸다.
⑤ 시내산 언약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덕적, 의식적, 국가적 율법을 주었다(출 20장 이하). 이는 인간에게 죄의식을 갖게 하는
것으로서(롬 3:20, 4:15, 5:13, 갈3:19)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몽학(蒙學) 선생의 역할을 한다(갈 3:24).
⑥ 신약시대의 언약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세워진 새 언약으로서 구약시대의 언약이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것인데 반(反)하여 이는 모든 국가, 모든 백성에게 확대되는 보편성과 성령의 강림(降臨)으로 인한 충만을 지닌다.
7) 은혜 언약의 완성자로서의 메시야「계약신학과 그리스도」
팔머 로벗슨 著, 김의원 譯,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p. 278아담
이후로 이스라엘이 비록 계약적 책임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은 한 위대한 백성을 일으켜 그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위대한 나라를 이룩하는 그의 목적에 실패하지 않으실 것이다. 타락한 인간 가운데에서 백성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목적은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멸망을 뛰어넘는 이런 희망어린 기대는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예언자들은 약속의 땅으로의 복귀, 받아들여질 예배로의 회복, 메시야적 왕의 혈통의 재생 등에 대하여 가장 빈번히
말하였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 계약적 약속의 다양한 흐름들을 한데 모으는 독특한 역할 때문에 이 마지막 하나님 계약은 “완성의
계약”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계약은 하나님의 이전(以前) 계약 사역들을 대신한다. 동시에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들 역사를 통해 경험했던 다양한 계약들의 핵심을 총괄적으로 실현하게 된다. 완성은 이 마지막 계약의 내용을 특징 지운다.
이
완성하는 실현의 중심은 한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약속들(행위, 구속, 은혜)의 성취자로서 그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렘 31:33)라는 계약 원칙의 핵심을 친히 이루신다. 그러므로 그는 언약을 완성하는
그리스도로 나타나실 수 있다.
Ⅲ. 결 론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어 노아를 거쳐서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그리고 이삭과 야곱을 거쳐서 계승(繼承)된 언약들은 모세에 이르러 시내산 언약으로
구체화 되었다. 이 언약들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신학자들에 의해)그 이름들을 달리 했지만, 결국 본질은 모두 은혜 언약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약속의 당사자는 인간이 아니라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언약은 사실 인간이 행함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언약을 하신 당사자인 여호와 하나님이 스스로 이루어
내실 언약이었다. 그래서 은혜 언약인 것이다. 또한 이 언약은 택자들에게서 반드시 하나님 스스로 이루어 내실, 인간이 조금이라도
기여(寄與) “불가항력적 은총 -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 구원을 위한 외적 소명에 부가해서 성령은 택자들을 필연적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특별한 내적 소명을 계속하신다.
외적 소명(구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은 거부될 수 있고, 또 종종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내적 소명(택자에게만 하시는)은
거부되어질 수 없다. 그것은 항상 회개를 초대한다. 이러한 특별한 소명에 의하여 성령께서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 그는
인간의 의지에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사역에 있어서 제한을 받지 않으며 또한 성공을 인간의 협동에 의존하지도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은헤스럽게도 택한 죄인을 협동하게 하시며, 믿게 하시며, 회개시키시며, 자유롭게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에게로 오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도무지 거부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이 미쳐지는 사람들의 구원을 반드시 이루신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D.스틸/C.토마스 共著, 김남식 譯, 1992. p. 21 - 할 수 없는, 은혜의 언약으로서 내적(內的)인
것이다.
장차 오실 메시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실 언약은,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율법으로(바울의 표현대로 “몽학선생”) 그림자적인 역할을 수행해낸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의 견고하고
화려한 왕국의 성취도 은혜 언약의 결과였지만,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모형에 불과했다. 이렇게 구약의 언약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이루어지고 통치가 이루어지는 외적 모습이었지만, 이제 그 언약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속사람
혹은 생각과 마음)안에 내적 모습으로 성취되었고 또 성취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은혜
언약 안에 행위 언약과 구속 언약이 있는 것이고, 이들 언약 모두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몫이었으며, 이제 우리는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소망 중에,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영원천국의 맛들을 보고 있는 현세천국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앞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의와 능력을 손톱만큼이라도 내세울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약을 통하여 당신만을 의지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意圖)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하게 그리고 영원히 성취되었다. 이 성취 아래서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성도의 견인 - 하나님에 의해서 택정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고 성령으로부터 믿음을 얻은 자는 모두 영원토록
구원을 받는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을 유지하여 끝까지 인내한다.”- Ibid. pp. 21-22영원천국을
향하여 가는 발걸음을 쉬지 않게 될 것이다.
< 참고 도서 >
1. 「벌코프 조직신학개론」, 루이스 벌코프 著, 박희석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2. 「기독교 교리개설」, 김성린,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3. 「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문화사, 2004.
4.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D.스틸/C.토마스 共著, 김남식 譯, 도서출판 엠마오, 1992.
5. 「계약신학과 그리스도」, 팔머 로벗슨 著, 김의원 譯,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6. 「QA시스템 성경연구시리즈」, 강병도, 기독지혜사, 1991.
7. 「구약성경과 그리스도」, 김두석, 칼빈대학교출판부, 2003.
8.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해설」, A.A.하지 著, 편집부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9. 「하나님의 구속경륜」, 서철원, 성문당, 1993.
10.「신학사전」, 신학사전편집위원회,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출처 : 블로그 >반석위에기쁨
영생은...아는 것이니이다
- 십자가의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을 바라보며 예수는 '영생'에 대하여 정의를 내린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어 왔었다(Bernard).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호 6:3)
예레미야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다'(렘 9:24)
'안다'(기노스코. ginōskō. γινώσκω)는 것은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하며 본절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수식하는 말로 사용됨으로 예수와 하나님의 인격적 하나 됨을 증거한다(Lenski).
γινώσκω
스트롱번호 1097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인생들에게 가장 쉽게 그리고 충분하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앎으로써 행복과 영생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주인으로서 영생의 주체(主體)가 되신다(11:35; 행 3:15).
한편 기도중에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저희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식하는 것'이란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Lenski) 그렇게 해석하면 헬라어 원문에 무리가 따르게 된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시기 위해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이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이 견해는 무난하게 채택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표현은 메시야의 자기 증거인 셈이다(Godet).
(3)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예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표현이라고 하는 주장이었다(Westcott, Hegnstenberg).
예수께 대한 요한의 고백은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반복 기록되었다(요일 1:3;2:22;4:3;5:20 등). 그러나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그날밤의 기억들을 잊어버렸다고 구태여 가정할 필요는 없다.
09-22-2024(주일)
암송 성구 #.18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ἐκτενής, ές 스트롱번호 1618
καλύπτω 스트롱번호 2572
- '무엇보다도'는 어떠한 일보다 사랑을 먼저 할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열심으로'(에크테네. 1618)는 '힘껏 노력하는', '전심 전력하는'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 힘써서 할 사랑은 감정적으로 하는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을 가지고 행동을 수반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을수 있다.
즉 피차간에 있는 허물을 덮어 주고 서로를 세워주고자 하는 사랑은 죄를 가리운다(잠 10:12).
'죄를 덮느니라'에 대해서 혹자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친절한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그 보상으로 자신의 잘못이 가리워질 수있다고 주장하나(Tertullian, Origen) 여기서의 사랑은 친절한 행위를 함으로 오는 반대급부를 바라는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을 하고 있는 주체자의 죄가 가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있는 객체자의 죄가 가리워짐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무조건적으로 용서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헬라어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아가패(ἀγάπη), 필리아(φιλία), 에로스(Έρως), 스토르게" 사용합니다.
1. 에로스(Eros)
Eros is the god of love and lust whose other name is Cupid. 에로스는 큐피드라고도 불리는 사랑과 정욕의 신이다.
Eros, the sex drive, and Thanatos, the death instinct. 에로스는 성적 본능이고, 타나토스는 죽음의 본능이다.
EROS was the mischievous god of love, a minion and constant companion of the goddess Aphrodite.
The poet Hesiod first represents him as a cosmic who emerged self-born at the beginning of time to spur procreation. (See the Protogenos Eros and Phanes, for more information.) The same poet later describes two love-gods, Eros and Himeros (Desire), accompanying Aphrodite at her birth from the sea-foam. Some classical authors interpreted this to mean they were born of the goddess at her birth, or alongside her in the sea-foam. The scene was particular popular in art, where the pair flutter around the goddess seated in her floating conch-shell.
Eventually Eros was multiplied by ancient poets and artists into a host of Erotes or Cupids, as they are commonly called in English. The one Eros, however, remained distinct in myth. It was he who lighted the flame of love in the hearts of the gods and men, armed either with a bow and arrows or else a flaming torch. He was also the object of cult. Eros was often portrayed as a child, the disobedient, but fiercely loyal, son of Aphrodite.
In ancient vase painting Eros is depicted as either a handsome youth or as a child. His attributes were varied: from the usual bow and arrows, to the gifts of a lover--a hare, a sash, or a flower. Sculptors preferred the image of the bow-armed boy, whereas mosaic artists favored the figure of a winged putto (plump baby).
2. 스토르게(Storge)
스토르게는 혈족애(血族愛)를 말한다.
부모 자식 사이의 피로 얽힌 사랑이다.
피는 물보다도 짙고 호르몬보다도 강하다. 그러므로 부모 자식간의 혈족애(血族愛)는 어느 사랑보다도 강(强)하다.
친자(親子)간(間)의 사랑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
그것은 인륜(人倫)을 넘어서 천륜(天倫)이다. 우정이나 애정은 상대방의 장점이나 매력(魅力) 때문에 생긴다.
만일 장점(長點)이나 매력(魅力)이 없어지면 사랑은 소멸(消滅)하거나 약화(弱化)된다.
아름답던 애인(愛人)이 추악(醜惡)한 불구자(不具者)가 되면 그 애정(愛情)은 고갈(枯渴) 된다.
그러나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그렇지 않다. 자식이 불구자가 되어도 부모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자식을 측은(惻隱)히 여기는 마음은 더욱 강(强)해진다.
자식이 불명예와 죄과(罪過)를 범하여도 부모의 사랑은 변(變)하지 않고 한결같다.
가장 확실하고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부모의 사랑이다.
가장 순수하고 이기적(利己的) 욕망을 떠난 사랑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의 사랑"이 사랑 중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
3. 필리아(Philia)
-philia: (명사에서) (특히 섹스와 관련하여 비정상적으로) …에 대해 갖는 이상 성욕[성애] <참고 -phobia> paedophilia: 소아성애.
Philia: Brotherly love, closer than that based on principles, denotes affection, close friend or family.
'PHILIA'는 그리스어로 친구간의 우정 혹은 사랑을 의미한다.
그 어원에서 출발하는 는 특히 사춘기 시절의 열정과 불안, 순수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친구관계, 그리고 그 관게에서 묻어나는 이야기들을 더듬어 가며 지나간 기억을 떠올린다.
4. 아가페(Agape)
아가페(그리스어: αγάπη)은 사랑을 뜻하는 여러 개의 그리스어 낱말 가운데 하나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지금까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여 왔지만, 보통 거룩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한다. 아가페라는 용어는 고대 사본에서는 드물에 쓰이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용어를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으로 부르고 있다. 또, 아가페는 수많은 기독교 작가들이 기독교적인 상황에서 서술해왔다. 아가페(agape)는 쉽게 말해 '절대적인 사랑 '을 뜻한다.
1. 에로스(Eros)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활과 화살을 가진 나체의 어린이로 나타나는데,
그가 쏜 금화살을 맞으면 사랑에 빠지고 납 화살을 맞으면 증오하게 된다고 한다.
로마 신화의 큐피드와 아모르에 해당한다.
<네이버 국어사전 출처>
- 열정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2. 플라토닉(Platonic love)
- 플라톤의 '대화'<향연> 편에 따르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올바른 방법은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즉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진정한 플라토닉 러브란 마음과 영혼을 고무시키고
정신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위키백과 출처>
- 순수하고 강한 형태의 비성적(非性的)인 사랑을 말한다.
3. 아가페(Agape)
- 신약성경에서 사랑을 가리키는 두 단어 중 대표적인 말.
- 절대적인 사랑을 뜻하는 말.
아가페 사랑은 절대적이라는 말, 성격적인 의미가 있다 보니
성경에 나와있는 사랑에 대해 설명되어 있는 글을 더 적어볼게요-
사랑을 뜻하는 헬라어에는,
에로스 - 남녀 간의 육정적이고 성적인 사랑. ‘열정’이 내포되어 있는 단어.
필리아 - 친구 간의 사랑. 우정이나 우애(약 4:4).
스트로게 - 가족 간의 사랑, 부모 자식 간의 사랑. 특히 자식을 향한 부모의 다함없는 사랑.
아가페 -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롬 5:5)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 아가페 [Agape] (라이프 성경사전) 출처>
4. 루두스(Ludus)
루두스는 라틴어 사전에 찾아보면 장난, 경기, 대단치 않은 일로 검색이 됩니다.
그래서 루두스에 사랑에 대해 검색을 해보면 연인보단 친구 같은 사랑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가벼운 관계를 뜻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5. 스토르지(Storge)
- 형제자매 사이나 친구 간에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무르익는 사랑의 감정을 뜻한다
- 고대 그리스어 Storgay(스토르게이)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 가족 간의 사랑을 뜻한다고 한다.
- 스토르게 사랑은 우정이나 연민을 생활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느끼고 사랑의 감정으로 발전한 경우이다.
-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의 사랑은 아니지만 서서히 진행되고 깊고 오래가는 사랑을 표현한 것 같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랑을 하고 계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6. 마니아(Mania)
Mania를 사전적 검색을 해보면 1. 열광 2. 조병, 조광증이라고 검색이 됩니다.
풀어져 있는 정의를 정리하자면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강한 집착 및 소유욕을 가진 사랑이라고 표현되는 거 같습니다.
보통 마니아층이 있다 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많이 사용하는 것 같아요
가볍게는 마니아, 마니아층이라고 표현할 수 도있지만
마니아 사랑의 찾아보면서 마니아의 타입의 사랑을 하시는 분들은
의존성이 강하고 불안해하는 일이 잦으며,
사랑받고 있다는 걸 자주 확인하고 싶어 하고 외로움을 많이 타며,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고 정리한 글도 보이네요
<출처 : 연애의 과학 >
7. 프라그마(Pragma)
pragma의 사전적인 검색을 해보면 나라마다 조금 다르게 나오긴 하지만
실제적인, 실용적인 등의 사전적 의미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하면서, 하게 되면서 마음도 중요하지만 현실을 직시하며,
사랑을 하시는 분들을 표현하게 되는 사랑의 유형인 거 같습니다.
- 현실적인, 합리적인, 가슴보단 머리로 가 먼저 생각나는 사랑의 유형인 거 같네요
이 사랑의 유형을 찾아보다가 너무 잘 보게 된 블로그가 하나 있어 블로그 작성자분께
허락을 맡고 글을 조금 더 끄적여봅니다-♡
에로스, 루두스, 스토르게는 일차적인 사랑
마니아, 프라그마, 아가페는 이차적인 사랑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러면서
마니아의 사랑은 에로스와 루두스가 합쳐진 사랑
프라그마는 스토르게와 루두스가 합쳐진 사랑
아가페는 에로스와 스토르게가 합쳐진 사랑
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09-15-2024(주일)
암송 성구 #.17 마태복음 16:24
참조 / 마가복음 8:34. 누가복음 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Th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따른다'는 것은 스승의 삶과 가르침에
온전히 순복하는 참 제자가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참된 제자의 조건을 전제한 것은 당신의 임박한 수난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그와 유사한 수난과 고초를 당하게 될 것을 익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직은 예수님을 따르기에는 너무 미흡한
제자들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며 수난당할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려면 내적으로는 자기 부인과 외적으로는 역경 가운데서도 적극적인 순종이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요구되는 소극적 측면으로서 자기의
이기적 욕망과 생각과 주장, 그리고 부패한 옛자아, 옛사람을 철두철미 굴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육신(사르크스)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죄인됨 인간 그 자체(롬 7:14, 18)가 됨으로써 그의 이성,
감정, 의지 등이 완전히 부패되었다(참조, 렘 17:9; 롬 1:18-32).
바로 이러한 본성적 존재로서는 예수의 제자로 결코
따라 나설 수 없다.
한편 이러한 제자의 요건을 망각(妄却)했던 베드로는 훗날 자기를 부인하는 대신 예수를 부인하고야 만다.
부인하다(아파르네오마이) ἀπαρνέομαι
스트롱번호 533
자기 십자가
-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살던 팔레스틴의 유대인이라면 십자가
형벌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야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27:32).
더불어 유다의
대반란으로 인해 수많은 십자가 형틀을 목격해야 했던 그들로서는(Josephus, 행 5:37) 죽음의 짐이요,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를 메라는 참의미가 무엇인지를 뼈 속 깊이 이해했을 것이다(10:38).
한편 예수께서 친히 골고다 험한 언덕에서 이 십자가
형을 당하신 이후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엄숙한 제자로서의 결단의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신 일은 인류 구속의 대업을 완성하시는 유일, 단회적인 행위였으나 제자들의 십자가 짐은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
생겨나는 다양하고도 지속적인 행위일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제자들은 각자의 십자가를 거룩한 기쁨과, 무한한 감격과 감사로,
그리고 가장 가치있는 일로 받아들이며 끝까지 지고 예수의 발자취를 좇아가야 할 것이다(빌 3:12-14).
지다(아이로) αἴρω
스트롱번호 142
좇을 것이니라(아코루데이토)
- 시제는 현재 명령형으로서 한두 번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좇아오라는 강한 명령이다.
실로 주의 제자된 자는 억지로, 이따금씩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심전력으로 부단한 노력과 헌신을 통해 계속 좇아가야만 한다.
09-08-2024(주일)
암송 성구 #.16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강조한 까닭은 빌립보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겸손"을 권면했습니다.(3절)
그리고 그와 같은 실제적인 증거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제시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번역된 단어는 "프로네오( phrŏnĕō) φρονέω)" 라고 하는데 '프로네오'의 의미는 "생각하다" "에 몹시 마음을 두다" "생각을 가지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예수님처럼 생각하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나의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생각의 전환이라고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할 때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가능성을 제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그러나 생각의 전환을 통해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어려운 상황에서 "절대로 해결할 수 없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이것은 도전적이지만 극복할 수 있어: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것은 우리의 자신감과 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1. 자기를 비우는 마음
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 자기를 낮추는 마음
8절상=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3.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
8절하=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본절은 앞에서 빌립보 교회의 일치를 위해 '겸손'을 권면한 것에 대한 예증으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전환절이다.
그리스도는 궁극적인 모델로서 이 땅에 오셔서 '겸손'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인들에게 모델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권면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자기를 부정하심으로 십자가를 지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서로가 겸손하고 자신을 부정할 때 다툼이나 허영은 사라지고 '교회의 일치'를 낳게 될 것이다(Martin, Kent, Hawthorne).
마음을 품으라(프로네오. phrŏnĕō) φρονέω
스트롱번호 5426
09-01-2024(주일)
암송 성구 #.15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but of righteousness,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義)와 평강(平康)과 희락(喜樂)이라고 합니다.
의(義)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 상태를 의미합니다(디카이오수네)
평강(平康)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 상태를 계속적으로 유지하는 힘을 말합니다(에이레네)
희락(喜樂)은 의와 평강을 이 세상에서도 마음껏 누리며 즐기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카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 한글 개역 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가르'(*, '왜냐하면')가 사용되어 본절이 15절 하반절과 16절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논거(論據)를 변화시켜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본질을 언급하고 있다(Sanday and Headlam). 강한 자들이 특정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것을 먹지 못한 약한 형제의 영적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 그리고 그로 인해 서로 판단하고 나아가 거룩한 믿음의 공동체가 좋지 않은 평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비쳐볼 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 바실레이아 투 데우,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는 먹는 것과 마시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즉, 이 땅위에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臨在)를 입증하는 것은 어떤 특정 음식을 먹느냐 못 먹느냐의 시시비비를 가리며 또한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외고집적으로 주장하는데 있지 않음을 책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는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바울은 여기서 전체의 논의를 단순히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다.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의 특징적인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성격으로 나타나는지를 진술한다.
'의'(*, 디카이오쉬네)는 속죄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부름받은 올바른 행동, 즉 '도덕적 의'를 말한다(Godet, Murray, Meyer, 6:13, 16, 18).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활 헌장으로 선포하신 산상 수훈(山上垂訓)의 결론에서도 나타난 '의'이다.
그리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나란히 취급한 데서 더욱 확인된다.
'평강'(*, 에이레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을 믿을 때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Calvin, 5:1;빌 4:7).
'희락' 또는 '기쁨'(*, 카라)은 '의'를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의 관계를 누리는 성도의 정서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영혼의 기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Calvin, Hodge) 성령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모든 관계에서 오는 사귐의 기쁨도 포함한다(Godet, Meyer, Murray).
따라서 성도의 삶에서 누리는 총체적인 기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기쁨은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반드시 다른 성도와의 참다운 사귐에서 오는 기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즉 구원의 기쁨과 다른 사람과의 정상적인 교제에서 오는 기쁨과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는 것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보이는 형제인 다른 사람과의 진실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이처럼 '의'와 '평강'과 '기쁨'의 공동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 알라 엔 프뉴마티 하기오)만 가능하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오직'(*, 알라)이란 접속사가 '...만', 또는 '...외에는'이란 뜻으로서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서는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2)의, 평강, 기쁨 세 명사가 모두 '엔 프뉴마티 하기오'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Kasemann).
(3) 갈 5:22, 23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에 '평강과 기쁨(희락)'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Harrison).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는 누구든지 성령을 의지하여 적극적으로 의와 평강과 기쁨의 열매를 나타내야 한다.
본절을 통해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로 형제끼리 서로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얼마나 거리가 먼 어리석은 모습인가를 알 수 있다(본장 주제 강해 '아디아포라' 참조).
08-25-2024(주일)
암송 성구 #.14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Therefore, my dear friends, as you have always
obeyed--not only in my presence,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구원을 이루라(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구원을 계속 이루어 가십시오(현대인)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새번역)
구원을 위해 힘쓰십시오(공동번역)
사도 바울은 이미 구원을 받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합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을 받은 것을 유지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구원의 은혜를 확산시키라는 것입니다.
개인 구원에 만족하지 말고 개인 구원을 공동체 구원으로 확산시켜야 합니다.
공동체 구원을 사회 구원을 넓혀가야 합니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성도들은 개인 구원의 은혜에 만족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개인 구원의 차원에서 공동체 구원 즉 가족 구원, 친족 구원,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의 구원 그리고 이러한 은혜를 세상을 더 넓게 확장해야 합니다.
사회 구원이란 의미가 사회를 향한 투쟁으로 반복되어 마치 정부를 향한 쓴소리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사회 구원이란 개인 구원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구원을 이루라
- '사랑하는 자들아'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목양하는 자로서 친근감있게 부르는 호칭이다.
친근한 호칭과 더불어 바울은 본절에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한다.
이 '구원을 이루라'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차원에서 본절을 이해한다(Muller, Kent).
칭의 이후에 오는 성화의 과정에서 신인협동(神人協同)의 차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미 구원의 확증은 얻었지만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구원의 증거들을 실증하며 살아가야 함을 시사한다고 한다.
2. '그리스도인의 연합적인 차원'에서 본절을 이해한다(Hawthorne, Martin, Michael, Gnilka, Collan-ge).
바울은 4절에서 이미 개인적인 삶만 집착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돌보아 주라고 권면하고 있으며 본절 이하에서 개인적 구원의 문제를 생각한 종말론적인 분위기가 전혀 나타나지 않기에 교회 전체의 집합적, 공동체적 권면으로 볼 수 있다고 한(Hawtho-rne).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Lenski).
왜냐하면 '구원'에있어서 '개인'과 '교회'는 분리할 수 없는 불가 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완성을 향해 계속해서 성숙해가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협력하여 나아가야 한다(엡 4:1-6).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 구원을 이루어가는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전적으로 의지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명령에 늘 순종하는 것이다(Martin, Kent).
이루라(카테르가조마이) work out
κατεργάζομαι
스트롱번호2716
08-18-2024(주일)
암송 성구 #.13 아모스 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자유대한민국이란 나라가 무너지기 일보직전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동안 자유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일들을 생각해보자!
첫째, 선교의 짧은 역사속에서 교회가 급성한 나라
둘째, 피선교국가에서 선고국가로 발돋움한 나라
셋째, 한강의 기적을 일으켜 선진대국으로 발전한 나라
넷째, 자유민주의가 아름답게 꽃을 피운 나라
다섯째, 훌륭한 정치 지도자가 배출된 나라(이승만대통령, 박정의대통령)
여섯째, 한류의 바람을 일으킨 나라
그런데 이런 자랑스런 나라가 붕괴되려고 한다.
그것도 자유민주주의 체재에서 김일성주의 체재로........
문제는 이러한 변화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급작스런 변화는 공법과 정의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선지자 아모스와 같은 외침을 강조해야 한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
사회기강이 흔들리고 있는 까닭은 교회의 예배가 신령과 진정의 자리를 버리고 영광과 축복으로 변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라도 의식이 있는 교회와 성도들을 통하여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그루터기를 만들어야 솟아날 수 있는 자리가 다듬어지기 때문이다.
- 본절에 의하면, 백성들의 잘못된 예배는 공법과 정의의 결여라고 볼 수 있다.
'공법'과 '정의'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기도 하지만(사 10:22), 아모스는 인간 사회에 구현되어야 할 원리로 보았다(7,15절. 6:12).
즉, 사회 질서와 관계있는 것으로 율법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 사회구조 속에서 구현되고 정직하게 이웃을 대할 때에야 비로소 그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흘릴지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이갈'(*)은 '굴리다'(roll)는 뜻의 '갈랄'(*)에서 온 나팔형 동사로 굽이치는 강물처럼 격렬하게 흐르게 하라는 명령형이다(BDB).
또한, 히브리어 원문에는 '끊임없는'(perpetual)이라는 뜻을 가진 '에이탄'(*)이라는 형용사가 있어서 그 강도를 더해준다.
그러므로 공법과 정의가 적극적이고도 계속적으로 흘러야만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사가 의미있고 가치있음을 보여준다.
☞의(창 15:6, 삼하 8:15, 잠 11:5), 의로움(신 6:25, 24:13,
사 5:7), 공의(신 33:21, 왕상 3:6, 사 10:22), 권리(느 2:20), 정의(암 5:7, 6:12, 슥 8:8).
[형]
의로운(삿 5:11, 대하 6:23, 시 11:7),옳은(삼하 19:28), 적당한(욜 2:23).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잠언 11:5
완전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그 길이 곧게 되려니와 악한 자는 그 악을 인하여 넘어지리라.
08-11-2024(주일)
암송 성구 #.12 베드로후서 1:4
신의 성품
베드로후서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성품은 타고난 성격이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성격과 성품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신의 성품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삼위로 존재하는 다양성과 온전한 하나로 존재하는 신비한 현상은 마치 다양한 성격의 그리스도인들이 한 영으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고 또한 다양한 지체들로 각자의 맡은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고유한 신분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신의 성품이란 성령의 지배를 받아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삶을 통하여 드러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아직도 성령화되지 못한 나의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습관을 성령의 지배를 받아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덕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의 일들 즉 그리스도의 재림(3:4,9,12), 새 하늘과 땅(3:13)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11절)에 참여케 되는 것을 가리킨다.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 '피하여'의 헬라어 '아포퓌곤테스'(*)는 부정 과거 분사로서 '피한 이래로'라는 의미이다(Bigg, Blum).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침례를 받은 후부터 죄와 정욕과 거리가 멀어지며 피하게 된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스데데이아스 코이노노이 퓌세오스'(*)에서 헬라어 '데이아스'(*, '신에게 속한')는 성경적 용어라기보다는 헬라 사상에 따른 이교적 표현이다(Richardson). 베드로는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그의 논쟁을 전개시키고 있다(Kasemann). 그러나 본문은 이교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내면에 본래부터 신과 같은 거룩한 성품이 있어서 이것을 잘 계발하면 성인(聖人)이 되고 거스리게 되면 악인(惡人)이 된다는 사상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참된 연합을 통해서 성령의 교제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됨을 시사한다(Bigg, Green).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 거듭나게 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된 영적 교제를 나누며(요 14:16,17,26), 장차 나타날 영광과 축북에 참여하게 된다(롬 8:18).
08-04-2024(주일)
암송 성구 #.11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What good will it be for a man if he gains the whole
world, yet forfeits his soul? Or what can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목숨의 소중함(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신약
성서는 종말론적 관심이 옥중에서 해방을 기다리고, 밤중에 새벽을 기다림같이 열망적입니다.
재림에 관련된 곳이 318번이나 썼고
천국과 지옥과 부활과 영혼 구원문제는 백주의 태양처럼 강렬한 현실이었습니다.
"온천하를 얻고도 네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현세주의자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하시고 말세에 사람들이
노아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마 24:38)하는 현세가 전부이며, 유물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가치관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말세 인간들은 예수 재림을 기롱합니다(벧후 3:3).
복음적 신앙을 오히려 반사회, 반문명, 반지성, 혹은 피안주의니
현실도피니 하는 낙인을 찍어 냉소하는 풍조를 만듭니다.
그것도 진화론 공작과 함께 악마의 반성서적, 반내세적, 반종말적정신 풍토
조성을 위한 고등공작의 가장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오늘도 영적인 세계를 알고 깨어 근신하며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숨(5590. 프쉬케)
ψ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5590
얻고도...잃으면
- 여기에서 '잃으면'(제미오데)이란 '해를 입히다'
'손해 보다'는 뜻의 '제미오오'(*)의 부정과거 가정법으로서 아직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는 표현이다.
이는 '얻고도'(*, 케르데세)라는 말이 능동태를 취하고 있는데 비해 수동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고 할
것이다.
즉 비로소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얻는다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어떤
유익이 있겠느냐는 역설적 대구인 것이다(눅 9:25).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 이는 인간 영혼(생명)의 최고
가치성과 유일성 및 단회적 생명성을 강조한 말이다.
즉 예수께서는 비록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온갖 부와 명예는 잃고 난 뒤에도
다시 취할 수 있지만 인간의 영혼은 한번 상실하면 도무지 회복할 수 없는 고귀한 것임을 강조하셨다.
이제 현존하는 모든 사람들은
'온 천하'냐 '자기 목숨'이냐 라는 종말론적 선택을 해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선택하기
원하신다(룻 1:16, 17; 왕상 18:21; 히 11:25).
07-28-2024(주일)
암송 성구 #. 10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카이 엔뒤사스다이 톤 카이논 안드로폰 톤 카타 데온 크티스덴타 엔 디카이오쉬네 카이 호시오테티 테스 알레데이아스.
και ενδυσασθαι τον καινον ανθρωπον τον κατα θεον κτισθεντα εν δικαιοσυνη και οσιοτητι της αληθειας
엔두오 호 카이난 안드로포스
입으라 (1746) 엔두오 [ ĕndüō ] ἐνδύω 스트롱번호 1746
그(3588)
ὁ, ἡ, τόpl. οἱ, αἱ, τά 스트롱번호3588
새(2537) καινός, ἡ, όν 스트롱번호 2537
사람(444)
ἄνθρωπος, ου, ὁ 스트롱번호444
새 사람(the New Self)이란 누구인가?
하나님을 따라...지으심을 받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카타 데온 크티스덴타'(*)는 문자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창조된'이란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되었음'을 시사한다(골 3:10, Bruce,Lincoln).
하나님은 죄로 잃어버렸던 그의 형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현시켰고 그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심으로(Bruce, Wood)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하셨다(Lincoln).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디카이오쉬네 카이 호시오테티 테스 알레데이아스'(*)는 문자적으로 '진리로부터 나온 의와 거룩함 안에서'를 의미한다.
'의와 거룩함'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함을 받는 새사람의 윤리적 덕목이며 자질(資質)이다(Lincoln).
'의'는 모든 생활 가운데 올바르고 충실하게 사는 것을 의미
'거룩함'은 세상으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속한 삶으로 악에 물들지 않는 성결한 삶을 의미
두 가지 덕목은 '진리'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진리'는 복음과 사도적 전승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실재다(21절;1:13).
새 사람을 입으라
본절은 22절의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와 대조된다.
'새 사람'은 문자적으로 '갓 만들어낸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2:15)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통해 재창조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이러한 '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된 자에 합당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
입는다는 동사는 주로 옷을 입을 때 사용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마치 무슨 탈을 뒤집어 쓰는 것이 아닙니다.
1930년대 미국의 대경제공항 때에 경제적인 위기가 점점 심각해지므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이 동물원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도 먹고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때에 동물들을 제대로 먹이는 것에 많은 재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도 살리고 동물원도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던 관계자들은 한 가지 좋은 생각을 제시했습니다.
동물의 탈을 쓰고 마치 살아있는 동물처럼 하루 종일 우리 안에서 지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숭이 우리에는 원숭이의 탈을 쓴 사람이 원숭이처럼 지내고 있었고 그 옆에 호랑이 우리에서는 호랑이 탈을 쓴 사람이 호랑이 흉내를 내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동물원의 관리인은 탈을 쓴 사람들에게 절대로 다른 우리로 넘어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한 번은 원숭이 우리에서 원숭이의 탈을 쓴 사람이 원숭이처럼 재롱을 부리다가 그만 호랑이 우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호랑이 한 마리가 어슬렁 어슬렁 원숭이 곁으로 다가옵니다.
절대로 사람의 소리를 내지 말라는 관리인의 주의사항을 기억한 원숭이는 다가오는 호랑이를 두렵게 바라봅니다.
이때 호랑이가 원숭이 곁에 와서 속삭이더랍니다.
"너도 나처럼 하루종일 원숭이 탈을 쓰고 고생하는구나!" 하며 원숭이 주위를 한 바퀴 돌더나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예수 탈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겉은 예수처럼 성자와 같은 흉내를 내고 있지만 그 속에서는 온갖 추하고 더러운 것들이 득시글 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예수의 탈을 쓰고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온전한 예수의 생각과 마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처럼 무장할 수 있을까요?
어느 날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매우 심각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결론으로 예수님의 대답은 "거듭나라!"고 하셨습니다.
거듭나다는 헬라 단어는 팔링게네시아()라고 합니다.
팔링게네시아는 "거듭남" 이란 명사형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첫째, 다시 시작하라
새 출발이란 의미는 새로운 사람이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결혼한 후에 서로 헤어졌습니다.
그런다가 각자 헤어진 후에 살아보니 그래도 예전에 함깨 하였던 사람이 더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직도 혼자서 지내던 두 사람이 다시 결합하기로 약속하면서 함께 생활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새 출발이라고 합니다.
비슷한 사례이지만 두 사람이 헤어진 후에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지냈습니다.
역시 구관이 명관이라는 옛말이 맞구나! 하고 느낄 때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현재 살고 있는 두 사람이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도 새 출발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새 출발보다 더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혼자사 쓸쓸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했었는데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이제부터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그 이전의 사람을 위하여 잘 살아야 한다고 중보기도도 합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먼저 생각하고 기도할 수 있을 때 이것도 새 출발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더 높은 것을 생각하라
사람들은 현재의 위치에서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러한 삶은 육체에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육체에 붙잡혔다는 증거가 육신적인 기준에 의해서 판단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반차 투정, 신발 투정, 옷 투정, 자동차 투정......
그러나 육신의 가치가 아니라 보더 한차원 높은 정신적 차원에서 생각해 봅니다.
반찬이 싱겁구나 내가 소금을 더 먹어야지
옷이 더럽구나 내가 손으로 직접 빨아어 입어야지
왜 나는 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시킵니까?
그런데 이것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고 상대방 중심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월남전이 한창 치열하게 전개될 때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이 월남 전선을 방문하여 장병들을 위로하는 위문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맨 앞줄이에 앉은 두 사병에 눈길이 쏠렸습니다.
한 사람은 오른 손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왼손이 없습니다.
다른 장병들이 손뼉을 치며 즐거워 할 때 두 사람은 서로 완손과 오른손을 마주치며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παλιγγενε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3824
1. 중생, 재생, 거듭남.
a. [세계에 대해서] 마 19:28.
b. [구속받은 사람의 재생에 대해서] 딛 3: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중생(딛 3:5), 새롭게 됨(마 19:28).
* 3825. πάλιν
스트롱번호 3825
1. 다시, 돌아, 도로.
a. [가다, 보내다, 돌아서다, 부르다 등의 동사와 함께] 돌아가다, 막11:3, 요6:15, 11:7, 갈2:1.
b. [전에 있던 상태로 다시 떨어지거나 전에 하던 동작으로 돌아가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 요4:13, 고전7:5, 갈2:18.
2. [이미 한 일을 반복하거나 어떤 일이 전에 생겼던 것과 같은 식으로 생긴다 든가, 어떤 존재 상태가 전과 같이 다시 일어날 때] 다시, 또 한 번, 또 다시, 새로, 막2:13, 눅23:20, 요1:35.
3. 그 위에, 더욱이, 더군다나, 거기서, 마5:33, 13:45, 19:24, 눅13:20, 롬15:10-12, 고전3:20.
4. 반면에, 차례로, 마4:7, 요12:22, 고전12:21, 고후10: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또(행 10:15), 다시(갈 1:9), 또한(고전 12:21).
* 1078. 게네시스 γένε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1078
07-21-2024(주일)
암송성구 #.9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You diligently study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by them you possess eternal life. These are the Scriptures that
testify about me.
상고(詳考)라는 헬라 단어는 "에류나오(ĕrĕunaō. ἐρευνάω)" 라고 하여 사도행전 17:11에서 소개한 "상고(아나크리노. anakrinō) ἀνακρίνω)"와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나크리노'는 "탐색하다, 조사하다, 체로 쳐서 골라내다" 라는 의미로 사용하였고, '에류나오'는 "찾다, 추적하다, 조사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상고한다는 것은 예전부터 전해오는 것에서부터 찾아내고 밝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상고하는 방법은 말씀을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말씀과 연결되는 37-38절을 읽어봅시다(개역 개정판으로 소개합니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성경에서 영생을 얻으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께 친히 증언하신 말씀을 찾고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곧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언이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미리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장차 메시아가 이 세상에 임하실 것이라는 예언(預言)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말씀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신약의 말씀은 구약의 예언에 대한 성취(成就) 및 응답(應答)을 말합니다.
상고하다(에류나오. ĕrĕunaō) ἐρευνάω
스트롱번호 204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생각하다(요 5:39), 상고하다(벧전 1:11), 살피다(롬 8:27), 통달하다(고전 2:10).
* 2046. ἐρέω
스트롱번호 2046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말하다(마 7:4, 눅 23:29, 롬 3:5), 명하다(마 17:20), 묻다(마 21:24, 눅 19:31), 이르다(막 11:29, 고후 12:9, 계 17:7), 말씀하다(눅 2:24, 요12:50, 행 2:16).
* 4483.
ῥέω
스트롱번호4483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 이 말씀은, 윗 귀절들(37-38)의 정당성을 증거한다.
곧, 구약 성경은 영생을 주는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는데, 유대인들이 그 성경을 상고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그와 같은 행동은 성경을 바로 앎이 아니다.
곧,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과 같다.
07-14-2024(주일)
암송성구 #.8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Follow my example, 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t.
미메타이 무 기네스데 카도스 카고 크리스투
μιμηται μου γινεσθε καθως καγω χριστου.
본 받는자(3402) 미메테스(mimētēs) μιμητής, οῦ, ὁ 스트롱번호 3402
* 3401.
μιμέομαι
스트롱번호 340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본절을 10장에 속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1. 2절에서부터 새로운 주제 즉 교회의 예배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2. 문맥상 본절은
10:3과 상관성(相關性)을 갖는다.
바울은 10장에서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와 우상의 제물을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으며 그 권면의 모델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즉 바울은 8장의 경고와 권면에 대한 결론으로 본절에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본받는 그리스도는 유일하고도 완벽한 모델로서(Godet) 그분의 삶은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이었다(빌 2:4, 5).
그러나 그리스도나 바울의 삶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이타적인 삶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이타적인
삶이었다(10:33).
오늘 본문에서 ‘본’이라는 말이 영어 단어로는 두 가지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example’이라는 말과 다른 하나는 ‘pattern’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인데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나서 하신 말씀입니다. 조금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길 수 있습니까? 아니 단순히 선생이 아닌 “주님”인데 말입니다. 당시의
풍습에 의하면 하인이 주인이나 손님의 발을 씻는 것이 관례였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기를 원하시는 새로운
‘pattern’입니다.
모든 경기에는 rule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도 새로운 룰이 적용됩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것은 ‘본’이 되는 삶을 산다는 것이 우리가 가진 기존의 관념을 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는 관념도 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를 잘 믿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조금은 유별나게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남들이 뭐라고 해도 식사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도 성경을 묵상합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닮고 싶어 하느냐? 아니면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하고 심지어는 혐오하느냐? 하는 것이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우리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유익이 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닮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점점 더 혐오하게 될 것입니다.
“본”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가 “거룩함”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생활에서 적어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는 가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교인들과 선교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것입니다. 선교팀들이 여기저기서 기도하는 모습을 봅니다. 식당에서도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은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신앙에 관한 한 열정적인지를 드러내야 합니다. 좀
“유별나다!”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제가 좀 믿음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저는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으면 개인 기도를 하고 먹거나,
작은 소리로 기도를 하고 식사를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식사 기도하는 것이 본이 되어야지, 다른
사람들의 식사를 방해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닌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터기에 성지순례를 하면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에베소의 원형극장에 갔을 때, 얼마나 울림이 좋은지 화음을 넣어서
성가를 부르면 사람들이 손뼉을 칩니다. 그래서 자꾸 노래를 더 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 소리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가이드가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합니다. 가이드 소리에 집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 찬양 소리 때문에 하나님이 손가락질을 당한다면 우리의 행동을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싶어 하셨던 새로운 삶의 스타일이 있다면 “섬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요한복음 13장 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때가 언제냐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것을 아시고, 바로 죽음을 앞에 놓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때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마지막까지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 끝까지 사랑하시던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오늘 본문을 가리켜 “때를 가리지 않는 섬김”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힘이 들어도 섬기지 못할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조금만 돈을 벌고 권력을 잡아도 섬기지 못할 이유가 됩니다. 가진 것 없어서, 지위가 없어서, 가진 것이 많아서
그 모든 이유가 섬기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데, 예수님은 가장 힘든 순간에 섬김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의 가장
진지한 모습이 드러나는 때가 극한 상황이라고 하지요.
제가 조금 무모한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던 광야를 실제로 체험하면서 설교 준비를 해 보려고 합니다.
제가 직접 애급에서부터 출발해서 시내 광야를 머물며 광야 체험을 하고 가나안까지 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나눠보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을 나누는데, 누가 함께 가야 할까? 추운 밤, 더운 낮 물도 없이 지나야 하는데, 건강한 남자들로 팀을 모으고,
12 지파의 모습들을 성경을 보면서 철저하게 재현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여자들도 데려가서 정말 현실감 있게 불평하는 모습도 담아야 합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아야 하니까요.”
여행사를 하시는 권사님이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광야 체험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렇게 온전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하루 코스에 하이라이트가 있는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무장한 강도들에 의해 납치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끌고 다니다가 호텔에 데려다 줍니다. 그러면 그 과정 중에 리얼하게 사람들의 본 모습이 다 드러납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그분이 누구이신지 우리가 분명히 압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신 것, 수없이 많은 기적을 행하신 일들이 결국은 섬기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섬김의 본이 위대한 것은 섬김의 대상에서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롯 유다도
예수님이 발을 씻기시는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에게 예수님을 팔려는 계획을 마음에 감춘 가롯 유다 앞에도
수건을 들고 대야를 놓고 발을 씻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섬김에서 누구도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을 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가장 강력한 크리스천의 영향력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은 늘 자기편과 반대편을 갈라놓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도 그런 나뉨이 존재합니다. 진리 때문에 나뉘는 것이 아니라 내 성향에 따라 갈라지는 것이죠. 나눠진 우리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라는 주석가는 "예수님은 겸손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마디로 말하면 겸손할 필요가
없는 시간에 겸손하셨습니다. 겸손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겸손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이 보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것이 무엇인가요? 오늘 본문에 다시 한 번 집중합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고 우리가 따라 하기를 원하셨고, 그렇게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우리를 보고 따라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한 번 상상을 해보세요. 우리가 상황에 관계없이 대상에 관계없이 섬기기를 시작했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또 다른 가치관을 누군가 보여 줄 수 있다면, 또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연히 읽게 된 책이 있습니다. 데이빗 케이프가 쓴 [주님의 음성에 그대로 순종한 예수를 위한 바보]입니다.
그가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백인과 흑인이 딱 갈라져서 서로 싸우고 죽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현장에서, 그것도 석탄 연기 가득한 빈민들과 깡패들이 사는 ‘소웨토’라는 곳에서 “예수님이 씻긴 발은 행복한 발입니다!”라는 문구를 새긴 티셔츠와 반바지, 두꺼운 고무 깔창을 댄 운동화에 양말을 발목까지 접어내리고, 등에는 큰 장비를 지고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라는 음성 말입니다.
자신의 모습이 너무 우습기도 하고, 정말 바보 같은 모습 실현 가능성이 없는 그 모습임에도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소웨토에서 만난 4명의 건장한 폭력배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이 발을 내놓았고, 그 중 한
명이 데이빗과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일어난 변화의 스토리 기적의 이야기가 그 책에 나와 있습니다.
그의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속도로에서 또는 샛길에서 만나 그들의 발을 씻겼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족히 수천 명은 될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성공이나 실패가 없고 오직 순종만 있을 뿐이다. 내가
하루에 이삼십 명의 발을 씻기면 그날은 성공적인 날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찾는
단 한 가지는, 우리가 그분의 신실한 자녀로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다.”
새로운 패턴의 삶을 살기 위해 순종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 세상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절대로 이 세상의 가치를 가지고 세상이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죠.
오스트리아의 애들러라는 의사는 자기를 찾아오는 우울증 환자를 치료할 때 이런 처방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가서 2주일 동안 매일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할까 그것만 골똘히 생각하고 한번 실천해 보세요. 2주일 동안만 그렇게 살면 당신 병은 깨끗이 낫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새롭게 하고, 세상을 치유할 유일한 길이 있다면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셨던 그런 삶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믿음을 본받기 원합니다. 적어도 제 생각에 세상 사람이 우리를 보고 본받기를 원하고 감동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을 볼 때입니다. 평상시의 삶에서 우리의 신앙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모습”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반대로 평상시에는 예수를 잘 믿는 것 같은데 위기 가운데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면 우리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평상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성경을 읽거나 전도하는 우리의 모습보다, 불합리하게 진급에서 떨어졌을 때 대응하는 우리의
모습, 부당하게 꾸지람을 듣거나, 누가 봐도 힘들게 하는 못된 상사를 만났을 때 처신하는 우리의 모습, 모두가 실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회사가 위기에 처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보이는 신앙인의 의연한 모습과 소망으로 인내하는 모습 말입니다.
자녀의 진로문제를 놓고 안달하고, 입시의 당락을 가지고 일희일비할 때,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자녀에 대한 소망의 끈을 놓지
않으며 기도하는 모습, 군대에서 진급 철이 되면 교회와 절과 성당에 사람들이 모이고 진급 발표가 나면 사람들이 쫙 빠져나가고
기뻐하거나 실망할 때,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며, 진급되었을 때, 그렇지 못한 사람을 위로하는 모습과 반대로 내가 실패했을 때에,
선한 길을 인도하실 하나님을 굳게 믿으며 잘 된 사람을 축복할 수 있는 모습 말입니다.
내가 목사고, 장로고, 권사고, 집사인데, 예수를 잘 믿는데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일이 잘 안 풀릴 때, 우리를 주목해 보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어려운 일이 찾아올 때,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우리의 행동을
바라보지 않겠습니까?
임은미 선교사가 쓴 [최고의 날 최고의 그리스도인]이란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 잘 믿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예수님을 잘 믿지 않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면
하나님을 떠나버리지 않을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친하게 여겨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주님, 이 고통을 저와 함께 나누기로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친구가 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주님의 고통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을 품는다. 어려움이 찾아온다면, 당신도 이런 마음으로 감사하며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어찌 보면 참 쉬운 일들 같은데 이런 모습이 세상이 바라는 모습입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본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받은 축복보다, 의인이 넘어졌을 때 일어나는 모습입니다.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넘어져서 일어나는 사람, 시험 가운데 견디는 사람, 죄 가운데서 용서받은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완전함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완전함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크리스천의 모습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의 [주님과 동행하십니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볼만한 묘기 가운데 하나는 공중그네 타기입니다. 우리는 숨을 죽여가면서 곡예사들이 한 그네에서 다른 그네로 옮겨가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천막의 가장 높은 곳에서 묘기를 펼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 사람을 다른 곳으로 밀어 보냅니다.
그러면 당신은 "저러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하며 조마조마합니다. 한 번은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그처럼 완벽하게 공연을 할 수 있습니까? 한 번도 떨어지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떨어집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공연마다 떨어집니다. 하지만 눈치를 못 채시는 거죠. 왜냐하면 우리는 떨어졌을 때 어떻게 만회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거든요. 우리는 떨어졌을 때 재빨리 다시 뛰어 오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도 공연의 일부라고 생각하지요."
그들은 밑에다 그물을 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될 때, 우리는 절대로 완전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안전합니다. 이 안전하다는 신뢰감이 모든 일을 성공하게 하는 힘이 되어줍니다.
교회가 본이 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요, 그 하나님의 우리의 행동을 바라보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시고 그대로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믿음 안에서 우리의 행동이 결정되고, 교회의
모습이 결정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더 큰 도전이 되는 것은 우리 개인의 삶의 문제일 뿐 아니라 크리스천들이 모여 있는 교회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보인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교회를 보면 세상 사람이 용서하시는 하나님,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싸우시는 하나님, 정죄하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용서하거나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조바심내고 안달하며 자기 것을 차지하려는, 섬기는 본이 아니라,
죽어도 자신의 것을 희생하지 않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기적인 교회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운동을 하며 기독교 TV를 보다가 포항중앙교회 서임중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축복과 저주의 부메랑”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우리가 잘 아는 어떤 교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서울에 있는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 담임목사님이 재임 당시 쓰러지셨을 때, 교회당회원들의 사랑과 배려는 온 세계를 감동시킨 위대하고 아름다운 역사로 지금 남아 있습니다.
1988년에 ○○○ 목사님이 뇌출혈로 쓰러지셨습니다. 3년 동안 말씀을 못 하셨습니다. 몸은 절반만 사용되는 불구가
되었습니다.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는 치명적으로 기억과 모든 의식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얼굴은 뒤틀려서 의사도 돌아올 확률이
없다고 진단을 내린 상황이었습니다. 웬만하면 포기할 법 한데, 그 교회 장로님들은 포기하지 않고, 3년 동안 목사님을 병원에
눕혀놓고, 매일 24시간 기도하면서 조를 짜서 병원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장로님들이….
목사님이 스스로 견디기 어려워 죽고 싶다고 하니까 장로님들은 그 목사님을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그렇게 죽고 싶은 것이 소원이시면 저하고 손잡고 한 번이라도 일어섰다 죽으십시오.”
그렇게 하면서 강권하여 담임목사를 운동시키는 조를 짜서 3년을 뒷바라지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목사님을 회복시킬까?’ 이것만 생각했습니다.
그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한 번은 제주도로 목사님을 모시고 가서 만장굴 앞에 세워놓고 이쪽으로 걸어와 보라고 합니다.
비실비실하면서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목사님이 사모님 손을 잡고 몇 발자국 움직여 장로님 앞으로 오게 될 때, 장로님들은
“우리 목사님 만세!” 하면서 울고 또 울며 그렇게 기뻐했다는 이야기는 잊을 수 없는 감동스토리가 되었습니다.
노회는 교회가 강단을 너무 오래 비운다고 설교 목사를 파송하려고 결의합니다. 그때 ○○○○교회 장로님들은 “누구도 우리
교회에 오지 못한다. 만약 노회가 설교 목사를 파송하면 우리는 ○○○○교회는 노회를 탈퇴한다고, 우리 목사님이 회복되어서 이
강단에 설 때까지는 누구도 ○○○○교회 강단에 설 수 없다.”라고 노회를 향하여 항거하기도 했습니다. 노회도 이 장로님들의 행위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습니다.
장로님들은 목사 지키기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드디어 3년 만에 목사님이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반신불수의 몸으로 어눌하지만
처음 설교를 하게 되었을 때 교회는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 목사님은 우리 한국교회사에서 설교 잘하기로 유명한
목사님이셨습니다. 말이 빠르면서도 발음이 정확하게 전달되는 어른이셨습니다. 그러나 병중의 설교는 알아듣기도 어렵고 어눌한
말이었지만, 그 소리를 듣는 교인들은 행복해했습니다.
뇌출혈 당시에 모든 기억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성경을 읽다 보니까 “태초”라는 말이 뭔지 몰랐습니다. 사전을 펴보니까 “맨
처음”이라고 되어 있었답니다. 창조라는 말이 뭔 말인지 몰랐답니다. 사전을 펴보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 이런 식으로 새롭게
어린아이같이 글을 익혀가는 가운데 너무 속이 터져서 “이게 사는 길이냐고, 죽자고” 포기를 하려고 했답니다. 그때 하나님이
소리치셨습니다.
“이놈아, 너는 살아있지 않느냐? 반은 쓸 수 있지 않느냐? 책은 읽을 수가 있지 않느냐? 밥은 먹을 수가 있지 않느냐? 남아 있는 것 붙들고 감사하지 못하고 없는 것 때문에 왜 불평을 하느냐고” 거기서 목사님이 깨어집니다.
어눌하게 성경을 읽기 시작하여 두 주일에 성경을 한 번씩 읽어내니까 1년에 25번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 읽는 어느 날,
갑자기 뇌 경이 마치 전기 스파크가 팍! 팍! 일어나듯이 온 뇌를 흔들더니만 기억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잃어버렸던 모든 언어가
회복되었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옛날에 암송해 두었던 성경구절이 다 회복이 되어 생각이 났습니다. 교인들은
행복했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예배당이 건축되었습니다. 쓰러질 때 교인 수가 1,500명이었는데, 3년 동안 교인 수가 불어나지
않았습니다. 강단에 선 목사님이 3년 동안 교회가 침체되었으니 오늘부터 하나님, 3년 만에 교회가 배가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정말로 출석교인 3,000명으로 부흥시켜 주셨습니다.
당시 예배당 좌석 수가 600석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설교를 다섯 번, 여섯 번 하니 장로님들이 목사님 설교 한 번만 하시라고 했더니 목사가 설교를 해야지 하면서 계속하니까 장로님들이 놀라운 결정을 합니다.
“우리 목사님 살리려면 여섯 번 설교할 것이 아니라 한번만 설교하게 하자. 그러려면 3,000명 들어가는 예배당을 짓자.”
그렇게 해서 세운 성전이 지금 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목사로 하여금 설교 한 번 하게 하기 위하여 시작한 성전이 잘 지어져 3,000석 좌석의 예배당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다가 2005년 2월 13일, 미국 남가주 안디옥 교회에서 집회 인도하시다가 마지막 부분에 성도들 얼굴도 보이지 아니하는
희미해져 가는 가운데, 마지막 설교를 끝내고 강단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열흘 후에 23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이게 단순히 어느 잘된 교회의 이야기, 쓰러진 목사님께 잘해라! 이런 이야기로 들리시나요? 이제는 싸우는 교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런 훈훈한 교회의 이야기가 들려야 합니다. 교회가 축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경험이 서로 섬기게 하여 줍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이 이런 일들을 경험하고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본을 보아야 배우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본을 보여줘야 세상이 배우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배운 것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Nachfolge”라는 독일어의 단어입니다. ‘제자’란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섬김을 받았기에 우리도 섬길 수 있습니다.
[고통이라는 선물]이라는 책을 쓴 폴 브랜드는 나병 환자를 치료하는 전문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생을 나병환자를 위해 살아온 분이었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나병환자를 치료하는 전문의가 된 것이죠.
그는 사람들에게 나병환자와 접촉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을 설득했고, 많은 사람이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참여하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자리에 들게 되었습니다.
순간 자신의 한쪽 발에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폴 브랜드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바늘을 가지고 찔러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는 나병을 치료하다가 나병 환자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바늘로 발뒤꿈치를
찔러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통으로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너무 피곤해서 잠시 마비현상이 왔던 것
같았습니다.
그는 그 순간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하나님, 고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폴 브랜드가 감사했던 것은 나병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나병환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들이 왜 자신들의 신체 일부분을 뜨거운 불에 넣는지, 신체 일부를 칼로 자르려고 하는지를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폴 브랜드는 일평생 나병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에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을 잘 섬길 수 있었습니다.
07-07-2024(주일)
암송성구 #. 7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악에게 지지 말고
- '악에게 진다'는 것은 원수의 악한 행위로 번민하거나 원수에 대해 악으로 갚으려고 악한 행위를 계획하는 것이다.
즉 원수의 악한 행위로 인해 선한 상태를 떠난 것을 의미한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 이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삶으로 곧 선행 구절에서 말한 겸손(3, 16절), 봉사(6-8절), 평화를 유지하는 것(18절)을 가리킨다.
또한 20절의 원수에게도 친절을 베푸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는 현재 삶에서 승리하는 생활을 말한다.
이 승리는 자신의 노력, 열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는 믿음과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의 힘으로 이뤄진다.
* 악(256)
* 선(18)
* 이기라(3528)
06-30-2024(주일)
암송성구 #. 6 고린도전서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Yet when I preach the gospel, I cannot boast, for I am compelled to preach. Woe to me if I do not preach the gospel!
06-23-2024(주일)
암송성구 #. 5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having a form of godliness but denying its power. Have nothing to do with them.
06-16-2024(주일)
암송성구 #. 4 고린도후서 5:9-10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So we make it our goal to please him, whether we are at home in the body or away from it.
For we must all appear before the judgment seat of Christ, that each one may receive what is due him for the things done while in the body, whether good or bad.
06-09-2024(주일)
암송성구 #. 3 에베소서 4:4-6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게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There is one body and one Spirit--just as you were called to one hope when you were called--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one God and Father of all, who is over all and through all and in all.
06-02-2024(주일)
암송성구 #. 2 사도행전 4:12
05-26-2024(주일)
암송성구 #. 1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 본 구절은 17세기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논쟁의 주요 쟁점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본절을 두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 구원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의 보편 구원론적 해석은 타당치 않다.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해 예비되었지만 그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만 구원을 얻는다(Earle).
그래서 칼빈(Calvin)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사실은 '구원을 받으며'의 헬라어 '소데나이'(*)가 수동형으로서 구원의 주체는 오직 '우리구주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일 때 구원을 얻는다는 점을 시사한다는 것에서 지지를 받는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본절을 통해 어떤 계층이나 종족의 특성 때문에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지는 않음을 말하는 것이지 개별적으로 모든 인간이 구원받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Lenski).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진리에 대한 지식은 구원의 뿌리요, 열매이다.
이러한 지식은 인간의 자의적(自意的)인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획득된다(마 16:17; 딤후 2:25).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겔 33:11)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마태복음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디모데후서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에스겔 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는 예정론, 자유 의지, 하나님 주권의 본질과 같은 교리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개신교 내의 두 가지 신학 체계입니다. 칼빈주의는 16세기 프랑스 신학자이자 개혁가인 존 칼빈(John Calvin)의 신학적인 가르침을 따르는 개신교의 한 분파이고, 알미니안주의는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자 야코부스(Jacobus Arminius)의 신학사상에 기초하여 17세기 초에 시작된 개신교 운동입니다.
칼빈과 알미니우스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 둘 사이의 몇 가지 주요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정론과 선택론
칼빈주의는 무조건적인 선택을 주장합니다. 즉, 하나님은 창세 전에 구원을 위해 특정한 개인을 선택하셨으며, 이는 그들이 행할 어떤 일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근거하여 선택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알미니안주의는 조건부 선택을 고수합니다. 즉, 하나님의 선택은 누가 자유롭게 그분을 믿기로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은혜에 응답할 사람을 미리 아시고 그들을 선택하십니다.
2. 속죄의 범위
칼빈주의는 제한 속죄를 가르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속죄 희생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선택하신 자들, 즉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알미니안주의는 무제한 속죄를 옹호하며, 그리스도의 희생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며 누구든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3. 구원
칼빈주의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은혜는 택하신 자들에게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하나님께서 먼저 허락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알미니안주의는 저항할 수 있는 은혜 사상을 지지하며,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죄가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4. 성도의 인내
칼빈주의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도 알려진 성도의 견인 교리를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선택하시고 거듭나게 하신 사람들은 믿음을 견지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알미니안주의는 배도의 가능성을 주장하며, 신자들이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함으로써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구원은 지속적인 믿음과 순종을 조건으로 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상은 단순화된 설명이며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내에서도 다양한 해석들이 있습니다. 둘 다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의 신비를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차이질문 /
답변 /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계를 설명해 보려는 두 가지 신학 체계입니다.
칼뱅주의는 프랑스 신학자 존 칼뱅(1509-1564)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고, 알미니안주의는 네델란드 신학자 야코뷔스
아르미누스(1560-1609)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두 체계는 다섯 가지 핵심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칼뱅주의는 인간의 완전한 타락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부분적 타락
완전한 타락을 고수하는 칼뱅주의 교리는 인간의 모든 면이 죄로 말미암아 부패되어 사람은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부분적인 타락을 말하는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모든 면이 죄에 오염되어 있지만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정도까지 오염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타락의 정도와 의미는 알미니안주의 진영 내에서도 논쟁이 되고
있지만) 고전적 알미니안주의는 부분적인 부패를 거부하고 칼뱅주의의 “전적 타락”과 매우 유사한 견해를 고수한다는 사실입니다.
대체적으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완전한 타락과 구원 사이에 어떤 ‘중간’ 상태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죄인들이 선행적
은총에 의해 그리스도께 이끌리는 것이 가능하며, 또한 하나님이 주신 능력에 의해 구원을 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칼뱅주의는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적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선택은 조건적
무조건적인 선택은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타고난 어떠한 가치와는 상관없이 자신만의 전적인 뜻에 근거하여 구원할 사람들을 택하신다는 견해입니다.
반면에
조건적 선택은 누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를지 미리 아심으로 그 예지에 근거해서 구원 받을 사람을 택하신다고 말합니다.
칼뱅주의는 속죄를 제한적이라고 보지만 알미니안주의는 무제한적이라고 봅니다.
이 점이 다섯 가지 쟁점 중에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입니다.
제한적 속죄는 예수께서 오직 택자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믿습니다.
무제한적 속죄는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나
사람이 믿음으로 그분을 영접하기 전까지는 그분의 죽음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칼뱅주의는 하나님의 은혜는 거부될 수 없다
알미니안주의는 개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
거부될 수 없는 은혜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부르시면, 그 사람은 필연적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거부할 수 있는
은혜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부르시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부름을 반대하고 거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칼뱅주의는 성도의 견인
알미니안주의는 조건적 구원
성도의 견인이란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은 사람은
믿음 안에서 인내하며 영원토록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그분으로부터 돌아서지 않는다는 개념을 말합니다.
조건적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도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리스도로부터 돌아설 수 있고 따라서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견해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많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조건적인 구원”을 부인하고 그 대신에 “영원한 보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의 논쟁 가운데 누가 옳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의 다양성 안에서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혼합된
온갖 종류의 견해들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다섯 가지 칼뱅주의 핵심을 전부 고수하는 칼뱅주의자들이 있고 다섯
가지 알미니안주의를 고수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 가지 핵심만 고수하는 칼뱅주의자들도 있고 두 가지 핵심만
고수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도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 두 견해가 혼합된 유형에 동조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입장은 두 체계
모두가 각각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러한 개념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주권적이며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인간은 구원을 얻기 위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결정을 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이 두 사실은 우리에게 모순되어 보일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는 완벽하게 이치에 맞습니다.
알미나안주의의 탄생 배경은 네덜란드 정부가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쿠른헤르트(Coornhert)에 대항하기 위해서 아르미니우스를 시켜 쿠른헤르트의 신학사상을 반론하라 한 것에 기인합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는 오히려 쿠른헤르트의 신학사상에 동조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아르미니우스와 고마르 사이에 신학논쟁이 있었는데, 논쟁의 내용은 '타락 전 예정론'과 '타락 후 예정론'이었습니다.
1608년 아르미니우스 사후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신학사상을 더욱 체계화하여 발전시켰고 마침내 40여명의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은
종교적 관용을 강조하는 네덜란드의 정치인 올덴바르네벨트의 요구에 따라 Remonstrance(항의서)라 불리는 신앙성명을
작성하였으며, 이에 대한 도르트회의(1619년)의 신학적 응답이 바로 칼빈주의의 5대 강령입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그 내용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분 칼빈주의 알미니안주의
인성 전적 타락 자유의지 인정
예정 무조건 예정 예지하여 예정
속죄 제한된 선택 구원 무한 선택 구원
은총 불가항적 은총 가항적 은총
성도 성도의 견인(보호) 성도 보호 불확실
결국 1618년 11월 13일-1619년 5월 9일까지 도르트회의가 열려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 승리하여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편 알미니안주의는 네덜란드를 벗어나 영국교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유니테리언주의와 침례교,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논쟁은 5세기경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을 연상시킬 정도로 17세기 초를 뜨겁게 달구었던 개신교 역사상 가장 거대한 신학 논쟁의 하나였습니다.
요한은 로고스의 신격을 논함에 있어서 먼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en arche en ho Logos) 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의 강조점은 로고스가 계셨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로고스가 태초에 계셨다는 데 있다.
즉 로고스의
선재성(先在性) 또는 영원성(永遠性)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먼저 ‘태초’의 의미에 대한 고찰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태초’(太初)라는 말은 우리말의 문자 그대로는 ‘가장 처음’이라는 뜻이나, 결코 시간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영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말은 칠십인 역본(LXX) 창 1:1에서도
요한복음 1:1의 arche 를 쓰고 있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같지 않다.
창 1:1에서는 천지 창조의 기사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시기를 ‘태초’라고 하여 시간 개념을 나타내고 있다.
요 1:1에서는 천지창조 이전까지의 영원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요 1:1의 arche (아르케, 태초)는 aion (아이온, 영원) 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말하는 태초는 사실 태초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불트만은 이것을 단순히 ‘선재성’(先在性,
pre-existence)으로 나타내지 아니하고 ‘선사성’(Vorgeschitiliche) 즉 영어의 pre-historical
existence 로 표현하나, 로고스의 존재성에서의 그 개념은 오히려 영어의 atemporal(無時性) 또는
nontemporal 또는 비시성(非時性)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리스도의 선재에 있어서 그는 지음을 받지
않으셨으며(agnnetos = ingenerate), 그는 무시간적(無時間的, timeless)이며, 불가시적(不可視的,
invisible)이며, 무형적(無形的, impalpable)이며, 무감각적(無感覺的, impassible)인 분이었으나 우리를
위하여 시간 안에 들어오셔서 가시적(可視的)이고 유형적(有形的)이고 감각적인 분이 되셨다.
요 1:1의 ‘태초’에 대한 원어를 보면 창 1:1의 히브리어 bereshith 나, 그 헬라어 번역인 70인 역본의
두 arche 나 신약 요 1:1의 arche 나 모두 문자적으로는 시간적인 개념으로 ‘처음에’를 뜻하는 점에 똑 같다.
그러나 그
어휘가 요 1:1에서는 창 1:1과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그 차별성을 나타내고자 하는 시도에서 해석적인 번역을
시도한 것이 몇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중국어역 성경 중 소위 ‘구어역’(1962년 홍콩성경공회 ‘神版’)에서는 창 1:1의
ebreshith 를 요 1:1의 ‘太初’와는 달리 ‘起初’ 로 하고 있다.
이것은 요 1:1의 로고스의 영원성=무시간성(無時間性)과
창 1:1의 창조 역사(役事)의 시간성을 구별하고자 한 시도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 1:1의 ‘太初’에 ‘초’(初) 자가 있는 한
창 1:1의 ‘起初’와 근본적으로 다른 영원성을 나타내지 못 한다.
중국어역 성경 문리역본(1854년 역)에서는 요 1:1과
요일 1:1의 ‘태초’를 ‘元始’로 번역하고, 창 1:1에서는 ‘太初’로 번역하고 있어, ‘元始’가 ‘太初’보다 이전임을 나타내고
있으나, 이 ‘元始’의 ‘始,’자에도 ‘始作’이라는 시간적인 개념이 들어가 있으므로 로고스의 영원성을 나타내는 데는 충분하지 못하다.
또 ‘初’ 즉 ‘처음’이라는 말도 그 자체가 벌써 시간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거기에 ‘太’(‘가장’ 또는 ‘아주 크게’라는
뜻)라는 한정사가 붙을지라도 그 개념을 변경시키지 못 한다.
왜냐하면 ‘처음’이나 ‘크다’라는 개념은 거기에 아무리 그 정도가 큰
것이라고 할지라도 유한성(有限性)의 범주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영어의 ‘in the beginning,’ 독일어의 ‘Am Anfang,’ Au
commencement,’ 일어의 ‘はじめに’(한자 표기로는 ‘始’ 또는 ‘太初’) 등 모두에서 같다.
우리말 성경에서 요 1:1을
보면, 개역(1938년), 새번역 신약전서(1967년), 표준새번역(1993년), 개역 개정판(1998년) 등에서는 다
‘태초에’라 하고 있으나, 예수셩교젼셔(1887년, 로스 역 신약전서)에서는 ‘처음에,’ 공동번역(1971년)에서는 ‘한
처음에,’ 천주교 200주년 기념성경(1992년)에서는 ‘맨 처음’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 196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쉬운
번역 또는 풀이역의 경향이 일어나, 여러 나라에서 그러한 번역을 볼 수 있다.
예컨대, 1966년의 ‘Good News For
Modern Man'(소위 Today's English Version; 후의 Good News Bible) 초판에서는 "From
the very beginning" 로, 제2판에서는 “Before the world was created”로 번역하였고, 독일어
번역 'Die Gute Nachricht'(1971년)에서는 “Am Anfang, bevor die Welt
geschaffen”(처음,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으로 번역되어 있고, 香港聖經公會 발행의 現代中文譯本(1975년)에서는
‘宇宙被造以前’으로, 當代聖經(1985년)에서는 ‘萬有之先’으로 번역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현대인의 성경(1985년)에서는
‘우주가 존재하기 전에’ 등 거의 같은 뜻으로 풀이역을 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신(神)의 이름에 대한 표기가
‘하나님’이 옳으냐?
아니면 ‘하느님’이 옳으냐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 이란 말의 어원을 따져 보면 ‘하’ (天) 에 ‘님’ 이란 존칭접미사를 더한 것인데,
처음 표기 중의 아래 아
(.) 자가 새로운 한글맞춤법의 채택으로 없어지면서,
서북지방에서는 ‘ㅏ’ 모음으로 바뀌어 ‘하나님’ 이 되고,
서울 이남에서는
‘ㅡ’ 모음으로 바뀌어 ‘하느님’ 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의 ‘하나’ 이든지, ‘하느님’ 의 ‘하느’ 이든지 간에 그
어원은 다같이 ‘하늘’ 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문법에서는 대개의 경우 ‘ㄴ’ 받침 위에 있는 ‘ㄹ’ 받침은 떨어진다.
예컨대, ‘아들’ 과 ‘딸’ 에 ‘님’을 붙이면 ‘아드님’이 되고 ‘따님’ 이 되는 경우와 같다.
(그러나 ‘달님’ ‘별님’ 과
같은 예외도 있다).
우리말
성경 최초의 번역인 1882년의 누가복음에서는 ‘하느님’ 으로 표기하였으나,
바로 그 다음 해에는 ‘하나님’으로 표기하여, 이
표기가 1971년의 공동번역까지 기독교의 신명 (神名)으로 정착되었다.
이렇게 기독교의 신명이 ‘하나님’으로 정착되게 된 것은
‘하나님’ 의 ‘하나’ 가 수 (數) 의 ‘하나’ 와 발음상 일치하여, 기독교인들은 ‘하늘’ 이란 어원적 의미와는 달리 유일신의
개념으로 이해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국어사전에서는 ‘하나님’ 과 ‘하느님’ 을 다른 어휘로 구별하여 ‘하느님’ 은 우리 민족이
재래적으로 가졌던 범신론적인 신이라 하고, ‘하나님’ 은 기도교인들이 믿는 유일신이라고 서술하였다.
그러다가
1971년의 공동번역에서는 그 최초의 어원에 맞게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을 쓰게 되어, 성경상 신에 대한 표기가 ‘하나님’
과 ‘하느님’ 의 두 가지가 다 쓰이게 되었다.
여기서 이 두 가지의 다른 어휘를 국어학적인 면에서 고찰해 보면, ‘하느님’ 은
어원적으로는 맞으나 오랫동안 기독교의 ‘하나님’ 과는 구별되는 개념으로 쓰여 왔고, 아직도 개신교에서는 ‘하나님’ 과는 다른
개념으로 (예컨대, 애국가의 ‘하느님’) 이해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천주교에서는 1965년 이후 ‘천주’ 를 ‘하느님’ 으로
바꾸어 쓰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이란 어휘는 국어학적인 면에서 말한다면, 바른 쓰기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에서 ‘하나’ 를 수의 ‘하나’ (one) 로 본다면, ‘님’ 은 존칭접미사가 아니고
명사가 될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에도 엄밀히 말하면 ‘님’ 은 ‘임’ 의 잘못된 표기이다), 그렇다면 명사 앞에 붙는
관형사로서의 ‘하나’ 는 ‘하나’ 그대로가 아니고 ‘한’ 이 되어 (예컨대, ‘한 사람’ 이나 책 ‘한 권’ 의 경우와 같이)
결국 ‘하나님’ 이 아니고 ‘한 님’ 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 교토(京都)에 가면 도시샤(同志社) 대학이 있습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니이지마 조(新島襄)가 설립한 대학입니다.
대학에는 설립자이며 초대 총장이었던 니이지마 조의 정신을 기리는 유물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부러진 벚꽃나무 막대기입니다.
한 번은 대학에 심각한 분규가 일어났습니다.
교직원과 학생들이 나뉘어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때 총장 니이지마 조는 깊이 기도를 한 뒤 모든 교직원과 학생들을 모이게 했습니다.
그 앞에서 총장은 분규 책임자를 찾아내어 엄벌에 처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총장은 벚꽃나무로 만든 막대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팔을 걷어 올리고는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막대기는 부러지고 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교직원들과 학생들은 총장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서로 화해하게 되었고 학교는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동지사 학교는 기독교 명문대학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 사건을 기리기 위해 벚꽃 막대기를 학교 유물로 보관하게 된 것입니다.
화평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바로 서 있는 사람입니다.
본래 인간은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관계가 회복되면서 화평이 생겼습니다.
화평은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유대인들은 일상생활에서 샬롬을 많이 사용합니다.
만날 때 샬롬으로 인사하고, 헤어질 때도 샬롬으로 헤어집니다.
샬롬의 원천이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샬롬이 없다면 살았으나 죽은 것입니다.
샬롬이 있으면 어려워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샬롬의 어원을 아십니까?
샬롬 - 셀렘(화목제물) - 실렘(댓가를 지불하다)
שָׁלוֹם 스트롱번호 7965
שֶׁלֶם 스트롱번호 8002
샬롬의 모음이 변해 셀렘이 되면 화목제물이라는 뜻이 됩니다.
다시 실렘으로 변하면 ‘대가를 지불하다’라는 동사가 됩니다.
이는 예수께서 셀렘(화목제물)으로 오셔서 실렘(대속)으로 죽으셨음을 뜻합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기 위해 화목제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으며 하나님과 화평인 샬롬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얻어지는 선물이 화평입니다.
여기의 ‘누리라’ 는 단어는 “아폴라우시스" (Apolausis)입니다.
그 뜻은 ‘즐기다’ 입니다.
* 누리다(2192) ἔχω
스트롱번호 2192
화평은 마음에 품고 있거나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즐겨야 합니다.
그래야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행복일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으로 더불어 즐겨야합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까?
첫째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18세기 유럽에 퀘이커(Quakers) 기독교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퀘이커란 ‘떤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살려고 힘썼습니다. 하나님을 벌주시는, 심판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였기에 주변의 사람들이 퀘이커란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기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보다 기뻐하며 감사함으로 찬양하며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루터(Martin Luther)가 로마를 방문하였을 때에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셨던 예루살렘 총독관저를 옮겨다가 지은 성당을 방문하였습니다. 루터는 의롭게 되기 원하여 무릎으로 힘들게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계단을 힘들게 기어 올라가던 중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기 때문에 내가 의로워진 것이지 이렇게 걸어간다고 나의 선행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루터는 벌떡 일어나 계단을 걸어 올라갔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 없이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결과는 하나님과 누리는 화평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아래 있었던 자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의 화평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화평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으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친구 됨이 곧 화평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누림은 하나님 나라를 세움에 동행하는 그 자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세워 나감으로 화평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은혜로 말미암아
손경미 사모의 ‘당신에게 힘이 될게요(WITH YOU)’ 라는 책의 내용입니다. 그녀가 어느 날 유방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여섯 번의 암 수술을 하였고 머릿속에 콩알만 한 뇌종양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님을 향한 끈을 놓지 않고 2008년 ‘아시안 암 환우회’라는 봉사단체를 만들어 자신처럼 암을 선고받고 투병 중인 환우와 환우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고백합니다. “처음엔 원망과 충격과 실망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내가 작아지는 순간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단지 암 환자라는 사실 때문에 다른 암 환자에게 다가가 진실된 소통을 하며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더 경이로웠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의 커튼 뒤에 행복을 숨겨두셨습니다.” 그녀는 은혜로 말미암아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며 궁극적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였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의 ‘은혜의 들어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약의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는 은혜를 얻었으나 즐거움으로 서 있지 못하고 두려움으로 서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잠깐 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에 들어감은 생명과 의가 왕 노릇하는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은혜입니다. 이런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화평을 얻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며 모진 고난을 당했지만 즐거울 수 있었던 까닭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시는 화평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폭풍우가 휘몰아친다 해도 더 은혜를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움을 당해도 낙심치 마십시오. 은혜야말로 하나님 곁으로 나아가게 하는 기회요, 화평을 가져오는 통로인 것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사랑으로 말미암아
영국의 시골에 살던 두 젊은이가 도시로 옮겨와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골 교회의 따뜻한 분위기 대신에 도시 교회의 많은 사람들 속에 적응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일 년 가까이 출석했지만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았습니다. 인내의 한계에 도달한 두 사람은 다음 주일에는 결판을 내자고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결심이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다음 주일에 나가서 그에게 이야기 거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면 그만 두겠다는 것이고, 또 한 사람은 다음 주일에는 자신이 먼저 누구에게든지 말을 걸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없자 즉시 교회를 떠났고, 또 한 사람은 자기의 작은 결심을 실천하여 먼저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 교회에 정착했습니다. 그가 바로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목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되면 상대방의 사랑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먼저 이해하고 용서하면서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본문 5절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령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까? 성령이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붓기에 부끄럽지 않게 됩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있기에 화평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신 것으로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고 있을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감사치도 아니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치 않으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위하여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 때문에 화평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확증되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이 마음에 부은바 되었습니다. 모쪼록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세인트 루이스(Saint Louis) 시내를 여행 중이던 변호사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서 교통경찰에게 물었습니다. “예배드릴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어디에 교회가 있습니까?” 경찰이 상세하게 일러 주는 대로 가보니 교회가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경찰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때 변호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 곳에 교회가 많던데 하필 맨 끝에 있는 그 교회를 소개하였습니까?” 그러자 경찰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좋은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예배드리러 가는 교인들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 교회로 드나드는 교인들의 얼굴이 제일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소개해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의 얼굴은 어떠한 모습입니까? 모름지기 화평을 누리는 자의 얼굴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바로 맺고 화평을 누리는 자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신 은혜로 화평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에 성령이 부으시는 사랑으로 화평을 누리고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디 하나님이 주시는 화평을 소유하심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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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언어란 본질적으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또는 종교적 소산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반드시 어법에 맞지 않는 경우에도 오랜 전통으로 정착이 될 때는 그것을 거부할 수도 금지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대다수 언중의 관용이 문법까지도 바꾼 사례를 1989년의 맞춤법 개정에서 모음조화의 법칙을 깬 것 (예: ‘괴로와’ 를 ‘괴로워’ 로 한 것 등) 으로도 알 수가 있다.
위와 같은 사실에서 볼 때, 한국 기독교인이 문법상 어원저으로 잘못된 ‘하나님’ 을 쓰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는 동시에, 이미 성경상의 어휘가 된 ‘하느님’ 을 쓰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1971년의 공동번역이 우리의 성경인 이상 우리는 현재 ‘하나님’ 과 ‘하느님’ 두 가지 신명 (神名) 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바울과 그의 선교 동반자들은 데살로니가에서 성공적으로 복음을 전파했지만, 결국에는 비방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떠나고 얼마 후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충실하게 남아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도 복음을 나누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자신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고 복음을 가르치는 데 전념했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기록했다. 또한, 그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우려하는 점에 대해 응답해 주었다. 그리고 그 후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거짓 개념이 계속해서 우려를 낳는 것을 알고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두 번째 편지를 보냈다.
데살로니가전서 소개
데살로니가전서는 현존하는 사도 바울의 서한 중 가장 초기의
기록으로 여겨진다.
사실, 이 서한은 신약전서 내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서로, 모든 복음서보다 10여 년 전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에 실린 바울의 가르침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 겪을 고난(데살로니가전서 3:3 참조), 재림 시에 있을 그리스도인의 부활(데살로니가전서 4:13~14 참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시기(데살로니가전서 5:1~2
참조) 등을 다룬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의 각 장에서 재림을 언급했다. 이런 가르침은 특히 후기 성도들에게 귀중하다. 후기
성도들은 주님께서 “나의 오는 … 그때가 가까이 왔음이라”라고 말씀하신 경륜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교리와 성약 35:15)
데살로니가전서는 누가 기록했는가?
데살로니가전서 1장 1절의 인사말에는 바울, 실루아노(실라), 디모데가 이 서한을 보냈다고 나온다. 이 세 명 모두 바울의 제2차 선교 여행 동안, 현대의 그리스에 있는 데살로니가에서 함께 복음을 전파했다. 실라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내는 이 서한을 작성하는 데 기여한 것은 맞지만, 몇몇 성구에 나오는 “나[I]”라는 말은 그 내용에 대해 바울이 개인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데살로니가전서 2:18; 3:5; 4:13; 5:27 참조)
데살로니가전서는 언제, 어디에서 기록되었는가?
바울은 제2차 선교 여행 중에(주후 51년 무렵), 실라 및 디모데와 함께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하지만 유대인 지도자들 때문에 세 사람은 그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사도행전 17:5~15 참조) 바울은 이후에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다시 보내어 그곳에 있는 교회 회원들을 지원하고 격려했다. 후에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박해에도 불구하고 충실히 남아 있으며 그들의 의로운 영향력이 널리 퍼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사도행전 18:5; 데살로니가전서 1:7~8; 3:6~8 참조) 바울은 주후 52년 무렵, 이 소식을 들은 직후에 데살로니가전서를 썼을 것이다.
성경의 몇몇 판에서 데살로니가전서 끝부분에 실린 짧은 주석(설명문)에는 아덴에서 이 서한을 기록했다고 잘못 기재되어 있다. 사실,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했음을 시사하는 증거가 있다. 실라와 디모데 둘 다 이 서한들을 쓰는 데 기여했기 때문에(데살로니가 전서 1:1 참조), 이 편지는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 있는 바울에게로 간 후에야 쓰일 수 있었다.(사도행전 18:1, 5 참조) 바울의 서한에 나오는 설명문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제38장에 나오는 “고린도전서는 언제, 어디에서 기록되었는가?”를 참조한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누구를 위해, 왜 기록되었는가?
바울이 제2차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에, 영은 바울과 그의 동반자들인 실라와 디모데, 그리고 아마도 누가에게(사도행전 16:11~12 참조) 에게해를 건너 마게도냐로 가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인도로 그들의 여행 일정이 바뀌어서 복음이 유럽에서 전파되기 시작했다.(사도행전 16:6~11 참조)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파한 후에(사도행전 16:12~40 참조) 데살로니가로 갔다. 데살로니가는 고대 그리스의 마게도냐 왕국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고 번창하는 도시였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특징 때문이다. 그 도시는 에게해에서 가장 훌륭한 자연항에 세워져 있었고, 로마와 오늘날의 터키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가 지나는 곳이기도 했다. 바울은 그 도시의 유대인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파하기 시작했으며, 많은 유대인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사도행전 17:1~4; 데살로니가전서 1:9 참조) 그러나 이후에 세 사람은 유대인 지도자들 때문에 그 도시를 곧 떠나게 되었다.(사도행전 17:5~15 참조;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2:17 참조)
데살로니가 개종자들은 복음을 받아들인 첫 유럽인들에 속하며, 그 때문에 그들은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또한 재림에 대해 많은 점을 궁금해했다. 아마도 그들은 박해를 덜 받게 될 더 좋은 때를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서한을 보내 격려하고 힘을 북돋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그들이 한 질문들에 대답해 주었다.
데살로니가전서에는 어떤 뚜렷한 특징이 있는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이 전하는 주요 주제 중 하나는 재림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악인들이 멸망하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고 의인들, 특히 과거에 죽은 성도들이 재림에 참여하는 것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데살로니가전서 1:10; 2:19; 3:13; 4:13~17; 5:1~10, 23 참조) 바울은 여러 성구에서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성신을 지칭하는 신회의 본질을 설명했다.(데살로니가전서 1:1, 5~6; 3:11; 4:8; 5:19 참조) 또한, 바울이 썼던 다른 많은 서한과는 달리 데살로니가전서는 날카로운 꾸짖음이나 무언가를 바로잡는 내용이 없고, 그 대신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대한 칭찬이 실려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개요
데살로니가전서 1~3장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게 큰 감사를 전하고, 그들이 수고하여 복음을 전파한 점을 칭찬했다.
그는 독자들에게 자신이 그들
사이에서 친절하게 베푼 성역을 상기시키며 그들의 충실함에 대한 기쁨을 표현했다.
그는 성도들에게 서로에 대한 사랑, 그리고 만민에
대한 사랑을 키우라고 상기시켰다.
데살로니가전서 4~5장바울은
성도들에게 거룩하고 성결하게 되라고 말했다.
그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리스도의 간증에 충실한 성도들이 부활하게 되며,
그날에 지상에서 살고 있는 의인들은 부활한 성도들과 함께 주님을 맞이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바울은 교회 회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을 준비하고 그날을 위해 깨어 있어야 함을 상기시켰다.
데살로니가후서는 신약성경에 있는 바울 서신 중 하나로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의 기본 구성
데살로니가후서는 재림에 대한 잘못된 사상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진 것이며, 전체적으로는 재림이라는 주제가 주를 이룹니다.
그 큰 주제 속에서, 박해에 대한 격려와 재림에 대한 훈계, 성도의 생활에 대한 권고 등을 통해 재림을 믿는 자가 취해야 할 바른 신앙 생활에 대한 권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서는 자체적으로 본서가 바울의 저작임을 스스로 두 번에 걸쳐 밝히고 있으며(1:1. 3:17), 또한 바울이 쓴 다른 서신서들과 문장의 구조나 어휘, 표현 방식 등이 일관성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과 함께 했던 경험을 기록함으로, 바울이 저자라는 것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3:10).
본서의 저작 시기는 데살로니가전서가 기록된 이후 약 2-3개월 정도로, 대략 AD. 51년경으로 추정됩니다.
살후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살후 3:17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
살후 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데살로니가후서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데살로니가에 대한 걱정스러운 소식을 듣게 되면서(3:11), 기록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핍박과 환난에 대해서 굳건한 신앙을 갖고, 믿음의 진보까지 보였으나, 재림에 대해서는 혼란스러운 상태였던 것이죠.
살후 1:3-4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살후3: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일부 성도들은 자신이 성령의 계시를 받았거나, 혹은 바울의 다른 편지를 받았다는 허위 사실을 유포하며 마지막 때가 벌써 왔다고 주장을 하기도 했고(2:2), 일을 하지 않기도 했습니다(3:6~15)
살후 2: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살후 3: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그래서 바울은 아직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재림 전에는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지와,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권면하려는 목적으로 편지를 쓴 것입니다.
살후 2: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데살로니가는 로마에서 아시아 또는 아가야 지방으로 이동하는 교통 요지였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확산된 잘못된 사상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던 여러 교회들에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체하지 않고, 그들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사랑으로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덕분에 우리에게도 바울의 사명 의식과, 진리를 지키려는 훈계가 상당히 유익하게 전달이 되며, 격려와 훈계의 서신이자, 종말에 대한 변증의 서신이 되었습니다.
D. A. Carson, Douglas J. Moo. 『A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Zondervan, 2005.
F. F. Bruce. 『1 and 2 Thessalonians』, Word Biblical Commentary, Thomas Nelson, 1982.
Leon Morris. 『1 and 2 Thessalonians』,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IVP Academic, 2009.
‘끓는 물에 개구리를 갑자기 넣으면 뛰쳐나오지만, 미지근한 물에 개구리를 넣고
천천히 끓이면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고 죽는다’는 건 유명한 은유다.
이른바 ‘삶은 개구리 증후군’이다.
19세기 말 미국의 몇몇
과학자들이 실험을 통해 주장한 게 시초가 됐다.
분당 0.2℃ 미만의 느린 속도로 온도를 올리면 개구리가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경제 위기, 기후 위기가 찾아오는데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의 비유로 자주 쓰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구리를 끓는 물에 넣으면 펄쩍 뛰지 않고 죽지만, 찬물에 넣으면 더워지기
전에 펄쩍 뛰어 탈출한다”(더글라스 멜튼 하버드대 생물학과 교수)고 한다.
팔팔 끓는 물에서는 달걀흰자가 굳듯 단백질 변형이 와
탈출이 어려울 수 있지만, 오히려 서서히 물 온도를 높이면 위험을 인지한 개구리가 어느 순간 냄비에서 뛰쳐나간다는 것이다.
유튜브에는 10분에 5℃씩 온도를 올렸을 때 개구리의 반응을 찍은 실험 영상도 있다.
이
영상에서도 개구리는 물이 끓기 전 냄비를 벗어났다.
개구리가 주변 온도에 따라 체온이 바뀌는 변온동물임에도 ‘치사 온도’를
정확하게 느끼고 몸이 반응하는, 통념과 다른 생존 능력을 갖춘 게 입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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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찌어다
Now may the Lord of peace himself give you peace at all times and in every way. The Lord be with all of you.
평강의 주(the Lord of Peace)
호 퀴리오스 테스 에이레네스(ο κυριος της ειρηνης)
평강이란 "어떤 환경에서든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평강의 하나님이라는 말과 평화의 주라는 말은 혼용될 수 있다.
우리 말 성경은 이 단어들을 혼용해 사용한다.
원문에서 크게 차이가 없거나 같은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고 100여년이 지난 요사이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말은 평안 보다는 평화일 것이다.
평화로 번역된 이 단어는 영어로 Peace인데 히브리어로는 ‘샬롬 (שָׁלוֹם, shalom)’이고
헬라어로는 ‘에이레네(εἰρήνη, eirene)’이며
라틴어로는 ‘팍스 (Pax)’로 사용되었고
각기 사용된 시기나 장소가 다르므로 다른 형태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전에 불리던 복음성가에 내게 강같은 평화(Peace like a river)와 같은 곡이 있었고 뉴스도 연일 평화 회담(peace talk)이 보도된다.
평화란 '고요함의 상태'를 뜻하는데 이와 반대되는 것이 분노와 같은 격렬한 감정, 파괴와 혼돈이 가득한 상태로 그 한 예로는 전쟁이 있다. 개인 간의 평화는 화합harmony과 일치accord의 상태를 말하며 이것이 개인의 상태에서는 tranquility 즉 평온이나 평정平靜의 상태를 말한다.
평화의 상태가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
평화는 화합과 일치를 만들고 이는 우리들에게 안전과 풍요를 가져다 준다. 구약의 사람들은 이 말을 인사로 삼아 ‘샬롬’을 말해왔고 신약 시대에는 평안히 가라(Go in peace)는 인사를 더하기도 했다. 예수님도 부활 후 이 말을 자주 사용했는데 구약의 전통과 예수님의 본을 따라 바울은 서신서들 마다 ‘Peace be with you! 너희에게 평강이 있기를’ 이란 문구로 인사를 하는 것을 쉽게 볼수 있다.
우리에게 근심이 가득한 동안 우리의 마음에는 평화가 머물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안녕을 염려하는 동안에도 평화는 함께하기 힘들다. 우리 가족의 안녕과 자신의 성공과 부요를 염려하는 동안 우리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 오지 않는다. 현재의 내가 소유하고 있거나 성공한 것이 중요하지 않다. 염려가 있는 동안에는 한적하고 평화스러운 장소에 가더라도 평화가 없다. 진정한 평화는 예수로부터 나오며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평화를 주는 평화 수여자로 등장하고 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은' 두려움이나 근심이 없는 평화이다. 이것이 가능할까? 또한 예수의 평화는 갈등이나 전쟁이 없는 평화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너무도 당연한 것이겠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받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평화를 줄수 있는 분으로 먼저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고 가르치셨다. 우리의 근심과 걱정이 어디에 닿아 있는가? 대개는 앞선 걱정이고 앞선 근심이다. 오늘 누리는 은혜에 감사하고 집중하는 것이 내일 있을 걱정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래를 걱정한다. 오늘에 집중하지 못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예수께서는 믿는 우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하신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것이 많다."
그러므로 예수를 평화의 수여자로 믿으면 오늘 염려보다 내일 걱정보다 진정한 평화를 얻을수 있다. 당신은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가?
예를 들면 풀무불에 던져지는 젊은 청년들은(아벳느고, 사드락, 메삭) 뜨거운 불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도 굶주린 사자의 먹이가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돌에 맞아죽는 처참한 자리에서 스데반은 오히려 돌을 던지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 이유는 순교의 영광스런 삶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즈음 "엠폭스"라는 코로나의 변종이 사람들을 두렵게 합니다.
이러한 두려움 가운데서도 평강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확신하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평강이란 무엇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환경을 뛰어넘는 은혜입니다.
셋째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선한 결과로 인도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강의 주라는 한글 번역 성경을 헬라어 성경에거 직역하면 "그 평강의 그 주"라고 하겠습니다.
막연한 평강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의 고통을 이기셨던 승리하신 그 주님이 누리셨던 그 평강을 나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에서 고백되는 평강의 주를 말합니다.
'엠폭스'의 강력한 공격이 시작되었을지라도 사나 죽으나 나는 이미 주님의 것이 되었다는 믿음으로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는 믿음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아우토스 데 호 퀴리오스 테스 에이레네스 도에 휘민 텐 에이레넨 디아 판토스 엔 판티 트로포 호 퀴리오스 메타 판톤 휘몬.
αυτος δε ο κυριος της ειρηνης δωη υμιν την ειρηνην δια παντος εν παντι τροπω ο κυριος μετα παντων υμων.
빌리 그레함 (Billy Graham) 목사님의 설교 중에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남미의 안데스 산맥 위로 비행을 하던 비행기가 있었습니다.
안데스 산맥은 세계에서 가장 변화가 심한 기류가 있는 지역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비행기가 갑자기 난기류(air pocket)를 만나 500 피트이상 뚝 떨어지며 급강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을 느끼며 사색이 되어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놀랍게도 맨 앞에 앉아 있던 어린아이는 비행기가 쿵 떨어질 때마다 오히려 깔깔 웃으며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20분쯤 후에 비행기가 안정을 찾고 날아가게 되자 사람들이 그 아이에게 질문했습니다.
“얘, 넌 무섭지 않았니?”
“아니오,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다들 무서워하는데 어떻게 너만 무섭지 않았니?”
“그건요, 이 비행기의 조종사가 내 아빠거든요.”
이 아이는 조종사인 자기 아빠를 신뢰했기 때문에 그 무서운 상황 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평강의 비결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상황과 관계없이 누리는 평강이 진짜 평강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평강” 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은 여러 군데에서 진정한 평강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평강”이 무엇인지 함께 보시고 받아 누리시길 바랍니다.
16절의 말씀입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찌어다.
일반적으로 평강이란, 모든 일들이 원하는 대로 잘되어갈 때 느끼는 고요함, 기쁨, 만족 등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런 느낌들은 진정제를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낮잠을 자거나 주변 사람으로부터 확신을 주는 말을 들을 때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하는 평강은 겨우 그런 정도의 평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사람의 수준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만들 수 있는 평강은 어떤 것이든 깨어지기 쉽습니다.
오래 가지 못합니다.
사람이 주는 평화는 상황이 잘못되거나 불안해질 때 즉시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삶의 여러 상황에 의한 영향을 전혀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평강을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천국이 우리의 목적지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평강을 늘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우리가 소유하고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래서 이 평강으로 우리는 네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평강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먼저 “평강의 주께서 친히”라고 말씀합니다.
“친히”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평강은 하나님으로부터 개인적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평강은 하나님의 본성 중에서도 아주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속성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 은혜, 자비, 공의, 거룩, 지혜, 진리, 전능, 전지함, 불변, 영원 등등 많습니다.
그런데 평강 역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평강이십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 있는 온전한 평강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트레스를 절대 받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불안해하지 않으십니다.
걱정하지도 않으시고, 의심하지도 않으시며, 두려워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런 평강을 경험하도록 기도합니다.
그 평강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그 평강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평안은 “관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생각나게 하시는 보혜사 성령님과 우리가 함께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당신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살아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상관없이 진실로 주님께 당신 자신을 완전하게 맡겼는가 하는 점입니다.”
‘평안’을 주제로 한 찬양 중에 가장 유명한 찬양이 있습니다.
이 찬양은 스패포드(Spafford)가 시카고 대 화재에서 재산을 잃고, 여행 중이던 자식들을 바다에서 다 잃고 나서 그 죽음의 바다에서 고백했던 것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최고이신 그분을 의지하고 살아갈 때,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어도, 큰 풍파로 무섭고 험해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평안하지 않은 우리가, 번잡스러운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평안하느냐?” 여기에 우리는 “아멘! 평안합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둘째, “평강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평강은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것인 동시에 또한 선물입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할 때, 평강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 즉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잘해서, 또는 일한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속한 사람들에게 평강을 선물로 주십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이 자꾸 떠난다고 하시니까 그것에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요 14:27)
염려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평화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거짓된 평화를 통해 자신들의 염려를 없애보려고 시도합니다.
이사야서 57장에 보면, 하나님은 멀리서든 가까이서든 당신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평강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지만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선포하십니다(이사야 57:19-21).
참된 평강은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다른 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만 받을 수 있는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셋째, “평강은 계속 주어진다”
어떤학자는 "샬롬"를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것" 이 평안 안에 하나님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여호수아 리프맨이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쓴 책인 '마음의 평안(Peace of Mind)이라는 베스트셀러가 있습니다.
이 책의 젊은 주인공이 어떤 노인을 찾아가서 자기의 소원을 말합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젊은이가 말합니다.
“첫째는 건강이고, 둘째는 재물이며, 셋째는 미모이고, 넷째는 재능이고, 다섯째는 권력이고, 여섯째는 명예입니다.”
이 소원을 말하는 청년을 지긋이 지켜보면서 이 노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청년! 그러나 평안이 없이는 아무 것도 즐길 수가 없다네”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평강은 선물인데, 그것도 한두 번 주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때마다 일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마다”라는 것은 평강이란 우리에게 언제나 계속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거꾸로 보면, 이것은 중단될 수도 있는 것이라는 점을 암시해줍니다. 하지만 평강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중단시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당사자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육신에 굴복하여 평강의 흐름을 끊어놓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온갖 염려에 문을 열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 앞날에 대한 불안감, 질병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어떻게 할 때 진정한 평강을 누린다고 할 것 같습니까?
그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눈을 세상으로 돌릴 때, 평강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염려를 누립니다.
불안과 초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초점을 주님이 원하시는 삶에 맞추고 이웃을 섬길 때, 진정한 평강을 누립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는다는 것이 이렇게 기쁘고 좋은 것인가를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넷째, “평강은 상황을 뛰어넘는다”
하나님의 평강은 또한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때마다 일마다” 즉 ‘언제나, 어느 방식으로든지’ 평강을 누리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평강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나 어떤 방식에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평강은 어떤 인간관계나 환경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틀림없이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 모든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나누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것은 “평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는 구원을 받고, 염려를 극복하고,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되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하나님 안에서 평강과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무한대로 주십니다.
이 사실을 굳게 믿으시고 날마다 주 안에서 평강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평강의 주님!
주 안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지속적인 평강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능력의 주 안에서 살 수 있도록 믿음위에 굳건히 서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평강(平康)의 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퀴리오스 테스 에이레네스'(*)는 신약성경 중 본절에서만 사용되었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공통적으로 '평강의 하나님'(*, 호 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롬 15:33; 16:20; 빌 4:9). 그러나 이 두개념은 큰 차이가 없다. '평강'(*,에이레네)은 모든 사람의 안녕과 질서를 의미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문제들(게으름과 불순종)을 해결할수 있는 열쇠가 된다(Thomas).
이 같은 평강은 인간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일 뿐이다.
그리고 '평강의 주' 만이 실제로 신자들 사이에 화평을 주는 동시에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는 데 기초가 되신다(엡 2:14-18).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 여기서 '때마다'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 판토스'(*)는 신약성경 중에서 종종 합성되어 '디아판토스'(*)로 사용되었다(막 5:5;눅 24:53;행 2:25). 이 단어)는 '계속적으로'(continually)라는 의미로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주어의 평강이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변치않는 영원한 평강을 가리킨다(Morris). 즉 주의 평강이 계속 유지되고 단절이 없기를 요구하는 것이다(요 14:27;16:33;골 3:15). 한편 '일마다'로 번역된 헬라어 '엔 판티 트로포'(*)는 '모든 면에서'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때마다'란 표현과 함께 강조적인 표현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주의 평강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처럼 주의 평강은 외부의 상황과 조건이 어떻게 변하든지 간에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평강이다(Morris).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 바울은 주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보증하신 약속을 간구하고 있다(Thomas). 하나님은 결코 그의 백성을 버리거나 떠나지 않고 영원히 함께 하신다(마 28:20;히 13:5). 실제로 주의 평강은 주의 임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마 1:23). 성도들은 주께서 우리와 함께 있음과 그가 자기를 신뢰하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심을 알 때에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평강을 소유하게 된다(요14:27). 한편 본문에서 '너희 모든'(*, 판톤휘몬)이란 표현이 경건한 자들만을 가리키는지 게으름을 피우며 바울의 가르침을 불순종한 자들도 포함하는지 본 문맥에서는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런데 바울이 편지하는 대상이 데살로니가 교인 전체이므로 양자를 모두 포함하는 표현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에 따르는 자들뿐 아니라 불순종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축복에 동참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기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진실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요한복음 14장 26절의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은 “관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생각나게 하시는 보혜사 성령님과 우리가 함께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말입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당신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살아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상관없이 진실로 주님께 당신 자신을 완전하게 맡겼는가 하는 말입니다.
‘평안’하면 늘 저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매우 좋아서 여러분과 참 많이 불렀던 찬양입니다.
무디와 함께 사역했던 평신도 스패포드(Spafford)가 시카고 대 화재에서 재산을 잃고, 여행 중이던 자식들을 바다에서 다 잃고 나서 그 죽음의 바다에서 고백했던 찬양 말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최고이신 그분을 의지하고 살아갈 때,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어도, 큰 풍파로 무섭고 험해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평안하지 않은 우리가, 번잡스러운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최고이신 그분이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평안하뇨?”
그런데 오늘 본문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안을 원하고 평안을 이야기하지만, 세상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과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안은 다른 것이죠.
오늘 본문에,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무슨 의미일까요?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주는 평안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겠죠.
우리가 생각하는 평안은 무엇인가요? 아마도 우리의 평안을 깨뜨리는 “근심거리”가 사라지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근심거리는 해결되어도 또 생긴다는 것이죠. 또 하나, 우리를 두렵게 하고 근심하게 하는 것들을 압도할 수 있는
뭔가를 얻으면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일정한 자리에, 풍부한 돈에, 원하는 사람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모든 것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압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그 무엇이 어느 날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세상은 우리가 믿고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구와 배신의 상처 가운데 우리의 평안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결국, 평안은 “얻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성령님과 함께할 때 찾아오는 것이요.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와 함께하시고 겸손한 자를 좋아하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기를 원한다고 말입니다.
겸손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절대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죄’의 문제를 정당화함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 하지요.
지난 주간에 오래된 곽선희 목사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곽 목사님의 고향은 이북이지요. 그래서 아마 실향민들과 많이 상담할 기회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분단이 10년 20년 지나면서 가족을 기다리다 지쳐가던 사람들 가운데 다시 결혼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다 목사님을 찾아온 분이 있었답니다.
“목사님, 전쟁이 끝나고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제 아내가 북에 살아 있을까요? 다시 통일이 될까요? 기약 없이 기다리느니 그냥 결혼을 해도 될까요? 이런 상황에서 결혼을 하면 죄가 될까요? 안 될까요?”
이 물음에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합니다. 그분이 듣고 싶어 하는 답이 무엇일까요? 목사에게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라는 선언을 듣고 싶지만, 그렇게 선언한다고 사실이 달라지나요?
결혼하려면 죄책감을 감당하고 하는 것이지 뭘 그렇게 구차하게 묻습니까?
“평안을 찾으려는 것이죠.”
우리는 종종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 변명할 때가 많습니다.
주일을 성수하지 않는 것,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정당화해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기쁨과 평안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정당화하는 순간 우리는 이기적인 자아 때문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너희가 계명을 지키리니”
정당성의 원리는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뿐입니다. 아마도 이번 시리즈 말씀을 통해 가장 많이 등장한 성경 구절 중의 하나가 바로 누가복음 9장 23절입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이 말씀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절대로 평안을 느낄 수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절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말입니다.
우리에게 문제는 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독립하려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마음과 자기주장이 바로 가장 많은 전쟁을 치러야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최고의 것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자연적인 인간의 본성으로 볼 때 멋있고 좋고 우아한 것들입니다.
자, 이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으며 살아온 것 같지만, “평안”을 잃어버린 삶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사역과 사명을 넘어선 “평안”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일 중독에 빠졌던 그레이그 크로셀은 그의 책 [크리스천 무신론자]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되짚어보면 그렇게 해서 인정을 받고 싶었거나 무가치한 존재라는 느낌을 떨쳐버리려 했음이 틀림없다. 이처럼 건전하지 못한 욕구는
일을 제외한 삶의 여러 영역을 간과하게 하였다. 중독은 일종의 우상숭배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충족될 수 있는 필요를 다른
데서 찾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님에게서 존재 의미를 찾는 대신 성과를 올리는 것으로 가치를 입증하려 들었다. 그것을 인정하기까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노력과 아픔을 겪어야 했다.
여기에 제 모습도 역시 들어 있습니다. 제가 누리지 못하는 평안은 늘 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지 못하고 말입니다.
지난 부활절 예배를 드리면서 참 평안했습니다. 두 번 설교를 하고 나니까 저에게도 이렇게 주일이 평안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왜 이렇게 우리는 예배를 많이 드려야 할까? 물론 예배드리는 시간을 통해 누군가를 배려하려는 측면도 있지만, 사실은 우리 교회의
성도를 더 많이 수용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지 않을까요?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평안”을 생각하며 말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14장 26절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보혜사 성령님께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모든 것을 가르치시리라고 약속하셨는데, 우리가 그 가르침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왜 그럴까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안함의 반대는 서두름이 아닐까? 조급한 사람은 평안함을 누릴 틈이 없습니다.
피터 언더우드가 쓴 [First Mover]라는 책에 나오는 한국인의 서두름입니다.
몇 년 전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인 빨리빨리 베스트 10’을 뽑은 적이 있다. 이 결과를 살펴보면 우리는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외국인의 눈에 얼마나 경이롭게 보이는지를 알 수 있다.
1.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가 나오고 있는데 손을 집어넣어 컵 잡고 기다리기
2.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가 출발하면 뒤따라 뛰어가면서 추격전 벌이기
3. 화장실 들어가기 전부터 지퍼 미리 내리기
4. 삼겹살이 다 익기도 전에 먹기
5. 엘리베이터에서 2초도 못 참고 ‘닫힘’ 버튼 누르기
6. 3분 기다려야 하는 컵라면 3분도 되기 전에 뚜껑 열기
7. 영화관에서 엔딩 자막이 끝나기도 전에 일어나 나가기
8. 화장실에서 볼일 보면서 양치질하기
9. 웹 페이지가 3초 안에 안 열리면 닫아버리기
10.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구매한 뒤 먼저 마시고 계산하기.
우리는 참 기다리기 어려운 세상에서 사는 것 같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는 시간을 가져도 뒤처지는 것 같고, 바보 같기도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늘 말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게으름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하는 죄이듯이, 서두름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게 하는 “죄”입니다.
서두름은 늘 “지금”이라는 눈으로 늘 “자기중심적”이라는 생각으로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계획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에서 지금 내 삶이 만족스러운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44장 2절을 보세요.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사야 55장 8-9절 말씀,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여러분은 자신의 능력으로 얼마나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다 알 수 없다면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 아닐까요?
평안을 잃어버리고 두려워하며 서두르는 이유, 그래서 내가 뭔가를 바꿔보려는 욕심과 사명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기도하고 몸부림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죠.
말씀을 준비하다 아주 흥미로운 예화를 하나 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탈리아에서 유럽 성악계에 새로운 태양처럼 떠오르는 한국 여성이 한 명 있습니다. 푸치니가 작곡한 나비부인의 주인공입니다.
처음부터 주인공으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한 극장에서 주연으로 발탁된다고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이분이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서 수년 동안 성악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직 빛을 못 보는 것은 내 눈 때문이구나! 쌍꺼풀 수술을 해야겠다.' 하고는
남편을 겨우 설득시켜서 허락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제일 좋은 병원에 예약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쌍꺼풀 수술 세계적인 권위자는 다 한국 사람이랍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모 성형외과에 어머니가 예약을
했습니다. 보통 예약을 하면 1년 뒤에 할 수 있는데 어머니가 빽을 써서 날짜를 받았습니다. 그 여인이 수술 날짜가 결정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 주일날 로마 한인교회에 예배드리러 갔습니다. 목사님 설교 내용이 "왜 주어진 것을
감사하지 않느냐 왜 여자들 쌍꺼풀 수술하느냐 쌍꺼풀 수술했다가 나중에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는데 하나님께서 '네가 누구냐? 나는
너한테 쌍꺼풀 안 주었는데... 네가 누구냐?'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설교를 들으면서
'이것은 내 문제구나! 나를 향하신 주님의 말씀이구나!'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 나 쌍꺼풀 수술
안 하겠습니다." 이 얘기를 듣고 어머니가 화를 내면서 어렵게 받은 날짜니까 꼭 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안 받는다고
했습니다. 수술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수술하기로 결정되어 있던 그날에 열리는 콩쿠르에 참석했습니다. 그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았습니다. 그 콩쿠르 현장에 독일의 유명한 극장의 극장장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비부인으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조연도 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주연을 하려니까 얼마나 실수가 많겠습니까. 그래서 극장장에게 어느 날 물었습니다.
"나처럼 서툰 사람을 왜 처음부터 주연으로 뽑았습니까?"
그 극장장 대답이 네 눈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본래 나비부인은 일본 여인이지만, 일본 여인들의 가창력은 한국 여자보다
떨어진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인정을 못 받는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여자는 전부 쌍꺼풀 수술을 했답니다. 그래서 일본 여자를
무대 위에 올려놓으면 유럽 관객이 볼 때 일본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너 같은 가창력을 가진 사람으로 쌍꺼풀
없는 동양 여자를 처음 봤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그분은 무대 위에서 나비 부인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쌍꺼풀 때문에 생긴 인생의 불만, 그것을 만들지 않으신 이유를 발견할 때 찾아오는 평안함과 사명이 있죠. 왜 우리가 성형을
하죠? 사실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성형이 발전해야 하는 이유는 잘못된 것과 불편한 것을 고치려
함이지, 누군가에게 내가 만족을 주려고 한다면 참 불행하지 않을까요?
케이티 데이비드가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라는 책에서 쓴 글이 참 평안함을 느끼게 합니다.
“이곳에서 나는 선교사도, 구호 기관의 일원도 아닌 그냥 엄마다.”
“엄마.” 맞다. 그 아이는 내 아이였다. 엄마란 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왜냐하면, 엄마는 영원하니까.
엄마란 이름은 정말 대단하다. “엄마”란 말은 ‘당신을 믿어요.’라는 뜻이다. “엄마”란 말은 ‘당신은 나를 보호해 줄
거예요.’라는 뜻이다. 엄마는 다급할 때 외치는 이름이고 기쁠 때 함께 웃어 주는 존재다. 엄마는 슬플 때 기대어 울 수 있는
존재이고 창피할 때 뒤에 숨을 수 있는 존재다. 엄마는 상처를 호호 불어 주고 아픈 마음을 달래 준다. 엄마의 품은 포근하고
안전하다. 엄마는 가족이다.
의심과 불안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기 어려울 때가 있죠?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고, 불의한 일이 아닌데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실 때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아니 그분이 나의 아버지임이 확실할 때 우리에게 평안이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성경에서 가장 고난을 많이 당한 인물을 든다면 주저함 없이 욥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욥기를 지혜서라고 말합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귀로 들은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았던 욥의 고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장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욥기 1장 21절입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우간다에서 고아들의 엄마로 사역을 감당하는 케이티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온전히 하나님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살려야 할 아이를 잃었을 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미숙아로 태어난 해피를 위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수많은 감정이 뒤섞여서 쓰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해피가 온전한 몸으로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니 마음이 평안하다. 은혜로우신 주님 감사합니다.
어제는 슬프고 괴로웠다. 해피가 주님 곁으로 가서 슬픈 건 아니었다. 해피가 세상을 떠나서 괴로운 게 아니었다. 그것이 주님의
뜻임을 잘 안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해피는 생후 넉 달이 지났는데도 몸무게가 1.8킬로그램도 채 되질 않았다. 해피의 심장에는
9밀리미터 짜리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을 무료로 치료해 줘야 하는 국립병원 의사들은 해피의 심각한 상태를 보고도
엄마에게 돈이 없는 걸 알자 그냥 돌려보냈다. 어떻게 해피의 천사 같은 얼굴을 보고도 그냥 돌려보낼 수 있었을까? 그 병원에는
심장의 구멍을 치료할 수 있는 심장외과 의사가 있었다. 얼마든지 해피를 고통스럽게 떠나보내지 않을 수 있었다. 이 나라에도 해피를
도울 수 있는 의술이 있었다.
어제는 완전히 지쳤다. 몸보다는 마음이 지쳤다. 해피를 안 시간은 고작해야 72시간 남짓밖에 되지 않지만, 그 72시간 동안 나는
성심을 다해 해피를 돌보고 엄마를 위로했다. 숨 쉴 힘도 없는 아기가 온 힘을 다해 내 손가락을 쥐는 바람에 나는 그만 해피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왜 변변히 돕지도 못할 사람들을 자꾸만 사랑하게 되는 걸까?
간밤에 침대에 쓰러져 성경을 읽는데 주님이 자꾸만 나를 예수님의 기적 속으로 이끌고 가셨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깨달음이 찾아왔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고 수많은 불치병 환자를 고치고 수천 명을 먹이셨다고 말한다.
그런데 성경이 직접 말하고 있지 않지만 중요한 사실은, 나사로가 결국에는 죽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고쳐 주신 사람들도 살다가
또다시 병에 걸렸을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 배불리 먹여 주셨던 사람들도 며칠 뒤에는 또다시 굶주렸을 것이다. 그래서
가시적으로 드러난 예수님의 권능보다도 그분의 사랑이 더 중요하다. 예수님이 이 사람들을 위해 권능을 사용하신 것은 그들을 먼저
깊이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고통으로 들어가 그들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사랑을 쏟으셨다.
세상 구원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심지어 우리는 단 한 사람도 구원할 수 없다. 그것은 예수님의 몫이다. 우리는 단지 마음을 다해 사랑하면 된다. 이웃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사랑을 쏟아 주면 된다.
어쩌면 괜히 내가 나서서 해피의 고통만 며칠 더 늘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해피를 사랑했다. 지금 그 아이는 내 마음속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마음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해피와 보낸 며칠을 생각하며 기뻐하고 있다. 언젠가 해피를 다시 만나 너 때문에 내 마음이 변했고 진정한 사랑을
배웠다고 말해 줄 수 있어서 기쁘다. 며칠 사이에 의사와 간호사, 친구와 낯선 사람들로부터 돕겠다는 이메일과 전화통화가 수없이
날아왔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몸이다.
지난밤과 오늘 아침, 나를 도와주던 미국의 의사 선생님들에게서 이메일이 몇 통 왔다. 해피의 사연을 알고 나서 우간다의 아픈 사람들을 도우려는 열정이 더 강해졌다는 내용이었다.
예쁜 해피야, 네가 기적으로 가는 길을 닦고 있단다. 너는 겨우 넉 달을 살면서도 많은 이의 마음을 움직였고 귀한 교훈을 남겼단다. 귀여운 아가야, 우리가 모두 너를 사랑한다.
순종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나의 조바심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며 행하실 일을 기대할 수 있을 때,
나의 욕심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서 사명을 감당하고 있을 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찾아오는 “평안”
그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평안함 가운데 우리는 자유함을 얻습니다.
늘 동행하기 때문이고, 우리의 가장 평범한 일상이 거룩한 삶으로 변하게 됩니다.
평안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과 가르침이 없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서울 예고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입니다. 사흘 동안 정말 제 눈에 거슬리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물론 억지로 예배를 드리는
학생에게 쉬운 시간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사흘 동안 고의적으로 떠들고 무시하는 태도 속에서 설교를 하는 제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떻게 평안을 누릴 수 있을까요?
첫날 집회를 마치고 다음날 새벽을 맞이하며 일찍 눈이 떠졌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들을 위한 기도, 그리고 아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를 볼 때, 미운 마음보다는 안타까운 마음, 성령께서 일하시기를 바라는 기대가 생겼습니다.
제가 참 평안하게 설교를 했던 것 같습니다. 성령님께서 행하실 일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의(義)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평강(平康)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힘 -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희락(喜樂)은 의와 평강의 결과를 누리는 것
여러분은 인생에서 더 많은 기쁨을 누리기 원하시나요? 더 깊은 평안을 갈망하신 적이 있나요? 성경은 이 두 가지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기독교에서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 말씀은 앞의
개념이 다음 개념을 이끄는 것처럼 보입니다.
의 ⇨ 평강 ⇨ 희락의 점진적인 단계로 진행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 삶에서 더
깊은 평안과 더 많은 기쁨을 얻는 원천은 바로 의로움입니다.
이것이 실생활에서는 어떻게 작용할까요?
이 세 가지 개념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 과정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의를 선함, 정당성, 자선 등으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국제 표준 성서백과사전(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은 이에 대해 ‘올바른 모습 혹은 행위에 대한 의도’라고 정의 내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올바른 모습과 행동에 대해 배웁니다. 성경은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지침서이며, 인류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올바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로마서 14장의 구절 역시 믿음의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개인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본문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사도들의 서신서(Writings of the Apostles, 신약)에서 의에 가장 많이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디카이오수네(dikaiosynē, δικαιοσύνη)’입니다.
세이어스 헬라어 사전(Thayer’s Greek
Lexicon)은 이를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서는 것, 선행, 사고와 감정과 행동의 올바름’으로 정의 내립니다.
스트롱 성경
사전(Strong’s Concordance)은 의를 뜻하는 히브리어를 ‘쩨다카(tsedakah, צדקה)’로 명시하고 있으며,
이는 헬라어 단어와 같은 뜻을 가집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 문화에서 쩨다카는 자선을 베푸는 것과 동일시되었습니다.
예수님(예슈아)께서도 마태복음 6장 1절을 가르치실 때 이러한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는 자선을 베푸는
올바른 방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에 대한 명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흥미롭고 유용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의를 실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사야서 32:17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바르게 사는 삶은 내적인 평안과 외적인 평안을 모두 가져옵니다. 옳은 일을 하면 하나님과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상처를 준 누군가가 우리를 쫓아올까봐 걱정하거나 불안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릇 행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그분의 높은 권위에 의해 징계를 받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1절은 말씀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징계는 달갑지 않은 것이지만
그로부터 교훈을 얻은 사람은 나중에 그의 삶 속에서 의와 평강의 열매를 얻습니다.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면(마태복음 22:37-39, 마가복음 12:30-31) 우리는 평안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평안을 갈등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개념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서신서(Writings of the Apostles, 신약)에서 보편적으로 평안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에이레네(eirēnē, εἰρήνη)’입니다.
세이어스 헬라어 사전은 이를 ‘안보, 조화, 번영’으로 정의합니다.
히브리어로
평안을 뜻하는 ‘샬롬(shalom, שׁלָוֹם)’은 보다 깊고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스트롱 성경 사전은 이를 ‘안전,
전체, 완전함, 안식’으로 정의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이 복된 개념을 우리의 일상에서 누릴 수 있을까요?
시편 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여러분의
인생에 큰 평안이 있고 안전하게 서기를 원하시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율법(토라(Torah, 창세기-신명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예슈아)께서는 이 원리를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마태복음 7:24-25)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그분의 의로운 명령에 따르는 것은 우리 삶에 평안과 안정을 가져다 줍니다.
안전벨트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안전벨트 착용이 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안전벨트를 매지 않는다면 경찰은 여러분을
주시할 것이고 벌금을 부과할 것입니다.
안전벨트를 착용하는 것은 제한을 받거나 구속을 당하는 느낌을 줄 수 있지만 단순히 벌금을
내는 법적인 문제를 너머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심각한 사고가 발생할 경우, 안전벨트는 생명을 구하고 부상의 위험을 줄이는 역할을
합니다.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지침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그분의 명령이 우리가 원하는 바를 제한 혹은 구속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입지 않도록 지켜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분의 명령을 따라야 할까요, 아니면 우리 삶과 관계 속에서 얻게 될 자유와 평안을 기대하며 의롭게 살기로 선택해야
할까요?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대부분 기쁨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청혼, 결혼, 자녀가 태어나는 등 행복한 일에는
언제나 기쁨이 가득합니다. 저는 이 티칭레터를 읽는 모든 분들이 인생 가운데 순전하고 무한한 기쁨을 느끼게 되시길 바랍니다.
히브리어에는 기쁨과 관련된 단어가 많습니다.
타나크(Tanakh,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심카(simcha,
שמִׂחְהָ)’이며, 스트롱 성경 사전은 이를 ‘반가움, 기쁨, 즐거움’으로 정의합니다.
שִׂמְחָה
스트롱번호 8057
동일한 의미로 사도들의
서신서(Writings of the Apostles, 신약)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카라(chara, χαρά)’이며, 스트롱
성경 사전은 이를 ‘쾌활함, 반가움, 기쁨’으로 묘사합니다.
내적인 평안과 외적인 평안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근심으로부터 자유합니다.
인생에서 기쁨을 빼앗아가는 것 중 하나가
근심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한 염려로 심란해지고 일상에서 필요한 것으로 인해 걱정할 때 기뻐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마태복음
6장 본문,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목록의 나열과 함께 염려하지 말라는 강한 훈계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마태복음 6장 25절에 기록된
예수님(예슈아)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그리고 33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가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마태복음 6:24). 우리는 세상 속에서의 염려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의로운 섬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후자를 택하면 평안이 있고 우리 마음에 기쁨이 생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잠언 12장 20절의 가르침과 같이,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야 합니다.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의로운 마음으로 화평을 이루는 자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레위기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절기를 명확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한 해 동안 절기들이 하나 하나 쌓여가면서 회개와 헌신과
기쁨을 위한 특별한 시간들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절기는 하나님께서 인류와 친밀한 관계 가운데 거하고자 하시는 깊은 소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각각의 절기는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 속에 살아가도록 준비시킵니다. 절기는 봄에
페삭(Pesach, 유월절)으로 시작합니다. 페삭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에서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자유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주권에 의지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다음에 오는 절기는
샤브옷(Shavout, 오순절)입니다. 샤브옷에는 시내산에서 토라(Torah, 창세기-신명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를 받은 것을
기념합니다. 계명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계명은 의의 참된
근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7절에서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하나님께서는 먼저 구원하시고 그후에 그분의 뜻을 나타내십니다.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다음 절기인 로쉬 하샤나(Rosh
HaShanah, 나팔절)를 맞이합니다. 나팔 소리는 하나님께서 심판하러 오실 것을 상기시킵니다. 그로부터 열흘 후는
욤키푸르(Yom Kippur, 속죄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방이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평강 가운데 거할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절기가 마지막 큰 축제인 수콧(Sukkot, 초막절)으로 이어지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온전히 즐거워하라고 명하십니다(신명기 16:13-15).
이것이 하나님의 절기,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해 동안 특별히 정한 시간에 우리를 그분 곁으로 가까이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계명을 따라 걸으며 그분과 맺는 올바른 관계는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고 우리를 기쁨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사십시오. 의와 평강과 희락이 여러분의 삶에서 흘러나와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And as for you, brothers, never tire of doing what is right.
선(2569) 카로포이에오 [ kalŏpŏiĕō ] λοποιέω 스트롱번호2569
옳은 일을 하다
살후3:13.
낙심(1573)
ἐκκακέω
스트롱번호1573
마음을 잃다
낙심하다
눅18:1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 갈 6:9에서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권면한 후 글을 맺기 전에 본 구절과 같은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바울은 게으른 자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성도들은 요동하지 말고 각자 행동에서 하나님 계명에 의하여 최고 선을 행해야 함은 물론 어떤 어려운 국면에 처하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계속 전진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낙심치 말라'는 이와 같은 의미를 잘 대변해주고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엥카케세테'(*)로 '겁내다', '시들다', '약해지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이 동사는 데살로니가의 경건한 교인들이 게으른 자의 행동으로 인해 실족할 가능성을 경계하는 의미를 지닌다(Calvin).
한편 '선을 행하다가'는 헬라어로 '칼로포이운테스'(*)인데 신약성경 중 본문에서만 사용되었다(Bruce).
'칼로포이운테스'란 말은 단지 '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좋은 일, 명예로운 일을 행하라'라는 의미로서 모든삶의 국면에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일을 말하며, 악행과 대조되어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영광이 되는 훌륭하고 아름다운 일을 가리킨다(롬 7:21; 고후 13:7; 갈 6:9).
창세기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시편 14:3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로마서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는 이유는 기도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행은 모든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삶의 자세가 아닙니다.
선행을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은 선을 행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다가 낙심할 때는 사람의 의지가 은사보다 더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의 열매를 얻으려면 기도가 밑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왜 낙심할까요?
선을 행하는 주제가 하나님의 역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려는 은밀한 욕망이 그 안에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낙심하게 하는 일에 열중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사람을 흥분시켜 새롭게 도전하는 일에 집중하도록 하시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소망을 주고 꿈을 주려고 한다면 먼저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기도에 소망의 은사가 부어지고 채워질 때 선행의 결과는 생각을 초월하는 열매로 나타날 것입니다.
오늘도 선을 위하여 선택받은 믿음의 사람으로 내가 맡은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받는 은혜가 풍성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새 힘을 더하여 주옵소서!
환난과 핍박 중에도
낙심(落心)
낙망(落望)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서양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어느날 마귀가 자기가 쓰던 모든 도구를 다 경매 처분한다고 광고를 내서 많은 구매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하나에만 '이것은 팔지 않음'하고 써 붙였는데 그것은 바로 '낙심'이라는 도구였습니다.
그 이유인즉 다른 도구는 다 없어져도 좋지만 이것만은 결코 없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낙심'이란 도구만 가지면 마귀는 무슨 일이나 원하는대로 해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이 '낙심'만 집어 넣으면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낙심이라는 도구는 마귀가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는 도구이며 따라서 신앙 생활을 잘 하다가도 어떤 이유에서건 낙심한 사람은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경은 "선은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낙심은 불신앙의 결과요,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떨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할까요?
선행의 결과가 없을 때 낙심하지 말라
착하게 살고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데도 성공하지 못하고 축복된 결과가 없을 때 우리는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선행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복된 결과가 이루어집니다.
복 받을 씨를 심으면 10년 후에건 20년 후에건, 자식대에 가서라도 반드시 그 열매를 거두는 때가 온다는 것을 믿고 길이 참고 나아가야 합니다.
반드시 심는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 7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고,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구두리라" 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기진맥진하여 좌절하여 쓰러지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선행의 열매를 거두는 때가 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절대 인내가 필요합니다.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으니 참지 못하고 낙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을 받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5:58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35-36에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담대함과 인내가 없이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과 상급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10:38-39에 보면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신자에게 낙심은 절대 금물입니다.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 것이 아닌 이상 이루어질 것을 믿고 끈질기게 계속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이 옵니다. 그런데 기도한 즉시로 응답이 오지 않는다고 낙심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 낙심은 절대 금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8:1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하시면서 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서 끈질기게 매어 달리며 "원한을 풀어달라"고 했더니 귀찮고 번거로워서 그 원한을 들어주었다고 하시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낙심지 않고 조금만 더 기도하면 응답을 받을 터인데, 도중에 낙심하고 그만두기 때문에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참된 기도란 저금 통장에 저금해 두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입니다. 언제 찾느냐가 문제이지 언젠가는 반드시 찾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란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이 응답이 아닙니다. 내가 기대하고 기도한 것과는 다른 결과로 응답이 오며 또한 더디게도 응답이 옵니다. 더 나아가서는 불응답의 응답도 있습니다. 불응답으로 응답된 기도는 실은 더 좋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다르게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믿고 기도한 것은 어떤 모양으로든, 언제이든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것을 믿고 계속해야지 결코 낙심하고 중단해서는 안됩니다. 기도 생활에 낙심은 금물입니다.
악인이 흥하고 잘될 때 낙심하지 말라
자기는 그런대로 의롭게 살고 믿음으로 사느라고 하는데 잘되는 노릇이 없고 다른 사람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못된 짓을 하며 사는데도 잘 사는 것을 볼 때 낙심하기 쉽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계시다면 이럴 수가 있을까…'하고.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투기하거나 분을 품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잠시 뿐이고 장래가 없다고 했습니다.
잠언 24:19에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잠시 뿐입니다. 시편 37편에도 보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그리고 이어서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든간에 오직 성도들은 믿음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잠언 37:5-6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면 정오의 빛과 같이 빛나게 될 때가 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시편 37:7-10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낙심은 절대 금물입니다.
낙심은 마귀가 사용하는 가장 큰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하신 말씀을 믿고 끝까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후반은 난해 구절 중 하나입니다.
주님께서 영으로 옥에 갇힌 영들에게 가서 선포한 것(19절)과 그 대상이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 회개하지 않고 불순종했던 사람들(20절)이라는 사실 모두 매우 해석해 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가
이야기하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하여 대답할 것을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준비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는
것(15~16절)에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 방주는 ‘물’ 곧
‘홍수’가 없이는 아무런 쓰임이 없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허망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행동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수치와 비난에 대하여 ‘증언’할 기회가 없었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묵묵히 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셈, 함,
야벳을 500세에 낳고 600세에 홍수가 났으므로(창 7:6) 그 방주를 건축하는 기간이 얼마나 길었을지, 그가 잣나무를 자르고,
안팎으로 역청을 바르며 놀라운 크기로 짓는 동안 많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경고를 전했다고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들어간 후 그 문을 닫으신 하나님(창 7:16)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구원에 대해 부러워 했던 자들이 당한에게 최종적 선포와
수치(16절)를 전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이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영으로 내려가서 ‘노아’대신 그
불순종의 대가에 대한 심판과 구원의 의미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 창세기 7:23
이
말씀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모든 신앙인들에게 맡겨진 ‘선행’과 ‘고난‘에 대한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와 우리가 끝까지
증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노아도, 같이 구함을 받은 그의 가족 역시 죄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또 방주를
만들고 타라고 하는 명령에 순종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삶으로 하나님을 증거했고, 하나님께서 내리신
물의 세례, 곧 홍수로 말미암아 방주를 만든 그들의 삶은 구원을 받았으며 심판받은 영혼들을 향해 최종적 증언은 그리스도께서
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물세례와 성령의 세례를 받아 ‘구원의 확신’에 이르렀고, 이는
그리스도를 따라 선행을 하고 고난에 대해 ‘온유와 두려움’으로 증언하기를 피하지 않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임할
‘불심판’이 이르기 전까지 쉬지 않고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에서 흔들리지 않아야 함을 흩어진 교인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 돌이킬 수 없는 날이 오기
전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전하는 복되고 선한 제자의 삶을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 히브리서 11:7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놀라운 섭리 안에 그 비밀을 맛보고 고난과 낙심 가운데 다시 일어날 힘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믿음으로 전하고, 맡겨진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도록 성령으로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지금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데 쓰임 받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영국의 유명한 50년 목회의 성공자인 레이몬드 데 오비스 목사가 목회를 시작하던 처음 한 노인에게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라고 전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지방 전도자들 모두 거의 반세기동안 그에게 전도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효력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하루는 완고하기로 유명한 노인이 떨며 눈물을 흘리면서 교회에 나아와 제단
기슭에 꿇어 앉게 되었고 그는 믿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오비스 목사의 목회는 대성공이라고 다들 떠들썩하게 되었습니다.
그 바람에
오비스 목사 자신도 어깨를 으쓱해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오비스 목사의 성공적인 목회로 그가 회개한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일로 인한 것입니다.
노인은 하루밤 자기가 믿게 동기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 내가 나의 여생을 주님께
바치게 하고, 나를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게 한 것은 내 늙은 어머니의 기도입니다. 그분은 벌써 세상 떠나 무덤에 계신지 4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40년 전 어머니의 기도가 늦게 결실한 것입니다. 기도에 낙심하지 아니하고 인내하면
반드시 결실을 보게 됩니다.
오늘도 인내의 기도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낙심을 물리치는 무기
이
이야기는 사탄의 경매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사탄이 걱정, 두려움, 욕망, 슬픔 그리고 자만심과 같은 물건을 팔기 위해
소비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상품 진열대 한 쪽편에 "세일하지 않음" 이라는 낡아 빠진 꼬리표를 단 물건이 있었습니다.
사탄에게 왜
이물건은 세일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사탄은 "다른 물건들은 충분한 여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물건만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유용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물건 없이 나는 사람들의 마음 깊숙히 들어가 일 할수 없습니다.
바로 이 물건은
"낙심"이라는 것이죠"라고 대답했습니다.
"낙심"을 물리칠 수 있는 무기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먼저 신뢰 하십시요.
하나님을
신뢰하고 우리의 낙심을 정직하게 아뢸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 주십니다.
또한 기도 하십시요.
낙심이나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때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낙심 가운데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
다음은 당신을 실망 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환경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매일
우리의 감정을 새롭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연단은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심을 믿으십시오. (롬 5:1-10).
고통없는 성장은
슬픔의 눈물을 흘리게 할 것입니다.
▣ 낙심을 물리치는 무기
시련 없이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다.
시련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을 더욱 단련하시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자 과정이다.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영국 속담처럼 시련 없이 성공한 사람 없고 시련 없이 훌륭한 성과를 얻을 수 없다.
훌륭한 작품은 그만큼 더 많은 시련을 거친
결정체이다.
그러므로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은 “시련이란 진리로 통하는 으뜸가는 길이다”라고 하였으며, 세네카도 “거치른 땅
위에서 굳어진 발굽을 가진 짐승은 어떠한 길이든 걸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쇠붙이를 달구지 않고서는 도구를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시련 없이 인간을 훌륭한 인격자로 만들 수는 없다.
“폭풍은 참나무가 뿌리를 더욱 깊게 박도록 한다”는 G. 허버트의 말처럼,
실로 시련은 인간을 만드는 계기이며 보다 나은 상태로 변화시키기 위한 진통이다.
시련은 인간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보지 않은 자는 작은 시련에도 좌절하기 때문이다.
시련을 극복하려는 의지는 인생을 성공시키는
원동력이며 매사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추진력이 된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롬 5:3,4)는 성경
말씀처럼 시련 극복의 의지는 인내를 기르고 소망을 키운다.
생활 속에서 오는 시련을 잘 견뎌내고 희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한다면
앞으로 더욱 큰 시련이 닥친다해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 기도 : 나의 죄로 인해 상심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나를 징계하시면서도 긍휼히 여기시고 회복을 약속하심 감사드립니다.
또한 실패와 시련을 통해 나를 더욱 강건케 하시며 정결케 하심을 믿고 바라오니 늘 나와 동행하여 주소서.
▣ 낙담케 하는 자
보아
전쟁(1899-1902) 중에 한 사람이 아주 특이한 죄명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죄명은 '낙담시키는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군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적이 얼마나 강한가?
왜 방어하기 어려운가?
또 이 도시는 필경 점령될 거라며 여러
말을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그는 총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군인들은 이미 모두
무기력해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남을 낙심케 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대안 없이 비난만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격려는 약한 자에게 힘을 주고 머뭇거리는 자에게 희망을 줍니다.
오늘 당신은 사람들을 낙담케 하는 자가 될 수도 있고
희망을 주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살후3:13)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 10:24)
▣ 낙심, 포기하지 말라
태국에서 코끼리를 어떻게 잡는 가를 소개합니다.
정글 속에서 으르렁대며 뛰어 나오는 코끼리는 미리 만들어 놓은 우리 같은 큰 집 속으로 들어가게 되며 들어가자마자 우리를 막아
버리는 큰문이 덜커덕하고 내려져 닫힙니다.
이제 코끼리 사냥꾼들은 갇혀버린 코끼리 발에 다 쇠사슬 줄을 매게 됩니다.
이 쇠사슬 줄의 한 끝은 벵갈 보리수라는 튼튼하고 큰 나무에 메어집니다.
이렇게 한 뒤에 우리를 치우고는 코끼리가 자유롭게 움직이게 해 주면, 코끼리는 며칠 또는 몇 주일 동안 발에 묶인 쇠사슬을 끌으면서 그 나무를 뿌리 뽑으려고 힘을 씁니다.
그러나 결국 코끼리는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뿌리 뽑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되어 발에 묶인 쇠사슬이 팽팽하게만 되면 곧 포기해
버리고 힘을 안 씁니다. 이제부터는 쇠사슬의 한쪽 끝에 그저 작은 기둥 같은 아무거나 묶어 놓아도 좌우간 팽팽하게만 만들 수 있는
정도의 것이면 아무 곳에나 코끼리를 묶어 놓을 수 있게 되었고 써커스의 천막까지라도 끌고 가서 그 놈을 팔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코끼리의 모습은, "나는 이런 정도의 사람밖에 안돼!"라고 하며 과거의 실패와 연약함에 포로가 되어 항상 포기를
쉽게 하는 사람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어떤 초등학교에서 벼룩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우선 여러 마리의 벼룩을 바닥에 놓고 사각형의 유리덮개로 벼룩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덮었습니다.
그랬더니
벼룩들은 그곳을 빠져 나오려고 펄쩍 펄쩍 뛰면서 안간 힘을 썼습니다.
그리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 유리 덮개를
치워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유리 덮개를 치워도 벼룩들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벼룩들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몇 번 시도해 보았다가 안되면 포기해 버리는 소망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적어도 크리스천들은
그런 패기 없는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낙망하여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 낙심하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이 낙심이요, 가장 권고할 만한 것이 자신감이다.
옛날에 아주 현명한 어떤 사람이 말하길 시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확고한 신앙이 가장 중요한데 첫째도 자신감이요, 둘째도 자신감이요, 셋째도 자신감이라고 거듭 강조하였다.
우리는 정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어느 날 사탄이 자기 부하들을 전부 모아놓고 회의를 열었는데 그 날의 토의 주제는 ‘어떻게 하면
선한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었다.
한 악령이 벌떡 일어나 “저는 그에게 죄를 짓는 즐거움과 기쁨을
알려주고 죄를 지으면 많은 상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해 주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또 하나의 악령이 일어나서 말했다.
“나는
그에게 선행의 고통과 슬픔과 어려움을 말해주고 또한 아무런 소득과 재미도 없음을 잘 설명해 주겠습니다.”
마침내 또 다른 악령이
“그의 영혼을 낙심과 절망에 빠뜨리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 짤막한 응답을 듣고 나서 사탄은 기쁨에 넘쳐 소리쳤다.
옛날에 한
작가가 말하기를 “모든 절망은 악마로부터 온다”라고 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을 교훈 삼아 깊이 마음에 새겨두고
죄에서 멀리 떠나야 하는 것처럼 낙심에서도 완전히 떠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
▣ 그래도 낙심 말라
존
웨슬리와 함께 영국 감리교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사람 가운데 휫필드가 있다. 휫필드가 낙심하고 있을 때마다 그에게 영적 도움과
충고를 제공한 사람은 헌팅턴 여사였다.
휫필드가 절망적인 어조로 헌팅턴 여사에게 말했다.
“저는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감사드리세요”
“왜 그런 감사를 드려야 합니까?”
“주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면 바로 당신을 위해 주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휫필드는 용기와 힘을 얻었다고 한다.
존
웨슬리에게 “만일 당신이 오늘 저녁에 죽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어떻게 하다니요? 아침에는
여전히 설교하고 약속한 사람을 만나고 집에서 저녁을 가족과 함께 먹고 기도한 후 침상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천국에서 눈을 뜰 것입니다” 확신에 찬 대답이었다.
▣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카포치아는
당대의 유명한 조각가였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동료들로부터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한
삶을 보내던 어느 날 카포치아에게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하루는 조각을 위한 대리석을 구하기 위해 채석장에 갔습니다.
그런데 인부가 부족하여 카포치아 자신이 직접 채석장에 나가 작업을 지휘하고 인부들과 함께 돌을 나르며 일을 하던 도중, 갑자기
커다란 돌이 카프치아의 오른손 위로 떨어진 것입니다.
겨우 돌을 들어내고 그를 꺼냈지만 이미 그의 오른손은 완전히 문드러져
버렸습니다.
유명한 의사들도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큰 사고였습니다.
조각가로서의 그의 인생은 끝이 난 것입니다.
카포치아 뿐 아니라 그를 아끼던 모든 사람의 실망은 여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두문불출하며 자신의 현실을 원망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오른팔을 포기하고 왼팔로 조각하는 것을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 번 절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꾸준히 땀을 흘리며 운명과 싸웠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작품활동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른팔로 하던 조각보다 더욱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시민들은 그 작품을 마을 한 가운데 세우고 그 작품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작품의 이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였습니다. 오늘도 전천후 신앙으로 승리하시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낙망하지 않는 기도
성경: 눅18:1
"항상 기도(祈禱)하고 낙망(落望)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譬喩)로 하여"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스펄젼 목사는 기도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기도는
아래서 줄을 당겨 하늘 위에 있는 큰 종을 하나님의 귀 밑에서 울리는 것과 같다" 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되는대로 힘들이지
않고 줄을 당기기 때문에 하늘에 종이 울리지 아니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단 한 번만 줄을 당겨 보고 맙니다. 그러나 응답을
받고야 마는 기도를 하는 사람은 그 줄을 단단히 잡고 전력을 다해 계속하여 당긴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기도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중국의 '모소'라는 대나무
중국에 '모소'라는 대나무는 산이나 밭에 심어놓아도 5년 동안은 땅 밖으로 전혀 솟아오르지 않고 땅속에서 뿌리만 사방으로 퍼져나갈 뿐이며 그러다가 5년이 지난 다음 해부터는 하루에
한 자씩 무성하게 자라는데 불과 6주만에 15미터 이상 키가 자란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기도 하다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여
낙심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 기도 제목이 이루어질 때까지 시간이 걸려도 다른 것을 또한 얻고 있는 것 입니다. 오늘도 감사함으로
기도하며 기쁨으로 사시는 하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
세계적인 부호인 록펠러도
한때 친구의 권유로 광산업을 시작했다가 사기를 당해 원금까지 모두 날려버리는 위기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빚독촉에 시달리던 그는
너무 괴로운 나머지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기업을 시작할 때부터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해온 록펠러는 황량한 폐광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없음을 믿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왔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위로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리라. 더 깊이 파라.”
록펠러는 이 말씀을 믿고 폐광을 더 깊이 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제 정신이 아니라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황금 대신 검은 물이 분수처럼 공중으로
솟구쳤습니다. 그 액체는 석유였습니다. 이 유전으로 그는 일약 거부가 되었습니다.
▣ 28년만의 기도응답
28년
전 신학교 졸업반 때 당시 서울의 한 대형 교회에 교육전도사 이력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보았다. 돌아가서 기도하고 기다리라 하기에
신학교 기도탑에서 금식하며 전화가 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오늘까지 전화는 오지 않고 있다. 28년 된 금년 어느 날,어느
목사로부터 한 주간 부흥회를 인도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 교회에 가서 피차 큰 화해와 감사의 은혜를 받았다. 성도들도 많이
울고 나도 시간시간 눈물로 말씀을 전했다. 다른 성회보다 내가 감격한 것은 28년 전 교육전도사 부임을 거절받고 얼마나 실망이
컸었는지…. 나는 건강도 부족하고,경력도 부족하고,학력도 부족하고,외모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월이란 시간을
섭리의 시간인 카이로스로 바꾸어 놓았다. 하나님의 때,정한 때에 나를 부흥사로 만들어 그 교회에 28년 만에 보내 28년 전
기도에 응답해주신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낙심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 생각을 초월하신다.
▣ 낙심하지 말라
성경: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
석수장이가 대리석을 깰 때에는 한 번 내리치고 두 번 내리치고, 열 번, 스무 번, 쉰 번, 목표를 정하고 내리칩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칩니다. 아흔 번, 백 번, 백 한 번 칠 때에 목적한대로 대리석이 쪼개집니다. 백 번을 칠 때까지 깨지지 않았지만 그 치는 동안 힘이 저축되어 있다가 마지막 한번을 내리칠 때에 깨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표를 향해서 낙심치 아니하고 전진하면 어느 땐가는 그 목표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와 같은 끈기 속에서 선행을 함으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낙심하지 말라
성경: 갈라디아서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이미
세상을 떠난 스탠리 존스라는 선교사는 젊은 나이에 인도에서 선교 사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복음을 전해도
완악한 인도 사람들은 회개하지를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스탠리 존스는 너무 한심하기도 하고 사기도 떨어져서 사과나무
밑에 쓰러져 누워 있었습니다. 그 때 나무 사이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스탠리 존스, 피곤하지? 지쳤지?"
"예, 하나님, 지쳤습니다."
"왜 지쳤느냐?"
"제가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저들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습니다. 저들에게는 열매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과나무를 보아라. 지금은 열매가 없는 것 같으나 뿌리가 땅에 묻혀 있고 잎이 태양을 향해 펼쳐 있고 채널을 나에게 향해 맞춰져 있을 땐 언젠가 좋은 열매가 맺힐 것이다. 낙심하지 말아라. 아름다운 열매가 맺힐 것이다."
여러분
혹 열매가 없더라도 낙심하지 맙시다. 하나님께로 향한 열려진 마음을 갖고 하나님께서 내 마음 가운데서 역사 하실 때 언젠가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채널을 여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환난 날에 낙심치 말라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잠 24:10)
1930년대 미국에 경제공황이 밀어닥쳐 은행, 공장, 심지어는 학교 등이 문을 닫고 경영주들이 자살하는 등 일대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J.J. 라스코라고 하는 실업가는 증권에 투자했던 돈을 빼내 많은 실업자들을 동원하여 맨해튼에 거대한 빌딩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라스코는 미쳤어. 저 사람은 망할 거야”라고 했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1929년에 시작해 1931년에 완공한 그 건물이 바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입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한창 미국이 경제 공황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을 때에 지어진 건물입니다. 사람은 사는 데 어려움 없고 모든 일이 잘되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꼭 환난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환난 가운데서 나 홀로 던져진 채로 쓰러져 몸부림치고 허우적대지만 그 어디에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절망의 짙은 안개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진가는 환난 날에 나타납니다. 이럴 때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감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크고 강한 권능의 손으로 보호해 주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 고기가 잡히지 않을 때
본문: 눅 5; 8∼11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게네사렛 호숫가로 몰려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를 가르치신 후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을 때 그 말에 따르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는 밤이 늦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애썼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실패한 그 밤이 결코 이득이 없는 밤이 아니었습니다. 실패한 가운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성공이 실패보다 더 나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공하면 자만에 빠지고,실패한 사람들을 멸시하게 되고 또한 생명과 건강과 지혜와 기회와 가정을 주셔서 성공하도록 도와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가 변화 받고 얼마 되지 않아 유명한 부흥사가 되어서 열아홉 살 때
어느 교회에 부흥강사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초청한 교회에서는 사람이 많이 올 것으로 예상하고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를 빌려서
집회 준비를 했는데 참석한 사람이 7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큰 교회에 7명밖에 없었으니 얼마나 썰렁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펄전 목사는 온 정열을 다해 일생 동안 행한 설교 가운데 가장 훌륭한 설교라고 기록될 정도로 훌륭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음 집회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왔다고 합니다.
저도 사회생활과 목회하면서 실패한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때가 바로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실패한 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실패 가운데서 놀라운 주님의 섭리가
함께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은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 기도: 주님, 세상 일이 잘되지 않을 때 실망하지 않고 주님만 믿고 의지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장애는 친구다.
“손님, 토요일날 이렇게 혼자 앉아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면
영업에 지장이 많습니다. 나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개인적인 아픔과 함께 목회를 그만두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실의에 빠진 서른여덟 살 남자에게 카페 주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몰려오는 창피함을 뒤로한채 카페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오다가 이 남자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습니다.
‘그래, 내가 카페를 하는 거야.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카페 마담이 되는 거야!’
다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서른여덟의 나이에 카페를 해보겠다고 결심한 이 남자는, 현재 전국에 20개 지점이 있고 한국 토종 브랜드로서 외국 진출을 준비하고 있는 ‘민들레영토’의 지승룡 사장입니다.
* 기도: 너무나 연약한 저의 모습을 보며 낙심하고 좌절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온전케 하실 것을 믿고 다시 일어서게 하소서. 제 삶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나아가게 하소서.
▣ G선상의 아리아
큐티를
하다 문득 '파가니니'라고 하는 한 음악가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이 사람은 이태리가 낳은 천재적인
바이올리니스트였습니다. 어느 날, 음악 애호가들이 모인 연주회장에서 연주회를 가졌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연주 도중에 줄이 하나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이 파가니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세 줄을 가지고 계속 연주를 해나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니까 또
한 줄이 끊어집니다. 그리고 조금 가니까 또 한 줄이 끊어집니다. 이젠 줄이 하나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청중들이 대단히
미안해하고 당혹해 하면서 오늘 이 연주야 말로 파가니니에게 있어 최고의 불행한 연주회가 될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파가니니는 청중들을 바라보고 잠시 음악을 멈추더니 그 남은 한 줄을 가지고 완벽한 음악을 만들어냈습니다. 바로 그 사건이
지금까지도 그 사람을 그토록 유명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바이올린에는 4줄이 있다고 합니다. 가장 낮은 줄은 G선
입니다. 때론 G선만 가지고도 아주 훌륭한 음악을 연주해 낼 수가 있습니다. 내 인생의 어느 때에, 내가 그토록 의지했던 줄이
끊어져 나갈 때가 있을 것입니다. 물질의 줄, 명예의 줄, 가정의 줄, 사랑의 줄......
내가 가지고 있는, 내가 의지 할
수 있었던 모든 줄들이 끊어지고 가장 낮은 G선만 남았을지라도, 우리는 G선상의 아리아와 같은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요. 우리 삶 속에서 G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우리에게 예수 줄이 있는 한 우리의 삶도 그러하리라
믿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 낙심하지 말라
성경: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동쪽하늘에 해가 떠오르기 직전 세상은 잠시 깜깜해집니다. 동트기 직전이 가장 춥습니다. 그래서 새벽녘에 닭들이 그렇게 비명을 지르는 것 아닌가? 또한 가장 짜릿한 순간은 역전되는 순간입니다. 가장 통쾌한 모습은 반전되는 모습입니다. 마지막에 기적적으로 뒤집어지는 순간에는 모두들 말을 잃습니다. 또한 가장 다리가 아플 때는 언제인가 하면 대문 앞에까지 왔을 때입니다. 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되는데, 대문 앞에 그냥 주저 앉으시렵니까? 포기해서는 않됩니다. 가장 극한 상황은 끝이 아니라 반전의 기회입니다. 삶이란 그런 것입니다. 아! 이제 마지막이구나! 하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새로운 일의 시작의 순간입니다. 오늘도 어떠한 상황이라도 절망하지 말고 믿음으로 인내하여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상실은 새로운 기회
1642년 영국
동부지역 울스소프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 아이가 겨우 말을 배우려고 할 때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아이는
자라면서 사과나무 아래 혼자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그후 아이는 천신만고 끝에 열망하던 대학에 들어가 학업을 마쳤다. 그의 꿈은
박사. 그가 박사학위 과정에 들어가려고 할 때 흑사병이 창궐,지역의 모든 대학이 문을 닫았다.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이게
뭐람.’ 그는 낙담한 채 고향에 내려가 사과나무 아래 앉았다. 꿈을 잃어버린 절망의 자리였다. 그때 사과 한 개가 ‘툭’
떨어졌다. 어쩌면 자기 처지와도 같았다. ‘왜 사과는 옆으로 안 떨어지고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걸까?’ 이 의문이 인류 과학사의
흐름을 바꿨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탄생시킨 의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아이작 뉴턴. 세기의 법칙은 낙담의 현장에서 탄생했다.
꿈을 잃었다고 절망할 일이 아니다. 상실은 새로운 기회다.
▣ 우리의 약점은 곧 하나님의 부르심
1967년 이스라엘 총리로서 연립 내각을 이끌었던 여자 정치가가 있었다. 그녀는 중동 평화를 위해서 무진 애를 썼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고 국민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그녀의 이름은 골다 메이어.
사람들은 그녀가 죽은 후에야 12년 동안이나 백혈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때때로 골다 메이어 총리는 자기의 약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는 제 얼굴이 못생긴 것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일반적인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았을 때 너무나 못났기에 열심히 기도했고 정말 최선을 다해 공부했습니다.
나의 이러한 연약함은 나에게 뿐 아니라 이 나라에도 무한한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리의 약점과 실망은 곧 하나님의 부르심 입니다."
▣ 헛되지 않은 10년
10년
동안 두 가지 고통에 시달린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해도해도 실패만 거듭하는 ‘고무 바퀴에 대한 실험’이었으며 또 하나는 주위
사람들의 냉대와 비난에서 오는 자괴감이었다. 1830년께 당시 나무와 쇠로 된 모든 바퀴에는 안전장치가 없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다쳤다. 이런 모습을 보며 ‘어떻게 하면 바퀴에 안전장치를 마련할 수 있을까?’하고 골똘하게 생각하던 그였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행히 그의 신조는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선한 결과가 온다”였다. 그는 이 신조를 갖고 나약해져가는
자신,실패만 거듭하는 연구와 투쟁했다. 그리고 마침내 1839년 ‘가황처리법’을 개발, 인류 최초로 타이어를 만들었다. 그의
이름은 찰스 굿이어.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명성이다. 인고의 세월을 견딘 그에게 창조주는 타이어를 선물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 우리를 안으시는 하나님
매우
단련된 신앙인이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헨리 무어하우스에게 닥쳤다. 그가 낙망해 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어린 딸을 통하여
확신을 주셨다. 어느 날 풀이 죽은 모습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들어오는 그를 응접실에서 놀고 있는 어린 딸이 반가이 맞아
주었다. 아빠가 들고 들어오는 꾸러미를 보자 휠체어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빠 그거 뭐예요?"
"엄마에게 줄 거란다. 엄마 어디 계시니?"
"2층에 계셔요. 아빠 그것 이리 주세요. 내가 들고 갈께요."
"아니 너는 제대로 걸을 수 없으면서... 어떻게 2층에 계시는 엄마에게 이것을 가져다준다고 그러니?"
그런데 그 아이가 말했다.
"나는 꾸러미를 들고, 아빠는 나를 안으면 되잖아요."
참으로 옳은 말이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리에 섬광처럼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하나님이 나를 이와 같이 안고 계시는데 왜 내가 그토록 좌절했던가."
헨리 무어하우스는 이 확신을 가지고 승리자가 되었다.
▣ 역전의 하나님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될 당시 기독교 인구는 43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1억 명이 넘는다. 백 투
예루살렘운동(이슬람권을 넘어 예루살렘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운동)을 위해 순교적 각오를 가지고 자원하는 사람만도 1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어떤 선교학자는 앞으로 최고의 기독교 국가가 중국이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까지 한다. 그야말로 역전의
은총이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는 역전의 이야기다. 노예로 끌려갔던 요셉, 목동이었던 다윗, 기생의 아들이었던 사사
입다, 포로로 끌려갔던 다니엘, 거지 나사로,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모두 역전의 주인공이다. 지금 주님 때문에 핍박받고, 손해를
보았더라도 낙망하고 좌절하지 말자. 지금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있더라도 포기하지 말자. 아직 당신의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더
좋은 날은 아직 당신에게 오지 않았다. 역전의 은혜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이시다.
▣ 봄에 눈이 와도 땅속의 새순은 솟아나고야 맙니다
윈스턴 처칠은 반항아적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어릴
때 공부에서 흥미를 찾지 못했고 어떤 종류의 필기 시험도 통과하지 못한 채 학교를 떠났으며, 세 번의 시도 끝에 가까스로 샌드
허스트에 있는 왕립군사학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는 보어 전쟁에서 보어인들의 포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국경에서 약 48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적의 영토에서 대탈출을 감행하였고 전쟁 영웅으로 귀국했습니다. 그는 어릴 때 우등생은
아니었지만 천천히 언어능력을 개발하여 폭넓은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신의 전쟁 경험으로 소설을
써 부와 명성을 얻었고, 대중 강연을 통해 국내외에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그림 그리기를 통해 공무의 중압감을 덜어내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으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1899년 군대에서 퇴역했을 때도 포기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정치에
도전하여 보수당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60여년 동안 공직에 몸담으면서 내무, 재무, 통상, 국방 장관 등 국가의
중요한 장관직을 수행하였습니다. 세계대전 초창기에 해군장관이었던 그는 갈리폴리 작전의 실패로 실각해 20년 간 공직을 떠났으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 낙심을 극복하는 지혜
낙심을 극복할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중의 하나가 꿈이다. 성령 충만한 사람의 특징은 그가 꾸는 꿈에 있다. 성경은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말씀한다. 꿈은 우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꿈은 우리의 소망,삶의 이유,존재의 근거가 된다. 인간은 꿈을 꾸고,꿈을 성취하며
살도록 만들어졌다. 그런데 꿈을 성취하는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적이 있다. 그것은 낙심이다. 낙심은 사단이 사용하는 무서운
도구다. 낙심은 용기와 희망과 자신감을 잃어버린 상태다. 기가 꺾인 상태다. 낙심을 낙망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낙망이란
소망이 떨어졌음을 뜻한다. 낙심 대신에 낙담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낙담이란 담력을 잃어버린 상태다. 자신감을 잃어버린 상태다.
낙심이 꿈을 성취하는 사람의 적이 되는 것은 포기하는 마음 때문이다. 낙심을 잘못 다루면 아주 위험하다. 우리는 낙심이라는 적을
이겨야 한다. 낙심을 정복해야 한다. 낙심을 물리쳐야 한다. 낙심을 이기는 길은 낙심의 원인을 분별해서 정복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2장 3절에 보면 낙심의 원인을 피곤과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보고 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 12:3) 우리는 피곤하면 낙심하게 된다. 그래서 피곤이 찾아오면 안식을 취해야
한다. 피곤과 함께 인간관계의 갈등은 우리를 낙심케 한다. 인간관계의 갈등을 해결하는 길은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참는 것이다. 예수님을 생각하면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위로를 받게 된다. 낙심을
이기는 길은 기도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말씀한다(눅 18:1). 낙심케 하는 사단의 공격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도구는 기도다. 기도하게 되면 힘을 얻어 낙심을 이기게 된다. 낙심은 꿈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낙심 때문에 낙심하지 않도록 하라. 낙심이 찾아오면 낙심을 정복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라. 기도하는 중에 위로부터 부어
주시는 능력을 힘입도록 하라. 무엇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도록 하라. 가장 강력한 에너지는 사랑의 에너지다.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된다. 사랑하면 낙심을 넉넉히 정복할 수 있다.
▣ 그래도 사는 길은 있습니다
한
실력 있는 회사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다 54세에 IMF를 맞아 해고되었습니다. 그때 가족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야 속이 후련하다. 내가 지금까지 오랫동안 회사에 매여 가족들과 좋은 시간도 못 가졌고 취미생활도 못했는데 이젠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도 많아지고 취미생활도 할 수 있어 잘 됐다.”
가족들은 정말 그런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처음엔 여행도
가고, 가족과 함께 외식도 했습니다. 그러나 3개월쯤 후부터 완전히 말을 잃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3개월 내내 자살을
생각했습니다. 그때 쉽게 죽지 못한 이유는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죽을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이 유일한 이유였습니다. 그의
54회 생일에 가족들은 아빠에게 힘을 주자고 했습니다. 그날 네 식구가 조용한 찻집에 가서 아내가 먼저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
54회 생일에 우리가 특별 선물을 준비했어요.” 그리고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습니다. 그 종이에는 그 동안 남편에게
고마웠던 일, 남편이 자랑스러웠던 일 54개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다 읽고 아내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었어요.”
곧 이어 대학생 딸이 아빠에게 고마웠던 54가지 일을 다 읽고 말했습니다.“저는 저를 이만큼
키워주신 아빠가 너무 자랑스러워요.” 아빠의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계속해서 고등학생 아들이 아빠에게 고마웠던 54가지 일을 다
읽고 말했습니다. “아빠는 우리 가정의 보석과 같은 분이예요.” 결국 아빠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날 그는
일어섰습니다. 자존심이 무너지며 다 무너졌는데 자기에게는 아직 소중한 가족이 있음을 깨닫고 더 이상 무너지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후 그는 다시 든든한 남편과 아빠의 모습을 되찾고 작은 행복의 조건에 감사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누구에게나 좌절의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사는 길은 있습니다. 나는 ‘내 생각을 초월한 어떤 분’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그분은 나를 사려고 ‘십자가’란
엄청난 값을 치르신 분입니다. 그분은 필요하면 쓰고 필요 없으면 즉각 버리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끝까지 나를 돌봐주시고,
책임지시고, 섬겨주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너는 내게 최고의 선물이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에게 나는 값진 진주입니다.
믿었던
것을 잃고 믿었던 사람이 내 곁을 떠나 “이제 어떻게 사나? 누굴 믿고 사나?”하는 생각이 들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살면 됩니다. ‘일자리’를 잃으면 ‘제자리’를 찾으면 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분만 계시면 됩니다.
“내가 없으면 안돼!”라고 하면 길이 없지만 “그분이 없으면 안돼!”라고 하면 길이 있습니다. 무엇이 없고 누가 없어서 못살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 무릎꿇은 나무
캐나다 로키산에 무릎 꿇은
나무가 있다. 오랜 세월 폭풍우를 견뎌내며 자라온 나무다. 이 나무는 마치 무릎 꿇은 것처럼 순종하는 자세로 서 있다. 그러나 이
나무가 명품 바이올린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시련을 이겨낸 나무로 만든 바이올린의 소리가 워낙
고와서 고가로 팔린다. 이것이 바로 로키산 나무가 주는 교훈이다.
어려움이 닥칠 때 좌절하고 낙심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인생이
끝난다. 그러나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은 명품 인생으로 다시 태어난다. 고난의 폭풍우를 견뎌온 사람들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낸다. 역경 앞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겸손이다.
낙타는 짐을 실을 때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 낙타는 짐을 내릴 때도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리할 때 부활의 기쁨이 우리의 삶 속에서 활짝 꽃핀다.
▣ 낙심에 관한 성경 말씀
0 잡으려는 소망은 헛것이라 그것을 보기만 하여도 낙담하지 않겠느냐(욥41:9)
0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 18)
0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5)
0 네가 만일 환난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잠24:10)
0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 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6:9-10)
0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3:21)
0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3:13)
0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12:3)
▣ 낙심에 관한 금언
0 인생은 패배했을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기했을 때 끝나는 것이다.(닉슨)
0 당신은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훌륭하다.(노만 빈센트 필)
0 늦게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다 중단하는 것을 두려워하라(중국속담)
0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낙심해서는 안된다. 해야 할 일을 한 이상은 강하여 남자답게 하라 별과 같이 잠자지 말고 쉬는 일 없이 하라 그러면 이루리라.(케에즈디)
0 세상에서 낙심하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으나 믿음의 사전에는 그런 말이 없다. 다른 사람에게 낙심되는 것들이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알리는 신호이다.(죤 뉴턴)
낙심은 금물
영국에 불신자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한 부인이 남편의 회개를
위해서 일년 열두달 날마다 기도하기로 결심하였다. 날마다 12시가 되면, 그 여자는 혼자 자기 방으로 가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
여자가 기도한지 12개월이 지나갔는데, 그가 굴복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여자는 6개월을 더 기도하려고
결심하고 날마다 혼자 방에 들어가서 남편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였다. 6개월이 또 지나갔는데 아직도 아무런 징조가 보이지를 않고
응답도 없었다. 회의가 그 여자의 마음에 일어났다. 그를 포기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속삭이실 때까지 그를
위해 기도하겠다`라고 그 여자는 말하였다.
바로 그날, 남편이 저녁 식사를 하려고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저녁 식사를 하려고 내려오지를 않았다. 마침내 그 여자는 남편 방으로 갔더니, 그가 무릎을 꿇고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셨다.
그는 기독교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자유로이 진행되었고, 그 사람 안에서 영광을 받으셨으며, 하나님은 그를 거대하게 사용하셨다. 그것이 바로
이 기독자 아내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 증거이다. 그 여자는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응답이 올 때까지 두드렸다.
선행에 낙심치 말라
미국 <뉴저지주> 서멀빌교회에 죤 브레덴벅 목사가
다년간 설교를 하였으나 그 교역은 실패라고 스스로 느낀 채 용기를 상실한 중에 별세 하였다. 그 후 일주일이 채 못가서 2백명의
새로운 신자가 나왔는데 거의가 다 자백하기를 브레덴벅 목사의 교역에서 감동을 받았다고 하였다.
서양의 어떤 목사가 자기 평생에 자기는 한 사람의 영혼도 구원하지 못했다고 자백한 후 세상을 떠났다. 장례날은 비가 내리고 음침하였다. 묘지에는 상여를 맨 사람, 무덤을 파는
사람, 주례하는 목사외 다른 한 사람의 조객 뿐이었다. 목사가 하관식을 마치고 돌아보니 조객 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서 목사는 가까이 가서 그 사람의 손을 잡고 말
하기를 `당신은 그의 친척이요` `아닙니다` `그러면 그 교회의 교인이요` `아닙니다. 나는 친척도 교인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이 내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고 하였다.
고통의 날에 낙심치 말라
본문 : 잠언 12장 1 절- 14 절
오늘 저녁 읽을 말씀 가운데서 1절 말씀을 보십시다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 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리라. 뜻이 통하는 다른 곳의 말씀을 같이 읽읍시다. 3장 11절-12절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 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5장 11절-14절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그 종말이 비참하게 된 사람이 후회 막심해서 울부짖을 것을 경고한 말씀입니다. 두렵건데 마지막에 이르 러 네 몸에 육체가 쇠패할 때에 네가 한탄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하여 훈계를 싫어하며 내 마 음이 꾸지람을 가벼이 여기고 내 선생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나를 가르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고 많은 무리들이 모인 중에서 모든 악에 거의 빠지게 되었었노라 하게 될 까 하노라. 9장 7절-8절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히리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있는 자를 책 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10장 17절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 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 13장 24절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 계하느니라. 15장 5절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 라. 15장 12절 거만한 자는 견책 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지혜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하느 니라. 19장 18절 네가 내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고 죽일 마음은 두지 말라. 소망있는 아들을 징계해야 바로 되지, 소망없는 자식은 징계하면 오히려 빗나갑니다. 23장 13절-14절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 찌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여기 우리가 같이 읽는 잠언서 가운데 징계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징계라는 말은 히브 리어로 무사르(musar)인데 그 뜻은 과실을 범한 자에 대한 처리이지 형법은 아닙니다. 그저 쉽게 말하면 사랑하는 아이가 잘못된 길로 나갈 때 혹은 나갈까 봐서 부모가 훈계하고 때로는 책망하고 어떤 때는 채찍으로 매를 드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어떤 때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자리에서 고통을 당하는 분이나 그런 고통 속에서 지나온 분이 에, 이번에 하나님께 되 게 맞았습니다 하는 말씀을 들을 때 어딘지 모르게 어진 아들이 아버지한테 불려 들어가서 굉 장히 심한 꾸지람을 받고 얼굴이 벌개서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매맞은 자리를 툭툭 털면서 그 형제들에게 에, 아버지한테 혼났어! 내 다신 안 그럴테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곤 합니다. 믿음 있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징계란 성경이 말씀하는 것처럼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아픈 일입니다. 눈물나는 일입니다. 손해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받느냐 하는데 따라서 징계가 축복이 될 수 있고 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옛날 시인들 가운데도 어려움을 당할 때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도무지 인간의 이성으로는 고난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민합니다. 가령 시편 73편 같은데 보면 성도의 고민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악한 사람은 오히려 건강하고, 살이 찌고, 고난도 없고, 재 앙도 없고, 그들이 소원했던 것보다 오히려 더 얻고, 재물은 더 해 가고, 그래서 교만하고 세 상에 높은 사람 없이 살다가 죽을 때도 고통이 없는데 오히려 신앙을 따라 바르게 살아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당하니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 의문을 도 저히 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73편 16절에 보면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그러면서 21절 이하에 내 마 음이 산란하여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 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 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 이시라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 파하리이다. 이 시인은 고통 속에서 낙심할 뻔 하였으나 하나님의 성소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 었습니다. 오히려 어려움이 극심한 속에서 주를 가까이 하면서 주님의 능력의 오른팔이 붙드심 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어린이들도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아버지를 신뢰하면 아버지가 매를 때리면 때릴수록 도망가 지 아니하고 아버지께로 가까이 가면서 아버지 품에 매달리면서 아버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께요 합니다. 그러면 아버지도 품에 안기는 아들을 더 이상 때릴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혹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나지 말고,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주님 품에 꼭 안겨야 합니다. 그러기에 시편 32편 9절에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 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의에 의해서 하 나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 그래서 신령한 의미로 볼 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 됩니다. 시 편 119편 67절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71 절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하였 습니다. 욥기 5장 17-20절을 보세요.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 즉 너희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매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습니다. 에가드(Egard)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탄의 애무와 사랑보다 오히려 낫 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게 하시려고 징계하시고, 사탄은 우리를 죽게 하려고 애무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징계 그 자체가 우리에게 괴로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동 기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입니다. 여기에 대한 좋은 해석이 히브리서 12장 5절-13절에 있습니다. 같이 찾아서 교독하실까요? 5 절 :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 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절 :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절 : 너 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 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절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절 :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 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절 :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 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절 :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 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절 :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 고, 13절 :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트라프(Trapp)이란 분은 하나님의 징벌을 피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는지 의심할 만 하다 고 하였습니다. 징계의 동기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입니다. 우리에게 소원과 기 대가 있어서 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8장 5절 이하에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 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 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좀더 넓은 의미에서 생각하면 인간에게는 고통이 있습니다. 물론 누구나 고통을 원하 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어떤 사람 은 오해를 하는데요 예수를 믿으면 이 모든 고통이나 환난을 당하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 나 성경에 그렇게 말씀한 곳은 한 곳도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 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받으나 즉 우리 믿는 사람도 세상에서 환난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물론 불의한 사람들과 같이 자기가 잘못해서 오는 여러 가지 곤란에서 벗어 나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사람은 불신자들보다 이 고난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을 바로 사는 것인가 하는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이 내신 도덕의 법칙을 바로 배워서 그대로 살 때 많은 불필요한 고난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대로 우리 믿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사 는 동안에는 모든 세상 사람들과 꼭같이 유전적으로, 사회적으로 질병이나 사고나 실패나 슬픔 의 고난을 같이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아는 것은 우리 믿는 사람들은 참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꼭 같은 고난을 받지마는 그 미치는 영향이나 그 결 과가 아주 다릅니다. 꼭 같은 용광로이지마는 나무가 들어가면 다 타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금광석이 들어가면 금이 아닌 부분이나 성분은 타 버리고 순금이 나오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당 한 경험을 생각해 보세요.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 불쌍한 계집종의 병을 고쳐준 죄로 억울하게 관청에 잡혀가서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힘을 당하고, 착고에 채워 부자유한 가운데 그 날 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보통으로 생각하면 기가 막힌 노릇이 아닙니까? 분한 일 아닙니까?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고,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할 정도가 아닙니까? 그 러나 바울과 실라는 그런 환경 가운데서 그런 마음을 조금도 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런 가운데서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그 결과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열리 고 착고가 풀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바울과 실라가 높은 테너 음 으로 찬송을 불렀더니 하나님께서는 지진을 통해서 낮은 베이스 음으로 화답하였다고 하였습니 다. 하여간 이런 가운데서 자결하려던 간수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온 집안이 구원을 얻었고 따라서 빌립보 교회의 기초가 튼튼히 서게 된 것입니다. 같은 고통이지마는 바울과 실라에게 있어서는 놀라운 결과를 맺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바울은 오랫동안 로마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지 않았습니까? 예나 지금 이나 옥중 생활이란 평안한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나이 많을 때에 옥중 생활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쓴 편지를 보면 그의 간증대로 내가 오 히려 이렇게 매임으로 말미암아 온 시위대와 가이사의 식구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생 각할 때에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 없다 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신앙의 자세입니까? 이런 가운데 쓴 편지인데도 오히려 자유롭게 평안히 사는 사람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한 것입니다. 가령 빌립보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 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 리라 하였습니다. 이런 옥고 가운데서도 참된 신앙으로 사는 사도 바울에게는 이와같은 기쁨이 있었고, 이와 같은 불후의 글을 써서 오늘까지도 성경으로 우리가 읽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과 실라의 경험만이 아닙니다.참된 신앙을 가진 모든 성도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같은 고통 고난을 받지마는 신앙이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자 포자기하지 않습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타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고통과 고난을 이용해 서 더 높이 비약합니다 더 큰 일을 합니다. 누구든지 주를 믿는 믿음 안에 사는 사람은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기는 능력을 주십니다. 빌 립보서 4장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였습니다. 로마서 8장 35절에도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 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 히 이기느니라. 간신히가 아니라 거뜬히, 넉넉히 이깁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영혼을 위로 향하게 합니다. 그래서 같은 슬픔, 병, 고난, 실패를 통 해서 새로운 비젼(Vision)을 얻고, 새로운 용기를 얻고, 새로운 능력을 얻어서 실패를 승리로 바꾸고 탄식을 찬성으로 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난에 대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시편 50편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하였습니다. 시편 107편 4-7절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여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 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 며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야고보서 1장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 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일년 동안 살아갈 때, 아니 여러분의 평생을 지내실 때 어려움을 당 하시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혹시 당한대도 낙심하거나 상심되고, 좌절되고, 실망하지 말고 오히려 담대하여 믿음으로 이 어려움을 잘 이겨 오히려 여러분의 삶에 큰 축복이 되시기 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낙심을 물리치는 무기
시련 없이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다. 시련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을 더욱 단련하시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자 과정이다.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영국 속담처럼 시련
없이 성공한 사람 없고 시련 없이 훌륭한 성과를 얻을 수 없다. 훌륭한 작품은 그만큼 더 많은 시련을 거친 결정체이다. 그러므로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은 “시련이란 진리로 통하는 으뜸가는 길이다”라고 하였으며, 세네카도 “거치른 땅 위에서 굳어진 발굽을
가진 짐승은 어떠한 길이든 걸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쇠붙이를 달구지 않고서는 도구를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시련 없이 인간을
훌륭한 인격자로 만들 수는 없다. “폭풍은 참나무가 뿌리를 더욱 깊게 박도록 한다”는 G. 허버트의 말처럼, 실로 시련은 인간을
만드는 계기이며 보다 나은 상태로 변화시키기 위한 진통이다. 시련은 인간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보지 않은 자는 작은 시련에도 좌절하기 때문이다. 시련을 극복하려는 의지는 인생을 성공시키는 원동력이며 매사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추진력이 된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롬 5:3,4)는 성경 말씀처럼 시련
극복의 의지는 인내를 기르고 소망을 키운다. 생활 속에서 오는 시련을 잘 견뎌내고 희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한다면 앞으로 더욱 큰
시련이 닥친다해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낙심 말라
존 웨슬리와 함께 영국 감리교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사람 가운데 휫필드가 있다.
휫필드가 낙심하고 있을 때마다 그에게 영적 도움과 충고를 제공한 사람은 헌팅턴 여사였다.
휫필드가 절망적인 어조로 헌팅턴 여사에게 말했다.
“저는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감사드리세요”
“왜 그런 감사를 드려야 합니까?”
“주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면 바로 당신을 위해 주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휫필드는 용기와 힘을 얻었다고 한다.
존
웨슬리에게 “만일 당신이 오늘 저녁에 죽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어떻게 하다니요? 아침에는
여전히 설교하고 약속한 사람을 만나고 집에서 저녁을 가족과 함께 먹고 기도한 후 침상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천국에서 눈을 뜰 것입니다” 확신에 찬 대답이었다.
낙심치 말라
시 42:5; 벧전 2:25; 히 10:39
존 브레덴벅 목사는 미국 뉴너지 주 서머빌 교회에서 다년간 목회 했으나 그 자신은 교역이 실패라고 느껴 용기를 잃고 있던중 별세하였다.
그 후 1주일이 채 못되어서 200여 명의 새신자가 생겼는데 신자들의 고백은 한결같이 브레덴벅 목사의 사역에서 이루어진 것 이라고 대답하였다.
또
서양의 어떤 목사는 일평생 사역에서 자기는 한 사람의 영혼도 구원하지 못하였음을 자백한 후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날 묘지에는
주례하는 목사와 한 사람의 조객뿐이었다. 목사가 하관식을 마치고 조객에게 가서 돌아가신 분의 친척이냐고 물었으나 아니라고 하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목사님의 친척도 아니고 교인도 아닙니다.
다만 돌아가신 목사님이 제 영혼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For even when we were with you, we gave you this rule: "If a man will not work, he shall not eat."
일의 축제
인간과 일터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일은 멍에가 아니라 선물이며 축제다.
미국의 교육가 버틀러(1862 ∼1947)는 일에 관해 세 부류의 사람을 말했다.
첫 번째는 일을 창조하는 소수의 사람들.이들은 개인의 일 차원을 떠나 공동체를 바 꾼다.
두 번째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방관하고 기피하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생각조차 안 하는 수많은 사람들.나는 과연 어떤 부류일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 이러한 바울의 명령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수 있고'(창 3:19)라는 말씀에 기초한 것으로 짐작된다(Bruce).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모범을 보인 것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함축성있는 교훈을 통하여 자신의 가르침을 더욱 구체화시키고 있다(Morris).
바울은 여기서 자신과 그의 동역자들이 스스로 노동을 하면서 복음 사역을 감당했음을 들어, 노동의 중요성을 분명히 강조하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노동에 대한 책임을 좀더 설득력 있게 권면하고 있다.
하나남께서는 게으르고 나태한 행동을 싫어하신다(시 128:2; 잠 10:4).
그리고 노동은 하나님의 신성한 명령(창 1:28)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교리로 자신들의 게으름을 합리화시키는 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교제의 떡을 나눌 자격이 없다.
창세기 1:28-29
우리가 들은즉
- 이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쿠오멘'(*)은 현재 시제로 바울과 그의 일행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나쁜 소문을 과거에 뿐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듣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 소문은 데살로니가에서 고린도로 온 여행자들에 의해 전해진 소식으로서 '주의 날'에 대한 그릇된 오해와 잘못된 종말사상을 가리킨다.
너희 가운데...일만 만드는 자들
- 바울은 구체적으로 그들이 누구인지 명확히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 속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바울이 비난하는 대상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을지라도 본절에 언급된 구체적인 사실로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이 어떤 사람들을 지칭하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일만 만드는 자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에르가조메누스'(*, '참견하다')는 신약성경 중 본문에서만 사용되었다. 그래서 모페트(Moffatt)는 '일에 참견하기만 하는 자들'이라고 번역하였다. 이와같이 데살로니가 교인 중 재림이 임박했다는 생각을 가진 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하는 다른 사람들에개도 일하지 말고 재림을 준비하라고 설득하고 다녔다.
일하다(에르가조마이. ĕrgazŏmai) ἐργάζομαι
스트롱번호 2038
먹다(에스디오. ĕsthiō) ἐσθίω 스트롱번호 2068
요한복음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믿도록 하심이 하나님의 일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신앙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고, 신구약의 모든 말씀들은 인간에게 믿음을 가르친다.
특별히 우리 본문에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일들이 아님)하심은, 의미심장하다.
여기 단수 명사로 된 "일"(*)은 "그 일"이란 말인데, 모든 다른 일들 곧, 율법적인 일들과 엄격히 구분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유일한 일이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은 무슨 내용을 가진 신앙인가?
그것은,
(1) 하나님을 신임하는 믿음,
하나님의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임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모독하는 큰 죄이다.
(2)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시는 살아 계신 신(神)이심을 믿음.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를 성육신(成肉身)하여 보내신 것은, 인간과 깊은 교제를 가지시기 위한 최고의 사랑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을 믿지 않는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버리신 무의 무정(無意無情)하신 이로 오해하는 자이다.
(3) 하나님 자신을 인간의 눈과 귀로 친히 보며 듣는 것과 같이 믿음.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하나님 자신을 받아 가진자이니, 그로서는 하늘의 하나님을 보겠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어떤 성도는 말하기를, "만일 전적으로 신앙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일어난다면, 세상의 역사는 변화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펄죤(Spurgeon)은 말하기를, "작은 믿음은 영혼을 하늘로 가져가고, 큰 믿음은 하늘을 영혼에게 가져온다"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남들의 권면을 받지 않고도 믿었고 (창 18:9-15; 롬 4:19-21), 수로보니게 여자는 하나님의 권면 없이도 믿었고(마 15:22-28), 노아는 경험한 바 없이도 홍수에 의하여 세상이 망할 것을 믿었다(히 11:7).
ἔργον, ου, ὁ 스트롱번호 2041
그 누구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일은 세상의 거의 모든 고통의 근원이다. 당신이 악함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이 일을 하는 것 혹은
일을 위해 설계된 세상에 사는 것으로부터 온다. 고통을 겪는 것을 멈추기 위해, 우리는 일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1985년에 밥
블랙이 쓴 “노동의 폐지”라는 에세이의 초반부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여가를 즐기는 문화 속에서, 많은 이들은 블랙의 감성에
전적으로 공감할 것입니다. 미국인들은 그들이 깨어있는 시간의 약 50퍼센트를 일에 몰두하며 소비합니다. 일은 저주일까요, 아니면
인류는 이것을 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일까요? 밥 블랙의 주장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일의 의미와 일이 갖고 있는 유익함은
성경에서 굉장히 중요한 주제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일의 근원은 창세기에서 서술되어 있습니다. 시작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느라고 바쁘셨던, 최초의 노동자이셨습니다
(창세기 1:1-15). 성경은 하나님께서 육일 동안 일하셨고, 칠일째에 쉬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 위에서 일을
하셨던 최초의 분이셨으므로, 정당한 일은 하나님의 활동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선하시기 때문에, 일 또한
본질적으로 선한 것입니다 (시편 25:8; 에베소서 4:28). 게다가, 창세기 1:31은 하나님께서 그 분의 노동의 열매를
보셨을 때, “심히 좋았[다]”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일의 질을 검사하고 평가하셨으며, 그 분께서 잘 되었다고
판단하셨을 때, 그 분은 그 결과에 만족하셨습니다. 이를 봤을 때, 일은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일은 가장 높은
질의 결과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합니다. 일에 대한 보상은 잘 끝마친 일로부터 오는 영광과 만족감입니다.
시편 19장은 하나님께서 그 분의 업적을 통해 그 분 자신을 드러내신다고 말합니다. 자연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는 이 땅
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러므로, 일은 그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그 무언가를 드러냅니다. 그 일한 사람의 근본적인
성품, 동기, 기술, 능력, 그리고 성격적 특성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고, 좋은
나무는 오직 좋은 열매만을 맺는다고 선포하셨던 마태복음 7:15-20에서 이 원칙을 상기시키십니다. 이사야 43:7은 하나님께서 그
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나타냅니다. 고린도전서 10:31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다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영화롭게 하다”라는 용어는 “정확한 묘사를 하다”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이 한 일은
하나님의 의로우심, 신실하심과 뛰어나심을 이 세상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과 같은 특성을 갖도록, 그 분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26-31). 그 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그 분과 함께 일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을 심으시고, 그것을 경작하고 유지하기 위해 아담을 그 안에
두셨습니다 (창세기 2:8, 15). 게다가, 아담과 하와는 이 땅을 다스리고 통치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고유의 임무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경작한다는 것은 성장을 촉진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지한다는 것은 실패 혹은 악화로부터 보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통제하고 훈육시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통치한다는 것은 관리하고, 책임을 지고, 결정을 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권한은 모든 직업에 적용됩니다. 15세기의 종교 개혁 지도자들은 직업을 하나님 앞에서의 사역으로서
여겼습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봤을 때, 직업이 사역임을 인정하고, 직장은 사역지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묘사된 인간의 타락은 일의 본질을 변화시켰습니다. 아담의 죄에 대한 응답으로, 창세기 3:17-19에서
하나님께서는 몇 가지 심판을 선고하셨습니다. 그 중 가장 가혹한 심판은 죽음입니다. 하지만, 노동과 노동의 결과는 나머지 심판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일이 힘든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도전, 어려움, 탈진,
고통을 암시하는 노역이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일 그 자체는 여전히 좋은 것이지만, 인간은 “얼굴에 땀을 흘려야”일을 성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결과가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인간은 들판의 채소들을 먹게 되겠지만, 그 들판은 또한
가시와 엉겅퀴도 생산할 것입니다. 열심과 노력에 대해서 항상 노동자가 기대하거나 갈망하는 대로 보상받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은 동산이 아닌 들판의 산물을 먹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눈에 띄는 대목입니다. 동산은 하나님께서 안전한 울타리로 만드신 이
땅의 낙원의 상징입니다. 동산은 또한 순결함과 결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와 반대로, 땅이나 들판은 무한하고, 보호되지 않는
공간을 나타내고, 억제의 상실 그리고 세속적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일하는 환경은 특히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적대적일 수
있습니다 (창세기 39:1-23; 출애굽기 1:8-22; 느헤미야 4장).
인간은 삶 속에서 세가지 기본 니즈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사랑, 목적성, 중요성이 그것입니다. 수 차례 인류는 일 자체의 목적성과
중요성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전도서 2:4-11에서, 솔로몬은 다양한 사업과 모든 종류의 일 속에서 의미를 찾아 다녔음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이 성취되었을 때 비록 어느 정도의 만족감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의 결론은,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에 대한 다른 중요한 성경적인 원칙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일은 노동자의 이익 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행해진다는 것 (출애굽기 23:10-11; 신명기 15:7-11; 에베소서 4:28).
•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고, 그 분의 백성들을 위해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 (시편 104:1-35; 127:1-5; 전도서 3:12-13; 5:18-20; 잠언 14:23).
•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백성들의 일을 위해 이들을 준비시키신다는 것 (출애굽기 31:2-11).
최근 우리 사회에서 실업자,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자, 교육을 받지 못한 자를 향한 사회적 책임과 의무에 대한 많은 토론이
있어왔습니다. 성경적 복지 제도가 일의 제도였다는 것이 주목할 만합니다 (레위기 19:10; 23:22). 성경은 게으름에 대해
냉혹하게 비난합니다 (잠언 18:9). 바울은 크리스천의 일에 대한 윤리에 대해 충분히 밝히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디모데전서 5:8).
게다가, 또 다른 교회에서 바울이 일하지 않기를 선호하는 자들에 대해 내린 지시는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라고 말합니다. 그 대신, 바울은 게을렀던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데살로니가후서 3:12).
비록 일에 대한 하나님의 본래의 설계는 죄에 의해 왜곡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죄가 불러온 짐을 없애시고 일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이사야 65:17-25; 요한계시록 15:1-4; 22:1-11).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자리 잡는 날까지, 일을
향한 크리스천의 자세는 예수님의 자세를 반영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어떤 이들은 생각하기를, 일하는 것은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물론 죄
때문에 일이 더욱 고되고 힘들어졌습니다만(창 3:17-19), 원래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일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편지 하면서 자신과 그의 동료가 그들 가운데 있을 때 보여준 본을 기억나게 합니다.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7-8절).
어떤 이들은 질병이나 장애로 인해 일을 할 수 없는 없는데, 성경은 이러한 자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합니다(약 2:15-16, 요일 3:17).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일을 기꺼이 해야만 합니다.
바울은 매우 분명하고 이해하기
쉬운 명령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10절),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12절).
데살로니가의 몇몇 신자들은 일하기를 포기하였으며, 이들은 다른 신자들의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님이 곧
오시시라 생각하고 일을 그만 두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언제든지 오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직장에서 근면하게 일해야만 합니다.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창세기 3:18-19
하나님은 죄를 범한 하와에게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셨고,
아담에게는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후에 모든 인류는 남자든 여자든 수고를 해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울도
데살로니가의 교인들에게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 3:7~12)
바울은 자기가 직접 일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본을 보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얻은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지만(창 32:9~10), 땀을 흘려 일한 자기의 수고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라반을 떠나기 전 레아와 라헬에게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내가 이 이십년에 외삼촌과 함께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떼의 수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 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 내었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 사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육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번이나 변역하셨으니”(창 31:6~42)
예수님은 피와 땀을 흘려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는
무엇인가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거저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 노력없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풍랑이 이는 배에서 잠이 들어 제자들이 깨워서야 일어날 정도로 진을 다 쏟으시며 일을
하셨습니다(막 4:37~38).
또 십자가에 달려 죽기 전에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도록
기도하셨으며(눅 22:41~44),
십자가에 달린지 얼마 되지 않아 죽으실 만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6:20~22)
여자가 해산하여 아이를 낳는 것처럼 예수님은 해산 이상의 수고를 통해 우리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수고로 얻은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공변된 보응을 피할 수 없습니다(히 2:1~3).
이러한 은혜를 무시하는 것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일입니다(히 6:6)
게으름이 악함이다
잠언
6:6~11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했습니다.
성경은 게으른 것을 악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일하지 않은 한 달란트 맡은 자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25:26)라고 했습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우리가
주안에 수고하면 반드시 거룩한 결실이 있습니다.
시편 126편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우리가 주로 인하여 흘리는 수고와
눈물은 하나님이 인정해주십니다.
시편 56편 8절에도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했습니다.
마지막 때 흰옷을 입고 나아오는 자들에 대해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 7:16~7)
요한계시록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예수가 죽음에 이르게 된 의학적 원인에 대한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며 어깨가 탈구됐고, 그 상태에서 십자가에 매달리며 동맥이 파열돼 사망에 이르렀다는 주장이다.
16일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패트릭 풀리치노 신부는 예수의 시신을 감싼 것으로 알려진 '토리노
수의'에 대해 법의학자와 의학자들이 수행한 연구 결과를 분석해 예수의 사망원인을 밝혀냈고, 가톨릭 의학 계간지 최신호에 논문을
게재했다.
풀리치노 신부는 영국국민보건서비스(NHS) 트러스트 소속 대학병원에서 신경과 의사로 근무하다가, 은퇴 후 신부가 됐다.
폴리치노 신부는 먼저 수의에 새겨진 예수의 형상에 주목했다.
오른팔이 왼팔보다 10㎝가량
늘어난 모습인 점을 들어 오른쪽 어깨가 탈구된 흔적으로 추정했다.
그러면서 예수가 오른쪽 어깨가 탈구된 상태에서 십자가에 매달리는
바람에 쇄골하동맥이 찢어져 심각한 내부 출혈을 일으켰을 것으로 봤다.
쇄골하동맥은 흉부와 머리·목·어깨 등을 이으며 혈액을 공급하는 큰 동맥인데, 당시 내부
출혈로 예수의 흉곽과 폐 사이 공간에 1.7L 이상의 피가 고였을 것이라 예상했다.
특히 성경에는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로마 병사가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기록됐는데, 풀리치노 신부는 내부 출혈 탓으로 봤다.
토리노 수의의 등 부위에는 예수가 십자가를 질 때 오른쪽 등에서 왼쪽 등으로 옮긴 흔적이
있다고 한다.
또 이전에도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기 전 T자형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십자가에 짓눌려 어깨가
탈골됐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바 있는데, 풀리치노 신부도 이에 동의했다.
풀리치노 신부는 "예수가 어깨가 탈구된 상태에서 3시간여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쇄골하동맥이 갈비뼈 표면을 가로지르며 마찰해 결국 파열됐을 것"이라며 "예수의 옆구리에서 피와 함께 나온 물은 뇌척수액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영국의
의학협회 회장이 하나의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습니다.
심장이 극심한 충격을 받아
파열되면 피가 심장 옆 한 주머니에
모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피가 그
주머니에 모이면 혈청은 깔아 안고 말간
물이 된다는 학설이었습니다.
그 후 프랑스
학자와 이태리 학자가 그 학설이 사실임을
입증했다고 합니다.
그 후 성경 해석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것은
심장이 극심한 충격을 받아 파열되어
죽었다고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마 27:50에
보면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라고 했는데 그 큰
소리는 심장 파열의 고통이 극심해서 지른
큰 소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바로 그 피물
주머니를 찔러서 물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이 받은 극심한 충격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묘사합니다.
그 중 한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부르짖은 부르짖음은
예수님이 받으신 극심한 충격을 나타내
보여 주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 말의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것입니다.
우리 대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시고 끊어짐을
당하실 때, 즉 우리 모두가 받아야 할
사약을 대신 받으시고 저주의 죽음을
죽으실 때 예수님은 극심한 충격을 받으시면서
그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보통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일과 양식에 대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현대인들의 풍조는 놀고 먹으면서도 넉넉하고 편하게 지내는 것이 마치 잘 살아가는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러한 삶을 부러워하며 또한 나도 그렇게 살았으면 하고 기대를 갖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교훈은 일과 양식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일은 곧 나의 사명입니다.
양식은 사명자들을 위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 필수적인 영양분입니다.
만일 사명자로 살아가는데 아직도 일용할 양식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사명자가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의 사명자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을 전도자로 보내실 때 이렇게 분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과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거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왔다.'고 전하여라.
병든 사람을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돈은 일체 가지고 가지 말아라.
여행 가방이나 갈아 입을 옷이나 여분의 신발이나 지팡이도 갖고 가지 말아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마 10:6-10. 현대인의 성경)
사명자를 위한 양식은 분명하게 예비되었으며 만일 예비된 것을 찾지 못했으면 차라리 금식하라고 하십니다.
과연 이 가르침대로 믿고 순종할 수 있는 사명자가 얼마나 될까요?
열심히 일을 하면서 또한 열심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존귀한 하나님의 일군으로 인정받는 은혜를 사모합시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실을 위하여 다시 일어납시다.
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나 맡은 본분은
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는 내게 기도는 건조하다. 노동은 육체요 기도는 마음 아닌가. 기도란 게 맘 편하고 몸 편해야 나올 법한 간구일 터, 지친 육체에 뭔 정신 있겠는가. 태양에 드러난 모래처럼 땡볕에 노출된 육체는 매마르기 그지없다. 내 몸이 공중으로 모두 증발하여 사라질 때가 오고야 말 텐가. 수분과 살점이 마르거나 닳지 않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내 몸 만세 하기를. 땡볕 노동으로 쩍하면 정신 나간 소리나 한다. 그러한 육신에 무슨 맑고 촉촉한 영혼이 흐르겠는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살후 3:10)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는 뭐 그렇겠지 하고 넘어간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5:17)는 예수님 말씀에 이르면 뭔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님을 느낀다. 일이 뭐길래 이처럼 각인토록 했을까 싶다. 돈만 좀 있으면 노동 없이 글만 쓰고픈 내게 참 고약한 말씀이다. 예수님까지 나서서 강조하시니 눈치 보여 일 안 할 수가 없다. 성경 읽는 것도 일인데 땀 흘리는 노동까지 해야 겨우 먹을 수 있고 하나님 아버지도 이제까지 일하신다며 일침을 놓는다. 힘들다.
<거룩한 가족>. 마르크스 엥겔스가 처음 공동 집필한 책이다. 세계를 노동자 농민 부르죠아 계층으로 구분, 노동자 농민의 가족만이 거룩한 가족이라 단정하며 "노동이 기도요, 공장이 교회다"라 선언한다. 어쩜 이리도 내 속을 시원하게 훑어주는가. 이 대목에서 그나마 한숨 돌린다. 동시대에 살았다면 분명 그들에게 한 표 던졌을 일이다. 먹고사는 원천 노동이 기도라니 내 직업은 꿩 먹고 알 먹기다. 일터가 교회라면 별도로 교회 나갈 일도 없으니 일타이패 일거양득이다.
대천덕 신부도 비슷한 말을 한 바 있으나 뜻은 결코 같지 않다. 마르크스는 노동으로써 '기도를 대체'해야 한다는 것, 곧 노동하면 기도한 것이니 교회 나갈 시간으로 노동이나 해라 뭐 그런 말일 테고, 대천덕 신부는 노동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 곧 노동을 숭고한 마음으로 해라 그런 뜻일 테다. 혹세무민하며 노동자 계급을 착취한 인간이 뭔들 기도로 미화하지 못할까.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요 노동은 훌륭한 기도인 만큼 노동자들이 종교를 버리고 노동에 전념하도록 마르크스가 하나님께 기도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베네딕토 성인은 기도 공부 노동의 삼각 균형을 강조하며 내 편을 들어준다.
삶이 풍족하려면 이 세 가지가 밑받침돼야 함에
공감한다.
나는 분명 두 가지 요소에 자신 있다.
성인은 기도하는 거룩과 노동하는 세속을 동일하게 본다.
나는 진정 그를 그리스도
다음으로 믿고 산다.
기도는 하나님의 노동이고 노동도 기도라며 정의를 내려준다.
나는 정녕 이를 가벼이 흘리지 않는다.
기도는
그냥 다소곳이 눈 감고 손 모아 하나님을 기리면 되는 쉬운 일인 줄 알다가 기도란 그런 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 머무는 참된 일임을
그에게 듣고선, "노동을 기도하듯 거룩하게 기도를 노동하듯 정성스레" 하겠다는 새로운 표어를 만든다.
내가 노동하는 만큼 하늘에
기도로 올려지는 셈이다. 노동도 좋고 세상도 모두 좋아만 보인다.
노동과 기도는 히브리어에서 그 어원이 유사하다.
때문에 노동과 기도를 하나로 묶어 요롷게도 써먹고 조롷게도 써먹는다.
노동을
하든 기도를 하든 뭐를 해도 매한가지다.
둘 중 하나만 부족해도 게으름을 넘어 죄가 될 테다. 그러기에 사무엘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라 하지 않는가 (삼상12:23).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창 3:19). 생명 유지에 순응하는 노동의 자세다. 노동을 하고 땀을 흘리며 가정으로 돌아오는
여정은 인간의 시간표다. 하나님께서 흙을 빚어 생명을 불어넣은 이후 흙에서 먹고사는 인간은 노동의 댓가로 다시 흙에서 나온 양식을
먹는다. 이때 하나님의 축복이 내리고 노동의 기도가 올려진다. 흙에서 삶은 그거다.
기도란 맘 편하고 몸 편하다고 나오는 게 아니다. 외려 고난이 닥치고 몸이 힘들 때라야 절실한 게 기도다.
마르크스 계산대로라면 노동을 반복하는 셈이지만 노동이 뭔
기도가 되겠나 싶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 < 만종 >은 하루치 노동을 마치고 감사드리는 기도의 자세다.
노을 지는
들녘, 흙투성이 구두, 캐다만 감자, 비스듬한 삼지창, 저 멀리 흐릿한 교회, 그 고요한 기도의 시간에는 모든 사물이 정지한다.
기도는 이토록 숭고하다. 거룩하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내 노동을 구별하시어 거룩하게 해주신 게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하고 있는 내 일은 팔뚝에 약간의 근육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한 노동이다.
평범하나 하나님께서 해 아래서 수고하도록 엄선하여 내려주신, 땀 흘리지 않고는 벌어
먹고살 수 없는 귀한 일이다.
그 결과물로 내 가정이 여유롭고 발전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게 좋을 테다.
하나님은 일의 종류와
거창함을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을 게다.
당신께서 내려주신 그 일을 내가 믿음으로 사명으로 해내는가의 여부, 그것을 보시지
않겠는가.
노동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쁨이 충만해져 간다. 즐겁고 즐거우며 즐겁고 즐거우니 모든 것이 즐겁기만 하다.
땡볕에서 일하는 내 직업, 이러니 정말 좋지 아니한가.
노동(아보다) עֲבֹדָה
스트롱번호 5656
우리가 하나 됨을 힘써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오히려 분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는 게으르고 전통대로 행하지 않은 자에게서 떠나라고 한다.
사도 바울이 보여준 전통은 교회에서 마땅히 받을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아무런 보상이나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수고한 것이다. 이것을 위해 바울은 밤낮 없이 수고해야만 했다.
사도는 이런 정신이 교회 사역자들의 본이 되고 전통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전통을 본받을 생각하지 않고 형제들에게 부담을 주고, 교회에서 물질적인 이익을 바라며 사역을 돈 벌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도들이 전한 전통을 반하는 일이다. 더구나 이런 자들이 리더임을 자처할 때 쫓아내기도 어렵다. 바울은 이런 자에게서 떠날 것을 명령했다.
풀타임 사역자들을 돕고, 후원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교회 사역이 직업화되는 것은 사도들이 전해준 전통은 아니다.
친구 목사 안수식에 참여한 적이 있다.
거기에서 나는 깜짝 놀랐다.
안수 직전에 '목회 외에는 어떤 직업도 가지지 않을 것이며, 오로지 양의 젖만으로 살 것'임을 약속하게 했다.
이게 무슨 족쇄인가?
오히려 사도가 보인 전통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일이 아닌가?
물론 이런 약속이 긍정적인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목사가 딴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목회에만 전념하라는 의미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바는 아니다.
내가 아는 형제 중에는 교회 목회를 하면서 세차업을 하는 분이 있다.
세차업이라고 해서 나는 어떤 거대한 세차장을 상상했었는데, 알고 보니 아파트에서 양동이 들고 다니면서 일일이 손 세차해 주는 일이었다.
그는 수십 년간 교회를 위해 봉사했지만,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형제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수고하는 그가 얼마나 멋진가?
물론 사역자가 봉급 받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이들을 후원할 것을 말씀한다.
그러나 교회 사역이 생계를 위한 직업이 되면 곤란하다.
내가 아는 가난한 후배 목사가 있다.
작은 교회이다 보니 늘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런데 어느 날 서울의 더욱 큰 교회에서 초빙 요청이 왔다.
여기를 버리고 갈 것인가 말 것인가?
내게 묻자 이런 권면을 했다.
형제가 사역의 길로 나선 것은 주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지 돈 벌기 위함은 아니지 않느냐.
이 한마디로 그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주님을 따르기로 하는 결심 속에서 기쁨이 그 목사 형제 얼굴에 퍼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도 그 작은 교회에서 힘들게 사역하고 있다.
교회는 물질적 이익을 얻기 위한 직장이 아니라 내가 드려지고 섬겨야할 대상이다.
무슨 물질적인 이익을 바라고 사역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지도자가 그런 자세를 가지면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에 발을 붙일 수가 없다.
주님은 값없이 그 크신 구원의 은혜를 주셨으며 우리는 그런 주님을 따르는 자임을 기억하자.
돈이 아쉬우면 일해서 벌 생각을 해라.
그러나 성도의 입장에서는 사역자에게 그런 요구를 하면 안 된다.
이것은 철저히 자발적이어야 한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과거의 영광을 따지지 말고 일할 수 있어야 한다.
성도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교회는 직업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그런 세속 사회가 아니다.
무슨 직업을 가졌든 자기가 맡은 일은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그가 아름답고 성도답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우리가 자신을 돌아보고 게으르지 않은지, 형제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명령한다(12).
일하는 것을 귀찮아하지 말고, 일의 귀천을 따지지 말고 힘이 있을 때 이것저것 열심히 일하자.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힘이 다 빠져서 일할 수 없는 시기가 올 것이다. 그때는 주님께서 또 챙겨주실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해야 할 때다.
그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됨을 삶 속에서 체험하자.
종말을 사는 자에 대한 실제적 지침들 중, 본문은 일에 대한 규례와 대인관계에 대한 지침입니다.
바울은 당시 그릇된
종말관으로 무위도식하는 이들에게 노동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신성한 규례임을 알리고, 종말이 올지라도 성도는 형제애를 잊지 말고
범죄자라도 회개시켜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그리스도께서 곧 다시 오신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뒤로 한 채 남의 일에
쓸데없이 콩놔라 팥놔라 참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들을 경계하면서, 침착하게 자기 할 일에 충실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들은즉’이라는 기묘한 표현은, 이 범주에 속한 사람들을 거명하지 않으면서 직접 그들을 향해 말하는 방법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이라는 번역은, 원문의 의도적인 언어유희를 잘
드러냅니다.
그들은 스스로 일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일로 그들을 부양하게 만드는데, 그들이 다시 주의 권위를 근거로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을 구입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하라는 매우 엄한 명령을 받습니다.
이 교훈은 다음과 같이
산뜻하게 요약됩니다.
‘괜한 참견을 하면서 바쁘게 돌아다니지 말고, 게으름도 피우지 말라. 그리고 남의 것을 우려내려고도 하지
말라’.
바울의 준엄한 명령이자 교훈입니다.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함은 침착하고 성실하게 자기의 할 일을 하고, 스스로 일하여 얻은 소득으로 살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바울의 훈계입니다.
지금 우리가 섬기는 교회 안에서도 말없이 침착하게 성심을 다해 봉사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게으름을 피우면서 자기보다 열심히
봉사하며 사명을 잘 감당하는 분들을 시기하고, 입으로 말을 옮기며 성도들을 모함하는 일들을 종종 목격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말을 많이 하며 입으로 옮기는 자와 게으름을 피우는 자들에게 이용당할 위험이 있음에도, 선을 행하다 절대 낙심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습니다.
말을 함부로 쏟아내지 말라는 뜻이지만, 무심코 내뱉은 말 한 마디가 실현됐을
때 쓰이는 속담이기도 합니다.
말에는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큰 능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별볼 일 없는 사람의 말에도 이런 힘과 능력이 있다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말씀은 과연 어떨까요?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땅을 적시어 싹이 돋아나게 합니다. 그만큼 하나님 말씀에는 위대한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는 준엄한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셨을까요?
수련회를 참석했으면 합당한 열매를 나눠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그냥 행사로 변질돼 아무런 감동 없는 수련회를 하다 보면 수십 년 간 진행된 행사라도 주님의 복음과는 무관함을
증명하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 해서 수련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열매 맺는 장로님도 계실 것입니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제일 바쁘게 수고하시는 분들이 교회학교 교사들입니다. 그들은 아이들을 위해 휴가도 반납하고 미래
일꾼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며 그들이 올바르고 선한 모습으로 양육되기를 갈망하면서 오늘도 무더운 장마철에 땀으로 샤워를 하며
최선을 다해 일하고 계십니다.
그저 자신은 눈치만 보며 슬금슬금 요리조리 무거운 일을 피해 다니며 게으름을 피우는 성도들, 입으로 상처를 주며 일을 방해하는 걸림돌 같은 교인들이 교회마다 많다는 사실 앞에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땀 흘리는
노동의 가치야말로 신성한 열매로, 가족과 회사를 살리고 이웃과 나라를 살리는 아름다운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민주노총을 위시하여
각종 단체에서 탈출해 회사 안에서 노조 활동을 하시기 바랍니다.
누구 좋으라고 그런 단체를 위해 희생하십니까? 노조위원장을 비롯해 모든 임원들은 각자 회사로 돌아가 참된 노동을 즐기며 근로자로서 역할과 책임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국민 세금으로 사례비를 받는 공무원과 전교조, 그리고 공공기관 직원들 역시 민노총에서 탈퇴해야 합니다. 국민 세금으로 먹고 사는 분들이, 오히려 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제 더 이상 국민들의 눈엣가시가 되지 말고 국민들이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공직자들로 다시 태어나, 나라와 백성들의 안전하고 안락한 삶을 위해 눈물과 땀으로 보답하며 봉사하는 청지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일하지 않고 돈만 챙기려는 국회의원과 나랏돈은 눈먼 돈이라며 마구 삼키려는 자들이 들끓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지 않고서 경제를 살릴 수 없음을 인식하고, 하루바삐 무의도식하는 자들을 반드시 척결해야 합니다.
또 비정상적 방법으로 나랏돈을 챙기려는 무례한 자들과 요령을 피우며 비건전한 방식으로 혈세를 축내는 자들을 반드시 찾아내, 국민 혈세가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근로의 아름다운 정신으로 내 가족과 이웃, 나라를 위해 최선 다해 일하는 참된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모두들 새로운 각오로 시대에 부응하며, 대한민국의 미래 도약을 위해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 사랑하고 베푸는 미덕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 하셨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무위도식하는 자 되지 않게 하소서!
일하기 원하는 자가 못먹게 되는 경우 없게 하여 주소서!
일하기 원하고 일하고 싶어하는 자,
자기에게 합당한 일을 찾게 하시고,
열심으로 일한 만큼 재물로 인한 어려움에 처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
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감당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게 도와 주소서!
일하기 싫어하거든이란 말씀은 일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 이런 자들에게 명령하여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함. 이들은 일을 할 수 있고 할 일이 있는데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돌봐주도록 기대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을 돌보는 등 친절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에 대해 그것은 용납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디다케에서는 방문자를 할 수 있는 대로 돕되 이틀 이상(필요하다면 사흘) 머물 수 없도록 가르쳤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무위도식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일하지 않고 얻어먹을 뿐 아니라 일하지 않으면서 교회에 일을 만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잘못된 이해 속에 그렇게 되었는지 아니면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이미 사도 바울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단호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세상에 연연해 하며 삶에 아등바등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삶을 방치하거나 규모없이 살아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일은 사명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일이 사명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일을 내게 맡기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 사명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일을 감당하기 위해 생명을 거셨습니다(막 10:45).
우리에게는 다 일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 양육이라는 일이 있습니다.
자녀는 공부라는 일이 있습니다.
노인은 사회의 어른이라는 일이 있습니다.
정치가는 바른 정치라는 일이 있습니다.
성도는 복음을 실천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세상에 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사명자라고 하겠습니다.
내게 맡겨진 일에 생명을 걸고 있습니까?
그 일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임을 깨닫고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현대인은 편하게만 일하려고 합니다.
돈 되는 일만 하려고 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일하기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남녀노소, 빈부귀천 상관없이 ‘누구든지’ 입니다.
대통령, 정치가, 기업가, 학생, 근로자,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상관없이 ‘누구든지’라고 말씀합니다.
일은 사명이고, 사명은 생명입니다.
일하는 자가 살아있는 자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 사명성취의 기쁨도 큽니다.
일 덜 하려고 꾀부리지 말고, 일 더하려고 힘씁시다.
어디로 가면 ‘편하게’ 일할 수 있을까를 묻지 말고, 어디로 가면 ‘제대로’ 일할 수 있을까를 물읍시다.
사도 바울처럼 온 힘을 다하여 일합시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사명자에게는 면류관이 주어집니다(딤후 4:5-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Christ, we command you, brothers, to keep away from every brother who is idle and does not live according to the teaching you received from us.
규모(規模) 있는 생활이란 본이 될 수 있는 삶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재림에 대한 그릇된 신앙의 자세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곧 재림하시기 때문에 일상적인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오직 주님만을 갈절히 기다리자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이러한 삶이 영적인 삶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주장하는 교인들은 일도 하지 않았으며 이 집 저 집을 방문하며 끼니를 해결하면서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기다린다고 자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생활 태도를 규모 없는 생활이라고 꾸짖습니다(11절).
따라서 규모 있는 생활이란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는지 아무도 알 수 없으므로 그 날까지는 현재 내게 맡겨진 본분을 믿음으로 바르게 감당해야 한다고 깨우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너희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댓가를 기대하지 않고 자비량으로 천막을 제조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너희들도 우리를 본받아야 한다고 교훈합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노동의 신앙적 의미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땀을 흘려 일을 해야만 하고 여자는 해산의 수고가 따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는 노동의 가치
노동을 통하여 의식주를 해결해야 합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게 하라고 엄하게 꾸짖습니다.
따라서 기도는 노동이며, 노동은 곧 기도라고 하여 기도가 신성한 것처럼 노동도 또한 신성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노동은 단지 우리가 날마다 많은 시간을 보내거나 청구서를 지불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우리는 일을 함으로써 끊임없이 창조사업에 동참하며, 물질과 맞서고 문제를 해결하면서 ‘자신’을 형성시킨다.”(로버트 엘스버그)
우리가 매체를 통해 날마다 마주치는 ‘광고’는 행복에 대해 쉽게 말하지만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노동할 때보다 여가나 휴가를 보낼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처럼 선전한다. 일이란 휴가나 여가를 보내기 위해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사막이나 동굴에서 홀로 살던 수도승들은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대로 살았다. 이것은 일 자체를 강조한다기보다, 노동이 영적인 삶을 방해하기는커녕, 우리는 일을 통해 치유되고, 지루함과 슬픔을 몰아낸다고 믿었다. 여기에 굳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했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이대지 않아도 좋다. 일은 복음적 명령 이전에 인간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막교구 폴 아빠스는 종려나무로 바구니를 짜면서, 바구니가 광에 가득 차면 태워버리고 다시 짜곤 했다. 그는 수도승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한곳에 오래 머물 수 없고, 거룩함의 길에 이를 수 없다고 보았다. 일이나 과제를 수행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고, 행복하지 않으면 누구도 그 삶을 계속할 수 없다.
이상대로 산다는 것의 어려움: 레오 톨스토이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를 발표하면서 명성을 얻었으나, 귀족사회에서 이룬 자신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거룩함을 추구했고, 그러한 거룩함을 가난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 속에서 오히려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리 고달파도 아침 일찍 일어나 온종일 일하고 기본적으로 인생은 선하다는 사실을 신뢰하며 밤이면 잠자리에 든다. 오늘 하루의 에너지를 온통 바치고 나서 잠을 청하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를 다룬 창세기의 내용처럼, 농민들은 그들의 노동을 징벌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동은 가족을 먹여 살리는 거룩한 과업이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한가한 사람들에게 주는 말>에서, 이렇게 다짐했다. “나는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시골에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우며, 내가 받은 교육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나눌 것입니다. 어떤 단체를 세우거나 책을 써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형제처럼 살아가면서 말입니다.” 실제로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라냐에서 농민들과 소박하게 살았으나, 집에 와선 비단옷을 입고 자야하는 삶에서 갈등을 느끼며 과로워하다 아스타포보 마을 철도역장 집에서 82세로 숨졌다.
여기서 로버트 엘스버그는 이상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지만 이상처럼 살기는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올바른 삶이란 “보편적 도덕률이 영혼에 깊이 새겨져 있을 때 가능하다.”고. 세상이 주는 세속적 지혜, 곧 복권에 당첨되어 ‘수백만 원을 타면 직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고 원하는 대로 늦잠을 자도 될 텐데!’하는 환상을 거부하고 “이기심과 경쟁보다 사랑과 연대를 나누며 사는” 비전으로 매일매일의 삶을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말한다.
기도는 하느님의 노동, 노동은 기도처럼
톨스토이가 발견했지만 살지 못한 이상은 기도와 일을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베네딕토 성인은 매일의 삶이 기도와 공부, 노동으로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베네딕토는 기도라는 거룩한 영역과 노동이라는 세속적 행위를 갈라놓지 않았다. 기도는 하느님의 노동이므로, 마찬가지로 노동 자체도 기도가 될 수 있다. 기도란 단순히 얌전하게 눈을 감고 손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머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노동이 기도할 때처럼 하느님의 현존 앞에 머물 때 노동은 곧 기도가 된다. 설거지를 하거나 정원에 물을 주거나 하는 단순한 노동뿐 아니라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들길 때처럼 복잡하고 까다로운 기계를 다룰 때에도 “일이 담고 있는 선을 존중”한다면 기도행위가 될 수 있다.
<하느님의 현존 연습>을 쓴 부활의 로랑 수사는 80살에 죽기까지 수도원에서 40년 동안 부엌일을 하며 냄비와 프라이팬을 뒤집었다. 그의 영적 삶은 단순했다. 그는 아주 단순한 일을 하면서 “하느님이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는 일 가운데 계시다.”고 확신했다. 그는 말한다. “나에게 일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과 다를 바 없다.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그릇을 씻으면서, 이것저것 청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마치 성체조배를 할 때처럼 깊은 고요 가운데 하느님을 모신다.” 이처럼 로랑 수사는 성무일도와 미사 같은 전통적인 영적 수련행위와 얼룩을 없애고 야채를 다지는 등 날마다 하는 일을 구분하지 않았다.
결국 거룩함은 그 일의 성격에 달려 있지 않고 그 일을 하는 내적 태도에 달려 있다. 로랑 수사는 이를 두고 “거룩함에 이르는 길은 일을 바꾸는 데 있지 않고, 지금 하고 있는 평범한 일을 하느님을 위해 하는 데 있다. 하느님은 일의 위대함을 보지 않고 그 일을 깊은 사랑으로 하는가를 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거룩한 일은 따로 없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서로 섬기며 자선을 베푸는 기회요 기도가 될 수 있으며 아름답고 진실하며 생명을 주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를 엘스버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접수를 하고 요금을 받거나 식품점에서 계산하면서도 은총과 사랑으로 일터를 거룩한 곳으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성인들이다. 당신은 학교나 골목길이나 바다에서, 교회나 기차, 가게와 찻집에서 성인을 만날 수 있다.”
고유한 나의 길을 따라서
“나에게 성인이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함과 구원의 문제는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하며 참된 나 자신을 찾는 것이다.”(토머스 머튼)
우리가 성인이 되기 위해 가야하는 정해진 길은 없다. 바람직한 직업도 없다. 다만 자기 고유의 길이 있을 뿐이다. 성 안토니오는 사막에서, 성 베네딕토는 수도원에서, 성 프란치스코와 성 글라라는 철저한 가난을 통해 그들만의 고유한 길을 찾았다. 물론 예수님처럼 모두 십자가에 못박힐 필요도 없다. 목수였던 유용주 시인은 예수는 못박힘으로써 가장 위대한 목수가 되었다고 말했지만, 정작 본인은 목수이면서 시인의 고유한 길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못박힘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목수가 되었다
그도 처음 목수 일을 배울 때에는
무수하게 자신의 손가락을 내리쳤으리라
으깨어진 손가락을 장갑으로 감추우고
20년 가까이 세상 공사판을 떠돌아다닌
우리 主 容珠 그리스도
지금 그의 일당은 사만 오천원이다
하루 한 편,
온몸으로 시를 쓰는
(가장 큰 목수, 유용주)
샤를 드 푸코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거룩하고 완전해지라고 초대하시며, 당신을 더 가까이 따르며 당신 뜻에 복종하라고 부르신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든 영혼이 똑같은 일로 각자의 사랑을 당신께 보여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똑같은 사다리로 천국에 오르고 똑같은 방식으로 선을 행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천국에 이르는 나의 길은 어떤 길인가? 나는 어떤 삶으로 나 자신을 성화시켜야 하는가?”
만약 그 길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다. 내 고유한 자리에서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은 “천국으로 가는 모든 길이 천국”이라고 했다. 우리가 그 길을 발견한다면 모든 길이 꽃길이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길을 발견하더라도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전적으로 응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성인이 성인인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직접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부르심이 하느님한테서 온 것이라고 느끼고 전적으로 응답했기 때문”이라고 로버트 엘스버그는 말한다.
회심: 도로시 데이의 응답
도로시 데이의 ‘회심’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과 응답 가운데 나타났다. 특별한 가난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에 공감하던 도로시 데이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던 성인들 이야기를 읽으며 감동하면서도 한편에선 이렇게 물었다. “내 마음 속에는 또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왜 애초에 악을 방지하지 않고 그 치료에만 그토록 매달리는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일하는 성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노예들을 보살피는 것도 좋지만 노예제도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성인들은 없는가?” 교회 안에서 답을 찾지 못한 도로시 데이는 종교에 등을 돌리고 진보정치에 희망을 두었다. 그러나 역사의 한복판에 참여하며 분투했던 젊은 날의 도로시 데이에게 다가온 것은 외로움과 도덕적, 영적 혼란이었다. 그는 훌륭한 공산주의자가 되기에는 너무 ‘종교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로시 데이는 딸의 임신과 출산이라는 ‘자연적 행복’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길을 찾다가 결국 가톨릭에 귀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국의 가톨릭교회는 가난한 사람들과 이민자들의 교회로 여겨졌다. 그러나 진보적인 그의 동료들에게 가톨릭은 부자들의 교회요 기득권자들의 옹호자로 여겨졌다. 이들에게 가톨릭교회에 입교한다는 것은 노동자들에 대한 배신으로 보였다. 도로시 데이는 자신의 신앙과 사회정의를 위한 투신을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는지 고심했다.
1927년에 세례를 받고 5년 동안 방황하던 도로시 데이는 워싱턴의 성모무염시태 성당에서 자신의 모든 재능을 동료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직후에 ‘가톨릭일꾼운동’의 공동창립자가 된 피터 모린이 그의 집에 찾아왔다. 하느님의 응답은 하늘에서 들려오지 않고 강한 53살의 프랑스 억양을 지닌 덥수룩한 사내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피터 모린은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복음서에 담긴 사회적 복음을 행동으로 옮길 운동을 제안했다. 더 이상 교회와 정부의 프로그램을 기다리지 않고, 당장에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사람들이 더욱 선해지는 사회’를 살아가는 가톨릭일꾼운동이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바다 한가운데 섬처럼 복음을 사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가톨릭일꾼운동은 자발적 가난을 살고, 가난한 이들의 당장에 필요에 응답하면서, 사회적 불의를 고발하고,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운동이었다. 이른바 ‘세상 속에 더 깊이 내려가고, 세속적 가치와 전혀 다른 삶을 실천하는 운동’이다. 그들은 1933년 5월 1일 노동자 성요셉 축일이자 메이데이에 유니온광장에서 <가톨릭일꾼> 신문을 배포하면서 운동을 시작했다. 사회질서를 변화시키는 성인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던 도로시 데이는 “네가 바로 그 성인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남은 생애 50년 동안 이 길에서 행복했다.
부르심 속의 부르심
도로시 데이가 아나키스트로서 살다가, 다시 가톨릭일꾼운동에 대한 부르심을 받았듯이,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어쩌면 거듭 새삼 새로운 부르심에 직면할 수 있다. 어떤 책을 접함으로써, 또는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아님 뜻밖의 경험을 통해서 말이다.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는 이런 체험을 ‘부르심 속의 부르심’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보통 ‘부르심’이라고 하면 수도자가 된다거나 사제가 되라는 부르심으로 좁게 해석하기 쉽지만, 수도성소나 사제성소 안에서도 더 근본적인 부르심에 노출될 수 있다.
평신도의 경우에도 자신이 그동안 무엇으로 밥벌이를 하고, 어떤 방식으로 자기실현을 해 왔다고 장담하더라도 뜻밖의 전혀 다른 ‘부르심’에 직면할 수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하면서 그 일에서 새로운 부르심을 받을 수도 있고, 아예 다른 과업에 헌신하라는 요청을 받을 수도 있다. 로버트 엘스버그는 ‘회심’이란 단순히 죄에서 돌아선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말한다. 특히 거룩함을 찾는 이에게 ‘회심’은 ‘참된 부르심을 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회심이 일어나면 무질서한 마음을 벗어나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 예전에는 평범한 삶에 짓눌려 버거웠지만 회심한 뒤로는 타오르는 불길로 밝게 빛난다.” 이러한 회심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생명력을 준다. 마더 데레사가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걸 보고 어느 기자가 “저라면 백만 달러를 준다 해도 이 일을 할 수 없을 겁니다.”하고 말하자, 그녀 역시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답했다.
‘의미’ 있는 노동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신의 일 속에서 충만한 의미를 찾는 일이다. 의미가 생기면 그 일은 무엇이든 어디서라도 기쁨으로 용약한다. 예수회 사제요 신비가요 과학자였던 테이야르 드 샤르댕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되어 살아있는 모든 것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다. 우리가 보고 만지고 듣고 냄새 맡으며 맛보는 세상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다. 하느님은 우리가 일하거나 활동할 때 우리를 기다리신다. 펜이나 삽, 빗이나 바늘 안에도 계신다. 우리가 자신이 하는 일에 환 획, 한 줄을 긋고 한 땀 한 땀 뜨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정성을 기울이고 의지를 다해 완성해 나가면 최종 목표에 다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거룩함이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마음을 다해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로버트 엘스버그는 우리가 “그때에 비로소 성인들이 말하는 노동의 진정한 행복을 맛본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고유한 길(노동)을 통해 기쁨으로 충만한 하느님께 이르는 거룩함이다. 그게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삶의 목표다.
규모(規模) : 법 규(規), 법 모(模)
1. 본보기(本--)가 될 만한 틀이나 제도(制度).
2. 사물(事物)이나 현상(現象)의 크기나 범위(範圍).
3. 씀씀이의 계획성(計劃性)이나 일정(一定)한 한도(限度).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따라야 할 규모 있는 행동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습니다. 특히 6절에서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들에게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규모란 말은 본보기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 본보기로 자신의 행동을 보 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이라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보낸 서신으로 일러준 교훈을 의미합니 다. 이런 것들을 지키지 아니하는 형제들에게서 떠나라고 한 것입니다. 1. 바울이 보인 규모 있는 생활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교회 앞에서 규모 있는 생활을 한 일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습니다. (1) 첫째로 수고하지 아니하고 양식을 취하는 자에 대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했습니다. 바 울은 그리스도인 중에 일하지 않고 먹는 게으른 자들에 대해 이처럼 경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바울은 '누구에게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했다'는 사실을 경종 했습니다. 바울이 이런 생활을 한 것은 아직 신앙적으로 어린 처지에 있었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물질적인 폐를 끼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장애가 될 것을 우려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그런 누를 끼칠 만한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목회자는 복음으로 살아야 할 하나님의 일 꾼들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의당 모든 생활비와 활동비를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초기 에 그런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덕을 세운 것입니다. 모든 목회자들이 본 받을 만한 미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일하지 않고 먹는 자는 일종의 기생충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규모 없이 행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일하지 않은 이유는 주 재림의 긴박성 때문에 일하는 것도 배우는 것도 필요 없다는 경망스럽고 잘못된 종말관 에서 온 것입니다. 또한 신비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 구하면 주신다고 하신 일, 염려하지 말고 구하라고 하신 말씀 등을 잘못 오해 한데서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은 결국 교회에 누를 끼치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신앙적인 나쁜 영향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류의 사람들에게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엄히 책망하였습니다. 2. 게으른 자의 경우 일하기를 싫어하는 자는 게으른 자를 말하는데 이 게으른 자에 대한 교훈이 잠언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잠20:4절에서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기를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잠19:15절에서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나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십계명에도 엿새 동안에 힘써 네 모든 일을 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을 하되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생활 지침이 있습니다.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교회를 봉사하는 일에는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하나님은 게으른 자에게 명하시기를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하셨습니다. 잠12:27절에서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 시128:2절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어떤 모양으로 받느냐?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도에 행하는 자로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고 하셨습니다. 손의 수고가 없으면 하나님의 축복도 만들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에게 해야 할 일 바울은 14절에서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 같이 권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순종치 않는 자들에 대한 우리의 처신에 대하여 그 사람을 지목하라고 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과의 교제를 삼가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교제란 일반적인 교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로서의 교제로 이런 사람들과는 일정한 신앙적인 경계선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끄럽게 하라는 말은 그런 생각에 동조하지 말고 책선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람들과 곧잘 어울려 한 무리가 되는 경우조차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이나 생활이나 헌신이나 규모 있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와 평강의 하나님이 시므로 우리의 생활에서 그런 열매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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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를 마감하면서 성도들에게 규모 있는 생활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규모 있는 생활이란 열심히 일을 하여 자기가 번 돈으로 생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규모 있는
생활을 하라고 권면하는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중에는 주님께서 곧 재림하신다고 믿고 하던 일을 그만 둔 이유로 먹을 것이
없어 다른 교인들의 가정을 빙빙 돌면서 폐를 끼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몇 년 몇 월 며칠에 주님께서 재림하신다고 믿고 재산을 다 처분하여 교회에 바치고 일도 안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도 않고 재림의 날만 기다렸던 한국의 어떤 재림 주의자들과 흡사한 일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일부 교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열망하는 것은 좋지만 열망이 지나쳐서 일상 생활의 일들을 다 팽개쳐서 먹을 것이 없어 다른 교인 가정으로부터
얻어먹는 생활 태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밤에 도적 같이 오실 주님을 영접할 모든 성도들은 그가 언제 오시든지 오시는 날 까지 일상 생활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규모 있는 생활이란 노동의 축복과 노동의 가치와 노동의 신성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되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규모 없는 자에게서 떠나라(6, 11, 13-15)
둘째, 규모 있게 행하라(7-10,
12)
셋째, 마무리 인사(16-18)
규모 없는 자에게서 떠나라(6절, 11절, 13-15절)
사도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중 어떤 이들은 도무지 일을 안하고 이 집 저 집 돌면서 남의 가정에 폐를 끼치고 또 일을 만드는 자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을 두고 규모 없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남들은 다 열심히 일을 해서 자기 먹을 것을
해결하고 있는데 자기 혼자 잘 믿는 것 같이 일도 안하고 재림하실 주님만 기다린다고 하면서 먹을 것이 없어서 이 집 저 집
성도들의 가정을 돌면서 얻어먹는 교인이 있다면 그 교회 성도들은 그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겠습니까?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남에게 덕을 끼치고 유익을 끼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신앙을 핑계 대고 남에게 폐를 끼치고 있으니 이런 사람을 교회에서는
잘 가르쳐서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으로부터 떠나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서 떠나라는 말은
그런 사람을 멀리하라는 뜻입니다. 좀 냉정하게 대해주라는 것입니다. 친절하게 하면 자기의 잘못을 모를 것이기 때문에 좀 냉정하게
대하므로 스스로 자기의 잘못을 알아차리고 규모 있는 자가 될 수 있도록 하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대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권면하고 이 편지를 읽어주어도 변화 없이 이집 저집 돌면서 폐를 끼치고 말을 만드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과 사귀지 말고 따돌려 부끄럽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따돌린다는 한계는 원수같이 하라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형제이기 때문에 그가 깨닫게 하는 목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구해주고 고쳐주기 위해 일시로 냉정한 태도롤 보이면서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냉냉한 대접을 받는 그는 그 이유를 깨닫고 고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규모있게 행하라(7절부터 10절, 12절)
사도 바울은 규모 없는 자들을
향해 규모 있게 행하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종용히 일을 한다는 말은
개으르고 말만 만드는 것에 대조되는 뜻으로 입을 다물고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을 뜻하며 남에게 덕을 끼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입을 다물고 열심히 일을 하므로 자기들이 먹을 양식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을 하지 않게 되고 또 가난한
자를 구제할 수 있는 능력도 갖게 되므로 종용히 일을 하는 것이 성도로서 규모 있게 행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들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아무런 재정적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일을
하면서 자기들의 생활비를 해결했던 것을 강조하면서 그들이 보인 모범을 본받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생활비를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받을 권리가 없어서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고 또 일하는 것을 본을 보여 데살로니가 교회가
본받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보인 본이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전도 일을 하면서도 스스로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하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할 당시 그들에게 권하기를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여 열심히 일할 것을 이미 가르쳤음에도 데살로니가 교회 일부 교인들이 규모 없이 행함을 보고 규모 있는 자들이 되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무리 인사(16절부터 18절)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후서를 끝맺으면서 평강의
주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에게 있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때때로 풍랑이 일고 비바람이 쳐 믿음이 흔들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평강의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언제나, 어떤 일에도 평강을 주실 것을 기원한 것입니다.
첫째는 땀흘려서 벌어먹는 노동의 축복에 대해 바로 알라는 교훈입니다.
젊은 나이에 돈이 많아서 일찍 은퇴하고 날마다 집에서
놀고 있는 자를 두고 복도 많은 사람이라고들 부러워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할 수 있는 나이에 일할 수 있는 건강을 가진
자라면 일을 하지 않고 노는 자보다 일을 하는 자가 더 복된 자라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할 수 있는 일거리가 있는 자란
노동의 대가로 받는 돈의 가치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늙어서 은퇴하고도 몇 푼 받지 못한다해도 일을 하고
있는 노인들을 동정심으로 바라보지 말고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할 수 있는 일거리가 있다면 일하는
사람에게 여러모로 상당한 의미를 가져다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는 요즘 일자리를 잃었지만 가족과 이웃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직장에 다니는척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그들에게 묻는다면 노동의 축복이 얼마나 큰지 말해주리라 봅니다.
일할 수 있는 나이에 일할 수 있는 건강을 가진 자라면 그 일거리가 무엇이든 감사히 받고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천막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했습니다.
광주 그리스도의 교회 고 강순명 전도자는 전도 일을
하기 위해 칼을 갈아주는 일을 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그가 어떤 직업 또 무슨 일을 하느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남이야 어떤 관심을 가지던 일을 하는 나 스스로는 현재 나에게 일거리가 있음을 감사하고 만족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또 아니면 복권이라도 당첨되어 일을 그만 두는 것이 복이 아니라 늙어서라도 할 수만 있다면
끝까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복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가치는 땀을 흘려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미국에서 65세까지 일을 하게 한 것은 불행이 아니라 복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돈의 크기로 가치를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받는 보수는 직업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납니다.
심지어는 같은
직업에서 일하는 자들도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압니다.
같은 팀의 야구 선수 중에는 천만불짜리도 있고 백만불 짜리도 있고 십만불
짜리도 있다면 좀 이상하겠지만 이것은 현실입니다.
만일 십만불 짜리가 천만불짜리의 선수와 자기 처지를 비교한다면 맥이 빠지고 더
이상 선수 생활을 할 마음이 나지 않겠지요?
그렇다고 자기 인생의 가치가 천만불짜의 인생의 가치보다 100분의 일의 가치밖에
없다는 뜻은 전연 아닌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남이 받는 수입에 자기의 수입을 비교하므로 스스로 맥이 빠지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얼마를 받던 그 받은 돈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감사를 가지고 규모 있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게 벌었기 때문에 쓰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쓰지는 못하지만 성도로서 남에게 규모 없다는 말을 듣지 않고 덕을 끼치며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생은 돈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남보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즉 비교할 남이 없다면 자기가 불행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은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잣대가 전연
아님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돈이 많이 있거나 돈이 많이 없거나 성도의 일은 남에게 덕을 끼치고 기쁨을 주는 규모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노동은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어떤 일거리이든지 주신 일거리를 감사히 받아 성실하게 그리고 열심히 일을 해야 하며 남이 받는 돈과 비교하지 말고 노동의 대가로 받고 있는 그 보수에 감사하면서 성도로서 규모 있는 생활을 하시다가 주님 오실 때에 평등의 나라 천국에서 영원히 기쁨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데살로니가 후서는 바울이 자기가 개척해서 세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데살로니가에 파송했던 디모데로부터 이제 막 개척된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 가운데 굳건히 서서 아름답게 성장
하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기쁜 심정으로 몇 가지 교훈을 담아 첫 번째 편지를 디모데 편으로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편지를 전해주고 돌아온 디모데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문제의 교인들이 생겨났다는 것입니
다.
그 문제의 교인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또 어떻게 치리할 것인가를 권면하기 위해 다시 붓을 들어 편지를 써서 보내게 됩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 후서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생겨난 문제의 교인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하던 일도 다 그만두고 신앙 생활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먹고 사는 것 교회가 할 수 없어 구제하게 되고 성도들 중 손 대접하게 됩니다.
많은 민폐를 끼칩니다.
그리고 교회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고 참여합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면서 저들이 주장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일 할 시간도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일에만 헌신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한 마디로 규모 없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이런 사람들을 방관하지 말고 교회의 질서를 잡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규모있는 삶을 살라고 당부하고 있
습니다.
규모 있는 삶이란?
그러면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규모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본문 6절에 나오는 “규모 없이 행하다”는 헬라어로 ‘아타크테오’입니다.
이 말은 ‘아’라는 부정 접두어와 ‘탓소’라는 동사의 합성어입니다.
ἀτάκτως
스트롱번호 814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게으르게(살후 3:6,11).
규모없이 행하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탁토스 페리파툰토스'(ατακτως περιπατουντος)로 '빈둥거리며 무질서하게 노는 것'을 특별하게 지칭하는 단어이다(Morris).
여기서 헬라어 '아탁토스'는 원래 군사 용어로 '대열을 이탈한'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Robertson).
따라서 본 구절은 그릇된 재림관과 임박한종말의 지나친 강조로 인해 불성실하며 무위 도식하는 무질서한 생활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살전 5:14).
ἄτακτος, ον
스트롱번호 813
뜻풀이부
1. 질서가 없는, 제자리를 떠난, 불복 종하는, 게으른, 살전5:14.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게으른(살전 5:14).
여기서 탓소는 군대 용어입니다.
그 뜻은 “배치하다”라는 말입니다.
엄격한 군대 질서를 따라 직위를 주고, 그 직위에 따른 역할
과 책임을 부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부정 접두어 ‘아’가 붙었기 때문에 그 의미는 반대가 됩니다.
그러니까 규모 없이 행하다는 말은 직위를 무시하고 제 멋대로 행동하고,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규모 있게 행동한다는 것은 어떤 상황이 닥쳐도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온다고 해도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의 일꾼들이 어떤 고난이 닥쳐온다고 해도 맡겨주신 그 자리를 지키고 해야 할 역할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편과 아내
가 어떤 위기 속에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해야 할 역할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용자와 노동자가 어떤 어려움 속에서
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자기 역할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사회에 규모 없이 행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자기 사명을 외면하고 자기 역할을 내 버린 주의 종 주의 일꾼들이 넘쳐납니다.
자기 위치를 벗어나고 자기 할 일을 내버린 아내, 남편, 엄마, 아빠, 자식들이 넘쳐납니다.
자기 직분을 망각하
고 자기 할 일을 게을리 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넘쳐납니다.
첫째, 그리스도인다운 현실 감각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 대학에서 고급 관리자로 근무하였던 어느 교직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기독교 대학이므로 교회에서 대심방을 하는 시기가 되면 직원들이 저마다 일찍 퇴근을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심방을 오시기 때문에 퇴근하고 집으로 가서 심방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이야기같지만 직장은 분명히 직장입니다.
직장의 일과 가정의 일 그리고 교회의 일은 분명하게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당시 일부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한다는 핑계로 자기의 위치를 저버렸습니다.
자기가 할 일을 외면했습니다.
가정 일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습니다.
직업도 내려놓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규모 없이 행하는 것이라고 질책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7-8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어떻게 우리를 본 받아
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
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아직 교인들이 믿음의 초보였기 때문에 주의 종을 물질적으로 뒷바라지 할 수준이 되지 못했습니
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직업 즉 텐트 만드는 일을 하면서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본을 보이
기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 주의 일을 했던 것입니다.
한
번은 중소기업을 운영하시는 한 장로님을 뵈었습니다.
“목사님 교회 청년들을 잘 지도해주십시오”
“왜 그러시는데요”
믿음이 좋다고 해서 청년 하나를 채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직장에서 일하는 태도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마치 교회 봉사하듯 하더
라는 것입니다.
급한 일이 있어 모두 쩔쩔매고 있는데 교회 모임이 있다고 나가더랍니다.
직장에서 일하던 도중에 교회 일한다고 펼쳐
놓고 있더랍니다.
장로가 운영하는 직장이니까 다 이해하고 또 그렇게 하도록 오히려 적극적으로 뒷바라지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태도라
는 것입니다.
현실 감각을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직장에서는 직장인으로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또 가정 일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회에서는 또 사회인으로서 자기 맡은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믿음이 좋다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주의 일과 세상일을 구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우선순위를 두고 선택하려
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제나 주의 일을 먼저하고 그리고 시간 나면 세상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으
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의 일과 세상 일을 구분하라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주신 것이면 그것이 교회에서 하는 일이든
지, 직장에서 하는 일이든지, 가정에서 하나는 일이든지 모두가 다 주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들이
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일들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해서 할 일이 아니고 모두 다 함께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either or"의 문제가 아니
고 “both and"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교회 일을 한다고 직장 일을 등한히 해서 직장에서 손가락질 받는 것 하나님께서 기뻐하
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교회 일 한다고 가정 일을 소홀히 하는 것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러 일들이 때로 상충되어 우선 순위 상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선택의 기준은 기계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
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을 원하실까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를 하고 다른 하나를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다른 현실 감각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칭찬받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존경 받는 직장인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사랑받는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규모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땀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수고의 땀을 흘리는 것이 고귀한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복권을 구입하여 1등 당첨이 되면 십일조 헌금을 바치고 그 후에 나머지는 교회 건축 헌금으로 바치고 그리고 또 일부는 집을 구입하겠다는 생각은 땀의 댓가가 없는 헌신이라고 하겠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일부는 일하지 않고 무의도식하며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땀 흘리지 않고 남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규모 없는 사람들이라고 질책했습니다.
1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일을 해서 정당한 소득으로 생계를 꾸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노동하도록 명하셨습니다.
노동의 결과로 생계를 꾸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노동의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노동을 통해서 수고의 열매를 먹게 하셨고, 노동을 통해 보람과 기쁨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노동은 의무임과 동시에 축복입니다.
바로 여기에 땀의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그런 말을 듣기 힘든데 저 어려서 어르신들이 “이 불한당 같은 놈들”하며 꾸짖으시는 이야기를 흔히 들었습니다.
도둑떼, 강도떼를 뜻하며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 뜻을 알고 보니 아니 不, 땀 汗, 무리 黨을 써서 “땀을 흘리지 않는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땀 흘려 일해서 소득을 얻는 것이 아니고 남의 소득을 가로채거나 거저 얻으려드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불로소득(不勞所得)을 탐하는 자들을 말합
니다.
한번은 한 목사님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었다면
서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초신잔데 로또 복권을 들고 찾아왔더랍니다.
어젯밤에 돼지꿈을 꿨는데 꿈이 심상치 않더랍니다.
분명히 돈과 관련해서 좋은 조짐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로또 복권을 샀답니다.
그리고 계획을 세웠답니다.
십일조를 내고 또 그 나머지 반은 교회 건축 헌금을 내리라... 아무래도 목사님께서 기도해 주시면 1등이 될 줄로 믿고 기도 부탁하러 왔더랍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불한당입니다.
투기를 한다든지, 사행심을 쫓는다든지, 일확천금을 꿈꾼다든지, 대박을 노린다든지... 이런 사람들은 땀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결코 땀의 축복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우나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몸이 찌뿌두둥할 때 사우나에 가서 땀을 쫙 흘리고 나면 얼마나 개운한지 모릅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등산을 한다든지 운동을 해서 땀을 비 오듯 흘리고 나면 얼마나 상쾌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땀 보다 더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수고의 땀입니다.
농부가 여름 내내 농사지으며 흘린 땀은 방울방울 알곡이 되어 보람의 열매를 거두며 참된 기쁨을 맛보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땀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규모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셋째, 시류(時流)를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 불한당처럼 규모 없이 행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또 나름대로 규모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들
이 규모 없이 행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 마음 가운데 억울한 마음이 듭니다.
“저들은 저렇게 놀고먹는데, 그러면서 신앙 좋
은 척은 다 하는데 우리는 무엇인가? 뼈 빠지게 일하고 저들 뒤치다꺼리나 하고...” 낙심하는 마음이 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
다.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런 사람들에
게 1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마음 흔들리지 말고 계속해서 규모 있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주변 시류에 휘말리지 말고 나름대로 소신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계속되
고 있지만 미국이나 카나다 시민권을 얻게 해 주려고 아이들을 미국이나 카나다에 가서 출산하는 사람들이 유행처럼 열풍이 일고 있었
던 때입니다.
우리가 시류에 편승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 편법을 행한다고 나도 따라 할 수는 없습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합니
다.
뜻이 아니면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잠시의 손해가 오고 불이익을 당한다고 해도 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다 살고 나면 하나님 앞에 설 것이고 그때 하나님의 평가가 있습니다.
그 평가의 기준은 “하나님 앞에 정직했느냐 그렇지 못했느냐”입니다.
시류를 따르기 보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모두가 “yes" 할 때 ”no" 할 수 있
어야 합니다.
또 모두가 “no"할 때 ”yes"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규모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규모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자리를 지키고 할 일을 다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May the Lord direct your hearts into God's love and Christ's perseverance.
살전 3: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날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려는 것은 모든 성도들의 삶의 목표라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표를 따라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 목표를 따라 살아가지 못했던 이유는 목표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은 완전한 영의 조건에서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완전한 육체를 갖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 목표가 육체적인 조건에서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조건 가운데서도 분명한 목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목표를 본문에서 두 가지로 강조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라
사랑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만을 채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자녀가 잘못된 길에서 방황 할 때는 가혹하게 채찍을 들어야 합니다.
사랑의 채찍은 사랑을 온전하게 실현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라
그리스도의 인내란 궁극적으로는 십자가의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감당하기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려면 죄를 들추는 비판의 자세가 아니라 죄를 덮어 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려면 성령의 임재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허물을 덮어줄 수 있는 사랑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인내의 열매를 얻기 위하여 오늘도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복한 믿음의 길을 다 함께 걸어갑시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하나님의 사랑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텐 아가펜 투 데우'(*)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냐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이냐로 다르게 해석되어질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 혹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Calvin, Meyer, Hendriksen)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바울이 그 서신서에서 사용하였던 표현 양식이기 때문이다(롬 5:5, 8; 8:39; 고후 13:13).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문맥상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이라고 주장한다(Alford, Hiebert).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전자(前者)와 후자(後者)의 개념으로 분리된 의미가 아니라 이 두 가지 개념 모두를 포함한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의 대상으로서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지배 원리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사랑하게 하는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행한 인간의 사랑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사랑과 더불어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인내
-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넨'(*)은 혹독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그의 목적과 신앙에 대한 충성을 지키는 사람의 특징을 지적하는 단어이다(Grim-Taylor).
본 구절도 앞 구절과 같이 두 가지, 곧 '성도를 위한 그리스도의 인내'와 '그리스도를 향한 성도의 인내'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모든 박해를 참고 견디신 그리스도의 인내를 의미하며, 이차적으로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인내를 본받아 인내하는 태도를 가리킨 것으로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Morris).
그리스도의 인내란?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십자가 속죄제물로 바치는 것을 완수하는 인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의 위로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사도행전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믿음이란 중심이 분명해야 합니다.
믿음의 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신명기 32:20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고 그들의 종말의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종류요 무신한 자녀임이로다.
사도 바울은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이 말씀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전한 것이라고 할 때 오늘의 시대에도 교회에 다니는 모든 교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하여 두 가지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첫째는 복음이 신속하게 전파되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기도하라
둘째는 악한 무리들로부터 안전하게 다닐 수 있기를 기도하라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가 대략 기원 후 51년경에 기록된 말씀이었다면 오늘의 시대는 그때보다 더 악한 시대가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세월이 지날수록 믿음이 점점 더 확장되고 굳세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의 역사가 더 강성하게 나타나는 시대가 되었기에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일까요?
믿음을 세 종류로 구분합니다.
믿음은 복음에 대한 반응으로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응이며 동시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
본능적인 믿음
본능적인 믿음이란 사람이 태어나면 부모를 의지해야만 생존이 가능하듯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은 본능적으로 무엇을 믿어야 만 합니다.
둘째, 이성적 믿음
이성적인 믿음이란 무엇을 믿어야 하되 교육과 경험 또는 과학으로 입증된 사실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영적 믿음
영적 믿음이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체에 갇힌 영적 존재로서 사람은 영적인 믿음을 가져야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이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영적인 믿음을 모든 사람이 가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도 영적인 믿음으로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믿는 일에 성공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합시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예를 들면 갓난 아기는 태어나서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자기 엄마와 아빠에 대한 본능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안아주면 웃고, 아줌마가 안아주면 운다.
또한
우리 모든 인간들은 우주의 질서와 법칙에 대한 본능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우리 가운데 혹시 내일 동쪽에서 해가 뜨지 않을까봐
불안해 하면서 잠자리에 드는 분 계신가요? “길을 걸어가면서 저 하늘이 무너져 내리면 어떡하나,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땅이
꺼져 내리면 어떡하나” 염려하면서 길을 걷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앉으나 서나
두려움과 염려에 사로잡혀서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가기가 힘들 것이다.
둘째, 이성적인 믿음
이성적인 믿음은 본능적인
믿음에 더해서, 교육과 경험 또는 과학으로 입증된 사실에 관해 의심하지 않고 믿는 믿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동차든
전철이든 비행기든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고철 덩어리에 우리의 생명을 맡길 수 있는 이유는 그것에 대한 “이성적인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의사에 대한 이성적인 믿음이 없이 어떻게 자신의 몸을 의사에게 맡길 수 있겠나? 은행에 우리의 평생 모은 돈을
맡길 수 있는 이유는 은행에 대한 “이성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것이 “본능적인 믿음”이든, “이성적인
믿음”이든,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면, 바꿔 말해서,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불신만으로 가득하다면
그 사람은 정상적인 사회생활, 인간다운 생활을 하지 못하고 온갖 두려움과 염려, 근심과 공포에 사로잡혀서 결국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말라 비틀어지게 될 것이다. “공황장애”가 그런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본능적인 믿음이나 이성적인 믿음이
다양한 이유로 인해 허약해진 것이다.
셋째, 영적인 믿음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인 믿음과 이성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본능적이고 이성적인 믿음만 가지고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본능적인 감각으로는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가 없고, 인간의 이성으로는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물질세계를
초월한 영적인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에게 “영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우리의 본능이나 이성으로 바라볼 때 얼마나 미련한 일로 보이나? 그러나 하나님은 그 미련한 방법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셨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우리의 본능이나 이성이 아닌 “영적인 믿음”으로 십자가를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시작되었고,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누릴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영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진실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 하나로 그의 놀라우신 역사를 경험하고
축복받은 사례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경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바로 왕의 제한과 통제를
이기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독자 이삭을 기꺼이 번제로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여 그의 자손이 큰 나라로 되게 하셨습니다.
욥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두
차례의 시험 앞에서도 굳게 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곱절로 받게 됐고,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주님이 자기 딸에게 들어간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주께 간구했고, 결국 믿음으로
말미암아 딸의 병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 밖에도 많은 사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진실한 믿음에 관한 진리를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래야 직장에서 손해를 보거나 현실 생활에서 좌절을 당하거나 가정에서 힘든 상황을 겪게 되는 등,
많은 어려움과 연단을 겪어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따라갈 수 있으며, 굳세게 서서 참된 간증을 하고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믿음’이라는 주제를 보면 매우 자신 있게 ‘나는 하나님을 100% 믿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으로 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 증명할 수 있다.’
또는 ‘난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는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속량하셨으니 주님께 회개하면 주님은 언제든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것도 주를
향한 믿음이 아니겠는가?’
혹은 ‘주님을 믿는 동안 나는 직장도, 가정도, 사업도 뒤로한 채 주의 일에 매진했다. 곳곳을 다니며
교회를 세웠고, 많은 고난을 받아도 불평하지 않았다. 이것도 주를 향한 믿음이 있다는 증거다’라는 등등의 말을 할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는 신념은 진실합니다.
그리고 열정적으로 주의 일을 위해 헌신하고 고난을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 그러한 것들이 과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진실한 믿음을 상징할까요?
이 문제는 신실한 믿음과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토론하고 나눌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일상 속에서 드러나는 삶과 이러한 모습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사실의 검증 앞에서 굳게 서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이 참하나님이시고, 우리의 구주이심을 인정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인정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을 상징하지 않으며,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배신하지 않는다고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것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 이익을 취하는 기초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참되지 못합니다.
그럼 진실한 믿음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어떤 모습들이 진실한 믿음을
상징할까요?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든, 네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언제나
생명을 추구하고 너에게서 하나님의 사역이 행해지기를 추구하고, 또 진리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행사를 알고 진리대로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참된 믿음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네가 하나님에 대해 희망을 잃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네가 연단 속에서도
진리를 추구하여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에 대해 의심이 생기지 않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계속 진리를 실행하여 그를 만족게
하고, 깊은 곳에서 그의 뜻을 구하고 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있는 것이다. 』
이로써, 진실한 믿음이란 고난이나 연단, 좌절과 실패를 당하고 또는 몸과 마음이 큰 고통을 당하는 등 어떤 상황에 처해도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순종하는 자세로 임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욥의
체험을 함께 살펴봅시다. 그럼, 진실한 믿음이 어떤 것인지 더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이삭이 조금 자랐을 때, 하나님은 그
아이를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많은 사람의 생각과 잘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그런 시험이 닥친다면, 무조건 하나님과 따지고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선택은 모든 이의 예상을 빗겨 나갔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따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께 순종했으며, 진심으로 이삭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려 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창세기 22:3, 9~10)
인간은 육에 속한 존재라 감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생기면 마음이 몹시 괴롭고 아프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분부대로 따랐습니다.
그가 그렇게 이성적인 자세로 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들 이삭은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돌려 달라고 할 때, 아브라함은 당연하다는 듯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으며 절대적으로 순종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이
찢어지듯 아프더라도 자신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려 했던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진실한 믿음과 순종으로 인해 하나님께
인정받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말리셨고, 그를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고 그의 후손들을
크게 성하게 하여 큰 나라를 이루게 하시겠다고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아브라함이란 이름의 뜻은 ‘열국(列國)의 아버지(창세기 17:4~5)’
원래 이름은 아브람(Abram. 큰
아버지)이었는데,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아브라함으로 개명한다.(창세기 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성경을 보면, 욥은 큰 부자였고 십여 명의 자녀와 많은 시종을 두었으며, 그 지역에서 존경받는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시험과 공격으로,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었고 몸에 악창까지 났습니다.
이러한 시험으로 욥은 동방의
가장 큰 자에서 일전 한푼 없는 사람으로 전락하였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비난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큰 시련을 당하면서도
욥은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고 도리어 엎드려 경배하며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기 1:21)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기 2:10)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욥은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찾고 구했습니다.
이는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었으며,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욥은 만사가 하나님께 달렸으니 자신에게 닥친 일도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욥은 수십 년의 인생을 살면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소유한 모든 재산도 자기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서 다시 취하시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순종하며, 요건을 따지거나 불평하지 말며, 설령 자기 목숨을 취하신다고 할지라도 절대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욥의 간증 앞에서 사탄은 수치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폭풍 가운데 나타나셨고, 욥에게
곱절로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욥의 사례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을 갖추려면,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사를 주관하심을 믿으며, 피조물의 자리에 서고, 피조물로서의 이성을 갖춰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어떤 큰 시련이나
환란이 닥쳐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배반하지 않고, 변함없이 하나님 편에 서서 흔들림 없이 따라가야 합니다.
아무리 큰 고통이
따를지라도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실한 믿음을 갖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변의 어떤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무신론 정권인 중국 정부의 박해를 당하고, 심지어 가혹한 고문과 중형에 처해져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배반하지 않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도 진실한 믿음을 갖춘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후, 가족이나 친구에게 버림받고, 혹은 여러 가지 불행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을 따라가며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진실한 믿음을 가진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에 비춰 볼 때, 우리 자신은 과연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일까요?
대부분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100% 인정하는 믿음, 주님을 위해 전도하면서
고난을 조금 받고 정도의 믿음만 있을 뿐, 진실한 믿음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욥이 살았던 시대의 연대를 정확히 산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책 안에 동시대의 역사적 사실이 직접적으로 언급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이 아브라함 당시와 거의 유사한 시대(족장시대)에 존재했던 인물이라는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는 근거들은 존재한다.
첫째, 욥의 생존 기간이 족장들의 나이와 비슷하거나 초월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창 25:7)
둘째, 욥의 부귀의 정도가 가축의 수효와 거느리고 있는 하인들의 수를 통해서 말해지는 기록(1:3)이 제시되고 있다.
이는 족장시대의 관례와 일치한다.
셋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등의 족장들과 마찬가지로 욥 또한 자기 가문의 제사장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 점은 시내 산에서 정식적인 제사장 제도가 확립된 이후의 것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점이다.
넷째, 족장시대보다 훨씬 이후의 내용인 출애굽 사건이나 모세 율법등에 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섯, 족장 시대에는 하나님께 대한 대표적인 호칭이 '샤다이'였는데, 욥기서에서도 이 호칭이 무려 31회나 사용되고 있다.
여섯, 화폐 단위가 족장 시대때 사용되던 화폐의 단위 '크시타'라는 점이다. (42:11)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수 24:32)
그러므로, 진실한 믿음을 갖추려면 매일 마주하게 되는 사람이나 일 속에서 하나님의 주재를 알고자 추구해야 하며, 하나님이
마련하신 상황이 아무리 내 뜻에 맞지 않고, 내 이익에 보탬이 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피조물의 자리에 서서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나아가 그런 환경을 마련해 주신 하나님의 고심을 알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겪어 나가면 우리는
늘 얻는 것이 있을 것이며,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행사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도 진실한 믿음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욥의 믿음도 타고난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은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의 주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알기 위해 노력했을 때, 조금씩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을 본받아 삶 속에서
하나님의 주재를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을 중시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려고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진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면, 어떤 고난이나 시험이 닥쳐와도, 우리의 육체나 마음이 몹시 괴로운 일을 당해도,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꿋꿋이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적극적으로 찾고, 하나님의 주재와 섭리에 순종하며 굳게 설
수 있습니다.
오늘은 믿음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믿음에 대한 기본이해부터 좀더 심층적인 부분까지 나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글은 명사와 동사, 또는 동명사 등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고 사용합니다. 물론 저도 그럴 것입니다. 이것은 한글이
갖는 특성 때문에 모든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간략하게 이러한 용어와 사용법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믿음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믿음은 믿는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동사적 성향이 매우 강합니다. 나는 너를 믿는다고 말할 때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하는 것입니다. 믿는 것, 자체를 믿음으로 규정합니다.
동사로서의 믿음은 누군가를 신뢰하는 행위로서의 믿음이다. 명사로서의 믿음을 규정하는 것이라며, 동사로서의 믿음은 관계적입니다. 즉 ‘나는 너를 믿어’라고 말하면,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이 갖추어야할 기본적 요소를 발견합니다.
먼저는 믿는 사람이 존재하고,
둘째는 믿는 대상이 존재하고,
셋째는 믿는 내용이 존재합니다.
예를들어봅시다. ‘나는 너를 믿어’라고 말했다며,
나는 네가 방금 ‘민수가 학교에 갔어’라고 말한 것을 믿어. 왜냐하면 너는 지금까지 나에게 거짓말한 적이 없거든. 그리고 너의 말을 신빙성이 있아 보여.
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3요소입니다. 저는 이러한 믿음의 3요소를 구분하여 믿음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믿음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할 부분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과 내용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봅시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시간과 역사를 주관하시며, 만물을 통치하시는 능력의 주인이십니다. 이러한 정의는 과도하게 간략하지만 명확한 정의입니다. 하나님을 계명을 주셨고, 그 계명을 사람들이 어김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작정하시고 보내주십니다. 순종의 삶을 살았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함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죽은 지 사흘만에 살려내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십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인류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구약 성막에서 드렸던 제물의 본질이십니다. 모든 죄를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하십니다.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오르십니다. 천상에 계신 예수님은 보좌에 앉으셔서 영원히 통치하십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믿음의 내용이며 대상입니다.
믿음은 사실의 인지를 너머 확신과 신뢰로 나아가야합니다. 믿음의 과정은 사실의 인지, 사건의 이해, 사건의 확신과
신뢰로 나아갑니다. 이 과정에서 성령이 역사하여 온전한 믿음의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조직신학적 용어로 이 과정을 ‘구원
서정’이라고 부릅니다. 9과정으로 나누어 설명을 하지만 엄밀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명-중생-회심-믿음-칭의-양자됨-성화-성도의 견인-영화
①소명(calling)
②중생(regeneration)
③회심(conversion)
④신앙(faith)
⑤칭의(justification)
⑥입양(adoption)
⑦성화(sanctfication)
⑧견인(perseverace)
⑨영화(glorification)
구원서정은 후에 따로 다루고 오늘은 믿음의 과정만을 간략하게 다룹니다.
사실의 인지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사실, 또는 성경에 기록된 구속사적 사건들을 말합니다. 역사적 사건을 누구나 믿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성경은 신화나 예수님의 역사적 사건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은 역사적 사건에 뿌리는 둡니다. 가상으로 꾸며낸 이야기에 근거하지 않고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는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믿음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성경의 기록된 사건들이 역사적 사건이란 사실을 믿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두 번째 확신의 단계는 그 사건이 나를 위한 사건으로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단지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나를 위한 것으로 받아 들아들이는 것으로 확신하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마지막 신뢰의 단계는 나의 삶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삶을 말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하고, 계명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삶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1. 이끄는 말
기독교에 대한 진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아주 흔하게 사용되는 용어 중의 하나가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행위를 총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용어가 바로 '믿음'이며,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하는 것도 도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어서나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규명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진리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 전달하는 자나 전달을 받는 자가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같이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용어를 전달하는 자와 전달을 받는 자가 서로 다른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면 정확한 진리의 내용 전달이 불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같은 내용을 서로가 다르게 이해하고 견해를 달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진리를 전하는 데 있어서 의미상으로 비중이 큰 믿음이라는 용어에 대한 바른 이해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전해진지 100여 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교회는 외형적으로 천만이 넘는 신자이 수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문제는 신자들의 믿음이 모두가 동일한가라는 질문에는 선뜻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가 주저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근본을 달리하는 구교를 제외하고는 개신교 안에서 만도 명칭을 달리하는 교단이 수십 개나 되고, 명칭은 같이 사용하면서도 교단을 달리하는 경우는 그 수를 정확히 파악 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많은 분파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들 교단들이 더러는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더러는 믿음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가 있겠으나 그 중에 아주 중요한 것은 '믿음'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매우 놀라운 사실은, 같은 교단은 물론, 같은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 사이에도 믿음에 대한 견해는 각기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모두가 '믿음'에 대한 성경적인 정확한 인식이 충분하지 못한 데서 발생하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경적인 정확한 해답을 찾아 제시함으로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의 일치를 꾀해 보려고 한다.
2. 믿음이란 말의 뜻
구약에서 믿음이라는 뜻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히브리어는 '에문'이라는 단어로서 '확고함'이라든가 '불변'이라는 원래 이 뜻에서부터 '신뢰'라든가 '성실성'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이 외에도 '빠타'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말은 세속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종교적 의미로도 사용이 되고 있다. 이 단어는 비교적 다양한 의미로 사용이 되기는 하지만, 이 단어의 정확한 실제적인 의미는 성도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바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신앙적 지각에 대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안전함'이라는 뜻과 '확신함' 또는 '신임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중에는 '하사'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주로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그 듯은 '피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피하다'라는 의미는 성도가 하나님께 자신을 도피시켜 의지한다는 뜻에서 사용되는 말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용어들 외에도 '믿음'이라는 개념으로 구약에서 사용되고 있는 히브리어들이 많이많이 있으나,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헤세드'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사용하는 폭이 넓어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자비'라든가, 사람이 하나님께 가지는 '경건심'이나 '신앙심'이라든가, 또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지게 되는 '긍휼'이나 하나님의 언약 아래서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 등으로 사용이 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심을 형성케 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말이다. 그리고 이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그 백성에 대한 신실하심, 곧 미쁘심(faithfulness)을 표현하는 데에는 아주 적합한 용어인 것이다.
신약에서는 '믿음'이라는 개념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용어들은 거의 대부분
'피스티스'라는 헬라어 어의 군에 속하는 용어들이다. 그 중에 하나가 '피스튜오'라는 동사인데 '믿는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그리고 '피스티스'라는 헬라어는 하나님을 믿는 인간의 믿음(faith)이라는 의미로 사용이 된다. 또한 '피스토스'라는 헬라어
형용사는 하나님의 지극하신 '미쁘심'을 나타내는 경우와 하나님의 말씀과 약 속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경우, 또는 기독교 진리의
미쁘신 상태를 나타내는 경우 등에 사용되는 용어이다.
3. 믿음의 속성
믿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그 속성을 먼저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안에 믿음의 속성에 대한 오해가 많이 있어서 기독교 사이비 신앙운동이 범람하는 근본 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기독교 정화에 기여도가 높은 해결 과제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몇 가지의 중요한 속성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속성들은
주권성, 은혜성 등으로 정리된다. 이들 속성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성경에서는 확실하게 밝혀주고 있어서 믿음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
1. 주권성이다
기독교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주권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믿음이 임간 의지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안에 속하여 뜻을 표현하는 말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믿음을 자기 스스로의 육체적 욕망에서 나오는 신념과 혼동해서 이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면 인간 욕망으로부터 나오는 '하면 된다'고 하는 소위 긍정적 사고의 경우가 바로 그 한 예가 되는 것이다. 이같은 경우는 어디까지나 인간 스스로의 욕망을 기초로 한 고집의 산물로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는 거리가 너무도 먼 것이다.
성경적인 믿음은 인간 편에서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믿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 적으로 주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게 하시면 인간 편에서는 절대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 말하기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하였다. 즉 인간이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이다.
2. 은혜성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적인 믿음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은혜의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믿음을 주실 때에 인간의 공로나 의를 조건으로 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을 따라 택한 자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적인 믿음은 은혜의 속성을 가지기 마련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말하기를"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다. 이 내용은 성도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성도 자신의 공로나 의의 대가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자의 것이 아닌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도 아브라함 자신의 의지적 결단에 의해 하나님을 믿으려고 노력한 결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을 따라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일방적으로 부르셔서 언약을 세우시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은혜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적인 믿음은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을 따라 택한 백성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주관에 의하여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서 믿게 하시면 인간은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의 올바른 믿음인 것이다.
4. 믿음의 조건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 자의 것이 된다. 그런데 이 믿음의 조건은 인간 편에서 갖추어야 할 주관적인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갖추어 주시는 객관적인 조건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믿음을 주셔서 믿게 하시기까지는 몇 가지 갖추어 놓으신
조건이 있으시다. 그것은 성부 하나님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과, 성자 하나님의 영원하신 속죄와,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중생이다.
1. 성부 하나님의 선택
영원한 스스로 계시는 성부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아들들이 될 자들을 미리 선택하셨다. 이것이 곧 믿음의 첫 번째 조건이다.
성경적인 믿음은 인간 자신의 의지적 결정에 의한 판단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 적인 섭리에 따라서 은혜의 선물로 거저 주어지는 것인데, 바로 그 믿음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로 선택해 놓으신 자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구원에 이르는 참 믿음을 은혜의 선물로 주시지 아니 하신다.
하나님께서 택자에게 믿음을 주셔서 구원을 얻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주관적인 섭리에
대하여 바울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고 말했다.
2. 성자 하나님의 속죄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구속주로서 세상에 오신 성자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의 죄를 영원히 속죄하여 주셨다. 이것이 곧 믿음의 두 번째 조건이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세상 모든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여 주시려고 죽으신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 미리 선택된 백성들의 죄만을 영원히 대속하여 주시려고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 하나님의 속죄는 당연히 믿음의 조건이 될 수밖에 없다.
믿음과 속죄와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속죄가 믿음의 조건이지 믿음이 속죄의 조건은 절대로
하나다. 다시 말해서 성자 하나님의 속죄를 받아야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는 것이지, 믿음을 선물로 받아야 속죄를 받는다는
말이 아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는 성도에게 믿음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속죄도 은혜이며 믿음도 은혜이다.
3. 성령 하나님의 소명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신 성령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선택이 되어 영원한 속죄를 받은 자를 불러 거듭나게 하신다. 이것이 곧 믿음의 세 번째 조건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불러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성자 하나님께서 속죄해 주신 자만을 정하신 대에 부르셔서 거듭나게 해 주신다. 그리고 이와 같은 놀라운 복음을 성령 하나님께서 감동하셔서 거듭난 자에게 깨닫게 하심으로 믿음을 가지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의 소명, 즉 부르심에 의한 거듭남의 역사는 당연히 믿음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거듭남의 역사는 믿음과 직접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부르심에 의한 거듭남의 역사나 복음을 깨닫게 하여 믿음을 가지도록 하는 역사는 모두가 같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인 점에서 관계가 깊다. 그리고 도한 성령의 부르심에 의한 거듭남의 역사가 믿음의 직접적인 조건이 된다는 점에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적인 믿음은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선택하심과 성자 하나님께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심과 성령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거듭나게 하심을 그 조건으로 삼고 있다.
5. 믿음의 대상
일반적인 종교들은 그 믿음의 대상을 각기 달리한다. 어떤 종교에서는 조상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어떤 종교에서는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우상이나 혹은 피조물들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일반적인 이방종교들과는 달리 기독교 특유의 분명한 믿음의 대상을 가지고 있다.
성경적인 믿음은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 여호와와 신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믿음의 직접적인 대상이시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간접적인 믿음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믿게 하시려고 신약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계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1. 하나님 여호와
성경적인 믿음은 하나님 여호와를 믿음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는다. '하나님'은 '전능한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여호와'는 '약속대로 이루시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여호와는 전능하셔서 약속대로 이루시는 자라는 듯을 가지고 있는데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분이라는 뜻으로도 이해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 여호와께서 성경적인 믿음의 직접적인 대상이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나 주신 다음, 여호와로도 알려 주시기 위하여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나라를 세우도록 해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이스라엘 열조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하신 대로 다 이루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언약하신 대로 이루어 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 여호와를 알게 해서 믿고 경외하게 하시려는 뜻에서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믿음은 전능하셔서 언약대로 이루시는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 여호와를 믿음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
성경적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간접적인 대상으로 삼는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히브리말로는 '메시야'라고 한다.
메시야는 약속대로 이루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어 주시기로 약속한 구세주이다. 구약에서 기름을 부어 세우는 선지직이나 제사직 그리고 왕직은 모두가 여호와께서 보내어 주실 메시야 약속에 대한 모형적이며 그림자적인 직임들이다. 그러므로 참 메시야는 선지직과 제사직 그리고 왕직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예수는 이 세 가지 직임을 모두 가지고 계신 자이기 때문에 예수는 그리스도(메시야)가 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적인 믿음의 간접적 대상이 되시는 것은 구속주로 오신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이 약속대로 이루시는 여호와가 되심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기 대문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 하는 이유는 구약에서 증거 하는 대로 하나님이 여호와가 되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적인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직접적인 대상이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간접적인 대상이 되신다.
6. 믿음의 실제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성경적인 믿음의 실제 곧 참 상태는 어떠한가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실제에 대하여 말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고 하였다.
1. 바라는 것들의 실상
성경적인 믿음의 실제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바라는 것"이란 하나님 여호와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대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고 "실상"이란 하나님 여호와의 약속이 성취된 실제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것은 하나님 여호와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대하는 것의 실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실제는,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미쁘심, 즉 신실성에 의하여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여호와의 약속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인간의 허황된 욕망에 의한 소원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들의 실상은 하나님 여호와의 신실성을 기초로 하지 아니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성경적인 참 믿음의 실제가 아니라 거짓 믿음의 실제에 지나지 않는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적인 참 믿음은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기초로 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것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들은 실상과 다름없이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성경적인 참 믿음의 실제인 것이다.
2.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또 하나의 믿음의 실제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로 나타난다. 여기서 "보지 못하는 것"이란 하나님 여호와의 약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증거"란 하나님 여호와의 약속들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증명하는 근거를 말한다. 따라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한 하나님 여호와의 약속들이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실히 증명하는 근거를 말한다.
이같은 믿음의 실제 역시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미쁘심, 즉 신실성을 기초로 한 때에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여호와의 약속과 관계가 없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는 모두가 거짓된 증거일 뿐만 아니라 참 믿음의 실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적인 믿음의 실제는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미쁘심, 즉 신실성에 기초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나이 늙어 단산했으나 다시 잉태하는 힘을 얻었던 것은 약속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미쁘신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2장은 그리스도의 강림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의 문제를 바로잡아 주는 말씀이었다.
3장에서는 복음
전파 역사를 위해 기도를 부탁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내용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잘 해결되지 않고 있는 현안
문제인 게으른 사람들의 문제를 마지막으로 다룬다.
그들이 스스로 일해서 번 것으로 먹는 자들이 되도록 그들을 분명하게 다루라고
방향을 준다.
1.1.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게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주도록 부탁한 두 가지가 무엇인가요(1-2)?
(참조. 시 147:15) 1.2. 이는 말씀 전파 역사에 관해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3:1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3:2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 시 147:15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1.1. 주의 말씀이 그들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는 것과, 또한 바울 일행을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져 주시는 것이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끝으로, 이 편지를 보내게 된 주된 이야기는 했기 때문에 마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 그들에게 기도해주도록 부탁을 한다.
두 가지가 나온다.
말씀이 힘있게 역사하도록, 말씀의 종들을 지켜주시도록.
-
첫째,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도록.
복음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경우처럼 속히 퍼져
나가서(달음질, 고린도의 이스트미아 경기에서 육상선수가 달리는 것처럼, 복음이 그렇게 달려서 데살로니가에서처럼 회심자를 발견하고
얻음으로) 영광스럽게 되도록, 전에는 다른 철학이나 이론이 높아져 있었는데 말씀이 그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고후 10:4,5) 기도를 부탁했다.
- 둘째,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우리를 건져주시도록. 데살로니가에서와 같이 군중을 선동해서 바울 일행을 방해했던 그런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다. 이들로부터 건져주시도록, 안전을 지켜주시도록 기도를 해달라고 했다.
1.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충성과 노력의 결과로 착각하는 때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교만해지고 다른 지체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일도 있다. 또 다른 경우는 자신이 전도해서 잘 양육하여 일꾼을 만들었을때 자신의 공로로 치부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접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사도 바울의 다음 고백을 들어보자.
- 고린도전서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귀한 하나님의 주인공이 되었다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그 답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한 내용을 통하여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본문을 통하여 그 답을 찾아보고 그 교훈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자 한다.
2. 바울의 기도 부탁
1) 복음이 영광스럽게 되도록 (1절)
바울은 자신들이 전도한 교회에 기도 부탁을 했다. 그러면 왜 바울이 그들에게 기도 부탁을 했을까? 한편으로 보면 세상 말로 낯깎이는 부탁이라고도 보이기도 하는데 말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고 그 교훈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자 한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자신들을 위해 기도를 부탁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그 복음이 속히 전파되고 많은 사람이 그 복음을 받아들여 복음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기도를 부탁했다.
바울이 이렇게 기도부탁을 한 것은 복음을 전하기는 사람이 전하지만 그 복음이 역사가 일어나서 100배, 60배, 30배의 결실 맺는 것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임을 분명히 알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복음 전파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전도자의 능력이 아니라 성도의 기도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복음의 능력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노아 홍수의 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때에 이해가 되고 믿어지는 것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한다. 또 아무리 이해가 되고 믿어져도 실천할 수 있는 용기와 힘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한다. 만약 이런 은혜를 주시지 않고도 믿어지고 실천할 수 있다면 세상에 머리좋은 박사와 사업가들은 다 예수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이 은혜 주셨느냐? 그렇지 않으냐? 에 따라서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 결과이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의 역사가 아니면 그들의 복음 사역은 다 헛수고가 되고 만다.
그래서 바울은 기도의 중요성은 어느 누구보다도 잘았기에 다른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했고, 또 그들에게 기도 부탁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바울이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 내용>
- 로마서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 고린도후서 13:7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 고린도후서 13: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 에베소서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 에베소서 3: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 에베소서 3:17~19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빌립보서 1: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 빌립보서 1: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 골로새서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 데살로니가전서 3: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 데살로니가후서 1: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 빌레몬서 1: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바울이 부탁한 기도 내용>
- 로마서 15: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 로마서 15:31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 에베소서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 에베소서 6: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 골로새서 4: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 데살로니가후서 3:1~2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을 전할때 얼마나 기도하며 전했는지 돌아보자. 주일학교 학생 전도를 위해서나 심방을 해보면 수많은 체험을 할 수 있다. 기도하고 나갔을때와 기도하지 않고 의무적으로, 맹목적으로 나갔을때의 차이는 전혀 다르다.
또 다른 복음 전도자들을 위해서 얼마나 기도했는지 점검해 보라. 특별히 말씀을 전하는 주의 종에게 전하는 말씀이 말씀을 듣는 지체에게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대로 실천하여 새사람으로 변화, 성장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함을 일깨워 주는 말씀이다.
우리는 전하는 말씀이 울리는 꽹과리가 되지 않고 살아서 역사함으로 깨어지고, 회개하고, 도전을 받고, 소망 가운데 성장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강력히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역사와 결과가 있고 아니하시면 역사와 결과는 없다.
2) 악한 자들에게 해를 받지 않도록 (2-3절)
바울의 기도 부탁의 두번째 내용은 복음을 전할때마다 만나게 될 다양한 시련속에서 자신들을 건져주시기를 기도해 달라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 보면 복음이 전파되는 전도 현장에는 수많은 악한자들의 방해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바울의 간증을 통하여 확인해 보자.
- 고린도후서 11:23~27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히브리기자의 말을 추가로 들어보자.
- 히브리서 11:36~38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복음 전파를 하는 현장에는 수많은 악한자들의 방해가 있지만 바울은 그 방해보다 미쁘신(신실하신, 믿을 만한) 주님이 굳게 지켜 주실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지켜주실 것을 믿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있게 믿음을 말할 수 있었다.
로마서 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는 오늘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될만큼 유능한 선교사나 목사, 전도자나 교사가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주의 말씀이 우리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복음을 전할때 어떤 고난과 반대, 역경 속에서도 열매를 맺도록 말씀을 전하는 복음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로 협력해야 한다. 하나님이 이 기도에 응답하시면 데살로니가교회와 같은 아름다운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다.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핍박은 당연히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기도하고 주님이 함께해 주시면 그것은 우리를 오히려 돕는 역사만 일어난다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자.
-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직접적으로 연결은 안되지만 요셉의 경험적인 고백을 들어보고 믿음을 가지자.
- 창세기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3. 바울의 기도(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는 은혜를 주시도록) (4-5절)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주님 오실때까지 신실하게 지켜주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 그래서 성도들이 바울이 가르쳐준대로 순종하고 어떤 시련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를 잘 보고 배우리라고 믿었다. 이처럼 바울의 성도에 대한 신뢰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에서 나왔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신실하신 분이시다. 단지 조건은 4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명한 것’ 즉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자들에게는 미쁘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환난 가운데서도 신실하게 지켜주시고, 그리고 말씀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이다. 또 우리의 마음을 이끌어주셔서 우리도 하나님 앞에 신실하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이런 하나님의 역사하심, 보호하심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다.
- 야고보서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이 비록 어렵고 고될지라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며,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인내의 세계에서 헤엄치며 살아가는 천국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4. 하나님이 은혜주셔야 믿음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바울의 기도 부탁과 기도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복음이 악한 자들에 의해 막히지 않고 잘 전파 되는 것, 전파된 말씀을 붙들고 실천하며 살아감으로 영광스럽게 되는 열매를 맺는 것, 말씀을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인내의 세계에서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모두는 기도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만주의 주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 은혜주시면 역사가 일어나고 은혜주시지 않으면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는 말씀이다. 그래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은혜주셔야 하고, 은혜받은 자들로 제한 된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우리 자신들뿐만 아니라 복음 전도자들, 그리고 그 복음을 듣는 모든 지체들에게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중보기도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아울러 다른 사람에게 기도 부탁하기를 바울처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믿음은 하나님이 은혜주셔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1.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 관해 확신하는 바가 무엇입니까(3-4)? 2.2. 바울은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인도하여 그들이 어떻게 하게 되기를 바랍니까(5)? (참조. 요일 4:7-9, 히 12:2-3)
3: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3:4 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2.1. 주는 미쁘셔서 그들을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실 것을 확신한다. 그들에 대하여는 자신들이 명한 것을 그들이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한다.
- 주 곧 예수님은 미쁘시다? 사람들이 미쁘지 않을지라도 주께서 미쁘신 것은 변하지 않는다. 미쁘신 주께서 너희를 굳건하게 하실 것이며, 악한 자에게서 지키실 것이다.
- 이런 미쁘신 주 안에서 그들을 볼 때? 주 안에서 그들에 대해 확신하고 있다. 무엇을?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지금도 실행하고 있고, 앞으로도 실행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3: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2.2.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한다.
- 이런 것을 소원기도라고 한다. 주 곧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인도하시되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더 깨닫게 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인내를 더욱 더 배울 수 있게 해 주시도록 기도했다.
3.1.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게 어떤 자들에게서 떠나라고 명합니까(6)? 3.2. 바울은 그들이 무엇을 스스로 안다고 합니까(7a)? 3.3. 이를 위해 바울 일행은 그들 가운데서 어떤 본을 보였나요(7b-9)?
3: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3.1. 형제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명한다고 한다. 그것은 게으르게 행하고 바울 등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는 것이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한다? 아주 분명하게 명령하는 것을 말한다.
- 게으르게 행하고? 이전 번역은 규모없이 행하고. 이는 대열을 이탈한 군인들을 가리킬 때 사용된 말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일하고 섬기고 있는 동안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리스도의 오심이 곧 있을 것이라며 그것을 기다리는 데 집중하겠다고 했을 것. 일하는 것은 천하고 비영적인 것이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재림하실 주를 기다리는 것은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먹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누군가에게 짐을 지웠을 것이다.
- 그들에게서 떠나는 것? 그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지 말라는 뜻이다. 그들과 말하지 않음으로 그들에게 참견할 거리를 주지 않는 것이다. 또 그들에 대한 지원을 끊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을 꾸짖는 것이 될 수 있다.
규모 있게 살아가라(6절)
데살로니가서의 마지막 강해가 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후서를 마감하면서 성도들에게 규모 있는 생활을 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규모 있는 생활이란 열심히 일을 하여 자기가 번 돈으로 생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규모 있는 생활을 하도록 권면한 배경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중에는 주님께서 곧 재림하신다고 믿고 하던 일을 그만 둔 이유로 먹을 것이 없어 다른 교인들의 가정을 빙빙 돌면서 폐를 끼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몇 년 몇 월 며칠에 주님께서 재림하신다고 믿고 재산을 다 처분하여 교회에 바치고 일도 안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도 않고 재림의 날만 기다렸던 한국의 어떤 재림 주의자들과 흡사한 일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일부 교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열망하는 것은 좋지만 열망이 지나쳐서 일상 생활의 일들을 다 팽개쳐서 먹을 것이 없어 다른 교인 가정으로부터 얻어먹는 정도는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밤에 도적 같이 오실 주님을 영접할 모든 성도들은 그가 언제 오시든지 간에 오시는 날 까지 일상 생활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우리들은 노동의 축복, 노동의 가치, 노동의 신성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규모 없는 자에게서 떠나라(6, 11, 13-15) [2]규모 있게 행하라(7-10, 12) [3]끝 인사(16-18)입니다.
[1]먼저 6절, 11절, 13-15절의 규모 없는 자에게서 떠나라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중 어떤 이들은 도무지 일을 안하고 이 집 저 집 돌면서 남의 가정에 폐를 끼치고 또 일을 만드는 자들이 있음을 들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을 두고 규모 없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남들은 다 열심히 일을 해서 자기 먹을 것을 해결하고 있는데 자기 혼자 잘 믿는 것 같이 일도 안하고 재림하실 주님만 기다린다고 하면서 먹을 것이 없어서 이 집 저 집 성도들의 가정을 돌면서 얻어먹는 교인이 있다면 그 교회 성도들은 그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겠습니까?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남에게 덕을 끼치고 유익을 끼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신앙을 핑계 대고 남에게 폐를 끼치고 있으니 이런 사람을 교회에서는 잘 정리해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으로부터 떠나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서 떠나라는 말은 그런 사람을 멀리하라는 뜻입니다. 좀 냉정하게 대해주라는 것입니다. 친절하게 하면 자기의 잘못을 모를 것이기 때문에 좀 냉정하게 대하므로 스스로 자기의 잘못을 알아차리고 규모 있는 자가 될 수 있도록 하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대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권면하고 이 편지를 읽어주어도 변화 없이 이집 저집 돌면서 폐를 끼치고 말을 만드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과 사귀지 말고 따돌려 부끄럽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따돌린다는 한계는 원수같이 하라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형제이기 때문에 그가 깨닫게 하는 목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구해주고 고쳐주기 위해 일시로 냉정한 태도롤 보이면서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냉냉한 대접을 받는 그는 그 이유를 깨닫고 고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2]두 번째는 7절부터 10절, 12절의 규모 있게 행하라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규모 없는 자들을 향해 규모 있게 행하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종용히 일을 한다는 말은 개으르고 말만 만드는 것에 대조되는 뜻으로 입을 다물고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을 뜻하며 남에게 덕을 끼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입을 다물고 열심히 일을 하므로 자기들이 먹을 양식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을 하지 않게 되고 또 가난한 자를 구제할 수 있는 능력도 갖게 되므로 종용히 일을 하는 것이 성도로서 규모 있게 행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들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아무런 재정적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일을 하면서 자기들의 생활비를 해결했던 것을 강조하면서 그들이 보인 모범을 본받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생활비를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받을 권리가 없어서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고 또 일하는 것을 본을 보여 데살로니가 교회가 본받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보인 본이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전도 일을 하면서도 스스로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하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할 당시 그들에게 권하기를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여 열심히 일할 것을 이미 가르쳤음에도 데살로니가 교회 일부 교인들이 규모 없이 행함을 보고 규모 있는 자들이 되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3]세 번째로 16절부터 18절의 끝인사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후서를 끝맺으면서 평강의 주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에게 있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때때로 풍랑이 일고 비바람이 쳐 믿음이 흔들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평강의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언제나, 어떤 일에도 평강을 주실 것을 기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땀흘려서 벌어먹는 노동의 축복에 대해 바로 알라는 교훈입니다. 젊은 나이에 돈이 많아서 일찍 은퇴하고 날마다 집에서 놀고 있는 자를 두고 복도 많은 사람이라고들 부러워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할 수 있는 나이에 일할 수 있는 건강을 가진 자라면 일을 하지 않고 노는 자보다 일을 하는 자가 더 복된 자라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할 수 있는 일거리가 있는 자란 노동의 대가로 받는 돈의 가치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늙어서 은퇴하고도 몇 푼 받지 못한다해도 일을 하고 있는 노인들을 동정심으로 바라보지 말고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할 수 있는 일거리가 있다면 일하는 사람에게 여러모로 상당한 의미를 가져다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는 요즘 일자리를 잃었지만 가족과 이웃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직장에 다니는척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그들에게 묻는다면 노동의 축복이 얼마나 큰지 말해주리라 봅니다.
일할 수 있는 나이에 일할 수 있는 건강을 가진 자라면 그 일거리가 무엇이든 감사히 받고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천막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했습니다. 광주 그리스도의 교회 고 강 순 명 전도자는 전도 일을 하기 위해 칼을 갈아주는 일을 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그가 어떤 직업 또 무슨 일을 하느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남이야 어떤 관심을 가지던 일을 하는 나 스스로는 현재 나에게 일거리가 있음을 감사하고 만족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또 아니면 복권이라도 당첨되어 일을 그만 두는 것이 복이 아니라 늙어서라도 할 수만 있다면 끝까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복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가치는 땀을 흘려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미국에서 65세까지 일을 하게 한 것은 불행이 아니라 복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돈의 크기로 가치를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받는 보수는 직업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납니다. 심지어는 같은 직업에서 일하는 자들도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압니다. 같은 팀의 야구 선수 중에는 천만불짜리도 있고 백만불 짜리도 있고 십만불 짜리도 있다면 좀 이상하겠지만 이것은 현실입니다. 만일 십만불 짜리가 천만불짜리의 선수와 자기 처지를 비교한다면 맥이 빠지고 더 이상 선수 생활을 할 마음이 나지 않겠지요? 그렇다고 자기 인생의 가치가 천만불짜의 인생의 가치보다 100분의 일의 가치밖에 없다는 뜻은 전연 아닌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남이 받는 수입에 자기의 수입을 비교하므로 스스로 맥이 빠지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얼마를 받던 그 받은 돈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감사를 가지고 규모 있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게 벌었기 때문에 쓰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쓰지는 못하지만 성도로서 남에게 규모 없다는 말을 듣지 않고 덕을 끼치며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생은 돈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남보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즉 비교할 남이 없다면 자기가 불행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은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잣대가 전연 아님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돈이 많이 있거나 돈이 많이 없거나 성도의 일은 남에게 덕을 끼치고 기쁨을 주는 규모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노동은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어떤 일거리이든지 주신 일거리를 감사히 받아 성실하게 그리고 열심히 일을 해야 하며 남이 받는 돈과 비교하지 말고 노동의 대가로 받고 있는 그 보수에 감사하면서 성도로서 규모 있는 생활을 하시다가 주님 오실 때에 평등의 나라 천국에서 영원히 기쁨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7a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3.2. 어떻게 바울 일행을 본 받아야 할지를 그들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 질서를 보여주었다. 오직 수고하고 주야로 일했다.
3:7b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3:8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3: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3.3. 바울 일행은 그들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않았다.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했다. 그들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바울 일행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오직 스스로 본을 보여 자신들을 본받게 하려 함이었다.
-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살전 2:9).
- 특히,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본을 보이는 것이 필요함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 만약 숙식을 받는 것이 복음 사역자로 자신의 자격에 지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는 기꺼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몸소 일해서 생계를 꾸려가는 자세가 되어 있었다.
4.1. 바울이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명한 것이 무엇이었나요(10)? 4.2. 지금도 바울이 어떤 자들에 대해 듣고 명하는 것이 무엇입니까(11-12)? 4.3. 왜 이렇게 자립하도록 명하는 것일까요?
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4.1. 그들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한 것이다.
-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이 말은 동전에 새겨져 노동자들이 함께 일하거나 견습생으로 훈련을 받을 때 늘 가르치던 주제였다.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적용했다.
- 일하기 싫어하거든? 일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 이런 자들에게 명령하여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함. 이들은 일을 할 수 있고 할 일이 있는데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돌봐주도록 기대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을 돌보는 등 친절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에 대해 그것은 용납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디다케에서는 방문자를 할 수 있는 대로 돕되 이틀 이상(필요하다면 사흘) 머물 수 없도록 가르쳤다.
3: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3: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A. 일에 대하여
1. 일 / 노동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일찍이 철학자들이나 인류학자들은 인간을 가리켜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고 했습니다. 노동하는 존재, 즉 일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일을 할 때 행복을 느끼고, 삶의 본분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들에 비해 기독교만이 노동을 귀하게 생각하며 열심히 일을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미신,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들은 그저 귀신을 잘 섬기기만하면 집안이 잘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잘됩니까? 미신과 우상이 많은 나라들은 가난하고 미개하게 삽니다.
불교는 어떻습니까? 세상을 체념하고 산 속에 들어가서 깨달음을 얻고 도를 닦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불교국가들이 가난한 것입니다.
유교는 어떻습니까? 계급의 서열을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고 하여 선비는 제일 높은 계급에 두어 존경했고, 일하는 사람들은 가장 낮은 계급에 두어 천박하게 여기고 멸시했습니다. 그래서 유교국가도 대부분 가난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는 기독교의 산물입니다. 기독교는 일하는 것을 중요시하고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천직으로 생각하여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들어가는 나라마다 부강하게 되고 선진국가가 되고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습니까?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 1483~1546)는 “인간은 빈둥거리며 놀고 지내면 신체와 생명이 망가진다. 왜냐하면 인간은 일하도록 태어났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대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건강한데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잔병치레를 더 많이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몸도 마음도 더 건강하고 발전하고 성장합니다.
독일의 정치경제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 1864~1920)는 『프로테스탄트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그의 책에서 “17세기 미국의 청교도들은 근면한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했다. 노동이라는 것은 생존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의 표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일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고,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은 일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9절 말씀을 보면 불순종하는 죄를 지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땀을
흘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지상 과제, 명령입니다. 땀을 흘리는 사람은 건강합니다. 땀을 흘리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땀을 흘리는
사람에게 행복도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9~10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을 주시며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엿새는 무조건 열심히 일하고 하루만 안식일을 택하여 휴식을 취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휴식도 있는 것이지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무슨 휴식이 있겠습니까?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그 열심을 통해서 보람도 있고 결실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부지런히 일하고(잠 21:5), 질서대로 하고(고전 14:40), 더 나아가서 성실한 마음으로 일해야
합니다(골 3:22).
2. 본문 배경 설명
오늘 본문말씀은 일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시한부 종말론에 빠져 세상이
끝날 날이 다 되었는데 직장을 가지고 일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일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지며 사회의 방해꾼이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문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일하는 사람, 일꾼으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주야로 열심히 수고하고 일하면 하나님께서 일한 대로 축복하시고 보상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겠습니다. 첫째, ‘규모 없이 행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하는 것을 본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고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B.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1. 규모 없이 행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 규모 있음, 질서 / 규모 없음, 무질서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살후3:6)
이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규모는 군대용어로 군인이 질서정연하게 행진을 하고 대열을 맞추는 등 군대에서의 질서를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생활에서도 군대와 같은 조직과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질서를 파괴하는 사람들을 떠나게 하고 전통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무단이탈하는 사람들을 또한 떠나게 해야 합니다.
규모 있는 삶을 살라는 것은 질서 있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법을 지키고 질서를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40절 말씀에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질서를 파괴하는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3절 말씀에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라고 하였습니다. 제도에 순복하겠다는 마음의 자세를 갖고 열심히 일하고 충성, 봉사,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위로는 하나님께 순종하고(신 13:4), 선생님께 순종하고(잠
5:13), 부모님께 순종하고(엡 6:1), 상전에게 순종하고(엡 6:5), 또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벧전 3:1).
성경말씀에는 순종이 많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순종을 파괴하는 사람은 그에 따른 처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사람은 사랑을 받고 큰 축복과 은총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삼성경제 연구소의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노사관계는 49개국 중에서 47위라고 합니다. 세계에서 꼴찌 수준인 것입니다.
노사분규로 인해서 직장이 폐쇄된 것이 올 한해만 벌써 40건이라고 합니다. 외국 기업도 7건에 달해서 외국 기업들이 해외로
나가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파업이 가져온 결과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현대자동차의 노조 파업은 국내외 공장 협력업체에게 3조 6천억 원에 이르는 엄청난 손해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장기 파업으로
인해 국가 경제가 위축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큰 피해가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파업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외국 회사 중 하나는 부산항을 떠나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컨테이너 환적 기항지를 일본이나 중국 항만으로
변경하려고 계획하고 있다고 합니다. 잦은 파업으로 인해 외국의 회사들이 한국을 떠날 계획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파업은 세계에서도 유명해져서 한국을 ‘파업공화국’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여러분, 더 이상 파업은 없어야 합니다.
2.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하는 것을 본 받으라
- 수고, 애씀, 일함 / 게으름, 불성실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살후 3:7~9)
양식이 필요한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그 대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수고를 해야 합니다. 주야로 일을 하고 그 일함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본을 보여서 본 받게 하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면 자녀는 그 모습을 배웁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힘을 합쳐서 일할 때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고 성공도 있고 승리도 있게 됩니다.
잠언 10장 4절 말씀에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후진국가, 가난한 나라, 어려운 나라일수록 거지가 많습니다. 그들은 거지 팔자가 상팔자라며 자랑합니다. 그러나 거지는 거지일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거지근성을 버리고 성공적이고 발전하는 삶의 태도인 열심히 일하는 자세를 택해야 하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1절 말씀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학생은 공부를, 직장인은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모인 가정이 행복합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직장,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을 열심히 해서 아름다운 결실과 보람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프랑스의 신학자 칼뱅(Jean Calvin ; 1509~1564)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 수고의 열매를 먹음으로 행복을 누린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 중에는 일하지 않고 자신만 편해지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 자녀들은
수고하고 그에 대한 열매로 인해 행복을 누려야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국가를 위해, 경제를 위해,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노력하고 땀을 흘려 다른 사람에게도 그 대가를 나누어 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 1749~1832)는 “천재는 항상 근면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부지런한 사람에게서 천재가 나오지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천재가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수상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Furst von Bismarck ; 1815~1898)는 독일의 젊은 청년들에게 “나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세 마디가 있다. 청년들이여, 일하라, 더 일하라, 끝까지 일하라.”고 말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일을 하라고 젊은이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젊었을 때에 열심히 일을 한 사람들은 노후에 편안하게 살지만 젊어서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노후에도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마다 병을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한국병’이 있고 영국에는 ‘영국병’이 있고, 미국에는 ‘미국병’이 있습니다.
또 일본에는 ‘일본병’이 있다고 합니다. 미국은 80년대에 재정적자로 인하여 심각한 국가병이 있었다고 합니다. 90년대에는
일본도 금융부실, 부동산 거품붕괴 등의 복합적인 병에 걸렸습니다. 지금은 서서히 병세가 호전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병은 노조병, 파업병으로 영국병과 비슷합니다. 영국은 이미 고쳤는데 우리나라는 이제 걸렸습니다. 이 병을 고치지 못하면 한국 경제는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노동부의 통계에 의하면 주 5일 근무제를 실시하면 한국 근로자의 연평균 휴일이 남자가 165일, 여자는 177일로 세계에서
최고로 많이 쉬는 나라가 된다고 합니다. 프랑스, 일본, 대만보다 쉬는 날이 많아지므로 ‘휴일왕국’이 되는 셈입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라는 노래가사처럼 젊어서 일하지 않고 놀겠다는 사고방식을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놀겠다는 생각보다는 열심히 일하고 나서 그 다음에 휴식을 취하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세계 모든 종족 중에서 제일 신체적인 조건이 좋은 종족은 아메리칸 인디언들인데 현재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래 미국은 인디언들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럽 사람들이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미국을 건설한 것이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에
인디언들에게 좋은 혜택을 많이 주었습니다. 먹을 것을 주고 옷을 주고 돈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말을 타고 다니며 활을 쏘고 사냥을
해야 할 인디언들이 나태해져 매일 술만 마셔서 90%이상이 알코올 중독으로 죽고 종족이 얼마 남지 않아 인디언 보호구역까지
생겼습니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인디언들이 일은 하지 않고 술만 마시니까 멸종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일을 할 때
건강해집니다. 우리의 정신도 일을 할 때 맑아집니다.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100세 이상 장수하는 사람들을 보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일하지 않는 사람의 평균 수명을 알아보니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일하지 않는 사람보다 14년을 더 산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열심히 일해서 성공하고 승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국의 한 큰 건물에 그리스도인인 경비원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탐이었는데, 그는 비록 다른 사람보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찾아오는 사람에게 항상 친절하게 대하고 궂은 일, 어려운 일,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건물 주인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바뀌었지만 워낙에 주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기에 탐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새 건물 주인은 탐에게 새로 해야 할 일들을 종이에 적어주며 그대로 하도록 지시를 했는데,
탐은 그 일들을 하지 않았습니다. 건물 주인은 의아히 여겨 탐을 불렀고, 그가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새 건물 주인은 탐을 해고하였습니다.
탐은 졸지에 직장을 잃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과 자신의 처자식을 돌보아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을 털어 자신이 일하던 빌딩 옆에 작은 구멍가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큰 빌딩을
지나다니며 그를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한동안 보이지 않던 탐이 가게를 열었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에게 항상 친절했던 탐을
떠올리며 그 가게의 물건을 팔아주었습니다. 그래서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장사가 잘 되니까 가게의 규모는 점점 커졌고, 체인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새 수십 개의 체인점을 거느린 거대한 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의 재산을 관리해 주는 은행원이 그에게 “글을 모르신다고 들었는데, 그러면서도 이렇게 큰 체인점의 사장님이 되신 것을 보니,
만약 글을 아셨다면 재벌회사의 회장이 되셨겠군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탐은 “내가 만약 글을 알았다면 지금도 그 빌딩의
경비원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글을 몰라 빌딩에서 쫓겨났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셔서 이렇게 큰 체인점의
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새 길을 보여주시고 새로운 축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주야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재물도 주시고 성공하게 하시고 승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 치고 외로운 사람이 있습니까? 실패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일하는 것에 대한 결실과 보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고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 일한 만큼 대가 / 일하지 않으면 대가 없음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살후3:10~12)
국가의 경제가 잘되려면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회사가 잘되려면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대가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일하는 사람과 일하지 않는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기 때문에 자꾸만 게을러지고 경제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도 주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을 자격이 없습니다. 종용히, 즉 말썽 없이, 소란 없이, 조용히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해서 거기에 대한 양식을 먹으라고 했습니다. 방해꾼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방해꾼이 많이 있습니다. 일꾼은 좋지만 방해꾼은 문제가 됩니다. 국가의 경제를 방해하는 사람, 가정의 질서나 직장의 질서를 파괴하는 방해꾼들이 많아지면 나라가 혼란에 빠집니다.
시편 128편 2절 말씀에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사람, 성공적으로 사는 사람, 보람되게 사는 사람들은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특권과 혜택을 받은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1~12절에도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한국이 앞으로 발전하고 성장하려면 일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도 일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야 하고 경제적으로 일하기 좋은 구조를 만들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대우받고 존경받고 부자가 되는 정책을 채택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축복하십니다. 일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시고(신 12:7), 일하는 사람을 형통케 하시고(시
128:1~2),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재물을 주시고(잠 11:16), 풍족하게 하시고(잠 13:4), 후손들도 번창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들,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가난하게 됩니다(잠 10:4). 패가망신하게 됩니다(잠 18:9). 있는 것도 빼앗기고(마 25:26~28), 쫓겨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마 25:30).
성경말씀 그대로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모두가 힘을 합쳐 열심히 일을 할 때 성장도 발전도 있습니다.
미국의 성공학자 데일 카네기(Dale Carnegie ; 1888~1955)는 “일하는 것에 즐거움을 가지면 회사도 이익이 되고 윗사람도 기뻐할 것이다. 즐겁게 일하는 사람은 승진도 빠르고 일도 잘 된다.”고 말했습니다.
일을 할 때에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신문을 보니 요즘 대학생들이 졸업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합니다. 졸업을 해도 취직이 되지 않으니까 한 학기나 일년을 늦추어 졸업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또 졸업한 학생들은 연봉을 많이 받지 못하더라도 일할 수 있는 직장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는 직장을 주고 분위기를 만들고 제도를 만들려면 오늘날 어른들이 파업하고 나라의 경제를 파괴하는 일을 빨리 그만두고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로 만들어서 국가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중국과 일본보다 더 앞서고 축복받고 잘되는 나라, 이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고 애를 쓰고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게으른 남자가 일하기는 싫지만 부자는 되고 싶어서 점을 보러 갔다고 합니다.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지 관상을 봐
달라고 하자 점쟁이는 “당신은 늙어서 누워서 먹고 살 팔자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이 늙어서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인
줄 알고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일하지 않고 누워서 먹고 사는데 어떻게 부자가 되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쟁이가 한 말이라며 자신은 틀림없이 부자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그는 병이 들어 누워서 먹고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부자가 되어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을 원통해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누워서 먹고 사는 것이 좋은 것입니까? 건강하게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형문자를 보면 남자의 남(男)자는 밭 전(田)자에 힘 력(力)자를 합한 것으로 밭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이 남자라는 뜻입니다. 또 부인의 부(婦)자도 여자가 빗자루를 들고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각자 맡은 자리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이 부지런하고 건강하지 편안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잔병치레만 하게 됩니다. 남자와 여자의 본분을 지킬 때 그 가정이 잘되고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러시아의 문학가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Graf Tolstoi ; 1828~1910)는 “사람의 행복은 일하는 데서 온다.”라고 말했습니다. 일하는 사람만이 참된 행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하는 노동이 얼마나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일인지 성경말씀에 쓰여 있습니다.
어느 종교이든지 노동을 인간의 본분으로, 삶의 가치로, 축복의 동기로 기록하고 가르치는 종교는 없습니다. 오직 기독교뿐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기독교인들이 제일 부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일하지
않을 때에 열심히 일해서 돈도 많이 벌고 자녀 교육도 잘 시키고 회사가 잘되고 번창하고 축복의 근원이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CEO 잭 웰치가 경영하는 제너럴 일렉트릭이라는 회사는 미국의 500대 기업 중에서 순이익 순위가 2위입니다.
그에게는 독특한 경영철학이 있는데 “양손에 비료와 물을 들고 꽃을 가꾸어라. 그래서 아름다운 정원이 된다면 그대로 두고, 만약
열심히 물을 주고 비료를 주어도 꽃이 피지 않고 아름다운 정원이 되지 않는다면 가차 없이 잘라버리고 갈아엎어서 다시 새로운 정원을
만들어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그 회사의 8만5천여 명의 직원에게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리고 직원들 중에서 열심히 일하고 충성하는 사원에게는 철저하게 보상해주고, 일하지 않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원들은 ‘보고 싶지 않은 존재’라고 낙인을 찍어 놓고 기회가 되면 바로 해고한다고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보상을 주고, 일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해고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 거대한 회사를 운영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달란트의 비유가 있지 않습니까? 주인에게 충성된 종에게는 더 주고 칭찬하였지만 악하고 게으른 종에게는 있는 것도 빼앗아버리고 쫓아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C. 주 안에서 수고하고 일하기를 힘써서 축복받는 성도가 되자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주어진 삶, 천직, 직장이나 사업이나 교회 안에 맡은 바 직분에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건강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축복도 주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고 풍족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첫째, ‘규모 없이 행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규모는 군대의 조직으로, 조직을 이탈하는 사람은 떠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하는 것을 본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수고하고 애쓰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고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자꾸 먹을 것을 주면 누가 일하겠습니까? 공산주의가 잘살지 못하는 이유는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이나 일하지 않는 사람이나 똑같이 평등하게 대해주기 때문입니다.
일을 하는 대로 수고한 대로 보상을 주고 칭찬을 주고 지위를 높여주는 것이 바로 성경말씀, 하나님의 뜻입니다.
염수진 집사님의 남편이 하고 있던 가내 공업은 잘되고 번창하고 있었는데, 그만 한 거래처의 부도가 연쇄부도가 되어 남편의
사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 남편은 그 일로 인해 과로하다가 쓰러져서 먼저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습니다.
그는 눈앞이 캄캄하고 남편을 따라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남겨진 아이들과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간다는 것이 무서워서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죽더라도 금식을 하다가 죽으면 자살이 아니니까 천국에 가겠지 하는 생각에 기도원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10일 금식을 작정하였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금식하고 울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8일 째 되는 날, 하나님께서 위장병,
관절염 등 그가 가지고 있던 지병들을 치료해 주셨고,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함이니라’는 음성도 들려주셨습니다.
10일 금식을 마치고 기도원에서 내려온 후, 그는 새벽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눈에 옷이 보였고, 그는 바로 그의 전세방을 월세로 돌리고 그 돈으로 화장품 가게 옆에 붙어있는 작고 허름한 가게를
계약하여 옷가게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게에 앉아서 기도만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자 화장품 가게에 오는 손님들이 그 옷가게에 들려 옷을 하나씩 사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장사가 너무 잘되어 직원 2명을 채용하게 되었고, 1년이 지나자 옆에 있는 화장품 가게까지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났을 때에는 옷가게가 입주해있던 5층 건물 전체를 매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족한 나, 외로운 나, 아무 것도 모르는 나를 축복하셨으니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살겠습니다.’ 하고 고백하고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예배, 주일예배, 구역예배 등 모든 예배에 참석하여 물질 드리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면 축복을 받습니다.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여 인생을 보람되게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기 바
4.2. 바울 일행은 그들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이런 자들에게 바울은 명하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한다.
- 바울이 앞에서와 같은 명령을 하라고 한 것은 데살로니가에 있다는 어떤 사람들을 들었기 때문이다.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 이런 사람들이 있다고 바울에게 알린 것을 볼 때, 이런 사람들을 감당하느라 많이 힘들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일하지 아니하고의 일? ‘에르가조마이’ 일하되 창조하고 생산하는 일을 말한다.
- 일을 만들기만 하고의 일? ‘페리에르가조마이’ 전치사 ‘페리, 두루 ~주위에’가 붙어 일하되 불필요한 가외의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쓸데없이 말참견하다는 뜻으로 주로 쓰였다.
- 일만 만들기만 하는 자들은? 참견하기 좋아하는, 남의 일에 간섭하는, 그래서 성가시게 만들고 일의 진전을 방해하는, 자기 일을 돌보지 않고 남의 일에 신경 쓰는, 자기 일보다는 다른 모든 사람의 일을 염려하는 자들을 말한다.
-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스스로 일해서 번 양식을 먹으라는 뜻이다.
- 조용히? 남의 일에 참견하고 간섭하며 말썽을 일으키지 말고. 양을 치는 데서도 적용을 할 수 있다. 자기가 양을 얻어 치지는 않고 다른 사람이 힘들게 얻은 양을 놓고 참견하고 말썽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5.1.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이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어떻게 대하도록 합니까(13-15)? 5.2. 왜 이렇게까지 하도록 하는 것일까요? (참조. 고전 5장) 5.3. 바울의 마지막 인사가 무엇이며, 왜 친필로 문안했을까요(16-18)? (참조. 2:2)
3: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3: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3: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5.1. 형제들에게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한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자신들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고 한다.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하라고 한다.
- 왜 낙심했을까? 게으르게 행하며 일만 만드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들을 그냥 두고만 보지 말아야. 그들을 돕는 것을 선한 일이라는 미명 아래 지원해서는 안 된다.
- 그들을 떠나야 된다. 그들을 지원하지 말고, 그들과 교제하지도 말아야 된다. 배고픔과 외로움이 그런 사람들을 생산적인 사람들로 만드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에서 내쫓아야 할 사람은 아니다. 모진 사랑과 약이 필요한 사람일 뿐이다. 경고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랑을 해야 된다. 입으로만 경고하지 않고 물리적인 행동으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함을 가르쳐 준다.
5.2. 고린도전서 5장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라고 하는 사람이 죄악을 행하는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 교회 공동체는 그들이 죄악을 중단하게 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교회는 우리의 유월정 양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시기까지 하면서 거룩한 공동체가 되게 하신 곳이기에 악한 누룩이 퍼지지 않게 해야 하기 때문이며, 이를 위해서는 교회의 권징이라는 조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3:17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 3: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5.3.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함. 바울이 친필로 문안하노니 편지마다 이렇게 쓴다고 함. 사칭을 못하게 하려 함.
- 평강의 주께서 평강을 주시도록 기도했다. 은혜가 있기를 기도했다. 왜 이런 기도로 마무리할까?
- 게으르게 행하는 자들이 겸허해져서 스스로 일해서 번 양식을 먹는, 자기 일로 복귀하기는 힘들 수 있고 그런 명령을 받을 때 시끄럽게 할 수 있다. 또 이들로 인해 괴로움을 당한 사람들이 이들을 사랑으로, 그러면서도 엄하게 대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평강의 주께서 때마다 일마다 평강을 주시기를 기도했다.
- 친필로 문안한다? 대개 대필자에게 편지를 받아쓰도록 했다. 그러나 때로는 친필로 짧게 문안을 쓰고 서명을 했다. 거짓교사들이 바울의 이름을 사칭하는 쓴 것이 아니고, 바울이 쓴 편지임을 가려내도록 하고자 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경우에 가짜 편지들이 돌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물리적인 육안(肉眼) 외에도 다양한 눈을 갖고 있습니다.
지안(智眼)과 심안(心眼) 그리고 영안(靈眼)도 있습니다.
어떠한 종류의 눈이든지 밝은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텍사스 오스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꿈에 그리던 주유소를 개업하게 된 한 사장이 있었습니다.
사업장을 허락하신 하나님과
그동안 도움을 베풀어준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고자 지역 신문에 이벤트 광고를 냈습니다.
광고를 보고 찾아온 손님들에게 무료로 기름을
넣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지역 신문 귀퉁이에 게재된 작은 광고를 본 사람들이 별로 없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한 젊은 여자분이 광고를 보고 찾아왔고
무료로 주유했다는 소식이 퍼지게 되자 비로소 사람들이 앞다투어 주유소를 찾아온 것입니다.
이처럼 육안(肉眼)도 밝아야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목회하던 시절 나이 많은 성도님들 중 영어를 모르시는 분들이 더러 계셨습니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교회에 오실 때
글자 대신 광고 그림을 보면서 환승해서 오시곤 했습니다.
오렌지쥬스 광고에서 환승해서 말보로 담배 광고에서 내리는 식입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광고가 다른 그림으로 교체되어 환승역을 놓치게 되는 바람에 이분들이 예배가 마칠
때쯤 교회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교회에서 영어학교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지식이 있어 지안(智眼)이 열려야 보이는
것이 제대로 보인다 할 것입니다.
작가는 무엇으로 글을 쓸까요?
마음의 눈을 통해 작품을 씁니다.
음악가도 마음의 눈으로 작곡하고, 미술가나 조각가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고 조각도 합니다.
과학자들도 마음의 눈, 즉 심안(心眼)으로 새 이론을 세우고 발명도 하는 것입니다.
미국 켄터키 주에 가면 세계에서 가장 긴 동굴인 '맘모스 동굴'이 있습니다.
확인된 길이만 650km에 달합니다.
이 동굴의
가장 깊은 곳에도 물고기나 새우 등 다양한 생물들이 살고 있는데 대부분 눈이 멀었습니다. 빛이 닿지 않아 눈이 퇴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인 빛이 있어야 육안(肉眼)이 열립니다.
마찬가지로 지식의 빛이 있어야 지안(智眼)이 열리고, 안목과 식견의 빛이
있어야 심안(心眼)이 열립니다.
그럼 우리의 영안(靈眼)은 무엇으로 열립니까?
빛이 되시는 예수님이 임하여 영혼이 거듭나야 비로소
영안(靈眼)이 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영안이 열려야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보입니다. 영안이 열려야 그리스도의 빛 아래 자기의 허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영안이 열려야 바울처럼 환상과 하늘의 비밀한 것들을 볼 수 있고 귀신을 내쫓을 수 있으며 영적 권세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영안이 열려야 인생 모든 것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이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눈이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밝은 육안, 지안, 심안 뿐만 아니라 밝은 영안이 있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행 9:17~18).”
믿음의 눈을 열어주소서(열왕기하 6:14-19) |
눈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육신의 눈 2. 지식의 눈 3. 영적인 눈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우리의 영안도 열릴 수가 있을까?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 아람 나라라는 강대국이 자주 이스라엘 지경을 침범해 오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아람의 침략은 패배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은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이스라엘 편에서 벌써 침략할 루트를 알고 사전에 차단하고 있거나 군사를 매복하고 있음으로 번번이 패전으로 끝났던 것입니다. 아람왕은
대단히 화가 나서 말하기를 ‘분명, 우리 편 중에 스파이가 있어서 적과 내통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당장에 그 스파이를
찾아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어느 신하가 말하기를 ‘왕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어서 우리 나라의 모든 것을 손바닥 보듯이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왕이 침실에서 한 이야기라도 다 알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다시 말하면, 엘리사의 영적 레이더에 다 걸리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왕은 기가 막힙니다.
아무리 국가의 1급 비밀이라도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한 결코 전쟁에 승리할 수 없는 줄 알고 왕은 우선 엘리사라는 선지자를 체포하리라고 결심을 하고 막강한 군사를 엘리사가 있는 도단이라는 작은 성으로 보내서 한 밤 중에 감쪽같이 몇 겹으로 포위를 했습니다. 마침내 아침이 훤히 밝았습니다. 선지자의 종이 아침 일찍이 일어나 하품을 하며 무심코 성 아래를 보다가 기절초풍을 했습니다. 아람나라의
군대가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한 채, 무시무시한 창검을 번뜩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종은 허겁지겁 주인 엘리사에게 쫓아와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지금 아람 군대가 우리를 포위하고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화급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희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종의 눈에는 자기 나라 군대는 성을 지키는 몇 백명의 중대 병력이나 있을까, 가장 막강한 아람 군대의 수만의 군대와는 감히 비교도 안됩니다. 엘리사가 이제는 노망이 들었습니까? 그 때, 엘리사가 종의 이러한 의심에 가득한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종의 눈에서 의심의 비늘이 벗기어지더니 영안이 열리었습니다. 열린 영안의
눈으로 성을 내려다보니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성과 엘리사의 집을 옹위하고 하고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엘리사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 아람 군대들의 눈을 어둡게 하소서.’ 그러자 아람 군대들의 눈들이 어두워졌습니다. 엘리사는 군인들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여러분, 이곳은 길도 아니요. 성도 아니 내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 오라’고 하자, 군대가 저를 따라 이스라엘의 당시 수도인 사마리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람 군대는 꼼짝없이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큰 근심에
빠졌던 이스라엘 왕은 신이 나서 당장에 그 모든 군대를 몰살을 시키려고 했지만 엘리사가 만류하고 오히려 떡과 물을 주어 먹게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원수를 먹이고 마시우게 한 것입니다. 그러자, 혼줄이 난 아람 군대는 엘리사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감히 침범하지 않았다고 23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갚으니 그 사랑 앞에 녹아지는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 너무나 멋지고 놀라워 감동이 큽니다. 이처럼 영안이
열리는 것은 신앙생활의 큰 힘이요, 승리의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 중에 영안이 닫히어서 하나님이 아무리 은혜를 주시려 하시거나 경고를 하시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매를 들고 때리셔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더 큰 매를 자초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멸망할 때 아브라함은 영안이 열리어 그 사실을 알았으나 롯은 세상의 욕심에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만났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영안이 열리며 예수님을 보고 고꾸라지며 변화되었으나 행 9:7절에 보면 같이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죽음의 유형지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은 영안이 열리면서 신령한 하늘의 세계와 미래 세계에 대한 환상을 볼 수 있었으나 많은 죄수들은 자기들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만 보다가 죽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계시는 데 세상의 욕심에 영안이 닫히어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여러분은 영안이 열린 자와 닫힌 자 중에 어디에 속한 자입니까? 여러분은 모두 영안이 열린 자가 됨으로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떻게 해야 믿음의 눈, 영안이 열릴 수가 있을까? 1. 하나님의 약속인 말씀을 통해서 보는 자들이 되는 것
하나님의
약속은 성경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지만 한가지 분명히 아는 것은 하나님은 성경의 약속대로 반드시
시행하시는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눈을 통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세계와 하나님의 뜻을 봅니다. 우리는 영안이 확
열리어서 천사의 모습이나 마귀의 모습은 보지 못할지라도 오직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성경의 약속대로 시행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고아
2,000명을 기적 가운데 먹여 살린 죠지물러에게 어느 분이 묻기를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하는 질문을
받고 대답하기를 ‘성경의 약속대로 믿은 데 있습니다. 나는 평생에 성경을 백 회 통독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싫증이 난 일이
없습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워졌고 읽을 때마다 힘을 얻고 희망을 얻었습니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 약속대로 이루어 주는 책입니다.
이것은 나의 54년간의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처음 3년간은 성경을 안 읽었습니다. 그 때 나는 신자로서의
기쁨도 사명도 느끼지 못하는 죽은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나는 그 2-3년 간을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성경의 눈으로 하나님의 세계와 하나님의 뜻과 인도를 바라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린 자가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기도의 눈을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와 뜻을 보는 것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인 반면, 기도는 그 약속을 붙잡고 드리는 청구요, 요청입니다. 즉, 성경은 약속의 보물창고라면 그
창고를 여는 열쇠는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으면서 믿음으로 쓰지 못하고 굶거나 물건을 못 산다면 얼마나
어리석겠습니까?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경고와 인도히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깊은
기도생활 중에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을 볼 수 있었고 가뭄 속에서도 미래의 큰비를 보는 믿음의 눈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사는 기도하는 자였기에 하나님의 천군 천사가 보호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믿음의 눈이
열립니다. 그러나 기도에 게을리 하면 이상하지요, 그나마 있던 믿음까지 약해지고 하나님의 세계와 그 뜻에 대해서 보지 못하는
지경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꾸준히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영적 세계를 보는 믿음의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응답으로 바꾸는
기도는 적어도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1)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을 찾아야 하고 그것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2) 기도의 저해요소인 죄책감이나 근심, 염려, 낙심을 하나님께 맡기어야 합니다. (3)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면
응답되어진 사실을 상상하며 그대로 될 줄로 믿으면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치유의
빛」의 저자 아그네스센포오드 여사에게 어느 부인이 상담하기를 ‘내 아이는 아주 삐뚤어 가고 있습니다.
남들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오해하여 점점 우울해지고 반항적으로 되어 감으로 점점 짜증이 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대답해 주기를 ‘이제부터 기도해 보세요. 기도를 하되 이렇게 해보세요. 밤에 그 아이가 잠들었을 때에 그 아이 위에 두 손을 얹고 그 아이가 앞으로 명랑하고 사랑스러우며 너그러운 아이가 되어 있는 모습을 눈앞에 그리면서 믿고 기도해 보세요.’라고 했습니다. 그 부인은 이
방법대로 한 달 동안 기도했습니다.
한 달 후에 연락이 오기를 ‘그 기도가 효과가 있었어요. 나는 한평생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었어요. 그 아이는 명랑해졌고 자신감이 생기었고 내게도 대단히 다정하게 대합니다.’라고 기뻐했고 2년 후에는 다시 연락이 오기를 그 아이는 행복감에 젖어 있고 훌륭한 신자가 되었다고 고백하더랍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으라. 그리고 응답되어진 사실을 바라보면서 기도하심으로 응답의 기쁨을 맛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말씀대로 믿고 나갈 때 영안이 열리는 것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이 있다는 증거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며 동시에 말씀대로 행할 때에 온전한 믿음으로 인정하시고 그 믿음 위에
친히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세 친구에게 큰 위기가 왔습니다. 간악한 왕 느브갓네살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화형을
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왕은 그들을 유혹하기를 ‘너희들이 이제라도 내가 만든 신상에게 절하면 살려주겠다.’고
합니다.
세 친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죽느냐? 아니면 우상에게 절하고 목숨을 부지하느냐?’는 심한 갈등으로 고민하다가 마침내 결단하여 외치기를
‘왕이 우리를 불 속에 던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 주지 않으실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상숭배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서 전혀 불에 타지 않는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강대국 아람
나라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 걸렸을 때에 엘리사의 초라한 초막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엘리사가 특별안수를 해주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런데 전혀 내다보지도 인사를 하지도 않은 채 하인을 시켜서 명령하기를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몸을 담그라.’고
했습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명령을 받고 나아만 장군은 처음에는 화를 몹시 냈으나 나중에는 모든 자존심을 벗어 던지고 무조건 물
속에 일곱번 들어갈 때에 문둥병이 깨끗이 고침받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신애성구공예사
대표 이희재 장로님의 간증에 의하면 4․19 혁명 이후에 사업이 크게 망해서 빚덤이 위에 앉게 됨으로 6남매가 굶기를 떡 먹듯이
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어머니인 이초운 권사님이 병들어 돌아가시는 큰 비극 속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삼각산에 올라가서 죽든
살든 간절히 기도하기를 며칠 동안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홀연히 “일어나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었습니다. 그런 음성을 세
번 듣고 힘을 얻은 다음에 다시 집에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충성을 다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맡은 일에 충성 등, 몇 년 동안 여전히 빚덤이 위에서 아무 증거, 아무 환상, 아무 음성이 없을지라도 무조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계속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어느 날부터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기 시작하는 데 놀라운 정도였고 나중에는 70평의 공장이 240평이 되고, 다시 700평이 되는 축복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말씀의 눈, 기도의 눈, 행함의 눈에 의해 영안이 열리어서 하나님의 세계와 그 뜻, 그 인도하심을 볼 수 있는 자들이 됨으로 늘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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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눈에 대한 사건이 많이 나온다. 단순한 사물을 보는 육신의 눈만이 아니다. 정신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있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눈도 있다. 우리는 육의 눈도 밝아야 하고, 정신세계를 보는 지식의 눈도 밝아야 한다. 그러나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적인 눈이 밝아지기를 사모해야 한다.
신명기 34:7에 모세는 죽을 때 나이 120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했다. 모세는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어둡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행7:55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 보좌에 서신 것을 보았다. 스데반은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는 순간, 날아오는 돌무더기에 죽어 가면서도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었다. 다윗은 시119:18에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이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눈을 말한다. 엘리사는 왕하6:17에 도단성에 갇혔을 때 불안에 떨고 있는 사환을 위해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눈을 여시매 불말과 불병거가 지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눈이 열려보니 불말과 불병거를 타고 지키는 하나님의 군대를 보니 도단성을 포위하고 있는 아람군대보다 많은 것을 보고 불안이 떠나고 담대함을 얻었다. 이 모든 말씀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눈이 열린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면서도 잘 못 살아서 신앙의 눈을 잃은 불행한 이들도 나온다. 삼손이 그러했다. 나실인으로 힘을 주셨는데, 힘을 정욕으로 잘못 사용했다. 머리카락이 잘리고 힘을 잃은 삼손을 블레셋이 붙잡았을 때, 손발을 절단한 것이 아니라 먼저 눈을 뽑아 버렸다. 눈을 잃은 삼손은 분별력을 잃었고, 방향을 잃었다. 비참한 말로로 끝이 났다. 엘리 제사장이 그러하다. 삼상3:2에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라고 했다. 어린 사무엘에게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이 엘리는 제사장이면서도 듣지 못했다. 눈이 점점 어두워졌다는 말은 신앙이 어두워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다는 말이다. 계3:18에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적인 눈이 병들었다는 말씀이다. 마귀는 성도를 공격할 때, 눈을 어둡게 만든다. 눈이 어두워지면 분별력이 없어지고, 방향을 잃게 된다. 오늘날과 같이 시대적으로나 영적으로 혼돈된 시대에 무엇보다 눈이 밝아야 한다. 사람은 세 종류의 눈이 있다. 육신의 눈이 있다. 모든 사물을 보는 눈이다. 지안이 있다. 지식을 통해 사물의 이치와 원리를 깨닫는 정신세계를 보는 눈이다. 영안이 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육의 눈이나 정신세계를 보는 지식의 눈으로 바라볼 수 없다. 신앙은 영적인 눈을 뜨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다. 기도도 영이신 하나님께 드린다. 예배도 영이신 하나님께 드린다. 요4:24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눈을 뜨고 영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롬8:5-6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다. 오늘도 우리는 영적인 눈을 뜨고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기를 사모해야 한다.
오늘 본문에는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이 얼굴에 슬픈 빛을 띠고 주님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내려가고 있었다. 사실, 부활하신 주님은 15절에 이들 곁에서 동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16절에 제자들은 눈이 가리워져서 알아보지 못했다. 17절에 제자들의 얼굴에는 슬픈 빛을 띠고, 주님을 향해 주님의 소식을 물을 때, 주님은 내가 바로 예수라고 하지 않으셨다. 같이 동행하시면서 성경을 풀어 주셨다. 이때 눈이 밝아진 제자들이 예수가 아니더냐고 외쳤다. 그리고, 32절에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고 고백을 했다. 그렇다. 오늘 이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1. 제자들은 동행하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15-17절)
1)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이다.(15-16절)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신다. 그런데 제자들은 눈이 가리워져서 동행하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눈이 가리워진 제자들은 불안하고 두려웠다. 자기들만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6절에 눈이 가리워져서 부활하신 주님이 동행하시나 알아보지 못했다.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눈이 가리워진 것은 무엇인가? 누이 가리워진 것을 해결해야 한다. 여러분도 신앙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 있지 않는가? 죄일 수 있다. 세속에 가리워질 수 있다. 육적인 것에 가리워질 수 있다. 또한 영적인 무지가 가리 울 수도 있다.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 곁에서 동행하고 있었지만 눈이 가리워져서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도 신앙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들이 벗어져야 한다. 신앙의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히12:2에 주님을 바라볼 때 평안을 얻는다. 그런데 눈이 어두워서 주님을 바라보지 못할 때 제자들의 모습을 보라.
2) 왜 제자들은 얼굴에 슬픈 빛을 띠고 있었나?(17절)
믿음 안에 살면서도 영적무지 때문이다. 영적인 눈이 어두워서 동행하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은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슬픈얼굴이다. 우리도 영적인 눈이 가리워진 제자들처럼 주님이 동행하는데 알아보지 못하고, 절망하고 낙심하며 슬픈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눈이 열려 주님이 나와 항상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알 때, 모든 근심, 염려 두려움과 슬픈 빛이 다 사라지게 된다. 오늘도 영적인 눈을 뜨고 동행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길 축복한다.
2. 어떻게 제자들의 눈이 밝아 졌는가? (31-32절)
1) 성경을 풀어 줄 때 영안이 열렸다.
성경을 풀어줄 때라는 말씀을 주목하라. “성경을 열어주실 때” 라는 뜻이다. 주님이 성경을 열어주실 때 눈이 밝아졌다. 주님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27절에 성경을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32절에는 성경을 풀어주셨다. 이때 눈이 밝아지면서 예수님을 알아 보았다. 그렇다. 주님이 성경을 열어주셔야 한다. 성경은 계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열어주셔야 한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다. 요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 했다.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이다. 성경을 많이 읽고 듣고 지켜가기를 힘쓰라. 이것이 축복이다. 성경 속에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사랑이 보인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걸어나오게 하라.”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 딤후3:16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철저히 어려서부터 성경을 가르친다. 신6:7에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을 갈 때든지, 누워 있을 때든지, 일어날 때든지, 이 말씀을 강론해 주라는 것이다. 이것이 쉐마교육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것이다. 유대인을 미워하는 사람은 있지만 무시하는 사람은 없다. 이들은 세계민족 위에 뛰어난 민족으로 평가받고 있다. 성경을 기준하여 인생의 방향을 정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들어야 한다. 롬10:17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다. 어린아이가 젖을 먹으면서 자라드시 믿음은 말씀을 들으면서 자란다. 성경은 수술도와 같다. 히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신다고 했다. 말씀이 속에 들어가면 수술도가 되어서 새 사람으로 변화 시킨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롬1:17절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읽다가 구원이 인간의 선행이나 고행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목숨 걸고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다. 성경을 풀어줄 때 영적인 눈이 열려서 부활의 주님을 알아본 것처럼 성경말씀이 열리기를 축복한다.
3. 눈이 밝아진 제자들의 반응을 보라.(32절)
1) 마음이 뜨거워졌다.
마음이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더냐고 외쳤다. 그렇다. 성경이 열릴 때, 마음속이 뜨거워진다. 은혜의 불이 나왔다. 성경이 열리기를 기도하라. 성경이 열려서 신앙의 눈이 밝아지고 마음이 뜨거워져야 한다. 주님도 뜨거운 마음으로 섬기고, 기도도 뜨거운 마음으로 드리고, 헌신도 사명도 뜨거운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축복한다. 구소련이 붕괴되었을 때, 알마타에서 타쉬켄트까지 18시간을 차로 가 본적이 있다. 가는 도중에 목동이 수백마리씩 양을 치는데, 길옆에 가끔 양이 죽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왜 이렇게 양이 죽었느냐고 목동에게 물었더니 하늘을 가리킨다. 큰 독수리가 수 십마리씩 날아 다닌다. 독수리가 잡아 먹고 버린 양이란다. 그곳은 고산지대라 해가 지면 몇 분 사이에 날이 어둡고 땅거미가 빨리진다. 이럴 때 양떼들이 목동의 시야에서 멀어지거나, 이탈한 양을 독수리가 쏜살같이 내려와서 공격을 하는데, 양의 등어리를 날개로 탁탁 친단다. 양이 적을 보는 순간 두 눈을 찍어버린다. 두 눈을 잃은 양은 분별없이 달려가다가 돌에 부딪치고 나무에 부딪쳐 쓰러지면 독수리가 와서 먹다 버린 양이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안이 밝아지길 기도하자. 원수 마귀는 성도를 공격할 때, 눈을 어둡게 만든다. 눈이 어두워지면 분별력이 없어지고, 방향을 잃게 된다. 사순절을 보내며 무엇보다 영안을 열어달라고 다윗처럼 기도하시길 바란다. 성경을 풀어줄 때 제자들처럼 가리워진 눈이 열리고, 마음이 뜨거워졌던 은혜가 회복되길 축복한다.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Finally, thers, pray for us that the message of the Lord may spread rapidly and be honored, just as it was with you.
신앙생활은 곧 기도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즈음 내가 기도하는 내용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무엇을 기도하고 있었는가?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두 가지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첫째는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기를 기도하라(1절)
주의 말씀이 달음질한다는 말씀은 복음이 매우 신속하게 전파되었다는 뜻이며 영광스럽게 되었다는 말씀은 복음이 전파되어 모두가 은혜를 입었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악한 사람들에게서 구해달라고 기도하라(2절)
복음을 전하려고 여러 낯선 지역을 순회할 때 예상하지 못한 위험과 어려움을 겪게 되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안전하게 보호해 줄 것을 부탁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가끔 뉴욕을 방문하는 미주지역 이외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은 뉴욕에서 지내는동안 매우 어두운 영이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뉴욕에서 살아가는 성도들과 주민들을 위하여 특별한 중보기도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체적인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구체적인 기도는 "기도(祈禱. Prayer)"와 "도고(禱告. Intercession)"와 "간구(懇求. Supplication)" 그리고 "감사(感謝. Thanks)"의 기도를 하라고 깨우쳤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은 "도고(禱告. Intercession)"에 해당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도고'란 다른 사람과 단체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기도생활을 점검할 때 나는 주로 무엇을 기도하였는지요?
기도의 범위가 나의 울타리에 머물고 있었다면 그 지경을 넓혀 영적으로 암울한 지역과 전쟁으로 고통을 받는 지역과 특별히 북한 땅에서 살아가는 주민들과 지하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오 주님
기도의 영으로 저희들을 덮어주셔서
영적으로 짓눌려 살아가는 암울한 도시들과
전쟁으로 상하고 지친 사람들
북녘 땅에서 신음하는 백성들과 지하교회 성도들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영혼들이 몸부림치는 현장에
말씀과 위로의 영이 임하여
소망의 삶을 누리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도고(禱告) Intercession
ἔντευξ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1783
사도 바울은 막연하게 기도를 부탁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으로 중보의 기도를 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의 부탁은 복음이 데살로니가교회에 신속하게 전파된 것처럼(대략 3주간 동안) 다른 지역에서도 이렇게 복음이 전파되기를 기도하라고 합니다.
복음의 신속한 전파와 복음의 열매를 위한 기도가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그리스도인들이 거주하는 그 지역에서 복음이 널리 전파될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위한 기도가 요구되는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뉴욕을 방문하는 선교사들이 이구동성을 하는 이야기는 "뉴욕이 마치 거대한 암흑에 휩싸여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영적으로 암흑과 같은 요해처럼 복음의 문을 쉽게 열지 않는 지역이라고 방문 소감을 자주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곳에 거주하는 성도들을 위하여 특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매우 심각한 특수한 지역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도의 협력으로 암울한 장막을 걷어내고 부흥을 위한 발판을 다듬을 수 있는 기회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1-3
1.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2.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새번역)
마지막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퍼진 것과 같이, 각처에 속히 퍼져서, 영광스럽게 되도록,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또 우리가 심술궂고 악한 사람에게서 벗어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사람마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여러분을 굳세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십니다.
기도의 네 가지 자세
디모데전서 2: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勸(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爲(위)하여 懇求(간구)와 祈禱(기도)와 禱告(도고)와 感謝(감사)를 하되.
I urge, then, first of all, that requests, prayers, intercession and thanksgiving be made for everyone--
기도(祈禱) Prayer
προσε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4335
뜻풀이부
1. 기도, 마 17:21, 막 9:29, 눅 22:45, 행 3:1.
2. 기도처, 기도소, 교회당, 행 16:13,16.
간구(懇求) Request. Supplication
1162.
δέη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1162
뜻풀이부
도고(禱告) Intercession
ἔντευξ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1783
1. 시간, 요구.
2. 기도, 딤전 2:1, 4: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도고(禱告)(딤전 2:1), 기도(딤전 4:5).
감사(感謝) Thanksgiving
εὐχαριστ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2169
뜻풀이부
1. 감사, 감사한 마음, 행 24:3.
2. 감사를 돌림, 감사함, 엡 5:4, 고후 9:11, 빌 4:6, 딤전 4:3등.
a. περισσεύειν ἐν εὐ. : 감사로 충만하다, 골 2:7.
b. εὐχαριστίαν τῷ θεῷ ἀνταποδοῦναι περὶ ὑμῶν : 너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살전 3:9.
3. 주의 만찬, 성찬.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첫째로'(*, 프로톤 판톤)는 시간적인 우선보다는 중요성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Guthrie, Robertson).
바울이 첫번째 중요한 사항으로 말하는 것은 기도에 어떤 사람을 포함시킬 것인가에 대한 것으로 본절에서 바울은 기도의 대상을 '모든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혹자는 '모든 사람'을 '모든 죄인들과 성도들을 포함하는 범세계적인 사람'(Robertson)으로 규정하지만 이것은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본절의 '모든 사람'은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인종이나 국적이나 사회적 지위의 구별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Hendriksen).
이것은 기도의 대상을 생각함에 있어 인간의 관습과 제도를 초월(超越)해야 함을 시사한다.
한편 본절에 나오는 네 개의 기도에 대한 명사인 '간구', '기도', '도고', '감사'가 각기 뚜렷한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아니면 단순한 동의어로서 반복 사용되었느냐에 대해서는논란이 많다(Hervey).
혹자는 이 네 단어의 의미를 따로이 규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Guthrie).
그러나 이 네 단어들이 열거된 것은 단순히 무의미한 반복만은 아니다.
그 단어들을 원어상으로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간구'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에세이스'(*)는 '긴박한 상황에서의 어떤 특별한 성취를 위한 탄원'을 의미한다(Earle).
둘째, '기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카스'(*)는 일반적인 의미로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경건한 아룀'을 뜻한다(Hervey).
셋째 '도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튜크세이스'(*)는 신약성경에서 딤전 4:5과 본절에서만 언급되는 단어로 '접근', '인터뷰','사회적 교제' 등의 개념으로 사용되었으나 본절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간구하는 '중보 기도'를 가리킨다(Hervey).
넷째, '감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카리스티아스'(*)는 과거의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뜻한다(Lenski).
하나님의 은혜(God's grace)
은혜라는 헬라어는 "카리스(charis. χάρις)" 라고 합니다.
'카리스'의 어원은 "기쁨(카라. chara. χαρά)"입니다.
은사(恩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카리스마()" 라고 합니다.
따라서 기쁨(카라)에서 은혜(카리스)가 파생하였고, 은혜(카리스)에서 은사(카리스마)라는 단어가 유래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은혜와 은사는 곧 기쁨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결과는 기쁨입니다.
은사를 사용한 결과 또한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
나님의 사랑(아가패)은 내가 사랑을 알기도 전에 먼저 나를 위하여 구세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영원한 위로
나님의 위로는 마음에 평안을 얻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구약에서의 은혜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과 같은 인물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을 통하여 드러났습니다.
그 은혜는 반복되는 결점에도 불구하고 선택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함에 의해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신약에서의 은혜는 성육신 사건을 통하여 최고의 절정으로 드러냈습니다.
Grace 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입니다.
구약 성경 는 언약의 약속과 구원의 행위를 통해 은혜를 보여줍니다.
신약 성경 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희생적인 죽음에서 은혜의 절정을 이룹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구원은 행위가 아닌 은혜의 결과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의로운 삶을 위한 힘을 강조하고 영생을 부여합니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하나님 아버지는, 무엇을 주셨는가?
-주시다는 동사 디도미(δίδωμι)는 "주다, 부여하다, 수여하다, 선물하다"
사랑을 주신 하나님(나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를 주신 하나님
영원한 위로 : '위로'는 '파라클레시스'(παρακλησιs) "격려, 권면, 호소, 간청, 위안, 위로"
어원이 보혜사 성령 원어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s)와 같다.
영원한 위로는 주님 안에 있다는 것으로 주님 안에 있으면 영원한 위로를 받는다.
좋은 소망을 주신 하나님
좋은 소망이란 하늘로 올라가셨던 부활 승천하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딤전 1:1)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니 곧 영광의 소망(골 1:27)
어렵고 힘든 세상에서 지낼 때 우리들을 굳게 세우시기를, 선한 일과 말을 나타내도록 도와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시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성품의 본질적인 측면이자 신자들의 삶에서 활동적이고 역동적인 힘으로 묘사됩니다.
성경에서 은혜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카리스(charis)는 인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은총, 축복이라는 개념을 요약한
단어입니다.
이 은혜는 의로운 행동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운 본성과 인류의 가치에 관계없이 친절과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그분의 열망을 강조하는 무상의 선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며 구약과 신약에 모두 스며들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구약 성경에서
은혜는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같은 인물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며, 반복되는 결점에도 불구하고
선택된 백성에게 하나님의 신실함과 공급이 확장됩니다.
예를 들어, 노아 이야기(창세기 6장)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박한 심판으로부터
구원의 수단을 제공한 방법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구출된 것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한 은혜의 행위였습니다(출애굽기 12장).
신약 성경에 따르면 은혜의 현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절정에 이릅니다.
요한복음 1장 14~17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그의 영광, 곧 아버지로부터 온 독생자의 영광,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을 보았습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어졌으나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율법이 의의 기준을 제시했지만, 예수님을 통해 은혜와 진리가 온전히 실현되어 인류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구원은 은혜의 직접적인 결과임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은 특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이 잘 설명해 줍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성경적 정의는 다방면에 걸쳐 있습니다. 은혜는 죄의 용서, 의로운 삶을 위한 능력 부여, 다음을
포함하되 이에 국한되지 않는 그분의 사랑과 은총의 심오한 표현입니다. 영원한 생명. 이는 성경 전체에서 구속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역동적인 힘으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변함없는 친절을 확신시키고 믿음과 감사의 삶을 위한 토대를 마련합니다.
Grace 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입니다.
구약 성경 는 언약의 약속과 구원의 행위를 통해 은혜를 보여줍니다.
신약 성경 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희생적인 죽음에서 은혜의 절정을 이룹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구원은 행위가 아닌 은혜의 결과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의로운 삶을 위한 힘을 강조하고 영생을 부여합니다.
복잡한 태피스트리에서 기독교 신학에서 은혜는 신앙, 구원, 신과 인간의 상호 작용이라는 근본적인 교리를 하나로 엮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리스어 '카리스'에서 유래한 은총은 인류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사랑을 포괄합니다. 이 신성한 자비는 우리의 행위나 공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깊이를 강조하는 하나님의 공짜 선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신자들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은 은혜에 의한 것이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다고 언급하며 은혜의 변화시키는 힘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에베소서 2:8-9).
기독교에서 은혜의 중요성은 여러 가지 렌즈를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원 :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인 은혜는 구원이 주어지는 메커니즘입니다. 은혜가 없다면 인류는
하나님과 멀어지고 죄의 짐을 지고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화해할 수 없습니다. 이 틈을 메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과 영생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변환 : 은혜는 단순히 정적인 선물이 아니라 신자의 삶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키는 역동적인
힘입니다. 은혜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도록 거룩하게 하시고 힘을 주시는 성령을 받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은 회심에 수반되는 도덕적, 영적 쇄신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임파워먼트 : 사도행전은 사도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담대하게 설교하고 기적을 행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준 방법을 보여줍니다. 이 같은 은혜는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신자들에게 힘을 주어 죄를 극복하고 용서를 베풀며 봉사와
사랑의 행위를 할 수 있게 해줍니다.
Unity : 은혜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단합을 촉진합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상호 의존성을 인정하면서 겸손과 사랑으로 서로를 끌어당겨 응집력 있고 서로를 지지하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합니다 : 은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 의로움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성품을 심오하게 반영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써 피조물과의 사랑스러운 관계에 대한 그분의 열망을 드러내십니다.
χάρις, ιτος, ἡ 스트롱번호 5485
뜻풀이부
1. 선물, 은사, 부여된 은총, 롬11:29, 고전1:7, 딤전4:14, 벧전4:10.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은사(롬1:11, 고전7:7, 딤전4:14), 선물(롬5:16).
923년 4월 11일 ~ 2019년 2월 16일
미국의 정신과의사, 작가입니다.
루빈은 미국 정신분석 연구소와 카렌 호니 정신분석 연구소의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뉴욕에 살았고 엘리너 캣츠와 결혼했습니다.
인생과 경력
루빈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 해군에서 복무했습니다.
그는 레이디스 홈 저널(Ladies' Home Journal, 1972-?)에 오랫동안 기고한 칼럼니스트였으며,
25개 이상의 소설 및 논픽션 작품의 작가였습니다.
1962년, 프랭크 페리 감독은 루빈의 소설 리사와 데이비드로부터 호평을 받은 영화 "데이비드와 리사"를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1998년 연예인 오프라 윈프리에 의해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그의 책 Shrink :
정신과 의사의 일기는 그가 뉴욕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하기 전까지 미국 서부 해안의 여러 정신 병원에 거주했던 시대에 쓰여졌습니다.
"자아 심리학"(동성애의 병리학으로 대표되는, 종종 정신 건강의 방정식과 규범적인 미국의 문화적 가치에 대한 순응으로 비판받는 운동)의 전성기에 정신 분석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임상의에게, 루빈은 정신분석학과 문화적 정통성과 관련하여 상징적인 존재였습니다.
연민과 자기 혐오 :
절망에 대한 대안(1975)은 억압과 방어에 대한 전통적인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지지하면서 신경증적 고통의 현상학에서 은밀한 자기혐오의 중심성을 강조하면서 정신분석학보다 티베트 불교와 더 유사한 자조적 접근법인 의식적으로 발동된 연민을 권장합니다.
이 이분법은 적어도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실존적 현상학과 영적 현상학에 대한 정신분석 모델의 개방으로서 (정신분석과 불교 사상이 생산적으로 동기화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최근의 설명은 엡스타인의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생각" 참조).
또는 정신분석학의 핵심 가정에 대한 인정되지 않은 급진적인 심문으로서 (분석적 글쓰기에서 이 경향에 대한 철저한 논의는 뒤퀘스네의 "프로이트 죽이기" 참조).
루빈은 2019년 2월 16일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루빈은 1966년 4월 11일 게임 쇼 진실을 말하기의 에피소드에 자신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다이어트와 체중 감량 방법에 대해 상담하는 심리학자로 청중들에게 소개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을 밝힌 후에야, 그 쇼의 진행자인 버드 콜리어는 그를 소설가이자 데이비드와 리사의 작가라고 밝혔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을 세 부류로 구분하였다.
첫째, 神을 발견하고 섬기는 사람이다.
(神을 찾아내고 섬김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시냇가 심은 씨앗-나무)
셋째, 神을 발견하려고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그냥 살아가는 사람이다.”
(神을 구하지도 않고 발견하지도 않고 세상적 가치관의 타성에 젖어 그냥 무위도식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 길가에 던져진 씨앗)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So then, brothers, stand firm and hold to the teachings we passed on to you, whether by word of mouth or by letter.
유전(遺傳)을 지키라!
유전(3862) 파라도시스
[ paradŏsis ] παράδοσις , εως, ἡ
스트롱번호 3862
뜻풀이부
1. 전해 내려오기, 전해 주기, [교훈, 계명, 이야기들의]전통, 유전, 전승, 마15:2, 막7:5, 갈1:14, 골2:8, 살후 3:6.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유전을 지키라
'유전'(遺傳)이란 '석유가 나오는 곳(油田)'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유전"이란 헬라어로 "파라도세이스"라고 하여 "어떤 사람에게 넘겨진 것" 이라는 뜻으로 바울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모세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율법"을 말합니다.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되고 사도에게 계승된 복음의 진리라고도 하겠습니다(3:6, 7. 마 28:20. 고전 11:23. 15:3).
좀더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 승천의 사실을 기초한 것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재림에 대한 신앙 때문에 서로 충돌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먼저 나타날 징조는 배도와 불법의 사람의 출현이 있을 것이라고 깨우쳤습니다.
세상에는 기적과 표적과 거짓의 불의로 사람을 미혹하는 일이 퍼지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하여 진리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은 환난과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믿는 자들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불의를 좋아하고 진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유전을 지켜야 할까요?
유전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잘 했다고 하는 칭찬을 듣기 위한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반드시 충성된 일군과 불의한 일군으로 구분하실텐데 충성된 일군에게는 착하고 충성된 일군이라고 위로하시며 참 안식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고전 11:2)
존귀한 주의 사람들이여!
악하고 개으른 종으로 심판대에 서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착하고 충성된 일군으로 보좌 앞으로 나가야 하겠습니까?
나의 삶이 나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지 누구보다 내가 더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모두 다 함께 주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때문입니다(13-14)
둘쨰는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 성령의 은혜로 우리 죄악을 고백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음받아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로 되게 하셨다.
3)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목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얻은 영생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된 마음으로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원하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으로 변화되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한다”(엡1:6)하였다.
2. 마지막 때에 사는 성도들을 향한 권면(15)
1)두려워하지 말고 동요하지 말고 굳게 서라 하였다. 주의 강림에 대한 거짓된 것에 미혹되어 두려워하여 동요하지 말 것을 권면하였다.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세상을 요란하게 하며 믿는 자라다 할수만 있으면 미혹할 것이라 주님도 말씀하셨다. 교회가 진리의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서지 못하면 사탄을 이길 수 없다.
2)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고 하였다. 우리를 굳게 할 것은 영적 체험도 아니고 성령의 은사도 아니다. 오직 사도들에게서 전해준 복음의 말씀이다. 이 말씀 위에 굳게 설 때 아무리 미혹의 역사가 세상을 혼란하게 한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자신을 성결케 할 것이다.
3)복음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세상과 사탄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할 것을 사도 바울은 권면하였는데 그 전신갑주의 무장은 곧 복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열매들이다. 이로 무장할 때 악과 싸워 이길 수 있고 영원한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있다.
3.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기도(16-17)
1)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하였다. 우리가 마지막 때에도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 기도할 대상은 예수님과 아버지이시다. 인생의 비극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리의 구원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게 때문이다.
2)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시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으로 품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 우리에게 위로와 힘의 근원이 된다. 또한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시다. 위로와 소망은 하나님께 있다.
3)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길 기도하였다. 성령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에게 임하게 되고 끝까지 선한 일과 말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행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다. 우리가 항상 추구하면서 나아갈 믿음의 열매이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But we ought always to thank God for you, brothers
loved by the Lord, because from the beginning God chose you to be saved
through the sanctifying work of the Spirit and through belief in the truth
하나님의 선택(God choose)
하나님이 우리들을 선택하신 이유는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
둘째는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나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나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을 확신합니까?
거룩한 사람은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으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드려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를 완전하게 하나님께 바치면 세상과나는 간 곳이 없어지고 오직 거룩하신 주님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자력종교가 아니라 타력종교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나의 노력과 수고로 인하여 종교가 목표하는 그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자기의 노력과 수고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 즉 성령의 도
움을 받아 흔들림이 없고 변함이 없는 믿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선택이 미래를 결정합니다.
유대 나라의 역대 왕은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때 백성들이 애끓는 호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제부터 백성들을 위로하고 살펴주십시오.
르호보암은 젊은 패거리들과 원로들을 찾아갔습니다.
원로들의 충고를 들을 것인가? 아니면 젊은 패거리들의 거센 다스림을 따를 것인가?
결국 르호보암은 지혜로운 원로들의 제안을 무시하고 젊은 패거리들의 거친 소리에 귀를 기우렸습니다.
그 결과 남쪽 유대 나라과 북쪽 이스라엘 나라로 분열했습니다.
믿음의 주가 되시며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나의 삶이 가장 아름답게 빛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시다.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르호보암의 선택
르호보암이
왕이 되자 국론이 분열되고 백성이 왕권에 도전하는 난국을 맞게 되었다.그의 신하 중에 정치적인 경험과 수완을가지 원로들은
온건책을 쓸것을 주장했고,경험이 적고 겁이 없는 소장파는 백성들을 힘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원로들은 백성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고, 소장파들은 백성들앞에서 왕의 이미지가 나약해 보이면 안되므로 백성의 의견을 들어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불행하게도 르호보암은 패망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원로들의 말을 무시하고 소장파들의 말을 들음으로 나라는 두 동강이 나는 비극을 초래하고 만 것이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택할 것이냐 아니면 이 세상을 택할 것이냐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은 우리를 죽음의 길로 혹은 생명의 길로 인도하게 되는 것이다.
聖化
救贖
선택(選擇)
택하사(하이레오마이) [ hairĕŏmai ]αἱρέομαι 스트롱번호 138
에베소서 1:3-4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찬송하리로다
- 이것은 유대인의 전형적인 찬양구로 하나님께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시사한다(롬 15:6; 벧전 1:3, Foulkes, Wood).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우리에게 복주시되
- 본절은 '엔'(*, '...안에')으로 시작하는 세 가지 전치사구로 구성되어 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엔 크리스토)
- 혹자는 본문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J.A. Allan). 그러나 본서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배제할 수가없다(2:6, Lincoln).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짐을 시사한다(Bruce).
(2) 하늘에 속한(*, 엔 토이스 에푸라니오이스)
- 본문과 같은 전치사구가 본서에서는 다섯번 나타난다(3, 20절; 2:6; 3:10; 6:12).
이것은 본절의 '신령한'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Foulkes, Bruce).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늘의 영역과 연결시키는 구원의 축복이다.
그러나 이 축복은 미래에 맛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속하는 축복이다(Lincoln).
(3) 신령한 복으로(*, 엔 율로기아 프뉴마티케)
- 여기서 '신령한 복'은 성령시 현존으로 이루어진 결과를 가리킨다(5:19; 골 1:9; 3:16).
이 복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지상적이며 육적인 축복이 아니라 천상적이며 영적인 복이다(Foulkes, Lincoln, Bruce).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택하사'의 헬라어 '엑셀렉사토'는 '선택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에클레고'의 단순 과거 중간태이다.
이것은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택하셨음을 시사한다.
즉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선택이
1. 하나님 자신을 위한 사역이며
2.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하에서 이루어졌음을 시사해 주는 표현이다(Wood).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됨을 시사한다(Lincoln).
한편 '창세 전에'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영원전에 이루어진 것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공적이나 일시적 환경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에서 비롯된 주권적 은혜임을 시사하며 동시에 '창세 전에'는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을 나타낸다(골 1:15-17, Lincoln).
택하사(에크레고마이)
[ ĕklĕgŏmai ]
ἐκλέγομαι
스트롱번호 1586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본절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선택하신 목적을 나타낸다.
'거룩하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순결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을 구별하여 도덕적인 결점이나 죄를 없게 하고 성령의 열매들을 소유하게 하심을 시사하며(갈 5:22, 23) '흠이 없게'는 결함이나 오점이 없는 깨끗한 상태를 가리킨다(5:27).
이런 두 가지 용어는 구약의 희생 제물과 관계가 있는것으로(LXX 출 29:36, 37; 민 6:14;19:2) 결점이 없는 윤리적 순결성을 의미한다.
이런 윤리적 순결성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사역을 통해 보여주신 '사랑'안에서 나타난다.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로 인하여 자신이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할 근거에 대해 진술합니다.
특히 바울은 '마땅히(호페일로. 3784)'란 수식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감사가 의무적인 것임을 암시합니다.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 바울은 신약성경에서 아주 드물게 쓰인 '헤일라토'('선택')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헤일라토'라는 동사는 70인역(LXX)에서 이스라엘의 선택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던 단어와 동일합니다(신 7:6, 7;10:15, Morris).
한편 '처음부터'(아파르켄)는 '영원 전부터', '창세 전부터'라는 의미로도 사용합니다(엡 1:4).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 '거룩'은 성령의 활동에 의한 결과이다(살전 4:7; 5:23).
이것은 신자에게 있어서 성령의 현재적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재림 때 완성되어지는 것으로(Bruce)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중 일부이기도 하다(Gloag).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요
- '진리를 믿음으로'란 인간의 반응에 대한 진술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믿음'으로 반응함을 의미한다.
'진리'(알레데이아스)에 대해 브루스(Bruce)는 하나님의 계시와 복음안에서 알려준 구원의 방법을 의미한다고 정의를 내렸다.
그렇지만 본 구절에서는 보다 좁은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 사건, 곧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Sanctification Of The Spirit
“…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 2:13)
거룩하게 하심은 우리 삶에서 성령님이 하시는 사역의 한 부분입니다.
거듭남으로 당신의 영이 하나님께 대해 살아있다 할지라도,
당신의 마음은 여전히 그 안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들로부터 정화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로마서 12:2에서 말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을 받을수록, 당신의 마음에 있는 잘못된 생각, 아이디어, 옛 본성의 산물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생각, 그분의 거룩한 말씀, 그분의 왕국의 나타남으로 교체됩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골 3:16)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세상의 길을 가고, 잘못된 선택을 하려는 갈망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제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로마서 12:1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분은 이것을 세상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죄에 내어주지 마십시오.
당신의 마음을 불의의 도구로 내어주지 마십시오. 당신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6:9-11은 말합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밑줄 친 부분에 주목하십시오!
당신은 살아있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대신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을 통해 당신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연합니다.
복되신 주님, 당신은 나를 영광스럽고 거룩하며 당신의 목적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셨고 모든 선한 일에 준비되게 하셨습니다.
나는 당신의 말씀이 나의 삶과 성품을 지어가도록 말씀에 완전히 내어드립니다.
의와 참된 거룩함의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베드로전서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디모데후서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안정은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열망되고 있습니다. 안정을 원하지 않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요즘 “안정”이라는 단어가 뉴스에 자주 등장합니다. 고용안정, 주거 안정, 생활 안정!!
급격히 흔들리는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요동치지 않고 굳건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격려할 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죠. “굳세어라 금순아!” 이 말에서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그 상황을 헤쳐나가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굳세어지기를 작정하고 결단하면 굳세지는 것입니까? 개인의 힘으로 굳건하게 서는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소아시아 지방에 흩어져 있던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도 녹록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시대 자체가 기독교 신앙으로 살아가는 일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로마제국은 황제를 숭배했습니다. 헌데 기독교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따랐기에 황제숭배를 거부하면서 받는 고난도 있었고, 유대교의 방해와 핍박도 있었습니다. 영지주의 이단들, 종교 사이비들이 판을 쳤습니다. 게다가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밀려오는 죄의 유혹도 엄청났습니다.
믿음 생활하려고 하는데 이렇게 사방을 둘러 어려움뿐이라면 신앙생활이 쉬운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은 주변의 어려움으로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을 바라보면서 바울은 그들에 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13절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당연합니다. 모든 것이 감사해야 할 일뿐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결단, 선택, 헌신으로 구원이 이루어진 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사 택하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없이는 누구도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면, 사람들의 삶이 달라지리라 생각해요.
둘째는 거룩하게 구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바울은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아무리 법을 잘 지키고 윤리적으로 살아도 거기에서 거룩함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택하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셔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셋째는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의 길이 다른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의 말씀처럼 구원은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뒷부분이 중요하죠.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믿음의 시작점이 성령이십니다. 고전 12:3b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아낌없이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은 종말에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우리를 이끌어갈 것입니다.
14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종말에 이루어질 영광, 하지만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영광이기에 피부적으로 와 닫지 않습니다. 그런데 롬 8:17에 보면 우리를 하나님의 상속자라고 하였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누릴 영광을 생각하면 대단한 겁니다. 이런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참 감사하죠!
이렇게 우리가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면 “다 되었다. 끝이다”라고 말 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이 부르셨고, 구원해주셨고, 영광을 예비하셨으면 이걸 누리며 앞으로 편안히 살아가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순간 분위기를 바꾸고 있습니다.
15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그러므로”라고 15절을 시작함으로써 이와 같은 부르심, 구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굳건하게 서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제들을 향해 말하고 있습니다.
굳건하게 서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미혹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살후 2: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오늘 한국의 교회 안에서도, 특별히 잘못된 은사자들을 통해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 잘 하다가도 이런 몹쓸 것들에 미혹되어 믿음이 무너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사도들이 예수님에게 가르침을 받은 내용을 전했습니다. 그와 함께 사도들은 편지를 통해서도 각각의 교회의 상황에 따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곤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복음을 믿고, 지켜야 했습니다. 복음 안에 굳게 서 있어야 사는 것입니다. 살후 3: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오늘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고, 지키는 것입니다. 믿음의 온전한 전통 위에 서는 것이 필요한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 내리지 못할 때, 우리의 믿음은 급격하게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잘 알지 못하니, 다른 것에 미혹되고, 거짓이 진리인 것처럼 빠지는 것입니다.
거룩한 지식이 축적되고 오직 하나님 말씀의 능력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또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견고하게 세워진 것 같은데,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것 같은데, 너무도 쉽게 흔들립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오히려 죄책감만 쌓여갑니다.
믿음의 완성은 우리 힘으로 불가합니다. 우리를 굳건하게 하여 주시는 마지막 방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시 89:21 “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벧전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16-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참으로 위로가 필요한 때입니다. 사람의 위로도 좋지만, 그 어느 위로보다도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를 다시금 세워주시는 힘이 됩니다. 그와 함께 믿음으로 살아가는 일이 어떤 상황 앞에서도 꺾이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굳건하게 하시기를 바울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홀로는 거친 세상 속에서 믿음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악한 세상이 그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것들을 이겨내며 우리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기를 그래서 견고한 믿음으로 시대 정신에 맞서 우뚝 설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나라는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우리는 요동치는 세상 나라 백성이 아닙니다. 이젠 흔들리지 맙시다. 자꾸 넘어짐으로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복음을 믿고, 복음대로 살아갑시다. 그리스도 안에 굳게 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하사 믿음의 시험, 삶의 위기, 죄의 유혹 앞에서도 미동하지 않도록 지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세 위격은 우리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아버지(God the Father)는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개인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택하여졌음을 배웁니다.
그리고 이러한 택함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바울은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라는 말을 사용합니다(살후2:13).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님(Holy Spirit)께서 관련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구별하시며, 그 결과 우리는 진리를 믿었습니다.
성경은 항상 하나님의 목적과 역사하심, 그리고 사람이
개인적으로 믿어야 하는 책임을 동일하게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음을 통해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셋째, 최종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our Lord Jesus Christ)의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님에 의해 실행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주 예수님과 긴밀하게 연결하는 데 그것은 결국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함께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실패나 우리의 적들도 그 영광의 목적에 도달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다 이해할 수는 없을 지라도, 우리의 반응은 13절과 같아야 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고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For this reason God sends them a powerful delusion so that they will believe the lie.
유혹의 낱말뜻
1. 히브리어
맛-싸 - 맛사, 시험, 유혹, 고난, 환난.
파흐 - 쇠판, 판금, 문패, 판금 갑옷, 올무, 덫, 함정 유혹.
파-타 - 속이다, 현혹하다, 배반하다, 꾀다, 유혹하다 어리석은, 망령된, 어안이 벙벙한, 아첨하 다, 우쭐하게 하다, 만족시키다, 설복하다, 납득 시키다, 믿게 하다.
2. 헬라어
아파테에 - 유혹, 속임수, 속임. 메도데이아 - 궤계, 유혹.
페이라스모스 - 유혹, 시험, 시험하는 쉬노파고마이 - 이끌리다, 유혹되다.
델레아조오 - 미혹하다, 유혹하다.
유혹에 대한 성구
1. 악을 꾀하는 자들의 특징
잠12:20 - 마음에 궤휼이 있음 잠6:14 - 마음에 패역을 품음
겔11:2 - 불의를 품음 잠16:27 - 불량한 자들임
잠24:8 - 사특한 자들임 에8:3-5 - 시기하는 자들임(창37:18)
렘7:24 -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함
시71:10 - 영혼을 엿봄 시64:2 - 행악자 임
시37:12 - 악인들 임
2. 악을 꾀하는 자들의 결과 및 보응
창5:5,6 - 하나님을 한탄케 함 민31:16 - 열병으로 징계를 받음
욥18:17 - 그 베푼 꾀에 스스로 빠짐 시106:43 - 죄악으로 인해 낮아짐
잠1:31 - 자기 꾀에 배부름 미2:1 - 화가 임함
신19:19 - 꾀한대로 벌을 받아야 함
3. 꾀는 이유 및 목적
신7:4 -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기 위하여
출22:16 - 처녀성을 빼앗기 위하여 삿16:5 - 비밀을 알아내기 위하여
왕하18:4-34 - 왕을 멸하기 위하여 약1:14,15 - 범죄케 하기 위하여
사3:12 - 다닐 길을 훼파하기 위하여 잠16:29 - 불선한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대하22:3 - 악을 행하게 하기 위하여 잠7:21 - 행음하게 하기 위하여
신13:6 - 우상을 숭배하게 하기 위하여 갈3:1 - 교리에 관하여
살후2:11,12 - 심판을 받게 하기 위하여
4. 꾀는 방법
선지자로(신13:1-3), 꿈으로(신13:1,계2:20), 이적과
기사로(마24:24), 여자로(삿14:15), 거짓 영으로(대하
18:20,21), 평강이 있다는 거짓 약속으로(겔13:10),
처자,형제,친구 등을 통하여(신13:6,7), 인간의 지혜
로(고전2:4), 궤술과 간사로(엡4:14), 음란으로(벧후
2:18,19), 고운 말로(잠7:21).
5. 꾀임받는 이유
약1:4 - 자기 욕심 때문에(엡4:22)
사47:10 - 자기의 지혜와 지식 때문에
마13:22 - 세상의 염려와 재리 때문에
갈2:13 - 외식하기 때문에
살후2:11,12 -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기에
6. 꾀임을 받는 자의 결과
창3:13 - 죽게 됨(잠7:23,신13:5,9)
왕하21:9 - 악을 행함 딤전2:14 - 죄에 빠짐
엡4:14 -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함
교묘한 유혹
요셉의 경우를 통하여
1. 청년의 몸으로 재물.색욕.명예욕에 불탈 때(창39:1-6)
2. 이역만리에서 고독할 때(창39:1-7)
3. 남의 수하에 있어 위협.공갈.원치 않을 때(창39:8)
4. 장기간에 걸친 여자의 유혹이 있을 때(창39:7-10)
5. 가정의 실권을 쥐고 있었고, 감독자가 없을 때(창39:9-10)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우리가 필히 경계해야 할 무리들
1. 이단을 설파하고 다니는 사람...............갈1:6-8
2. 경건을 이용하여 욕심을 채우는 사람.....롬16:17-18
3.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람..................벧후2:1
4. 진리를 거스리는 사람......................딤후3:8
5. 신화를 쫓는 사람........................딤후4:3-4
6. 진리에 착념치 않는 사람.................딤전6:3-5
7. 인습을 쫓는 사람...........................마15:9
8. 꾸며낸 이야기와 헛된 토론을 즐기는 사람
.......................................딤전1:6-7
9. 속이는 사람................................엡4:14
10. 정욕에 붙들린 사람...................벧후2:12-19
뒤로 미끄러짐
1.뒤를 돌아다 보는 것.........................눅9:62
2.소금의 맛을 잃는 것.........................마5:13
3.마음을 더러운 영들에 대해 열어놓는 것.......눅11:24-26
4.죄로 돌아서는 것............................요5:14
5.성경말씀을 거절하거나 제하는 것.............계22:19
6.유혹에 넘어가는 것..........................눅8:13
7.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것................요15:6
1.사탄이 사람을 유혹할 때 잘 쓰는 네가지 말(벧전5:9)
1) 누구나 다 하는 일이니까
2)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까
3) 너는 아직 젊으니까
4) 이번 한번 뿐이니까
= 그러나 유혹의 뒤에는 죽음과 절망이 하마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
2.사랑의 확증과 유혹을 이기는 힘
한 크리스챤 대학생으로부터 디스코텍 출입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어둡고 지루했던 긴 터널을 막 빠져 나왔듯이 고달프고 긴장되었던 고교시절을 마친 신입 대학생들에게는 이제까지 막혀있던 담이 뚫린것 같이 모든것이 자유로울 것이다.
한없는 가능성과 활짝 열린 기회앞에 오히려 선택의 갈등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크리스챤으로서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디스코택 출입문제도 그중의 하나이다.
그러한
곳에 가보고 싶은 유혹(誘惑)을 스스로 혹은 친구들로 부터 받게 된다. 적어도 이 문제로 갈등을 느끼는 사람은 영적으로 살아있는
증거라고 할 것이다. 갈등을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신앙적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려고 애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
없는 사람은 마치 죽은 물고기 같아서 물흐르는대로 떠내려 가는 것 같이 내면속에 이런 갈등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산 물고기는
물의 흐름과 싸우며 역행하려는 투쟁이 있는 것이다.
육신의 소욕, 즉 성령을 거스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된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쪽 선택보다 저쪽이 유혹이 더 많은 영적 우범지대(虞犯地帶)라면 우범지역 근처로 다니기를 피해야 하지 않는가 ?
크리스챤들을
하나님의 군사라고 성경은 말한다. 군인은 맹 훈련을 받아야 하고 엄격한 규율속에 통제된 생활을 한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기위해 육신의 법을 즐겨 쫓기를 원하는 나를 제어해야 하며 육이 원하는 것을 참는 고난도 감수해야 한다.
[군사로 다니는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세상과 벗되는 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으로서 경건을 방해하는 요소이다. 하나님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자기를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다.
나를 끌어 내리려는 유혹을 이기는 비결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 뿐이다. 이 사랑을 경험한 자만이 이런 유혹에 자신을
함부로 맡기지 않는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열중하여 놀다가 더 좋은 것을 발견하면 지금까지의 것을 미련없이
던져버리듯이 주님 사랑안에서 삶의 진정한 행복과 사랑을 발견한 자는 세속이 주는 재미를 버릴 수 있다. 유혹에 쉽게 빠지기 쉬운
청년의 때에 주의 말씀을 등불로 삼아 우리의 발을 삼가야 할 것이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4:8)
3. 악마의 회심의 미소
루이스는 유명한 [악마의 편지]라는 책을 통해서 마음밭 비유를 가장 탁월하게 설명했습니다.
어떤
영국의 노신사가 어느 날 대영제국의 도서실을 찾아갑니다. 그 노신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도서실에 들르는 그의 습관적인 태도로
그날도 도서관에 들어갔습니다. 여러 가지 책 중에서 손에 쥐어진 책이 신앙에 관한 책이었고, 이 책을 읽어 보다가 노신사의
마음 속에는 갑자기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분은 어떤 분일까? 나는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노신사에게 그 순간 악마가 찾아옵니다. 악마는 그의 마음 속에 이렇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점심 시간이야, 뭘 그렇게 생각해.
그 순간 그는 잠시 전 마음 속에서 생각하려고 했던 하나님에 관한 의식을 누르고 식탁으로 갑니다.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또 다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마음 속에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일까? 나는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가?
이 때에 악마는 그 마음 속에 다시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 악마에게 감동을 받은 노신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밥 먹는데 뭘 골치 아프게 생각을 하나. 우선 식사를 끝내고 보자.
식사를 끝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생각이 어렴풋이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노신사는 사단의 역사를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거 뭐. 있을 수 있는 생각이지. 오늘은 너무 바빠. 집에 가서 할 일이 많아.
그는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탑니다. 버스 좌석에 앉자 신문을 읽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런 자극도, 아무런 변화도 경험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때, 루이스는 이런 인상 깊은 그림을 그립니다.
마치 자신에게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고 버스를 타고 가는 이 노신사 뒤에서 악마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고 말합니다.
4. 뱀 같이 간교한 마귀
우리말 성경에는 뱀 또는 독사, 용
등으로 간단하게 번역되어 있으나 독사의 종류에도 살모사, 코카트라이스 혹은 바시리스크 등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그런데
바시리스크 독사나 북미 코카트라스 독사의 독액이나 독기는 너무나 강하여 그들의 입김이나 시선만으로 사람을 죽인다고 한다.
그런데
남미의 부쉬마스터라는 독사는 맹독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대하고 공격적이며 해독제가 전혀 없는 뱀으로서 그 뱀에게 쏘이면
피가 썩어 20분내로 죽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뱀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뱀이 지나가면 무지개 색깔이 선명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아름다움에 홀려 방심하면 사람이 그 뱀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기도 한다. 사단은 두 뿔 달린 무서운 도깨비의
모양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 인간을 매혹시키고 유혹해서 포로로 만든 후 죄의 독기를 불어넣어
생명을 잃게 한다.
5. 유혹을 받을 때
창세기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개를 훈련시키는 조련사의 이야기
개를
훈련시키는 방법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마룻바닥에 아주 먹음직스러운 쇠고깃덩이를 갖다놓은 후 개를 데리고 옵니다.
개가 쇠고기를
보고 뛰어가 그 고깃덩이를 물면 몇 차례 개를 때려주고 고기를 빼앗아 놓습니다.
그 다음 또 그 자리에 고기를 갖다놓고 기다리면
개가 또 뛰어가려고 달려듭니다.
그때 주인은 "안돼!" 하고 명령을 합니다.
그러면 개가 멈칫하고 섭니다.
이렇게 여러 번 반복 훈련을 하고 나면 개의 태도가 달라지게 됩니다.
나중에 고깃덩이를 또 갖다놓을 때 개가 어떻게 달라져 있는지 아십니까?
개는 고깃덩이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봅니다.
주인이 무엇이라고 명령을 하나?
개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행동할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가 떡을 가지고 와서 시험을 합니까?
세상의 인기를 가지고 와서 시험을 합니까?
세상의 영광을
가지고와서 시험을 합니까?
그것을 쳐다보지 마십시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무엇이라고 가르쳐 주시나?
주님은 어떻게 하셨나?
주님이 무엇이라고 명령하시나?
그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시험을 이기는 길입니다.
6. 개구리 신앙
미국 코넬 대학교의 실험실에서 있었던 예화를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를 차가운 물이 담긴 큰 비이커에 넣었습니다. 비이커 밑에는 분젠등을 놓고 1초에 화씨
0.017도씩 데워지도록 불꽃을 아주 작게 놓았습니다. 온도가 서서히 높아지기 때문에 개구리는 온도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비이커에서 뛰어올라 안전한 곳으로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구리는 태평스럽게 앉아
있었습니다.
온도는 0.017.도씩 올라 가는데 개구리는 여전히 제자리에서 빠져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두 시간
반쯤 지난 뒤 개구리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개구리는 뜨거운 물에 푹 삶아져서 죽어 있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죽은 것입니다.
자기가 죽어가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그대로 삶아진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이와 같은 개구리의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안일한 궁정의 환경이라는 비이커 속에서 정욕의 불이 0.017도씩 서서히
다윗을 데우기 시작했지만. 그는 자기가 얼마나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방심하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편안할 때일수록 더 기도해야 합니다. 더 바짝 말씀 가까이 다가앉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행복한 여건을 그 분의 이름을 높이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이런 열망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면 비록 당신 안에
어떤 육체의 정욕이 도사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발악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절대로 주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유 혹
성구와 금언
★ 우편으로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다(잠 4 : 27)
★ 한 영이 나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왕상 22 : 20)
★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저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게 하라(벧후 2 : 8)
★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 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썬데서 떨어질까 조심하라(벧후 3 ; 17)
★ 악마와 거래하고 싶지 않으면 악마의 상점에 가까이 가지 않도록 하라(토머스플러)
★ 불은 쇠를 시험하고 유혹은 바른 사람을 시험한다.
★ 유혹을 무서워하는 자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유혹된다(라브뤼이엘)
유혹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은 굴복하는 일이다.
★ 여자나 금전의 유혹에 이겨내는 힘이 없으면 완전한 인물은 아니다.(에머슨)
★ 썬다싱과 유혹 : 썬다싱이 기도 중에 예수님을 친히 뵙고 개종하여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씨이크교에의 전통적인 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자 썬다싱의 아버지 셔싱과 친척들의 반대와 핍박은 대단하여 썬다싱은 할 수 없이
고향과 친척을 떠나 멀리 루디아나의 기독교인 남자 기숙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썬다싱의 아버지 셔싱은 자기의 뜻을 거스르기는
했으나 사랑스러운 아들을 멀리 보내 놓고 걱정과 근심 속에 세월을 보내다가 썬다싱의 마음을 돌려 줄 방법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가정에 묶어 놓기 위해 결혼을 시켜 준다면 되겠지 생각하고 셔싱은 아들에게 결혼에 편지를 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내 눈의 광명이요. 내 마음의 평안이다. 나는 네가 오래 살기를 바란다. 여기에 있는 우리는 모두 잘 있다. 너도 잘 지내고 있겠지?
나는 네가 곧 결혼하기를 권한다. 서둘러 주기를 바란다. 기독교는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말라고 가르치겠지? 이렇게 편지를
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셔싱은 또 다른 편지를 썼다. 너는 미쳤느냐 누가 우리 재산을 관리해야 하는지 생각해봐라. 너는
가문에 오점을 남기고 싶으냐, 네가 약속만 한다면 3개의 은행에 저금한 돈 그 이자만도 매달에 34백 루피나 되는 그 돈을 몽땅
너에게 물려주겠다. 그러나 내게 약속을 해 주지 않는다면 네 몫으로 적금한 돈까지도 지불하지 않겠다.
지금 나는 건강이 몹시 좋지 못하다. 썬다싱은 이 편지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교장선생님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 고향인 람파로 돌아왔다. 썬다싱이 집에 도착하자 뜨거운 환영을 해주었다.
셔싱은 썬다싱의 목에 팔을 껴 앉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내 아들아 아버지 셔싱의 눈에서는 눈물이 고여 흘렀다. 그래 잘 돌아와 주었다. 너는 부탁한 것을 들어주기 위하여 집에 돌아온 것이지?
그때 썬다싱은 침묵하더니 칼끝보다 더 매서운 말을 했다. 아니요. 아버지 아닙니다. 나는 아버지의 요청대로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님의 종입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나는 예수님을 따르렵니다. 저는 루디아나가 아닌 여기 내 고향에서 예수를
알지 못하던 청년들에게 예수를 전하겠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과거보다 더 핍박했으나 유혹은 결코 이겼다.(설교 예화에서)
★ 유혹을 피하라 : 유혹을 피하는 것은 중요성에 있어서 거의 유혹에 저항하는 일에 필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눈의 욕심은 자칫하면 육욕을 불러일으키기 쉽기 때문이다.
이 일에 대하여 전에 읽은 매투 헨리의 주해에서는 〈당신이 금단의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면 금단의 나무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 유혹을 이기는 노래 : 헬라 신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헬라 나라는 섬이 많은
나라이다. 이 여러 섬들 가운데 한 섬에는 싸이렌이라고 하는 여자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선부들이 배를 타고 그 섬 옆으로
지나가노라면 그 여자들이 바닷가에 나와서 노래를 불러 선부들을 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래를 듣고 섬에 내렸다가는 가졌던 돈을 다
빼앗기고 마지막에는 거지가 되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선부들은 언제나 그 섬 옆으로 지나가게 되면 너무
무서워서 절대로 섬에 내리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고는 밧줄로 몸뚱이를 배에다 단단히 붙들어 메고 그 섬 엎을 지나갔다고 한다.
그렇게 지나가도 정작 바닷가에 이 여자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 광경을 보고 듣게 되면 도저히 견elf 수가 없어서 매었던 밧줄을
풀고 또 내려서는 홀딱 망하는 수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은 당시 헬라의 유명한 음악가 올훼오스라고 하는 사람이
배에 같이 타고 그 섬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올훼오스라는 음악가는 거문고를 한 손에 들고 노래를 부르니까 배에 타고
있던 선부들이 그 노래에 도취가 되어서 그 섬 옆을 지나면서도 이 여자들이 부르는 노래는 귓등으로 안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무서운 유혹을 이겼다는 이야기다. 우리 주위에서 음란의 노래가 들려옵니다. 이 유혹의 노래에서 이기려면 찬송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한경직)
★ 뒤를 보지 않고 : 어느 날 소크라테스가 길을 가고 있는데 악한 사람들이 소크라테스 뒤를 따라오며 돌을 던지면서 조롱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분개하여 대신 복수를 하겠다고 나서자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이 당신은 개가 짖으면 같이 짖고 나귀가 차면 같이 차겠느냐고 타이르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을 계속 걸어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 혹
<성구와 금언>
★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마 13 : 22).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 24 : 4).
★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 4 : 14).
★ 사람에게는 네 가지 유혹이 있다.
① 공상 ② 자만심 ③ 허위 ④ 생욕
★ 물은 쇠를 시험하고 유혹은 바른 사람을 시험한다(켐피스).
★ 가장 위험한 유혹, 그것은 무엇과 닮지 않겠다는 유혹이다(카뮈).
★ 유혹이란 구별없이 달라붙는 것이다(팔만대장경).
<실 화>
★ 유혹을 물리친 이상재
이상재 선생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있다.
기독교청년회 내에 소위 '유신회'라는 일파가 일어나 황성기독교청년회의 '황성'이란 두 자를 빼버리고 서양인 선교사들을 내몰고
일본조합교회가 우리 기독교청년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하려는 운동이 맹렬하게 일고 있는 무렵 난데없이 하루는 총독부로부터 좀
다녀가라는 전갈이 왔다.
선생은 영문을 모르고 갔었다. 그곳의 고위관리가 선생의 어려운 살림에 대해서 무척 동정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드디어 "우리가 돈 5만원을 드릴터이니 이 돈을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 여생을 편하게 보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노기가 등등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이 돈을 가지고 땅을 사라니 나를
이 자리에서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지"하시고는 "나는 하늘로부터 타고나기를 편안하게 일생을 마치지는 못하게 되어 있다."하시니 돈
5만원으로 선생을 매수하려던 자가 다시 할 말을 잃었다.
그때 당시 계란 한 꾸러미에 5전하던 시절에 돈 5만원은 거금이었다. 그만한 돈이면 논밭도 여러 정보 사고 과수원도 만들고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두르고 머슴, 하인 수십명도 두고 떵떵거리며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물질의 유혹을 이기지를 못한다. 그래서 돈 때문에 지조를 버리고 심지어는 나라를 파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상재 선생은 그런 유혹을 당장에 물리칠 수 있었던 과연 비범한 인물이었다.
★ 위싱턴의 유혹
위싱턴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지금도 그의 이름만큼은 살아서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정직했고 사심이 없었던 인물로 알려졌다.
그가 대통령이 되고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마치려 했을 때 미국 정계의 기류는 험악하였다.
강력한 연방정부를 주장하던 해밀턴 일파와 강력한 정부를 반대하면서 되도록 많은 권한이 각 주에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던 제퍼슨 일파 사이에 심각한 반목이 있었다.
사실은 그때 당시 워싱턴 외에는 아무도 그 반목을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의견도 두드러지게 대두되어 있었다.
"각하께서 이번에 물러나시면 신생공화국은 파멸되는 길밖에 없습니다."라고 간곡하게 번의를 종용하는 무리들이 왜 없었는가 말이다.
신생공화국을 파멸에서 막으려면 삼선개헌을 해서라도 대통령에 머물러 있어야 된다는 지론도 있었겠으나 이런 유혹을 단연 물리치고 삼선을 거부하고 권좌에서 내려왔으니 그의 위대함이 더욱 돋보인다.
★ 이성의 유혹
어떤 사람이 어린 남자아이를 여자없는 깊은 산중으로 데리고 가서 나는 새와 뛰는 짐승만으로 벗을 삼아 단 둘이서 살았다.
세월이 지나 어린 남자아이가 커서 20세가 되어 그 부자가 산중을 나와 속세에 발을 디뎠다.
때는 봄날이라 밭에서는 농부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이것을 본 하들이 밭에서 일하는 처녀를 보고 아버지에게 저것이 무슨 동물인가 물었다.
이때 아버지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두루미로다."라고 했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에게 요청하기를 " 이 동물을 잡아서 나를 주세요. 그것을 보니 내 마음이 두근거립니다."라고 하였다 함이다.
인간에게는 색에 유혹이 있다.
★ 신기루의 유혹
미국 서방 애리조나주에서 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에 사망의 골짜기가 있다고 한다.
지금부터 백 년 전에 기차도 없고 비행기도 없었던 그 때에 가주에 금이 많이 난다고 해서 동방사람들이 금을 캐기 위하여 마차를
타고 그 남방으로 골짜기를 통과하다가 죽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사망의 골짜기라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러면 그때 사람이 그
골짜기에서 왜 그렇게 많이 죽었는가 하면 그곳은 사망의 골짜기였기 때문에 목이 말라 죽었다는 것이다.
물이 없는 곳이지만
그 골짜기에 오면 신기루 현상이 생겨서 많은 사람이 그것이 물인 줄 알고 마시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신기루는 곧 푸른 바다와
푸른 물결같이 보이지만 사실 바다와 물이 아니다. 오늘날도 가짜 생수를 진짜로 속고 마시는 사람들은 반드시 죽고 말 것이다.
★ 악마의 유혹
파우스트(Faust) 박사가 주인공으로 나타난 작품 가운데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파우스트 박사가 땅 위의 쾌락에 빠지고 싶은 애욕과 천국에 올라가고 싶은 영생에 대한 기원과의 갈등으로 고뇌하고 있을 때 악마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가 나타나 유혹한다.
파우스트 박사는 메피스토펠레스가 세상에 온갖 쾌락을 보여주고 파우스트 박사가 그 유혹에 빠져 들어가 어느 순간을 보고 "게
섰거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하고 말하게 된다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자기 영혼을 맡기기로 약속을 하는 것이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 박사를 먼저 마녀에게 데리고 가서 어떤 여자든지 절세의 미녀 헬레네처럼 보이게 되는 마약을 먹인다.
동시에 그 약은 파우스트를 젊게 해주는데 성공시켰는데 그 늙은 학자 파우스트는 30년이나 젊게 하는데 성공했다. 파우스트는
거리에서는 평범하지만 마음씨 착한 소녀 그레에트엔을 만나 곧 사랑에 빠지는데 얼마 뒤 임신을 하고야 말았다.
그레에트헨의
오빠 바젠틴은 이 사실을 알고 노여워하여 파우스트에게 싸움을 걸지만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마력을 빌어 그를 죽여버리고
도망친다. 그레에트헨은 죄의식에 빠져 감옥에 갇혔는데 거기에 파우스트가 나타나 함께 도망가자고 꾀이지만 그레에트헨은 거절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린다.
하늘로부터 그 소녀가 구원되었다는 소리가 들리고 하늘로 올라가는 그레에트헨은 파우스트를 부르지만 그러나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이끌려 재빨리 도망친 뒤였다.
제2부에서 파우스트는 중세기 도이치 황제를 섬기는 몸이 된다. 파우스트는 황제를 부자가 되게 만들어 준다. 물론 메피스토펠레스의 마력을 힘입어서였던 것이다.
황제는 그리이스의 대표적인 미남 파리스와 미녀 헬레네를 눈 앞에 보여달라고 한다. 그래서 메피스토펠레스와 의논하여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어머니들 세계'에 도착한다.
그리하여 헬레네와 파리스가 서로 사랑하는 장면에 도착하여 파우스트는 이 과거의 환상적 세계로부터 헬레네를 빼앗는다. 뒤이어 인두마신히론의 힘을 빌어 그리이스 신화의 세계로 들어간다.
제3막이 되자 비로소 헬레네는 현실의 여성이 되어 파우스트 앞에 나타나는데 파우스트는 헬레네와 사랑에 빠져 그들 사이에 오이포
오리온이라는 자식이 태어난다. 오이포 오리온이 하늘을 나르려 하다가 이카루스처럼 땅에 떨어져 죽자 헬레네와 파우스트의 사랑도
끝이 난다.
그리하여 헬레네는 사라지고 그의 의상과 면사포만 파우스트의 판에 남는데 파우스트는 그 뒤 "이 지구에는
아직도 위대한 일을 할 여지가 남아 있다. 놀랄 만한 일을 해내겠다."하면서 황제로부터 습지를 받아 몇백만의 인류를 위해
간척사업을 하려 한다.
"새로운 땅을 만들어 지상낙원을 이룩하고 나는 믿음직한 언덕으로 이사하고 내 집 주위에는 파도소리가 철석이고 집안은 낙원일 것이다.
좋은 나라와 좋은 옥토를 가꾸어 이 쾌락을 누리겠다. 그때는 순간을 향해 '게 섰거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고 이 말을 독백으로 내뱉은 이유로 인하여 메피스토펠레스와 약속한 대로 죽는다.
마귀의 유혹은 끈질기며 온갖 유혹으로 결국은 사람을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이다.
★ 유혹을 거절한 아가나
이태리의 시실리 섬에는 성 아가나라는 동정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처녀는 너무도 우아하고 너무도 거룩해서 총독이 그를 범해 보려고 사람을 보내어 중매를 서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매장이가 중매를 서기는커녕 단단한 예수병이 전염되어 돌아오지를 않습니다. 이에 총독은 화가 나서 아가나를 잡아오게
하였습니다. 그 아름다운 미모 지성미가 흐르는 눈동자 온유가 단긴 몸매에서 아가나는 지독한 연민을 느낍니다.
'어찌해서
그대는 귀족의 아내가 되기를 거절하고 사형수의 종이 되고저 하는가?' 총독의 질문에 아가나는 엷은 웃음을 지우며 대답하는 말이
'그분은 나를 위해 정직한 죽음을 하셨습니다. 그분의 발을 씻는 종으로라도 사는 것이 비도를 밥먹듯 하는 귀족의 아내보다 훨씬
값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사실상 총독의 유혹을 거절하였습니다.
유혹에 관한 예화 모음
▣ 딱 한 번인데 뭘
미국 오클라호마 에이다의 제일 침례교회에서 열린 부흥회 때 한 시각 장애인 복음가수가 들려준 간증 한 토막이다.
10살
때 아버지와 사냥을 가게 되었어요. 그날은 주일이었어요. 어머니는 우리에게 주일예배 드릴 것을 권유했습니다. 아버지는 '주일 한
번 어긴다고 그리 걱정할 것은 없어' 라고 말했어요. 우리는 사냥터에서 토끼 한 마리를 발견했지요. 아버지는 저를 남겨두고 급히
토끼를 뒤쫓았습니다. 그리고 나무 사이에서 어른거리는 한 물체를 발견하고 총의 방아쇠를 당겼어요. 제 머리카락을 토끼의 꼬리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날부터 저는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이 일로 모두 구원을 받았어요. 제 눈을 잃고 그 대신
구원을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사탄은 항상 '딱 한 번인데 뭘' 이라는 말로 사람을 유혹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실수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삶의 지혜를 얻는다.
▣ 망신 부르는 3가지 함정
요 며칠 전 뉴스에 유명한 여배우가 음주운전을 하다가 경찰에 적발돼 자신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는 얘기가 화제가 됐다.
유대인들이 즐겨 읽는 ‘탈무드’에는 사람을 평가하는 세 가지 기준이 나온다. 그 첫째는 키이소오(돈주머니), 둘째는 코오소오(술잔), 셋째는 카아소오(노여움)이다.
먼저
그 사람의 인격을 측정해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돈’을 줘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그 돈을 어떻게 쓰고
처리하는가를 보고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돈 못지
않게 사람을 흔드는 게 있는데 그것이 ‘술’이다. 사람들이 술에 좌우되어 숱한 일들이 생기고 사고를 저지른다. 술로 인해 인생을
망치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다가 그 후는 술이 술을 마시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노여움’이다. 분노가 어떤 경우에 쓰느냐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짜증이 심할 때 느긋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 죄의 유혹
인간은
누구나 깊은 내면속에 죄를 지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절벽 위에 섰을 때 몸을 천길 만길 밑으로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과 같다.그러기에 사람은 죄를 두려워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죄에 빠져들게 된다.
미국의 황야지대에는 방울뱀이 살고 있다. 이 뱀은 무서운 독을 가지고 있어서 물리면 치명적이라고 한다. 이방울뱀이 다람쥐를 잡는 방법은 특이하다.
먼저
꼬리를 흔들어서 소리를 낸다. 이때 나무위에 있던 다림쥐가 그 소리를 듣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소리나는 곳을 내려다본다. 그 순간
다람쥐의 눈과 독사의 눈빛이 마주치게 된다. 다람쥐가 겁을 먹고 떨고 있을 때 독사는 입을 쩍 벌리고 기다린다. 떨던 다람쥐는
비실비실 중심을 잃고 나무 아래로 떨어진다 이때 독사는 다람쥐를 한 입에 꿀꺽 삼켜버린다. 인간이 죄의 함정에 빠지는 것도 이와
같다. 먼저 인간은 소리의 유혹에 달려든다. 달콤한 소리, 그럴듯한 소문,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다. 그러다가
이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되고, 눈이 욕망의 대상에 고착되면 자기도 모르게 그 대상에 이끌려 죄의 덫에 거릴고
만다. 일단 죄의 덫에 걸리면 빠져 나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 사탄의 유혹
사탄이 사람을 유혹할 때 즐겨 사용하는 네 마디 말이 있다.
첫 번째는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말이다. 작은 실수 하나가 사람을 함정에 몰아넣는다. 큰 물고기도 작은 미끼에 걸려든다.
두 번째는 "딱 한 번인데 뭘"이라는 말이다. 사탄은 항상 '딱 한번'이라는 말을 유혹의 무기로 사용한다.
세
번째는 "너는 아직 젊어"라는 말이다. 사탄은 교회출석을 결심한 사람의 귀에 이렇게 속삭인다. "네가 교회에 출석하기는 너무
젊어. 조금만 더 기다리라구" 이 유혹에 넘어가 젊은 시절을 허송하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네 번째는 "누구나 이렇게 사는데 뭘"이라는 말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을 강조한다. '좁은 문'은 군중에 휩쓸리지 않는 삶을 뜻한다. 인생은 한순간의 결단에 의해 성패가 갈린다. 바른 결단은 성공의 절반이다.
▣ 미모 여인의 유혹
어느
날 저녁 그가 저녁식사를 하고 있을 때 누군가 정원을 가로질러서 그의 오두막집으로 걸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요한 수사가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니 미모의 한 젊은 여인이 문간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요한 수사는 시내에서 또 예배당에서 몇 번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빼어나게 아름다워서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바로 그 여인이 요한 수사에게 한 말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 여인은 요한 수사를 애인으로 삼고 싶다고 열정적으로 고백하였던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요한 수사도 자기에 대해 같은
연정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이런 행동은 16세기의 스페인 여성으로서는 꽤나 당돌한 것이었다. 요한
수사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은 후에 그녀는 자기가 열망한 연인관계를 요한 수사와
나눌 수 없다는 걸 알고 집으로 돌아갔다. 긴 세월이 지나간 다음 요한 수사가 그 생애의 말년에 그의 친구 요한 에반젤리스타
수사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자기는 그 젊은 여인에게 완전히 마음이 끌렸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그 여자에게 어느 모로나
반했던 것이다. 이 실화는 자기 육신의 욕망 속에서 살면서도 어떠한 상황에서나 자기가 일찍이 선택한 예수님 한 분에게 자기를
완전히 맡겨 드린 충성스런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성자들의 118가지 이야기」/ 기독문서선교원
▣ 유혹을 이기는 힘
조선시대에
명기 황진이는 모든 영웅호걸들을 사로잡았던 절세미인으로 유명합니다. 하루는 지조가 있기로 유명한 벽계수가 황진이에게 꼼짝 못하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그녀를 만나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송도로 갔습니다. 하지만 천하의 벽계수도 밝은 보름달 아래에서 아름다운 자태로
시를 읊조리는 황진이의 모습에 넋이 나가 그만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항상 온갖 종류의 유혹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들은 그 유혹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나쁜 습관, 몸에
해로운 여러 가지 유혹들을 이기는 방법은 먼저 자신이 나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유혹의 요소에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 방울뱀처럼 유혹하는 사탄
미국의 황야지대에는 방울뱀이 살고 있습니다. 이 뱀은 무서운 독을
가지고 있어서 물리면 치명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방울뱀이 다람쥐를 잡는 방법이 특이합니다. 먼저 꼬리를 흔들어서 소리를
냅니다. 그러자 나무 위에 있던 다람쥐가 그 소리를 듣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소리 나는 곳을 내려다봅니다. 그 순간 다람쥐의 눈과
독사의 눈이 마주칩니다. 다람쥐가 겁을 먹고 떨고 있을 때 독사는 입을 쫙 벌리고 기다립니다. 떨던 다람쥐는 비실비실 중심을 잃고
나무 아래로 떨어져 독사는 다람쥐를 한입에 꿀꺽 삼켜버립니다. 이 시대도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입을 쫙 벌린 채 삼킬 자를
찾아다닙니다. 온갖 타락한 문화와 세속적인 물질문명을 매체로 하여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매혹적인 음녀로 가장을 하고
와서 함께 금잔의 포도주를 마시자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쾌락과 일락에 푹 빠져 혼합주의의 삶을 살아보자고 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신부로서 정결한 영성을 포기하고 부정한 삶, 음란하고 더러운 삶을 살자고 유혹합니다. 이에 우리 마음이 바람 앞의
갈대처럼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쾌락과 죄악의 짜릿함이 멋있어 보이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들이 낭만적이고 하나의 예술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바로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우리 안에서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매정하고 단호한 결단이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정결한 영성에 생명을 걸어라」/ 소강석
▣ 유혹의 콩
영국의 유명한 부흥 전도사 로랜드 힐 목사가 어느 날 거리를 지나가는데, 여러 마리의 돼지가 마치 양이 목자를 따라가듯 어떤 사람을 줄줄 따라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호기심이 생긴 힐 목사는 돼지들의 뒤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이 도살장으로 인도하는 데도 돼지들은 아무 반항 없이 따라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신기하게 생각한 힐 목사는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여보세요. 당신은 어떻게 해서 돼지를 이곳까지 능수능란하게 인도해 오셨습니까?" 힐 목사의 질문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에게는 비결이 있지요. 보시다시피 나는 완두콩 바구니를 들고 오면서 계속 몇 알씩 흘려주었지요." 힐 목사는 "바로 그거요. 그것이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방법입니다. 사탄은 쾌락의 콩, 정욕의 콩, 욕망의 콩, 우매의 콩, 죄의 콩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콩알을 계속 우리 앞에 뿌리고 갑니다. 우리가 그 콩을 주워 먹으며 따라가다 보면 우리 영혼의 도살장인 지옥으로 가게 되지요. 그 유혹의 콩으로 인해 많은 무리들이 계속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사라진 입술 자국
오레곤 주에 있는 한 중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학교의 여학생들은 립스틱을 화장실 거울에다 칠하곤 했는데, 그들은 거울에다가 작은 입술자국을 여럿 만들었던 것이다. 그 자국이
점점 많아져 골칫거리가 되자, 마침내 이 학교의 교장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좋은 수를 생각해 내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교장은 모든 여학생들을 화장실에 불러서 관리인과 함께 하도록 했다. 교장은 화장실을 매일 깨끗이 닦아야
하는 관리인에게 거울에 있는 입술자국이 문제가 되고 있음을 설명했다. 화장실을 닦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시범을 보이기 위해
교장은 관리인에게 거울 중에 하나를 닦도록 요청하였다.
그러자 관리인은 변기에 넣었다가 꺼내고 하던 자루가 달린 긴 솔을 가지고 입술자국을 문질렀다. 그 후 더 이상 거울에 입술자국은 나타나지 않았다. 자기들이 입맞춘 거울이 무엇으로 닦이고 있는지 보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죄의 유혹을 받을 때 이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 만약 당신이 입맞춘 유혹의 진정한 더러움이 무엇인지 단지 보기만 한다면, 당신은 그 유혹에 이끌리지 않을 것이다.
▣ 죄의 유혹을 제압하는 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옛날
뱃사람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적막한 섬'에서 들려오는 요정의 노래소리였다. 선원들이 밤중에 배를 타고 이 섬을 지나면 사람의
간장을 녹일듯한 요정의 노래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면 선원들은 그 음악에 도취해 비틀거리며 바다에 뛰어들었다. 아침이면 선원들은
모두 바다에 빠져죽고 빈 배만 둥둥 떠있었다. 그러나 한 배는 단 한사람의 희생자도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선원들은 요정의
노래가 시작되면 그보다 훨씬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화를 면했다. 요정의 노래는 선원들의 장엄한 합창에 완전히 눌렸다. 선원들은
요정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지 않았다. 우렁찬 합창으로 요정의 노래를 제압한 것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신앙이 주는 기쁨과 감격은 세속의 섬에서 들려오는 요정의 노래를 제압한다. 신앙은 죄의 유혹을 제압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 달콤한 유혹의 결과
어떤
여행객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영국의 한 해변을 찾았습니다. 그는 휴가철을 넘긴 후라 한적하고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즐길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여행객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완전 딴판이었습니다. 수많은 갈매기들이 모래사장 위에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여행객은 죽은 갈매기들을 치우고 있는 사람에게 갈매기들이 죽은 원인을 물었습니다. 갈매기를 치우던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여행객들이 던져준 과자와 사탕들 때문이지요. 갈매기들은 그 달콤한 먹이들을 받아먹다가 그만 자연먹이에
대한 식욕을 잃어버리게 됐고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긴 후에도 여행객들의 달콤한 먹이만 기다리다가 굶어죽은 겁니다.”
우리도 때때로 주위로부터 달콤한 유혹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달콤함에 탐닉하는 것이 때로는 우리에게 영혼의 배고픔을 채울 수 있는 좋은 양식들을 잊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김남준 목사(열린교회)
▣ 어느 쥐의 유언
송현이라는
사람이 쓴 <어느 쥐의 유언>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 말 귀담아 듣거라.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들은 저마다 다른
무서움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 중에서 무서움의 형식을 감추고 있는 무서움이 가장 무서운 무서움이다. 내 말 잘 알아듣거라.
고양이와 쥐덫이 가장 무서운 것이 아니다. 고양이는 언제나 고양이로 있고, 쥐덫은 언제나 쥐덫으로 있으니, 내 나이가 되면
고양이쯤이야 차라리 같이 늙어가는 이웃일 수도 있고, 쥐덫쯤이야 내 슬기의 시험대 정도로 그친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고양이도 아니고 쥐덫도 아니고, 무서움을 다채롭게 위장한 쥐약이다. 쥐약의 외형은 탐욕의 혀끝과 코끝을 유혹하기 위해 자연스럽고
믿음직스럽고 우호적이고 헌신적이다. 그러나 쥐약의 외형이 어떻거나 간에 쥐약은 쥐약이다. 이 바보들아.” 우리도 우리 육체를 위해
자연스럽고 믿음직하고 우호적으로 보이는 일들을 찾다가 영생의 길에서 멀어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들을
삼갑시다. 하나님이 섭섭해하실 일들을 삼갑시다. 그것이 지극히 작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믿음직스럽고 우호적인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작은 일들이 우리들에게 영적인 쥐약일 수 있습니다. 육체의 썩어질 것을 위해서 살기보다는 영생을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 고용봉
▣ 거저 얻으려는 유혹을 물리치라
일본 하네다 공항 근처에 조그마한 일본 교회가 하나 있는데 올림픽 경기를 앞두고 도로 계획상 땅을 싼값에 팔게 되었는데 그것을 교회가 샀습니다. 그런데 다음해 일본 정부는 도로를 다시 정리하면서 그 땅을 비싼 돈을 주고 사갔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돈을 많이 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제직회에서 "이렇게 큰 돈을 벌었으니 이 돈으로 교회당을 짓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있던 믿음 좋은 집사가 "목사님, 우리가 거저 받은 돈 가지고 교회당을 지으면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이 돈은 거저 받았으니 자선기관에 줍시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우리가 땀흘린 정성으로 지어야 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말에 동의했습니다. 거저 받으려고 하는 일확천금의 허영이 마귀의 심리입니다. 공무원들이 거저 주는 돈 받는 것이 뇌물이요, 거저 주는 팁을 받으려는 것이 유혹이요, 남의 것을 거저 가지려는 것이 도적이요, 강도입니다. 이것이 다 사단이 준 시험입니다. 절박한 순간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당연하나 항상 거저 받으려는 기도는 위험합니다.
▣ 바구니와 새
사람들이
어찌할 수 없는 높은 하늘을 마음껏 훨훨 날아다니는 새들을 보면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유롭고 속이 다 시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새가 바구니 속에 갇혀 있다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제가 어렸을 때는 바구니로 새를 잡아서 키우기도 했습니다.
바구니 아래 볍씨를 뿌려놓고 막대기로 괸 다음 실로 묶어 길게 늘어뜨려 그 끝을 잡고 절구통 뒤에 숨어있습니다. 볍씨를 발견한
새들이 처음에는 경계를 하면서 두리번거리지만 이내 바구니 아래까지 들어오고 맙니다. 실을 잡아당겨 괴어놓은 막대기가 빠지면서 새는
그만 바구니 안에 잡히고 맙니다. 전에는 그렇게 해서 새를 많이 잡았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늘을 날 수 있는 두 날개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와 말씀이라는 날개입니다. 하지만 날개를 접은 지 오래 되어서 날 수 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니면 닭처럼 날개가
퇴화하여 소용없는 날개를 달고 있던가. 하늘을 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아주 사소한 것들입니다. 바구니 아래 놓인 볍씨 같은 것들
말입니다.
ⓒ 최용우
▣ 터키 사탕
CS 루이스의 우화 ‘사자와 마녀와 옷장’ 의 줄거리이다.
악한 마녀가 아주 똑똑한 소년 에드먼드를 죽이려고 사용한 도구가 있다. 그것이 바로 ‘터키 사탕’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향기로운 사탕인데 한번 먹어본 사람은 그 달콤함에 빠져 그것을 먹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사탕
속에는 사람이 느끼지 못할 만큼 아주 적은 양의 치명적인 독약이 들어있다. 터키 사탕은 달콤한 맛으로 사람을 서서히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가는 무서운 독약인 것이다. 루이스가 여기에서 표현하려 한 것은 죄의 속성이다. 사탄은 터키 사탕처럼 달콤한 말로
인간을 유혹한다. 사탄의 말은 항상 ‘핑계’라는 이름의 당의(糖衣)로 싸여 있어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다. 사탄은 오늘도
인간을 향해 네 마디 말로 속삭인다.
“이번이 마지막인데 뭘. 이 정도는 괜찮아. 불가피한 일이었어. 누구나 이해할거야.”
죄는 항상 달콤하다. 그러나 그것의 종착역의 이름은 사망이다.
▣ 유혹을 경계하라
한
고등학교의 축구감독인 마이크 슬러터 감독은 2002년 시즌 때 그가 ‘평생 단 한 번뿐인 팀’이라고 부르던 축구 부원들을 데리고
주 우승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주전 선수들을 비롯한 16명의 선수들이 미성년자로서 음주한 사실이 적발되어
체포되었다. 평소 슬러터 감독은 선수들에게 술이나 담배, 마약으로 문제를 일으키면 팀에서 제명시킬 것이라고 말해 왔기 때문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결국 그는 선수들을 모두 제명시켰다. 슬러터 감독은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결국은 책임의 문제입니다.
선수들은 규칙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나는 언제나 너희를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너희가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단다.” 제명을 당한 선수들이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결승전이 다가왔을 때 유니폼을 입고 벤치에 앉아 팀을 응원했다.
그날 팀은 63대 0으로 패했다. 하지만 감독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누구나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타협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그 선을 넘지 않음으로써 얻는 만족감은 매우 크다. 한 20년쯤 후에 슬러터 감독 밑에 있던
선수들이 찾아와 그때 축구 팀에서 제적당한 경험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었으며, 그를 어떻게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는가
이야기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이 오면 슬러터 감독은 주 우승컵을 얻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보상받게 될 것이다.
「결정적 순간의 원칙」/ 존 맥스웰
▣ 꿀과 파리
이솝우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창고에 꿀이 흘려져 있었다. 이 꿀 냄새를 맡고 파리들이 몰려와 핥아 먹었다. 그런데 꿀맛이
어찌나 좋던지 파리들은 떠날 줄을 몰랐다. 그러나가 그만 날개며 발이 꿀이 묻게 되어 영영 헤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물질에 정신이 팔려 영원한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가 세상에는 많이 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자들만이 아니라 믿는자들도 여기에 나오는 파리들 처럼 세상의 쾌락과 물질에 빠져 그들의 인생을 망치는 자들이 많다 주님 오심이 가까운 이때에 우리자신들을 점검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 주인이 된 고슴도치
고슴도치가
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마침 구렁이 가족이 살고 있는 굴을 발견하고 함께 살자고 간청했다. 구렁이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고슴도치의 청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고슴도치가 굴속으로 들어온 다음에 보니 따가워서 도저히 같이 지낼 수가 없어서
구렁이가 말했다.
“고슴도치씨, 미안하지만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겨 주십시오. 당신은 몸집이 작은데 비해 가시가 너무
따가워서...” 그러니까 고슴도치는 성을 버럭 내면서 “내가 싫거든 당신들이 나가시오! 나는 다른 곳보다 여기가 좋소”라고
하였다.
사탄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겠다고 달콤하게 유혹하여 우리를 파멸 가운데로 이끌며, 끝내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우리를 종으로 삼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사탄을 문안에 결코 들여서는 안 된다.
▣ 유혹의 결과
안데르센의 동화에 [분홍신] 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술사가
만든 분홍신은 누구든지 한 번 신기만하면 일생동안 춤을 춰야하는 마법의 신입니다. 그런데 한 소녀가 그 신의 아름다움과 호기심에
매혹되어 그만 신을 신게 됩니다. 소녀는 날렵하게 춤을 추었습니다. 황홀했습니다. 화려한 거리에서 많은 청년들의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서운 악마의 계곡을 지나기도 합니다. 자기 집앞에 이르렀을 때 그 어머니는 "이제 그만 춤을 멈추고 집에
들어오라."고 애원하지만 분홍신의 마력은 어디론가 이끌어 갔고 소녀는 결국 춤에 지쳐 죽고 마는 것입니다.
▣ 뱀과 선악과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았는데 뱀이 와서 여자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하려고 합니다. 여자가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다 따먹어버렸습니다. 여러분, 만일 아담과 하와가 한국 사람이었다면 뱀의 유혹에
넘어갔을까요 안 넘어갔을까요? 절대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왜냐구요? 한국사람이라면 뱀이 와서 유혹할 때 뱀을 잡아 먹어버립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 뱀 같으면 간이 커서 선악과 따위를 따먹으라고 유혹하지 않습니다. 아예 하와를 유혹해서 데리고 도망간다구"
▣ 죄의 유혹
한
아랍 상인이 추운 겨울 사막에서 천막을 쳐놓고 살을 에이는 찬바람을 피해 편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밖에는 그의 낙타가 떨고 서
있었습니다. 이 낙타가 내려진 천막문을 제치고 고개를 들이밀고서 주인에게 고개만 좀 넣고 있자고 청하였습니다. 주인은 못마땅했지만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이 낙타가 한다는 소리가 "내 어깨가 몹시 춥군요. 제발 제 어깨와 앞발만 좀 들여놓게
해주세요."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낙타의 어깨와 앞발을 들여놓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조금 있다가 이 낙타는 살며시 주인에게
접근하여 처량한 목소리로 자기의 육봉과 몸을 좀 들여 놔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주인은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이제
낙타는 거의 다 들어와 있었습니다. 조금있다 이 낙타는 자기 뒷발을 들여놓자고 애걸하였습니다. 마지못해 주인이 이에 동의하여
뒷발을 다 들여놓자 이 조그만 천막 안에 들어선 낙타가 한다는 말이 "주인님, 우리 둘이 여기 있기에는 너무 좁군요. 주인께서
나가 주시는 게 어떨까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생활에 죄가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각성하라는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리 작은 유혹이라도 단호히 '안돼'라고 물리칠 수 있는 도덕적 용기가 필요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3:13)
/한태완 목사(예화포커스)
▣ 물질의 유혹 앞에서
1930년
프로펠러 하나 달린 단발기를 몰고 대서양을 처음 횡단한 영웅이 있었습니다. 린드버그 대위입니다. 생명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일에 도전했다가 생명을 잃었습니다. 린드버그 대위는 조그만 비행기를 타고 서른 몇 시간 동안 대서양을
횡단했습니다. 그리고는 일약 세계가 주목하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가 영웅이 된 다음에 파리를 한 번 방문했는데, 그가
온다는 말을 듣고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렸습니다. 어느 큰 담배 회사 사장이 이 기회를 이용해 자기 회사의 담배를 광고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린드버그에게 다가가 담배 한 개비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것을 손에 끼어도 좋고 입에 물어도
좋습니다. 포즈 한 번만 취해 주십시오. 그러면 사진 한 장을 찍는 대가로 5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70년 전에 5만
달러라면 대단한 액수입니다. 그러나 엄격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린드버그는 이런 말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저는 세례
받은 교인입니다.” 이 말은 파리 신문에 기사로 나왔고, 그의 말을 듣고 그 당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성금 10만 달러를 모아서 린드버그에게 갖다 주었다고 합니다.
- 드림 메이커 / 신경식 편저
유혹(誘惑) : 잘못된 길로 꾀임
유혹(4106) 프라내 πλάνη, ης, ἡ
스트롱번호 4106
미혹(迷惑) :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함
데살로니가후서 2:3
ἐξαπατάω
스트롱번호1818
속이다
롬7:11
살후2:3.
시험(試驗) : 사람의 됨됨이를 알기 위하여 떠보는 일
- 페이라조[ pĕirazō ] πειράζω
- 도키마조[ dŏkimazō ] δοκιμάζω
유혹(誘惑)이란 마음을 흔들어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것을 말합니다(꾈 유, 미혹할 혹).
그런데 사람이 유혹에 이끌리는 것은 주체가 사람 즉 내가 아니라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유혹의 미끼를 던짐으로 그것을 잡느냐 잡지 않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합니다.
물고기의 지능지수가 대략 10이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옆에서 미끼에 물려 몸부림치며 끌려가는 다른 물고기를 똑똑히 보면서도 다시 그 미끼를 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유혹에 이끌리는 사람의 영적인 수준은 마치 미끼에 물려 물위로 올라가는 물고기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나의 영적 수준은 얼마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육체가 있다고 깨우쳤습니다.
"사람의 육체, 짐승의 육체, 새의 육체, 물고기의 육체"(고전 15:39)
"하늘에 속한 형체, 땅에 속한 형체"(고전 15:40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사람의 육체(사르크스)를 가졌으나 하늘에 속한 형체(소마)로 살아야 합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는 신령한 삶을 추구합니다.
땅에 속한 형체는 세속적 삶을 추구합니다.
물론 하늘에 속한 형체일지라도 아직은 세상의 질서를 따라야 하기 때문에 의식주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의식주에 붙잡힌 인생같지만 나의 시민권이 저 하나님 나라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오늘도 세상의 의식주가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지만 육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영의 생각을 따라 이 세상에서 참 평안과 생명을 누리며 확신하는 삶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 육체(사르크스) 4561
σάρξ, σαρκός, ἡ 스트롱번호 4561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형체(아오마) 4963
σῶ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4983
몸.
신체
시체
헬라어 σώμα(소마)와 σaρξ(사르크스)를 혼용해서 쓸수있나요?
베드로전서 3:21과 로마서8:6의 사르크스를 소마로 적어도 되는지요?
둘은 종종 혼용해서 사용하는 어휘로 그 사이에 크게 두드러지는 차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구분하자면
σώμα(소마)는 영혼 정신 등과 대비되는 신체를 일컬을 때 사용하며
σaρξ(사르크스)는 신체에서 뼈, 살, 피 등을 이야기할 때 ‘살’을 가리킵니다.
살, 육체 flesh.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사르크스(Homer 이래)는 인간이나 동물의 '살'을 의미하며, 더욱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물고기나 작은 동물, 또는 과일의 '살'(과육)을 의미한다.
몸(소마)은 뼈, 피, 근육, 살, 피부(Plato, Phaedr., 98c. d)로 구성되어 있거나, 머리, 살, 뻐(Symp., 207d)로 구성되어 있다.
사르크스는 몸 전체, 특히 젊든 늙었든 죽었든 간에 육체적인 몸이라는 의미까지 확장되었다.
그래서 복수 사르케스는 시체를의미하기도 한다.
덧없음은 사르크스의 특별한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다.
활력(프쉬케 : 영혼)과 욕망(뒤모스)이 사라질 때, 살과 뼈는 소멸하고 만다(Od., 11, 219-222).
신이 인간과 동물과 다른 점은 사르크스를 가지고 있지 않은, 누스(nou'", 3563: 마음, 정신)와 에피스테메(:1064: 통찰력)와 로고스(lovgo", 3056: 말, 이성)라는 점이다(Epict., Diss., 118, 2).
따라서 인간의 불멸의 본성은 사라져 없어질 그의 육신과 더욱 더 대조된다.
땅 속에 묻히는 온코스 사르콘[육의 몸 body of flesh)은 우리 자신의 실재가 아니다(Plato, Leg., 959C; 참조: "육체라는 낯선 의복" Emp., Frag., 126).
그러나 에피쿠루스(Epicurus)는 이러한 관념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소멸이라는 것은 원자의 분산에 불과할 뿐이며, 이러한 분산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선의 시작(start)과 근본은 행복 곧 배(belly)의 헤로네(욕망 Desire)이다(Frag. 409).
육이 "배고파서는 안된다, 추워서도 안된다, 목말라서도 안된다"고 소리쳐 요구할 때, 영혼은 이러한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Frag. 200).
디아노이아(분별력 understanding)는 사르크스의 종말과 한계를 알기 때문에, 에피쿠루스(Epicurus)는 사람들에게 결코 쾌락의 생활을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철저한 자기 통제와 절도 있는 생활을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있어서도, 헤도네는 행운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다(Frag. 68).
이러한 관념들은 플라톤 학파와 같은 그들의 반대자들에 의해 탐욕을 추구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형태로 많이 격하되고 통속화되었다. 반대자들에 따르면, 몸의 욕구와 욕망은 신성함이 담겨져 있는 → 영혼(Soul)을 더럽힌다는 것이다. 에피쿠루스(Epicurus)는 식욕과 육체적 욕망과 간음과 그리고 무절제를 옹호한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안되었다(Frag. 414). 반에피루쿠스 논쟁(anti-Epicurean polemic)은 헬라니즘 세계속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으며, 그 논쟁은 유대교 속에 깊이 침투하였다.
(H. Seebass).
2. 구약 70인역본의 용법.
사르크스는 70인역본에서 약 280회 나오며 대부분 히브리어 바살(육, 살, 인간, 혈육, 남자의 성기)의 역사로 사용되었다. 사르크스는 소의 고기(창 41:2), 식용 고기(시 78:27), 인간의 '살'(미 3:2 이하), 육체(사 40:6; 사 40:8; 잠 5:11), 골육(창 29:14), 혈육(사 66:23; 창 6:17 이하; 창 9:11 등), 양피로 된 살(창 17:11 이하; 렘 12:3), 몸(겔 23:20; 겔 44:7; 겔 44:9) 등을 표현한다.
사르크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바사르와 셰에르이다(70인역본). 이 중에서 바사르가 훨씬 더 자주 사용되고 있다(266회, 셰에르는 17회). 사르크스는 좀더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단어는 심지어 '인간성' humanity이라는 의미까지도 지녔다(사 40:5f.).
1. (a) 바사르는 인간들이 먹는 식품으로서의 '고기' flesh를 의미한다(삼상 2:13; 삼상 2:15; 메추라기 고기, 민 11:33; 돼지고기, 신 14:8; 소고기, 창 41:2). 고기와 술은 경사스러울 때 먹는 음식이다(단 10:3). → 동물 Animal → 새 Bird.
(b) 바사르는 또한 '인간의 살' human flesh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갈빗대를 하나 취하시고 그곳을 살로 채우셨다(창 2:21).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음식을 먹지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살이 쪘다"(베리에 바사르). 그리고 그로 인해 몸의 상태도 양호하였다(단 1:15).
겔 37:6; 겔 37:8은 힘줄과 살과 피부 그리고 정신(→ 영 Spirit 루아흐)을 함께 언급하고 있으며, 욥 10:11은 피부와 살과 뼈와 힘줄을 언급하고 있다. 음경(the penis)은 특별한 의미로 '노출된 살' naked flesh(출 28:42, 하체), '양피로 된 살' the flesh of the fore skin(창 17:11이하; 레 12:3, 양피)로 지칭되며, 단순히 '몸' flesh으로 지칭되기도 한다(레 15:2 이하. [70인역본 소마; 겔 16:26; 겔 23:20; 겔 44:7; 겔 44:9].
(c) 바사르는 또한 전체의 부분부분을 일일이 들어 설명할 때 전체 그대로의 인간의 몸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합이 ......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왕상 12:27). 깊은 잠 속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을 때, 몸의 털이 곤두섰다(욥 4:15). 그러나, 육체(flesh)는 단순한 몸만이 아니라 인격체로서의 인간, 즉 전인(全人)을 의미한다. "하나님이여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참고: 시 54:3). 여기서 육체는 인간 자신의 자아 man's own self를 의미한다. ([편집자주] 욥 19:25f. 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히브리어 밉베사리] 밖에서 [난외주. From] 하나님을 보리라" 이 구절을 문법 그대로 해석해 볼 때 "without" 보다 "from"이 더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되지만, 많은 주석자들은 이것을 부활이나 사후의 생명에 대한 욥의 믿음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이것을 좀더 깊이 알기 위해서는 H. H. Rowley, '욥' Job, 1970, 172ff. 를 참조하라]). 로울리(Rowley)는 이 구절의 본문상의 그리고 문법상의 어려움들과 많은 주석자들이 그것을 현재의 삶 속에서 자신을 변호해 주리라는 희망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이 구절의 앞 부분에서 욥이 현재의 삶 속에서는 정당성을 인정받으리라는 증거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이것을 사후에 정당성을 인정받으리라는 희망으로 보려고 한다.
(d) 그러나 사람은 결코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친척은 "나의 골육이다"(창 29:14). 따라서, 창 2:23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여자는 남자를 위해 존재한다, 말하자면 그가 세상에서 편히 쉬는 장소인 것이다. 남자는 여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가정을 일으킨다. 형제는 "우리의 골육"이다(창 37:27). 좀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골육은 '모든 인류' all mankind를 의미한다. "그가 만일 자기만 생각하시고 ......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욥 34:15; 참조: 시 55:6; 시 55:12). 이와 유사하게 "모든 골육"은 "모든 사람" everyone을 의미한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사 66:23). 마지막으로 이 구절은 창 6:17이하; 창 9:11이하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와 동물세계를 포함하기도 한다.
(e) 살에 관한 의미가 그시발점에 있어서는 구약성경과 헬라 문헌 사이에서 아무런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이미 앞에서 예를 들어 입증한 살에 관한다양한 의미들에서 볼 때, 그들 사이에는 인류학적 결론이 다름을 알 수 있다.구약성경에서 살(flesh)은 전체로서의 인간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살을 그의 본질로 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희랍 개념에서 볼 때, 인간은 살을 가지고 있으나 살 그 자체만은 아니다. 이러한 개념은 또한 에피쿠루스(Epicurus)에게도 적용되는데, 그는 육체의 요구를 어떠한 수단을 써서든지 만족되어져야만 하는 현실적 실재(actual reality)로 이해했다. 디아노이아(diavnoia, 1271: 통찰력 discernment)는 필요한 것이므로, 미래의 행운이 과다(Super-abundance)를 나타내기 위해 희생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영혼의 환희는 비통과 마찬가지로, 육체의 그것들보다 훨씬 더 큰것이다(Frag. 445; Diog. Leart., 10, 137).
덧없음에 관한 이해에서도 이와 같은 차이점이 나타난다. 구약성경에서, 육체는 병과 죽음과 싸움으로 고통 당하는 자로서의 무상함 속에 있는 인간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마음(heart)과 같은(창 8:21) 다른 용어들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사 40:6; 사 40:8). 산헤립이 이끄는 앗수르의 무리들은 "육신의 팔"로 지칭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에 비교해 볼 때 보잘것없는 것이다(대하 32:8). 하나님은 "저희(이스라엘)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 따라서 그는 그들의 부정을 용서하신다(시 78:39). 다른 한편, 렘 17:5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2. 세에르(아카드어 쉬루: 살 flesh, 몸 body; pheon. 쉬르: 살 flesh)는 좀더 오래된 고어로 추정되며 다음과 같은 의미들을 가지고 있다. 식용고기(출 2:10; 시78:20; 시 78:27), 인간의 살(미 3:2f.; 렘 51:34f.), 골육지친(레 18:6; 레 20:19; 레 25:49; 민 27:10; 70인역본에서 연루자 related person, 친척 kin을 뜻하는 오이케이오스 혹은 오이케이아). Tl 73:26의 언급은 이 말의 의미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즉, 나는 사라지지만; 참조: 잠 5:11],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3. 유대교는 여러 모양으로 인간의 육욕을 인간의 죄와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으나 육체를 죄의 실제적인 동기로 판단하고 있지는 않다. 구약성경의 언명들은 육체에 의존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일 뿐만이 아니라 죄라고 묘사하기도 한다(사 31:3). "모든 육체"는 인류를 말하는 것이며 악에 대한 추구는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다(창 8:21). 따라서 육체와 육체에 의존하는 것 사이에는 반드시 관련이 있게 마련이다.
(a) 인간은 "자궁에 있을 때부터 부정하다"(1QH 4:30)고 가르치고 있는 쿰란 문서는 전적으로 구약성경과 일치하고 있다(시 51:5). 그러나 공동체규정 11:12에서는 선택 받은 자가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달리 말하고 있다." 내가 나의 육신의 죄로 말미암아 동요된다면 나의 의인은 영원히 참으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 말미암을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단지 육에 있는 한, 그는 사악한 자들의 공동체에 속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 절의 조금 앞 절(11:9)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사악한 인류에 속해 있으며 또한 죄 많은 육의 무리들과 함께 있다." 그리고 감사 두루마리 15:16이하에는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당신 홀로 의로운 자들을 창조하셨고 ...... 육 가운데에서 그의 영광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진노의 그때를 위하여 사악한 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즉,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자기의 생명(의)을 받은 것이지 그것이 육체로부터 연유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육의 대립물이 → 영 Spirit은 아니다. 왜나하면 거룩함의 영과 나란히 사악함의 영과 육체의 영도 존재하기 때문이다(1QS 4:20f.; 1QH 13:13f.). 육체와 대립되어 있는 것은 항상 하나님이시거나 혹은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그의 의이다.
(b) 랍비들의 용법은 구약성경과는 다른 두 가지의 특징을 보여준다. 무상함 속에 있는 인간은 지금 "육과 혈"(flesh and blood)로 불리우고 있다(그러한 예들이, 집회서 14:18에 처음으로 나옴). 더욱 중요한 것은 구약성경의 '바사르'가 자주 '굽'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굽'은 본래 "구멍" cavity을 의미했을 것 같다. 아랍어 가우프, 이것에 관해서는 TDNT Ⅶ, 116을 참조). 이 이면에는 의심할 나위도 없이 육을 어떤 경우든 다른 영을 담을 수 있는 용기(容器, a vessel)로 보는 새로운 인류학적 개념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육체가 평가절하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 때에 영혼을 불러내어 그것을 육체 안에 두실 것이며 그리고 그 둘을 함께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Sahh. 91a). 그러나 육체는 더 이상 전체 그대로의 인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늘로부터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들은 그들의 영과 육을 하늘로부터 얻은 것이며, 땅에서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은 그들의 영과 육을 땅에서 얻고 있다. 사람만이 여기에서 유일하게 제외된다. 즉, 그의 영혼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며, 그의 몸은 땅에서 온 것이다. 만약 인간이 율법에 순종하고 천국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면, 그때 그는 좀더 훌륭한 피조물로서 존재하게 될 것이다 ...... 그러나 만일 그가 율법을 실행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치 않는다면, 그는 더욱 천한 피조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Siphre Deut. 305, 233, 2). 이것은 헬라화한 동양적인 요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 밖에도 구약성경의 용법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참조: SBI 581).
(c) 헬라화한 유대교는 70인역본에서 그 말의 특색인 두 가지의 특징적인 요소로 변화되었음을 보여 주었는데, 70인역본을 마소라본문과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겔 10:22에서 이 말은 그룹들(the cherubim)의 몸둥아리에 관해 말한 것이 아니며, 민 16:22; 민 27:16에서 이 말은 히브리어 성경구절 "모든 육체의 생명(루훌)의 하나님이시여"를 데오스 톤 프뉴마톤 카이 파세스 사르코스("모든 육체와 생명의 주님이시여")로 번역하는데 사용되었다. 랍비적 유대교에서처럼 여기에서도 하늘과 땅이 상당히 분리되어 있다. 그가 매우 다르다. 이디오피아어 에녹서 17:6에 따르면, 지옥은 육 아닌 것이 가는 장소이다. 파랄리포메나 예레미야(Paralipomena Jeremiae) 6:6에 따르면, 사르크스는 결코 썩지 않을 것이라 한다. 외경 엘리야스 35:7이하; 42:12이하에는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 물리적인 육신은 벗어버리지만, 영적인 육신(사르케스 프뉴마토스)은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아담의생명(Life of Adam) 43:4과 에스드라 하 7:78; 에스드라 하 7:100에 따르면, 죽음에 있어서의 영혼은 그 자체가 육체에서 분리된다고 한다.
우주론적 이원론(cosmological dualism)의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언명들은 필로(Philo)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그는 하나님이 살(flesh)이나 몸(body)이 없는 존재라고 본다. 따라서, 그에 대한 인식은 살이나 몸이 없는 영혼에 의해서만 가능할 뿐이다(Deus Imm. 52-56). 영혼에 관한 한, 몸(육체)은 짐이자 노예이며 관이자 묘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금욕주의를 통한 육체로부터의 해방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육체는 영혼이 비상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죄는 영혼이 육체 속에 확고부동하게 존속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참조: Leg. All. 3, 152). 마찬가지로 필로(Philo)는 또한 영혼이 '알로가 파데'(이성과 다투는 정열 passions that war with reason)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육체에 의해 압도될 때 죄가 생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Deus Imm. 52). 육체는 그것의 열정으로 말미암아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선동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온코스 사르키노스'(육의 몸 fleshly body)는 발에 신는 신발과 마찬가지로 봉사하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Sacr. 63). (H. Seebass).
3. 신약성경의 용법.
사르크스는 신약성경에서 147회 나오며,그 중 바울 서신에 91회 사용되었다. 사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1. 공관복음서에서의 사르크스.
구약성경에서 인용한 막 10:8; 병행구 눅 3:6과 막 13:20과 병행구를 제외하면 오직 3회 나온다.
(a)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여기에서 "혈육"은 제한성(limitation)을 지닌 인간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반대어이다. "혈육"은 인간의 도덕성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을 가리킨다.
"혈육"은 인간의 부분들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적, 종교적, 신비적 능력을 포함한다. 그 반대는 하나님이시다.
(b) 막 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여기서 사르크스("육신")는 프뉴마("마음")와 대조 및 반대이다. 그러나 이 "육신"의 반대는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c) 눅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여기서"살과 뼈"는 지상 인간의 실체를 의미한다. 여기서 대조는 육체적 세계와 비육체적 세계의 대조이다. "살과 뼈"는 비육체적 영에 대조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재적 육체임을 가리킨다.
2. 사도행전에서의 사르크스
구약성경에서 인용한 행 2:17과 행 2:26을 제외하면 행 2:31에 오직 한번 언급되었는데, 행 2:26의 인용구로부터 예수님의 사르크스의 썩지 않음을 언급한다. 그러나 행 2:27의 프쉬케(yuchv, 5590)는 여기서 다시 언급되지 않고 그 대신 "그"를 나타내는 3인칭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이원론을 피한다.
3. 바울 서신에서의 사르크스.
(a) 사르크스는 몸(Body)을 의미한다.
(1) 사르크스는 고후 12:7에서 육체에 가시라는 표현에서와 같이 단순히 몸의 근육 부분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바울은 "살과 뼈"라는 표현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2) 사르크스는 인간의 전체적인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고전 15:39). 따라서 여기서 사르크스는 몸의 근육 부분을 가리키지 않는다.
(3) 갈 4:13에서 아스데네이아 테스 사르크스는 육체의 약함, 곧 병인 것 같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갈 4:14에서 사르크스 무는 바울의 병든 몸을 가리킨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4) 그렇지만 롬 6:19에서 동일한 표현은 인식의 약함을 나타낸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5) 고후 7:5에 따르면 사르크스에는 내적 근심도 포함된다. 여기서 외적 고생이 일차적일지라도 그러하다.
(6) 고전 7:28에서도 유사하게 사르크스는 육적 고난과 영적 고난에 노출되어있는 전 인간(全人間)을 의미한다: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7) 고후 7:1에 더 나은 "영과 육"이라는 문구는 인간의 더 나은 부분과 더 못한 부분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둘 다 불결이나 오염에 위협을 받고 있으며 둘 다 정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8) 고후 4:11에서 "죽을 육체"는 바울의 지상적 존재를 의미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9) 고후 10:3; 갈 2:20; 빌 1:22; 빌 1:24에서 사르크스도 지상 생활을 의미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살지 아니하는 가능성을 가진다. 우리는 믿음으로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생활이다.
(b) 사르크스는 지상적 영역을 의미한다.
(1) 롬 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 1:3-4에서 바울은 사르크스의 영역을 하늘이나 프뉴마의영역과 대조시키고 있다. 이 사르크스의 영역은 여기서 하나님께 적대적이고 죄 많은 것이 아니라 단지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이것은 세대의 자연적 연속이며, 이 영역 안에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메시야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는 성결의 영(롬 1:4)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됨을 천명하고 있다.
(2) 롬 11:14에서 단수는 지상적 민족적 이스라엘의 전체를 의미한다: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여기서 사르크스는 세속적 관계를 의미하며, 인간의 영역을 의미하며,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구원을 위한 결정적인 영역이 아니다. 롬 4:1; 롬 9:5; 롬 9:8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갈 4:23; 갈 4:29에서 "약속으로 말미암아"라는 문구는 "육체를 따라"와 병행되지 않는다: "23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그래서 롬 9:8에서 속격은 자녀가 속하는 영역을 가리킨다.
고전 10:18에서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은 지상적 민족이다.
(3) 고전 1:26에서 육신에 따른 지혜는 이 세상의 인간의 범주에 따른 지혜를 의미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그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포함한다. 교회에는 이런 부류의 지혜자들이 있지만 많지는 않다.
(4) 고전 1:24-26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사르크스의 지혜와 대조되며(참조: 고후 1:12), 고후 10:4에서 하나님의 힘은 사르크스의무기와 대조된다.
(5) 몬 1:16에서 사르크스와 퀴리오스가 결합된다. 오네시모는 빌레몬과 보다 중요한 그리스도교적 관계를 가질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도 가지고 있다.
(c) 살과 피, 모든 육체.
(1) 갈 1:16에서 "혈육"은 마 16:17에서처럼 인간 그 자체, 곧 신학적 통찰력, 종교적 경험, 교회의 전통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계시자이신 하나님의 반대어이다.
(2) 고전 15:50에서 이 문구의 요지는 우리의 부분들 중에서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 없는 부분과 받을 수 있는 부분으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 그 자체가 변화되지 않고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쉽게 부패할 뿐만 아니라 쉽게 유혹에 빠진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
갈 5:19 이하에서 육체의 일에 관해 언급하며, 이와 같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3) "모든 육체"라는 표현은 시 142:2에서 인용한 롬 3:20; 갈 2:16과 고전 1:29에 나온다. 이 세 구절에서 "모든 육체"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며,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없는 인류를 의미한다.
(d) 사르크스를 신뢰의 대상으로 삼는 것.
(1) 롬 2:28에서 바울은 몸의 지체의 할례를 마음의 할례와 대조시키고 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여기서 사르크스는 사람들이 사르크스를 보고 그것에 대해 자랑할 수 있기 때문에 부정적인 면을 지닌다(참조: 롬 2:23; 롬 2:27; 롬 2:29).
(2) 갈 6:13에서 거짓 교사들이 자랑하는 "너희 육체"는 할례의 육체이다. 갈 6:12에서 엔 사르크스는 '사람 앞에' 즉 '세속적 고려(considerations)에서'를 의미할 수 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교회 안에서 기독교인의 할례를 받음으로써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갈 6:13).그러나 무할례자들과 마찬가지로 할례자들도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3) 빌 3:3; 빌 3:4에서 사르크스는 매우 중요하며, 첫째로 이스라엘의 자연적 혈통을 의미하지만 바리새주의, 율법, 법적 의를 위한 열심도 의미하며 그래서 특별히 인간의 지적 종교적 역할을 의미한다.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으나, 그것들을 신뢰하는 것이 잘못이다. 따라서 여기서 사르크스의 정반대는 크리스토스 이에수스(그리스도 예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 난 의의 계시는 다른 모든 것을 제미아("해")로 만든다(빌 3:7-9). 그것들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삶의 기초로서 신뢰의 대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 이 새로운 신뢰조차도 하나님의 행동이다. 육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대신 육을 믿을 때만 나쁜 것이다.
(e) 죄의 주체로서 사르크스.
(1) 사르크스는 성령이 행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일하는 능력이 아니다(빌 3:3; 롬 8:13 이하; 갈 4:23; 갈 5:18 이하). 사르크스는 성령의 역사에 관한 기사의 배경이아닌 곳에서 행위의 주체로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성령은 사르크스가 있거나 없이도 지배적인 주체로 가끔 나타난다. 사르크스에 의지하거나 그것을 믿는 것은 죄짓는 것이다. 성령의 경우에 힘의 효능은 규범으로 인도하는 것과 같이 사르크스의 경우에는 역으로 규범의 사르크스는 힘의 사르크스가 된다. 이렇게 해서 사르크스의 일이 있게 된다(갈 5:16; 갈 5:19; 롬 13:14).
(2) 그렇지만 율법 준수는 그 자체 사르크스의 표현이다(갈 3:3; 갈 4:8 이하).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성령의 새롭게 하며 변화시키는 임재를 그들의 삶 속에서 경험했다. 어떻게 그들이 이제 율법의 행위에서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육체로 마친다(갈 3:3)는 것은 할례를 암시한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할례를 그리스도인 됨의 불가결한 절정('완성')으로 시행했던 것이다.
갈 4:8 이하에 의하면 유대의 율법 교사의 요구를 따르는 것은 이방의 미신으로 회귀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유대 절기의 규정들은 갈 4:9-10에서 이방의 점성 미신의 행불행 사상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3) 바울에게 있어서 사르크스는 인간적이며 지상적이며, 그것은 법적 의(righteousness)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사르크스를 신뢰하여, 그것에 의해 안녕과 명성을 얻도록 유혹하는 이상 사르크스는 성령의 역사에 반대되는 성격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갈 5:13; 갈 5:17). 따라서 사르크스에 예속은 운명이 아니라 죄이다. 육에 맞춰 사는 삶은 육을 섬기는 것이며, 육적인 사고를 지닌다. 사르크스의 반대어는 아들의 형상을 취하시어 죄많은 육의 형태로, 즉 완전한 인간으로 오시어 육체 속에 있는 죄를 정죄하신 하나님이시다.
(4) 롬 7:18; 롬 7:25에서 사르크스와 누스(nou'", 3563)의 분열이 암시되어 있는 것 같으나 이 묘사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해야 하는 것이 날카롭게 대립되는 그리스도인 이전의 생활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누스는 일시적이나 완전히 사르크스를 다스리거나 제지할 수 있는힘이 없다. 반대로 중요한 관찰자이다. 신자가 아는 것은 분열을 회고하는 것이다. 이 말의 요점은 단순히 그리스도인 이전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에게 반대되는 행위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바울은 처음에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원하지만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실제적인 죄, 즉 자신의 의를 세우는 죄를 범하는 바리새인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인간의 정당한 욕망도 즉시 자신의 육적 행위로 빠져든다. 따라서 순결한 의지의 순간들과 나쁜 행위의 순간들 사이를 구별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육체의 행위는 심사숙고한 후에야 비로소 사르크스를 반대하는 의지와 구별될 수 있다.
(f) 사르크스의 정복.
롬 7:5; 롬 8:8 이하; 갈 5:24에 보면 신자들은 벌써 사르크스에 살지 않는다. 신자는 사르크스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이 메시지는 바울의 새롭고 전형적인 메시지이다. 그들은 금욕주의 등으로 육체적 존재라는 사실을 피하지 않는다(참조: 갈 2:19-20).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삶으로 들어간다(갈 2:20). 육의 일들은 비논리적이며 재위임을 필요로 한다. 삶은 단일한 행동들로 쪼개어지지 않는다. 삶은 하나의 결정, 즉 사르크스냐 프뉴마냐 라는 질문에 의한 하나의 에르곤(일, 행위)이다. 신자들은 더 이상 사르크스에 의존하지 않고 그리스도에 의존한다. 이것은 그들이 일상적으로 믿음의 생활을 실행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g) 동사와 함께 사용된 카타 사르카타("육체대로", 육체를 따라).
(1) 고후 10:2 이하에서 언급하는 것은 특히 분명하다. 엔 사르키 페리파테인("육체에 있어 행하다")은 아주 단순하게 '한 사람의 육체로, 지상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바울에게도 적용된다. 단 한가지 잘못된 것은 사르크스에 대한 생각의 방향(orientation), 즉 더 이상 중립적으로 사르크스로 살지 않고 그 규범(norm)으로 생각하는 삶이다: 육체를 따라 행하거나 싸우는 것. 바울이 이것으로써 나타내는 바는 고후 11:18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한 삶은 "육체를 따라 자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보이는 것과 사람들과 관계하는 것 만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 반대는 "주를 따라" 말하는 것이며(고후 11:17), 그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께서 용납하시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유사하게 고후 1:17에서 "육체를 좇아 경영하는 것"은 인간과 지상의 상황만을 주목하고 하나님의 뜻에는 주의하지 않는 계획이다.
(2) 동일한 것이 훨씬 더 논란이 되는 구절인 고후 5:16에 적용된다. 카타 사르카는 명사 크리스토스가 아니라 동사 기노스케인과 어울린다. 본문에서 바울은 "외모로"(엔 프로소포), 즉 표면적으로 보이는 자질과 아무라도 주장할 수 있는 자질을 자랑하는 자들에 대하여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고후 5:12). 바울 자신은 이제 이런 식으로 아무도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고후 5:16은 이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보여준다. 기노스케인 카타 사르카는 인간의 기준으로, 즉 다른 사람 가운데 한 명의 인물로 간주되는 역사상의 예수님에 대해 알려진 것으로써 예수님을 판단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나타낸다.
(3) 마지막으로 갈 4:23; 갈 4:29에서 게난 카타 사르카는 약속과는 관련이 없고 다만 인간적인 기능만으로 발생한 자손(세대)이다. 만약 이것이 바울에게 두 개의 디아데카이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바울의 사상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르크스를 따르는 삶이냐 주님과 그의 약속과 성령을 따르는 삶이냐 하는 결정은 분명히 단지 순간의 단 한번의 결정인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의 기초라는 것이다. 이것은 롬 8:4; 롬 8:12 이하에서도 나타나는데, 여기서 새로운 삶은 페리파테인 혹은 젠 카타 사르카의 포기로 묘사된다. 관용문구 타 테스 사르코스 프호로네인이 롬 8:5에서 사용될 때 이것은 그 의미가 지상의 차원에서 삶의 의식적인 영적 방향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도 이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개인적 결정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것은 모든 삶의 기본적인 방향에서 야기한다. 생각은 에이나이 카타 사르카를 벗어나 발전한다.
(h) 골로새서에서 사르크스.
(1) 사르크스는 외부의 눈에 보이는 육체에 대해 중립적으로 사용된다(골 2:1; 골 2:5).
(2) 골 3:22에서 명사와 함께 쓰인 카타 사르카("육신의")는 인간 관계의 영역을 나타낸다.
난해한 골 1:24에서 이 단어는 고통을 당할 때의 사도의 육체적 존재를 가리킨다. 고후 4:11에서처럼 여기서 말하는 바는 바울이 육신으로는 당할 수 밖에 없는 고난을 통하여 복음을 당당하게 증거하고, 따라서 구원의 역사를 이룬다는 것이다(참조: 고후 5:19 이하).
(3) 골 2:23에서 사르크스는 의미가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을 나타낸다.
(4) 골 2:13에서 동격이 되는 사람은 유대인이라기보다 이방인이다. 그의 죄는 할례를 의지하는 것이라기보다 방탕함에서 드러난다(골 3:5). 그러므로 우선 매우 단순하게, 육체에 있어서 유대인과 구별되는 이방인에 대해 사용되는 아르코뷔스티아 테스 사르코스는 골 2:11의 할례를 아직 경험하지 않은 자들을 나타내는 용어가 된다. 따라서 사르크스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본성을 묘사하긴 하지만 헬라 용법에서 유래하는 특별한 뉘앙스를 지닌다.
(5) 한 가지 새로운 표현은 소마 테스 사르크스이다. 골 1:22에서 이 표현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육체에 대해 사용되며, 그러므로 사르크스는 단순히 물리적인 육체이다. 그러나 골 2:18에서는 누스 테스 사르크스("육체의 마음")라고 언급되어 있으며, 골 2:11은 믿음에 이른 사람은 그리스도의 할례로 "육적 몸"을 벗어 버려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골 2:13과 동일한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 여기서 바울의 용법이 반영되긴 하나 수정되며, 그밖의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다.
(i) 에베소서의 사르크스.
(1) 사르크스의 용법은 에베소서에서 훨씬 더 단순하다. 엡 5:31에서 우리는 고전 6:16에서와 동일한 인용을 본다. 이리하여 엡 5:29에서는 아내를 사르크스(=소마, 엡 5:28)로 묘사한다.
(2) 엡 5:32에 전제되어 있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는 이러한 개념의 사용은 독특한 것이다. 엡 2:14은 지상의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육체를 언급한다.
(3) 엡 2:11에서 육체의 할례에 관한 일반적인 진술의 영향은 단지 언어학상으로 그러할 뿐이다. 왜냐하면 페리토메("할례")는 에드네("이방인")에 상당하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엔 사르키("육체로")는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이 임시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종교가 속하는 지상의 인간 세상 안에서만 효력을 가지지만, 예수님의 공동체의 일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할례자에 대한 언급 역시 없다. 동일한 것이 레고메노("칭하는")를 부가함으로써 표현된다. 만일 우리가 엡 2:2에서 엡 2:3에 병행하는 개념을 주목한다면, 어떻게 사르크스가 점차적으로 개인의 귀신적(demonic) 특성을 취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방인 중에서 이 세상의 시대나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유대인들 중에서 사르크스였다. 사람을 사르크스와 디아노이아이(마음)로 구분하는 것은 놀랍다. 그러나 디아노이아(민 15:39[70인역본])는 사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썩어질 것이라는 사실에서 구약성경의 영향이 보인다.
(4) 엡 6:12은 독특하다. 실질적으로 본문은 비육체적인 영의 영역을 육신의 영역으로부터 구별하는 후기 유대교 사상과 부합한다.
(j) 목회서신의 사르크스.
목회서신에서 사르크스는 딤전 3:16에 한번 나온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이 구절은 롬 8:3; 골 1:22; 엡 2:14을 반영하는 한편 그리스도께서 즉 지상의 영역에 육신으로 나타나심이 구원 사건 자체라고 언급함으로써 그밖의 다른 모든 구절들과 매우 다르다. 본문의 전제로서 천체에 대한 헬라의 개념을 고려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늘의 존재로서, 그가 인간 세상으로 들어오심이 이미 하나의 기적인 것으로 고려된다. 특징적으로 이 개념은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5. 히브리서의 사르크스
히브리서에서 사르크스는 요일 4:2에서처럼 예수님의 지상의 존재를 의미한다.
(1) 히 5:7에서 "그의 육체의 날"(한글개역, "그는 육체에 계실 때", 히 5:7)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하늘의 존재로 간주되며, 그의 지상의 삶은 단지 잠시동안이었음을 보여준다.
(2) 비슷하게 히 2:14에서 "혈육"(하이마 카이 사르크스)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외양으로 취하신 것으로 여겨진다. 유대인의 전통은 이 개념이 지적 기능을 포함하는 인간의 본성 전체를 포괄하는 정도까지 해당한다.
그러나 유대의 표현에서 배제되지 않는 "실제상의" 특성이 지금 훨씬 더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여기서 하늘의 존재가 혈과 육을 취했다고 언급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사망에 예속하고, 따라서 구속을 필요로 하는 그는 천사들과 구별된다(참조: 히 2:16).
(3) 관련된 구절 히 12:9에서 "우리 육체의 아버지"는 "영의 아버지"와 구별된다. 이것은 영은 인간의 혼이라는 인류학적 이원론과 상관이 없다. 이 말씀은 오히려 히브리서에 매우 독특하게 존재하는 두 개의 영역 사고의 견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영의 아버지는 위의 세계가 복종하는 전능자이시고, 반면에 육의 영역에 속하는 아버지들은 지상의 아버지들이다.
(4) 히 9:10에서 "육체의 예법"은 거의 언제나 육체와 관련된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된다. 이것은 히 9:13 이하에 의해 지지된다.
(5) 히 9:13 이하에서 육체의 정결은 쉬네이데시스("양심")의 정결과 대조된다. 여기서 정결은 분명히 제의적 정결을 말한다. 초대 기독교에서 한 역할을 하는(마 9:13; 마 12:7), 호 6:6; 삼상 15:22의 선지자의 말이 여기서도 영향력을 끼친다. 그러나 이 외적 정결은 또한 일반적인 지상의 영역의 한 표시이다. 양심의 정결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의 성직자에게서만 발견된다. 그 성전은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것이다(히 9:11). 그렇다면 우리는 히 9:10에서 "육체"는 "지상의 영역의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지를 질문할 수 있다. 어쨌든 그 외적 측면은 인간 자신의 가능성을 나타내는 내적 측면과 대조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에게 판단 받을 때의 인간과 대조된다. 그러므로 유일한 하늘의 대제사장은 이 내적 정결을 소유하신다.
(6) 히 10:20에서 예수님의 사르크스는 그가 그 가운데로 새롭고 산 길을 만들어 놓으신 휘장이라고 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님의 사르크스는 십자가형인가? 그러나 소마가 이 의미에서 사르크스 대신 사용된다는 사실은 별개로 하고, 우리는 디아(diav, 1223)를 우선은 장소적으로, 그 다음으로는 구격으로 취하여, 휘장을 하나의 방해물이라기보다 오히려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사르크스를 예수님의 인성이라는 더 넓은 의미로 취한다면 마지막 두 주장이 그대로 적절할 것이다. 그렇다면 희생제사에서 피를 바치려면, 혹은 예수님께서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됨을 얻으려면 휘장이 찢겨져야 했듯이 예수님의 육체가 파괴되어야 했다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르크스는 하늘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만나는 장소이지만, 하늘의 세계가 그렇게 감추이고 따라서 예수님의 사르크스가 하늘에 접근할 길을 감추기도 하고 열기도 하는가?
또한 그럴듯한 해석은 하늘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사르크스를 지나서(혹은 의해서) 신자를 인도하되, 이러한 방법으로 신자는 그것을 통하여 하늘의 대제사장에게로 간다. 이 하늘의 대제사장은 지상적인 모든 것의 저편에서 하나님과 함께 신자를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시는 것이다.
(7) 이 모든 구절들에서 사르크스는 하나님의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지상의 영역을 나타낸다. 그러나 죄의 사상은 결코 연관되어 있지 않다. 새 언약에 대하여 제의적 율법이 그러하듯이 하늘의 영역에 대해 지상의 영역은 부적절하고 일시적인 영역이며, 사망의 위협을 받으나 하나님에 대항하여 결코 반역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이 단어의 역사(history)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바울 이상으로 발전하며, 롬 1:3 이하와 요한에서 가장 분명한 표현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5. 공동 서신의 사르크스.
(a) 약 5:3에서 너의 "살"(사르카스)이라는 복수가 사용된 것은 살점(살의 조각)과 같은 육체의 살부분을 의미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참조: 계 17:16; 계 19:18; 계 19:21). 녹은 화농균처럼 악처럼 먹어 들어간다(A. T. Robertson).
(b) 베드로전서에서 사르크스의 용법은 거의 다 이미 언급된 것의 범주 내에 속한다.
(1) 벧전 1:24에서 파사 사르크스("모든 육체")라는 표현은 사 40:6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육체 곧 인간의 힘은 풀과 꽃처럼 덧없는 것이다.
(2) 벧전 3:18과 벧전 4:6은 두 영역의 사상을 포함한다. 벧전 4:1 이하에서 사르키("육체의")는 단순히 땅 위에서 사는 삶의 시간을 나타낸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것은 이중 부가어 파데인(고난 받는 것)인데, 그 이유는 지상의 고난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선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나타나므로, 벧전 3:18과 비슷한 형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핍박 중에서 육체의 고난을 언급하는 것으로서 의도적으로 벧전 4:1a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역시 지상의 영역과 하늘의 영역의 대조가 나타난다.
(3) 벧전 3:21에서 히브리서에서처럼 외적 측면으로서의 사르크스를 쉬네이데시스(suneivdhsi", 4893: 양심)와 구별하는 용법을 발견한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6. 유다서에서 사르크스는
(1) 유 1:7에서 "이상한 육체"(한글 "다른 색")와의 간음은 롯을 방문한 천사들에 대한 소돔인들의 음욕을 가리킨다. 따라서 사르크스는 인간과 천사들의 다른 "육체"이다. 이것은 성적 욕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성적 욕망은 그 자체로는 악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왜곡될 때만이 악한 것이다. 본문은 벧후 2:10에서 채택되지만 에테라("다른")는 빠져버리고 엔 에피뒤미아 미아스무("더러운 정욕")가 부가된다. 베드로후서는 육체적 정욕 자체를 죄악된 것으로 간주한다. 이리하여 육체에 대한 금욕적 멸시를 향한 결정적인 발판을 제공하게 된다.
헬레니즘적 캐치 워드(표어)인 에피뒤미아이 사르코스("육체의 정욕")는 유 1:16의 단순한 에피뒤미아("정욕")를 대신하여 벧후 2:18에서도 도입된다.
(2) 유 1:6과 유 1:26은 둘 다 매우 모호하다. 두 곳에서 모두 사르크스는 (비자연적인 성적) 죄로 더럽혀진, 실제적인 외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나타낸다. 심지어 그가 입은 겉옷까지도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그 견해가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지적 중심이든 영적 중심이든 간에 이 더럽혀짐에 의해 영향 받지 않는다는 사상은 없다. 그러나 이 진술은 너무나 간략하여 어떠한 확실한 해석도 허락지 않는다.
7. 요한의 기록에서 사르크스.
(a) 요한복음.
요한복음에서 사르크스의 용법은 바울의 용법과 매우 다르다. 사르크스가 요한복음에서 상대적으로 드물게 사용된 점에서도 나타난다(13회).
(1) 요 17:2에 나오는 파사 사르크스는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한가지 새로운 점은 천부께서 인자에게 모든 육을 다스릴 권세를 주신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2) 요 8:15에서 예수님은 대적자들에게 비난하여 "너희는 육체(덴 사르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고 하였다. 사르카에 관사가 있으므로 이것을 단순히 바울의 용법을 따라 해석해서는 안된다. 요 8:14에 따르면 그러한 판단은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의 무지(blindnes)의 표시이다. 동일한 대조가 요 7:27에도 언급되어 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는지를 그들이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앞에 다음과 같은 경고가 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요 7:24). 요 6:42을 보면 이 언급이 예수님께서 청중이 잘 아는 부모에게서 태어났음을 말해주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사르크스는 예수님의 인격에 관하여 외적으로 보이는 것과 특히 그의 혈통을 나타낸다. 이것은 하나의 잘못된 판단을 가리키지만, 함축성 있는 바울의 의미에서는 아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과 관련해서만이 잘못된 것이다. 혈통과 태생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옳은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에 관한한, 이러한 말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하여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르크스는 지상의 것들을 판단할 때 아주 적절한 지상의 영역이지만, 다른 영역에서 오신 예수님을 판단하고자 할 때는 전혀 부적절한 것이다. 죄악된 것이라든가 죄로 유혹하는 것의 뉘앙스는 전혀 없다.
(3) 요 3:6에 사르크스는 인류에 대해 말하며, 인류에서 태어난모든 것이 사르크스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 단어는 그것이 사용된 대조적 병행구절로부터 그 내용을 획득한다. 사르크스 곁에 나란히 놓인 것은 프뉴마이다. 사르크스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며 그러므로 그러한 지식을 전달할 수 없는 인간의 지상의 영역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는 그것이 죄 가운데 서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 15:22-24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비로소 우주(cosmos)는 죄가 된다고 분명히 선언한다. 물론 사르크스로서의 존재 상태에서 세상은 파멸로 예정된 상태에서 구원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찾지 못한다. 지상의 더 낮은 영역으로서 사르크스는 그 정도까지 그것 안에서 단순히 살아가는 자를 결정하며, 따라서 그것은 거의 하나의 능력의 특성을 취하는데, 특히 그것은 또한 임신과 출생의 원리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사르크스를 통해서가 아니라 불신앙을 통해서만이 그 죄악된 특성을 얻으며, 죄로 가득하게 된다.
그것은 불신앙을 결정한 후에는 결코 사르크스로 불리지 않는다.
요 1:13에서 사르크스는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과 구별되는 자연적 출생의 원리이다. 의지는 사르크스에 속하므로 사르크스는 하이마타보다는 아네르에 병행한다. 따라서 그것은 해부학상으로 특정한 몸의 일부분이 아니라 구원을 소유하지 않은, 하나님에게 맞서 서있는 자로서의 인간 전체를 포괄한다.
(4) 요 1:14에서 사르크스 에게네토("육신이 되어")는 로고스가 지상의 죄를 친히 지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단순히 계시가 일어난 장소를 가리키는 지리학적 의미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계시가 인간의 형태를 취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 자기 계시는 옷과 같이 인간의 형태를 거저 입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형태와 동일하게 되어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 아버지의 독사(영광)를 볼 수 있게 하였으니, 그것도 기적을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분명하게,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순종으로 그렇게 하였다. 따라서 성육신의 신학적 토대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비난하는 세상과의 우주적 투쟁에서 신앙이 신적 그노시스의 단순한 부여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인격의 완전한 헌신을 포함하는 마르튀레인(증거)에 의해서만 창조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5) 요 6:63의 대조는 요 3:6의 대조일 수 있지만 요 6:51-58을 비추어 볼 때 요 8:15의 대조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요 6:63은 요 8:15의 비슷한 논쟁에서 말한 것과 정확히 똑같은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요 6:63은 다음을 의미한다.-예수님의 사르크스, 즉 예수님의 외적인 모습을 고려하는 자는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한다. 오직 예수님 자신이 천부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는 예수님의 전도만이 프뉴마(영)요 조에(생명)이다.
본 절은 성만찬에서 먹은 사르크스를 '불멸의 약'으로 잘못 이해하는 성례전주의자를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마("피")와 결합된 6겹의 사르크스는 성찬식과 관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자가 예수님의 사르크스를 먹을 때, 그것은 인자가 육체로 오심이 오직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육(즉 세상) 안에는 도움이 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동시에 신자는 이에 의해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 선물로 살아갈 것임을 고백한다.
(b) 요한 서신들.
(1) 요일 4:2; 요이 1:7에서 "육체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구분점이다. 예수님이 육으로 오신 것은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구별하는데 이용된다. 참 신앙을 가진 자는 예수님의 신성 뿐만 아니라 인성도 시인한다. 요한의 반대자들은 결코 계시자(Revealer)와 그들이 거절한 육신을 더이상 연관시키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고백 여하에 따라 하나님의 영인지 아닌지를 시험할 수 있다(요일 4:2; 참조: 요이 1:7).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단순히 내면적이거나 심리학적인 실재가 결코 아니었다. 말씀과 행위는 하나가 되어 상호 해석해주며, 하나님은 육체적 결과까지도 포함한 행위로만 비싼 대가를 치르시면서 역사의 무대에 개입하셨다. 따라서, 요한 이외의 다른 신약 성경 기자들은 그리스도가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거나(벧전 4:1)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다는 점을 강조한다(딤전 3:16; 참조: 눅 24:39; 롬 8:3; 엡 2:15; 히 5:7).
(2) 요일 2:16에서 "육신의 정욕"이라는 표현을 본다. 여기서 병행어구는 "안목의 정욕"이다. 여기서 세상을 믿지 말라는 경고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보다 강한 경고이며, 이 세상에는 육적 욕망이 포함되어 있다. 병행어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사르크스는 욕망을 자극하는 감각 기관으로 여겨진다.
[개역개정]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9: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마 19: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마 24: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막 10: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막 10: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막 13:20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막 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눅 3: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눅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 6: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 8: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행 2: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 2:26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행 2: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롬 1: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 2: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롬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 8: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롬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롬 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 11: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롬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5: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고전 6:16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고전 7:28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고전 10:18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고전 15: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고전 15: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고전 15: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고전 15: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고전 15: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고후 1:17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고후 4: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 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 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고후 7: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고후 10:2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고후 10:3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고후 10:3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고후 11:18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갈 1: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4: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갈 4: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같이 영접하였도다
갈 4: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갈 6: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엡 2: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5:29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같이 하나니
엡 5: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엡 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빌 1: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빌 1: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빌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빌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빌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골 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골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2: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골 2: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
골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 2: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골 2: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골 2: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골 3: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딤전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몬 1: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히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9: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 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 12: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약 5: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벧전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벧전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벧전 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벧전 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벧전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벧전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벧후 2:10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벧후 2:18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요일 4:2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요이 1:7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유 1: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유 1:8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도다
유 1: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계 17:16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계 19:18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
계 19:18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
계 19:18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
계 19:18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
계 19:18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
계 19: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
왜 멀쩡한 사람이 거짓 것을 믿을까요?
거짓 역사를 믿는 사람
거짓 교훈을 따르는 사람
거짓말 하는 사람을 친구로 삼은 사람
거짓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혹의 덫에 걸리지 않으려면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가져야 합니다.
멋진 판단력을 갖추는 비결
첫째, 선택에 따른 긍정적인 결과와 부정적인 결과를 생각하라!
둘째, 충동적인 선택을 피하라!
셋째, 제3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냉정한 판단
넷째, 후회하지 말고 반성하라!
다섯째,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라!
역사하사(1753) 에네르게이아 ἐνέργεια, ας, ἡ 스트롱번호 1753
1. 사역, 활동, 작용, 고전12:10.
2. 작업방법.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역사(役事)(빌3:21, 골1:29), 활동(살후2:9), 역사(役事)함(엡1:19, 3:7, 4:16).
* 1756. ἐνεργής, ές
스트롱번호 1756
1. 유효한, 활동적인, 강력한, 고전 16:9.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유효한(고전 16:9), 활력이 있는(히 4:12), 역사(役事)하는(몬 6).
유혹(4106) 프라내 πλάνη, ης, ἡ
스트롱번호 4106
뜻 풀이부 / 4108의 여성형 : 배회, 잘못, 미혹, 속임, 마27:64, 롬1:27, 엡4:14.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유혹(마 27:64, 엡 4:14), 간사(살전 2:3), 미혹(살후 2:11, 벧후 3:17, 요일 4:6), 어그러짐 (유 1:11), 그릇됨(롬 1:27).
*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실 때 "시험(페이라조. 3985)"
시험(3985) 페이라조
[ pĕirazō ] πειράζω 스트롱번호 3985
어원 / 미완료 ἐπείραζον, 미래 πειράσω, 제1부정과거 ἐπείρασα, 제1부정과거중간태, 2인칭단수 ἐπειράσω, 수동태, 제1부정과거 ἐπειράσθην, 완료분사 πεπειρασμένος, 398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시도하다, ~해보다, 행 9:26, 16:7, 24:6.
2. 시험하다.
a. [일반적으로] 고후 13:5, 계 2:2.
b. [좋은 의미로] 요 6:6, 고전 10:13, 히 2:18, 11:17.
c. [나쁜 의미에서] 유혹하다, 갈 6:1, 약1:13, 계2:10.
d.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고전 10:9, 히 3:9.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시험받다(마 4:1, 약 1:13, 히 4:15), 시험하다(마 4:3, 눅 11:16, 고전 7:5), 애쓰다(행 16:7), 시험 당하다(고전 10:13, 히 11:37, 계 3:10).
시험과 유혹의 차이?
영어로는 시험(to tes)과 유혹(to tempt)이 다르지만, 우리말 성경은 혼재되어서 쓰이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고 구분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영어 성경조차 버전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영어 원래의 뜻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차이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No temptation has overtaken you except what is common to man.
And God is faithful; he will not let you be tempted beyond what you can bear.
But when you are tempted, he will also provide a way out so that you can endure it.
1 Corinthians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Temptations: 시험(유혹)
위 말씀은 유혹이지만, 우리말로는 시험으로 번역되어있습니다. 실제로 내가 당한 시험이 시험인지, 유혹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음욕(lust)은 우리 마음 속에 내재되어있는 최악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보고 음욕을 품지(to lust for her) 않고, 기도를 했다(to pray for her)면, 죄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반자이심과 동시에, 시험 중에 능히 감당케 해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Trials: 시험
유혹(temptations)은 최악(the worst)을 끄집어내는 일이라면, 시험(trials)은 믿음(faith)을 강화(purer, stonger)하는 과정입니다.
Trials(시행)와 항상 같이 붙어다니는 단어가 Errors(착오)입니다. Trials는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는 것을 뜻합니다. 경험이 없기 때문에 실수, Errors(착오)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실수, 실패, 착오는 모두 시행 이후에 생기는 일입니다. 실수, 실패를 만나면 좌절하는 것은 우리 안에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수, 실패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These have come so that the proven genuineness of your faith – of greater worth than gold, which perishes even though refined by fire – may result in praise, glory and honor when Jesus Christ is revealed. – 1 Peter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
시험은 담금질(to quench)과 벼름질(to hammer)을 반복하는 과정입니다. 담금질은 물과 불에 번갈아가면서 넣는 일인 반면, 벼름질은 그 사이사이에 망치로 두드리는 일을 뜻합니다.
내가 받는 시험이 달콤하다면 유혹(temptations)일 수 있지만, 고통스럽다면 100% 시험(trials)쪽입니다. ‘내가 할 수 있겠다’ 싶은 것은 유혹 쪽일 수 있지만, ‘할 수 없겠다’는 쪽은 시험쪽입니다.
시험 당하게 된 원인은 인간의 태만, 부주의, 이기심, 실수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선한 자들을 위해 일하십니다(God works for the good of those who have been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Tests: 시험
Trials는 지식과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시도해보는 것이라면, Tests는 학교 시험과 같이 알고 있는 것, 이미 배운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를 확인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Tests는 Trials와 비슷하지만, Tests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되는 사건과 행동을 통해서 서로 믿음과 응답을 확인하는 작업을 뜻합니다. Trials는 하나님 또는 인간의 죄성 때문에 발생될 수 있지만, Tests는 100% 하나님이 제공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하는지 알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Go sacrifice your son. 창22:2)고 명하셨습니다.
기근(famine)에 닥쳤을 때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머무르지 않고, 이집트로 갔습니다(Abram went down to Egypt.창12:10).
일련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한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면, 응답해주셨습니다. 즉, 일련의 사건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험입니다.
성경본문
이사야 47:10-11, 야고보서 1:2-3, 12-15, 마태복음 4:1-10
설교문
사순절(四旬節, Lent)이 시작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사순절을 여는 주제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에 대해 생각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이 아니라 '유혹'이라고 말씀드리고 있는 점을 기억해주십시오. 시험(test)과 유혹(temptation)은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이 둘을 잘 구별할 수 있어야 사순절은 고행(苦行)의 기간이 아니라 참회(懺悔)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마태(4:1-10, 공동번역)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직후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1절)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예수께서 주리신지라, "유혹하는 자(the temper, NRSV)가 와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3절) 광야는 모래로 된 황무지가 아닙니다. 떡 덩어리와 같은 작은 석회석 조각으로 뒤덮여 있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흉년으로 고통당하는 많은 사람을 풍성하게 먹일 것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이 나쁜 일을 하라고 유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신명기 8:3] 하지 않았느냐?"(4절)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을 먹어야 살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아니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악마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그의 권능을 자신의 권력을 위해 사용하도록 호도했지만, 예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만 사용하겠다고 선언하신 겁니다.
두 번째 유혹은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의 성전 꼭대기에서 세우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 성서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시편 91:11] 하지 않았소?"(6절)였습니다. 유혹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의인을 보호해주신다는 약속을 담은 시편을 인용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능력을 발휘해 하나님의 아들임을 만천하에 보여주라. 그러면 당신의 뜻을 이루는 데 훨씬 쉽지 않겠는가?'라는 유혹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마귀의 방법을 택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께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이루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신명기 6:16]는 말씀도 성서에 있다."(7절)라고 성서를 인용하시며 악마의 제안을 거절하십니다.
벌써 두 번이나 좌절한 유혹자(the tempter)는 이제 본색을 드러냅니다. 악마는 다시 아주 높은 산으로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며 "당신이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9절)라고 유혹합니다. '인간들은 내 수중에 있다. 나와 흥정하자. 나와 조금만 타협하자. 너처럼 그렇게 높은 데 기준을 두면 안 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대를 따를 것이다'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마귀가 유혹한 '천하만국'은 예수께서 선포한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의 나라(통치)'와 확연히 대조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이 메시아적 통치를 사탄의 주권에 굴복시켰다면 그 나라는 악의 세력과 싸움 없이, 아무런 반대 없이, 그리고 십자가 없이도 이룰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한 '노'(No)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명기 6:13] 하시지 않았느냐?"(10절)라고 다시 성서를 인용해 대답하셨습니다. 결국 악마는 물러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을 들었다 했습니다. '천사들이 시중을 들었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보살피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광야 시험(유혹)은 많이 들어서 잘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 개의 서로 다른 유혹이 있었다기보다 한 가지 유혹의 세 개의 서로 다른 변형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유혹하는 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갖고 있었습니다. 사실 태초 때부터 악마는 '권력을 차지하라'라는 유혹을 해왔습니다. 뱀이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라고 꼬드길 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창세기 3:5)이라고 유혹하지 않았습니까.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할 때도 계속 전제한 것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3절, 6절)입니다. 더 좋은 번역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권능을 가지고 있으니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하고, 선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이렇게 예수님을 유혹한 자는 예수님의 최후의 순간에도 똑같이 주님을 유혹합니다. 예수께서 멸시와 버림을 받고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며 "성전을 헐고 사흘이면 다시 짓는다던 자야, 네 목숨이나 건져라.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 27:40)라고 모욕하였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신이 가진 힘을 보여주라'라는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유혹하는 자는 세상 맨 처음부터 맨 끝 날까지 계속해서 똑같은 제안을 귀에 속삭입니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이 이런 악마의 속삭임에 솔깃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광야 유혹을 '외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유혹은 예수님 자신의 마음속에서 계속되었던 내면적인 투쟁이었습니다. '내적인' 갈등이었습니다. 시험(test)이 외적인 것이라면 유혹(temptation)은 내적인 것입니다. 유혹자의 공격은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유혹하는 자는 우리의 가장 깊은 정신과 욕망을 통해 우리에게 옵니다. 시험이란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것입니다. 유혹은 어떤 사람의 욕망을 자극하여 그것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험은 사람들의 능력을 평가하고 발전시키는 기회가 됩니다. 그러나 유혹은 눈앞의 만족을 위해 미래의 불행을 감수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 중인 사람이 맛있는 디저트를 보고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디저트를 먹게 되면 지금 당장은 기분이 좋아지지만 내일 아침에는 불행을 경험할 것입니다.
시험이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서를 보면 하나님은 시험하시는 분입니다. 출애굽의 하나님은 '파라오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단련하시기 위해 광야에서 그들을 시험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명기 8:2) 했습니다. 광야에서 먹을 게 없다고 이스라엘이 불평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비 같이 양식을 내리시며 그 이유가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명기 8:16)라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출애굽의 하나님은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한다]"(신명기 13:3)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창세기 22장) 이런 시험의 목적은 시험을 받는 사람이 그 시험에 의해 이전보다 더욱 강하고 순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고난이나 시련 자체를 하나님의 저주나 징벌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정반대로 고난이나 시련은 신앙을 연단하기 위한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고난받을 때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예수께서도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태 5:11-12, 누가 6:22-23) 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베드로전서 4:12-13) 했습니다. 이런 시험은 연단을 위한 겁니다. 한 시편 기자는 이런 시험을 놓고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다]"(시편 66:10)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신약서신 본문(야고보서 1:2-15)도 그런 말씀으로 들립니다. 야고보는 "내 형제[자매]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절) 하면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12절) 말합니다. 그런데 후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13절)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 시험을 견디어 낸 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거라고 하더니 뒤에 가서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고 하니 앞뒤가 안 맞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시험이라 번역된 그리스어 '페이라스모스'(peirasmos)를 유혹으로 다시 번역하면 우리는 진정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조깨기까지"(히브리서 4:12)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로 오늘의 신약서신 본문을 다시 읽어봅니다.
"유혹을 당할 때에 아무도 '하느님께서 나를 유혹하신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지만 악을 행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실 분도 아니십니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옵니다."(야고보서 1:2, 12-15)
그렇습니다. 야고보는 인간이 당하는 모든 시련이 하나님에게서 유래한다는 사상을 거부합니다. 인간이 받는 시련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신학을 거절합니다. 인간의 악은 하나님에게서 유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유혹에 빠뜨리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유혹은 도대체 어디에서 옵니까?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예외 없이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개역개정)된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본성 안에는 욕심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을 미혹하고 유혹합니다. 그 욕심이 죄(하마르티아)를 낳고, 이 죄가 인간을 죽음(타나토스)에 이르게 합니다. 바울도 인간의 이런 이중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1-24)
도대체 인간 안의 욕심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야고보는 침묵합니다. 그러나 유혹은 유혹당하는 사람이 그 유혹에 동의할 때 잉태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당하는 유혹이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 인간이 당하는 유혹의 근원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악의 책임을 하나님에게 전가하려는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온갖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늘의 빛들을 만드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16-17절, 공동번역) 하나님은 시련과 유혹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라고 야고보가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미국 원주민 추장이 자녀들을 모아놓고 이런 가르침을 주었답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있단다. 두 마음은 서로 절대 지지 않으려고 싸워서 마치 늑대와도 같지. 한 마리는 악한 늑대란다. 미움, 분노, 살인을 부추기지. 다른 하나는 선한 늑대란다. 용서, 사랑, 화해를 하게 하지.' 그러나 한 자녀가 물었습니다. '둘이 싸우면 누가 이겨요?' 추장은 엄숙한 눈빛으로 이렇게 또박또박 힘주어 대답했습니다. '그건 네가 어느 늑대에게 먹이를 주느냐에 달렸지.'
악마의 가장 큰 속임수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악은 얼굴이 없습니다. 아니 악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악은 내가 아는 것보다 내게 더 가까이 있습니다. 내 안의 어둠 속에 꽁꽁 숨어 있습니다. 그렇게 악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내게 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자기를 속이지 않는 일입니다. 아무리 들여다보기 싫은 부분이 있어도 자기 안의 어둠을 직시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자신을 속이지 않게 됩니다. 이사야는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이사야 47:10)라고 질타합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갔다는 말입니다. "역경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백 명이라면, 성공과 번영을 잘 견뎌내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토머스 칼라일)라고 합니다. 실패보다 성공이 더 위험합니다. 유혹은 우리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통해서 옵니다. 우리의 강한 곳 바로 그곳을 우리가 항상 감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묻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태 6:13, 누가 11:4) 공동번역 성서의 번역대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말씀입니다. 한 영어 성경도 이렇게 번역합니다.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KJV) 예수께서는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고통의 잔을 받지 않을 수 없느냐고 하나님께 매달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누가 22:44) 간절히 기도하실 때에도 제자들을 향해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누가 22:40, 개역개정) 한 번 더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유혹에 빠지는 것은 유혹에 동조하는 욕심이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욕심을 통제할 수 있다면 유혹을 무력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욕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욕심에게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악한 생각이, 유혹이 머릿속을 스쳐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런 악한 생각이 마음속에 머무르게 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 무장한 삶을 살 때 그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사순절이 바로 그것을 위한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참회'의 시간입니다. 참회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깊이 뉘우치는 것입니다. 내 안의 어둠을 깨닫고 그것과 용감히 대면하는 것입니다. 죄책감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유혹당하는 사람의 주체적 결단이 중요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파라오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에 이스라엘은 배가 고파, 목이 말라, 그리고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아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태 4:4 = 신명기 8:8)라는 말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마태 4:7 = 신명기 6:10)라는 말씀, 그리고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태 4:11 = 신명기 6:13)라는 이 세 말씀은 모두 이때 주어진 말씀들입니다. 모두 이스라엘이 광야의 유혹에서 실패했을 때 주어진 말씀들입니다. 그러나 광야의 예수께서는 악마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실패했지만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신 예수께서는 이기셨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셨습니다. 비록 그분은 돌들로 떡을 만드는 것을 거부했지만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분은 세상 권세를 거부하셨지만,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셨습니다. 그분은 높은 성전 위에서 뛰어내릴 때 천사들이 그를 떠받치는 장관(spectacle)의 연출을 거부했으나 갈보리 산 높은 십자가 위에 달려서 자신의 손과 발에 못을 치는 사람들을 용서하시며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그랬습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셨습니다. 다 이기셨습니다.
기쁜 소식은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그분이, 그 유혹을 다 물리치신 분이 자신의 약함 가운데 우리를 강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분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히브리서 2:18)라고 성서가 이야기합니다.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사람이 흔히 겪는 시련 밖에 다른 시련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십니다."(고린도전서 10:13, 새번역)
그러므로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혹 지금 예상치 못한 시련과 유혹 가운데 있을지라도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에 유혹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의 편에 서서 항상 도우실 겁니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 겪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열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가 나의 능력이 되사 세상을 이길 힘 주실 겁니다. 이 의지와 이 신뢰가 바로 믿음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린도후서 13:4-5) 했습니다. 이번 사순절은 고행(苦行)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하는 참회(懺悔)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안의 어둠을 직시하고 그 속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은총과 기쁨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플라네(πλάνη, ης, ἡ 스트롱번호4106
도키마조(δοκιμάζω) - 시험하다
‘시험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도키마조(δοκιμάζω)는 ‘시험하다, 검사하다, 입증하다, 정밀하게 조사하다, 검사 후에 진짜라고 인정하다, 입증하다, 가치 있게 여기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다른 헬라어 페이라조(πειράζω)는 ‘철저하게 시험하다(to test thoroughly)’ 라는 의미입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도키마조와 페이라조를 동일하게 ‘시험하다’라는 말로 번역해 놓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약간의 오해를 가져올 수 있는 소지가 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을 도키마조 (Test)라고 하고, 사단이 주는 시험을 페이라조(Temptation)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반적이며 좋은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페이라조의 시험을 받지 않으시는 예수님이 마귀에게 페이라조의 시험을 받고(눅 4:2 - 마귀에게 시험{페이라조}을 받으시더라), 또한 누구도 페이라조의 시험을 하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 페이라조의 시험을 하신다(요 6:6 -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페이라조}하고자 하심이라).
누가복음 4:2
마귀에게 시험을(페이라조)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요한복음 6: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페이라조) 하심이라.
야고보서 1:3
사람이 시험(페이라조)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페이라조)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페이라조)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페이라조) 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유혹(프라내. planē) πλάνη / 미혹(delusion)
- 잘못된 길로 꾀이는 것
데살로니가전서 2:3(간사)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미혹(에크사파타오. ĕxapataō) ἐξαπατάω / 속이다(deceive)
-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함
시험(페이라조. pĕirazō) πειράζω / 유혹을 받다(tempted)
- 망하게 하려는 것
시험(도키마조. dŏkimazō) δοκιμάζω / 감찰하다(test)
- 진리를 깨닫게 하려는 것
도키마조(δοκιμάζω)의 시험?
시험을 통해서 숨겨진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알도록 하는데 있다.
페이라조(πειράζω)의 시험?
그 단어의 목적이 시험을 통해서 완전히 망하게 하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누가 시험을 주느냐 보다는 시험을 당하는 당사자 즉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삶의 현장에서 닥치는 수많은 사건, 사고를 일종의 시험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사건, 사고를 표피적으로 보아 판단해 버리면 결국엔 망할 수 밖에 없는 페이라조의 시험에 빠지는 것이요, 사건, 사고를 통해서 그것이 좋은 것이든,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것이든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을 수 있다면 그는 생명으로 가는 도키마조의 시험, 참 좋은 시험을 받은 것이다.
진리의 말씀이 있는 참 성도에게는 오직 도키마조의 시험만 있을 뿐이다.
페이라조의 시험은 생명없는 죽은자가 받고 영원히 멸망받게 되는 것이다.
야고보서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페이라조. 3985)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에피두미아. 1939) 끌려 미혹됨이니(델레아조. 118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멸망의 시험(페이라조)을 받는 이유는 죽어야할 ‘나’인 영원한 멸망받을 인간의 욕심, 정욕(에피두미아 - ἐπιθυμία ) 때문이다(약 1:14).
* 시험(페이라조. 3985) - 시험을 통하여 완전히 무너트리려는 것
시험(3985) 페이라조
[ pĕirazō ] πειράζω 스트롱번호 3985
마태복음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태복음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 시험(도키마조. 1381) - 시험을 통하여 감추어진 진리의 말씀을 깨우쳐 알게 하려는 것
시험(1381) 도키마조
[ dŏkimazō ]
δοκιμάζω
스트롱번호 1381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데살로니가전서 2: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욕심(에피두미아. 1939)
미혹(델레아조. 1185)
시험(도키마조. 1381) - 시험을 통하여 감추어진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알도록 하려는 것.
시험(1381) 도키마조
[ dŏkimazō ]
δοκιμάζω
스트롱번호 1381
뜻풀이부
1. 시험하다, 검사, 조사하다, [대격과 함께] 눅14:19,
ἑαυτόν, 자신을 살피다, 고전11:28, 고후13:5, [자신의 사업을] 갈6:4, [하나님의 역사를] 히3:9, [모든
것을] 살전5:21, [영들을] 요일4:1, [하늘과 땅을] 눅12:56, 알아내다, 엡5:10, 그 외, 롬2:18, 12:2,
살전2:4, 딤전3:10
2. [시험의 결과와 관련하여]
a. 시험하여 증거하다, 시험으로 알아내다, 고전3:13, 벧전1:7.
b. 증명된 것으로 받아들이다, 인정하다, 시인하다,
[대격과 함께] οὕς ἐὰν δοκιμάσητε: 누구든지 너희가 자격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롬1:28, 2:18,
14:22, 고전16:3, 고후8:8,22, [간접 질문이 뒤따르는 경우] δ., τί τὸ θέλημα τ. θεοῦ: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롬12:2, [수동] 살전2:4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나’를 죽이는 참 좋은 도키마조의 시험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사는 자(갈 2:20), 그가 성도인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거짓 것(5579) 퓨도스 ψεῦδος
스트롱번호 5579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거짓(요 8:44, 엡 4:25, 요일 2:27), 거짓말(계 21:27, 22:15), 거짓 것(롬 1:25)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 바울은 본문에서 진리를 거부한 자들의 운명을 보다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즉 진리를 거부한 자들이 거짓을 믿게 되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말하고 있다(Morris).
여기서 '유혹을...역사하게 하사'로 번역된 헬라어는 '에네르게이안 플라네스'(*)로 '강력한 미혹을 보내신'(send powerful delusion, NIV)으로 직역할 수 있다.
이는 그들에게 일어난 미혹이 불가항력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특히 바울은 '에네르게이안'(*)이란 동사를 사용하여 그들에게 임한 미혹이 초자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단지 수동적으로 그 미혹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다해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Morris).
요컨데 그들은 진리를 사랑하기를 거부(拒否)했기 때문에(10절) 선을 버리게 되고 악을 따를 수밖에 없다.
한편 본절에는 '유혹'이나 '거짓'과 같은 악의 세력 등이 임의대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주권적으로 그의 목적을 수행하신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官村武天).
마태복음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그때에(*, 토테) - 문장의 서두를 이루는 말로서, 요한의 세례를 받고 성령이 예수에게 임한 후 즉시를 말한다(막 1:12, '곧').
성령에게 이끌리어 - 예수를 잉태케 하신(1:20)성령은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거한(3:17) 후 마귀에게 시험 받으시도록 광야로 이끄신다(막 1:12, '몰아내신지라'). 이는 물론 외형상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해 예수께서 수동(passivity)적으로 인도당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예수께서 성령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하신 것을 나타낸다. 즉 성자, 성령의 유기적 연합과 협력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과 인류의 공동 대적(大敵)인 마귀에게 나아가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자, 성령께서 마귀에게 도전했다는 뜻이 아니다. 수세(受洗)와 관유(灌油)로 성령이 충만하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첫째 아담을 정복했던 사단이 둘째 아담인 자신을 꺾어버리기 위해도 전해 온 것을 받아들이신 것이다. 이 도전을 극복함으로 비로소 예수는 하나님과 사단의 공인(公認)을 받으며 참 메시야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할 수 있었다.
마귀(*, 디아볼로스) - 이 단어는 엄격한 의미로 '중상모략을 일삼는 자', '살인자'를 뜻한다. 70인역(LXX)에서 이 용어는 대적자, 저항자란 뜻의 히브리어 '사단'(*, 사탄)을 번역한 말이다. 따라서 마귀를 인종 차별이나 범죄의 배후에 있는 비인격적인 '힘'으로 축소시켜서는 안된다(Schweizer). 마귀 또는 사단은 인간 타락의 원인이되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대적하며, 땅 위에 어둠의 권세를 번식시키고 사람들의 파괴를 유도하는 타락한 영(靈)들의 왕이다. 그리하여 사단을 일컬어 살인자(요 8:44)요, 악한 자(요일 5:19)요, 거짓말장이 (요 8:44)요,시험하는 자(살전 3:5)요, 참소하는 자(계 12:10), 미혹하는 자(계 20:10)요, 대적(벧전 5:8)이요, 이 세상 임금(요 12:31)이요, 공중권세 잡은 자(엡 2:2) 등으로 부른다(본문 강해참조).
시험을 받으러(*, 페이라스데나이) - '페이라조'(*, '유혹하다')란 말은 인간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하는 사단의 계략(고전 7:5;살전 3:5)일 뿐아니라, 인간들의 인격을 성숙시키고 영적으로 성장케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연단(창 22:1;출 20:20;요 6:6;고후 13:5;계 2:2)을 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은 전자의 어두운 면을 내포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생 결단(死生決斷)의 시험이었다. 실로 사단은 인간을 악에 빠지도록 유혹(temptation)할 뿐 아니라(계 12:10-12),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악한 존재이다(창 3:1-5). 바로 그 파괴적 실체인 사단이 예수께 한낱 대리자를 보내지 않고 자기의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여 예수를 시험하였다.
광야 - 성경 문학적으로 '광야'란 귀신들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곳(사
13:21;34:14;마 12:43;계 18:2)이다. 그런데 이곳의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 모세와 엘리야의 40일 금식 처소인
시내산으로 보는 학자도 있고(Alford), 다볼산(외경, '히브리인의 복음') 내지는 여리고 근처의 전설적인 시험의 장소로
보기도 한다(수 16:1, De Wette). 그중에서 시험받은 장소가 세례 받은 장소에서 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십자군 원정 이후 이곳 지역을 그리스도의 '40일 금식'
지역(Quarantania)으로 명명(命名)하였다고 한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은 복음에 관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s) 혹은 `작은 복음서'(Little Gospel)라고 불리기도 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전체 대표할 수 있는 요절인 본절은 복음의 진수(眞髓)로서,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계시의 말씀을 사랑의 개념에서 천명(天命)한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세상'을 뜻하는 헬라어 `코스모스'(*)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 가리킨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 이스라옐에게만 국한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민족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이는 곧 복음의 보편성과 그 맥을 같이한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개방되어 있지만 그 은혜틀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본절에는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기가된 것임이 밝혀져있다. 특별히 `사랑'의 헬라어 `아가페'(*)는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 중의 하나로서, 하나님 편에서 선수권(先手權)과 주도권(主導權)을 가지고 인생의 연약함과 죄성을 끝없이 감싸 안으신다고 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이라 하겠으며(요일 4:8)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의 생애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사랑은 결코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성격의 것이며 막연한 이론이나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응분(應分)의 대가를 아낌없이 지불하는 것이다. 그리고 `독생자'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의 특수함을 강조하는 말이며, 루터의 말을 빌리면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결국 예수의 탄생은 영원 전부터 독생자로 존재하셨던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이었다는 점에서 유일 무이한 사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독생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노게네스'(*)는 `외아들'이란 뜻 외에 `그 속성과 성품에 있어서 유일 무이하신 분'이란 의미도 내표한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아들'의 뜻인 `휘오스'(*)를 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3:16, 36;5:20, 23;8:36 등). 한편 `주셨으니'의 헬라어 `디도미'(*)는 `보내다'(send)와 `넘겨주다'(hand over), `값을 지불하다'(pay) 등의 뜻이 있는데 본절에서도 이 말은 성육신(Incarnation)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crucifixion)까지도 의미하고 있다. 웨스트콧(Westcott)은 이 낱말이 재물을 바치는 일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창 22:2 주석 참조).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믿는 자의 구원에 있음을 15절에 이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멸망'과 `영생' 사이에 어떠한 중립적인 선택은 없으며 그것은 절대적인 양자 택일의 문제이다.
`멸망하다'의 뜻인 `아폴뤼미'(ἀπόλλυμι. 622) 또한 요한이 자주 사용한(10번 정도) 단어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첫째, 이 말은 `잃다', `상실하다'(to be lost)의 뜻과 둘째, `없어지다', `파괴되다'(to perish, be destroyed)의 뜻이 그것이다. 또한 이 동사는 구원과 반대되는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이며,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을 나타낼 때(막 3:6), 존속되는 것과 반대되는 `멸망'을 나타낼 때 (고전 1:19), 그리고 무엇을 얻거나 받는 것과는 반대되는 `상실'을 나타낼 때 등의 경우 에도(요이 8절) 사용되었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아가는 자들은 필경 절망과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됨을 암시한다. 그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허망하며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멸망을 뜻한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1. 복음의 보편성(普遍性) universality / 세상(코스모스) - 유대인 및 이방인 모두를 포함하는 인류 전체
유대인의 선민 사상을 부정하므로 유대인들은 싫어할 수밖에 없다.
2. 복음의 선재성(先在性) preexistence / 하나님이 먼저 사랑
- 사랑이란 아가패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3. 복음의 독창성(獨創性) originality / 아들은 곧 하나님이시다.
*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4. 구원의 비밀(秘密) / 예수를 믿으면
5. 구원의 결과(結果) /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
멸망하다(아폴루미.)
- 잃다, 상실하다(to be lost)
- 없어지다, 파괴하다(to perish, be destroyed)
영생
- 조에(영원한 생명), 푸쉬케(정신적 생명), 소마(육체적 생명)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and in every sort of evil that deceives those who are perishing. They perish because they refused to love the truth and so be saved.
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새번역)
9. 그 불법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작용에 따른 것인데, 그는 온갖 능력과 표징과 거짓 이적을 행하고,
10. 또 온갖 불의한 속임수로 멸망을 받을 자들을 속일 것입니다. 그것은, 멸망을 받을 자들이 자기를 구원하여 줄 진리에 대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멸망(滅亡) 하는 perish
아폴루미[ apŏllümi ] ἀπόλλυμι
스트롱번호 622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멸망하는 자들(those who are perishing)"은 누구일까요?
첫째는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사람
진리의 사랑이란 참된 사랑으로 죄의 결과로 죽어야 할 인생들을 위하여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죄값을 십자가로 지불하신 후에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교훈입니다.
둘째는 구원을 얻지 못하는 사람
구원이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에 의한 구원은 행위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가 구원을 얻는 것을 은혜의 종교라고 합니다.
셋째는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간 사람
사탄을 멸망의 아들이라고 합니다(살후 2:3).
사탄은 하나님 보좌를 빼앗으려고 반역하였으나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 공중의 권세를 잡은 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과 더불어 함께 멸망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탄의 소리에 귀를 기우려 미혹을 당하면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도 사탄의 소리는 종교다원화의 탈을 쓰고 등장하여 신앙의 울타리를 허물고 있습니다.
떼로는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과 이단의 교리에 마음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오직 진리로 무장하여 생명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믿음을 확신해야 하겠습니다.
주 믿는 사람 일어나
성경은 멸망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첫째, 여호와께 범죄한 사람(역대하 30:7)
너희 열조와 너희 형제 같이 하지 말라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한고로 여호와께서 멸망에 붙이신 것을 너희가 목도하는 바니라
둘째, 깨닫지 못하는 사람(시편 49: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셋째,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사도행전 3:23)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베드로후서 2:1)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을 기억하시지요?
앞으로 크게 될 사람은 이미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여 뛰어난 경우가 많다는 교훈입니다.
이 속담을 신앙생활에 적용하면 어떨까요?
"될성부른 신앙은 시작부터 다르다" 라고 하겠습니다.
파트리스교회는 주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은퇴할 나이가 되었을 무렵 환경의 변화에 따라 긴급하게 시작한 교회이었습니다.
뉴욕이란 대도시에서 원주민이 아닌 이방인과 같은 위치에서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야 할 이민자들의 힘든 삶을 눈여겨보며 주일마다 새 힘을 공급할 수 있는 영적 생명력이 풍성한 믿음의 공동체로 출발한 교회입니다.
시작은 미약하고 초라할지라도 영적 소망은 결코 초라하지 않은 믿음으로 새로운 소망을 자극하려는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특별히 예배 장소를 무상으로 사용하도록 배려한 데이케어 운영자의 사랑의 마음에 따라 지금까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민 1세들이 은퇴하면서 그 자리에 2세들이 대를 이어갈 수 없는 현실에서 멸망하는 교회가 아니라 새로운 꿈과 소망을 갖고 새롭게 시작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파트리스'란 헬라어로 "본향" 또는 "고향"이란 뜻입니다.
이민 1세들을 주님의 품으로 편하게 인도할 수 있는 공동체로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2세들에게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현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처럼 시작의 의미가 모두에게 마음 깊이 새겨질 수 있는 교회로 세워질 수 있도록 협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은, 어린 시절의 행동이나 태도가 그 사람의 장래를 예측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속담은 글자 그대로, 좋은 나무는 어렸을 때부터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떡잎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서 유래했습니다. 이는 자연 세계의 진리를 인간의 성장과 성품에 대입한 것으로, 어린 시절의 재능이나 성향이 장차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역사적 기록이나 전설보다는 일상에서 오랫동안 구전되어 온 속담입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는 속담을 통해, 우리는 어린 시절의 재능과 성향이 어떻게 한 사람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 속담은 우리에게 어린이들의 잠재력을 인정하고 그들의 성장을 지원하는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또한, 이 속담은 노력과 재능의 가치를 동시에 강조하며, 어린 시절부터의 지속적인 노력과 발전이 어떻게 미래의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속담을 활용하면, 더욱 풍부한 의미를 찾고 깊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속담들을 통해, 더욱 깊이 있는 인생의 지혜를 함께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 - 불법한 자의 활동은 사단의 능력에 따라 이루어지며 그것은 모두 거짓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불법한 자가 나타나 초자연적 행위를 세가지 용어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먼저 '능력'이 언급되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뒤나메이'(*)로 불법한 자의 배후에있는 이적을 행하는 힘을 가리킨다. 이 말은 내적인 능력을 가리키는 헬라어 '엑수시아'(*)와는 달리 외적으로 나타난 능력을 가리킨다. 두번째로 '표적'(*,세메이오이스)은 불법한 자의 행동들이 의미있게 보이는 표시와 증거를 말한다. 세번째로 '기적'(*, 테라신)은 사람들이 불법한 자의 행동을 통해서 갖게 되는 경이감(驚異感)을 말한다. 이러한 용어들은 불법한 자가 사단의 능력을 따라서 사용하는 초자연적 능력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도 성도의 구원과 자신의 복음을 확증케하시기 위해서 능력과 표적과 기적을 사용하셨다(Calvin). 그러나 이제 그것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불법한 자에 의해서 미혹과 파멸의 목적으로 사용되어질 것이다(마24:24).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 불법의 사람이 사단의 역사를 따라 능력과 표적과 기사를 행사하지만 그의 힘이 결코 불가항력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그에게 미혹당하는 사람만이 멸망하게 될 것이다(P.J. Gloag). 그들이 멸망하는 원인은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치 않고 그가 선물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기 거부한 결과에 기인한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른다.
진리의 사랑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아가펜테스 알레데이아스'(*)는 복음을 강조한 표현으로 적그리스도들이 주장하는 거짓이나 속임과 반대되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 알레데이아)는 복음의 진리(갈 2:5;골 1:5)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진리를 말한다(롬 1:25, Morris). 바울은 본절에서 악인들 스스로가 자기들이 아무 까닭없이 멸망한다고 생각하거나 자신들의 잘못보다는 하나님의 잔혹성 때문에 죽게 되었다는 불평을 못하도륵 그 근거를 충분히 제시하고 있다.
받지 아니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에덱산토'(*)는 '환영하지 않았다', '영접하지 않았다'라는 의미로 멸망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복음에 무관심하고 냉담한 태도를 보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
켄트 M. 키스(by Kent M. Keith, 1949~ ) 가 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시가 있습니다.
People are often unreasonable, illogical,
and self-centered;
Forgive them anyway.
If you are kind,
people may accuse you of selfish, ulterior motives;
Be kind anyway(…)
If you are honest and frank,
people may cheat you;
Be honest and frank anyway.
What you spend years building,
someone could destroy overnight;
Build anyway.
If you find serenity and happiness,
they may be jealous;
Be happy anyway.
The good you do today,
people will often forget tomorrow;
Do good anyway.
Give the world the best you have,
and it may never be enough;
Give the world the best you've got anyway
사람들은 때로 변덕스럽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용서하라.
네가 친절하면 이기적이고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도 친절을 베풀라.
네가 정직하고 솔직하면
사람들은 너를 속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 하라.
네가 오랫동안 이룩한 것을
누군가 하룻밤 사이에 무너뜨릴 수 있다.
그래도 무언가 이룩하라.
네가 평화와 행복을 누리면
그들은 질투할지 모른다.
그래도 행복 하라.
네가 오늘 행한 선을 사람들은 내일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선을 행하라.
네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세상에 내줘도 부족할지 모른다.
그래도 네가 갖고 있는 최상의 것을 세상에 주어라.
이 시는 인도 캘커타의 '어린이집'에 새겨져 있는 말로서 '마더 테레사의 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켄트 M. 키스(by Kent M. Keith, 1949~ )’씨의 글입니다. 하지만 누가 썼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메시지가 중요합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 바르게 살아도 다른 이들이 날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힘주어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라고 권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 순간 최상의 것을 내놓고 베푼다면 세상도 우리에게 언젠가는 최상의 선물을 줄 것이라고 믿어보라는 내용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열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신학과 문학을 공부한 '마쓰미 토요토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여러 권의 책을 썼는데 그 중에 「참사랑은 그 어디에」라는 소책자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세 가지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참 행복이란? 이 세 가지의 사랑 중 어느 것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세 가지의 사랑이란 이런 종류입니다.
첫째, 만약에의 사랑(IF)
'마쓰미 토요토미'는 '만약에의 사랑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조건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가령, '만약에 너 말 잘 들으면 아빠가 사랑할 것이다.' 라든가 '나에게 그것을 해주면 사랑하겠습니다.'라든가 '만약에 당신이 성공한다면 나는 당신과 결혼할 것입니다'라는 조건을 두고 하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끈 달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조건의 끈들을 끊어 버리고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가 못한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런 끈 달린 사랑의 동기는 지극히 이기적입니다.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도 뭔가를 얻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이 채워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는 것이 'IF'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아주 유치한 수준의 사랑입니다.
둘째, 때문에의 사랑(BECAUSE)
그는 또 '때문에의 사랑'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결과를 보고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받을 만한 조건이나 건덕지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잘 해주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인기가 있고, 명예가 있고, 돈이 많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랑이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해관계에서 오는 그런 사랑을 가리켜 부르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보면, 평생을 살고서도 한다는 소리가 '저 웬수'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당신에게 실망했다.'말을 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바랐기에, 무엇을 두고 사랑했기에 실망했다는 것입니까? 무엇을 보고 사랑했기에 이제 와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까? 동기와 목적이 잘못 되었고, 오리엔테이션이 잘못 되었습니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의 사랑
이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일방적이고도 절대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조건이 없는 사랑, 아가페의 사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결코 끈달린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사랑 받을만한 건덕지가 있어서 사랑한다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오히려 기대치 이하임에도 불구하고 용납하는 사랑을 가리켜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의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평생을 살면서 추구해야 할 사랑이라는 것이요, 이렇게 살면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사는 길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어느 한순간이라도 이런 사랑을 해 보셨습니까? 이런 사랑을 받아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렇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또는 성경을 읽으면서 중요한 부사를 하나 고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처럼 중요한 말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자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역설적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 보면 세 번째 소개한 전형적인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신앙의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에 그의 위대한 신앙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물고기를 잡는데서 부터 시작합니다.
'게네사렛 호숫가'는 현제 ‘갈릴리 바다의 별칭’입니다. 이 외에도 이 바다는 여러 명칭으로 불리웠는데
구약시대에는 '긴네렛 바다'(민 34:11;수 13:27) 또는 '긴네롯 바다'(수 11:2)로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긴네렛 호수', '디베랴 바다'(요 21:1)로 불리워 졌습니다.
이 바다는 남북의 길이가 20Km, 동서의 폭이 12Km이고 면적이 144Km에 해당하였는데 요단강 수원으로부터 흘러 호수를 거쳐 흘러 내려온 맑은 물과 갈릴리 바다 주변의 따뜻한 온천수로 이루어진 이 바다에는 엄청난 양의 물고기들이 번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위시한 어부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날따라 새벽에 돌아와 그물을 씻어 정리한다고 하는 것이 왜 그리도 피곤하고 짜증스러운지.... 그 이유는 아마 수고에 따른 열매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물 정리가 끝나 갈 무렵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베드로의 배를 빌려 타시고, 배를 강대상 삼아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호숫가에 배를 대고 그물을 씻는 것을 보아 그 두 척의 배는 고기잡이 나갔다가 금방 돌아온 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배를 사용하시고자 하는 것을 보면 그 두 배가 모두 빈 배였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척의 배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은 고기잡이를 나가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채 소득이 없이 돌아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서 베드로에게 뭔가 좀 보답할 뜻인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보십시오. 지금까지 수고한 밤새도록 허탕 친 바다입니다. 새 번역대로라면 ‘지금까지 애를 쓴’ 그런 바다였습니다. 그런데도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군소리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런데 “내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라고 순종한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놀랍게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어 동료들의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시작은 낙심과 피곤과 절망과 짜증으로 시작되지만, 끝은 '해피엔딩'이었습니다. 승리와 결과에 만족하며,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 비결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무엇이 시작과 끝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린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말 개역성경 5절에 보면, “잡은 것이 없지마는”으로 되어 있습니다마는 킹제임스 버젼을 보면, “Nevertheless”로 되어 있습니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베드로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을 상고하면서 은혜를 받고 저와 여러분의 신앙으로 삼으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어떤 신앙이 되어야 합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1. 실패했음에도 순종한 신앙입니다.
베드로는 어부로서 말이나 행하는 모든 것이 다 너무나 무식하고 거칠어서 인간적인 면으로는 전혀 성공적인 요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영접하게 되고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또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기를 많이 잡게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밤새도록 수고하여 그물을 던졌습니다마는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빈손으로, 빈 배로 돌아 올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빈배나 빈손은 실패를 의미합니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그물을 손질하고 있습니다. 다시 재도전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오늘의 실패로 인해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 소원대로 가득 채워지기만을 바라지만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내 생애에 베드로와 같이 ‘빈 배’와 같은 위기와 실패를 경험하게도 됩니다. 그것이 때로는 건강문제일 수도 있고, 사업문제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문제일 수도 있고, 자식문제일 수도 있고, 물질문제일수도 있고, 인간관계에서 생겨지는 문제일 수도 있고, 오늘과 같은 경제적 위기와 갖가지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물을 씻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물을 열심히 씻고 있는 베드로의 배에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다시 재도전 하려는 그 현장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현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성공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업도 성공해야 하겠고, 기업도 살려내야 하겠고, 기울어 가는 가정도 바로 일으켜야 하겠고, 정치도 성공해야 하겠고, 심지어 목회도 성공해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온갖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 성공을 향해서 무섭게 달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성공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올라가는 것만이 성공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내려가면 실패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오르막길이 있는가 하면 내리막길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항상 올라갈 수만은 없습니다. 문제는 내려갈 때가 문제입니다. 내려갈 때의 나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단 한 번의 그물을 쳐서 성공한 사람들 그리 많지 않습니다. 거의가 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의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역사상 전설적인 홈런왕이 있습니다. 아직도 그 기록을 깨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이브 루스'입니다. 그는 생전에 714개의 홈런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714개의 홈런을 날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경험했는지 모릅니다. 1330개의 스트라이크 아웃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1,330개의 실패를 경험하면서 비로써 714개의 성공의 열매를 거둘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 그가 존경받는 삶을 살게 된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준비된 대답은 이러 합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이 실패를 했거든요?”였습니다. 과거의 그 많은 실패가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는 대답입니다.
미국대학 교수 가운데 서부극에 나오는 명사수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조교수가 있습니다. 그의 논문의 주제가 무엇인지 아세요? “어떻게 하면 서부극의 명사수처럼 조준을 하지 않고도 명중시킬 수 있는가?”입니다. 그 교수는 박사학위 논문이 끝날 때쯤 되어서는 그도 명사수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자주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명사수가 될수 있느냐?” 였습니다. 그의 준비된 대답은 이렇습니다. “맞추든 못 맞추든 걱정하지 말고 2만 발을 쏘면 자연히 명사수가 될 수 있습니다.”
무슨 얘기인지 아십니까? 2만 번의 실패 끝에 성공할 수 있다는 대답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일부러 실패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실패하는 것이 두려워 시작조차 안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 앞에 그대로 주저앉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의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라는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자세에 있습니다. 순종(obediance)은 항상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삼상 15:22)". 불합리하고 부적합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그 상황이 불합리하고 불가능해 보이고 나타난 결과가 기적처럼 느껴질지라도 예수님에게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기의 있고 없음을 보신 것이 아니라 시몬의 심증을 보신 것입니다. 결국 기적은 예수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받아들일 사람의 믿음과 순종에 의해서 결실을 맺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삶도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그 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정도까지 순종 하셨습니까? 빌립보 2장엔 '죽기까지'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가 살고, 주님의 낮아지심으로 우리 모두가 높아졌습니다. 주님이 쓰신 저 가시관은 오늘날 온 인류를 다스리는, 왕의 왕으로서의 영광스런 왕관으로 바뀌어졌습니다. 동시에 베드로의 순종의 결과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필요한 곳에 차고 넘치게 주어집니다. 한 사람의 순종이 주위의 사람들에게까지 두 배에 가득 차는 축복을 방아 이익을 미치며 은혜를 끼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실패는 사생아”라는 말도 있지만 반대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습니다. 실패를 어느 각도에서, 어떤 자세를 가지고 대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요즘 쉽게 느낄 수 있는 어려움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것을 부정적이고도 절망적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전화위복의 기회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삶의 자세가 달라지고, 문제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수 있고, 그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 질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들의 생각의 현주소가 어디입니까?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실패’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실패는 당신이 틀렸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좀 더 다른 방법으로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실패는 당신이 포기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좀 더 열심히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실패는 당신이 해낼 수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간이 좀 더 걸릴 뿐임을 의미합니다. 실패는 당신이 버려졌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난 날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신 분이 있습니까? 오늘 위기를 겪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 위기, 그 실패로 인하여 오늘 낙심하고 주저하고 있는 분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베드로의 모습을 통하여 말끔히 씻어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씻는다는 자세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비합리적임에도 순종한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정말 순종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이치에 맞기를 합니까? 그렇다고 상식에 준하기를 합니까? 내 생각, 내 마음에 반절만이라도 든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전혀 엉뚱한 얘기입니다. 내 마음, 내 생각, 내 지식, 내 경험과도 상관없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비합리적인 말씀인가를 보십시오.
1) 시간적으로 보아도 맞지 않습니다.
시간적으로 보아서 지금은 그물을 내릴 때가 아닙니다. 갈릴리 지역의 특성으로는 밤에 고기를 잡습니다. 고기 잡는데 최적의 시간은 밤인데 지금은 태양이 바다에 눈부시게 비추는 아침이었습니다. 물고기가 호수가로 밀려 나오는 밤에 주로 고기를 잡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시간은 낮이었습니다.
2) 장소로 보아도 맞지 않습니다.
장소를 봐도 고기가 잡힐 장소가 아닙니다. 고기 잡는 방법이 낚시가 아닌 그물입니다. 여기서 그물이란 “디크튀아”로써 던지는 투망입니다. 투망이라고 하는 것은 고기가 많이 몰리는 곳에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물을 내리는 데는 적당한 깊이가 좋은데 예수는 깊은 데로 나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무데나 던진다고 해서 잡히는 게 아닙니다. 깊은 곳은 약 60M가 되는데 거기 투망을 던져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고기가 많이 모이는 곳은 깊은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던지라는 거라. 상식이나 경험에도 없는 말씀입니다.
3) 더구나 어려운 것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고기잡이에는 '비전문가’ 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나이 40이 넘도록 바닷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평생을 어부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전문가입니다. 어려서 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것이라고는 고기 잡는 일 밖에는 없습니다. 그는 어부로 외길인생을 걸어 왔습니다. 더구나 갈릴리 바다에 대해서는 훤하게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이스라엘 갔을 때 갈릴리 바다를 건너며 베드로 고기도 먹어 보았습니다마는 그 바다는 바다라기보다는 호수라고 해야 할 만큼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런 호수이기에 제 손바닥 보듯이 빤히 꿰뚫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 또한 고기잡이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이 거의 없는 목수였습니다. 목수에 관한 일이라면 모를까 목수가 어부를 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고 있습니다. 이걸 가리켜 '뻔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합니다. '공자 앞에 문자 쓴다.'고 합니다. '포크레인 앞에서 삽질한다.'고 합니다. 가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보세요, 경험으로 보나, 지식으로 보나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대로 순종합니다. 비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이치에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상식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그는 순종합니다. 여기에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 일찍이 ‘파스칼’이라고 하는 사람은 신앙을 정의하기를 “신앙이란 나의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철저하게 나의 이성과 경험과 생각과 주장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베드로는 이러한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여러 가지 조건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집니다. 신앙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합리적으로는 이치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이미 늦은 때이고, 환경 적으로 모든 여건을 뒤집기가 힘든 상황이었지만 주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대로 한번 해보겠다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피테도 프레마티수'라는 말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겠다.'는 뜻입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이 말을 '당신이 말씀하였다는 이 사실이 나에게 명령을 합니다.'라고도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곧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신 그 말씀이 내 속에서 강한 역사를 일으켜서 말씀대로 순종하도록 내 몸과 마음에 명령하고 있습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말은 헬라 원문에 '로고스'가 아닌 '레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고스'는 성경에 기록되어진 말씀 자체를 말하지만 '레마'의 말씀은 기록된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이 마음속에서 강력하게 역사 하여 나를 변화시키고 확실한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 성령의 감동으로 들려온 '레마'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것입니다.
딤후3:16에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속에 '숨'을 불어넣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숨'이란 단어는 히브리말로 '성령'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성령이 모든 말씀의 기록자이며 말씀을 통해 역사 하는 '영'이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히4:12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레마'의 말씀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다는 말은 성경대로 살아보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나에게 접촉하고 내 생활을 변화시키는 이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한 번 도전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문 6절의 "그리한즉"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베드로의 즉각적인 순종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회개시키고 심령 속에 뜨겁게 역사 하는 살아 있는 말씀대로 한번 해보겠다는 신앙고백이 있은 후 즉각적인 순종이 뒤따랐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요구하고 말씀하는 것이 때로는 비합리적으로 보여도 순종하겠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개성이니 지식이니 과학이니 하면서 제 고집이 너무 강합니다. 제 주장이 너무 강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개성도 좋고, 고집도 좋고, 의지도 좋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가서는 이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순종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순종을 배우기 못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라고 왜 할 말이 없었겠습니까? 그가 즐겁게만 순종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은 순종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혔습니다. 이것이 비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순종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3. 불확실함에도 순종한 신앙입니다.
이런 사건이 있은 후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저하지 않고 11절에 보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으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진정한 헌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배도, 그물도, 직업도, 심지어 처자식까지도 다 버려두고 예수를 쫓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우선의 삶을 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습니다. 전에 만난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따른다고 해서 생활이 보장된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불확실하기만 한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인생을 전적으로 예수님에게 맡겼습니다. "전적인 신뢰"를' 한 것입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베드로의 용기가 있는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는 하지만 너무 현실적이다 보니 적당히 타협할 때가 많고, 너무 계산적이다 보니 순수함을 잃어 가는 것 같아 마음 아플 때가 많고, 너무 안일무사하게 행동하다 보니 용기도, 뜨거움도 식어지는 것 같아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일찍 ‘헬렌켈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론을 위한 용기는 풍부한데 실천을 위한 용기는 미흡합니다. 말함에는 용기가 있는데 행함에는 용기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현대인의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지적을 했습니다. 아는 것은 많습니다마는 용기도 행함도 없는 현실적으로 바뀐 우리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미국의 어느 연구소에서 2,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왜 실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여러 가지 대답이 나왔는데 그 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대답한 것이 “결단성의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주저하다가 세월 다 보냈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모름지기 이제는 결단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앞날이 불확실하기만 하다고 미적거리다가는 세월 다 가고 마는 것입니다. 기회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둡고, 불투명하기만 하고, 어렵기만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여기에 베드로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많은 고기를 잡았지만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며 자기를 비웠습니다. 결국에는 예수님께서“이제 후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말씀하실 때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결국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을 다 버리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 제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혼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용기를 가지고 주님의 말씀에 묵묵히 따르노라면 상상도 못한 엄청난 축복의 사건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을 교훈삼아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순종하는 자세를 신앙으로 삼으셔서 생애의 나의 수고보다 몇 배나 가득 차도록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변함없는 사람으로 도우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주님 몸 된 교회에 달려 나와 예배를 드리도록 부르심을 감사합니다. 출타하신 당회장 목사님 동부인께서 안전하게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오시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특별히 오늘도 불확실하기만 하고, 어둡기만 한 현실 가운데서 우리를 불러주셔서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실수하고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비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앞날이 불투명하게 보여도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전진할 수 있는 결단성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생애에 다시 한 번 실패한 빈 그물이 아니라 그물에 고기가 가득차서 넘치는 축복을 경험한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맛보게 하옵소서. 순종함으로 기적을 체험하는 주인공이 되게 하옵소서.
“ 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 . . . 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살후2:3-8, 개역개정)
본 문장에서 "배교(apostasy)"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스타시아"인데 그 뜻은 "저버림, 배반, 반역, 배교" 이다.
영어의 "아포스타시"(apostasy)
라는 단어는 그 헬라어에서 유래하였다.
ἀποστα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646
그러면 누가 누구에게 배반하고, 반역한다는 말인가?
그 단어는 불신자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하는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용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배반한다는 말이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반역했던 것처럼 마지막
때에도 기독교회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배반할 것을 예고한 말씀이다.
그러면 마지막 때에 기독교가 어떤 형태로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배반할 것인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께 배교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하며 따라가는 것이다.
1930년 프로펠러 하나 달린 단발기를 몰고 대서양을 처음 횡단한 영웅이 있었습니다. 린드버그 대위입니다. 생명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일에 도전했다가 생명을 잃었습니다. 린드버그 대위는 조그만 비행기를 타고 서른 몇 시간 동안 대서양을 횡단했습니다. 그리고는 일약 세계가 주목하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가 영웅이 된 다음에 파리를 한 번 방문했는데, 그가 온다는 말을 듣고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렸습니다. 어느 큰 담배 회사 사장이 이 기회를 이용해 자기 회사의 담배를 광고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린드버그에게 다가가 담배 한 개비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것을 손에 끼어도 좋고 입에 물어도 좋습니다. 포즈 한 번만 취해 주십시오. 그러면 사진 한 장을 찍는 대가로 5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70년 전에 5만 달러라면 대단한 액수입니다. 그러나 엄격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린드버그는 이런 말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저는 세례 받은 교인입니다.” 이 말은 파리 신문에 기사로 나왔고, 그의 말을 듣고 그 당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성금 10만 달러를 모아서 린드버그에게 갖다 주었다고 합니다.
말로...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 사탄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과 성도들에 대한 실제적인 핍박을 가하게 된다(8절 '큰 말', 21절 주석 참조). 한편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의 '대적하다'(*, 차드)는 원어상 '...곁에', '...편에'란 뜻으로, 이는 하나님을 대적함과 동시에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까지 스스로를 높이는 교만을 지적하는 말이다(Thomson).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거시며 - 여기서 '때'(*, 제만)는 원어상 '정한 기한'이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창조 당시에 정하신 순리적인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며, '법'(*, 다트)은 '명령'이나 '규례', '포고령' 등의 문자적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모든 피조물의 생명과 활동의 근간이 되는 원리와 법칙을 가리킨다(Delitzsch). 실로 이러한 '때와 법'의 변경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에 속한 것인 바, 이것을 변경시키고자 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한 위치에 놓으려는 적그리스도의 극악한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다(Kliefoth).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 곧 여기서의 '때'(*, 이딴)가 본서의 용례상 '년'(年)을 가리킨다는 점에서(4:16) 7년 대환란 중의 3년반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계 13:5). 따라서 성도들이 3년반 동안 적그리스도의 손에 붙이우게 된다는 것은 그 시기에 집중적으로 성도들에 대한 엄청난 핍박이 있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21, 22절 주석 참조) 아마도 이 마지막 칠 년의 후반부(9:27)에 계 14-19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점진적으로 시행됨으로써, 결국은 아마겟돈의 최후 전쟁과 그리스도의 왕적 재림을 예비하게 될 것이다.
나누어 놓다
구별하다
판단하다
흐리면(*, 스튀그나존) - 이 말은 주로 침울한 감정이 얼굴로 표출된 상태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막 10:22). 그런데 가끔 분위기나 기후를 표현할 때도 사용되어 매우 짙은 어두움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어둠침침한 상태를 나타낸다.
날이 궂겠다 - 이를 표현한 원어 '케이몬'(*)은 단순히 찌푸린 날씨가 아닌 폭풍우치는 날씨를 Emt한다. 본문에서는 문맥상 날씨의 궂은 정도를 가리킬 수도 있고 궂은 날씨가 어김없이 찾아들것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췄다고도 볼 수 있다.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 '천기'(* ... ,토 프로소폰 투 우라누)란 '하늘에 나타나는 자연적인 제현상'(the face of the heaven)을 의미한다.
시대의 표적(*, 세메이아 톤 카이론) - 여기서 시대를 뜻하는 '카이론'은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어떤 특정한 시점을 가리킨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유대 민족이 대망하던 메시야의 초림 내지는 재림의 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대'에 관한 비밀한 정보들을 여러가지 표적들(signs)을 통해 나타내 보이셨던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의 때에 대한 긴박한 선포(막 1:15), 다니엘이 예언한 70이레의 마지막 주간의 도래(단 9:1-27장), 유대 전방에 걸친 메시야 도래에 대한 기대감 고조(눅 2:26, 38), 예수께서 친히 구약 예언의 성취로 오신 자신을 증거하고 이적을 베푸신 사실(12:8,32;13:37;24:30;눅 17:22-35) 등을 통해 시대를 분별할만한 중요한 표적들을 제시하셨다. 한편 본문에서 '시대의 표적'(signs of the times)은 원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쓰여져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과 섭리 등을 나타내시기 위해 특별히 보여주시는 것으로 전자는 단순한 물리적 차원의 현상을, 후자는 그 이면에 신적(神的) 목적이 있는 영적 차원의 현상을 가리킨다. 특히 후자, 즉 표적이란 성육신하신 예수가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새시대의 증거를 가리킨다. 우리들의 세계는 영적 차원과 물질적 차원이 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물리적 차원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유능하고 박식하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으로는 결코 전인적인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미혹하지 말라
- 바울은 경고의 범위를 확장시켜서 어떤 종류의 계교(計巧) 귀기울이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단호히 거부할 것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강권하고 있다.
'미혹하지 말라'라는 헬라어는 '메 엑사파테세'(μη εξαπατηση)라고 합니다.
당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사람들의 영적인 계시와 말 그리고 편지 등을 통한 거짓된 가르침과 그외의 어떠한 것에라도 사로잡히는 것은 곧 기만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Morris).
μή
스트롱번호 3361
ἐξαπατάω
스트롱번호1818
뜻풀이부
1. 속이다, 롬 7:11, 살후 2:3.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속이다(롬 7:11, 고전 3:18), 미혹하다(롬 16:18, 고후 11:3, 살후 2:3).
배도하는 일
- 바울은 주의 날이 임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아직 일어나지 않은 두 가지 현상을 인용하여 증명하고 있다. 그 중에서 먼저 바울은 배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말세의 징조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다(마 24:11, 23, 24). 여기서 '배도'(*, 아포스타시아)는 정치적, 군사적인 반란을 의미하는 말로서(Bruce), 이것은 마지막 날이 이르렀을 때 하나님을 대항하는 악의 세력이 출현할 것을 의미한다(딤전 4:1-3;딤후 3:1-9;4:3,4).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
- 바울은 주의 날에 이르지 아니함을 증명하기 위한 또다른 한 가지 현상으로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지 아니하였음을 들고있다. 역사속에서 사단의 악한 일을 행한 자들이 수없이 많았기 때문에(요일 2:18) 불법의 사람이 누구인지 결정하기는 힘들다. 그러므로 이 인물을 어떤 특정한 인물과 동일시하기 보다는 마지막 날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Morris). 특히 '사람'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안드로포스'(*)는 나타날 적그리스도가 사단 자신이 아닌 사단의 일을 수행하는 인간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다(Lenski). 또한 바울은 '멸망의 아들'을 '불법의 사람'과 동의어로 언급했는데, 이는 '멸망되기로 예정한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호칭은 예수께서 가룟 유다를 지칭하실 때에도 사용하셨다(요 17:12). 이 말은 '불법의 사람'이 아무리 흉악한 계획과 성도를 괴롭히는 일을 행할지라도 종말에는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나타나기
- 바울은 앞서 주의 재림을 나타낸 동사(1:7)의 헬라어 '아포칼뤼프데'(*, '나타난다')를 여기서 다시 사용하고 있는데, 이 동사에 사용된 부정 과거 시제는 미래적 의미를 나타내는 구절에 사용되어 불법의 사람이 역사의 정해진 시간에 발생할 결정적인 사건과 연관되어 나타나게 될 것임을 보여준다(Constable). 이런 진술을 통해 바울은 주의 날이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확신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주의 날의 초기 단계를 특징짓는 이 두 가지 뚜렷한 현상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Thomas).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으려면(마태복음 24:3-5)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많은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와서 자신이 그리스도요 재림주요 목자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을 미혹하는 자들이 누구일까요?
1. 예수께서 물질의 축복을 준다 하고, 물질의 축복을 받으려면 먼저 드려야 한다고 하면서 미혹하는 부흥사들
2. 예수 이름으로 물질을 강요하는 목사들
3. 이 세상에 천국을 건설한다고 하는 거짓 선지자들
4. 사람으로서 자신이 그리스도요 재림주요 목자요 보혜사라고 현혹하는 자들
5. 예언 방언 신유의 역사를 하면서 성령의 역사로 미혹하는 자들
6. 교회를 장사하는 기업으로 착각하는 자들
7. 세상 윤리 도덕적인 사람의 교훈을 진리로 가장하여 가르치는 자들
8. 예수의 이름으로 복 복 받으라 하면서 말씀을 팔고 사는 자들
9. 율법과 진리를 분별 못하여, 율법을 진리라 하고, 진리를 율법이라 하는 자들
10. 교파 교리에 속해야 정통이라고 하는 자들(예수님은 교파에 속하지 않으심)
이들은 사람의 생각으로 예수를 믿고, 사람의 생각을 이 땅에 이루고자 하는 자들로서, 결국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세상 물질에 눈이 어두워 세상의 복을 준다는 소리에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 예수께서 물질의 복을 준다고 하셨나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그러면 이방인들이 구하는 물질도 채워 주시겠다고
진정 예수를 믿고...본받아 주님의 뒤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그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는 원인은?
진리이신 예수를 입으로는 믿는데, 마음으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리(예수) 위에 믿음을 세운 것은 말뿐이고,
실상은 율법(마귀) 위에 믿음을 세운 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있다가도 없어질 물질의 복을 받기 위함이 아니고,
내 영혼이 영생 구원을 받기 위함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7:20-23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목사) 노릇하고 귀신을 좇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는 자라도,
하나님의 뜻인 보혈의 공로인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행하지 못하면,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지금은 미혹하는 자들에게서 돌아서야할 때입니다.
지금의 이 시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는 자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 아무리 물질이 필요할지라도,
예수를 믿는 형제들이여 예수께서 친히 죽으심을 통해서 이루어 주신 보혈의 공로인 십자가의 도 곧 진리의 말씀을 믿고 따르시길 바랍니다.
왜 이 사람들이 위험합니까?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은 많은 사람들을 미혹해서 진리를 부인하게 만듭니다.
또한 교회의 질서가 이들로 인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광야에 있다고 해도 나가지 말고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땅에서 나오는 분이 아니라 약속하신 대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는 성도는 주님 오실 날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반드시 오신다는 사실을 믿고 늘 준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아시지요?
예수님께서는 한 시간도 깨어있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42)"
코로나 바이러스의 변종 "엠폭스"라는 질환이 또다시 사람들을 두렵게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라는 분명한 삶의 목표가 이미 결정되었기에 세상의 질고가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영과 혼과 육이 흠이 없이 보존될 수 있도록 주의하면서 날마다 천국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의 주실 화평
성경에 나오는 믿음 좋은 사람들이 다 심지가 견고한 사람들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욥에게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을 때 욥은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하면서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욥 2:10).
욥의 심지가 대단히 견고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욥기 2:9-10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기다렸던 엘리야도 심지가 견고한 사람이었습니다(왕상 17:2-7).
열왕기상 17:3-5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다니엘 3:18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네이버 사전을 보니까 다음과 같은 질문 글이 올라 있습니다.
‘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가 맞나요, 아니면 그냥 '갔어야 함에도'가 맞나요? '불구하고'를 넣으면 중의적 표현이 되는 건가요.
이 질문을 보고 제가 느낀 점은 질문하신 분이 군더더기 표현에 일종의 알레르기 증상을 보이는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글을 다루는 분이라면 겹말(같은 뜻이 겹친 말)이니 군더더기니 하는 말을 많이 들어 보았을 테고, 따라서 이런 표현을 피하려는 심리가 몸에 배게 마련이지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에도 불구하고’는 겹말이 아니라 서로 짝을 이루는 ‘짝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하나를 빼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서로 붙어 다녀야만 하는 말이지요.
그 이유를 알아보기 전에 위의 질문에 대한 국립국어원의 답변을 알아보죠(네이버 사전에 실림).
불구하다'는 ‘-에도/-음에도 불구하고’ 짜임으로 쓰이므로, '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와 같이 쓸 수 있습니다.
(용례: 몸살에도 불구하고 출근하다∥우리 삶의 이상도 끝내는 도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무지를 이용해 거짓말을 하고 또 속는 것이나 아닐까?≪이문열, 시대와의 불화≫)
답변이 너무 간단하죠. 그냥 ‘-에도 불구하고’를 쓸 수 있다고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불구하고’를 뺀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해서 국립국어원에서 출간한 <한국어문법 2>를 들추어 보았습니다. 조사, 어미 등의 용법을 해설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 ‘-에’ 항목을 찾으니까 ‘에게/에 관하여/에 대해/에서/에 비해’ 등 ‘에’ 뒤에 붙는 표현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에도(-ㅁ에도)’는 없더군요. 대신 ‘에도 불구하고’는 나와 있습니다. 이건 무엇을 뜻할까요. ‘에도’는 (거의) 독립해서 쓰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에도 불구하고’의 꼴로 쓰인다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는 흔히 ‘불구하고’를 생략한 채 ‘에도’만 씁니다. 다음 예문을 보시죠.
○그럼에도 정부가 주도적으로 긴장을 완화하는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그럼에도 이를 수습해야 할 김재철 사장은 시종일관 언제까지 파업이…
○과감한 결단으로 돌파해야 함에도 박 후보는 ‘봉합’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에 대한 죗값을 받아야 함에도 활개치고 있다.
신문에서 발췌한 것들입니다. ‘불구하고’를 생략했습니다. 사실 신문에서는 거의 관례처럼 ‘불구하고’를 생략합니다.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에도’만 쓰는 건 어법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다만 관행적으로 쓰일 뿐이지요. 따라서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한다면 ‘불구하고’를 넣는 게 좋습니다. 그 이유를 예문 한 개를 통해 알아보죠.
①소방관의 헌신적인 구조 활동에도 살아남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②소방관의 헌신적인 구조 활동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①, ②를 비교하면 ①은 확실히 어색합니다(물론 어색함을 느끼는 정도가 개인에 따라 다릅니다만..). 어색한 이유는 ‘활동에도’와 호응하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활동에도’는 부사어입니다. 부사어는 서술어와 결합(호응)하지요. 예컨대 ‘집에’라는 부사어는 ‘있다/없다’ 등의 ‘어찌하다’라는 서술어와 결합하고, ‘집에서’라는 부사어는 ‘나왔다’ 등의 ‘어찌한다’라는 서술어와 결합합니다. 본문의 경우 뒷부분에서 서술어를 찾아보니까 ‘살아남은’과 ‘얼마 되지 않는다’ 두 개가 있는데, 이 둘은 ‘활동에도’와 의미적으로 결합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즉 ‘활동에도’가 이들 서술어를 수식하지 않는 것이지요. 따라서 수식하는 말을 넣어주어야 자연스러운 흐름이 됩니다. ‘~에도 불구하고’가 관용어처럼 쓰이는 것은 ‘~에도’라는 부사어가 ‘불구하고’라는 서술어와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위의 신문 발췌 글 중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이에 대한 죗값을 받아야 함에도 활개치고 있다.’는 적절치 않습니다. ‘함에도~활개치다’의 호응도가 너무 약하거든요.
그렇다면 다음 예문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③그럼에도 정부는 이를 외면하고 있다.
위의 신문에서 발췌한 네 개 예문 중 먼저 제시한 두 개 예문과 같은 형태입니다. 이건 ‘그럼에도’가 ‘외면하다’와 결합할 듯 말 듯하기 때문에 자연스러움의 정도를 가늠하기가 간단치 않습니다. 다만 이 표현에서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럼에도’를 쓴 이유는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런 문제도 외면한 채’라는 말을 하고자 한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위의 ③은 ‘그런 문제도 생각하지 않고 정부는 이를 외면한다’라는 의미를 담고자 한 겁니다. 그렇다면 '그럼에도'가 '그런 문제도 생각하지 않고'라는 표현과 같은 기능을 해야 하는데, 이 '그럼에도'가 부정어 '생각하지 않고'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읽히지는 않겠지요. 따라서 ‘그럼에도’ 뒤에 응당 따라야 할 부정어가 빠져 있으므로 뭔가 이가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을 (모국어에 익숙한 사람은 자신도 모른 사이에) 가질 수 있습니다. 이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그럼에도'가 '외면하다'와 잘 호응하지는 않는 것 같다는 심리와도 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그럼에도’를 문장부사로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데도’ 등처럼 독립성을 지니면서 문장 전체를 꾸민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그럼에도’만 써도 될 듯한데, 견강부회라는 느낌이 들기는 합니다.
이상의 제 견해는 매우 사적입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제 견해와 달리 ‘불구하고’를 생략해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입니다.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서 검색한 결과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더군요.
‘불구하고’를 생략한 ‘그럼에도’는 가능한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얽매여 거리끼지 아니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불구하다’가 주로 ‘-에도/-음에도’ 또는 ‘-ㄴ데도’ 구성으로 쓰이는데, ‘불구하고’를 생략하여 표현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그럼에도’의 어미 ‘-ㅁ에도’가 어떤 일이 일어났으나 그에 기대되는 다른 사건이 발생하지 아니하였거나 기대와 다른 사건이 발생하였음을 나타내는 연결 어미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국립국어원 관계자의 말인가 싶을 정도로 설명에 두서가 없다는 느낌이 들지만, 어쨌든 '불구하고'를 빼도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빼도 되고 넣어도 되는, 즉 규범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문제이므로 글을 다루는 사람은 스스로 어느 게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지 판단하여 선택적으로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제 ‘-ㄴ데도’와 ‘-ㄴ데도 불구하고’의 차이를 알아보아야죠. 이는 ‘에도 불구하고’와 조금 다른 형태입니다. ‘에도’는 체언(명사)에 붙지만, ‘-데도’는 용언(동사, 형용사)에 붙습니다. 곧 '하는(=용언)데도'의 형태이지요. 이때의 '하는데도'는 중간 서술어가 아닌 문말 서술어와 곧바로 호응됩니다. 예를 보죠.
③-1 그런데도 정부는 이를 외면하고 있다.
문장 ③의 ‘그럼에도’를 ‘그런데도’로 바꾼 것입니다. 그 결과 ‘그런데도’가 문말 서술어 ‘외면한다’와 잘 맺어집니다. 따라서 ‘불구하고’가 없어도 됩니다. 아니, 없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국립국어원은 '그런데도 불구하고'라는 표현도 틀리지 않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사실 '그럼에도'는 '불구하고'를 수식하지만 ‘그런데도’는 ‘불구하고’를 수식하기 어렵습니다. ‘불구하고’는 ‘구애받지 않고’의 준말로 볼 수 있는데, ‘구애받지 않고’는 구애 받는 대상(명사)을 필요로 하는 말이거든요. 다시 말하면 '무엇을/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라는 형태로 쓰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자연스러운 결합관계가 되는 거지요. 그런데 ‘그럼에도’는 이 '무엇이/무엇에(도)'와는 격이 다릅니다. 즉 '그런데도'와 '불구하고'는 자연스러운 의미 결합 관계라고 보기 어렵지요. 그런 점에서 ‘불구하고’는 의미 중첩, 즉 겹말일 소지가 많습니다. 다만 아래 문장은 '불구하고'가 들어간 게 빠진 것 보다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자연스러워 보이는 건 이 표현을 익숙하게 들어 왔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이중피동인 '잊혀진 계절'에 익숙한 결과 '잊힌 계절'이나 '잊어진 계절'이 상대적으로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 싶습니다. 한편 국립국어원이 펴낸 <한국어문법2>에서는 이때의 ‘불구하고’가 강조 기능을 한다고 판단합니다.
결론적으로 ‘-ㄴ데도 불구하고’의 불구하고는 대부분 삭제해도 무방합니다. 다만 앞말을 강조하기 위해 넣었다면 일리는 있어 보입니다.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 바울에게서 나온 것처럼 보이는 가르침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전달되었던 것 같다(Thomas). 그 경로중의 첫번째는 예언이라는 영적 은사와 관련된 초자연적 계시에 의한 것이었다. 예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지지받고 있었고(살전 5:19,20) 주의 말씀으로 인정되기도 하였다(Bruce). 또한 그 경로 중 두번째는 '말'이었다.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구'(*)는 여기서 어떤 사람들을 통해 전달된 내용이나 교훈을 가리킨다. 그래서 영역 성경 중 NIV는 '전언'(report)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마치 바울과 직접 대화한 것처럼 하여 그 내용을 전하려 했음을 암시한다(Lightfoot). 즉 어떤 이들이 직접 바울의 입으로부터 나온 '재림'에 대한 말을 들었다는 소문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 경로중의 세번째는 '편지'(*, 에피스톨레스)였다. 즉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의 편지 내용을 잘못 이해했거나거짓 교사들의 위조 편지를 받고 오해하기도 했을 것이다(Morris).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이 앞서 열거한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에 미혹당했는지 혹은 세 가지 모두에다 미혹당했는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이 세 가지 모두를 단호히 부정하고 있다(Thomas).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 '이르렀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스테켄'(*, '존재하다')은 고대 동사로 임박성(臨迫性)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현존함을 나타내는 말이다(Thomas, Morris).
즉 '주의 날이 벌써 왔다'(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공동번역)는 의미이다.
이는 데살로니가 교인들 가운데 예수의 재림이 이미 임했다고 믿는 자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잘못된 신앙은 어떤 면에서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딤후 2:18) 사상과 일맥 상통한다. 이러한 사상을 가르치는 자들은 아마 오순절 설령 강림을 예수의 재림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주의날에 대한 자세한 가르침(살전 5:1)을 바울에게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된 주장에 심히 흔들리고 있었다.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거짓 풍문에 흔들리지 말 것을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다.
'동심하거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 투 노오스'는 문자적으로 배가 안전한 닻에서 떨어져 바람이나파도에 밀려 요동하는 것처럼 갑작스런 열광이나 황홀 때문에 균형을 잃은 상태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성급하고 경솔한 행동을 뜻한다.
즉 그들이 갑작스런 흥분에 사로잡힐 가능성에 대해 주의시킨 것이다(Morris).
한편 '두려워하거나'로 번역된 헬라어'메데 드로에이스다이'는 예수께서도 막 13:7에서 사용하셨던 동사로서 무서움에 사로잡힌 상태나 걱정하는 상태를 묘사한다(Morris).
보다 구체적으로 이 동사는 현재 계속되는 동요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로서 신경과민에서 비롯되는 흥분상태 즉 갑작스런 충격을 받은 후에 뒤따라오는 동요를 의미한다(Milligan).
이처럼 바울은 '주의 날이 이르렀다'는 잘못된 가르침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물리치고 확실한 진리 위에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말 것을 강권(强勸)하고 있다.
숙주
- 녹두에서 싹이 튼 것으로, 나물로 무쳐 먹거나 쌀국수, 라멘 등에 많이 넣어 먹는다.
숙주라는 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이 또한 설이 분분하지만, 대표적인 설에 따르면 숙주는 실존 인물의 이름입니다.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이자, 영의정까지 올랐던 '신숙주' 가 바로 '숙주'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먼저 당시의 왕가의 계보를 좀 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종대왕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왕위에 올라 '문종'이 된 '이향'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쉽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수양대군'이 된 '이유' 였습니다.
조선시대에서는 장남이 왕의 자리를 물려받는게 당연한 일이었지요.
그런데 문종(이향)이 몸이 많이 약해, 세종대왕은 아래와 같이 신하들에게 당부를 했다고 합니다.
세종대왕 : "나의 아들 문종이 몸이 약해 일찍 죽게되는 경우... 문종의 아들인 어린 단종을 잘 보필하도록 하라!"
신숙주 : "대왕의 뜻을 받들어 목숨을 걸고 잘 보필하겠나이다..."
성삼문과 신하들 : "이 목숨을 다하는 날까지 대왕의 뜻을 저버리지 않겠나이다..."
(세종대왕이 죽고, 장남이었던 '이향'이 왕위에 올라 '문종'이 된다...)
문종 : "왕이 되긴 하였는데, 내가 몸이 약해 일찍 죽게되면... 어린 아들 '홍위'가 걱정이 되는구나..."
(깊은 고민 끝에 믿을만한 신하들을 부른다...)
문종 : "너희들은 내가 죽고, 나의 장남 '이홍위'가 왕에 오르거든 성심을 다하여 보필하도록 하여라..."
신숙주 : "전하!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아직 하셔야 할 일이 많사옵니다. 어서 쾌차하시지요..."
성삼문 등 신하들 : "그렇사옵니다. 전하의 건강에 국운이 달려있나이다...어서 회복을 하셔야합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 문종은 죽고만다...)
(그리고 문종의 장남이었던 '이홍위'가 12세라는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라 단종이 된다)
단종 : "이제 내가 왕이니 모두 나를 따르라~~"
수양대군 : (어린 놈의 자식이 왕이 되다니... 분하다 분해...저 녀석만 없었어도...형을 이어 내가 왕이 될 수 있었는데...ㅠㅠ)
한명회(수양대군의 측근) : "대군! 대군께서는 왕이 되시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단종을 폐위시키고 이 나라를 직접 다스려주시지요!"
수양대군 : "아? 너 생각도 그랬어?? 아 이거참 이렇게들 나를 추켜세워주시니.... 내가 가만 있을 수가 없구려~"
신숙주 : "대군~! 저도 대군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는데 힘을 보태겠나이다~"
수양대군 : "어라? 신숙주? 넌 우리 아빠(세종)랑 형(문종)한테 단종을 잘 보필하겠다고 맹세했던 녀석 아니야?"
신숙주 : "신은 애초부터 대군의 비범함을 눈치채고 마음속으로 깊이 흠모해오고 있었나이다..."
수양대군 : "아~ 그랬어??? 캬캬캬! 오키오키! 그럼 너도 껴라! 똑바로 안 하면 뒤진다"
(어느 날 밤...)
단종 : 삼촌? 밤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수양대군 : "삼촌???!!! 너 정신 똑바로 안 차리니? 이제부턴 내가 왕이야~ 살려는 드릴께~"
단종 : "헉??!!!"
(단종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게 되고, 결국 15세의 어린 나이에 죽게된다...)
세조(수양대군) : "이제 내가 왕이니라~ 찍소리 하면 다 죽는다! 걍 알아서 모셔라!"
(단종 폐위 후,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해 성삼문을 비롯한 여섯명의 신하 모인다...이들을 두고 사육신이라고 한다.)
상삼문 등 사육신 : "우리의 왕은 정통성을 가진 단종 뿐이십니다! 우리 모두 세조(수양대군)을 폐위하고, 단종을 모셔옵시다!"
(이를 듣고 있던 신숙주....)
신숙주 : "세조 전하.... 사육신들이 모여 전하를 폐위시키고, 단종을 데려올라고 한다는데요?"
세조(수양대군) : "오 신숙주!! 너 배신력 쩐다!!! 오키 제네 다 죽여!!!"
(결국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모두 죽게된다)
세조(수양대군) : "아이구 귀염둥이 신숙주야~~ 너 영의정 시켜줄테니까 애교 좀 부려 보려무나~~"
신숙주 : "일 더하기 일은 귀요미~ 이렇게요? 꺄아악! 부끄럽사옵니다 전하~"
세조(수양대군) : " 숙주 이녀석~ 일도 잘하는게 앙탈지고 참 귀엽구나~ 이리 가까이 와 보거라~"
신숙주 : "꺄아악~~"
대략 이렇게 되었던 것이지요...(실제로 저런 대사를 쳤다는건 아니고욤...)
그런데 녹두에서 싹이 튼 '녹두 줄거리'인 '숙주'는 다음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1. 흐물흐물 잘 꺾인다.
2. 쉽게 상하고 잘 변한다
즉, 지조와 절개를 지키지 않은 신숙주와 공통점이 있다고 하여 녹두 줄거리에 "숙주"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만두속을 만들 때에도 각종재료와 숙주를 짓이겨서 넣기 때문에 변절자 신숙주를 짓이겨버리겠다는 의미에서 "숙주"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신숙주가 죽은게 1475년인지라, "숙주" 라는 말도 1475년 부터 생겨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든 유래나 어원이라는게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설인 관계로 분명한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변절자라는 신숙주의 오명은 600년이 가까이 되도록 사라지질 않는군요...
매우 저렴하여[1] 일상생활에서는 급식 등 대규모 인원의 식단에서 단골 식재료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제사상에도 올라간다. 흔히 숙주나물 무침으로 조리하는 경우가 많다.
동남아 음식은 숙주를 많이 사용한다. 라멘, 쌀국수, 팟타이 같은 면 요리에 곁들이거나 볶음 요리 식재료로 넣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콩나물이 주류지만 해외에서는 숙주나물을 더 많이 먹는다. 콩나물을 많이 먹는 나라는 거의 한국이 유일하다. 사실 한국에서도 조선시대까지의 나물 선호도는 숙주나물>팥나물>>콩나물 수준이었다고 한다.
돈만 있으면 무조건 숙주나물을 선택했고 콩나물은 가난한 사람들이 돈 없을 때나 먹는 음식 취급이었다고.
비린내와 식감 때문에 반드시 조리해서 먹는 콩나물과는 달리, 숙주나물은 비린내가 훨씬 덜하며 콩[2]이 부드럽고 줄기가 굵고 아삭아삭한 덕분에 국수나 밥 위에 올려 생으로 먹기 좋은 나물이다. 괜히 숙주나물이 콩나물보다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은 것이 아니다. 다만 잘못 보관하거나 잘못 삶으면 비린내[3]가 심하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비린내가 안 나게 잘 취급했더라도 특유의 향이 강하기 때문에 숙주가 재료로 들어가는 음식을 만들 때 계량을 잘못하면 음식에서 숙주나물 맛 밖에 안 날 수도 있다.
인체에 필요한 무기질과 비타민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 특히 숙취 해소에 도움이 되는 나물이다. 또한 열과 고혈압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4][5] 그리고 라면에 넣어 먹을 때 국물이 맑아지는 효과를 볼 수 있다. 단 여름에는 콩나물이나 시금치 같은 다른 채소들보다도 훨씬 빠르게 쉬어 버리니 취급에 주의해야 한다. 구입한 당일에 즉시 조리하는 것이 좋다. 모르고 쉰 숙주나물을 먹으면 구강과 칫솔에서 썩은 내가 날 것이다.
그나마 조금 더 오래 보관하는 방법은, 숙주나물을 구매하자마자 통에 넣고 찬 물을 숙주가 잠길 정도로 넣은 다음 밀봉해서 냉장고에 보관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놓고 물을 하루에 한 번 정도 갈아주면 며칠은 더 보관할 수 있다.
질긴 식감 때문에 어느 정도 삶아야 하는 콩나물과 달리, 숙주나물은 콩나물처럼 삶았다간 순식간에 흐물흐물하게 되므로 데쳐서 익히는 것이 좋다. 나물을 무칠 용도라면 1~2분 내의 짧은 시간동안 끓는 물에 데친 뒤 식히고, 라멘 등의 국물 요리에 넣는다면 식탁에 올리기 직전에 넣어야 아삭한 식감을 즐길 수 있다.
한국에서는 데친 다음 무쳐서 먹거나 육개장처럼 푹 끓이는 장국류의 재료로 넣는 것 외에는 그다지 조리법이 많지 않았고, 콩나물에 비해 훨씬 먹을 기회가 적은 식재료였다. 그러다 쌀국수나 라멘 등의 해외 음식을 접하기 쉬워지고 이때 고명으로 생 숙주를 올려 먹으면 식감이 매우 좋다는 것이 알려져 현재는 저렇게 뜨거운 국물 요리에 먹기 직전에 넣어 먹는 조리법도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 외에는 만두를 만들 때 속 재료에 삶은 숙주를 넣을 때가 많다. 평안도식 만두를 빚을 때에는 필수로 들어가는 정도.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위로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높은 데 거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이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나이다마는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을 사르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 모든 일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가 주만 의뢰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멸하사 그 모든 기억을 멸절하셨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고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나이다 스스로 영광을 얻으시고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셨나이다 여호와여 백성이 환난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구로하며 부르짖음같이 우리가 주의 앞에 이러하나이다 우리가 잉태하고 고통 하였을지라도 낳은 것은 바람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생산치 못하였나이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로다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가리우지 아니하리라
지금은
벌써 옛 이야기가 되었지만 월남전은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전쟁이었다고 많은 사람들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전방과 후방이 서로 뒤섞여 있었다는 점
둘째는 아군과 적군이 뒤섞였다는 점
전쟁이란
전방과 후방이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얼마나 진격하고 후퇴하였는가를 알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이 싸움의 승패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월남전은 전혀 전후방이 구별이 안 되었기 때문에 싸움의 진척상황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미군으로 하여금 싸울
의욕을 잃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아군과 적군이 뒤섞여 있어 사람들이 낮에는 아군이요 밤에는 베트콩으로 돌변하였다고 합니다.
때문에 참전하는 미군들은 불안하여 잠을 잘 수 없었고 계속적인 긴장의 고통으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전방이고, 누가 적군인지 알아야 싸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여기 저기에서 총소리가 들려 전방인가 하면 돌연 피리소리가 들리니
이들은 그만 견딜 수 없어서 한 사람 두 사람씩 아편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통계에 의하면 미군 100명 중 28명이
아편 환자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총을 들이대면서 "손들어"하면 빙글빙글 웃으면서 두 손을 번쩍 든다고 하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웠던 전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과연 당면한 고통과 위험을 이런 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까?
타조
사냥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타조란 날지 못하는 대신에 힘이 세고 다리가 매우 길어 그 뛰는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고
합니다.
타조는 사냥꾼들이 말을 타고 쫓아가면 사력을 다하여 빠른 속도로 도망을 칩니다.
도망을 하다가 힘이 빠지고 지치면
머리를 모래 속에 묻고 꼼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을 탄 사냥꾼들이 가까이 가서 사로 잡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답니다.
아마도 그
새는 보지 않으면 위험은 다가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이렇게 앞에 당면한 죽음을 내가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습니까?
성경 본문에는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보통
강한 표현을 할 때에는 똑같은 단어를 두 번 반복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도 '평강의 평강, 평화의 평화(peace of
peace. 샬롬 샬롬)에로 그를 인도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사람의 마음속에
평화가 없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분석하여 말합니다.
첫째는 원심(怨心), 복수심
이런 마음이 있는 한 절대로
평안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지나친 욕망(ambition)
셋째는 질투심
자신의 능력이나 재질은
생각하지 않고 다만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형편만을 보고 질투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평안할 수 없습니다.
넷째는 마음에 분노
다섯째는 교만
평강할 수 없는 요인 중에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칼빈도 마음속에 평화가 없는 요인을 한 마디로 교만 때문이라고 만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불신앙적 교만은 모든 번민과 고민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의 마음이 평화를 잃고 불안에
싸여 있다면 자신을 한 단계 낮추어서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그 불안과 고민은 절반으로 감소될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평화를 얻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 중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쟁을 통해 쟁취하는 방법입니다.
나의 평안을 해치고 있는 상대방을 죽이고 항복시킴으로써 얻는 이 방법은 너무나도 허무한
것입니다.
둘째는 타협입니다.
첫 번째의 싸움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해를 입을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싸움보다는 서로
타협함으로써 평화를 얻기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타협이 얼마나 불안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인지 현대 정치에서 흔히 보지
않습니까?
타협이란 어느 편이든지 50%는 양보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망각입니다.
이 방법은 불교적인 처세로서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맨 처음에 예를 든 월남전의 미군 병사나 사냥꾼에 쫓긴 타조와 같이
망각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안을 해소시켜 주거나 평안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평강은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노력에 의하여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가끔 인간은 소유에
의하여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평강이란 많이 소유했다는 것에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소유는 불안과 근심만을 더하여 줄
뿐입니다.
어느 지역의 땅값이 오르고 내림에 대하여 혹은 증권시세가 내렸다던가 하는 것을 고민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못 가진 자들이
아니라 가진 자들입니다.
다음과 같은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큰 부잣집에 불이 났습니다.
재물이 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며 안타까워합니다.
그 때 멀리서 이 불을 구경하고 있던 거지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 사람들 참 안됐습니다"라고 하니까, 아버지 거지는 "그것 봐라, 우리들은 불 타 없어질 집이 없어
염려가 없으니 얼마나 좋으냐? 그게 다 이 애비 덕인 줄 알아라"라고 큰소리치더랍니다.
욕심은
욕심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소유한 자는 점점 더 많은 소유를 원합니다.
더 많은 욕심을 부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두
우리에게 걱정과 불안만을 더하여 줄뿐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지식으로 평화를 얻고자 합니다.
전도서 1:18에서는 지식을 더하면
근심을 더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도 "아는 것이 병이다"[識字憂患]라고 하였습니다.
알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필요 없는 지식만을 많이 알아서 근심을 더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어떤 사람은 명예를 자랑합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일이 높은 지위나 명예가 있는 사람에게는 큰 문제가 되거나 복잡해지는 것을 우리가 경험해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소박하게 사는 것이 제일 평안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평강은 인간의 소유나 지식, 명예에 의해서 획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내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 주셔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에는 이것을 아주 시적으로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
하나님의 성문은 하나님이 열어 주셔야만 합니다.
옛날 성(城)을
생각해봅시다.
성 밖에는 도둑과 맹수들이 있는 아주 불안한 지역이었으나, 성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아주 평안하고 질서가 있었습니다.
이제 성 밖에 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주인이 그 문지기에게 명령을 내려 열어주라고 하여야만 그는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평안은 성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성문은 주인이 명령해야만 열립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샬롬'은 '화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힌 문이 열려야만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려야만 합니다.
사도행전 16:14에 '성령이 그 마음의 문을 열어 말씀을
듣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면 그 누구도 그 고통에서 구할 수가 없습니다.
간혹
우리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 만사를 왜곡하여 보거나 해석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이미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은
절대로 평강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 주셔야만 그는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로 왕도 하나님이
강팍하게 하여 결국은 사망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강팍하게 된 심령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실 때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의 문이 열릴 때에 우리는 비로소 구원함을 받고 평강의 평강으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신(信)을 잘 지키는 사람
믿음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충성을 다짐한 사람입니다.
믿음이란 정말로 귀한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다면 그것은 다른 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기록도 공약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는 이렇게 불신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금석(金石) 같은 맹약도, 두 원수가 함께
발표한 공동 성명도 어떤 때는 하루아침에 휴지가 되고 말기도 합니다. 그러니 누가 그 공약을 믿으며, 그 공동 성명을 믿을 수
있습니까? 온 세계가 이처럼 흔들리고 정부도 역시 이렇게 흔들입니다.
정말 현대는 스승도 제자도 믿을
수 없는 슬픈 시대입니다. 나라가 튼튼하기 위하여는 공신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가 평안하기 위해서는 서로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신(信)을 지키는 나라, 믿음을 지키는 사회와 개인에게는 평안이 있습니다.
둘째는 의(義)를 지키는 사람
의로운 사람은 이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의(義)보다도 더 강한 것은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이 의를 마치 공로처럼 내세우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언젠가 신문에 택시 기사가 손님이 택시에 놓고 간 몇십만 원을
파출소에 갖다 주었다는 기사가 큼직하게 실려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했다고 실려있는 그 기사를 보고 어쩐지 제
마음이 서글퍼지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돌려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결코 신문에 날 만큼 선한 일은
아닙니다. 자기 돈을 남에게 내놓았다면 마땅히 선행이 되겠지만 자기 돈이 아닌 남의 것을 돌려주었다는 것이 어찌 선행이
되겠습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선행이라고 불러야 하는 현대 사회의 풍조가 심히 가슴 아플 뿐입니다. 또 요즈음 한창 거리 질서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새치기하지 않기, 줄 똑바로 서기 운동 등은 사실 우리가 당연히 하여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일, 법적인 제재가 없어도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 이것이 바로 의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세계의 4대 성현 중의 한사람입니다.
저는 그 분에 대한 여러 가지 일화 중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가장 소중히 여깁니다. 그 분은 아무 죄도 없이 붙잡혀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백방으로 손을 썼으나 석방이 되지 않게 되자 소크라테스에게 탈옥할 것을 권고합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악법(惡法)도 법이다"라고 말하면서 사약을 마시고 죽습니다.
아무리 잘못된 법이라도 법이다라고 말하며 죽어간 그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위대함입니다.
우리는
요즈음 너무나 실리적이고 또한 의를 떠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의가 부족하고 의가 없기 때문에 현대인은 평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의는 매우 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사는 사람은 어떠한 일이 닥쳐와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심지(心志)가 견고한 사람
이 평강의 평강으로 지킴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심지가 굳은 사람이란 마음이 한결같은 사람으로서 변덕이 없는 사람입니다. 변덕스러운 사람은 가장 다루기 어려운 상대입니다.
그래서 공자님은 여자와 소인은 가장 다루기 어렵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여자와 소인은 변덕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변덕스러움이란 아직도 마음에 믿음이 없어 스스로 불안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침에는 이렇게 말하고 저녁에는 저렇게
말하는 변덕은 다른 사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요즈음 결혼 서약서에서 "부부의 대의를 지키겠느뇨?"라고 합니다만 20년 전에
사용했던 결혼 서약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이 모든
경우에도 아내를 사랑하겠느뇨?" 이 얼마나 귀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떠한 경우에 처할지라도 한결같이 사랑할 수 있는 견고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러한 변덕스러운 인간이 되지 않기 바랍니다.
신앙 생활도
역시 그렇습니다. 일단 믿겠다고 결심했으면 믿는 것이고 또 일단 교회 나오겠다고 작정했으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와야 합니다.
제가 주일날마다 하는 고민이 바로 그것입니다. 날씨가 어둠침침하거나 비라도 와서 땅이 질면 "오늘 교인이 얼마나 교회에
나올까?"하고 고민합니다. 지난주에도 시작할 때 교인들 수를 헤어보니 별로 많지 않아 "역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후 그런
대로 자리가 차츰 채워지기는 했습니다만 이래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가 나오겠다고 결심한 이상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아져야
하겠습니다.
한국 교회의 비참한 현실 중에 하나가 '학습'이란 제도입니다. 세례 받기 6개월 전에
행하는 이 제도는 세계에서 오직 한국에만 있습니다. 어느 나라이든지 오늘 예수를 믿겠다면 그날 즉시 세례를 줍니다. 그런데 왜
이런 제도가 한국 교회에서만은 필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한국 교인들이 너무나 변덕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믿겠다고 해놓고는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정말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아프리카 토인들을 예로
들어봅시다.
그들은 예수를 믿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들의 씨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몸담고 있던 사회와의 결별을 뜻하며 심지어는 자기 가족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새로운 사람이 처음 교회에 나왔을 때에는 소개하는 정도로 끝내지 않고 예배가 다
끝난 다음에 그를 중심에 놓고 빙빙 돌아가며 환영의 춤을 춥니다.
굉장히 성대하게 환영을 합니다.
그들은 일단 믿었다 하면
절대로 죽을 때까지 변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평강으로 인도되는 길입니다.
숙주나물의
명칭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옛날 이조 시대에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대신 왕위에 오를
때였습니다.
이 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성삼문(成三問) 이하 여러 집현전 학사들이 죽음으로써 항거하였지만 그들과 함께 동문
수학한 신숙주(申淑舟)만은 변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여름에 하루만 지나면 쉬어 못 먹게 되는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심지가 견고한 사람, 변절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평강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한 번 마음 먹은 것을 끝까지 지키는 그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은 평안을 허락하십니다.
평강은
승리의 열매입니다.
죄를 이기고 나약함을 이기고 교만과 게으름을 극복하고 변절을 이겨서 얻어지는 평강입니다.
이 평안은 이제
아무도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주님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의 평강으로 지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한결같고 변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평강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신(信)을
지키며 의(義)를 지키며 심지가 견고하여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자를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의 불신과 변절과
나약함을 용서하여 주옵시고, 새로운 은총을 더하여 굳게 믿음을 지킬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어떠한 손해를 지불하고라도 의에 서게
하시고, 심지가 견고해서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생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주시는 평안을 체험하고 주의 평안 안에 살고 주의
평강을 축복으로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평안과 위로가 없는 이 세대에서 주의 평강 안에 사는 축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현대인의 성경>
“여호와는 자기를 의지하고 마음이 한결같은 자에게 완전한 평안을
주신다.”
(You will keep in perfect peace him whose mind is steadfast,
because he trusts in you.)
그러므로 본문의 “심지가 견고한 자”는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마음과 생활이 한결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어느 날 북대서양을 항해하는 큰 기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날은 아주 거대한 태풍으로 폭풍우가 휘몰아쳤기에 아무리 큰 배라도
속수무책으로 거센 바람에 떠 밀려가는 중이었습니다.
근심스러운 승객들은 선장을 중심으로 갑판에 모여서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때 참으로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것은 배 옆으로 한 빙산이 폭풍을 거슬러 반대 방향으로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이 타고 있는 배는 수만 톤이 넘는 기선임에도 불구하고 세찬 바람에 가랑잎처럼 떠 밀려가는데 저 빙산은 어떻게
해서 태풍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승객들은 선장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선장님, 어째서 저 빙산은 이 엄청난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까?” 했더니 선장은 웃으면서 “저 빙산은 겉보기 하고는
다릅니다.
드러낸 부분은 약 1/10 정도이고 9/10는 물에 잠겨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8%가 드러나 있고 92%는
잠겨있습니다.
즉 빙산은 거의 전부가 바다 물에 잠겨있는 셈이지요.
그리고 바다 밑에는 거대한 해류가 흘러가고 있는데, 이 빙산은
바다 밑의 해류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면 위에 그 어떤 태풍이 불어와도 빙산의 흐름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빙산은 오직 바다 깊은 곳을 흐르는 해류의 흐름을 따를 뿐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은 결코 요동하거나 표류하지 않습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환경과 처지에서도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이 바로 “심지가 견고한 자”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어도 세상은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심지가 견고한 자”는 일편단심 그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평강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평강’, ‘평화’, ‘평안’, ‘화평’ 등은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주시는 “완전한 평화”란 무엇이겠습니까?
전쟁이 전혀 없이 평화스러울지라도 가난하여 굶주리면
평화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물질이 풍성할지라도 건강하지 못하면 역시 평화의 가치를 느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돈도
많고 몸도 건강하지만 인간관계, 종족관계에 해묵은 갈등과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원한이 남아 있다면 그 역시 평화는 보장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재산도 넉넉하고, 몸도 튼튼하고, 모든 인간관계도 원만하지만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하다면 그 평화는 전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하면 그 결국은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평화”란 인간의 힘이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완전한 평화”는 우리의
노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완전한 평화”는 한 마디로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
곧 모든 것이 완벽하고 행복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세상에는 “완전한 평화”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그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는 마음과
생활이 한결같은 사람’에게 “완전한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어린나이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왕궁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포로 가운데 왕족과 귀족
출신으로 신체적인 결함이 없고 외모가 반듯하며, 지능 지수가 높아 학습능력이 빠르고 뛰어나 장래가 촉망되는 소년들을 데려다가
바벨론 학문을 가르쳐 왕궁에서 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한”(단 1:3-4) 이른바 ‘포로 두뇌 집단 활용 정책’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바벨론 왕은 자기가 먹는 제일 좋은 음식을 그 포로들에게 먹이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이 지정한
궁중 음식을 일체 거절했습니다.
이유는 궁중의 모든 음식은 우상숭배의 제물로 바쳐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자신이 비록
포로로 끌려왔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결코 우상숭배로 인하여 자신을 더럽힐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단1:8)고 마음을 확정했습니다.”
그 결과 다니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론의 모든 인재들보다 지혜와 총명이 무려 10배나 뛰어난 인물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총명으로 왕의 꿈을 해석하는 것을 계기로 바벨론의 총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의 총리 지위는
느브갓네살 왕에 이어 그 아들 벨사살이 통치할 때에도, 그리고 그 다음 나라 이름이 페르시아로 바뀌고 다리오가 통치할 때에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다리오 왕 때에 다니엘을 시기하던 바벨론 신하들이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해 악법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부터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기도하는 자를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입니다.’(단 6:7)
그러나 다니엘은 이러한
악법이 시행된다는 것을 알고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어 둔 다락방에서 전에 항상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단 6:10)
다니엘 제거를 위해 악법을 만들었던 자들이 이 사실을 즉시 왕에게
고소했습니다.
왕은 불량한 신하들의 악법 제정의 음모를 모르고 어인(御印)을 찍어버렸기 때문에, 다니엘의 인물이 너무 아깝지만
악법도 법인지라 어쩔 수 없이 다니엘을 사자굴속에 던져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속에 던져진 다음 날 새벽에 왕이 급히 사자굴로 가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다니엘을 부르며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하나님이 너를 사자굴에서 구할 수 있었느냐?’ 그때 다니엘이 대답합니다.
‘왕이시여, 만수무강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사자들의 입을 막았으므로 저는 평안합니다. 이는 저나 왕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음이 증명된 것입니다.’ 왕은 너무 기뻐서 즉각 다니엘을 끌어내 살펴보니 어디 하나 상한데 없이 멀쩡했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6:23)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다리오 왕은 악법을 제정하여 다니엘을 고소했던 자들을 그 가족들과 함께 사자굴속에 던져 사자 밥에 되게 하고, 악법을 폐기하며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습니다.
“(단6:25-27) 원컨대 많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니라.
이렇게 해서 다니엘은 다리오 왕과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 시대에까지 형통했습니다.(단6:28) 이처럼 다니엘은 뜻을 정한 후에 죽을 때까지 그 뜻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참으로 심지가 견고한 사람이었습니다. 환경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고, 그리고 법이 바뀌고 왕조가 바뀌어도 심지가 견고한 믿음으로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산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 평강에 평강으로 지켜주신 것입니다.
3. 일평생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의 삶을 살았던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29:1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여기 “자기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완전한 평화”의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다니엘처럼 한결같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 제사장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축복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민6:24-27)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이 말씀을 보면,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모든 사람이 복을 받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참으로 행복하고,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최고의 복이 “완전한 평화”입니다. 재물과 건강의 복, 명예와 권력의 복을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믿음,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한결같은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완전한 평화”가 없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평화”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구하는 가정과 교회, 나라 민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완전한 평화”는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마치 해바라기가 항상 그 얼굴을 해를 향하고 있듯이, 항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난 주 사이판 임마누엘 교회에 가서 많은 은혜를 그곳 교인들과 함께 나누고 돌아왔습니다. 특히 이 목사님께서 임마누엘 교회를 개척할 당시 많은 어려웠던 일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은혜들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어느 정도 자립해가는 중 모 장로님 가정이 교회에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이 장로님이 교회에 등록하면서 이 목사님에게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이 목사님, 앞으로 장로의 뜻을 잘 맞추어 목회를 하시면 편하실 겁니다.” 이 목사님은 장로님의 이같은 말에 주저하지 않고 “아니, 장로님, 내가 하나님 한 분의 생각과 뜻을 맞추어 목회하기도 힘든 지경인데 장로님의 뜻까지 맞추어 목회하라구요?”라고 반문했답니다. 그랬더니 금방 깨닫고 생각을 바꾸더랍니다.
교회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담임목사는 교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면 모든 것들은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믿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후 그의 관심과 생각 속에는 오직 예수뿐이었습니다.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나는 이제부터 오직 예수만 알기로 작정했다”는 말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노라”(빌3:8) ‘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의 뜻을 깨닫고 사는 것이 가장 고상한 것이어서 그 동안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버렸노라.’는 삶의 고백입니다. 이어 바울은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갈6:17)”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흔적”은 ‘십자가의 흔적’을 말합니다.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경험했노라.’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11:23-27에서 ‘십자가의 흔적’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것이었는가를 구체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후11:23-27)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기 위해 눈물을 흘려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해 매를 맞는 듯한 아픔, 생명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겪어보신 일이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경험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같은 십자가의 흔적, 즉
수많은 아픔과 고통, 삶의 위기를 겪었지만 “심지가 견고한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서울의 한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한 경찰서장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경찰병원의 과장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일의
성격상 거의 좌천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일을 당하고 그분은 낙심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충성했는데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십니까?” 결국 이 분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목사님의 위로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났을 때 그분이 ‘좌천 감사헌금’ 100만원을 들고 목사님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목사님! 면목이 없습니다. 저번에 저는
좌천된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저를 살려주셨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분이 전에 있던 경찰서 지역에 탈옥수 신창원이
나타났는데, 그 신창원을 잡지 못해서 후임 경찰서장이 파면을 당하고 자신은 보직 변경으로 파면을 면한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좌천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바람이 불 때도 있고 잔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그 부는 바람 속에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는 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부는 바람에 흔들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흔들린다면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습니까?
아름답게 핀 꽃이 부는 바람에 가시에 찢겨지는 이유를 아십니까?
꽃의
향기를 멀리 멀리 날리기 위해서입니다.
가장 좋은 바이올린은 일반 식물이 자라기 힘든 수목 한계선 지점에서 온갖 비바람, 눈보라를
맞으며 자란 나무에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우황은 병든 소에서 뽑아내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과 형편 처지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심지가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원망 불평하다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처음부터 끝까지 심지가 견고한 믿음을 간직하므로 마침내 요단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심지가 견고한 자”가 되시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완전한 평화”,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는” 복을 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정
러시아가 망하던 날은 참으로 참혹했습니다.
코카서스의 기마병들이 모스크바를 향해 쳐들어올 때, 모스크바의 피난 대열에는
금은보화를 잔뜩 실은 마차와 처녀들, 사제들, 그리고 귀족과 같은 부자들이 100만 명 이상이나 있었습니다.
먹을 것은 없고
날씨는 추워 영하 40도를 오르내려, 그 와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얼어죽고 병들어 죽었습니다.
만삭이던 한 부인이 아기를 낳다가
아기와 함께 죽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처참한 제정 러시아 최후의 날은 왜 닥쳐왔습니까?
당시 러시아는 기독교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던 사회였는데도, 사제들은 축도를 할 때 손가락을 펴는 방법, 사제복의 색깔, 성당의 첨탑 위에 천사들이 몇 명이나 앉을 수
있는가 하는 것과 같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정 러시아 최후의 날은 가장
절망스럽게 빗나간 기독교가 빚어낸 결과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의 교인들 중에는 과연 소돔 성의 멸망을 유보했을 수도 있었던 의인 열 명이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라고 담담하게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 기도 :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재림은 초림과 비교할 때, 영광의 재림이심을 볼 수 있다.
1. 초림시는 구유에 오셨으나(눅 2:7), 재림시는 구름을 타고 오신다.(마 25:31-32, 디도 2:13, 계 1:8)
2. 초림시는 멸시함을 받았으나(이사야 53:3), 재림시는 기이히 여김을 얻을 것이다.(살후 1:10)
3. 초림시는 고난을 받았으나(벧전 1:11), 재림시는 영광을 받으신다.(벧전 1:11)
4. 초림시는 십자가를 지셨으나(요 19:17), 재림시는 면류관을 쓰신다.(계 19:12)
5. 초림시는 죄인 모양으로 오셨으나(이사야 53:9), 재림시는 왕으로 오신다.(계 17:14)
언제라도 이루어질 수 있는 재림
리처드 트렌지 대주교의 말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언제라도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이 불가능한 날이란 있을 수 없다."
* 참조 : 마 24:44, 막 13:33- 35
양떼를 모으시는 날
오늘날 하나님의 양떼들은 온 땅에 흩어져 있으나 장차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방으로부터 모으사 양식이 끊어지지 않으며, 들짐승들로부터 보호하는 안전한 처소로 불러들이실 것이다.
* 참조 : 겔 34:12, 사 60:7, 시 107:41, 벧전 5:2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청교도 시대에 영국에서 의회가 모였다.
여러 가지 나라 일을 의논하는데 그 때는 신앙이 좋은 영국 사회인지라 많은 사람이 가까운 장래에 예수께서 재림할 것이라는 말세관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는
국회의원들이 모여 국사를 의논하는 가운데 갑자기 천지가 변하고 하늘에 이상한 징조 같은 것이 나타났다.
이렇게 되니까 여기에
모였던 여러 국회의원들이 천지가 심상치 않으니까 이제 주님께서 재림할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이렇게 한가히 국회에 앉아 있기만 해서는
되겠는가 어서 폐회하고 준비를 하자고 했다.
그때
한 청교도 국회의원이 일어서서 말하기를 "만일 이 시간에 주님께서 임한다고 할 때도 우리는 그대로 앉아서 수천 수만 사람을
대신해서 우리의 의무를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더 기뻐하실 줄 압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 더
가까울수록 우리는 맡은 임무를 더 잘 하여야 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딤후 4:1-8).
재림
며칠 전 장로교 목사님 한 분이 찾아와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콩고물만 자꾸 먹여서 성도들을 배탈 나게 하는데, 목사님은 복음의 핵심을 강의해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하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의아했으나 새김질 할수록 의미심장한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혼의 영양소가 되는 중요한 생명의 떡을 골고루 먹여야 되는데, 어떤 분은 중요한 말씀은 안 전해 주고 부수적이고 세상적인 이야기만 많이 말해서 영적으로 탈나게 하는 수가 있다고 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예수님의 재림교리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의 재림을 믿지 않는다면 구원 받을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재림 설교는 영혼의 맥박을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재림설교만 밤낮 하면 영적으로 고혈압에 걸려서 잘못되기 쉽고 재림설교를 너무 안하면 영혼이 저혈압이 되어서 역시 잘못되기 쉽습니다.
성경에
재림에 대한 말씀이 318절이나 기록되어있고, 신약성경에는 25절중에 1절 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메시야의 구원사역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재림을 믿지 않는다면 신앙생활도 헛것이요, 목회도 헛것이 되고 맙니다.
어떤 여자가 남편이 해외 취업을
나갔는데 그 남편을 보고 싶어 하지도 않고 도리어 “안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결혼은 파산 직전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말 예수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다면 마땅히 신랑을 사모하고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오심에 대한 열망
평생을
경건한 삶으로 일관한 호나티우스 보나르는 아침에 해가 뜨면 창문을 열고 커텐을 젖히며 '주여! 이 아침에 오시겠습니까?'라고
말하고, 또 밤이면 창문을 닫으며 '주여! 이 밤에 오시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항상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살았다고 한다.
확실히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어떻게 말씀을 거스리며 생활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주님의 오심에 대한 열망이 사라져가고 있다 주님 오심이 가까운 징조인것 같다
오늘날에는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하면 주님이 지금 오시지 않았으면 더 좋겠다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라고 본다 . 그리고 그에대한 가장큰 이유가 어쩌면 재미를 보고있는 세속적인 삶 때문이 아닐까 ?
스코틀랜드 복음 전도자요 찬송가 작사자인 호라티우스 보나르는 무려 364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 많은 목사를 탄생시킨 경건한 집안에서 1808년 열한 명의 형제 중 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형제들, 그 중에서도 형 제임스의 다뜻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리고 형 제임스(John James), 동생 앤드류(Andrew)와 더불어 목사가 되었다. 그는 에딘버러 대학(Edinburgh University)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토마스 찰머스 밑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1833년 설교할 자격을 획득하였다. 그의 첫 번째 사역은 리스(Leith)에 있는 성 요한 교구에서 전도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사년 동안 전도 사역을 감당한 후에 그는 켈소(Kelso)에 있는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게 되었다.
소위 ‘스코틀랜드 교회 분열’(Great Disruption)이 일어날 당시에 보나르는 복음적인 목사들과 장로들의 편에 굳게 서 있었고, 1843년 5월 그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를 탈퇴하여 스코틀랜드 자유교회(Free Church of Scotland)를 설립하는데 참여하였다. 그는 1830년대와 40년대 스코틀랜드 여러 지역에 영향을 미쳤던 영적 운동에 크게 쓰임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찬송시를 작시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찬송시들은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온 것으로, 거의 600편에 달하는 등, 그는 스코틀랜드 찬송가 작시가 중 제 1인자로 꼽히고 있다. 한국 찬송가 공회에서 발행된 찬송가에도 보나르의 찬송시가 일곱편이나 실려 있다. 신학적인 진리들을 참으로 경건하게 표현한 그의 찬송시는 가사만 읽어 보아도 은혜가 될 만큼 참으로 뛰어나다. 특별히 보나르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주제는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과 인간의 교만함을 낮추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사역과 찬송 작시와 저술에 있어서 오직 한가지 목적을 품고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존귀를 드리는 일이었다.
호라티우스의 펜을 통하여 흘러 나온 것은 찬송시만이 아니었다. ‘눈물의 밤’(The Night of Weeping), '진리와 오류‘(Truth and Error), '인간 - 그의 신앙과 세계’(Man : His Religion and His World) 등의 저술 활동을 통해 그는 교회를 위협하는 시대적인 조류에 대해서 계속 경고했다. 그는 거짓과 오류에 저항해서 용기있게 투쟁했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도 결연한 자세를 초지일관 유지하였다. 경건서적을 저술하고, 잊혀진 고전들을 발굴하여 재출판하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는 스코틀랜드 국경 지방 켈소에서의 사역은 거의 이십년 동안 계속되었고, 1866년에 그는 에딘버러로 돌아가 찰머스 기념 채플(Chalmers Memorial Chapel)의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1887년에 이르러서 그의 건강은 악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그해 5월 31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프랭크 라우바하
많은
사람들에게 글을 읽도록 계몽하는데 크게 이바지한 프랭크 라우바하는 "세계 인구는 매 35년마다 배로 늘고, 아기의 출산율은
식량증산을 앞지르며, 배운 사람들은 날로 부해지나 무식한 사람들은 날로 더 굶주리고, 우리는 필요이상의 식량을 생산하나 저들은
생산을 할 줄 몰라 굶주리고 있다."고 했다.
세계 인구는 한달에 2% 증가율을 보이는데 식량 증산율은 1%에 불과하다.
이미
세계 6세 이하의 어린이70%가 영양실조에 걸렸고, 약 1만 2천명이 매일 굶어 죽고있다.
세계 인구의 1/3은 무식자이다.
우주과학은 첨단을 달리고 있으나 아직도 원시인 생활권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지구에는 많다.
세상이 이토록 불균형해지면
창조주께서 이 지구를 흔들어 높고 낮은 차이를 없애는 날이 올 것이다.
그 날이 가장 무서운 날이 될 것이다.
노아 육백 세...그 달 십 칠 일
- 이스라엘의 종교력은 훗날 출애굽 사건과
관련되어, 제정되었으니(출 12:1, 2) 이 당시는 단순히 민간력으로 계산된 것일 것이다. 아뭏든 이처럼 홍수가 일어난 날짜를
분명하게 명기한 것은 그사건이 분명한 역사적 사건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인데, 이는 오늘날 많은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큰 깊음의 샘들
- 여기서 '깊음'에 해당하는 '테홈'(*)은 원래 지하수의
근원을 가리킨다. 그런데 시 104:6; 욘2:5 에서는 '큰바다'를, 창 49:25에서는 '아래 원칙'을 가리키는 머리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절은 대홍수 때 폭우와 함께 해일(海溢), 지하수의 범람까지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터지며
- 본래 땅은 물로 뒤덮여 있었으나(1:20) 창조 둘째 날 궁창으로
말미암아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구분되었다(1:7). 이어 창조 세째 날 궁창 아래의 물로부터 물이 융기되어
나왔다(1:9). 따라서 지구는 물 가운데, 그리고 물 위에 이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대 히브인들은 이 모든 물들이 언제든지
땅을 덮치려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제어로 말미암아 그 경계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였다(욥 26:10; 시104:9). 그러나 마침내
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제어의 재갈을 풀어 주자 일시에 엄청난 양의 물이 위.아래 할 것 없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현상을
묘사한 말이다. 그리고 지질학적으로 이 말은 깊은 바다 내에서나 혹은 지각에서 급격한 변화 현상이 일어남을 가리킨다(Lange).
하늘의 창들이 열려
- 여기서 '하늘의 창'이란 말은 고대인들의 우주관을
반영하고 있는 말인데, 즉 그들은 대기권 너머 2층천에는 비, 우박, 눈등을 엄청나게 보관하고 있는 하늘 창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하늘 창문을 통해 지상에 내려진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대홍수는 이러한 하늘 창문들이 한꺼번에 열려진 것으로
생각했고 또 그렇게 묘사했다. 여하튼 본절은 댐의 열린 갑문을 통해 물이 갑자기 쏟아져 내리듯 엄청난 양의 비가 한꺼번에 땅에
쏟아진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늘과 지상의 모든 물을 모두 동원, 일시에 지구를 물로 덮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이다(사 5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 아들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이는 장래의 진노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전서 1:10)
여기서 ἔρχομαι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의미하며, 그리스도가 다시 올 것을 기다리는 신앙을 강조한다.
에르코마이(e[rcomai) 오다 come, 나타나다 appear.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엘코마이(Homer 이래)는 '오다, 가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인격과 무생물에 다같이 사용되며, 전치사나 문맥에 따라 특별한 관계나 여러가지 어감을 지니며, 자연적 사건, 마음의 상태, 편지를 받는 것, 소유물의 이전, 혹은 계약하는 것 등과 같은 다양한 언급을 한다.
에르코마이의 제의적 용법은 특별히 중요하다.
헬라인의 헬라적 경건은 신이 인간에게로 오는 것 또는 인간이 신에게로 가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엘데(오다)라고 부르는 기도의 권고(참조: 시 80:2[79:3])는 고대의 여러 기도문이나 여러 마술 파피루스에서 발견된다(참조: S. Schnoider). 그러나 형식적인 유사성을 제의하면 이교도 예배와 성경의 예배 사이에는 연관성이 전혀 없다.
2. 70인역본의 용법.
에르코마이는 70인역본에서 1,000회 이상 나오며, 35개의 히브리어 단어 및 어군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대부분 보(가다, 도착하다, 들어가다)를 번역한다.
에르코마이는 70인역본에서 주로 공간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제의적 기사에도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집에, 성소에, 예루살렘에 오는 것,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하는 것,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기를 구하는 기도, 하나님, 그의 말씀, 천사, 메시야, 시대, 구원의 날, 성령의 도래, 혹은 열방들이 하나님의 기업에로 옴에 대해 사용되었다.
시편, 욥기 등에서는 선한 것과 악한 것 모두, 특히 악한 것이 온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에르코마이는 신약성경에서 631회 나오며, 대부분 '오다, 가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르코마이는 인격체와 사물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때때로 오는 것은 나타나는 것, 공개적으로 나아오는 것, 현장에 오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때때로 결정적 사건들, 자연적 현상, 조건 등에 사용된다.
눅 14:31에서 '적대적 접근',
행 19:27에서 '평판이 나빠지는 것',
막 5:26에서 '더 악화되는 것'을 나타낸다.
눅 15:17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오는 것',
고후 12:1에서 '새로운 주제로 옮겨 가는 것'을 나타낸다.
(a) 공관복음의 용법.
① 에르코마이는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나타낸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오심과 관련하여 이 어군은 신현현의 핵심을 묘사해 준다. 예수님께서 1인칭으로 엘돈을 사용하신 말씀은 그의 메시야 의식에서 나온 것이며 그의 메시야 임무를 진술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천국을 선포하러(막 1:38),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막 2:17), 새로운 생활 질서를 세우러(마 5:17), 땅에 불을 붙이러(눅 12:49), 그리고 불화를 조장하러(마 10:34 이하) 오셨다.
메시야로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하러 왔으며(눅 19:10; 눅 9:56TR;마 18:11), 그의 책무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는 것이다(막 10:45; 마 20:28). 예수님이 그의 생의 사역을 수행하는 방법은 마 11:18 이하; 눅 7:33 이하에 묘사되어 있으며, 세례(침례) 요한의 금욕주의와는 다른 이 세상의 좋은 것에 개방적이었다. 막 1:24; 눅 4:34에서 보면 귀신들은 예수님의 오심이 자신들의 파멸도 포함한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의 오심을 비슷하게 묘사하였다.
② 에르코마이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나타낸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종종 큰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온다. 하지만 참으로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은 우리가 특정한 개인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마 8:2; 마 9:18; 마 14:33; 마 15:25; 막 5:33; 참조: 마 2:2), 제의적인 행동을 수반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행함으로,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기꺼이 내어 맡기는 것을 수반한다(눅 6:47; 눅 9:23; 눅 14:27). 만찬 비유와 혼인 잔치 비유는 하나님의 초대에 대한 응답으로 오는 것, 혹은 오지 않는 것을 묘사한다(눅 14:17 이하). 탕자의 비유에서 오는 것은 또한 잃음과 멀어짐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눅 15:20; 눅 15:30).
③ 에르코마이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낸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서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한다(마 6:10; 눅 11:2).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시에 백성들은 오시는 메시야와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에 대하여 찬양을 돌렸다(막 11:10). 이 나라는 권능으로 임한다(막 9:1). 미래의 이 나라는 영생을 의미하는 장차 올 세대와 동일하다(막 10:30; 눅 18:30). 미래의 그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올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나라 안에 그리고 그의 나라와 함께 오신다(마 16:28; 눅 23:42).
④ 에르코마이는 메시야가 오시는 것을 나타낸다. 공관복음에서는 구원 시대를 열 메시야는 엘리야가 되돌아 온 뒤에 오실 자로 언급한다(마 11:14; 마 17:10; 마 17:12; 마 27:49; 막 9:12 이하). 세례(침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실 그 분인지를 묻는다(마 11:3; 눅 7:19; 눅 7:2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에 그를 메시야로 환영하는 군중들은 예수님을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으로 환호하였다(마 21:9; 눅 19:38; 참조: 시 117:25 이하).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 중에(마 16:27; 마 25:31), 하늘의 구름을 타고(마 24:30; 마 26:64와 병행구) 오실 약속된 메시야이시다. 이를 위한 때는 언제인지 예정되어 있지 않으며(마 24:42 이하와 병행구) 돌연히 임할 것이다(막 13:36). 메시야라고 사칭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먼저 올 것이다(마 24:5).
⑤ 에르코마이는 하나님이 심판하러 오시는 것을 나타낸다.
마 21:40의 악한 농부의 비유에서 하나님은 그의 종들과 아들을 박해한 농부들에게 무서운 심판을 집행하러 오시는 포도원의 주인이시다.
눅 13:6-눅 13:7의 무화과 비유에서 하나님은 과원에 와서 그 열매를 구하나 얻지 못했을 때 무화과 나무를 없애버릴 것을 명령하시는 주인이시다.
마 25:19의 달란트의 비유에서 하나님은 그의 종들과 회계하러 오사 상벌하시는 주인이시다.
⑥ 에르코마이는 결단의 날이 오는 것을 나타낸다.
이와 관련해서 엘류손타이 헤메라이("날이 이르다")라는 공식 문구에 의해 소개되는 일련의 기사들을 찾아볼 수 있다(눅 17:22; 눅 21:6; 눅 23:29; 마 9:15).
눅 22:7의 "무교절일이 이른지라"에서 이 날은 결정적인 어떤 일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일어날 날이나 절기이다.
막 14:41의 "때가 왔도다"에서 이 때는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하는 시간이다.
눅 2:27에서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간" 시간은 하나님이 정한 시간임을 암시한다.
(b) 요한의 기록들의 용법.
① 에르코마이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오심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요한 문서들에서 광범위한 비유적 용법으로 사용되며 아울러 보다 강한 신학적인 내용을 지닌다. 1인칭으로 된 예수님의 "오심"에 관한 말씀들은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논쟁적인 측면을 지닌다.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요 7:28; 요 8:42). 사람은 예수님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요 8:14).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보내심에 근거하고 있다(요 8:42).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요 5:43) 빛을 주고(요 10:10) 세상을 구원하려고(요 12:47) 오신다. 비록 그가 심판하려고 오신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요 12:47), 그의 오심은 심판을 의미한다(요 9:39). 왜냐하면 빛이 올 때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빛을 거부하기 때문이다(요 3:19). 그는 진리를 증거하러 오셨으며(요 18:37),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그의 말씀에 귀기울일 것이다. 예수님의 메시야적 주장은 그의 출신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요 7:27)과 메시야가 아직 오시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요 4:25)에게 대항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메시야적 주장은 빛, 곧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러 왔고(요 1:7) 예수님을 장차 오실 분으로 인정하고(요 1:15), 세례(침례)-예수님의 현시(manifestation)로서 종말적 의미를 지니는 세례(침례)로써 그의 길을 예비하는(요 1:31) 세례(침례) 요한에 의하여 지지받는다. 그리스도보다 먼저 온 다른 사람들은 도적들이요 강도들이다(요 10:8).
② 엘코마이는 요한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오는 것을 나타낸다. 요한복음에서도 공관복음에서와 같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본다(요 3:26; 요 6:5; 요 10:41). 예수님은 사람들을 오라고 초청한다(요 7:37). 이 초청에 응답하는 사람들은 제자가 됨으로써(요 1:47) 특별한 의미에서 오는 것이다(요 6:35). 제자들도 초대를 할 수 있다(요 1:46). 예수님은 오는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으시고(요 6:37) 그들에게 생명을 줄 것이다(요 6:35).
그렇지만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오는 것에 대한 결정적 권위는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님께 오는 자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다(요 6:45). 다음 그 대답은 아버지께서 그를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도 올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 오는 것은 하나님의 영향을 받아 오는 것이다. 분명히 인간의 자유 결정은 하나님이 정한 결정이다. 요한의 기사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선택 사상이 놓여있는 것이다(요 6:65).
따라서 예수님께 오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는다. 신자들로서 그들은 이미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요 5:24). 그들은 "주(당신)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고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고백에 이른다(요 11:27). 예수님께 오는 사람은 성령에 의해 거듭난 사람이며, 그의 기원은 신비로운 것이다(요 3:8).
예수님께 오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죄를 계속 고집하는 결심에 근거하여 있다. 예수님께 오기를 거부하거나(요 5:40), 빛으로 오기를 거부하는 것은(요 3:20) 결국 영원한 구원에서 제외이다.
③ 엘코마이는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오시는 것을 나타낸다. 요한에게 있어서 엘코마이는 부활 현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요한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시는 세 가지 신비를 기록한다:
·부활하신 주님은 도마가 없는 제자들에게 오셨다(요 20:19). 못과 창에 찔린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는 것은 주님의 정체를 확인하고 인식하는데 도움이 된다.
·부활하신 주님은 도마가 함께 한 제자들에게 오셨다. 도마의 의심은 부활하신 주님의 영적 실체에 의해 완전히 사라졌다(요 20:26).
·부활하신 주님은 디베랴 바닷가에있는 제자들에게 오셨다. 그 때 음식은 주님의 임재로 신성하게 되었다(요 21:13).
④ 엘코마이는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낸다. 요 14:3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에 대해 증거하신다. 요 21:22 이하에서도 이에 관해 언급한다.
그렇지만 초림과 재림 사이에는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요 15:26; 요 14:28).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지상에 오신 것과 같이 보혜사는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의 공동체에 오신다. 보혜사의 오심은 예수님의 오심의 계속을 포함한다.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이 있는 곳으로 올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혜사 성령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올 수 있게 한다(요 7:34; 요 8:21-요 8:22; 요 13:33).
⑤ 엘코마이는 요한복음에서 '시간의 도래'를 나타낸다. 요한복음에서 이 단어는 그의 오심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특정한 시점에 관하여 말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들은 요한의 공식 문구 엘 케타이 호라('때가 온다')에 의해 소개된다. 요 4:21에서 호라(때)는 미래의 구원의 때이다. 그러나 메시야의 구원의 때는 이미 동텄다는 사실을 표현한다(요 4:21; 요 4:23). 이런 사실은 요 5:25의 부활의 때에도 적용된다.
이 점에 관해서 가장 의미심장한 진술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에 대한 언급이다. 그것은 요한에게 있어서 영화와 동시에 일어난다. 호라(때)는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이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지상 인간 역사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시간이다. 요한복음에서 이 종류에 대한 두 기사가 있다. 첫째는 예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고(요 7:30; 요 8:20), 둘째는 때가 왔다는 것이다(요 12:23; 요 13:1; 요 17:1).
요 16:2; 요 16:4에서는 제자들의 때에 대해 언급한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박해와 죽임이 있는 순교의 때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시대는 이미 주님 자신의 체포의 때와 더불어 시작되었다(요 16:32).
⑥ 요한 서신들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 언급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요일 4:2에서 "육으로" 오신 자이고, 요일 5:6에서 "물과 피로" 오신 자이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적그리스도가 오는 것은 마지막 때의 징조이다(요일 2:18).
⑦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 언급한다. 영원한 하나님은 이미 오셨으며, 지금 오시고 계시며, 장차 오실 분이다(계 1:4; 계 1:8; 계 4:8). 그리스도는 빨리 오실 것이다(계 2:5). 교회는 그의 오심을 위해 살아가며(계 22:17), 그것을 대망하는 기도 제목으로 삼는다(계 22:20). 그리스도는 도적같이(계 16:15) 구름을 타고(계 1:7) 오실 것이다. 그의 오심은 심판을 가져 올 것이나(계 6:17 등), 메시야적인 환난 후에(계 3:10) 그의 오심은 또한 기쁨도 초래할 것이다(계 19:7).
(c) 바울 서신의 용법.
① 바울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언급보다 그의 종말론적 오심에 관한 언급이 더 많다. 그의 초림에 관한 언급은 엡 2:17; 딤전 1:15에만 나온다.
②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한 종말론적 기사들은 초대교회 전통의 골격으로 되어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기대하며 살았다(고전 4:5). 바울의 아람어 간구는 독특하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주의 만찬에 대한 바울의 기사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언급을 포함한다(고전 11:26).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갑자기 밤에 도적과 같이 오실 것이다(살전 5:2). 그러나 그는 영광 중에 오실 것이다(살후 1:10). 구원의 때는 온전하는 것이 오는 때이며, 부분적인 것은 폐해지는 것이다(고전 13:10). 하나님의 진노는 불신자에게 임할 것이다(골 3:6; 엡 5:6). 그리스도께서 나타나기 전에 배교가 있고 죄의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살후 2:3).
③ 바울은 또한 계명(롬 7:9)과 믿음(갈 3:23)이 오는 것과 같은 의미심장한 사건들에 대해서도 "온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도로서 바울 자신은 복음의 축복을 가지고 온다(롬 15:29). 그리고 그는 고상한 말을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고전 2:1), 복음을 전파하러 온다(고후 2:12). 그는 온유함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며(고전 4:21), 근심으로 나아가거나 징벌하려고 나아가기를 원치 않는다(참조: 고후 2:1; 고후 2:3). 그리고 그는 비록 회개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만, 그가 나아갈 때에 낮춤을 당할 각오를하고 있다(고후 12:20-고후 12:21).
(d) 신약성경의 다른 기록들의 용법.
여기에서는 이 단어의 종말론적 용법이 지배적이다.
① 행 1:11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언급한다: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구원 시대의 옴(히 8:8), 기롱하는 자들이 옴(벧후 3:3), 성령의 도래는(행 19:6), 구원 시대가 이미 동텄음을 보여준다(참조: 행 2:17-18).
② 행 2:20에서 큰 심판의 날이 임하는 것을 언급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③ 히 8:8에서 구원의 시대가 오는 것을 언급한다: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히 10:37에서도 마찬가지다.
④ 행 19:6에서 구원의 시대가 이미 동텄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⑤ 벧후 3:3에서 마지막 날에 기롱하는 자들이 올 것을 말한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J. Schneider; W. Mundle).예수님이 가르치신 종말론의 특징은 하나님나라가 이미 와 있다는 "현재적" 종말론이다.
1.
마가복음의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치신 말씀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1:15)에서 "가까이
왔다"에는 엥기조(ἐγγίζω)의 완료형이 사용되었는데 그 뜻은 "가까이 왔다"come near 이다.
하나님나라가 어느 정도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신 것일까?
김창락 교수는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오는 비유를 사용하여 이 표현의 뜻을 풀이하였는데, 기차가 이미
승강장에는 들어왔지만 완전히 정차하지는 않은 것만큼이나 가까이 와 있는 하나님나라를 묘사하는 표현이라고 했다.
ἤγγικεν 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엥기켄 헤 바실레이아 투 쎄우. 막 1:15)이 전하는 임박성이 사실상 현재적 종말론을 표현한
말씀이지 미래적 종말론을 표현한 말씀이 아니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바로 앞의 "때가 찼다"는 선포도 이런 해석을 지지한다.
2. 예수님께서 마가복음이 전하는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나 "겨자씨" 비유(4:26-32) 마태복음이 전하는 누룩의 비유(13:33)와 숨겨진 것들(보물, 진주, 그물)에 관한 비유(13:44-48)와 같은 하나님나라 비유는 모두 지금 - 여기 현존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이다. 와 있지만 분명히 보이지는 않는다는 말씀이다.
3. 아래의 말씀들은 비유가 아닌 직설적인 표현으로 현재적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에게 왔다.(마 12:28)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을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눅 17:20-21)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나라는 지금-여기 존재하는 실체라는 점이 특징인데, 그런 현재적 종말론을 예수 이전에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독창적 가르침이고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이다.
그런데
주의기도에는 예수님의 현재적 종말론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간구가 있다.
"당신의 나라가 오게하소서"라는 두 번째 간구가
그것이다.
여기서 "오게 하소서"에는 에르코마이(ἔρχομαι)가 사용되었다.
에르코마이의 의미는 "오다"이다. 영어에서 come이나
go가 기초 동사이듯이, 헬라어의 에르코마이 역시 셀수 없이 많은 빈도로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기초 동사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나라를 오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기도를 가르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종말론은 현재적이라기 보다는 미래적인 것
아닌가?
예를 들어 묵시적 종말론은 미래적이다.
묵시적 종말론은 묵시문학운동과 묵시운동의 형태를
띠었다.
로마제국의 압제에 대한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저항이 묵시문학의 상상력에 근거한 묵시운동으로 발현된 것이다.
묵시문학의
특징은, 현재를 종말이 임박한 때로 인식하고, 악이 기승하고 우주적 재앙이 다가오는 위기감, 죽은자의 부활에 대한 기대, 모든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심판, 새로운 시대의 시작, 인자와 같은 구원자 혹은 심판자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목표로 하였던 회복의 종말론에서 구원의 지평이 역사 내적이었다면(다윗 왕조의 회복), 묵시문학에서는 구원의
지평이 역사를 벗어났다.
역사 안에는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돌연하고 급박한 하나님의 역사개입을 통하여 역사는 끝장날
것이라 기대하였다.
묵시문학운동의 중심에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다.
묵시문학운동은 엘리트 운동이었다.
이런 믿음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묵시운동이다.
이는 예언자 전통을 이어받아 종교적 기반으로 벌어진 운동으로 발현되었고, 더
나아가 사회적 혁명적 저항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묵시문학운동이 엘리트 기반이었다면 묵시운동은 민중 속에서 일어난 종말론적
저항운동이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기도하라 하셨을 때, 이 기도는 묵시적
종말론이 전제한 것일까?
그렇게 급하게 오시는 묵시적 하나님나라를 기대한 기도일까?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예수님께서 현재적 하나님나라에 대해 말씀하셨다 하더라도, 그 완성은 미래에 두셨기
때문에(예를 들어 막 13:32~37) 예수님께서 미래적 하나님나라를 기대하는 기도를 가르쳐주셨다 해도 그것이 예수님의 현재적
종말론과 충돌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기도가 미래적 종말론이 아니라 현재적 종말론에 대한 기도일 가능성도 있다.
에르코마이를 번역할 때 1번 의미가 아니라 2번 의미를 택하면 가능하다.
에르코마이의
1번 의미는 앞서 말했듯 "오다"이다. 2번 의미는 "나타나다"이다.
에르코마이는 지금 보이지 않던 것이 눈 앞에 나타나 보이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다"와 "나타나다"를 묵상해 보면 그 차이가 크지 않고 두 뜻이 교차하여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헬라어 렉시콘 BDAG는 에르코마이의 그런 뜻을 이렇게 표기하였다.
"of making an appearance,
come before the public, appear".
아래의 성경 구절들은 이런 뜻이 적용될 수 있는 용례들이다.
"오다"
대신 "나타나다"를 넣어도 의미가 손상되지 않고 어떤 경우는 더 분명해지기도 한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새들이 와서, 그것을 쪼아먹었다.(마 13:4)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눅 3:16)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에서 오셨는지 아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 . . 무리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 그들이 말하였다. "그리스도가 오신다고 해도, 이분이 하신 것보다 더 많은 표징을 행하시겠는가?"(요 7:27, 31)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요 14:23)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집니다.(고전 13:10)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장차 올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 . .
그런데 그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 우리가 이제는 개인교사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갈 3:23, 25)
이상의 용례를 통하여 에르코마이를 "오다"로 해석하지 않고 "나타나다"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 분명하여졌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고, 분명하지 않던 것이 분명해지는 것이 에르코마이가 가지고 있는 다른 한 가지 의미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에르코마이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라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슨 뜻일까?
먼저,
미래적-철저적 종말론의 전통에 서서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가르침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현재적
종말론의 연장선 상에서, 이미 와 있는 "하나님나라"가 더 분명히 나타나게 해달라는 기도일 수도 있다.
뜻풀이부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과 데살로니가후서 2장 1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두 구절은 각각 ἔρχομαι(에르코마이)와 παρουσία(파루시아)를 사용하여 예수의 재림을 언급한다.
두 단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고,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신학적 개념을 교육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ἔρχομαι는 헬라어로 "오다" 또는 "다가오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이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사용된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 아들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이는 장래의 진노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전서 1:10)
여기서 ἔρχομαι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의미하며, 그리스도가 다시 올 것을 기다리는 신앙을 강조한다.
παρουσία는 헬라어로 "현존" 또는 "도착"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사용된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너희에게 구하노니." (데살로니가후서 2:1)
여기서 παρουσία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며, 그의 현존과 함께 성도들이 모이는 것을 나타낸다.
두 단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언급하며,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나타낸다.
이는 초대 교회의 중요한 교리로,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며,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승리와 심판을 의미한다.
오늘날 재림 신앙을 교육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중요한 영적 훈련이 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미래의 사건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교육의 초점은 다음과 같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의 ἔρχομαι와 데살로니가후서 2장 1절의
παρουσία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측면을 강조한다.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신학적 개념을 교육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중요한 영적 성장의 기회를 제공한다.
재림 신앙을 통한 소망과 위로,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이러한 교육은 성경 공부, 현대적 적용, 경험적 학습을 통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테 헤메라 에케이네'는 보통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마지막 날'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사 2:11, 17).
성경에는 '그 날'의 시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직 '그 날'은 하나님께 속한 권한으로(마 24:36) 언급되며 예수께서는 '그 날'에 대한 징조들을 언급함으로써 성도들이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 말씀하셨다(마 24:3-51. 눅 21:10-36).
한편 '그 날'은 악행하던 자에게는 영원한 멸망의 날이 되겠지만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를 맞이할 기쁨과 영광의 날이 될것이다(7절. 2:1. 살전 4:17).
강림하사
- 그리스도의 강림은 종말론적 의미를 지니므로 바울은 강림하시는 예수의 모습에 대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살전 4:16)라는 묵시 문학적인 용어로 묘사하였다.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 '성도들에게서'와 '모든 믿는 자에게서'란 구절 앞에 헬라어 성경에는 '엔'(*, ...안에서)이라는 전치사가 삽입되어 있다.
이대로 직역하게 되면 성도들이 영광을 반사(反射)하는 자가 될 것임이 강조된다.
즉 그리스도는 자신이 택한 백성의 삶 속에 거하시면서 그들을 통하여 영광받으실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신다(시 89:7).
더욱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날의 영광이 너무도 찬란하고 놀랍기 때문에 기이히 여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행하신 일로 인하여 그날에 성도들은 그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갈이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받을 그 영광을 소망하라는 암시와 함께 그들이 당하는 핍박과 박해 속에서 낙심치 않고 믿음 위에 굳건히 설 수 있도록 확신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 있다.
종말은 언제 오는가?
하나는 마지막 날들(last days) - 에르코마이
다른 하나는 마지막 날(the Last Day) - 파루시아
마지막 날들(Last Days)는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 때까지의 모든 기간을 말합니다.
마지막 날(The Last Day)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말세지말)를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두번째 말한 것만을 말하기 때문에 혼돈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두번째 말한 말세지말은 언제인가?
마태복음
24:30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은 그 날을 꼭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교회사를 보면 여러 번 주님의 재림의 날을 예언하여 물의를 일으킨 소위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있었다.
최근 한국에서 물의를 일으킨 다미선교회의 시한부 종말론 주장을 기억하고 있다.
주님께서 아무도
모른다고 했는데 자기들은 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단이다.
이런
시한부 종말론은 인류역사 6000년이란 잘못된 역사관과 왜곡된 성경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종말이 언제 올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말인가?
초대교회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종말론에 관한 혼란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종말)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
5:1∼2)
그러나
바울의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종말에 관한 혼란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살후 2:2)
그러면서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나니”(살후 2:3)라고 예언하고 있다. 비가 올 때에는 먼저 바람이 불고, 구름이 끼고, 날씨가 후텁지근하듯이 종말에도 먼저 여러 징조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에는 네 가지 징조를 말하고 있다.
첫째는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날 것
둘째는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해
일어나고
셋째는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게 되고
넷째는 불법이 성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
그러나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될 때에야 끝이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마 24:14).
이솝우화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자와 당나귀, 여우 셋이서 힘을 합해 사냥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냥한 것을 나누는데, 사자가
당나귀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당나귀는 똑같이 셋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랬더니 사자는 공평하지 못하다 하면서
당나귀를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번에는 여우한테 나누어 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우는 대부분을 사자 몫으로 돌리고
자기는 쥐꼬리만큼 가졌습니다.
그때서야 사자는 흡족해 이제야 공평하게 되었구나 말합니다.
사자가 여우에게 묻습니다. "너는 어떻게
해서 이런 지혜를 생각해 냈느냐"
그러자 여우가 대답하기를, "어떻게는 뭘, 당나귀 죽는 것보고 생각해 냈지".
남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내게 일어날 일을 생각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를 보고 우리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준비하여야합니다.
다른 사람이 병에 들었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우리도 병들 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준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준비하셔야 합니다.
성경전체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귀중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 날' 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창세기 7장 11절입니다.
"노아가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 창들이 열려".
그 날은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13장 19절에서
예수님은 "그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었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그 날 역시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심판의 날인 그
날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본문 25절은 우리에게 "그 날이 가까이 오고 있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 날은 변할 수 없는 날입니다. 확실히 다가오는 날입니다. 누구나 겪어야 하는 날입니다. 심판의 날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겪어야 할 날입니다. 우리 주께서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 이 있음을 알고 그 날이 가까움을 볼 수록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모습은,
첫째로 모이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무디가 유력한 사람을 찾아가 교회에 나올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교회에 안 나가도 신앙생활을 잘 하면 되지
않느냐?" 면서 반문하더랍니다.
그 때 무디는 벽난로에서 이글이글 타고 있는 석탄 덩어리들을 집게로 꺼내 따로 따로 땅에
놓았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잘 타던 석탄 덩어리는 불이 점점 약해지더니 마침내 시커먼 석탄 덩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무디는
말하기를 "아무리 열심 있고 신앙이 좋아도 교회에서 떨어지면 이 꼴이 되고 맙니다. 혼자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자에게는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없습니다" 라고 했답니다. 아무리 독실한 신자라도 영적인 모임인 예배에 자주 빠지면 신앙이
사라집니다. 교회에 함께 모여 뜨겁게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리지 않고 세상으로 흩어져 나가면 신앙 생활이 나약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자라도 열심히 모임에 참석하면 뜨거워집니다. 그의 믿음이 날로 성장합니다.
본문의 '모이기를 힘쓰라' 는 말은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라는 뜻입니다.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모여야 합니다. 모이되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로마서 13장 11-14절의 말씀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열심히 모여 믿음을 굳게 하지 않으면 점점 더 타락해 가는 세상을 이길 수 없고, 썩어진 세속에 물들면 갑자기 재림하실 주의 날에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움을 느낄수록 더욱 더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함께 모여야 예배도 있고, 교제도 있습니다. 함께 모여야 붙들어줄 수도 있고,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함께 모여야 격려할 수도 있고, 강권할 수 있습니다. 모이는 습관은 하나님께서 권하신 좋은 습관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는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의 악한 습관이 나타난다고 본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습관은 모이기에 열심을 내는 습관입니까? 아니면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에 익숙하십니까? 부디 주의 날이 가까이 옴을 깨달아 모임에 힘을 쓰며 열심을 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믿는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
로마의 검투사인 델리마쿠스는 자신의 칼에 맞아 죽어 가는 상대의 모습을 보고 기뻐하던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신앙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 검투를 끝내야 되겠다" 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검투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잔악 무도한 검투를 끝낼지어다." 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비웃으며 그를 칼로 찌릅니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외칩니다. "다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잔악 무도한 검투를 끝낼지어다." 진지하게 그의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며 검투사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로마에서 검투 경기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믿음의 도리를 죽음을 무릅쓰고 굳게 잡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악한 전통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23절 하반절에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잡고 사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됩니다. 사단을 붙들면 멸망하게 됩니다. 죄를 붙들고 거짓을 붙들면 그 댓가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굳게 잡아야 할 것은 믿음의 도리입니다. 거기에 영생과 구원, 승리와 성공, 사명과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우리는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고 살아야 합니다. '믿는 도리의 소망' 이란 헬라 원어는 '호몰로기아' 로써 '함께 입으로 고백하다' 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일 수록 신앙을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입술의 고백이 하나님을 향해 믿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4장 28절 말씀에“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믿음을 고백하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굳게 잡지 못하고 불평하며 원망하던 사람들은 광야에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확실한 믿음을 잡고 나아갈 때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나를 지키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아 하나님의 뜻인 소망이 있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새 가운데 서로 잘 돌보는 새는 기러기라고 합니다. 기러기는 그리 강한 새가 아닙니다. 날개도 약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러기는 새 가운데 가장 멀리 날아가는 새라고 합니다. 일년에 한 번 오고 한 번 가기에 장거리를 두 번 이동을 하는 셈입니다. 기러기는 날아갈 때에 언제나 V자 형으로 날아갑니다. 그 까닭은 먼저 날아가는 새가 공기를 뚫어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의 새는 그만큼 쉽게 날아 갈 수가 있습니다. 조류학자들에 의해 기러기의 대형처럼 날아가는 것이 혼자 날 때보다 71%나 더 많이 날 수 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앞서가는 기러기가 힘이 들어 지치면 교대하면서 날아갑니다. 병든 기러기가 있으면 버리고 떠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몇 마리의 기러기가 남아서 치료를 한 후 같이 날아간다는 것입니다. 미물인 새들도 이러할진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은 마땅히 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특히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서로 돌아보며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해야 합니다
사람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나이가 들면 들수록 위기가 오면 올수록 더욱 자신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의 사람은 그 날이
가까이 올수록 남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 갈 날이 가까이 오면 올수록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의욕이 솟아나도록
북돋워 주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신학자인 토니 캄플로는 "사람이 죽을 때는 못다 이룬 업적을 후회하지 않는다. 바르게 살지
못한 것과, 바르게 사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죽는다." 라고 말합니다.
본문 24절“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한
식구들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며, 서로 칭찬하며,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그리해야 더욱 힘을 얻어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다른 이의 약점만을 캐거나 헐뜯으면 사랑의 관계는 깨어지고 맙니다. 교회는 남의 약점을 들추어내어 즐기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서로 격려 받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선행으로 세워주어야 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천 화백은 이 그림이 자기가 그린 다른 작품을 흉내 낸 것이고, 붓질이나 제작연도를 표기하는 방식이 자기와 다르며, 자기가 한 번도 그려본 적 없는 흰 꽃이 등장한 점 등을 지적했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쪽에서는 그림에 대한 현미경 분석과 안료에 대한 화학적 실험, 이 그림이 국립현대미술관에 들어오게 된 경위
등을 내세워 진품임을 주장했다.
이 그림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소장했던 것인데, 그가 박 대통령을 저격하고
체포된 뒤 국가 재산이 되어 1991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 들어왔던 것이다.
하나의 그림을 놓고 미술가 자신은 위작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를 소장하고 있는 국가 기관은 위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한국화랑협회 감정위원회가 개입해서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 해 4월 이 그림이 천 화백이 그린
진품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천
화백은 작가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은 미술관과 협회 측의 태도에 큰 충격을 받았다.
결국 천 화백은 예술원 회원 자격을
반납하고 절필선언을 한 뒤 큰 딸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떠났고, 1998년 말에 자신의 작품 93점과 화구 등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이 사건은 1999년 7월에 이 그림을 자신이 그렸다는 위조범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고서화 위조사건으로
구속된 위조범 권모 씨가 "화랑을 하는 친구에게서 돈을 조금 받고 달력 그림 몇 개를 섞어서 이 그림을 만들었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그의 폭로는 앞선 감정 결과를 뒤집을 만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면 기존 입장을 고수했고, 검찰에서는 미술품 위조사건의 공소시효가 3년이라는 이유로 수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건은 다시 한 번 유야무야되었다.
(이연식의 '위작과 도난의 미술사' 중에서)
주여
하나님의 공의가 온 세상을 흔들고
정의로은 물결이 세상을 뒤덮는
은혜로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복을 내려 주옵소서!
우리와 함께
- 여기서 '우리'는 바울 자신과 실라와 디모데를 가리킨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극심한 환난과 핍박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과 그외 동역자들도 그들과 같은 고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고후 11:23-28). 그뿐 아니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일체감을 나타냄으로써 그들이 환난이나 안식에 동참할 수있음을 강조한다.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 '안식'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네신'(*)으로 본래 팽팽하게 당긴 활의 줄을 원래의 상태로 느슨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역경에서 해방되다', '수고를 그치고 쉬다'는 휴식(休息)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지금 바울은 그들이 믿음 때문에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그 고난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결국 참된 안식과 평안을 얻게 되는 과정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다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다(Calvin). '저의 능력의 천사들'이란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있는 존재들로서 그분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보내진 존재들이다(마 13:49;24:31;살전 4:16). 성경은 종말에 대한 묘사를 할 때 종종 심판과 천사들을 결부시켜 언급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날에(10절) 천사들과 함께 오셔서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마 16:27,Gloag).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 여기서 '때'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때, 곧 대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위엄 가운데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것이다. '하늘'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우라누'(*)로 여기에서는 단순히 문자적으로 '공중'(air, 행 11:6), '하늘'(sky, 계 6:14)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heaven,마 5:16;계 3:12) 곧 '하나님의 보좌'(마23:22;막 6:41)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그곳에서 이땅에 오셨고(요 3:13), 다시 그곳으로 승천하셨으며(벧전 3:22), 또 다시 재림하실때에 천사들을 대동하고 그곳에서 내려오실 것이다(마 24:30). 이것은 심판의 확실성을 보여주고 있다(官村武天). 한편 '나타나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립세이(*)는 일반적으로 '계시', '폭로', '드러냄'의 뜻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서는 종말론적 의미로서(롬8:19;고전 1:7) 마지막 날에 감추었던 것이 숨김없이 드러나게 됨을 가리킨다(TDNT). 즉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는 비밀에 싸였던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실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숨김없이 밝혀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또한 그가 '불꽃 중에' 오신다고 진술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주권과 영광과 위엄을 나타낸다(출 3:2;사 66:15;계1:13-15).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
- 여기서부터는 '화 있을진저'로 시작해서 여섯가지의 화(禍)가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에게 선포되는데, 이 문구에는 '저주' 또는 '복수'의 의미라기보다는 '탄식'의 뜻이 들어 있다(10:13).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장(死藏)시킨 채 그 형식에만 집착함으로써 성스러운 하나님의 율법을 박재화시킨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를 신랄하게 바판하고 있다. 본래 구약의 율법은 곡식, 포도주, 기름과 같은 주요 농산물과 가축에 대한 십일조를 규정하고 있다(레 27:30-33;신 14:22-29). 물론 여기에는 땅 위에서 소출하는 모든 것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랍비적 규범은 십일조를 아주 사소한 것까지 세분화하였는데, 심지어는 땔 나무까지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요구한다(Mishna). 이런 것 자체가 벌써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와 맹목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는 바리새인들이 바친 십일조의 세 항목이 열거되고 있는데, '박하'(*, 헤두오스몬)는 정원에서 재배하는 식물로 그 향기가 좋으며, '운향'(*, 폐가논)은 회록색의 잎과 노란 꽃을 가진 식물이다.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23:23) '회향'(*, 아네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논드 향료(anethum graveolens)를 가리킨다. 마지막 항목인 '채소'(*, 라카논)는 어떤 특정한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총칭으로서의 채소를 뜻한다. 마태는 누가와 달리 특정한 종류인 '근채'(*, 퀴미논)로 기록하고 있다.
공의와...사랑은 버리는도다
- 형식적 율법을 준수함에 있어서는 규정 이상으로 열성적이며 철저했던 바리새인들은 정작 가장 중요한 율법의 정신을 탈색시켜 버렸다. 여기서 '공의'(*, 크리시스)는 '정의', '의로움'의 뜻으로 사회 정의와 관련된 말이며(Easton),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불의에 억압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사랑'(*, 아가페)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보이신 사랑'에 근거하여 마음과 목숨과 힘, 그리고 뜻을 다해 하가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가리킨다(10:27).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공의와 사랑을 버렸던 것이다. '버리다'(*, 파레르케스데)는 '비켜나다', '간과하다'의 의미로 이들의 행위가 중요한 핵심을 비켜가면서 형식만을 추구하는 것이었음을 가리킨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 예수게서 그들의 철저한 율법 준수를 부정하신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철저하게 형식을 지키는 만큼 그 율법의 정신에 대해서도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자가 간과되거나 무시된 채 전자만이 지켜질 때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혹자는 정결법의 규절을 파기하신 예수께서(38절) 율법의 준수를 말하는 것이 모순이 아닌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예수를 맹목적 율법 파괴자로 오해하는 데서 오는 그릇된 문제 제기이다. 왜냐하면 (1)예수께서는 율법 자체를 파괴하거나 반대하시지 않고(16:17), (2)결코 예수는 정신이 결여된 율법 준수를 인정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3)을 법이 규정하지도 않은 유전적(遺傳的) 규범을 거부하는 것과 정당한 목적을 가진 십일조를 인정하는 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공의
어느 농부가 신문사 편집인에게 원고를 보냈습니다. “나는 일요일에 밭을 갈았습니다. 일요일에 씨를
뿌리고, 일요일에 거름을 주고, 일요일에 추수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요일에 추수한 곡식을 집으로 실고 왔습니다. 내 이웃
농부는 일요일에 교회를 갔어요.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나온 지 아십니까? 9월에 거둔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이웃에 사는 어느
농부보다도 많았습니다.” 편집인은 이 글을 싣어 신문을 발행했습니다. 그러나 그 글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습니다. “하나님은
9월에 모든 것을 결산하지는 않으십니다.”
이 글을 쓴 농부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참 모습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공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상대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더는 하나님의 공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통해 하나님의 우주적인 공정성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이 세상을 완전히 의롭게 다스리시며 모든 사람에게 의무를 부여하신다.” 공의가 때로는 보상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벌로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이고, 후자는 죄를 짓고 불순종하는 자에게
내리는 벌입니다. 그러나 상을 주시든 벌을 내리시든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일은 언제나 공정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온전히 거룩하시고 전능하시다는 점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속성은 그가 온전히
공의로우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로서 그는 항상 무엇이 옳은지 아시는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전능하심은
하나님께서 옳은 일을 행하실 능력이 있음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성경 여러 곳에 나옵니다. 다음은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이사야 45:21) 모세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고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했습니다. (신명기 32:4) 스바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가운데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스바냐 3:5)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장차 죄를 지을지도 모르는 인간을 만드셨나요?” 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정말로 사람을 영원한 지옥에 보낼 수 있나요?” 그런가 하면 개인적으로 큰 불행을
당한 사람들 가운데는 그들의 불행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당한 불행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어요.”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건과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 가운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신명기 29:29)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잘못은 아닙니다. 사람은 그 지식과 지혜에 한계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미적분학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사야 55:8-9) 다음은 바울의 고백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리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로마서 11:33-34) 사람의 마음에 비해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높으신지는 다음 구절에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린도전서 1:25) 그러므로 넘어지기 쉽고 유한한
우리가 전지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공의에 의문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지식과 지혜가 부족함 때문이지 하나님의 책임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점을 바울이 자신의 “육체의 가시”라고 불렀던 고통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드렸던 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면 하나님의 종으로서 틀림없이 더 효과적으로 사역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달랐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고린도후서
12:9) 바울은 자기가 남의 병은 고치면서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하는 것을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가 그로 하여금 “너무 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음을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2:7)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먼저 순종할 때 하나님의 공의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때로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공의로우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어 '체데크'(qd,x,
tsedeq ; 남성형), '
체다-카-'(hq;d;x, tsedaqah ;여성형) 남성형 117회, 여성형 155회 씌어져 있다.
공평, 정직, 의, 올바름, 의로움, 공정, 번영, 균등한, 전적으로 올바른), 공정한(-함), 의로운, 의롭게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히브리어 '미슈파-트'(fP;v]mi, mishpat)이것은 '재판, 판결' 등도 의미하는 넓은 의미의 말로서, '체데크', '체다-카-'보다 윤리적인 의미가 강한데 대해, '미슈파-트'는 법적 의미가 우월하다.
그리스어 '디카이오-마'(dikaivwma, dikaioma), '디카이오-스'(dikaivwsi",
dikaiosis)'디카이오-마'(dikaivwma, dikaioma)가 10회, '디카이오-시스'(dikaivwsi",
dikaiosis)가 2회 씌어져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구약에 있어서의 '의'의 개념의 연장으로 이해되는 것으로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또는 이에 기초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한(예컨대 '사랑'과 같다) 관계 개념이다. 이 말은 바울서신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신학적 개념인데, 기타의 문서에 있어서는 비교적 나오는 수도 적고(34회), 당시의 유대교의 사상적 공유재산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2. '의, 공의, 정의'의 개념(槪念)
1) 의(義)[히] qd,x,(tsedeq), hq;d;x](tsedaqah) [그] dikaiosuvnh(dikaiosune) [라] Justisia [영] Righteousness, Justice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상태(출15:26;시119:142;마6:33;계22:11). 일반적인 '의'는 윤리적인 성질에, 윤리적인
표준에의 일치에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표준은 사회 또는 집단의 규범에 의존하며 상대적이다. 하지만, 성경적인 용법에서는 그
표준은 '하나님의 의'이지, 사회의 규범은 아니다(시85:11;빌3:9;계22:11).
'의'(義)는 제1의적으로
'하나님의 의'이고, 하나님이 그 자신의 거룩하심에 적합하도록 인간에게 요구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신앙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고, 이 행위의 결과, 즉, 이 의를 이웃 사람에의 사랑에 있어서 완성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롬3:25;행13:38;롬4:3)."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시119:142)."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2) 공의(公義) [히] fP;v]mi(mishpat) [그] dikaiosuvnh(dikaiosune) [영] Justice(Right-)
공명정대하고
의로움. 하나님의 속성의 하나(신16:20;시106:3;창18:25;요7:24;눅11:42). '하나님의 공의'란, 그 절대
공정하심과 정의로우심을 뜻하고, 하나님은 이것을 사랑하신다(시37:28,99:4;사61:8,62:2).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으로(미6:8) 치리자는 공의에 따라야 하고(잠29:4;렘5:1;합1:4;습3:5),사람마다 이것을 행할
것이다(렘7:5;암5:15;미6:8).
'공의'로 번역된 원어는 수종이나 되는데, 같은 원어가 거의 '의'로도 번역되어
있다. 공의로 역된 히브리어 중 주요한 말은 명사 [미슈파-트]로서, 이것은 [심판하다]는 동사[샤-파트
fP'v,;(shaphat)]에서 파생된 것인데, 이 미슈파-트는 인간 상호의 관계를 정하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스어 명사로는 '디카이오수네-'가 '공의', 또는 '의'로 번역되어 있는데, 신약에 91회 씌어져 있는 말로서, 다만
하나님의 '의'에만 씌어져 있지 않고, 경건한 행위에 대해서도 씌어져 있다(마55:20).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06:3)."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요7:24).
3) 정의(正義)[히] qd,x,(tsedeq), hq;d;x](tsedaqah) [그] dikaiosuvnh(dikaiosune) [영] righteousness, justice
올바른
도리(렘33:15;암5:24;시33:5). 이 용어는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서로 연결된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①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하는 말 ② 죄에 의하여 잃어진 인간의 완전성과 의를 가리키기 위하여 ③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정당한 관계."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
[질문] 요즘 공의라는 말이 제 마음에 닿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공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세요? Righteousness of God이라는 의미인가요?
[답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다룰 내용이 아주 많으나 간단하게 알기 쉽게 답변 드리겠습니다. 우선 공의(公義)라는 단어는 공평(公平)과 정의(正義)를 하나로 줄인 말입니다. 인간사회에 불공평하고 부정한 일들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신분과 위치에 따라 불이익 차별을 당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인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당연히 그러하며 또 그런 방향으로 그분이 인간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을 그분의 공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에 찌든 인간들이 사는 이 땅에선 완전한 공의가 실현되기는 불가능합니다. 세상에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은 고통당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생기며 날이 갈수록 즉, 인간이 죄로 타락할수록 던 빈번해집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떨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통치에 잘못이 있거나 세상을 방임한 탓이 아닙니다. 인간끼리 각기 어리석음과 오류와 죄를 품은 채 무한 시기 경쟁함으로써 파생되는 필연적 결과일 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는커녕 인간사회에 자기들이 제정한 법과 제도와 관습마저 제대로 지키지 못해 인간적인 공의마저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모든 사람이 그분의 계명을 온전히 실천할 때에만 가능해집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에 세상이 타락해진 것은 제사장 나라로서 하나님의 공의의 본을 보이고 불신세상을 이끌 책임이 있는 이스라엘의 잘못이 더 큽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최후심판으로라도 당신의 공의를 당신께서 바로 세웁니다. 작금 한국이나 미국의 사태가 아주 혼돈스러워 하나님의 공의가 땅에 떨어져 가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의 구원(인간에겐 긍정적 결말)과 심판(부정적 결말)이라는 양 측면이 다 작용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이번을 계기로 사회적으로 이전보다 부정 없이 깨끗케 될 수 있거나 아니면 계속 혼란으로 치달을 수도 있지만 그 각각에 그분만의 공의는 엄연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인간사회의 공의가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든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에는 전혀 손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끝까지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그분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꿔서라도 당신의 공의를 세웁니다. 아니 이 땅과 인류를 지금 당장 몽땅 멸망시킬지라도 그분의 공의는 눈곱만큼도 훼손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그분 앞에서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미 예수를 믿어 그분의 공의 안에 살고 있는 자는 그 심판에서 건져서 구원의 완성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설명 드린 공의에 비해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는 조금 다르게, 더 넓고도 완전한 의미로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1-24)
우선 앞에서 말씀드린 공의 즉, 하나님이 악인에게 언젠가는 반드시 벌을 주어서 사회정의를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식으로 바로 세우는 일도 당신께서 의로우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율법을 주신 것도 그분의 의로움으로 인간이 그 계명대로 순전하게 살 때에 인간사회에 당신의 공의가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계명대로 온전히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또 다른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악인을 벌하기로 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일지라도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도적 주도적 일방적 무조건적인 용서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베풀어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말합니다.
인간 죄의 형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다 짊어지시고 죽으시고 대신에 죄인인 우리는 살려주셨습니다. 죄를 벌을 주는 것이 공의라면 죄인을 살려주는 것은 그분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에는 공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죄인을 구원해주시는 것이 바로 그분의 의입니다.
신자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는데 자신의 공로 자격 능력 하나 없이 오직 주님의 은혜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룩하게 바꿔주실 성령님이 영원토록 내주하십니다. 말하자면 인간사회의 공평과 정의, 하나님의 공의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자는 신자뿐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온전한 십자가 은혜가 실현되지 않았고 성령님도 각 개인에게 내주하지 않아 옛 이스라엘에선 하나님의 공의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 이스라엘인 기독교 신자들은 하나님의 전권 대사가 되어서 그분의 공의를 실현시켜야 합니다. 한 알의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되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의롭습니다. 그분의 의는 영원토록 단 한 치도 줄거나 퇴색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의, 그분의 공의와 사랑을 바로 세울 책임은 십자가로 의롭게 된 신자에게 있습니다. 신자가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정말로 의롭게 사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어 다른 죄인들로 회개케 해야 합니다. 또 어떤 극악한 죄인이라도 그 사람은 주님의 긍휼로 용서하고 사랑으로 섬기어 십자가 예수님의 의를 덧입도록 초대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벌 받아 마땅한 자를 벌 주는 것이 공의라면, 벌 받아 마땅한데도 예수님 때문에 용서하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는 것이 그분의 의입니다.
라"(렘33:15).
욥기 8:3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의로움이란 뭐냐 하는 것이죠?
뭐가 의롭다는 것입니까?
성경의 의로움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자리에 자리 잡고 있어야 그걸 의롭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빗나가면 어떤 것도 의로울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정의 이렇게 말하면 대개 사법적 정의를 말하는 거예요.
이거는 이제 재판하다 라는 단어에서 나온 단어예요.
재판을 할 때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법이라는 것이 그런 의미에서 공정, 정의, 공의 이런 뜻이 다 포함이 될 수 있어요.
그러나 이제 공의 라고 할 때는 하나님이 인간과 맺은 관계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것에 기준의 척도가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만 의롭다 라고 할 때 그분의 의로움 때문에 그분과 관계 맺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들어가면 그도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가 의로워진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옷
입혀짐으로써, 덧입혀짐으로써 우리도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바른 부모와 자녀의 관계 그렇게 회복될 때 우리는 공의
라고 말하는 거예요.
공의 하면 이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바른 관계다 이런 게 머릿속에 확실히 있어야 되고 정의는 우리가 주로 재판이라든지 이런 쪽에서 말하는 공정을 기초로 하는 그래서 이걸 누군가 재미있게 영어 단어 두 단어로 표현을 한 게 있는데 정의 라고 할 때는 Equality 의 개념이에요.
기회의 균등 같은 거 이런 걸 말하고 공의 라고 할 때는 Equity 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게 조금 의미가 다른 거죠.
예를 들어서 이런 거예요.
주례를 하러 가거나 하면 내가 키가 작아가지고 요새 신랑들이 키가 커요.
한 1미터 90되면 난 보이지도 않아요.
뒤에서 보면 그래서 내가 가면 좀 공의롭게 해달라 웃으면서 그래요.
나는 단이 한 20-30cm 하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도 체면이 서지..
그럴 때 나는 이 사람하고, 신랑하고 대등한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이만큼 단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그걸 우리가 말할 때는 공의 라고 하는 개념을 머릿속에 떠올리면 돼요.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 어떤 동일한 혜택을 누리기 위한 조치죠.
그런데 Equality 는 뭐예요?
땅바닥에 같이 서는 거예요.
90은 90이고 70은 70이고 60은 60이고 어떡하겠어요?
모두 다 땅바닥에 세우는 건 Equality 이고 나같이 키가 작은 사람을 좀 높은 단에 세우는 건 Equity 라고 표현단단 말이에요.
이게 두 개 다 있어야 된다는 게 문제예요.
성경을 쭉 보면은 과부한테 함부로 재판하지 마라, 가난한 사람 함부로 그렇게 유전무죄 하지 마라, 이때는 Equality 의 개념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나 사회적 약자를 돌보라, 이거는 하나님의 마음이 또 그런 마음이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Equality 와 Equity 라는 단어를 기억을 해야 하고 그다음 우리가 성경 전체에서 나오는 이 정의 와 공의 가 하나님께서는 함께 가야 한다는 거란 말이에요.
누구에게나 동등하죠, 인간이라는 게 왜냐면 하나님이라는 절대적인 기준 앞에 서면 키가 1m건 2m건 무슨 상관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인간끼리 살아갈 때는 하나님께서 약자를 조금 더 돌보고 약자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고 하는 게 그게 사회적 공의가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너무 산술적, 기계적, 평균적인 평등을 주장해도 안 되는 것이고 또 그것도 없는 그런 법 체계나 법 질서도 또 문제가 되는 것이죠.
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찌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4.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All this is evidence that God's judgment is right, and as a result you will be counted worthy of the kingdom of God, for which you are suffering.
합당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 단어는 "카타키오오(kataxiŏō. καταξιόω)" 라고 합니다.
'카타키오오'는 "가치 있다고 본다" "합당하다고 생각하다"라는 뜻입니다.
'카타키오오'라는 단어가 사용된 누가복음 20장 35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33. 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34.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 / 마가복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거듭난 자 / 요한복음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사도행전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는 자
혈과 육에 속한 자 / 고린도전서 15: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여기 이른바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몸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혈육 그대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 뿐이다.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우상 숭배자, 음행하는 자, 더러운 자 / 에베소서 5: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토 이스테 기노스콘테스'(*)는 현재 명령법 또는 현재 직설법으로 볼 수 있다(Robertson).
전자의 경우로 보면 '이것에 대해 확신하라'(Be verysure of this, NEB, RSV)로 해석되며 후자의 경우로 보면 '너희가 이것을 안다'(thisyou know, KJV, NIV, Foulkes, Bruce)로 해석된다.
이 두 가지 해석이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바울은 이 표현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Hendriksen).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 본절에서 열거된 죄악의 범주들, 곧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는 3절에 언급되어 있는 것과 근본적으로 같다.
본절에서 바울은 인간의 탐욕을 우상 숭배와 동일선상에 두고 있다(골 3:5).
우상 숭배자는 절제할수 없는 탐욕으로 인하여 자신을 우상화하여 앞서 언급한 죄악을 범하는 자이다.
결국 이러한 자들은 어느 누구라도 다가올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받을 수 없다(Wood).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의 헬라어는 '엔 테 바실레이아 투 크리스투 카이 데우'(*)로서 '크리스투'(*, '그리스도의')와 '데우'(*, '하나님')가 하나의 관사인 '투'(*)에 의해 수식된다.
이것은 '크리스투'의 나라와 '데우'의 나라가동일한 것임을 시사한다(Foulkes, Caird, Gnilka).
* 1349. δίκη, ης, ἡ 스트롱번호 1349
1. 형벌, 벌, 징벌, 행 25:15, 살후 1:9, 유 1:7.
2. [여신으로 인격화 되어진 이름] 정의의 신, 행 28:4.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정죄하기(행 25:15), 공의(행 28:4), 형벌 (살후 1:9, 유 1:7).
"반대의 통합"이란 서로 정반대 되는 두 개의 단어 떠는 개념이 항상 함께 사용되면서 그 개념을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 영원과 찰나, 거룩과 세속, 선과 악과 같은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만약 세상에 선만 있다면 그것은 세상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만약 세상에 악만 있다면 를 그것은 세상이 아니라 지옥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때로는 지옥과 같은 경험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혹독한 고통과 아픔과 수치를 경험하였기에 이러한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천국과 지옥은 훗날 역사의 종말이라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만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합당한 사람은 천국을 경험하며 살아갈 것이고 반면에 하나님에게 합당하지 않은 사람은 지옥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경험되어야 합니다.
만일 세상에서 단 한번도 천국과 같은 삶과 경험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신앙은 성경적으로 다시 정립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합당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첫째, 믿음이 자라는 사람(3절)
둘째, 서로 사랑함이 풍성한 사람(3절)
셋째, 환난과 핍박을 참는 사람(4절)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느 집안에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첫째가 장가들어 아내를 맞이하였다가 죽었고 당시 유대 전통에 따라 계대결혼의 풍속대로 둘째 아들이 아내로 맞이하였다가 죽었고 둘째도 죽었으며 그 후에 셋째와 넷째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아들이 모두 죽었는데 그렇다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라고 질문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의 대답이 누가복음 20장 35절입니다.
부활 때에는 세상의 풍속과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국의 원칙에 따라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합당하다(카타키오오)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는 누구일까요?(살후 1:3-4)
"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찌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4.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첫째, 믿음이 자라는 사람(3절)
둘째, 서로 사랑함이 풍성한 사람(3절)
셋째, 환난과 핍박을 참는 사람(4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믿음)
1. 믿음이 자라고(3절)
2. 서로 사랑함이 풍성하며(3절)
3. 환난과 핍박을 참는 인내(4절)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2661)
카타키오오(kataxiŏō) καταξιόω
스트롱번호 2661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합당히 여기다(눅 20:35, 행 5:41, 살후 1:5).
누가복음 20: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
- 현재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음으로 인하여 당하는 자신들의 환난과 핍박을 악한 박해자들의 번영이라는 현실과 비교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참으로 시행되고 있으며 앞으로 시행될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의구심은 구약 선지자 하박국도 하나님께 가졌던 적이 있다(합1:2-4).
그러나 바울은 미래에 각 개인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고난이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이라고 변명하고 있다.
'표'(*, 엔데이그마)는 '분명한 표식', '증거'의 뜻으로 쓰인다.
즉 데살로니가에서 핍박받는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은 바로 그들이 장차 있을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서 영광을 받는 증거가 되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극심한 핍박속에서 지켜 주신다는사실에 대한 보증이 된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함이니
- 본 구절은 앞문맥과 동격절로서 접속사 '이는'에 대한 수식적 설명이다.
본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환난과 핍박을 참아낸다고 해서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된다는 것은 그들의 행위나 공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엡 2:8, 9).
이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소유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모든 환난과 핍박가운데서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보호해준다(벧전 1:5).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 본문은 현재 시제로서 과거의 고난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고난이 뒤따른다(빌 1:29).
이 고난은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당하셨으며(벧전 2:21-25),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 실라와 디모데도 당하고 있다.
이처럼 성도에게 있어서 고난은 실제적이며 필연적인 것이다(요 16:33).
그런데 성도들이 받는 고난은 그들의 죄로 인한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받은 것이어야 한다.
성도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된다(벧전 2:20).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라면 그것이 정금보다 귀한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되는 것이다(벧전 1:7).
δέη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1162
ἔντευξ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1783
정치 참여(목회자, 크리스천)의 3가지 유형
1. 크리스천의 직접 참여: 윌리엄 윌버포스, 링컨, 대처 수상, 아데나워, 지미 카터, 미국의 대통령들
2. 목회자의 정치 참여: 아브라함 카이퍼(목회자 포기하고 의회 진출, 네덜란드), 영역 주권론
3. 목회 사역과 사회 변혁: 칼뱅의 제네바시 의회(칼뱅신학의 실천과 적용)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
1. 국가가 교회 위에 : 교회는 국가의 간섭과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관점이다.
교회의 재산권이나 인사권을 국가가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근거로 국교 제도가 생겨났다.
2. 교회가 국가 위에 : 교회와 국가는 모든 하나님의 권세에 순복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에게 천국 열쇠를 주셨기 때문에 교회와 국가에 대한 관할권은 교회에 위임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중세의
교회는 이 근거 위에서 교회가 국가의 모든 일을 관리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나 성경 말씀과 교훈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3. 교회와 국가가 적대적 관계 : 국가의 핍박이나 교회 탄압의 시기에 나타난 주장이었다.
교회는 신령하고 거룩하지만 국가는
세속적이고 사탄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본다.
그래서 국가를 적대시하고 국민의 기본적인 의무도 멀리하자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크리스천들의 국가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국가와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딤전 2:2).
세금이나 국민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롬 13:7).
관리들을 양심적으로 존경하고 합법적인 권위에 순종하라고 한다.
위정자들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선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교가 다르거나 불신앙자라고 해도 행정 관리들의 정당하고 합법적인
권위를 인정해야 하고 그들에게 순종해야 한다(벧전 2:13~16).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적인 권력자나 재판관이 되는 것을 죄악시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해서 공의를
세우고 세상을 치리하시기 때문이다(잠 8:15~16).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은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이기도 하다.
교인이면서
시민이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수 없듯이, 삶의 영역에서도 국가와 교회는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로버트 달은 '창조적 긴장 관계'가 가장 이상적인 관계라고 규정한다.
국가는 인간의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며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고 기독교의 공적 형태를 보호함으로써 최대의 기여를
한다. 교회는 가급적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제한적인 통제와 국가의 호의와 지원에 의존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는 종교를 정복할 수 없다.
정치 자체를 자신이 구원할 수도 없다.
정치에 구원이 없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그들의 신앙
문서에서 교회와 국가를 상호 병존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교회의 권세는 복음 전파와 성례전을 통한 영적 권세이다. 교회의 영적
권세와 국가권력은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정치에는 '구원'이 없다 그래서 교회와 국가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회가 국가의 영역에 전적으로
관여를 하는 것도 국가가 교회의 영역에 과도하게 관여하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상호 간의 우열을 논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각
영역에 행사하시는 '영역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러한 면에서 '영역 주권론'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나라'는
정치적인 개념이 아니고, 보이는 현실 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다스리시며 사람과 만물을 구원으로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말하는 종말론적인 개념이다.
인간관계 전문가로서 여러분들의 대인 관계에 도움이 되고자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다른 사람과 잘 협력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협력은 인간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협력을 잘하면 서로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고, 관계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협력을 못하면 갈등이 생기고, 성과가 저하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과 잘 협력할 수
있을까요?
협력이란 무엇일까요?
협력은 공동의 목적을 위해 여러 사람이 함께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협력은 단순히 일을 나눠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소통하고, 조율하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협력은 인간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많은 이점이 있습니다.
협력을 통해 다양한 관점과 지식을 공유할 수
있고, 창의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협력은 신뢰와 책임감을 갖게 하고, 자신감과 만족감을 높여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과 잘 협력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공동의 목표를 정하라
공동의 목표를 명확히 하고 공유하기: 협력의 첫 번째 단계는 공동의
목표를 정하는 것입니다.
목표가 모호하거나 일관성이 없으면 협력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협력하는 사람들끼리 목표를
명확히 하고, 서로에게 공유해야 합니다.
이때, 목표는 구체적이고 측정 가능하며 도전적인 것이 좋습니다.
둘째, 역할과 책임을 분명히하라
역할과 책임을 분명히 하기: 협력의 두 번째 단계는 역할과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역할과 책임이 모호하면 혼란과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협력하는 사람들끼리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정하고, 서로에게 알려야 합니다.
이때, 역할과 책임은 각자의 능력과 성향에 맞게 배분하는 것이 좋습니다.
셋째, 소통을 원활히 하라
- 소통과 피드백을 활발히 하기: 협력의 세 번째 단계는 소통과
피드백을 활발히 하는 것입니다.
소통과 피드백이 부족하면 오해와 불신이 생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협력하는 사람들끼리 자주
소통하고, 서로의 의견과 진행 상황을 공유해야 합니다.
이때, 소통과 피드백은 정직하고 존중적이며 건설적인 것이 좋습니다.
넷째, 문제를 해결하고 서로를 인정하라
- 문제를 해결하고 인정하고 기념하기: 협력의 네 번째 단계는 문제를
해결하고 인정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협력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때, 문제를 회피하거나 탓하지 말고, 함께
해결해야 합니다.
또한 협력하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노력과 성과를 인정하고, 목표를 달성했을 때 기념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협력의 의미와 가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
협력을 방해하는 요인은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 나의식주의 : 나의식주의란 자신의 의견이나 방식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나의식주의는 협력을 위한 소통과 조율을 방해하고, 갈등을 야기합니다. 따라서 협력을 할 때는 나의식주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방식에도 관심을 가지고, 타협하고 배려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 자기중심적 행동 : 자기중심적 행동이란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만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의 이익이나 명예를 무시하거나 해치는 행동을 말합니다. 자기중심적 행동은 협력을 위한 신뢰와 책임감을 저해하고, 반감을 일으킵니다. 따라서 협력을 할 때는 자기중심적 행동을 자제하고, 다른 사람의 이익이나 명예에도 배려하고 존중하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 비판적 태도 : 비판적 태도란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행동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난적으로 평가하고, 자신의 의견이나 행동에 대해 긍정적이고 칭찬적으로 평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비판적 태도는 협력을
위한 소통과 피드백을 어렵게 하고, 상처를 줍니다. 따라서 협력을 할 때는 비판적 태도를 고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행동에
대해 긍정적이고 건설적으로 평가하고, 자신의 의견이나 행동에 대해 겸손하고 개선적으로 평가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협력은 인간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능력입니다.
협력을
잘하면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공동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협력을 못하면 다른 사람과 갈등을 겪고,
성과가 저하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협력을 위한 방법과 장애요인을 잘 알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디모데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을 공경한다"
바울의 가장 귀한 동료이며 동역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바울과 실라가 제2차 선교 여행 중 디모데의 고향 루스드라를 지날 때 디모데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었다
아마 사도의 제1차 선교 여행 중 회개하였을 것이다
[행]16: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의 모친은 유대인이었으나 '믿는 자'였고,
부친은 헬라인으로 아마 작고한 것으로 보인다.
디모데는 할례를 받지 않았으나,
어렸을 때부터 성경으로 훈련을 받았다
[딤후]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바울은 디모데를 합류시키려고 젊은 제자에게 할례를 받게 하였다.
그것은 유대법에 따르지 않고 결혼하여 낳은 아들과 여행할지라도
유대인 가운데서 직접적인 방해를 받지 않고
일하려는 목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행]16: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행]16: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부득이 마게도냐를 떠나 아덴으로 향하면서,
바울은 디모데와 실라를 마게도냐에 그대로 남겨 두었다
[행]17: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행]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행]17: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행]17: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행]17: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행]17: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디모데가 아덴에서 바울과 합류하게 되자,
사도는 그를 다시 북쪽 데살로니가로 돌려 보냈다
[살전]3:1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생각하고
[살전]3:2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그들이 고린도에서 재상봉하게 되었을 때,
디모데는 다시 바울 곁에서 동역하였다
[행]18: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고후]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그의 이름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쓴 데살로니가에 보내는 편지들에서
언급되고 있다
[살전]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전]3: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살후]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제3차 선교 여행에서 바울은 어느 때는 디모데를 조력자로 삼았고
어느 때는 도움이 필요하지만
사도가 직접 갈 수 없는 그 곳에 그를 대신 보냈다
[행]19: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고전]4: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고전]16: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고후]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날 밤 고린도에 있었을 때,
적어도 그 여행 일부 가운데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있었다
[행]20: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롬]16:21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나중에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일하였는데
아마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기간에 그 곳으로 갔을 것이다.
만약 빌립보, 골로새, 빌레몬서가 로마에서 쓰여진 것이라면,
디모데는 적어도 잠시동안 바울과 함께 그 곳에 있었을 것이다
바울의 생애 말엽, 디모데는 디모데후서가 증거하는 대로
그의 신실한 봉사가 사도에 의해 기억되어
특별히 중요한 동역자로 드러났다
[고전]4: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바울은 사실 디모데와 함께 있기를 원하였다
[딤후]4: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디모데의 충성이 그 자신에게는 두려움이 되었는데,
바울은 그 두려움을 난점으로 생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딤후]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언젠가 기독교 사역자로서 활동하면서
디모데는 감옥에 갇힌 적도 있었다
[히]13: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실루아노는 ‘생각’이라는 뜻인데요, 헬라화 된 유대인으로서 로마의 시민권까지 아마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가정환경을 우리가 잘 알 수 없지만 그는 일찍부터 주를 믿어 예루살렘교회에서 신임을 받아서 안디옥교회로 파송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실루아노는 아마도 예수님의 70인 제자중의 한 사람이 아닌가 그렇게 봅니다. 그가 안디옥교회로 갈 때에는 유다 바사바라고도하는 사람이 함께 가게 되는데, 거기서 실루아노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의사항을 전하여서 형제들을 가르치고 할례에 대하여서 그 예루살렘교회의 공식적 입장을 천명한 편지를 전하고, 형제들을 권면하면서 가르치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실루아노는 거기 있는 동안에 바울의 명쾌한 보고의 진리에 아마 매료되었던 것 같이 보입니다. 결국 그 유다 바사바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실루아노는 거기 남게 되었는데요, 바울과 바나바가 전에 1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했던 각 성을 다시 방문하자고 제안했을 때에, 바나바는 잘 아시는 대로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했고, 바울은 마가는 같이 갈 수 없다고 했기 때문에 많이 다툰 후에 피차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바나바가 기어이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가고 나서요, 바울이 실루아노를 데리고 2차 전도여행 때 바울의 고향이었던 길리가아 쪽을 향해서 출발하는데, 이것이 인제 실루아노가 복음 사역에 들어서게 된 첫 길이었지요.
바울과 함께 2번째 전도여행을 쭉 동행하게 되는데, 바울이 처음에는 실루아노를 택하여서 출발하였지만 그 여행의 경로를 상세하게는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든 그 때 바울은 갈라디아지방을 지나가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이 확실합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과 실루아노가 더베와 루스드라에 도착한 것을 기록합니다. 거기서 바울과 실루아노가 만났던 사람이 디모데였지요. 그러니까 2번째 전도여행 때 제일 먼저 바울 그리고 실루아노, 그 다음에 디모데, 그 다음에 누가 이런 식으로 만나나 것입니다. 디모데는 그의 아버지가 헬라인이고, 외조모나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의 전도 팀에는 디모데가 가세함으로서 세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일행이 다시 서쪽으로 서쪽으로 진행하다가 어디에선가 누가를 또 만나게 되었는데 누가를 어디서 만났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드로아에서부터는 확실히 누가가 동행했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바울과 실루아노, 디모데, 누가 이런 네 사람이 됐지요. 나중에 고린도에 가가지고 브리스길라 아굴라를 만나 또 여섯 사람이 되고, 이렇게 자꾸 만나게 되지요. 바울이 지나갔던 노정에는 분명히 갈라디아를 지나간 것만 기록하고, 여기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짐작키로는 이때 바울이 건강이 악화되어서, 한동안 갈라디아 어느 지역에서 요양을 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건강이 악화된 것 때문에 물론 기도했겠지만 그보다도 병을 인하여 의사를 찾다가 아마 누가를 만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을 거쳐서 골로새와 시에라폴리스, 라오디아를 지나가게 되는데, 그 지방은 의학이 발달하였던 곳입니다. 특별히 시에라폴리스에는 온천욕이 아주 유명한데요, 병을 고치기위해서 그 로마황제가 로마에서 거기까지 올 정도로 아주 유명한 온천, 거기서 아마 바울이 온천욕을 즐겼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병이 낫기 위해서
그리고 라오디 지역에 가면 안약이 아주 유명하거든요, 요한계시록 보며는 라오디기아 교인들에게 너희 동네에 안약 많은데 안약 좀 사서 바르다고, 눈이 어둡다고 그렇게 책망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바울이 그 안질이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요. 거기서 아마 안약도 아마 사서 바울이 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거기서 조금 더 나가며는 버가모가 있는데, 그 버가모는 당시 의학을 연구하는 기관이 있었어요, 그래서 의사의 신, 그 치유의 신이라는 아스크레피우스라는 신이 있습니다. 그 신전이 거기 있고, 또 제우스신의 고향이기도 하고요, 그 버가모가, 누가도 아마 그러한 의학도중의 한 사람으로서 바울을 만나 치료하기 위해서 애를 쓰다가, 바울과의 교제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겠는데, 전승에는 누가의 고향이 수리아 안디옥이다 그렇게 기록이 돼 있습니다.
하여간 바울이 몸이 불편했을 때, 누가를 만나게 주선하고 애를 쓴 사람이 실루아노, 그리고 디도 이런 사람들이 같이 한 것 같은데, 디도가 같이 했는지, 안 했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누가가 디도의 이름을 전혀 쓰지 않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실루아노는 결코 나서지 않는 조용한 그런 성품의 소유자이면서, 실력은 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돕는 협력자로서, 생각이 깊은 그런 사람같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여러 일을 하는 중에 실루아노가 한 말이 한 마디도 안 나와요, 바울과 늘 동행하고 있는데, 아무 말이 없이 그렇게 조용히 봉사합니다. 그런데 아주 헬라어에 능통합니다. 헬라어에 얼마나 능통한가 하는 것은 베드로전후서를 보면, 베드로전후서를 역시 그 대서한 사람은 실루아노가 했거든요, 그러니까 실루아노의 헬라어 실력은 아주 대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울의 전도여행 경로를 따라 드로아를 답사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그 옛날 영광은 무너지고 지금은 돌무더기만 그 잡초하고 막 우거져 있습니다. 많은 여행자, 순례자들이 드로아를 이제 트로인줄 잘못 아는 수가 많은데요, 트로이는 아닙니다. 트로이는 드로아에서 상당히 올라가야 있지요. 드로아는 그 알렉산드리아 드로아스라 그렇게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다. 드로아와 트로이가 지역이 같은 곳이 아니고, 딴 곳입니다. 전혀 딴 곳입니다. 그 드로아가 아래쪽이고요, 트로이는 그 위쪽으로 한참 자동차로 한 시간 넘어 이상 올라가야 트로이가 있습니다. 여행사나, 관광회사 안내원 까지도요, 트로이하고 드로아를 그 구본을 못하고 있어요. 그 안타까운 일이지요.
드로아는 그 당시에 큰 항구도시, 유럽을 건너다보는 아주 유명한 항구도시였는데, 지금은 전혀 사람이 살지도 않을 정도로 황무지가 돼 있습니다. 우리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가는 길에 바울이 들러서 한 주간 동안 체류하면서 저녁설교를 오래 하다가 유드고가 떨어졌던 그 곳이 드로아지요. 바울과 실루아노는 거기서 사모드라게를 지나서, 네압볼리, 네압볼리는 네오폴리스, 네오폴리스를 인제 라틴어 식으로 말하며는 나폴리가 됩니다. 나폴리, 지금 현재는 그 네아폴리를 까발라라고 하는데요, 거기도 갔고, 다시 빌립보로 지나가지고,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지나서 빌립보 성에, 아니 빌립보 지나가지고 암미볼리, 아볼로니아를 지나서 그 어딥니까? 데살로니가쪽으로 가게 됩니다.
이 모든 길에 바울이 동행하게 되는데, 실루아노는 디모데하고 함께 단짝이 돼 가지고 2번째 전도에서 참 역할을 잘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루아노는 그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미하는 그런 장면도 나오지요. 바로 지진이 나서 감옥문이 터졌던 그 사건에서 실루아노가 같이 있었습니다. 감옥이 터지고 죄수가 도망간 줄 알았던 간수가 막 자살 하려고 했을 때, 바울과 실루아노가 말려가지고 우리가 다 여기 있으니까 죽지 말라고 했었지요. 그때 그 간수는 선생들아 우리가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겠는가 물었는데, 바울은 지금 내일 아침에 당장 목이 달아날 판이 돼 있는 그 간수를 보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겠다 그런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럴 때 역시 실루아노는 항상 바울곁에 있었습니다. 그 후에 바울과 실루아노가 데살로니아에 갔고, 거기서 3주간을 체류하는데, 그 3주간 체류하는 중에 바울과 실루아노의 이 사역으로 말미암아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개척이 되었습니다.
거기서 큰 핍박이 나자 바울과 실루아노는 베레아로 가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문제는 그 데살로니가의 그 괘악한 사람들이 베레다까지 따라와서 핍박하기 때문에 바울은 혼자 빠져 나와서 아테네로 갔고, 그 때에 실루아노하고 디모데는 아직 베레다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아테네에 얼마간 체류하는 동안에 아테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긴 했는데, 그때에 바울이 이 실루아노 하고 디모데가 옆에 없으니까요, 바울이 영 용기가 많이 위축되는 걸 볼 수 있어요. 그래서 바울이 혼자 가서는 일이 잘 안된다는 것을 또 볼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 같은 사람, 누가 같은 사람, 실루아노 같은 이런 조력자가 옆에 있어야만 힘있게 일하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두번째 전도여행 그 이후에 실루아노의 행방을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나중에 베드로하고 동행을 하고, 베드로의 통역을 하는지 그건 알 수가 없는데, 어떻든 실루아노는 그 뒤에 이름이 나오는 것은, 베드로전서의 맨 끝에 가서 볼 수가 있게 됩니다.
바울과 실루아노가 어떻게 결렬되었는지, 하는 그런 사실을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베드로가 바벨론에서 베드로전서를 쓰면서 거기에 실루아노와 마가가 베드로팀에 합류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가는 또 자기 외삼촌이었던 그 바나바를 따라서 구브로를 갔었는데, 바나바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가 없고, 역시 베드로하고 실루아노가 베드로곁에 있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겠지요.
실루아노, 마가 이 두 사람은 정말 다 훌륭한 그런 조력자들인데, 실루아노는 특별히 베드로전서를 썼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문학적 실력을 가늠할 수가 있습니다. 실루아노가 처음에 안디옥교회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서 전권을 위임받아 파송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의 신앙이나 학문이나 덕망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방인의 구원문제와 같은 중요한 사항을 전달하고 가르칠 책무를 맡고 안디옥교회로 파송된 것을 보아가지고 당시 예루살렘교회에서 지도자 위치에 있었던 것을 우리가 알 수 있겠지요.
안디옥에 가서 실루아노는 예루살렘교회와는 또 다른 열심과 사랑을 보면서 예루살렘교회로 돌아가지 않고 바울과 합력하여서 제2차 전도여행을 아주 성공리에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베드로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베드로 그 사역을 돕게 됐는데, 우리는 그 물론 베드로가 불러주고 인제 실루아노가 받아 썼겠는데, 베드로는 틀림없이 불러줘도 갈릴리 사투리, 아람어하고 히브리어 반반 섞어가지고 베드로는 그렇게 말을 했을 것이고, 이것을 아주 미려한 문장으로 번역을 해 가지고 베드로전서를 쓴 사람은 실루아노니까 실루아노의 그 조력이야말로 바울을 도운 것이라든지, 또 베드로를 도운 것은 큰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업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참 필요합니다. 늘 그저 모든 일에 뭐 일인자가 될려는 사람보다도 마가와 같이, 그리고 실루아노와 같이 묵묵이 일하는 사람, 또 누가 같은 사람들, 이런 사람이 굉장히 필요하지요. 한국 사람들 전부 다 머리만 되고 꼬리가 안 될려고 잘못하는데, 사실은 머리는 예수님 한 분이면 족하고요, 우리 모두는 다 손발이 되어가지고 함께 협력하고 돕는 그런 디모데, 혹은 디도, 실루아노, 마가 이런 사람을 아주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루아노의 봉사가 없었더라면 바울의 사역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앞장서서 일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곁에서, 혹은 뒤에서 돕는 손길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늘나라가면 상이 바울과 꼭 같은 상을 받게 될 겁니다. 선 자를 영접하되 선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사람들은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라 그렇게 예수님께서 가르쳤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실루아노와 같은 그런 훌륭한 조력자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팀의 리더가 되어서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면에서 이렇게 사역자를 돕는 일, 또한 중요함을 보여준 충실한 조력자 실루아노를 알아봤습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
- 이 세 사람은 본 서신의 공동 발신인이다.
그러나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본 서신을 쓰는데 협력하였을 뿐이며 본 저자는 바울이다.
바울은 그의 다른 서신서에서와 달리 본 서신에서는 굳이 자신의 사도권을 언급하지 않고 간결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그의 사도적 권위가 충분히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그가 세 사람의 명의(名義)로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은 이 세 사람이 데살로니가 교회와 깊은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실루아노는 실라와 동일 인물(행 15:22)로서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당시 바나바를 대신하여 바울을 수행하였다(행 15:40).
그는 바울의 진실한 동역자로서 빌립보 감옥에 바울과 함께 투옥당하기도 하였고 그를 도와 데살로니가 교회를 함께 설립했으며 베뢰아와 고린도에서 복음을 함께 전하기도 하였다(행 17:1, 10;18:5).
그리고 디모데는 바울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이며 복음 전도의 동역자였다.
그는 경건한 유대인 어머니 유니게에게 어려서부터 신앙 교육을 받았으며(행 16:1; 딤후 1:5) 바울의 2차 전도여행시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실라와 합류하였다.
그는 데살로니가를 직접 방문하여 그곳 교회의 소식을 가지고 바울에게 오기도 하였다(살전 3:1, 2, 6).
바울과 함께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파하고 함께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졌고 가장 존경받는 전도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깊은 관계를 갖고 서로 협력하였던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공동 발신인으로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냄으로서 실루아노와 디모데도 서신을 쓰는 바울 자신만큼 데살로니가 교회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샅로니가인의 교회
-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였다.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시 데살로니가에서 그의 복음 전도를 받은 많은 경건한 헬라인들이 개종하여 그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였다(행 17:1-9).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방인들에 의해서 세워진 한 지역 교회에 불과하였지만 바울은 그 교회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교회는 지역적으로 또한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모습을 띠지만 각각의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성도의 모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고백하는 신앙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실루아노(Silvanus) 바울과 동역자로 실라와 동일인이다(고후 1:19, 살전 1:1, 살후 1:1, 벧전 5:12) |
반대의 통일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사상가 인 헤라클레이토스 (기원전 535 년경 ~ 기원전 475 년경)에 의해 서양의 견해에 처음 제안되었다. 철학자들은 한동안 반대의 개념에 대해 고민해 왔다. 아낙시메네스는 모든 원소에는 반대되는 성질이 있거나 반대되는 성질과 연결되어 있다고 가정했다(물은 차갑고 불은 뜨겁다). 따라서 물질 세계는 원소(흙, 공기, 불, 물)와 그 반대의 쌍(뜨겁고 차갑고, 습하고 건조한)이 생겨난 무한하고 무한한 아페론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아낙시만데르에 따르면 이 세계에는 끊임없이 반대되는 것들의 전쟁이 벌어졌.아낙시메네스의 제자이자 후계자인 밀레투스의 아낙시메네스는 이 무한하고 무한한 아치를 중성적인 성질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공기로 대체했다. 아낙시메네스에 따르면 이 세상은 반대의 전쟁이 아니라 변화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는 밀레시안 일원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근본적인 물질적 아치를 우주의 신성한 단일 법칙, 즉 로고스라고 부르는 것으로 대체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우주는 동일하게 유지되면서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즉, 물체가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할 때 기본 법칙은 동일하게 유지되는 동안 변화가 발생한다. 따라서 우주에는 차이와 같음을 동시에 포함하는 반대의 통일성이 존재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격언은 이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은 같은 것이다." (히폴리투스, 반박 9.10.3) 이것은 반대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예이다. 왜냐하면 이 경사진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라는 상반된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에 따르면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모든 변화하는 물체는 적어도 한 쌍의 반대를 포함하며(반드시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반대의 쌍은 적어도 하나의 물체 안에 포함되어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또한 반대의 연속을 변화의 근거로 사용한다.차가운 것은 뜨거워지고, 뜨거운 것은 차가워지며, 촉촉한 것은 시들고, 메마른 것은 젖는다. (DK B126) 물체는 변화를 겪으면서도 반대되는 성질에도 불구하고 지속된다고 한다.
5세기 독일 철학자 니콜라우스 쿠자누스가 그의 에세이 <무지의 가르침>(De Docta Ignorantia, 1440)에서 사용한 신플라톤주의 용어이다. 20세기 종교 역사가인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신화와 의식에 관한 에세이에서 이 용어를 광범위하게 사용하면서 우연성을 "신화적 패턴"이라고 설명했다. 정신과 의사 칼 융, 철학자이자 이슬람학 교수인 헨리 코빈, 유대인 철학자 게르솜 숄렘과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도 이 용어를 사용했다. 연금술에서 우연의 일치란 우연의 일치와 동의어이다. 예를 들어 마이클 마이어는 반대의 결합이 연금술 작업의 목표라고 강조한다. 또는 파라셀수스의 제자 게르하르트 도른에 따르면 연금술의 최고 등급은 전체 인간과 우누스 문두스 ("하나의 세계")의 결합으로구성되었다. 이 용어는 이전에 서로 다르다고 믿었던 것들의 하나됨에 대한 계시를 설명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사물의 통일성에 대한 그러한 통찰은 일종재성이며 다양한 비 이원론자 및 이원론적 전통에서 발견된다. 이 아이디어는 탄트라 힌두교와 불교, 독일 신비주의, 조로아스터교, 도교, 선, 수피즘 등의 전통에서 나타난다.
독일의 저명한 칼뱅 학자 헤르만 바우케(H. Bauke, Die Probleme der Theologie Calvins)에 의하면 칼빈신학의 형식적 특징은 complexio oppositorum(반대의 통합)이라고 한다. 논리적이고 형이 상학적인 관점이 아닌 교리를 전체적으로 종합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칼빈의 신학방법은 하나나 혹은 두 개의 중심교리로부터 추론하는 연역적 체계가 아니라고 한다. 칼뱅은 개개의 교리의 가르침으로부터 추론하고 발전될 수 있는 Diagonale(대각선처럼 마주보는 개념)나 Stammlehre(단어의 내부구조를 찾는 형태론)나 중심교리나 혹은 자료적 원리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반대로 그는 논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모순 안에 있는 현존하는 개개의 교리적 가르침을 조직적인 결합으로 묶는 것을 찾아낸다고 한다. 이러한 특징은 많은 상충적 해석이 있음을 보여준다고 한다. 왜냐하면 해석자들은 한 교리에 집중하게 되면, 똑같이 중요한 다른 교리들에는 소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Martin Schulze의 연구는 이러한 잘못된 오류에 좋은 본보기라고 한다.[2] 바우케는 1922년에 이 문제와 관련된 「칼빈 신학의 문제들」이라고 하는 주목할 만한 저작을 내놓았다. 그는 칼빈 사상의 특징은 형식적인 변증법적 합리주의로서 그의 성서주의에 입각하여 반대되는 것들을 결합시켜 놓은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칼빈은 체계론자라기보다 변증론자, 기껏해야 변증법적 체계론자라고 부른다. "교의학의 개개의 기본적 요소들이 나란히 놓여 있으며 상호 변증법적으로결합되어 있으며 한둘의 기본적 원리로부터 연역적으로 추론되지 않는다.“ 이런 칼빈 사상의 특징은 프랑스인의 사고의 특징으로서 두메르규 같은 프랑스인 칼빈 연구가들은 칼빈 이해에 아무 어려움도 느끼지않지만, 내용적인 합리주의적 정신을 가진 독일인 칼빈 연구가들(예컨대 리츨과 랑)은 칼빈 이해에 상당한 어려움을 느낀다고 한다. 바우케는 칼빈신학에 있어서 모든 것을 추론해 낼 수 있는 하나의 통일적 원리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연구가들 사이에 새로운 분열을 야기시킬 뿐이라고 보았다. [3]
유명한 칼뱅학자 빌헬름 니젤은 이 책(Hermann Bauke, Die Probleme der Theologie Calvins, 1922)은 칼빈신학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하면서, 그 이전의 연구는 주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핵심적이며 근원적 원리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는 칼빈 신학의 형식(form)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다고 보았다.[4]
바우케의 신학적 내용의 전체적 구조 형태를 3가지로 분류,[5] 1. 내면적이 아닌 형식적 이성주의를 주장 칼빈은 형식적 변증법에 의해 신학교리 를 이해하려고 햇다고 한다. 2. 구조적 전개 방식이 Complexio oppositorum- 논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점이 아닌 교리를 전체적으로 종합하는 능력이다. 3. 성경주의는 성경의 주제를 바탕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형식적 의미의 교리이다. 결국 칼빈는 루터의 신학체계에 프랑스적 형식을 중시한 새로운 구조적 전개를 했다고 바우케는 평가했다고 니젤은 말한다,[6]
안토니 후크마(Anthony A. Hoekema)에 따르면,[7] 칼빈이 그의 신학체계의 근본적 원리로서 하나의 교리를 취했다는 바로 그 생각은 오류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런 잘못된 주장은 칼빈의 첫번째 관심이 논리적으로 철저한 체계 -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 비교해서 어떤 원래의 첫 전체로부터 연역적으로 세워진 것을 구축하려는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전혀 칼빈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한다. 칼빈은 그가 할 수 있는 한 성경의 가르침을 진실하게 재생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자가 되는데 관심이 있었고, 가능한 그는 성경의 가르침이 서로 논리적인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했다고 한다. 이것이 불가능할 때는 그는 이성적으로 조화시킬 수 없는 성경적 가르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두려워 하지 않았다고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에 대한 충실성은 지성적 일관성 보다 더 중요했다라고 한다.
존 리스 (John H. Leith, Calvin's Theological Method and the Ambiguity in His Theology)의 평가를 소개한다.
“ Bauke의 연구는 진정으로 앞으로의 한 발짝이었다. 왜냐하면 '기독교강요‘를 해석하는 모든 시도는 내용만큼 형식을 고려해야함을 분명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칼빈은 하나나 두 개의 원리로부터 신학의 시스템을 추론해내는 훌륭한 조직자였다는 개념에 파괴적인 일격을 가했다. 대부분의 최근 칼빈주의자들은 이러한 관점의 Bauke의 결론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모순된 해석에 종말을 고하지는 않는다. Bauke의 연구가 칼빈의 사상이해에 많이 기여한 반면, 적어도 세 개의 반론이 그의 결론에 대해 제기되어야 한다. 우선 첫째로, 칼빈 신학의 역설적인 특징에의 강조는 내면적인 통일성을 흐리게 한다. 그의 신학이 단순히 개인의 가르침들을 형식적으로 모아 놓은 것이고 서로 변증법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둘째로, 내용과 형식을 완전하게 분리하는 것이 가능한지의 문제가 제기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예정론의 정의에 대한 내용과 비난이 그들의 합리주적인 형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한가? 끝으로 칼빈사상의 형식적인 특징이 모순 없이 같은지 아닌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어야만 한다. 만일 형식적인 특징이 변한다면, 그때는 Bauke의 이론이 부적당하다.“
에드워드 A. 다위(Edward Dowey)는 같은 점을 말했다. 칼빈은 성경의 개개의 주제들을 명료화하고 이해하는 데에 높은 수준을 완전히 확신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이성적으로 조리있는 전체보다도 오히려 많 은 논리적 일관성을 포함한 신학을 창조하는 만큼 신적 신비앞에서 아주 복종적이었다. 만약 이것이 내가 믿는 바대로 사실이라면 신학에서 해결되지 않은 논리적 긴장을 인정하는 것은 칼빈주의의 뚜렷한 표지라는 것을 말해주는 좋은 경우를 만들 수 있다. 칼빈에게 충실한 신학은 논리학이 마지막 단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항상 인정하려고 해야 할 것이다.
크리스토퍼 옥커는 신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독교 강요와 관련하여 설명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는 가장 평범한 책으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도와 이들을 지도하여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려 한 바가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고, 기독교 철학에 담겨 있는 중요하고도 가장 무게 있는 주제들을 다루려는" 의도로 쓰여졌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의 해석가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 책은 서로 상충되는 혹은 역설적인 정신, 콤플렉시오 오포시토룸(complexio oppositorum), 곧 하나님과 인간 본성 사이의 차이, 혹은 하나님의 두 가지 얼굴, 곧 가장 준엄한 엄숙성과 가장 커다란 부드러움 사이의 차이 등으로 양극화된, 논리적으로는 서로 반대되는 사고를 아무런 어려움 없이 통합할 수 있는 정신의 신학을 제공하고 있음에 보편적으로 동의해 왔다. 좀더 폭넓은, 문화적인 용어로는 칼빈 신학의 변증법은 가장 적합하게는 바로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사이의 갈등으로 불리우고 있고 한다.[8]
박해경 박사는 바우케가 complexio oppositorum을 주장한 이래 칼빈의 신학을 변증법적으로 연구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였다. 이런 학자로 J. Bohatec, Calvins Lehre von Staat und Krche mit besonderer Berücksichtigung des Organismusgedankens (Breslau: Marcus, 1937), Ganoczy, Battles, Bouwsma, Wendel, Higman, Eire, Reid 등이 모두 변증법적 구조(dialectical structure)로, 혹은 juxtaposition으로, anti-these로, via media로 칼빈의 신학을 이해한다고 한다.[9]
김영한 박사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서 나오는 다양한 창조 영역의 주권을 천명하면서,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에 중요한 사상적 기초를 전하고 있다”며 “뿐만 아니라 공적 삶 이해에 필요한 신학적·철학적 관점을 통해, 공적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영역 주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공공신학의 기반을 제시하고 있다”고 정리했다. 그는 “카이퍼는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 사상이 16세기 종교개혁 전통과 정면으로 상충된다고 보고, 자신의 입장을 종교개혁 전통에 충실한 ‘반혁명적 복음주의’라고 천명했다”며 “그는 칼빈주의를 하나님 중심에서 세계를 보고 해석하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정립하고자 했다. 창조자에게 순종하는 정신과 반역하는 정신 사이에는 갈등과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이를 ‘반립(antithesis)’의 원리’라고 했다”고 소개했다.
현대 철학에서 독일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작품가운데 Phenomenology of Spirit(서로
대립하는 사상 간의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인 변증법 개념을 소개)과 Science of Logic(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반대되는 힘
또는 개념의 결과이며, 이러한 반대되는 힘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더 큰 전체의 일부라고 주장)에서 사용된 개념이다.
전반적으로 '복합적 대립'이라는 개념은 헤겔 철학의 중심 사상으로, 그의 주요 저작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정교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변증법에서 "반대"는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아이디어 또는 개념을 의미한다. 변증법 과정에는 이러한 반대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
포함되며, 결국에는 갈등의 종합 또는 해결로 이어진다. 이 종합은 새로운 논제가 되고, 이 논제는 또 다른 대립에 의해 반대되어 또
다른 갈등과 종합으로 이어진다.따라서 이러한 맥락에서 '복합적 대립'은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서로 반대되는 아이디어나 개념이
결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상반되는 아이디어나 개념이 반드시 상호 배타적인 것은 아니며, 더 높은 종합으로 통합될 수 있다.
반대의 합일 법칙은 유물론적 변증법의 기본 법칙으로, 모순의 법칙 또는 모순 이론이라고도 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모순 이론은 사회적, 지적 영역과 사물 사이의 모든 것이 모순을 포함하고 있으며 사물의 모순되는 두 측면이
결합되어 사물의 운동, 변화 및 발전을 추진하기 위해 투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통일과 모순의 법칙에는 모순의 양면의 동일성과
투쟁, 모순의 보편성과 특수성, 사물의 발전 과정에서의 모순과 모순의 양면 발전의 불균등성 등의 의미가 있다.
변증법은 모든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론이라고 한다.
원제인 Les Trois Mousquetaires은 세 명의 총사라는 뜻이고 여기서 총사는 총(머스켓)으로 무장한 왕실 호위병(Mousquetaires de la garde, 또는 Mousquetaires du roi)을 뜻한다.
하지만 등장인물 중 총사들도 대부분은 칼을 잡고 싸우며 작품 속에는 머스킷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이 소설을 삼총사로 번역한 이후 한국어 번역에서도 이를 따라서 같은 제목으로 쓰이게 되었다.
현재 삼총사는 단짝으로 지내는 세 친구를 의미하는 관용어로 널리 쓰이고 있다.
1625년 4월, 프랑스 남서부 가스코뉴 출신의 하급 귀족 다르타냥은 국왕을 지키는 총사대에 들어가기 위해 아버지가 총사대장 트레빌에게 써준 소개장만 들고 파리로 향한다. 하지만 여정의 도중에 여인숙에서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비웃는 남자와 결투를 하게 되고 그에게 아버지의 소개장을 빼앗기고 만다. 총사대장 트레빌을 찾아간 다르타냥은 소개장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를 총사대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마침 창 너머로 소개장을 빼앗아간 남자를 보게 된다. 그를 쫓던 다르타냥은 유명한 총사 아토스, 아라미스, 포르토스와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고 세 사람 각자와 그 날 오후 수도원 뒤뜰에서 결투를 벌이기로 약속한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있던 삼총사는 자신들이 결투 약속을 한 상대가 동일인물인 다르타냥이라는 사실에 놀란다. 다르타냥이 아토스와 막 결투를 하려는 순간, 그 자리에 총사대와는 견원지간인 추기경 리슐리외의 근위대가 나타난다. 근위대는 삼총사와 다르타냥이 나라에서 금한 결투를 하려 했다며 그들을 체포하려 들고 다르타냥은 삼총사의 편에 가담해 근위대와 싸운다. 다르타냥이 근위대의 우두머리 쥬사크에게 치명상을 입힌 덕분에 결투는 삼총사 측의 승리로 끝난다. 이 일을 계기로 다르타냥은 삼총사에게서 동료로 인정받은 것은 물론, 트레빌과 루이 13세도 다르타냥을 눈여겨 보게 된다.
한편 견습 총사로 임명된 다르타냥은 리슐리외의 근위대에게 쫓기던 하숙집 주인 보나슈의 아내 콘스탄스를 구해주게 되고, 젊고 아름다운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다. 왕비 안 도트리슈의 시녀인 콘스탄스는 다르타냥에게 왕비가 리슐리외의 음모로 위험에 빠졌음을 밝힌다. 남편 루이 13세와 사이가 좋지 않은 왕비는 영국의 재상 버킹엄 공작과 사랑에 빠졌고 이 사실을 안 추기경은 왕비를 궁지에 몰려 하고 있었다. 왕비는 자신을 만나러 온 버킹엄 공작에게 애정의 표시로 생일날 남편에게서 받은 12개의 다이아가 박힌 목걸이를 선물한다. 추기경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루이 13세를 부추겨 대무도회를 열게 하고, 루이 13세는 왕비에게 무도회에 그 다이아를 장식하고 나오라고 명한다. 왕비가 콘스탄스를 의지할 것을 꿰뚫어본 리슐리외는 콘스탄스의 남편 보나슈를 매수하고, 콘스탄스는 다르타냥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다르타냥은 영국으로 건너가 버킹엄 공작에게 다이아를 찾아오라는 밀명을 받고 삼총사와 함께 런던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리슐리외가 보낸 부하들의 습격으로 총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다르타냥만이 영국에 도착한다. 버킹엄 공작을 만난 다르타냥은 왕비의 처지를 설명하고 다이아를 돌려주길 부탁한다. 그러나 열두 개의 다이아 중 두 개는 이미 리슐리외의 심복 밀레디에게 도둑맞은 뒤였다. 버킹엄 공작은 유능한 보석 장인들을 수소문해 원래의 것과 똑같은 다이아를 갖추어 다르타냥에게 건네주고 말과 배를 준비해 다르타냥을 파리로 돌려보낸다. 무도회 당일, 루이 13세는 왕비에게 왜 자신이 준 다이아를 하고 나오지 않았느냐고 묻고 추기경이 왕비의 부정(不貞)을 폭로하지만 왕비는 완벽한 다이아를 장식하고 나타난다. 명예를 지킨 왕비는 다르타냥에게 감사의 표시로 반지를 하사한다.
다음날 밤 콘스탄스와 밀회를 하기로 한 다르타냥은 그녀가 리슐리외의 명으로 로슈포르 백작(다르타냥에게서 아버지의 소개장을 훔쳐간 남자)에게 납치되었음을 알게 된다. 다르타냥은 콘스탄스를 구하기 위해 왕비의 밀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흩어져 있던 삼총사를 불러모으고 파리로 돌아오는 길에 영국 귀족 윈터 경을 알게 된다. 그는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관련해 동생의 재산과 작위만을 물려받고 사라진 여인 밀레디를 의심하고 있었다. 다르타냥은 밀레디의 어깨에 남은 백합 낙인을 발견하게 되고 그녀가 예전에 아토스가 이야기했던 전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콘스탄스는 왕비에게 구출되어 수도원으로 피신하고, 리슐리외는 다르타냥에게 자신의 측근이 될 것을 제의하지만 다르타냥은 이를 거절한다.
한편 라 로셀에서는 버킹엄 공작의 지원을 받은 위그노의 반란이 일어나고 다르타냥과 삼총사도 그 진압을 위해 출전한다. 리슐리외는 밀레디에게 버킹엄 공작 암살을 명하고 그 대가로 '이것을 가지고 있는 자는 어떤 행위를 해도 좋다'는 권한을 부여한 편지를 써 준다. 아토스는 밀레디를 만나 그녀를 위협해 편지를 빼앗고 그것을 다르타냥에게 건네준다. 위그노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다르타냥은 리슐리외의 추천으로 정식 총사가 되고, 윈터 경에게 버킹엄 공작의 암살 위험을 알린다. 윈터 경은 밀레디를 붙잡아 런던 탑에 가두지만 밀라디는 존 펠튼을 유혹해 버킹엄 공작의 암살에 성공한다.
영국으로 돌아온 밀레디는 수도원에 몸을 숨겼다가 그곳에서 콘스탄스와 마주친다. 밀라디의 정체를 모르는 콘스탄스는 그녀에게 독살당하고 뒤늦게 도착한 다르타냥은 복수를 다짐한다. 다르타냥 일행에게 붙잡힌 밀레디는 죽음으로 그간의 악행에 대한 죗값을 치른다. 리슐리외는 로슈포르 백작을 보내 다르타냥을 체포하지만 다르타냥은 예전에 리슐리외가 밀레디에게 써 주었던 '이것을 가지고 있는 자는 어떤 행위를 해도 좋다'는 편지를 내보인다. 리슐리외는 다르타냥의 능력을 인정해 그간의 행동을 사면하고 총사대 부대장 임명장을 써 준다.
가스코뉴 출신의 젊은 귀족. 용감하고 정의로운 성격의 소유자다. 가공의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17세기에 활약한 프랑스 군인 달타냥 백작 샤를 드 바츠-카스텔모르나 영국 귀족 조지 공작이다.
삼총사 중 한 사람.
삼총사 중 한 사람.
삼총사 중 한 사람.
추기경이자 삼총사를 막으려한다
리슐리외의 심복이자 릴의 형사의 동생의 아내이자 아토스의 아내이자 윈터경의 아내.
리슐리외의 심복.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의 아내.
영국의 재상으로 찰스 1세의 총신.
총사대장.
다르타냥의 하숙집 주인 보나슈의 아내로 왕비의 의상 담당 시녀.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May God himself, the God of peace, sanctify you through and through. May your whole spirit, soul and body be kept blameless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영과 혼과 몸이 흠이 없게 보존되기를 원한다고 권면합니다.
영이 흠이 없다는 것은 거룩한 영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혼과 몸이 흠이 없다는 것은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쉬운 예를 들어봅시다.
자동차 보험에 가입하는 것은 자동차 사고가 일어났을 때 도움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동차 사고가 일어나서 보험에 가입하여 도움을 받게 된 것과 자동차 사고가 일어나지 않아 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과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까?
제 생각은 보험료를 매년 지불하지만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자동차 보험을 영과 혼과 육에 적용한다면 어떨까요?
첫째 흠 없는 영
거룩한 영과 더러운 영 중에서 어느 영의 지배를 받는 것이 흠 없는 영이 될 수 있을까요?
당연히 거룩한 영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일서 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ψ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5590
목숨(마2:20, 막8:35, 롬11:3), 영혼(마10: 28, 눅12:20, 고후12:15), 마음(마11:29, 막14: 34, 행14:22), 생명(막3:4, 요12:25, 행20:10), 힘(막12:33), 뜻(행4:32), 인(행27:37), 영(고전15:45), 혼(살전5:23, 히4:12), 명(벧전3:20), 심령(벧후2:8), 사람(행7:14, 롬13:1).
마태복음 2:20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8: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로마서 11: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σῶ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983
영적 존재에 속하는 것들은 "하나님" "천사" "사탄" 그리고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영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육체"를 갖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천사와 사탄은 영적 존재이므로 육체가 없습니다.
유일하게 사람만이 육체를 갖고 있는 불완전한 영적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사람을 설명할 때 어떤 학자는 사람은 "육체"와 "영혼"을 갖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을 "이분법"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학자는 사람은 "영"과 "혼"과 "육체"를 갖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을 "삼분법"이라고 합니다.
이분법이 맞는가?
아니면 삼분법이 맞는가?
서로 논쟁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견해는 두 설명이 모두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기능적으로 설명할 때는 삼분법이 맞습니다.
영의 기능, 혼의 기능, 육체의 기능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존재론적으로 설명할 때는 이분법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죽음이란 곧 이분법에 따라(존재론적 이론)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어떤 질병에 걸리지도 않고 건강하게 지내다가 주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사고와 사건에 의해서 육체의 장애를 갖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모든 사람들이 "영체의 몸" 즉 "부활체"로 일어나므로 세상에서 가졌던 장애는 없어질 것입니다.
영과 혼과 육이 흠없이 보존되기를 원한다는 말씀은 일생동안 내 몸에 어떤 사건과 사고가 없이 건강하게 보존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여
항상 강건하여 주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온전한 영과 혼과 몸이을 유지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가 맡긴 모든 역사
평강의 하나님
- 이 문구는 바울 서신의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롬 15:33;16:20;빌4:9;고후 13:11;히 13:20). 바울이
하나님을 '평강'(*, 에이레네스)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과 자신
사이에 평화를 이룩하신 평화의 근원이시기 때문이었다(골 1:20).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 '온전히'의 헬라어 '홀로텔레이스'(*)는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됨을 가리킨다. 이러한 '성화'(sanctification)는 내주(內住)하는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4:8;롬 15:16).
영과 혼과 몸 - 인간의 보편적 구성 요소와 관련되는 본문은 소위 말하는 삼분설 또는 이분설 논쟁이 제기되는 구절이다. 우선 몸은 순수하게 물질적인 부분, 즉 육신을 가리킨다. 다만 여기서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영'(*, 프뉴마) 과'혼'(*, 프쉬케)의 차이점이다. (1) 삼분설. 그리스 계통의 교부들(Irenaeus,Chrysostom)은 영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인간의 이성적 부분, 즉 양심이나 의지와 관련되어 있는 것에 반해, 혼은 동물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될 수 있는 생명이나 감정, 감각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하였다. (2) 이분설. 성경에는 인간의 본성을 거의 대부분 혼과 몸(창 2: 7; 마 6:25), 영과 몸(전 12:7;고전 5:3, 5)으로 구분하여 이분법적인 분류법을 말함으로 혼과 영을 혼용하고 있다. 바울은 본절에서 인간의 본성을 영과 혼과 몸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것은 당시 그리스의 사고 방식에 젖어있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삼분법적인 표현을 사용했거나 또는 수사학적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서, 실상은 성도들의 전인격(全人格)을 가리킨 말이다. 이의견에 대해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동의한다(Morris, Bruce, Milligan).
'육신에 있는 자냐 영에 있는 자냐(롬 8:8-9)'의 기준은, 거듭났느냐 아니냐로 결정됩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한 육으로 난 것과 영으로 난 것의 기준(요 3:6)이나 천국 입성의 자격도, 성령으로 거듭났느냐 여부에 있습니다(요 3:5). 바울 사도가 에서(Esau)를 '육체를 따라 난 자'로, 야곱(Jacob)을 '성령을 따라 난 자'로 구분한 기준도 거듭남 이었습니다(갈 4:29).
영역본 성경은 거듭나지 못한 '육신에 속한 자'를 자연인(natulal man)이라 번역했고(고전 15:46), 윌리엄
쉐드(William G. T. Shedd, 1820-1894) 역시 그의 명저 "Sernons to the Natulal
man"에서, 육신에 속한 자를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the natulal man)으로 풀이했습니다.
식품은 자연산 그대로가 좋지만, 사람은 아담으로부터 난 자연산 그대로는 부패하고 더럽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부정한 짐승의 상징으로 언급한 돼지는(마 7:6), 거듭나지 못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유대인처럼 율법에 완벽한 이들이 없다고 공인되던 시대에, 그들이 부정함의 상징이 된 것은 파격입니다. 이는 부정하고 정결함의
기준이 인간 윤리가 아닌 거듭남의 여부에 달려있음을 말해주며, 기독교 윤리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새 기준의 출현이었습니다.
성경이 육신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한 것도(롬 8:8),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행위 이전에 존재
자체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는(롬
9:11) 원천적 이유 외에, 성령을 따라 났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이는 기독교 인간론이 행위론적(behavioral) 이전에 존재론적(ontological)이며 관계론적(relational)이라는 확증이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물이고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과 직결됩니다.
인간은 고결한 덕행자냐 아니냐를 불문하고, 존재론적(ontological)으로 다시 나지 않는 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썩은 오물은 그 악취와 추한 몰골만으로도 능히 사람을 불쾌하게 하듯,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더 핑크(A. W. Pink, 1886-1952)가 "인간의 행위적인 죄는 부패한 인간 존재에서 나온 열매일 뿐,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근본 요인은 타락한 인간 존재 자체"라고 한 것은 올바른 지적입니다.
"인간은 교양이 있고 교육받고 세련되었고 종교적이기 조차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심히 부패'하였다(렘 17:9).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은 하나도 없기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다 타락한 자들이고 인간의
존재의 모든 부분은 죄로 인해 오염돼 있다. ... 그의 성향은 변질되어 버려서 그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시는
것을 미워한다.
그것은 몇 개의 잎사귀가 시들어버린 것이 아니라 나무 전체의 뿌리와 가지까지 썩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 인간 안에는 그
존재의 근원과 기질 안에 본래부터 부패되고 원래 악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그 열매에 지나지 않는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을 뿐더러, 그 자신도 하나님을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롬 3:10)"는 말씀은 다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소극적인 무관심(무지)을 넘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롬 1:28)' 의도적 반감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40)'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표하지 않는 단순 무관심자는 기독교의 적대자가 아니라는 낙관론을 폅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마 12:30)"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사실 그들의
무관심은 포장된 적대감의 표출입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우리 의식 세계는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대해선 의도적으로 눈을 감는
속성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께 대해 무관심(무지)으로 일관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책망대로 미물 짐승보다 못합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사
1:3)."
성경이 하나님 무지(무관심)에 대한 인간의 변명이 심판 때에 그를 변호해주지 못할 것이라고 한 것은(롬 1:20), 그들의
숨겨진 적개심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직설 화법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을 심판받을 죄로
선언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 1:8)." 그들의 하나님 무지가
비의도적이고 소극적인 것이 아닌, 부러 잊으려는(willingly are ignorant, 벧후 3:5) 의도적인 것임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진주와 돼지 비유에서 사람이 진주를 던지면 돼지가 그것을 발로 밟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던져준 사람에게 덤비기까지
하는 것은(마 7:6),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무관심 뒤에 적개심이 도사리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 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드러내는 사람들의 냉소와 무반응은,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숨겨진 적개심의 표출입니다. 복음 전도자나 설교자들이 전도를 녹록한 태도로 접근할 수 없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반감으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이
하나님을 미워한 데서 연유됐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그는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이유 역시, 그들이 자신에게 속한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
동생 아벨을 형 가인이 돌로 쳐 죽인 것은, 가인을 미워해서라기보다는 아벨이 믿는 하나님을 미워한 때문입니다. 동생의 제사는
받고 자신의 제사는 안 받는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 동생을 향한 질투심으로 나타났습니다(창 4:3-8). 그리스도를 전하는
스데반에게, 유대인들이 귀를 막고 달려들어 돌로 쳐 죽인 것은 스데반이 전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었습니다(행
7:57).
그리고 성경이 육신에 속한 자를 '육신을 좇는 자(롬 8:5)'로 지칭하는 것은, 그가 유별나게 저급한 육욕을 좇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타고난 본성에 충실한 거듭나지 못한 모든 자연인을 뜻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신령한 것에 대한
감각과 갈망이 없기에 본성적인 것만을 쫓기 마련입니다.
마치 사자가 풀을, 돼지가 진주를, 까마귀가 깨끗한 고기를 좋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창 8:7-9). 망령된
에서가 장자의 기업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는 것은(창 25:33-34), 영적인 것의 가치를 모르고, 땅의 것만 탐하는 거듭나지
못한 자의 속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어서 거듭나지 못한 자의 '육신의 생각'과 그것이 갖다 주는 '사망'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성경이 육신의 생각이
사망이라고 한 것은(롬 8:6),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의 생각의 허망함(엡 4:17)과 거기에 따르는 심판을 말한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의(엡 2:1) 모든 생각은 죽음같이 허망하고, 그 허망한 생각이 그를 사망에 빠뜨립니다.
성경이 죄 된 행실을 죽은 행실과 동일시하고 있음도(히 6:1; 9:14) 같은 맥락이며, 그 생각의 내용은 선악을
불문합니다. 악하고 더러운 생각뿐만 아니라, 불쌍한 자들을 향한 선한 연민의 마음도 사망의 범주를 벗어나게 못합니다.
이는 그 선한 마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동기의 발로가 아닌, 자연인의 본성과 자기 의(義)의 발로에서이고, 선행의
원천적인 힘도 육신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선악을 불문하고 본능으로 행하는 모든 것을 멸망 받을 짓거리로 폄하합니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유 1:10)."
계신대학원대학교 설립자 이병규 박사가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을 해석하여-유별나게 짐승 같은 추잡한 속성을 쫓는
것이 아닌-짐승과 같이 오관(五官)으로 느껴지는 본능 따라 행하는 자기 자랑, 자기중심, 자기만족을 위해 하는 것이라 하고,
'이성'을, 중생한 영혼이 사용하는 선한 기관으로 풀이한 것은 적절합니다.
죄인은 악을 행하면서도 죄를 쌓을 뿐더러 선을 행하면서도 죄를 쌓습니다. 이는 그의 선행 동기가 자기 본성과 의의 구현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고 한 것도 같은 관점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참된 행위를, '성령으로 행하며 예수를 높이고 육체의 힘으로 하지 아니하는 것'이라 규정했습니다(빌
3:3). 이 기준에 맞출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거듭난 사람뿐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이, 다만 거듭나지 못한 자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임에도 그 안에 남아있는 옛사람이 내는
생각도 육신의 생각입니다. 베드로가 분노하며 말고의 귀를 자른 것(마 26:51), 외식(갈 2:13-14), 십자가를 지실
예수님의 대업 앞에서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것(마 16:22-23) 역시 다 육신의 생각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어 갈라선 것(행 15:39),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작정한 연보를 떼어먹은 것(행 5:1-10),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파당을 짓고 경쟁심과 교만에 빠진 것(고전 1:11-13)도 다 육신의 생각입니다.
그런 육신의 생각들로 인해 사망의 악취를 풍겨내며 타인을 실족케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거듭나지 못한 자들의 육신의
생각처럼 사망의 판결을 받게 하지는 않습니다. 거듭난 자들에게는 성화의 판결은 있겠지만 더 이상 칭의의 심판은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갖는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 된다는 것도(롬 8:7) 말하고자 합니다. 죄로 죽은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고후 10:5). 성경이 사람의 계획하는 바가 어릴 때부터 악하고(창 8:21),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하다(창 6:5)는 말은, 단지 인간은 어려서부터 도덕적으로 부패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담의 원죄를 유전 받은 인간은 날
때부터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존재로 난다는 뜻입니다.
존 번연(John Bunyun, 1628-1688)도 같은 견해를 피력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원수가 되나니(롬 8:7; 골 1:21)'는, '본래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원수이고 그의 마음에서 원수 된 자'라는 뜻이다."
나아가 거듭나지 못한 자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롬 8:7)'에 굴복할 수 도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법은 단순히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구원 얻는 '믿음의 법(롬 3:27)'이 그 핵심이며, 오직 성령으로만 받아들여집니다(고전
12:3). 거듭나지 못한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고전 2:9). 동물이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없듯, 성령 없는
자연인에게는 믿음의 법이 어처구니없게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오직 예수가 위하여 죽은 구원 예정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 예수 믿고 구원 얻는 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반면 영의 사람이 갖는 '영의 생각(롬 8:6)'도 있습니다. 이는 타계주의자들의 세속사를 초탈한 생각, 혹은 신비주의자들의
소위 탈혼(입신) 상태에서 나오는 계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는 자연인의 본성에는 없는, 성령의 거듭남으로 우리 안에 부어진
하나님을 향한 생각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가 정의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영적인 사람들이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것을 영혼이 의식하게 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마음에 전적으로 새로운 지각이나 감각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 참된 성도는 새로운 영적 지각과 감각의 원리가 생긴다, 그리고 참된 성도는 이 새로운 감각으로 영적이고 신령한
것들을 알게 된다."
존 오웬(John Owen, 1616-1683) 의 견해 역시 같은 취지로 보입니다.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마음 자세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마음 상태이다."
'영과 영의 생각'에 대한 그의 견해도 탁월합니다. "성경에서 영은 '성령(롬8:9)'이나 '성령에 의해 신자 속에 생성되는
새로운 영적 생명(요 3:6)'을 뜻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영의 생각이란 '신자 속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영적 생명의
활동'을 뜻한다. 이 새로운 영적 생명은 신자가 영적인 생각을 하게하며 기뻐하게 한다. 회심하기 전에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불신자는 땅의 일들을 좋아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일들을 우선시한다."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나고 하나님과 화목한 영의 사람의 생각에는 생명과 평안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는 마인드
콘트롤(Mind-Control)이나 종교 수양으로 만들어진 심리학적인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화평과 초자연적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이루어진 하나님나라의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할렐루야
첫 번째의 책은 정신치료 전문가 쓴 “감사의 힘”이라는 책이다.
감사는 마치 전기와 같다.
전기는 단순히
어둠을 물리치는 데만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용도에서 힘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감사도 마찬가지다.
감사한 마음, 감사한
생각이 막강한 에너지가 된다. 힘의 원천이 된다.
두 번책은 하바드의과대학 교수가 쓴 “희망의 힘”이라는 책이다.
이 의사는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얻은 결과를 책으로
썼다.
병이 회복될 거라 스스로 믿는 환자들에게 실제로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희망이라는 감정,
희망의 생각이 갖는 치유력의 진정한 의미와 효능을 알게 된다.
세 번째의 책은 조엘 오스틴 목사님이 쓴 책인데 미국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교회의 젊은 담임목사이다.
40대 초반의 젊은 목사이다.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다.
긍정적인 생각과 긍정적인 관점이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키는 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베스트셀러 중에 하나이다.
감사의 힘, 희망의 힘, 긍정의 힘.
이 세 권의 공통점이 있다면 책 제목에 힘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고, 우리의 생각과 연관된
말이다.
감사하는 마음, 감사한 생각. 희망을 갖는 마음, 희망의 생각. 긍정하는 마음 긍정적인 생각. 감사하는 마음이 전기와
같이 단순히 불을 밝혀줄 뿐만 아니라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 이것은 희망도 마찬가지이고, 긍정적인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이같이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모든 일의 시작은 작은 생각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있을 때에 뱀이 유혹한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생각이 결국에는 선악과를 따 먹게 되었고,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부터 쫓겨나는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이스라엘 백성이 망하게 되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다. 이렇게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그 시작이 가룟 유다의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성공적인 삶, 승리의 삶, 축복된 삶을 살려면 먼저 생각의 축복부터 받아야 한다. 왜냐면 생각은 운명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인격을 낳고, 인격은 결국 운명을 낳는다.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는가? 작은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 생각은 운명의 씨앗이다. 교만의 씨앗을 심어 놓았기에 선악과를 따 먹고 결국에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 것도,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면 내가 쉴 방이 있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면 먹을 음식이 있는데 왜 내가 여기에서 주려 죽는가? 생각의 씨앗 때문에 아버지의 곁을 떠날 수도 있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올 수도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 생각의 축복을 받기 바란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있음을 가르쳐 준다. 우리 속에 있는 육신의 생각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과 남을 미워하는 생각. 이러한 육신의 생각이 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사랑 희락 회평 오래 참음, 자비와 양선과 충성 온유와 절제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천사와 같은 생각도 있고 악마와 같은 생각도 있다. 살인자로 사형을 당하는 사람에게도 천사와 같은 생각이 있고, 성자로 인정받은 사람에게도 악마와 같은 생각이 있다. 우리 속에는 두 가지 종류의 생각이 있다. 즉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다. 바울은 솔찍하게 고백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내 속에 두 마음이 있음을 바울이 고백한다. 이 마음은 곧 우리 모두의 같은 마음이다.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은
마치 버섯과도 같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울 때에 먹어도 되는 버섯과 독버섯의 차이점을 배웠다. 대체로 독버섯은 보기에 예쁘게
생겼다. 아름답게 생겼다. 먹음직스럽게 생겼다. 그러나 그 독버섯을 먹으면 죽는다. 먹어도 되는 버섯은 화려하지 않다. 아름답게
생기지도 않다. 그냥 그렇게 생겼다. 그것은 먹어도 된다.
대개 육신의 생각은 우리를 유혹하는 마력이 있다. 우리를 끌어 당기는 힘이 있다. 라스베가스에 가보라. 그렇게 화려할 수가 없다.
정말로 별난 세상이다. 멋진 조명으로 사람들을 끌어 당긴다. 그러나 투기하는 노름에 인생을 망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말씀하셨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찾는 자가 많다. 문도 크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은 그 결과
죽음이다. 영의 생각은 문도 좁다. 힘이 든다. 사람들이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결과는 생명과 평안이다. 다음 말씀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이같이 육의 생각은 죽음을 가져다 주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 사람들끼리는 자기의 생각을 감출 수 있다. 그리고 서로의 생각을 모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한 농부가 산속에서 거대한 곰을 만났다. 그는 공포에 질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이 곰의 마음을 순하게 변화시켜 주세요” 농부가 한참 기도를 하고 눈을 떴다. 그런데 곰도 마주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농부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된 것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이렇게 빨리 기도응답을 하시다니….내 기도가 곰의 마음을 감동시켰구나.” 그때 곰이 기도를 마치고 농부를 그윽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지금 무슨 기도를 했는지 전혀 모른다. 나는 다만 음식을 앞에 놓고 식사기도를 했을 뿐이다.” 농부는 곰의 속마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가끔 모두가 자신과 똑같은 마음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같이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모르고 살 때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주님은 우리의 생각을 알고 계신다.
우리는 어떤가? 영의 생각을 할 때보다는 육신의 생각을 할 때가 훨씬 더 많다. 하나님과 원수되는 생각을 할 때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하는 생각을 할 때가 훨씬 더 많다. 내 자신의 육신의 생각 때문에 후회하고, 후회하고,
이제는 똑같은 죄를 범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후회하고, 후회하면서 시간은 자꾸 흘러간다.
내가 스스로 결심한다고 육신의 생각에서부터 영의 생각으로 바뀔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 말씀인가? 내가 결심한다고 육의 생각을 죽이고 영의 생각을 할 수 있다? 천만에
말씀이다.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셔야 육의 생각을 제어할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 이 시대에 하나님을 믿고 사는 일이 얼마나 힘이든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때로는 사람을 속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세상이 주는 다양한 유혹 때문에 우리의 생각이 흔들릴 때도 많이 있을 것이다. 나의 의지로 내 영의 생각을 할 수 있는가? 어림도 없는 말이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목숨걸고 예수를 전한 사람이다. 순교한 사람이다. 예수에 완전히 미쳐서 살던 바울도 “누가 나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수 있으랴?” 그렇다면 우리 같은 사람은 어떻겠는가? 내가 결심한다고 육신의 생각에서 영의 생각으로 바꿀 수 있겠는가? 잠깐은 될지 몰라도 나도 모르게 육신의 생각으로 치우치게 된다.
바울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느니라.” 여기에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 있다. “내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옵소서.” “내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옵소서.” “내 속에
성령님이 거하시옵소서.” 본문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진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지만, 주의 영이 내 속에 임하셔서 영의 생각을 하면 생명과 평안을 우리에게 주신다. 얼마나 감사한가? 얼마나 감격적인 말씀인가?
한 늙은 인디언 추장이 자기 손자에게 자신의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큰 싸움’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싸움은 또한 나이 어린 손자의 마음속에도 일어나고 있다고 하였다. 추장은 궁금해 하는 손자에게 설명했다. “얘야, 우리 모두의 속에서 이 싸움이 일어나고 있단다. 두 늑대간의 싸움이란다.” “한 마리는 악한 늑대로서 그 놈이 가진 것은 화,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거만, 자기 동정, 죄의식, 회한, 열등감, 거짓, 자만심, 우월감, 그리고 이기심이란다. 다른 한 마리는 좋은 늑대인데 그가 가진 것들은 기쁨, 평안,. 사랑, 소망, 인내심, 평온함, 겸손, 친절, 동정심, 아량, 진실, 그리고 믿음이란다.” 손자가 추장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추장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기지.”
우리 속에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날마다 내 속에서 싸움이 일어난다. 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우리는 영의 생각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에 합당한 환경을 만들자.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가? 왜 우리가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가? 왜 우리가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감사하는 생각을 하고, 희망의 생각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마치 내 속에서 싸우고 있는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 속에 임하셔서 영의 생각으로 생명과 평안이 있게 하옵소서.
인간은 광대한 우주 속에서 아주 유한하고 미약한 존재일 뿐 아니라 죄로 인해 심히 일그러진 존재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는 무한경쟁,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사회에 살면서 인간의 존엄성이 부정당하고 인간성이 파괴되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인간이 과학기술에 의해 인간 자신의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 인간 이후의 새로운 종, 즉 포스트휴먼(post-human)이 되고자 꿈꾸는 테크노피아의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성서의 인간 이해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본문 중)
『빅 히스토리』 표지.
데이비드 크리스천과 밥 베인은 공저 『빅 히스토리』에서 빅뱅에서 현재까지의 역사를 아우르는 ‘빅 히스토리’(거대사)란 개념하에, 천문학, 물리학, 지질학, 생물학, 인류학, 역사학 등의 모든 학문을 융합하는 포괄적 학문을 수립하고자 시도한다. 크리스천과 베인에 따르면 빅 히스토리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과 같이 되었으며, 그 이야기 속에 우리는 어디에 위치해 있고,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다.”
크리스천과 베인은 137억 년 우주의 역사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특징을 가진 복잡한 것들이 점진적으로 출현했음을 지적하면서, 이 복잡성의 증대 과정을 여덟 가지 임계국면 또는 전환점을 통해 설명한다. 첫 번째는 빅뱅(137억 년 전), 두 번째는 별의 출현(135억 년 전), 세 번째는 새로운 원소의 출현(135억 년 전), 네 번째는 태양계와 지구의 생성(45억 년 전), 다섯 번째는 지구상의 생명의 출현(38억 년 전), 여섯 번째는 집단학습(20만 년 전), 일곱 번째는 농경(1만 1000년 전), 여덟 번째는 근대 혁명(250년 전)이다.
이 여덟 가지 임계국면 가운데 특히 지구상의 생명의 출현과 인간의 출현은 가장 새로운 신기원적 전환점이다. 크리스천은 생명의 출현을 가능케 하는 정교한 화학작용이 일어나게 한 지구의 골디락스 조건으로서, 첫째, 지구가 유기체 생명에 필요한 원소들(탄소, 수소, 산소, 질소)을 지닌 암석 행성이라는 점, 둘째, 지구가 태양과 지구 핵으로부터 적절한 에너지를 공급받고 있다는 점, 그리고 세 번째, 지구에 물이 있다는 점을 든다. 지구에서 생명이 출현한 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약 20만 년 전에 유인원으로부터 인간 종인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 출현했다. 20만 년 전과 6만 년 전 사이에 시작된 집단학습의 역사는 바로 인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집단학습은 인류가 오늘날의 문명을 이루어낸 힘이다. 또한 근대 이후 글로벌 네트워크, 시장경제, 에너지 사용의 증대는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것은 인류가 생물권 전체를 지배하고 변화시키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가 시작된 것을 의미한다. 이제 인류는 지구의 생물권 전체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미래의 지구 전체의 운명이 인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나 광대한 우주의 ‘빅 히스토리’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티끌과 같이 지극히 미미한 존재다. 인간이 사는 행성인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는 지름이 약 10만 광년 되는 은하계의 중심에서 약 3만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점과 같이 작은 부분이다. 은하계에는 태양계와 같은 4천억 개의 항성과 성단 및 성간 물질이 있으며, 우주에는 은하계와 같은 천억 개의 은하가 있다. 우주는 빅뱅으로 탄생한 이래 계속 팽창해 왔고 지금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이 광대한 우주 공간의 한 티끌과 같은 지점에 찰나와 같이 짧은 순간 존재하다 사라지는 인간의 존재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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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귀한 존재라고 말씀한다(창 1:27). 시편 저자는 인간의 존귀함을 이렇게 노래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시 8:4-6). 그런데 과연 인간은 성서의 저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존귀한 존재인가? 인간은 광대한 우주 속에서 아주 유한하고 미약한 존재일 뿐 아니라 죄로 인해 심히 일그러진 존재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는 무한경쟁,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사회에 살면서 인간의 존엄성이 부정당하고 인간성이 파괴되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인간이 과학기술에 의해 인간 자신의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 인간 이후의 새로운 종, 즉 포스트휴먼(post-human)이 되고자 꿈꾸는 테크노피아의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성서의 인간 이해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전통적으로 교회는 인간의 실존을 네 단계로 구별해서 이해해 왔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본래적 인간, 타락 이후의 죄악된 인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인간, 그리고 종말론적 미래의 천국에서의 영생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단계들은 인류 역사 속에서 연대기적 순서로 발생하는 인간 실존의 단계들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의 생의 과정에서 실존적으로 경험되는 단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실존 안에서 이 단계들은 단지 통시적인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가 아니라 공시적으로 경험된다. 즉 우리의 개인적 실존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 죄, 구원, 그리고 영생에 대한 소망은 동시적으로 현존하며 함께 경험된다.
인간 창조에 대한 성서의 묘사는 각기 별개의 근원으로부터 온 육체와 영혼이 결합함으로써 한 인격이 형성되었다는 이원론적 인간론보다는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생명의 호흡(영)에 의해 육체가 생명력 있는 생명체가 되었으며, 이 과정에 영혼 또는 정신이 육체로부터 창발되었다는 의미에서 현대과학의 창발적 인간론과 공명한다고 할 수 있다.(본문 중)
윤철호(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조직신학)
인간은 다차원적인 존재다. 한 인간 존재는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종교적 차원으로 구성된다. 이 다차원 가운데 물리-화학-생물 차원이 육체적 차원이라면, 심리-사회-종교 차원은 정신적 또는 영적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이분법 도식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천성적으로 두 본성, 즉 육체적 본성과 영적 본성을 지니고 있다. ‘본성’은 영어로 ‘nature’로 번역되는데, 인간의 본성은 단지 정신 또는 영혼과 대립되는 물질이나 육체로서의 ‘nature’를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nature)은 물질적, 육체적 요소와 정신적, 영적 요소 둘 다를 포함한다. 이 점이 인간의 본성(nature)이 인간이 아닌 다른 자연, 즉 돌이나 식물이나 동물의 본성(nature)과 다른 점이다. 즉 다른 자연의 본성(nature)은 정신 또는 영혼을 포함하지 않는 데 반해, 인간의 본성(nature)은 정신과 영혼을 포함한다. 정신 또는 영혼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독특성이다.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서구 기독교는 고대교회 이래 인간의 인격이 대립적이고 계층적인 관계 안에 있는 육체와 영혼이라는 두 실체로 구성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육체는 생멸(生滅)하지만, 영혼은 불생(不生), 불사(不死), 불멸(不滅)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플라톤적 이원론을 거부하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통일체로 이해했다. 즉 인간의 영혼은 질료인 육체에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전인적 인간을 만드는 생명의 원리로서, 육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그리고 플라톤과 같이, 아퀴나스도 영혼은 육체 없이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죽지 않고 불멸한다고 보았다.
영혼과 육체를 서로 분리된 두 실체로 이해하는 헬레니즘적인 이원론적 인간 이해는 영혼과 육체를 불가분의 관계 안에서 이해하는 전일적인 성서적, 히브리적 인간 이해와 상충된다. 창세기의 인간 창조 이야기에 따르면,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창 2:7). 이 구절에서 “땅의 흙”은 물질을 의미하고, “생기”는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느샤마, 니쉬마트 하임, breath of life) 즉 영을 의미하며, “생령”은 살아있는 존재(네페쉬 하야, living being)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은 아담의 몸에 생명의 호흡 즉 영을 불어넣으니 인간이 살아 있는(animated, enlivened)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 창조에 대한 성서의 묘사는 각기 별개의 근원으로부터 온 육체와 영혼이 결합함으로써 한 인격이 형성되었다는 이원론적 인간론보다는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생명의 호흡(영)에 의해 육체가 생명력 있는 생명체가 되었으며, 이 과정에 영혼 또는 정신이 육체로부터 창발되었다는 의미에서 현대과학의 창발적 인간론과 공명한다고 할 수 있다.[1]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 전시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중 아담 창조 부분.
인간은 육체적으로 다른 동물들과 유사한 생물학적 구조와 본성을 공유한다. 인간과 침팬지의 DNA는 98%가 동일하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정신 또는 영혼 안에서 종교성 즉 영적 본성을 갖는다. 육체적 본성은 몸의 출생과 더불어 주어진 본성이며, 영적 본성은 몸의 성장과 더불어 정신이 성숙해감에 따라 창발되는 본성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찾는 영적 본성, 즉 종교성을 갖게 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거나 본성과 모순되는 부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본성적 현상이다.
몸이 땅의 흙으로부터 나오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로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생물학적 존재다. 현대 과학은 인간의 인격이 생물학적 요인 특히 유전자에 의해 매우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주었다. 유전자는 생명 정보로서 DNA 복제를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그러나 생물학적 요인에 의해 인간의 인격이 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인간을 DNA에 의해 통제되고 결정되는 기계로 본 것은 지나친 환원주의적 사고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실상 도킨스 자신도 인간 존재와 행동이 전적으로 생물학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에게 관대함과 이타주의를 가르침으로써 이기적 유전자의 지시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며 또한 기를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2] 이것은 사회적 차원을 포함하는 다차원적인 인간 인격이 생물학적 결정론에 전적으로 종속되지 않고 그것에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인간은 정신-육체적(psychosomatic) 존재로서, 정신이 육체적 요인에 의해 매우 심대한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신이 육체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단정하는 물리학적 또는 생물학적 환원주의는 잘못된 것이다. 모든 인간의 인격에 있어서 육체와 정신 사이에는 ‘아래로부터 위로’(bottom up)의 인과율과 아울러 ‘위로부터 아래로’(top down)의 인과율이 작용한다. 만일 위로부터 아래로의 하향식 인과율이 작용할 수 없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인간은 단지 육체의 욕구에 지배되는 짐승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적 요인에 의해 심대하게 영향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결정론적으로 지배되지 않으며, 오히려 육체적 요인을 통제하고 목적 지향적으로 인도하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정신적, 영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정신-육체적 존재로서 인간은 역설적인 존재다. 인간은 높은 도덕적, 종교적 특성을 발현하는 선한 행동도 할 수 있지만, 비도덕적, 악마적 특성을 발현하는 악한 행동도 할 수 있다. 통상적으로, 전자를 표현할 때에는 ‘영’이란 개념이 사용되고, 후자를 표현할 때에는 ‘육체’ 또는 ‘육신’이란 개념이 사용된다. 신약성서의 바울은 육신과 영을 날카롭게 대립시키면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롬 8:6)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여기서 ‘영’과 ‘육신’이란 개념은 한 인격을 구성하는 두 부분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는 두 관점을 가리킨다. 즉 ‘영’이란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가리키고, ‘육신’이란 세상 풍조를 따라 자기의 소욕대로 사는 삶을 가리킨다. 정신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이원론은 잘못된 것이다. 영혼에 의해 선한 인간이 되고 육체 때문에 악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선한 행동을 하든지 악한 행동을 하든지 모두 정신적, 영적 차원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의 악한 결정과 행동에 대해서, 단지 그러한 행동을 실행하는 육체가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통해 자신의 결정을 행동으로 옮기는 정신이 육체와 함께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 또는 영이 인간의 일차적인 주체성과 책임성의 자리이다.
우리
인간은 보이는 육체인 몸이 있는데 반하여, 우리 몸 안에는 보이지 않는 영의 영역이 내재하고 있다.
이러한 영의 영역은 하나님을
섬기려는 선한 영역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하나님을 거스리며 육신의 욕심만을 생각하는 육신의 영역이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을
보다 진실하게 믿고 섬기려는 사람들은 인간의 육체에 만족보다는 신령한 것을 사모한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은 물론, 믿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신령한 것보다, 육신의 욕심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다. 성령의 역사로 인한 은혜가 충만한
삶을 살기 보다는 육신의 안락함과 평안의 삶을 더 추구하는 자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로 인하여 육체의
욕심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는 상반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성령에 따라 살고
있다면 신앙인이나, 성령을 좇지 않는 삶을 산고 있다면 이는 불신앙인이라도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를
분명하고 단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육체의 욕심은 성령의 역사를 반대할 뿐만 아니라, 성령을 거스린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마태복음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거스리지 않기 위하여 성령을 받고 살아야 하며, 충만하여 성령을 따라가며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은 육체에
대한 욕심을 받아들일 수가 없고, 성령에 대한 욕구는 육체적인 삶에 만족하는 것을 용납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을 진실하고 바르게 믿는 사람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아무리 세월이 흘러 우리의 육신이 쇠잔하여 간다할지라도 우리의 속은 날이
갈수록 새로워지는 은혜를 덧입게 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이
해가 어김없이 또 지나가면서 한살에 더 나이가 들어, 우리의 육신은 조금더 약해진다.
나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흔히 말하기를 몸은 50대, 60대가 되어도 마음은 평생 20대로 사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역시 육체와
마음이 상반되는 삶을 사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 속으로 20대라 생각하드래도, 아무리 20대에
기억만이 있다하드라도, 우리의 육신의 연약해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이 갈수록 성령의 충만함을
따라 새로워진다는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기쁜 소식인 것이다.
또한 믿는 성도들은 우리의 심령에
성령에 접붙임을 받아, 우리의 타락된 본성에서 되돌려 올바른 삶을 살야야 한다.
아무리 여러분이 다시 새로워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을 따라가는 삶의 중심을 잃어버렸을 때에는,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는 죄악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삼키려 하기에
우리는 선과 악의 갈등 속에 자신을 포기하는 생각은 쉽게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이 선과
악의 갈등 속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성령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반드시 성령을 쫓아 행하여야 한다.
그래서 오는 본문은 말씀을
시작하면서 “너희는 성령을 쫓아 행하라”고 강경하게 권면하고 있다.
육체의 욕심을 버려야 한다
-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한다는 것이다.
육체란 의미는 사람의 몸, 혹은 육신이다.
육체란 어떤 것인가?
1. 바람같이 지나가는 것이다.
시편 78:39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
2. 풀의 꽃과 같은 것이다.
베드로전서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3. 자랑할 수 없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육체의 욕심이란 무엇인가? - 유혹의 욕심이다.
에베소서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육체의 욕심을 버린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1.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게 한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3. 경건된 삶을 산다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4. 몸된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육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골로새서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왜 육체의 욕심을 버려야 하는가?
1.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4: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2. 욕심은 죄를 낳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1:14-15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3. 썩어진 것을 거두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4. 사람의 정욕을 쫓지 않기 위해서다.
베드로전서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를 살게 하려 함이라
육체의 일을 경계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이곳에서 말하는 육체의 일이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육신적인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열심히 일할 것은 권면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11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심지어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명한다.
데살로니가후서 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육체의 일을 경계하지 말라는 뜻은 무엇인가?
이는
오히려 부패하고 타락된 성품의 소산으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 같은 것들을 금지하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들 대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는 것들로, 성경이란 거울에 비추어 볼 때에 죄로 규정된 더러운 것들이다. 이러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자기 멋대로,
마음대로 사는 것을 강하게 막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자신의 노력으로는 안되는 것이다.
사람의 지식으로, 사람의 방법으로는 물밀 듯이 밀려 들어오는 이러한 죄악을 막아낼 수가 없다. 자신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다.
반복되는 훈련을 통하여 금하려고 할진데, 조금의 도움을 될지 몰라도 이러한 15가지나 되는 죄의 종류들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디모데전서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먹고 마시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개혁하실 때까지 맡겨두신 것이나, 그 이외에는 우리의 방식으로는 찾을 수가 없다.
히브리서 9: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믿지 않는 자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이러한 15죄악들을 피할 수 없어도, 우리 믿는 성도들은 이러한 죄악 속에서 피할 수 있는 길은 육체의 일을 경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야 한다.
육체의 일을 경계하는 일이란 무엇인가?
1. 육체에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을 피하여야 한다.
에베소서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2. 육체에 정욕을 제어하여야 한다.
베드로전서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3. 육체에 남은 기간은 잘 이용하여야 한다.
베드로전서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성령을 좇아야 한다.
성령을 좇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의 생명을 능력으로 덧입기 위해서이다.
히브리서 7:16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성령을 좇으려면
1. 성령을 받아야 한다. 누가 성령을 주시는가?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 3: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2. 누구에게 성령을 주시는가?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3. 어디에 성령이 거하시는가?- 믿는 성도의 가슴 안에 계신다.
요한일서 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4. 어떻게 성령을 받는가? 안수할 때에 성령을 주신다.
사도행전 8: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5. 왜 성령을 주셨는가? 보증으로 주셨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린도후서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5. 언제까지 성령을 주시는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주신다.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6. 얼마큼 주시는가?- 풍성히 부어 주신다.
디도서 3: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성령을 좇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1.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고린도전서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2. 아름다운 것을 지키게 된다.
디모데후서 1: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3.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
갈라디아서 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4. 영생을 거둔다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성령으로 살아야 한다- 성령으로 행하여야 한다.
1. 하나님을 섬긴다.
히르비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2. 성령으로 기도한다.
유다서 1: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3. 성령의 은사를 소유하게 된다
고린도전서 12:8-9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4. 성령으로 봉사하게 된다
빌립보서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5. 속 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여 진다.
에베소서 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보다 구체적으로 성령의 열매들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성령에 의하여 거듭난 성품의 9가지 열매들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죄를 짓게 하는 "육체의 일들"인 15가지의 죄악과는 상반된 표현이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들은 성령의
은혜를 덧입어 말씀의 나무를 심었다면, 이제는 이 말씀의 나무에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1. 사랑
(1) 주님의 제자가 된다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2) 허다한 죄를 덮는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3) 행하는 것이다.
요이 1: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2. 희락, 기쁨
(1) 좋은 소식이다.
눅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2) 구하여야 한다.
요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3) 성령 안에 있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3. 화평
고전 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1) 이를 구하고 좇아야 한다.
벧전 3: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2) 힘써야 한다.
롬 14: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3) 의의 열매를 거둔다
약 3: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4. 오래 참음
(1) 참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롬 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 서로 용납하여야 한다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약속의 기업은 받는다
히 6: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5. 자비, 친절
(1) 주님께서 원하신다.
마 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2) 행하여야 한다.
눅 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이기 때문이다.
히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6. 양선, 선함
(1) 선함이 가득차야 한다
롬 15:1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2) 선에 속하여야 한다
롬 12: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3) 생명의 부활이 있다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7. 충성
(1) 작은 일에 충성하여야 한다
눅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2) 맡은 자들에게는 충성만이 요구된다
고전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충성하는 자들에게 직분을 맡기신다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8. 온유
(1)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여야 한다
딤후 2:24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약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3)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9. 절제
(1) 지식보다 절제가 앞서기 때문이다.
벧후 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2) 사단이 틈타지 못하게 함이다.
고전 7: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3) 이기기 위해서 절제하여야 한다
고전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오늘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성령을 충만히 받았다.
이제는 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분들이 되어야 한다.
바로 여러분들이 성령을 좇아 행하여 결실을 맺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May God himself, the God of peace, sanctify you through and through. May your whole spirit, soul and body be kept blameless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사람은 영적 존재라고 합니다.
영적 존재에 속하는 것들은 "하나님" "천사" "사탄" 그리고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영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육체"를 갖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천사와 사탄은 영적 존재이므로 육체가 없습니다.
유일하게 사람만이 육체를 갖고 있는 불완전한 영적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사람을 설명할 때 어떤 학자는 사람은 "육체"와 "영혼"을 갖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을 "이분법"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학자는 사람은 "영"과 "혼"과 "육체"를 갖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을 "삼분법"이라고 합니다.
이분법이 맞는가?
아니면 삼분법이 맞는가?
서로 논쟁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견해는 두 설명이 모두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기능적으로 설명할 때는 삼분법이 맞습니다.
영의 기능, 혼의 기능, 육체의 기능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존재론적으로 설명할 때는 이분법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죽음이란 곧 이분법에 따라(존재론적 이론)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어떤 질병에 걸리지도 않고 건강하게 지내다가 주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사고와 사건에 의해서 육체의 장애를 갖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모든 사람들이 "영체의 몸" 즉 "부활체"로 일어나므로 세상에서 가졌던 장애는 없어질 것입니다.
영과 혼과 육이 흠없이 보존되기를 원한다는 말씀은 일생동안 내 몸에 어떤 사건과 사고가 없이 건강하게 보존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여
항상 강건하여 주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온전한 영과 혼과 몸이을 유지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가 맡긴 모든 역사
평강의 하나님 - 이 문구는 바울 서신의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롬 15:33;16:20;빌4:9;고후 13:11;히 13:20). 바울이 하나님을 '평강'(*, 에이레네스)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과 자신 사이에 평화를 이룩하신 평화의 근원이시기 때문이었다(골 1:20).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 '온전히'의 헬라어 '홀로텔레이스'(*)는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됨을 가리킨다. 이러한 '성화'(sanctification)는 내주(內住)하는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4:8;롬 15:16).
영과 혼과 몸 - 인간의 보편적 구성 요소와 관련되는 본문은 소위 말하는 삼분설 또는 이분설 논쟁이 제기되는 구절이다. 우선 몸은 순수하게 물질적인 부분, 즉 육신을 가리킨다. 다만 여기서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영'(*, 프뉴마) 과'혼'(*, 프쉬케)의 차이점이다. (1) 삼분설. 그리스 계통의 교부들(Irenaeus,Chrysostom)은 영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인간의 이성적 부분, 즉 양심이나 의지와 관련되어 있는 것에 반해, 혼은 동물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될 수 있는 생명이나 감정, 감각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하였다. (2) 이분설. 성경에는 인간의 본성을 거의 대부분 혼과 몸(창 2: 7; 마 6:25), 영과 몸(전 12:7;고전 5:3, 5)으로 구분하여 이분법적인 분류법을 말함으로 혼과 영을 혼용하고 있다. 바울은 본절에서 인간의 본성을 영과 혼과 몸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것은 당시 그리스의 사고 방식에 젖어있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삼분법적인 표현을 사용했거나 또는 수사학적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서, 실상은 성도들의 전인격(全人格)을 가리킨 말이다. 이의견에 대해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동의한다(Morris, Bruce, Milligan).
'육신에 있는 자냐 영에 있는 자냐(롬 8:8-9)'의 기준은, 거듭났느냐 아니냐로 결정됩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한 육으로 난 것과 영으로 난 것의 기준(요 3:6)이나 천국 입성의 자격도, 성령으로 거듭났느냐 여부에 있습니다(요 3:5). 바울 사도가 에서(Esau)를 '육체를 따라 난 자'로, 야곱(Jacob)을 '성령을 따라 난 자'로 구분한 기준도 거듭남 이었습니다(갈 4:29).
영역본 성경은 거듭나지 못한 '육신에 속한 자'를 자연인(natulal man)이라 번역했고(고전 15:46), 윌리엄
쉐드(William G. T. Shedd, 1820-1894) 역시 그의 명저 "Sernons to the Natulal
man"에서, 육신에 속한 자를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the natulal man)으로 풀이했습니다.
식품은 자연산 그대로가 좋지만, 사람은 아담으로부터 난 자연산 그대로는 부패하고 더럽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부정한 짐승의 상징으로 언급한 돼지는(마 7:6), 거듭나지 못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유대인처럼 율법에 완벽한 이들이 없다고 공인되던 시대에, 그들이 부정함의 상징이 된 것은 파격입니다. 이는 부정하고 정결함의
기준이 인간 윤리가 아닌 거듭남의 여부에 달려있음을 말해주며, 기독교 윤리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새 기준의 출현이었습니다.
성경이 육신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한 것도(롬 8:8),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행위 이전에 존재
자체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는(롬
9:11) 원천적 이유 외에, 성령을 따라 났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이는 기독교 인간론이 행위론적(behavioral) 이전에 존재론적(ontological)이며 관계론적(relational)이라는 확증이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물이고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과 직결됩니다.
인간은 고결한 덕행자냐 아니냐를 불문하고, 존재론적(ontological)으로 다시 나지 않는 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썩은 오물은 그 악취와 추한 몰골만으로도 능히 사람을 불쾌하게 하듯,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더 핑크(A. W. Pink, 1886-1952)가 "인간의 행위적인 죄는 부패한 인간 존재에서 나온 열매일 뿐,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근본 요인은 타락한 인간 존재 자체"라고 한 것은 올바른 지적입니다.
"인간은 교양이 있고 교육받고 세련되었고 종교적이기 조차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심히 부패'하였다(렘 17:9).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은 하나도 없기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다 타락한 자들이고 인간의
존재의 모든 부분은 죄로 인해 오염돼 있다. ... 그의 성향은 변질되어 버려서 그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시는
것을 미워한다.
그것은 몇 개의 잎사귀가 시들어버린 것이 아니라 나무 전체의 뿌리와 가지까지 썩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 인간 안에는 그
존재의 근원과 기질 안에 본래부터 부패되고 원래 악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그 열매에 지나지 않는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을 뿐더러, 그 자신도 하나님을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롬 3:10)"는 말씀은 다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소극적인 무관심(무지)을 넘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롬 1:28)' 의도적 반감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40)'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표하지 않는 단순 무관심자는 기독교의 적대자가 아니라는 낙관론을 폅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마 12:30)"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사실 그들의
무관심은 포장된 적대감의 표출입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우리 의식 세계는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대해선 의도적으로 눈을 감는
속성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께 대해 무관심(무지)으로 일관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책망대로 미물 짐승보다 못합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사
1:3)."
성경이 하나님 무지(무관심)에 대한 인간의 변명이 심판 때에 그를 변호해주지 못할 것이라고 한 것은(롬 1:20), 그들의
숨겨진 적개심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직설 화법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을 심판받을 죄로
선언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 1:8)." 그들의 하나님 무지가
비의도적이고 소극적인 것이 아닌, 부러 잊으려는(willingly are ignorant, 벧후 3:5) 의도적인 것임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진주와 돼지 비유에서 사람이 진주를 던지면 돼지가 그것을 발로 밟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던져준 사람에게 덤비기까지
하는 것은(마 7:6),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무관심 뒤에 적개심이 도사리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 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드러내는 사람들의 냉소와 무반응은,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숨겨진 적개심의 표출입니다. 복음 전도자나 설교자들이 전도를 녹록한 태도로 접근할 수 없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반감으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이
하나님을 미워한 데서 연유됐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그는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이유 역시, 그들이 자신에게 속한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
동생 아벨을 형 가인이 돌로 쳐 죽인 것은, 가인을 미워해서라기보다는 아벨이 믿는 하나님을 미워한 때문입니다. 동생의 제사는
받고 자신의 제사는 안 받는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 동생을 향한 질투심으로 나타났습니다(창 4:3-8). 그리스도를 전하는
스데반에게, 유대인들이 귀를 막고 달려들어 돌로 쳐 죽인 것은 스데반이 전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었습니다(행
7:57).
그리고 성경이 육신에 속한 자를 '육신을 좇는 자(롬 8:5)'로 지칭하는 것은, 그가 유별나게 저급한 육욕을 좇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타고난 본성에 충실한 거듭나지 못한 모든 자연인을 뜻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신령한 것에 대한
감각과 갈망이 없기에 본성적인 것만을 쫓기 마련입니다.
마치 사자가 풀을, 돼지가 진주를, 까마귀가 깨끗한 고기를 좋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창 8:7-9). 망령된
에서가 장자의 기업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는 것은(창 25:33-34), 영적인 것의 가치를 모르고, 땅의 것만 탐하는 거듭나지
못한 자의 속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어서 거듭나지 못한 자의 '육신의 생각'과 그것이 갖다 주는 '사망'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성경이 육신의 생각이
사망이라고 한 것은(롬 8:6),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의 생각의 허망함(엡 4:17)과 거기에 따르는 심판을 말한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의(엡 2:1) 모든 생각은 죽음같이 허망하고, 그 허망한 생각이 그를 사망에 빠뜨립니다.
성경이 죄 된 행실을 죽은 행실과 동일시하고 있음도(히 6:1; 9:14) 같은 맥락이며, 그 생각의 내용은 선악을
불문합니다. 악하고 더러운 생각뿐만 아니라, 불쌍한 자들을 향한 선한 연민의 마음도 사망의 범주를 벗어나게 못합니다.
이는 그 선한 마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동기의 발로가 아닌, 자연인의 본성과 자기 의(義)의 발로에서이고, 선행의
원천적인 힘도 육신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선악을 불문하고 본능으로 행하는 모든 것을 멸망 받을 짓거리로 폄하합니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유 1:10)."
계신대학원대학교 설립자 이병규 박사가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을 해석하여-유별나게 짐승 같은 추잡한 속성을 쫓는
것이 아닌-짐승과 같이 오관(五官)으로 느껴지는 본능 따라 행하는 자기 자랑, 자기중심, 자기만족을 위해 하는 것이라 하고,
'이성'을, 중생한 영혼이 사용하는 선한 기관으로 풀이한 것은 적절합니다.
죄인은 악을 행하면서도 죄를 쌓을 뿐더러 선을 행하면서도 죄를 쌓습니다. 이는 그의 선행 동기가 자기 본성과 의의 구현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고 한 것도 같은 관점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참된 행위를, '성령으로 행하며 예수를 높이고 육체의 힘으로 하지 아니하는 것'이라 규정했습니다(빌
3:3). 이 기준에 맞출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거듭난 사람뿐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이, 다만 거듭나지 못한 자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임에도 그 안에 남아있는 옛사람이 내는
생각도 육신의 생각입니다. 베드로가 분노하며 말고의 귀를 자른 것(마 26:51), 외식(갈 2:13-14), 십자가를 지실
예수님의 대업 앞에서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것(마 16:22-23) 역시 다 육신의 생각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어 갈라선 것(행 15:39),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작정한 연보를 떼어먹은 것(행 5:1-10),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파당을 짓고 경쟁심과 교만에 빠진 것(고전 1:11-13)도 다 육신의 생각입니다.
그런 육신의 생각들로 인해 사망의 악취를 풍겨내며 타인을 실족케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거듭나지 못한 자들의 육신의
생각처럼 사망의 판결을 받게 하지는 않습니다. 거듭난 자들에게는 성화의 판결은 있겠지만 더 이상 칭의의 심판은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갖는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 된다는 것도(롬 8:7) 말하고자 합니다. 죄로 죽은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고후 10:5). 성경이 사람의 계획하는 바가 어릴 때부터 악하고(창 8:21),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하다(창 6:5)는 말은, 단지 인간은 어려서부터 도덕적으로 부패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담의 원죄를 유전 받은 인간은 날
때부터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존재로 난다는 뜻입니다.
존 번연(John Bunyun, 1628-1688)도 같은 견해를 피력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원수가 되나니(롬 8:7; 골 1:21)'는, '본래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원수이고 그의 마음에서 원수 된 자'라는 뜻이다."
나아가 거듭나지 못한 자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롬 8:7)'에 굴복할 수 도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법은 단순히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구원 얻는 '믿음의 법(롬 3:27)'이 그 핵심이며, 오직 성령으로만 받아들여집니다(고전
12:3). 거듭나지 못한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고전 2:9). 동물이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없듯, 성령 없는
자연인에게는 믿음의 법이 어처구니없게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오직 예수가 위하여 죽은 구원 예정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 예수 믿고 구원 얻는 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반면 영의 사람이 갖는 '영의 생각(롬 8:6)'도 있습니다. 이는 타계주의자들의 세속사를 초탈한 생각, 혹은 신비주의자들의
소위 탈혼(입신) 상태에서 나오는 계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는 자연인의 본성에는 없는, 성령의 거듭남으로 우리 안에 부어진
하나님을 향한 생각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가 정의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영적인 사람들이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것을 영혼이 의식하게 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마음에 전적으로 새로운 지각이나 감각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 참된 성도는 새로운 영적 지각과 감각의 원리가 생긴다, 그리고 참된 성도는 이 새로운 감각으로 영적이고 신령한
것들을 알게 된다."
존 오웬(John Owen, 1616-1683) 의 견해 역시 같은 취지로 보입니다.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마음 자세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마음 상태이다."
'영과 영의 생각'에 대한 그의 견해도 탁월합니다. "성경에서 영은 '성령(롬8:9)'이나 '성령에 의해 신자 속에 생성되는
새로운 영적 생명(요 3:6)'을 뜻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영의 생각이란 '신자 속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영적 생명의
활동'을 뜻한다. 이 새로운 영적 생명은 신자가 영적인 생각을 하게하며 기뻐하게 한다. 회심하기 전에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불신자는 땅의 일들을 좋아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일들을 우선시한다."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나고 하나님과 화목한 영의 사람의 생각에는 생명과 평안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는 마인드
콘트롤(Mind-Control)이나 종교 수양으로 만들어진 심리학적인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화평과 초자연적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이루어진 하나님나라의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할렐루야
첫 번째의 책은 정신치료 전문가 쓴 “감사의 힘”이라는 책이다.
감사는 마치 전기와 같다.
전기는 단순히
어둠을 물리치는 데만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용도에서 힘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감사도 마찬가지다.
감사한 마음, 감사한
생각이 막강한 에너지가 된다. 힘의 원천이 된다.
두 번책은 하바드의과대학 교수가 쓴 “희망의 힘”이라는 책이다.
이 의사는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얻은 결과를 책으로
썼다.
병이 회복될 거라 스스로 믿는 환자들에게 실제로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희망이라는 감정,
희망의 생각이 갖는 치유력의 진정한 의미와 효능을 알게 된다.
세 번째의 책은 조엘 오스틴 목사님이 쓴 책인데 미국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교회의 젊은 담임목사이다.
40대 초반의 젊은 목사이다.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다.
긍정적인 생각과 긍정적인 관점이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키는 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베스트셀러 중에 하나이다.
감사의 힘, 희망의 힘, 긍정의 힘.
이 세 권의 공통점이 있다면 책 제목에 힘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고, 우리의 생각과 연관된
말이다.
감사하는 마음, 감사한 생각. 희망을 갖는 마음, 희망의 생각. 긍정하는 마음 긍정적인 생각. 감사하는 마음이 전기와
같이 단순히 불을 밝혀줄 뿐만 아니라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 이것은 희망도 마찬가지이고, 긍정적인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이같이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모든 일의 시작은 작은 생각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있을 때에 뱀이 유혹한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생각이 결국에는 선악과를 따 먹게 되었고,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부터 쫓겨나는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이스라엘 백성이 망하게 되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다. 이렇게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그 시작이 가룟 유다의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성공적인 삶, 승리의 삶, 축복된 삶을 살려면 먼저 생각의 축복부터 받아야 한다. 왜냐면 생각은 운명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인격을 낳고, 인격은 결국 운명을 낳는다.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는가? 작은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 생각은 운명의 씨앗이다. 교만의 씨앗을 심어 놓았기에 선악과를 따 먹고 결국에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 것도,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면 내가 쉴 방이 있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면 먹을 음식이 있는데 왜 내가 여기에서 주려 죽는가? 생각의 씨앗 때문에 아버지의 곁을 떠날 수도 있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올 수도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 생각의 축복을 받기 바란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있음을 가르쳐 준다. 우리 속에 있는 육신의 생각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과 남을 미워하는 생각. 이러한 육신의 생각이 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사랑 희락 회평 오래 참음, 자비와 양선과 충성 온유와 절제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천사와 같은 생각도 있고 악마와 같은 생각도 있다. 살인자로 사형을 당하는 사람에게도 천사와 같은 생각이 있고, 성자로 인정받은 사람에게도 악마와 같은 생각이 있다. 우리 속에는 두 가지 종류의 생각이 있다. 즉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다. 바울은 솔찍하게 고백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내 속에 두 마음이 있음을 바울이 고백한다. 이 마음은 곧 우리 모두의 같은 마음이다.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은
마치 버섯과도 같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울 때에 먹어도 되는 버섯과 독버섯의 차이점을 배웠다. 대체로 독버섯은 보기에 예쁘게
생겼다. 아름답게 생겼다. 먹음직스럽게 생겼다. 그러나 그 독버섯을 먹으면 죽는다. 먹어도 되는 버섯은 화려하지 않다. 아름답게
생기지도 않다. 그냥 그렇게 생겼다. 그것은 먹어도 된다.
대개 육신의 생각은 우리를 유혹하는 마력이 있다. 우리를 끌어 당기는 힘이 있다. 라스베가스에 가보라. 그렇게 화려할 수가 없다.
정말로 별난 세상이다. 멋진 조명으로 사람들을 끌어 당긴다. 그러나 투기하는 노름에 인생을 망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말씀하셨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찾는 자가 많다. 문도 크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은 그 결과
죽음이다. 영의 생각은 문도 좁다. 힘이 든다. 사람들이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결과는 생명과 평안이다. 다음 말씀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이같이 육의 생각은 죽음을 가져다 주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 사람들끼리는 자기의 생각을 감출 수 있다. 그리고 서로의 생각을 모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한 농부가 산속에서 거대한 곰을 만났다. 그는 공포에 질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이 곰의 마음을 순하게 변화시켜 주세요” 농부가 한참 기도를 하고 눈을 떴다. 그런데 곰도 마주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농부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된 것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이렇게 빨리 기도응답을 하시다니….내 기도가 곰의 마음을 감동시켰구나.” 그때 곰이 기도를 마치고 농부를 그윽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지금 무슨 기도를 했는지 전혀 모른다. 나는 다만 음식을 앞에 놓고 식사기도를 했을 뿐이다.” 농부는 곰의 속마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가끔 모두가 자신과 똑같은 마음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같이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모르고 살 때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주님은 우리의 생각을 알고 계신다.
우리는 어떤가? 영의 생각을 할 때보다는 육신의 생각을 할 때가 훨씬 더 많다. 하나님과 원수되는 생각을 할 때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하는 생각을 할 때가 훨씬 더 많다. 내 자신의 육신의 생각 때문에 후회하고, 후회하고,
이제는 똑같은 죄를 범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후회하고, 후회하면서 시간은 자꾸 흘러간다.
내가 스스로 결심한다고 육신의 생각에서부터 영의 생각으로 바뀔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 말씀인가? 내가 결심한다고 육의 생각을 죽이고 영의 생각을 할 수 있다? 천만에
말씀이다.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셔야 육의 생각을 제어할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 이 시대에 하나님을 믿고 사는 일이 얼마나 힘이든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때로는 사람을 속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세상이 주는 다양한 유혹 때문에 우리의 생각이 흔들릴 때도 많이 있을 것이다. 나의 의지로 내 영의 생각을 할 수 있는가? 어림도 없는 말이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목숨걸고 예수를 전한 사람이다. 순교한 사람이다. 예수에 완전히 미쳐서 살던 바울도 “누가 나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수 있으랴?” 그렇다면 우리 같은 사람은 어떻겠는가? 내가 결심한다고 육신의 생각에서 영의 생각으로 바꿀 수 있겠는가? 잠깐은 될지 몰라도 나도 모르게 육신의 생각으로 치우치게 된다.
바울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느니라.” 여기에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 있다. “내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옵소서.” “내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옵소서.” “내 속에
성령님이 거하시옵소서.” 본문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진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지만, 주의 영이 내 속에 임하셔서 영의 생각을 하면 생명과 평안을 우리에게 주신다. 얼마나 감사한가? 얼마나 감격적인 말씀인가?
한 늙은 인디언 추장이 자기 손자에게 자신의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큰 싸움’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싸움은 또한 나이 어린 손자의 마음속에도 일어나고 있다고 하였다. 추장은 궁금해 하는 손자에게 설명했다. “얘야, 우리 모두의 속에서 이 싸움이 일어나고 있단다. 두 늑대간의 싸움이란다.” “한 마리는 악한 늑대로서 그 놈이 가진 것은 화,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거만, 자기 동정, 죄의식, 회한, 열등감, 거짓, 자만심, 우월감, 그리고 이기심이란다. 다른 한 마리는 좋은 늑대인데 그가 가진 것들은 기쁨, 평안,. 사랑, 소망, 인내심, 평온함, 겸손, 친절, 동정심, 아량, 진실, 그리고 믿음이란다.” 손자가 추장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추장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기지.”
우리 속에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날마다 내 속에서 싸움이 일어난다. 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우리는 영의 생각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에 합당한 환경을 만들자.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가? 왜 우리가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가? 왜 우리가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감사하는 생각을 하고, 희망의 생각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마치 내 속에서 싸우고 있는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 속에 임하셔서 영의 생각으로 생명과 평안이 있게 하옵소서.
인간은 광대한 우주 속에서 아주 유한하고 미약한 존재일 뿐 아니라 죄로 인해 심히 일그러진 존재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는 무한경쟁,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사회에 살면서 인간의 존엄성이 부정당하고 인간성이 파괴되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인간이 과학기술에 의해 인간 자신의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 인간 이후의 새로운 종, 즉 포스트휴먼(post-human)이 되고자 꿈꾸는 테크노피아의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성서의 인간 이해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본문 중)
『빅 히스토리』 표지.
데이비드 크리스천과 밥 베인은 공저 『빅 히스토리』에서 빅뱅에서 현재까지의 역사를 아우르는 ‘빅 히스토리’(거대사)란 개념하에, 천문학, 물리학, 지질학, 생물학, 인류학, 역사학 등의 모든 학문을 융합하는 포괄적 학문을 수립하고자 시도한다. 크리스천과 베인에 따르면 빅 히스토리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과 같이 되었으며, 그 이야기 속에 우리는 어디에 위치해 있고,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다.”
크리스천과 베인은 137억 년 우주의 역사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특징을 가진 복잡한 것들이 점진적으로 출현했음을 지적하면서, 이 복잡성의 증대 과정을 여덟 가지 임계국면 또는 전환점을 통해 설명한다. 첫 번째는 빅뱅(137억 년 전), 두 번째는 별의 출현(135억 년 전), 세 번째는 새로운 원소의 출현(135억 년 전), 네 번째는 태양계와 지구의 생성(45억 년 전), 다섯 번째는 지구상의 생명의 출현(38억 년 전), 여섯 번째는 집단학습(20만 년 전), 일곱 번째는 농경(1만 1000년 전), 여덟 번째는 근대 혁명(250년 전)이다.
이 여덟 가지 임계국면 가운데 특히 지구상의 생명의 출현과 인간의 출현은 가장 새로운 신기원적 전환점이다. 크리스천은 생명의 출현을 가능케 하는 정교한 화학작용이 일어나게 한 지구의 골디락스 조건으로서, 첫째, 지구가 유기체 생명에 필요한 원소들(탄소, 수소, 산소, 질소)을 지닌 암석 행성이라는 점, 둘째, 지구가 태양과 지구 핵으로부터 적절한 에너지를 공급받고 있다는 점, 그리고 세 번째, 지구에 물이 있다는 점을 든다. 지구에서 생명이 출현한 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약 20만 년 전에 유인원으로부터 인간 종인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 출현했다. 20만 년 전과 6만 년 전 사이에 시작된 집단학습의 역사는 바로 인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집단학습은 인류가 오늘날의 문명을 이루어낸 힘이다. 또한 근대 이후 글로벌 네트워크, 시장경제, 에너지 사용의 증대는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것은 인류가 생물권 전체를 지배하고 변화시키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가 시작된 것을 의미한다. 이제 인류는 지구의 생물권 전체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미래의 지구 전체의 운명이 인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나 광대한 우주의 ‘빅 히스토리’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티끌과 같이 지극히 미미한 존재다. 인간이 사는 행성인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는 지름이 약 10만 광년 되는 은하계의 중심에서 약 3만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점과 같이 작은 부분이다. 은하계에는 태양계와 같은 4천억 개의 항성과 성단 및 성간 물질이 있으며, 우주에는 은하계와 같은 천억 개의 은하가 있다. 우주는 빅뱅으로 탄생한 이래 계속 팽창해 왔고 지금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이 광대한 우주 공간의 한 티끌과 같은 지점에 찰나와 같이 짧은 순간 존재하다 사라지는 인간의 존재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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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귀한 존재라고 말씀한다(창 1:27). 시편 저자는 인간의 존귀함을 이렇게 노래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시 8:4-6). 그런데 과연 인간은 성서의 저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존귀한 존재인가? 인간은 광대한 우주 속에서 아주 유한하고 미약한 존재일 뿐 아니라 죄로 인해 심히 일그러진 존재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는 무한경쟁,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사회에 살면서 인간의 존엄성이 부정당하고 인간성이 파괴되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인간이 과학기술에 의해 인간 자신의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 인간 이후의 새로운 종, 즉 포스트휴먼(post-human)이 되고자 꿈꾸는 테크노피아의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성서의 인간 이해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전통적으로 교회는 인간의 실존을 네 단계로 구별해서 이해해 왔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본래적 인간, 타락 이후의 죄악된 인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인간, 그리고 종말론적 미래의 천국에서의 영생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단계들은 인류 역사 속에서 연대기적 순서로 발생하는 인간 실존의 단계들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의 생의 과정에서 실존적으로 경험되는 단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실존 안에서 이 단계들은 단지 통시적인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가 아니라 공시적으로 경험된다. 즉 우리의 개인적 실존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 죄, 구원, 그리고 영생에 대한 소망은 동시적으로 현존하며 함께 경험된다.
인간 창조에 대한 성서의 묘사는 각기 별개의 근원으로부터 온 육체와 영혼이 결합함으로써 한 인격이 형성되었다는 이원론적 인간론보다는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생명의 호흡(영)에 의해 육체가 생명력 있는 생명체가 되었으며, 이 과정에 영혼 또는 정신이 육체로부터 창발되었다는 의미에서 현대과학의 창발적 인간론과 공명한다고 할 수 있다.(본문 중)
윤철호(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조직신학)
인간은 다차원적인 존재다. 한 인간 존재는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종교적 차원으로 구성된다. 이 다차원 가운데 물리-화학-생물 차원이 육체적 차원이라면, 심리-사회-종교 차원은 정신적 또는 영적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이분법 도식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천성적으로 두 본성, 즉 육체적 본성과 영적 본성을 지니고 있다. ‘본성’은 영어로 ‘nature’로 번역되는데, 인간의 본성은 단지 정신 또는 영혼과 대립되는 물질이나 육체로서의 ‘nature’를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nature)은 물질적, 육체적 요소와 정신적, 영적 요소 둘 다를 포함한다. 이 점이 인간의 본성(nature)이 인간이 아닌 다른 자연, 즉 돌이나 식물이나 동물의 본성(nature)과 다른 점이다. 즉 다른 자연의 본성(nature)은 정신 또는 영혼을 포함하지 않는 데 반해, 인간의 본성(nature)은 정신과 영혼을 포함한다. 정신 또는 영혼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독특성이다.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서구 기독교는 고대교회 이래 인간의 인격이 대립적이고 계층적인 관계 안에 있는 육체와 영혼이라는 두 실체로 구성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육체는 생멸(生滅)하지만, 영혼은 불생(不生), 불사(不死), 불멸(不滅)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플라톤적 이원론을 거부하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통일체로 이해했다. 즉 인간의 영혼은 질료인 육체에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전인적 인간을 만드는 생명의 원리로서, 육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그리고 플라톤과 같이, 아퀴나스도 영혼은 육체 없이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죽지 않고 불멸한다고 보았다.
영혼과 육체를 서로 분리된 두 실체로 이해하는 헬레니즘적인 이원론적 인간 이해는 영혼과 육체를 불가분의 관계 안에서 이해하는 전일적인 성서적, 히브리적 인간 이해와 상충된다. 창세기의 인간 창조 이야기에 따르면,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창 2:7). 이 구절에서 “땅의 흙”은 물질을 의미하고, “생기”는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느샤마, 니쉬마트 하임, breath of life) 즉 영을 의미하며, “생령”은 살아있는 존재(네페쉬 하야, living being)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은 아담의 몸에 생명의 호흡 즉 영을 불어넣으니 인간이 살아 있는(animated, enlivened)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 창조에 대한 성서의 묘사는 각기 별개의 근원으로부터 온 육체와 영혼이 결합함으로써 한 인격이 형성되었다는 이원론적 인간론보다는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생명의 호흡(영)에 의해 육체가 생명력 있는 생명체가 되었으며, 이 과정에 영혼 또는 정신이 육체로부터 창발되었다는 의미에서 현대과학의 창발적 인간론과 공명한다고 할 수 있다.[1]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 전시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중 아담 창조 부분.
인간은 육체적으로 다른 동물들과 유사한 생물학적 구조와 본성을 공유한다. 인간과 침팬지의 DNA는 98%가 동일하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정신 또는 영혼 안에서 종교성 즉 영적 본성을 갖는다. 육체적 본성은 몸의 출생과 더불어 주어진 본성이며, 영적 본성은 몸의 성장과 더불어 정신이 성숙해감에 따라 창발되는 본성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찾는 영적 본성, 즉 종교성을 갖게 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거나 본성과 모순되는 부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본성적 현상이다.
몸이 땅의 흙으로부터 나오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로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생물학적 존재다. 현대 과학은 인간의 인격이 생물학적 요인 특히 유전자에 의해 매우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주었다. 유전자는 생명 정보로서 DNA 복제를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그러나 생물학적 요인에 의해 인간의 인격이 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인간을 DNA에 의해 통제되고 결정되는 기계로 본 것은 지나친 환원주의적 사고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실상 도킨스 자신도 인간 존재와 행동이 전적으로 생물학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에게 관대함과 이타주의를 가르침으로써 이기적 유전자의 지시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며 또한 기를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2] 이것은 사회적 차원을 포함하는 다차원적인 인간 인격이 생물학적 결정론에 전적으로 종속되지 않고 그것에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인간은 정신-육체적(psychosomatic) 존재로서, 정신이 육체적 요인에 의해 매우 심대한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신이 육체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단정하는 물리학적 또는 생물학적 환원주의는 잘못된 것이다. 모든 인간의 인격에 있어서 육체와 정신 사이에는 ‘아래로부터 위로’(bottom up)의 인과율과 아울러 ‘위로부터 아래로’(top down)의 인과율이 작용한다. 만일 위로부터 아래로의 하향식 인과율이 작용할 수 없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인간은 단지 육체의 욕구에 지배되는 짐승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적 요인에 의해 심대하게 영향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결정론적으로 지배되지 않으며, 오히려 육체적 요인을 통제하고 목적 지향적으로 인도하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정신적, 영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정신-육체적 존재로서 인간은 역설적인 존재다. 인간은 높은 도덕적, 종교적 특성을 발현하는 선한 행동도 할 수 있지만, 비도덕적, 악마적 특성을 발현하는 악한 행동도 할 수 있다. 통상적으로, 전자를 표현할 때에는 ‘영’이란 개념이 사용되고, 후자를 표현할 때에는 ‘육체’ 또는 ‘육신’이란 개념이 사용된다. 신약성서의 바울은 육신과 영을 날카롭게 대립시키면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롬 8:6)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여기서 ‘영’과 ‘육신’이란 개념은 한 인격을 구성하는 두 부분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는 두 관점을 가리킨다. 즉 ‘영’이란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가리키고, ‘육신’이란 세상 풍조를 따라 자기의 소욕대로 사는 삶을 가리킨다. 정신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이원론은 잘못된 것이다. 영혼에 의해 선한 인간이 되고 육체 때문에 악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선한 행동을 하든지 악한 행동을 하든지 모두 정신적, 영적 차원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의 악한 결정과 행동에 대해서, 단지 그러한 행동을 실행하는 육체가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통해 자신의 결정을 행동으로 옮기는 정신이 육체와 함께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 또는 영이 인간의 일차적인 주체성과 책임성의 자리이다.
우리
인간은 보이는 육체인 몸이 있는데 반하여, 우리 몸 안에는 보이지 않는 영의 영역이 내재하고 있다.
이러한 영의 영역은 하나님을
섬기려는 선한 영역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하나님을 거스리며 육신의 욕심만을 생각하는 육신의 영역이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을
보다 진실하게 믿고 섬기려는 사람들은 인간의 육체에 만족보다는 신령한 것을 사모한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은 물론, 믿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신령한 것보다, 육신의 욕심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다. 성령의 역사로 인한 은혜가 충만한
삶을 살기 보다는 육신의 안락함과 평안의 삶을 더 추구하는 자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로 인하여 육체의
욕심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는 상반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성령에 따라 살고
있다면 신앙인이나, 성령을 좇지 않는 삶을 산고 있다면 이는 불신앙인이라도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를
분명하고 단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육체의 욕심은 성령의 역사를 반대할 뿐만 아니라, 성령을 거스린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마태복음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거스리지 않기 위하여 성령을 받고 살아야 하며, 충만하여 성령을 따라가며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은 육체에
대한 욕심을 받아들일 수가 없고, 성령에 대한 욕구는 육체적인 삶에 만족하는 것을 용납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을 진실하고 바르게 믿는 사람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아무리 세월이 흘러 우리의 육신이 쇠잔하여 간다할지라도 우리의 속은 날이
갈수록 새로워지는 은혜를 덧입게 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이
해가 어김없이 또 지나가면서 한살에 더 나이가 들어, 우리의 육신은 조금더 약해진다.
나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흔히 말하기를 몸은 50대, 60대가 되어도 마음은 평생 20대로 사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역시 육체와
마음이 상반되는 삶을 사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 속으로 20대라 생각하드래도, 아무리 20대에
기억만이 있다하드라도, 우리의 육신의 연약해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이 갈수록 성령의 충만함을
따라 새로워진다는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기쁜 소식인 것이다.
또한 믿는 성도들은 우리의 심령에
성령에 접붙임을 받아, 우리의 타락된 본성에서 되돌려 올바른 삶을 살야야 한다.
아무리 여러분이 다시 새로워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을 따라가는 삶의 중심을 잃어버렸을 때에는,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는 죄악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삼키려 하기에
우리는 선과 악의 갈등 속에 자신을 포기하는 생각은 쉽게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이 선과
악의 갈등 속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성령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반드시 성령을 쫓아 행하여야 한다.
그래서 오는 본문은 말씀을
시작하면서 “너희는 성령을 쫓아 행하라”고 강경하게 권면하고 있다.
육체의 욕심을 버려야 한다
-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한다는 것이다.
육체란 의미는 사람의 몸, 혹은 육신이다.
육체란 어떤 것인가?
1. 바람같이 지나가는 것이다.
시편 78:39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
2. 풀의 꽃과 같은 것이다.
베드로전서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3. 자랑할 수 없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육체의 욕심이란 무엇인가? - 유혹의 욕심이다.
에베소서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육체의 욕심을 버린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1.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게 한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3. 경건된 삶을 산다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4. 몸된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육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골로새서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왜 육체의 욕심을 버려야 하는가?
1.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4: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2. 욕심은 죄를 낳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1:14-15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3. 썩어진 것을 거두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4. 사람의 정욕을 쫓지 않기 위해서다.
베드로전서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를 살게 하려 함이라
육체의 일을 경계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이곳에서 말하는 육체의 일이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육신적인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열심히 일할 것은 권면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11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심지어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명한다.
데살로니가후서 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육체의 일을 경계하지 말라는 뜻은 무엇인가?
이는
오히려 부패하고 타락된 성품의 소산으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 같은 것들을 금지하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들 대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는 것들로, 성경이란 거울에 비추어 볼 때에 죄로 규정된 더러운 것들이다. 이러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자기 멋대로,
마음대로 사는 것을 강하게 막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자신의 노력으로는 안되는 것이다.
사람의 지식으로, 사람의 방법으로는 물밀 듯이 밀려 들어오는 이러한 죄악을 막아낼 수가 없다. 자신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다.
반복되는 훈련을 통하여 금하려고 할진데, 조금의 도움을 될지 몰라도 이러한 15가지나 되는 죄의 종류들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디모데전서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먹고 마시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개혁하실 때까지 맡겨두신 것이나, 그 이외에는 우리의 방식으로는 찾을 수가 없다.
히브리서 9: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믿지 않는 자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이러한 15죄악들을 피할 수 없어도, 우리 믿는 성도들은 이러한 죄악 속에서 피할 수 있는 길은 육체의 일을 경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야 한다.
육체의 일을 경계하는 일이란 무엇인가?
1. 육체에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을 피하여야 한다.
에베소서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2. 육체에 정욕을 제어하여야 한다.
베드로전서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3. 육체에 남은 기간은 잘 이용하여야 한다.
베드로전서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성령을 좇아야 한다.
성령을 좇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의 생명을 능력으로 덧입기 위해서이다.
히브리서 7:16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성령을 좇으려면
1. 성령을 받아야 한다. 누가 성령을 주시는가?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 3: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2. 누구에게 성령을 주시는가?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3. 어디에 성령이 거하시는가?- 믿는 성도의 가슴 안에 계신다.
요한일서 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4. 어떻게 성령을 받는가? 안수할 때에 성령을 주신다.
사도행전 8: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5. 왜 성령을 주셨는가? 보증으로 주셨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린도후서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5. 언제까지 성령을 주시는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주신다.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6. 얼마큼 주시는가?- 풍성히 부어 주신다.
디도서 3: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성령을 좇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1.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고린도전서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2. 아름다운 것을 지키게 된다.
디모데후서 1: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3.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
갈라디아서 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4. 영생을 거둔다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성령으로 살아야 한다- 성령으로 행하여야 한다.
1. 하나님을 섬긴다.
히르비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2. 성령으로 기도한다.
유다서 1: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3. 성령의 은사를 소유하게 된다
고린도전서 12:8-9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4. 성령으로 봉사하게 된다
빌립보서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5. 속 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여 진다.
에베소서 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보다 구체적으로 성령의 열매들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성령에 의하여 거듭난 성품의 9가지 열매들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죄를 짓게 하는 "육체의 일들"인 15가지의 죄악과는 상반된 표현이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들은 성령의
은혜를 덧입어 말씀의 나무를 심었다면, 이제는 이 말씀의 나무에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1. 사랑
(1) 주님의 제자가 된다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2) 허다한 죄를 덮는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3) 행하는 것이다.
요이 1: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2. 희락, 기쁨
(1) 좋은 소식이다.
눅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2) 구하여야 한다.
요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3) 성령 안에 있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3. 화평
고전 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1) 이를 구하고 좇아야 한다.
벧전 3: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2) 힘써야 한다.
롬 14: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3) 의의 열매를 거둔다
약 3: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4. 오래 참음
(1) 참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롬 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 서로 용납하여야 한다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약속의 기업은 받는다
히 6: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5. 자비, 친절
(1) 주님께서 원하신다.
마 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2) 행하여야 한다.
눅 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이기 때문이다.
히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6. 양선, 선함
(1) 선함이 가득차야 한다
롬 15:1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2) 선에 속하여야 한다
롬 12: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3) 생명의 부활이 있다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7. 충성
(1) 작은 일에 충성하여야 한다
눅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2) 맡은 자들에게는 충성만이 요구된다
고전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충성하는 자들에게 직분을 맡기신다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8. 온유
(1)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여야 한다
딤후 2:24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약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3)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9. 절제
(1) 지식보다 절제가 앞서기 때문이다.
벧후 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2) 사단이 틈타지 못하게 함이다.
고전 7: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3) 이기기 위해서 절제하여야 한다
고전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오늘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성령을 충만히 받았다.
이제는 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분들이 되어야 한다.
바로 여러분들이 성령을 좇아 행하여 결실을 맺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Avoid every kind of evil.
악(惡)이란 헬라 단어는 '포네로스(pŏnērŏs. πονηρός)'라고 하여 어떤 외형(appearance)이 아니라 악의 종류를 말합니다(kind. NIV).
따라서 온갖 악한 것들을 무시해야 합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모양이라도(even)'에서 '도(even)'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직역하면 "모든 종류의 악을 버리라" 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곳에 왜 악이 있습니까?
악은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라 인간의 반역에 의해서 드러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창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었기 때문에 악이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드러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때 악이란 히브리 단어는 성경에서 다양한 용례로 사용되었습니다.
'선'(토브)이란 "먹기에 좋은 나무"라는 구절에서 "좋은"에 해당합니다.
반면에 '악'(라)이란 '선'에 해당하는 "좋은"의 반대 개념으로 성경에서는 '죄악'(6:5), '재앙'(19:19),
'근심'(40:7), '곤경'(느 2:17), '위험'(시 107:26) 등과 같이 다양하게 번역되는 단어로서 온갖
부정적인 것을 모두 포괄하는 단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씀에서 다양한 종류의 악들은 성경에서 이렇게 사용됩니다.
창세기 6:5 - 죄악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세기 19:19 - 재앙
종이 주께 은혜를 얻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창세기 40:7 - 근심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관원장에게 묻되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느헤미야 2:17 - 곤경
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하고.
시편 107:26 - 위험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오스트리아의 과학자 "콘라트 로렌츠"가 인공부화로 갓태어난 새끼오리들이 처음 본 움직이는 대상을 어미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을 발견하였고 이런 행위를 "각인(imprinting)"이라고 합니다.
대한 생명과학협회에서의 공식 용어는 "인상찍히기"라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새끼오리에 그치지 않고, 병아리 등 다른 새의 경우에도 관찰되었고 태어난 직후의 한정된 시기에만 나타나는 성질로 일정 시기가 지나면 나타나지 않으며, 움직이는 대상이면 거의 대부분 인상찍히기 대상에 포함되기 때문에 다른 새, 인간 심지어 로봇을 이용해서 부모로 각인시킬 수도 있다고 합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태어난 인간은 악을 먼저 보았다면 그 악에 의해서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가장 좋은 것만을 보여줄 수 있는 믿음의 가정, 은혜로운 교회, 정의로운 사회, 이상적인 국가로 세워야 할 의무와 책임이 모든 성도들에게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נֶחְמָד לְמַרְאֶה וְטֹוב לְמַאֲכָל - 네흐마드 레마르에 웨토브 레마아콜)
'아름답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흐마드'는 단순히 보기에만 좋은 것이 아니라 '귀하고'(잠 21:20), '영화스러워서'(시 39:11), '흠모할'(사 53:2)만큼 '탐스러운'(3:6) 것까지 의미하는 다양한 뜻을 가진 '하마드'의 단순 재귀형(Niphal) 수동 분사이다.
'좋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브'는 '선하다'(26:29), '보배롭다'(왕하 20:13), '복되다'(욥 7:7), '유익하다'(전 5:11) 등으로도 번역된다. 따라서 '먹기에 좋다'란 의미는 단순히 맛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먹었을 때에 우리에게 매우 복되고 유익하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우 좋은 음식을 허락하셨다.
* 생명나무(וְעֵץ הַחַיִּים - 웨에츠 하하임)
'생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이'는 단순히 '생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기', '활력', '번영'(삼하 23:20; 삼상 25:6) 및 '소생'(18:10, 14; 왕하 4:16, 17)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람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생명이 유지될 뿐만 아니라 생기와 활력이 넘치고 번영하며 소생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칼빈(Calvin)은 이 나무는 아담과 하와가 그 과실을 먹을 때마다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성례전적 의미를 지닌 나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사람이 범죄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심으로 말미암아 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고 영생하는 것을 막으셨다.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וְעֵץ הַדַּעַת טֹוב וָרָע - 웨에츠 하다아트 토브 와라)
여기서 '선'(토브)은 본절에 나오는 '먹기에 좋은 나무'의 '좋은'과 동일한 단어로서 온갖 긍정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는 단어이다. 반대로 '악'(라)은 '죄악'(6:5), '재앙'(19:19), '근심'(40:7), '곤경'(느 2:17), '위험'(시 107:26) 등과 같이 다양하게 번역되는 단어로서 온갖 부정적인 것을 모두 포괄하는 단어이다.
창세기 6:5 - 죄악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세기 19:19 - 재앙
종이 주께 은혜를 얻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창세기 40:7 - 근심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관원장에게 묻되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느헤미야 2:17 - 곤경
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하고.
시편 107:26 - 위험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
'근심'(40:7), '곤경'(느 2:17), '위험'(시 107:26)
선(2896. 토브 tôwb) טוֹב
악(7451. 라. raʽ) רַע
1. 나쁜. 2. 사악한. 3. 해로운
발음
[ raʽ ]
어원 / 748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45회 사용
그리고 '알게'(다아트)는 '알다', '체험하다', '익숙하다' 등의 다양한 뜻을 지니는 히브리어 '야다'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지식'(시 19:2; 전 1:16), '재능'(왕상 7:14)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이란 표현은 선과 악을 명확히 구별하는 지식은 물론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선만을 행하였으나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는 악까지 행할 재능을 지니게 됨을 보여 준다.
한편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주신 까닭은 인간이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타율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였다. 만약
이러한 자유 의지가 발휘될 수 있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인간은 잘 만들어진 로보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자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이와 같은 선악과를
주셨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악과가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악을 행할 가능성이 있으나 자의적으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창세기 13:3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미국의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 조지 켈링
1982년 발표한 이론
"작은 무질서를 가볍게 여기면 더 심각한 범죄가 일어난다."
(예) 큰 건물에서 유리창 하나가 깨진 것을 방치하면 이어서 유리창이 깨지기 시작하고 그 건물은 범죄의 소굴로 변한다.
빈 건물의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하면 연이어 옆 유리창도
깨집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면 그 건물은 범죄의 온상이 되고 인근에 범죄가 속출하면서 일대가 무법천지로 변하게 됩니다.
이것을 소위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 Theory)이라 합니다.
미국의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1982년 발표한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작은 무질서를 가볍게 여기면 더 심각한 범죄가 생긴다는 것, 사소한 실수를
제때 고치지 않으면 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내면의 사소한 죄를 가볍게 여기다보면 큰 죄를
불러오게 됩니다.
오늘도 지은 죄가 생각나면 즉시 회개하시고 죄는 모양이라도 버리시는 복된날 되시기를 기도하며 축복합니다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 '모양'(에이두스)은 '외형'(appearance)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종류'(kind, NIV)를 뜻한다.
또한 '모양이라도'에서 '도'(even)는 원문에는 나와 있지 않다.
따라서 본절을 직역하면 '모든 종류의 악을 버리라' 이다.
악(4190) 포네로스(pŏnērŏs) πονηρός, ά, όν
버리라(568) 아페코(apĕchō)
ἀπέχω
스트롱번호568
모양(1491) 에이도스(ĕidŏs) εἶδος, ους, τό
예언을 멸시치 말고
- '예언'(프로페테이아스)에 대하여
1. 직접 계시를 통한 예언
2. 구약의 말씀이나 사도들의 교훈을 해석하여 가르치는 은사로서의 예언
이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하는 견해와(Lenski)
3.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있었던 '예언'은 예수의 재림과 관련된 앞일을 예언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Morris).
일반적으로 전자의 견해가 유력하다.
한편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예언'에 대해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이유는 예언의 은사에 비해 방언의 은사가 훨씬더 기적적이며 신비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상황에서(고전14:5) 바울은 예언의 은사를 더 큰 은사로 강조한 바 있다(Alford).
고린도전서 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항상 기뻐하라'는 원하는 일이 성취되었을 때 누릴 수 있는 기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렵거나 힘든 일에도 기뻐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쁨은 인간의 감정을 통해서 나타날수 없는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을 말합니다(롬 14:17. 갈 5:22).
쉬지 말고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하루종일 기도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하고(엡 6:18),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않는 것이며(눅 18:1), 기도에 항상 힘쓰는 믿음을 말합니다(롬 12:1).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란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를 말합니다.
영어 성경(NIV)에서는 "in all circumstances"라고 합니다.
성도는 이미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였으므로 모든 상황에 있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이여
매일의 삶속에서 신앙의 리트머스 시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떠났는지를 판단하며 항상 주와 동행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축복합니다.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빌 4: 6에는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 '하나님의 뜻'은 4:3에 언급된 바 '신자들의 성화'(sanctification)에 있다. 혹자는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것'이 성령께서 신자들을 성화시키는 내적인 역사로 본다(Bruce).
한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원초적(原]初的)이며 기본적인 요소이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서' 신자들의 성화나 하나님의 뜻은 생각할 수 없다.
기뻐하라(5463) 카이로(chairō ) χαίρω
스트롱번호 5463
쉬지말고 기도하라 -
아디알레잎토스 프로슈케스데( αδιαλειπτως προσευχεσθε )
기도하라(4336) 프로슈코마이( prŏsĕuchŏmai ) προσεύχομαι
스트롱번호 4336
범사에 감사하라 -
감사하라(2168) 유카리스테오( ĕucharistĕō) εὐχαριστέω
스트롱번호 2168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 바울은 이것과 거의 같은 말을 롬 12:17에서도 하였다. 이와 같은 교훈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본적인 가르침으로서 예수의 말씀에 기원을 둔 것이다(마 5:44-48;눅 6:27-36). 유대인들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출 21:23, 24의 모세 율법을 근거로 보복을 정당화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법의 정신에 입각하여 공정하게 재판하라는 것이지 피해를 준 상대방에게 보복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항상 선을 좇으라
- '선'의 헬라어 '아가돈'(아가도스)에 대해 혹자는 '유익이 되는 것'으로 해석(Lightfoot)
NIV는 '친절한 것'(to be kind)
이것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이되는 것을 뜻한다(Bruce).
1. [기본형] 선한, 착한, 좋은.
a. [외적인 의미에서] 적합한, 유능한, 유용한, 마25:21, 23, 눅19:17, 23:50, 행11:24, 엡4:29, 딛2:5, 벧전3:10.
b. [내적 가치, 특히 도덕적 가치로서] 완전한, 마19:17, 막10:18. 선한, 친절한, 마20:15, 벧전 2:18.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뜻풀이부
1. 나쁜, 가치 없는, 낮은
a. [도덕적인 의미에서] 나쁜, 악한, 막7: 21, 롬13:3, 고전15:33, 골3:5.
b. 유해한, 위험한, 흉악한, 유독한, 눅 16:25, 행28:5, 롬14:20, 딛1:12, 약3:8, 계16:2.
연관 단어 관련 성경
악한(마21:41, 막15:14, 롬13:3), 잘못하는 (요18:23), 상하게 하는(행16:28, 28:5), 행악 하는(빌3:2), 악행하는(벧전3:12). [명] 고난 (눅16:25), 해(행9:13, 딤후4:14).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것 같이 하라.
Therefore encourage one another and build each other up, just as in fact you are doing.
"피차 덕을 세우라(build each other up)"
'덕을 세우라'는 말씀을 헬라어 성경에서 "오이코도메이테"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오이코도메이테'는 "집을 세우다"는 뜻으로 성경에서 사용된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집을 세우다(마 7:24, 26. 16:18)
둘째는 교회가 든든히 서가다 즉 교회 성장(행 9:31, 엡 2:20-22. 4:12)
그러나 본문에서는 "영적인 성장을 도우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사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존경받을 만한 지도자a leader worthy of respect. vir nobilis princeps)"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회 전분야에서 마치 성공한 것처럼 드러나는 사람은 있어도 존경할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 사회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의식이 있는 사람은 사회 각 분야의 지도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먼저 인간이 되라!Be human first!. honoratus homini)"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특별히 교회 지도자들을 향하여 외칩니다.
"피차 덕을 세우라!"
어떻게 덕을 세울 수 있을까요?
본문에서 9,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첫째는 구원을 얻게 하라!
교회 지도자들은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지름길을 알려주고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성공한 것처럼 보여져도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그 길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성공은 성공이 아니라 자기 만족을 위한 자랑거리가 될 뿐입니다.
어떻게 구원의 지름기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그 길을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고 겸손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희생하라!
잘 익은 곡식은 머리를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크면 클수록 자라면 자랄수록 고개를 뻣뻣하게 쳐들고 자리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를 그대로 두라고 하셨습니다.
가라지를 제거하려다가 곡식까지 잘라버릴 것을 염려하신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늘 자기를 낮추고 모두에게 존경과 신뢰를 얻는 믿음으로 무장해야 하겠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애쓰지 말고 먼저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어둠의 세상에서 밝은 빛처럼 아름답고 귀하게 드러나는 덕을 세울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앞에
권면하다(파라칼래오. parakalĕō) παρακαλέω 스트롱번호 3870
1. ~곁에서 부르다, 옆으로 부르다, 호출하다, 소집하다.
a. [τινά+부정사가 따르는 경우] 행 28:20.
b. 청하다, 이끌다, 권하다, 눅 8:41, 행 8:31.
c. ~의 도움을 청하다, 마 26:53, 고후 12:8.
2. 호소하다, 강권하다, 역설하다, 권면하다, 격려하다, 행 16:40, 고후 10:1, 히 3:13.
3. 요구하다, 간청하다, 마 8:5, 막 1:40, 눅 8:31, 행 28:14.
4. 위로하다, 격려하다, 마 5:4, 눅 16:25, 고후 1:4, 엡 6:22.
5. 위로해보다, 정답게 말하다, 눅 15:28, 행 16:39, 고전 4:13, 살전 2:12, 딤전 5:1.
연관 단어 관련 성경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 2:1.
b. [성령을 가리켜서] 요 14:16, 26, 15:26, 16:7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 26, 16:7), 대언자(요일 2:1).
덕을 세우다(오이코도메오. ŏikŏdŏmĕō) / οἰκοδομέω 스트롱번호 3618
1. 건축하다
a. [실제적인 건물에 대해서] 마21:42, 막12:10, 눅11:48.
b. [교회를 세우는 일에 대해서] 마16:18, 벧전2:5.
c. [덕을 세우는 일에 대해서] 롬15:2, 고전14:17
연관 단어 관련 성경
짓다(마7:26, 눅6:48, 행7:49), 세우다(마16:18, 눅14:28, 살전5:11), 만들다(마23:29, 눅11:48), 건설되다(눅4:29), 서다(행9:31), 건축하다(롬15:20), 세워지다(벧전2:5).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오늘 날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고 다스리는 영적 지도자들의 성숙의 문제는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을 가리켜서 영적 지도자로 부릅니다.
영적 지도자를 두 부류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좁은 의미의 영적 지도자와 넓은 의미의 영적 지도자입니다.
좁은 의미의 영적 지도자는 교회 안에서 영혼들을 직접 지도하고 섬기고 인도하면서 영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교역자, 선교사, 주일학교 교사, 목자와 목녀, 직분자 등입니다.
넓은 의미의 영적 지도자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자녀들과 신앙의 후배들, 그리고 불신자들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기에 영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 '권면하고'의 헬라어 '파라칼레이테'(*)는 '충고하다', '용기를 북돋우다'의 의미도 있으나, 본절에서는 '위로하다'의 뜻이 강하다(Thomas).
또한 '덕을 세우기를'로 번역된 헬라어'오이코도메이테'(*)는 원래 '집을 세우다'의 뜻으로 공관복음에서는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고(마 7:24, 26; 16:18), '교회의 성장'을 의미할때도 사용되었다(행 9:31; 엡 2:20-22; 4:12). 여기서는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도 도우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어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살지 말고 서로의 성장을 위해 부단히 노력할것을 가르쳤다.
구약의 백성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가나안 일곱 족속을 진멸해야 합니다.
반면에 신약의 백성들은 언약의 땅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신의 성품을 소유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1:4-7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헤렘'(Herem) - 하나님께서 명하신 진멸전(殄滅戰)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투를 명령 하시며 무자비 하게 모두 다 죽이고 불태워 없이하라 시는사건을 볼때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수가 있나? 하는 이해하기 힘든 불만스런 느낌이 들게 되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된다.
여리고전투의 경우를 예로 생각해보면, 이 여리고성 전투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진멸전' 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진멸전'을 '헤렘법' 이라고 한다.
헤렘이란 -'헌신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로 '바치다','멸절시키다'란 의미로 하나님께 바쳐진- 전쟁에서의 노획물을 번제나 희생제물로 여호와께 바치는 것을 말한다.
즉
헤렘법은 전쟁에서의 노획물에 적용되었다.
노획물을 여호와께 바치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성전(聖戰)을
주관하시고 실제로 싸우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획물 또한 여호와의 것이며, 그 중 하나라도 취하면 여호와의 것을 사취한
범죄 행위 가 되었다.
헤렘법의 완전한 준수를 위해서는 호흡하는 모든 것은 죽여야 하며, 가연성 물질은 태우고, 귀금속은 성소의
금고 속에 보관해야 한다.
그래서 전리품을 착복한 아간(수 7:11-15)과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 준 사울(삼상 15장)은 하나님께 징벌을 받았다.
또한 여호수아의 여리고성 함락도 헤렘법이 적용된 본보기이다(수 6장).
'...그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것이며...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너는 여호와 네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신명기 7:2-6 요약)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헷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브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 (신명기 20:16, 17)
'오직 여호와께 아주 바친 그 물건은 사람이든지 생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속하지도 못하나니 바친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아주 바친 그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라' (레 27:28,29)
아간은 바친 물건을 횡령했다가 '헤렘'을 범했기 때문에 그와 그 일족이 근절 되었고..(수 7:1)
초대교회 때 아나니아가 일부를 감추고 자기소유를 판 전부를 사도들앞에 거짓으로 내어놓아,하나님께 드렸을때 그자리에서 즉사한 사건 은 이 헤렘을 범했기 때문이다.
헤렘법은 출애굽한 하늘나라 백성에게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들에게 요구하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고 하시며, 그땅의 거민들과 우상들을 다 진멸하고, 그들이 사는 방식과 습관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룩에로의 초청이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아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게.. ' 하시려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에게 허락하시는 은총이며 은혜안 의 훈련이다.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신자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한분만을 믿고 바라는것 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도록 명령 하셨다면 우리는 영적인 가나안인 예수그리스도 품안에
살며 그분의 인도하심과 통치를 받아 누리도록 요구하시는것 거룩으로 인도하심을 받는것에 방해받는 사탄의세력 사탄의통치에 해당되는
이세상에 속한 습관들을 버리도록 ...'거짓을 버리고,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도록 ' 요구받고 있는것이 교회로 부름받은
하늘나라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마음) 즉 신앙의 목표가 되어야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살기가 등등한 사울을 다메섹에서 부르셨다.
주여 뉘시오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고...사울은 예수믿는 신자를 핍박 하고 있으나 주님은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하신다.
주님은 주님의 몸인 사울이
핍박하는 신자를 머리이신 주님과 지체로 붙어있는 신자(그의몸)를 뜻하시며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고 하시는것 이다.
주님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교회를 그의 몸으로 부르셨다. 머리 아래에 건물이 달린 몸을 상상해 보라. 교회는 그의몸이지 그의 건물이
아니다.
몸으로 부름받은 지체된 우리 신자들은 머리되신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함께 묶여진 존재인 유기체(생명체),뼈와 살이 있는
지체 이다.
교회는 거룩과 성결을 요구받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열매를 자랑하는.. 특기자랑을 하거나 학예회를 하는곳이 아니다.
헤렘법이 적용되어 거룩을 연습하며 훈련받아 '신의성품'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신앙이 자라가는곳이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나무가 나쁜열매를 맺나니 좋은나무가 나쁜열매를 맺을수 없고 못된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수 없느니라.' (마 7:16-18)
신자의복이란 교회안에서 말씀으로 훈련되어져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어 세상의 빛이되고 소금이되는 아름다운 나무가되는 "됨 "-Being-하는 것이며, 영적가나안 인 그리스도( In Christ )안에서 살아가며 헤렘 을 순종하는 삶 이다.
▣ 빛을 나누라 성경: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롬12:5) 힘은
하나될 때에 강하게 역사합니다. 힘의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됨(Unity), 둘째, 조화(Harmony),
셋째, 협력(Cooperation)입니다. 자동차 한 대를 만들기 위해 약 2만 개의 부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 2만 개가
모여서 하나의 자동차가 됩니다. 자동차 한 대가 제대로 되려면 그 부속품 하나하나가 전부 제구실을 해야 합니다. 어느 하나라도
말썽을 부리면 안 됩니다. 어느 것 하나도 빼 놓고 달릴 수 없습니다. 2만 개의 부속이 똑같이 힘을 협력해야 조화를 이루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작은 빛도 하나되고, 모아지면 큰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7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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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일곱 가지 대죄 (칠죄종) 란 무엇인가?답변 초대 기독교 교훈 가운데 처음으로 사용되었던 일곱가지의 대죄의 목록은 기독교 신봉자들에게 죄를 지으려는 타락한 인간의 성향에 대해 가르치고 훈육하기 위한 것입니다. 일곱 가지의 “치명적인” 죄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못하실 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못하실 유일한 죄는 계속적인 불신의 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는데, 이는 불신은 용서를 얻기 위한 유일한 수단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적인 죽음). 치명적인 일곱 가지의 죄악에 대한 개념은 성경적입니까? 그럴 수 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잠언 6장 16-19절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1) 교만한 눈과 (2) 거짓된 혀와 (3)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4)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5)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6)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7)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 목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치명적인 일곱 가지 죄들이 아닙니다. 6 세기의 그레고리 교황에 따르면,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는 교만, 시기, 탐식, 색욕, 분노, 탐욕. 게으름입니다. 성경에서 이러한 죄가 부인할 수 없는 죄일지라도 “일곱 가지의 치명적인 죄”라고 묘사된 적은 없습니다. 치명적인 일곱 가지 죄의 전통적 목록은 많은 다양한 죄들을 분류하는데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종류의 죄가 이 일곱 가지 범주 아래 분류될 수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 일곱 가지 죄가 어떤 다른 죄보다 더 ‘치명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죄는 사망을 낳습니다(롬 6:23).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 받은 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마 26:28; 행 10:43; 엡 1:7). |
빛의 자녀들(에베소서 5:8~14)
하나님의
자녀는 '빛의 자녀들’이다.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이나 진실함’에 있다.
'착함’이란
관대한 정신을 말한다.
즉 개인 윤리적인 차원에서 평가되는 선행,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자선행동을 말한다.
'의로움’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회 정의 차원, 즉 공적인
관계에서 정의로운 생활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진실함’이란 거짓과 위선에 반대되는 즉 진심과 진정을 뜻한다. 나는 과연 빛의
자녀다운 삶을 살고 있는가!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저희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겸손하고 온유하며 오래 참을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만큼 성장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명절을 맞아 빛의 자녀다운 모습을 가족과 이웃에게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햇볕이 되고 싶은 아이
아직
바람이 찬 봄날, 화분을 손보러 빨간 벽돌집 뒤켠 공터로 나오니 다섯살바기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모여앉은 아이들이 자기의 꿈을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이 내 어린 시절의 한 자락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흐뭇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아이가 한참을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야, 너는 뭐가 될래?" "그래, 빨리 정해라." 친구들이 지친 듯 쪼그리고 앉아
재촉하는데도 그 아이는 망설이기만 했다. 그때 내가 빙긋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빨리 말해라. 친구들이 기다리잖아." 그러자
머쓱해진 그 아이가 뭔가 결심한 듯 벌떡 일어서더니 햇볕이 잘 드는 벽으로 뛰어들어가 기대어 섰다. "난 햇볕이이야, 너희들 모두
이리로 와 봐." 나는 속으로 "어허, 제법이네" 하며 그 아이를 힐끗 쳐다봤다. 어리둥절해 하던 아이들도 모두 달려가 그 아이
옆에 섰다. "와, 따뜻하다" 하며 벽에 붙어 서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정겨웠다. 나는 가끔씩 노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제공하곤
했다. 오늘은 색색 플라스틱 포크에 토끼모양으로 깎은 사과를 들고 나오다가 무심결에 햇볕이 되고 싶은 아이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우리 할머니는 시장에서 나물을 파는데 할머니가 앉아 계신 곳에는 햇볕이 잘 들지 않아요."
그
아이는 잠깐 동안만 할머니를 비추고는 금방 다른 데로 옮겨가는 햇볕이 얄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햇볕이 되어
할머니를 하루 종일 따뜻하게 비춰 줄 거라고 했다. 나는 그 아이를 꼭 안아 주었는데 햇살을 가득 품은 것처럼 따뜻했다.
▣ 빛의 열매
성경: 엡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
가톨릭
신부가 유교인을 개종시켰습니다. 신부는 "당신이 해야 할 모든 것은`나는 유대교인이었으나 지금은 가톨릭교인이다'라고 세 번
말하는 일입니다."고 지시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신부는 그의 신앙을 체크해 보기 위해서 일부러 금요일을
택하여 심방했습니다. 그 유대인은 닭고기를 튀기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분명히 금요일에는 닭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텐데요."
"알구
말구요. 신부님. 저는 프라이 팬에 닭고기를 넣고 물을 붓고는 `이전에 나는 닭고기였으나 지금은 생선이다'라고 말했는걸요."
그럴듯한 변명이지만 거짓된 것입니다. 오늘도 진실되게 빛을 비추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1946년
성탄절 전야에 낡은 2톤 트럭이 웨스 버지니아의 산간지방을 달리고 있었다. 운전수는 탄광에서 석탄을 나르는 이였다. 이제 하루의
고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집 쪽으로 난 길로 들어섰을 때 그의 늙은 아버지가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10Km쯤 떨어진 산 속에 사는 한 부인 이야기를 하였다. 몇 달 전에 남편이 죽었는데 사는 게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 돕고
사는 전통으로 광부들을 상자 몇 개에 먹을 것과 선물들을 넣었다. 그리고 석탄을 몇 부대 만들었다. 이것을 그 집에 전해주고
오라는 것이다. 그는 짜증이 났다. 몸은 피로해서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것도 성탄절 전야에 이미 늦었는데 기다리는 집안 식구들에게
뭐라고 할 것인가?
그러나 마음을 고쳐먹었다. "오늘이 성탄이 아닌가!"
그는
짐들을 실었다. 그 집을 찾아 산 속을 헤맸다. 한참 가니 비포장 도로가 꼬불꼬불 언덕으로 이어졌다. 더 올라갈 수 없어 그는
차에서 내려 2킬로쯤 눈보라 속을 걸어 올라가 오두막집에 도착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 부인과 어린이들 외엔 차도 수레도 없었다.
그는 다시 차로 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후진으로 그 언덕을 밀어 올라갔다. 그는 물었다. "하나님 내가 지금 무얼하고 있는
겁니까?" 그런데 트럭에 눈이 달린 듯 했다. 낡은 트럭이 그 좁고 꼬불거리는 길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그 오두막까지 올라간
것이다. 현관에는 그가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행복한 4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는 상자들을 내려놓고 석탄을 부렸다. 그러는
동안 허름한 옷을 입은 아이들이 가냘픈 몸으로 상자를 나르고 운전수를 오두막 안으로 맞이하였다. 모두들 행복했다. 어두운 길을
다시 내려가면서 그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이 트럭을 몰고 저 산 위를 후진으로 올라가다니! 이 눈 속에, 어디서 도움이
왔던가!" 그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이 이 험한 세상에 오셔서 자신에게 성탄의 선물을 주신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자신이 그 하나님의 헌신이 되어서 그 어두운 길을 올라갔던 것을 알게 되었다.
▣ 생명의 빛
닉슨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을 역임하고 현재 세계 교도선교회 회장을 맡고 있는 찰스 콜슨이 잠비아의 어떤 교도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바짝 마른 죄수들이 허리만 감춘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잠을 잘 공간이 없어서 교대로 잔다고 했다. 그들은 밤에 한
양동이의 물을 주면 그것을 마신 후 그 양동이에 배설한다고 했다.
콜슨은
잠비아 교도선교회 회장 라잔의 안내로 교도소 본부 건물 안의 가장 감시가 심한 구역에 들어갔다. 라잔이 “들어보세요”하고
귓속말을 했다. “저들이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간수들이 육중한 대문들을 열어주어서 들어가보니 작은 감방들로 둘러싸인 먼지
나는 운동장에서 60∼70명이 죄수들이 환한 웃음을 머금고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뒤의 흰색 벽에는 숯으로 그려진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상이 있었다. 그들은 함께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 때문에 그 무시무시한 곳에서도 기쁨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거기에서
생명의 빛 예수님을 영접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4)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은 생명의 작은 빛들이 된다. 빛은 어둠 속에서 그 존재 가치를 발견한다. 빛의 본질은 어두움을
탓하지 않고 어두움을 밝히는 데 있다.
어떤
직장 여성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동료들 사이에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너무 괴로워서 신앙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으로
목사님에게 찾아갔다. 상담하는 중에 목사님이 이런 질문을 하셨다. “우리는 어디에 등불을 둡니까?” 그녀가 답변을 하지 못해서
우물거리고 있는데 목사님은 말씀을 이어가셨다. “우리는 어두운 곳에 등불을 둡니다.”
하나님께서
그 여성을 신앙생활하기 어려운 직장에 배치하신 것은 그렇게 어두운 곳에 생명의 빛을 비추라고 하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몇주후 다른 여성들과 함께 목사님을 찾았다. “목사님, 이 분은 오늘 밤 예수님을 영접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이 분은 우리
직장에서 13번째로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신 분입니다.” 그녀가 어두운 세상을 탓하는 않고 생명의 빛을 발하는 동안 그 직장은
그만큼 밝아진 것이다. 우리도 그녀처럼 될 수는 없을까?
/권성수 <대구 동싱교회>
▣ 모기의 생리
모기는
어둠을 좋아해 낮에는 숨어 지내다 주로 밤에 활동합니다. 불을 켜면 사라지고 불을 끄면 공격을 개시하는 것이 모기의 생리입니다.
사람도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 생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밝은 곳을 피해 어둡고 침침한 곳을 찾아드는 습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카페같은 곳을 찾으면 침침하게 꾸며 놓은 곳이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정국 현안인 정치자금 문제도 모두 어두운 곳에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납치 도박 불법 탈선 사기 등의 범죄도 대부분 어두운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문제들은 낮보다 밤에 이루어지는 일이 많습니다. 모두 어두운 것을 좋아하는 습성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낮에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밝음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낮에와 같이 단정하라”(롬
13:13)고 했습니다.
/이정익 목사(신촌성결교회)
▣ 빛 가운데 있는 이유
아프리카에서 충성스럽게 헌신하던 한 선교사가 선교의 사명을 마치고 죽었다. 이 선교사의 무덤에 그의 전도를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아프리카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비문을 썼다.
“당신이 올 때는 어두웠으나 당신이 떠나간 지금 우리는 빛 가운데 있습니다. 빛이 되기 위해선 자신을 스스로 태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 영혼을 비추는 햇빛
사람들은
대부분 화창한 날씨에는 기분이 좋아지고 하늘이 흐려지면 우울해집니다. 관광업계에서는 이 사실을 이용하여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날씨가 좋은 곳으로 끌어들여 사업에 성공하고 있습니다. 태양을 즐기고 그 많은 혜택을 즐기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은 기분을 유지하기 위해 좋은 기후에만 의존한다면 우리들 내면의 세계는 날씨처럼 변덕스럽게 될 것입니다.
나는
십대에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매일 아침 나는 그 날 날씨를 점검하곤 했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행복했고,
날씨가 음침하면 나도 우울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나는 나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나의 죄에 대한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나의 삶 속에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나는 다음날 아침 그 날의 날씨를 점검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날씨가 더 이상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의로운 해”가 나의 마음에 떠올라(말4:2) 나의 변덕스럽기만 하던
행복의 원천을 예수님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개인적으로 어두운 시간도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나에게 변함 없는 “해와
방패”가 되셨습니다(시84:11). 나는 지금도 화창한 날을 좋아하지만 더 이상 “해를 경배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이제는 밖의
날씨가 어떻든 내 안에서 밝게 비추이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경배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경배하는 사람입니까?
▣ 빛을 전하는 신문
앞서가며
사는 사람, 따라가며 사는 사람이 있다. 비록 같은 시대, 같은 환경 속에 산다 해도 이들의 삶이 같을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삶의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앞서가며 사는 사람은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다. 반면에 따라가며 사는 사람은
소극적이요 미온적이다. 그러므로 같은 인생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생각과
행동이 남보다 앞선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 그런 사람들은 때때로 자기시대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배척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그런 이들로 인해 역사는 발전하고 시대는 새롭게 변모한다. 선각자는 그래서 위대하다. 말과 영광 받는 일에는 앞서면서도 희생과
봉사에는 뒷걸음 치는 자들이 있다. 약은 꾀는 자신을 망칠 뿐이다.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당신들
앞서 나를 보내셨나이다 라고 고백했던 요셉처럼 살아야한다. 19년전 이단과 불신앙의 시대상황으로부터 한국교회를 지키려고 창간된
국민일보의 선각자적 행동은 그래서 더욱 빛을 발한다.
/길자연 목사(왕성교회)
▣ 반사 빛
행성
중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은 태양뿐입니다. 밤하늘을 비추는 달빛도 태양으로부터 받은 빛을 반사하는 빛입니다.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찬란한 별빛도 반사 빛일 뿐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별빛을 따라 찾아온 곳이 바로 예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
마굿간이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빛을 발하십니다. 은혜의 빛입니다. 인간은 은혜의 빛을 복으로 받고, 받은 복을 이웃들에게 전합니다.
반사 빛입니다. 반사체가 아닌 행성이 무의미한 존재인 것과 같습니다. 이웃 사랑과 봉사는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에 감사하여 반사하는 하나님의 빛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어야 그 분의 빛을 반사합니다. 어둠에 묻혀버린 빛은 더 이상
빛이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고난과 어둠의 때에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합니다. 하나님이 믿어주는 사람에게만 복의 빛을
주십니다.
/박종화 목사(경동교회)
▣ 빛에 관한 성경 말씀
0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1:3)
0 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 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욥12: 25)
0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시27:1)
0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37:4- 6)
0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0 일어나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60:1)
0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5:14)
0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1:9)
0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0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0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9:5)
0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
0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8)
0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1서 1:7)
0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요한 1서 2:9)
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요일 2:10)
0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 별이 빛나는 밤에
별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난다는 것을 우리는 잊고 살 때가 너무 많습니다.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자녀를 키우는 한 어머니가 보잘것없는 식탁 앞에 앉아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음식만으로도 감사하렴. 어려워도 손에 잡을 수 있는 게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단다. 어두울 때라야 별은 더욱 빛나 보이는 법이지.”
찬바람이 휘몰아칠 때 낡은 이불 한 자락이 더욱 따뜻하고 숟가락은 많은데 국그릇이 적을 때 입맛은 더욱 당기고 밤이 캄캄해서 별은 더욱 빛나고….
우리 인생 곳곳에는 빛난 행복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아름답다고 노래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오인숙 (인천 영화초등학교 교장)
▣ 빛과 같은 인생
오래전에
한 서커스단이 미국에서 공연을 하던 중에 갑자기 정전 사태가 벌어졌다. 1분간이었지만 관중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때
무대에선 조련사가 호랑이 네 마리를 데리고 재주를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둠 속의 많은 관중도 위험했지만, 조련사가
호랑이들의 공격을 받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장내가 물을 끼얹은 듯이 고요하고 캄캄한데, 무대에선 조련사의 채찍 소리와
호랑이들에게 동작을 지시하는 명령이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전기가 다시 들어오자 관중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공연이 끝나고 기자 회견이 열리자, 조련사는 이렇게 말했다.
"어둠 속에서도 호랑이들은 나를 잘 봅니다. 내가 호랑이를 못 보고 있다는 것을 호랑이들이 눈치채게 해선 안 됩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도 밝은 빛 속에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조련사가 어둠 속에서도 호랑이들을 제압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빛의 사람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죄악으로 어두워진 세상에서 악을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살려면 빛의 사람이 돼야 한다.
-「하늘 소망」/ 박응순
* 기도: 항상 깨어 있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자녀가 되게 하소서. 오늘도 주님이 주신 지혜로 시대를 분별하며, 맡겨진 일과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충성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생명의 삶
▣ 세상의 빛
40년
전 링글린 브러더즈 서커스단이 뉴욕 공연을 할 때였습니다. 공연중 갑자기 정전이 됐습니다. 1분 간이었지만 관중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무대에서는 조련사가 호랑이 네 마리의 재주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철창 속이니까 관중에게는 위험이
없었으나 캄캄한 데서 조련사가 호랑이의 공격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걱정이었습니다. 장내가 물을 끼얹은 듯이 고요하고 캄캄한데
무대에서는 조련사의 채찍 소리와 호랑이의 동작을 지시하는 명령이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불빛이 다시 켜지자
관중들은 모두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습니다.
뒤에 기자회견이 열리자 조련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호랑이들은 나를 잘 봅니다. 내가 호랑이를 못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도 밝은 빛 속에 있듯이 행동해야 합니다.” 조련사가 어둠 속에서도 호랑이를 여전히 제압하고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어둠 속에서도 빛의 사람으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죄악으로 어두워진 이 세상에서 원수 마귀를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살려면 빛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사랑의 빛, 진리의 빛, 평화의 빛, 생명의 빛을 나타날 때 자랑스런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늘 본향에서도 많은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5:8-11)하였고,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5-7)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어둡고 황량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과 믿음과 사랑입니다. 1845년 미국 조지아주의 어거스틴 제일침례교회에서 남침례교단이 조직되었습니다. 교단을 창립한 사람들은 “혼란스러운 사회”에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선언하고 어두운 시대에 세상의 빛이 되고자 결의했습니다. 그날 교회에서는 이들의 선언과 결의를 기리기 위해 다음과 같은 기념비를 남겼습니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고, 믿을 수 없는 일을 믿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기 모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빛이요, 등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과 겸손과 온유의 모습을 이웃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웃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 우리는 즉시 달려가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급히 필요할 때, 또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부딪혔을 때도 어떤 식으로든 그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놀라운 삶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려면 우선 교회를 본래의 위치에 가져다 놓아야 합니다. 세속화되고 맛 잃은 소금같이 변질되고 외식하는 교회가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을 하면 지옥 자식이 배나 증가하게 되게 하는 것입니다.(마23:15) 특히 교회지도자들이 세상사람들처럼 물질과 명예, 권세에 연연하여, 외형적인 큰 교회의 목회자될 꿈만을 꾸고 있거나, 엉터리 박사학위등을 취득하려고 힘쓰고, 교단과 교회행사조직에 명예회장, 상임회장, 고문, 부회장 등등 거창한 직함을 좋아하여 수십 명씩 임명하는 등의 어두운 작태를 벌이고 있는 한 교회는 절대로 세상의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어두움 속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교회가 먼저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며(롬14:17), 초대교회와 같이 나눔과 사랑과 성령이 충만한 교회로 개혁되고 변화된 후에야, 세상에 빛을 비추고 그리스도가 바르게 전파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빛이 필요한 곳은 우리가 사는 동네, 즉 어두움 속입니다.
어느 도시의 시장이 전망대에 올라가서 도시의 야경을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야! 정말 아름답구나. 이 불빛을 한 건물 안에 다 모으면 얼마나 멋질까!” 그 시장이 커다란 건물을 지어 전 등을 그곳으로 다 모으고, 다른 곳은 모두 암흑 속에 들어가게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 도시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빛을 가지고 나가서 이웃에게 비추어야 합니다. 빛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비춰줄 때 그 가치를 제대로 발휘한 것입니다. 빛을 가장 효과적으로 밝힐 수 있는 곳이 바로 이웃을 향한 우리의 가정과 교회임을 기억하십시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60:1)
기도: 빛으로 오신 주여, 내 영혼을 밝게 비추시고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쳐 주옵소서. 주님의 불이 당겨져 나의 몸과 마음이 주를 향한 열정으로 타오르게 하시고 나의 주위에 이 빛을 비출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를 죄악가운데서 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
▣ '땅속의 빛'
한권의 책은 때때로 한 사람의 인생을, 운명을 통째로 바꾼다.
그의 인생 최대의 발견은 '땅속의 어둠'이라는 책 한 권이었다. '땅속의 어둠'이 어둠으로 내몰지 않고 그로 하여금 빛으로, 꿈으로 바꾸게 하는 성공의 지도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 다음은 열정과 실천, 그리고 결단이다.
- 잭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의《1% 행운》중에서 -
*
동굴 얘기가 실린 '땅속의 어둠'이라는 책 한 권으로 세계 최고의 동굴 수집가이자 관광 사업가가 된 스티븐 페어차일드의
이야기입니다. '땅속의 어둠'이 '땅속의 빛'으로 바뀌는 일생 일대의 극적 변화와 행운은 남의 얘기가 아니라 언제든지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행운은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준비하는 사람에게만 빛으로 보입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 빛의 힘과 아름다움
샛별미션센터 개관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인테리어 나머지 공사가 잘 마무리되고 선교언어 연구원이 잘 운영되도록 기도와 성원을 부탁합니다.
내게는
꿈이 있었다. 찬란한 꿈이었다. 그것은 많은 선교사를 키우고, 보내고, 돕고, 선교 중심적인 교회를 많이 개척하는 꿈이었다. 그
꿈을 이룰 선교센터의 꿈도 가졌다. 그러나 그 꿈에 비해 가진 것이 적었다. 때로는 초라한 내 모습에 돈키호테처럼 황당한 꿈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결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2007년
10월 31일, 교회 옆 공간에 임대를 내준 스포츠센터 사장이 재계약 날에 갑자기 재계약을 안 하겠다고 했다. 재정적인 준비를
전혀 못했기에 그 순간에는 크게 당황했지만 그 위기는 축복의 기회가 되어 2년 뒤로 미뤘던 선교센터의 비전이 앞당겨졌다. 드디어
인테리어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진행은 어려웠다. 공사비를 위해 매일 기도했다. “하나님! 오늘도 공사 진행을 위한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또
한 가지 공사 진행 중에 가장 염려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미션센터 내부의 벽 공사를 하면서 회색의 시멘트 보드로 벽을 댄 것
때문이었다. 그러자 인테리어를 할수록 센터가 더 어두워지는 느낌이었다. 공사 감독에게 염려하듯이 말했다. “집사님! 공사할수록
어두워지고 칙칙해지네요.” 그는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안심했다가 다음 날 시멘트 보드가 계속 덮이니까 회색의 분위기에 질식할 것 같아 감독에게 또 말했다. “집사님! 저는
아무래도 확신이 서지 않네요.” 그래도 별로 염려하는 기색이 없어서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그러자 “시멘트 보드는 외벽에 주로
쓴다! 주차장에 주로 쓴다!”는 부정적인 글들만 보였고, 또한 시멘트 보드로 인테리어를 한 사진 중에 별로 예쁜 사진들이 없어서
계속 염려가 되었다.
어느
날, 아내가 시멘트 보드 공사 현장을 보더니 “세련되게 보인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염려가 조금 덜어졌다. 그런데 그
염려가 결정적으로 사라진 때가 있었다. 공사를 거의 마쳐가면서 전등을 달고 난 뒤부터였다. 전등이 빛이 나오면서 시멘트 보드와 그
주변이 어우러지며 내 눈에도 인테리어가 세련되게 보였고, 사람들이 다 인테리어를 잘했다고 했다. 그때 빛의 힘과 아름다움을
새롭게 깨달았다.
한
미술가가 겨울의 저녁노을 풍경을 그렸다. 그 그림에는 눈으로 하얗게 덮인 나무들과 폭풍 가운데 홀로 외롭게 있는 집이 그려져
있었다. 슬프게 보이는 장면이었다. 그때 그 미술가가 노란색 크레용으로 창문 하나에 전등을 그려 넣었다. 그 하나의 전등으로
어둡고 칙칙했던 그림이 순식간에 기쁨과 희망이 넘치는 그림으로 변했다.
인생이
아무리 시멘트 보드와 같이 회색으로 칙칙하게 보여도 은혜와 진리의 빛이 그 인생에 비추면 그 인생도 아름답게 빛나게 된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게 느껴져도 결코 낙심하지 말고 그때 더욱 은혜와 진리의 빛을 따라가라. 그러면 칙칙했던 내 인생도 곧
아름답고 힘 있는 인생으로 빛나게 될 것이다.
ⓒ 글 : 이한규
▣ 암흑의 도시가 빛의 도시로
여섯
살짜리 소년 다이팬의 아버지는 누워서 파이프가 다할 때까지 한 번에 몇 시간씩 긴 파이프로 담배를 피웠다. 헤로인은 어디서든
피거나 수시로 주입되었다. 주위에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길거리에 누워 있는 앙상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예수의
빛은 이 어둠의 사람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재키
플린저가 말하길 마약을 끊는 데 기도 외에는 아무런 약물도 필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방법이 가능한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이들이 날 위해 기도했지만 나는 너무도 불편했다. 그중 한 사람이 나에게 입을 열어 기도하라고 했다. 그들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일 내가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런 역사도 없을 것이고 결국 나는 다시 마약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기도했다. ‘예수님, 제 죄를 시인합니다. 제 삶에 들어오셔서 저를 고쳐 주시길 원합니다.’
놀라웠다. 내가 ‘아멘’이라고 말했을 때 모든 고통이 사라졌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었다. 전에 마약을 끊으려고 했을 때는
절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17년 만에 마약에서 해방된 누가의 고백이다.
‘암흑의
도시’로 알려졌던 이곳이 이제는 홍콩의 모든 사람들이 그 빛에 이끌리는 유명한 곳이 되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고치시고,
구원하시고,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그곳에서 고침 받고, 구원 받고,
용서 받은, 바로 그들이었다.
-장벽을 부수고/재키 플린저-
[출처] [본문스크랩] 빛에 관한 예화 모음|작성자 pygr21
너희는 다 - '다'는 데살로니가 교인들 전부를 포함한다. 혹자는 이 말이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용기를 심어주는 말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Frame).
빛의 아들이요 - '빛의 아들'이라는 말은 요 12:36의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와 엡 5:8의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빛의 아들'이란 '빛속에 있다'는 의미 이상의 것이며(Morris), 하나님은 빛이신 고로 그의 자녀들의 삶은 '빛'에 의해 특징지워진다(Bruce).
낮의 아들이라 - '낮'(*, 헤메라스)을 '빛'의 은유적인 표현으로 간주해 '빛의 아들'과 같은 의미로 생각하는 견해(Lightfoot)와 '주의 날'을 그의 '재림의 날'로 확대 해석하여, '낮의 아들'을 '파루시아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로 해석하는 견해(Bruce, Morris)가 있다.
낮의 아들이라 - '낮'(*, 헤메라스)을 '빛'의 은유적인 표현으로 간주해 '빛의 아들'과 같은 의미로 생각하는 견해(Lightfoot)와 '주의 날'을 그의 '재림의 날'로 확대 해석하여, '낮의 아들'을 '파루시아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로 해석하는 견해(Bruce, Morris)가 있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for you know very well that the day of the Lord will come like a thief in the night.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
'주의 날'은 구약에 나오는 개념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로움과 심판을 나타내시는 날을 말합니다(욜 2:31. 암 5:18. 말 4:5).
요엘 2: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아모스 5:18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말라기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주의 날은 초대교회에서 예수가 '주'(쿠리우스. κύριος)로 인식되면서 '주의 날'(살후 2:2. 벧후 3:10), '그리스도의 날'(빌
1:10. 2:16), '그리스도 예수의 날'(빌 1:6), '우리 주 예수의 날'(고후1: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고전 1:8), '그날'(고전 3:13. 살후 1:10. 히 10:25) 이라고 불렀습니다.
주의 날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는 주일(主日)<the Lord's day>
주의 날이란 "주일(主日)"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요일(日曜日)'은 곧 "주일(主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요일을 "주일" 또는 "주님의 날"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둘째는 재림(再臨)의 날<Second Coming Day>
주의 날이란 "재림(再臨)의 날" 곧 승천(昇天)하셨던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다시 오시는 날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주의 날이란 재림의 날을 말합니다.
사자성어(四字成語)에 '함흥차사(咸興差使)' 라는 말은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을 빗대어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재림을 말할 때, "그도
함흥차사이지, 오긴 언제 와! 2천년이 넘는데도 안 오지 않아?" 하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계 1:7-)"
"속히 오리라(계 22:20)"
휴거(携擧) - 이끌 휴(携), 들 거(擧)
rapture - 황홀감
하르파조
[ harpazō ] ἁρπάζω 스트롱번호 726
I. 취하다, 잡아채다.
1. 훔치다, 끌어가다, 잡아가다, 마 12:29, 요 10:12.
2. 데려가다, 빼앗다, 빼앗아 가다, 잡아 채다.
a. 강제로 ~하다, 마 13:19, 요 6:15, 10:28, 구해내다, 유 1:23. 체포하는 것, 행 23:10.
b. 저항할 수 없도록 ~하다, 행 8:39, [수동으로] 마 11:12, 고후 12:2, 계 12:5.
연관 단어 /
마라나타
마라나타(Maranatha, 아람어: מרנא תא: maranâ thâ' 또는 מרן אתא: maran 'athâ' , 그리스: Μαραναθα, Our Lord has come,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2개의 아람어가 합쳐진 공식인데 신약 성경에 두 번 나온다.
성경에서 "마라나타(מרנא תא, maranâ thâ))"라고 하는 용어는 고린도전서 16:22,요한계시록 22:20에 두 번 나온다.
이것은 본래는 아람어로 기도문에 쓰인 것으로 헬라어로 표기한 것이다.
이
용어는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디다케(가르침이라는 뜻)"의 예식문(10:14)에서도 발견되며,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우리 주여 오소서(Our Lord(10:14) come 혹은 Our Lord has come)"라는 의미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휴거'는 '끌어 데리고 가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헬라어 '하르파조'는 '강력한 힘으로 낚아채다(Rapture)'라는 뜻으로 개역한글에서는 '끌어올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끌어당기는 물체인 '자석'을 연상하게 됩니다.
빛되신 예수님께서 공중강림을 하실 때에 끌어당기는 힘이 어찌나 센지...
그날에는 이미 무덤속에 죽어 있는 뼈만 남은 시신들이 순식간에 부활체가 되어 올라가고 강과 바다에 뿌려진 화장된 가루들이 순식간에 부활체로 모아져서 공중으로 끌어올려지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의 마른뼈 환상의 성취)
마치 엄청난 자성을 소유한 산업용 강자석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금속들이 빠른 속도로 달라붙는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 끌어올려질 수 밖에 없는 사람은 누구인지 <자석예화>를 통해서 조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석예화
자석에 붙는 것은 정해져 있습니다.
나무토막, 플라스틱, 돌 등은 전혀 자석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금속이라 할지라도 모든 금속이 자석에 달라붙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석에 달라붙는 금속은 '철'입니다.
철과 비슷한 금속 중에 구리, 알루미늄, 스테인레스강이 있는데 이들 역시 자석에 붙지 않습니다.
흔히 사용하는 동전들과 쿠킹호일들이 자석에 붙지 않는 이유는 이들이 바로 구리와 알루미늄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석이 가까이 왔을 때 붙지 않는 경우를 세가지로 나누어서 영적인 해석을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나무토막, 플라스틱, 돌 (불신자)
- 나무, 플라스틱, 돌 등 자성이 전혀 없는 모든 물질들은 자석에 달라붙지 않습니다.
이들은 불신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중강림하실 때에 이들이 들림받지 못하고 이 땅에 남아있게 된다는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한 진리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새롭게 철로 거듭나도록 부지런히 복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2. 알루미늄 (세상적인 그리스도인)
- 알루미늄은 자성이 있긴 하지만 너무나 미약하여 중력을 이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력때문에 자석에 붙지 않는다고 합니다.
주님 강림하실 때 이들은 자신의 발목을 강하게 붙잡고 있는 세상 욕심들(물질욕, 명예욕, 출세욕, 정욕 등)의 힘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결국 들림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소망이 있는 것은 알루미늄도 계속 강한 자석 근처에 머물러 있으면 강자성체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과 친밀하게 가까이 붙어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강자성체가 될 수 있고 주님 오실 때에 반드시 들림받게 될 것입니다.
3. 스테인레스강 (자기의가 강한 그리스도인)
- 스테인레스강은 가장 철과 흡사하여 당연히 자석에 붙을 것 같은데 붙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스테인레스강에 '니켈'이라는 성분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니켈의 함유량을 조절하여 여러가지 합금을 만드는데 그 대표적인 금속이 스테인레스강입니다.
스테인레스강은 녹도 잘 슬지 않고 성능도 좋아 자동차, 건축자재 등 많은 금속제품들에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해석할 때 이들은 자기의가 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들은 복음 외에 니켈과 같은 '자기의'라는 성분이 신앙에 첨가가 되어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굉장히 열심있고 꾸준하고 탁월하게 신앙생활 잘 하는 것 같아서 누가 봐도 저 사람은 당연히 구원받고 1순위로 들림받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성분에 제거되지 않는 한 안타깝게도 그는 들림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잘 살펴서 자기의를 내려놓고 오직 그리스도 그 분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게 안되면 주님은 반드시 용광로 속에 넣어서 그 속에 있는 불순물들을 제련하시는 과정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다면 과연 누가 예수님의 공중강림때에 들림받을 수 있는 휴거의 조건에 합당한 사람이겠느냐가 관건입니다.
4. 철 (휴거에 합당한 진짜 그리스도인)
다른 첨가물이 없는 철이 자석에 붙습니다.
철 중에서도 탄소함유량이 가장 적은 '순철'은 가장 빨리 자석에 붙습니다.
순철은 딱딱하지 않고 연해서 깨지지도 부러지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순철은 주로 전기통신분야의 와이어로 쓰인다고 합니다.
마치 주 안에서 연단되어 온유한 성품으로 다듬어져서 어떠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늘 감사로 화답하며 주님의 사랑을 열방으로 실어나르는 영적인 와이어 통신분야에 쓰임받는 사람들... 한마디로 주님의 신부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이 실제가 된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세상 것들(불순물)이 첨가되지 않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주님의 강하심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예수, 오직 보혈, 오직 십자가만 붙잡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https://m.blog.naver.com/keys01/222090907336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 '때와 시기'는 행 1:7에도 언급되었다.
어거스틴(Augustine)에 의하면 '때'(크로논)는 '시간의 연장'(stretches of time)이며, '시기'(카이론)는 '적절한 순간'(opportune moments)이라고 한다.
이와 거의 같은 견해로서 혹자는 '크로논'은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며 '카이론'은 질적(質的)인 시간으로서 '파루시아'(*, '도래','강림')를 예측케 하는 시간으로 해석한다(Morris).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 '때와 시기'에 대하여 쓸 필요가 없는 이유는 바울이 이미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에 일어날 사건에 대하여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살후 2:5).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주의 날
- '주의 날'은 구약에 나오는 개념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로움과 심판을 나타내시는 날이다(욜 2:31; 암 5: 18; 말 4:5).
이는 초대교회에서 예수가 '주'(퀴리우)로 인식되면서 '주의 날'(살후 2:2; 벧후 3:10), '그리스도의 날'(빌 1:10;2:16), '그리스도 예수의 날'(빌 1:6), '우리 주 예수의 날'(고후1: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고전 1:8), '그날'(고전 3:13; 살후 1:10; 히 10:25) 등으로 불렸다.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 이것은 '인자의 오심'에 대한 예수의 교훈(마 24:43; 눅 12:40)에 근거해서 한 말이다.
이 비유의 요지는 신자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눅 12:40; 17:24; 벧후 1:10, 11; 계 3:3; 16:15).
예수님이 이 땅위에 오실 것이란 초림(初臨)에 대한 구약의
예언 회수는 456회라고 합니다.
반면에 주님의 재림(재림)에 대한 예언 회수는 신구약에 도합 1,518회(신약에만 300회)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56회 예언된
예수님의 초림(初臨)은 성취되었는데, 1518회나 예언된 재림은 왜 아직 성취되지 않을까?
우리는 몇 천 번이라도 대답하기를, 그 약속은
이루어진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그대로 지키십니다.
그의 약속은 곧 사실과 같은 것이며, 진리 자체라고 하겠습니다.
다만 시간에 대한 개념이 우리들과 다를 뿐입니다(벧후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그는
여러 천년을 앞두고, 약속하시며, 기약이 이르면 성취하실 것입니다(계 1:7)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목숨의 소중함(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신약
성서는 종말론적 관심이 옥중에서 해방을 기다리고, 밤중에 새벽을 기다림같이 열망적입니다. 재림에 관련된 곳이 318번이나 썼고
천국과 지옥과 부활과 영혼 구원문제는 백주의 태양처럼 강렬한 현실이었습니다. "온천하를 얻고도 네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현세주의자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하시고 말세에 사람들이
노아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마24:38)하는 현세가 전부이며, 유물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가치관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말세 인간들은 예수 재림을 기롱합니다(벧후3:3). 복음적 신앙을 오히려 반사회, 반문명, 반지성, 혹은 피안주의니
현실도피니 하는 낙인을 찍어 냉소하는 풍조를 만듭니다. 그것도 진화론 공작과 함께 악마의 반성서적, 반내세적, 반종말적정신 풍토
조성을 위한 고등공작의 가장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오늘도 영적인 세계를 알고 깨어 근신하며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숨(5590. 프쉬케)
얻고도...잃으면
- 여기에서 '잃으면'(제미오데)이란 '해를 입히다'
'손해 보다'는 뜻의 '제미오오'(*)의 부정과거 가정법으로서 아직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는 표현이다.
이는 '얻고도'(*, 케르데세)라는 말이 능동태를 취하고 있는데 비해 수동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고 할
것이다.
즉 비로소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얻는다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어떤
유익이 있겠느냐는 역설적 대구인 것이다(눅 9:25).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 이는 인간 영혼(생명)의 최고
가치성과 유일성 및 단회적 생명성을 강조한 말이다.
즉 예수께서는 비록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온갖 부와 명예는 잃고 난 뒤에도
다시 취할 수 있지만 인간의 영혼은 한번 상실하면 도무지 회복할 수 없는 고귀한 것임을 강조하셨다.
이제 현존하는 모든 사람들은
'온 천하'냐 '자기 목숨'이냐 라는 종말론적 선택을 해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선택하기
원하신다(룻 1:16, 17; 왕상 18:21; 히 11:25).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새겨 있는 낙서
제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갇혀 있었는데, 그곳 벽에는 그들이 쓴 글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들이 남긴 글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우리는 메시야가 오실 것을 믿고 있다. 단지 그의 도착이 좀 늦어지고 있을 뿐이다."
성경의 신약에서만도 재림의 약속이 318번이나 나온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되 하나님의 시간 개념으로, 하나님의 넓은 마음을 생각하고 기다려야 하며, 종말은 진정으로 역사의 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참조: 벧후3:8, 약5:7-9, 딤후4:1-6
블룸하르트와 마차
블룸하르트는 남독일 시골 마을의 목사였다. 그저 평범한 시골 목사에 불과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그의 '종말론적 신앙론'이 기독교사에서 꽤 의미 있게 다루어졌다.
블룸하르트
목사는 예수의 재림을 살아 생전에 보리라고 예언하며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하였다. 그의 집 마당에는 언제나 한 대의 마치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시자 마자 그 장소로 달려가려고 준비해 둔 것이었다. 이렇듯 그는 끝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았다. 그리고 그러한 종말론적 사상으로 인해 사회나 현실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를 일깨워 줌으로써 커다란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물론 그의 생애 동안에 예수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끝날에 대한 확신 가운데서 깨어 한 시대를 생기 있게 살다간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 참조: 마25:13, 엡6:10, 히13:7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Therefore encourage each other with these words.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사람의 글"
어떻게 읽어야 할까? 예. 사. 재
1. 예수
2. 죽음(사망)
3. 재림
죽음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깨달음
미하엘 천사
톨스토이의 작품 [인간은 무엇을 사는가]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미하엘이란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벌로, 지상에서 구두직공이 되어 일을 했다.
미하엘은 일하면서 몇가지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인간에게 베풀어 있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어느날 한 신사가 천사인 줄 모르는 이 구두직공에게 "한
일년동안 튼튼하게 신을 구두를 만들어 달라"고 말했다. 미하엘이 보니 그 신사 옆에 죽음의 천사가 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1년"을 운위하는 것을 본 미하엘은 "인간에게 베풀어 있지 않은 것" 이 죽음의 날짜임을 알고 엷게 웃는다.
언제 호흡이
멎을지 모르는 인생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구원과 영생이다.
또한 주님이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죽음과 재림에 대한 성경적인 신앙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죽음을 잊지 마라' 등으로 번역되는 라틴어 문구이다.
어휘 'memento'는 'remember'에, 'mori'는 '(to) die'에 대응한다.
동양권에는 비슷한 말로 화무십일홍이 있었다.
"서로 위로하라(encourage each other)"
오늘의 시대를 일컬어 위로 받기 어려운 시대라고 탄식합니다.
왜냐하면 각 가정마다 한 자녀(외동 아들 및 외동 딸) 양육하기도 버겁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다른 형제자매들과 어울려 지낼 수 없었기 때문에 사회성이 결여된 환경에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에는 불법이 성행하므로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이미 예고하셨습니다(마 24:12).
그렇다면 이와 같은 시대에 믿음의 사람들이 어떤 신앙의 길을 선택해야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서로 위로하라"고 권면합니다.
어떻게 위로(慰勞) 할 수 있을까요?
'여러 말' 즉 "주님의 말씀으로" 위로하라고 합니다(15절).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곧 주님이 오실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사회적인 의무와 책임을 소홀히 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지 죽은 형제자매들보다 지금 살아있는 성도들이 앞설 수 없다고 합니다.
첫째 부활이란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많은 성도들이 부활했다고 하셨습니다(마 27:51-52).
또한 사망 권세를 이기는 믿음으로 첫째 부활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계 2:11).
따라서 이미 죽은 성도들에게도 살아있는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재림과 부활의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위로라는 헬라 단어는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 라고 합니다.
'파라칼레오'라는 단어의 뜻은 "곁으로 부른다" 입니다.
참된 위로자는 위로 받아야 할 대상을 찾아가서 그 곁에 머물며 함께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위로(慰勞)라는 한자의 훈(訓)은 "위로할 위" "일할 노"라고 하여 "고달픔이나 슬픔을 잊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위로를 영어 성경에서는 "encourage"라고 하여 "....의 안에(in)" "용기를 주다(courage)"라는 두 단어의 합성로 절망의 상황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새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루터의 부인은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1499-1550)"라고 합니다.
루터가 실의에 빠졌을 때 그녀는 상복을 입고 루터 옆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루터는 부인에게 "누가 죽었소?" 라고 물었는데 부인은 "하나님이 죽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루터는 깜짝 놀라며 "어떻게 하나님이 죽을 수 있습니까?" 하고 소리칠 때 그녀는 "당신이 그렇게 실망하는 것을 볼 때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죽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깨우쳤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실망과 좌절에 처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참된 위로자가 되어 "오직 예수로만" 새로운 삶의 소망을 갖도록 희망의 끈을 던져주시기 바랍니다.
어지러운 세상 중에
위로(3870)
παρακαλέω
스트롱번호3870
성경: [살전4:18]
주제1: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그릇된 재림관]
주제2: [종말론적 교훈]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 바울이 언급한 '이 여러 말'은 실제로 '주의 말씀'을 지칭한다(15절). 따라서 이 말씀은 그들에게 참된 위로를 줄 수 있는 견고한 기초가 되었다.
첫째부활 / 이긴 자의 부활, 그리스도인의 부활, 예수를 영접한 자의 부활
* 첫째사망 - 아담의 후손으로 원죄를 갖고 태어난 사람은 모두 첫째 사망으로 태어난 존재들이다.
둘째부활 / 성경에 둘째부활이란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다.
다만 둘째 사망이란 용어가 단 1회 사용되었다(계 20:6, 첫째부활, 둘째사망)
따라서 둘째부활이란 첫째사망으로 태어난 사람이 죽은 후에 심판대 앞에서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둘째 사망이란 첫째부활에 속한 사람은 해당이 없습니다.
둘째사망
요한계시록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요한계시록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요한계시록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Brothers, we do not want you to be ignorant about those who fall asleep, or to grieve like the rest of men, who have no hope.
(새번역)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잠든 사람의 문제를 모르고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소망을 가지지 못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첫째 부활(계 20:5-6)과 둘째 사망(계 2:11. 20:6, 14. 21:8)에 대한 것만 증거합니다.
그런데 왜 둘째 부활과 첫째 사망이란 용어가 자주 사용될까요?
그 이유는 이미 성경에서 첫째 부활이란 표현을 하였기 때문에 그 반대의 현상 "첫째 사망"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첫째 부활"이란 용어를 사용한 두 구절
요한계시록 20:5-6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The rest of the dead did not come to life until the thousand years were ended.) This is the first resurrection.
Blessed and holy are those who have part in the first
resurrection. The second death has no power over them, but they will be
priests of God and of Christ and will reign with him for a thousand
years.
그렇다면 '첫째 사망"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사망'이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미 죽어야 할 운명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 2: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둘째 사망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둘째 사망이란 원죄로 말미암아 첫번째 사망으로 태어난 존재가 심판의 날에 영원한 형벌의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성경에서 "둘째 사망" 이란 용어를 사용한 4구절
요한계시록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요한계시록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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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죽은 사람에 대하여 "잠을 잔다"고 표현합니다.
'잠을 잔다'는 것은 "잠에서 깨어날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죽음은 다시 깨어날 것을 확신하는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불교의 교주는 석가모니라고 합니다(석가모니의 본명은 "고타마 싯다르타")
'고타마'가 성씨이며 '싯다르타'가 이름입니다.
석가모니는 산스크리트어 '샤캬무니'를 음역한 것으로 샤캬족(석가)의 성자라는 뜻입니다.
'무니'에는 고행자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교의 교주 석가모니는 분명히 죽은 사람입니다.
이슬람교의 교주는 무함마드라고 합니다.
메카의 지배 계급은 5세기 말쯤 "부근 황야"에서 온 "쿠라이시족"이었으며, 무함마드는 그 중의 "하심가" 출신이라고 합니다.
하심가에는 아브드 알 무딸립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열 명의 아들이 있었고 막내의 이름이 "아브드 알라"입니다.
'아브드 알라'는 "아미나"와 결혼을 했는데, 그 사이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났습니다.(570년 경)
무함마드는 이슬람 신앙을 포교하는 데에 있어서 나라의 힘이 강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무함마드는 정복 전쟁을 계속해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632년 3월에는 메카에서 예배를 지내고, 무함마드 자신이 순례를 지휘하였다.
같은 해 6월 8일(이슬람력 11년 3월 13일) 애처 아이샤가 지켜보는 가운데 메디나의 자택에서 사망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검소하게 장례를 치러 오늘날 메디나에 있는 예언자의 모스크에 매장되었습니다.
이슬람의 교주 무함마다는 분명하게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와 이슬람교는 죽음의 종교라고 한다면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라고 하겠습니다.
죽음의 교리를 믿겠는가?
아니면 생명의 교리를 믿겠는가?
선택은 사람마다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직 생명의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겠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갖도록 깨달음을 주셨고 그 길로 이끌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풍성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석가모니는 고대 인도의 샤캬 부족의 소왕국 '카필라'의 왕인 "정반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왕자로 태어났으나(기원전 560년 경), 인간의 삶이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벗어나고자, 이후
왕세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많은 수행 끝에 '감정이라는 악마'의 유혹을 견뎌내고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후
인도 북부를 중심으로 가르침을 펼치고 많은 이들을 교화하다가 마지막 제자인 쑤밧다를 교화하고 80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어갔습니다.
이슬람교의 교주는 무함마드라고 합니다.
메카의 지배 계급은 5세기 말쯤 "부근 황야"에서 온 "쿠라이시족"이었으며, 무함마드는 그 중의 "하심가" 출신이라고 합니다.
하심가에는 아브드 알 무딸립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열 명의 아들이 있었고 막내의 이름이 "아브드 알라"입니다.
'아브드 알라'는 "아미나"와 결혼을 했는데, 그 사이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났습니다.(570년 경)
무함마드는 이슬람 신앙을 포교하는 데에 있어서 나라의 힘이 강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무함마드는 정복 전쟁을 계속해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632년 3월에는 메카에서 예배를 지내고, 무함마드 자신이 순례를 지휘하였다.
같은 해 6월 8일(이슬람력 11년 3월 13일) 애처 아이샤가 지켜보는 가운데 메디나의 자택에서 사망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검소하게 장례를 치러 오늘날 메디나에 있는 예언자의 모스크에 매장되었습니다.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최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8가지 성경구절’을 소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공포가 아닌 축복의 근원”이라고 강조했다.
크리스천투데이는 “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이미 모든 것들의 온전한 구속과 영광을 위해 다시 오시는 때에 대해
말씀하셨다”면서 “그분이 이 땅에 처음 오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셨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기쁨과 소망을 가지게 됐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소식이지만 이보다 더 좋은 게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최고의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깨어진 이 땅의 모든 것을 회복하고 바르게 하시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그날은 모든 것이 회복되고 하나님께서 이 땅을 처음 만드신 대로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크리스천투데이가 소개한 종말에 관한 8가지 성경구절이다.
계시록 22장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시록 1장 7절
“보라, 그분께서 구름들과 함께 오시느니라. 모든 눈이 그분을 보겠고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분으로 인하여 통곡하리니 참으로 그러하리로다. 아멘”
베드로후서 3장 10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야고보서 5장 7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히브리서 9장 28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골로새서 3장 4절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타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사도행전 1장 10~11절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으니라”
마태복음 26장 6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자는(2837) 카이노스
κοιμάω 스트롱번호2837
1. 자다, 잠들다.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 '잠자다'는 표현은 '죽는 것'에 대한 완곡 어법으로 고대에서나 헬라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한 표현이었다.
그 증거로 왕상 2:10에는 "다윗이 그 열조와 함께 누워 자서 다윗 성에 장사되니"라고 기록되었고
호머(Homer)는 자신의 글 중에 전쟁에서의 죽음을 표현할 때, '코이메사토 칼케온 헤프논'(*, '그는 청동같이 잠들었다')이라고 죽음을 표현하였다(Iliad 11, 241).
한편 헬라인들이나 다른 이교도들은 '죽음의 잠'을 깨어날 수없는 '영원한 잠'으로 인식한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깨어날 것으로 믿고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였다(Bruce).
본절에서도 '자는자들'은 죽은 그리스도인들을 일컫는 말로서 데살로니가 교인 중에 죽은 자들을 가리킨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죽은 자들의 장래의 운명에 대하여 의문을 갖고 있었으며 이러한 의문은 디모데를 통해 바울에게 전달되었다.
이제 바울은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있다.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 이런 어투는 바울이 중요한 주제를 다룰 때, 독자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게 하기 위하여 자주 사용하였다(롬 1:13; 11:25; 고전10:1; 12:1; 고후 1:8).
여기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는 '파루시아'('그리스도의 강림')때 죽은 신자들의 운명에 대한 것으로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여기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갖지 못했었다.
소망 없는 다른 이
- 부활의 믿음을 갖지 못한 비그리스도인들을 총칭한다.
그 당시 이교도들이 죽음에 직면해서 가졌던 생각은 그들의 문학 작품이나 비문(碑文)에 잘 반영되어 있다.
데오크리투스(Theocritus)는 그의 글에서 "희망은 산 자를 위한 것이며 죽음에는 희망이 없다"(*, 엘피데스 엔 조오이신 아넬피스토이 데 다논테스)라고 말하였다(Idyll 4, 24).
I, 잠자는 자들
1. 잠자는 자란?
인간의 본성적인 상태는 잠을 자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영혼이 깊은 잠에 빠져 든 상태라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원죄'로도 바꾸어 말할 수 있는 상태로, 아담의 죄가 아담의 허리에서 난 모든 사람 안에 뿌리내린 상태다.
(1) 이 상태는 영혼이 자신의 상태에 대해 무감각한 것이 특징이다.
우리는 밤중에 깊은 잠에 빠져드는데 밤은 전적으로 암흑의 상태를 말한다. 암흑 상태에 있는 사람이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처럼 어두운 밤에 잠에 취해 있는 사람이 그러하다. 무엇보다도 자기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전 8:2). 자신이 타락한 영인 것도,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해야 할 '유일한 일'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내면의 전적인 변화이며 '위로부터의 탄생'(요 3:31)이고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을 뵙지 못한다(히 12:14)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2) 영혼이 잠든 자는 자신이 처한 처지를 알지 못한다.
그는 모든 질병에 걸려 있으면서도 오히려 온전하다고 생각하고, 비참한 족쇄로 매여 있음에도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완전 무장한 억센 마귀가 완전히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데도 평안하다고 말하고, 지옥이 다가오고 음부가 열려 입을 벌리고 심판의 불이 그 앞에서 타고 있어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잠자는 것에 취해 있어 하나님 형상을 상실한 채로 살고 죽는 것에 만족하고, 자신의 질병과 그 치료를 알지 못한다. 또 다가오는 징벌을 피하라(마 3:7)는 경고를 마음에 두지 않을 뿐더러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는가 하는 부르짖음이 없다.(행 6:30)
(3) 깊은 잠에 빠져 깨우기조차 어려운 이들도 있다.
이들은 외형적으로 보면 매우 도덕적이고 종교적이다. 때로는 매우 신사적이고 합리적이다. 은총의 수단을 열심히 사용하며 악을 피하고 할 수 있는 선을 행하는 경건의 모양이 두드러져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들에게 의와 공로가 되어 깊은 잠에서 깨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에 취해 있느라 진리와 생명, 경건의 능력을 추구할 의지조차 갖지 않기에 더욱 위험한 상태다.
2. 잠에 빠진 이들은 하나님께 혐오의 대상이다.
주님은 이들을 위선자들로 바라보며(마 23:13) 모든 재앙의 상속자라고 선언한다. 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마 23:25) 속은 더러운 회칠한 무덤 같은 이들이다. 마치 죽은 뼈 위에 살과 가죽이 덮어져 있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이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자신은 알지 못하지만 이미 허물과 죄로 죽은 자다(엡 2:1). 이 상태는 모든 자연적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현세의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영적 죽음을 의미한다(창 2:17).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생명과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의미한다. 이 상태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살리는 영을 부어주시기 전까지 지속된다.
3. 잠자는 자의 뚜렷한 증상
무엇보다도 영적 지각 능력(히 5:14)이 없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막 8:18)는 말이다. 영적인 일들이 존재한다는 자체를 부정하고 영적 감각이라는 말 자체를 어리석은 일로 치부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볼 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생명의 말씀을 손으로 만질 수도(요일 1:1) 없다. 예수님의 이름이 들려와도 아무런 유익 없는 '쏟은 향기름'과 같이(아 1:3) 여길 뿐이다.
4. 우리는 잠자는 자가 아닌가?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성령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하는가? 여기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저주의 자식일 뿐이다. 우리는 성령이 증거하는 예언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하면 소리와 진동이 있고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지는(겔 37:7) 역사가 있을 것이다. 그때에 생기가 사방에서 와서 죽은 자들을 살릴 것이다(겔 379). 마음을 닫지 말라. 성령을 막지 말라. 그분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할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고 있음을 깨닫게 할 것이다.
II. 깨어나라
1. 잠자는 자여 깨어나라.
죽은 자 가운데서 깨어나라. 나 자신의 참 모습을 보라. 영원한 죽음에 처한 자신의 모습,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의 심연에 빠져드는 자신의 모습을 보라. 이렇게 자신을 진실로 바라보고 자신의 죄를 심판하는 자, 그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난다.
(1)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여호와의 분노의 잔이 우리 앞에 쏟아지고 있기 때문(사 51:17)이다. 우리는 깨어나 참된 의이신 주님을 붙들어야 한다. 죄의 티끌을 떨어버려야 한다(사 52:2). 부들부들 떠는 간수처럼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는가"(행 16:30) 부르짖어야 한다. 이 부르짖음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주어질 믿음의 선물을 가지고 구원 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까지 결코 쉬지 말아야 한다.
(2) 너무 깊이 잠든 자들 또한 깨어나야 한다.
자신의 의에 취해 깊은 잠에 빠져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가련한 자여, 다가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라(눅 3:7). 옥에 갇힌 사형수의 모습을 기억하라. 이중의 쇠사슬에 결박되어 어두운 지하 감옥에 누워 있고, 사형 집행의 시간은 시시각각 다가온다. 이 무서운 상황에서 영혼은 깊이 잠들어 있다. 깊은 낭떠러지, 영원한 멸망의 어구에서 잠에 취해 있다. 빛을 비추시는 이를 바라보라. 죽음의 감옥에 빛을 비추시는 전능하신 분의 손길을 느끼라. 다음의 말씀을 듣고 깨어나 일어나라. “급히 일어나라 …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행 12:7~8)
(3) 세속적 행복의 꿈에 취해 있는 자들 역시 깨어나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 쉴 때까지 쉼이란 없다. 이 세상은 쉴 곳이 아니다. 구원의 방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세상의 행복은 사라질 하나의 피조물일 뿐이다. 영원이 눈앞에 있다. 지금은 바로 영원이 결정될 순간이다. 영원한 저주냐 영원한 행복이냐가 결정될 순간이다.
(4) 깨어 있는가를 스스로를 살펴야 한다.
우리는 다음 질문을 하며 스스로를 살펴야 한다. 우리는 과연 눈이 정결함으로 악을 차마 보지 아니하시는(합 1:13)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설 준비가 되었는가? 성도에게 주어질 유업에 합당한가?(골 1:12)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을 지켰는가?(딤후 4:7) 하나님의 형상(의와 거룩함)을 회복했는가?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는가?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는가? 등잔에 기름을 준비했는가?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생각을 다해, 힘을 다해 주님 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막 12:30)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했는가? (벧후 1:4)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을 아는가?(고후 3:5)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아는가?(고전 316) 성령을 받았는가?(행 19:2) 이런 준비가 없다면 그는 아직 잠든 자다. 이런 사람은 아직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의 기도를 받지 않으신다.
2. 깨어 있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1) 그는 달리 말하면 거듭난 자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요, 두렵고(갈 6:15)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자다(빌 2:12), 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고(마 7:13)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다.(요 21:17)
(2) 깨어 있는 자에게 하나님은 형언할 수 없는 풍성한 은혜를 베푸신다.
깨어난 자는 성령과 그 능력을 선물로 받고(행 10:38)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며(골 1:27) 행복과 성결을 느끼며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체험한다(눅 17:21). 그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화평과 기쁨을 누린다(롬 14:17). 이 평안은 사람의 지각을 넘어선 평안이며(빌 4:7), 이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이다.(벧전 1:8)
3. 어떻게 깨어날 수 있는가?
이것은 도덕적 삶이나 선행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직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 마음이 가난한 자(마 5:2), 곧 회개하는 심령이 될 때 가능하다. 아버지의 용서함 받기를 갈망하는 탕자의 심령(눅 15:17)이요, 하나님의 의를 간절히 사모하는 이다. 그에게 하나님은 은총을 베푸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 은총을 입는다. (엡 2:8~9)
지금이 바로 그때다. 오늘 마음을 완고히 하지 말라(히 4:7). 지금 일어나라. 영원한 죽음에서 일어나라(엡 5:14). 죄와 죽음 가운데 사귄 옛 친구를 바로 떠나 참된 친구 예수를 따르라. 그리스도께서 그의 빛을 비추실 것이다.(엡 5:14)
III. 빛을 비추신다.
1. 깨어난 자에게 하나님은 빛을 비추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깨어난 자에게 은총과 영광을 허락하실 것(시 84:11)임을 의미한다. 그는 더 이상 어두움 가운데 살지 않으며(사 58:10) 하나님의 치료의 광선이 비춰진다(말 4:2).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으로 풍성해질 뿐 아니라(고후 4:6)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안에서 참 빛으로 계시하신다. (요 1:9)
2. 이 빛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총이다.
이 빛은 죄의 용서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며 완성하도록 이끄는 안내자다. 이 빛으로 인해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사랑 가운데 터가 굳어지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채워져 가게 된다. (엡 3:17~19)
3. 이 빛은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의 역사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집을 이루어 가는 성도가 되도록(엡 2:22) 부르실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해 성령을 통해 각 성도들에게 필요한 은사와 선물들을 허락하신다.
4. 믿음으로 받으라.
빛을 비추시는 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에게 부으시려는 하나님의 은총의 섭리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바의 성취요 율법의 완성이며(사 44:3; 겔 36:27), 지금도 우리 가운데 지속되는 일이다. 우리는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믿음으로 빛을 받아들이며 믿음으로 빛에 머물러야 한다.
5. 교회는 빛의 공동체
교회는 빛의 공동체다. 참된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도록 기도를 가르쳐야 하고 안수해야 한다.
결론
누가 이 빛의 비췸을 받는가? 이 빛은 지혜롭고 총명한 자에게 숨겨져 있고 때로는 조롱받고 비난받는다. 빛을 인지하는 이는 다수가 아니다. 세상에서는 오히려 희귀하다고 말할 수 있다. 경건의 모양에 치중하고 경건의 능력을 무시하는 자, 참 믿음에는 무관심하고 종교적 행위에만 열심인 자에게는 감추어져 있다.
우리는 빛을 찾아야 한다. 회개하고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계 2:5). 복음의 진리와 단순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라(합 3:2), 잠에서 깨어나라. 주의 나팔이 울리기 전에 간절히 구하라.(벧전 2:12; 시 79:9, 80:18~19)
제 목: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
원문제목: Awake, Thou That Sleepest
성경본문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설교이해를 위한 가이드
존 웨슬리에겐 찰스라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찰스는 형 존과 같이 성공회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예술적인 재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찬송시를 지어 많은 심령들을 깨웠는데 이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찬송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찰스도 형 존 만큼은 아니지만 때때로 설교를 했습니다. 이 설교는 그 중의 하나인데, 찰스가 1742년 4월 4일에 옥스퍼드 대학 교회였던 성 메어리 교회에서 행한 설교입니다.
이 설교의 주제는 제목처럼 영혼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데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마음에 불편함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설교자들이 꺼려하는 주제입니다. 그러나 존과 찰스 형제는 ‘회개야말로 하늘나라에 이르는 현관’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인기 없는 설교주제를 언제 어디서든지 선포했습니다. 이 설교의 대단원에 나타나는 연속적인 도전적 질문들은 청중들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서의 회개’를 촉구하는 가장 준엄하면서도 뛰어난 문장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은 당시 교만에 가득 찬 옥스퍼드 지식인 청중들에게 회개에 이르게 하는 복음의 메시지가 아니라 불편함을 야기하는 큰 짐으로 여겨졌습니다. 오히려 이 설교는 옥스퍼드가 아닌 곳에서 복음을 사모하던 이들로부터 크게 환영 받았습니다.
풀어 쓴 설교
서 론
인간은 잠든 존재입니다. 인간의 원래 상태가 깊은 잠에 빠져 든 상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원죄’라고도 부릅니다. 영혼이 잠들어 있는 이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무감각한 것이 특징입니다. 잠자는 이가 자신이 잠든 것을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이런 사람은 심각한 질병에 걸려 있으면서도 오히려 온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의 족쇄로 매여 있어 시시각각 죽음의 골짜기로 향하고 있음에도 자신은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억센 마귀가 자신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데도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심판의 불이 자신 앞에서 타고 있어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영혼은 문둥병에 걸려 하나님 형상을 상실했고 날마다 죽어가고 있지만 깨닫지 못하고 그저 현실의 삶에 만족하고 자신의 질병과 그 치료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는 영혼의 잠에 취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런 사람은 깨우면 깨어날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이보다 더욱 깊은 잠에 빠져 깨우기조차 어려운 이도 있습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매우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사람은 은총의 수단을 열심히 사용하며 악을 피하고 할 수 있는 선을 행하는 ‘경건의 모양’이 두드러져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들에게 의와 공로가 되어 깊은 잠에서 깨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에 취해 있느라 참된 경건의 능력을 추구할 의지조차 갖지 않기에 더욱 위험한 상태라 볼 수 있습니다.
[설교 이해를 위한 팁] ‘다 안다 병’ 우리의 믿음에 치명적인 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 안다’라는 병입니다. 대개 교회생활의 연조가 있는 분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병인데, 처음 믿음생활을 할 때의 생동감이 점점 사라지고 교회생활이 습관화 되는 병입니다. 교회생활이 오래되다 보면 하나님과 그 나라에 대한 ‘정보’는 많이 갖게 되지만 그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집니다. 이 병이 깊어지면 하나님에 대한 영적 지각 능력(히 5:14)이 상실되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하나님을 볼 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생명의 말씀을 손으로 만질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이런 일들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갖고 있기에 스스로를 ‘다 아는 자’로 여기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에 바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자는 자인지 심각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잠들어 있는가? 아니면 깨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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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스로 잠든 자인가 깨어있는 자인가 질문해야 합니다.
다음 질문을 하며 우리 스스로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 우리는 티끌만한 죄악도 차마 보지 아니하시는 정결하신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설 준비가 되었습니까? (합 1:13)
2.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된 유업(상속분)을 받을만한 합당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골 1:12)
3.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을 지키고 있습니까?(딤후 4:7)
4. 하나님의 형상(의와 거룩함)을 온전히 회복했습니까?
5. 옛사람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습니까?
6. 심령의 등잔에 기름을 준비했습니까?
7. 마음과 생명과 생각과 힘을 다해 주님 되신 하나님을 사랑합니까?(막 12:30)
8.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소유하고 있습니까?(벧후 1:4)
9.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을 확신하고 있습니까?(고후3:5)
10.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자신 안에 계심을 알고 있습니까?(고전 3:16)
11.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행 19:2)
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불행히도 우리는 아직 잠든 자입니다.
경건의 모습을 갖춘 그리스도인일 수는 있어도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저주의 자식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이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음성이 되고 단단한
바위를 깨뜨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망치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증거하는 예언의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소리와 진동이
있고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지는(겔 37:7)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 때에 생기가 사방에서 와서 죽은 자들을 살리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겔 37:9).
마음을 닫지 마십시오.
성령을 막지 마십시오.
그 분은 우리가 잠에 빠져 있는 자신을 보게 할
것입니다.
깨어나라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이 잠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주는 거짓
평강과 기쁨에 취해 잠들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쉴 때까지 참된 평강이란 없습니다. 이 세상은 머물
곳도 쉴 곳도 아닙니다. 이 세상이 주는 행복은 하나의 사라질 피조물일 뿐입니다. 죽음의 잠에 빠져 영원한 죽음의 운명에 처한
자신의 가련한 모습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죽음의 잠에 취해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의 심연에 빠져드는 자신의
모습을 보십시오. 비록 이 일이 참으로 두렵고 비참한 일일지라도 진실로 바라보십시오 회피하지 말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십시오. 이런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하늘나라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깊은 잠에 빠진 사람은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자신의 의에 취해 깊은 잠에 빠진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는 가련한 자입니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십시오. 옥에 갇힌 사형수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두운 지하 감옥에 이중의 쇠사슬에 결박되어 있고 사형집행의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습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 무서운 상황에서도 영혼은 너무 깊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깊은 낭떠러지 영원한 멸망의 어구에서 잠에 취해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빛을 비추시는 이를 바라 보아야 합니다. 죽음의 감옥에 생명의 빛을 비추시는 은혜로우신 분의 손길을 느끼십시오. 빛으로 오셔서 영혼의 옆구리를 쳐 깨우시는 그 음성을 들으십시오. “급히 일어나라…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겉옷을 입고 따라오라”(행 12:7-8) 머뭇거릴 틈이 없습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 참된 의이신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영혼을 깨우는 은총의 빛
잠자고 있는 영혼이 깨어나는 일은 영혼의 도덕적 삶이나 선행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늘로부터 비취는 빛입니다. 이 빛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즉, 이 빛은 죄의 용서이며, 또한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며 완성하도록 이끄는 안내자입니다. 우리 영혼은 이 빛으로 인해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터가 굳어지며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채워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엡 3:17-19).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빛은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입니다. 우리 영혼에 빛을 비추셨다는 의미는 다름 아닌 성령을 우리에게 부으신 하나님의 은총의 섭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이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즉 아직 잠에 빠져 있을 때, 성령을 부으셔서 지난 죄악을 고치시고 또한 다시는 범죄하지 않고 죄에 승리하는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인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빛을 통해 잠자고 있는 영혼에게 행하시는 일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잠을 자는 영혼을 깨게 합니다. 그는 이제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됩니다. 또한 성령과 그 능력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행10:38).
그는 지난 죄악을 고침 받았을 뿐 아니라 다시는 범죄하지 않고 죄에 승리하는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즉 그는 이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가 되었고(갈 6:15),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자가 되었습니다(빌 2:12).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게 됩니다.(골 1:27)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게 됩니다(눅 17:21). 그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화평과 기쁨을 누립니다(롬 14:17). 여기서 말하는 평안은 사람의 지각을 넘어선 평안(빌 4:7)이며, 이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벧전 1:8)입니다. 한 마디로 그는 ‘그 어디나 하늘나라’를 누리게 됩니다.(롬 14:17 참조)
하나님의 빛의 인도함을 받는 영혼은 이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가 되었고(갈 6:15),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자가 되었습니다.(빌 2:12) 이 일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바의 성취요 율법의 완성이며(사 44:3, 겔 36:27) 지금도 우리 가운데 지속되는 일입니다.
믿음을 통해 비취는 은총의 빛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의 빛을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잠든 영혼을 깨우는 일은 우리의 고도의 도덕적 삶이나 선행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로는 우리의 잠자는 영혼을 깨울 수 없습니다.
영혼을 잠으로부터 깨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빛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은총의 빛을 우리가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가난한 심령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가난한 심령만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영혼, 곧 심령이 가난한 자(마 5:2)에게는 깨어남의 은총이 주어집니다.
이 심령은 아버지의 용서함을
받기를 간절히 구하는 탕자의 심령(눅 15:17)이요, 하나님의 의를 간절히 사모하는 심령입니다. 이런 심령에게 하나님은 한 없는
은총을 베푸시는 것입니다(엡 2:8-9).
‘성령사역은 곧 구원사역’ 웨슬리는 ‘이성적이고 신앙적인 사람들을 향한 호소’라는 글을 통해 성령의 네 가지 사역에 대해 설명합니다. 성령의 네 가지 사역 깨어나는 일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
하나님의 은총의 빛은 지혜롭고 총명하다고 하는 자들에게 숨겨져 있고, 때로는 이들에게 조롱 받고 비난 받기도 합니다.
이
빛을 발견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오히려 희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에 치중하고 경건의 능력을
무시하는 자, 참 믿음에는 무관심하고 종교적 행위에만 열심인 자에게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비추시는 빛을 찾아야 합니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여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계 2:5).
복음의 진리와 단순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긍휼의 빛을 구하십시오(합 3:2).
그리하여 잠에서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잠에서 깨어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십시오.
1. [자동사] 일하다, 활동하다, 고전 4:12, 살전 4:11.
a. νυκτὸς καὶ ἡμέρας: 밤낮으로 일하다, 마21:28, 살전2:9, 살후3:8.
b. ἐ. ἐν αὐτοῖς: 그들과 함께 일하다, 마25:16, 눅13:14, 요9:4, 행18:3, 고전9:6, 살후3:10,12.
c. τῷ ἐργαζομένῳ: 일하는 사람에게, 롬4:4.
d.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일하시다, 요5:17.
관련 성경 / 힘쓰다(롬 15:20, 고후 5:9, 살전 4:11)
* 5384 φίλος, η, ον
스트롱번호 5384
* 5092. τιμή, ῆς, ἡ
스트롱번호 5092
1. 받다, 당하다, 겪다, 살후 1:9.
문법설명 / 미래 τίσω, 기본형 τίω의 강세형
관련 성경 / (멸망의 형벌을) 받다(살후 1:9).
주제2: [실생활에 대한 교훈]
종용하여...힘쓰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필로티메이스다이 헤쉬카제인'(*)은 '조용하기를 열망하다'(to beambitious to be quiet)의 뜻이다. 여기서 '필로티메이스다이'는 활동적이며 정열적인 행동을 뜻하며 '헤쉬카제인'은 반대로 '조용히 하다'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상호 반대 의미를 가진 두 단어를 연결하여 조용하기를 강력히 권면하는 것은 '영리한 바보'와 같이 일종의 수사학적(修辭學的)인 모순 어법이다. 혹자는 '조용하기를 힘쓰라'는 바울의 권면에 대하여,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난 후 영지주의자들이 침입하여 소란을 일으켰을 것으로 추측하면서 이에 대한 근거로 살후 3:6-13을 위시하여 목회 서신 가운데 여러 구절을 제시한다(Schmithals, 딤전 5:13-15;딤후 3:1-9;딛 1:10, 11).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의 동요(動搖)는 과도한 종말론적 분위기에 기인한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인 견해이며(Morris, Bruce), 바울은 이와 같은 소란에 대하여 종용할 것을 권면하였다.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 본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일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생각으로 일하지 않고 소란을 피우는 자들이 있었다. 또한 헬라인들은 노동하는 것을 노예들이나 하는 천한 것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바울은 노동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으며(엡 4:28) 친히 모범을 보였다(2:9).
Wenn ich wusste, dass die Welt morgen untergeht,
würde ich dennoch heute einen apfelbaum pflanzen.
Even if I knew that tomorrow the world would end,
I would plant an apple tree today.
(Even if I knew that tomorrow the world would go to pieces,
I would still plant an apple tree.)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너무나도, 널리 알려져 있는 이 말이…
한국에서는 스피노자 (Baruch Spinoza, 1632-1677, Netherlands)의 말로
아주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 한국에서는 스피노자의 말로 굳어져 있다!
[한국 사회에 퍼져 있는 것들의 대부분이, 일본을 통하여 들어온 것들인 만치,
이것 역시, 어떤 일본 사람이 써놓은 것을 그대로 인용하여 사용하다 보니…
스피노자의 말로 굳어져 버리게 되었을 것이리라.]
그런데… 독일을 비릇한 서양에서는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것일까?
물론, 두 사람 모두 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아주 유명한 사람들이다!
Martin Luther는 ‘종교개혁’을 일으킨 독일 사람이고…
Spinoza는 소위 ‘범신론(汎神論)’이라는 것으로 널려 알져진
Amsterdam에서 살았던 Jewish philosopher(유태인 철학자)다.
그런데… 두 사람 간에는 약 150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이 놓여 있으니,
그 두 사람에 대한 것을 아주 간단하게 나마 짚어 보기로 할까?
Martin Luther (1483-1546)
우선 시대 순으로, Martin Luther에 관한 것을 먼저 기술(記述)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대가 독일의 Eisenach(아이제나흐) 라는 도시엘 가보면,
Martin Luther가 15살 때에- 즉 라틴 학교를 다닐 때에- 머물렀던 집으로
알려진 집 앞에 세워져 있는 비석을 볼 수 있는데…
그 비석에는,
Und wenn ich wäre, da morgen die Welt unterginge,
so geht, würde ich doch heute mein apfelbaumchen pflanzen.
라고 새겨져 있고, 그 비석 옆에는 커다란 사과나무가 있다.
[그리고, 이 문구는
마틴 루터가 쓴 ‘일기장 속에 들어 있던 글’ 이라는 설명까지 곁들어 있다.]
하지만…
크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즉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틴 루터가 쓴 ‘일기장’에 대한 것- 일기의 내용, 기록 날자-에 대한
근거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말이 정말로 ‘Martin Luther의 말인지?’
아니면, 후세에 ‘Martin Luther의 것으로 조작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 밖에 없기는 하다!
마틴 루터가 학생이었을 때, 즉 1483년부터 1501년까지 살았던 집은,
Eisenach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 중의 하나다.
이 집에는 아주 멋진 담장이 있으며, 현대적인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이 전시관은 역사적인 전시품들과 현대적인 멀티미디어 기술이 함께 어우러져…
마틴 루터에 대한 것을, 오늘날의 사람들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종교개혁자 루터와 가까이서 교감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루터의 방에는 아이제나흐 학창시절을 보여주는 전시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위층에는 독일 개신교의 역사를 재현해 놓은 전시관이 있는데,
이를 통해 사람들은 그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과나무에 대한 글이 들어 있다!” 는 그 일기장에 대한 것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바로, 이 점이, 신빙성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회에 꼭 알아 두어야만 될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Martin Luther가 한 말이다!
그는 ‘믿음만을 중요시 여기는 개신교 (Protestantism)의 선구자’ 답게…
이성(理性, Reason)의 바탕 위에 세워진 철학(哲學)을 겨냥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Reason is the Devil’s whore,
Which must be sacrificed as the enemy of God.
(理性이라는 것은 단지 악마의 갈보이기 때문에,
神의 敵으로 간주하여 없애 버려야만 된다. ~ 마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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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uch Spinoza (1632-1677)
Spinoza는 네델란드의 유태인 주거지역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철학적으로 아주 높은 경지- 사실상 가장 높은 경지-에 올랐던 사람답게,
그에게서 나온 명언들이 아주 많다. 그의 말 중에서, 몇 가지만 소개하여 볼까?
I do not know how to teach philosophy
without becoming a disturber of established religion.
(기존의 종교라는 것을 훼손하지 않고서,
철학이라는 것을 가르칠 방도는 없다.)
Fear cannot be without hope nor hope without fear.
(두려움 없이는 희망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희망이라는 것은 두려움 없이는 있을 수 없다.)
Peace is not an absence of war, it is a virtue, a state of mind,
a disposition for benevolence, confidence, justice.
(평화는 전쟁의 不在가 아니라, 미덕이고, 마음의 상태이며,
자비, 확신, 정의를 향한 경향이다.)
Whatsoever is contrary to nature is contrary to reason,
and whatsoever is contrary to reason is absurd.
(무엇이든 자연에 反하는 것은 理性에 반하는 것이며,
理性에 反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그루의 사과 나무’에 관한 말이 ‘스피노자의 것’이라는 주장에도 약간의 일리(一理)가 있어 보이기는 하겠지만서도…
그 말은 이미 종교개혁 시기에 회자(膾炙) 되었던 것이고, 그 후, 유럽 사회에서는 널리 인용되는 격언(格言)과도 같은 말이었기에…
후세에 태어난 스피노자도 그 말을 사용하기는 하였을 것이다.
하긴, 그 말은 ‘모든 것 안에 神이 깃들어 있다!’ 는 스피노자의 철학사상과도 아주 잘 어울리는 말이었기에, 스피노자의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겠지만… 스피노자의 말이 아닌 것 만큼은 확실하다.
종용하여...힘쓰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필로티메이스다이 헤쉬카제인'(*)은 '조용하기를 열망하다'(to beambitious to be quiet)의 뜻이다. 여기서 '필로티메이스다이'는 활동적이며 정열적인 행동을 뜻하며 '헤쉬카제인'은 반대로 '조용히 하다'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상호 반대 의미를 가진 두 단어를 연결하여 조용하기를 강력히 권면하는 것은 '영리한 바보'와 같이 일종의 수사학적(修辭學的)인 모순 어법이다. 혹자는 '조용하기를 힘쓰라'는 바울의 권면에 대하여,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난 후 영지주의자들이 침입하여 소란을 일으켰을 것으로 추측하면서 이에 대한 근거로 살후 3:6-13을 위시하여 목회 서신 가운데 여러 구절을 제시한다(Schmithals, 딤전 5:13-15;딤후 3:1-9;딛 1:10, 11).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의 동요(動搖)는 과도한 종말론적 분위기에 기인한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인 견해이며(Morris, Bruce), 바울은 이와 같은 소란에 대하여 종용할 것을 권면하였다.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 본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일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생각으로 일하지 않고 소란을 피우는 자들이 있었다. 또한 헬라인들은 노동하는 것을 노예들이나 하는 천한 것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바울은 노동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으며(엡 4:28) 친히 모범을 보였다(2:9).
(새번역) 그러므로 이 경고를 저버리는 사람은, 사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저버리다 :
1.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나 의리를 잊거나 어기다.
2. 남이 바라는 바를 거절하다.
3.
등지거나 배반하다.
reject : 거부하다
'저버리다'라는 헬라 단어는 "아데테오(ἀθετέω)" 라고 합니다.
1. 무효로 하다, 폐기하다, 제외하다, 막 7:9, 눅 7:30, 갈 3:15.
2. 깨뜨리다, 딤전 5:12.
3. 혼란시키다, 고전 1:19.
4. 거부하다, 인정하지 않다, 막 6:26, 눅 10:16, 요 12:48, 살전 4:8, 유 1:8.
연관 단어/ 관련 성경
거절하다(막 6:26), 저버리다(막 7:9, 눅 7:30, 딤전 5:12), 폐하다(고전 1:19, 갈 2:21), 업신여기다(유 1:8).
마가복음 7: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는 경우
디모데전서 5:1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 처음 사랑, 처음 믿음을 버린 경우
갈라디아서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 하나님의 은혜는 폐 할 수 없다.
오직 십자가만으로 구원을 얻는 길을 찾아야 한다.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 '저버리다'의 헬라어 '아데테오'는 '취소하다', '무시하다'를 의미한다(갈 3:15).
한편 혹자는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데살로니가를 떠난 후에, 영지주의자들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성윤리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버리라고 주장하였을 것이라고 한다(Schmithals, Paul and Gnostics, PP. 157, 158).
바울은 이에 대해 자신의 가르침을 버리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라고 반박한다.
1. 매음, 음란, 부정, 간음, 행 15:20, 고전 5:1, 갈 5:19.
연관 단어 관련 성경
음란(마 15:19, 막 7:21, 고전 6:13), 음행(마 5:32, 행 15:20, 고전 5:1, 계 2:21), 추악(롬 1:29).
1. [일반적으로]
a. 물건, 막11:16, 계18:12, 눅17:31, 마12:29, 막3:27, 행27:17.
b. 그릇, 단지, 접시, 눅8:16, 요19:29, 딤후2:20, 계2:27, 롬9:21, 딤후2:21.
2. [비유적으로] 도구, 행9:15, 롬9:22, 고후4: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세간(마 12:29, 막 3:27, 눅 17:31), 물건(막 11:16), 그릇(눅 8:16, 롬 9:21, 벧전 3:7, 계 18:12), 연장(행 27:17), 아내(살전 4:4).
연관 단어 관련 성경
(부끄러운) 욕심(롬 1:26), 정욕(골 3:5), 색욕(살전 4:5).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 1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그의 뜻을 준행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 분이 거룩하신 것같이(레19:2) 그의 백성들의 성화(sanctification)에 있다(레 11:44,45; 벧전 1:15,16).
혹자에 의하면 3:13의 '성도'의 헬라어 '하기오쉬네'(*)는 '거룩한 존재'를 의미하는 반면에, 본절의 '거룩함'의 헬라어 '하기아스모스'(*)는 '거룩하게 되어가는 과정'를 뜻한다(Lenski, Bruce).
음란을 버리고
- 음행에 관해서는 바울이 본서를 쓰기 1, 2년 전에 열렸던 예루살렘 회의(A.D.49)에서 규정을 정하여 이방 교회에 알린 바 있었다(행 15:20).
성적인 순결이 성화의 전부는 아니었으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었고 특히 음행이 성행하였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음란'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르네이아'(*)는 주로 '매춘부'(*,포르나이)와의 성적 관계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으나 여기에서는 그 외 부정한 성관계를 나타내는 포괄적인 의미를 함축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마 19:9; 행 15:20, 29; 21:25; 고전5:1).
기독교나 유대교에서는 '결혼'이라는 범주 안에서만 성관계가 인정되는 것이었으나 이교 사회에서는 결혼한 사람 이외의 사람들과 성관계를 맺는 것이 허용되었다.
또한 그들의 종교적인 제의(Cult)에는 음행이 수반되었다.
데살로니가에서도 음행이 하나의 제의로서 허가된 행위였다.
혹자는 바울이 본절에서 음행에 관해 언급한 것은 바로 이 제의에서 행해지는 음행을 피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Lightfoot).
바울은 복음이 이교도 지역에 들어갈 때 음행과 갈은 악습(惡習)을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고 믿었다(고전 6:12-20).
첫째, 불레(bŏulē) βουλή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 입니다.
이 뜻은 우리가 저항할 수 없고 거스릴 수 없는 저항 불가능의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런 의미의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가롯 유다가 막을 수 없고, 가야바나
안나스가 막을 수 없었으며, 더더욱 빌라도는 그것을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사탄도 예수님께 십자가를 피하도록 여러번 유혹했지만 이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절대적인 뜻은 저지가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불변입니다.
불레(bŏulē) βουλή, ῆς, ἡ
스트롱번호 1012
둘째, 델레마(thĕlēma) θέλημα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소원적인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디모데전서 2장 4절을 보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원함을 저들이 거역하는 것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 먹을 수 있는
완전한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들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따먹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델레마'는 저항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여기에는 책임있는 응답이 필요한 것입니다.
델레마(thĕlēma) θέλη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2307
누가복음 10: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소원 / 블로마이(bŏulŏmai) βούλομαι
스트롱번호 1014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마태복음 6:9-10)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을 두 가지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불레
(Boule)’라는 단어로 단어의 의미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절대적인 뜻’ ‘저항 불가능한 뜻’ 입니다.
이 뜻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시면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꼭 이루어지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두 번째는 ‘델레마’(thelema)라는 단어로 쓰인 하나님의 뜻인데 이 하나님의 뜻은 이것은 우리가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는 이처럼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과 허용적인 하나님의 뜻이 주어진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이 있기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받겠습니까?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하심의 뜻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반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만 있고 허용적인 뜻이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로봇이나 기계처럼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허용적인 뜻이 있기에 우리의 자유의지로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는 곧 자기 부인의 기도입니다.
날마다 죽어야 응답이 가능한 기도입니다.
쉽지 않은
기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 뜻에 순종하기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죽을 수 있는 힘, 내려 놓을 수 있는 믿음,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은혜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때, 자기를 부인할 때, 우리가 주님의 뜻
가운데 죽어질 때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 가정과 교회와 이 땅 가운데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기쁨’이라는 단어 ευδοκια(유도키아)는 ‘좋은’, ‘훌륭한’, ‘즐거운’을 뜻하는 접두어 ‘ευ’(유)와 ‘셈하다’, ‘생각하다’, ‘판단하다’, ‘판정하다’, ‘입증하다’, ‘선택하다’라는 뜻의 동사 ‘δοκεω’(도케오)가 합성된 여성 명사이다.
ευδοκια의 동사형은 εὐδοκέω(유도케오)로 뜻은 다음과 같다.
1. 만족하다, 기쁘다, 동의하다
2. 동의할 수 있다, 만족스럽다
1. to be well pleased or content, to acquiesce in a thing
2. (of things) to be well-pleasing or acceptable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기쁨을 표현한 대표적인 구절을 보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εὐδοκίας)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εὐδοκίας(유도키아스), 소유격 여성 단수 명사.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εὐδόκησεν)(눅 12:32). εὐδόκησεν(유도케센), 부정과거 직설법 능동 3인칭 단수 동사.
“그 기쁘신(εὐδοκίαν)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εὐδοκίαν(유도키안), 목적격 여성 단수 명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εὐδοκίαν)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엡 1:9). εὐδοκίαν(유도키안), 목적격 여성 단수 명사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토록 기뻐하실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형제자매의 사랑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수준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형제자매는 어떻게 삼위일체 하나님 수준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형제자매 안에 성령님께서 사랑을 부어주시기 때문이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 5:5).
세상의 사랑은 오류가 있다. 그러나 성도의 사랑은 오류가 없다. 왜 그런가? 성령님께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오류가 없는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자매를 사랑하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을 할 때 주님께서는 감사교회를 어떤 교회로 역사하여주실까?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5, 16).
단어는 εὐ(좋은, 선한)와 δοκέω(생각하다, 간주하다)로 이루어진
복합어이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의 뜻은 ‘좋게 생각하다’라는 말이 된다.
이 동사는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해서 ‘기뻐하다’ 라는
뜻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신약성경에는 이 동사의 주어로서 하나님이 14번이나 언급되며, ‘하나님이 기뻐한다, 호감을 가지고
있다’ 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단어에서 파생된 헬라어 명사는 ‘기쁨, 만족’이라는 뜻을 지닌
εὐδόκησις(유도케시스)이다.
εὐδοκέω (유도케오)는 구약성경 70인역에서 기본적으로 세 가지의 뜻으로 사용되면서, 신약성경으로도 이어졌다.
첫째는
‘기뻐하다’
하나님의 기쁨에 대해서 성경의 저자는 말하고 있다(시 147:11; 전 9:7; 합 2:4; 말
2:17; 눅 12:32; 골 1:19; 히 10:6, 8).
또한 사람의 즐거움이나 만족에 대해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창
33:10; 욥 14:5; 대상 29:3; 고후 12:10; 살후 2:12).
둘째는
‘선택하다’
의지적 선택을 말한다(집회서 25:16).
요단 강에서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하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고 말씀한다.
이 이사야 42:1-3의 말씀은 마태복음 12:8에서 이사야서의
인용을 밝히며 다시 나타나고, 변화산에서도 하늘의 음성으로 반복된다(마 17:5).
마태복음은 3번이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호의적인
선택을 받은 사랑하는 아들이심을 강조하고 있다(호 아가페토스 무 에이스 혼 유도케센 헤 프쉬케 무, ὁ ἀγαπητός μου
εἰς ὃν εὐδόκησεν ἡ ψυχή μου).
사랑하는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을 강조하였기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이 장면이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를 입양하는 선택을 보여준다고 해서, 입양론적인 기독론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단어에 부정어가 함께 사용되면, 거절의 뜻을 나타낸다.
구약성경 하박국 2:4을 인용하고 있는 히브리서 10:38은 70인역을
인용하고 있기에, εὐδοκέω (유도케오)의 뜻을 ‘선택’의 의미로 사용한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 10:38).
여기에서 하나님은 뒤로 물러가는(믿음이 약한 사람) 사람을
선택하기보다(거절하다, οὐκ εὐδοκεῖ), 믿음으로 사는 의인을 선택한다(기뻐한다).
단순히 기쁨 이상의 하나님의 우호적인
선택(favor, goodwill)을 받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갈 1:15).
선택(choice)의 의미 속에는 의지적인 결심(decision)이 포함되어 있다. 바울은 고난의 사역에서도 자신의 우호적인 선택과 결심을 말한다: “우리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는 차라리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바랍니다”(새번역, 고후 5:8). 육신을 떠나 주님과 함께 살기를 선택하고 그런 결심을 보여주는 바울이다(We would rather be away from the body and at home with the Lord). 바울은 주님을 향한 사랑의 결심, 성도와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기꺼이 바칠 수 있다는 헌신의 결심도 보여준다(살전 2:8). 이 의지적인 결심을 보여주는 단어가 εὐδοκέω (유도케오)라 할 수 있다(살전 2:8; 3:1).
셋째는 동사 εὐδοκέω (유도케오)에는 동의(consent)와
인정(recognition)
법이나 약속, 행동에 동의를 표하는 의미를 지녔다(토빗 5:17).
‘동의’의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보여주는 파생동사가 συνευδοκέω(수뉴도케오)가 신약성경에 나타난다(행 8:1; 22:20; 고전 7:12,
13; 계 1:32).
사도행전 8장에서 박해자 청년 사울이 스데반 집사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긴 것은 산헤드린 공회의 처벌에
동의한 것이었다(συν-ευδοκέω, 수뉴도케오, agree with).
신약성경에는 동사
εὐδοκέω의 명사형 εὐδοκία(유도키아)가 9번 나오는데, 70인역에는 52번 나온다.
이 단어는 특별히 유대문학과
크리스천 저술에만 등장한다.
예수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말하며 εὐδοκία(유도키아)를 사용하였다(마 11:26; 눅
10:21).
하나님의 선한 뜻(goodwill)을 말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도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빌 2:13; 살후
1:11).
비록 바울은 εὐδοκία(유도키아)를 인간의 선한 뜻에도 이 단어를 사용하지만(롬 10:1; 빌 1:11),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와 선한 뜻에 대하여 이 단어를 절대적으로 사용하였다(엡 1:5, 9).
그래서 70인역은
εὐδοκία(유도키아)를 히브리어 רָצוֹן(라쫀)의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이 히브리어는 주로 하나님의 은혜나 하나님의
기쁨과 뜻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신약성경은 인간의 구원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한 뜻과 의지를 강조하며, “은혜로운 뜻”(새번역 마
11:26; 눅 10:21), “기쁘신 뜻”(엡 1:5, 9)을 지칭하기 위해 εὐδοκία(유도키아)를 사용했다.
인간의 뜻과 지혜, 의지로 되지 않는 인간의 구원이기에,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과 사람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선한 뜻을 믿고 우리의 사랑과 섬김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로마서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 마음에 원하는 바
- 헬라어 구절은 '헤 멘 유도키아 테스 에메스 카르디아스'
'멘'(* , '한편')은 주로 '데'(* , '그러나', '또 한편')와 같이 쓰여서 달리 내용을 구별할 때나 반대되는 내용이
전개될 때 사용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데'와 상관없이 쓰여서 내용이 계속됨을 나타낸다. 즉, 본문은 9:33에 이어진 것으로
'내 마음'을 표현한 '에메스 카르디아스'(* )의 '에메스'('나의')는 '무'(* , '나의')보다 더 강한 표현이다. 이는
바울의 안타까운 심경(心境)을 드러낸다. '원하는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도키아'는 단순히 '바라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라는 표현이라기보다 '기뻐하는 것'의 표현이다.
이 단어에서 바울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사랑하는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 '구하는 바'의 헬라어 표현은 '데에시스'(* ), 즉 '간구하는 것'이며 이는 '기도하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케'(* )와 구별되는 강한 표현이다(엡 6:18). 따라서 본문에 쓰인 '내'(에메스) '원하는
바'(유도키아), '구하는 바'(데에시스)등은 이스라엘에 대한 바울의 간절한 호소와 간구를 담은 강한 어조의 표현들이다.
구원을 얻게 함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스 소테리안'(* )으로 구원을 향한 마음이 목적이나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이스'에 담겨 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해 확실히 언급했지만 동시에 동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픈 마음 또한 애타게
호소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바울의 열망은 행 13:46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간절한 마음은 신자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으로 불신자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신앙생활의 기초 다섯 가지
첫째, 회개하는 생활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제일 처음에 전파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회개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도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7,48).
예수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도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하시면서 회개하라는 말씀을
다섯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2:5).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계3:19).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날 제일 먼저 전파한 말씀도 “회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행2:38).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 선교지에서 전파하고 증거한 것도 회개와 믿음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20:18,21).
“회개”는 “신앙생활”의 입문이고 과정이고 출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는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고 자기를 부인하고 항복하는 것인데 “회개” 없는 믿음은 가짜 믿음입니다. “회개”는 한 번 크게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데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울면서 돌이키고 또 돌이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을 “참회” 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회개”와 “참회”를 계속해서 가장 많이 가장 처절하게 한 사람이 다윗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밤 낮 울면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56:8).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윗의 뒤를 이어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평생토록 계속해서 드렸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귀중한 종으로 사용하셨고 순교의 제물로 받으셨습니다.
다윗과 사도 바울의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고백을 본받아서 성 어거스틴과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께서도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의 귀한 종들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의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고백들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길선주 목사).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이기풍 목사). “이 놈이 주님이 차지하여야 할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습니다”(주기철 목사). “나는 어릴 때부터 범죄를 계속한 불의하고도 불충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나는 큰 죄인임을 깨닫고 두렵게 떨며 울었습니다”(손양원 목사).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며 티끌 같은 미말의 존재입니다”(이성봉 목사). “나는 고멜과 같은 음녀입니다”(김치선 목사). “나는 신사 참배하는 죄인입니다”(한경직 목사).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박윤선 목사).
올바른 “신앙생활”이란 “회개”하고 “참회”하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회개”와 “참회”가 없는 믿음은 형식적인 믿음이고 위선적인 믿음이고 거짓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회개”와 “참회”의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51:17).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다윗과 사도 바울을 비롯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모두 평생토록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면서 살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저는 지금 한국교회와 우리들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은 다윗과 사도 바울을 비롯한 신앙의 선배님들의 처절한 회개를 본받아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고백과 제사를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셔서 날마다 “회개”와 “참회”의 고백과 제사를 드리면서 살아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배하는 생활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목적은 우리 죄인들로 하여금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눈물과 시간과 정성과 물질을 다 쏟아 바치며 하나님께
“예배”의 제사를 드리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애굽의 목적도 하나님께 예배의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8:1).
예수님께서 “예배”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요4:23).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 받은
우리 제일 먼저 힘써야 할 일이 몸을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기독교는 “제사”와 “예배”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며 성막과 성전에서 “제사” 드리게 하셨고, 신약시대와 교회 시대에는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예배”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것이 기독교의 중심입니다. 주님께서 주일 날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날은 모두 주일 날 새벽과 주일 날 저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안식 후 첫날인 주일 아침부터 밤까지 드린 예배의 모습이 사도행전 2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행20:7-11). 청교도들이 가장 강조한 것은 주일 성수와 예배였습니다. 한국교회도 그 초기부터 주일 성수와 예배를 강조해 왔습니다. 주일에는 온종일 모든 세속적 업무를 중단하고 예배와 전도와 봉사에 바쳐야 할 것을 엄격히 가르쳤습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헌법 제 6부 예배모범은 주일성수의 원리를 엄격히 규정했습니다. “이 날은 주일인 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지니 공동 회집으로나 개체로 예배하는 일에 씀이 옳으며 모든 사무와 육신적 쾌락의 일을 폐할지니 세상 염려와 속된 말도 금함이 옳다. 먹을 것까지라도 미리 준비하고 이 날에는 가족이나 집안 사환으로 공동 예배하는 일과 주일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되지 않도록 함이 옳다.”
올바른 “신앙생활”이란 “예배”의 제사를 정성껏 드리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의 제사를 바로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우리들이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며 정성을 다해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들을 축복하십니다. 우리들의 삶이 변화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하늘에서 이루어질 영원한 안식의 축복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은 앞으로 하늘에서 이루어질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권면했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이란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일에 모든 정성을 쏟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신앙의 선배님들이 물려준 주일 성수의 영적인 유산을 점점 저버리고 세속화와 인간화와 편의주의로 치닫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배가 너무 시끄러워졌습니다.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회가 너무 많아졌는데 너무 불행한 일이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 한국교회가 주일 저녁 예배를 점점 폐지하고 있는 것을 기가 막히는 일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총신대의 박용규 교수님이 최근에 한국교회의 영적 침체가 주일 저녁 예배를 폐지 한데서 비롯했다고 올바로 지적했습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주일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실 제가 11살 때 혼자서 38선을 넘어서 남한으로 오게 된 목적도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면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한 평생 주일에는 종일 집에 가지 않고 교회에서 예배 드리면서 살았습니다. 저는 강변교회에서 29년 동안 목회하면서 주일성수를 가장 중요하게 강조했습니다. 주일성수를 제대로 하지 않은 집사님들과 장로님을 책벌하기도 했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이란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며 정성껏 “예배” 드리는 일에 모든 정성을 쏟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를 정성껏 드릴 때 우리들의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충만하게 되고 평안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기초”와 본질은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면서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 드리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구제하는 생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도움이
필요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들도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신10:17-19). 예수님께서는 이웃은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이 너무너무 귀중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39-44).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병자들과 죄인들의 몸을 만지시면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8:3). 그리고 강도 만나서 매를 맞고 거의 죽게 된 사람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편 사람처럼
우리들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33-37). 사도 바울도 비슷한 권면의 말씀을 했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17,20).
요사이 한국교회가 순수한 “회개”와 “예배”는 물론 순수한 “사랑” 실천을 소홀히 하고 그 대신 각종 프로그램과 행사에 치중하고 있는데 너무너무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왜 교회가 학원처럼 프로그램과 행사에 치중하냐고 책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 왜 교회가 공연장처럼 시끄러운 음악에 치중하냐고 책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른 것들을 다 집어치워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한 “회개”와 주일 성수의 “예배”와 함께 순수한 “사랑” 실천에 전력을 다한다면 한국교회는 교회다운 모습을 되 찾게 될 것이고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되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 프랜시스의 믿음과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의 믿음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감히 이런 분들과 비교할 수 없는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탐욕적이고 배타적이고 비판적이고 위선적인 죄인이지만, 주님께서 지니셨던 그리고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이 지니셨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조그만 아주 조그만 부스러기라도 몸에 지니고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로, 방글라데시로, 북한으로, 중국 연변지역으로, 필리핀으로, 아프가니스탄으로 달려가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조금씩, 조금씩 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순수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펼 때 전도가 쉽게 또는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진리 선포가 아닌 순수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펼 때 저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고 전도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을 세계 곳곳에서 발견하고 저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큰 기쁨과 행복을 지니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참된 전도는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데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사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착한 사람들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착한 사람 도르가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에 의해서 욥바에 전도가 이루어졌고, 착한 사람 고넬료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에 의해서 가이사랴에 전도가 이루어졌고, 착한 사람 바나바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에 의해서 안디옥에 전도가 이루어졌고, 착한 사람 루디아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에 의해서 빌립보에 전도가 이루어졌고, 착한 사람 디모데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에 의해서 여러 곳에서 전도가 계속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신앙생활의 기초”와 본질은 불우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넷째,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생활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울면서 에서와 화해한 이야기를 전해주시면서 우리들도 “화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화려하고 대단한 예배를 드리기 이전에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2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화해”를 이루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엡2:16).
“화해”와 “화목”은 진리의 깃발을 휘두르므로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몸과 마음에 지닐 때
이루어집니다. 스데반 집사님도 성 프랜시스도 손양원 목사님도 한경직 목사님도 장기려 박사님도 원수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 분노와
증오와 저주를 쏟아내는 대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뿜어내면서 “화해”의 손길을 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의 기초”와
본질은 분노와 증오와 분열로 치닫고 있는 이 세상에 “화해”의 손길을 펴며 “화해”를 실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것인즉"(레26:6). 그리고 독생자를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사9:6).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과 함께 “평화”를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우리의 “화평” 또는 “평화”라고 선언했습니다(엡2:14).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화평”과 “평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5:9). 사도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18)고 권면했습니다. “신앙생활의 기초”와 본질은 분노와 증오와 분열로 치닫고 있는 이 세상에 “평화”의 손길을 펴며 “평화”를 실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통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선지자 에스겔에게 “통일”의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겔37:17).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피를 흘리신 것은 우리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시고 그리고 서로 원수가 되었던 우리들을 “하나로” 만드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6, 갈3:28). 성령님의 사역도 하나되게 하시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2:3). 사람들뿐이 아니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 되는” “통일”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신앙생활의 기초”와 본질은 분노와 증오와 분열로 치닫고 있는 이 세상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인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염원을 몸과 마음에 지니고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섯째, 천국 소망을 위한 생활
“신앙생활의 기초”는 세상을 바라보는 대신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첫째 복과 여덟 번 째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라는 복이었고 팔복의
결론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2).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바라보시면서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14:1,2).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면서 하늘을 우러러 보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요11:41). “예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요17:1).
사도 바울도 항상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기쁘게 살았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 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후5:1-3).
사도 요한이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기쁘게 살았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계4: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계5:1).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 오는데”(계10: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계12:1). “내가 또 보니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계14: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계18: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계19: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계20: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계21:1).
기독교 신앙의 중심과 목표는 새 하늘과 천국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이 세상의 본향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사모했다고 기록했습니다(히11:16). 올바른 “신앙생활”이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근심
걱정 불평 불만 다 내어버리고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잠시뿐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밤의 한
경점”(시90:4) 같고, “아침에 돋는 풀”(사90:5) 같고, “없는 것” 같고(시39:5),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게”(약4:14)와 같다고 모세와 다윗과 야고보가 고백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마라나타” 라는 인사를 주고 받았는데
“마라나타” 라는 말의 뜻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은 요한계시록을 만 독을 하고
암송을 하며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한국교회의 무디라고 불리던 이성봉 목사님은 밤에
자다가 옆집 방앗간에서 방아 찢는 소리만 들려도 주님이 오시지 않나 하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쳐다보곤 하셨다는 간증을 저는
중학생 때 여러 번 들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도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힘들고 지칠 때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손수
지은 “주님 고대가”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세속화와 인간화로 치닫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과 돈과 자신의 명예와 쾌락을 너무
사랑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천국 신앙을 강조하지 않고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
음악적인 유행에 정신이 빠져서 하늘대신 세상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과 돈과 자신의 명예와 쾌락을 좀
무시하는 바보 같은 모습을 지니도록 힘쓰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에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지녔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부스러기를 조금씩, 조금씩 부어주셨습니다.
저는 참으로 부족하고 부족한 죄인이지만 “천국
소망”을 지니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즐겁게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나의 모습"
첫째는 흐느껴 우는 모습
둘째는 무릎을 끓고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는 모습
셋째는 반가움과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
넷째는 무릎을 꿇고 두 손 높이 들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찬양하고 또 찬양하는
모습
지금 한국교회와 우리들이 힘써야 할 것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의 기초”와 본질과 종말은 세상을 바라보는 대신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하고 귀중한 것은 순수한 믿음을 지니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기초”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리들이 날마다 힘써야 할 것은
순수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와 우리들이 가장 힘써야 할 것은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이
물려주신 올바른 “신앙생활”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질문을 하나 드려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항상 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부족하게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다른 말로 말하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신앙생활에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규범은 무엇인가?
믿음인가? 사랑인가? 순종인가? 말씀인가? 예배인가? 교육인가? 기도인가? 선교인가? 교회인가? 영생인가? 천국인가? 등등
그러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를 보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어느 계명이 가장 크고 중요합니까? 라는 한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관계” 이다고 대답하셨다.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사랑의 관계] 라는 말이다.
하나님께 접근할 때도 관계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계명,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신앙 생활이 무겁고, 재미도 없다.
그러니까, 신앙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이다.
즉,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와 이웃과 사랑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실패하고 있다면, 신앙생활은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삐뚤어져 있는데, 아무리 교회 봉사하고, 기도 많이 하고,
헌금하고, 성경 많이 알고, 암송한들... 신앙 생활은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것을 실패하고 있으니, 다른 것 잘해 봐야 소용없다.
어떤 부잣집에 도둑이 들어와서 보석을 훔쳐서 가방에 넣고,
여유만만하게 식탁에서 밥도 먹고, 설겆이도 해 놓고, 베큠하고, 도망쳐 갔다.
이 도둑은 착한 도둑인가? 그럴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이 잘못되었는데, 다른 사소한 것 잘한들 소용없다.
★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사랑의 관계이다.
(39절)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다.
그와 같으니, 즉, 똑 같다는 말이다.
이 말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같은 것이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둘째는.... = 이 말은 순서가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사랑이 막혀 있으면, 이웃 사랑도 안 된다.
우리에게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아가페, 사랑이 없다.
마치 저수지의 마른 땅과 같다.
차돌을 짜서 물을 내려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의 관계 속에서 그 사랑을 내 안에 채우고,
그 후에야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이것 없이는 힘만 들고, 오히려 괴로움만 더해 진다.
그러므로, 순서를 잊지 말아야 한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 사랑을 내 마음에 채우고 나면,
그 사랑이 넘쳐흘러서 이웃에게도 사랑을 줄 수 있다.
봉사, 헌신, 기도, 성경 읽기, 전도... 이 모든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신앙 생활에서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느냐?
어떻게 하면, 하나님 사랑의 도구가 되어서 이웃을 사랑하느냐?
이것이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초점이다.
(결 론)
신앙생활의 기본은 올바른 사랑의 관계를 개발하고 유지하는데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나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고 하셨다.
이 말씀 앞에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나는 처음에 못하겠다. 황당하다. 어렵다는 등등 절망감이나 분노를 느꼈다
차라리, 십일조도 하고, 봉사도 하겠다.
그러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면 나는 남는 게 뭔가?
너무하다 싶었다.
그러나, 어느 날, 이 성경구절이 부담이 아니라, 감격의 구절이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왜 이런 말씀을 주셨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구나... !!!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한 사랑이다.
1/3 = 0.333... , 1/2 = 0.5, 1/100 = 0.01
∾/1 = ∾(무한대), ∾/100 = ∾(무한대),
∾/1억 = ∾(무한대)
온 우주에 나 하나 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신다.
(신 4:24) 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출 20:5)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 (중략)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하여 찾아낸 단어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
질투하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그렇게 사랑해 주셨다. (요 3:16)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이처럼 사랑하시니, 우리도 그렇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농사꾼을 분류할 때 삼종(三農)으로 분류한다. 바로 상농(上農), 중농(中農), 하농(下農)이다.
상농은 땅을 기경하는 것을 말한다.
중농은 곡식을 기르는 것을 말한다.
하농은 풀을 기르는 것을 말한다.
하농은 게으름이 특징이다.
게으르니 밭에 알곡보다 잡초가 더 무성하게 자란다.
중농은 부지런히 알곡 농사를 잘 지어 처자식을
굶주리지 않게 한다.
즉 가족은 건사하면 이웃에 도움을 준다.
하지만 부지런히 토양을 가꾼다.
그 결과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다.
결국 상농만이 기본기가 충실한 농사꾼이라 할 수 있다.
신앙생활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면 어떨까?
상신(上信), 중신(中信), 하신(下信)
상신이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믿음
중신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
하신이란 자기만을 사랑하는 신앙
나우영 교육컨설팅 대표인 김도윤은 그의 책 《1등은 당신처럼 공부하지 않았다》에서 1994학년부터 2018학년까지 25년간 수능만점자 201명 중 30명을 분석했다.
이런 학생들은 특징은 기본기가 잘 갖춰져 있었다.
공부이 기본기는 공부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다.
김도윤은 공부의 습관이 되어져 있으면 언젠가 공부로 훨훨 날 수 있다고 말한다.
“공부 습관으로 닦아 둔 탄탄한 기본기는 내가 날고 싶을 때 훨훨 날 수 있도록 튼튼한 날개가 되어준다.”
기본기가 탄탄하면, 공부에서 남다른 결과를 이끌얼 낼 수 있다. 기본기가 튼튼해야 수능 만점을 받을 수 있다.
그는 학생이 갖출 공부의 기본기는 세 가지가 있다고 이야기 한다.
첫째, 공부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라.
둘째, 공부를 꾸준히 하라.
셋째, 독서를 많이 하라.
위의 세 가지도 공부의 기본기다.
제 생각은 한 가지를 더 갖춰야 된다고 생각한다.
공부도 ‘내가 하는 것’이다. 자기주도 학습법에 따라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다.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
운동도 기본기가 중요하다. 요즘 사람들의 화두는 ‘웰빙’이다. 잘 사는 것이다. 웰빙에서 중요한 한 가지가 건강이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려면 건강하게 운동할 수 있는 기본기를 갖춰야 한다.
건강의 기본기도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날마다 30분 이상 운동한다.
둘째,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셋째, 기쁨으로 산다.
기본기를 갖추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기본기를 갖출 때 프로 선수가 될 수 있다. 운동 전문가들은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기본기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야구선수인 이승엽은 후배들에게 프로의 기본기는 책임감과 노력이라고 이야기한다.
“프로페셔널, 프로는 책임이 따른다.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은 없다.” 그는 재능의 한계를 느꼈을 때, 노력의 가치를 알았다.
프로는 노력과 책임에 대한 기본기가 잘 되어 있다. 남보다 더 많은 땀을 흘릴 기본을 갖추고 있다.
신앙생활도 기본기가 관건이다
농사도 기본이 중요하다. 공부도 기본기를 갖춰야 한다. 운동도 기본기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은 어떤가?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것이 ‘기본기를 갖추었는가?’이다.
신앙생활의 기본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이다.
본문 11절에 신앙의 기본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신앙생활의 기본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냐?’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가?’ 여부다.
신앙생활도 기본기가 중요하다. 선교사역도 기본기가 중요하다. 그 기본기는 자기를 드러냄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냄이다.
베트남에서 선교 사역을 하시는 김광균 장로(선교사, 호치민 호프 사역)는 선교 사역의 기본기가 잘 갖춰져 있다. 선교 보고를 할 때도 자신의 자랑거리가 될까봐 조심한다.
선교 사역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나타나기만을 원한다. 그의 잘 갖춰진 기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귀하게 사용하신다고 생각된다.
저도 제 삶에서 기본기를 중시한다. 제 삶의 기본기는 삶 속에서 루틴을 변함없이 지속하고 있는가의 여부다.
시간 날 때마다 서점에서 책을 읽는가? 책을 읽지 않을 때는 글을 쓰는가? 를 어제,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하고 있는가?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이 돌리고 있는가?
이런 기본기로 인해 선한 열매가 나타날 때 제가 영광을 취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 다.
기본기를 갖추면 ‘사익’이 아니라 ‘공익’을 추구한다
한국교회는 기본기에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을 지나 걱정거리가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사익 추구가 아니다. 공익 추구다. 즉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세상의 만연한 물질주의가 아니다. 영적
추구를 통한 하나님 영광의 나타남이다. 하지만 교회는 사익을 추구하고 있다. 개인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발버둥친다.
믿음의 사람들은 사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한다. 김형석 교수는 그의 책 《교회 밖 하나님 나라》에서 기본기가 잘 갖춰진 인촌 김성수를 언급한다.
저는 인촌이 2018년 친일파로 몰려 건국공로훈장을 박탈당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신앙적인 면에서는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촌 김성수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민족자본으로 동아일보를 창간했다. 그는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기에 신문사 사장을 친구 송진우에게 맡겼다. 재정난으로 위기에 처한 중앙고등학교를 인수했다.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기에, 건물을 보충하고 교사를 채용하는 등 모든 준비 단계를 직접 챙긴 뒤 운영권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기에, 우리나라 최초로 민간인으로 세운 대학인 고려대학도 설립했지만, 총장직은 교육자인 현상윤에게
맡겼다.
인촌은 공익 추구에 있어 기본기가 잘 되어 있었다. 우리에게 신앙인으로서 사익을 추구하지 않고 공익을 추구해야 함을 교훈해 준다.
신앙인은 신앙 기본기를 갖춰야 한다. 기본기가 잘못 되어 있으면 하나님께로부터 책망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했다. 사도 요한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를 요한계시록 3장 15절과 16절에서 아래와 같이 이야기 한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라오디게아 교회가 신앙의 기본기를 버리니 회색을 띤다. 기본기는 회색이 아니다. 색이 선명하다.
신앙생활에는 기본기가 중요하다. 오늘 베드로는 신앙생활의 기본기를 이야기 한다.
첫째, 기도하라.
둘째, 맡겨진 것의 책임을 감당하라.
셋째, 서로 사랑하라.
넷째, 기준을 하나님으로 두라.
기본기를 갖춰야 인정받게 된다
왜 기본기를 강조하는가?
신앙의 기본기를 갖춰야 교회가 든든히 서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세상이 교회를 인정해주게 만들기 때문이다.
교회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온다. 더 나아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1990년대에 잊혀지지 않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어떤 분은 교회에 나오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주위의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려거든 교회로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는 그랬다. 지금은 “아직도 교회를 다녀?”, “교회는 너와 같은 사람은 가면 안 돼”라고 말한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 고등학생 때 친구들이 제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엄청 부러워했다.
그 때는 ‘교회 가자!’ 한 마디만 해도, 친구들이 거절하지 않았다. 교회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갈 때도 기본기를 잘 갖춰야 한다. 기본기를 잘 갖춰야 오래, 아니 끝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기본기가 더욱 중요하다. 튼튼한 기본기를 갖춰야 기초가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하체가 튼튼해야 장수한다고 한다. 저는 하체가 부실해도 장수하고 싶지 않을 듯싶다. 어쨌든 하체가 부실하면 오래 서 있기가 힘들다.
사람들이 집을 지을 때도 기초를 튼튼해야 한다. 최근 추적 60분에서 아파트 부실공사를 다뤘다. 시공사, 감리사, 허가낸 관청 등이 부실 공사의 주범이었다.
공무원들만이라도 기본기대로 하면 부실 아파트를 방지할 수 있다. 하지만 공무원들도 기본기대로 하지 않고 허가를 내주니, 전 재산을 들여서 입주한 아파트가 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런 아파트는 국가와 시공사가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모두들 책임 회피에 급급하다. 이는 국가와 대기업이 기본기가
잘못되어 있다는 반증이다. 오래 전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은 기본기가 잘못됐기 때문임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본기가 무너지면 기초가 부실해진다. 기초가 부실하면 전체가 망가진다.
공자가 《논어》에서 한 말이 있다. “가닥을 잘못 잡고 시작하면 전체를 망치고 만다.” 기초가 부실하면 전체가 망가진다는 것이다.
공자는 군자들에게 ‘전체가 망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근본에 힘쓰라’고 말한다. 《논어》에서 “무릇 군자는 근본에 힘쓴다”고 했다.
군자는 근본에 힘쓴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은 더욱 근본에 힘써야 한다. 근본, 즉 본질인 말씀에 힘써야 한다. 근본, 본질에 힘쓸 때 튼튼한 기초를 다질 수 있다.
몸도 기초가 중요하다. 몸의 기초는 장이다. 장이 튼튼해야 장수한다. 장이 튼튼하면 삶의 질이 높아진다. 일상이 편안하다. 하지만 저는 장이 나빠 일상을 대단히 불편하게 살아가고 있다.
삶과 신앙생활에서도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그럴 때 끝까지 멋진 삶을 살 수 있다. ‘추적 60분’의 한 하청업체 대표는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아파트는 10년만 지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유럽은 500년이 넘는 건물들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이런 건물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튼튼하게 지었기 때문에 관광 명소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기초가 튼튼하다
구약이나 신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신앙의 기초가 튼튼했다.
여호수아는 말씀의 기초가 튼튼했다. 그가 가나안 정복 전쟁에 탁월한 리더가 될 수 있었던 근원이 말씀 묵상이었다. 그의 묵상이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다니엘은 기도의 기초가 튼튼했다. 그는 죽음의 위기에서도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다. 죽음을 불사한 기도로 사자의 굴에서도 살아날 수 있었다.
‘버티기’를 잘 해야 한다
신앙의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그럼 신앙의 기초가 튼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버티기’를 잘해야 한다. 군대에서 훈련이 힘드니 자주 들었던 말이 있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 그럼 큰 소리를 지르며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
세상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일본 바둑 기사인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9단이 승부에 대해 던진 바둑 명언 중 이런 말이 있다.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것이다.”
요즘은 이 말을 바꿔서 이렇게 말한다.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자가 강한 것이다.” 그만큼 버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장사를 하면 3년 버티기가 힘들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장사를 시작해 망하는 비율이 미국보다 ‘3배’가 높다.
저는 지금 11년 때 독서 중이다. 독서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중 하나가, “하나님 잘 버티게 해 주세요”, “끝까지 버티게 해주세요”였다. 지금 11년 째 버티고 있다.
신앙인들은 내 힘으로 버틸 수 없다. 하나님 주시는 힘으로만 할 수 있다. 저를 버티게 하는 힘은 다름 아닌 예배다. 매주 드리는 예배로 한 주 한 주 버텼다. 지금도 예배로 버티고 있다.
신앙생활하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버티게 해주는 힘은 예배를 통해 공급받는 하나님의 은혜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다. 우리가 받고 있는 고통이 예수보다는 훨씬 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살아 있다. 그러니 받는 고통은 예수님과는 비교할 조차 안 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지 않았는가?
‘절박함’이 기초를 튼튼하게 해준다
그럼 어떻게 해야 기초를 튼튼하게 할 수 있는가? 절박함으로 살아야 한다. 바로 베드로는 7절 말씀에서 말세를 절박함으로 살라고 말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절박한 마음으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영적으로 깨어 있게 한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기도를 급박한
상황이 닥칠 때에야 비로소 한다. 평상시의 기도는 시간 때우기일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절박함으로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럴 때 정신을 차린 상태로 살아갈 수 있다.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한다
신앙의 기초는 절박함에서 그치면 안 된다. 한 발 더 나가야 한다. 포기할 것을 포기해야 한다.
9절 말씀처럼, 대접받기를 포기해야 한다. 대가 바라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우리가 자기의 욕망을 포기할 것 포기할 때 하나님만 붙들고 살아갈 수 있다.
문제는 우리에게 가장 힘든 것이 포기라는 것이다. 권리 포기, 야욕 포기. 이익 포기가 아주 어렵다. 반대로 채움은 쉽다.
그러나 포기는 어렵다. 그래서 기초를 잘 갖춰야 한다. 기초가 제대로 갖춰있지 않으면 포기가 불가능할 정도가 된다.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있다. 인간의 욕망이다. 이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기초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욕망이 극대화되는 것은 기초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다는 증표다. 탐욕을 포기하지 못하니 세상이 그렇게 반대를 해도 세습을 강행한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포기는 물론 재물도 포기해야 한다
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삶의 포기와 재물의 포기다. 재물 포기도 어려운데, 삶을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스도인들은 기쁨 보따리를 이고 살아가야 하지만, 현실은 근심 보따리를 이며 살아간다. 그 이유는 제물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는 11년 간 공부하면서 욕심을 포기하는 기도를 했다. “하나님 밥만 먹여주세요.”
이 포기는 내 힘으로는 못한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만 할 수 있다. 밥만 먹여달라고 했기에 은혜의 보따리를 매고 살아올 수 있었다.
삶의 포기와 재물 포기는 배워야 한다. 그럼 누구에게로부터 배울 수 있는가?
첫째, 예수님께로부터 배울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의 생명까지 포기하셨다. 그 포기가 세상에 희망과 구원 그리고 생명이 선물로 주어졌다. 생명을 포기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물질쯤은 포기할 수 있다.
둘째, 재물의 포기는 베네딕트 수도원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캐나다 벤쿠버 텐스 교회 담임 켄 시게마츠(Ken Shigematsu)는 그의 책 《상황에 끌려 다니지 않기로 했다》라는 책에서 불교인들이 베네딕트 수도원에 대해 평가한 것을 아래와 같이 이야기 한다.
“베네딕트 수도원의 규율을 접한 불교인들은 수도원의 삶이 포기하는 삶이다”고 말했다. 베네딕트 수도원은 초대 교회의 삶을 실천하며 개인적인 소유를 포기한다. 또한 자신의 전 재산을 수도원에 헌납하거나 친구나 가족에게 준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포기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포기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된다.
소설가인 G. K. 체스터턴(G. K. Chesterton)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명예나 돈을 얻을 희망이 없어도 뭔가를 연습하고, 심지어 잘하게 될 가능성이 없어도 연습하려면 그것을 정말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가능성이 없어도 가능성이 생긴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을 품을 수 있다.
면역력을 준비하라
삶에서는 면역력이 중요하다. 저는 장이 안 좋은데, 면역력의 문제 때문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앙의 면역력을 만들어야 한다. 신앙의 면역력이 만들어질 때까지 할 것은 반복이다.
면역력이 만들어질 때까지 반복해야 한다. 포기를 연습하고 포기를 반복하면 포기할 수 있는 면역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튼튼한 기초 아래서 끝까지 가려면 견딜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 힘은 바로 면역력이다.
미세먼지 경보가 발령되면, 면역력이 약한 어린이나 노인은 집 밖에 나가지 않도록 권장한다. 하지만 정상인인 성인은 스스로 선택해서 밖으로 나가도 된다. 면역력, 즉 저항력이 강한가 약한가의 여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9절부터 11절까지 말씀처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려면,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려면 원망의 면역력, 섭섭함의 면역력이 길러져 있어야 한다. 신앙의 면역력이 없으면 대접하다가 금세 원망한다.
면역력이 있으면 선한 청지기로 시작했다가, 면역력이 떨어지면 악한 청지기로 전락한다. 봉사도 신앙의 면역력이 있으면 하나님의 힘으로 하지만, 신앙의 면역력이 떨어지면 자기 힘으로 한다. 결국 불평과 원망 그리고 시비가 발생한다.
신앙생활에서 갖춰야 할 것은 하나님의 면역력이다. 하나님 은혜로 인한 면역력이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신앙은 기본기 닦기라는 것이다. 그 기본기가 신앙생활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게 한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을 끝까지 할 수 있다.
남다
풍성하다
매우 부하다
이 표현의 유래는 중국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데, 과거 중국의 한 명장이 전쟁에서 이길 확률이 낮다고 판단한 후, 병사들에게 빠르게 퇴각하도록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병사들은 이미 빠르게 움직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장이 계속해서 채찍질을 하여 속도를 더 올렸다고 전해집니다.
한자풀이를 살펴보면, 走(주)는 '달리다'라는 뜻이고, 馬(마)는 '말'입니다. 또한, 加(가)는 '더하다', 鞭(편)은 '채찍'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마가편'은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더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주마가편'은 업무나 일의 속도를 높이려는 열정과 끈기를 나타내는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 '종말로'의 헬라어 '로이폰'(*)은 바울의 임박한 종말관을 엿보게 하는 말이며, 서신에서 종결 부분임을 알리는 말이다(엡 6:10; 빌4:8;살후 3:1). 바울은 '로이폰'과 아울러 '형제들아'(*, 아델포이)라는 애정어린 말로 편지의 내용을 전환시키고 있다. 즉 앞장에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원(祇願)을 언급한 것과는 달리, 이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결함을 지적하고 그들을 권면하는 내용으로 주제를 전환시키고 있다(Thomas).
주 예수 안에서...권면하노니
-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은 사도의 권위로 주는 것임을 나타낸다.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 '받았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렐라베테'(*)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그들에게 가르친 내용을 말한다(2:13).
혹자는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의 내용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다음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1. 복음의 요약.
그것은 설교의 형태나 신앙 고백의 형태를 띠고 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와 말씀.
3.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윤리적인 삶.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삶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Bruce).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May he strengthen your hearts so that you will be
blameless and holy in the presence of our God and Father when our Lord
Jesus comes with all his holy ones.
공동번역 / 리하여 여러분의 마음이 굳건해져서, 우리 주 예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다시 오시는 날, 우리 아버지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새번역 / 그래서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께서 자기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 잡힐 데가 없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현대인 /
또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님이 모든 성도들과 함께 다시 오실 때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을 '공동번역'에서는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라고 번역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동번역의 말씀처럼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지내고 보면 그러한 삶을 실천하지 못한 자신의 쭈그러진 모습과 삶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삶이 일생토록 반복되고 계속되면 '타성(惰性)'에 갇혀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타성'을 영어로 "force of habit" 또는 "habitual routine" 이라고 합니다.
이미 내 몸과 나의 생활에 익숙해져서 습관(習慣)이 된 상태를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처럼 간구(데오마이)해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 간구(데에시스)는 어느 특별한 문제를 위한 집중적이고 끈질긴 기도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미 고질화된 현상은 간구(데오마이)하는 기도로 해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힘과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스가랴는 이렇게 외쳤습니다(4:6b).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의 후예들은 이미 그들의 방법으로 해결 할 수 있는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에덴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도움을 구하는 것을 "간구(데오마이)" 라고 합니다.
거룩한 습관을 위한 방법론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말씀 훈련(읽어야 할 말씀을 정하라)
둘째는 기도 훈련(약속의 시간을 정하라)
셋째는 목표 훈련(나의 목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는 목표를 확인하라)
이러한 방법론을 위한 말씀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5)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날마다의 삶의 자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는 거룩한 현장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오늘도 새롭게 내일은 더 새롭게 나를 세워가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레위기’라는 책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는 진리에 기초한다.
‘거룩’(qodesh)이라는 말은 레위기 히브리어 원문에서 100회 이상이나 등장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모든 악이나 흠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되어 계시다는 의미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완벽하면서도 온전하게 좋으신 분이라는 것이다.
여호와는 전적인 충성과 하나님만을 향한 예배, 사랑에서 비롯된 순종을 받기에 합당하시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드러나게 된 연유는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 그들이 거룩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스라엘이 매우 실질적인 방식으로 거룩하게 행동하기를 여호와께서 기대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 자신이
거룩하시므로 이스라엘도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레 11:44, 45; 19:2. 20:7. 21:8).
레위기에
나오는 판이해 보이는 율법은 삶의 의식적, 윤리적, 상업적, 형법적 국면을 다루고 있으며, 이 모든 율법은 거룩하심에 대한 이런
핵심 개념에 근거한다.
알렉산더 힐(Alexander Hill)은 하나님의 거룩, 공의 및 사랑에 기초해
크리스천의 기업 윤리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다.
“만일 어떤 기업의 행위가 하나님의 거룩하고 공의롭고 애정이 깊은 품성을 반영한다면
그것은 윤리적인 것이다.”[1]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Christian Ethics for the Marketplace, 2nd ed. (Downers Grove: IVP Academic, 2008), 15쪽.
힐은 사업을 하는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품을 때 하나님의 거룩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 하나님은 그들의 궁극적인 최우선의 대상이시자 순결과 책임감과 겸손함을 가지고 행동하는 분이시다.거룩에 대한 이스라엘의 외적 관습은 두 가지 분야로 표현된다.
첫째로, 하나님은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규정에 따라 서로에게 거룩함을 실천하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셨다. 예를 들어, 인류학자인 메리 더글러스는
레위기에 나오는 음식법이 제멋대로 제정된 것도 아닐뿐더러, 주로 사람의 건강을 염두에 두고 제정된 것도 아님을 밝혀냈다.
이스라엘이 매일 먹는 음식은 구별되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강력하게 상기시키고 강화하는 역할을 한 것이었다.[2]
Mary Douglas, Purity and Danger: An Analysis of the Concepts of Pollution and Taboo (London: Routledge, 1966).
이것은 ‘구별된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데 필수적이었다.Christopher J. H.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4), 299쪽.
이 원리는 상이한 종류의 동물을 교배하지 못하게 하는 율법, 상이한 종자를 동일한 밭에다 혼작하지 못하게 하는 율법, 상이한 직물로 만든 옷을 입지 못하게 하는 율법(레 19:19)뿐만 아니라 이발이나 문신을 금지하는 율법(레 19:27-28)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거룩하라고 요구하신 두 번째 분야는 다른 나라와의 관계였다.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 20:26).
모세의 말을 빌리자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따른다면 위대한 지혜와 지식을 소유하게
되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열국이 인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신 4:6-8).
하나님의 백성이
일상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야 하는 강력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라이트는 이런 사명에 대한 동기를 다음과 같은
말로 확증했다. “종교적 구별은 윤리적 구별을 통해 구현되어야 하며, 이 두 가지는 다 넓은 의미의 거룩에 포함된다.
그런데
윤리적인 하나님 여호와(YHWH)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해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윤리적 구별이었을
것이다.”[4]
Christopher J. H. Wright, The Mission of God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6), 336쪽. 크리스토퍼 라이트, 《하나님의 선교》(IVP 역간).
레위기에서 ‘거룩’은 구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번영시키기 위한 것이며, 나아가 각 구성원이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한 것이다.
거룩은 규정을 따르는 개인 행위와 관련 있을 뿐만
아니라, 각자의 행위가 하나님 나라의 대리자인 하나님 백성 전체의 삶과 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이에 비춰 볼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이방인에게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신 요구(마 5:13-16)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거룩하라는 말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도 사랑하며 “그러므로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 5:48 레 19:2, 18 참조)라고 한 율법을 초월하는 것이다.
요컨대 고대 이스라엘이 레위기를 따랐던 것은 그것이 일련의 특이한 규정이어서가 아니라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임재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레위기는 오늘날 하나님 백성에게도 중요하다.
흠이 없게(273) 아멤프토스[ amĕmptŏs ] εμπτος, ον 스트롱번호 273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흠 없는(눅 1:6, 살전 3:13), 무흠한(히 8:7)
거룩함(42) 하기오수네
[ hagiōsünē ] ἁγιωσύνη, ης, ἡ
스트롱번호 42
1. 거룩함, 신성함, 롬 1:4, 고후 7:1.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베드로후서 2: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아디쿠메노이 미스돈 아디키아스 헤도넨 헤구메노이 텐 엔 헤메라 트뤼펜 스필로이 카이 모모이 엔트뤼폰테스 엔 타이스 아파타이스 아우톤 쉬뉴오쿠메노이 휘민.
κομιουμενοι μισθον αδικιας ηδονην ηγουμενοι την εν ημερα τρυφην σπιλοι και μωμοι εντρυφωντες εν ταις απαταις αυτων συνευωχουμενοι υμιν
점(4695) 스필로스(spilŏs) σπίλ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4695
1. 점, 흠, 엡 5:27, 벧후 2:13.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티(엡 5:27), 점(벧후 2:13).
흠(3470) 모모스(mōmŏs) μῶμ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470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기본 동사의 중간태. 제1부정과거 ἐμεμψάμην
기본 동사의 중간태. 제1부정과거 ἐμεμψάμην
관련 성경 / 허물하다(롬 9:19), 지적하다(히 8:8), 부정한 것을 보다(막 7:2).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 본문은 거짓 교사들이 남들에게 불의하게 행한 그것으로 인해서 자신들도 속임을 당하고 보응을 받음을 의미한다(Cranfield, Green,Blum, Mayer). 이러한 예는 불의하게 예언하려다 멸망한 발람에게서 찾을 수 있다(민24:11).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 '낮에'에 대해서 혹자는 '날마다'(Meyer, Alford, Auther)로 이해하고, 혹자는 '매일'(Oecumenius)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나 '낮 시간에'(Zahn, Bigg, Strachan, Blum)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연락'의 헬라어 '트뤼펜'(*)은 사치스럽고 자유 분방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눅7:25, Gibson). 취하고 방탕한 생활은 일반적으로 밤에 이루어지나 거짓 교사들은 이들보다 더 악한 자들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 '점과 흠'은 어떤 모양을 손상시키는 오점을 말하는 것으로(엡 5:27; 벧전 1:19) 거짓 선생들의 불의한 행동을 가리킨다.
또한 '간사'는 '어리석음' 혹은 '속임'을 뜻한다(Robertson,G-reen, Lenski) .
본절은 거짓교사들이 낮에도 밤처럼 향락(享樂)에 빠진 생활을 즐길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모임에서도 역시 자신들의 술 취하고 음행하는 방탕한 행위로써 불의를 드러냄을 시사한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구속할 수 있는 것은 점이 없고 흠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점과 흠은 외모나 삶의 모습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점이야 그렇다 치고 흠은 기준이 아주 모호합니다.
예를 들어 키(신장)가 얼마여야 육신적으로 최적이며,
몸무게는 어떠며 생긴 것은 또 어떻게 해야 흠이 없는 상태인지 정의 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육신의 모양이나 행실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사람마다 모두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점과 흠이 없다고 표현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이 가진 기준으로 볼 때 점과 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에 대한 기준입니다.
종합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은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고도 오래 전에 이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다름이 아니라 처음 만드신 상태의 아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심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기로 하시고 만드신 사람이 아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하나님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람이란 존재를 보면 하나님을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보면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목적이었습니다. 그 목적으로 만드신 아담을 보니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사람의 모습이 온전하고 온전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람이 창조된 이후에 어떤 업그레이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그런 말씀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의 관점에서는 다르겠지만, 진화는 그 목적이 없는 일입니다. 목적을 가지고 진화했다면 적어도 사람은 존재하는 이유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존재의 목적과 의미도 없는 진화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여튼 우리 인생들은 창세기에서 창조된 모습이나 예수님의 오신 모습이나 오늘 우리의 모습이나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게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보시고 만족하심은 육신의 어떠함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온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에 아주 온전한 존재라는 것, 그러니까 이 육신은 점과 흠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물학적 육신은 물론이고 그 안에 있는 본성도.
그리고 다음으로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육신이 하나님의 목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그것이 육신으로 나오는 상태일 때 점과 흠이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셨는데,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 곧 뜻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존재가 바로 점과 흠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육신을 부정하게 여깁니다. 외모도 외모지만 무엇보다 그 마음의 본성을 부정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그 둘은 모두 사람입니다. 어느 것도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콜라가 없는 병은 그냥 빈병이고, 콜라병에서 쏟아진 콜라는 먹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본성과 육신은 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기 때문에 자꾸 뭔가를 합니다. 마음을 수련한다느니 명상을 해야 한다느니 참선을 해야 한다는 등이 다 그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가지신 뜻을 표현하기에 너무 온전한 우리 육신을 자기가 인생을 선택하지도 않은 주제에 그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흠과 점을 생각합니다. 그렇다보니 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인생의 본성이 없는 것이 점과 흠이 없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은 점과 흠이 넘치는 분입니다.
넘치다
못해 죽임을 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점과 흠이 없다고 하셨다면 당연히 육신에 대한 기준, 세상이
사람에게 기대하는 기준, 사람의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기준과 안목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논리 같지만
이것은 육신인 자신에 대하여 이전과 전혀 다른 생명으로 보지 않는다면 절대로 동의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동의되고 순종되면 그렇게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점과 흠은 한 마디로 부정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예수님을 부정하게 여겼기에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부정하고 악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어린 양이라고 했고, 그 어린 양의 피 곧 희생이 하나님께서 무엇을 점 없고 흠 없는 것으로 여기시는지를
보인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신앙, 어떤 학문, 어떤 노력, 어떤 수련, 어떤 다짐이나 신념이 우리가 가진 인생의 본성을 억제하고 고치려는 노력이라면 참 가상하고 경건한 것 같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노력과 가치관은 육신을 가진 인생을 보는 관점에서 하나님과 절대적인 적대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절대적인 악입니다.
예수님께서 점과 흠이 없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과 뜻에 관해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육신을 부정하게 여길 수 없습니다. 육신의 본성을 이기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행위와 외모가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으로 인하여 부정함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을 안다면 이 육신이 그 목적에 얼마나 온전한지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육신을 드려 보이셨습니다.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을 위하여 소비하는 것이지 보존하고 안위케 하는 것이 아니며, 이 육신은 강해지고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해져 가는 것으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수고를 하기에 너무 적합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에베소서 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유다서 1: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 본문은 거짓 교사들이 남들에게 불의하게 행한 그것으로 인해서 자신들도 속임을 당하고 보응을 받음을 의미한다(Cranfield, Green,Blum, Mayer). 이러한 예는 불의하게 예언하려다 멸망한 발람에게서 찾을 수 있다(민24:11).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 '낮에'에 대해서 혹자는 '날마다'(Meyer, Alford, Auther)로 이해하고, 혹자는 '매일'(Oecumenius)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나 '낮 시간에'(Zahn, Bigg, Strachan, Blum)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연락'의 헬라어 '트뤼펜'(*)은 사치스럽고 자유 분방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눅7:25, Gibson). 취하고 방탕한 생활은 일반적으로 밤에 이루어지나 거짓 교사들은 이들보다 더 악한 자들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
'점과 흠'은 어떤 모양을 손상시키는 오점을 말하는 것으로(엡 5:27; 벧전 1:19) 거짓 선생들의 불의한 행동을 가리킨다.
또한 '간사'는 '어리석음' 혹은 '속임'을 뜻한다(Robertson,G-reen, Lenski) .
본절은 거짓교사들이 낮에도 밤처럼 향락(享樂)에 빠진 생활을 즐길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모임에서도 역시 자신들의 술 취하고 음행하는 방탕한 행위로써 불의를 드러냄을 시사한다.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 이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 2절을 근거로 본다면 '마음을 굳게 하다'는 곧 '믿음을 굳게 하다'이다(Morris).
2.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기 위하여 '윤리적인 견고함'을 말한 것이다(Bruce).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윤리적으로 견고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할수는 없다.
온전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믿음'뿐이다. 따라서 전자의 견해가 보다 타당하다 하겠다.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 바울은 본절에서 슥14:5 곧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하리라"를 염두에 두고 있다(Bruce). 그 외에도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본 구절의 묘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이야기한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신 33:2; 시 68:17; 단 7:10).
한편 구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재림(Parousia of Christ)을 언급한 모든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시 50:3; 80:1; 82:8; 107:20; 사 26:19; 42:13; 63:9; 64:1; 66:18; 합 2:3; 슥 1:15; 말 4:1(Glasson).
시편 50:3
시편 80:1
시편 82:8
시편 107:20
이사야 26:19
이사야 42:13
이사야 63:9
이사야 64:1
이사야 66:18
하박국 2:3
스가랴 1:15
말라기 4:1
어원적 의미
레위기
19장 2절의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개역개정)”라는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대체 무엇을
요청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가요?
표준국어대사전은 ‘거룩’을 “뜻이 매우 높고
위대하다”로 정의
Oxford Languages는 ‘holy’를 “dedicated or consecrated to God
or a religious purpose”로 정의
“거룩하라”는 명령은 뜻을 높은 곳에 두고 24시간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뜻인가요?
명사 코데쉬와 형용사 카도쉬의 어원적인 의미는 ‘분리(separate)’와
‘다름(different)’을 의미합니다.
따로 떼어놓아, ‘다른 것과 다른’ 특별한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창세기 2장
3절에서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라는 구절은, 그 일곱째 날이 무언가 금치장으로 빛이 번쩍번쩍하고 함부로 손대면 안 될 것 같은 귀한 날이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일곱째 날은 다른 날과 다른, 특별한 날이며, 그 날의 다른 점, 혹은 특별한 점은 하나님께서 그 날에
창조행위를 멈추셨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성(聖)과 속(俗)의 이원론으로 이해하면, 일곱째 날인 안식일만
‘성스러운(holy)” 날이 되고, 나머지 6일동안의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속된’ 것이 되어버립니다.
모든 날이 귀하고 소중한 날입니다.
다만 일곱째 날은 다른 날과는 다르게 하나님께서 일을 하지 않으신 날이고,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주일에 하루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명분을 부여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절기인 유월절과 무교절이 제정되는 출애굽기 12장 16절의 “첫날에도 성회(거룩한 모임)요 제 칠일에도 성회(거룩한 모임)가 되리니 이 두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라는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첫째날과 일곱번째 날은 특별한 날인데, 어떤 점에서 특별하냐 하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날과는 다르다.’
출애굽기 28장에서 제사장의 복장을 규정하는 장면에서도 아론을 위해 “거룩한 옷”을 지어(2절), 그 옷으로 아론을 “거룩하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그 옷감이 값비싼 귀한 재질로 되어 있거나 어떤 신비한 힘이 깃든 옷이라는 뜻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입는 옷과는 차이가 나는 다른 방식으로 지어진 특별한 옷이라는 뜻으로, 그 옷을 입은 사람은 옷만으로도 그가 남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코데쉬/카도쉬”는 분리와 다름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 단어가 나올 때는 어떤 면에서 다른가, 혹은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뒤따라옵니다. 레위기 19장 2절의 “너희는 거룩하라”는 명령은 “너희는 달라야 한다”는 뜻이기에 3절 이하에서 어떤 면이 달라야 하는가를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이 다른 민족들과 달라야 할 첫번째로 성경이 언급하는 것은 흥미롭게도 “부모를 경외하라”는 것이고, 그 다음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뒤따릅니다(레19:3). 다른 민족들이 어떻게 하든 간에 하나님 믿는 백성들은 자신의 부모를 두려움으로 공경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쉼 없이 일을 하건, 열흘에 한번, 혹은 십사 일에 한번 휴식을 취하건,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창조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6일을 일했으면 하루는 반드시 멈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19장이 말하는 “거룩,” 즉 다름과 차이, 특별함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대하는 ‘수직적’인 측면이고, 또 하나는 이웃과 사람들을 대하는 ‘수평적’인 측면입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4절)는 명령과 제물을 드리는 특정한 방식(5-8절),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지 않는 것(12절) 등을 ‘수직적인 거룩’이라 한다면, 그 외의 대부분의 명령은 ‘수평적인 거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난민들을 위해 밭과 포도원의 일부를 추수하지 않고 남겨놓는 것(9-10절), 남의 것을 훔치지 않으며,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하지 않는 것(11절), 이웃을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않고, 노동자의 임금을 제때 지불하는 것(13절), 장애가 있는 이들을 괴롭히지 않는 것(14절), 공평과 정의로 재판하는 것(15절), 이웃을 희생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는 것(16절), 형제를 미워하지 않으며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17절) 등. 마지막으로, “너희는 거룩하라(2절)”는 명령은 그 유명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18절)”는 명령으로 귀결됩니다.
이러한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거룩의 두 방향성은 십계명의 두 가지 측면(수직적인 1-4계명과 수평적인 5-10계명: 제4계명인 안식일 계명은 수직성과 수평성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과 연결되며, 그리고 마태복음 22장과 누가복음 10장에서 말하는 율법(성경)의 핵심인 하나님과 사랑과 이웃 사랑의 명령과도 궤를 같이 합니다. “너희는 거룩하라”는 명령이 여러분의 머리 속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성경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셔야 할 때입니다.
거룩이란 말은 히브리어 코데쉬(kodesh)에서 온 것으로 뜻은 하나님께 구별되다이다. 하나님께 구별되다는 ‘하나님께만 드려지다’는 뜻이다. 즉 성경이 말하는 거룩은 ‘하나님의 전용’이란 뜻이다. 제사장이 거룩한 이유는 제사장 자체가 아니라 제사장의 직무를 말한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일’만’을 하는 사람이다. 제사장은 다른 세속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불을 때지 않거나 밭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세속적인 부를 쌓거나 권력을 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직 하나님께 구별되어 하나님의 일만 한다는 뜻이 거룩이다.
거룩의 다양한 의미를 더 찾아 보자.
레위인과 제사장
구약에서 거룩한 사람은 크게 두 부류이다. 하나는 레위인들이다. 레위인들은 가문을 따라 성막을 관리하는 사람들과 제사의 직무를 감당하는 부류이다. 더 세세하게 들어가면 제사의 직무는 대제사장이 한 명 있고, 그 다음은 일반 제사장이 아론의 후대 가문을 때라 나뉜다.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이후 다윗의 시대에 제사의 직무는 제사 행위를 하는 자들과 찬양과 다른 잡무를 하는 이들로 분류가 된다. 솔로몬의 성전이 지어진 후 더 체계화 되고 이것은 신약까지 이어진다.
나실인
나실인은 일반인이지만 스스로 하나님께 서약하여 거룩을 맹세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가끔 자의와 다르게 하나님께서 직접 거룩한 자로 구별한 자들이 있는다. 삼손의 경우가 그렇다.
선지자
선지자들도 종종 특별히 어느 한 때 나실인처럼 하나님께 구별된 자들이 있다.
하늘 / 하늘은 하나님 계시는 거룩한 곳이다. 하늘 종종 하나님의 보좌로 소개된다.
성소 / 성막과 성전은 하나님이 땅에 임재하는 방편이자 장소이다. 하나님은 성전을 거룩하게 하신다.
현현의 장소 / 성경에서는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을 때가 많지만 성경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현현의 장소를 거룩하게 여겼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성전이 세워진 이후에도 하나님의 현현 장소는 특별히 구별되어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하곤 했다.
제물 /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은 거룩하다. 거룩한 제물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화목제물과 같이 일부는 제사장과 자세장의 가족들이 먹기도 하지만 엄격할 규례에 따라 먹을 수 있었다. 예로 제사장의 시집간 딸은 먹지 못하나 시집가지 않은 딸은 먹을 수 있다.
성전 기물 / 성전 기물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려진 것으로 하나님을 위한 제사, 찬양 용도 외에는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저주하신다.
안식일
신명기 5:14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역대상 23:31 또 안식일과 초하루와 절기에 모든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가 명령하신 규례의 정한 수효대로 항상 여호와 앞에 드리며
축제일
50년 (희년)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11:45)
성경은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명령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만일 이 말씀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거룩'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 의미를 먼저 알아야 하며, 어떻게 하는 것이 거룩하게 되는 것인지 그 방법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하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를 잘 알지 못하고, 그저 구름처럼 두루뭉실하게 뭔가 영적인 어떤 고귀한 삶을 살라는 뜻이려니 하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런 분명하지 않은 이해를 바탕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중요한 이 '거룩'의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거룩하다'는 '뜻이 매우 높고 위대하다'라고 나와 있으며, 《우리말 어원사전》을 찾아보면 '거룩하다'는 말은 '거륵[偉] + ᄒᆞ[爲] + 다[어미]'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설명으로는 거룩의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좀 더 과거로 올라가서 '거룩'이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어사전》을 찾아보면 '거룩'의 옛말은 '거륵'이며, '거룩하다'라는 말은 '거륵ᄒᆞ다' 또는 '거록ᄒᆞ다'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거륵ᄒᆞ다'나 '거록ᄒᆞ다'는 말은 '거르다'라는 말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거르다 : 거르다[濾:거를 려]
거리다 : 건지다, 구원하다, 구제하다; 거르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거룩'이라는 말은 '거룩하다'라는 말의 명사형으로,
'거르다' 또는 '거리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거룩'이라는 말은 '여과(濾過)', 걸러내는 것, 즉
'필터링(filtering)'의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즉 우리 삶에서 걸러내야 할 온갖 더러운 것과 악한 것들을 걸러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hagios: sacred, holy
Usage: set apart by (or for) God
거룩을 뜻하는 헬라어 '하기오스(ἅγιος)'라는 말은 '하나님을 위하여
분리하다' 또는 '하나님에 의하여 분리되다'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분리한다'는 말은 바로 '거른다'는 말이니, '하기오스' 또한
'걸러낸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헬라어의 의미나 우리말의 의미나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너희는 칠일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출 12:15)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엡 5:3)
'거룩하라'는 말은 명령으로 주어졌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일반 명령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만약 거룩하라는 명령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누룩이 온 반죽 덩어리를 부풀게 하는 것처럼, 우리 삶에 들어와 있는 온갖 음란하고 더럽고 악한 것들이 우리 삶을 가득 채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는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 자신을 점령해 버릴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더욱 거룩하라는 명령의 말씀을 신중하게 받아들이고, 이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걸러내야 할 것들은 너무나도 달콤하고, 너무나도 집요하게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기에, 거룩은 쉽지 않은 작업이 될 것입니다. 쉽지 않은 작업이 아니라, 그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 될 것입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 우리의 이기심과 탐욕이 주는 유혹이 우리를 거룩과 멀어지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명 이 거룩에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매번 성공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서 거룩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며, 깨어지고서라도 다시 거룩을 향한 도전을 멈춰서는 안될 것입니다. 거룩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더러운 것들을 받으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것들은 버려져야 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커피를 내릴 때 필터를 두고 찌꺼기를 걸러내면 순수한 커피를 얻을 수 있듯이,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거룩을 실천하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온갖 악과 더러운 것들을 다 걸러내고 맑고 깨끗한 순수한 존재로 거듭 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고 계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거룩하라'는 말은 우리에 대한 명령의 말입니다. 그러나 '거룩하다'라는 말은 거룩을 실천한 결과로 얻어진 결과물이 찌꺼기가 하나도 없이 맑고 영롱한 상태의 것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말로서, 하나님께서 거룩을 실천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고 하시는 긍정적인 평가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에 성공할 때, 우리 마음에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사라지고 없게 될 것입니다. 온갖 악한 것들도 사라지고 생각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거룩이 우리 자신을 온갖 더러운 것들과 음란한 것들과 악한 것들로 부터 우리를 지켜주게 될 것입니다. 거룩으로 우리 마음에 그런 것들이 제거되어 싹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싹이 트지 않는데, 어떻게 그런 마음이 자라며, 어떻게 그런 마음이 우리를 주관할 수 있겠습니까? 거룩한 상태가 되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거룩의 실천 주체의 문제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룩을 실천하는 주체가 '나 자신'인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라면 문제가 좀 달라지게 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1~12)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1~33)
마태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인간들을 필터링하여 거룩을 실천하시겠다고 나서는 매우 엄중한 상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거룩을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 명령을 실천했는지 실천하지 않았는지를 이제 스스로 직접 점검한 후에, 거룩한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스스로 걸러내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거룩을 실천하면, 순수한 자가 되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지만, 내가 스스로 거룩을 실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두 팔을 걷어 붙이고 순수하지 못한 우리를 걸러내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하는 거룩은 축복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룩은 재앙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이 거룩이라는 것이 한 번 거르기만 하면 그 효과가 평생 지속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 더없이 좋겠지만, 문제는 그것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한 번 목욕했다고 해서 그 깨끗함이 평생 유지되지 못하듯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점점 더 낡아지고, 점점 더 무질서해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거룩의 문제는 우리가 매일 매일 실천해야 할 과제가 되며, 순간 순간 실천해야 할 과제가 되는 것입니다. 《대학》이라는 책에 거룩의 일상화와 관련된 글이 있습니다.
湯之盤銘曰:「苟日新,日日新,又日新。」
탕지반명왈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대학(大學)》
탕임금의 세수하는 대야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만일 어느날 새롭게 되었다면, 하루하루 새롭게 하고 또 날마다 새롭게 하라.
자신이 세수하는 대야의 바닥에 위와 같은 글귀를 새겨두고, 매일 매일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새롭게 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1) 입지(立志)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거룩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거룩을 실천하는 첫 단계는 거룩을 실천하겠다는 뜻을 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거룩한 삶을 살겠노라는 마음을
세우지 않았는데, 저절로 거룩해지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룩하지 않은 삶은, 내가 그런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지
않아도, 우리의 삶은 자연스레 거룩하지 못한 삶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의 이치가 그렇고, 자연의 법칙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점점 질서가 무너지고, 점점 흐트러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해이(解弛)증가의 법칙'이 작용하는 세상에서, 해이해지는 자신을 다잡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에너지를 투입하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물이 역류하는 것처럼,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댓가가 필요하다는 말이며, 고통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힘은 어디에서 얻습니까? 입지(立志)입니다. 뜻을 세우는 것입니다. 뜻을 세우면 힘이 생깁니다. 그 힘이 자연의 질서를 조금은 거스르게 도와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고, 우리가 세운 뜻 자체도 해이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문득 우리는 내가 언제 무슨 결심을 했는지조차도 잊어버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거룩하지 못한 삶에 절어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2) 필터 장착
거룩한
삶을 살겠노라 뜻을 세웠다면, 다음 단계는 걸러내기 위한 도구, 즉 필터를 장착해야 합니다. 커피를 거를 때는 거름종이, 즉
여과지 한 장만 꼽으면 됩니다. 그러나 내 삶의 더러운 것을 걸러내기 위해서는 무슨 필터를 채용해야 할까요? 어느 회사의 제품을
구입해야 할까요? 음란한 생각을 걸러내는 필터, 미움을 걸러내는 필터, 분노를 걸러내는 필터, 이기심을 걸러내는 필터, 게으름을
걸러내는 필터... 이런 필터를 어디에서 구입할 수 있으며, 얼마를 주면 살 수 있을까요? 세상에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런 필터를
파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여과지로 걸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청언동(視聽言動)의 필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명하신 거룩을 실천하고자 하면 무슨 필터를 준비해야 할까요? 그 대답은 《논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안연이 공자께 인(仁)을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질문합니다. 그때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子曰:"非禮勿視,非禮勿聽,非禮勿言,非禮勿動。"
자왈:"비례물시, 비례물청, 비례물언, 비례물동."
예에 맞지 않는 것은 보지 말고, 예에 맞지 않는 것은 듣지 말며, 예에 맞지 않는 말은 하지 말고, 예에 맞지 않는 행동은 하지 말라.
공자의 이 말을 네 글자로 줄여서 시청언동(視聽言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왜 필터가 됩니까? 필터가 무엇입니까? 걸러주는 것입니다. 무엇을 걸러주는 것입니까? 온갖 더럽고 악하고 나쁜 생각을 걸러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어디에서 생기는 것입니까? 모두 우리의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왜 이런 것들이 생겨납니까? 외부에서 악한 것들이 마음으로 유입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좋지 않은 것들이 마음에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악한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하면 됩니다. 눈으로 들어오는 것 중에서 좋지 않은 것을 걸러서 보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귀로 들어오는 것 중에서 나쁜 것들을 걸러내고 듣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 좋지 않은 것이 유입되지 않으면, 좋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지 못할 것이고, 좋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지 못하는데, 어떻게 좋지 못한 일을 행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음으로 입력되는 모든 것들을 걸러주는데, 어떻게 마음에 좋지 못한 것이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마음을 지키는 한 가지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외부의 좋지 못한 정보가 입력되는 것은 입력센서인 눈과 귀에서 걸러주고, 좋지 못한 행동을 걸러주는 것은 출력도구인 입과 손발을 제지시켜 막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악을 걸러주는 필터가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 입력 통제 방법
그렇다면 좀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에 맞지 않는 것은 보지 말라고 했는데, 눈에 보이는 것을 어떻게 보지 말라는 것입니까? 눈으로 먼저 보고 평가를 해야, 봐도 되는 것인지, 보면 안되는 것인지 알 수 있는데, 어떻게 보지도 말라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이 봐도 되는 것인지 여부를 알 수 있겠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뭔지 봐야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가를 하기 위해 보게 된다면, 이미 보지 말아야 할 그것을 본 것이 됩니다. 그럼 거르기도 전에 이미 걸러야 할 것들이 내 마음 속에 들어와 버린 것이니,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거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꼭 봐야 할 것, 꼭 필요한 것만 골라서 보라는 말씀입니다. 필요하지도 않은데, 이것 저것 뒤적거리다가는, 보지 말아야 할 쓸 데 없는 것까지도 보게 될 것이니, 꼭 필요한 것만 찾아서 보는 것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말입니다. 꼭 봐야 할 것만 찾아서 보고, 꼭 필요한 것만 골라서 보라는 말입니다. 인터넷을 켜놓고 폭풍 스크롤을 하고 있지 말라는 말입니다. 봐도 되고 안 봐도 되는 것이라면 보지 말고,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되는 것이라면 듣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단 눈으로 봤다면 빨리 눈을 돌리고, 일단 귀로 들었다면 빨리 다른 곳으로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다른 곳에 마음을 집중할 것을 찾게 되면, 방금 전에 본 것이나 들은 것이 내 마음에 남아 있지 않도록 하는 것에 조금은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 출력 통제 방법
잘못된 말과 행동을 거르는 방법도 동일합니다. 말은 꼭 해야 할 말만 하라는 것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말은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말이 많으면, 탈도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행동은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꼭 필요한 말만 하고, 꼭 필요한 행동만 하라는 말입니다.
인생을 그렇게 딱딱하게 살라고 하면 무슨 재미로 살겠습니까? 사람이 좀 쓸데없는 말도 하고 살아야 하고, 실없는 짓도 하면서 살아야 숨을 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꼭 해야 할 말만 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을 많이 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말입니다. 방종으로 흘러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혀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절제하면서 조심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또 하나의 복병
그런데 아무리 눈과 귀를 통제한다고 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미 본 것과 들은 것, 경험한 옛 기억을 꺼내서 되새기는 것입니다. 옛날의 기억을 꺼내서 마음으로 계속 음미하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눈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귀로 듣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옛날의 기억을 다시 꺼낼 때마다, 우리의 감정이 다시금 요동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그런 기억의 되새김질을 자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쉽지 않다면, 늘 다른 집중할 것을 찾아서 거기에 마음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몰입하고 있으면 더 좋습니다. 쓸데 없는 것이 아니라면. 집중을 하고 몰입을 하면, 다른 쓸데없는 추억을 곱씹을 시간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훈련소에서 훈련병들이 잡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잠시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계속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처럼 하시면 조금은 도움이 된다는 말입니다.
도움이 될 만한 구체적인 방법을 몇 가지 제시해 보았지만, 사실 이론이야 간단하지만, 실제로 이것을 실천해 나가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이것이 쉽겠습니까? 인간이 어떻게 이런 것을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상 쉽지 않은 것이고,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 방법을 실천하면, 실천하지 않는 것보다는 좋겠지만, 오래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마음 속에 거룩에 대한 다짐을 계속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인간의 결심도 계속적으로 쇠하고, 다른 바쁘고 중요한 일들과 세상 살이로 인해서, 거룩에 대한 생각이 어느 틈엔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4:8의 말씀처럼 이런 방법은 '육체의 연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근본적인 도움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도 '약간의 유익'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은 인간적인 방법이고, 육신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오래 유지하고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방법은 없습니까?
그것은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가 되면, 이런 필터를 적용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런 더럽고 악한
생각들이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가득 담긴 그릇에 다른 것을 더 담을 수 없듯이, 성령이 마음에 충만하게
되면, 다른 생각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는 성령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는 동안 계속 지속되는 것이니,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온전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방법으로 자신을 지키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거룩을 지켜가고자 기도한다면, 자애로운 하나님의 선물이 분명히 있게 될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가 되면 우리의 거룩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는, 우리는 우리의 눈과 귀를 제어하고, 우리의 입과 손발을
제어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지키고, 우리 자신을 방종에 빠지지 않도록 단속하는 작업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 않겠느냐?(마 7:11)"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우리가 늘 거룩할 수
있도록 은혜로운 선물로 우리를 채워주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 '심히'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레크페릿수'(*)는 이중 강조 부사로 매우 강한 뜻을 담고 있다.
이 단어는 본절과 5:13; 엡 3:20에 만나와 있다.
단 3:22(The Greek Old Testament of Theodotion)에서는 풀무의 불꽃을 표현할 때 '심히' 곧 '에크페릿수'(*,'과도하게')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본절에서 사용된 단어는 여기에 전치사 '휘페르'(*, '한층더')가 첨가된 형태이다.
또한 '간구함은'의 헬라어 '데오메노이'(*)는 '필요한 것을 간절히 요청한다'는 뜻으로 앞의 부사와 연결되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깊은 뜻임을 나타낸다.
심히(4057) 페리쏘스
[ pĕrissōs ] περισσῶς 스트롱번호 4057
1. 굉장히, 한량없이, 매우, 더욱 더, 마 27:23, 막 15:14, 10:26.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더욱(마 27:23), 매우(막 10:26), 심히(행 26:11).
간구함은(1189) 데오마이 [ dĕŏmai ] δέομαι 스트롱번호 1189
고린도후서 5: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We are therefore Christ's ambassadors, as though God were making his appeal through us. We implore you on Christ's behalf: Be reconciled to God.
화목하라(2644) 카탈라쏘()
Be reconciled to God.
카탈라게테 토 데오(καταλλαγητε τω θεω)
고린도교회는 남다른 은사를 많이 소유했던 교회이었으나 분열과 시기와 당파 싸움으로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영적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가르침이었다.
사신이 되어 - 바울의 사도직은 오직 그리스도의 화평의 메시지(엡 2:16, 17)를 전파하는 데에 의미가 있을뿐 바울 자신은 말씀과 비견(比肩)되는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그는 단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봉사할 뿐이다.
하나님과 화목하라 -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그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당파와 시기, 질투로 인해 분열되어 있으며 또한 거짓 사도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된 고린도 교인들이 화목한 관계로 돌아갈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과의 화목에 의해서다. 따라서 바울은 복음의 본질을 통해서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 질병을 치유시키고자 했다. 한편 바울이 화해의 메시지를 전할때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동등한 권위를 지니고 있다.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 '부족함을'의 헬라어 '휘스테레마타'(5303)는 문자적으로 '늦다', '뒤에 오다'는 뜻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환난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소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적 지식에 있어서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실제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웃 교회의 모범이 될 만큼 열성적인 신앙을 보였으나 재림과 종말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여되어 신앙생활에 많은 혼란과 어려움을 겪었다.
부족함을(5303) 후스테레마[ hüstĕrēma ] ὑστέρη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5303
1. 결핍, 궁핍, 부족, 눅 21:4, 고전 16:17, 고후 8:14, 빌 2:30.
2. 부족, 결점, 살전 3:10.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가난함(눅 21:4), 부족함(고전 16:17, 고후 8:14, 빌 2:30).
온전케 하려 함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르티사이'(2675)는 '그물을 수선하다'(마 4:21) 또는 '사람을 교화(敎化)하다'(갈 6:1)는 의미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이 온전히 성숙되기를 바라는 바울의 목회자적인 심정이 잘 드러난다(Morris).
2675. καταρτίζω
스트롱번호 2675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으로 굳게 서서 환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있음을 들었을 때 큰 기쁨과 감사로 넘쳤다. 바울의 기쁨과 감사는 오직 성도들의 믿음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어 자기 몸을 내어주신 사랑의 복음에 의한 것이다. 바울은 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1. 믿음의 성장을 위해 기도하였다.
1)믿음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성장한 것이 아니다. 처음 주를 받아들었을 때 삶의 변화가 일어난다. 새로운 관계, 새로운 추구, 새로운 관심으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이제 자신이 정말 믿음으로 굳센 사람처럼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 믿음으로 인해 환난이 오면 돌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곧 말라버리게 될 수 있다.
2)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라 불리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통과하여야 했다.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알지도 못한 미지의 땅으로 가는 것은 정말 엄청난 믿음이 동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나안 땅에서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가게 되었고 이로 아내 사라까지 빼앗기게 되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 믿음이 자라게 되었을 것이다.
3)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보고 싶어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의 부족함을 채워주고자 하는 부모와 같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도록 목사와 교사를 주셨다. 참된 양식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우리 영혼을 먹일 때 자라게 된다.
2.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도록 기도하였다.
1)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미 사랑의 수고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더욱 많아 넘치게 하도록 기도하고 있다. 율법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명하고 있는데 이제 주님은 주의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해 주의 계명을 지키라 하셨다. 그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 였다.
2)바울은 그리스도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7-18)
3)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계명을 이룸으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된다. 이제 계명이 우리에게 저주가 아니라 사랑의 말씀으로 우리 사이를 더욱 아름답게 하게 된다. 사랑의 열매는 성령 안에서 거하는 믿음의 사람에게 자연스런 것이다.
3. 하나님 앞에 거룩함에 흠이 없도록 기도하였다.
1)믿음과 사랑이 넘치는 삶은 곧 하나님 앞에 거룩함에 이르는 삶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 근본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나가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다.
2)하나님 앞에 드리는 희생제물은 흠이 없는 양이어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제물인 어린양이 되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이로서 우리의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살아 숨쉬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다.
3)죄의 개념이 사라져가는 이 세대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함에 대한 추구는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에하도록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우리에게 주셨다. 세상과 구별되게 하는 것이 바로 이런 믿음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1:3절에서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라고 했다.
그는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것이다. 라고
말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평가를 한다고 하면 어떤 평가가 나올 수 있을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한 마디로 ‘하나님께 감사’가 아닐까? 한다.
그렇다. 바울이 고백했듯이 믿는 성도에게 최고의 축복은 바로 감사이다. 바울은 감사하는 이유를 ‘믿음이 자라고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바울은 고전 10:30, 31절에서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최고의
도구는 바로 감사입니다.
바울이 신생교회 데살로니가 교회에 파송한 복음의 일꾼 디모데의 보고를 받은 후에 사도적 기쁨과 사랑에 대하여 보도하고 있는 종결 부분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데살로니가 성도들로 인하여 심히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들을 직접 찾아가 그들의 믿음의 부족함을 채워 줄 수 있도록 위하여 기도한다고 밟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 가운데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라는 말씀을 제목으로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을 살펴볼 때 피차에 큰 은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의 기쁨
오늘 말씀의 제목이 된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라는 말씀의 의미를 제목 그대로 받을때에는 감사의 방법을 언뜻 떠 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은 ‘너희에 관하여’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본 절은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대해 어떻게 하여도 다 보답할 수 없다고 하는 의미를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견고한 믿음 위에 서서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경이로운 역사요 섭리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에 대한 감사함에 감탄사를 가득 담은 바울의 고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 본문 9절은 바울 일행의 첫 고백이 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이 말은 사도바울이 디모데로부터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기쁜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서 감출 수 없는 영적인 만족감을 가지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바울 일행의 기쁨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 일행이 기뻐하는 기쁨이 자기 자신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시인한 것입니다. 그 증거가 오늘 말씀의 제목입니다.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까?’입니다.
이와같이 성도에게 있어서 기쁨의 참된 근원은 바로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빼앗을 수 없는 귀중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을 때 커다란 기쁨을 느낍니다. 거기에는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인격적이거나 정신적인 것도 포함됩니다.
#가령~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기쁨의 요인 자체만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그들은 그러한 요인들의 이면에 계시면서 정작 그 요인들의 주체가 되시는 분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가 기뻐하게 되는 요인들의 이면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쁨 이면에 서 계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단지 기쁨을 여기게 되는 직접적인 요인들에게만 우리의 눈이 맞춰진 나머지 더 근원적인 요인을 발견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비록 이 시대가 그 이면에 계시는 하나님을 점점 가리고 숨기는 우상을 섬기는 시대일지라도 성도는 바로 보고 바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 18장에서 보면~
*18: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 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21:5,6 ‘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때에 백 세라 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비 로소 사라가 자신의 기쁨의 진정한 근원을 발견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기쁨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진정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요15:11절 말씀입니다.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다 보답할 수 없다고 하는 최고의 고백,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기쁨에 대한 감사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바울은 본문 9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말씀은 어떠한 감사의 방법이라기보다는 받은 은혜에 대하여 어떻게 하여도 다 보답할 수 없다고 하는 반어적인 표현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통하여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소식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기뻐할 수 있었던 그 기쁨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8절에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서 복음의 일꾼 디모데를 보냈는데 디모데가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였다. 그리고 피차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는다. 특히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복음의 일꾼 디모데를 통하여 전달받은 내용은 한 마디로 데살로니가 교회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잘 자라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돌보시며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가령 식물들의 씨앗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것에서부터 지구를 중심으로 온 우주가 일정한 범칙에 따라 운행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하물며 영적인 일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즉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도록 세밀하게 돌보시며 성도로 하여금 믿음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림 없도록 성장시키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사실을 망각한 채 특정 지도자를 중심으로 분파를 형성하여 싸움을 일삼았습니다. 이에 바울이 말하였습니다.
☛고전 3:6, 7절 말씀입니다.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이는 곧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을 부여하시며 성장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만 높여야 합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2:7절에 보면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지 않은 사람은 감사할 수도 없고 감사함을 넘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위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자녀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충성하고, 순종하며, 감사하고 헌신하는 자에게 상급을 주실 것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11:6절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못을 박아 놓았습니다.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왜 열납하지 않으셨습니까? 히 11:4절에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시편 9:1절에서 다윗은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전심이라 함은 마음을 다해서 감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져오는 무수한 제물들을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은 어떠한 것으로도 온전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감사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드린 엽전 두 닙을 기뻐하심(마12:42)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엡5:20절에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하였습니다. 범사에 감사, 항상 감사는 성도의 열매입니다. 자식도 부모에게 생일 때에나 제사만 잘 지내는 자식은 불효막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변함없이 효도를 다 하는 사람은 좋은 자녀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는 상활도 언제나 감사, 언제나 찬송, 언제나 사랑하는 것이 그분이 주신 은혜에 화답하는 것입니다.
셋째, 믿음의 부족함을 보충하라.
본문 10절에서 바울은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바울 자신이 데살로니가 교회로 직접 가서 그들의 믿음을 온전케 할 수 있게 하려고 밤낮으로 매우 열심히 기도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야’라는 말은 단순히 밤, 낮의 정해진 두 번의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라는 말이며, ‘심히’라는 말은 ‘한도를 넘어서서 더 많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아주 열정적이면서도 간절하게 기도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떤 면을 위하여 그리 기도하였을까요?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즉 데살로니가 교회의 부족한 믿음을 채워 주기를 위해서 그처럼 간절히 소망하며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현재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이 부족하다거나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1:3). 또한, 하나님을 향하는 믿음의 소문이 각 처에 퍼졌으며(1:8), 그들은 재림의 신앙을 가지며(1:10), 말씀을 믿음으로 받았습니다(2:14). 이 정도면 더 바랄 바 없는 칭찬 받을 만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바울은 그들의 믿음의 부족을 온전하게 하려고 그들에게 직접 가볼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현재의 그들의 믿음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잘 달리는 말이 더 잘 달리도록 채찍을 가하는 것처럼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을 계발하고 권고함으로서 그들로 더욱 온전한 성도가 되도록 돕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아무리 훌륭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계속하여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온전하게 하려고 목회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견고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항시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
*마16:16절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 니이다’
*마16:18절 ‘교회를 세우시겠다’
*마16:22절 ‘주여 그리 마옵소서’
*마16:23절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어떠한 감사로도 다 갚을 길이 없을 정도로 넘치게 받아서 견고한 믿음의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항상 주의해야 할 바가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신앙은 불완전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위에 굳건히 서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의 믿음을 위협하는 사단의 공격은 더욱 거세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굳건한 믿음 위에 바로 서 있되 늘 겸손한 자세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 할 때 우리의 믿음은 더욱 온전해져서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즉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어떠한 감사로도 다 보답할 수 없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For now we really live, since you are standing firm in the Lord.
생명이란 헬라 단어가 세 가지로 표현됩니다.
첫째는 육체적인 생명을 의미하는 비오스(βίος)
둘째는 정신적인 생명을 의미하는 푸쉬케(ψυχή)
셋째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조에(ζωή)
본문에서 "살리라"는 단어는 영생을 의미하는 '조에'의 동사형으로 "자오( zaō. ζάω)" 라고 합니다.
'자오'라는 단어를 세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바울의 영적 생명력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소식을 들었을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계속 유지되었던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견고한 믿음에 대한 소식으로 바울이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는 '조멘'을 '생명의 호흡'(breath of life)으로 번역하여 바울과 그 일행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염려 가운데
있다가 그들의 견고한 믿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세 가지 견해가 모두 타당성이 있지만 본문의 전후 문맥상 데살로니가 지역의 교회들이 사단의 유혹과 유대교의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견고하게 서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안심할 수 있었다는 세번째 견해가 가장 적합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생명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주 안에서 굳게 서 있었기 때문" 이라고 합니다.
'굳게 선즉'의 헬라어 '스테케테'는 견고히 서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스테케테'를 그의 서신에서 여러 차례 사용했습니다(고전 16:13. 갈 5:1. 빌 1:27).
영생이란 훗날 내가 죽은 후에 예수님 앞에서 다시 살아나서 얻게 되는 생명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예수를 구세주로 믿었을 때 얻은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이 세상을 헛된 곳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이 아니라 헛되고 헛된 이 세상에서도 영원한 삶을 살아가듯 날마다 새로운 소망의 삶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없어지는 시간이 아니라 영원을 위하여 기초가 된다는 믿음으로 매 순간 순간을 영원한 생명을 위한 믿음의 현장으로 지켜가는 일에 성공하는 은혜가 풍성한 이 하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1. 조에(zōē)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2. 비오스(biŏs) βί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979
3. 푸쉬케(psüchē) ψ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5590
살리라(2198) 자오 [ zaō ] ζάω 스트롱번호 2198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 '굳게 선즉'의 헬라어 '스테케테'(*)는 견고히 서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리킨다. 바울은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스테케테'를 그의 서신에서 여러 차례 사용하였다(고전 16:13;갈 5:1;빌 1:27).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 '살리라'의 헬라어 '조멘'(ζωμεν)은 현재형으로서 세 가지로 해석될 수있다.
1. 바울의 영적 생명력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소식을 들었을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계속 유지되었던 것이다(Morris).
2.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견고한 믿음에 대한 소식으로 바울이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다(Thomas).
3. '조멘'을 '생명의 호흡'(breath of life)으로 번역하여 바울과 그 일행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염려 가운데 있다가 그들의 견고한 믿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으로 해석한다(Bruce).
세 견해가 다 타당성이 있으나 전후 문맥상 세번째 견해가 가장 적합한 듯하다(we can breathe again, JB).
호티 뉜 조멘 에안 휘메이스 스테케테 엔 퀴리오
헬라어신약Stephanos,8 οτι νυν ζωμεν εαν υμεις στηκητε εν κυριω
개역개정,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새번역,8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게 서 있으면, 이제 우리가 살아 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성경,8 여러분이 주 안에서 굳게 서 있다니 우리가 이제 살 것 같습니다.
가톨릭성경,8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다고 하니 우리는 이제 살았습니다.
영어NIV,8 For now we really live, since you are standing firm in the Lord.
영어NASB,8 for now we really live, if you stand firm in the Lord.
영어MSG,8 Knowing that your faith is alive keeps us alive.
영어NRSV,8 For we now live, if you continue to stand firm in the Lord.
헬라어신약Stephanos,8 οτι νυν ζωμεν εαν υμεις στηκητε εν κυριω
라틴어Vulgate,8 quoniam nunc vivimus si vos statis in Domino
히브리어Modern,8 כי עתה נחיה אם תעמדו אתם באדנינו׃
굳게 선즉 / 스테코(stēkō) στήκω 스트롱번호 4739
뜻풀이부
1. [문자적으로] 서다, 막 11:25, 요 1:26.
2. [상징적으로] 굳게 서다, 확고하다, 롬 14:4, 고전 16:13, 갈 5:1, 빌 4:1, 살전 3:8, 살후 2:1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For this reason, when I could stand it no longer, I
sent Timothy to find out about your faith. I was afraid that in some way
the tempter might have tempted you and our efforts might have been
useless.
삶이 형통하고 평안할 때는 믿음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내가 원하는 삶을 누리며 즐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에 부딪치고 생각하지도 못한 사건이나 환난과 핍박이 닥쳐오면 믿음이 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의 중심 주제는 "주의 재림(파루시아)"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때는 재림의 주님께서 오른 편에는 양의 무리들을 왼편에는 염소의 무리들로 구분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을 알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지역의 하나님의 교회들을 향하여 경고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첫째는 믿음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
믿음이란 한자는 "믿을 신(信)" 자로 표현합니다.
'믿을 신'자를 파자하면 "사람 인(人)"과 "말씀 언(言)"이 결합된 문자입니다.
한자의 의미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가 된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라고 분명하게 증거합니다(롬 10:17).
둘째는 믿음은 신실한 것
믿음이란 헬라 단어는 "피스티스(pistis. πίστις)" 라고 합니다.
'피스티스'라는 단어는 "믿음" "신실성" "엄숙한 약속" "충성" "도" 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피스티스'란 "신실(信實)" 또는 "성실(誠實)"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어떤 가르침은 십일조는 구약의 산물이므로 신약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반드시 행해야 할 것이 아니라고 하며 심지어 십일조를 바치면 지옥에 간다는 동영상도 자주 소개됩니다.
그러나 '피스티스'라는 믿음은(한글 성경에서는 신) 분명하게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생명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면 그 분을 위하여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걸림돌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과 믿음을 갖고 맡은 자리에게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는 믿음의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으로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나 맡은 본분은
信자는 ‘믿다’, ‘신임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信자는 人(사람 인)자와 言(말씀 언)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믿다’라는 뜻은 人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㐰(믿을 신)자가 먼저 쓰였었다.
이후 소전에서는 口자가 言자로 바뀌면서 본래의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표현한 信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있어야 하고 거짓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信자는 ‘믿다’나 ‘신뢰하다’, ‘신임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마가복음 11:21-24
하나님을 믿으라 -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소유하라)
누가복음 7: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요한복음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요한복음 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 2168. 유카리스테오(ĕucharistĕō) εὐχαριστέω 스트롱번호 2168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 "예수께서 떡을 가져"란 말씀은, 그 제공한 다섯 개의 보리떡을 받으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여기서 전연 없는 데서 창조하심이 아니고, 조금이라도 있는 것을 가지시고 많게 하셨다.
"축사"하셨다는 말은 감사하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적은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께 감사하셨다.
감사하는 자리에 더 많은 축복이 임한다.
마가복음 5:41-42
* 하나님의 믿음이란?
1. 말씀대로 믿는 것
2. 감사하는 것
3. 선포하는 것
4. 죽어야만 하는 것(자아의 포기)
이러므로 나도
- 본 구절에서 바울은 1절과 같은 표현을 되풀이함으로써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심정을 한층 강조하고 있다. '나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고'(*)는 일인칭 단수이다. 바울이 지금까지 '우리'를 사용하다가 여기에서 단수를 사용한 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생겨난 일을 알기 위해 디모데를 그곳에 보내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이 그 자신임을 분명히 밝혀 두기 위함이다.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 '시험하는 자'는 2:18의 '사단'과 동일시되는 존재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사역을 좌절시키기 위하여 전도자들을 훼방하거나, 올가미를 놓아 회심자들의 영적(靈的) 붕괴를 야기시키고자 한다(마4: 3; 고전 7:5).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 '헛된 수고'에 대하여 빌 2: 16을 참조할 수 있다. 거기에서 빌립보 교인들의 인내는 복음을 위한 바울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되어,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바울에게 기쁨을 안겨주게 될 것이 언급되어 있다. 본절에서 바울은 사단의 시험으로 그의 수고가 헛되이 될 것을 염려하나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한편 하나님의 종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상은 70인역 사 65:23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Bruce).
인공지능(人工智能, artificial intelligence, AI)
인간의 학습능력, 추론능력, 지각능력을 인공적으로 구현하려는 컴퓨터 과학의 세부분야 중 하나이다.
정보공학 분야에 있어 하나의 인프라 기술이기도 하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이 갖고 있는 지능 즉, 자연 지능(natural intelligence)과는 다른 개념이다
인간의 지능을 모방한 기능을 갖춘 컴퓨터 시스템이며,
인간의 지능을 기계 등에 인공적으로 시연(구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범용 컴퓨터에 적용한다고 가정한다.
이 용어는 또한 그와
같은 지능을 만들 수 있는 방법론이나 실현 가능성 등을 연구하는 과학 기술 분야를 지칭하기도 한다.
초기 인공지능 연구에 대한 대표적인 정의는 다트머스 회의에서 존 매카시가 제안한 것으로 "기계를 인간 행동의 지식에서와 같이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의는 범용인공지능(AGI,
강한 인공지능)에 대한 고려를 하지 못한 것 같다.
인공지능의 또다른 정의는 인공적인 장치들이 가지는 지능이다.
거의 대부분
정의들이 인간처럼 사고하는 시스템, 인간처럼 행동하는 시스템,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시스템 그리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시스템이라는
4개의 분류로 분류된다.
인공지능의 작동 방식이 의사 결정과 문제 해결, 학습에 있어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과 유사할수록 강한 인공지능으로 분류되고, 논리에 의해 만들어지는 합리적인 생각이나 행동에 가까울수록 약한 인공지능으로 분류된다.
약인공지능(weak AI)은 사진에서 물체를 찾거나 소리를 듣고 상황을 파악하는 것과 같이 기존에 인간은 쉽게 해결할 수 있으나 컴퓨터로 처리하기에는 어려웠던 각종 문제를 컴퓨터로 수행하게 만드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한참 막연한 인간 지능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더 현실적으로 실용적인 목표를 가지고 개발되고 있는 인공지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일반적인 지능을 가진 무언가라기보다는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로써 활용된다.
강인공지능(strong AI) 또는 인공 일반 지능(arificial general intelligence, AGI)은 인간처럼 실제로 사고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일반 지능"을 인공적으로 구현하려는 시도이다. 오늘날 이 분야의 연구는 주로 미리 정의된 규칙의 모음을 이용해서 지능을 흉내내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 강한 인공지능 분야의 발전은 여전히 미약하지만, 인간과 같은 지능이라는 목표를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 어느 정도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존 설이나 휴버트 드라이퍼스와 같은 몇몇 철학자들은 몸이 아닌 기계에 인간의 지능이나 의식을 구현하는 작업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바탕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설은, 튜링 테스트의 통과 여부는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기계가 의식을 갖추었다는 판단의 필요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중국어 방에 대한 논증으로 유명하다. 드라이퍼스는 그의 저서 "컴퓨터가 할 수 없는 것들: 인공적인 추론에 대한 비평"에서 의식이라는 것은 룰이나 논리 기반 시스템 또는 물리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시스템에서 찾을 수 없으나, 신경망(neural network)이나 그 유사한 메커니즘을 이용하는 로보틱 시스템은 인공지능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철학자들은 엇갈린 관점을 고수한다. 많은 사람들이 약한 인공지능 정도는 가능하다고 보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이 강한 인공지능을 지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니얼 C. 데넷은 그의 '의식에 대한 설명'에서 만일 마법의 불꽃이나 영혼이 없다면 인간은 기계에 불과하다며, 지능에 대해서만 인간이라는 기계가 다른 실현 가능한 모든 기계와 다르게 특별 취급을 받아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묻고 있다.
어떤 철학자들은 우리가 약한 인공지능을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강한 인공지능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능은 외견상 보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지 진정한 실체가 아니라는 약한 인공지능의 입장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에 반하는 손쉬운 예를 사이먼 블랙번의 철학 입문서 "생각"에서 찾을 수 있다. 블랙번은 당신이 지능적으로 보이지만, 그 지능이 실존하는가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우리는 단지 믿음 또는 신념 위에서 그것을 다룰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강한 인공지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인공지능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증이 결국은 아래와 같은 주장을 조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강한 인공지능을 뒷받침하는 논증(따라서 반대하는 사람은 이 논증을 논박해야 한다.)은 다음과 같다.
로저 펜로즈를 포함한 몇몇 학자들은 지능에 처치-튜링 명제의 적용이 가능하지 않다고 논박한다. 특히 펜로즈는 인간의 마음에는 물리적인 속성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고 이야기하며, 그의 주장은 우리의 우주 안에서 초연산(hypercomputation)이 가능하다는 논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양자역학과 뉴턴 역학에 따르면 이러한 초연산은 가능하지 않지만, 특별한 시공간에서는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소수의 주장이며, 우리의 우주는 그러한 초연산이 가능할 정도로 꼬이지(convoluted) 않았다는 많은 학자들의 합의가 존재한다.
상당수 인공지능 연구의 (본래) 목적은 심리학에 대한 실험적인 접근이었고, 언어 지능(linguistic intelligence)이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것이 주목표였다(튜링 테스트가 대표적인 예이다).
언어 지능을 제외한 인공지능에 대한 시도들은 로보틱스와 집합적 지식을 포함한다. 이들은 환경에 대한 처리, 의사 결정을 일치시키는 것에 중심을 두며 어떻게 지능적 행동이 구성되는 것인가를 찾을 때, 생물학과, 정치과학으로부터 이끌어 낸다. 사회적 계획성과 인지성의 능력은 떨어지지만 인간과 유사한 유인원을 포함한, 복잡한 인식방법을 가진 동물뿐만 아니라 특히 곤충들(로봇들로 모방하기 쉬운)까지 포함한 동물학으로부터 인공지능 과학은 시작된다. 여러 가지 생명체들의 모든 논리구조를 가져온 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수치화, 기계화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공지능 학자는 동물들은 인간들보다 모방하기 쉽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물의 지능을 만족하는 계산 모델은 없다. 매컬러가 쓴 신경 행동에서 내재적 사고의 논리적 계산[8], 튜링의 기계와 지능의 계산[9] 그리고 리클라이더의 인간과 컴퓨터의 공생[10]가 기계 지능의 개념에 관한 독창적인 논문들이다.
존 루커스의 지성, 기계, 괴델[11]과 같은 논리학과 철학기반의 기계지능의 가능성을 부인한 초기 논문들도 있다.[12]
인공지능 연구에 바탕을 둔 실질적인 작업이 결실을 거둠에 따라, 인공지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업적을 깎아내리기 위해 인공지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예전에는 '지능적'인 일이라고 주장하던 컴퓨터 체스나 바둑, 음성인식 등과 같은 작업에 대해 말을 바꾸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이와 같이 연구 목표를 옮기는 작업은 '지능'을 '인간은 할 수 있지만, 기계는 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정의하는 역할을 한다고 지적하였다.
(E.T. Jaynes에 따르면) 존 폰 노이만은 이미 이를 예측하였는데, 1948년에 기계가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강의를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은 기계가 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당신이 그 기계가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야기해준다면, 나는 언제든지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 했다. 폰 노이만은 이미 그 전에 모든 처리절차(procedure)는 (범용)컴퓨터에 의해서 시뮬레이션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함에 따라 쳐치-튜링 이론을 언급했다.
1969년에 매카시와 헤이스는 그들의 논문 "인공지능 관점에서 바라본 철학적인 문제들"에서 프레임 문제를 언급하였다.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 수학, 철학, 공학, 경제 등 다양한 영역의 과학자들에게서 인공적인 두뇌의 가능성이 논의되었다. 1956년에 이르러서, 인공지능이 학문 분야로 들어섰다.
생각하는 기계에 대한 초기 연구는 30년대 후기에서부터 50년대 초기의 유행한 아이디어에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당시 신경학의 최신 연구는 실제 뇌가 뉴런으로 이루어진 전기적인 네트워크라고 보았다. 위너가 인공두뇌학을 전기적 네트워크의 제어와 안정화로 묘사했으며, 섀넌의 정보 과학은 디지털 신호로 묘사했다. 또 튜링의 계산 이론은 어떤 형태의 계산도 디지털로 나타낼 수 있음을 보였다. 이런 여러 밀접한 연관에서, 인공두뇌의 전자적 구축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온 것이다.[13]월터의 거북이 로봇이 이 아이디어를 중요하게 포함한 연구의 예이다. 이 기계는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아날로그 회로를 이용했지만, 디지털의 전자적, 상징적 추리를 보여주기엔 충분했다.[14] 월터 피츠(Walter Pitts)와 워런 매컬러(Warren Sturgis McCulloch)는 인공 신경망에 기인한 네트워크를 분석하고 그들이 어떻게 간단한 논리적 기능을 하는지 보여주었다. 그들은 후에 신경 네트워크[15]라 부르는 기술을 첫번째로 연구한 사람이다. 피츠와 매컬러는 24살의 대학원생인 젊은 마빈 민스키를 만났고, 민스키는 1951년 첫번째 신경 네트워크 기계인 SNARC[16]를 구축했다. 민스키는 향후 50년동안 인공지능의 가장 중요한 지도적, 혁신적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1950년 앨런 튜링은 생각하는 기계의 구현 가능성에 대한 분석이 담긴, 인공지능 역사에서 혁혁한 논문을 발표했다.[17] 그는 "생각"을 정의하기 어려움에 주목해, 그 유명한 튜링테스트를 고안했다. 텔레프린터를 통한 대화에서 기계가 사람인지 기계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대화를 잘 이끌어 간다면, 이것은 기계가 "생각"하고 있다고 말할 충분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었다.[18] 튜링 테스트는 인공 지능에 대한 최초의 심도 깊은 철학적 제안으로 평가받는다.
1951년에, 맨체스터 대학의 페란티 마크 1(Ferranti Mark 1) 기계를 사용하여 크리스토퍼 스트레이(Christopher Strachey)는 체커 프로그램을 작성했고, 디트리히 프린츠(Dietrich Prinz)는 체스 프로그램을 작성했다.[19] 아서 새뮤얼(Arthur Samuel)이 50년대 중반과 60년대 초반에 개발한 체커 프로그램은 결국 존경받는 아마추어에 도전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적 발전을 이룩했다.[20]
디지털 컴퓨터에 접할 수 있어진 5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몇몇 과학자들은 직관적으로 기계가 수를 다루듯 기호를 다루고, 사람처럼 기호의 본질적인 부분'까지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21] 이것은 생각하는 기계를 만드는 새로운 접근 방법이었다. 1956년[22]에, 앨런 뉴얼(Allen Newell)과 허버트 사이먼(Herbert A. Simon)은 "논리 이론"을 구현했다. 그 프로그램은 결국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수학 원리'에 나오는 52개의 정리중 32개를 증명해냈고, 일부 새롭고 더 우아한 증거를 찾아내기도 했다.[23]
세계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자연의 재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지구의 온난화 현상이라고만 생각합니까?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내려서 바다의 수위 즉 해수면이 점점 높아지기 때문에 기후의 심각한 변화 현상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다시 오실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자연의 경고라고 생각해 보셨는지요?
성경은 두 차례의 강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첫번째 강림은 예수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셨던 사건이었습니다.
이미 이 사건은 구약에서 예언하였던 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두번째 강림은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후에 하늘로 오르시며 너희가 본 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강림이란 두 번째 강림을 말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강림의 사건이 일어날 때 징조가 있을 것이라고 예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의 징조를 분명하게 깨우치고 있습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이 그치지 않으며,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분쟁하는 일이 끊이지 않으며,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같은 재난 소문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불법이 성행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랑이 식어 서로 미워하고 반목합니다.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서 믿는 자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빠른 속도로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현상들은 주의 강림이 가까왔다는 징조라고 하겠습니다.
마지막 시대의 징조라고 생각하면 이제는 영적으로 깨어나야 합니다.
믿음에 견고히 서고, 주의 강림을 고대하면서 영광의 상급을 바라보며 한 생명이라도 더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힘쓰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강림하시는 그 날에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모두가 기쁨으로 주님을 영접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 예수의 강림이
지난 2024년 7월 18일 한국 대법원에서 판결하기를 동성 커플의 인정
아시아 지역에서 최초로 동성애 결혼을 인정하는 판결을 결정한 것
동성 연인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과 관련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보험료 부과 처분 취소 소송에서 승소한 소성욱씨와 김용민씨가 재판이 열린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4.7.18. 도준석 전문기자
대법원이 동성 배우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했다.
이로써 국내에서 동성 부부의 사회보장 권리가 법적으로 인정된 첫 사례가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소성욱씨가 국민건강보험공단(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보험료 부과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심의
원고승소 판결을 18일 확정했다.
민법상 인정되지 않는 동성 부부의 법적 권리를 일부나마 인정한 최초의 대법원 판단이다.
대법원은 “국민건강보험법령에서 동성 동반자를 피부양자에서 배제하는 명시적 규정이 없는데도 동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제하는 것은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이라며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사생활의 자유, 법 앞에 평등할 권리를 침해하는 차별 행위이고 그 침해의 정도도 중하다”고 밝혔다.
1심 “현행법상 부부는 남녀 결합” 소씨 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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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 연인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판결 앞두고 열린 반대집회 동성애동성혼반대국민연합 등 단체 회원들이 18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동성 연인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불허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2024.7.18동성애동성혼반대국민연합 등 단체 회원들이 18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동성 연인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불허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2024.7.18
연합뉴스
소씨는 동성 반려자 김용민씨와 2019년 결혼식을 올리고 이듬해 2월 건강보험 직장 가입자인 김씨의 피부양자로 등록했다. 그러나 공단은 소씨가 ‘피부양자 인정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면서 소씨에게 지역가입자 건강보험료를 내라는 처분을 내렸다.
소씨는 “실질적 혼인 관계인데도 동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부인하는 것은 피부양자 제도의 목적에 어긋난다”면서 행정소송을 냈다.
1심은 “현행법 체계상 동성인 두 사람의 관계를 사실혼 관계로 평가하기는 어렵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1심 재판부는 “법이 말하는 사실혼은 남녀 결합을 근본으로 하므로, 동성 결합과 남녀 결합을 본질적으로 같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2심 “‘동성 결합 상대방’, 사실혼과 본질적으로 동일 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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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 연인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과 관련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보험료 부과 처분 취소 소송에서 승소한 소성욱씨와 김용민씨가 재판이 열린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4.7.18. 도준석 전문기자동성 연인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과 관련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보험료 부과 처분 취소 소송에서 승소한 소성욱씨와 김용민씨가 재판이 열린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4.7.18. 도준석 전문기자
2심 역시 두 사람의 ‘혼인’을 ‘사실혼 관계’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성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사실혼과 같은 생활공동체 관계에 있는 사람의 집단”이라며 두 사람을 ‘동성 결합 상대방’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사실혼과 비교 대상이 되는 동성 결합은 ‘동거·부양·협조·정조 의무에 대한 상호 간 의사의 합치 및 사실혼과 동일한 정도로 밀접한 정서적·경제적 생활공동체 관계’를 전제로 한다”며 “사실혼 배우자 집단과 동성 결합 상대방 집단은 이성인지 동성인지만 달리할 뿐 본질적으로 동일한 집단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어 “따라서 행정청인 피고(공단)가 이성 관계인 사실혼 배우자 집단에 대해서만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고, 동성 관계인 동성 결합 상대방 집단에 대해서는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대우”라며 공단의 처분이 잘못됐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법률적 의미의 가족과 부양 의무는 피부양자 제도의 출발점일지언정, 그 한계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도 설명하며 소씨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며 보험료 부과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씨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 “사실혼과 차이없어…성적지향에 따른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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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 연인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과 관련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보험료 부과 처분 취소 소송에서 승소한 소성욱씨와 김용민씨가 재판이 열린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4.7.18. 도준석 전문기자동성 연인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과 관련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보험료 부과 처분 취소 소송에서 승소한 소성욱씨와 김용민씨가 재판이 열린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4.7.18. 도준석 전문기자
대법원도 공단의 처분에 헌법상 평등원칙을 위반한 실체적 하자가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대법관 9인은 다수의견으로 “동성 동반자는 부부공동생활에 준할 정도의 경제적 생활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사람으로, 공단이 피부양자로 인정하는 ‘사실상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과 차이가 없다”며 “동성 동반자도 동반자 관계를 형성한 직장가입자에게 주로 생계를 의존해 스스로 보험료를 납부할 자력이 없는 경우 사실상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피부양자로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동성 동반자를 직장가입자와 동성이라는 이유로 배제하는 것은 성적지향에 따른 차별”이라며 “함께 생활하고 서로 부양하는 두 사람의 관계가 전통적인 가족법제가 아닌 기본적인 사회보장제도인 건강보험의 피부양자제도에서조차도 인정받지 못함을 의미해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사생활의 자유 ▲법 앞에 평등할 권리 등을 침해하는 차별행위이고 그 침해 정도도 중하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동성동반자를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인정하는 문제와 민법 또는 가족법상 ‘배우자’의 범위를 해석하고 확정하는 문제는 충분히 다르게 논의할 수 있다고 봤다. 또 동성동반자를 피부양자로 인정한다고 이들의 숫자가 불합리하게 증가하거나, 건강보험의 재정건정성을 유의미하게 해친다고도 볼 수 없다는 설명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사회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나 판례를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 대법관들 모두가 참여해 선고한다. 대법원장이 재판장이 되고 대법관 3분의 2 이상으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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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 연인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인정 소감 밝히는 동성 커플
대법원이 사실혼 관계인 동성 배우자를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등록할 수 있다는 판결을 18일 내린 데 대해 외신이 '획기적 판결'(landmark ruling)이자 성소수자 권리를 위한 '역사적 승리'라고 평가했습니다.
로이터 통신은 이날 "한국 대법원이 동성 동반자가 국가 건강보험의 배우자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판결했으며, 이는 다른 지역보다 뒤떨어져 있는 한국의 성소수자(LGBTQ) 권리를 위한 승리의 움직임으로 묘사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AFP통신은 이날 판결이 "동성 배우자의 권리에 있어 역사적 승리"라며 "획기적이면서 한국 내 성소수자 공동체에 있어 중요한 순간"이라고 평했습니다.
AFP는 또 "대법원에서 '건강보험은 동성 커플에 대해서도 배우자 혜택을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문이 낭독되자 활동가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며 현장 분위기도 전했습니다.
AFP는 "이번 판결은 항소할 수 없으며, 따라서 동성 사실혼 배우자는 이성 배우자에게만 허용됐던 국민건강보험에 피부양자로 등록할 수 있게 됐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외신들은 그러나 이번 판결이 '동성혼'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짚었습니다.
블룸버그 통신은 이번 판결이 성소수자의 "결혼 평등에 관한 한국 내 최초의 판결이지만, 건강보험 내에서만 그 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좁은 의미의 판결이기도 하다"며 "한국이 동성 결혼을 법적으로 완전히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로이터는 "대만과 태국에서는 동성 결혼이 합법화했지만 한국에서는 성소수자의 동반자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따라서 합법적으로 결혼하고 싶은 동성 커플들은 해외로 이주해야 한다"고 전했습니다.
AFP도 "한국은 동성애를 불법으로 간주하지는 않지만 동성 결혼을 인정하지 않으며, 성소수자들은 (성적 지향을) 숨기려는 경향이 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AFP는 "활동가들은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의 필요성을 오랜 기간 강조해왔으나 차별금지법은 국회에서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수년째 입법화되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블룸버그는 지난해 11월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32개국에서 실시한 동성 결혼에 대한 설문조사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이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의 동성 결혼에 대한 찬성률은 41%로 아시아 12개국 중 찬성 비율이 9위에 머물렀습니다.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사실혼 관계인 동성 배우자를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등록할 수 있다고 판결했습니다.
대법원은 "국민건강보험법령에서 동성 동반자를 피부양자에서 배제하는 명시적 규정이 없는데도 동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제하는 것은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이라며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사생활의 자유, 법 앞에 평등할 권리를 침해하는 차별 행위이고 그 침해의 정도도 중하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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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상 인정되지 않는 것을 인정한 행정소송에서 대법원에서 인정하라고 판결
https://www.youtube.com/watch?v=96fZUfvXm4Ihttps://www.youtube.com/watch?v=96fZUfvXm4I
성경적인 재림 신앙(마태복음 24:1-14)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두 번에 걸친 강림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첫 번째 강림은 2천 년 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탄생하신 것을 가리키며,
두 번째 강림은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첫 번째 강림은 성자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신 것으로 우리와 마찬가지로 여인의 태에 잉태되셔서 탄생하셨지만,
두 번째 강림은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그 모습 그대로 하늘 구름을 타시고 강림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번째의 강림을 일컬어 재림이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 아니라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친히 자기의 재림에 관해서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 보면,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하는 비유들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먼 곳에 갔다가 불시에 돌아와서 종들을 만나는 집 주인에 비유하였는가 하면. 신부를 데리러 오는 신랑으로, 그리고 세 종에게 달란트를 나누어 주고 먼 나라로 갔다가 돌아오는 주인에 비유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비유 뿐 아니라 여러 번 당신의 재림에 관하여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마 25:31)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공회의 재판 석상에서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말하기를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대답하시기를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외에도 사도들의 서신서들을 읽어보면 주님의 강림에 대한 예언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약속이 성취된 것과 같이 재림에 대한 약속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성취될 것을 믿습니다.
이 시간 저는 “성경적인 재림 신앙을 갖자”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성도들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즐겨 사용한 인사말은 “샬롬”과 “마라나타”(Maranatha)였습니다.
전자는 “평화” 또는 “평강”을 기원하는 말이고, 후자는 아람어로서 “주께서 오실 것입니다” 또는 “우리 주님이 오십니다”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마라나타”라는 인사말은 로마 제국의 극심한 박해 아래 고난당하던 그리스도인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강림을 대망하는 이 인사말은 핍박 받는 성도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진심으로 즐겨 사용해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소망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이 불의한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세상이 아름답고 행복한 낙원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이번에 물러난 이집트의 독재자 무바라크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것입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에다가 수백억 달러가 넘는 재산을 갖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권력자들이나 부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억압당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지금도 굶어죽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휴전선 너머에 있는 북한 동포들 가운데도 지금 이 시간에도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고, 죽음을 무릅쓰고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도주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지난주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제 겨우 32살 난 여류 시나리오 작가가 지병과 굶주림으로 죽었는데, 그 사람이 집 주인 아줌마에게 남긴 쪽지에는 "죄송해서 몇 번을 망설였는데...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 번번이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국민소득 2만 불을 달성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평균치가 그렇다는 것이지 현실은 부의 분배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생활고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불의하고 악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를 절망하게 만드는 것은 이 세상의 불의가 일부 욕심 많고 악한 사람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굳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두 사람이 악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정치, 경제를 비롯해서 모든 사회 제도에 불의한 요소가 다분히 있기 때문에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슬람 세계에 가면 아동들이나 여자들의 인권이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서 열 살 난 여자 아이가 쉰이 넘은 남자에게 후처로 팔려 가는 일이 합법화되어 있습니다. 이런 일이 허용되는 세상이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것은 불의를 보고서도 못 본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그런 식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악하고 불의하다고 단정 짓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하다고 진단합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갈수록 점점 더 나빠져 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에 보니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라고 했습니다. 노아 시대에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세상도 죄악이 가득하게 되면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강림하시는 이유 가운데는 이 죄악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최후의 심판주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행 10:42).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심판주가 되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한없는 위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의로 세상을 판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통할지 몰라도 주님의 법정에서는 뇌물이 통하지 않습니다. 이사야서 11장에 보니 “3)…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악인들에게는 심판을 의미하지만, 하나님의 백성 된 성도들에게는 위로와 상급과 승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믿음으로 핍박과 역경을 이겨낸 성도들이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의의 면류관을 받아쓰고 승리의 찬송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날에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이르기를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했습니다. 주 안에서 죽은 성도들이 부활의 몸으로 살아나고, 살아서 주의 강림을 맞이하는 성도들은 홀연히 변화되어 부활의 몸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보니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구름 속으로 들림 받아서 공중에서 강림하시는 주님을 영접하여 항상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언제나 주의 강림을 고대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도들은 주의 강림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주의 강림을 고대해야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주의 강림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올바로 아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오늘날 이단들이 주의 강림을 빙자하여 기독교인들을 미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주의 강림하심과 세상 끝에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4)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마 24:)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23절 이하에 보면, “23)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25)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7)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요즘 이단의 교주들은 하나같이 자기를 재림주라고 주장합니다. 더구나 신천지 이단의 교주 이만희는 예수님의 영이 재림하셔서 자기 안에 와 계시기 때문에 자기를 본 것은 곧 재림주이신 예수님을 본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자기가 재림주라는 말과 같습니다. 직접 대놓고 자기가 재림주라고 말하기가 곤란하니까 그런 식으로 돌려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성령 안에서 영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여 계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재림주는 여럿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영으로 재림하시는 것이 아니라 승천하신 그 모습 그대로 육체로 강림하실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오백 여 성도들이 보는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워 가시는 것을 제자들이 자세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흰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말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고 했습니다. 흰옷 입은 두 사람은 곧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도 이르기를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강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모든 사람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서 주의 강림이 영적 강림이 아니라 육체적인 강림인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단의 교주들은 거의 예외가 없이 자기를 재림주라고 내세웁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만 자칭 재림주가 50여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자들이 다 미혹케 하는 귀신에게 사로잡힌 자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미혹에 빠지기 않기 위해 주의 강림 시기에 관해서 성경적으로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19세기에 미국에서 윌리암 밀러라는 안식교의 지도자가 1843년과 1844년, 두 번에 걸쳐서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말을 믿은 사람들이 수만 명이 한 곳에 모여 주의 재림을 기다렸으나 불발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986년부터 ‘내가 본 천국’이라는 허구로 지어낸 책의 영향을 받아서 휴거 열풍이 맹렬하게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이장림이라는 목사가 1992년 10월 28일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고 선전하자, 수많은 사람이 미혹을 받아 우리 사회에 큰 문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예언 역시 불발로 그쳤습니다. 지금도 시한부종말론은 이단, 사이비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누구라도 주의 강림 일시를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왜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단 사이비들의 거짓말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진실로 주의 강림을 고대하는 성도들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야단법석을 떨지 않고 항상 영적으로 깨어서 믿음을 지키며 주의 일에 힘씁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올지라도 오늘 한 그루 나무를 심는 자세로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강림을 항상 고대하면서 살았지만, 성도들이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했습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이같이 권면했습니다. “1)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3)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4)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우리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선전을 듣고서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마음을 차분하게 가지고 주의 강림 전에 나타날 징조들을 주시하면서 마음의 대비를 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하였음을 알리는 여러 가지 징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적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므로 믿는 자들 가운데서 배도하는 자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의 진리를 버리고 이단에게 끌려가는 자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징조는 계시록에 예언된 바로 그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적그리스도가 곧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9절 이하에 보니 “9)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언급된 “악한 자”도 적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인데, 많은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기만에 넘어가서 그를 그리스도인 줄로 알고 따르다가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후서 2장 8절에 이르기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셔서 적그리스도를 멸하여 영원한 불못에 던져 넣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께서 강림하시는 것은 우리를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와 악인들을 심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강림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강림은 성도들에게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운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마지막 때가 될수록 더욱 믿음에 굳게 서서 강림하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주님의 강림을 고대하는 성도들은 영원한 상급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세상 사람들과 같이 일상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의식주를 위해서 경제 활동을 하고,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 교육시키고,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세금도 내고 국방의 의무도 하는 등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선거에 출마하거나 투표권을 행사하는 등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희망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의 삶이 전부입니다. 그들은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행복하게 사는 것이 최고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희망하고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7)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실생활에서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을 예로 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현실적인 일에만 몰두해서 살아가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자나 깨나 세상일에만 집중하고 몰두하다보니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부활이나 최후의 심판이나 영생은 정신 나간 그리스도인들이나 관심을 갖는 것이지, 슬기로운 자기들이 관심 둘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대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성공할까, 어떻게 하면 더 재미나게 살 것인가, 하는 데만 정신이 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는 관심이 없지만, 이 세상일에는 잠자는 것도 잊고 몰두합니다. 마치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홍수가 나서 멸망하기까지도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인 것을 알지 못했던 것처럼, 오늘날 인류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임박한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돈 버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강림을 고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충실하게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도 동시에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고 주의 일에도 힘써야 합니다. 생전에 주의 일에 힘쓴 성도들은 강림하시는 주님께로부터 영광스러운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니 “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 하였고, 계시록 22장 12절에 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일을 이룰지라도 그것은 이 세상에서만 인정을 받을 뿐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는 못합니다. 노벨상을 탈만한 일을 했더라도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상급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같은 일들은 이 세상에 속한 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한 일은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헛되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41)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고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다니엘서 12장 3절에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하신 대로, 불신 이웃을 전도하여 구원의 길로 인도한 성도들은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강림(降臨) 3952 파루시아(parŏusia) παρου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3952
1. 현존, 임재, 고후 10:10.
2. 오심, 강림, 내림.
a. [인간에 대해서] 고후 7:6, 7, 빌 1:26.
b. [특수한 전문 술어로서 그리스도가 세상 마지막에 임하시는 일을 가리킴] 재림, 마 24:3, 살전 4:15, 약 5:7.
c. [적그리스도의 출현] 살후 2:9.
연관 단어 관련 성경
임함(마 24:3, 벧후 3:12), 강림(고전 15:23, 살전 2:19, 약 5:7), 옴(고전 16:17, 고후 7:6, 7).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 소망이라 함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싹튼 신앙이 성숙하게 자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온 것이며, 기쁨이라 함은 그들의 믿음의 진정성(眞正性)에서 나온 것이고, 자랑이라 함은 그리스도 앞에 그들이 바울의 전도사역의 열매로 나타날 것이라는 확신에서 온 것이다.
'자랑의 면류관'이란 말 속에는 운동 경기에서 우승자가 받았던 월계관의 뜻이 있다(Bruce).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 특히 자신의 사도적 사역을 표현함에 있어서 운동 경기 용어를 자주 사용하였다(고전 9:25;갈 2:2).
그의 강림하실 때
-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날' 대신에 '그리스도의 강림'이란 말을 쓰고 있다.
'강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루시아'는 고위 관리가 어느 지역을 방문할 때 사용되었는데 특히 거의 신적(新的)인 존재로 추앙받는 황제와 같은 지배자가 방문할 때 쓰여졌다.
바울은 '파루시아'를 쓸 때에 이와같이 황제의 방문을 연상하여 그리스도의 날에 나타날 더 크고 화려한 영광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굳게하다
야고보서 5: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στηρίζω)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στηρίζω
스트롱번호 4741
1. 세우다, 굳게 고정시키다, 확립시키다, 힘을 돋우다.
a. [문자으로] 눅 9:51.
b. 확실히 하다, 확립하다, 힘있게 하다, 굳세게 하다, 눅22:32, 롬16:25, 살전3:2, 살후3:3, 벧전5:10, 계3:2.
연관 단어
관련 성경
굳게 결심하다(눅 9:51), 굳게 하다(눅 22: 32, 살전 3:13, 계 3:2), 견고하게 하다(롬 1:11, 16:25), 굳게 서다(벧후 1:12).
예를 들면 이스라엘과 아멜렉이 전투할 때 모세가 산위로 올라가서 두 손을 들었습니다.
하루종일 계속되는 전투의 양상을 볼 때 모세가 두 손을 드는 것이 너무 힘들어 아론과 훌이 힘을 보태기를 양쪽에서 두 손을 함께 들고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붙들었을 때 드디어 이스라엘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출애굽기 17:12).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 '굳게 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릭사테'(*)는 '받침', '지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특히 70인역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울 때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받쳐 주고 지지하던 것을 가리킨다(출 17:12). 따라서 본문은 확실한 신앙에 온전히 서서 핍박 가운데서도 인내할 뿐만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내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함을 시사한다(시 112:8;살후 3:13).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 본문은 의로운 자들이 인내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사상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심되는 사상 중의 하나이다(롬 13:11;고전 15:52;살전 4:15;요일 2:18 등).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는 그리스도인들이 열매 즉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때이며(7절) 동시에 온 세상에 대한 심판의 때이다. 한편 '가까우니라'는 재림과 심판의 시기에 대한 불확실성을 나타냄과 동시에 세상의 존속 기간이 영원과 비교할 때 짧은 시간임을 시사한다(시 90:4;벧후 3:8, Mayor, Manton).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
For you, brothers,
became imitators of God's churches in Judea, which are in Christ Jesus:
You suffered from your own countrymen the same things those churches
suffered from the Jews,
바울의 서신들을 살펴보면 특이한 것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린도전서 1:2-3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린도후서 1:1-2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갈라디아서 1:2-3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에베소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빌립보서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골로새서 1: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데살로니가전서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데살로니가후서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디모데전서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디모데후서 1: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디도서 1:4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빌레몬서 1:1-2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신약 성경 27권 중에서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을 13권으로 구분합니다.
바울 서신 13권을 분류하면
옥중서신 4권 /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목회서신 3권 /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일반서신 6권 /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바울 서신은 특징은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이 누구이며 어떻게 불렀는가를 살펴봅니다.
목회서신은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개인적인 서신이므로 디모데와 디도가 대상입니다.
옥중서신은 에베소서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이 대상입니다.
빌립보서는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드와 감독들과 집사들이 대상입니다.
골로새서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 대상입니다.
바울 서신에서 일반 서신 로마서는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린도전서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린도후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갈라디아서는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데살로니가후서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신약 성경에서 교회는 모두 어느 지역에 있는 성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고린도서에서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3:15 / 개역 개정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 본절에서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청지기 역할의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다.
몇 사본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헬라어 사본에서 '행하여야'라는 동사의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이 동사의 주어는 일반적인 사람이나 디모데가 포함될 수있다.
비록 본 동사('알게 하려')의 주어가 디모데이나 앞의 구절에서 열거되었던 지침들을 살펴보면 문맥상 일반적인 사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Guthrie).
한편 '하나님의 집'(오이코 데우)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우러러보는 그리스도인 전체의 가족'을 나타내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정'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이는 지상에 있는 보편적 교리를 가리킨다.
교리를 집이라고 일컬은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되는 가족들을 소유하고 계시고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Earle, Lenski).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 교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영원히 살아 계셔서 주관하시는 하나임의 소유이다.
바울이 이처럼 교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소유라고 말한 것은 교회를 돌보는 사람들이 지킬 거룩하고 흠없는 생활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Hervey).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 여기서 '기둥'은 '터'에 의해 더욱 강화되는 지주(支柱)의 개념을 갖는다.
그리고 본문 전체를 볼때 '기둥'과 '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되는 '진리'의 확실성과 견고성을 강조한다.
혹자는 본문을 '하나님께서 각지역 교회의 신앙의 증인들을 사용하사 교인들의 삶의 터전 위에 진리를 강화시켜 나가신다는 의미로 해석한다(Lock).
기둥(1477) 헤드라이오마(hĕdraiōma) ἑδραίωμα, ατος, τό
1. 토대, 기초, 땅, 기반, 지지물[큰 돛대를 받치는] 밧줄, 의지할 곳, 딤전 3:1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1476. ἑδραῖος, (αία) αῖον
스트롱번호1476
1. 확고한, 흔 들리지 않는, 튼튼한, 고전 7:37, 15:58, 골 1:23.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터(4769) 스투로스(stulŏs) στῦλος, ου, ὁ
1. 기둥.
a. [문자적으로] 계 10:1.
b. [상징적] 갈 2:9, 계 3:12.
연관 단어 관련 성경
기둥(갈 2:9, 딤전 3:15, 계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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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교회(God's church)
교인들이 처음 만나서 인사 할 때 먼저 물어보는 것 중의 하나는 "어느 교회에 다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듣게 되면 아주 자랑스럽게 나는 영락교회에 다닙니다.
또는 나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에 다닙니다.
아니면 나는 충현교회에 다닙니다.
이러한 대답을 듣게 되면 마치 내가 그 교회가 된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감리교를 창설한 요한 웨슬레목사가 천국에 들어가는 환상 중에 가장 먼저 질문한 것이 "여기에 감리교인이 얼마나 됩니까?" 그러자 천사가 답하기를 "여기에 감리교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순간 깜짝 놀란 웨슬레 목사는 그러면 장로교회 교인은? 침례교회 교인은? 하고 질문할 때마다 그런 교인들은 없다고 하였답니다.
그러면 어떤 교인들이 이곳에 있는가? 라는 질문에 오직 주 예수를 믿는 교인들 뿐이라고 하였답니다.
천국에 들어갈 때는 교단과 교회가 아니라 오직 예수 이름으로 입성할 수 있다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어느 교회에 다니십니까?"
"예, 하나님의 교회에 다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교회는 어떤 교회라고 성경은 말씀합니까?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신도" 라고 하겠습니다.
신도란 신사적인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마치 베뢰아 사람들처럼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교인들을 일컫습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하나님의 교회 성도들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성도들이 모인 교회(고린도전서 1:2)
고린도전서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둘째는 자기 집을 신앙으로 바르게 다스리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디모데전서 3:5)
디모데전서 3: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셋째는 예수 때문에 고난과 핍박을 견디는 교회(데살로니가전서 2:14)
데살로니가전서 2: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
넷째는 진리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디모데전서 3:15)
디모데전서 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찬송하는 소리 있어
고린도전서 10: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고린도전서 11: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고린도전서 15: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고린도후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갈라디아서 1: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디모데전서 3: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디모데전서 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2: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의 교회(톤 엨클레시온 투 데우) των εκκλησιων του θεου
1577. ἐκκλη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1577
3578. ξεν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3578
숙소(몬 1:22), 유숙하는 집(행 28:23).
교회(주제별 예화모음)
좋은 교회
조그만 시골의 이발사인 '존'은 시로부터 큰 상금을 받고 다른 주에다 더 큰 이발소를 차리게 되었다. 존의 식구가 이사하기 전 교회에서는 환송회를 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축복하였다. 그런데 얼마되지 않아 존은 다시 돌아와 그의 이발소를 열었다. 아마도 큰 곤경에 처했던 것 같았다. 존은 다시 가위질을 하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 큰 도시에 글쎄 교회도 주일학교도 없지 뭡니까? 사람들은 돈벌이와 도박, 술 먹는 데 너무 바빠서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더라고요. 주일이 되어서 아이들을 보낼 주일학교가 없으니 어쩝니까? 난 그래서 돌아온 것이랍니다. 좋은 교회에서 온가족이 함께 자기의 은사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는것은 그리 흔한 복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자녀 교육이나 직장에 따라 이사를 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자기와 자기 가족의 신앙을 생각하여 이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 진정한 교회
성경: 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진정한 교회는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참으로 누추하고 보잘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귀중하고 사랑스러우며 높은 평가를 받는다. 제사장 아론은 성전에 나올 때, 장식품을 걸친 화려한 외모로 향기를 풍기며 영광스럽게 나타났으나, 그리스도는 가장 천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점차 대형화되고 있는 현대 교회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건물의 크기와 화려함으로 자신들의 교세를 과시하려는 것입니다. 이미 일부 대형화된 교회들은 자기들 위주의 공동체 모임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도와 주는 것은 좋아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은 꺼려합니다. 교회가 너무 깨끗하고 화려해서 남루한 옷차림의 가난한 사람들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모습을 입으면서까지 낮아지셨던 주님의 사랑을 돌이켜보면서, 화려한 교회 건물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려지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 기도: 교인들만의 교회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교회가 되게 하소서.
▣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가 그의 몸이기에 성경은 교회를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했다(엡 1:23). 이 말의 의미는 교회가 온 세상에 가득해야 하고 이 세상을 온통 교회로 충만케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왜 교회가 이 세상에 가득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이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돌과 나무로 지은 성전을 자기 처소로 삼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돌과 나무로 지은 성전을 무너뜨리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성전을 세우셨다. 바로 그 새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세상 안에 거하시고 그 거하심을 통해 만물을 충만케 하시기로 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새로운 성전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성전인 교회에 거하시고 교회를 채우시기 때문이다.
물론 이 교회는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하고 그를 믿는 성도들의 공동체를 그의 몸으로 하는 생명체를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 교회가 하나님의 새로운 거소요 성전이다. 그러나 교회는 단번에 하나님의 완전한 거소가 될 수 없고 만물을 충만케 할 수가 없다. 교회가 하나님의 완전한 거소가 되기 위해서는 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하지만 양적으로도 온 세상에 가득하고 충만해야 한다. 교회를 통해서만이 이 땅에 하나님의 거룩한 거소가 확대되어 가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분이다. 온 땅에 안 계신 곳이 없이 천지에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만이 자기의 성역화된 처소를 확대시켜 가시고 진정한 통치 영역을 확장시켜 가신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야말로 이 땅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곳이다. 비록 녹슨 종탑과 초라한 간판을 건 아주 작은 개척교회라도 청와대·백악관보다 더 영광스러운 곳이다. 교회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기에.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교회는 더 많이 부흥해야 하고 이 땅에 더 많이 존재해야 한다. 또한 땅끝까지 더 많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야 한다. 누가 감히 이 땅에 교회가 너무 많다고 했던가.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한 거소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기에 지금보다 더 많아야 하고 온 땅에 가득해야 한다. 그리고 지상의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온전한 거소가 되기에 합당한 교회로 갱신되고 새롭게 정화되어야 한다.
▣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에는 각각 이름과 함께 오장육부가 있다. 머리에는 귀, 눈, 코, 입이 있다. 이 같은 지체들은 기능도 다르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교사 등은 주님의 몸에 붙은 지체들이다. 그러나 하는 일은 각각 다르다. 이 모든 지체는 몸을 위해 서로 협력하면서 일한다. 이런 지체들로 하여금 일을 하도록 명하는 것은 머리다. 머리는 생각하고 결정한 것을 각 지체들에게 그 역할을 분담시킨다.
교회는 머리 되신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야 한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 되는 일을 대신 하도록 한 사람을 세웠다. 담임목사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 교회의 적
백합은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꽃이지만 썩으면 극심한 악취를 내는 꽃이다. 이러한 반대적 현상은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돌아선 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독일의 사회주의자 '칼 막스'(K. Marx)가 한 때 신학생이었다는 사실은 기독교 변절자가 오히려 기독교에 미치는 악영향이 어떠한 것인가를 대변해 주는 가장 훌륭한 예이다.
교회에 가장크게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것은 불신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기독교인들이라고 말하면서도 기독교인처럼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라는것이 마음아픈 일이다.
▣ 신나는 교회 생활
어떤 사람은 주일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주일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에서 분주하게 하루 종일 지내면서도 별로 피곤해하지 않고 밝은 얼굴로 보낸다. 어떤 사람은 주말이 되면 또 어느새 일요일이 돌아왔는가 하면서 짜증스러워 하기도 한다. 예배가 시작된 예배당에 걸어들어와서 시큰둥한 표정으로 털썩 자리에 앉아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성경책을 들고 오지도 않고 멍청하게 앉아서 찬송을 부를 때에는 다 죽어가는 것처럼 개미 소리만하게 따라 부르고, 헌금하는 시간에는 주머니에서 부시럭거리면서 구겨진 돈을 꺼내서 언짢다는 듯이 헌금 주머니에 넣는다. 설교가 시작되면 영락없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설교가 끝나면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축도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교회 문을 나서는 것이다. 신나는 교회생활을 하고 싶은가? 우선 "내가 정말 예수님을 바로 믿고 있는가?"부터 다시 검토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러 가는 사람이 축쳐진 어깨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느릿느릿 가겠는가? 시간에 늦을까봐 부리나케 달리고 서둘지 않겠는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정직한 마음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마음으로 나의 믿음을 재확인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 참된 교회와 기쁨
본문: 시편 94 장 19 절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미국의 어느 도시를 여행하던 사람이 주일이 되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통 경찰에게 교회를 좀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경찰은 멀리 보이는 한 교회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가까운 곳에도 교회가 있을 텐데, 왜 저렇게 먼 데 있는 교회를 가르쳐 주십니까?’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경찰은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이 근처에 있는 교회들보다도 저쪽 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훨씬 기쁘고 즐겁게 보였습니다. 나는 불신자이지만 그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이고 참된 교회인 것 같아서 소개한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도 은혜받은 얼굴과 은혜받지 못한 얼굴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평안하고 기쁜 환경에서 나오는 감사보다 고통과 환난 가운데서 나오는 감사가 더욱 값진 감사입니다. 설령 우리의 삶에 많은 힘겨운 문제가 있을지라도 은혜받은 백성에게는 영혼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며 우리 영혼을 즐겁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영혼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을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야겠습니다.
* 기도: 환난으로 인하여 생각이 복잡해질 때 영혼 가운데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 중매쟁이
나는 얼마 전 아주 친한 친구로부터 자기 아들을 중신시켜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친구 아들은 서울의 우수대학원을 졸업한 전자학 석사이고 우리나라 최고의 회사인 S전자 사원이길래 그에 걸 맞는 여성을 소개해 주기 위해 수소문해서 현재 서울에 있는 명문 의과 대학 본과 2학년 여학생을 만나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만난 후의 결과는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좋지 않은 말이 들려왔다. 이 일로 나는 중신하는 것의 어려움을 더욱 실감했다. 목사는 신랑 되신 하나님과 신부 될 사람과의 중매쟁이이다. 요사이 신랑감과 신부감이 맞선을 보는 곳은 보통 호텔 커피숍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만약 신부감 여성이 신랑의 인품을 보려고는 하지 않고 맞선 장소인 호텔 커피숍의 조명이 어떻고, 의자가 어떻고, 커피 값이 너무 비싸다고 하면서 신랑을 거부한다면 과연 그 여자를 현명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최근 전도를 하다보면 신랑 되신 주님의 성품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주님을 만나는 장소인 교회가 어떻고 신자가 어떻고 하면서 신랑되신 우리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을 너무 많이 본다. 이 지구상에는 온전한 교회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불완전하고, 죄인이기 때문에 완전한 교회를 이루기는 참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랑 되신 예수님을 보고 혼인잔치에 참여할려고 준비하는 신부가 되어야지 신랑과 만나는 장소에 너무 집착하여서는 안 된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
▣ 등불켜고 준비하는 밤
옛날 어떤 의사가 한밤중에 13㎞나 떨어진 먼 시골로 중환자를 왕진하러 가야만 했다.폭설이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그 집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의사는 가는 길목의 가장 가까운 첫번째 집에다 전화를 걸어 창문에 등불을 켜 둘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이웃집에다 전화를 해서 역시 창문에 등불을 켜 두도록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환자의 집에 이르는 동안 모든 길목의 집들이 창문에 등불을 켜게 되었고 의사는 쏟아지는 폭설과 어둠을 뚫고 길을 찾을 수가 있었다.바로 이러한 것이 우리 교회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서로 도와주는 길목의 등불이어야 합니다
▣ 교회는 구원의 우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그 육신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했습니다.
그 신령한 몸이 40일 동안 제자들과 같이 있다가 마지막에는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이 신령한 몸이 하늘로 승천한 후에는 이 땅위에 보이는 몸을 대신 세웠습니다.
그 몸이 곧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문자 그대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수를 주는 구원의 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일세기에도 많은 목마른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생명수를 마시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2세기에도 그러했고, 3세기에도 그러했고, 오늘날 20세기에 와서도 또한
그러합니다.
어거스틴은
성경만 읽은 것이 아닙니다.
주일마다 진실되게 근실하게 밀리노 교회에 나가서 여러 성도들과 같이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때 로마
제국 일원에서 제일 유명하다고 하는 성 암부로스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더욱 깊은 자리에 들어갔고 풍성한 생명수를 마신 것입니다.
이
교회야말로 이 광야같이 메마른, 아니 사하라 사막같이 쓸쓸한 세상에서 영적 오아시스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대로 구원의 우물이
되는 것입니다.
▣ 맑고 아름다운 목회자와 교회
사람들이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헌금이 많이 나오고, 커다란 건물을 가지고 있으면 큰 교회라 합니다.
모이는
사람도 몇 명 안되고, 아직도 보조를 받아야 교회가 유지되고, 예배 장소도 상가에 세 들어 있다면 작은 교회, 또는 개척교회라
합니다.
이러한 평가 기준은 거의 보편적이 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은 요한계시록 2-3장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사람들 숫자나, 헌금 액수나, 건물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부자 교회에 이렇게
경고합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계 3:17)
어떤
목회자가 교회를 개척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애를 썼는데도 굉장히 어렵습니다.
목회를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합니다.
희망과 기도와 낙담과 용기와 믿음과 뭔지 모르는 것들이 뒤죽박죽 됩니다.
하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 그 목회자가 아집과,
교만과, 욕심과, 야망을 내려놓고 낮아지고 낮아져서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면 그는 어느새 성도들의 숫자는 하나님
앞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숫자와 상관없이 영혼이 맑고 아름답고 투명한 목회자와
교회가 된다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런 교회가 큰 교회입니다.
▣ 한국교회 쇠퇴원인
한국교회에서
기독교인 숫자가 여러 해 전보다 많이 줄었다는 사실을 걱정한다.
그러나 기독교인 숫자가 줄어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이 먹고 살만하면서 배가 부르고, 땅도 가지고 있고, 자식들에게도 양질의 교육을 시킬 수 있고, 내 자신의
만족을 채울 수 있으니 다른 사람들을 무관심하게 대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에 기독교인들이 앞장서고 있으니 기독교인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공동체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또 나는 이제 먹고 살만하니 괜찮다고 하는 자기만족에 빠져서도
안 된다.
무관심과 자기만족은 교회라는 공동체가 악에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깨어나라, 그리고 주위를
한번 살펴보라.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 공동 묘지화된 교회당
구라파
도처에 궁전 같은 교회들이 있고 교회 경내에는 대개는 공동 묘지가 있다.
구라파인들은 98%가 크리스천이라고 등록이 되어 있으나
결혼식과 장례식, 평생 두 번 교회에 가는 교인이 대부분이고 그나마도 주로 노인들이 교회에 참석하는데 평균 3%가 출석
교인이어서 공동 묘지화된 교회를 보는 느낌이다.
미국 교회를 빌려서 예배드리던 한국 교인들이 점점 주객이 전도되어 미국 교인수가
줄어들자 많은 교회들을 한국 교회가 접수하는 중이다. 미국 교회도 최후의 몸부림을 다하지만 미국의 영성의 시간은 오후 6시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기독교의 기류가 태평양 시대 기류를 타고 한국에 그 중심이 머물고 있다.
이 부흥을 잘 감당하면 영광스런 통일
복음 민족이 될 수 있으나(겔 39장, 신 28장) 잘못 감당하면 지금 짓는 거대한 교회들이 공동화하고 공동 묘지 같이 텅 비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
▣ 정의로운 교회
교회는
연약한 사람들이 종교를 의지하러 가는 곳이라고 비하하며 무시했던 아인슈타인이 활동할 당시에 독일에서 나치스가 일어났습니다.
그 때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대학의 지성인들을 기대했다.
그러나 대학 교수들은 즉시 나치즘에 무릎을 꿇고 아첨했다.
그들은 나치즘이 주장하는 잘못된 인종이론을 마치 옳은 것인 양 떠들어댔다.
또 나는 신문과 언론인들을 기대했다.
그러나 신문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필봉을 놓았다.
그런데 오직 교회만이 독재자에 항거하여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줄지어 감옥으로 향했다.
나는 교회에
한없는 찬사를 보낸다.”
교회가
불의하면 이 사회는 아예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어야 할 교회조차 불의하다면 이미 다른 집단은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항상 정의롭고 공의롭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사회를 향해 광야의 소리를 발할 수 있습니다.
▣ 복된 교회
기도하는 지도자들이 있는 교회는 복되다.
이는 그들이 교회 안의 무질서를 볼 수 있으며, 그것을 슬퍼하며, 하나님의 일의 진전에 큰 해를 끼치는 악행을 시정하려고 손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교회의 기초와 같아 기도가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립니다. 교회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간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교회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교회를 위해 무릎 꿇는 한 사람 그 한 사람이 우리 각 사람의 이름이 되길 기도합니다.
▣ 교회 참석의 동기
에머슨 파스틱이라는 설교가는 미국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는 데는 4가지 동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생활 습성이나 관습 때문에 교회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어떤 목사님의 설교 때문에 그 설교를 듣기 위하여 교회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교회란 좋은 곳이라 교회에 나가서 활동하면 사회에서도 인정을 받기 때문에 교회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일시적인 위안을 얻기 위하여 교회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동기들은 교회에 나가는 주체적인 동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은혜를 받는 곳입니다. 당신은 왜, 그 무엇 때문에 교회에 참석하고 있는 것입니까?
▣ 교회의 세 가지 형태
콜린 윌리엄스는 교회의 모습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 아브라함적 동기가 교회가 있다. 이런 교회는 미지의 세계를 믿음으로 순복한다.
둘째, 모세적 동기의 교회가 있다. 이런 교회는 조직제도를 상징하며 신앙심으로 조금 위험하다.
셋째, 바울적 동기의 교회가 있다. 영적 회심을 바탕으로 한 교제가 넘치는 교회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는 모든 사람의 공동체다. 위에 열거한 교회 형태 중 세 번째 형태를 근거로 해서 교회를 활성화해야 한다.
▣ 성막과 교회
유대인들에게는 단지 한 곳의 예배 장소만 있으나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많은 예배 장소가 있다. 대부분 예배 장소들은 존경과 관심의 주된 중심지며,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변화 속에서도 변함 없이 서 있다. 선조들은 그 교회의 상수리나무 밑에서 안식하고자 떠나버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교회들의 뾰족탑들은 갑작스레 죽은 마을 사람들이 본 마지막 장면들이었다. 수천 가지의 기억들은 우리에게 있어 교회가 귀중한 곳이 되게 한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들임을 배워 온 곳은 바로 교회였다. 우리의 모든 이해력을 초월하는 커다란 하나님의 평강이 헤르몬 산의 이슬처럼 내려온 곳도 교회였다. 우리가 시내 산의 천둥보다 더 큰 힘을 지닌 '조용한 작은 음성'을 들어온 곳도 바로 교회였다.
* 참고: 왕상 8:27-53, 대하 6:10-42, 합 2:20, 엡 2:20,21, 계 11:19
▣ 마르틴 루터의 교회론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다. 교회는 피 흘림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 까닭은 교회의 원수인 사탄이 기만자이고, 살인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는 언제나 나의 피를 흘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이 세상에 완전히 순결하고, 정화된 교회를 바라는 사람들과는 고별하라. 이들에게서 확실한 것은 그들이 교회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의 형태와 외모는 낙원과 같으나, 참 교회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누추하고, 모양 없고, 거리낌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귀중하고, 애호 받고, 높이 평가를 받는다. 제사장 아론은 성전에 나타날 때에, 장식품과 부유한 자태를 가지고, 향기를 풍기며, 영광스럽게 나타났으나, 그리스도는 가장 천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교회는 병원이다
이상적인
교회에서 교회 생활을 하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적인 교회를 찾자면 먼저 이상적인 교회가 어떤 것인지
머리 속에 그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에베소 교회가 우리가 찾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상적인 교회가 될 수 있는 조건 -좋은 위치, 문화적·경제적 중심지, 훌륭한 창립자와 훈련받은 지도자- 을 다 갖춘 곳
같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본문을 보면 에베소 교회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에베소서는 에베소 교인
중에 거짓말쟁이들과 혈기 부리는 사람, 도둑질하는 사람, 쌍소리나 음담을 지껄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회는 성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생각하시는 이상적인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왜 사람들이 교회를 보고 실망합니까? 교회에서 천국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상적인 교회는 천국이 아니라 병원입니다. 거만하고, 이기적이고, 혈기 부리고, 술 담배, 노름에 중독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변화 받는 치료의 장소가 바로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대한 개념부터 바꿔야
합니다. 교회는 천국이 아니라 병원입니다. 교회는 병원이기 때문에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치료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나 자신이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치료의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 병원에서는 아픈 사람이 제 구실을 못한다고 나무라지 않습니다. 교회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인격이 모자란다고 나무라면
안 됩니다. 치료받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교회의 분위기가 가족적이어야 합니다. 가정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와 허물이 용납되는
곳입니다. 이러한 가족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하나님께서는 치료의 역사를 나타내 주십니다. 또한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분위기가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하지 말아라" 하는 말을 하고 난 다음에는 즉시 "하라"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무슨 결심을 하든지 간에 긍정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하시기 바랍니다. 겸손해지고 싶으신 분들은, 자신을 낮추려 마시고 남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에게도 잔소리하지
말기를 결심하지 말고 칭찬을 많이 하겠다고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치료는 부정적인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데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치료하고, 치료받는 병원 분위기로 바뀌겠습니까? 치료의 역사는 언제든지 조그만 그룹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려면 교회는 작아야 합니다. 앞으로 가족을 생각할 때는 부인 혹은 남편, 자녀들을 비롯해서
가정교회에 속한 8명 내지 15명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들 앞에서는 나의 치부를 내어 보일 수 있어야 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는 도움을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성장의 윈칙
신앙생활은
몰상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앙은 건전한 상식과 함께 세워진다.
건전한 상식은 초(超)상식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
은총의 손길이 개입하는 여지를 마련해 두고 있다. 한때 한국교회를 풍미한 신앙의 유행이 있었다. 막무가내식으로 믿어야 잘 믿는다는
평가를 받는 때가 있었다. 경제개발의 논리를 신앙의 논리와 혼동한 것이다. 치열한 자기반성과 심사숙고의 과정을 생략한 채 열매와
성과에 치중해 성공과 실패를 규정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영적
세계에는 속도전이 위험하다. 즉각적 순종은 아름답지만 자신의 내밀한 이기적 동기를 만족시키기 위해 과정을 무시하는 태도가 몸에
배면 오염이 시작된다. 요즘 교회마다 ‘상식이 통하는 교회’라는 구호가 유행한다. 오죽하면 상식을 지키는 것이 미덕으로 수용되는
분위기가 되었을까. 신앙은 상식과 손잡고 있다. 세상은 상식선에 미치지 못하는 교회를 결코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목회자의
세계에서 상식이 꽃피워 열매 맺기를 소원해본다.
교회 성장의 비결
얼마
전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부근에서 가장 큰 교회인 덴튼바이블교회에 갔다.
토미 넬슨 담임목사를 만났다.
한때 딸이 찬양대원으로
섬겼던 교회다.
어린이를 포함해 주일 1만명이 모이는 대형교회의 비결을 알고 싶었다.
딸의 통역 도움으로 한 시간 동안 목회철학과
적용에 대하여 들었다.
교회
목표는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실천’이었다.
지역에서 소외된 가난한 자와 장애인, 곤고한 자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을 위해
에베소서 4장 12절에 나오는 헌신자들을 양육하는 일에 비중을 둔 교회였다.
자질 있는 사람을 택해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를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꾼 양성을 위해 새벽 5시30분부터 한 시간씩 훈련한다고 했다.
교회 안팎에서 힘든 일,
어려운 일을 하는 일꾼 양성을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킨다고 하였다.
새벽기도와 훈련이 한국교회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용장 밑에 약졸 없다.
협동하는 교회
사람은 때때로 외롭거나 쓸쓸할 때가 있습니다.
친구도 형제도 귀찮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때는 화목이니, 우애니, 친절이니 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인 것같이 여겨집니다.
"0"이라는 수의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0"은 그 자신이 외롭고 초라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같이 있어 줄 친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0"은 1, 2, 3... 모든 숫자를 만나 보았지만 그들은 모두 작고 가진 것이 없는 "0"의 친구가 되기를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0"은 좌절감에 빠지고 맙니다.
"1"도
"0"와 마찬가지로 친구를 찾아 헤맸지만 거만한 숫자들에게 거절당하고 만 것입니다.
여기서 "1"과 "0"은 친구가 되어
"10"을 이루게 되자 이제까지 무시하고 멸시했던 숫자들이 모여들어 친구가 되기를 간청했습니다.
이와 같이 아무리 작고 미약한
존재일지라도 뭉치고 합하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1"이나 "0"은 분명히 "8"이나 "9" 보다
작고 초라한 숫자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10"이라는 수는 확실히 "8"이나 "9"보다 크고 우월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힘없고 작은 사람들이 협동하여 큰 일을 이루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11명의 힘없고 낮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늘의 기독교를 이루었듯이 말입니다.
너희가...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는 자되었으니 - 1:6에서 데살로니가인들은 사도들을 본받은 자들로서 칭찬을 받았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식이었다. 그리고 본절에서 데살로니가인들이 유대에 있는 교회를 본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의 진정성을 보다 확고히 해준다. 그것은 유대 교회에서일어난 것처럼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됨으로써 자연히 수반되는 박해를 견뎌내고 믿음을 지킨 일이었다. 특히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동족에게 핍박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개종함으로 인해 이전의 관습과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자 했기때문이다. 이처럼 이방문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일로서 온갖 수난과 고통이 뒤따르게 마련이다(딤후 3:1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크리스토 예수'(*)는 개별적인 교회들이 하나로 묶여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생명이 하나가 되었고 또한 그리스도의생명을 계속 공급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인해 핍박받는 자들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주시고 보호하시고 견고케 하신다(롬 8:26;히2:18).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And we also thank God continually because, when you
received the word of God, which you heard from us, you accepted it not
as the word of men, but as it actually is, the word of God, which is at
work in you who believe.
소통(疏通) / 소통할 소(疏), 통할 통(通) / communication, communicate
1. 막히지 아니하고 서로 통(通)함.
2. 뜻이 서로 통(通)함.
3. 속이 트임. 도리(道理)와 조리(條理)에 밝음.
영적인 존재는 초자연적인, 무형의 존재입니다.
성경은 영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주장으로 시작합니다(창 1:1).
성경에 언급된 다른 영적 존재로는 천사, 마귀, 사탄이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세계관은 창조에서 계시록까지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곳에서 성경 전체에서 발견됩니다.
하늘 저편에 있는 영적인 존재들에
대한 모든 것을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신자들은 영이신 하나님께 경배하고(요 4:24),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의
나라를 고대합니다(요 18: 36).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십니다.
하나님은 물리적 형태가 없으시며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그분을 대표하도록 만들 수 없습니다(출애굽기 20:4, 신명기 4:12, 행 17:29).
하나님과 같은 지위,
위대함, 능력이 아닌 다른 영적 존재들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주님, 하늘이 주님의 놀라운 일을 찬양하며 주님의 성실하심을
거룩한 자들의 모임에서 찬양합니다.
하늘에서 누가 주님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 있는 존재 중에 주님과 같은 자가
누구입니까?
거룩한 자들의 모임에서 하나님은 크게 두려워하십니다.
그는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보다 더 훌륭합니다.
만군의 주
하나님이시여, 누가 당신과 같습니까?
여호와여 주는 전능하시며 주의 성실이 주를 두르시나이다(시 89:5-8)
성경의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거룩한 자들과 하늘에 있는 존재들과 다른 모든 영적 존재들보다 크신 만군의 주 하나님의 모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천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시 148:2).
하나님이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모든 천사들이 기뻐 외쳤습니다(욥 38:4-7). 이 영적인 존재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기 전에
존재했습니다.
영적인 존재라면 그 존재는 인간도 동물도 아니다.
인간과 동물 모두 육체를 가지고 존재한다.
영적 존재가 무엇을 하는지 알려주지 않으며 그 상태를 전달하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어, 천사는 영적인 존재입니다(시편 104:4).
아직 천사들
는 다양한 유형의 영적 존재를 포괄하는 용어입니다.
천사는 계층 구조 내에 존재하며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천사는
하나님께 충성하고 다른 천사, 즉 타락한 천사는 마귀에게 충성합니다(마 25:41). 사자 천사들(창세기 32:3, 7; 신명기
2:26), 대천사들(살전 4:16; 유다서 1:9), 그룹들(창세기 3:24), 스랍들(이사야 6:2), 감시자(다니엘 4장)
13, 17, 23), 여호와의 사자(창 35:7), 그리고 신성한 회의(렘 23:18)는 모두 하나님의 천군의 일부인 것
같습니다.
충성스러운 천군들과 더불어 흑암 세력을 이루는 다른 영들이 있습니다(엡 6:12). 이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두움의 권세들과 악한 영들도 하늘에 거합니다. 악한 영적 존재에는 마귀(막 1:34)나 더러운 영, 거짓 신과 여신(출 15:11, 신 11:16, 32:17), 배반한 하나님의 아들(창 6:2, 4)이 포함됩니다. 이들은 모두 영적인 존재이지만 그들의 충성은 만군의 여호와를 향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이 영적인 세력들에 대한 것입니다(엡 6:12).
마귀는 또한 하나님보다 높기를 갈망하는 영적 존재이기도 합니다(이사야 14:12-15).
그의 교만은 그를 넘어지게 했고 그는
계속해서 악을 행했습니다.
마귀가 이 세상의 임금으로 언급되지만(요 12:31; 고후 4:4), 그의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와
같지 않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만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그를 따르는 모든 악마의 죽음과 함께
확실합니다(마태복음 25:41; 요한계시록 20:3).
우리는 영적인 영역을 볼 수 없고, 성육신 외에는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항상 하나님이시며(요 1:1) 사람의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14절).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만물이 그
안에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권세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느니라(골 1:15-16) 육신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완전한 삶을 사셨고, 십자가에서의 그의 완전한
희생은 단번에 구속을 제공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화목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영계의 권세와 권세도
무력하게 하셨습니다(골 2:15).
모든 영적인 존재 중에 우리 하나님과 같은 분은 없습니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다른 어떤 영적 존재도 우리가 숭배할 가치가 없습니다.
삶의 마지막에 우리는 영적인 영역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죽으면 천사들에 의해 주님이 계신 곳으로
옮겨집니다(참조 누가복음 16:22).
불신자들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지옥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믿음이 눈에
보이고 영적인 영역이 눈에 보일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반사체
1.1 하나님을 절대 의존해야 하는 피조물(창1:27)
인간에 대한 학술적 명칭은 다양하다.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인간), 호모 에렉투스(직립보행 인간), 호모 하빌리스(손을 쓰는
인간), 호모 폴리티쿠스(정치적 인간), 호모 파베르(도구적 인간), 호모 루덴스(유희적 인간), 호모 로퀜스(언어적 인간),
호모 그라마티쿠스(문법적 인간)...
이중 인간에 대해서 어떤 정의를 택할까? 이런 것들은 인간의 여러 특징을 부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종합해서 설명하는 것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성경의 정의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여기서 하나님 형상이란 의미는 하나님의 복사판, 반사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할 때 그 본래 고유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달은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이다. 달은 태양을 의존할 때만 제 모습을 찾을 수 있고 발견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나님의 반사체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되서는 절대로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을 절대의존 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연결되어야만 제 모습이 드러나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정확한 정의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사판, 반사체라는 하나님 형상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이다.
1.2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창1:26,28)
하나님을 절대 의존해야 하는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세계를 다스리기 위해 만드신 것이다. 그 다스림을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에게 지혜를 주셨다.(창2:19)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것일까?
팔기 위하여 작품을 만드는 자는 진정한 예술가가 아니다. 예술가는 그 작품 자체를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온 피조세계를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만드셨다. 대화하실 인격적 상대가 없어 외로우신 것도 아니었고, 영광송을 불러줄 찬양대가 없어 쓸쓸하신 것도 아니었다. 예술 화가가 자기를 위하여 자기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고 작품을 그리듯,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을 현시하는 인간과 모든 피조세계를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셨다.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광대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지구를 만드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피조세계를 만드셨다. 하나님은 첫째 날에 천지를 만드시고(창1:1), 그 안에 빛을 만드시고 낮과 밤을 나누셨다. 둘째 날에는 그 천지 안에 궁창을 만드시고(창1:6), 지구의 하늘 위에 있는 물과 지구 안의 물을 나누시며, 지구 안의 물을 한 곳으로 모으심으로 육지와 바다를 조성하셨다.(창1:10) 셋째 날에는 물과 구분된 땅위에 각종 풀과 채소와 나무와 식물을 만드셨다.(창1:11) 넷째 날, 하나님은 다시 하늘에 태양과 달과 별을 만드심으로 지구의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창1:16) 바다는 각종 생물과 물고기, 하늘은 온갖 종류의 새로 번성하게 하셨다.(창1:21) 다섯째 날, 하나님은 땅 위에 온갖 짐승들을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그들이 조화 있게 뛰놀도록 하셨다.(창1:25) 여섯째 날, 하나님은 맨 마지막으로 이 모든 피조세계를 조화있게 만들 가장 핵심적인 존재,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1:26)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대리통치자의 영광과 권위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반사체가 되게 하셨다.(창1:27)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대리통치자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창1:28) 하나님은 인간이 대리통치자로 있는 이 모든 피조세계를 보시고 심히 기뻐하셨다.
범죄 이후 인간의 정복함과 다스림은 칼로 지배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피와 눈물의 고통이 있다. 그러나 범죄 이전 인간에게 주신 피조세계 통치권은 모든 만물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싸고 하나님의 지혜로 만물이 질서있게 제 역할을 하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이로 인해 모든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인 사람을 중심으로 하나되어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의 영광을 나타내게 된다. 이는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악보에 그려진 작곡자의 의도대로 각 악기 연주자들이 정확히 자기 소리를 내고 조화를 이루도록 지휘봉으로 사인을 주듯, 그리고 그 아름다운 하모니의 모든 영광을 작곡자에게 돌리듯, 인간에게 주신 대리통치자의 역할은 바로 이것이었다. 인간이 자기 소유물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유를 위임받아 통치하는 것이기에 대리 통치자이다.
1.3 육체를 가진 거룩한 영적존재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적 피조물이다. 흙으로만 만들어진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를 소유한 영적인 존재이다.(창2:7)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의 역할을 위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적존재로 창조되었다. 물론 여기서 교제란 이 세상 친구처럼 동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사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과 창조자와의 절대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제요 교통임을 말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며 자신의 모습을 가진 인격으로 대우하시고, 피조물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인격적 교제를 의미한다.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을 볼 수 없고 교제할 수 없다. 하나님도 다른 어떤 피조물과 교제하지 않으신다. 오직 인간뿐이다. 그래서 인간만 육체를 가진 거룩한 영적존재이다.
여기서 인간이 육체를 가진 거룩한 영적 존재라는 의미는 인간 육체의 중요성을 내포한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신비하게 결합되어 있는 존재이다. 물질적인 육체와 비물질적인 영혼이 어떻게 쉽게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결합이 되어있는지는 신비이다. 인간은 천사와 다르게 육체를 가진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는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도 포함한다. 하나님은 피조세계에 두 영적존재를 창조하셨는데 곧 천사와 인간이다. 천사와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지정의를 가진 독립적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대리통치자가 되기 위해 육체를 가진 하나님 형상이란 점에서 그 지위와 위엄이 천사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천사는 육체가 없고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다. 또는 천사는 육체가 없기에 하나님 형상이 아니다. 당연히 피조세계의 통치자가 되지 못한다. 천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을 수종드는 영적 존재이다.(히1:14)
하나님이 처음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서로 거스리지 않았다. 인간의 육체는 오늘의 모습처럼 죄의 오염된 상태가 아니었기에 하나님을 본성적으로 거부하지도 않았고, 죄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범죄 이전의 사람은 비록 오늘과 같이 생물학적인 육체를 가졌지만 그것은 조금도 불의하거나 부패하지 않은 거룩한 몸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산 영 곧 육체를 가진 거룩한 영적존재라고 불리웠다.(창2:7) 비록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불편함이 있지만 천사와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거룩한 영과 같은 존재였다. 오히려 천사가 인간의 육체를 부러워하고, 육체는 거룩한 영으로서의 생활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육체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직접 만지고 다스리며 통치하는 근거였다. 육체가 없는 천사는 물리적 피조세계를 다스릴 수 없다.
육체는 영혼과 함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영혼 없는 육체가 하나님 형상이 아니듯이, 육체 없는 영혼도 완전한 하나님 형상이 아니다. 비록 지금 죽음 이후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분리되어 각기 땅과 하늘에 구분되어 있지만 재림 때가 되면 모든 육체는 부활하여 다시 자신의 영혼과 하나 된다. 마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인간은 하나님이 첫 창조하신 그 본래 상태로 돌아가 육체를 가진 거룩한 영적존재로서 다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부활이다.
기독교는 영혼만 중요시 하고 인간의 육체 또는 육신을 가진 이 땅의 삶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는 인간구성의 절대적 요소이다. 잠시 땅속에 묻혀 영혼과 분리되지만 반드시 다시 부활의 모습으로 만나 범죄 이전의 상태 곧 거룩한 육체의 모습으로 회복될 것이다. 이 땅에서 거룩한 삶은 우리 육체가 버려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시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간이 천사가 부러워하는 육체를 가진 영적 존재에서, 오늘날 같이 부패한 본성을 가진 타락한 육체로 전락하게 된 것은 아담의 범죄 때문이었다. 아담의 범죄는 인간을 육체를 가진 거룩한 영적존재에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부패한 자기 본성을 따라 사는 육체로 전락시켰다. 이때부터 인간은 산 영이 아니라 육체라고 불리워진다.(창6:3) 영과 육체가 정 반대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바로 범죄 이후 부터였다.
1.4 피조세계에서 그 위엄과 존귀함이 하나님의 영광과 같음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다.(고후4:4)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리스도가 앞서 설명한 하나님을 절대 의존하는 존재, 지정의를 가진 독립적 자유 인격이란 말인가? 이는 그리스도를 첫 아담과 대조되는 마지막 아담으로 설명하는 바울의 관점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메섹 체험은 유대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의 신학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나무에 달려 저주받아 죽은 예수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셨던 것이다. 바울은 영광의 광체에 둘러싸여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를 뵈옵고 예수가 바로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 형상을 회복한 분으로 보았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첫 아담이 잃어버린 인간의 모든 피조물보다 존귀함과 영광스러움을 다시 회복한 분이다. 그리고 성도는 심판과 재림 때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회복될 것이다. 복음을 새 언약으로 설명하는 고린도후서 3-6장과 유대주의자들과 대비해서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빌립보서 3장에 이 점이 잘 나타나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라”(고후3:18)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4)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4:6)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게 변케하시리라.”(빌3:21)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인류는 다시 첫 아담이 범죄 이전에 가졌던 영광스러운 위엄과 존귀의 모습을 회복할 것이다. 이는 재림과 심판 이후 성도들의 완전한 부활 모습이기도 하고 또 지금 종말론적 유보 상태에 있는 성도가 불완전하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 첫 아담이 잃어버린 하나님 영광을 회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했다.(갈4:19)
인간은 범죄 이후 육체를 가진 거룩한 영적존재인 산 영에서(창2:7), 거룩성을 상실한 범죄한 육체적 존재로 전락되었다.(창6:3) 그러나 부활 이후에 죄와 사망, 그리고 사단이 이 세상에서 모두 제거됨으로 우리 육체도 다시 거룩함을 입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모습처럼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모습은 성도가 얻을 범죄 이전 하나님 대리통치자로서의 영광의 위엄을 미리 보여준다. 성도는 이것을 부활 때 완전히 얻을 것이고 지금은 부분적으로 맛보게 된다.
2. 지정의를 가진 자유 인격
2.1 자기 판단과 자기 행동을 책임지는 독립적 주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반사체라는 점과 함께 또 인간은 지정의를 가진 자유 인격체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지성, 감정, 의지는 인간을 설명하는 중요한 내용이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지성, 감정, 의지를 가지고 있다. 동물들에게 지정의라는 단어가 부적절하나 인간과 비교하기 위해 사용한다면 다른 피조물들의 지정의는 생존을 위한 본능에 불과하나, 인간은 동물과 달리 생존의 본능 그 이상의 지정의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어떤 사실을 보고 원리를 이해하며 추론하는 지성이 있다. 또 그것을 자기와 적용해서 받아들이는 감정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가 판단하고 감정으로 느끼며 행동으로 옮긴다. 즉 인간은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가 좋아하며, 자기가 직접 실행하는 자유 인격이다. 누구의 구속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성과 감정과 의지는 자유 인격에 중요한 근거가 된다. 스스로 원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려면 그에게는 스스로 판단하는 지성이 있어야 하고, 좋고 나쁨의 감정과 그 일을 하고 싶어하는 의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인간의 행동은 자기가 결정한 것이지 다른 사람에 의한 결과가 아니다.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행동을 하고 그 일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지는 자유 인격이다. 물론 귀신들리거나 정신적 결함이 있는 사람은 예외이나 이들은 특수한 경우들이다. 이들은 자유 인격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격리된다. 자기 행동을 책임 질 수 없기 때문에 물리적인 힘에 의해 제한해두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이 영화 메트릭스처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또한 자기 의지 없이 다른 영적 존재에게 조종당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인간은 자기 행동에 대한 그 어떤 책임은 없다. 그렇게 프로그램화하고 그렇게 조종하는 자의 책임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처럼 조종하지 아니하신다. 로봇은 자기 판단, 자기 감정, 자기 의지가 없다. 기계적으로 조종하는 자의 손발 노릇을 할 뿐이다. 잘한 일도 그가 한 일이 아니고 잘못한 일도 그가 한 일이 아니다.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있게 된다. 이는 절대로 그릇되다. 하나님의 절대예정을 숙명적 결정론으로 오해하면 이런 의미로 받아들이기 쉽다. 이는 크게 오해한 것이다. 예정론은 죄인된 우리를 선택하셔서 구원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를 로봇으로 만들어 구원하심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사람을 바꾸셔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감사하며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다. 예정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는 뒤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사단도 인간을 로봇처럼 조종하지는 않는다. 아니 조종하지 못한다. 간혹 자기 지정의 없이 사단에게 지배당하는 자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의 귀신들린 사람에게 해당되는 일이다. 이 세상에 분명히 있는 일이지만 일반적이지 않고 특별한 경우이다. 사단이 인간의 지정의 없이 지배한다면 인간의 모든 범죄에 대한 책임은 인간이 아니라 사단에게 있게 된다. 성경은 절대로 인간 범죄에 대한 책임을 사단에게 전가하지 않는다. 유혹은 사단이 했지만, 인간이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해서 행동했기에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고 단언한다.
인간은 자기 판단과 자기 행동의 독립적 주체인 자유 인격이다. 인간은 자기 의지나 자기 책임 없는 중국 강시나 서양 좀비들처럼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아무에게도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스스로 존재하시며 자기 원대로 하실 수 있는 하나님처럼 독립된 주체이다.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자기가 실행하고 또 할 수 있는 자유 인격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인간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노예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자유 인격이 죄에 오염되서 인간이 판단하고, 느끼고, 하고 싶어하는 의지는 본성적으로 악한 것을 선택한다는 의미이지, 인간은 자기 행동에 아무 책임이 없는 로봇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인간은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는 독립적 주체로서 자유 인격이다. 이것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유일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2.2 선택의 자유가 있는 자유 인격
자유는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두 개의 빵을 앞에 두고 뒤에서 총을 겨눈 후 당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가지라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북한의 투표는 100% 투표에 100% 찬성이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다. 자유란 무엇인가? 내가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내게 달려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아무 제약 없이 하는 것이다. 결국 선택의 자유이다. 사람이 자유 인격임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인격이란 단어 속에는 필연적으로 자유가 포함되어 있다. 자유가 없는 것은 기계, 정신질환자... 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인격이란 단어는 대체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나타내는 도덕적 품성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자유 특히 선택의 자유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같은 의미가 반복되어도 자유 인격이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겠다.
2.3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윤리적 존재
진화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인간의 특징 중 이타심과 윤리의식이 있다. 사람들이 어떤 대가를 받지 않으면서도 친절을 베풀고 도움을 건네는 것은 진화론적 관점에선 터무니없는 행동이다. 또 윤리의식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계산에 의해 자기에게 유리한 선택만 하지 않고 자신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윤리적인 선택을 한다. 인간만 그렇다. 이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이타심과 윤리의식은 하나님 형상에서 왔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임은 지정의의 판단에 의해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인인데 그 결정에 있어서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윤리적 존재라는 의미이다. 인간의 행동은 이성적 합리적 결정만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아무리 손해가 되더라도 해야 하는 일과 이익이 되더라도 해서는 안되는 일을 구분하는 존재이다. 특히 도덕적 기준으로 볼 때 그렇다. 짐승에게는 이런 윤리의식이 없다. 인간만 가지고 있다. 비록 지금은 죄에 오염되어 언제나 윤리적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인간은 독립적이며 윤리적인 판단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특징이다. 그렇기에 인간만 윤리적 존재이며 윤리적 책임이 뒤따른다. 죄로 오염된 세상에서 의와 거룩을 구분하는 기준을 부여받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이기에 인간에게는 윤리적 책임이 있다.
짐승에게는 이런 윤리적 판단 능력이 없다. 필요에 의해서 자기 새끼나 어미를 잡아먹는 살모사 뱀이 있고, 환경만 주어지면 새끼와 어미가 얼마든지 재교배가 가능하며, 오직 힘에 의해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라 행동하는 생존본능만 있다. 짐승에게는 윤리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 오직 본능에 의한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인간은 짐승이 아닌 윤리적 존재이다. 죄의 본성은 하나님께는 비신앙적이지만 인간에게는 비윤리적인 것을 특징으로 한다. 성령이 오셔서 인간을 변화시키면 인간은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새 사람은 하나님께 신앙적이 되고, 사람에게는 윤리적이 된다. 윤리가 신앙을 갖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신앙이 윤리를 가져온다. 윤리가 절대 신앙을 앞서지 않지만 그러나 윤리는 언제나 신앙과 함께한다. 신앙은 윤리에 의해 진실성을 입증받고 윤리는 신앙에 의해 정당성을 보증 받는다. 성령받은 사람은 신앙과 윤리가 언제나 비례해서 성장되고 변화받는다. 그것이 인간에게 하나님 형상이 회복되어가는 모습이다.
3.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3.1 창조주와 피조물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계시해준다. 인간은 아무리 능력적으로 탁월하고 신비한 존재라 할지라도 그는 스스로 생겨난 자가 아니라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는 구조 자체가 하나님을 절대 의존해야 제 모습이 나오게 되어있고, 세상 모든 피조물의 통치자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대리통치자이다. 그는 다른 피조물에게 없는 탁월한 영적인 능력이 있지만 그 위치는 피조물 곧 영적 피조물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과 인간은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다. 피조물은 절대로 창조주를 넘어설 수 없다. 죄는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3.2 왕과 백성, 주인과 종
구약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관계를 당시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잘 설명해준다. 왕과 백성은 보호와 순종 관계를 나타내고, 주인과 종은 명령과 복종관계를 강조한다.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것이 피조물로서 창조주 앞에서 취해야 할 마땅한 모습이다. 순종과 복종은 인간에게 있어서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선택적 차원이 아니다. 하면 좋고 하지 않으면 나쁜 윤리적 차원도 아니다. 삶과 죽음의 절대적 차원이다. 죄는 바로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3.3 목자와 양
목자와 양은 우리의 생명 여부가 전적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의 돌보심에 달려있음을 보여준다. 양은 자기 힘으로 생명을 유지해 나갈 수 없다. 목자의 보호와 인도가 없이는 물과 풀을 얻을 수 없고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수 없다. 양의 생사가 전적으로 목자에게 달려있듯 인간의 존재와 생사화복은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해주심만이 우리의 소망이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참으로 적절하게 표현하는 비유이다. 피조물로서 창조주께 순종하고 복종하며 의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죄는 바로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십자가
성 요셉에 따르면, 인간의 초본성적 목적은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깊고 내밀한 교체에 있다.
이것이 바로 초본성의 신비가 갖는
심오한 실재를 구성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중심적 신비를 이루고 있으며 이는 다름 아닌 성령의 활동 아래 성자의 자녀 됨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과 인격적인 친교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우리는 십자가 성요한의 작품에서 이와 관련된 텍스트들을
상당히 발견할 수 있다. 2 산길 5,3; 3 산길 2,4; 2 밤 14, 1; 2 산길 4,2; 2 산길 5,7;노래 35,6;
2 산길 15,1; 2 산길 2,1; 3 산길 2,8; 불꽃 3,75 등. 필자는 여기서 관련 텍스트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2
산길 5,5의 텍스트만을 제시하겠다. 여기서 성인은 하느님과 영혼 사이의 합일에 대해 설명하는 맥락에서 요한 1,13을 주해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잇다.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 결국 혈육으로 낳지 않은
사람들(세례성사를 받은 사람들)만 하느님 안에서 변화될 수 있다. 이는 육체들과 본성적 결합으로 태어난 사람들과 육정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변화될 수 없다는 것이며, 본성적 능력과 습성에 따라서, 그리고 남자의 욕망에 의해 태어난 사람들도 역시 변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 이런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에게도 주시지 않았으며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에게만 하느님의
자녀가 될 권한을 주셨다. 즉 먼저 낡은 인간을 죽이고 은총으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하느님으로부터 양자와 재생의 권한을 받으면서
자신을 딛고 초자연적인 것으로 일어서 사람에게만 하느님의 자녀가 될 권한을 주셨다.) 이러한 초본성적 목적과 관련해서 우리가 고찰해야 할 문제는 하느님과의 친교라고 하는 이 목적을 수용하기 위한 인간의 성향(性向) 또는 능력(能力)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르면 이러한 능력은 인간의 '영적 본성'(靈的本性)또는 '영적 조건'(靈的條件)을 통해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영적(靈的, espiritual)이란 표현은, 그와 비슷한 또는 그 말을 포함을 여타의 어휘와 함께, 하느님과의 합일이 실현되는 상태 또는 조건을 지칭하기 위해 성인이 선호했던 용어였다. 한마디로 그것은 '본성적인 것' 안에 '초본성적인 것'이 개입되어 들어가는 접점(接點)이다. 이 경우 그가 말하는 '영적'(espirituelle)이란 말은 드뤼박이 말하는 '영적 피조물'(creature esprituelle)과 같지 않다. 드뤼박에게 있어서 그것은 초본성의 개업을 요청하는 인간적 차원을 말하다. 그러나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있어서 '영적;이란 말은 그보다 하느님과의 친교가 실현되는 영혼의 상층부를 일컫는다.
이는 초본성적 치원이자 동시에 계시에 있어 고유한 실제로 드러나는 '영'(靈, spiritus)이라는 성서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바로 이 비물질적인 결손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영(spiritus Dei)과의 관계에 자신을 내어놓게 한다.(상송 <H. Sanson)은 앞서 여러 번 인용한 그 책(El espiritu bumano segun San Juan de Cruz)에서 시바가 성 요한의 '신비'를 '영의 신비'(mistica del espiritu)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에 대한 정담함은 책의 서언(pp. 48-61)과 결론(pp. 553-572)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거기서 그는 '영'(espiritu)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영은 하느님을 찾는 영혼의 움직임이자 동시에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부어 주시는 움직이다"(146). 십자가의 서 요한은 이를 "하느님과 관련되고 친교를 나누는 영혼의 상층부"(3 산길 26,4)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에 자신을 통교하는 것은 감각보다는 영에 더 적합하고 통상적이다"(2 산길 11,2)라고 확신하면서 '영 안에서의 하느님과의 친교"(comunicacion be Dios en el espiritu, 1 산길 2,4)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된다"(3 산길 2,8). 그러나 영안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는 지복직관을 갈망하는 영혼의 깊은 열망을 충만하게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노래 B39,14). 또한 이 열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결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불꽃 3,10).
이제 이 본문들을 배경으로 우리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사용한 '영'(espiritu)과 '영적'(espiritual)이란 개념 그리고 칼 라너(K. Rah-ner)'초본성적 실존'(existentia supernaturalis) 개념 사이의 유사함을 보다 쉽게 입증할 수 있다. 십자가 성 요한이 말하는 '영적'(espiritual)이란 개념은 본질적으로 '실존적(實存的)이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의 보다 심층적인 차원인 '영'(espirtu), '영혼의 주심이 자 본질(centro y sustancia del alma)로 향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초본성적(超本性的)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의 인격적이고 무상적인 친교를 지향하는 접점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적'이라는 말은 인간이 하느님을 수용하기 위해 그리고 초본성적 실재를 수용하기 위해 그의 '영'이 갖는 본질적인 성향이자 능력을 말한다. 그러한 성향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 본성 안에 각인되어 있으며 초본성적이다.("영적인 것은 본성과 초본성의 합류점(合流點)에 있다. 하느님은 본성적인 현존에 따라 영혼 안에 정확히 말해 창조되고 구원된 인간의 구체적인 본성 안에 본성적으로 주입된다. 그러나 영혼 역시 하느님이 주신 선물을 그분께 다시 되돌려드리는 가운데 벗어버림과 영적 가난의 상태에 있을 때 하느님은 영혼 안으로 쇄도해 들어오신다)
그러나 이 주제와 관련해서 십자가의 성 요한이 제시한 새로움은 초본성이 본성 안에 개입해 들어가는 것에 대한 설명보다도 초본성 자체에 대한 그의 가르침에 있다. 이는 특히 그러한 신적 통교에 이르기 위해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감각의 길이 아닌 '영의 길'(camino del espiritu)이다. 그리고 소유의 길이 아닌 '가난'(pobreza)과 '적나라'(desnudez)의 길이다. 또한 그 길은 여러 가지 선들(심지어 영적인 선들까지도)과 더불어 누리는 기쁨과 위로의 길이 아니라 감각적. 영적 정화의 길이다. 마지막으로 그 길은 수덕적인 수고의 길이라기보다 신비적인 수동의 길이다.(이와 관련해서 텍스트는 수없이 많다 그 가운데 2 밤 7,3에서 성인은 이 정화의 과정을 '격렬하고 몸서리쳐지는 밤'(tempestuosa y horrenda noche)이라 부르며 그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성인은 이 지독한 밤이 "영혼이 겸손해지고, 부드러워지고, 정화되고, 예인해지고, 단순해지며, 가벼워짐으로써 비로소 하느님의 영과 하나가 될 때까지 지속된다. 고 말한다.)
또한 우리는 십자가 성 요한이 초본성 개념과 관련해서 공헌한 또 다른 개념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작용의 원리처럼 본성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능력 범위 밖에 있다(불꽃 3,34). 구체적으로 말해 그것은 영의 적나라와 가간에 이르기 위한 길이자 수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진정한 영적 존재 그리고 신적 친교에 도달하게 해 준다. ㅇ와 관련 한 다음의 두 텍스트는 십자가 성 요한의 작품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개념으로서 신적 통교의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초본성' 개념을 보다 분명히 설명해 준다. 1 산길 5,7; 2 산길 4,2.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 초본성 개념을 보완하면서 동시에 이 개념과 병행하는 또 다른 여러 개념(그러나 엄밀히 말해 초본성 개념과 구별되지 않는)을 사용하고 있다.
- 초본성은 인간의 여러 능력 안에서 하느님이 활동하시는 모든 것으로서 인간적 능력들이 개입함 없이 그것들을 통해 영의 적나라와 가난 속에서 수동적으로 수용된다. 정확히 말해 신적 즉각성(神的卽刻性)과 인간적 수동성(人間的受動性)은 신비적 은총들을 특징짓는 것들이다.(2 산길 14,10, 15,2).
- 초본성은 무상적(無償的)으로 오직 하느님의 이런 초본성적 도움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은 자기 노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영혼이 초본성적인 것으로 움직여지지도 않고 움직일 수도 없으며, 단지 하느님께서 영혼을 움직여 주시고 초본성적인 것으로 영혼을 데레다 주신다"(3 산길 13,3).
"하느님은 초본성적으로 당신을 내어 주신다.(---) 또한 영혼을 초본성적으로 움직여 주신다"(3 산길 31,7). "움직임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원초적인 주동자이시며,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곳, 영혼의 지성과 의지와 기억보차도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 없는 초본성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곳으로 영혼의 손을 붙잡아 데리고 가시는, 즉 장님을 인도하는 어린 아이시라는 것을 알아 두어야 한다."(불꽃 3,29); "주님께서는 초본성적ㅇㄴ 예술가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각각의 영혼 안에 원하시는 집을 초본성적으로 지어 주실 것이다"(불꽃 3,47).
우리는 십자가 성 요한의 전망에서 바라본 '초본성' '영적'이란 개념에 대한 고찰을 마치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안을 교려해야 한다.
①십자가의 성 요한의 초본성(超本性) 개념은 '신화(神化) 교리에 비탕을 둔 희랍 교부들의 전망과 '초본성' 개념을 중심으로 한 스콜라 신학자들의 전망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희랍 교부들의 '신학적' 전망은 '하느님의 모상' 개념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이는 인간에게 있어서의 하느님의 내재성(內在性)을 강조한다.
반면 스콜라 신학자들의 인간학적 전망은 초본성을 향한 인간의 정향성(定向性)이 인간 본성을 절재적으로 초월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여기서는 은총의 초월성(超越性)이 분명히 드러나고 잇다. 십자가 성 요한의 초본성 개념에는 이 '내재성'과 '초월성'이 모두 잘 드러난다. 성인은 자신의 영적 전망을 펼치는 맥락에 따라 이 둘을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자신의 인간 이해의 바탕으로 삼았다.
②십자가의 성 요한이 초본성을 "본성적인 기능과 덕을 초월하는"(3 산길 30,1) 어떤 것으로 언급할 때, 그는 그 언급 뒤에 '본성' 개념을 전제했다. 하지만 그의 인간적 전망과 교의 체계를 규정하는 개념 중의 하나인 이 '본성' 개념은 정확히 말해 하느님과의 친교를 향한 질서 안에서 역사적으로 그분에 의해 창조된 한에서의 "구체적 인간 본성"(具體的人間本性)을 의미한다. 이는 구체적이면서도 단일한 인간에 대한 전망이다.
하지만 이 전망 안에서는 '본성적인 것'과 '초본성적인 것'을 구별할 수 없다. 사실 우리는 인간의 신적 변모(神的變貌) 과정에서 본성적인 것과 초본성적인 것 사이를 구별하는 경계를 제시할 수 없다. 그것은 지속적이면서도 단일하고 상승적인 과정으로서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이 서로 긴밀하게 어우러지는 가운데 일어나는 총체적인 합일 과정이다. 그래서 십자가 성 요한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본성적으로 영혼에 자신을 건네주시던 하느님께서 은총을 통하여 초본성적으로 건네주시도록 영혼은 본성적인 엇갈림들과 반대적인 것들을 모두 벗어 버릴 필요가 있다"(2 산길 5,4) "그러므로 이것이 언제나 영혼이 본성적 초본성적으로 욕구하는"(노래 B38,3)것이다.
창세기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사람에게 하셨던 말씀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라고 합니다.
처음으로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원수 사탄 마귀를 영이신 하나님께서 육체로 존재하는 사람에게 하셨던 말씀을 뒤집는 일에 묘수(妙手)를 갖고 접근합니다.
사탄은 하와에게 그 열매를 먹어도 너희가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 열매를 머는 순간 너희도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을 핵심을 흔들었습니다.
그때 하와가 그 열매를 보는 순간 먹음직도 하고(육신의 정욕) 보암직도 하고(안목의 정욕)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여(이생의 자랑) 하와가 먼저 그열매를 따먹고 남편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로 바꾸도록 유혹하는 가장 영악스런 존재가 사탄입니다.
사탄은 영적 존재로 육체로 살아가야 하는 영적 존재인 사람을 무너트리는 놀라운 수법을 사용합니다.
그 수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켜 인간의 유혹의 바구니에 채우도록 이끌고 갑니다.
당장 육체의 바구니에 채워지는 것들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주워 담는 어리석은 인간의 결말은 타락과 방탕이며 비참함이 됩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신명기 32:46-47)
하나님의 말씀은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느냐 사느냐 문제입니다. 성경을 사소한 것 혹은 빈 말로 취급하면 당신은 생명을 잃습니다.
우리의 육체적 생명도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으며(시편 33:6; 히브리서 11:3), "그가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계시기(히브리서 1:3)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야고보서 1:18). "너희가 거듭난 것은 . . .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기 시작했을 뿐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속 살아갑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태복음 4:4; 신명기 8:3).
우리의 육체적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고 유지되며, 우리의 영적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생되고 지탱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을 주는 능력을 증거하는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모을 수 있을까요!
실제로, 성경은 "당신에게 빈 말이 아닙니다" — 그것은 당신의 생명입니다! 모든 기쁨의 기초는 생명입니다. 우리의 창조와 우리의 보존 등 우리의 존재에 관한 것은 가장 기초적인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 생명의 창조와 유지도 동일한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빈 말이 아니라, 당신의 생명 자체이며 당신의 기쁨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 로곤 데우(λογον θεου)
3056. 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3056
2316. θεός, οῦ , ὁ, ἡ
스트롱번호2316
영적 존재에는 하나님, 천사, 사탄
육적 존재이며 영적 존재에는 사람
사람과 하나님은 존재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소통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전한 영적 존재이며, 사람은 육체로 살아야 하는 어설픈 영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이 어설픈 영적 존재에게 무엇을 전달하려면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눈이 많이 내려서 참새들이 먹이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한 농부가 마당의 눈을 쓸고 땅 바닥에 참새들이 먹을 수 있는 곡식을 뿌렸습니다.
그리고 참새 떼를 향하여 "참새들아, 이리 내려와서 어서 먹이를 먹으라!" 아무리 외쳐도 참새들은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과 참새가 서로 소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온전한 영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이 육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외쳐도 듣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선택한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과 소통을 위한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소통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신 사건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은 직접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땅에서 이루어진 사건에 관한 말씀을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공관복음의 특징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과정을 소개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 시기가 창조 이전부터 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소통을 위하여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모두 마친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실 때 너희들과 소통하기 위하여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두 가지 통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보혜사 성령" 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을 받았느냐? 라는 질문은 어떤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느냐 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통하시려고 말씀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존재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땅에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루어진 사건을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이 보그최고의 소통
하나님은 영(靈)이시기 때문에 영으로 육체(肉體)의 사람에게 말을 하면 사람은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합니다.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선지자에게 영의 말씀을 계시하시고 영의 말씀을 받은 선지자가 말씀을 전달하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라는 형식으로 소개됩니다(왕상 12:22, 대상 17:3, 대하 11:2, 신 4:30, 28:15 등).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데살로니가 지역의 사람들은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받았습니다.
이것은 축복된 관계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설교자가 전하는 말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된 관계에서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항상 가깝게 지낼 수 있는 동일한 육체를 갖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한다면 혈육의 관계 즉 의무적인 관계에서 신령한 관계로 발전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육체적인 관계를 신령한 관계로 발전시키고 인정할 수 있을 때에만 사람이 전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사람의 가르침과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씀을 상고하라(사도행전 17: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ἀνακρίνω 스트롱번호350
자세히 조사하다
질문하다
행17:11
성경을 상고하는 사람들 (행 17:10~15)
모택동(毛澤東)이 중국을 통치할 때의 일입니다. 극동 방송국에 일본 동경극동방송을 경유하여 중국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당시 중국은 문화혁명으로 인해 모든 성경들이 불에 태워 없어져 지하교회의 성도들이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극동방송은 밤 자정 시간부터 성경을 중국어로 읽어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매 시간마다 성경을 받아 적던 중국의 어느 성도가 요한계시록 22장까지는 다 받아 적었는데, 사무엘상 15장을 들을 때 방송 상태가 고르지 못해 잘 받아쓰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다시 한 번 읽어달라는 것입니다.
감격한 아나운서는 편지를 잘 받았다는 말과 함께 그 부분을 다시 읽어 드릴 테니 잘 준비하고 있으라며 눈물로 방송을 하였습니다. 약속된 날짜와 시간이 되었습니다. 중국어 아나운서는 보통 때보다 더 천천히 읽어주었습니다. 일주일 후에 중국의 성도로부터 온 편지에 의하면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도 이제 성경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성경은 한 짐이나 됩니다"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내내 붓으로 성경을 받아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성경을 다 받아 쓴 그는 너무나도 감격하여 한동안 울었노라며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천하를 뒤흔드는 자' 라는 별칭을 받으며 가는 곳마다 기적과 변화를 일으키던 사도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의 핍박을 피해 베뢰아에 도착하였습니다. 베뢰아는 두 하천이 흘러 물이 풍성하다는 뜻으로 이름이 지어진 곳인데. 나무가 무성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마게도냐 제2의 산간 도시로 알려졌습니다. 그 베뢰아에 교회가 있었는데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교회였습니다. 후에 바울 사도는 그가 다녀온 교회마다 서신을 통해 견책하고 혹은 책망하며 교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교회에는 서신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베뢰아 교회가 허물이 없이 신앙생활을 바로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할 때 바른 신앙이 됩니다. 성경을 생활화할 때 바른 생활이 이루어집니다. 본문의 베뢰아 교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이기에 누구나 읽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동시에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며 사죄의 은혜를 입게 됩니다.
본문 11절입니다.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여기의 '상고하다' 는 '아나크리노' 로 '자세하게 살펴서 티를 골라낸다' 라는 뜻입니다. 즉 말씀을 관찰하여 삶에 적용시켜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저들의 삶이 신사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면 반드시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날마다 상고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생명을 얻기에
제임스 1세(James I)는 킹 제임스(King James Version)성경을 번역한 독실한 신앙을 가진 영국의 왕입니다. 그는 작은 범죄도 엄하게 다스렸습니다. 한번은 암스트롱이라는 도둑이 양을 훔치다가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암스트롱은 사형을 피하기 위해 묘안을 짜낸 후 간수를 불러 말합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 마지막으로 성경을 읽고 싶소. 임금께 내 뜻을 전해주시오" 제임스 1세가 그 말을 듣고 "참 기특한 죄인이로구나. 그에게 성경을 갖다주어라. 그리고 성경을 다 읽은 후에 사형을 집행토록 하라" 고 명령했습니다. 암스트롱은 그 날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 사형을 집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루에 한 절씩 성경을 묵상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절수가 3만 1,102절인데 그것을 다 읽으려면 적어도 80년 이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결국 제임스 1세는 그를 풀어주며 말했습니다.“집에 가서 성경을 읽도록 하여라” 암스트롱은 성경을 통하여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새 사람이 되어 국가에 봉사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성경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전체가 구원자 예수를 증거합니다. 구약이 오실 메시아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면, 신약은 오신 메시아와 다실 오실 메시야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며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정하신 때가 되면 다시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시는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은 자들은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구속의 진리를 터득하여 날마다 생명을 얻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기준이 되기에
한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책을 선물로 받았는데 읽어보니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처음 몇 장을 읽다가 구석에 밀쳐놓았습니다. 몇 달 후 한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그에게 말합니다. "서재에 있는 책의 저자 이름이 당신의 이름과 똑같습니다." "그 책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녀가 대답하자 그는 말합니다. "이상할 것 없습니다. 그 책은 바로 내가 썼으니까요." 다행히 그는 책에 대해서 묻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책을 찾아내어 먼지를 털고 처음부터 끝까지 샅샅이 읽었습니다. 그 후 그 책은 그녀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기준이 바뀐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 성경이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책이 될 것입니다. 기준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베뢰아 사람들처럼 성경의 기초 위에 신앙의 집을 세워야 합니다. 철저히 성경에 의해 비판받는 성경적 가치관을 정립해야 합니다. 삶의 기준과 가치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되어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어떤 일이든지 말씀에 비추어보았습니다. 선택과 결정의 근거가 오직 성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세상적 가치를 붙잡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적 논리와 세상 이치에 더 밝습니다. 결정과 선택이 언제나 세상적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가치가 최상이라고 믿고 따르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기준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언제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자기 말이 아닌, 오직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신약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가라사대' 가 아닙니다. '내가 가라사대' 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가라사대'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적 진리요, 모든 것의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아니라면 이미 무너진 기초 위에 신앙의 집을 짓고 있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불행은 인생의 매뉴얼이요, 완벽한 기준인 말씀을 떠날 때 찾아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기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상고하지 않는다면 결국 기준을 잃어버린 잘못된 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삶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따를 때 비로소 행복이 주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승리를 주기에
빅토리아(Alexandrina Victoria)는 영국 역사상 황금시대를 이룬 여왕이었습니다. 64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로 번영시켜 놓았습니다. 여왕이 된 그녀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성경을 폈습니다. 잠시도 품에서 떠나지 않던 성경을 놓고 "주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치를 하도록 하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해결했으며 기도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한번은 인도의 왕자가 찾아와 여왕께 물었습니다. "정치를 잘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녀는 성경을 펴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책에 기초를 삼고 그 위에 나라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요한 일서 2장 14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살기가 무척 힘든 세상입니다. 죄악이 관영하고, 음란하며 흉악한 자들이 많아지는 세상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거하며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만 합니다. 그것이 '상고' 의 모습입니다.
말씀을 마음에 되새김질 할 때 승리하는 인생이 됩니다. 즉 성경을 상고할 때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열매를 맺는 삶이 이루어집니다. 성경을 상고하는 민족은 하나님께서 세계 민족 위에 뛰어난 민족을 이루게 하시며 형통의 은총을 허락해 주십니다.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뮬러(George Mueller) 목사의 전기를 보면 그는 3개월마다 한 번씩 성경을 통독했다고 전해집니다.
일생 동안 무려 2백번 이상 성경을 통독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힘이 약해져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뮬러 목사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은 항상 성경을 읽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얻은 힘으로 5천명의 고아를 길러 내는 기적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이야말로 지혜를 주는 책입니다.
평안을 주는 책입니다.
승리를 주는 책입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할 때 승리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일이 벌어지면 성경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해답을 찾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기분이나 감정, 분위기에 의해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부디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해답이 보입니다.
승리는 말씀에 대한 태도에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멈추고 성경을 상고함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신사적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베뢰아 사람들처럼 변화되어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신도란 신사적인 그리스도인
말씀을 묵상하라(시편 119:148)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밤을 새워가며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깨닫게 된 은혜가 무엇인가?
한승옥권사님의 경우
말씀을 기억하라(누가복음 24:8)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베드로가 주를 모른다고 주님을 부인한 후에 닭의 울음 소리를 듣고 밖으노 나가서 통곡하였다.
말씀을 전하라(사도행전 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선지자 요나가 니느웨에서 외쳤던 말씀에 의하여 그 성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금식하며 회개하였다.
주의 말씀 듣고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마태복음 5:13-14)
성 경: [마5:1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소금과 등불의 비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소금'(*, 할라스)은 고대의 종교 세계에서 인내와 순결과 부패 방지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거룩한 제사에 사용되었고(출 30:35; 레 2:13), 하나님과의 영원 불변하는 언약에 연관되었다(민 18:19).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 소금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셨다. 예를 들면 제자들은 희생의 의미를 담고서 소금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막 9:49).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소금이 그 맛을 잃는 것에 대한 언급(눅 14:34, 35)은 매우 흔한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意味)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소금과 햇빛보다 유용한 것은 없다'는 혹지(Pliny)의 말처럼 소금과 빛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늘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들이 그로부터 생겨난 것이 분명하다. 앞서 소금의 여러 용도가 이야기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소금은 음식을 보존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고기에 약간만 뿌려 두어도 부패가 상당히 느려지게 된다. 그런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소금이 그 맛을 잃을 수는 없다. 염화나트륨(Nacl)은 완전한 화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사용되던 대부분의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염분이 있는 늪지 등에서 추출된 것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었다. 진짜 소금은 불순물보다 쉽게 녹기 때문에 용해되어 나오기 쉬웠고 그렇게 희석(稀釋)되어 소금이 추출되고 남은 나머지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맛을 잃은 소금이 평평한 지붕의 흙 위에 뿌려진다고 전해진다. 이 소금 때문에 흙은 더 단단해지고 새는 구멍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지붕이 운동장이나 공공집회의 장소도 되기 때문에 소금은 여전히 사람에게 밟히고 있는 것이다(Deatrick, 'salt', p. 47). 한편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는가'하는 본문의 질문은 슈바이쩌(Schweizer)가 지적한대로 어떤 구체적인 답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소금을 다시 짜게 할 수 있는 것이 '노새의 태(胎)'와 같다고 대답한 랍비의 말(노새는 번식력이 없으므로 결국은 불가능하다는 뜻)은 요점을 놓친 것이다(Schweizer). 여기에서 말하는 요점은 (1) 예수의 제자들이 천국의 규범에 따름으로써 세상에서 방부제로 행동하여야 하며, (2) 도덕적 기준이 저급하고, 끊임없이 변경되거나,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 속에서 소독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계속 유지하여야만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Tasker).
소금(할라스) halas ἅλας,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217
주제2: [소금과 등불의 비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13절에서와 같이 '너희'가 강조된다. 너희, 즉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하였지만(롬 2:19) 진정한 빛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 고난받는 종 한 분뿐이다(사 42:6;49:6). 그리고 이것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요1:9). 그에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비취는 새 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엡 5:8, 9; 빌 2:15). 한편 빛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적 상징이다.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빛이 부정함에 대립되는 순수함, 거짓이나 무지와 대조되는 진리와 지식,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산 위에 있는 동네 - 이 문구는 어떤 면에서 의미가 매우 분명하다. 고대의
마을은 흔히 흰 석회암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태양속에서 빛나는 것이 많은 사람들 눈에 보이고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다. 밤에는 동네
주민들이 켜놓은 등불이 주변 지역에 빛을 드리우게 한다(Bonnard). 그런데 '산 위에 있는 동네'에 대한 말씀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의 산 또는 시온의 세계 속에서 뛰어나게 되고 모든 족속(族屬)이 그리로 몰려 올 때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사 2:2-5;42 장;49장;54장;60장;Grundmann, Trilling, K.M.
Campbell).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추측은 아니며 산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사야서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어쨌든 만일 전자의 주장이 옳다면 본문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참된
모임이고,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의 전초기지이며, 그리스도의 참 빛을 세상에 비추는 순결한 반사체인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모두
마태복음에서는 중심적인 것들이다(Carson).
φῶς, φωτός, τό
스트롱번호 5457
1.말씀 묵상속에서 영감을 얻은 하이든
오스트리아의 하이든은 <천지창조>와 같은 오라토리오<종교적 아극>를 발표한 위대한 작곡가이다. 언젠가 그의 교회음악이 어쩌면 그렇게 감동적일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면 풍성한 기쁨으로 인해 곡조들이 춤추듯이 떠오르며, 그러면 나는 펜을 움직여 용서받은 기쁨과
감사하는 영혼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음악을 작곡합니다" 라고 말했다. 하이든은 말씀을 묵상함으로 아름다운 오라토리오를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다.
2.신앙과 말씀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고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것은 우리가 받는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사람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고 그 말씀이
자신을 변화시키리라는 믿음을 갖기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포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우리의 믿음이 굳게 설
수있고 그 믿음의 그릇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데살로니가전서 2:13)
* 기도: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서 역사하고 계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들이 언제나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믿음 위에 굳게 서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이제 아침 큐티 시간은
식사 시간처럼 제게 자연스런 습관이 되었습니다. 아침 5시 20분 자명종이 울리면 무조건 일어나 세수로 정신을 차린 후, 식탁에
앉아 큐티를 합니다. 아침밥이 그렇듯이 때로는 꿀맛 같은 큐티 시간을 갖지만, 많은 경우 의무적인 식사 시간처럼 지나가 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제게는 이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아침 큐티 시간에 주시는 말씀이 오늘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때로 한 번의 큐티로 잘 알아듣지 못할 때는 몇 번에 걸쳐 같은 메시지를 주십니다.
한동안 보직 해임 통보로 실망하고 힘들어할 때 하나님은 시편 61-66편에 걸쳐 계속해서 ‘저를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직원들의 업무 평가를 앞두고 있을 때는 디모데전서 5장 21절 말씀을 통해 “편견과 편벽 없이 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흐트러져 있는 청년부의 부장을 맡게 되어 걱정과 염려가 생겼을 때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는 말씀으로 마음을 강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저에게 큐티 시간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귀하고 귀한 시간입니다.
/ 방선오
*
기도: 제 인생의 등불 되시는 주님, 저를 위해 예비하신 약속을 찾아 말씀을 볼 때 제 마음에 성령의 빛을 비추소서. 환난이나
곤고에 처할 때 읽었던 말씀을 생각나게 하사, 필요할 때마다 주님의 약속을 적용함으로 올바른 기도를 할 수 있게 하소서.
4.지혜의 말씀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잠 1:5,6)
영국
왕 제임스 1세는 킹 제임스 성경을 번역한 독실한 신자였는데 그는 작은 범죄도 엄하게 다스렸습니다. 한 번은 암스트롱이라는
좀도둑이 양을 훔치다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이 때 암스트롱은 사형을 피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낸 후 간수를
불렀습니다. “나는 어차피 죽을 몸, 마지막으로 성경을 읽고 싶소. 임금께 내 뜻을 전해주시오” 제임스 1세는 그 소식을 듣고
대답했습니다. “참 기특한 죄인이로군. 그에게 성경을 주어라. 그리고 성경을 모두 읽은 후에 사형을 집행하라” 암스트롱은 그날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 사형을 집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루에 딱 한 절씩만 성경을
묵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임스 1세는 그를 풀어주며 말했습니다. “집에 가서 성경을 읽어라” 암스트롱은 그 후 새사람이 되어
봉사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항상 지혜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마음에 새기는 지혜로운 자는 잠언이 주는 교훈을 열린 마음으로 듣고
순종하여 더욱 지혜로워집니다. 또한 선악과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는 명철한 자는 잠언의 말씀을 통해 모략을 얻습니다.
‘모략’이란 인생의 진로를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길잡이의 역할을 합니다. 잠언은 명철한 자의 인생을 성공의 길로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 기도: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무지했던 제 모습을 고백합니다. 저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아가게 하소서.
5.가장 큰 지혜
손으로 물을 건져 올려 보라. 이내 새어
나가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릇으로는 얼마든지 퍼 올릴 수 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지 않으면 보배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미 없이 새어 나가 버릴 1초를 영원으로 건져 올려 담는 그릇이다. 허망하게 사라져 버릴 1분 1초를 영원이란 보배로
꿰어 주는 사슬이다. 부디 어떤 경우에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인생은 절대로 거창한 데 있지 않다. 지금 당신을 스쳐 지나가고
있는 1초가 바로 인생이다. 그 1초를 어떻게 맞느냐에 따라 당신의 일생이 결정되는 것이다.
지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그릇 삼아, 그 1초를 영원으로 건져 올려라. 하나님의 말씀을 당신 삶의 씨줄로 삼아라. 그리고 그 씨줄에
당신을 스쳐 가는 1초를 날줄로 엮어 가라. 그때부터 당신의 삶은 절대적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절대적 의미는 영원하신
절대자인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만 움트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줌의
흙에 지나지 않을, 바로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렇기에 청년의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보다 더 큰 지혜는 없다.
- 참으로 신실하게 / 이재철
*
기도: 하나님,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말씀을 지키기 원합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복에 복을 더할 줄 믿사오니 청년의
때에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행동으로 제 자신을 관리하게 하시며, 주님의 말씀을 근실히 지키도록 도와주소서.
6.갈매기의 죽음
영국을 여행하는 한 나그네가 관광지로
유명한 해안지대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바닷가에 많은 갈매기가 죽어 있는 것이었다. 그는 죽은 갈매기떼를 치우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 그에게 물었다. "이 많은 갈매기가 왜 죽게 되었습니까?" 그는 대답했다. "여기는 관광지가 되어서 여름 한철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관광객들은 늘 갈매기들에게 빵과 과자와 사탕을 줍니다. 갈매기들이 사람들의 손바닥에 올라 앉아서 그런
먹이를열심히 쪼아 먹지요. 사람들은 그게 재미있어서 더 열심히 그런 먹이를 주곤 합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갈매길들은 입맛이
달라졌고, 그래서 이제는 자연의 먹이에는 식욕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철이 바뀌어서 관광객들의 발길이 뚝 끊어지고 보니
갈매기들은 별 수 없이 굶어 죽고 만 것입니다." ...누가 이 갈매기들을 죽이자고 과자를 주었겠는가? 갈매기를 향해서 총을 쏘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사람들이라고 나무라지만 갈매기에게 과자를 주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나무라는 사람은 없다. 그런 먹이가
결국에는 갈매길들을 떼죽음시킨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다. 갈매기가 먹어야 할
음식은 따로 있다. 갈매기는 갈매기로서의 길을 가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름대로 즐기느라고 이렇게 갈매기에게 먹여서는 않되는
먹이를 준 결과로 이러한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사람은 분명히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면 꼭
먹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목회 사회학자가 연구해 보았는데, 넉 주일만 교회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존재가 안보인다고
한다. 먹어야 할 것은 먹지 않으면 안 먹어야 될 것을 먹게 된다.
/곽선희 목사 설교예화
7.말씀을 청종하는 자세
언젠가 조지 윗필드가 설교를 할 때
한 사람이 중간에서 열심히 졸고 있었습니다. 윗필드는 설교를 멈추고 단 아래로 내려가서 졸고 있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충고하였습니다. “만약에 내가 하는 설교가 윗필드 자신의 말이라면 주무셔도 좋습니다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졸 수
있습니까?” 윗필드는 심하게 꾸중하고 난 다음에 후반부 설교를 다시 이어 갔습니다. 졸음에서 깨어난 그 사람이 일생 일대의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설교를 듣고 난 후에 들은 메시지는
잊어버리고 오직 설교 중에 동원되었던 재미있는 예화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설교는 끝났는데 나중에 교인들의
마음속에 남은 것이라고는 배꼽을 잡고 웃게 만들어 주었던 예화밖에 없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예화가 우리의 마음과 삶을 바꿔 놓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설교를 듣는 시간이 강연을 듣는
시간과 같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청교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설교를 들으면서 그 속의
재담이나 일화에 귀를 기울이고 즐거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마치 배고픈 사람이 화려하게 차려 준 밥상에서 밥 대신에 밥그릇의 무늬를
보면서 즐거워하는 것과 같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기울여 들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목소리라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무엇이든 말씀하시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 김남준
8.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라
성경: 행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초대
교회사에 나오는 위대한 순교 사화입니다. 로마 교회의 식스투스 감독은 경건하고 인자하여 그의 목회에 감동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는 빈민 구제와 사랑을 실천하여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그를 처형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조용히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식스투스 감독이 사형장에 끌려갈 때 라우렌티우스 집사가 식스투스의 뒤를
따라가면서 “아버지여, 당신께서 제단으로 나아 가실 때 늘 저에게 도움을 청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지금은 저를 데려가지
않으십니까?”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때 식스투스는 “사랑하는 아들아, 너희들도 며칠 후면 나의 뒤를 따르게 되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당시에 식스투스 감독의 교회 수석 집사로 거대한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막대한
재산을 알게 된 로마 시장은 교회의 모든 재산을 상납토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교회 재산을 정리하겠다는 구실을
내세워 상납일을 연기하도록 허락받고 교회당의 모든 보물을 다 팔았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의존하고 있는 수천의 민중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당에 그 사람들을 모집하였습니다. 약속한 날 시장이 교회당으로 올라오면서 “보물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문을 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때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교회당 문을 활짝 열고 소경,
벙어리, 걸인, 병자, 고아, 과부의 무리를 가리키며 “교회의 보물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눈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히 행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태승 목사
9.코끼리의 칼슘
코끼리는 우둔해 보이지만 생존을 위한
지혜는 가히 경이롭다. 코끼리는 더울 때 귀로 부채질을 하거나 목욕을 하여 더위를 이겨낸다. 또는 침을 잔뜩 괴었다가 코로
들이마신 후, 몸에 뿌리는 식으로 더위를 피한다. 물론 이 방법은 근처에 개울이나 연못이 없을 때 쓰는 비상 수단이다. 햇볕을
피해 나무 그늘을 찾아서 몇 시간이고 꼼짝 않고 서 있을 때도 있다.
코끼리의 지혜는 음식 섭취에서도
나타난다. 코끼리는 이빨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 대나무를 즐겨 먹는다. 코끼리는 단단하고 질긴 통 대나무를 으깬 다음, 코로
말아 올려 먹기도 하고, 그냥 입으로 ‘우지직’ 씹어 먹기도 하면서 부족하기 쉬운 영양소를 섭취한다고 한다. 또한 아프리카의
건조한 초원 지대의 코끼리는 죽은 동물의 뼈를 먹음으로써 부족한 칼슘을 보충한다. 그들은 보통 하루에 300kg 정도의 먹이를
먹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몸에 꼭 필요한 영양분을 찾아 섭취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영적 건강도 무슨 음식을 섭취하는가와 직결된다 하겠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해야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는 편식에 길들여져 버린다. 어린아이가 밥상에서 편식을 하듯 말씀에 대한 편식을 하는 것이다. 귀에
거슬리는 설교에는 방음막을 친다. 좀 까다롭거나 부담스러운 말씀은 그냥 건너뛴다. 그러나 깨달아야 한다. 코끼리는 달콤한 야자
열매만 찾아다니지 않는다. 코끼리는 칼슘을 보충하기 위해 억센 대나무를 씹기도 하고, 죽은 동물의 뼈를 먹기도 한다. 당신에게도
이런 결단이 필요하다.
/ 이진우
10.말씀의 맛을 보라
어떤 총각이 여자 친구와 결혼할
것을 결심하였지만 그 총각은 부끄러움이 많아서 여자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매일 연애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런 일이 3주 계속된
다음, 드디어 그녀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결혼한 사람은 연애편지를 보낸 그 총각이 아니라, 매일 편지를 배달한
우체부였다. 계속적인 접촉이 사랑에 이르렀고 결국 결혼으로 골인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주님과 접촉하게 되고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인자하심이 어떠한지, 그 맛을 보게 되면 더욱 말씀을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맛을 말씀으로 보고 말씀을
더욱 갈구하면 그 결과 더욱 성장하게 된다. 이것이 성장의 순환이다. 죄악을 통한 세상의 맛이 쓰다는 것을 느껴야 말씀을 통한
주님의 맛을 갈구하게 된다. 말씀을 통한 주님의 맛을 보고 나면 죄악을 통한 세상의 맛이 시들해진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기,
위선, 시기, 비방 등 모든 악독을 버리고 순수한 말씀의 젖을 갈구해야 한다. 부모가 어린 자식이 위험한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에
무조건 그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장난감을 주면서 그것을 버리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말씀을 통한 인자하신 주님의
맛을 대안으로 내어놓으면서 옛 사람의 달콤한 죄악들을 버리게 하신 것이다. 죄를 버리고 말씀을 갈구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성장하자.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수 1:8)
* 기도 : 주를 알아가는 지식이 커가면서 주를 향한 열정이 식어져가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주의 말씀을 들을 때 주를 향한 순수한 사랑이 회복되게 하시며, 그 말씀이 나의 심령과 골수를 쪼개는 강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권성수
11.말씀으로 돌아가자
얼마 전 신문에 재미있는 글이
실렸습니다. 부동산 투자에 관한 글이었는데 제목이 '망하는 길 10가지'였습니다. 그 첫째가 "전문가나 컨설팅업체의 말을 100%
믿는다. " 그러면 반드시 망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런 사례가 실려 있었습니다. "투자론을 강의하는 유명대학 K교수, 그의
강의는 늘 인기가 있다. 사람을 몰고 다닐 정도다. 그런 그가 한 초청 강연장에서 그 잘하던 강의를 망친 적이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세들어 살고 있는 집 주인이 청중 속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그의 책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얄팍한 술수나 꾀가 아닙니다. 우리를 향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아는 지혜입니다. 초대 교회가 타락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 사막으로 나아갔던 사막의 교부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깨닫는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런
운동을 통해서 당시의 교회들이 새로워졌습니다. 중세 교회가 교권주의에 매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때, 종교개혁자들은 말씀을 새롭게
연구하기 시작했고, 성경에서 개혁의 불길을 찾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바로 알고, 바로 깨닫고, 그 말씀을 따라 살기를
결단하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바꾸실 것입니다. 우리를 온전케 하실 것입니다.
/ 서정오
12.믿음을 키우는 약
한번은 '무디'선생이 자신의 간증을
했다. '내가 하나님께 믿음을 달라고 기도한 시간만 합쳐도 몇 달은 족히 될 것이다. 내 생각으로 믿음이란 번개불과 같이 어느 날
나를 확 달아오르게 할 어떤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수없이 기도해도 믿음이 오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나는 로마서 10장을
읽다가 '그런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란 구절을 보았던 것이다. 그 즉시 난 성경을 부등켜
안고 믿음을 구했다. 그리고는 성경을 다시 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시작했더니 믿음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는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알고 이를 순종하는것이 제일이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흙은
원래 부드럽지만 사람들이 밟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굳어지고 단단하게 되는 것이 길바닥입니다. 어린아이의 마음은 부드럽고 복음을
전하면 잘 받아들이지만 길바닥같이 인생의 경륜이 쌓인 사람들은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듭니다. 마음이 부드럽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길바닥에 떨어진 것과 같아서 믿음이 자랄 수 없고 하나님을 느끼거나 천국을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는 좋은 땅은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최홍준 목사(호산나교회)
13. 말씀의 표적
캐나다 동북쪽에 사는 아이누이츠라는
에스키모족이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도 고수하는 그들만의 관습이 있다고 합니다. 악령을 쫓기 위해 문이나 현관에 물건을 달아맵니다.
매의 깃털이나 동물의 가죽 혹은 독수리의 깃 등을 문에 달아놓으면 악령을 쫓아낸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부적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적을 붙여본 경험이 있습니까? 우리의 신령한 표적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문이나 현관에 붙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판에 새기고 다닐 표적입니다. 이 말씀을 미간에 붙이고 문설주에 붙이고
손목에 매달아놓는 것입니다. 말씀을 늘 붙이고 새기고 다니는 사람은 악한 영이 넘보지 못합니다. 말씀을 떠나 사는 사람을 마귀는
가장 좋아합니다. 언제든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성희 목사(연동교회)
14.말씀적용
두 기독교인 신사가 같은 좌석에 앉아 기차
여행을 하고 있었다. 점심 시간이 되자 그중 한 사람이 두 개의 샌드위치 중 하나를 먹기 시작했다. 다른 한 사람은 그의 동료가
먹는 모습을 보자 배고픈 듯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개의 샌드위치를 먹는 사람에게 '나는 최근에 주님의
계명에 조용히 사로잡힌 일이 있습니다. 당신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아십니까?' '거참 좋은 말씀입니다'
하며 남은 샌드위치를 입 속에 집어넣고는 이렇게 응수했다. '나는 또 다른 성경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들의 입장에서만 성경을 해석한다. 그리고 자기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말씀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15.하나님의 말씀을 좇으라
위대한 사람 옆에 서 있다고
내가 저절로 위대해지지 않습니다. 배부른 사람 옆에 있다고 내가 배부르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말씀을 따라다니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교회나 목사를 좇아다니지 마십시오. 사람을 좇아다니면 꼭 얻는 것이 있습니다.
실망과 상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좇으십시오.
/하용조 목사
16.하나님의 말씀
성경: "하나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30:5,6)
로버트
모리슨은 중국에 파견된 개척 선교사였습니다. 그가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해 가던 중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라는 같은 구절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함께 번역 작업을 해온 중국인 동료가
말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결코 구세주를 뵙게 될 것이라거나 하나님을 면전에서 맞대어 보게 될 것이라고는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이 구절의 번역을 다르게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모리슨이 대답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도록 합시다."
순전하다는
것은, 마치 뜨거운 불로 연단하여 찌꺼기를 모두 제거한 금처럼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해서 그 속에 더러운
것이나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말씀만 믿고 의지하고 나가면 그 말씀이 참으로 드러나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을 모든 시험과 환난에서 지켜 보호해 주십니다.
* 묵상: 말씀 가운데서 삶의 지혜를 공급받고 있습니까?
17.성경 말씀
1789년 영국 군함
바운티(Bounty)호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반란자들 중 일부는 피트게언 섬에 상륙하여 원주민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정치적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9년이 지난 뒤 그곳에는 살인과 폭력, 성(性)의 문란,
알콜 중독 등 심각한 사회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고 이러한 결과에 회의를 품은 지도자 플래처 크리스천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배가 떠나기 두 달 전 존 아담스라는 사람이 창고에서 우연히 성경책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다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다시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영국으로 가는 배에 오르지 않고
성경과 함께 섬에 남았습니다. 이제 죄악으로 얼룩졌던 피트게인 섬은 한 권의 성경으로 다시 소생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활자나 많은 출판물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성령이 살아 계셔서 생명을 불어넣은 책입니다. 때문에 성경 말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말씀은 역사 속에 함께 하고 있는 능력입니다.
"성경: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 기도: 주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늘 묵상하게 하소서
18.등불이 되는 말씀
성경: 잠6:23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責望)은 곧 생명의 길이라 "
스웨덴의
동물학자가 "개를 보고 웃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웃는 얼굴을 보고 호감을 갖는 것은 사람의 기분이고 웃으면 이빨이 나오기
때문에 개는 기분이 상합니다. 이빨을 내미는 것은 공격의 징조라는 개의 상식을 계산에 넣지 않고 내 본위로 판단하는 것이
오해입니다. 바로 인생사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태승 목사
19.꿀 송이 보다 더 단 하나님 말씀
본문: 시19:10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미국 농담에 거북이 교인 (Turtle Christian)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는 9일간 먹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12일간이고 개는 20일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북이는 500일을 먹지 않아도 살고 뱀은 800일을 견딥니다. 곤충들은 1200일을 음식 없이도 생존합니다. 그래서 참다운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 없이 사는 신자를 거북이 크리스찬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들은 매일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오늘도 꿀송이 보다 더 단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가장 먼저 전해야 할 말씀
모라비아 교회 선교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최초로 그린랜드에 파견되었을 때 그들은 그 곳 사람들에게 먼저 자연종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단 한사람의 개종자를 얻는데 무려 17년이라는 세월이 걸릴 정도로 비참한 것이었다.
어느 날 카야르낙이라는 매우 사악한 사내가 선교사의 움막에 들렀다가 우연히 선교사가 성경 읽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때
선교사가 읽고 있었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중 마지막 한 주간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원주민은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으며, 죄인들은 그 분을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희미하게나마 알게 되었고 그에 대해 자세히 듣기 위해
선교사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저에게 자세히 말씀히 주십시오. 저도 구원받고 싶습니다."
뜻밖의
일에 선교사는 깜짝 놀랐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카야르낙과 그의 가족은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들은 그린랜드에서
구주께 드려진 첫 열매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선교사들은 죄인들에게 가장 먼저 설교해야 할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희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21.말씀이 우리 안에 거함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모두
받으려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해야 한다. 무슨 신비한 명상이나 황홀경을 체험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를 배우는 방법은 바로 기록된 말씀을 받아 섭취하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우리 마음 속에
심어주셔서 살아 역사하게 만드시도록 만드는 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지식적으로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그
말씀에 대한 묵상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끊임없이 바라보며 성령께서 그 말씀을 우리 마음 속에 살아 있게 만드시도록 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속에 계속해서 맴돌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도록 하면, 그 말씀들이 우리를 자극하여 기도하게 만든다. 그 말씀들의 틀 속에서 우리의 기도가 형성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동일선상에 있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서는 기도의 응답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가장 위대한 기도의 사람 중 한 사람인 조지 뮬러는 기도할 때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기도가 자연스럽게 마음속에서 우러나기 시작할 때에 비로소
기도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 자신이 기도를 일으키시고, 또한 자신이 불러일으키신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친히
응답하시는 것이다.
/ R. A. 토레이
22.말씀을 듣는 믿음
성경: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꼭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0:42)
한
어머니가 아이와 함께 이름있는 선생님을 찾아와 말했습니다.“우리 아이는 워낙 총명해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아이입니다.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하고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 그 어머니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어떻습니까? 매우 똑똑하죠?” 그 때,
선생님은 아이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아이가 말씀하신대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아이이긴 합니다만 문제는 가장 기본이
되는 하나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에 이르러 날이 저물었습니다.
그곳에서 마르다라는 여인이 예수님의 일행을 맞이하여 하루를 묶게 되었습니다. 저녁준비에 마르다는 분주했으나 그의 여동생 마리아는
저녁준비는 하지 않고 예수님의 발 옆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참다 못해 불평의 소리를 합니다.“주님,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맡기고 있는데 가만히 있으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도우라고 일러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야,마르다야”하고 화난 그를 두 번씩이나 다정하게 부르시며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을 하지만,
실제로 중요한 것은 한가지이다. 마리아는 그 많은 것들 중에 참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된다”라고 오히려
마리아를 칭찬해 주셨습니다.
23.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분명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그냥 고민하던 문제가 해결되어버리지요. 문제 해결을 하기 위해 여기 저기 기웃거릴 필요 없어요. 골방으로
들어가 문 걸어 잠그고 딱 꿇어앉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 까지 안 일어나겠다는 작심을 하세요. 그러면 들립니다. 그리고 한
가지 절대로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는데...." 라고 말하는 것을 삼가십시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무척 싫어합니다. 그
이유는 저도 모르겠고, 어쨌든 꼭 마음속에 비밀로 간직하십시오. 그 마음속의 비밀이 많은 사람일수록 얼굴 표정을 보면 환하게 빛이
납니다.
/최용우
24.재료가 있어야 불이 탄다
1962년 화재가 발생한
이후 45년 동안 불이 꺼지지 않고 있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콜롬비아 카운티에 위치한 센트레일리아 마을. 그곳은 유령 마을로
전락한 지 오래다. 지난 1984년 주 당국은 거주하고 있던 지역 주민들에 대한 철수명령을 내렸는데, 그 이유는 도로 및 들판 등
마을 곳곳이 화염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40여년 전까지만 해도 센트레일리아 마을은 석탄 채굴로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하던
곳이었다. 이 마을이 재앙에 휩싸인 것은 1962년의 작은 화재 때문이다. 불길은 진화됐지만 불씨가 석탄 광맥에 옮겨 붙었고,
이후 지하에 매장된 석탄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을은 서서히 연소되기 시작해 현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도로 또한 끊어진
상태다. 센트레일리아 마을의 지하에 매장된 석탄이 다 연소되려면 앞으로 250년이 더 걸릴 것이라고 한다.
불꽃이 한 번 타오르면 연료가 바닥날 때까지 계속된다. 우리들에게 성령의 불이 지속적으로 피어오르게 하려면 말씀의 연료가 필요하다.
25.태워도 없어지지 않는 ‘말씀’
어떤 남자가 알코올에
중독돼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어느 사람이 그의 아내에게 성경을 한 권 줬는데 아내는 성경을 읽다 예수를 믿게 됐다. 아내는
성경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고 그것을 보물처럼 여겼다. 하지만 남편은 아내의 새로운 신앙을 비웃기만 했다.하루는 남편이 또 만취해
집에 돌아와 아내의 손에서 성경을 빼앗아 난로속에 던져버렸다.“보자, 네 성경이 뭐가 될지” 다음날 아침 남편은 남은 재를
치우다가 타다 남은 성경 몇쪽을 보게 됐다. 그중 마태복음 24장 35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나의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 구절을 읽고 그는 깜짝 놀랐다. 성령께서 그 경험을 사용하신 것이다. 그는
죄책감을 강하게 느꼈고 결국 그의 영혼은 구원의 믿음을 얻게 됐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브리서 4:12)
/김상복 목사
26.육신이 되신 말씀
예수님의 탄생을 “나심”이 아니라 “오심”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님의 오심을 이렇게 규정할 수 있다.
“대화자”로서
오신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란 맨 처음 거기에는 삶의 “공유”가 있었다. 하지만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로막고 말았다. “대화의 단절”이 생겨났다. 이제는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수준으로
올라서든지 하나님이 인간의 수준으로 내려오든지 둘 중의 하나가 선택되어야 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수준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 죄의 멍에가 너무도 무겁고 컸기 때문이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인간 편으로 내려오셔야 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막힌 대화의 담을 헐어버리셨다. 그는 하늘 보좌의 자리를 버리고 죄인의 자리에 오셨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증언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3056. 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3056
말하기.
말
㉠ 너의 말
2316. θεός, οῦ , ὁ, ἡ
스트롱번호2316
하나님
행28:6
요1:1,18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 헬라어 본문에는 '우리가'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사이에 '또한'(*, 카이)이라는 접속사가 나온다. 이 단어는 '감사'를 강조하기 위한 말일 수도 있고(Bruce) '우리편에서'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Thomas). 후자를 택한다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인 사실에 대해 바울 일행이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 '받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랄라본테스'(*)는 특별히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예언이나 가르침이 다음 세대에 넘겨질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고전 11:2;살후 2:15).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맡씀으로 받음이니
- 앞에 나온 '받음'은 객관적인 받아들임을 나타내는데 반하여 여기에 나오는 '받음'의 헬라어 '에덱사스데'(*)는 주관적인 받아들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열렬히 받아들이는 것을 나타낸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의 말을 스스로 지어낸 인간의 말이라 하여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인들은 바울의 말을 인간적인 차원의 말로 곡해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바울에게 대단한 용기를 심어주는 일이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Surely you remember, brothers, our toil and hardship; we worked night and day in order not to be a burden to anyone while we preached the gospel of God to you.
하나님의 복음(토 유앙겔리온 투 데우) το ευαγγελιον του θεου
the Gospel the of god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려고 자비량 전도에 몰두하였다고 합니다.
자비량 전도를 영어로 텐트 미션(tent mission) 이라고 합니다.
자기 직업을 갖고 생계를 유지하려고 주간에는 일을 하고 야간에는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첫째는 참되신 하나님을 믿는 것(살전 1: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둘째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살전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셋째는 신망애의 삶을 회복하는 것(살전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넷째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행 17: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사도 바울은 최초의 자비량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손수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일을 마친 후에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간절한 노력에 의하여 여로 곳에 세워진 교회들 중에 가장 모범적인 교회는 데살로니가교회이었습니다.
모범적인 교회로 세우기 위하여 바울과 같은 헌신의 삶을 결단하고 그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순수한 믿음을 사모합시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복음(유앙게리온) 2098
하나님(데오스) 2316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가억하리니
- 여기서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동안 자신들이 많은 고생과 고난을 겪어가며 자활(自活) 생활을 한 것을 회상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의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에 바울이 목숨까지 주기를 기뻐하였다(8절).
물론 목숨을 준다는 것은 크고도 먼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증거로 가깝고도 쉬운 문제에서부터 사랑을 실천하였다.
'수고와 애쓴 것'(톤코폰 카이 톤 모크돈)은 자신들을 희생함으로써 초래한 피로와 그러한 수고를 하는 과정에서 직면한 외적인 많은 고난들을 강조한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동안 밤낮으로 손수 노동을 하여 자급전도를 하였으니, 그의 일은 장막 만드는것이었다(행 18:3).
바울의 이러한 솔선 수범하는 자세는 교인들에게도 정당한 근로를 가르칠수 있었던 모범이 되었다(4:11).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 이것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장애도 받지 않으려 한 사실과 그의 사역에 추호의 이기심이나 탐심도 개입되어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처럼 자급 전도하였다(행 20:34, 35; 고전 4:12; 고후 11:8).
한편 바울은 전도자가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말하였으나(고전 9:14), 그는 결코 전도함에 있어서 이 권리를 요구하지 않았다.
때때로 그는 회심자들로부터 선물을 받기도 했고(고후 11:8)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는 빌립보의 형제들에게서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빌 4:16).
그러나 그는 어떤 선물이든지 복음의 확장에 도움이 될 때에만 받아야 함을 중요시하였다.
종일토록 복음을 전파한 바울은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남은 시간을 손수 노동함으로써 그의 회심자들이 자신의 생활비를 보조하는 부담을 갖지 않게 하였다.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 '전파하였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케뤽사멘'(*)은 전달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말을 가감(加減)없이 그대로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메시지를 최선을 다해 그대로 전달하였다.
여기에 복음전도자로서의 바울의 확고한 사명 의식이 깃들어 있다.
1:9 /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복음이란?
1.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살전 1:10)
2. 참되신 하나님을 믿는 것(살전 1:9)
- 우상은 죽은 것, 거짓 된 것
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3. 신망애의 삶을 회복하는 것(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4.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행 17: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바울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가운데 서있던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하여 감사.
그러면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너희를 택하셨다는 확실한 표징임을 말씀.
1.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는 확실한 근거
2. 믿는 자의 본이 되고, 믿음의 소문이 퍼질 수 있었던 이유
3. 믿는 자의 본이 된 구체적 내용
1.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는 근거 혹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5, 6절)
그들이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가운데 서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는 증거. 그러나 그것은 저절로 가만히 앉아서 되는 것은 아님.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고 인간의 응답이 있을 때 가능.
1)하나님의 보내심에 응답하여 수고한 자들이 있다.(5절)
살전1: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구원의 역사는 그냥 쉽게 되는 게 아니다. 성령이 역사하시고 성령이 사람을 세우시고 그 부르심과 세우심에 응답하여 성령이 주시는 능력과 성령이 직접 역사하시는 은혜와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믿음과 확신으로 사람들에게 전함으로 시작된다. 물론 그 다음에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만 우선은 감사와 기쁨과 능력으로 전하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먼저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교회에 감사하고 자신을 구원해 준 교회를 소중히 여기며 동시에 그 바통을 이어받아 그 역할을 해야한다.
2)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고 주님과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아야 한다.(6절)
살전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아무리 능력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진다.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야 한다. 세상적인 어떤 가치기준이나 자신의 어떤 욕망이나 생각대로 말씀을 받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님께 내 자신을 맡기고 내 생각이나 세상의 가치와는 무관하게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도를 받았으면 마땅히 주님과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아야 한다. 주님은 성삼위 하나님이시기에 주님의 삶이 곧 하나님의 뜻이요,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주님이 곧 진리이고 생명이고 은총이다. 우리의 완전한 모델이시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주님을 본받아 따라가야 한다.
뿐만아니라 주님을 본받았으면 그 주님을 따르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을 본받아야 한다. 세상에서 제아무리 영웅호걸이라해도, 제아무리 윤리적으로 선하다해도 인간은 모두 죄인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야 하고 그 주님을 본받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을 본받아야 하는 것이다. 오직 거기에만 생명과 은혜와 기쁨이 있다.
2.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고 주님과 바울을 본받은 결과(8, 9절)
1)믿는 자의 본이 됨(7절)
살전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주님을 본받고, 신실한 믿음의 사람을 본 받아 우리도 본이 되어야. 주님의 빛을 받아 새생명 얻고 더 풍성히 받아 생명의 은총을 누림과 동시에 그 빛을 비추어야 한다. 그럴 때 나도 살고 너도 산다. 그럴 때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교회는 부흥한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되었나?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을 때. 성령의 능력을 덧입을 때, 말씀을 받을 때, 환난과 핍박, 어려움 속에서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말씀을 따를 때. 어디서 능력이 나오나? 어디서 사랑이 나오나? 어디서 참 길을 찾나? 오직 예수님, 오직 말씀. 그러므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으면 그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닮아가며 본이 되는 것이다.
2)믿음의 소문이 퍼짐(8절)
살전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소문이 무섭다. 음식점도 음식을 잘하면 입소문이 퍼져 저절로 잘된다. 교회도 소문이 나야한다. 물론 목회자도 소문이 나야. 성도들도 소문이 나야. 목회자와 성도간에 아름다운 화합이 소문이 나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소문이 나야. 성도와 성도간에 아름다운 사랑이 소문이 나야. 오직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그 안에서 희망과 소망과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소문이 나야.
물론 이런 소문도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을 때. 성령의 능력으로 은혜를 받고 주님과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본 받을 때.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3.소문이 날 정도의 믿음의 내용(9, 10절)
그들이 어떤 믿음위에 있었기에 그렇게 소문이 날 정도였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옴.(9a)
살전1: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우상을 버렸다. 당시는 다신교 사회. 데살로니가는 항구도시. 우상과 음란과 향락의 도시. 그러나 그들이 복음을 받고는 그런 생활에서 떠남. 우상을 버림. 이것이 거룩. 이것은 큰 결단을 요구.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안 그러면 주변의 환경들에게 끌려다님. 센 자석으로 끌려 가듯이.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 성령의 자성체가 되어 성령의 강력한 자석에게 끌려 다녀야. 그러면 모든 우상, 직접적인 우상이든 간접적이든 우상이든 얼마든지 이길 수 있어. 성령의 능력으로 넉넉히 이기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빛을 발할 수 있다.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김(9b)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 이것은 우상과 대비된 하나님의 속성을 말씀. 우상은 죽고 거짓되고 본래부터 생명이 없음. 사람이 부어 만들거나 깍아 만들거나 그려 만든 것. 자기가 만들어 놓고 자기가 섬기는 것. 그래서 거짓 것. 헛된 것. 썩어없어질 것. 인간만도 못한 것.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영원 후까지 살아계신 하나님, 참되신 하나님.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생명의 부여자이시며 주관자이시며 생명력을 공급하시는 분. 동시에 100% 완전하게 참이신 하나님. 오류와 거짓과 부족함과 한계가 없으신 분. 그래서 완전한 참 생명의 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로 이런 하나님을 섬김. 이런 하나님 앞에 경배함. 무릎을 꿇음. 그 앞에 부복함, 주인으로 모심. 그래서 세상의 다른 어떤 것에게 종노릇하지 않고 주님께 종노릇함. 그런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다는 것. 그러니 생명이신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심으로 더욱 능력, 은혜, 사랑, 소망, 믿음의 소문, 생명력, 기쁨이 충만함.
주님의 재림을 기다림(10절)
데살로니가전서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재림과 부활은 데살로니가전 후서의 중요한 주제.
언제 일어나느냐?
어떻게 전개되느냐?
어떻게 기다려야 하느냐?
홀연히 오신다.
도적같이 오신다.(5:14)
어떻게? 호령과 나팔소리로. 구름을 타고.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산 사람은 들림.(4:13-18) 자세는? 소망, 권면, 열심히 일하며, 항상 기뻐하며...(4,5장)
믿음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포함. 현재에 안주해서도 안되고, 미래만 바라보아서도 안됨. 눈앞에 것만 추구하는 것도 문제. 종말만 이야기하는 것도 문제. 종말이 반드시 있을 것. 주님 앞에 설 것. 그러면 현재는 중요치 않나? 아니, 종말이 있기에 현재가 더 중요해짐. 주님 앞에 섰을 때 심판 받아야 하니까? 동시에 그렇게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살아갈 때 우리는 현재적인 천국도 누리는 것. 그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현실적인 어려운 문제들 앞에서도 평안을 누리고 기쁨을 누리게 되었던 것. 그러므로 더욱 믿음의 소문이 나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던 것.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더욱 성령의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자. 그리하여 더욱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만을 바르게 섬기자. 너무 현재에 집착하지 말고 주님 앞에 설날을 생각하며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자. 그래서 우선은 우리 자신이 기쁨과 능력과 은혜와 소망가운데 살아가고 믿는 자의 본이되고 믿음의 소문을 퍼트려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더욱 힘있게 이루어가자.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On the contrary, we speak as men approved by God to
be entrusted with the gospel. We are not trying to please men but God,
who tests our hearts.
감찰(監察) / 볼 감, 살필 찰
감시하고 살피는 것
마음을 영어로 번역할 때 두 가지로 단어로 표현합니다.
첫째는 마인드(Mind)
마인드란 주로 뇌의 영역에 관련되어 의사 결정 및 참과
그릇됨을 판단하는 역할을 하는 기능을 말할 때 마인드라고 합니다.
둘째는 하트(Heart)
하트란 문학적 영역으로 느낌과 정서를 조절하는 기능을 말할 때는 하트(Heart)라고 합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때는 두 가지 영역을 모두 포함합니다.
본문에서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정의를 모두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갈이 아브람의 집에서 도망하여 광야에 머물렀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여 주인에게도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말합니다(창 16:9).
그리고 하갈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하갈은 여호와를 가리켜 "감찰하시는 하나님" 이라고 하였으며 그 지명을 "브엘라해로이"라고 합니다.
'브엘라해로이'란 "나를 감찰하시는 생존자의 우물" 이란 뜻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하갈을 아브람의 집으로 돌려보내시고 장차 그 아들을 통하여 동방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손들이 오늘의 아랍족속입니다.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를 형상하고 있습니다.
만일 아브람이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줄 확신하고 여종 하갈과 동침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원한 적대 관계를 형성하는 이스마엘 족속은 없었을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다리는 믿음의 삶을 회복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온 세상 위하여
예레미야 17:9-11
그 어느 것보다도 비뚤어진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은 심히 악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속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나
여호와는 사람의 속을 살필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을 시험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각 사람이 일하고 행동한 대로 갚을 수
있다.
남을 속여서 부자가 된 사람은 자기가 낳지도 않은 알을 품고 있는 자고새와 같아서, 인생의 중반에 이르면 그 재산을
잃어버릴 것이요, 늙으면 그의 어리석음이 밝히 드러날 것이다.
성경에는 수많은 마음이 언급되어 있다.
간절한 마음(행 17:11),
감사하는 마음(골 3:16),
거만한 마음(잠
16:18),
겸손한 마음(대하 30:11, 빌 2:3),
회개하지 않는 마음(롬 2:5),
교만한 마음(전 7:8, 고전
4:6),
굳건한 마음(행 11:23),
급한 마음(전 5:2, 7:9),
기쁜 마음(출 25:2, 대상 28:21, 엡
6:7),
순전한 마음(행 2:46),
즐거운 마음(신 28:47),
깨끗한 마음(딤후 2:22),
깨달은 마음(고전
14:19),
절제하는 마음(딤후 1:7),
멸시하는 마음(겔 25:15),
무서운 마음(히 10:27),
반역하는 마음(렘
5:23),
반항하는 마음(욥 23:2),
분한 마음(겔 3:14)
온유한 마음(고전 4:21),
사악한 마음(시 101:4),
통회하는 마음(시 51:17),
정직한 마음(왕상 3:6),
성실한 마음(수 14:7, 엡 6:5),
슬기로운 마음(욥 20:3),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잠 6:18),
악한 마음(잠
26:23, 렘 3:17, 7:24, 겔 3:19),
어지러운 마음(사 19:14),
연단된 마음(벧후 2:14),
온전한
마음(창 20:5, 대상 28:9),
완악한 마음(시 9:9, 10:12),
완전한 마음(시 101:2),
음란한 마음(겔
6:9, 호 4:12),
자족하는 마음(딤전 6:6),
정직한 마음(대상 29:17),
정한 마음(시 51:10),
지혜로운
마음(출 31:6, 35:35),
착하고 좋은 마음(눅 8:15),
참는 마음(전 7:8),
청결한 마음(딤전 1:5),
초조한
마음(욥 20:2),
평온한 마음(잠 14:30),
허탄한 마음(사 44:20)
나아만은 겉모습으로는 계급장과 훈장을 줄줄이 붙인 장군이었지만, 옷을 벗고 나면 문둥병 환자였다.
우리도 겉옷과 사회적
타이틀을 벗고서 나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라.
그 다음엔 내 속에 있는 진짜 자아, 나의 마음, 나의 인격을 진단·파악해
보라.
나는 어떤 사람인가?
1. 향기로운 마음 :
남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이다.
벌과 나비에 꿀을 내주는 꽃처럼 베푸는 마음이다.
2. 여유로운 마음 :
풍요를
선물하는 마음이다.
바람과 구름이 평화롭게 머물도록 넉넉한 공간을 비워놓는 하늘 같은 마음이다.
3. 사랑하는 마음 :
존재에 대한
자기와의 약속이다.
믿음의 날실에다 이해라는 구슬을 꿰어놓은 것처럼, 관심 속에 바라봐 주는 마음이다.
4. 정성된 마음 :
자기를
아끼지 않는 헌신의 마음이다.
뜨거움을 참아내며 은은한 향과 맛을 건네주는 녹차와 같은 마음이다.
5. 참는 마음 :
나를 바라보는 선이다.
절제를 통해 부드럽게 마음을 비우는, 대나무 같은 마음이다.
6. 노력하는 마음 :
목표를
향한 끊임없는 투지이다.
깨우침을 위해 세상의 유혹을 떨치고 머리칼을 자르며 공부하는 학생처럼, 꾸준하게 한 길을 걷는 집념이다.
7. 강직한 마음 :
자기를 지키는 용기이다.
흔들림 없이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처럼 한결같은 믿음이다.
8. 선정된 마음 :
나를
바라보게 하는 고요함이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게 하는 햇살처럼 어둠을 물리치고 세상을 환하게 하는 지혜이다.
역대상 28:9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찌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And you, my son Solomon, acknowledge the God of your
father, and serve him with wholehearted devotion and with a willing
mind, for the LORD searches every heart and understands every motive
behind the thoughts. If you seek him, he will be found by you; but if
you forsake him, he will reject you forever.
역대상 29:17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즐거이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I know, my God, that you test the heart and are pleased
with integrity. All these things have I given willingly and with honest
intent. And now I have seen with joy how willingly your people who are
here have given to you.
시편 33:15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
he who forms the hearts of all, who considers everything they do.
시편 11:5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The LORD examines the righteous, but the wicked and those who love violence his soul hates.
로마서 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And he who searches our hearts knows the mind of the
Spirit, because the Spirit intercedes for the saints in accordance with
God's will.
감찰(1381) 도키마조(dŏkimazō ) δοκιμάζω 스트롱번호 1381
* 1384 δόκιμος, ον 스트롱번호1384
생각하다(마 3:9, 눅 17:9, 요 11:13), 주관하다(막 10:42), 알다(눅1:3, 요20:15, 행15:28), 가결하다(행15:22), 유력하다(갈2:6), 보이다(고전12:22), 여기다(고후11:16). [명] 생각 (마17:25, 21:28, 요11:56), 의견(눅10:36).
어느 아이가 길을 가는데 길가에 구리철사와 고물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사방을 둘러 보아도 주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옳다, 됐다 이것을 갖다가 엿이나 사 먹어야겠다'하는 생각을 하고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것을
안고서 몇 발자국 가는데 '이놈! 거기 놓고 가라!'하고 위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 아이는 사방의 땅은 다 둘러 보았지만 전주
위에서 자기를 내려다 보고 있는 전기 수선공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참 어리석은 아이라고 생각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모든
사람들도 이와 같이 어리석은 짓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의 일거수 일투족,
모든 행동과 마음의 생각과 중심까지 꿰뚫어 살피시고 계신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 때가 심히 많습니다.
'들으시는' 하나님인
줄만 알고, '보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33편 13절로 15절에도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감찰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만 아니라 마음의 중심까지도 감찰하시는 분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위선자가 되기도 하고 불행과 패배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라 영(靈)이신고로 우리 눈에는 안 보이시지만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운행하시며 여러분의 마음
중심까지도 지금 이 순간에 살펴보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무엇을 감찰하시는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범죄함을 보십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이 나의 모든 행위를 지켜 보고 계심을
잊고 살기 때문에 범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믿음 좋은 성군(聖君)이었으나 마귀가 그의 눈을 가리우매 목욕하는
여인만을 보았지 자기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여 끔찍스런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범죄함을 불꽃같으신
눈으로 살펴보시고 감찰하고 계심을 의식하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곧 믿음의 생활인 것입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엘리사와 문둥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람 나라의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치고 엘리사에게 은
10달란트와 금 6천개, 그리고 의복 10벌을 엘리사에게 예물로 주었으나 굳이 그것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은 하는
수 없이 예물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그 때 이것을 보고 있던 엘리사의 종인 게하시가 그 예물이 탐이 나 몰래 나아만 장군에게
뒤따라 가서 '주인께서 선지성도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주라 하십니다'하고 속이고는 그것을 받아 가지고 집에다 감추어
두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종 엘리사는 성령 충만한 영감(靈感)의 사람인지라 이 사실을 알고 돌아오는 게하시에게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게하시는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때 엘리사는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을 때냐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가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하고 저주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양심을 지키지 못하고 진실하게 살 줄 몰랐기 때문에
자기와 자기의 후손대에까지 무서운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아간은 아이성 싸움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시날산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과 금 50세겔을 장막 속에 숨겨 두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온 백성이 그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우리가 신앙 생활에 실패하고 마귀에게 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의 마음 속에 무엇인가 숨은 죄가 있고 그것을 들어 내어 놓지 않을 때에 실패하는 수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감찰하신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불행인지 모릅니다.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믿음이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과 똑같이 알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셉은 믿음으로 이 사실을 알고 그러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가 애굽의 장관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할 때에 처음에는 어린 소년으로 왔으나 나이가 점점 들어가자 인물이 뛰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반하여 친절을 베풀고 암시를 주었으나 요셉은 묵묵히 자기의 맡은 일만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요셉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애걸하며 매어 달렸습니다. 이 때 요셉은 창세기 39장 9절에 보면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피하였습니다. 이것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의식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또 다시 요셉의 옷깃을 붙잡고 애원하자 옷을 벗어 던지고 도망쳐 나왔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험을 이긴 것입니다.
여러분! 죄악의 장소는 될 수 있는대로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의지가 굳어서 괜찮습니다.'하고 말합니다만 죄악의 장소는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 일로 인해 그만 사랑이 증오로 변해서 누명을 쓰고 꼼짝없이 감옥에 들어가게 되어 2년 동안이나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지마는 그러나 그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려고 하다보면 때때로 사람에게 오해도 받게 되고 욕도 먹고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변하여 합동하여 유익하게 되어 축복이 되게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혹여나 때 늦게라도 범죄함이 깨달아졌으면 다윗과 같이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진실하게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 우리 하나님은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잠언서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범죄함을 살피시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때 늦은 자라도 범죄함을 깨닫고 애통하며 진실히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는 것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살인 강도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옷을 입고 거룩한 체 하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와 무덤 속의 송장같이 더러운
것이 가득찬 서기관과 제사장과 장로들은 책망하고 저주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진실한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범죄함을 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이것이 진정 믿는 사람의 생활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의 선행(善行)도 감찰하시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말씀하시기를 선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치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갚아
주실 것을 믿어야지,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할 때에는 외식이 되고 위선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구제할 때에
나팔을 불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도 위선자들처럼
회당에서나 큰 길 모퉁이에서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데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금식할 때도 위선자들처럼 사람에게 보이려고 침울한 표정을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받을 것을 이미 다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17절에 보면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내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할 때에 그 모든 의(義)도, 선행(善行)도, 하나님이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면 도리어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옳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곧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3. 하나님은 마음의 숨은 동기(動機)를 보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의 결과보다
우리의 믿음과 생각을 살피시고 행위의 숨은 동기를 더 중요시 하십니다.
창세기 6장 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 하반절에도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는 '모세는 간음하지 말라고 했지마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또 '모세는 살인하지 말라고 했지마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 미워하기만 해도
살인하는 죄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행위로 나타나는 결과보다 마음의 숨은 동기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숨은 동기를 살피신다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그럴듯 하게 변명해도 소용없습니다.
그
마음의 숨은 동기가 하나님 앞에 진실한가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시편 139편 23절과 24절에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하는 시편 기자의 간절한 기도가 곧 우리의 매일매일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생활이란 보이지 않는 것이라도 보는 것 같이 알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마는 불꽃 같으신 눈으로 나의 모든 행위와
마음과 생각의 숨은 동기까지라도 살피시고 계시는 것을 믿고 나갈 때에 진실한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살
때에 우리는 범죄하게 되고 위선자가 되기 쉬운 것입니다.
어느 성도는 '생각마가 주님을 사모하고, 말마다 주님을 증거하고,
걸음마다 주님과 동행하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의식하며 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이 가운데 운행하시며 여러분의 마음 중심을 보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쪼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시고 하나님이 항상 나의 마음을 지켜보고 계심을 믿고 하나님 앞에 진실한 생활을 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사무엘상 16 : 7)
주님은 어떤 사람과도 다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겉모습만 보며 판단한다.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처음 만났을 때 사람들에 대해 신속하게 판단하고 그들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다. 대부분이 의견은 상대방의 옷을 입는 방법, 겉으로 드러난 행동, 심지어 그들이 걷는 방법에서 비롯된다. 비즈니스 인사이더(Business Insider)의 한 기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그는 우리의 옷을 보거나 그 분이 우리를 알기 전에 우리의 첫 번째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그 분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우리를 알고 계셨다.(시 139 : 13-16 참조).
우리가 태어나기 전 부터 우리를 아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은 또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동기를 아신다. 그 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은밀한 것까지 아신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알고 계신다. 그는 우리의 동기를 주의 깊게 바라 보면서 매 순간 마음의 중심을 살피신다. 이 진리는 무서운 것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그것은 가장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 중 하나다. 특히 일상 생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최근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마음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에 대해 소개하며 이 진리가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이유에 대해 소개했다.
1.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것도 위조 할 수 없다.
청소년들이 모인 모임에 가 본적 있는가? 그리고 몇몇은 당신보다 더 좋은 옷을 입은 것을 보았나?
또는 제자 훈련 그룹에 가담하여 자신의 불안감을 느꼈다. 특히 다른 회원들이 자신감 있고 축복을 받은 것 처럼 보일 때 불안한 느낌이 들었는가?
이 같은 순간들은 사람들 앞에서 진정한 모습을 감추는 이미지를 그려지게 한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의 가식"을 입고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이 옳은지 어떤지 보시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위장하고 가짜로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2.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올바르게 살 수 있는 이유가 주어진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동기를 판단하실 것이라고 알려준다. 잠언 16 : 2은 말한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에 무게를 두신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향해 마음의 동기를 숨길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님을 두려워하고 말씀대로 올바르게 생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3. 항상 그분의 사랑을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깨달은 적이 있는가? 로마서 5 : 6-8은 말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라. 하나님은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에도 그렇게 많이 사랑해 주셨다.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 그분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요한복음 3:16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죄에 빠져 갇혀 죽은 사람들을 위해 돌아가셨다. 우리는 불의한 사람들이었다. 인간은 죄를 지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생자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보신다는 사실은 우리를 격려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와 결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
마음은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생각, 인지, 기억, 감정, 의지, 그리고 상상력의 복합체로 드러나는 지능과 의식의 단면을 가리킨다. 이것은 모든 뇌의 인지 과정을 포함한다. "마음"은 가끔 이유를 생각하는 과정을 일컫기도 한다. 보통은 어떠한 실체의 생각과 의식의 능력으로 정의된다.[1]
마음의 정확한 본성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전통적으로 마음은 물질로 이해되었지만 현대 철학자들은 마음을 속성이나 능력의 집합체로 보는 경향이 있다. 철학, 종교, 심리학, 인지과학에서는 마음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마음의 구별되는 속성이 무엇인지, 인간만이 마음을 가진 유일한 존재인지를 탐구하는 오랜 전통이 있다.
마음 또는 정신은 일반적으로 몸, 물질 또는 육체와 대조된다. 이 대조의 본질, 특히 정신과 뇌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심신 문제라고 한다.[2] 전통적인 관점에는 마음이 비물질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이원론과 이상주의가 포함된다.[2] 현대의 견해는 종종 마음이 뇌와 거의 동일하거나 신경 활동과 같은 물리적 현상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물리주의와 기능주의를 중심으로 한다.[3] 또 다른 질문은 어떤 종류의 존재가 마음을 가질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4] 또는 마음이 인간이 만든 일부 유형의 기계의 속성일 수도 있는지 여부도 포함된다.
서로 다른 문화 및 종교적 전통은 종종 서로 다른 마음의 개념을 사용하므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도 서로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을 인간에게만 배타적인 속성으로 보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마음의 속성을 무생물(예: 범심론 및 애니미즘), 동물 및 신에게 돌린다. 가장 초기에 기록된 추측 중 일부는 마음(때때로 영혼 또는 영과 동일한 것으로 묘사됨)을 조로아스터, 붓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및 기타 고대 교리에서 죽음 이후의 삶과 우주론 및 자연 질서에 관한 이론에 연결했다.
프로이트와 제임스와 같은 심리학자와 튜링과 같은 컴퓨터 과학자들은 마음의 본질에 관한 영향력 있는 이론을 발전시켰다. 비생물학적 마음의 가능성은 사이버네틱스 및 정보 이론과 긴밀히 협력하여 비생물학적 기계에 의한 정보 처리가 인간 마음의 정신 현상과 유사하거나 다른 방식을 이해하는 인공 지능 분야에서 탐구된다.[5] 마음은 때때로 감각 인상과 정신 현상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의식의 흐름으로 묘사된다.[6][7]
‘마음이 아프다’, ‘마음가짐이 틀렸다’
마음이란 무엇일까?
마음이 있다면 어디에 있을까?
알 듯하면서도 모르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마음이란 신체의 어느 곳에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 존재하기는 한것일까?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문제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가져왔던 수수께끼였다.
학자들은 마음은 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들 말한다.
혹은 뇌가 바로 마음이라고도 이야기 한다.
현대인과 옛날 사람의 생각이 크게 다른 것은, 옛날 사람들은 마음을 마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제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잠을 잘 때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잠을 자는 상태’는 마음이 일시적이나마 몸에서 떠난다고 생각했으며, ‘잠에서 깨어나는 상태’는 이탈한 혼이 다시 신체 안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죽음’이란 ‘마음이 영구히 몸에서 떠나는 현상’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수시로 몸에 들어오며 나가는 마음은 평소 어디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리스 시대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우리에게 뇌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사물을 생각할 수 있으며, 기분이 좋거나 나쁜 것을 분별해 낼 수 있다’고 말하여, 마음이 머무는 곳을 뇌로 추정했다.
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음은 심장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심장에 마음이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뇌는 ‘점액을 배출하는 점액선, 체온을 조절하는 냉각기’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다소 재미있는 생각을 가졌던 학자가 근대 철학자인 데카르트이다.
데카르트 이전의 사람들은 마음이 몸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움직일 수 있으며, 웃거나 울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혼이 떠나면 육신은 죽고 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이같은 견해를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즉, 혼이 떠난다고 해서 몸의 기능이 중지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을 중지하기 때문에 몸이 죽고, 그 결과 마음이 육체에서 떠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느 쪽이든 마음을 실체로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서로 같으며, 이러한 사고방식은 19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우리들은 마음이 아플 때 가슴을 쓰다듬거나 ‘가슴 속에 간직한다’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마음이 실질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며, 마음이 인간의 몸에 머므르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이 심장 속에 머물러 있다는 사고는 동서를 불문하고 각 나라의 말에도 나타나 있다.
심장을 의미하는 ‘심’자는 마음을 뜻하며,
영어의 하트(heart)라는 단어도 마음과 심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몸 따로 마음 따로
사람의 '마음'은 어디에 존재하고 있을까?
고대 그리스 시대 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는 마음은 뇌에 있다고 했다. 반면에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음은 심장에 있다고 했다. 그는 '마음'은 심장에, 뇌는 점액을 배출하는 곳으로 체온을 조절하는 냉각기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풀이했다. '감정'은 마음에 가깝고, '이성'은 머리에 가깝다는 의미로도 보인다.
근대 철학에 큰 기여를 한 데카르트는 '실체 이원론'을 주창했다. '실체'란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데, 데카르트는 '인간은 정신이라는 실체와 육체라는 실체가 함께 공존하는 독특한 존재'라 규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혼이 떠난다고 몸의 기능이 중지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을 중지하기 때문에 몸이 죽고, 그 결과 마음이 육체에서 떠난다고 보았다.
예전에 어느 드라마에서,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마음이 아프다며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지는 빨간약을 가슴에 바르는 모습으로 전 국민을 눈물바다에 빠뜨린 적이 있다. 이것만 보면 우리는 결국 '마음'은 심장 쪽에 위치해 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받는 모든 자극은 오감을 통해 뇌로 전달되고, 그 뇌에서 신경 세포의 화학적/ 전기적 반응을 통해 감정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을 보면 '마음'이 머리에 있는 것인지, 심장에 있는 것인지 쉬이 결론 내릴 수가 없다.
직장인을 위한 심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전에 다소 원론적이면서도 쉽지 않은 질문을 던져 보았다. 심리학의 기본이 되는 '마음'에 대한 것. 그것에 대해 우리는 인지를 하고 실체를 파악해야 한다. 바쁜 일상과 꾸역꾸역 반복되는 지친 생활 속에서 우리는 입으로는 영혼을 운운하며 '이원론'을 농담 삼아 외쳐대지만, 정작 그것을 따로 두고 보아 각자의 마음을 관찰하거나 위로하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심리학을 좀 더 알아야 하는 이유이자, 직장인으로서 수많은 자극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그것으로 받은 상처를 어떻게 보듬을 것이냐 하는 자기 생존의 목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을 공부하고, 심리학의 눈으로 '직장'을 바라보기 전에 심리학의 기본에 대해 몇 가지 짚어보고 넘어가고자 한다. 그 옛날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젊었을 때의 열정을 떠올리며 차근차근 같이 알아나가 보는 것이 좋겠다.
엘 로이 : 뜻은 ‘보시는 하나님’이다.
엘은 하나님이고, 로이는 '보다'는 뜻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곳은 하갈이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와 위로하는 장면 이후에 나온다.
하갈은 하나님을 만난 후 이렇게 고백한다.
창세기 16: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하갈은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무시하는 하갈을 내어 쫓는다.
자신의 잘못 때문이기도 하지만 억울하다.
철저히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길을 잃고 죽음을 준비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
하나님은 하길을 보고 계셨다.
하나님은 살피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신다.
오직(*, 알라) - 이 말은 바울이 앞절에 열거한 것과 같은 이교도들의 중상 모략에 대하여 더욱 강한 어조로 상세하게 변호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 '옳게 여기심'으로 변역된 '데도키마스메다'(*)는 금과 은의 제련에 사용되는 말로서 시험을 통해 그 진가를 알아내는 것을 가리킨다(벧전 1:7).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받은 후에 합격하여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위임되었음을 강조한다(행 9:1-31).'부탁을 받았으니'의 헬라어 '피스튜데나이'(*)는 보통 '믿는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바울을 전도자로 신임하시고복음을 맡기셨음을 뜻한다. 분명 복음은 신적 기원을 가진 것이기에(2절)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법을 통해 그의 사신(使臣)을 선택하실때에만 복음의 위임이 가능하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사무엘상 16 : 7)
주님은 어떤 사람과도 다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겉모습만 보며 판단한다.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처음 만났을 때 사람들에 대해 신속하게 판단하고 그들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다. 대부분이 의견은 상대방의 옷을 입는 방법, 겉으로 드러난 행동, 심지어 그들이 걷는 방법에서 비롯된다. 비즈니스 인사이더(Business Insider)의 한 기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그는 우리의 옷을 보거나 그 분이 우리를 알기 전에 우리의 첫 번째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그 분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우리를 알고 계셨다.(시 139 : 13-16 참조).
우리가 태어나기 전 부터 우리를 아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은 또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동기를 아신다. 그 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은밀한 것까지 아신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알고 계신다. 그는 우리의 동기를 주의 깊게 바라 보면서 매 순간 마음의 중심을 살피신다. 이 진리는 무서운 것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그것은 가장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 중 하나다. 특히 일상 생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최근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마음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에 대해 소개하며 이 진리가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이유에 대해 소개했다.
1.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것도 위조 할 수 없다.
청소년들이 모인 모임에 가 본적 있는가? 그리고 몇몇은 당신보다 더 좋은 옷을 입은 것을 보았나?
또는 제자 훈련 그룹에 가담하여 자신의 불안감을 느꼈다. 특히 다른 회원들이 자신감 있고 축복을 받은 것 처럼 보일 때 불안한 느낌이 들었는가?
이 같은 순간들은 사람들 앞에서 진정한 모습을 감추는 이미지를 그려지게 한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의 가식"을 입고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이 옳은지 어떤지 보시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위장하고 가짜로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2.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올바르게 살 수 있는 이유가 주어진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동기를 판단하실 것이라고 알려준다. 잠언 16 : 2은 말한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에 무게를 두신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향해 마음의 동기를 숨길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님을 두려워하고 말씀대로 올바르게 생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3. 항상 그분의 사랑을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깨달은 적이 있는가? 로마서 5 : 6-8은 말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라. 하나님은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에도 그렇게 많이 사랑해 주셨다.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 그분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요한복음 3:16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죄에 빠져 갇혀 죽은 사람들을 위해 돌아가셨다. 우리는 불의한 사람들이었다. 인간은 죄를 지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생자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보신다는 사실은 우리를 격려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와 결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민 목회를 하고 있는 한 목사님이 18년 만에 영등포에서 섬기던 교회에 부흥 사경회 인도차 왔습니다. 옛날에 같이 섬기던 한
권사님이 찾아와서 “목사님 어쩌면 18년 만에 오셨는데 옛날과 변하지 않으신 그 모습 그대로 예요? 조금도 늙지 않으셨네요!”라고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목사님은 기분이 매우 좋았습니다. 예배당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다른 권사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권사님은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목사님, 미국에서 목회하시기에 매우 고달픈 모양이시죠? 18년 동안 못 본 사이에 어쩌면 그렇게 팍
늙으셨어요?”하며 혀를 차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전에 좋았던 기분이 싹 가시면서 “아 아니 예배당 건물 모퉁이를 도는 사이에
내가 그렇게 팍 늙었나?”라고 중얼거렸답니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요즈음은 지구촌 어디에 가서 산다 할지라도 서로가 서로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비행기나 인공위성을 타고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잠수함을 타고 바다 속으로 내려갈지라도, 지하 수백 m의 지하철을 타고 간다 할지라도 도청을 당하고 감시를 받고 있는 현실입니다. 영국의 목회자이며 시편강해의 대가였던 스펄전(Spurgeon)은“시 139편은 하나님의 전지와 전능을 나타내는데 이 시의 밝기는 사파이어나 에스겔이 말한 ‘굉장한 수정’(겔 1:22)과 비슷하다. 이 시는 밤을 낮으로 만들 정도로 번쩍이며 빛난다. 이 거룩한 노래는 등대처럼 바다의 아주 먼 곳까지 밝은 빛을 비춘다.”고 말했습니다.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의 심신과 영혼 속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1. 우리를 감찰하고 계시는 하나님 !
다윗은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시139:1)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 중에서 특별히 우리를 감찰하시고, 주목하여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요한은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 2:25)고 말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하나님께 굳이 설명을 해드리지 않아도, 자식이 부모를 위해 하나님께 굳이 설명을 해드리지 않아도 하나님은 다 잘 아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속담에도 “하나님이 아신다.”“하나님만이 알고 계셔”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신다”는 이 말은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므로 신원할 일은 신원하시고, 심판할 이는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시편 기자는 “대저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시 44:21)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생각까지 꿰뚫어 알고 계시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숨길 수 없고, 또 아무리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도망간다
하더라도 숨을 곳이 없습니다. 사람은“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싫어하며 외면하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끝까지 지키시고 샅샅이
살피십니다.
2. 우리를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
사람은 아무리 똑똑해도 한 치의 앞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멍청스러운 짓을 하기 일쑤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병원 심방을 갔습니다. 할머니의 병문안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침대 옆에 있는 땅콩을 다 집어 먹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할머니 제가 그만 땅콩이 맛이 있어서 땅콩을 다 먹었네요. 할머니가 괜찮아요. 쪼콜렛은 내가 다 빨아 먹었어요. 땅콩은 내가 이빨이 없어서 못 먹고 남겨 둔거예요. 괜찮아요 잘 잡수셨어요..,
다윗은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39:2-4)라고 말했습니다.
“통촉하신다.”는 말은 꿰뚫어 보신다는 말입니다. 주께서는 나와 우리를 아시며 나와 우리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조용히 앉아 있을 때도 관찰되며, 결연히 일어설 때도 주목받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가장 일반적이고 평범한 행동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필수적인 운동들을 주목하시며, 그것들을 규제하는 내면의 생각을 아십니다. 우리가 비천한 자포자기에 빠지든지, 교만하여 고개를 쳐들든지, 주께서는 우리 몸의 동작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의 움직임을 보십니다.
이는 매 순간 기억해야 할 사실입니다. 생각하기 위하여 앉든지, 행동하기 위하여 일어서든지 우리는 언제나 우리 주 여호와께 관찰되고 인식되고 통찰됩니다.
다윗은 “악인의 악을 끊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心腸)을 감찰하시나이다”(시 7:9)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찰하신다는 말이 수없이 거듭 되풀이 됩니다.
하갈은 사라의 질투로 쫓겨나 광야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을 때 너무나 감격하여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창 16:13)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곱은 자기를 속인 외삼촌에게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셨다”(창
31:42)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예비하옵소서”(렘 12:3)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시 10:13)고 합니다.
다윗은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알아”(대상 29:17) 하나님의 전을 짓기 위한 모든 물품을 모아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그 아들 솔로몬에게 교훈하기를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고 권면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속마음을 샅샅이 다 살피고 감찰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 또는 용서하심만을 생각한 나머지 하나님의 감찰하심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앉고 섬을 아시고 먼데서도 우리의 모든 행동과 마음을 꿰뚫어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순간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3.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 !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방법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믿고 열심히 노력하고 순종하면 됩니다.
믿음이 좋은 어느 여집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녀의 기도의 제목 1호는 남편의 구원이었습니다. 기도하고 금식하고 전도해도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어느 날 새벽 예배 시간에 남편의 구두를 가지고 나와서 강대상 앞에 놓고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구두가 먼저 나왔사오니 주인도 이 구두 따라 나오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여집사는 그런 기도를 하고 한참 웃었다고 합니다. 그 날 다른 기도는 못하고 실컷 웃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남편이 느닷없이 교회에 나가겠다고 자청하여 나오기 시작하더니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잘 나온다고 합니다.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웃기고 웃었더니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 주시더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늙은 사라를 웃겼고, 사라는 하나님을 웃겼습니다. 다시 1년 후에 하나님은 사라와 아브라함을 웃겼습니다. 이삭은 웃음의 열매입니다. 욥은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걸음을 감찰하시니 악을 행한 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어두운 그늘이 없느니라”(욥 34:21, 22)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고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시 33:15)라면 사실 인간은 한없이 불안한 위치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순간이라도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또는 우리의 소원대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이익을 찾고 즐거움을 찾아가곤 하는 마음의 충동을 언제나 억제당해야 할 것이므로 악인들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이 한없이 미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생활은 언제나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감시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길과 눕는 것을 아신다”거나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 때 그것은 성도로 하여금 의의 길로 가도록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고 계시다는 든든한 마음으로 그의 감찰하심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4)고 말했습니다.
끝맺는 말
다윗은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 10:4) 라고 말했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이 감찰치 아니하신다고 생각하면서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가장 무서운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자들보다 더 무서운 자들은 없습니다.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고 당부의 말을 했습니다.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10:30-3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And so you became a model to all the believers in Macedonia and Achaia.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 실라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신앙의 본이 되었던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헬라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본이 되었다고 합니다.
신앙의 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sample(견본)
model(모델)
example(예)
"본"이란 헬라 단어는 "투포스(τύπος)" 라고 합니다.
'투포스'는 '찍어서 생긴 표', '일격을 가한 흔적' 이란 뜻으로 '똑같이 따르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예수님을 따라 살았던 것처럼 세상에 흩어진 모든 성도들도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투포스'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첫째는 "거울" 둘째는 "본보기" 라고 번역합니다.
따라서 믿는 자의 본이란 믿는 자의 거울이 되라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면 나를 통하여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믿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 없고 오히려 더럽고 추한 것들만 드러나기 때문에 복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도록 안내할 수 있는 신앙의 이정표 역할을 바르게 감당해야 합니다.
믿는 자의 본이란 믿는 자의 본보기가 되라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쟁에 휘말린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 되라"(고전 11:1)
어미 게가 옆으로만 기어가면서 새끼들에게 너희들은 앞으로 가야 한다고 가르칠 때 앞으로 가는 것을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새끼들이 그러면 앞으로 가는 것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어미 게가 새끼들이 보는 앞에서 자 봐라 앞으로 간다 하며 여전히 옆으로 기어갑니다.
그러자 새끼들도 옆으로 기어가면서 보세요 우리도 앞으로 가고 있어요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의 시대는 복음을 말로만 전하면 듣지를 못합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성공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본이 될 수 있는 말과 행실을 회복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예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성공하는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마게도냐와 아가야'는 B.C. 146년 이후 헬라 지경의 두개의 거대한 주로서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는데 마게도냐의 수도는 데살로니가
이며 아가야의 수도는 고린도였다.
특별히 마게도냐의 수도인 데살로니가는 남방 유럽의 상업 중심 도시로서 이러한 지리적 조건에 의해 그들의 신앙을 더욱더 급속히
헬라 전 지역에 전파(傳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요인은 그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전하였다는 것에 있으며, 아울러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본이 되었다는 데에 있다.
'본'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포스(τύπος)는 '찍어서 생긴 표', '일격을 가한 흔적'이란 뜻으로서 '똑같이 따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5179) 투포스(tüpŏs) τύπος, ου, ὁ
연관 단어 관련 성경
자국(요 20:25), 형상(행 7:43), 양식(행 7: 44), 모형(롬 5:14), 본(롬 6:17, 살후 3:9, 벧전 5:3), 본보기(고전 10:6,11).
믿음을 위한 거울(고린도전서 10:1-11)
본문에는 ‘본보기’라는 말이 6절과 11절에 두 번 나오고 있습니다.
이 ‘본보기’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투포스(τύπος)' 라고 합니다.
'투포스'라는 단어에서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본보기
둘째는 거울
‘거울’이란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는 도구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기록된 사건들을 보면서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살펴뱌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말씀의 거울" 이라고 합니다.
가령 장례식장에 갔을 때는 나도 죽을 것이라는 명제를 생각하며 남은 때를 조금 더 경건하게 살아가려고 다짐합니다.
결혼식장에 갔을 때는 과연 가정의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장례식장에 가서 결혼식에서 생각해야 할 명제를 생각하고 결혼식장에 가서 장례식장에서 생각해야 할 명제를 찾는다면 이러한 생각은 건전한 생각이 아닙니다.
경우에 맞는 생각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한 랍비가 제자에게 물었어요.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하고 나왔는데 한 아이의 얼굴은 시커먼 그을음이 묻어 있었고, 다른 아이의 얼굴에는 그을음이 없었네.
그렇다면 두 아이 중에서 누가 얼굴을 씻었겠는가?"
"그야 물론 얼굴이 더러운 아이겠지요."
제자의 대답에 랍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어요.
"그렇지 않아.
얼굴이 더러운 아이는 깨끗한 아이를 보고 자기 얼굴도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씻지 않지.
하지만 얼굴이 깨끗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매진 아이를 보고 자기 얼굴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씻는다네."
"과연 그렇겠군요."
제자들은 고개를 끄덕였어요.
랍비가 다시 물었어요.
"그렇다면 다시 같은 질문을 하지.
굴뚝 청소를 마치고 나온 두 아이가 있네.
한 아이의 얼굴은 그을음으로 더러워져 있었고, 다른 아이는 그을음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얼굴이었네.
두 아이 중 누가 세수를 하겠는가?"
제자가 당연하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어요.
"얼굴이 깨끗한 아이겠지요."
랍비가 다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어요.
"두 아이 모두 굴뚝 청소를 했는데, 어떻게 한 아이는 얼굴이 깨끗하고, 한 아이는 더러울 수 있단 말인가?"
진정
자기를 보기 원한다면 다른 사람의 상한 얼굴을 보면서 내 얼굴이 상한 것을 알고, 다른 사람의 사건을 보면서 그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불 수 있어야 합니다. 그와 같은 마음 자세가 바로 거울을 바르게 보는 마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건이나
물체, 혹은 인격이나 역사에 자기 자신을 투영시켜서 그래서 자기의 참 모습을 볼 줄 아는 것이 바로 거울을 보는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거울을 본다고 하였을 때, 거울 그 자체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러나 그보다는 거울을 보는 자세 ― 다시 말해서 거울을 보는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되는가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그러면 거울을 봄에 있어서 가져야 하는 절대적인 조건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첫째는, 거울에 비친 사람과 자신과는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이것이 나와는 다르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추녀는 거울을 싫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못생긴 얼굴이 보기 싫어서, 그래서 거울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의 얼굴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보기 싫어도 보아야 하는 것이 거울입니다. 자기 얼굴이 보기 싫다고 하여 다른 사람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거울에 비춰진 얼굴을 그대로 자기의 얼굴로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을 가지고서야 거울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저기 저 모습과 나와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고 ㅡ 그런 사람에게는 ‘거울’이란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것이 될 뿐인 것입니다.
옛날 이야기 중에 거울에 얽힌 이런 이야기
한
시골의 나무꾼이 장가를 갔습니다.
아내가 여간 사랑스럽지가 않았지요.
그래서 하루는 나무를 팔아서 모은 돈으로 아내를 위해
무엇을 선물할까 생각하며 시장바닥을 서성이고 있는데, 한 박물장수가 조그만 물건을 내다보이면서, 이것이 ‘거울’이라는 것인데
당신 마누라에게 사다주면 아주 좋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거울을
처음 보는지라 들여다보니 여간 신기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서는 곧장 집으로 달려왔는데, 마침 아내가 빨래를 하러 가서
집안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나무꾼은 거울을 방안에다 두고는, 그 동안 나무를 좀 더 하겠다며 산으로 갔습니다.
조금
후 이 부인이 돌아와서 방안에 놓여있는 거울을 들여다보니 예쁜 여자가 거기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혼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다른 여자를 집안에 데려다 놓았다며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시어머니가 며느리 울음소리를 듣고는
달려와서 왜 그러냐고 묻습니다.
며느리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후에, 어디 보자며 거울을 들여다 보고나서는 무어라고
말하였겠습니까?
“색시는 무슨 색시냐? 할망구다. 걱정마라. 데려오려면 예쁜 것이나 데려올 것이지, 뭐 저런 다 늙어빠진
할망구를 데려왔겠느냐?”
내 얼굴과 거울에 비친 얼굴은 같은
얼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지금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여러분께서는 그와 같은 동질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당하는 사건―그 실패―그 실수―그 죽음을 보면서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철저히 타인의 것으로, 강 건너 불처럼, 전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질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거울 앞에 진실해야 하고, 거기에서 내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조건으로서는, 소경에게는 거울이 필요치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를 살피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만
거울을 필요로 한다는 말입니다. 하루를 가고 이틀을 가도 자기에 대한 성찰을 하지 않을 때에는, 거울이란 그에게 있어서는 필요가
없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의 거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면서도 하루 종일 생활을 하는 동안에 성경을 단 한 절도 보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루 종일 거울을 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거울은 자기 성찰을 하는 자만이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마음이 없는 사람은 거울을 볼 필요도 없거니와, 본다고 하더라도 아무 것도 보이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세 번째는, 거울 자체를 놓고 시비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진을 찍는 분들이 하는 말에 의하면, 찍어 놓은 자기 사진을 보면서 거기에 어떻게 나왔든지 간에 잘 나왔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제나 사진사를 나무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사진이라면 거기에 눈을 감았던 입을 비뚤어지게 하고 있던, 어쨌든 그 순간의 자기 자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놓고 타박을 한다면, 이 사진 속의 내 모습은 그러면 어디에서 온 것이란 말입니까?
거울에 나타난 내 모습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거울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거울이 잘못되었다며 비판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비판의 결국은 자기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매사에 밖을 향해 원망하고 시비하는 것은 ‘거울을 보는 자세’가 잘못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 속’에 거울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친절하게 하거든 내가 친절하게 대한 것으로 알고, 다른 사람들이 무엇인가 나에게 잘못 대하거든 나에게 잘못이 있는 것으로 아는 그것이 바로 거울을 바르게 보는 마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본보기―거울’이라는 말을 하시면서, 지금까지 제가 말씀 드린 것과 같은 일반적인 이론이나 단순한 신학적 논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가운데서도 아주 구체적인 한 사건을 예로 들어서, 아주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모두 보는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출애굽과 그 구원의 역사를 예로 들어서 이것을 하나의 ‘거울’로 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성경을 바로 나를 비추어보는 ‘거울’로서 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 성경에 나타난 역사, 성경에 나타난 사건―이 모두가 다 본보기가 되고 표본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신구약 성경 속에서 참으로 많은 사건과 많은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누가 복을 받았고 누가 저주를 받았으며, 어떤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어떤 때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는지를 압니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얼굴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출애굽의 역사를 ‘거울’로 이야기함에 있어서, 특별히 몇 가지 구체적인 상황을 들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보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서, 애굽에서 출애굽하여 나왔다고 하는 것과, 그리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기다리며 광야에 머물러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광야 교회인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 구원받고 천국을 가기 위해 지금 교회에서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광야에서 생활을 한 것은 바로 우리 성도들의 오늘의 생활에 있어서 ‘거울’이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철저히 같은 운명에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받아 출애굽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는 과정들을 곰곰이 살펴보세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죄 아래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무슨 능력이 있어서 자기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로서 된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된 것도 그들이 무슨 그 은총을 받을 만한 어떤 자격이 있어서 된 것도 아니었고, 그들은 그저 무력하고 스스로서는 아무런 내세울만한 것이 없는 단순한 노예였을 뿐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단순히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사 그들을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써 구원하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 우리의 힘으로 구원 얻은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써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그 은총을 받을 만한 어떤 자격이 있어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단순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어 구원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을 하는데 있어서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 홍해를 건너기 전까지는 그들은 출애굽을 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애굽 땅에 있었고, 이제 홍해를 건넘으로써 그들은 완전히 애굽 땅을 벗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홍해를 건넌 것’도 오늘 우리가 구원을 받음에 있어서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죄에서부터 용서함을 받았고,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는 표징으로서 ‘세례’를 받지 않습니까? 우리가 죄의 노예에서――말하자면 애굽의 노예상태인 것이지요.――여기에서 우리는 출애굽을 하였습니다. 구원받은 것이지요. 그리고 죄에서 완전히 구원받았다는 표징으로서――말하자면 애굽 땅을 완전히 벗어난 표징으로써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받는 이 세례를 옛날 이스라엘이 받았던 ‘홍해를 건너는 세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넜다고 해서 곧 바로 가나안땅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하였고, 여기서 율법을 받고 성막을 중심하여 생활을 하며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한 훈련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요단강을 건넘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이제 40년 동안의 광야생활 ― 이것은 바로 우리의 일생에 해당하는 기간인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교회를 중심하여 믿음의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 나라에 갈 시간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장례식 때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하고 찬송하지 않습니까? 이 요단강을 건넘으로 우리는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광야에 머무르면서 광야교회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광야 교회에서의 우리의 모습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옛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거울로 하여서 볼 때, 우리가 이 기간 동안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 것입니까?
우선 아직 출애굽하지 못한 부분을 완전히 출애굽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세요. 그들은 애굽에서 나오기는 하였지만, 완전히 애굽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걸핏하면 ‘애굽의 국솥’을 생각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지요.
이 잘못된 옛 버릇을 완전히 끊어버리기까지에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합니다. 나쁜 습관, 나쁜 성격, 나쁜 세계관 등등 이 잘못된 것들을 철저히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치는 것’이 그리 쉽게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시간과 훈련의 기간을 통하여 고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여 홍해를 건넜지만, 그 다음이 바로 가나안이 아니라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40년의 훈련의 기간이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필요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곰곰이 한번 살펴보십시오. 솔직히 어떤 때에 보면 천사와 같고, 어떤 때에 보면 사실이지 이제 막 지옥에서 튀어나온 악마와 같지 않습니까?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정말이지 말씀하신 그대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엎치락뒤치락 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그런 모습에 대해서는 ‘인간인고로’하면서 관용으로 보아주면서, 왜 다른 사람이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냉철하게 심판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흔히들 말하기를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바다처럼 관용하고, 남에게 대해서는 바늘처럼 예민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애굽의 죄악된 생활의 잔재로서 가지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사실은 그래서 우리 인간사에 그렇게도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광야 교회라는 것은, 애굽에서 나오긴 하였음으로 원칙적으로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옛 습관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채, 이렇게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많은 시련과 많은 사건들 속에서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지금 성화되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앞으로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에서 지키게 될 소중한 율법을 미리 받아 그 법을 하나 둘씩 익혀 나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지 위해서 새로운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란 그러므로 천국 생활을 위한 오리엔테이션 기간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영화의 예고편과도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이것이 모두가 아닙니다! 저 하늘나라의 영원한 세계를 오늘 여기에서 보여주는 하나의 예고편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사랑과 겸손을 배우고, 인내를 배우는 등 필요한 것들을 다 배워 나가고 있는 이것이 바로 교회 생활인 것입니다.
혹 어떤 사람은 이 광야에서의 훈련과정이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왜 이렇게 이 광야의 기간을 두어서 고생을 시키느냐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그 길로 곧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간다면, 가나안에 가더라도 살지를 못합니다. 공간적으로 땅만 옮겨 놓았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돈이 좋다고는 하지만 돈을 관리할 줄 아는 지혜와 능력과 인격을 갖추기 전에 돈을 주면 다 망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도 망하고 다른 사람도 망하고, 결국은 나라도 망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복 주세요. 돈 주세요”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그것처럼 한심한 소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애굽에서의 국솥’얘기를 하면서 조르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메추라기와 만나를 이미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에 따라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주시겠습니까? 아직 주시지 않은 것은 주어서는 안 될, 혹은 자격 미달이기 때문에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또는 더 큰 뜻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세요. 바울은 자기 몸에 있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주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오직 ‘아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대로가 다 내게 필요하기에 주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원망을 하다가 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두 거울이 있습니다. 원망만 하던 거울과, 또한 사도 바울이 ‘내게 주신 은혜’라고 오히려 감사하는 이 두 거울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 내게 주신 현실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할 것인가를 배울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다시 한 번 거울을 봅니다. 거울을 통하여 자신을 보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죄스러운 모습을 보는가 하면,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게 됩니다. 내 믿음의 상태와 정도를 거울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울로 보면서 내 운명을 보십시다. 이렇게 원망하다가는 저렇게 죽어갈 것입니다. 여기 이렇게 회개하고야 저렇게 구원받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울을 통하여 나의 운명, 나의 미래, 나의 종말을 보는 마음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거울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잡다한 현실 속에 깊이 계시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그리스도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거울을 보는 마음으로 성경을 대하고, 그 사건―그 인물들을 거울로 삼아 그 속에서 언제나 내 모습, 내 믿음, 내 운명을 보며, 더욱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볼 줄 아는 그런 은혜가 여러분모두에게 항상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1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깊이 마음속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기록된 말씀을 이렇게 받아들일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유대교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성령이 주시는 기쁨 안에서 복음을 받아들였고,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 마게도냐(데살로니가의 수도)
* 아가야(고린도의 수도)
당시 그리스는 북쪽 마게도냐와 남쪽 아가야로 나뒤어져 있었습니다.
"우리와 주를 본 받은 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사도들과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랐다는 뜻입니다(고전 11:1; 빌 3:17).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신앙 생활을 본
받았고, 이는 결과적으로 주를 본 받은 것이 되었습니다.
복음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중심으로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으로 널리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머물고 있었던 아가야의 수도인
고린도까지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이 알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소문의 내용은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굳건히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은 당시 사회, 종교적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성결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우상을 버리고 참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상'은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 도시로 갈
수 있는 도로가 있는 도시의 특징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대가 발달해 있으며, 이러한 도시는 음란함과 혼합 종교가 크게
나타나게 됩니다.
즉,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그 말씀을 전하는데 힘을 쏟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이기게하고, 관계를 잘 이어가도록 합니다.
사랑은 책임이며 희생이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됩니다.
어려움을
견디며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은기다리고 인내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이며, 사랑의 본질이며, 소망의
대상입니다.
그분이 누구시고 어떤 삶을 사셨는지를 알면 그 분에게 소망을 둘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라고 해서 쉽게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먹을 물이 없어도 바닷물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말씀이 기초가
되고 중심이 되어 믿음의 본을 보이며,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살전 1장 / 재림의 소망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이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됨을 칭찬하는 내용의 인사말
살전 2장 / 재림 때의 영광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증거할 때의 심정과 자세를 기록한 내용
살전 3장 / 재림을 위한 준비
디모데를 통해 들은 데살로니가의 안부와 데살로니가를 다시 방문하고 싶어하는 바울
살전 4장 / 재림의 위로
주 재림 때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함께 데리고 오실 것에 대한 예언
살전 5장 / 재림의 임박성, 긴급함
'주의 날'의 때와 시기에 관한 예언과 이를 준비하는 자들의 자세에 대한 권면
살후 1장 / 그리스도의 재림
살후 2장 / 적그리스도의 반역
살후 3장 / 그리스도인의 윤리(거룩)
파트리스교회(πατρίς ἐκκλησία)
πατρίς, ίδος, ἡ
스트롱번호 3968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고향(마 13:54, 눅 4:23, 요 4:44), 본향(히 11:14)
* 3962. πατήρ, πατρός, ὁ
스트롱번호 3962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Paul, Silas and Timothy, To the church of the Thessalonians in God the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Grace and peace to you.
데살로니가전서 1장 : 재림의 소망
* 데살로니가(Thesalonica) : 하나님의 승리
1. 자유시로서 시장이 모든 일을 처리 하였다(행 17:1-13).
2. 바울이 2차 여행 때 이곳에서 얼마동안
전도하였고(행 17:1-13).
성경은 예언의 말씀입니다.
구약은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초림(初臨, First Coming)에 대한 예언
신약은 오신 메시아 예언에 대한 성취와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에 대한 예언이라고 하겠습니다.
재림(再臨, Second Coming)에 대한 예언
따라서 마지막 남은 예언은 다시 오실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는 마지막 예언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먼저 데살로니가전서 1장을 읽어야 합니다.
묵상의 주제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 바울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합니다.
마침 데살로니가에 유대인의 회당이 있으므로 그곳에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할 때 귀부인들과 경건한 헬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성을 소란케 하며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 내려고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맞아들였다고 하며 이 사람들이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고 고소합니다.
그러자 읍장들은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아주었습니다.
결국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칠 때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데살로니가(Thesalonica)는 "하나님의 승리"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는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 대략 3주간 동안 머물면서 그곳에서 말씀을 가르쳤으며 그때 세워진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말씀위에 세워진 교회
둘째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교회
셋째는 신앙의 덕을 갖춘 교회
우리 주위에서 교회를 자랑하는 내용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신앙적인 내용 보다는 세속적인 내용을 강조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처럼 신앙의 내용을 갖춘 교회로 회복하여 하나님의 승리를 자랑하는 교회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시온성과 같은 교회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We always thank God for all of you, mentioning you in our prayers.
1. 당신이 지쳐서 기도 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
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약함을
사랑으로 돌봐주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2. 당신이 외로이 홀로 남았을 때
당신은 누구에게 위로를 얻나
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마음을
그대 홀로 있지 못함을
조용히 그대 위해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사도 바울은 두 가지를 약속합니다.
첫째는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는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무엇 때문에 감사할까요?
감사는 영적 보호와 같습니다.
감사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의 감사는 비록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신령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자연 재해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세상에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우리들을 지켜주십니다.
그 은혜는 곧 영적 보호와 같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도할까요?
기도는 영적 교제와 같습니다.
무엇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나의 모든 것을 맡기려고 기도합니다.
내 생각과 계획과 방법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기도합니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한다는 믿음과 더불어 나도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의 여유를 갖는 은총의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딜레마(Dilemma, 딜렘마)는 두 가지 옵션 중 각각 받아들이기 어려우거나 불리한 어려운 상태를 말한다.
세 가지의 경우는 트릴레마라고 한다.
딜레마의 어원은 그리스어 di(두 번)과 lemma(제안, 명제)의 합성어로된 '두 개의 제안'이라는 뜻으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의미이다.
고슴도치 딜레마
추운 날씨에 두 마리의 고슴도치가 모여 서로를 따뜻하게 하고 싶어하지만 서로의 바늘 때문에 접근할 수 없었고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체온을 나누었다는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우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서로의 온기를 위해 몇 마리의 고슴도치가 모여있었다.
하지만 고슴도치들이 모일수록 그들의 바늘이 서로를
찌르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떨어질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추위는 고슴도치들을 다시 모이게끔 하였고,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기
시작하였다.
많은 수의 모임과 헤어짐을 반복한 고슴도치들은 다른 고슴도치와 최소한의 간격을 두는 것이 최고의 수단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와 같이 인간 사회의 필요로 인하여 인간이라는 고슴도치들이 모이게 되었지만, 그들은 인간의 가시투성이의 본성으로
서로를 상처 입힐 뿐이었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서로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예의를 발견하였으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서로의 거리를
지키기 위해 거칠게 말해지곤 하였다.
이 방법을 통해 서로의 온기는 적당히 만족되었으며, 또한 인간들은 서로의 가시에 찔릴 일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남을 찌를 수도, 자신을 찌를 수도 없었던 사람은 자신만의 온기로 추운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 '너희 무리를 인하여'(페리 판톤 휘몬)란 말은 '너희 모든 무리를 인하여'(forall of you, NIV)란 말로 번역할 수 있다.
이 말 속에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 중어느 누구라도 제외시키지 않으려는 사도 바울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비록 복음의 역사는 짧으나 성도들이 복음에 근거한 바른 신앙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날마다 성장하고 있었다.
바울은 이처럼 성장하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사도의 이런 감사는 관습적이며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부터 부단히 계속되는 참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의 '감사하고'에 행동하는 헬라어 동사 '유카리스투멘'(*)이 현재형이며 '항상'(*, 판토테)이라는 부사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한편 본절 초두의 '우리'는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1절에 언급된 '실라'와 '디모데'도 동일한 감사의 마음을 가졌음을 나타낸다.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 바울은 '말함' (므네이안 포이우메노이)이란 말을 오직 기도와 관련된 부분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바(롬 1:9; 몬 1:4), 이는 자신이 세운 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복음 위에 바로 서서 신앙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렸음을 의미한다(L. Thomas).
둘(two)
διχάζω
스트롱번호 1369
1. 두 번, 막 14:30, 72, 계 9:16.
a. [주]
b. ἅπαξ καὶ δ. : 여러 번, 번번히, 빌 4:16, 살전 2:18.
c. [속격과 함께] 눅 18:12, 유 1:12.
관련 성경 / 두 번(막 14:30, 72, 빌 4:16), 두 번씩(눅 18:12).
교회를 헬라어로 "에클레시아(ĕkklēsia. ἐκκλησία)"라고 합니다.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교회(마 16:18, 행 2:47, 롬 16:4), 모인 무리(행 19:32), 민회(행 19:39), 모임(행 19:41)" 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두 개의 단어 즉 "에크(ĕk. ἐκ)"와 "칼레오(kalĕō. καλέω)"가 만든 단어인데 '에크'는 "...밖으로" '칼레오'는 "밖으로 불러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교회 즉 에클레시아는 세상에 도취되어 세속의 욕망에 붙잡혀 살아가는 인생들을 불러내어 "교회 공동체"로 불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한다고 강조합니다.
오늘의 시대에 교회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2000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을 맞아 저희 가족들은 뉴욕으로 이주했습니다.
뉴욕에 도착하며 다짐한 것은 "불낙지교회"를 세워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불낙지교회란 "불신자(不信者)"와 "낙심자(落心者)"와 "지체자(遲滯者)"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속담을 생각하면 강산이 두 번씩이나 변해야 하지만 아직도 예수님이 기뻐하는 교회를 세우지 못한 아쉬움과 안타까움만이 가득합니다.
그래도 이 목표를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이 시대에 모두에게 귀감이 될 만한 교회가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일을 위한 기도를 생각합니다.
"너희 무리를 인하여"
파트리스교회를 위한 기도 제목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예수의 영을 회복하자
둘째는 예수의 삶을 실현하자
셋째는 예수를 본 받자
에크 / ~에서부터, ~에서부터 멀리, ~로 말 미암아, ~에게서 온(마1:18).
칼레오 / 부르다(마2:7, 막2:17, 행4:18), 일컬음을 받다(마5:19),
청하다(마22:3, 눅14:10, 12), 칭하다(마22:43, 눅20:44, 행3:11), 일컫다(마27:8, 눅1:32,
요일3:1), 이름을 짓다(눅1:62), 청함을 받다(눅14:8, 요2:2), 부르심을 받다(고전7:18,22, 엡4:1,
골3:15, 딤전6:12), 부르심을 입다(갈5:13).
3. 바울에게 빌립보 교우들이 몇차례 비용을 보내 왔다(빌 4:16).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번 나의 쓸것을 보내었도다
4. 아리스다고의
고향(행 27:2).
5. 유대인들이 바울을 핍박함으로 베뢰아로 피난하였다(행 17:1-10).
데살로니가 바르달 문에 있었던 헬라어 비문. 여섯명의 통치자들이 새겨져 있다.
데살로니가의 통치자들이 읍장들(폴리타르크스, 행 17:6)이었음을 입증하는 유일한 유물이다.
옛 데살로니가의 잔재는 오늘날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데살리키라는 이름으로 바뀐 그 곳은 지금 그리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로마 시대 말기에는 에그 나티아 가도가 이 사진에서 보는 갈레리우스의 개선문(the Arct of Galerius)
아래로 지나갔다.
이 거리는 아직도 그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
데살로니가는 항구도시로서 마게도니아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로마의 시인 키케로가 데살로니가를 두고 ‘우리 영토의
심장부“라고 말했을 정도로 경제는 물론 정치적으로 요충지였습니다.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것은 빌립보에 교회를 세운 다음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어렵게 교회를 세웠고 심지어 감옥에 갇히는 핍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비해서 데살로니가에서의 전도는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우선 데살로니가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 가서 3주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많은 숫자의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에서 간신히 자주장사 루디아의 마음이 열리면서 복음이 전파된 것에 비하면 데살로니가의 복음 전파는 폭발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상류층 부인들과 헬라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도시 전체가 복음으로 들썩인 것 같습니다. 그곳에 살던 유대인들이 바울일행을 핍박합니다. 그들은 불량배들까지 동원해서 바울 일행을 공격합니다. 빌립보에서 바울 일행이 자주장사 루디아의 집에 머물러있었듯이, 데살로니가에서는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에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야손의 집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바울을 발견할 수 없자 이들은 야손과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읍장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야손과 그의 형제들이 바울 일행 대신에 체포됩니다. 로마에는 황제가 있는데 다른 임금인 예수를 전해서 세상을 소란케 만들었다는 죄목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바울에게 거처를 제공했다가 체포된 야손과 그의 형제들은 보석금을 내고 석방됩니다.
빌립보 교회에 비해서 쉽게 복음이 전해졌지만, 데살로니가 교회 역시 핍박을
받으면서 성장했습니다.
데살로니가 1장에는 바울이 세운 교회, 야손이라는 첫 번째 교인이 체포되고 보석금을 내고 나오면서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 근방에서 소문난 교회로 성장해 갔다고 전해줍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 사랑, 소망으로 철저하게
무장했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령의 능력과
성령이 주시는 믿음의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처음에 교회를 세울 때 3주 동안 회당에서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고 뜻을
풀어주면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전해준 말씀위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으면서 교회가 크게 성장한 것입니다. 말씀위에
세워졌고, 성령의 능력과 확신 가운데 성장한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을 잘 이겼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는 교회, 각
처에 소문난 교회로 자라갔습니다. 할렐루야!
데살로니가는 교회사에서 중요한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강력한 통치자로 알려진 황제 테오도시우스와 어거스틴의 스승으로 유명한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대결에 데살로니가 도시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379-395)는 신앙이 좋기로 유명한 황제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도 하나님께서 주신 자(Theo, Dosius)라 칭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종교로 공식적으로 공포한 최초의 황제였습니다.
그런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390년에 어려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주둔군이 있는 데살로니가에서 주민들의 폭동 일어났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총독으로 고트 즉 출신의 부테릭 장군이 근무했었는데, 그는 참모들과 함께 시민들의 재산을 탈취했고 격분한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켜 사령관과 참모들을 돌로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끌고 거리를 행진하였습니다.
그것은 로마제국을 향한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그 보고를 받은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 항거한 주민들을 죽이라는 명을 전령사를 통해 내렸습니다. 이에 로마군인들이 현지인 7천명(어떤 자료는 6천명)을 살상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감독은 대노했습니다. 황제에게 공식적인 참회와 교회 출입 금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부활절에 측근을 이끌고 예배에 참석하려 했고, 암브로시우스는 교회입구에서 입장을 막아 황제는 발길을 돌렸습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성탄절에 다시 들어오려 했지만 주교는 또 다시 참회를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성경에 보면 다윗도 죄인이 아니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이에 암브로시우스는 '황제께서 다윗을 모방하시겠다면 다윗의 참회도 모방하셔야 합니다!'며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황제는 시민들이 보는데서 무릎 꿇고 회개했습니다. 황제는 비로소 주교의 용서를 받고 성찬례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용기와 정의감도 대단하지만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믿음과 인격도 대단합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황제가 주교의 책망을 듣고 순종한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사실 황제는 로마 총독을 죽인 데살로니가 시민들을 보복하라고 했지만 곧 돌이켜 그 명령을 철회하는 명령을 내렸답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고 합니다. 다시 내린 명령을 받은 전령사가 너무 늦게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이 암브로시우스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일화는 훗날 카놋사의 굴욕(1077년 1월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 앞에서 무릎을 꿇은 사건)과 유사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내용과 결말은 전혀 다릅니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한때 무릎을 꿇었으나 권력을 잡은 후 1084년 교황을 폐위시키며 복수를 했습니다. 그레고리 7세 교황은 이듬해 망명지에서 쓸쓸히 객사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은 3주간의 짧은 선교 활동으로 중요한 결실을 얻습니다. 야손(Jason), 아리스다고 그리고 세군도 등의 결신자를 얻고, 건강한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웁니다.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로마까지 바울과 동행했던 아리스다고(Aristarchus, 행20:4,골4:10,몬1:24)는 데살로니가 교회 초대 감독이 되었습니다. 비잔틴 제국시절 도시 데살로니가는 콘스탄티노플 다음가는 도시로 성장했고, 교회도 부흥하여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이은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1. 데살로니가교회의 시작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 중에 세워졌다. 사도행전 16장 6-10절을 보면 바울 일행이 아시아에서 마케도니아로 발길을 옮기게 된 과정이 소개되어 있다.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시는 것을 성령이 막으시므로”(6절), “예수의 영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7절), “밤에 바울에게 환상이 나타났는데,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다”(9절)는 말씀이 이를 뒷받침한다. 특히 바울이 마케도니아로 여행지를 바꾸기로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드로아에서 본 환상 때문이었다. 바울은 이 환상을 보고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자기를 부른 것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마케도니아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네압볼리, 빌립보, 암비볼리,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데살로니가에 도착했다(행 17:1). 바울과 실라(또는 ‘실루아노’)는 빌립보에서 말씀을 전하다 감옥에 갇히는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행 16:16-40 참조), 데살로니가에 도착해서도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바울은 (늘 하던대로)유대인 회당에서 세 안식일에 걸쳐 성서를 강론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그가 전한 복음을 믿은 많은 그리스 사람들과 몇몇의 귀부인들에 의해서 교회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바울 일행을 핍박한 까닭은 바울이 전한 복음, 곧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다”라는 말에 분개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거리의 불량배들을 매수하여 바울 일행을 잡아 그들의 나름의 방식대로 처단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바울 일행이 몸을 숨기자, 유대인들은 신도 중 한 사람인 야손의 집을 습격하여 야손과 신도 몇 사람을 시청의 관원들에게 끌고가서 “로마 제국과 황제에 반대하는 자들을 따르는 자들이 여기 있다”면서 그들을 고소하였다. 그러나 시청의 관원들은 보석금을 받고서 야손 일행을 풀어주었다(행 17:5-9 참조).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 일행을 근처 도시인 베뢰아로 급하게 피신시켰다. 바울 일행은 베뢰아에서도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쫓아와 베뢰아의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소동을 벌였다. 신도들은 곧바로 바울을 배에 태워 아테네로 피신케 하였다. 워낙 상황이 급박했던지라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남겨둘 수 밖에 없었다.이처럼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에 교회를 세웠지만 유대인들의 거센 핍박 때문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도시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2. 데살로니가교회의 상황
바울 일행이 핍박을 피해 급하게 도시를 떠나자 데살로니가교회는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
데살로니가교회에는 녹록치 않은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 상황은 크게 세가지였다.
첫째는
박해의 상황
데살로니가교회는 설립 초기부터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당했다(살전 1:6).
그리고 그 박해의 분위기는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베뢰아 지역까지 쫓아가 바울 일행을 괴롭힐 정도로 집요했던 유대인들은 지속적으로 데살로니가교회를 못살게
굴었다(살전 3:3; 살후 1:4).
바울은 박해의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데살로니가교회의 교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두 통의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이다.
둘째는 가르침과 권면이 필요한 상황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머무른 기간은 약 3개월 정도로 추측할 수 있다.
세번의 안식일에 걸쳐 회당에서 강론했다는 누가의 기록을 근거로
3주로 체류 기간을 제한하여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데살로니가전후서를 꼼꼼하게 읽다보면 3개월 정도 머물렀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3주이든 3개월이든 기간이 짧은 것은 마찬가지이다.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기 때문에 바른 가르침을
충분히 듣고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데살로니가교회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 오해하기도 했다(살전 4:13-18).
“그들은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살아 생전에 주님의 재림을 경험할 것이라고 예측한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죽는 것을
볼때 마다 놀랐으며 죽은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염려에 사로잡혀 있었다."(독일성서공회의 해설을 참조) 또 이방 신비 종교의 잘못된
가르침과 풍습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살전 4:3-8, 11-12). 이미 제1강에서 “데살로니가인들은 디오니소스 숭배의 영향으로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 중에는 여전히 과거의 악습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 편지로 그들을 가르치고 권면하고 있다.
셋째는 바울 일행에 대한
오해
유대인들의 박해가 시작되자 바울 일행은 어쩔 수 없이 데살로니가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데살로니가를 떠날 의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교회만 남겨두고 떠난 꼴이 되었다.
그래서 사정을 잘 모르는 교인들이 인사도 없이 황급히 떠난 바울 일행을
두고 이러저런 오해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간파하고서 편지로나마 오해의 불씨를 막으려 했던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바울의 사랑과 자랑이 남다릅니다. 곳곳에서 그 사랑과 자랑의 감격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를 향한 사랑과 자랑의 마음이 주님을 닮았습니다.
질문 /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기억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3)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사람들 (1-4)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로 말미암아 매일 감사하고 있습니다(2a).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2b). 하루도 그 감사와 기도를 빼먹을 수 없을 만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사랑하고 있습니다(2c). 우리도 주님께 감사의 이유이며 기도의 제목이며 뜨거운 사랑의 대상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바울의 기도와 감사의 효력이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힘을 다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역사(役事, work)'입니다(3a). 그들은 주님이 주신 사랑으로 교회 안의 지체들을 기꺼이 섬기며 서로를 위해 즐거이 희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수고'입니다(3b). 그들은 주님이 주신 소망으로 핍박의 상황에서도,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한 기도와 기대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소망의 인내'입니다(3c). 하나님의 사랑과 택하심의 은혜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4).
내가 가진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진정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습니까?
질문 / 데살로니가 교회의 거룩한 영향력은 어디에까지 이르렀습니까? (7)
거룩한 영향력이 풍성한 사람들(5-10)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일어난 아름다운 역사는 우리 교회에서도, 나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선 한 가지만 잘하면 됩니다. 말씀을 환영하고 영접하는 것입니다(6a). 바울이 전하는 말씀은 세상의 말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사람을 살리는 복된 소식, 복음입니다(5a). 성령님의 말씀입니다(5b). 그 능력이 증명되어 진리로 확증받은 말씀입니다(5c).
우리가 받은 말씀도 그런 말씀입니다. 그 말씀 자체가 우리를 말씀대로 살게 합니다. 그 말씀이 주님을 닮게 하고 본받게 합니다. 놀랍게도 그 말씀이 우리를 누군가에게 본이 되게 하고, 나아가 거룩한 영향력을 갖게 합니다(6-8).
우리가 환영하며 영접한 그 말씀은 우리에게 우상을 단절하는 믿음과,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랑과, 다시 오실 주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선물합니다(9-10).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환영하며 영접하는 그 말씀 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기쁨과 기대가 있습니까? 없다면 반드시 주님께 요청하십시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성숙한 신앙으로 인해 바울과 사역자들이 감사하는 본문이다. 바울은 편지를 쓰면서 자주 성도들을 향한 감사로 시작하는데, 데살로니가전서가 특히 그러하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전해 듣고는 하나님 앞에 감사한다. 믿음으로 행하고, 사랑으로 수고하며 소망으로 인내하는 그들의 신앙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다른 성도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었고, 각처로 소문이 퍼져나가 수많은 성도들의 귀감이 되었다. 성도들로 인해 아파하는 때가 많았던 바울에게 적잖은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사람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신약 최초의 교회였던 예루살렘교회의 태동을 통해 사도행전에 나타난 신앙공동체로서 교회"의 특징
1. 기도공동체
2. 은사공동체
3. 나눔공동체
4. 치유공동체
5. 말씀공동체
6. 선교공동체
기도공동체의 특징은 "합심기도로써 신약 최초의 교회가 태동했다.
사도행전에는 '마음을 같이하여'란 말이 교회론의 중심에
꼭 있다"
"합심기도의 능력은 이런 맥락 가운데 있다.
합심 기도는 모두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한다.
마음이 온전히 하나가 된
기도공동체는 신약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교회를 이루게 된다."
"합심하여 기도할 때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반면 교회의 위기는 마음이 나뉘고 분쟁이 일어날 때
찾아오게 된다"
바울 사도의 선교로 세워진 고린도교회는 건강한 교회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고 파벌이 발생한
뒤로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심지어 그리스도 파가 서로를 비판하고 비난하였다(고전 1:10).
이에 바울 사도는 나눠진 마음을 한 데 모으고, 같은 마음을 품고 하나가 되어 기도하라고 강하게 권면하였다.
합심기도가
교회를 온전히 하나 되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할 때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며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할 때,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고 은사를
체험하게 된다(행 2:1-4).
이 외에도 성령의 은사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게 하는 힘이 된다(행
4:31).
마음을 합하여 기도할 때 교회는 건강해지고, 놀라운 부흥 또한 뒤따르게 된다"고 했다.
온 교회가 마음을 같이하여 선교를 계속 하였다.
선교사들을 계속 파송 하였다.
예루살렘교회는 마음을 같이하여 파송한
선교사를 계 속 후원하고, 또 계속해서 선교사를 보냈다.
마가 요한, 디모데, 디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의사 누가 등을 보내며
파송교회와 선교지간 마음을 같이 하였다.
"선교는 진실로 교회의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 선교는 교회의 본질로서, 이를 통해 교회는
바로 서게 되며, 진실한 성도들의 헌신 또한 뒤따르게 된다"며 "예루살렘교회는 마음을 같이하는 선교공동체였다.
교회는 마음을
같이하여 예루살렘교회의 전승을 대물림하는 선교공동체가 되어야만 그 본질을 상실치 않을 수가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사도행전적 교회의 모습
1.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교회 (행 2:1~4)
오순절날 성령이 임했던 것처럼, 그런 성령의 역사가 실제로 경험되고, 이야기되고, 그 역사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많이 하면 사람이 보이고,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이 보인다고 말씀하시는 하 목사님. 그리고 너무 똑똑하면 골치만 아프고, 교회는 똑똑하기보다 성령 충만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2. 예수 공동체를 이루는 교회 (행 2:42~47)
교제하고, 떡을 떼고,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하는 것을 경험하고 느끼는 그런 공동체, 그런 관계의 형성, 그것이 제자훈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든, 일대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든, 큐티라는 표현을 사용하든 간에 그런 게 중요합니다.
3. 기적을 체험하는 교회 (행 3:1~10)
병든 자가 일어난 것도 기적이지만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예수 믿는 것도 기적 아닐까요? 교회에는 날마다 이런 기적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세례받는 수가 날마다 더하더라.' 예수 안 믿던 사람이 믿고, 세례 안 받은 사람이 받고,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변하는 그런 간증들이 매일 있는 것이죠.
4. 고난 속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 (행 4:1~4)
사도행전의 주제가는 '고난'이며, '흩어지는 것'이죠. 예루살렘교회도 흩어지고 깨졌는데요. 이게 교회라고 하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한 교회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정면돌파하죠. '고난 중에 성장하는 교회', '고난 중에 성숙해지는 교회', 고난 중에 부흥하는 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오히려 교회의 최대 위기는 '안정권에 들어섰을 때'라는 말을 명심해야 겠습니다.
5. 소유를 나누어 쓰는 교회 (행 4:32~37)
초대교회가 능력이 있었던 것은 물질의 유혹을 넘어섰기 때문이죠. 우리가 돈에 얼마나 예민한지 세상보다 더 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돈 가지고 사람을 후려치고 조종합니다. 세상에서 먹는 것 가지고 사람 조종하는 게 제일 치사하고, 돈 가지고 사람부리는 것은 웃기는 거죠. 그건 사도행전적 교회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명하고 전통이 있고 멋있어도, 권력다툼이 일어나고 재물의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사도행전적 교회가 아닙니다.
6. 순결과 거룩을 꿈꾸는 교회 (행 5:1~11)
교회의 본질은 거룩이며, 정직이며, 순결입니다. 이런 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이고, 그런 교회가 능력이 있죠. 물질을 이길 수 있고 명예와 세상의 권력을 이길 수 있는 그런 힘은 어디서 오는가? 순결의 힘이며, 정직의 힘이죠.
7. 영적 지도자를 세우는 교회 (행 6:1~7)
진정한 사도행전적 교회는 몇몇 사람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리더십을 나누는 교회였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이 리더십을 나누지 못하는 부분에서 '빨간등'이 켜져 있죠. 그래서 리더십 싸움이 생기고, '목사가 독점하느냐, 장로가 독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잡으면 절대 놓지 않습니다.
8. 이방인을 가슴에 품는 교회 (행 10:17~23)
교회의 본질은 끼리끼리 노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가슴에 품는 것이며, 다른 민족을 가슴에 품는 것입니다. 나와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형제가 되는 것이죠. 진정한 사도행전적 교회는 문화와 언어와 모든 가치관이 다른 사람이라 할 찌라도 가슴에 껴않고 하나가 되는 교회입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탈북자들을 잘 품어야 합니다.
9.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교회 (행 13:1~3)
사도행전을 끌고 간 것은 안디옥교회로, 바나바와 바울이 첫 선교사로 떠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이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하는 얘기로 꽉 차있다면 우리 교회도 전도 이야기와 선교 이야기로 꽉 차야 합니다. 선교사님이 가고 들어오고, 이야기 듣고, 교인들이 선교에 미치고 하는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10. 교회가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 (행 28:30~31)
바울과 2년 동안 성경 공부했던 사람들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집으로 돌아갔을까요, 아니면 성경공부로 끝났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불덩어리'가 되어 어디에 가든지 성령의 역사와 그 기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순교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초대교회요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이 사도행전적 기준에 얼마나 부합되세요?
교회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사도행전적이냐?
두 세 사람이 모였다 할지라도
그것이 시골에 있건 서울에 있건, 선교지에 있건 오지에 있건 간에 우리의 설교와 가르침, 그리고 우리 성도들의 삶과 가치관,
우리 교회 공동체의 목표가 사도행전적 목표와 비슷하다면 그건 사도행전 29장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우리는 우리의 기도 가운데 여러분을 기억하여 말하면서, 여러분 모두를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We continually remember before our God and Father your work produced by faith, your labor prompted by love, and your endurance inspired by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의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가 모범적인 교회로 드러나게 된 세 가지 기둥이 있습니다.
첫쨰는 믿음의
역사(work produced by faith)
둘째는 사랑의 수고( labor prompted by love)
셋째는 소망의 인내( endurance inspired by hope )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믿음의 역사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이란 헬라어는 "피스티스(pistis)"라고 하며, 역사라는 헬라어 단어는 "에르곤(ĕrgŏn)" 이라고 합니다.
피스티스(pistis)는 "행실(마 5:16, 딤전 5:10, 벧후 2:8),
행위(마 11:2, 요 3:19, 롬 2:15), 일(마 26:10, 눅 24:19, 롬 13:12), 사무(막 13:34),
역사(요5:36), 소행(행5:38), 사업(롬14:20, 계2:19), 공적(고전3:13,14), 실천함(약1:25),
이룸(약 1:4), 지음(히 1:10), 행함(롬 2:6)으로 소개됩니다.
에르곤(ĕrgŏn)이란 "힘을 다하는 일, 행동, 노력"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역사를 새번역 성경에서는 "믿음의 행위" 공동번역에서는 "믿음의 활동"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믿음으로 행한 일"이라고 번역합니다.
헬라어 성경에서 믿음의 역사를 "투 에르구 테스 피스테오스(του εργου της πιστεως)"라고 하며 직역하면 "그 일 그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의 역사란 "그 믿음으로 행한 그 일"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으로 행한 그 일"이란 우상을 숭배하던 지역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었던 아브람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곳을 떠나라고 하셨을 때 아브람은 당장 그곳을 떠났던 그 믿음으로 순종했던 그 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하나님의 구체적인 어떤 계시와 지시가 나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전반적인 믿음의 원리에 따라 그 믿음을 나에게 적용시켜 나도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저희가 미국 나사렛교단에 속한 뉴욕지방회 소속의 교회로 건물을 교단 재단에 가입하여 교회 건물을 사유화 하지 않고 교단에 귀속시켰습니다.
그런데 모든 모게지를 청산하고 제가 은퇴할 무렵이 되었을 때 교단에서 그 건물을 매각하여 뉴욕지방회의 재산으로 사용하겠다고 결정 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경우 두 가지 방법을 선택합니다.
첫째는 여론화 시켜 법적 투쟁으로 재산권을 찾는 방법입니다.
둘째는 교단의 결정에 따르는 방법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경우를 맞이한다면 어떤 방법을 선택하겠습니까?
사회법과 교단법을 비교하면 교단법은 특별법이며 세상은 특별법 우선의 원칙을 따르기 때문에 여론화 시킨다는 것은 결국 자기 욕심에 의한 방법일 뿐입니다.
제가 선택한 것은 교단의 결정에 따라 물러서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건물을 사유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역사란 믿음의 법칙에 따라 득과 실을 계산하지 않고 질서에 순응하는 것을 말합니다.
때로는 믿음으로 행하려면 어려움도 겪게 될 것입니다.
그 어려움이 두렵고 겁이 나서 그 방법을 포기하는 것은 이미 믿음을 포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가는 그 길을 지켜주시고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오늘도 믿음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기도합시다.
주 믿는 사람 일어나
새번역 /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 / 여러분의 믿음의 활동과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꾸준한 희망을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현대인 / 우리는 여러분이 믿음으로 행한 일과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인내한 것을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늘 기억합니다.
πίστ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4102
'수고(코포스)'는 '희생, 고생'을, '인내(휘포모네)'는 '참을성 있는 기다림, 변함없는 충성'을 의미한다.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 성도들로 인해 기도하면서 감사하는 삼중 근거가 제시되었다.
역사와 수고와 인내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각각
제시된 믿음, 사랑,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 있는 삶의 정수이다. 바울은 이 세 가지의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항상 있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고전 13:13) 다름아닌 이 세 가지 것을 기초로 한 열매들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삶에 아름답게 열매 맺히고 있었으므로 바울 일행은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것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삶속에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기뻐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 나오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초대 교회 당시 널리 사용되던 어휘로서 자주 한 단위로 결합되어 언급된다(5:8;롬 5:1-5;고전 13:13;갈 5:5, 6;골 1:4, 5;히 6:10-12;10:22-24;벧전 1:21, 22,Bruce, Hunter). 이 세 가지는 서로 유기적 관계에 있는 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에게 부여하신 삶의 진수(眞髓)를 이루는 덕목들이다(Bornkamm). 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덕목들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영역을 지배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다.
믿음의 역사(*, 투 에르구 테스피스테오스)
'믿음 가운데서 우러나온 너희의 역사'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Morris).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구속 역사에 근거한다.
이러한 믿음은 필연적으로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게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궁극적인 승리의 날을 바라보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은 현실속에서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온다 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를 지니고 있다. 본절의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네스'(*)는 진취적이고 용기있는 그리스도인의 특질로서 용감한 군인이 극한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버텨나가는 기상(氣像)을 의미한다(Findlay). 그리스도인들은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결코 낙심치 아니하고 인내로써 전진해야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 본절은 2절에 나오는 바울의 중보기도의 때를 말해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 대한 기억이 매우 자주 떠올랐던 까닭에 '쉬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특히 바울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기도가 신실함을 나타내준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떤 자들은 자신들을 대하는 바울의 동기(動機)에 대해 의심을 품었던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바울은 본 서신의 서두에서부터 그러한 의혹을 일소하고자 한다(2:5,10;3:9, Thomas).
믿음의 역사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역사" 또는 "믿음에서 비롯된 역사"를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을 위해 일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 신뢰에서 말미암는 것으로서 외적 행위를 통해 그 존재의 양상이 나타난다.
역사(에르곤)은 ‘일(work)’, 또는 ‘행위(act)’라는 의미
사람의 내면에서 생성되는 믿음이 사람의 말과 태도와 행위를 통해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것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사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거짓되고 생명 없는 우상을 가차없이 버리는 믿음 발휘(9절)
유대인들의 심한 핍박 중에서도(행 17:5)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 발휘(살전 3:8)
데살로니가전서 1: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바울이 살았던 시대의 데살로니가 도시는 당시 인구 20만명이나 되는 대도시로서 마케도냐의 수도로서, 아시아와 유럽을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물물교환이 활발한 도시였다. 현재는 그리스의 아테네 다음의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이다.
2-2. 이 곳에 바울과 실라는 제2차 전도여행때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까지는 160km 되는 거리로서, 약 사흘길 걸어서 도착할 수 있다.
2-3. 이미 빌립보에서 사역하다 고난과 능욕을 당한 바울 일행은 상당히 힘들었다. 육적, 영적으로 탈진 상태(행 16장)에 있었다.
2-4. 데살로니가에 가서 회당에서 세 안식일(20일) 동안 복음을 전하다 반대에 부딪쳐 몰래 도망쳐 나올 수 밖에 없었다(행 17장).
2-5. 바울 일행이 봤을 때, 분명히 실패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1년 후에 바울은 그 고난 가운데 세운 교회가 가장 모범적이고 소문난 교회로 성장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데살로니가 교회를 부흥 성장케 했을까요?
3. 우리 갈릴리교회도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칭찬 받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갈릴리교회를 어떻게 하면 더 크게 성장시킬 수 있을까요? 성경 본문을 통해서 답을 찾아 보도록 합시다.
4. 바울은 이어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感謝하면서 記憶하였다고 하였습니다(2절).
4-0. 헬라 서신서의 인사말 뒤에는 수신자를 위해 기도한다는 내용과 함께 상대방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기도할 때 상대방을 기억한다는 것은 매우 정감 있는 표현이며, 그들이 하나님을 알기 전에 믿었던 신이 아닌 유일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은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사한 것은 무엇일까요?
4-1.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 성도들로 인해 기도하면서 감사한 것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였습니다. 이는 믿음, 사랑, 소망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며, 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은혜'에 근거한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직접적인 감사의 이유인 이 성령의 열매들에 이어 또 하나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궁극적인 이유로 '너희 택하심을 아노라'(knowing your election)입니다.
4-2. 바울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항상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고전 13:13).
4-3. 이 세 가지를 기초로 맺은 열매들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삶에 아름답게 맺히고 있었으므로 바울 일행은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5. 데살로니가 교회가 칭찬을 들은 것, 우리 갈릴리교회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믿음의 役事'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所望의 忍耐'입니다.
먼저 믿음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믿음의 역사 ]
6. 먼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는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역사’, 또는 ‘믿음에서 비롯된 역사’라는 뜻입니다. NIV성경에서는 'your work produced by faith"라고 하였습니다. - 믿음의 결과로 이루어내는 산출물
7. '믿음'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을 위해 일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7-1.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가? (ex) 어떤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한 말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7-2.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의로 여기셨다고 하셨는데, 이 때 믿음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말씀, 아브람의 자손이 하늘의 뭇별과 같이 하겠다고 하신 말씀을 믿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7-3.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즉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8. ‘역사’란 ‘일(work)’, 또는 ‘행위(act)’라는 의미입니다.
8-1.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는 "토목이나 건축 따위의 공사", "하나님의 일함, 또는 그런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8-2. 교회용어사전과 라이프성경사전에서는 다같이 거의 유사한 표현으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육체적 노동과 관련하는 '일', '공사'(출1:14; 대상28:20; 스2:69)
토목이나 건축 공사(출5:4-5; 왕하22:9; 느5:16)
일(work), 임무(task)
행한 일이나 행함을 의미
국가적인 대사(大事)나 공공을 위한 큰 일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그리스도)의 거룩한 사역(막16:20; 고전12:6; 골2:12; 찬송가 240,243장)
8-3. 즉, 역사(役事)란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거룩하고 위대한 사역을 의미합니다.
9. '믿음의 역사'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 그 믿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우리들의 말과 태도와 행위를 말하며, 이를 통해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구원의 역사를 말합니다. '믿음의 결과로 이루어내는 산출물'을 말합니다.
9-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때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기 때문입니다(히 11:10). 그 결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또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9-2.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는 너 자손을 하늘의 뭇별과 같이 많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죽게 되더라도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기 때문입니다(히 11:18-19).
9-3. 요셉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에게 온갖 고난이 닥쳐 왔지만 그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간 것을 믿었기 때문에 큰 일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10.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이루어낸 믿음의 역사는 무엇이었을까요?
10-1. 그들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거짓되고 생명 없는 우상을 가차없이 버리는 믿음을 발휘하였으며(9절),
10-2. 유대인들의 심한 핍박 중에서도(행 17:5)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발휘하였습니다(살전 3:8).
11. 갈릴리교회 성도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조금이라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음으로써 많은 역사를 이루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는 일에 크게 쓰임 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사랑의 수고(투 코푸 테스 아가페스) του κοπου της αγαπης
사랑의 수고(labour of love. labor prompted by love)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투 코푸 테스 아가페스(του κοπου της αγαπης)" 라고 합니다.
이때 사랑이란 헬라 단어는 "아가패"를 사용합니다.
성경에서 사랑이란 단어는 "가족간의 사랑(스토르게)" "친구의 우정(필리아)" "하나님의 사랑(아가패)" "남녀간의 사랑(에로스)"으로 구분합니다.
본문에서는 "아가패"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마치 하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여 그 아들을 세상에 구주로 보내셨던 것처럼 믿음의 역사에 참여하는 데살로니가교인들도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을 칭찬하며 강조합니다.
수고라는 헬라 단어는 "코포스(κόπος)" 라고 하여 "희생" "고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랑의 수고"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희생과 고생"이라고 하겠습니다.
위대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이 23세였던 1665년에 런던에 큰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그가 다니던 케임브리지대학도 휴교령을
내렸고, 이후 20개월 동안 학생들은 전염병을 피해 시골 등으로 흩어져 두려움과 고립감 속에 살아가야 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자 틀에박힌 생활에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뉴턴은 그 시간을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만드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도 역시 시골의 어머니 집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매일 수학책들을 쌓아놓고 씨름했습니다.
날이 좋으면 집
부근 과수원에 앉아 사과나무에 달린 사과를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습니다.
'왜 사과는 나무에 붙어 있을까? 왜 달은 지구
궤도를 벗어나지 않을까?'
뉴턴의 위대한 과학적 업적은 타고난 천재성 때문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뉴턴은 20개월의
지루함을 견뎌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예수님을 말씀하셨습니다(마 10:22, 24:13, 막
13:13).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약 1:12).
이런 시련의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까요?
좀 더 거룩한 나를 이 세상에 바르게 세우기 위하여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는 기회로 활용해야 하겠습니다.
시인 나태주의 "기도" 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내가 외로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내가 추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추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내가 가난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더욱이나 내가 비천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비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그리하여 때때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게 하여 주옵소서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사랑으로 율법을 완선하셨던 예수님처럼
주님 닮아가며
주님처럼 살아가며
세상에 사랑의 씨를 뿌려봅시다.
세상 모두 사랑없어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나타내 주거니와 믿음과 마찬가지로 실천적 행위를 동반한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병자와 굶주린 자를 돕기위해 자선을 행하였으며,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열성적 헌신을 다하였다(Hendriksen).
이것은 사도 바울이 다른 곳에서 표현한 바, 복음을 위한 수고들이다(3:5;고전 15:10, 58;고후 10:15;갈 4:11;빌 2:16).
'수고(코포스)'는 '희생, 고생'을,
κόπ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2873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수고(고전 15:58, 살전 1:3, 계 14:13), 수고로움(고후 6:5), 괴로움(마 26:10, 막 14:6, 눅 11:7), 번거로움(눅 18:5), 노력(요 4:38),
일(고전 3:8).
사랑의 수고란?
‘사랑으로 말미암은 수고’
‘사랑에 의해서 촉진된 수고’
‘필리아’도 아니고, ‘에로스’도 아닌 ‘아가페’이다.
‘필리아’는 가족이든 친구이든 서로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간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피차간의 끌림, 우정, 강한 애착을 나타내며,
‘에로스’는 이성에 대한 강한 집착과 갈망에서 일어나는 열렬한 육체적 사랑을 나타낸다.
‘아가페스’의 원형 ‘아가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을 향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근거로 하여 발생하는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관계.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희생적인 행위로 나타남
수고란?
‘코포스’, 피곤할 정도의 노동 또는 녹초가 될 정도로 고된 일을 의미
바울이 말하는 이타적 사랑은 타인을 위해 자신의 피곤함을 상관하지 않고 수고를 떠맡는 것을 가리킴
사랑의 수고에 대한 사례
그리스도의 죄인들에 대한 사랑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으로 나타났음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랑(9절)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자들이기에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사랑의 수고
‘사랑으로 말미암은 수고’, 또는 ‘사랑에 의해서 촉진된 수고’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NIV 성경에서는 'your labor prompted by love'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사랑’에 해당하는 단어는 ‘필리아’도 아니고, ‘에로스’도 아닌 ‘아가페’이다.
‘필리아’는 가족이든 친구이든 서로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간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피차간의 끌림, 우정, 강한 애착을 나타내며,
‘에로스’는 이성에 대한 강한 집착과 갈망에서 일어나는 열렬한 육체적 사랑을 나타낸다.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은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아가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을 향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근거로 하여 발생하는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랑입니다.
‘수고’의 원어적 의미는 피곤할 정도의 노동 또는 녹초가 될 정도로 고된 일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타적 사랑인 아가페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피곤함을 상관하지 않고 수고를 떠맡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랑의 수고란 타인을 위해 자신의 피곤함을 상관하지 않고 목숨을 희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희생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랑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으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죄인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피곤함을 상관하지 않고 희생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멋진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의 수고(투 코푸테스 아가페스) του κοπου της αγαπης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나타내 주거니와 믿음과 마찬가지로 실천적 행위를 동반한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병자와 굶주린 자를 돕기위해 자선을 행하였으며,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열성적 헌신을 다하였다(Hendriksen).
이것은 사도 바울이 다른 곳에서 표현한 바, 복음을 위한 수고들이다(3:5;고전 15:10, 58;고후 10:15;갈 4:11;빌 2:16).
'수고(코포스)'는 '희생, 고생'을,
데살로니가전서 1: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능력 - 믿음의 역사
δύναμ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1411
성령 - 사랑의 수고
πνεῦ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151
확신 - 소망의 인내
πληροφορ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4136
1. 확신, 골 2:2, 살전 1:5, 히 6:11, 10:22.
2. 충만, 골 2:2, 히 6:11, 10:22.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확신(살전 1:5), 풍성함(골 2:2, 히 6:11), 온전함(히 10:22).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We continually remember before our God and Father your work produced by faith, your labor prompted by love, and your endurance inspired by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감동 받은 참음(인내)
'인내(휘포모네)'는 '참을성 있는 기다림, 변함없는 충성'을 말합니다.
따라서 "소망의 인내"란 "소망으로 말미암은 인내" 또는 "소망에 의해 고무된 인내" 라고 하겠습니다.
소망은 성도와 교회 가운데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는 것입니다(빌 1:6).
이러한 소망은 현재의 고통스런 상황들을 기쁨으로 묵묵히 견뎌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소망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대한 것이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며, 그 소망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내(휘포모네)는 ‘~아래에(under)’라는 의미의 ‘휘포’와 ‘머물러 있다’라는 의미의 ‘메노’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
문자적으로는 견디기 힘들지만 지고 있는 짐 아래에 그대로 머물러 견디는 것을 의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죄 많은 세상에서 겪는 고통을 기쁨으로 묵묵히 이겨나가게 하는 원천이 된다는 것을 암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있는 자는 어떠한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고 장차 다가올 영광과 주의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며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것이다(롬 8:23-25 ; 히 12:2).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사례
/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기다림(10절)
/ 외부로부터 오는 핍박(살전 2:14-16) 가운데서도 장차 재림하여 면류관을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였기에 인내로써 이겨낼 수 있었음
[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 기억함이니 ]
바울을 비롯한 공동 발신자들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기억하고 있다.
‘기억한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므네모뉴온테스’의 원형 ‘므네모뉴오’는
/ ‘마음에 두는’이라는 뜻의 ‘므네몬’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을 잊지 않고 마음에 소중하게 간직하다’라는 의미이다.
/ 바울 및 그 동료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머물 때에 믿은 지 얼마 안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보여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그들에게 매우 인상 깊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글 개역 성경은 NIV나 RSV처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를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라는 문장 바로 앞에 둠으로써 ‘기억하다’라는 동사를 수식하는 것처럼 번역했으나,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와 관련된다.
따라서 이는 소망의 인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품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품는 소망의 인내’라는 것은 장차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서는 것을 바라는 소망의 인내라는 의미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장차 심판하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성취될 것이라는 의미(W. Hendriksen)를 모두 내포한다.
‘소망의 인내’에서 소망이란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대한 것이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말합니다.
또한 그 소망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소망의 인내’는 ‘소망으로 말미암은 인내’, 또는 ‘소망에 의해 고무된 인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NIV 성경에서는 "your endurance inspired by hope"라고 번역되어 있다.
'소망'은 성도와 교회 가운데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빌 1:6).
이러한 소망은 현재의 고통스런 상황들을 기쁨으로 묵묵히 견뎌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인내’는 '아래에 머물러 있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내'를 의미하는 '휘포모네'는 '~아래에(under)'라는 의미의 '휘포'와 '머물러 있다'라는 의미의 '메노'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문자적으로는 견디기 힘들지만 지고 있는 짐 아래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나가면 다시는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계속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인내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에는 다음과 같은 동의어가 있습니다.
Perseverance : 어려운 어떤 일을 계속 노력하는 것의 '인내'
Patience :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능력의 '인내'
Endurance : 신체적 지구력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인내'(견디다)
Bear : 참다
무엇이 우리들을 죄 많은 세상에서 겪는 고통을 기쁨으로 묵묵히 이겨나가게 하는 원천이 될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입니다.
재림하시는 그 주님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품는 소망의 인내’라는 것은 장차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서는 것을 바라는 소망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장차 심판하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성취될 것이라는 의미(W. Hendriksen)를 모두 내포하는 것입니다.
농부에게는 추수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일년이라는 기간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과수원 지기에게는 과실을 얻을 소망이 있기 때문에
십년의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학업 대성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평생의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실업가들에게는
사업 성공의 소망이 있기에 전심전력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소망이 크면 클수록 인내도 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천국을 믿으려는 신자의 소망이야말로 최대의 소망이므로 또한 더 오래동안 견뎌야 합니다.
소망의 인내란 어떠한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고 장차 다가올 영광과 주의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며 현재의 어려움을 간직하고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합니다(롬 8:23-25 ; 히 12:2).
견디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외부로부터 오는 핍박(살전 2:14-16) 가운데서도 장차 재림하여 면류관을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였기에 인내로써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분명했기 때문에 한난 가운데서도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본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오랜 기간동안의 견디는 것, 기다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옛날에는 집안에서 어린 아이들이 어머니가 만들어주는 간식을
기다리면서 더 큰 맛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어린이들의 간식은 곧 바로 나오는 인스턴트들이기에 더욱 더 기다릴 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자체가 쉬운 길이 아닙니다.
가시밭길 같은 고난이 닥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 때 무너지지 않아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소망을 가집시다.
하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우리 교회의 성장된 모습을 꿈꾸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진 자는 끝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리고 견디며 이겨냅니다.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그 날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침내 승리하는 삶을 실천하는 파트리스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좋은 소문이 많이 나는 교회,
칭찬거리가 많은 교회로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이불변응만변(以不變應萬變)'이란
말이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으로 만가지 변화에 대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원칙은 변하지 않고 지켜 나가는 자세를
가지고, 만변(萬變, 수시로 변하는 여건이나 현상에 대응해 나간다는 뜻)해야 합니다. 내 속에 변하지 않는 믿음으로 우리 주변에서
변화무상한 여러가지 일에 잘 대응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헌신으로 교회를 세워 가야 한다는 마음은 절대 변하면 안됩니다.
이 마음이 변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가운데, 이를 이루기 위해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여러 가지 변화들에 대해 잘 대처해 나가 자랑스러운 교회를 세워 갑시다.
소망의 인내
(살전 1:3)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눈앞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끊임없이 기억하기 때문이니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함께 소망의 인내를 가졌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같이 있기 때문에 이들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고전 13:13) 그런즉 이제 믿음, 소망, 사랑 이 셋은 항상 있으나 이것들 중의 가장 큰 것은 사랑이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많은 환난과 핍박을 겪었습니다. 유대에 있는 교회들이 자기들의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고난을 받았던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그 지방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받았습니다.
(살전 2:14) 형제들아,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따르는 자들이 되었나니 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고난을 받은 것 같이 너희도 너희 지방 사람들로부터 비슷한 것들로 고난을 받았느니라.
하지만 세상이 주는 그런 환난과 핍박이 그들의 믿음을 꺾어 놓거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들을 끊어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 환난은 인내를 낳았고, 인내는 체험을 통해 마침내 소망을 이루었습니다.
(롬 5:3-4)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서 주신 확실한 약속의 말씀에 근거한 소망이 있으면 어떤 고난 앞에서도 인내할 수 있으며, 믿음으로 인내하면 그 소망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히 6:12) 이것은 너희가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인내를 통해 약속들을 상속받는 자들을 따르는 자들이 되게 하려 함이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간절히 기대하던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것을 고대하며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살전 1:10)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그분의 아들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는지 보여 주나니 이분은 곧 다가올 진노로부터 우리를 건져 내신 예수님이시니라.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현실 도피 목적으로 빨리 천국에 가기를 원하거나, 예수님이 속히 오셔서 데려가시기를 기다리는 그런 바람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그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것은 복된 소망입니다.
이런 소망이 있었기에 그들은 환난 중에도 인내하며 믿음을 굳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딛 2:13) 저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느니라.
‘더+살로니카’와 ‘데살로니가교회’
‘데살로니카’는
알렉산더 황제의 누이인 “살로니카”를 위해 만들어지고 이름 지어진 도시입니다.
알렉산더 황제는 20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자마자 세계정복에 나섰고, 33살 되던 BC 323년 인더스 강가에서 향수병에 걸려 죽을 때까지 10여 년을 전쟁터에서만
살았습니다.
알렉산더가 죽자 그 부하 장군 4명이 알렉산더가 정복한 땅을 나누어서 통치했는데, 마게도냐 본토는 카산드로, 이집트는 톨레미, 안티오코스는 지중해와 중앙아시아, 리시마커스는 트라키아와 소아시아 일부를 장악했다.
이중 카산드로의 부인이 알렉산더의 누이 “살로니카”였고, 카산드로가 살로니카의 이름을 따 만든 항구도시가 ‘데살로니카’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3주간에 걸쳐 복음을 전했을 때 세워진 교회입니다(행 17:1-2).
바울은 이후 고린도에서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는데(행 18:11) 이때 쓴 편지가 “데살로니가서”인 것으로 추정합니다.
3주간 복음을
전했는데 교회가 설립된 것도 놀랍고, 2년도 안된 교회가 든든하게 서가는 것도 놀랍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로 구성된 신학적 신앙적 깊이가 낮은 데살로니가교회가 큰 핍박과 환란으로 어려움을 당하자 그들을 격려하고(3:3)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독려하고(4:1~12)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 가운데 확신을 주기 위해 이 편지를 보냈습니다(4:13~18).
데살로니가 교회는 비록 바울이 3주 밖에 복음을 전하지 않았고, 교회가 설립된지 2년도 되지 않은 교회였지만 오늘 편지를 통해 본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한 평가는 놀랍습니다.
바울의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한 칭찬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환란 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승리한 교회(1:6)
둘째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교회(1:7)
셋째는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교회(1:8)
넷째는 사랑이 많은 교회(4:9)
다섯째는 종말을 간절히 소망하는
교회(1:10, 2:19, 3:13, 4:13~18, 5:23).
특별히 데살로니가교회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와 같은 세 가지 덕을 갖춘 교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데살로니가교회를 본받아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은 교회와 성도들로 거듭날 수 있는가를 점검하며 무장해야 하겠습니다.
먼저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했다고(1:2) 고백하고,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2:19,20) 고백합니다. 성도를 향한 감사와 기도! 이것이야 말로 교회 지도자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덕목인 것입니다.
이렇게 항상 감사하고 기도하며 기억하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1:3)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고린도전서13:13에서도 항상 성도 안에 교회 안에 있어야 함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이 세 가지는 데살로니가교회가 위에서 언급한 평가를 받는데 가장 기초가 되는 내용입니다. 이를 중심으로 데살로니가교회가 어떤 교회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
믿음의 역사는 믿음의 행위, 믿음으로 행한 일, 믿음의 활동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의 밑거름이며 출발점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고, 소망으로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믿음과 행함을 구분하는데 익숙하지만, 실제 믿음과 행함을 구분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단지 그냥 도덕과 윤리적인 행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행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2:18),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2:22) 칼빈은 이를 “믿음의 효력”(faith effect)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는 믿음의 행위를 합니다. 사실 주께서 사람들을 불러서 하나님의 자녀 삼고 주님의 제자를 삼는 다는 것은 단지 믿는 것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2:12)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장에 보면 데살로니가교회에 큰 환란과 핍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울은 디모데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보냅니다.(3:2,3) 혹시 그런 시험에 넘어져 낙심하거나 배교하지 않았나 염려했기 때문입니다.(3:5) 그런데 데살로니가를 다녀온 디모데의 보고는 그들이 주안에서 굳게 서있다는 것입니다.(3:8)
이처럼 데살로니가교회가 믿음 안에 굳게 서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택하심(1:4),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1:5), 주님의 재림에 대한 믿음(1:10) 등 믿음의 기초가 되는 진리에 굳건히 서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그 말씀이 그들 가운데 역사하였기 때문입니다.(2:13)
이렇게 신학/신앙적인 단단한 기초 위에서 삶의 열매를 맺어가는 ‘믿음의 역사’는 성도 개인에게도 교회 공동체에게도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날마다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성도들의 믿음의 역사에 대한 나눔을 통해 서로 격려 받고 위로 받고 한 몸이 되어가는 것이고, 이를 통해 공동체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이빈다.
더함공동체교회의 핵심가치 중 첫 번째는 “단순함”입니다. 단순하게 믿고 단순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지난 1년 동안 더함공동체가 개척되고 세워져 오는 과정동안 우리는 더함공동체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고 경험했습니다. 믿음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시작된 믿음의 역사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꽃을 피우고 열매 맺어갈 것입니다.
둘째는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
여기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 사랑을 나누고 표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올바른 사랑을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충만한 곳이고 또 그래야 합니다.
공동체는 그저 저절로 형성되고 성숙하고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들의 사랑의 수고가 모여야 합니다. 육체적 노동, 물질적 희생, 정신적인 관심과 배려, 시간의 투자, 공동체적 실천 등 이런 것들이 사랑의 수고의 내용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당시 시대를 주도하던 패권 국가였던 마케도냐의 중심부에 있었습니다. 항구도시로 번성해 있었지만 그만큼 핍박도 심하고, 우상숭배도 심했으며, 도덕/윤리적 타락도 심했습니다. 예수 믿는 다는 것 때문에 경제생활을 박탁 당했고 고문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때로 죽음도 당했습니다. 이를 견딜 수 있는 것은 성도들 간의 “사랑의 수고”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먼저 믿은 성도들의 헌신 즉, 사랑의 수고를 통해 성장합니다. 우리가 기억하듯이 믿음 생활을 오래하신 장로/권사님들이 예배당을 청소하고, 안내하고, 심방하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들에 우리는 익숙합니다. 그런 분들의 사랑의 수고가 있었기에 우리들이 믿음도 자라고, 믿음의 역사도 이루어지는 것이빈다.
4:9은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 함이라”라고 합니다.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제사랑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마지막으로 권고하는 것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5:13)입니다.
성도와 교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야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해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고, 이런저런 신학/신앙적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서로를 배려하고 용서하는 따뜻한 형제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신학교도 사회복지기관도 NGO도 아닙니다. 교회는 가정이 확대된 확대가족과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그 기초는 사랑의 수고입니다. 진리를 말할 때도 사랑 안에서 말해야 합니다.(엡4:15)
셋째로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는 ‘소망의 인내’를 이루어 교회다운 교회로 세워지게 할 것입니다.
소망의 인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으로 그것은 장차 이루어질 “재림”을 말합니다.
핍박과 환란이 많았던 데살로니가교회는 그 고통과 아픔을 재림에 대한 소망으로 견디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주님이 변화된 몸으로 부활하고 승천했던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재림을 더욱 사모했으며 하늘로 올라가셨던 주님이 금방 오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것이 지나쳐 재림만을 바라보고 각자의 삶을 불성실하게 사는 페단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는 이에 대해
바울이 주의 재림 때 일어날 징조를 설명하고, 헛된 것에 미혹되지 말도록 당부하며, 각자의 삶을 성실하게 살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역사이고, 사랑이 수고인 것에 비해 소망은 인내와 정비례합니다.
소망이 강할수록 인내도 강합니다.
로마서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앎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롬 5:4).각 개인의 삶도 무엇인가를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인내하며 노력하고 수고해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 25)
성경의 마지막 남은 예언은 주님의 재림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이 신앙인의 의무이며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재림은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와 그 시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당히,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빛의 아들답게”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야 합니다(5:4).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들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쓰고 살아가야 합니다(5:8).
믿음이 소문이 각처에 퍼지고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교회라고
평가 받았던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그런 평가가 가능했던 것은 그 교회 안에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우리가 이러한 교회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가 데살로나기교회처럼 소문난 교회로 그 지역에서 아름답게 세워지기를 소망하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요셉의 일생 - 시련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고(신뢰) 의뢰하라.
요샙은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열한 번째 아들이었다.
야곱이 유난히 사랑했던 아내 라헬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남다른 사랑을 받고 자랐다.
야곱은 요셉을 위해 대단히 값지고 화려한 겉옷을 만들어 입혔다.
형들은 아버지가 자신들보다 더 사랑함을 보고 미워하여 한 마디도 다정스럽게 하지 않았다.
와중에 요셉이 꾼 두 가지 꿈 때문에 비현실적인 자아상에 스스로 매료되어 오만한 젊은이로 자라갔다.
소년 요셉의 꿈은 형들의 마음에 쓰디쓴 악영향을 미쳐 형들의 노여움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였지만 제대로 누리지 못한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다.
형들이 세겜에서 아버지의 양 떼를 돌보고 있을 때, 야곱은 형들과 양 떼가 잘 있는지 살펴보고 오라고 요셉을 보내었다.
이 때 형들은 요셉을 빈 우물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 이십을 받고 팔아버렸다.
요셉은 꼼짝없이 붙들려 머나먼 애굽으로 끌려가서 바로의 신하 취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려 갔다.
주인의 눈에 들어서 좀 더 나은 처지가 되려는 꿈을 꾸고 열심히 일했지만, 연인을 삼으려는 계획이 틀어진 것에 앙심을 품은 안주인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기약이 없는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는 우물에 갇혔을 때 형들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기도 하였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비롯한 조상들의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침묵 뿐이었다.
그리고 애굽에 끌려온 뒤로 노예 생활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게 해 달라고, 적어도 종살이만큼은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그런데 종살이를 면하기는커녕 바로의 감옥에 갇힌 죄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요셉은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오랫동안 기도해 왔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답이라고는 단 한 마디도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침내 반전이 이루어졌다.
옥살이를 하던 요셉은 바로의 궁에서 일하다 끌려 온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를 만나게 된다.
요셉은 하나님의 영의 도움으로 그들의 꿈을 해석해 주게 되어 자신의 억울함으로 풀게 될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복직이 된 술 맡은 자는 요셉의 존재를 새까맣게 잊어 버렸다.
그는 2년 동안 옥살이를 하는 동안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기도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이제야 한 가닥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는 두 번에 걸쳐 희한한 꿈을 꾸게 되고, 술 맡은 자에 의해 바로의 궁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된다.
7년 동안의 풍년과 7년 동안의 흉년에 대한 대비책을 제안하게 되었고, 바로는 요셉의 총명함과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있음을 알아보았다.
바로는 요셉을 총리라는 고위직에 앉히고 요셉이 설계한 정책을 직접 실행할 권한을 주었다.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이용하여 가뭄이 계속되는 동안 온 백성의 삶을 유지시킬 정부 차원의 광범위하고 효과적인 기근 대책을 마련하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셉의 아버지 야곱과 형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에도 가뭄이 들게 되었고 그들은 요셉을 찾아와 기근을 면하게 된다.
이러한 요셉의 삶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이던 기간이 얼마나 길었는가?
마른 우물에 던져진 요셉이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을 때,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려 애굽 땅으로 끌려 갈 때,
보디발의 아내로 인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갈 때,
감옥에서 2년 동안 기다리고 있을 때,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했을 것이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한 번도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침묵하셨다.
하나님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신 걸까?
요셉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던 그 시기에 하나님은 그 현장에 계시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 자리에 계셨고, 그를 위해 여전히 일하고 계셨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있을 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고(창 39:2,3,5), 그를 위해 여전히 일하고 계셨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에 보내 종살이를 시키기 위해 온갖 사건을 일으키셨다.
요셉을 시켜 형들이 양 치고 있는 현장을 살피게 해야 했고,
요셉을 애굽으로 팔게 하기 위해 이스마엘 상인들을 그곳을 지나가게 하셨고,
맏형 르우벤은 요셉을 해치지 않으려고 했지만 때마침 자리를 비우게 하여 유다와 다른 형제들이 아우를 종으로 팔아 버릴 수 있게 하였다.
그뿐이 아니다.
요셉의 바로의 궁전으로 보낸 또 다른 종류의 일들이 많이 있었다.
요셉에게 한 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 안주인이 없었더라면 옥에 갇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옥에 갔다 할지라도 바로가 술잔을 올리는 관리를 미워하지 않았더라면, 요셉이 있는 감옥에 들어올 일이 없었을 터이고, 요셉과 만나는 일도 일어나지 앟았을 것이다.
이처럼 사소한 사건들 하나하나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요셉은 애굽의 바로 앞에 나아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대다수가 불행하고 끔찍한 일들이었다.
이러한 많은 일들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사소한 일들(요셉에게는 끔찍하고 불행한 일들) 하나하나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요셉은 형통한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그랬더라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까?
기근으로 인해 이루 헤아릴 스 없을 만큼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요셉은 교만했을 테고 형들은 분노에 찌들어 있었을 것이다.
야곱은 막내를 우상처럼 섬기며 중독적인 사랑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요셉에게는 어떤 일들로 비쳐줬을까?
그에게는 기도에 응답하지 않고 침묵하고 계시는 하나님으로 비쳐줬을 것이다.
자신이 당하는 고난과 환난과 고통을 참고 이겨 나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일하고 계신다.
이런 고난이 없었더라면 요셉은 애굽으로 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기근이라는 고난이 없었더라면 요셉의 형들은 애굽에 곡식을 사러가지 않았을 것이다.
요셉이 끔찍한 시련을 당한 것처럼 형들과 야곱도 고난을 겪었다.
요셉이 거쳐온 참혹한 종살이의 세월, 형들이 지나온 참담한 죄책감의 세월, 야곱이 살아온 처참한 슬픔과 우울의 세월은 하나 같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징계를 내리시고, 고통을 겪은 뒤에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사례)
영국의 목자들은 양을 한 마리씩 잡아서 소독약을 푼 커다란 물통에 집어 넣는다.
한 마리 한 마리 귀와 눈, 코까지 물에 완전히 잠기도록 밀어넣는다.
양들로서는 숨이 막히도록 무서운 과정이다.
물에 다 들어가기도 전에 수조 밖으로 뛰쳐나가려 하는 녀석이 있으면 때리고 을러서 도로 통 속에 몰아넣는다.
양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지만, 주기적으로 그런 처치를 해 주지 않으면 기생충이나 질병으로 희생되기 쉽다.
결국 양들에게 유익한 조처인 것이다.
우리에게도 지극히 헌신적인 목자가 계신다.
그분도 종종 우리에게는 겁나는 일,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자주 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정말 요셉이 기도하면서 간구하였던 것들을 허락하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셉의 구체적인 요청에 대해 일일이 답하지 않으신 까닭을 알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흘렸습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기도에 응답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꿈의 해석은 본인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석을 하시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요셉의 말(창 40:8 ; 41:16,25,28)을 통해서 요셉의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기도했던 건져 주시길, 구출해 주시길 구한 요셉의 기도를 하나님은 놓치지 않고 듣고 또 꾸준히 응답하셨습니다.
하지만 요셉이 청하는 시기와 방법대로는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 것만 같은 그 기간 내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등을 돌리기는커녕,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야곱이 세상을 떠나자, 형들은 혹시라도 요셉에게 아직 원한이 남아 있어서 복수하지않을까 걱정을 하였습니다. 이 때 요셉은 형들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50:19-21)
형들의 소행은 악했고 잘못을 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으로 선을 이루셨습니다.
또한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창세기 45:5-8).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5:5)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이러한 믿음을 갖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시는 가운데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택하여 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그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말로만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여러분을 위하여 어떻게 처신하였는지를,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택하셨음을 안다고 확신 있게 선언하였다(4절).
확신 있게 선언하게 된 근거는 바울이 전한 복음이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능력 ; 이적과 기사를 일으키는 능력이 아니라, 죄인으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권능을 말한다.
성령 ; '성령으로(with the Holy Spirit)'라는 의미로서 복음이 전파될 때 성령이 역동적으로 역사하셔서 듣는 자들의 영혼 속에 본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가 바로 성령이라는 의미이다.
큰 확신 ; 듣는 자들에게 임한 확신이 아니라 전도자들에게 주신 확신으로서, 복음 전할 때에 하나님께서 듣는 자들의 마음 속에 강하게 역사하고 계시는 것을 크게 확신하는 것이다.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또한 여러분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이 주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많은 환난'이란 실제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에 반대하여 일어난 환난들을 말한다.
바울 일행이 복음을 전할 때 복음에 적대적이었던 유대인들로 인한 핍박(행 17:5-9)과 그 도시의 이교도들로부터 당한 극심한 고난(살전 2:14)을 말한다.
이러한 환난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는 ‘환난’으로 번역된 ‘들립세이’의 원형 ‘들립시스’가 잘 보여준다. ‘들립시스’는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서 포도를 틀에 넣고 압박하여 으스러뜨리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본문처럼 이 ‘들립시스’가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어 참기 힘들 정도로 괴로운 고통을 의미한다.
이러한 환난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다(행 14:22).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기쁨’은 ‘성령께서 그 내주하는 자에게 부여하시는 기쁨’이다.
‘기쁨’으로 번역된 ‘카라스’의 원형 ‘카라’는 성령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오는 열매 중 하나이다(갈 5:22).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의 내주를 체험하였고, 그분이 한량없이 부어주시는 영적 기쁨으로 인해 어떠한 환난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성령을 통해 그들이 받은 이러한 기쁨은 외부에서 밀려오는 환난을 압도하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다.
이러한 기쁨은 빌립보에서 전도를 하다 깊은 옥에 갇힌 바 있는 사도 바울과 실라에게 임했던 기쁨과 동일한 것이었다(행 16:22-25).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그래서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부터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만 울려 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두루 퍼졌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두고는, 우리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믿음)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사랑)와
그들은 우리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어떠한 영접을 받았는지, 어떻게 해서 여러분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대하여 스스로 소문을 내고 다니던 자들이 전한 내용
첫번째 내용 ;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믿음)
‘가운데’로 번역된 전치사 ‘프로스’는 ‘~을 향하여(toward)’라는 의미가 있으며, ‘들어가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에이소돈’의 원형 ‘에이소도스’는 명사로서 ‘들어가는 행동’ 혹은 ‘접근’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안으로(into)’를 뜻하는 ‘에이스’와 ‘길(road)’을 뜻하는 ‘호도스’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원래는 어떤 장소로 인도하는 입구를 의미했으나, 신약 성경에서는 들어가는 행동이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접근하는 행동을 나타내는 데 쓰였다(행 13:24 ; 살전 2:1 ; 히 10:19).
빌립보 전도를 마치고 데살로니가로 간 바울 일행이 거기에 있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한 사실과 그때에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환영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사실(행 17:1-4) 모두를 가리킨다.
두번째 내용 ;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사랑)
‘우상’과 ‘하나님’ 앞에 각각 붙어 있는 전치사 ‘아포’와 ‘프로스’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우상으로부터 뛰쳐나와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마치 실제 눈으로 보는 듯한 시각적 이미지를 전달한다.
전치사 ‘아포’는 '~로부터’란 뜻으로 분리 · 이탈의 의미를 나타내는 반면, 전치사 ‘프로스’는 '~를 향하여’란 뜻으로 누군가에게로 향해 달려가는 뉘앙스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치사는 ‘너희가 ... 돌아와서'로 번역된 본문의 동사 ‘에페스트랩사테’와 잘 조화된다. 이 동사의 원형에 '피스트레포’는 그 자체로 이미 ‘돌이키다’(마 7:6)라는 의미가 있는 동사 ‘스트레포’에 강조의 의미로 쓰인 접두어 ‘에피’가 결합된 동사로서 기존의 위치에서 의지적인 결단에 의해 완전히 돌이키는 것을 의미하며 '회심을 통한 하나님 백성으로의 가입'을 나타낸다.
참된 회심은 그 자신이 과거에 머물러 있던 죄악으로부터 뛰쳐나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분만을 섬기는 것이다.
‘우상’으로 번역된 ‘에이돌론’은 이교도들이 섬기기 위해 만들어 놓은 형상을 뜻하는 ‘에이돌론’의 복수형이므로 ‘우상들(idols)’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 당시 데살로니가의 이교도 사회는 여러 신들을 동시에 섬기는 다신교 사회였다.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복음을 듣고 회심하기 전까지는 여러 신들을 섬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 일행을 통해 놀랍고도 충격적인 복음을 들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진정한 신은 한 분뿐이며, 그분만이 살아계신 참 신이라는 것이었다.
‘사시고’로 번역된 ‘존티’는 ‘살아있다’라는 의미를 지닌 ‘자오’의 현재 분사형으로서 ‘그 생명이 계속해서 있는’, ‘영원히 살아계시는’이라는 의미이다.
레온 모리스(L. Morris)의 지적과 같이 영원히 살아계셔서 활동하시는 하나님(God)은 죽은 우상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신들(gods)과 너무나 분명하게 대조된다. 또한 비도덕적이며 진실하지 못한 우상 숭배자들의 삶을 살아오던 사람들에게 높은 도덕성을 가지고 진실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삶은 자신들의 이전 삶이 얼마나 허위로 가득 찬 것이었었던가를 잘 보게 하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었다.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소망)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어떻게 해서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그분의 아들, 곧 장차 닥쳐 올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기를 기다리는지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세번째 내용 ;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소망)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내용을 명확히 전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바울과 전도자들은 십자가와 부활만이 아니라, 그의 재림과 성도들의 궁극적 구원 등 복음에 대하여 총체적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분명했기에 환난 가운데서도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본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기다리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아나메네인’은 ‘아나메노’의 현재 부정사형이다. 이 동사는 신약 성경에서 본절에만 유일하게 나오는데, 타이어(Thayer)에 따르면 이 동사는 장차 오기로 약속되어 있는 사람을 ‘인내와 신뢰로써’ 기다린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나아가 헨드릭슨(W. Hendriksen)에 따르면 준비를 갖추고 기다림, 즉 재림하실 예수를 부끄럼 없이 맞이할 수 있도록 마음과 생활의 성화를 추구하면서 기다린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들이 어려움 가운데서도 인내와 신뢰로써, 또한 성화를 추구하면서 기다리는 대상은 하늘로부터 오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로 번역된 '에크 톤 우라논’은 문자적으로 ‘하늘에서부터(from heaven)’라는 의미인데, 이는 하나님이 계시는 처소에서부터 내려오심을 나타내는 셈어의 관용적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계시는 처소에서부터 강림하신다는 사실은 그가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것을 끝낸 것이 아니라 부활 승천하여 그곳에 올라가셨음을 보여준다. 그는 부활하여 하늘로 올리우신 이래로(눅 24:51 ; 행 1:9-11) 지금까지도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행 7:55 ; 롬 8:34), 장차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이 땅에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이다(살전 4:16 ; 마 24:30,31). 또한 그는 저주의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나(갈 3:13) 하나님에 의해 다시 살리심을 받은 무죄한 자로서(행 2:24), 장차 자기를 믿는 자들을 죄와 죽음에서 다시 살리실 것이다.
바울은 본서에서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언급을 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모두 다섯 장으로 구성된 본서에서 재림에 대한 언급이 모든 장마다 다 나온다는 사실이다(살전 1:10 ; 2:19 ; 3:13 ; 4:13-17 ; 5:1-11,23).
내용의 분량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재림에 대한 기사는 4장부터 본격적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처럼 본격적으로 재림에 대하여 논하기에 앞서 1-3 장의 말미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하겠다.
재림을 고대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 사실을 지속적으로 일깨워줌으로써 그 소망 안에서 더욱더 견고히 머물러 있으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과 함께 바울 자신도 그러한 한 소망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그들과의 연대감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보충적 설명으로서, 직역해 보면 ‘죽은 자들로부터 그가 다시 살리신’이 된다.
여기서 ‘그’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 베드로도 그의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행 2:24)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셨음을 분명히 선언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사망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셨기에 그분의 재림도 있는 것이다. 즉 예수의 재림은 그의 부활에 기초한다.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바울은 여기에서 심판주로서가 아닌 구원주로서의 재림 예수에 대해 말한다.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분사가 두 개 쓰였는데, 그 둘 모두 현재 분사형이라는 것이다. 먼저, '장래’로 번역된 ‘에르코메네스’는 ‘오다(come)’를 뜻하는 ‘에르코마이’의 현재 분사로서 ‘오고 있는’이라는 의미이다.
이 현재 분사는 미래에 다가올 일과 현재에 진행되고 있는 것을 모두 나타내는데, 이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최후 심판의 자리에서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 하늘로 쫓아 나타나나니’라는 롬 1:18의 현재 직설법 표현과도 맥을 같이한다.
그렇다면 현재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그 상실한 마음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 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악을 계속해서 쌓게 함으로써 심판의 날을 두려움 속에서 기다리게 하는 것이다(롬 1:28-32).
이는 신학 용어에서 유기(遺棄)로 표현되는 것이며, 이 역시 하나님의 심판의 한 측면이다.
최후 종말의 날에 있을 하나님의 진노는 무엇인가?
불과 유황으로 영원히 타오르는 불못에 던짐으로써 둘째 사망에 처하게 하는 것이다(계 21:8). 그들은 그 불못에서 영원토록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마 24:51 ; 25:46).
‘건지시는’으로 번역된 뤼오메논은
위험한 상황이나 구덩이에서 끌어당겨 구조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뤼오마이’의 현재 분사로서, 이 역시 현재 진행의 의미와 더불어 최후 종말론적 의미를 함께 내포한다.
즉 이는 ‘건져내고 계시는’이라는 의미와 ‘장차 건져내실’이라는 의미를 함께 지닌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믿는 자들이 상실한 마음에 방치되어 완악한 상태로 살아가지 않도록 끊임없이 은혜를 부어주심으로써 그들을 진노에서 건지신다.
또한 장차 최후 심판의 자리에서 모든 인류에 대한 재판이 벌어질 때, 그들에 대해 변호하심으로써 그들로 영원 복락을 누리게 하신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1:1-10
찬송 ; 313장 내 임금 예수 내 주여
본문 이해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성숙한 신앙으로 인해 바울과 사역자들이 감사하는 본문이다. 바울은 편지를 쓰면서 자주 성도들을 향한 감사로 시작하는데, 데살로니가전서가 특히 그러하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전해 듣고는 하나님 앞에 감사한다. 믿음으로 행하고, 사랑으로 수고하며 소망으로 인내하는 그들의 신앙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다른 성도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었고, 각처로 소문이 퍼져나가 수많은 성도들의 귀감이 되었다. 성도들로 인해 아파하는 때가 많았던 바울에게 적잖은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설교 방향 - 대지형 설교
'본이 되는 성도'를 설교할 수 있겠다. 모든 성도가 귀하지만, 다른 성도들의 모범이 되는 성도는 더욱 귀하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러하였다. 3절을 중심으로 분해형 3대지 설교를 구상할 수 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성숙함은 무엇인가?
첫째, 믿음의 행동이다. 믿음의 역사로 기록되어 있는데, 믿음의 사역 혹은 행동으로 읽을 수 있다. 그들의 행동과 사역은 믿음에 기초했다.
둘째, 사랑의 수고다. 감정적 사랑을 넘어 땀 흘려 수고하는 사랑을 실천했다.
셋째, 소망의 인내다. 고난 중에 소망으로 인내했다.
서론과 우산질문
오늘의 말씀은, 본이 되는 성도입니다. 성도들 중에 다른 성도들의 본이 되는 분이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귀하고 아름답지만, 이런 분들은 더욱 귀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러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사역자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성숙한 신앙을 전해 듣고는 마음으로 기뻐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주변 지역과 각처에 있는 성도들의 모범이 되었는데, 묵상할 때에 우리도 그들의 성숙함을 본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믿음의 사역입니다.
2절에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첫 항목이 “너희의 믿음의 역사”입니다. 믿음의 행동 혹은 믿음의 사역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행위는 믿음에 기초했고, 교회로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사역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에 기초했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이나 주변 상황에 휘둘리기보다 오직 믿음으로 판단하고, 믿음으로 사역했습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의 행동과 사역도 이와 같기를 바랍니다.
둘째, 사랑의 수고입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다음에 "사랑의 수고"를 언급합니다. 사랑은 단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에 있어 감정이 차지하는 자리가 꽤 묵직하지만, 사랑의 감정이 진심이 되려면 수고의 땀이 보태져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사랑이 그러했습니다. 단지 입술의 고백이나 마음의 애틋함을 넘어 땀 흘려 서로를 섬기는 참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러한 사랑으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소망의 인내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데살로니가 교회도 많은 초대 교회들처럼 핍박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며 인내하였습니다. 10절에는 주님의 부활과 재림이 언급되는데, 고난 중에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강직하게 하는 기초였습니다.
결론과 도전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믿음의 행동으로, 소망의 인내로, 그리고 사랑의 수고로 열매 맺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기도 제목 ; 말씀을 들을 때마다 기쁨과 설렘이 있게 하소서.
* 바울(Paul) : 작은 자
(1) 출생과 교육 :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으로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 열심있는 자이며(행22:3) 청결한
양심으로 선조때부터 섬기던 하나님을 섬기고(딤후1:3) 할례를 받았고 자랑할만한 베냐민 지파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의 선두에서 핍박하던 사람이니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도무지 결점이 없는 사람이었다(빌3:5-6).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었다(갈1:14). 나면서 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다(행22:26-28).
(2) 성격:논리의 힘과 능력의 결합 즉 이성과 영력이 일치된 것이 특색이다. 결점이 있다면 너무 성급하여 후회하는 일이 있었던
점(행15:39, 23:4-5). 자기 몸에 가시가 있다고 말한 것은 성격의 나무람 같다(교후12:7). (3) 회개:기독인들이
율법을 경히 여기고 성전을 모독한다고 생각했었다(행6:31). 스데반 죽이는 일에 가담한 것은 의분심에서 였다(행7:5-4:3).
그 후 기독교인을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향하였다(행9:1-2).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여
크리스챤이 되었다(행9:1, 22:4, 26:9). (4) 선교활동:공중앞에서 회개한 사실을 간증하고 전환된 마음을 수습하고
앞날을 위한 준비로 아라비아에 은퇴하여 더욱 힘을 얻고 돌아와 유대 인에게 예수가 기다리던 그리스도임을
전파하였다(갈1:16-18, 행9:22).
* 1차 선교여행은 바나바와 같이 마가를 데리고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구브로섬을 경유 소아시아 중남부 지방의 유다인 회당을
순방하면서 거기를 발판으로 선교하였다. 이 선교 활동 중 이방인 회심자와 유대인의 율법과의 관계에 있어 문제가 야기되어 유대교의
전통을 고집하는 자들의 반대에 부딛쳐 이 문제 해결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루살렘회의 때 이방인 선교에 관한 문제 협정을
지었다 (행 13:4-14:28).
바울의 1, 2차 선교여행 지도
* 2차 선교여행은 실라를 데리고 안디옥을 출발하여 드로아 바다를 건너 유럽 땅에 들어가 마게도냐 지방의 빌립보 데살로니가 아덴
고린도에 이르러 1년 반 동안 머물렀다가 그 후에 에베소를 지나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안디옥으로 돌아왔다(행15:40-18:22).
바울의 3차 선교여행 및 로마 여행 지도* 3차 선교여행은 소아시아의 내륙지방 갈라디아 부르기아 지방을 지나 에베소에 도착하여
거기서 3년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그 부근에서 선교하였다. 그 후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 마게도내에서 고린도로 가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이 선교 여행에서 지중해 연안에 몇개의 교회가 설립되었고 신약성서에 편집된 성서 편지(바울서신)도 많이
썼다(행18:23-21:14).
* 3차 선교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반대파인 율법주의 자들의 선동과 모략으로 입건되어 가이사랴에 2년간 감금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인연이 되어 바울은 총독 벨렉스 베스도 그리고 아그립바왕 앞에서 자신을 변명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 후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지중해를 건너 로마로 갔다(행21:17-24:27).
(5) 인물:헬라 문화의 교육을 받았으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지중해 연안에서 많은 박해를 받으면서
전도하였다(고후11:23-28).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30년간 선교사로서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고전 9:10).
건강은 좋지 못했고 용모도 보잘것 없었다(고후10:10, 12:7).
* 실루아노(Silvanus) - 생각
바울과 동역자로 실라와 동일인이다(고후 1:19, 살전 1:1, 살후 1:1, 벧전 5:12)
* 디모데(Timothy) - 하나님을 공경한다
소아시아의 루가오니오 사람1) 모친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는 다 경건한 신자로 디모데를 어릴 때부터 성경으로 잘 가르쳐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모범 청년이 되었다(행 16:1, 딤후 1:5, 3:15). 2) 주후 48년에 바울이 루스드라에 처음 갔을 때에 믿고 51년 두번째 전도시에 전도하기로 결심하고 할례를 행함(행 16:1-3). 3) 장로들의 안수식으로 목사직을 받음(딤전 4:14). 4) 바울과 함께 소아시아, 헬라, 마게도냐, 로마등지에 순회 전도하니 바울이 그를 가리켜 나와 함께 수고하는 자라 하였고(롬 16:21)5) 내 귀하고 신실한 아들이라고 하였다(고전 4:17). 6) 형제라(고후 1:1) 7) 믿음의 참 아들이라(딤전 1:2) 8) 사랑하는 아들(딤후 1:2) 9) 바울과 함께 로마옥에 갇혔다가 풀려남(히 13:23) 10) 바울의 후임으로 에베소에서 사역하였다(딤전 1:3). *주후 64년 바울이 출옥하면서 빌립보에 있을 때 디모데 전서를 보내고 67년 재차 투옥되어 최후로 소아시아에 있는 그에게 디모데 후서를 보내었다. [디모데]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 라는 뜻)는 바울의 제자가 되어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일에 충성을 한 목회자이다.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디모데는 어릴 때부터 경건한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가 헬라인이었으므로 헬라적인 영향을 받아 다신사상에 빠져들수도 있었으나 디모데는 그 이름과 같이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섬겼다. 신실한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성경을 배우며 하나님 중심으로 신앙 생활을하는 디모데는 모범적인 젊은이가 되어 갔다. 한 분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봉사하는 청년 디모데가 그의 고향 루스드라에서 모든 사람들의 칭찬을 한몸에 받게 된것은 당 연한 일이었다. 이처럼 평온한 가운데 기독교 교육을 받던 디모데의 인생은 사도 바울과의 만남을 통해 변화의 계기를 맞는다. 1차 전도여행 중 루스드라를 방문한 바울과 디모데의 만남은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기적을 행하고 복음을 전파하다가 모진 핍박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바울의 모습은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온 디모데에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 만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디모데는 자 신에게 새생명을 불어 넣어준 영적 아버지 바울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제자 훈련을 받게 되었다. 어린시절부터 가정에서 성경공부를 함으로써 기반이 다져진 디모데의 믿음은 바울의 가르침을 받는 가운데 점차 성숙되어 갔다. 온유하고 충성스런 성품과 훌륭한 인품을 소유한 디모데는 바울의 [사랑하고 진실한 아들] 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와같이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 된 디모데를 바울이 2차 전도여행에 동행케 하였다. 유대인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하례를 받고 장로회에서 안수까지 받은 디모데는 본격적으로 바울의 동역자로 서 부족함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디모데 역시 부족함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부끄럼을 잘 타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인데다가 병약하기까지 한나이 어린 디모데는 거친 광야와도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인도해 나가는데 너무도 힘이 들었다. 디모데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훗날 바울의 후임으로 있던 에베소교회에서도 복음 전파하기를 두려워하고 진리를 왜곡시키는 거짓 교사들을 두려워 함으로써 그의 한계를 드러내었다. 그렇지만 이처럼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디모데는 바울이 보내준 서신(디모데후서)를 통해 위로와 가르침을 받고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디모데 역시 고독한 사도의 길을 가는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의 마음에 큰 위로를 주는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사고력과 인내력이 뛰어난 반면 우유부단한 디모데에게 바울의 추진력과 결단력이 잘 조화되어 두 사람의 아름다운 인간 관계는 곧바로 하나님나라의 확장과 연결이 되었다. 바울과 디모데 사이의 이러한 관계를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바울이 디모데를 찾아 후계자로 삼으려는 모습 속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디모데후서 4:9). 디모데는 바울과 세대가 다르고 성격과 인품도 달랐으나 성령의 끈으로 하나로 묶이자 더할 수 없는 동역자가 되었던 것이다. 겸손하고 진실된 평화 애호자로서 사도의 내역자가 되어 선교와 목회사역을 해나간 디모데는 오늘 주님의 일꾼이 되어 헌신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능력과 더불어 훌륭한 인품을 갖추고 아름다운 인간 관계를 맺어야 함을 시사해 주고 있다.
07-11-2024(목) 데살로니가전서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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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We always thank God for all of you, mentioning you in our prayers. 너희 무리를 인하여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감사의 대상을 확장합시다!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항상 기도합니다. 기도의 지경을 넓히는 믿음 |
* 디모데()
본절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삶속에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기뻐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 나오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초대 교회 당시 널리 사용되던 어휘로서 자주 한 단위로 결합되어 언급된다(5:8;
롬 5:1-5; 고전 13:13; 갈 5:5, 6; 골 1:4, 5; 히 6:10-12; 10:22-24; 벧전 1:21,
22, Bruce, Hunter).
이 세 가지는 서로 유기적 관계에 있는 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에게
부여하신 삶의 진수(眞髓)를 이루는 덕목들이다(Bornkamm). 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덕목들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영역을 지배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다.
믿음의 역사(투 에르구 테스피스테오스)
'믿음 가운데서 우러나온 너희의 역사'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Morris).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구속 역사에 근거한다.
이러한 믿음은 필연적으로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게 한다.
사랑의 수고(투 코푸 테스 아가페스)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나타내 주거니와 믿음과 마찬가지로 실천적 행위를 동반한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병자와 굶주린 자를 돕기위해 자선을 행하였으며,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열성적 헌신을 다하였다(Hendriksen).
이것은 사도 바울이 다른 곳에서 표현한 바, 복음을 위한 수고들이다(3:5; 고전 15:10, 58; 고후 10:15; 갈 4:11; 빌 2: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궁극적인 승리의 날을 바라보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은 현실속에서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온다 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를 지니고 있다.
본절의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네스'()는 진취적이고 용기있는 그리스도인의 특질로서 용감한 군인이 극한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버텨나가는 기상(氣像)을 의미한다(Findlay).
그리스도인들은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결코 낙심치 아니하고 인내로써 전진해야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2절에 나오는 바울의 중보기도의 때를 말해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 대한 기억이 매우 자주 떠올랐던 까닭에 '쉬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특히 바울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기도가 신실함을 나타내준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떤 자들은 자신들을 대하는 바울의 동기(動機)에 대해 의심을 품었던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바울은 본 서신의 서두에서부터 그러한 의혹을 일소하고자 한다(2:5,10;3:9, Thomas).
믿음의 역사는 동사(動詞)
사랑의 수고는 명사(名詞)
소망의 인내는 형용사(形容詞)
사랑을 행동으로 나타낼 때 그 사랑이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면 반드시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명사, 믿음은 동사, 소망은 명사와 같은 사랑을 수식하는 형용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데살로니가교회는 믿음의 소문이 주위에 널리 알려졌던 모범적인 교회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역사
- 빌레몬서에서 바울이 오네시모를 만난 후에 회심한 노예 오네시모
데살로니가후서 1: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요한복음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히브리서 6:10
하나님이 부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넘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야고보서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둘째는 사랑의 수고
- 바울, 실라(실루아노, 로마식 이름), 디모데의 수고 빌립보 지방에서 귀신들린 여종을 치유한 후 감옥에 갇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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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다룹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와 재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책들은 두통의 편지 형식으로 쓰여 있으며 몇 주일의 짧은 시간 차이로 보내졌습니다.
데살로니가
편지의 수신 지역인 데살로니가는 지리적,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를 포함한 지역을 ‘마게도냐’라고 부릅니다.
이곳은 알렉산더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데살로니가는 한쪽은 아시아의 관문인 이스탄불과 다른 한쪽은 로마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당시 세계의 수도라고 인정하던 곳이 로마와 이스탄불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는 복음 전파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였습니다. 물론 문화적으로 풍성하고, 경제적으로도 번영했습니다.
바울 선교팀이 제2차 전도 여행 중에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으로 아시아로 가려던 계획을 유럽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마게도냐 지방의 관문 도시인 빌립보에 도착해서 사역을 시작했지요. 그후 데살로니가로 와서 복음을 전합니다.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많은 귀부인들이 복음을 믿자 유대인들이 이를 시기하여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온 도시를 소동하게 했습니다. 이 도시에서 바울 팀이 “천하를 소동케 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리웠습니다(행 17:1-9).
견고한 믿음과 재림에 대한 오해
바울과 실라는 그 소동을 피해서 베뢰아로 갑니다. 그곳에서도 많은 헬라인과 귀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만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와서 소동을 일으키지요. 이때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그곳에 남겨두어 더 사역을 하게 하고 혼자만 아가야 지방으로 갑니다. 아덴에서 복음을 전하고 더 내려가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마게도냐 지방에서 사역하던 실라와 디모데가 와서 합류합니다. 바울은 이들에게서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해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좋은 소식은 이들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모든 믿는자의 본이 되었다.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 처에 펴졌다”(1:7,8),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서도 너희의 믿음으로 위로를 받았다”라고 이들을 칭찬합니다(3:6,7). 데살로니가교회가 많은 환난 중에도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있는 것을 보며 바울은 큰 위로를 받습니다.
반면에 나쁜 소식은 데살로니가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오해로 혼란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이 재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도록 두 통의 짧은편지를 보냅니다.
바울은 두 가지 면에서 재림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을 오해해서 일도 하지 않고 규모 없이 사는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곧 오실 것이기 때문에 앞날의 계획을 세우거나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다고여겨서 일을 하지 않았지요. 바울은 이들에게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고 엄하게 말하면서 노동과 계획의 중요성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마치 예수께서 내일 재림하실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근신하며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맡겨진 주의 일을 행할 때는 예수께서 500년 후에 오실 것처럼 신중하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야 하지요. 철저한 계획을 세우며 여유를 가지고 부지런히 맡겨진 일을 해야 합니다. 재림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예수님께서 재림하기 전에 죽은 사람들은 어찌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고 죽은 사람들도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동일하게 영광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죽음에서 일어나 모든 믿는 사람들과 함께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져 공중에서 주를 영접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과 부활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고, 날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억하면서, 소망 중에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아가라고 말씀합니다.
공통점과 차이점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는 공통점이 많지만 매우 큰 차이점도 있습니다. 전서 1장과 후서 1장이 그러한데, 전서 1장은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삶의 세 가지 요소인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말합니다.
후서 1장도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말하지만 이것은 교회가 가져야 할 올바른 표지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는 믿음이 자라나야 되며, 사랑은 풍성해야 하고, 인내는 점점 더 견고해져서 모든 박해와 환난을 이겨야 한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개인의 삶에서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후서는 교회 공동체로서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또한 전서는 리더와 목자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리더는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는 삶을살아야 하며, 돈을 위해 일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을 유모와 아비로서 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유모는 유순한 자로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을 말하고, 아비는 자녀들을 권면하고 위로하고 징계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고 목자의 모습도 여러 면으로 설명합니다. 성도를 향한 애정과 근심으로 성도의 필요를 돕고 기뻐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고 격려함으로 섬겨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후서는 특별히 재림 전에 불법자들이 일어날 것을 말합니다. 이 땅에는 악의 세력이 존재하지만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다스리셔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승리하게되고,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인내하며, 무질서의 삶에서 돌이켜 질서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실된 사역자의 삶의 일곱 가지 특징(2장 1-12절)
1. 먼저 본을 보여야 합니다(2:10-12).
이것은 사역자의 기초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행하셨고(행 1:1), 에스라도 본을 보였습니다(스 7:10). 본을 보이는 것도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은자신이 본을 보이며 산 것에 대해 데살로니가 형제들과 하나님이 증인이라고 담대히말합니다.
2.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2:4).
끊임없이 테스트를 받고 통과하여 하나님께 인정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한번만 테스트를 받는 게 아니라 반복해서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마음놓고일을 맡기십니다.
3. 어려운 여건과 환경 가운데서도 포기하거나 핑계 대지 말고 변하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실하게 주를 섬겨야 합니다(2:2).
4. 재정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동기로 사역해야 합니다(2:3-5). 재정을 올바르게 다룰 줄 알아야 하며 돈에 있어서 깨끗해야 합니다. 바울은 재정적으로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했습니다(2:9).
5.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지 말고, 오히려 주어진 권리를 다 쓰지 않습니다(2:7). 베드로는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라”라고 합니다(벧전 5:3).
6. 자녀를 기르는 어미의 심정으로 형제들을 대해야 합니다(2:7,8).
유순한 자가 되어 목숨까지 주는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유순한’이란 ‘친절하고 부드럽고 온유한’이란 뜻입니다.
7. 아비의 태도로 형제들을 대해야 합니다(2:11,12).
아비는 자식을 권면하고, 위로하고, 때로는 엄하게 경계하여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게 합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침서(5장 12-22절)
● 수고하고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
● 서로 화목하라.
●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라. 무질서하게 행동하는 자들을 경고하라.
● 믿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라-이들은 영적으로 어린 자를 가리킵니다(롬 14:1-15:13, 고전 8:10).
●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주라-이들은 몸과 마음이 연약한 자들입니다(롬 14:1-15:13).
●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 선으로 악을 이기라.
●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모든 일에 무엇이 좋은지 시험하여서 입증된 것을 굳게 잡아 내 것으로 소유하라는 것입니다.
●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악한 것은 가까이 가지도 말고 흉내도 내지 말고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홍성건 | NCMN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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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1Thessalon)
-저자, 대상, 내용, 기록연대와 장소 -
I. 저자
본서의 저자가 자신을 가리켜,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 (1:1) 라고 밝혀주고 있다.
실루아노와 디모데의 이름이 함께 소개되어 있지만, 이것은 실루아노와 디모데 모두, 또는 그들 중 어느 한 사람이 본서를 쓰는데 어떤 역할을 했다거나 불러 준 것을 받아썼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첫절 이후에 바울은 끊임없이 자신의 인격으로 말하고 있으며, 또한 자신을 지시하는 일인칭 단수를 사용하고 있다(2:18,3:5,5:27).
본서가 바울의 저작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1) 그런데 19세기에 바우르(F.C.Baur,1792-1860)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가 주장하는 내용은 다음고 같다.
(1) 본서는 바울의 다른 서신들보다 훨씬 덜 교리적이며, 또한 대수롭지 않은 내용이다.
(2) 본서는, 칭의가 율법 행위에 의한 것이라는 관념을 공격하지 않는다.
(3) 수개월이란 짧은 시일 안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이데살로니가전서 1:78과 4:10에 묘사된 바와 같이 강렬하고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리가 없다.
(4)데살로니가전서 2:14-16의 유대인들에 대한 강경한 언어는,바울의 저작인 로마서에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라는 말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5) 본서는 이상할 정도로 지나친게 바울적이다. 본서는 바울의 다른 서신들(특히 고린도전서와 후서)에 있는 문장들과 비슷한 문장들이 너무나 많다. 따라서 본서는 바울이 아니라 A.D. 70년 이후에 바울의 제자가 재림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쓴 것이다.
黑崎는이 편지가 정말 바울의 것이냐에 관해서는 바우르일파의 부정설이 있을 뿐, 대체로 의심 없이 바울의 편지로 인정되고 있다.그리고 바울의 부정설은 유력한 학설이 아니므로 여기에 논할 필요를 인정치 않는다]라고 일축해 버린다.
아뭋든 우리는 바우르의 견해를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 견해에 대해, 헨드릭슨은대사도의 모든 문서가 다 동등하게 교리적 특성을 가져야만 한다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울 서신들은 어떤 구체적 상황으로부터 생긱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각 교회의 상황은 다르다. 따라서 어떤 교회에는 교리의 명백성을 제시해 주어야 하고, 어떤 교회에는 훈계에 주어야 하며, 어떤 교회에는 책망해 주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둘째 견해에 대해 헨드릭슨은, 바울이 오직 단 하나의 사상만 가진 사람이었는가고 반문한다.
더우기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은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의 상황과는 달랐다.
세째 견해에 대해, 우리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30,비교 20:16,막10:31)는 예수의 말씀으로 답변할 수 있다.
헨드릭슨 역시 그럴 수 없는가고 반문하면서, 사실상 본서에 의해 제공된 일련의 정보는사도행전 17:6의 서술에 의해 제공된 것으로 확증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네째 견해에 대해, 헨드릭슨은 순수한 슬픔 및 고통을 느끼는 것과 무서운 실재의 계시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오히려 우리는 주를 거역하고 제자들을 핍박하는 죄를 일삼는 동족(유대인)에 대한 바울의 애절하고도 뜨거운 사랑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다섯째 견해에 대해, 헨드릭슨은 (1)과 (2)와 반대되는 논의라고 공박하였다.
사실상 다섯째 견해는, 오히려 바울의 저작임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바우르의 학설을 여지없이 반박한 학자들은 코흐(Koch-1848),뤼네만 (Luneman-1850),그림(Grimm-1850),랑게(Lange), 로이스(Reuss-1853)등이다.
본서가 바울의 저작임을 뒷받침해주는 외적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본서는 말시온(Marcion)의 정경 (A.D. 140년경) 에 포함되어 있다.
(2) 본서는 무라토리 단편 (The Muratorian Fragment)에도 들어 있다.
(3) 2세기 말의 교부인 이레니우스(Irenaeus,130-202), 터툴리안(Tertullian, 160- 220),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150-213)가 본서를 바울이 저작으로 알고 인용하였다. 이들보다 먼저 폴리갚(Polycarp,69-155) 가 저스틴 마티어 (Justin Martyr,100-165) 가 인정하고 있었다.
(4) 옛 라틴어 역 성서와 옛 시리아 역 성서에 포함되어 있다.
(5) 데살로니가전서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편지들의 최초 사본인 The Chester Beatty Codex (A.D.220년경)에 단편적인 형태로 발견된다.
(6) 유세비우스(Eus- ebius)와 오리겐(Origen)도 본서를 바울의 것으로 인용하였다.
본서가 바울의 저작임을 뒷받침해 주는 내적 증거는 논의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무수하다. 본서는 바울의 처녀작이며 원형대로 우리에게 전해진 신약 중에 제일 먼저 쓰여진 책이다.
그 몇 가지 증거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본서 자체가 저자로서 바울을 지시하고 있다(1:1,2:18).
(2) 본서는 형식과 구조에 있어서, 본서가 바울의 저작임을 부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울의 것으로 인정하는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 그리고 갈라디아서와 똑같다.
(3) 본서에 사용된 용어는 명백하게 바울의 것이다. 본서의 단어 중 80%이상이 소위 바울의 4대 서신(롬,고전.후,갈)에서도 발견된다. 만일 옥중서신을 바울의 것으로 인정한다면, 4대 서신과 옥중서신 속에서 거의 그 90%을 발견하게 된다. 만일 목회 서신이 추가된다면 그 비율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프레임,헨드릭슨).
(4) 본서에는 바울 서신에서만 발견되는 특징 있는 절들이 나타나고 있다 (프레임 핸드릭슨).
(5) 본서는 바울의 성품을 명백하게 반영하고 있다(핸드릭슨). 형제들이 장점에 대한 애정어린 인식(왈커), 목회적인 배려와 애정(부르스) 그의 개종자들에 대한 강렬한 사랑과 그들의 영적 복지에 대한 염려, 그들의 믿음과 자비에 대한 그의 기쁨, 고귀한 자립심(글로악) 등.
이 점에 대해 프레임은 그에 의해 믿게 된 개종자들에 대한 포근한 애정,부족한 그들에 대한 신뢰, 목회적 문제에 대한 재치 있는 처리, 사도로서의 권리에 대한 인식, 사랑의 양보, 모든 일에 있어서 독자들을 동료로 의식하는 것, 그리고 그들의 동정과 기도를 위한 호소 등을 들고 있다.
(6) 본서에는 선교사인 목회자로서 살고 있는 사도 바울과 방금 태어난 고난 중에 성장하는 교회와의 가장 깊은 관계가 생생하게 묘사도어 있다(宮村武天).22) 지금까지의 논의를 미루어 볼 때, 본서가 바울의 저작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로마 판도에 편입된 후에도 데살로니가는 계속적으로 번창하여 갔다.
바울 당시에는 마게도냐인과 헬라인 이외에 로마인과 동양인 그리고 다수의 유대인이 잡거하는 복잡한 도시였다(참조:행17:1).
주후 150년경에는 인구 20만을 헤아려 '전 마케도냐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사도 바울의 생애와 사업에 관련된 옛 도시로서, 로마를 제하고는 이 살로니카처럼 그 당시의 성격과 중요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데가 없을 것이다.23)
이에 형제들이 밤에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피신시켰으며, 바울과 실라는 베뢰아에서도 복음을 전파하여 많은 결실을 얻었다(행17:10-12).
오라는 명령을 받은 디모데와 실라는 즉시 고린도로 옮겨 간 바울을 찾아와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핍박과 환난의 소식을 전하였다(살전 3:1-3).
어린 교회가 어려움을 당한다는 소식에 초조해진 바울은, 직접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하고 싶어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살전 2:1718).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대신하여 그들을 굳게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디모데를 보냈다(살전 3:1-3).그러나실라는 다른 지방(빌립보나 베뢰아)으로 보내진 듯하다] 24).
미구에 디모데와 실라가 마게도냐로부터 고린도로 와서 복명하였다(행18:5).
그 내용은 바울이 염려한 것과 달리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이 잘 성장하고 있고 또한 바울 일행을 생각하는 그들의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이다(3:6).
그들의 핍박을 받으나 용감했으며, 그 굳센 크리스챤 품격은 널리 알려졌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꾸준히 바라며 지내고 있었다] (어드맨).
둘째, 그 교회는 핍박 받는 중이라서 성도들의 인격과 재산까지도 위협받고 있었다.
세째, 이교도 출신인 교인들 중에는 여전히 옛날의 부도덕한 생활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4:1-6).
네째, 바울의 전도를 듣고 주의 재림이 임박한 것으로 단정하여, 일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교인들이 있었다(4:11-12,살후3:8).
또한 주의 재림 전에 죽은 자들 때문에 몹시 슬퍼하는 이들이 있었다(4:13-18).
첫재, 소개와 인사(1:1),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대한 감사와 기도(1:2-4), 그리고 각처에 소문이 자자한 그들의 믿음에 대한 칭찬이다(1:5-10).
세째, 바울은 그들의 사랑의 성장을 위해 기도한다(3:11-13).
다섯째, 바울은 그들이 주의 재림 때까지 성결하도록 기도해 준다(5:23-24).
(3) 갖 설립된 어린 교회에 보낸 편지답게,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것처럼, 부모의 애정과 같은 사랑과 자비가 흘러넘치고 있다(글로악).27)
(4) 그 뿐만 아니라 본서는 참으로 사도적이며 권위적이고 영감적이다(어드맨).28)
(6) 초대 교회의 전도의 열심, 핍박에 대한 인내, 목자에 대한 존경, 그리고 재빠른 믿음의 성장 등이 잘 드러냐 있다.
이 진술은 이 사건을 52년의 아우구스트 1세와 1월 25일 사이에다 위치시키고 있다. 총독은 겨우 1년간 근무하였고, 2년도 채우지 못했었다.
위의 견해들을 종합해 볼 때, 본서는 50-53년경 사이에 고린도에서 쓰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본서는 바울 서신 중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1Thessalon) 개관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중요한 도시다. 바울이 제 2차 전도 여행 때에
이곳에서 세 안식일에 걸쳐서 전도한 결과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그 성에 사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항하여 소동을 일으켜서 바울은
할 수 없이 그곳을 떠나게 되었으나 그곳의 어린 신자들의 영적생활에 걱정이 있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 있는 동안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퍽 희망적 인 소식이었다. 디모데는 그 교회의 두어가지 문제를 가지고 왔는데 바울은 이에 대한 편지를 써서 보낸다 주후52년 경에 썼다.
초점 | 뒤를 돌아봄 | 앞을 내다봄 | |||
구분 | 구원 | 봉사 | 성화 | 슬픔 | 근신 |
본문 | 살전 1:1">살전 1장 | 살전 2:1">살전 2장 | 살전 3:1">살전 3장 | 살전 4:1">살전 4장 | 살전 5:1">살전 5장 |
주제 | 믿음 | 사랑 | 소망 | ||
위안 | 교정 | ||||
장소 | 고린도 | ||||
시간 | A.D 52년 |
이 서신의 내용은 대체로 두 면에서 볼 수 있다.
첫째는
유대인의 박해 아래서도 데살로니가 교회가 굳게 서 있는데 대한 칭찬이요, 둘째는 저들 가운데 자라고 있는 어떤 잘못과 오해를
교정 시키는 일이다. 여기에 주요 문제는 예수의 재림문제이다. 사람이 예수를 믿다가 예수 재림하시기 전 에 죽으면 주님이 재림
하시더라도 만나보지 못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1. 인 사 살전1:1-11 2. 교회의 상태 살전1:2-10 3. 사도와 교회와의 관계 살전2:1-3:13 4. 교회의 문제들 살전4:1-5:11 5. 결 론 살전5:12-28
(1) 교회의 상태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가진 교회였다(살전1:3). 이 교회는 복음이 말로만 들어간 것이 아니라 능력과 큰 확신으로 택함을 받은 교회이다(살전1:4-7). 이 교회는 주로 이방인으로 구성 되어 있었으나 저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소문이 퍼졌다(살전1:8-10).
(2) 사도와 교회와의 관계
바울은 자기에 대한 비평에 대하여 대답한다. 어떤이는 바울의 교훈은 간사하고 부정하고 궤계가 있다(살전2:3), 바울이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한다(살전2:4), 바울은 아첨하는 말과 탐심의 탈을 쓰고 있다(살전2:5), 또는 바울이 사람의 영광을 구하 고 있다(살전2:6)고 비난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저희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하였음을 말하고(살전2:10), 그리고 바울은 그렇게 교훈한 것은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게 하려 함이다(살전2:12)고 하였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의 말씀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살전2:13). 살전2:13-16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방문하지 못했으나 자기의 사랑하는 동역자 디모데를 보 냈다. 그것은 저들을 굳게하고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는데서였다. 그러나 바울은 디모데에게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리 스도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보고를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3) 교회의 문제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실제적 생활에 대하여 논의한다. 먼저 성도덕의 문제다(살전4:1-8). 성생활에 순결을 지켜야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살전4:7)다. 다음은 사회적 행위의 문제다(살전4:9-12). 서로 사랑할것을 권하며 그리고 날마다 하는 일에 성의를 다하라고 바울은 권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죽은자의 부활 문제이다(살전4:13-18). 저들가운데 이미 죽은 사람은 예수 의 재림의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이 아니냐 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속 으로 끌려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재림의 시기 문제다(살전5:11) 주님께서는 아무 경고하심이 없이 재림하실 것이므 로 재림의 날을 미리 알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언제 오시든지 맞이 할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말한다.
(4) 결 론
그리스도인 생활의 3대 근본인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5:16-18)는 말씀으로 마지막 권면을 하고있다.
어떤 사람이 아들에게 말했다.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너라."
잠시후 아들이 빈 손으로 돌아왔다.
"왜 그냥 오느냐?"
"예, 빌려주지 않던데요."
거절당한 것이다.
그런데 몇 일 뒤에 그 집에서 호미를 빌리러 왔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호미를 빌려 주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들이 항의를 했다.
"아니, 아버지! 그들은 우리에게 빌려주지 않았는데 우리는 왜 그들에게 빌려줍니까?"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도 빌려주지 않으면 그것은 복수하는 것이다. '그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빌려준다'라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그것은 증오라는 것이다. 그 집에서 빌려주었든지 빌려주지 않았든지 지난 것은 잊어버리고 지금 그
집에서 필요하니까 빌려주는 것이 용서요, 사랑이다."
‘찰스 스윈돌’ 목사는 책 <은혜의 각성 (Awakening Grace)>에서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일곱 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우리는 모든 사실을 다 알지는 못한다.
우리는 늘 제한된 사실과 지식만 가지고 하는 비판은 늘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우리는 그 동기를 다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사람의 동기를 100%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3. 완전히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의 각자의 판단은 늘 어느 정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의 주관적인 비판은 해서는 안 됩니다.
4. 상황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
어떤 사실이나 사건은 모두 상황과 그 맥락이 있습니다.
5.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
우리의 인식은 늘 제한적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6. 우리는 편견이 있으며 시야가 흐려질 수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편견이 있습니다.
7. 우리 자신은 불완전하며 일관성이 없다.
인간은 늘 불완전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는 독일 히틀러 정권에 항거하다가 수용소에 수감 되었다.
1945년 4월 8일 주일 아침 기도 중에 간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본 회퍼는 이것이 자기의 마지막인 것을 알았다.
이 때 같은 감옥에 있던 한 영국장교가 본 회퍼 목사님을 향해 말했다.
"목사님, 마지막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본 회퍼 목사는 미소를 머금고 평화스러운 표정으로 감방에 있던 동지들에게 인사를 했다.
"동지 여러분! 이제 나에게는 죽음이 왔소.
그러나 기억하시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고 시작이오.
주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아버지의 집에서 만날 때까지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감방을 떠나는 그에게서 평안과 기쁨이 흘러넘쳐 감옥 속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이 흘러넘쳤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For even when we were with you, we gave you this rule: "If a man will not work, he shall not eat."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하라
If you don't want to work, don't eat.
일하기 싫어하거든
If a man will not work
우 델레이 에르가제스다이
ου θελει εργαζεσθαι
Γιατί δεν θέλω να δουλέψω.
성도의 규모있는 생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이러한 바울의 명령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수 있고'(창 3:19)라는 말씀에 기초한 것으로 짐작된다(Bruce).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모범을 보인 것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함축성있는 교훈을 통하여 자신의 가르침을 더욱 구체화시키고 있다(Morris).
바울은 여기서 자신과 그의 동역자들이 스스로 노동을 하면서 복음 사역을 감당했음을 들어, 노동의 중요성을 분명히 강조하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노동에 대한 책임을 좀더 설득력 있게 권면하고 있다.
하나남께서는 게으르고 나태한 행동을 싫어하신다(시 128:2; 잠 10:4).
그리고 노동은 하나님의 신성한 명령(창 1:28)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교리로 자신들의 게으름을 합리화시키는 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교제의 떡을 나눌 자격이 없다.
율법학교에 한 청년이 찾아와 스스로 랍비가 될 자격을 갖추었다고 자랑했다.
랍비는 찾아온 학생에게 물었다.
"스스로 갖추었다고 하는 그 자격이 무엇이냐?"
학생은 의기 양양하게 대답했다.
"저는 제 몸을 단련해서 맨 땅 위에서도 잠을 잘 수 있고, 들판의 풀을 먹을 수 있으며, 날마다 채찍으로 세 번씩 제 몸을 때리며 훈련하고 있습니다."
랍비가 마당 곁에 매여 있는 나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나귀를 보아라. 저 나귀는 맨땅 위에서 자며, 들판의 풀을 먹고, 날마다 세 번 이상 채찍으로 맞는다.
지금까지 너는 나귀가 될 자격을 갖춘 것이지 랍비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니다."
재림을 준비하는 신앙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야 합니다.
6절 /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규모 없이(814) 아탁토스(ataktōs) ἀτάκτως 스트롱번호 814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명령함에 있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근거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진정한 사도적 권위를 나타내 주는 것으로서 그 명령의 절박성을 나타냄과 동시에 데살로니가 교인들로 하여금 그 명령에 복종하도록 하기 위함이다(Morris).
그러므로 이 명령은 바울이라는 한 개인으로부터가 아닌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인만큼 반드시 정중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Calvin).
규모없이 행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탁토스 페리파툰토스'(ατακτως περιπατουντος)로 '빈둥거리며 무질서하게 노는 것'을 특별하게 지칭하는 단어이다(Morris).
여기서 헬라어 '아탁토스'는 원래 군사 용어로 '대열을 이탈한'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Robertson).
따라서 본 구절은 그릇된 재림관과 임박한종말의 지나친 강조로 인해 불성실하며 무위 도식하는 무질서한 생활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살전 5:14).
우리에게 받은 유전
- '유전'(파라도신)은 문자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넘겨진 것'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교훈', '가르침'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이에 대해서는 2:15주석을 참조하라.
이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체류할때 그들을 향해 선포했던 복음을 비롯하여 본 서신을 통해 제시한 교훈과 권면까지도 포함한다(살전4:11, 12;5:14).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 여기서 의미하는 '떠남'은 출교(excommunication)와 같은 공적 추방이 아니라 개인적인 교우 관계를 멀리하라는 말이다(Calvin).
즉 이것은 모든 교제의 단절이 아니라 의심받고 있는 범죄자로부터 자신을 멀리 떼어 놓으라는 의미이다(Morris).
이러한 바울의 경고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잘못된 교리에 미혹되어 부패하게 될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낚시에 빠져 주말이면 토요일 아침부터 일요일까지, 때로는 금요일 저녁부터 친구들과 낚시여행을 떠나는 남자가 있었다.
독실한 신자인 아내는 남편에게 제발 주일에 같이 교회에 가자고 졸랐으나 남편은 늘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부활절이 다가오자 아내는 더욱 남편을 졸랐다.
"이번 주일이 부활절이니 부활절에는 꼭 같이 교회 갑시다."
남편이 대답했다.
"어디 예수님 같은 목사님이 있으면 나도 교회갈텐데."
아내는 깜쩍 놀라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예수님은 밤새 낚시질 하는 낚시꾼들에게 교회 오라고 하지 않으셨지. 대신 예수님이 낚시꾼들을 찾아오셨거든. 그 뿐 아니라 낚시 포인트까지 알려주셨으니, 그런 목사님 계시면 나도 교회 간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자신의 사역을 위한 기도를 부탁합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사도로 부름을 맏은 소명과 사명을 갖고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뿐이라고 합니다.
또한 시한부 종말론의 영향을 받아 현실의 일에
충실치 않아 교회 의 물의를 일으키는 자들에 대하여 치리할 것을 명하면서, 성도가 규모 있게 행함으로써 열심히 일하여 자신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일에 대하여 생계
유지 또는 자아 성취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적극적인 믿음으로 일해야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일에 성실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거나 혹은 나태함으로 인해 가난해져서 도둑질할 경우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직업에 임하는 자신의 자세가 하나님의 영광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여 성실한 태도를 보임으로 써 불신자들에게 모범이 되고 나아가서 이로 인해 하나님을 증거하며 그분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데살로니가에는 자기 일을 포기하고 일상의 일을 중단하고 흥분하고 나태하며 재림의 날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 혹은 이런 태도를 본장에서 '규모 없이 행한다'고 합니다.
'규모없이 행한다'는 헬라어는 "아탁토스"라고 합니다.
'아닥토스'는 '무단
결석하다,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는 뜻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 어떤 이들은 매일의 직무와 일을 안하면서 교회와 사회의
삶을 무질서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교회는 교인 각자의 행동에 책임을 느끼는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는 이와 같이 분별없이
행동하는 형제들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기준을 지키기 위하여, 놀고 지내는 이 같은 자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기 위하여 '저들과의 밀접한 교제를 피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소극적 교훈이고, 그는 적극적으로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자신의 모범을 기억할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그것을 따를 것을 권면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부양받을 권리가
있었음에도 블구하고 스스로 일하면서 본을 보였을 뿐 만 아니라, 데랄로니가 교인들에게 성실한 삶을 명령했었다. 바울은 다시
본장을 통해 종말을 전제로 한 실천적 삶을 가르치면서 그 첫번째로 '일' 즉 '노동, 직업'에 대해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직업관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2가지 계시
1. 일반계시와 특별 계시
2. 우리는 피조물과 말씀을 통해서 천국(하나님 나라)을 알 수 있다.
3. 특별계시(말씀)에 대한 부분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4. 많은 선진들이 성경은 물론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과 천국을 발견했다.
ex) 성 프란체스코, 썬다싱,
5. 하나님은 만물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잠언 25:2 /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신명기 29:29 /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6. 구약성경의 “지도자_나기드” : 폭로하는 자!
① ‘성경’의 비밀을 폭로하라!
(마 13: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엡 3:4)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엡 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② ‘만물’의 비밀을 폭로하라!
(롬 8: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왕상 4:34)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
일반계시인 만물 안에서 천국을 발견하는 방법
1) 지혜의 개념을 잡기
① 지혜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구절 <잠언 1:1~19>
② 지혜의 종류
ⓐ 아룸 [םורע] : 뱀의 간교함과 현명함
ⓑ 삔 [ןיב] : Understanding, 60세 이상의 통찰력
ⓒ 다아트 [תעד] : Knowledge, 히브리어 동사 “야다”, 경험에서 나오는 지식(전수)
ⓓ 투시야 [הישות] : 환난 시, 하나님께 기도로 받은 음성(그때 그때의 조언)
(잠언 3:21)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_투시야와 근신_미바타흐을 지키고 이것들이 네 눈 앞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되며, 네 목에 장식이 되리라.
ⓔ 타암 [םעט] : 맛을 보다, 지각하다 “분별력”
ⓕ 마스길 [ליכשמ] : 히브리어 동사 “샤칼”에서 유래, 오른손과 왼손을 얹을 분별력
ⓖ 호크마 [המכוח] : 히브리어 동사 “하캄”에서 유래, 본 것을 적용할 수 있는 응용력
2) 천국의 지혜, 호크마
① 아담의 지혜
(창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② 브살렐의 지혜
(출 36:1)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
③ 솔로몬의 지혜
(대상 28:11) 『다윗이 성전의 복도와 그 집들과 그 곳간과 다락과 골방과 속죄소의 설계도를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주고 또 그가 영감으로 받은 모든 것 곧 여호와의 성전의 뜰과 사면의 모든 방과
하나님의 성전 곳간과 성물 곳간의 설계도를 주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과 여호와의
성전에서 섬기는 모든 일과 여호와의 성전을 섬기는 데에 쓰는 모든 그릇의 양식을 설명하고』
(왕상 4:29-33)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 그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그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며, 그가 또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한지라.』
④ 예수님의 지혜
(요 1:42)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창 32: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눅 8: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가?
(약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① 1단계: ‘회개’로부터
(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② 2단계: ‘기도’로부터
(마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잠 2:1-4)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③ 3단계: ‘말씀’으로부터
(잠 3:3) 인자_헤세드와 진리_에메트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겨라.
(왕상 2:3)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잠 6:23)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④ 4단계: ‘아비’로부터
(잠 1: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잠 15:5)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
0) 창세기 1-2장은 주가 만드신 “피조물의 의미들”을 밝힌다.
① 땅이 혼돈_토후하고 공허_보후하며 흑암_호세크이 깊음_테훔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_루아흐 엘로힘은 수면 위에_알 프네이 하마임 운행_라하프하시니라.
1) 첫째 날: 빛을 지혜로 이해하기
① 모든 것들의 근원은 “빛”이다.
② 삼위 하나님의 선언을 통해서 빛이 임했다.
③ 하나님은 처음부터 빛_오르과 어둠_호세크을 구별하셨다.
ⓐ 음부는 스올이며, 어두움과 차가움은 지옥의 속성이다.
ⓑ 어둠의 일은 “자기 사랑”으로 시작하여, “죄악”으로 마친다.
ⓒ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폐하고, 자기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채워진 곳: 어둠
2) 둘째 날: 궁창과 하늘, 바다를 지혜로 이해하기
① 궁창(라키아, עיקר) : 두드려 펴다_라카 עקר
② 하늘(샤마임, םימשה) : 거기 2개가 있다.
③ 하늘 성전(Heaven) – 유리바다 – 우주(Space) - 궁창 윗물 – 하늘(Sky) - 궁창 아랫물
④ 하늘은 주의 보좌요, 바다는 그 보좌 앞의 거울이다.
3) 셋째 날: 땅을 지혜로 이해하기
① 땅은 그의 발등상이요!
② 천하의 물이 한 곳(마콤 에하드)으로 모이고_카와 הוק 니팔_모으다, 수집하다
③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간 열매나무를 내라!
④ 천국의 “장소”개념과 일치한다.
4) 넷째 날: 해, 달, 별을 지혜로 이해하기
① 광명체 (마오르: 빛을 내는 것들) : 반사체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빛을 간접적으로 나타냄
② 이것을 통해서 징조(오트), 계절(모에딤), 날(하욤), 해(샤나)를 형성하게 함.
③ 천국의 ‘시간’ 개념과 일치한다.
④ 희년서에서는? “해와 달로 안식일, 월삭, 절기, 안식년, 희년의 징조가 되게 하라.”
⑤ 태양 (남성명사, 셰메쉬 שמש 오르 רוא)
(에녹서 72:4) 위대한 광명체, 그 이름은 태양이라. 그것의 둥근 모양은 하늘의 둥금과 같으며, 그것은 불로
가득 차 있어 빛과 열을 내었더라.
ⓐ 에녹서에 따르면, 태양은 3가지 이름을 가졌다. 1) 오르 רוא 2) 세메쉬 שמש 3) 함마 המח
ⓑ 태양은 하나님을 상응하는 존재이며, 그의 빛과 열에 의하여 지구 물질 세계가 운영된다.
ⓒ 하나님은 태양과 같아서, 모든 영적 세계는 그분을 통하여 운영된다. (광합성)
ⓓ 그의 빛은 진리이며, 그의 열은 사랑이다.
⑥ 달 (여성명사, 예라흐 הרי)
ⓐ 달은 태양의 둥금과 같으며, 정해진 양의 빛과 열이 그녀에게 비췬다.
ⓑ 달의 주기는 여성의 월경 주기와 연결되어 있으며,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자궁의 조건과 관련 있다.
ⓒ 달은 태양의 반대편을 비추는 특징을 가진다. (낮에는 태양 빛을 충분히 받지 못하여 하늘에만 나타난다)
ⓓ 달의 히브리 이름은 예라흐 הרי 과녁을 맞추다 라는 뜻이다.
⑦ 별 (남성명사, 코카브 בכוכ)
ⓐ 별은 정해진 양의 빛과 열이 그에게 비취므로 밤을 밝힌다.
ⓑ 성경에서 별은 “천사”들과 “주의 일을 감당하는 성도들”로 비유된다.
(욥 38:6)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 별은 “주의 일을 잘 감당했던 성도들”로 비유한다.
(단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고전 15: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 별은 종종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민 24:17)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5) 다섯째 날: 물고기와 새를 지혜로 이해하기
① 여러 궁창을 언급하며, 하늘(Sky)을 땅위의 하늘궁창으로 정한다.
② 물은 번성하게 해라_샤라츠 צרש 가득차다, 우글거리게 하다
③ 네페쉬 하야_ 살아 있는 혼적 존재들을 번성하게 하는 것 Water
④ 피조물 중 가장 첫 것_ 큰 바다 짐승 “탄닌 ןינת”
ⓐ 옛 뱀, 용, 이 세상의 주관자
(출 7:10)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된지라』
(시 91:13)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시 74:13)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 리워야단과 혼용으로 쓰이기도 한다.
(욥 41: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시 74:14) 『[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으며』
(사 27:1)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⑤ 물고기와 새가 가진 의미들
ⓐ 레위기에 나타난 물고기: 정한 물고기는 방향성과 압력을 이기는 갑옷을 가진다.
(레 11:9-12)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너희가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수중 생물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가 혐오할 것이니라.
ⓑ 레위기에 나타난 새들: 부정한 새들은 “날개가 있으나 땅을 다니며, 시체를 먹는다.”
(레 11:13-19)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물수리와 말똥가리와 까마귀 종류와 [16] 타조와 타흐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올빼미와
가마우지와 부엉이와 흰 올빼미와 사다새와 너새와 황새와 백로 종류와 오디새와 박쥐니라.
ⓒ 욥기에 나타난 새들의 의미: 부정한 새들은 “하늘을 다니지 않고, 썩은 것을 먹는다”
(욥 39:13-18) 타조는 즐거이 날개를 치나 학의 깃털과 날개 같겠느냐 [14]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흙에서 더워지게 하고 [15]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16] 그
새끼에게 모질게 대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고생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나니 [17] 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라 [18] 그러나
그것이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기느니라.
(욥 29:26-30)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27]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 [28]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살며 [29] 거기서 먹이를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30]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느니라』
ⓓ 기타 성경 본문 : 물고기_추수와 영혼구원 / 새_하늘을 사는 존재들
(느 12:39) 『에브라임 문 위로 옛문과 [어문]과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를 지나 양문에 이르러 감옥 문에 멈추매』
(요 21: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시 103: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사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사 46:11)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_טיע (맹금류)]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6) 여섯째 날: 동물을 지혜로 이해하기
① 땅을 그 생물_네페쉬 하야을 그 종류대로 내되
② 가축 (베헤마, המהב) : “벙어리가 되다”, 네 발 짐승들, 집에서 기를 수 있는 짐승
③ 기는 것 (레메스, שמר) : 가볍게 움직이다, 미끄러지듯 움직이다. 파충류, 곤충, 벌레
④ 땅의 짐승 (하이 에레츠, יח) : 살아 있는, 생존해 있는, 야생의
7) 사람을 지혜_호크마로 이해하기
① 우리의 모양(데무트, תומד: 담! 피! DNA), 우리의 형상(첼렘, םלצ 그림자)
② 다스리게 하자(라다, רדה) : 밟다, 지배하다, 다스리다
③ 남자 (자카르, רכז) : 기억해야 하는 사람
④ 여자 (네케바, הבקנ) : 나카브, 뚫다, 찌르다, 저주하다, 악담하다
⑤ 구약의 지상명령 : 파라_הרפ 라바_הבר 말레_אלמ, 카바쉬_שבכ 라다_הדר
(열매 맺어라! 많이 맺어라! 땅에 가득해라! 속박해라! 밟아 다스려라!)
⑥ 사람에게 허락하신 음식: 씨 맺는 모든 채소 + 열매 맺는 모든 나무
⑦ 짐승에게 주신 음식: 푸른 풀_예레크 에세브 : 푸른 빛의 풀들
1. 샤밧의 존재의 목적
1) 샤밧_안식일 or 주일은 어떤 날인가?
① 죄가 그치는 날
② 저주가 그치는 날
③ 안식일 중의 안식일, 대속죄일
④ 장차 있을 영원한 안식일을 예표하는 날
2) 우리는 샤밧에 무엇을 해야하는가?
① 하나님의 이름םש을 알아가는 시간
② 나의 이름םש을 알아가는 시간
③ 희년서 2:32 “그 날은 축복_바라크과 거룩_카도쉬과 영광_카봇이 입혀지는 날이더라.”
④ 천사들의 세계에서 샤밧 – 이스라엘에서 샤밧 – 온 열방이 샤밧
2. 아담의 호크마
(창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1) 땅에 열매가 없는 2가지 이유
①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기 때문
② 경작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
③ 우리가 할 일 (1) 비_은혜를 달라고 구해야 함 (2) 땅을 경작_아바드해야 함
④ 안개만 덮였더라 _ 현상유지 정도만 해 주신다. 기도할 때까지.
2) 사람이 생령이 되는 순간은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오는 순간”이다.
① 네페쉬 하야_ 살아 있는 짐승이다. 혼(지식, 감정, 의지)을 가지고 있다.
② 짐승들은? 네페쉬 하야 이지만, 사람의 터치가 이뤄져야 하나님을 경외한다.
(롬 8: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③ 사람이 지혜를 가지려면, 성령이 반드시 오셔야 한다! (회개, 기도, 말씀)
3. 에덴동산, 하늘의 비밀이 땅에 풀어지다
1) 에덴동산의 위치
① 하나님께서 동방의 에덴(베-에덴 미-케뎀)에 “동산(간_ןג 정원)”을 창설_‘나타’ 심다
② 에덴과 동산은 구별된다. 에덴의 크기 12,000 스다디온(2,300km)
③ 동산은? 시온산, 모리아산,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④ 사람이 동산에 세워지니, 싹이 나고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다. (사람의 존재 목적)
⑤ 흐르는 4개의 강 이름들
ⓐ 비손강 (ןותיפ: 쏟아져 나오는 물, 넘쳐 흐름) : 와디룸 지역, 하윌라 온 땅, 순금, 베델리엄, 호마노
ⓑ 기혼강 (ןוהיג: 터쳐나옴) : 구스_에티오피아,우간다 온 땅(함 지역), 기혼샘,
ⓒ 힛데겔강 (לקדח: 빠름, 급류) : 티그리스강, 이라크 지역, 앗수르 동쪽
ⓓ 유브라데강 (תרפ: 급류) : 아랍) 와디 켈트 = 히) 나할 파라트 / 예루살렘 부근 아인 파라트
(성조지 수도원, 유대광야 여리고 부근)
2) 에덴동산과 예루살렘
① 에녹서 24장에 나타난 예루살렘 묘사
ⓐ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을 방문한 에녹
(에녹서 24:1) 그가 나를 밤과 낮 타오르는 불의 산을 보여주시니
7개의 웅장한 산이 있는데, 동쪽으로 3개요, 남쪽으로 3개이며,
가운데 큰 산이 하나 있더라. 그곳에 한번도 본적이 없는 나무를
보았으니, 영원히 시들지 않는 나무요, 대추야자 열매 다발과 같은
열매가 가득하고, 그 잎은 마음을 유쾌하게 하고 그 열매는 매우
맛있어 보이더라.
ⓑ 하늘의 보좌를 먼저 본 에녹은
땅의 성전터인 예루살렘으로 옮겨진다.
(에녹서 26:1) 거기에서 나는 땅의 중앙_רותב으로 옮겨졌더라. 나는
거룩한 산을 보았고, 그 산의 동쪽 아래 물이 흘러 나오더라.
ⓒ 메시야가 이 땅에 내려오실 때 앉으실 땅의 보좌 예루살렘
(렘 3:17) 『그 때에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모든 백성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그들이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마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 예루살렘은 호크마의 도시이다
(시 122: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사 66: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
(히 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슥 14: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쪽 림몬까지 이를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 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 사람이 그 가운데에 살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리로다
3) 하나님이 맡기신 사람의 직무 2가지
① 땅을 경작하고_아바드דבע
② 땅을 파수하라_샤마르רמש
4) 아담은 어떻게 경작을 완수하였는가?
① 아담이 에덴동산에 거주했던 기간은 “7년” - 희년서 3장
② 7년간 “네페쉬 하야(짐승)”들의 “카라(이름을 불렀다)”
(창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③ 땅의 모든 피조물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 = 교회의 사명
(창 2: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롬 8: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롬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계 5: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5) 돕는 배필로서의 아내
① 사람이 혼자 사는 것_바드(דב: 분리됨)이 좋지 아니하니
② 돕는 배필_ 에제르 네게드 : 맞은 편에서 돕는 자 (나가드_ 반대하다, 맞서다, 폭로하다)
6) 하나님의 호크마로 동물들 속에서 천국 발견하기
① 새_우프ףוע가 알에서 부화하는 것은?
ⓐ 유정란과 무정란_ 말씀의 씨를 가진 자, 천국의 삶으로 나아간다.
ⓑ 어미닭의 라하프: 성령의 “라하프”를 계시한다_ 그의 사랑으로 우리는 부화(孵化)된다.
ⓒ 우리는 땅의 족속에서 하늘의 족속[우프_천사적 존재]으로 거듭난다.
② 누에고치와 나비
ⓐ 나비의 성장 과정은 우리 인생의 모형
ⓑ 육체를 입고 살다 영체를 입는 것의 상징!
ⓒ 고린도전서 15장의 비밀_ 육의 몸이 있은 즉, 영의 몸도 있느니라.
ⓓ 처음에는 검푸른 색의 누에고치가 죽을날이 되면 먹지도 않으며 흰색으로 바뀐다.
- 비단을 내는 시기는 이 때이다! 인생의 끝자락에 가장 좋은 것을 쏟아낸다.
ⓔ 마침내 하늘을 사는 자가 되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 나비는 이꽃 저꽃을 다니며 열매 맺고 싹이 나게 한다.
③ 거미
ⓐ 거미는 악령과 같이 크게 거미줄을 쳐서 잠복한다.
(잠 7:11) 『이 여인은 떠들며 완악하며 그의 발이 집에 머물지 아니하여 어떤 때에는 거리, 어떤 때에는 광장
또 모퉁이마다 서서 사람을 기다리는 자라』
ⓑ 희생물이 걸리면 순식간에 덤벼들어 포식한다.
(잠 7:26)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Ⅳ. 아담이 보았던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레 11장, 신 14장)
1. 정한 짐승의 기준
① 쪽발이 되고 새김질 하는 것 : 소, 양, 염소, 사슴, 노루, 산양 등
② 의미: 세상과의 구별과 말씀을 먹는 삶
③ 부정한 짐승 : 낙타, 사반, 토끼, 돼지
2. 정한 물고기의 기준
① 지느러미가 있고 비늘이 있는 것은 정하다
② 의미: 방향성과 강직함
③ 부정한 물고기 : 메기, 장어, 곰치, 물뱀, 붕장어 등
ⓐ 고등어, 갈치, 복어, 뱀장어류, 게·새우류·가재류 같은 절지동물
ⓑ 달팽이, 민달팽이, 조개, 굴, 오징어, 문어, 앵무조개 등의 연체동물
3. 정한 새의 기준
① 썩은 고기를 먹는 것들은 부정하다
② 의미: 썩지 않는 영원한 양식을 먹고 살라.
③ 부정한 새들
ⓐ 독수리, 솔개, 물수리, 말똥가리, 매 종류
ⓑ 까마귀, 갈매기, 올빼미, 부엉이, 박쥐, 학, 황새, 타조 등
4. 정한 곤충의 기준
① 날개가 있으면서 기어다니는 것은 부정하다.
② 의미: 하늘을 살아야 할 존재가 땅을 기어다니면 합당치 않아
③ 부정한 곤충들: 메뚜기, 베짱이, 귀뚜라미, 팥중이 제외한 뛰는 곤충들
5. 땅에 기는 길짐승은 모두 부정하다
① 의미: 땅을 기는 것은 ‘사탄’의 특징. 사탄을 닮은 짐승
② 두더지, 쥐, 큰 도마뱀, 육지악어, 사막도마뱀, 카멜레온 등
Ⅴ. 동물 속에 숨겨진 호크마
1. 뱀 [שחנ,나하쉬] : 점을 치다, 경험적으로 알다, 점이나 징조로 알다
(창 3:1) 『그런데 뱀[나하쉬]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0:27)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창 49:17) 단은 길섶의 뱀[나하쉬]이요, 샛길의 독사[셰피폰: 뿔뱀]로다. 말굽을 물어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출 4: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나하쉬]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민 21:6) 여호와께서 불뱀[나하쉬]들을 백성중에 보내어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대상 19:1)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마 10:16)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머리를 세우지만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② 빈틈이 없으며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다.
③ 저주 받아 땅에 기어다니기에 도망치기 쉽지 않다. 그래서 머리를 들고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배웠다.
④ 그러니 주님이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말씀하셨다.
2. 소 [רפ, 파르] : 해체 될 것, 힘과 권위, 제물 됨
① 수소 (רקב,바카르) : 단어의 뜻만 보면 1.흠이나 티가 없는지 점검해야 할 동물 2.아침을 깨우는 동물
(레 13:36) 제사장은 그를 진찰할지니(바카르)
② 수송아지 (רפ,파르) : 해체하다 카파르(רפ+ כ,안수하여 송아지에게 손을 얹다)
(민 29:12) 일곱째 달 15일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이레동안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키되, 수송아지(파르)를 드릴 것이며
(삼상 6:12) 『암소(파롯트)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③ 권위와 힘을 가진 존재
(신 33:17) 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시 22: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겔 1:10)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3. 염소 [זע , 에즈] : 단단한, 우세한, 뻔뻔한
① 고대 그리스로마, 염소는 아주 호색한 짐승
: 다른 수컷이 자신의 암컷에게 접근하는 것을 전혀 제지하지 않기 때문 -> 수치스러운 남편을 비유할 때 “염소”
(대하 11:15) 『여로보암이 여러 산당과 숫염소 우상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하여 친히 제사장들을 세움이라』
② 양과 염소의 비유
(창 15: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잠 30:31) 『사냥개와 숫염소와 및 당할 수 없는 왕이니라』
(마 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③ 아사셀 [내보냄, 사라지다] 염소
(레 16:8)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여 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광야로 던질지니라.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에녹1:10) “아사셀에 의해 가르쳐진 일들로 온 세상이 타락 했으므로 모든 죄를 그에게 돌릴찌니라.”
아사셀(עֲזָאזֵל)이란 '쫓겨난 귀신,' '추방당한 악령'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잘젤의 유음 화어로써 타락한 천사의
우두머리인 사단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모세 이전의 사람들이 타락한 천사들의 우두머리인 사단을 일컫기 위해
사용했고, 유대인들도 사단을 일컫기 위해 그들의 문헌에 사용했다. 아사셀이란 신학적 광야에 거주하는 사단을
나타내는 것이다.
(에녹서 8:1-4) 아사셀은 검과 작은 칼과 방패와 흉배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고 금속과 그 제품과 팔찌와 장식과 안티몬을
바르는 방법과 눈썹을 손질하는 방법과 각종의 돌 중에서도 가장 크고 뛰어난 것과 온갖 물감을 가르쳤도다. 그
후 불경건한 일이 행하여지고 사람들은 간음하며 길을 벗어난 그 행위는 완전히 부패하게 되었도다. ‘세미하사’는
모든 마술을 쓰는 자와 (초목의) 뿌리를 끊는 자를 가르쳤고 알메르스는 어떻게 하면 마술에 걸린 것을 풀 수
있는가를 가르쳤고 바라크엘은 점성가를, 코카비엘은 (천체의) 징조를, 다니엘은 별을 관찰하는 법을 가르쳤으며
사하리엘은 달의 운행을 가르쳤느니라. 사람들이 죽어가자 그들(천사들)이 외치는 함성 소리는 하늘에까지
이르더라.
4. 양 [ןוצ, 촌] : 나오다
① 대속의 상징
(창 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 22:7)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레 1:10) 『만일 그 예물이 가축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② 양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동물 : 단어가 매우 다양하다
(촌_야차_나오다) (케베스_카바쉬_속박하다) (케세브, 속전) (아일_숫양의 가죽) (에데르_돕다)
(라헬_암양, 여행하다) (세_시아흐_묵상하다) 등..
③ 자신의 암양을 지키고자 하는 남편 : 명예의 상징
④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요 1: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계 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5. 비둘기 [הנוי, 요나] : 안식, 쉼
① 가난한 자들의 예물
(레 1:14) 『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이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예물을 드릴 것이요』
(눅 2: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② 비둘기의 눈
(아 1: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아 5:12)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③ 성령의 임재의 상징 : 하늘의 뜻을 가지고 오는 전령
(눅 3: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요 1: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④ 요나(הנוי) : 안식과 쉼
(시 55:6)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시 68:13) 『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
6. 낙타 [למג, 김멜] : 노동과 보상, 옮기다 (삼일 길)
① 운송수단 : 하늘의 보화를 낙타에 싣고 감당하는 구원의 여정
(대하 9:1)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어려운 질문으로 솔로몬을 시험하고자 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니 매우 많은
시종들을 거느리고 향품과 많은 금과 보석을 낙타에 실었더라 그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사 66:2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뭇 나라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② 하늘의 것을 운반하는 세례 요한
(마 3: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③ 바늘귀 문 = 낙타가 밤 중에 지나가는 문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사 45:1) 내가 “두 짝으로 된 성문”(한글성경에는 그냥 ‘성문’으로 되어 있음)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삿 16:3) 삼손이 밤중까지 누웠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마 23:24)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7. 사자 [ירא, 아리] : 나의 빛
① 진리의 전쟁을 감당하는 의인
(창 49:9) 유다는 사자새끼로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숫사자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민 23:24) 『이 백성이 암사자 같이 일어나고 수사자 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하리로다 하매』
(욥 38:39) 『네가 사자를 위하여 먹이를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욕을 채우겠느냐』
(잠 30:30) 『곧 짐승 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자와』
② 유다 지파의 상징
③ 사탄의 공격성
(삿 14:5) 『삼손이 그의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 젊은 사자가 그를 보고 소리 지르는지라』
(삼상 17: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시 10:9) 『사자가 자기의 굴에 엎드림 같이 그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당겨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단 6:22)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④ 열 두 지파와 열 두 제자
(왕상 10:18-20) 『[18] 왕이 또 상아로 큰 보좌를 만들고 정금으로 입혔으니 [19] 그 보좌에는 여섯 층계가 있고 보좌
뒤에 둥근 머리가 있고 앉는 자리 양쪽에는 팔걸이가 있고 팔걸이 곁에는 사자가 하나씩 서 있으며 [20] 또 열두
사자가 있어 그 여섯 층계 좌우편에 서 있으니 어느 나라에도 이같이 만든 것이 없었더라』
(계 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8. 말 [סוס 수스] : 기쁨. 기뻐서 껑충 뛰다
① 전쟁과 교만, 왕과 고관들
(출 14:23)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바다 가운데로 들어오는지라』
(삼하 10:18)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 명을 죽이고 또 그 군사령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왕상 10:26)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천사백 대요 마병이 만이천 명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
(시 147:10-11)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② 물러서지 않는 기질
(욥 39:19-24)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그것이 골짜기에서 발굽질하고 힘 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두려움을 모르고 겁내지 아니하며 칼을 대할지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그의 머리 위에서는
화살통과 빛나는 창과 투창이 번쩍이며 땅을 삼킬 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에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나팔
소리가 날 때마다 힝힝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지휘관들의 호령과 외치는 소리를 듣느니라.
9. 나귀[ רמה, 하모르] : 추수와 운반을 돕는 짐승
① 겸손의 상징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마 21: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② 호멜(רמה, 220리터)에서 나귀(하모르, רמה)가 나왔다. 한 호멜 = 나귀 1마리의 짐
③ 짐을 지는 짐승 : 세상의 짐에서 주님의 짐으로
(창 49: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창 49:14)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민22:21)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고관들과 함께 가니
(시 68: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시 81:6) 『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④ 들나귀 : 자유분방함
(욥 39:5)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롭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들나귀는 성읍에서 지껄이는 소리를
비웃나니 나귀 치는 사람이 지르는 소리는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Ⅵ. 솔로몬의 호크마 : 역대하 9장을 근거하여
0. 다윗이 보았던 천국의 특징
1) 끊어지지 않는 기도의 향
2) 끊어지지 않는 천사들의 찬양
3) 장차 들어가야 할 천국의 모습을 그는 보았다.
4) 다윗은 <사도, 선지자>로서 천국의 DNA를 본 자이다.
5) 솔로몬은 <복음전도자, 목자, 교사>로 천국을 실현시키는 자이다.
1. 솔로몬의 호크마
1) 스바 여왕의 방문
① 솔로몬의 지혜[המכח 호크마] : 지성(知性)에 기술(技術)이 더해진 개념
② 매일의 조례 시간 마다 풀어지는 하늘의 DNA
③ 그 소문이 스바(אבש, 7 맹세_에티오피아) 여왕에게까지
- 7일간의 초막절기 행사의 은혜가 온 열방에 소개되었다.
- 어려운 질문_히다 הדיח, 수수께끼, 알기 어려운 문제, 복잡한 난제 (임 레브_그녀의 마음 안에 있는)
- 솔로몬이 그녀에게 대답_나기드(폭로하다)하였으니, 로 알람! 숨기고 감추인 것 X
- 스바여왕이 가져온 황금과 유향과 보석과 낙타는 열방이 주님을 예배할 모형
- 스바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와 건물에 황홀_로 하야 오드 베 루아흐(영이 빠졌다)했다.
2) 솔로몬의 궁전과 그의 집무실
① 솔로몬의 집 (왕상 7:1-12) ※ 참조
② 그의 상의 음식물
(왕상 4:22-23) 『솔로몬의 하루의 음식물은 가는 밀가루가 삼십 고르요, 굵은 밀가루가 육십 고르요, 살진 소가 열 마리요
초장의 소가 스무 마리요 양이 백 마리이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진 새들이었더라.』
③ 신하들의 좌석, 도열, 공복
(대하 9:17-19) 『왕이 또 상아로 큰 보좌를 만들고 순금으로 입혔으니 그 보좌에는 여섯 층계와 금 발판이 있어 보좌와
이어졌고 앉는 자리 양쪽에는 팔걸이가 있고 팔걸이 곁에는 사자가 하나씩 섰으며, 또 열두 사자가 있어 그 여섯
층계 양쪽에 섰으니 어떤 나라에도 이같이 만든 것이 없었더라』
④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층계
2. 솔로몬이 파악했던 만물의 비밀 : 시(詩), 화(畵), 악(樂)으로 표현하기
(왕상 4:32) 그가 잠언 3,000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1,005편이며 , 그가 또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한지라.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
1) 백향목에서부터 담에서 나는 우슬초까지 : 가장 큰 식물로부터 작은 것까지
2) 식물은 무엇을 계시하는가?
① 씨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가 나타난다.
② 하늘의 빛과 열, 성령의 물과 사람의 사랑을 통해서 식물은 자란다.
③ 진리와 사랑을 먹고 자라는 사람들을 의미.
3. 성경의 식물들
1) 포도 [ןפג_게펜]: 기쁨의 상징
① 8-9월 모든 물이 갈할 때, 섭씨 40-45도의 무더위 속 포도 수확시기, 포도 = 기쁨
(창 9: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창 49: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민 6:4)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민 15:7) 『전제로 포도주 삼분의 일 힌을 드려 여호와 앞에 향기롭게 할 것이요』
(삿 9:13)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전 10:19)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
② 깃딧에 맞춘 노래 시편 8편, 81편, 84편 “포도주 틀을 밟으며 부르는 노래”
(시 8: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 이니이다.
③ 안식일 1잔의 포도주, 결혼식 2잔의 포도주, 유월절 4잔의 포도주
- 결혼식의 하이라이트는 신랑이 베푼 잔치의 포도주를 신부가 마시는 순서
(요 2: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아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④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2) 감람[תיז_자이트] : 영원함과 인내
① 겟세마네의 2,000년된 감람나무, 오랜 생명력을 나타낸다.
(창 8: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② 추수 중 가장 마지막에 추수 (9월 중순~10월 중순)
(삿 9:9)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③ 심은 뒤 40년이 지나야 좋은 기름을 생산할 수 있음 = 인내
(출 27:20)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④ 유대인들은 올리브나무를 보며 메시야를 대망했다.
(사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rfejo: 목자의 막대기, 공격무기)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rx,nE : 지팡이,
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슥 14:4)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눅 21:37)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⑤ 성령, 성령 충만한 성도
(슥 4:3)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 하고』
(계 11:4)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3) 석류 [ןומיר_림몬]: 아름다움, 풍성함, 613가지의 율법
① 끝부분의 모양이 왕관의 모양_ 아름다움, 영광으로 표현
② 석류의 모양과 열매 안의 석류 알은 여성의 다산을 축복하는데 쓰임
③ 유대인의 신년인 나팔절에 석류알을 먹는 전통 : 풍성한 열매, 특별히 613개의 율법의 열매!
④ 림몬, 히브리어 “룸”에서 유래. 가장 높은 것!
(출 28:33)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석류를 수놓고, 금방울을 간격을 두어 달되,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한 금 방울, 한 석류, 한 금 방울, 한 석류가 있게 하라』
(왕상 7:20) 『이 두 기둥 머리에 있는 그물 곁 곧 그 머리의 공 같이 둥근 곳으로 돌아가며 각기 석류 이백 개가
줄을 지었더라』
(아 6:7)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4) 살구나무 [דקש 샤케드, 깨우다] :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
① 이스라엘에서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꽃, 아몬드 꽃. 1월 말~2월 초
(렘 1: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② 영적으로 흔들어 깨운다는 의미
(잠 19:25) 『거만한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으리라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
(시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③ 메노라의 아몬드꽃 :꺼지지 않는 기도의 불
(출 25:33) 『이쪽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쪽 가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잔대에서 나온 가지 여섯을 같게 할지며』
(민 17:8)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5) 백향목 [זרא 에레즈] : 권세, 부귀, 교만
① 나무들의 제왕
(민 24:6)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 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 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삼하 7: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왕상 4:33) 『그가 또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한지라』
② 솔로몬과 이스라엘 왕들의 교만
(왕상 10:27)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 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더라』
(시 29:5)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③ 의인들의 성장과 굳건함
(시 92:12)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아 5:15) 『다리는 순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생김새는 레바논 같으며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6) 우슬초 [בוזא 에조브] : 겸손
① 가장 작은 식물
(왕상 4:33) 『그가 또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한지라』
② 정결예식에 사용된 식물
(출 12:22)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레 14:51)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과 살아 있는 새를 가져다가 잡은 새의 피와 흐르는 물을 찍어 그 집에
일곱 번 뿌릴 것이요』
(민 19:18) 『정결한 자가 우슬초를 가져다가 그 물을 찍어 장막과 그 모든 기구와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뿌리고
또 뼈나 죽임을 당한 자나 시체나 무덤을 만진 자에게 뿌리되』
(시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7) 무화과 [הגפ 파게, הנאת테에나] : 그늘, 보호, 나라
① 그늘과 쉼, 나라와 도시
(민 13:23) 『또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거기서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따니라』
(삿 9:11)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왕상 4:25)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② 파게와 테에나의 차이, 첫 열매를 보면 나중 열매를 알 수 있다
(아 2:13) 『무화과나무(테에나)에는 푸른 열매(파게)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렘 8: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테에나)에 무화과(테에나)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호 9: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테에나)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파게)를 봄 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③ 말씀을 연구하고, 메시야를 기다리기 가장 좋은 장소, 무화과 나무 밑
(요 1: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④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테에나)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⑤ 종말의 상징, 무화과 : 무화과를 통해 4계절을 알 수 있다. 파게 1회(3월) 테에나 4회(5~9월)
(마 24: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צק_케츠)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 종말을 하는 방법 1)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유대인의 남은 자 2) 절기
(마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케츠)이 오리라』
(살전 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8) 종려나무[רמת,타마르] : 승리! 풍요, 의인, 다산
① 승리: 죽은 나무에서 다시 새순이 돋고 자라 열매 맺는 나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는 나무)
(겔 40:16) 『문지기 방에는 각각 닫힌 창이 있고 문 안 좌우편에 있는 벽 사이에도 창이 있고 그 현관도
그러하고 그 창은 안 좌우편으로 벌여 있으며 각 문 벽 위에는 종려나무를 새겼더라』
(요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더라』
② 풍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유대인에게 꿀 = 대추야자 열매가 녹은 것)
(출 15: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레 23:40) 『첫 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삿 4:5)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③ 의인: 직선 30m로 자라며 하늘을 향해 뻗는다.
(아 7:7)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
④ 유다의 며느리 다말, 솔로몬의 딸 다말 : 모두 건강한 여성의 이름
9) 각종 향품들
① 몰약 [rm_모르] : 마라르(쓰다)에서 유래. 향기로우나 먹으면 쓰다. 죽은 시체의 향을 없앰 (죽음)
(아 4:6)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막 15: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② 유향 [hn;/bl_레보나] : 라벤(희다)에서 유래. frank-incense 기도의 유향
(레 2:1)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아 3:6) 『몰약과 유향과 상인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내 풍기며 연기 기둥처럼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가』
(계 8: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계 5: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③ 나드향 [D]r]n_나르드] : 인도식물에서 채집, 처녀가 결혼식을 예비할 때 모으는 향기로운 기름
(아 1:12) 『왕이 침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구나』= 성찬식에서 나의 감격
(요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깊은 사랑을 느낀 신부의 깨어짐 (석고로 된 병)
※ 이스라엘의 프로포즈는 여인이 결정 (1) 포도주를 받아 마신다 (2) 나드병을 깨뜨린다
④ 고벨화 [רפק_카파르]: 구원의 꽃, 속죄소
(아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아 4:13)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풀과』
10) 밀[הטח_힛타] : 이스라엘 3대 특산품(밀, 올리브, 포도)
(출 29:2) 『무교병과 기름 섞인 무교 과자와 기름 바른 무교 전병을 모두 고운 밀가루로 만들고』
(신 32:14)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룻 2:23)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
(시 81:16) 『또 내가 기름진 밀을 그들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
(렘 12:13) 『무리가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은즉 그 소산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분노로 말미암음이니라』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1) 보리[hr;[oc_세오라] : 가난한 자들의 음식
(삿 7:13) 『기드온이 그 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룻 1: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요 6: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계 6:6) 『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5. 호크마를 통하여 복음이 전파된다
(대하 9:12) 『솔로몬 왕이 스바 여왕이 가져온 대로 답례하고 그 외에 또 그의 소원대로 구하는 것을 모두 주니
이에 그가 그의 신하들과 더불어 본국으로 (하파크_변화되어) 돌아갔더라』
(대하 9:23) 『천하의 열왕이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하여』
사도 요한이 보았던 천국
1. 요한일서에서 표현되는 천국
①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아야 한다(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② 하나님은 빛이시라(1: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③ 하나님은 사랑이시라(4: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한계시록에서 표현되는 천국
1. 내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1: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 천국의 예배와 성전을 본 사도 요한(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3. 새 예루살렘 성을 본 사도 요한(21:1-2)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Ⅵ. 나오기
1. 천국을 보는 지혜를 가져라
2.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
3. 자연 만물을 관찰하라. 성경을 상고(相考)하라.
4. 하늘의 지혜에 닿아 천국을 계시하는 삶을 살라.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Don't let anyone deceive you in any way, for (that
day will not come) until the rebellion occurs and the man of lawlessness
is revealed, the man doomed to destruction.
불법의 사람(the man of lawlessness)은 멸망의 아들(the man doomed to destruction)이라고 합니다.
γιος της ανομίας(죄악의 아들)
아노미아스 호 휘오스
αμαρτιας ο υιος
그렇다면 재림의 징조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배도(背道)하는 일
'배도'(아포스타시아)란 정치적, 군사적인 반란을 의미하는 말로서(Bruce), 이것은 마지막 날이 이르렀을 때 하나님을 대항하는 악의 세력이 출현할 것을 의미합니다(딤전 4:1-3, 딤후 3:1-9, 4:3-4).
따라서 악의 세력에 의하여 신앙을 포기하는 것을 배도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불법의 사람
불법의 사람이 누구인지는 결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사단의 악한
일을 행한 자들이 수없이 많았기 때문에 바로 그와 같은 세력들을 불법의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불법의 사람이란 어떤 특정한 인물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마지막 날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불법의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서 스스로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칭 하나님이라고 할
것입니다.
또한 멸망의 아들이란 말은 그가 멸망되기로 예정된 자를 말합니다.
그가 아무리 흉악한 계획과 성도를 괴롭히는
일을 할지라도 그의 활동은 정해진 그 시간에만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오셨으며 이미 마귀를 멸하셨기 때문에 장차 받을 고난과 환난과 핍박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승리하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 우리들도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다만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등장할 때마다 재림의 때가 가까왔다는 징조라고 생각하며 깨어 준비하는 믿음으로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법의 사람은 온갖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와 같은 속임으로
믿음의 사람들을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어두워지는 세상을 향하여 오늘도 진리의 등불을 들고 똑바로 일어나서 저 천성을 향하여 당당하게 걸어가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12
1. 적그리스도(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Dear children, this is the last hour; and as you have
heard that the antichrist is coming, even now many antichrists have
come. This is how we know it is the last hour.
요한일서 2장 18절에 등장하는 ‘적그리스도’라는
단어는 헬라어 ‘안티크리스토스(αντιχριστοσ)’를 번역한 겁니다.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크리스토스’에
‘안티’(αντι)라는 단어가 붙은 것입니다.
‘안티’라는 단어는 먼저, 대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가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보면 적그리스도가 세상 나라를 장악하여 마지막까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대적하다가
결국 재림하시는 주님에 의해 심판을 받고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합니다(계 20: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And the devil, who deceived them, was thrown into the lake of burning sulfur, where the beast and the false prophet had been thrown. They will be tormented day and night for ever and ever.
하지만 헬라어 ‘안티’(αντι)라는 단어는
‘대적한다’는 뜻 뿐 아니라, ‘거짓, 혹은 사이비’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가짜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적그리스도,
‘안티크리스토스’는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때,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세상을 구원할 진짜 그리스도인 것처럼 믿어지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신약 성경 가운데서도 적그리스도에
대한 묘사가 가장 상세하게 등장하는 말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짧은 본문이지만, 적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이고, 그가 종말의 때에
등장해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이고, 그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운명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핍니다.
2. 적그리스도의 명칭
3절에서는 적그리스도를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명칭들은 적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이고 그가 장차 종말의 때에 등장하여 하게 될 일들과 그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운명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불법의 사람은 죄의 사람(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불법이 사람’ 곧 ‘죄의 사람’인 것입니다.
장차 이 땅에
등장하게 될 적그리스도는 진리 되신 하나님이 법인 말씀을 고의적으로 범하고, 대적하는 일을 행할 것입니다.
3절에 등장하는 ‘불법의
사람’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불법의 비밀’(7)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비밀스럽게
활동하며 적그리스가 통치할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써 온 세력들이 있습니다.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예수회로 대변되는
세계정부주의자들입니다.
‘불법의 비밀’이라는
표현처럼, 이들도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법인 말씀을 대적하고, 왜곡하는 일들을 벌여왔습니다.
교회 안에선 ‘자유주의 신학’이란
이름으로, 교회 밖에선 ‘인본주의’, ‘배금주의’, ‘쾌락주의’, ‘상대주의’ 혹은 ‘뉴에이지 사상’과 같은 세상철학들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법인 말씀을 대적해왔습니다.
저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진리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무너뜨리고 불법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도래하면 ‘불법의 사람’인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불법의 사람은 멸망의 아들
적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두 번째 명칭은 ‘멸망의
아들’입니다.
‘멸망의 아들’은 본래 ‘멸망되기로 예정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장차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세상의 권세를 잡고 왕 노릇할 것이지만, 저에게 허락된 시간은 마흔 두 달(1260일, 계 13:5)에 불과하고 그 후엔
재림의 주님이 오셔서 저를 잡아 산채로 유황 불붙는 못에 던질 것(계 19:20)이라 했습니다.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 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적그리스도가 세울 나라를 ‘장망성’으로 묘사하듯이 이 나라를 통치할 적그리스도도 멸망받기로 작정된 ‘멸망의 아들’인 것입니다.
3. 적그리스도의 행적
그렇다면 장차 ‘막는 자’(Restrainer)인 성령과 교회가 떠나간 뒤,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행할까요?
a. 먼저, 저가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라 했습니다(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본문에서 설명하는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은 이방신들 뿐 아니라, 하나님을 포함한 모든 신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 옛날 루시퍼가 스스로를 높여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을 가로채려 했던 것처럼(사 14:14), 루시퍼의 화신인 적그리스도도 자존하여 하나님의 자리와 만왕의 왕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하려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그가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할 것”(4)이라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9장 27절에서는 이에 대해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도 바로 이 다니엘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마 24:15,16)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도 장차 적그리스도가 자기 우상을 세워 사람들에게 경배를 강요하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계 13:14,15)
이처럼, 장차 이 땅에 등장할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빼앗아 하나님을 대신하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권세는 ‘한 이레의 절반’인 ‘마흔 두 달’(계 13:5)에 불과할 것이라고 성경은 명시하고 있습니다.
b. 세상을 미혹할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9,10)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막는 자(Restrainer)’를 데려가시고 불법의 비밀과 불법의 사람이 등장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하도록 허락하시는 분명한 의도와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세상을 시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될 7년 대환난의 기간은 환난의 기간인 동시에 시험의 기간입니다. 휴거 사건에 참여하지 못하고, 이 땅에 남겨진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주신 ‘마지막 시험의 기간’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루시퍼를 믿을 것인가?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 적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 진리 되신 하나님의 법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할 것인가?(12절) 분명한 선택이 필요하고 이에 대한 결과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시험(Test)의 기간’입니다.
이 시험의 기간 동안 적그리스도는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멸망의 길로 이끌어가려 할 것입니다. 저는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9,10) 사람들을 미혹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참된 메시야로 믿도록 만들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의 진리 안에 바로 서 있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가 이 거짓된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적그리스도를 따르다가 결국 저와 함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10, 12)
오늘 본문 10절에서는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과연 누가 적그리스도의 미혹에 넘어가게 될 것인가? 바로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는 자”가 미혹에 속아 결국 멸망의 길을 갈 것이라 하십니다. “진리의 사랑을 받는다(ουκ εδεξαντοσ)”는 말씀은 본래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인다(환영한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 말씀 안에 바로 서 있는 자들만 적그리스도의 미혹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겁니다.
거짓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진리 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리를 알아야 거짓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진리 안에 바로 서 있어야 거짓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탄 마귀의 미혹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말씀 안에 바로 서 있어야 불법의 비밀과 불법한 자의 거짓 가르침과 미혹을 물리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4. 적그리스도와 그를 따른 자들의 운명(8, 12)
하나님은 선인 뿐 아니라, 악인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하신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섭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 때에 불법의 비밀인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불법의 사람인 적그리스도의 등장을 허락하시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한 과정입니다.
‘막는 자’가 떠난 뒤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세상의 권세를 잡고, 마흔 두 달 동안 왕 노릇 할 것이니만, 결국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강림하여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그의 권세를 폐하실 것입니다.(8절) ‘멸망의 아들’이라는 그의 이름에 합당한 운명인 것입니다.
불법의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등장을 통해 세상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를 믿고 추종할 것인가? 아니면 어떤 고난이 와도 진리 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것인가? 마지막 결단을 해야 할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잠시 잠깐 환난과 핍박을 면하겠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적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자들에겐 ‘멸망의 아들’인 적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적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자들에게 멸망과 심판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었던 어떤 문제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 문제가 어떤 것인가는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해 언급을 하면서 강림의 문제로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것을 보면 재림과 연관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잘못된 사상을 접함으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문제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이처럼 재림을 중심으로 문제가 발생한 것은 예전부터 있어왔던 일입니다.
2절을 보면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재림이 이루어졌다는 말이 됩니다. 즉 예수가 재림했고, 내가 곧 재림한 예수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말한다고 하기도 하고, 사도에게 들었다고 하기도 하고, 사도의 편지를 받았다는 말로써 자신들의 말에 신빙성을 더하고자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을 전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신비감을 더하고, 군중들로 하여금 의심하지 않고 거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이용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옷차림을 특이하게 하기도 하고 말의 억양을 바꾸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도는 그러한 말에 미혹되지도 속지도 말라고 합니다.
3절의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을 보면 사도는 그 날, 즉 재림이 이르는 징조로써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을 것이고,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일이 있기 전에 그 날은 이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배교는 종교를 바꾼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실상은 하나님을 배반한 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배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배교가 지금은 없습니까? 지금만이 아니라 배교는 예전부터 있어왔던 일입니다. 불법의 사람 역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부터 세상에 존재했습니다. 불법의 사람은 단지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불법의 사람이 그런 뜻이라면 주의 날이 이르지 않은 지금은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전혀 맞지 않습니다.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은 악한 세력을 뜻합니다. 즉 사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 역시 분명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이 사탄이 하와에게 접근한 결과가 아닙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 때부터 이미 세상에 존재했던 것이 불법의 사람인데, 그가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않는다면 지금은 불법의 사람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이 역시 불법의 세력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지금의 현실과 모순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타났다’는 말을 존재의 의미가 아니라 드러남의 의미로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법의 사람은 창조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세상에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불법의 사람의 정체를 알지 못합니다. 하와도 자신에게 접근하는 존재가 악한 영인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불법의 사람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감추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은 분명 사탄이 장악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세상은 그러한 현실을 알지 못합니다. 사탄에게 장악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누구에게 장악되고 지배되고 있는가를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의지와 생각으로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여길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탄이 자신을 감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법을 행하면서도 불법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또한 교회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배교한 자로 살고 있고,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행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불법을 행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배척하는 것임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행하는 자신들을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겼지만 예수님에게는 사탄의 자식으로 보였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실상을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신 예수님께 분노하여 붙잡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며 의로운 행위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불법의 사람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자신을 감추고 있기에 발생하는 현상들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부르지만 불법의 사람의 정체를 알지 못합니다. 멸망의 아들에게 속고 있으면서도 속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 행위를 신앙의 근거로 삼고 행위에 의의 의미를 두면서 예수께 나오는 것이 곧 불법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불법은커녕 참된 신앙으로 인정됩니다.
믿음을 도구 삼아 세상의 복을 얻고자 하는 것이 불법의 사람에게 장악되어 있는 사고방식임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 목적을 두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곧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배신하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기 열심을 도구 삼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할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이 불법의 사람으로 인한 사고방식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불법의 사람이 아직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법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기 전에 그 날은 이르지 않습니다. 그 날이 이르면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합니다. 심판의 근거는 불법과 진리입니다. 진리에 순종한 사람은 생명으로, 불법에 순종한 사람은 사망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불법이었는지가 먼저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그 날은 이르지 않는다는 것이 사도의 말입니다.
4절을 보면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고 말합니다.
불법의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만 섬겨야 하는 것에 대항하여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자신이 신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세상이 사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대항하는 불법의 사람과 동일합니다. 하나님만 섬겨야 하는 것이 피조물의 본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주인이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 활동하는 증거고, 불법의 사람에게 장악된 현실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불법이며 멸망에 해당되는 악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드러내실 때가 있습니다.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을 하고 있지만, 세상으로 하여금 무엇이 불법인가를 알지 못하도록 막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은 자신의 본성에 의해 불법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그것으로 자기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를 구분하십니다. 백성에게는 진리를 알게 하시고 무엇이 불법인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모든 희망을 두고 살게 합니다.
우리에게 위로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불법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리거나 미혹되지 않아야 합니다. 불법은 반드시 드러낼 때가 있고 오직 진리에 순종한 사람만이 생명에 들어가게 되는 그 날이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는 ‘언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리 안에 있다면 ‘언제’는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날이 언제 이루어지든 진리 안에 사는 것 자체가 생명이기 때문에 날마다 진리를 소망하고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관심일 뿐입니다.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은 누구인가?
그것은 개인인가 어떤 세력인가?
그것을 막는 자 는 또 누구인가?
어떤 개인인가, 무서운 세력인가, 아니면 어떤 운동(movement)인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는 재림의 시기를 정하는 극단적인 문제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바울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재림이 이미 임했다고 말하여 혼란을 일으켰다.
이것은 열광과
동시에 두려움을 일으켰다(2:2).
바울은 예수께서 이미 재림하셨다는 거짓 가르침에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지”말라고 권면하면서, 재림은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불법의 사람 즉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 기 전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어떤 형태로든 배도는 각 시대를 통해 있어 왔기 때문에 여기서 말한 배도는 조직적이고도 세계적인 마지막
배도를 의미하고 있다. 불법의 사람이 나타난다는 말은, 없던 존재가 갑자기 출현한다기 보다는 그 정체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는 말로
이해해야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재림 직전에 구체화될 불법의 사람이란 무엇인가?
바울은 그 정체에 대해 설명하기를 그가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2:4)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것이 한 개인을 의미하지 않고 어떤 특정한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어떤 개인이 갑자기 나타나 그런 일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각 시대를 통하여 적그리스도의 세력들이 있어 왔다. 그 당시 로마의 세력도 적그리스도라고 볼 수 있지만 재림 직전에 나타나야 한다고 바울이 구분한 것으로 보아 국가로서의 로마 제국은 아니다.
재림 직전에 그 정체가 구체화될 불법의 아들은 다니엘의 기록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다니엘서에 나오는 작은 뿔의 정체와 같은 성격의 존재일 것이라고 본다.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 한다고 했기 때문에 보통의 정치 세력이나 나라는 아니고 강력한 권력을 동원할 수 있는 어떤 종교적 세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세력은 지금도 존재하지만 막는 자에 의하여 그 활동을 억제당하고 있다가 마지막 순간에 현저한 정치적, 종교적 힘을 발휘하여 성도들을 훼방하고 하나님의 뜻을 대적할 것이다.
불법의 아들을 재림시까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적절히 통제하고 막는 자가 있다.
역시 바울은 그 신원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불법의 아들을 막는 자가 로마 제국이나 로마 황제라고 생각한다.
로마 제국의 잘 발달된 법과 정치가 복음의 확산을
도왔으며 그 덕분에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억제되었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로마를 하나님 편에서 적그리스도를 막는 존재로
나타낸 일이 없다.
오히려 로마는 바벨론(벧전 5:13)으로 묘사되었으며 수 많은 그리스도인을 핍박한 주체였다.
막는
자가 천사들이라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 바울이 열심히 전도했기 때문에 “막는 자”가 바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바울의 성품을
생각해 볼 때 그가 그렇게 교만한 주장을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불법의 아들을 막는 자란 다름 아닌 “복음” 이라고 보는 것이
제일 정확한 해석이 될 것이다. 복음이 널리 전파되어 불법의 아들이 정체를 드러내는 것을 억제하고 있으며 더구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끝이 올 것이기 때문에 (마 24:14) 그런 의미에서도 복음 전파는 막는 자이다.
불법의 아들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막는 자 즉 복음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그 활동이 억제되어 있다가 재림 직전에
그 정체가 확실히 나타날 어떤 강력한 종교적 세력이다.
그 세력은 하나님의 참된 진리를 대적하며 자기를 하나님 대신 제시할
것이다.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 저를 죽이시[리라.]”—데살로니가 후 2:8.
1, 2. 불법의 사람의 정체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불법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불법은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어디에나 불법적인 약탈자들에 대한 그리고 그들이 우리 개인과 재산에 가하는 위협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세기 동안 활동해 온, 그보다 훨씬 더 음흉하고도 불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성서에서는 그것을 “불법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2 이 불법의 사람의 정체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좋은 신분을 훼손시키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약화시키기에 여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합니까?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포기하고 그 대신 거짓을 믿게 하여,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숭배하는 일로부터 멀어지게 함으로써 그렇게 합니다. (요한 4:23, 새번역) 바로 이 불법적인 요소가 하나님의 헌신한 백성에 대해서만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에 반대하는 행동에서 그 점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3. 성서는 어떻게 불법자에게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킵니까?
3 성서는 데살로니가 후서 2:3에서 이 불법의 사람에 관해 알려 줍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배교, 새번역]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이] ··· 나타나기 전에는 [여호와께서 이 악한 제도를 멸망시키실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바울은, 이 제도가 끝나기 전에 배교가 일어나고 불법의 사람이 나타날 것임을 예언하였습니다. 사실상, 바울은 7절에서 “불법의 비밀[이 불법의 신비, 신세]이 이미 활동”한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제 1세기에, 이 불법자는 이미 자신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불법의 사람의 기원
4. 불법의 사람은 누구로부터 기원한 것이며 후원자는 누구입니까?
4 이 불법의 사람은 누구로부터 기원한 것이며 누구의 지원을 받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악한 자[불법자, 새번역]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데살로니가 후 2:9, 10) 그러므로 사단은 불법의 사람의 아버지이며 유지시키는 자입니다. 그리고 사단이 여호와와 그분의 목적과 그분의 백성을 반대하듯이, 불법의 사람도 그 점을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간에 그렇게 합니다.
5. 불법자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무슨 운명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5 불법의 사람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그와 동일한 운명, 곧 이러한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데살로니가 후 2:8) 불법의 사람과 그의 지원자들(“멸망하는 자들”)을 멸망시킬 그때는 얼마 안 있어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올 것이며, 그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데살로니가 후 1:6-9.
6. 바울은 불법자에 관해 어떤 사실을 더 알려 줍니까?
6 바울은 더 나아가 이 불법자를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데살로니가 후 2:4) 그러므로 바울은 사단이, 심지어 하나님의 법보다도 자신을 더 높은 자리에 놓을 불법자 곧 숭상의 거짓 대상을 일으킬 것임을 경고합니다.
불법자의 정체
7. 바울이 일 개인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고 결론 내리는 이유는 무엇이며, 불법의 사람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7 바울은 단 한 개인에 관해서 이야기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 “사람”이 바울 시대에 분명히 있었으며, 여호와께서 이 제도의 끝에 그를 멸망시키실 때까지 계속 존재하리라고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여러 세기 동안 존재해 왔습니다. 분명히 어떤 문자적인 사람도 그렇게 오랫동안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법의 사람”이라는 표현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집합체 혹은 반열을 나타내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8. 불법의 사람은 누구이며, 그 정체를 드러내는 특징 몇 가지는 무엇입니까?
8 그들은 누구입니까? 증거는 그들이 그리스도교국의 교만하고 야심적인 교직자 집단임을 알려 주며, 그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자신들이 법인 양 마음대로 행동해 왔습니다. 그리스도교국 내에 상이한 수천 가지 종파와 분파가 있고 각각 교직자들이 있는데다 교리나 의식의 어떤 면에서 서로 상충한다는 사실을 볼 때 그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열된 상태는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비교 미가 2:12; 마가 3:24; 로마 16:17; 고린도 전 1:10.) 이 모든 종파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그들이 성서의 가르침을 고수하지 않으며,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는 법칙을 어긴 점입니다.—고린도 전 4:6; 또한 마태 15:3, 9, 14 참조.
9. 불법자는 성서 진리를 어떤 비성경적 신앙으로 대치하였습니까?
9 따라서, 이 불법자는 복합적인 사람 즉 그리스도교국의 종교 교직자들입니다. 교황이든 사제이든 총대주교이든 혹은 프로테스탄트 전도자이든, 그들 모두에게는 그리스도교국의 종교적인 죄에 대한 공동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버리고 이교의 거짓말을 받아들여, 인간 영혼의 불멸, 지옥불, 연옥 및 삼위일체와 같은 비성경적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종교 지도자들과 같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 저[는]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니라.]” (요한 8:44) 그들의 의식 역시 그들이 불법자임을 드러내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활동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7:21-23.
자신들을 높임
10. 불법자는 정치 통치자들과 어떤 관계를 누려 왔습니까?
10 역사는, 이 불법의 사람 반열에 속한 사람들이 매우 교만하고 오만한 태도를 나타내어 사실상 세상 통치자들을 지시해 왔음을 알려 줍니다. ‘왕권 신수’(王權神授) 교리를 구실로, 교직자들은 자신들이 통치자들과 하나님 사이에 없어서는 안 될 중재자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들은 왕과 황제를 즉위시키기도 하고 폐위시키기도 하였으며, 대중을 움직여 통치자들을 지지하거나 반대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그들은 예수를 배척한 유대의 고위 제사장들이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하였습니다. (요한 19:15)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요한 18:36.
11. 교직자들은 어떻게 자신들을 높였습니까?
11 이 불법자 반열은 자신들을 일반 사람들 위에 더욱 높이기 위해서, 보통 검정색으로 된 구별되는 복장을 채택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눈길을 끄는 온갖 기장(記章)과 더불어 관(冠), 십자 훈장 및 주교관(主教冠)으로 장식해 왔습니다. (비교 마태 23:5, 6.) 그러나 예수와 그분의 추종자들은 그러한 복장을 전혀 하지 않았으며, 일반 사람들과 똑같은 옷을 입었습니다. 교직자들은 또한 한층 더 ‘모든 자 위에 자신을 뛰어나게’ 하는 일로서 “신부,” “성하,” “주교,” “대주교,” “각하,” “예하” 등과 같은 칭호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렇지만, 종교적 칭호들에 관해 예수께서는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태 23:9) 그와 비슷하게, 엘리후도 욥의 위선적인 위안자들을 논박하면서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아첨하지[칭호를 부여하지, 신세] 아니”한다고 말하였습니다.—욥 32:21.
12. 바울은 교직자들이 사실상 누구를 섬기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까?
12 바울은 그 당시에 불법의 사람이 이미 활동을 시작하였다고 기술하였을 때, 불법자의 불법적인 태도를 반영하는 사람들에 관해서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린도 후 11:13-15.
참 숭배에 대한 반역
13. 바울이 예언한 배교는 무엇입니까?
13 바울은 이 불법의 사람이 배교와 더불어 발전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이 불법자 반열의 정체에 대해 바울이 지적한 첫 번째 실마리는 ‘먼저 배도[배교, 새번역]하는 일이 있기 전에는 주[여호와, 신세]의 날[여호와께서 이 악한 사물의 제도를 멸망시키실 때]이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데살로니가 후 2:2, 3) 그러면 “배교”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문맥에서, 배교란 단지 영적인 약함으로 인해 낙오되거나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배교”에 해당하는 희랍어 단어는 무엇보다도 “배신” 혹은 “반항”을 의미하였습니다. 몇몇 번역판에는 그 단어가 “반역”(rebellion)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윌리엄 바클리 역은 이러합니다. “큰 반역[the Great Rebellion]이 있기 전에는 그 날이 올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서」는 그것을 “큰 반항”(the Great Revolt)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논하고 있는 문맥에서, “배교”는 참 숭배에 대한 반항을 의미합니다.
14. 배교는 언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까?
14 이러한 배교 곧 반역은 어떻게 발전하였습니까? 데살로니가 후서 2:6에서, 바울은 그 당시에 불법자를 ‘막고 있던 것’에 관해 기록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사도들의 억제하는 힘이었습니다. 성령을 통해 받은 강력한 선물을 가지고 있는 사도들의 존재는 배교가 널리 퍼지지 못하도록 막아 주었습니다. (사도 2:1-4; 고린도 전 12:28) 그러나 제 1세기 말경에 사도들이 죽자, 억제하는 힘이 없어졌습니다.
비성경적인 교직자 반열의 발전
15.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 회중을 위해 무슨 마련을 하셨습니까?
15 예수께서 설립하신 회중은 제 1세기에 장로(감독자)와 봉사의 종의 인도하에 발전하였습니다. (마태 20:25-27; 디모데 전 3:1-13; 디도 1:5-9) 그들은 회중으로부터 선택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신학 훈련을 전혀 받지 않은 유능한 영적 남자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러한 훈련을 전혀 받지 않으셨던 것과 같습니다. 사실, 그분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라고 의아해 하였습니다. (요한 7:15) 그리고 종교 통치자들은 사도들에 관하여 똑같이 이렇게 평하였습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더라.]”—사도 4:13.
16. 배교는 어떻게 회중 조직에 대한 제 1세기 그리스도교의 본으로부터 빗나가는 일이 있게 하였습니까?
16 그러나 배교로 인해 유대교 교직자에게서 그리고 마침내는 이교 로마의 종교 조직에서 유래한 개념들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참 믿음으로부터 돌아서는 일이 일어나면서, 비성경적인 교직자 반열이 발전하였습니다. 관을 쓴 교황은 추기경단을 다스리고, 추기경은 수백명의 주교와 대주교 가운데서 나오고, 주교와 대주교는 신학교 훈련을 받은 사제 가운데서 승격되게 되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제 1세기 이후 오래지 않아서 신비에 속한 교직자 반열이 그리스도교국 내에서 우세해졌습니다. 이 반열은 제 1세기의 그리스도인 장로와 봉사의 종들을 본받은 것이 아니라, 이교 종교 제도를 본받은 것입니다.
17. 특히 언제 불법자의 권력이 견고해졌습니까?
17 일찍이 기원 제 3세기에, 일반 신자들은 하류 계급인 평신도 신분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배교한 불법의 사람은 점차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이러한 권력은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통치중에, 특히 기원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 후에 견고해졌습니다. 그때 이후, 교회와 국가는 함께 뭉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불법의 사람—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참 하나님 여호와께 반항하는, 여러 세기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배교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따라온 법과 마련은 그들 자신의 것이지 하나님의 것이 아닙니다.
이교 가르침
18. 불법자는 무슨 신성 모독적인 이교 가르침들을 채택하였습니까?
18 불법의 사람의 발전은 또한 이교 가르침을 빌려 오게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불가사의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삼위일체 신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 주지 아니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이사야 42:8; 45:5) 이처럼 하나님의 진리 대신에 인간적인 심지어 이교적인 개념을 받아들이는 일은 확대되어, 성서에 나오는 미천한 마리아를 그리스도교국의 “하느님의 어머니”로 경배하는 또 하나의 신성 모독을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러한 거짓 가르침의 조장자인 교직자 반열은, 그리스도께서 뿌리신 좋은 씨를 질식시키려고, 사단이 심은 “가라지” 중에서 가장 지독한 것이 되었습니다.—마태 13:36-39.
19. 그리스도교국은 여러 세기에 걸쳐 내려오면서 어떻게 나뉘었으며, 그러나 무엇은 계속되어 왔습니까?
19 분열과 불화가 일어나면서, 그리스도교국은 수백 가지 종파 및 분파로 나뉘었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새로운 종파나 분파는 거의 예외없이 교직자와 평신도 구분을 유지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불법의 사람 반열은 현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구별되는 복장과 거창한 칭호들로 일반 사람들 위에 높이는 일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바울은 불법의 사람 반열이 스스로를 영광스럽게 하여 신과 같은 지위로 높일 것이라고 말했을 때 과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황권
20. 한 가톨릭 문헌은 교황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20 그처럼 영광스럽게 하는 일의 두드러진 예가 로마의 교황권의 경우입니다. 이탈리아에서 발행한 루치오 페라리스 편 교회 사전은 교황을 “단순히 사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하느님이자 하느님의 대리인이라고 할 정도로 매우 위엄 있고 높은 존재”로 묘사합니다. 교황의 관은 “하늘, 땅 및 지옥의 왕으로서의” 삼중 관입니다. 동 사전은 계속 이렇게 묘사합니다. “교황은 말하자면 지상의 하느님이요, 그리스도의 신자 가운데 유일한 군왕이요, 가장 위대한 만왕의 왕이다.” 그 사전은 이렇게 부가합니다. “교황은 때때로 하느님의 법을 무효화할 수 있다.” 또한, 「신 가톨릭 사전」(The New Catholic Dictionary)은 교황에 관해 이렇게 기술합니다. “그의 대사들은 대사단의 다른 성원들보다 우위에 있다.”
21. 교황의 행동과 베드로 및 천사의 행동을 대조하여 설명하십시오.
21 예수의 제자들과는 달리, 교황은 종종 매우 공들여 만든 옷을 입고 사람들의 찬사를 즐깁니다. 교황은 버젓이 사람들의 절을 받고 반지에 키스하게 하며 특별한 의자에 앉은 채로 사람들의 어깨에 실려 다닙니다. 역대 교황은 여러 세기에 걸쳐 참으로 허영심 있는 태도를 나타내 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베드로의 꾸밈없는 겸손과는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로마 장교 고넬료에게 “일어나십시오. 나도 역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도 10:25, 26, 공동번역) 그리고 사도 요한에게 계시를 전달한 천사와도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요한은 그 천사에게 엎드려 숭배하려 하였지만, 천사는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계시 22:8, 9.
22. 무슨 성경적 법칙을 통해 불법자를 알아볼 수 있습니까?
22 교직자 반열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너무 가혹한 것입니까? 예수께서 거짓 예언자들을 알아볼 수 있도록 주신,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라]”는 법칙을 적용함으로써 우리는 그 점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마태 7:15, 16) 그렇다면, 여러 세기에 걸쳐 그리고 현 20세기에 교직자들은 무슨 열매를 맺어 왔습니까? 이 불법의 사람의 운명은 어떠할 것이며, 누가 같은 운명을 당할 것입니까?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불법자와 관련하여 무슨 책임이 있습니까? 다음 기사들이 이러한 점들을 다룰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에 대한 사도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사도는 먼저 주 안에서 형제 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구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구한다’는 것은 ‘당부한다’입니다. 곧 주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과
관련해 데살로니가교회 교우들에게 당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당부한다는 것입니까?
2절에서 4절입니다.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그것은 주님의 재림과 관련해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종말에 대한
분별없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종말을 운운합니다. 오늘의 시대를 가리켜 종말의 때라 말하기도 하고, 세상에 일어난 큰 사건들을 보며 종말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종말에 대한 언급은 실은 이미 2천 년 전 초대 교회 당시에도 있었고, 중세시대에도 있었고, 근대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런 세상의 종말과 관련해 분명한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진리를 버림과 진리에 대한 왜곡입니다. 다시 말해 넘치는 사이비 이단들의 출현과 편만 된 교역자와 성도의 타락 곧 교회의 변질이 종말의 때를 암시한다고 합니다.
일본이 일본 역사 이래 진도 9.0이라는 사상 초유의 큰 지진과 쓰나미로 참으로 무력하게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큰 지진이 오기 전에 이미 며칠 전부터 예진이 있었다고 합니다. 역사의 종말에는 징조가 있습니다. 그 징조가 불법의 출현이며, 심판을 모르는 교만의 행보입니다. 오늘은 참으로 많은 이단과 사이비들이 사람들의 영혼을 속이고 미혹하고 있고, 인간 스스로가 만든 어리석은 우상 앞에 절하며 복을 빌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조차 자기가 주님이라도 된 양 스스로 선하고 의롭고 경건한 척 하는 모습들이 적지 않고, 지도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하나님인양 종교권력을 휘두르는 자들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고 보면 종말의 징조는 숨겨져 있지 않고 이미 드러나 있으며,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영적으로 깨어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과 역사의 유일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다시 오시며, 다시 오셔서 거짓과 교만의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 12절입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은
시간 속에서 삽니다. 시간의 제한 속에서 사는 것이 사람입니다. 세상에 온 날이 있으면 가는 날이 있습니다.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영원한 역사가 아닙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역사가 아니라 유한한 역사요 정해진 역사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시작도 끝도 없는 입체적 역사가 아니라 시작과 끝이 있는 직선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시간과 역사가 하나님의 유예기간
속에 있는 시간이며 역사입니다.
사람과 역사는 하나님의 유예기간 속에 있습니다. 일정기간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 살고
존재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며 인간의 역사입니다. 인생과 역사는 영원한 허락과 방치 속에서 존재하거나 지속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
모르는 하나님의 지혜와 결정 안에서의 하나님의 유예기간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참되고 복된 지혜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유예기간 속에 있음을 겸손히 시인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진리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과 생명의 주님이시며, 반드시 세상에 다시 오실 심판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구원의 삶, 말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13절에서 17절입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령님으로 하나님의 자녀들로 택함 받고 부름 받은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영광을 위해, 말씀을 위해 부름 받고, 택함 받은 천국의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살아있는 동안 주님께 택함 받고 부름 받아 참된 진리를 알고, 말씀의 교회 안에 있게 되었다는 것은 생의 가장 큰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인생과 역사는 유한하고,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시며, 오셔서 거짓과 진리의 사람을 영원히 나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님의 사람들로서 말씀대로 마음을 지키고 입을 지키고 선함을 추구하는 하루가 될 뿐입니다. 그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있습니다.
기도. 우리의 유일한 구주가 되시는 주님. 생전에 주를 알고 믿고 따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주님은 반드시 심판과 구원의 주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사는 동안 주님의 사람으로 마음을 지키고, 입을 지키고, 선함을 추구하며 사는 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위로 속에서 사는 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본과 세상을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With this in mind, we constantly pray for you, that
our God may count you worthy of his calling, and that by his power he
may fulfill every good purpose of yours and every act prompted by your
faith.
믿음의 역사(the work of Faith)
에르곤 피스테오스(εργον πιστεως)
믿음(4102)
πίστ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4102
역사(2041)
ἔργον, ου, ὁ 스트롱번호2041
믿음의 역사(the work of Faith)에서 "역사(役事)"란 한자의 훈은 "부릴 역(役)"과 "일 사(事)"라고 하며, 사전적 의미는 "토목(土木), 건축(建築) 따위의 공사(工事)"라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데살로니가교회와 성도들이 핍박과 환난 중에서도 믿음을 굳게 지켜가는 "행위(에르곤. ἔργον)"를 말합니다.
이미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서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라고 소개했습니다.
믿음의 역사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는 믿음의 성장(3절)
둘째는 서로 사랑하라(3절)
셋째는 인내하라(4절)
믿음의 역사를 이루었을 때 비로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될 것입니다(5절).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인정을 받으려면 반드시 고난(환난)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이란 과정을 겪으면서 더욱 강하고 담대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까?
더구나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온갖 시련를 겪어야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천상의 세계에서 지상의 세상으로 내려오시는 것이 곧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천상에서 시장으로 적응하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오셔서 낮은 자의 삶을 몸소 경험하며 온간 시련과 고통을 모두 통과하시고 다시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보여주신 이유는 이 세상에서 겪어야 할 다양한 고통과 어려움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의 본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때로는 육신의 질고와 정신적인 갈등과 물질적인 어려움으로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어야 할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절망의 언덕을 넘어 소망의 들판을 향하여 달려갈 수 있는 용기와 믿음과 인내를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이기셨던 그 길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이 그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하며 기도합시다.
이 세상에 근심 된 일이 많고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의 고난이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데살로니가인들로 하여금 환난을 받게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실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원수들에 의해 부당하게 환난받는 자들에게 핍박의 긴장과
고난으로부터 안식을 얻게 하실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의 적용은 보복법 이상의 의미를 지닌 하나님의 경륜에 기인한 것이며
공정한 판결이다.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형벌이 따르고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상이 따르는 것이 곧 하나님의 공의이다.
그리고 환난받는 자들에게 약속된 안식은 원래 '극심한 갈등으로부터의 휴식'이란 개념을 지니고 있다.
즉 이것은 '온 격의
휴식'을 의미한다.
우리가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워서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며, 선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선을 좇아 생활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성숙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인 것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란 돌아온 탕자를 기쁘게 맞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완악한 자에게는 그 행위대로
심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며 모진 박해를 받는다 하더라도 성도는 결코 좌절하거나 낙망치
말아야 합니다.
의를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을 인해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5:10-12).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은 장차 임할 심판의 징표이며 동시에 핍박자에게는 멸망의 표시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성도에게는 구원의 증거가
됩니다.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믿음을 연단하는 과정이며, 믿음의 연단은 영혼의 구원으로
이어지는 축복의 열쇠라고 하셨습니다(벧전1:9).
그러므로 성도들은 현재의 고통을 오히려 기뻐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인내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가 기록된 당시의 상황은 데살로니가전서가 기록된
상황과 아주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의 기록 목적 역시 전서의 기록 목적과 상당 부분
유사합니다. 본 서신서가 기록된 여러 가지 목적 중에서, 세 가지 중요한 목적을 간략하게 정리하겠습니다. 첫째로, 데살로니가후서는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기록되었습니다. 이교도 세계의 한가운데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공동체에 대한 박해는 그
당시 점점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다룰 필요성을 인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하여 성도가
당하는 환난의 의미 및 그 결말에 대해 다룸으로써 바울은 다시 한번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두 번째 이
서신서의 목적은 주의 재림에 대한 일부 성도들의 오해를 교정하고 재림신앙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권면하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퍼져있었던 나태에 대한 문제입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 가운데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사람들에
대해서 권면을 하는 목적으로 본서를 기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사말(1-2)]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공동 발신자들로 언급한 것은 바울이 이 편지를 기록할 때 이들이 바울과 여전히 함께 있었음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첫
번째 편지를 보낸 후에 얼마 되지 않아 기록되었음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첫 번째 서신서 서두와 달리 추가된 단어가
‘우리’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물론, 단어 하나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여 과도한 해석을 하는 것은 지양되어야겠지만, ‘우리’라는
단어를 삽입해 줌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관계가 그 당시 만연히 퍼져있던 이교도의 신들이 보여준
두려움과 불확실한 개념들과 완전히 상반된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 주는 표현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데살로니가후서의
편지 서두가 전서의 편지 서두와 다른 문구의 추가가 있었습니다. 전서와는 다르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는
전치사구를 추가해서 2절을 설명합니다. 다른 서신서와 마친가지로 바울의 서신에서 나타난 은혜와 평강에 대한 평범한 문안 인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데살로니가 교회가 처한 박해와 어려움의 상황을 투영하여, 본문을 해석해보면,
만유의 주재이시며, 믿는 자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함께 하심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바울이 확증시켜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감사와 위로(3-10)]
[(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신앙으로 인한 자신의 감사와 자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절의 앞부분은 NASB 영어성경의 직역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께 항상 감사해야만 한다’ 라고 표현하며, 강한 당위성의 의미를 포함하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할지니’로 변역된 헬라어 단어는 ‘오페일로’라는 단어로, 본래 지불해야만 하는 돈을 빚지고
있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는 단어입니다. 즉, 이 단어는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는 매우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이 계속하여 아름답게 성장해 가는 것과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으로 인해 그
교회의 헌신자인 바울 자신이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여기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감사의 근거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을 언급하고 있는데,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를 나타내는 수직적 신앙의 태도인
동시에, ‘사랑’은 하나님께 대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믿음이 성도 및 타인에 대해 나타나는 수평적 신앙의 표현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앞선
3절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신앙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바울이 본절에서는 그들이 박해와 환난 주에서도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모든 교회에 자랑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박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디오그모스’라는 단어의 변형
형태인데, 원래 사냥개가 사냥감을 뒤쫓는 모습에서 유래된 단어라고 합니다. 사냥개가 표적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쫓아가는
것처럼, 적대자들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집요하게 박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환난’으로 번역된 헬라어 또한 박해이라고
번역된 헬라어와 유사한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인데, 데살로니가 교회가 외적 고통과 더불어 내적 압박감으로, 당시 굉장한 곤경에
처했음을 단어에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랑하는 구체적 내용은 이러한 박해와 환난 가운데에서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폭력이나 분노 또는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있음에 바울은 매우 감격하며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5절은
박해와 환난 가운데 인내와 믿음으로 견딘 성도의 모습을 ‘심판의 표’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고난을
통해 인내하는 믿음은 그들이 역사의 마지막에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증표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인과 관계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인내가 보증서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 5절에서 눈여겨볼 점이라고 생각됩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박해를 받았지만, 인내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신실하게 그들이 인내할 수 있도록 도왔기 때문이라는 전제가 없다면, 자칫 잘못된 해석으로
오용될 수 있습니다. 5절 후반절에 나오는 ‘고난을 받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는 ‘파스케테’로 능동태로 쓰였다는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존재인데, 이는 고난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의무라는
소극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능동적으로 고난을 받는다는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바울은 이번에는
본절과 7절 상반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원칙이 무엇인가를 밝힘으로써 환난받는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고 있습니다. ‘환난을 받게
하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들리보’라는 단어는 원래 포도를 짓눌러 즙을 짜내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모두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어 포도를 짓눌러 으깨는 것처럼 사람을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압박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도에게 이러한 고통을 가하는 자들은 장차 심판자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고통을 받게 된다고 6절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7절에
표현된 ‘안식’이라는 헬라어는 ‘아네시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의 뜻은 이 세상에서의 혹독한 환난으로부터 해방되어 더 이상
마음 졸임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러한 은혜는 사람의 힘으로 쟁취할 수 없고, 완전한 안식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만 받을 수 있는 복이라는 것을 7절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복의 보증을 하나님의 공의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하나님의 공의시니’라는 문구는 헬라어 성경 6절 첫부분에 있습니다. ‘에이페르’라는 헬라어
접속사가 헬라어 성경 6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뜻은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 접속사입니다. 6절과
7절을 결합하여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실 것이라는 사실이 단순히
그러할지도 모르는 개연성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필연성을 갖는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7절
후반부에 나오는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예수님에 대한 표현은 예수님의 재림 때 예수님의 모습이 이 땅에서 증언되었던 어린양의
모습이 아닌, 왕 중의 왕되신 모습으로 비춰질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8절은
재림주로 나타날 때 예수님께서 내리실 형벌의 대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인간의 식견과 지식으로는 모두 파악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알기를 거부한 모든 사람이 형벌의 대상임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형벌’로 번역된 헬라어는 일정 기간 처벌한 후
사면되는 일시적 형벌의 개념이 아닌, 영원토록 처벌의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 영원한 형벌을 표현한 단어입니다.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9절은
최후 형벌을 당하는 자들이 주의 얼굴 및 그의 힘의 영광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앞으로부터 쫓겨나는 것만큼 처절한 형벌과 고통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깊게 생각해봐야 하는 점은 영원한 멸망의 대가는
하나님의 외면하심이 아니라, 죄인들이 하나님을 외면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10)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10절에서
표현하는 그날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날로서 공의의 심판이 행해지는 날입니다. 그날은 바로 최후 심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권한을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아 재림하시는 그 날을 뜻합니다. 이처럼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의 성도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실것인데, 이 영광은 감히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경이로움일 것입니다.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라는 표현은 주를 믿는
자들이 경험할 모습은 놀라움과 경탄이 쏟아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 속한 자들은 그 날에 예전에 전혀 경험해 보지 못 한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영광으로 인해 경탄해 마지않게 될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비함을 경험할 사람 중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환난과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는 크나큰 위로이자 격려였을 것입니다.
[바울의 기도(11-12)]
[(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11절과
12절은 바울 자신 및 시루아노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사실과 그 기도의 내용을 기록한 부분입니다. 여전히 부족한
죄인이며, 죄로 인해서 항상 넘어지기 쉬운 성도이지만, 성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권능을 통해 효과적으로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달라는 기도를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부분입니다.
[(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12절에서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그 부르심의 목적에 합당하게 행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임을 증언합니다. 만약,
‘영광’이라는 의미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정의 내린다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바로 하나님께 속하여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변화된 자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나타나게 되는 성도의 행실이 단지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영광을 주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나누어주신다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12절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의와 억울한 일이 많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주께서 보응해 주실 심판은 믿는 성도들에게는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억울한 일을 겪는 가운데 인내하며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주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거룩한 길이라는 사실 또한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씀을 받고 해석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심판의 모습이 과연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의 도우심과 판결에 순종하는 참된 성도의 모습인지, 아니면, 말씀의
준엄한 심판을 나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에게만 해당시켜 살아가는 어리석은 바리새인의 모습은 아닌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서, 우리의 허름한 삶조차도 기억하시며, 위로하시는 예수님의 시선에 매료되어 살아가는 복된 하루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for you know very well that the day of the Lord will come like a thief in the night.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
헤 헤메라 쿠리우(η ημερα κυριου)
'주의 날' 이란 요즈음의 "주님의 날(主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날이란 구약에 나오는 개념으로 하나님께서 의로움과 심판을 나타내는 날을 말합니다(욜 2:31, 암 5:18, 말 4:5).
따라서 주의 날이란 곧 심판의 날이라고 하겠습니다.
주의 날이란 초대교회에서 예수가 '주'(퀴리우)로 인식되면서 다양하게 표현했습니다.
주의 날(살후 2:2, 벧후 3:10)
그리스도의 날(빌
1:10, 2:16)
그리스도 예수의 날(빌 1:6)
우리 주 예수의 날(고후 1: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고전 1:8)
그날(고전 3:13, 살후 1:10, 히 10:25)
주님의 재림에 관한 종말에 대하여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지만, 그날이 예기치 않은 때 찾아올 것은 분명합니다.
어둠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그 날이 도적 같이 임하겠지만, 근신하면서 믿음, 사랑, 소망으로 무장한 삶을 사는 빛의 아들들과 낮의 아들인 성도들에게는 그 날이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깨든지 자든지 항상 주님과 함께 살게 하려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그날은 재난이 아니라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확신이 없이 애매모호하게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교회 뜰만 밟고 사는 것은 위험합니다.
참된 믿음 안에서 살되 확신이 있는 믿음을 구하십시오.
서로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힘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의 날
- '주의 날'은 구약에 나오는 개념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로움과 심판을 나타내시는 날이다(욜 2:31; 암 5: 18;말 4:5).
이는
초대교회에서 예수가 '주'(퀴리우)로 인식되면서 '주의 날'(살후 2:2; 벧후 3:10), '그리스도의 날'(빌
1:10;2:16), '그리스도 예수의 날'(빌 1:6), '우리 주 예수의 날'(고후1: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고전 1:8), '그날'(고전 3:13; 살후 1:10; 히10:25)등으로 불렸다.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 이것은 '인자의 오심'에 대한 예수의 교훈(마 24:43;눅 12:40)에 근거해서 한 말이다.
이 비유의 요지는 신자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눅 12:40;17:24;벧후 1:10, 11;계 3:3;16:15).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수많은 삶의 돌을 만납니다. 그때마다 그 돌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그 돌을 어떤 사람은
걸림돌이라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디딤돌이라 말합니다. 삶에서 오는 모든 장애물을 불평과 원망의 눈으로 보는 것과 또 그것을
발판으로 재기와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 것과는 분명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인은 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디딤돌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서
일어나는 필연이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길을 가다가 나타난 돌은 걸림돌이 아닙니다.
그것은 디딤돌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는 돌을 볼 때마다 우리는 이런 마음의 태도와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디딤돌이다’ 왜냐하면 천지만물을 주관하시고 이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시고 옳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신학주제]
재림의 시기.
신약 성경이 묘사한 재림의 모습이 구약 성경을 배경으로 하여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지 않는 한 재림의 시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구약성경 중에는 주의 날의 개념이 보편화되어 있다.
그리고 주의 날에 속한 모든 묘사는 재림과 결부되어
있다.
주의 날은 돌연 예기치 않을 때 올 것이고, 주의 날에는 전세계의 기초가 동요되는 것 같은 대변동이 도처에 일어날
것이기에, 주의 날은 심판의 때가 될 것이라고 구약 시대에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당연히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그날이 언제 오는가를
알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수 자신이 그 시기와 장소에 대하여서는 자신뿐 아니라 그 누구도 모르며 다만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
다고 확실히 말씀하셨다(마 24:36).
이에 관하여 기록한 본장의 강조점은 주의 재림 시기는 예측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본장에서 바울은 주의 날을 암시하는 때와 시기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주의 날의 불예측성을 강조한다.
즉
주의 날은 마치 밤에 도적이 임하는 것처럼 이를 것이라고 한다(2절).
이 비유가 나타내는 것은 주의 날이 예측할 수 없는
시간에 임한다는 것이지, 반드시 밤에 임한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주의 날은 세상이 재난을 당하고 있을 때보다는 오히려 평온할
때 임할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근신으로 늘 깨어 있어야 그날이 임하는 줄을 알 수 있게 된다.
항상 기뻐하고(16절), 쉬지 말고 기도하며(17절), 범사에 감사하라(18절)는 권면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의와 영생의 소망을 붙잡고 침착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즉 영혼의 중용과 평온함을 지니는 것이 곧 기쁨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렇지 못하고 쉽사리 슬픔에 빠지며 초조해지게 마련이다.
때문에 바울은 곧이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당부하며,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어 항상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모든 상황에서도 성도들에게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성도들은
항상 기쁨과 기도와 감사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It is God's will that you should be sanctified: that you should avoid sexual immorality;
하나님의 뜻(God's will)
델레마 투 데우(θελημα του θεου)
θέλη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2307
첫째, 불레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 입니다.
이 뜻은 우리가 저항할 수 없고 거스릴 수 없는 저항 불가능의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런 의미의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가롯 유다가 막을 수 없고, 가야바나
안나스가 막을 수 없었으며, 더더욱 빌라도는 그것을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절대적인 뜻은 저지가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불변입니다.
둘째, 델레마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소원적인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디모데전서 2장 4절을 보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원함을 저들이 거역하는 것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 먹을 수 있는
완전한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들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따먹었습니다.
'델레마'는 저항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여기에는 책임있는 응답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를 불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본질적인 특성 두 가지는 "사랑(헤세드, 아가페)"과 "거룩(카도쉬, 하기오스)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위하여 무엇을 하라고 하십니까?
첫째, 음란을 버리라(3절)
이방인들의 삶은 육신의 정욕을 즐기려고 색욕을 좇아 살아간다고 꾸짖습니다.
색욕을 좇아살가는 것을 '형제를 해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이 번역을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남의 아내를 가로체지 말라"고 깨우칩니다(6절).
둘째, 성령의 가르침을 따르라(8절)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은 곧 거룩한 삶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 자기 일에 집중하라(11절)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까닭은 궁핍한 삶에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여유를 갖기 때문입니다.
만일 믿는다고 하면서 항상 궁핍하여 이곳저곳 분주하게 다니며 구걸하는 식의 삶은 신앙의 덕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의 삶에 충실한다면 주의 강림의 때에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있는 자들 또한 그 뒤를 이어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라 고 합니다.
오늘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즐거움을 누리며 행복한 삶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그러면 ‘말씀으로 기도하기’를 어떻게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요?
말씀으로 기도하기 전 가져야 할 믿음과 태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말씀으로 기도하기 전 이런 영적 상상을 해보면 도움이 됩니다.
말씀으로 기도할 때마다 말씀의 소리가 내게 와 부딪히고 충돌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말씀의 소리가 세상을 형성했듯, 말씀으로 기도하는 그 소리가 내 자아의 견고한 틀을 깨뜨리고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켜 원래 있어야 할 모습을 이뤄갈 것이란 상상과 믿음을 가져 봅니다.
어린아이일 수록 빠르게 성장합니다. 부모의 양육이 가장 많이 필요한 때입니다. 성장은 건강한 양육에 비례합니다. 이것은 크리스천에게도 동일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린 아기가 모유로 양육을 받듯, 성도는 ‘믿음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야 함을 알려줍니다.
믿음의 말씀으로 항상 양육을 받아… (딤전 4:6, NASB 번역)
constantly nourished on the words of the faith (NASB)
말씀으로 기도할 때마다 모유를 먹는 어린 아기가 양육을 받고 성장하는 상상을 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딱딱한 글자로 이뤄진 말씀을 갓 짠 우유로 바꾸는 간단한 방법이 ‘기도로 말씀을 읽고,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말씀으로 항상 양육을 받는 비결입니다.
1. 긴 호흡과 함께 ‘주님~’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원어로 ‘영’은 ‘호흡’을 의미합니다. 존재의 가장 깊은 근원에 영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호흡에 실어 부를 때 주님이 들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먹으라고 초대하셨습니다. 갈망함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식탁으로 이끄십니다.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I am the bread of life / NIV)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48, 53)
배고픔과 목마름이 최고의 부름입니다. 그 갈망함으로 단순히 이렇게 부르십시오. “주님~ … 주님~ …”
조금 익숙해지면 다양하게 응용하여 여는 기도를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생명의 빵이 필요합니다. 어린 아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부모의 양육을 받듯, 주님…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임을 고백합니다. 그저 주님이 필요한 자입니다. 저를 당신의 생명으로 채워주소서.”
바울은 항상 영 안에서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영 안에서, 그 호흡 안에서 믿음을 실어 마음 담는 법을 배우십시오. 긴 호흡과 함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영 안에서 기도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모든 경우마다 모든 종류의 기도와 요청으로 그 영 안에서 기도하십시오…(엡 6:18, NIV 번역)
Pray in the Spirit on all occasions with all kinds of prayers and requests… (NIV)
2. 말씀 몇 절을 읽습니다.
말씀을 생명의 양식, 영의 양식으로 취하는 것은 통독과 다릅니다. 성경 연구와 다릅니다.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영의 생명을 취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많은 구절 보다는 두 세절 정도가 적당합니다. 때로는 한 절 혹은 한 절의 일부만으로도 영의 양식을 삼을 만합니다.
3. 반복할 단어 혹은 구(句, phrase)를 찾습니다.
눈은 양식으로 삼을 구절에 고정한 채 한 입 분량의 단어 혹은 구(句, phrase)를 찾아 그것을 계속 반복하며 주님께 기도로 올립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예로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오 하나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니 감사합니다.
4. 반복하며 기도하는 중간중간 ‘아멘!’을 넣거나 ‘주님~’을 부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처럼 사랑하사…오 주님…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니 감사합니다. 아멘… 아멘… 오 주님… 이처럼 사랑하사… 아멘 주님… 주님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요. 오 주님… 아멘…
아멘은 하나님의 견고한 말씀에 대한 신뢰와 믿음의 표현입니다. 보증하신 말씀의 마침표와도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4절은 주님의 이름을 “아멘(the Amen)”으로 표현합니다. 아멘을 말하는 것은 주님을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멘”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아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많던지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약속은 “예스”입니다. 우리가 그를 통하여 아멘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고후 1:20, NIV 번역)
For no matter how many promises God has made, they are “Yes” in Christ. And so through him the “Amen” is spoken by us to the glory of God. (NIV)
5. 반복하며 기도할 때 감동을 주시면 개인적인 기도로 바꿉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처럼 사랑하사…오 주님… 나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죄 많은 이 세상 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멘 주님. 제가 그 사랑에 눈 뜨게 하옵소서… 아멘.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독생자를 주셨으니… 아멘… 주님… 독생자를 주실 정도로 이처럼 사랑하시는 주님. 그 사랑이 나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사랑으로 나를 사로 잡으소서. 아멘…
6. 반복하며 기도할 때 감사, 찬양, 회개, 선포할 것이 있는지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독생자를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아멘…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주님은 자기 자신을 내어 드릴 정도로 세상을 사랑하셨는데.. 나를 사랑하셨는데… 주님 저는 당신만큼 세상을 사랑하지 않음을 회개합니다. 나 자신 밖에 사랑하지 않는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님… 독생자를 주셨으니…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주님…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주님… 주님을 믿는 모든 자마다 멸망하지 않으리라! 아멘. 주님을 믿는 모든 자마다 영생을 얻을 것이라! 아멘. 주님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아멘 주님.
7. 반복하며 기도할 때 중보할 것이 있는지를 생각합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주님…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주님… 사랑하는 주님… 그를 믿는 모든 자마다 멸망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신 주님. 사랑하는 부모님이 이 모든 자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저희 부모님을 위해서도 십자가 지셨음을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부모님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기도의 분량이 있다면 이 시간 제가 이렇게 기도하오니… 부모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실제가 되게 하소서… 아멘 아멘…
8. 양식으로 삼은 구절을 암송하고 일상에서 그 말씀을 기도로 풀어냅니다.
‘기도로 말씀을 읽고,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을 두 글자로 줄이면 히브리식 묵상을 의미하는 ‘하가’입니다. ‘말씀으로 기도하기’의 가장 강력한 효과는 일상에서 드러납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일상에서 ‘하가’를 언제(when) 어디서나(where) 어떤 방법(how)을 사용해서라도 할 것에 대해 다룬 아랫글을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도를 자라게 할 양식입니다.
The Word of God is the food by which prayer is nourished.
– E. M. 바운즈 (E. M. Bounds)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묵상하다(하가) הָגָה
스트롱번호 1897
창세기 24:63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7742. 수아흐 묵상하다가
חֵסֵד 스트롱번호2617
욕구
열심
인자함
ἀγάπη, ης, ἡ ἀγάπη 스트롱번호26
사랑.
인간의 사랑.
사랑의 대상이 없는 경우. ㉠ 고전8:1
ἀγαπάω 스트롱번호25
사랑하다
인격에 대한 호감.
마5:44
קָדוֹשׁ 스트롱번호6918
거룩한
욥6 : 1 0
레21:6
거룩함
신성
고결
봉헌한
순수한
거룩한.
하나님의 뜻은 거룩함이라고 합니다.
특히 음행을 멀리하라고 권면합니다.
세부적으로는 아내를 거룩함과 존중함으로 대하며 이방인과 같이 색욕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바울 당시의 사람들은 성윤리에 대해 무감각했습니다.
성적으로 타락했을 뿐만 아니라 성적인 만족을 위해 탈선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의
아내까지도 넘보는 일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사회적으로 아내는 자녀를 출산하고 가정을 돌보는 하나의 도구로 인식되었고, 이혼은
기분대로 행해졌으며, 혼외관계를 갖더라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성적인 욕망이 금지되기는커녕 용인되고
조장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류 속 바울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성적 방종에 동참하지 않는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함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 모두를 그리스도인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세상 사람처럼 무분별하게 사는 삶이 아니라 성결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쾌락을 추구하며 인생의
즐거움을 육적인 것에서 찾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적입니다.
만약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과 같이 문란하게 제 멋대로의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를 거룩한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행동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삶, 정결한 삶,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할 이유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로 ‘형제 사랑’을 꼽고 있습니다.
본문 9절에서 10절입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형제 사랑과 관련하여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며 그들을 칭찬합니다. 그들이 교회 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온 마케도니아에 있는 형제들, 곧 마케도니아에 있는 교회들에게도 사랑을 잘 실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의 삶의 자세에 대해 바울은 앞으로도 그렇게 행해 나가길 권유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난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의 죄를 속죄해 주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화목제물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해야할 근거입니다.
더 나아가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버리신 주님의 가르침이시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굴레 가운데 죽어가던 우리의 영혼을 당신의 생명과 맞바꾸어주셨습니다. 그를 통해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주님의 생명력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가르치심을 좇아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며, 또한 서로 사랑해 가야할 이유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오늘과 오늘 일에 충실한 삶’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본문 11절에서 12절입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권고합니다. 당시 주의 날, 곧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거짓 가르침에 속아 일상의 일을 포기하고 생업을 내려놓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습니다. 일은 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도와주시겠지 하며 무작정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등장했습니다. 그에 대해 바울은 그런 그릇된 신앙풍조에 동요하지 말고 하던 일에 전념하기를 권유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믿지 않는 불신자들로부터 빈축을 살 뿐 만 아니라 결국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에 내 몰리게 될 것이 뻔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시대적으로는‘포기’라는 단어가 너무나도 팽배해 있는 상황입니다.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3포 세대, 더 하여 내 집과 인간관계를 포기하는 5포 세대, 거기에 또 더하여 꿈과 희망과 삶의 가치를 포기하는 N포 세대, 그것도 모자라 노년까지도 포기하는 노포세대에 이르기 까지...
이제 ‘소망’ 과 ‘도전’이라는 단어는 차츰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고, 대신 ‘절망’ 과 ‘포기’라는 단어가 사람들의 생각과 사회 곳곳에 침투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유도 없이 일을 하지 않으면서 구직활동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은 증가하는 추세이며, 그런 자신들을 가리켜 ‘잉여인간’이라며 스스로를 비하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취약한 경제 기반과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저성장국면에 접어 든 것이 우리 경제의 실상입니다. 하지만 외적인 상황만을 탓하고 두 손을 놓고 있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들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을 내일을 약속 받을 수 있는 기회로 여기며,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할 일을 찾고, 주어진 일에 감사하며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됩니다. 내게 오늘이라는 시간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편으로 곡해된 재림 사상은 데살로니가 교우들로 하여금 이미 죽음을 맞이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걱정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재림이라는 영광스러운 상황에 참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염려였습니다. 그에 대해 바울은 ‘소망 없는 불신자들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재림 시에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다가 죽음을 맞았던 그리스도인들 역시 부활시켜 주실 것이고(14절), 그 다음에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 또한 주님을 영접하며 그 주님과 함께 영원히 동거하는 은총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 안에서 서로 위로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이어가길 마지막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에는 ‘거룩’이라는 단어가 실종되어 가고 있습니다.
성결 된 삶으로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모습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인들이 차츰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사랑’이라는 단어 또한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조차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목격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결코 짧지 않은 손을 지니신 권능의
주님을 바라보며 ‘도전’하고, ‘최선’을 다해야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 환경을 탓하며, ‘자포자기’라는 세상의 분위기에 짓눌려
있는 형국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택해주신 하나님은 죽음의 한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일으켜 세우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오늘도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삶을 의탁하시며, 거룩한 삶, 사랑을 실천하는 삶, ‘도전’과 ‘최선’을 다하는 삶으로
주님께 기쁨이 되어드리는 사랑하는 우리 교우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소망의 주님,
오늘도 귀한 하루를 저희에게 허락해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부정했던 저희를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라는 주님의 기대가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아침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사 오늘 하루를
거룩하게 성결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형제 사랑, 서로 사랑을 통해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삶으로 증명하게 해 주십시오.
죽음의 한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일으켜 세우신 권능의 주님을 바라봄으로
‘포기’ 대신 ‘도전’을, ‘절망’ 대신 ‘소망’을 품고
할 일을 찾고,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해 주십시오.
그를 통해 거룩하신 주님이심이, 사랑의 주님이심이, 권능의 주님이심이
저희 삶을 통해 입증되고, 그로 인해 저희 삶이 주님께 기쁨이 되게 해 주십시오.
거룩하시며 사랑과 소망이신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불러주신 이유는 무엇인지 묵상하여 봅시다(7절).
2)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가르치심은 무엇인지 묵상하여 봅시다(9절).
3) ‘오늘’ 이라는 시간과 상황에 대해 성경은 어떤 삶의 지침을 주고 있는지 묵상하여 봅시다(11절).
4) 현재 포기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절망 속에 내려놓은 것이 있습니까? 이 아침 죽음의 한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일으켜 세우신 권능의 주님께 소망을 두며, ‘도전’ 과 ‘최선’이라는 단어를 묵상하여 봅시다.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For this reason, when I could stand it no longer, I
sent Timothy to find out about your faith. I was afraid that in some way
the tempter might have tempted you and our efforts might have been
useless.
"믿음을 알기 위하여(find out about your faith)"
에이스 토 그노나이 텐 피스틴(εις το γνωναι την πιστιν)
그 믿음을 알기 위하여
3절 / 환난
θλῖψ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2347
바울이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베뢰아에서 아덴까지 먼저 온 후에 실라와 디모데가 바울의 뒤를 쫓아 아덴에 오게 되었다(행 17:13-15).
그리고 나서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하여 다시 데살로니가로 파송되었고 그후 실라도 임무를 갖고 마게도냐로 가게 되었다.
이처럼 디모데를 먼저 데살로니가로 보내고, 그후 실라도 마게도냐로 보낸 다음에, 바울은 아덴에잠시 머물다가 바로 고린도로 가서 그곳에서 실라와 디모데와 다시 합류(合流)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디모데로부터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듣고 바울은 본 서신을 쓰게 되었다(Bruce).
그리스도인들이 환난을 당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사도행전 14:22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갈라디아의 회심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환난을 겪는 것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이므로 변경될 수 없는 불가피한 것이다(Morris).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알아보려고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디모데가 데살로니가교회를 방문한 후에 디모데의 보고들 받은 바울은 매우 만복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어봅시다(3:6-10).
6. 디모데가 돌아와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이 이전처럼 확고하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또 여러분이 언제나 우리를 좋게 생각하고 우리가 여러분을 그리워하고 있듯이 여러분도 우리를 보고 싶어한다는 사실도 그가 말해 주었습니다.
7. 형제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여러분의 믿음으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8.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게 서 있으므로 이제는 우리가 살 것 같습니다.
9. 우리가 여러분 때문에 우리 하나님 앞에서 갖게 될 모든 기쁨에 대하여 그 보답으로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10. 우리는 여러분을 다시 만나 여러분의 믿음에 부족한 것을 채워 줄 수 있게 해 달라고 밤낮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실험실에서 어떤 용액의 성분을 알 수 없을 때에 '리트머스 시험지'를 사용하여 용액의 성분을 검사합니다.
예를 들면 성분을 알 수 없는 용액에 리트머스 시험지를 넣으면 파란색이 붉은 색으로 변화하면 그 용액은 "산성" 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리트머스 시험지를 넣었을 때 붉은 색으로 변하면 그 용액은 "알카리성" 이라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의 믿음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환난과 핍박 중에 어떤 반응을 보여주는가에 의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그들은 감옥안에서도 찬송을 부르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찬송과 기도를 감옥에 갇혀 있던 모든 죄수들도 들었습니다.
감옥에 갇히면 어떻게 감옥에서 나갈 수 있을까 하는 방법론을 먼저 찾는 것이 사람의 본능일텐데 바울과 실라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평소에 하는 것처럼 찬송과 기도를 멈출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믿음의 사람이라면 내가 갖고 있는 문제와 고통에 의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반드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건강한 것만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약한 육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갖는다면 그 약함이 도리어 큰 장점이 되어 나를 하나님이 붙들고 계신다는 굳센 믿음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제게는 작은 아들 다니엘의 선천적 장애(덴디 워커, 쟈베트 신드롬)가 늘 저희들을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믿음은 "내 아들이니 내가 지킬 것" 이라던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기 때문에 감사할 뿐입니다.
어떤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어려움 때문에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을 더 의지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오늘도 이러한 믿음과 능력을 사모하며 험한 산길도 거친 골짜기도 평안하게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데살로니가전서 3:7-8).
"Therefore, brothers and sisters, in all our distress and persecution we were encouraged about you because of your faith. For now we really live, since you are standing firm in the Lord."(1 Thessalonians 3:7-8).
성도들의 믿음을 확인하는 바울(1-3)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한 목적은 환난을 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을 구원하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케 하려 하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동참케 하려 하심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환난을 허락하셨을 때에는 피할 길도 미리 예비해 두셨을 것이기 때문에 성도는 환난을 당하나 결국엔 원수를 이기고
승리하게 됩니다.
위로를 받는 바울(4-7)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면서 시험하는 자가 성도들의 믿음을
깨뜨림으로써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복음을 헛되게 만들까 하여 염려하였습니다.
그러나 디모데가 바울에게 전한 소식은 성도들이 믿음을
잘 지키고 있으며 바울을 매우 보고 싶어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위로를 받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울도 복음을
위하여 궁핍과 환난 가운데 있었지만 성도들의 믿음과 용기는 바울에게도 용기와 위로를 주었던 것입니다.
기쁨으로 감사하는 바울(9)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믿음에 굳게 서서 영적 싸움을 잘 수행하고 있음을 알게 된 바울은 근심했던 것만큼 큰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께 대한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믿음을 지켜 주셔서 그와 같이 강한 믿음을 지닐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야로 심히 간구하는 바울(10-13)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인하여 주야로 심히
간구한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로 데살로니가 교회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바울과 복음 사역자들이
성도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과 같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피차 서로 뜨겁게 사랑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믿음에 굳게 서서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주께서 주신 오늘!
어떠한 환난과 고난이 다가와도 요동치 아니하고 믿음에 굳게 서서 그리스도를 닳아 가길 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 즉 오늘날의 터키 지역에서 전도를 하다가 발칸반도인 오늘날 그리스 북부 국경선 위쪽 지역에
해당되는 마게도냐로 가서 전도하게 됩니다.
바울의 수차례 전도여행의 특징 중 하나는 수리아의 안디옥이나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되돌아오면서도 전도했습니다.
2차 전도여행은 1차 전도지역의 가장
서쪽이었던 비시디아 안디옥을 넘어 오늘날 터키 지역인 아시아, 무시아를 넘어가 서쪽까지 다다랐습니다.
그러다가 아시아 지역에서
배를 타고 ‘에개해’를 건너 발칸반도로 넘어 마게도냐 지역으로 가게 됩니다.
발칸반도까지의 전도는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1차
전도여행보다 서쪽으로 거리가 약 3배 정도 되는 상당히 떨어진 지역입니다.
대륙을 넘어 들어갔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미지 세계에
대한 긴장감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 바다를 건너 발칸반도로 간 가장 큰 이유는 사도행전 16장에
나타납니다(행 16:6-10).
성령님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고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도와 달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발칸반도에서 사도 바울의 사역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마게도냐 첫 성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실라와 함께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몇 군데 거쳐 갔던 곳이 데살로니가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은 사도행전 17장 전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 위협으로 인한 전도의 어려움을 겪었지만
복음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3, 4절입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이 사도 바울과 실라의 복음의 결실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사도 바울의 전도 결실은 특별한 애착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발칸반도에서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은 여러 장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성경에 서신서로 기록이 남은 곳이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 2장
17~20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다”라고 했으며 또한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고 서신서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두 차례 가고자 했으나 어쩔 수 없이 가지 못했던 것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애정은 오늘 본문 2절에도 나타납니다.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디모데를
보낼 때 사도 바울의 상황을 살펴보면, 데살로니가에서 시장에 있던 불량한 사람들이 일으킨 소동으로 인하여 피신하여 베뢰아
지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사도 바울의 복음의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복음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처럼 베뢰아에서도 사도행전 17장 12절을 보면,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었듯이 전도의 열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데살로니가에서 사도 바울을 방해하였던 사람들이
약 40km나 떨어진 베뢰아까지 와서 무리를 일으켜 소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시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그 사람의 믿음을 보고
성령님의 역사로 치유하였습니다.
이 치유 사건의 계기로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 사람들로부터 헤르메스와 제우스라는 소리를 듣게 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 소문이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로 오기 이전의 장소인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흘러 들어갔습니다. 이
두 지역은 루스드라에서 약 45km와 약 225km 떨어진 곳입니다. 이곳에서 유대인들이 루스드라 지역까지 와서 무리를 충동하여
소동을 일으켜 사도 바울을 방해하였습니다(행14:19). 이런 어려운 전도 사역을 하면서 사도 바울이 했던 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 하반절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와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환난을 겪으면서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환난 중에 흔들리지 말 것을 원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소동이 있어서 피신하여 환난을 당한 사람은 사도 바울뿐만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따랐던 사람도 데살로니가에서 환난을 받았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도행전 17장 5절에 야손과 그의 형제들입니다. 이들은 사도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무리들에게 끌려 구속당했습니다. 비단 야손과 그의 형제들만 환난을 당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환난의 결과를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난 이후에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어렵게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환난으로 버린바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루 빨리 데살로니가로 되돌아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보고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의 진행이 여의치 않자 결국은 디모데를 보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대신하여 디모데를 보내서라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로해 주고 싶었습니다. 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초신자들의 연약함을 사도 바울은 너무나도 잘 알았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이 흔들릴 때마다 굳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위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살다가 환난을 만나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다면 굳건하게 하는 주위의 신앙의 선배들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믿음에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주위에 연약한 자들이 있습니까? 애정어린 위로가 필요할 줄 압니다. 초신자들이 신앙생활에서 위로를 받아야 되는 궁극적인 이유는 3절 상반절에 있습니다.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굳건함과 믿음의 위로가 필요한데 과연 그것을 어떻게 얻겠습니까? 사도 바울과 디모데와 같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위로는 강단에서의 말씀, 그리고 주님 안에서 성경을 근거한 권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곧 가장 큰 위로의 말씀이 되고 신앙을 굳건하게 할 수 있습니다. 환난으로 흔들릴 때마다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어떤 온전한 위로와 굳건함은 제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초신자들만이 환난 중에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믿은 자들과 신앙의 선배들도 환난 중에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어떻게 위로를 받겠습니까? 물론 이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 받아야할 존재입니다. 7절은 또 다른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원천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르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형제들’은 초신자인 데살로니가 교인들이고 ‘우리’는 1장 1절에서 언급한 바울과 실루아노 즉 실라와 디모데를 의미합니다. 복음 전도자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하기도 하고 또는 복음 대적자들로 인해 환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 복음 전도자들을 위로해 주는 요소는 경제적 궁핍을 해결해 주는 물질이 아니라 자신이 전한 복음을 듣거나 다른 이들로부터 복음을 들어 신앙생활을 하는 초신자들의 믿음으로 인하여 위로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초신자들로 인해 은혜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가끔씩 하는 간증이나 새교우 환영회에서 새교우 중 초신자들의 짧은 고백에서 큰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먼저 믿은 자나 나중에 믿은 자나 서로서로 믿음으로 위로받고 위로해 주게 됩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이며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5절
말씀에 있듯이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시험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항상 주님 안에서 굳게 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굳게 서기를 간절히 원하는 바를 8절에 다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이제는 살리라’는 ‘안도의 숨을 쉰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사도 바울은 목회자로서 전도의 결실인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굳게 설 때 비로소 자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다는 애정어린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마음은 오늘 본문 10절과 기도 내용인 11~13절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성장을 원하고 피차간의 사랑을 원하고 믿음을 굳게 하기를 원하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성도의 거룩한 삶을 원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오실 때까지 시험에 빠지지 않고 믿음에 굳게 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위로의 하나님 아버지 성도간의 믿음으로 인한 위로를 허락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 항상 주님 안에서 굳게 서게 하옵시고 그로 인하여 피차간에 위로받게 하옵시고 나아가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For what is our hope, our joy, or the crown in which we will glory in the presence of our Lord Jesus when he comes? Is it not you?
강림하실 때(When Jesus comes)
강림하실 때(Οταν έρχεστε)
강림(降臨)의 사전적의 의미는 "신이나 성령이 인간에게 내려 오는 것"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정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던 예수님께서 심판하실 주가 되어 다시 오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강림(parŏusia. παρουσία)의 때는 세상의 역사는 멈추고 심판이 시작되는 때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에서는 강림하실 때에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할 때 빌립보 지방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했습니다(행 16:19-34).
사도 바울은 전도여행 중 빌립보 지방에서 세 번의 안식일을 맞이하여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세워진 교회이었습니다.
세 차례의 가르침을 받고도 진리의 터 위에 세워진 데살로니가교회와 성도들이 고난 가운데서 순수한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심판하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강림의 때에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영광이요 기쁨"이 될 것이라고 칭찬합니다.
자 이제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점검해 봅시다.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어떤 고난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복음을 위하여 하나 뿐인 생명까지라도 내려놓을 수 있습니까?
순교자적인 신앙과 삶을 위하여 결단합시다.
오늘의 시대는 좌파와 우파의 이념 충돌에 의한 힘 겨루기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좌파와 우파의 충돌에서 옳바른 판단력을 상실한 수 많은 사람들 특히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상당수가 좌파의 선동과 주장에 동조합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진리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려놓을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주의 강림하실 때에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처럼 믿음의 영광이요 기쁨이 될 수 있는 거룩한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ὅταν
스트롱번호 3752
ὅτε 스트롱번호 3753
강림(3952) 파루시아(parŏusia) παρου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3952
연약한
성도를 대하는 바울의 방식은 의외로 다양합니다.
원칙주의자이며 다혈질의 성향을 가진 바울이지만 성도를 대할 때는 기꺼이 자신의
모습을 내려놓습니다.
성도를 대하는 바울의 모습을 통해 현대 목회자들이 배워야할 많은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1. 1-2절 복음을 전하는 방식
2. 3-16절 네 가지 비유로서의 복음 전도자
ㄱ. 3-4절 옳은 청지기
ㄴ. 5-8절 유모
ㄷ. 9-12절 아버지
3. 13-16절 고난에 동참한 교회
4. 17-20절 데살로니가에 방문하기를 원함
1. 1-2절 복음을 전하는 방식
데살로니가
교회와 바울의 관계를 살펴보려면 사도행전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1장에서는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2장과 3장에서는
바울이 교인들로부터 심각한 오해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7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16장에서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귀신들린 여자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귀신들린 여자 아이를 통해
점을 치고 돈을 벌던 주인이 화가 난 것입니다.
그 일로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를 떠나게 되고 암볼리아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이르게 됩니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합니다(행 17:1-2).
‘세 안식일’이란 표현을 통해
삼일 동안 유대인 회당에서 바울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준 것 같습니다.
랍비였던 바울에게 성경을 해설이 달라고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증언을 하게 됩니다(행 17:3).
그러자 유대인들은 바울을
회당에서 쫓아내게 됩니다.
이때 야손이란 사람의 집에 들어가 바울과 실라를 잡으려 했지만 바울과 실라는 이미 그곳에 없었습니다.
누가는 ‘유대인들은 시기하여’(행 17:5) 바울과 실라를 고발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데살로니가 읍장들, 즉 관원들에게 고발한
내용은 반역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7:5-9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가이사를
대신할 다른 임금인 예수를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빌라도가 예수님께 심문했던 그 질문이었습니다.
어쨌든 이일로 바울과
실라는 쫓겨나다시피 하여 데살로니가를 벗어나게 됩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이것을 그대로 둘리 없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자신들만의
안정을 위해서 도망갔다고 모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2절에서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했다고 말합니다.
빌립보뿐 아니라 데살로니가에서, 또 뵈레아에서 쫓기고 또 쫓기는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들이 결코 자신들만을 위해 살고 싶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6절에서 바울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고 고백합니다.
8절에서는 오히려 우리의 목숨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럼 바울은 어떻게 복음을 전했을까요?
명백하게 복음을 전하라
2절에
보면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글 번역은 모호하지만 원문에 보면
‘전하다라’라는 동사에 설명이 덧붙여 있습니다.
‘파르레시아조마이(παρρησιάζομαι)’라는 동사인데, 뜻은 ‘자유롭게’
‘공개적으로’ ‘두려움 없이 말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표현을 쓴 이유는 자신들의 복음 사역 자체가 모호하거나
비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공개되어 있고, 분명하게 복음을 전한다는 뜻입니다. 1:5에도 보십시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사역을 함에 있어서 누구 몰래 어떤 일을 하거나, 모호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명백하고 분명하게 일을 처리했고,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행동을 취함으로 의혹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단어는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교묘하거나 간사한 말이 아니라 분명하게 복음이 무엇인지 전달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4절에서는 이것을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복음을 조작하거나 교묘한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니라’라고 고백합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하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행 5: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역 원칙 중의 하나는 바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무시하거나 하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복음을 조작하거나 모호하게 설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고난을 피하지 말라
두
번째 원리를 ‘고난과 능욕’이란 단어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거나 모호하게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힘든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상황이 결코 좋았거나 우호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능욕이 따랐고, 유대인들은 계속하여 바울을 시기하여 가는 곳마다 따라 다니며 바울을 괴롭히고 죽이려 들었습니다.
비록 그런
상황이라도 해도 고난을 회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상황과 맞서 싸웠고, 하나님께 자신들의 상황을 맡겼던 것입니다.
3-16절
복음전도자의 세 가지 이미지
바울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무식하게 예수 천당만을 외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이고 명징하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바울은 네 가지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복음 전도
사역을 소개합니다.
3-4절 청지기
οἰκονόμ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623
3-4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복음의 청지기로 소개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하나님께 ‘복음을 위탁 받았다’고 말합니다.
즉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입니다.
마치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의 양을 치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 표현에서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복음을 전할 때 종종 특권의식을 갖지 말아야 됨을 말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당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복음은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때문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다른 곳에서 바울은 ‘나의 복음’이라는 표현을 가끔 사용합니다.
그때는 거짓 교사들이 전하는 복음과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절대 우월의식이나 특권을 의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단지 하나님의 종이요 청지기일뿐입니다.
5-8절 / 유모
유모(5162) 트로포스(rŏphŏs) τροφός, οῦ , ἡ
두
번째 이미지는 유모입니다.
7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바울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특권을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 같이 했다’라고 말합니다.
목회자 성도에게 취해야할 두 번째 이미지는 바로
온유한 유모입니다.
목회자는 영적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어머니는 어린 자녀들에게 먹을 것을 줍니다. 바울은
이곳에 ‘온유한’이란 수식어를 붙여 목회자 성도를 대할 때 온유해야 할 것을 설명합니다.
거칠고 무례하게 성도를 대하는 목회자는
좋은 모습은 결코 아닙니다.
목회자는 항상 성도들의 안위를 생각하고, 그들을 걱정하고, 바르게 말씀을 자라도록 먹이고 입히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심지어 목숨까지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말합니다.
4절 /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옳게 여기심을 입어, 마음을 감찰하시는 / 도키마조(dŏkimazō)
δοκιμάζω 스트롱번호 1381
오직(알라)
이 말은 바울이 앞절에 열거한 것과 같은 이교도들의 중상 모략에 대하여 더욱 강한 어조로 상세하게 변호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 '옳게 여기심'으로 변역된 '데도키마스메다'(*)는 금과 은의 제련에 사용되는 말로서 시험을 통해 그 진가를 알아내는 것을 가리킨다(벧전 1:7).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받은 후에 합격하여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위임되었음을 강조한다(행 9:1-31).
'부탁을 받았으니'의 헬라어 '피스튜데나이'(*)는 보통 '믿는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바울을 전도자로 신임하시고복음을 맡기셨음을 뜻한다.
분명 복음은 신적 기원을 가진 것이기에(2절)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법을 통해 그의 사신(使臣)을 선택하실때에만 복음의 위임이 가능하다.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함이라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되고 위임받은 복음 전도자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바른 태도를 가리킨다(갈 1:10).
'기쁘게 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레스콘테스'()에는 '남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바울은 이 말을 사용함으로 자신이 인기와 명예에 영합(迎合)하여 사람을 의식하며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기를 기뻐하였다(롬 1:1; 빌 1:1).
한편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함으로써 자신의 복음 전도가 진실된 것임을 더욱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감찰하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마존티'(*)는 앞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와 같은 어군의 동사로서 '시험하다', '시험을 통해 인정하다'란 뜻이며,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포함하는 전인적(全人的)인 감찰의 의미를 갖는다.
오직 -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복음 전도의 순전함과 진실성을 본절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
'유순한'(에피오이)은 종에 대한 주인의 태도나 신하에 대한 왕의 태도,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와 같이 하급자에 대한 상급자의 관대(寬大)한 행동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따라서 바울과 그 일행이 존경받을 권리와 지배력의 행사를 버리고 마치 자녀를 앙육하는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유모'(트로포스)는'자기'(헤아우테스)라는 말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강조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자식을 위해 큰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고 특별한 사랑과 노력을 쏟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바울 자신도 데살로니가교인들을 향하여 그러한 사랑과 열정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지도하였음을 가리킨다.
세
번째 이미지는 아버지입니다.
어머니로 족할 것 같은데 왜 권위적인 아버지의 모습도 함께 지녀야 할까요?
1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한다’라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먹이고 입히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아버지는
교육하고 가르치는 이미지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양을 많이 키웁니다.
목자는 양들을 인도하고 먹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거칠고
불량하고 게으른 양들이 있습니다.
그때 목자는 몽둥이로 양들을 때리거나 개를 통해서 그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목회자는 성도를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말을 듣지 않고 진리에 거스리는 행동을 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지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지 않고, 영적으로 태만한 성도가 있다면 그를 바르게 지도하여 잘 양육해야 합니다. 성도가 좋아하는 것만을 해주면서 목회를 잘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어느 누가 기도하고 싶고, 성경을 읽고 싶고, 예배에 참석하고 싶어 하겠습니까? 일어나 운동해야할 때 누워만 있다면 비만에 걸리고 건강은 악화되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로하고 격려도 해야 하지만 때는 강력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 이미 앞에서 데살로니가인들이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1, 2, 5, 9, 10절).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 바울은 여기서 자신을 어머니 상(象)에서 아버지상으로 바뀌 말한다.
앞에서 그는 데살로니가인들을 복음으로 양육하는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말했으나 여기서는 그들의 잘못된 신앙의 상태를 바르게 교육하는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강조한다(Chrysostom). 한편 모성(母性)과 부성적(父性的) 측면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시 103:13;사 66:13).
권면하고 위로하고
- 두 단어는 거의 같은 뜻을 내포한다. 그러나 '권면하고'(*,
파라칼룬테스)는 특별한 행동 지침을 충고할 때 사용되며 '위로하고'(*, 파라뮈두메노이)는 그러한 행동 지침을 계속해서 따르도록
격려할때 사용된다(Lightfoot). 바울 서신에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많아 사용되고 있다. 바울이 두 단어를 병행해서 쓰는
이유는 독자들에게 강하게 권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경계하노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로메노이'(*)는 보다 권위적인 어조가 담겨 있다. 이것은 단순한 요청 이상으로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당위성을 내포한다.
13-16절 고난에 동참한 교회
바울은 다시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13절) 바울은 사람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바울은 못생기고 키고 작고 말도 어눌하고 대머리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안질(眼疾)이 있어 육신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바울은 13절 후반부에서 말씀이 너희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한다고 말합니다. 즉 말씀을 따라 성령의 열매들이 풍성하게 맺었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1:9-10절을 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상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만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온 각처에 그들의 소문이 퍼져 나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본받음
14절을 보면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본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예루살렘 교회를 지칭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교회가 예루살렘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교회는 대표성을 띠는 상징적인 교회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본받은 것일까요? 바로 고난을 피하지 않은 것입니다. 14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동족의 위험’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15-16절까지에서 유대인들이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대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15절) 이것을 데살로니가 교회에 적용해 본다면, 그들도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목숨의 위협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고린도후서 8:2에 의하면 데살로니가교회를 비롯한 마케도냐의 교회들은 많은 환난과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2)
이들이 당한 고난은 우연히 사업이 망하거나 자연재해로 인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일어난 자발적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를 선택하느냐, 세상의 안락함을 선택하느냐의 기로에서서 기꺼이 예수를 선택함으로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17-20절
데살로니가에 방문하기를 원함
이제 바울은 자신들이 데살로니가를 갑자기 떠난 이유를 밟힙니다.
먼저는 바울은 마음이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데살로니가성도들을 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18절에 의하면 바울은 여러 번 다시 데살로니가 교회로 가려고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사탄이 막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자랑스러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영광이며 기쁨이라고 말합니다.(20절)
사도 바울은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함께 2차전도 여행을 하면서, 데살로니가의 유대인 회당에서 3주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짧은 기간이었지만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로 인해 밤중에 빠져나와야 할 정도로 박해가
심하게 일어났습니다.
박해로 인해 개척한지 몇 달 밖에 되지 않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박해 속에서 복음을 전해준 사도들과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바울은 디모데를 통해, 데살로니가 교회가 박해와 신학문제들에 직면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하고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고 있는 복음이 헛되지 않음을 역설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해가는 이유는 복음이 그 내용으로만 진실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과정과 동기도 진실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음에는 그에 합당한 동기와 삶의 실재가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먼저 그 동기에 대해서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들의 명성과 인정을 얻기 위해 복음을 전한 것이라면 복음은 헛된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믿는다면, 복음의 내용이 헛됨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믿음의 고백이 헛되지 않는 복음에 합당한 삶의 실재를 살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들이 어떠한
목적과 삶으로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는지 아래에서 말합니다.
사도 바울과 일행은 빌립보에서 옥에 갇혔다 풀려나자 마자 데살로니가로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앞서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했다고 하는데, 사도행전 16장에서 그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에서 사도바울은 점치는 여자에게서 귀신을
내쫓았지만, 그 주인들에게 모함을 당해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습니다.
그 일은 바울에게 치욕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로마 시민의 경우 재판에서 형이 확정되기 전에는 처벌할 수 없었으나, 로마 시민이었던
바울은 정식 재판도 없이 태형을 당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40대 이내의 매를 맞지만, 바울은 그 수에 상관없이 많은
매질을 당하였고, 감옥에서도 깊은 내실에 갇혀 발에 족쇄가 채워져 결박되었습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빌립보로 건너왔지만, 복음을 전하다 치욕스러운 일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많은 싸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싸움’이라는 말은 히브리서에서는 ‘경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또한 디모데전서에서는 같은 단어를 ‘믿음의 선한 싸움’에 사용하고 있듯이, 바울이 믿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그가
믿음을 ‘선한 싸움’으로 받아들이기에, 치욕을 당하고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만일, 바울이 믿음을 고난을 벗어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면 실족했을 것입니다.
복음을 따르다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을 따르는 삶은 이 땅에서는 끝나지 않는 분투이며 경주입니다.
그는 빌립보에서의 치욕을 당한 후에도,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에 대해 2절 끝부분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힘입어’라고 하는
말에서, 그들의 믿음의 싸움의 동력이 하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 스스로에게서 동력을 얻어 복음을 전했다면 그들은 이미 실족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실패할 때 복음도 실패한 것처럼 여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힘입는지, 자신의 내적 동기에 의해 힘입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자신의 내적동기에 의해 자신을 위해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어떻게 증명됩니까?
그것을 증명해주는 것은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사용한 복음 전도 방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간사함과 부정과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간사함은 원어의 의미로 ‘잘못된 방식’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부정은 ‘불순한 동기’라는 의미가 있고, 속임수는 ‘사람의 마음을 기만하는 방법’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 세 가지를 넓게 해석할 때, 인간적인 관계와 감정과 처세를 의존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방법으로 복음의 전도가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복음은 그 자체의 목적이 있지 사람의 마음을 얻는데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타인과 잘 어울려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사역은 처세가 아닙니다. 더욱이 신앙생황 또한 처세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방식을 통해, 우리의 믿음의 동기를 점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믿음의 동기는 신앙생활 방식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동기와 근원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에 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동기에 대해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동기와 목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심을 입고’, ‘위탁받았다’는 것은 모두 수동형으로, 바울의 복음 전도의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복음을 전한 동기와 목적은 바울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고 또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서신서에서 여러번,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자신의 진실성이 입증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구절에서도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진실하다고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 하는 고백이기도 한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해보다 더 밝은 빛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그 이후로도 하나님께 자신의 심장폐부까지 훤히 드러나 있다는 것을 알게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기쁘게 하기 위해 믿음을 고수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앞에 한번 자신을 비추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첨하는 말은 ‘타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과장되고 꾸며진 말’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복음은 아첨하는 말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복음은 듣기 좋은 말도 아니고, 대책 없는 위로도 아닙니다. 사람의 환심을 사는데 목적이 있는 사람은, 듣기 좋은 말을 신앙적인 말인 양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듣는 사람의 마음에 맞추어 주는 아첨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의 형벌을 받아 죽으셨기에, 자신의 죄를 자복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게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의 전하는 말이 그렇지 않다면, 복음과 무관한 것일 수 있습니다.
바울을 또한 ‘탐심의 탈’을 말하는데, 아첨은 또한 탐심과 관련됩니다. 아첨은 상대방을 위한 말이 아니라 환심을 얻기 위한 자기의 탐욕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탐심은 결국 자기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조차도 수단으로 여기는 것인데, 바울은 영광을 얻으려고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그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이 아니라 달을 보아야 하듯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바울이 아닌 그가 전한 하나님의 복음을 보길 원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으려는데 바울의 목적이 있지 않기에, 우리 또한 바울이 아니라 바울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복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에 따르는 아이러니는, 출처와 권위를 하나님께 돌림으로 오히려 자신을 더 높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신앙을 포장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라고 하면서, 덩달아 자신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쉽게 그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부분에 대해 다시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권위를 주장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유모는 기르고 먹이며 양육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군대의 교관과 유모는 둘 다 훈육하고 양육하는 사람이지만, 그 방법이 다릅니다.
군대의 교관은 규율과 귄위로 훈육하지만, 유모는 유순한 말과 젖으로 양육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한 바울은 권위를 내세우는
교관처럼 하지 아니하고, 유모처럼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항상 모든 사람들에게 유순한 유모처럼 한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엄하게 잘못을 질책하기도 하고 매를 들겠다고 까지 말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이 이 구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도라고 말하지만, 권위를 내세우고 권위로 복음을 전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순한 태도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들이 어떻게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는지도 말합니다.
바울은 ‘너희를 사모했다’는 표현을 쓰며, 그들에 대한 애정이 복음을 전하는 하나의 동기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복음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주기를 기뻐하였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들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 고초를 당하고 다시 데살로니가로 와서 또다시 박해를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사도들은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실질적인 생명의 위협을 매일 감수하며 그 길을 피하지 않고 데살로니가에까지 이르렀고, 그곳에서도 가감 없이 복음을 전하다 박해를 당하고 밤에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바울은 보답을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들을 기뻐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밤잠 못자며
보살피지만, 아기에게 보상받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받은 기쁨을 감사해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복음 사역은 보답을 바라며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믿음 또한 보상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믿음 자체로 기쁨을 얻는 것일 것입니다.
바울 자신들의 권위와 유익을 위하지 않고 또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사모하였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그들이 스스로 일해 자급하였다는
것입니다. 폐를 끼치지 아니한다는 말은 ‘짐을 지우지 않는다’ 는 말로 경제적인 부담을 주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에 의할 때 복음을 전하며 생계를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가 사도들에게 있지만(고전9:12), 그 권리를 얻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데도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한 순전한 목적과 동기가 또한 생계에 있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믿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위해 생존하는 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은 복음의 진실성이 자신이 한 행위로 증명되고 있음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복음과 삶이 어떻게 일치되어져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우리의 동기와 행동과
생활방식은, 우리가 믿는 복음의 내용과 일치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 동기와 행동과 생활방식은,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타인의 유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복음을 믿지만,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한 것과 다른 삶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신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주가 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말한 복음 전도사역은,
예수님의 이 복음에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복음에 합당한 하루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1장 / 재림의 소망
2장 / 재림 때의 영광
3장 / 재림을 위한 준비
4장 / 재림의 위로
5장 / 재림의 갑작스러움 - 임박(臨迫) : 임할 臨, 핍박할 迫(어떤 시기가 닥쳐 옴)
데살로니가전서와 데살로니가후서는 재림론(再臨論)
재림(再臨, 영어: Second Coming, Second Advent, Parousia)은 기독교에서 부활하여 승천한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 속에 또다시 내림(來臨)하여,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재림주의(再臨主義, Adventism)는 미국에서 부흥한 2차 대각성 운동에 힘입어 19세기에 시작한 기독교 운동이다.
이 이름은 다가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
윌리암 밀러가 시작한 이 운동의 신자들을 밀러주의자들로 부른다.
오늘날 이 운동에 수반된 최대 교회는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이며, 그 외에도 재림주의자 그리스도교회(Advent Christian Church)등이 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는
구원론(救援論)
구원론(救援論, 영어: soteriology)은 구원에 대한 여러 종교의 교리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에베소서는 교회론(敎會論)
교회론(Ecclesiology)은 기독교 신학의 조직신학 분야의 연구 분야로 기독교의 기원,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구원의 역할, 교회의 정책, 치리, 그리고 리더십과 관련된 기독교 교회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 단어의 영어 어원은 그리스어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ᾱ)에서 유래하여, 라틴어로 음차한 "에클레시아"(ecclisia)에서 형성되었다. '에클레시아'는 '불러내다'라는 뜻이다.
골로새서는 기독론(基督論)
그리스도론( - 論, Christologia, Christology)은 주로 신약성경의 복음서와 서간들에 기록된 예수의 위격적 존재론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연구 분야이다.
데살로니가전후서는 종말론(終末論)
종말론(終末論, ἔσχατος, eschatology)은 인류의 역사에세 최종적으로 일어날 사건이나 우주의 마지막에 대한 신학적 이론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삶속에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기뻐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 나오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초대 교회 당시 널리 사용되던 어휘로서 자주 한 단위로 결합되어 언급된다(5:8;
롬 5:1-5; 고전 13:13; 갈 5:5, 6; 골 1:4, 5; 히 6:10-12; 10:22-24; 벧전 1:21,
22, Bruce, Hunter).
이 세 가지는 서로 유기적 관계에 있는 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에게
부여하신 삶의 진수(眞髓)를 이루는 덕목들이다(Bornkamm). 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덕목들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영역을 지배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다.
믿음의 역사(투 에르구 테스피스테오스)
'믿음 가운데서 우러나온 너희의 역사'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Morris).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구속 역사에 근거한다.
이러한 믿음은 필연적으로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게 한다.
사랑의 수고(투 코푸 테스 아가페스)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나타내 주거니와 믿음과 마찬가지로 실천적 행위를 동반한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병자와 굶주린 자를 돕기위해 자선을 행하였으며,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열성적 헌신을 다하였다(Hendriksen).
이것은 사도 바울이 다른 곳에서 표현한 바, 복음을 위한 수고들이다(3:5; 고전 15:10, 58; 고후 10:15; 갈 4:11; 빌 2: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궁극적인 승리의 날을 바라보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은 현실속에서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온다 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를 지니고 있다.
본절의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네스'()는 진취적이고 용기있는 그리스도인의 특질로서 용감한 군인이 극한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버텨나가는 기상(氣像)을 의미한다(Findlay).
그리스도인들은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결코 낙심치 아니하고 인내로써 전진해야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2절에 나오는 바울의 중보기도의 때를 말해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 대한 기억이 매우 자주 떠올랐던 까닭에 '쉬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특히 바울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기도가 신실함을 나타내준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떤 자들은 자신들을 대하는 바울의 동기(動機)에 대해 의심을 품었던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바울은 본 서신의 서두에서부터 그러한 의혹을 일소하고자 한다(2:5,10;3:9, Thomas).
믿음의 역사는 동사(動詞)
사랑의 수고는 명사(名詞)
소망의 인내는 형용사(形容詞)
사랑을 행동으로 나타낼 때 그 사랑이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면 반드시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명사, 믿음은 동사, 소망은 명사와 같은 사랑을 수식하는 형용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데살로니가교회는 믿음의 소문이 주위에 널리 알려졌던 모범적인 교회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역사
- 빌레몬서에서 바울이 오네시모를 만난 후에 회심한 노예 오네시모
데살로니가후서 1: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요한복음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히브리서 6:10
하나님이 부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넘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야고보서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둘째는 사랑의 수고
- 바울, 실라(실루아노, 로마식 이름), 디모데의 수고 빌립보 지방에서 귀신들린 여종을 치유한 후 감옥에 갇히는 것
Strong's Exhaustive Concordance. foot. From baino(to walk) |
Strong's Greek: 1684. ἐμβαίνω (embainó) -- to walk on, to
Strong's Concordance. embainó: to walk on, to step into, ie embark. Original Word: ἐμβαίνω Part of Speech: Verb Transliteration: embainó Phonetic |
(예) 누가복음 3:22(강림, 카타바이노), 데살로니가전서 4:16(카타바이노)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 고린도전서
15:23(강림, 파루시아) παρουσία(parousia. 3952) a presence, a coming, 요한일서
2:28(파루시아), 베드로후서 1:16(파루시아), 3:4(파루시아), 야고보서 5:7-8(파루시아), 데살로니가후서
2:1(파루시아), 데살로니가후서 2:8(파루시아), 데살로니가전서 2:19(파루시아), 데살로니가전서 3:13(파루시아), 데살로니가전서 4:15(파루시아)
(예) 데살로니가후서 1:10(에르코마이) ἔρχομαι(erchomai. 2064) to come, go
데살로니가전서 1:10(에르코마이),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휴거(携擧, Rapture)
데살로니가전서 4: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携擧)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After that, we who are still alive and are left will be caught up together with them in the clouds to meet the Lord in the air. And so we will be with the Lord forever.
첫째, 휴거(Rapture)란 무엇인가?
휴거는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성도들을 불러올리는 사건을 말합니다.
그런데 휴거라는 단어가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왜 휴거라는 단어를 사용할까요?
한글 성경을 처음 번역할 때 중국의 한문 성경을 참조하여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당시 한글은 언문(言文)이라며 아녀자들만 사용하는 아주 천한 언어라고 하여 선비들은 주로 한문을 사용했습니다.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한문 성경을 기본으로 사용하여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라는 말씀에서 “끌어 올려(caught up)” 라는 말씀을 한문 성경에서 “휴거(携擧)”라고 합니다.
따라서 공중으로 끌어 올려라는 문장을 간략하게 "휴거(携擧)" 라고 사용한 것입니다.
둘째, 휴거(Rapture)의 의미는 무엇인가?
1. 한자의 의미
“휴거(携擧)”라는 한자는 “이끌 휴(携)” “들 거(擧)” 라는 훈으로 “이끌려 들려지다”라는 뜻입니다.
2. 영어의 의미
휴거를 영어로 “랩처(Rapture)” 라고 합니다.
“랩처(Rapture)”의 뜻은 “환희(delight), 열중, 넋을 잃음”입니다.
따라서 공중으로 끌어 올려간다는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왜 영어에서 휴거를 랩처라고 하였는가?
“갑작스럽게 잡아서 옮기다.” “강한 힘을 가지고 강하게 빼앗아 가다”, “재빠르게 자기에게 끌어들이다”
* 데려감을 당하고 (마 24:40∼41, 눅 17:34-35) - 수동태(Taken away)
1. 요한복음 6:15 - 붙들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GRK : σιδηρᾷ καὶ ἡρπάσθη τὸ τέκνον
NAS : and her child was caught up to God
KJV : her child was caught up unto God,
INT : iron and was caught away the child
5. 유다서 1:23 - 끌어내다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GRK : ἐκ πυρὸς ἁρπάζοντες οὓς δὲ
NAS : save others, snatching them out of the fire;
KJV : fear, pulling [them] out of
INT : out of fire snatching [them] others moreover
6. 데살로니가전서 4:17 - 끌어 올리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GRK : σὺν αὐτοῖς ἁρπαγησόμεθα ἐν νεφέλαις
NAS : and remain will be caught up together
KJV : [and] remain shall be caught up together
구약의 마지막 절(말라기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엘리야는 선지자 엘리야가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결론은 메시아이신 엘리야가 반드시 오실 것이라는 예언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약의 마지막 절(요한계시록 22:20~21)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신약의
결론은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 4장에서 오실 메시아로서 엘리야로 오실 것을 예언했던 그 메시아가 신약에서 이 세상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후에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재림(再臨)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의 사건을 요한계시록 21:1-2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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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에 대한 비성경적인 신앙
칠년 대환난을 당할 때 환난의 시기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공중으로 들림을 받는 것이다.
첫째, 대환난 시대를 피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때 공중 재림은 7년 대환난 시대에 공중으로 들려올라 가므로 환난의 때를 아주 평안하게 지낼 수 있다고 믿는다.
둘째, 공중으로 끌어 올려에 대한 오해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중으로 끌어 올림을 받는다는 것은 실제로 공중으로 들려올라가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악한 것에 의해서 빼앗길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