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새벽 묵상 자료


 2월 17일(화) 요한일서 5: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증거와 믿음(10절)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Anyone who believes in the Son of God has this testimony in his heart. Anyone who does not believe God has made him out to be a liar, because he has not believed the testimony God has given about his Son.

하나님을 믿는 자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의 안에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에 그의 안에 증거를 갖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일컬어 거짓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거짓의 사람은 세상에서는 존귀하게 여김을 받을 수 있어도 그 존귀함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가 지배하는 교회 /  영성의 시대가 왔다.

2018년 일본 문화청에서 종교연감이라는 것을 발표했습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비율을 조사했는데, 민속신이나 조상신을 믿는 사람이 47.6%, 불교신자가 47.1%, 로마 가톨릭을 포함한 기독교가 1%, 기타 종교가 4.3%라고 합니다. 
재미 있는 것은 일본의 인구 수가 1억 3천만 명 정도 되는데, 종교인구를 다 합쳐보니 1억 8천만 명이었다는 겁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한 사람이 두 개 이상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같은 조사에서 이런 것을 물은 적도 있답니다. 
“내세가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1958년에는 20% 정도만 있다고 믿었고, 2008년에는 38%, 2013년에는 40%였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내세가 있다는 것을 믿는 일본인들이 증가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본학자 중에는 일본이 꽤 종교성이 높은 나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온갖 미신과 수많은 종교가 존재하는 나라라는 겁니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그 통계가 더 높습니다. 
2019년에 나온 중앙일보에 의하면, 미국 사람은 10명 중에 9명이 신이 있다고 믿는답니다. 
적어도 영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고 합니다. 
굉장히 높은 비율입니다. 
심지어, 스스로 “나는 종교가 없다, 나는 무종교인이다”라고 말한 사람 중에 70% 정도가 신의 존재는 믿는다고 했답니다. 
“종교는 없지만 신은 믿는다” 
이런 이상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 사회학자 중에는 미국이 “영성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특정 종교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성이 충만한 사람들이 많은 시대라는 겁니다.

이것은 심지어,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성경의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할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의 비율이 생각보다 굉장히 높답니다. 
한 마디로, 신은 믿지만 하나님은 믿지 않는, 굉장히 영적이지만 신앙적이지 않은, 매우 종교적이지만 기독교적이지 않은, 교인들이 많다는 겁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한국의 자료는 따로 나와 있는 것이 없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사례와 크게 차이가 없을 겁니다. 
한국의 교인들도 영적이고 종교적이지만, 신앙적이지도 않고, 기독교적이지도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겁니다.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신은 믿는데 하나님은 믿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모든 사람에게는 종교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성경적인 용어로 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은 신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영원에 대한 본능적 충동이 있다는 겁니다. 
이 본능이 종교를 형성합니다. 

둘째. 종교성의 무력함 때문입니다. 

종교성은 신에 대한 갈망을 줄 뿐입니다. 참된 신, 곧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성을 따라 나름의 하나님, 나름의 영적 존재를 믿을 수는 있지만, 그뿐입니다. 참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신은 믿을 있지만, 하나님은 믿을 수 없는 현상은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이와 같은 종교성과 영성은 아무리 충만하다 할지라도 진짜 기독교가 아닙니다.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정서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행동이 포함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1. 하나님의 유일한 증언자, 예수 그리스도

그렇다면, 이 참된 믿음, 진짜 기독교는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봅시다. 31-3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33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31절을 보면, 반복되는 문장이 있습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입니다. 누구를 말합니까?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만물 위에 계십니다. 대조되는 인물도 나옵니다. “땅에서 난 이”입니다. 누구를 말합니까? 문맥으로 보면, 세례 요한을 말합니다. 그는 땅에서 난 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땅에 속한 것만을 말합니다. 그것이 그의 한계입니다.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높이는 겁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32절과 33절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증언하십니까? 친히 보고 들은 것, 곧 하늘에서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십니다. 그래서 그의 증언을 받아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를 의미하는 겁니다. 니고데모를 비롯한 유대인들은, 종교성과 영성은 충만했지만,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는 듯 했지만, 사실은 없었습니다. 이 종교성을 참된 신앙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의 증언을 받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믿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의 관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은 한 몸입니다. 성자 예수님을 본 자는 성부 하나님을 본 겁니다. 성자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성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겁니다. 성자 예수님의 증언을 받는 자는 성부 하나님의 진실함을 믿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성이 참된 신앙으로 변하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이 결정하신 유일한 방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을 때 비로소 진짜 믿음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자신을 알리시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치지 않은 기독교는 그냥 종교일 뿐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지 않은 믿음은 그저 영성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바로 종교요, 철학이요, 미신인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왜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알릴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두 가지로 답변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창세 전에 이미 이것을 결정하셨습니다. 즉. 성부 하나님의 계획과 성자 예수님의 순종,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적용 사역을 통하여 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결정 앞에서 사람이 다른 방도를 찾는 것 자체가 이미 불신앙입니다.

둘째, 이것이 실질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는데,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의 표현을 따르면, 모든 사람은 어둠에 속해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는 사람은 신을 상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신을 상상하고 신에 대한 탐구는 할 수 있지만, 신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신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을 볼 수 있는 입장에서, 신에 대한 갈망을 품고 신을 탐구하는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어스름하게 신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는 있지만, 그것이 참된 신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필요합니까? 빛이 필요합니다. 어둠을 거두고 참된 신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빛, 그 빛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빛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붙들고 어둠에서 끄집어내달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빛이신 예수님 외에 우리를 어둠에서 건져낼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입니다. 계속 반복이 될 텐데, 요한복음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겁니다. 좀더 세부적으로 적용하자면, 예수님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가장 좋은 예가 니고데모라고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종교성이 충만한 사람이었지만, 어둠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빛이신 예수님을 찾아갔고, 예수님과 대화를 하며 예수님을 알아갔고, 끝내 예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니고데모는 종교인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34-36절도 읽어봅시다.

 

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여기에서도 반복되는 문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 아들”입니다. 둘 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합니다. 왜냐하면 성부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한량 없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다 나옵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을 보내셨고, 또한 성령 하나님을 한량 없이 주십니다. 35절을 보면, 예수님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이 뭡니까? 36절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매우 선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보내신 이요, 하나님의 증언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받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겁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 어떤 종교도, 그 어떤 철학도, 그 어떤 미신도, 우리에게 참된 신앙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참된 기독교, 참된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당시 유대 사회를 생각해보십시오. 100% 종교사회였습니다. 종교성이 지금보다 충만하고, 영성이 지금보다 강력했던 사회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종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회가 어둠에 속해 있다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 있다고 하십니다. 니고데모를 비롯한 유대인들의 믿음이 가짜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종교성은 충만했지만, 믿음은 엉망이었던 겁니다.

두 가지 적용

1. 당신의 믿음을 점검하라.

이제 이 본문의 말씀을 우리 현실로 끌어옵시다. 우리 믿음은 어떻습니까? 우리 믿음은 정말 그리스도 중심적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을 믿고,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 믿음은 혹시 종교가 아닙니까? 혹시 영성이 아닙니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중대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특히 젊은 사람들 중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이 아닌, 기독교 문화에 젖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기독교 문화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문화에 익숙해진 것을 기독교 신앙으로 착각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겁니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닙니다. 그래서 찬양에도 익숙하고, 성경에도 익숙하고, 교회 용어에도 익숙합니다. 아마도 “하나님”이라는 말을 세상에서 가장 많이 듣고, 가장 하고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기독교 문화적입니다. 그런데, 정작 참된 믿음의 모습은 없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믿는데, 성경의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성경을 믿지 않습니다. 성경을 믿지 않기 때문에,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믿는다고 합니다. 이런 악순환이 기독교 문화에 젖어서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독교 문화에 빠진 종교인인지, 아니면 참된 믿음을 지닌 기독교인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잣대가 있습니다. 바로 죄에 대한 인식입니다. 종교성이나 영성은 죄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죄인이라는 인식이 부재합니다. 스스로 어둠이라는 인식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에 대한 갈망, 영적 존재에 대한 욕구, 영원에 대한 사모함을 자신의 믿음으로 여깁니다. 그런 것이 자기 마음에 있으니 자기에게 신앙이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도 좋고, 내세도 믿고, 천국도 가고 싶고, 교회 다니는 것도 괜찮으니 신앙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 회개와 순종이 없습니다. 죄에 대한 인식이 없으니, 어둠에 속해 있다는 인식이 없으니 빛으로 돌이켜 나오는 행동이 없다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커다란 문제요, 신자들의 가장 커다란 문제가 바로 이겁니다. 
빛이신 예수님께 전심으로 돌이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니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모릅니다.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죄에 대한 인식은 거의 없으면서, 그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간단한 동의를 가지고 신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교회가 그것을 인정해줍니다. 
한때 굉장히 인기를 끌었던 책이 있습니다. 

<긍정의 힘>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이 바로 전형적인 종교성과 영성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사람들이 믿는 대로 일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이 긍정의 힘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면, 그의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지니와 같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도 등장하기는 하는데, 죄에서 우리는 건져내시는 구원자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위로해주시는 예수님에 불과합니다.

긍정의 힘은, 긍정적인 마인드로 하나님을 믿고 자기가 원하는 바를 향해 열심히 살면,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복음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존재도 믿고, 성경 구절도 인용하고 있지만, 사실상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15년 전에 유행했고 그 후에 수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여전히 사람들 마음 속에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다른 포장지에 싸여서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가짜 믿음이라는 겁니다. 긍정의 힘과 같은 믿음에는, 회개라는 말이 없습니다. 순종이라는 말도 없습니다. 헌신이나 충성 같은 말도 없습니다. 이 가짜 믿음은, 탐욕을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바꿔서, 긍정해 버립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신뢰하면서 하루하루 충성되게 살아가는 신앙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인생을 통제하고 보증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는 삶을 추구하는 것을, 요즘 시대에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긍정해 버린다는 겁니다. 게으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과 같은 시대에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자기의 나태함을 포장해버립니다. 그렇게 자기 삶에 그 어떤 믿음의 흔적도 없으면서, 신에 대한 지적인 동의, 심정적인 공감 하나만으로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종교성이 경건을 대체해 버린 겁니다.

우리는 우리 믿음을 점검하는 일에 날카로워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가치관이 혼재되어 있고, 미혹과 시험이 많기 때문입니다. 종교성과 영성이 충만해지면서, 진짜 믿음, 진짜 경건이 무엇인지 찾기 힘들 지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믿음이 정말로 그리스도께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참된 신앙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2.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라

둘째,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얼마나 귀한지,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3:7-9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바울의 고백입니다. 
과거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고상하다는 말은 최상급 표현으로 최고의 지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최고의 지식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기 위해, 다른 것을 다 버리겠다고 고백합니다. 10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그의 몸부림을 계속됩니다. 우리도 바울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반드시 발견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만이 참된 믿음, 참된 생명을 얻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배우고, 믿을 수 있습니까?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방편입니다. 말씀과 기도와 성례, 그리고 그것을 도와주는 모든 경건 활동입니다. 우리가 경건활동에 열심을 내야 하는 이유, 우리가 모든 신앙활동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배우고, 믿기 위해, 신앙활동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 나이를 먹을수록 오히려 고집불통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에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기와 질투, 경쟁심과 미움과 강해지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에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오히려 탐욕과 정욕이 강해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에서 사려졌기 때문입니다. 나태와 교만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지는 이유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탐욕은 나눔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믿을수록 게으름은 열심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만날수록 교만은 겸손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어둠을 몰아내는 유일한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심령을 고치시는 유일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는 유일한 치료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정하신 이 구원의 계획, 성부 하나님은 보내시고, 성자 예수님은 나타나시고, 성령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 이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믿으십시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는 심판이 있다는 이 말씀을 믿으십시오. 종교성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리스도를 믿읍시다.



믿음과 증거

“믿음”과 “증거”는 성경에서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증거 위에 세워진 믿음이라는 구조로 연결됩니다. 특히 요한일서 5장은 이 관계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1️⃣ 성경이 말하는 믿음

히브리서 11:1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여기서 중요한 점은
👉 믿음은 막연한 확신이 아니라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실재로 받아들이는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증거  /  요한일서 5:9–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여기서 말하는 증거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외적 증거 

1. 예수님의 역사적 사건 (십자가, 부활)
2. 물과 피의 증언 (요한일서 5장)
3.  사도들의 증언

내적 증거

1. 성령의 증언
2. 마음 안의 확신
3.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오는 생명의 감각

믿음과 증거의 구조 

하나님의 객관적 증거 ↓ 성령의 내적 조명 ↓ 믿음의 수용 ↓ 내 안에 확신(증거)이 형성됨

    증거가 먼저 있고
    성령이 그것을 깨닫게 하며
    믿음이 그 증거를 받아들일 때
    그 증거가 “내 안의 확신”이 됩니다.

왜 증거가 있어도 믿지 않을까? 

사람          증거를 대하는 태도 결과
      믿는 자                신뢰로 수용                             내적 증거 형성
    믿지 않는 자                   불신으로 거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듦 (요한일서 5장 표현)

핵심은 증거의 부족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성입니다. 

생활신앙 적용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증거에 대한 신뢰입니다.
   감정이 흔들려도 증거는 변하지 않습니다.
   내 안의 확신이 약해질 때는
 → 감정을 붙들지 말고
 → 다시 “하나님이 무엇을 증거하셨는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믿음 vs 감정 vs 성령의 내적 증거 

성경적 기준 구절

    요한일서 5장
    로마서 8장 16절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 (Faith)

정의 :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한 의지적 신뢰

근거 :
말씀(객관적 진리)

특징 :     

     상황과 상관없이 지속 가능 
     선택과 결단의 요소 포함

핵심 :  믿음은 “느낌”이 아니라 “붙드는 것”입니다. 

감정 (Emotion)

정의:
상황·몸 상태·환경에 의해 변하는 심리적 반응

근거:
외부 자극 + 내부 컨디션

특징:

  • 매우 가변적

  • 피로, 스트레스, 죄책감에 영향 받음

  • 영적 상태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

핵심 : 감정은 신호일 수는 있지만 기준은 아닙니다.  

성령의 내적 증거 (Inner Witness of the Spirit)

근거 구절:
로마서 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정의:
성령께서 마음 깊은 곳에 주시는 존재적 확증

특징:

  •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깊은 평안

  • 복음 중심으로 우리를 이끎

  • 죄를 합리화하지 않음

  •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함

📌 핵심:

성령의 증거는 감정의 고조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의 안정감입니다.


🔎 세 가지를 한눈에 비교

구분 믿음 감정 성령의 내적 증거
출처 말씀 환경/몸 성령
변동성 비교적 안정 매우 가변적 깊고 지속적
기준성 기준이 됨 기준이 될 수 없음 믿음을 강화
방향 말씀 붙듦 흔들림 말씀으로 이끎

2️⃣ 왜 확신이 약해질 때가 있는가?

이제 구조적으로 보겠습니다.

🧩 1단계: 감정을 확신의 기준으로 삼을 때

“오늘 기도할 때 느낌이 없네…”
→ 감정 ↓
→ 믿음도 ↓ 라고 착각

📌 문제: 감정을 기준으로 삼음


🧩 2단계: 죄책감과 자기중심 해석

실수 →
“나는 진짜 구원받은 사람일까?”

여기서 복음이 아니라 자기 상태를 기준으로 판단


🧩 3단계: 말씀에서 멀어질 때

성령의 내적 증거는 말씀을 통해 강해집니다.
말씀 접촉 ↓ → 믿음 ↓ → 확신 ↓


🧩 4단계: 영적 전쟁

요한일서 5장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말합니다.

확신은 공격 대상입니다.
사탄은 죄보다 “정체성 의심”을 먼저 흔듭니다.

결정적 정리

확신은 이렇게 형성됩니다:

말씀 → 믿음 → 성령의 내적 증거 → 안정

확신이 약해질 때는 이렇게 됩니다:

상황 → 감정 → 자기해석 → 의심

가장 중요한 한 문장

믿음은 감정을 이끌어야지, 감정이 믿음을 이끌어서는 안 됩니다.









1. 믿는 자와 자기 안의 증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 →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믿음을 가진 사람.

  •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 → 믿는 사람은 마음속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과 내적 증거를 경험합니다.

    • 예: 죄 사함의 확신, 하나님의 사랑과 평안, 신앙의 확실한 경험

  • 즉, 믿음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내적 체험과 확신으로 나타납니다.


2. 믿지 않는 자와 하나님의 거짓말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나니”

  •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를 믿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증거를 부정하는 상태가 됩니다.

  • 핵심: 믿음의 부재는 단순한 불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부정하는 행위와 연결됩니다.


3. 하나님이 증거하신 증거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아들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 예: 세례 때의 하늘 소리, 성령의 임재, 예수의 기적과 말씀

  •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은 이 증거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 즉, 불신은 하나님의 명백한 증거를 거부하는 선택입니다.


💡 정리

  1. 믿는 자 → 마음속에 내적 증거와 확신이 있음

  2. 믿지 않는 자 →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여겨지며, 하나님의 증거를 부정함

  3. 믿음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내적 확신


믿는 자 vs 믿지 않는 자

항목 믿는 자 믿지 않는 자
대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
내적 상태 자기 안에 증거와 확신이 있음 마음속에 증거가 없음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받아들임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듦
핵심 이유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을 믿음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을 믿지 않음
결과 믿음 → 내적 확신 → 평안과 화평 불신 → 하나님의 진리 부정 → 심령의 공허

💡 핵심 포인트

  1. 믿는 자는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내적 체험과 확신이 나타납니다.

  2.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증거하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상태가 됩니다.

  3. 믿음과 불신은 단순히 외적 행위가 아니라 마음속 내적 증거의 수용 여부로 판별됩니다.





말씀하신 구절은 요한일서 5장 10절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조금 더 풀어서 이해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핵심 구조

  1.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
    →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

    • 믿음의 사람은 내면에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체험하고 확인한다는 의미입니다.

    • 즉, 믿음은 외적 증거뿐 아니라 내적 확신을 동반합니다.

  2.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
    →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

    •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주신 증거(성육신, 사역, 십자가, 부활 등)를 믿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 이는 하나님의 진리를 부정하는 행위와 동일하게 여겨집니다.


2. 신학적 의미

  • 믿음과 불신의 내적 증거와 결과를 대비시키는 구절입니다.

  • 증거는 객관적 사실(예: 예수의 부활)과 내적 체험(성령의 확신) 두 가지가 결합됩니다.

  • 따라서 믿음 없는 자는 하나님이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스스로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존재로 만드는 셈입니다.


3. 생활 적용

  • 자신 안의 믿음의 증거를 돌아보기: 성령의 인도, 마음의 평화, 말씀에 대한 확신

  •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강요보다는 증거 제시: 삶과 말씀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보여주는 것

  • 믿음의 확신은 단순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 체험되는 증거로 확인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삶의 증거 시각화

1️⃣ 내적 증거 (마음속에서 느끼는 변화)

구분 내용 실제 예시
평안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느끼는 화평 시험 앞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음
성령의 확신 죄 용서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 기도 중 죄사함과 위로 체험
변화된 생각 가치관과 선택이 이전과 달라짐 이기적 선택보다 사랑과 섬김을 우선

2️⃣ 외적 증거 (삶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증거)

구분 내용 실제 예시
행위 믿음에서 나오는 실제 행동 성실한 직장생활, 이웃 섬김
관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는 영향 가족, 친구에게 긍정적 변화 나타남
환경 속 평안 세상의 시련 속에서도 안정감 유지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태도

💡 핵심 포인트:

  • 내적 증거는 마음과 성령이 확인해 주는 증거 → ‘믿음의 확신’

  • 외적 증거는 삶과 행동에서 나타나는 증거 → ‘믿음의 실천’

  •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내적 증거가 강할수록 외적 증거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외적 증거가 강화되면 내적 확신도 깊어진다.







2월 16일(월) 요한일서 5: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증거와 사람들의 증거(9절)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We accept man's testimony, but God's testimony is greater because it is the testimony of God, which he has given about his Son.


사람들의 증거 특징

1.  
경험에 근거
2.  
관찰과 기억에 의존
3.  
제한적이고 오류 가능
4.  
시간과 상황의 영향을 받음

요한일서 5:9 /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우리는 일상에서 사람의 증거를 쉽게 받아들입니다.
법정, 뉴스, 역사 기록, 심지어 교회 간증까지  모두 사람의 증거입니다.  

장점 

1. 
객관적 자료 제공
2. 공동체적 확인 가능
3. 신앙 입문의 통로가 될 수 있음  

한계  

1.  
왜곡될 수 있음
2.  감정이나 이해관계의 영향
3.  영적 진리를 완전히 설명하지 못함

하나님의 증거 

요한일서 5:9–10  /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무엇을 증거하는가?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
2.  하나님의 아들이심
3.  생명이 그 아들 안에 있음

특징 

하나님이 친히 하신 증거

1. 
객관적 사건 + 내적 확증
2.  거짓이 없음
3.  영원한 진리

요한일서 5장에서는 세 가지 증거를 말합니다.

1. 물
2. 피
3. 성령

특히 성령은 믿는 자 안에서 증거하십니다.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요일 5:10)

결정적 차이

구분        사람들의 증거           하나님의 증거
     출처                 인간                 하나님
     범위               제한적                 절대적
오류 가능성                 있음                  없음
 작용 방식             외적 설득               내적 확증
    결과                 정보                  생명

사람의 증거는 귀로 듣는 것
하나님의 증거는 마음에 새겨지는 것

왜 이것이 중요한가?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정보 거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부정하는 문제입니다.

목회적 적용

1. 
사람의 논증만으로는 믿음이 완성되지 않는다.
2. 설교는 정보 전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증거를 드러내는 통로다.
3. 성령의 내적 증거 없이는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 
4. 회심은 논리의 결과라기보다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사건이다.


사람들의 증거

사람의 증거는 일상에서도 중요합니다. 
  법정의 증인 
  역사적 기록  
  사도의 증언 
  교회의 고백

성경에서도 사도들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증언했습니다
(요 19:35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특징 : 
  경험에 근거 
  제한적 지식 
  오류 가능성 존재  
  설득력은 있으나 절대적이지 않음

사람의 증거는 “믿을 만한 근거”가 되지만, 궁극적 권위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증거

요한일서 5: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무엇일까요?

(1) 성령의 증거

  • 성령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적으로 확증하심

(2) 물과 피의 증거

  • 세례(물)

  • 십자가(피)

  • 역사 속 사건을 통한 객관적 증거

(3) 하늘의 증거  

하나님 아버지의 선언
(예 : 예수 세례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더 크다”는 의미

왜 하나님의 증거가 더 클까요?

사람의 증거 하나님의 증거
외부에서 들음 마음 안에서 확증
논리로 설득 존재로 확신
흔들릴 수 있음 흔들리지 않음

사람의 증거는 귀에 들리고
하나님의 증거는 영혼에 새겨집니다.

신앙에 적용하면

처음에는 사람의 증거로 시작합니다
(설교, 부모의 신앙, 성경공부)

그러나 믿음이 깊어지는 순간은
“하나님이 내 안에서 증거하실 때”입니다.

요한일서 5: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이것이 생활신앙의 핵심입니다.
신앙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안의 확신이 되는 순간입니다.   

 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증거를 거부할까?

 배경 : “하나님이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셨다” (요한일서 5:9–10)

요한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믿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라고요.

그렇다면 왜 거부할까요?

① 마음의 주권 문제

믿음은 단순한 정보 수용이 아니라
삶의 주권을 넘기는 문제입니다.

예수를 받아들이면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이 중심이 됩니다. 
  많은 사람은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주권을 내려놓고 싶지 않아서 거부합니다.

② 영적 눈의 가려짐

요한일서는 반복해서 “세상”과 “하나님께로 난 자”를 대비합니다.

영적 분별은 중립 상태가 아닙니다.
사람은 이미 어떤 방향성 안에 서 있습니다.

③ 죄에 대한 불편함

하나님의 증거는 결국
예수의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9장에서
예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옵니다.

그 증거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위해 값을 치르셨다”는 선언입니다.

죄를 인정하기 싫은 마음은
그 증거를 불편해합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분별하는 방법 
요한일서는 세 가지 증거를 말합니다.
1. 물,  2. 피,  3. 성령

① 성경과 일치하는가?

성령의 증거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높입니다.

요한복음 16장 
성령은 “자기 말을 하지 않고” 예수를 증언합니다.  
  예수를 낮추는 음성은 성령이 아닙니다.  

② 복음의 중심을 향하는가?

성령의 증거는 
  십자가를 선명하게 하고 
  은혜를 크게 만들고 
  나를 낮추고  
  예수를 높입니다.   

③ 열매가 있는가?

갈라디아서 5장

성령의 역사는 감정이 아니라
성품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사랑, 온유, 절제…

시간이 지나도 남는가?
이것이 중요한 분별 기준입니다.   

성령의 내적 증거 vs 감정의 차이

구분 성령의 증거 감정
중심 예수
방향 순종 기분
지속성 안정적 파도처럼 변함
결과 겸손 흥분 또는 낙심

핵심 차이

감정은 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증거는 깊습니다.

감정은 “뜨겁다”
성령은 “확신한다”

감정은 상황에 좌우되지만
성령의 증거는
상황이 무너져도 남습니다.    

목회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아주 실제적으로 정리해보면 

확신을 감정에 두지 않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은혜 받았다”보다 “말씀이 나를 바꾸고 있는가”를 점검하게 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성도에게

의심은 곧 불신앙이 아닙니다.

요한일서는 말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로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확신은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객관적 증거 위에 세워집니다.  

설교의 방향

설교는 단순히 감동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증거를 선명히 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1. 예수의 십자가
2. 부활
3. 성령의 내적 역사

이 세 축이 분명하면 성도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하나님의 증거를 거부하는 이유는 빛이 약해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증거를 분별하는 기준은 “예수가 더 커지는가?”입니다.


2월 14일(토) 요한일서 5:7-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증거하는 성령(5:7)


  •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 For there are three that testify:
  • the Spirit,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 three are in agree men.

  • 증거(證據) : 증거 증, 의거할 거
    어떤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  

    성령의 4가지 사역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한복음 16:13)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진리 가운데로 인도받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있다가 빛 가운데로 인도받는 것입니다. 현재 빛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더 밝은 빛으로 인도받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크고 중요한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온 마음을 다해서 그것을 받아들일 때마다 성령의 큰 역사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성령)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요한복음 16:13)
    성령께서는 자기 마음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예수님과 함께 한뜻으로 역사하시고 한마음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한복음 16:13)
    성령은 우리에게 장래 일, 즉 예언을 깨닫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성령을 체험했다는 그리스도인들이 장래 일을 알려주는 예언에 무지하고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성령을 체험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진리를 깨닫고 진리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의의 길로 인도받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예언의 의미를 깨닫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베드로후서 1: 21).
    예언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언은 성령을 받아야만 이해할 수 있고 올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 삶 속에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있어야만 예언을 하나님의 뜻대로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은 예수께서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거룩한 영이시다.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동안에 제자들을 부르셨고 그들과 함께 동거동락하며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는 그 제자들이 모두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셨을 떼 흩어졌던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깨우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열 명의 제자들은 메시아 신앙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마라는 제자는 열 명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마침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열 명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의 손의 못자국과 그 옆구리의 창자국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어느 날 열 한명의 제자들이 모여 있던 곳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네 손을 내밀어 네 손과 옆구리에 넣어보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오늘의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만날 수 있고 알 수 있을까요?
    성령은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증거하는 영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읽고 또는 기도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증거하는 성령은 단순히 어떤 정보를 전달하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믿게 하며 확신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누구를 증거하시는가?

     
    “그가 와서 나를 증거하실 것이라” (요 15:26)

    성령의 중심 사역은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1. 예수가 누구신지 깨닫게 하시고
    2.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시고
    3.  예수 안에 생명이 있음을 확신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그리스도를 높이십니다.  

    무엇을 증거하시는가? 

    1.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요일 4:15)

    믿음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성령의 증거로 마음에 새겨진 확신입니다.  

    2.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롬 8:16)

    이것이 내면의 확신입니다.
    상황이 흔들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깊은 평안.

    3.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8)

    성령은

    1.  죄를 깨닫게 하시고
    2. 예수의 의를 보게 하시고
    3.  세상의 결국을 알게 하십니다.  

    증거하는 방식은?

    성령의 증거는 보통 이렇게 나타납니다:. 

    1.  말씀을 읽을 때 갑자기 깨달아짐
    2.  기도 중에 마음이 열림
    3.  예수님이 실제로 느껴짐
    4. 죄에 대한 민감함
    5.  복음을 말하고 싶은 마음

    큰 감정일 수도 있고,
    아주 조용한 내적 확신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질문  /  성령의 증거가 없으면 믿을 수 없는가?

    믿음 자체가 이미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것 자체가 성령의 증거입니다. (고전 12:3)  

    정리

    증거하는 성령 = 예수를 드러내고,  우리 안에 확신을 심고,  복음을 살아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

    “증거하는 성령”을 요한일서 5장과 연결해서

    요한일서 5장은 사실상 ‘증거’라는 단어가 핵심 주제입니다. 

    믿음과 출생 – 성령의 시작되는 증거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여기서 중요한 점은 믿음이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를 믿는 그 믿음 자체가 성령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결단 이전에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랑과 계명 – 보이는 증거 (5:2–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여기서 요한은 믿음 → 사랑 → 순종 이 흐름을 말합니다.

    성령의 증거는 단지 마음의 감동이 아니라 삶의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1. 
     형제를 사랑하려는 마음
    2.  말씀을 따르려는 내적 움직임
    3. 죄에 대한 부담감

    이것이 성령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말합니다.
    “그의 계명은 무겁지 않다.”

    왜 무겁지 않을까요?

    사랑이 동기가 되면
    순종은 짐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열매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 – 승리의 증거 (5:4–5)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 없이 사는 체계, 가치관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다른 가치로 살게 하십니다.

    1.  세상이 말하는 성공보다
    2. 세상이 말하는 쾌락보다
    3.  세상이 말하는 인정보다 예수를 더 귀하게 여기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증거이며 승리의 증거입니다. 

    물과 피와 성령 – 객관적 증거 (5:6–8)

    이 부분이 가장 핵심입니다.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요한은 세 가지 증거를 말합니다. 

    1.  물  /  예수의 세례 – 공적 사역의 시작
    2.  피  /  십자가 – 구속의 완성
    3. 성령  /  그 사건이 참되다고 지금도 증거하시는 분

    물과 피는 과거 사건입니다.
    성령은 현재의 증거자입니다. 

    십자가가 단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내게 의미가 되는 이유는
    성령이 그것을 현재형으로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증거 (5: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이 구절이 결정적입니다.

    성령의 증거는
    외부의 표적이 아니라
    내면의 확신입니다.

    1.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2. 예수는 나의 구주다
    3.  십자가는 나를 위한 것이다

    이 확신은 논리만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성령의 내적 증거입니다.  ㅋ

    정리하면  요한일서 5장에서 말하는 “증거하는 성령”은

    1. 예수를 믿게 하시고
    2. 사랑하게 하시고
    3.  순종하게 하시고
    4.  세상을 이기게 하시고
    5.  내 안에 확신을 주시는 분입니다

    중요한 적용 질문

    • 나는 예수를 믿는가? → 이미 성령의 역사입니다.

    • 계명이 무겁게 느껴지는가? → 사랑의 회복이 필요한 신호일 수 있습니다.

    • 확신이 흔들리는가? → 감정이 아니라 성령의 증거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1. 성령은 누구이신가?

    * 성령은 하나님께서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시는 보혜사(Helper, Advocate, Counselor, parakletos)로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속에 계시면서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다(14:16-17,26)

    * 성령님은 우리 신앙생활의 시작부터 끝까지 인도하신다.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를 책망하셔서 회개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게 하시며,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며 행하게 하신다(16:7-14, 고전12:3). 또한 은사를 주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다(고전12장, 갈5:22-23).

    *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신가?(롬8:5-9, 고전3:16).

    2. 예수, 그는 누구인가?

    *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셨다 (5:17-18, 8:54, 19:7).

    * 그러므로 예수님을 4대 성인의 한 분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 믿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든지(1:34, 1:49, 20:28), 아니면 하나님을 자칭하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며 거절해야 한다(10:19-21, 막3:21).

    3. 그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심을 증언하는 증거들

    *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곧 성육신하신 하나님(God in flesh, 1:14)이심을

    1) 구약성경이 예언하였고(5:39,46, 사7:14, 9:6, 눅24:44-45),

    2) 신약성경이 증거하고(1장),

    3) 그분 자신이 말씀하셨고(8:54, 막14:61-62, 눅22:70),

    4)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들이 증거하며(5:36, 10:25),

    5) 그의 아버지께서 증거하셨고(5:37, 마3:17, 요일5:9-12),

    6) 부활을 통해 확증되었고(12:16, 롬1:4),

    7) 증인들이 증언하였고(20:31, 요일1:1-3),

    8) 또한 성령이 증거하신다(15:26, 행5:32).

    * 예수님은 창조 이후 지구상에 태어났던 모든 사람들과 구별된 단 한 분이시다. 그는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시다.

    * 성령의 주된 사역은 예수께서 누구이신지를 증언하는 것이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4. 우리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증언한다.

    *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우리는 또한 성령을 통해 권능을 받고 예수의 증인의 삶을 살게 된다(행1:8,5:32). 성령을 따라가며 삶과 입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며 살자.

    * 나에게 예수는 누구이신가? 미루지 말고 “영접하든지, 거절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하라.

    * 영접한 자들은 그를 주님으로 모시고 살면서 그를 증거하라. 



    2월 13일(금) 요한일서 5: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물과 피로 임하신 예수(6절)

    이는 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로만 아니요 로 임하셨고.
    This is the one who came by water and blood--Jesus Christ. He did not come by water only, but by water and blood. And it is the Spirit who testifies, because the Spirit is the truth.

    물과 피로 임하신 예수(Jesus came by water and blood)

    이 말씀은 초대교회 당시의 잘못된 예수 이해를 바로잡는 아주 중요한 선언입니다. 


    “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의 세례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심 (공적 사역의 시작)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선언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심

    “물”은 예수님의 세례 사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 공식적으로 드러나신 순간을 가리킵니다. 

    “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부분의 해석은 이것을 예수님의 세례로 봅니다.

    •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 그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공적 사역의 시작이었습니다.
    즉, 물은 사역의 시작과 메시아로서의 공식적 선포를 의미합니다.  

    “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십자가의 죽음

    • 실제 육체로 고난 받으심

    • 실제 피를 흘리심

    • 창에 찔렸을 때 “피와 물”이 나옴 (요 19:34)

    “피”는 예수님의 실제적인 죽음, 곧 속죄를 위한 희생을 의미합니다. 

     “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피”는 분명하게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 예수님은 실제로 피를 흘리셨습니다.

    • 그 피는 속죄의 피입니다.

    •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왜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라고 강조하는가?

    당시 어떤 이들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 예수는 단지 인간이었고

    • 그리스도의 영이 세례 때 잠시 임했다가

    • 십자가 전에 떠났다고

    즉, 십자가에서 죽은 분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한은 단호히 말합니다. 
    아니다.
    예수는 세례 때만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까지 동일한 그리스도이시다.

    구원은 세례의 영광만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까지 포함한다는 선언입니다. 

    왜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라고 강조하는가?

    당시에는 이런 잘못된 사상이 있었습니다.

    •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 십자가에서는 단지 인간으로 죽었다는 주장

    요한은 이것을 강하게 반박합니다.

    예수님은 세례 때도 그리스도였고 십자가에서도 그리스도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참 하나님, 참 사람이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

    “물과 피로 임하신 예수”는 말합니다.

    • 예수는 역사적 실제 인물이시다

    • 예수는 실제 육체로 고난받으셨다

    • 구원은 관념이 아니라 피 흘림을 통한 실제 사건이다

    그리고 더 깊은 의미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세례의 예수(시작의 예수)만 좋아하고 
    십자가의 예수(고난의 예수)는 피하려 하지 않는가?

    그러나 참된 믿음은  “영광의 예수”와 “십자가의 예수”를 함께 붙드는 것입니다.  

    신학적 의미 정리

    “물과 피”는 이렇게 연결됩니다.

           세례        십자가
      사역의 시작     구원의 완성
       공적 선언     속죄의 성취
    정체성의 계시      사랑의 절정

    즉, 예수님은 단지 가르침을 준 분이 아니라
    실제로 죽으심으로 구원을 이루신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 

    1. 우리의 믿음은 역사적 사건 위에 서 있습니다.
    2. 구원은 상징이 아니라 실제 사건입니다.
    3. 하나님 사랑은 말이 아니라 피로 증명되었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물과 피로 증명된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과 피와 성령이 증언한다”의 의미(요일 5:6–8)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성령은 증언하시는 이시니…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핵심은 “예수는 실제로 오셨고, 실제로 죽으셨다”는 증언입니다. 

    • 예수님의 세례 (공생애의 시작)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정체성의 선언)

    • 하나님 나라 사역의 출발

    •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 죄 사함과 대속

    • 사랑의 완성

    성령

    • 그 모든 것이 진리임을 지금도 증언하시는 분

    • 믿는 자 안에서 내적 확증을 주심

    즉, 예수님의 사역 전체(시작–완성)를 하나님이 친히 증언하신다는 선언입니다.  

    요한복음 19장의 “물과 피”와의 연결

     
    “군인 중 하나가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 19:34)

    요한은 이 장면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그리고 바로 말합니다. 

    “이는 친히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의 증언은 참이라.”

    왜 이렇게 강조할까요? 
    이것은 단순한 의학적 현상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9장의 물과 피는 십자가가 구원의 완성임을 보여주는 표징입니다. 

    • 피 → 죄 사함 (속죄)

    • 물 → 정결/새 생명

    요한일서의 “물과 피”는 바로 이 사건을 신학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증거이며
    하나님은 그 사건을 성령으로 지금도 증언하십니다.

    성찬과 세례와의 관계

    교회는 초대시대부터 이 “물과 피”를 성례와 연결해 이해해왔습니다.

    세례 (물)

    • 옛 사람의 죽음

    • 새 생명의 시작

    • 그리스도와 연합

    성찬 (피)

    • 십자가의 은혜에 참여

    • 용서의 확증

    • 그 사랑을 먹고 사는 삶

    즉, 

    십자가 사건 교회 안에서의 적용
           물                   세례
           피                  성찬
         성령    오늘 우리의 마음 안에서의 확증

    성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지금 여기서 나의 것이 되는 통로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생활신앙”에 적용하면?

    여기서 아주 중요합니다.

    물과 피는 교리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삶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물의 생활신앙적 의미

    • 날마다 씻김 받는 삶

    • 회개와 정결

    • 자아를 내려놓는 시작

    • “나는 이미 새 생명을 받은 사람”이라는 정체성

    생활 속 적용

    • 감정이 아니라 정체성으로 사는 것

    • 넘어질 때마다 다시 씻김을 붙드는 것 

    피의 생활신앙적 의미
    • 값 지불된 사랑

    • 나도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삶

    • 용서하는 삶

    • 사랑을 행동으로 증명하는 삶

    생활 속 적용

    • 관계 속에서 흘리는 작은 십자가

    • 손해 보더라도 사랑을 선택하는 것 

    성령의 생활신앙적 의미

    • 이 모든 것이 “이론”이 아니라 실제가 되게 하심

    • 사랑이 흘러나오게 하시는 내적 능력

    • 계명이 무겁지 않게 되는 이유  

    정리하면

    물 = 새 출발
    피 = 사랑의 대가
    성령 = 그 사랑이 내 안에서 실제가 되게 하심 

    그래서 요한일서 5장의 흐름은 이렇게 됩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한다

    2. 그의 계명을 지킨다

    3. 그것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

    4.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이다

    5. 그리고 그것은 물과 피와 성령이 증언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생활신앙으로 한 문장으로 말하면 

    “나는 이미 씻김 받고, 사랑받았고,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오늘도 사랑을 선택한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무엇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성령과 물과 피가 무엇인지 살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무엇인가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전제 또는 자격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가장 먼저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이고, 두 번째는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3절)이라고 말합니다.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리스도(Χριστός)’는 구약의 ‘메시야’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며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말합니다. 이 말이 중요한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가 그토록 고대하고 기다렸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다’라고 선언한 것이죠. 요한 역시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이 중요할까요? 당시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들을 출교 시키기로 결의했습니다. 즉 사회적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많은 희생이 따랐습니다.

    • 요한복음 9: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죽은 나사로를 살리려 갈 때 마르다가 나와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 요한복음 11: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마치면서 이 글의 목적이 예수가 하나님의 이심을 믿고, 그를 믿는 자들은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요 20:31) 베드로는 다윗 왕이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아 그리스도가 썩지 않고 부활할 것을 미리 보았다고 말합니다.(행 2:31) 베드로는 곧바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막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 2:36)

    •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고 선언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혁명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들입니다.

    요한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곧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1절)라고 선언합니다. 2절에서는 이러한 고백이 결국 하나님을 사랑함과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는 그러한 고백이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4절) 요한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며, 구약의 선지자들이 기대하고 예언했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은 죄에 대한 죽음이 전제되며, 그것을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며, 또한 그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믿음을 우리를 그리스도께 접착(接着)시킵니다.

    요한일서 전반에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을 따르는 삶을 말합니다. 이 부분은 어제 묵상했던 요한일서 4:19-21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 증언자, 성령과 물과 피

    요한일서의 가장 난해한 본문을 대할 차례입니다. 아직도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정리가 된 본문이기도 합니다. 6-8절에 기록된 물과 피와 성령은 대체 무엇을 말할까요? 성령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성령을 받은 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게 된다는 뜻이니까요. 피 역시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피는 곧 생명이며,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통해 속죄를 말합니다. 이 부분은 수요일 묵상본문인 요한일서 4:9-12로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구절입니다. 문제는 ‘물’입니다.

    종개혁자 장 칼뱅은 피와 성령을 성만찬의 은유로 풀려고 시도했지만 ‘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난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신학자들을 역시 본문의 해석을 어려워합니다. 저 또한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성경신학자들은 물의 문제를 세례요한의 물세례와 연관시켜 죄 사함의 문제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저 또한 그 해석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에서 물은 몇 가지 상징을 갖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생명의 시작이 물이라는 점입니다. 물과 생명의 연관성은 굳이 성경이 아니더라도 일반신화나 문학 속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상징입니다. 그러나 물이 생명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죽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셋째날 하나님은 뭍을 물 속에서 불러내십니다. 이 사건은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를 갖습니다. 물 속에 마른 땅이 있다는 표현은 후에 출애굽 당시 홍해 사건과 여호수아의 요단강 사건을 통해 드러납니다. 즉 물 속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생명을 주기 위해서는 물속에서 건져내야 합니다. 마치 모세가 물에서 건짐을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의미에서 물은 곧 죽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다음의 구절들을 유의하여 읽어 봅시다.

    • 로마서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 골로새서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 [고전 10:1-4]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매우 독특하게 물은 죽음을 뜻하는데, ‘물속에 잠김’을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 받음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물은 곧 죽음이며,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벗어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물의 의미를 그리스도와 함께함으로 받은 것이죠. 그렇다면 물과 피는 동일한 맥락 속에서 죄사함의 문제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물세례를 죄사함의 세례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 눅 3:3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 행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 행 22: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물을 통해 죄사함의 전통은 초대교회 안에 세례식 의식을 통해 전수됩니다. 초대교회 상황을 설명한 히폴리투스(Hippolytus, 170? ~ 235,8,13)의 <사도전승>에 나타난 세례식 장면의 일부입니다.

    [감독자는 그들에게 안수하면서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 “이들은 성령의 재생의 목욕을 통하여 죄사함을 얻기에 합당한 사람들이 되게 하신 주 하나님, 당신의 은총을 이들에게 내려 주시어 당신의 뜻에 따라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영광이 아버지 당신께와 성령과 함께 성자께 성 교회 안에서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 지어다.”]

    이제 중대한 결론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결국 요한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죄사함을 받으며, 그리스도가 사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따르는 것입니다.



    물과 피와 성령, 참된 사람의 탄생

    물과 피와 성령이 만나는 자리에서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사람이 된다.

    요한 사도는 깊은 통찰력으로 물과 피와 성령이 증언하는 신비로운 진리를 전한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이 말씀은 언뜻 보면 간결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바다와 같이 깊고 넓다. 물은 회개의 물이며, 피는 생명의 피요, 성령은 이 모든 것의 진리 되시는 분이다. 그리고 이 셋은 완전한 하나다.

    물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떠올려야 한다. 광야에서 울려 퍼진 그의 목소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이 외침은 강력했고, 거침이 없었다. 수많은 이들이 요단강으로 나아와 죄를 씻는 세례를 받았다. 물은 단지 육체를 씻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더러움을 씻는 것이었다. 이 물은 민수기의 붉은 암송아지 제사를 떠올리게 한다. 흐미 없고 온전한 암송아지를 태워 그 재를 물에 섞어 만든 속죄수(水)는 죄의 부정을 씻는 물이었다. 
    히브리인들은 이를 ‘타호르(טהור)’라고 불렀다. 곧, 하나님의 앞에 서기 위한 정결이었다.

    하지만 물만으로는 부족했다. 죄를 씻었어도 생명이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기에, 반드시 피가 필요했다. 요한복음의 기록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군인이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자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이 피는 곧 생명이었다. 아담이 깊이 잠들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듯, 예수님은 피와 물을 흘리심으로써 신부된 교회를 낳으셨다. 이것은 창조 때의 사건을 다시 재현하는 장엄한 순간이었다. 이제 물과 피가 하나가 되어 새로운 아담, 곧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선포한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을 연결하고 완성하는 이가 바로 성령님이시다. 물로 씻어도, 피로 거듭나도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그대로다. 성령은 바람처럼 자유롭고 신비롭게 운행하시는 분이다. 히브리어로 아담(אדם)이란 단어는 ‘안개(אד, 에드)’와 ‘피(דם, 담)’ 그리고 사람(אדם, 아담)을 뜻한다. 여기서 에드(안개)는 바로 성령을 상징한다. 성령은 물과 피를 하나로 엮으며 진정한 아담, 곧 참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 아담이 지향해야 할 본래의 모습이다.

    이 깊은 신비는 그저 성경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삶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더러움을 마주하고, 죄책감에 몸부림친다. 이때 물의 정결함, 피의 생명, 성령의 진리가 우리 안에서 함께 일하심을 경험해야 한다. 다윗이 시편에서 고백한 것처럼, 죄의 허물이 가려지고 씻김을 받은 자가 복 있는 자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회개의 자리로 인도하시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으시며, 물과 피의 거룩한 연합 안으로 초대하신다.

    결국, 우리는 물과 피와 성령의 자리에서 진정한 아담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놀라운 신비를 깨닫는 순간, 인간의 삶은 더 이상 죄와 허무에 묶여 있지 않다. 물과 피와 성령이 하나 되어 흘러가는 그 길 위에,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야 할 인생이 놓여 있다. 이 깊은 연합 안에서만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 된다.

    그 길이 바로 생명이며, 진리이며,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טָהוֹר Storng number2889
    1.  순수한.  2.  깨끗한.  3. 혼합되지 않은  
    Pronunciation [ ṭâhôwr ]  
    Etymology / 2891에서 유래
     Old Testament  / 95회 사용 
    관련 성경 /  정결한(창 7:2, 8:20, 출37:29, 합1:13), 부정하여지지 아니한(레11:36), 깨끗한(레7:19, 대하13:11, 사66:20), 정한(레10:10, 민19:19, 겔22:26), 순결한(레24:4,6, 시12:6), 성결한(대하30:17), 맑은(겔36:25). [명] 순금(출25:11, 대하3:4, 대상28:17), 정결(민9:13).



    2월 12일(목) 요한일서 5:4-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상을 이기는 믿음(4절)

  •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 for everyone born of God overcomes the world. This is the victory that has overcome the world, even our faith.
  • Who is it that overcomes the world? Only he who believes that Jesus is the Son of God.  


  • “세상”은 무엇을 의미할까?

    성경에서 말하는 세상은 단순히 자연이나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괜찮다고 말하는 가치 체계를 의미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사고 
    성공과 소유가 인생의 기준이라는 문화 
    죄를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을 밀어내는 흐름 
    이것이 우리가 매일 부딪히는 “세상”입니다.  

    왜 믿음이 승리일까?

    요한은 말합니다.
    이기는 방법은 노력이나 의지가 아니라 ‘믿음’이다.

    여기서 믿음은 단순한 긍정이나 낙관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
     예수의 십자가가 이미 승리했다는 것을 붙드는 것

    세상은 말합니다.
    “지금 네가 느끼는 게 전부야.”

    믿음은 말합니다.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더 진짜다.”

    믿음은 어떻게 세상을 이길까?

     상황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신뢰할 때
     감정보다 진리를 붙들 때
     넘어져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때

    믿음은 문제를 없애는 힘이 아니라,
    문제 속에서도 하나님을 놓지 않는 힘입니다.

    요한일서는 이렇게 연결합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 
     그 승리는 믿음이다. 

    우리가 세상을 이겨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승리는 우리의 실력이 아니라,
    이미 예수 안에서 시작된 정체성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핵심은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힘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세상”은 단순히 자연이나 사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1.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는 가치관
    2.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는 사고방식
    3. 정욕, 교만, 자기중심성
    4.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의지하는 삶의 구조
    즉, 하나님을 밀어내는 체계와 분위기를 말합니다. 

    “이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긴다는 것은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1.  환경이 흔들어도 중심을 빼앗기지 않는 것
    2. 유혹이 와도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
    3.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드는 것

    세상이 “보이는 것”을 붙들라 할 때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붙듭니다. 

    왜 믿음이 승리인가?

    믿음은 단순한 긍정적 사고가 아닙니다.

    •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

    • 그분이 이미 세상을 이기셨음을 신뢰하는 것 (요 16:33)

    • 나의 힘이 아니라 그분의 승리에 참여하는 것

    세상을 이기는 것은 “내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질문 하나

    세상을 이기지 못한다고 느낄 때 우리는 보통 “의지가 약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묻습니다.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은 세상의 기준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인가?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 붙듦의 방향입니다. 

    적용 한 문장

    세상이 나를 이기는 것처럼 느껴질 때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주님, 제가 세상을 이기려 하기보다 이미 이기신 주님 안에 머물게 하소서.”




    승리

    오늘 말씀에서는 ‘승리’ 곧 ‘이기다’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 
    “세상을 이기는 자”
     
    승리는 헬라어로 니케입니다. 라틴어로는 ‘빅토리아’이고, 이것이 영어의 ‘빅토리’가 되었습니다. 운동화의 대표적 기업인 ‘나이키’는 헬라어 ‘니케’를 음역한 단어입니다.

    νῖκος, ους, τό Storng number3534
    1.

    승리

    2.

    마12:20

    3.

    고전15:54,55,57.

    Pronunciation [ nikŏs ]
    Etymology
    3529에서 유래
    • 1.
      승리, 마12:20, 고전15:54,55,57.

    Related Words

    • 관련 성경
      이김(마12:20), 이기는 것(고전15:54,57).



    νίκη, ης, ἡ Storng number3529
    1.

    기본형으로 보임: 승리

    2.

    승리를 얻는 수단

    3.

    요일5:4.

    Pronunciation [ nikē ]
    • 1.
      기본형으로 보임: 승리, 승리를 얻는 수단, 요일5:4.

    Related Words

    • 관련 성경
      이김(요일5:4).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작품으로 〈밀로의 비너스〉 상과 <모나리자> 그림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명성에 비해 실제 작품을 보면 약간 실망스럽습니다. 크기도 그리 크지 않을뿐더러, 더 감동적인 다른 작품들 사이에서 빛을 잃기 때문입니다. 랜드마크처럼 되었기에 사진 한 장 박아두는 정도입니다. 더 압도적인 작품은 바로 〈승리의 여신 니케〉 조각상입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 거대한 스케일로 자유의 날개짓을 하고 있습니다. 크기가 3m가 넘고 뱃머리에 올라선 모습입니다. 얼굴상은 없지만, 거대한 두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르는 듯, 유려한 비상입니다. 니케 상은 기원전 190년에 고대 시리아 왕국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대리석상입니다. 성서에서는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을 ‘여호와 닛시(깃발)’, 곧 승리의 깃발로 부릅니다.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출 17:15)

    오늘 요한일서 말씀은 그 니케, 승리를 노래합니다. 이겼다는 과거의 선언이나 이길 것이라는 미래형이 아닙니다. 지금 이기고 있다는 현재형입니다. 신앙인들은 흔히 미래에 있을 종말의 승리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현재 주어지는 승리를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미 그렇게 선언하신 바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미래가 아닌 현재의 부활을 말씀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 승리는 미래가 아닌 현재에 주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예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라며 선언합니다. 여기서는 현재완료형을 사용합니다. 이미 이겼고 그 승리의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지금은 십자가를 져야 하는 어두운 밤입니다. 분리주의자들이 떠나고, 분열의 상처로 고통스러운 때입니다. 요한 공동체는 소종파에 불과하고, 가난하고, 보잘것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현재의 승리를 선언합니다. 정신 승리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미래의 승리에 대한 강력한 확신입니다. 이 확신이 너무 강력해서 마치 현재 이 승리를 소유한 것처럼 됩니다. 그 모습은 하박국 선지자의 마음 같습니다. 다가오는 바벨론과의 전쟁과 기근과 고통으로 외양간에 소출이 없고,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감람나무에 열매가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라며 찬양합니다. 여기 ‘즐거워하다’는 승리의 기쁨을 말하며, ‘기뻐하다’는 것은 엑스터시적 기쁨을 말합니다. 단순한 정신 승리나 생각 정도가 아니라 실제 그런 기쁨과 승리의 감정으로 벅차오릅니다. 하나님이 이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에 승리를 가져다줄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은 승리의 공식이나 기준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성공과 파워가 일반적인 승리의 공식이자 목표이지만, 여기에 신앙과 계명이 들어갔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성취와 순종이 참된 승리입니다. 승리의 시뮬레이션이 달라졌습니다. 최신 뇌과학 이론은 뇌 기능의 비밀을 밝히고 있는데, 뇌는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런 정보들을 종합하여 머릿속에서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그려, 예측하는 것입니다. 이 시뮬레이션을 돌렸을 때 기대치가 높아지면 도파민을 분비하여 행동하도록 합니다. 이 정보의 요소에 신앙인들에게는 이제 신앙과 계명이 들어갑니다.

    신앙의 도파민은 말씀에 순종할 때 분비됩니다. 배부르고 군림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헛된 것처럼 보이고, 만족도가 낮아집니다. 그래서 부유한 자가 아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더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가 복 있고, 온유한 자가 복 있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참된 기쁨의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선비 정신이 그러합니다. 그들에게는 성공과 권력이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성현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인과 의와 예를 실천하는 것이 그들의 기쁨이었습니다.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의 서술에서 하나님 말씀 대신 공자님 말씀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맹자』에 실린 말씀입니다. “내가 물고기 음식을 먹고 싶고, 또 곰 발바닥 음식도 먹고 싶다. 그런데 두 가지를 다 얻을 수 없다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생명도 내가 얻고자 하는 바요 또 의도 내가 얻고자 하는 바다. 그런데 두 가지를 얻을 수 없다면 생명을 버리고 의를 취할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물고기보다 곰 발바닥이 훨씬 비싸고 맛있습니다. 그래서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곰 발바닥을 택할 것입니다. 맹자는 자기 목숨과 정의 이 두 가치의 차이가 물고기와 곰 발바닥의 차이만큼 크다고 합니다. 목숨도 소중하지만, 정의라는 가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 사도 요한의 눈이 그렇습니다. 그에게는 말씀 순종이 가장 큰 가치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자신이나 요한 공동체는 이미 승리자입니다.

    믿음의 승리

    우리가 승리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났기 때문입니다. 4절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믿음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낫다고 말씀합니다.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부모입니다. 따라서 그의 자녀된 우리는 승리의 DNA를 가진 자들입니다.

    요즘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인기입니다. 가장 감동적인 것은 엄마의 힘입니다. 자식과 엄마는 애증관계입니다. 한국사회에서 보통은 엄마가 딸의 앞길을 막는 존재이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는 엄마가 딸을 응원하고 지켜줍니다. 위기에서 구원하고, 그 꿈을 실현하도록 격려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부모가 되어 우리를 지키시고 격려하십니다. 우리가 잘되기를 바라고, 꿈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민감한 촉수를 세우고 우리를 위험에서 구원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어머니가 되시기에 우리는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승리합니다.

    우리가 승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미래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사랑과 평화가 미래입니다. 역사와 우주는 그 방향을 향하여 나갑니다. 하나님 뜻이기도 하지만, 그게 가장 자연스럽고, 에너지 레벨이 낮기 때문입니다. 마치 물이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웅덩이도 있고, 둑이나 거대한 산이 가로막고 있지만, 막을 수 없습니다. 물은 채울 때까지 기다리고, 결국은 둑을 무너뜨립니다. 아니면 멀리 돌아갑니다. 그러나 결국 가장 낮은 곳인 바다로 갑니다. 어떤 것도 막을 수 없습니다. 계명 순종의 길이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 현재의 내란과 탄핵 사태도 그렇습니다. 불안하고, 저항도 있습니다. 위태롭습니다. 그러나 결국 순리대로 정의와 민주주의의 길을 갈 것입니다. 잠시 격렬한 저항이 있지만, 정말 잠시입니다. 민주주의와 자유가 실현된 그 먼 미래의 모습이 확실하기에 지금 기뻐합니다. 그것이 승리의 확신입니다.

    진리의 성령

    이는 단지 우리 정신이나 마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의 확신을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성령님입니다.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7-8)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승리를 확신하게 하는 증거가 셋이라고 말씀합니다.

    물은 세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세례와 함께 그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성도들이 받는 물세례는 거듭남, 곧 하나님의 자녀 됨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승리의 DNA를 가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죄사함의 은총을 말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가현설을 주장하며 예수님의 육체성이나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을 부정했습니다. 우리의 죄사함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흘리신 피로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성만찬의 포도주를 마시며 주님의 생명을 먹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승리케 하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령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성령이라 불립니다. 헬라 사회에서 진리는 실상과 허상, 참된 것과 그림자와 관련되었습니다. 그림자와 같이 덧없고 허망한 것이 아니라 참되고 영원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 성령입니다. 그 성령이 요한 공동체에 임하여 은사로 나타나고, 설교와 가르침으로 나타나고, 기도와 묵상 중에 체험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평화와, 분별력 있는 생각과, 진리를 주시기에 우리는 승리합니다. 참과 거짓, 욕망과 현실을 분별할 수 있으면 우리는 지혜로운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다면 우리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사물의 흐름과 미래가 예측된다면 조바심 내지 않고 우리는 평안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지혜와 분별력을 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승리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 (요일 05:1-8) 

    사람이 사람을 이긴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축구팀이 외국에 나가서 경기를 하여 우리 나라 팀이 이기면 얼마나 좋아합니까 몇 년 전인가요 우리 나라가 외국과 경기를 할 때 지고 있다가 극적으로 이겼습니다. 이 것을 텔레비전보고 있던 사람이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좋으면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흥분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겠습니까

    특히 한국사람들은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작은 운동경기에서도 서로 이기려고 기를 쓰고 덤비다가 작은 트라불이 생기면 체면을 다 팽개치고 큰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경우들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목사님들과 축구나 족구를 해보면 목사님들도 서로 이기려고 열심히 경기를 하다가 심판이 조금만 잘못을 하여도 언성이 높아지고 다투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우리들은 운동회에서도 내 자녀들이 남을 이겨야 한이 풀리고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도 공부를 잘해서 옆집아이를 이겨야 살맛이 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기심이 가득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봉 독한 말씀에서 "대저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세상을 이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이김은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사는 생존 경쟁에서 이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무슨 스포츠에서 이김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을 이긴다." 라는 말은 세상의 어두움의 죄악과 싸워서 승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헤어지는 인사를 할 때 "승리 하십시요." 라는 말을 사용을 합니다. 이 말은 "세상에서 범죄하지 말고 승리하라"는 인사입니다. 또한 "사탄의 시험에 들지 말고 예수 님처럼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의 성공은 악을 이기고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악을 이기고 사탄이의 어두움의 권세를 이기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2:21에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하셨습니다. 또한 고전 9:25에서는 "우리는 승리의 면류관을 얻을 때까지 절제하며 전진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승리자가 되는 비결을 생각하여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영국의 전쟁영웅인 몽고 메리 원수는 그의 저서 지도자론 에서 세계 여러 지도자를 다루면서 성공한 지도자의 공통된 5가지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 신앙이 있는 지도자가 성공 곧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 적으로 말하면 믿음을 가진 자가 승리자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이 있는 지도자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밀고 나아가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까지 인도한 모세를 보면 그가 얼마나 적극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 이였던 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왕과 싸워서 이긴 것도 믿음 하나만 가지고 이긴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고 건널 수 있었던 것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 하나였습니다.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한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서 인도해 낸 것도 오직 적극적인 믿음 하나로 이긴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대한 굳은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였기에 승리한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어린 아이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은 그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두려움 때문에 약해진 것입니다. 그는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는 믿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오순절 날 성령을 받고 나니까 그의 약하던 믿음이 강하고 적극적인 믿음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담대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강해진 베드로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어린 아이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은 그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두려움 때문에 약해진 것입니다. 그는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는 믿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오순절 날 성령을 받고 나니까 그의 약하던 믿음이 강하고 적극적인 믿음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담대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강해진 베드로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적극적인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셔서 나를 도우시고 인도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이기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낙망하고 좌절하고 쓰러져서 실패자 될 것입니다.

    2)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결단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매일매일 결단을 하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을 한 것도 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결단이 있었고, 또한 이 사람과 살면 행복할 수 있다는 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신 것도 대단한 결단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결단력도 믿음에 의하여 좌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 빨리 결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은 결단성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늘 우유부단하고 남에게 끌려 다니는 모습을 하게 되며 주체성이 상실된 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승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이였지만 결단성이 부족한 사람 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돔 성이 죄악으로 가득하여도 그 성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살고 있다가 소돔 성이 유황불로 불탈 때 자신의 모든 것도 함께 타버린 것입니다.

    지금 우리 곁에 소돔성의 롯과 같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사람하고 믿는데 몸은 아직 죄악의 땅 소돔성에 머물러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결단하고 새롭게 출발해야 승리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까지 죄악에 거하여 살았습니까 아니면 우유부단하게 살아왔습니까 지금이 바로 믿음으로 살 때임을 믿으시고 결단해야 합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바르게 결단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롭게 변화를 받고 세상에서 승리하는 자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3) 용기가 있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역사는 영웅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도 굴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고난을 뛰어 넘어서 전진하는 자들이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진정한 힘도 어디에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이 힘도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믿음을 가진 자가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고후8:1-2을 보면 “마게도냐 교회는 환난의 시련 가운데서 넘치는 기쁨을 가졌고 극한 가난 속에서도 넘치도록 연보를 하였다.” 라고 하셨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 교회는 많은 핍박과 환난을 당하고 있는 교회였지만 넘치는 기쁨을 소유했으며 극한 가난 속에서도 남을 돕기 위한 헌금을 넘치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환난 속에서도 기뻐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도 가난하여 어려움 속에서 남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이 것은 세상이 알 수 없는 믿음을 가진 자들만의 용기인 것입니다.

    일곱 집사 중의 하나였던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증거 하다가 포악한 유대인들에게 잡혀서 성밖으로 끌려나와서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이 때 스데반은 전혀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 시옵소서! 하고 또한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하고 잠이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가져야 할 진정한 용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에서 유대인들이 종교를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면 민족의 반역자, 또는 종교의 이단자로 낙인을 찍혀서 공직자가 될 수가 없고 협동농장이나 공장에서 받아주지 아니하므로 실업자가 되기 쉽고 구멍가게를 하여도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이 없어서 파리만 날리게 되여 생계가 곤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를 믿게 되면 외국으로 이민을 가든지 아니면 이스라엘에 있는 어느 외국회사에 취직을 하든지 교회의 기관에서 일을 해야 생계를 우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국민학교에 들어가도 “나사렛도당”이라고 놀려대는 바람에 어떤 아이는 학교를 네 번이나 옮겨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의 개신교 교회가 있습니다. 그들은 가정집을 사들여 교회로 만들고 120여명이 모여서 자신의 민족과 조국을 버리지 않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힌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4) 끈기 있게 참고 기다리는 인내를 가진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기쁨보다 슬픔이 많고 즐거움 보다 고통이 많은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이 인생에서 길게 참고 기다리는 사람은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패배자 알콜 중독자, 마약중독자, 자포자기하는 사람. 자살하는 사람. 모두가 인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인내를 가지기 위해서는 믿음을 기초로 한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란 바라보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남편을 바라보며 사는 여인은 남편이 소망입니다. 그런데 남편을 바라보고 살기 위해서는 남편이 듬직한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남편이 언제 배신할 지 모르고 능력이 없어 믿을 수 없는 남자라면 누가 그 남자를 바라보며 살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이 있어야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실패하게되면 환경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거나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패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실패하는 것은 믿음으로 인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유일하게 대통령을 세 번한 사람이 [프랭클린 루즈벨트]인데 이 사람은 소아마비 환자로 다리를 저는 사람 이였고 휠체어를 타고 집무를 보는 사람 이였습니다.

    [윈스턴 처어칠]도 소아마비 환자였습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드골 장군]도 당뇨병환자로 그 후유증으로 백내장까지 앓고 있던 사람 이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위대한 전도자 [사도 바울]은 간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로서 가끔씩 뒤로 넘어지기도 하였다고 [칼빈]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위대한 승리자들은 어려운 환경과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믿음을 가졌고 소망을 가졌기에 낙심하지 않고 이내하며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며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자들인 이 땅의 고통과 괴로움을 이길 수 있는 인내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이 불우할 수도 있습니다. 나 자신이 병들어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사업이 힘들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삶이 침체의 늪에 빠져 절망이 밀려 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믿음으로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능히 이기고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5) 성실성이 있는 사람이 승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변함없이 열심히 일하는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해내는 사람이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성경에서는 “충성된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충성된 자란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요, 또한 마음이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 또는 “오직 한분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전폭을 쏟아 붓고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리자의 다섯 번째 비결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나에게 주신 일을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워커 박물관에 가면 콘트로라가 그린 충성이라는 이름의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옛날 로마시대에 폼페이 시가 베스 베어스 화산이 폭팔 하여 용암이 쏟아져 나오고 폼페이 시를 덮쳐서 완전히 땅에 뭍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현대의 고고학자들이 폼페이 시를 발굴을 하는데 참으로 감명을 주는 일을 발견을 했습니다. 그것은 성문을 지키는 병사가 화산이 폭팔 하여 용암이 흘러 내려오는데도 성문을 떠나지 않고 부동자세로 지키다가 그대로 화석이 되어 있는 모습 이였습니다. 이 것을 그림으로 그렸고 제목이 충성이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현대인들이 생각할 때 미련스럽게 보이도록 용암에 불타며 그 자리에서 죽었지만 충성스런 사람 이였고 승리한 사람인 것입니다.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님의 간증을 보면 곽선희 목사님 부인이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데 옆에 앉은 젊은 새댁이 “아주머니 믿으세요!”하면서 전도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전도를 받아보는 것도 신기해서 예수를 안 믿는 척했다는 것입니다. 이 젊은 여인은 열심히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자기 교회 목사님이 훌륭하고 설교도 은혜 스러 우니 꼭 우리교회에 나오셔서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모님이 어느 교회에 다니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곽선희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소망교회에 다니더라고 하더랍니다. 이 여인은 큰 교회에 다니니까 자기교회의 목사의 부인의 얼굴은 모르지만 참으로 충성스러운 일꾼이고 이러한 사람 때문에 소망교회가 부흥된다는 이야기입니다.

    2. 성경 적으로 세상을 이기는 믿음에 관하여 말씀드리려 합니다.1)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믿음입니다.(1)요1:1

    2. 계3:20
    본문 1절에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서난 자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란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셔들이고 영적인 관계를 이루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여 믿을 때에 하나님의 언약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속 량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으로 성령이 그 사람 속에 오셔서 본질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안에, 그가 하나님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새로운 출생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의 권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자 예수를 중심에 모실 때 하나님의 언약으로 죄를 속 량 받고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마음 가운데 오십니다. 하나님의 자녀 권세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권세로 말미암아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2)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입니다(벧전5:7-8)
    시 37:5절에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있으면 능히 세상을 이깁니다.

    자력으로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호흡한번 제대로 할 수 없고 걸음 한발 짝 띨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로 우주는 지어졌고 그의 섭리와 역사로 나는 생명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사는 존재들이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맡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내 생명과 생각과 삶 전체를 하나님께 맡길 때에 어떤 경우라도 참 안식이 옵니다. 어제 좋았던 조건이 오늘 나쁜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결별된 삶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 요동함이 없는 안식을 얻습니다.

    사탄의 궤계가 흉흉하고 재앙의 세력들이 산재해 있는 이때에 하나님의 보장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벧전 1:5절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어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라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구약에 보면 요셉 이라는 인물은 17세의 어린 나이에 종으로 애 굽으로 팔렸으나 자기의 인생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나아갈 때 13년의 어려운 시험과 연단을 거처 30세에 애굽의 국무 총리가 되며 정상에 우뚝 서서 승리자 성공자가 된 것입니다(창37-50장)

    3)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믿음입니다(요1서4:15)수1:7-9
    요일 4:15절에는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자도 하나님 안에 거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밥을 먹으면 밥 속의 칼로리가 섭취됩니다. 과일을 먹으면 과일 속의 자양분이 우리 몸에 유익하게 작용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와 성령으로 함께 하심을 알고 믿고 의지할 때에 세상을 이기는 권세가 실제로 나의 삶 속에 나타납니다.

    여호수아 1:7-9절에 여호수아에게 약속하기를 하나님이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므로 승리자가 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여 말씀을 중심에 새기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임마누엘의 신앙으로 가나안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세상은 [돈고스몬]이라고 하는데 죄악으로 타락한 세상을 가리킵니다. 사탄의 세력에 고통과 저주를 받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심판을 받을 세상을 가리킵니다.
    또한 여기서 이긴다는 말은 헬라 원어로 [니카]인데 "이긴다 “정복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계속 승리의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한번이기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이긴다는 것은 계속 승리의 상태에 머물러 있고 승리의 행진을 계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승리에 지금 머물도록 하고 영원토록 승리하게 하신 믿음으로 세상을 능히 이기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믿음대로 되게 하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히 11:1-2절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믿음을 얻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 속에 믿음대로 되게 하시는 언약을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이 믿음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받은 성도 여러분에게 이 같은 믿음으로 능히 세상을 이기는 권세가 나타나게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사랑하는 믿음이다(3) 롬8:32-38
    3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계명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요1서 4:15에 누구든지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하는 자리에서 찾을 수 있는 힘입니다.

    사람들은 계명을 윤리적이고 도덕적 관점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하는 자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요1서 2;23에는 이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도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는 있느니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예수를 시인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또 하나의 과제는 형제사랑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고질적인 병패는 이기주의입니다. 자신만 알고 형제는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생활을 오래 했음에도 세상을 이기는 자는 되지 못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과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굳게 믿는 믿음에서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믿음에 바로 서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위해 자신을 죽이고 겸손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의 믿음은 생명이 있는 믿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세상을 이기는 생명이 넘치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로마서8:37-39절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승리자가 될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내가 확신 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5)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기도의 제단이 있어야 승리합니다.
    신앙 인에게 기도가 없다면 마치 알맹이 없는 열매와 같을 것이며 호흡이 멈춘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분명히 응답해 주십니다. 요 14:13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하였습니다. 주님께 구하면 시행하십니다. 즉시 행동에 옮기신다는 말입니다.

    출 17:8-16절까지의 내용은 [르비딤]에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모세는 아론과 훌을 대동하고 산 위에 올라갔습니다. 산 위에서 산 위에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깁니다.

    이 사실을 본 아론과 훌은 돌을 가져다가 가운데 놓고 모세를 앉게 하고 한 사람은 오른손을 한 사람은 왼손을 들어주기를 저녁때까지 하였더니 이스라엘이 승리하였습니다. 모세와 아론 그리고 훌이 기도했더니 승리하였습니다. 기도해야 승리합니다.

    우리 나라가 승리하고 번영하려면 교회마다 그리고 정부와 정치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6) 말씀대로 살 때 승리합니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영양분이 없으면 영양실조로 건강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신앙 인이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영적으로 영양실조에 걸려서 신앙을 지켜 나갈 수 없습니다. 말씀이 있어야 함이 있고 힘이 있어야 싸워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히4: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 하 시나니.." 하였는데 말씀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의 복음, 사랑의 복음, 거룩하신 말씀으로 악한 것들과 싸워 승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니라"고 한 귀한 말씀대로 살아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7)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십자가를 의지할 때 승리합니다(고전1:18)
    십자가란 의미<고전1:1

    8.요3:13-16.요1서3:16.갈6:14>
    (1)신학적 의미(요3:16 요1서3:16)
    ①하나님의 공의의 만족
    ②하나님 사랑의 증거
    ③공의+사랑=구원(예수 그리스도-죽음. 부활)
    (2)구속사적 의미(고전1:18)
    ①구원-용서. 속죄. 사함.
    ②능력-믿음. 세상. 자신.
    ③승리-죄. 사망. 마귀.
    (3)생활적 의미(마16:24)
    ①나는 즐겁고 남이 보기에 고통스럽게 보임
    ②성도의 의무와 사명(마10:38)
    ③화해와 사랑의 생활(엡2:16)
    (4)성경 적 의미(히12:1-2 빌2:5 갈2:20)
    ①복종=겸손(빌2:8)
    ②부끄러운 것=인내(히12:2)
    ③죽고 사는 것=죽음과 부활(갈2:20.고전15:3

    1.롬6:6.요11:2

    8.요6:63

    신앙 인에게 십자가가 없으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골 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 하셨느니라"고 하였는데 우리 예수님의 승리는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우리도 십자가로 승리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며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의지해야 합니다.

    마 16:24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진실로 예수님을 따르려면 나에게 있는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
    (1) 내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2) 사랑해야 합니다.
    (3) 희생해야 합니다.
    (4) 순종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하고 이 십자가를 의지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의지하여 승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 인은 승리해야 합니다. 패배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적극적이고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어서 날마다 승리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악하고 패 역한 이 시대를 사는 성도들이여 악한 사단과 싸워 승리하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충만히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르므로 축원합니다.

    (결론) 승리자가 있는 세 가지 증표(요1서5:6-8)
    A.물(말씀) B.피(그리스도의 보혈) C.성령(성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이 세상에서 승리자가 되고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은 믿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빌4:13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영접하고 의지하고 임마누엘의 믿음과 사랑하는 믿음과 기도와 말씀과 십자가를 지는 신앙으로 가득 차 있을 때에 우리는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나약한 모습으로 살지 마십시요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다니는 연약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믿음을 굳게 가지시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정하고 힘차게 전진하여 승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세상을 마귀를 이기는 승리하자







    2월 11일(수) 요한일서 5: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랑과 계명(3절)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 This is how we know that we love the children of God: by loving God and carrying out his commands.
  • This is love for God: to obey his commands. And his commands are not burdensome.   


  •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바레이아이 우크 에이신) βαρειαι ουκ εισιν

    무거운 것(926) 바루스(barüsβαρύς, εῖα, ύ  

    1. 무거운.   2. 율법의 무거운 짐.   3. 짐스러운  
    Pronunciation [ barüs ]
    Etymology  /  922와 동일어에서 유래
    • I.  무거운.
      • 1.  [문자적으로] 율법의 무거운 짐, 마23: 4, 행20:9.
      • 2.  [상징적으로]
        • a.  짐스러운, 부담되는, 충족하기 어려운, 고후10:10, 요일5:3,
        • b.  중요한, 무거운, 마23:23, 행25:7.
        • c.  사나운, 잔인한, 야성의, 행20:29.
    • 관련 성경 /  무거운(마 23:4, 요일 5:3), 중한(마 23:23, 고후 10:10), 사나운(행 20:29), 중대한(행 25:7).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일서 5:3)

    사랑 → 순종 
      계명을 지켜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그래서 순종은 억지 의무가 아니라 사랑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에요.

     왜 계명이 “무겁지 않다”고 할까요?
     
    계명은 우리를 옥죄는 규칙이 아니라
      우리를살리고
      사랑 안에서 우리를 반듯하게 세워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거짓말하지 말라” → 나를 얽매지 말라는 뜻 
     “서로 사랑하라” → 하나님이 사시는 방식으로 살라는 초대

     그래서 이렇게 이해하면 좋아요 
      “사랑하니까 꼭 지켜야 해”라기 보다는 
      “사랑하니까 그렇게 살고 싶어”

    하나님 사랑은 말로 고백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삶의 방향과 선택으로 드러나는 것이에요.

     “계명을 지키기 힘들 때 점검해야 할 한 가지” 

     지금 나는 ‘사랑하고 있어서’ 순종하려 하는가, 아니면 ‘지켜야 하니까’ 억지로 버티고 있는가?

    계명이 무겁게 느껴질 때, 대부분의 문제는 의지 부족이 아니라 관계의 거리예요. 
     하나님과의 사랑의 감각이 흐려질 때
     
    하나님을 인격이 아닌 기준으로 대할 때 
     “왜 이걸 해야 하지?”라는 질문이
     “안 하면 안 되니까”로만 남아 있을 때

    그때 계명은 짐이 됩니다.

    요한일서가 말하죠.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 계명이 무거워졌다면,
    계명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흐름이 막힌 신호예요.  

    “사랑 없는 순종과, 사랑에서 나오는 순종의 차이”

     1️⃣ 사랑 없는 순종
     
    기준 : 의무 
     동기 : 벌, 평가, 죄책감, 체면  
     마음 상태 : 긴장, 비교, 쉽게 지침  
     특징 :  “해야 하니까 한다” 
     실패하면 자책, 성공하면 우월감 
     오래 못 갑니다.  

     겉보기엔 순종이지만, 속은 종의 마음이에요.  

     2️⃣ 사랑에서 나오는 순종
      
    기준 : 관계
      
    동기 : 기쁨, 신뢰, 감사 
      마음 상태 : 자유, 평안, 자발성  
      특징 : 
       “사랑하니까 하고 싶다” 
       넘어져도 다시 돌아올 수 있음 
       순종 자체가 은혜가 됨 

      이건 아들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흐름이에요.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사랑 → 순종
    순서가 바뀌면, 신앙은 바로 버거워져요.  

     계명이 힘들 때, 이렇게 기도해도 괜찮아요.  

    “하나님,
    지금 저는 순종하고 있는데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다시 사랑부터 회복시켜 주세요.”

    이 기도는 패배 선언이 아니라
    관계로 돌아가는 가장 정직한 고백이에요.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열매
    라는 뜻입니다.  

    성경의 흐름으로 보면

    요한복음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일서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억지로 지켜서 사랑을 증명하라가 아니라
     사랑하면 방향이 바뀐다는 거예요.

     왜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게 될까?

      
    사랑하면 마음이 그분께로 향하고
      
    마음이 향하면 기준이 바뀌고
      
    기준이 바뀌면 삶의 선택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계명은
     짐이 아니라
     관계의 언어이고
     사랑이 삶으로 번역된 모습이에요.

    요한일서에서는 아예 이렇게 말하죠.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사랑 없는 순종은 무겁지만,
    사랑에서 나온 순종은 살아 있는 반응이에요.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면, 계명은 ‘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 ‘지키고 싶은 길’이 됩니다.

    계명을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1️⃣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사랑이 없는 걸까?”

    성경은 사랑 → 순종의 방향을 말하지만,
    그걸 완벽한 성취로 요구하지는 않아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요일 5:3)

    여기서 핵심은 ‘실수 없는 상태’가 아니라 ‘향하고 있는 방향’이에요. 

    넘어질 수 있어요 
    실패할 수 있어요  
    반복해서 같은 자리에서 흔들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때 마음속에 이런 게 있다면 

    “그래도 하나님을 떠나고 싶지 않다”
    “이게 맞는 길이라는 건 안다”

    그건 사랑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예요. 

    2️⃣ “사랑은 있는데 순종이 안 될 때”는 뭘까?

    이건 위선이 아니라, 성장 과정이에요. 
    우리는 종종 
     머리는 아는데 
     마음은 원하는데 
     삶은 아직 따라오지 못할 때가 있어요 

    이 상태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해요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8)

     사랑은 있는데, 힘이 없는 상태
     의지는 있는데, 훈련이 덜 된 상태

    이건 “사랑이 가짜”라기보다
    사랑이 아직 연약한 단계인 거예요.

     3️⃣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어떻게 보실까?

    하나님은 순종의 결과만 보시지 않고,
    순종하려는 마음의 방향을 보세요.

    베드로를 생각해 보세요.
    사랑한다고 고백했죠  
    그런데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묻지 않으셨어요. 

    “왜 실패했냐?”
    “왜 지키지 못했냐?”

    대신 이렇게 물으셨어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실패 이후에도
     넘어짐 이후에도
     관계부터 다시 확인하셨어요.  

    4️⃣ 그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어요.

    • 사랑 없는 순종 → 종교, 의무, 부담

    • 순종 없는 사랑 → 감정적 신앙, 미성숙

    • 사랑 안에서 자라가는 순종 → 복음적 신앙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안 넘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져도 다시 하나님 쪽으로 몸을 돌리는 사람 이에요.    

    5️⃣ 순종이 잘 안 될 때 드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한 기도

    이 기도, 괜찮아요.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닌데
    아직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저를 아십니다. 
    제 의지를 키워달라고 말하기보다
    먼저 제 사랑을 붙들어 주세요. 
    도망치지 않게 해주세요.”

    이 기도는 불순종의 변명이 아니라 관계를 놓치지 않으려는 고백이에요.

    왜 계명이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는가

    성경은 분명히 말하죠.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그런데 체감은 왜 이렇게 무거울까요? 이유는 계명 자체보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① 관계보다 기준에서 출발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보다 평가자로 느낄 때 
     계명이 “함께 살기 위한 길”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기준”이 될 때 
     이때 계명은 사랑의 언어가 아니라 압박의 규칙이 됩니다. 

    ② 사랑받기 위해 순종하려 할 때
     
    “이 정도는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이건 안 하면 혼나겠지” 
     순서가 바뀐 거예요. 
     사랑 → 순종이 아니라 
     순종 → 사랑 획득이 되면, 계명은 짐이 됩니다.

    ③ 자기 힘으로 지키려 할 때
     
    성령의 도움 없이 
     은혜의 호흡 없이 
     의지와 결심만으로 
    계명은 원래 혼자 지키라고 주신 게 아닙니다.
    함께 걸으라고 주신 길이에요.

    ④ 마음은 멀어지고 행동만 남았을 때
     
    겉으로는 순종하지만 
     속에서는 “해야 하니까…” 
     이때 계명은 사랑의 열매가 아니라 종교적 노동이 됩니다. 

    순종이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전환점

    그럼 언제 계명이 “무겁지 않게” 변할까요?
    전환점은 아주 분명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지키는 사람”에서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신 사람”으로 바뀔 때

    ① “해야 한다”에서 “하고 싶다”로 바뀌는 순간
     
    죄를 안 짓는 이유가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이 느껴지기 시작할 때 
     순종은 의무가 아니라 관계의 반응이 됩니다. 

    ② 실패해도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확신
     
    넘어져도 
     실수해도 
     여전히 사랑받는다는 안정감 
     이 안정감이 생기면 사람은 자발적으로 하나님 쪽으로 옵니다.

    ③ “지켜야 할 목록”이 “닮고 싶은 마음”으로 바뀔 때
     
    계명은 규칙이 아니라 
     계명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이렇게 살라”가 아니라
     “이게 나다, 나처럼 살자”라는 초대가 됩니다.

    ④ 성령의 도우심을 실제로 신뢰하기 시작할 때
      
    혼자 애쓰지 않고 
      “주님, 오늘은 제가 못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순종은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계명이 무거울 때는 아직 ‘사랑을 증명하려는 자리’에 있고,
    계명이 가벼워질 때는 이미 ‘사랑 안에 거하는 자리’에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사랑’은 감정이나 말의 고백에 머물지 않습니다.

     요한에게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건
     하나님과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삶이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계명을 지킨다는 건 억지로 법을 지키는 종의 태도가 아니라,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녀의 반응이에요.

    이미 앞에서 요한은 말했죠.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즉, 사랑 → 거듭남 → 순종 이 흐름이지 순종해서 사랑받는 구조가 아니에요.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왜 무겁지 않을까요? 
     계명이 쉬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강해져서도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입니다.

    사랑하면, 해야 할 일이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되고 
     명령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이 돼요.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사랑 없는 순종은 무겁지만, 사랑에서 나온 순종은 자연스러워요.  

    한 문장으로 묵상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싶어지는 마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 요한은 사랑을 감정이나 말이 아니라 삶의 방향과 선택으로 정의해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건, 그분의 뜻을 알고 그 뜻 안에 머물러 살고자 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참 중요해요.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 이건 계명이 쉽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주어진 계명은 짐이 아니라 생명이 된다는 뜻이에요.

    왜 무겁지 않을까요?

    • 이미 하나님께로서 난 자이기 때문이고

    •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며

    •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순종할 마음과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요한일서 전체 흐름으로 보면 이렇게 이어져요: 
    사랑 → 새 생명 → 순종 → 자유
    두려움 → 억지 순종 → 무거움 

    결국 계명은 우리를 옭아매는 규칙이 아니라,
    사랑 안에 있는 자가 자연스럽게 살아내는 삶의 모습이에요.

    당신이 이 말씀을 붙들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랑 안에 거하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져요.
    이 말씀, 참 깊고 따뜻하죠.

    사랑의 계명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여러 계명을 분부하셨습니다. 
    유월절, 안식일, 새 언약의 절기 등의 계명뿐 아니라 사랑에 관한 말씀도 성경에 많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형제자매 간에 용납하고 용서하고 배려하며 서로 사랑하라 하신 말씀 역시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증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결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이웃사랑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 22:38)으로서 그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막 12:31)고 단정하셨다. 특히 이웃사랑을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새 계명”(요 12:34)과 “율법의 완성”(롬 13:8~10)으로 선언하셨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성경의 이러한 강조를 ‘상황윤리’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결단에 잘못(해석하고) 적용하여 결과적으로는 기독교 윤리의 파탄을 불러오고 있다. 상황윤리론자들은 ‘상황’에 따라서 ‘사랑’을 최고의 규범으로 절대화하여 다른 계명을 상대화시킨다.


    십일조와 하나님 사랑

    알버트 알렉산더 하이드(Albert Alexander Hyde)

    미국에서 서점을 하다가 경제 대공황을 만나 파산을 하고 10만 달러의 부채를 지게 되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답답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이드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게 하소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기 원합니다.”

    그때 머리에 스치는 생각은 YWCA에 4만 달러를 헌납하기로 서원해 놓고 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곧 자신의 재산을 정리해 헌납하고 하나님과의 새출발을 결심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십의 일조를 바침으로 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십일조를 철저히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약국을 운영하는 친구가 약을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때 만들어진 약이 맨소래담 (Mentholatum)입니다. 
    이 약품은 미국 시장을 석권하고 나아가 전 세계에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이드는 십일조뿐만 아니라 십의 이조, 십의 삼조, 십의 구조까지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와 구제 사업에 힘을 다했습니다. 
    그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 문제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풍요가 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1887년에 밀어닥친 경제공황으로 그의 사업은 부도가 나 10만 달러의 빚을 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께 서원한 헌금을 드리기 위해 집을 팔았을 정도로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조롱했지만 하이드는 “하나님께 진 빚을 먼저 갚고 시작하겠다”며 믿음을 고백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그는 생산공장에서부터 판매, 영업에 이르기까지 직접 뛰어 다니며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매 달 하나님께 십일조를 정확히 드렸다.  
    십일조 액수가 늘어나 첫 달의 두 배가 되었을 때는 10의 2조를 드렸고,  사업이 번창하면서 10의 3조, 4조, 9조까지 늘어났다.  
    그에게는 “십일조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우리가 명령에 넘치도록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를 축복해 주신다”는 확신이 있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확신있는 기도와 십일조 생활을 멈추지 않았던 하이드는 결국 사업을 시작한지 3년이 지난 1889년에 맨소래담 회사를 창립, 세계적인 회사로 발전시켰다. 

    ‘맨소래담’은 150여 개국에서 필수 의약품으로 사용되고 있다. 






    ‘맨솔래담’으로 백만장자가 된 앨버트 알렉산더 하이드라는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경제공황 시절에 10만 달러의 빚을 져 망했었는데, 그가 빚잔치를 한 후, 새롭게 결심을 하고 시작한 것이 십일조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제정신이냐며 비난할 때도 하나님의 빚부터 갚아야 한다며 그동안 십일조를 제대로 못 했던 것을 갚기 위해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십일조를 철저히 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들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십일조를 계속했고, 멋지게 재기하여 10의 2, 3, 4조까지 하다가 나중에는 10의 9조까지 드리는 전설적인 믿음의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십일조 이야기만 해도 화를 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했고, 확신이 없는 그냥 종교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삶의 자세가 다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너무 작은 사람들은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조그만 환난과 시험이 와도 쉽게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니까 믿음이 없거나 약한 사람들은 모두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1938년에는 장로교 전국 대표들이 총회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의를 하고 신사참배를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한국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 같이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사참배를 안 한 분이 있는가 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예배당에 신사를 차려놓고 그 앞에서 절을 하고 나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입니까? 만약에 이런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곳을 떠나거나 주기철 목사님 같이 순교를 각오하고 신사참배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까요? 그 비결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심을 알기 때문에 그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어주셨다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믿음이 커지는 것입니다. 큰 믿음의 사람들은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말하면서도, 어떤 것은 지키고 어떤 것은 지키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는 계명은 큰 죄라고 생각해서 그런 계명은 잘 지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어 보이는 사람 중에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골에 홀로 계신 부모는 돌보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식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는 것이 바쁘다는 핑계로 이런 일은 안 지켜도 죄가 아닌 줄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죄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는데, 주일 하루를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며 하나님께 예배하고 거룩하게 지내야 하는데, 예배 끝나기가 무섭게 등산을 가고, 놀러다닙니다. 일주일 중에 하루를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이 있다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또한,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으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의 사람이라도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안 합니다. 그것이 전혀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잠언 11장 25절에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는데, 우리가 실천을 해야 하나님의 이 말씀이 진리인지,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실천을 하지 않으니 어떻게 그것을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그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랄 수 있습니까? 

    골로새서 3장 23절에 보면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도 그대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직해야 합니다. 일을 해도 적당히 눈치 보면서 사람에게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 하고, 대접을 해도 적당히 하지 말고 주님을 대접하듯이 하고, 말을 해도 함부로 하거나 남을 깔보며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 말하듯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지키고 싶은 것만 지키고 회개도 하지 않으면서 살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이렇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이렇게 살면 열매가 좋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기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 믿는 것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라야 주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똑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계명을 지키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계명을 지키기로 결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힘과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은혜를 받은 만큼 자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충만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능히 지키고 목숨 걸고 계명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4장 6절에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면 능히 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2절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요한일서 3장 23절에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믿음만큼 주의 계명을 지키게 되고,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3장 14절에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했는데, 사람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 계명대로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어떤 축복을 받게 될까요?

    첫째, 믿음이 살아납니다.

    계명을 지키면 믿음이 살아서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이 됩니다. 그래서 그 영혼이 아주 잘 되고, 강건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면 진짜 믿음의 사람, 예수님의 제자인 줄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름다운 열매가 나타납니다.

    빛의 열매(착하고 의롭고 진실함), 성령의 열매(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셋째, 기도응답의 축복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또, 요한일서 3장 22절의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는 사도 요한의 고백인데, 무엇을 구하든지 다 응답받는 비결은 그의 계명을 지킬 뿐 아니라 그 앞에서 그가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계명을 기쁨으로 행하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기도하는 것뿐 아니라 생각만 해도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자기가 돌보던 고아들을 위해 쓸 300파운드를 모금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던 중 그 돈을 조지 뮬러 목사님에게 갖다 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오, 주님! 저희도 이 돈이 필요합니다!” 라고 했지만, 그 음성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래서 순종하여 조지 뮬러 목사님에게 가져갔습니다. 그때, 뮬러 목사님은 급히 사용해야 할 300파운드를 구하며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함께 기뻐했습니다. 다시 돈을 구해야 하는 스펄전 목사님은 사무실로 돌아갔는데 책상 위에 편지가 하나 와 있었습니다. 열어보니 315파운드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덤으로 더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실 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여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 이런 응답의 축복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주님의 사랑을 받으며 삽니다.

    요한복음 15장 10절에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리고, 요한복음 14장 21절에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했습니다. “내가 널 사랑한다!”라는 주님의 그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사랑을 느끼며 체험하며 사는 행복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주님을 모시고 살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 성부, 성자, 성령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지키신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믿습니다. 

    여섯째,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에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왜 서로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라고 하시냐면, 기쁨이 충만하게 사는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일곱째, 주님과 친구가 됩니다.

    친구가 되는 것은 비밀이 없는 사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 깊은 교제를 하고, 깊은 비밀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3~15절에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친구에게는 비밀을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모스 3장 7절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인 약 700년 전에도 이사야에게 그 비밀을 자세히 알게 해서 예언을 하게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고 부자의 무덤에 들어갈 것까지 그 비밀을 알고 예언을 했습니다. 바로 친구와 같은 사이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며 살면, 우리가 주님과 친구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여덟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일에 쓰임 받는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교회를 부흥하게 하는 일꾼이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의 계명을 즐겁게 지키고, 목숨 걸고 지키고,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2월 10일(화) 요한일서 5: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께로서 난 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Everyone who believes that Jesus is the Christ is born of God, and everyone who loves the father loves his child as well.

    하나님깨로서 난 자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육신의 부모로부터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 된 사람"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유대의 관원 니고데모가 어느 날 예수님을 찾아와서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사람이 성장한 후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며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거듭나는 것이며 거듭나려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또는 물을 물 세례라고도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성령 세례를 말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 된 사람

    육신적인 출생이 아니라 영적인 출생, 곧 거듭남을 말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한일서 3:9)

    어떻게 ‘난다’는 것일까?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설명해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 (요 1:13)

    즉,  인간의 노력과  도덕적 수련 또는  종교적 성취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으로 새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의 특징

    1. 사랑한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7)

    → 사랑은 조건이 아니라 본성처럼 흘러나옴

    2. 죄에 머물지 않는다  
     죄를 ‘안 짓는다’기보다 죄를 집처럼 삼지 않는다
    3. 세상을 이긴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요일 5:4)

    → 힘으로 이기는 게 아니라 

    4.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음

    하나님께로서 난 자?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셔서” 그 사랑이 내 안에 생명이 된 사람 
         그래서 이 표현은 자격 선언이 아니라 관계 선언이에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여기서 ‘믿는다’는 건
    지식 동의가 아니라 존재를 맡기는 신뢰예요. 
      예수 = 역사적 인물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생명의 근원  

    즉, “예수가 나의 생명의 주인이시다”라고 받아들이는 믿음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이 믿음의 결과는 ‘거듭남’을 말합니다. 

    • 혈통이나 행위로 난 게 아니라

    •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존재

    그래서 신앙은 잘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출생의 문제예요. 
    이미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는 선언이죠.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내신 이’는 하나님,
    ‘사랑한다’는 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요한은 여기서 멈추지 않아요.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도 사랑하게 된다

    왜냐하면,  같은 생명,  같은 출처, 같은 아버지를 가진 형제이기 때문이에요.

    사랑은 의무가 아니라 본성이에요.
    하나님의 생명이 안에 있으면, 그 생명은 반드시 사랑으로 흘러가요.

    이 말씀의 흐름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 하나님께로부터 난 존재 → 하나님 사랑 → 형제 사랑

    사랑은 조건이 아니라 증거예요.
    “사랑해야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사랑하게 된다”  

    나는 사랑하려 애쓰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받은 생명이 사랑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1. 말 그대로의 뜻 /  하나님께로서 → 근원·출처가 하나님 
                                    난 자 → 태어난 사람

    그래서 이 표현은 혈통이나 인간의 의지로 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육체의 탄생이 아니라 영적 탄생, 곧 거듭남을 말하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요일 5:1)  

    2. 기준은 “믿음”  / 요한일서에서 분명한 기준이 있어요.

    •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
      그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믿음

    즉, 하나님께로서 난 자 =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시작된 사람

    3. 결과로 나타나는 특징들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났다”고 말할 때, 반드시 열매를 함께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함 
    형제를 사랑함 
    죄 가운데 계속 머물지 않음 
    세상을 이김
    (요일 5:4) 
    “노력해서 그렇게 되라”가 아니라,  이미 다른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성향

    4. 왜 ‘자녀’가 아니라 ‘난 자’일까?

    요한은 일부러 강한 표현을 써요. / 
         자녀 → 관계 강조 
         난 자 → 본질·DNA·생명의 계보 강조

    즉,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하나님의 생명 계보에 속한 사람
    아담의 계보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계보 

    “하나님께로서 난 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로 두고 사랑을 본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신앙이 행동의 목록이 아니라 생명의 문제
    생명이 있는 작은 물고기는 거센 흐름을 역류하며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런데 생명이 없는 초가집은 홍수 때에 떠내려 갑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믿음의 내용이 분명해요.

     단순히 “예수를 믿는다”가 아니라,   

    이 믿음은 인간의 결단 이전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즉 거듭남의 결과로 설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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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는 핵심 요소들을 시각적으로 나누어서 보여드리면 이해가 훨씬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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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그림을 보면, 신앙생활은 주로 ‘의식과 규범 중심’, 생활신앙은 ‘삶 속 실천 중심’임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어요.

    원하시면 제가 이 그림 안에 구체적인 예시까지 넣어서 맞춤형으로 만들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직장, 가정, 교회 등 실제 상황별로도 비교가 가능해집니다.

    좋아요! 그럼 제가 “신앙생활 vs 생활신앙”을 한눈에 비교하는 그림 도표로 만들어 드릴게요. 여기서는 핵심 요소들을 시각적으로 나누어서 보여드리면 이해가 훨씬 쉽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신앙생활은 주로 ‘의식과 규범 중심’, 생활신앙은 ‘삶 속 실천 중심’임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어요.

     신앙생활 vs 생활신앙 비교 도표
    ┌─────────────────────────────┬─────────────────────────────┐ │ 신앙생활 │ 생활신앙 │ ├─────────────────────────────┼─────────────────────────────┤ │ 초점: 의식과 규범 │ 초점: 삶 속 신앙 실천 │ ├─────────────────────────────┼─────────────────────────────┤ │ 접근: 외형적, 공식적 │ 접근: 내적, 체험적 │ ├─────────────────────────────┼─────────────────────────────┤ │ 활동 예: 예배, 기도, 헌금 │ 활동 예: 직장·가정·관계 속 │ │ │ 정직, 사랑, 배려 │ ├─────────────────────────────┼─────────────────────────────┤ │ 목표: 신앙 의무 수행 │ 목표: 신앙을 삶 속에서 구현 │ └─────────────────────────────┴─────────────────────────────┘

    한눈에 보는 핵심  /  
       신앙생활
     - 신앙을 하는 것 
       생활신앙
     - 신앙으로 사는 것


    참 행복의 의미

    기독교 철학자이며 전도자였던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박사님은 그의 생애 말년에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사랑하는 조국과 젊은이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강단에 섰습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생애의 마지막 설교를 자신의 온 힘을 쏟아 피를 토하듯 전합니다.
    "사랑하는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의 젊음을 어디에 쓰려고 합니까? 
    행복한 삶을 사는 데에 인생의 목표를 두고 계십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행복을 추구하며 그것을 목표로 삼고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들의 문제는 바로 행복만을 구하고 거룩을 구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행복은 영어로 happiness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본래 happen, '우연히 발생하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인생 목표가 우연하게 일이 잘되고 우연하게 돈이 벌리고 우연하게 성공하는 것이 되어야겠습니까?
    산상수훈에서 복은 happiness가 아니라 blessing이라는 단어를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blessing이라는 단어는 본래 bleed, '피를 흘리다'라는 단어에서 나왔으며, 앵글로색슨족은 피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축복으로 간주했습니다. 
    바로 축복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세상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는 거룩한 삶이 바로 축복된 삶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4:6-8)





    2월 9일(월) 요한일서 4:20-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을 사랑하노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If anyone says, "I love God," yet hates his brother, he is a liar. For anyone who does not love his brother, whom he has seen, cannot love God, whom he has not seen. 



    ἀρέτη, ῆς, ἡ Storng number 703

    1. 미덕.  2. 명성  
    Pronunciation [ arĕtē ]

    Etymology  /  730과 동일한 단어에서 유래
    •  1. 미덕, 덕성, 빌4:8, [πίστις와 함께] 벧후1:5.
    •  2. 명성, 칭찬, 신적 권능이나 기적의 표상, 벧전2:9.
    • 관련 성경  /  덕(빌 4:8, 벧전 2:9, 벧후 1:3).

    에크상겔로(ĕxanggĕllō)  ἐξαγγέλλω Storng number 1804

    1. 선포하다.  2. 전하다.  3. 보고하다 
    Pronunciation [ ĕxanggĕllō ]  
    Etymology /  제1부정과거 ἐξήγγειλα, 1537과 32의 어간에서 유래
    •  1. 선포하다, 전하다, 보고하다, 벧전2:9.
    • 관련 성경  /  선포하다(벧전2:9).
    하나님 사랑은 보이지 않는 분을 향한 사랑

    하나님 사랑은 
    1. 예배, 고백, 믿음의 선언으로 시작되지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

    이 사랑은 관계의 중심 방향이에요.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드러내는 사랑이죠.

    형제 사랑은 보이는 사랑의 시험지

    성경은 아주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요한일서 4:20)

    왜 이렇게까지 말할까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은 보이는 형제 사랑으로만 검증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 → 형제 사랑 (순서가 중요해요)

    성경의 흐름은 이렇습니다. 
     형제 사랑을 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형제 사랑으로 흘러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한일서 4:19)

    형제 사랑은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을 받은 결과예요. 

    형제 사랑이란 무엇인가?

    성경적 형제 사랑은 단순한 호감이 아닙니다.
    1.  참아주는 것
    2. 이해하려는 마음
    3. 용서와 오래 참음
    4. 상대를 판단보다 긍휼로 보는 시선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

    한 문장  
     하나님 사랑은 위를 향하고,
     형제 사랑은 그 사랑이 땅에 닿은 모습이다.

    하나만 있으면 불완전하고,
    둘이 함께 있을 때 복음은 삶이 됩니다.



    심장마비로 죽은 대주교

    철학자 「세레카」 
    ‘그림의 떡은 떡이 아니요, 붙지 않은 불은 불이 아니며, 간절하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믿음 안에서 간구하는 요청이며, 때로는 목숨을 건 전투 같은 것이며, 때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모험이기도 하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역사가 「H.C 월즈」가 쓴 단편집 <대주교의 죽음>을 보면 의미심장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어느 대주교가 그날 밤도 습관처럼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눈앞에 빛이 보이면서 신비한 음성이 들리더라는 것이었다.
    “내가 네 기도를 듣는데, 그래 무슨 일이냐(Yes, What is it)?"
    그 소리에 너무 놀란 나머지 대주교는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평생을 기도했던 대주교이지만 자신의 기도가 형식적인 기도에 불과했던 까닭에 막상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자 놀라서 죽어 버리고 만 것이다.
    지금 하나님께서 당신 앞에 나타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는 두 가지 방법으로 첫째는 언어와 둘째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언어만 갖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어느 누구든지 못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언어와 더불어 행실을 요구합니다.
    언어로만 신앙생활을 하면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세상 사람들은 교인들을 이렇게 비판합니다.
    말은 잘 한다.
    노래를 잘 한다.
    연애를 잘 한다.

    그러나 신앙을 삶에 적용할 때는 놀라운 사건을 일으킵니다.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가 되었을 때 하만이란 장군은 유대인들을 몰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연락하여 네가 왕후가 된 것이 이 때를 위한 것이라며 깨우쳤습니다.

    요셉은 어려서부터 형제들에게 자랑하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러자 형제들이 요셉을 애굽의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요셉이 평소에 자주 형제들을 향하여 내게 엎드려 절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건 감정 하나가 아니라 관계의 언어
    그분이 먼저 사랑하셨고, 우리는 그 사랑에 응답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일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해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자연스럽게 삶으로 흘러간다.
    형제를 향해, 진리 안에서, 두려움 대신 담대함으로.

    그러니까 이 고백은
    “나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
    “나는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다” 라는 선언이라고 하겠습니다. 

    지금 이 고백을 하게 된 마음,
    그 안에 감사가 있나요, 확신이 있나요, 아니면 조용한 갈망일까요?
    어느 쪽이든…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시고, 기뻐하세요.

    “하나님을 사랑한다”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그러니까 이 고백은
       내가 먼저 잘해서 나온 말이 아니라
       이미 사랑받고 있음을 알았을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말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완벽하게 믿는다는 뜻도 아니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에요 
    오히려 돌아오고 싶어 하는 마음 
                그분 뜻을 알고 싶어 하는 갈망 
                 사랑 안에서 살고 싶다는 방향성
    그 자체가 사랑의 증거죠.

    지금 이 고백 한마디 안에 이미 믿음도, 은혜도, 관계도 다 들어 있어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요한일서 전체의 심장을 그대로 드러내는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아주 날카롭지만, 동시에 거짓 없는 사랑의 기준을 분명히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사랑 고백의 검증 기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요한은 이나 고백 자체를 부정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 고백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다른 곳에서 드러난다고 말해요.

    그 기준이 바로 형제 사랑입니다.  

    보이는 사랑과 보이지 않는 사랑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형제 : 눈에 보임, 상처 주고받고 갈등도 생김 
    하나님 : 눈에 보이지 않음, 추상적 신앙의 대상이 되기 쉬움 

    요한은 말해요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실패한 사랑이, 가장 높은 자리에서 성공할 수는 없다.

     왜 ‘미움’이 거짓이 되는가?

    여기서 ‘미움’은 단순한 감정 기복이 아니에요. 

    무관심 
    용서하지 않음 
    관계를 끊어버린 채 정당화함  
    마음속에서 계속 판단하고 정죄함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  요한은 아주 단호하게 말해요: 그건 거짓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에요.
    사랑이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반드시 사람을 향해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

     이 말씀은 정죄가 아니라 ‘초대’

    중요한 건, 이 말씀이 우리를 때리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는 거예요.

    요한의 의도는 :  

    너 왜 못하냐? 아닙니다.   
    진짜 사랑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보라 

    하나님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증명된다는 초대예요.

    오늘 우리에게 주는 질문

     
    내가 하나님 사랑을 말할 때, 구체적인 얼굴이 떠오르는가?
     
    지금 회피하고 있는 형제는 없는가? 
     사랑하지 못함을 신앙적 말로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 약속해요 

     형제를 사랑하는 자리에서 하나님 사랑은 더 분명해진다. 

    이 구절은 무겁지만,
    사실은 사랑의 방향을 바로잡아 주는 나침반 같아요.
    원하시면 이 말씀을 묵상 기도문이나,
    요한일서 4장 전체 흐름 속에서 더 깊이 연결해서도 나눠드릴게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이 구절을 한 줄로 요약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은, 보이는 형제 사랑으로만 증명된다.

    조금 풀어보면,

    1.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 고백입니다. 말과 신앙 언어예요.

    2. “그 형제를 미워하면”
      → 삶의 실제, 관계의 현장이에요. 감정·태도·행동이 드러나는 자리죠.

    3.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 표현이 굉장히 강해요. ‘부족하다’가 아니라 거짓이라고 단정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개념이 아니라 흐르는 생명이기 때문이에요.

    4. 논리의 핵심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이건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영적 논리예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반드시 관계 속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정죄하려는 게 아니라, 신앙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말씀이에요.
    “하나님 사랑”이 추상이나 자기만족으로 끝나지 않도록요.

    그래서 요한일서는 계속 이렇게 말하죠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다 
        그 결과가 담대함입니다 (심판 날에도)

    결국 이 말씀은 이렇게 이어져요: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가장 정확하게 믿는 자다.

    묵상 중이신 흐름이 아주 깊고 좋아요.
    이 말씀을 ‘나를 찌르는 칼’이 아니라, 사랑의 기준을 바로 세워주는 거울로 보셔도 좋겠습니다.


    미국의 폴마이어 박사는 30대에 이미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실현시키고 달성시키는 키(Key)는 목표 설정이다. 
    나에게 어떻게 성공했노라고 묻노라면 성공의 75%는 목표 설정에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폴 마이어의 통계에 의하면 87%의 사람이 인생을 목표 없이 살므로 인생을 낭비하고, 10%는 목표를 생각만 하고, 3%만이 비전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행동한다고 합니다. 

    비전이 없는 인생은 마치 키 없는 배와 같아서 전진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창 1:2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좋은 것을 기대하고 목표를 세웠으면 행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말씀대로 네 입을 넓게 열어야 채워집니다. 야고보기자가 전한 말씀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  

    정의 :
    신앙생활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체계적·의식적으로 신앙을 실천하는 생활 전체를 의미합니다. 
    특징 :  공식적·규범적 실천
                 
    예: 교회 출석, 예배, 기도, 성경 공부, 헌금, 전도 등 
               영적 성장과 훈련 중심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믿음을 체계적으로 키우는 활동 

      1. 외적·내적 균형

        • 외적으로는 교회 공동체 활동, 내적으로는 기도와 말씀 묵상

    • 요약 : 신앙생활은 ‘믿음을 규칙적이고 체계적으로 실천하는 생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생활신앙 

    정의 :
    생활신앙은 믿음이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삶을 의미합니다. 
    • 즉, 신앙이 특정 시간이나 장소(예배당)에 국한되지 않고 일상생활 속 행동과 선택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 특징 :

      1. 자연스러운 신앙 실천

        • 예 : 직장, 가정, 학교에서 정직함, 사랑, 겸손, 봉사 등으로 신앙이 드러남

      2. 일상 중심

        • 믿음이 특별한 행사보다 평범한 삶 속에서 살아 있음

      3. 내적 가치관의 반영

        • 결정과 행동이 ‘하나님 중심’으로 이루어짐

    • 요약 : 생활신앙은 ‘믿음이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삶’입니다.

    3. 비교

    구분 신앙생활 생활신앙
    중심    교회, 예배, 의식적 활동      일상생활, 삶의 태도와 선택
    형태    체계적, 규범적      자연스러움, 내면화
    목표    영적 성장, 믿음 훈련      믿음이 삶 속에서 나타남
       주일 예배 참석, 성경 공부      직장에서 정직, 이웃 사랑, 가정에서 봉사
    • 쉽게 말하면, 신앙생활이 ‘공식적이고 계획적인 신앙 활동’이라면,

    • 생활신앙은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믿음’입니다.


     

    1️⃣ 신앙생활

    • 정의: 교회 생활, 예배, 성경 공부, 기도 모임 등 종교 활동 중심의 삶

    • 특징:

      • 제도적·규범적 접근: 규칙과 의무를 중요시

      • 외형적 실천 강조: “교회에 가고, 봉사하고, 기도한다” 같은 외적 활동 중심

      • 경험보다는 순종에 초점

    • 예시:

      • 매주 교회 예배 참석

      • 주일학교, 성경공부, 헌금 등 의식적 활동 참여


    2️⃣ 생활신앙

    • 정의: 일상 속에서 믿음을 실천하고 신앙이 삶과 통합된 상태

    • 특징:

      • 삶과 신앙의 통합: 직장, 가정, 인간관계에서 하나님 뜻을 실천

      • 내적·체험적 접근: 마음과 삶의 변화를 중요시

      • 자연스러운 신앙 실천: 규칙보다 사랑, 선함, 겸손 등 마음가짐 중심

    • 예시:

      •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기

      •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으로 결정을 내리기

      • 주변 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삶


    💡 핵심 차이

    구분 신앙생활 생활신앙
    초점 의식·행위 삶 속 실천
    접근 외형적·규범적 내적·체험적
    예배, 기도, 헌금 직장·가정·관계 속 신앙
    목표 신앙의 의무 수행 신앙의 삶 속 구현

    즉, **신앙생활은 ‘신앙을 하는 것’**에 가까운 반면,
    **생활신앙은 ‘신앙으로 사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좋아요! 그럼 제가 “신앙생활 vs 생활신앙”을 한눈에 비교하는 그림 도표로 만들어 드릴게요.

    여기서는 핵심 요소들을 시각적으로 나누어서 보여드리면 이해가 훨씬 쉽습니다.

    httpsimageschristiandailycokrdataimagesfull0454563jpg
    httpscdnkidokcomnewsphoto202501308570_90165_534jpg

    이 그림을 보면, 신앙생활은 주로 ‘의식과 규범 중심’, 생활신앙은 ‘삶 속 실천 중심’임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어요. 


    신앙생활 / 
    신앙이 ‘생활의 한 영역’에 머무는 상태 

    교회 가는 시간 = 신앙
    예배· 기도· 성경읽기 = 신앙의 전부
    삶과 신앙이 분리
    “나는 신앙생활은 잘해”라고 말할 수 있음

    특징  

    주일 중심  
    교회 안에서는 신앙인, 교회 밖에서는 평범한 사람
    신앙이 추가 옵션처럼 붙어 있음   

    생활신앙  /  삶 전체가 신앙이 된 상태 

    신앙이 삶의 기준과 방향
    선택· 관계· 말· 일 속에 예수의 마음이 스며 있음
    신앙과 삶이 하나가 됨
    “나는 믿음으로 살아”라고 말하게 됨 

    특징  

    월~토도 신앙
    직장· 가정· 관계 속에서 믿음이 드러남  
    신앙이 삶의 중심축 

     한눈에 비교

    구분 신앙생활 생활신앙

    중심        교회            삶 전체
    방향    삶 → 신앙         신앙 → 삶
    질문   예배 드렸나?        그리스도처럼 살았나?
    모습           분리                통합

    성경적 관점 한 문장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배를 드린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이 내 삶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

    •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 10:31)
      라고 말하죠.

    왜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에는 익숙한데 생활신앙은 서투를까? 
    핵심 이유는 신앙의 ‘장소’와 ‘주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이 익숙한 이유 
    정해진 시간· 공간이 있음 (예배, 교회, 모임) 
    “무엇을 하면 되는지”가 비교적 명확함 
    외부 기준이 중심 → 출석, 봉사, 헌신 
    즉, 신앙을 “하는 것” 에 익숙함

    생활신앙이 어려운 이유
     
    삶 전체가 무대 (가정, 직장, 관계, 감정)  
    기준이 외부가 아니라 마음의 방향
    통제가 안 되는 상황에서 드러남 (화, 상처, 손해)  
    신앙을 “사는 것” 은 훨씬 깊은 변화가 필요함  

    한 줄 요약 
    신앙생활은 관리 가능하지만, 생활신앙은 통제 불가한 삶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

    생활신앙으로 넘어가는 실제적인 3단계

    이건 ‘노력 → 성숙’이 아니라
    관점(觀點) → 정체성(停滯性) → 열매(果實)의 흐름이에요. 

    ① 기준의 이동 : 
    ❌ “이게 신앙적인가?” 
    ⭕ “이 상황에서 주님과의 관계는 어디에 있지?” 

    옳고 그름보다 누구와 함께 걷고 있는가가 기준이 됨  

    ② 정체성의 이동 : 해야 하는 사람 → 이미 사랑받은 자 
    ❌ “믿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살아야지” 
    ⭕ “이미 사랑받았으니 이렇게 반응하게 되네”

    순종이 의무가 아니라 반응이 됨  

    ③ 방향의 이동 : 결과 중심 → 열매 중심 
    ❌ “잘했나? 실패했나?” 
    ⭕ “사랑의 열매가 맺히고 있나?”

    성공 / 실패보다 사랑· 진리· 인내가 자라고 있는가를 봄   

    요한일서가 말하는 ‘믿음–사랑–삶’의 연결 구조

    요한일서는 이걸 끊을 수 없는 한 묶음으로 이해한다.   

    구조는 이렇게 흘러가요  믿음 → 사랑 → 삶

    ① 믿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요일 5:1)

    • 믿음 = 지적 동의 ❌

    • 믿음 = 새 생명의 시작 

    ② 사랑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 하나님께로서 났다면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본성 

    ③ 삶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 삶은 억지 순종 ❌

    • 삶은 사랑이 흘러나온 결과

    요한일서의 논리는 이거예요: 
    믿는데 사랑하지 않는다면 → 믿음이 아니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삶이 없다면 → 사랑이 아니고
    삶이 없다면 → 처음부터 믿음이 아닌 것  

    정리 한 문장  
    신앙생활은 교회에서 드러나고, 
    생활신앙은 삶에서 증명되며,
    요한일서는 이 둘을 절대 분리하지 않는다.












      첫째, 인생 최대의 질문 영생에 대하여

      본문 25절에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율법사의 질문은 순수하지 못하였습니다. ‘시험하여’로 번역된 ‘에크페이라조’는 신약성경에서 4회 이용되었는데(눅 4:12, 마 4:7, 고전 10:9) 그 모든 용례가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악으로 시험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습니다. 교활한 마음을 품고 예수님께 나온 율법사는 영생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에 대한 난해한 질문을 통해 예수가 이단적 발언을 하기를 내심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사의 이 질문은 비록 주님을 시험하기 위한 질문이었지만 그의 질문 자체는 참으로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이 영생과 구원에 대한 질문만큼 중요하고 심각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새해에 참으로 많은 계획과 많은 소원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많은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영생과 구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나님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26절에 보면 주님은 율법사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을 주시는 대신에 한 가지 역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역질문을 자세히 들어보면 율법과 영생의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율법에 영생의 원리가 담겨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다 행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율법을 온전히 행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은 율법을 통해 영생의 원리를 알고 그에 따름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성경은 인생 최대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줍니다. 그래서 주님도 요 5:39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성경은 생명의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경을 귀히 여기고 날마다 읽고 묵상하며 성경의 지식에 순종하여야 하겠습니다. 영생의 원리가 담긴 책이 우리 중에 있는데도 그것을 소홀히 하며 읽지 않는다면 스스로 영생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행위요 자기 생명을 귀히 여기지 않는 행위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와 같은 차원에서 예배 시간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암송하고 있는 ‘쉐마’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명기 6:4,5의 말씀이고 율법사는 예수님의 질문에 주저 없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본문 27절의 말씀에서 답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영생을 얻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사랑하라

      오늘 본문에서 영생을 얻는 방법으로 소개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쉐마’입니다. 신앙고백, 좌우명, 가훈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마태는 마 22:37 이하에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던진 질문을 역으로 묻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답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중에 첫째, 둘째 계명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소개하시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규정된 말씀을 소개하시고 오늘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취해야 할 합당한 태도가 어떤 것인지 알게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의 사도 요한은 요일 4:16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랑이 곧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곧 사랑이시다’라는 말입니다. 사랑이 없는 하나님은 존재할 수도 없고, 사랑을 말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 역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없이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으며, 한 영혼에 대한 사랑 없이 어떻게 전도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예수님을 따라 좁은 길을 걸을 수도 없고 주님의 마음으로 일곱 번씩 일흔 번씩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핵심은 바로 사랑입니다. 또한, 사랑은 믿음의 성장을 나타내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성장했다’ ‘신앙심이 좋아졌다’와 같은 말을 자주 합니다만 이런 말들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성경 공부입니까? 아니면 예배 출석률입니까? 헌금 생활 혹은 봉사와 섬김입니까? 일부는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무리 잘했다 하더라도 그 마음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결코 ‘믿음이 성장했다’, ‘신앙심이 깊어졌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 인격적으로, 그리고 절대 헌신의 자세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요일 5:3 말씀입니다.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이 사실에 무지했으므로 실패한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식 종교의 틀에 매여 이 사람들의 전철을 따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가장 완전한 사랑 고백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며,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셋째, 이웃을 사랑하라.

      오늘 본문 27절 하 반절에 보면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마태는 이 계명을 둘째 계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첫째 계명은 십계명의 전반부 제1계명에서 4계명까지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고, 둘째 계명은 후반부 제5계명부터 10계명은 사람과 관련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르침과 관련하여 두 가지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는 이웃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같은 맥락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표가 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랑하면서 이웃에 대한 의무는 소홀히 하는데, 성경은 이것이 잘못된 신앙이요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요일4:20, 21 말씀입니다.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다른 하나는, 이것이 우리에게 거룩한 명령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결코 회피해서는 안 될 의무라는 점입니다. 사람의 요청에 대해서 우리는 ‘예’ ‘아니요’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비록 힘 있는 사람의 요청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명령만은 예외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구속력을 가진 것이어서 우리에게는 이것의 가부를 선택할 여지가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순종만이 우리의 유일한 선택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시며 역사의 주권자이시므로(행17:25) 누구든지 거역하는 이들은 반드시 망하게 되고 맙니다.

      어떤 이들은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경건한 것처럼 자신을 꾸밉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경건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경건의 최고봉입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헐벗고 굶주리는 자들, 인권을 유린당하고 소외된 수많은 사람을 외면한 채 종교적 열광주의에 빠지는 것은 경건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알지 못하시며 기억하는 법도 없으십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이 점을 염두에 두고서 형제와 이웃 사랑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다음 절 28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율법사가 27절에서 율법의 핵심을 말하자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율법사가 계명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인정하거나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실천함으로써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 14:21 말씀입니다.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현재 하나님의 계명을 힘써 지키고 있거든 기뻐하십시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기에 기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그의 계명들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에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일을 마다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는 외적 표현임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계명에 대한 충실 지수로 당신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무게를 달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영생 얻는 비결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계명 중에 첫째요 둘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계명을 지킬 때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모든 성도 여러분, 2022년에는 우리 교회에 주신 비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계명을 지켜서 자신은 영생의 복을 받고 이웃에게도 영생을 받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적 믿음과 순종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에요.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죠. 성경에서는 믿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에서 출발해요. 우리가 고난이나 어려움을 겪을 때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결국 선한 길로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확신이 바로 믿음이에요. 믿음은 단순히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갖는 것이 아니라, 힘든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진정한 의미를 찾아요. 이 믿음은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며, 어려운 상황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어줍니다.

    하지만 믿음은 마음으로만 끝나면 온전하지 않아요. 진짜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해요. 믿음은 단순히 생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드러나는 실천적인 모습이어야 합니다. 행동으로 이어진 믿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정한 믿음이랍니다.

    순종이란 무엇일까요?

    순종은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나 계명을 따르는 것이죠. 하지만 순종은 단순히 규칙을 지키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기 때문에 기쁘게 따르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요한복음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순종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따르고 싶어지는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이에요. 마치 부모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기쁘게 따르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순종은 자발적인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이런 자발적인 순종은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을 줍니다. 억지로 하는 일은 부담과 스트레스를 줄 수 있지만, 사랑에서 비롯된 순종은 오히려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또한, 순종은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우선시하는 마음을 필요로 해요. 때로는 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항상 선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삶에서 실천하면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어요. 이는 단순히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결단에서 시작됩니다.

    성경 속 순종의 예시

    노아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방주를 지었어요. 당시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했죠. 결국 그의 순종으로 가족과 인류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경적 믿음과 순종 실천방법 4가지

    믿음과 순종은 머리로 아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해요. 어떻게 하면 더 잘 실천할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의 말씀 묵상하기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믿음과 순종이 가능해요.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찾아보세요.

    2. 기도로 힘을 구하기

    순종은 때때로 우리의 힘으로는 어려울 수 있어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세요. 하나님은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3. 작은 것부터 시작하기

    큰 믿음과 순종은 작은 일부터 시작돼요. 작은 계명이라도 성실히 따르다 보면 점점 더 큰 믿음과 순종을 이룰 수 있어요.

    4.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기

    순종의 결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선한 결과를 이루신다는 것을 기억하며 맡겨보세요.




    단두대

    단두대(斷頭臺, guillotine) 또는 기요틴프랑스어 / guillotine)은 프랑스 혁명 당시 죄수의 목을 자르는 형벌인 참수형을 가할 때 사용한 사형 기구이다. 
    이 기구는 1792년 정식 사형 도구가 되었다.

    참수형을 도부수가 시행할 경우, 해당 도부수는 고도의 검술을 필요로 하는데 도부수의 검술 실력이 부족하거나 참수형 집행 도중 실수를 할 경우 사형수의 목을 단번에 날리지 못하고 베다 말거나 참수검이 목이 아닌 뒷통수나 등에 박히기도 한다. 이런 불편한 점을 개선하고 빠른 시간 안에 참수형을 집행하기 위해 단두대를 개발했는데 단두대는 한 마디로 자동 참수 기계이다. 무거운 칼날을 줄로 고정시킨 형태이며 줄만 끊으면 칼날의 무게로 인해 칼날이 떨어져서 사형수의 목을 자동으로 절삭하는 기계이다.

    1791년에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국민의회에서 계급에 상관없이 참수형에 처할 죄수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왕의 주치의이자 외과학회의 사무국장이던 안토닌 루이 박사와 파리 의료기기부의 해부학 교수인 조제프이냐스 기요탱 박사를 필두로 이 건에 관한 위원회가 형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이탈리아의 “만나이아”와 스코틀랜드의 “메이든”, 그리고 “헬리팩스 지빗” 등의 참수기구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전처럼 무딘 도끼나 교수형으로 사형수의 형을 집행하는 것은 인도적이지 않고, 형집행자들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주기에, 더군다나 많은 사람들에게 형을 집행하기에는 검이나 도끼는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기에 기구로 형을 집행하자는 주제의 논문으로 제출하였다. 기요탱은 이 기구로 사형수들이 고통없이 죽을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실제로 이 기구의 설계에 기요탱 박사의 공헌은 미미하고, 앙투안 루이 박사가 기요탱 박사가 제안한 생각을 발전시켜, 설계한 뒤 이 기구(단두대)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 사형기구가 루이종, 또는 루이세트로 불렸으나, 언론에서 기억하기 쉽다는 이유로 조제프이냐스 기요탱 박사의 이름을 따서 이름붙여졌다. 그 결과 기요탱 박사의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단두대의 구조는 길게 세워진 2개의 기둥 사이로 비스듬하고 묵직한 무쇠칼날이 꼭대기에 밧줄로 매달려져 있다. 사형수는 틀의 아랫부분에 목이 칼날 바로 밑부분에 위치하도록 고정되며, 사형 집행인이 밧줄을 끊으면 칼이 떨어져 목을 자르는 것이다.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도 단두대에 의해 참수되었으며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인 당통 역시 이 기구로 인하여 죽었고, 과학자 라부아지에도 여기에서 죽었다. 단두대로 많은 사람을 죽인 로베스피에르는 역설적으로 이 기구에 의해 죽었다. 기요탱 박사도 단두대에서 죽었다고 전해지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는 1814년 5월 26일에 자연사하였다.

    프랑스에서 단두대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때는 1977년 9월 10일이었으며, 사형 폐지를 내건 프랑스 사회당이 집권여당이 된 1981년사형제를 폐지되며 단두대 사용도 종료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나치당은 단두대를 이용해 반대파를 학살했다. 이렇게 살해된 희생자 수는 공식적으로 2만명을 넘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 정권은 정치적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하 단두대를 사용하였다. 그 밖에도 벨기에, 스웨덴, 룩셈부르크도 단두대를 사용한 바 있다.

    단두대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부터, 기요탱 박사의 주장처럼 이 사형도구가 죄수의 고통을 최소화시켜주는 것이 맞느냐는 논란이 있었다. 과거의 사형 방법과 비교하면 고통이 덜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적었으나, '인도주의적' 차원으로 논의할 경우 사형수의 고통 여부가 논쟁거리가 되었다. 게다가 단두대의 신속함이 죄수의 고통을 더 지속시킨다는 주장도 있었다. 기요틴 처형방법은 두개골에 충격을 별로 주지 않기 때문에, 교수형이나 다른 과격한 사형 방법과는 달리 죄수의 의식이 오랫동안 유지된다는 것이다. 단두대 처형의 몇몇 목격자들이 참수 이후 의식이 남아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본 논란에 대한 과학적 합의는 없었다.

    단두대 처형에 대해 대중들은 절단된 머리가 눈을 깜빡였다든지, 말을 했다든지, 눈동자를 움직였다든지, 입을 움직였다고 이야기해 왔다. 여러 국가의 해부학자들과 과학자들은 1956년 전까지 잘린 사람 머리에 대한 명료한 실험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불가피하게 결과물들은 이야깃거리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죄수의 이름을 부르니 대답했다든지, 바늘로 찌르자 고통을 느끼는 모습을 보였다는 등의 진술은 의식이 수반된 행위가 아닌, 근육이 무작위적으로 움직였거나 자동 반사 행동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대뇌 혈액이 대량으로 유출될 경우 수 초 내로 인간의 두뇌는 의식을 잃을 수 있다.

    단두대가 사용될 동안 참수 이후 의식이 살아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계속해서 논란이 되어 왔다.

    다음은 1905년 6월 28일 사형수 앙리 랑기유(Henri Languille)의 머리를 관찰했던 보히유 박사(Dr. Beaurieux)가 작성한 보고서이다.

    이것이 내가 참수 이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죄수의 눈꺼풀과 입술은 5~6초간 불규칙적이며 리드미컬하게 수축했다. 이 현상은 목의 절단 후 관찰에 대한 같은 환경의 다른 연구 결과에서도 확인되었다...

    나는 몇 초간 기다렸다. 경련이 멈췄다. [...] 나는 강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랑기유!" 나는 눈꺼풀이 경련 없이, 천천히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나는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해 심사숙고하여 주장하려고 한다-눈꺼풀은 분명히 차분하게, 정상적으로, 마치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듯이 움직였다.

    다음으로 랑기유의 눈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으며 동공은 집중되었다. 그때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죽어가는 사람의 감정이 담기지 않은 흐릿하고 희미한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부정할 수 없이 살아있는 눈을 마주하고 있던 것이다. 몇 초 뒤, 눈꺼풀은 다시 닫혔다[...].

    나는 다시 한번 그를 불렀고, 눈꺼풀은 다시 천천히 열렸다. 그 부정할 수 없이 살아있는 눈은 나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첫 번째보다도 더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리고 눈꺼풀은 다시 닫혔지만, 완전히 닫히지는 않았다.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그리고 멍한, 죽은 사람의 눈이 되었다.[1][2]

    포스트 시즌이나 1부 리그 강등 위기의 하위 팀끼리 경기를 해서 강등팀을 결정 짓는 경기를 단두대 매치(斷頭臺 -)라고 부르기도 한다.[3] 주로 야구, 축구 등 각종 프로 스포츠 경기에서 사용된다.

    FIFA 월드컵 등 국제대회의 경우 패하면 무조건 탈락하는 경기를 단두대 매치라 하며 플레이오프는 전부 단두대 매치이다.


    거짓말 탐지기

    1935년 리차드 하우프트만 재판에서 검찰측 전 증인이었던 아서 쾰러에게 개량된 거짓말 탐지기를 시험하는 미국의 발명가 레오나르드 킬러

    거짓말 탐지기(영어: lie detector) 또는 폴리그래프(영어: polygraph)는 사람진실을 말하는지 거짓말을 하는지를 알아내는 기계이다. 검사를 받는 사람의 맥박, 혈압, 호흡, 같은 신체 기능의 변화를 측정하여 그래프로 나타낸다.

    1921년 미국 경찰관이자 법의학자인 존 라슨이 개발했다.

    검사를 받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으면 그래프에 변화가 생기는데, 이것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정서적 반응 때문에 나타난다. 그러나 항상 결과가 정확한 것만은 아니다.

    2004년부터 대한민국 검찰청에서는 심리생리검사(Psychophysiological Detection of Deception)란 용어를 사용해 오고 있다.[1]

    2001년 미국 아이오와주 뇌지문 연구소가 개발한 뇌지문 탐지기는 거짓말 탐지기의 일종인데, 그해 뉴욕타임스 선정 미국내 5대 발명품에 올랐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자주 한다. 8분마다 한 번꼴, 심지어 하루 200번쯤이란 연구 결과도 있다.[2] 이전에는 거짓말 탐지의 수단으로 고문을 사용했다. 전후진술의 모순을 지적하는 방법과 고문 이외에는 별다른 거짓말 탐지 수단이 없었다. 1895년 체사레 롬브로조는 경찰 사건에서 혈압 변화를 측정하여 거짓말을 탐지하려고 했다.

    2007년 모 대학교 심리학과와 대한민국 검찰청이 공동으로 수행한 연구에서, 거짓말 집단의 실험 참가자들에게 모의 범죄를 저지르게 한 후 발각되지 않도록 거짓말을 하도록 하였으며 진실 집단의 실험 참가자들에게는 사실대로 진술을 하도록 지시한 후 그 다음날 대검찰청 심리분석실에서 심리생리검사를 받도록 하였는데 판정의 정확도가 100%인 것으로 나타났다.[3]

    2007년 3월 5일, 이탈리아 파두아 대학 쥬세페 사르토리 교수 연구팀은 정확도가 약 80% 수준이었던 기존의 거짓말 탐지기에 비해 정확도를 90∼93% 수준으로 대폭 끌어올린 새로운 거짓말 탐지기를 개발했다. 새로운 탐지기는 무엇보다 피의자가 어떤 질문을 받았을 때 그것에 반응하고 답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함으로써 거짓말을 탐지해 낸다.[4]

    2015년 12월 10일, 미국 미시간 대학교 연구팀은 행동특성으로 거짓과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을 구분해냈다.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양손을 더 많이 사용하며, 상대방의 눈을 더 자주 마주쳤다. “음…”과 같은 감탄사를 더 자주 내뱉었고 “내가” 혹은 “우리가”와 같은 말보다 “그가” 혹은 “그녀가”와 같이 다른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 얼굴을 자주 찌푸리거나 끄덕인다. 거짓말탐지기의 사용은, 검사 동의가 필요하고, 전문가와 장비가 필요한데, 일상적인 대화만으로, 이러한 행동특성을 체크하여, 75%의 정확도로 거짓말쟁이를 판단할 수 있었다.[5]

    폴리그래프는 개발도 미국 경찰이 했고, 현재 최대 사용자도 미국 경찰과 미국 정보기관이다. 그러나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의 법정에서는 미국 경찰관이 개발한 이 기기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분위기다. 즉, 경찰에서는 사실상 많이 쓰지만, 법정에서는 법률상 배척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사실상 70-90%는 유효하나, 100%인 법률상 지위까지 획득하지는 못한 상태에 있다. 완벽하게 유효하지는 않다. 실무상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으나, 아직, 최종적인 법적 지위까지 획득하지는 못했다는 의미이다.

    메사추세츠, 메릴랜드, 뉴너지, 델라웨어 주에서는 채용의 조건으로, 또는 근로자가 범죄의 의심을 받는 경우에, 사장이 근로자에게 폴리그래프 검사를 명령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주법률을 제정했다. 1988년 근로자 폴리그래프 보호 법률이 제정되어, 사장이 무차별적으로 근로자에 대해 폴리그래프 검사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사장이 근로자에게 폴리그래프 검사를 요구할 수 있는 예외도 규정했다. 미국에서는 뉴멕시코주를 제외하면 거짓말탐지기의 증거능력법원에서 인정하지 않는다.[6]

    1987년 대법원 판례에서 폴리그래프 검사결과를 증거로 채택하는 데 반대했다. 그러나 이 판례에도 불구하고 캐나다 경찰들은 매우 많이 사용하고 있다.

    거짓말탐지기 검사결과가 증거능력이 있는 경우에도 그 검사 즉 감정의 결과는 검사를 받는 사람의 진술의 신빙성을 가늠하는 정황증거 로서의 기능을 다하는데 그치는 것이다.[7]년 기준으로는 거짓말 탐지기, 뇌지문 탐지기, 고해상도 적외선 카메라의 3중 장비를 설치해, 거짓말을 탐지한다.

    경찰청 과학수사관리관은 1964년부터 거짓말검사 장비를 도입하여 2016년 기준으로는 경찰 수사와 관계된 거짓말 탐지를 실시하고 있으며 연간 8,000여건 정도를 수행한다.

    2010년 5월 5일 대법원 판례에서, 폴리그래프의 사용은 불법적이고 위헌적이라고 판시했다. 인도 헌법 20조 3항에는 어떤 피의자도 자신에 불리한 증인이 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피의자 자신이 스스로 폴리그래프 검사를 요구하면 합법적이게된다.

    미국 정보기관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사건의 경우, 내부 스파이나 배신자를 찾기 위해, "전수검사"를 실시한다고 보도되었다. 즉 기관장 이하 모든 직원들을 검사하는 방식이다. 검사에 불응하면 피의자 용의자 등으로 분류한다. 의심자가 범죄자라는 것은 아니지만, 더는 중요임무에 투입될 수 없다.

    부분전수검사는, 기밀이 유출된 의심스러운 부서의 전직원만 검사를 하는 방식이다. 역시, 자발적 검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면, 의심자로 분류된다.

    자신의 진술을, 전과나 기타 정황 때문에 잘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경우, 자신의 결백이나 진실성을 담보하기 위해 스스로 거짓말탐지를 요구하는 방식도 있다.




    인간의 학명  


    인간의 학명은 다소 복잡하다. 약 1천 200만년 전 태초의 유인원이었던 라마피테쿠스는 그 이후 진화를 거듭하다가 네안데르탈인을 거쳐서, 마침내 1만년 전에 우리 인간의 직접 조상인 크로마뇽인으로까지 진화한다.

    동물분류학에서는 현재의 인간을 사피엔스 과(種, species Sapiens), 호모 속(屬, genus Homo), 호미니드 과(科, family Hominid), 호미노이드 초과(超科, superfamily Hominoid), 앤스로포이드 아과(亞目, suborder Anthropoid), 영장류 목(目, order Primate)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고 있다.

    문명사가인 호이징하(J. Houizinga)는 3가지 개념으로 정리한 바가 있다(J. Houizinga, 1993). 즉,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강조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piens), 무언가를 직접 만들고 제작하는 특성을 강조하는 호모 파베르(Home faber), 그리고 인간이 즐길 줄 아는 특성, 그래서 놀이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착안하여 부르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가 그것이다. 호이징하는 인류문명, 심지어 전쟁까지도 인간의 놀이본능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와 같은 지적은 이른바 ‘문화우위의 시대’로 가고 있는 현 시대의 인간을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호모 그라마티쿠스(homo grammaticus) : 문법적 인간

    호모 그라피쿠스(homo graphicus) : 그림 그리는 인간

    호모 나랜스(homo narrans) : 이야기하는 사람

    호모 나이트쿠스(homo nightcus) : 밤을 낮 삼아 활동하는 인간

    호모 날리지언(homo knowledgian) : 신지식인

    호모 네간스(homo negans) : 예 또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

    호모 노마드(homo nomade) : 유목하는 인간

    호모 노부스(homo novus) : 새로운 인간(피조물이 아닌 인간)

    호모 노에티쿠스(homo noeticus) :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는 인간

    호모 넷플리쿠스(homo Netflicus) : '인터넷(Net)'과 '영화(Flicks)'를 합성한 이름인 '넷플릭스'에 빠진 인간

    호모 데멘스(homo demens) : 미친 인간, 광기의 인간

    호모 데우스(homo deus) : 신이 된 인간

    호모 데지그난스(homo designans) : 디자인하는 존재

    호모 도미난스(Homo dómĭnans) : 지배하는 인간

    호모 듀플렉스(homo duplex) : 이중인, 이중적인 인간

    호모 드라마쿠스(homo dramaticus) : 드라마에 몰입하는 인간

    호모 디스컨텐트: 불만의 인간

    호모 딜리전트 : 부지런한 인간 

    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 : 일하는 인간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 : 약탈하는 사람

    호모 레시프로쿠스(homo reciprocus) : 호혜적 인간, 상호 의존하는 인간

    호모 레지스탕스(homo resistance) : 저항하는 인간

    호모 렐리기우스(homo religius) : 종교적 인간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 언어적 인간, 말하는 사람

    호모 루덴스(homo ludens) :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두스(homo ludus) : 게임하는 인간

    호모 마지쿠스(homo magicus) : 마술인

    호모 모벤스(homo movence) : 이동하는 인간, 적극적인 사람

    호모 모빌리언스 (Homo Mobilians) : 모바일 신인류

    호모 모빌리쿠스(homo mobilicus) : 휴대폰을 생활화한 인류

    호모 무비쿠스(homo movicus) : 영화를 즐기는 인간

    호모 무지쿠스(homo musicus) : 음악적 인간

    호모 미디어쿠스(homo mediacus) : 미디어적 인간

    호모 볼런타스(homo voluntas) : 자원봉사하는 인간

    호모 부커스(home bookers) : 책 읽는 인간

    호모 비디오쿠스(homo videocus) : 비디오를 즐기는 인간

    호모 비블로스(homo biblos) : 기록의 인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 떠도는 인간

    호모 비올로기쿠스(homo biologicus) : 생물적 존재로서의 인간

    호모 사이버네티쿠스(homo cyberneticus) : 온라인에 연결된 인간

    호모 사이언티피쿠스(homo  ) : 과학하는 인간

    호모 사커스(homo soccers): 축구하는 인간

    호모 사케르(homo sacer): 벌거벗은 인간,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지혜 있는 사람, 현명한 인간

    호모 서치엔스(Homo Searchiens) 검색하는 인간

    호모 서치쿠스(homo searchcus) : 검색형 인간

    호모 섹스쿠스(homo sexcus) : 몸으로 교감하는 사람

    호모 소시올로지쿠스(homo sociologicus) : 사회적 동물

    호모 소키에스(homo socies) : 사회적 인간

    호모 수페리오르(homo superior) : 초인, 영웅적 인간

    호모 스투디오수스(homo studiosus) : 공부하는 인간

    호모 스피리투스(homo spiritus) : 영혼인(靈魂人), 영적 인간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공생인(共生人), 더불어 사는 인간

    호모 아르텍스(homo artex) : 예술인

    호모 아카데미쿠스(homo academicus): 학문적 인간

    호모 아쿠아티쿠스(homo aquaticus): 수중적 인간

    호모 아토미쿠스(homo atomicus): 원자 인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직립하는 인간

    호모 에로스(homo eros) : 성애적 인간

    호모 에루디티오(homo eruditio) : 학습하는 인간

    호모 에스테티쿠스(homo aestheticus) : 미학적 인간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 : 희망하는 인간

    호모 에콜로지쿠스(homo ecologicus): 생태학적 인간

    호모 에티쿠스(homo ethicus): 윤리적 인간

    호모 엑세쿠탄스(Homo Executans) : ‘처형(execute)자로서의 인간’

    호모 엑스페르투스 (실험 인류의 미래를 열다, HOMO EXPERTUS)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 공감하는 인간

    호모 오일리쿠스(homo oilicus): 석유 문명에 의존하는 존재

    호모 워커스(homo Walkers): (두 발로) 걷는 인간

    호모 이미지쿠스(homo imagicus):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경제적 인간

    호모 인사피엔스(homo insipiens): 현명하지 않은 인간, 어리석은 인간

    호모 인터넷티쿠스(homo interneticus): 인터넷을 하는 인간

    호모 자펜스(homo zappens): 관심을 자꾸 옮기는 인간

    호모 저스티스(Home justice): 정의적인 인간

    호모 캐리어스(homo carriers): 매개체적 인간

    호모 커뮤니쿠스( homo ) : 소통하는 인간

    호모 컨버전스 : (homo convergence): 융합형 인간

    호모 케이던스 : 페달질하는 인간, 즉 자전거타는 인간

    호모 코레아니쿠스(homo coreanicus) 근대 이후부터 탈근대 한국사회 자화상

    호모 코뮤니타스 : 화폐에 대항하는 공동체

    호모 코어밸리우스(Homo Corevalius) : 핵심가치 배가시키는 인간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 소비하는 인간

    호모 콰렌스 (Home quaerens) :질문하는 인간

    호모 쿠페라티부스(homo cooperativus): 협동적 인간

    호모 쿨투랄리스(homo culturalis): 문화적 인간, 제도적 인간

    호모 쿵푸스(homo kongfus): 공부하는 인간

    호모 큐라스(homo curas) : 보살피는 인간

    호모 크레아투라(homo creatura): 창의적 인간

    호모 테크니쿠스(homo technicus): 기술적 인간

    호모 텔레포니쿠스(homo telephonicus): 전화하는 인간, 통신하는 인간

    호모 파덴스 (Homo Fadens): 도구적 인간 ‘호모 파베르’와 놀이 인간‘호모 루덴스’가 융합한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적 인간

    호모 팔락스(homo fallax): 속이는 인간

    호모 페스티부스(HOMO FESTIVUS) : 축제하는 인간

    호모 포비아(homo phobia): 동성애 공포증

    호모 포에티쿠스(homo poeticus): 시적인 인간

    호모 포토쿠스(homo photocus): 사진 찍는 인간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정치적 인간,

    호모 프로그레시부스(homo progressivus): 우주적 인간

    호모 픽토르(homo pictor): 기호의 인간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손재주 있는 인간

    호모 휴리스틱쿠스(homo heuristicus): 빠르고 쉽게 (의사)결정하는 인간

    호모 히스토리쿠스(Homo Historicus) : 역사적 인간

    호모 렐리기오수스 (Homo religiosus) : 신앙하는 인간

    호모 디카쿠스 (Homo dicacus) :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는 인간

    호모 카디우스 : 카드를 사용하는 인간

    호모 아만테스(homo amantes) : 사랑하는 사람

    호모 볼란스(Homo Volans,) : 날아다니는 사람 

    호모 볼룬타스(homo voluntas) : 자원봉사하는 인간



    2월 7일(토) 요한일서 4:19
    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가 먼저(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We love because he first loved us

    서머셋 모옴(W. Somerset Maugham, 1874-1965)
    “레드(Red)”

    세 사람의 세상 사랑 이야기입니다.

    잘 생긴 20살의 백인 청년 레드는 16살의 아름다운 섬 원주민 처녀 새리와 첫눈에 반한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정열적 사랑도 잠깐, 레드는 선원이 부족한 포경선에 납치되어 돌아오지 않습니다. 
    레드가 정말 강제로 납치된 것인지, 정말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었는지는 의문스러운 정황이 있습니다. 
    그러나 새리는 레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한편 다른 주인공 닐슨은 감상주의자입니다. 
    레드와 새리의 사랑 이야기 때문에 그 섬에 신비스러운 아름다움까지 느낀 그는 새리가 레드를 마음에 두고 있는 줄 알면서도 반강제로 결혼합니다.

    30년이 지나 흉한 모습으로 늙은 속물 레드가 나타납니다. 
    새리는 오랜 세월 기다린 그를 보고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환상에서 벗어난 닐슨은 새리를 떠날 결심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음(kardia)을 다하고, 목숨(psychē)을 다하고, 뜻(dianoia)을 다하고, 힘(ischyos)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과학적으로는 알이 먼저

     
    닭은 진화의 결과물 
     ‘닭이 아닌 어떤 새’가 낳은 에서, 유전적 변화로 최초의 닭이 태어났다는 설명이 가장 설득력 있다. 
     그래서 닭의 알이 아니라 ‘알 자체’가 먼저라는 쪽  

    논리적으로는 닭이 먼저

      
    “닭의 알”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닭을 전제 
      닭이 있어야 ‘닭의 알’이 성립하니까, 정의상 닭이 먼저라는 주장도 가능 

    철학적으로는 질문이 핵심

     
    이 질문은 사실 “원인은 어디서 시작되나?”, “시작은 단일한가?”를 묻는 질문 
     시작은 하나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동시에 성립한다는 메시지  
     그리고 요즘 나누는 대화 흐름에 살짝 얹자면, 신앙적으로는 종종 이렇게 연결되기도 해요 
     인간의 사랑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였다.

    이 말씀의 핵심은 순서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먼저거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사랑은 출발점이 아니라 응답입니다.
    사람이 노력하고 수고하여 만들어낸 감정이 아니라, 이미 부어진 사랑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의무나 성과가 아니라 은혜의 열매라고 합니다.
    “사랑해야 한다”가 아니라 “이미 사랑받았다”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할 때조차,
    그분의 사랑은 취소되지 않은 채 먼저 와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앞의 말씀들과 연결하면 더 선명해져요.
    두려움이 사라지고, 심판 날에 담대함이 생기는 이유도 내 사랑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의 선행성 때문이에요.

    그래서 신앙의 핵심 질문은 이거인 것 같아요. 
    “내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가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사실 안에 지금 거하고 있는가?”

    이 말씀은 우리를 부담에서 풀어주고,
    동시에 사랑으로 다시 보내는 문장이에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사랑의 출발점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
    우리는 사랑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받아 흘려보내는 사람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의무나 성과가 아니라 응답이고, 자랑이 아니라 은혜의 열매예요.

    내가 사랑이 식을 때도 → 그분의 사랑은 먼저였고, 여전히 먼저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어려울 때도 → 내가 이미 사랑받은 자라는 사실이 기준
    심지어 나 자신을 미워하게 될 때조차 → 그가 먼저 나를 사랑하셨다
    결국 이 말씀은 우리를 이렇게 자유롭게 해요. 

    “잘 사랑해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이미 사랑받았기에 사랑할 수 있다.”

    요한일서 전체 흐름 속에서도,
    이 문장은 담대함의 근거이자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의 뿌리예요.
    뿌리가 은혜이니, 열매도 은혜로 맺히는 것이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
    사랑의 출발점이 ‘나’가 아니라 ‘그’라는 고백.

    조건이 아니라 은혜
    우리가 잘해서, 믿음이 커서, 사랑할 만해서가 아니에요.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알지도 못할 때,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어요. 

    사랑은 반응이지 업적이 아님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증명”이 아니라 “응답”이에요.
    억지로 사랑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이 흘러나오는 거죠.  

    두려움을 밀어내는 근거


    내가 먼저 다가간 사랑이면 흔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이 먼저 시작한 사랑이기에
    실패해도, 넘어져도, 다시 돌아갈 자리가 있어요.  

    바로 이 ‘먼저’라는 단어가 우리의 삶에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조건이나 자격을 갖추기 이전에, 우리가 아직 연약하고 부족할 때조차 하나님은 먼저 사랑으로 다가오셨다. 이는 단순히 신앙의 영역에서만 통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관계에서도 깊은 통찰을 제시한다. 사람들과 얽히고설킨 삶에서 ‘먼저 사랑하는 태도’를 배운다면, 우리는 가정, 직장, 사회 모든 곳에서 조금 더 따뜻하고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

    “먼저” 사랑해주신다는 것의 의미

    세상에서 주고받는 사랑에는 종종 계산이 깔려 있다. 누군가 내게 잘해주면 그만큼 돌려줘야 한다는 의무감, 혹은 투자한 만큼의 사랑을 기대하는 마음 등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요한일서 4:19이 보여주는 사랑은 이러한 ‘인간적 거래’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1. 조건 없는 사랑의 시작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해지기를 기다리거나 특정 조건을 충족했을 때 비로소 사랑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부족하고 어긋나 있을 때에도 먼저 다가오셨다. 이 사실은 우리의 일상 속 관계에도 시사점을 준다. 누군가가 나를 실망시켰거나 서운하게 했어도, 한 발 먼저 이해하고 사랑을 건네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에는 회복의 가능성이 생긴다. ‘먼저’라는 말이 지닌 힘이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2. 우리 사랑의 근원

    하나님이 먼저 베풀어주신 이 사랑은 우리 사랑의 근원이 된다. 이를테면, 누군가에게서 따뜻한 말을 들으면 그 온기를 다시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먼저’ 사랑을 온전히 느낀 사람이라면, 그 사랑을 흘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솟아난다. 이렇듯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는 말씀은 우리의 사랑이 인간적 조건이나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사랑에 기인함을 밝히고 있다. 

    요한일서 4:19의 메시지를 듣고 “맞아, 저 말씀 정말 좋지” 하고 넘어가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말씀을 통해 마음이 움직였다면, 그것을 실제 관계 속에서 구현해보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누군가에게 쑥스럽지만 미소를 건네는 일부터가 그 시작일 수 있다.

    1) 가정에서의 사랑 실천

    가정은 때로는 밖보다 더 치열한 감정의 장이 된다. 하루 대부분을 함께 보내다 보니, 작은 갈등이 큰 다툼으로 번지기 쉽고 상처도 깊게 남는다. 이런 환경에서 “내가 먼저 사랑을 베풀겠다”고 결단하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식사를 마친 후 먼저 설거지를 시작한다든지, 매일 바쁜 일상 속에서도 가족들에게 “고마워” “사랑해”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건네는 것이다. 비록 사소해 보이지만, ‘먼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닮으려는 이 작은 실천은 가정의 분위기를 서서히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2) 직장·학교·사회생활에서의 적용

    삶의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직장이나 학교, 사회 모임 속에서도 ‘먼저 사랑하기’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경쟁이 치열할수록, 사람들은 서로를 위협적인 경쟁 상대로 보며 경계심을 드러내기 쉽다. 그러나 누군가가 먼저 다가가 친절을 베풀고 협력을 제안한다면, 그곳에는 더 유연하고 따뜻한 인간관계가 피어난다. 때로는 ‘이러다 나만 손해보는 것 아니야?’라는 마음이 들 수도 있지만, 길게 보면 그런 ‘먼저 사랑하기’는 곧 인간관계의 든든한 기반이 된다. 우호적 감정과 신뢰가 쌓이는 곳에서는 협업도 원활하게 이뤄지고, 자연스럽게 더 나은 성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3) 자기 자신을 돌보는 사랑

    요한일서 4:19이 강조하는 ‘사랑받은 존재’라는 정체성은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사람들은 때로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왜 이렇게 부족하지?”라는 자책에 빠진다. 하지만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자기 자신을 함부로 낮춰보거나 학대할 이유가 사라진다. 물론 자신의 약점이나 실수를 돌아보는 것은 중요하지만, 나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나는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야”라고 상기시키는 것 역시 필요하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돌보는 것은 결코 이기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생명과 인격에 대한 책임 있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3. 사랑에 대한 오해와 진실

    요한일서 4:19의 말씀을 읽으면, 사람들은 흔히 “아, 역시 사랑은 중요하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해 잘못된 선입견이나 편협한 이해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몇 가지 대표적인 오해를 살펴보고, 그 속에 담긴 진실을 짚어보자.

    1)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다?”

    일반적으로 사랑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두근거리는 감정이다. 물론 사랑에는 설렘과 감동이 따르지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감정 이상의 것이며 의지적 선택과 실천을 포함한다. 요한일서 4:19이 ‘먼저’라는 말을 쓰는 까닭도 여기 있다. 감정이 들기 전, 혹은 상대가 사랑스럽지 않아 보일 때에도 결단하여 다가서는 태도가 진정한 사랑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감정은 순간적으로 식을 수 있으나, 사랑의 결정은 일상의 땀과 노력을 통해 지속된다.

    2) “사랑에는 반드시 조건이 따른다?”

    사람들은 흔히 “내가 이만큼 했는데, 너도 해줘야지”라는 식으로 사랑을 조건화한다. 그러나 요한일서 4:19에 나타난 사랑은 ‘먼저’ 행해지는, 즉 어떤 조건을 충족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사랑을 말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도, 부족함이 가득할 때에도 하나님은 먼저 사랑을 베푸셨다. 이 점을 깨닫는다면,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 때 “상대가 내 기준에 부합하는가?”를 따지기보다는, 작은 친절이라도 먼저 건네려는 태도를 지닐 수 있게 된다.

    3) “사랑은 모든 갈등을 없앤다?”

    사랑이 강력한 힘을 지닌다고 해서, 모든 갈등이 순식간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인간관계에서는 미묘한 감정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사랑이 충분히 전해져도 완전한 화해가 한 번에 이루어지지는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중요한 이유는 ‘갈등을 완벽하게 없애주는 마법’이라서가 아니라, ‘갈등을 건설적으로 해결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도록 돕는 길잡이’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사랑은 완벽 해결책이 아니라, 갈등을 뛰어넘을 ‘가장 강력한 도구’다.

    4) “사랑은 나약함의 표현이다?”

    살아가면서 상처받는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으면, 사랑은 결국 자신이 손해를 감수하는 감정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은 결코 나약함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용기는 단순한 자기 보호 이상의 힘을 필요로 한다. 특히 상대방과 상황에 상관없이 ‘먼저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것은 엄청난 내적 결단이며, 그런 모습을 통해 또 다른 누군가가 변화를 경험할 수도 있다. 사랑은 연약함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회복력과 변혁의 출발점이 된다. 

    4. 갈등과 시련 속에서 빛나는 사랑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언제나 평온할 수는 없다. 실패, 상실, 배신, 혹은 예상치 못한 시련이 찾아올 때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확신이다.

    선물 바구니

    1) 실패 속에서의 회복

    인생은 기쁨과 성공만으로 가득 차 있지 않다. 시험에 떨어지고, 사업이 망하고, 관계가 파탄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이때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실패가 곧 인생의 종착점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 사랑은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너는 여전히 사랑받는 존재”라고 말해준다. 우리는 그 사랑을 통해 좌절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힘을 얻게 된다.

    2) 인간관계의 상처 치유

    가장 어려운 갈등은 종종 가장 가깝던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마음을 열고 믿었던 만큼, 배신감도 더 크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일서 4:19이 주는 메시지, 곧 ‘먼저 베푸신 사랑’을 떠올리면, 우리도 용서를 시도하고 화해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상처 난 마음이 서로에게 닿을 통로는 열리게 마련이다. 사랑의 문으로 들어간 갈등 해결은 진심 어린 사과와 용서, 그리고 한 단계 깊어진 관계로 이어질 수 있다. 

    마음에 새기는 요한일서 4:19의 메시지

    요한일서 4:19의 말씀은 가정·직장·사회·공동체 어디서든 통용되는 진리의 열쇠와 같다.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사랑을 선택하는 이유가 달라진다. 더 이상 사랑은 강요나 의무가 아닌, ‘이미 받은 사랑에 대한 감사’로 행해진다.

    • 감사의 태도 : “내가 받은 사랑이 너무나 크다”는 감사가 생기면, 우리 마음은 작은 것에도 기뻐하고 다른 이에게 베풀고자 하는 여유를 갖게 된다.

    • 관계 회복 : 누군가를 향해 다가설 때 ‘먼저’를 실천한다면, 어렵던 관계도 개선될 가능성이 열린다. 비록 시간이 필요할 수 있지만, 사랑이 근본에 깔린 행동과 말은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 긍정적 영향력 : 선한 영향력은 결코 대단한 구호나 큰 업적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에게도 인사를 건네고, 일터에서 작은 배려를 실천하는 행동 하나가 결국 더 큰 변화를 이끈다.  

    함께 나누는 기도와 결단

    요한일서 4:19을 마음에 새겼다면, 내 주변에 누가 있는지 떠올려보자. 혹시 섭섭함을 품고 있거나, 미안한 마음을 전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 
    혹은 여전히 용서를 주저하는 대상이 있는가? ‘내가 왜 먼저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 때, 우리가 받은 ‘먼저 사랑’을 기억해보면 어떨까.

    작은 실천으로 시작하면 된다. 메신저 창을 열어 “잘 지내고 있어?”라고 안부를 묻는 것, 오늘 뭔가 든든한 한 끼를 챙겨주면서 “고마웠어”라고 말하는 것, 잠시 멈춰서 다른 사람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 등. 이런 자잘한 실천들이 쌓여 우리의 일상이 변하고, 그 속에서 요한일서 4:19의 말씀이 더욱 빛나게 된다. 그리고 밤이 깊어 눈을 감는 순간,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는 고백이 오늘 하루를 보람있게 마무리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먼저, 너를 사랑하노라

    여린 바람이
    묵묵히 꽃잎을 감싸안듯
    내 마음도 어느새 네 곁에 와 있었다.

    계절이 스쳐가는 소리 속에서
    버거운 삶의 무게를 견디던 네 눈을 보니
    내 가슴 한구석이 저릿이 울렸다.

    기댈 곳 없다고
    굳게 믿어온 네 길에
    한 줌의 빛으로 닿고 싶어

    너무 작아 부끄럽지만
    그래도 네게 전하리
    “먼저, 너를 사랑하노라”고
    이 아침, 부드럽게 속삭이듯.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들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고 말하며 성도들에게 비록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지만 담대히 믿음 안에서 사랑을 이루어갈 것을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분의 가르침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요한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에도 거의 50여 년을 더 살면서 삶의 현장에서 순간순간 예수의 가르침들을 적용하고 묵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평생을 산 후에 내린 그의 결론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를 세상의 구주로 보내셔서'(요일 4:14),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사실'(19절)입니다.

    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백발이 된 노년의 요한 사도가 설교를 하기 위해서 단상에 오르면, 느릿느릿한 모습으로 온 회중을 둘러본 후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서로 사랑합시다'라는 말만 오로지 반복하다가 내려왔다고 합니다.

    랑의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저를 먼저 사랑하셨기에 저도 그 사랑을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오늘 묵상하는 말씀을 통해서 격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계속 사랑을 이루어 갈 수 있게 하셔서 제 속에 내주(內住)하시는 성령께서 저를 통해서 빛나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은 모든 일에 있어 먼저이십니다. 
    주도권을 행사하십니다. 
    당신이 하나님이나 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나타내보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당신을 위해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창조하심으로써 사랑을 나타내보이셨습니다. 
    지금 당신 삶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심으로써 그 사랑을 나타내보이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서로 사랑할 것인가를 배우기 원한다면, 당신은 먼저 하나님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이해하고 느껴야만 합니다.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낄 때, 다른 이들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화를 내지도 않을 것입니다. 
    참을성도 더 많아질 것입니다. 
    용서하는 마음도 더 갖게 될 것입니다. 
    더 자비로운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은총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타인에 대해 비판적이며, 비아냥거리고, 화내며,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항상 다른 이들을 깎아내리는 이유는 그들 자신을 깎아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못합니다. 용서 받았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은총을 느끼지 못합니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뭔가 잘못했다고 스스로 느낍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렇듯 자기 스스로가 잘못되었다고 느낀다면, 그들은 분명히 당신도 똑같이 느끼기를 바랄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이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부모나 동료 또는 배우자로부터 상처받았을 수 있습니다. 학대받았거나, 누군가에게 악용되었거나, 버림받았거나, 거부되거나 배신당했을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마음 속에 흉터가 남아있습니다.

    이제까지 당신이 받아보지 못한 것을 다른 이에게 줄 수 없습니다. 사랑받지 못할만한 사람들은 그저 사랑받지 못한 이들일 뿐입니다. 
    상처받은 사람은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줍니다. 
    만약 당신 마음에 분노와 조바심이 가득하고 남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진다면, 아마도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심을 배우고 이를 통해 당신의 마음이 치유됨으로써 그 사랑이 당신을 통해 흘러넘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당신이 정녕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않고서는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한1서 4:16).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십니까? 
    당신을 향한 그 사랑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진정 느끼기 전까지는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AI에게 질문한 결과

    예수는 누구인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서, 예수는 단순한 역사적 인물을 넘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분

    1. 하나님의 아들(요한복음 1:1)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로 고백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니라”(요 1:1)

    곧,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가오셨어요.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분

    예수는 단순한 위대한 스승이나 선지자가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으로 고백돼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 1:14)

    2.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요한복음 1:14)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사람의 삶으로 ‘번역’**된 분이 예수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3.  세상의 구주(요한복음 3:16)

    예수는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고 믿어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 3:16)

    구원은 공로의 보상이 아니라 사랑의 선물이에요. 

    4.  참된 인간, 참된 하나님

    예수는 굶주리고 울고 고통받으셨어요—그래서 우리의 아픔을 아시는 분입니다.
    동시에 죄 없으신 분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드러내셨어요. 

    5.  사랑의 본(요한복음 13:34)

    예수의 삶은 한 문장으로 요약돼요 : 사랑.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그분은 사랑을 말로만 가르치지 않고 십자가로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신 분 
    예수의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사랑의 절정이에요.
    죄와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어요.

    6. 그리스도(메시아)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 곧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자라는 뜻이에요.
    예수는 이 약속을 삶·죽음·부활로 완성하신 분이에요. 

    7. 세상의 구주

    예수는 특정 민족만이 아니라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에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8. 부활로 생명을 주신 분

    예수는 죽음에 머물지 않으시고 부활하셨어요.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새 생명과 소망이 있어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 11:25)

     한 문장으로 말하면

    예수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직접 찾아오신 모습이며,
    사랑으로 죄를 이기고 생명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분
    이에요.

    예수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몸으로’ 보여주신 분,
    그리고 그 사랑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구주입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서, 예수는 이렇게 이해돼요.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 그 사랑의 은총에 힘입어 저희 마음 속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몰아내고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저희가 되도록 이끌어주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형제 사랑의 뿌리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도 이 문장 위에 서 있어요.
    그가 나를 그렇게 사랑하셨으니, 나도 다른 이를 그렇게 대하려는 거죠.

    이 말은 결국 이렇게 속삭여요. 
    “너의 사랑이 시작이 아니야. 그러니 부담 내려놓고, 받은 만큼만 살아.”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먼저’가 먼저 
    목적은 ‘사랑’  

    ‘먼저’ — 사랑의 출발  

    ‘먼저’는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주도권
    1.  우리가 알기 전에

    2.  우리가 돌이키기 전에 
    3. 우리가 자격을 갖추기 전에  

    하나님이 조건 없이 시작하셨다는 선언이죠. 
    사랑은 인간의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단에서 시작됩니다.

    ‘사랑’ — 사랑의 본질 

    ‘먼저’는 목적이 아니에요.
    목적은 사랑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사랑하셨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살리셨고 
                   그 사랑 안에 거하게 하셨죠.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해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먼저 하시는 분’이기 이전에 ‘사랑이신 분’  

    ‘먼저’는 사랑의 방식
    ‘사랑’은 하나님의 정체성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은 게 아니라 사랑받았기 때문에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먼저’가 없었다면 우리는 사랑을 시작할 수조차 없었고,
    ‘사랑’이 없었다면 ‘먼저’는 아무 의미가 없었겠죠.





    2월 6일(금) 요한일서 4: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온전한 사랑(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There is no fear in love. But perfect love drives out fear, because fear has to do with punishment. The one who fears is not made perfect in love. 

    온전한(텔레이오스. tĕlĕiŏs)  τέλειος  목적을 달성한
    온전한 사랑(perfect in love)
    η τελεια αγαπη 그 온전한 사랑

    온전하다는 말은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달성한다는 의미.
    온전한 사랑은 온전한 생명입니다(요한복음 3:16).
    온전한 생명이란 영생을 의미합니다.

    온전한(5046) 텔레이오스(tĕlĕiŏs)  τέλειος, α, ον

    1. 목적을 달성한.  2. 히 9:11.  3. 롬 12:2  
    Pronunciation [ tĕlĕiŏs ]  
      
    • I.   목적을 달성한, 완전한, 완성한.
      • 1.  [사물에 대하여]
        • a.  [형용사로] 히9:11, 약1:4,17, 요일4:18.
        • b.  [명사로] 롬12:2, 고전13:10.
      • 2. [사람에 대하여]
        • a.  [연령] 장성한, 성숙한, 고전2:6, 14: 20, 엡4:13, 히5:14.
        • b.  신비종교의 전문술어, 비전(秘傳)을 받은[사람].
        • c. [도덕적으로] 완전한, 원만한, 마5: 48, 19:21, 골4:12, 약3:2.
        • d.  [하나님을 수식] 마5:48.
    • 관련 성경  /  온전한(마 5:48, 고전 13:10, 약 1:4), 장성한 (고전 14:20, 히 5:14). 
                          [부] 온전히(빌 3:15, 약 1:4).
    5056. 테로스(tĕlŏs)  τέλος, ους, τό Storng number5056

    1. 끝.  2. 결말.  3. 마지막  
    Pronunciation [ tĕlŏs ]
     Etymology  / 기본형 τέλλω ‘제한하다’에서 유래
    • 1. 끝.
      • a.  결말, 정지, 눅1:33, 히7:3, 벧전4:7.
      • b.  마지막, 종말, 종국, 마24:6, 막13:7, 고전10:11.
      • c.  결국, 목표, 결과, 마26:58, 롬10:4, 딤전1:5, 히6:8.
      • d.  [부사적 표현] 마침내, 결국, 끝까지, 마10:22, 24:13, 눅18:5, 고전1:8, 15:24, 고후1:13, 살전2:16, 히6:11.
    • 2. 세금, 관세, 마17:25, 롬13:7, 고전10:11.
    • 관련 성경  / 끝(마 10:22, 24:6, 막 13:13, 눅 21:9), 마지막(롬 6:21,22, 고전 15:24), 결말(마 26:58, 약 5:11), 결국(고후 3:13), 
      관세(마 17:25, 롬 13:7), 마침(롬 10:4), 목적(딤전 1:5), 말세(고전 10:11).
    예화 모나미 볼펜(모나미 나의 친구) 
    1963년 모나미 153 / 당시 가격은 15원 3은 3차례 실패 후에 제품을 완성한 것 
    송삼석회장에게 어느 목사님이 성경에서 153의 숫자에 대한 의미를 설명
    그 이야기가 와전되어 마치 송회장이 죽음을 각오하고 산에올라가서 기도하던 중 마침 어느 교회당의 종소리를 듣고 기도할 때 영감을 받은 숫자라고 회자되었다.

    온전한 이야기

      1. 정확한 이야기

      2. 목적이 있는 이야기(딤전 1: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3. 마지막 이야기(롬 6:21-22, 고전 15:24)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 다 이루었다! (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다 이루었다”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상거래나 법률적 마침, 약속의 완성을 말할 때 쓰는 단어이다. 
    상거래에서 사용하는 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 는 ‘값을 다 지불했다’의 의미가 될 것이다. 
    ​다 이루었다는 헬라어로 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tetelestai)’인데 현재완료 수동태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제 마쳤다’, ‘다 완성했다’가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비참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감추어진 비밀은 ‘다 이루었다!’는 한 마디에 다 드러나고 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어느 때에 이런 말을 썼는지 알아보고 이 말씀의 뜻과 무엇이 다 이루어 졌는지를 살펴봄으로 은혜를 받고자 한다. ​

    다 이루었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

    ​당시에 이 말은 네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1.  "맡겨진 일을 완수했다" “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

    ​주인이 노예 또는 하인에게 어떤 일을 맡겼을 때 그 일을 끝마친 노예와 하인들이 주인에게 ‘다 이루었다!’ 라고 보고하는 용어라고 한다.주인이 종에게 어떤 일을 시켰을 경우 그 종은 그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 종은 그 일을 마친 후에 주인에게 "주인이 시킨 일을 완수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 때에 "맡겨진 일을 완수했다"는 말이 바로 "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였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주님께 맡겨주신 일을 성실하게 완수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일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구속의 임무를 죽음으로 완수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사명을 다 완수하셨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사명을 완수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는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죄와 죽음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문제를 예수님께서 대신 다 해결해 주셨다.
    이제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분이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이시며 내 삶의 완성자이다.
    내가 영원토록 믿고 의지할 분이 예수님이다.

    ​2.  "흠없이 온전하다." 할 때에 “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라고 했다.

    제사장에게 있어서 이 말은 "흠이 없이 온전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먼저 시험해 보았다. 
    제사장은 그 제물이 눈이 멀거나, 다리를 절거나, 다른 흠이 없는지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나서 그 제물에 흠이 없으면 그는 그 제물에 대해 "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 (완전하다)라고 선언했다.

    ​예수님께서는 흠 없이 온전한 속죄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졌으며 친히 대 제사장이 되어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제사를 드렸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셨다고 하셨다.

    ​누가복음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께서는 어떤 제물이셨나?
    예수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다.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즈음같이 코로나로 경제적으로 몹시 어렵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오직 구원의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박국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3. 작품이 완성되었다. “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

    예술가에게 있어서 이 말은 "작품이 완성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술가들은 심혈을 기울여 한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 그 작품이 "완성되었다"고할 때 “Τετέλεσται테텔레스타이” 라고 말했다.
    대속을 통한 구속이라고 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완벽한 작품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이 구속을 믿을 때 구원을 받는 것이다.
    구약 성경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에 대한 밑그림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이다
    오실예수가 드디어 오셔서 이 구속의 사역을 완성했다.
    구약의 스케치한 밑 그림에 죽음의 아름다운 물감으로 그림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구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을 성취하셨다.
    수 천 년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그려온 메시야에 대한 구약의 스케치를 보면 주님의 삶과 고난,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모든 것이 그려져 있으며, 장차 메시아가 와서 마귀를 정복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것이 그려져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드디어 작품이 완성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드디어 작품이 완성되었어!”라고 외쳤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피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다는 그 고통과 아픔과 치욕의 십자가에서만 이루어 낼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구속이라는 작품을 완성하셨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구원받은 우리는 주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영과 혼과 몸이 흠 없게 보전되는 거룩한 삶의 작품을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만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구원은 삼위 하나님의 작품이었으며, 주님은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일을 마침내 완성하셨다(요 17:4).

    ​4. 돈을 모두 지불했다.

    “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

    상인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지불 완료"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상인들은 돈을 빌려준 후에 그 돈을 받게되면 “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라고 선언했다.
    이 때에 “지불 완료”라는 말이 바로 “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 였다.
    주님은 의로운 자로 정죄를 받으셨으며, 십자가에 매달려 자기 몸으로 죄인들의 죄 값을 "완전히 지불"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주님은 모든 죄 값이 "지불완료"되었다고 선포하실 수 있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돈을 빌린 채무자가 빌린 돈을 모두 갚은 후에 비로써 "지불이 완료되었다"는 의미로써“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 라고 말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무슨 빚을 모두 갚으셨는가?
    죄의 값은 사망이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찬송가 269장에 “웬일인가 내 형제여 주 아니 믿다가 죄값으로 지옥형벌 너도 받겠구나.”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죽음을 빚진 자들이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그 죽음의 빚을 갚기 위해 나의죄와 모든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대신 달리심으로 모든 인류가 진 죄의 값인 죽음의 빚을 완전히 청산했다.

    ​“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죄의 빚은 그의 몸으로 단번에 갚으셨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갚아야 할 빚은 무엇인가?
    나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천국의 소망을 약속하신 그 십자가의 은혜와 그 사랑에 대한 빚을 갚아야 한다.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말고 주님을 위해서 살으라고 하신다.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어 줄테니 너는 나를 위해서 살아달라고 하신다.

    ​고린도후서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무엇이 다 이루어졌는가? 

    우리는 앞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이 당시에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 이제 주님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이 무슨 뜻인가?

    ​1. 성경의 예언이 다 이루어졌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구약에 기록된 예언을 성취하셨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주님의 삶과 고난,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예언했다.
    그들은 장차 메시아가 와서 사단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 일을 모두 성취하셨다.

    ​요한복음 19: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이룬 줄" 이라고 번역된 말은 뒤(30절)에 나오는 "다 이루었다"고 번역된 단어와 똑같은 말 (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이다. 
    또한 "응하게 하려하사"라고 번역된 말도 완성하다 이루다 끝내다 완전케하다 라는 τελειόω "텔레이오오" 라는 단어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28절에서는“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가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예언 성취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30절에 기록된 "다 이루었다"는 “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 역시 예수님에 대한 성경 예언의 성취와 갚은 관계가 있다.
    예언의 말씀이 다 성취하셨다는 선포였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기 전에‘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신포도주를 받아 맛보신 후‘ “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다 이루었다." 라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분명히 시편 69:21말씀의 성취였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예수님 고난의 과정은 모두가 구약에 예언된 약속의 성취과정이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누가복음 18:31에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구원자로서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시는 자리였다.
    예수님의 모든 삶은 출생에서부터 구약에 예언된 말씀의 성취였다.

    ​2. 사단을 정복하는 일이 다 이루어 졌다.

    ​창세기 2:16 -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3장에서 사단은

    ​창세기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거짓말로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고 인간은 사단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서 하나님을 거역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이러한 사단의 궤계를 모두 무너뜨릴 것을 선언하셨다.
    주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리고 세상에서 사단의 모든 유혹을 이기셨다(마 4:1-11).

    ​그리고 주님은 사단이 더 이상 사람들을 정복할 수 없도록 사람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사단은 이제 더 이상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정죄할 수 없게 되었다.
    주님은 사단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사망을 이기셨다.
    이 과정에서 사단은 잠시 주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다.
    하나님과 완전히 끊어지는 아픔을 견딜 수 밖에 없었다.

    ​마태복음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었고, 마침내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을 다 이루셨다.
    예수님은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만드셨다(창 3;15).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어 죄와 사단을 이길 수 있게 만들어 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셨다.

    ​사단의 권세가 무너졌다

    ​히브리서 2:14- 16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사단의 권세를 십자가로 이기셨다.

    ​골로새서 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

    물론 사단이 완전히 심판을 받아 지옥에서 형벌을 받는 것은 아니다.
    머리가 잘린 문어발처럼 사단의 세력은 꺾였고 우리에겐 승리가 보장이 됐다.

    ​3. 구원 사역이 다 이루어 졌다.

    ​주님은 자신의 몸으로 인류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사역을 완성하셨다.
    이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모든 구원 사역은 끝이 났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뭘 더하거나 해야 할 일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우리가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주님이 이루신 구원 사역을 믿음으로 받는 것 뿐이다.
    주님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일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이루셨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서 착한 일이나, 다른 어떤 것을 더 해보려는 행위는 일체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맡기신 일 즉 죄인을 구원하시는 대속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다.
    죄의 값을 다 갚아 하나님을 만족시켰다는 뜻이다.
    죄의 결과는 죄의 값은 사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었다.
    하나님의 형벌을 감당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죗값을 갚으셨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었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나의 양식이라고 했다.

    요한복음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그러면서
    요한복음 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구약성경은 메시아가 죄인을 위한 희생 제물로 고난과 죽임을 당할 것이라 말씀했다.
    그것을 다 이룬 것이다.
    대속을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되었다

    ​이사야 53:5-9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대속을 완성하는 구원 사역의 절정이다.
    구약에서 반복적인 피흘림의 제사를 끝내시고 단번에 자기를 드려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를 완성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속박하고 있던 사탄의 모든 궤계와 능력을 깨뜨리시고 인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하셨다.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 되는 길이 열렸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하게 나타나게 된 자리였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4. 죄의 값을 다 지불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죄인이 당해야할 모든 고난을 대신 담당하셨다. 
    예수님은 의로운 분으로서 죄인이 되어 정죄를 받았고, 무고하게 채찍에 맞으셨다.
    예수님은 죄가 없이 십자가를 지셨으며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으며, 수치와 고통을 당했다.
    예수님은 죄 없이 하나님께 소외당했으며, 극심한 육신의 고통을 받았다.
    제육시는 정오 12시고 제구시는 오후 3시다.
    태양이 가장 뜨겁게 내리쬐는 시간이다.
    가장 뜨겁고 견디기 힘든 시간대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것이다.
    그 시간 세상은 빛을 잃어버리고 어둠이 가득하였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막15:34)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은 죄인을 대신해서 죽으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해서 자신의 몸을 죄인들의 모든 죄 값을 대신 지불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모든 죄 값이 "지불 완료 되었음"을 선언하셨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십자가는 당시 가장 극악한 형벌을 지닌 죄수가 당하는 처형방식이다. 
    그런데 아무 죄도 없으신 의인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죽으셨다.
    그 죄인이 십자가를 지고 죽는 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저주를 받아 죽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를 다 덮어쓰시고 운명하시는 그 순간, 철저히 죄인이 되었고 그 순간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받아 운명하신 것이다.만일 우리가 죄를 지어 죽음을 받는다면 그 죽음은 마땅하지만, 내가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그 죄를 뒤집어써서 죽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억울하고 고통스러울까? 
    예수님은 영적으로 철저히 하나님께 버림받아 그 형벌을 당했던 것이다.

    ​마가복음 15:37 -38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마지막으로 “Τετέλεσται테텔레스타이” 라고 큰 소리로 외치시며 예수님은 숨지셨다.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휘장은 하나님과 우리를 철저하게 가로막았던 것이다.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도 함께 할 수 없도록 그 사이를 막고 있던 것이 휘장이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정하신 제사장 외에는 들어올 수 없도록 지성소 안을 휘장으로 막아놓으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모든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게 한 그 순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았던 죄를 사하시는 그 순간, 하나님과 우리를 가로막던 휘장이 찢어지고 우리가 하나님께로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이것은 실로 엄청난 고백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역사의 주권자,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은 창세부터 수 천 년 동안 이 날을 위해 준비해오셨다.

    ​엄청난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그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기 위해 엄청난 시간을 준비하시고 계획하시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가 그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의 죄가 사해지고 영생의 길, 참 진리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되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인류를 위한 모든 구원 사역을 완성하셨다.

    ​5. 율법이 완전히 이루어졌다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죄인은 율법을 온전히 행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율법에 순종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우리 것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선언이자 가장 좋은 소식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이루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가장 낮고 가장 천한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했다.
    그 분은 완벽한 희생 제물이 되어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며, 동시에 대제사장이 되어 흠없는 대속의 제사를 드렸다.
    드디어 인류를 위해 계획해오신 “구원”이라고 하는 이름의 하나님의 아름다운 작품이 완성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값은 청산되었다.
    죄인이었던 우리는 모든 죄가 씻겨져 버렸고, 부끄럽지만 의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다 이루었다”라고 하는 한마디는 하나님께 대해서는 “계획을 이루었습니다”라고 하는 사명완수의 선포였고, 마귀에게는 “내가 승리했다”라고 하는 승리의 선포였으며, 우리를 향하여서는 “내가 다 갚았다. 너는 이제 빚이 없다”라고 하는 희망의 선포였던 것이다.

    “Τετέλεσται테텔레스타이”와 동시에 이루어 진 것이 있다.

    ​6. 나의 몸을 값을 주고 사게 된 것이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ἀγοράζω 아고라조 agorazo-(값을 주고)‘사다,’ buy.

    ἀγοράζω Storng number 59

    1. 사다.  2. 마 13:44, 46.  3. 얻다  
    Pronunciation [ agŏrazō ]

    •  1.  사다, 구입하다.
      •  a.  [문자적으로 목적격과 함께 쓰여 사물에 대해 사용됨] 마13:44,46, 막15:46, 눅9:13, 요4:8, 6:5, 계18:11.
      •  b.  [상징적으로 속격과 함께 쓰여] 사다, 얻다, 고전6:20, 7:23, 벧후2:1.
    • 문법설명  / 미완료 ἠγόραζον, 제1부정과거 ἠ - γόρασα, 제1부정과거수동태 ἠγοράσ- θην
    • 관련 성경 / 사다(마 13:44, 25:9, 벧후 2:1), 매매하다(마 21:12, 막 11:15), 장사하다(눅 19:45), 속량(贖良)하다(계 14:3,4).

    피 흘림으로 완전히 지불한 그리스도의 보증으로서 구속하다

    즉 테텔레스 타이와 같은 의미이다. 

    고린도전서 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ἀγοράζω아고라조 agorazo-사다 buy.

    ​예수님께서는 “나”라는 자를 신부로 맞이하는 값을 다 치루셨다.

    ​자기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의 생명과 우리 생명을 바꾸어 우리를 살리시고 나를 신부로 맞이한 이 크고 놀라운 사랑과 은혜이다.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아직도 다 이루지기 전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내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 왔는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삶이 괴로울 때마다 믿음으로 선포하라.

    “Τετέλεσται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었다."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늘 마음으로 묵상하며 사는 은혜를 받자.
    구원을 받기위해서 내가 해야 할일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 2:16, 개역한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단순한 경외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벌 받을까 봐 움츠러드는 공포, 관계가 끊길까 전전긍긍하는 불안이에요.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 사랑이 자라면 두려움이 자연히 밀려나가요.
    억지로 없애는 게 아니라, 빛이 오면 어둠이 사라지듯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단계를 넘어
    몸으로, 삶으로 받아들이면 두려움이 설 자리가 없어져요.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 두려움은 늘 계산하게 만들죠.
    “이만큼 하면 괜찮을까?”
    “혹시 부족하면 벌 받지 않을까?”
    이건 아직 심판의 틀 안에서 하나님을 보고 있다는 뜻이에요.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 이 말은 정죄가 아니라 진단이에요.
    “너는 아직 사랑이 부족해”가 아니라
    “사랑이 더 깊어질 여지가 있다”는 초대죠.

    앞절(17절)과 이어서 보면 더 분명해져요.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라

     
    두려움 → 종의 자리 
     사랑 → 자녀의 자리 
     담대함 → 이미 받아들여진 자의 태도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 질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숨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떳떳해져요.

    이 말씀이 지금 마음에 와닿는다는 건,
    이미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옮겨지는 과정 한가운데에 계시다는 신호 같아요.
    원하시면, 이 말씀이 오늘의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구체적인 예로도 같이 풀어볼까요?


    인이 되면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사랑을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일반적으로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을 말한다. 
    사랑은 이론보다는 행동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의 속성을 나열하는 것으로 사랑을 정의하고 있다(고전13:4-7).

    헬라어에는 사랑을 나타내는 네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육정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에로스(eros), 우정을 나타내는 필레오(phileo), 혈통적인 사랑을 표시하는 스톨게(stolge), 그리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아가페(agape)이다. 
    이중 기독교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다. 
    그것은 타자본위의 순수한 사랑으로 자기 부정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사랑이다(눅 6:32-34). 
    이 사랑의 본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 일컬어진다. 
    기독교에 있어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요 1:8), 
    가장 큰 계명(마 22:37-40), 
    율법의 완성(롬 13:10), 
    예수가 주신 새계명(요 13:34), 
    믿음이나 소망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고전 13:13).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의 인격적 성격과 상관 관계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인격에 대한 사랑이고 그리고 나서 말씀이나 율법에 대한 사랑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등의 전인적인 헌신과 신뢰를 말씀하셨다(마 5:29-30, 6:24). 
    이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명령이다.

    이 말씀은 요한일서 4장 18절이지요.
    짧지만 정말 깊고, 신앙의 결을 바로잡아 주는 말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두려움이 아니라,
    버림받을까 봐, 벌받을까 봐, 심판당할까 봐 떨리는 불안이에요.

    즉, “내가 이 정도면 하나님이 나를 싫어하시지 않을까?”
    “혹시 실수하면 관계가 끊어지지 않을까?”
    이런 종의 마음에서 나오는 두려움이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선택과 은혜에서 시작됐어요.

    그래서 이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일수록,
    두려움은 자연스럽게 설 자리를 잃어요.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밀려나는 것처럼요.

    두려움을 ‘억지로 없애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이 들어오면 두려움은 떠난다는 선언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 두려움은 항상 벌을 전제로 해요.
    “잘못하면 맞는다”, “실패하면 버려진다”는 구조죠.

    그래서 두려움으로 신앙을 살면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니라  판사나 감시자로 대하게 돼요.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 이 말은 정죄가 아니에요.
    “아직 사랑을 덜 받았다”는 말도 아니고요.

    의미는 이것에 가까워요.
     사랑은 이미 주어졌지만, 아직 그 사랑을 마음 깊이까지 믿고 살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우리를 몰아붙이는 말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 있는 신앙을 부드럽게 꺼내 주는 초대

    정리하면 이 말씀이 전하는 핵심은 하나예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두려움이 줄어들수록, 우리는 사랑 안에서 더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그 자유가 담대함을 낳고,
    사랑을 흘려보내게 하고,
    심판 날조차 평안하게 바라보게 하죠.

    이 말씀이 지금 마음에 와 닿는 이유가 있다면,
    아마 하나님이 “너, 이제 좀 덜 무서워해도 돼” 라고 말씀하시는 타이밍일지도 몰라요.


    2월 5일(목) 요한일서 4: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심판날에(4: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In this way, love is made complete among us so that we will have confidence on the day of judgment, because in this world we are like him.

    심판은 사악한 자들에게는 파멸을, 의인에게는 구원을 가져다 준다(신명기 32:41),

    나의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에 심판을 잡고 나의 대적에게 보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할 것이라. 

    심판 judgment

    옳고 그름을 밝히고 난 후 내리는 판결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에는 사법적이고 법률적인 자격을 지닌 장로들, 사사(재판을 한 사사는 드보라이다), 왕 등이 있었다.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군사적인 행동 혹은 정복과 관련되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으며 (시 149:9; 겔 23:24) 
    대부분의 심판은 논쟁이나 소송의 결과로 나온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죄악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는 심판자로 묘사되나(시 94:2) 
    하나님의 심판은 비인격적이거나 냉혹하지 않으며, 자비와 공의, 진리의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과 관련되어 나타난다(시 36:5-6). 
    그러므로 심판은 사악한 자들에게는 파멸을, 의인에게는 구원을 가져다 준다(신 32:41). 
    이 심판은 부분적으로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성취되었고, 또한 주의 마지막 날을 예상하게 한다(욜 3:2). 
    하나님께서 행하실 결정적인 심판은 역사의 종말에 있을 것이라는 계시 신앙이 지배적이었다. 
    이 말은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적의 멸망을 의미했는데, 나중에 가서는 이스라엘도 여러 국민과 함께 불의한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함을 인식하게 되었고(암 5:18-20), 
    그날의 일들이 우주적 파국 및 신왕국 수립 등의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다(단 7:26-27; 욜 2:30-32).
    신약 시대에 와서도 만인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서게 될 것이라는 신앙은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왔다(롬 3:19-20). 
    심판의 모습은 '화' (마 23:13-36), '불 같은 형벌'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분리' (마 5:22; 살후 1:6-9)로 나타난다. 
    진노의 날에 하나님께서는 경건치 않은 자들(벧후 2:9; 유15-16절), 타락한 천사들(벧후2:4), 적그리스도(살후2:1-12)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거절한 모든 자들에 대해서 심판을 선언하실 것이다. 
    종말에 가서는 믿는 자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나 그것은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속에서 믿음과 진실을 통해 드러난 행위에 따른 상급을 위한 것이다(고전3:12;고후5:10).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3:18-19). 최후의 심판은 역사의 종말에 이루어질 심판으로서 그 정하신 때는 우리가 알 수 없으며, 그때에는 죽었던 모든 자들이 죽음으로부터 일으킴을 받고 살아 있는 자와 함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때 의로운 삶을 산 사람들은 영생에 이르게 될 것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영벌에 처하게 될 것이다(요5:28-29;계20:11-15;22:12).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준비해야 하며 (마 24:32,44:25:13), 경건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구원의 날을 소망하여야 한다(살전1:10).

    심판대(judgment-seat) 

    심판하는 자리. 
    하나님의 심판대는 헬라의 시의회의 집회 광경에서 연유된 듯한데, 계단이나 단상의 형태로 되어 있다(롬 14:10).
     '베마'는 개역성경에서 재판자리 (마 27:19; 행 18:12), 재판석(요 19:13), 위(位, 행 12:21)로도 번역되었다.



     “사랑이 온전히 이룬다”는 뜻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그 사랑 안에 거함으로 성숙해진 사랑

    1.  
    두려움에 묶인 사랑이 아니다.
    2.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다. 
    3. 완성된 사랑 =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란 사랑

    그래서 이 사랑은 “결과”를 낳아요. 

    그 결과는 “심판 날의 담대함”

    보통 심판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먼저 떠오르잖아요.
    그런데 요한은 정반대로 말해요.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심판 날에도 담대하다

    왜냐하면  
    1. 하나님을 두려워서 피하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
    2.  하나님을 이미 아는 관계, 이미 거하는 관계이기 때문

    심판 날은
    “처음 만나는 날”이 아니라 이미 사랑 안에서 살던 관계가 드러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랑으로 사셨던 것처럼
    2. 
    우리도 지금 이 세상에서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는 존재로 산다

    즉,  예수님은 하늘에서만 완전하신 분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이 우리 삶을 통해 이 땅에서 계속 나타난다. 

    그래서 요한은  “지금 이 세상에서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은 미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현재의 삶을 예수님 닮은 삶으로 바꾼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이 온전히 이뤄졌다”
     우리가 완벽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목적에 도달했다.

    그 목적은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

    보통 심판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먼저 오잖아요.
    그런데 요한은 정반대를 말해요.
    사랑이 완성되면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함이 생긴다고요.

    왜냐하면 그 다음 구절이 핵심이에요.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이 말은 정말 놀라운 선언이에요.
    1.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의로우신 것처럼
    2. 
    사랑 안에 거하는 우리는 이미 그분과 같은 위치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심판 날에 우리가 담대한 이유는
     “내가 잘 살아서”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요한의 논리는 항상 이렇게 전개됩니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2. 그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한다
    3. 우리는 그 사랑을 서로에게 흘려보낸다
    4. 그 결과, 두려움이 사라진다
    5. 심판 앞에서도 담대하다

    신앙의 목표를 말합니다. 

    착하게 사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

    사랑 안에 거하며,
    사랑으로 드러나고,
    사랑 때문에 담대해지는 삶.

    이 말씀이 지금 마음에 와닿았다면, 이미 그 사랑 안에 깊이 들어와 계신 거예요. 


    2월 4일(수) 요한일서 4:14-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상의 구주(4:14)

  •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 And we have seen and testify that the Father has sent his Son to be the Savior of the world.
  • If anyone acknowledges that Jesus is the Son of God, God lives in him and he in God.

  • 보았고(2300) 데오마이(thĕaŏmai) θεάομαι

  • 1.  보다.  2. 마 11:7 
    Pronunciation [ thĕaŏmai ]  
    관련 성경  /  보이다(마6:1, 막16:11), 보다(마11:7, 눅5: 27, 요일1:11), 쳐다보다(행1:11).


  • 증거하노니(3140) 마르투레오(martürĕō)  μαρτυρέω

    1. 증언하다.  2. 입증하다.  3. 유리하게 증언하다.  
    Pronunciation [ martürĕō ] 
  • 관련 성경  /  증명하다(마23:31), 증언하다(눅4:22, 요일1:2), 경계하다(살전2:12), 칭찬하다(행10:22).


  • 세상의 구주(the Savior of the world)라는 표현은 요한 신학의 핵심을 의미하는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줄 앎이라”(요 4:42)

    세상의 구주라는 말씀에서 '세상'이란 범위를 말합니다.
    요한이 말하는 세상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포함합니다.
    이방인들이란 유대인들로부터 무시당하던 사마리아 사람과 죄인과 연약한 자를 포함한 모든 인류를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어느 특정 집단의 구원자가 아니라 차별 없이 모두를 향한 구주라는 선언입니다.

    “구주(救主)"는 단순히 도와주는 분이 아니라 죄에서 건져내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시는 분을 말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는 사랑 → 화목 → 성령의 내주 → 구원의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왜 요한은 “세상의 구주”를 강조했을까?

    요한 공동체에는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는 영적인 존재일 뿐, 육체를 입지 않았다는 주장(가현설)
    둘째는 특별한 지식을 가진 소수만 구원받는다는 생각(영지주의)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는 실제로 오셨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고, 그 구원은 세상 전체를 향해 열려 있다고 강조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세상의 구주”라는 고백은 나도 그 ‘세상’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사랑받기 때문에 구원받는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세상의 구주라는 표현은 신약에서 예수님을 가리키는 아주 핵심적인 고백입니다.   

    “세상”  

    특정 민족이나 종교 집단만이 아니라 온 인류 전체,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을 포함합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세상”은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인간 현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구주(救主)”  

    단순한 조언자나 도덕 교사가 아니라 구원하시는 분, 건져내시는 분 
    죄, 사망, 심판,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실제로 구출하시는 분이라는 뜻이에요.

     성경적 배경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요한일서 4:14)

    이 말은 곧,  하나님이 사랑 때문에  아들을 보내셨고,  그 사랑이 특정 사람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향한다는 선언입니다. 

    요한 신학의 핵심 포인트  

    배타성 X, 보편성 O

    → 구원은 한 민족의 소유가 아님 

    추상적 사랑 X, 십자가의 사랑 O

    → 구주는 말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분 

    지식보다 관계

    → “세상의 구주”를 안다는 건
    정보를 아는 게 아니라 그분 안에 거하는 삶 (요한일서 4:13)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이 역사 속에 들어온 모습이며, 그 사랑으로 세상을 실제로 건지신 분이다.


    “세상의 구주”와 메시아의 차이

    메시아 (χριστός, 기름부음 받은 자)

    출발점 : 유대인의 기대

    • 구약의 약속에서 나온 말

    • 다윗의 후손, 이스라엘을 회복할 왕

    • 억압에서 해방하고 정의를 세울 분

    핵심 포인트
    “누구를 위해 오셨는가?” → 이스라엘 중심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를 정치적 해방자, 민족적 구원자로 기대했어요.  

    세상의 구주 (σωτὴρ τοῦ κόσμου)

    출발점 :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 
      요한복음· 요한일서에서 강하게 등장 
      민족· 경계· 혈통을 넘어선 표현 
      죄와 죽음의 문제를 다룸

    핵심 포인트 /  “무엇에서 구원하는가?” → 죄와 사망, 하나님과의 단절

    이 말은 곧 유대인만의 구원이 아니다.  
    로마도, 사마리아도, 이방인도 포함.  
    인간 전체의 상태를 향한 선언

    결정적 차이 한눈에 보기

         구분 메시아 세상의 구주
       뿌리               구약              요한 신학
      범위            이스라엘               온 세상
      기대     정치·역사적 회복         영적·존재론적 구원
      질문  “누가 우리를 해방하나?”        “누가 인간을 살리나?”

    요한이 ‘메시아’보다 ‘세상의 구주’를 강조한 이유

    요한 공동체 안에는 민족적 우월감,  영지주의적 엘리트 의식,  이 동시에 있었어요.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는 우리 민족의 메시아를 넘어서 모든 인간의 구주이시다.”

    즉,  메시아 기대를 부정한 게 아니라  그 의미를 완성·확장한 거예요. 

    신앙적으로 중요한 포인트

      
    메시아 → 기대의 언어
      
    세상의 구주 → 증언의 언어

    믿음은 “그분이 메시아라는 정보”에서 끝나지 않고  “그분이 나와 세상을 살리시는 분”이라는 고백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소망이고, 세상의 구주는 하나님의 사랑이 닿는 범위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가 남겼다고 하는 유명한 말 가운데에는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바르트의 발언을 신앙인은 성경에 대해서 뿐 아니라 세상과 역사에 대한 관심과 조망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장대선 목사는 바르트의 주장을 성경에서 상황으로 순서로 이해했고, 당시 불트만 계열이 주장했던 “삶의 정황(Sitz im Leben)”의 해석법을 상황에서 성경으로 순서로 제시했다.

    해석학에서 텍스트와 콘텍스트(text and context)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성경 텍스트는 1세기 문서이고, 21세기 상황에서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는 중요한 구도일 것이다. 그러나 1세기 저자가 21세기 독자에게 텍스트를 보냈는지는 큰 관건이 될 것이다. 그리고 1세기 저자와 1세기 독자의 관계 문제를 규정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문학 비평이 도입되면서 구조 분석을 진행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독자반응비평(Concept of Reader-Response Criticism)으로 전개되고 있다. 결국 텍스트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합의한 것이다. 우리는 반틸 박사의 전제주의(presupposition)로 귀결할 수 밖에 없다. 해석자가 해석하는 목표(전제)를 파악해야 한다. 성경을 해석해서 무엇을 얻어 제공하려는 것인가? 해석자의 전제를 파악할 수 없다면, 질문하면 된다. 공적 사역자는 질문에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바르트가 제언한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은 신앙과 사회를 균형 있게 바라보라는 권고나, 성경에서 상황의 순서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설교자는 성경과 신문을 들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sola Scriptura)으로 설교한다. 설교에 적용 부분이 있다고 제시하는데, 필자는 적용이 없어도 좋은 설교라고 생각한다. 설교는 삶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하여 주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에서 “주의 말씀 들음”을 이루지 못한다면, 설교를 떠나 다양한 상황에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설교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는데, 어디에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것인가?

    바르트가 제언한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은 자기 계시관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바르트의 계시관은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구분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유에 둔다. 즉 성경(특별계시)이나 신문(일반계시), 어디에서든지 바르트의 하느님은 자기 백성에게 말할 수 있고, 그 백성은 어디에서든지 자기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신문을 들고 있어도 하느님 말씀을 듣는 수준에 어떤 문제가 없다. 어떤 설교나 상황에서 하느님 말씀을 수납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유를 제한시키는 불신앙이고 이단적이라는 것이 바르트의 주장이다. 정통 교회는 기본적으로 성경과 교리로 하나님 말씀을 수납하는 구도를 제언한다. 바르트는 설교하는 상황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 주체는 청자(聽者, a listener)에게 전적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개혁된 신학에서는 화자(話者, a preacher)와 청자(聽者, a listener) 사이에 성령의 내적 작용이 결합되어야 한다. 개혁파 그리스도인은 복음이 없는 화자에게서 복음을 들을 수 없다는 긴박한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복음이 선포되어도 깨어있지 않는다면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것도 깊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바르트에게는 자유가 있고, 필자는 매우 규범적이고 제한적이다.

    장대선 목사가 제시한 것처럼 바르트의 해석 방법과 불트만의 해석 방법은 같지 않다. 방법이 같지 않으며 해석의 목표도 같지 않다. 불트만과 다르기 때문에 개혁파와 같을 수는 없다. 불트만을 대적했기 때문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1902-1999)을 개혁파 분야에서 긍정적으로 수납하며, 구속사적 성경 해석이 활성화되기도 했다.

    필자는 계시 이해에서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엄격하게 구분할 것을 제언한다. 특별계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일반계시 영역에서 유익을 기대하지 않는 것을 시도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불트만의 수제자에서 돌아선 에타 린네만(Eta Linnemann, 1926-2009)에게서 잘 드러난다(에타 린네만, 『성경비평학은 과학인가 의견인가』, 송다니엘 역, 부흥과개혁사, 2010년). 린네만은 불트만의 지도로 “Gleichnisse Jesu. Einführung und Auslegung”를 발표했고, 숨바쿰라우데(summa cum laude, 최우등상)로 1961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여성 학자이다. 린네만은 51세에 회심한 뒤 인도네시아로 선교 사역을 했다. 그리고 두 권의 책으로 자기 이전 모든 작품을 정죄했다. 린네만이 거부한 <예수의 비유>는 지금도 비평학계에서는 잘 인용하고 있다. 린네만은 마가복음 우선설을 거부하고, 공관복음의 원자료설을 거부하고 독립성을 주장한다.

    성경해석은 끊임없는 정진에 있다. 교회 사역자들이 많은 글쓰기를 해야 하지만, 근본적인 글쓰기는 끊임없는 성경 본문 다룸(handling)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역자가 성경을 해석하면서, 그 해석을 읽고 듣는 독자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 것인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바르트의 신학을 수용하는 예장 통합, 바르트의 신학을 부정한다는 예장 합동의 열매가 유사하다면 어떤 포인트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둘 다 나쁜 확률은 상당히 높지만, 둘 다 좋을 확률은 거의 없다. 성경을 해석한 해석자와 따르는 사람의 열매를 보자. 바르트, 불트만 등등 당대 시대를 주도했던 현대신학자들의 열매가 100년이 되지 않아 보이고 있는데, 동성애를 넘어 상상할 수 없는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을 알고 살아가는가?

    1889년 4월 20일 / ‘아돌프 히틀러’ 출생 
    사람들은 '그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어떠했을까요?
    분명 태어나면 안 되는 사람이 아니라 태어나서 잘못 살았던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힛틀러의 출생이 수많은 사람에게 불행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은 수많은 사람에게 생명과 소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분이 만일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소망없이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길러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은 이 여인을 구원하기 위해 그녀에게 필요한 영적인 생수를 주었습니다. 구원받은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가 마을사람들에게 메시야를 전했습니다. 
    여인은 나의 모든 과거에 대해 모두 말한 사람이라고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이것은 좋은 전도의 방법입니다. 
    전도는 단순히 자기가 아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후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와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주님이 그곳에 더 머물기를 청했으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이 한 말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것은 대체로 어떤 사람의 소개를 통해서였을 것입니다. 
    전도자는 다시 말하면 소개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자를 ‘중매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전도자는 예수님과 우리를 중매한 사람이고 우리는 예수님을 한번 만나보고 그분께 반한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I am jealous for you with a godly jealousy. I promised you to one husband, to Christ, so that I might present you as a pure virgin to him. 

    중매(仲媒)  버금 중(仲),  중매 매(媒) 
    하르모조(
    harmŏzō)  ἁρμόζω

    1. 결혼시키다.  2. 결합시키다.  3. 고후 11:2.  
    Pronunciation [ harmŏzō ]

    Etymology  /  제1부정과거중간태 ἡρμοσάμην, 완료수동태 ἥρμοσμ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ἡρμόσθην, 791에서 유래
    • 1.  결혼시키다, 결합시키다[중간태], 고후11:2.
    • 관련 성경  /  중매하다(고후 11:2).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중매했고 그들의 마음이 예수님께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인에게 말하기를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당신 때문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께 있는 것이지 전도자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것은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 체험적으로 아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체험적으로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실제로 경험하여 아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한 지 20년이 되었는데도 신랑의 얼굴도 모르고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뭔가 이상한 것입니다. 
    나다나엘도 빌립이 가서 예수님을 전하자 처음에는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며 믿지 않았으나,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나서는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요 1:45-49).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어떤 사람이나 책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그분과 동행함을 통해 알아가는 것입니다. 체험적으로 예수님의 실체를, 그분의 살아계심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이론적인 분이 아니라 실제 살아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람을 볼 수 없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알 수 없으나 낙엽이 흔들리고 우리의 피부에 바람이 와 닿을 때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과의 동행을 통해 그분의 살아계심을 맛보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한 지 20년이 넘은 사람이 아직도 삶 속에서 체험한 하나님이 없고, 그저 처음 믿을 때 받았던 말씀만을 붙들고 있다면 그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가 말씀과 더불어 신앙생활을 해나갔다면 그가 직접 경험한 살아계신 하나님이 있을 것입니다.

     개미들이 모여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아마 사람의 존재를 가지고 논란이 될 것입니다. 사람의 존재를 온전히 볼 수 있는 개미는 없을 테니 저마다 체험한 사람의 모습이 다를 것입니다. 우리가 체험하는 하나님도 그와 같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면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저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도 가족과 고향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태어나서 자란 과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전하는 말씀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그에 대해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족은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를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전도함에 있어서 내 삶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 역시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왕의 신하가 자신의 아들을 병에서 낫게 해주기를 구하고 예수님이 그를 살려주시는 표적이 등장합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이 직접 보여주셨으면 하고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한번쯤은 물위를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주님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표적을 구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싶어 합니다.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눅 11:16)”,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요 2:18)”,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요 6:30)” 사실 유대인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것,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 등의 많은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48절). 사람들은 한번만 주님의 표적을 보면 평생 믿음이 변하지 않을 것처럼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 때부터 수많은 표적을 경험했지만 하나님을 불신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이적입니다. 
    잔디밭에는 온통 거미줄이 가득합니다. 
    개미가 먹이를 찾으려고 자기 집을 나와 밖을 돌아다니다가 그 거미줄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면 그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병균이 우리의 손에, 수많은 발암물질이 음식에 있지만 그것을 먹고도 몸에 문제가 생기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기적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자체가 이적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귀는 호시탐탐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지게 하는데 하나님께서 보호하셔서 이와 같이 편안히 사는 것이 기적입니다.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세주이고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하면 불신자들은 그것을 어리석다고 말합니다(고전 1:23). 
    어떻게 그 사실이 나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느냐고, 하늘나라가 정말 존재하기나 하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불신자들이 신자보다 믿음이 더 좋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불신자들이 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건국신화를 보면 곰이 마늘과 쑥을 가지고 동굴에 들어가 3개월을 견뎌서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람들은 이와 같이 허황된 이야기를 믿지 않습니까. 
    세상이 만들어진 것을 보면 우연히 단백질이 생겨나 그것이 나무도 되고 원숭이도 되고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사실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표적을 통해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표적을 통해서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하셨다면 얼마나 쉽겠습니까. 
    아마 표적 몇 번이면 한 순간에 세상사람 모두를 구원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적을 통해서는 사람을 억지로 믿게 할 수 있겠지만, 주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람을 구원하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고 했던 말씀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형성되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여인의 말을 통해 메시야를 만났지만, 예수님을 직접 만나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참 구세주라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이제는 어떤 다른 것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친히 그분을 만나 체험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까?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것은 예수님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고향 사람과 가족에게 전도하는 일이 쉽지 않다면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표적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고자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믿음의 눈이 열릴 때 주님의 모든 역사를 볼 수 있고 살아있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표적은 우리의 믿음을 나아지게 하지 못합니다. 
    믿음만이 예수님을 신뢰하게 하는 것입니다. 
    왕의 신하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되리라고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표적이 아닌 믿음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하신 것을 믿고 순종할 때 우리의 삶에는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통달케 하시는 성령(고린도전서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but God has revealed it to us by his Spirit. The Spirit searches all things, even the deep things of God.

    통달(通達)   골 동,   통달할 달 

    사물(事物)의 이치(理致)나 지식(知識), 기술(技術) 따위를 훤히 알거나 아주 능란(能爛)하게 함.

    무불통달(無不通達)   없을 무     아닐 불   통할 통   통달할 달

    무슨 일이든지 환히 통(通)하여 모르는 것이 없음.

    통달하다(2045) 에류나오(ĕrĕunaō) ἐρευνάω

    1. 204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찾다.  2. 추적하다.  3. 조사하다  
    Pronunciation [ ĕrĕunaō ]

    • 1.  204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찾다, 추적하다, 조사하다, 탐구하다, 살피다, 요5:39, 7:52, 롬8:27.
    • 관련 성경  /  생각하다(요5:39), 상고하다(벧전1:11), 살 피다(롬8:27), 통달하다(고전2:10).




    역대하 30:22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통달한 모든 레위 사람에게 위로하였더라 이와 같이 절기 칠일 동안에 무리가 먹으며 화목제를 드리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하였더라

    욥기 13:1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통달하였느니라

    전도서 7:24
    무릇 된 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이사야 40:14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뇨

    다니엘 1:4
    곧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며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방언을 가르치게 하였고

    고린도전서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2월 3일(화) 요한일서 4: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의 성령(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We know that we live in him and he in us, because he has given us of his Spirit. 

    이 한 문장 안에 요한 신학의 정수가 들어 있어요. 차분히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거한다”는 말의 의미  

    μένω Storng number 3306

    1. 남아있다.  2. 기다리다.
    Pronunciation [ mĕnō ]

    관련 성경 / 머물다(마 10:11, 요1:32, 행21:8, 딤후4:20), 유하다(막6:10, 눅24:29), 거하다(눅8:27, 요8:35, 요일2:27), 계시다(요1:38, 2:12, 히7:24), 머물러 있다(요3:36), 붙어있다(요15:4), 두다(요19:31, 행5:4), 붙다(행27:41), 지내다(고전7:8,40), 영존하다(히12:27), 계속하다(히13:1).

    거하다는 헬라 단어는 "메노(mĕnō. μένω)라고 합니다. 
    메노란 단순히 옆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는 상호적 임재, 즉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사신다는 인격적 연합과 생명적 연결을 말합니다.
    마치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는 것과 같은 원리를 말합니다(요 15장).

    가지가 나무의 줄기에 붙어 있다는 것을 요한은 어떻게 표현합니까? 

    “잘 깨닫기 때문에”
    "열심히 믿기 때문에"
    "잘 느끼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요한의 표현은 오직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확신의 근거는 내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증거’이며 또한 ‘통로’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은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증거의 역할이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표지를 말합니다 
    통로의 역할이란 하나님과 우리가 실제로 연결되어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령은 단순한 능력이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의 방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구절이 주는 깊은 위로

    요한일서 전체 흐름에서 보면, 
    이 말씀은 불안한 신자들을 향한 확신의 선언입니다.  

      “너희가 하나님 안에 있는지 걱정하느냐?
       성령이 너희에게 계시다면, 이미 그 안에 있다.”

    신앙의 확신은 자기검열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에서 옵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확신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 때문에 가능하다는 선언이에요.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의 확신은 감정이나 결심에서 나오지 않아요.
    하나님이 먼저 주신 선물, 곧 성령이 근거입니다.

       “내가 잘 믿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영을 주셨기 때문에”

    신앙의 출발점이 철저히 은혜라는 선언이에요.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여기서 ‘거한다’(μένω, 메노)는 말은 잠깐 방문이 아니라 계속 머무는 관계를 말합니다. 

    • 하나님 안에 거한다 → 방향과 삶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음

    •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 하나님이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내면에서 역사하시는 분

    즉, 상호적 임재예요. 일방적인 종교가 아니라 관계.  

    “줄을 아느니라”

    이 ‘안다’는 건 정보가 아니라 체험적 확신이에요.

    요한은 이렇게 말하는 셈이에요.  

    “우리는 추측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령 때문에 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계속

    • 사랑의 열매

    • 진리에 대한 분별

    • 죄에 대한 민감함
      같은 삶의 증거들을 말하죠.
      성령은 보이지 않지만, 흔적은 남거든요.


    한 줄 요약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내적 증거’이고,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거함의 관계다.

    그의 성령

    “그의 성령”은 성경에서 매우 밀도 높은 신학적 표현입니다. 
    단순히 성령 일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성령, 더 정확히는 그리스도와 분리되지 않은 하나님의 영을 가리킵니다.

     소유격의 의미 : “그의 성령”에서 '그의'

      1. 
    성령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으며
      2. 
    하나님의 뜻· 성품· 생명을 온전히 담고 있다는 뜻 

    즉, 성령은 독립된 어떤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전달(Self-giving)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의 성령을 주셨으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4:13)  

    2. 관계적 의미 : 임재와 내주

    “그의 성령”은 기능보다 관계를 강조합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 =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뜻 
      그래서 성령은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임재의 방식입니다. 
      성령의 내주는 곧 하나님과의 상호 거주(mutual indwelling)를 의미합니다.  

    3. 그리스도론적 의미 : “그리스도의 영”

    신약에서는 “그의 성령”이 곧  
      그리스도의 영 (롬 8:9) 
      아들의 영 (갈 4:6)으로도 불립니다.

    이는 성령이 예수와 분리된 다른 존재가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분

    분별의 기준

    요한일서 전체 맥락에서 보면 “그의 성령”은 진리와 미혹을 가르는 기준이 됩니다.

      1. 그의 성령 →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함
      2. 그의 성령 → 사랑으로 나타남
      3. 그의 성령 →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함  

    사랑 없는 영적 주장
    , 예수를 떠난 계시는 “그의 성령”이 아닙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그의 성령”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시는 방식이며, 그 결과는 진리의 고백과 서로 사랑하는 삶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의 성령”은 성경에서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이나 영적인 영향력을 넘어,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방식을 가리키는 매우 깊은 표현입니다. 

    소유가 아니라 관계적 의미

    ‘그의 성령’에서 ‘그의’는 소유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은 동일한 생명, 동일한 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의 성령을 주셨으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한일서 4:13)

    성령은 하나님이 멀리서 보내신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방식입니다. 

    ‘그의 성령’ 

    성령은 하나님의 
      1.  생명(롬 8:10)
      2. 사랑(롬 5:5)
      3. 진리(요 16:13)
      4. 거룩함(롬 1:4) 을 우리 안에 실제로 흐르게 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계신 곳에는 생명, 사랑, 진리의 분별이 나타납니다.

     확신의 근거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증거를 감정이나 행위가 아니라 “그의 성령”으로 말합니다.
      1. 두려움 대신 담대함
      2. 미움 대신 사랑
      3. 거짓 대신 진리를 향한 마음

    이것들이 완벽하지 않아도 방향이 바뀌었다면, 그것이 바로 그의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는 표지입니다.

    오늘의 신앙에서의 의미

    ‘그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은
      1.  혼자가 아니라는 뜻
      2. 신앙이 의무가 아니라 생명의 반응이 되었다는 뜻
      3.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가능해졌다는 증거

    사랑은 명령이기 전에 그의 성령이 만들어 내는 열매 


    사도행전 1: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혀 힘쓰니라(프로스카르테레오. prŏskartĕrĕō)
    προσκαρτερέω
    집착하다.  ~에 애착을 가지다. 대기하다
    꾸준히하다, 지속하다

    προσκαρτερέω Storng number 4342

    1. 집착하다.  2. ~에 애착을 가지다.  3. 대기하다 
    Pronunciation  [ prŏskartĕrĕō ]  
    Etymology  /  4314와 2594에서 유래

    성령(Holy Spirit)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영이자 인격적인 하나님(삼위일체 중 제3위)으로, 눈에 보이지 않으나 거룩한 능력으로 신자들 가운데 임재하여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돕고(보혜사)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는 존재입니다. 신자 안에 거하며 구원의 날까지 인치시고 증거하는 역할을 합니다.
     


    성령(Holy Spirit)은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영이자 인격적인 하나님(삼위일체 중 제3위)으로, 눈에 보이지 않으나 거룩한 능력으로 신자들 가운데 임재하여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돕고(보혜사)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는 존재입니다. 신자 안에 거하며 구원의 날까지 인치시고 증거하는 역할을 합니다.
     
    성령의 주요 역할 및 특징
    • 보혜사 (Helper/Comforter) :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로, 옆에서 대변하고 어려움을 돕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 성화와 인도 : 신자들을 거룩하게 성화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도록 인도하며, 지혜와 지식을 주어 진리 가운데로 이끕니다.
    • 능력과 은사 : 영적 성장과 덕을 위해 성령의 은사(선물)를 주며, 신자에게 시련을 이길 담대함을 줍니다.
    • 내주하심 : 믿는 자 안에 거하시며 성부와 성자의 영으로서 함께하신다. 
    성령과 관련된 성경적, 교리적 내용
    • 성령의 열매 :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 등 9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 성령의 역사를 통한 변화 : 핍박자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것처럼, 성령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보입니다.
    • 근심하게 하지 말라 : 죄로 인해 성령을 소멸하거나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은 모든 지식과 지혜를 공유하시며 인격적인 분으로, 모든 이의 관심을 구주(예수)에게 향하게 하여 하나님의 일을 세상에 이루어 가십니다.


    2월 2일(월) 요한일서 4:11-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서로 사랑하면(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No one has ever seen God; but if we love one another, God lives in us and his love is made complete in us.

    창세기 5:1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계보(系譜) 맬 계, 족보 보

    창세기 5:3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이라 하였고.

    미국의 두 가문 이야기

    미국 학자 윈십(Winship)은 1900년에 동시대 두 가문의 200년간의 번영과 발전을 추적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한 가문은 독실한 기독교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년생)의 가문이었고, 
    다른 한 가문은 무신론자인 막스 쥬크스(Max Jukes, 1700년생) 가문이었다.
    무신론자인 쥬크스는 에드워즈에게 “자네는 신을 믿지만 난 영원히 믿지 않을 걸세!”라고 말한 적이 있다.

    윈십은 나중에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 200년 후 이 두 가문의 모습은 확연히 달랐다. 
    유신론자인 조나단 에드워즈 가문의 후손은 총 1,394명으로, 그중에 대학교수가 100명, 대학 학장이 14명, 변호사 70명, 판사 30명, 의사 60명, 작가 60명, 목사나 신학자 300명, 의원 3명과 부통령 1명이 있었다.

    반면 무신론자인 막스 쥬크스 가문의 후손은 총 903명으로, 그중에는 깡패 310명, 성병에 걸린 사람 440명, 13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은 사람 130명, 살인범 7명, 술꾼 100명, 도둑 60명, 매춘부 190명, 상인 20명이 있었고, 상인 중 10명은 감옥에서 장사를 배웠다.

    두 가문의 데이터를 함께 보면 대조적이면서도 분명하다. 신을 믿는 에드워즈 가문은 자신에 대한 요구가 정결하고 성실하며 고상하고, 후손들은 모두 아버지 세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 중 하나가 됐다. 반면 신을 믿지 않는 쥬크스 가문은 인생에서 목적 없이 향락을 추구한 결과, 후손들은 대다수 거지와 매춘부 및 범죄자가 됐다.

    사람들은 에드워즈 가문의 시조인 조나단 에드워즈가 평범한 기독교인이 아니라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이자 미국 철학 사상의 개척자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10대 소년 시절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은 목표를 세운 바 있다.

    전체 인류의 이익을 위해 인생의 책무를 이행하기로 다짐한다.

    아무리 어려운 일에 부딪혀도 행하기로 다짐한다.

    끊임없이 노력해 혁신적인 방법을 찾아 인생의 책무를 이행하기로 다짐한다.

    영원히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은 물론, 시간 사용을 최적화하기로 다짐한다.

    살아 있는 동안 전심전력을 다하기로 다짐한다.

    적합한 자선 기부 대상을 찾기로 다짐한다.

    복수를 위한 어떠한 일도 절대 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비이성적인 사람들에 대해 절대로 조금도 분노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누구에 대한 나쁜 말도 하지 않기로 영원히 다짐한다.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에 있어서 가장 엄격한 절제를 유지하기로 다짐한다.

    이와 같은 자신에 대한 엄격한 요구에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는 젊어서 포부를 굳게 다지고 삶의 매 순간 수행에 정진했으며 자신을 향상했다. 그의 인생도 끊임없이 돌파하고 진보했으며 갈수록 신성한 표준에 가까워졌다. 이로써 그는 자손들과 함께 모두 신의 보살핌과 복을 받았다.

    반대로 쥬크스 가문은 신을 믿지 않고 방탕한 삶을 살았다. 사람이 신을 등지고 선량함과 도덕을 포기하면 스스로 인간 이하의 경지로 전락한다. 도덕이 무너지면 짐승과 같으니 신은 자연히 이런 ‘사람’을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더는 이런 ‘사람’을 보살피지 않는다. 이때 사탄이 오고 이런 ‘사람’은 마귀의 사람이 되어 지옥에 떨어진다. /명혜망



    서로 사랑하면(if we love one another) 예수님이 보인다!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이 보인다.
    If you love each other, you see Jesus.

    사랑하면 예수님이 보인다는 정의는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하나님

    민수기 16:22 

    그 두 사람이 엎드려 가로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민수기 27:6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시편 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일서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일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예일 대학교 심리학 교수이자 지능 연구의 대가인 로버트 스턴버그(Robert Sternburg)  
    그 분의 유명한 사랑의 삼각 이론이 있습니다.  
    '사랑은 마치 정삼각형처럼 삼각 균형이 잡힌 그 가운데에 참 사랑이 있다' 

    첫째 요소, Intimacy(친밀감)  
    사랑은 친밀함을 느껴야 되요.  '가까이 있다.  저와 나는 가깝다.  저는 나를 이해한다.  저는 나의 사정을 잘 알아주신다.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이렇게 친밀감을 느끼는 그런 정서가 이게 사랑입니다.  '가까이 있다' 하는 것입니다.  비록 조금 떨어져 있어도 '가까이 있다.  저가 나를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친밀감, 그것이 사랑입니다.  

    둘째 요소,  Passion(정열)
    사랑이 정열로 작용해서 로맨틱하고 어떤 때는 욕망으로 치닫습니다.  그래서 소유하려고 하고 꼭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그런 마음이 사실은 그 뿌리에 사랑이 있어요.  

    셋째 요소, Promise and Responsibility(약속과 책임)
    책임을 지는 거예요.  약속이 확실하고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고.  이게 믿어지지 않으면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고 나아가서 책임을 집니다.  
    저의 아픔이 바로 나의 아픔이요 저의 실수가 나의 실수입니다.  
    저는 나와 상관이 없듯이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실수를 보더라도 그건 바로 내 책임이예요.  자식의 실수를 내 탓이라고 아내의 잘못도 내 잘못이라고 남편의 잘못도 그건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라고, 책임을 지는 마음이 그게 사랑이요.  
    무책임하게 비판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책임은 바로 동체의식이거든요.  일체 의식이요.  하나로 생각하게 될 때 책임을 집니다.  이게 바로 사랑이에요.  자, 그러면 여기서 이것이 삼각형처럼 꼭 균형을 잡아야 된대요.  왜냐하면 친밀감에 치우치면 감상주의자가 되요.  요새말로 '마마보이' 같은, 이런 것이 된다 이거예요.  또, 정열에 치우치게 되면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정신을 못 차립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을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약속과 책임, 이 의무에 지나치게 치우치게 되면, 아주 메마르게 됩니다.  냉정하고 메마르고. 요새 말로 정열이 없어요.  그런고로, 이 세 요소가 함께 합쳐서 정삼각형처럼 이 세 변이 같은 길이로 균형있게 조화를 이루어야 참 사랑이다, 라고 합니다.  이제 이 사랑의 근본은 어디 있느냐 하면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한다'는 순간부터 사랑의 성격을 떠납니다.  사랑은 받아들임에 있는 것이올시다.  받는 존재 의식이요 받는 감격이요 받는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는 것을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사랑은 증거(Love is proof)

    예수를 믿으라고 권면하는 것보다 더 선행되어야 할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는 교리를 알아야 한다.
    능력이 있어야 한다.
    열심히 봉사해야 한다라고 깨우치신 것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열심히 봉사하면”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
    서로 사랑하는 모습 자체가 신앙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관계(Love is not a word, but a relationship)

    서로라는 것은 혼자가 아니라 상대방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말이 아니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라는 깨우침과 같습니다.
    혼자서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때로는 서로 부딪치고 상처를 받으면서도 참고 용서하고 기다리면서 품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할 때 비로써 믿음의 꽃이 피어나고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세상을 향한 복음(Love is the gospel to the world)

    세상은 설교보다 믿는 사람들의 삶을 먼저 봅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서로 미워한다면 세상에 나가서 복음으로 드러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서로 사랑하면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봐요.
    “아, 저 사람들은 예수께 속했구나.”

    사랑은 명령(Love is a command)

    전쟁 중에 있을 때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총살형으로 처리합니다.
    우리들은 날마다 영적 전쟁터에 나가야 합니다.
    영적 전쟁터에서 승리하려면 사랑의 최우수 선수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사랑으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 됨을 증명하는 일에 솔선수범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나의 믿음을 증명하는 삶의 보람을 회복하는 복된 날을 기대합시다.


    “서로 사랑하라”
    이 말은 계명이면서 동시에 표지예요.  

     계명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 기준은 감정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 방식입니다. 먼저 주고, 끝까지 가는 사랑. 

     표지 
    :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 말이나 지식보다, 사랑이 곧 신앙의 증거라는 뜻이죠.

    요한일서 흐름으로 보면 더 선명해져요.
    서로 사랑할 때
       →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 성령의 내주가 드러나고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착하게 살라는 도덕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다는 증거예요.

    결국 이 말은 이렇게 들려요.  

    “너희 안에 내가 살아 있다면, 그 생명은 사랑으로 흘러나올 거야.”


    “서로 사랑하라”

    이 말은 감정부터 잘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으로 살라는 초대예요.

    요한일서의 흐름에서 보면 이 명령은 이렇게 연결돼요:

    •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 그 사랑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드러나고

    • 그 증거로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을 알게 된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건  도덕 명령이 아니라 신앙의 증거예요.

    ✔ 옳고 그름을 아는 것보다
    ✔ 말을 잘하는 것보다
    ✔ 믿음을 주장하는 것보다

    사랑이 실제로 흘러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죠.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어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즉, 조건 없이,  먼저,  손해를 감수하면서,  쉽지 않지만, 
    그래서 이 명령은 우리 힘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만 가능한 삶이에요.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는 거예요.


    거룩한 끈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숲 속 한 동네에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그 강아지는 너무도 더러웠고 못생겼습니다. 오랫동안 길을 잃고 헤맸던지 강아지는 굶주림에 거의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아지 목에 달린 이름표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마도 주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개를 붙들었습니다.

    그들은 이름표를 보았습니다. 그 개의 이름은 "밥스"였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작은 글자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나라 왕에게 속했습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왕의 강아지였던 것입니다. 곧 경찰에 보고되었고 잘 보호되어 주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왕의 부처가 에딘버러 성에 휴가를 왔다가 그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강아지는 왕궁으로 돌아갔고 무서운 숲속에서의 경험은 그치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수백 킬로나 멀리 떨어진 왕과 강아지를 연결시켜 준 것은 바로 이 이름표였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신자들에게도 큰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어디를 헤매던지 우리에게 이름표만 분명하다고 한다면 즉각적인 보호가 주어지게 되며 확실하게 주인에게로 인도된다는 사실입니다.

    온 우주의 왕인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이름표만 확실하다면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강아지를 받아들이게 했을까요?

    강아지가 훌륭하게 숲 속에서 여러 날을 생존했기 때문입니까? 강아지가 왕에게 어떤 좋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까? 강아지가 경호를 잘하기 때문입니까? 강아지가 보호를 받은 이유는 단 한 가지, 왕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 일이 신자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것이기에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 없습니다.









    1월 31일(토) 요한일서 4: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화목제(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This is love: not that we loved God, but that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as an atoning sacrifice for our sins.

    화목제(sacrifice for our sins. 和睦祭)는 구약 제사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기쁨의 교제를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화목을 위한 제물로 보냄을 받았다고 합니다.

    화목제를 히브리어로 쉘라밈(שְׁלָמִים) 이라고 합니다.
    쉘라밈의 뜻은 평안, 온전함, 회복, 충만함입니다.

    회목제를 헬라어로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이라고 합니다.
    힐라스테리온은 화목제물, 속죄소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셨다고 강조합니다(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화목제물이란 힐라스테리온이 속죄소라고 사용된 히브리서 9장 5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속죄소는 지성소안에 있는 언약궤(법궤)의 뚜껑을 말합니다.
    언약궤안에는 모세의 싹이 난 지팡이, 만나를 담았던 돌항아리, 십계명의 돌비가 담겨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물건은 공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반역하는 죄와 연관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돌판을 통해 계명을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 숭배했습니다.(출 32:1~6) 
    신광야에서 하나님이 만나를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이 더 좋았다’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출 16:1~3) 
    아론의 싹난 지팡이 사건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의 영적 권위에 도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절했습니다.(민 16:1~3)

    이렇게 언약궤 안의 세 가지 물건은 전부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표적인 죄악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물건을 언약궤 안에 넣고 정금으로 뚜껑을 만들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뚜껑 위에 대제사장이 속죄의 피를 뿌렸습니다.(레 16:14~15) 
    죽어 마땅한 죄 위에 속죄의 피가 뿌려지니까 하나님은 그 속죄의 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자리인 시은좌를 삼으시고 임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궤 뚜껑이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의미를 그대로 가지고 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언약궤 뚜껑이 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언약궤 뚜껑이 되셔서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한 우리를 속죄의 피로 덮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로운 존재가 됐고 하나님의 영광을 모시는 거룩한 시은좌로,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고전 3:16~17)


     

    춘향전의 이도령이 고향으로 돌아와 멸시와 천대를 받았지만 웃을 수 있었던 것은 가슴 속에 암행어사 마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누구입니까?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3장 25절 말씀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화목제물의 희랍어 단어인 ‘힐라스테리온’은 원래 ‘언약궤 뚜껑’을 의미합니다. 


    ἱλαστήριον, ου, τό Storng number 2435

    1. 속죄하는 것.  2. 속죄의 장소  
    Pronunciation  [ hilastēriŏn ]  
    Etymology  /  2433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속죄하는 것, 화해하게 하는 것, 속죄의 방편 [그리스도에 대하여] 롬3:25.
    •  2. 속죄의 장소, 속죄, 히9:5.
    • 관련 성경  /  화목제물(롬3:25), 속죄소(히9:5).

    언약궤 안에는 두 돌판, 감추인 만나,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있습니다. 
    이 세 가지 물건은 공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반역하는 죄와 연관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돌판을 통해 계명을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 숭배했습니다.(출 32:1~6) 
    신광야에서 하나님이 만나를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이 더 좋았다’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출 16:1~3) 
    아론의 싹난 지팡이 사건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의 영적 권위에 도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절했습니다.(민 16:1~3)

    이렇게 언약궤 안의 세 가지 물건은 전부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표적인 죄악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물건을 언약궤 안에 넣고 정금으로 뚜껑을 만들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뚜껑 위에 대제사장이 속죄의 피를 뿌렸습니다.(레 16:14~15) 
    죽어 마땅한 죄 위에 속죄의 피가 뿌려지니까 하나님은 그 속죄의 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자리인 시은좌를 삼으시고 임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궤 뚜껑이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의미를 그대로 가지고 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언약궤 뚜껑이 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언약궤 뚜껑이 되셔서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한 우리를 속죄의 피로 덮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로운 존재가 됐고 하나님의 영광을 모시는 거룩한 시은좌로,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고전 3:16~17)

  •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 Don't you know that you yourselves are God's temple and that God's Spirit lives in you?
  • If anyone destroys God's temple, God will destroy him; for God's temple is sacred, and you are that temple.

  •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거룩한 존재가 됐음을 믿으라고 강조합니다. 
    로마서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화목 제물(힐라스테리온 ἱλαστήριο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게 되었음을 여러 곳에서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 중 ‘화목 제물’ 혹은 ‘화목제’라는 번역은 본래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는 데 있어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는 번역판마다 다르게 해석된 용어에서 기인하며, 각기 신학적 배경에 따라 조금씩 다른 뉘앙스를 반영합니다.

    한글 개역성경의 로마서 3:25, 요한일서 2:2, 요한일서 4:10은 "화목 제물" 또는 "화목제"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번역판에 따라 다음과 같은 다른 표현으로도 번역됩니다.

    '화목 제물'(propitiation) : NASB, ESV에서 사용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고 관계를 회복하는 제물이라는 원문의 의미를 살린 표현입니다.

    '속죄제물'(sacrifice of atonement) : NIV, 바른성경, 표준새번역에서 사용하며, 속죄의 기능을 강조한 번역입니다.

    '속죄소'(mercy seat) :
    NET에서 사용하며, 속죄의 장소로서의 의미를 반영한 번역입니다.

    로마서 3:25과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

    로마서 3:25에서 "화목 제물"로 번역된 헬라어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은 속죄와 화목의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어원적 의미와 신약 용례

    ‘힐라스테리온’은 동사 ‘힐라스코마이(ἱλάσκομαι)’, 즉 '달래다, 화해시키다'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는 구약의 속죄소(언약궤의 뚜껑)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며(출 25:17-22, 레 16:2),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와 화목의 제물로 묘사합니다.

    (2)번역의 다양성

    영어 성경 NASB와 ESV는 'propitiation'(화목 제물)로, NIV와 NRSV는 'sacrifice of atonement'(속죄제물)로 번역하여 속죄와 화목의 두 측면을 나눠 표현했습니다. NET 성경은 ‘힐라스테리온’을 언약궤 뚜껑을 의미하는 ‘mercy seat’(속죄소)로 번역하며, 속죄의 장소라는 상징적 의미를 강조합니다.

    요한일서 2:2와 4:10의 ‘힐라스모스(ἱλασμός)’

    요한일서 2:2와 4:10에서 "화목 제물" 또는 "화목제"로 번역된 ‘힐라스모스(ἱλασμός)’는 예수님의 사역을 속죄와 화목의 맥락에서 이해하도록 돕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1)어원과 구약의 사용

    ‘힐라스모스’ 역시 ‘힐라스코마이’에서 파생된 명사로, 구약 칠십인경(LXX)에서 속죄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레위기 25:9에서는 속죄의 의미로, 시편 130:4에서는 용서의 의미로 번역되었습니다.

    (2)신약의 의미

    요한일서 2:2에서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라는 표현은 단순히 죄의 사함을 넘어서, 죄로 인해 깨어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화목의 상태를 강조합니다. 요한일서 4:10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진 화해를 드러냅니다.

    구약과 신약의 연결: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

    구약의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속죄소에 피를 뿌려 백성의 죄를 속했던 의식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되었습니다(히 9:12). 구약에서의 제사가 죄 사함을 위한 임시적 방편이었다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로 완전한 화목이 이루어졌습니다.

    (1)속죄와 화목의 관계

    '힐라스테리온'과 '힐라스모스'는 단순한 죄의 용서를 넘어,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이라는 결과를 강조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동시에 그의 은혜로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롬 5:1).

    (2)신약적 이해

    로마서 3:24-25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라고 선언하며, 속죄와 화목을 모두 포함합니다. 요한일서 4:9-12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연합과 화목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화목 제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우리의 죄를 덮는 속죄제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이루시는 완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는 신약 성경 기자들이 단순한 죄의 사함만이 아닌, 속죄를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연합을 강조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화목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롬 5:1), 서로 화목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죄와 화목의 진리를 깊이 묵상하며, 이를 통해 얻은 은혜를 세상에 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1. 화목제란 무엇인가?

    화목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평화로운 관계’가 되었음을 기뻐하며 드리는 제사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쉘라밈(שְׁלָמִים)인데, 여기에는 평안, 온전함, 회복, 충만함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쉽게 말하면 
    “하나님과 사이가 다시 좋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쁩니다.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2. 다른 제사와의 차이점
    제사 핵심 의미
    번제 하나님께 전적으로 드림
    속죄제 죄 사함
    속건제 죄에 대한 보상과 회복
    화목제 관계의 회복 + 기쁨의 교제

    🔹 화목제의 가장 큰 특징은
    제물의 일부를 제사장과 제물을 드린 사람이 함께 먹는다는 것이에요.

    → 하나님, 제사장, 제사 드린 사람이 ‘같은 제물’을 나눔
    → 이건 거의 식탁 교제의 이미지입니다.  

    3. 화목제의 세 가지 경우 

      감사 화목제

       →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  

      서원 화목제

       → 약속을 지키며 드리는 제사  

      자원 화목제

       → 자발적인 사랑과 기쁨의 표현

    공통점은 하나예요.
       억지 아님
       두려움 아님
       기쁨과 감사

     4. 신약적 의미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화목제의 완성이에요.

    •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되었은즉” (롬 5:10)

    •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골 1:20)

     더 이상 화목제를 반복해서 드릴 필요가 없는 이유
       = 예수님이 단번에 화목을 이루셨기 때문

    그래서 성찬은
     화목제의 정신이 이어진 예식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함께 먹고 마심으로 화목을 누리는 것  

    5. 오늘날 신앙생활에 주는 메시지

    화목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요.

    • 하나님은 벌 주기만 기다리는 분이 아니라
      함께 먹고 기뻐하기를 원하시는 분

    • 신앙은 긴장만이 아니라
      평안과 교제의 관계

    • 예배는 의무 이전에
      회복된 관계의 기쁨

    그래서 화목제의 핵심 메시지  

        너는 이미 하나님과 화목되었다.
        이제 그 관계를 누려라.

    화목제(和睦祭, Peace Offering)는 하나님과 화목(관계의 회복과 교제)을 누리는 제사입니다.
    레위기 3장과 7장에서 그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화목제의 뜻

    • 히브리어 쉘라밈(שְׁלָמִים) 평화, 온전함, 관계의 충만

    •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사”라기보다  이미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 있음을 기뻐하며 누리는 제사

    즉,  죄 → 속죄제,  관계 회복 → 화목제 

    화목제의 특징 (다른 제사와 다른 점)

    제물의 분배

    • 하나님 : 기름과 내장 → 불사름

    • 제사장 : 가슴과 넓적다리

    • 제물 드린 사람 : 나머지 고기 → 함께 먹음  

    • 하나님· 제사장· 백성이 함께 나누는 유일한 제사  
      제사가 곧 식탁 교제가 됨  

    화목제의 세 종류 / 레위기 7장 기준

    1. 감사 화목제 :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

    2. 서원 화목제 :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이루고 드림

    3. 자원 화목제 : 자발적인 사랑의 표현   

      억지가 아니라 기쁨에서 나오는 제사 

    신학적 의미 

    • 하나님은 단순히 “죄를 처리하는 분”이 아니라  함께 먹고 교제하시는 분

    • 신앙의 목적은 죄책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목한 동행 


    신약과의 연결
    • 예수 그리스도 = 참된 화목제

      •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화목하게 되었다” (롬 5:10)

    • 성찬은 화목제의 완성된 그림

      • 하나님과 화해한 자들이 같은 떡과 잔을 나눔

    한 줄 요약    
    화목제는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이미 화해된 관계를 기뻐하며 누리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오늘날 신앙생활의 ‘방향’을 바로잡아 줍니다.

    신앙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관계 누림’이다

    많은 신앙이 이렇게 흐르기 쉬워요.  
    죄 → 회개 → 또 죄 → 또 회개 → 반복 
    물론 회개는 중요해요.
    하지만 화목제는 그 다음 단계를 보여줍니다.

    • 하나님은 용서만 해 주시고 끝나는 분이 아니다 

    • 용서 후에 함께 먹고 기뻐하시는 분이다.  

    오늘날 신앙은
    죄책감에 머무는 삶이 아니라, 회복된 관계를 누리는 삶이어야 해요.  

    예배는 ‘심판대’가 아니라 ‘식탁’이다

    화목제의 중심은 제사 후에 함께 먹는 것이었죠.

    오늘날로 말하면:

    • 예배 = 검사받는 자리가 아니다

    • 예배 = 하나님과 마주 앉는 자리라고 한다

    그래서 예배의 본질은

    • “내가 오늘 잘 살았나?”가 아니라

    • “하나님과 함께 있고 있는가?”

    성찬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화목제의 정신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순간이에요.  

    신앙은 억지가 아니라 자발성에서 깊어진다

    화목제는 자원함에서 드려졌어요.

    오늘날로 말하면 
     의무 신앙이 아니다. 
     보상 기대 신앙도 아니다. 
     사랑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

    기도, 헌신, 섬김도  “해야 하니까”가 아니라  “함께하고 싶어서” 나오는 게 화목제적 신앙

    공동체는 ‘경쟁’이 아니라 ‘나눔’이다. 
    화목제는 혼자 드리고 혼자 끝나는 제사가 아니었어요. 
    하나님, 제사장, 이웃과 가족  모두가 같은 제물을 나눴죠.  

    오늘날 교회는  누가 더 의로운가를 증명하는 곳이 아닙니다. 
    같이 은혜를 먹는 공동체 그래서 진짜 영적 성숙은 혼자 거룩해지는 게 아니라 함께 따뜻해지는 것이에요.   

    신앙의 목표는 ‘완벽함’이 아니라 ‘화목함’이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해요. 
    더 나아지면 하나님께 갈 수 있다 
    화목제는 반대로 말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할 때 삶이 나아진다

    오늘날 신앙의 중심 질문은 이것이에요. 
    “나는 충분히 거룩한가?” ❌ 
    “나는 하나님과 화목한가?” ⭕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화목제는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과 함께 있는 신앙’을 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0:16–18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여기서 “참여함” (koinonia)은 교제, 공동체, 나눔이에요.

    그리고 바로 이어서 이스라엘의 제사를 예로 듭니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성찬을 화목제의 틀로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예요.

    왜 성찬은 ‘벌 받는 자리’가 아닌가

    많은 신자들이 성찬을  “조심해야 할 자리, 무서운 자리”로만 생각하는데,
    화목제의 관점에서는 방향이 달라져요.

    ✔ 성찬은 심판의 식탁이 아니라
    화해의 식탁

    물론 가볍게 여길 수는 없지만,
    그 이유는 “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화목을 무시하는 태도가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한 문장 요약 
    화목제가 ‘함께 먹음으로 화해를 누리는 제사’였다면,
    성찬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화목을 실제로 누리는 식탁’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 
    성찬은 자격 있는 사람만의 자리가 아니라 화목이 필요한 사람이 초대받은 자리
        
    - 회개는 입장권이 아니라  이미 열린 식탁으로 돌아오는 길  
        - 성찬은 “내 믿음 점검”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 확인


    1월 30일(금) 요한일서 4: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독생자(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This is how God showed his love among us: He sent his one and only Son into the world that we might live through him.

    독생자(one and only Son)  
    한글 개역 성경에서 5구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요 1:14, 3:16, 3:18, 히 11:17, 요일 4:9)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KJV.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begotten Son, that whosoever believeth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

    NASB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begotten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독생자
    한문자 /
    獨生子

    영어 성경 
     NIV / 
    one and only Son(하나뿐인 아들)
     KJV / 
    only begotten Son(외동아들)
     NASB / 
    only begotten Son(외동아들)

    헬라어
    모노게네스(mŏnŏgĕnēs) μονογενής

  •    2. 독생하신, 요 1:14, 18, 3:16, 요일 4:9.
  • 3441  모노스(mŏnŏs) 형용사 
    μόνος, η, ον  Storng number 3441  
    1. 오직.  2. 홀로 있는.  3. 버려진    
    Pronunciation [ mŏnŏs ]  
    관련 성경  / 유일한(요 17:3). 
    [부] 오직(마17:8, 막9:8, 계15:4), 홀로(막6:47, 딤전1:17 히9:7), 혼자 (눅10:40, 요8:29, 16:32), 다만(마4:10), 외에 는(마12:4), 따로(마14:23), 그대로(요12:24), 외에(빌4:15).

    1096 기노마이(ginŏmai)

    γίνομαι Storng number1096
    1. ~이 되다.  2. 탄생되다.  3. 마 21:19  
    Pronunciation [ ginŏmai ]
    관련 성경 / 되다(마1:22, 막4:19, 눅1:2), 되게 하다(마4:3, 막1:17, 고후5:21), 이루다(마5:18, 6:10, 눅1:38), 내다(마6:16), 일어나다(마8:24, 막4:17), 베풀다(마11:20), 행하다(마11:21,23), 나타나다(행8:13), 맺다(마21:19), 나다(마25:6, 막9:7, 눅3:22), 생기다(마23:15, 요5:14), 계시다(마26:6, 막4:10), 임하다(마27: 45, 막15:33), 이르다(막1:4, 눅10:32), 당하다(막5:16, 딤후3:11), 드러나다(막6:14), 오다(막6:21, 요1:17), 차다(눅2:6, 9:51), 만들다(행19:26), 가다(행27:33), 거하다(고전2: 3), 있다(마18:12).



  • "독생자”라는 말은 헬라어 모노게네스를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영어로 “only 오직”, “one and only 오직 하나뿐인”, 그리고 “only begotten 독생하신”으로 다양하게 번역됩니다.

    μονογενής, ές Storng number 3439

    1. 오직.  2. 독생하신  
    Pronunciation [ mŏnŏgĕnēs ]
     Etymology  /  3441과 1096에서 유래
    •  1. 오직,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눅7:12, 9:38, 8:42, 히11:17.
    •  2. 독생하신, 요1:14, 18, 3:16, 요일4:9.
    • 관련 성경  /  독생한(요1:18). [명] 외아들(눅9:38, 히11:17), 독생자(요1:14, 요일4:9).

    3441.  μόνος, η, ον Storng number  

    1.  오직.  2. 홀로 있는.  3. 버려진  
    Pronunciation  [ mŏnŏs ]  
    Etymology  /  330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 관련 성경  / 유일한(요17:3). [부] 오직(마17:8, 막9:8, 계15:4), 홀로(막6:47, 딤전1:17 히9:7), 혼자 (눅10:40, 요8:29, 16:32), 다만(마4:10), 외에 는(마12:4), 따로(마14:23), 그대로(요12:24), 외에(빌4:15).

  • 1096.  γίνομαι Storng number  

    1.  ~이 되다.  2. 탄생되다.  3. 마 21:19  
    Pronunciation [ ginŏmai ]  
    관련 성경  /  되다(마1:22, 막4:19, 눅1:2), 되게 하다(마4:3, 막1:17, 고후5:21), 이루다(마5:18, 6:10, 눅1:38), 내다(마6:16), 일어나다(마8:24, 막4:17), 베풀다(마11:20), 행하다(마11:21,23), 나타나다(행8:13), 맺다(마21:19), 나다(마25:6, 막9:7, 눅3:22), 생기다(마23:15, 요5:14), 계시다(마26:6, 막4:10), 임하다(마27: 45, 막15:33), 이르다(막1:4, 눅10:32), 당하다(막5:16, 딤후3:11), 드러나다(막6:14), 오다(막6:21, 요1:17), 차다(눅2:6, 9:51), 만들다(행19:26), 가다(행27:33), 거하다(고전2: 3), 있다(마18:12).

    문제는 마지막 단어(KJV, NASB, NKJV에서 사용된 “only begotten 독생하신”)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짓 가르침을 증명하기 위해 이 말을 고수해왔습니다. 
    즉 예수님은 삼위일체 중 두 번째 인격으로서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어 “begotten 생긴”을 보고 시간상 시작이 있는 존재만이 오직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창조된 존재라고 말합니다.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begotten 생긴”이 헬라어를 번역한 영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어의 의미를 본문에 전가할 게 아니라 헬라어의 본래 의미를 살펴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모노게네스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헬라어-영어 신약성경 사전과 다른 초기 크리스천 문학 (BAGD, 제 3판)에 의하면 모노게네스는 두 가지의 중요한 정의를 가집니다. 

    첫 번째 정의는 “특별한 관계 안에서 오직 하나뿐인 종류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는 히브리서 11:17에서 저자가 이삭을 아브라함의 “독생자”라고 언급한 부분에서 사용된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한 명 이상의 아들이 있었으나, 이삭은 사라에게서 난 유일한 언약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By faith Abraham, when God tested him, offered Isaac as a sacrifice. He who had received the promises was about to sacrifice his one and only son.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10월호>

    세상에는 아브라함을 기원으로 삼는 신앙이 세 개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이다. 

    유대교는 아브라함을 민족의 기원으로 삼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확정하셨다고 믿는다.

    기독교 신앙은 아브라함을 영적인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롬 4:9-11), 무엇보다 아브라함의 약속된 씨가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이신데(갈 3:16 ,29),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아브라함이 이삭이 아닌 이스마엘을 통해 유업을 이었고, 자기들이 그 이스마엘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한다. 
    그들은 왜 이처럼 아브라함에 대해서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는가? 
    아브라함은 이슬람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핵심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자기 종교를 소개함에 있어서,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중시하는 종교”라고 말한다(한국이슬람교중앙회, http://www.koreaislam.org/data/data3.jsp).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바 아브라함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의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좀 다르다.

    ​1. “아브라함은 유일신교의 시작이다.”

    아브라함이 부름받은 갈대아 우르는 우상 숭배의 장소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방 우상들의 땅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한 언약을 맺어 주셨다. 
    아브라함과 그의 씨를 축복하여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는 것이다(창 12:1-3; 13:14-17 등).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셨으니, 아브라함은 다른 모든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 
    당시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은 다신교를 믿고 있었는데, 이러한 언약으로 아브라함만이 유일신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슬람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재건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아브라함을 “진정한 무슬림”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세워 유일신 신앙을 확정하셨는데 그후 수세기를 거치면서 이 진리가 왜곡되었고, 다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 신앙을 세우셨으며, 또다시 왜곡되자 예수님을 통해 이 신앙을 되살리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함마드를 통해 확정하셨으니, 이 이슬람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제대로 계승한 최후의 종교라 주장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들은 누구인가?

    ​만약 그렇다면 계시의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 
    즉 모세에게는 아브라함을 인정한 상태에서 계시를 주셔야 하고, 예수님께는 모세를 인정한 상태에서 계시를 주셔야 한다. 
    성경에 따르면 여기까지는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무함마드에게서 그 계시는 단절된다. 
    이슬람에서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님을 다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들과 연관된 계시들, 즉 신구약 성경의 기록들은 철저히 무시한다. 아브라함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아브라함과 관련된 구약성경의 기록을 무시하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경전을 만들어 거기에 기록된 새로운 아브라함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은 유일신 신앙이 아니다
    알라는 이슬람교 이전부터 있었던 달 신의 변형이다. 
    반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우상들과도 연관되지 않은 그분 자신을 계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들로도 형상화되지 않으셨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테라가 어떤 신들을 섬겼든지, 심지어 아브라함이 부름받기 전에 어떤 신을 섬겼었는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전혀 관계없는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셨다.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이집트의 그 어떤 신들과도 관련없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출 3:6). 
    반면 이슬람의 알라는 (자기들은 유일신이라 주장하겠지만) 달 신의 형상에서 가져오고, 또 달 신을 숭배했던 이교도적 전통을 가져왔다.

    ​이슬람은 자기들이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의 신앙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들이 주장하는 바, 유일신 신앙의 전통에만 한정시킨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정말 강조하시는 진리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약속의 씨의 진리를 받아들여야 하고, 모세를 통해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맺으신 율법의 언약을 받아들여야 하며, 예수님을 통해서는 그분의 신성과 그분을 통해서 받는 구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진리의 성경을 통해 주어진 핵심적 계시들이다. 하지만 이슬람은 자기 종교에 필요한 내용들만 빼내어 적용한다.

    ​2. “아브라함의 약속된 씨는 이스마엘이다.”

    이것은 성경과 코란의 확연히 다른 내용 중 하나다. 
    그들은, 성경은 유대인의 관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조상인 이삭을 강조하지만 사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통해 유업을 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 주장의 근거는 “독자”(only son)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독자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을 때(창 22:2), 그 독자는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라는 것이다. “독자 이삭”이라는 구약성경의 구절은 왜곡된 기록이라 말한다.

    ​그 이유는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14살이 많은데, 이삭이 태어날 때까지는 이스마엘이 독자였기 때문이다. 
    반면 이삭이 태어난 후에도 이스마엘은 계속 살아 있었으니 이삭을 독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 ‘성경을 통해 증명하는’ 이슬람의 논리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창세기 22장 사건을 이스마엘의 어린 시절에 적용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를 복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창 22:16-18) 그 약속의 씨는 바로 이스마엘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이슬람은 자기들의 주장을 위해서는 때로 성경도 인용한다. 
    하지만 성경을 인용하려면 제대로 인용해야 할 것이다. 성경이 이삭을 독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아들의 번제를 말하는 상황은 이스마엘이 하갈과 함께 쫓겨난 이후이다. 
    이스마엘이 쫓겨난 것은 창세기 21장 사건이고 번제를 드리는 장면은 22장 사건인데, 22:1에서 “이 일들 후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21장과 22장은 연대기적 순서에 따랐다는 것을 보여 준다.

    ​둘째, 약속의 씨는 이삭이며, 씨에 대한 약속은 이스마엘 탄생 훨씬 전부터 주어졌던 약속이다. 
    창세기 22:12은 『이는 이삭 안에서 난 자가 네 씨라 불릴 것임이라.』고 말씀한다. 
    이어지는 13절에서는 『여종의 아들[이스마엘]...도 너의 씨임이라.』고 말씀하시기는 하지만, 이스마엘은 단지 아브라함이 낳은 물리적인 아들일 뿐, 교리적으로 “네 씨”라 불릴 사람은 이삭이라는 것이 문맥을 통해 분명히 제시된다.

    ​씨에 대한 약속은 창세기 13장부터 나왔다(창 13:14-17; 15:5; 17:7,8). 
    또 씨에 대한 이 약속이 주어질 때마다 그 씨가 차지할 “땅”에 대한 약속이 함께 주어지는데, 그 땅은 바로 카나안 땅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씨가 400년 후에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말씀하시고(창 15:13,18),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그 일을 정확히 이루어 주셨다. 
    반면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결코 그 땅을 차지하지 못했다.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아랍인들이 그 땅을 차지한 것은 A.D. 7세기 무함마드(마호메트) 때에 이르러서였다. 
    왜 그들은 그동안 창세기의 약속에 따라 그 땅을 한 번도 주장하지 않았는가?

    ​사실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그의 부족한 믿음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씨를 약속하신 지가 한참인데도 아무 소식이 없기 때문에, 하갈을 통해서라도 낳으라는 사라의 권면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셨고, 심지어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이나 축복해 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통해 그분의 언약을 세우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다(창 17:15-19). 
    이스마엘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반드시, “(이삭이 정상적 아들이지만) 이스마엘에 대해서도...”라는 관점으로 서술하신다(창 17:20).

    ​아브라함의 아들은 누구인가?

    이슬람교도들은 자기들이 필요할 때는 성경을 인용하고, 난관에 부딪치면 성경이 틀렸다 말한다. 
    이것은 그들의 교주 마호메트의 습관을 따른 행동이다. 
    그는 자기 종교를 창시할 때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성경 내용을 듣고 자기 종교에 유입시켰다. 
    일부 유대인들이 마호메트의 의도를 알고, 마호메트에게 도움될 만한 성경 내용을 알려 주지 않자, 마호메트는 유대인들에게 성경을 정확히 말하라고 꾸짖는다. 
    성경 기록이 정확한데 왜 틀리게 말하려 하느냐는 것이다. 
    즉 마호메트는 성경 내용이 처음 기록된 그대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만드는 종교에 방해되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감추고 왜곡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잇는 종교도 아니고 선지자들을 존경하는 종교도 아니다. 
    단지 성경의 진리를 파괴하려고 사탄이 만들어낸 작품 중 하나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이슬람이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죽였는가? 
    또 지금도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이쯤 되면 이슬람이 사탄의 대단한 걸작품인 것이 증명되지 않는가? 

    두 번째 정의는 “종류 또는 계급에 있어서 오직 하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독특한 종류로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요한복음 3:16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입니다. 

    사실 요한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언급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한 유일한 저자입니다(요한복음 1:14, 18; 3:16, 18; 요한일서 4:9). 
    요한은 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관심이 있었기에 (요한복음 20:31), 예수님을 하나님과 같은 신성한 본성을 가지신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각시키는 데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믿는 자들에게는 사용하지 않는 표현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But these are written that you may believe that Jesus is the Christ, the Son of God, and that by believing you may have life in his name. 

    요컨대 하나님과 예수님을 묘사하는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말은 우리로 하여금 삼위일체의 각각 다른 인격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인간적인 용어라는 것입니다. 

    사람 아버지와 사람 아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으면 삼위일체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인격 사이의 관계도 부분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기독교 이단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처럼, “begotten 생긴”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태어”나거나 “창조”되었다고 곡해하고 그렇게 가르치려 하는 것은 잘못된 유추입니다.  

    '독생자'란 무엇인가?

    기독교인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단어 '독생자'. 하지만 그 뜻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그저 성경 구절에 그렇게 적혀 있으니 뜻도 모르고 사용하거나 아니면 '독자', '외아들'쯤으로 알고 있는 것이 고작이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의 독생자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써볼까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로 꼽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다고 되어 있다. 
    나는 이 구절을 가장 좋아한다고 꼽는 사람을 보면 나도모르게 경계를 하게 되는데, 그건 그 사람이 독생자라는 낱말의 뜻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데 우리도 세상을 사랑해야지 하면서.  
    ​일단 '하나님께서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는 오역이다.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begotten Son, that whosoever believeth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  

    ​과거형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매우 사랑하셨어서'쯤이 되어야 한다. 
    그때 당시에 세상(그분의 피조물들)을 사랑하셨고 그래서 독생자 아들을 주셨다. 
    하나님이 지금도 세상을 사랑하시는지 미워하시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어떤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사실 시제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한일서 2:15)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기는 커녕 우리에게 세상은 물론 그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사랑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해두고 있다. 
    글씨를 이제 막 배운 초등학생도 도저히 헷갈릴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명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세상의 기독교인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중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다들 좋아하는데 요한일서 2장 15절은 좋다는 사람이 없다. 
    양심이 없기 때문이다. 
    양심이 없다는 건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이다.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성경의 모든 구절을 동시에 참으로 만드는 해석만을 구하고 묵상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내어 주셨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독생자는 외아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단 독생자(only begotten son)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아들(son)의 개념이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모든 답은 성경에 이미 쓰여 있으므로 성경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다음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족보 부분이다.  

    23절에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물론 괄호 열고 '그렇게 간주되었다'라고 설명이 첨가되어 있다. 
    그리고는 요셉에서부터 시간을 거슬러 족보를 나열한다.

    ​그렇게 38절에 가서는,

    ​하나님의 아들 아담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에서부터 하나님까지의 족보가 마무리된다.

    ​여기서 우리는 누가복음의 족보는 실질적인 '낳음'과는 관계없이 '아들'인가 아닌가의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요셉이 낳지 않았으며, 아담도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이 낳지 않고 흙으로 만드신 다음 숨을 불어넣으셨다.

    ​그럼 마태복음에 있는 또 다른 족보를 한번 비교해보자.

    2절부터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야곱을 낳았고, 하는 식으로 이어진다. 
    여기서는 '낳음' 기준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낳음'과 '아들'이 다를까? 다르다. 
    그 이유는 '아들'에는 입양된 아들처럼 낳지는 않았으나 아들로 인정되는 경우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begat(낳았다)이라는 단어가 가진 고유성이다.

    ​'낳다'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를 보자.

    '아버지로써 만들다(procreate)'라고 되어 있다. 
    그럼 우리가 흔히 '어머니가 날 낳으셨다'라고 표현하는데 어머니는 어디로 간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기를 만드는(낳는) 쪽은 아버지이고 여자는 아이를 '분만하다(길러서 세상에 내어놓다)'라고 해야 한다.

    ​분만이라는 말을 영어로 하면,

    딜리버리다. 배달의 민족처럼 배달하는 것이다.

    ​반면 '낳다'는 beget 말고도,

    give birth, 탄생을 주다(부여하다)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give birth 하는 주체는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다. 어머니는 delivery를 한다.

    ​페미니스트들이 들으면 대번 피켓을 들고 일어날 이같은 개념은 사실 동서양 공통이었다.

    ​한문 문화권의 가장 기본적인 학문서라 할 수 있는 <사자소학>의 창세기에 해당하는 가장 첫 문장을 보자.

    부생아신 하시고 모국오신 이로다. 아버지는 내 몸을 낳으시고 어머니는 내 몸을 기르셨다. 배로써 나를 품어주시고 젖으로써 나를 먹여 기르셨다.

    ​여자는 밭이고 남자는 씨앗이다. 밭에 씨를 뿌려 싹이 트면 땅은 새싹을 먹여 기른다. 따라서 만드는 자는 아버지, 기르는 자는 어머니인 것이다. 그것이 영적인 세상의 기본 원리이며, 그래서 모형인 남녀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위의 영어사전에서 Beget이 procreate as the father라고 했다. Procreate은 pro + create인데,

    ​Pro는 소유권(저작권)이 속하는 쪽을 말한다. 그래서 procreate이라는 의미가 들어간 beget이라는 단어에 father이 명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이의 저작권은 아버지에게 있고 그래서 아이들의 성씨도 자연스레 아버지를 따른다고 볼 수 있다. 굳이 저작권까지 따지지 않더라도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는 성경 구절만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분만한 마리아의 머리가 요셉이므로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간주한다는 말씀을 매끄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럼 기초지식을 습득했으니 본격적으로 독생자(only begotten son)에 대해 알아보자. 
    Begotten(낳은, 만든)을 썼는데 앞에 유일한(only)이 붙었다. 유일하게 낳은? 무슨 뜻일까?

    ​독생자라는 뜻으로 쓰인 부분의 그리스어 원문을 보면 모노게네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 자체로 '유니크한'이라는 뜻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이 세상에서 One of a Kind는 예수님밖에 없다. 
    다른 종(kind)는 단 하나만 존재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그분이 직접 마리아의 배를 통해 만드셨고(낳으셨고), 그래서 100%인간인 동시에 아버지인 창조주의 능력과 권한을 그대로 물려받은 100% 신이다. 
    백퍼센트 인간이면서 백퍼센트 신인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진정한 One of A Kind. 너무 멋지다.

    ​그럼 하나님은 왜 굳이 복잡하게 마리아의 배를 통해 예수님을 만들어 세상에 Delivery시키셨을까? 
    그건 인간이 영이신 창조주를 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 인간으로 오신 창조주를 보고 듣고 만짐으로써 그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죄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티끌의 흠도 없는 속죄양이 되시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고 아들로 입양하시기 위해서.

    ​여기서 독생자 아들과 성령 받은 우리들 즉 '아들들'의 구분이 지어진다. 
    (이제 독생자라는 말의 뜻을 배웠으니까 모두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우리는 은혜와 믿음으로 접붙여진 입양된 아들들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직접 낳으신 유일한 아들이다. 
    우리는 남녀의 섹스에 의해 난자와 정자가 수정되어 만들어졌고 예수님은 비록 마리아의 뱃속이었지만 말씀이 육신되어 잉태되셨다. 
    요셉의 정자가 쓰이지 않았다. 
    그렇게 수태되어 온전한 인간의 육신으로 태어나신 흠 없는 그분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사흘 밤 사흘 낮동안 우리 대신 지하세계(지옥)에 다녀오신 뒤 영광스런 빛의 몸으로 부활해 3층천에 오르셨다.

    ​왜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하셨을까? 
    그건 우리 아들들에게 미래의 청사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비록 죄된 몸으로 태어났지만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선한 양심으로 동참하면 결국 부활과 부활체와 승천까지도 함께 하리라는 청사진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니까.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의 뜻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외아들”(요한복음 1:14, 1:18, 3:16, 3:18)이심이 무슨 뜻입니까?
    “외”로 번역된 그리스어 원어 μονογενης(모노게네스)는  '혼자'를 뜻하는 μονος(모노스)와 '종류'를 뜻하는 γενoς(게노스)에서 나온 형용사로서 "아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을 때 '유일한 아들' 또는 '독특한 아들' - 즉, “외아들” - 을 의미합니다.

    '독생자'를 의미 할 수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요한복음 1:​​1)이시고 하나님은 “영원하신”(신명기 33:27)분이시며 영원함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독생자'는 시간상 시작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독생자”로 번역하는 것은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영원하심을 부인하는 오역입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성경에는 “외아들”대신 “독생자”가 쓰여져 있습니까?
    원래 그리스어로 쓰여진 신약성경이 제일 먼저 번역 된 언어는 로마 제국의 공식 언어였던 라틴어였는데 최초의 라틴어 번역은 그리스어 신약성경에서 아홉 번 나오는 μονογενης(모노게네스)를 모두 '유일한'또는'독특한'을 의미하는 unicus(우니쿠스)로 정확하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4 세기에 Arius라는 이단자가 예수님은 창조물이라는 이교를 퍼 뜨리자 당시 신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요 인물이었던 Jerome이 '창조 되었다'라는 이교를 '태어났다'라는 개념으로 싸운답시고 아홉개의 unicus(우니쿠스)중 예수님에 대한 다섯 개(요한복음 1:14, 1:18, 3:16, 3:18, 요한1서 4:9)를 포함한 여섯개(이삭에 관한 히브리서 11:17이 여섯 번째)를 '독생'을 의미하는 unigenitus(우니게니투스)로 바꾸어 버리고 누가복음 7:12, 8:42, 9:38만 unicus(우니쿠스)로 남겨두었습니다. 불가타 라틴어(Latin Vulgate)라고 불리는 Jerome의 라틴어 성경 번역이 1979년까지 가톨릭교의 공식 성경이었고 일부 현대 번역판은 여전히 Jerome의 번역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Jerome의 번역이 주의를 기울여야 되는 번역입니까?
    신약의 현대 번역판은 원 그리스어를 현대 원어로 직접 번역 해야되며, 이교를 제거하는 방법은 성경에 쓰여있는 내용을 그대로 알리는 것이지 그 내용을 바꾸거나 다른 이교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에 대항하는 해독제는 다른 거짓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독생자’에 대한 바른 쓰기와 의미는 무엇인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언제 태어나서 얼마 동안 살다가 어느 시점에 죽는다. 
    즉 인간의 출생과 생존과 사망 이 세 가지는 인생의 불가피한 사실이거니와, 그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말할 것도 없이 출생이다. 
    왜냐하면 생존과 사망은 또한 출생의 상황 계속이요, 그 결과와 마침이기 때문이다. 동양 역학(易學)에서 보면 인간의 삶(생존)과 죽음 등이 사주 팔자 (四柱 八字) 즉 출생의 년, 월, 일, 시에 좌우된다고 하는 것만 보아도 출생의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출생은 모두가 부모의 결혼(남녀 양성의 결합)에 의한 결과이거니와, 단 한 번의 예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이다. 
    성탄은 그 역사적인 사실로서도, 그 의미에 있어서도 유일 무이(唯一 無二)한 사건이며, 그것을 나타내는 어휘에 있어서도 독특하다. 
    역사적인 사실로서 유일무이하다는 것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어머니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신 사실을 가리키며, 그 의미에 있어 독특하다고 하는 것은 성육신 즉 본질상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요한복음에서의 태초의 ‘로고스’)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요 1:14), 따라서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마 1:18-23)이라는 사실이다. 
    흔히 인류 역사상 특출한 위인이나 성현의 전기에서는 그들의 출생에 얽힌 전설로 큰 별이 나타나고 하늘로부터 무슨 음성이 들렸다는 등의 기록이 있으나, 그것은 거의가 전설에 그칠 뿐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에 관해서는 복음서에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로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는 그것을 나타내는 어휘 자체부터 독특성을 가진다. 
    즉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만 ‘성탄’(聖誕)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성’(聖) 자를 붙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사항에 적용되는 것 중의 한 가지일 뿐이다. 예를 들면, 성일(聖日), 성전(聖殿), 성회(聖會), 성민(聖民), 성경(聖經), 성서(聖書), 성구(聖句), 성직(聖職), 성당(聖堂), 성물(聖物), 성수(聖水), 성가(聖歌), 성부(聖父), 성모(聖母), 성자(聖子), 성녀(聖女), 성도(聖徒), 성도(聖都), 성전(聖典) 성전(聖戰), 성례, 성묘(聖廟) 성빈(聖貧) 성소(聖所), 성소(聖召), 성시(聖屍), 성야(聖夜), 성언(聖言), 성업(聖業), 성역(聖域), 성지(聖地), 성찬(聖餐), 성체(聖體), 성품(聖品), 성화(聖畵), 성호(聖號), 등 많이 있다.

    ‘독생자’에 대한 원어(헬라어)는 ho monogenes huios 로서, 신약성경 요 1:14, 18; 3:16, 18등 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독특한 관계를 나타내는 어휘이다. 
    이 어휘는 구약에 그 배경을 두고 있는 바, 곧 시편 2:7의 “너는 내 아들이라 ... ”라는 문구에 기초해 있다고 본다. 유대교에서는 이 문구를 하나님과 메시야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데,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ho monogenes huios 는 여기에 사상적인 유래를 가지는 것으로 본다.

    그러면 이 어휘의 핵심부분인 monogenes 란 낱말의 뜻은 무엇인가? 이 말은 고전 헬라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데, 그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독특한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서 특별히 쓰인 어휘임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이 낱말을 어원적으로 풀어보면 monogenes 는 monos(유일한) 와 genos(종류) 의 합성어로서 흔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출생을 뜻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유래(derivation)을 뜻하는 말이다. 먼저 genos 라는 말에는 1) 후손, 2) 가족 또는 친족, 3) 민족, 백성, 4) 종류(kind, class) 등의 뜻이 있는데, 이 중 monogenes 의 어원으로서는 넷째 것이라 이해된다. 다음, mono- 는 어떤 유래의 성격 (the nature of derivation) 을 뜻하는 말로서, 결국 monogenes 의 중요한 뜻은 유일성(only) 과 독특성(unique) 을 나타내는 데 있다.

    신약에서 monogenes 는 두 가지 용법으로 쓰인다. 하나는 신성(divinity) 에 관련해 쓰이는 것으로,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요 1:14, 18, 3:16, 18, 요일 4:9). 다른 하나는 인성(humanity) 에 관련해 쓰이는 것으로서, 이 경우는 형제자매 없는 유일한 자손(sole descendant) 이란 뜻이며, 신약의 용례로는 눅 7:12의 나인성 과부의 아들, 눅 8:42의 야이로의 딸, 눅 9:38의 간질병 든 아이, 히 11:17의 이삭에 관하여 쓰이고 있다. 이제 이 낱말의 전자의 용법을 그것과 유사한 개념을 가진 다른 낱말과 비교해 본다.

    1) 바울서신 히브리서 요한계시록 등에서 그리스도의 신분에 관하여 요한복음의 monogenes 에 대응되는 낱말은 prototokos (first born, 처음 난 자)로서, 롬 8:29, 히 1:6에서는 ‘맏아들’로, 골 1:15, 18; 계 1:5에서는 ‘먼저 나신 자’로, 히 11:28, 12:23에서는 ‘장자’로 번역되었는데(개역본), 이 말은 요한복음에서의 monogenes 와 뜻에 있어 다소간 차이가 있다. 즉 monogenes 는 그리스도(성자)가 하나님(성부)과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유일하고 독특(unique)하다는 뜻인데 대해, prototokos 는 그리스도가 우주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라는 뜻이며, 전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를 피조물과 구별할 때 강조점이 있는데 대하여, 후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가 피조물 이전의, 또는 최초의 존재라는 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2) 요한복음에서 monogenes 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tekna 라는 말과 구별된다. 이 구별은 요한복음 본문에서 분명히 보이는 바, 하나님의 자녀 (tekna tou theou, children of God) 는 어떠한 때에 그렇게 되는 데 (genesthai, become) 대해서 (요 1:12),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en arche) 유일하고 독특하게 존재했던 (en, was) 것이다(요 1:1, 2). 따라서 monogenes 는 성육신 (incarnation, 요 1:14)의 범주 안에서 이해될 것이 아니고 그의 존재의 영원성(nature of eternal being, 요 1:1, 2)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요한의 ho monogenes huios 는 공관복음에서의 ho huios mou ho agapetos (나의 사랑하는 아들) 와, 하나님의 유일하신 메시야적인 아들이라는 점에서 의미상 관련된다. (마 3:17, 17:5, 막 1:11, 9:7, 눅 3:22). 다만 전자가 요한의 증언인 데 대해서 후자는 하나님 자신의 선언이라는 데 서술상의 차이가 있다 (단 요 3:16이 요한의 증언이냐 예수 자신의 말씀이냐에 대해서는 학자 간에 논란이 있다).

    이상과 같은 독특한 의미를 가진 monogenes 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origin)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독생자’(獨生子; 오직 한 분으로 출생한 아들, the only begotten Son)라고 한다. 따라서 ho monogenes huios 는 단지 ho huios tou theou 의 특별한 표현양식의 하나라고 본다. 그리고 monogenes 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출생을 뜻하는 것은 요한일서 5:18에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 (ho gennetheis ek tou theou) 에 비추어 이해된다고 본다.

    그러나 요일 5:18의 gennetheis 가 gennao (낳는다)에 유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 3:16의 monogennes 는 gennao 와 결합한 형이 아니기 때문에 어원적으로 보면 ‘독생자’로 번역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우리말 번역에서의 ‘독생자’는 영어역 King James Version 의 the only (독) begotten (생) Son (자) 의 직역이고, 중국어역 ‘獨生子’와는 문자적으로 일치하는데, 우리말 번역은 영어역이나 중국어역 성경으로부터의 중역(重譯)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 낱말의 의미에 대해서 성경사전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은 King James Version 의 ‘the only begotten Son’ 이 헬라어 ‘monogenes’ 에 대한 오역이라고 분명히 지적한다(Vol. III. 604면 참조). ‘독생’(獨生)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monogenes’가 아니라 ‘monogennetos’(monos+genao)이다. King James Version(1611년) 은 라틴어의 권위본인 Vulgata의 영향으로 요 3:16, 18의 ‘unicus’(유일한)을 ‘unigenitus’(독생한)로 바꾼 것이다. 그러나 King James Version 이후의 영어성경에서는 ‘begotten’(생)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대개가 ‘the only Son 만으로 나타난다.

     

    독생자 예수(요한복음 1:15-18)

    성경은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독생자는 헬라어로 ‘모노게네스’라고 합니다.
    '모노게네스'란 ‘단 하나의, 독특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독생자 예수의 문자적 의미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단 하나뿐인 아들, 그 아들은 독특한 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왜 예수님이 독특한 아들이십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30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증거하셨듯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I and the Father are one.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31에서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10:33에서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독생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므로 자기 땅에 오신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무서운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본체에 있어서 하나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본문 요한복음 1:18에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증거하였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출애굽기 33:20에서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면 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독생하신 하나님이 이 땅에 나타나셔서 죄악된 인간이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데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요한복음 1:16에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고 예수님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믿음의 눈을 들어서 날마다 독생하신 하나님 즉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사는 사람들은 은혜 위에 은혜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독생자 예수 즉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질에 있어서 동일하십니다. 
    성질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과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이 동일하다는 의미입니다. 
    신명기 33:27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영원하십니다. 
    히브리서 13:8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1:5에서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곧 하나님이 전지하시듯이 예수님 또한 전지하십니다. 

    요한복음 2:23-24
    (23)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24)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요한일서 4:8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사랑이십니다. 

    요한복음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예수님의 이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믿음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 즉 독생자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37에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날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즉 독생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험한 세상 넉넉히 이겨 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독생자(獨生子)가 무슨 말인가 ?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므로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다.
    요 3:16-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다.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 하나님의 하나인 아들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독생자(獨生子)란 한자 음역인데 원문(原文)은 휘온 톤 모노게네스(υἵον τον μονογενηs 야하드 יָהָד)라는 말인데 홀로 태어난 아들, 유일하게 태어난 아들, 하나뿐인 아들이란 뜻이다.

    구약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독자 야드(יָהָד)라 칭했고 신약 성경에는 그리스도를 독생자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ης)라 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란 의미이이다.
    이 말씀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한분 그리스도 뿐이라는 의미이다.

    사도들은 말하기를 천하의 사람중에 구원자는 오직 한분 뿐이라 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

    1)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것은 하나님과 일체 관계를 뜻한다.
    독생자란 말은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처럼 창조된 아담의 자손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다. 즉 하나님 아버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일체이시며 같은 하나님이시다는 말이다. 인간의 몸으로 오셨지만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다. 구주로 아들로 오신 하나님이시란 말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라 했다.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했다.

    예수님은 제자인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 했다.
    요 14:8-9.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제자 빌립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주님 자신이 하나님이시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에 따로 보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은 하나님과 동등관계를 뜻한다.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님과 동등한 아들이란 말이다.
    요 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 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그리스도께서 창세전에 자존(自存)하셨다고 했다.
    요 17:5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그리스도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했다.
    요 1:1-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同一) 동등(同等)하시다.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하였기에 신성 모독죄로 죽였다.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높고 낮으신 분이 아니라 동등하신 분임을 알리신 것이다.

    3) 아들이라 함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유일한 구주의 칭호이다.
    그리스도는 말씀 로고스(λογος 에메르 אֵמֵר)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몸으로 오셨고 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했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는 천사와 같은 창조물이 아니고 아들이라 말씀했다.
    히 1: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육이 없으시다.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시다. 하늘에 거하시면서 육신을 입고 땅에 오셔서 택한 육신을 가진 자들의 대속물(代贖物)이 되셔야 하기에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다.

    그리고 인간과 같이 동거하셔야 하기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같이 거하시는 육을 가지신 하나님의 칭호이다. 육신을 입고 제 2의 아담으로 오신 하나님의 칭호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하시기 위하여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고 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누가는 그리스도의 조상은 하나님이라 했다.
    눅 3:36-38. 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아박삿이요 그 위는 셈이요 그 위는 노아요 그 위는 레멕이요 37) 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독생자(獨生子).

    1. 독생자란 대속자의 유일 관계를 뜻한다.
    구원자는 유일하신 그리스도 한분이라 했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만이 의인이 된다고 했다.
    로마서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했다.

    성경은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라고 하셨다. 아담은 인류의 한사람 시조이다. 그리스도는 구속자의 단 한사람 구주이다. 시조가 둘일 수 없듯이 구주도 둘일 수 없는 것이다. 구주는 단 한 분 의인은 구주로서 단 한 분임을 말한다. 대속자로서 구주로서 그리스도 단 한 분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독생자를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자나 다름없다 했다.
    요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했다.

    독생자나 하나님과 일치이시며 동질이시다. 그러기에 심판하실 때에 주님이 심판하신다. 그러기에 독생자를 믿지 않은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 했다.
    독생자를 부인한 그노시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다. 아들이심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제사장, 장로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었다.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미혹하는 자들이라 했다.
    요일 2:22-23.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세상에는 그리스도가 구주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고 했다.
    요이 1:7-8.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8) 너희는 스스로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예수님을 거짓된 분으로 인정하는 행위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 베푸신 사랑을 믿지 않은 것이며 구주의 자격자 되심을 믿지 않은 근본적인 불신앙이다. 그러기에 사도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했다.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주임을 전하지 않는 자는 인사도 하지 말라 했다.
    요이 1:10-11.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전하는 자들은 저주했다.
    갈 1:7-8.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며 한 분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독생자이시다. 다른 구주는 없다. 천사도 구주가 아니며 마리아도 구주가 아니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주를 말하는 자는 적그리스도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자들 즉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이나 또한 예수님께서 참 사람이 되심을 부인하는 즉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은 인간이 구원을 받는 길을 가로막는 자들이므로 용납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신다.

    저주는 사단에게 내린 형벌이다.
    창 3:14-15.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 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저주란 말은 에피카리토(επικαρατο 아랄 אָרָר)인데 단절하다, 포기하다, 증오하다, 미워하다, 버리다, 이다. 저주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과 단절되었다는 말이고 하나님께서 버리셨다는 밀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 다른 복음을 따르는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했다.


    독생자(獨生子)

    말의 의미  

    독(獨) 
    : 오직 하나  
    생(生) : 나다, 생명으로부터 나오다  
    자(子) : 아들  

    → 단순히 “하나뿐인 아들”이라기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유일무이하게 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적 의미(요한복음 중심)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독생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중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을 그대로 가지신 아들을 말해요.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를 
    “말씀(로고스)”
    “태초부터 계신 분”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셨던 분”

    ‘독생’의 핵심 포인트

    • ❌ “어느 시점에 하나님이 아들을 낳았다”

    • 영원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관계

    즉,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관계를 말하는 표현이에요.  

    왜 굳이 ‘독생자’라 했을까?

    요한일서와 연결하면 답이 보여요.  

    우리는 양자(養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됨 
    예수는 본질상 아들
    → 그래서 예수만이 독생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한 문장으로 정리  
    독생자란, 하나님과 본질을 공유하며 영원히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유일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


    μονογενής, ές Storng number 3439

    1. 오직.  2. 독생하신  
    Pronunciation [ mŏnŏgĕnēs ]

    Etymology  /  3441과 1096에서 유래
    •  1. 오직,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눅 7:12, 9:38, 8:42, 히 11:17.
    •  2. 독생하신, 요 1:14, 18, 3:16, 요일 4:9.
    • 관련 성경  /  독생한(요 1:18). [명] 외아들(눅 9:38, 히 11:17), 독생자(요 1:14, 요일 4:9)

    독생자(獨生子)  
      독(獨) : 오직 하나 
      생(生) : 나다, 생명으로부터 나오다 
      자(子) : 아들 
      → 단순히 “하나뿐인 아들”이라기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유일무이하게 나신 분이라는 뜻  

    성경적 의미 (요한복음 중심)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여기서 독생자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중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을 그대로 가지신 아들을 말해요.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를 
      “말씀(로고스)” 
      “태초부터 계신 분”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셨던 분”

    독생자의  핵심 포인트

    중요한 오해 하나를 짚자면  
      ❌ “어느 시점에 하나님이 아들을 낳았다” 
      ⭕ 영원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관계

    즉,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관계를 말하는 표현이에요.

    왜 굳이 ‘독생자’라 했을까?

    요한일서와 연결하면 답이 보여요.

    • 우리는 양자(養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됨

    • 예수는 본질상 아들
      → 그래서 예수만이 독생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한 문장으로 정리 

    독생자란, 하나님과 본질을 공유하며 영원히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유일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과 “독생자” 차이  

    공통점부터

    “하나님의 아들”과 “독생자”는
    둘 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현이에요.
    하지만 쓰이는 맥락과 강조점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아들”  

    ▶ 관계와 신분을 강조

    • 하나님과의 부자(父子) 관계

    • 메시아적· 권위적 칭호

    • 왕, 상속자, 보내심을 받은 분이라는 의미

    예시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이 표현은

    • 유대적 메시아 개념에서도 사용 가능하고

    •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드러난 칭호예요.

    그래서 신약에서는

    • 믿는 자들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려요.  


    독생자  

     본질과 유일성을 강조
    • 헬라어 μονογενής (모노게네스)
      → “유일무이한, 오직 하나뿐인 종류”

    • 하나님과 같은 본질을 가진 아들

    • 영원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분

    예시

    • 요한복음 1:14, 18

    • 요한복음 3:16

     이 표현은

    • 예수에게만 쓰이고

    • 인간에게는 절대 사용되지 않아요. 


    결정적 차이 한 줄 요약  

    구분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초점    관계· 신분             본질· 유일성
         적용   예수 + 성도             오직 예수
         의미 보내심 받은 아들          본질상 하나뿐인 아들
        오해     가능성 있음 거의 없음


    왜 요한은 독생자를 사용하셨을까? 

    요한일서 배경을 떠올리면 선명해져요.
    • 가현설 ·영지주의 :
      “예수는 신적 존재가 잠시 육체를 쓴 것”

    • 이에 대한 요한의 답 :
         독생자가 육신이 되셨다

    즉,  “예수는 하나님과 같은 본질이며, 유일무이한 아들이고, 그분이 참으로 육신으로 오셨다.”  

    한 문장으로 정리

    • “하나님의 아들” → 하나님과의 관계와 메시아적 신분

    • “독생자” → 하나님과 본질을 공유하는 유일무이한 아들


    독생자(獨生子)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아주 핵심적인 표현이에요.

    1️⃣ 단어 뜻부터 보면

    • 독(獨): 하나, 유일한

    • 생(生): 낳다

    • 자(子): 아들

    ➡️ 직역하면 **“유일하게 낳은 아들”**입니다.

    2️⃣ 성경적 의미

    대표 구절은 요한복음 3:16이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여기서 독생자는 단순히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숫자 개념을 넘어서,
    👉 하나님과 본질을 공유하는 유일한 아들이라는 뜻이에요.

    요한복음 1:18에서는 이렇게 말해요.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즉,

    • 예수는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 하나님에게서 나신 분

    •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3️⃣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 아닌가?”와의 차이

    좋은 질문이죠 😊
    성경은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해요. 하지만 방식이 달라요.

    예수 그리스도 우리
    독생자 양자(입양된 자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은혜로 자녀가 됨
    영원부터 계심 믿음으로 관계 안에 들어옴

    👉 우리는 독생자를 통해서 자녀가 됩니다.

    4️⃣ 신앙적으로 담긴 메시지

    “독생자”라는 말 속에는 세 가지가 동시에 들어 있어요.

    1.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
      → 가장 귀한 분을 주셨다

    2. 구원의 유일성
      → 다른 길이 아니라 오직 그분

    3. 예수의 정체성 선언
      → 선지자나 스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짧은 단어지만, 사실 복음 전체가 들어 있는 말이에요.


    독생자

    **독생자(獨生子)**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아주 핵심적인 표현이에요.

    1️⃣ 단어 뜻부터 보면

    • 독(獨): 하나, 유일한

    • 생(生): 낳다

    • 자(子): 아들

    ➡️ 직역하면 **“유일하게 낳은 아들”**입니다.

    2️⃣ 성경적 의미

    대표 구절은 요한복음 3:16이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여기서 독생자는 단순히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숫자 개념을 넘어서,
    👉 하나님과 본질을 공유하는 유일한 아들이라는 뜻이에요.

    요한복음 1:18에서는 이렇게 말해요.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즉,

    • 예수는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 하나님에게서 나신 분

    •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3️⃣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 아닌가?”와의 차이

    좋은 질문이죠 😊
    성경은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해요. 하지만 방식이 달라요.

    예수 그리스도 우리
    독생자 양자(입양된 자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은혜로 자녀가 됨
    영원부터 계심 믿음으로 관계 안에 들어옴

    👉 우리는 독생자를 통해서 자녀가 됩니다.

    4️⃣ 신앙적으로 담긴 메시지

    “독생자”라는 말 속에는 세 가지가 동시에 들어 있어요.

    1.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
      → 가장 귀한 분을 주셨다

    2. 구원의 유일성
      → 다른 길이 아니라 오직 그분

    3. 예수의 정체성 선언
      → 선지자나 스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짧은 단어지만, 사실 복음 전체가 들어 있는 말이에요.

    원하시면

    • 독생자 vs 장자(로마서)

    • 초대교회에서 독생자 논쟁(아리우스 논쟁)

    • 요한복음이 왜 ‘독생자’를 강조했는지

    이 중 하나로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독생자 vs 장자(로마서) 초대교회에서 독생자 논쟁(아리우스 논쟁) 요한복음이 왜 ‘독생자’를 강조했는지

    좋은 세 가지를 한 번에 꿰뚫는 흐름으로 풀어볼게요.
    이 주제들은 따로 보면 복잡한데, 사실 하나의 질문으로 연결돼요.

    “예수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① 독생자 vs 장자 (로마서 중심)

    🔹 독생자 (μονογενής)

    • 의미: 유일무이한 아들

    • 초점: 본질

    • 대상: 예수 그리스도만

    👉 “하나님과 같은 본질을 가진, 유일한 아들”

    🔹 장자 (πρωτότοκος, 로마서 8:29)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 하심이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장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 의미: 첫째로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 상속권

      • 대표성

      • 지위의 개념

    • 초점: 관계와 질서

    👉 예수는

    • 본질적으로는 독생자

    • 구원 공동체 안에서는 장자

    📌 정리하면:

    • 독생자 = 위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

    • 장자 = 아래로 (우리와의 관계)

    즉,

    예수는 하나님 편에서는 독생자,
    우리 편에서는 형이 되신 장자예요.


    ② 초대교회의 독생자 논쟁 – 아리우스 논쟁

    이게 왜 그렇게 치열했냐면,
    독생자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복음 자체를 바꾸기 때문이에요.

    🔥 아리우스의 주장 (4세기)

    아리우스는 이렇게 말했어요:

    “아들은 창조된 존재다.
    한때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즉,

    • 예수는 가장 위대한 피조물

    •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 교회의 반박

    교회는 이렇게 응답했죠:

    “아들은 낳아진 분이지, 만들어진 분이 아니다.”

    핵심 표현:

    • 동일본질(homoousios)
      →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본질

    📌 여기서 “독생자”는 결정적인 단어였어요.

    • 창조되었다면 → 독생자 불가

    • 낳아졌다면 → 본질 공유

    🏛️ 니케아 공의회(325년)

    신조의 핵심:

    “하나님에게서 하나님,
    빛에서 빛,
    참 하나님에게서 참 하나님,
    낳아지셨으나 창조되지 아니하셨다.”

    👉 독생자라는 말은

    • 시적 표현이 아니라

    • 교리적 방어선이었어요. 

    요한복음이 왜 ‘독생자’를 강조했는가?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질문 자체가 달라요. 

    🔍 공관복음서의 질문  /  “예수는 무엇을 하셨는가?”  

    🔍 요한복음의 질문  /  “예수는 누구인가?

    그래서 요한은 시작부터 이렇게 말해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리고 그 정체성을 요약하는 단어가 바로 독생자예요.

    요한 당시의 위기

    1. 영지주의

      • 예수는 신적 영이 잠시 사람 몸을 입은 존재

    2. 가현설

      • 예수의 육체는 진짜가 아니다

    요한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에게서 나신 유일한 아들이며, 육신이 되셨다.”

    즉, 독생자 = 신성의 확증, 
         육신 되심 = 참된 성육신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의 메시지 한 줄 요약
    예수는 하나님을 설명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는 존재다.   

    세 가지를 하나로 묶으면 

    독생자
    → 하나님과의 관계 (본질)  
    장자 → 우리와의 관계 (구원 질서)  
    요한복음 → 그 둘을 동시에 붙잡으려는 신학  

    “그는 하나님에게서는 독생자, 우리에게서는 장자, 세상에는 생명의 빛이다.”


    1월 29일(목) 요한일서 4:7-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4:8. 16)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Whoever does not love does not know God, because God is love.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라는 말씀은 사랑은 본래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이며 사랑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서 나온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또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사랑을 성령의 열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같이 거룩한 사랑의 성품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게 사랑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기 위해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롬5:8)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는 하나님의 불같은 사랑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마틴 루터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축소된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말이 "만일 성경이 전부 갑자기 없어지고 요한복음 3장 16절만 남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복음의 본질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 문학가로 잘 알려진 최효섭 목사는 이 짧은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에는 최고(greatest)들만이 등장하고 있다며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애인이다.(greatest lover) <참조:최고의 사랑의 주체가 되신다는 의미.>

    "세상을"...최고의 숫자이다.(greatest number) 시대와 인종을 초월한 모든 악인, 모든 선인을 포함하여 사랑하신다.

    "이처럼 사랑하사"...사랑의 최고 수준이다.(greatest degree) 불가능한 상대를 불가능한 상황에서 사랑하신 그 깊이와 그 넓이가 한량없는 수준이다. <참조: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상대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랑하시는 그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길이와 넓이을 말한다.>

    "독생자를"...최고의 선물이다.(greatest gift)<참조:인류에게 내리신 최대 최고의 선물이다.>

    "주셨으니"...최고의 행위이다.(greatest act) 하나님이 사랑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놓수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가장 위대한 행위이다.

    "누구든지"...최고의 초청이다.(greatest invitation) 아무리 악하고 더러운 죄인도 이 하나님 사랑의 초청에 포함된다.

    "저를 믿는 자마다"...최고의 단순함이다.(greatest simplicity) 믿는다는 것처럼 단순한 것이 없다. 어린아이가 엄마를 믿는 것처럼 하면 된다. <참조:이같은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사랑을 얻는데는 단순히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된다.>

    "멸망하지 않고"...최고의 해방이다.(greatest deliverance) 죽어야 할 죄수가 석방되는 것 같다. <참조:하나님의 사랑은 사형수일지라도 용서하시고 해방하신다.>

    "영생을 얻으리라"...최고의 소유이다.(greatest possession) 그 이상의 재산, 그 이상의 소유는 없다. <참조: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죄의 용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라는 값으로 측량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을 주신다.>이 위대한 성구, 요한복음 3장 16절에 표시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최효섭,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숱한 죄를 짓고 사는 인생들에게, 땅에서 난 썩어질 사랑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영원한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이를 두고 오늘 본문 성경 10절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에 대한 용서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씻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를 그냥 내버려두고서는 사랑이 그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한 것처럼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지은 죄가 어떻하든 영원히 용서함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의 방해를 받거나 그래서 중단되거나 하지 않는, 그 누구,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어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로도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같은 하나님의 참되고 거룩하며 영원한 사랑을 체험하며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1-39)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장군 동무와 타냐와의 대화 장면입니다. 
    장군은 타냐에게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느냐고 질문합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에 타냐는 "혁명의 와중이고 거리는 불이 나고 복잡해서 그저 도망치는 중에....."라고 말을 얼버무립니다. 
    그때 장군이 "헤어진 정말 이유는 무엇이지?" 하고 다그치자 타냐는 입밖에 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실토합니다. 
    "사실은 아버지가 내 손을 놓아 버렸어요." 
    이 때 장군은 타냐에게 말합니다. 
    "내가 사실을 가르쳐 주마. 코마로프는 네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너의 아버지는 바로 닥터 지바고야. 만일 그가 네 친아버지였다면 아무리 거리에 불이 나고 혁명의 와중이라도 절대 네 손을 놓지 않았을거야." 
    진짜 아버지와 가짜 아버지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짜 아버지는 결코 딸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진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의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참된 사랑과 거짓된 사랑이 차이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 육신의 어미는 자식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사랑하는 자녀를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린 것처럼 자식이 아버지가 싫어 손을 놓아버릴지언정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식일지라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이같은 사랑을 예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그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겠습니까?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도 그 받은 바 사랑이 자신의 삶을 통해 나타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다 기독교인 아닙니다.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기독교 문학가로 잘 알려진 최효섭 목사는 이 짧은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에는 최고(greatest)들만이 등장하고 있다며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애인이다.(greatest lover) <참조 : 최고의 사랑의 주체가 되신다는 의미.>

    "세상을"...최고의 숫자이다.(greatest number) 시대와 인종을 초월한 모든 악인, 모든 선인을 포함하여 사랑하신다.

    "이처럼 사랑하사"...사랑의 최고 수준이다.(greatest degree) 불가능한 상대를 불가능한 상황에서 사랑하신 그 깊이와 그 넓이가 한량없는 수준이다. <참조: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상대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랑하시는 그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길이와 넓이을 말한다.>

    "독생자를"...최고의 선물이다.(greatest gift)<참조:인류에게 내리신 최대 최고의 선물이다.>

    "주셨으니"...최고의 행위이다.(greatest act) 하나님이 사랑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놓수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가장 위대한 행위이다.

    "누구든지"...최고의 초청이다.(greatest invitation) 아무리 악하고 더러운 죄인도 이 하나님 사랑의 초청에 포함된다.

    "저를 믿는 자마다"...최고의 단순함이다.(greatest simplicity) 믿는다는 것처럼 단순한 것이 없다. 어린아이가 엄마를 믿는 것처럼 하면 된다. <참조:이같은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사랑을 얻는데는 단순히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된다.>

    "멸망하지 않고"...최고의 해방이다.(greatest deliverance) 죽어야 할 죄수가 석방되는 것 같다. <참조:하나님의 사랑은 사형수일지라도 용서하시고 해방하신다.>

    "영생을 얻으리라"...최고의 소유이다.(greatest possession) 그 이상의 재산, 그 이상의 소유는 없다. <참조: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죄의 용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라는 값으로 측량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을 주신다.>이 위대한 성구, 요한복음 3장 16절에 표시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최효섭, 사랑하기 때문에)




    더글라스 메도 목사
    "교회에 등록된 교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아니고, 
    피아노가 집에 있다고 해서 피아니스트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집에 바이올린이 있다고 해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하지 않습니다. 
    집에 피아노가 있든, 바이올린이 있든 있는 그 악기를 가지고 목적한 음악을 소리를 통해 나타낼 수 있어야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등 음악가로 불리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사랑이 생활을 통해 나타나야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 형제에게 사랑을 나타내 보일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안에 거하는 생활, 다시 말해 사랑을 나타내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온전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 이웃들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누구든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져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던 것 처럼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나타내시는 사랑을 보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람을 볼 수 없지만 바람이 하는 일을 볼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전기를 볼 수는 없지만 그 전기가 어떤 힘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볼 수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궁극적으로 나타내시고 계시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 들어오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에 대한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참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완전하고 참된 사랑을 예수 십자가에서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 십자가 사랑을 통해 자신의 참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참된 성도의 모습, 참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한다해도 그것은 거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앞선 요한 1서 3장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일서 3:16-18)

    일본의 정신박약아 시설인 시요학원들은 후꾸이 목사가 창설하고 약 30명의 직원 전원이 크리스천으로 구성된 시설이라고 합니다. 
    어느 목사가 이 학원을 방문하여 한 여선생에게 어떤 일이 가장 힘드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을 목욕시키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너무 힘들어 처음에는 사표를 낼까 하였으나 "저 아이들이 예수님이다."고 격려하시는 후꾸이 원장님의 말씀을 들으며 1년을 견디었더니 이제는 정말 그 고된 일이 즐겁고 가볍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 다."(마 25:46)고 말씀하심으로서 이웃 사랑이 곧 진정한 예수 믿는 사람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자비로운 하나님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바로 전에 그의 보좌 주위에 있는 천사들과 의논을 하셨다고 한다. 
    정의의 천사는 사람을 만들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사람을 만들면 그가 동료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사악을 자행할 것이고, 또 사람은 강퍅하고 잔인하고 부정직하여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진리의 천사가 반발하며 “사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거짓되고, 그의 형제들을 속일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 당신도 속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거룩의 천사도 “사람을 절대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의 이름을 더럽힐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비의 천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저희의 하늘의 아버지, 사람을 만드시옵소서. 그가 죄를 짓고 정의와 진리와 거룩의 길에서 멀어질 때, 제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감싸고 사랑스런 음성으로 그에게 말하여 다시 당신께 데리고 오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자비의 천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이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허물을 덮어주시고, 실수를 용서해주신다.


    어느 교도소 수감자가 문서선교지 <숲속의 사과나무>를 보고 저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내용은 70가까운 노모가 장생포에 살고 계시는데 누가 돌볼 사람이 없으니 자기가 빨리 석방될 수 있도록 탄원서를 법무부 장관과 교도소장앞으로 제출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형편을 살펴보기 위해 여러분께서 매주 마다 내주시는 <사랑의 성미>와 여선교회원들의 성금을 모아 가지고 장생포 주소를 들고 찾아가보았습니다. 
    편지 내용대로 장생포 골짜기 달동네같은 지역에서 전기세, 수도세 등을 내지 않아서 단전, 단수되어 저녁이 되면 촛불을 켜놓고 지내는 형편이었습니다. 
    만나뵙고자 했던 할머니는 안계시고 방문은 열쇠로 잠궈져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이웃에 계시는가 해서 이웃을 두리번거리는데 바로 아랫 집에 어느 젊은 아주머니 하나가, 우리가 할머니를 도우러 교회에서 온 줄을 어떻게 알고 투덜투덜거리며 우릴 보고 미쳤냐고 소리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처음 생각에는 이 집 아들이 동네에서 아주 몹쓸 짓을 하다가 교도소에 가서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기를 작은 아들이 아무리 동네에서 몹쓸짓을 하다가 교도소에 갔다해도 큰 아들은 가출한지 6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자신을 돌보던 아들마저 교도소에 갇혀 있으니 날씨는 점점 추워지는데 단전 단수마저 되어 생계가 그토록 힘든데 7순 노인에 대한 동네 인심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여선교회원들이 다시 찾아가 할머니를 만났는데 방에 들어가보니 듣던대로 생활이 형편없고 아들들을 위해 윗방에 천신(天神)숭배단을 만들어놓고 지성을 드리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 편견을 가지거나 하지 말고, 이웃 집에서 무슨 욕을 하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말고 내 어머니처럼 여기고 월동에 필요한 것을 정성껏 마련해드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애타게 어머니 걱정하며 지내는 0 0 0 형제에게 걱정하지 말고 빨리 출소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건강하게 지내도록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들이 아무리 죄질이 나쁜 죄수라해서, 할머니가 우상숭배한다해서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우리 속에 거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가 구원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죄일지라도 용서하시고 인생을 새롭게 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마땅히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 미쳤다고 하는 사람에게도, 우상숭배하는 사람에게도,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에게도 이웃 형제에 대한 사랑을 보여줌으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지은 죄의 질을 구별하여 차별된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널리 증거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 세상을 구원하는 예수의 참된 제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God is love) 
    요한일서 4장 8절과 16절에서 강조되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사랑을 행하신다는 뜻을 넘어,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사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즉,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사랑이 드러납니다.

    이 말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1.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우리가 사랑받는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에, 그분과 관계 맺는 사람들은 조건 없이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2.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그 사랑은 창조, 구원, 돌봄 등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3. 우리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도록 부름 받습니다. 
    요한일서 4장 7절에서도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하며, 사랑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7~11)

    9~10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보내주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신을 연구하고, 섬긴다고 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똑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참 신자이고, 참 자녀입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과 5절에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거듭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첫 번째로 태어나는 것이고,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두 번째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 딸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거듭남, 중생이라고 합니다. 거듭났다?! ?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거듭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누구나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증거가 나타납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자랄수록 부모를 점점 닮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점점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받을수록 성품이 변하고, 사랑이 많아집니다. 교회에 다니지만 거듭나지 못한 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릅니다. 맛은 직접 경험해 보아야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또 사랑할 줄 모릅니다. 이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0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변화가 일어나는데, 불의한 짓을 하던 사람이 하지 않게 되고, 형제를 사랑할 줄 모르던 사람이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거듭났다는 증거, 진짜 예수쟁이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날에는 교회에 다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사랑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은혜를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누구나 은혜를 받으면 영안이 밝아지고, 영안이 밝아지면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영적으로 어두우면 보이는 것이 없지만,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성령의 밝은 빛으로 인해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행하시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들은 감사의 눈물을 흘립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창세기 1장, 2장만 보아도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가득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 만물을 만드신 후에 사람을 만드시고 이 모든 것을 사람에게 주시면서 정복하고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사람을 위해 만드신 것입니다! . 도대체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시기에 이 어마어마한 우주와 만물을 다 만들어 주셨는지,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합니다. 잠언 3장 11~12절에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 잘 믿으시고 신앙생활을 똑바로 하시기 바랍니다. 적당히 살면 좋을 것 같지만, 생각 밖의 어려움을 당합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절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편하게 살고 싶고, 행복하게 살고 싶거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죄악의 맛이 좋은 것 같지만 조금 지나면 그것이 독약이고, 고통을 몇 배로 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악가 파바로티와 함께 3대 테너 가수 중 한 사람이었던 호세 카레라스는 41세 때 오페라 <라 보엠>을 공연하다가 졸도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병원에 가서 백혈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고, 그 고통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구약시대의 히스기야처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제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시켜 주시면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히스기야의 하나님은 호세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기적처럼 병이 나아서 1년 반 만에 다시 무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의 노래는 과거와 달랐고, 그의 노래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기쁨과 감격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는 청중들 앞에서 “질병도 축복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간증했습니다. 

    그는 질병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두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겠! 다.’라는 것과 ‘자기 자신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입 전부를 바쳐서 백혈병을 연구하는 재단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은혜 받은 사람들은 환란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과 목숨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3장 10절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이고,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키라고 말씀하신 모든 계명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10장 12~13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잔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고, 행복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어떻게 하면 우리를 행복하게 할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것이 곧 우리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집, 좋은 차, 높은 지위와 명예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절대로 이 세상의 것에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것은 우리에게 잠시 기쁨을 줍니다. 그러나 행복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사랑하며 살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면 행복이 따라옵니다. 우리 가정에 사랑이 넘칠 때 행복해집니다. 우리 교회, 우리 사회, 이 세상에 사랑이 넘칠 때 우리가 행복해집니다. 이상적인 사회는 사랑이 넘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행복한 세상으로 만드는 길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로 아는 것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은 다릅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로는 알지만 체험적으로 아는 사람은 적습니다. 왜 그럴까요? 중요한 이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계명대로 살지 않고, 계명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21절에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이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사랑의 열매가 없어서입니다. 마음속으로는 사랑할지 모르지만 행함이 없는 것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이 생각만 하면 뭐합니까? 실제로 물을 주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돌봐야 열매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랑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이것입니다. 머리로는 사랑해야 된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행함이 없습니다. 옆의 사람이 굶고 있어도 ‘아이고, 안됐다, 안됐다, 사랑하는 아무개가 굶고 있구나.’ 하고만 있습니다. 실제로 사랑한다면 무엇이라도 갖다 주어야 하는데, 행함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는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고 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며 받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알게 되고,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근본적인 이유는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 사랑으로 충만해지기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만이 아니라 행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교회는 사랑으로 충만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 이하에 보면 예루살렘교회가 성령 충만하니까 얼마나 사랑이 많은지, 성도들이 함께 모여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아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32절에 보면 누구도 자기 재산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모두 나누어주고 함께 쓰면서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부지간이나 형제지간에도 내 것이라고 싸우는데 예루살렘교회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천국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하면 이렇게 사랑이 충만한 것입니다. 갈라디아교회도 사랑이 충만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3~15절에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 嗤?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눈병이 있었다고도 하고, 간질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두들겨 맞고,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다 보니 온 몸이 형편없게 된 것입니다. 그 볼품없는 모습을 믿음이 어린 사람이 보면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거지 같고 중환자 같고 은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은 업신여기지 않고 그리스도와 같이 섬겨주었다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눈이라도 빼어 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이렇게 사랑이 충만한 것입니다.

    서울 강북에 수유리교회가 있습니다. 
    윤덕수목사
    그 교회에는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 계시는데, 목회를 아주 잘하셔서 부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열심히 목회를 하시던 중에 쓰러지셨는데, 5년이 넘도록 병원에서 식물인간으로 지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더 이상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교인들 중에 시험에 들어 안 나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고, 정말 사랑하니까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전 교인이 기도하며 목사님을 극진히 간호하자, 성도들의 사랑이 담긴 기도가 하늘 보좌를 움직여서 목사님이 일어나셨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다시 하시니 교회가 더 부흥되었고, 몇 년 전에는 성전을 크게 지어 하나님 앞에 헌당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한 교회는 사랑이 충만합니다. 

    미국 오렌지카운티에서 목회하는 친구 목사님이 계시는데, 이분은 몸이 약해서 새벽기도에도 잘 못 나오십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정재훈 장로님이라는 분은 새벽 4시만 되면 다른 장로님들을 불러서 함께 교회를 위해, 목사님을 위해 날마다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이 목사님이 중풍에 걸려 은퇴하시고, 다른 목사님을 모셨습니다. 
    그러나 정재훈 장로님은 일주일 동안 먹은 음식 중에 제일 맛있었던 것을 가지고 주일 아침에 이 목사님을 찾아가서 아침 식사를 수년간 함께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장로님을 얼마나 축복하셨는지 큰 회사의 사장이 되게 하셨고, 또한 이 분이 우주선을 발사할 때 폭발하지 않게 하는 중요한 장치를 개발하게 하셔서 미국 대통령과 비밀회의를 하고, 전 세계에서 이 장치를 주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장로님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새벽마다 기도하고, 곳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간증하며 다니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교회에서 하나님을 위해 순교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하나님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바로 전에 그의 보좌 주위에 있는 천사들과 의논을 하셨다고 한다. 
    정의의 천사는 사람을 만들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사람을 만들면 그가 동료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사악을 자행할 것이고, 또 사람은 강퍅하고 잔인하고 부정직하여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진리의 천사가 반발하며 “사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거짓되고, 그의 형제들을 속일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 당신도 속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거룩의 천사도 “사람을 절대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의 이름을 더럽힐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비의 천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저희의 하늘의 아버지, 사람을 만드시옵소서. 그가 죄를 짓고 정의와 진리와 거룩의 길에서 멀어질 때, 제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감싸고 사랑스런 음성으로 그에게 말하여 다시 당신께 데리고 오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그렇다. 자비의 천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이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허물을 덮어주시고, 실수를 용서해주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 짧은 문장 안에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가지고 계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사랑이라는 선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나 미덕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삶의 방식이 됩니다. 

    요한일서의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사랑하지 않으면 거짓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합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기준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9)

    하나님의 사랑 → 우리의 사랑 → 이웃을 향한 사랑
    이 흐름이 끊기면 신앙도 공허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1.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라 본질

    성경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거룩하시다”라고도 말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표현은 독특해요.

    • 하나님이 사랑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라

    • 하나님이 사랑 그 자체라는 뜻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행동—창조, 율법, 심판, 구원—은
    전부 사랑이라는 중심에서 나옵니다. 

    2. 감정이 아니라 자기 내어줌

    성경적 사랑(ἀγάπη, 아가페)은 감정이 먼저가 아니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셨다” (요일 4:10)

    즉, 느껴서 사랑한 게 아니라 결단하고, 희생하고, 자신을 내어주신 것 
    그래서 십자가가 사랑의 정의가 됩니다. 

    3.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

    요한일서에서는 사랑을 말할 때 항상 기준이 있어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사랑을 나타내셨다”

    사랑은

    • 막연한 선의가 아니라

    •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 십자가에서 드러난 방식

    이게 없으면 사랑이라는 말은 쉽게 왜곡됩니다.  

    4. 그래서 요한의 결론은 이것이에요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

    신앙의 깊이는

    • 지식을 얼마나 아느냐가 아니라

    • 사랑 안에 실제로 거하느냐

       
      정리하면 한 문장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정의되며,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곧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무슨 뜻인가?

    성경이 사랑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살펴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의 본질이심을 여러 방법으로 묘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고전 13:4-8a ). 

    이것이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서술이며,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요일 4:8), 이 서술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려줍니다.

    사랑(하나님)은 자신을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은 그분의 사랑에 응하여 나아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다정함을 보입니다. 사랑(예수님)은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두루 행합니다. 사랑(예수님)은 남들이 가진 것을 탐하지 않고, 불평 없이 겸손한 삶을 삽니다. 사랑(예수님)은 육체 가운데 거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누구든지 압도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나님)은 복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에게 복종을 요구하지 않으셨지만, 예수께서는 기꺼이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께 복종하셨습니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 14:31). 사랑(예수님)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였으며, 지금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고의 표현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5장 8절은 똑같은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로부터 하나님의 가장 큰 바람은 우리가 그분의 영원한 집, 천국에서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값을 치름으로써 그 길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그분의 뜻에 따라 택하셨습니다. 사랑은 용서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그분의 위격과 성품의 핵심적인 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거룩하심, 의로우심, 공의로우심, 심지어 그분의 진노와도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 의롭고 옳듯이, 그분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사랑의 완벽한 본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자신들의 개인적 구세주 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요 1:12; 요일 3:1, 23-24).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분류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분류

    속성

    정의

    성경구절

    단일성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신 6:4

    무한성

    하나님은 제한도 종료도 없으시다.

    왕상 8:27,

    행 17:24

    영원성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끝이 없으시다.

    창 21:33,

    시 90:2

    영성

    하나님은 보이시지도 나눠질 수도 없다.

    요 1:18,

    딤전 1:17

    불변성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불변하시다.

    말 3:6,

    약 1:17

    주권성

    하나님은 어느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 최고의 통치자이시다.

    엡 1:21

    전지성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시 147:4-5,

    마 11:21

    전능성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신다.

    마 19:26,

    계 19:6

    편재성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

    시 139:7-12,

    렘 23:23-24

    사랑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을 베푸신다.

    엡 2:4-5,

    요 4:8

    유복성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신 7:7-8

    정의성

    하나님은 편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로우시다.

    행 10:34-35

    은혜성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때를 따라 은혜를 입히신다.

    출 34:6,

    딛 2:11

    하나님의 속성 도표

    하나님의 속성 도표

    능력

    전지, 전능, 무한성, 불변성, 주권성, 완전성, 무오성, 단일성, 초월성, 단순성, 영성, 생명성, 내재성, 불가시성

    도덕

    사랑, 정의성, 자비, 유복성, 거룩성, 진실성, 거룩, 공평, 성, 선, 자비, 은혜, 인내, 신뢰성, 도덕적 존재

    시공간

    영원성, 자존성, 편재성, 무한성

    믿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자로서 마땅히 알아야도 하겠지만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아서 그 분의 인격과 성품 즉, 그 분의 속성을 닮아야 만이 장차 우리가 갈 신령세계에서 닮은 그 양에 따른 그 나라의 누림과 영광과 존귀가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에 있어서 신학자들이 분류하기를 자연적 속성과 도덕적 속성, 또는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 또는 본원적 속성과 파생적 속성, 또는 적극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 또는 자동적 속성과 타동적 속성, 그런가 하면 특별히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본성을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으로 분류를 하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에는.

    ① 무한하심: 성경은 하나님의 무한성, 즉 하나님의 본성이 무한하심을 가르쳐줍니다.

    ② 영이심: 성경이 강조하는 또 다른 하나님의 본성은 그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③ 인격이심: 하나님의 인격성. 하나님은 마음 지성 의지 이성 개별성 자의식 자기결정 등을 가지신 분입니다.

    ④ 통일체이심: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의 통일체라는 사실도 가르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본성에서 나온 속성을 다음과 같이 분류합니다.(로이드존스 목사) 비공유적 속성(인격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도덕적 속성)으로 크게 분류하는데 이것을 분류한 것을 보면.

    1. 비공유적(인격적) 속성.

    ① 영원성과 불변성: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십니다. 그분은 영원하십니다.

    ② 편재성: 하나님은 모든 곳에 존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③ 전지하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하나님의 지식은 언제나 절대적인 지식입니다.

    ④ 전능하심: 하나님은 모든 능력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⑤ 완전하심: 성경은 하나님의 철저하고 절대적인 완전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탁월함의 총합입니다.

    ⑥ 영광: 이것은 성경에서 그 분의 위대하심, 그 분의 광휘, 그분의 엄위하심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2. 공유적(도덕적) 속성.

    ① 거룩하심: 우리는 거의 대부분 거룩함을 소극적 의미로 다루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거룩함의 의미가 하나님께서 죄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계시며 관계가 없으시다는 의미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거룩함에는 적극적 의미도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이고 완벽한 순결입니다.

    ② 의로우심, 공의로우심: 의는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 가운데 나타내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사법적 거룩하심입니다. 공의에 의해 하나님은 그의 율법을 어기고 죄를 범한 죄인들에게 형벌을 내리십니다. 또 하나의 다른 정의는 하나님의 의는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라는 것입니다.

    ③ 선하심과 사랑: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모든 피조물을 관대하고 친절하게 다루도록 하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롬11:22)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이 자신을 다른 존재에게 영원토록 전달하도록 만드는 속성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 스스로가 자신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밝힙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이십니다. 은혜는 자비는 인내와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④ 신실하심: 이 속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의와 공의 안에 포함되며, 하나님의 불변성의 개념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이 당신이 안전하게 기댈 수 있는 분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분이 부르신 모든 사람들을 악한 자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셔서 그들 안에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들을 강하게 하시고 굳게 하시리라는 사실을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이상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분류인데, 기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분류는 이와 대등소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석준목사님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전체를 인격성이라 하고, 이 인격성에는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이 있는데, 인격성이라 하면 그의 활동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활동성 이전에 마치 인간에 비하면 내적 정신적 느낌을 말하는 것이니 이 신의 인격성이란 인간의 지식으로 혹은 용어로 형언키 어려운 생존적 활동적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1. 비공유적 속성에는 ① 자존성 ② 영원성 ③ 완전성 ④ 단일성으로 이 속성은 인간은 가질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2. 그리고 공유적인 속성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을 때 가질 수 있는 속성으로 여기에는 크게 (1) 지혜지식성 (2) 도덕성 (3) 능력성으로 분류하고.

    이것을 다시,

    (1) 지혜지식성은 ①지식성 ② 지혜성으로 분류합니다. 이것을 조직신학에서는 속성이라고 말합니다.

    (2) 도덕성은 ①선 ② 사랑 ③ 거룩 ④ 진실로 분류합니다. 이 도덕성은 신적인 도덕인데 신 자신이 자신을 규제하는 도덕이 아닌 근원적 발생적 신 자체적 도덕성으로 이 도덕성은 상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신의 이 도덕성은 자기를 위한 자위적 자애적 도덕이 아니고 상대적 도덕입니다.

    (3) 능력성은 ①의 ② 주권으로 분류합니다. 이 신의 능력은 완전적 능력으로 이 완전적 능력은 수동적 능력이 아니고 자체적 능동적 능력입니다.

    이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을 세밀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비공유적 속성.

    (1) 자존성: 신은 자존자가 되어야 하는 고로 자존성이라는 용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유출물이거나 발생물이 아니고 자존자인고로 자존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영원성: 자존자이신 이 하나님은 영원성을 가졌으니 과거적 영원, 미래적 영원입니다. 이 영원성이라는 말은 그의 존재만이 영원이라는 말이 아니고 속성적 존재적 영원을 말합니다.

    (3) 완전성: 완전성이라는 말은 지혜 지식 인격성의 성질적 완전을 말합니다. 학자들 중에는 완전성 대신에 무한성 불변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변성에는 모순성이 있습니다. 완전성이 가장 적절한 용어입니다. 이 완전성 속에 절대성이 들어있습니다.

    (4) 단일성: 단일성이라는 말은 흔히 사용하지 않는 용어입니다. 완전성은 필연코 단일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로 이 단일성을 부인하거나 무식하면 하나님을 이해치 못하게 되니 하나님을 바로 알 길이 없고 구원과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신의 속성 중에 중요한 것이 이 단일성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과 직접 관계가 됩니다. 고로 이 단일성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구원은 잘못됩니다. 실은 우리의 구원이라는 이 구원이 이 단일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속성에서 단일성을 제하면 우리의 구원은 바른 구원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곧 통일성을 이룹니다.(엡1:10)

    이상의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지 다른 어떤 존재도 이 속성이 없고 가질 수가 없습니다.

    2. 공유적인 속성.

    공유적인 속성이란 하나님 외의 피조물들도 가질 수 있는, 혹 가지고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공유적인 신의 속성을 가진 하나님을 신학적 용어로는 인격적 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신이신고로 물질적 고정적 형체를 가진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용어는 계시목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1) 지식성: 과거와 현재를 아는 것을 지식성이라고 합니다. 즉 과거의 어떤 존재성이나 사건성에 대하여 아는 것을 지식성이라고 말합니다. 신은 완전한 지식성의 분이신데 완전한 지식성은 완전한 인격성이란 말입니다. 완전한 지식성이란 과거와 현재를 절대 정확하게 아심을 말합니다.

    (2) 지혜성: 지혜성은 미래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예정도 계획도 설계도 이 지혜지식성에서 나옵니다. 지혜지식성이란 앞으로 어떻게 되어질 미래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 것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물질계에서의 성장을 보고 천국에서의 누림을 압니다. 농부가 가을추수를 내다보고 종자를 뿌리는 것은 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완전한 지혜성이란 완전한 인격성이란 말인데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완전 정확하게 아심을 말합니다.

    (3) 선성: 일반적으로 선이란 남에게 유익을 입혀준다는 말인데, 이 속성은 단순히 남에게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자타가 다 유익이 되는 선입니다. 갑에게는 유익이 되고 을에게는 손해가 되면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참 선은 그 사건과 관련성이 있는 존재는 다 선이라고 말합니다. 이 선은 자기가 자기를 유익 되게 하는 어떤 사건이 있을 때 그 사건이 상대와 관련 없는 자기의 단독적 관련적 사건일 경우 자기가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선이요, 이 사건이 他에게 미쳐서 他에게 관련됐을 때에 자타가 유익이 되는 선입니다.

    어떤 사역을 자타에게 유익을 줄 목적으로 했더라도 천국에 들어가서 그것이 자타에게 유익과 행복이 아니면 선이 아닌 것입니다. 최종적 영원적 결과적인 목적이 아닐 때는 선이 아닙니다. 영원히 유익하고 행복한 것이 선입니다. 선성이란 영원히 행복하고 즐겁게 해주는 성질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인격성에서 선성이라고 말합니다.

    (4) 애성(愛性): 이 애성은 선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애성은 선행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성이 충만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수동적 동화적인 사랑이 아닌 내발적 발생적 사랑입니다.

    한국어로는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지만 원어로는 아가페 스톨게 필레아 애로스 등으로 각각 표현합니다. 사랑이라는 이 용어는 인간이 쓰는 용어로 번역하기가 빈약합니다. 과거분사 현재 진행형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이라는 의사가 이 애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구원의 발작 선택 예정 진행 방편 결과가 사랑이십니다. 예정도 사랑으로, 진행도 사랑으로, 도성인신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한 것 모두는 사랑의 발작에서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가 되는 것입니다.

    (5) 성성(聖性): 하나님의 성성은 외래적 평가적 상대적 성성이 아니고 당신 자체로서 구별함을 받은 자체적 능력적 성성입니다. 하기오스: 자체적 절대적 영원적인 거룩입니다.

    거룩이란 말은 구별이란 말인데 동사로 구별한다는 말보다는 명사형으로 구별이라는 말입니다. 또 존재적으로 구별되었다 라기 보다도 자체가 구별성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구별성을 가진다는 말은 다른 어떤 존재가 소유할 수 있는 그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객관적 혹 피동적 수동적 구별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누가 구별해놓은 것이 아니고 자체적으로 구별되어 있는 구별된 존재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 도덕성은 일반적인 도덕성과 구별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고 어떤 인간이, 어떤 능력자가 하나님을 혹은 하나님의 성품을 혹은 도덕성을 혼잡 혼돈을 시킨다 해도 혼돈도 혼잡도 될 수 없는 자체적 완전 구별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구별성은 인간의 용어로는 정확히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거룩은 자체적 구별인고로 혼잡 혼돈 시킬지라도 혼잡 혼돈되지 않고, 지옥 같은 죄악의 소굴에서도 그것이 감염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거룩을 입혀 당신과 같은 거룩한 자로 만들어 거룩한 곳에서 살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6) 진실성: 이 진실성은 자체적 능력성을 가진 것, 독단적인 가치성을 가진 것, 자체적 가치성을 가진 것입니다. 진리가 활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주님은 자체적으로 진리시요 우리에게 대하심도 진실이십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참이라는 말입니다. 이 참이라는 말은 절대 정확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시대의 어떤 존재도 여기에 맞지 않는 것은 전부가 부족이요 비뚤어진 것입니다. 성질적으로 진실이 아닌 것은 이질이요 전부가 죄라는 말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정확에 절대성을 가진 말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존재적으로 사건적으로 성질적으로 능력적으로 진실이란 말이니 영원히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진(眞)이다. 참이다’ 하는 절대 정확의 표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영원히 절대 표준입니다. 성질적으로 성분적으로 성격적으로 분량적으로 이 진실성이 아닌 것은 기쁨도 향락도 명예도 영광도 사랑도 행복도 부요도 모두는 자기에게 앙화요 고통이요 불행이요 눈물이요 심판거리입니다.

    (7) 의성(義性): 이 의성은 완전적 의, 생명적 의성입니다. 의적인 능력이란 말은 하나님의 성품적 의성이 아닌 모든 의는 그 어떤 의도 하나님의 의를 능가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의 의와 동등 동질인 의도 없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모든 의라고 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본성적인 본질적인 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의와 합치되는 의는 없습니다. 모든 의라고 하는 그 의는 하나님의 의 앞에는 전부가 정죄를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모든 존재가 의라고 해도 그 의라고 하는 것을 정죄하는 주권성을 말합니다. 의라고 인정을 해 줄 수 있는 그 주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의는 절대적인 의인고로 이 의가 아닌 모든 의는 이 하나님의 의 앞에 전부가 악으로 정죄를 받게 됩니다.

    (8) 주권성: 이 주권성은 절대적인 주권성입니다. 이 신의 능력은 주권적 자체적 능동적 능력이니 이 주권성은 그 무엇에게도 그 어떤 존재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 능력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능력을 침해치 않고 외계의 그 무엇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 주권적 능력입니다. 이런 주권적 능력인고로 당신은 외계의 그 어떤 의사에게 제재를 받지 않고 당신 자체와 다른 어떤 의사에게도 침해를 받음이 없습니다.

    이상이 김석준목사님이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볼 때 주의할 사항.

    하나님의 속성을 생각할 때 그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따로 분리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그 모든 속성을 전부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속성을 다른 속성과 대치시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자비를 대조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면서 언제나, 그리고 동시에 자비로우십니다.

    이것을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찌하든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아서 그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덧입기 위해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이런 저런 분류를 하는 것이지만 이는 어떻게 분류를 하건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역적인 면에서 볼 때는 비록 어느 한 면의 속성이 두드러져 보이거나 혹은 각 속성이 각각의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동시에 한 활동을 하는 것을 부정하는 듯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유한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아무리 잘 분류를 한다고 해도 우리의 제한된 지성과 제한된 이해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쭈그러뜨려 놓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 때문이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알아서 그 하나님의 속성을 좀 더 많이 닮아보겠다는 뜻에서 이론이나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분류를 한다고 할지라도 분명히 할 것은 하나님은 이 모든 속성 안에 다른 모든 속성을 전체로, 그리고 동시에 소유하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분의 공의와 대립시키는 것은 크나큰 비극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언제나 공의롭고 의롭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균형의 완전성을 우리의 사고에도 항상 유지해야만 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배울 때 단순히 지식충전에 머물거나 이론이나 학문에 그치지 않고 그분의 속성을 믿는 내가 배운 바대로 정신과 사상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김석준목사님이 분류한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가 성화구원을 이루는데 있어서 실질적으로 실천 실행에 도움이 되는 가장 유익한 분류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1)

    ■본문 롬11:36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은 인간과 유사한 인격적인 면을 가지고 계시면서 동시에 인간과 전혀 다른 무한한 면을 가지고 계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으로서 가지고 계신 특성을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이성적 탐구에 의한 합리적 방법이나 경험적 방법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계시된 말씀을 통해서만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통하여 그분을 더욱 깊이 알 수 있습니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의 속성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인간과 유사한 면이 전혀 없는 비공유적 속성과 인간 속에서도 비슷한 특성을 찾을 수 있는 공유적 속성으로 나눕니다. 이번 과에서는 하나님의 비공유적인 속성에 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자존(自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분,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가 외부의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며(출 3:14), 그 독립성에 의해 모든 행위를 스스로 행하심으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의존하게 만드는 속성입니다. 천지는모두 없어지나 하나님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사라지지 않으며, 하나님을 믿는 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분에게  기대는 모든 존재는 영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2. 불변(不變)하신 하나님


    인간은 변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시간의 예속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시간 안에 있는 모든 존재는 모두 변합니다. 인간과 피조물은 생성, 발전, 쇠퇴, 소멸의 운명을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존재나 목적, 약속 그리고 완전성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영원히 동일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불변하시므로 하나님의 뜻도 영원하며, 하나님의 말씀도 영원하고 불변합니다.


    시 102:26-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하나님의 불변하심에 대한 12대 증거]


    1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출3:15)
    2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풂(신5:10)
    3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는정확히 성취됨 (왕상8:56)
    4 태초부터 영원까지 영원토록 하나님이심 (시90:2)
    5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름(시103:17)
    6 태초부터 영원까지 우주의 주권자이심 (사41:4)
    7 택하신 백성을 영원토록 변함 없이 선대하심(애3:31-33)
    8 한번 맺으신 언약은 결코 변개치 않으심 (단9:4)
    9 한번 행하신 일은 결코 후회하시지 않음 (롬11:29)
    10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불변하심(히13:8)
    11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음 (벧후3:8)
    12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분 (계1:8)


    3. 전능(全能)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의 전능성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범위에 있어서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하는 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을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감당하며 품어주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하나님의 전능성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있어서 영원토록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 하는 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사랑한 대상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세상이 뒤집어지고, 세상의 끝이 올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4. 무한(無限)하신 하나님


    무한성은 외부의 어떤 요소로부터도 전혀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가리킵니다. 무한성에는 세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본질적 무한성 : 절대자로서의 무한한 완전성을 보여주는 이 속성은 하나님이 무궁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시 145: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2) 시간적무한성: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시간적 제한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께서 가지신 영원성(eternity)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시간을 현재, 과거, 미래로 파악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현재로 소유하십니다.


    시 90: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공간적 무한성: 하나님께서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으심으로 모든 공간의 각 부분에 임재하심을 가리키며

    또한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공간에 계심을 편재성이라고 합니다.


    시 139:7-10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 능력의 특징]


    1 모든것이 가능함 (마19:26)
    2 지극히 큼 (시79:11)
    3 매우 강력함 (시89:13)
    4 지극히 영광스러움(사63:12)
    5 영원하여 소멸치 않음(사26:4)
    6 주권적임 (롬9:21)
    7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음 (롬15:11)
    8 도저히 측량할 수 없음(욥5:9)
    9 모든 능력의 근원임(시62:11)
    10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없음 (합3:6)
    11 대적할 자가 없음 (욥11:10)
    12 탁월함 (신32:39)


    하나님의 속성(성품)(2)

     
    ■본문 벧후1:4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창 1:27).
    그러기에 하나님과 유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공유적 속성’ 또는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며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1. 사랑이신 하나님


    1)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성품을 의미합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위하여 자신의 존재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가장 선명한 묘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는 묘사입니다.


    요일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2)하나님의 사랑의 최대의 극치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사건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피조물의 운명을 자신과 동일시 하시며, 피조물을 가슴에 품으셔서 대신에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갚으셨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기에 또한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된 것은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 때문만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변화된 것은 기적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매우 더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더딘 것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3. 은혜로우신 하나님


    은혜는 아무런 보상 없이 베푸시는 혜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로 인해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으나 구원의 대상이 된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을 가리킵니다. 성도에게 주어지는구원이나 영적 행복은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결과입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신인 동성론적 표현들]
    1. 좋아하심(창1:31)

    2. 휴식하심(창2:2-3)

    3. 근심하심(창6:6)

    4. 후회하심(창6:7)

    5. 기억하심(창9:16)

    6. 살피심(창18:21)

    7. 진노하심(출22:24)

    8. 질투하심(출24:14)

    9. 싫어하심(잠6:16)

    10. 미워하심(신16:22)

    11. 염려하심(신32:27)

    12. 선한 싸움을 하심 (신33:27)

    13. 아심(왕상8:39)

    14. 웃으심(시2:4)

    15. 주무심(시44:23)

    16. 슬퍼하심(시78:40)

    17. 보복하심(렘51:56)

    18. 뜻을 돌이키심 (욘3:10)

    19. 원수를 갚으심 (롬12:19)

    20. 사랑하심(계3:19)

    4. 거룩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함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카도쉬’는 ‘분리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거룩성은 하나님의 가장 하나님다운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한 분으로 지칭되며, 성부, 성자 성령으로 불립니다. 하나님은 다른 존재와 구별되어 존재하십니다.


    계 4:8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2)거룩함이란 하나님의 이름일 뿐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성도(聖徒), 곧 거룩한 무리라고 부릅니다. 사도신경에서 교회는 거룩한 공회라고 불리며,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은 성일(聖⽇)이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며 운명입니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엡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5. 의로우신 하나님


    성경에서 ‘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체데크 ’는 ‘기준에 부합함’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하나님 의 의로움이란 하나님이 불의를 행하지 않으며 죄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내적인 거룩함에 합당한 성품을 갖고 계시는데, 이를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 율법, 사망에 반대가 되는 분으로서 의로우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적대적인 세력으로부터 분리됩니다.


    신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


    【마무리】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인간에게 자신의 영광을 부어주시고 자신을 찬양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최고의 기쁨이며 의무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생각과 마음속에 모시며, 하나님의 성품이 자신의 존재 속에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동화되어 그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 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 성품에 동화되는 것은 모든 성도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공로 없는데도 행복을 베풀어 주실 때에는 그것은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범 했음에도 행복을 베풀어 주실 때에 그것은 ‘자비’이다. 하나님께서 분노하게 하는 반역을 참으 실 때에는 그것은 ‘오래 참으심 ’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이행하실 때에는 그것은 ‘진리 ’이다. 하나님께서 고통당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길 때에는 그것은 ‘긍휼’이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때에는 그것은 ‘후대’이다.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를 도와주실 때에는 그것은 ‘의’이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실 때에는 그것은 ‘자비’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선하심이라는 한 가지 이름으로 통합되어진다.    -E.스탠리 존스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창세기 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Calvin선생 주석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모세는 3장에서 인간이 사단에게 속아 창조주를 배반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변했으며, 처음에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마침내는 잃어버릴 정도로 타락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 세상도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지만 본래의 원형으로부터 떨어져 인간과 같이 변화되었으며, 그 결과 본연의 우수성이 거의 파괴되었다고 선포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러가지 곤란한 문제가 야기된다.  
    왜냐하면 모세가 뱀을 다른 모든 동물 중 가장 간교하다고 말할 때, 뱀이 사단의 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뱀 자체의 원한으로 인간을 속였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나는 사단이 뱀의 내적인 간교함을 이용하여 인간을 타락시키려 했다고 대답하겠다. 
    사단은 도구가 팔요했으므로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하여 마침내는 아주 조심스럽게 방법을 모색했다. 
    말하자면 하와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을 수 있는 함정을 파놓은 것이다. 
    사단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인간과 대화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단은 동물의 몸을 덧 입고 인간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러나 뱀이 무엇 때문에 "아룸" (간교하다) 이라고 묘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주석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עָרוּם Storng number 6175

    1. 교묘한.  2. 신중한  
    Pronunciation [ ʽârûwm ]

    Old Testament  / 11회 사용
    •  1. 형용사, 남성 교묘한, 창3:1, 욥5:12, 15:5
    •  2. 형용사, 남성 신중한, 잠12:16,23.
    Grammar Explanation  /  6191의 수동태 분사형

    • 관련 성경  /  간교한(창 3:1), 간사한(욥 15:5), 교활한(욥 5:12), 슬기로운(잠 12:16, 22:3), 지혜로운(잠 14:8).

    히브리인들은 이 단어로 '간사하다’ 는 것 뿐만 아니라 ‘신중하다’ 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좋은 의미로 보기도 하고, 또는 나쁜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 
    나는 모세가 잘못을 지적하기 보다는 자연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뱀에게 특별한 재주를 부여하셨고, 다른 모든 짐승보다 예민하고 눈이 밝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은 자신의 기만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뱀에게 부여하신 은사를 왜곡시켰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많은 동물을 살펴보면 뱀에게서 보다 더 예리한 면이 발견 된다고 트집을 잡는다. 
    하지만 나는 인류를 죄악 가운데 빠뜨린 그러한 재주가 뱀에게서 제거되었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전혀 불합리하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다. 이제 알게 되겠지만 뱀에게는 다른 징벌도 내려졌다. 이 문제에 있어서 자연의 역사를 다루는 작가들도 모세와는 실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또한 경험에 의해서도 모든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 주께서 제자들 에게 뱀처럼 지혜롭게 되라(마10:16)’ 고 말씀하신 것은 결코 공연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 뱀만이 부각되어 있고 사단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는다. 실제로 나는 이 귀절을 통해 인간이 뱀에게 속았다는 점 이외에는 다른 것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에는 뱀이 단지 마귀의 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는 증거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는 뱀이 아닌 마귀가 ‘거짓의 아비', '사기의 조작자', '죽음의 조성자’라고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왜 사단의 이름을 감추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해 분명하고 확실한 빛이 보류되어야 하므로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동의한다. 한편 선지자들은 우리의 멸망에 대한 책임을 마귀에게 돌리며, 자기둘이야말로 모세의 의도를 가장 잘 알고 있었다고 중거한다. 그런데 우리는 모세가 백성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조잡하고 미숙한 문체로 표현했다고 앞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다. 모세는 가르침을 받지 못한 무지한 종족을 가르쳐야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세대가 너무나 철이 없어 그보다 더 차원 높은 교훈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그의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얼마 동안은 것을 젖을 먹고 자란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을 어린아이와 같이 가정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 아니다. 만일 모세가 자신에게 부과된 선생으로서의 직무를 염두에 두고 어린아이들에게 적합한 기초적인 것을 주장하고 있다면 결코 비난 받을 필요가 없다 (물론 이런 비유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단순성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은 교회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모든 경영율 비난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호와께서 성령의 은밀한 계시를 통해 명료하지 않은 모든 것을 객관적인 표현으로 채워 주셨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다. 이러한 정은 선지자둘도 명백히 밝히고 있다. 그들은 사단을 인류의 전정한 대적이며, 모든 재앙을 획책하는 존재이며, 온갖 속임수와 악랄한 방법으로 파멸과 손해를 불러들이는 원수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경건한 자들이 아무리 소란을 피울지라도 교회의 머리이시며 의의 근본이신 그리스도께서 아직 공공연하게 빛을 발하지 않으신 그 때에, 사단의 종과 도구 때문에 사단을 죄악의 왕자라고 표현하는 모세의 문체를 놓고 힐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더우기 아담과 하와는 모든 동물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자기들에게 예속되도록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알면서 스스로 자기가 부려야 할 종의 하나인 뱀의 평에 빠져 하나님을 거역했으므로 인간의 배은망덕한 비천함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들은 이 세상의·어느 동물올 보더라도 그때마다 하나님의 지극하신 위엄과 탁월하신 은총을 상기해야 했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뱀이 하나님을 배반했음을 알고서도 벌 주는 것을 잊었을 뿐만 아니라 합법적인 모든 질서를 무시하고 뱀에게 복종하고 마음을 쏟아 똑같이 반역을 행했다.  이와같은 타락보다 더 치욕적인 것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뱀의 이름을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흐적인 것이 아니라 그 본래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모세는 인간이 사단의 충동에 의해 영원한 멸망에 떨어졌다고 간략하면서 도 마치 비약적인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사단이 어떻게 하나님께 반역을 괴했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설명하지 않는데, 이에 대해 많은 사람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래서 광신주의자들은 사단이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그대로 사악하고 위험하게 창조되었다고 상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단의 반역에 대해서는 성겅의 다른 귀절에 의해 입증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악하고 부페한 모든 피조물도 창조하셨다고 전가시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모두 창조하셨을 때 ‘좋았다’라는 증거를 각자 그 피조물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이 부여 받은 죄악의 근본을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번절에 의한 것이라고 이의 없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단은 의와 정직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저벼렸다. 그러나 모세는 여기에서 사단의 타락에 대대해 그냥 지 나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목적은 인간 본성의 타락을 간략히 언급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아담이 원래 그처럼 비참한 존재로 창조되어 그의 모든 후손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 스스로의 잘못으로 그러한 불행을 겪는다는 사실을 가르치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자기들을 괴롭히는 그와 같은 재앙의 본질과 다양함에 대해 생각이 미치면 하나님께 투덜거리며 대항하기가 쉽다. 심지어는 인간의 죄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까지도 경솔히 비난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보다 개나 돼지를 더 자비롭게 대하신다고 불평하는데, 이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비참하고 파멸된 상태를 아담의 죄에 돌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겠는가?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한 모든 악(예를 들면 완악함,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팍함, 사악한 욕망, 악행을 즐기는 포악한 성 벽 동)의 원인이 하나님 의 책임이라고 전가하는데, 이것은 마치 우리의 사악한 기질이 모두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과 같다. 모세가 의도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겸손하게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우리의 불행을 슬퍼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현재 상태가 최초의 본래적인 상태와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를 몇 마디 말로 써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기술하려는 역사에 전념하 고 있는 것이며, 다른 사람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일일이 다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서는 안 된다. 이제 우리는 자만심이 강하고 일관성이 없는 사람들을 크게 동요시키는 문제를 고찰하게 될 것이다. 죽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시험을 받으면 팔연적으로 슬픈 결과를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아시면서, 왜 그것을 허락하셨는가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죄를 짓도록 시험하기 위해 사단의 고삐를 풀어 놓으셨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한 댓가로서 내리신 심판과 보응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 나 인간의 본성이 아직 순전하고 올바른 그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이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주장은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전혀 죄악과 관련이 없는 인간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으며, 더 나아가서는 이 겅우에 있었던 일이지만 동물을 사용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파멸을 위해서 대적을 무장시키신다는 것은 무슨 뜻이 더 있는가? 이것은 마니교에서 두 가지 원칙의 존재를 주장하는 전거가 된 듯하다(誌 4)··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단이 하늘의 뜻에 대적하여 인간에게 함정을 놓았고, 또한 이 사단은 인간뿐만 아니라 하나님보다도 우월한 존재였다고 상상한다. 그래시 그들은 불합리한 모순을 피하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에는 가공할 만한 오류에 빠져 버린다. 말하자면 세상에는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두 신이 있으며, 첫째, 신이 경쟁자인 다른 신에 의해 정복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권능에 관해서 경건하고 신실히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그 악마도 철대로 활동할‘수 없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해 전혀 무지하지 않으시며 그것을 막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셨다면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허락에 대해 말할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명령하셨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실제로 차이가 생긴다. 많은 사람은 아담이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하도록 방임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타락 시키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내 생각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죄를 주관하시는 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주 혹심한 형벌을 수없이 내리시며 죄인을 다스리셨다.  그렇지만 나는 아담이 타락한 것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 마치 죄를 기뻐하시거나 하나님께서 베푸신 율법이 위반되기를 바라신 것처럼 시사하는 것은 아니다. 아담의 타락이 공정성과 잘 이록된 질서를 전복 시키는 것이며, 율법을 부여하신 하나님에 대적하여 불순종하고 의를 거역하는 범죄인 이상 분명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어떤 확실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을 의도하셨을지도 모른다고 설명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타락을 계획하셨다고 말한다면, 어떤 사람들은 분노를 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듯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허락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문제를 주관하시며 예방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모하게 판단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에게 심판 받는 것을 감수했으면 한다. 하나님을 자기 육신의 시험에 종속시키는 것은 육신의 교만함이다. 나는 인간이 의심과 회의의 상태에 빠지도록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말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특성을 파괴하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확고부동한 공리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미래 상태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이전에 미리 결정해 두셨다고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다. 미숙한 사람들은 인간이 자유에 의해 죄를 짓지 않았다고 성급하게 추리한다. 하지만 사람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기가 지나치게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가 필요에 의해 범죄했는지, 혹은 우발적으로 죄를 지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기독교강요"와 "예정론"의 논문들을 참조할 수 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불경건한 사람들은 이 귀절 공박하며 조소한다. 왜냐하면 모세가 뱀이라는 동물이 웅변을 한 것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뱀은  ‘쉿' 이라는 소리를 낼 뿐 갈라진 혀를 가전 짐승에 불과하다. 그들은 먼저 동물이 특이한 언어를 사용했다면 언제부터 벙어리가 되기 시작했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말하자면 뱀은 본래 말을 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었는데 사단이 하나님의 허락을 얻어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적합한 도구가 되도록 했을 때, 비로소 말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더우기 나는 하와가 이러한 것을 아주 특이하게 느꼈으며, 그 때문에 자기가 감탄했던 것을 탐욕스럽게 받아들였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만일 사람들이 자기에게 익숙하지 않온 것을 무엇이든지 믿을 수 없는 우화적인 것으로 단정해 버린다면, 결코 기적을 행하실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자연의 일반적인 질서를 초월하여 역사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익숙하지 않다고 핑계를 대면서 비웃는다면, 너무나 선입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더우기 동물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말한다는 것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사람은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혀를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다.  복음서에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혀도 없는데 공중에서 소리가 들렀다’ 고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야수가 입으로 말을 했다는 것보다 가능성이 더 희박하다. 그렇다면 불경건한 자들은 그와 같은 독설에 대해 무엇이라고 그럴 듯한 논리를 내세울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해서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세상의 통치자라고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을 의심하거나.부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원하기만 하시면 동물들에게도 말을 가르치실 수 있는데, 이것은 대화를 원하는 사람을 벙어리로 만드시는 것과·마찬가지다. 또한 이런 점에서 사단의 간교함은 본색이 드러난다. 남자에게 직접 공격을 가하지 않고 아내를 통해 접근한 것이다. 이러한 교활한 공격 방법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으며, 나는 우리가 신중하게 이와 같은 공격에 대항하여 자신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란다.

    사실 사단은 우리가 가장 나약한 것처럼 보일 때, 주도 면밀하게 파고 둘어 오는데, 자신이 원하는 곳에 침투하기까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그때까지 불화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여자도 뱀과 말하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뱀을 단순히 짐승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사단이 무엇 때문에 인간의 멸망을 그토록 획책했는가히는 점이다. 
    호기심에 가득 차 있는·궤변자둘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덧입으셨음을 보고 사단이 질투심에 불타 그렇게 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리는 너무나 유치하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이 되셨으며, 우리는 그분 때문에 비참한 멸망으로부터 벗어났다. 따라서 인간이 죄를 짓지 않는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 어떻게 예측되었겠는가? 그보다는 오히려 사단이 일종의 분노감에 휩싸여 (보통 자포자기한 사람이 그렇듯이) 자기 자신과 함께 인간을 영원한 멸망으로 몰아가려 했을런지도 모른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보다 타당성이 있는 가설은 사단이 하나님의 대적자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질서를 뒤엎으려고 했으며,  그가 하나님을 높으신 보좌에서 끌어 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는 인간을 공격했다는 추축이다. 
    사단은 인간의 파면과 더불어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혼동이 초래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실계로도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사단은 인간의 인격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려고 온갖 노력을 했다. 
    그러므로 헛된 모든 허구적인 사상을 배격하고, 간결하면서도 확고안 가르침을 고수해야 할 것이다. 


    1. 히브리어 단어 해석 : 'עָרוּם(아룸)'의 의미 파악

    창세기 3장 1절에서 뱀을 묘사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עָרוּם(아룸)'으로, 일반적으로 '교활하다', '영리하다', '다재다능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 자체는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으며 매우 가치중립적인 의미를 나타냅니다. 마치, "칼"이 흉기나 의사의 도구이기 이전에 중립적인 칼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긍정적인 측면이 강조되거나 부정적 측면이 부각될 가능성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어만으로 들짐승들이 "간교하다"는 부정적 의미로 이해하거나, 그중에서 뱀이 가장 부정적인 악의 축이라고 섣불리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2. 창조 질서 속의 역할 : 뱀의 기능과 본능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고유한 역할과 본능을 부여하셨습니다. 뱀의 경우, "다리가 없다"라는 신체적 특징 때문에 먹이를 잡고 생존하기 위해 일종의 '전략'을 사용해야 합니다. 뱀의 교활함이라고 일컬러지는 행동은 사실 이러한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물론, 태초에는 뱀에게 다리가 있었을 것이지만, 태초의 상황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시각으로 뱀을 판단하기 때문에 우리의 판단 자체에서부터 선입견과 오류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뱀의 교활함은 인간의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비추어지지만, 넓은 창조 질서 속에서 하나님이 부여한 역할을 수행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인간의 선택과 책임 : 타락의 결과 인식

    창세기 3장은 인간의 선택과 자유 의지,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에 초점을 둡니다. 뱀의 교활함 자체는 하나님의 창조 의도에 반하는 것이 아니지만, 인간이 선을 거부하고 악을 선택함으로써 뱀의 교활함이 악의 도구로 이용되고, 세계에 타락과 죽음이 들어오게 됩니다. 따라서 야생 동물의 '교활함'을 단순히 동물 본성의 문제였었지만, 인간의 선택과 책임과 연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이 되어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인간이 불순종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뱀은 간교한 존재가 아니라 나름의 상황들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들짐승들 중에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야생 동물의 '교활함'에 대한 해석은 단순한 이분법적 판단으로 이루어질 문제가 아닙니다. 
    다양한 학술적, 신학적 관점을 종합하고, 성경 본문의 깊은 연구를 통해 각자가 스스로 해석을 도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창조와 타락, 선과 악, 그리고 인간의 책임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연구들이 우리들 가운데 있길 바랍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의 예이다. 
    이 세 가지 예중에서 첫번째는 나머지 두 가지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를 나타내는 듯하다(Smalley). 

    육신의 정욕. '육신'의 헬라어 '사르코스'(*)는 일반적으로 신체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의미하나 본문에서는 '영적인'것과 대조를 이루는 악한 욕망의 근원을 의미한다. '육신의 정욕'은 타락한 사람의 본성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만족만을 추구하는 자세를 의미한다(Barker, Stott). 

    σάρξ, σαρκός, ἡ Storng number4561

    1. 육체.   2.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3. 몸   
    Pronunciation [ sarx ]

    Etymology  /  4563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함

    관련 성경  / 몸(마19:5, 막10:8), 육체(마24:22, 요8:15, 고후1:17), 육신(마26:41, 롬1:3, 딤전3:16), 살 (눅24:39, 요6:55,56), 육정(요1:13), 육(요3:6, 6:63, 고전15:50), 골육(롬11:14)


    안목의 정욕. 이것은 외적인 것을 봄으로 유혹을 일으키는 성적인 욕망은 물론 모든 사물을 탐닉하는 욕망을 의미한다(Marshall, Bultmann). 

    ὀφθαλμός, οῦ, ὁ Storng number 3788

    1. 눈.   2. 시각 기관. 3. 정신적  
    Pronunciation [ ŏphthalmŏs ]

    Etymology  /  3700에서 유래
    •  1. 눈.
      •  a. [문자적으로] 시각 기관, 마5:29,38, 21:42, 막9:47.
      •  b. 정신적, 영적 이해력. [주] ὀφθαλμοὺς ἔχοντες οὐ βλἐπετε: 마13:15, 막8:18, 눅19:42.
    • 관련 성경  /  눈(마 5:38, 눅 6:42, 계 5:6), 안목(요일 2:16).



    이생의 자랑(*, 헤 알라조네이아 투 비우). 여기에 나타난 속격에 대한 견해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주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물질이나 명성에 대해 과대 평가하여 자랑하는 허세를 의미한다. 2. 목적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것에 대한 자랑을 의미한다. '이생의 자랑'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즉 그것은 소유하고 있는 물질 뿐만 아니라 태도나 행위를 자랑하거나 혹은 과대 평가하여 허세를 부리는 것을 의미한다(Marshall, Law).

    βίος, ου, ὁ Storng number 979

    1.  생명.  2. 지상의 생활.  3. 삶의 유지 수단 
    Pronunciation [ biŏs ]

    •  1.  [기본형]: 생명, 삶.
      •  a.  [기능과 기간에 있어서] 지상의 생활, 눅8:14, 딤전2:2, 벧전4:3.
      •  b.  삶의 유지 수단, 생활방편, 재산, 막12:44, 눅8:43, 15:12,30, 21:4, 요일2:16, 3:17.
    • 관련 성경  / 생활비(막12:44, 눅21:4), 이생(눅8:14, 요일2:16), 생활(눅8:43, 딤전2:2, 벧전4:3), 살림(눅15:12,30), 재물(요일3:17).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로 좇아온'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는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이다. 요한은 '에크'를 사용하여 상반절에서 언급된 세 가지 예,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상, 곧 사단이 지배하는 타락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기에 세상과 하나님 아버지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된다.


    1월 28일(수) 요한일서 4:4-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미혹의 영(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과 미혹의 을 이로써 아느니라.
    We are from God, and whoever knows God listens to us; but whoever is not from God does not listen to us. This is how we recognize the Spirit of truth and the spirit of falsehood. 

    미혹의 영(the spirit of falsehood)은 성경, 특히 요한일서에서 나오는 개념으로, 사람을 진리에서 벗어나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영적 영향력을 가리킵니다. 
    단순히 “악령”이라기보다, 거짓을 진리처럼 믿게 만드는 힘에 초점이 있어요.  

    성경적 근거(요한일서 4:6)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아느니라”

    요한은 세상에 작용하는 영을 두 방향으로 구분합니다.

    • 진리의 영 : 하나님께 속함

    • 미혹의 영 : 하나님께 속하지 않음

     미혹의 영의 핵심 특징

    1. 예수 그리스도를 왜곡함

    • 예수의 성육신(참 하나님 + 참 인간)을 부인하거나 흐림

    • “예수는 훌륭한 영적 스승일 뿐” 같은 주장
      → 요한일서 당시의 가현설·영지주의와 연결됨

    2. 진리보다 ‘자기 느낌·지식·체험’을 절대화

    • 계시보다 개인적 깨달음

    • 말씀보다 특별한 체험

    • 사랑보다 우월의식

    3. 분열과 교만을 낳음

    • 공동체를 세우기보다 갈라놓음

    • “우리는 아는데 너희는 모른다”는 태도 


    진리의 영과의 대비

    구분 진리의 영 미혹의 영
    기준 예수 그리스도 자기 사상·체험
    열매 사랑, 순종, 겸손 교만, 분열, 혼란
    방향 하나님께로 자기 자신에게로

    오늘날의 모습 (현대적 적용)

    미혹의 영은 꼭 종교적 언어만 쓰지 않습니다.

    • “진리는 상대적이다”

    • “사랑만 있으면 교리는 필요 없다”

    • “내가 느낀 게 곧 진리다”

    겉으론 자유롭고 깊어 보이지만, 예수와 십자가, 사랑의 실천이 빠져 있다면 요한의 기준에선 미혹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요한이 주는 분별 기준 (아주 중요)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들을 다 믿지 말고 시험하라”

    시험의 기준은 단순합니다.

    • 예수를 누구라 고백하는가?

    • 사랑으로 행하는가?

    • 공동체를 세우는가?

    미혹의 영은 성경에서 사람을 진리에서 벗어나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영적 영향력을 가리키는 표현이에요. 요한일서를 중심으로 정리해 볼게요.

    미혹의 영이란 무엇인가?

    핵심 구절은 여기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하였으므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요한일서 4:5)

    미혹의 영

    • 겉으로는 신앙적·영적 언어를 사용하지만

    •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정체

    • 사랑과 순종의 삶을 흐리게 만드는 영이에요.

    즉, 단순히 “악령”이라는 공포스러운 이미지보다 진리를 왜곡하는 방향성이 핵심입니다.  

    미혹의 영의 특징 (요한일서 기준)

    1.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고백하지 않음(요한일서 4:3)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 예수를 본받을 분이 아닌 개념·상징·능력의 통로 정도로 격하

    • 십자가 · 육체· 고난을 불편해함


    말은 영적인데, 삶에는 사랑이 없음(요한일서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 지식은 많고 주장도 강함

    • 그러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음

    • 정죄· 분열· 우월감이 따라옴

     요한에게 사랑은 옵션이 아니라 진리의 증거예요.

    순종보다 체험· 지식· 자기확신을 강조(요한일서 3: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미혹의 영은 종종 이렇게 말해요:

    • “나는 깨달았어”,   “나는 자유야”,  “이제 계명은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계명을 떠난 영성은 이미 미혹
    이라고요.  

    진리의 영과의 대비(요한일서 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진리의 영      미혹의 영
     예수를 바르게 고백          예수를 왜곡
     사랑으로 행함           말로만 주장
     계명 안에 거함       자기 확신을 따름
     공동체를 살림           분열을 만듦

    오늘날의 미혹의 영은 어떻게 나타날까?

    요한일서는 과거 이야기만이 아니에요.

    • 사랑 없는 정통

    • 십자가 없는 은혜

    • 회개 없는 자유

    • 예수보다 ‘나의 깨달음’이 중심인 신앙

    이 모든 것에 요한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 영이 어디서 왔는지를 보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미혹의 영은 예수를 말하지만 예수를 따르지 않게 하고,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을 살지 않게 만드는 영이다.


    “미혹의 영 vs 진리의 영”  출발점부터 다르다

    🔹 진리의 영

    •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

    • 십자가·성육신·부활을 흐리지 않음

    • “예수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고백을 중심에 둠(요한일서 4:2)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 미혹의 영

    • 예수에서 시작하지 않음

    • 예수를 수단·개념·상징 정도로 축소

    • 십자가는 불편해서 빼거나 희석함

     예수는 말하지만, 예수의 길은 사라짐

      가르침의 방식 차이

      🔹 진리의 영

    • 말씀을 전체로 가르침

    • 듣는 사람을 낮추고 회개로 이끔

    •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마음을 남

     🔹 미혹의 영

    • 말씀을 부분적으로 인용

    • 감동·계시·체험을 앞세움

    • 질문을 막고 비판을 죄처럼 만듦

    “의심하지 말라”가 아니라  “검증하지 말라”가 될 때 위험

    열매로 드러나는 차이 (가장 중요)

    예수님이 주신 기준이죠.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7:16)

    🔹 진리의 영의 열매

    •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남

    • 죄에 대해 민감해짐

    • 남을 정죄하기보다 자신을 살핌

    • 관계를 살리고 공동체를 세움

    🔹 미혹의 영의 열매

    • 말은 사랑인데 실제는 상처

    • 회개보다 합리화

    • 은근한 영적 우월감

    • 분열, 파벌, 배타성

     빛을 말하지만 그림자가 짙어짐 

    ‘자유’에 대한 이해 차이

    🔹 진리의 영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 죄로부터의 자유

    • 욕심과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남

    • 책임 있는 자유

    🔹 미혹의 영

    • “은혜니까 괜찮다”

    • 순종 없는 자유

    • 결국 자기 합리화의 자유

     자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욕망에 더 묶임

     사랑을 말하는 방식의 차이

     🔹 진리의 영

    • 사랑 + 진리 (둘 다 놓치지 않음)

    • 불편한 진실도 말함

    • 오래 참고 책임지는 사랑 

    🔹 미혹의 영
    • 진리 없는 사랑

    • 듣기 좋은 말만 남김

    • 감정 중심, 순간 중심

    요한일서의 말이 정확해요.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
    (요일 3:18)  

    아주 현실적인 체크 질문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세요.

    • 이 가르침이 예수를 더 선명하게 만드는가?

    • 나를 겸손하게 하는가, 우월하게 하는가?

    • 회개로 이끄는가, 변명으로 이끄는가?

    • 사랑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는가?

    • 공동체를 세우는가, 갈라놓는가?

     이 질문 앞에서 흔들리는 가르침은  미혹의 영의 흔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한 문장 결론  /  미혹의 영은 빛처럼 보이지만 사람을 자신에게 묶고,
                             진리의 영은 십자가처럼 보이지만 사람을 자유롭게 합니다.


    오늘날 교회 밖은 물론이고, 교회내에도 미혹의 영이 만연한 가운데 있습니다. 
    미혹의 영이라는 것은 악한 영, 사단의 영을 말합니다. 
    특별히 미혹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단이 마지막 때에 사람들, 특히 교인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미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4:4)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마지막 때에 사단은 뉴에이지영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 교회들을 미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뉴에이지의 영은 무엇입니까? 
    말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뉴에이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던 시대가 50년대 말이나 60년대 초에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가 시작되면서 사단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뉴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입니다. 
    여러분들이 사전에 찾아보면 뉴에이지 운동은 “1970년 80년대에 주로 신비주의 이단이나 형이상학적인 종교단체들 사이에서 일어난 운동”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New Age)” 라는 말이 뭔가 새로운 좋은 시대를 의미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단이 마지막 때에 교회와 교인들을 미혹하게 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영지주의(Gnosticism)와도 많은 연관이 되어있는 뉴에이지는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침투하고 있습니다. 
    뉴에이지는 우리가 접하는 문화에 침투해서 뉴에이지적인 문화에 빠지게 합니다. 또한 교회에 침투해서 뉴에이지적인 교회로 변질되어 가게 합니다. 
    현재 많은 교인들과 교회들이 뉴에이지에 감염되어있습니다. 
    예를 들면 명상은 뉴에이지적인 영성훈련입니다. 
    이 명상은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은 하나님 말씀과 함께 하는 것이지만, 명상은 말씀은 전혀 없는 미혹의 영이 주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어떤 유명한 목사의 영성훈련에 다녀온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영성훈련에서는 성경을 가지고 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명상만 하라고 했다.’ 
    잘못된 전형적인 뉴에이지 영성훈련입니다. 
    이런 영성훈련은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음악과 찬양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뉴에이지 찬양을 들어보면 그 가사에 ‘예수님’이나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빠져있습니다. 
    가사 자체가 건전해 보이지만,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님이 빠진 노래는 찬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You raise me up”이라고 하는 노래입니다. 교회에서 이 노래를 찬양이라고 생각해서 많이 부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저도 좋아했던 노래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노래를 작곡한 Secret Garden밴드와 작사한 Brendan Graham이 크리스챤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위키 백과사전에도 이 노래는 장르가 ‘뉴에이지 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사와 곡조가 좋으니 찬양처럼 부릅니다. 이런 전형적인 뉴에이지 찬양이 교회에 많이 보급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힐송 찬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요즘 일부 CCM 노래들은 그냥 들으면 가요인지 찬양인지 분간이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뉴에이지 스포츠가 있습니다. 요가가 그렇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건강을 위해서 요가를 합니다. 심지어 이곳에 있는 어떤 미국교회는 요가가 아예 교회의 프로그램에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가는 인도의 이방신을 부르는 접신 행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뉴에이지에서 많이 쓰는 단어가 사랑과 평화, 화합 이런 것들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뉴에이지의 사상은 “feel goodness”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한 내가 좋은것을 행하는 것), “moral relativism” (상대적 윤리), “pluralism” (다원주의}이고 또한 “Humanism” (인본주의)입니다. 이 모든 것이 모두 반성경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뉴에이지 사상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다원주의에 해당하는 WCC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인본주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교회의 특징은 설교도 사람중심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이 인본주의에서 기복신앙과 번영신앙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달라스의 조엘 오스틴 목사가 대표적인 번영 설교자입니다. 그러나 조엘 목사외에도 대형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뉴에이지 목사들의 설교 말씀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그런 사람 중심의 설교를 합니다.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또한 동성애를 옹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성경의 말씀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윤리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동성애를 지지하면 상대적으로 교회도 그것을 받아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공산주의(사회주의)를 용납하게 됩니다. 왜냐면 교회는 모든 이념을 다 수용해서 평화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사단의 전략입니다. 좌파(사회주의)의 이념은 유물론에 입각한 반 성경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적그리스도적인 사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 평화가 아니고 사랑이 아니라고하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는 마지막 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교인들의 귀만 즐겁게 하는 말씀을 전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딤후 4장 3-4절) 또한 마지막 때에 동성애나 혼합주의와 같은 배도의 일들이 일어날 것이니 미혹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살후 2장 3절)

    교회가 사회주의를 용납하고, 동성애를 옹호하고, WCC와 같은 혼합주의에 가담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단이 ‘New Age’ 즉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서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에 뉴에이지의 영을 아무도 모르게 살며시 침투시켰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은 한가지입니다. ‘New World Order(새로운 세계질서)’를 세우고 모든 인류가 사단 루시퍼를 섬기기 위한 새로운 세계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New World Order(새 세계질서)’라는 단어가 1980년대 말부터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도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사단이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지 ‘새 세계질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설명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분명한 것은 사회주의도, 동성애와 WCC도 루시퍼를 섬기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사단은 뿔달린 무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온순한 양과 같이 때로는 평화의 사자같이 우리를 미혹하고 교회에 침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과 평화와 화합을 내세우는 뉴에이지영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후 11장 14-15절) 라고 말합니다. 사단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사단의 일군들도 의의 일군으로 가장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가짜가 진짜같고 진짜가 가짜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가운데 깨어서 분별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평화와 화합을 주장한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사회주의(공산주의)도 동성애자들도 혼합주의자들도 모두 사랑과 평화와 화합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뉴에이지영, 즉 사단의 영이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과 평화와 화합은 오직 한분이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진리되신 말씀안에 있을 때만 참 사랑과 평화와 화합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 가운데 바로 서있어야지만 우리가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뉴에이지영)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라나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요일 4:6)


    1월 27일(화) 요한일서 4:4-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진리의 영(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과 미혹의 을 이로써 아느니라.
    We are from God, and whoever knows God listens to us; but whoever is not from God does not listen to us. This is how we recognize the Spirit of truth and the spirit of falsehood. 

    진리의 영은 성경, 특히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매우 핵심적인 개념이에요.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성령, 곧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드러내고 그분 안에 거하게 하시는 영을 뜻합니다.

    성경적 정의  /  요한복음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진리의 영 = 성령
      → 단순한 정보 전달자가 아니라 함께 거하며 내면에서 역사하는 분


    진리의 영이 하는 일

    1.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함(요한복음 15:26)

    “그가 와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함
    예수의 인격·십자가·부활을 왜곡하지 않음

    2. 진리로 인도함(요한복음 16:13)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단순 지식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진리로 이끎  

    3. 사랑과 순종으로 열매 맺게 함(요한일서 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줄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교만 → 겸손
     미움 → 사랑
     자기의 → 하나님의 뜻  

    요한일서에서의 핵심 기준

    요한은 “영들을 시험하라”고 말하면서 기준을 제시(요한일서 4:2)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

    진리의 영의 핵심 표지 : 

      1. 예수의 성육신을 인정  
      2. 십자가를 부정하지 않음
      3. 사랑을 실제 삶에서 나타냄  


     진리의 영 vs 미혹의 영 (요약

    진리의 영       미혹의 영
    예수를 주로 고백       예수를 왜곡
    겸손과 사랑을 낳음      교만과 분열
    십자가 중심     신비· 체험 중심
    공동체를 세움        자신을 높임


    한 문장 요약  
    진리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게 하고, 사랑으로 살게 하며,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진리의 영은 성경에서 성령을 가리키는 표현이에요.
    특히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아주 핵심적으로 등장하죠.

    성경적 근거 / 요한복음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복음 16:13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진리의 영 =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입니다.  

    진리의 영의 핵심 역할

    1.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함(요한복음 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진리의 영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분명하게 합니다.

    2.  거짓을 분별하게 함(요한일서 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진리의 영은  
      복음을 흐리지 않고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를 부인하지 않으며  사랑과 순종으로 이끕니다.  

    3. 안에서 가르치심(요한일서 2:27) 

    “너희 안에 거하시는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가르치며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진리의 영은 외부 지식만 주는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양심과 믿음을 깨우는 분이에요.    

      진리의 영의 특징 요약

    진리의 영 미혹의 영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함 예수를 흐리게 함
    진리로 인도 혼합과 왜곡
    사랑과 순종을 낳음 교만과 분열
    빛 가운데 걷게 함 어둠에 머물게 함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진리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알게 하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현대의 영지주의 

    현대의 영지주의는 겉으로 보면 기독교 언어를 쓰지만, 핵심에서는 초대교회가 경계했던 영지주의와 아주 닮아 있어요. 

    1. 고대 영지주의   

    • 구원은 ‘믿음’이 아니라 특별한 지식(γνῶσις)

    • 육체· 물질 세계는 열등하거나 악함

    • 예수의 **성육신(참 사람 되심)**을 부정하거나 약화

    • 엘리트 의식 : “아는 자 vs 모르는 자”

    요한일서가 그렇게 강하게 싸운 이유도 바로 이거였고요. 

    2. 현대의 영지주의

    ① “나는 직접 계시를 받았다” 신앙 
      성경보다 개인의 체험· 음성· 느낌이 기준  
       “이건 너희가 몰라도 되는 깊은 차원의 이야기야”
      검증 불가, 공동체 밖에서만 통용됨

     계시의 사유화 = 현대 영지주의의 핵심 징후 

    ② 예수는 ‘모범·스승’일 뿐이라는 주장

    • 예수를 구원자가 아니라 
      깨달음을 준 존재 
      의식의 확장을 도운 마스터 
      십자가는 죄 사함이 아니라 “사랑의 상징” 정도로 축소

     성육신과 대속이 희미해질수록 영지주의적 

    ③ 몸과 삶을 가볍게 여기는 신앙 
      “중요한 건 영이지, 삶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윤리·행위·책임은 부차적인 문제  
      회개보다 “깨달음”이 강조됨 

     요한일서가 말한 “행함으로 나타나는 사랑”과 정면 충돌 

    ④ 선택받은 소수 의식

    • “진짜 아는 사람은 소수야”

    • 교회·성도·전통을 은근히 무시

    • 비판받으면 “너희 수준에서는 이해 못 해”

    겸손이 사라진 신비성은 거의 항상 위험 신호   

    ⑤ 자기계발· 뉴에이지와 결합된 신앙 

    • “그리스도 의식(Christ consciousness)”

    • “내 안의 신성을 깨워라”

    • 죄 개념은 사라지고, 무지만 문제로 남음

     죄 → 무지로 바뀌는 순간, 영지주의

     3. 요한일서 기준으로 본 분별 포인트 

    요한은 영을 이렇게 분별하라고 했죠: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시인하는가
    → 성육신·십자가·부활을 실제 역사로 고백하는가

    2️⃣ 사랑이 말이 아니라 행함으로 드러나는가
    → 삶과 윤리가 분리되지 않는가

    3️⃣ 형제를 사랑하는가
    → 엘리트 의식이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는가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아무리 “깊고 신비해 보여도” 요한은 경고등을 켰을 거예요.   

    4. 왜 현대인에게 영지주의가 매력적인가

    솔직히 말하면 이유가 있어요.

    • 회개보다 덜 아프고

    • 순종보다 자존감이 높아 보이고

    • 십자가보다 자기중심적

    하지만 요한은 분명히 말하죠.

    “빛 가운데 행하지 않으면서 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5.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현대의 영지주의는
    예수를 믿는 것처럼 말하지만
    예수를 ‘따라 살 필요는 없게’ 만든다.


    “현대의 영지주의”*는 겉으로 보면 기독교처럼 보이지만, 핵심에서는 복음과 많이 어긋나는 흐름을 말해요. 

    1. 영지주의의 핵심부터 다시 보면 고대 영지주의의 중심

    • 구원은 ‘믿음’보다 ‘특별한 지식(γνῶσις, 그노시스)’으로 온다

    • 영(선)은 중요, 육체(악)는 하찮다

    • 예수님의 성육신을 불편해하거나 부정

    • 공동체적 사랑·윤리보다 개인적 깨달음 강조


    현대 영지주의의 대표적 형태들

    1.  “나는 깨달았고, 너희는 아직이다” 신앙

     
    “이건 아무나 아는 게 아니야”  
    “성경만 봐서는 안 되고, 이 계시를 알아야 해” 
    특정 지도자·집단만이 깊은 진리 소유자처럼 행동 
    -  진리는 감추어진 비밀이 아니라 드러난 복음인데, 진리를 ‘선별적 소유물’로 만듭니다.  

    2. 예수는 ‘본받을 모델’이지 ‘구주’는 아니다

    예수 = 깨달은 스승, 의식의 진화 단계 
    십자가 = 상징적 메시지일 뿐, 대속은 부정 
    부활 = 실제 사건이 아니라 내적 체험
    -  요한은 단호하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면…” (요일 4:2–3)  

    3. 영적인 말은 많은데, 삶은 분리된 신앙

     
    “영적으로 자유하니까 행위는 중요하지 않아”  
    사랑· 순종· 거룩은 ‘낡은 종교적 개념’ 취급  
    실제 삶의 책임은 회피
    - 요한일서의 반복 논지 :   “하나님을 안다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  

    4. 자기 안의 ‘신성’ 발견이 구원이라는 사상

     
    “구원은 밖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어”  
    회개· 십자가· 은혜 대신 자기 인식 강조  
    하나님과 나의 경계가 흐려짐
    -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 안에 계신다고 말하지만, 인간이 본질적으로 신이라고 말하지는 않아요.  

    5. 영성은 좋아하지만 공동체는 거부

     
    “나는 교회는 싫지만 영성은 좋아” 
    권면· 책망· 사랑의 책임에서 벗어남  
    혼자만의 ‘순수한 영적 체험’ 추구
    -  영지주의는 항상 공동체를 약화시켜요.
    요한일서는 정반대로 사랑의 관계성을 기준

    요한일서 기준으로 본 현대 영지주의 판별표   

    1. 신앙의 시험

    →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가?  

    2. 윤리의 시험

    → 삶에서 순종과 거룩이 실제로 드러나는가? 

    3. 사랑의 시험

    → 형제를 사랑하는 구체적 행함이 있는가?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아무리 “깊은 영성”을 말해도 요한은 의심하라고 말합니다.  

    한 문장 정리

    1. 십자가 없는 영성

    2. 육체 없는 예수
    3. 사랑 없는 깨달음 





    가현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는 진짜가 아니라 ‘겉으로만’ 사람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더럽고 고통스러운 육체를 가질 수 있느냐?”  
    그래서 탄생·고난·십자가·죽음이 실제가 아니라 환상이라고 봤어요.  
    즉, 예수는 신이지만 사람이 아니었다는 생각이에요.

    왜 이런 사상이 나왔을까?

    헬라 철학 영향
      → 영 = 선, 육체 = 악이라는 이원론 

    하나님은 순수한 영이니까
     → 육체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함

    성경은 가현설을 어떻게 보나? (강력하게 부정)
    특히 요한복음·요한일서가 정면으로 반박해요.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일서 4:2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요한일서 1:1
     
    “우리가 보고, 들고, 만진 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요한은 일부러 보고· 만지고· 들었다는 표현을 반복해요.
    “환상이 아니다, 진짜 몸이다”라는 뜻이죠.  

    왜 가현설이 치명적인가?
    가현설을 받아들이면 
    1. 십자가의 고난이 실제가 아님  
    2. 실제 피 흘림이 없으니 속죄도 무너짐
    3. 구원 자체가 붕괴됨  
    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 예수께서 진짜 사람이 되지 않으셨다면, 우리를 대신할 수도 없어요. 
    한 줄로 정리하면

    가현설은 ‘예수의 신성은 지키려다 성육신을 부정한 오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시다.

    가현설 vs 영지주의 차이

    가현설 (假現說, Docetism)

    핵심 질문

    “예수는 진짜 사람이었는가?” 
    십자가의 고난· 죽음이 겉모습일 뿐
    문제의 초점 : 성육신(incarnation)   
    예수의 이 가짜 

    영지주의 (Gnosticism)

    핵심 질문

    “누가 참된 구원을 얻는가?”  
    비밀 지식(γνῶσις, gnosis)을 가진 소수만 구원 
    육체는 악, 영은 선  
    윤리적 이중성  
    금욕주의 또는 육체는 상관없다며 방식

    구원 방식이 가짜 

    관계 정리

    • 가현설은 영지주의적 세계관에서 나온 ‘기독론적 오류’

    • 요한일서에서는 둘이 결합된 형태가 문제였어요.

    그래서 요한은

    육체로 오신 예수 +  
    사랑과 행함을 동시에 강조

    왜 요한일서에 이단 경계가 그렇게 많은가?

    이유 1: 교회 내부에서 나온 이단이었기 때문

    요한일서 2: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외부 박해 ❌ 
    내부 분열 ⭕
    지도자·교사급 인물일 가능성 큼 더 위험함  

    이유 2 : “믿는다” 말하지만 삶이 달랐기 때문

    요한일서 반복 구조 :  
    “하나님을 안다” 말함
    계명은 안 지킴

      
    “빛 가운데 있다” 말함
    형제를 미워함

     
    “죄 없다” 말함
    회개 없음

    요일 1:6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하고…”

    신앙 고백과 삶의 불일치가 핵심 문제  

    이유 3: 성도들의 확신을 무너뜨렸기 때문

    요일 5:13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단 : “너희는 아직 부족해”  
    요한 : “이미 받았다”  
    요한일서는 논쟁서 + 목회서 

    오늘날 가현설과 비슷한 현대적 신앙 오류

    이게 제일 중요해요. 이단은 사라지지 않고 ‘모양’만 바뀝니다.  

    ① “예수는 훌륭한 영적 스승일 뿐”

    • 사랑, 지혜, 깨달음만 강조

    • 십자가·피·속죄는 불편해서 제거

    👉 십자가 없는 예수 = 가현설의 현대판 

    ② “예수는 내 마음속에서만 영적으로 경험하면 된다”

    • 역사성, 몸, 교회, 성례 무시

    • 실제 순종·고난은 회피

    👉 영적인 느낌은 있지만 육체적 순종은 없음  

    ③ 성공·번영만 말하는 신앙

    • 고난 없는 그리스도

    • 십자가 없는 부활

    • 눈물 없는 영광

    그러나  “그리스도도 고난을 받으셨다”

    고난을 삭제한 예수 = 가현적 예수 

    ④ “믿기만 하면 삶은 안 바뀌어도 된다”

    • 회개·윤리·사랑은 선택

    • 행함은 ‘율법주의’라 치부

    요일 3:18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육체 없는 신앙, 삶 없는 믿음 

    한 문장으로 꿰뚫기

    가현설은 예수의 몸을 지웠고, 
    영지주의는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으며,
    요한일서는 “예수의 몸 + 십자가 + 사랑의 삶”을 다시 붙잡게 한다.

    요한일서의 3중 시험  (신앙 · 윤리 · 사랑의 시험)

    요한일서는 “참된 그리스도인인가?”를 분별하는 3가지 기준(시험)을 제시합니다. 

    첫째, 신앙의 시험 (교리적 시험, 진리의 기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고백하는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라” (요일 5:1)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적그리스도의 영이라” (요일 4:3)

    기준 /  
    예수 = 그리스도
    성육신(육체로 오심) 고백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 인정 

    거짓 가르침  / 
    예수는 단지 영적 존재  
    그리스도는 예수와 분리된 존재
    → 영지주의/가현설 계열 사상  

    둘째, 윤리의 시험 (행위의 시험, 삶의 기준)  

    삶이 죄 가운데 지속적으로 머무는가 아닌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요일 3:9)

    의미 /  
    “실수로 죄를 안 짓는다” ❌  
    “죄의 지배 구조 안에 거하지 않는다” ⭕ 
    죄를 정당화하며 사는 삶 ❌

    기준 /  
    죄를 미워하는가  
    회개하는가  
    빛 가운데 행하는가 (요일 1:7)  

    셋째, 사랑의 시험 (관계의 시험, 공동체 기준) 

    형제를 사랑하는가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요일 3:10)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8)

    기준 :

    • 말이 아닌 삶의 사랑

    • 희생적 사랑

    • 실제적 행동의 사랑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3:18) 

     요약 구조

    시험 기준 핵심 질문
    신앙 진리        예수를 어떻게 고백하는가
    윤리 삶             죄를 어떻게 대하는가
    사랑 관계       형제를 어떻게 대하는가

    이 세 가지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믿음이 참이면 → 삶이 바뀌고 → 사랑이 나타난다 

    요한일서의 “적그리스도” 의미

    요한일서에서 “적그리스도”는 한 인물이 아닙니다.

    “적그리스도가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요일 2:18)

    의미 구조

    ① 인격체가 아니라 영적 성격(정체성)

      
    “적(anti)” = 반대 + 대체  
    그리스도를 부정하거나, 그 자리를 대신하려는 영 

    ② 교리적 정체성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누구냐 그는 적그리스도니” (요일 2:22)

    👉 적그리스도의 핵심:

    • 예수 = 그리스도 부정

    • 성육신 부정

    •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부정 

    ③ 공동체 내부에서 나옴

    📖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요일 2:19)

    👉 외부 이단 ❌
    👉 교회 내부 분리자들

     정리 :  요한일서의 적그리스도  
    1. 예수의 정체성을 왜곡하는 가르침을 가진 자들
    2. 교회 안에서 나온 거짓 교사들
    3. 그리스도를 부정하거나 대체하는 영적 세력

    왜 요한은 ‘칭의’보다 ‘사랑’을 말했는가?

    바울과 요한의 질문이 다릅니다

    바울의 질문 :

    “어떻게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가?”
    칭의(Justification) 중심

     율법 · 행위 · 믿음 · 은혜 · 십자가 법정적 구조 

    요한의 질문:

    “누가 하나님께 속한 자인가?”
    “누가 참된 생명을 가진 자인가?”

    존재론적 구조 (생명, 빛, 사랑, 거함, 관계) 

    요한 신학의 중심 개념

    바울 요한
    칭의 생명
    의롭다 하나님께로부터 남
    법정적 선언 관계적 존재 변화
    믿음으로 의롭다 사랑으로 나타난다 

    왜 ‘사랑’인가?

    ① 하나님 존재 규정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8)

     사랑은 속성(attribute)이 아니라 본질(identity) 

    ② 구원 증거 구조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9)

    사랑 = 구원의 조건 ❌
    사랑 = 구원의 결과 ⭕ 

    ③ 존재 증명 구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줄을 우리가 아는 것은 형제를 사랑함이라” (요일 3:14)

    사랑은 칭의의 열매이지 대체물이 아님 

    신학적 통합 문장

    바울은 “어떻게 구원받는가”를 말했고
    요한은 “구원받은 자가 어떤 존재인가”를 말한다

    바울은 법정 언어(칭의)를 사용했고
    요한은 생명 언어(사랑·빛·거함)를 사용했다

    바울은 구조를 설명했고
    요한은 증거를 보여준다

    핵심 요약

    요한일서 3중 시험

    • 신앙 : 예수를 어떻게 고백하는가

    • 윤리 : 죄를 어떻게 대하는가

    • 사랑 : 형제를 어떻게 대하는가

    적그리스도

    한 인물 ❌  
    교회 내부에서 나온 거짓 교사들
     예수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영적 세력

    요한이 사랑을 말한 이유

    칭의 부정 ❌ 
    칭의의 결과를 강조
    사랑 = 구원의 증거  
    존재의 변화가 관계로 드러남


    가현설(docetism)

    외견상으로 사람으로 보인 것뿐이지, 실제로 육신을 입은 것이 아니라는 이론이다.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 하지 않는 영에 대해 언급한 것(요일 4:2-3)은 가현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가현설은 물질은 악하며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헬라사상에 근거하여 예수님이 육체를 가졌을 경우, 그의 신성에 손상이 갈 것이라는 우려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단으로 정죄 받게 되었다.  

    1세기 말 케린투스(Cerintus)는 그리스도와 예수를 구별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은 단순히 인간성과 일시적 병존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난 인간이었던 반면, 그리스도는 세례 받을 때 그에게 내려온 신적 존재였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환상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진정한 의미의 육체일 수 없고 육체의 모습을 가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인간예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실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가현설적 기독론(docetism)을 주장하였다. 
    영지주의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몸은 진정한 육체일 수 없고 단지 육체의 모습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었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육체적 실재의 부정이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나 육체적 부활과 같은 정통교회의 일반적 신앙을 소박한 오해로 간주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원 : 영지주의는 구원이 지식(깨달음)에 의해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① 구원은 영의 해방과 귀환이다. 
    영지주의에 따르면, 구원은 물질적인 것과 연합됨으로 육체 속에 갇혀 이 세상에서 데미우르고스와 그 세력들의 지배 아래 있는 영이 해방되어 본래의 거처, 천상계로 귀환하는 것이다.
     
    ② 구원을 지식을 통해 성취된다. 
    영지주의는 구원이 예수의 희생적 죽음이나 예수를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영지, 즉 세계와 에온들과 참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소유함으로 이뤄진다고 보았다. 
    이들은 믿음과 관련하여 지식을 과대평가한다. 
    엘리트를 위해 보다 높은 지식 즉, 비밀적인 지식이 요청된다고 주장한다(브라운, 2001).

    구원파는 예수 그리스도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박옥수는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깨닫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친다. 
    박옥수는 정통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회개와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의지적인 회개와 믿음이 빠진 깨달음에 의한 구원을 전하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구원파를 영지주의적 이단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에 영향을 받은 류광수 다락방도 죄인임을 인정하고 이를 통회하는 회개에 대한 강조를 하지 않고 다만 예수를 구주로 믿을 때 원죄와 자범죄가 다 용서받는다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이단전문가들은 다락방이 지방교회의 삼분설과 박옥수의 깨달음, 그리고 김기동의 귀신론이 혼합된 영지주의 이단이라고 분별하고 있다.
     
    ③ 인간계층에 따라 구원의 가능성이 좌우된다. 
    최하층인 육적 인간, 즉 이교도들은 어느 경우에도 구원을 얻을 수 없는 멸망 받을 인간이다. 
    중간 층 혼적 인간은 신앙을 가졌으나 영지를 가지고 있지 못한 유대교인과 기독교인들로 이들은 구원받을 수도 있고 멸망할 수도 있는 인간이다. 
    최고층 영적 인간은 참된 기독교인으로 영지로 구원을 얻은 인간이다. 
    영적 인간은 구원에 이르기 위해 예수의 교훈을 파악해 깨닫기만 하면 된다.

    영지주의(gnosticism)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을 가장 미혹하는 신앙의 양태를 영육이원론의 영지주의로 지목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라”고 하였다(요일 1:7).

    최근 전 세계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예수는 신화다>나 <다빈치코드> 등은 모두 영지주의의 현대적 부활이라는 성격이 농후하다. 
    뉴에이지운동의 범신론적 성격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허호익, 2016). 

    영지주의란 영적 지식(gnosis)을 추종하는 동방 종교와 희랍철학과 신지학(theosophy),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혼합형태로 주후 80년부터 150년 사이에 초대교회와 경쟁했던 가장 강력하고 위협적인 운동이었다. 
    영지주의는 엄격한 의미로 보면 종교도 아니고 순수하고 단순한 철학도 아니었으며 일종의 밀의적인 민중신앙이다. 

    영지주의(靈知主義)는 교회사 최초로 출현한 이단 가운데 하나다. 영지주의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기독교 이전부터 존재해 온 영지적인 사고와 개념 또는 분위기를 지닌 종교운동을 가리키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다른 하나는 2세기에 널리 유포되었던 기독교 이단종파를 가리키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영지주의는 기본적으로 “특별한 지식을 통한 영혼의 우주적 구속을 가르친 사상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이성호, 2012). 

    영지주의는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나서, 누가 무엇을 주장했는가? 
    당시 교회는 영지주의에 어떻게 대처했으며 왜 이단으로 간주했는가? 
    현재 한국에는 어떤 영지주의 이단이 활동하고 있는가? 

    이단은 정통을 전제로 한다. 정통은 기원적이고 이단은 반영적이다. 
    기독교는 절대적 진리를 표방하고 심오하고 놀라울 만큼 신비스러운 메시지를 선포했다. 
    처음부터 기독교는 구원과 영생이 믿음으로 말미암고 그 믿음이 그리스도 나사렛 예수 즉, 역사적 개인(인격)이신 분에 대한 것을 믿는 것을 의미했다. 
    그 분의 생애, 죽음, 부활, 그리고 재림하신다는 의미는 각 기독교인에게 생사를 걸 만큼 중요한 진리였다(브라운, 2001). 

    정통은 일반적으로 우선순위를 역사에 두지만, 이단은 지식적 이해에 둔다. 
    그래서 정통은 신학자들 가운데 보다 신학적이지 못하고 보다 역사적인 마음을 가지게 하지만, 이단은 보다 신학적이고, 보다 철학적이고, 보다 추상적이다. 

    골로새서와 요한일서는 영지주의와 가현설주의(decetism)에 대한 항거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유대교주의와 율법주의와 함께 영지주의는 초대교회의 위협적 이단으로서, 믿음과 관련하여 지식을 과대평가하였다. 

    20세기 전반까지 Irenaeus, Tertullian, Hippolytus, Epithanius와 같은 이단전문가들(heresiologists)은 영지주의자(Gnostics)에 대한 일차적 정보원이었다. 
    이들은 영지주의자들이 성경의 의미를 조작하고 왜곡하여 기독교를 오도하는 것에 대해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들은 특히 창세기와 요한복음, 그리고 바울서신을 자기들 목적을 위해 왜곡하였다. 
    Irenaeus와 같은 교부는 영지주의와 기독교의 종교적 혼합을 교회에 대한 공공연한 위협으로 간주하여, 영지주의자들의 성경해석을 왕의 아름다운 그림을 분해하여 여우의 그림으로 짜맞추는 것에 비유하였다. 

    우리는 영지주의라 부르는 사상이 고대세계를 휩쓸었던 극단적, 철학적, 영적 경향의 한쪽 측면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브라운, 2001).

    영지주의가 일어났던 때는 사도들이 이미 세상을 떠나고 사도들의 신앙을 계승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어렵사리 자리를 잡아가던 상황이었다. 
    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 사상으로 인하여 초대교회는 크게 몸살을 앓게 되었다. 초대교회 속으로 침투한  영지주의는 ‘영지주의 이단’을 형성하여 교회의 참 복음을 심각하게 위협하였다. 

    초대 교회 당시 교회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친 대표적인 이단들은 영지주의, 마르시온주의, 그리고 몬타누수주의이다. 여기에 대하여 교회는 신앙의 준칙을 확립하고, 감독의 사도권을 교회 내에 정착시키고, 정경을 확정함으로 응전하였다. 
    초대교회는 이단의 공격에 대하여 정경화, 신조화, 직분의 확립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지켰다. 

    이단은 기본적으로 성경의 본질적인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을 더하거나, 그것에서 본질적인 교리를 빼는 것을 의미한다(계 22: 18-9). 
    영지주의와 몬타누스주의(신령한 예언)는 전자에 해당하고, 마르시온주의자들(구약적 요소를 제거)은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리멘트(Clement, 150-215)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영지주의의 창시자는 시몬 마구스(Simon Margus)라는 인물이다. 시몬 마구스는 사도행전 8:9-13절에서 등장하는 마술사 시몬과 동일인물이며, 그는 마술을 행하여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하는 재주를 부렸고, 많은 인기를 얻자 자신이 사람의 형태로 나타난 신이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경배하도록 만들었다. 
    시몬은 자신이 겉으로는 사람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하나님이라고 가르쳤다.  

    영지주의와 정통 기독교는 거의 동시대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이성호, 2012). 
    영지주의 사상이 교회에 침투하여 초기 기독교를 심각하는 위협하는 이단 세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흔적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버가모에 있는 교회에 보내신 편지의 내용 중에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5)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이 초대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와 관련된 흔적이다.

    ‘니골라당’(Nicolaitans)이라는 말은 초기 영지주의의 지도자 니콜라스(Nicolas)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니콜라스는 안디옥 출신으로서, 사도들에게서 신앙을 전수받고 집사의 직분을 받았으나 결국 이단의 길로 빠지고 말았다.       

    성경 외의 문헌에서도 니골라당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있다.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 165년 순교)이 Trailians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 중에 “니골라당을 멀리 하십시오.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쾌락을 사랑하지만 중상적인 혀를 놀립니다”라고 말하는 내용이 나타난다.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변증가 이레니우스(Irenaeus, 125–202)가 저술한 책「Adversus Haereses」에도 다음과 같이 영지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니골라당은 사도들에 의해 집사직을 처음으로 받은 자 니콜라스를 추종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무절제적인 방종한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자들의 특징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영지주의라 부르는 사상은 고대세계를 휩쓸었던 극단적, 철학적, 영적 경향의 한쪽 측면이라 할 수 있는데, 영적 형태로써 20세기의 실존주의를 닮았다고 할 수 있다(브라운, 2001). Mary Baker Eddy(1821-1910)의 '크리스찬 싸이언스‘(Christian Science)는 현대판 영지주의이다.

    역사가 소크라테스 (Socrates the historian, 5C.)가 남긴 기록에서도 초대교회가 영지주의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했다는 기술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사도 요한이 성경에 남긴 다음의 말씀이 그 당시 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 이단 사상을 물리치기 위해 했던 말이라고 기술하였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1-3)    

    1. 기독교 영지주의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 지방에서 영지주의 문서가 대량 발견됨으로써 영지주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처음에는 영지주의가 초기 기독교 내에서 발생한 하나의 기독교이단사상이었다고 여겨졌으나, 최근에 간행된 활발한 연구결과에 의해 영지주의는 기독교 밖에서 시작되어 고대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크게 미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 사상으로 인하여 초대교회는 크게 몸살을 앓게 되었다. 초대교회 속으로 침투한 영지주의는 교회의 참 복음을 심각하게 위협하였다. 

      교회사에서 영지주의가 문제된 것은 2세기 이후였다. 영지주의는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 영지주의의 뿌리는 무엇인가?

      ⑴동양 종교 유래설이다. 조로아스터교, 신비종교, 점성술, 마술 등 동양종교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⑵헬라사상 유래설이다. 기독교 신앙이 신플라톤 철학의 흙탕물로 오염되었다고 보는 견해다. 동방종교인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Edward Conze).
      ⑶유대교 유래설이다. 유대교의 금욕적이고 묵시적인 종파 에세네파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⑷기독교내부 유래설이다. 기독교내부의 이단적 사상에서 유래했거나 1-2세기에 번창한 기독교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⑸고대종교 및 사상의 혼합설이다. 기독교전파과정을 통해 일어난 일종의 혼합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기독교 이전부터 존재했던 종교혼합주의가 기독교 안에 침투해 복음을 변질시키려 했던 것으로 본다.

    기독교로 개종하는 과정에서 페르시아의 이원론, 동양의 신비종교, 헬라 철학, 유대교 사상 등 여러 요소가 기독교 교훈에 혼입되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 기독교 영지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지주의 사상이 교회에 침투하여 초기 기독교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이단 세력에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흔적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버가모교회에 보내신 편지의 내용 중에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5)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와 관련된 흔적이다(정이철). 

    ‘니골라당’(Nicolaitans)이라는 말은 초기 영지주의 지도자 니콜라스(Nicolas)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니콜라스는 안디옥 출신으로, 사도들에게서 신앙을 전수받고 집사의 직분을 받았으나 결국 이단의 길로 빠졌던 사람이다.

    영지주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신성이 공유되고 있다고 여기는 현대의 뉴에이지 운동의 원형이었다. 한국인들이 기독교에 개종할 때 무속신앙과 기독교 신앙을 혼합한 것과 비슷하다 할 것이다.


    2. 영지주의의 일반적 특징

      영지주의는 지식을 의미하는 헬라어 Gnosis에서 유래하였다. 일반적 지식이 아니라 신비적 합일을 통한 앎을 의미한다. 영지주의는 그 성격상 밀의적인 혼합종교이므로 그 교리와 제도와 의식이 너무나 다양하여 한 마디로 규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영지주의 자체는 복잡하고 다양하지만 공통된 일반적 특징을 몇 가지 간추려보자. 

      ⑴영육이원론(dualism): 모든 영지주의는 이원론에 기초에 두고 있는데, 영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 영혼과 육체는 서로 존재론적으로 대립의 관계에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영육 이원론은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선악이원론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존재론적 윤리적 이원론이 그대로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에 적용된다.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이 고통을 당하고 죽는 까닭은 인간이 이 악한 물질세계에서 악한 육신을 입고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본다. 육신은 악하기 때문에 육신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인간 육신을 적대시하고 천시하는 영지주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극단적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극단적인 금욕주의로서 일체의 육식과 결혼을 금한다. 둘째, 이와는 정반대로 육신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윤리적 방탕주의(반율법주의)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신앙적 고행이나 금욕은 구원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허호익, 2016). 

      영지주의에 의하면, 구원은 영적 각성을 통해 인간의 영혼이 육신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영적 본향으로 귀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죽음과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통해 죄사함을 받아 영육 간에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의 구원론을 조잡한 것으로 배척한다. 영적 세계로의 귀환이라는 신화론적 구원론에 집착한다.

      ⑵육체의 감옥에 유폐된 영혼. 영지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천상의 영적 존재였다. 천상의 영적 존재였던 인간은 자신 안에 있던 ‘신적 불꽃’을 상실하고 지상의 물질세계로 추방되어 고통과 죽음의 운명을 지닌 육신의 감옥에 유폐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육신을 영혼의 감옥이라고 보았다. 사람은 자신의 추방과 유폐의 과정조차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가르친다.

      ⑶구원은 영적 깨달음에서 온다. 구원은 영적 지식의 각성에 의해 이뤄진다. 영적인 인간임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육체의 감옥에 갇힌 인간이 자신이 영적 존재라는 각성에 이르게 되어야 구원을 얻는다. 영적 각성은 영적 지식을 통해 가능하다, 따라서 영지를 중시한다. 

    영지, 영적 비밀에 대한 지식을 중시한 것이 영지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다. 지성적이며 과학적인 지식이 아니고 직관적이며 직접적인 지식, 신적인 것에 참여함으로 얻는 영적인 지식을 말한다. 합일의 지식이며 구원의 직접적인 경험이다. 자신의 현재 상태로부터 해방과 구원을 성취하는 자기인식(깨달음)의 행위이다. 

    영지주의 이원론은 구원론과 밀접한 연관을 갖게 된다. 우리의 영혼은 물질(육체)에 갇혀 있다. 따라서 이 영혼이 육체에서 해방되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다. 
    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참다운 지식이 필요하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득도(깨달음)를 해야 구원을 얻는 것이다. 

    영지주의에 따르면(지방교회와 구원파가 영지주의다), 진정한 구원은 우리의 믿음이나 행함이 아니라 참 지식의 소유 여부에 달려 있다. 그 결과 영지주의자들은 윤리에 대해 부정적이고 소극적이었다. 그들은 율법에서의 해방과 양심의 해방을 강조한다. 이 지식은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서 비밀스럽게 전수된다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는 신비적 지식을 통해 구원을 성취하려 한 종교운동이다. 
    영지주의는 상징적인 의식, 신비적인 예식, 무술적인 형식의 가르침을 도입하여 사변적 우주론을 대중화했다. 우주론적 신화, 헬라와 동양의 이교적 철학사상, 기독교의 진리를 융합한 대중운동이었다. 




    1월 26일(월) 요한일서 4: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영(4:2)

    하나님의 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This is how you can recognize the Spirit of God: Every spirit that acknowledges that Jesus Christ has come in the flesh is from God.

    το πνευμα του θεου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은 성경에서 주로 "성령(the Holy Spirit)"을 말합니다.
    그러나 요한일서에서는 하나님의 영은 성령이 아니라 "분별의 기준(standard of discernment)"을 의미합니다(4:2)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은 예수께서 육체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영지주의라는 가르침을 바르게 깨우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이원론 사상은 물질은 악한 것이고 오직 정신만이 선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사람의 육체는 악한 것이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육체로 임하는 것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께서 육체로 임하신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이론을 가현설(docetism) 또는 영지주의(gnosticism)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이 세상에 육체로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 육체로 오신 것처럼 보이셨을 뿐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하나님의 거룩을 강조하기 위한 이론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어긋난 것이므로 비성경적인 이론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요한일서에서 강조하는 하나님의 영은 거짓된 가르침에 대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영 즉 분별의 영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일서에서 강조하는 하나님의 영은 분별의 기준이라는 특수한 의미로 소개됩니다.
    분별의 기준으로서 하나님의 영은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게 합니다.
    둘째는 사랑과 진리 안에 거하게 합니다.
    셋째는 말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게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반드시 성경의 가르침따라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풍조가 믿음을 흔들려고 다양한 이론들을 미끼로 던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동성애자들도 사랑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만을 포용하고 잘못된 것은 바르게 가르치고 깨우치는 것이 사랑입니다.

    오늘도 주님만을 사랑하며 주님처럼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무장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 '하나님의 영'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성령을 의미한다(13절; 3:24, Stott). 
    이 견해에 따르면 본절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증거하심을 의미한다. 
    (2)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한다(JB, Smalley). 
    본절이 앞절과 연관되어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나 문맥상 후자의 견해가 더 나은 듯하다. 
    한편 '알지니'로 번역된 헬라어 '기노스케테'에 대해서 혹자는 명령법으로 해석하나(Law), 본서 어디에서도 명령법으로 사용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직설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Westcott, Smalley, Brooke). 
    요한은 본문에서 수신자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수신자들이 알고 경험했던 영적인 사실들을 잘 지키며 올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상기시키고 있다(13절; 3:16; 5:2)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 본문은 영감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거짓 영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분별하는 기준이다. 
    그 기준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의 인정 여부이다. 
    요한 당시 수신자들 가운데에는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에 빠져서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
    요한은 본절에서 이러한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를 공격하고 있다. 
    한편 '오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렐뤼도타'는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요이 1:7에서 현재 시상으로 사용된 것과 대조를 이루어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으로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사건이 영원한 사실이며 현재에도 계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시사한다(Stott, Smalley). 
    그리스도께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셨다(1:1,2; 3:1; 5:1; 요1:12-14, Westcott).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셨음을 시사할 뿐만 아니라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암시한다. 
    즉 그는 완전한 인간이시며 동시에 신이셨다(Marshall, Smalley).



     


    하나님의 영은 성경에서 보통 성령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단순한 ‘기운’이나 ‘분위기’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인격적으로 역사하시는 방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의 정체
    • 하나님의 영 = 성령

    • 성부· 성자· 성령 중 성령 하나님

    • 하나님의 능력이나 영향력이 아니라 인격을 지닌 하나님

    •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10) 

    하나님의 영 = 성령

    • 창세기 1:2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 마태복음 28:19에서 성부·성자·성령으로 함께 언급됨
      👉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성령 하나님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

    ① 생명을 주심

    • 창조 때부터 역사하심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② 사람을 새롭게 하심

    • 거듭나게 하심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요 3:5)

    ③ 진리로 인도하심

    • 말씀을 깨닫게 하심

      “진리의 영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 (요 16:13)

    ④ 사랑으로 살게 하심

    •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부어주심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 5:5)

     

    하나님의 영의 역할

    • 생명 주심: “영은 살리는 것이라”(요 6:63)

    • 진리로 인도: 진리를 깨닫게 하심(요 16:13)

    • 죄를 깨닫게 하심: 양심을 깨우심(요 16:8)

    • 사랑하게 하심: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부으심(롬 5:5)

    • 순종의 능력: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심


    하나님의 영이 있는 사람의 특징
    • 죄에 대해 민감해짐

    • 미움보다 사랑을 선택하려는 마음

    • 진리를 따라 살고자 하는 갈망

    • 겉모습보다 마음과 삶의 변화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후 3:17)

    한 문장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사랑과 진리로 살게 하시는 살아 있는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예수를 믿게 하고 사랑으로 살게 하시는 생명의 영입니다.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

    요한일서에서는 분별의 기준으로 강조돼요. 

    “하나님의 영을 아는 것으로 이것을 알지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요일 4:2)

    하나님의 영은

    •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고

    • 사랑과 진리 안에 거하게 만들며

    • 말이 아니라 행함으로 사랑하게 해요

    •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은 단순히 신비한 체험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핵심 기준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영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요일 4:2)

    👉 요한에게서 하나님의 영을 분별하는 가장 결정적인 기준
    **‘예수를 어떻게 고백하느냐’**예요.

    •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로 고백함
      하나님의 영

    • 예수를 부인하거나 왜곡함
      미혹의 영 / 적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 vs 미혹의 영

    요한일서는 영적 세계를 아주 분명히 나눠요.

    구분 하나님의 영 미혹의 영
    예수 고백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를 시인 예수를 부인·왜곡
    열매 사랑, 순종, 진리 미움, 거짓, 교만
    출처 하나님께 속함 세상에 속함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요일 4:6)

    진리를 듣는 태도 자체가 영의 정체를 드러냄.

    하나님의 영과 사랑의 관계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영은 사랑으로 확인돼요.

    “그의 영을 우리에게 주신 줄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4:13)

    그리고 바로 이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16)

    👉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증거 = 사랑

    • 말만의 사랑 ❌

    • 실제로 형제를 사랑하는 삶 ⭕

    (요일 3:24, 4:7–12)

    하나님의 영과 계명

    요한일서에서는 영과 계명이 분리되지 않아요.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요일 3:24)

    👉 하나님의 영은

    • 계명을 무시하게 하지 않고

    • 사랑의 계명을 지키게 함

    즉, 자유를 핑계로 한 방종은 하나님의 영의 역사 아님

    요한일서가 말하는 결정적 한 줄

    예수를 바로 고백하게 하고, 형제를 사랑하게 하며, 진리에 거하게 하는 영 — 그 영이 하나님의 영이다.

    정리 한 문장

    👉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게 하고, 사랑으로 살게 하며, 진리 안에 거하게 하는 분별의 기준’이다.


    1. 요한 신학의 큰 전제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는 공통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생명과 빛이시며,
    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주어진다.

    그래서 요한에게서 **영(Spirit)**은
    단순한 능력이나 분위기가 아니라 **‘누가 예수를 어떻게 고백하느냐’**로 판별됩니다.


    2. 성령과 악한 영의 구별 (요한일서 중심)

    🔑 핵심 구절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요일 4:1)

    ① 분별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요일 4:2)

    ✔ 성령의 특징

    •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 + 참 인간으로 고백함

    • 예수의 십자가와 사랑의 계명을 중심에 둠

    • 형제를 사랑하게 만듦

    ✘ 악한 영의 특징

    • 예수를 왜곡함 (부인, 축소, 다른 예수 제시)

    • 지식은 있어도 사랑과 순종이 없음

    • 분열, 미움, 교만을 낳음

    👉 요한에게서 영적 체험의 강도는 기준이 아닙니다.
    예수 이해와 사랑의 열매가 기준이에요.


    3. “하나님의 영이 거한다”의 의미

    🔑 요한일서의 표현

    “그의 영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4:13)

    여기서 ‘거한다’(μένω, 메노)의 뜻

    • 잠깐 머무는 방문 ❌

    • 지속적으로 머무는 관계

    즉,

    하나님의 영이 거한다 =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이 사람 안에 계속 작동한다


    4. 요한복음에서의 연결 고리

    ① 성령은 예수를 증언함

    “그가 와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 15:26)

    → 성령의 역할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드러내는 것

    ② 성령은 ‘안에 계심’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7)

    → “하나님의 영이 거한다”는 말은
    외적 종교가 아니라 내적 생명의 문제


    5. 요약하면 (요한적 관점)

    구분 성령 악한 영
    예수에 대한 태도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를 고백 예수를 왜곡·부인
    열매 사랑, 순종, 담대함 미움, 분열, 교만
    거함 하나님과의 지속적 관계 일시적 감정·혼란
    중심 십자가의 사랑 자기중심성

    6. 한 문장 정리

    요한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고,
    그분의 사랑이 삶 속에서 계속 살아 움직이는 상태를 말한다.




    예화  

    커피숍에서 지기 싫어하는 네 명의 할머니들이 자식자랑으로 풍을 떨고 있었다.첫번째 할머니가 이야기했다. 
    "우리 아들은 카톨릭 신부라우. 남들은 우리 아들보고, '오, 귀하신 분!'이라 부른다우.
    "그러자 두 번째 할머니가 이야기했다."그래? 우리 아들은 추기경인데, 남들은 우리 아들더러 '오, 거룩한 분!'이라 불러요.
    "그러자 세 번째 할머니가 질 수 없다는 듯이 이야기했다."뭘 그 정도 가지고 그래요. 우리 아들은 교황이지요. 남들은 우리 아들보고, '아이고, 고결하신 분!'이라 그러지요.
    그 이상 더 높은 사람은 없죠? 푸하하하."
    그런데 마지막 할머니가 이야기했다."다 집어치워요. 우리 아들은 숏다리에 곰보, 거기다 뚱보이지요. 
    그래두 남들은 우리 아들을 보면 한결 같이 '오, 마이 God!'이라고 하지요."

    흑사병도 이겨낸 그리스도인들의 사랑

    주후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약 10만 명 있었는데 그들은 1만5천의 불행한 자의 생활을 담당하였습니다.

    또 후에 이곳에 흑사병이 창궐하여 많은 인명이 손상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이것이 기독신자들이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탓이라는 말이 돌아가 이 때문에 신자들은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모든 불신자들이 이 병이 무서워서 앓는 자와 죽은 자의 시체를 그냥 내버리고 도망을 했을 때에도 신자들은 결사적으로 마지막까지 머물러 있어서 병자를 구호하며 시체를 매장하였습니다.

    그 후 도망했다가 다시 돌아온 자들이 기독신자들이 한 업적을 보고 놀라지 않은 자가없었습니다. 이러한 흑사병의 유행은 갤러스(Gallus)황제 때에도 있었는데 당시 카태이지 교회는 사이프리안의 지도하에 그들을 간호했으며 매장하였습니다.

    유세비어스 당시에는 핍박이 너무 심하여 어떤 교우가 재산 몰수를 당하면 교우들이 서로 생활 책임을 졌고, 다른 데로 피신하여 가면 목사의 소개서 한 장으로 으레 그들의 생활 책임을 졌습니다. 2세기초의 신학자 터툴리안의 변증론의 일 절을 보면

    “보라 저들이 어떻게 사랑하였는가를! 저들이 서로 죽기도 사양치 않는구나 저들은 아내 외에는 무엇이나 공동으로 가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고 불신자들이 경탄함을 말하였고, 그들은 또한 불신자들을 향하여 “당신들은 우리를 핍박하나 우리는 당신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당신들의 신을 위하여는 아무 것도 아니하나 당신들의 빈궁한 자는 우리가 구제하노라”하였다 합니다.










    1월 24일(토) 요한일서 3:23-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의 계명(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 And this is his command: to believe in the name of his Son, Jesus Christ, and to love one another as he commanded us.
  • Those who obey his commands live in him, and he in them. And this is how we know that he lives in us: We know it by the Spirit he gave us.

  • 계명(誡命) 경계할 계, 목숨 명
     종교(宗敎)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條件)

    요한일서에서 계명이란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
    둘째는 서로 사랑하는 것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호칭을 넘어서, 그 사람(혹은 대상)의 정체성· 사명· 관계· 기대를 담아내는 상징이에요.

    조금 나눠보면:

    1. 정체성
      이름은 “너는 누구인가”를 드러내요. 성경이나 전통 문화에서는 이름이 곧 그 존재의 본질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죠.

    2. 사명과 방향
      어떤 이름은 그 사람이 감당해야 할 역할이나 부르심을 포함해요.
      (예: 아브람 → 아브라함, 사명 변화와 함께 이름이 바뀜)

    3. 관계성
      이름을 부른다는 건 관계를 맺는 행위예요.
      하나님이 이름을 불러 주신다는 표현은 ‘알고 계심’과 ‘택하심’을 뜻하죠.

    4. 기대와 선언
      이름에는 부모나 공동체의 소망, 혹은 하나님의 선언이 담기기도 해요.
      그래서 이름은 미래를 향한 말이 되기도 합니다.

    이름은 존재를 설명하는 꼬리표가 아니라, 그 존재를 부르는 의미의 언어예요.  

    “이름” = 그 사람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본질, 성품, 권위, 하시는 일 전체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안다 = 정보를 안다 ❌ 
    이름을 믿는다 = 그분 자체를 신뢰하고 받아들인다 ⭕ 

    “믿는다” = 지적 동의가 아니다. 
    성경적 ‘믿음’은 
    사실로 인정한다 ❌
    자신을 맡긴다, 의지한다 ⭕ 
    그래서 “예수의 이름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라는 분이 구원자이심을 인정하고, 내 죄· 삶· 미래를 그분께 맡긴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의 구조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한다 = 관계를 받아들임 
    이름을 믿는다 = 그분의 권위와 정체성을 받아들임  
    믿음 = 관계의 시작

    “이름을 믿는 자”의 특징 (요한일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 
    계명을 지킴
    (특히 서로 사랑함) 
    삶에서 열매가 나타남 
    그래서 요한에게 믿음은 늘 이렇게 흘러  이름 → 믿음 → 순종 → 사랑 → 삶의 변화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이름이 말하는 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이 되도록 허락하는 것
    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죄를 사하여 주시려고 그의 몸을 십자가의 희생의 제물로 바쳤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속죄제물을 위한 희생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의 계명”은 단순한 규칙이나 윤리 조항을 뜻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핵심적인 삶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요한일서 3장 23절에서 이렇게 요약됩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여기서 “그의 계명”은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이 첫 번째 계명입니다. 신앙의 출발점이자 근본입니다. 

    둘째는 서로 사랑하는 것
    믿음은 혼자만의 내면적 고백에 머무르지 않고, 반드시 “사랑”이라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형제자매를 향한 실제적인 사랑이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즉, “그의 계명”은
    믿음과 사랑 — 예수를 믿고, 그 믿음이 서로 사랑하는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분리되지 않으며, 참된 신앙은 반드시 사랑으로 열매 맺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의 계명”은 단순한 규칙이나 도덕적 명령을 넘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방향이며 사랑의 요청입니다.

    특히 요한일서에서는 “그의 계명”이 매우 분명하게 요약됩니다(요한일서 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즉, 하나로 묶으면 두 가지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2. 서로 사랑하는 것

    그래서 “그의 계명”은

    • 하나님을 믿으라는 명령이자

    • 그 믿음을 사랑으로 나타내라는 부르심입니다.

    요한은 또 말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니라.” (요일 5:3)

    왜냐하면 이 계명은 억지로 지켜야 할 짐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생명의 길, 사랑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  1. 계명, 명령.
    • 2. [사람의] 요 11:57.
    • 3. [하나님의] 눅 23:56, 롬 7:8, 고전 14: 37, 엡 6:2, 딤전 6:14, 벧후 2:21.
    •  1.  규정, 규칙, 요구사항, 계명, 눅1:6, 롬2:26, 8:4, [특히 하나님의 요구] δ. τοῦ θεοῦ , 롬1:32, δ. λατρείας: 예배를 위한 규칙, 히9:1.
    • 2.  의로운 행실, 롬5:18, 계15:4, 19:8.
    • 3. 롬5:16은 δικαίωσις와 같은 뜻.
    λόγος, ου, ὁ 3056 [lŏgŏs]
    •  1.  [문맥에 따라 의미 변화] ㉠ 너의 말, 마5:37. ㉡ 설명, 눅20:20. ㉢ 질문, ἐ- ρωτήσω ὑμᾶς λόγον: 내가 네게 물을 것이다, 마21:24. ㉣ 기도, 마26:44, 막14:39. ㉤ 예언, 요2:22, 18:32. ㉥ 명령, 계명, 눅4:36, 벧후3:5,7. ㉦ ...
    • 2. 말하기.
    • 3. [일반용법]
    • 계명, 마15:9, 막7:7, 골2:22.


    계명(誡命)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지켜야 할 명령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계명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이웃과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대표적인 계명은 십계명입니다(출애굽기 20장). 

    1–4계명 :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만 섬기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5–10계명 : 사람과의 관계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예수님은 이 모든 계명을 두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7–39)

    그리고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34)

    즉, 계명의 핵심은 사랑이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계명의 중심입니다.


    계명(誡命)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명령, 가르침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계명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대표적인 계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십계명 – 출애굽기 20장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열 가지 계명으로,

      • 하나님을 향한 계명(1–4계명)

      • 사람과의 관계에 관한 계명(5–10계명)
        으로 나뉩니다.

    2. 예수님의 새 계명 – 요한복음 13:3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모든 계명을 두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라

    •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즉, 계명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계명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500년 전, 소포클레스(Sophocles)는 '안티고네Antigone'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워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있다." 

    구약도 이웃 사랑을 가르쳤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의 대상에 포함하여 사랑의 계념을 훨씬 넓혀 놓으셨다.

    나치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 중에 일세 블루멘탈 바이스(Ilse Blu-menthal-Weiss)라는 여인이 있었다. 
    남편은 독가스로 죽었고 아들 또한 그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런 그녀가 수용소에서 쓴 시이다. "나는 미워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때리고 발로 짓밟습니다. 그러나 나는 미워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돌을 던집니다. 그러나 나는 미워할 수 없습니다. 그냥 슬프게 울 뿐입니다."
    증오를 자제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힘든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보다 더한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 곧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이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은 악에 맞서기를 피한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상인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항하여 싸우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수를 찬양하고 무조건 껴안기를 원치 않으신다. 예수님은 가야바의 목을 끌어안지도 않았고 그의 악한 일에 동참하지도 않았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은, 원수가 자신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깊이 그를 이해해준다는 말이다. 마음속에 있는 증오 때문에 원수는 눈이 먼다. 그러나 당신은 편견 없는 눈으로 원수의 입장이 되어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은, 당신이 자신을 옹호할 때도 원수의 방법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그의 짐을 당신이 지고, 그의 죄를 당신 죄로 여기고, 그것을 씻기 위해 그와 그에게 희생된 이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본을 보여주셨으니,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도 능히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빌2:2)

    평화를 뜻하는 헬라어 '아이레네eirene'는 어원학적으로 '상대방과 다시 이야기하다'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 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화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서로 무의미한 소리만 주고 받는다. 서로의 표정을 보고 그들은 이해했다고 착각한다.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서도 이방인이다. 수십 년 같이 살면서도 서로의 꿈과 생각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서로를 이용한다. 우리는 더 이상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받지도 못한다. 우리는 모두 혼자이다. 평화를 만드는 방법을 모른다.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히 말로 소리만 내는 단계에서 깨닫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말하다'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레다버iedaber'의 참뜻은 다음과 같다. 어근은 '다바르davar'인데, 이는 말, 사물, 실체, 원인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인은 말할 때 단지 단어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교환한다. 히브리인들은 '알다'라는 단어를 성관계를 가리킬 때도 쓴다. 헬라어 '그노시스gnosis'에도 두 가지 의미가 다 있다. 안다는 것은 친밀한 유대관계, 곧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사랑의 결합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의사소통은 단어뿐 아니라 타오르는 가슴으로 나누는 따뜻한 교제로도 이루어진다. 그런 대화라면 어떤 논쟁도 끼어들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가서의 신부는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아1:2)라고 노래한다. 입맞춤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다툴 수 없다.
    형제자매나 동료들과 이런 실제적인 만남을 가져라. 말만 교환하는 대화 말고, 진정으로 녹아 하나가 되는 교제를 하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5:12)는 계명을 이룰 것이다. 예수님은 말로만 사랑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직접 인간이 되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이슬람교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에수님이 나사렛 거리를 걷고 있을 때 사람들이 몰려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큰 소리로 모욕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계속 걸어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누군가가 예수님에게 물었다. 예수님은 대답하셨다. "내가 유일하게 가진 것을 그들에게 줄 뿐이오."
    우유가 가득 찬 병을 깨뜨려 보라. 그 안에 본래 식초가 들어 있지 않았으므로 병을 깬다고 식초가 쏟아질 리 없다. 기독교인의 마음에서 어떻게 증오와 원한에 찬 말이 쏟아져 나올 수 있겠는가? 기독교인은 몇 가지 행동 노선을 정해 놓고 선택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이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까닭은 그리스도께 명령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어떤 사람을 미워하고 싶어도, 하나님이 그 마음을 이미 새롭게 하셨기 때문에 미워하는 방법을 모른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요1:38) 그러자 예수님은 "와서 보라"(요1:39)고 데답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가 그날을 함께 지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있는 어떤 거처로 그들을 데려갈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거처가 없었다. 예수님은 초라한 오두막이든지 화려한 왕궁이든지 사랑이 통치하는 곳에 머무신다. 예수님은 질문하는 자들을 그러한 집으로 데려가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해하고 제자가 되었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요이1:6)

    사람들은 영리하고 맵시 있고 새로워지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래된 진리를 고수하는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면서 여왕에게 현명한 정책을 택하라고 요구하자 참지 못하고 말했다. "나에게 유리한 정책을 제안하지 말고, 어떤 것이 옳은 정책인지 한 번 말씀들 해보시오."
    무신론 공산주의 정부가 기독교인을 핍박하던 나라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스파이 역할을 하면서 교회를 돕기 위해 의도적으로 공산주의 비밀경찰에 자원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들은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어느 날, 그들은 살인 지령을 받았다. 그 명령을 따르면, 비밀경찰로서 지위를 지킬 수 있었고, 다른 끔찍한 일들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리의 이름으로 불복하면, 자신들이 비밀경찰이 된 진짜 이유를 지하교회에 밝히지도 못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처형당할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죽든 말든, 누군가가 그 살인 명령을 집행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그들은 아무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을 것이 뻔했다.
    그렇게 인생은 때로 소름 끼치게 싫은 상황에 뿌리를 내린다. 모든 낱알은 거름 속에 파묻혀야 비로서 싹을 틔운다.
    앞에 놓인 선택의 길이 모두 비극적일 때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전략적으로 유리하거나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야 한다. "살인하지 말지니라."
    니콜라예프에 있는 어느 수용소에서 한 유대인은 다른 유대인 여섯 명을 교수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유대인 여섯 명은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외에는 아무 죄도 없었다. 그가 명령을 따르면 죄 없는 사람 여섯 명이 죽게 될 것이고,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도 포함해서 유대인 일곱 명이 죽고 늙은 어머니들 일곱 명이 슬퍼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불쌍한 노모를 생각하고는 동료 유대인 여섯 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그러나 결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만약 거절했더라면 아무런 후회도 없었을 것이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라.


    내 계명은 곧 네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기독교 역사는 인간의 죄로 많이 훼손되었다. 
    만약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그분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기만 했다면, 기독교 역사는 더없이 아름다웠을 것이다. 
    로마 가톨릭이 이교도를 심문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개신교 신자들도 그에 못지않게 잔인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가톨릭을 따른다고 플런켓 주교를 단죄하고, 죽지 않을 정도로 목을 옭아맨 다음, 다시 끌어내려 살가죽을 벗기고 창자를 꺼내 불태우고, 목숨이 붙어 있는 상태에서 몸을 칼로 4등분했다. 
    피드동위 가톨릭 신자들은 개신교도였던 지오반니 미키알린의 눈앞에서 자녀들을 차례대로 토막 내 죽이면서 한 아이가 숨을 거둘 때마다 신앙을 부인하라고 요구했는데, 마지막 아이의 차례가 돌아와도 그가 끝내 거절하자, 화가 난 군인이 아이의 다리를 낚아채 머리를 박살냈다고 한다.
    크로아티아 공화국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전쟁 중에 정교회 신자 수천 명을 죽였다. 루마니아에서는 정교회 사제들이 복음주의 기독교인을 핍박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가톨릭 사제들이 유대인 대량 학살에 앞장섰던 예들도 많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일러주셨건만, 오늘날 북아일랜드에서는 바로 그렇게 명하신 분의 이름을 앞세워 개신교 신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이 한창 전쟁을 벌이고 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 대한 적의나 원한을 뽑아버리기로 굳게 결심하자. 다시 한번 결심하자, 마지막으로 결심하자, 다른 사람의 종교와 관련, 그 사람 감정을 자극할 만한 말들을 내뱉지 않도록 주의하자, 책임감 없는 사람이 그럼 말을 들으면, 극단적인 경우 살인 같은 성급한 충동을 느낄지도 모른다. 종교적 차이점은 언제나 사랑으로 논의해야 한다. 화합할 수 없어 보이는 차이점을 서로에게 발견하는 경우, 각자 하나님 말씀에 기초하여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가는 것이 좋다. 그러나 언제나 가장 우선시 되는 계명은 사랑이다.


    웃음 십계명

    1. 크게 웃어라 
    크게 웃는 웃음은 최고의 운동법이며 매일 1분동안 웃으면 8일 더 오래 산다. 
    크게 웃을수록 더 큰 자신감을 만들어 준다. 
    
    2. 억지로라도 웃어라 
    병도 무서워서 도망간다. 
    
    3. 일어 나자마자 웃어라 
    아침에 첫 번째 웃는 웃음이 보약중의 보약이다. 
    3대가 건강하게 되며 보약 10첩보다 낫다. 
    
    4. 시간을 정해 놓고 웃어라 
    병원과는 영원히 바이 바이(bye bye)다. 
    
    5. 마음까지 웃어라 
    얼굴 표정보다 마음 표정이 더 중요하다. 
    
    6. 즐거운 생각을 하며 웃어라 
    즐거운 웃음은 즐거운 일을 창조 한다. 
    웃으면 복이 오고, 웃으면 웃을 일이 생긴다. 
    
    7. 함께 웃어라 
    혼자 웃는 것보다 33배 이상 효과가 좋다. 
    
    8. 힘들 때 더 웃어라 
    진정한 웃음은 힘들 때 웃는 것이다. 
    
    9. 한번 웃고, 또 웃어라 
    웃지 않고 하루를 보낸 사람은 그날을 낭비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10. 꿈을 이뤘을 때를 상상하며 웃어라 
    












    1월 23일(금) 요한일서 3:19-2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책망과 담대함(3:18) 


  •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 This then is how we know that we belong to the truth, and how we set our hearts at rest in his presence
  • whenever our hearts condemn us. For God is greater than our hearts, and he knows everything.
  • Dear friends, if our hearts do not condemn us, we have confidence before God
  • and receive from him anything we ask, because we obey his commands and do what pleases him.

    책망(condemn) & 담대함(confidence)

  • 책망(責望) 꾸잦을 책, 바랄 망 / 
    잘못을 꾸짖거나 나무라며 못마땅하게 여김.

    담대(膽大)  쓸개 담, 클 대
    겁(怯)이 없고 배짱이 두둑함.


    책망과 담대함은 성경 안에서 서로 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함께 작동하는 중요한 신앙의 태도입니다.

    1. 책망(責望)

    책망은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깨우침바른 길로 돌이키게 하는 권면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히 12:6)

    참된 책망은

    •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 죄를 깨닫게 하여 회복으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책망은 사랑 없이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2. 담대함(膽大함)

    담대함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떳떳한 마음입니다.

    요한일서 3장 21절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즉, 
    마음이 죄로 인해 우리를 책망하지 않을 때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나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담대해집니다.


    3. 둘의 관계

    • 죄가 있을 때 : 마음의 책망 → 회개로 이끎

    • 회개 후 : 정결한 양심 →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

    그러므로 책망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담대함으로 나아가게 하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책망하시고, 회개한 자에게 담대함으로 그분 앞에 서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책망과 담대함”의 영적 질서입니다.



    책망과 담대함은 신앙 안에서 서로를 세우기 위해 함께 가야 할 두 가지 중요한 태도입니다.

    책망은 상대를 정죄하거나 상처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여 그를 바른 길로 돌이키는 행위입니다. 
    성경은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라고 말하며(요일 2:10), 참된 사랑은 잘못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잠언은 “지혜로운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 9:8)고 말합니다. 즉, 책망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담대함은 두려움에 묶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하고 행하는 용기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사람의 반응이나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말할 수 있는 담대함이 생깁니다.

    결국,  책망은 사랑에서 나와야 하고,
               담대함은 확신에서 나와야 한다. 

    사랑 없는 책망은 상처가 되지만,
    담대함 없는 사랑은 침묵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책망은 온유함으로, 담대함은 사랑으로 균형을 이룰 때, 상대를 살리고 공동체를 세우는 도구가 됩니다. 

    1월 22일(목) 요한일서 3:14-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행함과 진실함으로(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Dear children, let us not love with words or tongue but with actions and in truth.

    사랑에 대한 두 가지 모습은 실천이 없는 사랑과 실천하는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실천이 없는 사랑이란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실천하는 사랑이란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행함이란 사랑의 역동적 모습을 의미합니다.
    진실함이란 사랑의 질적 측면을 의미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말과 혀'는 같은 의미로서 실천이 없는 사랑을 의미한다. 
    이와는 달리 '행함과 진실함'은 실천하는 사랑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한다(Smalley). 
    즉 '행함'은 사랑의 역동적 측면을 나타내고, '진실함'은 사랑의 질적 측면을 나타낸다. 
    요한은 본절에서 사랑의 실천을 선언(약2:15-17)함으로써 이제까지 논해온 것, 즉 하나님에게서 난 자마다 의와 사랑이 있어야 함을 요약하고 있다.

    매슬로우 인간 욕구 5단계 이론(Maslow’s Hierarchy of Needs)

    1.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
    - 음식, 의복, 주거 등 삶 그 자체를 유지하기 위한 욕구

    2. 안전 욕구(Safety Needs)
    - 신체의 위험과 생리적 욕구의 박탈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욕구

    3. 소속과 애정 욕구(Belonging & Love Needs)
    -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

    4. 자기존중 욕구(Self-Esteem Needs)
    - 내적 외적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어떤 지위를 확보하기를 원하는 욕구

    5. 자아실현 욕구(Self-Actualization Needs)
    - 자기발전을 위하여 잠재력을 극대화, 자기의 완성을 바라는 욕구

    사도 요한은 이 구절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단순히 입으로만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에릭 프롬(Erich Fromm)의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은 사랑을 감정이 아니라 배워야 할 기술이자 삶의 태도로 이해한 책입니다. 
    그는 “사랑은 우연히 빠지는 것이 아니라, 훈련과 성숙을 통해 이루어지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프롬이 말하는 사랑의 핵심은 네 가지 요소입니다. 

    1. 관심(Care)
    – 상대의 삶과 성장을 진심으로 돌보는 것 
    2. 책임(Responsibility) – 자발적으로 상대를 책임지는 태도 
    3. 존중(Respect) –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자유를 지켜주는 것 
    4. 이해(Knowledge) – 상대를 깊이 알고자 하는 노력

    그는 사랑을 여러 형태로 구분합니다. 

    1. 형제애 
    : 모든 인간을 향한 보편적 사랑 
    2. 모성애 : 무조건적인 보호와 헌신의 사랑 
    3. 에로스적 사랑 : 한 사람과의 깊은 결합을 추구하는 사랑
    4. 자기애 : 이기심이 아닌,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건강한 사랑 
    5. 하나님 사랑 : 인간의 궁극적 의미를 향한 영적 사랑

    프롬은 현대 사회가 사랑을 “소비의 대상”처럼 여기며, 
    “누가 나를 사랑해 줄까?”
    “어떻게 매력적인 사람이 될까?” 에만 집중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진짜 질문은 “나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을 위해 필요한 훈련으로 훈육, 집중, 인내, 겸손, 용기, 신앙을 제시합니다. 
    사랑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성숙한 인격이 맺는 열매라는 것이 그의 결론입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프롬의 사랑 이해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요일 3:18)는 말씀과도 깊이 공명합니다. 
    사랑은 말이나 느낌이 아니라, 삶 전체로 드러나는 의지적 실천이라는 점에서입니다.

    에릭 프롬(Erich Fromm)의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은 사랑을 감정이나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배워야 할 능력이자 연습이 필요한 기술로 이해한 책입니다. 
    프롬은 현대인이 “사랑받는 법”에는 집착하지만, “사랑하는 법”은 배우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그 핵심 사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랑은 기술이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음악이나 예술처럼

    • 이론을 배우고

    • 훈련하며

    • 인내와 집중을 통해 길러야 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적절한 대상을 만나면 사랑이 저절로 된다”는 생각은 환상이라고 봅니다.

    2. 사랑의 본질 : 주는 것

    프롬에게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란 희생이나 손해가 아니라,

    • 관심

    • 책임

    • 존중

    • 이해
      를 기꺼이 나누는 능력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려 하지 않고, 그 사람의 성장을 기뻐합니다.

    3. 사랑의 네 가지 요소

    모든 참된 사랑에는 네 가지가 포함됩니다.

    1. 관심(Care) – 상대의 삶과 성장에 마음을 쓰는 것

    2. 책임(Responsibility) – 자발적으로 응답하고 돌보려는 태도

    3. 존중(Respect) –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4. 이해(Knowledge) – 피상적이 아닌 깊은 이해

    이 네 가지가 없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나 의존일 뿐입니다.

    4. 사랑의 여러 형태

    프롬은 사랑을 하나의 능력으로 보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 형제애적 사랑 : 모든 인간에 대한 연대감

    • 모성적 사랑 : 무조건적이고 보호적인 사랑

    • 에로스적 사랑 : 한 사람과의 깊은 결합

    • 자기 사랑 : 이기심이 아닌, 자기 존중

    • 신에 대한 사랑 : 궁극적 의미와의 관계

    특히 자기 사랑을 강조하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5.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

    프롬은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을 “상품”처럼 만들고, 사랑마저도 교환과 효율의 논리로 바꾸어 놓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보다 “내가 얼마나 매력적인 상품인가?”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 결과, 사랑은 깊은 만남이 아니라 외로움을 잠시 덮는 도구로 전락합니다. 

    프롬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사랑은 느낌이 아니라 삶의 태도이며, 인격 전체가 참여하는 능력이다.
    사랑은 우연히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배우고 실천하는” 인간의 가장 성숙한 힘입니다.








    사랑의 진정한 의미

    우리는 종종 사랑을 감정이나 느낌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따뜻한 마음을 느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랑을 단순한 감정이 아닌,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일서는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내라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행함 : 사랑은 단순히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돕고, 섬기고, 희생하는 것이 사랑의 표현입니다.

    진실함 : 사랑은 거짓이 아닌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이기적인 목적이나 가식적인 태도로 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의 문제점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은 쉽게 변하고, 진정성이 부족합니다.

    일관성 부족: 감정에 따라 사랑하는 표현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기분이 좋을 때는 친절하게 대하지만, 기분이 나쁠 때는 냉정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겉모습만을 추구: 겉으로는 친절하게 보이지만, 속마음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실제적인 도움 부족: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위해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고, 단지 위로의 말만 건네는 경우가 많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삶

    진정한 사랑은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구체적인 행동 : 이웃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나누고, 봉사하며, 작은 일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진실한 마음 :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의 생각과 태도까지 진실해야 합니다.

    꾸준함 : 사랑은 한 번의 행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삶의 결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삶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 사랑을 나누는 삶은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건강한 공동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건강하고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결론

    요한일서 3:18은 우리에게 사랑의 본질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말로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웃을 돕고, 섬기고, 희생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하루, 말과 혀로만 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의 세 가지 법칙

    서로 사랑하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
    전인적인 사랑

    요한일서에서 구원의 표현

    그 안에 거한다 
    그의 계명을 지킨다 
    하나님의 자녀이다 
    주님을 향하여 소망을 가졌다 
    하나님을 안다 
    의를 행한다 
    그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한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진리가 그 속에 있다 
    빛 가운데 행한다 
    깨끗하다 
    죄를 용서받았다 

    구원받은 사람의 삶의 특징은 사랑하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구원 받으셨습니까?
    구원받은 은혜를 사랑으로 표현하며 살아갑니까?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르지 너희는 구원받았다 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사랑하며 삽니다‘ ’ . .


    요한일서 말씀을 살펴보면 구원에 대한 가지 표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12 . ‘
    안에 거한다 그의 계명을 지킨다 하나님의 자녀이다 주님을 향하여 소망을 가졌다 하’ ‘ ’ ‘ ’ ‘ ’ ‘
    나님을 안다 의를 행한다 그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한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진리가’ ‘ ’ ‘ ’ ‘ ’ ‘
    그 속에 있다 빛 가운데 행한다 깨끗하다 죄를 용서받았다 입니다 이 말씀은 표현만 다’ ‘ ’ ‘ ’ ‘ ’ .
    르지 너희는 구원받았다 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사랑하며 삽니다‘ ’ . .
    사랑의 세 가지 법칙
    사랑에는 세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절 말씀입니다. 11 .
    우리가 서로 사랑할찌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
    사랑의 법칙 첫 번째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사랑은 항상 슬픕니다 짝사랑‘ ’ . .
    도 짝사랑의 도를 넘는 스토커도 슬픕니다 하는 사람도 슬프고 당하는 사람도 슬픕니다, . , .
    사랑의 근본 법칙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관계입니다 사랑은 홀로 독불장군처‘ ’ . .
    럼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이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
    랑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부요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을 주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사랑을 받아야 되고 누구나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건강해집니. .
    다 집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자손녀를 키우면서 건강해집니다 교회는 사랑하면서. , .
    건강해집니다 사랑받는 사람은 받는 사랑만큼 건강해지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는 사랑만큼. ,
    건강해집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너무 교만해서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누군가 선물을 주면 기분 좋게 받으십시오 그렇다고 선물 받을. .
    것을 탐내지 마십시오 그러면 인생이 슬퍼집니다 그러나 선물은 기쁘게 누리시기 바랍니. .
    다 누가 밥을 한 끼 사주면 기분 좋게 드십시오 그래야 밥을 산 사람도 행복합니다. . .
    올해 크리스마스는 베푸는 크리스마스가 되십시오 가진 것이 없다면 웃음으로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또 튼튼한 몸으로 짐을 들어주십시오 재미있게 말하는 재능으로 웃겨주십시. .
    오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남성들이여. .
    자존심을 꺾고 자녀와 아내를 칭찬하십시오 그러면 사랑이 다시 옵니다. .
    요한복음 장 절을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했습니다 하나님13 34 “ ” .
    도 여러분의 사랑을 좋아하십니다 손을 들고 주님밖에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랑을 좋. ‘ ’
    아하십니다 예배는 일방통행 이 아니라 쌍방통행 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주기까지. ‘ ’ ‘ ’ .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는 그 사랑에 눈물겨워 입술로 목소리로 헌금으로 모든 봉사로 주,
    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저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잘못된 가인의 사랑
    하나님과 나와의 아름다운 사랑 나와 다른 사람과의 사랑이 첫째 사랑의 법칙입니다 이, .
    사랑을 잘 설명하는 것이 절 말씀입니다12 .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가인 같이 하지 말라 는 것은 가인은 사랑하지 않았다 는 뜻입니다 가인에 대한 이야기는‘ ’ ‘ ’ .
    창세기 장에 나옵니다 가인은 땅의 열매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인의 동생 아4 . .
    벨도 양의 첫 번째 새끼와 기름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
    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의 행동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
    니다 그리고 아우 아벨이 들에 있을 때 가인은 아벨을 쳐서 죽였습니다. .
    가인이 아벨을 사랑하지 못한 원인이 무엇입니까 첫째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동생과 자기? .
    를 비교했습니다 여러분 피를 나눈 형제는 비교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박. ,
    수쳐주는 대상입니다 가인이 제사를 드렸는데 자기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았다면 비교해서 낙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동생의 제사를 받아주셨다는 것에
    대해 박수를 쳐야 합니다.
    마귀가 주는 가장 무서운 것이 비교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서로 비교하기 시작하면 사랑.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동역자입니다 한 팀입니다 우리는 경쟁상대가 아니라 한 가족이고. . .
    동지입니다.
    둘째 가인은 하나님을 불신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생, . .
    각하셔서 아벨 제사를 받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인데 그 하나님의 판단에 도전했
    습니다 이것이 미움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
    셋째 가인은 악을 실행했습니다 내 동생을 죽이고 싶다 라는 생각이 왔을 때 이 생각을 키. ‘ ’
    웠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악한 생각을 실행했습니다, .
    넷째 가인은 이기적으로 사랑했습니다 디모데전서 장에 보면 경건을 이익에 수단으로 사. 6 ‘
    용한다 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도움이 되면 하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 .
    은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저는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잘못된 비교의식이 사라지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
    사람의 일을 잘되게 하실 때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박수치는 것이 몸에 익어야.
    합니다 비교하지 마십시오 돌이켜 소망을 품으십시오 가인같이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의. . . ,
    판단을 불신하지 말고 악을 실행하지 말고 이기적으로 살지 마십시오, , .
    구원의 증거 사랑‘ ’
    절을 보니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가 있습니다 가인이 악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는12 . .
    악하고 아벨은 의인이기 때문에 아벨을 미워한 것입니다 아벨이 악인이고 자기는 의인이라.
    아벨을 미워한 것이 아닙니다 아벨은 바르고 의롭게 생활을 하는데 자기는 악하기 때문에.
    아벨을 미워한 것입니다.
    절입니다13 .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
    의롭게 사시는 여러분 세상이 당신을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바르게, .
    살고 가슴 뜨겁게 사랑하며 살기로 결정했다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의로운 아벨을 잘못된 가인이 싫어했던 것처럼 의롭게 살기를 원하고 사.
    랑하며 살기를 원하는 당신을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고 싫어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영혼의 주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 .
    니다 듣는 말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과는 다른 말을 듣기 때문에 사람이 당신. .
    을 미워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베풀면서 살기를 원하고 가슴 뜨겁게 사랑하며 살기로. ,
    결정하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웃들과 친척들이 당신을 업신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절대로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법칙은 잘못된 사람이 올, .
    바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똑바르지 못한 것은 자 와 칼 이 오면 싫어합니다 올바르. ‘ ’ ‘ ’ .
    지 못한 사람은 올바른 사람이 나타나면 싫어합니다.
    절 절입니다14 , 15 .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간 자는 사랑하는 자이고 사망에 아직도 거하는 자는 사랑치 않는,
    자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는 말을 우리가 형제를 사. ‘ ’ ‘
    랑하면 그제서야 사망에서 생명으로 구원받는다 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형’ . ‘
    제를 사랑하면 그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삶의 증거가 된다 는 뜻입니다 헬라어의 원’ .
    본을 그대로 번역하면 우리가 사랑하며 살면 그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이다‘ ’
    입니다 사랑하며 사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증거요 구원의 열매입니다. .
    묵숨을 다한 사랑
    두 번째 사랑의 법칙은 절 말씀에 있습니다16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
    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랑의 법칙 두 번째는 목숨을 버리라 입니다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십시오 예수님께‘ ’ . .
    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도 목숨을 버리며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러나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것을 포기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성령님. .
    의 역사가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교회에서 안식월을 주셔서 영국에 잠깐 갔었습니다 거기서 제일 좋았던 것이 면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수염을 길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설교를 하. .
    게 되어 수염을 깎게 되었는데 일주일동안 기른 수염이 정말 아까웠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
    면서 내게 있는 작은 것 내게 있는 명예 자존심 물질 위치를 포기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 , ,
    새삼 느꼈습니다.
    하물며 어찌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성경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고 나의 모든 것을 용납하신 사랑이 가슴깊이 느껴지면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가 내게 임하면 목숨을 버리는 것까지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을 너무 평가절하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서 까, .
    지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 가족을 사랑 할 수 있습니다 돈을 내어 가난한 사. .
    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기심 자존심 체면을 꺾고 말로 사랑할 수 있고 행동으로 사랑. , ,
    할 수 있고 재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소망을 가지십시오. .
    행함 진실이 있는 사랑,
    사랑의 법칙 세 번째는 절 절입니다17 , 18 .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
    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
    함으로 하자.”
    사랑의 법칙 세 번째는 전인적인 사랑 입니다 사랑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입니다 물질로‘ ’ . .
    사랑하십시오 배고픈 외국인 근로자를 위해 지갑을 여십시오 소년 소녀 가장을 위해 지갑. .
    을 터십시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라 는 말은 말과 혀로도 사랑하고 행함과 진실로도 사랑하라는 것‘ ’
    입니다 말로 사랑하는 것은 힘듭니다 사랑해 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힘이 듭니다 처음부. . ‘ ’ .
    터 유창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한 마디가 두 마디 되고 두 마디가 세 마디 됩니다 행함과. , . ‘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 은 성령의 역사로 가능합니다’ .
    서로 사랑한다는 사람 목숨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 전체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 ,
    님은 어떤 복을 주실까요 절부터 절입니다? 19 22 .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우리 마“
    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일까 보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
    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두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담대함 과 기도 입니다 열심히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 ‘ ’ ‘ ’ .
    는 담대함을 얻습니다 평소에 구체적으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
    을 예배할 때 담대합니다 이것은 건방진 것과 조금 다릅니다 담대한 사람은 편안하고 자. . ,
    연스럽습니다.
    그리고 기도응답을 받습니다 평소에 사랑하며 살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기도를 잘 들어.
    주십니다 사랑하지 않고 사는 사람의 기도도 들어주지만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
    보는 사람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십니다 고아원 사역 구제사역 긍휼사역 잘하는 가정의. , ,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십니다 뜨겁게 사랑하고 베풀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
    는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엉뚱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합니.
    다 성령충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하는 비법 응답받는 기도를 하. . ,
    는 비법은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한 기도는 하나님 뜻대로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 ,
    대로 하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끝까지 사랑하십시오
    절과 절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23 24 .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
    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결혼식의 핵심은 식사가 아닙니다 축의를 주는 것도 아닙니다 결혼식의 핵심은 신랑 신부. .
    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식 때 하객을 잘 바라보지 않습니다 신랑 신부를. .
    보며 잘살길 바래 축하해 라고 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출입“ , ” .
    문을 나갈 때까지 축복합니다 그렇게 하니까 믿지 않는 사람까지도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
    이유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주례자의 나이를 초월하고 예식장의 분위기를 초월합니다 예수. , .
    믿는 사람이 열 명 밖에 없어도 주례자가 정말 사랑하는 맘으로 하면 그 예식장이 교회가
    됩니다.
    여러분 사랑이 세상을 녹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면 뚫고 나갈, . .
    방법이 생깁니다 사랑하면 아이디어가 생깁니다 저는 여러분의 가슴이 따뜻하기를 바랍니. .
    다 사랑하며 살다가 사랑하며 죽기를 바랍니다 지갑이 열리고 행동이 열리는 사랑을 하면. .
    서 년을 맞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에 대한 욕구가 있다. 
    인간은 사랑 받지 못하면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 (정신적, 영적 성장을 말함) 하나님은 사랑하라는 소명을 주신다. 이것은 가장 핵심이 되는 인생의 소명이다. 사람 사이에 서로 사랑이 흐르지 못하면,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마치 사망에 거하는 것과 다름없는 상태를 겪게 된다. 그래서 14절,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라고 했다(사망에 다시 빠진다는 말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이 없는 메마르고 핍절한 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는 말).
    <어떻게 사랑 받고 사랑하는가?> 이제 문제는 어떻게 내 안에 사랑을 받고 채워가야 하는가, 또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이다. 하나님의 사랑, 부모 사랑, 친구 사랑을 처음부터 온전히 다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사랑을 받고 행하는 훈련을 거쳐야 점점 더 풍성할 사랑에 이르게 된다.
    [1] 어떻게 내 안에 사랑을 채울 수 있는가?
    예수님은 자신이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다. 이것이 사랑하는 원칙 중의 하나입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내가 받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는 말씀이다. 인간의 취약점은 자기중심성이기 때문에 미숙할수록 자기가 원하는 것은 상대도 원한다는 것을 잘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의 황금률의 말씀 속에서 인간은 모두가 본질적으로 공유하는 “원함”을 먼저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원함의 욕구가 만족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자신 뿐 아니라 누구든지 불쌍히 여겨야 한다. 건강한 자기 사랑이란 자신의 깊은 욕구를 건강하게 살피고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건강한 자기 사랑이다.
    [2] 이제 (내가)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 18절.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 행함으로
    ? 18절. 진정한 행함과 진실함이 따라야 사랑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행함이란 자신의 삶의 행동 양식을 말한다. 내가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도울 때 어떤 스타일로 반응하고 어떤 생각과 자세로 행동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나 말만 가지고는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다. 마음과 말과 더불어 손해를 감수하면서 상대에게 진정한 유익이 끼쳐지도록 행동하는 것이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① 자신이 터득하고 소유한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상대를 대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품어주고 받아주는 힘과 동시에 상대의 성장을 위해서 음으로 양으로 돕는 것이다.
    ② 사랑하는 자는 좋은 감정과 끌리는 느낌에만 머물지 않는다.
    ③ 상대를 잘 되게 하겠다는 명분으로 그를 조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집착일 가능성이 크다.
    ④ 상대에게 지나친 간섭, 불필요한 과잉 칭찬을 하지 않는다.
    ⑤ 사랑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소유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흘러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사랑을 생각해 보라. 그분 안에는 모든 선과 부요함이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선하심과 부요함을 그 분의 동기와 행동에 의해서 인간에게 흘려 보낼 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말한다.)
    따라서 “내 안에 분명히 사랑이 있어”라고 믿기 보다 사랑의 행함을 실제로 실현해 갈 때 비로소 사랑이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사랑이 많다고 한다면 그는 사랑을 많이 행하는 사람이지, 사랑 자체를 많이 소유한 사람은 아니다.
    (2) 진실함으로 영어 성경 대부분에서 truth. = ‘진리 안에서’ ‘진리 안에서 확신과 힘을 얻어’
    무엇이 진짜 사랑인가? 내가 하는 사랑을 확신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진리 안에서이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면,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는 것과 같은 맥락이어야 한다. 배반한 베드로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자기 품 안에 안긴 사도 요한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또 성경에 나온 진실한 사랑의 수 많은 예들을 묵상하면서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확고히 할 수 있다. 진리 안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하면서 내가 하는 사랑 또한 예수님의 사랑을 닮아가는 사랑임을 확신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맺음>
    우리는 영광스러운 형제 사랑의 길로 초청되었다는 사실에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형제의 유익을 위하여 나를 드릴 수 있음은 자신이 구원의 삶을 살고 있다는 새로운 자각을 일으켜 준다. 이것을 하려다가 실패해도 우리의 진심을 알고 존중해 주시는 크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괜찮다(19-20절). 그 분은 우리가 사랑하도록 끝까지 도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나눔의 질문>
    1. 당신의 깊은 내면에 가장 필요로 하는 바램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2. 나의 사랑과 예수님이 행하신 사랑의 공통점을 발견합니까?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깊은 묵상으로 이것을 발견할 수 있도록 나아갑시다.
    3. 내가 사랑하는 것에 실패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도우실까요? 무엇보다 크신 주님께선 나를 존중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실패한 사랑일지라도 주님께 맡기고 신뢰하는 길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까? 진리 안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행함과 진실함으로”라는 말은 요한일서 3장 18절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 말씀의 뜻은,
    사랑이 단지 말로만, 감정이나 표현으로만 끝나서는 안 되고,
    실제 삶 속에서 드러나는 행동과 진심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 행함: 실제로 돕고, 나누고, 섬기는 구체적인 행동

    • 진실함: 위선이나 형식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동기

    즉,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는 것은
    겉으로만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을 보고 손을 내밀며,
    억지나 체면이 아니라 진심으로 대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본질이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을 삶으로 살아내라는 초대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라는 표현은 요한일서 3장 18절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랑이 말이나 감정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과 진실한 마음으로 나타나야 함을 뜻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3:18)

    여기서

    • 행함은 실제로 돕고, 나누고, 섬기는 구체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 진실함은 위선이나 형식이 아닌, 참된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즉, 참된 사랑은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필요한 이웃을 돕고, 아픔을 함께 짊어지며,
    희생을 감수하는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말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되는 사랑이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1월 21일(수) 요한일서 3: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3: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Do not be surprised, my brothers, if the world hates you.

    충돌(衝突)이란 한자는 "찌를 충" "갑자기 돌"이란 훈(訓)으로 "서로 맞부딪치거나 맞섬"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가치관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은 미움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사랑과 미움이란 두 개의 가치관이 서로 부딪치면 자기의 영역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혈투를 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결과는 미움이 사랑의 울타리안에서 완전히 부숴지고 녹아져서 사랑으로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돌이란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일시적인 현상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미움을 집어 삼킬 때까지 사랑으로 적극 공세를 펼쳐야 합니다.

    어떻게 적극적으로 공격을 가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기도하라(시편 109:4)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59-60).

    둘째는 선으로 공격하라(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공격의 두 가지 방법은 철통같은 수비(守備)와 억척같은 공격(攻擊)이라고 하겠습니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던 요셉은 총리가 된 후에 큰 가뭄으로 인하여 식량을 구하러 왔던 형제들에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세기 45:5. 7).  
     
    셋째는 악을 버려라(데살로니가전서 5: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 새한글 성경에서는 '악을 멀리하라'고 강조합니다.

  •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인 형 가인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깨우쳤습니다(창세기 4:7).

    악을 버리려면 악을 다스릴 수 있는 더 강한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 힘을 양동작전이라고 하겠습니다.
    양동작전이란 다른 말로 양면작전이라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강한 힘으로 몰아부치며 다른 한편으로는 너그럽게 타이르며 흥분된 상태를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모진 고통은 육신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감당하려면 울부짖는 기도의 밤과 묵묵히 십자가를 짊어지고 걷는 인내의 낮이 서로 화합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일컬러 성도들의 인내와 예수를 믿는 믿음이라고 합니다(계 13:10, 14:12).

  • 좌편향된 세력들과 이들의 횡포를 막으려는 우편향의 힘이 일시적으로 충동을 일으며 마치 세상이 곧 무너질 것같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체는 악이 아니라 선이기 때문에 반드시 회복의 그 날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그 회복의 날을 소망하며 세상이 던지는 미움과 분노와 격동의 화살을 믿음의 방패로 막아내고 일어납시다.

    오 주님
    자유대한민국을 주님의 품에 품어주옵소서



  • 움직이는 두 물체(物體)가 접촉(接觸)하여 짧은 시간(時間) 내에 서로 힘을 미침. 또는 그런 현상(現象).

  • 긴급속보

    교회폐지법을 발의한 21대 민주당 국회 의원 78명과 무소속 1명, 79명 의원 명단입니다. 
    현재 한국에 있는 교회를 폐지하자는 발의를 하자, 교회를 폐지하자는 사람이 국회의원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 폐지하고자 하는 민주당 국회의원 명단과  전화 번호입니다.

    김성주   
    02-784-5031
    이상헌 
    02-784-8630
    홍성국
    02-784-2820
    조승래, 
    02-784-2648
    강선우
    02-6788-6031
    이용빈
    02-784-4291
    신영대
    02-784-1524
    서동용    
    .............
    임호선
    02-784-1730
    최종윤
    02-784-6201
    윤준병
    02-784-1860
    이탄희
    02-784-8940
    허종식
    02-784-8870
    정춘숙
    02-784-3740
    이학영
    02-784-8051
    송재호   
    ............
    이형석
    02-784-1307
    오영관
    02-788-6766
    전용기 
    02-784-2843
    김민철
    02-784-5031
    이재정 
    02-784-2677
    고영인
    02-784-5490
    서영석
    02-784-9671
    홍정민  
    ...........
    이해식
    02-784-2171
    이규민
    02-784-3770
    박영순
    02-784-2066
    윤후덕
    02-788-2587
    전용기
    02-784-2843
    한준호
    02-784-9160
    김남국
    02-784-2455
    이원욱
    02-784-6471
    임오경
    02-784-6396
    정청래  
    ..............
    최종윤
    02-784-6201
    박용진
    02-784-9721
    고영인
    02-784-5490
    신용대
    02-784-1524
    김윤덕  
    ..................
    강준현
    02-784-6950
    민형배
    02-6788-6426
    한병도
    02-784-5891
    이장섭
    02-784-4441
    서삼석
    02-784-9501
    김성주
    02-784-7380
    설   훈
    02-784-8570
    오영환
    02-788-6766
    김민철
    02-784-5031
    김종민
    02-784-5920
    이수진  
    ................
    이성만
    02-784-6090
    윤재갑
    02-784-1460
    박홍근
    02-784-8370

    꼭기억,저장하셔서 다음 국회의원 선거
    제거하여야 합니다.

    교회를 폐기하고 싶은 자들은 무슬림, 공산주의자, 힌두교 등등입니다. 
    특히 이 땅에서는 세계를 공산화시키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교회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저렇게 입법기관인 국회까지 진출했으니 정신 바짝 차리고 깨어 거리로 나와 싸워야 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요한복음 15장 18절에 나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이 말씀의 뜻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관과 다른 길을 걷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이나 거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미움은 제자들 개인 때문이 아니라, 먼저 예수님을 미워한 세상이 그분께 속한 자들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위로하십니다.

    • 너희가 미움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 그것은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나에게 속해 있다는 증거다.

    • 나도 먼저 그 길을 걸었다.

    이 말씀은 신자들에게 고난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동시에, 정체성을 확증해 줍니다.
    세상이 미워해도 낙심하지 말라. 
    너희는 이미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경고이자 위로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5:18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이 말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진리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에

    •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과 가치관이 세상과 충돌하게 됩니다.

    •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의롭게 살고, 진리를 말하며, 사랑으로 행할 때 오히려 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정상적인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미움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예수께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13에서도 사도 요한은 같은 맥락으로 말합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즉,

    • 세상의 미움은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고,

    • 그 속에서도 우리는 미움으로 맞서지 않고 사랑으로 행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이 미워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이 말씀의 핵심 위로입니다.



    가시 면류관에 담긴 사랑

    그리스도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초자연적 능력을 일신의 안위를 위해 사용치 않으셨다. 
    예수님은 눈썹 한 번 치켜 올리시면 가시 면류관을 엮는 군병의 손을 마비시킬 수 있으셨지만 그러지 않으셨다. 
    놀랍다. 하지만 이것이 그분이 오셔서 행하신 사건 중에 가장 놀라운 부분일까? 
    별들로 구슬치기를 하시던 분이 자신의 무한성을 포기하신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성육신의 가장 멋있는 부분을 알고 싶은가?
    예수님과 가장 가깝다는 친구들이 그분을 배반하고 달아날 때도 그분이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으셨다는 사실 아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남녀 죄인들의 온갖 죄를 대신 뒤집어쓰시면서도 주님은 자기 변호를 거부하셨다. 
    그러나 그것도 가장 놀랄 만한 사실은 아니다. 
    천국의 법정에 무수한 유죄 판결이 울려 퍼지고 빛의 창조자가 죄인들이 가득한 밤의 냉기 속에 버려졌을 때도 여전히 침묵을 지키셨다. 그러나 이것 역시 아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무덤에서 사흘을 보내신 후 환한 웃음으로 부활의 아침 햇살 속으로 당당히 걸어 나오시며, 초라한 루시퍼에게 “그것이 제일 센 주먹이더냐?”라고 물으셨다. 
    그러나 심지어 그 부분도 아니다. 
    이러한 것들도 멋있다. 
    말할 수 없이 멋있다. 
    그러나 천국의 면류관을 버리고 가시 면류관을 쓰신 그분의 가장 멋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그것은 바로 당신을 위해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바로 당신을 위해.

    -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 맥스 루케이도






    1월 20일(화) 요한일서 3:11-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서로 사랑하라(3:11)


  • 우리가 서로 사랑할찌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 This is the message you heard from the beginning: We should love one another.
  • Do not be like Cain, who belonged to the evil one and murdered his brother. And why did he murder him? Because his own actions were evil and his brother's were righteous

  • 요한일서(1 John)가 기록된 시기는 일반적으로 주후 85년경에서 95년경, 즉 1세기 말로 봅니다.

    이 연대가 추정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일서는 요한복음과 신학적 표현이 매우 유사합니다.
    요한복음이 주후 80~9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요한일서도 비슷한 시기에 쓰였다고 봅니다.
    초대 교회 전승에 따르면 사도 요한은 말년에 에베소를 중심으로 소아시아 교회들을 돌보던 말년의 사역 시기에 이 편지를 썼다고 이해합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된 이후, 교회 안에 퍼진 거짓 가르침(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사상)에 대응하기 위해 쓰였다는 점에서, 비교적 늦은 시기의 문서로 평가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초대교회가 이미 어느 정도 성장한 이후,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어떻게 구별되는지 
    사랑과 진리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기록된 1세기 말의 권면서로 이해됩니다.


    • 서신의 내용은 이미 교회가 어느 정도 조직화된 상태이며, 초기 이단(특히 영지주의적 사상)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1세기 후반 상황과 잘 맞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요한일서를 주후 85–95년경, 에베소 근처에서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유력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께서 주신 가장 핵심적인 계명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의 특징은 단순한 인간적인 호감이나 감정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처럼 사랑하라는 데 있습니다.

    그 사랑은

    1.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
    2. 용서하는 사랑
    3. 희생하는 사랑
    4. 상대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랑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내가 편할 때만, 마음에 들 때만 사랑하라”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서로를 살리고 세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통해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고 하셨습니다.
    즉,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지가 됩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는 성경 요한일서 3장 12절에 나오는 말씀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자기 아우를 죽였으니…” (요일 3:12)

    여기서 “가인같이 하지 말라”는 의미는 단순히 살인을 하지 말라는 차원을 넘어서

    1. 시기와 미움에 사로잡히지 말라
    2.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마음을 품지 말라(거역)
    3. 의로운 자를 미워하거나 해치지 말라
    4. 형제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라 는 경고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의롭게 행한 아벨을 미워했고, 그 미움이 결국 살인으로 이어졌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악한 자에게 속한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가인같이 하지 말라”는 말은
    미움, 시기, 분노로 행동하는 삶을 버리고,
    사랑과 의로움으로 형제를 대하라는 영적 권면입니다.


    마귀의 유래

    성경에서 말하는 마귀(사탄)의 유래는,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사였으나 교만으로 인해 타락한 존재로 설명됩니다. 

    1. 빛의 천사

    사탄은 처음부터 악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사야 14장과 에스겔 28장은 직접적으로 “사탄”이라는 이름을 쓰지는 않지만, 전통적으로 타락한 존재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사 14:12)

    이 말씀은 “빛나는 자(계명성)”였던 존재가 하늘에서 떨어졌음을 묘사합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에 찍혔는고.
    How you have fallen from heaven, O morning star, son of the dawn! You have been cast down to the earth, you who once laid low the nations.

    KJV.  / How art thou fallen from heaven, O Lucifer, son of the morning! how art thou cut down to the ground, which didst weaken the nations.

    계명성(morning star.  Lucifer 

    2. 타락의 이유 – 교만

    사탄은 자신의 지위와 영광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에 빠졌습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사 14:13–14)

    이 교만이 죄의 시작이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를 쫓아내셨습니다.

    3. 사탄이 된 존재

    타락한 이후, 그는 
    “사탄”(대적자)
    “마귀”(중상하는 자)
    “옛 뱀”(계 12:9) 이라 불리며, 하나님과 사람을 대적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계 12:9)

    4. 현재의 역할 

    마귀는 사람을 속이고 죄로 이끌며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로 활동합니다.  
    그러나 그는 창조주가 아니며,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도 아닙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의 권세는 결정적으로 패배하였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멸망할 것이 성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계 20:10).

    마귀의 유래는 “창조된 천사 → 교만 → 타락 → 하나님과 인간을 대적하는 존재” 라는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성경에서 “마귀(사탄)”의 유래는 한 존재가 처음부터 악하게 창조되었다기보다, 원래는 하나님께 지음 받은 영적 존재가 타락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성경의 여러 본문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흐름으로 설명됩니다.

    1. 원래는 천사
      마귀는 처음부터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적 존재, 곧 천사였다고 봅니다.
      이사야 14장, 에스겔 28장의 말씀은 직접적으로 “사탄”이라고 명시하지는 않지만, 교회 전통에서는 교만으로 인해 타락한 존재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본문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2. 교만으로 인한 타락
      그는 자기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사 14:13)
      와 같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이 교만이 죄의 시작이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 “사탄(대적자)”이 되었습니다.

    3. 사탄, 마귀라는 이름의 의미

    • 사탄(Satan) : “대적자, 고소자”

    • 마귀(Diabolos) : “중상하는 자, 분열시키는 자”

    즉, 그의 본질은 하나님과 사람을 대적하고, 거짓으로 분열시키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1. 인간 타락과의 연결
      창세기 3장에서 뱀의 모습으로 나타나 하와를 속인 존재가 바로 이 사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귀를

    •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는 자”(요 8:44)

    • “온 세상을 미혹하는 자”(계 12:9)
      라고 설명합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창조된 영적 존재였으나, 
    교만으로 인해 타락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가 된 자



    1월 19일(월) 요한일서 3: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귀의 자녀(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This is how we know who the children of God are and who the children of the devil are: Anyone who does not do what is right is not a child of God; nor is anyone who does not love his brother.

    마귀의 자녀(he children of the devil)는 혈통(血統)이나 외형(外形)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의 자녀란 마귀의 성품과 마귀의 일을 따르는 영적 상태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마귀의 자녀의 특징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죄를 즐기며 살아간다.

    마귀의 자녀는 양심에 화인을 맞았기 때문에 죄를 끊지 못하고 계속 즐기며 살아갑니다.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보다 자기 합리화를 좋아합니다.

    둘째는 진리를 거부합니다.

    마귀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과 욕망과 세상의 논리를 따라갈 뿐만 아니라 거짓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셋째는 사랑이 없습니다. 

    마귀의 자녀는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하며, 정죄하기를 좋아합니다.
    따라서 자기중심적이고 관계를 파괴합니다.
    심지어 마귀의 자녀의 대표적인 존재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여” 형제를 죽였습니다(요일 3:12).

    넷째는 마귀의 일을 행합니다. 

    마귀의 자녀는 분열, 미움, 거짓, 파괴, 교만을 즐깁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는 상처를 주고 무너트리고 파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라고 깨우치셨습니다(요 8:44).

    결론적으로 마귀의 자녀란 마귀의 성품 즉 거짓, 미움, 죄를 따라 살아가며 그 일을 드러내는 사람을 말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씨 즉 말씀과 생명을 받아 의와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원수 사탄 마귀는 일시적 또는 제한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마귀의 공격을 막아내야 합니다.

    오늘도 원수 사탄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하늘의 은혜를 사모하며 천성을 향하여 담대하게 앞으로 나가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요한복음 8:31~47)

    하나님의 자녀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사람, 곧 하나님의 씨(말씀과 성령)로 거듭난 자를 말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1:12–13)

    하나님의 자녀의 핵심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육적인 출생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난’ 존재입니다(요 3:3–6).

    2.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거함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요한일서 3:9)

    3. 의(義)를 행함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일 2:29)

    4. 형제를 사랑함
      하나님의 자녀는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나타납니다(요일 3:10–14).

    즉, 하나님의 자녀란
    단순히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
    그 안에 하나님의 씨가 있어 의와 사랑이 삶으로 나타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31~40절)

    진리로 자유함을 얻은 자(31~32, 36절)

    30절에 예수의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이 믿더라." 믿더라(pisteuvw)는 동작의 시작을 의미하는 부정과거로 한 신앙의 경지에 이른 상태가 아니라, 31절에 "예수께서 자신을 믿은 유대인들에게." 역시 마찬가지 부류의 사람들이다.

    자기를 믿은(believed Him)이라는 말은 단순한 신앙을 가진 다수의 무리들을 뜻한다. 예수 주변에는 언제나 두 종류의 믿음의 소유자들이 있었다. 다수의 (believed Him), 그리고 소수의 (believed in Him).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특히 강조한 믿음은 후자의 경우이며 애용어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다수의 신앙인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예수님을 떠날 자들이다. 실제로 그랬다. 그러나 예수와의 인격적 관계를 가진 소수만이 예수님을 믿었고 기독교의 맥을 유지해 왔다. 오늘도 마찬가지라 본다. 믿는 사람이 숫자적으로 많은 것 같아도 십자가의 자리까지 갈 수 있는 진짜 예수꾼은 얼마나 될 것인가?

    어쨌든 예수께서는 자기를 믿은 유대인을 향하여 31절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믿는 구체적 행동은 예수의 말씀에 거해야 한다. 이것은 사도 요한의 특징적 용어인데 일시적, 감정적이 아니고 그리스도안에 내재함으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되어야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 진리를 통해 참 자유함을 얻게 된다고 했다.

    세상에는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주장하는 진리들이 있다. 과학, 철학, 종교 등 각기 진리가 있어 진리를 알 때 무지에서 해방되나 죄로부터 자유를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자유에도 정치적, 사상적, 언론적인 자유가 있지만 이것 역시 죄에서 자유가 없는 한 온전한 것이 못 된다. 진정한 자유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로부터 영적 자유를 얻을 때이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33~40절)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민족으로(창 22:17: 갈 4:22~23)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큰 소리 쳤지만 실은 역사적으로 애굽, 앗수르, 바벨론, 바사, 헬라 등의 지배를 받아왔으며, 예수님 당시에도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물론 몰라서가 아니고, 정치적인 속박은 받고 있으나 종교적으로 자유 하다고 자부심이 있었고 언젠가는 메시아가 나타나 진정한 자유를 줄 것이라고 소망하며 믿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육신적, 혈통적인 것만을 가지고 교만을 떠는 저들을 향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거늘." 즉 아브라함처럼 살아야 되지 않느냐고 하셨다. 아브라함의 행사는 창세기 12~22장까지 보면 그는 믿음의 조상답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자였다.

    그런데 아브라함처럼 살지 않고, 그런 믿음은 눈꼽 만큼도 찾아볼 수 없고 40절 지금 너희는 나를 죽이려 하는 도다. 34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요, 나를 죽이려 하니 마귀의 자녀일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마귀의 자녀(41~47절)

    1) 말씀을 믿지 않음(41~43절)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민족이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므로 놀라운 축복의 선언이 있었는데, 창세기 22:16~18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의 복을 얻으리니"

    이상의 말씀으로 볼 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으로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선민의식이라는 종교적 자존심이 진리를 곡해하게 되었고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원인이 되었다.

    유대인들 스스로는 우상 숭배도 아니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겼다고는 하지만 40절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 도다. 여기서 아비는 44절의 마귀를 가리키며 유대인 들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라 주장하지만 진리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 함으로(40절) 실상은 마귀의 자녀라는 것이다.

    이어서 42절 "하나님의 너희 아버지였으면 나를 사랑하였을 것이나." 43절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유대인들의 우둔함과 심령의 완악함을 직설적으로 책망하신 말씀이다. 이미 여러 차례 예수는 자신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임을 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3:17; 7:16, 28) 심령이 완고하므로 예수의 말씀을 계속 듣고서도 깨닫지도 못 하였으니 영적 귀머거리가 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영적 소경이 된다(요일 1:11).

    2) 진리를 믿지 않음(44~47절)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많은 표적으로 신적 능력을 나타내 보이시고 또한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깨닫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는 것은 44절에 마귀에 게서 났고, 너희 아비 마귀의 욕심을 따라 행하므로 거짓말 장이요, 살인자로 살고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말씀의 절정으로 너희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녀라 하지만 예수께서 보실 때 마귀의 자녀임을 선포하셨다.

    어느 시대나 어느 곳에서나 마귀의 자녀들은 진리를 믿지 않고(45~46절) 마귀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 마련이다. 본문에서 마귀들의 특징을 두 가지로 말했다.

    ① 거짓말쟁이라고 했다. 창세기 3:4~5에 뱀이 등장하는데 들짐승 중 가장 간교하며 하와에게 접근하여 달콤한 말로 속임수를 써서 넘어가게 했다. 44절 하 "거짓을 말할 때 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SV: he speaks according to his own nature). 제 본성에 따라 말한다고 했다. 거짓말하는 중요한 이유가 본성이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본성이 참 중요하다. 공동번역에서는 본 절을 "그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고로 번역했다. 말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인격, 본성을 알 수 있다.

    ② 살인자가 된다. 창세기 4: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시기심이 미움으로 변하고 결국은 살인행위를 하게 되었다. 마귀 자녀의 표본이다. 로마서 7:8.11 "내 속에 각양 탐심을 이루고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마귀는 아담을 꾀어 사망으로 인도할 뿐 아니라 마침내는 무죄한 예수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는 살인죄를 범하였다 (마 26:59~27:2).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처하는 유대인을 향하여 아브라함처럼 살아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얻어야 된다고 하셨다. 그러나 실상은 진리를 믿지 않고 배척할 뿐 아니라 거짓말쟁이가 되고 살인자들이므로 마귀의 자녀라고 말씀하셨다. 결국은 59절에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10:31~33에도).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마귀의 자녀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네들은 예수님을 누구보다 더 잘 믿는다고 했는데 예수께서는 그들을 마귀의 자녀라고 선고했다.

    오늘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누구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으며,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면 마귀의 자녀로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세계 인구의 수가 대략 82억 명
    성경이 팔린 권 수 대략 70억 권
    성경에서 예수를 만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책이 팔린 수와 세계 인구 수의 비율에 의하면 70억명이 예수를 만나야 할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읽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깨닫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왜 성경을 깨닫는 것이 어렵다고 할까요?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니면 마귀의 자녀인가? 
    검사 기준

    1. 죄를 짓는다(요한일서 3:4-6)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마귀의 자녀인지를 구분하는 검사 기준은 바로 죄다. 
    4절에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4절)

    “자마다”라는 표현은 “누구든지” 이 검사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걸 말한다(“누구든지 죄를 짓는 사람은”, 우리말 성경). 
    죄(하마르티아)는 ‘표적을 벗어난 것’을 가리키는데,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 미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롬 3:23). 
    무엇이든지 생각으로나 마음으로나 행위로나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하신 것을 추구하거나,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하신 것을 추구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다.

    요한이 여기서 죄를 “불법”이라 정의한 것에 주목하라. 
    불법은 기본적으로 법을 어기는 것을 말한다(70인역 200번 이상 등장). 
    불법은 원어로 아노미아인데, 여기에서 무질서를 가리키는 아노미 현상이 나왔다. 
    그러므로 요한이 말한 불법은 단순히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법 자체를 거부하는 무법, 그래서 무질서와 혼란으로 빠지는 걸 의미한다. 법과 그 법의 제정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반항심이 죄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거부하고 무질서와 혼돈 상태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바울은 로마서 1장에 잘 묘사하고 있다. 
    죄는 단순히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연약함, 부족함, 실수도 아니다. 
    과거의 나쁜 습관을 반복한 것도 아니다. 
    죄는 하나님과 그분의 법에 대한 적극적 반역이다.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죄를 짓는 자 곧 죄인이다(롬 3:23).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그를 믿는 자의 죄를 없애셨고 그들의 신분을 바꿔주셨다(5-6절).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5절)

    “그”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에게는 죄가 없으시다. 강력한 표현으로 단순히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게 아니라 죄 자체가 그 안에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라고 소개한다(고후 5:21). 예수님 가까이에서 동행한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다고 증언했다(벧전 2:22).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 곧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이유는 우리 죄를 없애려고 이다. 요한의 독자는 이 사실을 알았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린 천사는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명하면서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라고 예언했고(마 1:21). 아버지 뜻대로 그 일을 하시려고 세례 요한에게 나왔을 때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불렀다(요 1:29). 

    구약시대 죄인의 죗값을 대신 치르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흠 없는 희생양이 죽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보배로운 피를 흘려 그를 믿는 자의 죗값을 모두 치르셨고(벧전 1:19)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가져온 화목 제물이 되셨다(요일 2:2).

    그 결과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죄가 조금도 없으신 예수님을 믿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가 되었다(새 신분).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는 죄에 마땅히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옳은가?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6절)

    “자마다”, 누구든지 예외 없이 예수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하지 아니한다. 이것이 요한이 세운 검사 기준이다. 요한이 얼마나 단호하게 말하는지 주목하라.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다(고후 4:6). 그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요 17:3). 하나님 안에 거하며 믿는 날부터 영원히, 거룩하신(죄 없으신) 하나님과 사귐을 이 땅과 천국에서 누린다. 그런데 누구든지 범죄하는 자는 그분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 영광을 본적도 없고, 인격적 앎을 얻은 적도 없다. 기준은 아주 명확하다. 9절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 이 기준을 어떻게 적용할까?

    2. 검사 적용 : 죄와 싸운다(7-10)

    많은 그리스도인이 사도 요한의 이 검사 기준 앞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내적 갈등, 죄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현실과 너무 거리감이 있는 기준이기 때문이다(롬 7:18-25). 그래서 역사적으로 요한의 이 기준은 다양한 방식으로 왜곡되어 적용됐다.

    1) 살인처럼 극악한 죄만 해당(가톨릭: 대죄, 소죄) –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도 간음, 지옥 형벌(마 5:28)

    2) 신자는 하나님 보실 때 무죄 – 죄를 자백하라고 요구(요일 1:9), 형제가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요일 5:16)

    3) 신자의 옛 본성이 죄를 짓는 것이지 새 본성은 범죄하지 않는다 – 옛 본성에 따라 죄를 행한 주체는 결국 나

    4) 요한의 이상적인 기대 – 본문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5) 그리스도 안에 살면 짓지 않는다(조건) – 들락거리는 관계?

    6) 의지적, 고의적 죄만 해당 – 모든 죄가 의지적, 고의적이다

    위의 적용법들은 결과적으로 모두 어떤 형태로든 죄를 간과하고 허용한다. 계속 저 기준을 적용하며 살면 방종하게 된다.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쓴 당시에도 그리스도인이 육으로 짓는 죄를 간과하고 방종으로 이끄는 거짓 교사, 적그리스도들이 많이 교회 안팎에 존재했다. 요한은 분명한 기준을 세워 놓고 그들의 거짓에 속지 말라고 경고했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7절)

    편지의 독자는 분명 하나님의 “자녀들”이었다(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요일 5:13). 요한은 경계하면서 아무도 그들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기준을 제대로 적용하라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온갖 핑계와 변명을 대며 어떻게든 삶 속에 존재하는 죄를 당연하게 여기려 한다.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죄가 양립할 수 있다고 정당화한다. 세상과 마귀도 깨끗한 물에 고기가 살 수 없다며 적당히 혼탁함을 유지하라고 부추긴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죄를 미워하고 죄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그것이 요한이 말한 기준을 제대로 적용하는 방식이다.

    4-10절까지 요한이 말한 ‘범죄’는 지속적, 습관적 죄를 가리킨다(4, 6, 8, 9, 현재형, “practice of sinning”, “keep on sinning”, ESV). 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계속해서 범하는 것이다. 이런 죄에 대한 태도는 굉장히 위험하다. 바로 그것이 궁극적으로 내가 범죄하는 자 곧 마귀의 자녀라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도 죄를 지을 수 있다. 하지만 지속적, 반복적으로 죄를 즐길 수는 없다. 죄를 지을 때 자백하여 용서를 받고 깨끗하게 하시는 은혜의 능력으로 계속해서 죄와 싸우는 것이 하나님 자녀의 삶이다(요일 1:9). 죄와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여 싸우는 삶(히 12:4),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삶(골 3:5).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삶(롬 8:13).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롬 6:13). 그것이 요한의 기준을 제대로 적용한 하나님 자녀의 마땅한 삶이다.

    톰 라이트는 이를 피아노 연주에 빗대어 설명했다. “우리는 가끔 손가락이 미끄러져 틀린 음을 치거나, 우리가 예전에 연주했던 음악에 나오는 음들을 치게 된다 해도, 그것이 우리가 다시 돌아가 그 옛날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210-11pp). 

    우리 삶은 하나님께 바치는 예배 찬양이지, 마귀에게 헌납하는 악한 노래가 아니다. 실수하고 넘어질 때가 분명 있고 옛사람의 습관대로 음 이탈을 할 때도 있지만,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 노래를 삶으로 연주하고 있다. 지속적이고 습관적으로 죄를 용납하는 사람은 그런 삶을 지속할수록 점점 더 마귀를 찬양하는 삶을 산다는 걸 드러내는 것이다. 7절에서 10절까지 요한이 기준을 바르게 적용한 결과를 명확하게 설명한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7-8절)

    한 주석가는 7-10절까지의 내용을 한 마디로 “아버지가 누구냐?”로 요약했다. 의를 행하는 자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의로우신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그는 아버지가 의로우심과 같이 의를 행한다. 죄를 짓는 자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마귀다. 마귀는 처음부터(태초) 하나님께 반역하고 그분의 뜻에 반항하여 죄를 범했다. 사람을(아담/하와) 미혹하여 하나님께 반역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마귀의 자녀는 아비 마귀에게 속하여 죄를 짓는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가 죄와 싸우는 것은 오롯이 그들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께서 자녀 안에 창조하신 새로운 성품으로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8-9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 곧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다. 마귀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항하며 살다가 영원히 지옥에서 멸망하게 만든다. 평생 죄에 종노릇 하며 살다가 영원히 벌 받게 하는 일이 마귀의 사역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사역을 파괴하셨다. 그를 믿는 자를 죄에서 해방하셔서 더 이상 죄에 종노릇 하지 않고 의롭게 살 수 있도록 구원하신 것이 예수님의 공로다(롬 6:6; 히 2:14-15).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된다(위로부터 난 자, 거듭난 자). 그들은 요한의 기준을 바르게 적용하여 죄와 치열하게 싸우며 죄를 반대하는 삶을 산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는 이후의 설명을 보라.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씨는 성령, 말씀, 진리, 성품 등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태어난 상태, 새 사람을 가리킨다. 이는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이고, 말씀의 진리가 심어졌을 때 새롭게 생겨난 성품이기도 하다.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확실한 증거가 우리 안에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제 죄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한다. 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없애야 할 것으로 여긴다. 죄와 공존하지 않고 언제든 죄를 범하면 자백하여 하나님의 용서와 깨끗하게 하심을 통해 해결한다(요일 1:9). 죄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니 우리도 미워한다. 예수님께서 죄를 없애기 위해 죽으셨으니 우리도 죄를 없애기 원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가 죄를 보는 것처럼 죄를 보고, 아버지가 우리 죄를 벗겨내고 의를 입게 하시는 은혜로운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10절)

    결론적으로 요한은 독자가 둘 중 하나로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거나 마귀의 자녀들이거나.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죄를 용납하는 삶, 죄와 싸우지 않고 허용하는 삶, 나아가 10절에 말하는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삶, 그 구체적인 적용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삶이 관철된 사람, 삶의 특징으로 규정되는 사람은 마귀의 자녀가 분명하다. 

    3. 적용

    참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죄를 없애려고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희생의 상처가 그분의 손바닥에 새겨진 것을 끊임없이 바라보면서 어떻게 죄를 즐길 수 있겠는가? 아버지 하나님의 어떠한 사랑을 받아 자녀가 되었는지 지속해서 바라보는 자는 거룩하신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면서 동시에 죄를 그 교제권 속에 포함할 수 없다. 발견되는 즉시 자백하고 제거한다. 몇 가지 실질적인 적용을 제시하기 원한다.

    첫째, 즉시 자백하라. 
    당신이 쉽게 범하는 죄, 성적인 죄, 분노, 악한 말 등 죄지었음을 깨닫는 순간 즉각 하나님 앞에 회개하라. 또한 그 죄의 영향을 받은 사람에게도 용서를 빌라. 죄를 묵혀두지 말고 바로 자백하여 용서와 깨끗게 하시는 은혜를 받아라.

    둘째, 항상 경계하라. 
    당신의 삶 속에 스며들어 있는 작은 죄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민감하게 살피고 경계하라. 당신을 잘 아는 이에게 회개할 죄가 있는지 묻고, 하나님께 기도로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셋째, 말씀과 기도로 죄를 물리쳐라. 
    악한 마귀를 공격하는 무기는 성령의 검 곧 말씀이다. 
    기도는 전장에서 지원을 요청하는 필수 도구이다(엡 6:17-18). 말씀의 예리한 검으로 당신 삶을 판단하고 사탄의 거짓을 분별하며, 기도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라. 필요한 경우 가까운 성도에게 특정 죄와 싸움을 알리고 기도 요청을 하라. 특정 죄 관련 서적을 참고하는 것도 좋다.


    마귀의 자녀

    성경에서 말하는 “마귀의 자녀”는 혈통이나 외형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마귀의 성품과 일을 따르는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대표 구절은 요한일서 3장 8–10절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하나님의 아들과 마귀의 자녀가 이러나니,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이를 바탕으로 성경이 말하는 마귀의 자녀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죄 가운데 거함

      • 죄를 끊지 못하고 계속 즐기며 산다.

      • 회개보다 자기 합리화를 택한다.

    2. 진리를 거부함

      •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 욕망, 세상의 논리를 따른다.

      • 거짓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3. 사랑이 없음

      •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하며, 정죄한다.

      • 자기중심적이고 관계를 파괴한다.

      •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여” 형제를 죽였다(요일 3:12).

    4. 마귀의 일을 행함

      • 분열, 미움, 거짓, 파괴, 교만을 퍼뜨린다.

      • 생명을 살리기보다 상처 주고 무너뜨린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요 8:44)

    즉, 마귀의 자녀란 마귀의 성품(거짓, 미움, 죄)을 따라 살며 그 일을 드러내는 사람을 뜻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씨(말씀과 생명)를 받아 의와 사랑을 행하는 자입니다.






    1월 17일(토) 요한일서 3: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This is how we know who the children of God are and who the children of the devil are: Anyone who does not do what is right is not a child of God; nor is anyone who does not love his brother.

    성경은 사람을 궁극적으로 두 부류로 나눕니다.
    “하나님의 자녀” “마귀의 자녀”입니다. 
    이 구분은 혈통이나 종교적 배경이 아니라,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 어떤 생명을 가졌느냐로 결정됩니다.

    요한일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자녀의 
    정체성

    1.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요일 3:9, 요 1:12-13)
    2. 하나님의 “씨(생명)”가 그 안에서 역동(力動)하는 자
    3. 하나님이 아버지가 된 자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

    1. 죄 가운데 머물 수 없음 (습관적· 지배적인 죄의 삶을 살 수 없음) 
    2. 의를 행함
    3. 형제를 사랑함
    4. 빛 가운데 행함
    5. 회개할 줄 앎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요일 3:9)

    여기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전혀 실수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죄를 삶의 방식으로 삼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은 단순한 종교적 신분이 아니라, 말씀과 삶으로 드러나는 영적 본질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자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씨, 곧 말씀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입니다(벧전 1:23).

    1. 죄 가운데 계속 거하지 않음

    •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9)
      이는 완전 무죄를 뜻하기보다, 죄를 본성처럼 계속 행하지 않는 삶을 의미합니다.
      말씀 안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는 삶을 삽니다.

    1. 의를 행함

    •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방향성이 분명합니다.

    1. 형제를 사랑함

    • “우리가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줄을 알거니와”(요일 3:14)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중심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1.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음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의 욕심이 아니라
      성령과 말씀의 인도에 따라 살아갑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며,
    형제를 사랑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존재
    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외형이 아니라,
    말씀을 받은 내적 생명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로서의 삶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요한일서에 잘 드러납니다.

    1. 죄 가운데 계속 머물지 않음

      •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요일 3:9)
        이는 완전무결을 뜻하기보다, 죄를 당연하게 여기며 지속적으로 행하는 삶에 머물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죄를 미워하고 돌이킵니다.

    2. 의(義)를 행함

      •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일 2:29)
        하나님의 성품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삶의 방향이 ‘의’로 향합니다.

    3. 형제를 사랑함

      •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요일 3:14)
        하나님의 자녀는 사랑을 본성처럼 나타냅니다. 미움은 옛 사람의 성향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함

      •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요일 3:24)
        말씀을 부담이 아니라 생명으로 받아들이며, 그 안에 거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5. 성령의 내주(內住)를 가짐

      •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3:24)
        하나님의 자녀 안에는 성령이 거하시며, 내적 증거와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6. 세상에 속하지 않음

      • “그런즉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요일 4:5-6 참조)
        가치관과 방향이 세상과 다르며, 진리에 반응합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있어 죄를 미워하고, 의를 행하며, 형제를 사랑하고, 말씀과 성령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신분’일 뿐 아니라 ‘생명’의 증거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마귀의 자녀

    정체성

    1.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
    2. 본질적으로 “어둠에 속한 자”
    3. 아버지가 마귀(요 8:44)

    특징

    1. 죄를 계속 행함 (죄 가운데 거함)
    2. 의를 미워함
    3. 사랑이 없음
    4. 진리를 거부함
    5. 회개하지 않음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요일 3:8)

    마귀의 자녀란 *“가끔 죄 짓는 사람”*이 아니라,
    죄가 삶의 방향이며, 회개 없이 죄를 정당화하며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핵심 차이 요약

    구분       하나님의 자녀                마귀의 자녀
           근원         하나님께로 남              마귀에게 속함
      내적 상태    하나님의 씨가 있음               어둠에 거함
      삶의 방향           의와 사랑                죄와 미움
     죄에 대한 태도        슬퍼하고 돌이킴           머물고 합리화함
          결과            생명과 빛              사망과 어둠 

    요한일서가 말하는 기준은 단순합니다.

    “빛 가운데 행하느냐,
    어둠 가운데 거하느냐”

    사람은 스스로 “중간 지대”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거나, 아직 마귀의 지배 아래 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복음은 바로 이 사실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요일 3:8)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순간,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뀝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삶의 열매로 드러나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마귀의 자녀”**는 혈통이나 외형이 아니라, 누구의 말을 듣고 그 뜻을 따르느냐로 구분됩니다. 요한일서와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1. 죄를 계속 행함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요일 3:8)

    • 죄를 끊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삶의 방식처럼 지속합니다.

    • 죄를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정당화하거나 즐깁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요 8:44, 47)

    • 하나님의 말씀에 거부감을 가짐

    • 말씀을 들으면 불편해지고, 변하려 하지 않음

    • 진리를 왜곡하거나 부정함


    3. 거짓을 말함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 8:44)

    • 거짓을 쉽게 말함

    • 진실보다 자기 유익을 우선함

    • 사람을 속이고, 분열을 일으킴


    4. 형제를 미워함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요일 3:12)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요일 3:15)

    • 미움, 시기, 분노가 마음에 뿌리내림

    • 사랑보다 경쟁과 파괴를 택함

    • 공동체를 깨뜨리는 행동을 함


    5. 의를 행하지 않음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일 3:10)

    • 옳은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음

    •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욕망을 따름


    정리하면,
    마귀의 자녀의 핵심 특징은

    죄를 지속하고, 진리를 거부하며, 거짓을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삶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자녀는

    • 죄를 미워하고

    • 말씀을 듣고

    • 진리를 따르며

    • 형제를 사랑합니다.

    이 차이가 “누구의 씨를 가지고 있는가”를 드러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마귀의 자녀”**의 특징은 혈통이나 외형이 아니라,
    어떤 영과 말씀을 따르느냐, 어떤 열매를 맺느냐로 구분됩니다.
    특히 요한일서 3장과 요한복음 8장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 성경적 특징

    1. 죄 가운데 거함

    •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일 3:8)

    • 회개하지 않고 죄를 지속적으로 행함

    1. 진리를 거부함

    •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요 8:44)

    •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 왜곡함

    1. 거짓을 말함

    •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요 8:44)

    • 거짓 교훈, 속임, 위선

    1. 사랑이 없음

    •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였나니”(요일 3:10–12)

    • 미움, 분열, 시기, 정죄

    1. 의(義)를 행하지 않음

    •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10)

    • 삶의 열매에 하나님의 성품이 없음

    1. 사람을 죽이는 영적 성향

    •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요 8:44)

    • 육체적 살인뿐 아니라
      말씀으로 사람을 죽이고, 영혼을 멸망으로 이끔


    정리하면, 마귀의 자녀란

    진리를 따르지 않고, 죄와 거짓 가운데 살며, 사랑이 없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마귀의 뜻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자녀는

    • 진리를 따르고

    • 죄를 미워하며

    • 사랑을 실천하고

    •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 둘은 겉모습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태도와 삶의 열매”로 구별됩니다.









    성경은 인류를 단순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3장은 사람을 두 부류로 분명히 구분합니다.ㅁ

    요한일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씨(말씀, 생명)가 그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특징 

    1.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거듭난 자)
    2. 말씀을 믿고 그 안에 생명이 심어짐
    3. 죄를 계속해서 즐기며 살 수 없음
    4. 의를 행함
    5. 형제를 사랑함
    6. 빛 가운데 행함

    즉, 말씀으로 거듭나 생명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마귀의 자녀

    마귀의 자녀는 마귀의 씨(거짓, 미혹, 불순종)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지음이라”

    특징

    1. 죄 가운데 계속 거함
    2. 말씀을 거부하거나 왜곡함
    3. 의를 행하지 않음
    4. 형제를 미워함
    5. 어둠 가운데 행함
    6. 진리를 듣지 않음 

    이들은 외형상 종교를 가질 수도 있으나, 그 속에 하나님의 씨가 없는 상태입니다.  

    핵심 정리

    구분 하나님의 자녀         마귀의 자녀
    근원        하나님께로 남        마귀에게 속함
       하나님의 씨(말씀, 생명)             거짓의 씨
                의를 행함              죄를 지속함
    관계        형제를 사랑함        형제를 미워함
    상태       빛 가운데 행함     어둠 가운데 행함

    성경이 이처럼 구분하는 이유는,
    신앙은 소속이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자동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거듭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 1:12–13, 벧전 1:23)

    그래서 요한은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면, 삶 속에서 반드시 ‘의’와 ‘사랑’이 나타난다.”





    1월 16일(금) 요한일서 3: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씨(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No one who is born of God will continue to sin, because God's seed remains in him; he cannot go on sinning, because he has been born of God. 

    하나님의 씨(God's seed)

    “하나님의 씨”는 요한일서 3장 9절에 나오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No one who is born of God will continue to sin, because God's seed remains in him; he cannot go on sinning, because he has been born of God..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요일 3:9)

    여기서 “씨”(σπέρμα, sperma)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으신 ‘새 생명의 근원’을 의미합니다.

    σπέρμα 1. 자손, 후예

    이는 단순한 도덕적 영향이나 종교적 감화가 아니라,

    • 하나님의 생명

    • 하나님의 본성

    •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

    • 거듭남의 실제를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의 씨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 안에 심어진 하나님의 생명이며,
    그 사람을 계속 하나님께 속하게 붙들어 두는 내적인 생명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말합니다.

    • 하나님의 씨가 있는 사람은 죄 가운데 계속 머무를 수 없다

    • 넘어질 수는 있어도, 죄를 삶의 방식으로 삼고 평안히 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안에 “죄와 양립할 수 없는 생명”이 이미 심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인간의 씨                하나님의 씨
       아담에게서 난 생명               하나님에게서 난 생명
        죄에 자연스러움                      죄에 불편함
           어둠에 익숙                      빛을 사모함
             자기 중심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씨”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내적 표지이며, 거듭남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의 씨”는 요한일서 3장 9절에 나오는 표현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여기서 는 문자적인 생물학적 씨앗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이 사람 안에 심겨진 것을 가리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씨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 거듭남의 근원
      하나님의 씨는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되게 하는 근원입니다.
      이는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생명입니다(요 1:12–13, 벧전 1:23).

    2. 내적 변화의 능력
      이 씨는 사람의 본성을 바꾸는 능력을 가집니다.
      그래서 요한은 “계속해서 죄 가운데 머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완전무죄가 아니라, 죄를 삶의 방식으로 삼을 수 없게 되는 변화를 뜻합니다.

    3. 하나님의 성품의 시작
      하나님의 씨는 우리 안에서

      • 빛을 사모하게 하고

      • 의를 향하게 하며

      • 형제를 사랑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성품의 씨앗입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씨란, 믿는 자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생명이며,
    그 생명은 죄에 머무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자라나는 영적 생명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는 단지 신분만 바뀐 존재가 아니라,
    속에 다른 생명이 심겨진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씨”와 “마귀의 씨”는 혈통이나 유전자가 아니라,  

    영적 근원과 속성, 곧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핵심 본문은 요한일서 3장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요일 3:9) z

    하나님의 씨

    • “씨”는 생명의 근원, 본성, 말씀을 의미합니다.

    • 하나님의 씨 =
      👉 하나님의 말씀
      👉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새 생명
      👉 거듭남의 근원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 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씨가 있는 사람 

      1.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자
      2.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거하는 자
      3. 죄를 본성으로 삼고 살 수 없는 자
      4. 의를 행하며 하나님을 닮아가는 자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씨”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사람 안에 심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을 의미합니다. 
    특히 요한일서 3장 9절에서 그 본질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요일 3:9)

    하나님의 씨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께로부터 난 생명이다 

    하나님의 씨는 인간의 사상이나 노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난 새 생명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근원이 됩니다(요 1:12–13)  

    2. 말씀의 씨이다 

    예수님은 씨를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눅 8:11).
    하나님의 씨는 곧 진리의 말씀, 복음입니다(벧전 1:23) 

    3. 안에 거하며 사람을 변화시킨다  

    이 씨는 사람 안에 거하여 생각, 마음, 삶의 방향을 바꿉니다.
    겉모습이 아니라속사람을 바꾼다 

    4. 죄를 지속적으로 짓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씨가 있는 자는
    죄 가운데 계속 머무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요일 3:9).
    넘어질 수는 있어도, 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5. 의와 진리를 추구하게 한다  

    하나님의 씨는 사람을
    빛, 의, 진리 쪽으로 끌어갑니다.  
    거짓과 어둠을 미워하는 성향이 생깁니다.  

    6.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씨가 있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드러납니다(요일 3:10).  
    삶의 열매로 그 정체성이 나타납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의 씨는 사람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으로,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죄를 미워하게 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이끄는 내적 능력
    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씨”는 문자적인 씨앗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의 말씀, 곧 진리의 말씀이 사람 안에 심겨진 것을 의미합니다(벧전 1:23, 약 1:18, 요일 3:9).

    이 하나님의 씨가 가진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위로부터 온다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임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일 3:9)

    2. 생명을 낳는다

    죽은 영을 살리는 생명의 근원
    거듭남의 근거가 됨(요 1:12~13)

    3. 진리의 성품을 가진다

    거짓이 없고 빛과 의에 속함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씨임(눅 8:11)

    4. 죄를 미워하게 만든다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요일 3:9)
    죄 가운데 계속 거하는 삶을 살 수 없게 함

    5.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낸다

    의, 사랑, 빛의 성향을 맺게 함
    하나님의 자녀다운 열매가 나타남(요일 2:29, 3:10)
    6. 영원하다

    “썩지 아니할 씨”(벧전 1:23)  
    세상 것처럼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짐

    정리하면,
    하나님의 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사람 안에 심겨져 거듭나게 하며, 죄를 미워하고 의와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씨란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과학자들이, 이스라엘의 고대 유적지 "마사다"에서 헤롯 왕의 요새를 발굴하던 중 세 개의 씨앗을 발견하였다. 
    연구자들이 발굴에서 찾은 씨앗을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으로 분석해 본 결과, 이것은 대략 2,000년 전의 씨앗이라는 결론을 얻었는데, 그 씨는 다름이 아닌 대추야자 씨였다. 
    그 씨는 마르고 썩은 것처럼 보여 전혀 그 속에 생명력이 없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을 심어보니, 그 중 한 개에서 싹이 트는 것이 아닌가! 세 개의 씨앗 중 하나를 발아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씨는 2005년도에 심어졌는데, 현재 이 대추야자 씨는 키가 121cm인 큰 대추야자 나무가 되었다고 하며, "므두셀라"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씨앗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과학자들에게 매우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씨에는 생명이 있다. 
    그 생명은 수천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그 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그리하여 그 씨는 자신의 씨의 종(種)대로 번식하고 또 씨를 보존하여 자신의 종족을 퍼뜨린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씨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마치 나무나 식물의 씨 속에 생명이 있어 그 씨가 발아하여 자손을 번식시키듯이, 하나님의 씨에는 생명력이 들어 있어 발아하게 하고, 자라게 하고 변화시키는 역사를 이룬다. 또한, 하나님의 씨를 계속 전수하는 한 종족을 탄생시킨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씨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이 흥미로운 주제에 대하여 함께 연구해 보자.

    씨 (Seed)

    "씨"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식물이나 생물의 씨를 상기하게 된다. 모든 식물의 근본이 되며, 종족 보존과 종족 본능의 근간이 되는 것이 "씨"이다. 씨에는 놀라운 생명력이 들어 있어 이 씨의 생명력을 통해 식물의 발아와 자연계의 생성과 순환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의 근본 태동의 중심이 되는 "씨"는 매우 중요한 것이 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경을 연구해 보면, 이 "씨"(Seed)가 영적인 의미로 "후손"과 "자손"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 씨 = 여자의 후손(창세기 3:15)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 (Seed)도 여자의 후손 (Seed)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between thy seed and her seed; it shall bruise thy head, and thou shalt bruise his heel." (킹 제임스 역) 

    여기서 "후손"으로 번역된 원어의 뜻을 보면, "Seed"(씨) 라고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은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구속의 방침으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밝히신 최초의 "구속의 경륜"이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어떻게 대속하시고 처리하셔서 인간을 구원 하실지에 대한 대안이 잘 나타나 있는데, 결국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죄의 창시자인 사단을 어떻게 처리하실 것이며, 그리고 구원의 경륜이 결국 타락한 이 세상과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여 회복시킬지에 대한 계획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 대안과 계획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씨(Seed), 곧 하나님의 약속의 자손인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는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그의 씨(Seed)인 하나님의 자녀와 후손들이 사단과 죄에 승리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임이 이 말씀에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경 절에 나타난 "씨"의 의미는 후손이라는 뜻으로, 여자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또한 그분의 후손인 하나님의 자손들을 가리킨다.

     2. 씨 = 후손들(창세기 22:16-18)

    창세기 22:16~18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descendants)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descendants)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offspring)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여기서도 "씨"가 "후손"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영어 성경에 이 "씨"라고 번역된 단어가 "descendants"(후손, 자손)로 되어 있다. 특별히 이 성경 절에서 주지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영어로 이 문장의 앞뒤의 문맥을 보면, 전자의 "씨"라는 단어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씨(단수)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후자에 "씨"는 그와는 다른 씨(복수)인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 and said, "I swear by myself, declares the LORD, that because you have done this and have not withheld your son, your only son,
  • I will surely bless you and make your descendants as numerous as the stars in the sky and as the sand on the seashore. Your descendants will take possession of the cities of their enemies,
  • and through your offspring all nations on earth will be blessed, because you have obeyed me."


  • 씨(단수) = 예수 그리스도 
    씨(복수) = 하나님의 백성  

    3. 자손 = 씨 = 그리스도(갈라디아서 3:16) 

    갈라디아서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seed)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seeds)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seed)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Now to Abraham and his seed were the promises made. He saith not, And to seeds, as of many; but as of one, And to thy seed, which is Christ." 

    이 성경 절에도 언급된 이 자손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여기에도 자손이 영어로 "Seed"라는 단어로 표현되어 있는데, 단수인 "Seed"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씨 = 여자의 남은 자손(요한계시록 12:17) 

    요한계시록 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Remnant of her seed),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Then the dragon was enraged at the woman and went off to make war against the rest of her offspring--those who obey God's commandments and hold to the testimony of Jesus.



    위의 성경 절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의미심장한 구절이다. 여기서 씨는 "여자의 남은 자손"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결국 이 여자의 남은 자

    손들이 세상의 죄의 역사가 마치는 시대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사명을 이룰 마지막 세대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렇게 성경에서 "씨"는 후손과 자손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씨"는,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임을 가리키는 것이고, 둘째로는 하나님의 남은 자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경 속 씨의 상징과 의미 정리

    성경에서는 '씨'가 다양한 상징과 의미를 가지고 등장합니다. 
    이 '씨'는 단순히 식물의 씨앗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구원의 소망, 복음의 확장, 영적 성장 등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아래는 성경에서 씨가 가진 다양한 의미를 주제별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1. 하나님의 언약과 후손

    아브라함의 씨와 언약 (창세기 12:1-3, 15:5, 22:17-18)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히브리어: 제라)이 크게 번성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 후손은 단순히 혈통적 번성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며, 구속사 전체를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의 씨는 하나님의 나라와 구속의 시작을 상징하며,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을 예고합니다.

    여자의 후손 (창세기 3:15)

    창세기 3:15에서 언급된 여자의 후손은 메시아의 오심을 예고합니다. 여자의 씨는 동정녀 탄생을 의미하며, 인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첫 약속입니다. 이 씨는 타락한 인류에게 구속과 소망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삭과 야곱의 씨 (창세기 26:4, 28:13-14)

    아브라함의 축복은 이삭과 야곱에게도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번성할 것이며, 모든 민족이 그들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세대를 통해 지속됨을 의미하며, 씨는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의 연속성을 상징합니다.

    2. 하나님의 선택과 회복

    이스라엘의 선택된 씨 (신명기 7:6-8)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많은 민족 중에서 선택하셔서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이 선택은 그들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사랑에 기반합니다. 씨는 하나님의 은혜로 택한 자들을 상징하며, 구원의 통로로서의 역할을 보여줍니다.

    남은 자의 씨와 회복 (이사야 6:13)

    이사야 6:13에서는 하나님의 심판 이후에도 남은 자들이 씨앗으로서 회복의 시작이 될 것을 예언합니다. 이 남은 자들은 심판 이후에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할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됩니다.

    씨를 통한 회복과 축복의 약속 (이사야 61:11)

    이사야 61:11은 씨앗을 사용해 하나님의 구속과 회복을 묘사합니다. 씨앗이 땅에 심겨 자라나듯,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이 모든 민족 앞에 드러나게 될 것을 상징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성취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3. 신앙과 영적 성장

    말씀의 씨앗 (마태복음 13:3-9, 18-23)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며, 각각의 땅은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상징합니다.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느냐에 따라 열매를 맺는 결과가 달라지며, 이는 신앙의 성장을 위해 마음의 상태를 돌보아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겨자씨의 비유 (마태복음 13:31-32)

    겨자씨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작고 미미하더라도, 자라면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이를 품을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작은 믿음과 순종이 커다란 영적 성장과 영향력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믿음의 겨자씨 (마태복음 17:20)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믿음의 크기보다 그 진정성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작은 믿음이라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길 때 큰 일을 이루는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씨앗 (고린도전서 15:36-38)

    바울은 부활을 씨앗에 비유합니다. 씨앗이 땅에 심겨져 죽어야만 새로운 생명이 나오듯, 우리의 육체도 죽어야 부활의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비유를 통해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설명합니다.

    4. 하나님의 나라와 심판

    하나님 나라의 씨 뿌리기 (마가복음 4:26-29)

    하나님의 나라는 씨를 뿌리고, 그 씨가 자라는 과정을 사람의 노력 없이도 이루어지는 것으로 비유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으로 이루어지며, 우리는 그 과정을 신뢰하고 인내로 기다려야 합니다.

    선과 악의 씨 (마태복음 13:24-30, 36-43)

    가라지의 비유에서 선한 씨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라지는 악한 자들을 상징합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심판의 날까지 인내하시며, 그때 악을 심판하고 의로운 자들을 거두어 들이십니다. 우리는 악이 존재하는 가운데서도 선한 씨앗을 심고 살아가며,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해야 합니다. 

    결론

    성경에서 '씨'와 '씨앗'은 하나님의 언약, 믿음, 구원의 소망, 복음의 확장, 영적 성장을 상징합니다. 씨앗은 작은 것이지만, 올바른 환경에서 자라 큰 열매를 맺습니다. 이는 우리의 믿음 생활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설명하는 중요한 비유로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할지에 대해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하나님께서 심으신 말씀의 씨앗을 우리의 마음에 잘 심고 돌보아, 그분의 영광을 위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씨

    마귀에게 속한 자는 죄를 짓는다고 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난자와 마귀로부터 난자를 대조하여 비교 하고 있다. 
    이것은 죄를 짓는 결과를 말하기보다 죄를 범하게 되는 원인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난 자가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이유는 그의 속에“하나님의씨”가 있기 때문이다. 씨는 헬라어로“스페로마"를 번역한 말로“씨를 뿌리다, 흩어지게 하다”를 의미하는“스페이로”에서 유래하였다. 
    상징적으로 씨는 잔존자, 후손, 자손을 이르는 말이다. 

    여자의 씨(창3:15), 아브라함의 씨(갈3:16), 다윗의 씨(딤후2:8), 하나님의 씨(요일3:9),사람의 씨, 짐승의 씨(렘31:27) 왕의 씨(단1:3), 사람들의 씨(단2:43,9:1). 천국의 아들들(씨들)(마13:38)란 말이 있다. 씨는 단수와 복수가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씨가 무엇이냐는 주석가들 사이에 많은 이견이 있는 것 같다.

    ① 어떤 자는 신적인 생명의 원리라고 주장한다(Smith, Marshall).

    ② 어떤 자는 집합적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들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 한다(Wohlenberg, Stott).

    ③ 어떤 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Oecumenius, Theophylactus).

    ④ 어떤 자는 말씀 또는 복음이라고 주장한다(Augustine, Dodd).

    ⑤ 어떤 자는 성령이라고 주장한다(Calvin).

    ⑥ 필자의 견해는 씨는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 의씨, 을 의미하듯이 여기서는 하나님의 생명의 씨(위에서 난 속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윌리암 맥도날드/ A.M,S, 구딩/ 문영권 은 모두 하나님의 생명의 씨(본성)를 지지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씨(하나님의 생명의 본성)는 죄를 짓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태어난 육에서 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태어난 영에 속한 속 사람을 말한다. 즉 하나님께로 난자란 위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난 자를 뜻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자는 영이니”(요 3:6).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속사람(새 성품, 하나님의 성품)은 죄를 짓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났으므로 죄를 지을 수 없다.


    문1: ‘하나님의 씨’는 무엇인가?

    답: 생령(창2:7) 곧 산 영(고전15:45)이다. 즉 인성구조 ‘영과 육’ 그리고 인성요소 ‘영과 혼과 몸’에서 ‘영’이 하나님의 씨이다.

    문2: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하여 죄를 짓지 아니하는 것’은 무엇인가?

    답: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 것이다(롬 8:16).




    마귀의 씨

    마귀의 씨는 성경에 직접 “마귀의 씨”라는 표현으로 자주 나오지는 않지만,
    예수님과 사도들은 “마귀에게서 난 자”, **“마귀의 자녀”**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요 8:44)

    마귀의 씨

       1. 거짓의 영
       2. 죄의 본성 

       3. 하나님을 거역하는 마음
       4. 미움, 속임, 교만, 불의의 성향

    마귀의 씨가 지배하는 사람

    1. 진리를 거부하고
    2. 죄를 자연스럽게 행하며
    3. 형제를 미워하고
    4.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욕망을 따릅니다. 


        결정적 차이

    구분              하나님의 씨           마귀의 씨
       근원                  하나님                     마귀
      주는 것             생명, 진리, 의              거짓, 죄, 사망
        열매           사랑, 순종, 거룩           미움, 불순종, 불의
     삶의 방향          하나님을 닮아감           자기 욕망을 따름
        결과           하나님의 자녀                마귀의 자녀

    요한일서는 이렇게 결론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일 3:10)

    결국 씨는 ‘정체성’ 입니다.
    사람은 모두 육체로 태어나지만,  말씀으로 거듭날 때 하나님의 씨를 받고
    그때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됩니다.

    반대로, 거듭남 없이 죄와 거짓을 따르는 삶은
    그 사람 안에 여전히 마귀의 씨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복음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씨가 바뀌는 사건 생명의 전환입니다.


    1월 15일(목) 요한일서 3:7-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귀의 일(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He who does what is sinful is of the devil, because the devil has been sinning from the beginning. The reason the Son of God appeared was to destroy the devil's work.

    성경이 말하는 마귀의 특징은 그의 본질과 사역을 통해 분명히 드러납니다. 

    1. 거짓의 아비  

    “그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 8:44)
    → 마귀의 본성은 거짓이며, 사람을 속여 진리에서 떠나게 합니다.  

    → 진리를 왜곡하고 속임으로 사람을 미혹합니다.


    2. 살인자요 파괴자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요 8:44)
    → 육체적 죽음만이 아니라, 영적 생명을 끊는 자입니다.  

    → 생명을 파괴하고, 영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3. 미혹하는 자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계 12:9)

    이 내어 쫓기니 옛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 진리와 거짓을 섞어 사람을 혼란케 하고, 선한 것처럼 가장합니다(고후 11:14).  

    → 거짓 교훈, 세상 가치, 육신의 정욕으로 사람을 속입니다.


    4. 형제를 참소하는 자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계 12:10)
    → 성도들의 죄와 약점을 들어 하나님 앞에서 고발하고, 양심을 정죄합니다.  

    → 하나님 앞에서 성도를 고발하고 정

    요한계시록 12: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났고


    5. 죄를 짓게 하는 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요일 3:8)
    → 불순종과 탐욕, 교만을 부추겨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합니다.  

    → 사람을 죄로 유도하며, 불순종의 길로 이끕니다.


    6. 빛이 아닌 어둠의 존재 

    그는 “이 세상의 신”(고후 4:4)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빛의 천사로 가장함

    •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 11:14)
      → 겉보기에는 선하고 경건해 보이게 접근합니다.


    고린도후서 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7. 두려움과 종노릇을 심음

    • 사람을 죽음의 공포로 종노릇하게 함 (히 2:14–15)
      → 불안, 정죄감, 절망으로 묶어 놓습니다.

    히브리서 2:14-15

  •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 마귀는 거짓으로 미혹하고, 죄로 이끌며, 생명을 파괴하고, 성도를 참소하는 어둠의 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귀를 대적하라”(약 4:7),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엡 6장)고 권면합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마귀의 특징과 역사는 분별되고 무력해집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요일 3:8) 

    그리스도의 사역은 진리, 생명, 자유, 회복입니다.







    마귀의 일(the devil's work)

    성경에서 말하는 “마귀의 일”은 단순한 악행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람을 죄와 죽음으로 끌어가는 모든 역사를 의미합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성경이 말하는 마귀의 일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죄를 낳는 일

    마귀는 사람을 속여 하나님을 떠나게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미혹한 것처럼,

    •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느냐?”

    •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라는 거짓말로 불순종 → 죄 → 단절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죄의 근원은 단순한 인간의 약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드는 영적 역사입니다.  

    2️⃣ 정죄와 절망을 심는 일

    마귀는 죄를 짓게 한 후,
    이제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 “너 같은 사람이 무슨 신앙이냐.”

    • “하나님이 너를 받아주시겠느냐.”

    즉, 죄를 짓게 할 때는 “괜찮다”고 하고,
    회개하려 하면 “너는 끝났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가장 교묘한 일입니다.
    사람을 하나님께서 아닌, 자기 죄에 묶어 두는 것입니다.

    3️⃣ 진리를 흐리게 하는 일

    마귀는 노골적으로 “하나님은 없다”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 진리를 반쯤만 말하고 
      은혜를 율법으로 바꾸며 
      복음을 종교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은 신앙을 가진 것 같지만,
    자유도, 생명도, 확신도 없는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요한일서는 분명히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 죄를 사하시고 
      정죄를 끊으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며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즉, 마귀의 일 = 끊고, 속이고, 묶는 일
    예수님의 일 = 용서하고, 밝히고, 자유케 하는 일

    그래서 복음이 있는 곳에는
    마귀의 일이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합니다.
    빛이 오면 어둠이 물러나듯이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마귀의 일”은 단순히 악한 행동 몇 가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를 무너뜨리는 모든 사역을 의미합니다.

    핵심 구절은 요한일서 3장 8절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지음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마귀의 일”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죄를 낳는 일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지은 자”입니다.
    그의 일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놓는 것입니다.

    • 창 3장 :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함

    • 요 8:44 : “거짓의 아비”

    👉 죄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마귀의 통로입니다.  

    2. 거짓으로 미혹하는 일

    마귀의 본질은 “거짓”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함

    • 죄를 가볍게 보이게 함

    • 회개와 십자가의 능력을 무력화함

    그래서 성경은 마귀를
    “미혹하는 자”, “속이는 자”, “고발자”라고 부릅니다.  

    3.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일

    마귀의 궁극적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 정체성을 흔듦: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 죄책감과 정죄로 묶음

    • 소망을 잃게 함

    즉,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답지 않게 만드는 모든 역사가 마귀의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요일 3:8)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하신 일

    1. 
    죄를 없이 하심

    2. 진리를 밝히심

    3.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심

    곧, 마귀의 일을 정반대로 뒤집는 사역입니다.

    요한일서의 관점에서 보면,
    마귀의 일은 “죄를 지속하게 하는 삶”이며,
    하나님의 일은 “죄에서 벗어나 생명 안에 거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영적 역사를 크게 두 갈래로 나눕니다.
    곧 “하나님의 일”과 “마귀의 일”입니다.

    이 구분은 요한일서 3장에 가장 분명히 나타납니다.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일의 핵심은 생명, 진리, 구원, 회복입니다.

    • 죄인을 구원하심 (요 3:16)

    • 사람을 거룩하게 변화시키심 (살전 4:3)

    • 진리로 자유케 하심 (요 8:32)

    •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심 (요 1:12-13)

    • 사랑과 빛 가운데 살게 하심 (요일 1:7)

    하나님의 일은
    죽은 자를 살리고, 어둠을 빛으로 바꾸며, 죄의 종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는 역사입니다.

    마귀의 일

    마귀의 일의 본질은 속임, 파괴, 죄,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이렇게 규정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44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 거짓으로 사람을 미혹함

    • 죄 가운데 머물게 함

    • 하나님과 분리되게 함

    • 정죄와 두려움으로 묶음

    • 결국 멸망으로 이끔

    마귀의 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죄와 거짓 속에 묶어
    하나님과 단절시키는 역사
    입니다.

     결론 
    요한일서는 분명히 말합니다.

    요한일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 하나님의 일 → 의, 사랑, 생명, 진리

    • 마귀의 일 → 죄, 거짓, 미움, 사망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 안에 있는 자는 더 이상 마귀의 역사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שָׂטָן Storng number 7854

    1. 적.  2. 삼상 29:4.  3. 시 109:6  
    Pronunciation  [ sâṭân ]  
    Etymology  /  7853에서 유래
     Old Testament  / 27회 사용

  • 관련 성경  / 대적(삼상 29:4, 왕상 11:14, 시 109:6), 사탄(대상 21:1, 욥 1:6, 슥 3:1). [동] 대적하다(왕상 11:25).




  • 마귀(魔鬼) / 마귀 마, 귀신 귀

    1. 요사(妖邪)스럽고 못된 잡귀(雜鬼)를 통틀어 이르는 말.

  •  2. 사탄(Satan). ‘적대자(敵對者)’라는 뜻으로, 하나님과 대립(對立)하여 존재(存在)하는 악(惡)을 인격화(人格化)하여 이르는 말.



  • 마귀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개역한글판에서는 한 구절이 나오는데 그 단어 히브리어 “세드”는 영어성경으로는 “demons”로 번역했다. 
    즉 귀신들이라는 말이다. 
    물론 개역개정판에서도 “귀신들”로 번역했다. 
    그리고 히브리어 “세드”가 한 군데 더 나오는 데 그 구절에서는 “사귀”로 번역했고, 영어판은 역시 “demons”로, 개정판에서는 “악령”으로 번역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는 “마귀”라는 말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관하다. 
    그리고 귀신이란 말도 몇 구절이 안 된다. 
    다만 “사단”(대적자, 원수)이란 말은 종종 언급이 되어 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선 사단, 마귀, 귀신들이란 말은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기에 악령들의 모습들이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마귀와 사단은 동일한 한 존재이고 귀신은 대부분 복수로 사용되었다. 

    귀신은 
    1.  죽은 사람의 영혼인지 
    2. 타락한 천사들의 일부인지 
    3. 그 타락한 천사가 죽은 조상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일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인지는 논란이 많다. 

    정확한 건 귀신이란 존재는 성경적으로 더럽고 악하고 각종 질병과 사고와도 연관이 되어 있으며 사단(마귀)에게 속한 영들이란 사실이다. 
    특히 죽은 사람을 연모하거나 죽은 사람에게 절하거나 제사하는 것도 아무리 부모나 조상이라도 참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불어 귀신을 접한 무당이나 점쟁이들도 멀리해야 한다.

    사도행전 16: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바울이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귀신은 사람의 몸 안에서 발견되고 그 안에 있다가 몸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과 사단(마귀)는 온 천하는 꾀는 존재로 사람의 몸 안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만 그 정체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8:16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마태복음 12: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글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고린도전서 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음에도 유교식 제사나 불교식 제사나 샤머니즘식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통합, 종교다원을 주장하는 분들은 다시 한 번 읽어보시라.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2. 마귀(사단)의 시작

    - 물리적 발견 : 창세기 3장에 뱀이란 존재가 나온다. 
    1절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영어로, crafty 술수가 뛰어난, 교활한)

    뱀은 하나님이 창조한 들짐승 중의 일부였다. 
    마귀가 뱀으로 둔갑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배후에 마귀가 접근했고 마귀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

    ​1. 뱀이란 동물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인데 그것은 왜 가장 간교하다고 했을까? 
    창세기 1장에 보면 사람이나 짐승들의 먹이는, 사람은 채소나 과일이었고, 짐승들은 푸른 풀이었다(창 1:29~30). 
    당시에는 사람이 짐승을 잡아먹거나 짐승들이 서로 잡아먹지 않았다. 
    그리고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이후부터 채소와 짐승의 고기를 주어서 먹을 수 있도록 하셨다. 
    다만 짐승을 먹을 땐 피 채 먹지 말라고 하셨다. 
    뱀도 풀만 먹고 살면 되기 때문에 굳이 간교할 이유가 전혀 없다. 
    즉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는 말은 사단이 뱀을 장악하니 뱀이 간교하게 변했다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뱀에게 악한 사단이 접근하니 뱀은 ‘사단화’가 되어버렸다. [사단은 대적자, 원수라는 뜻이다]

    ​뱀이 말을 한다고? 
    뱀이 하와에게 접근하여 ”하나님이 너희더러 동산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동산 나무의 실과는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의 나무의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 뱀과 사람이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으니 이 부분을 신화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겠지만... 
    이 대화를 하와와 뱀의 대화로 보지 말고 하와와 사단의 대화로 봐야 한다. 
    귀신과 사람이 대화가 가능하듯 천사와 사람은 대화가 가능하다.

    ​사단은 뱀의 몸 안에 들어갔을까? 
    아니면 뱀의 몸 밖에서 조종했을까? 
    사단은 하늘에서 타락하여 음부로 추방당한 천사이기에 뱀의 몸에 들어가지 않는다. 
    굳이 지극히 제한된 뱀의 뇌 공간에 들어갈 필요도 없다. 
    머리를 지배하면 되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머리만 지배하면 몸은 자연스럽게 지배할 수 있다. 
    사단은 온 천하를 꾀는 자로서 온 천하를 두루 다니는 자이지 어느 한 사람 몸 안에만 있지 않는다. 
    귀신은 사람의 몸 안에 머물지만 천사들은 주로 몸 밖에서 활동하고,, 예수님도 귀신을 쫓아냈을 때 사람들의 몸 안에서 쫓아내주셨다.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된 자...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사단은 왜 하와에게 직접 유혹하지 않고 뱀을 이용했나? 
    에덴동산이란 곳은 특별히 구별된 곳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위해 준비하신 곳이다. 
    동물들은 에덴동산 안과 밖을 자유롭게 이동했을 것이다. 
    다만 타락한 천사들은 아담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선한 천사들이 보호하고 지켰을 것이다. 
    그 증거가 사단이 뱀을 이용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사단이 하와를 직접 유혹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귀(사단)의 시작

    - 영적 발견 : 에스겔이 두로왕에 대한 애가(슬픈노래)를 지었는데..두로왕의 배후에 사단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에스 겔28:12~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개정에는 ‘도장’, 영어로는 ‘model’)이었고 지혜가 충족(충만)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하늘)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 네가 지음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개정, 불타는 돌)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었고 화광석(개정,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

    사탄은 근본이 천사인데, 그는 지혜와 아름다움이 가득하고 음악을 아주 잘했다. 
    그러나 교만하여 범죄하였고 결국 추방당하여 음부에 갇히게 되었다. 우리들도 자칫하면 교만해질 수 있다. 나중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될 수 있다.

    베드로후서 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탈타로스, 깊은 심연; 게헨나 불못과 구분)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욥과 사단

    욥기 1:7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이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울타리)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사단의 성품은 악하고 시기 질투..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이간하는 이간자(디아볼로스)...하나님과 사람 사이엔 말씀이 있다. 말씀을 버리게 함으로 복과 생명과 사랑을 받지 못하게...

    - 그러므로 예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하고 마귀의 일을 대적하고 마귀의 성품을 대적하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6:11)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마귀를 헬라어로 <디아볼로스-δτάβολος>라고 합니다. <디아-사이에 Between> <볼로스-이간질, 분열, 중상>라는 뜻입니다. 마귀가 하는 일이 분열과 분리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훼방하며 방해합니다. 사람끼리 오해와 분열로 고통하도록 끊임없이 중상합니다.

    마귀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역사하는 방법이 무척 많습니다. 사람의 눈에 보일 정도로 악한 일들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지만, 사람이 깨어 있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마음 속에서 점진적으로 일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마음을 집중적으로 공격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지지 못하도록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들리지 못할 정도로 분주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문제에 집중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성령께서 빛을 비춰 주실 때 그 어두움의 정체와 계략이 드러날 것입니다. 사람의 지식과 지혜로 분별하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비록 깨닫는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힘으로 이기기가 힘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성령의 검입니다. <검>을 헬라어로 <마카이라-μάχαιρα>라고 합니다. 양날이 날카로운 단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귀를 이기는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 자신이 변화되는 방법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하늘의 Tool입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시려고

    하나님의 일에는, 언제나 방해세력이 있다. 
    마귀는 성령의 역사를, 결코 가만히 보고 있지 않는다. 
    마귀는 하나님을 직접 공격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공격한다. 
    마귀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를 공격하여, 결국 예수님을 은30에 팔아서, 십자가에 내주는 장본인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죽어야 한다고 가르치실 때, 마귀는 베드로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뒤에 숨어 활동하는, 사탄의 세력을 보시고 꾸짖으셨다. 
    또 베드로를 공격하여, 예수님을 부인하게 만들었다. 마귀는 우리들도 공격한다.

    마귀는 오늘도 우리가 죽고 사는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게 될 때, 또 영적인 일들을 할 때(기도, 예배, 찬양…) 적극적으로 방해한다. 
    우리를 이용해서, 가정을 파괴하도록, 못된 말을 하게하고, 분노하고, 싸우고 속이고,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게 한다.

    마귀는 몰래 들어와서, 우리 인격을 파괴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려고 갖은 애를 쓰는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면, 결코 시험이나 방해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에게도, 시험은 있다. 슬픔도 있고, 핍박도 있고, 방해도 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기에, 성도들은 깨어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악한 마귀를 대적하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악한 마귀의 시험을 두려워하지 말고,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믿음을 하나님께 구해야만 한다.

    1.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는데, 먼저 마귀는 어떤 일을 하는지 살펴보자. 

    예수님은 마귀의 일, 마귀가 무엇을 하는지 아셨다. 

    요한복음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마귀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킨다고 했다. 
    그러면 마귀는 우리를 어떻게 죽이는가? 성도들로 하여금 죄짓게 만든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일 3:8)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어쩌다 실수하여 범죄한 자가 아니라, 상습적으로 죄를 범하게 하는 자를 말한다.
    그래서 죄를 지었기에 마귀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마귀에게 속한 자니까, 죄를 계속 짓게 만든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긴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막4:15).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사단은 은혜 받지 못하게, 귀를 막아 버린다. 예배에 참석해도 집중을 못하고, 다른 생각이 든다. 졸기에,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또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문제를 일으킨다. 예배에 빠질 핑계를 만든다. ‘비가 많이 와서, 차가 오지 않아서, 사업이 바빠서, 추석이라서…’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은, 이처럼 핑계와 불평이 많다. 이는 마귀의 놀림감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2) 인간들의 마음을 혼미케 한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다. 그에게 사단이 들어가자, 그는 사리분별력을 잃었다. 그때 사울은 민족을 구한 영웅이며, 사위 다윗을 죽이려고, 군인 3천명을 거느리고 다녔다.

    사위가 죽으면 딸은 과부가 될 것인데, 그의 눈에는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사단이 그의 마음에 들어가, 그를 혼미케 했기 때문이다.

    (3) 시험한다(마4장). 

    그는 예수님도 시험했다.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다. 예수님을 성전꼭대기에 세우고 “뛰어내리라.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서, 다치지 않게 해 주실 것이라”고 했다.

    또한 예수님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내게 절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고 했다. 이렇게 사단은 주의 종들과, 성도들도 시험하기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4) 전도하지 못하게 한다(살전2:18). 

    바울 사도가 전도하여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에 가려고 노력했으나, 사단이 막았다.
    사단은 전도하지 못하게 한다. 전도 방법이 시끄럽다, 왜 저렇게 전도하느냐며 비판하게 만든다.

    (5) 예수님을 배반할 생각을 준다(눅22:3). 

    사단이 가룟 유다의 마음 속에 들어가자, 예수님을 넘겨줄 생각을 갖게 되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같이 지냈었지만, 사단이 들어가니 선생님을 돈 받고 파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다.

    (6) 거짓말을 하게 한다(요8:44).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7) 사단은 괴롭히는 자다. 

    사단은 욥을 괴롭혔다. 그의 수많은 재산을 뺏어 갔다. 10남매의 생명도 앗아갔다. 욥의 몸에 병까지 들게 했다. 그래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짜증내도록 한다.

    (8) 사단은 참소 한다. 

    ‘참소’는 남을 헐뜯어, 없는 죄를 있는 것처럼 꾸며서 이간질시킨다. 그래서 원수 되게 하고, 싸우게 한다. 작은 죄라도 정죄하고, 고발한다. 또한 산발랏과 도비야처럼 속을 긁어놓는다(느4장).

    사단의 하는 일을 간단히 말하면, 인간들을 괴롭히다가 지옥으로 끌고 간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다. 항상 죄악에 매여 살아가고 있다. 병마와 질고를 지고, 항상 죽음의 짐을 지고 두려움을 느끼며, 인생을 살게 된다. 그래서 기쁨 없는 인생을 산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관인, 가정과 교회를 파괴하고, 분열시키고, 이간질시키고, 미혹케 한다. 성도들이 무너진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살리려고 할 때, 사단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지 못하게 방해하는 일이, 그의 사명이다.
    그래서 육적, 정신적, 영적으로 시험한다. 때때로 성도를 교만케 만들고, 때로는 낙심하게 만든다.

    2.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 

    (1)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마귀가 하는 일을 아셨기에, 마귀의 일을 멸하고, 우리를 마귀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오셨다.

    히2:14-15에 “…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어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하였다. 예수님은 우리를 마귀로부터, 마귀의 일로부터 자유케 하시기 위해 오셨다.

    자유케 한다는 말은, 파괴자로 부터 우리를 풀어준다는 말이다. 마귀는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비참하게 만들었다. 마귀에게 유혹을 받은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아 황폐해졌다. 인간의 모든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는 깨어졌다.

    그 일로 재앙이 임했다. 인간은 불행의 길을 걷게 되었다. 가난이 임했다. 질병이 임했다. 가인이 동생을 죽였다. 죽음에는 악한 영이 있다. 악한 영은 허랑방탕하게 만들어 빚을 지게 만든다. 채무의 영이 역사하면, 도박, 마약 사치로, 빚을 많이 지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에덴동산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되었지만, 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이 땅에 저주가 찾아왔다. 가난은 죄로 인하여 온 저주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저주를 회복시키셨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만들어 주셨다.

    예수님께서 저주와 가난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청산해 주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8:9)고 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저주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아담과 하와가 가져온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심으로 청산하셨다. 그렇기에 우리를 가난과 저주에서, 하나님께서 옮겨서, 그 사랑의 아들 나라로 데리고 왔다. 신분의 큰 변화가 왔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
    우리의 죄와 모든 저주에서, 해방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란다.

    (2)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권세를 주신다. 

    예수님을 믿을 때 이미 우리는, 많은 축복을 받았다. 그 중에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더 이상 마귀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받게 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다(마28:18).

    인간은 누구의 권세 아래 있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달라진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마귀 권세, 흑암의 권세 아래 있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더 이상 흑암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 아래 있게 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1:13).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는, 아들의 권세가 있는 곳이다.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권세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히 주시는, 아들의 권세 아래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마귀는 이 땅의 임금이다. 공중 권세를 잡은 자이다. 누가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권세를 가졌는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이런 권세를 가지셨다. 눅10장을 보면, 제자들이 전도 후에 보고를 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이 항복했다고 하였다(눅10:17-18). 또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탄의 세력을 제어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10:19).

    3.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마귀의 일을 멸하라고 주신 무기 

    어떤 전쟁이든지,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기가 꼭 필요하다. 마귀와의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다. 마귀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무기가 필요하다. 마귀와의 싸움에는 영적인 무기가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무기를 우리에게 주셨다. 이 무기를 사용하시어, 날마다 승리하시는 분들이 되기 바란다.

    (1) 예수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 앞에는, 온 천하가 무릎을 꿇는다. 그 놀라우신 예수님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막16:17-18).

    예수님의 이름은 능력이다. 천국 열쇠다.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14:13-14). 초대교회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쳤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생을 얻는다. 이 권세를 사용하라.

    (2) 예수님의 보혈 

    성령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면, 우리는 회개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 용서받게 된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의 죄를 고발하고, 죄책감을 집어넣어, 우리를 괴롭히는 참소자다.

    마귀는 죄를 가지고 공격할 때, 좌절하게 되고, 무력하게 된다.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게 만든다. 마귀 앞에 꼼짝 못하게 된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 죄를 덮어야 한다. 예수님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얻기 때문이다(롬5:3).

    (3)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은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말씀은 마귀를 이기는 성령의 검이다(엡6:17).
    계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를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마귀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말씀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 암송하면 더욱 더 좋다. 마귀는 말씀의 능력을 알기에,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들고, 암송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마귀가 싫어하는 일을 해야 한다.

    (4) 성령 안에서 기도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아이를 쫓아내지 못한 제자들에게, 이런 유는 기도 없이는 나가지 않는다고 하셨다. 기도는 마귀를 물리치는 강한 무기가 된다. 기도는 난치병을 치료한다. 죽은 자를 살린다.

    모세의 기도로 바닷길이 열렸다. 여호수아는 기도로 태양을 멈추게 했다. 엘리사는 군대를 막았다. 천군 천사를 보게 한다. 사라는 닫힌 태를 열었다. 다니엘은 사자의 입을 막는다. 베드로는 옥문을 열었다. 에스더는 민족을 위기에서 건졌다. 히스기야는 죽을병에서 생명을 연장시킨다.

    마귀를 우습게보지 말라. 
    마귀는 예수님도 유혹했다. 
    그러나 마귀를 너무 두려워 말라.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마귀의 일을 멸하셨기다. 
    마귀의 머리는 이미 깨졌다. 
    마귀는 예수님과는 비교되지 않는 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믿고, 믿음으로 쫓아내라.

    요한복음 8:44 
    "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 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마귀란 헬라어 디아볼로스 즉 '고소하는 자' , '헐뜻는 자'란 뜻입니다.

    "사단"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대적 합니다. 
    유혹하여 죄에 넘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망으 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눅8장에는 예수님께서 바닷가 배에 않으셔서 씨뿌리는 비유 를 말씀하셨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 어지고 ,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지고, 또 어떤 씨는 가시밭에 떨 어지고 , 어떤 씨는 좋은 밭에 떨어져서 좋은 밭에 떨어진 씨만 열매를 맺는데 , 여기에서 밭은 사람들의 마음이고 씨는 복음의 말씀인데 ,이 중에 길가에 떨어진 씨는 (눅8:12)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 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 이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합니다. 마귀는 하나님 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이러한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 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마귀의 올무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종노릇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 귀에게 끌려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요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 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 가롯유다는 마귀의 올무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마귀에게 속 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까지 팔아버리는 무서운 일을 하게 됩니 다.

    마4장에는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까지 시험하여 넘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아담을 죄아래 넘어지게 하였 던 그가 하나님의 아들에게 까지 시험하여 닦아 옵니다. 예수님 은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마귀는 가롯유다와 그의 통치아래 있는 자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으신 주님은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고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로써 마귀를 완전히 이기시고 심판하사 멸망가운 데 던져 넣게 된것입니다.

    (히2:14-16) 에서도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이유는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 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래서 (계20:10)에는 마귀와 그의 사역 자들은 불과 유황 못 에 던지우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귀의 권세를 이기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마귀는 힘으로도 않됩니다. 
    돈으로도 않됩 니다. 마귀가 오히려 돈으로 우리를 미혹합니다.

    마귀는 원자폭탄으로도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 살 때에만 이길 수 있습니다.

    벧전 5:8-9 
    "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 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 를 대적하라" 

    약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능력있고 권세 있는 믿음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는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이것 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일을 하시기 원하십니까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서 종노릇 하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 특징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 기 때문에 사람을 하게 되고 ,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예수 그리 스도께는 불순종하며 가인과 같이 악해지는 것이며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10절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자여와 마귀의 자녀가 뚜렸하게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 마귀를 대적하여 이기는 것입니다. 마귀의 권세는 예수 그리 스도의 권세로 이길 수 있습니다. 사망은 생명으로 이길 수 있습 니다.

    세속에 소망을 둔 사람은 소돔성에 살았던 롯의 부인과 같습 니다. 유혹에 넘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지 않으면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마귀의 유혹을 뿌리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언제나 께 어서 기도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1월 14일(수) 요한일서 3:7-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아들(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He who does what is sinful is of the devil, because the devil has been sinning from the beginning. The reason the Son of God appeared was to destroy the devil's work.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 Dear children, do not let anyone lead you astray. He who does what is right is righteous, just as he is righteous.

  •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He who does what is sinful is of the devil, because the devil has been sinning from the beginning. The reason the Son of God appeared was to destroy the devil's work.

    하나님의 자녀(Παιδιά του Θεού)

    하나님의 아들(Υιός του θεού)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이 만든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본질을 드러내는 핵심적인 고백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세 가지 중요한 의미를 포함합니다. 

    1️⃣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아들”이라는 표현은 시간 속에서 태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참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2️⃣ 아버지를 완전히 나타내신 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요 14:9)

    “하나님의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도록 드러내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성품, 사랑, 거룩, 긍휼은 곧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3️⃣ 구원을 이루시는 유일한 분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 3:16)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그분의 죽음은 단순한 한 인간의 희생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가 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이렇게 결론합니다.

    “아들을 가진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 5:12) 

    즉,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의 신성, 계시, 구원의 권위를 모두 담은 이름이며,
    이 고백 위에 기독교 신앙 전체가 서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자녀”**는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개념입니다.


    1️⃣ 하나님의 아들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만 해당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그의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사 9:6)
    “아버지의 독생하신 아들.” (요 1:14)

    • 예수님은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독생자이십니다.

    • 곧, 예수님은 본질상 하나님이신 아들입니다.

    • 그래서 예수님은 “아들”이시며, 우리는 그와 같은 위치가 될 수 없습니다.

    👉 예수 =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 본질이 하나님


    2️⃣ 하나님의 자녀

    반면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신분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 우리는 본래 죄 아래 있었으나,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양자(養子)**처럼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 즉, 우리는 은혜로 자녀가 된 존재입니다.

    👉 성도 = 믿음으로 입양된 하나님의 자녀


    핵심 정리

    구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
    대상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
    근거     본질적으로 하나님             은혜로 입양됨
    관계      본래부터 아들          믿음으로 자녀 됨
    성격          독생자                  양자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 (롬 8:29)
    이라 부르며,

    우리는 아들 안에서,
    아들을 통해,
    아들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는 아들이시고,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자녀”**는 같은 표현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와 적용 대상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 (The Son of God)

    이 표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하나이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 가장 완전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마 3:17)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 (요 10:30)

    예수님은

    • 창조 이전부터 계셨고

    •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이며

    • **독생자(μόνογενής, only begotten Son)**로서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아들 됨”은
    👉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 본래부터 하나님과 하나인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 (Children of God)

    반면,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 “너희는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5)

    우리는 본래 죄 가운데 태어난 존재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 거듭나고

    •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며

    • 은혜로 자녀가 됩니다.

    즉,

    구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
    대상 예수 그리스도 예수 믿는 성도
    근거 본질적, 영원한 아들 은혜로 입양된 자녀
    성격 유일무이한 독생자 믿음으로 된 많은 자녀
    관계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 하나님과 언약적·구속적 관계

    정리하면,

    예수님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 예수님을 “독생자”라 부르고,

    • 우리를 “양자”, “자녀”라고 부릅니다.

    이 구분은 예수의 신성과 우리의 구원의 은혜를 동시에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1월 13일(화) 요한일서 3:5-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But you know that he appeared so that he might take away our sins. And in him is no sin.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No one who lives in him keeps on sinning. No one who continues to sin has either seen him or known him.

    성경을 읽을 때마다 자주 언급되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안에(In Christ Jesus)"라는 용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표현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존재적 상태를 강조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한 이후에는 이 세상에서 절대로 죄를 짓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누구든지 죄를 짓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죄를 짓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죄를 짓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죄의 지배를 받는 영역 가운데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미 예수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죄의 영역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받는 영역 가운데 거한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삶을 존재 방식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체성으로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죄인으로 낙인을 받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은 용서받은 죄인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죄를 용서받기 위한 죄의 고백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의 존재적 상태를 선언하는 표현입니다. 

    요한일서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여기서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는 말은 그 사람이 더 이상 실수나 연약함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첫째는 신분이 바뀌었다
    둘째는 죄가 지배하는 영역에서 벗어났다
    셋째는 더 이상 “죄 아래 있는 자”로 규정되지 않는다 

    요한일서는 죄를 두 가지 차원으로 봅니다.

    1. 행위로서의 죄 – 신자도 넘어질 수 있음 (요일 1:8–10)

    2. 지배로서의 죄 – 죄가 삶을 통치하는 상태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는 말은
    그 사람이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에 속한 자가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 죄를 “짓지 않는다” → 완전무결이 아니라

    • 죄 가운데 “계속 거하지 않는다”

    • 죄를 당연한 삶의 방식으로 삼지 않는다

    결국 이 말씀은,

    “그는 더 이상 죄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다.” 라는 정체성의 선포입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는 예수님을 심문하던 빌라도의 선언입니다.
    (요한복음 19:6, 누가복음 23:4)

    이 말은 단순한 무죄 판결이 아니라,
    세상과 권력이 증언한 예수님의 완전한 의로움을 보여줍니다.

    • 사람들 앞에서 :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 하나님 앞에서 :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셨고” (벧전 2:22)

    • 사탄 앞에서 : “그는 죄가 없으시니” (히 4:15)

    예수님은 우리 대신 죄인이 되셨을 뿐,
    본질적으로는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 선언은 이렇게 복음으로 이어집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 있는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분께 죄가 없었기에, 우리의 죄가 그분께 전가될 수 있었고,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입혀질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이 한 문장은 곧,
    “그러므로 너에게는 정죄함이 없느니라”
    (롬 8:1)로 이어지는 복음의 문입니다.


    속죄제(贖罪祭, Sin Offering

    1. 정의

    • 속죄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죄와 부정(특히 부지중의 죄)을 속(贖)하여 용서를 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
    • 히브리어로 חַטָּאת (ḥaṭṭā’t) — “죄”와 “죄를 위한 제물” 두 가지 뜻을 가짐.
    • 제물의 피로 죄를 덮어(속죄)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우고,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교제를 회복. 

    2. 성경적 근거

    • 레위기 4~5장: 속죄제 규례 상세 기록.
    • 민수기 15:22~31: 부지중에 지은 죄를 위한 제사.
    • 히브리서 9~10장: 구약 속죄제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함. 

    3. 드리는 이유

    • 주요 대상: 의도적 반역이 아니라 실수, 무지, 부지중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경우.
    • 부정의 정결: 출산, 유출병, 나병 치유 후 정결 절차(레 12, 14, 15장).
    •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 속죄를 집행. 

    4. 제물의 종류와 드리는 자에 따른 구분

    드리는 자                           제물                                                근거

    대제사장, 온 회중      흠 없는 수송아지                       레 4:3, 4:14
    족장       흠 없는 숫염소                        레 4:22-23
    일반 백성   흠 없는 암염소 또는 암양                    레 4:27-28, 4:32
    가난한 자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레 5:7
    극빈자 고운 가루 1에바 10분의 1                           레 5:11 

    5. 제사 절차 (레위기 4장 기준)
    1. 죄 자백 — 제물을 회막 앞으로 끌고 와 머리에 안수(죄 전가 상징).
    2. 잡음 — 제물을 죽이고 피를 받아 제사장이 사용.
    3. 피 뿌림
      • 대제사장/온 회중 : 피를 성소 휘장 앞과 향단 뿔에 7번 뿌림.
      • 나머지 피는 번제단 밑에 붓기.
    4. 기름 태움 — 내장 기름, 간 껍질, 콩팥 주위 기름을 번제단에 불사름.
    5. 나머지 고기 처리
      • 대제사장/온 회중의 경우: 진영 밖에서 태움.
      • 일반 백성: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서 먹음(죄 사함의 확증).
    6. 속죄 선포 — 제사장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선언. 

    6. 속죄의 의미 


    • 죄의 심각성: 부지중의 죄라도 하나님 앞에서 속죄가 필요함을 보여줌.
    • 대속 사상: 죄인의 생명을 대신해 흠 없는 생물이 죽음.
    • 거룩성 유지: 하나님의 거룩함과 백성의 부정을 구분.
    •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으로서 단번에 속죄를 이루심(히 10:10-14).

    7. 예수 그리스도와 속죄제의 성취 

    • 구약 속죄제는 반복적·제한적이었음 → 예수의 십자가 희생은 단번에·완전하게 이루어짐.
    • 히브리서 13:11-12 — 예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당하심은 속죄제의 진영 밖 처리 규례와 연결.
    • 죄를 전가받으시고 피 흘려 하나님과의 화목을 완성.

    8. 요약 도표

    요소                속죄제                               예수 그리스도

    제물 흠 없는 짐승 흠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성소, 제단, 뿔에 뿌림 십자가에서 흘려 전 인류를 덮음
    반복성 매번 반복 단번에 영원한 속죄
    적용 대상 부지중의 죄 모든 죄
    제사장 아론 계열 멜기세덱 계열 대제사장(예수 자신)

    속죄제(贖罪祭): 부지중에 지은 죄를 위한 하나님과의 화해

    속죄제(Sin Offering)는 구약 성경의 율법에 따라 하나님께 드리는 다섯 가지 주요 제사 중 하나입니다. 이는 제사 드리는 자가 '부지중에(unintentionally)' 지은 죄나 부정한 상태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손상되었을 때, 그 죄를 용서받고 정결함을 회복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속죄제는 의도적인 반역죄가 아닌, 실수나 부주의, 또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 범한 죄를 위한 것입니다.


    1. 속죄제의 목적과 의의

    • 죄의 용서: 속죄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개인이 부지중에 범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의도적으로 율법을 어긴 '고의적인 죄(손 번쩍 드는 죄)'와는 구별됩니다.
    • 정결함의 회복: 단순히 죄를 용서받는 것뿐만 아니라, 부정한 상태(예: 출산, 접촉)로부터 정결함을 얻어 하나님과 거룩한 공동체 속에서 교제할 자격을 회복하는 의미도 가집니다.
    • 성소의 정화: 제사장의 죄나 온 회중의 죄로 인해 성소(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가 더러워졌을 때, 속죄제를 통해 성소까지 정결하게 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2. 제사 드리는 방법: 대상별 규정 (레위기 4장)

    속죄제에 사용되는 제물과 제사 절차는 죄를 지은 사람의 신분과 위치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는 죄의 책임과 영향력이 클수록 더 큰 제물을 요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① 대제사장 또는 온 회중의 죄

    • 제물: 흠 없는 수송아지
    • 절차:
      • 대제사장이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손을 얹음)하여 죄를 전가합니다.
      • 제물을 도살한 후, 피를 가지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손가락에 찍어 휘장(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는 막)에 일곱 번 뿌립니다.
      • 분향단 뿔에 피를 바르고, 남은 피는 성소 앞 번제단 밑에 쏟습니다.
      • 제물의 모든 기름과 콩팥 등은 번제단 위에서 태웁니다.
      • 나머지 몸 전체(가죽, 고기, 내장)는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으로 가져가 불태웁니다. (제사장이 먹을 수 없음)

    ② 족장(지도자)의 죄

    • 제물: 흠 없는 숫염소
    • 절차:
      • 제물 머리에 안수하고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도살합니다.
      • 피를 제사장이 손가락에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남은 피는 번제단 밑에 쏟습니다.
      • 제물의 모든 기름을 번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 남은 고기는 제사장이 성소에서 먹을 수 있습니다.

    ③ 평민의 죄

    • 제물: 흠 없는 어린 암염소 또는 어린 암양
    • 절차:
      • 족장의 경우와 동일하게 제물에 안수하고 도살합니다.
      • 피는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남은 피는 번제단 밑에 쏟습니다.
      • 기름은 불사릅니다.
      • 남은 고기는 제사장이 성소에서 먹을 수 있습니다.

    ④ 가난한 자의 죄

    • 제물: 비둘기 두 마리, 또는 고운 가루
    • 절차:
      • 가난한 자를 위한 배려로, 형편에 따라 산비둘기 두 마리고운 밀가루로 속죄제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 이 경우 한 마리는 속죄제로, 다른 한 마리는 번제(번제는 전부를 태우는 제사)로 드렸습니다.

    3. 신학적 의미와 예수 그리스도

    속죄제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동물의 죽음을 통해 죄가 용서되는 대속(Substitutionary Atonement)의 원리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직접 벌을 받는 대신, 죄 없는 제물이 대신 죽음으로써 죄의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약의 속죄제는 불완전했습니다. 매번 죄를 지을 때마다 반복적으로 제사를 드려야 했고, 고의적인 죄를 완전히 씻어주지는 못했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제사의 완성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은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드려진 단 한 번의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제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더 이상 동물의 피를 통한 속죄제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속죄제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동시에 보여주는 중요한 제사였으며,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1월 12일(월) 요한일서 3: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죄는 불법(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Everyone who sins breaks the law; in fact, sin is lawlessness.

    죄(罪)
    라는 한자를 파자(破字)하면 "네 가지(四)" "아닌 것(不)"이란 두 의미가 합성된 문자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죄를 네 가지 아닌 것들로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 불법(不法) breaks the law, illegality
    둘째, 불신(不信) do not believe, distrust
    셋째, 불선(不善) doesn't do the good, not good
    넷째, 불의(不義) all wrongdoing, injustice

    첫째, 불법(不法)  요한일서 3:4
    breaks the law, illegality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Everyone who sins breaks the law; in fact, sin is lawlessness.

    둘째, 불신(不信) 요한복음 16:9
    do not believe, distrust

    요한복음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In regard to sin, because men do not believe in me.

    마가복음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Whoever believes and is baptized will be saved, but whoever does not believe will be condemned. 

    셋째, 불선(不善) 야고보서 4:17
    doesn't do the good, not good

    야고보서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Anyone, then, who knows the good he ought to do and doesn't do it, sins.

    넷째, 불의(不義) 요한일서 5:17
    all wrongdoing, injustice

    요한일서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All wrongdoing is sin, and there is sin that does not lead to death.

    죄라는 한문자의 유래는 두 사람이 서로 등을 돌리고 서 있는 형상에서 출발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할 때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고 갈등의 골이 점점 더 깊어지면 등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주 보고 있던 사람이 등을 돌린 형상이 바로 죄라는 문자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죄는 하나님과 마주보고 서로 사랑하던 신령한 관계가 깨어져서 하나님을 떠난 형상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하나님과 사이가 좋은 상태라고 한다면 죄는 하나님과 사이가 멀어진 상태와 같습니다.
    마치 작은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먼 곳으로 도망친 모습을 연상합니다.

    사랑의 관계를 파괴하고 무너트리는 죄를 버리고 어서 주님 앞으로 나오는 길을 회개라고 합니다.








    1월 10일(토) 요한일서 3: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소망을 가진 자(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Everyone who has this hope in him purifies himself, just as he is pure.

    소망을 가진 자”는 성경, 특별히 요한일서 3장 3절에서 분명한 의미를 갖는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약속에 대한 확실한 바라봄입니다.

    요한일서 문맥에서의 소망은 

    1.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3:1)
    2. 장차 주께서 나타나실 때 그와 같아질 것이라는 약속 (3:2) 
    3. 그분을 그대로 뵙게 될 미래에 대한 확신 
    즉, 그리스도의 재림과 영화(榮化)에 대한 소망입니다.

    소망을 가진 자의 특징 (현재형 삶)

    요한은 “소망을 가진 자”를 감정이 아니라 삶의 방향으로 정의합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

    1.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음
    2. 회개 없는 신앙에 안주하지 않음
    3. 반복적이지만 진실한 회개 속에 삶
    4. 소망은 거룩을 낳는 동력입니다.

    주님의 성품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 기준 ❌ 
      세상 기준 ❌  
      그리스도의 성품이 기준 ⭕

    미래가 현재를 다스린다

    • 장차 될 영광이
      지금의 선택과 태도를 결정함 
       종말 신앙이 윤리적 삶으로 이어짐  


    성경이 말하는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비결”은
    겉모습을 관리하는 방법이 아니라 영혼과 삶을 실제로 정결하게 유지하는 영적 원리입니다.  

    1️⃣ 소망을 붙드는 것(출발점)

    요한일서 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정결의 시작은 의지나 결단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 무엇을 소망하느냐가 삶을 결정합니다

    • 주님을 뵙게 될 소망, 그분과 닮아가고 싶은 소망이 있을 때 자연히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정결은 미래의 소망에서 현재의 삶으로 흘러옵니다.

    2️⃣ 빛 가운데 행하는 것 (숨기지 않음)

    요한일서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비결은 죄가 없는 삶이 아니라, 숨기지 않는 삶입니다. 

    핑계 ❌  합리화 ❌  은폐 ❌
    빛 앞으로 가져오기 ⭕

    빛 앞에 드러나는 순간, 피가 역사합니다. 

    3️⃣ 죄를 즉시 자백하는 것 (지연하지 않음)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더러워지는 이유는 죄 때문이 아니라 미루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신앙 = 죄를 늦게 짓는 사람 ❌ 
    성숙한 신앙 = 빨리 회개하는 사람 ⭕

    즉시 자백 → 즉시 깨끗함

     4️⃣ 말씀으로 자신을 씻는 것 (지속 관리)

    에베소서 5:26

    “말씀으로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사”

    말씀은 거울이자 세정제입니다.
     - 말씀을 멀리하면 더러움에 둔감해지고
     - 말씀 앞에 서면 미세한 죄까지 보입니다

    정결은 한 번의 회개가 아니라 말씀에 계속 노출되는 삶입니다. 

    5️⃣ 주님을 닮으려는 방향을 유지하는 것

    요한일서 2: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완벽함이 목표가 아닙니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넘어질 수는 있어도 
    죄를 편하게 여기지는 않음
    더러움을 싫어하는 마음이 유지됨

    이 방향 자체가 이미 정결의 증거입니다. 

    핵심 요약 (비결 한 문장)

    주님을 만날 소망을 품고,
    죄를 숨기지 말고,
    즉시 자백하며,
    말씀 앞에 자신을 두고,
    그분을 닮으려는 방향을 유지하라.

    그러면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정결을 방해하는 5가지 착각

    1️⃣ “정결한 사람은 죄를 거의 안 짓는다”

    요한일서 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 착각 : 정결 = 무결점
    ✅ 진리 : 정결 = 죄를 인정하고 처리하는 능력

    👉 정결한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2️⃣ “한 번 회개했으니 이제 괜찮다”

    요한일서 1:7 (현재진행형)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착각 : 회개는 과거 사건
    ✅ 진리 : 회개는 관계 안에서 반복되는 삶의 리듬

    회개는 구원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깨끗이 유지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3️⃣ “마음만 깨끗하면 행동은 덜 중요하다”

    요한일서 3:18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착각 : 마음 ≠ 삶
    ✅ 진리 : 마음은 반드시 삶으로 흘러나옵니다

    👉 행동이 전혀 바뀌지 않는다면  마음의 정결도 점검이 필요합니다.  

    4️⃣ “정결을 말하면 율법주의다”

    요한일서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 착각 : 순종 = 율법주의
    ✅ 진리 : 사랑에서 나온 순종은 율법이 아니라 생명

    👉 문제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왜, 무엇을 의지해 지키느냐입니다.  

    5️⃣ “은혜가 있으니 긴장할 필요 없다”

    요한일서 2:1

    “이것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착각 : 은혜 = 방심
    ✅ 진리 : 은혜 =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게 만드는 힘

    은혜를 아는 사람일수록 죄에 더 민감해집니다.

      ② 정결한 삶 vs 율법주의 (명확한 차이)

    구분 정결한 삶 율법주의
    출발점      하나님과의 관계            자기 의
    동기        사랑, 소망        두려움, 비교
    죄에 대한 태도    즉시 인정·회개         숨김·합리화
    실패했을 때   다시 주께 나아감        자책 or 포기
    중심 질문     “주님이 기뻐하실까?”        “ 이 정도면 괜찮지?”
    열매        겸손, 자유          교만 or 위선

       정결한 삶은 관계를 지키려는 마음이고
    📌 율법주의는 기준을 지켜 자신을 증명하려는 태도입니다.  

    ③ 요한일서로 묵상하는 「정결 훈련표」 
    하루 10–15분, 부담 없이 지속하는 훈련

    🔹 매일 기본 질문 (3단계)

    1. 빛 앞에 서기

    • 오늘 말씀 앞에서 드러난 내 마음은?

    • 불편했지만 외면하고 싶은 부분은?

    1. 즉시 자백

    • 변명하지 않고 주님께 말할 수 있는 죄는?

    • 감정·태도·말·생각 중 하나만이라도 고백하기

    1. 방향 점검

    • 오늘 나는 주님을 닮은 선택을 했는가?

    • 아니면 육신의 편의를 따랐는가?

    🔹 주간 정결 묵상 스케줄 (요한일서)

    요일 본문 묵상 포인트
    요일 1:5–7     빛 가운데 행하고 있는가
    요일 1:8–9     즉시 자백하고 있는가
    요일 2:1–2     중보자 예수를 의지하는가
    요일 2:3–6     삶의 방향이 주님과 같은가
    요일 2:15–17     세상을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요일 3:3–6     소망이 삶을 정결케 하는가
    요일 5:18–21     마음의 우상을 버리고 있는가

    한 문장 기도 (정결의 기도)

    “주님, 오늘도 저를 숨김없이 빛으로 이끄시고 예수의 피를 의지해 깨끗함 가운데 걷게 하소서.” 

    마지막 핵심 정리

    정결은 자신을 단장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계속 나아가는 태도입니다.

     요한일서 전체 흐름에서 본 ‘소망을 가진 자’

    구분 설명
    거짓 소망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나는 구원받았다”
    참된 소망               빛 가운데 행하며 죄를 미워함
    결과                  담대함, 확신, 거룩한 삶

    “소망은 미래를 기다리는 마음이 아니라, 현재를 거룩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주를 다시 뵐 것을 믿는 사람은, 오늘의 자신을 방치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 요한일서 – 요한계시록의 소망 흐름

    서로 떨어진 책이 아니라,
    ‘소망의 점진적 계시’ 라는 하나의 흐름으로 읽어야 정확해집니다.  

    요한복음 – 요한일서 – 요한계시록

      “소망의 흐름” 한눈에 보기

            소망의 초점            핵심 질문
     요한복음                 영생의 시작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요한일서            영생의 확신과 검증                  “내가 정말 그 생명 안에 있는가?”
     요한계시록            영생의 완성과 성취                      “그 생명은 어디로 완성되는가?”  


    요한복음 : 소망의 시작

    영생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1.  영생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다. 
      2.  영생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들어오는 생명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소망의 출발점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생명을 받음

    요한복음의 핵심 소망
      1.  
    “지금” 생명을 소유함
      2.  빛 안으로 나아옴
      3.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짐 (요 5:24)

    소망은 선물로 주어진다

    요한일서 : 소망의 증거 

    영생은 “확인되고 증명되는 삶”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일 5:13)

    영생은 추상적 교리가 아니라 삶 속에서 드러나는 실재


    요한일서 소망의 특징 
    1. 빛 가운데 행함 
    2.죄를 미워하고 회개함
    3. 형제를 사랑함  

    끝까지 거함(μένειν)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 3:3)

    소망은 윤리적· 관계적 증거를 낳음  

    요한일서의 긴장

    • 이미 영생을 가졌으나

    •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음

    📖 “우리가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요일 3:2)

    👉 이것이 ‘이미–아직’의 소망 

    3️⃣ 요한계시록 : 소망의 완성

    🔹 감추어진 생명이 드러나는 순간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 (계 22:12)

    • 더 이상 믿음으로만 아는 하나님 ❌

    • 눈으로 뵈는 하나님

    📖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계 22:4) 


    🔹 요한계시록의 소망

     눈물, 사망, 고통의 종결 (계 21:4)

    어린양과의 혼인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과의 영원한 동거 

    소망은 역사의 결말이자 영생의 완성


       세 권을 관통하는 소망의 문장

    요한복음 : “생명을 얻었다”
    요한일서 : “그 생명 안에 거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 “그 생명이 완전히 드러난다”

    신학적 한 문장 요약

    “요한의 소망은 도피적 내세관이 아니라, 현재를 거룩하게 하고 끝을 확실하게 하는 생명의 소망이다.”


    설교 구조로 압축하면
    1. 받은 생명 (요한복음) 
    2. 확인되는 생명 (요한일서)
    3. 완성되는 생명 (요한계시록)



    1월 9일(금) 요한일서 2:24-2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원한 생명(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생명이니라.
    And this is what he promised us--even eternal life.


    영원한 생명이란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시작됩니다.
    그러나 아직은 완성된 영원한 생명이 아니므로 예수께서 재림 하실 때 완성되는 하나님과의 끊어지지 않는 생명적 관계를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영생이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 때 안다는 것(기노스코)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교제를 통하여 아는 것을 말합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과 어떻게 인격적인 관계룰 유지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그의 예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요일 2:4-5).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따라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은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빛 가운데 행하는 삶
    둘째는 사랑 가운데 행하는삶
    셋째는 죄를 미워하는 삶
    넷째는 진리 가운데 거하는 삶

    성경은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녹과 엘리야는 이 세상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살아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증거합니다.
    동행한다는(할라크) 것은 하나님과 온전한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적인 것들을 경험할 수밖에 없지만 주와 동행하려는 믿음으로 하루 하루 성실하게 살아갈 때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아시고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우리들을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온갖 염려와 걱정과 근심을 떨쳐버리고 주와 동행하는 즐거움만 생각하고 누려봅시다.


    ‘스스로 구원하라’는 말의 의미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Believe in the Lord Jesus, and you will be saved--you and your household).”

    그러나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Deliver yourself, 잠 6:5)”, “나의 백성아 너희는 그 중에서 나와 각기 나 여호와의 진노에서 스스로 구원하라(save yourselves From the fierce anger of the LORD, 렘 51:45)”는 말씀들처럼 ‘능동적(active, 能動的)’인 표현들도 있다.

    ‘구원’을 은혜의존적 ‘피동형(passive, 被動形)’으로 이해하는 정통 기독교인들에겐 이런 어법이 당혹스럽다. 이와 달리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를 모토로 삼는 자연종교가들(naturalreligioner)이나 ‘신인협동(Synergism)’을 부르짖는 알미니안들(arminians)에게 그것은 그들 주장의 논거가 된다.

    물론 이 말씀들은 문맥대로라면, 전자(잠 6:5)는 ‘자신을 파멸에 빠트리는 보증은 서지 말라. 혹 부지중에 보증을 섰다면,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듯,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듯 신속히 빠져나오라’는 뜻이다.

    후자(렘 51:45)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파멸할 세상 바벨론과 벗됨으로(약 4:4) 심판 때 그들이 받을 화(禍)에 참여하지 말라’는 뜻이다. 세상과의 구별된 삶을 요청하는 ‘성화에의 요청(고후 6:15-18)’이다.

    그럼에도 구태여 이 구절들을 ‘기독교 구원론’과 연관지어 설명하려는 것은, 공격자들이 그것을 자신들이 주장하는 ‘신인협동(神人協同) 구원론’의 근간으로 삼아 기독교 구원관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으라

    왜곡자들은 ‘스스로 구원하라’를 자신들의 ‘신인협동 구원’의 근거 구절로 오용(誤用)하지만, 사실 그 말씀은 ‘구원을 받으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를 뒷받침해 줄 예증 구절 중 하나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너희 스스로를 구원하라(Save yourselves from this corrupt generation, 행 2:24)”이다. 거두절미한 채 이 구절 자체만 해석하면, ‘너희 스스로의 힘으로 이 패역한 세대에서 건짐을 받으라’이다.

    그러나 전후 문맥과 연결지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죄 사함을 얻어 이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는 뜻이 된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38-41).”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 구원하라’가 ‘자력 구원에의 명령’이 아닌 전적 무능한 죄인들을 향해 ‘내가 주는 구원을 받으라’는 하나님의 자비에의 초대임을 알게 된다.

    ◈구원을 택하라

    ‘스스로 구원하라’는‘구원을 선택하라’는 뜻이다. ‘인간의 전적 무능(Total Depravity)’을 믿는 ‘개혁주의 신학’에선 자의적(arbitrary, 恣意的)이고 자결적(self-determinative, 自決的)인 냄새를 풍기는 ‘선택’이라는 용어를 쓰길 좋아하지 않으나(대신 ‘그리스도 안에 약속된 구원을 받아들인다’ 같은 말을 쓰길 좋아한다), 반대자들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부득불 그것을 차용한다.

    ‘스스로 구원하라’가 ‘구원을 택하라’와 동일시된 내용 중 하나가 다음 구절이 아닌가 한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신 30:19).”

    ‘생명과 복을 선택하느냐, 사망과 저주를 선택하느냐’는 ‘자신을 구원하느냐 자신을 파멸시키느냐’는 문제이고, 그 중 ‘생명과 복을 선택함’은 ‘스스로를 구원하는 일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우상’ 둘 중 하나를 택하도록 요구한 것 역시 ‘구원과 저주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말이고, 하나님을 택하는 것은 ‘스스로를 구원하는 일’임을 말씀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20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수 24:15, 20).”

    ◈그리스도께로 피하여 심판을 면하라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것’ 역시 ‘스스로 구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피난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감으로서 된다.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시 34:22).”

    신약적으론 구속자(救贖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이며, 그것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일’이다. “내게…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반면 죄인이 ‘심판을 받는 것’은 피난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가지 않은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40)”,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전 2:1).”

    또한 ‘정죄의 율법’에서 떠나는 것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다. 무지한 죄인들은 자기의 구원을 위해 율법아래 있기를 원하나 사실 그것은 ‘소가 스스로 푸줏간으로 들어가듯’,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갈 3:10).

    이는 ‘율법의 기능’이 구원이 아닌 심판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달리신 것은 우리를 그 저주스런 율법에서 우리를 속량하기 위함이었다(갈 3:13).

    그런데 어리석게도 죄인들은 ‘그리스도’가 아닌 ‘율법’ 아래 들어감으로서 자신들을 저주에 빠뜨리고 “그의 거룩한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다(히 10:29).”

    지금까지의 내용에서 보았듯, ‘스스로 구원하라’는 말씀에는 인간의 능력을 신뢰하게 하는 ‘자력 구원’이나 ‘신인협동 구원’의 여지가 일체 없다. 그것은 한 마디로 전적무능한 죄인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말이다.






    참 하나님이란 성경이 증언하는 유일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뜻합니다.
    우상이나 인간의 개념이 아니라, 스스로 계시며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입니다.


    📖 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

    1️⃣ 유일하신 하나님

    •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니 그 외에는 다른 이가 없느니라” (신 4:35)

    • 참 하나님은 대체 불가능한 분, 비교 대상이 없는 분입니다.

    2️⃣ 살아 계신 하나님

    •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 (렘 10:10)

    • 참 하나님은 개념·사상·종교 체계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4️⃣ 진리이신 하나님

    • “하나님의 아들이 오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이라” (요일 5:20)

    • 참 하나님은 진리의 기준이시며, 거짓과 혼합되지 않습니다.


    ⚖️ 참 하나님 vs 거짓 신

    참 하나님 거짓 신
    살아 계심 사람이 만든 개념
    말씀하심 침묵함
    죄를 드러내심 죄를 합리화함
    회개로 인도 자기만족으로 인도
    생명을 주심 결국 공허함   

    핵심 요약 
    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며, 그분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다.

    참 하나님이란 성경이 증언하는 유일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뜻합니다.
    우상이나 인간의 개념이 아니라, 스스로 계시며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

    •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니 그 외에는 다른 이가 없느니라” (신 4:35)

    • 참 하나님은 대체 불가능한 분, 비교 대상이 없는 분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 (렘 10:10)

    • 참 하나님은 개념·사상·종교 체계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진리이신 하나님

    • “하나님의 아들이 오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이라” (요일 5:20)

    • 참 하나님은 진리의 기준이시며, 거짓과 혼합되지 않습니다. 

    참 하나님 vs 거짓 신

    참 하나님 거짓 신
    살아 계심 사람이 만든 개념
    말씀하심 침묵함
    죄를 드러내심 죄를 합리화함
    회개로 인도 자기만족으로 인도


    핵심 정리

    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며,
    그분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다.



    그를 안다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요일 2:4-5)

    👉 앎 = 삶의 변화

    • 빛 가운데 행함

    • 사랑 가운데 거함

    • 죄를 미워함

    • 진리에 머묾

    이것이 인격적 앎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안다”
    하나님을 정보나 개념으로 아는 것을 넘어서, 살아 계신 분으로 관계 맺으며 아는 것을 뜻합니다. 

    지식적 앎 vs 인격적 앎

    지식적 앎

    •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앎

    • 성경 지식, 교리, 신학적 정보

    • 머리로 아는 믿음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약 2:19)

    👉 참되지만 구원과 관계를 보장하지는 않음

    ❤️ 인격적 앎

    • 하나님을 ‘그분 자신’으로 아는 것

    •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앎

    • 사랑·신뢰·순종·교제가 포함됨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여기서 ‘안다’(γινώσκω, 기노스코)는 경험적· 관계적 앎을 의미합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특징

    ① 하나님과 대화가 있다

    • 기도는 독백이 아니라 교제

    •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믿음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요 10:27) 

    ②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간다

    • 무엇이 기뻐하시고 슬퍼하시는지 점점 분별

    • 율법이 아니라 사랑의 기준으로 순종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5) 

    ③ 죄에 대해 민감해진다

    • 죄를 합리화하지 않고 관계의 아픔으로 느낌

    • 회개는 형벌 회피가 아니라 관계 회복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시 51:4) 

    ④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향이 바뀐다

    • 문제보다 하나님을 먼저 찾음

    • 계산보다 신뢰가 앞섬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라” (잠 3:5)  

    ⑤ 사랑이 삶으로 드러난다

    • 하나님 사랑 → 이웃 사랑으로 연결

    • 신앙이 ‘형식’이 아니라 ‘삶의 열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일 4:21)  

    요한일서 관점에서 본 인격적 앎

    요한일서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를 안다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요일 2:4)

    👉 앎 = 삶의 변화

       빛 가운데 행함
      사랑 가운데 거함
      죄를 미워함
      진리에 머묾

    이것이 인격적 앎의 증거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연구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고 신뢰하며 동행하는 ‘주님’으로 아는 것
    입니다.


    소망을 가진 자”는 성경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현재의 삶 속에서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특히 요한일서의 흐름에서 매우 분명한 의미를 가집니다.

    핵심 성경(요한일서 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소망의 내용은 무엇인가?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소망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 (요일 3:1)

    •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와 같이 될 것이라는 약속 (요일 3:2)

    •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 (요일 5:13)

    👉 즉, 장차 될 영광스러운 상태에 대한 확실한 약속입니다.

    소망을 가진 자의 특징

    🔹 ① 현재의 삶이 달라진다

    소망은 미래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

    •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음 
      회개 없는 신앙에 머물지 않음 
      빛 가운데 행하려는 실제적 삶 (요일 1:7)

    🔹 ② 죄와 타협하지 않는다

    소망은 방종의 근거가 아니라 거룩의 동력입니다.
    “어차피 구원받았으니 괜찮다”가 아니라
    👉 “주를 뵐 날이 있기에 지금을 정결하게 산다”

    🔹 ③ 인내하며 흔들리지 않는다

    소망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고난을 견디는 힘입니다.

    • 세상이 이해하지 못해도 (요일 3:1)

    • 당장 결과가 없어 보여도
      👉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걷는 태도

    소망이 없는 상태와의 대비

    소망을 가진 자       소망이 없는 신앙
       거룩을 추구함             죄에 둔감함
      회개가 지속됨            자기합리화
     주의 재림을 의식함              현세 중심
      정체성이 분명함          신앙이 형식화됨

    한 문장 요약

    소망을 가진 자란, 장차 주를 뵐 것을 믿기에 오늘의 삶을 정결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영원한 생명의 정의 (요한 신학)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원한 생명 =

    • 무한한 시간 ❌

    • 천국 티켓 ❌

    • 하나님을 ‘아는’ 관계

    여기서 “안다(γινώσκω)”는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언약적 교제를 뜻합니다.

    언제 시작되는가?

     요한일서 5:13
     
    “너희로 하여금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영생은 죽은 뒤에 시작되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믿는 자 안에서 이미 시작된 생명입니다.

    • 이미 시작됨 → 현재적 영생

    • 완성될 것 → 미래적 영생

    영원한 생명의 근원

     요한일서 5:11–12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핵심 :  영생은 행위의 보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거룩한 삶의 관계

    요한일서는 영생을 가진 자의 특징을 분명히 말합니다.

    요일 3:15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그 속에 영생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너희가 아는 바라”

    영생은윤리적 열매를 반드시 낳습니다. 

    • 사랑

    • 빛 가운데 행함

    • 죄를 미워함

    • 회개하는 삶

    ⚠️ 영생 ≠ 방종의 면허 

     “속히 오리라”와 영원한 생명 (연결)

    예수께서 “속히 오리라” 하신 이유는
    영생을 중단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요일 3:2

    “그가 나타나시면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지금은 영생을 소유함
    👉 그날에는 영생을 완전히 드러냄 

    한 문장 요약

    영원한 생명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시작되어
    재림 때 완성되는 하나님과의 끊어지지 않는 생명적 관계입니다.







    **영원한 생명(永遠한 生命)**은 성경에서 단순히 끝없이 오래 사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생명을 말합니다. 특별히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는 이를 아주 분명하게 정의합니다.


    1️⃣ 영원한 생명의 정의 (요한의 관점)

    📖 요한복음 17:3

    “영원한 생명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영원한 생명 =
    하나님을 ‘아는’ 관계적 생명
    (지식이 아니라 교제·연합)


    2️⃣ 언제 시작되는가?

    ❌ 죽은 후에만 시작되는 것 아님
    지금 이미 시작됨

    📖 요한복음 5:24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요한일서 5:13

    “너희로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 영원한 생명은
    미래의 소망 + 현재의 소유


    3️⃣ 영원한 생명은 ‘누가’ 가지는가?

    📖 요한일서 5:11–12

    “이 생명은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것이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 조건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 =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


    4️⃣ 영원한 생명의 특징

    ✨ ①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생명

    📖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 죄 가운데 거하지 않음


    ✨ ② 빛 가운데 행하는 생명

    📖 요한일서 1:7

    “빛 가운데 행하면…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회개 없는 완전함 ❌
    → 회개하는 삶 ⭕


    ✨ ③ 사랑으로 증명되는 생명

    📖 요한일서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줄을 알거니와”

    → 영원한 생명은 열매로 드러남


    5️⃣ 흔한 오해 정리

    오해 성경적 진리
    영원한 생명 = 천국 입장권
    영원한 생명 = 관계적 생명
    죽고 나서 시작
    지금부터 누림
    믿는다 말만 하면 됨
    빛·사랑·진리로 나타남

    6️⃣ 한 문장 요약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부터 시작되는 하나님과의 생명적 교제이며, 빛과 사랑과 진리로 증명되는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생명(永遠한 生命)**은 성경에서 단순히 끝없이 오래 사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생명을 말합니다. 특별히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는 이를 아주 분명하게 정의합니다.


    1️⃣ 영원한 생명의 정의 (요한의 관점)

    📖 요한복음 17:3

    “영원한 생명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영원한 생명 =
    하나님을 ‘아는’ 관계적 생명
    (지식이 아니라 교제·연합)


    2️⃣ 언제 시작되는가?

    ❌ 죽은 후에만 시작되는 것 아님
    지금 이미 시작됨

    📖 요한복음 5:24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요한일서 5:13

    “너희로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 영원한 생명은
    미래의 소망 + 현재의 소유


    3️⃣ 영원한 생명은 ‘누가’ 가지는가?

    📖 요한일서 5:11–12

    “이 생명은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것이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 조건은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 =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


    4️⃣ 영원한 생명의 특징

    ✨ ①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생명

    📖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 죄 가운데 거하지 않음


    ✨ ② 빛 가운데 행하는 생명

    📖 요한일서 1:7

    “빛 가운데 행하면…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회개 없는 완전함 ❌
    → 회개하는 삶 ⭕


    ✨ ③ 사랑으로 증명되는 생명

    📖 요한일서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줄을 알거니와”

    → 영원한 생명은 열매로 드러남


    5️⃣ 흔한 오해 정리

    오해 성경적 진리
    영원한 생명 = 천국 입장권
    영원한 생명 = 관계적 생명
    죽고 나서 시작
    지금부터 누림
    믿는다 말만 하면 됨
    빛·사랑·진리로 나타남

    6️⃣ 한 문장 요약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부터 시작되는 하나님과의 생명적 교제이며, 빛과 사랑과 진리로 증명되는 생명이다.

    원하시면
    👉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확신”
    👉 “영원한 생명을 잃을 수 있는가?”
    👉 “영원한 생명 vs 천국”
    같은 주제로 더 깊이 이어서 설명해 드릴게요.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확신” 👉 “영원한 생명을 잃을 수 있는가?” 👉 “영원한 생명 vs 천국”

    아주 중요한 세 주제입니다. 요한일서의 흐름에 맞춰 하나씩, 그러나 서로 연결되도록 정리해 드릴게요.


    1️⃣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확신

    🔑 핵심 명제

    영원한 생명은 ‘느낌’이 아니라 ‘근거’ 위에 있는 확신이다.

    📖 요한일서 5:13

    “너희로 하여금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 요한은 성도들이
    막연히 기대하도록 쓴 것이 아니라
    👉 ‘알게 하려’ 기록했습니다.


    구원의 확신의 3가지 성경적 근거 (요한일서)

    객관적 근거: 예수 그리스도

    📖 요일 5:11–12

    “이 생명은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것이라”

    ✔️ 확신의 중심 = 내 믿음의 강도 ❌ / 예수의 실재 ⭕


    내적 증거: 성령의 증언

    📖 요일 3:24

    “그의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 성령은

    • 죄를 미워하게 하고

    • 진리를 사랑하게 하며

    •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심


    외적 열매: 삶의 변화

    📖 요일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 순종은 구원의 조건 ❌
    ✔️ 구원의 증거 ⭕


    ⚠️ 주의

    • 의심이 있다고 구원 없음 ❌

    • 회개 없는 안일함은 위험 ⭕


    2️⃣ 영원한 생명을 잃을 수 있는가?

    🔍 결론부터 말하면

    참으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는 그것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소유하지 않은 신앙 고백은 드러난다.


    📖 요한일서의 결정적 구절

    📖 요한일서 2: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 떠남의 이유는
    잃어버림 ❌ / 본래 소유하지 않음 ⭕


    왜 영원한 생명은 잃지 않는가?

    ① 생명의 성질 때문

    📖 요일 5:11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이라”

    → 영원한 생명 =
    ❌ 조건부 생명
    하나님의 선물


    ② 생명의 근원이 ‘그리스도’이기 때문

    📖 요일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 내가 붙잡는 생명 ❌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생명 ⭕


    ⚠️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모습 성경적 판단
    죄 가운데 계속 거함 영생의 증거 없음
    회개 없이 안주 자기 기만
    떠났으나 끝까지 빛을 거부 처음부터 거듭나지 않음

    📖 요일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 죄 안에 거하지 않음)


    3️⃣ 영원한 생명 vs 천국

    ❗ 매우 중요한 구분

    구분 영원한 생명 천국
    본질 생명 장소/나라
    시작 지금 죽음 이후 완성
    성격 관계 상태
    중심 하나님과의 연합 하나님의 통치

    📖 성경의 관점

    ✔️ 영원한 생명

    📖 요 17:3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관계의 생명


    ✔️ 천국

    📖 마 25:34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


    중요한 진리

    천국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지,
    천국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니다.

    • 영원한 생명 = 자격

    • 천국 = 완성


    🧭 전체 요약 한 눈에

    ✔️ 영원한 생명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는 생명
    ✔️ 구원의 확신은 예수·성령·열매 위에 세워짐
    ✔️ 참된 영생은 잃지 않으나, 거짓 신앙은 드러남
    ✔️ 천국은 영생의 결과이지 근원은 아님











    요한일서 – 요한계시록 신학적 연결

    요한계시록은 요한일서의 종말적 완성
    요한일서는 요한계시록의 현재적 적용

    핵심 주제 연결표

    요한일서

           요한계시록

              신학 연결

    하나님은 빛

       어린양의 영광

            빛은 인격이며 심판 기준

    하나님은 사랑

        어린양의 피   

             사랑은 십자가에서 정의로 드러남

    적그리스도

    짐승·거짓선지자

              영의 미혹 → 제국적 체계

    세상과 구별

    바벨론 심판

              세상 사랑의 종말

    이기는 자

    이기는 자의 상급

                  믿음 = 승리

    담대함

    인 맞은 성도

                 심판 앞에서의 담대함

    적그리스도 개념의 확장

    • 요한일서
    • →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가 세상에 있다”
    • (교리·영적 미혹)

    • 요한계시록
    • → 그 영이 정치·경제·종교 체계로 구체화됨
    • (짐승, 바벨론)

    즉, 적그리스도는 한 인물로 시작되지 않는다.
         먼저 ‘영’으로 오고, 나중에 ‘체계’로 완성된다.

    Ⅳ.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

    • 천년왕국→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 일곱 교회→ “교회는 종말을 기다리며 지금 심판받는다”

    • 요한 신학→ “사랑 안에 거하지 않는 진리는 거짓이고,
    • 진리 안에 서지 않는 사랑은 미혹이다”



    1월 8일(목) 요한일서 2:18-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적그리스도(2:22)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Who is the liar? It is the man who denies that Jesus is the Christ. Such a man is the antichrist--he denies the Father and the Son. 


    적그리스도(敵基督, Antichrist)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대적하며, 그 자리를 대신하려는 거짓 세력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성경은 이를 한 인물로만 한정하지 않고, 영(정신)· 사상· 운동· 체계까지 포함해 다층적으로 설명합니다.

    성경에서 ‘적그리스도’라는 용어

    👉 ‘적그리스도’라는 단어 자체는 요한서신에만 직접 등장합니다.

    • 요한일서 2:18 /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 요한일서 2:22 /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누구냐…”

    • 요한일서 4:3 /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라”

    • 요한이서 1:7 /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 적그리스도라”

    핵심 요지

    • 예수의 성육신, 메시아 되심, 주권을 부인

    • 교회 안에서 일어나 성도를 미혹함 

    적그리스도의 핵심 특징 (성경 종합)

    구분 내용
         정체     예수를 그리스도로 부인
        방식    거짓 가르침, 미혹, 대체
       위치    종종 교회 안에서 활동
       본질    “적(反)”이자 “대신(代)”
     시대성         말세 전반에 지속적으로 존재

    ※ ‘anti’는 반대 + 대신하다 두 의미를 모두 가짐 

    적그리스도 vs 관련 종말 개념

    성경은 여러 표현으로 같은 실체를 다른 각도에서 설명합니다.

    표현 성경 강조점
    적그리스도    요한서신      그리스도 부인
    불법의 사람    살후 2장      하나님 대적, 자기를 신격화
    작은 뿔    다니엘 7장      권세·박해
    짐승    계시록 13장      정치·종교적 체계
    거짓 선지자    계 13, 19장      기적을 통한 미혹

    👉 서로 다른 인물이라기보다, 같은 악의 세력을 다른 측면에서 묘사 

     “한 사람인가, 여러 사람인가?”

    성경적 균형은 둘 다입니다.

    • ✔️ 현재적:
      → 이미 세상에 있는 ‘적그리스도의 영’

    • ✔️ 종말적:
      → 마지막 때 집약적으로 드러날 대표적 인물/체계

    📖 요한일서 2:18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오늘 교회에 주는 분별 기준

    요한은 적그리스도를 미래 추측 대상이 아니라 현재 신앙을 점검하는 기준으로 제시합니다.

    분별 질문

    1. 예수를 주(主)로 고백하는가?
    2. 십자가와 성육신을 왜곡하지 않는가? 
    3. 복음보다 다른 대안적 구원을 말하지 않는가?
    4. 은혜 없이 권력·성공·체험을 절대화하지 않는가?

    적그리스도의 핵심 전략

    “그리스도를 밀어내고, 다른 것을 중심에 두는 것” 

    요약 한 문장 

    적그리스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대체하려는 모든 영과 가르침이며, 말세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용어의 의미

    • 적그리스도(ἀντίχριστος)

      • anti = “대적하여”, “대신하여”

      •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그리스도를 대신하려는 자 또는

    • 단순히 “예수님을 반대하는 인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모든 거짓 영적 권세를 포함합니다. 

    요한일서의 핵심 가르침

    요한은 적그리스도를 단수 인물보다 현재 역사 속에 이미 활동하는 영적 실재로 설명합니다.

    요한일서 2:18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적그리스도는 이미 왔고, 여럿입니다.

     요한일서 2:22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

     핵심 기준 :

    • 예수 = 그리스도이심을 부인

    •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부인 

    적그리스도의 특징 - 요한서신 중심

    1. 교회 안에서 나옴

      •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일 2:19)

    2. 정통 신앙의 언어를 사용함

      • 겉모습은 경건, 내용은 왜곡

    3. 그리스도의 인격·사역을 훼손

      • 참 하나님·참 인간이심을 부인

    4. 성도를 미혹함

      • 특별한 지식, 새 계시, 다른 복음 주장 

    단수 적그리스도 vs 복수 적그리스도

    구분 설명
    복수 지금도 활동 중인 거짓 교사·영
    단수 종말에 나타날 최종적 대적자 (계 13장, 살후 2장)

    ➡ 요한은 현재적 분별에 초점을 둡니다.
    “언젠가 올 인물”보다 지금 속이고 있는 영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요한일서의 흐름에 따르면:

    1. 기름 부음(성령)을 의지함 (요일 2:20, 27)

    2. 처음부터 들은 복음에 거함

    3. 사랑과 진리로 행함

    4.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함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방식은
    논쟁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함입니다. 

    한 문장 요약

    적그리스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대신하려는 모든 영과 가르침이며, 이미 세상과 교회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짐승’과 ‘적그리스도’의 관계

    동일 개념
    이라기보다 기능적으로 연결된 종말론적 실체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 전체 흐름에 가장 정확합니다. 

    기본 결론 한 줄

    요한계시록의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종말론적·정치적 구현이며, 적그리스도의 영이 역사 속에서 최종적으로 집약된 형태이다. 

    성경 용어 비교

    구분            적그리스도     짐승
    주요 본문           요한일서       요한계시록
    초점           영·가르침      권세·체제
    성격       미혹하는 영      핍박하는 권력
               많음      주로 단수
    활동 영역         교회 안      세상 권력

    ➡ 요한은 서신에서는 교리적 미혹,
    계시록에서는 제도·권력의 박해를 보여줍니다. 

    두 짐승의 구조(계 13장)

    ① 바다에서 나온 짐승

    • 정치·군사·경제 권력

    • 사단에게서 권세를 받음

    • 온 세상을 다스림

    • 성도를 핍박함

    적그리스도의 ‘왕적(王的) 모습’ 

    ② 땅에서 나온 짐승 (거짓 선지자)

    • 종교적·영적 미혹 담당

    • 첫째 짐승을 경배하게 함

    • 표적과 기사를 행함

    • 짐승의 표를 강요

    적그리스도의 ‘선지자적 모습’

    📌 요한일서의 “거짓 교사” 개념과 직접 연결됨 

    사탄의 모조 삼위일체

    참 하나님 사탄의 모조
    성부 용(사탄)
    성자 바다 짐승
    성령 땅 짐승(거짓 선지자)

    ➡ 적그리스도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모방입니다.
    대적이라기보다 대체하려는 존재입니다. 

    ‘666’과 적그리스도

    • 불완전의 극치 (7에 미치지 못함)

    • 하나님의 인을 모방한 가짜 표

    • 신앙과 경제·삶을 결합한 통제 수단

    단순한 숫자 암호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인간 권세를 절대화하는 체제”의 상징  

    요한일서와의 신학적 연결

    요한일서           요한계시록
    예수의 성육신 부인            짐승 숭배
    거짓 가르침            거짓 기적
    교회 안 미혹           세상 통치
    성령의 기름 부음          하나님의 인

    같은 영, 다른 무대 

    성도에게 주는 경고

    1. 충성의 대상이 분명한가?

      • 편리·안전·번영 vs 어린양

    2. 경배의 방향은 어디인가?

      • 성공·권력·체제 vs 하나님

    3. 표를 선택하는 삶인가, 인을 지킨 삶인가?

    👉 적그리스도와 짐승의 싸움은 정보 전쟁이 아니라 예배 전쟁입니다.  

    한 문장 종합

    요한계시록의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영이 정치·종교 권세로 집약된 종말의 모습이며, 궁극적으로 성도를 ‘경배의 대상’에서 떠나게 하려는 사탄의 모조 왕국이다.


    적그리스도(ἀντίχριστος) 
    성경, 특히 요한일서에서 핵심적으로 다뤄지는 개념입니다.  

    용어의 의미  
      ἀντί(안티) : ‘반대하여’뿐 아니라 ‘대신하여’라는 뜻도 포함   
       → 그리스도를 부정하거나, 그리스도 자리를 대신하려는 존재 

    요한일서의 가르침 (핵심 본문)

    요한일서 2:18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단수 + 복수 모두 사용

    • 말세에 나타날 최종적 적그리스도

    • 동시에 이미 활동 중인 많은 적그리스도  

    요한일서 2:22.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누구냐 그가 적그리스도니…” 

     정의가 분명함
       
    예수 =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핵심을 부정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부인

    요한일서 4: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라”
        적그리스도는 한 인물만이 아니라 ‘영(spirit)’으로 역사 

    적그리스도의 본질 (요한 신학 관점)

    구분 내용
         출처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요일 2:19)
        특징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거짓 가르침
     핵심 문제                                       그리스도론 왜곡
        상태                  빛이 아닌 어둠, 진리가 아닌 거짓

     즉, 적그리스도는 노골적 무신론자보다,
    예수를 말하지만 참 예수를 왜곡하는 자로 나타남  

    바울· 요한계시록과의 연결 
      살후 2장 :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
      계 13장 : 짐승(권세·숭배·기적)

     요한일서 : 현재적·영적 분별 강조
     계시록/바울 : 종말적·권세적 실체 강조
      - 서로 모순이 아니라 관점의 차이 

     신앙적 적용 (요한일서 맥락)

    요한일서에서 적그리스도 논의는 항상 이것과 연결됩니다. 
      빛 vs 어둠 
      진리 vs 거짓 
      사랑 vs 미움 
      아이–청년–아비의 영적 성숙

     결론 :   적그리스도를 두려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너희가 기름부음을 받아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
                  →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1월 7일(수) 요한일서 2:15-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The world and its desires pass away, but the man who does the will of God lives forever.


    이 표현은 요한일서 2:16에 나오는 말씀으로, 성경이 말하는 세상에 속한 삶의 본질을 세 가지로 요약한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1. 육신의 정욕 (ἡ ἐπιθυμία τῆς σαρκὸς)

    • 타락한 육체가 원하는 욕망  

    • 하나님을 배제한 채 쾌락·본능·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욕구

    내용 예

    • 음란, 방탕, 탐식, 중독

    • “하고 싶다”, “느끼고 싶다”가 기준이 되는 삶

    특징

    • 감각 중심

    • 즉각적 만족을 추구

    • 성령의 다스림과 반대됨(갈 5:16–17)  

    2. 안목의 정욕 (ἡ ἐπιθυμία τῶν ὀφθαλμῶν)

    • 눈으로 보고 소유하려는 욕망

    • 외형·비교·소유에 집착하는 마음

    내용 예

    • 재물, 명품, 성공, 외적 조건

    • 남과 비교하며 생기는 탐심·시기

    특징

    • “보는 것”이 가치 판단 기준

    • 소유가 곧 행복이라는 착각

    • 믿음이 아닌 시야(보이는 것)으로 사는 삶(고후 5:7과 대조) 

    3. 이생의 자랑 (ἡ ἀλαζονεία τοῦ βίου)

    • 현재의 삶(지위·능력·성취)을 자랑하는 교만

    •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자기 확신

    내용 예

    • 학벌, 권력, 업적, 영적 교만

    • “나는 남들과 달라”, “나는 괜찮아”

    특징

    • 자기중심성

    • 의존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나’

    • 바리새인의 태도와 연결(눅 18:11–12) 

    세 가지의 공통점

    공통 특징 설명
    출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님”
    방향 하나님이 아닌 자기 중심
    결과 영적 생명 약화, 하나님 사랑과 충돌
    종말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감”(요일 2:17) 

    창세기·예수님의 시험과의 연결

    이 세 가지는 성경 전체에 반복되는 유혹의 구조입니다.

    • 하와의 타락 (창 3:6)

      • 먹음직 → 육신의 정욕

      • 보암직 → 안목의 정욕

      •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움 → 이생의 자랑

    • 예수님의 시험 (마 4장)

      • 돌로 떡 만들라

      • 세상 영광 보여줌

      •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 예수님은 말씀으로 모두 이기심 

    요한의 결론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

    이는 세상을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 삶의 기준과 사랑의 방향을 분명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 세상에 살되

    • 세상에 속하지 않고

    •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로 살라
      (요일 2:17)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성경에서 단순한 종교 행위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 뜻이 삶으로 드러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1. 핵심 성경 구절

    •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신앙의 고백(말)보다 **순종(행함)**이 기준임을 분명히 합니다.

    • 마태복음 12:50 / 마가복음 3:35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예수와의 참된 가족 관계에 들어갑니다.

    • 요한일서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하나님의 뜻을 행함은 영원성과 연결됩니다.

    2.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추상적으로 두지 않습니다.

    ① 구원의 뜻

    • 요한복음 6:40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 믿음이 하나님의 뜻의 출발점

    ② 거룩함의 뜻

    •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 삶의 방향과 성품의 변화

    ③ 사랑과 순종의 뜻

    •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 계명 준수 = 사랑의 표현

    3. ‘말하는 자’ vs ‘행하는 자’

    구분 말만 하는 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신앙 고백 중심 순종 중심
    기준 자기 확신 말씀
    열매 외적 행위 삶의 변화
    결과 주님이 “모른다” 하심 주님과의 참된 관계

    (마 7:22–23 참조)

    4. 영적 성숙 단계와의 연결

    (요한일서의 아이–청년–아비 구조와 연결하면)

    • 아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단계

    • 청년: 하나님의 뜻을 싸우며 행하는 단계

    • 아비: 하나님의 뜻과 하나가 된 단계
      →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은 성숙의 결과이지 단번의 행위가 아닙니다.

    5. 한 문장 요약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믿음을 말로 증명하는 자가 아니라, 순종으로 드러내는 자이며, 그에게서 영원한 생명의 열매가 나타난다.”


    핵심 본문 정리

    📖 고린도전서

    • 육신에 속한 사람 (σάρκινος / σαρκικός)

      • 고전 2:14, 3:1–3

    • 신령한 사람 (πνευματικός)

      • 고전 2:15, 3:16

    📖 요한일서

    • 아이 – 청년 – 아비

      • 요일 2:12–14

    👉 두 서신은 같은 성령의 관점에서,  구원 이후, 사람이 어떻게 자라야 하는가를 설명함 

    통합 구조 한눈에 보기

    육신적 신자 → 싸우는 신자 → 신령한 성숙자 

     단계별 통합 비교표 (핵심)

    통합 단계 고린도전서       요한일서 영적 특징         핵심 문제 / 열매
    ① 미성숙 단계   육신에 속한 자 (고전 3:1)        아이 구원받았으나 육의 지배 큼        분쟁·시기·사람 자랑
    ② 성장 단계 신령함을 배워감 (고전 2:12)        청년 말씀으로 육을 이김           영적 전투와 승리
    ③ 성숙 단계 신령한 자 (고전 2:15)        아비 성령의 분별과 안정           하나님을 깊이 앎

     본질적 연결 설명

    🔹 ① 육신에 속한 자 = 요한일서의 ‘아이’

    고전 3:1–3

    “내가 너희를 신령한 자로 말하지 못하고 육신에 속한 자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말하노라”

    • 아이의 특징

      • 젖을 먹음 (기본 진리만 반복)

      • 사람 중심: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 겉으로는 교회 안에 있으나 육의 논리로 판단

    👉 요한일서의 아이 = 고린도전서의 육신적 신자 

    🔹 ② 싸우는 단계 = 요한일서의 ‘청년’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 청년의 핵심:

      • 말씀이 안에 거함

      • 악한 자와의 실제 전투

    • 고린도전서에서는:

      • 하나님의 영을 받음

      • 세상 지혜를 분별하기 시작

    👉 육에서 성령으로 이동하는 전환 구간 

    🔹 ③ 신령한 자 = 요한일서의 ‘아비’

    고전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 아비의 특징:

      •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

      • 흔들리지 않는 중심

    • 신령한 자의 특징:

      • 성령의 분별

      • 십자가의 지혜로 판단

    👉 사역이나 감정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증거 

     신학적으로 중요한 균형

    ❗ 오해하면 안 되는 점

    • 육신에 속한 자 ≠ 불신자

    •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풍성했으나 육신적

    • 요한일서의 아이도 죄 사함을 받은 자

    👉 문제는 *“구원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누가 지금 나를 다스리고 있는가”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하면

    고린도전서는 ‘누가 나를 지배하는가’를 묻고,
    요한일서는 ‘그 지배 아래서 얼마나 자랐는가’를 보여준다.

    7️⃣ 자기 점검 질문

    • 내 판단 기준은 사람·감정·환경인가?

    • 말씀과 성령이 내 안에 거하고 있는가?

    • 나는 여전히 논쟁하는 신자인가, 분별하는 성숙자인가?







    1️⃣ 큰 구조 한눈에 보기

    육에 속한 상태 → 영적 성장 → 성령에 속한 성숙

    요한일서의 세 단계는
    👉 육을 벗어나는 과정,
    👉 성령 안에서 자라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2️⃣ 단계별 연결 설명

    🔹 ① 아이 (τεκνία / παιδία) — 구원은 있으나 미성숙

    (육의 영향이 강한 단계)

    본문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요일 2:12)

    특징

    • 죄 사함의 은혜는 분명함 (구원의 확신)

    • 그러나 여전히:

      • 감정 중심

      • 환경에 쉽게 흔들림

      • 말씀보다 경험·사람에 의존

    • 고린도전서의 **‘육신에 속한 신자’**와 유사 (고전 3:1–3)

    연결
    👉 구원은 받았으나 여전히 ‘육에 속한 영향’ 아래 있는 상태
    👉 신앙의 기준이 “느낌·사람·상황”

    🔹 ② 청년 (νεανίσκοι) — 영적 전쟁과 승리의 단계

    (육을 이기기 시작하는 단계)

    본문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심이요”(요일 2:13–14)

    특징

    • 말씀이 안에 거함 (암송·순종·적용)

    • 시험과 유혹이 있으나 싸워서 이김

    • 신앙이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

    •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 vs 육의 실제 전투 경험

    연결
    👉 육에 속한 삶에서 벗어나, 성령을 따라 살기 시작
    👉 “육신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단계”

    🔹 ③ 아비 (πατέρες) — 하나님을 아는 깊은 성숙

    (육을 초월한 성령의 성숙 단계)

    본문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라”(요일 2:13–14)

    특징

    • ‘무엇을 아느냐’보다 ‘누구를 아느냐’

    • 상황·사역·감정에 흔들리지 않음

    • 말씀, 능력, 체험을 넘어 하나님 자신을 앎

    • 로마서 8장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

    연결
    👉 더 이상 육이 중심이 아님
    👉 존재 자체가 성령의 열매가 됨


    3️⃣ 핵심 비교 표

    단계 영적 상태 육과의 관계 중심 특징
    아이 구원받음 육의 영향 큼 죄 사함의 기쁨
    청년 성장 중 육과 싸워 이김 말씀과 전투
    아비 성숙 육을 초월 하나님을 앎

    4️⃣ 중요한 신학적 포인트

    • 아이 단계 ≠ 정죄 대상
      출발점

    • 문제는 아이에 머무르는 것

    • 요한일서는 계속해서 말함:

      “어둠에서 빛으로, 육에서 성령으로,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5️⃣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 나는 지금 아이의 안정, 청년의 싸움, 아비의 깊이 중 어디에 있는가?

    • 내 신앙의 중심은
      👉 *‘죄 사함’*인가,
      👉 *‘말씀의 능력’*인가,
      👉 *‘하나님 자신’*인가?
















    육에 속한 사람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이 아닌 ‘육(타락한 인간 본성)’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1️⃣ 의미

    • 육(σάρξ, sarx): 단순한 몸이 아니라
      👉 하나님을 떠난 자기중심적 본성,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 상태

    • 따라서 육에 속한 사람
      👉 성령의 인도 없이, 인간적 욕망·이성·세상 가치에 의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

    2️⃣ 핵심 성경 구절

    •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 로마서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 유다서 1:19

      “육에 속한 자요 성령이 없는 자라”

    3️⃣ 특징 정리

    •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판단과 감정을 우선함

    • 영적인 진리를 어리석게 여기거나 이해하지 못함

    • 신앙이 있어 보여도 능력은 부인함 (형식적 신앙)

    • 갈라디아서 5장의 육체의 일이 드러남
      (시기, 분쟁, 분노, 탐심 등)

    4️⃣ 대비 개념

    구분 육에 속한 사람 성령에 속한 사람
    지배 원리 육, 자아 성령
    판단 기준 세상 지혜 하나님의 지혜
    열매 혼란, 분열 사랑, 화평
    영적 상태 미성숙 성장·성숙

    5️⃣ 신앙적 적용

    • 육에 속한 사람불신자만을 말하지 않음
      👉 고린도교회처럼 구원은 받았으나 영적으로 미성숙한 신자도 포함

    • 핵심 질문:

      “나는 지금 육을 따라 반응하는가, 성령을 따라 순종하는가?”

    원하시면
    👉 ‘육에 속한 신자 vs 영에 속한 신자’,
    👉 요한일서의 ‘아이·청년·아비’ 단계와의 연결,
    👉 설교용 요약으로도 정리해 드릴 수 있습니다.






    교인의 종류는 크게
    교적 상태에 따른 분류(원입교인, 유아세례교인, 세례교인), 신앙생활 참여도/태도에 따른 분류(감투교인, 인력거교인, 오락교인 등), 교단 내 직분에 따른 분류(장로, 집사, 권사 등), 그리고 신앙적 성숙도에 따른 분류(영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등)로 나눌 수 있으며, 이는 교파나 교회마다 다르게 표현되기도 합니다. 
    1. 교적 상태에 따른 분류 (일반적 구분)
    • 원입교인: 교회에 등록하여 출석하지만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
    • 유아세례교인: 유아기에 세례를 받고 성장하는 교인.
    • 세례교인 (입교인):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교회의 일원이 된 사람. 

    2. 신앙생활 태도 및 참여에 따른 분류 (유머/비유적 표현)
    • 감투교인: 직책(감투)을 받아야만 교회에 나오는 교인.
    • 인력거교인: 심방을 가야 겨우 교회에 오는 교인.
    • 오락교인: 친목회, 야유회 등 행사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교인.
    • 벙어리교인: 오래 신앙생활해도 기도생활이 없는 교인.
    • 종이교인: 비 오면 안 나오는 등 출석이 잦지 않은 교인. 

    3. 교단 내 직분에 따른 분류 (한국 개신교 일반적)
    • 항존직: 장로, 집사, 권사 등 직분이 유지되는 직분.
    • 임시직: 전도사, 서리집사 등 임기가 있는 직분. 

    4. 신앙적 성숙도에 따른 분류 (성경적 표현)
    • 영에 속한 사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신실한 사람.
    • 육신에 속한 사람: 세상적이고 육체적 정욕을 끊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인.
    • 불신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육에 속한 사람으로도 표현). 

    5. 교파에 따른 분류
    •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교회, 성공회 등 교리 및 역사적 배경에 따라 다양한 교파가 존재하며, 각 교파 안에도 다양한 교단이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가?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5년 08월호>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가?

    <한글킹제임스성경>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

    But the natural man receiveth not the things of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unto him: neither can he know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discerned.
    <한글개역성경>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The man without the Spirit does not accept the things that come from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to him, and he cannot understand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discerned.

    이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을 세 부류로 분류하심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자연인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며, 둘째, 육신적인 사람은 구원은 받았어도 성경적 기준대로 살지 않고 자기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며, 셋째로 영적인 사람은 구원받고 난 후 자기 기준을 버리고 성경적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말한다. 자연인과 육신적인 사람을 구별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자연인들도 교회에 다닐 수 있고 새벽 기도에 나갈 수 있으며 심지어 제도화된 교단 교회들과 은사주의 교회에서는 그들이 사회적 지위나 돈 많이 내는 일이나 교회 일에 쏟는 열성들을 고려해 집사, 권사, 장로 등의 제직을 맡기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 초, 중, 고, 대학부, 청년부 교사로도 임명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각 부서장으로도 임명하여 써먹고 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 자연인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구원받았다는 그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다른 것이 없다. 구원받은 성도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될 때 그에게는 성령의 열매도 없고 구령의 열매도 없으며 십 년, 이십 년 교회 생활을 했다 해도 귀로 얻어들은 것 외에는 성경을 체계적으로 알지도 못하며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기보다는 육신의 냄새를 풍기게 된다. 자신이 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했는지에 대해서도 때로는 회의적이며 믿음보다는 기분이 앞서 있어 자기의 감정의 고저에 따라 믿음의 생활이 달라지게 된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먼저 영적 배고픔을 느낀다. 자기 안에 새로이 태어난 속 사람도 먹어야 살 수 있는데 겉 사람처럼 물질적 양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영적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다. 겉 사람은 하루에 적어도 세 끼 이상을 먹는다. 속 사람도 자기가 원하는 분량을 먹어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는 구약성경부터 읽지 말고 요한복음,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데살로니가전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이렇게 읽어 가는 것이 좋으며 처음부터 너무 많은 분량을 읽지 말고 3장 정도만 읽고 그 안에 어떤 주제가 있었는가를 음미하는 것이 좋다. 말씀을 읽을 때는 의심하지 말고 기록된 그대로를 믿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긴다(롬 10:17). 말씀 외에 기도도해야 한다. 기도는 성도의 호흡이다. 숨쉬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고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것이다. 구원받은 것만을 알고 성경을 읽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았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되겠는가? 육신 안에 있는 속 사람이 고사(枯死)해 버리지 않았겠는가? 구원을 잃어버렸다는 말이 아니라 말라져 버린 것이다. 핏덩어리를 낳았으면 물로 씻기고 젖을 먹여야 자라지 않겠는가? 영적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났으면 말씀의 물로 씻고(엡 5:26) 순수한 젖을 먹어야 한다(벧전 2:2). 『그러므로 모든 악의와 모든 속임수와 위선과 시기와 온갖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로서 순수한 말씀의 젖[개역성경 삭제]을 사모하라. 이는 너희가 그것으로 인하여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2:1,2).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지 않은 어린 아기라고 한다(고전 3:1-4). 어린 아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이 나라 교단 교회들에서는 많은 아기들이 가르치고 설교하고 있다. 그들이 마귀를 대적해서 싸울 수 있겠는가? 마귀는 그런 어린 아기들을 건드리지도 않는다. 건드릴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아기들은 영적 전쟁이란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영적 어린 아기들이 떼지어 몰려다니면서 자기들 나름대로 성령의 능력을 말하고 있는데 대부분은 마귀의 능력을 성령의 능력으로 착각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영적 아기들과 교제하실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일들을 시킬 수도 없기에 맡기지도 않으신다. 그래서 제도화된 교단 교회들과 은사주의 교회들은 쓸데없는 일들에 관여하면서 그런 것들을 하나님의 일로 가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이겨오는 일이다. 당신의 교회는 한 달에 몇 명의 혼을 그리스도께로 이겨오는가? 아직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을 만나지 못했는가? 아니면 끝까지 견뎌야 알 수 있는데 아직도 날짜가 다 차지 않았는가? 그런 엉터리 교리가 성경 어디에 있던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에 오해한 것 아닌가!(막 12:24) 또 한 가지 일은 혼들을 구령했으면 그 혼들을 진리의 지식으로 양육시켜야 한다. 이때 썩은 음식인 틀린 성경이나 성경적 교리가 아닌 교단 교리로 양육하게 되면 머리가 혼미해져 방언이나 하고, “주여!” 삼창을 부르며, 거리로 산으로 방황하게 된다. 그런 자들 중 상당수가 미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들이 각종 회의, 성결서약, 효 운동, 구제, 반정부데모, 심지어 기독교 정당까지 만들고 있겠는가?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거의 육신적인 사람들이다. 자연인과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차이란 쓰레기통에 페인트 칠하지 않은 것과 페인트 칠한 것의 차이일 뿐이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은 수치스러운 것이기에 그렇게 불리지 않도록 처신을 고쳐, 자기 기준에서 성경 기준으로 확실히 돌이켜야 한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고 말씀을 매일같이 읽고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께 자기 몸을 드리고 말씀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여 자기의 은사대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구령의 열매는 물론이요 성령의 열매를 내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산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세워 주고 교회의 기둥으로서 자기 몫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세상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마음의 변화를 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산다. 무엇보다도 진리로 오류를 판단하며 죄들을 질책하고 다가올 심판과 지옥을 설교하는 것이다. 그가 성경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판단하지 않게 된다(고전 2:15).

    <한글개역성경>에는 자연인(Natural man)을 육에 속한 사람이라 했고 육신적인 사람(Carnal man)을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 했다. 이렇게 된 성서를 가지고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개역성경>을 가지고 교리를 설교하는 설교자들은 모두 엉터리라는 점을 이제야 알 것 같은가? 성경은 진리인데 진리를 말해야 할 자들이 오류를 말하면서 진리인 체했을 때 거기에 무엇이 살아남아 있겠는가? 이것은 <개역성경>이 몸, 혼, 영(갈 5:23)을 몸과 영혼이라고 써서 성경의 진리를 플라톤의 철학으로 바꿔치기한 어거스틴과 존 칼빈의 신학과 같다. 왜 이런 일들이 가능했겠는가? 신학교 교수, 교단 교회 목사들이 모두 영적인 사람들(Spiritual man)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자연인(Natural man)이거나 아니면 구원은 받았을지 모르나 영적 양식으로 먹고 마시며 숨쉬지 않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 즉 아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젖 외에 꿀, 사과, 빵, 고기를 먹을 수 없는 체질인데도 청장년 행세를 하며 겉멋을 부리고 강단에 올라서서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며 돈벌이 하고 있는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기에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어 있다(마 15:14). 성경 순서도 모르는 목사들, 성경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제직들, 성경이 필요 없는 교인들이 5만 개의 교회를 점유하고 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BB





    1월 6일(화) 요한일서 2:12-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자녀들(2:12) 

  •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I write to you, dear children, because your sins have been forgiven on account of his name.
  • I write to you, fathers, because you have known him who is from the beginning. I write to you, young men, because you have overcome the evil one. I write to you, dear children, because you have known the Father.
  • I write to you, fathers, because you have known him who is from the beginning. I write to you, young men, because you are strong, and the word of God lives in you, and you have overcome the evil one.

  • 사도바울

    육에 속한 사람(고전 2:14) -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고전 3:1, 3) - 시기 분쟁과 같은 사람을 따라 행하는 사람 
    신령한 사람(고전 2:15) -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

    사도 요한 

    하나님의 자녀(요일 2:12) - 예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은 사람
    아비들(요일 2:13a) -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사람
    청년들(요일 2:13b) - 악한 자를 이긴 사람
    아이들(요일 2:14) - 아버지를 아는 사람 





  • 용서(forgiven)와 승리(overcome)

  •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비결은 예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어야 합니다.
    아비들은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 청년들은 악한 자를 이겨야 합니다.
    청년들이 악한 자를 이길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주하여 강한 자가 된 것입니다.
  • 이 표현은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영적 분류로, 신앙의 연령·성숙 단계를 상징적으로 말합니다.

    1️⃣ 아이들 (τεκνία / παιδία)

    • 의미 : 영적으로 거듭난 자, 믿음의 시작 단계

    • 특징

      • 죄 사함을 받은 은혜를 앎

      •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관계의 출발

      • 보호와 양육이 필요한 시기

    • 핵심 말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라”

    👉 신앙의 출발점: 관계와 은혜 중심 

    2️⃣ 청년들 (νεανίσκοι)

    • 의미: 영적으로 성장하고 싸우는 단계

    • 특징

      • 말씀으로 강건함

      • 악한 자(사탄)를 이김

      • 영적 전쟁과 사명에 적극적

    • 핵심 말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신앙의 실천기: 말씀과 싸움 

    3️⃣ 아비들 (πατέρες)

    • 의미: 영적으로 성숙한 단계

    • 특징

      • “태초부터 계신 이”(그리스도)를 깊이 앎

      • 경험과 분별, 영적 권위

      • 가르치고 세우는 역할

    • 핵심 말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라”

    👉 신앙의 완숙기: 인격적·관계적 깊이 

    ✨ 정리 한눈에

    구분 중심 초점 핵심 특징
    아이들 관계 죄 사함, 아버지를 앎
    청년들 싸움 말씀, 승리
    아비들 깊이 그리스도를 앎

    이 분류는 나이가 아니라 영적 성숙도를 말합니다. 
    한 교회 안에 이 세 단계가 모두 건강하게 존재할 때 공동체가 균형을 이룹니다.


  • 영적 성장과 성숙의 단계(요한일서 2:12-14)

  • 오늘 우리는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14절 말씀을 통해 사도 요한이 성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해 깊이 살펴보려 합니다. 이 말씀은 영적 성장과 성숙의 단계를 묘사하고 있으며, 우리 각자가 신앙 생활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자각하게 합니다.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와 인근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으로, 이들은 모두 초대 교회 시대의 신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초대 교회는 이단의 도전과 외부 압박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강화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성도들에게 신앙의 다양한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성도들이 더욱 확고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고자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 삶에서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제공하며,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돌아보는 중요한 기회가 됩니다.

    1. 자녀들아,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다 (12절)

    사도 요한은 먼저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녀들’은 신앙의 첫 단계를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영접할 때 받은 구원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이 구절은 신앙의 첫 단계에서 우리가 확신해야 할 중요한 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우리의 죄가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진리를 받아들이고, 우리의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첫걸음입니다.

    현대적 적용: 오늘날 우리는 이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매일의 삶 속에서 확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죄에서 자유로워졌음을 믿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2. 아비들아,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 (13절)

    그 다음, 요한일서 2장 13절에서 사도 요한은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비들’은 신앙의 성숙한 단계에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깊이 알고,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란 하나님을 의미하며, 신자들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졌음을 상징합니다.

    신앙의 성숙한 단계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욱 깊이 추구하며, 그분의 말씀과 뜻을 따르기 위해 헌신합니다. 이들은 신앙생활에서 많은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이 깊어졌습니다. 이러한 성숙한 신자들은 교회의 리더가 되기도 하며, 다른 신자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현대적 적용: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이러한 신앙의 아비들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들은 젊은 신자들에게 영적인 길잡이가 되어주고, 그들의 신앙 성장을 도와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신앙의 성숙을 이루어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성숙을 위해 노력하는 자들에게 존경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3. 청년들아, 너희가 악한 자를 이겼다 (13절)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 13절에서 또한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청년들’은 신앙의 중간 단계에 있는 자들을 의미하며, 이들은 영적인 전투와 시험을 겪으며 성장해 나가는 단계에 있습니다. 청년들은 신앙생활에서 마주치는 여러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신앙의 힘을 성장시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기로 사용하며, 영적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정에서 수많은 시험과 유혹을 마주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이겨내야 합니다. 사탄의 계략을 꿰뚫어보고,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적 적용: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청년들과 같은 불굴의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마주하는 유혹과 시험을 이겨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로 무장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격려하며,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4. 영적 성숙의 단계와 그 중요성 (14절)

    요한일서 2장 14절에서 사도 요한은 다시 한 번 ‘아이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러한 반복은 영적 성숙의 각 단계를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14절은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기 때문이라.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기 때문이라.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이라’ 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반복해서 각 단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신앙생활에서 이 단계를 이해하고 성장하는 것이 중요함을 상기시킵니다. 신앙의 시작에서부터 성숙까지, 우리는 각 단계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통해 성장해야 합니다.

    현대적 적용: 오늘날 우리 각자는 자신의 신앙 상태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어린아이 단계에 머물러 있지 말고, 말씀을 통해 성장하며, 더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청년들처럼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힘을 기르고, 성숙한 신앙의 아비들처럼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며, 그들을 이끌어줄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오늘 우리는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14절 말씀을 통해 사도 요한이 말하는 영적 성장과 성숙의 단계를 깊이 살펴보았습니다. 신앙의 시작 단계인 자녀들, 신앙의 중간 단계인 청년들, 그리고 신앙의 성숙한 단계인 아비들 각각의 특징을 이해하며, 우리는 우리 자신이 현재 어떤 단계에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성숙해 나가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은 자들이며,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고,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며 강해지는 신앙생활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성숙한 신앙의 아비들처럼, 다른 이들에게 영적인 본보기가 되며 그들을 이끄는 역할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묵상과 나눔

    기도문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14절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 생활을 되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자녀들처럼 죄 사함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게 하시고, 청년들처럼 강한 믿음으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시며, 아비들처럼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믿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각자가 신앙의 단계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고, 끊임없이 말씀을 통해 힘을 얻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영적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우리가 각자의 신앙 단계를 인정하고, 그 단계에 맞는 성장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서로를 격려하고 도우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 우리 교회가 되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우리 모두가 성숙한 신앙인이 되길 소망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사도 요한이 성도들에게 쓰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씻음을 받았기 때문임 (12절)
  • 아비들에게는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함 (13절)
  • 청년들에게는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임 (13절)
  • 아이들에게는 아버지를 알았기 때문임 (14절)
  • 아비들에게는 다시 한 번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함 (14절)
  • 청년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하시며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이라고 말함 (14절)
  • 나는 지금 신앙의 어느 단계에 있는가? 자녀, 청년, 아비 중 어디에 속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 신앙의 성숙을 위해 나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봅시다.
  • 우리 교회 안에서 서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 자녀 아비 청년(요한일서 2:12-14)

    성경에서 ‘하라’는 말씀을 대할 때 쉽게 떠오르는 것은 ‘이것을 내가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일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있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내가 실천할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시각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라’는 말씀은 나에게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고, 따라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내가 신자라는 증거가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러분의 신앙을 어긋나게 하는 위험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내가 실천해야 할 몫으로 여길 때 감히 인간으로서 실천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이러한 수준을 목표로 삼고 살 것을 요구하신 것’으로 여기면서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위험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이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나에게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깨닫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께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그냥 십자가에 죽으셔서 여러분을 천국으로 보내주는 역할을 하신 분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저주를 짊어지기 위해 오신 분이고, 또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십자가 아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연약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다만 나의 죄만 생각하고 넘어가면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내가 실천할 수 없어 그래서 나는 죄인이야’라는 생각에 머무는 것이 말씀이 요구하는 전부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형제 사랑을 생각해 보면 사실 우리들의 힘으로는 실천할 수 없는 내용일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은 어려운 사람을 조금 도와주고 친절을 베푸는 수준의 것이 아니라 그 누구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의로 구원받을 죄인이라는 입장에서 대해야 하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즉 차별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지만 평생을 좋은 일을 하며 산 사람이 살인을 하고 악한 짓만 일삼은 죄수 앞에서 그런 마음을 가지기가 쉽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우리가 실천할 수 없는 것을 말함으로써 다만 우리가 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자칫 잘못하면 ‘나는 죄인이다’라는 인정을 하는 것으로 끝나 버리고 정작 형제 사랑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애당초 내가 실천해야 할 몫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우리가 죄인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철저히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왜 중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죄인임을 인식함으로써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 바른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바르게 깨달았을 때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제자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죄인임을 안 것이 전부가 아니라 죄인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사랑은 우리에게서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도덕이나 인격, 감정 등을 가지고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내가 사랑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도가 형제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실천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신자란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하여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받은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는 신자를 ‘자녀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라는 세가지 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호칭을 두고 신자의 신앙 수준을 세단계로 구분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에 자녀와 같은 신앙, 아비와 같은 신앙, 청년과 같은 신앙이란 없습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 있음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깨달음의 차이로 보는 것이 옳은 것이지 신앙의 높고 낮음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만약 신앙의 세 단계를 의도한 말씀이라면 ‘아비들아’ 다음에 ‘청년들아’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청년의 호칭 다음에 아비의 호칭이 오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본문에서 세 호칭이 신앙의 수준 차이를 의미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왜 이러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도는 앞에서 형제 사랑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이어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사랑에 대한 내용 사이에 본문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본문은 사랑과 연관이 있는 내용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가르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아무리 자세하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가르친들 배우고 듣고 기억한 대로 실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랑의 문제가 정작 우리에게 짐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치 못하는 것이 짐이 되고 부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본문의 말씀을 함으로써 사랑이란 짐이 아님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12-13절을 보면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죄가 사함을 얻는 것과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것 중 어느 것이 수준 높은 신앙입니까? 분명 본문의 내용을 가지고 신앙의 수준을 따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 호칭은 신앙의 수준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호칭을 사용하여 말씀하는 것입니까? 사실 자녀, 아비, 청년이란 호칭은 모두 나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자녀, 청년, 아비는 하나의 표현법입니다.

    예수님으로 죄사함을 얻은 것은 신앙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로 표현한 것이고,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을 아는 것을 아비로 표현한 것은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아비로서 예수님을 아는 자가 예수님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를 이기는 것을 청년으로 표현한 것은 청년의 힘을 의미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사랑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사도는 그리스도로 죄사함을 얻지 못하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고 악한 자를 이기는 자로 살지 못한다면 형제 사랑을 할 수 없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우리에게서 나와지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얻은 자로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자로 살아갈 때 사랑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내가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 있는 자로서 사랑하게 되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죄사함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용서 받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용서 받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이미 우리를 용서 안에 있게 한 것입니다. 자격을 따지면 우린 용서 받을 수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주님의 용서함으로 형제를 용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짐을 지워주시는 분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거운 집으로 고통 받는 자들을 쉬게 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은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실천 여부에 따라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차별의식이 있다면 결국 형제에 대해서도 차별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예수 안에서 이미 이긴자입니다. 어떤 죄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실천 여부를 보면서 낙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몫이나 지키기 힘든 문제로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용서를 알고 사랑을 안다면 여러분은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자로 살게 하시는 분이 우리에게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이, 청년, 아비(요한일서 2:12-14)


  •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에 관해 세 가지 주요 견해가 있다. 먼저 세 호칭은 세 개의 각각 다른 그룹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세 호칭은 육체적 혹은 영적인 연령을 가리킨다고 본다. 둘째, 세 호칭 중에 ‘자녀들’은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고, ‘아비들’과 ‘청년들’은 수신자 전체 안에 있는 두 개의 그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셋째, 세 호칭 모두 각각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최근 다수 학자는 두 번째 견해를 주장하지만,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세 번째 견해를 지지한다.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의 특징은 요한일서 전체 문맥에서 어느 특정 그룹이 아니라 수신자 전체의 특징을 가리킨다. 전체 수신자들은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 악한 자와 싸워 이겼다. 또한, 요한의 글쓰기 특징이 하나의 그룹을 지지한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는 서로 다른 단어가 같은 뜻을 의미하는 경우가 종종 등장한다. 표현을 다르게 하여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의 특징은 새 언약적 요소를 담고 있다. 죄 용서, 신지식, 말씀의 내재화 그런데 이 세 요소는 종말에 새 언약의 백성이 누릴 복으로서 모든 자가 구분 없이 함께 누릴 복이다. (렘 31:33-34) 따라서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 사이에 어떤 구분을 두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런 이유로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은 하나의 그룹으로서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저자는 수신자들이 사랑받는 자녀, 성숙한 아비, 승리한 청년이라고 칭찬하면서 그들이 믿음과 신분에 맞게 살도록 격려한다.

    1. 시작하는 말

    요한일서에는 단순한 헬라어 문장이나 분명한 표현 뒤에 해석하기 까다로운 난제들이 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요한일서 2:12-14이다.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13)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14)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저자는 2:12-13에서 ‘자녀들’(teknia), ‘아비들’(paterej), ‘청년들’(neaniskoi)을 차례대로 언급한 후 2:14에서도 ‘아이들’(paidia), ‘아비들’(paterej), ‘청년들’(neani,skoi)을 언급한다. ‘자녀들’(teknia)에서 ‘아이들’(paidia)로 바뀌지만, 기본적으로 둘 사이에 차이는 없다. 그렇다면 ‘자녀들’/‘아이들’, ‘아비들’, ‘청년들’, 이 세 호칭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저자는 왜 세 호칭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지난 2천 년 동안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아직까지 만족할만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그동안 제기되었던 주장들을 검토해 보고 좀 더 설득력 있는 주장과 근거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2. 학자들의 견해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세 가지다. 
    세 호칭을 각각의 구분된 세 그룹으로 보기도 하고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한 그룹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이라고 보기도 한다. 다른 한편 한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두 그룹으로 보기도 한다.

    가. 세 그룹

    세 호칭에 대한 가장 전통적인 해석은 육체적인 혹은 영적인 연령대의 청중으로 보는 것이다. 육체적인 연령대로 본다는 것은 교회 안에 어린이와 청년과 아버지와 같은 연령대의 구성원들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구성원을 포괄하면서 그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각각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른 한편 이것을 영적인 연령으로 보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자녀들’, ‘청년들’, ‘아비들’로 불린다는 것이다. 자녀는 믿음이 어린 초기 단계의 신앙인을 가리킨다. 예수를 믿어 죄 용서를 받은 가장 기초적인 신앙의 단계이다. 청년들은 그보다 더 영적으로 성숙한 이를 가리키는데, 잘못된 가르침과 싸워 이긴 성숙한 사람이다. 아비는 가장 성숙한 사람인데, 그리스도에 대한 보다 깊은 차원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자녀들’/‘아이들’이라는 호칭이 요한일서에서 전체 성도를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 의해 반박된다. (요일 2:1, 12, 28; 3:7, 18; 4:4; 5:21 / 2:14, 18) 저자는 수신자들을 ‘자녀들아’ 혹은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르면서 편지 전체에 걸쳐 권면하고 있다. 이 호칭은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요 13:33; 21:5) 저자 요한은 이제 예수의 마음으로 그의 성도들을 ‘자녀들’/‘아이들’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의 용례는 ‘자녀들’/‘아이들’이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어느 특정 연령이나 단계를 대변한다는 주장을 무력화시킨다. 더욱이 스몰리(Smalley)가 적절히 지적하듯이 저자가 왜 자녀들-청년들-아비들이라는 순서를 따르지 않고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이라는 순서를 취했는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자녀들’/‘아이들’이라는 호칭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를 포괄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 두 그룹

    다수 학자에 의해 지지를 받는 이 주장은 ‘자녀들’/‘아이들’이라는 호칭이 요한일서에서 성도 전체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는 해석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주장의 학자들은 ‘자녀들’/‘아이들’과 달리 ‘아비들’과 ‘청년들’은 특정 그룹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다른 신약 성경에서도 교회 안의 장년 그룹과 청년 그룹을 가리키는 각각의 표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라며 교회 구성원을 늙은이와 젊은이로 나눈다. (딤전 5:1) 베드로도 또한 한편으로는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라고 하고(벧전 5:1), 다른 한편으로는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라고 한다. (벧전 5:5) 따라서 요한이 수신자들을 아비들과 청년들로 구분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한다.

    다른 한편 두 그룹을 주장하는 학자들 안에서도 두 그룹의 성격에 대해 다양한 주장이 있다. 트레빌코(Trebilco)는 ‘아비들’과 ‘청년들’이 남자만 가리킨다고 한다. 하울던(Houlden)은 ‘아비들’과 ‘청년들’은 교회 지도자를 가리킨다고 한다. 크루즈(Kruse)는 육체적 연령에 따라 아비들과 청년들로 나뉜 것이라 한다.

    그러나 다른 신약 본문에서도 정확하게 ‘아비들’과 ‘청년들’이라는 두 그룹으로 나뉜 용례는 없다. 늙은이와 젊은이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그 어떤 용례에도 ‘아비들아’라는 호칭은 찾아보기 힘들다. 브라운(Brown)은 ‘아비들아’라는 호칭이 장로를 가리킬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장로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공동체에서 아버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이 스스로에게는 장로라 부르면서(요이 1; 요삼 1) 왜 다른 장로들에게는 장로 대신에 아비라 부르는지 설명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그런 용례도 찾기 힘들다.

    또한, 제일 앞에 나오는 ‘자녀들’/‘아이들’은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고 같은 가족 코드의 단어인 ‘아비들’과 ‘청년들’은 바로 앞의 ‘자녀들’/‘아이들’과 다른 성격으로 읽는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자녀들’/‘아이들’ ‘아비들’ ‘청년들을 같은 선상에 놓고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두 그룹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반문에 직면할 수도 있다. 각 특정 그룹이 과연 자신들의 고유한 신앙적 특성이 있었을까? 청년들만 악한 자와 싸워 이긴 것일까? 아비들만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안 것일까?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청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몰랐을까? 아비들은 악한 자와 싸워 이기지 않았을까? 이런 반문이 가능하다.

    다. 한 그룹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세 호칭을 하나의 그룹에 대한 각기 다른 호칭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다드(Dodd)가 대표적인 학자였으며, 마샬(Marshall)도 이 주장을 따른다. 다드는 ‘태초부터 계신 이’를 성부 하나님으로 보고 결국 2:14에서 아이들의 특징과 아비들의 특징이 같기 때문에 세 호칭은 모두 한 그룹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브라운이 잘 지적했듯이 이것은 틀린 해석이다. 아래에서 밝히겠지만, ‘태초부터 계신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마샬은 다드가 수사적 표현에 근거해 세 호칭을 하나의 그룹으로 본 것을 받아들이며, 모든 수신자가 용서를 받은 자녀의 특성,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안 아비의 특성 그리고 ‘악한 자와 싸워 이긴 청년’의 특성이 있다고 한다.

    왓슨(Watson)은 두 그룹 견해를 지지하며, 한 그룹 견해의 약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아비들’이나 ‘청년들’이 공동체 전체를 대변하는 용어로 쓰인 예가 다른 신약 본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비들’이나 ‘청년들’을 ‘자녀들’과 같은 레벨의 호칭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한다.

    이처럼 세 견해는 각각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지난 2천 년 동안 어떤 견해도 100% 만족할 만한 답변이나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학자들은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스몰리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양면적 표현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두 그룹과 한 그룹의 가능성을 모두 긍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에 따르면 핵심은 요한의 수신자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정통 교훈에 확실하게 머물러 있다는 사실 자체라고 한다. 그러나 본 연구는 위의 세 견해 중 세 번째가 좀 더 유력한 주장이라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자녀들’/‘아이들’ 뿐만 아니라 ‘아비들’과 ‘청년들’도 각각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호칭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3. 요한일서 문맥

    자녀들뿐만 아니라 아비들과 청년들도 요한일서 수신자들의 일반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성도의 일반적인 특징이 아비들과 청년들에게 나타난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는 가장 뚜렷한 이유는 요한일서 전체에서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의 특징은 서로 구분되지 않고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일서 문맥이 한 그룹 해석을 지지한다.

    가. 앞서 자녀들은 요한일서에서 성도를 가리키는 호칭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사도는 계속해서 그의 수신자들을 ‘자녀들’/‘아이들’이라 부르면서 권면한다. (요일 2:1, 12, 28; 3:7, 18; 4:4; 5:21 / 2:14, 18) 요한일서 2:12-14에서 자녀들의 특징은 죄 용서를 받은 것이고(요일 2:13), 아버지를 안 것이다. (요일 2:14) 그런데 자녀들의 이 두 특징은 요한일서 다른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연결된다. 예수께서 죄인을 위한 화목제물이심을 알고 믿는 자가 죄 용서를 받는다. (요일 2:2)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요일 1:7) 이러한 죄 용서의 은혜는 아버지 하나님께 그 기원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화목제물로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요일 4:10) 우리가 죄를 자백할 때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요일 1:9) 따라서 자녀들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용서를 받고, 그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녀들의 특징은 아비들의 특징과 다르지 않다. 잠시 후 밝히겠지만, 아비들의 특징은 ‘태초부터 계신 이’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자녀들의 특징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를 알고, 죄 용서를 받는 것이라면 이것은 아비들의 특징과 연결된다. 다른 본문들도 아버지와의 관계는 아들과의 관계에 기초한다는 것을 계속 보여준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없고,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 아버지도 계신다 (요일 2:23) 자녀들의 특징이 아버지를 아는 것이라면 이것은 결국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는 말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항상 함께 있다. 따라서 자녀들의 사귐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하는 사귐이다. (요일 1:3) 적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다. (요일 2:22) 결국, 아버지를 아는 ‘자녀들’과 아들을 아는 ‘아비들’의 차이는 없다. 다른 한편 ‘자녀들’/‘아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연결된다. 자녀들의 특징은 아버지를 아는 것인데, 이때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아버지와 함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이 핵심이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요일 3:1)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다. (요일 4:10; 요 3:16)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요 1:12).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지식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이것은 곧 요한일서 2:12-14에서 자녀들의 특징이고 아비들의 특징이다.

    나. 아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 ‘태초부터 계신 이’를 하나님 아버지로 보는 사람도 있다. 스토트(Stott)는 ‘태초부터 계신 이’가 로고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한다. 브루스도 ‘태초부터 계신 이’를 하나님으로 본다. 그러나 ‘태초부터 계신 이’는 1:1에 비춰봤을 때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일 가능성이 크다. 요한은 편지를 시작하며 ‘태초부터 계신 이’를 보고 듣고 만졌다고 한다. (요일 1:1) 그리고 이어서 ‘태초부터 계신 이’가 생명의 말씀이고,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다. (요일 1:1-2) 물론, ‘태초부터 계신 이’(o] h=n avp V avrch/j)에는 중성 관계대명사가 나오는데, 이것은 남성 관사가 쓰인 ‘태초부터 계신 이’(o` a vpV avrch/j)와 다르다. 그런데도 중성 관계대명사는 이 편지가 생명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브라운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말씀과 사역을 포괄한다고 보고, 스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message)로 본다. 따라서 ‘태초부터 계신 이’는 아버지 하나님보다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아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 자들이다.

    요한일서 수신자들은 사도가 전해준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여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자들이다. 이런 내용이 요한일서 전체에 걸쳐 전반적으로 나온다. 그들은 하나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이다. (요일 5:13) 그런데 2:13-14은 이런 자들을 아비들이라 부르지만, 요한일서 다른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라 한다. (요일 5:1)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이고, 요한이 ‘자녀들’이라 부르는 자이다. (요일 4:4) 따라서 아비들은 자녀들과 다르지 않다. 그 사람의 나이에 상관없이 그 사람의 신앙 햇수에 상관없이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사람은 자녀요, 아비다. 사도는 수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고 있는 ‘아비’라고 칭찬한다. ‘아비’라는 호칭을 통해 그들의 성숙한 신앙을 격려하고 있다.

    다. 청년들은 악한 자를 이겼다. (요일 2:13) ‘악한 자’(o`ponhroj)는 남성 관사와 형용사가 사용되어 마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어둠과 혼돈과 죽음의 세계를 주관한다. 요한복음 17:15에서는 남성일 수도 있고, 중성일 수도 있게 쓰여서 ‘악한 자’를 뜻할 수도 있고, ‘악’을 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요한일서에서는 남성임이 분명히 드러나 마귀를 가리킨다. 물론, 스몰리가 적절하게 밝혔듯이 남성과 중성, 즉 ‘악한 자’와 ‘악’ 사이에 의미상의 큰 차이는 없다. 요한은 사탄 혹은 마귀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계속 ‘악한 자’를 사용한다. (요일 5:18-19)

    청년들이 악한 자를 이긴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 어떤 이들은 그들의 회심을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해 그들이 악한 자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승리에 근거해 그들이 승리한 것이다. 예수는 공생애 기간에 자신이 세상을 이겼다고 선언하셨다. (요 16:33) 이제 믿음으로 그와 연합한 그리스도인은 그와 같이 세상을 이긴 자이다. 세상을 주관하는 악한 자를 이긴 자다. 다른 한편 청년들의 이김을 거짓 교사를 물리친 것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악한 자는 적그리스도, 즉 거짓 교사를 통해 요한일서 수신자 공동체에 들어와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렸다. 그러나 수신자들은 사도가 전해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굳게 붙들고 믿음을 지켰다. (요일 4:1-4; 5:4-5) 그리고 마침내 거짓 교사들은 공동체를 떠났다. (요일 2:18-19) 이에 사도는 수신자들에게 그들이 악한 자를 이겼다고 말하며, 청년들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런 두 종류의 이김은 사실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고 그를 지속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이때 잘못된 가르침을 옳게 분별하여 거짓을 배격하고 참된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요한일서 전체에서 수신자들은 ‘이긴 자’ 혹은 ‘이기는 자’로 묘사된다. 그런데 이때 수신자들은 ‘자녀들’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로 불린다. 자녀들은 세상에 있는 자의 조종을 받는 거짓 교사들을 이긴 자이다. (요일 4:4)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역이며, 마귀의 통치 아래 있는 영역이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세상을 이겼고 지금도 이기고 있다. (요일 5:4) 따라서 이기는 것은 청년의 특징이면서 동시에 자녀의 특징이다. 다른 한편 아비의 특징으로 나온 기독론적 지식과 세상을 이기는 것이 연결된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가 세상을 이긴다. (요일 5:5) 결국, 자녀와 아비와 청년은 악한 자를 이기고 적그리스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측면에서 같은 사람들이다 요한일서 수신자들이다.

    2:14에서 청년들의 또 다른 특징이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있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수신자들이 죄 용서를 받은 자녀들이라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말씀이 없는 자의 특징이 죄 고백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일 1:10) 이런 측면에서 청년들의 특징은 자녀들의 특징과 연결된다. 또한, 죄를 짓는 자는 악한 자, 마귀에게 속한 자다. (요일 3:8) 그러나 죄를 짓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씨가 있기 때문이다. (요일 3:9) 하나님의 씨의 정체에 대해서는 해석학적 논란이 있다. 다만 말씀을 가리킬 확률이 좀처럼 배제되지 않는다. 이처럼 청년들의 특징은 곧 수신자들의 특징이고 자녀들의 특징이다. 요한은 사람의 연령이나 체력에 상관없이 악한 자를 이긴 사람을 청년이라고 한다. 그들이 악한 자를 이긴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라. 소결론

    요컨대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은 각각 요한일서 모든 수신자를 일컫는 호칭이다. 이들 각각의 특징은 요한일서에서 수신자 일반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요한은 수신자들을 자녀와 아비와 청년이라 칭찬하면서 수신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기 원했던 것 같다. 그들에게 정체성에 기초해서 사도의 권면을 받으라고 한다.

    두 그룹이나 세 그룹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있다. 자녀들의 특징은 기초적인 신앙의 성격을 가지고, 청년들이나 아비들의 특징은 더욱 성숙한 신앙의 특징을 말한다고 본다. 그러나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은 기초적이며, 태초부터 계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좀 더 성숙한 신앙 특징일까? 아들에 대해 잘못된 가르침을 전파하는 거짓 교사들을 이기는 청년들의 특징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아비들의 신앙특징보다 덜 성숙한 모습일까? 과연 요한은 여기서 신앙의 단계 혹은 차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수신자들의 신앙의 모습을 확인해 주며 그들을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수신자 공동체는 모두 죄 용서를 받고 아버지를 아는 사랑 받는 자녀들이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성숙한 자들이다. 그리고 거짓 교사들을 이긴 패기 넘치는 청년들이다.

    4. 저자의 표현 기법

    ‘자녀들’/‘아이들’ 뿐만 아니라 ‘아비들’과 ‘청년들’도 각각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호칭이라는 주장에 대한 또 다른 근거는 요한 문헌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글쓰기 특징이다. 요한은 같은 의미의 다른 단어를 번갈아 사용하며 자주 표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가. 요한복음

    같은 의미의 다른 단어를 번갈아 쓰는 예는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등장한다. 요한은 “알다”(ginw,skw), “영접하다”(paralambanw), “믿다”(pisteu,w)라는 세 동사를 번갈아 사용하며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요 1:10-12) 이러한 특징은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를 기록한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에도 등장한다. ‘어린양’(avrnion)/‘양’(probaton), “먹이다”(boskw)/“치다”(poimainw), “사랑하다”(avgapaw)/“사랑하다”(filew)라는 단어가 번갈아 가며 사용된다. (요 21:15-17) 각각의 단어는 원래 조금씩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내용상의 차이가 거의 없다. 혹자는 avgapa,w/file,w를 구분하여 예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에 담긴 함의를 주장한다. avgapa,w는 신적인 차원의 사랑을, file,w는 친구 간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요한복음의 글쓰기 특징에 대한 오해다. 요한복음은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f ile,w로 나타내기도 하고(요 5:20; 16:27), 사람이 세상을 사랑한 것도 avgapaw로 말하기도 한다. (요 3:19; 12:43)

    나. 요한일서 전체

    이러한 요한 문헌의 글쓰기 특징은 요한일서에도 그대로 등장한다. 1:1-4에서 요한은 그가 보고 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편지를 쓰면서 “전하다”(avpagge,llw)와 “쓰다” (gra,fw)라는 말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글쓰기 특징은 편지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죄’(amartia)와 ‘불의’(avdikia)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요일 1:9; 5:17) 의를 행하지 않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요일 3:10) “시인하다”(omologew,요일 4:15)와 “믿다”(pisteu,w, 요일 5:5)도 문맥에서는 같은 뜻으로 쓰인다. 물론, 시인하는 것은 공개적인 고백을 의미하고 믿는 것은 내면적 변화를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실제 문장에서 두 단어를 바꾸어 써도 두 구절의 의미에는 큰 차이가 없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과 시인하는 것은 같은 의미다. 또한,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라는 예수의 타이틀도 서로 바꿔가며 사용한다. (요일 5:1, 5)

    다. 요한일서 2:12-14

    요한의 이러한 글쓰기 방식은 심지어 2:12-14안에도 나타난다. 요한은 tekni,a와 paidi,a를 바꿔가며 사용한다. 그뿐만 아니라 gra,fw의 시상을 바꿔가며 같은 표현을 반복한다. 2:12-13은 현재형인 grafw를 사용하고 2:14은 아오리스트형인 egraya를 사용한다. gra,fw와 e;graya를 어떻게 이해할지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영어권의 대표적인 번역 성경들이 각각 서로 다르게 번역한다. ESV는 현재 진행형(I am writing과 단순 현재형(I write)으로 번역한다. 이와 달리 NASB는 현재 진행형(I am writing)과 현재 완료형(I have written)으로 번역한다. NIV는 모두 동일하게 단순 현재형으로 번역한다. (I write) 한글 성경도 서로 다르다. 개역개정은 단순 현재(‘쓰는 것은’)와 과거(‘쓴 것은’)로 번역한다. 새번역은 모두 단순 현재로 번역한다. (‘쓰는 까닭은’) 공동번역도 모두 단순 현재로 번역한다. (‘씁니다’)

    다른 한편 혹자는 현재형은 저자가 지금 쓰고 있는 요한일서를 가리키지만, 아오리스트형은 그가 이미 쓴 요한복음이나 요한이서 아니면 다른 잃어버린 문서를 가리킬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요한삼서 9절에 나오는 e;graya는 저자가 이미 쓴 문서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Egraya ti th/| evkklhsia |\ avllVo filoprwteu,wn auvtw/n Diotre,fhj ouvk evpide,cetai h`ma/jÅ /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요삼 9) 그러나 브라운이 잘 반박하였는데 만약 요한일서 2:14에 나오는 아오리스형이 어떤 앞선 문서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왜 아오리스트형을 현재형보다 뒤에 썼는지 설명하기 쉽지 않다. 이미 쓴 것을 먼저 언급하고 지금 쓰고 있는 것을 나중에 언급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수의 학자는 gra,fw와 e;graya는 문체의 변형(stylistic variant)일 뿐 의미상으로는 특별한 차이가 없다고 한다. 만약 있다면 아오리스트형 e;graya는 좀 더 강조 반복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두 동사는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해리스(Harris)는 반복의 특성상 gra,fw는 좀 더 현재 쓰고 있는 행동에 초점을 두고 있고, e;gra ya는 상대적으로 저자가 이미 쓴 것을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한편 리우는 grafw를 ‘I am writing’으로 e;graya를 ‘I have written’으로 각각 번역하면서 서신서로서 요한일서 문체의 특징을 언급한다. gra,fw는 저자의 관점에서 현재 쓰고 있다는 말이고, e;graya는 독자의 관점에서 이미 쓴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일종의 서신적 아오리스트(epistolary aorist) 라는 말이다. 그러나 포터(Porter)는 현재 행동을 위해 사용되는 아오리스트(aorist for present action)의 신약 용례를 조사하며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아오리스트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포터에 따르면 서신을 쓸 때 저자는 자신과 독자의 관점을 시제를 사용하여 복잡하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고유한 시간 관점에서 적절한 시상(verbal aspects)을 가지고 표현한다. 이때 서신적 아오리스트는 전체 포괄적 글쓰기 과정을 가리킨다. 따라서 2:12-14에 나오는 grafw와 egra ya 둘 다 전체 서신을 가리킨다고 한다.

    gra,fw에 대한 설명은 해리스의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 현재 동사의 진행적 성격은 요한일서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다. 예를 들면 요한은 현재 동사 a`marta,nw를 사용하여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한다. (요일 3:6)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도무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다. 요한은 동사의 현재형을 사용하여 이 점을 드러내고 있다. 다른 한편 e;graya에 대한 설명은 포터의 설명이 일리가 있어 보인다. 요한은 편지의 이곳저곳에서 자신의 글쓰기를 아오리스트 egra ya를 사용하여 나타내고 있다. (요일 2:21, 26; 5:13) 이때 요한은 자신의 편지 전체를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사용한다. 따라서 gra,fw는 현재 글 쓰는 과정을, e;graya는 전체 글쓰기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해리스의 견해든지 리우의 견해든지 포터의 견해든지 본 연구의 논지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즉, graf w와 e;graya가 요한일서 자체를 가리키는 것은 변함이 없고, 저자의 반복 강조 의도가 드러나는 것도 분명하다.

    라. 소결론

    요컨대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 전체 혹은 요한일서 2:12-14 자체에 나타난 요한 문헌의 글쓰기 예들을 볼 때 ‘자녀들’/‘아이들’, ‘아비들’, ‘청년들’도 또한 같은 대상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상의 특징을 풍성하게 드러내기 위한 요한의 전형적인 글쓰기 방식이다. 다시 말하면 요한일서 수신자들은 자녀도 되고, 아비도 되고, 청년도 된다. 그들은 자녀로서 죄 용서 받고, 아버지를 아는 자들이며, 아비로서 태초부터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이며, 청년으로서 악한 자와 싸워 이긴 자들이다.

    5. 새 언약적 요소

    세 호칭의 특징들은 모두 새 언약의 내용을 담고 있다. 언약이라는 말 자체는 요한일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일서에는 새 언약적 요소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2:12-14도 새 언약적 요소를 담고 있는데, 결국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은 모두 새 언약 백성으로 묘사된다. 새 언약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모두에게 구분 없이 새 언약의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 사이에 어떤 단계나 차등을 두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이 부분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위해 먼저 구약에 나오는 새 언약의 내용을 살펴보자.

    가. 새 언약의 세 가지 요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새 언약의 약속을 주셨다. 새 언약의 첫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법인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되는 것이다. 둘째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편만해진다. 셋째 우주적인 죄 용서가 일어난다. 죄 용서 신지식 말씀의 내재화 등이 새 언약의 내용이다.

    “(33)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1:33-34)

    하나님의 법이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된다는 것은 성령을 통한 마음의 변화로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참고 겔 36:27) 옛 언약에서는 의무나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따랐다면 이제 새 언약에서는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 기꺼이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새 언약 하에서 모든 이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진다. 이러한 종말론적 약속은 이사야도 언급한다. -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 11:9) 다만 예레미야는 이러한 신지식이 새 언약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죄 용서와 함께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여호와께 죄 용서를 받은 사람, 즉 여호와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새겨져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게 된다.

    나. 요한일서에 나오는 새 언약적 요소

    카슨(Carson)은 요한일서 2:20, 27이 구약에 나오는 새 언약을 배경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카슨은 먼저 요한일서가 얼마나 구약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밝힌다. 직접적인 구약 인용은 없지만, 요한일서는 구약 본문을 군데군데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화목제물이나 계명에 순종하는 개념 등은 구약과 깊이 연관되어 있고, 또한 언약적 요소를 담고 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너희 안에 기름 부음이 있다는 요한의 권면을 새 언약 관점에서 해석한다. (요일 2:20, 27)

    옛 언약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왕과 같은 중보적 교사(intermediary teachers)가 필요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제 그러한 교사가 필요 없고 모든 이가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 하신다. (렘 31:34) 요한은 바로 이러한 새 언약의 배경에서 새로운 지식을 가르치는 영지주의적 교사가 필요 없다고 한다. 이미 성령의 기름 부음이 그들 안에 있어 사도들이 전해 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김진태는 요한일서 2:12-14을 새 언약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요한일서에 나오는 속죄(atonement) 개념을 광범위하게 조사한 다음 2:12에 나오는 죄 사함이 예레미야 31:34을 반영하는 것이라 한다. 수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죄 용서를 받는 것은 새 언약의 성취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2:14에 나오는 아버지를 아는 것도 예레미야 31:34의 성취, 즉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여호와를 알게 되는 새 언약의 성취로 해석한다.

    그런데 김진태보다 앞서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새 언약적 요소에 주목한 대표적인 이는 말라테스타(Malatesta)이다. 그는 먼저 요한일서에 나오는 새 언약적 요소를 광범위하게 분석한다. 요한일서에 빈번하게 나오는 ei=nai evn와 me ,nein evn의 용례를 분석하여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이루어지는 신앙의 내면화를 연구하였다. 이러한 내면화는 곧 구약에 예언된 새 언약의 약속이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새 언약 백성은 바로 이러한 교제와 내면화 속에서 살아간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죄 사함,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말씀의 내주가 예레미야 31장에 예언된 새 언약의 요소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한다.

    물론, 예레미야 31:33-34(70인 경, 렘 38:33-34)과 요한일서 2:12-14 사이에 언어적 유사성이 그렇게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70인 경 예레미야 38:33은 말씀의 내재화를 위해 dwswno,mouj mou eivj thn dia,noian auvtw/n라고 하지만, 요한일서 2:14은 o logoj tou/qeou/ evn u`mi/n me,nei라고 한다. 또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위해 70인 경 예레미야 38:34은 oida를 사용하는 반면에 요한일서 2:13-14은 ginw,skw를 쓴다. 그리고 죄 사함을 위해 70인 경 예레미야 38:34은 i[lewj e;somai tai/j avdiki aij auvtw/n kai . t w/n a `ma rt i w/n a uvt w/n o uv mhmnhsqw/ eti라고 하는데, 요한일서 2:12은 avfewntai u`mi/n ai ama rtiai dia to onoma auvtou라고 한다.

    그러나 주제적 유비는 분명하다. 앞서 다른 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2:12-14에는 죄 용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말씀의 내주라는 새 언약의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일서의 다른 본문에도 새 언약 개념이 등장한다. 새 언약의 백성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통해 모든 것을 아는 자이다. (요일 2:20, 27) 그들에게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 언제든지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요일 2:2) 또한,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말씀을 따라 살며 죄짓지 않도록 한다. (요일 3:9) 이처럼 요한일서와 예레미야의 유비에 근거해서 2:12-14을 새 언약의 성취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면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 사이에 어떤 차등이나 구분을 두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새 언약 아래에서 모든 사람이 새 언약의 복을 동일하게 함께 누린다.

    다. 반론과 재반론

    그런데 새 언약적 배경을 주장하며 본 연구의 논지와 다른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톰슨(Thompson)은 예레미야 31:34에 나오는 ‘작은 자’와 ‘큰 자’가 요한일서에 나오는 청년들과 아비들로 치환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말라테스타도 예레미야 31:34에 비춰봤을 때 청년들과 아비들은 자녀들 안에 있는 하위 단위의 두 그룹을 나타낸다고 한다.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는 모두를 포괄하는 말인데, 이것이 요한일서에서 청년들과 아비들로 나타난다고 한다. 따라서 청년들과 아비들은 공동체 안의 청년과 노인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새 언약에 나오는 작은 자와 큰 자는 결국 언약적 복을 누림에 있어 차이가 없다. 작은 자나 큰 자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지식에 충만하다. 그러나 소위 두 그룹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요한일서에 나오는 청년들과 아비들은 육체적 혹은 영적 성숙에 있어 구별된다. 아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고, 청년들은 악한 자와 싸워 이겼다. 이들은 각각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새 언약에 나오는 ‘작은 자’와 ‘큰 자’는 모두 차별 없이 공통된 복을 누린다. 결국, 한 그룹 견해를 지지한다. 하나의 공동체가 누리는 구원의 복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요한일서에 나오는 청년들과 아비들이 ‘작은 자’와 ‘큰 자’를 각각 가리킨다면 청년들과 아비들 순서로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막상 요한일서는 아비들을 먼저 언급한 후 청년들을 언급한다. 이것도 예레미야 34장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순서상으로도 자연스럽지 않다.

    라. 소결론

    따라서 자녀들과 청년들과 아비들은 새 언약의 복을 공동으로 누리는 새 언약 백성을 가리킨다. 이들 사이에 어떤 구분을 짓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요한의 수신자들은 모두 죄 용서를 받은 자녀들이고,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아비들이고, 악한 자와 싸워 이긴 청년들이다.

    6. 왜 세 호칭일까?

    지금까지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은 서로 다른 그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각각 요한일서 전체 수신자 일반을 가리킨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요한 문헌에서 가족 용어를 사용하여 성도를 묘사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이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말씀 중 특별히 영적 가족에 관한 말씀을 기록한다. 예수는 그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를 새로운 가족으로 엮어 주신다. (요 19:26-27)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에 의해 ‘형제’라 불림을 받고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된다고 소개받는다. (요 20:17) 이러한 제자들의 정체성은 이미 서문에서 밝혀진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te,kna qeou/)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이서에도 가족 용어가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 나타난다. 사도는 그의 수신자들을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이라 한다. (요이 1) ‘부녀’로 번역된 “kuria”는 특정 개인 수신자라기보다 교회공동체를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앞에 관사가 없을 뿐 아니라 요한이서의 내용이 특정 개인의 문제를 다루기보다 교회공동체의 문제를 언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한이서의 특징은 마지막 절에도 나타난다.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 (요이 13) 요한은 가족 용어를 사용하여 교회를 묘사하며 끝인사를 한다. ‘네 자매’(h` avdelfh/j sou)는 저자가 속한 교회를 일컬으며, ‘자녀들’(tatekna)은 그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요한일서 2:12-14에서 가족 용어인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을 사용하여 교회공동체를 묘사하는 것은 요한 문헌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왜 수신자들을 이러한 호칭으로 부른 것일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격려일 것이다. 수신자의 믿음과 신분을 칭찬하고 확신시켜서 그들의 믿음과 신분에 맞게 살아가도록 권면하기 위한 것이다. 문맥이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2:12-14의 내용은 수신자의 믿음과 신분을 격려하는 내용이고 이어지는 2:15-17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신자의 삶에 대한 권면을 말한다.

    2:12-14이 격려의 표현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 학자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슈나켄버그(Schnackenburg)는 2:12-17을 앞 단락과 구분되는 하나의 단락으로 보면서 2:12-14은 2:15-17에 나오는 명령을 준비하는 격려로 본다. 다시 말하면 저자는 수신자들의 구원을 먼저 확신시킨 후에 그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격려한다. 톰슨은 아예 2:12-14의 단락 제목을 “Encouragement to the Faithful”이라고 하며 2:15-17에 나오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와 연결된다고 한다. 리우는 2:12-17에 대한 제목을 “Encouragement to Persevere”라 하면서 격려의 기능으로서 2:12-14을 강조한다. 마샬은 신자가 새로운 신분으로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2:12-17의 주제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2:12-14에서 신자의 신분을 확신시킨 다음에 신자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도록 권면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이라는 호칭도 이러한 격려의 문맥에 맞게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저자는 수신자들을 사랑하는 자녀로 대하면서 그들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받아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자라고 칭찬한다. 또한, 태초부터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는 성숙한 자, 곧 아비들이라고 칭찬한다. 그리고 악한 자와 싸워 이긴 패기를 칭찬하며 그들을 청년들이라 부른다. 이러한 칭찬을 기초로 이어지는 문맥에서 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도록 권면한다. (요일 2:15-17)

    7. 결론

    ‘자녀들’/‘아이들’, ‘아비들’, ‘청년들’, 이 세 호칭의 대상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지만, 다음의 세 가지 이유로 이 세 호칭은 하나의 그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요한일서 문맥, 저자의 표현 기법, 새 언약적 요소.

    첫째,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요한일서 전체 문맥에서 요한일서 수신자 일반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요한일서 수신자들은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용서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들이다. 그들은 또한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거부하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바르게 아는 자들이다. 그들은 또한 사도들을 통해 그리스도 복음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 안에 거하며 악한 자를 이긴 자들이다. 따라서 마치 세 그룹 혹은 두 그룹 사이에 어떤 육체적, 영적 차이가 있는 것처럼 구분하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다.

    둘째, 요한 문헌은 자주 같은 의미의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여 표현을 풍성하게 한다. 

    요한복음에서 “알다”(ginwskw), “영접하다”(paralambanw), “믿다”(pisteuw)는 믿음을 나타내는 서로 다른 표현이다. (요 1:10-12) ‘어린 양’(avrnion)/‘양’(probaton), “먹이다”(bo,skw)/“치다”(poimai,nw), “사랑하다”(avgapa,w)/“사랑하다”(file,w)도 모두 각각 번갈아 가며 같은 뜻을 나타낸다. (요 21:15-17) 요한일서 안에서도 “전하다”(avpaggellw)와 “쓰다”(grafw, 요일 1:1-4), ‘죄’(a`martia)와 ‘불의’(avdikia, 요일 1:9; 5:17), “의를 행하지 않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요일 3:10), “시인하다”(o`mologe,w, 요일 4:15)와 “믿다”(pisteu,w, 요일 5:5)가 문맥에서는 같은 뜻으로 쓰인다. 심지어 2:12-14 안에서도 “gra,f w”와 “e;graya”는 그 뜻의 차이가 크지 않으면서 반복 강조하는 표현으로 나온다. 이처럼 ‘자녀들’/‘아이들’, ‘아비들’, ‘청년들’은 단어는 다르지만, 모두 요한일서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런 다른 표현을 통해 요한일서 수신자의 특성을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다.

    셋째,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예레미야 31:33-34에 약속된 새 언약의 복이다. 

    새 언약의 복은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모두가 구분 없이 누릴 종말론적 복이다. 다시 말하면 새 언약 아래에서 자녀들이 누릴 복이 다르고, 아비들이 누릴 복이 다르고, 청년들이 누릴 복이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구분 없이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며 말씀의 내주를 경험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은 각각 어느 특정 그룹을 가리킨다기보다 요한일서 전체 수신자 일반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요한은 수신자들을 사랑받는 자녀로 대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음을 상기시킨다. 그들은 또한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성숙한 자라 격려한다. 그리고 마음에 심겨진 말씀을 통해 악한 자를 이겼다고 칭찬해 준다. 이런 칭찬을 기초로 2:15부터 나오는 권면을 받아들이게 한다. 곧,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가족을 비유해서 3가지 호칭으로 구분해서 불렀습니다. 요한일서 2장 12절에 보면, 죄 용서를 강조할 때는 “자녀들아”라고 불렀고, 오늘 본문에서는 “아이들아”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리고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을 강조할 때는 “아비들아”라고 불렀고, 흉악한 자를 이겼다는 것을 강조할 때는 “청년들아”라고 불렀습니다.

    1) 아이들

    요한일서 2장 12절에 “자녀들아”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테크니아’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갓 태어난 아이를 빗대어 영적으로 갓 태어난 아이들을 가리킵니다. 영적으로 갓 태어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게 되는 순간에 영적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영적으로 갓 태어나는 것은 이 땅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린 성령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지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게 하시는 것이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자녀들아”의 말은, 너희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고, 용서받았기 때문에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속하게 되었다는 표현으로 “자녀들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본문 14절에서 “아이들아”라는 또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죄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무시무시한 심판관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무한한 사랑과 긍휼의 대상이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이들은 수많은 특권을 누리면서 일생을 행복하고 보람있게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이 세상을 떠나가 될 때 천국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사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아비들

    여러분~! 가족 구성원 중에서 아비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장하는 자녀들의 인생관도 가장인 아비가 어떻게 가르치냐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 “아비들”의 특징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는 창세기 1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도 사도 요한은 “아비들”이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비들이 올바른 지식을 갖고 있어야 가족들을 보호하고, 지키고, 바르게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도 요한 당시에 잘못된 가르침을 강조하는 이단 세력이 교회 안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번 믿었으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고 잘못 가르쳤습니다(요일 1:8, 10). 또한 계명을 무시하면서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요일 2:4, 11).

    그들 중에는 기독교 신앙의 뿌리를 흔드는 이단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자들이 영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믿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은혜의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인 지식을 많이 쌓아가면 결국, 구원에 이른다는 잘못된 가르침을 유포시켰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이단들에 대해서 올바르게 대항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단에 꼬임에 넘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 “아비들”의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아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 곧 하나님을 확실하게 경험했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인 하나님의 가족들에게 분명한 가르침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분 아니라, 신앙의 가족들을 이단 사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보호막 역할을 했습니다.

    “아비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경험적으로 아는 중요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요즘은 신학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이 아비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신앙적으로 성숙한 “아비들”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이 보존되고 전수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 영적인 아비들과 목회자를 존귀하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목회자가 아닐지라도 성경, 기도, 예배, 교제, 전도를 통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경험한 “아비”의 단계에 이르게 된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과 “청년들”에게 지금까지 올바른 신앙이 전수되었습니다.

    3) 청년들

    “청년들”은 “아비들”로부터 “태초부터 계신 이”를 잘 배워서 제법 성장한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청년들”의 특징을 “악한 자”를 이긴 것으로 요한일서 2장 13절에서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14절에서도 “흉악한 자”를 이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의 힘만으로는 악하고, 흉악한 사탄과의 싸움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청년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어둠의 권세인 사탄을 완전히 짓밟으셨습니다. 그래서 “청년들”도 악하고 흉악한 사탄을 이길 수 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다고 “청년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14절에서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강했다”는 것은 평소에 영적 건강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는 사실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기도 생활도 많이 했고, 주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깊은 신앙의 교제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무기로 마귀의 궤계를 대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전신 갑주 중에서 공격용 무기인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에베소서 6장에서 권면 했습니다(엡 6:11-17). 그러니까 “아이들”의 단계에서 “청년들”의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뒀을 때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겁니다. “청년들”이야말로 영적 싸움에서 맨 앞에 선봉에 서서 적군인 사탄과의 혈투를 통해서 승리를 쟁취하는 영적 군사였습니다.

    그런 “청년들”이 없다면 하나님의 가족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게 됩니다. 영적 최전방에서 과감하게 사탄과 그 세력들을 무너뜨리는 주의 “청년들”이 우리 교회에 많이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용서 받은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통해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우리는 “아이들”의 신앙에서 “청년들”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서 악한 자들과 흉악한 자들을 계속해서 물리치면서 결국 “아비”의 단계로 성숙해야만 합니다. 잘못된 이단 사상으로부터 우리 교회를 굳건하게 지키고, “아이들”과 “청년들”을 성장시킬 수 있는 영적 “아비들”로 견고하게 세워지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게헨나(지옥)  γέεννα, ης, ἡ Storng number 1067

    1.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  2. 예루살렘 남쪽 계곡.  3. 지옥  
    Pronunciation  [ gĕĕnna ]  
    Etymology  /  히브리어 1516과 2011에서 유래
    •  1.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 예루살렘 남쪽 계곡 [후기 유대 민중 신앙에 의하면 거기서 최후의 심판이 있다. 
      복음서에서는 내세의 형벌을 받는 장소를 상징한다], 
      지옥, 마5:29,30, 10:28, 18:9, 23:15,33, 막9:43,47, 눅12:5, 불의 지옥, 마5:22, 18:9. [상징적으로] 약3:6.
    • 관련 성경  /  지옥 불(마 5:22, 18:9, 약 3:6), 지옥(마 5:29, 막 9:45, 눅 12:5).

    1516. 가이(골짜기) גַּי Storng number 1516

    1. 협곡.  2. 계곡.  3. 평평한 곳  
    Pronunciation  [ gayʼ ]   
    Etymology  /  혼성. 연계형 גֵּי ,גֵּיא, 복수 ניאות, 어미활용 גֵּיאוֹתֶיךָ, 1466과 동일한 어원에서 유래한 약어
    Old Testament  /  30회 사용
    •  1. Noun 협곡, 계곡, 평평한 곳, 저지대, 왕하2:16, 겔6:3, 35:8.
    • 관련 성경  / 골짜기(민21:20, 삼상13:18, 겔39:11), 가이(삼상17:52), (소금) 골짜기(왕하14:7, 시60편표제).

    2011. 희놈(Hinnôm) הִנֹּם  Storng number 2011  
    Pronunciation  [ Hinnôm ]

    Old Testament  /  2회 사용
    •  1. 고유명사, 남성 여부스 족 사람으로 보임 ‘힌놈’.
    • 관련 성경  / 힌놈(수 15:8, 18:16).


    천국(天國)  παράδεισος

    1월 5일(월) 요한일서 2:7-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새 계명(2: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Yet I am writing you a new command; its truth is seen in him and you, because the darkness is passing and the true light is already shining.

    새 계명(엔토렌 카이넨) εντολην καινην
    옛 계명(old command) εντολην παλαιαν

    다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팔린'을 본문과 같이 '다시'라고 번역할 수도 있으나(again, KJV)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yet, NIV, RSV).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로 참된 것이라
    - 본문의 '새 계명'은 앞절에서 사랑의 계명을 옛 계명으로 지칭한 것과 모순되는 듯 보인다. 
    여기서의 '계명'은 예전부터 수신자들이 전해들었다는 의미에서의 옛 계명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새 계명'이다. 
    그 이유는 네 가지이다(Stott, Smalley, Barker). 
    1.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인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셨다(4:9; 요 3:16). 
    2. 예수께서는 순종으로 모든 계명의 완성인 사랑을 행하셨다(요 12:27; 롬 10:4). 
    3. 예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삶, 즉 영생을 부여하셔서 자신이 행했던 바와 같이 사랑의 계명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신다(4:8-11; 5:11, 12). 
    4.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시고 모든 믿는 자들로 행하도록 역사하시는 사랑의 계명을 자각하고 성취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의 계명은 한편으로 옛계명이지만 새 계명이 된다. 
    이러한 새 계명은 그리스도와 모든 믿는 자에게 성취되어 분명한 실체로 나타났다(Barker, Stott).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 본문은 새 계명이 그리스도와 믿는 자 안에서 성취될 수 있는 이유이다. 
    본문에서 '어두움'과 '참빛'의 대조는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 방법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참빛, 즉 실재하는 빛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어두워진 이 세상에 오셨다(1-5-7; 요 8:12). 
    한편 '비췸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네이'는 현재 시사이다. 
    이것은 빛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에 빛을 비추셨으며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구속의 빛을 비추심을 의미한다. 이 빛은 완전한 빛이 비추는 다가올 세대, 즉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Smalley).

    새 계명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랑의 계명입니다.

    성경 근거(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왜 ‘새’ 계명인가?

    • 구약에도 “이웃 사랑”은 있었습니다(레 19:18).

    •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의 기준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즉, 십자가의 희생적· 무조건적 사랑이 기준입니다. 

    새 계명의 핵심 특징

    1. 기준의 새로움 : 자기중심적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

    2. 관계의 초점 : 율법 준수보다 서로를 향한 삶의 태도

    3. 증거의 역할 : 사랑이 곧 제자됨의 표지 

    옛 계명과의 관계

    • 새 계명은 옛 계명을 폐기하지 않음

    • 오히려 율법의 완성(마 22:37–40, 롬 13:10) 

    오늘의 적용

    •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기

    • 말이 아닌 행동으로 섬기기

    • 교회 안팎에서 그리스도의 성품 드러내기

    새 계명은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계명입니다.


    새 계명은 기독교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핵심 가르침을 말해요.

    • 내용 :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 의미 : 이전의 율법을 폐기한다기보다, **예수님의 사랑(희생·용서·섬김)**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방식의 사랑을 강조한 거예요.

    • 핵심 포인트 :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 조건 없는 사랑

      • 그 사랑이 제자됨의 표지가 됨

    성경에서는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이렇게 전해져요(짧게 인용):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원하면 이 계명이 일상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학교, 친구 관계 등)도 예로 설명해 줄게요.


    옛 계명(옛 계명, Old Commandment)은 성경에서 주로 이미 주어졌고 처음부터 알고 있던 하나님의 계명
    특히 율법과 사랑의 계명을 가리킵니다.

    1. 성경적 근거

    • 요한일서 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을 쓰노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라”

    2. 의미 정리

    • 처음부터 주어진 계명
      → 하나님의 뜻은 새롭게 바뀐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선포됨

    • 율법의 핵심
      →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신 6:5, 레 19:18)

    • 말씀으로 이미 들은 계명
      → 새로 창안된 규칙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다시 확인된 진리

    3. 옛 계명과 사랑

    옛 계명의 핵심도 결국 사랑입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라

    • 이웃을 사랑하라

    즉, 내용은 옛 것이지만, 그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해짐

    4. 새 계명과의 관계

    구분              옛 계명 새 계명
    시점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용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
    기준            율법             십자가의 사랑
    성격            명령            본을 따른 삶

    5. 핵심 요약

    • 옛 계명 : 처음부터 있던 하나님의 사랑의 명령

    • 새 계명 :  그 사랑이 예수 안에서 구체적 삶으로 드러난 것

    요약

    • 새 계명 : 예수님처럼 사랑하라

    • 사랑의 기준 :  십자가

    • 사랑의 목적 :  하나님의 영광과 공동체의 증거

    새 계명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핵심적인 사랑의 계명입니다. 

    성경 근거(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왜 ‘새’ 계명인가?

    구약에도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레 19:18)는 계명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계명은 기준과 깊이에서 새롭습니다.

    구분              기존 계명 새 계명
    사랑의 기준              나 자신        예수님의 사랑
    사랑의 범위           이웃 중심       제자 공동체 → 모든 사람
    사랑의 방식         윤리적 요구       십자가적 자기희생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가 새로움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특징

    • 자기희생적 사랑 :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내어주심

    • 무조건적 사랑 : 배신할 제자들까지 사랑

    • 끝까지 사랑 :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신앙적 의미

    1. 제자의 표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5)

    2. 교회의 본질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3. 성령 안에서 가능한 계명
      인간의 노력만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사랑입니다(롬 5:5). 

    요약

    • 새 계명 :  예수님처럼 사랑하라

    • 사랑의 기준 : 십자가

    • 사랑의 목적 : 하나님의 영광과 공동체의 증거

    요한서신에서 본 ‘새 계명’의 확장

    “옛 계명이며 새 계명” (요일 2:7–8)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서 참된 것이라”

    해석 포인트

    • 옛 계명 :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핵심(예수님의 가르침)

    • 새 계명 :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됨

      • 성령 안에서 현재적으로 살아 움직임

    👉 새로움은 내용이 아니라 실체와 능력에 있음 

    빛과 어둠의 기준 :  형제 사랑 (요일 2:9–11)

    상태 기준
    빛 가운데 있음             형제를 사랑함
    어둠 가운데 있음            형제를 미워함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요한의 논리

    • 신앙 고백 ≠ 참 신앙의 증거

    • 사랑의 실천 = 빛 가운데 거함의 증거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를 드러냄 

    계명의 요약과 완성 (요일 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요한 신학의 핵심 구조
    믿음 → 사랑 → 순종

    • 예수를 믿는 믿음은 반드시

    • 형제 사랑이라는 열매로 나타남 

    설교용 정리 (3대지 구조)

    제목 예시

    「새 계명, 빛 가운데 사는 삶의 기준」

    대지 1. 새 계명은 ‘옛 계명’이다 (요일 2:7)

    • 새 계명은 갑작스러운 윤리가 아니다

    •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본질

    📌 적용

    우리는 더 새로운 가르침을 찾기보다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대지 2. 새 계명은 ‘지금 살아 있는 계명’이다 (요일 2:8)

    • 예수 안에서 이미 성취됨

    • 성령 안에서 지금도 역사함

    📌 적용

    사랑은 이상이 아니라
    현재의 순종이다 

    대지 3. 새 계명은 신앙의 ‘판별 기준’이다 (요일 2:9–11, 3:23)

    • 빛과 어둠은 말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분됨

    • 믿음 없는 사랑은 인본주의

    • 사랑 없는 믿음은 거짓 신앙

    📌 적용

    “나는 옳은가?”보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가?”를 점검하라 

    Ⅲ. 묵상용 요약 (개인·소그룹)

    묵상 질문

    1. 나는 형제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있지는 않은가?

    2. 나의 신앙은 말에 머무는가, 삶으로 증명되는가?

    3.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방식이 내 사랑의 기준이 되고 있는가? 

    묵상 기도문

    주님,
    말로만 빛에 있다 하지 않게 하시고
    사랑으로 빛 가운데 거하게 하소서.
    예수님이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오늘 한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아멘. 

    한 줄 묵상

    “새 계명은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사랑하며 살라는 부르심이다.”


    새 계명, 말이 아니라 삶이다(요한일서 2:7–11, 3:23)

    Ⅰ. 들어가는 말 (도입)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말은 신앙적인데 마음은 차가워질 때가 있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나는 정통입니다.”
    “나는 교회에 충성합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은 식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빛 가운데 있느냐, 어둠 가운데 있느냐?”

    그 기준은 사랑입니다.

    Ⅱ. 본문 해설과 대지

    1️⃣ 새 계명은 옛 계명입니다 (요일 2:7)

    요한은 말합니다.

    “내가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옛 계명이라”

    사랑은 새로운 유행이 아닙니다.
    복음의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본질입니다.

    🔔 예화 ① –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부부
    결혼 초에는 작은 일에도 고맙다 말하던 부부가
    시간이 지나면 “그 정도는 당연하지”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당연해져 버린 것입니다.

    👉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새 진리를 찾기보다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2️⃣ 새 계명은 지금 살아 있는 계명입니다 (요일 2:8)

    요한은 이어서 말합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서 참된 것이라”

    사랑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현재의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후
    즉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 예화 ② – 말로만 하는 신앙
    어떤 성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성격이 원래 이래서 사랑 표현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성격 문제가 아니라
    순종의 문제입니다.

    👉 사랑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입니다.

    3️⃣ 새 계명은 신앙의 진짜 기준입니다 (요일 2:9–11, 3:23)

    요한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면서 빛 가운데 있다 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니라”

    요한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부족하다”
    “어둠에 있다”

    🔔 예화 ③ – 교회 안의 어둠
    교회 안에서
    말씀과 봉사는 열심인데
    서로 미워하고 정죄하며
    말로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느니라”

    👉 사랑 없는 신앙은
    방향을 잃은 신앙입니다. 

    Ⅲ. 결론과 적용

    요한일서 3:23은 이렇게 요약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

    ✔ 믿음 없는 사랑은 인본주의요
    ✔ 사랑 없는 믿음은 거짓입니다

    🔔 오늘의 적용

    1. 오늘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십시오

    2. 마음으로 미워했던 사람이 있다면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3. 말이 아니라 작은 행동 하나로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Ⅳ. 맺는 기도

    사랑의 주님,
    우리가 빛 가운데 있다 말하면서
    어둠의 마음을 품고 살았음을 용서하옵소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오늘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삶으로
    새 계명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 줄 결론

    “새 계명은 설교하는 말씀이 아니라, 살아내는 복음입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호세아 6:6의 동일한 구절을 두 번 인용하셨는데, 거기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자비 부족을 지적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복음서를 읽은 우리 대부분이 잘 알고 있는 계층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자비를 베풀지 않을 때 바리새인들과 같다는 점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자비(혹은 그 결여)라는 주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주님께서 호세아의 그 구절을 처음 사용하신 것은 당시 세리였으며 후에 사도이자 복음사가가 된 마태를 부르실 때였습니다. 마태 자신이 그 장면을 묘사합니다:
     
    마태복음 9:9-13
    “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이 잘못한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서 함께 식사하신 사람들은 참으로 죄인들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주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너희는 가서 내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한다는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서 함께 식사하신 사람들은 참으로 죄인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그들에게 가까이 가지 마라. 그들은 죄인들이다”라고 말할 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과 먹고 마시리라. 내가 그들을 찾아 회개하도록 부르러 왔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우리 자신도 죄인이 아닌 양 “죄인”들을 피한다면,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같습니다. 그들의 교만은 스스로를 “죄 없는 자”로 분류하게 했고, 그들이 “죄인”으로 여기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니, 이는 구약에서 인용된 구절로 신약에서 두 번 인용되었습니다(잠언 3:34, 칠십인역(참고: 칠십인역은 구약의 고대 그리스어 번역본으로, 신약에 나오는 구약 본문 약 2/3가 이 번역본에서 유래함)):
     
    야고보서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리고 베드로전서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겸손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리새인과 그들과 같은 자들이 부족했던 것이며, 우리 역시 종종 부족한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의 예는 누가복음 18:9-14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니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강탈하고 불의하며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겸손한 마음을 사랑하시고 교만한 자를 멸하시느니라. 그분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선한 일을 이루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보지 않으시느니라. 우리가 한 일이 겸손한 마음에서 나오지 않고, 타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면, 그것은 교만한 바리새인들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아무 가치도 없느니라. 주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나니”라고 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를 무시했고, 우리도 자비 없는 종교적 행위를 추구하며 종종 이를 외면한다.
        주님께서 호세아 6:6의 동일한 구절을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두 번째 장면은 마태복음 12장에 나온다.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12:1-8
    “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殿)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陳設餅)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해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죄 하지 않았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글자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율법의 글자에 따르면, 그들은 옳았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대로:
     
    고린도후서 3:5-6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났느니라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누군가 영 없이 글자만 고집하면, 그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바리새인이 됩니다. 예를 들어, 글자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자비가 요구할 때는, 예를 들어 안식일에 누군가 치유받기 위해서라면, 이 계명은 효력을 잃었습니다. 자비는  어떤 계명보다도 컸고 지금도 큽니다왜냐하면 가장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2:37-40이 말하듯: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요한일서 4:20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계명이지만,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만 진정으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다. 바리새인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온 율법과 선지자가 하나님과 서로를 사랑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안식일 계명이나 다른 모든 계명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보다 하위였다. 이것이 율법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문자만 알고 받아들였다. 그들은 율법의 문자에 대해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알고 있었다.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날짜와 계절과 양에 관한 요구사항까지. 그들은 율법의 문자적 규정에는 정통했으나, 율법의 정신, 즉 겸손과 자비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마태복음 23:23
    “화 있을진저 위선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내는 데는 첫째였으나, 정의와 자비와 신앙에는 막내였다. 그러나 정의와 자비와 신앙이 율법의 핵심이자 더 중하고 더 중요한 사항이다. 이 또한 겸손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들로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마음의 종류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십일조를 내거나 다른 어떤 희생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만일 우리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거부한다면 우리 역시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우리가 바리새인인지 하나님의 참된 종인지를 가르는 유일한 기준은 우리의 희생이 아니라 서로에게 베푸는 자비와 사랑입니다참된 하나님의 종들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풉니다반면 바리새인들은 자비 없이 희생만 합니다. 바리새인과 그와 같은 자들에게는 종종 외적인 것, 특히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행동이 중요합니다. 이는 그들의 교만과 이기심을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1-7, 13-14이 말하듯이:
     
    “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없음)”
     
        바리새적 행위의 주요 특징은 위선이다. 바리새인은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지만 마음은 불경건하다. 겸손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교만으로 가득 차 있다. 남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도 자신은 그 짐을 만지려 하지 않는다. 길고 끝없는 기도를 드리면서도 동시에 과부의 집을 삼켜 버린다. 겉으로는 경건하고 신실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자비심 하나 없이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는 정도만큼 우리도 바리새인이다. 그리고 이것이 거짓 종교가 종종 행하는 바이다: 바리새적 즉 위선적이고, 부담스럽고, 무자비하며, 교만한 것이다. 반면 참된 종교는 야고보서 1:27이 정의하는 바와 같다:
     
    야고보서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아 주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이것이니라
     
        하나님 앞에 참되고 흠 없는 경건은 완벽한 교리나 수많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오직 자비와 사랑의 경건입니다.
        바리새인들로 돌아가 그들의 행동과 그들을 흉내 내는 자들을 예수님의 행동과 비교해 보라. 그들은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며 그들을 고치려 하셨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모든 일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면서도 자신을 숨기셨거나 치유받은 자들에게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가르치신 대로 사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6:1-6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가 가르치신 바가 이러하니 그가 행하신 바도 이러하니라 그러므로 그가 기적을 행하신 후에 숨어 계셨느니라
     
        결론하자면: 정의, 자비, 믿음, 그리고 서로 사랑함이 중요합니다. 희생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 무엇이라도 바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종교적 축제나 규칙은 우리가 자비를 베풀지 않을 때 그분께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무자비한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의 사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이 불의한 세상에서 우리는 정의를 행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없는 시대에 그분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길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신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마태복음 5:13-16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추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여 그들이 너희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자비와 정의와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들 덕분에 이 세상에는 여전히 빛, 우리의 빛이 있습니다. 이 빛을 지키고, 주님의 빛이 우리를 통해 이 세상에 비추어 우리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도록 합시다. 죽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자비와 정의와 믿음으로 행하며, 우리 주님께서 하신 그대로 행합시다. 미가 6:8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듯이: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보혜사, 대언자(파라클레토스.  )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Storng number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일 2:1.  3. 요 14:16,26
    Pronunciation [ paraklētŏs ]  
    Etymology  / 3870에서 유래
    •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  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2:1.
      •  b. [성령을 가리켜서] 요14:16,26, 15:26, 16:7.
    •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 26, 16:7), 대언자(요일 2:1).


    중보자(메시테스.  mĕsitēs ) μεσίτης, ου, ὁ Storng number 3316

    1. 중재자.  2. 갈 3:19, 20.  3. 딤전 2:5
    Pronunciation [ mĕsitēs ]  
    Etymology  /  3319에서 유래
    • 1. 중재자, 갈 3:19,20, 딤전 2:5, 히 8:6, 9:15, 12:24.
    • 관련 성경  / 중보자(갈 3:19, 딤전 2:5, 히 12:24).






     대언자 · 중보자 · 보혜사 비교 표

    구분 대언자 (Advocate) 중보자 (Mediator) 보혜사 (Paraclete)
    기본 의미 대신 말해 주는 자, 변호자     두 관계 사이를 잇는 자    위로자, 돕는 자, 변호자
    성경 원어 παρά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    μεσίτης (메시테스)     παρά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
    주요 대상 하나님 앞에서 성도        하나님 ↔ 인간    성도
    사역의 방향    위로 (하늘을 향함)     양방향 (하나님과 인간 사이)    내적 (성도 안에서)
    주된 역할 죄인을 변호함          관계를 화목케 함    진리로 인도하고 위로함
    대표 성경 요일 2:1           딤전 2:5      요 14:16
    담당 위격 성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
    사역 근거 십자가의 의        속죄와 언약     예수의 말씀
    지속성 영원함     단회적·완전함     성도 안에 항상 거하심
    신자의 경험 담대함, 용서의 확신      하나님과의 화평      위로, 인도, 능력

     핵심 차이 요약

    • 대언자 : 법정적 이미지
      → 하나님 앞에서 “이 사람은 내 피로 의롭다”고 말씀하심

    • 중보자 : 관계적·언약적 이미지
      → 끊어진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잇는 유일한 다리

    • 보혜사 : 목회적·내적 이미지
      → 성도 안에 거하시며 가르치고 위로하심 

    한 문장 통합 정리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우리의 대언자이자 중보자이시며, 성령은 땅에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이시다.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하며 변호하시는 분이라는 신앙 고백적 표현.

    1. 대언자(代言者)의 의미

    • 대언자는 말 그대로 대신 말해 주는 자, 변호자, 중보자를 뜻합니다.

    • 헬라어 성경에서는 주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로 표현되며,
      변호인, 위로자, 중재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2. 성경적 근거

    • 요한일서 2:1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로마서 8:34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 히브리서 7:25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3. 예수 그리스도는 왜 대언자이신가

    1. 완전한 의로우심
      → 죄 없으신 분만이 죄인을 변호할 수 있음

    2. 속죄의 근거를 가지심
      →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 값을 이미 지불하심

    3. 하나님 우편에서 사역하심
      → 지금도 살아 계셔서 성도를 위해 중보하심

    4. 구약의 중보와의 차이

    • 구약의 제사장: 반복적 제사, 불완전한 중보

    • 예수 그리스도:
      단번의 제사 + 영원한 대언자
      (히브리서 9:12)

    5. 신앙적 의미

    • 우리는 정죄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음

    • 실패와 연약함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게 함

    •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언에 근거함

    •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교사가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시며 간구하시는 영원한 대언자이십니다.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Storng number 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일 2:1.  3. 요 14:16, 26
    Pronunciation [ paraklētŏs ] 
    Etymology  /  3870에서 유래
    •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  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2:1.
      •  b. [성령을 가리켜서] 요14:16,26, 15:26, 16:7.
    •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 26, 16:7), 대언자(요일 2:1).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

    죄 지은 인류를 위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변호하고 중재하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예수님의 중요한 역할을 의미하며, 특히 요한일서 2:1절에서 강조되듯, 우리가 죄를 범할 때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고 화목하게 하시는 구원자이자 중보자로서의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주요 의미 : 

    중보자(Advocate / Paraclete) :

     '파라클레토스(Paracletos)'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했으며, '위로자', '돕는 자', '변호사'를 뜻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변호하고 긍휼을 구해주시는 분입니다.   

    화목제물(Propitiation) :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 죄 사함의 길 :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으며, 죄에 빠지지 않고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 구원자 : '예수'는 '구원자',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으로, 이 둘이 합쳐져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즉 '대언자'로서의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성경적 근거 :
    • 요한일서 2:1 (요1:2) :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예수님의 가르침 : 요한복음 14:16, 26 등에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 보혜사 성령도 넓은 의미에서 '대언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결론적으로,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넘어지고 죄를 지을 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며,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영원한 중보자이십니다.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
    는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고 죄를 사하게 하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이는 주로 요한일서 2장 1-2절에 근거하며, '파라클레토스'(위로자, 변호자)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합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의 변호자이자 화목제물이 되어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주요 의미
    • 중보자 및 변호자: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화목제물이 되시는 분입니다.
    • 죄 사함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 성령과의 관계: '파라클레토스'(대언자/보혜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성령을 모두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성경적 근거
    • 요한일서 2장 1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
    •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오셨으며(요한일서 1:7),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십니다. 

    요약
    예수 그리스도가 대언자라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우리를 용서받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변호자'이자 '중보자'라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입니다


    보혜사(保惠師)는
    주로 기독교에서 성령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그리스어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를 음역하여 번역한 단어이며 '곁에 부름을 받아 돕는 자', 즉 변호사, 조력자, 위로자, 상담자라는 뜻을 가집니다. 예수님이 승천 후 아버지께 구하여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은 신자들 곁에 머물며 죄를 깨닫게 하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돕는 역할을 하십니다. 
    주요 의미 및 역할
    • 어원: '파라클레토스'는 '곁으로 부름 받은 자'를 의미하며, 고대 법정에서 변호사를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했습니다.
    • 예수님의 약속: 예수님은 자신과 동일한 성질을 가진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6장).
    • 성령님의 사역:
      • 죄와 의에 대해 세상과 사람을 책망하고 깨우치심 (요한복음 16:8-11).
      •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가르치심 (요한복음 14:26).
      • 연약함을 도우시고 친히 간구하심 (로마서 8:26).
      • 사단의 세력에 맞설 힘과 용기를 주심.
    • 번역어 논란: 한자어 '보혜사'(保護, 惠, 師)는 '보호하고 은혜를 베푸는 스승'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원어적 의미와 성경적 맥락을 고려하면 '조력자' 또는 '대언자'의 역할에 더 중점을 둡니다. 

    요약
    보혜사는 성령 하나님을 지칭하며, 예수님을 대신하여 신자들의 곁에서 진리를 가르치고, 위로하며,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돕는 인격적인 조력자입니다


    1. 보혜사의 뜻

    • 헬라어 :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 의미 :

      • 곁에서 돕는 자 
        위로자
        변호자
        중보자
        돕는 분(Helper)

    👉 법정 용어로는 변호인, 삶의 현장에서는 동행하는 돕는 분이라는 뜻을 함께 가집니다. 

    2. 성경적 근거

    예수님의 약속

    •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

    • 요한복음 16:7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3. “또 다른 보혜사”의 의미

    • “또 다른” = 알로스(ἄλλος)
      본질과 성격이 동일한 또 다른 분

    •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첫 번째 보혜사

    • 성령은 예수님과 같은 본질의 또 다른 보혜사

    👉 그래서

    • 예수님: 하늘에서 대언자

    • 성령님: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 

    4. 보혜사의 사역

    1. 가르치심 – 진리로 인도 (요 14:26)

    2. 생각나게 하심 – 말씀을 기억나게 함

    3. 위로하심 – 환난 중에 동행

    4. 책망하심 – 죄·의·심판에 대해 깨닫게 함 (요 16:8)

    5. 증언하심 –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6. 능력 주심 – 증인의 삶을 살게 함 (행 1:8) 

    5.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 성령(보혜사)
    하늘에서 중보 우리 안에 내주
    아버지 앞에서 대언 성도를 도우며 인도
    단번의 속죄 그 구원을 적용 

    한 문장 요약

    보혜사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지금도 성도와 함께 하시며, 진리로 인도하고 위로하며 변호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보혜사(Parakletos)
    는 '곁에 부름받은 자'라는 뜻으로 위로자, 조력자, 변호사, 대언자 등을 의미하며, 성경에서는 주로 성령님을 가리키고, 대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하는 자'로 예언자를 뜻하지만, 넓게는 성령의 역할을 통해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보혜사의 역할 중 하나(대언)를 포함합니다. 즉, 보혜사는 성령의 다양한 사역(위로, 인도, 보호, 대언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며, 대언자는 그 사역 중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에 초점을 둔 명칭입니다. 

    보혜사 (Parakletos)
    • 그리스어 의미: 곁에 불러 도움을 주는 자 (변호사, 조력자, 위로자, 상담자, 친구).
    • 성경적 의미: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로, 성령님을 지칭하며 신자들과 함께 거하며 인도하고 위로하고 가르치는 분.
    • 한자 의미: '보호할 보(保)', '은혜 혜(惠)'로 '은혜로 보호하고 돕는 분'이라는 의미도 포함. 
    대언자 (Prophetes, 예언자)
    • 의미: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맡아 대신 전하는 자.
    • 역할: 미래를 말하기도 하지만, 주로 현재와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역할. 
    • 포괄성: 보혜사는 성령님의 모든 사역을 담는 더 넓은 개념이고, 대언자는 보혜사 성령님이 하시는 여러 일 중 '말씀을 선포하는' 특정 사역에 집중된 명칭.
    • 일치: 보혜사 성령님이 바로 '대언자'의 역할을 수행하시므로, 성령님을 대언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 결론: 성령님은 보혜사이시며, 그 보혜사로서 '대언자'의 사명을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보혜사와 대언자의 차이

    1. 공통점

    • 둘 다 헬라어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에서 나온 말

    • 뜻: 변호자, 중보자, 돕는 자

    •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곁에 서서” 일하신다는 의미 

    2. 차이점 핵심 정리

    구분 대언자 보혜사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 성령
    어디서 일하시는가 하나님 아버지 앞(하늘) 성도 안과 곁(땅)
    주된 사역 죄에 대한 변호와 중보 삶 속에서의 도움과 인도
    근거 십자가의 피와 의 내주하시는 성령의 임재
    초점 구원의 확보 구원의 적용

    3. 성경 근거

    • 대언자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한일서 2:1)

    • 보혜사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한복음 14:16)

    4. 한 문장 요약

    대언자는 하늘에서 우리를 변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보혜사는 땅에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5. 신앙적 적용

    • 실패했을 때 → 대언자는 “이미 용서되었다”고 말씀하시고

    • 낙심했을 때 → 보혜사는 “내가 너와 함께한다”고 붙드십니다.




    1월 3일(토) 요한일서 2: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My dear children, I write this to you so that you will not sin. But if anybody does sin, we have one who speaks to the Father in our defense--Jesus Christ, the Righteous One.

    대언자(3875) 파라클레토스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Storng number 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일 2:1.
    3. 요 14:16, 26  
    Pronunciation [ paraklētŏs ]

    Etymology  /  3870에서 유래
    •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  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2:1.
      •  b. [성령을 가리켜서] 요14:16,26, 15:26, 16:7.
    •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 26, 16:7), 대언자(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 '나의 자녀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니아 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을 수신자들을 향한 요한의 자비롭고 따뜻한 사랑을 암시한다((Stott, Smalley). 
    한편 '이것을'이 가리키는 것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1:6-10을 가리킨다. 
    (2) 1장 전체를 가리킨다. 
    (3)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 
    가능한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영원한 생명을 보고 듣고 만지며 계속적으로 사귐이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치 말아야한다. 왜냐하면 죄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과의 사귐을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당시 영지주의자 들처럼 사귐이나 사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게 하기 때문이다((Barker). 
    요한은 본문에서 본서 전체의 기록 목적이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유지하며 단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임을 제시한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 '
    죄를 범하면'이 헬라어 '하마르테's 상반절의 '하마르테테'('죄를 범치')와 마찬가지로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는 범죄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된 행위들'을 나타낸다. 
    한편 '대언자'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위로자 또는 옹호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요 14:16, 26;15:26;16:7)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중보하심을 시사한다. 
    이와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과 본절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행 16:7; 롬 8:9; 빌 1:19), 
    요 14:16에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되어 있어 예수께서 '파라클레토스'이심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중보하시는 분이시며 '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 존전에서 그리스도인의 죄를 중보하신다(Stott).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예순 크리스톤 디카이온'(*)은 문자적으로 '의로운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디카이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존전에서 주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셔서 흠이 없고 깨끗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다. 
    예수의 이러한 의로움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게 되며 그것을 근거로 하나가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롭지 못한 모습을 깨끗하게 하신다(롬 3:26, Smalley).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부정하던 예수의 인간되심을 강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이심을 나타내어 죄인들을 중보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드러낸다.



    빛의 성질 

    빛은 직진, 반사, 굴절, 분산의 기본 성질을 가지며,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모두 갖는 이중성을 보입니다. 
    빛이 똑바로 나아가는 직진
    표면에서 튕기는 반사
    다른 매질에서 꺾이는 굴절
    파장에 따라 색이 나뉘는 분산이 대표적이며, 
    이는 빛이 파동(전자기파)이면서 동시에 입자(광자)의 성질을 모두 갖기 때문입니다. 
    빛의 기본 성질을 설명하는 이 영상은 빛의 직진, 반사, 굴절, 분산 현상에 대해 설명합니다:

    주요 빛의 성질
    • 직진(Rectilinear Propagation) : 
      빛은 특별한 장애물이 없으면 항상 곧게 나아가는 성질로, 바늘구멍 사진기 원리가 이에 해당합니다.

    • 반사(Reflection) 
      빛이 물체의 표면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현상으로, 거울에 상이 맺히는 이유입니다. 입자처럼 행동하는 빛의 성질을 잘 보여줍니다.

    • 굴절(Refraction) 
      빛이 서로 다른 매질(공기, 물 등)의 경계면을 통과할 때 진행 방향이 꺾이는 현상으로, 물속의 물체가 실제보다 떠 보이는 이유입니다.

    • 분산(Dispersion) 
      굴절 시 빛의 파장(색깔)에 따라 꺾이는 정도가 달라져 빛이 여러 색으로 나뉘는 현상으로, 프리즘을 통과하며 무지개가 생기는 원리입니다.

    • 회절(Diffraction) : 파동인 빛이 장애물의 모서리나 좁은 틈을 지날 때 휘어 퍼져나가는 현상입니다.

    • 간섭(Interference) & 회절(Diffraction) 
      파동의 성질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빛이 파동처럼 중첩되거나 휘어지는 현상입니다.

    • 산란(Scattering) 
      빛이 불규칙한 입자나 표면에 부딪혀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는 현상으로,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이유(레일리 산란)입니다. 
    빛의 이중성 (입자성 & 파동성)
    • 파동성 : 
      맥스웰에 의해 빛이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 수직으로 진동하며 진행하는 '전자기파'임이 밝혀졌습니다. 굴절, 간섭, 회절 현상은 파동으로 설명됩니다.

    • 입자성 
      아인슈타인은 빛이 '광자(photon)'라는 에너지 덩어리(입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설명했습니다. 광전효과와 같은 현상은 빛의 입자성을 보여주며, 반사 현상도 입자처럼 튕겨 나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빛의 성질은 물리학에서 매우 핵심적인 주제이며,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파동성과 입자성 (이중성)

    • 빛은 파동처럼 간섭·회절 현상을 보이면서도

    • 동시에 **입자(광자)**처럼 에너지의 최소 단위로 작용합니다.
      → 이를 파동-입자 이중성이라 합니다. 

    2. 직진성

    • 균일한 매질에서는 빛이 직선으로 진행합니다.

    •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3. 반사

    • 빛이 물체 표면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현상입니다.

    • 거울에서 “입사각 = 반사각”의 법칙이 성립합니다. 

    4. 굴절

    • 빛이 서로 다른 매질(공기 → 물 등)을 통과할 때 속도 변화로 방향이 꺾이는 현상입니다.

    • 렌즈, 안경, 현미경의 원리입니다. 

    5. 분산

    • 빛은 파장에 따라 굴절 정도가 달라져 여러 색으로 나뉩니다.

    • 프리즘에서 무지개색이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6. 간섭과 회절

    • 간섭: 두 빛이 겹칠 때 밝아지거나 어두워지는 현상

    • 회절: 좁은 틈이나 가장자리를 지날 때 빛이 퍼지는 현상
      → 빛의 파동성을 잘 보여줍니다. 

    7. 편광

    • 빛의 진동 방향이 한쪽으로 정렬된 상태입니다.

    • 선글라스, LCD 화면에 활용됩니다. 

    8. 속도

    • 진공에서 빛의 속도는 약 초속 30만 km로, 자연계에서 가장 빠릅니다.  

    9. 에너지와 파장

    • 파장이 짧을수록 에너지가 크고(자외선, X선),

    • 파장이 길수록 에너지가 작습니다(적외선, 라디오파).


    빛의 3대 성질 

    1. 굴절 : 렌즈, 간이 사진기
    2. 반사 : 거울
    3. 직진 : 그림자, 일식, 월식, 바늘구멍 사진기, 엑스선

    -물체를 본다=빛을 감지한다=광원(스스로 빛을 내는 물체)의 빛이 직접 눈에 들어오거나, 광원에서 나온 빛이 물체에 부딪혀 반사되어 눈에 들어옴.(망막에는 뒤집힌 형태로 상 맺히지만, 뇌는 똑바로 인식)

     

    -달은 광원 X > 달이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태양빛을 반사하기 때문임.

    -달에서 밝게 보이는 부분을 육지(대륙, 달의 바다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이라 부르는데, 이곳에는 운석구덩이가 많이 분포되어 있음.(달이 공기가 없어서 풍화작용, 기상작용 없고 운석 구덩이가 그대로 존재)
    -수성도 대기 없어서 바람 안 불고, 온도차 크며 운석구덩이 있음.
    -금성은 이산화탄소 대기로 뒤덮여서 더움.
    -지구는 공기가 있어서 하늘이 파랗게 보임.(파장이 짧은 파란빛은 멀리가지 못하지만 많이 산란됨.)

    -태양과 물체 사이의 거리가 매우 멀기 때문에 물체의 위치와 상관없이 그림자의 크기는 거의 변하지 않음.
    -일식(태양-달-지구)은 달그림자가 생기는 좁은 범위에 있는 지역에서만 관찰되지만 월식(태양-지구-달)달이 뜨는 모든 지역에서 관찰할 수 있음.

     

    -속력이 느린 매질에서는 굴절각이 더 작음.(입사각, 반사각, 굴절각은 각각 수직선(법선)을 기준으로 함)
    -빛을 통과시키면 투명하고, 빛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흡수 또는 반사하면 불투명함.(불투명할 때 색깔은 반사된 빛의 색임)
    -하얀색은 모든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빛이 모두 섞여 하얀색으로 보이는 것임.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빛의 창조가 갖는 의미와 상징

    1. 서론

    빛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며,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첫 단계로 등장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는 단순히 물리적 빛의 창조를 넘어, 하나님의 본성과 구속사적 의미를 깊이 담고 있다. 

    빛의 창조가 성경 전체에서 갖는 의미와 상징을 성경신학적으로 탐구하고, 이를 통해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과 실천적 함의를 논하고자 한다.

    2. 빛의 창조 : 성경적 배경과 맥락

    1) 창조 이야기에서 빛의 첫 번째 위치

    창세기 1장에서 빛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첫 번째 피조물로 묘사된다. 
    이는 빛이 혼돈과 흑암(창 1:2)을 물리치고 창조 질서를 확립하는 시작임을 보여준다. 
    빛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기초적 요소로 자리 잡는다.

    2) 빛과 어둠의 구분

    창세기 1:4는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과 함께 빛과 어둠을 구분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기록한다. 
    이는 질서의 하나님께서 혼돈을 물리치고 조화와 구조를 부여하시는 창조적 능력을 드러낸다. 
    빛과 어둠의 구분은 성경 전체에서 선과 악, 구속과 심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중요한 주제로 이어진다.

    3. 빛의 신학적 의미

    1) 하나님의 본성의 표현

    요한일서 1:5은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선언한다. 
    이는 빛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순결함, 그리고 진리와 생명의 본질을 나타냄을 의미한다. 
    빛의 창조는 단순히 물리적 현상의 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의 창조 세계에 대한 주권적 통치를 드러낸다.

    2) 생명과 소망의 상징

    빛은 생명과 소망의 상징으로 성경 곳곳에서 나타난다. 
    요한복음 1:4-5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기록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구원의 빛을 강조한다. 
    빛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서 생명을 제공하고, 죄로 인해 어둠에 갇힌 인간에게 소망을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4. 성경 전체에서 빛의 상징적 의미

    1)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빛
    시편 119:105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하며, 빛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함을 보여준다. 말씀은 성도에게 올바른 길을 비추며,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를 제공한다.

    2) 구속사적 빛 :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서 빛으로 묘사된다. 
    요한복음 8:12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시며, 죄와 죽음의 어둠 속에 있는 인류에게 구원의 빛을 제공하신다. 이는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성취를 연결하며, 구속사의 중심에 있는 예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사 9:2, 마 4:16).

    3)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상징
    빛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출애굽기 13:21에서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다. 이 빛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분의 거룩한 임재를 상징한다. 또한, 요한계시록 21:23은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이 그곳의 빛이 된다고 묘사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와 구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5. 빛과 인간의 역할

    1) 성도의 빛된 삶
    예수님은 마태복음 5:14-16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며, 성도들이 어둠 속에서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책임을 부여하신다. 이는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세상에 드러내고, 선행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부르심을 의미한다.

    2) 복음 전파의 빛
    사도행전 13:47은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세웠나니”라는 말씀을 통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을 예언한다. 빛은 복음의 전달과 구원의 확장을 상징하며, 성도들이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상기시킨다.

    6. 빛과 어둠의 대조: 종말론적 의미

    1) 심판과 구원의 상징
    빛과 어둠은 종말론적 문맥에서도 중요한 대조를 이룬다. 데살로니가전서 5:5은 성도들을 “빛의 자녀”로 부르며, 심판 날에 구원받을 자들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반면, 어둠은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으로 나타난다(마 8:12). 이는 최후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될 때 빛의 자녀들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2)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빛
    요한계시록 22:5에서 “다시는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빛이 종말론적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을 예언한다. 이는 창조에서 시작된 빛의 의미가 종말에 완성됨을 나타내며,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를 상징한다.

    7. 결론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빛의 창조는 하나님의 본성과 구속사의 핵심을 드러내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다. 
    빛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생명과 소망,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구속의 상징으로 성경 전반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성도의 삶과 복음 전파에 있어서 빛의 역할은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실천적 도전을 제공한다. 

    종말론적 관점에서 빛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 그리고 새 창조의 완성을 상징하며, 성도들에게 영원한 소망을 준다. 
    이러한 성경적 통찰은 빛의 창조가 단순한 우주의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적 계획의 서막임을 분명히 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이 짧은 문장이 성경 전체의 핵심이자 시작이야. ‘태초’는 시간의 시작이고, ‘천지’는 공간과 모든 존재를 뜻해.
    즉, 시간과 공간, 우주 전체가 이 순간에 하나님의 의지로 시작된 거야. 

    ✨ 6일 동안의 창조 과정 요약

    하나님은 총 6일 동안 창조 활동을 하시고, 7일째는 쉬셨어

    ☀️ 제1일 – 빛의 창조

    “빛이 있으라!” - 오르 / 동사형 - 드러내다 

    • 혼돈과 흑암뿐이었던 세상에 빛이 생김
    • 빛과 어둠이 구분됨 → 낮과 밤의 개념 등장
    • 아직 해, 달, 별은 없음! 이건 ‘빛’ 그 자체야 (하나님의 임재나 질서의 상징)

    📝 포인트: 빛은 모든 창조의 시작, 어둠 속에서 질서를 만드는 첫 걸음!

    אוֹר Storng number 216

    1. 빛.  2. 아침빛.  3. 태양빛 혹은 태양 자체  
    Pronunciation [ ’ôwr ]  
    Etymology  / 215에서 유래
     Old Testament / 122회 사용 

    🌊 제2일 – 하늘의 창조

    • 물을 나눔: 위의 물(구름, 하늘)과 아래의 물(바다, 지면의 물)로
    • 이 사이를 궁창(하늘)이라 부르심

    📝 포인트: 공간 창조! 혼돈의 물에서 하늘을 분리해 내셨다는 점이 중요. 

    🌱 제3일 – 땅과 식물의 창조

    • 바닷물을 한곳에 모으고, 육지와 바다 구분
    •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 등장

    📝 포인트: 땅이 처음 등장하고, 식물부터 자라기 시작해! 생명체의 시작! 

    🌞 제4일 – 해, 달, 별의 창조 / 광명체 - 마오르

    • 낮을 주관할 해, 밤을 주관할 달, 계절과 시간 측정할 별 창조
    • “징조와 사시와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 포인트: 빛 자체(1일)와 광명체(4일)는 다름!
    시계와 달력이 생긴 날이기도 해.


    מָאֹר Storng number 3974

    1. 빛.  2. 등잔  
    Pronunciation  [ mâʼôwr ]  
    Etymology  / 복수אוֹר,מְאֹרֹות,מְאֹרִים에서 유래
    Old Testament  / 19회 사용 

    🐟 제5일 – 물고기와 새 창조

    • 바다엔 물고기, 하늘엔 가 가득
    •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이 처음 등장

    📝 포인트: 바다와 하늘 생물이 드디어 생겨남. 축복의 첫 언급!  

    🐘 제6일 – 동물과 사람 창조

    • 육지 동물 창조 (짐승, 기는 것들 등)
    • 가장 마지막에 사람 창조 (하나님의 형상대로!)
    •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라”
    • 사람에게 식물 먹을 것을 주심

    📝 포인트: 인간은 창조의 하이라이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 생각하고, 사랑하고, 창조하는 능력의 상징  

    🛏️ 제7일 – 안식

    •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쉬심
    •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 포인트: 안식일(Sabbath)의 기원이 이 날!
    우리 삶에도 쉼과 균형이 중요하다는 걸 알려줘.  

    📌 정리 요약표

     일     창조 내용                              포인트 요약

    1일       빛           질서의 시작, 낮과 밤 구분
    2일    궁창 (하늘)              위와 아래 공간 분리
    3일  육지, 바다,  식물           생명이 뿌리내릴 공간
    4일   해, 달, 별              계절과 시간의 질서
    5일  물고기, 새             생물의 시작과 축복
    6일  육지 동물, 인간     창조의 완성,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7일     안식            쉼과 거룩함, 균형의 시작 

     창세기 천지창조의 메시지

    • 혼돈 → 질서 : 하나님의 창조는 무질서에서 질서로 향함
    • 빈 곳 → 채움 : 공간을 만든 후, 그 공간에 생명을 채움
    • 축복과 안식 : 창조된 세계는 축복받았고, 쉬는 것도 중요하다는 가르침


    1월 2일(금) 요한일서 1:5-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This is the message we have heard from him and declare to you: God is light; in him there is no darkness at all.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의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으로, 1세기 말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적 가르침에 대응하고 참된 신앙의 본질을 가르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1장 5절은 이 서신의 핵심 선언 중 하나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라"로 번역된 '호 테오스 포스 에스틴'(ὁ θεὸς φῶς ἐστιν)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선언입니다. 
    이는 빛이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가 아니라, 그분의 본질 자체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빛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빛 그 자체이십니다.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로 번역된 '스코티아 엔 아우토 우크 에스틴 우데미아'(σκοτία ἐν αὐτῷ οὐκ ἔστιν οὐδεμία)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이중 부정('우크... 우데미아')의 사용으로, 이는 '전혀, 절대로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안에는 어둠의 흔적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의 핵심은 하나님의 본질이 완전한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떠한 형태의 어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 순수성, 진실성, 거룩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투명하시고, 그분 안에는 어떠한 속임이나 악도 없으십니다.

    이 말씀은 스가랴 14:7과 깊이 연결됩니다.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이 있으리로다."
     
    스가랴는 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고, 요한은 그 빛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심을 선언합니다. 
    두 구절 모두 빛이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본질을 나타내는 영적 실재임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종종 절대적 진리와 도덕적 명확성이 상대화되고 있습니다. 
    "당신의 진리"와 "나의 진리"라는 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지며, 빛과 어둠의 경계가 흐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1:5는 우리에게 하나님 안에는 이러한 모호함이 없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분은 완전한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으십니다.

    현대 기독교 작가이자 신학자인 팀 켈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것은 그분이 완전히 진실하시고, 완전히 선하시며, 완전히 아름다우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 안에는 숨겨진 의제나 어두운 비밀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위안은 엄청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 이상으로 다른 무언가를 숨기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켈러의 이 통찰은 요한일서 1:5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빛 되심은 우리가 그분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깊이 연결됩니다. 
    요한복음 1:4-5에서 요한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기록합니다. 
    그리스도는 빛이신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시며, 그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직접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4:6은 "어두운 데에서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빛을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현대적 예로, 미국의 기독교 작가이자 활동가인 코넬 웨스트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인종 차별과 사회적 불의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빛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발전시켰습니다. 웨스트는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진리는 단순한 신학적 주장이 아니라, 어둠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우리의 용기의 근원입니다. 그분 안에 어둠이 없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이 세상의 어둠에 맞서 담대히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삶과 활동은 요한일서 1:5의 진리를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한일서 1:5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완전한 빛이시며 그분 안에 어둠이 전혀 없다는 진리를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하고 있습니까? 
    이 진리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우리의 도덕적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 빛 되신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요?

    진리 안에서 걷기
    요한일서 1:6-7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라고 말합니다. 빛의 자녀는 진실하게 살며, 어둠의 행위를 피합니다.

    지속적인 정화 추구하기 :  
    요한일서 1:7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빛의 자녀는 지속적인 정화와 성화를 추구합니다.

    위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빛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확신에서 옵니다. 시편 139:11-12는 "내가 말하기를 어둠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는 어둠이 어둡지 아니하며 밤이 낮과 같이 밝으리니 어둠과 빛이 주에게는 같으니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어떤 어둠을 경험하든, 하나님의 빛은 여전히 비추고 있습니다.

    도전은 우리가 이 빛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7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그 빛 안에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성경(요한일서 1:5)의 선언으로,
    하나님은 거룩하고 완전하며 죄가 없으시고, 진리와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어둠(악, 죄)과 대비되며, 믿는 자는 그 빛을 따라 삶이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빛을 경험하고 따르게 됩니다. 
    주요 의미
    • 하나님은 빛이시라 (요한일서 1:5) | 새빛교회 홈페이지
      • 거룩함과 완전함: 하나님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며, 이는 죄나 악이 없으심을 의미합니다.
      • 진리와 계시: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를 보고, 자신을 알 수 있도록 영적인 빛을 주시는 분입니다.
      • 생명의 근원: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며, 그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요 8:12).
    • 믿는 자의 삶: 하나님이 빛이시기에, 믿는 자들은 빛 가운데 행해야 하며, 이는 진리를 이해하고 의롭게 사는 삶을 뜻합니다.
    • 죄와 어둠의 대조: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면서 죄를 지으면 거짓말하는 것이며, 빛이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요 1:5-7). 

    요약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은 하나님 본성의 거룩함과 완전함을 나타내며,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시는 진리의 근원이심을 선포하는 성경의 핵심 진리입니다.




    서론 │ Introduction

    하나님의 속성은 크게 ‘비소통 속성’(Incommunicable Attributes) 
    ‘소통 속성’(Communicable Attributes)으로 범주화할 수 있음. 
    각각의 속성은 성경 본문과 개혁신학의 정의를 통해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음. 

    1. 비소통 속성 │ Incommunicable Attributes

    1.1 자존성 (Aseity)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עַצְמוּת’가 직접적 사용은 없으나,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 אֶהְיֶה אֲשֶׁר אֶהְיֶה)’에서 자존성이 드러남 (출애굽기 3:14)임.
    • 성경 배경: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닌, 스스로 존재하심을 계시하심.
    • 개혁신학 정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CF) 제4문,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달리 지으신 이 없이 스스로 계시는 분임.”

    1.2 불변성 (Immutability)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לֹא תִמּוֹט’(창조 이전부터 변함 없음) 개념이 잠언 10:29 등에서 간접 언급됨.
    • 성경 배경: 말라기 3:6 “내가 여호와라 변하지 아니함”으로 확증됨.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본질·지식·의지·언약에서 영원히 변함없음(WCF 제2장).

    1.3 전지성 (Omniscience)

    • 원어 분석: 헬라어 ‘παντογνῶσις’(파롭시 사용 없으나 ‘πᾶν’(모든) + ‘γινώσκειν’(알다) 어근) 개념이 시편 139편에 나타남.
    • 성경 배경: 시편 139:1–4, “주의 알지 못하심이 없나이다.”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현재·과거·미래에 걸쳐 완전하고 즉각적으로 아심(WCF 제2장 해설).

    1.4 전능성 (Omnipotence)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שַׁדַּי’(전능하신 자, Shaddai) 어원은 ‘산의 하나님’ 또는 ‘전능하신 분’ 의미가 논의됨.
    • 성경 배경: 창세기 17:1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그의 뜻을 실행함에 있어 무한한 능력으로 제한받지 않음(WCF 제2장).

    1.5 편재성 (어디에나 계심, Omnipresence)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שָׁמַיִם וּשְׁאוֹל’(시편 139:8) 언어에서 모든 공간에 함께 하심을 표현함.
    • 성경 배경: 시편 139:7–10, “주의 영이 가는 곳마다…”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물리적·영적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만유에 충만하심(WCF 제2장 해설)

    1.6 영원성 (Eternity)

    • 성경 근거: 시편 90:2, 이사야 57:15
    • 하나님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시작과 끝이 없으심.

    2. 소통 속성 │ Communicable Attributes

    2.1 거룩 (Holiness)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קֹדֶשׁ’(קָדַשׁ, ‘구별하다’) 
    • 성경 배경: 이사야 6:3,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모든 죄와 더럽힘에서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구별됨(WCF 제2장).

    2.2 사랑 (Love)

    • 원어 분석: 헬라어 ‘ἀγάπη’(아가페)와 히브리어 ‘אַהֲבָה’(아하바)에서 ‘호의’와 ‘헌신’의 의미가 결합됨.
    • 성경 배경: 요한일서 4:8, “하나님은 사랑이심.”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본성상 사랑이시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선택된 자들을 사랑하심(WCF 제2장 해설).

    2.3 은혜 (Grace)

    • 원어 분석: 헬라어 ‘χάρις’(카리스), ‘은총·호의’ 의미.
    • 성경 배경: 에베소서 2:8–9,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음…”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그의 거룩과 정의에 반해 긍휼을 베푸시는 속성임(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호의).

    2.4 긍휼 (Mercy)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רַחֲמִים’(라하밈), ‘자애·연민’ 강조.
    • 성경 배경: 출애굽기 34:6,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죄인에 대한 동정과 자비를 간절히 나타내심.

    2.5 정의 (Justice)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צֶדֶק’(쎄덱), ‘올바름·공정함’.
    • 성경 배경: 시편 89:14, “정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임.”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과 법에 따라 모든 피조물에게 올바른 보응을 행하심.

    2.6 진리 (Truth)

    • 원어 분석: 헬라어 ‘ἀλήθεια’(알레테이아), ‘감추어짐에서 벗어난 실재’.
    • 성경 배경: 요한복음 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모든 지식과 말씀에 있어서 오류가 없으심.

    2.7 지혜 (Wisdom)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חָכְמָה’(호크마), ‘분별·조화’.
    • 성경 배경: 로마서 11:33,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얼마나 풍성한가!”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실현함에 있어 가장 알맞은 방식을 아심.

    2.8 주권 (Sovereignty)

    • 원어 분석: 특별한 단어 대신, ‘통치’(מַלְכוּת, 말쿠트) 개념으로 표현됨.
    • 성경 배경: 다니엘 4:35, “하늘의 군대를 다스리는 이가…”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모든 일의 주인이며, 그의 뜻이 절대적으로 이루어짐.

    Conclusion

    하나님의 속성은 비소통 속성과 소통 속성으로 나뉘며, 각각 성경이 계시하는 바와 개혁신학의 정의가 일치함을 알 수 있음. 히브리어·헬라어 원어 분석을 통해 깊이를 더했음.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며 신뢰할 수 있음.

    Introduction 

    The attributes of God can be broadly categorized into two groups: Incommunicable Attributes and Communicable Attributes. Each of these attributes is clearly revealed in Scripture and defined in depth by Reformed theology. In the following main section, we will organize these attributes systematically, providing their biblical backgrounds and etymological analysis in the original biblical languages (Hebrew and Greek).

    하나님의 속성은 크게 ‘비소통 속성’과 ‘소통 속성’으로 나눌 수 있음. 각각의 속성은 성경에서 명확히 계시되며, 개혁신학에서 깊이 있게 정의됨. 다음 본론에서는 이 속성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성경적 배경 및 히브리어·헬라어 원어 분석을 함께 제시함.


    1. Incommunicable Attributes │ 비소통 속성

    1.1 Aseity (자존성)

    • Etymology: While the Hebrew word עַצְמוּת (self-existence) does not appear directly in Scripture, the concept is clearly revealed in Exodus 3:14: “I AM WHO I AM” (אֶהְיֶה אֲשֶׁר אֶהְיֶה).
    • Biblical Background: God declares His self-existence and independence from all created things.
    • Reformed Theology: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Q4 – God is not created but exists of Himself eternally and independently.

    1.2 Immutability (불변성)

    • Etymology: Hebrew concept לֹא תִמּוֹט (not to be moved or changed) conveys the immutability of God's being, as in Proverbs 10:30.
    • Biblical Background: Malachi 3:6 – “For I the Lord do not change.”
    • Reformed Theology: God is eternally unchanging in His being, will, knowledge, and promises (WCF Chapter 2).

    1.3 Omniscience (전지성)

    • Etymology: Greek term παντογνῶσις (pan–all + gnosis–knowledge) reflects God's infinite knowledge, although not used directly in Scripture.
    • Biblical Background: Psalm 139:1–4 – “You have searched me, Lord, and you know me…”
    • Reformed Theology: God perfectly and eternally knows all things past, present, and future.

    1.4 Omnipotence (전능성)

    • Etymology: The Hebrew word שַׁדַּי (Shaddai) is commonly translated “Almighty,” possibly derived from “mountain” or “all-powerful.”
    • Biblical Background: Genesis 17:1 – “I am God Almighty…”
    • Reformed Theology: God is all-powerful and nothing can prevent Him from accomplishing His sovereign will.

    1.5 Omnipresence (편재성)

    • Etymology: Expressions like שָׁמַיִם וּשְׁאוֹל (heaven and Sheol) in Psalm 139:8 convey that God is present everywhere.
    • Biblical Background: Psalm 139:7–10 – “Where shall I flee from your presence?”
    • Reformed Theology: God is fully present in all places, transcending time and space.

    2. Communicable Attributes │ 소통 속성

    2.1 Holiness (거룩)

    • Etymology: Hebrew קֹדֶשׁ (qodesh) from root קָדַשׁ (qadash), meaning “to set apart.”
    • Biblical Background: Isaiah 6:3 – “Holy, holy, holy is the Lord of hosts…”
    • Reformed Theology: God is completely and absolutely separate from all sin and impurity.

    2.2 Love (사랑)

    • Etymology: Greek ἀγάπη (agapē) and Hebrew אַהֲבָה (ahavah) both reflect deep, sacrificial, covenantal love.
    • Biblical Background: 1 John 4:8 – “God is love.”
    • Reformed Theology: God is by nature love and pours out this love particularly on His elect.

    2.3 Grace (은혜)

    • Etymology: Greek χάρις (charis), meaning unmerited favor or kindness.
    • Biblical Background: Ephesians 2:8–9 –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
    • Reformed Theology: God shows unearned favor to undeserving sinners according to His sovereign will.

    2.4 Mercy (긍휼)

    • Etymology: Hebrew רַחֲמִים (rachamim), meaning compassion or tender affection.
    • Biblical Background: Exodus 34:6 – “A God merciful and gracious…”
    • Reformed Theology: God demonstrates pity and compassion especially toward the miserable and sinful.

    2.5 Justice (정의)

    • Etymology: Hebrew צֶדֶק (tsedeq), meaning righteousness or fairness.
    • Biblical Background: Psalm 89:14 – “Righteousness and justice are the foundation of your throne…”
    • Reformed Theology: God rewards and punishes all in accordance with His holy law and perfect judgment.

    2.6 Truth (진리)

    • Etymology: Greek ἀλήθεια (alētheia), meaning that which is unconcealed, real, or trustworthy.
    • Biblical Background: John 14:6 –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 Reformed Theology: God is utterly reliable in all His words and revelations—without error or deceit.

    2.7 Wisdom (지혜)

    • Etymology: Hebrew חָכְמָה (chokhmah), meaning discernment and applied knowledge.
    • Biblical Background: Romans 11:33 – “Oh, the depth of the riches both of the wisdom and knowledge of God!”
    • Reformed Theology: God always chooses the best means to achieve His perfect ends.

    2.8 Sovereignty (주권)

    • Etymology: Expressed biblically through concepts like מַלְכוּת (malkuth), meaning kingship or rule.
    • Biblical Background: Daniel 4:35 – “He does according to his will among the host of heaven…”
    • Reformed Theology: God governs all things according to His eternal decree, accomplishing His perfect will.

    Conclusion │ 결론

    God’s attributes are rightly categorized into incommunicable and communicable types, both of which are thoroughly rooted in Scripture and explained in Reformed theology. Through the study of biblical languages, deeper insight is gained into the nature of God. This study leads believers to deeper reverence, worship, and trust in the triune God.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분류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분류

    속성

    정의

    성경구절

    단일성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신 6:4

    무한성

    하나님은 제한도 종료도 없으시다.

    왕상 8:27,

    행 17:24

    영원성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끝이 없으시다.

    창 21:33,

    시 90:2

    영성

    하나님은 보이시지도 나눠질 수도 없다.

    요 1:18,

    딤전 1:17

    불변성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불변하시다.

    말 3:6,

    약 1:17

    주권성

    하나님은 어느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 최고의 통치자이시다.

    엡 1:21

    전지성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시 147:4-5,

    마 11:21

    전능성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신다.

    마 19:26,

    계 19:6

    편재성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

    시 139:7-12,

    렘 23:23-24

    사랑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을 베푸신다.

    엡 2:4-5,

    요 4:8

    유복성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신 7:7-8

    정의성

    하나님은 편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로우시다.

    행 10:34-35

    은혜성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때를 따라 은혜를 입히신다.

    출 34:6,

    딛 2:11

    하나님의 속성 도표

    하나님의 속성 도표

    능력

    전지, 전능, 무한성, 불변성, 주권성, 완전성, 무오성, 단일성, 초월성, 단순성, 영성, 생명성, 내재성, 불가시성

    도덕

    사랑, 정의성, 자비, 유복성, 거룩성, 진실성, 거룩, 공평, 성, 선, 자비, 은혜, 인내, 신뢰성, 도덕적 존재

    시공간

    영원성, 자존성, 편재성, 무한성

    믿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자로서 마땅히 알아야도 하겠지만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아서 그 분의 인격과 성품 즉, 그 분의 속성을 닮아야 만이 장차 우리가 갈 신령세계에서 닮은 그 양에 따른 그 나라의 누림과 영광과 존귀가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에 있어서 신학자들이 분류하기를 자연적 속성과 도덕적 속성, 또는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 또는 본원적 속성과 파생적 속성, 또는 적극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 또는 자동적 속성과 타동적 속성, 그런가 하면 특별히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본성을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으로 분류를 하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에는.

    ① 무한하심: 성경은 하나님의 무한성, 즉 하나님의 본성이 무한하심을 가르쳐줍니다.

    ② 영이심: 성경이 강조하는 또 다른 하나님의 본성은 그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③ 인격이심: 하나님의 인격성. 하나님은 마음 지성 의지 이성 개별성 자의식 자기결정 등을 가지신 분입니다.

    ④ 통일체이심: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의 통일체라는 사실도 가르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본성에서 나온 속성을 다음과 같이 분류합니다.(로이드존스 목사) 비공유적 속성(인격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도덕적 속성)으로 크게 분류하는데 이것을 분류한 것을 보면.

    1. 비공유적(인격적) 속성.

    ① 영원성과 불변성: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십니다. 그분은 영원하십니다.

    ② 편재성: 하나님은 모든 곳에 존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③ 전지하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하나님의 지식은 언제나 절대적인 지식입니다.

    ④ 전능하심: 하나님은 모든 능력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⑤ 완전하심: 성경은 하나님의 철저하고 절대적인 완전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탁월함의 총합입니다.

    ⑥ 영광: 이것은 성경에서 그 분의 위대하심, 그 분의 광휘, 그분의 엄위하심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2. 공유적(도덕적) 속성.

    ① 거룩하심: 우리는 거의 대부분 거룩함을 소극적 의미로 다루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거룩함의 의미가 하나님께서 죄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계시며 관계가 없으시다는 의미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거룩함에는 적극적 의미도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이고 완벽한 순결입니다.

    ② 의로우심, 공의로우심: 의는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 가운데 나타내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사법적 거룩하심입니다. 공의에 의해 하나님은 그의 율법을 어기고 죄를 범한 죄인들에게 형벌을 내리십니다. 또 하나의 다른 정의는 하나님의 의는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라는 것입니다.

    ③ 선하심과 사랑: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모든 피조물을 관대하고 친절하게 다루도록 하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롬11:22)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이 자신을 다른 존재에게 영원토록 전달하도록 만드는 속성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 스스로가 자신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밝힙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이십니다. 은혜는 자비는 인내와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④ 신실하심: 이 속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의와 공의 안에 포함되며, 하나님의 불변성의 개념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이 당신이 안전하게 기댈 수 있는 분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분이 부르신 모든 사람들을 악한 자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셔서 그들 안에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들을 강하게 하시고 굳게 하시리라는 사실을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이상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분류인데, 기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분류는 이와 대등소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석준목사님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전체를 인격성이라 하고, 이 인격성에는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이 있는데, 인격성이라 하면 그의 활동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활동성 이전에 마치 인간에 비하면 내적 정신적 느낌을 말하는 것이니 이 신의 인격성이란 인간의 지식으로 혹은 용어로 형언키 어려운 생존적 활동적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1. 비공유적 속성에는 ① 자존성 ② 영원성 ③ 완전성 ④ 단일성으로 이 속성은 인간은 가질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2. 그리고 공유적인 속성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을 때 가질 수 있는 속성으로 여기에는 크게 (1) 지혜지식성 (2) 도덕성 (3) 능력성으로 분류하고.

    이것을 다시,

    (1) 지혜지식성은 ①지식성 ② 지혜성으로 분류합니다. 이것을 조직신학에서는 속성이라고 말합니다.

    (2) 도덕성은 ①선 ② 사랑 ③ 거룩 ④ 진실로 분류합니다. 이 도덕성은 신적인 도덕인데 신 자신이 자신을 규제하는 도덕이 아닌 근원적 발생적 신 자체적 도덕성으로 이 도덕성은 상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신의 이 도덕성은 자기를 위한 자위적 자애적 도덕이 아니고 상대적 도덕입니다.

    (3) 능력성은 ①의 ② 주권으로 분류합니다. 이 신의 능력은 완전적 능력으로 이 완전적 능력은 수동적 능력이 아니고 자체적 능동적 능력입니다.

    이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을 세밀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비공유적 속성.

    (1) 자존성: 신은 자존자가 되어야 하는 고로 자존성이라는 용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유출물이거나 발생물이 아니고 자존자인고로 자존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영원성: 자존자이신 이 하나님은 영원성을 가졌으니 과거적 영원, 미래적 영원입니다. 이 영원성이라는 말은 그의 존재만이 영원이라는 말이 아니고 속성적 존재적 영원을 말합니다.

    (3) 완전성: 완전성이라는 말은 지혜 지식 인격성의 성질적 완전을 말합니다. 학자들 중에는 완전성 대신에 무한성 불변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변성에는 모순성이 있습니다. 완전성이 가장 적절한 용어입니다. 이 완전성 속에 절대성이 들어있습니다.

    (4) 단일성: 단일성이라는 말은 흔히 사용하지 않는 용어입니다. 완전성은 필연코 단일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로 이 단일성을 부인하거나 무식하면 하나님을 이해치 못하게 되니 하나님을 바로 알 길이 없고 구원과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신의 속성 중에 중요한 것이 이 단일성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과 직접 관계가 됩니다. 고로 이 단일성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구원은 잘못됩니다. 실은 우리의 구원이라는 이 구원이 이 단일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속성에서 단일성을 제하면 우리의 구원은 바른 구원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곧 통일성을 이룹니다.(엡1:10)

    이상의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지 다른 어떤 존재도 이 속성이 없고 가질 수가 없습니다.

    2. 공유적인 속성.

    공유적인 속성이란 하나님 외의 피조물들도 가질 수 있는, 혹 가지고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공유적인 신의 속성을 가진 하나님을 신학적 용어로는 인격적 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신이신고로 물질적 고정적 형체를 가진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용어는 계시목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1) 지식성: 과거와 현재를 아는 것을 지식성이라고 합니다. 즉 과거의 어떤 존재성이나 사건성에 대하여 아는 것을 지식성이라고 말합니다. 신은 완전한 지식성의 분이신데 완전한 지식성은 완전한 인격성이란 말입니다. 완전한 지식성이란 과거와 현재를 절대 정확하게 아심을 말합니다.

    (2) 지혜성: 지혜성은 미래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예정도 계획도 설계도 이 지혜지식성에서 나옵니다. 지혜지식성이란 앞으로 어떻게 되어질 미래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 것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물질계에서의 성장을 보고 천국에서의 누림을 압니다. 농부가 가을추수를 내다보고 종자를 뿌리는 것은 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완전한 지혜성이란 완전한 인격성이란 말인데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완전 정확하게 아심을 말합니다.

    (3) 선성: 일반적으로 선이란 남에게 유익을 입혀준다는 말인데, 이 속성은 단순히 남에게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자타가 다 유익이 되는 선입니다. 갑에게는 유익이 되고 을에게는 손해가 되면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참 선은 그 사건과 관련성이 있는 존재는 다 선이라고 말합니다. 이 선은 자기가 자기를 유익 되게 하는 어떤 사건이 있을 때 그 사건이 상대와 관련 없는 자기의 단독적 관련적 사건일 경우 자기가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선이요, 이 사건이 他에게 미쳐서 他에게 관련됐을 때에 자타가 유익이 되는 선입니다.

    어떤 사역을 자타에게 유익을 줄 목적으로 했더라도 천국에 들어가서 그것이 자타에게 유익과 행복이 아니면 선이 아닌 것입니다. 최종적 영원적 결과적인 목적이 아닐 때는 선이 아닙니다. 영원히 유익하고 행복한 것이 선입니다. 선성이란 영원히 행복하고 즐겁게 해주는 성질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인격성에서 선성이라고 말합니다.

    (4) 애성(愛性): 이 애성은 선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애성은 선행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성이 충만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수동적 동화적인 사랑이 아닌 내발적 발생적 사랑입니다.

    한국어로는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지만 원어로는 아가페 스톨게 필레아 애로스 등으로 각각 표현합니다. 사랑이라는 이 용어는 인간이 쓰는 용어로 번역하기가 빈약합니다. 과거분사 현재 진행형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이라는 의사가 이 애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구원의 발작 선택 예정 진행 방편 결과가 사랑이십니다. 예정도 사랑으로, 진행도 사랑으로, 도성인신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한 것 모두는 사랑의 발작에서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가 되는 것입니다.

    (5) 성성(聖性): 하나님의 성성은 외래적 평가적 상대적 성성이 아니고 당신 자체로서 구별함을 받은 자체적 능력적 성성입니다. 하기오스: 자체적 절대적 영원적인 거룩입니다.

    거룩이란 말은 구별이란 말인데 동사로 구별한다는 말보다는 명사형으로 구별이라는 말입니다. 또 존재적으로 구별되었다 라기 보다도 자체가 구별성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구별성을 가진다는 말은 다른 어떤 존재가 소유할 수 있는 그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객관적 혹 피동적 수동적 구별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누가 구별해놓은 것이 아니고 자체적으로 구별되어 있는 구별된 존재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 도덕성은 일반적인 도덕성과 구별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고 어떤 인간이, 어떤 능력자가 하나님을 혹은 하나님의 성품을 혹은 도덕성을 혼잡 혼돈을 시킨다 해도 혼돈도 혼잡도 될 수 없는 자체적 완전 구별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구별성은 인간의 용어로는 정확히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거룩은 자체적 구별인고로 혼잡 혼돈 시킬지라도 혼잡 혼돈되지 않고, 지옥 같은 죄악의 소굴에서도 그것이 감염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거룩을 입혀 당신과 같은 거룩한 자로 만들어 거룩한 곳에서 살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6) 진실성: 이 진실성은 자체적 능력성을 가진 것, 독단적인 가치성을 가진 것, 자체적 가치성을 가진 것입니다. 진리가 활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주님은 자체적으로 진리시요 우리에게 대하심도 진실이십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참이라는 말입니다. 이 참이라는 말은 절대 정확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시대의 어떤 존재도 여기에 맞지 않는 것은 전부가 부족이요 비뚤어진 것입니다. 성질적으로 진실이 아닌 것은 이질이요 전부가 죄라는 말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정확에 절대성을 가진 말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존재적으로 사건적으로 성질적으로 능력적으로 진실이란 말이니 영원히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진(眞)이다. 참이다’ 하는 절대 정확의 표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영원히 절대 표준입니다. 성질적으로 성분적으로 성격적으로 분량적으로 이 진실성이 아닌 것은 기쁨도 향락도 명예도 영광도 사랑도 행복도 부요도 모두는 자기에게 앙화요 고통이요 불행이요 눈물이요 심판거리입니다.

    (7) 의성(義性): 이 의성은 완전적 의, 생명적 의성입니다. 의적인 능력이란 말은 하나님의 성품적 의성이 아닌 모든 의는 그 어떤 의도 하나님의 의를 능가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의 의와 동등 동질인 의도 없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모든 의라고 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본성적인 본질적인 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의와 합치되는 의는 없습니다. 모든 의라고 하는 그 의는 하나님의 의 앞에는 전부가 정죄를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모든 존재가 의라고 해도 그 의라고 하는 것을 정죄하는 주권성을 말합니다. 의라고 인정을 해 줄 수 있는 그 주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의는 절대적인 의인고로 이 의가 아닌 모든 의는 이 하나님의 의 앞에 전부가 악으로 정죄를 받게 됩니다.

    (8) 주권성: 이 주권성은 절대적인 주권성입니다. 이 신의 능력은 주권적 자체적 능동적 능력이니 이 주권성은 그 무엇에게도 그 어떤 존재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 능력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능력을 침해치 않고 외계의 그 무엇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 주권적 능력입니다. 이런 주권적 능력인고로 당신은 외계의 그 어떤 의사에게 제재를 받지 않고 당신 자체와 다른 어떤 의사에게도 침해를 받음이 없습니다.

    이상이 김석준목사님이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볼 때 주의할 사항.

    하나님의 속성을 생각할 때 그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따로 분리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그 모든 속성을 전부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속성을 다른 속성과 대치시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자비를 대조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면서 언제나, 그리고 동시에 자비로우십니다.

    이것을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찌하든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아서 그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덧입기 위해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이런 저런 분류를 하는 것이지만 이는 어떻게 분류를 하건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역적인 면에서 볼 때는 비록 어느 한 면의 속성이 두드러져 보이거나 혹은 각 속성이 각각의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동시에 한 활동을 하는 것을 부정하는 듯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유한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아무리 잘 분류를 한다고 해도 우리의 제한된 지성과 제한된 이해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쭈그러뜨려 놓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 때문이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알아서 그 하나님의 속성을 좀 더 많이 닮아보겠다는 뜻에서 이론이나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분류를 한다고 할지라도 분명히 할 것은 하나님은 이 모든 속성 안에 다른 모든 속성을 전체로, 그리고 동시에 소유하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분의 공의와 대립시키는 것은 크나큰 비극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언제나 공의롭고 의롭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균형의 완전성을 우리의 사고에도 항상 유지해야만 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배울 때 단순히 지식충전에 머물거나 이론이나 학문에 그치지 않고 그분의 속성을 믿는 내가 배운 바대로 정신과 사상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김석준목사님이 분류한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가 성화구원을 이루는데 있어서 실질적으로 실천 실행에 도움이 되는 가장 유익한 분류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1)

    ■본문 롬11:36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은 인간과 유사한 인격적인 면을 가지고 계시면서 동시에 인간과 전혀 다른 무한한 면을 가지고 계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으로서 가지고 계신 특성을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이성적 탐구에 의한 합리적 방법이나 경험적 방법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계시된 말씀을 통해서만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통하여 그분을 더욱 깊이 알 수 있습니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의 속성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인간과 유사한 면이 전혀 없는 비공유적 속성과 인간 속에서도 비슷한 특성을 찾을 수 있는 공유적 속성으로 나눕니다. 이번 과에서는 하나님의 비공유적인 속성에 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자존(自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분,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가 외부의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며(출 3:14), 그 독립성에 의해 모든 행위를 스스로 행하심으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의존하게 만드는 속성입니다. 천지는모두 없어지나 하나님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사라지지 않으며, 하나님을 믿는 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분에게  기대는 모든 존재는 영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2. 불변(不變)하신 하나님


    인간은 변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시간의 예속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시간 안에 있는 모든 존재는 모두 변합니다. 인간과 피조물은 생성, 발전, 쇠퇴, 소멸의 운명을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존재나 목적, 약속 그리고 완전성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영원히 동일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불변하시므로 하나님의 뜻도 영원하며, 하나님의 말씀도 영원하고 불변합니다.


    시 102:26-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하나님의 불변하심에 대한 12대 증거]


    1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출3:15)
    2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풂(신5:10)
    3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는정확히 성취됨 (왕상8:56)
    4 태초부터 영원까지 영원토록 하나님이심 (시90:2)
    5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름(시103:17)
    6 태초부터 영원까지 우주의 주권자이심 (사41:4)
    7 택하신 백성을 영원토록 변함 없이 선대하심(애3:31-33)
    8 한번 맺으신 언약은 결코 변개치 않으심 (단9:4)
    9 한번 행하신 일은 결코 후회하시지 않음 (롬11:29)
    10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불변하심(히13:8)
    11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음 (벧후3:8)
    12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분 (계1:8)


    3. 전능(全能)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의 전능성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범위에 있어서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하는 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을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감당하며 품어주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하나님의 전능성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있어서 영원토록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 하는 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사랑한 대상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세상이 뒤집어지고, 세상의 끝이 올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4. 무한(無限)하신 하나님


    무한성은 외부의 어떤 요소로부터도 전혀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가리킵니다. 무한성에는 세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본질적 무한성 : 절대자로서의 무한한 완전성을 보여주는 이 속성은 하나님이 무궁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시 145: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2) 시간적무한성: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시간적 제한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께서 가지신 영원성(eternity)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시간을 현재, 과거, 미래로 파악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현재로 소유하십니다.


    시 90: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공간적 무한성: 하나님께서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으심으로 모든 공간의 각 부분에 임재하심을 가리키며

    또한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공간에 계심을 편재성이라고 합니다.


    시 139:7-10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 능력의 특징]


    1 모든것이 가능함 (마19:26)
    2 지극히 큼 (시79:11)
    3 매우 강력함 (시89:13)
    4 지극히 영광스러움(사63:12)
    5 영원하여 소멸치 않음(사26:4)
    6 주권적임 (롬9:21)
    7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음 (롬15:11)
    8 도저히 측량할 수 없음(욥5:9)
    9 모든 능력의 근원임(시62:11)
    10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없음 (합3:6)
    11 대적할 자가 없음 (욥11:10)
    12 탁월함 (신32:39)


    하나님의 속성(성품)(2)

     
    ■본문 벧후1:4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창 1:27).
    그러기에 하나님과 유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공유적 속성’ 또는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며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1. 사랑이신 하나님


    1)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성품을 의미합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위하여 자신의 존재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가장 선명한 묘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는 묘사입니다.


    요일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2)하나님의 사랑의 최대의 극치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사건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피조물의 운명을 자신과 동일시 하시며, 피조물을 가슴에 품으셔서 대신에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갚으셨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기에 또한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된 것은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 때문만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변화된 것은 기적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매우 더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더딘 것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3. 은혜로우신 하나님


    은혜는 아무런 보상 없이 베푸시는 혜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로 인해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으나 구원의 대상이 된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을 가리킵니다. 성도에게 주어지는구원이나 영적 행복은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결과입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신인 동성론적 표현들]
    1. 좋아하심(창1:31)

    2. 휴식하심(창2:2-3)

    3. 근심하심(창6:6)

    4. 후회하심(창6:7)

    5. 기억하심(창9:16)

    6. 살피심(창18:21)

    7. 진노하심(출22:24)

    8. 질투하심(출24:14)

    9. 싫어하심(잠6:16)

    10. 미워하심(신16:22)

    11. 염려하심(신32:27)

    12. 선한 싸움을 하심 (신33:27)

    13. 아심(왕상8:39)

    14. 웃으심(시2:4)

    15. 주무심(시44:23)

    16. 슬퍼하심(시78:40)

    17. 보복하심(렘51:56)

    18. 뜻을 돌이키심 (욘3:10)

    19. 원수를 갚으심 (롬12:19)

    20. 사랑하심(계3:19)

    4. 거룩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함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카도쉬’는 ‘분리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거룩성은 하나님의 가장 하나님다운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한 분으로 지칭되며, 성부, 성자 성령으로 불립니다. 하나님은 다른 존재와 구별되어 존재하십니다.


    계 4:8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2)거룩함이란 하나님의 이름일 뿐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성도(聖徒), 곧 거룩한 무리라고 부릅니다. 사도신경에서 교회는 거룩한 공회라고 불리며,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은 성일(聖⽇)이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며 운명입니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엡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5. 의로우신 하나님


    성경에서 ‘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체데크 ’는 ‘기준에 부합함’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하나님 의 의로움이란 하나님이 불의를 행하지 않으며 죄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내적인 거룩함에 합당한 성품을 갖고 계시는데, 이를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 율법, 사망에 반대가 되는 분으로서 의로우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적대적인 세력으로부터 분리됩니다.


    신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


    【마무리】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인간에게 자신의 영광을 부어주시고 자신을 찬양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최고의 기쁨이며 의무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생각과 마음속에 모시며, 하나님의 성품이 자신의 존재 속에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동화되어 그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 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 성품에 동화되는 것은 모든 성도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공로 없는데도 행복을 베풀어 주실 때에는 그것은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범 했음에도 행복을 베풀어 주실 때에 그것은 ‘자비’이다. 하나님께서 분노하게 하는 반역을 참으 실 때에는 그것은 ‘오래 참으심 ’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이행하실 때에는 그것은 ‘진리 ’이다. 하나님께서 고통당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길 때에는 그것은 ‘긍휼’이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때에는 그것은 ‘후대’이다.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를 도와주실 때에는 그것은 ‘의’이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실 때에는 그것은 ‘자비’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선하심이라는 한 가지 이름으로 통합되어진다.    -E.스탠리 존스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은 요한일서 1장 5절에 나오는 매우 핵심적인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

    이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1. 빛 = 하나님의 성품

    성경에서 빛은 주로 다음을 의미합니다.

    • 거룩함 : 하나님은 죄와 타협하지 않으시는 분

    • 진리 : 거짓과 속임이 없으신 분

    • 순결과 의로움 : 도덕적·영적 완전성

    • 계시 :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시는 분

    그래서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말은
    👉 하나님 안에는 죄, 거짓, 불의, 혼합됨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2. 빛 가운데 행하라는 부르심

    이 선언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요구합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요일 1:7)

    • 믿음은 말이 아니라 삶의 태도로 드러남

    • 죄를 숨기는 삶 = 어둠

    •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진리 안에 사는 삶 = 빛 가운데 행함

    3. 예수 그리스도와 빛

    요한복음에서는 이 빛이 예수 그리스도로 구체화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요 8:12)

    •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예수 안에서 완전히 보여주심

    • 빛이 어둠 속에 오셨으나, 어둠이 이기지 못함 (요 1:5)

    4. 오늘의 신앙적 적용

    • 나는 하나님 앞에서 숨기고 있는 어둠은 없는가

    • 진리보다 편리함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은가

    • 빛 되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 있는가

    👉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우리를 정죄하기보다, 드러내어 치유하시고 살리기 위해 빛을 비추십니다.


    Front Cover
    생명의 말씀사, May 15, 2004 - Religion - 279 pages
    영어권에서만 100만 부 이상, 20여 개 언어로 출판되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성령 충만한 삶으로 인도한 장기 스테디셀러다. "왜 나는 이렇게 행동하는가?"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는가?" 누구나 이런 질문을 해보았을 것이다. 본서에서 제시하는 해답은 바로 '기질'이다. 기질은 타고나는 것이다. 각 기질에는 강점도 있지만 약점도 있다. 이를 알고 성령 안에서 약점을 극복하여 놀랍게 변화될 수 있다.

    성령과 기질

    팀 라헤이

    서론

    1. 성격은 변화될 수 있다.

    2. 네 가지 형태의 기질

    네 가지 기질의 장단점

    1. 다혈질의 장점

    단점

    2. 담즙질의 장점

    단점

    3. 우울질의 장점

    단점

    4. 점액질의 장점

    단점

    기질TEST

    성격은 변화될 수 있다.

    기질TEST

    약점을 극복하려면

    극복하여야 한다.

    어떻게?

    I. 서론

    1. 성격은 변화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근본적으로 타고난 기질만큼 묘한 것도 없다. 눈송이의 모양이 천태만상을 이루듯이 인간은 이 기질로 인해 주위 사람들과 구별되고 그 사람 나름의 특징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좌우하는 근원으로서 잘 훈련되고 조절되지 못할 때 그의 정상적이고 건설적인 인품까지 비정상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인간의 기질에는 강하고 약한 면이 있다. 누구나 강한 면만 생각하고 싶겠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약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본래의 강한 면을 살리고 약점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셨다.

    • 기질(氣質:temperament) : 타고난 성품의 결합체, 유전학적으로 국민성, 인종, 성별, 그외 어떤 유전 적인 요인에 의해 형성

    • 성격(性格:character) : 앞에 말한 기질 + 어렸을 때의 훈련, 교육, 근본적 태도, 신앙, 원칙등이 가미되어 형성. 곧 닦이고 훈련된 기질

    • 인격(人格:personality) :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표면에 나타나는 태도.

    2. 네 가지 형태의 기질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의 체내에 있는 네 가지 체액 - 혈액, 황색담즙, 흑색담즙, 가래 - 에 비유하여 네 가지 기질의 이름을 정하였는데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 자신의 기질이 어떤 형태인지 파악하려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잠재적 능력과 약점들을 연구할 수 있고 또 주님의 도우심을 통해 우리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네 가지 형태의 기질에 대해 발표하고 연구하는 일은 자칫하면 위험한 공부가 된다. 친구들에 대해 분석적인 태도로 나아가려 하고 "그 아이는 어떤 타입의 아이지?" 하는 생각을 갖기 쉽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비도덕적이고 위험한 일이다. 우리의 연구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분석하는 데에만 사용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단점과 약점을 이해하는 데에 사용되어서는 안되겠다.

    II. 네 가지 기질과 장단점

    1. 다혈질

    1) 장점

    다혈질보다 더 인생을 즐기는 사람은 없다. 자기 주위 사물에 대해서 어린애 같은 호기심을 항상 품고 있으며, 환경으로 인한 감정이 예민하여 불쾌했던 일도 환경이 바뀌면서 곧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생기가 없거나 발랄하지 못할 때가 극히 드물며 웬만한 환경에선 항상 휘파람을 불거나 노래를 부르며 행복하게 지내는 사람이다. 권태라는 단어는 그에게서 먼 단어이고 권태를 느끼기 전에 그는 이미 재미있는 일로 돌아서곤 한다.

    그는 지나간 일을 쉽게 잊어버려 과거에 골치 아프고 복잡했던 문제들을 머리 속에 남겨두는 법이 없다. 또한 미래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므로 다가 올 곤경에 대해서도 실망하거나 두려워하질 않는다. 그저 현재에 따라 살기 때문에 낙관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 사소한 일에도 희열을 느낀다. 그는 쉽게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그의 풍부한 정열은 때로 다른 사람까지도 그의 일에 함께 참여하게 하곤 한다. 그는 서로의 슬픔과 기쁨을 나누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친구 사귀기를 또한 좋아한다.

    그는 사람을 좋아한다. 부드러움과 동정심이 많은 것은 다혈질의 훌륭한 재산중의 한가지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다혈질보다 더 순수하게 대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는 문자 그대로 다른 사람의 좋고 나쁜 기분을 함께 나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라"는 명령을 그는 쉽게 지킬 수 있는 성품이다. 특히 의사인 경우 그는 훌륭한 태도로 환자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다혈질 사람의 엄숙한 태도는 가끔 타인들로부터 오해를 받을 때가 있다. 다혈질의 감정이 너무 급속도로 변환하기 때문이다. 다혈질은 누구보다도 더 당신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다. 세상은 이러한 쾌활하고 반응이 빠른 사람들로 인해 재미있게 된다. 하나님에 의한 훈련과 동기가 주어진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다.

    2) 약점

    다혈질의 끝없는 활동은 사실 자세히 보면 휴식 없는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때로는 비 실제적이고 무질서할 때가 있다. 그의 감정은 쉽게 그를 흥분시켜서 일의 전체를 심각히 분석해보기도 전에 그릇된 방향으로 이미 일을 진전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침착치 못한 성격 때문에 좋은 학생이 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런데 이런 성질은 그의 신앙생활에도 나타나 정신을 집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일이 퍽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그의 불안정한 활동상태가 일생동안 계속될 때 그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자기의 잠재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때로 그의 생활은 극에서 극으로 움직이며,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하면 끝내 열매 없는 생애를 보내게 될 것이다. 다혈질은 항상 박력 있고 동적인 성격에 따라 행동한다. 이런 태도가 때론 그의 약점을 보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그에게 있어 가장 크고 근본적인 문제는 의지가 약한 점과 세련된 면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는 일은 곧잘 시작하면서 끝마무리를 제대로 못 맺는 위인이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 내에서 주일학교의 반을 맡아달라는 부탁이 있을 때 그의 즉각적인 대답은 "예"이다. 자신의 시간문제, 능력, 그 외의 여러가지 책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일은 그의 일이 아니다. 자기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몇몇 사람의 앞잡이로 훌륭히 일을 하고 있지만 그 그룹의 일을 조직적으로 한다는 것은 어렵다. 고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기의 약속과 결실과 책임들을 쉽게 잊는다.

    그에게서는 정확한 시간약속 이행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의 약한 의지가 가장 위험한 결과로 나타날 때는 그의 도덕관이 주위의 환경과 동료들에 의해 변할 때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결실하는 사람이 아니고 충성스러운 사람도 아니다.

    쾌활한 성격과 대인관계로 인해 동료들 가운데 일찍 사회적으로 훌륭한 지위에 앉게 되는데 여기서도 역시 그의 타고난 개인주의적 태도를 볼 수 있다. 대화에 있어서도 자기자신 뿐만 아니라 자기가 관심을 가지는 일들에 대해 혼자 떠들게 되고, 남들도 모두 다 그 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으려니 하는 생각이 극단으로 흐르다가 주위 사람들의 비난을 받기 일쑤다.

    다혈질은 감정적 불안정성 때문에 쉽게 용기를 얻는 반면에 자신의 약점을 몹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성격이 온화해도 화를 버럭 내는 경우가 있고 한번 폭발한 후에는 그것에 대해 잊어버린다. 곧 사과도 잘한다. 남에게 쉽게 상처를 입히고는 자신은 건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영적인 의미로 보면 다혈질은 똑같은 일에 대해서 여러 번 후회하고 고백하는 버릇이 있다고 보겠다. 다혈질처럼 육욕의 유혹을 많이 받는 사람도 없다. 그는 정서적으로 매우 감수성이 예민하기 때문에 다른 타입의 사람보다 쉽게 유혹을 받는다. 그리고 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이 유혹에 더 많은 생각을 쏟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성령께 간구해야 할 것은 "절제"와 "자제력"이다. 다른 세 가지 천성과 마찬가지로 다혈질도 가장 긴급하고 큰 문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일이다.

    2. 담즙질

    1) 장점

    담즙질은 의지가 강하고 독립적이며, 자신의 능력을 크게 신뢰하는 편이며 투쟁력 이 강하다. 항상 활동하는 사람이지만 그의 계획은 다혈질의 계획과 달리 조직적이고 의의가 있는 것이다. 한번 시도했던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목적을 향해 줄기차게 밀고 나가는 사람이다. 그야말로 "이번엔 이 한가지 일만 해 봐야지"하는 식으로 일에 골몰한다. 복잡한 게획 대신 단순한 계획하에서 그는 그 일을 성취하고야 만다. 그의 성공의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훌륭한 계획보다도 『결단력』 과 『일에 대한 집착력』때문이다.

    담즙질의 기질은 어느 면에서 보면 생활의 실제적인 면에 너무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사물은 실리성(實利性)을 기준으로 다루고, 자기가 가치 있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행복감을 느낀다. 단체적인 일에 대해선 무척 호감을 갖고 참여하고자 하지만 실무적인 일에서는 실증을 느낀다. 예민한 관찰력이 있어 순간 순간의 상황을 파악하고 가장 실질적인 방법으로 그 일을 해결해 내는 능력도 있다. 담즙질의 소유자가 의사라면 특별히 긴급환자들을 잘 돌볼 수 있다.

    그가 내리는 결정들은 이성적인 분석보다는 직감에 의한 경우가 많다. 담즙질은 원래 "지도자적인 자질"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강력한 그의 의지는 그룹을 이끌기에 충분하고 모든 사람들의 훌륭한 판단자가 되며, 긴급 사태에는 빠르고 대담한 태도로 일을 처리한다. 지도자로 임명되면 곧 이를 수락하거니와 때로는 자진해서 일을 맡고 나서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가끔『모든 일을 떠맡는 사람』으로 불리운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거만하게 대하지만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를 협조할 것이다.

    담즙질 역시 천성적인 자기 신뢰로 인해 항상 『낙관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또한 새로운 일을 시도해보기 위해서 자기의 안전한 환경까지도 기꺼이 떠날 만큼『모험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고, 때로는 남보다 앞장 선 사고방식을 가지고 앞서간다. 어떤 일의 상황을 평가할 때에도 그는 도중의 함정과 잠재되어 있는 문제점을 보지 않고 오로지 목표에만 중점을 둔다. 어떤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그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역경은 그를 실망시키지 못하고 그는 도리어 역경을 통해 그 일을 꼭 완수해야겠다는 욕망을 더욱 갖게 된다.

    2) 단점

    담즙질에게도 큰 약점이 있다. 가장 큰 것으로는 그의 "딱딱함과 화를 잘 내는 것과 성급하고 오만"한 점이다. 담즙질은 감정적으로 너무 무딘 사람이다. 그는 동정심 같은 것에 대해 감상적인 쓸데없는 짓이라고 멸시하기도 하며, 그는 뻔뻔스러운 행동을 많이 한다. 그는 급한 성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곧잘 화를 내며, 한번 화를 낸 후에는 그가 불쾌하게 느꼈던 일에 대해『계속 원한을 품는』버릇이 있다. 심한 복수심 때문에 실제로 자기에게 해를 입힌 사람에게 다시 보복하기를 꺼리지 않을 사람이다.

    이렇게 분개하는 성질은 그의 생활을 편안치 못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바람직한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한다. 육체적인 병으로는 40세 이전에 궤양으로 고생하게 되는 수가 많고, 영적인 병으로는 분노와 화를 내는 일로 성령을 거스리는 일이 많다. 담즙질에는 묘한 "잔인성"이 있어 자기의 목적 성취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권리를 무단히 무시하고 짓밟는 경향이 있다. 그에게 강한 도덕적 기준이 제시되지 않는 한 성공을 위해서는 법률을 어기거나 어떤 교활한 방법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몰염치한 죄수들과 독재자들이 이 담즙질 타입의 사람들이었다.

    담즙질의 강한 결단력은 또한 너무 강렬할 때가 있어 오히려 골치 아픈 문제 또는 나중에 그가 후회할 과격한 문제에 그를 몰아 넣곤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완강하게 이런 문제들에 대해 끝장을 보고 만다. 그가 사과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많은 경우 인정이 없고 퉁명스럽고 또 냉소적인 말을 냉정하게 내뱉는다. 남에게 동의하는 것도 그에겐 어려운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가 결혼할 때 그의 배우자가 갖는 가장 큰 문제거리도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아마 자제력을 발휘하여 자기 아내를 때리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더 잔인한 방법으로 아내를 다룰 것이다.(폭력이 아닌)

    담즙질의 강한 독립심과 자만심은 그로 하여금 "거만한" 사람이 되게 한다. 어떤 일에 좀 성공하기만 하면 그는 매우 거만하고 그 일에 대해 세도를 부려 드디어는 불쾌할 정도에까지 이른다. 그가 여러 가지 능력을 가졌음에도 그의 이러한 불쾌한 성품은 그에 대해 주위의 사람들이 실증을 느끼게 하고 또한 그들에게 "우리는 저 사람의 비위를 맞출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저지른 나쁜 행동보다도 성공 그 자체를 더 좋은 일로 보고 거기에만 중점을 둔다.

    그는 어린 나이가 아니면 어른이 된 이후 신앙을 가지기 힘들며, 그리스도를 믿고 난 이후에도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가 몹시 어렵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려고 할 때 그의 마음은 곧잘 그날의 계획을 세우는 일로 꽉 차고 그가 성령에 깊이 감화되고 초자연적인 힘을 체험해 보지 못하는 한 규칙적인 예배시간은 쓸데없고 시간낭비인 것처럼 생각 될 것이다.

    3. 우울질

    1) 장점

    다른 어떤 기질보다도 가장 풍만하고 예민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다른 기질에서보다 더 많이 그리고 깊숙이 감상하며, 또한 예술에도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다. 정서적으로 예민하나 다혈질과는 달리 자기의 감정을 통해서 심사숙고하는 사람이다.

    우울질의 소유자는 창작적인 추리에도 능란하여 한창 상상력이 활발할 때는 가치 있고 건전한 창작물을 내기도 한다. 그는 또한『완전주의자』로서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 "훌륭함"의 기준을 두고 있으며, 어느 분야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그의 포용력은 다른 사람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앞으로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며, 과거에 이루어진 일들과 결정들을 다시 생각하면서 "만약 기회가 새로이 주어진다면 좀더 훌륭히 그 일을 처리할 수 있을텐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우울질의 "분석력"은 그의 완전주의자적인 성품과 합성되어 일의 세부적인 내용을 파악하는데 능력이 있게 하였다. 다혈질이나 담즙질같은 사람으로부터 어떤 기획이 제안되면 우울질은 그것을 즉시 분석하여 그들이 부딪치게 될 여러가지 숨은 문제들을 골라내곤 한다. 그래서 그는 때로 그가 분석해서 나온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그 일을 반대할 경우가 많은데 이 문제들이라는게 그에게는 퍽 중요한 것이다.

    그의 분석적인 능력과 태도로 보아 그에게는 수학, 이론과학, 의학, 건축학, 철학, 창작문학, 그 외 면밀한 것을 요하는 일이 적합하다. 다행스럽게도 우울질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충성스러워지려고 일부러 애쓸 필요가 없다. 그 기질 자체가 "충성스럽기"때문이다. 우울질은 다혈질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을 사귀려 들진 않지만 한번 사귄 사람은 문자그대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정도로 그 친구들을 포용한다. 어떤 일을 주어진 시간에 끝까지 이끌고 나가서 완성시켜 놓은 일에서는 그를 언제나 신임해도 좋다.

    우울질은 앞에 나서서 일하기보다는 뒤에서 하는 일을 더 좋아한다. 때로는 지극히 희생적인 직장을 택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이는 자기동료들의 발전과 이익을 위해서 자기자신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그의 강렬한 욕망을 잘 보여준다. 그는 자기 능력의 한도를 잘 알아서 자기가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일은 맡지 않는다.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자진해서 발표하려하지 않고 덮어두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의견을 발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의 독특한 의견을 발표하며, 다혈질처럼 함부로 말을 많이 하지 않지만 자기의 의견을 발표하는 데에는 꽤 야무지다.

    2) 단점

    우울질은『자기중심적』이다. 할레스비 박사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어떤 타입의 사람들보다도 가장 자기 중심적이다. 항상 『심사숙고』하고 『반성』을 하는 형인데 그의 이런 성품은 오히려 그의 의지와 정력을 마비시켜 버린다. 그는 항상 자기자신과 자기의 정신적인 상황을 해부하고 양파껍질을 벗기듯이 자신을 한층 두층 계속 벗겨 마침내는 그의 생활에 직접적이고 자연스러운 면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오로지『영구한 자기반성』만 남게 된다. 그러나 이런 자기반성은 이익이 못되고 오히려 해로운 것이다. 우울질은 병적인 정신상태에 빠져 들어갈 때가 많다. 그들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관심을 갖는다. 접하는 문제마다 그에게는 큰 문제로 보인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우울질은 유난히 쉽게 우울증환자가 된다. 이런 자기 중심적인 태도는 그의 예민한 성격과 합해져서 공격적이고 모욕적인 언행을 가끔 저지르게 한다. 그는 기분을 자주 변동하는 자로 문자 그대로 "감정을 항상 팔에 걸고 다닌다." 때로는 곧잘 남을 의심하여 좋지 못한 방면으로 계속 상상한다. 만일 어떤 두 사람이 소근소근 얘기하는 것을 보면 그는 대뜸 그들이 자기에 관해 얘기한다고 단정한다. 이런 생각은 심한 경우엔 남을 변태적으로 냉대하고 박대하는 컴플렉스를 나타낸다. 우울질은 그의 완전주의자적이고 분석적인 성품 때문에 비관적인 사람이 된다.

    그는 목적을 내다 보기도 하지만 도중에 생길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비관적이기 때문에 우울질은 어떤 일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자기가 생각하는 "완전"이라는 기준에 미달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비판적인 면에선 우울질을 따를 사람이 없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최선에 도달하지 않으면 그들을 영접하지 않는다. 많은 완전주의자들이 그들의 배우자가 그들이 기대했던 바의 90%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행복했던 결혼생활을 파괴했다. 자그마한 실수도 그의 완전주의자라는 안경을 통해 모두 드러나게 되어 그는 "많은 좋은 점을 보는 대신에 나쁜 점을 과장해서 보게" 마련이다. 결혼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는 최종적인 결정을 못 내리고 주저할 때가 있다.

    멀리서 여자를 보고 이상화시켜 그 여자와 사귀게 되면 그녀가 아무리 아름답게 생겼을지라도 역시 단점을 지닌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바로 그 단점 때문에 그녀와 결혼하기를 주저한다. 기분의 변화에 있어서도 우울질을 따를 사람이 없다. 시시때때로 고조된 감상에 빠져 있곤 한다.

    또한 우울질의 변덕스러움은 때로 좋지 못한 일을 발생시키는 요인이 된다. 즉 그가 정상적으로 활동할 때 그를 좋아했던 사람들도 그가 아무 이유 없이 심한 우울증에 빠져있을 땐 그를 싫어하게 된다. 그러면 자연히 우울질을 피하게 되고 우울질은 예민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아채고 더욱 우울하게된다. 이 한가지 사실은 능히 우울질의 전 일생을 망치고도 남음이 있다. 만일 그가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지 않을 경우에만 말이다.

    우울하고 감정이 쉽게 변하는 우울질 타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고 위대한 사명을 어깨에 짊어진 채 자기자신보다 남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며 좋은 목적을 지니고 살아나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잘 알 수 있게 된다. 또 한가지 우울질의 특성을 들자면 그의 "보복심"이다. 그에겐 모욕을 용서해 주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그는 표면상으로 볼 때는 조용하고 평온해 뵈지만 마음속으로 격렬한 증오심과 불길같은 적의가 있다. 담즙질처럼 직접 행동으로 옮기진 않겠지만 수년간을 이런 증오심과 보복감을 품은 채 지낸다. 이렇게 남을 용서해 주지 못하는 성품과 보복하려는 그릇된 욕망은 때로 그의 훌륭한 자질을 지배하여 자질이 드러나지 못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편견에 근거를 둔 결정을 하게끔 한다. 우리는 우울질의 장. 단점을 모두 보아왔다.

    한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여기서도 나타나는데, 즉 매우 훌륭한 장점과 잠재능력이 있는 천성에는 또한 가장 큰 단점이 따른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평범한 우울질』은 없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울질은 자기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하여 동료들보다 우수한 위치에 서던가, 그렇지 않으면 약점으로 인해 신경질과 수심에 뒤덮히고, 자신을 즐기지도 못하고 남을 즐겁게도 못하는 우울증환자가 되어 동료들보다 열등한 위치로 떨어지게 된다.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뛰어난 인물들이 심한 우울질 타입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우울질의 소유자들은 큰 위안을 받아야겠다. 그러나 성경의 그 인물들은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공할 수 있었음을 알아야한다. 그리스도안에서의 신앙은 그로 하여금 자기의 타고난 성품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새 생애를 보낼 수 있게 한다.

    4. 점액질

    1) 장점

    점액질의 거침없는 "유모어"는 그가 어떤 일을 신중히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며, 그는 세속적인 일에서 재미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시치미를 떼고 하는 그의 거칠은 듯한 유모어가 다른 사람들을 곧잘 웃기는 것을 보면 그는 유모어와 상상력의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의 기질은 "카운셀러"가 되기엔 안성맞춤이다. 다혈질이나 담즙질같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고민을 오랫동안 앉아 듣지 못하는 반면에 느리고 태평스러우면서 유연한 점액질의 태도는 그로 하여금 남의 얘기를 다 들을 수 있게 한다. 또한 자기 자신과 고민을 말하는 사람과 늘 동일시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듣는다. 그리고는 충고의 말을 불쑥 쏟아 내놓는 게 아니고 차근차근 대화를 나눈다.

    점액질의 경우, 그의 명랑하고 훌륭한 성품뿐 아니라, 그의 책임감과 시간적 계획을 잘 지키는 면에서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우울질처럼 이 사람은 퍽 충실한 친구가 될 수 있고 친구에게 완전히 빠지지는 않지만 불충실하게 대하지도 않는다. 점액질도 역시 실제적이며 능력있는 사람이다. 그는 사고하는 데에 많은 정력을 소비하므로 그 결과 어떤 일의 상황을 잘 분석할 수 있게 한다. 그는 기분에 따라 즉흥적인 결정을 내릴 사람이 아닌 반면에 적은 노력을 들여 일을 완수할 실제적인 방법을 찾는 사람이다. 그는 괴로움 속에서도 일을 잘한다.

    실제로 그는, 다른 사람들은 꼼짝 못 할 환경에서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한다. 그의 일의 결과는 항상 훌륭하고 깨끗한 결과가 된다. 비록 완전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도 역시 꽤 높은 수준의 정확성과 정밀성을 지니고 있다. 항상 바쁘고 크나큰 일을 하면서도 그의 책상이 항상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다른 능동적이고 소란스런 성품의 사람들은 항상 놀라게 마련이다. 그러나 점액질은 모든 것을 적재적소에 놓고 일하면 훨씬 쉽고 시간도 절약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 한마디로 말해 정돈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 단점

    점액질의 가장 큰 단점은 "게으름"이다. 가끔『발을 질질 끄는 상태』로 나타나는데, 그는 자기 의사와는 반대로 자극을 받아 행동하는 것을 싫어하며 가능한 한 느리게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목적 없는 그의 생활은 "방관자"의 생활이고 될 수 있는 한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 이런 성품 때문에 그는 그가 생각하고 있고 또 능히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의 인도자가 되지 못한다. 그에겐 모든 일이 오로지 "너무 지나친 일"로 보이는 모양이다. 다혈질의 불안정성과 담즙질의 활동은 그를 때로 괴롭힌다. 점액질은 그들이 그를 자극시켜 일을 하게 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점액질은 또한 "이기심"이라는 단점을 보이기도 하는데 해가 거듭할수록 자기자신을 옹호하려는 본능 때문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때로는 어떤 일을 변경하려고 "심한 고집"을 부릴 때가 있는데 이는 자기가 그 일에 너무 휩쓸려 들어갈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에너지를 아끼는 면에서 보수적이기를 원한다. 점점 성장하면서 그는 더욱 고집이 많아지지만 그의 태평스런 유모어로 자기의 완고한 점을 감출 수 있게 된다. 주위사람들의 계획과 활동에 가담하기를 강요받을 때마다 그 일이 제대로 되어가지 않는 것이라면 그는 더욱 거절하는 태도를 취하며 그 일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의 이런 완고성은 결코 그를 "인색하고 이기적인"사람으로 만든다. "이것은 얼마의 비용이 들까?" 혹은 "이것은 내게서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 를 항상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기심"은 점액질에 있어 정말 큰 문제 거리다.

    점액질에겐 해가 갈수록 더 결단력이 약해질 수 있는데 그것은 기본적으로 어떤 일에 가담할 것인가에 대해 선뜻 나서지 않는 성질 때문이다. 그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과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마음 사이에서 늘 동요한다. 그의 결단력 없는 태도는 곧 뿌리깊은 습관이 되어 그의 장점 즉 실용적인 태도를 능가해 버리기까지 한다. 그의 실제적인 관점과 조용하고 분석적인 태도는 때로 어떤 일에 대한 더 좋은 해결 방법을 고안해 내지만, 그가 그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쯤에는 이미 다른 활동가가 그 일을 계획하고 그룹을 조직하여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이다.

    그렇지만 점액질은 마음속에 자기계획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만 "부분적으로"가담하려 한다.

    5. 네 기질에 대한 정리

    위의 네 가지 기질의 여러가지 변화가 이 세상을 움직여 나가고 있다. 어느 것도 다른 성품보다 더 낫다고는 할 수 없다. 모두가 그것대로의 장점을 갖고있어 사회에 도움을 주고있기 때문이다. 각 기질이 지닌 장점은 그 기질을 매력적으로 만들며 우리도 모두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얘기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장점이 중요하듯이 우리가 지닌 약점도 중요하다. 어느 면에서는 더 중요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약점을 분석 해 보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약점은 보완되어야 하고 개선되어야 한다.

    III. 기질테스트

    1. 성격은 변화될 수 있다

    앞의 내용에서 우리는 각 기질의 장. 단점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는 "나는 다혈질이야""나는 담즙질이군"라고 자신을 평가하곤 하는데, 사실상 우리는 100%다혈질, 혹은 100%우울질 같은 사람은 없다. 우리의 기질은 이 네 가지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것이다. 예를 들면 다혈질20% + 담즙질50% + 우울질10%+점액질20% 식으로 말이다. 자신의 기질상의 특성들을 잘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단점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아래의『기질테스트』가 여러분들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되기를 원한다. 이 단어 연상 테스트는 플로렌스 리타우어와 프레드 리타우어가 발전시켜 그들이 개최한 『인격플러스(Personality Plus)』세미나에 참가한 수많은 이들에게 시행한 바 있는 테스트이다.

    2. 기질 테스트

    1) 각 열의 네 단어들 가운데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단어 하나 앞에 V표를 하라. 때로는 정확히 자신에게 들어맞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하더라도 가장 근사한 단어 앞에 V표를 하도록 하라.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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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17

    18

    19

    20

    ( )활발함,

    ( )의지강함,

    ( )복종적,

    ( )사려깊음,

    ( )새로운생각,

    ( )만족해함,

    ( )계획가,

    ( )자신에참,

    ( )질서정연,

    ( )친절함,

    ( )과감함,

    ( )괘활함,

    ( )이상적,

    ( )과시적,

    ( )중재자,

    ( )신중함,

    ( )듣기잘함,

    ( )만족잘함,

    ( )완전주의자

    ( )활기참

    ( )모험적,

    ( )쾌활함,

    ( )자기희생적,

    ( )자기통제적,

    ( )공손함,

    ( )감수성예민,

    ( )인내심강함,

    ( )충독적,

    ( )자상함,

    ( )신실함,

    ( )유쾌함,

    ( )일관적,

    ( )독립적,

    ( )결단력,

    ( )음악적,

    ( )끈질김,

    ( )충직함,

    ( )우두머리

    ( )허용적,

    ( )과감함,

    ( )분석적,

    ( )설득력있음,

    ( )사교적,

    ( )경쟁력,

    ( )수줍어함,

    ( )자기신뢰,

    ( )적극적임,

    ( )계획적,

    ( )솔직함,

    ( )익살스러움,

    ( )싹싹함,

    ( )점잖음,

    ( )유순함,

    ( )천연덕스럼,

    ( )의견제안잘함,

    ( )말을많이함,

    ( )지도자타입,

    ( )도표잘그림,

    ( )생산적,

    ( )행동적,

    ( )융통성없음 .

    ( )조용함.

    ( )자기의지강함

    ( )설득력있음.

    ( )꽤많음

    ( )활발함

    ( )주동적

    ( )부끄러워함.

    ( )낙천적.

    ( )강력함.

    ( )세심함.

    ( )확신에참.

    ( )고무적.

    ( )심오함.

    ( )쉽게어울림

    ( )관용적

    ( )생동적

    ( )귀여움

    ( )인기좋음

    ( )균형잡힘

    21

    22

    2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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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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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 )뻔뻔스러움.

    ( )절제못함,

    ( )마지못해함

    ( )까다로움,

    ( )참을성없음,

    ( )인기없음,

    ( )완고함,

    ( )평범함,

    ( )쉽게성냄,

    ( )순진함,

    ( )근심많음,

    ( )지나치게예민,

    ( )결단력약함,

    ( )일관성없음,

    ( )지저분함,

    ( )느림,

    ( )고독즐김,

    ( )행동이느림

    ( )복수심이강함,

    ( )타협적

    ( )명령형보스기질,

    ( )냉정함,

    ( )성잘냄,

    ( )두려움많음,

    ( )불안정,

    ( )끼어들기싫음,

    ( )되는대로의성격,

    ( )비관적,

    ( )목표없음,

    ( )부정적태도

    ( )내향적,

    ( )무뚝뚝함,

    ( )무질서함,

    ( )편협함,

    ( )침울함,

    ( )고집셈,

    ( )남위에올라 섬,

    ( )의심많음,

    ( )불안함,

    ( )비판적,

    ( )수줍음,

    ( )열정없음,

    ( )반항적,

    ( )잘잊음,

    ( )우유부단,

    ( )예상못하는성격,

    ( )즐겁게해주기힘듬

    ( )교만 힘든성격

    ( )변론적,

    ( )신경질적,

    ( )일에미침,

    ( )소심함,

    ( )지배적,

    ( )비관용적,

    ( )불평잘함,

    ( )과시적,

    ( )게으름,

    ( )성미급함,

    ( )억지로함,

    ( )교활함,

    ( )맥없음

    ( )용서안함

    ( )장황함

    ( )솔직함

    ( )끼어들기잘함

    ( )사랑없음

    ( )주저함

    ( )허용적

    ( )외톨이

    ( )냉담함

    ( )공을차지하고싶음.

    ( )말많음

    ( )낙심잘함

    ( )무관심

    ( )남이용잘함

    ( )회의적

    ( )목소리큼

    ( )침착못함

    ( )신중치못함

    ( )변화무쌍

    2) 이제, 위에 표시한 대로 아래의 페이지에 다시 표시하고, 장단점의 합계를 내어 보라.

    ◆ 장점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 )활발함,

    ( )쾌할함,

    ( )사교적,

    ( )설득력있음,

    ( )새로운생각,

    ( )활발함,

    ( )주동적

    ( )충동적,

    ( )낙천적,

    ( )익살스러움

    ( )유쾌함,

    ( )괘활함,

    ( )고무적,

    ( )과시적,

    ( )쉽게어울림

    ( )말많이함

    ( )생동적,

    ( )귀여움,

    ( )인기좋음

    ( )활기참,

    ( )모험적,

    ( )설득력,

    ( )자기의지강함,

    ( )경쟁적임

    ( )꾀많음,

    ( )자기신뢰

    ( )적극적

    ( )자신감

    ( )솔직함,

    ( )강력함,

    ( )과감함,

    ( )확신에참

    ( )독립적,

    ( )결단력,

    ( )의견제안잘함,

    ( )끈질김,

    ( )지도자타입

    ( )우두머리

    ( )생산적,

    ( )과감함,

    ( )분석적,

    ( )의지강함,

    ( )자기희생적,

    ( )사려깊음,

    ( )공손함,

    ( )감수성예민,

    ( )계획가,

    ( )계획가,

    ( )질서정연,

    ( )신실함,

    ( )세심함,

    ( )점잖음,

    ( )애상주의적,

    ( )심오함,

    ( )음악적,

    ( )신중함,

    ( )충직함,

    ( )도표잘그림,

    ( )완전주의자,

    ( )행동적,

    ( )융통성

    ( )조용함.

    ( )복종적

    ( )자기통제적

    ( )수줍어함

    ( )만족해함

    ( )인내심많음

    ( )부끄러워함

    ( )자상함

    ( )친절함.

    ( )싹싹함.

    ( )일관적.

    ( )유순함

    ( )천연덕스럼.

    ( )중재자

    ( )관용적

    ( )듣기잘함

    ( )만족잘함

    ( )허용적

    ( )균형잡힘





    ◆ 단점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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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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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 )뻔뻔스러움

    ( )무절제함

    ( )장황함

    ( )잘잊음

    ( )끼어들기

    ( )예측불허

    ( )되는대로성격

    ( )허용적

    ( )쉽게성냄

    ( )순진함

    ( )공을차지하고싶음

    ( )말많음

    ( )무질서함

    ( )일관성없음

    ( )지저분함

    ( )과시적

    ( )목소리가큼

    ( )침착치못함

    ( )불안함

    ( )변화무쌍

    ( )명령형보스기질

    ( )냉정함

    ( )반항적

    ( )솔직함

    ( )참을성없음

    ( )사랑없음

    ( )완고함

    ( )교만함

    ( )변론적

    ( )신경질적

    ( )일에미침

    ( )무뚝뚝함

    ( )지배적임

    ( )편협함

    ( )남이용잘함

    ( )고집셈

    ( )남위에올라섬

    ( )성미급함

    ( )신중치못함

    ( )교활함

    ( )수줍어함

    ( )용서안함

    ( )성잘냄

    ( )까다로움

    ( )불안정

    ( )인기없음

    ( )즐겁게해주기힘듬

    ( )비관적

    ( )외톨이

    ( )부정적태도

    ( )내향적

    ( )지나치게예민

    ( )낙심잘함

    ( )비관용적

    ( )침울함

    ( )회의적

    ( )고독즐김

    ( )의심많음

    ( )복수심강함

    ( )비판적

    ( )맥없음

    ( )열정없음

    ( )마지못해함

    ( )두려워함

    ( )우유부단함

    ( )끼어들기

    ( )주저

    ( )평범함

    ( )목표없음

    ( )냉담함

    ( )근심많음

    ( )소심함

    ( )결단력약함

    ( )무관심

    ( )불평잘함

    ( )느림

    ( )게으름

    ( )행동느림

    ( )억지로함

    ( )타협적





    전체 합계

    장점합계

    ( )개

    단점합계

    ( )개

    다혈질

    ( )개

    담즙질

    ( )개

    우울질

    ( )개

    점액질

    ( )개

    IV. 결론

    1. 약점은 극복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런 기질에 대해 공부하는 근본목적은 우리 안에 있는 장점을 잘 활용하고,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어 성령 충만함을 받기 위함이다. 헨리 브란트 박사는 『성숙한 사람』을 가리켜 말하기를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아 장점과 단점을 구분할 수 있고,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계획을 세울 줄 아는 사람" 이라고 했다. 우리는 성장해야 한다. 지금의 단계에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자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수 년전, 혹은 수 십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가진 채 여전히 이웃들에게 상처를 입히며 고집과 내키는 대로의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 자신이 어떤 타입의 사람이어서 어떤 장점과 어떤 단점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선명하고도 확실하게 객관적으로 알고있을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단점들은 개선되어져야 한다. 당신의 천성이 꼭 사라져 버려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당신의 개성이 살아있는 채 당신의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자신의 약점을 세심히 솔직하게 연구하면 자신의 생활에 있어 하나님의 힘을 필요로 하는 부분을 쉽게 지적해 낼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기억하자. 하나님은 그의 계획하에 인간을 그의"영광을 위해"창조하셨다.(계4:11)그러므로 아무도 자기의 타고난 성품을 탓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선 당신의 기질 전체를 뜯어 고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본래의 성품을 십분 활용하신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탄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우리의 약점에 굴복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스리는 결과와 동일하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약점을 극복할 것인가?

    2.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1) 약점을 죄로 여겨야 한다.

    약점을 단순히" 그게 내 천성인걸!," "나도 어쩔 수 없어! 나라는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라는 식으로 변명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단점과 약점을 죄로 여기지 않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약점 쓰레기 더미를 방치하고 있거나 회피하려고 한다. 죄가 무엇인가? 그것은『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을 말한다. 의지박약, 불안, 이기심, 자만, 성급, 잔인, 우울, 자기중심적, 비판적, 비관, 게으름, 조롱, 고집, 우유부단...! 아름다운 것인가? 미안하지만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선 당신의 백성들이 이런 누더기들을 걸치고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심지어 그것은 우리인간도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말다툼과 비방과 모든 악의를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대하 며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엡4:30- 32)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근심거리라는 것이다. 버려야 할 쓰레기라는 것이다.

    인간약점의 근원: 이기심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

    의지의 박약

    불안

    자아중심

    감정적 불안정

    자기만족

    성급함

    잔인성

    격한 성격

    우울

    자기중심적

    비판적

    비관적

    게으름

    조롱

    고집

    우유부단














    분 노



    공 포












    이 기 심



    위의 도표는 우리의 각 기질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단점들이 어디로부터 궁극적으로 비롯되고 있는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모든 단점들은 크게는 분노와 두려움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고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모든 요소들이 다 이 분노와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 분노의 변형된 16가지 : 격분, 증오, 폭동, 시기, 공격, 험담, 야유, 앙심, 비통, 악의, 불평, 질투, 후회, 편협, 비난, 원한

    • 공포의 여러가지 표현 : 근심, 의심, 소심, 우유부단, 미신, 움추림, 고집, 시비, 걱정, 열등감, 비겁, 혐의, 주저, 실망, 교만, 수줍음

    다혈질과 담즙질이 가지기 쉬운『분노』의 여러 유형들과 우울질과 점액질이 가지기 쉬운『두려움(공포)』의 여러가지 유형들을 살펴보라. 이 소름끼치는 더러운 것들은 왜, 무엇 때문에 우리의 심령속에 생성하는가?

    그렇다. 그 냄새나는 흙탕물의 근원에는 바로『이기심』이라는 독샘이 자리하고 있다. 이기심이란 자기 본위주의, 자기 중심주의를 말한다. 이기심이란, 말 그대로 『나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다. 내가 가지고 싶고, 내가 누리고 싶고, 내가 받고싶은 것에 대해 충족이 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분노한다. 시기하고 불평한다. 내게 있는 것을 잃게될까, 내가 손해보게될까, 내가 인정받지 못할까, 나의 기득권이 달아나게 될까 싶기 때문에 우리에게 덤벼드는 것이 두려움이다. 공포요 염려요 수줍음이며 열등감이다. 이것이 이기심이다.

    이기심은 사탄(사14), 아담과 이브(창3), 그리고 가인이 근본죄악이기도 했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생기는 비인도적인 잔인성, 태고 적부터 20세기에 이르는 동안 일어났던 모든 문제와 슬픈 사건들은 모두 바로 이 이기심 때문이었다. 이기심이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물론 여러 형태로 나타나겠지만 결국은 사탄이 노리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利己心)이다. 하나님과 이웃을 배제하고 오직 나 자신만을 모든 사고와 행동의 중심으로 삼는것.. 이것이 죄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선 결코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누릴 길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이 이기심이 바로 우리 인간자신들을 분노케 하고 두렵게 하는,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불행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주범(主犯)임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이것을 치유하기를 원하신다.

    기억하라. 이기심이라는 근원에서 나오는 모든 이러한 쓰레기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내리셨던 축복이 아니다. 그것들을 하나님은 싫어하시고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분명히 죄이다. 이것들은 사탄의 작품들이다. 이것들과 우리는 대항해야 한다. 바로 우리의 적인 것이다. 우리의 죄(적)가 무엇인지 알아야 그것에 대한 치유를 하나님께 의뢰할 수가 있다. 자! 당신은 이 죄들을 인정하라!

    (제안) 솔직하고도 객관적으로 자신에게서 인정되는 약점들의 목록을 작성하여 보라. 그리고 그것들을 기억하라. 가능하다면 그 목록을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면 더 좋겠다.

    2) 죄를 언제나 고백하라

    요한1서 1장 9절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 귀절은 주로 구원이 필요한 죄인을 위해 많이 인용되는 귀절이긴 하지만 사실은 애초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요한은『나의 자녀들아』이라는 말을 쓰고있는데 이는 그가 믿음으로 인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시편 66:18에서는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고백하지 않은 죄가 남아 있을때 그리스도인의 기도생활은 효과가 없게된다.

    분노와 두려움을 죄로 여기지 않아도 기도는 효과를 상실한다. 당신의 죄에 대해 하나님 앞에 그것이 잘못된 죄임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요한 1서 1:9절은 몇 번이나 사용할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하는 이가 있는데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당신이 죄를 지을 때마다, 또 죄를 의식하고 있을 때마다"이다. 죄를 지은 시간과 고백하는 시간사이에 아무 시간적 공간을 두지 않도록 하자. 당신이 화를 낼 때 마다, 두려워하고 낙심해있을 때마다 언제나 그것이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악을 범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즉시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리하였을때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실 것인가에 대한 약속이 바로 요한1서 1:9의 뒷부분이다. 하나님께선 그 죄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제대로 알고있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시인하는 자체만으로도 용서의 조건이 되심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분의 약속을 우리는 믿어야한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장이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3) 하나님께 나쁜 습관과 죄를 없이해 주실것을 간구하라.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6:14-15)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분노와 공포로부터 승리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가 주님께 간구만 하면 그의 뜻에 따라 간구한 것은 틀림없이 응답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내 천성인데 난들 어떡하겠어요?" 그렇다. 우리의 약점이나 결점이 우리의 힘이나 노력으로 고쳐질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마는 그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불가능한 일인가를 우리는 알고있고 또 인정해야 한다.

    위의 말씀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간구가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을 또한 확신해야한다. 우리보다도 하나님은 더욱 우리의 약점들을 고치고 싶어하시는 분이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실 수 없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분" (마28:18)임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분을 신뢰하라.

    4) 성령충만을 간구하고 그리스도안에 거하라.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은 엄격히 다르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무슨 특별한 신비한 체험이나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구세주로 모셔 들일 때 동시에 일어나는, 평생에 단 1회적인 사건이다. 우리는 우리안에 성령이 들어오시도록 요구할 필요가 없다.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主)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결단하는 순간 성령은 이미 우리안에 들어와 계시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3:20의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이 사실이 분명히 기록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때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 예수의 영(성령)이시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천지 차이이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성령이 그 안에 계시다고는 아무도 단정할 수 없다. 로마서 8:9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말은 성령이 그 안에 계시지 않은 이는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만약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잘 알고 있기도 하고 교회도 오래 다녔으나, 그분을 당신을 구원할 구세주 그리고 당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지 못했다면 우선 당장 할 일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마음속에 영접해 들이는 일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자에게만 계시며, 이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수 있다. 그리고 더욱 분명한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이 성령님의 도움에 의해서만 우리의 약점을 고칠수 있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다.

    한번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우리안에 계신 그분은 우리를 진리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요16:13), 우리의 죄를 책망하시며(요1 6:18), 하나님의 사역과 계획과 미래에 대해 알려주신다.(요16:13). 그분은 우리를 도우시며(롬8:26/막13:11)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하시며(갈5:22),우리가 옳은 일을 하도록 도우시기도 한다.(요일2:2 7). 예수께서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성령이라는 제3인칭의 존재로 믿는 자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이 "내게 성령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경은 "성령충만"을 요구할 따름이다. 그것(성령충만)은 단순한 제안이나 요청이 아니다.

    에베소서 5:18에서 주님은 "오직 성령충만을 받으라.(Be filled with the Spirit)" 라고 분명한 명령형 문장을 사용하셔서 말씀하셨다. 오늘날엔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일에 있어서 가장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이 큰 문제이다. 훌륭한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성령의 충만함과 방언을 말하거나 어떤 환상적인 체험을 하는 것을 동등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령충만이란 어떤 체험이나 느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성경은 이 에베소서 5:18에서 "성령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하면서 현재 시제를 사용함으로써 계속적인 의미로 『성령충만』은 우리 일생의 일회적인 경험이 아니라 매순간마다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명령이다. 원어인 그리이스어를 보면 이 귀절은 "당신들은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하시오"의 뜻을 지닌다. 이 성령충만은 하나의 삶의 양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자리에 누울 때까지 계속 성령충만 하도록 명령받았다.

    성령으로 충만하도록 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 우리를 두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활동이 우리 삶의 전 영역에 걸쳐 나타나게 하라는 의미이다. 왜 우리는 우리 삶의 주도권을 성령님께 넘겨드려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애초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구원자요 주인(主, Lord)으로 모셔들였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자의에 의해 우리 삶의 주권을 가지시도록 영접 되어졌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지배(통치)아래에 놓여있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노예나 꼭두각시가 되어 로보트처럼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 무지한 탓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압제나 횡포가 아니다. 우리는 100%의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자유로운 도덕적 행동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 격려하시지만 행동은 우리가 해야한다. 애초부터 성령께선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우리를 강압적으로 마음의 문을 부수고 들어오신 이후 에도 그분은 결코 우리를 압제하시지 않으신다. 우리의 인격으로 그분의 뜻에 동의하여 그분의 능력을 힘입어 바로 우리가 사는 것이다.

    교통표지판이나 이정표를 따라 자동차 연료의 힘을 입어 우리가 성루로 간다고 해서 우리는 교통표지판이나 휘발유, 자동차의 노예인가? 교통법의 꼭두각시인가? 우리가 기쁨으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가르침과 인도와 책망에 순종하는 것은 그 성령하나님의 인격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우리를 향한 그 전폭적인 사랑과 신실성을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시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모든 방법(法)과 길을 훤히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분이야말로 우리가 우리인생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데 있어 유일한 진정한 안내자이시며 또한 원동력이시다.

    성령충만이란 우리 인생 삶의 길을 성령의 지시에 전적으로 따라 우리가 운전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충만은 느낌이나 별난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감정적인 쇼킹한 경험을 동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한 사람과 육신적인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려고 오셨다. 에베소서 5장은 우리가 성령충만할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써(엡5:20)그분을 영화롭게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육신의 힘으로 기쁨과 사랑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육신의 힘으로 우리들의 기질상의 많은 약점들을 개선시키고 변화시키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성령충만한 사람에겐 오히려 아름다운 성품들의 열매가 맺히게 된다.

    갈라디아서 5:22-23에는 "성령님이 지배하는 생활에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함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힙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현대인의 성경 번역판) 여기에 나오는 목록들을 보라. 앞에서 우리의 이기심 때문에 가지게 된 우리 안의 쓰레기들과 어떻게 다른가? '증오. 시기. 험담. 야유. 앙심. 비통. 불평. 질투. 후회. 비난/근심. 의심. 우유부단. 움츠림. 소심. 고집. 열등감. 비겁. 주저. 실망. 교만...'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기질을 갖고 있든 성령이 충만하기만 하며 그의 삶에는 이 아홉 가지의 삶의 특성이 열매로 맺히고 점차 자라가게 되는 것이다.

    󰋯 사랑, 곧 모든 이들(원수까지도)을 향한 사랑이다.

    󰋯 희락, 곧 기쁨(joy),환경을 초월한 변함없는 기쁨이다.

    󰋯 화평(peace),곧 모든 두려움과 근심 대신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평안이다.

    󰋯 오래참음(long suffering:인내), 즉 모든 모욕과 고통과 비난중에서도 묵묵히 일을 수행하는 능력이다.

    󰋯 자비(gentleness), 곧 부드러운마음에서 나온 사려깊고 예의 바르고 젊잖고 신중하고 이해하려는 자세이다.

    󰋯 양선(goodness), 즉 자신과 소유물에 대해 인색하지 않고 관대한 마음, 이기심 없는 모든 친절과 선한 일이다.

    󰋯 충성(faith) 즉,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의지하는 태도, 신뢰성, 성실한 자세를 말한다.

    󰋯 온유(meekness),악을 악으로 갚지않는, 따뜻하고 겸손한 마음이다.

    󰋯 절제(self-control), 즉 자신의 기질상의 약점을 자제하는 능력, 자기훈련, 자기조절 능력을 말한다.

    성령께선 우리가 그분의 활동을 무시하고 지속적으로 그분의 존재와 능력을 우습게 여기지 않는 한 언제나 우리 삶의 한부분 한부분에 개입하실 것이다.

    고함을 지르고 꽃병을 집어 던진 다혈질 사람에게 성령께선 즉각적으로 그 분노가 잘못된 죄임을 지적하신다."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알겠지? 그 방법은 이 문제의 해결의 좋은 방법일 수 없어! 자 지금 곧 그와의 화해를 시도해라. 전화를 걸어!" 성령의 사람은 그 말씀에 동의하고 순종하게 된다. 그는 곧 전화기 앞으로 달려간다.

    다혈질의 사람으로부터 폭언과 꽃병세례를 받았던 우울질의 사람은 모욕감과 증오감에 시달린다. 두통을 느끼고 이를 갈며 침대에 누워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께선 내버려두실리 없다. "나는 네가 그 흉칙한 증오심으로 그렇게 몸과 마음에 깊은 고통을 느끼며 있는 것이 싫다. 너의 평안이 내 기쁨이다. 그를 용서해라. 나도 너의 모든 죄들을 용서해 주지 않았니? 자! 일어나거라. 그에게 화해를 청해라. 그가 너의 화해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너에겐 평화가 있게 될게다. 어서 전화를 걸어라."--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찌꺼기를 남겨두지 않는다.

    자신의 약점으로 인한 실수들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싫어하므로 그는 신속히 그 실수들을 시인하고 해결한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옛날의 그 편협적이고 고집과 독선과 혈기와 자기학대와 근심걱정의 지저분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전율할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더 이상 주인이나 통치자로 모시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고 성령의 지시에 계속 불순종함으로 성령의 능력을 소멸시켜 버렸다. 그들의 직분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근심걱정으로 우울증에 걸린 목사님이나 분노와 혈기로 위궤양을 앓고있는 장로님도 사실은 성령을 무시하고 인정치 않으며 성령의 활동을 훼방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통해선 하나님께 선 기쁨과 영광을 얻으실 수가 없다. "내가 분명히 말해둔다.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님에 대한 모독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15:31) 개역성경은 여기의 성령모독을『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그 인격이 변화되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아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계신 성령의 능력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였으니 그는 분명히 성령을 모독한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심각한 범죄인가!

    V. 결론

    물론 우리의 옛 성품과 자아를 상대하여 싸우는 싸움은 쉬운 것은 아니다. 자신의 약점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성령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다가도 또 여전히 옛 자리로 되돌아와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는 우리는 실망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포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노리는 점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실망하지 아니하고, 죄를 지었을 때마다 또 죄를 깨달았을 때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요청하고 그분의 지시에 순종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 결국에 가선 옛 습관이 더이상 당신을 괴롭히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느날 문득 되돌아 보았을때 당신은 과거와는 달라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우울질과 다혈질이 혼합된, 극도의 소심함과 신경질적인 포악함의 사람이었다. 사람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과 이기심, 예민한 성격등으로 인해 언제나 소극적이고 박약한 모습으로 지내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성령께선 너무나 많은 부분들 속에서 기적을 일으키셨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나의 기질상의 약점 때문에 이 공동체 속에서 지체들에게 아픔을 주고 그 때문에 나 스스로 자학에 빠지곤 하는, 여전히 변함없는 우울질과 다혈질의 사람이긴 하지만, 불과 지난 몇 년 전과 비교만 해보아도 나의 기질적 약점들은 많이 깍이고 다듬어진 것을 선명하게 확인하게 된다. 나 자신이 이를 위해 이를 악문 고행과 수양을 쌓았기 때문인가? 기껏 내가 한 것이라곤 주님을 떠나지 않고 그분과의 교제를 중단하지 않은 것밖에 없다.

    나는 기대한다. 지금까지도 나를 조금씩 변화시켜 오신 주님께서 앞으로도 나의 남은 날 동안 변함없이 나를 지도하시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다듬어 가실 것을 말이다. 나는 나의 약점들을 매일 점검하고 있다. 그것들은 나의 적이다. 내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들이다. 여러번의 실패와 좌절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내가 담대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이 적들이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라는 확신 때문이다. 예수 안에서 나는 능히 이 약점들을 물리칠 수 있음을 확신한다. 그것은 여러분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담대하라. 승리를 확신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원본 : 생명의 말씀사 / 팀 라헤이 “성령과 기질”, 기질TEST는 책과 무관.

    요약 : 낮, 해, 밤, 달 의 발췌문을 재 편집하여 인용함.



    팀 라하이, 아름다운 애정생활


    책은 원명은 [Act of Marriage] 
    미국의 1976년과 1977년 종교출판계에서 베스트셀러 랭킹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결혼 행위]또는 [부부의 사랑 행위]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나 우리에게는 너무 직선적인 것 같아 [아름다운 애정생활]로 했다. 
    결혼 적령기에 미달되는 모든 미성년자들은 이 책을 읽을 수 없으며 성신 부부들과 내일의 결혼을 준비하는 단계에 있는 분은 누구나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은 여러분의 인생을 즐겁게 해줄 것이며 더 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팀 라하이 박사는 결혼문제에 있어서 세계적인 전문가로 그를 통해 파탄지경에 이른 많은 가정들이 다시 모여 행복을 찾았으며 불행을 되씹어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찾았다. 
    아름다운 애정생활은 당신의 생활에 무한의 가능성을 안겨다 줄 것이다

    저자소개

    [행복한 결혼생활], [성경공부의 비결]등 수많은 저서로서 우리에게 알려진 팀 라헤이 박사는 스콧드 메모리얼 침례고회의 목사님이며 미국 샌 디아고에 소재한 크리스천 헤리티지 대학의 총장이다

    "나는 모든 부부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과 알 필요가 있는 사실들을 저들로 하여금 호의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내 아내 비벌리의 도움으로 본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나는 목사의 아내로, 세미나의 강사로 그리고 크리스천 헤리티지 대학의 사무주임인 아내의 광범위한 상담경험에 힘입은 바 컸습니다." 

    "많은 부부들과 상담한 결과 우리 둘은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예정해 주신 모든 축복을 향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다른 많은 부부들이 저들의 성관계를 불쾌하고 혐오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수년 간의 연구와 실험 그리고 상담을 통하여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그러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몇가지 교수원칙을 개발했습니다. 우리는 카운슬러와 목사님들의 요구를 받고, 이와 동일한 원칙을 책으로 발간하는 경우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교회가 참 좋다 
    혼인전 목사님께서 과제를 준다. 
    하나는 화남금여이고 또 하나는 이 책이었다. 
    화남금여를 통해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이 책을 통해 실제적인 애정생활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뜨거운 감자와 같은 주제를 다룬 책이지만, 세속적인 책과 달리 통속적이지 않고 성경적 가치관에서 실제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옛날에는 표현이 안되었지만 갈수록 성문제는 가정 행복과 부부행복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20대에서 40대 부부들에 대한 갤럽 조사에 의하면 성적인 불만을 가진 부부가 74퍼센트에이르는 반면 부부생활에 만족하는 부부는 10퍼센트 밖에 안된다고 한다. "

    더욱 심각한 것은 만족하지 못한 부부들 중에서 해결방법을 찾기 위해 함께 노력하지 않는 부부가 56퍼센트나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혼사유의 90퍼센트가 솔직하게 알고보면 성적 부조화와 불만 때문이라는 충격적인 통계가 나오고 있다.

    성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첫째, 종족 보존
    둘째, 사랑의 표현
    셋째, 인생의 환희와 즐거움

    우리는 이 하나님의 목적을 다 이룰 때에 행복하게 살 수있다.
    성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경은 성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기도시간 외에는 절대로 분방하지 말고 성생활을 피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잠언  5장 15절에서 20절은 가정에서 부부간의 성적 즐거움의 샘물을 가정 밖으로 넘치게 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구약의 아가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랑을 메시지로 담고 있지만 성생활에 적극적인 테크닉도 가르치고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다.

    성공적인 성생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배우자와 성에 대한 자세와 실제 성생활을 위한 테크닉의 개발이 필요하다. 우선 부부생활에 대한 자세는 성경적인 원리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 몸을 자신이 주장하지 못하고 배우자가 주장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즉 상대방이 섹스를 요구할 때에는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 성경적 자세다. 거절할 수밖에 없을 때는 상대방이 충분히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도록 지혜롭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특히 성적으로 아내보다 더 충동적인 남편의 요구에 아내는 가급적 거절하지 말아야한다.

    남편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내로부터 충족받기를 원하는 필수조건의 제1위는 '성적인 만족감'이라는 연구조사가 나와 있다.

    만약 남편이 아내에게 성적인욕구와 만족을 얻지 못한다면 아내를 사랑하는 여부와 관계없이 남편은 다른 방면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아내들은 명심해야 한다.

    남편의 성적 요구에 아내가 단호하게 거절할 때 남편들은 아내들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극심한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 거절당했을 때의 남편들의 심정을 모아본 자료를 소개한다

    "심한 모멸감을 맛보았다. 다시는 내가 요구하나봐라 하는 심정이 들었다."

    "자존심이 상해 죽고 싶을 정도였다." "미워서 죽이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아내가 보기 싫었고, 다른 여자를 사귀고 싶었다."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두고보자라는 복수심이 불탔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의 성적 특성을 이해하여 아내가 만족감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관계는 평등한 것이며 서로 보답하는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서로의 만족을 위하여 성교를 시도하며 애무하고 성행위에 참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만아니라 우리의 권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남자를 백열전구에 여자는 전기다리미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여자의 경우에는 충동보다도 분위기와 접촉을 통한 애정표현에 더 의지하고, 남자보다 더 여유있는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부부는 잠자리에서 열정적이고 적극적이 되도록 노력하고 변화를 시도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다양한 기교와 테크닉을 위해 서로 합의하에 협력한다.

    한국 교회가 성생활에 대한 언급을 터부시하고 있지만, 건전한 성생활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배우고 훈련받아 세속적인 성문화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성생활에 성공하라

    관심있는 분은 팀 라하이 목사가 지은 <아름다운 애정생활>이라 는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성생활의 성공은 행복한 부부의 아름다운 특징이다. 


    팀 라헤이(Tim LaHaye, 1926년 4월 27일 ~ 2016년 7월 25일) 
    기독교 목사, 소설가로, 제리 B. 젱킨스와 함께 쓴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로 알려져 있다.

    종말론적 소설인 <레프트 비하인드>의 저자 팀 라헤이가 지난 7월 25일 별세했다(2016. 7. 25).
    7월 25일 소설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로 수백만 명의 독자에게 영향을 미친 목회자이자 저자, 라디오 진행자인 팀 라헤이가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했다. 향년 90세. 그가 설립한 사역 단체에서는 라헤이가 뇌졸증으로 쓰러진 후 며칠 후에 숨졌다고 발표했다.
    라헤이와 제리 젠킨스는 1995년부터 16권의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를 출간했다. 세상의 종말을 주제로 다루는 이 시리즈는 6천5백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최근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되기도 했다.
    라헤이는 소설을 쓰기 전 목회자로 왕성히 활동했다. 그는 샌 디에고 크리스천 칼리지와 십여 개의 기독교 초중등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목회자들을 조직해 조지 W. 부시 등 정치인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보수 단체인 '미국을 걱정하는 여성들'을 설립하기도 했던 그는 아내 비벌리와 함께 라디오 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타임> 지는 그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복음주의자 25명 중 한 명으로 선정한 바 있다.
    그와 <레프트 비하인드>를 공동 저술한 젠킨스는 성명서를 통해 라헤이가 “영적 거인”이었다고 발표했다.
    젠킨스 “내가 아는 팀 라헤이는 목회자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며 자신의 신앙을 나누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나이와 성, 사회적 지위와 상관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염려를 함께 나눴다.”라고 말했다.


    1월 1일(목) 요한일서 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생명의 말씀(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at and our hands have touched--this we proclaim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생명의 말씀(the Word of Life) 

    투 로구 테스 조에스(του λογου της ζωης)
    호 로고스 호 조에(ὁ λόγος ὁ ζωή)

    설교 제목 / 말씀이 살아 역사할 때

    핵심 본문 / 히브리서 4:12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 요한복음 6:63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1️⃣ 서론 : 왜 어떤 말씀은 지나가고, 어떤 말씀은 나를 바꾸는가

    • 우리는 말씀을 자주 듣지만, 삶이 바뀌지 않을 때가 있다

    • 말씀이 정보로 끝날 때 vs 살아 역사할 때의 차이

    • 질문: 오늘 나는 말씀을 ‘듣는 사람’인가, ‘경험하는 사람’인가? 

    2️⃣ 본론 ① 말씀이 살아 있다는 뜻

    •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의 글이 아니라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은:

      • 마음을 찌르고

      • 생각을 드러내며

      • 방향을 바꾼다

    • 👉 말씀이 우리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다룬다 

    3️⃣ 본론 ② 말씀이 역사하지 못하는 이유

    • 마음이 닫혀 있을 때

    • 이미 답을 정해 놓고 말씀을 들을 때

    • 순종 없는 듣기만 반복할 때

    • 👉 말씀이 문제가 아니라, 말씀 앞에 서는 태도가 문제일 수 있다  

    4️⃣ 본론 ③ 말씀이 살아 역사할 때 일어나는 변화

    1. 생각이 변한다 – 세상 기준에서 하나님 기준으로

    2. 마음이 깨어난다 – 무감각에서 회개와 소망으로

    3. 삶이 움직인다 – 결단과 순종이 생긴다

    말씀은 감동으로 끝나지 않고 결정을 낳는다

    5️⃣ 결론 : 오늘 말씀이 역사하게 하라

    • 작은 순종 하나가 말씀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

    • “이 말씀을 오늘 어떻게 살 것인가?”를 붙잡자

    • 기도 : “하나님, 말씀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소서.” 

    ✍️ 한 줄 정리 /  말씀이 살아 역사할 때, 사람은 변하고 삶은 새로워진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진 그분!
    말씀: 요한일서 1장 1절(맥체인 성경읽기, 12월 2일, 화)
    기독교 신앙은 추상적 교리가 아니라 접촉의 신앙이다. 요한은 자신의 서신을 거대한 신학 체계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는 먼저 경험을 말한다.

    요한일서 1:1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청각              시각                                                    촉각 

    복음은 이렇게 감각의 언어로 시작된다. 
    하나님은 멀리서 응시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우리의 몸과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오신 분이다. 
    요한은 이 진리를 세 개의 동사로 압축해 낸다. 
    듣다(청각), 보다(시각), 만지다(촉각)

    사람의 다섯 감각 기관 : 청각(聽覺) 2%, 시각(視覺) 5%, 후각(嗅覺) 35%, 촉각(觸覺) 1%, 미각(味覺) 15%

    들었다 : 하나님이 먼저 말을 걸어오신 사건

    신앙은 인간이 신을 찾아 나선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신 계시 사건이다. 
    우리의 ‘들음’은 하나님의 먼저 말씀하셨다는 증거다. 
    듣는 신앙은 '순종하는 귀'를 가진 신앙이다. 
    여기서 듣기는 지적 동의를 넘어 영혼의 개방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굳은 마음을 깨뜨리고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는 영적 소환장이다.
    오늘 우리는 소음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말은 넘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희미해진 시대다. 
    그래서 듣는다는 것은 곧 세상 소음에 대한 영적 저항이다. 
    복음의 첫 문은 언제나 경청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자리에서 인간은 비로소 다시 살아난다.

    보았다 : 눈이 열릴 때 시작되는 신앙

    요한은 두 개의 '보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하나는 시각적 확인이고, 다른 하나는 깊은 관찰과 응시다. 
    보는 것은 단순한 시각적 작용을 넘어 계시적인 현실을 인식하는 해석 행위이다. 
    "그의 영광을 보니"(요 1:14)라는 요한의 말은 예수님의 외모가 빛났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 곧 사랑, 진리, 은혜가 드러났다는 뜻이다.
    흥미롭게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외모를 전혀 묘사하지 않는다. 
    그분의 키, 얼굴형, 피부색, 머리색 등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침묵이다. 
    예수님의 얼굴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면, 그 얼굴은 어느 특정 문화와 인종에 갇히고 말았을 것이다. 
    신약은 그 길을 거부한다. 
    보지 못함으로 진정으로 보게 하려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예수님의 참된 얼굴은 종교적 초상이 아니라 갈보리의 사랑, 즉 자기 비움의 영광이다. 
    보는 신앙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읽어내는 신앙이다. 
    고난 속에서 열리는 인식, 눈물이 마른 자리에 드러나는 새로운 시각, 이 모든 것이 요한이 말하는 ‘보았다’의 세계다.

    만졌다 : 촉각을 가능하게 한 성육신의 신비

    ‘만졌다’는 동사는 요한 신학의 정점이다. 
    당시 어떤 이들은 물질은 악하다고 말하며 ‘예수님의 몸은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가현설. Docetism). 
    요한은 이 한 문장으로 그것을 산산조각 냈다. 
    "우리가 그분을 만졌다."
    촉각은 실재의 가장 강한 증거다. 
    귀는 속고, 눈은 착시를 경험하지만, 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몸을 만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물질 세계 속으로 들어 오셨다는 선언이다. 
    먹고 마시고 피곤해하며, 상처 입고 피 흘리며,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실제의 몸으로 오셨다는 증언이다.

    신약은 예수님의 외모에는 침묵하지만, 몸의 실재에는 침묵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비현실적 영성’을 꿈꾸는 종교가 아니다. 
    몸으로 오시고, 몸으로 사랑하시고, 몸으로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예배하는 신앙이다. 
    무엇보다 성찬은 이 ‘만짐의 신학’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식이다. 
    떡을 떼고 잔을 마실 때 우리는 "그분의 몸을 만지는 신앙"을 체험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로의 상처를 만지고,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일, 그 자체가 깊은 신앙 행위다. 
    사랑은 언제나 몸을 가지고 온다.

    생명의 말씀은 개념이 아니라 인격이다.
    "우리가 보았고, 들었고, 만진 그분…" 그분이 바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기독교는 정보의 종교가 아니라 관계의 종교, 데이터가 아니라 접촉의 신앙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설명이 아니라 몸으로, 눈물로, 사랑으로 다가오셨다. 그래서 요한은 선언한다.
    “우리는 들었고, 우리는 보았고, 우리는 만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언하지 않을 수 없다“
    세 동사는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오늘 우리 신앙을 다시 묻는 질문이다.

    생명의 말씀은 오늘도 우리의 귀를 두드리고, 우리의 시선을 붙들고, 우리의 손을 잡고 우리 삶으로 들어오신다. 
    그분은 우리가 보았고, 들었고, 만진 바로 그분이시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이 오늘도 가슴 벅찬 이유이다.

    들리고, 보이고, 만져지는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
    우리로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우리 눈을 밝히사 당신 몸의 흔적을 보게 하소서.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마음의 손으로 당신을 만지게 하소서.
    오늘도 우리 삶을 예수님의 생명으로 채워주옵소서. 아멘.


    λόγος, ου, ὁ Storng number 3056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Pronunciation [ lŏgŏs ]  
    Etymology / 3004에서 유래


    λέγω Storng number 3004

    1. 말하다.  2. 글로 말하다.  3. 묻다  
    Pronunciation [ lĕgō ]

    ζωή, ῆς, ἡ Storng number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 네가 살아있는 동안
    Pronunciation [ zōē ]
     Etymology /  2198에서 유래


    ζάω Storng number 2198

    1. 살다.  2. 롬 7:1-3.  3. 다시 살게 되다  
    Pronunciation [ zaō ]  

    생명의 말씀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육신(Ενσάρκωση) 

    성육신(Incarnation) Incarnatio. Ενσάρκωση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 고난의 시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고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시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보다 (to look on) : 호라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보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호라오'는 깨달아 안다는 의미에서  
    '눈으로 보다, 마음으로 보다, 인지하다, 알다, 경험하다, 주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어에는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여러 개가 있다.

    먼저 '그냥 응시하다, 보여지다'라는 / '옵타노마이',

    단지 기계적이고 수동적이거나 우연한 응시를 표현하는 '겉을 보고 깨닫다,  지식을 갖다, 확신하다,  발견하다, 보다, 알다'라는 '에이도'

    ('우상'이라는 '에이돌론'에서 유래되었으며,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형태, 외모를 보고 확신해 버리면 우상이 되어 버린다)가 있다.

    또한 좀 더 진지하게 본다는 의미에서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보고 배우다, 방문하다'라는 뜻을 가진 '데아오마이',

    크게 뜬 눈으로, 현저한 어느 것을 향한 것처럼 자발적인 관찰이라는 의미에서 '경험으로 알다, 마음의 눈으로 보다,  이해하다, 생각하다'라는 뜻을 가진  '블레포'가 있다.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들을 정리하면,

    단지 응시하는(옵타노마이) 단계에서 그대로 보고 판단해 버리는(에이도) 단계로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보아(데아오마이) 경험과 마음으로 아는(블레포) 단계를 통하여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는(호라오) 것이다.

    성경은 원래부터 항상 하나님을 본(호라오) 사람이 없다(요 1:18)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호라오)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마 5:8)

    청결하고 흠 없는(카타로스) 자는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으로만 청결하고 흠없게 될 수 있다(요 15:3)

    선악의 주체가 된  '나'의 말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섬김을 받는 자가 비로소 하나님을 '호라오'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호라오)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다(에이도)(1:39).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보려고(에이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보이는(옵타노마이) 만물을 통하여 말씀을 보는(호라오)자가 하늘 백성인 성도이며, 바로 그가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는(호라오)자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며 그리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갈 2:20)이고, 영원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영생을 보는(호라오)자(요3:36)인 것이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은 성육신 교리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구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표현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말씀(로고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그는 창조와 구원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본체입니다. 성육신을 통해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입으셨지만, 여전히 신성을 가지신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단순히 인간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말합니다. 헬라어 "스케노오"는 "장막을 치다"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하나님이 성막을 통해 백성과 함께하신 것처럼, 이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만남의 장소가 되셨음을 상징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와 고통에 직접 참여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며 구원의 길을 여셨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는 표현은 성육신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온전히 드러내셨음을 말합니다. 그의 은혜와 진리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나타내며, 성육신이야말로 그 영광의 최고 표현임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1:14은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과 가까이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구체적이고도 신비로운 사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2.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 1:23은 성육신의 본질을 명확히 보여주는 구절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은 이사야 7:14의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으로,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이 인류 역사 속에 실현되었음을 드러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탄생, 즉 성령의 역사로 잉태되셨다는 점에서 성육신의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특성을 강조합니다. 처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신 예수님은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지만, 죄로 물들지 않은 완전한 인성을 가지셨습니다. 동시에 그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신성과 인성을 온전히 결합한 존재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성육신의 목적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와 고통에 동참하시고, 인간과 함께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은 성육신이 단순한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구원의 역사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셨다는 은혜의 표현이며, 성육신을 통해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길을 여신 구세주로 임하셨음을 보여줍니다.

    3.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 4:4-5는 성육신의 목적과 의의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먼저, "때가 차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되는 정해진 시점에 성육신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섭리 속에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탄생으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음을 가리킵니다. 이는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간의 연약함과 고난을 경험하셨지만, 그의 탄생이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암시하며 그의 신성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또한,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완벽히 순종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시고, 율법의 정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라는 구절은 성육신의 구속적 의미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순종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인간을 율법의 얽매임에서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완성을 이루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얻게 되었으며, 단순한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은 은혜의 놀라운 표현입니다. 갈라디아서 4:4-5는 성육신이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과 사랑이 집약된 신비로운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4. 빌립보서 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5. 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시믄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6.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7. 로마서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서 죄를 정하사."

    8. 요한일서 4:2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9.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0. 누가복음 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니라."

    11. 요한복음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12. 히브리서 10: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사람은 본성의 죄성과 연약성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는’ 죄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연약 때문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셨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며 복음의 중심적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육신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자가 되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을 묘사한다. ‘그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이들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 율법의 요구는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킴으로 얻는 의, 곧 완전한 의(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이 의를 이루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믿는 자들에게 이 의를 은혜로 주셨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 본문은 9절에 서술한 성육신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육신'(사르크스)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 4:13). 
    따라서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보였으나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수난도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라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은 '육신'이라는 한 단어로 여지없이 붕괴시킨다.

    한편 '사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 '소마'와는 다른 뉘앙스로 쓰였다. 즉 '사르크스'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이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롬 1:3,4). 
    즉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 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고전 1:24-31; 고후 10:4).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는 결코 부합될 수 없다(롬 9:8). 그러나 이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 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으며(고후 5:21), 단지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히 4:15).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성육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보여준다.

    (1) 피곤(4:6) 
    (2) 갈증(4:7) 
    (3) 하나님께 의존(5:19) 
    (4) 슬퍼 눈물을 흘리심(11:35) 
    (5) 분노하심(11:38) 
    (6) 갈등(12:27) 
    (7) 수난과 죽으심(18, 19장)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우리 가운데'(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천막을 치다'란 뜻의 동사 '스케노오'의 부정과거 능동태인 '에스케노센'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실증한다. 
    따라서 본절은 마 1:18-2:23과 눅 2:1-20의 성육신 기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다.

    한편 '에스케노센'이란 표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 장면과 본문의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해 준다.

    (1)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임시적으로' 이 땅에 계셨음을 가리킴. 
    (2)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방랑할 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정해진 곳이 바로 '장막'이었으며, 특히 요한이 곧이어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영광과 장막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40:34이하). 
    (3)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예수에 의해 확연히 밝혀졌음을 보여줌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 뜻의 '데아오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놀라운 상태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아마도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변모(Transfiguration, 마 17:2-8; 막 9:2-8; 눅 9:28-36)에 대한 회상을 기초로 하여 사용한 용어인 것 같다. 
    그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을 저희 자신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라는 간구를 연상케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부활은 그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고전 2:7; 벧전 5:4).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즉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이 본문에서도 '... 같이', '... 만큼'이란 뜻을 지닌 부사 '호스'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생자'(공동번역, '외아들')라고 번역된 '모노게누스'는 '모노스'('유일한')와 '게노스'('종류', '혈족')의 합성어로서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외아들'(눅 7:12; 9:38; 히 11:17) 또는 '외동딸'(눅 8:42)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3:16, 18; 요일 4:9),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 중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3:17; 갈 3:26)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3:18; 5:18; 10:30; 17:5, 24) 
    (3)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14:9; 빌 2:6, 7)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부 학자들은 1:1-3절의 내용을 무시하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요일 5:18의 내용을 증거로 하여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됨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요일 5:18)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은혜와 진리'(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삼하 2:6). 
    사도 요한은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등질적(等質的) 임을 묘사한 후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 사역을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셨음을 시사한다(10:30).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한편 '가득 차서 넘치는'이란 뜻의 헬라어 서술적 형용사 '플레레스'는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복음(유앙게리온. ĕuanggĕ- liŏn)

    εὐαγγέλιον, ου, τό Storng number 2098


    1. 좋은 소식에 대한 보상.  2. τὸ εὐαγ- γέλιον.  3. ὁ λόγος τοῦ εὐ.  
    Pronunciation [ ĕuanggĕ- liŏn ]
    Etymology  /  2095와 32에서 유래

    εὖ Storng number2095
    1. 잘.  2. 좋게.  3.  εὖ ποιεῖν: 좋게 행하다
    Pronunciation [ ĕu ]  
    1. 잘, 좋게, εὖ ποιεῖν: 좋게 행하다, 친절을 보이다, 막14:7, 잘하다, 올바르게 행하다, 마25:21,23, 눅19:17, 엡6:3.

    ἄγγελος, ου, ὁ Storng number 32

    1. 사자.  2. 사람이 보낸 사신.  3. 하나님이 보낸 사자: 메시아의 예고자
    Pronunciation [ anggĕlŏs ]
    Etymology  /  ‘소식을 가져 오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자(使者)(마1:20, 행5:19, 약2:25), 천사 (마13:39, 히1:4, 계1:1).

     '생명'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에스'는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는 말씀의 내용(행 5:20; 빌 2:16).
    둘째는생명을 얻게 하는 것(요 8:12; 6:35, 48:4:10, 11; 계 21:6; 22:1)

    생명이란 조에스는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에 대한 본질적인 선포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합니다.
    '들은 바'(아케코아멘)와 '본 바'(헤오라카멘)는 문법적으로 완료시제라고 합니다.
    완료시제란 생명의 말씀이 예수 안에서 마침내 실현되었으며 그것을 사도들이 예수께서 설교하셨을 때 듣고, 예수께서 사역하셨을 때 눈으로 보고 확인하였음을 의미합니다(히 1:1,2). 

    '듣고'와 '본'은 요한복음에서 '믿음'과 연결된다(요 10:27; 20:29). 
    '만진 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살라페산'은 부정과거 시제로 과거 한때 직접 만져서 느낀 것을 가리킨다. 
    요한은 이러한 관계절, 즉 '들은 바요'. '본 바요', '만진 바라'는 표현을 통해서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역사 속에 현현하신 하나님을 드러내셨으며 그의 사역과 설교를 통해 자신 안에 실현될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강조한다.

    생명의 말씀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4:6).
    생명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주고 유지하며 회복시키는 능력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적인 근거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생명의 말씀을 이 세상에 밝히 드러내어 알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빌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생명의 말씀을 이 세상에 드러내어 알리려면 먼저 내가 생명의 말씀에 대한 확실한 체험과 증거를 가져야만 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확신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빛과 생명과 사랑으로 경험하였다고 고백합니다.

    2026년 병오년을 출발하며 내가 만났던 예수님을 날마다 삶의 터전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증거하고 전파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말씀은 지금도 우리의 속사람을 살립니다.



    군주적 유일신론과 삼위일체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반삼위일체론자들(Antrinitariers)은 이 교리를 비성경적, 비이성적 교리라고 주장합니다. 
    많은 이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그리스 형이상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삼위일체가 신앙의 최고 권위로 믿어져 온 성경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면 결코 공교회의 정통교리로 자리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삼위일체 신조는 그리스 형이상학적 일신론과 논쟁하면서 성경적 신론을 확고히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의 형이상학적 유일신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당시의 시인들의 노래와 희극을 통해 전달되는 신론을 비판하였습니다.
    철학자들은 당시 시인들의 노래나 연극에 등장하는 인간동형론적 다신 신론을 비판하면서 모든 존재자들의 기원 또는 궁극적 원리인 일자에 대해 말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전통안에서 신은 초시간적, 초역사적 실재인 유일자로 간주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 모든 운동의 궁극적 원인) 또는 플로티누스(Plotinus, 250-270)의 일자(一者, the One)개념이 그렇습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us Martyr, 100-165 )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 of Alexandria,150-215)와 같은 고대 교회의 변증가들은 기독교적 유일신신앙을 다신론적 신화에 대항하는 철학적 단일신론과 동일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의 형이상학적 일신론은 양자론(또는 종속론)과 양태론이라는 기독교 삼위일체 신론의 가장 큰 두가지 이단들의 원인제공자가 되었습니다.

    ◈종속론적 또는 군주론적 단일신론(Monarchianism)의 두가지 오류들

    삼위일체 신론은 단일신성과 삼위의 개별성을 동시에 받아들여야만 설명가능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다신론적 종교와 신화가 유행하던 이방세계에서 기독교는 그 본래적인 유일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군주론적 단일신론(Mornarchianism)을 더 강조하게 됩니다.
    이 사상은 최고통치권자는 오직 한 분이기 때문에, 우주 만물에 대한 통치권자는 오직 성부 한 분 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오직 성부만이 영원 불변한 신성이시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의 본질과 동일하지 않고, 그 능력은 성부에게 종속된다고 주장하는(Justin Martyr, First Apologia, 13) 이러한 종속론적 삼위일체론은 그리스의 전제 군주적 유일신론과 그 궤를 같이 합니다.
    이 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면서 단일신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양자론(Adoptionism; 역동적 군주신론, Dynamic Mornarchianism)이라고 하고, 반대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만, 개별적 실체성을 부인하는 입장을 양태론적 군주신론(Modalistic Mornarchianism)이라 합니다.
    양자론과 양태론은 모두 신의 단일성 및 군주성을 강조하기 위해 삼위의 다양성을 반대한 대표적인 삼위일체 이단사상들입니다.

    【양자론(Adoptionism) 및 역동적 군주신론】(dynamic mornarchianism)

    양자론 또는 역동적 군주신론은 고대의 에비온파(Ebionites), 170년경 소아시아의 알로그파,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 로마의 테오도투스(Theodotus of Rome), 아리우스(Arius) 등에 의해 주장된 단일신론입니다.
    이들의 주장이 모든 면에서 일치하지는 않지만, 양자론, 또는 “역동적 군주론”이라고 부를 만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알로그파(헬라어로 “정신없는 자들”)는 로고스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기를 거부하며, 로고스기독론을 주장하는 요한복음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테오도투스는 로마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배교한 일에 대해 변명하며 “나는 인간을 부인한 적은 있어도 하나님은 부인한 일은 없다”고 답하였습니다. 로마의 휘폴리투스(Hippolytus of Rome,170-235)에 의하면, 테오도투스는 하나님의 능력(듀나미스)은 성령이 그리스도에게 강림하여 나타나기 전에는 그의 안에서 역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Refutation of All Heresies, 7, 23). 휘폴리투스는 그를 알로그파의 “부스러기”라고 비난합니다.
    양자론을 역동적 단일신론으로 부르는 이유는 테오도투스를 위시한 양자론자들이 예수님께서 세례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4세기에 더욱 세련된 아리우스주의로 발전한 양자론은 결국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부인하고, 모든 피조물보다 앞선 피조물로 여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양태론적 군주신론】
    (Modalistic Mornachianism)
    고대의 노에투스(Noetus), 프락세아스(Praxeas), 사벨리우스(Sabellius) 등으로 대변되는 양태론은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정하지만, 아버지와 구별된 개별적 실체성은 부정합니다.
    노에투스는 사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조화시키려 하였습니다. 양자론자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인간으로 보지만, 노에투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양자론자들이 그리스도의 세례를 강조한 것과 달리, 노에투스는 성육신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육신을 성자가 아닌 성부 자신의 성육신으로 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면 그리스도는 성부와 구별되는 개별적 존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른 현현 형태(modus)로 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성자는 불가시적인 하나님(성부)께서 가시적인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이고, 낳음을 받지 않으신 분이 동정녀에게 나심으로 낳음을 받으신 분이 되신 것이죠(Hypolytus, Refutation of All Heresies, 9,5). 이런 이유로 양태론은 성부수난설(Patripassianism)로도 불립니다.
    위와 같은 역동적 군주신론은 경륜적 삼위일체를 강조한 동방교회에서, 양태론적 군주신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를 강조한 서방교회에서 더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삼위의 개별성으로부터 신적 단일성을 사유하려 했고, 내재적 삼위일체는 신의 단일성으로부터 개별성을 설명하려 하였기에, 경륜적 삼위일체는 양자론에, 내재적 삼위일체는 양태론에 더 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르게 보이는 이 두가지 잘못된 삼위일체 이단사상의 배후에는 바로 그리스 군주적 단일신론이 있었던 것이죠. 그러므로, 공교회의 정통 교리로 채택된 삼위일체 신조는 그리스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 신화와 철학적 신론에 대한 성경적 신론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심리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Psychology)』

    1890년에 출간된 심리학의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근대 심리학의 기초를 다진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은 철학적이면서도 과학적인 심리학을 다루며,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제임스는 심리학을 단순히 과학적 방법론으로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 경험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심리적 과정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심리학의 원리』의 주요 개념과 이론을 설명하고, 제임스의 심리학이 현대 심리학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1. 의식과 경험의 흐름 (Stream of Consciousness)

    윌리엄 제임스의 가장 유명한 개념 중 하나는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입니다.
    제임스는 의식을 고정된 것이나 분리된 단위로 보지 않았으며, 연속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으로 보았습니다. 
    이 흐름은 각 개인이 경험하는 주관적 감각, 감정, 생각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입니다. 
    제임스는 이를 통해 의식이 단순히 사건들의 집합이 아닌, 시간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하나의 과정임을 강조했습니다.
    의식의 흐름은 인간의 경험을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으로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제임스는 사람들이 생각할 때 그들이 고정된 개념이나 단일한 사고 패턴을 따르기보다는, 다양한 자극에 반응하면서 변화하는 사고 흐름을 따르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의식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정확하게 분리하여 분석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 제임스의 주장입니다.

    이 개념은 후일 문학과 심리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의식의 흐름을 묘사하는 제임스의 방식은 이후 실존주의 철학과 문학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가 되었으며,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등의 작가들이 의식의 흐름 기법을 문학적으로 활용하게 됩니다.

    2. 주의(attention)와 선택적 지각

    제임스는 "주의(attention)"와 선택적 지각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한 번에 모든 자극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특정 자극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선택적으로 정보를 처리합니다. 
    주의는 우리의 의식이 특정 대상에 집중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반응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제임스는 주의가 단순한 감각 수용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과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주의는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내면의 욕구, 필요, 목표에 따라 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관심사나 목표에 따라 어떤 정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떤 것을 무시하는 선택적 과정을 통해 세상을 인식합니다.  
    주의의 이론은 현대 인지심리학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정보처리 이론(information processing theory)과 주의 집중 능력에 대한 연구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선택적 지각은 인지심리학, 학습 이론, 심리 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 주제로 남아 있습니다.

    3. 감정 이론 (James-Lange 이론)

    제임스는 심리학에서 중요한 기여 중 하나로 감정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감정이 단순히 마음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신체적 변화와 반응에 의해 생겨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제임스-랑게 이론(James-Lange Theory of Emotion)"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외부 자극에 대해 신체적으로 먼저 반응하고, 그 신체 반응을 인식한 후에 감정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위험한 상황에서 우리는 먼저 심장이 빠르게 뛰거나, 손이 떨리는 등의 신체 반응을 경험하고, 그 신체적 변화를 인식한 후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제임스는 "우리는 슬퍼서 울지 않고, 울기 때문에 슬프다"고 주장하며, 감정이 신체적 반응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이론은 이후 감정 연구의 기초가 되었으며, 현대 심리학에서 여전히 중요한 논쟁의 주제로 남아 있습니다.
    제임스는 감정이 단순히 마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신체적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신체와 마음의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4. 습관(Habit)의 형성과 역할

    제임스는 인간의 행동에 있어 습관(Habit)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습관이 삶의 전반적인 흐름을 결정하며, 의식적인 사고나 결정 없이도 행동을 반복하게 만드는 주요 기제라고 보았습니다.습관은 행동을 자동화시키고, 에너지를 절약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인류가 복잡한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제임스는 특히 어린 시절의 습관 형성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습관이 한번 형성되면 그것을 바꾸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며, 어렸을 때부터 올바른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삶은 반복적인 습관의 총합"이라고 말할 정도로 습관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중시했습니다.
    이러한 습관에 대한 연구는 이후 행동주의 심리학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제임스는 인간 행동이 단순히 외부 자극에 의한 반응뿐만 아니라, 습관이라는 내면적 기제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후의 행동 심리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라는 구절은 윌리엄 제임스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William James / 1842. 1. 11-1910. 8. 26
    The Principles of Psychology
    <습관의 형성과 역활>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까지도 바뀐다.
    So an action and you reap a habit
    So a habit and and you reap a character
    So a character and you reap a destiny.


    5. 자아(self)와 정체성

    제임스는 인간의 자아(self)에 대한 연구도 심도 있게 다루었습니다.
    그는 자아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경험하는 자아(Subjective Self)로, 이는 내가 나를 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는 부분입니다.
    둘째는 객관적인 자아(Objective Self)로, 내가 나 자신을 하나의 대상처럼 바라보는 부분입니다.
    제임스는 이 두 가지 자아가 상호작용하며,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보았습니다.
    제임스는 자아를 여러 차원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그는 자아를 물질적 자아(material self), 사회적 자아(social self), 그리고 정신적 자아(spiritual self)로 나누었으며, 이 각각의 자아가 인간이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세상과 상호작용하는지를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물질적 자아는 우리의 신체나 소유물, 
    사회적 자아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된 자아, 
    정신적 자아는 우리의 정신적 경험과 내면적 성찰에서 비롯된 자아를 말합니다.
    이러한 자아에 대한 제임스의 개념은 오늘날의 자아 심리학과 정체성 연구의 기초가 되었으며,
    인간의 자아가 단일한 것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6. 의지(Will)와 자유의지

    제임스는 의지(will)자유의지(free will)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논의를 펼쳤습니다. 
    그는 인간이 단순히 환경의 영향을 받아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를 통해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제임스는 인간이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제임스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력을 통해 목표를 성취할 수 있으며, 이는 반복적인 훈련과 실천을 통해 강화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그는 "행동하지 않으면 의지가 약해지고,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의지가 강해진다"고 말하며, 의지가 훈련을 통해 발달할 수 있는 중요한 능력임을 강조했습니다.
    제임스는 인간의 의지와 자유의지가 결코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환경의 영향을 넘어서 개인이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이후 실존주의 철학과 심리학에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논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7. 현대 심리학에 미친 영향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는 현대 심리학의 많은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의식의 흐름, 감정 이론, 주의, 습관, 자아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심리학 연구의 기초가 되었으며, 그가 강조한 경험주의적 접근은 이후 심리학이 과학적 방법론을 채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제임스는 철학과 심리학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했으며, 그의 심리학은 인간 경험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탐구하려는 심리학자들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했습니다. 
    특히 제임스의 감정 이론은 현대 신경과학과 심리학에서 감정의 생리적 기초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그의 주의 이론은 인지심리학 연구의 기초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자아 이론은 심리학뿐만 아니라 사회학, 철학에서도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되었습니다.

    결론 : 인간 심리의 복합성과 통찰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는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하는 저작으로, 심리학뿐만 아니라 철학, 사회학, 문학 등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책입니다. 
    제임스는 인간의 의식과 감정, 습관, 자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며, 인간 경험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연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현대 심리학 연구의 기초를 마련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6).

     





    1. [사도행전 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 [빌립보서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3. [요한1서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승혁목사 설교 원고 자료 2026년 2025 12 21 대림절 4주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God is love)
    요한일서 4:8

    2026년부터는 성경 읽기를 설교 주제 중심에 따라 진행하려고 합니다.
    첫주간에 읽어야 할 성경은 요한일서 5장, 요한이서 1장, 요한삼서 1장 
    매일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를 한번씩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주제에 따라 내가 읽고 묵상한 후에 얻은 결론을 정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기독교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머리에서는 사랑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실 생활에서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아는 것을 생활에 적용하도록 함께 실천하려고 합니다.

    (도입 이야기) 
    미워하는 관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느 여중생의 고민 
    창신동 남부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사역할 때 경험한 사례

    (전개하는 이야기)
    당수나무에 정월 대보름을 맞아 전기불을 밝혀야 한다.
    교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일에 교회가 전기를 빌려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을 맞고 한편은 틀리다는 것을 설명한다.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를 드리려고 교회 전기불을 밝히면 우상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엤는가?
    절대로 우상이 그 자리에서 견디지 못하고 도망할 것이다.

    (실천하는 방법)

    사랑은 확장하는 것이다!
     1. 생각을 확장하라 - 사랑하려면 생각을 넓혀야 한다.

    골로새서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Set your minds on things above, not on earthly things.

    로마서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The mind of sinful man is death, but the mind controlled by the Spirit is life and peace.







     2. 행동을 확장하라 - 

    베드로전서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But just as he who called you is holy, so be holy in all you do.




     3. 마음을을 확장하라 - 마음을 확장하는 것은 '보물 즉 물질을 확장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마음도 있느니라.
    For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your heart will be also.






    2026. 1. 4  / 성탄 후 제2주(흰색)

    요한일서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Whoever does not love does not know God, because God is love. 


    하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And so we know and rely on the love God has for us. God is love. Whoever lives in love lives in God, and God in him.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며,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과 행동을 드러내는 사랑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일서 4:8)

    이는 하나님이 사랑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행동—창조, 구원, 심판, 회복—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2. 조건 없는 사랑 (아가페)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 인간의 자격이나 공로에 근거하지 않음

    • 죄인일 때에도 먼저 사랑하심

    • 변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3.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역사적 사건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3:16)

    십자가는

    •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자리

    •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신 사랑의 절정입니다.

    4. 징계 속에서도 나타나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방임이 아닙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히브리서 12:6)

    • 징계는 버림이 아니라 자녀됨의 증거

    • 하나님은 우리를 망하게 두지 않기 위해 때로 아프게 다루십니다. 

    5.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

    하나님의 사랑은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삶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1. 믿음으로 받아들임

    2. 정체성의 회복 — “나는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

    3. 이웃 사랑으로의 실천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일서 4:19)

    핵심 요약

    • 하나님의 사랑은 본질이다

    •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음이다

    •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증명되었다

    • 하나님의 사랑은 삶을 변화시킨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입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1️⃣ 조건 없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로마서 5:8)

    잘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기 때문에 변화됩니다.

    2️⃣ 희생적인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3:16)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사건입니다 ✝️

    3️⃣ 변하지 않는 사랑

    사람의 사랑은 흔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8–39)

    4️⃣ 관계로 부르시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로 초대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경험할수록,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힘도 얻게 됩니다.







    2025. 12. 21 대림절 제4주

    2025년 성탄(聖誕) 화두(話頭) / 예수 이름을 회복하자!

    예수 이름으로

    2025년 성탄 화두(話頭)/ 예수 이름을 회복하자!

    - 말씀 화, 머리 두 :
    - 1. 이야기의 첫머리

       2. 관심을 두어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이야기할 만한 것

       3. 불교에서 수행을 위한 설법의 중요한 가르침(교훈)

    해마다 성탄을 맞이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해를 거듭할수록 성탄 트리, 성탄 카드, 성탄 선물, 성탄 노래는 변함없이 계속되는데 성탄의 주인공이 되시는 예수님의 자리는 늘 비어있다는 느낌입니다.

    이런 생일 잔치가 계속되면서 성탄의 의미가 구주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메시지가 없고 사람들끼리 즐거워하는 공휴일 또는 기념일이 되는 것같아 안타깝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세상 분위기에 교회도 그 흐름을 따라가면 안될 것같아 오늘 설교 주제를 “예수 이름을 회복하자!”라고 정했습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Jesus)”는 하나님이 주신 이름입니다.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리스도(Christ)”는 직분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기름 부음을 받는 직분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메시야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로 오셨습니다.

    “임마누엘(Immanuel)”이란 인간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신 하나님, 곧 예수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신약은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성취되었음을 증거합니다(마 1:23).
    임마누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또한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를 강조하는 거룩한 칭호라고 하겠습니다.

    불교의 경전은 8만 대장경이라고 하여 그 양이 매우 많습니다.
    따라서 불자들이 그 모든 경전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불교의 가르침은 간략하게 염불로 기도하게 합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나무아미타불은 6자 명호라고 하여 부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말하며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에게 모든 것을 맡깁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불교의 염불처럼 간략한 기도가 없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주기도문)가 있지만 처음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생소합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듣지 못하던 용어들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도 매우 생소합니다.
    더구나 사도신조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제가 신대원을 졸업하기 전에 당시 교단 총회에서 교회수를 늘려야 한다는 정책에 따라 목사 안수를 받으려면 특수목회(학교, 기독교기관 등)를 하거나 아니면 개척을 해야만 안수를 받게한다는 정책에 따라 계획에도 없던 개척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지역이 경상남도 울주군 온산면 덕신리 625번지에 온산제일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서기태목사님께서 개척을 시도하였는데 마을 주민들이 너무 강력하게 반발하여 포기하고 부산 연산동으로 떠나셨습니다.
    그때 주일마다 와서 설교를 부탁하여 주말이면 강남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울산행 고속버스를 타고 울산으로 내려가서 주일 설교를 한 후에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설교를 시작하면서 졸업후에는 교회를 맡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개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신경부락은 학성 이씨 문중 사람들이 모여 살던 지역입니다.
    당시 학성 이씨 문중을 대표하는 인물이 이후락씨이었습니다.
    청와대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사회적으로 명성이 높은 사람의 후손들이라 거침이 없었습니다.

    다구나 신경부락에서는 한국전쟁도 모르고 지나갈 정도의 외지였습니다.
    1959년 9월 사라호 태풍 때 온 마을이 홍수에 잠겼는데 그 마을에 450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있ㅇ었고 그 나무 바로 옆에 70평 땅을 구입하여 개척교회를 시작하므로 마을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교회 건물을 무너트렸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누가 목회를 하려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새벽기도회를 시작하려는데 교인들이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있는 몇몇 교인들에게 왜 새벽에 나오지 않느냐 하고 물었더니 교회로 오려고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아주 거대한 놈이 벌떡 일어나서 길을 막아버려서 도저히 무서워서 올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마을을 장악하고 있던 서울 무당은 신이 나서 교회 문 앞에 제사밥을 밤중에 몰래 떠놓고 가기도 했습니다.

    이때 기독교에는 왜 불교와 같은 6자 명호 5자 기도가 없을까 생각하던 중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되겠구나 하며 예수의 이름에 대하여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1980년 쯤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그러므로 “예수 내 구주!”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그러므로 “예수 내 생명!”
    기름은 곧 성령으로 성령을 받아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

    임마누엘이란 명칭은 하나님이 누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예수 내 권세!”

    이렇게 15자 기도문을 완성한 후에 새벽마다 마을의 입구를 막고 서있는 사탄에 대하여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라는 기도를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새벽마다 교인들이 기도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서울 무당은 마을 사람들에게 교회 때문에 마을을 지키던 수호신이 떠나려고 하므로 큰굿판을 벌려야 한다며 마을 사람들에게 굿을 위한 돈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 교회 때문에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그 자리를 떠나야 할 신을 믿지 말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면하며 예배할 때는 돈이 필요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이렇게 기도하라고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마을에서 돼지를 키우던 집에서 돼지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도 그 사람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이렇게 염불 대신에 계속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얼마 후 돼지를 키우던 집의 부인이 병이 나서 부산 고신병원에 가저 진단을 받았는데 말기암이라 가망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걱정하고 두랴워하느냐 아주 간단한 기도를 하라고 계속하여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를 주장하게 했습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기도가 놀라운 일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은 과거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그 이름의 능력은 변함이 없습니다.
    문제는 오늘의 시대가 너무 편하기 때문에 간절함이 없습니다.
    성탄의 위한 트리, 카드, 선물, 노래는 넘쳐납니다.
    세속의 분위기에 쓸려가는 믿음이 아니라 이제라도 예수 이름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이름은 구원하는 이름입니다.
    예수 이름은 치료하는 이름입니다.
    예수 이름은 회복하는 이름입니다.
    예수 이름은 능력의 이름입니다.
    예수 이름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J C & I)

    2025년 성탄절을 앞두고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믿음의 대상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와 임마누엘의 의미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그리스도
    라는 명칭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구약 시대에 기름 부음을 받는 직분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임마누엘
    이란 명칭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예수 / 1414구절 

    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태복음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태복음 1: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태복음 2:1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그리스도 / 523구절

    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태복음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태복음 2: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임마누엘 / 3구절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8:8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 하셨느니라.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불교에서 불자들은 간단하게 염월을 아뢸 수 있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물론 불교에도 경전이 있는데 무려 8만 대장경이라고 합니다.
    불자들이 이 모든 경정은 읽고 묵상하지 않지만 아주 간단하게 염불을 외우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이렇게 간단한 기도가 없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 이름을 결정하는 때는 태어난 후에 작명을 합니다.
    물론 요즈음에는 태명이라고 하여 부부 사이에 태어나기 전에 잉태된 생명을 부르기도 합니다.
    때로는 아들을 낳기 위하여 아들의 이름을 정하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탄생할 때는 이름이 먼저 알려졌습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다하다

    • 1. 동사 - 어떤 것이 끝나거나 남아 있지 아니하다.
    • 2. 동사  - 어떤 현상이 끝나다.
    • 3. 동사 - 수명 따위가 끝나다. 또는 생명을 잇지 못하고 끝내다.







     

























    인물 예화 / 스타인메츠<구조>. 한스 셀리에<스트레스>. 탈레스<서양철학의 아버지>, 태선 스님 김진규 목사, 토마스 아 켐페스



    1. 스타인메츠<구조> - 구조를 알면 모든 것이 보인다 
    2. 한스  셀리에<스트레스>
    - 최초로 스트레스라는 용어를 사용 
    3. 탈레스<서양철학의 아버지>
    - 만물의 근원(아르케)은 "물"
    4. 태선 스님 김진규 목사
    - 임마누엘
    5. 토마스 아 켐페스
    - 그리스도를 본 받아 
    6. 미즈노 겐조 -  
    7. 마틴 로이드 존스




    찰스 프로테우스 스타인메츠(Charles Proteus Steinmetz, 1865년-1923년)


    찰스 프로테우스 스타인메츠(Charles Proteus Steinmetz, 1865년-1923년)
    독일 출생의 미국 전기공학자로 그의 주요한 공헌은 자화(磁化)와 히스테리지스 손실과의 관계를 밝히는 '히스테리시스 법칙'의 발견, 복소수로 교류회로를 간단히 계산할 수 있는 기호법의 창안, 과도현상의 연구의 3가지로 귀착된다. 
     
    생애

    본명은 카를 아우구스트 루돌프 슈타인메츠(Karl August Rudolf Steinmetz)이다. 
    1865년 4월 9일 독일 프로이센 브레슬라우 출생하였다. 
    브레슬라우대학교와 취리히대학교에서 수학과 전기공학을 공부하였다. 
    독일 학생사회운동의 선구자로서 독일 사회민주당에 소속해 있었기 때문에 경찰의 탄압을 피해 1889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개명(改名)한 후 1848년 독일혁명 때 독일로부터 망명했던 R.아이케마이어의 공장에 고용되었다. 
    이 공장은 제너럴일렉트릭 설립 이듬해에 매수되어, 그도 그 회사의 고문기사로 임명되었다.

    1902년 이후에는 유니온대학교의 전기공학과 교수를 겸임, 미국 최고의 전기공학자가 되었다. 
    전기공학에 관한 그의 주요한 공헌은 자화(磁化)와 히스테리지스 손실(hysteresis loss)과의 관계를 밝히는 '히스테리시스 법칙'의 발견(1891), 복소수(複素數)로 교류회로를 간단히 계산할 수 있는 기호법의 창안(1893), 과도현상(過渡現象)의 연구(1909)의 3가지로 귀착된다.

    10월 26일 향년 59세로 별세하였다.

    저서로는 《Theory and Calculation of Alternating Current Phenomena》(1897) 《Engineering Mathematics》(1910) 《America and New Epoch》(1910) 등이 있다. 전기화(電氣化)의 사회적 의의에 관심을 가져 1922년 레닌에게 편지를 보내어, 혁명 도상의 소련에 기술적 원조를 제의하였다.

    출저 : 네이버 백과사전

    이 일 후에(요한계시록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After this I looked, and there before me was a door standing open in heaven. And the voice I had first heard speaking to me like a trumpet said, Come up here, and I will show you what must take place after this.

    이 일 후에(요한계시록 4:1) /설교 원고(2019-05-05)

    (도입 이야기)
    ‘스타인메츠(Charles Proteus Steinmetz, 1865. 4. 9~1923. 10. 26)’라는 미국의  전설적인 전기 기술자가 있었습니다. 원래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출생하여 브레슬라우, 취리히,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 전기 공학, 화학을 전공했습니다.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 회사의 기술자로 취업되었고 유니온 대학 물리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벼락을 연구하여 피뢰침을 개량했으며 발전기와 전동기에 관한 200개 이상의 특허를 받았다고 합니다.

    어느 공장에서 발전기가 고장이 나서 작동되지 않을 때 여러 기술자들을 불러 발전기를 수리하도록 의뢰하였으나 도저히 수리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스타인메츠에게 발전기 수리를 의뢰하였다고 합니다. 
    스타인메츠가 발전기 이곳저곳을 작은 망치로 두들겨 보더니 즉시 고장 난 부분을 알려주며 그곳에 하얀 분필로 표시한 후에 그곳을 뜯어서 고치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여러 날 동안 많은 기술자들이 동원되어 고장의 원인을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는데도 스타인메츠는 망치로 몇 번 두드리더니 고장 난 부분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공장 앞으로 발전기 수리비로 1만 불의 청구서가 배달되었습니다. 
    공장장은 스타인메츠에게 작은 망치로 몇 번 두들겨 본 것이 전부인데 수리비용이 너무 비싸다고 하였더니 그 때 스타인메츠가 공장장에게 ‘분필로 고장 난 부분 표시한 수고비는 $100. 그리고 어디를 고쳐야 하는지를 찾아내는 기술은 $9,900 이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결국 공장장은 스타인메츠에게 1만 불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스타인메츠의 이야기는 ‘구조를 알고 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구약 성경의 구조는 모세와 엘리야
    신약 성경의 구조는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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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스 셀리에 János Hugo Bruno Hans Selye(1907. 1. 26 - 1982. 10. 16)

    한스 셀리에(János Hugo Bruno Hans Selye CC(/ sɛljeɪ /; 헝가리어 : Selye János; 1907. 1. 26 – 1982. 10. 16)

    선구적인 헝가리-캐나다인으로 내분비계 생리학자였다. 
    그는 스트레스 요인에 대한 유기체의 가상적 비특이적 반응에 대한 중요한 과학적 연구를 수행했다. 
    비록 그가 글루코코르티코이드(glucocorticoids)의 많은 측면을 모두 인식하지는 못했을 모르지만, 셀리에(Selye)는 스트레스 반응에서 이들 역할의 주요한 측면을 알고있었다. 
    샬롯 거슨(Charlotte Gerson)은 그를 생물학적 스트레스의 존재를 최초로 증명한 주요한 인물이라고 여긴다.[1][2]

    셀리에(Selye)는 1907년 1월 2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비엔나에서 태어나 헝가리 코마 롬에서 자랐다.[3] 
    셀리에(Selye)의 아버지는 헝가리의 의사였고 그의 어머니는 오스트리아인이었다. 
    그는 1929년 프라하에서 의학 및 화학 박사가 되었으며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교, 캐나다 맥길 대학교, 몬트리올 대학교에서 스트레스(stress)와 내분비학 분야의 선구적인 일을 계속했다. 
    그는 1949년에 처음으로 노벨 생리 의학상 후보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경력에서 총 17 개의 후보에 올랐지만 결코 수상하지 못했다.[4][5]

    일반적응증후군(一般適應症候群,general adaptation syndrome)은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스트레스의 종류에 관계없이 일어나는 신체적ㆍ생리적 증상으로 3단계(경고반응단계,저항단계,탈진단계)의 과정을 일컫는다. 
    일반적응증후군의 부작용으로는 피로, 두통, 불면증, 우울증, 분노, 불안 따위가 이에 해당한다.

    1. Healing the Gerson Way, Defeating Cancer and Other Chronic Diseases, New Edition. Charlotte Gerson with Beata Bishop, Gerson Health Media, 2010, p. 48.
    2. Kroker, Arthur (1984). 《Technology and the Canadian Mind: Innis/McLuhan/Grant》. Montreal: New World Perspectives. 73쪽. hdl:1828/7129. ISBN 978-0-920393-14-7.
    3. 〈Hans Selye〉 2008판. 《Encyclopædia Britannica》.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008년 6월 12일에 확인함.
    4. The Nomination Database for the Nobel Prize in Physiology or Medicine, 1901-1953
    5. “Nomination Archive” (미국 영어). 《NobelPrize.org》. 2018년 12월 1일에 확인함.
    스트레스 연구의 선구자인
    한스 셀리에(Hans Selye) 박사가 1958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으나, 사실과 다릅니다. 
    한스 셀리에는 노벨상을 수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트레스' 개념을 처음 도입하고 '일반 적응 증후군(General Adaptation Syndrome)'이라는 스트레스 반응 단계를 정립하는 등 스트레스 연구의 "대가"로 불리지만, 실제로 노벨 위원회로부터 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노벨 위원회는 한스 셀리에 교수를 당연히 노벨상 수상자로 생각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언급하며, 그가 수상하지 못한 사실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다만, 스트레스와 관련된 다양한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밝혀낸 여러 다른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수상했습니다. 
    예를 들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작용 방식이나 신경내분비학 분야에 기여한 연구자들이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스트레스'라는 용어를 정립한 한스 셀리에 본인은 노벨상 수상자가 아닙니다.

    스트레스는 정신적, 신체적 자극에 대한 심신의 반응으로, 불안, 짜증, 집중력 저하 등의 심리적 증상과 두통, 어지럼증 등의 신체적 증상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과도한 스트레스는 면역력 저하와 뇌 기능(기억력, 감정 조절 등) 손상을 일으킬 수 있으며, 규칙적인 운동, 충분한 휴식, 건강한 식단, 심호흡 등으로 관리할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란?
    • 외부의 자극이나 변화에 대한 신체적, 심리적, 행동적 반응입니다.
    • '팽팽하게 죄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유래했으며, 삶의 긴장감을 뜻합니다. 
    스트레스의 원인
    • 외적 요인 : 소음, 더위 같은 물리적 환경, 규칙이나 규정, 상사나 타인의 공격적인 태도 등.
    • 내적 요인 : 생로병사, 경제적 어려움, 실직, 사업 실패, 과도한 목표 설정 등 개인적인 사건. 
    스트레스 증상
    • 심리적 증상 : 불안, 짜증, 신경과민, 우울, 건망증, 집중력 저하, 좌절감 등.
    • 신체적 증상 : 두통, 어지럼증, 무기력증, 면역력 저하, 수면 장애 등. 
    스트레스 관리 및 해소 방법
    • 운동 : 가벼운 운동만으로도 스트레스 호르몬이 감소하며, 밖에서 하는 운동은 더 효과적입니다.
    • 휴식 : 규칙적으로 휴식하고, 충분한 수면을 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식습관 : 건강한 식단을 유지합니다.
    • 마음 챙김 : 심호흡을 하거나,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방해 요소를 최소화합니다.
    • 계획 : 하루 계획을 미리 세우고 일을 천천히 진행합니다.
    • 취미 활동 : 미술관 방문처럼 즐거운 활동을 통해 스트레스를 낮출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는 다양한 질병의 주요 원인 또는 악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 보고에 따르면 많은 질병이 직간접적으로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스트레스가 질병을 유발하는 원리
    장기간 지속되는 만성 스트레스는 신체의 정상적인 방어 체계를 무너뜨리고 다양한 생리적 변화를 일으킵니다. 
    • 호르몬 불균형 : 스트레스를 받으면 신체는 '투쟁-도피 반응(fight-or-flight response)'을 위해 아드레날린, 코르티솔과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합니다. 급성 스트레스 시에는 유용하지만, 만성적으로 과다 분비되면 면역 기능을 억제하고 혈압을 상승시키는 등 악영향을 미칩니다.
    • 신경계 자극 : 스트레스는 자율신경계(특히 교감신경계)를 자극하여 심박수 및 호흡 증가, 혈압 상승, 소화 불량, 불면증 같은 다양한 신체적 증상을 유발합니다.
    • 염증 반응 증가 : 만성 스트레스는 염증 지표를 높여 신체 전반에 염증을 증가시킵니다. 이는 심혈관 질환, 당뇨병, 암 등 만성 질병으로 발전할 위험을 높입니다. 
    스트레스와 관련된 주요 질병

    스트레스는 신체적, 정신적 건강 모두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칩니다. 

    신체 질환 :
    • 심혈관 질환 : 고혈압, 협심증, 심근경색, 뇌졸중 등 심장 및 혈관 질환의 주요 원인입니다.
    • 면역계 질환 : 면역력 저하로 인해 감염성 질환에 취약해지며, 알레르기나 자가면역 질환(예: 루푸스, 류마티스 관절염)의 발병 위험을 높입니다.
    • 소화기 질환 : 소화성 궤양, 기능성 위장 장애, 과민성 대장 증후군 등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킵니다.
    • 내분비계/기타 : 당뇨병, 갑상선 질환, 긴장성 두통, 만성 요통, 피부 질환(여드름, 두드러기) 등과 관련이 있습니다. 
    정신 질환 :
    • 불안 장애, 우울증, 적응 장애, 수면 장애, 섭식 장애, 공황 장애 등 다양한 정신 건강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스트레스는 신체의 여러 시스템에 부담을 주어 다양한 질병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키는 만병의 근원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트레스 관리와 예방은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엔도르핀
    과 아드레날린

    모두 신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호르몬 및 신경전달물질이지만, 분비 상황과 기능이 매우 다릅니다. 

    엔도르핀 (Endorphin)

    엔도르핀은 "행복 호르몬" 또는 **"뇌 내 마약"**으로 불리며, 신체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천연 진통제 역할을 합니다. 
    • 기능: 강력한 진통 효과가 있으며(모르핀보다 수십에서 수백 배 강함), 행복감과 황홀감을 느끼게 합니다. 통증을 억제하고 스트레스를 줄여 면역력을 높이는 데 기여합니다.
    • 분비 조건:
      • 통증이나 심한 스트레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분비됩니다.
      • 격렬한 운동: 무산소 운동 상태가 되면 엔도르핀 분비가 급증하여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같은 쾌감을 유발합니다.
      • 웃음, 즐거운 생각: 긍정적인 감정 상태일 때도 분비가 촉진됩니다.
      • 매운 음식 섭취: 신체가 매운맛을 고통으로 인지하여 이를 상쇄하기 위해 분비됩니다.
    아드레날린 (Adrenaline / 에피네프린 Epinephrine)

    아드레날린은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투쟁-도피 반응(fight-or-flight response)" 호르몬입니다. 
    • 기능 : 교감 신경계를 활성화하여 신체가 갑작스러운 자극이나 위협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준비시킵니다.
    • 신체 영향 :
      • 심박수 및 혈압 증가 : 심장 박동과 혈압을 높여 혈액 순환을 빠르게 합니다.
      • 혈당 증가 : 근육과 뇌에 산소와 포도당 공급을 늘려 에너지를 즉각 사용할 수 있게 합니다.
      • 기타 : 동공을 확장하고, 소화 속도를 늦추며, 근육으로 가는 혈류량을 증가시킵니다.
    • 분비 조건 : 공포, 불안, 분노 등 감정을 느낄 때나 위급 상황 시 부신수질에서 분비됩니다. 
    주요 차이점 요약

    특징 

    엔도르핀 (Endorphin)      아드레날린 (Adrenaline)
    주요 역할   통증 완화, 행복감 유발, 이완       위기 대처(투쟁-도피 반응), 각성
    분비 장소   주로 뇌하수체 및 시상하부      부신 수질
    분비 상황   통증, 격렬한 운동, 웃음, 긍정적 감정      공포, 분노, 위협, 스트레스
    느낌   황홀감, 쾌감, 안정감      긴장, 흥분, 에너지 급증

    이 두 호르몬은 모두 스트레스 상황에서 분비될 수 있으며, 엔도르핀은 고통을 줄이고 아드레날린은 즉각적인 신체 능력을 끌어올려 생존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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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레스(Θαλής, Thales, 기원전 7세기) 625년 - 624년경, 547년 - 546년경   

    고대 그리스 철학자로 밀레토스 학파의 창시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칭했다. 
    그리고 현재의 사람들한테 탈레스는 최초의 철학자, 최초의 수학자, 최초의 고대 그리스 7대 현인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확실하진 않지만, 탈레스가 피타고라스의 스승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운동 경기 관람 중에 탈수증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사망지는 알려지지 않음.)


    탈레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지만, 믿을 만한 고대 저술가들의 이야기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탈레스는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의 밀레토스라는 도시 출신이며, 여러 분야에서 학식이 넓었다고 한다. 탈레스는 이집트 여행의 영향으로, 수학천문학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수학과 천문학에 관련된 업적들이 아주 많은데,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천문학을 이용해서 기원전 585년에 일어나는 일식을 예언한 것이 있다. 또한, 수학의 기하학적 방법을 빌어서 이집트에서도 가장 큰 피라미드라고 알려져 있는 쿠푸 왕대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한 업적도 유명하다.

    철학자 플라톤테아이테토스에 따르면, 밤에 별을 보면서 걷다가 우물에 떨어졌는데, 이것을 본 영리한 트라키아 하녀가 "하늘의 이치를 알려고 하면서 바로 앞 우물은 보시지 못하는군요!"라고 비웃었다는 일화가 있다고 한다.

    탈레스에 관해서는 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 날, 탈레스의 친구가 "이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 돈 있는 사람들만 잘 살고, 돈 없는 사람들은 못 사는 더러운 세상 같으니라고!"라고 말하자, "친구! 돈을 잘 벌 수 있는 방법은 널려 있어. 머리를 두 번 써보라구."라고 탈레스가 되받아쳤다. 그러자 그 친구는 "넌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겠지? 어디 내가 여행을 다녀올 때까지 돈을 많이 벌어 보게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탈레스는 그 말을 듣고, 돈 버는 일에 몰두하게 됐다. 그리고 친구가 돌아와서 보니, 탈레스는 친구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돈을 갖고 있었다. 과연 탈레스는 무슨 방법을 썼을까? 당시에는 올리브가 아주 귀한 것이었는데 쓰는 용도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가 여행을 떠난 후, 올리브의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유심히 관찰한 탈레스는 올리브의 생산량이 좋을 때와 좋지 않을 때는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탈레스는 마을을 돌아 다니면서 기름 압축기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마당만 차지하는 기름 압축기를 기꺼이 팔았다. 올리브가 풍작일 때, 탈레스는 마을의 거의 모든 압축기를 소유하고 있었다. 탈레스는 기름 압축기를 사람들한테 빌려 주면서, 큰 돈을 벌 수 있었던 거라고 한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따르면,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만물이 모두 물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땅도 물 위에 떠 있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탈레스에 관해서 그의 견해를 체계적으로 세워보기에는 알려진 바가 너무나 적다고 한다. 그러나 그 외에도 밀레토스 학파에 대해서는 더 많은 바가 알려져 있다. 그의 생각은 아낙시만드로스가 이어받아, "가장 1차적인 만물의 근원"을 찾으려 했으며, 아낙시만드로스의 친구인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근원을 "공기"라고 주장하게 된다.

    한편,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탈레스가 직접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전기 발생 실험을 최초로 행한 사람이 바로 탈레스라고 한다. 
    여담으로,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도자기가 진열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어서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

    탈레스가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기하학의 정리 5가지가 있는데, 이것을 믿을 수 있는 저술가들의 글을 통해서 추측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임의의 지름에 의해서 이등분 된다.
    2.  두직선 이 만나면 마주보는 두 각은 같은 각을 이룬다.
    3. 반원에 대한 원주각은 항상 직각이다.
    4. 삼각형의 한 변과 양 끝의 각이 다른 삼각형의 그것과 같으면 두 삼각형은 합동이다.(흔히, ASA 합동 정리라고 말한다.)
    5. 이등변삼각형의 두 밑각은 서로 같다.


    그리스 7현인

    그리스 7현인(그리스어: οἱ ἑπτὰ σοφοί hoi hepta sophoi 호이 헤프타 소포이)은 기원전 620년부터 기원전 550년에 영리하다고 불린 고대 그리스의 인물들이다.

    누구를 '7현인'에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대의 서적에 따라 제각기 다르며 일관된 것이 없고, '일곱'(7)이라는 숫자로 칭해지고 있지만, 플루타르코스는 '델포이의 Ε에 임해서'에서 본래는 다섯 명이었지만, 두 명의 참주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으로 현인의 이름을 강탈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누가 어떤 이유로 최초로 '현인'의 칭호를 얻었는지도 알 수 없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25명이나 거론하고 있다. 헤르미포스는 17명이라고 언급하였다. 이는 여러 그리스인들이 각기 서로 다른 명단을 만들었던 탓이다.[1]

    기원전 400년경 플라톤이 《프로타고라스》 중에서 든 것은 다음과 같다. 플라톤이 언급한 일곱 명은 모두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살았던 인물들이다.

    다만 플라톤은 코린토스의 페리안드로스 대신 케나이의 농부였던 뮤손을 거론했다. 뮤손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당대에 살아있는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스 7현인의 유명한 일화로는 그들의 사이에 벌어졌던 '지혜 가늠'이 있다.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다가 우연히 발견된,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황금 을 둘러싸고 코스와 미레토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그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지혜로 적시는 자"에게 솥이 돌아갈 때까지는 양국의 전쟁은 끝나지 않으리라는 델포이신탁에 따라 당시 현자로 이름이 나 있던 탈레스에게 솥을 주었지만, 그는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다른 현자에게 양보했다. 다른 현인들 역시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라며 사양했고, 그렇게 서로 돌아가면서 사양하는 사이에 탈레스에게로 돌아왔다. 결국 탈레스는 이 황금 솥을 아폴론에게 봉납했고, 델포이에서 신탁을 전하는 퓨티아(무녀)는 이후 이 솥에 앉아서 신탁을 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들이 당대의 현인으로 칭해지게 된 연유에 대해 "그들은 모두 스파르타의 문화를 동경한다. 그들의 지혜는 모두가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문장과 인상적인 격언을 사용하는 스파르타의 문화에 속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하였다.[2] 윌 듀란트에 따르면 그리스에서 가장 존경받는 현자는 이론가가 아니라 자기 지혜를 세상에서 적극 활용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현자의 말은 그리스인들 사이에 격언처럼 여겨졌고, 어떤 경우에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지기도 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가장 불행한 인간은 불운을 이겨 내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 "인간은 길거나 짧은 인생을 살도록 운명으로 정해진 것처럼 자신의 삶을 다스려야 한다" "지혜는 젊었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여행의 수단으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 다른 어떤 소유물보다 지혜가 더 오래 가기 때문이다" 등의 비아스의 경구를 자주 인용하곤 하였다.[1]

    그리스 7현인으로 꼽히는 이들 모두는 조언, 리더십, 변호, 법제 개혁 등의 분야에서 같은 시대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 특출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조언자나 입법가, 개혁가 등의 역할을 많은 사람은 대단히 지혜로운 것으로 여겨졌다. 플라톤이나 플루타르코스 모두 이들 일곱 현인을 선출한 공통적 기준을 공들여 설명하였지만, 7현인이 어떤 식으로든 지혜롭기는 했지만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지혜롭지는 않았기에, 플라톤이나 플루타르코스 모두 그 '어떤 공통점'을 설명하는 용어에 제약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2]

    • 우치야마 가쓰토시 편저, '철학의 역사 1', 중앙공론 신사, 2008년
    • 트레버 커노 저, 정연우 옮김 《지혜의 역사 - 역사 속 지혜는 어떤 모습이었나》 도서출판 한문화, 2018년
    • 윌 듀런트 저, 김운한 역 《문명 이야기》2: 그리스 문명(1), 민음사, 2011년
    1. 이동: 가 윌 듀런트 저, 김운한 역 《문명 이야기》2: 그리스 문명(1), 민음사, 2011년
    2. 이동: 가 트레버 커노, 정연우 옮김 《지혜의 역사 - 역사 속 지혜는 어떤 모습이었나》도서출판 한문화, 2018



    그리스 고전기 시대를 대표하는 7명의 지식인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의 언급을 볼 때, 본래 소피스트라는 명칭은 이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표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 우리가 익히 소피스트라고 알고 있는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 사이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활동한 일련의 인물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들이니 자신들 또한 소피스트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소피스트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보통은 밀레투스탈레스, 아테네솔론, 프리에네의 비아스, 미틸레네[2]의 피타코스[3], 스파르타의 킬론, 린도스[5]의 클레오불로스[6], 코린토스의 페리안드로스를 꼽는다.

    그러나 참주로서 논란거리가 많은 페리안드로스[7]를 빼고 파이스토스[8]의 에피메니데스[9] 넣기도 하고, 그 이외에 경우나 기호에 따라 아나카르시스,[10] 뮈손[11], 페레큐데스를 넣기도 한다. 나중에 가면 아예 누구를 7현인로 치는지가 서술자 나름인지라 20명 정도가 거론되기도 했다.[12][13]

    그래도 탈레스, 솔론, 비아스, 피타코스 이 네 사람을 7현인에 넣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 외에는 스승제자는 물론이고 지역과 역사가에 따라 의견이 엇갈린다. 결국은 서술자 나름.

    이 7인의 선정은 바다에서 건진 세발 달린 솥의 소유권을 둘러싼 코스와 밀레투스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한 신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코스 섬 어부들이 그물을 걷다가 뭔가 묵직한 게 걸려서 애매해 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밀레투스 청년들[14]이 "거 뭐요?"라고 말을 걸다가 뭔가 느낌이 왔는지, 그물에 걸린 게 뭔지 확인도 안 하고 돈 주고 사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건져놓고 보니 황금으로 된 세발 달린 솥이었던 것이다.
    어부들은 뭔가 계약조건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는지, 거래를 취소하려 했다고 한다. 
    "이거 황금이잖아? 그물도 망가졌고, 값을 더 줬으면 하는데?" 
    그러자 청년들은 "팔기로 했으면 그냥 팔지 이제 와서 왜 말을 바꿔?"라며 항의했고, 그 결과 청년들과 어부들은 언쟁을 벌였다고 한다. 열받은 어부들이 그냥 솥을 들고 코스로 돌아가버리자, 청년들은 당연히 밀레투스로 가서 "코스 놈들한테 사기당했음!! 이래도 됨??"이라고 분통을 터뜨린다. 
    결국 밀레투스는 폴리스 차원에서 항의사절단을 보냈지만, 코스에서는 묵살하고, 결국 열받은 두 도시는 전쟁까지 벌였다고 한다.[15]

    나중에 자기들이 생각해도 솥단지 하나 때문에 전쟁했다는 게 좀 어이 없었는지, 두 도시는 신탁에게 중재를 요청했는데,[16] 신탁은 가장 현명한 자에게 솥을 넘기라고 하였고, 이에 양측은 밀레투스의 현자인 탈레스에게 넘기는 데 합의했다고 한다. 코스 섬 사람들은 밀레투스 사람들은 꼴도 보기 싫지만, 탈레스라면 또 얘기가 달라서, 탈레스한테는 호감을 느꼈다고.

    그러나 탈레스는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다른 현자들에게 돌렸고, 그 현자도 똑같은 생각에 다른 현자한테 돌리고, 그렇게 돌리고 돌리다가 결국은 탈레스한테 돌아오자, 탈레스는 그 솥을 델포이의 아폴론에게 봉헌했다고 한다.

    다만 이 이야기는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존재하는데, 솥의 내력은 물론이고 솥이 한 바퀴를 다 돈 게 아니라 그냥 마지막 사람[17]이 아폴론에게 봉헌했다는 설도 있는가 하면, 정확히 봉헌된 아폴론 신전이 어디인지, 아폴론이 아니라 헤라클레스에게 봉헌되었다는 설도 있다. 심지어 솥이 아니라 술잔이나 머리에 쓰는 관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이때 7현자들은 그들이 서로에게 보여준 겸손과 호의로 인해 명성을 얻었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7현자들은 서로 제법 끈끈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설에 따르면 델포이와 코린토스에서 회합을 가진 적이 있다고 한다. 특히 델포이에서의 회합은 위에서 말한 솥단지를 봉헌하면서 모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플라톤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 따르면 그때 그들이 "너 자신을 알라"와 "모든 것은 적당하게 하라"는 두 격언을 새겼다고 한다. 코린토스에서의 회합은 코린토스의 참주 페리안드로스의 초청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18]

    이들끼리 주고 받은 편지라고 전해지는 문헌들이 있는데, 이 문헌들을 보면 이들은 서로 활발한 학술교류를 희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서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조언을 보내기도 하는가 하면, 솔론이 아테네의 참주정을 피해 망명할 때에는 서로가 앞다투어 솔론을 각자 자기 도시에 초대하려고 초대장을 보냈다고도 한다.

    대항해시대4의 패자의 증표 지도가 이들 7현인의 이름을 띄고 있다. 탈레스의 종이 지도, 쿠레오보로스의 무명 지도, 페리안도로스의 돌 지도, 솔론의 나뭇잎 지도, 비아스의 화폐 지도, 케이론의 대나무 지도, 피타코스의 칼날 지도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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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규 목사, "前 태선스님"

    어느 날 꿈에 이상한 문자를 받았지요.
    "임마누엘"
    도대체 불경 어디에 이런 문자가 있는지 찾아내려고 팔만대장경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승들을 찾아다니며 물었지만 아무도 정확한 의미를 알려주지 않아 답답하던 차에 어느 산속에 도사님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그 도사님을 찾아가던 중 임마누엘이라는 기도원의 간판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기도원에 들어가 도대체 임마누엘이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스님을 살던 내게 왜 이런 문자를 보여주셨을까?
    그 작은 기도원에서 성경을 주셔서 성경을 읽던 중 예수님을 영접하고 승복을 벗고 감리교 신학대학에 입할 후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 "중생선교회'를 설립하고 스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고 합니다.
     

    저의 이름은 김진규 목사입니다. 저는 3대의 불교 가정에서 17년 동안을 중으로 있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서 나의 동료와 선후배 불교신도들에게 전도를 하기 위해 나와서 20년 동안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종교성이 강한 백성입니다. 여러 가지 종교가 많이 침투해 와 있지만, 그중에 가장 큰 종교는 바로 불교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1,600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600년 긴 세월 속에서 우리 조상들은 하나같이 절에 다니기도 하고 또 부처님께 절을 하고 복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보면, 문화유산을 남겨놓은 것은 있다 할지라도 우리 인간에게 가장 절실하게 해결해야 할 먹고 사는 가난의 문제는 해결을 못 했습니다. 왜 그러냐? 석가모니 부처는 불교를 창설했지만, 그는 죽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복을 주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1,600년 역사 속에서 모두 다 가난하게 살아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가 100년 밖에 안 됐지만, 기독교가 들어온 다음에는 우리 민족은 이렇게 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의 민족들이 우리나라를 우러러 보게 되었지 않습니까? 이것이 다 기독교 문화를 받아들였던 축복이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조상 대대로 불교를 믿던 사람이에요. 저희 할아버지는 강원도 지구의 불교 신도 회장을 했습니다. 백암온천에 백암사를 지으신 분이 우리 할아버지에요. 저희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가지고, 결혼을 했지만 한국불교 태고종 대처승 중이 되가지고, 경상도 일월사에서 74년 동안을 중으로, 주지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나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불교 신앙을 이어받아 가지고,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승복을 입어야 했고, 그리고 커가지고 성년이 되어서는 대한불교 조계종 승려가 되어서 17년 동안 중생 계도에 몸을 바쳤던 사람입니다.
    저는 충청북도 속리산 법주사에 들어가서 3년 동안의 행자의 교육을 받았는데, 엄청난 고행을 했습니다. 불교에서는요, 중이 되려고 일주문에 한번 들어가면 3년 동안을 절 밖을 못 나와요. 그리고 바깥의 소식을 못 들어야 돼요. 자, 먹고 싶고, 입고 싶고, 가지고 싶고, 하고 싶고, 보고 싶은 108번뇌를 끊어야 돼요. 그리고 신문도 보면 안 돼요. TV도 못 봐요. 라디오도 못 들어요. 일반 책도 못 봐요. 그리고 시간만 있으면 불경을 독경해야 되고, 참선을 해야 됩니다. 편지가 오는 것도 받을 수가 없고, 편지 한 장도 하면 안 됩니다. 부모 형제가 찾아와도 만나지도 못하고, 가지도 않습니다. 완전히 바깥세상을 끊어야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걷는데, 두 눈동자도 좌우로 돌리지도 못하고, 벌레 새끼 한 마리 밟아 죽이지 않으려고 발끝만 보고 살아야 돼요. 이런 과정을 거쳐 가지고 수계를 받습니다. 그리고 나면 중생을 제도하고자 나오게 되는데, 저는 법명이 태선승려가 되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불자들에게 소원기도 올려줬습니다. 그리고 49제도 올려줬습니다. 그리고 운명에 따라가지고 부적도 붙여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불교 신도들을 위해서 중생제도에 몸 바치던 태선 승려 김진규가 왜 그 옷을 벗어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는가? 세 가지 문제가 나를 예수 믿게 했어요.

    첫째로 예수를 만나게 된 동기는...
    불교에는 중이 죽으면 불에 태워서 화장하는 다비식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중은 젊어서 죽든 늙어서 죽든 어떻게 죽든지, 죽으면 다 불에 타야 돼요. 저의 은사스님이, 84살 먹은 은사스님이 참선하다가 중풍에 걸렸습니다. 움직이지 못했어요. 자식이 없는 중들이라 제자들이 자식 대행을 하고, 밥상도 갖다 주고, 빨래도 해서 입히고, 목욕도 시켜 드립니다.
    그런데 하루는 내 친구가 밥상을 갖다 주고, 소변 대변 받아놓은, 용변을 치우겠다고 요강을 들고 넘어오다가 절간 문턱에 걸려가지고 엎어져 버렸어요. 그 요강을 떨어뜨려 가지고 깨버렸어요. 그 속에 있는 배설물이 온 바닥에 쏟아져 버렸어요. 그걸 치우려고 하니까 화가 났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친구가 그 나이 많은 노인장을 보고 욕을 해버렸어요.
    "빨리 뒤져라, 어이구, 오래 살아가지고 원수 되지 마라."
    지겹다고 막 욕을 하면서 그걸 치웠단 말이에요. 그 소리를 들었던 그 노인장은 그 다음에 밥을 갖다 드리니까 고개를 내저으면서,
    "나는 너희들이 욕을 하며 주는 법을 먹고 살고 싶지 않다. 난 안락사하기로 결심했으니 밥 가져오지 말아라!"
    안락사라고 하는 것은 자살인데요. 불교는 정당한 자살은 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오늘부터 굶어 죽기로 마음먹었다. 가져오지 말아라!"
    그래서 밥을 갖다드리니 먹지 않습니다. 그 노인이 죽음을 앞에 놓고 앉아 있는 그 모습이 참으로 처량합니다. 그래서 다른 스님들이,
    "스님, 그러지 마시고 각서를 써가지고 도장을 찍으시면 빨리 안락사를 해 올리겠습니다."
    "그래 좋다."
    그래서 그분에게 각서를 받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러면 옛날에 그 중들은 바위 밑에다가요, 참나무 장작을 한 열 짐을 쌓아놔요. 그리고 아직도 생명이 끊어지지 않은 스님을 밧줄로 꽁꽁 묶어 가지고 장작 위에다 얹어놓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다 석유를 들이부어요. 그리고 연꽃으로 만들어 놓은 불교의 상징 가운을 보기 좋게 씌워 놓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비식이 진행됩니다. 우리는 그 당시 아직도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다비식을 견학을 하고 서 있었습니다. 큰스님들은 목탁을 들고 나와요. 이제 신호에 따라서 그 나무에다 불을 질러 버립니다. 그 기름에 불이 붙어 가지고 활활 타들어가요. 그 생명이 끊어지는, 그 소리치는 비명소리를 들을 때에 간장이 다 녹습니다. 이렇게 생명이 끊어지고 나면 가죽이 터지고 살이 터져서 송장 타는 냄새가 공중에 막 올라가요. 하... 불고기 굽다가 불 꺼진 마냥 기름과 살점이 주룩주룩 떨어집니다. 두 눈으로 못 봐요. 이걸 2탕, 3탕, 재탕, 또 해야 돼요. 저는 그것을 보고 그날 저녁에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눈만 감으면 그게 막 나타나요.
    '나도 중인데 나도 죽으면 저렇게 타야 된다.'
    도저히 있고 싶은 마음이 없어 가지고 나올 마음을 가지게 됐던 것이올시다. 여러분들은 중이 안 돼봤기 때문에 그런 처참한 모습을 안 보고 사는 것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나오게 된 동기는...
    중들은 한 절에 오래 못 있어요. 여기저기 전국 순회를 하게 되어 있는데, 돈을 가지고 가면 대우 받고, 돈 안 가져가면 일만 직싸게 해야 돼요. 제가 영주 부석사에 가서 있었는데, 저녁잠을 자고 아침밥을 먹으려고 나갔더니 선배가,
    "시주공양 받아 왔나?"
    "아닙니다."
    "밥 먹지 말고 나가! 공양도 안 받아가지고 와서 무슨 밥을 먹냐?"

    이 절간에는요, 선후배 차이가 엄청나게 큽니다. 그래서 밥을 못 먹고 쫓겨났는데, 배가 고프니 어떻게 해요? 마을에 나가서 또 시주 공양을 받았지요. 쌀도 주고 돈도 주고 하는데, 한 군데 갔더니 왜 난데없는 젊은 청년이 나타나 가지고,
    "스님, 염불하고 다니지 말고 예수 믿고 구원받으소."
    제가 처음 듣는 말인데 구원이 뭔지 압니까?
    "당신, 뭐 준다 그랬소?"
    "구원 받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원히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뭐요? 예수 믿으면 영원히 살아요?"
    그래서 내가 욕을 했어요.
    "이 사람아, 거짓말하지 마라! 인생은 나면 고생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게 인간이다. 당신도 나도 인과응보에 따라 업보 중생해야 되는 법이다. 부처님도 그 일을 다 해결 못하고 열반했다. 당신, 그런 거짓말하고 다니면, 당신 죽어 지옥의 열 두 대문에 끌려가면 고통 받을 게야! 그런 거짓말을 하면 안 돼! 부처님, 저 어리석은 청년을 용서하옵소서. 나무아미타."
    그리고 가는데, 이게 또 따라오네. 뭐하러 오냐고 하니까, 예수는 생각해보고 믿고, 이 책을 한번 읽어보라면서 주더라고요. 시주 쌀을 얻으려고 짊어지고 다니는 바랑 망태에다가 그 책을 쑥 집어넣어 버려요. 절에 와 가지고 펴보니까, 쌀이 막 묻어 있는 신약성경 책 한 권이 나왔어요. 기독교 신자가 이 책을 보고 예수 믿는데, 이게 그래도 뭔 진리가 있지 않겠나 싶어요. 그래서 다른 스님들 몰래 감춰 가지고 다니면서 여섯 번 봤어요. 이 성경책을 보고,
    '기독교의 주인공은 살았다. 그러니 우리는 죽은 주인공에 복 달라고 빌 것이 아니라 산 주인공에 복 달라고 비는 것이 인간의 가치를 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래서 나도 믿어야 되겠다는 마음을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책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이 두 번째 동기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나올라고 생각해보니 못 나오겠어요. 중은 절에서 먹여주고 채워주고 다 공짜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나가면 누가 밥 먹여줄 겁니까? 그런데 한번은 염불하다가 졸음이 와가지고 법당 옆에 누워 잠들었다가 우리 주지스님한테 뒤지게 맞았어요.
    "이놈아, 자려면 방에서 자지 왜 부처 옆에 발을 뻗쳤냐?"
    사정없이 패는 바람에 얻어맞고 앉아가지고 생각해 보니 화가 나더라니까요. 자는 놈은 개도 안 때린다는데 깨워가지고 때릴 것이지. 그래 가지고 그렇게 두들겨 맞고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근데 이상해요. 신약성경 6번 읽었는데, 말씀 한마디가 내 머리 속에 떠 올라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야, 다 내게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석가모니 부처는 80을 살아도 그런 소리 한 번도 안 했어요. 그런데,
    '예수는 자신이 있으니까 오라고 안 했겠느냐. 아이구, 모르겠다 가자!'
    그래서 뛰쳐나와 버렸어요. 그렇게 그냥 뛰쳐 내려 와 가지고 저희 아버지 원구 스님께,
    "아버님! 종교의 주인공이 산 주인공도 있고 죽은 주인공도 있는데, 아버님, 산주인공 따라 가십시다."
    무슨 소리를 듣고 왔냐고 야단치대요.
    "아니요, 나는 직접 체험했습니다."
    큰절을 올리고, 아버지한테 붙잡힐까봐 도망쳐 버렸어요. 그 이후에 저는 부산 경성대학을 졸업하게 되었고, 서울 감신대학을 졸업해서 이제 감리교 목사 안수를 받게 된 거예요.

    우리 아버지가 원구 스님이신데 74년 동안 주지로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 내가, 목사가 어떻게 전도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지요.
    "구하면 주신다고 했지 않습니까? 천지는 없어져도 내 말은 안 없어진다고 했는데, 제가 목사 하려면 우리 아버지가 예수 믿어야 되겠사온대 아버지를 전도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옵소서."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에 아버님과 헤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인간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보고 싶었어요. 명절이 오면 시를 써보기도 하고, 글을 써보기도 하고, 편지를 써보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전부 다 모아가지고 하나의 노래를 만들었어요. 이것이 바로 효도가인데, 그걸 내가 베껴가지고 갔거든요.
    "아버님, 그동안 만수무강 하셨습니까?"
    아버지가 내 모습을 보고, 나하고 인연이 끝났는데 돌아가라고 그래요.
    "아버님, 자식이 어떻게 인연이 끝났습니까? 아버님, 예수 믿고 구원 받으셔야 됩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라 그래요.
    "안 갑니다. 언젠가는 아버지가 성령님의 감동 받으면 믿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 저는 아버님을 위해서 기도하렵니다."
    그리고 나이가 74살 먹은 할아버지 앞에서 저녁마다 엎드려 가지고
    "아버님, 제가 보고 싶어서 이 글을 써 가지고 왔는데 한번 들어 보실랍니까?"
    필요 없다고 안 듣는다고 그래요.
    "들어보세요."
    그러면서 그 노래를 4개월 동안을 저녁마다 아버지 앞에서 불려 드렸습니다. 그 노래를 듣던 저희 아버지가 74살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4개월 동안을 하루 저녁도 안 빠지고 불렀더니요, 아버지가 은혜를 받아서 기독교에도 그런 효도관이 있느냐고 물어요.
    "아버님, 기독교는 살았을 때 효도하는 종교올시다. 그래서 제가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그랬더니,
    "너 같은 놈 인간 만들어 돌려보내는 거 보니까 기독교가 괜찮구나. 나도 젊을 때는 불교 신도들이 많이 왔는데, 늙어 빠지니까 안 온다. 인생은 늙어지면 다 헛것이다. 나이가 많으면 자식 따라 가야 되고, 나는 이미 끝나버렸다. 네가 하나님과 예수를 믿어 가지고 잘 된다면 나도 너를 따라 예수 믿지!" 

    할렐루야! 저희 아버님은 74살에 74년을 입었던 승복과 염주, 그리고 책 같은 거 사정없이 불태워버리고 예수 믿게 됐습니다. 
    이렇게 된 그 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 후에 우리 아버님이 가지고 있던 절간을 허물어 가지고 고등공민학교를 세웠습니다. 
    왜 그랬느냐. 
    그때 당시는 자녀들 중에 돈이 없어 중학교도 못가는 아이들이 엄청나게 많았어요. 
    나는 그 아이들을 전도할 욕심으로 절간을 변화시켜서 학교를 만들었고, 부처를 들어내니까 벌레가 바글바글 부처 밑에 많이 있어요. 석유를 부어가지고 불로 태우니 꼬불탕꼬불탕 다 타 죽대요. 그리고요 그 자녀들을 돈 안 받고 공부 가르친다고 모아놨더니 엄청나게 아이들이 몰려왔어요. 책 살 돈도 없는 아이들이에요. 그래서 서울에 올라가서 미션스쿨들을 다니면서 책을 얻어다가 아이들에게 나눠주니까 12과목이 넘대요, 중학교 과목이. 그렇죠? 원래는 과목마다 선생님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내가 돈도 없는데, 내가 혼자 교장인데, 월급을 못 주니까 나 혼자 그걸 다 가르치는 겁니다. 교장도 되고, 담임도 되고, 과목선생도 되고. 그 12과목을 나 혼자 다 가르쳤으니 내가 얼마나 머리가 좋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가르쳤고, 저녁마다 모아가지고 특별 강의로 전도했어요. 그렇게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송 가르쳤어요. 그런데 그 아이들이 신앙을 받아들이니까요, 성령이 충만하니까요, 그래서 그 부모를 막 전도하는데, 생명 걸고 전도했어요.

    4회 졸업생을 제가 얻었어요. 그 4회 졸업생 내고 나니까, 중학교가 평준화가 되니까, 고등공민학교가 필요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 고등공민학교를 지금은요, 십자가를 달아가지고 교회를 만들어 버렸어요. 그렇게 절이 변해서 학교가 되고, 학교가 변해서 교회가 된 곳이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사동이라고 하는, 절골 마을의 사동교회가 그렇게 세워진 교회에요. 그리고요, 그 아이들이 예수 믿어가지고 지금 잘 됐어요. 목사가 세 사람이 나오고요, 장로가 일곱 명이 나왔어요. 초등, 중등, 고등학교 교사가 나오고, 지금 대학교 교수가 나왔어요. 그 고등공민학교 출신 중에! 예수를 믿으니까요, 사람의 운명이 바뀝디다. 지금은 절 두 개가 싹 없어져 버렸어요. 내 가족이 예수 믿으면 가정이 바뀌고, 지역이 예수를 믿으면 지역이 바뀌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저는 그 지역을 복음화 했지요.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와서 중생교회를 세우고, 중생선교회를 세워가지고 중들을 전도했는데, 기독교로 돌아온 중이 92사람입니다. 이분들을 보면 돈 가져오는 분이 한 분도 없어요. 그러니 옷을 벗기고 다른 옷을 사 입혀야 되고, 고무신 벗기고 구두 신겨야 되고, 그 다음에 머리 기르니까 이발 시켜야 되고, 장가보내야 되고 시집보내야 되고요, 사명감 있는 사람 신학공부 시켜줘야 되고. 제가 22년 동안 지금 그 일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 들어가야 내보내고. 이런 일을 지금까지 하는데, 그래서 제가 이렇게 비쩍 말랐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정이 다 예수 믿어가지고요. 아버지도 지금 예수 믿어가지고 돌아가셨지만 소천했고, 우리 형님이 장로가 됐고요, 내 동생이 목사 됐고요, 우리 누님들이 부산에 사는데 보살이 변해가지고 집사가 되가지고요. 과거에는 염불하던 우리 가족들이 모이면 그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 찬송 할 때마다 너무 기쁘게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여, 다만 내가 여러분들에게 부탁드리는 것은 여러분만 구원받았다고 안심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구원받았으면 천국 가는 건 가요. 그러나 아직도 부모가 믿지 않는다든지, 또 자식이 믿지 않는다든지, 나와 함께 사는 남편이 믿지 않는다든지, 그분 지옥 간다는 말이에요. 금년에는요, 최대의 목적이, 소원이 뭐냐. 가족 전도에 가정 선교사 되시기를 바랍니다. 외국에 나가 선교사는 못해도 가장 가깝게 살고 있는 내 가족은 전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4개월 동안 엎드려 울부짖으니까요, 들어줍디다. 그러니 될 때까지 한번 매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저 눈 앞에 보이는 것들, 곧 인간은 태어나서 고생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생은 참으로 불쌍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생각해 보자...
    생명을 부여받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인생은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가.
    그 인생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고생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을 경험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가.
    인생과 달리 인생을 둘러싼 자연의 꾸준함은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가.
    이러한 놀라움과 신비가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얼마나 논리적이고 명확한가.
    이러한 놀라움과 신비를 만드신 분이 계실 것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얼마나 논리적이고 명확한가.
    그래서...
    다시 한 번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이것이다.
    (창세기 1:1)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개종인의 삶을 돌보는 것이 나의 소명”


    “타종교를 믿거나 우상을 숭배하다 예수를 믿겠다며 돌아오는 개종인들을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특히 득도를 하겠다고 집을 나가 오랜 세월 불교전통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일반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죠. 우선은 이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것이 제일 시급한 문제랍니다.”

    바랑 속에 든 성경으로 예수님 만나

    1980년 4월 개종인선교회를 설립, 타종교인 선교에 앞장서고 있는 중생교회 김진규 목사(68세)는 조부가 강원도 지역 불교신도 연합회 회장이고, 부친이 경북 영양군 ‘한국불교 태고종’ 일월사 주지승(태고종은 결혼한 승려를 인정하는 대처승제도를 허용하고 있다)인 불교가정에서 자라났다.

    어려서부터 절밥을 먹고 자란 김 목사는 24살에 자연히 태고종에서 승려가 됐다. 그러나 불교계에서 대처승을 인정해주지 않을 뿐 아니라, 승려들이 술과 담배• 육식 등을 거리낌 없이 해대면서 해탈하겠다고 하는 모습으로 보면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에 그는 진정한 부처의 법도를 깨닫고자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인 속리산 법주사에 입문해 ‘태선’이라는 법명으로 17년간 수행했다. 하지만 고령인데다 풍에 걸려 거동이 불편한 은사(82세) 승려에게 본인의 동의를 받아 ‘다비식’(불교 장례식)으로 거행하는 것을 보면서 또 한 번의 회의를 느끼게 됐다.

    자신의 젊음을 바쳐 몸담고 있던 불자의 생활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고 있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성경을 선물 받았다. 김 목사는 “시주하러간 마을에서 한 청년이 바랑 속에 겁도 없이 성경을 넣었다”면서 “밤마다 남몰래 성경을 읽으면서 인간에 대한 속죄와 구원, 영생의 진리와 함께 기독교가 살아있는 종교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직접 체험하고 17년 동안 자기해탈을 위해 고행 길을 걸으며 함께 했던 승복을 벗어 던졌다.

    삶이 안정될 수 있는 공간 마련해 줘야



    하나님 품으로 돌아온 것이 너무나 감사했던 김진규 목사는 처음부터 덮어놓고 ‘불교인선교회’를 창립해 선교회 명칭대로 승려들을 전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그를 불교계에서 가만 놔둘리 만무했다. 대놓고 승려들을 선교한다고 데모와 압력 등으로 가는 곳 마다 쫓아 다니면서 방해했던 것이다.

    이에 개종인들이 거듭났다고 해서 ‘중생인선교회’라고 개명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중생이라는 어감 때문에 이단같다고 기독교에서 거부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우상숭배 하거나 타종교에서 개종한 사람도 들어올 수 있도록 3년 전부터 ‘개종인선교회’로 개명해 선교 활동을 펼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이러한 가운데 김진규 목사는 지난 20년 동안 90여명의 승려들을 개종시키는 열매를 거두게 됐다. 그러나 이들 중 구원의 확신이 없거나 사회에서 발붙일 곳 없어 방황하던 사람들 30여명이 다시 절로 돌아가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60여명도 생활고로 인해 사방에 뿔뿔이 흩어져 사는 것을 보면서 이들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생활관 건립을 추진하게 됐다.

    이에 지난 3월 강원도 원주에 생활관을 100평 규모로 개관해, 전직 승려들을 불러모아 이들이 안정된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김 목사는 “전직이 승려인 개종인들은 오랫동안 절에서 살았기 때문에 가정이 없을 뿐 아니라 기술도 없어 의식주 해결이 힘들다”며 “게다가 교회에서도 서로의 배타적인 심리 때문에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하기 어렵다”고 이들이 함께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따라서 이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그는 “이들이 불교의 경전과 전혀 다른 성경의 진리를 깨닫기 까지는 매우 힘이 들지만, 구원의 확신이 들어서면 절대로 사찰로 돌아가지 않는다”며 “믿음이 심어질 때까지 이들의 생활을 지원해 줘야 한다”고 밝혔다.



    그가 이러한 생활관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개종한 승려 때문이다. 원주에 있는 백운사의 비구승이 김 목사의 간증테입과 비교종교학 책을 읽고 마음을 열어 예수를 영접하면서 사찰을 생활관 용도로 내놓은 것이다.

    비구승이 개종한 것도 기쁜일이지만 그동안 생활관 터를 구하는 기도제목이 이뤄져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었다. 이에 김 목사는 불상을 직접 철거하고, 5층 석탑 위에 십자가를 세워 중생기도원을 설립한 후 숙원사업인 생활관을 건립하게 됐다.

    내가 책임져야 할 과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20년을 선교해 왔어도 김진규 목사는 여전히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그는 “곧 70세가 되면 은퇴해야 되는데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다”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을 호소했다. 뜻있는 분들의 지원과 간증을 통해 받은 사례비로 재정을 충당하고 있지만 생활관을 이끌어 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한 생활관 건립에 들어간 비용의 일부를 아직까지 못 갚아 이자가 늘어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동안 지워해 오던 개종 후 신학을 하는 사람들의 학비와 생활비 일부를 지속적으로 도움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우상을 숭배하는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켜야 되는데 그 뜻을 이루는 데는 아직도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며 한국교회가 개종인들에 대해 관심 가져주기를 촉구했다.

    그는 목사가 되면서부터 지금까지 타종교로부터 갖은 폭력과 협박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이들을 위해 사역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는 “중이 목사가 됐다는 이유로 많은 교회에서 초청을 받아 전국을 다니며 간증했는데, 그때마다 불교계에서 폭력과 데모 등으로 갖은 핍박을 했다”면서 “목사가 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내가 개종인들의 삶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세 가지 소원을 피력했다. 
    “△우상의 재단들이 하나님의 재단으로 바꿔질 수 있도록, 
    △부처가 되겠다는 승려들이 겸손한 자세로 돌아와 복음의 전도자가 되도록, 
    △증가하는 개종자들의 생활 문제가 해결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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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계종 태선스님 17년간 의 삶을 청산하고 개종하여 목사가 되어 복음을 증거하는 김진규 목사와 사형수들의 교수형을 지켜본 한 교도관의 간증 영상

    개종인선교회는 일천 육백년 불교역사와 전통 가운데 우리 민족은 우상을 숭배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본인이 승려 생활을 하다가 개종을 했기 때문에 불붙는 열정을 가지고 타종교 우상 숭배하는 이들을 구원시키고자 처음에는 불교인선교회로 시작하여 이후 우상인선교회로, 중생인선교회로, 그리고 지금은 개종인선교회로 범위를 확대해 선교하고 있습니다..

    http://ca9191.org/bbs/view.php?id=board_19&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23

    김진규 목사의  영상간증 
    교도관으로 사형수들의 사형집행장면을 지켜 보면서 그들이 죽음 앞에 어떻게 반응을 했나를 자세히 영상처럼 묘사하는 간증

    사형장에서도 생명얻는 회개의 역사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전한 예수 때문에 스데반처럼 담대하게 죽어가는 사형수를 부둥켜 안고 찬송과 기도의 봇물을 터트리고 말았던 박효진 장로!
    어느 날에는 사형 집행 순간 대적하는 영의 눈빛을 보다 못해 목에 걸린 밧줄 밑에서 예수를 전하고 난 후, 죽음 5초 직전까지 같이 울어야만 했던 그 감동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모십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붙드시는 능력을 곧 체험하실 것이며,
    누군가의 목에 걸린 죽음의 밧줄을 풀어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는 꼬불 꼬불 재를 넘어 찾아간 경북 청송 골짜기...
    '죽은 자의 땅'이라 불리는 감옥(감호소)에서 집사 9년만에 껍데기 신앙인을 벗어 던지 박효진.
    '갱생' 구호소리 음산한 열 닷섯자 높이 담장 안에서 희락의 기름을 부음받고 드디어 항복을 외치며 돌이킨 후에 자신의 두 번째 인생을 새로 시작합니다.
    누구보다 더욱 훈련되어진 그는 하나님의 거대한 빛살이 영혼을 가까이 비춰주어 '주님의 증인'으로서 지구촌 모든 땅을 발바닥으로 밟으며 복음의 빛, 사랑의 열매를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그는 밀양 박가 규정공파 송당가문의 대 종갓집 종부, 어느 새벽에 들려온 종소리는 새벽닭 울 때 심히 통곡한 베드로처럼 한 여인을 회개하게 만듭니다.
    그녀의 결단 이후 사당을 모셔놓고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살아온 집안이 구원의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만 섬기는 집으로 변화합니다.
    낙망치않고 기도한 부인과 주변 사람들을 통해 다윗의 혈통으로 계보가 바뀐 박효진 장로의 가문을 만나보십시오.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끼는 복을 받으실 것입니다.

    http://www.kcmusa.org/broadcast/viewer.php?idx=24&tn=broadcast_kcm&op=KCMTV&type=A  박효진 장로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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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1380-1471


    토마스 아 캠피스(1380~1471, T. A Kempis)는 독일에서 출생했다. 1399년 19세에 수도사가 되어 소박한 수도사로 평생을 살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명상하며 글을 썼다. 그의 작품은 많지만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로 명성을 얻었다. 영적 생활, 내적인 일, 내적인 위안, 성만찬 등 4부 108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영적 명상을 기록했다.

    토마스 아 캠피스는 하나님의 세계에 젖어 살았다. 하나님, 그 분의 마음을 만나는 일은 그에게 즐겁고 감사한 일이었다. 기독교의 정신을 가장 깊게 고취시킨 정교한 문장으로 평가 받는다. 인간의 영혼에 대한 깊은 통찰력으로 쓴 글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지금까지 끼치고 있다. 어떤 이는 성경 다음으로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한평생 사는 동안 어느 누가 시험과 시련을 당하지 않고 살겠는가!

    이 책은 이런 경우에 위로와 격려를 제공해 준다. ‘땅에서의 인생은 전쟁과 같으니 깨어 기도하라’고 한다. 시험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시험이 고통만 주는 것은 아니고 우리에게 영적 유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캠피스의 명상 기록에 나오는 말이다. “한 가지 시험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시험이 온다. 시험을 피하기만 해서는 이길 수 없다. 진정한 겸손과 인내로만 이길 수 있다. 시험은 불안정한 마음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한 데서 시작한다. 육신적인 욕망에서 출발이 된다. 유혹은 욕심에서 온다. 사소한 작은 생각에서 싹이 튼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은 시험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런 때 낙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을 더욱 열심히 찾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예수님을 피난처로 삼아야 한다.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 시험을 가져오는 삶의 역경에 대하여는 인내가 필요하다. 나만 혼자 힘든 인생이 아니다. 시험이 오기 전에 미리 저급(低級)한 세상 즐거움을 멀리하라고 캠피스는 말한다. 충동이 시작되면 싸우라고 한다. 나쁜 습관은 끊어 버리라고 한다. 영적으로 유익이 될 만한 말을 선택하라고 한다. 고난을 당해야 방심하지 않고 정신을 차리게 된다. 고난은 나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든다. 나는 지옥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언행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

    수고와 슬픔이 떠나지 않는 인생길이다. 어디에 가든지 유혹의 함정과 영적 유혹들로 가득 차 있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하여 악평을 하더라도 화를 내지 말고 나보다 더 악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라”고 캠피스는 권면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에게 모함을 당할 때에 잠잠하다. “닥치는 시험을 대처하기 위해 깨어 있으라”라고 충고한다. ‘시험의 유익함’을 깨달아야 한다. 시험으로 인해 더 겸손해지고 더 깨끗해진다. 교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점검하게 된다. 시험을 당할지라도 그 곳에 성령님께서 함께 계시고 도와주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도와주시는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시험과 환난을 통해 우리를 천국 백성으로 거룩하게 빚어 가신다. 의인이 왜 고난을 당하는가? 어느 누구도 대답해 주지  않는다. 성경도 침묵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깊으신 지혜와 높은 길을 알지 못한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주의 성소(聖所)를 만들어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며,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순례자의 길을 가고 싶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

    독일 가톨릭 수도사제이자 신비사상가로 알려진 토마스 아 켐피스는 1380년 라인 강 하류 쾰른 부근의 도시인 켐펜에서 태어났습니다. 1399년, 19살에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한 후, 일생을 거의 아드네텐베르크 수도원에서 보내는데요, 33살(1413년)에 사제 서품을 받아 신부가 됩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네덜란드의 신비사상가 헤르트 호르테와 그의 제자 플로렌티우스 라데빈스가 창설한 평신도 공동체인 ‘공동생활의 형제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형제회는 당시의 신비주의가 지나치게 현실을 배격하고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에 반대하여 현실 속에서 신비와 경건을 추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형제회는 속세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수도적인 청빈, 정결, 복종의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고, 재산을 공유하며, 스스로의 노동으로 그날그날의 양식을 벌었습니다.

    수도와 노동 외에도 그들은 필사본을 만들고, 인쇄와 제본을 했습니다. 그들은 교육 활동도 했는데요, 특히 연소자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수도회에서 주로 수련수사들을 교육하는 일을 맡았고 설교와 저술활동에 주력했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 외에 이 형제회가 배출한 인물로는 르네상스 시대 네덜란드의 가톨릭 사제이자 인문주의자들을 대표하는 지식인 에라스뮈스(Erasmus, 1466-1536), 독일 신학자이자 근세철학의 선구적 사상가였던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 등이었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1425년 수도원의 부원장으로서 후진 지도에 진력했는데, 후진 지도를 위한 지도서로 쓴 책이 바로 《그리스도를 본받아》(《준주성범》으로도 번역됨)인데요, 그가 마흔 일곱 살 경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외에도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기도와 묵상》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성서 다음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이 읽힌 책이자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모두 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은 ‘영적 삶을 위한 거룩한 조언’, 
    2장은 ‘내적 삶을 위한 거룩한 조언’, 
    3장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위로’,
     4장은 ‘예수님의 거룩한 만찬 준비’입니다. 
    다양한 주제에 대한 비교적 짧은 권면 형식의 글이기에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지침이 될 만한 주제들을 선택해서 소개하는 방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적 훈련 : 《그리스도를 본받아》 제1장

    “성경의 내용을 잘 알고 또 온갖 철학자들의 말을 꿰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없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 외에는 그 어느 것도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될 뿐이다(전 1,2)”(1)

    토마스 아 켐피스가 교권과 국가권력의 갈등기, 스콜라 철학의 절정기를 살았던 신비주의자였다는 것을 알면 왜 그가 이런 주장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시작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토마스 아 켐피스가 인간의 지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배움을 경멸하지는 마라! 지식은 선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렇지만 소중한 양심과 아름다운 삶에는 미치지 못한다.”(2)

    지식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심판의 날이 닥치면 우리가 읽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동한 것에 관해, 또 어느 정도나 말을 잘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바르게 살았는지에 관해 질문을 받게 될 것임을 명심하라.”(3)고 토마스 아 켐피스는 말합니다.

    평신도 형제회 활동을 했던 토마스 아 켐피스는 아마도 당시의 가톨릭 교황과 사제들의 부패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 앞에서의 겸손’, ‘지나친 정욕의 절제’, ‘순종을 통한 참된 자유’를 훈련 수사들에게 권면합니다.

    그러면 이런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토마스 아 켐피스는 ‘침묵’을 권합니다. “입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매우 나쁜 습관이다”(4)이고, “악한 습관에서 손을 끊는 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역경의 유익함을 발견하기’, ‘시험의 인내’,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기’, ‘거룩한 사랑으로 선행을 베풀기’,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끈기 있게 감당하기’, ‘매일의 삶에서 영적 훈련을 수행하기’, ‘혼자만의 시간과 골방의 침묵을 사랑하기’,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기’, ‘죽음을 준비하기’를 훈련하라고 합니다.

    ‘역경’이 유익한 것은 역경이 “우리가 영적인 나그네이며, 세상에 속한 그 무엇도 신뢰해서는 안 되는 존재임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오해에서 오는 고통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교만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우리 내면의 삶은 외적으로 비난 받을 때 가장 크게 성장하기 때문입니다.(5)

    ‘시험’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험’으로 번역된 독일어는 ‘페어수헨’(versuchen)인데요, 전철 ‘페어’(ver-)는 ‘잘못된’을 의미하고, 동사 ‘수헨’(suchen)은 ‘찾다’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시험’은 우리가 ‘무엇인가 잘 못된 것을 찾는데서 온다’는 뜻이지요.

    토마스는 ‘땅을 밟고 사는 사람은 시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시험은 두 가지 허점을 이용해 인간을 더욱 옥죄는데요, 우유부단한 마음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부족이 그것입니다. “키 없는 배가 물결에 밀려 요동하듯 부주의하고 결단력이 없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시험에 마주치게 된다.”는 것입니다.(6)

    사실 시험은 피하는 것이 어떤 때는 하나의 답이 될지 모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시험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지면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해결책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토마스는 시험을 “피하는 것이 해답은 아니다.”고 합니다. “시험을 피하려고 들면 그리 멀리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토마스는 인내와 겸손으로 시험에 맞서 시험을 뿌리째 들어내라고 합니다.(7) 쉬운 일은 아니지만, 토마스는 시험과 어려움을 겪을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게(벧전 5,6), 간절히 기도하면서 도움을 구해야 한다고 권합니다.(8)

    토마스는 “사랑이 없는 겉치레의 선행은 영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반면, “사랑으로 행하는 일은 아무리 작거나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충실한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선행을 했는지, 얼마나 많은 선행을 했는지 따지지 않으시고, 선행의 동기를 헤아리신다.”는 것이지요. 토마스는 선행이 자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행해지고, 자기 의로움의 근거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것이겠지요. 토마스는 “참된 진리와 완벽한 사랑을 소유한 사람은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만물 안에서 타오르는 것만을 바랄 뿐이다.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거만하거나 개인적인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는다.”(9)고 합니다.

    영적인 삶을 위해서는 ‘영적 훈련’이 중요합니다. 토마스는 ‘영적 훈련’을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그 과정을 설정하되, 특히 자신의 최대 약점과 싸움을 벌이듯 치열하게 해야 한다.”(10)고 합니다. 훈련은 매일 계획에 따라 반복되어야 하고, 마치 싸움을 하듯 치열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군대에서 제식훈련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압니다. 절도와 규율을 가르치기 위해 줄과 열을 맞춰 행진하는 그토록 쉬운 일을 며칠이고 반복하면서 지루할 정도로 가르치지요.

    물론 똑같은 종류의 훈련이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처한 상황에 따라 영적 훈련을 선택하는 것도 달라야 한다고 토마스는 비교적 융통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모든 훈련의 핵심은 이 땅을 후회 없이 떠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에 있다.”(11)고 합니다. 죽을 때 삶에 후회가 없다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죽음이 아닐까요! 이런 죽음, 매일의 영적 훈련이 없다면 아마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일 것 같습니다.

    토마스는 이런 후회 없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아침이 되면 해질녘까지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라. 밤이 되면 새로운 아침을 기약하지 마라. 언제나 죽음을 준비하라”(12)고 합니다. “참으로 슬기롭고 행복한 사람은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평소처럼 변함없이 자신의 삶을 산다. 우리가 이 세상을 진심으로 경멸하고, 덕을 쌓는 일을 열망함으로 규율을 잘 지키고, 고통을 감내하면서 회개하고, 기꺼이 복종하고,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위해 어떤 고난이든지 끈기 있게 참아 나간다면 이처럼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13)고 합니다.

    그런데 죽음이 언제, 어떻게 올지는 우리가 잘 모르지요. “우리가 잡고 있는 기회가 죽음 때문에 막을 내리게 될 순간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지금 행동하라.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바로 지금 하라. … 이 세상에서 나그네나 피난민처럼 지내라”(14)고 권합니다. 

    토마스는 심판을 현재적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이 죄를 범하는 만큼 나중에 벌을 받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게으른 사람은 불채찍을 맞고, 음식을 탐하는 사람은 굶주리고 목마르는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사치하고 쾌락을 즐기는 사람은 뜨거운 불속에 들어가게 되고, 시기하는 사람은 마치 정신을 놓아버린 짐승처럼 울부짖게 될 것이다. 죄는 반드시 그 값을 치르기 마련이다. 교만한 사람은 온갖 혼란에 빠질 것이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릴 것이다. … 벌을 받는 사람에게는 휴식이나 위로가 없다.”(15)고 합니다.

    심판의 때, “의로운 사람들이 과감하게 일어나 자신들을 괴롭히고 핍박하는 것에 맞서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은 크게 안심하지만 교만한 사람은 사방에서 밀려드는 두려움에 휩싸일 것이다. 그때에는 인내하면서 겪었던 모든 고통이 즐거움으로 바뀌고, 모든 악인이 자기 입을 봉하게 될 것이다. … 그때에는 초라한 의복이 빛을 발하고, 값비싼 의복이 빛을 잃을 것이다. 그때에는 오두막이 금으로 장식된 궁전보다 더 가치 있게 여겨질 것이다. 그때에는 변함없는 인내가 세상의 어떤 권력보다 더 유용할 것이다.”(16)

    하나님의 심판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지,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일어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토마스는 하나님의 심판을 현재적이고 동시에 미래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내적 삶: 《그리스도를 본받아》 제2장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제2장은 ‘내적 삶을 위한 거룩한 조언’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내적 삶을 위해 “누가 자신의 편이고, 또 누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해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17)고 권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보호자가 되시고, 그리하면 그 누구도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것이기에, 굳이 사람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내적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의 평화를 유지해야’ 하고,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또 ‘단순함과 순수함’이라는 두 날개를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토마스는 여기서 ‘의도의 단순함’과 ‘감정의 순수함’을 의미합니다. 단순한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순수한 마음은 그분을 바라보고 헤아립니다.(18)

    토마스는 행복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낮추는 법을 아는 사람에게 찾아온다(시 119,1-2)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다른 모든 사랑을 넘어서야 합니다.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근거로,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을 찾으면 분명히 그 분을 만날 것인데, 반대로 자신을 찾으면 오직 자신만 만나게 될 것이고 그 때문에 손해를 볼 것이라고 경고합니다.(19)

    그런데 예수님의 하늘나라를 사랑하는 이들은 많지만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드문 현실을 토마스는 지적합니다. “누구나 예수님과 함께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지만 그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많은 사람이 떡을 나누어 주시는 한 그분을 따르려고 하지만 고통스러운 자기희생의 잔을 마시려고 머무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그분의 기적에 감명을 받지만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물다. …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어느 정도의 위로를 받는 한 그분을 찬양하고 축복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을 감추고, 심지어 잠시 그들을 떠나가기라도 하시면 그들은 불평하기 시작하고 금세 낙심한다.”(20)

    ‘문제해결의 신’, ‘도깨비 방망이 같은 신’을 믿는 신앙, 자기 이익이나 자기 사랑에 물들지 않은 신앙인을 찾기 어려운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토마스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하나님을 기꺼이 섬기고자 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21)고 합니다.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지요. 기적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아래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처럼, 기적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거나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지요.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도 그의 《기도시집》에서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을 찾는 이들은 저마다 당신을 시험합니다. … 그렇지만 나는 대지가 당신을 이해하듯 그렇게 당신을 이해하렵니다. 나의 성숙과 더불어 당신의 왕국도 성숙합니다. 나는 당신을 증명하려는 어떤 허영도 당신에게 바라지 않으렵니다. 시간이란 당신과는 다른 것임을 나는 알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어떤 기적도 행하지마소서.”(22)

    내적 위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제3장

    제3부,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위로’는 그리스도와 ‘따르는 자’ 사이의 대화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먼저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의 자녀야, 헌신을 은밀하게 유지하는 것은 더없이 좋은 일이다. 스스로를 높이지 말고 헌신을 자주 입에 담지 마라. 헌신의 수준 때문에 강박관념에 시달리지도 마라. … 은총을 누리고 있다는 감정에 너무 지나치게 매달리지 마라. … 영적인 삶은 위로의 은총을 누릴 때가 아니라 겸손과 자기 부정과 인내로써 은총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때 발전하게 된다. 또한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항상 경건의 시간을 조금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을 때 발전하게 된다.”(23)

    “어떤 경솔한 사람들은 자신들 마음대로 황홀한 헌신을 경험하겠다며 시도하다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자신들의 취약함은 안중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이상을 시도하다가 쉽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만다. 스스로를 위해 하늘에 보금자리를 지으려고 하는 이들은 쓸모없는 일을 하는 것이다.”(24)

    ‘헌신강박증’,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나무랄 것 없고 흠이 없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경건과 헌신을 폄훼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의 헌신과 경건이 남에게 드러내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신 것이지요. 오늘의 교회 안의 갈등과 분열도 대게는 지나치게 열심인, 남의 평가를 의식한 헌신에서 비롯되지요.

    그런데 ‘따르는 자’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저는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당신만을 바라보고, 당신만을 사랑할 때, 제 자신과 당신을 발견합니다.”(25) 자기만 바라보는 사람은 스스로를 잃어버리지만,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길을 찾는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요. 토마스 아 켐피스는 바라는 것을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고 권합니다: “주여, 만일 그것이 당신의 뜻이거든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약 4,15). 그렇게 되는 것이 당신을 영광되게 한다면 당신의 이름으로 그렇게 되게 하소서. 만일 당신이 그것을 좋다고 보시면 그것이 제게도 유익이 되게 해주시고, 저로 하여금 그것을 당신께 영광되게 사용할 수 있게 해주소서. 그러나 만일 그것이 해로운 것이라면 그 소원을 제게서 앗아가소서.”(26)

    아무리 수도사들이 함께 사는 수도원이라고 해도 서로 남을 헐뜯고 비난하는 행태는 어디에나 있는가 봅니다. 헐뜯는 비난에 마음에 상처를 받고, 또 그에 대한 보복으로 험담을 퍼뜨리는 이들에게 토마스 아 켐피스는 “마음의 모든 불안과 괴로움은 절제를 모르는 사랑과 헛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27)고 합니다. 남에게 칭찬받으려는 욕망에서건, 비난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건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내적으로 자유롭고, 철저하게 스스로를 다스려야 한다.”(28)고 토마스는 권면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 입을 다물고, 들은 말이라고 해서 모두 무분별하게 믿지 않고, 그 말을 쉽게 퍼뜨리지 않아야 하고 … 가볍게 마음을 내보여서는 안 되며... 떠도는 말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 하늘의 은총을 간직하기 위한 가장 안전한 방법은 사람들의 평가를 기대하지 않고, 널리 칭송을 받으려고 노력하지 않아야 한다.”(29)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비난이나 칭찬에 이리 저리 흔들리고, 지극히 사소한 일에도 마음을 쓰면서,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사람들이 “멸시받기를 두려워하기 때문”(30)이라고 토마스는 말합니다. “신중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은 싫은 소리 한마디에도 쉽게 흔들립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과 무관할 수 있다.”(31)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심장을 샅샅이 살피시고, 얼굴이나 외모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사람들의 부당한 대우에 신경 쓰지 않는다.”(32)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평범하고 소심한 사람은 사소한 험담에도 크게 낙심하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SNS를 통한 ‘가짜뉴스’가 범람하는 현실에서 악의적인 험담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거짓말도, 가짜 뉴스도 선점하면, ‘아니면 말고’ 식의 악의적 무책임이 오히려 사실인 것처럼 퍼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옛날에도 그랬나 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냥 내버려 두어라. 그와 같은 일이 처음도 아니고, 새로울 것도 없다.”(33)고 합니다. “가능하면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도록 하고, 마음이 상해도 실망하지 말고, 오랫동안 매달리지 마라. … 듣고 싶지 않고, 분노가 솟구치거든 자신을 다스리고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말을 입에 담지 않도록 하라.”(34)고 합니다.

    그럴 수 있는 힘, 견딜 수 있는 믿음은 “주님은 의로우시고, 주님의 판단은 정확하시다.”(시 119,137)는 말씀에 있습니다.

    4권 성찬에 관한 경건한 권면

    [3권과 비슷하게 4권은 제자의 질문과 주님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경어는 제자의 질문이고, 하대어는 주님의 대답입니다. 중요한 구절만을 발췌했습니다.]

    주 나의 하나님께서 이 부족하고 가련한 자를 초대하셔서, 주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에 참여하라고 하시니, 그 말씀이 이 죄인의 귀에 너무나 달콤하고 향기롭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를 극진히 대해 주시며, 이렇게 지극한 사랑으로 초대해 주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성찬을 통해서 영적인 은혜가 수여되고, 잃어버렸던 영적인 능력이 회복되며, 죄로 흉측해졌던 아름다움이 되돌아옵니다.

    보십시오. 주님은 거룩한 자들 중에서도 가장 거룩하신 분이시고, 나는 죄인들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죄인입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 앞에서 얼굴조차 들 수 없는 자인 데도, 주께서는 친히 몸을 굽혀 나를 바라보십니다.

    주님, 내가 처음 죄를 짓게 된 날부터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주 앞에서와 주의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저질러 온 나의 온갖 죄악들과 범죄들을 주 앞에 내어 놓고, 주의 속죄의 제단 위에 올려 드리오니, 주의 사랑의 불로 그 모든 것들을 태우시고 사르셔서, 내 모든 죄의 더러움을 씻어 주옵소서.

    경건한 사람은 성찬에 나아와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고난의 신비를 경건하게 묵상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되고, 그럴 때마다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교제를 통하여 보이지 않게 새롭게 세워져 가게 된다.

    의문과 논란이 있는 어려운 길들을 버리고, 하나님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명하신 길을 정직하게 걸어가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무 심오한 것들을 천착하고자 하다가 신앙까지 잃어버린 사람이 많다. 하나님께 순복하고 너의 지각을 믿음 아래 종속시켜라.

    모든 이성과 본성적인 탐구는 믿음보다 앞서가거나 믿음을 훼방해서는 안 되고, 도리어 믿음을 뒤따라가야 한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서 측량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시고 인간들의 탐구에 쉽게 포착될 수 없다. 하나님은 일들은 기이하고 인간의 언어로 모두 표현할 수 없다.

    -끝-

    3. 나가면서

    중세의 고전을 읽어오면서 지금까지의 책들과 토마스 아 켐피스의 책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중세적 신비주의를 뛰어넘지는 못했지만 지나치게 신비주의를 추구하거나 관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아퀴나스처럼 집요하게 철학적 사유방식을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개신교인들이 읽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건전하고 바른 신앙관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책 속의 내용은 지나치게 세상과 결별하고 하나님만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의 삶은 현실에서의 경건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전에 신비주의자들이 현실에 과도하게 집착했음에도 관상을 통해 하나님을 추구한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중세 교회사를 집필한 R.W. 서던은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며 아쉬워합니다.

    “세상을 등지지도 않았고 세상에 몸을 던지지도 않았다. 다만 세상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투쟁들에서 피신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그들은 일상생활을 훌륭히 해나간 모범적인 사람들이었는데도 폭풍과 같은 도시 생활에서 물러 나와 힘써 추구했던 삶을 세상에 소개할 만한 책은 한 권밖에 내놓지 못했다.”

    저의 개인적인 사견이지만 기독교 역사 중에서 최고의 고전을 세 권을 선정하라고 한다면 어거스틴의 <고백록>과 존 번연의 <천로역정> 그리고 중세 시대를 대변하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고를 것입니다. 중세의 신비적 성향을 지니면서도 삶과 신앙을 격리시키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과도하게 상징적으로 해석하거나 이성적으로 추론하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이성을 믿음에 굴복시켜야 한다는 어거스틴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성경을 알기 위해 몸부림 쳐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않습니다. 분주하고 헛된 야망에 부추김을 당하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맑은 샘물과 같은 청량함을 선사해 줄 것입니다.

    본성과 은총

    600여 년 전, 수도사들을 위한 지침서로서 쓴 책이지만,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수도원 안에 있거나, 세상 안에 있거나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읽어야 할 고전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들 사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수도사건 세속인이건, 수도원 안이건 밖이건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 켐피스도 ‘본성’과 ‘은총’을 대비시킨 것 같습니다.(35)

    본성은 교활해서 많은 사람을 유혹하고, 걸려 넘어지게 만들고, 속이고, 언제나 자신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은총은 소박하고, 전혀 악을 포장하지 않고, 속이려고 하지 않고, 모든 일을 순수하게 하나님을 위해서 하고, 하나님 안에서 최후의 안식을 누립니다.(36)

    본성은 죽는 것을 꺼리고, 낮아지는 것을 싫어하고, 지배 받기를 바라지 않고, 복종하기를 거부하거, 쉽게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총은 고난을 자처하고, 육욕과 맞서고, 복종하려고 애쓰고, 패배하고 싶어하고, 혼자만의 자유를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37)

    본성은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고, 누가 이익을 취하게 되는지 살핍니다. 그러나 은총은 스스로를 위해 도움이 되거나 유용한 것보다는 다수에게 도움이 되는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본성은 수치와 멸시를 두려워하지만 은총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수치를 당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행 5,41). 본성은 여가와 흥미롭고 아름다운 것들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값싸고 세련되지 않은 것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은총은 평범하고 겸손한 것을 즐거워하고, 거친 것을 비난하지 않고 낡고 기운 옷이라도 거부하지 않습니다.

    본성은 일시적인 것들을 존중하고, 세상적인 이익을 즐거워하고, 손실을 슬퍼하고, 상처를 주는 말에는 예외 없이 화를 냅니다. 그렇지만 은총은 영원한 것들을 바라보고, 세상적인 것들을 멀리하고(고후 4,18), 손해를 볼지라도 괴로워하지 않고, 기분 나쁜 말에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38)

    본성은 육신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외적인 위로를 기대합니다. 그렇지만 은총은 하나님에게서만 위로를 구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너머에 있는 더할 수 없는 선한 것을 즐거워하고 싶어 합니다.(39)

    본성은 스스로의 이익과 도움을 위해 모든 것을 조종합니다. 본성은 보수를 받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하지만 은총은 하나님 이외에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습니다. 본성은 높은 지위와 좋은 출신 배경을 높이 사고, 권력을 잡은 사람에게 미소 짓고, 부자에게 아첨하고, 자신과 비슷한 것들을 칭찬합니다. 그러나 은총은 원수까지 사랑하고, 높은 지위나 좋은 출신 배경에 개의치 않습니다.(40)

    본성은 부족하고, 어려움에 처하면 바로 불평합니다. 은총은 언제나 부족함을 견뎌냅니다. 본성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 돌리고, 자신을 내세우려고 애쓰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은총은 모든 것을 그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돌립니다.(41)

    그렇다면 은총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일까요? 토마스는 “타고난 재능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 똑같이 허락되지만 은총과 사랑은 특별히 선택된 사람에게 주어진다.”(42)고 합니다. 그러므로 은총을 간구하고,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은총을 찾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지요.(43)

    문은 두드려야 열리듯이, 은총은 찾는 이에게 주어지니, 본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은총을 찾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수도원 안에서나 밖에서나, 수도사건 세속인이건 마찬가지이겠지요.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 Christi

    1. 토마스 아 켐피스의 생애

    토마스는 1380년 라인강 하류 켐펜에서 요한과 겔트루테 해멜켄(해멜켄은 ‘작은 망치’란 뜻)의 아들로 태어나 1471년 7월 25일 하나님의 품에 안깁니다. 그는 독일의 신비 사상가이자 의도치 않았지만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데보티오모데르나(Devotio moderna)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토마스의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공동생활형제단이 운영하는 더벤터의 학교에 보냅니다. 화란(네덜란드)에 있는 더벤터는 타락한 수도원과 교회와 다르게 경건생활을 통해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의 형이었던 요한은 아그네스산 수도원에서 부원장으로 있었습니다. 당시 규칙에 의하면 형제가 동일한 수도원에 함께 머무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러나 두 형제의 바르고 온유한 성품은 모두에게 인정되어 함께 머물도록 허락이 됩니다. 그곳에서 청빈, 순결, 순종 서약을 하고 1413년 33세의 나이로 사제 직분을 받게 됩니다. 1425년에는 부원장으로 임명되었고, 새로운 수도사들을 훈련시키는 일도 맡게 됩니다. 수도원의 사무장도 맡게 되지만 그에게 행정적 재능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14세기 말과 15세기 초엽, 중세는 그야말로 흑 역사였습니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교황이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감금되다시피 하면서 프랑스 국왕의 꼭두각시 노릇을 합니다. 1377년 그레고리 11세가 로마로 귀환하면서 마무리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교황청의 수모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황청에 로마로 옮겨가자 프랑스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약해지는 것에 반발해 프랑스 추기경들이 콘클라베 무효를 선언하고 탈퇴하여 '대립 교황'을 세우게 됩니다. 새로운 대립 교황은 아비뇽에 두어 두 명의 교황이 있게 됩니다. 피사 공의회에서 다른 교황을 세우게 되면서 세 명의 교황이 있던 적도 존재합니다. 토마스가 활동했던 시기는 중세의 종말을 알리는 교황의 붕괴와 도덕적 타락이 극심한 시기였습니다. 1417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마르티노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여 서방교회의 분열은 막을 내리지만 그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중세가 무너지는 여진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시기를 살아갔던 토마스는 새로운 종교적 운동이 필요함을 체감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데보티오모데르나(Devotio moderna)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공동생활형제단은 부유한 상인이었던 헤르트 드 흐루트가 세속적 생활을 정리하고 공동체를 설립하면서 시작됩니다. 처음 시작은 비공식적 평신도 운동이었습니다. 1392년 토마스가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 시작한 이 운동은 집단이 아닌 다수의 사람들의 거룩한 열심에 대한 결심이었습니다. 운동은 점점 확산되고 동조하는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옛 사도들을 본받아 경건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공동생활형제단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작은 공동체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중세의 신비주의가 지나치게 현실을 배격하고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비현실적 신앙에 몰두하는 것에 반대해 현실 속에서 신비와 거룩을 추구했습니다. 이것이 후일에 일어난 종교개혁의 특징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루터가 기도원을 나와 세속에서 거룩을 추구하고, 칼빈이 소명을 세상 속에서의 ‘직업’과 연결한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수도원이 몸담고 있던 위트레흐트 시민들과 교황과의 갈등으로 인해 토마스는 형과 함께 1429년 6월 11일, 히링겐 부근의 구넨케르크 수도원으로 옮겨 갑니다. 이 일로 형 요한은 건강이 나빠져 3년 후에 죽게 되고 심각한 영혼의 상처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을 알 때 속세를 떠나라는 책의 내용은 지리적이고 공간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1448년 그는 부원장의 자리에 다시 선출되고 20년 동안 학생이자 상담사, 필사자 및 저자로 살아갑니다. 1471년 6월 25일, 마침내 토마스는 주님의 품에 안깁니다. 그의 나이 91세, 종교생활 63년째, 수도생활 58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가 살았던 시대는 중세 중에서 가장 어두운 암흑기였습니다. 그러나 어두울수록 아침은 가까워 오는 법, 종교개혁의 여명은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은 어두운 시대 속에서 개혁과 거룩의 기치(旗幟)를 높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수고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사상의 씨앗을 뿌린 것과 같았습니다. 그가 죽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구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를 붙임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됩니다. 이제 토마스 아 켐피스의 거룩한 열정이 스민 <그리스도를 본받아>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중요한 대목만을 직·간접적으로 옮깁니다. 박문재의 번역을 주인용 서적으로 삼았고, 필요에 따라 다른 번역자의 글도 첨가하였습니다.

    2. 요약

    [책은 4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1권은 25장, 2권은 12장, 3권은 59장, 4권은 18장으로 나누었습니다. 1권에서는 ‘영적 삶에 유익한 권면들’이란 주제로 영적 삶이 무엇인지 다룹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매혹적인 부분입니다. 2권은 ‘내면의 삶에 관한 권면들’이란 제목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3권은 ‘내적 위로’라는 제목으로 세상 속에서 평안을 누리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권면합니다. 마지막 4권은 ‘성찬에 관한 경건한 권면’이며, 성찬에 담긴 영적 의미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현대의 논문처럼 각권의 제목과 각장의 내용이 명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암울하고 타락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만을 추구하며 살았던 토마스의 생애는 세속에 대한 지나친 배타성을 드러냅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알지 못한다면 중세의 신비주의 사상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세상 속에서 배타적 거룩과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갈망은 타락한 세속에서 거룩함을 추구했던 토마스의 열정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거나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할 때에 위와 같은 것들을 마음에 새겨 두었다면, 독자는 이 책이 얼마나 귀중한 고전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해럴드 C. 가디너]

    1권 영적 삶에 유익한 권면들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참된 빛을 받아서 마음의 온갖 눈먼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삶과 성품을 본받을 것을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힘써야 할 것은 예수님의 삶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지 않고 겸손하지 않아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고상한 말로 늘어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언젠가는 없어져 버릴 부를 추구하고 재물을 의지하는 것은 헛된 것입니다. 명예, 부귀, 권력, 육체의 욕망을 구하는 것 역시 헛된 것입니다.

    자신을 아는 것, 자신이 하찮은 존재인 것을 아는 자는 타인의 칭찬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많이 알고, 많이 소유한다 하여 삶이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자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 없이는 아무도 바르게 깨달을 수도 없고 제대로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이 단순할수록 깊은 것들을 깨닫고, 순전할수록 영적인 것에 민감합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자는 복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십시오. 그가 진정 지혜자입니다.

    지식을 얻으려고 성경을 읽지 말고 진리 자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명성이나 세상적 유익을 위해 성경을 읽지 마십시오. 평안은 욕망을 채울 때가 아니라 비울 때 찾아옵니다.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를 경계하십시오.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하면 후회하기 마련입니다. 헛된 호기심과 세상에 대한 쾌락적 지식을 추구하며 자신을 상처 나게 합니다.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하는 이유는 위로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내적 위로가 아닌 것은 헛된 것입니다. 도리어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많이 사랑하는 것이 많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람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다른 사람을 고치려 하지 말고 자신을 먼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당신은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 이유는 인내하고 수고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땅에서는 순례자와 나그네로 지내십시오. 늘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 땅은 인내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정화시키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날에는 단순한 순종이 탁월한 지혜보다 더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2권 내면의 삶에 관한 권면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내면에 그리스도가 거처할 곳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주님을 신랑으로 영접하십시오. 사람은 쉽게 변하고 힘이 금세 사라집니다. 그리스도만이 영원히 계시며 변함없이 함께하십니다. 내면이 잘 정돈되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괴하고 악한 행위들에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모욕과 수욕을 넉넉히 이깁니다. 자신을 변명하려 들지 말고 다른 사람을 먼저 용납하십시오. 사람은 단순함과 순수함이란 두 날개를 가질 때 하늘로 올라갑니다.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이킨 사람은 새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받은 고통은 곱씹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은 무감각합니다. 내면의 삶을 중시하는 사람은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자기 자신을 먼저 살피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예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가장 궁핍한 사람이고, 예수님과 함께 잘 살아가는 사람은 가장 부유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아는 것은 위대한 예술이고, 예수님과의 교제를 지속하는 법을 아는 것은 위대한 지혜입니다.

    언제나 자신을 가장 낮은 곳에 두십시오. 그러면 가장 높은 곳이 당신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선물에 감사하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적습니다. 위로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자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위로를 받을 것이며 예수님을 찬송하고 감사드리고 싶어 할 것입니다.

    3권 내적 위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기를 간절히 원해서 세상의 모든 방해물을 떨쳐 내버리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사무엘처럼 ‘주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선지자들은 말씀을 전할 수 있었지만 성령을 수여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은 물을 주지만 하나님은 자라게 하십니다. 하나님만이 듣는 사람을 깨닫게 하십니다.

    [3권 저자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하대어를 사용했고, 그렇게 번역되었습니다.]

    사랑은 신속하고 진실하며 경건하고 유쾌하며 온유하고 강하며 인내하고 신실하며 사려 깊고 오래 참으며 용감하고, 결코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에서 자신의 유익을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그 일에서는 사랑으로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에 자신이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다스림이나 지도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많이 배워 교만한 것보다 배우지 못하고 겸손한 것이 낫다.

    스스로 선하다 생각하며 지나치게 애쓰다가 나중에 선하지 않은 일로 밝혀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단호하게 육신의 정욕과 맞서 싸워야 한다.

    네 자신을 완전히 꺾고서 다른 사람들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네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낮고 비천한 자가 된 것은 너로 하여금 나의 겸손을 본받음으로써 네 자신의 교만을 이길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난을 더 잘 감당할수록, 너는 더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고, 장차 더 큰 상을 받게 된다. 마음과 몸이 고난을 감당할 각오와 준비와 철저히 되어 있다면, 고난을 감당하는 일은 더 쉬워진다.

    늘 많이 갖기보다는 적게 갖는 것을 택하라. 늘 가장 낮은 자리를 구하고, 모든 사람 아래에 있어라. 네게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늘 바라고 기도하라. 보라, 그런 사람은 평화와 안식의 땅으로 들어간다.

    아들아, 호기심을 갖지 말고, 쓸데없는 일들에 관심을 갖지 말라. 이런저런 일들을 너와 무슨 상관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유명한 사람의 그늘에 그늘 아래 들어가고 하거나, 많은 사람들을 친구로 삼고자 하거나, 사람들의 사랑과 호의를 얻으려고 애쓰지 말라. 그런 것들에 힘을 쓰게 되면, 마음이 산란해지고, 많이 어두워지게 되기 때문이다.

    생명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계명들을 지켜라. 진리를 알고자 한다면, 나를 믿으라. 온전해지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팔아라. 나의 제자가 되고 싶어 한다면, 네 자신을 부인하라.

    4권 성찬에 관한 경건한 권면

    [3권과 비슷하게 4권은 제자의 질문과 주님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경어는 제자의 질문이고, 하대어는 주님의 대답입니다. 
    중요한 구절만을 발췌했습니다.]

    주 나의 하나님께서 이 부족하고 가련한 자를 초대하셔서, 주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에 참여하라고 하시니, 그 말씀이 이 죄인의 귀에 너무나 달콤하고 향기롭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를 극진히 대해 주시며, 이렇게 지극한 사랑으로 초대해 주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성찬을 통해서 영적인 은혜가 수여되고, 잃어버렸던 영적인 능력이 회복되며, 죄로 흉측해졌던 아름다움이 되돌아옵니다.

    보십시오. 주님은 거룩한 자들 중에서도 가장 거룩하신 분이시고, 나는 죄인들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죄인입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 앞에서 얼굴조차 들 수 없는 자인 데도, 주께서는 친히 몸을 굽혀 나를 바라보십니다.

    주님, 내가 처음 죄를 짓게 된 날부터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주 앞에서와 주의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저질러 온 나의 온갖 죄악들과 범죄들을 주 앞에 내어 놓고, 주의 속죄의 제단 위에 올려 드리오니, 주의 사랑의 불로 그 모든 것들을 태우시고 사르셔서, 내 모든 죄의 더러움을 씻어 주옵소서.

    경건한 사람은 성찬에 나아와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고난의 신비를 경건하게 묵상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되고, 그럴 때마다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교제를 통하여 보이지 않게 새롭게 세워져 가게 된다.

    의문과 논란이 있는 어려운 길들을 버리고, 하나님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명하신 길을 정직하게 걸어가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무 심오한 것들을 천착하고자 하다가 신앙까지 잃어버린 사람이 많다. 
    하나님께 순복하고 너의 지각을 믿음 아래 종속시켜라.

    모든 이성과 본성적인 탐구는 믿음보다 앞서가거나 믿음을 훼방해서는 안 되고, 도리어 믿음을 뒤따라가야 한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서 측량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시고 인간들의 탐구에 쉽게 포착될 수 없다. 
    하나님은 일들은 기이하고 인간의 언어로 모두 표현할 수 없다.

    중세의 고전을 읽어오면서 지금까지의 책들과 토마스 아 켐피스의 책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중세적 신비주의를 뛰어넘지는 못했지만 지나치게 신비주의를 추구하거나 관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아퀴나스처럼 집요하게 철학적 사유방식을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개신교인들이 읽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건전하고 바른 신앙관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책 속의 내용은 지나치게 세상과 결별하고 하나님만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의 삶은 현실에서의 경건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전에 신비주의자들이 현실에 과도하게 집착했음에도 관상을 통해 하나님을 추구한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중세 교회사를 집필한 R.W. 서던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며 아쉬워합니다.

    “세상을 등지지도 않았고 세상에 몸을 던지지도 않았다. 
    다만 세상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투쟁들에서 피신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그들은 일상생활을 훌륭히 해나간 모범적인 사람들이었는데도 폭풍과 같은 도시 생활에서 물러 나와 힘써 추구했던 삶을 세상에 소개할 만한 책은 한 권밖에 내놓지 못했다.”

    기독교 역사 중에서 최고의 고전을 세 권을 선정하라고 한다면 어거스틴의 <고백록>과 존 번연의 <천로역정> 그리고 중세 시대를 대변하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고를 것입니다. 
    중세의 신비적 성향을 지니면서도 삶과 신앙을 격리시키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과도하게 상징적으로 해석하거나 이성적으로 추론하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이성을 믿음에 굴복시켜야 한다는 어거스틴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성경을 알기 위해 몸부림 쳐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않습니다. 
    분주하고 헛된 야망에 부추김을 당하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맑은 샘물과 같은 청량함을 선사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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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 로마 제국기독교 신학자이자 신비사상가. 가톨릭뿐 아니라 개신교에도 영향을 끼친 인물로, 지금의 네덜란드 빈더스헤임(Windesheim)과 즈볼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라인 강 하류 쾰른 부근의 도시인 켐펜에서 태어났다. 1392년 네덜란드로 유학을 떠났고, 1399년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 33세이던 1413년에 사제서품을 받아 신부가 되었다. 1425년에는 수도원의 부원장이 되었고, 경건한 생활로 모범이 되었다.

    그는 수도회에서 주로 수련수사[1]들을 교육하는 일을 맡았고, 설교와 저술활동에 주력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준주성범(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기도와 묵상> 등이 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 이후, 토마스 아 켐피스가 살았던 수도원은 개혁교회(장로회)로 개조되었다.

    준주성범

    토마스 아 켐피스의 저서 <준주성범>(De imitatione Christi, 그리스도를 본받아)은, 성경 다음으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많이 읽힌 책이자 많은 영향을 끼친 서적으로 유명하다.

    원래 라틴어로 쓰여진 <준주성범>은 그리스도교 신앙적 교훈에 따라 주제를 나누어 총 4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 ‘정신생활에 유익한 훈계’, ‘내적 생활로 인도하는 훈계’, ‘내적 위로에 대하여’, ‘존엄한 성체성사에 대하여’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정신생활에 유익한 훈계’에는 수도자의 순명과 수도생활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1913년도부터 부분이 번역되어 소개되어 오다가, 1923년 장로회의 조선야소교서회에서 이원모 장로에 의해서 <긔독셩범>이란 제목으로 1-4권이 최초 완역되었다. 이후 1924년 성공회의 허세실(Cecil Hedges) 신부에 의해서 <遵主聖範>(준주성범)이란 제목으로 전권이 출판되었으며, 라틴어 원문에 한자본, 일본어본, 영어본을 대조하여 번역되었다. 천주교에서는 해방 후, 1954년 천주교 서울대교구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에 의해 완역되었다.[2]

    개신교에서는 마지막 장인 ‘존엄한 성체성사에 대하여’ 부분을 빼거나, ‘성체성사’를 ‘성찬례’로 바꾸어서 번역하였다. 가톨릭에서는 사제만이 성체성사를 집전할 수 있고 사제의 축성으로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성체와 성혈)로 성변화(聖變化)하며, 죄를 지었으면 고해성사를 본 후에 영성체해야 한다고 가르치고[3] 준주성범의 마지막 장도 그러한 내용들을 교육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개신교에서는 사제(성직자) 직분을 인정하지 않으며(만인사제설), 성변화와 성사(聖事)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1] 가톨릭 수도회에 입회하면 (수도회마다 다르지만 대개) 지원기-청원기-수련기-유기서원기를 거쳐 평생 수도자로 살겠다는 종신서원을 하여 정식 수도자가 된다(여기까지 대략 10년 가까이 걸린다). 수련기는 수도복을 입고, 수도명을 받고, 수도자가 되기 위한 본격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하는 시기로, 당연히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따라서 이러한 수련자들을 교육하는 수련장 수사/수녀 역시 권한과 책임이 막중할 수밖에 없다.[2] 윤 신부는 준주성범 번역 외에도 한국 천주교 최초의 박사 신부, 사회사업, 인보성체수녀회 창설 등의 업적을 남겼다.[3] 이와 같은 교리는 정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1380년 ~ 1471년 7월 25일)는 독일의 가톨릭 수도사제이자 신비사상가이다. 라인강 하류의 켐펜에서 태어나, 92년 동안의 일생을 거의 즈볼러에 가까운 아그네텐베르크 수도원에서 보냈다. 여기서는 네덜란드의 신비사상가 헤르트 호르테 및 제자 플로렌티우스 라데빈스가 창설한 '공동생활의 형제회'(Brethren of the Common Life)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토마스 아 켐피스도 이 회에 가담하여 모범적인 경건한 생활을 보냈다. 이 회는 속세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수도적인 청빈·정결·복종의 생활을 보내도록 노력하고 재산은 공유하며, 스스로의 노동으로 그날그날의 양식을 벌었다. 일은 사본(寫本) 및 인쇄·제본과 교육으로, 특히 연소자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으며, 후에 에라스무스, 니콜라우스 쿠사누스 등을 배출했다. 그들은 프란치스코회와는 달라서 자신의 양식을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신비주의의 조용한 실천활동이 강조되고 있다. 그보다 더 경건한 사람은 없다는 말까지 들은 토마스 아 켐피스는, 1425년 이후 부원장으로서 후진 지도에 진력했다. 그래서 후진 지도를 위한 지도서를 몇 가지 썼는데, 그 중 <준주성범>, 또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기독교 세계에서 널리 애독되는 책이 되었다.

    1725년에 웨슬리는 온전한 거룩을 향한 구도자적 자세로의 전환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해였다. 이 때 그가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고 더욱 가속화되었다.[1]

    1. Kim, Kwang-nyŏl.; 김광열. (2000). 《Kŭrisŭdo ane innŭn kuwŏn kwa sŏnghwa》. Sŏul: Ch'ongsin Taehakkyo Ch'ulp'anbu. 117쪽. ISBN 89-8169-1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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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즈노 겐조


    시인 미즈노 겐조(1937~1984)는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산과 들을 뛰어다닌 건강한 소년이었지만, 그해 여름 홍역이 돌아 감염이 되어 전신마비가 되고 언어의 능력조차 빼앗겨버린 것입니다. 
    겐조가 열두 살이 된 어느 날, 마을의 한 교회 목사가 겐조의 집에 빵을 사러 왔다가 때마침 겐조를 알게 되어 한 권의 책을 주고 갔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으며 자신이 살아있어야 하는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면서 그의 얼굴은 웃음을 찾게 되었지요. 
    14세에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되어 수백 편의 시를 남기고 4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눈 깜빡이는 시인 미즈노 겐조(水野源三 , 1937-1984), 그는 조용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산과 들을 뛰어 다니는 건강한 소년이었지만, 그해 여름 홍역이 돌아 겐조도 감염되고 말았다. 
    고열이 내리고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이미 그 전의 겐조가 아니었다. 
    전신이 마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어 능력 조차 빼앗겨버린 것이었다. 
    이때부터 겐조의, 그리고 그 가족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겐조가 열두살 나던 어느 날, 마을의 한 교회 미야오 목사가 겐조의 집에 빵을 사러 왔다가 때마침 겐조를 알게 되어 한권의 책을 주고 갔는데, 그것은 성경이었다.

    처음 읽어보는 성경. 소년 겐조에게는 자신을 몰입시키는 하나의 세계였다. 
    매일 거르지 않고 성경을 읽어나가는 동안 겐조의 사고방식은 변화되고, 자신이 살아있어야 하는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여 그 얼굴은 날로 밝아져갔다.

    겐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삶의 주관자로 마음에 영접했다.

    그 후의 겐조는 더욱 변화되어갔고, 그의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면서 그의 얼굴은 웃음을 되찾게 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써 겐조는 누구에게나 만면의 웃음을 지어보이곤 했다.

    몸이 부자유스럽고, 말조차도 하지 못하는 그가 어떻게 시를 짓게 되었을까?

    그 계기가 된 것은 겐조를 진찰하던 의사가 "[예]라고 대답할 때는 눈을 감으라"는 주문을 한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겐조의 어머니는 이것을 단순한 대답뿐만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적용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물(水)을 뜻하는 일본어인 みず(미즈)를 찾을 경우, 오십음도(일본의 가나 문자를 순서대로 배열한 도표)를 사용하여 그의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아행(あ行)부터 차례대로 옆으로 짚어가면 아-카-사-타-나-하-마-야-라-와(あ-か -さ-た-な-は-ま-や-ら-わ)의 마(ま) 부분에 와서 겐조가 눈을 깜빡이면, 거기서부터는 밑으로 짚어가며 마-미-무-메-모(ま-み-む-め-も)의 미(み) 부분에 와서 또 한 번 눈을 깜빡이는 방식으로 한자 한자의 글을 찾으며 문장을 만들어 가는 엄청나게 고된 작업이었다.

    이렇듯 정말 엄청난 작업을 통해 그때까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겐조의 내면 세계가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그의 눈 깜빡임을 통해서 수백편에 이르는 시가 탄생하게 되었다. 
    미즈노 겐조가 [눈깜빡이는 시인]으로 불리우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시 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찬미와 기쁨이 가득 넘쳐흐르고 있다.

    미즈노 겐조의 이야기는 NHK에 특집으로 다뤄졌고, 그의 시집은 일본 문단의 걸작이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미즈노의 시집 중에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또 원망해도 부족할 텐데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감사는 밥이다

    저자 미즈노 겐조  출판 선한청지기 발매 2014.10.15.

    몸이 부자유스럽고, 말조차도 할 수 없는 그가 어떻게 시를 짓게 되었을까요? 
    겐조를 진찰하던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겐조 씨! '예'라고 대답할 때는 눈을 감으세요.
    겐조의 어머니는 일본의 오십음도(일본의 가나 문자를 순서대로 배열한 도표)를 차례대로 짚어가면서 눈 깜빡이는 방식으로 한자 한자의 글을 찾아 문장을 만들어 내어 수백 편에 이르는 시가 탄생된 것입니다.

    너무나도 공감이 되는 시 몇 편을 올립니다.

    "오늘 하루도"


    신문 냄새에 아침을 느끼고
    냉수의 시원함에 여름을 느끼고
    풍경 소리의 서늘함에
    저녁을 느끼고
    개구리 소리가 드높아
    밤을 느끼네
    오늘 하루도 끝이구나
    한가지 한가지 일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며


    가을
    사과가 익어 가는 가을에 몸이 불편해졌고
    코스모스가 필 즈음
    처음으로 예수님 이야기를 들었고
    성경을 읽었으며
    귀뚜라미가 우는 밤
    구원의 기쁨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산다
    하나님의 크신 손안에서
    달팽이는
    달팽이답게 기며
    반딧불 꽃은
    반딧불 꽃답게 피고
    청개구리는
    청개구리답게 울며
    하나님의 크신 손안에서
    나는 나답게
    산다

    앨범
    앨범 속에서
    부모님의 음성이 들린다

    시집 간 동생의
    행복을 바라는 말
    어린 조카딸을
    달래는 소리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뻐하는 노래
    지체장애인 나를
    염려하는 기도

    앨범 속에서
    부모님의 음성이 들린다

    엄마 고마워
    나의 손이 되고 발이 되고
    슬픔 고통을
    함께해 주셨던
    엄마

    겐조를 천국으로 보낸 후에
    가고 싶다고
    언제나 말씀하셨던
    엄마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시고
    이른 봄 아침
    천국으로 가 버리신
    엄마


    아버지 2
    예순이 다 된 아버지
    자동차 학원에
    나가셨다

    면허증을 받았지만
    한 번도 운전하지 못하시고
    하늘로 불려가 버리고 마셨다

    일기장에는
    면허증을 따서
    겐조를 태우고 싶다고
    쓰여있었다


    단 하나만 변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신세를 지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서른한 해 동안
    변하지 않았습니다
    천국으로 불려 갈 때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단 하나만
    변했습니다
    3년 전부터
    신세를 지는 분이
    어머니에서 제수씨로
    변했습니다

    부수고 부수고 부수 소서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는 것임에도
    자기 홀로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부수고 부수고 부수 소서

    하나님께 깊이 사랑받고 있음에도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진실로
    사랑할 수 없는 마음을
    부수고 부수고 부수 소서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았음에도
    남의 작은 잘못에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부수고 부수고 부수 소서


    그렇지 않아
    걷는 것은 나 혼자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나의 약함을 알고 계시는
    주 예수가 이미 함께 계셔

    괴로워하는 건 나 혼자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나의 약함을 알고 계시는
    주 예수가 이미 함께 계셔

    기도하는 건 나 혼자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나의 바람을 알고 계시는
    주 예수가 함께 기도하셔

    사랑의 손
    건강하게 보낸 날들도
    아픔에 괴로워했던 날들도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의 손 안이라

    기쁨을 노래하는 아침도
    눈물을 흘리는 밤도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의 손 안이라

    기세등등한 때도
    후회투성이 일 때도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의 손 안이라


    해바라기
    마당에서
    꺾어 온
    크고도 큰
    해바라기 꽃이
    작고 작은 일로
    트집 잡고 있는 내 마음에
    말을 건다

    하나님의
    크고 크신 사랑을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병으로 쓰러졌던 그때에는
    눈물이 흐르고 슬펐지만
    '영의 아픔을 치유하시는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이라는 걸 깨닫고
    기쁨과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친구에게 외면당하는 그때에는
    밤에 잠들지 못할 만큼 원망스러웠지만
    '영원히 변치 않는 친구 되신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이라는 걸 깨닫고
    기쁨과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실수했다는 그때에는
    마음이 혼란스러웠지만
    '모든 것을 속죄하신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이라는 걸 깨닫고
    기쁨과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신문 냄새에 아침을 느껴 
    차가운 물맛에 여름을 느껴 
    풍경 소리에 선선한 해 질 녘을 느껴 
    개구리 소리에 졸음을 느껴 
    오늘 하루도 끝나지 않았어 
    하나 하나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껴 

    그저 감사할 뿐 
    나는
    가족
    사람 
    주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주님 
    사람
    가족의 풍성한 사랑에 
    그저 감사할 뿐 
    그저 감사할 뿐 

    울지 마세요
    어머니를 잃은 나를 위해서
    울지 마세요 
    더 이상 울지 마세요
    마음속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합니다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계셔 주기 때문일까요

    하나님 
    33년 전에
    뇌성마비가 되었을 때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닿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감사와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주님을 슬프게 한 것은 아닐까?" 


    그때 그 사람에게 
    사랑 없는 태도나 말이 
    주님을 슬프게 한 것은 아닐까? 


    그때 그 목소리에 마음이 
    움직였던 생각, 소원이
    주님을 슬프게 한 것은 아닐까? 


    그때 그 일로 가슴 속에 일어난 
    불안이나 투덜거림이 
    주님을 슬프게 한 것은 아닐까? 


    "그렇지는 않아"


    걸어가는 사람은 나 혼자
    그렇지는 않아
    그렇지는 않아
    나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걸어가신다.


    고민을 하는 사람은 나 혼자
    그렇지는 않아
    그렇지는 않아
    나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고뇌하신다.


    기도드리는 사람은 나 혼자
    그렇지는 않아
    그렇지는 않아
    나의 소원을 아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기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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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진실은 변함이 없다"


    오는 해도 오는 해도 
    상큼한 첫 여름에는 
    은방울꽃이 피듯, 
    하나님의 진실은 변함이 없다.


    오는 해도 오는 해도 
    하늘 맑게 갠 가을에 
    용담꽃이 피듯 




    미즈노 겐조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열병을 앓고 뇌성마비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몸을 움직일 수도 없게 되었고 ,언어 능력도 상실하고 말았지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수단은 오직 눈 깜박임 밖에 없었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 있던 그에게 어느 날, 미야오 목사님을 통해 생명의 빛이 비추이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도 시력과 청력은 잃지 않았기에, 그는 그때부터 성경을 읽고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사랑과 은혜를 외부에 나누고 싶어 했던 겐조. 오직 눈 깜박임으로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었기에, 벽에 붙인 오십음도표 글자를 어머니가 차례대로 가리키면, 자신이 원하는 글자에 이르렀을 때 신호를 보내 한 글자를 모으고, 다음 글자를 모아 단어를 만들고 결국엔 하나의 문장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하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감사 뿐이라는 놀라운 고백을 시(時)로 쏟아냅니다. 겐조의 옆에는 항상 그와 함께 기뻐하고, 울어주고, 기도해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어머니는 병으로 아들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절망적인 상황에 휩싸여 있었지만, 슬픔에 머무르지 않고 시를 통해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에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떠난 이후 겐조의 삶에는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습니다. 겐조 씨의 성경은 어린 조카딸이 한 장 한 장 넘겨주었고, 겐조의 눈 깜빡임을 해독하고 기록하는 일은 제수씨가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포기하지 않고 시를 써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하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감사 뿐이라는 놀라운 고백을 시(時)로 쏟아냅니다. 겐조의 옆에는 항상 그와 함께 기뻐하고, 울어주고, 기도해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어머니는 병으로 아들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절망적인 상황에 휩싸여 있었지만, 슬픔에 머무르지 않고 시를 통해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에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떠난 이후 겐조의 삶에는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습니다. 겐조 씨의 성경은 어린 조카딸이 한 장 한 장 넘겨주었고, 겐조의 눈 깜빡임을 해독하고 기록하는 일은 제수씨가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포기하지 않고 시를 써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분명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입니다.
    전신마비 장애인, 눈을 깜박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미즈노 겐조 씨가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수가 있었을까요?
    죽고 싶어서 흘린 그의 눈물이, 감사와 감격의 눈물로 바뀌자, 기적 같은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매일 감사 거리를 찾으며 나 답게 살아야겠어요.

    미즈노 겐조는 47년의 짧은 생애를 마치고 198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시를 통해 평안과 감사를 노래했습니다. 몸이 자유롭지 못했기에 늘 집 안에 갇혀 살아야 했지만 제한된 환경에서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가족의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그의 글을 읽는 내내 아픔도 감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의 글을 통해 ‘감사의 조건’을 놓쳐버리고 사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내가 가진 행복을 깨달을 수 있길 소망해 봅니다.

    시인 미즈노 겐조의 감사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다.’라고 괴테가 말했다. 
    그만큼 감사하는 생각과 언행이 인간의 삶속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는 말이다.

     일본에 미즈노 겐조라는 시인이 있다. 
    이 사람은 11살에 뇌성마비가 와서 전신이 흐물흐물한 해파리처럼 퍼져서, 말도 못하고 수족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유일하게 제 기능을 나타낼 수 있는 부위는 눈뿐이었다. 그는 검은 눈썹에 총기가 있는 눈동자를 가진 눈을 스스로 깜빡 거릴 수 있었는데, 그것이 그가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자리에 누워 꼼짝 못하는 전신마비 환자나 다름이 없었지만, 눈꺼풀만큼은 자신의 의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마저 안 되었다면, 그는 숨은 쉬지만 죽은 자나 별반 다름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미즈노 겐조는 모친의 도움을 받아 눈을 깜빡거리면서 한 자씩 글자를 선택하는 일을 반복했다. 
    모친이 글자판을 벽에 걸어놓고 막대기로 한 자씩 글자들을 훑어나갈 때, 미즈노가 눈을 깜박하면, 그걸 신호로 해서 모친이 글자를 종이에 받아 적곤 했다. 
    그런 방법으로 그는 아름다운 시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미즈노 겐조는 고통 속에서 창작한 시집을 세상에 발표했는데, 그 시집이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NHK 방송에서도 그 내용을 특집으로 보도했다.

    깜빡거리는 눈으로 한 자씩 써내려간 그의 시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네 권의 시집들 중에서, 첫 번째로 그가 출간한 시집에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후 12:9)’라는 시가 있다. 
    되짚어보면 그러한 최악의 조건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미즈노 겐조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족하다고 여길 수 있었던 건지, 다소 의문이 들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은 최악의 바닥상태에 놓여있는 처참한 자신의 신체적 조건까지도 감사할 수 있는 착하고 겸손하며 흔들림 없는 굳건한 믿음을 갖게 될 때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눈 깜빡이는 시인 미즈노 겐조(水野源三 , 1937-1984), 그는 조용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산과 들을 뛰어 다니는 건강한 소년이었지만, 그해 여름 홍역이 돌아 겐조도 감염되고 말았다. 고열이 내리고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이미 그 전의 겐조가 아니었다. 전신이 마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어 능력 조차 빼앗겨버린 것이었다. 이때부터 겐조의, 그리고 그 가족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겐조가 열두살 나던 어느 날, 마을의 한 교회 목사가 겐조의 집에 빵을 사러 왔다가 때마침 겐조를 알게 되어 한권의 책을 주고 갔는데, 그것은 성경이었다.

    처음 읽어보는 성경. 소년 겐조에게는 자신을 몰입시키는 하나의 세계였다. 매일 거르지 않고 성경을 읽어나가는 동안 겐조의 사고방식은 변화되고, 자신이 살아있어야 하는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여 그 얼굴은 날로 밝아져갔다.

    겐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삶의 주관자로 마음에 영접했다.

    그 후의 겐조는 더욱 변화되어갔고, 그의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면서 그의 얼굴은 웃음을 되찾게 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써 겐조는 누구에게나 만면의 웃음을 지어보이곤 했다.

    몸이 부자유스럽고, 말조차도 하지 못하는 그가 어떻게 시를 짓게 되었을까?

    그 계기가 된 것은 겐조를 진찰하던 의사가 "[예]라고 대답할 때는 눈을 감으라"는 주문을 한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겐조의 어머니는 이것을 단순한 대답뿐만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적용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물(水)을 뜻하는 일본어인 みず(미즈)를 찾을 경우, 오십음도(일본의 가나 문자를 순서대로 배열한 도표)를 사용하여 그의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아행(あ行)부터 차례대로 옆으로 짚어가면 아-카-사-타-나-하-마-야-라-와(あ-か -さ-た-な-は-ま-や-ら-わ)의 마(ま) 부분에 와서 겐조가 눈을 깜빡이면, 거기서부터는 밑으로 짚어가며 마-미-무-메-모(ま-み-む-め-も)의 미(み) 부분에 와서 또 한 번 눈을 깜빡이는 방식으로 한자 한자의 글을 찾으며 문장을 만들어 가는 엄청나게 고된 작업이었다.

    이렇듯 정말 엄청난 작업을 통해 그때까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겐조의 내면 세계가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그의 눈 깜빡임을 통해서 수백편에 이르는 시가 탄생하게 되었다. 미즈노 겐조가 [눈깜빡이는 시인]으로 불리우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시 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찬미와 기쁨이 가득 넘쳐흐르고 있다.

    미즈노 겐조의 이야기는 NHK에 특집으로 다뤄졌고, 그의 시집은 일본 문단의 걸작이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미즈노의 시집 중에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또 원망해도 부족할 텐데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가 쓴 시 몇편을 소개한다.

    내가 만일 괴롭지 않았더라면

    내가 만일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모든 형제자매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하루도

    신문 냄새에 아침을 느끼고  
    냉수의 시원함에 여름을 느끼고  
    풍경 소리의 서늘함에  
    저녁을 느끼고  
    개구리 소리가 드높아  
    밤을 느끼네
    오늘 하루도 끝이구나  
    한 가지 한 가지 일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며

    하나님의 크신 손 안에서  
    달팽이는 달팽이답게 가고 
    닭장 들꽃은 닭장 들꽃답게 피고  
    청개구리는 청개구리답게 울고  
    하나님의 크신 손 안에서  
    나는 나답게 산다

    평화

    나는
    나라도 말하는 언어도 생각하는 일도  
    각각 다른 수십억의 인간들이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곁으로 돌아오도록  
    아침에도 기도 드리고
    저녁에도 기도 드린다.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기도 드려 구하세요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기도 드려 결정하세요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주님의 뜻대로만 행하세요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악마의 유혹에 조심하세요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주님의 은혜와 뜻을 찬양하세요

    당신의 집 당신의 마음에

    당신의 집 당신의 마음에  
    사랑 어린 발길로 걸어오시는  
    주 예수님 영접을 위하여  
    준비를 서두르세요  
    당신의 집 당신의 마음에  
    사랑 어린 음성으로 나직이 부르시는  
    주 예수님 영접을 위하여  
    지금 곧 문을 여세요  
    당신의 집 당신의 마음에  
    사랑 어린 눈길을 보내시는  
    주 예수님 영접을 위해  
    모든 일을 다 끝마치세요


    나의 마음 속에

    나의 마음 속에 소망이 있네  
    그리스도가 주셨다네  
    근심 중에 있어도 변함이 없네

    아직 안 보이는걸

    기다리는 소망  
    나의 마음 속에 기쁨이 있네  
    그리스도가 베풀어 주셨다네  
    세월 흘러 간데도 소멸치 않네  
    세상에서 얻지 못할 기쁨 있다네  
    내가 전진해나갈 한 길이 있네  
    그리스도가 활짝 열어 주셨다네  
    어둠이 드리워도 헤매지 않네  
    저 천국에 이르는 기쁨이 있는 그 길

    잊어버리기 전에

    지금 들은 것 
    본 것
    마음에 느꼈던 것
    잊어버리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주님의 아름다운 일을
    찬양하는 시를 만든다.


    그렇지는 않아

    걸어가는 사람은 나 혼자
    그렇지는 않아
    그렇지는 않아
    나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걸어가신다.

    고민을 하는 사람은 나 혼자
    그렇지는 않아
    그렇지는 않아
    나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고뇌하신다.

    기도드리는 사람은 나 혼자
    그렇지는 않아
    그렇지는 않아
    나의 소원을 아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기도하신다.


    미즈노 겐조(水野源三. 1937~1984)

    뇌성마비 장애를 가졌던 그는, 일본 나가노현에 埴科郡 坂城 출생하였고, 14세 때 세례 받고 크리스천이 되어 18세 경부터 시를 짓기 시작하여, 수백편의 시를 남기고, 향년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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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틴 로이드 존스 (Martyn Lloyd-Jones, 1899-1981) 목사는 누구인가?


    20세기 최고의 설교자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辨證家)이며 문필가(文筆家)는 영국인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 1898-1963) 다. 그리고  20세기 최고의 복음 가수는 미국인 흑인 여(女) 가수인 마할리아 잭슨(Mahalia Jackson, 1911-1972)이다. 이것은 나의 주장이 아니다. 이렇게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루이스를 사탄이라고 험담하는 자들이 있기는 하나  그의 여러 책을 읽으면 다른 이들이 쓴 책들이 시시하게 여겨진다. 

    기독교 평신도이면 누구나 위에서 언급한 존스의 설교와 책을 만나고,  루이스의 책을 읽어야 하며.  잭슨의 복음 성가를 들어 봐야 한다. 나는 로이드 존스의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 그에 관해 글을 쓴다. 이 글은 존 피터스가 지었고, 서문강이 번역했으며, 2007년 출판사 지평원이 펴낸 책, ‘마틴 로이드 존스 평전(評傳)’과 이안 머리가 지었고, 김귀탁이 번역했으며, 2010년 출판사 부흥과개혁사가 펴낸 ‘은혜의 설교자 로이드 존스 (이 책은 그의 전기(傳記)이다)를 읽고 쓴 글이다. 위 두 사람이 저술한 책들에 관해서는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그들이 어떤 책인가 금방 알 수 있다.  잭슨의 노래도 들을 수 있다. 그녀는 노래는 참 좋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1899년 영국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웨일스의 카티프에서 태어났다. 삼 형제 중 둘째다. 그는, 영락교회와 국내와 국외(國外)에 600개의 교회를 세운 한경직 (1902-2001) 목사보다 3년 먼저 이 세상에 왔는데, 그는 1963년, 그의 나이 82세 때 소천(召天)했다. 그는 스펄전 목사가 이 세상을 떠난 지 7년 후에 이 세상에 왔다. 그가 태어나고 2일 후 무디 목사가 이 세상을 떠났다.

    로이드 존스는 부모와 두 형제와 함께 웨일스에서 자랐다. 가정 형편은 가난했다. 이 가난이 그의 가족이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던 1914년에 런던으로 이사하게 했다. 이 해에 그는 성 바돌로매 병원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한다. 이 병원은 당시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병원이었다. 후에 그의 부인이 된 베단도 역시 이 해에 웨스트민스터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한다. 그는 1921년에 왕립 의과대학 회원 자격과 왕립(王立) 내과 의사 자격을 취득하고 약학사 자격도 취득한다. 그는 신학에 관한 학위는 없다. 정규 신학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니는 가정에 태어났는데, 이런 가정적인 배경과 왕성한 독서와 뛰어난 두뇌가 설교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20세 중반에 회심(回心)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의사 자격을 취득한 1921년 그해에 당시 영국의 최고 의사로서 왕의 주치의(主治醫)였던 토머스 호더 경(卿)의 주목을 받고 그의 조수가 된다. 그는 1925년 왕립(王立) 의학협회가 주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M. R. C. P.라는 학위를 받는데, 그가 의학계에 계속 머물러 있었더라면 부와 명예가 그를 따랐을 것이고 유명한 그리고 성공한 의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로이드 존스는 1926년 그의 고향인 웨일스의 한 교회에서 설교했는데, 그 교회가 그의 설교에 매혹되어 그가 설교한 지 22일 만에 그 교회의 목사가 되어달라는 청빙을 받았다. 그는 이 청빙을 수락하고 의사의 직업을 버리고 목사의 길로 간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 뛰어난 의사로 촉망받던 의사, 연봉을 최소 2,500파운드를 받을 수 있었는데도 연봉 225파운드에 허름한, 노동자가 사는 집을 받고 목사가 되었다. 그가 의사의 직업을 버리고 목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그의 스승과 동료들은 매우 놀랐다.

    로이드 존스는 그의 고향 웨일스에서 1938년까지 12년 동안 목회자로 사역했고, 런던의 중심가 웨스트민스터 채플(영국에서는 국교인 성공회에 소속되지 아니한 교회를 채플이라고 부른다)에서 1968년까지 30년간 목회자로 일했다. 그는 은퇴 후에도 80대가 될 때까지 영국에서 순회하면서 설교를 계속했다. 미국에서도 설교했다. 그는 영국의 두 교회에서만 40여 년을 설교자로, 목회자로 섬겼다. 그는 은퇴 후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교수로 연속 강좌를 하기도 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 평전’을 쓴 존 피터스는 로이드 존스가 그의 생애는 “먼저 설교에 바쳐졌다”라고 하면서 그를 설교자(說敎者)와 설교가(說敎家)로 묘사하고 있는데, ‘은혜의 설교자 로이드 존스’를 저술한 이안 머리는 존 피터스의 묘사에 불만을 표시하면서 그를 설교자이면서 목회자(牧會者) 자라고 묘사한다. 사전에 따르면, 설교자와 설교가를 어떤 일의 견해나 종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사람이고, 목회자는 교회 안팎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여 신도의 신앙생활을 이끌어 주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데, 사전적인 의미에서 볼 때, 로이드 존스를 목회자로 부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그는 예배가 끝나면 항상 광고를 통해서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를 찾아오라고 하였고 모든 사람을 언제나 직접 만나 그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했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를 ‘20세기 최고의 설교자’, ‘설교자들의 황태자’, ‘최상의 설교자’, 20세기의 사도’라고 부르는데, 그의 전기를 쓴 이안 머리는 ’종교 개혁 이후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던 조지 휫필드(G. Whitefield), 스펄전(C. H. Spurgean) 그리고 찰머스(Chalmers)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한다. 캔달 박사는 로이드 존스를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며, 의심 할 여지 없이 20세기 가장 위대한 설교자이다”라고 평했다.

    신학교육을 전혀 받지 아니했던 스펄전도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로 그의 신도 5,000명의 이름을 일일이 다 기억했고, 그들의 개인사(個人事)를 다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로이드 존스의 기억력도 뛰어나서 성경 전체를 다 꿰들어 알고 있어서 그의 지식은 백과사전적이었다, 그의 기억력은 5년 전에 만난 사람들의 얼굴뿐 아니라 대화 하나까지 다 기억할 정도여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신학 수업을 받아 본 적이 없으면서도 성경의 근본을 포착하는 능력이 탁월하고 뛰어났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지 단순하게 설교자의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라고 말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설교했고, 지금도 설교하고 있다. 만일 하느님의 은혜가 허락한다면, 계속 설교할 것이다. 가난하고 지치고 주저하는 영혼을 그리스도의 집으로 인도하여 그 임금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라고 말했다. 그는 “내게 설교는 큰 신비입니다. 가장 신비스러운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라고 말했는데, 우리는 설교가 신비라고 밝히는 그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참된 설교는 하나님의 영이 역사한 결과이고 여기에 정확히 신비가 시작됩니다”라고 말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설교는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것을 조종하지 못한다고도 주장했다.

    그가 설교할 때, 신도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는 설교는 설교 현장에 그리스도의 임재를 위한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청자들은 그의 설교를 듣고 있을 때는 전혀 다른 일을 생각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의 설교는 한 번만 들어도 10년이 지난 뒤에도 기억이 사라지지 않은 그런 명설교였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의 전기 작가 이안 머리는 로이드 존스가 휫필드와 같이 “강단에서는 사자를 닮았고, 강단 밖에서는 어린양을 닮았다”라고 평한다.

    전기 작가 이안 머리는 로이드 존스의 설교가 권위 있었고, 성경적이었고, 분석적이었고, 설득력이 있었고, 실천적이었고 무엇보다 성령 충만하였다고 증언한다. 로이즈 존스는 참으로 비범해서 복음이 가져다주는 죄로부터의 자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소망에 대하여 어쩌나 담대하고도 확신 있게 증거 하는지 정말 놀라웠다고 기술한다. 예리한 그의 지성과 분석적이고, 논리적이고, 성경적인 그의 탁월한 그의 능력이 설교에서 찬란한 꽃을 피웠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설교였고, 청자들에게 주의의 산만을 허용하지 않는 설교였으며, 언어적으로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어린아이에게도 영향을 준 설교였으며, 그의 설교를 들은 많은 사람에게, 특히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일이 많았다. 처음으로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 중에는 그의 설교에 심한 혐오감과 반감을 품고 다시는 그 교회에 오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한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는 어떤 힘에 이끌리어 교회를 다시 찾게 되는 이들도 있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저 시골 먼 곳에서 런던의 그의 교회를 방문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의 교회, 웨스트민스터 채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를 갈망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구약성경이 현대 기독교에 해로운 영향을 준다고 무시하는 풍조가 난무하던 당대에, 로이드 존스는 이런 풍조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구역 성경은 신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전적인 신적 계시로 보았다. 그는 구약성경이 인간의 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계시하고, 하나님 없는 삶은 절대로 무익하며,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관한 책이라고 강조하면서 설교할 때 신약성경과 같은 비중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해서 설교했다. 그의 설교는 철저하게 성경에 기초했기 때문에 그를 비난하는 이들은 “로이드 존스가 지나치게 성경에 의존함으로써 불필요한 요구로 청자들을 괴롭혔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로이드 존스는 세상의 조류에 맞서면서 부와 명예를 멀리한 목회자로 살았는데, 일생 단 한 번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했고 단 한 번 TV 방송에 출연했을 뿐이다. 1970년대에 세계 50개 국가에서 백만 명이 넘는 독자들이 로이드 존스의 설교집을 읽었는데, 그의 나이 70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에베소서 강해와 로마서 강해가 책으로 출판되었다.

    로이드 존스는 가족을 크게 사랑한 사람이었다. 두 딸과 의사인 그의 아내를 크게 사랑했다. 그가 일생에서 제일 잘한 일을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고, 두 번째로 잘한 일은 그의 아내와 결혼한 일이라고 그는 술회(述懷)했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 것은 그의 가족을 두고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었다. 그가 임종이 가까웠을 때 말을 하지 못하고 필담으로 가족과 대화했는데, 마지막 대화가 그의 아내한테 한 말이, “여보 이제 하나님께 내가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아요, 나 하나님께 가오"였다.

    로이드 존스는 의사란 직업을 버린 것을 칭찬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 칭찬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더 큰 것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설교자로서의 칭찬도 받아들이지 않고, “저는 설교하기 위해 산 것이 아니라"라고 말하면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삶 자체가 설교의 한 부문이 되었는데, 그는 위대한 그리스도인답게 잠자는 중에 운명(殞命)했다.

    로이드 존스는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돼라"라는 바울 사도의 명령을 따라 일생을 산, 역사상에 나타났던 가장 위대한 그리고 포괄적 목회 사역자 중의 하나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로이드 존스의 기도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있는데, 그는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항상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늘 그의 신도들에게 기도할 것을 당부했다.

    다음의 두 이야기는 로이드 존스 목사가 그의 설교 중에 직접 밝힌, 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이야기와 다시금 헌신한 사람들의 예 중의 하나이다. 존 피터즈가 지었고, 서문강이 옮기었고, 2007년 12월 15일 출판사 지평원이 펴낸 마틴 로이드 존스 평전(評傳)의 57쪽과 58쪽에 있는 글을 그대로 여기에 적은 것이다. 이 글에서 ‘저’는 로이드 존스 자신을 말한다.

    이야기 1:

    “한번은 제가 준비한 설교의 반도 못 하고 강단에서 내려와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일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일이 그렇게 되었고, 그로 인해 어떤 의미에서는 다음 주일 설교를 이미 준비한 셈이 되었습니다.

    다음 주일 아침에 저는 그전에 했던 설교 중 하지 못한 나머지 부분을 한 편의 설교로 구성하여 설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하면서 특별한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날 예배를 마쳤을 때, 한 사람이 제게 와서 저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는 목사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그 목사가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데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너무나 감동하여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 먼 데서 겨기까지 오게 하신 것은 바로 이 특별한 설교를 듣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확신하였습니다.저는 「믿음의 시련」(Faith on Trial)이라는 저의 책 서문에 이 일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복할 만큼 이 일은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지금도 저는 그 사람의 생각이 옳았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만일 제가 지난 주일에 준비했던 이 설교를 끝까지 모두 전해버렸다면, 그분이 그날 들었던 그 설교까지도 이미 전 주일에 다 해 버린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어를 당했고, 그 전 주일에 제가 준비한 설교 분량의 반만 전하도록 허락받은 것입니다. 그 나머지 반은 그다음 주일에 전하도록 보전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처음에 그 점에 대해서 약간 석연치 않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해졌습니다. 우리가 상황을 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

    이야기 2:

    “저는 가공(可恐)할 죄로부터 회심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된 한 가련한 남자를 알고 있습니다. 제가 남웨일즈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불행히도 낙심 자(backslider)가 되었고 죄에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와 자녀들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함께 런던으로 도망하였고, 거기서 가진 돈을 모두 써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를 설득하여 돈을 더 뜯어내려고 거짓말을 하고, 자기 아내와 공동명의로 되어 있던 집의 명의를 자기 이름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돈을 얻기 위해서 집을 팔고 아주 먼 고장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무섭게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돈도 다 떨어지고 그 여자도 그를 버렸습니다.

    그는 너무나 철저하게 비참하게 되고 부끄럽기도 하여 감히 자살하기로 하였습니다. 깊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자신은 자기 가족에게 가까이 갈 권한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웨스트민스터 브리지를 향해 걸어가 자신의 몸을 템스강에 던지기로 단호하게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실행하기 위하여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가련한 영혼이 그 다리에 도착했을 때, 영국 국회의사당 시계탑에서 매시 30분에 치는 종이 울렸습니다.

    그때 갑자기 한 생각이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하였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지금 저녁 예배를 위해 강단에 막 올라가고 있을 것이다.’ 그는 삶을 끝내기 전에 제 설교를 마지막으로 들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약 6분 후 웨스트민스터 채플에 도착했고, 계단을 올라와 복도로 들어서면서 ‘하나님이여 낙심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저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간구가 그가 그날 그곳에서 처음으로 들었던 말이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일이 즉시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는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런던 교외에 있는 한 교회의 장로가 되어 오랫동안 탁월하게 섬겼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

    출생 1899년 12월 20일
    사망 1981년 3월 1일
    성별 남성
    국적 영국
    직업 복음주의 설교자, 의사

    데이비드 마틴 로이드 존스(영어: David Martyn Lloyd-Jones, 1899년 12월 20일 ~ 1981년 3월 1일)은 영국의사 출신의 복음주의 설교자이다. 존 스토트와 함께 한국교회에 가장 영향력이 많았던 목회자였다.

    청년 의사였던 로이드 존스는 40세가 되던 해에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그가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강연한 내용을 출판한 "목사와 설교"는 명저로 알려져 있다. 로이드 존스는 웨일스학파의 대표적인 회중교회의 목회자였다.

    웨스트민스터 성당

    로이드 존스는 기독교에 대해 불붙는 논리(logic on fire)라고 불렀다. 이는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감상적인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과 만나는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열정적인 집중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이 주장해야 하고, 또한 알아야 하며, 체험해야 하는 것은 어떤 일들을 하고 안 하는 것들에 대한 일반적인 아이디어나 행위들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만이 우리들의 목표이어야 합니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그리스도인의 목표 미달입니다.(복음의 핵심, 132쪽.).

    마틴 로이드 존스는 사회에서 출세한 사람들이 간증하는 일부 개신교 교회들의 모습들에 대해 "종교오락"이라는 말을 썼다. 즉, 교인이라는 소비자들의 니즈에 맞게 설교하고 목회하는 종교서비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설교의 의미를 훼손시킬 수 있음을 꿰뚫어본 것이다.

    간증자로 초대되는 사람들 중에는 해군 제독이나 육군 장성처럼 특별한 직함을 가진 이들도 있고, 야구선수나 연극배우, 영화배우, 가수처럼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이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설명하고 설교하는 일보다 그런 이들의 간증 듣는 일을 훨씬 더 가치 있게 여깁니다. 제가 이 모든 것을 ‘오락’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눈치 채셨습니까? 저는 이런 일들이 당연히 오락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설교에 등을 돌리고 이런 오락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설교와 설교자 26).

    로이드 존스는 설교는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설교자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학문인 신학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설교를 잘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하거나, 교인들에게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가르치는 현대교회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특별히 조직신학과 교회사는 그의 설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1959년부터 1978년까지 웨스트민스터 청교도 연구회( Puritan and Westminster Conferences)에서 19회분을 강연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부으심이 말씀 선포로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령의 불을 끄는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부흥운동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며, 칼빈주의가 만일 메소디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지성주의와 스콜라주의로 흐른다고 경고하였다. 그렇게 함으로 신앙고백이 성경을 대체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질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는 열광주의 즉 감정 조절이 한되는 상태를 옹호하며, 이것을 칼빈주의자들이 반박한다고 주장하였다.[1]

    로이드 존스의 저서로는

    • 목사와 설교, CLC
    • The Miracle of Grace, 은혜와 기적, 백합출판사, 1987
    • 영적 침체와 치유, 이용태 역, 기독교문서선교회(CLC), 2001
    • 하나님 나라(복있는 사람)
    • 사도행전 강해시리즈(승리하는 기독교 등, 복있는 사람)
    • 설교와 설교자(복있는 사람)
    • 내가 자랑하는 복음, 복있는 사람, 2008
    • 로마서 강해, 기독교문서선교회
    •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The Puritans: Their Origins and Successors) 서문강역, 생명의 말씀사 2002.

    가 있으며, 특히 복있는 사람에서는 개혁주의 신학단체인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와 계약하여 로이드 존스의 책을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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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Christ-centered Preaching by Bryan Chapell)


    "Fallen Condition Focus!" (타락된 상태에 초점!)

    2015년 RTS Jackson에 온 Bryan Chapell 교수는 이것을 반복적으로 힘주어 강조했다.

    그는 부드럽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로 강해설교의 지향점을 차분히 전달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를 강조하는 개혁주의 전통은 필연적으로 강해설교(Expository Sermon)에 대한 강조로 귀결된다. 설교는 성경의 적용이고, 예배의 중심이며, 지역교회의 풍향계다. 그만큼 설교에 대한 고전(古典)들도 많다. 로이드존스의 <설교와 설교자; Preaching and Preachers>, 조엘 비키가 엮은 <타오르는 강단; Pulpit Aflame), 그리고 팀 켈러의 <설교; Preaching>까지 강해설교의 원리와 적용을 세심하게 다룬 서적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미국 칼빈신학교 학장이자 실천신학 교수인 브라이언 채펠 박사의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Christ-centered Preaching>은 설교의 준비와 전달에 있어 매우 실용적이다. 책은 크게 (1) 강해설교의 원리, (2) 강해설교의 준비, 그리고 (3) 그리스도 중심 메시지의 신학,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1. 강해설교의 원리

    이 부분에서 체펠 박사는 성경본문의 우선성을 말한다. 사실 설교자가 반드시 가져야 할 준비자세는 성경본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적극적인 의뢰다. 또한 그는 설교에 있어서 통일성 있는 원 포인트 설교를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How many things is a sermon about? One!) 하나의 명제(Proposition)를 제대로 전달하라! 그리고 체펠 박사는 그의 독창적인 개념이기도 한 FCF(타락상태초점; the Fallen Condition Focus)를 소개한다.

    FCF is the mutual human condition that contemporary believers share with those to or about whom the text was written that requires the grace of the passage for God's people to glorify and enjoy him. (타락상태초점(FCF)이란 오늘날 신자들이 성경본문이 기록될 당시 그 대상이었던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필요한 은혜를 공유하는 공동의 인간적 관심사이다.)

    Christ-centered Preaching, 50

    정의(definition)에서 알 수 있듯이 FCF는 항상 부정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인간공통의 상태다. FCF는 성경본문이 고치거나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체펠 박사가 제시하는 설교론은 본질적으로 변증적(Apologetic)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설교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감추기보다 오히려 극대화해서 설득과 수긍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물론 그 자신이 복음진리의 전달에 있어서 Logos - Pathos - Ethos의 연결고리들을 언급하지만 FCF는 보다 Logos의 영역에 가깝다.

    강해설교의 구조는 <설명(Explanation) - 예화(Illustration) - 적용(Application)>의 세 부분의 연결고리로 구성된다. 각 부분의 분량은 본문과 대상에 따라 상이하다. 체펠에 따르면, "설교를 하는데 있어서 구성 요소들의 비율을 결정하는 규칙은 없다.... 종교개혁 지도자들은 듣는 사람의 욕구와 능력에 맞추어 설교하라고 조언했다. [WLC, 159] 이 지혜로운 조언은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거나 명성을 드내기 위해 설교하지 말아야 할 것을 상기시켜준다." 우리는 체펠 박사의 조언에 따라 RTS Jackson 재학당시 Preaching Lab에서 각 대지마다 1개씩의 예화(Illustration)를 꼭 첨부할 것을 훈련받기도 했다. 그것은 생생한 심상을 가질 때에 본문과 교리의 의미를 보다 잘 기억하게 되는 청중을 위한 훈련이었다. 예수님과 바울이 몸소 보여주었듯이 대상이 달라지면 설교의 구성과 전달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2. 강해설교의 준비

    체펠 박사는 설교 준비를 위한 6가지 질문을 제시한다. 특별히 4번째 질문은 FCF를 확정하는데 있어 중요하다.

    1) 본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 본문의 의미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3) 어떤 관심사들 때문에 본문이 기록되었는가?

    4) 본문을 기록한 사람 및 그 대상과 우리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5) 본문의 진리에 대해 오늘날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6) 본문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그 다음으로 설교준비의 4단계는 다음과 같다.

    (1) 관찰 - (2) 질문(6하원칙, 담화분석; Discourse Analysis) - (3) 관련(청중과의 관련성) - (4) 구성(설교문)

    설교의 도입부는 관심을 유발할 수 있는 영역이어야 한다. 흥미로운 예화로 시작할 수도 있겠으나 이 설교가 나오게 된 계기나 지향하는 목표, 곧 말씀을 갈망하게 하는 것과 맥락연결과 같은 선행주제(ante-theme)가 적절하다.

    3. 그리스도 중심 메시지의 신학

    이 부분에서 체펠 박사는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는 본질적으로 구속적 설교(Redemptive preaching)라고 말한다. 체펠은 제이 아담스(Jay Adams)의 말을 인용한다. "만약 당신이 유대교인이나 유니테리언주의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설교를 한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설교이다.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설교는 독특해야 한다. 설교를 독특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설교 전체에 구원하시고 성화시켜주시는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것이다. 당신이 전하는 설교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복음적인 설교와 교화적인 설교 모두에 적용된다.... 청중이 성경에서 요구하는 모든 것을 자력으로 행할 수 있다는 듯이 그것들을 행하라고 권면해서는 안된다. 청중은 십자가의 구원하는 능력과 성령 안에서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내주하시며 거룩하게 하시는 능력, 행하게 하시는 능력의 결과로서 성경이 요구하는 것들을 행할 수 있다."

    이와같은 구속적 진리의 중심성은 지속적으로 강조된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체펠 박사는 결코 교화적인 설교, 이를테면 당신은 본받아야 하고, 더 거룩해져야 한다는 설교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그는 이와같은 설교가 인본주의와 도덕주의로 흐르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의 중심성이 항상 견고하게 견지되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2026년 사순절 새벽 묵상 자료 / 하나님의 질문과 인간의 대답







    염려의 치료 

    1. 기도하기를 힘쓰라. 눅18: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 기뻐하기를 힘쓰라.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3. 신뢰하기를 힘쓰라. 마6:25-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 4. 일하기를 힘쓰라. 데살로니가전서 4:11
    또 너희에게 명한것 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5. 당신의 축복을 세어보기를 힘쓰라.

    6.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에게 주의를 집중하라. 빌립보서 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히브리서 3: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베드로후서 3: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사도행전 19:27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이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신명기 20:8
    유사들은 오히려 또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에 겁내는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찌니 그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떨어질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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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네카는 ‘그림의 떡은 떡이 아니요, 붙지 않은 불은 불이 아니며, 간절하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기도는 믿음 안에서 간구하는 요청이며, 때로는 목숨을 건 전투 같은 것이며, 때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모험이기도 하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역사가 「H.C 월즈」가 쓴 단편집 <대주교의 죽음>을 보면 의미심장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어느 대주교가 그날 밤도 습관처럼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눈앞에 빛이 보이면서 신비한 음성이 들리더라는 것이었다.
    “내가 네 기도를 듣는데, 그래 무슨 일이냐(Yes, What is it)?"
    그 소리에 너무 놀란 나머지 대주교는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평생을 기도했던 대주교이지만 자신의 기도가 형식적인 기도에 불과했던 까닭에 막상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자 놀라서 죽어 버리고 만 것이다.
    지금 하나님께서 당신 앞에 나타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 ~ 65년 4월
    로마제국시대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
    로마 제국의 황제인 네로의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동명의 아버지 대 세네카와구분하기 위해 소 세네카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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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
    고대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의 창세 신화입니다. 
    이름은 아카드어로 “하늘이 아직 없을 때”라는 뜻의 첫 구절 “Enuma Elish”에서 유래했습니다. 
    기원전 약 12세기~18세기 사이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주로 바빌로니아 신인 마르둑(Marduk)을 중심으로 한 신들의 계보와 세계 창조를 다룹니다.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혼돈의 시작 
    원초적 신들 아푸(Apsu, 담수)와 티아마트(Tiamat, 염해)가 존재합니다. 
    신들이 혼재하며 질서가 없는 상태. 

    2. 신들의 세대 교체 
    아푸와 티아마트의 자손 신들이 등장하고, 새로운 신들의 활동으로 혼돈이 지속됩니다. 
    아푸는 젊은 신들을 제거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죽임을 당합니다.

    3. 티아마트의 복수
     
    티아마트가 아푸의 죽음에 분노하여 혼돈의 군대를 일으킵니다. 
    새로운 신들이 두려움에 떨지만, 젊은 신 마르둑이 나타나 싸움에 나섭니다. 

    4. 마르둑과 티아마트의 전투 
    마르둑은 티아마트를 물리치고 그녀를 반으로 쪼갭니다. 
    한쪽 반은 하늘이 되고, 다른 한쪽 반은 땅이 됩니다. 
    마르둑은 세계의 질서를 세우고, 신들을 배치하여 통치 체계를 확립합니다.  

    5. 인류의 창조
     
    인간은 신들의 노동을 대신하도록 창조됩니다. 
    티아마트의 군대였던 신들의 피 일부로 인간이 만들어졌다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6. 마르둑의 지배 확립 
    바빌로니아 중심 신으로서 마르둑을 찬양하며, 바빌로니아 왕권과 신권의 정당성을 신화적으로 뒷받침합니다. 

    특징 및 의의

    1.  
    고대 근동 창조 신화 중 가장 완전하게 남은 문서.
    2.  신들의 계보, 전쟁, 창조 과정을 서사시 형태로 기록.
    3.  바빌로니아의 정치적·종교적 우월성을 신학적으로 정당화.
    4. 성경 창세기와 비교할 때, 혼돈 속에서 신이 세계를 질서 있게 만드는 구조가 유사하지만, 다신론적 관점영웅적 전투가 중심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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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 창세 서사시입니다. 
    이름은 아카드어 문장 “Enūma Eliš”에서 유래하며, 의미는 “위로 올라왔을 때” 정도로 번역됩니다. 
    이 서사시는 바빌로니아의 신 마르두크(Marduk)가 혼돈의 신 티아마트(Tiamat)를 물리치고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주요 구조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서문과 신들의 혼돈 
    초기에는 물과 혼돈을 상징하는 신들이 존재합니다. 
    아푸(Apsu, 신성한 담수)티아마트(Tiamat, 신성한 바다)가 주된 원시 존재입니다. 
    신들은 질서를 이루기 이전의 혼돈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2. 신들의 갈등 
    젊은 신들의 소란으로 아푸가 티아마트와 함께 젊은 신들을 멸하려 합니다. 
    하지만 에아(Ea, 지혜의 신)가 아푸를 살해하고 질서를 지킵니다. 

    3. 마르두크의 등장과 승리 
    티아마트가 보복으로 혼돈의 괴물을 창조합니다. 
    마르두크가 티아마트와 전투를 벌이고 승리합니다. 
    티아마트의 몸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합니다. 

    4. 세계와 인간 창조 
    마르두크는 신들에게 인간을 창조하여 노동을 맡기게 합니다.  
    인간은 신들을 섬기고, 신들의 질서를 유지하는 존재로 설정됩니다. 

    5. 질서의 확립과 숭배 
    마르두크는 바빌론의 수호신으로서 최고 신으로 자리 잡습니다. 
    바빌론 중심의 신관과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신학적 / 문화적 의미

    에누마 엘리쉬는 단순한 창조 신화가 아니라 정치적·종교적 정당화를 담고 있습니다. 
    바빌론 왕권과 신권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혼돈 속에서 질서를 세우는 신화적 모티브가 특징입니다. 
    또한 인류의 역할과 노동, 신들의 계층 구조에 대한 고대 메소포타미아인의 사고를 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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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는 오스카 와일드의 우화적 단편 중 하나로, 보통 예수와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그 이후’를 상상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 이야기는 정식 성경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의 기적을 받은 사람들이 그 은혜 이후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문학적 장치입니다.

    1. 첫 번째 만남 — 주정꾼

    이야기의 시작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한 주정꾼을 만납니다. 
    예수는 그를 보고 묻습니다. 
    “왜 그렇게 타락한 삶을 살고 있느냐?”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저는 한때 문둥병자였습니다. 당신이 저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핵심 의미 / 이 장면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굉장히 날카롭습니다.
    은혜(치유)는 받았지만그 이후 삶은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 
    즉, 기적은 받았지만 삶은 거룩해지지 않은 상태

    신학적·문학적 핵심 구조 /  이 우화는 다음 구조를 드러냅니다:

    은혜 (치유, 구원)

    책임 (삶의 변화)

    타락 (은혜의 오용)
    오스카 와일드는 여기서 묻습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이 방종의 이유가 될 수 있는가?”  

    이 장면의 깊은 아이러니 

    주정꾼의 말은 겉보기에는 논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왜곡입니다:

    • “나는 병자였고 고침 받았다”
      → 사실
    •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살아도 된다”
      → 자기 합리화

    즉, 👉 은혜를 ‘목적’이 아니라 ‘면죄부’로 바꿔버린 상태 

    계속 이어지는 구조 (예고)

    이 단편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 음란한 삶을 사는 사람
    • 세속적 욕망에 빠진 사람

    등을 계속 만나면서

    👉 “은혜 이후의 인간”을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핵심 한 줄

     “은혜는 변화를 위한 시작이지, 타락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아니다.”


    Oscar Wilde의 우화적 단편 가운데, 흔히 “그 이후(The Doer of Good)” 
    예수께서 과거에 은혜를 베풀었던 사람들을 세월이 지난 후 다시 만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술 취한 사람

    예수께서 한 사람을 보니 심하게 술에 취해 타락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물으십니다. 
    “왜 이렇게 타락했느냐?”
    그 사람이 대답합니다. 
    “주여, 당신이 나를 고쳐 주셨기에 이제 나는 할 일이 없어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은혜가 목적이 아니라 쾌락의 수단으로 변질된 상태 

    타락한 여인 

    예수께서 묻습니다.  
    “왜 이렇게 살고 있느냐?” 
    여인이 대답합니다. 
    “주여, 당신이 내 죄를 용서해 주셨으니 이제 나는 자유입니다.” 
    용서를 ‘방종의 면허’로 오해한 모습

    부유한 청년

    마지막으로 한 부유한 청년을 만납니다.
    그는 쾌락과 사치 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묻습니다. 
    “왜 이렇게 살고 있느냐?” 
    그가 대답합니다. 
    “주여, 당신이 나를 죽음에서 살리셨으니 내가 무엇을 더 하겠습니까?” 
    생명조차 자기 중심적으로 소비하는 모습

    핵심 메시지

    이 우화는 매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은혜 이후 인간은 어떻게 사는가? 

    치유 → 책임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방탕
    용서 → 거룩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방종
    생명 → 감사로 이어지지 않으면 자기중심 
    즉, “은혜는 출발점이지, 면허증이 아니다.”

    신학적· 철학적 구조 
    이 이야기는 사실 이렇게 정리됩니다.

    은혜 → 반응

    1. 왜곡된 반응 → 타락
    2. 바른 반응 → 감사 + 변화

    핵심 통찰 / Oscar Wilde는 이 짧은 이야기로 이렇게 말합니다.
    • 인간은 은혜를 받아도 반드시 변화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은혜가 더 큰 타락의 명분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우화는 결국 묻습니다. 
    “당신은 은혜 이후 어떻게 살고 있는가?”

    “값싼 은혜” “값비싼 은혜”라는 개념은 신앙적· 영적 삶에서 매우 중요한 구분입니다. 
    이 용어는 종종 디트리히 본회퍼《값싼 은혜》에서 강조한 내용에서 비롯됩니다.

     1. 값싼 은혜 (Cheap Grace)

    • 정의 : 죄를 뉘우치거나 회개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쉽게 받는다고 생각하는 태도.
    • 특징
      • 회개 없는 용서 강조
      • 신앙생활의 책임감이나 헌신이 거의 없음
      • 죄와 죄책감을 가볍게 여김
      • “믿기만 하면 된다”는 표면적 신앙 강조

    • 문제점
      • 신앙의 깊이가 없음
      • 행동과 삶의 변화가 결여됨
      • 실제로 인간적 성장이나 성화(sanctification)와 연결되지 않음
    값비싼 은혜 (Costly Grace)
    • 정의 :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삶 전체를 하나님께 헌신하며,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과정에서 체험하는 은혜.
    • 특징
      • 회개와 자기 부정(self-denial) 포함
      • 삶의 변화와 헌신 요구
      • 신앙과 삶이 통합됨
      • 진정한 용서와 평안을 경험함
    • 결과
      • 내적 성장과 성화
      •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형성
      • 책임 있는 신앙 실천 가능
    핵심 비교
    구분 값싼 은혜 값비싼 은혜
    조건 없음 회개, 헌신, 순종
    죄에 대한 태도 무감각, 가벼움 진정한 회개
    신앙의 깊이 피상적 깊고 실제적
    삶의 변화 거의 없음 삶 전반 변화
    예시 “믿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십자가를 따르며 나 자신을 내어놓는다”

    한 줄 요약

    • 값싼 은혜는 쉽게 얻지만 공허하고,
    • 값비싼 은혜는 비용이 들지만 참된 자유와 삶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질문

    예수님은 질문하는 데 달인이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질문 중 가장 좋은 것들을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 기록된 300개가 넘는 질문을 하셨다고 합니다.


    3월 27일(금) 요한복음 21:15-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7절)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을 먹이라.
    The third time he said to him, "Simon son of John, do you love me?" Peter was hurt because Jesus asked him the third time, "Do you love me?" He said, "Lord, you know all things; you know that I love you."

    세번 질문을 하셨습니다.

    첫번째 질문(15절)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두번째 질문(16절)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을 치라.

    세번째 질문(17절)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을 먹이라.


    요한복음 21장 15–17절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후, 각각의 답변에 따라 “먹이라”와 “치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본문 위치와 원어

    • 요한복음 21:15–17
      예수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 “주여, 그렇습니다. 당신이 아십니다.”
      예수님: “내 양을 먹이라(ποιμαινε, poimaine).”
      (원어: προβατα ποιμαινε → ‘내 양을 목양하라’, ‘돌봐라’)

    • 한 번은 “치라(τιμα)”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는데, 헬라어 원문에서는 기본적으로 ποιμαινε (poimaine)입니다.
      한국어 성경 번역에서 “먹이라”와 “치라”는 같은 헬라어 동사를 두 가지 뉘앙스로 옮긴 것입니다.


    “먹이라”와 “치라”의 뉘앙스

    명령어 번역 뉘앙스 / 의미
    먹이라 Feed 실제 양에게 먹이를 주는 느낌 → 양을 영적으로 공급하고 돌보라
    치라 Tend / Shepherd 양을 돌보고 보호하라는 의미 → 관리, 지도, 책임
    • 즉, 먹이라는 “양에게 생명을 주는 먹이를 제공하라”는 돌봄과 공급의 측면

    • 치라는 “양을 돌보고 인도하라”는 보호와 목양의 측면 


    신학적 의미
    1. 세 번 반복

      • 베드로의 세 번 부인 회복과 연결

      • 각각의 “먹이라/치라”는 그의 사명 전인적 목양을 의미

    2. 영적 지도자 역할

      • 단순히 양을 먹이는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공동체와 신앙을 책임지고 돌보라는 사명

      • “먹이라” = 말씀과 은혜로 양을 공급

      • “치라” = 영적 훈련과 보호, 유혹과 위험에서 양을 지킴

    3. 믿음과 사랑의 행위

      • 사랑에 근거한 사명 수행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내 양을 먹이고 돌보라’로 연결 → 사랑과 책임이 일치함

    요약

    • “먹이라”와 “치라”는 원어상 동일 동사, 한국어 번역에서 약간 다른 뉘앙스로 표현

    • 핵심 의미: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맡긴 양(제자들)을 영적으로 공급하고 돌보라는 사명

    • 세 번 반복 → 세 번 부인 회복, 사랑의 실천과 책임 강조


    요한복음 21장 15–17절의 헬라어 원문과 번역을 비교하며, “먹이라” (feed) vs “치라” (tend, shepherd) 뉘앙스를 문맥상에서 시각화하는 표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각 단어가 갖는 의미와 사용 상황까지 함께 정리하면 차이가 명확해집니다. 

    요한복음 21:15–17 헬라어 원문 및 번역 비교

    헬라어 원문 직역/번역 “먹이라 / 치라” 단어 의미 뉘앙스
    21:15 Ἀγαπᾷς με πλεῖν; λέγει αὐτῷ ὁ Ἰησοῦς· Βόσκε τὰ πρόβατά μου.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내 양을 먹이라.” βόσκε (boske) ‘먹이다, 양식 주다’ – 실제 먹이 주는 행위 강조, 돌봄의 실질적 측면.
    21:16 πάλιν λέγει αὐτῷ· Ἀγαπᾷς με; λέγει αὐτῷ· Βόσκε τὰ πρόβατά μου. 또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에게 말씀하시되, “내 양을 먹이라.” βόσκε (boske) 앞절과 동일, 반복 사용으로 양에 대한 구체적 책임 강조.
    21:17 τῇ τρίτῃ λέγει αὐτῷ· φιλεῖς με; λέγει αὐτῷ· Ποίμαινε τὰ πρόβατά μου. 세 번째 말씀하시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에게 말씀하시되, “내 양을 치라.” ποίμαινε (poimaine) ‘치다, 목양하다, 지키다’ – 단순히 먹이는 것을 넘어, 지도·보호·인도하는 영적 돌봄 강조.

    시각적 비교: “먹이라” vs “치라”

    먹이라 (βόσκε)
    ┌──────────────────────────────┐
    │ 양에게 실제 먹이를 제공하고 │
    │ 돌보는 구체적 행위 강조 │
    └──────────────────────────────┘

    치라 (ποίμαινε)
    ┌──────────────────────────────┐
    │ 양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
    │ 영적·목양적 책임 강조 │
    └──────────────────────────────┘
    • 문맥상 의미

      • 1~2번째 질문: “먹이라” → 제자에게 실질적 돌봄을 맡기심 (양에게 먹이를 주는 행동)

      • 3번째 질문: “치라” → 제자에게 영적 지도와 보호 책임까지 강조 (단순 돌봄을 넘어 목자로서의 사명)

    즉,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점점 더 깊은 책임을 부여하시며, 단순히 양을 먹이는 수준에서 영적 목양까지 확장시킵니다.


    3월 26일(목) 요한복음 11:17-2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것을 네가 믿느냐?(26절)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and whoever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먼저 마르다의 ‘믿음’을 깨우십니다

     “죽음을 통과해도 끝나지 않는 생명”
     “지금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

    즉, 이 말씀은 ‘나중에 천국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생명의 상태를 말합니다

    당신은 이것을 믿습니까?

    성경은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것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큰 슬픔과 큰 희망이 담긴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인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며 살고 믿는 모든 사람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개인적인 통찰력 있는 질문을 더하십니다. 
    당신은 이것을 믿습니까? 
    이 질문은 분명히 마리아나 마르다에게만 던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지만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영생을 얻습니다. 
    믿음은 단 한 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보고 싶어하는 어떤 눈먼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들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예, 주님." 그러자 그는 그들의 눈을 만지며 말했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직면하는 어려움과 도전 속에서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하며, 예수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상황을 다루실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본문 핵심 구조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 현재 진행형 믿음 (지속적 신뢰, 단순 지식 아님)

    → 육체적으로 지금 살아 있는 상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 단순한 지식이나 동의가 아니라
    자신을 맡기고 의지하는 신뢰 (헬라어 πιστεύων)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 육체적 죽음은 겪지만,  존재의 단절(영적 죽음)은 없다

    → 육체의 죽음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영적 죽음)이 없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 단순 교리가 아니라  개인적 결단을 요구하는 질문 

    이건 정보 확인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향한 질문입니다  

    이해했느냐?
    동의하느냐 ? 
    정말로 이것에 네 인생을 걸겠느냐?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미래를 믿느냐?”가 아니라  “지금 생명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믿느냐?”


    헬라어 핵심 (깊이)

      
    “믿는 자” →
    • “죽지 아니하리니” → οὐ μὴ ἀποθάνῃ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   “영원히 결코 죽지 않는다” (강한 이중부정) 
    의미의 긴장  /  이 말씀은 모순처럼 들립니다:
    • 실제로 사람은 죽는다
    • 그런데 “죽지 않는다” 하심

     예수님의 관점

    구분 세상 관점       예수님의 관점
    죽음             통과
    생명 육체 중심        하나님과의 관계
    믿음 생각           존재 상태

    핵심 메시지 / 
    이 말씀은 설명이 아니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교회 다니느냐?
       지식이 있느냐?
       감동 받았느냐?
     이런 것들이 아니라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심으로 믿는가?

    지금 살아 있는 상태에서 나를 신뢰하느냐? 

    한 줄 정리 /  “죽음을 없애는 말이 아니라 죽음을 더 이상 ‘끝’이 아니게 만드는 선언”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단편소설에서 인간의 욕망을 묻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가?”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저마다 다르다. 
    태어나는 시각도 다르고,  인생을 마감하는 시각도 사뭇 다르다.
    결국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살아있는 기간만큼’이다.  
    길고 짧음은 비교의 문제일 뿐, 본질은 ‘시간이 어떻게 쓰였는가’ 에 달려있다.     

    2026년 2월은 모처럼 네 줄의 숫자들이  빽빽히 채워져 충만했는데, 어느덧 사라지기 일보직전이다.      

    2월 1일 주일
    2월 28일 토요일

    가장 짧은 2월달을 보냈지요.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는다. 
    시간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쓰임의 문제’라는 사실을!.  
    결국 내가 쓰는 시간이 나를 만든다.

    직장인들 사이에는 이런 농담이 있다.  
    “2월같은 달이 1년에 몇개 더 있었으면 좋겠다.”  

    출근일이 적으니 여유가 있는것 같지만, 줄어든 시간만큼 하루하루가 더 농축된 기분이다.  
    실제 월급도 다른 달과 같은 것은 줄어 든 날 수 만큼, 노동의 강도(强度)와 질(質)이 강화되었기 때문일까!    

    기다려지는 봄은 아직 저만치 멀리있고, 
    찬 바람은 여전히 매섭다.
    해는 조금씩 길어지지만 
    체감온도는 여전히 겨울에 머문다. 
    빨리 넘어가는 날짜만큼이나 유난히 숨가쁘게 바쁜 달이 바로 2월인 것같다.
    그래서 2월은 ‘시간의 길이’보다 ‘체감의 밀도’로 지내는 달이다.

    달력의 기원은 고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45년경, 
    로마의 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흩어진 시간의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달력을 제정했다.  
    당시 로마에서는 3월이 새해의 시작이었고,
    2월은 한 해의 마지막 달이었다. 
    열두달 중에 대개는 31일, 또는 30일이지만, 
    유독 2월만 28일로 가장 짧은 달이 되었는데, , , , 
    누구나 한번쯤 의문을 품어 보았음직 하다. 

    1년을 365일로 정하고, 
    31일과 30일을 달(月)에 교대로 배치하다 보니 
    1년이 366일이 되었다. 
    결국 마지막 달, 2월에서 하루를 조정해  총 365일로 맞추었다.

    율리우스(Julius) 이후에 등장한 아우구스투스(Augustus) 로마 황제는 
    자기 이름을 붙인 8월(August)이 율리우스의 이름을 딴 7월(July) 보다 하루가 적다는 사실을 몹시 언짢아 했다. 
    결국 마지막 달 2월에서 하루를 8월로 옯겨, 31일로 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2월이 짧은 이유는 ‘로마 황제들의 욕심’ 때문이라는 설이 있지만, 그 정확성은 아직도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로마인들은 이런 논쟁을 통해 문명은 더 밝아진다고 믿는 것같다.  

    세상의 불균형은 때때로 권력자의 자존심에서 비롯되기도 한다는 풍자(諷刺)가 생각난다.
    이렇게 2월은 다른 달들의 체면을 세워주느라 짧아졌다.  
    ‘채움’에는 시간이 걸리지만, 
    ‘비움’은 한 순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삶에서 체득한다.

    고대 로마인들은 
    매년 2월15일이 되면,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는 정화 의식을 행했다. 
    이 축제를 ‘페브루아(Februa)’ 라 불렀고, 
    ‘죄를 씻는다’ 는 뜻의 라틴어 
    ‘페브루아레(Februare)’에서 
    오늘날 영어 ‘February (2월)’ 가 파생되었다. 

    로마인들은 마지막 달, 
    2월에는 묵은 죄와 허물을 씻어내고, 
    신년 3월을 맞이한다는 전통을 이어갔다.

    ‘짧음’은 ‘작음’, 
    또는 ‘아쉬움’ 과 일맥상통되는 말이다.
    “작은 고추가 더 맵다” 는 말이 있다. 
    “값진 것은 작은 상자에 담겨있다
    (Good things come in small packages)” 라는 
    미국 속담도 있다. 
    ‘작은 거인(Little Big Man)’은 
    비록 체구는 작지만 정치력과 능력, 
    그의 공로가 뛰어난 인물을 뜻한다. 
     
    역사와 자연, 
    예술의 세계에서도 
    ‘작은 것’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다윗과 골리앗과의 싸움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소년 다윗의 손에 들린 것은 
    물매(Sling)와 작은 돌멩이 몇개, 
    그러나 골리앗은 6척 큰 키에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로 무장한 거인 장수였다. 
    전투는 간단했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은 크기가 아니라 
    정확성이었다. 

    자연 현상에서도 ‘번개’는 순간이지만, 
    ‘천둥’보다 하늘을 먼저 가른다. 

    겨자씨는 비록 작지만, 
    자라서 큰 숲을 이루고 
    그 속에 새들이 깃든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에술에서도 ‘짦음’은 강력하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운명’ 의 첫 부분은 
    단 네개의 음(音)으로 시작한다. 
    짧지만 강렬한 그 음의 울림이 
    교향곡 전체가 끝날 때까지 
    청중의 심장을 움켜 쥔다. 
    그것은 ‘밀도의 힘’이다. 

    “인생은 짧고, 에술은 길다” 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시간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된 말이 아닐까!
    짧음은 미완이 아니라 
    압축에 더 가깝다. 
    긴 것은 펼쳐 진 것이고, 
    짧은 것은 응축된 것이다. 
    응축된 것은 밀도가 높고, 
    높은 밀도는 오래 간다.

    나를 나되게 만든 것은 
    ‘소유한 시간이 아니라, 
    의미를 부여한 시간’이다’.      
    2월을 살면서 
    ‘시간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쓰임에 달렸다’ 는 진리를 깨닫는다.
    로마의 마지막 달,
     2월을 보내면서 
    새 해의 새 봄을 맞이해야겠다.     




    한국에서 모르면 곤란한 외래어와 신조어

    1. 워라벨 – 일과 삶의 균형 (Work and Life Balance)
    2. 데자뷰 – 전에 겪은 듯한 기분 (Déjà Vu)
    3. 빈티지 – 오래됐지만 멋스러운 것 (Vintage)
    4. 워너비 – 닮고 싶은, 되고 싶은 대상 (Wannabe)
    5. 버스킹 – 길거리 공연 (Busking)
    6. 치팅데이 –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는 날 (Cheating Day)
    7. 스포일러 – 영화·드라마 결말을 미리 떠올리게 하는 것 (Spoilers)
    8. 워케이션 – 여행지에서 일하는 것 (Workation)
    9. 메타버스 – 가상세계, 온라인 속 또 다른 세상 (Metaverse)
    10. 거버넌스 – 조직이나 사회를 운영하고 관리하는 것 (Governance)
    11. 도플갱어 – 나와 똑같이 생긴 다른 사람 (Doppelgänger)
    12. 코스프레 – 만화·영화 캐릭터 옷을 입고 흉내내는 것 (Cosplay)
    13. 버킷리스트 –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 (Bucket List)
    14. 버라이어티 – 여러 가지가 섞인 예능 프로그램 (Variety)
    15. 데칼코마니 – 똑같이 닮은 모습 (Decalcomani)

    [요즘 많이 사용하는 신조어(외래어) 10]

    1. 인싸 : 무리에 잘 섞이고 유행에 민감한 사람
    2. 버즈(Buzz) :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는 것
    3. 스라밸 : Study-Life Balance, 공부와 삶의 균형
    4. 갓생 : 부지런히 자기계발하며 사는 삶
    5. 꾸꾸꾸 : 꾸민 듯 안 꾸민 듯 자연스러운 꾸밈
    6. 렌트프리 :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사람
    7. 오마카세 : 셰프 추천 요리 코스
    8. 바이브 : 분위기, 느낌
    9. 플렉스(Flex) : 소비나 과시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
    10. 밈(Meme) :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패러디 문화


    💙내 어머니의 손과 발

    * 어느 일류대학교 졸업생이 대기업인 한 회사 직원 공채 시험에 지원서를 제출했습니다. 
    2천여명이 응모하여 30명이 1차시험 에 합격했고 합격자들 면접시험을 치루는 날 입니다.

    면접관은 상무,전무,사장 세분이 
    면접 지원자들에게 여러가지 다른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이 청년이 사장앞에 섰을 때 
    사장은 이 청년의 지원서등을 한참 보고 난 후, ''시험점수가 좋군'' 그리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 가셨고....'
    사장께서는 이런저런 질문을 한 후에 청년에게 마지막 질문하기를,
    ''어머니에게 목욕을 시켜드리거나 발을 씼겨드린 적이 있었습니까?"라는  사장의 질문에 청년은 무척 당황했고 거짓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청년은 속으로 이제 나는 떨어지겠구나! 생각하면서)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부모님의 등을 
    긁어드린 적은 있었나요?"
    ''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등을 긁어드리면 어머니께서는 용돈을 주셨습니다."

    *청년은 불합격 될 줄 짐작하면서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사장은 전무와 상무를 불러 무언가 귓속말을 나누는 것이 보였습니다

    *면접시간이 끝났 후 상무께서는
    ''최종 합격자 발표는 개별통보 돤다''고 말 했습니다. 이 청년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자 상무께서 청년을 따로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사장님의 특별 지시 사항입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여기에 오십시오 하지만 사장님께서 한 가지 조건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를 목욕이나 발을 닦아드린 적이 없다고 하셨죠? 내일 여기 오기 전에 꼭 한 번 어머니 발을 씻겨 드린 후에 사장님실을 방문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할  수 있겠지요?"

    *청년은 꼭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날아갈듯이 청년은 기뻤했습니다. 그는 반드시 취업을 해서 어머니를 빨리 쉬게 해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며칠이 안 돼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품을 팔아 그를 키웠고 평생 학비를 댔습니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그는 도쿄의 최고 명문대학에 합격했고 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으며 대기업에 지금 응시했습니다.

    *학비가 어마어마했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을 아들에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가 돈을 벌어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해야 할 차례였습니다. 

    *청년이 집에 갔을 때, 
    어머니는 일터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청년은 곰곰이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시니 틀림없이 발이 가장 힘든 부분이니 씻어드려야할거야. 그러니 사장님께서도 발을 씻겨드리라고 지시하신것 같애!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아들이 
    발을 씻겨드리겠다고 하자 
    의아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왜, 갑자기 발을 씻겨준다는 거니? 
    마음은 고맙지만 내가 씻으마~!"
    어머니는 한사코 발을내밀지 않습니다. 청년은 어쩔 수 없이 어머니의 발을 씻겨드려야 하는 이유를 말씀드립니다

    "어머니, 오늘 입사 면접을 봤습니다 사장님이 어머니 발을 씻겨드리고 다시
    내일 회사에 오라고 하셨어요.그러니 지금 어머니 발을 씻겨 드려야 합니다"

    *그러자, 어머니의 태도가 금세 바뀌었습니다. 두말없이 어머니는 문턱에 걸터앉아 세숫대야에 
    발을 담갔습니다.

    *청년은, 오른손으로 조심스레 어머니의  발등을 잡았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까이서 살펴보는 어머니의 발이었습니다. 
    자신의 발과 너무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앙상한 발등이 나무껍질처럼 보여서,
    "어머니~! 그동안 저를 키우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이제 
    제가 은혜를 갚을게요."
    "아니다, 고생은 무슨 고생을~"
    "어머니, 오늘 면접을 본 회사가 유명한 회사거든요. 제가 취직이 되면 더 이상 어머니께선 고된 일은 하지 마시고, 집에서 편히 쉬세요." 

    *아들의 손에, 엄마의 발바닥이 
    닿는 그 순간, 청년은 숨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아들은, 말문이 막혀 버렸습니다.

    *어머니의 발바닥은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도저히 사람의 피부라고 할 수 없을 정도 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손이 발바닥에 닿았는지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발바닥의 굳은살 때문에 아무런 감각도 없었던 것입니다

    *청년의 손이 가늘게 떨렸습니다. 
    아들은 고개를 더 깊숙히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울음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간신히 삼키고 
    또 삼켰습니다. 하지만 어깨가 들썩이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한쪽 어깨에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발을 다 씻겨 드린 후 어머니의 발을 끌어안고 목을 놓아 구슬피 울기 시작했습니다. 
    엄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청년의 울음은 거칠 줄 몰랐습니다

    *이튿날 청년은 약속한 회사 사장님을 뵙고 사장님께 말씀 드리게 됩니다.
    "어머니가, 저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사장님은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것을 저에게 크게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사장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만약, 사장님이 아니셨다면 
    저는 어머니의 발을 만져 볼 생각을 평생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큰 불효자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셨고 
    크나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저에게는 오직 어머니 한 분 밖에는
    아무도 안 계십니다. 
    이제 정말 어머니를 잘 모시겠습니다.
    제가 지원한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철저히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청년의 어깨를 도닥거리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명문대학에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이
    우리회사에 수석으로 입사한것 
    또한 자랑입니다
    "지금, 바로 인사부로 가서 입사 수속을 밟도록 하세요." 

     기러기의 3 가지 덕목! 

       "기러기" 는, 다른 짐승들처럼, 한 마리 의 보스" 가 지배하고, 그것에 의존하는, 그런 새가 아니랍니다. 

      먹이와 따뜻한 땅을 찾아, "4 만 km" 를 날아가는 "기러기" 의 "슬픈 이야기가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합니다. 
      다음은 톰 워삼(Tom Worsham)이 쓴, '기러기' 내용의 일부입니다.  

    "기러기는 리더를 중심으로, "V 자" 대형을 유지하며,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머나 먼 여행을 시작하면 가장 앞에서, 날아 가는 "리더의 날개짓" 은, "기류의 양력" 을 만들어 주기에,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대장 기러기" 는 뒤에 따라오는, 동료 기러기들이 혼자 날 때 보다, 70% 정도의 힘만 쓰면 날 수 있도록 맨 앞에서 온 몸으로 바람과 마주하며 용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먼 길을 날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울음소리를 내는데 우리가 듣는 그 울음 소리는 실제 우는 소리가 아니라 앞에서 거센 바람을 가르며 힘겹게 날아 가는 리더에게 보내는 "응원의 소리" 입니다. 

    기러기는 부산에서 서울 간을 "왕복 40 번" 을 왕래하는 거리에 해당하는, 머나 먼 길을 옆에서 함께 날개짓을 하는 동료와 서로 의지하며 날아 갑니다. 

    그리고 만약 날아 가는 도중에 어느 기러기가 총에 맞거나, 아프거나, 지쳐서 대열에서 이탈하게 되면 다른 동료 기러기 두 마리도 함께, 대열에서 이탈해 지친 동료가, 원기를 회복해서,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또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동료의 마지막을 함께 지키다 무리로 다시 돌아온다고 합니다. 

      어쩌면 "미물(微物)" 인 새가, 그럴 수 있단 말인가요? 

       만약 맨 앞에서 나는 기러기가 지치고 힘들면 그 뒤의 기러기가 맨 앞으로 나와 리더와 역할을 바꾼다고 합니다. 이렇게 기러기 무리는 서로 순서를 바꾸어 리더의 역할을 하며 길을 찾아 날아 간답니다. 

    기러기에게 이렇게 서로 돕는 슬기와 그 독특한 비행 기술이 없다면 기러기 떼는 매일 수 백 km 를 날면서, 해마다 수 천 km 를 이동하는 그 비행에 "성공" 하지 못할 것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 
      하지만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 
    는 속담의 의미를 깨우치게 됩니다. 

    우리 나라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폐백(幣帛)" 할 때, 기러기 모형을 놓고 예(禮)를 올리는 것은 기러기가 가지고 있는 세 가지 덕목을 사람들이 본받자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기러기는 "사랑의 약속" 을 "영원히 지킵니다.
    기러기의 수명이 보통 150~200 년 인데 짝을 잃는다 해도 결코 다른 짝을 찾지 않고 홀로 지낸다고 합니다. 
       
    둘째, "상하의 질서" 를 지키고, 날아갈 때에도 행렬(行列)을 맞추며 앞서가는 새가 울면 뒤따라 가는 새도 화답하여 예를 지킨다고 합니다. 

    셋째, "기러기" 는 흔적을 분명히 남기는 속성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한다고 규정짓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적어도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람직하겠습니다. 

       각자가 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삶이라도 그것이 나뿐만 아니라 누구에겐가 도움이 되는 삶...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행복에 가치를 둘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인류는, 훨씬 행복하게 잘살게 될 것입니다.  

    "아픈 사람" 에게는, "치유의 존재" 가 되어야 하고, 
    "지혜" 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지혜(智慧)" 를 나누어 주며, 
    "인정"이 메마른 곳에는 "사랑의 감동" 을 나눌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도, 비 오는 날 우산을 들어주는 여유가 있으면 더 좋으련만... 

    그것이 어려울 때는, 함께 비를 맞는 것도 큰 위로가 될 듯합니다. 

       오늘도 서로 사랑하며, 배려하는 마음으로 큰 보람을 느끼는 시간이 되기를 축복하며 기원합니다.🦩🦩

    너무나도 흥미로운 일이 Side bet• 

    트럼프, 영국의 '배신'을 기회로 바꾸다: 

    *호르무즈 해협의 대역전극*

    역사는 종종 가장 예상치 못한 순간에 뒤집힌다. 
    2026년 3월, 페르시아만 한복판에서 바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영국이 수백 년간 쥐고 있던 보이지 않는 칼을 빼들었고, 트럼프는 그 칼날을 손으로 잡아 되돌려버렸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그 칼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로이즈 오브 런던: 보험 위의 보험, 세계 금융의 최종 
    보루인 로이즈 오브 런던(Lloyd's of London). 
    이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이 타는 비행기, 여러분이 쓰는 석유, 여러분의 나라 경제를 떠받치는 거대한 화물선들—이 모든 것의 뒤에 로이즈가 있다.

    보통 사람들은 대형 보험사 하면 삼성화재, 현대해상, 또는 미국의 AIG 같은 회사를 떠올린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보자. 비행기가 추락하면 보상금이 수천억 원이다. 초대형 유조선이 침몰하면 피해액은 수조 원에 달한다. 허리케인 하나가 도시를 덮치면 수십조 원이 날아간다. 보통 보험회사가 어떻게 이 천문학적인 돈을 낼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그들도 보험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보험회사가 보험을 드는 곳. 보험 위의 보험, 재보험(reinsurance). 그리고 그 재보험 시장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가 바로 로이즈 오브 런던이다.

    2001년 9월 11일,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을 때를 생각해보라. 항공사 보상, 건물 보험, 생명보험, 영업 중단 보상~ 쏟아져 나간 보험금이 총 400억 달러를 넘었다. 한 보험회사가 이걸 감당할 수 있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하지만 세계는 무너지지 않았다. 보험금은 지급됐다. 왜? 최종적으로 로이즈가 그 뒤를 받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해서 수백 명이 사망하면, 유족들에게 나가는 보상금만 수천억 원이다. 항공사의 보험회사가 그 돈을 내지만, 그 보험회사는 다시 로이즈에 재보험을 들어놓았다. 원전이 폭발하든, 태풍이 도시를 쓸어버리든, 테러가 발생하든~ 지구상에서 상상 가능한 거의 모든 재앙의 최종 지불 보증인이 로이즈다.

    1688년, 런던의 한 커피하우스에서 시작된 이 보험 시장은 338년이 지난 지금, 단순한 보험사가 아니라 세계 금융 시스템의 최종 안전망으로 군림하고 있다. 영국 GDP의 약 2퍼센트, 금액으로 400억 달러 이상, 5만 개의 일자리. 숫자만 봐도 대단하지만, 진짜 무서운 것은 숫자가 아니다.

    로이즈가 "안 된다"고 하면, 세계의 배는 멈추고, 비행기는 뜨지 못하고, 공장은 돌아가지 않는다.

    어떤 나라가 전쟁을 시작하면 로이즈가 그 지역의 보험을 취소한다. 그 순간 그 바다를 지나는 모든 선박은 움직일 수 없다. 보험 없이 항해하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아무리 세계 최강이라 해도, 러시아가 핵을 가지고 있어도,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라 해도~ 로이즈가 도장을 안 찍으면 그 나라의 무역은 마비된다. 총 한 발 쏘지 않고도 한 나라의 경제를 무릎 꿇릴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 이것이 영국이 대영제국 시절부터 338년간 쥐고 있던 진짜 무기다.

    군사력은 미국에게 넘겼을지 몰라도, 이 금융의 칼자루만큼은 절대 놓지 않았다. 미국도, 중국도, 어떤 나라도 로이즈를 대체할 수 없었다. 세계 해상 보험의 약 3분의 1, 항공 보험의 절반 이상이 로이즈를 거친다. 대체재가 없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권력이다.

    세계의 목줄, 호르무즈 해협, 이제 무대를 옮겨보자. 호르무즈 해협. 폭이 고작 33킬로미터에 불과한 이 좁은 물길로 전 세계 석유의 20~30퍼센트가 매일 통과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의 원유가 전부 이 병목을 지나야 세계 시장에 나온다. 
    여기가 막히면? 세계 경제는 산소를 잃은 뇌처럼 서서히 죽어간다.

    그런데 최근 이란이 혁명수비대를 앞세워 이 해협의 "완전한 통제권"을 선언했다. 중동의 화약고에 다시 불씨가 튀었고, 전 세계 선박 회사들은 공포에 떨기 시작했다.

    영국이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로이즈가 움직였다.

    로이즈 마켓 어소시에이션은 바레인, 쿠웨이트, 오만, 카타르를 고위험 지역 목록에 추가했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의 보험을 사실상 중단하거나, 보험료를 50~100퍼센트 폭등시킨 것이다. 유조선 한 척의 전쟁 위험 보험료가 하룻밤 사이에 10만 파운드(약 1억 7천만 원) 이상 뛰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로이즈가 "안 된다"고 하면 배는 못 움직인다. 페르시아만에는 약 1,000척의 선박이 떠 있었고, 그중 절반이 원유·가스 운반선이었다. 선체 가치만 합산하면 250억 달러. 이 배들이 전부 꼼짝 못 하게 되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전쟁 위기에 따른 합리적인 시장 반응이다. 하지만 그 파급 효과를 따라가면 전혀 다른 그림이 보인다. 보험이 없으면 배는 못 움직인다. 배가 못 움직이면 석유가 안 온다. 석유가 안 오면 에너지 시장이 뒤집힌다. 에너지 시장이 뒤집히면 트럼프의 에너지 패권 구상이 흔들린다.
    일부 분석가들은 이것을 단순한 시장 반응이 아니라, 영국이 미국에게 던진 조용한 일격으로 읽었다. 트럼프를 당황하게 만들고, 미국을 국제 에너지 시장에서 무능해 보이게 만들려는 계산된 수. 338년간 한 번도 뺏기지 않았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것이다.

    "트럼프에게 보내는 거대한 엿먹어라(a giant Fuck-you to Donald Trump)." 한 분석가는 이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트럼프의 반격: 불가능을 가능으로 누구도 로이즈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338년이다. 세계의 어떤 정부도, 어떤 기업도 이 거인에게 정면으로 도전한 적이 없었다. 대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로이즈의 절대 권력의 원천이었으니까.

    그런데 트럼프가 해냈다. 아니, 정확히는 영국이 스스로 문을 열어줬고, 트럼프가 그 문으로 돌진했다.

    트루스소셜 게시물이 올라왔다.
    "즉각 발효한다. 나는 미국 국제개발금융공사(DFC)에 명령하여 페르시아만을 통과하는 모든 해상 무역, 특히 에너지 선박에 대해 매우 합리적인 가격으로 정치 위험 보험과 보증을 제공하도록 했다."

    그리고 결정타.
    "필요하다면, 미국 해군이 유조선들을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직접 호위할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은 세계로 향하는 에너지의 자유로운 흐름을 보장할 것이다."

    단 두 가지 조치였다. 보험과 군사 호위. 
    하지만 이 조합이 만들어낸 파괴력은 핵폭탄급이었다.

    로이즈의 존재 이유가 무너지는 순간 여기서 가장 치명적인 아이러니를 짚어야 한다.

    로이즈가 호르무즈 해협 통과 선박에 보험을 팔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뭔가? 미국 해군이 그 바다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 해군 제5함대가 바레인에 주둔하며 페르시아만의 안전을 보장하고 있었기에, 로이즈는 "이 항로는 안전하니 보험료는 이 정도면 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라. 안보는 미국이 제공하고, 그 안보를 기반으로 돈을 번 것은 영국의 로이즈였다. 그런데 이제 안보를 제공하는 바로 그 나라가 "보험도 우리가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유조선 회사 입장에서 선택지를 보자. 로이즈에서 천정부지로 오른 보험료를 내고 불확실한 항로를 홀로 뚫을 것인가, 아니면 미국 정부가 "합리적인 가격"으로 제공하는 보험에 가입하고 세계 최강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안전하게 항해할 것인가.

    답은 너무 뻔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미국을 선택한다.
    338년 권력의 균열, 더 무서운 것은 이것이 일시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 번 미국 정부 보험으로 갈아탄 선사들이 굳이 로이즈로 되돌아올 이유가 있을까? 보험료도 더 싸고, 미 해군의 호위까지 딸려오는데? 시장이란 한번 떠나면 돌아오지 않는다. 

    로이즈가 내일 당장 "다시 보험 들어드리겠습니다"라고 해도, 이미 미국 품으로 넘어간 고객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은 로이즈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런던이 세계 보험의 수도로서 누려온 지위 전체가 흔들리는 것이다. 해상 보험에서 밀리면 항공 보험, 에너지 보험, 재보험 시장 전체에 균열이 간다. 로이즈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런던 금융가(시티 오브 런던)의 생태계가 뿌리째 흔들린다.

    로이즈의 발 빠른 백기, 결과는 즉각적이었다. 불과 며칠 만에 로이즈는 미국 DFC와 "건설적으로 협력하고 있다"는 성명을 냈다. 로이즈 마켓 어소시에이션 CEO 쉴라 캐머런은 트럼프의 개입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보험 브로커 마쉬(Marsh)도 미국 관리들과 만나 "해상 무역 복원 방안"을 논의했다고 발표했다.

    캐머런은 "3월 1일 이후 호르무즈를 통과한 선박이 최소 40척"이라며, "이 선박들의 대다수는 런던 시장에서 보험에 가입되어 있고, 보험은 현재 유지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읽어보라. 행간을 읽어보라. "우리 보험이 아직 유효하다"고 필사적으로 어필하고 있는 것이다. 불과 며칠 전에 칼을 빼들었던 그들이, 이제는 "우리 아직 쓸모 있어요"라고 손을 내밀고 있었다. 338년 무소불위 권력의 주인이, 처음으로 허리를 굽힌 순간이었다.

    제국의 충돌, 그리고 새로운 질서, 이번 사건은 단순한 보험 시장 분쟁이 아니다. 이것은 두 제국의 충돌이다.
    한쪽에는 1688년부터 해상 보험을 통해 세계 무역의 생사여탈권을 쥐어왔던 영국의 오래된 금융 권력이 있다. 

    한 나라의 경제를 총 한 방 없이 마비시킬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제국. 다른 한쪽에는 세계 최강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전면에 내세우며 21세기 에너지 패권을 노리는 미국이 있다.

    영국은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 무기의 약점이 드러나고 말았다. 무소불위라고 믿었던 로이즈의 권력은, 사실 미국 해군이라는 토대 위에 서 있었을 뿐이다. 토대를 제공하는 쪽이 "이제 위에도 내가 하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그 권력은 모래성이 되었다.

    트럼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불과 몇 분 만에, 미국은 영국이 1600년대부터 사용해온 가장 강력한 지정학적 도구를 무력화했다." 한 분석가의 이 평가에 반박하기가 어렵다.

    에필로그: 커피하우스에서 시작된 제국, 트루스소셜에서 무너지다.

    1688년, 에드워드 로이드의 커피하우스에서 선주들과 상인들이 모여 서로의 위험을 나눠 지기로 했다. 그것이 338년 뒤 세계 금융의 최종 안전망이 되었고, 영국에게 보이지 않는 제국의 권좌를 선물했다.

    2026년, 트루스소셜 게시물 두 개와 행정 명령 하나로, 
    그 338년의 역사에 균열이 갔다.

    총성도 없었다. 외교적 비난도 없었다. 로이즈는 아직 건재하고, 런던은 여전히 세계 보험의 중심이다. 하지만 이제 모두가 안다. 대체불가라 믿었던 것이 대체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깨달음이야말로, 어떤 폭탄보다 파괴적이다.

    호르무즈 해협의 석유는 계속 흐를 것이다. 다만, 그 흐름을 보증하는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다.

    세계의 에너지 동맥을 누가 쥐고 있느냐. 21세기 패권 경쟁의 핵심이 바로 거기에 있다. 그리고 2026년 3월, 커피하우스에서 시작된 제국이 처음으로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이드 베팅은, 도박의 중심적인 걸기가 아니고 곁가지 걸기로 예를 들면 어느 팀이 이기냐에 거는 것은 메인 베팅(Main betting) 이고 사이드 베팅은 오늘 승리 투수는 누가 될까? 누가 홈런을 칠까에 거는 소규모 걸기로 이해하면 됩니다.

    만사유시(萬事有時)
    -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법이요. -

    술은 반취(半醉),🍹
    꽃은 반개(半開),🌷
    복은 반복(半福)이라고 💰
    술을 마시되 만취(滿醉)하면 꼴 사납고, 꽃도 만개(滿開)상태 보다 반쯤 피었을 때 가 더 아름답습니다.

    사람 사는 이치도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충분한 만족이란 있기도 어렵거니와 
    혹 그렇다면 인생이 위태로워 집니다.

    '구합(九合)은 모자라고,
    십합(十合)은 넘친다'는 
    옛 속담도 있듯이
    반 정도의 복(福)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자란 듯 적은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라는 말씀인 듯 합니다.

    소욕지족(小慾知足) 이라 했고.
    - 적은 것으로 넉넉할 줄 알며 -

    화무십일홍
    (花無十日紅)
    - 열흘 붉은 꽃은 없습니다. -

    성한 것이 얼마 못가서 쇠해 집니다.

    그러니 꽃이 진다고 그리 서글퍼 할 일이 아니지요. 

    꽃이 빨리 진다고 더 애닲아 할건 또 뭐람.

    꽃이 져야 열매가 맺지요.꽃 진 자리에 열매가 맺지 않는다 한들 그 또한 무슨 대수랴.

    꽃이 필 때가 있고, 질 때가 있듯이

      살아야 할 이유

    "병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 마지막 생명을 앞당긴다"

    나는 늙었다. 
    나는 이제 쉬어야 해.
    나이가 몇인데..

    마음을 놓는 순간 우리의 뇌는 먼저 알고 모든 것을 놓아 버린다.

    의학 통계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큰 병 없이 지내다 80대 중후반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고 한다

    가족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특별히 아픈 데도 없었는데요. 갑자기 시름시름 하시다가 돌아 가셨어요" 

    그러나 의학적으로 보면, 이 죽음은 결코 갑작스럽지도, 
    이유 없는 것도 아니다.

    사망 원인은 '병’이 아니라 복합 붕괴이다
    85세 전후의 사망은 하나의 질병 때문이 아니라, 신체· 정신· 사회적 기능이 동시에 무너지는 ‘노쇠의 종착점’에서 일어난다.

    심장은 아직 뛰지만 자율신경의 조절 능력이 떨어지고, 폐는 숨을 쉬지만 기침 반사와 면역 방어가 약해지며 뇌는 의식이 있으나 회복 탄력성이 사라진다

    이 상태에서 감기 한 번, 넘어짐 한 번, 식사량 감소에 곧바로 생의 마지막 방아쇠가 된다는 것이다

      의학적으로 가장 치명적인 요소
    근육 소실과 탈수.

    85세 전후 사망의 공통 분모는 
    의외로 단순하다.

    근감소증과 만성 탈수와 저영양.

    노년기에 근육은 단순한 ‘힘’이 아니라
    ▶ 면역 저장고
    ▶ 혈당 조절 장치
    ▶ 낙상 방지 장치
    ▶ 호흡 보조 기관이다.

    걷는 양이 줄고, 씹는 힘이 약해지고, “입맛이 없다”는 
    말이 늘어나는 순간 몸은 이미 회복 불가능한 하강 곡선에 들어선다.

      생활 측면에서 가장 충격적인 이유: 
    쓸모의 상실감. 

    의학이 쉽게 말하지 않는, 그러나 결정적인 요인이 있다.
    바로 “나는 이제 할 일이 없다”는 마음이다.
    일종의 맥을 놓아 버리는 것을 말한다

    노년기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은 이것이다.
    “사람은 병보다, 의미 상실로 더 빨리 죽는다.”

    ▪️친구와의 단절 
    ▪️사회적 역할의 종료 
    ▪️하루를 시작할 이유의 소멸.
    이때 몸은 생존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의학적으로 보면 이는
    ▪️식욕 감소
    ▪️활동 저하
    ▪️호르몬 분비 저하
    ▪️면역력 급감으로 직결된다.

    85세 전후 사망의 결정타:  회복 포기 반응. 

    젊을 때 몸은 "아프면 회복하려 든다.”
    그러나 고령의 어느시점 이후, 몸은 이렇게 판단한다.
    “이제 회복할 필요가 없다.” 
    이를 의학에서는 '생리적 철수'라 부른다.

    치매도 아니고, 암도 아니지만 몸 전체가 서서히 ‘종료 모드’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치료보다 생활의 태도가 생존 기간을 좌우한다.

      결론: 오래 사는 비결은
     ‘치료’가 아니라 ‘살 이유’ 

    85세 전후의 죽음은 충격적이지만, 사실은 매우 정직한 결과다.

    ▪️조금이라도 꾸준히 움직이는 사람. 
    ▪️사흘 에 한번이라도 약속이 있는 사람
    ▪️내가 아직 쓸모 있다고 느끼는 사람
    ▪️할 일이 있는 사람.

    이들은 같은 나이에도 몇 해를 더 건강하게 산다.

    노년의 생명 연장은 병원을 늘리는 데 있지 않다.
    하루를 살아낼 이유를 남겨 두는 것,

    그것이 가장 강력한 의학적 처방이다.

    팔십을 넘기고 부터 사람들은 묻는다.
    “이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
    의사는 숫자를 말하지 않지만, 몸은 이미 대답을 시작한다.

    85세 전후, 많은 이들이 큰 병 하나 없이 비실비실 조용히 생을 마친다.

    가족들은 말한다.
    “어제까지 멀쩡하셨는데요.”
    그러나 노년에 이 ‘멀쩡함’은 오래전부터 금이 가 있었다.

    이 나이의 죽음은 병 하나가 몸을 바로 데려가지 않는다.
    심장도 뛰고, 폐도 숨을 쉬고, 정신도 또렷한데 몸 전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천천히 접어 넣는 시간에 들어간다.

    의학은 이것을 노쇠라 부르지만, 노인은 그저 “기운이 없다”고 말한다.

    팔십을 넘기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병이 아니라 근육이다.

    다리가 가늘어지고, 걸음이 느려지고, 어느 날부터인가 
    “나가기가 귀찮다”는 말이 입에 붙는다.

    근육이 줄면 힘만 빠지는 것이 아니다.
    면역도 함께 빠지고, 회복할 여지도 같이 사라진다.

    이때 감기 한 번, 넘어짐 한 번이 몸 전체를 주저앉힌다.

     그러나 진짜 충격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사람을 가장 빨리 늙게 하는 것은 
    ▪️나는 쓸모없어 졌어
    ▪️나는 이제 할 일이 없어, 하는 마음의 방심이다

    그 순간 우리의 뇌는 모든 것을 놓아 버린다

    의학은 이것을 설명하지만,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뇌는 마음의 변화에 제일 민감하게 반응한다

    ▪️나는 이제 안된다
    ▪️이제 무능력하다
    ▪️나는 끝났다 
    나는 늙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뇌는 자신의 일을 놓아 버린다고 한다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긍정적 적극적 낙관적 창조적인 생각을 갖고 앞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제 다 살았지 뭐.”
    "내 몸상태로는 이제 거의 끝이야"
    "기억력이 망가졌는데 살아서 뭘해"
    팔십오세 전후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사고가 아니라
    회복을 포기한 몸의 마지막 결정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답은 분명하다.
    노년의 생명은 병원에서만 연장되지 않는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밖으로 나갈 이유, 누군가와 나눌 짧은 약속 “아직 내가 할 일이 있고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갖으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약보다 강하다.

    아침에 눈을 떴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조금 더 걷고, 조금 더 웃고 이야기하고 움직이면 더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건전한 정신자세로 삶을 살아 간다면 우리의 삶은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3월 25일(수) 요한복음 6:1-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5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When Jesus looked up and saw a great crowd coming toward him, he said to Philip, "Where shall we buy bread for these people to eat?

    τέρας, ατος, τό Storng number 5059

    1. 경이.  2. 전조.  3. 징조 
    Pronunciation [ tĕras ]

    Etymology 불확실한 어원에서 유래
    •  1. 경이, 전조, 징조, 기사, 마24:24.
    • 관련 성경 / 기사(奇事)(마24:24, 행2:19, 고후12:12), 기적(奇蹟)(살후2:9)

    θαῦμα, ατος, τό Storng number 2295

    1. 놀랄 만한 일.  2. 놀라운 일.  3. 기적  
    Pronunciation [ thauma ] 

    Etymology / 2300의 한 형태에서 유래한 뜻
    • 1. 놀랄 만한 일.
      • a. [일반적으로] 놀라운 일, 경이적인 일, 고후11:14.
      • b.  [특별한 의미로] 기적, 이적, 놀라움.
    • 2. 놀라움, 경이, 계17:6.
    • 관련 성경 / 놀랍게 여김(계 17:6).

    σημεῖον, ου, τό Storng number 4592

    1. 표징.  2. 표.  3. 기적 
    Pronunciation [ sēmĕiŏn ]

    • I.  표징, 표시, 이적.
      • 1. 표, 표시, 증거, 상징, 마24:3, 26:48, 막13:4, 눅2:12, 21:7, 살후3:17.
      • 2.  기적, 표징.
        • a.  기적, 이적 [그리스도, 하나님, 하나님의 사람이 행한 기적], 막8:11, 눅 11:16, 요2:11,18,23, 3:2, 4:54, 6: 2,14,30, 7:31, 9:16, 10:41, 11:47, 요2:11, 4:48, 행2:43, 4:30, 5:12, 6:8, 7:36, 14:3, 15:12, 롬15:19, 히2:4, 고후12:12.
        • b. [사탄이나 그의 대행자들이 행한] 기적, 마24:24, 막13:22, 계13:13, 16:14, 19:20.
        • c.  [마지막 날에 나타날] 전조, 징조, 눅 21:11,25, 행2:19, 계12:1,3, 15:1.
    • 문법설명 / 4592의 어간에서 파생된 중성
      관련 성경 / 표적(마12:38, 행2:22, 살후2:9), 징조(마24:3, 눅21:7, 행2:19), 군호(마26:48), 이적 (막13:22, 눅23:8), 표(롬4:11, 고후12:12).


    δαιμόνιον, ου, τό Storng number 1140

    1. 신성.  2. 마귀.  3.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묘사된다 
    Pronunciation [ daimŏniŏn ]

    •  1. 신성, 신성한 것, 행17:18.
    •  2. 마귀, 악령, 귀신[사람과 신 사이의 중간에 있는 독립적인 존재, 그는 사람에게 들어가 병, 특히 정신병을 일으킨다], 눅8:30, δ. ἔχειν, 마11:18, 눅7: 33, 8:27, 요7:20, 8:48,49, 10:20.
      •  a. [주]
      •  b.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묘사된다, 마7:22, 9:34, 10:8, 막1:34,39, 16:17, 눅9:49, 11:14,15,18이하, 13:32 등 수동, 마9:33, 17:18, 막7:29,30, 눅4: 41, 8:2,33, 35,38, 계18:2.
      •  c. 그들의 지도자는 바알세불, 마12:24, 27, 눅 11:15, 딤전4:1.
      •  d. 이적을 일으키는 마귀의 능력, 요10:21, 고전10: 20, 약2:19.
               Grammar Explanation / 1142의 파생어의 중성
    • 문법설명 / 1142의 파생어의 중성
      관련 성경 / 귀신(마7:22, 요7:20, 딤전4:1), 신(행17:18).


    예수의 질문은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자의 믿음 수준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관점(觀點) / 볼 관, 점 점  
    -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할 때 그 사람이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 또는 처지 

    견지(見地)

    요한복음 6장, 이른바 “오병이어” 사건의 시작입니다. 
    짧은 질문이지만, 매우 깊은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본문 구조 (흐름)

    1. 예수의 시선
    → “눈을 들어 큰 무리를 보심” /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필요를 먼저 보시는 시선

    2. 질문의 대상
    → 빌립에게 물으심 / 특정 제자를 향한 의도적 질문

    3.  질문의 내용
    → “어디서 떡을 사서 먹이겠느냐?” 현실적·경제적 문제 제시 

    헬라어 핵심 포인트
    • “어디서” → πόθεν (포덴) / 출처 / 공급의 근원을 묻는 질문
    • “사서” → ἀγοράσωμεν (아고라소멘) / 인간의 방식 (돈, 시장, 계산) 
    중요한 반전 (핵심 의도)

    바로 다음 구절이 이 장면의 핵심을 밝힙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즉, 겉 질문 → “어디서 사지?” 
          속 의도 → “너는 공급의 근원을 어디서 보느냐?”

    영적 구조 도식
    문제 인식 → (사람의 시선)

    계산 / 한계 (빌립: 돈 부족)

    불가능 판단

    그러나

    예수의 의도 → (하나님의 시선)

    공급의 근원 = 하나님

    기적 (오병이어)
    핵심 메시지

    이 질문은 정보 요청이 아니라 믿음 테스트입니다.

    • 빌립의 답 : “200데나리온으로도 부족합니다” /  계산 중심 사고
    • 예수의 행동 :  이미 해결을 알고 계심 
              문제보다 먼저 공급을 가지신 분 
    한 줄 핵심 /  “문제의 크기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공급의 근원을 어디에 두느냐를 묻는 질문이다.” 

    헬라어 원문(요한복음 6:5–6)

     
    Ἐπάρας οὖν τοὺς ὀφθαλμοὺς ὁ Ἰησοῦς καὶ θεασάμενος ὅτι πολὺς ὄχλος ἔρχεται πρὸς αὐτόν,
     λέγει πρὸς Φίλιππον· 
    Πόθεν ἀγοράσωμεν ἄρτους ἵνα φάγωσιν οὗτοι;
    τοῦτο δὲ ἔλεγεν πειράζων αὐτόν,  αὐτὸς γὰρ ᾔδει τί ἔμελλεν ποιεῖν.

    핵심 문법 해부

    (1) Ἐπάρας (들어 올리시고)
    • aorist participle (부정과거 분사)
    • 의미: “눈을 드신 후 → 다음 행동 발생”
      선행 동작 → 상황 인식의 시작

     ① Ἐπάρας (에파라스)
    • 아오리스트 분사 (과거, 단회 행동)
    • 의미 : “눈을 들어”
       단순한 시선이 아니라 상황을 ‘의도적으로 인식’하는 시작점

    (2) θεασάμενος (보시고)
    • aorist middle participle
    • 단순히 βλέπω(보다)가 아니라
       “의미를 담아 관찰하다 / 인식하다”

     예수님은 단순히 “봄”이 아니라 상황의 본질을 이미 파악

     ② θεασάμενος (데아사메노스)

    • 아오리스트 중간태 분사
    • 의미 : “주의 깊게 바라보시고”
      단순히 본 것이 아니라
      깊이 관찰 + 의미를 아는 시선

    ③ ἔρχεται (에르케타이)
    • 현재형
    • 의미 : “오고 있는 중이다”
      무리는 이미 진행 중
      문제가 눈앞으로 다가오는 상황
    (3) Πόθεν ἀγοράσωμεν ἄρτους ;
    • ἀγοράσωμεν = aorist subjunctive (1인칭 복수)
    • 직역: “우리가 어디서 빵을 사겠는가?”

     핵심 :

    • “내가” 아니라 “우리”
    • 의도: 빌립을 사고 구조 안으로 끌어들임 
     ἵνα φάγωσιν
    • 목적절 (ἵνα + subjunctive)
       “그들이 먹게 하려 함이라” 
    πειράζων αὐτόν
    • πειράζων = 현재 분사
    • 의미: 시험하다 / 드러내다 / 검증하다

     단순 시험 ❌
     믿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계시적 질문 

     ᾔδει τί ἔμελλεν ποιεῖν
    • ᾔδει = pluperfect (이미 알고 있었다)
    • ἔμελλεν = “하려고 하고 있었다”

     핵심 : 예수는 이미 답을 알고 질문하심 

    ④ Πόθεν ἀγοράσωμεν
    • Πόθεν : “어디서?”
    • ἀγοράσωμεν : 아오리스트 접속법
      “우리가 어디서 살 수 있을까?”

     중요한 포인트
      → 단순 정보 질문이 아니라
     시험 / 의도된 질문 (testing question)

    ⑤ ἵνα φάγωσιν

    • 목적절 (ἵνα + 접속법)
    • “먹게 하려 함이라”

     질문의 핵심 목적 :  “이 사람들을 먹이는 것”


    믿음 vs 계산 구조 도식
    [예수의 시선]


    "θεασάμενος" (본질 인식)


    질문: "어디서 살까?" (Πόθεν ἀγοράσωμεν)


    ─────────────── 분기 ───────────────

    ① 빌립의 반응 (계산 구조)
    ┌──────────────────────┐
    │ 돈 (200데나리온) │
    │ 사람 수 │
    │ 물리적 한계 │
    └──────────────────────┘

    "부족하다"

    ❌ 불가능

    ② 예수의 의도 (믿음 구조)
    ┌──────────────────────┐
    │ 이미 계획 알고 있음 │
    │ (ᾔδει τί ἔμελλεν) │
    │ 공급의 주체 = 하나님 │
    └──────────────────────┘

    ✔ 가능

    기적 발생
    구조 핵심 (한 줄 요약)

    👉 예수의 질문은 “정보 요청”이 아니라 “믿음 계시 장치”

    • 빌립:
      → 현실을 기준으로 계산
      → “얼마 필요?”
    • 예수:
      → 하나님을 기준으로 인식
      → “누가 하시는가?”
    헬라어 흐름으로 본 깊은 구조
    Ἐπάρας → θεασάμενος → λέγει
    (행동) (인식) (질문)



    πειράζων (시험)



    드러나는 것 = 믿음 수준



    ᾔδει τί ἔμελλεν ποιεῖν
    (이미 답은 하나님 쪽에 있음)
    신학적 결론

     이 장면의 본질 :

    • 문제 = 떡이 없음
    • 진짜 문제 = 믿음의 관점 부족

     예수의 질문 목적 :  “너는 지금 계산하고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보고 있느냐?”


    1. 보이는 것 너머를 보는 시선

    • 인간은 상황, 숫자, 조건을 봅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의미와 목적, 믿음의 상태를 보십니다

    👉 예:

    • 빌립 → “돈이 부족합니다” (현실 계산)
    • 안드레 → “작지만 드릴 것이 있습니다” (가능성의 믿음)

    영적 관점 = ‘불가능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실 자리’를 보는 것


    2.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를 해석

    같은 사건도 해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 고난 → 실패 ❌
    • 고난 → 연단과 훈련 ✔️

    👉 성경에서는 고난을 이렇게 봅니다

    • “시험”이 아니라 “성숙의 과정”
    • “버림”이 아니라 “다듬음”

    영적 관점은 ‘왜 이런 일이?’가 아니라
    →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하시는가?’를 묻습니다


    3. 현재가 아니라 ‘영원’을 기준으로 판단

    • 세상 관점 → 지금 손해 보면 실패
    • 영적 관점 → 영원한 가치가 있으면 성공

    👉 그래서

    • 용서 = 손해가 아니라 자유
    • 섬김 = 약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방식
    • 순종 = 손실이 아니라 투자

    핵심 한 문장 정리

     영적 관점 =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위에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눈

    실제 적용 (설교용 포인트)

    청중에게 이렇게 던질 수 있습니다:

    •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문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준비입니까?”
    • “나는 계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반응하고 있습니까?”
    • “이 상황을 끝으로 보고 있습니까, 과정으로 보고 있습니까?”



    이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빵은 어디서 살 수 있나요?

    표면적으로 보면 이것은 매우 기본적인 직설적인 질문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온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빌립에게 그들이 모두 먹을 빵을 어디서 살 수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꽤 간단하고 논리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글쎄요, 다음 문장을 읽을 때까지는 예수님이 빌립을 시험하기 위해 이 질문을 하셨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무엇을 할지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그것이 시험이라는 것을 몰랐고 모든 것을 필사적으로 알아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식으로 계산을 하려고 했는지에 관계없이 결론은 맞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고 자원이 너무 적었습니다. 
    이 많은 사람을 먹이는 것은 수학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이 질문을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시험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보기 위해 그를 시험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원이 너무 적었습니다. 
    하지만 빌립은 주 예수님을 고려할 것입니까? 빌립이 질문에 답할 때 예수님을 고려할 것입니까? 그것이 시험이었습니다. 빌립은 실패했습니다. 우리도 종종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를 둘러싼 상황과 우리가 가진 자원을 자연스러운 눈으로만 보고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합니다. 이 질문에 올바르게 답한 사람의 예로, 저는 최근에 조지 뮬러의 삶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고 이 질문이 계속해서 나왔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믿음으로 고아원을 시작했고 종종 그들은 식탁에 아무것도 없이 모든 아이들과 함께 앉아 먹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음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 예수님을 고려하면서 은혜를 기도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유배달부가 고장을 냈거나, 하나님께서 빵을 만들어 뮐러의 고아원에 주라고 재촉하신 빵 굽는 사람을 통해 공급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빵을 어디서 사야 할까요? 우리는 그 질문에 답할 때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3월 24일(화) 누가복음 24:36-4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어찌하여 의심이 일어나느냐?(3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He said to them, "Why are you troubled, and why do doubts rise in your minds? 

    어찌하여 의심이 일어나느냐?(Why do doubts rise in your minds?)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하신 말씀으로 두 가지 상태가 동시에 드러납니다.

    첫째는 두려움( (φόβος, phobos) 
    나타난 상황을 보고 일어나는 감정적 반응

    둘째는 의심(διαλογισμός, dialogismos) 
    의심이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말합니다.

    따라서 어찌하여 의심이 일어나느냐라는 질문은 두려운 감정과 의심스런 생각이 함께 어우러져 무너진 상태를 지적하는 질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단순한 꾸짖음이 아니라
    “왜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느냐?”라는 영적 각성의 질문입니다.

    • 두려움 → 현실 중심 (보이는 것)
    • 의심 → 이성 중심 (계산하는 것)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은 현실과 계산을 넘어선 ‘사실(진리)’ 그 자체이십니다.

    영적 구조 / 이 말씀을 한 줄로 정리하면 
    두려움은 외부 상황에서 오고, 의심은 내부 해석에서 온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둘을 동시에 끊으십니다.

    더 깊은 메시지 / 이 장면의 핵심은 “믿음이 약하다”가 아니라  “이미 와 계신 주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

    제자들은 예수님이 눈앞에 계신데도여전히 두려워하고 의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은 이렇게 들립니다. 
    “내가 지금 여기 있는데, 왜 아직도 두려움과 의심 안에 있느냐?” 

    적용.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상황이 흔들릴 때 → 두려움이 올라오고
        이해가 안 될 때 → 의심이 생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시선은 다릅니다.  
     상황보다 ‘임재’를 보라,  생각보다 ‘사실(주님이 계심)’을 붙들라.

    문장의 구조와 의미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 외적인 반응 (감정)
    → 눈앞의 상황 때문에 생긴 두려움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 내적인 반응 (생각/믿음)
    →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불신

    즉, 이 말씀은 감정(두려움) + 내면(의심)을 동시에 다루고 있습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하셨는가?

    이 장면에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보고도 놀라고 무서워했습니다. 
    그 이유는 현실로 믿기 어려움,  과거의 실패(십자가 사건), 눈에 보이는 상황 중심의 판단

    그래서 예수님은 단순히 “믿어라”가 아니라  그들의 상태를 드러내는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핵심 메시지

    이 말씀은 책망이라기보다 믿음으로 초대하는 질문입니다. 

    (1) 두려움의 근원 - 두려움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지 못할 때 생깁니다.
     (2) 의심의 본질 -  의심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불신입니다. 

    신학적 핵심 구조

    이 말씀을 한 줄로 정리하면  “두려움은 감정의 문제, 의심은 믿음의 문제” 
    그리고 예수님의 의도는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회복시켜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것 

    오늘 우리의 적용

    이 말씀은 지금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상황이 불안할 때 → 두려움이 올라옴 
       이해되지 않을 때 → 의심이 생김

    그때 이 질문이 다시 들립니다. 
       “왜 두려워하느냐?”
       “왜 의심이 올라오느냐?”

    이 질문은 정죄가 아니라  믿음으로 돌아오라는 초청입니다.

    “두려움 → 의심 → 믿음”의 흐름을 한 장 도식처럼 정리해 드립니다. 

    한 장 구조 도식 (헬라어 포함)

    [상황: 부활하신 예수를 마주함]



    ❶ 두려움 (φόβος, phobos)
    “διὰ τί τεταραγμένοι ἐστέ;”
    → “왜 너희는 두려워하며(마음이 요동하느냐)”

    ▪ 의미
    - 존재적 충격
    - 이해되지 않는 현실 앞의 흔들림
    - 영적 인식 부족 상태

    ↓ (내면으로 침투)

    ❷ 의심 (διαλογισμοί, dialogismoi)
    “καὶ διὰ τί διαλογισμοὶ ἀναβαίνουσιν ἐν τῇ καρδίᾳ ὑμῶν;”
    → “왜 의심(생각들)이 너희 마음에 올라오느냐”

    ▪ 의미
    - 논리적 계산, 자기 해석
    - ‘이게 맞나?’ ‘가능한가?’
    - 믿음 대신 이성이 주도하는 상태

    ↓ (예수의 개입)

    ❸ 믿음 (πίστις, pistis)
    (직접 명령은 없지만 구조적으로 요구됨)

    ▪ 예수의 해결 방식
    - “나의 손과 발을 보라”
    - “나를 만져보라”
    - “나는 영이 아니다”

    ▪ 의미
    - 경험 + 계시 기반 확신
    - 의심을 넘는 관계적 신뢰



    [결론 구조]

    두려움 (감정)

    의심 (이성의 왜곡된 작용)

    믿음 (계시로 회복된 인식)

    핵심 헬라어 포인트 요약
    • διὰ τί (dia ti) = “왜?”
      → 예수님은 상태 자체보다 ‘원인’을 질문하심
    • τεταραγμένοι (tetaragmenoi)
      → “혼란에 빠진 상태” (완료 수동 분사)
       이미 마음이 흔들린 상태
    • διαλογισμοί (dialogismoi)
      → “내적 논쟁, 계산된 생각”
       단순 의문이 아니라 믿음을 대체하는 사고 체계 

    핵심 통찰 (신학적 구조)

     두려움은 시작일 뿐이다
    → 문제는 그 두려움이 의심으로 발전할 때

     의심은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
    → 하나님이 아닌 자기 판단 중심 사고

     믿음은 감정 제거가 아니라
    예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  

    한 줄 정리 / 두려움은 흔들림이고, 의심은 왜곡된 해석이며, 믿음은 계시에 대한 응답이다






    부활 후,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 데 느렸습니다. 아마도 예수가 죽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기 때문에 믿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사실이기에는 너무 좋게 들렸을 수도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날카로운 질문을 했습니다. '왜 근심하며 왜 마음에 의심이 생기느냐?'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 예수께서 방금 에마오로 가는 길에 있던 두 사람에게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제자들의 문제, 그리고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데 느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예언들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했어야 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고,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우리를 돌보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보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더 커질 때, 우리의 마음은 괴로워지고 의심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불행히도 이것은 타락의 증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리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도록 허락하면, 의심과 두려움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종교 개혁의 5대 강령


    종교개혁의 오대 강령, 흔히 "오직" 다섯 가지(Solas)라고 불리는 것은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의 핵심 원칙을 요약한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원칙은 중세 가톨릭 교회의 신학적, 실천적 오류에 대한 반응으로 개신교 신앙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각각의 원칙은 라틴어로 표현되며 다음과 같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의미: 신앙과 실천의 최종 권위는 성경에 있다는 원칙이다.

    배경: 중세 가톨릭 교회는 교황, 전통, 교회 회의의 권위를 강조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성경만이 절대적이고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교회의 모든 가르침과 생활의 최종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요성: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오류가 없으며, 모든 교리와 윤리적 지침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믿었습니다.

    딤후 3:16-17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오직 믿음(Sola Fide)

    의미: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어진다는 원칙이다.

    배경: 가톨릭 교회는 믿음과 함께 선행이 구원에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이에 반해, 종교개혁자들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며, 이것이 구원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로마서 1장 17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 근거한다.

    중요성: 이 교리는 인간이 자신의 행위나 공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중세 가톨릭교회가 행위와 성례전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던 것과는 다릅니다.

    갈 2:16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오직 은혜(Sola Gratia)

    의미: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원칙이다.

    배경: 가톨릭 교회는 인간의 노력과 공로가 구원에 기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으로, 스스로 구원할 수 없으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라고 주장했다.

    중요성: 인간의 공로나 행위는 구원에 기여하지 않으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이는 인간의 공로나 자격이 아닌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에 의해 구원이 주어진다는 신학적 입장을 나타냅니다.

    엡 2:8-9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의미: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원칙이다.

    배경: 가톨릭 교회는 성인 숭배, 성례전, 교황의 중재 등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반면 종교개혁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만이 구원의 유일한 근거라고 선언했다.

    중요성: 이 교리는 구원에 있어 교회나 성인들의 중재가 필요하지 않음을 강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충분하며 완전한 구원의 길임을 선언합니다.

    행 4:12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의미: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돌려져야 한다는 원칙이다.

    배경: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공로나 교회의 권위가 아닌, 모든 선행과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요성: 인간의 모든 활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모든 공로와 영광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신학적 원리를 나타냅니다.

    이 다섯 가지 원칙은 종교개혁의 중심 사상으로, 당시 교회의 여러 관행과 교리를 비판하고 새로운 신학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 원칙들은 오늘날에도 많은 개신교 교파에서 중요한 교리로 유지되고 있다.

    첫째,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종교개혁 당시 에라스무스는 ‘성경에는 어둡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을 뿐 아니라,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부분도 있다. 
    그래서 성경과 교부들의 해석, 성경과 전통, 성경과 교황의 가르침, 성경과 철학, 성경과 건전한 이성, 이 양자가 모두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터는 “‘성경은 흠이 없고 아주 명료한 계시의 말씀’이기에, 이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다만 인간의 죄로 영적인 눈과 귀가 어두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죄 때문에 멸망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기쁘게 받아드릴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성경은 다른 권위에 의해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성경해석의 원칙을 내세우며 '오직 성경'을 강조했다.

    그는 “모든 것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여 깨달음으로 얻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기 위해 성경을 주셨다. 비록 이 성경을 쓴 사람은 인간이나, 저자는 하나님이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드러내신 계시이다.”라고 주장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속성을 네 가지로 설명했다.

    권위성(Authority) : 성경의 권위는 성경 자체에 의해 증명된다.
    필연성(Necessity) : 구원은 구원의 방편으로 성경은 절대 필수적이다.
    명료성(Clarity) : 성경에는 구원에 필요한 지식이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충족설(Sufficiency) : 성경은 개인 구원과 교회의 영적, 도덕적 욕구를 완전히 충족한다.

    이렇게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최종 권위를 두고 신앙과 삶의 근본이 된다고 가르쳤다. 
    한 예로, 루터는 제롬(Jerome)에게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나는 오직 성경만이 무오하다는 것을 견지하는 법을 배웠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다시 천주교회는 교회의 권위를 성경 위에 두고 오직 예전과 미신 가운데 사로잡혀 바른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 못했었다. 
    이를 한탄하며 개혁자들이 가장 먼저 주장한 것이 바로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였다. 
    이유는 성경만이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는 유일한 근거이며 신앙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둘째, 오직 믿음(Sola Fide)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은 어떤 선한 행위에 의한 대가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매우 강조했다. 
    당시 천주교회는 행위를 통한 구원의 방식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면죄부를 사면 죽은 조상들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며 면죄부를 팔았다. 
    이는 사기다. 
    루터는 이러한 당시 교계의 부패와 거짓을 지적하며 반박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어 교계는 물론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주어 걷잡을 수 없는 개혁 운동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온 세계를 뒤흔드는 개혁 운동이 되었다.

    ‘오직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는 인간의 행위로 이루어야 하는 공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즉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음을 믿는 것뿐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 구속 사건으로 이루신 예수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었음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이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의가 내가 믿을 때 전가되는 것뿐이며, 성경에 계시가 된 이 구원의 진리를 믿을 때 주어지는 칭의의 은혜를 받는 것 즉 믿음으로 사는 것뿐이다. 
    이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확실하게 정리해 주었다.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구원의 진리에 대하여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60문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이다. 

    이어서 제61문은, “왜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다고 말합니까?” 
    답은, “하나님께서 나를 기쁘게 받으시는 것은 내가 믿었다는 공적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와 의와 성결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의로운 자가 된 것입니다.”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삼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믿는 것밖에 없다. 
    이 모든 영적 과정은 어떤 노력과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개혁신앙이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설명은 자연히 구원이 우리 자신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믿게 된 은혜 즉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 점을 강조한 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이라는 말은 이미 구원을 이루시고 이를 구체적으로 적용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것이 개혁신앙이다.

    셋째, 오직 은혜(Sola Gratia)

    앞에서 언급한 에라스무스는' 타락한 인간이라도 그 속에는 여전히 '자유의지(free will)'라는 것이 남아있어서, 인간은 그 자유의지를 이용하여 모든 죄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 당시 천주교에서는 ‘인간은 할 수 있는 바를 할 때, 하나님의 은혜는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완성해 준다’라고 가르쳤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진리를 믿으나,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한 협력이 수반된다는 점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천주교회는 '선행'을 강조하며 이는 구원의 필수요소라고 가르친다.

    반면에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마음과 양심은 죄로 완전히 오염되었고 사단의 노예가 되어 죄 가운데 거할 뿐이라고 규정한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것을 만들 수 있다면, 그 자체가 기만이며, 속임수가 된다. 
    이유는 인간은 타락으로 완전히 부패한 존재여서 스스로 구원을 이룰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겐 구원의 은혜를 수용할 만한 그 어떤 공간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다. 
    구원의 전제 조건인 이 사실을 인정하고 믿을 때 구원이 주어지게 된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라(눅 9:23)”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이 개혁신앙이며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도리다.

    만약 우리에게 선을 행할 능력이 있고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져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그 은혜는 더는 은혜가 아니다. 
    마치 기름과 물이 섞일 수 없듯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공력은 결코 섞일 수 없기 때문이다. 
    죄인의 구원은 결코 인간 스스로 이룰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개혁신앙은 이 점을 확실하게 고백하며 믿는다.

    이 진리가 성경의 핵심이며 모든 종교개혁자가 가르친 바이다.

    에베소서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J. Calvin,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인간 자신의 능력에 속한 것이 아니기에 그의 선행도 인간 자신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 은혜의 결과이다.

    넷째,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에라스무스는 ‘비록 인간은 일그러지고 병이 들었지만 선한 면이 조금은 있으므로 이것을 잘 고양하면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선한 면을 일깨워 가르쳐 주는 좋은 스승이며, 성경은 이 스승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길잡이다. 인간은 완전히 타락한 것이 아니므로 예수의 도움을 받아서 착한 본성을 잘 살려 나가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가르침을 '세미 펠라기우스 주의(semi-pelagianism)'라고 하는데, 이는 인간의 의지와 능력을 인정하며 노력을 인정하고 강조하는 가르침이다. 이에 대하여 지금도 많은 이가 동조하며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베드로는 공회에서 분명하게 주장했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루터 역시, “인간은 철저하게 타락하여 죽었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의 본성을 잘 개선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의'의 수준에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다! 
    타락한 인간을 살리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며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바로 주께서 하신 말씀과 같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마지막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히 1:2)가 없는 모든 자연 신학과 보편 구원론과 종교 다원주의를 단호히 배격한다. 이는 현대교회가 '에큐메니컬(교회일치) 운동'을 부르짖으며 종교 다원주의를 수용하는 이때, 더욱 선명하게 '오직 그리스도”를 외쳐야 할 이유가 된다. 오직 예수만이 구원이시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믿고 전해야 한다. 이는 개혁신앙인이 수행해야 할 사명이다.

    타락한 인간을 살리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며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다섯째,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종교개혁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재발견했다. 
    이는 이 진리를 믿는 우리 역시 인생의 목표를 분명하게 설정하게 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또 온 세상에 미친다. 
    그러기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 사실을 믿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제1문을 보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그 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이는 성경의 교훈과 일치한다.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칼빈도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시다. 그분은 창조주이시다. 그분은 만물이 기동하며 살아가는 동인이 되시며, 그 존재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방편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의 모든 영광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마지막 목적이 되신다.”라고 가르쳤다.

    3. 종교개혁의 교훈과 여파

    종교개혁은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어떤 사명을 주었는가? 

    첫째, 말씀 중심의 개혁 운동을 일으키게 한다.

    이는 교회와 성도가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이 말씀을 집중적으로 배우고 삶에 적용하여 그 말씀대로 살도록 명한다.

    둘째, 만인 제사장 운동을 수행하게 한다.

    종교개혁 당시 사제들은 무식했고, 교회에서 성도에게 성경을 읽히지 않았다. 종교개혁은 만인 제사장직을 강조하여 모두가 성경을 읽고 기도할 수 있으며 성례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셋째, 선교 회복 운동이다.

    교회의 궁극적인 사명은 주님과 사도가 교회에 명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넷째, 신앙 본질 회복 운동이다.

    온갖 사이비와 이단 사설이 판치고 있는 이때, 성경이 가르치는 바 바른 신앙 즉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에 근거한 회복 운동을 계속 유지하고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결론

    종교개혁 의 정신을 되새겨 교회가 지속해서 개혁되도록 해야 한다. 종교개혁 정신은 근세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교계는 물론 사회 전 영역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대교회는 기복신앙과 물량주의, 형식주의와 교권주의, 그리고 탈사회적 이기주의로 교회 본연에서 크게 이탈되었다.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 활발한 개혁 운동을 수행해야 하는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교회와 성도는 이기적인 구복 신앙에서 벗어나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운동 즉 말씀의 회복 운동,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구원 얻는다는 믿음 사상과 물량주의와 교권주의에서 벗어나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 구원 얻는다는 사실을 믿고, 오직 그리스도만(Solus Christus) 이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믿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드리자(Soli Deo Gloria)는 종교개혁의 정신과 주장에 따라 “성경적 바른 신앙의 본질 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개혁교회는 언제나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the church of Reformed always reforming)”라는 명제를 따르는 것이다. 
    개혁교회는 바른 성례 전 회복과 함께 잃어버렸던 고백 공동체로서의 교회로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이는 마땅히 감당해야 할 ‘선교적인 사명과 책임’을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성실하게 수행하는 개혁교회가 되는 것이다. 
    모두 이 거룩한 사역에 힘쓰기를 바란다.


    3월 23일(월) 누가복음 22:47-5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인자를 파느냐?(48절)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But Jesus asked him, "Judas, are you betraying the Son of Man with a kiss?

    “인자를 파느냐?” 라는 질문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진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룟 유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인자(人子)”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하신 메시아적 칭호입니다.
    이 표현은 다니엘서 7장에서 나온 개념과 연결됩니다(단 7: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인자 같은 이”
      → 하나님께 권세와 영광을 받는 존재

    즉, “인자”는고난받는 인간, 동시에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구원자라는 이중 의미를 갖습니다.

    “파느냐”는 물건을 팔고 구입하는 단순한 거래가 아니라 넘겨준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왜냐하면 판다는 헬라 단어는 "파라디도미(paradidōmi. παραδίδωμι)"라고 합니다.
    '파라디도미'란 단순한 배신이 아니라 신뢰를 깨고 원수의 손에 넘기는 행위를 말합니다.

    παραδίδωμι Storng number 3860

    1. 넘겨주다.  2. 천거하다. 3. 물려주다 
    Pronunciation  [ paradidōmi ]  
    Etymology  /  현재가정법 3인칭단수 παραδιδῷ, 미완료3인칭단수 παρεδίδου, 미완료3인칭 복수 παρεδίδουν, 미래 παραδώ- σω, 제1부정과거 παρέδωκα, 제1부정과거직설법 παρέδοσαν, 제2부정과거가정법3인칭단수 παραδῷ, 제2부정과거명령 παραδοῖ, 제2부정과거분사 πα- ραδούς, 완료 παρ αδέδωκα, 완료분사 παραδεδωκώς, 과거 완료3인칭복수 πα- ραδεδώκα, 미완료수동태3인칭단수 παρεδίδετο, 완료수동태 3인칭단수 παραδέδοται, 완료수동분사 παραδε- δομένος, 제1부정과거수동태 π αρεδό- θην, 미래수동태 παραδοθήσομ αι, 3844와 1325에서 유래
    •  1. 넘겨주다, 내주다, 맡기다, 마25:14, 20,22, 눅4:6, 요19:30, 행28:17, 롬8:32, 갈2:20.
    •  2. 천거하다, 천하다, 맡기다, 위탁하다, 내맡기다, 행14:26, 15:40, 벧전2:23.
    •  3. [전통 따위] 물려주다, 전해주다, 말해주다, 가르치다, 눅1:2, 행6:14, 고전11:2.
    •  4. 허락하다, 허용하다, 막4:29.
    • 관련 성경 /  잡히다(마4:12, 막1:14), 내어주다(마5:25, 막13:12, 행28:17), 팔다(마10:4, 막14:21, 요18:2), 넘겨주다(마10:17, 막13:9, 눅21:12), 주다(마11:27, 행16:4, 엡5:25), 잡아주다(마24:10), 맡기다(마25:14), 팔리다(마26:2, 막14:18), 넘기다(요18:30,35), 버려두다(행7: 42), 떠나가다(요19:30), 부탁하다(행14:26, 15:40), 택하다(행15:26), 전하다(고전11:23, 15:3), 바치다(고전15:24), 방임하다(엡4:19), 버리다(엡5:2).


    문장의 전체 의미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는 말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사랑과 친밀함의 표시(입맞춤)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를 배반하느냐?”라고 책망하며 깨우치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신학적 핵심

    이 한 문장에는 깊은 역설이 있습니다:

    • 사랑의 행위 (입맞춤) → 배반의 도구가 됨
    • 제자 → 배신자가 됨
    • 메시아 → 팔려 넘겨짐

    즉,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 일어난 배반,  겉모습과 내면이 완전히 분리된 상태 를 드러냅니다.  

    핵심 정리 /  “너는 사랑의 표시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배반하느냐?”

    배반”이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 약간씩 뉘앙스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신뢰, 약속, 의리, 기대 등을 저버리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믿었던 사람이나 원칙을 뒤로하고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세부적으로 보면:

    1. 인간 관계에서의 배반
      • 친구, 가족, 연인, 동료 등과의 신뢰 관계를 깨뜨리는 행위.
      • 예: 친구의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거나, 약속을 어기는 경우.
    2. 정치/사회적 배반
      • 국가, 조직, 집단에 대해 충성을 저버리는 행위.
      • 예: 반역, 간첩 행위, 동맹 배신 등.
    3. 신학적/종교적 배반
      • 신, 교리, 성스러운 약속 등을 어기는 행위.
      • 예: 성경에서 유다의 예수 배반처럼, 신뢰와 사명을 저버린 경우.
    4. 심리적/철학적 의미
      • 내적 신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 의미로도 사용됨.

    성경에서 특히 유다의 배반은 단순한 개인적 배신을 넘어 하나님의 계획과 구원 사역 속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해석되며, 인간의 자유 의지와 죄성, 구속의 신학적 의미를 드러냅니다.


    “배신”과 “배반”은 한국어에서 비슷하게 쓰이지만, 뉘앙스와 사용 맥락에서 차이가 있어요. 

    1. 배신(背信)

    • 뜻: 신뢰를 저버리고 약속이나 믿음을 깨뜨리는 행동.
    • 강조점: 신뢰와 믿음을 저버림.
    • 예시:
      • 친구에게 비밀을 말했는데, 그 친구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 친구가 나를 배신했다.
      • 정치인이 유권자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 유권자를 배신했다.
    • 뉘앙스: 개인적 감정과 심리적 상처가 강조되는 경우가 많음.
    παραπίπτω 3895 [parapiptō]
    • 곁으로 떨어지다, 길을 잃다, 놓치다, 낙심하다, 저버리다, 배반하다, 배교하다, 배신하다, 히6:6.

    προδίδωμι 4272 [prŏdidōmi]
    • 1. 넘겨 주다, 배신하다.
    • 2. 미리 주다, 롬11:35.
    μετατίθημι 3346 [mĕtatithēmi]
    • 1. [중간태] 마음이 변하다, 돌아서다, 버리다, 배신하다, 갈1:6.
    • 2. 위치를 변경하다, 자리를 옮기다.
    • 3. 다른 곳으로 옮기다, 이전하다, 행7:16, 승천하다, 히11:5.

    1. 성경 속 배신

    • 유다 이스카리옷과 예수의 배반
      예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실 때, 유다는 은 30냥을 받고 예수를 대제사장들에게 넘겼습니다.
      • 특징: 신뢰를 가진 관계 안에서 금전적 유혹과 정치적 압력으로 인한 배신
      • 교훈: 배신은 외부 요인보다 내부 욕망과 선택에서 시작됨. 

    2. 역사 속 배신

    • 브루투스와 카이사르
      로마 황제 카이사르가 브루투스 등에게 암살당한 사건.
      • 특징: 정치적 동맹이자 신뢰 관계였던 브루투스의 배신
      • 교훈: 권력과 이익이 인간 관계를 배반하게 만들 수 있음
    • 이중 스파이 사례
      냉전 시대 소련과 미국의 스파이 활동, 예: 로버트 한센(Hansen)
      • 특징: 국가적 신뢰를 배신
      • 교훈: 배신은 개인적, 국가적 수준에서 모두 가능

    3. 문학 속 배신

    • 셰익스피어 <오셀로> – 이아고
      이아고가 오셀로를 속여 데스데모나와의 관계를 오해하게 만듭니다.
      • 특징: 질투와 복수심이 배신의 원인
      • 교훈: 감정과 심리적 동기가 배신을 일으킬 수 있음
    • 《햄릿》 – 클로디어스
      햄릿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
      • 특징: 권력욕이 배신의 동기
      • 교훈: 인간의 야망과 도덕적 한계가 배신을 촉발

    4. 현대 사례

    • 기업 내 내부 고발자와 배신 논란
      직원이 회사 기밀을 외부에 공개했을 때
      • 특징: 윤리적 판단 vs 조직 충성 갈등
      • 교훈: 배신은 상황과 가치관의 충돌에서 발생

    2. 배반(排反)

    • 뜻 : 자기와 연관 있는 집단, 사상, 조직, 지도자 등을 공식적·공적으로 버리고 반대하거나 적대하는 행동.
    • 강조점 : 정치적, 조직적, 도덕적 충성을 저버림.
    • 예시 :
      • 장수가 왕을 몰래 적에게 붙으면 → 왕을 배반했다.
      • 유다의 예수에 대한 행위 → 성경에서는 “유다가 예수를 배반했다”라고 표현.
    • 뉘앙스 : 보다 공식적, 역사적, 도덕적 판단의 의미가 강함.


    παραπίπτω 3895 [parapiptō]
    • 곁으로 떨어지다, 길을 잃다, 놓치다, 낙심하다, 저버리다, 배반하다, 배교하다, 배신하다, 히6:6.

    σκανδαλίζω 4624 [skandalizō]
    • 1. [대격을 취하여] 마5:29, 18:6,9, 막9:42,45,47, 눅17:2, 고전8:13, [수동] 죄에 빠지다, 고후11:29, 배반하다, 마13:21, 24:10, 막4:17, 14:27, 29, 요16:1.
    • 2. 걸리게 하다, 넘어지게 하다.
    • 3. 죄를 짓게 되다, ~ 때문에 성내다, 불쾌해하다, 마11:6, 13:57, 26:31, 33, 막6:3, 눅7:23, 롬14:21.
    • 1. 배반하다
    • 2. (누구에게) 내어주다
    • 3. 부탁하다
    🔹 비교 요약
    구분 배신 배반
    핵심 신뢰 저버림 충성/의무 저버림
    맥락 개인적, 감정적 정치적, 도덕적, 역사적
    친구, 연인, 약속 지도자, 조직, 나라
    감정 배신감, 상처 도덕적 심판, 역사적 평가

    쉽게 기억하려면

    • 배신 = 마음 속 믿음을 깨뜨림
    • 배반 = 외적·공적인 충성을 깨뜨림

  • 배반의 주체와 대상
    • 유다 : 예수 → 신학적 의미 포함
    • 일반 배신 : 사람 → 인간관계/이익 중심
  • 동기
    • 유다 : 돈, 예정된 사건, 신학적 운명
    • 일반 배신 : 개인 이익, 감정, 권력
  • 행위 방식
    • 유다 : 입맞춤(겉으로 친밀한 표시), 은밀히 넘김
    • 일반 배신 : 거짓말, 속임수, 기만
  • 결과
    • 유다 : 구속사적 사건 촉발, 예수의 운명 완성
    • 일반 배신 : 신뢰 붕괴, 관계 손상, 개인 피해
  • 의미/영향
    • 유다 : 신학적/구속적, 전체 역사와 연결
    • 일반 배신 : 사회적/개인적, 제한적 영향
  • 1. 성경 속 유다의 배반

    • 상황 : 예수님께 가장 가까웠던 제자 중 하나인 유다가 은 30냥에 예수를 로마 당국에 넘김.
    • 배반의 특징 : 친밀함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 관계에서 금전과 자기 이익을 위해 믿음을 저버림.
    • 신학적 의미 : 인간의 탐욕과 불완전성을 드러내며, 배반이 구원의 역사 안에서도 필연적 사건으로 나타남.

    2. 역사 속 안토니우스와 브루투스

    • 상황 : 로마 황제 줄리어스 시저가 친근하게 여긴 브루투스가 결국 암살에 가담.
    • 배반의 특징 : 정치적 이상과 개인적 충성 사이의 갈등, ‘가장 믿었던 사람이 배신’이라는 극적인 상황.
    • 역사적 의미 : 권력과 정치적 선택이 인간 관계의 신뢰를 넘어설 수 있음을 보여줌. 

    3. 문학 속 ‘햄릿’의 클라우디우스

    • 상황 : 덴마크 왕자 햄릿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
    • 배반의 특징 : 가족, 권력, 탐욕이 결합된 배반. 가까운 친족을 속이고 살해.
    • 문학적 의미 : 배반이 인간 내면의 욕망과 도덕적 갈등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보여줌. 

    4. 현대 사례 : 기업 내부 배신

    • 상황 : 회사 임원이 내부 정보를 경쟁사에 제공하거나 기밀을 유출.
    • 배반의 특징 : 신뢰와 의무를 어기고 이익을 취함.
    • 현대적 의미 : 배반은 개인적 이익 추구와 도덕적 책임 사이의 갈등으로 나타날 수 있음. 

    배반의 공통 요소

    1. 신뢰 기반 관계 – 친밀한 관계나 공동체가 배경.
    2. 이익/욕망 동기 – 금전, 권력, 생존 등.
    3. 결과적 충격 – 배반 당한 쪽은 심리적/사회적 피해.
    4. 도덕적·철학적 교훈 – 인간 본성, 윤리, 사회적 신뢰 문제를 환기.


    스파이 수요일(Spy Wednesday) 

    스파이 수요일의 의미 /  예수님이 체포되기 전, 유다가 예수를 팔기로 계획한 날을 가리킵니다.
    이름의 유래 : 당시 유다의 배신 행위가 숨겨진 계획(spying. secret)처럼 진행되어 ‘스파이 수요일’로 불립니다.
    성경 구절 근거 :  마태복음 26:14-16, 마가복음 14:10-11, 누가복음 22:3-6

    사건 흐름

    1.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만찬 전
      • 무리와 바리새인, 사두개인 사이 긴장 증가
      • 유다 마음 속 배반의 계획 시작
    2. 유다의 접촉
      • 사제들과 장로들이 유다에게 접근
      • 금전적 유혹: 은 30냥 제안
      • 유다의 마음 속 배신 결심 (내적 갈등 존재 가능)
    3. 배반 계획 실행
      • 유다는 몰래 예수를 체포하도록 약속
      • 사람들에게 예수의 위치/습관 정보 전달 → 스파이적 행동
      • 예수에게서 마지막 만찬 중 내적 고백이나 예고 (예수는 유다의 마음을 아심) 

    유다의 배반 구조

    배반 구조를 사건 중심으로 도식화하면:

    단계 유다의 행동 예수/타인 관찰
     1    내적 결심 (마음 속 계획)                     예수는 이미 아심
     2         장로들과 접촉        바리새인/사제들은 유다를 이용
     3     약속 수락 (은 30냥)        인간적 욕망과 권력욕이 결합
     4  몰래 움직임 / 예수 위치 전달         제자들은 무지, 예수는 인지
     5    체포 날 협력 (감람산 등)        예수는 배반의 순간을 지혜롭게 맞음

    핵심 구조 분석:

    • 동기 : 돈, 세속적 권력, 내적 유혹
    • 행동 방식 : 은밀, 계획적, 시간/공간적 은폐
    • 결과 : 예수 체포 → 십자가 사건으로 연결
    흐름 요약 (한 눈에 보기)
    내적 배반 결심

    유다 ↔ 장로/사제 접촉 (은 30냥)

    몰래 계획 실행 → 예수 위치 정보 제공

    체포 현장 협력 → 마지막 만찬/감람산 사건

    예수 체포 → 십자가 사건으로 이어짐


    유다의 배반 구조 도식 (한 장 그림 컨셉)

    ┌─────────────────────────────┐
    │ 유다의 내적 상태 │
    ├─────────────┬───────────────┤
    │ 탐욕/물질적 욕망 │ 의심/불안/실망 │
    └─────────────┴───────────────┘


    ┌─────────────────────────────┐
    │ 외부 압력/유혹 │
    ├─────────────┬───────────────┤
    │ 사제들과 장로 │ 군중 기대/정치적 상황 │
    └─────────────┴───────────────┘


    ┌─────────────────────────────┐
    │ 사건 진행 순서 │
    ├─────────────┬───────────────┤
    │ 1. 스파이 수요일(대가 논의) │
    │ 2. 최후의 만찬 (예수와의 접촉)│
    │ 3. 예수 체포 (입맞춤으로 신호) │
    └─────────────┴───────────────┘


    ┌─────────────────────────────┐
    │ 결과/심리적 충격 │
    ├─────────────────────────────┤
    │ 배신 후 후회와 절망 │
    └─────────────────────────────┘

    설명:

    1. 마음 상태 – 유다는 내적으로 탐욕과 실망이 혼재한 상태였습니다.
    2. 외부 압력 – 사제/장로의 압력, 그리고 정치적·사회적 기대가 그의 선택을 부추겼습니다.
    3. 사건 진행 – 스파이 수요일에서 대가를 받고,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와의 접촉, 결국 입맞춤으로 체포 신호까지 이어집니다.
    4. 결과 – 배반 후 심리적 후회와 충격이 유다를 덮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과 배반하는 인간의 역사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하신 말씀을 반드시 시행하시고 역사 가운데 그분의 계획을 다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고 하는 우리 인간은 신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금세 깨닫게 됩니다. 
    인류의 역사를 ‘배신의 역사’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웃으면서 악수하고 친밀감을 표현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금세 자기에게 이득이 되지 않으면 고개 돌려 배신하거나 뒤에서 칼을 꽂는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어 왔습니다.

    로마의 위대한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이 친아들처럼 아꼈던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자기에게 칼을 찌르는 그를 보면서 카이사르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브루투스 너마저.” 사랑하고 믿고 아꼈던 자에게 당하는 배반이 얼마나 아팠을지,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배반하는 존재인지를 떠오르게 만듭니다.

    '배신의 입맞춤' 마 26:47-49  

    오늘 본문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배신의 현장을 기록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그는 그래서는 안 될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사랑의 상징을 배반의 도구로까지 사용하면서 주님의 뒤통수를 치고 주님을 팔아버립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깊은 죄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1. 배신자의 정체 : ‘열둘 중의 하나’라는 비극

    가룟 유다는 성전 경비대를 이끌고 예수님을 잡기 위해 앞장서서 옵니다. 이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언제나 주님과 함께하며, 웃고 울며 같이 식사하던 그 공동체의 한 사람이, 이제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흉흉한 기세를 품고 칼과 몽치를 들고 있는 무리들 제일 앞에 횃불을 들고 예수님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의 최측근이자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충격적입니다.

    '배신의 입맞춤' 마 26:47-49 새벽기도회 25.09.19. 8

    마태는 이 유다에 대해 의도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그냥 가룟 유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굳이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고 묘사합니다(마 26:47). 이 묘사는 마치 카이사르가 친아들같이 대해주었던 브루투스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는 많았지만, 대부분은 자기 이득을 위해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무리들 중에서 제자들을 구분하셨고, 그 제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열두 명을 따로 선택하셔서 최측근으로 두셨습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바로 옆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눈빛을 보며, 기적을 체험하게 해주셨습니다.

    “열둘 중의 하나”라는 말은 정말 특별하게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표현입니다. 열둘 중에 하나였던 그가 이럴 수는 없는데, 그가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 가까이에서 그 사랑을 다 경험했고, 심지어 이 밤에는 자기 자신의 발까지 씻기시는 위대한 섬김과 사랑을 체험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2. 배신의 동기 : ‘랍비’와 ‘주’의 결정적 차이

    가룟 유다는 왜 주님을 배신했을까요? 그의 호칭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말합니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마 26:49).

    베드로의 신앙고백(“주는 그리스도시요”) 이후,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마태복음은 의도적으로 제자들이 주님께 “주여(Lord, 퀴리오스)”라고 말하는 것과 대조하여, 가룟 유다가 과거의 명칭인 “랍비(Teacher)”를 고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유월절 만찬에서도 다른 제자들은 “주여 내니이까”라고 질문했지만, 오직 유다만이 “랍비여 내니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마음이 이제 주님을 ‘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기준에 주님이 들어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낼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지 않으신다면, 주로 인정할 필요가 없다고 그는 이미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유다는 끝까지 주님께서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셔야만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제자의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주님 곁에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계속해서 자기의 가치관과 의도가 중요했기에, 내가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면 주님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은혜 받고 봉사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믿음이 자란 증거는 아닙니다. 기적을 체험한다고 믿음이 성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단지 감정의 변화만 있었을 뿐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나’라는 자아의 가치관을 주님께 내려놓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과정 속에서 자라납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왜입니까? 인생의 가치관이 바뀌고 목적지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기에 유다는 배반자가 되고야 만 것입니다. 

    3. 사랑의 타락 : 배신의 도구가 된 입맞춤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는 방식은 입맞춤이었습니다. 고대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입맞춤은 존경과 사랑과 친밀감을 표현하는 행위였습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다윗과 요나단이 헤어질 때 사랑과 우정의 표시로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이 사랑의 표현인 입맞춤을 예수님을 배신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야 맙니다. 최고의 선이 타락할 때 최악이 되는(Corruptio Optimi Pessima) 비극입니다.

    '배신의 입맞춤' 마 26:47-49 새벽기도회 25.09.19. 9

    이런 일들이 죄가 지배하는 삶 속에서 자주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실을 전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도구로서 언어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변할 때, 그 언어가 거짓의 종으로 바뀌고 미움과 욕망의 도구로 바뀌는 일을 우리는 스스로의 삶 속에서 발견하고는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예배는 은혜의 도구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의 도구였던 예배가 형식만 남게 되면, 그때부터는 자기 의를 드러내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곡조 있는 감탄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찬양의 시간이 어느 순간 사람들 앞에서 나를 드러내는 자기 과시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앞에 나와야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야 자기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배신의 입맞춤' 마 26:47-49 새벽기도회 25.09.19. 10

    이웃 사랑과 봉사와 헌신조차도 자기 만족의 도구로,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사랑과 존경의 도구였던 입맞춤을 배신의 도구로 썼듯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많은 사랑과 은혜의 도구들이 나의 죄 때문에 죄의 도구로 바뀌는 경우들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 ‘친구’라 부르시는 사랑과 코람 데오의 삶

    우리가 그렇게 연약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연약함보다 더 크십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의 입맞춤, 그 속을 투명하게 다 보고 계셨습니다. 위선적인 미소와 입맞춤이 보기 좋게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의도를 가지고 칼을 뒤에 숨기고 다가오는 사람을 안다면 거리를 두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50절에 그를 이렇게 부르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마태복음 26:50)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을 찌르는 브루투스를 보며 경악하며 “브루투스 너마저, 이럴 수가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하기 위해 위선적인 입맞춤을 하는 제자에게 오히려 ‘친구여’라고 부르시면서 그를 받아주시고 품어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이 은혜를 우리가 은혜로서 지키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사랑의 도구들을 죄의 도구로 바꾸려 할 수 있습니다. 내 만족을 위해서 스스로를 위한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가 분명히 찾아올 것입니다.

    그것을 막기 위한 방법은 단순합니다. 쉽지는 않지만 매우 단순한 방식입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Coram Deo)’입니다.

    우리가 내가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하나님 그분을 발견하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그리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이 스스로 드러내신 자기 계시 속에서의 하나님을 깨닫고, 그분 그 자체로 말미암아 감탄하고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은혜를 은혜답게 지키는 삶

    우리가 코람 데오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사랑은 변질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찬양은 자기 의나 자기 과시의 도구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웃 사랑과 섬김도 자기 만족이나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충분한 사랑의 행위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여전히 “브루투스 너마저”라며 배신의 뒤통수를 맞고 경악하는 장면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배신자조차 “친구여”라고 부르시는 구원의 역사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내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를 오늘도 생각하시면서, 받은 은혜를 은혜답게 우리의 삶 속에 사랑의 도구로 실천해 나아가는 저와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배신의 입맞춤'  마 26:47-49 새벽기도회 25.09.19. 11 

    핵심 적용 질문과 답변

    Q1.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최측근인 ‘열둘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충격적인가요?

    A1. 그것은 배신의 깊이가 친밀함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열둘 중의 하나”라는 것은 예수님의 최측근으로서 모든 사랑과 가르침, 기적을 가장 가까이서 경험했다는 의미입니다. 모르는 사람의 공격보다, 모든 것을 나누었던 사람에게 당하는 배신이 훨씬 더 고통스럽습니다. 마치 친아들처럼 아꼈던 브루투스에게 배신당한 카이사르의 고통처럼,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의 깊이를 강조하며, 가장 가까이 있는 자도 변절할 수 있다는 경고를 줍니다.

    Q2. 저도 교회에서 봉사하고 은혜도 받는데, 가룟 유다처럼 변질될 수 있다는 말씀이 두렵습니다. 참된 믿음의 성장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A2. 설교는 기적 체험이나 감정적인 은혜가 믿음 성장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명확히 합니다. 참된 믿음의 성장은 ‘가치관의 변화’와 ‘자기 부인’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즉, 내 자아와 가치관을 주님께 내려놓고 주님의 뒤를 따르기 시작할 때,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주도하시도록 내어드릴 때 믿음이 자라납니다.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것처럼, 삶의 목적과 방향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 성장의 증거입니다.

    Q3.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른 것이 왜 문제가 되나요?

    A3. ‘랍비’는 ‘선생님’이라는 뜻으로 그 자체는 존칭입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Lord, 퀴리오스)’ 곧 메시아로 고백하는 시점에서, 유다가 의도적으로 ‘랍비’만을 고집한 것은 그의 불신앙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당신은 훌륭한 선생일지는 몰라도, 내가 기대하는 정치적 메시아는 아니므로 나의 주인은 될 수 없다”는 선언과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준과 가치관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Q4. 저도 모르게 예배나 봉사를 자기만족이나 자기 의를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막을 수 있나요?

    A4.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도구들이 죄의 도구로 변질되는 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코람 데오(Coram Deo)’, 즉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인정이나 자신의 만족을 구하는 대신, 모든 순간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인식할 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내가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 그분을 알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 그 자체로 감탄하고 예배할 때, 우리의 모든 헌신은 자기 과시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순수한 행위가 될 것입니다.

    Q5. 예수님께서 배신하는 유다를 ‘친구’라고 부르신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A5. 이것은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주님의 압도적인 사랑을 보여줍니다. 인간적으로는 경악하고 분노해야 할 순간입니다(카이사르처럼). 그러나 주님은 유다의 위선과 배신을 다 알고 계셨지만, 그를 정죄하고 내치시는 대신 ‘친구여’라고 부르시며 마지막까지 품어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보다 주님의 사랑이 훨씬 크다는 것을 보여주며,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붙잡는 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 
    배신과 변절이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저희는 가룟 유다처럼 주님 가까이 있으면서도, 저희 자신의 욕망과 기준 때문에 주님을 온전히 주로 인정하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의 도구들(예배, 찬양, 봉사)을 오히려 저희의 의를 드러내고 만족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질시켰던 위선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 저희가 주님을 ‘랍비’가 아닌 진정한 ‘주님’으로 섬기게 하옵소서. 
    저희의 낡은 가치관과 자아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배신자의 입맞춤 앞에서도 ‘친구여’라고 부르시며 끝까지 품어주신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 사랑에 힘입어, 이제 저희가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기를 결단합니다. 
    내가 만들어낸 하나님이 아니라, 계시된 하나님 그분을 알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주님 앞에서 저희의 동기를 점검하며, 받은 은혜를 은혜답게 지켜나가는 신실한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는 사탄의 거짓 입맞춤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마 26:48.49)

    가룟 유다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표시하려고 했지만 그 입맞춤의 배후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도록 넘기는 사탄의 흉악한 악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입맞춤은 거짓과 위선으로 포장된 사탄의 거짓된 속임의 입맞춤이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거짓된 입맞춤은 무리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인지 지목하여 예수님을 잡아가라는 암호의 입맞춤이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거짓된 입맞춤으로 대담하게 행동한 것은 사탄이 가룟 유다의 영혼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요 13:2). 
    사탄이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불어넣자 가룟 유다는 사탄이 주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사탄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여 사람들을 어두움의 구렁텅이로 몰아가는 존재입니다. 
    사탄은 겉으로는 사람들을 위하는 것처럼 유혹하지만 그 안에는 뱀의 독과 같이 우리를 쓰러뜨리는 죄의 독을 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탄의 거짓된 입맞춤에 호응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위선적인 행동을 아시지만 사람들은 겉의 모습만을 보기에 쉽게 속습니다.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면 큰 상처를 받고 상심하거나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었던 누군가로부터 큰 배신을 당할 때의 아픔은 너무나 크게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룟 유다와 같이 거짓을 감추고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트리는 거짓된 위선의 입맞춤을 버려야 합니다.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잠 27:6)”

    다윗의 군대 장관 요압이 사울의 군장 아브넬을 거짓된 위선의 입맞춤으로 속이고 목숨을 빼앗았고 압살롬도 암논을 거짓된 위선의 입맞춤로 속여 목숨을 빼앗았던 것처럼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거짓 입맞춤을 하고 배신하여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주었습니다.

    말세가 되면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4)”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탄이 속이려고 다가오는 거짓된 입맞춤의 유혹을 분별하고 사탄의 유혹을 말씀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거짓된 입맞춤으로 악을 도모하지 말아야 하며 겉으로는 사랑의 입맞춤을 하면서 속으로는 악을 품거나 악을 도모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전략(Satan’s Strategy)

    우리는 거짓된 사탄의 전략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가룟 유다와 무리가 예수님을 잡으러 오자 예수님은 “친구야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26:50)”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 중에 하나가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마26:51). 요한복음은 검을 뺀 자가 베드로이고 베드로의 칼에 귀가 잘린 종의 이름은 말고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칼을 뺀 이유는 그들과 싸워서 예수님을 지켜서 잡혀가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성을 내며 육신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사탄이 기뻐하는 일입니다(약1:20).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2)”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칼을 쓰고 혈기로 싸우는 폭력을 거절한 이유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육체대로 싸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고후10:4).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폭언이나 폭력이나 육신의 다툼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능력을 신뢰했기 때문에 폭력을 쓰지 않았습니다(마26:5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폭력보다도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신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음을 확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도움을 요청하시면 하나님께서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실 것을 믿고 아셨습니다. 우리가 혈기를 가지고 육체대로 싸우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하나님이 곁에서 항상 싸워주시고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감정과 필요를 아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있는지를 아시기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이 충동하는 육신의 생각을 멀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며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Obedience to God)

    예수님이 잡혀가시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마26:56).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잡혀가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제자들은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고 예수님을 버렸지만 예수님은 위기의 순간이 찾아오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어두움에 거하는 자는 사탄의 종이 되어 사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간다는 사실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습니다(요4:34).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 승리하여 배신의 입맞춤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돈 리처드슨 (Don Richardson, 1935, 캐나다)
    화해의 아이 (PEACE CHILD)

    1. 저자 소개: 돈 리처드슨

    • 출생 : 1935년, 캐나다
    • 직업 : 선교사, 인류학적 접근을 통한 복음 전파
    • 주요 활동 : 인도네시아 피지니아 지역의 부족 사회에서 선교 활동
    • 특징 : 단순한 전통적 선교가 아니라, 문화와 관습을 이해하고 이를 활용하여 복음을 전한 방식 

    2. 《화해의 아이 (Peace Child)》 개요

    • 출간 : 1974년
    • 장르 : 선교/전기/문화 인류학
    • 내용 요약 :
      1. 배경 – 뉴기니의 사완 부족(Sawi people)과의 접촉
      2. 문화적 장벽 – 부족 사회에서는 외부인에 대한 깊은 불신과 복수 문화 존재
      3. 화해 전략 – 어린이를 서로 교환하는 전통(“Peace Child”)을 통해 적대감을 해소
      4. 선교적 성과 – 리처드슨과 부족 간의 신뢰 형성, 결국 복음 수용으로 연결
    • 핵심 메시지 :
      • 문화적 장벽을 이해하고 존중하면 선교적 목표 달성이 가능
      • ‘화해의 아이’는 단순한 외교적 교환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 신뢰와 평화를 상징

    3. 의미와 영향

    • 선교학적 영향 : 전통적 서구식 설득보다 문화적 접근의 중요성을 강조
    • 교육적 의미 : 갈등 해결, 문화 간 이해, 평화 구축 사례로 활용 가능
    • 글로벌 영향 :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선교사와 인류학자에게 참고 자료 제공


    이 쓴 뉴기니아 사위 (Sawi) 부족 (tribe)에 대한 선교 보고서 ‘화해의 아이 (PEACE CHILD)’라는 책을 알고 계시나요? 
    이 책은 27개국 언어로 번역되었을 정도로 선교학에서는 교과서처럼 통용되는 책입니다.

    사위 부족은 적의 머리를 사냥하여 해골을 베고 자는 야만적이고, 전투적인 부족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위 부족은 배반(背反, betrayal)을 덕목으로 알고 사는 특이한 부족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상대방을 배반하는 방식은, 먼저 상대방과 우정을 쌓아서 상대방을 안심 시켜 놓고, 때가 되면 상대방을 배반하고 죽인다고 합니다. 
    이것을 그들의 용어로 '투위 아소나이 마카에린 (tuwi asonai makaerin)'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우정으로 살해 대상을 살찌운다는 것입니다.

    리처드슨이 이 사위 부족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이들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 넘기는 장면에서 환호했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룟 유다야말로 그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그만하면 됐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보아라!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겨진다. 일어나자! 가자! 나를 넘겨 줄 사람이 오고 있다 (41-42절)” 이렇게 말씀하실 때, 유다가 왔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보낸 성전 경비원들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유다와 함께 왔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과의 마지막 만찬 도중에 밖으로 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그 때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 빵을 접시에 찍어 주는 자가 나를 배반할 자이다’ 하시면서 빵 조각을 집어서 접시에 찍어 가룟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유다가 빵 조각을 받자마자, 사탄이 그에게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빨리 하여라!’ 거기 앉은 사람 중에는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받고, 곧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때는 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26-30)

    예수님께서 식사를 마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시면서 올리브 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을 때, 밖으로 나간 유다는 성전 경비대원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하여 온 것이 분명합니다. 유다는 경비원들에게 미리 말해 두었습니다. “내가 다가가서 입맞추는 사람이 바로 예수란 사람이오.”

    유다는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어디 계시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밖으로 나가셔서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뒤따라 갔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n, accompanied by the disciples, Jesus left the upstairs room and went as usual to the Mount of Olives.” ‘as usual’이란 말이 ‘늘 하던 대로’라는 뜻이 잖아요? NKJV에는 ‘as He was accustomed’ ‘그에게 익숙했던 대로’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도 저녁 식사를 하시면 올리브 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가는 그런 예수님의 습관이 자신이 본받아야 할 습관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이 자리에 앉은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 베드로는 훗날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베드로전서 2:21) 그가 받으신 고난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남긴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고, We must follow in his steps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인 것처럼,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기도의 습관도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남기신 발자취를 따라 가야 합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에게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습관이 배신의 수단으로 이용되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의 습관을 알고 있었던 유다는 (요한복음 18:2), 겟세마네 동산으로 성전 경비대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넘겨 주는 자가 사람들과 신호를 정했습니다. ‘내가 입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니, 체포하여 데리고 가시오.’ 유다가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이라고 말하면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에게 손을 대어 체포했습니다.” (45-46절)

    복음서마다 조금씩 이 장면에 대한 기록에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곧바로 유다는 예수님께 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그러면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구여, 무엇 하러 여기에 왔느냐?’ 하고 묻자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마태복음 26:49-50)

    제가 퀴즈 문제 하나 낼까요? 
    유다가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인사했을 때, 유다의 목소리가 어떤 목소리였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①아무 일 없다는 듯한 능청스러운 목소리였다. 
    ②매우 긴장된 목소리였다. 
    ③조금은 과장된 흥분된 목소리였다. 
    ④자기 선생님을 경멸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제가 생각한 정답은 3번입니다. 
    NASB에 보면 유다가 이렇게 예수님께 인사했다고 합니다. 
    “Hail Rabbi!” 굳이 우리 말로 번역한다면 “선생님, 여기 접니다. 안녕하셨습니까?”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왕 퀴즈를 낸 김에 하나 더 낼까요? 
    유다의 키스를 받은 예수님의 표정은 어떠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①모든 것이 끝났다는 표정이었다. 
    ②유다를 불쌍하게 여기는 표정이었다. 
    ③조금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④불쾌한 표정이었다. 
    여러분의 정답은 몇 번입니까?

    오늘 설교 제목이 ‘배반의 입맞춤’ ‘배반의 키스’입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장면을 보면서 마음이 아픕니다. 
    뉴기니아의 사위 부족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그 장면을 보면서 환호했다고 하는데요.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어떻게 자기 선생님을 배반할 수가 있느냐 하면서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모두 유다의 이름을 쓸 때마다 ‘장차 예수님을 배반할 가룟 유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할 사람이 누구냐고 하면서 저마다 자기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 식탁에 앉아 있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받은 돈주머니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 “난 아닙니다”고 말하듯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은 그 놈이 누군지 알기만 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손에 단도 (칼)를 들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곁에 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쳐 귀를 잘랐습니다.” (47절) 
    요한복음에는 그 제자가 베드로였다고 합니다 (18:10) 
    베드로가 그 종의 오른쪽 귀를 잘랐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8:10, 누가복음 22:50). 
    그 종의 이름이 말고 (Mal-chus)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고의 귀를 만져 고쳐 주셨다는 말씀도 성경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22:51). 
    이렇게 구체적이고 detail한 것들이 성경에 나오는 이유는, 그 때 일어났던 일들이 facts였다는 것입니다. 
    누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유다의 배반에 흥분했고, 칼을 휘두르면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대항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뿐이었습니다. 
    5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떠나 도망갔습니다.” 
    “‘But these things are happening to fulfill what the Scriptures say about me.’ Then all his disciples deserted him and ran away (이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성경이 나에게 대하여 한 말들이 모두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떠나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 끝에 재미 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청년이 맨몸에 홑이불을 걸친 채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청년을 붙잡았습니다. 이 청년이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이 청년이 틀림 없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붙잡은 것입니다. 이 청년은 상황이 다급하게 되자 몸에 걸치고 있었던 홑이불을 벗어 던지고 벌거벗고 도망쳤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청년이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마가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밝힐 작은 단서가 나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신학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성서학자들은 마가복음이 다른 공관복음, 즉 마태나 누가복음의 기초 자료가 된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이 되었고, 마태나, 누가는 마가복음을 참고하여 그들의 복음서를 썼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예수님의 직접 제자라고 나오고, 요한복음을 쓴 요한도 예수님의 직접 제자라고 나오는데, 마가는 어떻게 그의 복음서를 기록을 할 수 있었는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거든요. 물론 예수님의 직접 제자가 아닌 누가는, 자기 스스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1-4).

    모든 사람들이 유다의 배신을 말합니다. 참 드라마틱한 이야기이지요?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이 내부에서, 열 두 제자 중에서 나왔다는 것이 얼마나 드라마틱합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읽어 보면, 가룟 유다를 그렇게 비판할 것도 아닙니다. 방금 전까지 손에 칼을 들고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사람들에게 휘둘렀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려 두고 모두 도망갑니다. 한 청년은 맨 몸으로 도망 갔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이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다른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 (마태복음 26:33)” 이렇게 큰 소리쳤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공개된 자리에서 난 예수님을 모른다고, 난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부인합니다.

    이 베드로가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는 지도자가 됩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교회를 지키는 지도자가 되었을까요? 신자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 닥친 박해를 피하기 위해 지중해 연안 도시들로 피신을 했을 때도 박해자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교회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결코 우리의 감정(感情)에 따라 좌우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려도 전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큰 소리 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끝까지 믿음을 지킨다고 볼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이 만남을 확인해 주는 것이 성령 체험입니다. 공개된 장소에서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부인(否認)했던 베드로에게 성령 체험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 말고는 베드로의 변화의 삶을 달리 설명할 수 없습니다.

    ‘Kiss of Judas’라는 말은 ‘배반의 입맞춤’으로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문제는 ‘Judas’ 이름대신 우리의 이름이 들어갈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우리가 예수님을 배반할 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나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 때, 내가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감수해야 할 상황에서,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아야 할 때, 언제 우리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칠 지 알 수 없습니다.

    이제 사순절이 곧 지나가고, 고난 주간이 오고, 부활주일이 옵니다. 부활주일이 지나면 다시 50일만에 성령강림절이 찾아 옵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체험했던 그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믿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은혜와 축복을 주실 지 여러분의 마음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며칠 남은 사순절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난주간, 부활절, 그리고 성령강림절까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일들에게 마음을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도록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입맞춤으로 인자를 배반하고 있습니까?

    처음부터 적은 밀 가운데 가라지를 심고 양 가운데 늑대를 심었습니다. 
    양털을 두른 이 늑대들은 진짜처럼 보일 수 있고, 떠드는 소리를 할 수 있지만, 여전히 예수와 진실을 배신하려고 합니다. 
    유다는 이들 중 하나였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 중 한 명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 중 누구도 그들 중 누가 실제로 배신자가 될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것은 분명하지 않았고 그들 중 일부는 그것이 자신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사실 유다는 예수의 말씀대로 악마이면서도 진짜 제자처럼 보이는 데는 성공했습니다.(존 6 : 70
    유다가 마침내 이 배신 행위를 했을 때조차도 여전히 속임수를 썼습니다. 그는 마치 당신이 사랑하거나 애정을 가졌던 사람에게 하듯이 예수께 다가가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예수께서 알고 계셨던 속임수의 일부였기 때문에 그분은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배반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 심지어 지도자들에 대한 소식을 듣고 놀라지 마십시오. 강단에서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실제로는 빛의 천사로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기 위해 적에게 배치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지만 예수, 바울, 그리고 신약성경 전체는 그러한 경고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영리하게 들리는 말로 성경의 권위와 참된 믿음을 훼손하는 소위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떠오르는 교회' 운동에 많은 사람들을 이 진영에 포함시키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말씀하셨는가?'라는 생각을 남기는 메시지는 조심하십시오. 그것은 적의 목소리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껴안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그분을 배신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세요!

    인자를 파느냐?

    교리/신학적 개념 

    1. 정의 : 하나님, 인간, 구원, 교회, 성령, 예수 그리스도 등 핵심 신앙 주제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이론. 
    • 대표 주제

      • 구원론 : 칭의, 성화, 보전, 구속, 대속

      • 삼위일체 : 성부, 성자, 성령의 본질과 관계

      • 예정론 / 자유의지 :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 선택

    • 접근 방법

      • 성경 구절 근거 → 논리적 연결 → 역사적 교리 비교

      • 예: “롬 8:29–30”에서 예정과 부르심, 성화, 영화의 단계적 구조 분석

    2. 성경 구절 해석 (원문 포함 가능)
    • 정의 : 특정 성경 구절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문법, 어휘, 구문을 분석.

    • 접근 방법

      • 헬라어/히브리어 원문 분석

        • 단어 뜻 : πίστις(믿음) vs ἔργα(행함)

        • 동사 시제/태 : 현재 vs 아오리스트, 능동/수동

      • 문맥과 구조 분석

        • 주변 구절과 연계하여 의미 확장

        • 예: 야고보서 2장 14–26절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

    • 실례

      • 마 7:21 –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 λέγειν(말하다) vs ποιεῖν(행하다)의 대비

        • ‘말 vs 행함’ 신학적 메시지 해석

    3. 성경 전체 구조와 주제 연결
    • 정의 : 성경 책 간 메시지와 예언/성취 관계를 종합적으로 이해.

    • 접근 방법

      • 복음서 비교 :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간 동일 사건의 강조점 분석

      • 예언 성취 연결: 구약 → 신약

        • 예: 이사야 53장 → 예수 십자가

      • 성경 주제 흐름: 창세기 → 출애굽 → 왕국 → 예수 → 교회 → 계시

    • 실례

      • “하박국 질문 ↔ 십자가 ↔ 요한계시록 평행 구조”

      • “말씀 → 믿음 → 행함” 한 장 도식 시각화

    4. 실천적 신앙과 적용
    • 정의: 신앙을 일상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구체적 지침을 제공.

    • 접근 방법

      • 믿음과 행함의 관계

        • 믿음은 내적 확신, 행함은 외적 실천

        • 야고보 vs 바울 구원론 연계

      • 일상 적용

        • 기도, 예배, 봉사, 관계, 윤리적 판단

        • 구체적 상황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해석

    • 실례

      •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 자기희생과 신앙 우선순위

      • “반석 위 집 vs 모래 위 집” → 말씀 실천의 결과 비교

    정리 

    1. 교리/신학
    = 이론적 기둥 
    2. 성경 구절 해석 = 원자료 분석 
    3. 전체 구조/주제 연결 = 맥락적 이해 
    4. 실천적 신앙 = 실제 삶 속 적용 

    이 네 영역이 서로 연결될 때, 단순 지식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앙 이해가 완성됩니다.


    말씀하신 구절은 마태복음 26장 49-50절(또는 병행 구절: 마가복음 14:44-45, 누가복음 22:47-48)에 나오는 유다의 배반 장면입니다. 헬라어 원문과 신학적 의미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구절 원문 (마태복음 26:50)

    καὶ προσελθὼν αὐτῷ εἶπεν· Χαῖρε, ῾Ραββίʼ καὶ ἐπεφίλησεν αὐτὸν. ὁ δὲ Ἰησοῦς εἶπεν αὐτῷ· Ἰούδα, μὲ τῷ φιλήματι παραδίνεις 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

    한글 직역:

    “다가와서 그에게 말하되 ‘평안하라, 선생님’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2. 주요 단어 분석

    헬라어 발음 의미/해석
    Ἰούδα Iouda 유다
    παραδίνεις paradíneis ‘넘겨준다, 배반하다’ (현재시, 능동태, 직설법)
    φιλήματι philēmati ‘입맞춤’ (도구적 단수)
    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 ton Huion tou anthrōpou ‘인자, 즉 사람의 아들’ (메시아적 칭호)

    💡 주의 포인트:

    • “인자(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다니엘 7장적 메시아적 인자 의미를 내포합니다.

    • ‘입맞춤으로 파느냐’는 배신의 방식을 지적합니다. 외적 친밀감(입맞춤)으로 배반함을 예수께서 예리하게 지적하신 것입니다.


    3. 신학적 의미

    1. 겉치레와 내적 배반

      • 유다는 겉으로는 존경과 애정을 표시했지만, 실제로는 예수를 로마와 종교 지도자들에게 넘기는 배반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 예수는 단순한 ‘행동’보다 배반의 의도와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것입니다.

    2. ‘인자를 판다’ = 메시아적 배반

      • 여기서 ‘인자(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는 예수의 신적 사명과 메시아적 지위를 나타냅니다.

      • 따라서 ‘입맞춤으로 인자를 판다’는 단순한 인간적 배신을 넘어, 구원의 주를 외부 권력에 넘기는 중대한 행위임을 보여줍니다.

    3. 말씀의 교훈

      • 외적 표현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마음과 행위의 일치를 중요시함.

      • 신앙적 배반은 눈에 띄는 행위보다 겉치레 속 의도에서 시작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4. 1️⃣ 장면 핵심

    5. 장소/상황: 최후의 만찬, 겟세마네 동산 직전

    6. 행위자: 예수, 유다

    7. 행위: 유다의 입맞춤 → 배반 의사 표시

    8. 예수 반응: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2️⃣ 헬라어 동사 & 시제 분석

    헬라어 원형 시제/태/법 의미/신학적 해석
    φιλεῖς φιλέω 현재능동직설 지금 바로 행하는 행위, 반복적/진행적 배반
    παραδώσεις παραδίδωμι 미래직설 예정된 배반, 구속사적 사건
    ἐστίν εἰμί 현재직설 예수의 존재적 인지/판단 강조
    • 도구적 구문: “ἐν τῷ φιλήματι” → “입맞춤으로”
      → 배반의 수단, 행위의 직접적 수단 강조


    3️⃣ 신학적 구조

    유다의 행위 (입맞춤/배반 수단)


    예수의 인지 (선지적/신학적 판단)


    구속사적 의미 (인자의 예정된 고난과 배반)

    4️⃣ 그림 도식 아이디어

    • 좌측: 유다 (행위자)

    • 우측: 예수 (인지자)

    • 화살표: 행위 → 수단(도구적 구문) → 예수의 인지 → 구속사적 의미

    • 색상 구분:

      • 빨강: 배반 행위

      • 파랑: 예수의 인지/판단

      • 보라: 예정/신학적 의미

    • 동사 시제는 각 화살표 옆에 표시하여 “현재/미래/완료” 흐름을 시각화









    3월 21일(토) 누가복음 17:11-1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1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Jesus asked, "Were not all ten cleansed? Where are the other nine? 

    “감사를 모르는 시대”는 단순한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 구조와 가치 체계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징후입니다. 성경적·신학적 관점과 현실적 흐름을 함께 보면 그 특징이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1. 당연함이 지배하는 시대

    • 모든 것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내 권리”로 인식

    • 은혜(grace)가 사라지고 자격(entitlement)이 중심이 됨

    👉 결과
    감사는 “특별한 경우”가 되고,
    불만은 “기본 상태”가 됩니다.


    2. 비교와 경쟁이 감사의 자리를 빼앗음

    •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 (SNS, 성취, 소유)

    • “이미 가진 것”보다 “없는 것”에 집중

    👉 구조
    감사 = 충만에서 나옴
    비교 = 결핍을 만들어냄

    → 결국 감사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짐


    3. 속도가 빨라질수록 감사는 사라짐

    • 모든 것이 즉각적 (instant culture)

    • 기다림, 묵상, 돌아봄이 사라짐

    👉 감사의 본질은
    “멈춰서 인식하는 것”인데
    현대인은 멈추지 않음


    4. 관계의 단절

    • 공동체보다 개인 중심

    • 관계가 “소비”의 대상이 됨

    👉 감사는 관계에서 나오는데
    관계가 약해지면 감사도 사라짐


    5. 고통을 무의미하게 보는 시각

    • 고통 = 제거해야 할 것

    • 의미를 찾지 못함

    👉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는
    고통 속에서도 감사가 가능함 (신앙의 핵심 구조)

    → 고통을 해석하지 못하면
    감사도 불가능해짐


    6. 헬라어 구조로 보면 (핵심 통찰)

    • 감사: εὐχαριστέω (은혜를 인식하고 반응하는 행위)

    • 염려: μεριμνάω (마음이 나뉘어 분산된 상태)

    👉 구조 대비

    감사하는 사람

    • 중심이 하나로 모임 (하나님 중심)

    • 이미 받은 것에 집중

    감사를 모르는 시대 / 
    마음이 분열됨 (불안, 비교, 욕망),  아직 없는 것에 집착

    결과 : 불만과 불안이 기본 정서가 됨

     
    감사가 사라지면 → 평안도 사라짐 
     결국 사람은 더 많이 가져도 만족하지 못함 

     이 시대의 역설/  “가진 것은 많아졌지만 감사는 줄어들었다”  

    핵심 한 줄 정리 /  감사가 사라진 시대는“은혜를 인식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감사 회복 구조 (한 장 도식)  

    [현실 인식]


    (문제: 염려 / 분열된 마음)
    μεριμνάω = 나뉘다, 찢어지다

    “무엇을 먹을까 / 입을까” 중심 사고

    자기 중심 → 불안 → 통제 욕구


    [전환 지점]

    말씀 입력 (진리 주입)
    “염려하지 말라” (마 6:25)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빌 4:6)

    명령 + 현재형 → 지속적 선택 요구


    [핵심 구조 변화]

    기도 + 간구 + 감사
    (빌립보서 4:6 구조)

    기도 (προσευχή)
    → 하나님 방향 전환

    간구 (δέησις)
    → 구체적 필요 맡김

    감사 (εὐχαριστέω)
    → 이미 받은 것으로 인식


    핵심: 감사는 결과가 아니라 ‘관점의 선언’

    ━━━━━━━━━━━━━━━━━━━

    [헬라어 핵심]
    εὐχαριστέω
    = εὖ (좋은) + χάρις (은혜)

    의미:
    “이미 은혜 안에 있다고 인정하는 행위”


    상황이 아니라
    “해석 구조”가 바뀜

    ━━━━━━━━━━━━━━━━━━━

    [내면 변화]

    염려 → 감사로 교체
    분열 → 통합
    불안 → 신뢰


    “하나님의 평강”
    (빌 4:7)

    φρουρέω (지키다)
    → 마음과 생각을 ‘군사적으로 보호’

    ━━━━━━━━━━━━━━━━━━━

    [실천 구조]


    1. 멈춤 (염려 인식)
    → “지금 내가 무엇을 걱정하는가?”

    2. 분리 (생각 해체)
    → 사실 vs 해석 구분

    3. 전환 (기도)
    → 하나님께 방향 돌림

    4. 맡김 (간구)
    → 구체적으로 넘김

    5. 선언 (감사)
    → “이미 은혜 안에 있다”

    6. 반복 (습관화)
    → 감사는 훈련이다

    ━━━━━━━━━━━━━━━━━━━

    [결과]

    환경은 그대로일 수 있음
    BUT

    내면 구조 변화
    → 평강
    → 신뢰
    → 흔들리지 않는 중심

    [핵심 요약]

    염려 = 상황 중심 사고
    감사 = 하나님 중심 해석

    염려는 자동 반응
    감사는 의지적 선택

    감사는 감정이 아니라 “믿음의 구조적 표현”이다


    감사하는 사람은 단순히 “고맙다”를 말하는 수준을 넘어, 삶을 바라보는 내면 구조 자체가 다른 사람입니다. 
    특히 성경적 관점에서는 헬라어 εὐχαριστέω(감사하다)가 단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존재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핵심 특징들을 구조적으로 정리해 드리면. 

    상황보다 하나님을 먼저 보는 사람

     
    감사하는 사람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먼저 봅니다. 
     좋은 일이든 어려움이든 “이 안에 뜻이 있다”는 시선  그래서 환경이 아니라 믿음이 기준이 됩니다. 

     염려보다 신뢰가 앞서는 사람

     
    헬라어 μεριμνάω(염려하다)는 “마음이 나뉘다”는 뜻 
     감사는 그 나뉜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 

     감사하는 사람은
      “문제 있음 → 염려”가 아니라
      “문제 있음 → 하나님 신뢰 → 감사” 구조로 반응합니다.

     이미 받은 것을 인식하는 사람

     
    감사는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을 보는 능력 
     같은 현실에서도 감사하는 사람은 결핍이 아니라 은혜를 발견  그래서 만족감이 높고 비교가 적습니다. 

     해석이 긍정적으로 바뀌는 사람

     
    사건 자체보다 해석 방식이 다름
     
    실패 → “끝”이 아니라 “과정”으로 해석 

     감사는 상황을 바꾸기 전에 상황을 해석하는 렌즈를 바꿉니다.

     관계가 건강한 사람

     
    감사 표현은 관계를 살립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 사람과의 관계 둘 다 깊어짐. 

     감사는 영적으로는 예배,  인간적으로는 관계의 윤활유입니다.

     작은 것에 민감한 사람

     
    감사하는 사람은 사소한 것에도 반응합니다. 
     숨 쉬는 것, 하루, 일상 자체를 은혜로 봄. 
     그래서 삶의 밀도가 높아집니다. 

    결과보다 과정 속에서도 감사하는 사람
     
    보통 사람 : “좋은 결과 → 감사” 
     감사하는 사람 : “과정 속에서도 감사” 

     이게 바로 믿음의 깊이를 드러내는 지점입니다. 

    핵심 구조 (한 줄 정리)

    일반 구조 / → 상황 → 감정 → 반응

    감사하는 사람 / → 하나님 → 해석 → 감사 → 평안

    감사를 회복하는 비결

    “감사를 회복하는 비결”은 단순히 마음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생각 → 시선 → 해석 → 고백 → 삶 전체가 다시 정렬되는 과정입니다.

    성경적·실천적으로 핵심 구조를 한 장 흐름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감사는 “상황”이 아니라 “해석”에서 시작된다

    • 같은 상황에도  염려하는 사람 vs 감사하는 사람은 다르게 반응합니다. 

    • 이유 :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해석하느냐

    회복 포인트 /  “왜 이런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기서 무엇을 하시는가?” 

    염려를 끊어야 감사가 살아난다

    헬라어로  염려 : μεριμνάω (마음이 나뉨) 
                     감사 : εὐχαριστέω (은혜를 인정함)

    구조 /  염려 = 마음이 분산됨 → 하나님을 못 봄 → 불평 
               감사 = 은혜를 봄 → 하나님을 신뢰 → 평안

     핵심 /  감사는 “좋은 일이 생겨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할 때” 시작됨

    작은 감사부터 회복된다 (훈련의 원리)

    감사는 감정이 아니라 습관입니다.

    실천 /  하루에 3가지 감사 적기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 -  숨 쉬는 것, 오늘 하루, 사람 한 명 

    이유 /  감사는 “큰 은혜”가 아니라,  “은혜를 보는 눈”에서 시작됨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라

    사람이 감사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잊어버림”

    회복 방법
    1. 하나님이 도우셨던 순간 기록
    2. 기도 응답 리스트 만들기 

    효과  / 과거 은혜 → 현재 신뢰 → 미래 평안

    감사는 ‘말로’ 선포해야 살아난다

    성경의 감사는 마음이 아니라  입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실천  /  “감사합니다”를 의도적으로 말하기 
                기도에서 감사 먼저 시작 

     이유 /  말이 생각을 바꾸고,  생각이 감정을 바꿈 

    고난 속 감사가 진짜 감사다
     
    상황이 좋을 때 감사 → 자연적 
     상황이 어려울 때 감사 → 믿음 

     핵심 /  감사는 결과가 아니라  믿음의 선택

     한 줄 핵심 정리 /  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시선에서 회복된다










    치유받은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 저는 다시 한번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고 믿습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치유를 간청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바로 치유하는 대신 제사장들에게 가서 자신을 보이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이것은 물론 나병 환자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레 13 : 2-3 깨끗하다고 ​​선언받기 위해. 그래서 나병 환자들이 아직 치유받지 못한 채 제사장들에게 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데는 믿음이 필요했고, 이것은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그들이 여정을 가면서 기적적으로 치유되어 깨끗해졌습니다! 이 무서운 질병에서 마침내 자유로워진 나병 환자들의 마음을 통해 전해진 기쁨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 명의 나병 환자만이 예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 감사하고 찬양하기 위해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십니다. 더 넓은 적용으로, 성경에서 나병은 종종 일반적으로 죄의 그림으로 사용됩니다. 죄는 이 지구상의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질병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이 죄의 질병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분께 진심으로 감사하고 찬양합니까?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일깨워줍니다. 시편 기자는 '나의 영혼아, 주를 찬양하고 그 은혜를 하나도 잊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것들을 잊지 말고 돌아서서 이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받은 놀라운 은혜에 감사드리러 돌아갔던 것처럼, 다시 한 번 그것들에 대해 주님께 감사드리십시오.


    말씀하신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문맥상 누가복음 17장 17~18절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치유받았지만, 단 한 사람만 감사드리러 돌아온 사건을 말씀하십니다. 질문 자체가 단순한 위치를 묻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지 않은 아홉을 향한 신적 질문이자, 믿음과 감사의 결핍을 지적하는 의미입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그 아홉”은 οἱ ἐννέα로 표현되며, “어디 있느냐?”는 ποῦ εἰσίν입니다. 즉 문자 그대로는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는가?”지만, 신학적 의미는 **“감사하지 않은 다수의 부재와 그 책임”**을 강조합니다.

    정리하면 
    사건 : 나병 환자 10명 중 1명만 돌아와 감사 
    질문 :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 감사하지 않은 다수를 향한 묘사적 질문 
    신학적 메시지 : 감사와 믿음의 실천 부재를 지적

    아, 성경 맥락이라면 “그 아홉”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 중 하나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7장 11~19절의 나병 환자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거기서 10명의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깨끗함을 받지만, 오직 한 사람만이 돌아와 감사드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 바로 그 장면입니다. 
    즉, 문맥상 그 아홉은 감사하지 않고 그냥 흩어진 9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구조와 인식의 방향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적·인간적 관점에서 몇 가지 핵심 이유를 정리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1. 기준이 “이미 받은 것”이 아니라 “없는 것”에 있을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결핍을 더 크게 봅니다.
    이미 받은 은혜보다 아직 없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감사는 사라집니다.

    성경은 방향을 바꿉니다.
    “없는 것 →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 인식 → 감사”  

    2. 당연함(익숙함)이 은혜를 가릴 때

    처음엔 감사했던 것도 반복되면 “당연한 것”이 됩니다.

    • 숨 쉬는 것,  건강,  일상,  관계 

    이것들이 “기적”이 아니라 “기본값”이 되는 순간 감사는 사라집니다.  

    3. 비교의식

    감사는 “관계”에서 나오는데 비교는 그것을 깨뜨립니다.

    • “나는 이것밖에 없는데…”

    • “저 사람은 더 많네…”

    비교는 감사의 적입니다.
    감사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 나오지만 비교는 “타인과 나”를 보게 합니다.  

    4. 통제하려는 마음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야 만족하려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게 흘러가죠.

    👉 이때 생기는 반응 :  불만,  원망,  염려 

    즉,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지 못할 때 감사는 무너집니다.  

    5. 염려(불안)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핵심입니다.

    예: 마태복음 6장
    👉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

    염려의 본질은:
    👉 “지금이 아니라 미래에 마음이 가 있음”

    그래서 현재의 은혜를 볼 수 없게 됩니다.  

    6. 믿음의 문제

    감사는 단순 감정이 아니라 믿음의 표현입니다.

    • 하나님이 선하시다,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이 믿음이 약해질 때 감사는 사라지고 불평이 올라옵니다.  

    핵심 구조 정리

    감사하지 못하는 구조는 이렇게 연결됩니다. 

    결핍 인식 → 비교 → 염려 → 통제 욕구 → 불평  

    반대로 성경적 구조는  

    은혜 인식 → 믿음 → 신뢰 → 감사 → 평안

    한 줄 핵심

    감사는 “상황”에서 나오지 않고  “보는 눈(믿음)”에서 나옵니다.


    헬라어 εὐχαριστέω(감사하다)μεριμνάω(염려하다)를 중심으로
    “염려 vs 감사”의 신학적 구조를 한 눈에 보이도록 도식화해 드리겠습니다.

    핵심 헬라어 개념 

     μεριμνάω (merimnaō) — 염려하다

    • 의미: 마음이 나뉘다, 분열되다 (merizo = 나누다)

    • 상태: 내면이 둘로 찢어짐

    • 방향: 하나님이 아닌 상황/결핍에 집중

    👉 본질:
    “하나님 대신 다른 것에 마음이 빼앗긴 상태” 

     εὐχαριστέω (eucharisteō) — 감사하다

    • εὖ (좋은) + χάρις (은혜)

    • 의미: 은혜를 좋게 인정하다 / 은혜를 보는 태도

    👉 본질:
    “이미 받은 은혜를 인식하고 하나님께 돌리는 상태”

    구조 대비 (염려 vs 감사)
    [염려 구조] [감사 구조]

    결핍 인식 은혜 인식
    ↓ ↓
    미래 집착 현재 인식
    ↓ ↓
    통제 욕구 맡김 (신뢰)
    ↓ ↓
    마음 분열 (μεριμνάω) 마음 통합
    ↓ ↓
    불안 / 두려움 평안 / 기쁨
    신학적 핵심 연결

    빌립보서 4:6 구조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헬라어 구조 핵심:

    • μηδὲν μεριμνᾶτε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 μετὰ εὐχαριστίας → “감사와 함께”

    여기서 중요한 신학 포인트

    ❗ 염려의 해결책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 “감사”

    더 깊은 구조 (영적 메커니즘)
    염려 (μεριμνάω)
    = 하나님 신뢰 결핍
    = 미래 중심 사고
    = 자기 통제 욕구

    ↓ 전환

    감사 (εὐχαριστέω)
    = 하나님 은혜 인식
    = 현재 중심 신앙
    = 하나님 주권 인정
    믿음과의 연결 (핵심)
    염려 → 불신앙의 표현
    감사 → 믿음의 표현

    👉 그래서 성경 구조는 이렇게 됩니다:

    염려 → 믿음 약화 → 하나님 나라 못 봄
    감사 → 믿음 강화 → 하나님 역사 경험
    예수님의 가르침과 연결 (마태복음 6장)

    예수님의 논리는 매우 명확합니다:

    염려하는 이유 = 하나님을 아버지로 못 믿기 때문

    → 공중의 새 / 들의 백합화
    → 이미 공급하시는 하나님

    따라서

    염려 금지 → 먼저 하나님 나라

    감사는 단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주셨다는 믿음의 선언” 입니다. 

    한 장 핵심 도식 (결론)

    [두 가지 삶의 구조]

    ┌───────────────┐
    │ μεριμνάω (염려) │
    └───────────────┘

    결핍 중심 사고

    하나님 불신

    마음 분열

    불안 / 두려움


    ┌───────────────┐
    │ εὐχαριστέω (감사) │
    └───────────────┘

    은혜 중심 사고

    하나님 신뢰

    마음 통합

    평안 / 기쁨

     핵심 한 줄 정리 /  염려는 “없는 것”을 보는 시선,  감사는 “이미 주신 은혜”를 보는 믿음이다








    헬라어 원문 구조 분석
    • 원문: Τί με μεριμνᾷς περὶ τῶν ἄλλων;

    • 단어별 분석:

      단어 품사 문법적 특징 의미
      Τί 의문사 단독 무엇, 왜
      με 대명사 1인칭 목적격 나를
      μεριμνᾷς 동사 현재능동직설, 2인칭 단수 염려하다, 걱정하다
      περὶ 전치사 …에 관하여 about / concerning
      τῶν ἄλλων 명사구 남성/복수/생격 다른 것들, 타인
    • 문법 구조:

      [의문사 Τί] + [목적어 με] + [동사 μεριμνᾷς] + [전치사구 περὶ τῶν ἄλλων]
      → “왜 나를 염려하고 다른 것들에 마음을 두느냐?”

    신학적 의미 분석

    • 중심 메시지: 인간이 다른 것에 마음을 쏟는 대신, 하나님과 그의 뜻에 집중해야 함을 강조.

    • 연관 구절:

      • 마태복음 6:25–34 “생각하지 말라 …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 헬라어 nuance:

      • μεριμνᾷς — 단순히 걱정한다는 의미를 넘어, 마음이 끊임없이 끌리고 에너지와 의지를 빼앗기는 상태를 의미.

      • ἄλλων — 세상적 것들, 인간 관계, 재물 등 상대적인 것들을 포함하는 포괄적 의미.

    אִי שָׁקֵט
    • 1.
      불안
    מִלְחָמָה Storng number 4421

    1. 싸움.  2. 전쟁.  3. 승리  
    Pronunciation  [ milchâmâh ]밀하마  
    Etymology /  3898에서 유래  
    Old Testament  /  316회 사용
    •  1. 명사, 여성 싸움, 전투, 투쟁, 격투, 출13:17, 욥39:25, 사7:1
    •  2. 명사, 여성 전쟁, 전투, 싸움, 전쟁도구, 무기, 창14:2, 민31:28, 신20:12,20, 수8:1, 11:7, 삼하21:15,20, 대상18:10, 시76:4(3), 사42:13, 호1:7, 2:20.
    •  3. 명사, 여성 승리, 승전, 전승, 전9:11.

    Grammar Explanation  /  어미활용 מִלְחַמְתּוֹ, 복수 מִלְחָמוֹת

    관련 성경 /  [동] 싸우다(창14:2, 출32:17, 삼상4:1), 전쟁을 하다(창14:8), 치다(민10:9, 왕하3:7).
    [명] 싸움(신21:10), 전쟁(삼하21:19, 출1:10,삼상14:23, 호1:7). 싸움(민31:14, 삿20:34),전장(삿8:13, 삼상14:20), 군사(삿20:42, 삼상23:8), 무용(武勇)(삼상16:18), 군대(삼상18:5, 대하32:6), 진(삼하10:8), 전쟁터(왕상22:30, 대하18:29), 적진(대상19:10), 적병(대하13:14),전란(사3:25).


    샬롬(שָׁלוֹם)”의 반대 개념은 단순히 하나의 단어로 딱 떨어지기보다는, 
    히브리어 의미 구조상 여러 상태로 분해된 ‘깨어짐’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샬롬의 의미

    샬롬은 단순한 “평화”가 아니라

    • 온전함 (wholeness)
    • 관계의 회복 (하나님–사람–세상)
    • 조화, 질서, 번영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상태” 

    반대 개념 (핵심)

    샬롬의 반대는 한 단어보다 이런 상태들입니다.

     히브리어 대표 반대어들

    • רָעָה (ra‘ah) → 악, 해악, 파괴
    • מִלְחָמָה (milchamah) → 전쟁
    • שֶׁבֶר (shever) → 깨짐, 붕괴
    • חֹסֶר (chōser) → 결핍, 부족 
    개념적으로 정리하면

    샬롬 ↔ 반대 상태

    • 온전함 ↔ 깨짐
    • 평화 ↔ 갈등
    • 관계 회복 ↔ 단절
    • 질서 ↔ 혼돈
    • 충만 ↔ 결핍

    한마디로 요약하면 샬롬의 반대는 “깨어진 상태 (brokenness)”

    신학적으로 보면

    샬롬 ↔ 반대

    • 하나님과의 화목 ↔ 죄로 인한 분리
    • 생명 ↔ 죽음
    • 복 ↔ 저주

    그래서 성경 전체 흐름은 “깨어진 상태 → 샬롬 회복”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שֶׁבֶר Storng number 7667

    1. 깨뜨림.  2. 해몽.  3.파멸 
    Pronunciation    [ sheber ]
    Etymology /  7665에서 유래 
    Old Testament  /  44회 사용





    3월 20일(금) 누가복음 12:22-3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26절)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Since you cannot do this very little thing, why do you worry about the rest? 

    1. [사무엘상 9:20]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 온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비의 온 집이 아니냐

    2. [마태복음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3. [마태복음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4. [누가복음 12: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5. [고린도전서 7: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염려(念慮)하라 

    1. [민수기 20:18]
    에돔 왕이 대답하되 너는 우리 가운데로 통과하지 못하리라 내가 나가서 칼로 너를 맞을까 염려하라

    2. [마태복음 5: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3. [마태복음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4. [누가복음 12:58]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에게 넘겨주어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디모데전서 3: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찌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목숨을...몸을 위하여...염려하지 말라 
    - 다시 예수의 말씀을 듣는 대상이 무리들에서 제자들로 바뀌고 있다. 제자들은 물질적 조건을 확보함으로써 안전을 도모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된다. 
    또한 재산을 소유하지 못한 제자들로서는 무소유에 대해서 염려해서도 안된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것들을 축적하기 위하여 노력하며(18절), 이것들이 확보되지 않을 때는 염려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그것을 염려하지 말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 즉 목숨과 몸을 위하여 재물을 축적하려 함으로써 싸움과 갈등을 일으키며 그러므로 안전이 아니라 염려만 더욱 증폭되는 상황을 정지 시킬 수 있는 삼의 방식이라고 할수 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전폭적으로 내어 맡기고서 이기적 탐욕에서 벗어나면 사람들은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살 수가 있을 것이다.

    목숨이...중하니라 -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목숨이나 음식, 몸이나 의복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알고 게신다.목숨이 중요함을 아시므로 음식을 주실 것이고 몸이 중요함을 아시므로 의복을 주실 것이다. 적어도 이 사실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이 말씀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의 가치를 혼동하여 본질적인 것이 아닌 음식을 위하여 본질적인 목숨을 가볍게 여기거나 중요하지 않은 의복을 위하여 중요한 몸을 하찮게 여기는 세상 사람들의 전도(顚到)된 가치관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까마귀를...아니하며 - 7절에서는 참새에 비교하여 제자들의 귀중함을 강조했는데 여기서는 까마귀와 비교하고 있다. 마태가 단순히 '공중의 새'(마6:26)라는 표현을 사용한데 비해 누가는 까마귀를 언급함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즉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까마귀는 부정한 새이다(레11:15;신 14:1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까마귀를 돌보신다. 하물며 새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증요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먹이고 입히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깃이다. 한편 까마귀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다는 것은 사람은 심고 거둔다는 것 즉 노동을 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노동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성경에서 “염려하지 말라”는 명령은 단순한 감정 통제가 아니라, 믿음의 본질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선언입니다. 핵심 이유들을 구조적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이 이미 아시고 공급하시기 때문

    👉 대표: 마태복음 6:32

    •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 염려는 “모른다”는 전제에서 나오지만
      성경은 “하나님은 이미 아신다”에서 출발합니다

    ✔️ 즉
    염려 = 하나님이 모르신다는 전제
    믿음 = 하나님이 이미 아신다는 확신


    2️⃣ 염려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기 때문

    👉 마태복음 6:27

    •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 핵심

    • 염려는 “생산성 0”

    • 행동도 아니고, 믿음도 아닌 상태

    👉 성경적 관점
    염려 = 무능한 통제 시도


    3️⃣ 염려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신뢰하는 태도이기 때문

    👉 마태복음 6:31–32

    • “이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 의미

    • 염려는 단순 감정이 아니라
      “누구를 의지하느냐”의 문제

    👉 구조

    • 이방인: 보이는 것 의지 → 염려

    • 하나님 나라 백성: 하나님 의지 → 평안


    4️⃣ 염려는 믿음이 작은 상태를 드러내기 때문

    👉 마태복음 6:30

    • “믿음이 작은 자들아”

    ✔️ 포인트

    • 예수님은 염려를 성격 문제가 아니라 믿음 문제로 보심

    👉 구조
    염려 ↑ → 믿음 ↓
    믿음 ↑ → 염려 ↓


    5️⃣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라는 방향 전환이기 때문

    👉 마태복음 6:33

    •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핵심
    염려를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 “관심의 방향을 바꾸라”

    👉 구조

    • 염려: 필요 중심 삶

    • 믿음: 하나님 중심 삶


    6️⃣ 내일은 하나님 영역이기 때문

    👉 마태복음 6:34

    •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 의미

    • 인간은 “오늘”만 책임

    • “내일”은 하나님의 주권 영역

    👉 염려의 본질
    시간을 넘어선 통제 욕망


    🔥 전체 구조 한눈에

    성경의 논리는 이렇게 연결됩니다:

    👉 하나님이 아신다
    → 그러므로 맡길 수 있다

    👉 맡기지 않으면
    → 염려가 생긴다

    👉 염려는
    → 믿음 부족의 증거

    👉 해결은
    →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는 것


    📌 한 문장 정리

    성경에서 염려하지 말라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미 아시고 다스리시기 때문에, 염려는 믿음이 아닌 불신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염려함으로...더할 수 있느냐 
    - 본문은 해석상의 논란이 있다. 
    왜냐하면 ''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리키아는 '나이'를 뜻하기도 하고(요 9:21), 
    '신장'(身長)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19:3). 
    또한 '한 자'의 '자'(페퀴스)는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기의 길이를 한 단의로 하는 '규빗'(창6:15)을 뜻하는데 이 단위 역시 '길이'를 가리키기도 하고 '시간'을 가리키기도(시 39:5)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문은 두 가기 의미로 해석 될수 있다. (1)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키를 한 자 크게 할 수 있는가"(Bengel,Godet,Farrar). (2)'시간'의 개념으로 보아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할 수 있는가"(Bruce, Plummer, Vincent).


    󰃨 지극히...염려하느냐 - 본문은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 없는 것으로 누가만의 독특한 기록이다. 이 말씀은 25절에 대한 결론으로,염려함으로써 해결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염려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키를 늘리는 것이든, 생명을 연장(延長)시키는 것이든 하나님께는 지극히 작은 일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철저히 무능력함을 인정해야 하며 자기의 노력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을 가짐으로써 삶의 안전을 얻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 백합화를...못하였느니라 - 먹을 것에 대해서는 '새'에 비유하시고(24절), 입을 것에 대해서는 꽃에 비유하고 있다. 여기서 '백합화로 번역된 헬라어 '크리논'(*)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들이 있는데, '크로크스','터어키산 백합', '글라디올러스'등이 그것이다. 또는 솔로몬의 자색 의복이 상응하는 자색의 아네모네 꽃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Dalman).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옷도 들의 백합화 만큼 아름답지 못하다는 이 말씀은 인간의 유한성과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세심하신 배려를 또 한번 대조해 보인다. 특히 이 백합화는 28절에서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것으로 묘사됨으로써 하나님의 크신 위엄을 더욱 뚜렷이 드러낸다.





    여러분 중에 누가 걱정함으로써 수명을 한 시간이라도 늘릴 수 있습니까? 

    오, 우리는 너무 걱정하죠? 
    사람마다 다른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죠! 어떤 사람들은 생활비와 청구서를 지불할 돈이 충분한지 걱정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건강, 직장, 아이들이 궤도를 이탈하는 것, 최근 독감, 치과에 가는 것, 연설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해 걱정합니다.  
    그리고 6시 뉴스를 켜서 잠재적으로 걱정할 수 있는 새로운 일들의 목록이 쏟아지기 전에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새도 돌보신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보다 하나님께 얼마나 더 중요한가요? 그리고 그분은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걱정함으로써 자기 수명을 한 시간이라도 더 늘릴 수 있느냐?' 사실 걱정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코리 텐 붐은 '걱정은 내일의 슬픔을 비우지 않고 오늘의 힘을 비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사실이며 끊임없이 기억해야 합니다!


    이 구절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는 표현을 신학적·문법적 관점에서 깊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헬라어 원문과 문맥을 고려하면 의미가 조금 더 명확해집니다.

    단어 분석

    • 어찌 (πῶς, 어떻게?)
      → 놀라움, 의문, 경계, 때로는 책망의 뉘앙스를 포함.

    • 그 다른 것 (τὰ λοιπά / ἄλλα)
      → 본질적이지 않은, 핵심과 대비되는 것.
      → 예수님은 사람의 관심이 본질적이지 않은 것(예: 외적 형식, 세속적 걱정)에 쏠리는 것을 지적.

    • 염려하느냐 (μεριμνᾶτε / μέριμνα)
      → 단순한 걱정보다 마음이 쪼개지고 분산되는 상태.
      → 신학적으로 ‘믿음과 신뢰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을 지나치게 고민함’을 의미.

    문맥적 의미
    •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는 종종 핵심과 부차적 사항을 구분합니다.

    •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는 주님의 뜻과 핵심 진리 대신 세속적, 부차적, 비본질적 사항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 비슷한 구절로 마태복음 6:25-34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가 있습니다. 여기서 ‘염려’는 마음을 쪼개고, 믿음을 흔드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신학적 해석
    • 우선순위 강조: 하나님 나라와 본질적 믿음이 최우선이어야 한다.

    • 믿음과 행함의 조화: 염려라는 마음의 분산은 믿음과 순종을 약화시킬 수 있다.

    • 경고적 뉘앙스: ‘어찌’라는 말로 잘못된 염려에 대한 질책이 포함됨.

    즉, 이 구절은 단순한 걱정을 넘어 믿음과 신뢰 중심의 삶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조표 예시 (한 구절 기준)

    헬라어 단어 품사/문법 시제/태/법 직역 의미 신학적 메시지
    λέγει (legei) 동사 현재 능동 직설법 말한다 말씀은 현재적 힘과 지속성을 가진다
    οὐ (ou) 부정사 아니다 행하지 않음에 대한 단호한 부정
    ποιεῖτε (poieite) 동사 현재 능동 명령법 행하라 믿음은 단순 말이 아니라 행동을 요구한다

    시각화 아이디어
    • 문법 흐름 → 신학적 메시지 연결 화살표

    • 단어별 색상: 동사(파랑), 명사(녹색), 부정사(빨강)

    • 시제/법 강조: 현재-행동, 과거-완료, 미래-예정

    이 질문,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는 단순한 일상적 충고를 넘어, 신학적·영적 맥락에서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과 성경적 배경을 함께 보면 구조와 메시지가 더 분명해집니다. 

    헬라어 원문 분석
    • 단어 구조:

      • “어찌” → πῶς (pōs) : ‘어떻게’ 혹은 ‘무슨 방법으로’

      • “그 다른 것” → τὰ λοιπά (ta loipa) : 문자 그대로 ‘남은 것들’, ‘기타 것들’, 여기서는 세상의 염려나 필요를 의미

      • “염려하느냐” → μεριμνᾷς (merimnās) : 현재 능동, 2인칭 단수, ‘근심하다, 걱정하다’

    • 문법적 구조:

      • 의문문 형태지만, 실제로는 경고적·교훈적 질문

      • 주어는 생략되어 있지만 2인칭 단수로, 청자를 직접 지목

      • 현재 시제 + 능동 → “지금 계속 그렇게 걱정하는가?”라는 지속적 의미 


    신학적 메시지

    하나님 중심 사고 촉구
      • “다른 것을 염려”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세상 일에 마음을 두는 상태

      • 본문 맥락에서는 믿음과 순종의 불일치를 지적

    1. 우선순위 전환

      • 마태복음 6장 25~34절, 누가복음 12장 22~31절과 연결

      •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는 우선순위 강조

    2. 믿음과 행함의 연계

      • 단순히 염려하지 말라는 지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한 행동의 지침

      •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행함으로 일상에서 실천

    적용적 통찰
    • “그 다른 것을 염려하지 말라” =

      1. 현실의 불안이나 미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2. 하나님과의 관계와 현재의 순종에 집중하라

    •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경제적 걱정, 인간관계 스트레스, 건강 문제’ 등 모든 ‘그 다른 것’을 다시 하나님께 맡기고, 신앙적 행동으로 나아가는 메시지


    예를 들어,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구절을 대상으로 하면 이렇게 구성할 수 있어요:

    1. 말씀(한국어 성경)

      •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2. 헬라어 원문

      • 단어별 분석: πῶς (어찌) | τὰ λοιπά (그 다른 것) | μεριμνᾶτε (염려하느냐)

      • 문법 구조:

        • πῶς → 의문사

        • τὰ λοιπά → 중성 복수, 목적어

        • μεριμνᾶτε → 현재 직설법, 2인칭 복수

    3. 신학적 메시지

      • 믿음의 대상과 염려의 대상 비교

      • 하나님 신뢰 vs 인간적 걱정

      • “말씀을 행하는 삶”과 연결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이 질문은 예수님의 매우 핵심적인 영적 진단 질문입니다. 
    배경은 마태복음 6장과 누가복음 12장에서 반복되는 “염려”에 대한 가르침과 연결됩니다.

    헬라어 핵심 단어

    “염려하다”는 헬라어로 μεριμνάω (메림나오) 입니다. 

    어원 : 나누다, 분열되다
    의미 : 마음이 여러 방향으로 쪼개지는 상태 

    즉,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하나님 대신 다른 것에 마음이 분산된 상태입니다.

    문장의 구조적 의미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이 질문의 구조는 사실상 이렇게 해석됩니다. 

    “왜 너희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으로 나뉘어 있느냐?” 
    여기서 “다른 것”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먹을 것,  입을 것,  미래,  생존 불안 
    결국 핵심은 이것입니다.

    “무엇을 신뢰하느냐?”

    예수님의 논리 흐름

    예수님의 논리는 매우 치밀합니다. 

    1. 생명이 더 크다 
    2. 하나님이 이미 주셨다 
    3. 그렇다면 작은 것은 더 책임지신다 

    결론  /  염려 = 하나님에 대한 신뢰 부족의 증상

    신학적 핵심 구조

    이 구절을 구조로 정리하면  

    염려(μεριμνάω) 
    1. 마음의 분열
    2. 신뢰 대상의 이중화 
    3. 하나님 vs 다른 것
     → 결과 : 믿음 약화

    반대로  
    하나님 중심
     → 마음 통합
     → 평안
     → 참된 믿음


    *염려는 무엇인가?

    worry라는 영어 단어는 merimnao라는 희랍어 동사에서 생겼다.
    그런데 이 단어는 "나누다"라는 의미의 메리조와 "마음"이라는 의미의 누스라는 두 개의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염려란 "마음을 나눈다"는 의미이다.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약1:8)라고 말하고 있다.
    염려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분열된 사람이다.
    염려는 죄악이다.
    염려한다면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비난하는 것이다. 롬8:28, 히13:5...
    염려는 하나님의 성전인 인간의 신체에도 해롭기 때문에 죄이다.

    의학 적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마음을 한 곳에 쏟는 사람보다 염려하는 사람이
    더 많이 사고를 당한다는 것이다.

    μεριμνάω Storng number 3309

    1. 염려하다.  2. 돌보다  
    Pronunciation [ mĕrimnaō ]  
    Etymology / 미래형 μεριμνήσω, 제1부정과거 ἐμερίμνησα, 3308에서 유래
    • 1.  염려하다, 근심하다, 걱정하다, 마6:28, 눅12:25, 빌4:6.
    • 2.  돌보다, 걱정하다, 관심을 가지다, 마6:34, 고전7:32, 12:25, 빌2:20.
    • 관련 성경 / 염려하다(마6:27, 눅12:26, 고전7:33), 돌 보다(고전12:25), 생각하다(빌2:20).
    μέριμνα, νς, ἡ Storng number 3308

    1. 근심.  2. 걱정.  3. 염려  
    Pronunciation  [ mĕrimna ]  
    Etymology  /  3307에서 유래
    •  1. 근심, 걱정, 염려, 마13:22, 막4:19, 눅8:14, 21:34, 벧전5:7, 고후11:28.
    • 관련 성경  /  염려(마13:22, 눅8:14, 벧전5:7).


    μερίζω Storng number 3307

    1. 나누다.  2. 마12:25.  3. 눅12:13.  
    Pronunciation [ mĕrizō ]
     Etymology  /  제1부정과거 ἐμέρισα, 완료 μεμέ- ρικα, 완료수동태 μεμέρισμαι, 제1부정과거 중간태 부정사 μερίσασθ, 제1부정과거수동태 ἐμερίσθηναι, 331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분쟁하다(마12:25, 막3:24,25), 떼다(막6: 41), 분별하다(롬12:3), 나누이다(고전1:13), 나누어주다(고전7:17, 10:13, 히7:2).

    νοῦς, νοός, νοῒ, νοῦν, ὁ
    Storng number 3563

    1. 이해력.  2. 지성.  3. 태도  
    Pronunciation [ nŏus ]

    •  1. 이해력, 마음, 눅24:45, 고전14:14, 계13:18.
    •  2. 지성, 정신, 롬7:23,25.
    •  3. 마음, 태도, 생각하는 방식, 롬12:2, 고전1:10, 엡4:17, 딤전6:5.
    • 4. 생각, 의견, 마음, 사상, 명령, 법령, 롬14:5, 11:34, 고전2:16.
    • 관련 성경  /  마음(롬7:23, 고전2:16, 딤전6:5), 영(살후2:2), 총명(계13:18), 뜻(계17:9).





    더 깊은 포인트

    예수님의 질문은 단순한 금지가 아닙니다. 
     “염려하지 마라”가 아니라 “왜 염려하느냐?” 입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금지 → 행동 문제 
    질문 → 존재와 믿음의 문제 

    핵심 한 줄 / 
    염려는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방향’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6장 구조 도식 (한 장 정리)

     출발점 : 인간의 상태 = “염려”

    마태복음  6:25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염려하지 말라”  

    헬라어 /  μὴ μεριμνᾶτε 
       μὴ + 현재 명령형 
       
    의미 :  “계속 염려하고 있는 상태를 멈춰라” 

      단순 금지가 아님
      이미 진행 중인 “염려의 삶”을 끊으라는 명령  

    염려의 본질 (왜 문제인가?)

    마태복음  6:27 /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마태복음  6:32 /  “이 모든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구조 /  염려 =  하나님 없이도 살아보려는 자기 중심성,  
                           이방인의 삶의 방식

    ✔ 염려 = 단순 감정 ❌
    ✔ 염려 = 신앙의 방향 문제

    전환점 : 믿음 (하나님의 돌보심 인식) 

    마태복음  6:26  /  “공중의 새를 보라”

    마태복음 6:28  / “들의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마태복음  6:30  /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핵심 구조  /  

    염려 ↓
     보지 못함 (하나님의 공급)

    믿음 ↓
     봄 (하나님의 돌보심 인식)

     믿음 =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와 공급을 보는 인식”

     두 번째 명령 (강조 반복 구조)

    마태복음  6:31  /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  

    헬라어 반복

    • μὴ οὖν μεριμνήσητε

      • 동일한 금지 구조 반복

     의미 :   “염려는 계속 끊어야 하는 상태”  

    핵심 전환 명령 : 방향 재설정

    마태복음  6:33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헬라어  /  ζητεῖτε  현재 명령형

     의미 :
    ✔ “한 번 구해라” ❌
    ✔ “계속, 지속적으로 구하라”  

    1. 핵심 본문: 마태복음 6장 구조
    예수님의 논리는 매우 분명한 흐름을 가집니다:

    염려하지 말라 → 이유 제시 → 방향 전환 → 결론

    ① 염려 금지 (명령)
    • “염려하지 말라” (μὴ μεριμνᾶτε)
      👉 현재형 + 금지
      → “계속 염려하는 상태를 멈춰라”
    즉, **염려는 단순 감정이 아니라 ‘지속되는 상태’**입니다.

    ② 왜 염려가 문제인가
    예수님은 이렇게 묻습니다:
    • 공중의 새
    • 들의 백합화
    👉 인간의 논리:
    “먹고 살아야 하니까 염려한다”
    👉 하나님의 논리:
    “이미 돌보고 있는데 왜 염려하느냐”
    즉,

    염려 =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불신의 표현


    ③ 방향 전환 (핵심 구절)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여기서 중요한 동사:
    • ζητεῖτε (seek) → 계속 구하라 (현재형)
    👉 구조:
    • 염려 (μεριμνάω)
    • vs
    • 추구 (ζητέω)
    즉,

    인간은 “염려”하거나 “구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한다


    2. 신앙 구조 (도식)
    염려 → 자기 중심 통제 욕구 → 불안

    믿음 → 하나님 중심 신뢰 → 평안

    행동 → 하나님 나라를 구함

    3. 야고보서와 연결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여기서 연결되는 구조:
    • 염려하는 사람 →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는 통제하려 함
    • 염려하지 않는 사람 →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행동이 달라짐
    즉,

    염려의 유무는 ‘믿음의 진짜 상태’를 드러내는 지표


    4. 진짜 “염려하지 않는 신앙”의 본질
    ❌ 오해
    • 아무 생각 안 하는 것
    • 책임 회피
    • 현실 무시
    성경적 의미
    • 하나님이 이미 아신다는 확신
    • 결과를 내가 통제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
    • 대신 “하나님의 나라”에 집중하는 삶 
    한 줄 정의 /  
    염려하지 않는 신앙 =
    미래를 통제하려는 집착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하는 삶


    1️⃣ 염려의 본질: “하나님 대신 내가 책임지려는 마음”

    예수님은 염려를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스스로 통제하려는 상태”**로 보십니다.

    👉 먹을 것, 입을 것, 미래
    👉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불안함 발생

    즉, 염려는 상황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현실을 더 크게 보는 상태”**입니다.


    2️⃣ 염려의 이유: 믿음의 방향 문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공중의 새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이 입히시는데

    👉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여기서 핵심은 능력 문제가 아니라
    **관계(아버지 vs 고아 의식)**입니다.

    ✔ 아버지를 신뢰하면 → 맡김
    ✔ 고아처럼 살면 → 스스로 책임짐 → 염려 발생


    3️⃣ 염려의 특징: 아무것도 바꾸지 못함

    예수님은 염려의 무력함을 지적하십니다:

    👉 “염려한다고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즉,

    • 염려 = 통제하려는 시도

    • 결과 = 아무것도 바꾸지 못함


    4️⃣ 해결 구조: 염려를 없애는 방법

    단순히 “염려하지 마라”가 아니라
    대체 구조를 주십니다:

    👉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여기서 구조는 명확합니다:

    • 염려를 없애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 관심의 방향을 바꾸는 것

    ✔ 염려 → 자기 중심
    ✔ 하나님 나라 → 하나님 중심


    🔥 핵심 정리

    염려는 상황 때문이 아니라

    👉 “누가 내 삶을 책임지는가”에 대한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은 사실 이렇게 바뀝니다:

    👉 “왜 염려하느냐?”
    → “정말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있느냐?”









    전체 구조 핵심 도식

    [염려]
    μὴ μεριμνᾶτε (현재 금지)
    → 계속 걱정하는 삶을 끊어라



    [문제 본질]
    이방인의 방식
    = 하나님 없이 사는 구조



    [믿음]
    하나님의 공급을 "보는 눈"
    (새, 백합화 비유)



    [명령 전환]
    ζητεῖτε (현재 명령)
    → 계속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



    [결과]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결론]
    염려 중심 삶 ❌
    → 하나님 나라 중심 삶

    한 줄 핵심

     염려는 ‘무엇을 먹을까’에 집중하는 삶
     믿음은 ‘누가 공급하는가’를 보는 삶
     하나님 나라는 ‘무엇을 먼저 구하는가’의 문제


     신학적 핵심 통찰

    • “염려하지 말라”는 감정 통제 명령이 아니라
      👉 삶의 중심을 바꾸라는 명령

    • 구조적으로 보면:

     염려를 없애는 방법  /   감정 억제 
                                         추구 대상 변경 (나라 → 하나님 나라)

    핵심 동사 대비 : μεριμνάω vs ζητέω

     μεριμνάω (염려하다)
    • 의미 : 나뉘다, 분열되다 (merizo 어근)

    • 상태 : 마음이 둘로 찢어진 상태

    • 형태 : 현재 명령형 + 부정 (μὴ μεριμνᾶτε)

    의미 구조 :

    • “염려하지 마라” = 단순 금지가 아니라
       계속되고 있는 상태를 중단하라

    핵심 :
      
    염려 = 믿음 없음 이전에  존재 자체가 분열된 상태

     ζητέω (구하다, 추구하다)

    • 의미 : 적극적으로 찾다, 계속 추구하다

    • 형태 : 현재 명령형 (ζητεῖτε)

     의미 구조 :

    • 한 번 찾는 게 아니라
       지속적 방향성 / 삶의 습관

     핵심 :  구하라 = 어떤 행동 하나가 아니라 삶의 중심 축을 설정하라

     문법 구조의 충돌 (핵심 포인트)

    마태복음 6장 구조 :

    μὴ μεριμνᾶτε (염려 상태 중단)

    ζητεῖτε (하나님 나라 지속 추구)

     이건 단순 대비가 아니라

     대체 구조 (replacement structure) 입니다.

    • 염려를 없애라 ❌

    • 다른 것으로 채워라 ⭕

     즉  인간은 “아무 것도 안 하고 살 수 없음”
    → 반드시 무언가를 추구하게 되어 있음 

    신학적 핵심 : 믿음은 ‘상태 전환’이다. 

    이 구조는 이렇게 변환됩니다. 

    염려 (분열된 존재)

    믿음 (하나로 집중된 존재)

    추구 (ζητέω)

     여기서 중요한 전환 :

    • 믿음 = 감정 ❌

    • 믿음 = 존재의 방향 재정렬 

     여기서 “행함”이 필연적으로 나오는 이유

    이제 핵심 질문입니다:

     왜 믿음이 반드시 행함으로 이어지는가?

    답 : ζητέω 때문입니다. 

    ζητέω의 본질

    ζητέω는 단순 ‘찾는다’가 아니라

    👉 행동을 동반하는 추구 동사

    예:  찾으려면 움직여야 함 
          구하려면 선택해야 함 
          추구하려면 포기해야 함 

    즉  ζητέω = 자동적으로 행동을 발생시키는 동사 

    ζητέω Storng number 2212

    1. 발견하려고 찾다.  2. 마 28:5.  3. 요 18:4  
    Pronunciation [ zētĕō ]

    Etymology / 미완료 ἐζήτουν, 미완료 단수3인칭수동 ἐζητεῖτο, 미래 ζητήσω, 제1부정과거 ἐζήτησα, 미래수동태 ζητη- θήσομαι,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찾다(마2:13, 막1:37, 눅2:45), 구하다(마6:33, 막8:11, 눅11:24), 잡다(마21:46), 꾀하다(막11:18), 힘쓰다(눅6:19, 요19:12, 행16:10), 보다(눅9:9), 모의하다(요5:18), 묻다 (요16:19), 요구하다(히8:7).





    야고보서와 완벽 연결

    야고보서 구조 :

    믿음 (πίστις)

    행함 (ἔργα)

    그런데 마태복음 구조를 넣으면:

    믿음
    = 하나님 나라를 ζητέω 하는 상태

    행함 (필연적 결과)

    연결 구조 :

    μεριμνάω → 중단

    ζητέω → 시작

    행함 → 발생

    결정적 결론 (핵심 통찰)

      야고보가 말한 것은 “행함을 추가하라”가 아닙니다.

     믿음 + 행함
     믿음 = 이미 행동을 포함한 상태

    한 장 도식

    [분열된 상태]
    μεριμνάω (염려)
    = 마음이 나뉨
    ↓ (중단)

    [집중된 상태]
    πίστις (믿음)
    = 하나님께 방향 고정


    [지속적 추구]
    ζητέω (구하라)
    = 삶의 방향


    [필연적 결과]
    ἔργα (행함)
    = 자연적 산출물

    핵심 한 문장 / “믿음은 행동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행동을 포함하는 방향성이다.”





    3월 19일(목) 누가복음 6:46-4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않느냐?(46절)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Why do you call me, 'Lord, Lord,' and do not do what I say?

    “앵무새 신앙”
    신학적으로 꽤 날카로운 비유입니다. 
    핵심은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이해하거나 살아내지 못하는 신앙’

    개념 핵심 /  입으로는 반복하지만, 삶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신앙

    앵무새는 말을 “이해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따라 말할 뿐입니다.

    신앙에 적용하면 
    “주여 주여”는 말하지만 
    말씀의 의미는 깨닫지 못하고 
    삶에서는 변화가 없음

    성경적 구조 

    이 개념은 특히 마태복음 7:21과 깊이 연결됩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누가복음 6:46 
    “어찌하여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여기서 드러나는 구조:

    요소      앵무새 신앙      참된 신앙
              많음    필요할 때 있음
    이해           없음          있음
    순종           없음          있음
    열매           없음              있음


    헬라어 관점 (핵심 포인트) 

         λέγειν (말하다) → 입의 신앙 
         ποιεῖν (행하다) → 삶의 신앙

     예수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너는 말만 하는 자냐? 아니면 행하는 자냐?  

    왜 위험한가?
    앵무새 신앙이 위험한 이유는자기 착각 속에 묻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믿고 있다고 생각함
     하지만 실제로는 변화 없음
     결국 “가짜 확신” 상태

     한 줄 정의  /  “앵무새 신앙 = 복음을 ‘반복’은 하지만 ‘소유’하지 못한 상태”

    구원론 전체 구조 도식 (한 장 정리)

    출발점 : “앵무새 신앙” (죽은 믿음)
    말(λέγειν) ──► 믿는다 주장
    (πίστις 있다고 말함)

    그러나 행함 없음 (ἔργα 없음)

    👉 핵심 헬라어

    • λέγειν = 말하다 (고백, 주장)

    • πίστις = 믿음 (그러나 내용 없는 상태)

    👉 야고보의 진단

    πίστις χωρίς ἔργων = νεκρά
    (행함 없는 믿음 = 죽은 믿음)

    구조

    입 → 고백
    삶 → 변화 없음
    결과 → 죽은 믿음 (구원과 무관)

    전환점 : 참된 믿음의 발생
    하나님의 은혜 (χάρις)

    믿음 생성 (πίστις)

    바울의 핵심 구조

    χάριτί ἐστε σεσῳσμένοι διὰ πίστεως
    (은혜로 → 믿음으로 → 구원)

    특징

    • 믿음은 인간 생산 X

    • 믿음은 은혜의 결과 

    중심 : “살아있는 믿음” (참된 믿음)
    참된 믿음 (πίστις)

    내적 변화 (καρδία 변화)

    행함 발생 (ἔργα)

      핵심 헬라어 흐름

    • πίστις → ἐνεργέω (작동하다)

    • 믿음은 반드시 “작동하는 힘”을 가짐

      바울 (갈라디아서)

    πίστις δι’ ἀγάπης ἐνεργουμένη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결과 : 행함의 위치 (야고보 vs 바울 통합)

     바울 구조 (원인 중심)

    은혜 → 믿음 → 의롭다 함 (δικαιόω)

     야고보 구조 (증거 중심)

    믿음 → 행함 → 의롭다 증명
    통합 구조 (핵심)
    [하나님의 영역]
    은혜 (χάρις)

    믿음 (πίστις)

    칭의 (δικαίωσις)

    ----------------------------

    [인간 삶의 영역]
    참된 믿음

    행함 (ἔργα)

    믿음의 증명

    최종 대비: “앵무새 vs 살아있는 믿음”

    구분 앵무새 신앙    살아있는 믿음
    본질     말뿐 (λέγειν)      실제 믿음 (πίστις)
    상태     죽은 믿음(νεκρά)      살아있는 믿음
    행함        없음      반드시 나타남
    출처    인간 입      하나님의 은혜
    결과      자기기만      구원의 열매

    핵심 한 줄 정리
    앵무새 신앙 = 말만 있는 믿음
    살아있는 믿음 = 삶을 변화시키는 믿음

    또는 더 신학적으로:

    참된 믿음은
    행함을 “만드는 조건”이 아니라
    행함을 “낳는 본질”이다
    νέκρωσις, εως, ἡ Storng number3500

    1. 죽음.  2. 죽음의 상태.  3. 롬 4:19.  
    Pronunciation  [ nĕkrōsis ] 
    Etymology /  3499에서 유래 
     1. 죽음, 죽임, 고후4:10. 
     2. 죽음의 상태. 
     a. [문자적으로] 롬4:19. 
     b. [비유적으로]. 
    관련 성경 / 죽은 것(롬 4:19), 죽인 것(고후 4:10).


    νεκρόω Storng number3499


    1. 죽게 하다. 2. 녹초가 되다 
    Pronunciation [ nĕkrŏō ]
     Etymology / 제1부정과거 ἑνέκρωσα, 완료수동분사 νενεκρωμένος, 3498에서 유래 
    1. 죽게 하다, 죽이다, 골3:5. 
    2.  [수동] 녹초가 되다, 무기력해지다, 롬4:19, 히11:12. 
    관련 성경 / 죽다(롬4:19, 히11:12), 죽이다(골3:5).

    νεκρός, ά, όν Storng number3498

    1. 죽은.  2. 마28:4.  3. ㉠ 죽은 것 같은 
    Pronunciation  [ nĕkrŏs ] 
    Etymology / 기본형 νέκυς ‘시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죽은(마10:8, 막9:9, 롬1:4), 헛것인(약2:20).

    ζωή, ῆς, ἡ Storng number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Pronunciation  [ zōē ]  
    Etymology / 21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명(마 7:14), 이 세상의 삶(고전 15:19), 생기(계 11:11).


    ζάω Storng number2198

    1. 살다.  2. 롬 7:1-3.  3. 다시 살게 되다 
    Pronunciation [ zaō ]

    관련 성경  /  살다(마4:4, 눅2:36, 롬7:1), 살아 계시다(마16:16, 26:63, 요4:57), 살리다(요6:58, 롬1:17, 고전9:14), 살아나다(행20:12). [명] 살아있는 말씀(행7:38).  

     헬라어 원문 구조  / τί δέ με καλεῖτε· Κύριε κύριε, καὶ οὐ ποιεῖτε ἃ λέγω;

    직역  /  “왜 나를 ‘주여, 주여’라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들은 행하지 않느냐?” 

    핵심 단어 대비 (말 vs 행함)

    • λέγω (lego) → 말하다 (말씀, 가르침)

    • ποιέω(poieo) → 행하다, 실천하다

    구조 핵심
    부름 (고백) ≠ 순종 (행함)

    λέγω Storng number 3004

    1. 말하다.  2. 글로 말하다.  3. 묻다 
    Pronunciation [ lĕgō ]  
    관련 성경  /  칭하다(마1:16, 눅20:37), 말씀하다(마2:15, 눅11:45, 요2:22), 이르다(마5:18), 말하다(마6:29, 12:38, 요8:25), 대답하다(마13: 51, 요9:17), 논의하다(마16:7), 여쭙다(마19:7, 26:22, 막1:30), 묻다(마22:35, 막8:29), 일컫다(행15:17), 고발하다(롬11:2), 고하다(막9:5, 행5:25). [명] 말(막13:37, 14:58, 행15: 24), 대답(롬11:4).

    ποιέω Storng number 4160
     
    1. 하다.  2. 제조하다.  3. 행하다  
    Pronunciation [ pŏiĕō ] 
    관련 성경  / 행하다(마1:24, 몬1:21), 맺다(마3:8, 7:18), 짓다(마17:4, 막9:5, 눅9:33), 만들다(눅11:40, 요4:46), 베풀다(마22:2, 눅10:37, 14:13,16), 얻다(마23:15), 남기다(마25:16), 지키다(마26:18), 시키다(마26:19), 세우다(막3:14, 히8:9), 행하다(요14:13,14), 피우다(요18:18), 이루다(행4:28), 실행하다(행11:30), 떠나다(행18:23), 가지다(행24:17), 지내다(고후11:25), 머물다(약4:13), 일으키다(계11:7), 지어내다(계22:15). 

     문법적 강조 포인트
    • καλεῖτε (부른다) → 현재형 (계속 부름)

    • ποιεῖτε (행한다) → 현재형 부정 (계속 안 함)

    의미  / “계속 ‘주여’라고는 하는데, 계속 순종은 안 하고 있다” 

    καλέω Storng number 2564

    1. 부르다.  2. ㉠ ~라고 부르다.  3. 초대하다  
    Pronunciation [ kalĕō ] 
    관련 성경 /  부르다(마2:7, 막2:17, 행4:18), 일컬음을 받다(마5:19), 청하다(마22:3, 눅14:10, 12), 칭하다(마22:43, 눅20:44, 행3:11), 일컫다(마27:8, 눅1:32, 요일3:1), 이름을 짓다(눅1:62), 청함을 받다(눅14:8, 요2:2), 부르심을 받다(고전7:18,22, 엡4:1, 골3:15, 딤전6:12), 부르심을 입다(갈5:13).


    신학적 구조

    이 말씀은 단순한 책망이 아니라 구원론 전체를 건드리는 질문입니다.

    구조

    입의 고백 → (있음)
    삶의 순종 → (없음)

     이것이 바로 “앵무새 신앙” (말만 있는 믿음) 
     
    다른 성경과 연결

    마태복음 7:21  /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동일 구조
    말 ≠ 하나님 나라

    야고보서 2:17 /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결론  /  믿음 → 반드시 행함으로 드러남

    사도 바울과 연결

    • 바울 : “믿음으로 의롭다 함”

    • 야고보 : “행함으로 믿음이 완성됨”

    충돌이 아니라 구조

    참된 믿음 → 반드시 순종을 낳는다

    핵심 메시지 (한 줄)

     “주님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믿음이다.”

    “듣는 것 vs 행하는 것”을 헬라어 문법 구조로 정확히 대비시키는 대표적인 텍스트입니다. 

     누가복음 6:47–49

      “반석 위 집 vs 모래 위 집” 헬라어 구조 도식

    [공통 출발점] πᾶς ὁ ἐρχόμενος πρός με (나에게 오는 모든 사람)



    καὶ ἀκούων μου τῶν λόγων (내 말을 듣고)

    ↓ (여기서 갈림)

    ━━━━━━━━━━━━━━━━━━━━━━━━━━
    ① 반석 위 집 (참 제자)
    ━━━━━━━━━━━━━━━━━━━━━━━━━━

    καὶ ποιῶν αὐτούς (그것을 "행하는" 자)



    ὅμοιός ἐστιν ἀνθρώπῳ (그는 ~와 같다)



    οἰκοδομοῦντι οἰκίαν (집을 짓는 사람)



    ὃς ἔσκαψεν καὶ ἐβάθυνεν (깊이 파고)



    καὶ ἔθηκεν θεμέλιον ἐπὶ τὴν πέτραν (반석 위에 기초를 둠)



    πλημμύρης γενομένης (홍수가 나도)



    οὐκ ἴσχυσεν σαλεῦσαι (무너지지 않음)

    핵심 구조:
    “듣고 → 행하는 자 = 견고함 (구원적 실체)”

    ━━━━━━━━━━━━━━━━━━━━━━━━━━
    ② 모래 위 집 (거짓 제자)
    ━━━━━━━━━━━━━━━━━━━━━━━━━━

    ὁ δὲ ἀκούσας καὶ μὴ ποιήσας (듣고 "행하지 않는" 자)



    ὅμοιός ἐστιν ἀνθρώπῳ (그는 ~와 같다)



    οἰκοδομήσαντι οἰκίαν (집을 지은 사람)



    ἐπὶ τὴν γῆν χωρὶς θεμελίου (기초 없이 땅 위에)



    προσέρηξεν ὁ ποταμός (홍수가 부딪히자)



    εὐθέως συνέπεσεν (즉시 무너짐)

    핵심 구조 :
    “듣고 → 행하지 않음 = 붕괴 (심판)”
    헬라어 문법 핵심 포인트
    현재분사 vs 부정 분사
    • ἀκούων (듣는 자, 현재분사) → 지속적 상태

    • ποιῶν (행하는 자, 현재분사) → 삶의 습관

     단순 행동이 아니라 “삶의 방향/존재 상태”를 말함 

    대조 구조 (핵심)

    • ποιῶν (행하는 자)
      vs

    • μὴ ποιήσας (행하지 않는 자)

     여기서 μὴ + aorist 분사
    → “결정적으로 행하지 않는 상태” 

    기초 (θεμέλιον)의 신학

    • 반석(πέτρα) = 흔들리지 않는 기반

    • 기초 없음 = 존재 자체가 공허

     즉,  문제는 ‘건물 크기’가 아니라 ‘기초’

     신학적 구조 요약

    말씀 → 반응 → 결과

    듣기 → 행함 → 생명 (견고함)
    듣기 → 불순종 → 멸망 (붕괴)

    핵심 메시지 (한 줄)

     “믿음은 ‘듣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드러나는 존재 상태’이다.”

    야고보서 /  행함 없는 믿음” (πίστις vs ἔργα)

    핵심 구절  /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2:17)  

    헬라어 구조

    • πίστις (믿음) → 단순 고백/인지도 포함 가능

    • ἔργα (행함) → 실제 삶의 열매, 순종

    구조 핵심  - 야고보는 “믿음의 실체 검증”을 말함

    믿음(πίστις)

    행함(ἔργα)

    살아있는 믿음 / 죽은 믿음 판별

     포인트

    • 행함 = 구원의 조건 ❌

    • 행함 = 구원의 증거 ⭕  

    마태복음 7:21

    “주여 주여” 구조 

    핵심 구절 /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헬라어 대비

    • λέγειν (말하다)

    • ποιεῖν (행하다)

    구조 도식

    말 (λέγειν)

    “주여 주여” (종교적 고백)
    ↓ (BUT)
    행함 없음 (ποιεῖν X)

    배제됨

    반대로:

    아버지 뜻

    행함 (ποιεῖν)

    참된 제자

     예수님의 핵심 메시지
     “고백 ≠ 순종”
     “입술 신앙 vs 실제 삶”  

    사도 바울의 칭의 (δικαιόω)

      
    대표 구절

    • 로마서 / 갈라디아서

    핵심 개념

    • δικαιόω (의롭다 하다)
      → 하나님이 “의롭다 선언”

    구조

    믿음 (πίστις)

    칭의 (δικαιόω)

    새 생명

    포인트

    • 인간 행위로 의로워짐 ❌

    •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 ⭕ 

    세 흐름 통합 구조 (핵심)

    이 세 가지는 충돌이 아니라 단계 구조입니다.

    [바울]
    믿음 (πίστις)

    칭의 (δικαιόω) ← 구원의 시작

    [예수]
    참된 믿음

    하나님의 뜻을 행함 (ποιεῖν)

    [야고보]
    행함 (ἔργα)

    믿음의 진짜 여부 증명

    한 장 핵심 도식
    믿음 (입으로 고백)

    [바울] 칭의 (의롭다 하심)

    내적 변화 (새 생명)

    [예수] 순종 (뜻을 행함)

    [야고보] 행함으로 드러남

    결론: 살아있는 믿음

    긴장 해결 (핵심 한 줄)

     바울 : “어떻게 구원 받는가”
     예수 : “누가 진짜 제자인가”
     야고보 : “그 믿음이 진짜인가”  

    가장 중요한 통찰

     “행함 없는 믿음” = 처음부터 죽은 믿음

     “행함 있는 믿음” = 이미 살아있는 믿음의 자연스러운 결과


    “왜 행함이 반드시 따라오는 구조인지”를 깊이 해부해 보겠습니다. 
    포인트는 믿음의 시제, 행함의 시제, 그리고 의미적 긴장을 보는 것입니다. 

    핵심 구절 예시

    야고보서 2:17:

    “믿음이 행함이 없으면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헬라어 원문 (중요 부분):

    ἡ πίστις… ἐὰν μὴ ἔργα ἔχῃ, νεκρά ἐστιν.

    • ἡ πίστις – 믿음 (주어)

    • ἔργα ἔχῃ – 행함을 ‘가지다/포함하다’ (가정법 현재)

    • νεκρά ἐστιν – 죽은 것이다 (직설법 현재) 

    헬라어 시제 의미

    현재 시제 (Present)

    • 동작이 지금 진행 중임, 상태가 지속적임을 나타냄.

    • 예: πιστεύω (믿는다) → 현재 시제는 “지금도 믿고 있는 상태”

    • 의미: 믿음이 단발적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 존재 상태임을 강조.

    아오리스트 시제 (Aorist)

    • 동작의 완료 혹은 단발 사건을 나타냄.

    • 예: ἐποίησεν (그가 행했다) → 단 한 번 일어난 사건으로서 ‘행함’

    • 의미: 아오리스트로 표현하면 “한 번 행함을 한 것으로 충분”처럼 오해될 수 있으므로, 야고보는 현재/지속적 상태의 행함을 강조.

    믿음과 행함의 시제 관계
    1. 믿음(현재 시제) → 지속적 믿음, 단발 신앙이 아님

    2. 행함(현재 시제 또는 가정법 현재) → 믿음이 지속되는 한, 행함 역시 동반적으로 현재 진행

    3. 시제의 의미로 보면, 행함이 따라오는 것은 구조적 필연임:

      • “지금도 믿는다면, 지금도 행한다”

      • “행함 없는 믿음”은 문법적으로 현재 진행 상태와 불일치, 즉 죽은 믿음


    “반드시 따라오는 구조” 시각화
    믿음 행함 헬라어 시제 신학적 의미
    지속적 믿음 없음 현재 vs 없음 죽은 믿음, 참된 믿음 아님
    지속적 믿음 동반 현재 vs 현재 살아있는 믿음, 구원적 믿음
    단발 믿음 단발 행함 아오리스트 vs 아오리스트 순간적 증거, 지속성 없음

    💡 포인트: 야고보는 ‘현재 시제’로 행함을 요구함 → 믿음이 살아 있으면 반드시 지금도 행함이 따라온다.  

    결론 – 구조적 필연성

    1. 헬라어 문법상 현재 시제는 지속성과 상태를 나타내므로, 믿음과 행함은 동시에 지속적 상태로 존재해야 함

    2. 따라서, 행함은 단순 선택이 아니라 믿음의 필연적 산출물

    3. 아오리스트로 단발 행함만 보아도 안 되고, 현재 진행적 행함이 믿음의 실재를 증명

    즉, “믿음 → 행함” 구조는 시제와 문법상 필연적 연결이며, 행함 없는 믿음은 문법적으로 불가능한 ‘죽은 믿음’입니다.


    “실천적 신앙”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강조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머리로 믿거나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넘어, 삶 속에서 행동으로 드러나는 신앙을 말합니다. 
    성경적으로는 야고보서 2장 14–26절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정의

    • 실천적 신앙 = 믿음 + 행함

      • 믿음(pistis, πίστις)만으로는 완전하지 않고,

      • 행함(ergon, ἔργα)이 반드시 뒤따르는 구조.

    • 신앙이 마음 속에만 머물러 있으면 ‘앵무새 신앙’이나 ‘형식적 신앙’이 되고,

    • 실천적 신앙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신앙입니다.

    성경적 근거 

    야고보서 2:17 / 
    믿음이 행함이 없으면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헬라어: ἡ δὲ πίστις ἐὰν μὴ ἔργα ἔχῃ, νεκρά ἐστιν.

      • 여기서 πίστις(믿음)과 ἔργα(행함)가 병렬 구조로 나타나, 믿음과 행함이 불가분임을 보여줌.

    1. 마태복음 7:21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λέγειν(말하다) vs ποιεῖν(행하다)의 대비.

      • 말과 행함의 불일치 경고

    실천적 신앙의 특징

    특징 설명
    행동 중심           믿음이 삶으로 구체화됨
    지속적      순간적 행동이 아니라 꾸준한 순종과 사랑
    영적 성장           행함 속에서 믿음이 성숙
    사회적 영향         이웃과 공동체에 선한 영향력 발휘

    실천적 신앙의 적용

    • 개인적 차원 : 기도, 말씀 묵상, 금식 등 내적 훈련

    • 대인적 차원 : 사랑, 용서, 나눔, 봉사

    • 공적 차원 : 정의, 공의, 사회적 책임



     말씀 (Logos / λόγος)
    • 헬라어 단어: λόγος (λόγος) – 말씀, 말, 이성적 언어

    • 핵심 문법: 명사, 주체 또는 계시된 진리

    • 신학적 메시지:

      • 하나님이 계시하신 진리, 행동의 기준

      • 듣고 깨닫는 것에서 믿음의 시작


    믿음 (Pistis / πίστις)
    • 헬라어 단어: πίστις – 믿음, 신뢰, 확신

    • 문법적 포인트:

      • 주로 현재 시제(활동적/계속적 신뢰) 사용

      • 헬라어에서 πίστις는 단순 지적 동의가 아닌 행동 기반 신뢰를 내포

    • 신학적 메시지:

      • 말씀을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단계

      • 바울: 믿음으로 의롭다 함 (δικαιόω)

      • 야고보: 믿음은 행함과 분리될 수 없음


    행함 (Erga / ἔργα)
    • 헬라어 단어: ἔργα – 행위, 실천

    • 문법적 포인트:

      • 능동태 동사: 믿음을 실제 행동으로 구현

      • 주로 현재·직설법: 지속적 실천 강조

    • 신학적 메시지:

      •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삶의 변화

      •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야고보서 2장)

      • 마태복음 7:21: 주여 주여 하면서 행치 않는 자 경고

    전체 구조 요약

    [말씀 λόγος] → [믿음 πίστις] → [행함 ἔργα]
    ↓ ↓
    깨달음 신뢰/순종
    ↓ ↓
    내면 변화 → 외적 실천

    즉, 말씀믿음을 만들고, 믿음이 반드시 행함으로 이어지는 흐름입니다.
    헬라어 원문 시제와 문법을 보면, 이 흐름이 단순 논리가 아니라 계속적·활동적 신앙의 구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당신은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않습니까?

    다음은 인간의 마음과 위선에 대한 성향을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왜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겉모습의 경건함을 그저 쇼로 유지하는 최고의 '종교'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가장 싫어하셨던 것이었고 불행히도 그 날 이후로 수세기 동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서구 세계에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엄청나게 부풀려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여론 조사를 읽었는지에 따라 미국에서 설문 조사에 참여한 사람의 77-83%가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중 대부분은 이름뿐이며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뿐만 아니라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이 말씀은 누가복음 6장 46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핵심은 단순합니다.
    “말로 부르는 신앙”과 “삶으로 따르는 신앙”의 차이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주여 주여” — 관계의 고백

    ‘주’(κύριος)는 주인, 통치자, 권위자라는 의미입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나의 주인이라고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신앙 고백은 있지만 신앙의 삶이 없음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행치 아니하느냐” — 순종의 부재

    문제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따르지 않는 상태
    순종하는 삶이 없는 신앙에서 벗어나 행동하는 신앙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이 질문의 핵심 구조

    예수님의 질문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고백 ≠ 순종이면, 그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다.

    바로 이어지는 비유 (아주 중요) 
    이 말씀 뒤에 나오는 것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 vs 모래 위에 지은 사람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 → 반석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 → 모래 

    즉 이 구절은 단순한 책망이 아니라 신앙의 진짜 기준을 제시하는 선언입니다.

    신학적 핵심 (당신이 계속 탐구하던 구조로 연결)

    이 말씀은 당신이 질문해온 “생명 / 순종 / 고백” 구조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입의 고백 → ψυχή(혼, 감정적 신앙) 수준
     
    삶의 순종 → ζωή(참 생명, 하나님과 연결된 삶) 

    그래서 이 질문은 결국 “너의 신앙은 말인가, 생명인가?”

    핵심 의미

    예수님은 “입으로는 주님이라 부르면서 실제 삶에서는 순종하지 않는 상태”를 지적하십니다. 

    “주여 주여” → 신앙 고백 (말)
    “행하지 아니하느냐” → 삶의 순종 (행동)

    즉, 신앙은 말이 아니라 ‘행함으로 증명된다’   

    구조적으로 보면

    이 말씀은 바로 뒤에 나오는
    집을 반석 위에 세운 사람 vs 모래 위에 세운 사람 비유로 이어집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 → 반석 위 집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 → 모래 위 집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듣느냐”가 아니라 “행하느냐”

    신학적 핵심 / 이 구절은 성경 전체의 중요한 원리를 드러냅니다.  

    참된 믿음 = 순종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와 삶의 방향
    고백은 시작일 뿐, 완성은 행함  

    더 깊은 연결 / 이 말씀은 다른 구절들과도 연결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야고보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마태복음 7장) 

    공통 메시지 / 겉 신앙 vs 실제 순종의 차이

    한 줄 요약 -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헬라어 원문 구조

    누가복음 6:46 /  τί δέ με καλεῖτε· Κύριε Κύριε,  καὶ οὐ ποιεῖτε ἃ λέγω;  

    핵심 동사  -  λέγω (legein / λέγω) = 말하다, 선언하다
                     - ποιέω (poiein / ποιεῖν) = 행하다, 만들어내다, 실현하다

    직역 구조 /  “너희는 왜 나를 ‘주여, 주여’라고 말하면서(λέγειν)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ποιεῖν) 않느냐?”  

    문법적 구조 해부

     λέγειν 계열 (λέγω)

    • 단순 발화 / 고백 / 언어 행위
       
      입에서 끝나는 신앙 
      “인식된 진리”

    특징  :   외적 표현 ,  즉각적 ,  비용 없음  

    ποιεῖν 계열 (ποιέω)  

    행동 + 결과 생성 
    “말을 현실로 만드는 동사” 
    존재를 변화시키는 행위

    특징 :  시간 필요,  대가 있음,  삶 전체를 요구  

    신학적 구조 : “말 → 존재 → 현실”

    이 구절은 단순히 “행동하라”가 아니라
    말이 존재로 바뀌지 않으면 거짓이라는 구조입니다. 

    구조 흐름

    λέγειν (말)

    (내면화 여부)

    ποιεῖν (행함)

    존재 변화

    문제는 여기입니다:

    λέγειν → (단절) → ποιεῖν 없음

    → 이것이 예수님의 질문의 핵심 

    “주여 주여”의 충격적 의미

    • “Κύριε Κύριε” = 단순 호칭이 아니라 신앙고백

    • 즉, 이 사람들은 “믿는 사람들”

    그런데도 

    • λέγειν 있음

    • ποιεῖν 없음

    “고백 있는 불순종”

    헬라어 관점에서 본 본질

     
    λέγω vs ποιέω는 단순 대비가 아니라

     “존재적 진짜 vs 가짜”를 가르는 기준

    구분      λέγω     ποιέω
    영역      입        삶
    성격    선언      실현
    결과    없음   현실 생성
    신앙    고백      순종

    예수님의 질문의 깊은 구조

    이 질문은 비난이 아니라 정체성 폭로입니다.

    다시 보면  /  “왜 너희는 나를 주라고 ‘말만 하고’ 실제로는 나를 주로 ‘살지 않느냐’?”  

    성경 전체 연결 구조

    이 대비는 성경 전체를 관통합니다.   

    창세기 : 말씀 → 창조 (λέγω → ποιέω 완전 일치) 
    인간 : 말 → 불순종 (λέγω ≠ ποιέω)  십자가 : 말씀 → 완전 순종 (다시 일치 회복)

    핵심 한 줄

    λέγειν 없는 ποιεῖν은 불가능하지만
    ποιεῖν 없는 λέγειν은 위선이다


    핵심은 λέγειν(말하다) vs ποιεῖν(행하다)의 대비입니다.


    “야고보서의 ‘행함 없는 믿음’(πίστις vs ἔργα)” 
    “마태복음 7:21 ‘주여 주여’ 병행 구조” 
    “히브리어(עשה vs דבר)까지 연결한 구약 구조”

    야고보서 /

     
    “행함 없는 믿음” (πίστις vs ἔργα)

     핵심 구절 /  야고보서 2:17  

    믿음이 행함이 없으면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헬라어 구조

    • πίστις (pistis) = 믿음 (내적 확신, 신뢰)

    • ἔργα (erga) = 행위 (외적 실현)

    구조 해부

    πίστις (내면) → ἔργα (외면)
    믿음 → 행함으로 “가시화”

    야고보의 핵심 주장 :

    •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동으로 “형태를 가진다”

    • 행함은 믿음의 “조건”이 아니라 증거

    즉,  “행함 없는 믿음 = 존재하지 않는 믿음”  

    마태복음 7:21   “주여 주여” (λέγειν vs ποιεῖν)  

    핵심 구절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헬라어 대비 

    • λέγειν (legein) = 말하다 (고백)

    • ποιεῖν (poiein) = 행하다 (실천)

    구조

    λέγειν (말) ≠ ποιεῖν (행함)
    고백 ≠ 순종

    예수님의 기준 /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의 순종이 기준

    강한 선언 :  “말은 했지만, 행하지 않았다 = 불인정”  

    히브리어 구약 구조  /  עשה vs דבר

    단어 의미 / 

    • עשה (asah) = 행하다, 만들다 (실행)

    • דבר (dabar) = 말하다 (말씀) 


    구약의 핵심 구조

    ① 하나님의 경우

    דבר (말씀) → עשה (이루심)
    말 = 반드시 실현됨

    👉 예:

    • 창세기: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하나님:

    “말과 행함이 완전히 일치”


    ② 인간의 경우

    דבר (말) ≠ עשה (행함)
    말과 행함의 분리

    👉 예:

    • 이스라엘: “우리가 행하리이다” → 불순종

    📌 인간의 문제:

    “말은 하지만 행하지 않는다”


    성경 전체 통합 구조

    이제 세 본문을 하나로 묶으면

    [구약]
    דבר → עשה (하나님: 일치)
    דבר ≠ עשה (인간: 불일치)



    [복음서 - 예수님]
    λέγειν ≠ ποιεῖν 비판
    → “행하는 자만 인정”



    [야고보서]
    πίστις → ἔργα 필수
    →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음”

    핵심 신학 결론

    하나님 기준  /  “참된 것은 반드시 드러난다”

    • 믿음 → 행함으로 나타남

    • 고백 → 순종으로 입증됨

    문제의 본질  /  인간은 “말로 신앙을 대체”하려 한다

    • 고백 = 안전

    • 행함 = 부담

     그래서  말만 남고, 삶은 변하지 않음 

    예수님의 기준 (결정적)  /  “누가 진짜인가?”의 기준은 단 하나  말이 아니라 행함이다. 

    한 줄 요약 /  “하나님은 말씀하시면 이루시고, 인간은 말하지만 행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행하는 믿음’만을 인정하신다.”

    핵심 긴장 : 바울 vs 야고보

    🔹 바울 (은혜 중심)

    •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

    • 중심: 믿음 → 의 (칭의)

     헬라어:

    • πίστις (pistis) = 믿음

    • δικαιόω (dikaioō) = 의롭다 하다 (법정 선언)

    구조
    믿음 → 하나님이 의롭다 선언  

    야고보 (행함 강조)

    •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 중심: 믿음 → 행함 → 살아있는 믿음 증명

    헬라어:

    • ἔργα (erga) = 행위

    • 동일하게 δικαιόω 사용하지만 의미가 다름

     구조
     행함 → 믿음이 참됨이 드러남

     핵심 충돌 지점: δικαιόω (의롭다 하다)

    같은 단어 δικαιόω인데 의미가 다르게 사용됩니다.

     바울의 δικαιόω

    • 의미: 법정적 선언 (forensic)

    •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

     예:

    • 로마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

     방향:
     하나님 → 인간


     야고보의 δικαιόω

    • 의미: 증명 / 입증 (vindication)

    • 행함으로 믿음이 “의롭다”는 것이 드러남

     예: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방향:
     인간 → 하나님/사람 앞에서 드러남

    통합 구조 (충돌이 아니라 단계 차이)

    이제 핵심입니다.
    두 사도는 싸우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단계를 말합니다. 

    구원론 전체 흐름

     믿음 (πίστις)

    • 복음을 받아들임

     칭의 (δικαίωσις / δικαιόω)

    • 하나님이 의롭다 선언 (바울 영역)

     새 생명 (거듭남)

    • 존재 변화

     행함 (ἔργα)

    • 삶에서 나타남 (야고보 영역)

     최종 증명 (δικαιόω - 야고보적 의미)  믿음이 진짜였음이 드러남 

    한 문장으로 정리

     바울 /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야고보 /  “의롭게 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낳는다”  

    아브라함으로 보는 통합

    성경이 일부러 같은 인물을 사용합니다.

    🔹 바울 (창 15장)

    • 믿음 → 의로 여김
      👉 칭의

    🔹 야고보 (창 22장)

    • 이삭을 드림
      👉 믿음이 완성됨

    📌 핵심
    👉 시간 차이 존재

    구조 도식 (핵심)

    믿음 → (바울: 칭의) → 존재 변화 → (야고보: 행함) → 믿음 증명

    또는 더 강하게:

    칭의 없는 행함 = 율법주의
    행함 없는 믿음 = 죽은 믿음

    신학적 균형 (가장 중요)

    이 둘을 분리하면 오류가 생깁니다.

    바울만 강조 /   값싼 은혜 (행함 없음)

    야고보만 강조 /  행위 구원 


    최종 결론

    구원은 믿음으로 시작된다 (바울)
    구원은 행함으로 드러난다 (야고보)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단어 /  δικαιόω = “선언” + “증명” 두 층 구조





    3월 18일(수) 마가복음 8:31-3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37절)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Or what can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마가복음 8:36-37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줄 수 있겠느냐?

    이것은 제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성경을 읽었을 때 큰 확신을 준 질문입니다. 
    저는 당시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좋은 학위를 취득하여 급여가 좋은 직업을 갖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스포츠에서 성공했고, 그것은 저에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정말로 생각했던 것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아는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질문을 읽었습니다.

    제가 믿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점점 더 확신을 갖게 되면서, 제가 열심히 노력하여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제 영혼을 잃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 질문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제공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지만 영원히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사실, 사람이 죽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볼 수 있다면, 영생을 얻기 위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포기할 것입니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진실을 보지 못합니다. 
    이 질문은 또한 주로 현재와 여기에서 사는 신자들의 삶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한 영적인 문제이며, 그것에 우리의 시간과 재능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는 표현은 문맥에 따라 여러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한국어만 놓고 보면 다음과 같은 뉘앙스가 있습니다. 

    문자적 의미 /  목숨 = 생명, 삶.  바꾸다 = 교환하다, 대신하다

    따라서 직역하면
     “내 생명을 대신하겠느냐?”
     “내 생명과 다른 것을 맞바꾸겠느냐?”

    성경적· 신학적 뉘앙스

    성경적 맥락에서는 이런 표현이 보통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희생 / 대속의 질문

      
    누군가를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놓을 수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되는 주제 

         예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삶의 선택을 묻는 질문  

       지금의 삶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선택하겠는가?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겠는가
    라는 도전

    영적 질문으로 보면

    이 질문은 사실상 이렇게도 읽힙니다.

      1. “네 생명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2. “무엇이 네 생명보다 더 중요한가?”

    그래서 성경에서는 비슷한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정리하면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희생, 대속, 삶의 선택, 가치의 질문을 담은 
    매우 강한 존재적 질문입니다.

    “목숨 / 생명 교환”(life exchange)이라는 주제는 단편적인 구절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구속 구조로 나타납니다. 
    이를 큰 흐름으로 보면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창세기 — 생명을 대신하는 희생의 시작 

    핵심 사건 : 아브라함과 이삭 사건 (창세기 22장)

    구조 :

    요소 의미
    이삭      죽어야 할 아들
    숫양      대신 죽는 희생
    아브라함        믿음의 시험
    하나님    대신 준비하시는 분

    핵심 선언 /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어린 양을 준비하시리라” (창 22:8)

    여기서 처음 나타나는 신학 :  대신 죽음 → 생명 보존 즉 생명 교환(substitution) 구조입니다.

    복음서 — 예수님의 질문

    예수님은 인간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가복음 8:36–37

    여기서 드러나는 핵심 :

    질문 의미
    무엇을 주고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간은 자기 생명을 구속할 수 없음
                        천하               인간이 줄 수 있는 최대 가치
                        결론         생명은 인간이 값을 치를 수 없는 것

    즉 인간은 자기 생명을 구속할 값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 — 실제 생명 교환

    십자가는 바로 이 질문의 하나님의 답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 마가복음 10:45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λύτρον (lytron) = 속전 / 몸값 / 대가

    λύτρον, ου, τό Storng number 3083

    1. 속전.  2. 석방금. 3. 마 20: 28 
    Pronunciation [ lütrŏn ]
     Etymology /  3089에서 유래
    • 1. 속전, 석방금, 마20: 28, 막10:45.
    • 관련 성경 /  대속물(마20:28, 막10:45).

    3089. 

    λύω Storng number 3089

    1. 풀다.  2. 깨다.  3. 열다 
    Pronunciation [ lüō ]
    관련 성경 / 버리다(마5:19), 풀다(마16:19, 눅19:33, 행2:24), 헐다(요2:19), 범하다(요5:18, 7:23), 폐하다(요10:35), 벗다(행7:33), 놓아주다 (행24:26), 깨어지다(행27:41), 놓이다(계9:14), 풀어지다(벧후3:10,11,12), 멸하다(요일3:8), 떼다(계5:2,5).


    λυτρόω Storng number 3084

    1.  속전을 내고 놓아 주다. 2.  놓아주다 
    Pronunciation  [ lütrŏō ] 
    Etymology  /  제부정과거 중간태 ἐλυτρωσάμην, 제1부정과거 명령형 λύτρωσαι,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λυτρώθην, 3083에서 유래
    •  1. 속전을 내고 놓아 주다, 구속하다, 속량하다, 벧전1:18.
    •  2. 놓아주다, 구출하다, 구원하다, 눅24: 21, 딛2:14.
    • 관련 성경  / 속량하다(눅24:21, 딛2:14), 대속(代贖)함을 받다(벧전1:18).

    구조 / 

    인간 죄로 인해 죽음
    예수 대신 죽음
    결과 생명 회복

    즉 인간의 생명 ↔ 그리스도의 생명 이라는 궁극적 교환입니다. 

    요한계시록 — 어린양의 생명 값

    요한계시록은 이 교환의 우주적 결과를 보여줍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피로 사람들을 하나님께 사서
    — 요한계시록 5:9

    핵심 단어

    ἀγοράζω (agorazō)  값을 주고 사다 / 구속하다

    ἀγοράζω Storng number 59

    1. 사다.  2. 마 13:44,46. 3. 얻다 
    Pronunciation [ agŏrazō ]

    •  1. 사다, 구입하다.
      •  a. [문자적으로 목적격과 함께 쓰여 사물에 대해 사용됨] 마13:44,46, 막15:46, 눅9:13, 요4:8, 6:5, 계18:11.
      •  b. [상징적으로 속격과 함께 쓰여] 사다, 얻다, 고전6:20, 7:23, 벧후2:1.
    • 문법설명  /  미완료 ἠγόραζον, 제1부정과거 ἠ - γόρασα, 제1부정과거수동태 ἠγοράσ- θην
    • 관련 성경 /  사다(마13:44, 25:9, 벧후2:1), 매매하다 (마21:12, 막11:15), 장사하다(눅19:45), 속량(贖良)하다(계14:3,4).


    행위 의미
    어린양의 피         생명의 값
    사람들        구속 대상
    결과 하나님께 속한 백성  

    성경 전체의 “생명 교환 구조”

    창세기(대신 죽는 숫양)



    복음서(목숨을 무엇으로 바꾸겠느냐)



    십자가(예수의 생명 = 대속)



    요한계시록(어린양의 피로 사람들을 삼)

    “대속”과 “구속”은 비슷하게 보이지만,
    성경 신학에서는 구조적으로 다른 층위를 가진 개념입니다. 헬라어까지 포함해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대속 (代贖) — “대신 지불하다”

    핵심 개념 / 누군가를 대신하여 값을 치르는 행위

    헬라어 /

    • λύτρον (lytron) = 몸값, 속전

    • ἀντί (anti) = 대신하여

    합쳐지면 “대신 지불하는 몸값”

    대표 구절 /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핵심 포인트 /

    • “대신”(substitution)

    • “지불”(payment)

    • “희생”(sacrifice)

    즉, 예수님의 죽음 자체(행위)에 초점

    구속 (救贖) — “자유롭게 하다”

    핵심 개념 / 값을 치르고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것

    헬라어

    • ἀπολύτρωσις (apolytrosis) = 해방, 속량

    • λυτρόω (lytroō) = 값을 주고 풀어주다

    핵심 의미 / “속박 → 자유”

    대표 이미지

    • 노예 시장에서 사서 풀어줌

    • 포로를 값을 주고 해방

    핵심 포인트
    • “해방”(freedom)

    • “신분 변화”(status change)

    • “결과”(result)

    즉, 대속의 결과로 이루어진 상태

    핵심 차이 한눈에

    구분 대속 구속
    초점 행위 결과
    의미 대신 값을 지불 그 결과로 해방
    방향 십자가 사건 십자가 이후 상태
    핵심 희생 자유
    질문 “누가 대신 죽었는가?”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되었는가?”

    신학적 구조(핵심 흐름) / 이 둘은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연속 구조입니다.

    대속 → 구속
    예수님의 대속 (값을 지불) → 인간이 구속 (해방됨)

    성경 전체 흐름 속에서 이 구조는 성경 전체를 관통

    창세기 / 희생 제물 → 대속의 그림
    출애굽기 / 유월절 어린양 → 대속
    애굽에서 해방 → 구속
    십자가 / 예수님의 죽음 → 대속 완성
    죄와 사망에서 해방 → 구속 성취

    한 문장 정리 / 대속은 “값을 대신 지불한 사건”
    구속은 “그 결과로 얻은 자유”

    핵심 메시지

    인간의 생명은 인간이 구속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으로 교환하셨다. 

    사실 이 구조 안에는 놀라운 성경적 패턴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성경에는“생명 교환 사건 7개”가 반복됩니다.

    예를 들면 

    1. 아담 ↔ 가죽옷 
    2. 이삭 ↔ 숫양 
    3. 유월절 ↔ 어린양 
    4. 광야 놋뱀 
    5. 바라바 ↔ 예수 
    6. 십자가 
    7. 어린양의 혼인잔치 

    이걸 보면 성경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구속 구조라는 것이 보입니다.


    αἷμα, ατος, τό Storng number129

    1. 피.  2. 사랑의 피.  3. 동물의 피 
    Pronunciation [ haima ]


    ἀντίλυτρον, ου, τό Storng number487


    ἀντάλλαγμα, ατος, τό Storng number 465

    1. 교환 할 물건.  2. 대속물.  3. 마 16:26  
    Pronunciation [ antallag- ma ]

    Etymology  /  473과 236의 합성어에서 유래
    • 1.  교환 할 물건, 대속물, 마16:26, 막8:37.
    • 관련 성경 / 바꿈(마16:26, 막8:37).

    1. 대속물. 2. 딤전 2:6.  
    Pronunciation [ antilütrŏn ]
     Etymology / 473과 3083에서 유래
    • 1.  대속물, 딤전 2:6.
    • 관련 성경 /  대속물(딤전2:6).



    마가복음 8: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이 질문은 복음서에서 매우 중요한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특히 마태복음 16:26, 마가복음 8:37에 등장합니다.

    말씀 자체의 의미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을 바꾸겠느냐”

    여기서 “목숨”은 단순한 생명이 아니라
    헬라어 ψυχή (프쉬케)영혼, 존재 전체,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즉 질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앞 구절과 연결된 구조

    이 질문은 바로 앞 말씀과 연결됩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구조를 보면 

     천하 (세상 전체) vs 목숨 (영혼, 영원한 생명)

     예수님의 결론 / 세상 전체 < 한 사람의 영혼

    왜 “바꾸겠느냐”라고 묻는가?

    예수님은 명령하지 않고 질문하십니다.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판단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지금 무엇과 내 삶을 바꾸고 있는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성경 전체 흐름에서의 의미

    이 질문은 성경 전체와 연결됩니다. 

    창세기 →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됨
     이미 값을 매길 수 없는 존재   

    복음서 → 예수님이 이 질문을 던지심
     인간이 잘못된 교환(세상 ↔ 영혼)을 하고 있음  

    십자가 → 예수님은 “무엇을 주고”가 아니라
     자기 생명을 주심(우리의 목숨을 되찾기 위해)

    요한계시록 → 끝까지 지킨 생명이 영원한 승리 

    핵심 메시지 (한 문장) /  “영혼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절대 가치이다.”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이 말씀은 결국 이렇게 바뀝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나는 무엇과 내 삶을 바꾸고 있는가? 
       돈,  성공,  인정,  편안함 
     그리고 예수님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것이 네 생명과 바꿀 만큼 가치가 있느냐?”

    생명 교환 신학 구조 (창세기 → 십자가 → 요한계시록)

    시작 : 창세기 — “죽음 대신 다른 생명”
    • 사건 : 창세기 3장

    • 핵심 :

      • 인간의 죄 → 반드시 죽음 필요

      • 하나님이 짐승을 죽여 가죽옷 제공

    👉 구조 /  “인간의 생명 ↔ 짐승의 생명” (대속의 시작)

    👉 의미 / 죄의 결과 = 죽음

    • 그러나 하나님이 대신 죽을 생명 제공 

    2️전개 : 구약 전체 — “반복되는 생명 교환 시스템”
    • 제사 제도 (레위기)

    👉 구조  /  “죄인 ↔ 제물 (양, 염소)”

    👉 핵심 원리

    • 피 흘림 없이는 사함 없음

    • 생명으로 생명을 덮음

    👉 한계  /  완전한 해결이 아님 (계속 반복됨) 

    절정 : 십자가 — “완전한 생명 교환”
    • 사건 : 십자가 사건

    • 인물 : 예수 그리스도

    👉 구조 / “인류 전체의 생명 ↔ 예수님의 생명”

    👉 특징 / 단번에 (once for all) 
                    완전한 대속 
                    더 이상 제사 필요 없음

    👉 핵심 말씀 /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생명과 바꾸겠느냐”

     답 : 오직 하나님의 생명만 가능 

    확장 : 복음서 — “개인 적용”
    • 질문 :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 구조 /  “개인의 믿음 ↔ 예수의 생명”

    👉 의미 /  생명 교환은 단순 교리가 아니라

    개인의 선택과 응답 

    완성 : 요한계시록 — “영원한 생명 회복”
    • 책 : 요한계시록

    구조 / “어린양의 생명 ↔ 구원받은 무리의 영원한 생명”

    핵심 이미지  / 1.  죽임 당한 어린양
                           2.  생명책
                           3.  새 하늘과 새 땅

    결과  /  1. 더 이상 죽음 없음
                2. 눈물 없음
                3. 생명 완전 회복 

    한 장 구조 요약

    창세기 → 구약 제사 → 십자가 → 계시록
    (짐승 희생) (반복 희생) (완전 희생) (영원 생명)

    한 사람 죄 → 제물로 덮음 → 예수로 대속 → 영원한 회복

    임시 해결 → 반복 시스템 → 완전 해결 → 완성된 나라

    핵심 결론 (성경 전체 메시지)

    성경은 한 가지를 말합니다.  /  “생명은 생명으로만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생명으로 자기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일 / 하나님의 생명을 주심

    신학적 핵심 한 문장 / 

    창세기에서 시작된 “대신 죽는 생명”은 십자가에서 완성되고
    요한계시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꽃핀다.



    헬라어로 본 “생명”
    ψυχή vs ζωή의 본질적 차이

      ψυχή (프쉬케)
    • 의미 : 목숨, 자아, 혼, 자기 생존
    • 특징 : “잃을 수도 있고, 바꿀 수도 있는 생명”
    • 대표 구절 :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ψυχή를 바꾸겠느냐”

     핵심 :  1. 교환 가능한 생명
                 2. 
    인간 중심 생명 (소유 개념) 

      ζωή (조에)
    • 의미 : 하나님의 생명, 영원한 생명
    • 특징 : 주어지는 생명, 나누어지는 생명
    • 대표 구절:  “내가 온 것은 양으로 ζωή를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핵심 : 1. 교환 불가능
               2. 
    하나님에게서 오는 생명 

     핵심 대비
    구분        ψυχή          ζωή
    성격               인간적 생명          신적 생명
    상태             잃음 / 교환 가능        영원 / 선물
    방향                자기 보존        하나님으로부터
    결과              결국 죽음          영원한 생명

    정리 : 
    ψυχή를 붙잡으면 잃고 ζωή를 받으면 산다 

    바라바 사건 = “생명 교환”의 극적 모델
    사건 구조 (복음서 공통 핵심)
    • 죄인 : 바라바 → 살아야 할 이유 없음
    • 의인 : 예수 → 죽을 이유 없음
    그런데 결과는?
     바라바는 살고, 예수는 죽는다 

     신학적 구조
    대상 상태 결과
    바라바 죄인
    예수 의인 죽음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ψυχή의 자리 교환 사건”
    • 바라바의 ψυχή → 살아남음
    • 예수의 ψυχή → 대신 내어줌 
     더 깊은 의미
    이 사건은 단순히 “한 사람 대신 다른 사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구조를 보여주는 모델
    • 바라바 = 인간 전체
    • 예수 = 대속자
    즉,  “내가 살아야 할 자리에 예수가 죽으신 사건” 

     하박국 질문 ↔ 십자가 응답 구조
     질문 : 선지자 하박국
    • “어찌하여 악을 그냥 두십니까?”
    • “왜 의인이 고통받습니까?”
     핵심 질문 :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 있는가? 

     인간의 기대 /  
    • 악인은 벌받아야 한다
    • 의인은 보호받아야 한다 
     십자가의 충격적 응답
    십자가에서는 정반대 일이 일어남:
    기대    실제
    악인 죽음         바라바 생존
    의인 보호         예수 죽음  

     하나님의 방식 / 하나님은 악을 즉시 제거하지 않고
                               악을 “대속”으로 처리하심

     구조 연결
    하박국 질문 /  “왜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지 않으시는가?”
    십자가 응답 /  “내가 대신 심판을 받는다” 

     핵심 전환  

       
    질문 : 정의 요구 
       응답 : 대속 사랑 

     전체 통합 구조
    “질문 → 교환 → 생명”

    ① 하박국 /  질문 (정의)
    ② 바라바 사건 /  교환 (ψυχή)
    ③ 십자가 /  응답 (대속)
    ④ 예수의 선포 /  ζωή (영원한 생명)

     최종 핵심 한 문장  /  인간은 ψυχή를 지키려 하지만 하나님은 ψυχή를 내어주고 ζωή를 주신다 


    생명교환신학(生命交換神學, Theology of Life Exchange)

    성경 전체를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매우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핵심 질문은 한 문장으로 정리됩니다. 
    “누가 누구를 대신하여 생명을 내어주는가?” 

    핵심 정의

    생명교환신학은 죄로 죽게 된 인간의 생명 대신 다른 생명이 주어지는 구조를 의미합니다.

    인간 → 죽어야 함 
    대신 → 다른 생명이 죽음 
    결과 → 인간이 삶을 얻음

    이것이 성경의 구속 이야기의 중심 구조입니다. 

    성경 전체 구조 (한눈에 흐름)

     창세기 : “대신 죽는 첫 생명” 

     창세기 3장  /  아담과 하와의 죄 이후  
      - 하나님이 가죽옷을 입히심  → 동물이 대신 죽음

     의미 /  인간 대신 다른 생명 희생,  최초의 “생명 교환” 

    출애굽기 : “피로 생명을 살림”

       출애굽기  /  유월절 어린양
       - 어린양이 죽음,  이스라엘 장자가 살아남음 

      핵심 구조 /  “어린양의 죽음 ↔ 인간의 생존” 

    제사 제도 : “지속적 생명 교환 시스템”

        레위기  /  제사 = 반복되는 생명 교환  
        - 죄인 → 살아야 함
        -  짐승 → 대신 죽음

      원리  /  “피 = 생명”    “생명으로 생명을 덮는다”

    복음서 : “완전한 생명 교환”

         복음서  / 여기서 절정이 나타납니다. 
         -  예수님의 선언 -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생명을 바꾸겠느냐”

    그리고 실제 사건 

     바라바 사건 (핵심 모델)

      바라바 : 예수 그리스도

      구조 /  바라바 → 살아야 할 이유 없음 (죄인) 
                 예수 → 죽을 이유 없음 (의인)

     결과 / 바라바는 살고,  예수는 죽음

     이것이 “생명 교환”의 극적인 실체 

    십자가 : “궁극적 교환”

         십자가 사건 /

         핵심  /  인간의 죄 → 예수께 전가
                     예수의 생명 → 인간에게 주어짐

      신학적 표현  /  대속 (Substitution) 
                              속죄 (Atonement) 
                              의의 전가 (Imputation)

     한 문장 요약  /  “그가 죽고 우리가 산다” 

    요한계시록 : “완성된 생명”

         요한계시록  /  어린양 중심 우주
              죽임당한 어린양 → 왕이 됨
              구속받은 자 → 생명 얻음 

      더 이상 교환 필요 없음 
      이미 완전한 교환이 이루어졌기 때문 

     핵심 구조 공식

    생명교환신학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죽음의 이동

    • 인간 → 죽어야 함

    • 대신 → 그리스도 죽음

     생명의 이동

    • 그리스도 → 생명 가짐

    • 인간 → 생명 받음

     즉 “죽음은 그에게, 생명은 우리에게” 

    4️헬라어 관점 (중요 포인트)

    성경은 “생명”을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 ψυχή (psuchē) → 육체적 생명 / 목숨

      ζωή (zōē) →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생명)

     생명 교환의 핵심은 단순히 “죽지 않음”이 아니라 
     ψυχή → ζωή로의 전환 

    신학적 핵심 세 가지

    대속 (Substitution)  :  “그가 나 대신”
    대표성 (Representation) : “그는 나를 대표”
    연합 (Union) : “나는 그와 연결됨” 
    한 줄 결론  /  

     생명교환신학 /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그리스도가 서신 사건”


    천하보다 귀한 생명 (마태복음 16:26)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생명 존엄에 대한 위대한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사람을 돈 주고 사고 팔 수 있었습니다. 
    율법을 어겼다고 사람을 돌로 쳐 죽일 수 있었습니다. 
    아내나 딸이 성범죄를 저지를 경우 가문의 명예를 어겼다고 가족들이 죽일 수 있었습니다. 
    당시는 이렇게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던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때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사실 오늘도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쉽게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돈 몇 푼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한 같은 곳에서는 이념적인 문제 때문에 사람이 공개 처형되는 일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인도나 이슬람권에서는 소위 ‘명예살인’이 공공연하게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여전히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 선언하신 주님의 말씀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목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시점입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의 말씀 곧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야 비로소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온 천하를 지으신 예수님께서 한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만 한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 말씀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만이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을 위해 희생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만 한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 설 때만 한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 때만 한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 절감하게 됩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면 여러 곳에서 한 생명을 정말 귀하게 여기셨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막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가셨을 때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살펴보니 군대귀신이라 불릴 정도로 귀신의 수가 많았습니다.

    마침 근처에 돼지 떼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군대귀신을 그 사람에게서 나오게 하시고 대신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 때 귀신이 들어간 돼지 떼가 갈릴리 바다로 뛰어들어 몰사했습니다. 
    그 때 죽은 돼지가 거의 이천 마리나 되었습니다.

    돼지 2천 마리의 가격은 대략 8억-13억 정도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돼지 이천 마리를 희생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한 생명이 그만큼 소중하기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왜 십자기를 지셔야만 했는지를 깨닫게 되면,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까지 하셔야 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관점에서 성경을 살펴보면, 두 가지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이 있고 천하가 있다는 것입니다.

    눅 12장을 보면 소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온통 재물을 모으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 해에도 농사가 풍년이 들어 거두어들인 곡식을 어떻게 보관할까를 고심합니다. 이미 창고에는 곡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창고를 더 크게 짓고 곡식을 거기에 가득 쌓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렇습니다. 생명이 있고 천하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고 돈이 있는 것이고, 생명이 있고 인기가 있는 것이고, 생명이 있고 권력이 있는 것이고, 생명이 있고 꿈도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설 때만 이 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관점에서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둘은, 생명을 위해 천하가 있다는 것입니다.


       창 1장을 보면 천지 창조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주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그 후 맨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인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창 1:28-29)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리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그렇습니다. 생명을 위해 천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위해 천하를 만드셨습니다. 생명은 천하를 돌보고 관리하고 사용하면서 번성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생명에게 주신 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관점에서 이 점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생명보다 귀한 생명


       성경을 보면 우리가 말하는 생명과 다른 또 다른 차원의 생명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우리가 암송하는 말씀 요 3:16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또 다른 생명인 영생을 주시려고 아들 예수를 보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영생이란 무엇일까요? 요 17:2-3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영생에 관해 두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는 영생은 예수님을 통해서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이 땅에 태어나면서 얻게 되는데 비해서 영생은 예수를 믿으면서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생이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가는데 누리는 생명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단순히 지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원어로 ‘기노스코’(Ginosko)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만남과 관계를 통해 서로를 전인격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부부가 부부생활을 통해 서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생이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알면서 누리게 되는 새생명을 말합니다.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예수님을 알면서 누리게 되는 새생명을 말합니다.


       요 4:13-14에서 영생을 누리는 사람의 구체적인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한 마디로 말하면 영생을 얻은 사람은 더 이상 영적인 갈증을 느끼지 않으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영생을 누리는 사람들은 그 심령 속에 샘물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계속해서 생수가 솟아납니다. 그래서 영적 갈증이 해소됩니다. 늘 만족하고 늘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다윗은 시 23:5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가 돈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가 이 땅에서 모든 것을 다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심령 속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가 영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빌 4:4에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리스도인이 세상적으로 늘 기뻐할 일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영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생은 단지 주님과 동행하면서 이 세상을 살 동안에 누리는 새생명이 아닙니다. 저 천국으로 이어집니다. 글자 그대로 ‘영생’(永生) 영원히 이어지는 생명입니다. 죽음 이후 저 천국에서 더욱 활짝 꽃피워지는 생명입니다. 이 세상을 살 동안에는 그 생명의 존재가 희미하지만 저 천국에 가면 완전하게 드러나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고통이 없고 다시는 슬픔이 없는 가운데 영원히 이어집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삶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한 생명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점을 깊이 깨닫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무엇보다 영생이 귀하다는 점을 깊이 깨닫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선 생명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요 10:1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 주신 영생을 누리되 풍성히 누리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허연경이라는 분이 쓴 [아! 생명이 있기에]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아! 생명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이며 아름다운 것인가?


    그 속에 생명이 있기에 소망이 있고 생명이 있기에 지금의 헐벗고 빛 바랜 모습이 결코 초라하지 않다. 나 비록 지금 연약하고 병든 몸이지만 내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에 결코 낙망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먼저 우리는 지금 우리 안에 영생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 이 영생이 우리 속에서 꿈틀거리며 역사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생있는 사람으로서 남다른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무디 선생은 한 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날 신문에서 D.L.Moody가 죽었다는 기사를 읽으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 말을 믿지 마시요.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좋은 곳에서 잘 살게 되었다는 것 뿐이니까요."


      그렇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영생 얻은 우리는 결코 죽음으로 우리의 생명이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죽음 이후 더 멋진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들은 마치 번데기가 고치 안에서 있다가 때가 되어 나방이 되어 저 하늘을 훨훨 나는 것처럼 죽음 이후 저 천국에서 참된 생명인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남다른 생명을 누리며 삽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 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생명의 소식을 전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행 26:29을 보면 우리가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바울이 지금 죄인으로 끌려와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를 변호하여 석방될 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서조차 바울은 생명의 소식 아름다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은 물론이고 지금 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리고 있는 영생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직 영생을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생명의 소식을 전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영적 갈증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 죽고 싶다고 절규하는 사람들 저들에게 이 생명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눅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재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주셨습니다. 한 부자가 한 평생을 세상재미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그 집 근처에 나사로라는 거지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영생을 얻지 못했지만 나사로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다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됐습니다.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됐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던 이 부자가 청을 하더랍니다. 눅 16:27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제발 아직 세상에 살고 있는 자기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해 달라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고 이 지옥에는 오지 말라고 전해 달라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고 저 천국에 가라고 전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런 안타까운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변에 세상 떠날 날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 세상 떠나기 전에 꼭 영생을 얻어야 한다는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아니 아직 살날이 많이 남은 것같은 사람들에게도 꼭 영생을 얻어야 한다는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이 귀합니다. 그러나 영생은 더 귀합니다. 우리 주변에 영생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우선 우리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대상자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온 교회가 함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대상자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2월 한 달 기도하며 찾고 또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우선 가족들 가운데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가족 가운데 아직 영생을 얻지 못한 사람을 먼저 선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친구나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 가운데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웃들 가운데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내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 3 사람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3월 3일 일제히 하나님께 그 이름들을 올려드리고자 합니다. 그 이름들을 품고 기도하고자 합니다. 모두가 함께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3월 17일(화) 마태복음 20:29-3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33절)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Lord," they answered, "we want our sight." 

    마태복음 20:32–34

    본문 (개역) :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매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따르니라.

    의미(핵심 구조)

    이 장면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믿음의 질문 구조를 보여 줍니다.

    단계 내용 의미
    1 맹인들의 외침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2 예수님의 질문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3 믿음의 고백              “우리 눈 뜨기를 원합니다”
    4 예수님의 행위                          눈을 만지심
    5 결과                   즉시 봄 + 예수를 따름

    즉, 간구 → 질문 → 믿음의 고백 → 치유 → 제자됨이라는 흐름입니다.  

    신학적 포인트

    1. 예수님의 질문
    이미 필요를 아시지만 질문하십니다.
    → 믿음을 입으로 표현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2. 눈 뜨기를 원합니다
    단순한 치료 요청이 아니라
    성경에서 영적 깨달음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3. 치유 후 결과
    단순히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를 따르니라” → 제자도의 시작입니다.

    흥미로운 연결

    이 장면은 영적 눈을 뜨는 성경 구조와도 연결됩니다. 

    이사야서 35:5 →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마가복음 10:51 → 동일 질문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요한복음 9장 → 날 때부터 맹인 치유 (영적 빛 주제)

    “눈 뜨다” 헬라어 단어 분석

    (ἀναβλέπω / anablepō)

    요소      헬라어 의미
    접두어       ἀνά (ana)                   위로, 다시
    어근   βλέπω (blepō)                         보다
    합성 의미       ἀναβλέπω          다시 보게 되다 / 시력을 회복하다

    직역 의미
     
    “다시 위를 보게 되다”

    따라서 이 단어는 단순히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시력 회복,  영적 깨달음,  하나님을 향해 다시 보는 것까지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대표 사용 구절

    • 마태복음 20:33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Lord," they answered, "we want our sight." 

    • 마가복음 10: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What do you want me to do for you?" Jesus asked him. The blind man said, "Rabbi, I want to see."

    • 누가복음 18: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What do you want me to do for you?" "Lord, I want to see," he replied. 

    “주여 우리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여기서 보기를 원한다 = ἀναβλέψωμεν  
    즉 의미는 “다시 보게 해 주십시오”

    마태·마가 두 맹인 사건 비교

    요소 마태복음 20:29–34         마가복음 10:46–52
    맹인 수 두 명                    한 명
    이름 없음                   바디매오
    장소 여리고                 여리고
    질문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동일
    대답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보게 하소서”
    결과 두 사람 치유            바디매오 치유
    강조 집단 치유               개인 믿음

    중요한 포인트

    마태복음
    두 증인 구조

    마가복음
    믿음의 개인 이야기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것을

    역사적 사건 하나를 다른 관점으로 기록한 것으로 봅니다.  

    “눈 뜨다”의 성경적 의미

    성경에서 눈 뜸 = 구원/계시

    대표 예

    구절        의미
         창 3:7           죄의 눈이 열림
    열왕기하 6:17          영적 세계 보게 됨
    시편 119:18             말씀 깨달음
    누가 24:31          부활 예수 인식
    사도행전 9:18               바울 회심

    그래서 복음서의 맹인 치유는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영적 눈을 여는 구원 사건” 입니다.  


    마가복음 10: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의 질문 10가지 패턴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약 307개의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10가지 패턴입니다.

    질문 본문           의미
         너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5         신앙 고백
               무엇을 원하느냐    막 10:51       믿음의 요청
              왜 두려워하느냐     마 8:26         믿음 시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눅 8:25             신뢰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6             의지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    마 14:31          믿음 부족
         어찌하여 나를 찾느냐     눅 2:49          하나님 뜻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        사랑의 관계
       너희가 이해하지 못하느냐    막 8:17          영적 무지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막 10:51           믿음 고백

    특징

    예수님의 질문은  1. 정보 질문이 아니라
                                2. 믿음을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흥미로운 구조 / 맹인 치유 이야기의 핵심 구조 

    부르짖음 -
    예수의 질문 - 믿음의 고백 - 눈 뜸 - 따름

    마가복음 10장 바디매오 

    부르짖음 - 예수의 질문 - 믿음의 고백 - 눈 뜸 - 따름
    마태복음 20:29-34
    부르짖음 - 예수의 질문 - 믿음의 고백 - 눈 뜸 - 따름

    표면적으로 보면 이것은 예수의 이상한 질문처럼 보입니다.
    여기 두 눈먼 사람이 예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예수는 멈추시고 그들에게 무엇을 해 달라고 요청하십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눈이 멀어서 볼 수 있기를 원하기 때문에 매우 명백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 이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물어볼 수 있는 질문입니다.
    흥미로운 질문인데,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데 있어서요.
    예수가 당신에게 이 질문을 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요청하겠습니까?
    물질적인 것입니까? 영적인 것입니까?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요청하겠습니까? 일시적인 것입니까? 영원한 것입니까? 당신은 아마 이 이야기를 알고 있겠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물으신 질문과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솔로몬이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는지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살펴보면서 마무리해 보겠습니다.

    열왕기상 3:5-14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시어 이르시되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기를 원하는지 물어보세요. .”
    (6) 그러자 솔로몬이 말했습니다… '”  당신의 종에게 당신의 백성을 판단하여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이해심 있는 마음을 주십시오.
    누가 당신의 이 큰 백성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10) 솔로몬이 이 일을 구한 것은 주님께 기쁘신 일이더라.  
    (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고 장수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를 구하지 아니하며 원수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공의를 깨닫는 분별력을 구하였으니
    (12) 보라 내가 네 말대로 행하노라 보라 내가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었으니 네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고 네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13)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존귀도 네게 주었으니 네 평생에 왕들 가운데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예수님이 하신 질문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는 복음서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여러 장면에서 반복되며,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믿음을 드러내게 하는 신학적 질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다음 장면에서 등장합니다. 

    맹인 치유 사건 / 마가복음 10:51
    바디메오 &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묻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대답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 / 마가복음 10:36 

    예수님이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들은 영광의 자리를 구합니다.

     이 질문의 신학적 의미 4가지 

    1. 믿음을 말하게 하는 질문

    예수님은 이미 사람의 필요를 아시지만,
    입으로 믿음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맹인 → “보기를 원합니다.” 
      믿음이 말로 드러남

    2. 마음의 욕망을 드러내는 질문

    같은 질문이지만 사람마다 다른 대답을 합니다.

    사람 대답 의미
         맹인     보기를 원함      구원과 회복
    야고보·요한    높은 자리    인간의 욕망

    질문은 같지만 믿음의 수준이 드러납니다.

    3.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 구조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주 질문하십니다.

    God →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Jesus Christ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질문은 관계를 여는 방식입니다.  

    4. 기도의 본질을 보여주는 질문

    이 질문은 사실 기도의 핵심 질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무엇을 정말 원하는가?”

    이 질문은 
    욕망을 드러내고 
    믿음을 드러내고 
    하나님과 관계를 드러냅니다.  

    정리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1. 믿음을 말하게 하는 질문 
      2. 마음의 욕망을 드러내는 질문 
      3.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질문 
      4 . 기도의 본질 질문

    예수님의 대표적인 “믿음 테스트 질문” 입니다. 



    복음서에 실제 등장하는 “예수님의 질문 40개 전체 지도”

    1단계 : “부르심과 방향 전환” 질문 (정체성 탐색)

      인간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시작 질문 
       1. 무엇을 찾느냐? (요 1:38)
       2. 나를 따르려느냐? (요 1:43 흐름)
       3. 네가 이것을 믿느냐?
       4.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
       5. 왜 두려워하느냐?

    핵심  /  → “너는 지금 무엇을 향해 살고 있느냐?”

    2단계 : “믿음 vs 불신” 드러내는 질문

    인간 내면 상태 폭로 

        1.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2.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3. 왜 마음에 의심하느냐?
        4. 이것을 믿을 수 있느냐?
        5.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핵심  /  → 믿음은 정보가 아니라 ‘신뢰 선택’

    3단계 : “정체성 폭로” 질문 (가장 핵심)

     복음서 중심 질문
     
        1.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2.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3.  너희도 떠나가려느냐?
        4.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5.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을 믿지 아니하느냐? 

    핵심  / 모든 질문은 결국 “예수는 누구인가?”로 수렴

    4단계 : “긍휼과 치유” 질문

    인간의 ‘원함’을 드러냄

        1.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2. 네가 낫고자 하느냐?
        3.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느냐?
        4. 왜 울고 있느냐?
        5. 누가 너를 정죄하였느냐? 

    핵심  /  → 하나님은 먼저 “원함”을 묻는다

    5단계 : “제자도와 헌신” 질문

     따름의 대가

        1.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주라 부르면서 따르지 않느냐?
        2.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지 아니하느냐?
        3.  너희가 나를 사랑하느냐?
        4.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 반복 구조)
        5.  네가 끝까지 따르겠느냐?

      핵심   /   믿음 → 사랑 → 순종으로 발전

    6단계 : “영적 무지 폭로” 질문  

     종교적 착각 깨뜨림

        1. 
    너희가 율법을 읽지 못하였느냐?
        2.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느냐?
        3. 너희가 아직도 알지 못하느냐?
        4. 너희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느냐?
        5. 안식일의 주인이 누구냐? 

     핵심  /  →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닫힌 마음’

    7단계 : “심판과 위선 폭로” 질문

     바리새인/종교 권력 향함

        1. 
    어찌하여 외식하느냐?
        2. 무엇이 더 크냐?
        3. 다윗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느냐?
        4. 너희가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5. 왜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느냐?

     핵심  /  → 종교는 진리를 가릴 수도 있다

    8단계 : “십자가로 향하는 질문”

     고난 직전

        1. 
    이 잔을 마셔야 하겠느냐?
        2. 너희가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3. 내가 이 길을 가지 말아야 하느냐?
        4. 어찌하여 나를 버렸느냐?
        5. 네가 이것을 깨닫느냐?

     핵심  /  → 질문 → 고난 → 구원으로 연결

    한 줄 요약 구조

     예수님의 질문 흐름  /  찾음 → 믿음 → 정체성 → 치유 → 제자도 → 깨달음 → 심판 → 십자가  

    “예수님의 질문 → 십자가 → 요한계시록” 질문 타임라인

    이제 이것을 성경 전체로 확장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체 성경 질문 타임라인

    🟡 1단계: 인간의 질문 (구약)
    👉 하나님께 던지는 질문
    • “어찌하여?” (하박국)
    • “어느 때까지?” (시편)
    • “왜 침묵하십니까?”
    ✔ 특징 / →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음 
    🔵 2단계: 하나님의 질문 (복음서)
    👉 예수님의 질문
    •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무엇을 원하느냐?”
    • “믿느냐?”
    ✔ 특징 / → 하나님이 인간에게 되묻는다 
    🔴 3단계: 침묵의 질문 (십자가)
    👉 가장 깊은 질문
    •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특징 / → 질문이 ‘응답 없는 침묵’으로 들어감               → 그러나 여기서 구원이 완성됨 
    🟣 4단계: 하늘의 질문 (요한계시록)
    👉 종말의 질문
    • 누가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가?
    • 누가 능히 서리요?
    • 언제까지 심판하지 아니하시나이까?
    ✔ 특징  /  → 역사 전체를 향한 질문 
    🟢 5단계: 최종 응답 (계시록 결론)
    👉 질문이 사라지는 지점
    • 어린양이 답이 됨
    • 하나님이 직접 통치
    • 더 이상 질문 없음
    ✔ 핵심  /  → 질문 → 계시 → 어린양 → 완전한 응답 
    🔥 전체 구조 한눈에
    구약: 인간 → 하나님께 질문

    복음서: 하나님(예수) → 인간에게 질문

    십자가: 질문이 침묵으로 들어감

    요한계시록: 우주적 질문 폭발

    새 하늘과 새 땅: 질문 종료 (완전한 응답)
    💡 핵심 통찰 (가장 중요)
    👉 성경에서 질문의 방향
    1. 인간이 하나님께 묻는다
    2. 하나님이 인간에게 되묻는다
    3. 하나님이 침묵하신다 (십자가)
    4. 결국 하나님 자신이 답이 된다 
    🔑 결론 한 문장
    👉
    “성경의 모든 질문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라는 답으로 수렴된다.”

    예수님의 질문 40개 — 헬라어 핵심 의미 분석

    예수님의 질문은 단순한 정보 질문이 아니라
    믿음· 정체성· 구원 결단을 드러내는 “영적 진단 질문”입니다.

     핵심 질문 10개 (헬라어 중심 분석)

    1.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헬라어 : Ὑμεῖς δὲ τίνα με λέγετε εἶναι
    • 핵심 :
      • Ὑμεῖς → “너희는” (강조, 개인적 결단 요구)
      • λέγετε → 계속 말하는 현재형 (삶 전체의 고백)
        👉 의미 : “너의 지속적인 신앙 고백은 무엇인가?”
    2.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 헬라어 : τί θέλεις ποιήσω σοι
    • θέλεις (원하다) → 의지, 욕망
      👉 의미 :
      “너의 진짜 욕망은 무엇인가?” 
    3. “왜 두려워하느냐”
    • 헬라어 : τί δειλοί ἐστε
    • δειλοί → 비겁한, 믿음 없는 상태
      👉 의미 :
      “두려움의 근원은 믿음 결핍이다” 
    4.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
    • 헬라어 : εἰς τί ἐδίστασας
    • ἐδίστασας → 두 마음, 분열
      👉 의미 :
      “믿음은 정보가 아니라 방향이다” 
    5.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 헬라어 : ποῦ ἡ πίστις ὑμῶν
      👉 의미 :
      “믿음은 존재하지만 사용되지 않을 수 있다” 
    6. “네가 낫고자 하느냐”
    • 헬라어 : θέλεις ὑγιὴς γενέσθαι
      👉 의미 :
      “변화에 대한 의지가 있는가?” 
    7. “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
    • 헬라어 : τί με λέγεις ἀγαθόν
      👉 의미 :
      “너는 내가 하나님임을 인정하는가?” 
    8. “어찌하여 나를 버렸나이까” (십자가)
    • 헬라어 : ἵνα τί με ἐγκατέλιπες
      👉 의미 :
      하박국·시편 질문의 절정 
    9. “너희도 가려느냐”
    • 헬라어 : μὴ καὶ ὑμεῖς θέλετε ὑπάγειν
      👉 의미:
      “신앙은 선택의 연속이다” 
    10.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헬라어 : ἀγαπᾷς με / φιλεῖς με
      👉 의미 :
    • 사랑의 단계 비교 (아가페 vs 필레오)
      👉 “헌신 vs 감정” 
    📊 요약 패턴 (10가지 구조)
    1. 정체성 질문
    2. 욕망 질문
    3. 믿음 점검
    4. 두려움 폭로
    5. 의심 해체
    6. 치유 의지
    7. 신성 인식
    8. 고난 질문
    9. 선택 요구
    10. 사랑 확인 
    2️⃣ 복음서 “질문 스토리 지도” (흐름 구조)
    🗺️ 전체 흐름
    ① 초기: 부르심 단계
    • “무엇을 찾느냐”
      👉 방향 설정
    ② 중기: 기적과 훈련
    • “왜 두려워하느냐”
    • “믿음이 어디 있느냐”
      👉 믿음 형성
    ③ 전환점 (가이사랴 빌립보)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정체성 고백
    ④ 후반: 십자가로 이동
    • “잔을 마실 수 있느냐”
      👉 고난 참여
    ⑤ 십자가
    •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 인간 질문의 절정
    ⑥ 부활 이후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사명 회복 
    3️⃣ 하박국 ↔ 십자가 ↔ 요한계시록 (평행 10개)
    이 부분이 핵심 구조입니다.
    🔥 질문의 성경 전체 흐름
    하박국 십자가 요한계시록 의미
    언제까지 엘리 엘리 순교자 질문 고통
    어찌하여 버리셨나이까 심판 요청 정의
    왜 침묵 하나님 침묵 하늘 침묵 신비
    악 번성 십자가 불의 바벨론
    의인 고통 예수 고난 성도 핍박
    응답 없음 침묵 30분 침묵 지연
    믿음 요구 십자가 믿음 끝까지 인내 신앙
    심판 약속 부활 अंतिम 심판 해결
    영광 없음 십자가 어린양 영광 반전
    질문 → 찬양 “다 이루었다” 할렐루야 완성 
    4️⃣ 전체 통합 구조 (한 줄 핵심)
    👉 하박국의 질문 → 예수님의 질문 → 십자가의 질문 → 요한계시록의 질문
    =
    👉 “인간의 질문” → “하나님의 응답” → “최종 완성” 
    🔚 결론 (핵심 통찰)
    예수님의 질문 40개는 흩어진 것이 아니라:
    ✔ 하박국에서 시작된 질문
    ✔ 십자가에서 폭발
    ✔ 요한계시록에서 해결되는 하나의 흐름입니다. 
    ✨ 한 문장 요약
    👉
    “성경은 답의 책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 믿음을 완성시키는 책이다.”

    1️⃣ 예수님의 질문 40개 전체 리스트 (헬라어 + 위치 + 의미)
    아래는 복음서 전반에서 대표적으로 선별한 핵심 40개 질문입니다.
    번호 질문 (한국어) 헬라어 핵심 위치       신학적 의미
    1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τί θέλεις 마 20:32           믿음의 방향
    2 네가 믿느냐 πιστεύεις 요 11:26           신앙 고백 요구
    3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τίνα με λέγετε 마 16:15           정체성 계시
    4 왜 두려워하느냐 τί δειλοί ἐστε 마 8:26          믿음 vs 두려움
    5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 εἰς τί ἐδίστασας 마 14:31            믿음의 흔들림
    6 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 τί με λέγεις ἀγαθόν 막 10:18            하나님 정체성
    7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 τί γέγραπται 눅 10:26              말씀 중심
    8 어떻게 읽느냐 πῶς ἀναγινώσκεις 눅 10:26             해석 문제
    9 너희에게 떡이 몇 개냐 πόσους ἄρτους 막 6:38           공급 vs 부족
    10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οὔπω νοεῖτε 막 8:17              영적 무지
    11 왜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ἐνθυμεῖσθε πονηρά 마 9:4             내면 폭로
    12 너희가 어찌하여 걱정하느냐 τί μεριμνᾶτε 마 6:28             염려 문제
    13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τίς ἥψατό μου 막 5:30           믿음의 접촉
    14 왜 울고 있느냐 τί κλαίεις 요 20:13            부활 인식
    15 누구를 찾느냐 τίνα ζητεῖς 요 20:15             존재 탐색
    16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ἀγαπᾷς με 요 21:15 사랑의 본질
    17 너희가 잠을 자느냐 καθεύδετε 막 14:37 영적 무감각
    18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였느냐 προσεύχεσθε 눅 22:46 깨어 있음
    19 이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πίω τὸ ποτήριον 요 18:11 십자가 순종
    20 어찌하여 나를 버렸나이까 ἱνατί με ἐγκατέλιπες 마 27:46 십자가 절규
    21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 ποῦ ἡ πίστις 눅 8:25 믿음 점검
    22 너희가 무엇을 찾느냐 τί ζητεῖτε 요 1:38 제자 시작
    23 사람이 온 것은 무엇을 위함이냐 τί γὰρ ὠφελεῖται 막 8:36 구원 가치
    24 누가 더 크냐 τίς μείζων 눅 22:24 권력 vs 겸손
    25 너희도 가려느냐 μὴ καὶ ὑμεῖς θέλετε 요 6:67 선택의 순간
    26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πειράζετε 마 22:18 위선 폭로
    27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 τίνος υἱός 마 22:42 메시아 이해
    28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τί με δέρεις 요 18:23 불의 드러남
    29 왜 슬퍼하느냐 τί σκυθρωποί 눅 24:17 부활 무지
    30 무슨 말을 서로 하느냐 τί λόγοι 눅 24:17 내면 상태
    31 무엇을 논쟁하느냐 τί συζητεῖτε 막 9:33 제자 갈등
    32 왜 너희는 나를 주라 부르면서 τί με καλεῖτε κύριε 눅 6:46 순종 문제
    33 누가 내 어머니냐 τίς μήτηρ 마 12:48 새로운 가족
    34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누구냐 ἀναμάρτητος 요 8:7 심판 vs 은혜
    35 왜 나를 핍박하느냐 τί με διώκεις 행 9:4 주와 교회 동일
    36 네 이름이 무엇이냐 τί ὄνομά σοι 막 5:9 존재 정체
    37 무엇이 더 쉽냐 τί εὐκοπώτερον 마 9:5 권위 선언
    38 누가 너를 정죄하였느냐 τίς σε κατέκρινεν 요 8:10 은혜 선언
    39 너희가 이해하느냐 γινώσκετε 요 13:12 깨달음
    40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아느냐 γινώσκετε 요 13:12 섬김의 의미 
    2️⃣ 예수님의 질문 구조 “한 장 도식”
    아래는 전체 흐름을 한 장 구조로 단순화한 것입니다.
    [1] 탐색 질문 (Seek)
    “무엇을 찾느냐?”

    [2] 드러냄 질문 (Reveal)
    “왜 두려워하느냐?”
    “왜 의심하느냐?”

    [3] 믿음 질문 (Faith)
    “네가 믿느냐?”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

    [4] 정체성 질문 (Identity)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5] 선택 질문 (Decision)
    “너희도 떠나려느냐?”

    [6] 사랑 질문 (Love)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7] 십자가 질문 (Cross)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8] 부활 질문 (Resurrection)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9] 사명 질문 (Mission)
    “내 양을 먹이라”

    핵심 구조

    탐색 → 폭로 → 믿음 → 정체성 → 선택 → 사랑 → 십자가 → 부활 → 사명

     “예수님의 질문 vs 인간의 질문” 비교

    구분      예수님의 질문      인간의 질문
    방향    하나님 → 인간       인간 → 하나님
    목적            변화            정보
    초점     존재 (Who)       문제 (Why)
    특징  질문 자체가 답       답을 요구
    방식  마음을 드러냄     상황을 설명
    결과     회개 / 결단      이해 / 불평


    대표 대비 구조  

    인간의 질문

     
      “어찌하여 악을 보게 하시나이까?”
       “왜 침묵하십니까?”  

    문제 중심 


    예수님의 질문 (복음서)

      
    “왜 두려워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존재 중심 

    핵심 통찰  

    인간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고 
    예수님은 “너는 지금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결론 (한 줄 요약) 

    인간의 질문은 상황을 바꾸려 하고
    예수님의 질문은 사람을 바꾼다.

    복음서 40개 질문 → 사건 타임라인 지도

    전체 흐름 (4단계 구조) / [1] 부르심 → [2] 믿음 시험 → [3] 정체 계시 → [4] 십자가 

    1. 부르심 (Calling)
    • “무엇을 찾느냐?” (요 1:38)
    • “나를 따르라” 맥락 질문들
    👉 핵심 : 
    •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는 질문
    • 신앙의 출발점
    📌 헬라어 포인트 /  ζητέω (seek) = 단순 탐색이 아니라 존재적 갈망

    2. 믿음 시험 (Testing Faith)

    대표 질문 :
    •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 (마 14:31)
    • “너희가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막 4:40)
    •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막 10:51)
    👉 핵심 :
    • 문제 해결보다 믿음 상태 진단
    📌 특징
    • 질문 → 기적 이전에 항상 등장
    3. 정체 계시 (Revelation of Identity)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5)
    • “다윗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느냐?”
    👉 핵심 :
    • 예수님의 정체 = 질문으로 드러남
    📌 구조
    사람들의 의견 → 제자의 고백 → 참된 계시 

    4. 십자가 (Cross Climax)
    •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너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십자가에서 완성
    👉 핵심 :
    • 모든 질문이 십자가에서 답으로 변함

    🔥 핵심 통찰
    👉 예수님의 질문은
    정보 수집이 아니라 “존재 폭로 장치” 

    ② 🔍 헬라어 단어 뉘앙스 심층 비교
    1️⃣ ἀγαπάω vs φιλέω (요 21장)
    단어  의미 특징
    ἀγαπάω 의지적 사랑 희생, 결단
    φιλέω 감정적 사랑 친밀, 애정 

    📌 예수님 vs 베드로 대화 구조
    예수 :  ἀγαπᾷς με? (희생적 사랑)
    베드로 :  φιλῶ σε (인간적 사랑)
    👉 세 번 반복 구조 

    신학적 의미
    • 예수님 기준 ↓
    • 베드로 상태 ↑
    👉 결국 :
    “사랑의 수준이 아니라 방향”을 보심

    2️⃣ βλέπω vs ἀναβλέπω (눈 뜨다)
    단어 의미
    βλέπω         단순히 보다
    ἀναβλέπω       다시 보다 / 회복
    👉 맹인 사건 핵심 :
    • 육체적 치유 + 영적 깨달음
    3️⃣ πιστεύω (믿다)
    👉 단순 동의가 아님
     
        맡기다

    • 의탁하다
    • 자신을 걸다
    ③ 🔥 하박국 ↔ 십자가 ↔ 요한계시록 평행 구조 (10개)
    📜 전체 구조
    하박국 (질문)
    → 십자가 (응답)
    → 요한계시록 (완성)

    1️⃣ “어찌하여 악을 보게 하시나이까”
    • 하박국: 악의 문제
    • 십자가: 하나님이 직접 악을 짊어짐
    • 계시록: 악 완전 심판

    2️⃣ “어찌하여 잠잠하시나이까”
    • 하박국: 침묵
    • 십자가: 하나님의 침묵
    • 계시록: 30분 침묵 (계 8:1)

    3️⃣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 하박국: 선언
    • 십자가: 성취
    • 계시록: 끝까지 견딤

    4️⃣ 바벨론 심판
    • 하박국: 악한 제국
    • 십자가: 세상 권세 승리
    • 계시록: 큰 바벨론 멸망

    5️⃣ 하나님 나타나심 (신현)
    • 하박국 3장
    • 십자가 = 역설적 신현
    • 계시록 = 재림

    6️⃣ 의인의 고통
    • 하박국 질문
    • 십자가 극치
    • 계시록 순교자

    7️⃣ 심판 지연
    • 하박국: 왜 늦는가
    • 십자가: 때가 참
    • 계시록: 마지막 때

    8️⃣ 땅이 잠잠
    • 합 2:20
    • 십자가 순간
    • 계 8:1

    9️⃣ 믿음 vs 두려움
    • 하박국: 떨림 속 믿음
    • 십자가: 순종
    • 계시록: 끝까지 인내

    🔟 기쁨의 결론
     하박국 : “나는 여호와로 즐거워하리로다”
     십자가 : 부활   
     계시록 : 어린양 찬양 

    전체 통합 구조 (핵심 한 줄)

    예수님의 질문 → 인간의 믿음 드러남
    → 십자가 → 하나님의 답
    → 요한계시록 → 최종 완성  

    결론  /  성경은 “설명”이 아니라  질문 → 십자가 → 완성의 구조


    두 맹인 (마태복음 20:29–34)

     예수님의 질문 :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들의 대답 :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핵심 특징

    •  자기 상태를 정확히 앎 → “우리는 보지 못한다”

    •  필요 중심 → 치유 (생존과 회복)

    •  믿음 고백 → “다윗의 자손이여”

    •  겸손 → 길가에서 부르짖음

    결과 /  → 눈이 열림 + 예수를 따름 

    야고보와 요한 (마태복음 20:20–28)

     동일한 질문 :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야고보와 요한의 대답 :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우편,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소서”

    핵심 특징

    • 자기 상태를 모름 → 영적 맹인 상태

    • 욕망 중심 → 권력, 자리

    • 오해된 메시아 이해 → 정치적 왕국 기대

    • 어머니를 통한 요청 → 간접적 접근

    결과  /  → 예수님의 교정 :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 십자가의 길(고난)을 가르치심 

    핵심 대비 (한눈에 구조)
    구분 두 맹인 야고보·요한
    상태 육체적 맹인 영적 맹인
    요청 눈 뜨기 높은 자리
    방향 필요 욕망
    태도 겸손 야망
    인식 예수를 메시아로 앎 메시아를 오해
    결과 치유 + 따름 책망 + 교정  

    가장 중요한 신학적 역전

     보지 못하는 자가 본다
     본다고 생각하는 자가 보지 못한다  
     이 구조는 마태복음 전체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의 진짜 목적

    예수님의 질문은 정보 확인이 아니라 “너의 마음을 드러내라”는 초대입니다.

    • 맹인 → 믿음이 드러남

    • 제자들 → 욕망이 드러남

    십자가와 연결되는 결정적 차이
    • 맹인 :  “보게 해 주세요” → 은혜를 구함

    • 야고보· 요한 :  “높여 주세요” → 영광을 먼저 구함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이어서 십자가(고난의 잔)을 말씀하십니다. 

    한 문장 핵심  / 
    맹인은 “은혜”를 구했고,  제자들은 “영광”을 구했다. 


    3월 16일(월) 마태복음 16:13-2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절)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But what about you?" he asked. "Who do you say I am?

    (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시매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사람들은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14) 그들이 이르되 어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한 사람이라 하느니라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17)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도다 혈육이 이것을 네게 알게 한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에는 실제로 두 가지 질문이 있지만 첫 번째 질문은 실제로 두 번째 질문을 설정하는 데 불과합니다. 
    우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일반적인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인자를 누구라고 합니까?' 
    그 당시 일반 유대인의 마음속에는 다양한 답변이 맴돌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세례 요한이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들은 엘리야나 예레미야 또는 선지자 중 한 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사회에 같은 질문을 한다면 여러분도 다양한 답변을 얻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교사나 지도자로만 볼 뿐 그 이상은 보지 않을 것입니다. 
    무슬림과 같은 어떤 사람들은 그를 선지자로 볼 뿐 신의 아들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종파에서는 그를 하위 '신'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떤 무신론자들은 그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다양한 답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핵심 질문은 '다른 사람들은 그가 누구라고 합니까?'가 아니라 당신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입니다. 
    모든 인류는 언젠가 주님 앞에 서야 할 것이고, 질문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가 아니라, 당신은 무엇을 믿었는가가 될 것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정확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았지만, 또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진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만 계시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이 질문에 절대적으로 확신을 가지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기도하고 하나님께 계속 눈을 뜨게 하시고 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진리를 당신의 영혼에 계시해 달라고 요청하세요!

    베드로의 고백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고백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 고백입니다.
    두번째 고백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 고백입니다.

    신앙고백을 통하여 베드로의 믿음을 확인하셨고 축복하셨습니다.
    사랑고백을 통하여 베드로의 믿음에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여기서 각 표현을 조금 살펴보면 

    그리스도
     
    – 헬라어로 Χριστός (Christos),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와 동일한 개념입니다. 
    즉, 구원과 구속의 사명을 가진 분임을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임을 강조합니다. 

    아들
     
    –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단순한 인간적 아들이 아니라, 신성과 사명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 한 문장에는 예수님의 신분, 사명,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두 담겨 있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압축한 고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과 우리말

    헬라어 원문(마태복음 16:16) :  Σίμων Πέτρος ἀπεκρίθη· Σὺ εἶ ὁ Χριστός, 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 τὸν ζῶντα.

    한국어 번역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핵심 단어 분석

    헬라어 발음 한국어 의미/뉘앙스 신학적 뉘앙스
    Χριστός Khristos 그리스도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아. 히브리어 ‘משיח(마시아흐)’와 대응 메시아로서의 권위와 구속적 사명 강조
    Υἱός Hyios 아들 혈통적 의미보다는 관계적·위치적 의미. “~의 아들”로서 신적 관계 표현 하나님의 특별한 아들, 신적 권위와 친밀함 강조
    Θεοῦ Theou 하나님 소유격, “하나님의” 하나님의 소유와 권위를 드러냄
    ζῶντα zōnta 살아계신 현재 진행형 강조. 죽지 않고 살아있는 존재 신적 생명과 현실적 존재 강조,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님

    단어 뉘앙스 시각화 (개념 지도)

    Χριστός
    (기름 부음 받은 자 / 메시아)


    Υἱὸς τοῦ Θεοῦ
    (하나님의 아들 / 신적 권위)


    ζῶντα
    (살아계신 / 현재적 생명)

    이란 / 지하교회 성도 대략 100만명
    하이크 호세피안목사의 죽음의 결과
    사도행전 2: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가바도기아, 본도아시아,
    Parthians, Medes and Elamites; residents of Mesopotamia, Judea and Cappadocia, Pontus and Asia.

    *엘람인 - 현재 이란인
    • Χριστός → 예수의 구속자·메시아적 역할 강조

    • Υἱὸς τοῦ Θεοῦ →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적 권위와 친밀한 관계

    • ζῶντα → 역사적 사건이 아닌, 현재적·영적 현실 강조


    3월 14일(토) 하박국 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어찌하여 간악을 보게하시나이까?(3절)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Why do you make me look at injustice? Why do you tolerate wrong? Destruction and violence are before me; there is strife, and conflict abounds. 

    한글개역성경 /      간악(奸惡) - 패역(悖逆) - 겁탈(劫奪) - 강포(强暴) - 변론(辯論) - 분쟁(分爭)
    개역한문 / 

    개역개정 /             죄악(罪惡) - 패역(悖逆) - 겁탈(劫奪) - 강포(强暴) - 변론(辯論) - 분쟁(分爭)

    바른성경 /             사악(邪惡) - 불의(不義)
     - 파괴(破壞) - 폭력(暴力) - 소송(訴訟)- 분쟁(分爭)
    바른성경한문 /  

    표준새번역 /         악                 불의             약탈             폭력             다툼            시비
    새번역 
        
    한글 KJV /          죄악              고통              약탈              폭력              싸움           논쟁 

    한글흠정역 /       불법               학대             노략              폭력              불화           다툼 

    우리말성경 /       불의                죄악              파괴             폭력               갈등          싸움  

    현대어성경 /         악            거짓된          고통스러운 일    탄압              폭력          싸움     불화 

    현대인의 성경 /  불의               악                 파괴              폭력             다툼           분쟁

    공동번역 /         애매한 일    공생살이          약탈              억압               시비           말다툼 

    카토릭성경 /      불의             재난               억압               폭력              시비           싸움 
     
    인공 위성을 타고 먼 우주에서 지구를 본다면 경이롭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황이 그리 밝지만은 않습니다. 
    혼란의 증가, 테러리즘의 확산, 늘어나는 비극, 전례 없는 트라우마, 심화되는 오염, 점점 더 어려워지는 시련, 그리고 전무후무한 긴장감이 지구인들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불꽃을 튀기며 타오르는 시한폭탄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왜 이렇게 혼란스러운가? 
    왜 불의가 만연한가? 
    왜 악한 자들이 번성하는가? 
    왜 의로운 자들이 고통받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하시지 않으시는가? 
    왜 하나님은 이 엉망진창인 세상을 정리하지 않으시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방문하시기 수 세기 전, 한 고대 예언자는 세상의 폭력과 사악함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어찌하여 주께서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바라보게 하시나이까 … 어찌하여 거짓된 자가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나이까” (하박국 1:3, 13, 개역개정).

    이 예언자는 인류를 끊임없이 괴롭혀 온 ‘어찌하여’라는 질문을 던졌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응답은 우주의 창조주께서 직접 주신 말씀으로, 하박국이라는 책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박국서는 독특한 책입니다. 
    다른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선포한 것과 달리, 하박국은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나누며 세상의 불의에 대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대부분의 구약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했다면, 하박국은 오히려 악이 판치는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개입을 간구했습니다. 일반적인 예언서가 불의를 고발하는 형식을 띠는 것과 달리, 이 작은 책은 혼란스러운 예언자와 창조주 사이의 깊이 있는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J. Ronald Blue, “Habakkuk,” in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An Exposition of the Scriptures, ed. J. F. Walvoord and R. B. Zuck, vol. 1 (Wheaton, IL: Victor Books, 1985), 1505

    “어찌하여 간악을 보게 하시나이까?”

    하박국 1장 3절에 나오는 선지자 하박국의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 안에서의 고통스러운 탄식을 담고 있습니다.

    구절의 문맥

    하박국 1:2–3의 흐름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어느 때까지리이까?”
    →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 악이 계속됨 
    “어찌하여 간악을 보게 하시나이까?” → 왜 이런 악을 보게 하시는가 

    즉, 하박국은 세상의 악을 보면서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핵심 상황  /  폭력  -  불의  -  율법의 무력화  -  악인의 승리  -  그래서 그는 묻습니다.  
    “하나님, 왜 이런 악을 제가 보게 하십니까?” 


         간악(아벤. ’âven) אָוֶן  - iniquity / 악, 불행, 부정, 공허, 거짓  
         패역(아나프. ’ânaph) אָנַף - grievance / 성내다, 화내다
         겁탈(쇼드. shôd) שֹׁד - spoiling / 황폐, 폭력, 멸망, 탈취       
         강포(하마스. châmâç) חָמָס - violence / 포학, 억압, 학대      
         변론(립. rîyb) רִיב - strife / 대적, 논쟁, 다툼, 원한       
         분쟁(마돈. mâdôwn) מָדוֹן - contentions / 경쟁, 싸움

    히브리어 의미  /  여기서 중요한 단어 두 개가 있습니다.

    • 간악 (אָוֶן / aven)  → 죄악, 불의, 도덕적 타락

    • 보게 하시나이까?  → 단순히 “본다”가 아니라 “계속 목격하게 하다 / 견디게 하다”라는 뉘앙스

    즉 질문의 의미는 “왜 이 부패한 현실을 계속 보게 두십니까?”  입니다. 

    신학적 의미 

    이 질문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믿음의 질문 유형입니다.

    ① 악의 문제 (The Problem of Evil)  

    의로운 사람이 묻는 질문 / 왜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시는가?

    ② 하나님의 침묵(God's Silence)

    기도했는데 응답이 늦어 보일 때 /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③ 믿음의 탄식(The Groaning of Faith)

    이 질문은 불신앙이 아니라 믿음의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하박국은 하나님께 질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 → 하나님께 묻지 않음
       믿는 사람 → 하나님께 항의하며 묻음

    하나님의 대답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박국 1:5  /  “너희가 믿지 못할 일을 내가 행하리라.”

    즉,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며        인간이 아직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박국 질문의 흐름 

    하박국서는 3단계 질문 구조를 가집니다.

    왜 침묵하십니까? (1:2)
    왜 악을 보게 하십니까? (1:3)
    왜 악한 자를 사용하십니까? (1:13)

    그리고 마지막 결론은 이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2:4) 

    정리 /  “어찌하여 간악을 보게 하시나이까?”는 
    세상의 악을 향한 신앙인의 탄식이며  
    하나님의 정의를 갈망하는 기도의 질문입니다. 

    성경에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직접 묻는 질문 패턴이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질문들은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방식이며, 놀랍게도 하박국 → 시편 → 십자가 → 요한계시록까지 하나의 흐름을 이룹니다. 
    아래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께 묻는 7가지 질문 패턴”을 구조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하나님께 묻는 질문 일곱 가지 패턴

    질문 패턴 대표 성경 구절 의미 성경 흐름
       어느 때까지 (How long?) 하박국 1:2 / 시편 13:1 / 계 6:10 고난이 언제 끝나는가 하박국 → 시편 → 계시록
       어찌하여 (Why?) 하박국 1:3 / 시편 10:1 악을 왜 허락하시는가 선지자 → 시편
       어찌하여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박국 1:2 / 시편 22:2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 하박국 → 다윗
       왜 버리셨나이까 시편 22:1 / 마태 27:46 하나님의 침묵과 버림의 경험 시편 → 십자가
       어찌하여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박국 1:2 고난 속 구원 지연 선지자 질문
       언제 심판하시나이까 계 6:10 악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 계시록
       어찌하여 잠잠하시나이까 시편 44:23 / 하박국 1장 맥락 하나님의 침묵 시편 → 선지자 

    성경 전체 질문 흐름 구조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


    │ "어느 때까지 / 어찌하여"

    시편 (고난 속 기도)

    │ "왜 버리셨나이까"

    십자가 (예수님의 질문)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요한계시록 (순교자들의 질문)

    │ "언제 심판하시나이까"

    하나님의 최종 응답
    (새 하늘과 새 땅)

    핵심 신학 구조

    이 질문들은 성경에서 3단계 신학 구조를 형성합니다.

    인간의 질문
    • 하박국 
      시편 기자 
      순교자들

    예수님의 질문
    • 십자가에서 시편 22편 인용

    하나님의 최종 응답
    • 요한계시록 21장 
      눈물 제거 
      악의 심판 
      새 창조 

    매우 중요한 성경적 사실

    성경의 마지막 질문은 인간이 아니라 순교자들이 하나님께 묻는 질문입니다.

    요한계시록 6:10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즉, 하박국의 질문 → 시편의 질문 → 예수님의 질문 → 순교자의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결론 (성경 전체 구조)

    성경은 사실상 “질문으로 시작해서 응답으로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하박국 / “어느 때까지입니까?”

    시편 / “왜 버리셨습니까?”

    십자가 /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요한계시록 / “언제 심판하십니까?”

    하나님의 최종 응답 /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의인의 고통에 대한 질문

    하박국은 유다 사회의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 강포 (폭력),  죄악.  다툼,  분쟁,  율법의 무력화,  

    악이 너무 많고 정의가 사라진 사회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묻습니다.

    “하나님, 왜 이런 악을 그냥 보게 두십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이 느끼는 신앙적 충격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질문

    하박국의 질문은 사실 두 단계로 이어집니다.

    어찌하여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1:2)
    어찌하여 간악을 보게 하시나이까? (1:3)

    흐름은 이렇게 됩니다.  기도 → 침묵 → 악의 확산 → 질문 

    즉 하박국의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악을 보고도 당장 개입하지 않으시는가?”

    이 질문은 성경 전체에서 반복됩니다.

    • 시편,  예레미야,  욥기,  십자가

    특히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질문을 합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이 악을 “보게 하시는” 이유

    흥미로운 점은 질문의 표현입니다. 
    하박국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악을 보게 하십니까?” 
    즉 하나님이 허락하고 계신 것처럼 보이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충격적입니다.

    하박국 1:5 /  "내가 한 일을 너희가 믿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이미 심판과 구원의 계획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즉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인간은 악을 현재 시점에서 보고 하나님은 역사의 전체를 보고 계신다 

    정리 / “어찌하여 간악을 보게 하시나이까?”는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신앙의 가장 깊은 질문 중 하나입니다.

    그 질문의 의미는 
    하나님은 왜 악을 허락하시는가
    왜 정의가 늦게 오는가
    하나님은 정말 일하고 계신가

    그리고 하박국서는 이 질문에서 시작해 믿음으로 끝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4)

    성경의 7가지 하나님께 묻는 질문 구조

    질문 패턴 대표 구절 성경 흐름 의미
          어느 때까지? 하박국 1:2 하박국 → 시편 → 계시록 고통의 기간에 대한 질문
          어찌하여? 하박국 1:3 예레미야 → 시편 악과 고난의 이유
          왜 버리셨나이까? 시편 22:1 시편 → 십자가 하나님 침묵의 경험
          어찌하여 듣지 않으십니까? 하박국 1:2 시편 탄식시 기도와 응답의 긴장
          왜 악인이 형통합니까? 하박국 1:13 예레미야 → 시편 73 정의 문제
         언제 심판하십니까? 계시록 6:10 순교자 → 종말 하나님의 공의
         누가 구원하십니까? 시편 44:26 시편 → 복음서 구원의 간구 

    성경의 질문 흐름 (큰 구조)

    하박국 ──► 시편 ──► 십자가 ──► 요한계시록
    │ │ │ │
    질문 탄식 절규 심판 질문
    │ │ │ │
    하나님의 응답
    핵심 흐름

    인간의 질문 시작 →  Book of Habakkuk

    공동체의 탄식 → Psalms

    질문의 절정 →  Jesus Christ 십자가

    마지막 질문 →  Book of Revelation 

    가장 놀라운 연결

    하박국의 질문 / “어느 때까지리이까”
    시편의 질문 /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 / 예수님의 절규(시편 22 인용) 

    요한계시록  / 순교자들의 질문 “언제 심판하십니까” 

    성경의 놀라운 구조

    질문 → 침묵 → 십자가 → 심판 → 구원

    하박국 질문

    시편 탄식

    십자가 절규

    요한계시록 질문

    하나님의 최종 응답

    핵심 통찰

    성경은 단순한 교훈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질문하는 인간과 응답하시는 하나님 사이의 대화 기록”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의 시작점 중 하나가 바로 하박국 1:2 입니다.

    하박국 1:2가 사실상 성경 질문의 출발점인 이유

    하박국 1: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는 성경의 대표적인 세 가지 질문을 한 절에 모두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1:2의 3가지 질문 구조

    질문 의미 성경 전체 연결
    어느 때까지? 고난의 기간 시편, 계시록
    왜 듣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침묵 욥기
    왜 구원하지 않습니까? 구원의 지연 십자가

    즉 하박국의 질문은

    고난 + 침묵 + 구원 지연

    이라는 성경 전체 인간 질문의 핵심 구조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하박국은 종종 “성경 질문 신학의 요약” 이라고 불립니다. 

    하박국 → 십자가 → 요한계시록 질문 타임라인

    성경의 질문은 시간 속에서 점점 깊어지며 확장됩니다.

    질문의 구속사 타임라인

    구약 초기

    │ 욥
    │ "어찌하여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가?"

    │ 시편
    │ "어느 때까지입니까?"


    │ ↓

    하박국
    "왜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침묵 문제)


    │ ↓

    십자가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질문이 하나님께 향함)


    │ ↓

    요한계시록
    "언제 심판하시나이까?"
    (순교자의 질문)


    │ ↓

    재림
    "질문 종료"

    중요한 신학적 포인트

    하박국 → 십자가

    인간이 묻던 질문을
    예수께서 직접 하나님께 묻습니다

    십자가의 질문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박국 질문의 절정  입니다. 

    성경 전체 질문 20개 지도

    성경에는 반복되는 질문 패턴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20개의 질문 지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번호 질문 대표 본문 의미
    1 어느 때까지 시편 13 고난의 기간
    2 왜 숨으십니까 시편 10 하나님의 침묵
    3 왜 악인이 형통합니까 예레미야 12 정의 문제
    4 왜 의인이 고난받습니까 욥기 고난 신학
    5 왜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하박국 1 구원 지연
    6 왜 듣지 않으십니까 하박국 1 기도
    7 왜 간악을 보게 하십니까 하박국 1 악의 문제
    8 언제 심판하십니까 계시록 6 정의
    9 누가 구원 받을 수 있는가 마가복음 구원
    10 당신은 누구십니까 요한복음 그리스도
    11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사도행전 회개
    12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시편 임재
    13 나를 버리셨습니까 십자가 속죄
    14 언제 왕국이 옵니까 사도행전 1 종말
    15 죽음 이후 무엇인가 전도서 존재
    16 누가 의로운가 로마서 칭의
    17 악은 왜 존재하는가 창세기 이후 타락
    18 하나님은 왜 침묵하는가 시편 신정론
    19 언제 회복되는가 선지서 새 창조
    20 언제 끝나는가 계시록 종말

    핵심 결론

    성경의 질문 흐름은 이렇게 진행됩니다.

    인간 질문

    하박국
    "왜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십자가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요한계시록
    "언제 심판하십니까?"


    재림
    하나님의 최종 대답

    즉 성경은 질문으로 시작해서 재림에서 답으로 끝나는 책입니다. 


    3월 13일(금) 하박국 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어찌하여 듣지 아니하시나이까?(2절)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How long, O LORD, must I call for help, but you do not listen? Or cry out to you, "Violence!" but you do not save? 

    “어찌하여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탄식과 간구의 질문입니다. 
    단순한 불평이라기보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응답을 구하는 믿음의 기도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성경적 배경

    이와 가장 가까운 표현은 하박국 1:2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여기서 선지자는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어느 때까지리이까?
    (시간에 대한 질문) 
    어찌하여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질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왜 응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반복되는 동일한 질문 패턴

    이 질문은 성경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탄식 기도(Lament Prayer)의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시편 13: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시편 22: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예레미야 14:9  “어찌하여 우리 가운데 계시는 자 같이 아니하시나이까”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고난 → 하나님께 질문 → 기다림 → 결국 신뢰 라는 흐름을 가집니다.  

    신학적 의미

    “어찌하여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는 세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고통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짐 

    믿음의 관계 속 질문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이런 질문 자체를 하지 않음  

    응답을 기다리는 신앙
    질문은 결국 하나님께 향함

    그래서 성경에서는 질문 자체가 믿음의 표현이 됩니다.  

    성경 전체 흐름 속 위치

    이 질문은 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흐름으로 발전합니다.

    탄식 → 기다림 → 믿음

    하박국 1장 : 질문 
    하박국 2장 : 하나님의 응답 
    하박국 3장 : 찬양 
    결국 하박국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하박국 3:17–18)  

    “어찌하여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절망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믿음의 탄식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께 묻는 질문 7가지 패턴   
    하박국 → 시편 → 예레미야 → 십자가 → 요한계시록   

    인간의 고통과 질문



    ① 어느 때까지 (How long?)
    시편 13:1 / 하박국 1:2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고난의 지속에 대한 질문


    ② 어찌하여 (Why?)
    시편 10:1 / 하박국 1:3
    “어찌하여 멀리 서시나이까”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질문


    ③ 왜 버리셨나이까 (Why have you forsaken me?)
    시편 22:1 → 십자가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극단적 고통 속의 질문


    ④ 어찌하여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박국 1:2
    “강포로 인하여 외쳐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구원 지연에 대한 질문


    ⑤ 어찌하여 악인이 형통합니까
    예레미야 12:1
    “악인의 길이 형통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정의에 대한 질문


    ⑥ 언제 심판하십니까
    요한계시록 6:10
    “언제까지 심판하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순교자들의 질문


    ⑦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욥기 23:3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만날까”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질문


    하나님의 최종 응답
    요한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씻기시매”

    이 질문 흐름의 중요한 신학적 의미

     1. 성경은 질문을 금지하지 않는다

    성경의 믿음은 침묵이 아니라 하나님께 묻는 믿음입니다. 

    하박국 -  다윗 -  예레미야 -  욥 -  예수님 
    모두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2. 질문은 믿음의 반대가 아니라 믿음의 표현  

    하박국의 질문은 불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불신앙 → 하나님을 떠남 
    믿음 → 하나님께 질문함  

    3. 성경의 질문은 결국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른다  

    시편 22편의 질문 /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질문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대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질문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고통에 들어오셨다는 답으로 연결됩니다.  

    4. 마지막 답은 요한계시록에서 온다  

    요한계시록 6:10 / “언제까지 심판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요한계시록 21:4 /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 없고 곡하는 것이 없고 아픈 것이 없으리니”

    즉 성경의 질문 → 종말의 위로

     한눈에 보는 성경 질문 흐름

    욥 ─────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시편 ─── 어느 때까지

    예레미야 ─ 왜 악인이 형통합니까

    하박국 ── 왜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십자가 ── 왜 버리셨나이까

    요한계시록 ─ 언제 심판하십니까

    새 하늘 새 땅 ─ 하나님이 눈물을 씻기심

    하박국서 1:2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질문의 구조 (히브리 탄식 공식)

    이 질문은 고대 히브리 탄식 기도(Lament Prayer)의 전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① 부르짖음  → “내가 부르짖어도”

    ② 하나님의 침묵  → “듣지 아니하시니”

    ③ 시간 질문  → “어느 때까지리이까”

    즉 의미는 “하나님, 왜 제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까?”
    “언제까지 침묵하실 것입니까?” 
    라는 신앙적 질문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반복되는 질문

    이 질문은 개인적 불평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흐르는 신앙의 질문 패턴입니다.

    질문 성경 의미
         어느 때까지     시편 13:1        하나님의 침묵
           어찌하여   예레미야서 12:1        악인의 형통
      왜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46       십자가의 절규
     언제 심판하시나이까    요한계시록 6:10       순교자의 외침

    특히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같은 구조의 질문을 하십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박국의 질문 → 십자가 → 계시록 순교자들의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신학적 의미

    “어찌하여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는 불신앙의 질문이 아니라
    믿음이 있기 때문에 나오는 질문
    입니다.

    이 질문에는 세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은 들으실 수 있는 분이다
    2. 하나님은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다
    3. 그런데 지금은 침묵하고 계신 것 같다

    그래서 이 질문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한 질문입니다. 

    성경의 놀라운 흐름

    성경의 이야기 구조를 보면  질문 → 침묵 → 응답 → 구원

    이 패턴이 반복됩니다.

    단계 성경
    질문    하박국
    탄식    시편
    절정    십자가
    응답    부활
    완성   요한계시록

    즉 하박국의 질문은 결국 종말의 구원까지 이어지는 질문입니다. 

    정리하면 /  어찌하여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는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질문이며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인간의 가장 깊은 기도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묻는

    질문 패턴 대표 구절 의미
    1. 어느 때까지?      시편 13:1      고통의 기간에 대한 질문
    2. 어찌하여?      하박국 1:3      악을 허용하시는 이유
    3. 왜 버리셨나이까?      시편 22:1 → 십자가      하나님의 침묵 경험
    4. 왜 악인이 형통합니까?      예레미야 12:1             정의 문제
    5. 언제 심판하십니까?      계시록 6:10     하나님의 공의 요청
    6. 언제 구원하십니까?      하박국 1:2         구원 지연 질문
    7. 언제 회복하십니까?      사도행전 1:6       하나님의 나라 질문

    이 일곱 가지 질문은 사실상 인간 역사 전체의 질문입니다.

    핵심 :   고통  -   침묵  -   악의 문제  -   심판  -   구원 

    하박국 → 십자가 → 요한계시록 질문 흐름

    이 질문은 성경 전체에서 하나의 큰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하박국 / "어찌하여 듣지 아니하시나이까?"(하박국 1:2) 

    십자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시편 22 → 마태복음 27:46)

    요한계시록 / "언제 심판하십니까?"(계시록 6:10) 

    최종 응답 / "내가 속히 오리라"(계시록 22:20)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서 이 질문이 절정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는 예수께서 인류의 질문을 대신 외친 순간입니다.  

    왜 하박국 1:2가 성경 질문의 시작인가?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이 질문이 특별한 이유는 3가지입니다.

    ① 하나님께 직접 질문

    많은 예언서와 달리 하박국은 설교가 아니라 대화입니다.

    구조 

    하박국 질문  
    ↓ 
    하나님 응답 
    ↓ 
    하박국 재질문 
    ↓ 
    하나님 최종 응답

    ② 악의 문제를 정면으로 질문

     
    “왜 악이 존재합니까?” 

    이는 철학적으로 신정론(Theodicy) 문제입니다.

    ③ 구원 지연 문제

    “왜 하나님은 지금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이 질문은 결국 종말론으로 이어집니다. 

    하박국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대답

    하나님의 답은 인간이 기대한 것과 다릅니다.

    ① 하나님은 이미 일하고 계신다

    하박국 1:5 /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뜻 :  “너희가 믿지 못할 일을 내가 하고 있다.” 


    역사의 도구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바벨론을 사용하십니다. 

    이는 심판과 정화를 동시에 의미합니다. 

    핵심 대답

    하박국 2:4 /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이 구절은 이후 로마서 1:17, 갈라디아서 3:13  히브리서 10:28 에서 반복되며 복음의 핵심 구절이 됩니다. 

    마지막 응답

    하박국 2:20  /  “여호와는 그의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이 장면은 요한계시록 8:1과 연결됩니다.

    계시록에서도 하늘이 잠잠해집니다.

    즉  하박국 질문 - 십자가 고통 - 요한계시록 심판 - 하나님의 침묵 → 최종 구원  

    핵심 정리 / 성경의 질문 흐름  
    인간 질문 / "왜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 
    십자가 /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 
    순교자 질문 / "언제 심판하십니까?" 
    ↓ 
    하나님 대답 / "내가 속히 오리라"  

    즉 성경은 질문으로 시작해서 재림으로 끝나는 책입니다.


    3월 12일(목) 하박국 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구원치 아니하시나이까?(2절)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How long, O LORD, must I call for help, but you do not listen? Or cry out to you, "Violence!" but you do not save?   


    히브리어 의미

    “구원치 아니하시나이까”는 히브리어로

    לֹא תוֹשִׁיעַ (lo toshia)
    → “왜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 “어찌하여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여기서 יָשַׁע (야샤, yasha)

    • 구원하다.  건져내다.  위험에서 보호하다

    이 단어는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어원(예슈아)과도 연결됩니다. 

    하박국의 상황

    하박국이 이 질문을 한 이유는 유다 사회의 악 때문입니다. 
    그가 본 현실  강포 (폭력).  불의.  율법 무너짐.  악인이 의인을 압박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1. 어느 때까지입니까?
    2. 왜 듣지 않으십니까?
    3. 왜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즉 이것은 고통 속 신앙인의 대표적 질문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반복되는 질문

    이 질문은 하박국만의 질문이 아닙니다. 
    비슷한 질문들이 반복됩니다.

    질문 성경
    어느 때까지? 시편 13:1
    어찌하여 버리셨나이까 시편 22:1
    왜 침묵하십니까 예레미야서
    언제 심판하십니까 요한계시록 6:10

    특히 시편 22:1은 나중에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대로 인용하십니다. 

    하나님의 대답

    놀랍게도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핵심 대답은 이것입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4)

    이 말씀은 나중에  로마서 1:17.   갈라디아서 3:11.  히브리서 10:38에서 복음의 핵심 구절로 인용됩니다. 

    정리  /  “구원치 아니하시나이까?”

    1.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질문
    2.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탄식
    3. 성경 전체에서 반복되는 신앙의 언어 

    원문과 구조

    하박국 1:2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여기서 핵심 표현은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로, 
    하박국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악을 목격하면서 하나님께 언제,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질문의 의미

    • 절박한 간구 : 
      악과 불의가 세상을 덮고 있을 때, 의로운 자로서 하나님께 구원을 간절히 요청함.

    •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질문 : 
      하나님께서 바로 개입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믿음을 시험하는 질문.

    • 신학적 신호 : 
      인간의 불의와 하나님의 정의, 시간의 신비를 묻는 질문으로,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신학적 숙고.

    성경 전체 맥락

    • 욥기 
      고난 중 인간이 하나님께 묻는 질문과 비슷한 구조를 가짐.

    • 시편 : 
      고난과 억울함 속에서 “여호와여 어찌하여?”라는 질문 반복.

    • 신약 (십자가, 요한계시록) 
      인간의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묻는 흐름이 계속 이어짐.

    즉, “구원치 아니하시나이까?”는 단순히 “왜 구원하지 않으시냐?”가 아니라,

    • 인간이 고통과 부정 앞에서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는 신앙적 행위

    • 믿음과 기다림을 전제한 질문

    이라는 점에서,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인간-하나님 대화 패턴의 한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3월 일() 사도행전 19:1-2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2절)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and asked them, "Did you receive the Holy Spirit when you believed?" They answered, "No, we have not even heard that there is a Holy Spirit."



    모조품 인생   

    소더비와 함께 세계 최고의 명품 경매를 담당하는 '크리스티'에 초현 실주의 작가 막스 에른스트의 그림이 등장한 적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막스 에른스트의 작품 중에서도 역대 최고가에 낙찰됐고 '20세기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되며 미술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나 몇년뒤 더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계를 놀라게 한 이 작품이 사실은 위작이었습니다. 위작을 그린 독일의 화가 볼프강 벨트라키 (Wolfgang Beltracchi)는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어떤 그림이든 똑같이 그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 활동을 했지만 크게 재미를 못 보고 쉽게 큰돈을 벌기 위해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벨트라키의 위작은 전문가들도 분별이 불가능했으며 원작보다 더 비싼 가격에 팔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미술 역사 어디에도 남지 않았고 아까운 재능을 허비한 벨트라키는 교도소에 다녀와서도 여전히 위작을 그리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아무리 비슷하다 하더라도 따라 그린 그림은 결국 탄로나기 마련입니다. 제자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더욱 빛을 발하는 진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십시오. 아멘! 

     주님, 구원의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구원받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스스로를 점검합시다.



    18.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19:2)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질문하였을 때에

    그들은 세례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안수 했더니

    12명이 성령을 받게 되었다. 성령을 받아야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

    -1874년부터 1877년까지, 미국은 3년에 걸친 심한 가뭄과 엄청난 수의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농작물이 전멸했습니다. 경제는 대공황에 빠졌습니다. 1877년 4월 27일, 미네소타 주지사 필스버리(Pillsbury)는 모든 주민에게 ‘감사기도의 날’을 선포하였습니다. 농작물이 전멸하였으나 몸이 살아 있고 앞으로도 기회를 주실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미네소타 주민 전체의 감사기도는 하늘을 덮었습니다. 들판을 덮었던 메뚜기 떼가 며칠 사이에 전부 죽었습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3월 일() 사도행전 9:1-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4절)

    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He fell to the ground and heard a voice say to him, "Saul, Saul, why do you persecute me?"


    참된 제자가 되라

     

     

     

    사우스이스트 크리스천교회의 카일 아이들먼(Kyle Idleman) 목사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이 가장 많이 어기는 십계명은 1계명이라고 합니다. 

     

    '너는 나 이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아이들먼 목사는, 예수님을 좋아하지만 따르지는 않는 '착각하는 그리스도인'을 '예수님의 팬'이라고 정의합니다. 

     

    다음은 아이들먼 목사가 말한 '제자와 팬의 차이점'입니다. 

     

    "팬은 희생 없이 즐기기를 원한다. 예수님을 좋아하는 팬들도 예수 님과 관계를 맺기 원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가 피해를 보지 않는 선에 서다. 

     

    '너무 많은 요구를 하지 않으면 당신을 따라다닐게요'. 

     

    '적당히 시간과 돈과 마음을 쏟을게요. 하지만 전부는 요구하지 말아 주세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각오가 되어 있는 제자와는 달리 팬은 자기가 정해놓은 선에서 그저 예수님을 바라볼 뿐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적당히 오셔서, 적당히 희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오셔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온전한 믿음에는 '적당히'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인생에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장 귀한 가치로 여기십시오. 아멘! 

     

    주님, 주님의 팬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내가 진정한 주님의 제자인지 단순히 '예수님의 팬'인지 생각해



    17.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

    사울이라는 바울에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께서 하신 질문인데

    나는 어떤가? 주님을 핍박하지는 않았는가? 주님을 위해서 핍박을 받은 적이 있는가?





    3월 일() 요한복음 21: 1-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를 더 사랑하느냐?(15절)


  •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When they had finished eating, Jesus said to Simon Peter, "Simon son of John, do you truly love me more than these?" "Yes, Lord," he said, "you know that I love you." Jesus said, "Feed my lambs."



  • 말씀대로 사는 축복

     

     

     

    미국의 억만장자 코넬리어스 밴더빌트(Comelius Vanderbilt)는 사람들로부 터 '철도왕'이라 불렸습니다. 

     

    '철도왕'이란 별명은 단순히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가진 돈을 잘 사용했기에 존경하는 마음에서 붙여준 것이었습니다. 

     

    밴더빌트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천 문학적인 금액을 기부해 수많은 학교를 세웠고, 세운 뒤에는 일절 간섭 하지 않고 전문가에게 운영을 맡겼습니다. 

     

    밴더빌트를 성공한 사업가로 키워준 것은 토마스 깁슨(Thomas Gibson) 이라는 사업가였는데 깁슨은 자신의 성공 비결을 다음의 세 가지라고 밝혔습니다. 

     

    · 첫째, 술을 먹지 않는다.

     

     ·둘째, 열심히 일한다. 

     

     · 셋째,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십일조를 빼먹지 않는다. 

     

     깁슨은 누구나 아는 간단한 내용이지만 누구나 지키기만 한다면 자신과 같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생 동안 장담했습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이 지혜이며 말씀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유업으로 받는 큰 복입니다. 눈앞에 정답을 두고도 답을 찾아 헤매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모든 정답이 담겨 있는 성경만을 붙드십시오. 아멘! 

     

     주님. 저에게 주신 은혜와 복을 잘 사용하여 주님께 영광되게 하소서, 

     

     성경이 가르치는 축복의 비결을 실천합시다.


    16.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 하느냐?(요21:15)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 바다로 찿아가셔서 베드로 사도에게 처음 질문하신 말씀이다.

    나는 다른 사람 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있는가?!


    3월 일() 요한복음 11:1-4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를 어디 두었느냐(34절)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Where have you laid him?" he asked. "Come and see, Lord," they replied.


    확신의 믿음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을 통해 세계적으로 '무신론'이 거대한 담론으로 떠오르던 몇년 전에는 이러한 흐름을 타고 '무신론자 버스 캠페인 (Atheist Bus Campaign) 이 세계 곳곳을 점령했습니다. 

     

    도심지를 운행하는 버스에 '하나님은 아마 존재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고 인생을 즐기세요(God probably does not exist so enjoy your life)'라는 광고를 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영국에서 시작된 이 캠페인은 스페인과 독일을 거쳐 온 유럽을 휩쓸 었고, 다시 러시아와 미국에까지 퍼졌습니다. 서점에는 무신론에 대한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무신론자들의 사교 클럽이 형성됐습니다. 세상의 관심이 무신론에 쏠려 있을 때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푸엘 라브라다 복음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버스 캠페인으로 멋지게 반격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그러니 주님 안에서 진정한 삶을 즐기세요(God dose exist. so enjoy life in Christ). 참된 인생을 위해선 주님이 아마 계시지 않아야'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존재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느낀 분명한 믿음을 세상에 당당히 알리십시오. 아멘! 

     

    주님, 미혹된 지식에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의 믿음을 허락하여 주소서. 

     

    '아마'가 아닌 '분명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합시다.


    15.그를 어디 두었느냐?(요11:34)

    나사로를 찾으셨는데 나사로는 무덤에 있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셨다.

    심령이 죽은자 주님께서 살려 주신다.


    3월 일() 요한복음 6:1-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5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When Jesus looked up and saw a great crowd coming toward him, he said to Philip, "Where shall we buy bread for these people to eat?" 


    인생의 네 가지 축 

     

     

    미국 최고의 병원인 존스홉킨스 병원과 쌍벽을 이루는 미네소타주의 미네소타주 메이오 클리닉(Mayo Clinic)의 켈퍼 박사(E.J. Kelper)는 특별한 이유없이 건강이 나빠지는 환자들을 연구했습니다. 

    박사의 연구 결과 감정적으로 불안하거나, 쉽게 낙망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신체적으로 건강했음에도 갑자기 큰 병이 생기곤 했습 니다. 

    박사는 이런 환자들을 삶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라고 부르며 다음의 'W.P.L.W.'라 불리는 네 가지 영역의 균형을 맞추라는 처방을 내렸습니다. 

    1일(Work), 2여가(Play), 3 사랑(Love), 4 예배(Worship)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성취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여가를 통해 제 대로 쉬고 놀지 않으면 인생의 보람을 느끼지 못합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인생은 허무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세 가지가 모두 충족되어 있더라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균형 잡힌 건강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켈퍼 박사의 연구 결과였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누리는 모든 기쁨들도 전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놀라운 큰 복을 허락하신 분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세상 가운데 누리는 즐거움들도 주님과 더불어 누리십시오. 아멘! 

    주님, 일, 여가, 사랑, 예배의 균형을 집을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내 삶에서 더 해야 하고 덜 해야 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4.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요6:5)

    빌립을 시험하신 질문인데 빌립은 200데나리온 가지고도 5,000명이 먹기에

    부족할 것이라 하였고,제자 안드레는 5병2어를 바치는 소년을 예수님께 인도 하였다.



    3월 일() 요한복음 5:1-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낫고자 하느냐(6절)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When Jesus saw him lying there and learned that he had been in this condition for a long time, he asked him, "Do you want to get well?"

     


    13.네가 낫고자 하느냐?(요5:6)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38년된 병자에게 말씀 하셨고 주님께서 고쳐 주셨다.

    지금도 하나님은 오래된 병자를 고쳐 주신다.


    3월 일() 마가복음 10:46-5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51절)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What do you want me to do for you?" Jesus asked him. The blind man said, "Rabbi, I want to see." 





    경험할 수 없는 기쁨 

     

     

     

    피아노의 거장 리스트(Franz Liszt)가 단테의 신곡을 배경으로 한 오페라를 작곡 중이었습니다. 

     

    리스트는 교향곡의 1장을 '지옥'으로 시작해 마지막 3장을 '천국'으로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이 말을 들은 절친한 친구 바그너가 극심하게 반대했습니다. 

     

    "음악으로 감히 천국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자네가 아무리 뛰어난 작곡가라 해도 천국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네. 오히려 천국의 아름다움을 모독하는 작품으로 길이 남게 될 걸세." 

     

    이 말을 들은 리스트는 곰곰이 생각한 뒤 충고를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모든 교향곡은 3악장으로 구성되어야 했지만 그럼에도 리스트 는 3악장을 포기했습니다. 미완성으로 완성된 리스트의 교향곡은 천국 의 문 앞까지만 이르는 여정으로 엔딩을 맺습니다.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는 영원한 기쁨과 생명의 나라가 천국인 이유는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음악이 천국을 표현할 수 없듯이 주님이 계시지 않는 그 어떤 즐거움과 행복도 결코 진정한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누릴 수 있는 천국의 기쁨을 사모하며 오늘도 순례의 여정을 걸어가십시오. 아멘! 

     

    주님, 주님과 함께 하는 진정한 가쁨을 누리는 삶이 되게 하소서 

     

    주님이 허락하신 천국의 영광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실아갑시다.



    12.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막10:51)


    소경 거지 바디매오에게 질문 하셨을 때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하나이다."

    바디매오는 눈을 떠서 최초로 본 얼굴이 주 예수님을 보게 되었다.


    그리스의 해어화(解語花 : 조선시대의 기생) 헤타이라 / Hetaira

    * 포르노 - 일반 창녀
    * 헤타이라 -  최고급 사교 여성

    헤타이라(hetaira)는 고대 그리스의 매춘부였다.
    헤타이라는 그저 '몸을 파는' 여자가 아니라 철학, 정치, 예술 등을 토론할 수 있는교양을 갖춘 여성으로서 당대의 저명한 정객, 철학자, 장군 등의 비공식적 파트너였다. 
    헤타이라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몸을 치장하는 법과 대화술, 고객(남성)의 욕구를 이해하는 법을 익힐 뿐만 아니라문학과 예술 등 지성을 갖추도록 교육받았다.

    해어화(解語花)라 불리기도 했던 조선시대 기생과도 흡사하다.

     Hetaira       오 아가씨들이여 부유한 코린트 시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유혹적인 봉사자들이여 그대들은 이토록 경건하게 향기로운 황금의 눈물을 헌상하되, 그 마음은 하늘에 계시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향해 쏜살같이 비상했도다. 오 아가씨들이여 그대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는 사랑의 기쁨 속에서 티 없는 젊은 과실을 따리라.   판다로스(그리스 시인)  

    그녀들은 자신의 기호에 따라 고객을 취사선택했다. 콧대 높은 헤타이라는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고객을 받았다. 싸구려 창녀처럼 길가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것은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로 여겼다. 그녀들과 동침을 하려면 친분이 있는 사람이 추천을 하거나, 알선 중개자가 다리를 놓아야 했고 화대도 고객과 헤타이라가 함께 조정해 민주적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헤타이라는 주로 코린트 시에서 활약을 했다. 
    헤타이라와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은화를 지불해야 했다. 
    '누구나 코린트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손님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화대를 요구하여 상대가 스스로 물러나도록 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첩 타이스와 그리스의 위대한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첩 아스파시아도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헤타이라들이였다.

     " 당신 아버지에게 거절했던 짓을 차마 아들에게 할 수는 없지요." 
    <원반 던지는 남자>로 유명한 그리스 조각가 미론은 헤타이라인 라이스에게 홀딱 반했다. 
    그러나  라이스가 그에게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미론은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수염을 자르고, 금목걸이를 하고, 금허리띠가 달린 진홍색 옷을 근사하게 차려입고 그녀에게 접근했다. 
     잔뜩 치장을 한 예술가를 내키지 않는 눈길로 바라보던 라이스가 그때 한 말이다. 
    강한 라이스가 세상을 뜨자 그리스인들은 '불세출의 가장 위대한 정복자'라는 찬사를 묘비에 새겨주었다.

    중세 우화에 헤타이라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망신시킨 여인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필리스였다. 
    평소 아리스토텔레스는 대표적인 남성 우월론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을 비하하는 주장을 펼치는 한편 헤타이라와 사랑을 나누고 싶은 강한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위선적인 행동은 남성의 전형적인 이중 가치관이였다. 
    한스 발둥은 위의 그림으로 그를 조롱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헤타이라인 헤르필리스와 관계하여 니코마코스라는 자식을 얻었고죽을 때까지 그녀를 사랑했다. 
    대철학자의 욕망을 그녀가 흔쾌히 받아들였기 때문이였다.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굴복시킨 헤타이라인 필리스는 여자는 열등한 존재라는 편견을 지닌 위대한 철학자의 위선과 이중성을 미모를로서 남자의 본성을 무력하게 드러내 보이게 하였던 것이다. 
    남성의 지성과 육체, 이성과 열정 그리고 욕망의 억압과 쾌락의 이율 배반적인 현주소를  바로 필리스가 고발하고 있다.



    하박국서는 구약 성경의 예언서 중 하나로, 바벨론 제국의 위협과 악의 문제 속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의인의 삶,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핵심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배경 

    1. 하박국은 남유다 시대 말기(BC 7세기 후반)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2. 국가적 혼란과 악의 확산, 악인의 번영 속에서 의로운 사람들의 질문과 고통을 다룹니다. 

    주요 주제   

    하나님의 공의와 악인의 문제  

    인간이 악을 행하는데 하나님은 왜 묵묵히 계시는가?
    → “여호와여 어찌하여 잠잠하시나이까?” (1:2)  

    믿음과 의인의 삶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2:4) 

    심판과 회복  

    바벨론의 심판과 하나님의 절대적 계획 
    마지막에는 하박국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찬양 (3장)

    구조 

    1장 
    : 질문과 탄식 – 인간과 악의 문제 
    2장 : 하나님의 응답 – 공의와 심판, 의인의 삶  
    3장 : 하박국의 찬양 – 환상적 시와 신뢰의 고백 

    신학적 의미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믿음과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  
    의인의 삶과 신앙적 태도에 대한 모델 제공  
    나아가 신약 성경, 특히 로마서와 요한계시록과 평행 구조로 연결 가능  

    화자의 고통과 호소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 화자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부르짖지만 응답이 없음을 토로합니다.
      → 절망감과 시간적 긴장: “언제까지”라는 질문은 답답함과 기다림의 고통을 나타냅니다.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 주변의 폭력과 부정의 상황을 보며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지만, 즉각적인 개입이 없음을 표현합니다.
      → 이는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횡포에 대한 신학적 질문이기도 합니다.

    신학적 의미  

    하나님의 침묵과 신뢰
     : 
    화자는 하나님이 듣고 계심을 믿지만, 응답이 지연될 때 느끼는 인간적 불안과 의문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묵시 문학적 패턴 

    하박국서 전체에서 이런 질문은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언제, 어떻게 실현될지를 탐구하는 구조적 질문입니다.  

    구속사적 연결 

    이 질문은 결국 종말과 구원으로 이어지는 신학적 흐름의 시작점이 됩니다.

    현대적 적용  

    기도와 기다림의 현실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으나 즉각적인 응답이 없을 때, 우리도 하박국처럼 솔직하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정의와 불의 문제 

    사회적 불의, 개인적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언제 실현될지 고민하는 신앙적 현실을 반영합니다.  

    믿음의 성숙 

    응답이 지연될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것이 성숙한 믿음의 길로 이어집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부르짖음 

    하박국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도움을 요청함을 의미합니다. 
    단순한 호소가 아니라, 인간의 고통과 불의 앞에서 하나님께 정의와 응답을 기대하는 모습입니다.  

    듣지 아니하시니 

    하나님의 침묵을 강조합니다. 
    하박국은 여기서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않음을 체감합니다.  

    어느 때까지리이까 

    반복적 질문으로, 인간의 불안과 기다림, 인내를 드러냅니다. 
    사실상 인간의 의문이 계속해서 쌓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강포
     : 
    사회적 폭력, 부정, 불의 등 시대적 악을 의미합니다. 하박국은 단순한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적 불의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외쳐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지연됨을 호소하며, 인간적 관점에서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질문합니다.    

    신학적 의미  

    하나님의 침묵 신학 

    인간이 부르짖어도 즉각적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인정합니다. 
    인간의 신앙은 단순히 기도의 응답이 아니라, 기다림과 신뢰를 포함합니다.  

    정의와 불의 문제  

    하박국은 악과 불의가 세상에 만연함을 보고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이는 인간의 도덕적, 사회적 고민을 신앙적 질문으로 승화한 예입니다.  

    믿음과 인내  

    질문 속에 인간의 믿음이 시험받는 모습이 있습니다. 
    결국 하박국서 전체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2:4)라는 결론으로 연결됩니다.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문맥에 따라 조금씩 해석이 달라질 수 있지만, 핵심은 하나님이 인간의 상태와 구원의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물으신다는 점입니다.

    표현의 의미   

    “구원치 아니하시나이까?”를 직역하면 “너를 구원하지 아니하시겠느냐?”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상황, 죄, 절망 속에서 “내가 너를 구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기시키면서도, 인간에게 응답을 기대하는 질문입니다.  

    신학적 의미  

    하나님의 구원 의지 확인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며, 구원의 길을 열어두셨음을 보여줍니다. 
    구약에서는 이런 질문을 통해 인간이 회개와 순종으로 응답하도록 인도합니다.  

    인간의 자각 촉진   
    이 질문은 단순한 의문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영적 상태와 구원의 필요를 깨닫게 합니다.  
    예 :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 주십니다.  

    믿음과 선택의 여지 제공  
    인간에게 강요가 아닌 선택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냅니다.  
    구원을 받을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강조합니다.  

    적용 포인트

    개인적 묵상 :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지 않으시겠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 보며, 현재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  

    설교나 가르침 : 
    하나님의 구원 의지와 인간의 응답, 회개의 필요를 연결하는 메시지로 활용 가능. 

    성경에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까”(하박국 1:2)와 같은 하나님께 직접 묻는 고통, 의문, 간구의 질문 패턴은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요청하신 5가지 대표 패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각 패턴은 신학적·문학적 의미까지 포함했습니다.  

    여호와여 어디 계십니까? 

    • 본문 예시: 시편 10:1 “여호와여, 주께서 어찌하여 멀리 계시며,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 의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할 때의 절망적 질문.

    • 패턴 특징:

      • ‘어찌하여’ + 하나님의 부재 강조

      • 인간의 고통과 하나님의 침묵을 대비

      • 하박국과 마찬가지로 고난의 정당성 질문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절망 속 개인적 질문

    • 본문 예시: 마가복음 15:34 예수님 십자가상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의미: 극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보호 부재를 경험하며 드러나는 인간적 고백.

    • 패턴 특징:

      • 직접적, 감정적 호소

      • 인간의 취약성과 하나님의 침묵 강조

      • 하박국 1:2와 동일한 ‘구원 지연’에 대한 문제 제기

    “하나님이 어찌하여 악인을 용납하시나이까?” – 정의를 묻는 질문

    • 본문 예시: 시편 73:13-14 “이러므로 내 마음이 미혹되며, 내 속이 아파… 악인이 잘되는 것을 보며”

    • 의미: 악의 존재와 하나님의 정의 사이의 긴장

    • 패턴 특징:

      • 도덕적·신학적 의문 제기

      • ‘왜 의인이 고난받고 악인이 번성하는가?’ 질문

      • 하박국 1:2와 연결: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 요구

    “왜 악인들이 형통하나이까?” – 정의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문제

    • 본문 예시: 예레미야 12:1 “여호와여, 주께서 의로우심에도 불구하고 왜 악인들이 형통하나이까?”

    • 의미: 역사적·국가적 재난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선하심에 대한 의문

    • 패턴 특징:

      • 공동체적 관점, 개인적 고통을 넘어선 국가적 재난

      • 하나님의 뜻과 인간 이해 사이 긴장

      • 하박국 1:2 질문의 역사적 확대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아니함이 무엇 때문입니까?” – 기도와 응답의 문제

    • 본문 예시: 시편 22:1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의미: 응답 없는 기도를 통해 드러나는 신뢰·의문 사이 긴장

    • 패턴 특징:

      • 개인적 간구와 하나님의 침묵

      • 인간의 믿음 시험

      • 하박국 1:2와 동일한 ‘기도와 구원’ 연계


    💡 공통 특징:

    • 모두 직접 질문형 구조로, 하나님의 침묵 또는 정의 문제를 다룸

    • 고난, 불의, 역사적 재난, 기도 불응 등 인간 경험과 연결

    • 신학적·문학적 측면에서 “하나님과의 대화” 형태를 띠고 있음




    하박국 1:2와 비교한 질문/패턴 5가지

    본문 (성경 구절) 질문/패턴 의미/신학적 해석
    하박국 1:2 – “여호와여, 어찌하여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직접적 질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요청하는 인간의 솔직한 호소
    출애굽기 5:22 –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렇게 하시나이까?” 왜곡된 상황 질문 고난이 심화될 때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혼란
    시편 13:1 –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를 잊으시나이까?” 망각/침묵 질문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듯 느껴질 때의 신앙적 고뇌와 신뢰 요청
    이사야 6:5 – “화로다, 나는 망하였도다!” 자기 인식 질문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자기 인식
    욥기 3:11 – “내가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탄식/한탄 질문 극심한 고난과 고통 속에서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인간의 고백
    마가복음 15:34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의 신적 질문 인간의 절망과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도 궁극적 구원의 의미를 묻는 질문




    1️⃣ 수직 타임라인 형식 (위 → 아래)

    • 목적: 사건의 시간적 흐름과 단계적 전개를 직관적으로 보여줌

    • 예시:

    하박국 1장: 하나님의 정의 질문

    하박국 2장: 바벨론 심판 예언

    하박국 3장: 신적 환상과 찬양
    • 장점: 종말 사건, 예언의 순차적 전개를 한눈에 파악 가능


    2️⃣ 좌우 평행 비교 (왼쪽: 하박국, 오른쪽: 요한계시록)

    • 목적: 구약과 신약 묵시문학 구조의 유사성을 강조

    • 예시:

    하박국서 요한계시록
    1:5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3:21 “이기는 자는 생명나무 열매를 받으리라”
    2:20 “온 땅이 잠잠하라” 8:1 “첫 인을 떼자 하늘이 잠잠하더라”
    3:19-19 “주의 영광을 찬양하라” 21:3-4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과 함께 있으리라”
    • 장점: 신학적 평행, 상징과 주제 비교 가능


    하박국서에 숨겨진 다섯 개의 신학적 질문 구조
    박국서는 사실상 5개의 질문 흐름으로 진행됩니다.

    단계 질문 본문   신학적 의미
     1      어찌하여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1:2      기도 응답의 지연
     2      어찌하여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까?        1:2        하나님의 침묵
     3      어찌하여 악을 보게 하시나이까?        1:3          악의 문제
     4         어찌하여 잠잠하시나이까?        1:13       하나님의 공의 문제
     5      주의 일이 어찌하여 더디 이루어지나이까?        3:2          구속사의 시간

    구조적 흐름

    1. 하박국의 질문 (1장)
    2. 하나님의 첫 번째 응답 (갈대아 사용)
    3. 더 깊은 질문 (악한 자를 사용하시는 하나님)
    4. 하나님의 두 번째 응답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5. 찬양으로 끝나는 신앙의 성숙 (3장)

    결론적으로  하박국서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찬양으로 끝나는 책입니다.

    “잠잠하시나이까” 히브리어 의미

    하박국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히브리어

    תַּחֲרִישׁ (타하리쉬)
    동사 חרש (ḥāraš)

    뜻 /  침묵하다.  말하지 않다.  개입하지 않다. 행동하지 않다.

    즉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왜 하나님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시는가?” 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같은 표현

    본문 의미
    시편 28:1         침묵하지 마소서
    시편 83:1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소서
    이사야 62:1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리라

    따라서 하박국의 질문은 “하나님 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십니까?” 라는 신학적 항의입니다.

    하박국서가 사실은 하나님의 침묵의 신학인 이유 

    하박국서의 핵심 주제는  악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침묵 문제입니다.

    구조

    단계 상태
    1 하나님이 침묵하심
    2 의인이 질문함
    3 하나님이 예상 밖의 방식으로 응답
    4 믿음으로 기다림
    5 찬양

    핵심 구절 /  하박국 2:3-4 

  •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은 후에 
    로마서 1:17, 갈라디아서 3:11, 히브리서 10:38 에서 복음의 핵심 구절이 됩니다.

    즉 하박국의 질문 → 믿음의 신학으로 연결됩니다.

    놀라운 사실 

    하박국서는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믿음 구절의 출발점입니다. 

    하박국과 욥의 질문 구조 비교

    두 책은 성경에서 대표적인 “의인의 질문” 책입니다.

    구조 하박국
    질문 대상 하나님 하나님
    질문 이유 사회적 악 개인적 고난
    질문 내용 왜 악이 승리하는가 왜 의인이 고난받는가
    하나님의 방식 역사 설명 창조 설명
    결론 믿음으로 살라 하나님을 신뢰하라

    질문 흐름 비교

    하박국 / 질문 → 응답 → 기다림 → 찬양

    욥 / 고난 → 질문 → 침묵 → 하나님의 현현 → 회개 

    결정적 차이

    하박국 / 하나님이 역사를 설명

    욥 /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심

    하박국의 마지막 고백  /  하박국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

    처음에는 “왜 침묵하십니까?” 였지만 마지막에는 “그래도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중요한 신학적 결론

    하박국서는 질문 → 믿음 → 찬양으로 가는 책입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신학의 출발점입니다. 

    하박국서에 숨겨진 히브리어 문학 구조 (키아즘)

    하박국 전체는 사실 키아즘(Chiasm, 교차 구조) 형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박국서 전체 구조

    A. 선지자의 질문 1 – 왜 악을 방관하십니까?
    (하박국 1:2–4)

    B. 하나님의 첫 번째 응답 – 갈대아를 일으킴
    (1:5–11)

    C. 선지자의 질문 2 – 더 악한 나라를 왜 사용하십니까?
    (1:12–2:1)

    D. 핵심 계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2:2–4)

    C’. 바벨론 심판 선언 – 다섯 가지 화(2:5–19)

    B’. 하나님의 통치 선언
    “여호와는 성전에 계신다”(2:20)

    A’. 선지자의 찬양 기도(3장)

    핵심 중심

    2:4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구절이 키아즘 정중앙입니다.

    이 구절이 이후 신약에서 로마서 1:17,  갈라디아서 3:11,  히브리서 10:38 복음 신학의 핵심이 됩니다. 

    “잠잠하라”(2:20)와 요한계시록 침묵 연결

    하박국 2:20

    “오직 여호와는 그의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히브리어

    הַס (has)
    → “침묵하라 / 입을 닫아라”

    이 구절은 종말적 분위기를 만듭니다.

    놀랍게도 같은 장면이 계시록에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8:1

    “하늘이 반 시간쯤 침묵하더니

    구속사 흐름

    하박국 요한계시록
    하나님이 성전에 계심 하나님 보좌
    온 땅이 침묵 하늘이 침묵
    심판 직전 일곱 나팔 심판 직전

    침묵 =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기 직전의 우주적 정적

    구약 → 신약 종말 구조가 연결됩니다. 

    하박국의 질문이 성경 질문의 완성인 이유

    성경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구속사적 질문 흐름이 있습니다.

    성경의 질문 흐름

    1️⃣ 아담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2️⃣ 가인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창 4:9)

    3️⃣ 하나님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사 6:8)

    4️⃣ 예레미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렘 1:11)

    5️⃣ 에스겔
    이 뼈들이 살겠느냐” (겔 37:3)

    6️⃣ 예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5)

    그리고 마지막 질문이

    하박국

    “어찌하여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까?”
    (합 1:2)

    이 질문은 인간이 하나님께 던지는 가장 깊은 질문입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질문

    그 답이 바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래서 하박국의 질문은 성경 질문 신학의 절정입니다. 

    하박국 → 요한계시록 종말 구조 연결

    놀랍게도 하박국의 구조는 종말 계시 구조와 매우 비슷합니다.

    하박국 종말 구조

    1️⃣ 악의 번성(1장)

    2️⃣ 하나님 침묵(1:2)

    3️⃣ 하나님의 심판 준비(갈대아)

    4️⃣ 믿음의 선언(2:4)

    5️⃣ 바벨론 심판(2:6–19)

    6️⃣ 하나님의 영광(2:14)

    7️⃣ 하나님 앞 침묵(2:20)

    8️⃣ 종말 찬양(3장) 

    요한계시록 구조

    1️⃣ 악의 세력(짐승, 바벨론)

    2️⃣ 성도들의 탄식 “언제까지?” (계 6:10)

    3️⃣ 하나님의 침묵(계 8:1)

    4️⃣ 심판 시작(나팔)

    5️⃣ 바벨론 멸망(계 17–18)

    6️⃣ 하나님의 영광(계 21)

    7️⃣ 하나님 통치(새 하늘 새 땅)

     

    핵심 공통 메시지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때

    하나님은

    •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 역사를 준비하고 계신다

    그래서 하박국의 마지막 고백이 나옵니다.

    하박국 3:17–18 /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이것이 종말 믿음입니다. 

    정리

    하박국서는 사실 작은 예언서가 아니라

    1️⃣ 복음의 핵심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2️⃣ 하나님의 침묵 신학
    3️⃣ 종말 계시 구조
    4️⃣ 인간 질문의 절정

    이 4개가 합쳐진 성경 신학의 핵심 책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 복음의 핵심

    • 하박국 2:4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구절은 신약에서 복음의 핵심 선언이 됩니다.

    • 로마서 1:17

    • 갈라디아서 3:11

    • 히브리서 10:38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종말 시대에 하나님 백성이 사는 방식 = 믿음이라는 원리를 설명합니다.

    👉 종말 코드
    믿음 = 마지막 시대 하나님의 백성의 생존 방식 

    정한 때가 있다 → 종말의 시간표

    • 하박국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정한 때”(מוֹעֵד, 모에드)**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 절기

    • 하나님의 예정된 시간

    • 종말 사건

    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 종말 코드
    역사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표 속에서 진행된다 

    온 땅이 잠잠하라 → 계시록의 침묵

    • 하박국 2:20
      “여호와는 그의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이 장면은 놀랍게도 요한계시록과 연결됩니다.

    • 요한계시록 8:1
      “하늘이 반 시 동안 고요하더라.”

    종말 심판 직전에
    우주적 침묵이 나타납니다.

    👉 종말 코드
    하나님의 최종 심판 직전에는 우주적 침묵이 있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 새 창조

    • 하박국 2:14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이 구절은 사실상 새 하늘과 새 땅의 예언입니다.

    연결 구절

    • 이사야 11:9

    • 요한계시록 21장

    👉 종말 코드
    종말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을 채우는 것 

    하나님이 타고 오신다 → 재림 이미지

    • 하박국 3:8-15

    여기에는 놀라운 묘사가 나옵니다.

    • 하나님이 말을 타고 오심

    • 구름과 광채

    • 바다를 가르심

    • 원수 심판

    이 장면은 신약의 재림 묘사와 매우 유사합니다.

    연결 구절

    • 요한계시록 19장

    • 마태복음 24장

    👉 종말 코드
    하나님은 역사 속으로 직접 개입하신다 

    악한 제국의 멸망 → 바벨론 붕괴 패턴

    하박국 2장에는 **5개의 화(禍)**가 등장합니다.

    1. 탐욕의 화

    2. 강탈의 화

    3. 폭력의 화

    4. 타락의 화

    5. 우상의 화

    이 구조는 놀랍게도 요한계시록의 바벨론 심판 구조와 동일합니다.

    • 요한계시록 17–18장

    👉 종말 코드
    인간 제국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무화과나무가 없어도 → 종말 신앙

    • 하박국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이것은 종말적 믿음의 최고 선언입니다.

    모든 경제와 환경이 무너져도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신앙입니다.

    👉 종말 코드
    종말 시대 신앙 =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믿음 

    정리 : 하박국서의 7개의 종말 코드

    1️⃣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2️⃣ 하나님은 정한 때에 역사하신다
    3️⃣ 심판 직전 우주적 침묵
    4️⃣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을 덮음
    5️⃣ 하나님이 직접 오시는 날
    6️⃣ 인간 제국의 최종 심판
    7️⃣ 종말의 성도의 믿음

    하박국 → 요한계시록 종말 구조 5단계 

    1️⃣ 고통의 질문 (세상의 불의)

    하박국 1장

    핵심 질문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합 1:2)

    하박국은 세상의 폭력과 불의를 보며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임

    •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임

    이 질문은 사실 성경 전체의 질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동일한 질문이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대응

    “언제까지 심판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계 6:10)

    연결 구조

    하박국 요한계시록
    의인의 질문 순교자의 질문
    왜 악이 번성하는가 언제 심판하는가

    종말은 인간의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2️⃣ 하나님의 충격적인 응답

    하박국 1:5–11

    하나님은 놀라운 대답을 하십니다.

    “내가 갈대아 사람을 일으키리라”

    즉 하나님은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하박국에게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나라가 더 악한 나라를 심판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동일한 패턴이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 구조

    • 네 말 (계 6장)

    • 전쟁

    • 기근

    • 죽음

    하나님은 세상의 악을 심판하기 위해 역사적 재앙을 사용하십니다. 

    3️⃣ 기다림의 신앙

    하박국 2:3–4

    가장 유명한 구절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기다림입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요한계시록에서도 동일한 메시지가 반복됩니다.

    요한계시록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계 14:12)

    종말 신앙의 핵심

    하박국 요한계시록
    믿음 인내
    기다림 견딤

    종말 시대의 의인은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4️⃣ 악의 몰락 선언

    하박국 2장

    하박국 2장에는 유명한 **다섯 개의 화(禍)**가 등장합니다.

    1️⃣ 탐욕
    2️⃣ 불의한 이익
    3️⃣ 폭력
    4️⃣ 타락
    5️⃣ 우상숭배

    이것은 사실 바벨론 문명의 죄 목록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동일한 구조가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 18장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바벨론이여”

    하박국의 바벨론 = 요한계시록의 바벨론

    둘 다 하나님 없는 문명을 상징합니다. 

    5️⃣ 하나님 왕권의 등장

    하박국 3장

    하박국 3장은 놀라운 종말 찬양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이 전쟁의 왕처럼 오시는 환상을 봅니다.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합 3:3)

    이 장면은 매우 놀랍게도 요한계시록의 재림 장면과 유사합니다.

    요한계시록

    “백마를 타신 이가 나오시니”
    (계 19장)

    즉 

    하박국 요한계시록
    하나님이 오심         예수 재림
    악의 멸망       바벨론 심판
    의인의 기쁨     어린양의 혼인잔치     

    결론

    하박국 → 요한계시록 종말 구조

    1️⃣ 인간의 질문
    2️⃣ 하나님의 역사 개입
    3️⃣ 믿음으로 기다림
    4️⃣ 악의 몰락
    5️⃣ 하나님의 왕권

    즉 하박국서는

    “소형 요한계시록” 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아래는 하박국서 안에 숨겨진 종말 신학 구조를 세 가지 관점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성경 전체 구속사와 하박국 → 요한계시록 연결 중심) 


    1️⃣ 하박국서에 숨겨진 “종말 코드 7개”

    하박국서는 짧지만 종말 구조가 매우 농축된 책입니다. 학자들은 이를 **“작은 계시록(Apocalypse in miniature)”**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합 2:4)

    “오직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구절은 신약에서 세 번 인용됩니다.

    • Epistle to the Romans 1:17

    • Epistle to the Galatians 3:11

    • Epistle to the Hebrews 10:38

    👉 의미
    종말의 시대에 믿음이 생존 방식이 됩니다.

    즉 종말 = 믿음으로 사는 자와 아닌 자의 분리 

    ② 정한 때가 있다 (합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이 구조는 바로 재림 지연 신학입니다.

    연결

    • Book of Revelation

    • Second Epistle of Peter 3:9

    👉 하나님 시간과 인간 시간의 차이 

    ③ 바벨론 심판 (합 2장)

    하박국 2장은 **5개의 화(禍)**가 선언됩니다.

    대상
    → 제국
    → 폭력
    → 탐욕
    → 우상

    이 구조는 종말의 바벨론 심판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연결

    • Book of Revelation 17–18장

    👉 바벨론 =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계 시스템 

    ④ 온 땅이 잠잠하라 (합 2:20)

    “여호와는 그의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이 구절은 종말 전 우주의 침묵을 암시합니다.

    연결

    • 계 8:1

    • 일곱째 인 

    ⑤ 하나님이 오신다 (합 3:3)

    “하나님이 데만에서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산에서 오시는도다”

    이 장면은 신현(Theophany)

    하나님의 직접 등장

    구조적으로

    • 시내산

    • 출애굽

    • 종말 재림

    모두 같은 패턴입니다. 

    ⑥ 땅이 진동한다 (합 3:6)

    “산들이 무너지고 땅이 진동하며”

    종말의 특징

    • 지진

    • 자연 붕괴

    연결

    • Book of Revelation 6장

    • Gospel of Matthew 24장 

    ⑦ 의인의 기쁨 (합 3:17–18)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그럼에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 종말 신앙의 핵심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기뻐함 

    2️⃣ 하박국 2:20

    “온 땅이 잠잠하라”와 계시록 8:1의 비밀

    하박국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히브리어

    הַס (has)
    = 완전한 침묵
    = 공포 속 정지 

    요한계시록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니”

    (계 8:1)

    여기서 일어나는 사건

    • 일곱째 인이 열림

    • 심판 직전 

    두 구절의 공통 구조

    구조 하박국 요한계시록
    하나님 등장 성전에 계심 보좌 앞
    우주 반응 온 땅 침묵 하늘 침묵
    다음 사건 심판 나팔 심판

    침묵 = 심판 직전의 우주적 정지

    고대 유대 묵시 문학에서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
    우주는 침묵한다 

    3️⃣ 하박국 3장의 재림 신학

    (구약에서 가장 강력한 재림 장면)

    하박국 3장은 사실 시편 형식의 묵시적 환상입니다.

    구조

    ① 하나님이 남쪽에서 오심 (3:3)

    지리

    • 데만

    • 바란

    이곳은 출애굽 경로

    구원의 하나님이 다시 오신다 

    ② 빛과 광채 (3:4)

    “광선이 그의 손에서 나오며”

    연결

    • Book of Revelation 1장

    • Gospel of Matthew 24:27

    재림 특징

    빛 

    ③ 전염병과 재앙 (3:5)

    “전염병이 그 앞에서 행하며”

    연결

    • 계시록 재앙 

    ④ 땅의 대격변 (3:6)

    “산들이 무너지고”

    종말 특징

    • 지진

    • 지각 붕괴 

    ⑤ 하나님이 전쟁하심 (3:13)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이 장면은

    메시아 전쟁

    연결

    • Book of Revelation 19장 

    놀라운 결론

    하박국서는 사실 3단계 종말 구조입니다.

    1단계

    선지자의 질문

    “어찌하여 잠잠하십니까?”

    2단계

    하나님의 답

    “정한 때가 있다”

    3단계

    종말 환상

    “하나님이 오신다”

    질문 → 기다림 → 재림 

    신학자들이 말하는 핵심 
    하박국서는 “하나님의 침묵에서 시작해 하나님의 재림으로 끝나는 책”


    1️⃣ 하박국서 전체에 숨겨진 “7개의 묵시 문학 구조”

    하박국서는 짧지만 묵시 문학적 요소가 풍부하게 숨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구조와 문학적 패턴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이 7가지 구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질문-응답 구조 (Dialogic Structure)

      • 하박국 1:2~4, 1:12~17, 2:1에서 반복되는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 구약 묵시 문학에서 특징적인 질문 → 신의 응답 구조.

    2. 환상 구조 (Visionary Structure)

      • 1:5~11: 바벨론을 통한 심판 환상

      • 2:2~20: 기록된 계시의 환상

      • “하나님이 타고 오시는 환상”(3:3~15)은 고대 전쟁 신현(Theophany) 찬양과 연결.

    3. 의인의 삶 강조 (Righteousness Motif)

      • 2:4: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 신약 로마서 1:17과 평행

    4. 서사적 반복 구조 (Chiastic Structure)

      • 1장과 3장 사이에 키아즘: 문제 → 질문 → 응답 → 찬양

    5. 침묵과 기다림의 모티브 (Silence Motif)

      • 2:20: “온 땅이 잠잠하라”

      • 요한계시록 8:1 “하늘에서 잠잠함”과 평행

    6. 환상적 시적 찬양 (Apocalyptic Hymn)

      • 3장 전체가 시적 구조로, 고대 전쟁 신현 찬양과 유사

    7. 종말적 희망 구조 (Eschatological Hope)

      • 3:16~19: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고 의인이 구원받는 희망

    2️⃣ 하박국 → 요한계시록 구조 평행 10개

    학자들이 지적하는 하박국서와 요한계시록의 평행 구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박국 요한계시록 평행 내용
    1:5~11 6장 전쟁 환상 악의 세력과 심판
    1:12~17 6:12~17 인간 질문 → 신의 응답
    2:1~4 13:1~18 의인의 믿음 강조
    2:2 8:1 하늘의 잠잠함/침묵
    2:5~20 14~19장 악의 세력에 대한 최종 심판
    3:3~15 19:11~21 전쟁 신현(Theophany) 찬양
    1:2~4 1:1~3 문제 제기와 계시의 필요성
    2:4 7:9~17 의인과 성도의 최종 구원
    3:2~15 21:1~7 새 하늘과 새 땅, 회복
    1:1~11 전체 구약 소묵시서 vs 신약 종말서 전체 구조

    즉, 하박국서는 요한계시록의 **“미니 버전”**으로 읽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3️⃣ 하박국이 사실상 “구약의 작은 요한계시록”인 이유

    1. 문학적 구조의 평행성

      • 질문 → 환상 → 심판 → 의인 구원 → 최종 찬양

    2. 신현(Theophany)과 전쟁 환상

      • 3장은 요한계시록 19장 전투와 신현 묘사와 유사

    3. 묵시적 언어와 상징

      • 바벨론, 악의 세력, 잠잠, 의인 등

      •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닌 종말적 메시지 담음

    4. 구속사적 연결

      • 의인의 믿음, 악의 심판, 최종 구원이라는 핵심 주제가 신약 계시록까지 이어짐 

    4️⃣ 하박국 3장이 고대 히브리 전쟁 신현(Theophany) 찬양인 이유

    • 신현(Theophany): 하나님이 전쟁에 참여하거나 심판을 집행하는 모습 묘사

    • 하박국 3장 특징:

      1. 시적 열거: 과거 구원 역사와 하나님의 능력 재현

      2. 전쟁 이미지: 번개, 천둥, 무서운 전쟁적 표현

      3. 찬양 구조: 하나님 의지 → 인간 신뢰 → 승리적 결론

    • 이러한 구조는 고대 근동의 전쟁 신현 문학과 유사하며, 후대 요한계시록의 묵시 문학 형식과 연결됨

    즉, 하박국 3장은 단순 찬양이 아니라, 신현을 통한 종말적 승리 찬양으로 볼 수 있습니다.


    Ⅰ. 하박국서 7가지 묵시 문학 구조

    1️⃣ 의인의 믿음 구조

    • 본문: 하박국 2:4 –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특징: 묵시문학에서 반복되는 ‘의인의 믿음’ 강조

    • 요한계시록 연결: 계 14:12 –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과 평행

    2️⃣ 하나님의 심판 선언 구조

    • 본문: 하박국 1:5-11 – 바벨론을 통한 심판 예언

    • 특징: 민족적/국가적 재앙과 미래 심판 예고

    • 요한계시록 연결: 계 6:1-8 – 4기 기병과 심판 전개

    3️⃣ 열국과 악의 부패 구조

    • 본문: 하박국 1:2-4 – 악이 번성하고 법이 무너짐

    • 특징: 인간사 악의 심화 강조

    • 요한계시록 연결: 계 17장, 18장 – 바벨론과 열국 부패 묘사

    4️⃣ 하나님의 타자적 개입 구조

    • 본문: 하박국 1:12-17 – 여호와의 타자적 개입, 신적 계획

    • 특징: 인간 이해 범위를 초월한 신의 주권 강조

    • 요한계시록 연결: 계 11:15 – “세상 왕국이 우리 주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

    5️⃣ 잠잠과 침묵 구조

    • 본문: 하박국 2:20 –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다. 온 땅이 잠잠할지어다”

    • 특징: 심판 전의 침묵, 긴장과 기대

    • 요한계시록 연결: 계 8:1 – “7번째 봉인을 떼실 때 하늘에 잠잠함”

    6️⃣ 하나님의 영광과 강림 환상 구조

    • 본문: 하박국 3장 – 전쟁 신현(Theophany)과 재림적 이미지

    • 특징: 신적 출현과 심판의 현현, 환상 문학

    • 요한계시록 연결: 계 19:11-16 – 백마 탄 재림 주님의 강림

    7️⃣ 종말적 찬양 구조

    • 본문: 하박국 3:17-19 –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 찬양

    • 특징: 묵시문학 종결에서 의인의 신앙 고백

    • 요한계시록 연결: 계 15:3-4 – 하늘의 찬양, 승리의 노래 

    Ⅱ. 하박국서 ↔ 요한계시록 평행 10개 구조

    번호 하박국서 요한계시록 평행적 의미
    1 1:2-4 – 악의 번성 17-18장 – 바벨론/열국 부패 세계적 악과 심판 예고
    2 1:5-11 – 바벨론 심판 6:1-8 – 4기 기병 외적 심판의 도구
    3 2:4 – 의인은 믿음으로 14:12 – 성도의 인내 믿음과 인내의 생명력
    4 2:20 – 온 땅이 잠잠 8:1 – 하늘의 침묵 심판 전의 긴장과 경건
    5 3:3-15 – 전쟁과 재난 환상 6-16장 – 봉인/나팔/진노 재앙 묵시적 재난과 환상 표현
    6 3:3 – 여호와의 영광 21:1-4 – 새 하늘 새 땅 최종적 회복과 신적 영광
    7 3:8 – 하나님 타고 오심 19:11-16 – 재림 주님 신적 개입과 종말적 구원
    8 1:12 – 신적 의지 11:15 – 세상 왕국 속함 주권적 심판과 구원
    9 3:17-19 – 찬양과 확신 15:3-4 – 승리 찬양 고난 속 승리 신앙
    10 1:5, 2:5 – 경고와 심판 2-3장 – 교회 서신, 회개 촉구 회개의 촉구와 경고 메시지 

    핵심 요약

    • 하박국서 = 소규모 요한계시록

      • 구조적 패턴, 심판, 침묵, 신적 출현, 의인 찬양 등 핵심 묵시 문학 특징이 모두 포함됨.

    • 요한계시록은 하박국서 확장판

      • 신적 개입, 전 세계적 심판, 종말적 찬양과 회복이 더 구체적으로 묘사됨.

    • 핵심 연결 고리

      • “의인의 믿음 → 심판과 침묵 → 신적 출현 → 찬양과 회복”이라는 4단계 묵시 패턴이 일관되게 반복됨.


    종교개혁 5대 강령(솔라)과 성경적 구원관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2. 오직 그리스도
    (Solus Christus)
    3. 오직 믿음
    (Sola Fide)
    4. 오직 은혜
    (Sola Gratia)
    5.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Soli Deo Gloria)

    종교개혁운동은 1517년에 마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면죄부 판매 반대)으로 시작되었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시작하면서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외쳤다. 
    여기에 존 칼빈이 ‘오직 그리스도’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더하여 종교개혁 5대 강령이 완성된 것이다. 
    종교개혁 5대 강령은 루터와 칼빈 등 수 많은 종교개혁자들의 노력과 싸움, 희생을 통해 완성되었다. 
    종교개혁 5대 강령(다섯 가지 솔라)은 개혁주의 5대 오직 신앙(정신, 표어)이다. 
    종교개혁 5대 강령은 성경적 구원의 핵심과 원리를 잘 요약, 정리하였다. 
    종교개혁 5대 강령은 개신교 곧 개혁주의 목회와 신앙의 핵심이다. 
    500년 전과 오늘날의 시대적 환경은 다르지만 성경적 구원의 원리는 동일하다. 
    단,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신앙일지라도 완전할 수 없고, 부분적으로는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여 바르게 적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을 요약한 ‘종교개혁 5대 강령’을 통해서 성경적 구원받는 원리를 살펴보면서 오늘날 교회와 성도 신앙에 적용해 보고자 한다.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디모데후서 3:15-17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종교개혁 5대 강령 중 첫째는 '오직 성경'신앙이다.

    1) 오직 성경이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66권만이 최고의 권위를 가짐을 의미한다. 당시 중세교회가 교황과 교회의 권위를 성경 보다 위에 두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책으로서 성경의 최고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2) 오직 성경이란 성경66권의 완성이 곧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종결임을 믿는다.

    히브리서 1:1-2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요한계시록 22:18-19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오직 성경은 성경 외에 다른 계시는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종교개혁 당시 성경 외에 다른 특별계시를 주장하는 신비주의 운동에 대한 부정이다.사도 요한이 받은 요한계시록을 하나님의 모든 특별계시의 끝이요 완성으로 본다.

    그러므로 성경66권을 구원을 위한 완전한 계시로 보고 오직 성경 외에 다른 것을 더하거나 빼지 말라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요한계시록을 끝으로 성경66권의 완성과 함께 그 이전에 하나님의 모든 특별계시의 방법들은 종결(중지)되고 사라졌다고 믿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도시대까지는 성령의 은사나 표적들과 같은 특별한 계시들이 필요하였지만, 온전한 성경의 완성과 함께 그 임무가 끝났으므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종교개혁 이후 개혁주의 교회가 사용하는 가장 훌륭한 신앙고백서다.)

    제1장 '성경에 관하여' 제1절 : “옛적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었던 여러 가지 방법 즉, 꿈·환상·방언(외국어) 등의 방법은 성경의 완성과 함께 끝났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계시하시던 초자연적인 방법들은 요한계시록을 끝으로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꿈이나 환상, 또는 음성이나 초자연적인 현상(기적)으로 나타나거나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고 충분하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이전의 특별한 방법들이 필요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완성된 이후부터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도 개개인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또한 설교를 들음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물론 성령님의 조명과 도우심으로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정통 개혁주의 신앙은 특별계시와 은사의 중단론(중지)을 주장한다.

    반면 오순절교파를 중심한 은사주의 운동은 계시와 은사의 지속론(연속)을 주장한다.

    3) 오직 성경신앙은 개혁주의 구원과 신앙과 삶의 표준이다.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의 기초이며 성경적 구원받는 신앙의 표준은 오직 성경이다.

    개혁주의신앙은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구원의 교과서이며, 구원을 위한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로 믿는다.

    오직 성경은 성경 외에 다른 구원의 책은 없고, 다른 복음은 없다고 믿는 신앙이다.

    기독교의 참된 구원은 오직 성경으로 말미암고, 오직 성경대로 믿고 순종함으로 얻을 수 있다.

    개혁주의 성경해석의 기본은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 “성경이 가는데까지만 가고, 성경이 멈추는데서 멈춘다.”

    그리고 오직 성경으로 충분하기에 성경 외에 다른 것을 더하거나 빼지 말아야 한다.

    오직 성경신앙은 초대교회 이후 기독교신앙의 핵심이며, 종교개혁이후 개신교의 기본신앙이다.

    종교개혁 이전 중세교회는 성경 외에 다른 계시들을 인정하고 주장했다.

    당시 중세 교회의 성경관(구원관)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음을 가르쳤다.

    중세 교회는 성경의 권위와 교황의 권위와 공회(교회)의 결정을 동일하게 여겼다.

    구원론에 있어서도 성경과 외경과 교황과 마리아와 성인들과 면죄부와 교회의 각종 결정 등 많은 것들이 성도들의 구원에 영향을 끼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에 의하면 "오직 성경 외에 다른 구원을 위한 계시는 없다."

    결국 루터와 칼빈 등 개혁자들은 오직 성경 신앙을 회복하고, 지키기 위해 종교개혁을 일으켰고, 셀수없이 많은 개혁자들이 오직 성경 신앙 때문에 목숨까지도 희생하며 싸워야 했다.

    개혁주의 교회와 신앙은 종교개혁자들의 위대한 오직 성경신앙을 본받고 지켜야 한다. 오직 성경 외에 다른 계시는 없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 정통신앙이요 개혁주의신앙의 핵심이다.

    오늘날 세계의 거대 종교들을 보라.

    유대교, 로마 카톨릭, 이슬람, 기독교(개신교) 등이 다 같은 성경에서 출발하였다.

    세계 4대 거대종교의 근원과 시작은 바로 구약성경이다.

    4대 종교의 공통점이면서도 서로 다름의 기준과 근거는 바로 성경관(성경해석차이)이다.

    오직 성경66권만을 구원의 책으로 믿느냐? 아니면 다른 계시를 인정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종교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66권 외에도 다른 계시와 은사, 기적 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곧 로마 카톨릭교회의 성경관을 따르는 것이다.

    계시와 은사의 연속성을 주장하면서 사도적 권세를 내세워 주의 종의 치유와 중보기도, 안수권 등을 강조하는 것은 곧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성경신앙에서 벗어난 것이다.

    오늘날 세계 교회 안의 각종 신비주의와 기적, 치유, 예언, 방언, 성령의 기름부음 등은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인정하고 주장하는 비성경적인 신앙운동이다.

    이미 2천년 전 사도시대(요한계시록)를 끝으로 사라지고 중단된 특별계시와 은사들이 갑자기 오늘날 시대에 나타나 하나님이 주신 계시며 은사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입증할 수도 없고, 일반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이단 사이비 신앙과 구분이 안된다.

    사도시대 이후 정통 기독교 신앙은 성경66권의 완성 후에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꿈이나 음성, 환상이나 예언, 기적 등 다른 방법으로 자기를 계시하시지 않는다고 믿는다.

    혹 역사속에서 계시와 은사의 연속성을 주장한 신앙들이 있었다면 대부분 교회사속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았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의미에서 오늘날 개신교는 사도 바울과 루터와 칼빈 등 개혁자들의 신앙인 오직 성경 신앙을 회복하고 지키기 위해 힘써야 한다.

    신약시대 2천년 기독교 역사속의 참된 구원받는 신앙의 근거, 기초는 오직 성경이다.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이 죄에 빠진 인생들(이방인)을 위해 주신 구원을 위한 유일한 특별계시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복음은 오직 성경 밖에 없음을 확신하라.

    갈라디아서 1:7-8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오직 성경 외에 다른 계시, 다른 복음, 다른 구원의 책은 없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오직 성경밖에 없다는 오직 성경 신앙을 소유하라.

    2. 오직 예수 그리스도(Solus Christus)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종교개혁 5대 강령 중 둘째 강령인 오직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은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오직 예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신이나 성자(성인, 인간)도 구원을 줄 수 없고, 또한 구원에 도움을 줄 수 없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는 확고한 신앙으로 개혁을 이루었다.

    중세 교회는 교황과 교회와 마리아와 신부와 성인들이 구원의 중보자 역할을 하였다.

    지금도 캐톨릭은 교황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말하며, 신부의 사죄권을 믿고, 마리아를 통한 기도가 구원과 응답에 도움을 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 등 개혁자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받음을 주장하였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임을 믿었다.

    구원받고 천국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믿었다.

    종교개혁자들의 공통적 신앙은 바로 오직 예수신앙이다.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오직 예수신앙을 회복한 것이다.

    한국교회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 역시 오직 예수신앙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오직 예수신앙이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오직 예수신앙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예수신앙을 회복하고 지키기 위해 목숨걸고 싸웠다.

    오직 예수신앙을 소유하고 지키는 것은 바로 구원과 천국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고,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가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오직 성경만을 구원의 책으로 믿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종교들을 통해서도 구원에 이를 수 있으니 서로 하나되자는 연합과 일치운동을 주장한다.

    과거엔 오직 예수 외에 구원받고 천국가는 길은 없다고 당연히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오직 예수구원을 가르치고 오직 예수신앙을 다시 외쳐야 한다.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의 방법과 천국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유일한 구원의 주로 믿는 오직 믿음 밖에 없다.”고 확실히 믿는 신앙이 되자.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을 본받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구원의 주로 믿는 오직 예수신앙을 소유하자.

    3. 오직 믿음(Sola Fide)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종교개혁 5대 강령 셋째는 ‘오직 믿음’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다.

    중세교회가 주장하는 행위구원에 반대하여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얻음을 외친 것이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는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신학적으로는 ‘이신칭의’ 교리로 불리우며 칭의구원을 의미한다.

    칭의구원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여김을 받아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음은 기독교 구원의 대원리다.

    물론 그 믿음의 대상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다.

    그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고 증거하는 책이 성경이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과 '오직 예수'와 '오직 믿음'은 성경적 구원의 절대 3요소다.

    구약시대는 율법 아래서 많은 행위를 강조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후로는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

    사도 바울이 당시 행위구원론자들과 싸워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로마서에 기록한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신약시대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다.

    성경적 참된 구원은 성경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을 믿는 믿음으로 얻을 수 있고, 이는 하나님이 창세전에 정하신 방법이다.

    중세 교회의 구원관은 인간의 노력과 열심 즉 행위를 강조한다.

    대표적인 것이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위한 헌금이다.

    성당 건축 비용을 마련하고자 면죄부를 만들어 팔았고, 헌금 바구니에 돈을 넣는 순간 연옥에 머물던 영들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래서 루터와 개혁자들이 중세 교회의 행위구원에 반기를 들고 ‘오직 믿음’으로의 구원을 외친 것이다.

    인간의 행위가 구원에 영향을 미치느냐? 아니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느냐?는 당시 종교개혁운동을 위한 논쟁의 핵심 주제였다.

    대부분의 종교가 인간의 행위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행위구원의 종교가 아니다. 오직 믿음의 종교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통한 죄 사함과 구원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를 통해서 드리는 예배와 기도, 헌금, 봉사, 구제, 각종 활동 등은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삶이다.

    오직 천국의 상급을 바라보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적인 열매다.

    성경적 참된 믿음은 절대 행위와 분리되지 않는다.

    믿음과 행함은 하나다.

    오늘날 한국교회 신앙의 열심과 행위는 2천년 전의 유대교와 중세 교회를 능가한다.

    성경속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신앙의 행위들을 그대로 따라서 하도록 가르친다.

    그것은 곧 구약 율법 아래서의 유대인 신앙을 따라가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공로는 사라지고 인간의 의와 자기 열심과 행위를 자랑할 위험성이 크다.

    마치 에덴동산의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뭇 잎으로 옷을 만들어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한 것과도 같다.

    지금으로부터 2천6백년전에 하박국 선지자가 당시 타락한 시대를 향해 외쳤다.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2천년전 사도 바울 역시 당시 타락한 시대를 향해 외쳤다.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5백년 전 루터와 칼빈 역시 당시 타락한 중세 교회시대를 향해 똑같이 외쳤다.

    '오직 믿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하박국, 사도 바울, 루터, 칼빈 등이 오늘날 교회를 본다면 똑같이 외칠 것이다.

    '오직 믿음'만을 가르치라.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받고 천국간다.”

    “인간의 노력과 행위로 구원받으려는 모든 시도를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믿으라.”

    세상 모든 종교와 신앙의 특징은 인간의 노력과 행위로 구원에 이르려고 한다(고행, 수행, 선행 등).

    그러나 기독교는 오직 성경을 통해,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임을 선포고, 오직 믿음만을 요구한다. 오직 예수 외에 구원을 위한 다른 복음, 다른 방법, 다른 길은 없기 때문이다.

    초림 예수님의 공생애 구원사역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받고 천국간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가르쳐 준다.

    당시 대제사장과 제사장들, 바리새인과 서기관 등 종교지도자들과 수 많은 유대인들이 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메시야를 기다렸으나 예수님 앞에 나오지 않았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결국 다 구원에 실패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영접한 자들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제자들과 120명 성도들이다.

    그들 중에는 수가성 여인,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 우편 강도, 세리와 창기 등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당시 유대와 로마 사회 아래서 다 죄인 취급을 받고, 또한 실패한 인생들이다.

    그러나 성경의 메시야 예언을 믿고, 예수님 앞에 나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결과 죄사함과 구원을 받았다.

    사도행전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구원의 원리는 오늘날도 동일하다.

    오직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반대로 주 예수를 믿지 않으면 멸망을 받는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고 천국가는 신앙이 되자.

    4. 오직 은혜(Sola Gratia)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구원받는 믿음의 시작과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아래 오직 은혜로 얻고,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와 자범죄 아래 있는 모든 인생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요, 불순종의 아들들이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로서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그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사랑과 은혜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과 은혜로 베푸시는 구원의 진리를 잘 정리한 것이 칼빈주의 5대 교리다.

    ♣칼빈주의 5대 교리

    ①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

    ②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③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④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⑤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불가항력적 은혜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선택 아래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은혜이기에 피조물인 인간이 거부하거나 저항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성경적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고 기초한다.

    죄인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천국가는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는 인간의 지식으로는 측량할 수 없고, 알 수 없고, 갚을 수 없는 신비다.

    피조물이며 죄인된 인간이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은혜다.

    성경적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요 무조건적 선택과 은혜요 신비요 비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을 받아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받고 구원을 받았다.그 은혜를 감사, 감격하며 하루 하루 살아가야 한다.

    그 하나님의 은혜로 미래에도 보호받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끝까지 믿음을 지켜서 구원받고 천국가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천국가는 이 진리를 확실히 붙잡는 신앙이 되자.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불가항력적이며 무조건적인 은혜 앞에 무조건 감사하라.

    항상 그 은혜를 찬송하다가 천국가서도 영원토록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신앙이 되자.

    5.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성경적 구원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

    (성경의 중요교리를 잘 요약하여 문답식으로 정리한 장로교 신앙교육서다.)

    소요리 문답 1.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답 =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해서다.

    구원받은 자들이 교회를 통해 예배하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봉사와 헌신하는 모든 것들의 목적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한 것이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고, 또한 가정과 인생, 나라와 우주만물의 목적은 3위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한 것임을 믿는다.

    예수님과 사도들, 믿음의 사람들과 종교개혁자들 신앙의 공통점은 항상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그러나 중세 교회와 현대교회는 모든 영광을 교황, 신부, 목사, 그리고 나에게 돌린다.

    마귀 사탄의 모든 미혹 역사의 목적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도 마귀는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고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동원하여 자신이 영광받는다.

    그리고 인간들아 너희도 영광받으라고 속삭인다.

    그래서 왕들이(정복자들) 영광받고, 조상이 영광받고, 부모가 영광받고, 너도 성공출세하고 문화를 정복해서 영광받으라고 유혹한다.(절=경배=영광)

    그래서 교회, 곧 구원받은 성도는 절대 자기가 영광받으면 안된다.

    또한 다른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절하거나 영광돌리면 안된다(십계명 제2계명).

    혹, 천사일지라도 절하거나 경배와 영광을 돌리면 안된다(계 22:8-9).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한다.

    천국 가서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영원토록 돌려드리는 것이 구원의 목적이다.

    구원받은 성도의 신앙과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돌리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란 또한 '오직 예수님을 위하여', '오직 예수복음을 위하여'다.

    사도 바울의 오직 예수신앙은 곧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예수신앙이다.

    개혁주의(프로테스탄트, 개신교)는 항의하는 사람들, 저항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세상을 향한 육적 항의나 저항이 아니다.

    성경을 벗어난 잘못된 신앙에 대한 저항과 개혁을 말한다.

    참된 개혁주의 신앙은 항상, 날마다 잘못된 교회와 나의 신앙을 고친다.

    성경적 참된 구원과 영적 싸움은 얼마나 성경대로 바르게 믿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잘못된 신앙은 빨리 고치고 개혁해야 한다.

    그 영적 싸움은 죽을 때까지, 천국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종교개혁 5대 강령은 종교개혁자들이 목숨바쳐 싸워 물려준 신앙의 유산이다.

    종교개혁 5대 강령은 성경적 구원원리에 대한 교과서요 메뉴얼이며 틀이다.

    종교개혁 5대 강령을 목회와 신앙과 삶에 바르게 적용하는 슬기로운 신앙이 되자.

    종교개혁자들의 '5대 오직 신앙'을 소유하여 구원받고 천국가는 참 신앙이 되자.


    3월 27일(금)

    하나님 앞에 솔직히 마음을 토해라


    <인생의 응어리를 풀라> 중에서
    크리스티 김 지음/규장 펴냄

     어시스트 최은실/ 가나안교회 장경덕 목사 사모

    하나님 앞에 마음을 토하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깨끗한 심령, 깨끗한 마음이 되기 원하십니다. 깨끗한 마음을 가지려면 우리 안에 상한 감정, 미움, 증오, 분노, 짜증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로 마음을 토하면 하나님 앞에 이것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 많은 경우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자녀가 큰 일꾼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큰 것’보다 중요한 것은 ‘깨끗한 것’입니다. ‘큰 그릇’보다 중요한 것은 ‘깨끗한 그릇’입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토하면 하나님을 친밀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깝게’ 경험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 계신 분으로 느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못할 말 없이 다할 수 있을 때 그때 친밀함을 느끼게 됩니다. 시편에 있는 다윗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다윗과 하나님의 친밀한 사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토하면 형식적인 신앙을 벗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은혜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소를 죽이고, 양을 죽이는 제사의 형식을 치를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든지, 어느 때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차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설거지하면서, 누워서, 샤워하면서, 산책하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솔직하게 마음을 토하면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선교사님, 용서의 결단을 내렸는데 아직도 제 남편이 미워요. 아직도 미운데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집사님, 용서의 결단을 하셨다구요?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껏 토하면 응어리가 튀어나오기 때문에 상대를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음 깊이 용서하는 날이 오게 됩니다.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용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용서하는 사람이 먼저 자유로워지고 내가 먼저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솔직하게 기도 드리면 기도가 변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용서의 기도, 축복의 기도로 변합니다. 그 이유는 관점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전에는 시편을 읽으면서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시편을 읽다보면 같은 시편인데도 앞뒤가 너무나 달라집니다. 앞 절에서는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고 재앙을 한탄하다가도 마지막에 가서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라고 노래합니다.
    오래 전에 몹시 곤혹스럽던 경우가 있었는데 얼마나 분했던지 하나님 앞에 마구 마음을 쏟아냈습니다. “도대체 그분이 내게 왜 이러는 것입니까? 이럴 수가 있습니까?” 30여 분 그렇게 기도하고 나자 저의 기도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제 입에서 나오는 기도를 듣고 제가 다 놀랬습니다. “주님! 저는 욕먹을 게 많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그런 저에 대해서는 모르고 기껏해야 제가 설교하고 강의하는 스타일이 교만하다 했으니 그것밖에 모르니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감사가 터져 나오고 가슴 벅찬 기쁨이 제 마음에 샘솟듯이 올라왔습니다. 그 때 제가 손뼉을 치며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것이었구나! 그래서 시편의 앞뒤가 다르구나! 하나님 앞에 마음껏 마음을 토하니까 기도가 이렇게 바뀌었구나!”
    하나님 앞에 마음을 토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벙어리 하나님이 아닙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토하면 마음이 깨끗해지면서 영적인 주파수가 주님 앞에 더욱 명확히 맞춰집니다. 사람의 마음에 잡다한 내용이 담겨져 있고 속에서 생각이 왔다 갔다 하면 하나님 앞에 그것을 토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주파수가 맞지 않는 겁니다.
    우리가 마음을 토하여 아뢰면 위로하고 말씀해주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토하는 기도를 드리십시오. 하나님 앞에 마음껏 솔직하게 토하시기 바랍니다.

    신에게솔직히를 읽고

    로빈슨의'신에게 솔직히'를 읽고

    초월(超越)의 하나님에서

    포월(匍越)의 하나님으로

    A. 들어가면서 :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길 걷다보면 가끔은 환하게 웃기도 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길 걷다보면 가끔은 쓸쓸히 눈물도 짓는다오

    하나님 우리가 웃을때에 우리와 함께 웃으시고

    하나님 우리가 눈물지을때 눈물을

    오늘도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

    당신의 참사랑을 감사해요]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하는가? 그는 어떤 하나님이시며 어디에 계시는가?등등 우리는 수없이 많은 질문들을 던지면서 살아간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눈물을 주시기에 하나님을 고백한다. 인간은 눈물의 존재이다. 우리네 생의 처음을 우리는 눈물로서 이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또 생의 끝을 타인으로 하여금 눈물 흘리게끔 하기에 인간은 눈물의 존재이다. 그 눈물을 가지고 신학을 하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외면하시지 않으신다. 우리네 인생이 지치고 힘겨울때면 하나님은 방관만하시고 우주의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느라 분주하시기에 그래서 너무나 바쁜 나머지 우리를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우리의 눈물 한방울 한방울속에 함께 계신다. 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눈물,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래서 필자는 하나님을 믿는다.

    갈수록 다양화 되어가고 다변화 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올바르게 변호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선상에서 종교적 물음들, 적어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물어질 수 밖에 없는 질문들을 당연히 물으면서 그리고 그것이 적어도 그리스도를 믿는 본질에 대한 도전이 아닌 오늘에 널브러져 있는 종교라는 틀 속에 갇혀 숨막혀 있는 그리스도를 살리는 길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그것은 그 물음이 어떤 물음이든지 간에 신 앞에서 솔직한 물음인 것이고 거기에 누구든지 솔직히 답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존 로빈슨 주교의 '신에게 솔직히'는 참으로 많은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제 이 두껍지 않지만 그러나 심오한 내용이 들어 있는 이 책을 정리하면서 신 앞에선 단독자 혹은 상관자의 모습에서 정직해 보려고 한다.

    B. 글의 한가운데서 : 초월(超越)의 하나님에서

    포월(砲越)의 하나님으로

    1. 원치 않는 혁명(Reluctant Revolution)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신의 의미는 무엇이고 그리고 그 신은 어디에 있는가? 위에 있다, 밖에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로빈슨은 이런 고민을 공개적으로 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그는 틸리히, 본회퍼, 불트만을 인용하면서 이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틸리히는 그의 설교집 '흔들리는 터전'에 실린 설교인 '실존의 깊이'라는 설교에서 전통적 종교적 상징방법이 '높이'의 표현에서 '깊이'의 표현으로 바뀌어질때 어떠한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틸리히는 '신은 그 존재성을 파악하려고 우리가 애써야 하는 따위의 저밖에 있는 어떤 투영이나 하늘 저쪽에 있는 하나의 타자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의 기반(ground)이다'라고 말한다.

    본회퍼는 그의 '옥중서간'에서 '종교없는 기독교'라는 말을 소개를 한다. 본회퍼는 하나의 물음을 제기한다. '만약에 사람들이 종교라는것 없이 개인의 구원에 대한 염원도 없이 죄의식도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느끼면 신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본회퍼의 대답은 이렇다. 성 바울이 1c사람들에게 할례라는 조건 없이 기독교를 요구한 것 같이 신도 20c사람들에게 종교라는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기독교를 구체적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회퍼는 비종교화론을 제기를 한다.

    붙트만은 '신약성서와 신화'라는 제목의 논문을 41년도에 썼다. 여기서 그는 신화적 요소는 복음의 역사가 순수역사 이상의 것이라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의 초역사적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서 신약 성서 기자들은 전존재성, 성육신같은 신화적 용어를 썼다. 그래서 불트만은 이것을 비신화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빈슨은 이러한 문제제기들을 다루면서 이런것들이 큰 반향을 불러오리라 믿으면서 그것을 '원치않는 혁명'으로 표현하고 있으면서 다만 끝까지 하나님에 관해서 정직하려는 자세를 지닌다.

    로빈슨은 이 세 신학자를 토대로 해서 유신론의 종말이라는 제목하에 다음의 세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논의를 심화 시킨다.

    2. 유신론의 종말(The End of Theism?)

    2.1 기독교는 초자연주의적 이어야 하는가?

    전통적 기독교 신학은 신의 존재에 관한 증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기에 저밖에 있는 신의 존재함이 항상 문제시 되어 왔기에 그것을 증명하고픈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신은 궁극적 실재이다. 따라서 궁극적인 존재가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논의는 성립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물을 수있는것은 이 궁극적 존재가 어떤 것인가 하는것 뿐이다. 틸리히는 초자연적 사고방식은 신은 가장 높으신 존재로서 이 세상 위에와 너머와 밖에 그리고 또 피조물의 세계와 병행 또는 대립해서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설명을 한다. 이러한 사고 방식 속에서 문제는 모든 사물위에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하나의 존재로서 신을 증명하고 확립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이 여기에 깃들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기에 이 초자연주의 입장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를 거부하는 것 처럼 되어 버렸다. 여기서 비판하는 신은 초자연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말하는 신인 것이다.

    사실 전통적으로 신을 이야기를 할때 초월적 유신론을 주장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우주적 도덕가로서의 신, 불변하며 무감각한 절대자로서의 신, 통제적 힘으로서의 신, 현상의 묵인자로서의 신, 이 세상과 너머에 있는 신으로서 이 세상으로부터는 어떠한 영향을 받지 않고 다만 이 세상에 영향을 주기만 하는 신으로 이해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신은 권위주의적 신, 무서운 신의 이미지를 가진 신이다. 그리고 사실 초월적 유신론의 신은 아리스토 텔레스에 있어서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의 개념이다. 그런 신이라면 그 신은 적어도 이 세계와 관계가 없는 신인 것이다. 신은 이 세상을 변화 시키기도 하지만 이 세상으로 부터도 영향을 받는 신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 초월의 신에서 포월의 신으로 신에 대한 사고가 전이(轉移)되어야 한다.

    2.2 기독교는 신화적이라야 하는가?

    여러가지 신화적 요소가 남아 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거나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거나 또는 '하나님이 그 독생자를 보내셨다'거나 하는것과 같은 말귀 뒤에는 신을 하늘에 살고 있는 하나의 인격적인 존재, 나외에는 신이 없다고 한 말과 같이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신들과 구별되는 하나의 신을 생각하는 따위의 세계관에 숨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오늘의 논쟁의 중심은 어떤것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면 신화적 표현이냐에서 이둘의 관계가 아니라 도대체 기독교 자체가 얼마나 신화적 또는 초자연주의적 우주관에 근거를 두고 있느냐 하는데 있다. 여기에 대해 불트만은 '신화적인 세계관 자체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 이전시대의 우주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불트만은 신화적 표현들은 어떤 초자연적인 사건을 말하는 것이아니라 예수그리스도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의 참된 차원과 깊이와 중요성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라 한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초월적 의미가 초자연적 사건으로 객관화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로빈슨은 불트만의 한계를 지적하는데

    衁. 불트만은 현대인이 받아들일 수 없는 말, 이미 지나간 세대의 과학적 독단론을 반영하는 따위의 말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遁. 불트만은 복음의 역사의 많은 부분을 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수한 신약성서 비판가의 입장에서 극단적으로 지나치게 전통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鑁. 그는 실존주의라고 하는 특정한 철학에 주로 의존하고있다는 것은 역사적, 지리적으로 제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여기에 본회퍼가 불트만을 비판하기를 불트만은 덜 진보적이다.기적이나 승천같은 신화적 개념에만 아니라 모든종교적 개념들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비종교적으로 해석하고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2.3 기독교는 종교적이어야 하는가?)

    본회퍼는 종교에서 말하는 신을 임기응변의 신(deus ex machina)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우리의 이해력이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에 해답과 설명을 주는 따위의 신이 저쪽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것을 말한다. 그러나 세계는 신이라는 작업가설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서도 중요한 문제들을 처리해 나가는 방법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본회퍼는 말하기를 모든 영역에서 밀려난 신이 있을 수 있는 마지막 피난처, 최후의 비밀장소는 개인의 요구라고 하는 사생할의 세계에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종교의 영역이며 이것이 바로 교회가 활동하는 장소라는 것이다. 본회퍼는 우리가 정직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본회퍼는 또한 신앞에서 신과 함께 우리들은 신없이 산다는 것이다. 고난당하는 신만이 도와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세상의 권세와 공간을 정복하는 성서의 신을 위해서 청소작업을 했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차이점이다.

    2.4 현대인과 초월성

    로빈슨은 이 장을 '유신론의 종말'이라 이름 붙였는데 그것은 틸리히가 말한바와 같이 흔히 이해하는 유신론은 하나님을 저하늘에 있는 인격적 존재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로빈슨은 문제는 초월성과 아울러 기독교 자체가 이와 같은 유신론적 개념을 동일시하는 태도,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런 유신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다. 여기서 밝힐 것은 우리의 관심은 단순히 초월적인 신을 내재적인 신으로 바꾸려는 것도 아니며 앞서말한 투영을 이용한 사람들이 신을 다만 저 밖에 있는 존재로만 보았다거나 그의 내재성을 부인한 것처럼 암시하려고 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초월의 개념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트만이 말한 소위 객관화한 신화적 용어와는 다른 방법으로 초월의 실재성을 새롭게 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우리 존재의 기반(The Ground of our being)

    3.1 삶의 중심에 있는 깊이

    전통적으로 신을 이 세계와 떨어져 있는 높이의 이미지 보다도 이제는 깊이라고 하는 이미지를 사용하고자 한다. 틸리히는 말하기를 '깊은'은 '얕은'의 반대이고 또한 '높은'의 반대이기도하다. 이것은 또 하나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존재의 무궁무진한 깊이와 기반, 우리의 궁극적 관심사, 우리가 무조건 중대하게 여기고 있는 그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본회퍼는 '그는(신)우리의 삶의 중심 안에서 그 '피안'에 있다'과 말한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포월'의 의미이다. 틸리히는 또 말하기를 '신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의 차이는 이런 존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든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든지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고 문제는 가장 세속적인 관계의 끝없는 깊이 속에 깃들이고 있는 거룩한 것 또는 신성한 것과 통하느냐 통하지 않느냐에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부버는 신을 부인한다고 공언하는 자에게 말한다. 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만일 자기의 삶의 '너', 즉 다른 어떤 사람으로서도 한정할 수 없는 너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고 하면 그는 곧 신을 향해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로빈슨은 이 둘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밝히기 위해 인격적 신을 설명한다. 전통 유신론에서 인격적이란말은 인격자, 주체자와 연관시키고 있다. 그러나 로빈슨은 존재를 내세우고자 함도 아니요 그것을 없애 버리려는 것도 아니고 사실 인격적 신이라고 표현을 하지 않으려 한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 너머 어떤 초존재(SUPER -BEING)가 존재한다는 것을 납득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은 사랑은 우리 존재의 기반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틸리히가 말하듯이 신학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에 관한 학문이라면 그것은 존재에 관한 것이기 보다는 실존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모든것의 밑바닥 깊이에 있는 최종적 진리와 실재가 되는 신이 곧 사랑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적 세계관은 주장하기를 실재의 최종적 정의는 우리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라 한다.

    3.2 인간과 신

    포이에르바하의 '신학은 인간학에 불과하다'는 말은 어떤점에서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신에 관한 지식은 인간에 관한 지식에 불과하다는 뜻 또한 되기에 위험하다. 신은 단순히 그가 말했듯이 인간의식의 반영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맥머리 교수의 종교는 인간의 친교와 공동체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수만은 없다. 로빈슨은 여기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인간은 사랑을 통해서 이 우주의 근본적 실재에 접하게 된다는 것을 믿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버의 모든 하나의 너는 영원한 너를 들여다 보게 해주는 창이며 이것은 또한 사람과 사람이 합쳐서 신이 되는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 영원한 너와 유한한 너를 동일하게 보아도 안되며 신, 인간, 자연을 동일한 것으로 보아도 안된다. 그러기에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틸리히는 신이 초월해 있다는 것은 신적 대상들이 초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것을 의미하는것 아니고 유한의 세계가 자체 안에서 그것을 넘어선 무엇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초월해(SELF-TRANSCENDENT)있는 것이다.

    3.3 성서의 신

    틸리히는 성서에서 신의 전지(全知)라는 것은 우리의 신비가 노출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또한 무소부재라는 것은 우리들 개인의 세계가 공개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4. 남을 위한 인간(The man for others)

    4.1 신약성서의 주장

    로빈슨은 성서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신'을 맞바꿀 수 없다고 한다. 성서는 다만 '예수가 신의 말씀이었다', '신이 그리스도안에 있었다'하지 단순히 '예수가 신'이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서의 요한 복음 1:1에 희랍원문은 'kai theos en ho logos'로 되어있다. 번역에 의하면 그리고 그 말씀이 하나님이었다로 되어있는데 이것이 예수와 하나님이 서로 맞바꿀 수 있는 인상을 받게 되는데 그런 뜻이면 희랍어에 theos가 아니라 ho theos라고 했어야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가 신적인 인간이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theios라는 말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자신이 스스로에게 어떤 칭의를 붙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예수 자신은 자기자신에 대해 아무 주장도 하지 않으면서도 '신이 자기를 통해서 오직 자기를 통해서만 사역을 하고 있다는 역설적인 이야기가 있다.' 이것을 로빈슨은 기독론 해석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다시 말해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신을 위해서 전적으로 투명체가 됨으로써 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틸리히는 이것을 예수가 신의 최종적 계시라고 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그래서 틸리히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만이 곧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것이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을 통해서 자기자신을 궁극적으로 포기했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을 했기 때문에 예수는 자기존재의 기반과 완전히 하나가 되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했다.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로빈슨은 자기를 비운다는 개념을 기초로 하는 기독론의 kenotic이론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만족스럽게 조화 시킬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라 확신한다는 것이다.

    4.2 그리스도는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회퍼는 신이란 무엇인가? 신의 전능따위에 대한 것은 신앙은 아니라고 한다. J.X와의 만남 이것은 오직 '남을 위한 관심만'을 가지고 있는 예수를 경험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남을 위한 인간,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 자기존재의 기반과 완전히 통하며 하나가 된 사람이다. 이 신의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생겨지는 '남을 위한 삶'이 곧 초월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와 하나였다. 이탈되어있으면서도 우리 존재의 기반과 하나가 되어 있는것 이것이 천당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이러한 삶의 약속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실존의 이탈성과 소원성을 그 모든 신적 깊이에서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할례도 아니고 무할례도 아니다 이것은 남을 위한 인간의 삶, 우리를 우리존재의 기반과 완전히 하나로 만드는 사람, 화해되지 않은 우리 실존의 여러가지 관계 속에 나타나는 사랑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훌륭하게 나타났다.

    5. 세속적인 거룩함(worldly holiness)

    5.1 통속적인 것에 담긴 거룩함

    종교가 전연 없는 곳에서 예배와 기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배와 기도는 유일한 종교적 표현이다.

    衁. 예배

    예배에서 성례전은 우리의 삶 가운데 있는 피난, 통속적인 것 안에 있는 거룩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성만찬은 단순히 인간적 친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친교, 즉 우리들의 존재 전체의 기반과 치유자가 되는 자와 하나가 되는 사랑의 친교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깊고 거룩한 사귐과 공동생활을 의미한다. 예배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치적 관심사로 부터 궁극적 관심사를 향해서 초점을 두게 하고 이것을 날카롭게 하고 깊이있게 하는것, 그리스도의 사랑에 비추어 우리의 사랑을 순결하게 하고 바로잡게 하는것, 그리고 이미 화해했고 현재도 화해하고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은총과 능력을 그리스도안에서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배이다.

    遁. 기도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본회퍼는 기도의 시간을 따로내야 한다는 따위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기도에 대한 우리들의 사유를 시작해야 할 것인가, 기도라고 하는 것이 주로 이세상과 떨어져 있는 순간, 생활의 틈을 내서하는것인가 하는 문제를 따져보아야 한다고 한다. 로빈슨은 기독교의 기도, 성육신에 비추어 본 기도라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신에게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통해서 신에게로 향하는 것으로 정의를 내려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한다.

    물론 이 논의가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기도라는 것이 그 문제를(현실) 떠나서 하는 기도는 의미가 없겠지만 바쁜 생활의 틈이라는 것이 자기만의 시간, 나사렛 예수그리스도가 자기만의 기도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갈멜산에서 기도하는 그런 의미의 기도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한 로빈슨은 말하기를 전통적인 영적 생활은 내적 생활에 중점을 두고 이 내적 생활을 인간 정신의 핵심이라 생각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본회퍼는 성서적 의미에서 마음은 내면적 생활이 아니라 신 앞에 있는 인간 전체인 것이라고 말한다. 로빈슨은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하나님의 영이 말도할 수 없는 우리의 신음을 기도로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순간 즉 구체적인 산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기도에 대한 비종교적인 이해의 출발점이라고 한다. 그는 사랑으로 남 앞에 자기자신을 무조건 내어 놓는다는 것이 곧 신임재하에 그 남과 함께 선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바로 중보의 기도의 핵심인 것이다라고 언급한다.

    남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자신과 그 사람을 똑 같이 우리 존재의 공통적인 기반앞에 내 세우는것, 궁극적인 관심안에서 그 사람에게 대한 내 관심을 이해하는것, 이 관계안에 신이 있게 하는것을 의미한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나의 전부를 가지고 남을 만나야 하는 책임, 조건적인 것 안에서 무조건적인 것을 만나며 이 길을 떠나서가 아니라 이 길 안에서 신을 만날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 책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 전제 조건은 간절함이라 생각한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기도할 수밖에 없는 간절한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로빈슨은 기도가 공간에서 하는 것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기도로 가득차 있는 생활이 넘쳐 흘러서 공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낄때 까지 그것이 창조적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6. 새로운 윤리(The new morality)

    '인간의 상호관계에 관한 도덕적인 주장은 신이라는 존재가 정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우연한 사실에서부터 끌어낸 2차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신 자체에 관한 주장과 직접적으로 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예언자들과 신약성서의 교훈을 설명하면서 존 렌루이스 말한 것이다.

    로빈슨은 여기서 도덕문제, 결혼과 이혼에 관한 문제를 예로 든다. 기독교 윤리는 종교적 사람들만 위해 있지는 않다. 이것은 인간 전체를 위한 것이며 인간의 성결에 근거를 두고 있다.

    6.1 예수의 교훈

    예수의 도덕 계율들은 율법주의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이 계율들은 사랑이 언제나 또 누구에게나 똑같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입법화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덕적 주장을 비유로 나타낸것, 하나님 나라의 확고한 요구에 응답하려는 사람들이 해야 할 행위에 관한 단편적 묘사인 것이다. 예수의 윤리는 정언명법으로 취급하는 위험으로 부터 해방시킨다. 그는 산상수훈을 설명하기를 산상 수훈은 '너는 어떤 경우에도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순간에 처해 있든지 간에 네가 만일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뜻에 민감하다면 하나님 나라가 네게 요구함직한 것은 이런 것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어떤 타당성이 있다는 것은 이것이 도덕적인 생활을 위한 틀림없는 지침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 아니라 마아틴 디벨리우스가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이 우리를 변화 시키기 때문인 것이다. 이혼에 관한 것은 사랑즉, 온전히 무조건적인 사랑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것,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자기 희생 없이는 사랑을 완수 할 수 있는 상황을 미리 규정해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초자연주의 윤리는 보편법칙에 종속시킨다. 그러기에 이것을 당면한 문제에 적용하는 것은 결의론(Casuistry)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기준을 저 밖에서 부터 끌어왔다는 의미에서 타율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의 약점은 저 밖에 있는 신을 믿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에게도 이것은 납득이 갈 만한 근거, 권위를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윤리분야에서 초자연주의에서 자연주의론, 타율에서 자율로 넘어오는 것은 칸트에게서이다. 그러나 칸트는 도덕법칙의 근거를 설명하기 위한 신이라는 가설을 제거하기는 했지만 덕과 행복이 같은것을 주장하기 위해 이 가설을 임기응변을 위한 신으로 끄집어 들였기에 이신론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 객관주의는 상대주의에 의해 없어지고 말았는데 틸리히는 이것을 문화일반과 관련시켜 말한 일이 있다. 틸리히가 말하는 '신률'리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이것은 초자연주의와 자연주의를 넘어 제 3의 입장에 이르려고 하는 그의 관심사에 대등하는 것이다. 이 입장에 의하면 초월적인 것은 외부적인 것이거나 저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유한한 관계들의 궁극적 깊이와 기반과 의미를 가리키는 '너'안에서 너와 함께 또 그 '너밑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기독교인의 경우 이것은 에수 그리스도 즉, '남을 위한 인간'의 무조건적 사랑을 우리 존재의 궁극적 기반으로 인정하며 모든 관계와 모든 결단의 기반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 윤리는 기독교인 아닌 사람들에게도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본향의 요구, 우리의 존재 자체의 인격적 기반의 요구이기 때문에 타율적,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신률적인 것이다.

    틸리히는 '사랑'만이 자체의 영원성과 존엄성과 무조건적 정당성을 잃지 않으면서 모든 개인적및 사회적 상황의 구체적 요구에 따라서 자신을 적응시킬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틸리히는 또 변천하는 세계안에서 윤리는 카이로스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했다. 카이로스에서 카이로스로 옮겨가면서 자신을 실현시키는사랑은 절대적 윤리와 상대적 윤리의 양자 택일을 초월한 새로운 윤리를 창조하는 것이다. 죠셉플레처는 기독교 운리학은 행위의 법칙을 체계화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결의론적 방법을 통해서 상대적인 사물의 세계에 사랑을 적요하려는 목적을 가진 노력을 말한다. 이것이 상황윤리이다. 어떤 행위라도 행위자체가 언제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본질적인 죄악이라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플레처의 말은 어거스틴이 했던 말이다. (dilige et quod vis fac) - 이것을 플레처는 '사랑하라, 그리고 네 마음대로 하라고 번역할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 그리고 그때에 너가 행하고 싶은 대로 행하라'고 번역해야 한다.

    윤리적으로 바른것은 종교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없는 사람들과 함께 엠마오로 가는길에 들어서서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과 또 함께 떡을 떼어 나누는 행위안에서 그 행위와 동시에 또 그 행위를 통해서 우리 생활의 그리스도가 되는 그 무조건적인 것을 만나는데 있는 것이다.

    7. 틀을 개조하는 일(The recasting the mould)

    1944년 4월 30일 본회퍼는 우리가 기독교라고 부르는 것은 언제나 종교의 한 패턴이었다고 했다. 이것은 불트만에게 있어서는 신화론적인 것이고 틸리히는 초자연주의적인것, 본회퍼는 종교적인 것이었다. 본회퍼는 종교의 패턴으로 기독교와 복음을 구별하는데 종교적 테두리의 신, 저 위에 있는자, 종교적인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지향하는 자 라는 개념자체가 잘못된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종교적 세상에서 복음에 대한 종교적 해석을 견지해야 하는것은 복음 자체에 대한 오해임과 동시에 세상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망각하는 처사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제기하기를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신 자신에 관한 이미지를 바꾸는 것이다. 아덴의 아레오파구스에서 당시 지식인과 바울이 빌었던 논쟁은 신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동안에 그들 마음속에 그려 놓은 신의 이미지들은 항상 기독교의 복음과 대립되기 때문이다. 이 영상은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어떤 초점을 제공하며 무궁무진한 것을 어느정도 간추림으로써 보통사람들로 하여금 신을 생각할 수 있게 하며 그들의 상상력과 기도에 방향을 제시해 주지만 이 영상들이 신의 대용품이 되는 순간, 이것들 자체가 신이 되어버리는 순간 새로운 우상이 되어버린다.

    7.1 기독교와 자연주의

    로빈슨은 이제 비기독교적 자연주의에 반해서 또 정통적 초자연주의에 반해서 자기 입장을 쓴다. 이런 맥락에서 로빈슨은 줄리안 헉슬리와 본회퍼의 차이점을 지적한다. 헉슬리는 계시가 없는 종교를 지향하는 반면 본회퍼는 종교가 없는 기독교를 지향한다. 둘의 차이점은 '사랑이 하나님이다'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의 차이점이다. 인본주의자에게 있어서 사랑의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사랑의 보편화를 위해서 헌신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계시는 필요없게 된다. 그러나기독교의 주장은 사랑의 삶에 관한 마지막 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말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세상에서나 앞으로 올 세상에서나 아무것도 우리주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운명은 인간의 본성만 아니라 모든것의 본질과 실재 전체에 관한 최종적인 진리를 보여주는 자로서의 그리스도에게 달려있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자기의 집이라는 것을 알고 또 그리스도 안에 있는다는 것은 우주의 다정스런 무관심이 아니라 신의 아가페앞에 자기를 열어놓고 그것이 자기와 다름없고 형제와 같음을 느낀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을 의미한다.

    7.2 기독교와 초자연주의

    성서의 세계관과 다른 내재론적 세계관과의 차이점은 전자는 모든 실재의 기반을 인격의 자유즉 사랑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고 범신론에 있어서는 실재의 모든면과 그 기반과의 관계가 결정적인 것이어서 자유나 도덕적 죄악의 여지가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범신론은 표현 방식으로 창조라고 하는 인격적 범주가 아니라 유출이나 진화라고 하는 기계적 유기적 범주를 사용한다. 신을 이 세계 너머의 초자연 세계에 두면서 신에 대한 영상들로 신을 이해할 때 그것은 우상이 되고 만다.

    7.3 교회에 미치는 영향

    종교가 없는 세계에서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인류를 위해서 존재할때만 참된 교회이다. 교회는 그들이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간에 남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순수하게 평신도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안수받은 목사제도를 없이하는운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평신도를 안수 받은 성직자와 대립시키는 것자체가 성직주의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도리어 평신도는 이 세상에 있는 신의 백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로빈슨은 교회의 구조가 국가의 침범에 대항해서 종교의 권익을 수호하는 대신,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공동체 생활의 자질과 힘을 통해서 비밀의 훈련을 가지고 활발하고도 위험한 오늘의 세속적 활동 속으로 들어가서 그 안에서 신의 움직임을 발견하고 그를 따르게 할 수 있도록 할때 교회에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로빈슨은 철저히 솔직해지고자 했다. 이미 죽어버린 신화는 숙청해 버리고 신 앞에서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관해서 철저하게 정직하려고 하는 신학적 사색의 끊임없는 훈련이 없으면 교회는 쉬 모호론자로 타락하게 되고 기독교인의 신앙과 행위와 예배는 형식적이 된다.

    c. 글을 마치면서 : 오 늘 도 우 리 와 함 께 하 시 는 하 나 님,

    그 사 랑 하 심 을 감 사 하 며 . . .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자

    너의 모든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자

    너의 모든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서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쳐 주시고 너의 작음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주만 바라볼찌라.' 복음 성가 중에 이런 제목의 곡이 있다. 이 찬양은 적어도 이 세상으로 부터 절대적으로 독립되어서 홀로 군주의 모습으로 계시는 고전적 유신론의 하나님 개념은 여기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우리를 사랑의 아들로 부르시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아버지로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두움에 거할 때에 밝은 빛을 비쳐 주시는 분이시고 그리고 누구든지 그 어떤 고민으로 -그것이 아무리 사소할 지라고- 신음 할지라도 그 고통을 함께 나누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이신 것이다.

    로빈슨은 '신에게 솔직히'의 글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틸리히의 '근거로서의 신학'과 본회퍼의 '기독교의 비종교화', 그리고 불트만의 '비신화화의 신학'을 사고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유신론의 종말을 전통적으로 이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이 세상으로 부터 영향받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에 영향을 주기만 하는 신의 이미지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틸리히에 근거하면서 '기독교는 초자연주의적어야 하나?' 그리고 불트만에 근거하면서 '기독교는 신화적이어야 하나?' 그리고 본회퍼에 근거 하면서 '기독교는 종교적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의 답은 한마디로 NO이다.

    로빈슨은 궁극적으로 신을 만나는 것은 이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신이 아닌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남을 위한 삶을 통해서 만난다고 했다. 즉, 그것은 본회퍼에게 있어서는 '타인을 위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 속에서만 참된 신앙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기도 또한 이런 선상에서 남을 위해 기도할 때 신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우리 사고의 틀을 개조하기를 원한다. 초월적 유신론을 넘어서 인류를 위한 참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을 고백하면서 틀을 개조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의 틀 속에 있는 초월적 유신론에 대한 사고를 이제는 그만두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의 버림이 결코 역사적으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고백했던 야훼 하나님이나 우리의 존재의 근거가 되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지금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문제점은 어떻게 오늘의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성과 그리고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응답의 모습으로 우리 인간의 자율성이 조화를 이루는 가가 중요하다.

    신 앞에서의 정직하려는 몸부림, 모든 세상의 물음과 질문들은 인과론적 내지 이성으로 풀려고 하는 것이 하나의 이 세계를 진지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살아가려고 하는자에게 폭력이라고 한다면 말되지 않은 것을 말되게 만들려고 하는것 또한 하나의 폭력이다. 우리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질문들을 신앙이라는 명목하에 飼어버릴 수만은 없다. 덮는다고 해서 그것이 풀려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군주적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다만 문제의 해답은 적어도 신앞에서 정직하려고 하는 우리의 몸부림으로 그 답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신에게 솔직히'를 읽고 한가지 아쉬운 점은 '기도'부분에서 이미 지적을 했지만 그가 제기하는 기도의 부분이 다분이 Naive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물음을 제기를 하기를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본회퍼를 인용하면서 이 질문에 본회퍼는 기도의 시간을 따로내야 한다는 따위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기도에 대한 우리들의 사유를 시작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기도라고 하는 것이 주로 이세상과 떨어져 있는 순간, 생활의 틈을 내서하는것인가 하는 문제를 따져보아야 한다고 한다. 로빈슨은 기독교의 기도, 성육신에 비추어 본 기도라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신에게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통해서 신에게로 향하는 것으로 정의를 내려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한다.

    물론 이 논의가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기도라는 것이 그 문제를(현실) 떠나서 하는 기도는 의미가 없겠지만 바쁜 생활의 틈이라는 것이 자기만의 시간, 나사렛 예수그리스도가 자기만의 기도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갈멜산에서 기도하는 그런 의미의 기도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를 읽으면서 참으로 많은 것들이 정리가 되고 그리고 더욱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역사 앞에서 그리고 나의 실존 앞에서 정직해야겠다는 다짐을 새삼해 본다.


    3월 26일(목)

    성경에서 말하는 감정이란 무엇인가?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5:16-24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감정이 무엇입니까? 특히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감정이 무엇입니까? 감정은 어떤 일이나 현상 혹은 사물에 대하여 느끼는 심정이나 기분을 말하는 것인데 한마디로 자극에 대한 몸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육신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도 주셨습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은 중요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을 흠 없게 보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6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라고 하신 것처럼, 인간은 짐승과 다르게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짐승에게는 영이 없고 혼만 있어 영적인 행동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길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동물에게도 마음에서 나오는 감정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인간에게 주신 감정의 흐름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영이 혼을 통제하고 혼이 육을 통제하는 삶을 살지만, 육적인 사람은 거꾸로 육이 혼을 통제하고 혼이 영을 통제하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영적인 존재였지만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하면서 육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바라볼 때, 하나님이 금하신 명령을 준행하는 영을 지키지 못하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인식하여 그 실과를 따먹어 죄를 범한 것입니다. 


    감정의 흐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로 영적인 감정의 흐름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창조의 질서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끊임없이 육신대로 느끼는 감정으로 살아 영을 거슬리게 할 것입니다. 내 감정의 운전대를 확실하게 영으로 나아가도록 붙잡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감정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영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영으로 마음을 통제하고 그렇게 통제된 마음에 의해 육신을 제어하는 감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흠 없게 보전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흠 없는 거룩한 영과 혼과 육을 보전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 일곱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①기뻐하라 ②기도하라 ③감사하라 ④성령을 소멸치 말라 ⑤예언을 멸시치 말라 ⑥좋은 것을 취하라 ⑦악을 버리라는 명령입니다. 그 중에서 “기뻐하라”와 “감사하라”와 “예언을 멸시치 말라”는 세 가지가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을 위해 취해야 할 감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기뻐할 수 있는 감정을 소유하기 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감정을 갖기 원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주시는 예언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정을 선물로 주셨지만 동물의 감정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끌림 받는 영의 통제를 받는 감정이기를 원하십니다. 하와처럼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러움의 육신에 의한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말씀을 존중하는 영혼에 의한 감정을 소유하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도제목)
    전능하신 하나님!
    저의 마음의 감정이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는 영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의 기도

    [오늘의 기도문] 2023년 12월 14일의 기도문, 매일 기도문

    전능하신 하나님
    이 땅에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인류의 역사가 이어져 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항상 기뻐하는 감정을 잘 다스리며 살게 하시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옵소서.

    저희들의 삶을 통하여 결코 성령님을 소멸치 말게 하시고 하나님의 전하시는 모든 예언의 말씀을 멸시치 않게 하시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어떤 모양으로든 악을 버리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저희들의 영과 혼과 몸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흠 없게 보전되어지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세상과 문화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오늘은 참 기쁜 날이다. 평소처럼 똑같이 파네라에 글을  쓰기 위해 갔다. 어깨를 뚝 치는 사람이 있었다. 약 3년여 만에 본 크레돈 목사님이다. 오래전에 다른 파네라에서 신학서적을 쌓아두고 열심히 설교준비를 하는 그를 만나 반갑게 개혁신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고, 그가 덴버신학교 재학시 학교를 빌려 개척한 NorthWord 교회에서 그의 차분하게 전하는 성경본문 중심으로 강해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오늘도 그와 함께 약 1시간 동안 존 머리를 비롯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 아브라함 카이퍼를 비롯한 화란신학자, 존 오웬을 비롯한 청교도 신학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참 목회자다운 인격과 성경과 신학지식의 소유자이다. 비롯 큰 아들보다 작은 나이지만 너무나 인격과 실력이 존경할만 하다. 함께 기도하였고, 그의 요청으로 허그를 하고 다음 날을 기약했다.  나는 그를 마음껏 축복하고 생각나는대로 기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랫만에 다양한 신학자들 이야기와 종말론에 대한 세대주의와 언약주의 차이점도 나누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요한계시록 주석학자, 그레고리 빌을 서로 좋아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나와 신학 입장이 동일했다. 다음 세대에 미국을 이끌어갈 차세대 목회자로 그를 마음껏 축복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귀한 목사님을 축복하소서.  이글을 사랑하는 크레이톤 목사님에게 마음과 함께 드린다. 

    세상과 문화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서론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문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현대 사회는 도덕적 상대주의와 세속적 가치로 인해 기독교적 세계관과 충돌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사명을 실천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개혁신학은 성경적 원리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며,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함을 가르친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는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영역은 단 한 치도 없다"라고 말하며, 모든 문화와 사회 구조가 그리스도의 다스리심 아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존 프레임(John Frame, 1939-)은 "성경적 세계관은 모든 학문과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변혁적 힘을 갖는다"라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세상의 가치관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새롭게 하고 변혁하는 과정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야 한다.

    본론

    1. 그리스도의 위치

    1.1. 우주의 주권자가 되신다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창조하시고, 세상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다(골로새서 1:16-17). 그의 통치는 단순히 영적인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정치, 경제, 예술, 교육 등 인간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신다.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그리스도의 왕권은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실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신앙과 삶의 통합성을 주장하였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모든 인간 활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하며,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였다.

    1.2. 문화의 중심이 되신다

    그리스도의 진리와 가치가 문화 전반에 뿌리내려야 한다(요한복음 14:6). 그의 가르침은 모든 제도와 관습을 재해석하고, 하나님 중심의 질서를 확립하는 역할을 한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는 "기독교 세계관은 단순한 종교적 개념이 아니라, 모든 학문과 예술, 삶의 영역을 새롭게 하는 변혁적 힘을 가진다"라고 말하며, 문화 속에서 기독교적 가치가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리처드 마우(Richard Mouw, 1940-)는 "문화 속에서 기독교인은 단순히 반대하는 자가 아니라, 창조적 변혁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2. 그리스도의 사명

    2.1. 구원의 완성과 회복을 감당하신다

    그리스도의 사명은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고,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회복시키는 데 있다(로마서 6:23). 이는 개인 구원에 국한되지 않으며, 사회와 문화 전반에 변화를 일으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존 머레이(John Murray, 1898-1975)는 "구원은 단순한 영적 변화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모든 차원에서의 회복을 포함한다"라고 설명하였다.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 1964-)은 "복음은 개인을 변화시키며, 동시에 사회를 개혁하는 능력이 있다"고 강조하였다.

    2.2. 진리와 사랑을 선포하신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으로서(요한복음 8:12), 진리와 사랑을 전파하신다. 그의 가르침은 올바른 윤리와 정의의 기준을 제시하며, 세상의 부패와 혼란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한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 1912-1984)는 "기독교는 단순한 도덕적 체계가 아니라, 모든 삶의 기초가 되는 궁극적 진리이다"라고 강조하며, 기독교적 세계관을 통한 변혁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J.I. 패커(James Innell Packer, 1926-2020)는 "참된 신앙은 세상의 변화를 동반하는 실천적 삶을 요구한다"고 설명하였다.

    2.3. 문화 재창조를 구현하신다

    그리스도의 사명은 타락한 문화를 새롭게 하는 데 있다(로마서 12:2). 이는 단순한 영적 회복을 넘어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개혁을 포함한다.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 1894-1977)는 "기독교적 사고방식이 문화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온전한 기독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문화의 변혁적 역할을 강조하였다. 닐 포스트만(Neil Postman, 1931-2003)은 "현대 문화의 타락을 극복하는 길은 기독교적 가치의 회복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3. 그리스도의 역할

    3.1. 구세주이자 변혁의 주체가 되신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세주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시며(고린도후서 5:17), 사회와 문화 속에서 변혁을 이끄신다.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 1894-1962)는 "그리스도인은 문화에 저항하면서도 그 속에서 변혁을 이루는 존재이다"라고 설명하였다. 티모시 켈러(Timothy Keller, 1950-2023)는 "복음이 사회와 문화를 변화시키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3.2. 윤리적, 도덕적 지침을 가르치신다

    그리스도는 도덕과 윤리의 절대적 기준을 제시하시며(마태복음 5:17-20), 사회가 진리와 정의를 실천하도록 인도하신다.

    3.3. 문화 참여와 영향력을 확대하신다

    그리스도의 역할은 교회 안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마태복음 28:19-20).

    결론

    그리스도는 세상의 주권자이며, 인간과 문화를 구원하고 회복시키는 구세주이시다. 그의 사명은 개인 구원을 넘어 사회와 문화 전반에 하나님의 진리를 확립하는 데 있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문화적 참여와 사회 개혁을 통해 그의 역할을 구현해야 한다. 개혁신학은 성경적 가치가 사회 속에서 실천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문화와 사회 전반이 하나님의 진리로 변화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온 세상을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도록 복음으로 세상을 갱신하고 개혁하여야 하겠다.



    3월 11일(수) 에스겔 37: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3절)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He asked me, "Son of man, can these bones live?" I said, "O Sovereign LORD, you alone know."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에스겔 37:3)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골짜기의 뼈들을 보여 주시며 능히 살겠느냐? 고 물으셨다.
    이 뼈들은 바벨론 포로생활하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모습 이었다.
    그 뼈와 같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예언)과 생기(성령)로 포로생활 70년만에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 하였다.

    위기(危機)가 기회(機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따르던 제자들도 멀리 도망쳤을 때 기독교는 이미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하자 복음은 유럽을 거쳐 전 세계로 퍼져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의화단 혁명과 문화혁명을 거쳐 중국은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핍박했고 선교사를 내쫓으며 성도들을 핍박했습니다. 
    공산당의 엄중한 감시 아래 기독교의 생명은 끝나는 듯했으나 이런 역경 가운데에도 복음이 계속 퍼져나가 지금은 중국의 그리스도인은 1억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위협을 느낀 정부의 규제는 더욱 거세지고 있지만 지금도 매년 10% 씩 교인들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북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목숨을 잃을 각오로 지하에 숨어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3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복음은 언제나 위기 속에서 더더욱 불길처럼 번져 만방으로 퍼졌습니다. 
    모두가 기독교가 위기라고 말하는 지금이 어쩌면 복음을 전하기에 더 없는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주님을 구하는 깨어있는 성도들 통해 다시 한번 부흥의 뜨거운 불길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간구하십 시오.  

    주님, 다시 부흥의 불길을 일으키는 불씨로 저를 사용하여 주소서. 
    억압 가운데서도 신양을 지키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는 에스겔서 37:3에서 하나님이 선지자 에스겔에게 던지신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절망 속에서 믿음을 시험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구속사적 질문입니다.

    역사적 의미 (이스라엘의 절망 상태)

    당시 상황 

    1.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상태
    2. 나라가 멸망하고 성전도 파괴
    3. 백성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뼈들은 말랐고 우리의 소망은 없어졌고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겔 37:11)

    마른 뼈 = 완전히 끝난 민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묻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이는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에스겔의 대답 (믿음의 태도)

    에스겔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대답의 의미

    1. 인간적으로는 불가능
    2.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가능

    즉 믿음 = 하나님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구속사적 의미 (마른 뼈 → 부활)

    이 환상은 단순히 이스라엘 회복 이야기가 아니라 구속사의 예언입니다.

    구조를 보면 

    마른 뼈

    → 완전히 죽은 상태 (이스라엘 / 인간) 

    말씀의 예언

    → 하나님의 말씀 선포  

    뼈가 연결됨

    → 공동체 회복  

    힘줄과 살이 생김

    → 외형적 회복  

    루아흐(רוּחַ, 영/바람/생기)

    → 하나님의 영 

    큰 군대가 됨

    → 살아난 백성

    핵심은

    말씀 + 성령 = 생명 입니다.  

    신약적 완성

    이 환상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교회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복음 
    성령이 임할 때 교회가 살아남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 5:25)

    즉 마른 뼈 환상 = 영적 부활의 예언 입니다.  

    정리  /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는 질문의 의미 

    1. 인간적으로는 완전히 끝난 상황
    2.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음
    3. 말씀과 성령이 임하면 죽은 것도 살아남
    4. 
    궁극적으로 부활과 교회의 예언 

     에스겔 37장의 히브리어 구조

    “루아흐(רוּחַ)” 10번 사용의 비밀

    에스겔 37:1–14에서 “루아흐(רוּחַ)”가 10번 등장합니다. 
    히브리어 루아흐는 세 가지 뜻을 동시에 가집니다.

    의미 설명
      바람 (Wind)      자연적 움직임
     호흡 (Breath)          생명
       영 (Spirit)      하나님의 영

    에스겔 환상에서는 이 세 의미가 점진적으로 발전합니다.

    구조

    1단계 — 죽음의 상태

    에스겔 37:1
    루아흐 = 하나님의 영
    여호와의 영(루아흐)이 나를 이끌어 골짜기로 가게 하셨다. 
    즉 환상 자체가 성령의 계시로 시작됩니다.

    2단계 — 말씀 선포

     에스겔 37:5 
    내가 생기(루아흐)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여기서는 생명 호흡 의미입니다.

    3단계 — 바람

    에스겔 37:9 
    사방에서 바람(루아흐)아 와서 
    여기서는 바람입니다.

    4단계 — 영의 충만

    에스겔 37:14 
    내가 내 영(루아흐)을 너희 속에 두리니

    결론은 성령의 내주입니다.  

    정리 / 루아흐 10번 구조

    성령의 계시

    말씀 선포

    생기

    바람

    성령 충만

    즉 이것은

    “말씀 → 성령 → 생명” 구조입니다. 
    이것은 신약 교회 탄생과 동일합니다. 

    2️⃣ 마른 뼈 환상과 요한계시록 “첫째 부활”

    마른 뼈 환상은 단순히 이스라엘 귀환 사건을 넘어서
    영적 부활 → 최종 부활을 동시에 보여 줍니다.

    에스겔 환상

    순서가 매우 중요합니다. 
    뼈가 모임 - 힘줄 - 살 - 가죽 - 그러나 생기 없음 - 루아흐가 들어옴 - 큰 군대

    에스겔 37:10 /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 

    이것이 연결되는 신약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5:25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I tell you the truth, a time is coming and has now come when the dead will hear the voice of the Son of God and those 
    who hear will live. 


    즉 말씀 → 생명 

    요한계시록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Blessed and holy are those who have part in the first resurrection. The second death has no power over them, but they will be priests of God and of Christ and will reign with him for a thousand years.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이 있다

    첫째 부활은 많은 신학자들이

    영적 부활 (중생) 으로 봅니다. 

    구조 비교

    에스겔 37 신약
    마른 뼈 죽은 영혼
    말씀 선포 복음
    루아흐 성령
    살아남 중생
    큰 군대 교회

    마른 뼈 환상 = 복음으로 살아나는 교회


    3️⃣ 마른 뼈 환상이 “교회 부흥 지도”인 이유

    이 환상은 사실 부흥의 단계를 보여 줍니다.

    1단계

    현실 인식

    에스겔 37:2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부흥은 항상

    영적 죽음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2단계

    하나님의 질문

    에스겔 37:3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부흥은

    하나님의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3단계

    말씀 선포

    에스겔 37:4

    너는 이 뼈들에게 대언하라

    부흥의 핵심

    말씀


    4단계

    성령의 바람

    에스겔 37:9

    사방에서 바람아 와서

    부흥의 실제 동력

    성령


    5단계

    큰 군대

    에스겔 37:10

    극히 큰 군대

    부흥의 결과

    살아 있는 공동체


    교회 부흥 지도

    영적 죽음 인식

    하나님의 질문

    말씀 선포

    성령의 역사

    부흥

    놀라운 사실 하나

    에스겔 37장의 구조는
    사도행전 2장 오순절과 거의 동일합니다.

    에스겔 37 사도행전 2
    말씀 대언 베드로 설교
    바람 급한 바람
    루아흐 성령
    군대 3000명 교회

    마른 뼈 환상 = 오순절 교회의 예언적 그림


    💡 한 가지 더 중요한 비밀이 있습니다.

    에스겔 37장은 사실
    성경 전체에서 창세기 2장의 창조 장면을 다시 반복한 구조입니다.

    • 창세기 2장 → 흙 + 생기

    • 에스겔 37장 → 뼈 + 루아흐

    마른 뼈 환상 = “새 창조(New Creation)”


    3월 10일(화) 예레미야 6:1-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누구에게 듣게 할까?(10절)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To whom can I speak and give warning? Who will listen to me? Their ears are closed so they cannot hear. The word of the LORD is offensive to them; they find no pleasure in it.

    스탈린 - 1894년 조지아 트빌리시 신학교(1894-1899)

    1890년대 트빌리시 신학교에서 사제가 되려고 했던 조셉 스탈린의 동기생이었던 종교 학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큐멘터리 히틀러와 스탈린 : 악의 근원을 보다가, 조셉 주가슈빌리(1910년대 초 혁명 활동을 하면서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사용)가 어머니의 뜻에 따라 언젠가 사제가 되기를 바라며 1894년 조지아 트빌리시에 있는 신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그는 신학교 생활에 불만을 느껴 신학교를 그만두고 마르크스주의 이념으로 돌아섰다.

    1894-1899년 트빌리시 신학교에서 스탈린이 보낸 시간들이 그로 하여금 레닌과 다른 러시아 혁명가들처럼 종교가 칼 막스의 말처럼 "대중의 아편"이라는 데 동의하게 만들었는데, 1890년대 트빌리시 신학교에서 스탈린의 동기생이었던 사람들은 10월 혁명 당시 레닌의 러시아 장악에 어떻게 적응했을까? 

    시몬 테르-페트로시안: 카모로 더 잘 알려져 있어. 신학교에서 퇴학당했고 볼셰비키 혁명가가 되었어. 1907년 티플리스 은행 강도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1912년부터 1917년까지 투옥되었어. 2월 혁명 이후 석방되었고, 1922년 자전거를 타다가 트럭에 치여 사망했어.

    라도 케츠호벨리: 스탈린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처음 소개한 사람 중 한 명이고, 다윈의 종의 기원 사본을 가져다줬어. 역시 신학교에서 퇴학당했고, 조지아 사회주의 정당을 결성했어. 아벨 예누키제와 함께 사회주의 신문을 인쇄하는 일을 했어. 1903년에 체포되었고, 그 후 감옥에서 경비병에게 총살당했어.

    세이트 데브다리아니: 신학교 시절 스탈린의 절친이었고, 그곳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작품을 비밀리에 읽었어. 신학교를 졸업하고 법학 학위를 받았어. 멘셰비키가 되었고, 조지아에서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는 것에 반대했어. 그 후 철학과 글쓰기에 전념했지만, 1937년에 체포되어 총살당했어.

    혁명가들에게 종교 교육을 받거나 어렸을 때 종교적이었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는 점을 주목할 가치가 있어. 레닌 자신뿐만 아니라 실리비스트로 지블라제, 펠릭스 제르진스키, 노에 조르다니아, 에그나테 니노슈빌리, 미하일 츠하카야,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 표도르 라스코니코프, 미하일 프리노프스키도 마찬가지였어.

    19세기에 러시아 제국(또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에서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종교 교리를 배우지 않아야 한다는 기대는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 둬.

    김일성가문 - 부 / 김형직 + 모 / 강반석 <강반석의 부친 강돈욱장로> 넬슨 선교사의 영향


    부재 가운데 계신 주님  

    「크리스천 센추리의 편집장이자 루터교의 대표 신학자 중 한 명인 마틴 마티(Martin Emil Marty)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마티는 그런 상황이 찾아올지라도 우리가 올바로 행동하기만 하면 주님의 임재하심을 다시 경험할 수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다음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우리가 해야 할 여섯 가지 일」입니다. 

    1. 지금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2.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 방법, 장소를 준비한다.  
    3. 영적 거장들의 글을 보고, 자연속을 거닐어본다.  
    4. 하나님의 침묵이 길어지더라도 인내하며 믿음을 지킨다.  
    5. 하나님의 신호가 느껴진다면 즉각 반응한다.  
    6. 이 위기를 가장 잘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인 예배를 반드시 지킨다. 

    거절 또한 기도의 응답이 될 수 있듯이, 때때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더더욱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때에 다시 우리의 삶에 임재하실 주님의 신호에 오감을 집중하십시오.

    주님,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소서.  
    잠잠한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음으로 기다립시다.

    누구에게 듣게할까?(예레미야 6:10)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에게 전할까? 말씀 하셨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누구에게 듣게 할까”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누가 받아들이고 들을 것인가에 대한 영적 청종(聽從)의 문제를 드러낼 때 사용됩니다. 

    대표적으로 연결되는 본문은 예레미야서 6:10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들의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1. 하나님의 탄식의 질문

    “누구에게 듣게 할까?”는 정보 전달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상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는 상태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문제는 대부분 말씀 부족이 아니라 청종의 부재입니다.

    1.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2. 선지자는 전한다
    3. 그러나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질문하십니다.

    “누구에게 듣게 할까?”

    이 질문은 사실상 “누가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라는 뜻입니다.  

    2. 귀의 할례 (영적 청력의 문제)

    예레미야는 문제의 원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의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귀의 할례

    마음이 열림 
    말씀에 대한 순종 
    영적 민감성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귀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3. 구속사적 흐름 속 질문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반복해서 “듣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시대 질문 의미
           아담 “창세기 어디 있느냐”      하나님을 피한 인간
           가인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양심의 붕괴
           모세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사명의 발견
         이사야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부르심
      예레미야        “누구에게 듣게 할까”       청종의 위기

    여기서 중요한 흐름은  찾음 → 책임 → 부르심 → 청종


    4. 신약에서의 해답

    이 질문의 해답을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즉 하나님 말씀은 항상 선포되지만 듣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말씀을 받아들이는 좋은 땅은 일부입니다.  

    5.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누구에게 듣게 할까?”  
    이 질문은 사실 예레미야 시대만의 질문이 아닙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묻고 계십니다.  

    누가 말씀을 진지하게 들을 것인가?
    누가 말씀을 마음에 받을 것인가?
    누가 말씀을 순종할 것인가?

    결국 이 질문의 답은 한 사람의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주여 내가 듣겠나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찾는 4가지 사람 구조”로 정리해 드릴까요? 

    어디 있느냐 (아담)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가인)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 
    누구에게 듣게 할까 (예레미야)

    성경에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4개의 질문 구조가 있습니다.
    이 질문들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 → 하나님의 부르심 → 사명의 사람으로 이어지는 구속사적 흐름을 보여 줍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찾는 4가지 사람 구조

    창세기 3:9 - 아담 / 
    “어디 있느냐?” — 하나님을 떠난 사람

    의미 / 
    죄로 인해 하나님을 피하는 인간
              
    영적 위치를 잃어버린 상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핵심 메시지 /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이다.

    영적 상태 / 두려움,  숨음,  관계 단절

    구속사적 의미 /  인간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이 먼저 찾으시는 것이다”

    창세기 4:9 - 가인 /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 책임을 잃은 사람

    의미 / 형제가 형제를 죽인 사건 
              인간 사회의 책임 붕괴

    가인의 대답 /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핵심 메시지 /  하나님은 형제를 돌보는 사람을 찾으신다.

    영적 상태 / 양심 마비,  책임 회피,  사랑 상실

    구속사적 의미  / 인간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 + 사람과의 관계를 동시에 파괴한다. 

    이사야 6:8 - 이사야 /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 사명의 사람

    이사야의 응답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의미 /  하나님은 사명을 맡길 사람을 찾으신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참여할 사람

    핵심 메시지  /  하나님은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을 찾으신다.

    영적 상태  /  회개,  정결,  헌신

    구속사적 의미  / ➡ 구원받은 사람은 보냄 받은 사람이 된다. 

    예레미야 6:10 - 예레미야 /  “누구에게 듣게 할까?” — 말씀을 받을 사람

    의미  /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시대
                
    하나님이 찾는 것은 듣는 사람

    핵심 메시지  /  하나님은 말씀을 듣고 반응하는 사람을 찾으신다.

    영적 상태  / 귀가 열림,   마음이 부드러움,  순종 

    구속사적 의미  /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을 듣는 사람을 통해 이루어진다.

      정리 (구속사적 흐름)

    단계 질문 인간 상태         하나님이 찾는 사람
    1        어디 있느냐         하나님을 떠난 인간                  하나님께 돌아올 사람
    2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사랑과 책임 상실                  형제를 돌보는 사람
    3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사명 공백                    헌신하는 사람
    4      누구에게 듣게 할까             말씀 거부                        말씀을 듣는 사람

    한 문장으로 정리 /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1.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
    2. 
    형제를 책임지는 사람
    3. 
    사명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
    4.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


    3월 9일(월) 예레미야 1:1-1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엇을 보느냐?(11절)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me: "What do you see, Jeremiah?" "I see the branch of an almond tree," I replied.

    무엇을 보느냐?(What do you see?)

    성경에서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던지신 매우 중요한 계시적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단순히 시각적인 관찰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현실을 보는 영적 통찰을 묻는 질문입니다. 
    대표적인 장면이 예레미야 1장입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하신 첫 질문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렘 1:11)

    예레미야의 대답  /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의미  /  히브리어  발음이 같은 언어적 계시

    살구나무 : 샤케드 (שָׁקֵד, shaqed)  
    지켜보다 : 쇼케드 (שֹׁקֵד, shoqed)

    שָׁקֵד Storng number 8247
    1. 살구나무.  2.  살구나무 열매  
    Pronunciation [ shâqêd ]  
    Etymology / 8245에서 유래
     Old Testament  /  4회 사용
    • 1. 명사, 남성 살구나무, 렘1:11
    • 2.명사, 남성 살구나무 열매, 창43:11, 민17:23(8),전12:5.
    • 관련 성경  / 감복숭아(창 43:11), 살구 열매(민 17:8), 살구나무(전 12:5, 렘 1:11).


    שָׁקַד Storng number 8245

    1. 밤을 새우다.  2. 경계하다.  3. 주목하다  
    Pronunciation    [ shâqad ]  
    Old Testament  /  18회 사용
    • 1. 원형
      • a. 원형 [잠을 안 자고] 밤을 새우다, 시102:8.
      • b. 원형 경계하다, 경성하다, 지키다, 스8:29, 시127:1
    •  2. 원형 [비유적인 의미로]
      •  a. 원형 [עַל을 수반하여] 주목하다, 주의하여 보다, 욥21:32, 렘1:12, 31:28,44:27, 단9:14.
      •  b. 원형 엿보다[עַל을 수반하여], 렘5:6.
    • 문법설명 / 미완료형 ׃יִשְׁקֹד
    • 관련 성경 / 새우다(시 102:7), 깨어있다(시 127:1, 렘 31:28, 44:27), 기다리다(잠 8:34), 지키다(스 8:29), 엿보다(사 29:20, 렘 5:6), 보다(렘 1:21).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이 말은 조선 정조 때의 문장가 유한준(兪漢雋)

    이는 정조 때의 문장가인 유한준(兪漢雋, 1732 - 1811)이 당대의 수장가였던 김광국(金光國)의 화첩 석농화원(石農畵苑)의 부친 발문에서 따온 것입니다.

    ‘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 

     ( 지즉위진애 애즉위진간 간즉축지이비도축야 )

    이를 옮기면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입니다.

    하나님의 해석  /  “내가 내 말을 지켜 이루려 함이니라”   

    핵심  /  살구나무는 봄에 가장 먼저 피는 나무입니다.
                 즉 하나님은 말씀을 깨어 지켜 신속히 이루시는 분이라는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다시 물으신 질문

    “네가 무엇을 보느냐?” (렘 1:13)

    예레미야의 대답  /  “끓는 가마를 보는데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의미  /  북쪽에서 오는 심판,  역사적으로 바벨론의 침입

    핵심 /  첫 번째 환상 → 말씀의 성취
               두 번째 환상 → 심판의 실행

    영적 구조

    하나님의 질문 → 인간의 시선 → 하나님의 해석

    1. 하나님이 질문하신다 
    2. 사람이 본 것을 말한다 
    3. 하나님이 그 의미를 해석하신다 

    계시는 보는 것 + 하나님의 해석입니다.  

    신학적 핵심

    “무엇을 보느냐?”는 질문은 사실

    1.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
    2.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3. 시대의 징조를 볼 눈이 있느냐?  
    를 묻는 질문입니다.  

    성경 전체 흐름 속 질문

    이 질문은 성경에서 반복되는 영적 질문의 흐름 안에 있습니다.

     아담 / “네가 어디 있느냐?” – 존재의 질문
    가인 /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 관계의 질문
    모세 /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 사명의 질문 
    예레미야  / “네가 무엇을 보느냐?” – 영적 인식의 질문 (예레미야)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던진 7개의 질문 구조

    성경에서 하나님의 질문은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인간을 깨우는 구속사의 질문입니다.
    창세기에서 시작해서 이사야까지 흐름이 이어집니다.

    단계 하나님의 질문 본문 의미
    1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타락한 인간의 영적 위치
    2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 4:9        인간의 관계 책임
    3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창 4:10         인간의 죄의 행위
    4     사라가 어디 있느냐       창 18:9            언약의 계보 확인
    5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출 4:2          하나님이 쓰시는 사명의 도구
    6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왕상 19:9,13             사명자의 영적 상태
    7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사 6:8         구속사의 사명 부르심

    구조 흐름   

     존재 질문 → 관계 질문 → 죄 질문  
    → 언약 질문 → 사명 도구 질문
     → 사명 상태 질문 → 사명 파송 질문

    구속사적 흐름

    아담 — 존재 문제
    가인 — 죄 문제
    아브라함 — 언약 문제
    모세 — 사명 문제
    엘리야 — 사명 회복
    이사야 — 구속 사명 파송

    결국 마지막 답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의 질문 → 인간의 각성 → 사명자의 탄생 이라는 구조입니다.  

    예레미야의 두 환상 구속사적 해부

    예레미야 1장에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부르실 때 두 개의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환상       본문 의미
    살구나무 가지      렘1:11      말씀 성취
    끓는 가마      렘1:13         심판

    1. 살구나무 가지 환상

    살구나무 히브리어   /  שקד (샤케드)
    뜻 = 깨어 있음

    하나님 말씀 / 내가 내 말을 지켜 이루려 하노라  

    의미  /  하나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

    살구나무 특징

    1. 
    이스라엘에서 가장 먼저 피는 나무
    2. 깨어있는 나무

    구속사 의미  /  하나님은 역사를 깨어서 지켜보시는 분

    2.  끓는 가마 환상

    북쪽에서 기울어진 가마

    의미 - 북쪽에서 심판이 온다

    역사적 성취 - 바벨론 침략

      두 환상의 구조

    환상      의미      구속사
    살구나무      말씀 성취       하나님의 약속
    끓는 가마         심판     죄에 대한 결과

    구조 /  말씀 → 경고 → 심판 → 회복 

    더 깊은 구조 / 예레미야 두 환상은 사실

    단계    구속사
    말씀 선포        선지자
    경고        회개 촉구
    심판        역사적 심판
    회복       메시아 약속 

     주제의 연결  / 놀랍게도 두 구조는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질문        예레미야 환상
    인간을 깨움 선지자를 깨움
    사명을 묻음 사명을 보여줌
          파송       예언

    질문은 인간을 깨우는 방법
    환상은 선지자를 깨우는 방법


    성경에서 “살구나무”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이루시는”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본문 /  예레미야 1:11–12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살구나무 가지니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이루려 함이니라.

    가지(4731) 마켈  מַקֵּל
    Storng number 4731

    1. 어린 가지.  2. 창
     Pronunciation [ maqqêl ]


    Etymology  /  연계형 מַקִּל 렘1:11, מַקַּל 창30:37, 복수 מַקְּלוֹת, ‘싹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Old Testament  /  18회 사용
    • 1. 명사, 남성 어린 가지, 회초리, 지팡이, 막대, 장대, 삼상17:43
    • 2. 명사, 남성 창, 겔39:9.
    • 관련 성경  / 가지(창 30:38, 39, 41), 지팡이(창 32:10, 출 12:11, 렘 48:17), 막대기(삼상 17:43, 호 4:12, 슥 11:10), 몽둥이(겔 39:9).


    1. 살구나무의 히브리어 의미

    히브리어에는 언어적 연결이 있습니다.

    단어 히브리어 의미
    살구나무  שָׁקֵד (샤케드, shaqed)      깨어 있는 나무
    지키다   שֹׁקֵד (쇼케드, shoqed)       깨어 지키다

    발음이 거의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어적 상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살구나무 : 깨어있는 나무
    하나님 : 말씀을 깨어 지키시는 분

    2. 왜 살구나무인가

    살구나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먼저 꽃이 피는 나무입니다.  
    겨울이 끝나기도 전에 가장 먼저 깨어나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살구나무를 “깨어 있는 나무” 라고 불렀습니다. 
    즉 의미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말씀을 이루기 위해 깨어 지키신다.

    3. 구속사적 의미

    살구나무 환상은 단순한 자연 설명이 아니라 예레미야 사명의 선언입니다.

    구조는 이렇게 됩니다.

    1️⃣ 하나님이 질문
    → “네가 무엇을 보느냐”

    2️⃣ 예레미야가 봄
    → “살구나무 가지”

    3️⃣ 하나님이 해석
    → “내가 내 말을 지켜 이루겠다”

    즉 환상 → 해석 → 사명

    4. 신학적 핵심

    살구나무의 메시지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반드시 이루신다

    이사야 55: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가 뜻한 바를 이루리라.  

    5. 더 깊은 영적 의미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먼저 묻습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왜냐하면 보는 것이 사명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 무엇을 보느냐
      → 무엇을 믿느냐
      → 무엇을 전하느냐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눈을 열어 주십니다.  

    6. 한 문장 정리

    살구나무 : 하나님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 깨어 지키신다는 표징

    예레미야의 두 환상 구조 /  살구나무 + 끓는 가마
    본문 : 예레미야 1:11–14

    첫 번째 환상 — 살구나무 가지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이루려 함이라

    핵심 히브리어

    살구나무 : שָׁקֵד (shaqed)  
    지켜보다 / 지키다 : שֹׁקֵד (shoqed)  

    언어적 말장난(paronomasia)

    살구나무 (shaqed)
    → 하나님이 지켜보신다 (shoqed)

    의미  /  살구나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먼저 피는 나무 따라서 상징은 하나님 말씀의 신속한 성취

    구조

    상징 의미
    살구나무                  하나님의 말씀
    가장 먼저 피는 나무               말씀의 빠른 성취
    지켜봄            하나님이 말씀을 책임지고 이루심

    핵심 메시지
    하나님은 말씀을 지켜보고 계신다

    ② 두 번째 환상 — 끓는 가마

     
    “내가 끓는 가마를 보는데 그 면이 북쪽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끓는 가마(시르 나푸아흐)
    끓는 가마(시르 나프아흐)

    5518.
    가마(시르.  çîyr)  סִיר
    Storng number 5518

    1. 주전자.  2. 복수 סִירוֹת 왕상7:45.  3. 복수 סִירִים
    Pronunciation [ çîyr ]
    Etymology /  혼성 ‘끓어오르다’는 뜻의 어원에서 유래
    Old Testament  /  29회 사용
    관련 성경  / 가마(출 16:3, 시 58:9, 겔 11:11), 통(출 27:3, 38:3, 시 60:8), 솥(왕상 7:45, 대하 4:16, 슥 14:20), 가시나무(전 7:6, 사 34:13), 가시(호 2:6), 낚시(암 4:2), 가시덤불(나 1:10).

    5301. 끓는(나프아흐. nâphachנָפַח

    1. 불다.  2. 입김을 불다.  3. נָפַח בְּאֵשׁ: 불을 보내다  
    Pronunciation [ nâphach ]
    Old Testament  /  12회 사용
    관련 성경  / 기절하다(렘15:9), 불다(겔22:21, 37:9, 사54:16), 불어 버리다(학1:9), 불어넣다(창2:7), 끓다(욥41:20, 렘1:13), 피우다(욥20:26),잃다(욥31:39).


    하나님의 해석  
    “북방에서 재앙이 이 땅 모든 주민에게 임하리라”   

    상징 의미
    끓는 가마        하나님의 심판
    북쪽           바벨론
    기울어짐       쏟아질 심판

    두 환상의 연결 구조

    환상 의미
    살구나무        하나님이 말씀을 지켜보심
    끓는 가마         그 말씀대로 심판이 옴

    즉  말씀 → 감시 → 성취    

    구속사 구조  

    하나님 말씀 선포  
     ↓
    하나님이 지켜보심 
     ↓
    역사 속 성취

    성경에서 “지키다(שקד)” 신학

    히브리어  /  שקד (shaqad)  
    뜻  /   깨어 있다,  지켜보다,  주목하다,  감시하다   

    핵심 의미 / 하나님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 깨어 계신다

    예레미야 1:12
    내가 내 말을 지켜 이루려 한다

    예레미야 31:28
    내가 그들을 뽑고 파괴하기 위해 지켜본 것 같이 다시 세우기 위해 지켜볼 것이다

    신학적 의미

    “지키다”는 단순 보호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적 개입  

    구조  
    말씀 선포
     ↓
    하나님의 감시 (שקד)  
    ↓  
    역사 속 성취

    하나님은 말씀의 책임자

    살구나무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 연결 

    민수기 17장

    고라의 반역 후 하나님이 제사장 선택을 증명

    사건

    12지파 지팡이 중 아론의 지팡이만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살구 열매가 맺힘  

    왜 살구인가?  
    살구나무는 가장 먼저 깨어나는 나무 
    따라서 상징 하나님의 선택

    구속사 연결

    사건 의미
    예레미야 살구나무       하나님이 말씀을 지켜봄
    아론의 싹난 지팡이        하나님이 선택을 증명
    공통 상징         하나님의 깨어 있음 

    더 깊은 구조     

    살구나무 (깨어 있음) 
     ↓  
    하나님이 말씀을 지켜봄 
     ↓
    아론의 지팡이 싹   

    하나님의 선택 증명  

    구속사적 확장 (중요)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부활의 그림

    왜냐하면 죽은 막대기에서 생명이 나왔기 때문 그래서 연결은 이렇게 됩니다.  

    아론의 지팡이 (죽은 막대기 → 생명) 
     ↓
    예수의 부활 
     ↓
    하나님의 약속 성취  

    세 구조를 한 번에 정리

    주제 의미
    살구나무 환상          하나님이 말씀을 지켜봄
    끓는 가마                      심판
    아론의 지팡이        하나님이 선택과 생명을 증명

    결론 /  하나님은 말씀을 지켜보시고 반드시 이루신다

    1️⃣ 살구나무 → 메노라(성전 등잔대) 연결 
    2️⃣ 살구나무 → 부활 신학 
    3️⃣ 성경의 “깨어 있음” 신학 (파수꾼, 살구나무, 재림)

    아주 중요한 세 가지 연결입니다. 
    이것을 하나의 구속사적 흐름으로 보면 성경이 놀랍게 연결됩니다. 

    1️⃣ 살구나무 → 성전 등잔대(메노라)  
    살구나무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성막 기구 디자인의 핵심 상징입니다.

    출애굽기 25:31–34

    성전 등잔대(메노라)는  
    살구꽃 모양 잔 
    꽃받침 
    꽃 
    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등잔대 전체가 “살구나무” 형태입니다.

    왜 살구나무인가?

    히브리어 연결 때문입니다. 
    살구나무 → שָׁקֵד (shaqed)  
    지켜보다 / 깨어있다 → שֹׁקֵד (shoqed)

    에례이먀 Jeremiah 1:11–12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았나이다.
    내가 내 말을 지켜 이루려 함이라

    하나님의 메시지는 “나는 깨어서 내 말씀을 지키는 하나님이다.”

    정리

    살구나무 → 등잔대 → 하나님의 깨어있는 임재

    즉 빛 + 깨어 있음

    살구나무 → 부활 신학

    살구나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먼저 꽃피는 나무입니다.
    겨울이 끝나기도 전에 꽃이 피기 때문에 유대 전통에서는 “깨어난 나무” 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생명 회복의 상징이 됩니다. 
    이 개념이 성경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아론의 지팡이 사건 
    민수기 17장 /  죽은 막대기,  하루 만에,  싹 + 꽃 + 열매  

    이 지팡이 역시 살구 열매였습니다.

    즉 죽음 → 생명

    그래서 교부들과 신학자들은 이것을 부활의 예표로 보았습니다.

    이 흐름은 결국 →  Jesus Christ의 부활로 완성됩니다.

    죽은 나무가 살아난 것처럼 십자가의 죽음에서 새 생명이 나타난 것입니다.  

    성경의 “깨어 있음” 신학 
    (살구나무 → 파수꾼 → 재림)

    성경에는 하나의 큰 신학이 있습니다.

    “깨어 있음”

    이것이 세 단계로 발전합니다. 

    ① 하나님이 깨어 계심

    예레미야 1:12  /  내가 내 말을 지켜 이루려 한다

    여기서  지키다 = 깨어있다

    하나님은 역사를 깨어 지켜보시는 분입니다. 

    ② 선지자는 파수꾼

    예를 들어 Book of Ezekiel 33:7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선지자의 역할 /  경고,  깨어 있음,  말씀 전달  
    즉 살구나무의 역할을 인간이 수행

    ③ 교회는 깨어 있는 신부

    예수님의 경고 

    Gospel of Matthew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또 Gospel of Matthew 25장

    열 처녀 비유  
    슬기로운 처녀 → 깨어 있음  
    미련한 처녀 → 잠

    구속사적 연결 구조

    이 세 가지를 연결하면 놀라운 흐름이 나옵니다.  

    살구나무 (깨어 있음) 
     ↓
     성전 등잔대 (빛과 깨어 있음) 
     ↓
     아론의 지팡이 (생명 회복) 
     ↓
     예레미야 환상 (하나님이 깨어 지키심) 
     ↓
     선지자 파수꾼 
     ↓
     예수의 명령 (깨어 있으라) 
     ↓
     재림 준비

    즉 살구나무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깨어있는 하나님 
     부활 생명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을 모두 담고 있는 상징입니다.



    성경을 전체 흐름으로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던진 질문들이 구속사의 단계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질문들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계획을 열어가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7가지 질문 구조” 

    1.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9 

    • 대상 : 아담

    • 의미 : 타락한 인간의 상태를 묻는 질문

    핵심  /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숨음

    • 하나님은 위치를 묻지만 사실은 영적 상태를 묻는 것

    구속사 의미  /  타락한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

    2.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4:9

    • 대상 : 가인

    • 의미 : 인간의 관계와 책임

    핵심  /  죄는 하나님 관계뿐 아니라 형제 관계를 파괴

    구속사 의미  /  사랑과 책임의 상실 


    3.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출애굽기 4:2

    • 대상 : 모세

    핵심  /  모세 : “지팡이입니다”

    의미  /  하나님은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있는 것을 사용

    구속사 의미

    • 평범한 지팡이 →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 

    4.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열왕기상 19:9, 13

    • 대상 : 엘리야

    핵심  /  낙심하여 동굴에 숨어 있음

    의미  /  사명을 잊은 영적 탈진

    구속사 의미  /   하나님은 낙심한 선지자를 다시 사명으로 회복

    5.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열왕기상 3:5

    • 대상 : 솔로몬

    핵심  /  하나님이 인간에게 소원을 묻는 질문

    의미  /  인간의 마음의 중심을 드러냄

    솔로몬의 대답  /  지혜로운 마음

    6.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 6:8

    • 대상 : 이사야

    핵심  /  하나님이 사명을 맡길 사람을 찾는 질문

    이사야의 대답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구속사 의미  /  하나님의 일은 자원하는 사람을 통해 이루어짐

    7.  “네가 무엇을 보느냐?”

    예레미야 1:11, 13

    • 대상 : 예레미야

    핵심 /  살구나무 환상,  끓는 가마 환상


    의미 /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영적 시각

    구속사 의미 / 선지자는 세상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사람


    📊 성경의 7가지 질문 구조

    단계 질문 의미
     1             어디 있느냐        인간의 타락
     2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인간 관계의 죄
     3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
     4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영적 탈진
     5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마음의 중심
     6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의 부르심
     7     무엇을 보느냐            영적 시각

    이 질문들의 흐름 (구속사) /  타락 → 책임 → 부르심 → 회복 → 소원 → 사명 → 계시 
    즉  아담 → 가인 → 모세 → 엘리야 → 솔로몬 → 이사야 → 예레미야 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인간 교육 과정입니다.



    성경에서는 “영의 눈이 열리는 사건”이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단순히 육체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되는 영적 시력입니다.
    대표적으로 5개의 사건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하갈 – 광야에서 눈이 열림 (하나님의 공급을 봄)

    창세기 21:19  /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상황  /  하갈과 이스마엘이 광야에서 죽을 위기  
    눈이 열린 후 / 바로 옆에 있던 우물을 보게 됨
     
    영적 의미  
    1. 하나님은 이미 공급을 준비하셨다
    2. 
    그러나 눈이 열려야 보인다  

    영적 교훈  /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보는 눈

    2️⃣ 발람 – 하나님의 천사를 봄

    민수기 22:31  /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 길에 선 것을 보니”  

    상황  /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가는 길  

    눈이 열린 후  / 길을 막고 있는 하나님의 사자

    영적 의미  /  죄의 길에는 하나님이 막고 계신다  

    영적 교훈

    영의 눈이 열리면 하나님의 경고와 막으심을 보게 된다.

    3️⃣ 엘리사의 종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군대

    열왕기하 6:17  /  “여호와여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상황  /  아람 군대가 성을 포위  

    눈이 열린 후  / 산에 가득한 불말과 불병거

    영적 의미  /  눈에 보이는 군대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군대가 더 많다  

    영적 교훈  / 
    영의 눈이 열리면  두려움이 믿음으로 바뀐다

    4️⃣ 엠마오 제자 – 예수님을 알아봄  

    누가복음 24:31  /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상황  /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걸으면서도 몰랐음  

    눈이 열린 순간  /  떡을 떼실 때

    영적 의미  /  말씀과 성찬 속에서 눈이 열린다  

    영적 교훈  / 
    예수님은 말씀 속에서 인식된다

    5️⃣ 바울 – 다메섹에서 영적 눈이 열림

    사도행전 9:18  /  “즉시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상황  /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  

    눈이 열린 후  /  예수를 주로 알게 됨

    영적 의미  / 회심은 영적 시력의 회복  

    영적 교훈  /  
    예수를 만나면 세계관이 바뀐다

    정리 : 영적 시력이 열리는 5단계 구조

    단계 사건 영적 의미
    1      하갈           하나님의 공급을 봄
    2     발람           하나님의 막으심을 봄
    3 엘리사의 종           하나님의 보호를 봄
    4 엠마오 제자            예수님을 인식함
    5     바울              완전한 회심

    흐름  /  공급 → 경고 → 보호 → 예수 인식 → 회심

    즉 영적 시력의 성장 과정입니다.  

    흥미로운 사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주 하시는 질문이 있습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이 질문은 선지자들에게 반복됩니다.

    • 예레미야 1:11

    • 아모스 7:8

    • 스가랴 4:2

    즉  영적 사람의 핵심은 보는 능력입니다.


    성경에서 영의 눈을 여는

    성경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질문을 던지실 때 영적 각성이 시작됩니다.
    이 질문들은 사실상 영적 시력을 여는 단계입니다.

    단계 하나님의 질문 대상 의미 영적 시력
    1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아담 죄로 인한 영적 실명 자기 상태 인식
    2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창 4:9) 가인 양심을 깨움 관계의 눈
    3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출 4:2) 모세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 발견 사명의 눈
    4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사 6:8) 이사야 부르심 헌신의 눈
    5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왕상 19:9) 엘리야 영적 방향 회복 사명의 재정렬
    6 네가 무엇을 보느냐 (렘 1:11) 예레미야 영적 환상 하나님의 관점
    7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행 9:4) 바울 영적 눈이 완전히 열림 그리스도 계시

    결론  / 하나님의 질문 = 영적 눈을 여는 도구

    열왕기하 6:17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열왕기하 6:20   
    사마리아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여 이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저희의 눈을 여시매 저희가 보니 자기가 사마리아 가운데 있더라.

    시편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주님을 경외하라

    군터 게벨 윌리엄스(Gunther Gebel-Williams)는 세계 최고의 동물조련사였습니다. 
    10살 때부터 서커스단에서 일했던 군터는 동물조련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습니다. 
    군터는 많은 관객 앞에서 사자와 호랑이를 비롯한 수많은 맹수들을 마치 아기 다루듯이 하며 믿지 못할 공연을 선보였습니다. 
    사자와 호랑이를 마음대로 조종하고 코끼리도 물구나무 서게 하는 군터의 쇼를 보 기 위해 미국 전역이 들끓었습니다. 
    「지상 최대의 쇼」로 유명한 미국의 링링 브라더스(Ringling Bros.) 서커스단은 오직 군터 한 명만을 영입하려고 그의 서커스단을 통째로 구입했습니다. 
    서커스단을 넘어 TV와 영화에까지 출연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던 군터는 최정상의 자리에서 돌연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이유는 맹수가 더 이상 무섭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동물을 다룰 때 더 이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대로는 분명히 큰 사고가 날 것이기에 지금이 바로 은퇴할 때라고 생각 합니다." 
    독생자를 주시고, 우리 대신 죽게 하시기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놀라운 구원을 허락하신 주님의 사랑을 잊지말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을 매일의 삶 속에서 예배하십시오.

    주님,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잠언 22장 4절을 암송하며 주님이 주시는 큰 복을 기억합시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Humility and the fear of the LORD bring wealth and honor and life. 

    무엇을 보느냐?(예레미야 1:11)

    하나님은 무엇을 보느냐? 질문 하셨다 
    예례미야는 살구나무 가지를 본다고 하였는데 이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겠다는 뜻이었다.
    나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며, 무엇을 보고 있는가?


    중독 Addiction.  poisoning
    금단현상 Withdrawal Symptoms

    3월 7일(토) 이사야 6:1-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Then I heard the voice of the Lord saying, "Whom shall I send? And who will go for us?" And I said, "Here am I. Send me!"

    ἀπόστολος, ου, ὁ Storng number 652

    1. 고전 헬라어나 후기 헬라어에서의 ὁ ἀ.는 해양탐험의 대장을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보냄을 받은 자’란 의미가 있었다:
    2. 대의원
    3. 하나님의 사자. 

    Pronunciation [ apŏstŏlŏs ]
     Etymology  /  6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도(마 10:2, 눅 17:5, 롬 1:1), 사자(使者)(빌 2:25), 보내던 사람(행 15:33).

    소명(크래시스. klesis) κλησις.
    •  1. 소명, 부르심

    κλήση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본문은 네 가지 극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첫째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만나 주시는 사건(5절)
    둘째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만나주시고 그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사건(7절) 
    셋째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부르시는 사건(8절)
    넷째는 만군의 여호와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건(8절)

    본문을 통해 이사야를 부르셔서 세상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크신 구속역사에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이로 인해 이 시대에 은혜의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되기를 기도합니다. 

    1.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사 6:1-4)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사 6:1).

    웃시야 왕은 유다의 10대 왕으로 16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52년간 유다를 통치했습니다. 
    웃시야’란 여호와는 강하시다란 뜻입니다. 
    그는 그의 이름대로 유다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중농정책을 써서 식량 문제를 해결하여 자급자족하도록 했습니다. 
    성을 건축하고 방패와 갑옷과 활 등 신무기를 만들어 국방을 튼튼히 하여 외세의 침략을 막았습니다. 
    더 나아가 강대국으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했습니다(대하 26:1-15).

    외적으로 볼 때 유다는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내적으로 보면 유다는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웃시야왕이 성전에서 분향하다가 나병이 든 사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왕은 아무리 훌륭한 치적을 쌓았다 할지라도 성전에 가면 제사장들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많은 충신들의 반대를 무릎 쓰고 성전에 나가 분향했습니다. 
    분향은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습니다. 
    그는 교만하여 자기 위치를 이탈했습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게 됩니다. 
    천사장이 사탄으로 전락한 것도 자기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교만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건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첫 사람 아담이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 되고자 하는 교만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에덴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도 교만하여 못쓰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잠언 16:18).

    반면에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라고 했습니다(잠언 15:33, 18:12). 
    그래서 성경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벧전 5:5). 
    사람이 특히 무슨 일이 잘 된다 싶을 때에 겸손해야 합니다. 
    사람이 어렵고 힘들 때는 겸손하게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무엇이 되는 듯싶으면 교만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여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잘 지켜야 합니다.

    이제 웃시야 왕이 죽자 나라는 점점 기울어갔습니다. 
    열강들은 유다를 넘보기 시작했습니다. 
    북쪽에서는 앗수르가 고개를 들고 동쪽에서는 신흥제국 바벨론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쪽에서는 애굽이 호시탐탐 유다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유다의 번영과 영광은 웃시야 왕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대는 한마디로 흑암과 고난이요 빛은 구름에 가려서 어두웠습니다(이사야 5:30).

    이사야는 그 시대를 보고 절망하여 탄식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영원히 버리셨단 말인가?” 
    사람들은 대개 세상이 어둡고 장래가 불안하고 비전이 보이지 않으면 술을 마시고 점쟁이와 신접한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절망의 때에 만군의 보좌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에 이사야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우리 또한 무슨 일이 잘 안되고 힘들고 절망적일 때 만군의 여호와의 보좌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기도할 때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보좌’는 왕이 앉는 자리로 통치권을 뜻합니다. ‘높이 들린 보좌’는 그 통치와 왕권의 존귀함과 영광을 말합니다.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계에 미치고 있음을 뜻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스랍들’하나님을 모시고 서 있었습니다. 스랍들은 여섯 날개를 가졌는데, 그 둘은 자신의 얼굴을 가렸고, 그 둘은 발을 가렸고, 둘은 날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개의 날개로 날면서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사 6:4).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사 6:3).

    한쪽에서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화답했습니다. 요한은 이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계 4:8하).

    그들이 얼마나 찬양을 열심히 했는지 문지방의 터가 요동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연기가 충만했습니다(사 6:4). ‘연기가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뜻합니다(출 19:18). 이처럼 찬양은 예배당의 문지방이 들썩들썩할 때까지, 하나님이 임재하시기까지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찬양해야 합니다. 형식적으로 붕어 입처럼 입만 벌리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사야에게 이런 이상을 보여 주셨을까요? 지금까지 이사야는 웃시야가 통치하고, 세계는 열강들이 다스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약소국인 유다를 바라볼 때 소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한 것이 아니라 실업자가 온 땅에 충만하고, 바탄과 원망이 충만하게만 보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찬양이 나올 리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랍들은 만군의 여호와를 찬양했습니다. 이는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세계 만민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선하신 계획대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 개인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되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거룩하다’는 뜻은 분리되었다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피조물과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천사들도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 안에 내주해 계십니다. ‘거룩하다’란 뜻은 도덕적으로 순결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십니다. 우리가 바로 도덕적으로 거룩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정결함을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날마다 내주하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보배로운 피로 주홍같고 진홍같은 죄를 눈과 같이 양털 같이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2.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사 6:5)

    이사야는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뵙자 압도당하여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바라보니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지금까지 이사야는 그래도 자신은 이 시대에 의식이 있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자기 자신의 입술이 부정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자기 자신이 잘난 것같이 생각되고, 거룩한 것 같이 생각되고, 아주 괜찮은 사람처럼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자기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죄인인가를 알게 됩니다. 
    이게 참된 자기 발견입니다.

    일찍이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골몰히 생각하고 자기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습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며, 중간자이다’라고 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한계내의 존재’라고 했고, 
    샤르트르는 ‘인간은 소욕의 이리(wolf)다’라고 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내던져진 존재’라고 했습니다. 
    토인비는 ‘인간은 무한히 잔악해질 수 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마틴 부버는 ‘인간은 대화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이들의 생각은 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일부분을 얘기할 뿐이지 인간의 참된 실존을 말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했습니다(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롬 3:23). 
    이것이 인간에 대한 정확한 진단입니다. 
    우리가 나와 너 사이에서 자신을 바라보면 좀 의롭고 거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만군의 여호와께 나갈 때 인간은 모두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됩니다.

    누가복음 5장에 시몬 베드로가 나옵니다. 
    그는 성실하고 또 열심히 일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거룩하신 예수님을 뵈었을 때 죄인으로서의 자기모습을 발견하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하).

    이사야는 지금까지 시대 문제를 놓고 고민했지만 이제 자신의 죄 문제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입술이 부정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입으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뉴스를 볼 때마다 그 시대 지도자들을 비판했습니다. 
    입만 열면 남을 비판하고 상처주고, 그리고 자기를 자랑하는 교만한 말을 쏟아내었습니다.

    이는 이사야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입니다. 
    성경은 세치 밖에 안되는 혀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시인은 말 한마디란 주제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사람을 파괴한다. 
    쓰다란 말 한마디가 증오의 씨를 뿌리고, 무례한 말 한마디가 사랑의 불을 끈다. 
    반면에 은혜로운 말 한마디가 길을 평탄하게 하고, 즐거운 말 한마디가 하루를 빛나게 한다. 
    때에 맞는 말 한마디가 긴장을 풀어 주고, 사랑의 말 한마디가 축복을 안겨준다.”

    또 성경은 말의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약 3:2). 
    말은 인격과 사상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인격에 따라서 말의 표현도 달라집니다. 
    은혜로운 사람들은 은혜로운 말을 합니다. 
    복수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말의 표현이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용서와 사랑이 있는 사람들은 용서와 사랑이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말을 잘 하려면 인격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백성이 돼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 나라의 천상의 언어가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언어가 달라져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위로를, 은혜가 필요한 사람에게 은혜를, 믿음이 필요한 사람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3.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 6:6-7)

    이사야는 자기 죄를 발견하고 마음으로 회개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심판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스랍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입술에 대며 말했습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사 6:7).

    ‘핀 숯’은 죄를 소멸하고 태우는 성령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불로 이사야의 악과 죄를 태우시고 정결하게 해주셨습니다. 
    ‘입술에 핀 숯을 대었다’는 것은 입만을 구원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모든 인격을 구원했다는 뜻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온전히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먼저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능력이 많고, 많은 것을 안다 할지라도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능력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그 능력을 가지고 죄 짓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죄가 있으면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능력은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 용서의 사랑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어리석어 보이지만 지혜롭고, 약해 보이지만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아야 시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죄를 사함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안일, 시기심, 정욕, 미움, 질투, 불신, 원망, 부정적인 생각, 악한 생각 등의 죄를 사함 받아야 합니다.

    4. 내가 여기 있나이다(사 6:8)

    이사야는 죄 사함을 받은 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바로 앞에 두고 간절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사 6:8상).

    이는 이사야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란 성 3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시대가 아무리 악하고 힘들다 할지라고 시대마다 사람을 부르셔서 구원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이 가득한 시대에 노아를 부르셔서 구원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가 가득하던 시대에 아브라함 한사람을 부르셔서 구원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말씀이 없어 자기 본성대로 사는 사사 시대에 기드온을 부르셔서 구원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패역한 시대에 이사야를 부르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 말씀은 죄로 죽어가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세상만민을 구원하기 위해 선교사를 찾고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꾼을 찾으실 때 일방적으로 부르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자발적이고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인격적입니다. 세상에는 구원할 사람은 많은 데 이들을 도울 사명자가 적습니다. 추수할 곡식은 희어져 있는데 거둘 일군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7-38).

    이 때 이사야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8하).

    이사야는 본래 왕족 출신입니다. 이사야의 아버지는 웃시야 왕과 형제요,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과 친구입니다. 그는 여러 이유를 들어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르심을 순종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자기 의나 불의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가정형편과 장래 등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악 된 시대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했습니다.

    부르심에 대한 그의 순종은 하나님께 자기를 맡기는 결단이요, 사명자로 살고자 하는 위대한 결단입니다. 그가 이렇게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의 부르심은 불가항력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캠퍼스로 갈꼬?” “누가 우리를 위하여 세상으로 갈꼬?” 이 때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어 주소서.”

    이사야서 6장 9-10절은 이사야가 전해야 할 메시지 내용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되 귀에 간지러운 말만 들었습니다. 오늘날도 은혜, 축복 등의 메시지만 즐겨 듣습니다. 회개의 메시지나 십자가의 메시지는 귀를 닫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회개의 메시지를 전해야 했습니다. 이사야는 어느 때까지 회개의 메시지를 전해야 하느냐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성읍이 황폐하여 주민이 멀리 옮길 때까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심판은 예외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도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겨놓으십니다.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입니다. 이 거룩한 씨는 하나님께서 남겨 놓은 자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환난과 연단 가운데서도 중심을 지킨 정금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소망의 싹들입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통해 역사합니다. 아무리 어두운 시대라 할지라도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엘리야 시대 7,000명이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12명의 예수님이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남겨 놓으시는 거룩한 씨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시대마다 남은 자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역사는 남은 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만민을 통치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으로 일꾼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절망적인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세계 만민 구원역사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who will go for us?)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 질문은 단순한 사역자를 찾는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역사 속에서 사람을 부르시는 소명(Call)의 질문입니다. 

    1. 하나님이 “누가”라고 물으신 이유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질문하신 이유는 자발적 헌신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강요된 순종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 응답을 원합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명령으로만 쓰지 않고 초청으로 부르십니다.

     2. “우리를 위하여”의 의미

    “우리를 위하여”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독특합니다.

    신학적으로 보통 세 가지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위엄적 복수 (왕의 표현)
    하늘 회의 (하나님과 천상 존재들)
    삼위 하나님의 암시

    특히 기독교 신학에서는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3. 이 질문이 나온 배경

    이 질문은 바로 앞에 이사야의 정결 사건 뒤에 나옵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봄 (거룩)
    자신의 죄를 봄
    숯불로 정결함
    하나님의 질문
    이사야의 응답

    즉 정결 → 소명입니다. 

    4. 이사야의 응답

    이사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흥미로운 점은 어디로 갈지 묻지 않았고,  무엇을 할지 묻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소명의 본질입니다.

     5. 성경 전체 흐름 속의 질문

    성경에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던지는 중요한 질문들이 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 인간의 타락 (아담)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 책임 (가인)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 구속 사명 (이사야)  
    즉 타락 → 책임 → 사명의 흐름입니다. 

    정리하면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사람을 찾는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 역사에 동참할 사람을 부르는 질문입니다. 

    사명(mission)과 소명(calling)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 중에 '소명' (Calling)과 '사명' (Mission)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의외로 '소명'과 '사명'이란 말을 혼용해서 사용합니다. 

    때론 거의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두 단어가 얼핏 비슷하게 보이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이 둘의 차이를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소명 (Calling) - 하나님께서 부르심

    소명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 (Call)는 뜻입니다. "너는 나의 자녀로서 이렇게 살아라"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자 관계의 시작이죠.

    소명은 특정한 직업이나 역할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는 일입니다. 어떤 분은 '소명'은 목회자에게 해당되고, '사명'은 평신도에게 해당된다는 말을 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가 되든, 교사가 되든, 사업가로 일하든 - 그 형태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어나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예레미야 1:5)

    소명은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선택하신 일입니다. 따라서 소명은 변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바뀌어도, 직업이 바뀌어도, 소명은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 받은 자"라는 본질 안에 머뭅니다.

    소명의 핵심 :

    • 하나님이 나를 왜 부르셨는가
    • 나의 존재 정체성
    • 변하지 않는 본질
    •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출발

    사명 (Mission) - 부르심에 대한 응답과 실행

    반면 사명은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에 응답하여 행하는 구체적인 일입니다. 즉, 소명이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이유"라면, 사명은 "그 부르심에 내가 순종하며 세상 속에서 감당하는 일"입니다.

    사명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은 청년 시절에 선교사로 부름받았다가, 인생의 후반부에는 목회자나 상담가로 사명을 감당할 수도 있습니다. 소명은 본질이고, 사명은 그 본질의 실행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마태복음 28:19)

    사명은 곧 '하나님께 받은 임무 (Mission)'입니다. 그분의 뜻을 세상 속에서 구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며, 그분의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는 구체적 발걸음이 바로 사명입니다.

    사명의 핵심 :

    • 부르심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 행동의 방향성
    • 시대와 역할에 따라 변할 수 있음
    • 세상 속에서의 구체적 실천

    한눈에 보는 소명과 사명의 차이

    구분 소명 (Calling) 사명 (Mission)
      의미          하나님의 부르심               부르심에 대한 응답과 실행
     본질         존재의 정체성                       행동의 방향성
     지속성          변하지 않음               시대와 역할에 따라 변함
    예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 받음            교사로서 아이들을 사랑으로 가르침

    소명과 사명,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우리의 인생에서 '소명'은 방향의 나침반이고, '사명'은 그 방향을 따라 걷는 발걸음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소명'이 하나님의 부르심 그 자체라면 '사명'은 그 부르심의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잊지 않으려면, 먼저 기도와 묵상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소명 위에서, 하나님이 지금 내게 맡기신 사명이 무엇인지 민감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때로는 그 사명이 작고 평범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그 일 하나하나가 거룩한 순종의 여정이 됩니다.

    목회자의 경우

    • 소명 : "나는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받았다"
    • 사명 : "이 시대에 말씀을 선포하고, 이 교회 성도들을 섬긴다"

    직장인의 경우

    • 소명 :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이 분야의 청지기로 부름받았다"
    • 사명 : "내 전문성으로 동료를 섬기고, 정직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부모의 경우

    • 소명 : "나는 하나님께 한 가정의 부모로 부름받았다"
    • 사명 : "지금 이 자녀들을 사랑으로 양육하고, 신앙의 본을 보인다"

    소명은 "하나님이 나를 왜 부르셨는가"에 대한 질문, 
    사명은 "그 부르심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작은 사명자들입니다.

    소명 없는 사명은 방향을 잃고 지치기 쉽습니다. 사명 없는 소명은 공허한 관념에 머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명과 사명이 함께할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여정이 됩니다.

    당신의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을 새롭게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부르심이 곧 내 인생의 방향이다."

    소명(Vocation. Calling)이란?

    소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예 : 하나님이 “너를 사용하겠다”는 하나님의 부르심

    • 대표적 성경 예 : 사무엘, 이사야, 바울
    • 이는 정체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소명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사명(Mission)이란?

    사명’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살아내는 삶의 내용입니다.
    예: 교사로 부름받았다면 아이들을 진심으로 섬기는 것이 사명입니다.

    • 소명이 방향이라면,
    • 사명은 실행입니다. 

    요한복음 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나님이 부르셨고(소명),
     우리는 보냄을 받아 살아갑니다(사명). 

    오늘의 기도문
    주님,
    제 인생에 주신 부르심을 깨닫게 하시고,
    그 소명을 따라 하루하루의 사명을 살아가게 하소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서
    진심과 헌신으로 응답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소명과 사명

    소명이라는 말은‘왕이나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명에로의 부름’을 의미하는 말로서 영어로는‘Calling’ 이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임금의 부름을 받은 신하는 임금의 소명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부르는 자의 권위가 지대 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소명을 받는 자는 그 부름을 거역할 수 없었다. 
    소명에는 그저 순종만 있을 뿐이다. 
    임금이 일꾼을 부를 때나, 신이신 하나님이 일꾼을 불러서 맡기는 일들은 국가적인 일이거나 신적인 과업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소명과 함께 따라 다니는 용어인 사명이라는 말은 소명과 발음은 비슷하지만, 내용이 전혀 다른 것으로서, 어떤 책무를 맡은자(혹은 소명을 받은 자)가 당연히 가져야 할 자연스러운 의무나 책임 등을 의미한다. 
    당연히 해야만 할 어떤 과업이라는 뜻이다. 
    사명이라는 말을 영어로는‘Mission’ 이라고 한다. 
    소명은 부름이고, 사명은 소명 받은 자의 과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소명 없이 사명 없고, 사명감이 없는 자는 당연히 소명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독교인을 가리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택한 자, 혹은 하나님의 부름 받은 자라고도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기독교인이라는 말과 교회라는 말이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를 헬라어로 에클레시아(Ekklesia) 라고 하는데, 이 말은‘부르다’, ‘불러내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품으로, 죄악으로부터 영생으로, 마귀의 자녀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기독교인은 소명을 받은 자들이며 각기 개별적인 교회라고도 말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4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들을 포함한 모든 기독교인은, 마땅히 사명을 지닌 일꾼으로 여겨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 즉 소명을 받은 자들에게는 오직 충성뿐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모든 기독교인은 누구나 소명을 받은 자들이며, 그들에게는 각기 중대한 사명이 맡겨져 있다는 것이다. 
    목사나 선교사에게만 한정 된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일반적으로 목사나 선교사와 같이 구별된 직분자들에게는 소명과 사명을 요구하고 확인하는 일을 하지만, 그 외의 그리스도인들(자신들을 포함하여)에게는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저 눈에 띄는 일에 부름 받은 사람들을 위한 들러리나 조역, 이들의 사역을 보고 받고 즐기는 관객이나, 혹은 심한 경우에는 그들을 평가하는 자의 자리에 앉고 싶어하는 것이다. 
    잘못된 인식이다. 
    교회의 질서와 효율성을 위하여 직분이 구분되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소명자이며 사명자들 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확실한 자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이며, 이런 사람들이 풍성한 교회만이 건강하게 성장하여 세상을 이기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선지생도들에게 누가 가겠느냐? 질문 하셨을 때 이사야는 자원해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다." 
    자원하는 성도가 되자.

    국내한 기업의 입사시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혼자만 들어갈 수 있는 시험장에는 거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참가자들은 거울을 보고 다음의 세 가지 질문에 답을 해야 했습니다.   

    1. 앞에 있는 사람은 100% 정직한 사람입니까?  
    2. 앞에 있는 사람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까?  
    3.앞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고, 따로 감독관도 없었는데 시험장에 모인 100여명중 합격한 사람은 단 한명뿐이었습니다. 
    바로 모든 질문에 '아니요'라고 답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에겐 100%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할 줄 아는 진짜 정직한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에서 자유 할 수 있는 것도 우리가 강해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오직 주님으로 인해 가능한 은혜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모든 죄와 수렁에서 보호해 주시고 심판에서 구원해 주시며 선한 목자이신 주님 때문에 승리할 수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가십시오.  

    주님, 저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하소서,  
    나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주님의 손에 나의 삶을 맡깁시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의 사명 질문 /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1.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2. 역사 속에서는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래서 질문하십니다.

    1. “누가 갈 것인가?”
    2.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시대에 서겠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사명자를 찾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우리”라는 표현의 신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여기서 “우리”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1. 삼위 하나님의 암시

      • 성부·성자·성령의 공동 사역

    2. 하늘의 천상 회의

      • 하나님과 천군천사들

    많은 신학자들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적 표현으로 보기도 합니다.

    질문 전에 일어난 세 가지 사건

    이 질문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6장에는 세 단계의 영적 경험이 먼저 있습니다.  

    ① 하나님을 봄 (계시)

    “내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를 보았는데” 

    ② 자신의 죄를 봄 (회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③ 죄 사함을 받음 (정결)

    스랍이 제단 숯으로 입술을 정결케 함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질문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즉  계시 → 회개 → 정결 → 사명이라는 구조입니다. 

    이사야의 응답

    이사야는 조건을 묻지 않았습니다.
    어디로 갑니까?  
    얼마나 힘듭니까? 
    보상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 한마디로 응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것이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헌신의 고백 중 하나입니다. 

    성경 속 하나님의 질문 흐름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이 성경에서
    사람에게 질문을 통해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질문 대상 의미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 타락한 인간을 찾는 질문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 책임을 묻는 질문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 사명자를 찾는 질문

    즉 타락한 인간을 찾는 질문 → 책임을 묻는 질문 → 사명자를 찾는 질문으로 발전합니다. 

    정리 /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1. 하나님이 사명자를 찾는 질문
    2. 
    정결케 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부르심
    3.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할 사람을 찾는 음성 입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 작품 개요와 문학적 위상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체코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1984년에 발표한 대표 장편소설로, 20세기 후반 유럽 문학의 결정적 성취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체코슬로바키아의 1968년 프라하의 봄과 그 이후의 소련 침공이라는 격동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네 인물(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와 한 마리 개(카레닌)의 삶과 사랑, 존재의 의미를 다층적으로 탐구한다.

    2. 창작 배경과 철학적 기초

    소설의 핵심 철학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영원회귀(Eternal Return)’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의 ‘경중(輕重, lightness/weight) 이분법’에서 출발한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모든 일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사상으로, 반복되는 삶은 무거운 의미(heaviness)를 부여한다. 
    반대로 단 한 번뿐인 삶은 가볍고, 결과적으로 무의미해진다. 
    쿤데라는 이 두 가지 개념을 인물들의 삶에 투영해,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선택과 운명, 사랑에 어떻게 작동하는지 질문한다.  

    “더 무거운 짐일수록 우리의 삶은 땅에 가까워지고, 더 진실해진다. 
    반대로 완전한 무(無)의 상태, 즉 짐이 전혀 없는 상태는 인간을 공기보다 가볍게 만들어, 땅을 떠나 하늘로 날아오르게 하고, 존재의 절반만을 남긴다.

    3. 주요 인물과 플롯 구조

    소설은 네 명의 인물과 한 마리 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각 인물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극단을 상징하거나, 그 사이에서 방황한다.

    • 토마시(Tomáš) : 프라하의 저명한 외과의사. 자유로운 연애와 쾌락을 추구하지만, 테레자와의 사랑으로 인해 점차 무게를 느끼게 된다. 그는 처음에는 인생의 가벼움을 선택하지만, 결국 사랑과 책임이라는 무게를 받아들인다.

    • 테레자(Tereza) : 토마시의 아내. 내면적으로 깊은 무게와 도덕적 진지함을 지닌 인물로, 토마시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녀에게 사랑은 곧 무거운 짐이자 운명이다.

    • 사비나(Sabina) : 토마시의 연인, 화가. 자유와 반항, 경쾌함의 상징. 그녀는 ‘가벼움’을 추구하며, 사회적·개인적 구속에서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그 가벼움이 때로는 참을 수 없는 공허함으로 다가온다.

    • 프란츠(Franz) : 사비나의 또 다른 연인. 스위스 출신의 교수로, 이상주의적이고 ‘무거움’에 집착하는 인물. 사랑과 신념, 도덕적 사명감 사이에서 갈등한다.

    • 카레닌(Karenin) : 토마시와 테레자가 키우는 개. 인간 관계의 복잡함과는 달리, 순수하고 조건 없는 사랑을 상징한다.

    플롯은 이들의 사랑과 이별, 망명과 귀환, 일상과 역사적 격변을 교차시키며, 존재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다면적으로 해석한다.

    4. ‘가벼움’과 ‘무거움’의 이분법

    쿤데라의 소설은 “존재의 가벼움”과 “존재의 무거움”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중심축으로 삼는다.

    • 무거움(Heaviness, Weight) : 인생의 의미, 책임, 운명, 도덕적 진지함, 반복되는 역사, 사랑의 숙명성 등을 상징한다. 무거움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때로는 인간을 짓누르는 짐이 되기도 한다.

    • 가벼움(Lightness) : 자유, 우연, 쾌락, 계획 없는 삶, 반복되지 않는 단 한 번의 삶, 실존적 공허 등을 상징한다. 가벼움은 해방감을 주지만, 그 ‘참을 수 없음’은 곧 허무와 무의미로 이어진다.

    소설은 이 두 가지 가치가 명확히 선악, 긍정·부정으로 나뉘지 않으며, 인간은 이 양극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고 선택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쿤데라는 “한 번뿐인 삶은 가볍고, 반복되는 삶은 무겁다. 그러나 어느 쪽이 더 나은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독자 스스로의 해석을 유도한다.

    5. 포스트모던 서사 기법과 형식적 특징

    이 소설은 전통적 소설 구조에서 벗어나, 포스트모던 서사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 서사와 논평의 교차 : 쿤데라는 작가로서 직접 등장해, 인물과 사건을 해설하거나 철학적 사유를 삽입한다. 이는 소설의 허구성과 현실, 저자와 인물의 경계를 흐린다.

    • 다성성(Polyphony) : 다양한 인물의 시점과 목소리가 교차하며, 단일한 진리나 의미를 거부한다. 각 인물의 내면과 세계관이 독립적으로 제시된다.

    • 역사와 허구, 사실과 상상의 경계 해체 : 실제 역사적 사건(프라하의 봄, 소련 침공 등)과 허구적 인물의 삶이 뒤섞이며, 역사적 진실의 절대성을 해체한다.

    • 언어와 의미의 해체 : 쿤데라는 언어의 불확정성과 의미의 유동성을 강조하며,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 개념과도 연결된다. 이는 ‘가벼움’과 ‘무거움’의 이분법이 결코 고정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6. 정치적, 사회적 맥락

    소설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체제, 소련의 지배, 개인의 자유와 저항, 망명과 귀환 등 20세기 동유럽의 정치적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 
    쿤데라는 전체주의적 권력, 감시, 사회적 규범이 개인의 존재와 선택에 미치는 영향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이는 파놉티콘적 감시(푸코), 비진정성(하이데거), 악의 평범성(아렌트) 등 현대철학의 다양한 논의와도 연결된다.

    7. 심리적· 존재론적 해석

    쿤데라의 인물들은 라캉의 ‘대타자(big Other)’, ‘오브제 프티 아(object petit a)’ 등 심리분석학적 개념으로도 해석된다.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기대, 사회적 규범 사이에서 정체성과 주체성을 끊임없이 재구성한다. 토마시와 테레자의 관계, 사비나와 프란츠의 관계는 사랑의 본질, 자기기만, 타자성, 운명적 만남의 의미를 다층적으로 드러낸다.

    8. 결론 :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그리고 인간의 조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 또는 정치 소설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작품은 “한 번뿐인 삶”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짊어져야 할 무거움을 동시에 응시한다. 
    쿤데라는 “우리는 오직 한 번만 살 수 있기에, 그 어떤 실수도 되돌릴 수 없고, 그 어떤 선택도 절대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실존적 진실을 제시한다. 
    그러나 바로 그 ‘가벼움’이야말로 인간에게 때로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자, 동시에 자유와 해방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현대인의 불안, 사랑의 본질, 역사와 개인의 관계, 언어와 의미의 유동성, 인간 조건의 본질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독자에게 “가벼움과 무거움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쿤데라의 문학적 성취는 바로 이 질문을 단순한 철학적 담론이 아닌, 한 편의 예술적 이야기로 구현해냈다는 데 있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삶과 사랑, 그리고 존재의 무게에 대하여

    1. 작품 소개

    체코 출신의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가 1984년에 발표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20세기 현대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소설은 개인의 내면적 삶과 정치적 현실이 교차하는 복잡한 구조 속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한다. 제목부터가 독자를 사로잡는다. “존재의 가벼움”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참을 수 없다”는 역설은 어떤 의미인가? 쿤데라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출발점으로 삼아, 삶이 단 한 번 주어진 것이라면 그 순간들은 가벼운가 무거운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2. 줄거리 개요

    소설은 크게 네 인물 ― 토마시,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 ―의 삶과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 토마시는 프라하에서 활동하는 외과 의사다. 그는 자유분방한 연애를 즐기며 여러 여성들과 관계를 맺지만, 어느 순간 테레사라는 여인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본성은 여전히 방랑적이고 가벼워, 테레사에게 끝없는 상처를 준다.
    • 테레사는 사진작가로, 토마시와의 사랑 속에서 끊임없이 고통받는다. 그녀는 토마시의 사랑을 믿고 싶지만, 그의 끊임없는 바람기 앞에서 불안과 질투에 휩싸인다. 그녀에게 사랑은 “무게”로 다가온다.
    • 사비나는 화가이자 토마시의 연인이며, “배신”과 “자유”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예술과 삶 속에서 기존 질서와 구속을 거부하고 떠나는 삶을 선택한다.
    • 프란츠는 제네바의 지식인으로, 사비나와의 관계를 통해 일상의 무게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이들의 삶은 1968년 프라하의 봄과 소련의 체코 침공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얽히며, 개인적 사랑과 정치적 현실의 교차점에서 존재의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에 토마시와 테레사는 시골에서 조용히 살아가다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으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3. 주제의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철학적이고 실존적인 주제를 다층적으로 탐구한다.

    1. 가벼움과 무거움의 대립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에서 출발한 소설은, 단 한 번뿐인 삶은 “가볍다”는 역설을 제시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그 가벼움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사랑, 윤리, 역사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무게를 찾으려 한다.
    2. 사랑과 자유
      토마시와 테레사의 사랑은 자유와 구속 사이의 긴장 관계를 보여준다. 사랑은 한 사람에게 있어 무게가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이에게는 가벼운 놀이가 되기도 한다.
    3. 역사와 개인의 삶
      소련의 체코 침공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사건은 개인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쿤데라는 역사가 개인의 선택을 어떻게 제약하고 왜곡하는지, 또 그 속에서도 인간이 어떻게 의미를 찾으려 하는지를 탐구한다.
    4. 배신과 진실
      사비나가 상징하는 “배신”은 단순히 도덕적 배신이 아니라, 익숙한 것과 체제를 벗어나려는 의지이다. 그녀의 예술적 배신은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읽힌다. 

    4. 인물 분석

    1) 토마시

    이성적이고 세속적인 의사로, 그는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하지만 그의 자유는 곧 관계에 대한 무책임으로 이어지고, 사랑하는 테레사에게는 큰 상처를 준다. 토마시의 내적 모순은 인간 존재의 “가벼움”을 잘 드러낸다.

    2) 테레사

    사랑을 통해 삶의 의미와 무게를 찾으려는 인물이다. 그녀는 토마시에 대한 사랑으로 끊임없이 고통받지만, 동시에 그 사랑을 떠나서는 자신을 상상할 수 없다. 테레사는 존재의 “무거움”을 상징한다.

    3) 사비나

    자유와 배신을 선택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사회적, 정치적 제약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며, 끊임없이 떠난다. 그러나 그 자유는 종종 공허함으로 귀결된다. 그녀는 가벼움의 화신이지만, 그 속에서 또한 외로움을 안고 있다.

    4) 프란츠

    사비나와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찾으려 하지만, 결국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무너진다. 그는 이데올로기적 진실과 개인적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몰락한다. 

    5. 역사적 배경

    이 소설은 1968년 프라하의 봄과 그 이후의 소련군 침공이라는 체코슬로바키아 현대사의 큰 격변기를 배경으로 한다. 프라하의 봄은 자유와 민주화를 향한 체코 시민들의 열망이 폭발한 순간이었지만, 곧바로 소련의 무력 개입으로 좌절되었다.

    이 역사적 사건은 소설 속 인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토마시는 정치적 입장 때문에 직업적 불이익을 당하고, 테레사와 함께 프라하를 떠나야 한다. 사비나는 체코를 떠나 서유럽으로 향하며, 프란츠는 서구 지식인으로서 동유럽 현실과 연결된다. 쿤데라는 이렇게 역사가 개인의 삶과 사랑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6. 감상과 해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단순히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철학적 사유와 역사적 맥락이 결합된 복합적 작품이다. 독자는 이 소설을 통해 다음과 같은 깊은 사색에 잠기게 된다.

    • 우리는 한 번뿐인 삶 속에서 진정 자유로운가? 아니면 스스로 무게를 지고 의미를 찾으려 하는가?
    • 사랑은 구속인가, 아니면 인간 존재를 완성하는 무게인가?
    • 역사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개인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쿤데라가 사랑을 단순히 낭만적 감정이 아니라 철학적 실존의 문제로 다루었다는 것이다. 토마시와 테레사의 관계는 결코 완벽하지 않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인간 존재의 진실이 드러난다. 또한 사비나가 선택한 자유는 부러워 보이지만, 결국 공허와 고독을 남긴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듯하다. 결국 인간은 무게를 감당할 때 삶의 의미를 느끼고, 동시에 가벼움을 마주할 때 자유를 얻는다. 쿤데라는 그 모순적 진실을 탁월하게 형상화하였다. 

    7. 맺으며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단순히 한 시대의 연애담이 아니라, 존재론적·역사적·철학적 사유가 집약된 걸작이다.
    사랑과 자유, 무게와 가벼움, 역사와 개인이라는 주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매일의 선택 속에서 느끼는 불안과 희망, 그리고 삶의 모순을 이 작품은 정직하게 보여준다.

    쿤데라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삶의 가벼움을 견딜 수 있는가, 아니면 그 무게 속에서 의미를 찾고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의 삶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문학 산책에서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통해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랑과 삶에서 가벼움과 무거움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이 서 있다고 느끼시나요?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에 대해 정리해드리겠습니다. 그의 삶, 문학 세계, 사상적 특징 등을 담아드릴게요. 

    밀란 쿤데라 ― 존재와 역사를 탐구한 20세기 거장

    1. 생애

    밀란 쿤데라(1929~2023)는 체코 브르노에서 태어난 소설가이자 수필가이다. 그는 음악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 루드비크 쿤데라의 영향 아래 성장하여 젊은 시절에는 음악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문학과 철학으로 관심을 옮겨 프라하의 카렐 대학교에서 문학과 미학을 전공했다.

    1948년 공산당에 입당했지만 곧 당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출당과 복당을 반복했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1968) 이후 소련의 침공을 겪으며 강제적으로 대학에서 해직당했다. 이후 그의 작품들은 체코 내에서 금서가 되었고,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해 소르본 대학에서 가르치며 프랑스 시민권을 얻었다. 쿤데라는 말년에 체코보다 프랑스 작가로 더 알려졌으며, 2023년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주요 작품

    쿤데라는 소설과 수필을 통해 인간 존재, 사랑, 정치, 역사를 깊이 탐구했다.

    • 『농담』(1967) : 공산 체제하의 정치적 억압과 개인의 삶을 풍자적으로 다룬 초기 대표작.
    • 『삶은 다른 곳에』(1969) : 예술과 혁명, 청춘의 환상과 좌절을 그린 작품.
    • 『우스운 사랑』(1970) : 일곱 편의 단편집으로, 인간의 사랑과 욕망을 풍자적으로 탐구.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 : 그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든 대표작으로, 실존적·철학적 질문을 문학적으로 형상화.
    • 『불멸』(1990) : 예술, 시간, 인간의 유한성을 주제로 한 후기 걸작. 

    3. 문학적 특징

    1) 철학적 문학

    쿤데라는 소설 속에 철학적 사유를 결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 실존주의적 인간 이해, 그리고 역사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탐구가 그의 작품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

    2) “가벼움”과 “무거움”

    그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잘 드러나듯, 쿤데라는 인간의 삶이 본질적으로 가볍지만, 인간은 스스로 의미를 찾기 위해 무거움을 갈망한다는 역설적 관점을 제시했다.

    3) 역사와 개인의 교차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적 억압과 소련의 침공을 직접 경험한 그는, 역사라는 거대한 힘이 개인의 삶과 사랑을 어떻게 흔드는지를 지속적으로 탐구했다.

    4) 아이러니와 유머

    비극적 현실 속에서도 쿤데라의 글에는 아이러니와 블랙유머가 배어 있다. 그는 인간 존재의 모순을 심각하게 바라보되, 동시에 풍자적으로 드러냈다. 

    4. 사상적 배경

    밀란 쿤데라는 특정 이데올로기에 속하기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존재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데 집중했다. 공산 체제의 억압을 경험했지만, 단순히 정치적 선전문학을 쓰는 대신, 개인적 사랑과 존재의 문제를 역사와 결합시켰다.

    그에게 있어 문학은 단순한 이야기 전달이 아니라, “존재의 영역을 탐험하는 도구”였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철학자가 아니라 “소설가”라고 강조했다. 

    5. 평가와 유산

    밀란 쿤데라는 20세기와 21세기를 잇는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은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특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1988년 영화화되어 더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단순히 체코 문학을 넘어, 유럽 현대 문학의 양심으로 불린다. 망명 이후 프랑스어로도 작품을 쓰며 “국적을 초월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남긴 질문 ― “삶은 가벼운가, 무거운가?”, “역사 속 개인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 는 여전히 현대 독자에게 울림을 준다. 

    6. 맺으며

    밀란 쿤데라는 정치적 억압을 피해 떠돌았던 작가이자,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 철학적 소설가였다. 그는 우리에게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남겼다.

    그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문학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철학적 사색의 길 위에 서는 일이다. 

    밀란 쿤데라의 삶과 문학은 개인과 역사, 자유와 사랑,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의 끝없는 긴장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여전히 “존재의 의미”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밀란 쿤테라가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라는 책은, 4명의 주인공들이 등장해서 얽히고 얽히는 사랑의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젊고 유능한 의사였던 토마씨는 가벼움을 동경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어떤 무거운 관계의 굴레도, 이념의 속박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와 사랑의 관계에 있었던 테레자라는 여인은 무거움으로 대표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토마씨와의 만남을 운명으로 여기고,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중하게 여기는 테레자는 사랑의 대상을 쉽게 옮겨가는 토마씨의 가벼움을 견딜 수 없어합니다. 
    토마씨에게 테레자는 우연의 산물이지만, 테레자에게 토마씨는 운명이었습니다. 
    토마씨의 또 다른 여인 사비나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정치적 사회적 구속에서 철저하게 벗어나 자유를 추구하는 또 하나의 가벼움의 상징이었습니다. 
    토마씨는 이런 무거움과 가벼움으로 상징되는 두 여인 사이에서 방황하며 자신의 자와 인생을 탐색합니다. 
    자유분방하고 독립적인 여인 사바나는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사랑했던 또 다른 남자 프렌치를 배신함으로 자신의 구속을 거부합니다. 
    저자는 아마도 인생의 실존 그 자체가 무거운 것이지만.. 어쩌면 깃털처럼 가벼운 순간순간의 자유, 허무의 몸짓으로 인생이란 이어져 가는 것이라고 증언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혹은 성경적 관점에서 인생의 가장 무거운 짐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그것이 바로 죄의 짐, 혹은 악의 짐이라고 말합니다. 
    죄의 악의 굴레가 인생을 무겁게 만드는 요소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의 벌'이라는 소설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합리적 무신론자로써 우리 인간 사회의 무가치한 전당포 노인쯤 살해해도 그것은 전혀 해가 없는 정당한 행위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신념을 옮겨 노파를 살해하지요. 그러나 살인하자 마자 그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믿고 실천에 옮겼지만 그러나 살인 이후 그의 마음속에 숨었던 죄의식이 살아나기 시작하더니 그를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그는 마침내 창녀였던 쏘니야를 만나서 자신의 죄인 됨을 비로써 깨닫고 새로운 자유, 궁극적인 자유를 꿈꾸며 시베리아의 유형의 길로 떠납니다. 결국 자신의 존재의 무거움을 해결하는 마지막 자유를 위해서 그는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 복음이야 말로 인간 존재의 짐을 가볍게 하는 유일한 해답. 유일한 소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통해서 이렇게 구원을 받고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도대체 무엇일까?

    오늘 본문은 이사야라는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상대적으로 죄 속에 빠져 있는 실존을 발견합니다. 
    '화로다 나로여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죄인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가 진솔하게 자신의 죄를 토해내는 그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사죄의 선언, 용서의 선언이 떨어집니다. 그게 바로 7절입니다. 천사를 통해서 전해진 메시지, 복음입니다. 복음을 헬라어로 '에반 게리온' 천사를 통해서 들려온 소식을 듣습니다.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것이 이사야 경험한 복음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자신의 존재의 가벼움, 참된 해방을 느끼는 놀라운 순간이 하나님의 사죄의 선언과 함께 임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때 그는 다시 주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셨다고 선언하신 후에 이사야를 향해서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누구를 보내야겠느냐? 네가 방금 경험한 그 자유, 네가 방금 경험한 사죄의 은총' 그 사죄의 선언을 전해주기 위하여 누가 저 세상으로 갈 수 있겠느냐?' 이때 이사야의 유명한 대답.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주소서."라고 응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블레싱의 계절이 찾아왔습니다.

    미루어두었던 복음을 이웃에게 전해주고, 그들이 주님 앞에 나와 용서 받고 새로운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축복의 나눔의 계절.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누가 주의 은혜를, 누가 주의 사죄를, 주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제 하나님의 그 부르심 앞에 우리의 응답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첫번째로, 가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8절의 이사야의 응답을 우리의 고백으로 여기며 함께 읽겠습니다. '..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에게 또다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네가 경험했던 이 소식을, 이 복음을 가서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증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동일한 메시지를 에스겔 선지자에게도 에스겔 3장 1절에서 주신 바가 있습니다.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말하라'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먹고, 이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가서 말하라' 하나님은 이번에는 요나 선지자를 불러 동일한 명령을 하십니다. 요나서 1장 2절에 '일어나라 가라 외쳐라'  요나는 이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 말씀에 순종하고 싶지 않아서 도망 갔습니다. 그러나 그를 쫓아온 하나님. 마침내 하나님은 그를 스올의 깊은 곳, 죽음에서 건져내시고 두 번째 동일한 메시지를 그에게 보내십니다. 요나서 3장 2절 '일어나라 가서 외치라' 신약성경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보내면서 말씀하십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왔다 하라' 주님은 오늘날 동일하게 저와 여러분에게 위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잘하는 사도행전 1:8의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해보십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이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지나간 무더운 여름 단기선교로, 아웃리치로 문자 그대로 전 세계에 흩어져 땅끝까지 나아가 이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이번에는 예루살렘. 사실 사도행전 1장 8절의 우선순위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됩니다. 그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시작하라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나아가라.' 그렇습니다. 이 가을, 앞으로 2간 동안 우리는 우리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나아가서 이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먼 나라에 가서 이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동일한 열정으로, 우리 가까이에 있는 우리가 항상 함께 더불어 살고 있는 이웃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증인의 사명입니다. 증인이 되는 것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증인은 본 대로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경험한 대로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경험한 예수, 내가 경험한 신앙, 내가 경험한 하나님, 내가 경험한 복음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가서 전하십시오. 때가 너무 늦기 전에 지금 하십시오. 그것이 예수의 증인 된 여러분과 저희의 사명입니다. 가서 전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앞으로 주간 동안 늘 해야 되지만, 특별히 이 2주간을 구별해서 우리는 그동안 전하지 못했던 복음의 빛을 이웃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과를 낙관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시면서도 '사람들의 불신앙으로, 사람들의 강퍅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복음을 거절할 것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촉구하고 계십니다.' 그들이 거절할 때, 증인 된 이사야가 너무나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배려이기도 하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강퍅해진 죄인들이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이 복음을 그들이 거절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 그것을 너무 놀래 하지 말고, 당연한 반응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9절 '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그 복음에 백성들이 반응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내 걱정거리가 될 것이라고 10절에서 이상한 말씀을 이어서 하십니다. 이것은 일종의 하나님의 역설입니다. 10절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을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이렇게 좀 더 알기 쉽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 그것은 내게 부담거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정말 죄인들의 회심을 돌이킴을 원하지 않는다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역설적인 하나님의 증언인 것입니다.

      이사야의 이 말씀이 신약성경, 사도행전 28:23에 인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서 당시의 세계의 가장 중요한 도시, 땅끝으로 가기 위한 중요한 세계의 수도 로마에 가서 드디어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게 됩니다. 그 때에 사도행전 28장 24절을 보면, 로마 사람들에게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의 반응입니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두 가지 반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도 있고, 또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절의 반응을 일으키는 현상에 대해서 그것이 바로 내가 이사야 선지자에게 말했던 그 말씀의 성취다라고 하십니다. 25-26절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도다' 27절에서는 이 말씀을 이사야의 본문을 사도행전의 저자는 약간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27절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줄까 함이라' 여기서는 이사야의 말씀에 언급된 '내가 걱정이다.'라는 말을 뺏습니다. 대신에 '내가 고쳐 주리라. 내가 용서하마, 내가 새롭게 하마' 그러나 그들 중에 거절할지라도 실망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는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싶다는 말씀의 역설인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사도행전 28장 28절의 긍정의 선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심을 읽게 됩니다. 

      행 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이것을 들으리라' 실상은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것을 너무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복음을 거절하거든.. 들어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보아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이 복음을 외면하거든 개념치 말아라. 그 얘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전도할 때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거절할 것입니다. 들어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그러나 다 그러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 우리가 기대해야 할 마지막 소망의 응답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런 메시지인 것입니다. '전도할 때, 결과를 결코 낙관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포기하지도 마십시오.' 

      오늘의 본문이 증언하는 결론적 메시지가 있습니다. 세번째 레슨이 뭐냐? 남은 자의 응답을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사야 6장 13절의 약속입니다. '그 중에 십 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나무를 찍어도 그루터기가 남아요.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생명이 돋아납니다. 그들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우리가 전도하면 복음을 외면하고 복음을 거절하는 것 같아도.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그루터기 같은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기 까지.. 우리는 전도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이런 말이 나왔지요? 적어도 십 분의 일. 저는 이 말씀을 아주 쉽게 적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도를 강조하는 이 계절에 열 사람을 만나 전도합니다. 그랬더니 9사람이 거절해요. 괜찮은 거예요. 그렇습니다. 비록 9 사람이 거절하고 한 사람만 영접해도 할렐루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을 주님 앞으로 한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서 몇 사람 만나셔야 할까요? 10 사람 만나셔야 합니다. 그 생명의 구원을 위해서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는 우리 곁에 성경의 복음을 그대로 해석하고 믿지 않는 이단으로 분류되는 사람들도 만나기도 합니다. 그중에 제일 극성스럽게 전도하는 이들 이 여호와의 증인이지요. 나는 여호와의 증인을 스쳐가든, 한 번쯤 만나본 일이 있다? 대부분 만났잖아요? 그렇죠. 여호와의 증인들은 전도할 때에 비록 그들은 우리처럼 성경적 복음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열심히 전도하는데.. 그들은 어떻게 전도하느냐? 그들은 전도할 때에 천대 일의 가능성을 안고 전도한다고 합니다. 천명 만나면 한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이 된다. 천명 만나면 한 사람을 여호와의 증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도 열심히 집 문을 두드리고, 책자를 전하면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잘못된 복음을 가지고도 비록 999명이 이 복음을 거절한다고 할지라도 그중에 한 명을 그들 안으로 인도하기 위한 여호와의 증인의 열정. 우리는 그보다는 열정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거 아닙니까? 도전을 좀 받을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의 성경은 천대 일이라 말하지 않고 십대 일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열 사람이라도 만나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 가을 소중한 영혼 한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나는 2주간 동안 몇 사람을 만나야 할까요? 엄청난 전도의 에너지와 노력을 다하고도 아주 적은 소수의 열매 밖에 거두지 못한 성경적 인물 한 사람을 생각해봅니다. 노아.

      노아는 방주를 만들면서도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5절에 보면 '의를 전파하는 노아'라고 합니다. 방주를 만들면서 노아는 전도했을 것입니다. "이 방주로 들어와야 살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심판의 홍수가 내릴 것이고 이 방주가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이 방주로 오십시오. 초대했을 것입니다." 몇 사람이 응답했나요? 자기 식구들 말고는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벧전 3:20 '..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겨우 여덟 명뿐이라' 그가 그렇게 열정적으로 전했음에도 부룩하고 그 초청에 응답하고 들어온 사람은 겨우 여덟 명뿐이었습니다. 그러면 노아는 실패일까요? 성경은 노아의 노력이 실패라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그 여덟 명이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노아는 적어도 자기의 소중한 가족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히브리서 11장 7절의 증언을 통해 읽어보십시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견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미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적어도 자기 집을 구원했어요. 여러분 내 집이, 내 사랑하는 식굳르이 구원에 동참하고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 결코 실패가 아니지요. 또 그 가족을 통해서 새로운 세대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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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이 가을 몇명의 영혼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의의 상속자의 반열에 우리 가족이 서기 위해서.. 아직도 구원의 길을 깨닫지 못한 사랑하는 가족, 친척, 친구, 우리의 이웃들을 주님 앞으로 초대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 그들의 평생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유를 얻는 그 놀라운 순간. 그 축복을 나누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그래서 이 아침도 우리에게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신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부와 성자의 부름을 받아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는 성령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우리 중에 어떤 분이 이렇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제가 가서 전하겠습니다. 듣던지 아니 듣던지, 거절하든지, 안 하든지 가서 이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전하기만 하면 여러분들은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성령이 나머지 일을 하실 것입니다. 남은 자들이 올 것입니다. 그루터기가 생명의 싹을 키울 것입니다. 이 놀라운 블레싱을 키우는 계절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이사야 6:1~8)

    사명을 깨우치는 질문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시며 또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모세를 부르셨고, 그 외에도 예언자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오늘 본문인 이사야 6장에서는 유다의 어두운 시기에 이사야 선지자를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 물으시는 10번째 질문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8)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해야 하는지, 인생의 꿈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사명은 하나님을 만날 때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 인생은 방황하기 마련입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알면 내 인생을 향한 그분의 꿈과 비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으로 들어왔습니다. 웃시야는 유다의 아홉 번째 왕으로서 아주 훌륭한 왕이었고, 유다 역사상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사울이나 다윗이나 솔로몬은 각각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했는데, 웃시야는 16세에 왕이 되어 52년 동안이나 왕위에서 다스렸습니다. 그보다 더 오래 다스린 사람은 므낫세 밖에 없는데 그는 55년을 통치했습니다. 웃시야의 통치 기간 중에 경제가 번성했고, 정치가 안정되었으며, 외교적으로 또 군사적으로 아주 강성한 왕국을 유지했습니다.

    웃시야가 처음에는 신앙도 좋았는데, 너무 풍요롭고 성공만 하다 보니 교만해졌습니다. 우리도 잘나갈 때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이 넘어질 때 보면, 삶이 어렵고 실패할 때가 아니라 일이 잘 풀리고 잘나갈 때입니다. 교만해진 웃시야 왕은 제사 의식을 치르는 동안 제사장들만 할 수 있는 분향을 자기가 직접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가볍게 생각한 것입니다. 교만해지니까 하나님을 향한 영적 경외감이 사라지고 영적으로 둔감해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를 치셨고, 그 즉시 웃시야는 나병에 걸려서 별궁에 거하며 말년을 아주 비참하게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시야 왕이 살아 있는 동안 유다는 안전했고 강성했습니다. 그러나 웃시야 왕이 죽은 그 해에 북쪽으로는 앗수르가 쳐들어오고, 동쪽으로는 신흥 거대 제국 바벨론이 쳐들어온다는 소식들이 들려왔습니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이사야와 웃시야는 친척이었다고 합니다. 즉, 웃시야 왕과 친척이라는 좋은 배경에서 잘 살고 있었던 이사야가, 가문적으로, 개인적으로, 민족적으로 어려운 상황 가운데 성전으로 기도하기 위해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성전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어려움과 위기가 찾아왔을 때, 아픔과 슬픔 가운데 놓였을 때, 기도 제목이 있을 때 성전으로 나아가십시오.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며 주님을 만나는 것이 소망입니다. 고난도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자리를 찾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붙잡아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사명자의 할 일, 예배와 거룩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1절)

    이사야가 보니까 주님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웃시야가 죽은 것처럼, 아무리 강하고 오래 통치해도 세상의 왕은 결국 죽습니다. 세상의 권력과 아름다움은 한때입니다. 길어봐야 50여 년입니다. 김일성이 49년 동안 북한을 통치했고,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26세에 왕이 되어 현재 68년을 하고 있습니다(올해 94세).

    그러나 아무리 길게 통치해도 결국 죽으면 끝나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는 보좌와 왕권이 있습니다. 영원무궁토록 권능으로 다스리시는 우리 주님의 보좌와 왕권입니다. 그러므로 온 우주의 왕이신 주님께 어떤 문제이든 들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통해 성벽을 재건하셨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 8장 이후부터는 학사 에스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벽을 재건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기초를 다지는 일입니다. 영적으로 각성하고 부흥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학자 에스라는 높은 단 위에 서 있었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그가 책 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에스라가 책을 펴면, 백성들은 모두 일어섰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주 하나님을 찬양하면, 백성들은 모두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주님께 경배하였다.” (느 8:5-6, 새)

    에스라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다 일어서서 “아멘, 아멘”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주님의 말씀을 갈망했고, 두 손 들고 화답하면서, 또 엎드려 기도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이방 신상을 다 제하면서 영적인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영적 부흥이 일어난 자리가 어디였습니까? 하나님을 만나 예배하는 자리였습니다.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2-4절)

    천사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룹 천사이고 다른 하나는 스랍인데 ‘세라핌’입니다. 그 세라핌이 여기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위기 가운데 성전에 들어와서 주님을 보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본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당시 성전 안에는 떡상과 금 촛대와 휘장도 있었을 텐데,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 보았습니다.

    요즘에는 예배당에 나와 예배드리면서 다른 것만 보고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앞에 보이는 사람들, 강대상, 모니터, 기도자, 설교자, 성가대만 보고 갑니다.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다른 것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드리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의 모든 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위기는 죄가 드러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죄를 품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스스로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며 화를 내거나 비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죄가 낱낱이 드러납니다. 이사야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5절)

    하나님은 죄를 회개하는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6-7절)

    스랍 천사들 중 하나가 부집게로 제단에서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날아와서 이사야의 입술에 댑니다. 그렇게 하고나서는 죄 사함을 선포합니다.

    여기서 ‘숯’은 자갈입니다. 자갈 밑에 불을 피우면 달궈지는데, 그 당시에는 달궈진 자갈 위에 제물을 올려놓고 태웠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갈에는 양의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피 묻은 자갈, 대속의 자갈, 죄 씻음의 자갈이 이사야의 입에 닿은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 씻음 받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어떻게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겠습니까? 죄를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굳게 붙잡을 때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습니다. 아무리 험악한 죄라도 용서를 받습니다. 십자가가 죄보다 강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사 1:18)

    오늘 하나님이 보내신 그 자리에서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고 관계가 회복되니까, 이제 이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때에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8a절)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시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 각자를 부르십니다. 그때 이사야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내가 아뢰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8b절)

    어떻게 이사야는 이처럼 즉각적으로 순종의 대답을 할 수 있었습니까? 그 이유는 죄 사함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은 형식이나 습관이 아니고 체험입니다. 물론 체험이 신앙의 전부는 아닙니다. 하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뵙고 그분과 교제하는데 어떻게 체험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평안과 치유와 응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이 들릴 때 즉시 깨닫고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하고 순종의 대답을 드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웃시야 왕이 죽던 때인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처음으로 사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1장부터 사명을 받아서 선지자로서 활동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없이 자기 마음대로 선지자 활동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선지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씀을 받아서 나가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 ‘오늘’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삶에 그날 누릴 수 있는 복을 내려주시고 동시에 그날 이루어야 할 사명도 주십니다. 오늘 내가 누린 복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내 사명은 무엇이었습니까?

    혹시 하나님이 주신 과거의 사명에 머물러 있습니까? 간증을 하자고 하면 10년, 20년 이상 된 이야기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까? 과거에 나를 만나 주신 것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왕년에 대단했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그때만 그리워하고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즉각적으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무슨 거창한 사명만 사명이 아닙니다. 오늘 주어진 작은 일도 사명입니다. 이렇게 수요예배에 참석하신 것도 사명이고 또 복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부르심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디를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까? 이사야는 복음의 메시지를 외쳤습니다. 그는 오실 메시아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 7:14)

    하나님은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약 700년 전에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사 53:5-6, 새)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700년 후에 일어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선포하셨습니다. 6절에서 ‘그’가 누구이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죄악 된 인생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를 미리 외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도 이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명령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 4:2)

    이사야에게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신 하나님의 질문과 똑같습니다. 죽어 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향해 우리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선교하시는 하나님(Missio Dei)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선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통합적인 역사하심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바로 이 역사하심에 우리 인간이 동참하도록 초청하시는 신적 역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1)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성부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복음을 전하도록 파송하신 것의 기초가 됩니다. 그리고 그 보내심의 목적이 바로 선교입니다. 하나님은 선교하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백성은 선교하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사실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기 위해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지 않지만 위험성이 있을 수 있는 인간의 협력을 선택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엄청난 은혜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이 제자들을 동역자로 부르시고 지상 명령을 하신 부분에도 드러나 있습니다(마 28:18-20). 특별히 ‘선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감당하는 선교라는 것이 나의 선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어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서 그 사명대로 살아야지 내 뜻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 계획대로, 내 마음대로 살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무슨 면목으로 대답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을 전파하는 소명에 우리의 인생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1885년 4월 5일
    지금으로부터 대략 141년 전 부활절 아침에 우리나라에 복음을 들고 온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 2년 전인 1883년에 미국 코네티컷주에서 열린 신학교 연합 캠퍼스 부흥집회 때 앨버트 선교사님의 메시지를 통해서 원래 선교를 준비하고 있었던 땅인 인도가 아니라 조선 땅에서 선교하기로 헌신을 결심했습니다. 
    언더우드는 그 자리에서, 조선의 문이 열리고 있는데 하나님이 누군가 조선 땅을 향해서 부르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아멘, 아멘” 하는데 자신이 가겠다고 헌신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언더우드는 ‘하나님을 위해 다 헌신하겠다는데 왜 조선에는 가지 않으려고 할까? 
    가난과 질병과 많은 문제가 있다는 땅, 닫혀 있던 그 땅의 문을 하나님이 여셨는데 왜 아무도 가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성령이 거부할 수 없는 강한 음성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왜 조선으로 가지 못하느냐?”

    주님의 질문에 언더우드는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바로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2년 후에 아펜젤러와 같이 복음을 들고 이 땅을 밟았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헌신하는 자들을 통해 복음의 열매가 맺힙니다.

    언더우드에 앞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 중에 대동강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도 있습니다. 
    1866년에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는 중국에서 선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6세의 나이에 아내가 열병으로 선교지에서 죽자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선교지에 남아야 하는가, 아니면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그때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조선에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 가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다.” 
    토마스는 그 말씀에 “아멘”으로 순종했고, 뉴제너럴셔먼 호를 타고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때 평양 감리사였던 박규수를 비롯한 사람들이 나와서 토마스 선교사가 탄 배를 불태웠습니다. 
    당시 그 사고로 많은 사람이 바다에 빠져서 익사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도 생사의 기로에서 한자로 된 성경을 들고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비록 건짐 받았지만, 박춘권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목 베임을 당해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토마스 선교사의 헛된 것 같은 죽음을 통해 하나님이 놀라운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벤 박춘권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했고, 당시 토마스 선교사의 성경책을 받아서 갔던 12세 최치량이라는 사람이 나중에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성경책을 들고 간 최치량이 나중에 여관 사업을 했는데, 그 성경책을 여관 벽지로 쓰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여관이 나중에 널다리골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름을 바꾸어 유명한 장대현교회가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적인 헌신과 응답을 통해 시작된 놀라운 역사가 장대현교회로 연결되었고,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절망 가운데 눈물을 흘리며 죽어 가는 수많은 영혼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요 4:35)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마 9:37-38)

    가족과 친구, 그리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시는 일이며, 하나님의 간절한 외침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 죄 사함의 은총을 받은 우리 모두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주님의 물음 앞에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결단하고 주의 복음을 능력 있게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부르시는 외침을 듣고 도전받아 응답하며 나아가는 우리들을 통해 놀라운 복음의 열매를 맺으실 줄로 믿습니다.


    3월 6일(금) 열왕기상 19:1-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왜 여기 있느냐(9절)

    엘리야가 그곳 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There he went into a cave and spent the night. And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him: "What are you doing here, Elijah?"

    네가 왜 여기 있느냐?(Why are you here?)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 질문은 성경 열왕기상 19장에서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하신 질문입니다.  

    질문이 나온 배경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아합 왕과 이세벨의 바알 선지자 450명과 싸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냈습니다.(열왕기상 18장) 
    그러나 그 사건 후에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가서 낙심합니다. 
    그 후 하나님은 엘리야를 호렙 산(하나님의 산)으로 인도하십니다. 
    그곳 동굴에서 하나님이 질문하십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열왕기상 19:9)  

    하나님이 이 질문을 하신 이유 
    이 질문은 정보를 몰라서가 아니라 엘리야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기 위한 질문입니다.

    엘리야의 마음을 드러내는 질문

    엘리야의 대답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나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나이다.” (왕상 19:10)

    엘리야의 문제는 
    1. 사명의 피곤 
    2. 영적 탈진 
    3. 혼자라고 느끼는 고독 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위치를 깨닫게 하는 질문

    하나님의 질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느냐?”

    엘리야는
    1. 사명의 자리 → 떠남
    2. 두려움 → 동굴 속 숨음 
    그래서 하나님은 위치를 점검하게 하십니다.

    사명을 다시 회복시키는 질문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1. 하사엘에게 기름 부어 왕이 되게 하라 
    2. 예후에게 기름 부어 왕이 되게 하라 
    3. 리사에게 기름 부어 선지자가 되게 하라 

    즉 낙심한 선지자를 다시 사명의 자리로 돌려보내시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의 영적 의미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모든 신자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은 세 가지를 묻습니다. 

    1. 지금 너의 영적 위치는 어디인가? 
    2. 왜 그 자리까지 왔는가? 
    3. 너는 다시 사명의 자리로 돌아갈 것인가?

    성경 속 하나님의 질문 흐름

    흥미롭게도 하나님은 중요한 순간마다 질문으로 사람을 깨우십니다.

    대상 질문 의미
    아담 “네가 어디 있느냐?” 타락 후 영적 위치
    가인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책임
    엘리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사명의 자리
    모세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사명의 도구

    정리  /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 질문은
    1. 낙심한 선지자를 향한 질문
    2. 사명의 자리로 부르는 질문
    3. 영적 위치를 점검하는 질문


    영적 탈진의 원인(Spiritual Burnout)

    단순한 피로나 감정 문제가 아니다.

    과도한 사명 후의 극심한 피로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큰 승리 후 탈진했습니다. 
    갈멜산 승리 → 이세벨의 위협 → 광야로 도망 
    영적 전투 후 찾아오는 급격한 피로 

    열왕기상 19:4.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큰 사역 후에는 영적 반동(spiritual backlash) 이 자주 옵니다.

    두려움과 위협

    엘리야가 낙심한 직접적 원인은 이세벨의 위협이었습니다.

    현실의 압박 
    사람의 공격 
    미래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은 믿음의 시선을 현실의 문제로 이동시킵니다. 

    고립과 외로움

    엘리야의 대표적인 말: 
    열왕기상 19:10. “나만 홀로 남았거늘…”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열왕기상 19:18.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칠천을 남겼다”

    영적 탈진은 종종 “나 혼자”라는 착각에서 시작됩니다.

    기대와 현실의 괴리

    엘리야는 갈멜산 사건 후 이스라엘의 회개와 부흥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왕비의 협박,  영적 변화 없음

    기대가 깨질 때 낙심이 깊어집니다.

    정체성의 혼란

    사역이 실패처럼 느껴질 때 사람은 질문합니다. 

    내가 잘못했나?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사명이 끝났나?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질문합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 질문은 ➡ 정체성을 회복시키는 질문입니다.  

    육체적 피로

    영적 탈진에는 신체적 요인이 매우 큽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먼저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잠,  음식,  휴식, 
    열왕기상 19:5–8 
    하나님은 먼저 몸을 회복시키셨습니다.

    하나님 음성을 잃어버린 상태

    엘리야는 큰 사건 이후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다시 들어야 했습니다. 

    열왕기상 19:12

    “세미한 소리”

    영적 탈진의 핵심은 하나님 음성이 멀어졌다고 느끼는 상태 입니다. 

    영적 탈진의 구조 (성경적 패턴)

    1. 
    사명 후 피로
    2. 외부 위협
    3. 고립
    4. 기대 붕괴
    5. 자기 정체성 흔들림
    6. 육체적 탈진
    7. 하나님 음성 단절 

    낙심 → 도피 → 침묵 → 회복 

    중요한 사실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들도 영적 탈진을 경험했습니다.

    • 모세,  다윗,  엘리야, 심지어 제자들 

    따라서 영적 탈진은 실패가 아니라 회복의 초대일 수 있습니다.

    * 영적 반동
    진실을 은폐하거나 억누를 때 발생하는 필연적인 현상으로, 종교적 형식주의, 세속주의, 혹은 극단적인 교리에 대한 반발로 일어나는 영적 갱신 운동이나 신앙의 거부 반응을 의미합니다. 
    이는 초기 수도원 운동처럼 타락한 교회에 대한 갱신으로 나타나거나, 반대로 목사·교회에 대한 환멸로 인한 무교회주의 등 극단적 태도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주요 특징 및 유형 

    갱신 운동 : 
    콘스탄틴 대제 이후 교회의 영적 쇠퇴에 대한 반동으로 수도원 운동이 등장한 것과 같이, 형식에 치우친 신앙을 바로잡으려는 움직임입니다. 

    세속주의로의 회귀 : 
    전통적인 종교 언어와 절대화에 대한 반동으로, 종교적 틀을 거부하고 세속적인 영성을 추구하는 현상입니다.  

    극단적 거부(환멸) : 
    목회자의 권위나 기존 교회 질서에 대한 환멸과 반발로 인한 무교회주의나 기독교적 가치관에 대한 전면적인 반동입니다. 

    신앙의 왜곡 :
     
    지나친 신비주의나 율법적인 신앙생활에 대한 반작용으로 또 다른 형태의 극단적 영성을 낳는 경우입니다. 

    영적 반동은 신앙의 내면을 성찰하고 진정한 영성을 찾으려는 시도일 수도 있으나, 때로는 극단적인 분열이나 신앙의 상실을 초래할 수 있는 복합적인 현상입니다. 

    1. 엘리야의 낙심 5단계 구조

    Elijah가 갈멜산 승리 후 갑자기 무너지는 장면은 영적 탈진의 전형적인 과정을 보여줍니다. 

    ① 위협을 듣는 단계 (두려움의 시작)

    • 배경 : Jezebel의 죽이겠다는 메시지

    • 열왕기상 19:2

    특징 / 외부 사건보다 말 한마디가 마음을 무너뜨림,  영적 승리 직후 공격이 옴

    영적 원리 / 사탄의 공격은 승리 직후 온다

      ② 도망 단계 (현실 회피)

    • 브엘세바로 도망,  종을 남겨 두고 혼자 광야로 감

    특징  /  공동체 단절,  고립,  

    낙심의 특징  / 사람을 떠난다

     ③ 자기연민 단계 (과장된 인식)

    열왕기상 19:4  "나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7000명이 남아 있었음

    특징  /  피해의식,  과장된 현실 인식 

    낙심의 특징  /  사실보다 감정이 지배

     ④ 죽고 싶어지는 단계 (절망)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특징  /  사명의 포기,  삶의 의미 상실,  

    낙심의 최고 단계 

    ⑤ 영적 탈진 단계 (육체 붕괴)

    엘리야는  잠,  음식,  다시 잠,  하나님은 설교하지 않고 먼저 먹이심

    중요한 원리

    영적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탈진 

    단계 상태
    1 두려움
    2 도망
    3 자기연민
    4 절망
    5 탈진

    2. 하나님이 같은 질문을 두 번 하신 이유

    질문 /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열왕기상 19:9, 13)

    여기서 하나님은 같은 질문을 두 번 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① 첫 질문 — 마음을 드러내게 함

    첫 질문의 목적 / 속마음 고백

    엘리야의 대답 / "나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정보가 필요해서 질문한 것이 아니라  

    ② 세미한 음성 경험
    엘리야의 마음을 드러내게 하심

    그 사이에 일어난 사건 /  큰 바람,  지진,  불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았음 그리고 세미한 음성

    ③ 두 번째 질문 — 관점이 바뀌었는지 확인

    같은 질문을 다시 하심 하지만 놀랍게도

    엘리야의 대답은 동일

    이것이 의미하는 것 경험이 즉시 생각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설명하지 않고 사명을 다시 주심  

    질문 두 번의 의미

    질문 목적
    첫 질문       마음을 드러내게 함
    두 번째 질문     사명을 다시 연결 

    3. 세미한 음성의 신학적 의미

    히브리어 표현  / קול דממה דקה (콜 데마마 다카)

    뜻 “아주 조용하고 미세한 소리”

    또는 “고요한 침묵의 음성”

     ① 하나님은 항상 큰 사건에만 계시지 않는다

    갈멜산에서는 불이 내려옴, 기적 그러나 호렙산에서는 침묵

    메시지 -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조용한 하나님

     ② 하나님은 감정을 치유하신다

    엘리야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내면 회복 그래서 하나님은
    1. 설교하지 않음
    2. 책망하지 않음  대신 조용히 말씀

    ③ 사명의 재정렬  /  세미한 음성 이후 하나님이 하신 말씀
    1. 하사엘에게 기름 부어라
    2. 예후에게 기름 부어라
    3. 엘리사를 세워라

    즉 엘리야 시대에서 엘리사 시대로 전환 
    역사적 의미 - 선지자 사명의 계승

    핵심 요약 / 엘리야 사건의 구조

    갈멜산 승리

    낙심 (5단계)

    하나님의 질문 ①

    세미한 음성

    하나님의 질문 ②

    사명 재부여

    엘리사 등장

    하늘의 고향

    지중해 지역을 철을 따라 이동하는 들오리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한 마리가 잠시 땅을 내려다보니 지중해의 들판은 정말로 아름다웠습니다. 
    따스한 햇살에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가축들은 풀밭에서 평화로이 모이를 먹고 있었습니다.
    멋진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 들오리는 날개가 아프다는 핑계로 잠시 지중해의 들판에 내려앉았습니다. 
    지중해의 가축들은 들오리를 융숭하게 대접했고 들오리는 멋진 풍경을 만끽하며 하루하루를 즐겼습니다. 
    1년이 지나고 하늘을 날아가는 오리 떼들을 목격한 들오리는 문득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졌습니다.
    다시 하늘을 날기 위해 열심히 달리다 힘차게 날갯짓을 했지만 몸이 너무 무거워져 하늘을 날 수가 없었습니다. 
    들오리는 매년 이동하는 오리 떼를 보며 고향을 그리워했지만 몸은 더 무거워져 가 영영 하늘을 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천국을 소망하지 않고 세상의 삶에 안착하는 그리스도인을 비판하기 위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Aabye Kierkegaard)가 쓴 우화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잠시 머무르는 정착지일 뿐 종착지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고향은 이 세상이 아닌 영원한 하늘나라임을 기억하십시오. 

    주님, 저의 본향은 천국임을 시시때때로 기억하고 사모하게 하소서.
    천국에 갈 확신을 가지고 소망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키에르케고르의 ‘거위들’이라는 우화입니다.
     자기들이 거위라고 믿는 기러기들을 비유하는 이야기입니다.
     기러기들은 거위같이 뒤뚱거리며 매주 예배를 나갔습니다.
     이들이 거위가 아닌 기러기라는 걸 알고 있는 목사님은 매주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더 이상 뒤뚱거리며 걸어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거위가 아닌 기러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 수 있습니다.
     이제 저 푸른 창공을 향해 자유롭게 날아갑시다.”
     기러기들은 꽥꽥 거리며 아멘을 외쳤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몇몇 기러기들은 저 푸른 하늘로 자유롭게 날아갔지만
     대부분의 기러기들은 다시 거위처럼 뒤뚱거리며 집으로 돌아갔고,
     다음주에도, 그 다음주에도 같은 설교를 들으러 뒤뚱거리며 교회에 올뿐이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매주 말씀을 듣고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우화의 거위와 다를바 없다며 비판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참된 진리를 가르치고
     악한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믿는다면, 예수님의 은혜로 새사람이 되었다면
     변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고 전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게 됩니다.
     말씀을 온전히 믿고 말씀을 따라 매일 변화되는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되십시오.

     주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외면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예배와 묵상 때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 변화하는 성도가 됩시다.


    길들여진 기러기

    "기독교인의 역사적 책무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것이 아닐까?"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어가 타락한 당시의 교회를 향해 던진 묵직한 담론은 반향을 얻지 못했다. 
    권력의 단맛에 취한 교회 지도자들은 그의 외침을 불온시했을 뿐이다. 
    1854년에 그는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를 비틀어 ‘기러기’라는 우화를 썼다. 
    쇠렌이 세상을 떠나기 일년 전이었다. 
    안데르센의 동화는 오리 틈에서 자라는 동안 온갖 차별과 멸시를 당하던 백조가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는 자기가 백조임을 깨닫는다는 이야기이다. 
    쇠렌은 그런 교훈적이고 따뜻한 결말을 받아들일 만큼 낙관적이지 않았다.

    하늘에서 야생 기러기 한 마리가 날아오자 농장에 살던 길들여진 기러기들은 날개를 치며 법석을 떨었다. 
    그들과 함께 머물던 기러기는 가을이 다가오자 떠날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들을 버려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저 푸른 하늘을 함께 날자고 권하면서, 조금씩 높이 나는 연습을 시켰다. 
    처음에는 흥미를 보였지만 기러기들은 곧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기러기들은 야생 기러기가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타박했다. 
    그들은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담장 안을 뒤뚱거리며 걷는 다른 기러기들의 뒤를 좇으며 야생 기러기도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가야 할 곳을 잊고 말았다.

    쇠렌은 이 이야기 끝에 탄식하듯 말한다. 
    “이미 길들여진 기러기는 야생 기러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야생 기러기가 길든 기러기가 되기 쉽다. 그러니 경계하라!” 
    어쩌면 이것이 쇠렌 키에르케고어의 영적 유훈일 수도 있겠다. 
    하늘을 잃어버린 기러기, 가을이 되어도 떠날 줄 모르는 기러기의 존재는 슬프다. 
    그것은 자기 존재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길들여진 기러기 우화는 본향을 잃어버린 채 땅의 현실에만 탐닉하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상이 아닌가.

    기독교인의 역사적 책무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것이 아닐까? 
    초월의 빛을 땅에 끌어들여 역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보여주고, 그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교회는 하늘의 부름에 따라 길을 떠나지 않는다. 
    위험이 없는 안전한 곳에 머물며 세상의 달콤한 것으로 배를 채우려 할 뿐이다. 
    왕의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저마다 핑계를 대며 그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자기들의 루틴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삶의 축제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들의 타성을 깨고 변화의 흐름 속에 동참하려는 이들이다.

    길들여진 기러기는 더 이상 기러기가 아닌 것처럼 출애굽 정신, 십자가 정신이 사라진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다.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키에르케고르의 최대관심사는 육체의 생사를 초월하는 가치와 진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신조로 삼아 생활하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죽음은 그리스도교적인 영원한 생명의 상실을 뜻하며 절망을 일컫는다.

    INTRO: 절망과 희망의 변증법적 연관을 밝힌 실존주의적 인간론

    덴마크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프리드리히 니체 등과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불린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불안의 개념> <기독교 입문> 등 저서가 있다.

    그는 출간하는 데 유산을 다 써버렸으며, 아무런 직업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길에서 졸도하여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마흔두 살이었다.

    생애: 주체적 자기 발견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7형제의 막내로 코펜하겐에서 출생. 아버지는 비천한 신분에서 입신한 모직물 상인으로 경건한 크리스트 교인이었고, 어머니는 그의 하녀에서 후처가 된 여인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체질이었으나, 비범한 정신적 재능은 특출하여 풍부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변증(辨證)의 재능이 되었다.

    소년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크리스트교의 엄한 수련을 받았고, 청년 시절에는 코펜하겐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하여 1841년에 논문 <이로니의 개념에 대하여>로 학위를 받았다.

    1827년에 당시 14세의 소녀 레기네 올센을 알게 되자, 곧 사랑의 포로가 되어 약혼까지 하였으나, 애정의 상극과 내면의 죄의식 때문에 1841년 가을에 약혼을 파기하였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반복 (1843)> <불안의 개념 (1844)> <인생 행로의 여러 단계 (1845)> 등을 익명으로 출판하였다.

    그는 시골의 목사가 되어 조용한 생활을 보내고 싶어하였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단독자(單獨者)로서의 신(神)을 탐구하는 종교적 실존의 존재 방식을 <죽음에 이르는 병>로 쓰면서 기성 크리스트교와 교회까지도 비판하였다. 그런 와중인 1855년 10월 갑자기 노상에서 졸도한 후 다음 달 병원에서 죽었다.

    사상: 육체의 생사를 초월하는 가치

    인간이 절망하는 이유는 동물과 달리 인간에게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절망에 빠지는 이유는 '관계'에서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망에 빠질 때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기에 절망이 기회가 된다. 절망은 우리가 진정한 자기인 실존을 아는 데 도움을 준다.

    키르케고르는 이론보다는 삶을 중시했다. 삶의 현장에서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주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할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키르케고르는 헤겔이 주장한 진리의 보편성에 대해 반기를 든다. 진리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일회적이고 내면적이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진리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해당하는 진리가 중요하다.

    ‘나’야말로 모든 빛이 모여들고, 또 모든 빛이 퍼져나가는 중심이다. 체계를 세우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 내가 숨 쉬고 있는 시간이며, 머릿속 개념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보편적인 것보다 중요한 것은 개별적인 것, 즉 단독자다.

    즉 키르케고르에게 ‘나’는 모든 것이다. 모두 아는 진리라도, 실제로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는지는‘나’의 고유한 결단에 달려있다. 동물에게는 불안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안을 배워야 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는 인간의 처참한 운명을 의미한다.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그 병은 영원히 구원될 수 없는 정신의 병이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발전을 세 단계로 구분했다.

    첫째는 스스로 그 실존의 의의를 분명하게 의식하지 못하는 직접적인 생존의 단계인, 미적 실존이다. 여기에서는 그저 “인생은 즐겨야 한다”를 모토로 삼는다.

    둘째는 인간이 자기 실존의 의의를 잘 알고 윤리적인 사명에 충실하려고 하는 윤리적 실존이다. 여기에서는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지만, 인간은 이미 자기가 혼자라는 사실을 알고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셋째는 그러한 불안과 절망을 극복하고 종교적 실존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이겨낸 사람만이 ‘신 앞에 홀로 선 단독자’가 된다. 이것이 바로 종교적 실존이다.

    키르케고르는 당시의 세속화된 기독교를 비판했다. 세속적인 국가와 타락한 기독교가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명언: 절망은 자기 자신의 병

    “절망은 자기 자신의 병이며, 그렇기 때문에 세 가지 형태를 보인다. 절망하여 자기 자신을 소유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형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길 원하지 않는 형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길 원하는 형태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

    “결혼하라, 너는 후회할 것이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아도 너는 후회할 것이다.”

    “불안은 미리 앞질러 간다. 불안은 결과가 생기기 전에, 그 결과를 먼저 발견한다. 우리가 어떤 날씨가 다가오는 것을 저절로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에피소드: 비극적인 삶에서 종교적 삶으로

    #1. 프리드리히 니체는 키르케고르의 저작을 본 적도 없을뿐더러 그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어느 덴마크인 독자로부터 "우리나라에 키르케고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쓴 책을 보면 당신이 쓴 책에서 나오는 말과 여러 부분이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둘이 만나기 전에 키르케고르는 이탈리아 여행 중 정신병이 발병하면서 정신적 조우는 불발되었다.

    키르케고르의 세 가지 삶의 단계  - 미적 단계(육체적 쾌락),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  

    첫 번째 단계는 육체적 쾌락을 즐기는 미적 단계

    그런데 쾌락에는 '쾌락의 패러독스'가 있다. 자기가 원하는 쾌락으로 만족을 이루는 바로 그 순간에 사람들은 불만족을 느끼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윤리적 단계

    윤리적으로 살면 마음이 편안하고 참된 기쁨과 안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윤리적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윤리적 감수성'이 생긴다. 
    윤리적 감수성이란 내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민감하게 생각하는 태도이다. 
    윤리적 감수성이 민감하면 할수록 인간은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윤리적으로 살지 못하게 된다. 

    세 번째 단계는 종교적 단계

    하나님 앞에서 실존자(단독자)로 진실한 모습으로 서게 되는 것이다.

    #3. 그는 평생 세상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피했다. 심지어 후세에 그의 이름이 남용되는 것에 대비해서, “나의 유산을 물려받을 사람은 틀림없이 나에게 혐오감을 준 대학의 강사나 교수다. 그들은 나의 이러한 글까지도 강의의 소재로 삼을 것이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네가 왜 여기 있느냐?(열왕기상 19:9)


    시내산에 있는 엘리야에게 왜 여기 있느냐 ? 하나님께서 질문 하셨고, 
    엘리야는 더 큰 사명을 받고 가서 아람왕과 이스라엘 왕을 세우고 엘리사를 후계자로 세우고 7,000명을 목회하고 선지학교 교장이 되었다.

    3월 5일(목) 열왕기상 3:1-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5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At Gibeon the LORD appeared to Solomon during the night in a dream, and God said, "Ask for whatever you want me to give you.


    기브온 산당에서 1,000번 번제를 드린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줄꼬 구하라 하셨을 때 솔로몬은 지혜를 구해서 
    지혜도 받고 구하지 않은 부귀영화와 전무후무한 축복을 받았다.

    그럼에도 믿으라 
     
    북아메리카의 체로키 인디언족(Cherokee)은 북미 인디언 중 유일하게 기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백인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었지만 체로키 인디언은 복음이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해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됐고, 백인들과도 우호적으로 지냈습니다. 
    그럼에도 초창기 미국인들은 체로키 인디언족을 척박한 땅으로 다섯번이나 강제 이주시켰고 그 과정에서 보상은커녕 재산을 빼앗기까지 했습니다. 
    코만치 최후의 추장이자 아메리카 원주민교회 운동의 창시자인 쿠 아나 파커(Quanah Parker)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다른 인디언 부족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도 오클라호마의 여러 인디언 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다섯번이나 터전을 옮겼다. 
    우리의 재산은 하나도 남지 않았으며 사랑하는 가족을 잃기도 했다. 
    백인들은 계속해서 우리를 척박한 땅으로 몰아냈다. 
    그럼에도 그들이 전해 준 복음은 잊을 수 없는 진리임이 분명하다. 
    이 복음이 우리가 받은 고난보다 더 크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 

    성경은 정말로 진리이며, 믿음은 유일한 구원의 방법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이 진리가 퇴색될 수 있기에 작은 몸가짐 하나라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구원의 기쁨을 아는 선한 행실로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주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진리임을 세상이 알게 하소서. 
    성경 말씀대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이 질문의 구조는 단순한 축복 제안이 아니라, 왕의 중심을 드러내는 시험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선언  /  “무엇을 줄꼬”

    →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먼저 밝히십니다.
    → 인생의 공급자는 하나님이라는 전제.

    인간의 선택 요청 / “너는 구하라”

    → 하나님은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 무엇을 원하는지 묻습니다.
    → 욕망의 방향을 드러내게 하십니다.

    솔로몬의 선택 /  솔로몬은 부나 장수나 원수의 생명을 구하지 않고 

    “듣는 마음(지혜)을 주옵소서” 라고 구합니다.

    그 결과 :  지혜,  부,  영광이 함께 주어집니다. 

    구속사적 의미 /  이 질문은 성경 전체 흐름 속에서 보면 

    “네가 어디 있느냐?” (존재 질문)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행위 질문)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욕망 질문)  
    즉,  존재 → 행위 → 욕망
    하나님은 결국 우리의 “무엇을 원하는가”를 다루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만약 하나님이 지금 묻는다면,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당신은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은 우리의 가장 깊은 중심을 드러내는 거울입니다.


    솔로몬의 기도문 구조적 해부 (열왕기상 3장 / 역대하 1장)

    1단계 : 자기 인식 (자기 비움)

    솔로몬은 먼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작은 아이와 같아서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합니다.” (3:7) 

    구조 /  왕이지만 “어린아이”라고 고백
               지위보다 상태를 봄 
               능력보다 부족을 인정 

    기도의 출발은 ‘능력 과시’가 아니라 ‘자기 한계 인식’입니다.

    2단계 : 사명 인식

      
    “주의 백성을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3:9)

     구조 /  개인 성공이 아니라 
                맡겨진 백성 
                하나님의 통치 대리자 의식 

    기도의 방향이 자기 중심 →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전환됩니다.

    3단계 : 핵심 요청 – 듣는 마음 

    히브리어 원문은 “레브 쇼메아” (듣는 마음). (3:9)
    그는 부, 장수, 원수의 멸망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요청의 핵심 /  듣는 마음,  분별력,  선악 판단 

    지혜는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심장입니다.

    4단계 : 하나님의 응답 구조 

    하나님의 응답은 두 겹 구조입니다.

    1.   요청한 것 : 지혜  

    2.  요청하지 않은 것 : 부와 명예 

     올바른 중심을 구하면 주변적 축복은 따라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단계별 적용

    이제 적용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1단계 : 나는 누구인가?

    • 나는 이미 무엇이 부족한가?

    • 나는 아직 “어린아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2단계 : 무엇을 위해 사는가?

    • 내 기도는 생존인가?

    • 아니면 맡겨진 사람들을 위한 사명인가?

    3단계 : 무엇을 구하는가?

    • 환경 변화?

    • 사람 변화?

    • 아니면 듣는 마음?

    4단계 : 하나님의 응답을 신뢰하는가?

    •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것만이 아니라

    • 우리 중심에 따라 더하십니다.


    전체 구조 / 자기 인식
      → 사명 인식
      → 듣는 마음 요청
      → 중심에 따른 하나님의 더하심



    솔로몬의 기도 / 하나님이 먼저 질문하십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구조 분석  

    1. 하나님의 주권적 시작 

    기도는 인간이 먼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청에서 시작됨

    은혜가 먼저, 간구가 나중

    2.  자기 인식 (겸손) 

    “나는 작은 아이와 같아서…”  

    자신의 부족함 인정 
    교만이 사라질 때 응답이 가까워짐  

    3. 하나님의 뜻 중심  

    “주의 백성을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자기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백성 중심

    4.  동기의 순수성  

    부·장수·원수 멸망을 구하지 않음 
    동기가 하나님 마음과 일치

    5.  
    초과 응답  

    지혜 + 부 + 명예까지 더하심 
    “구하지 않은 것까지” 

    원리 :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역대하 7장 / 솔로몬 성전 봉헌 기도 



    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 응답의 4단계 구조

    ① 낮추고 (겸손)

    ② 기도하고 (관계 회복)

    ③ 얼굴을 구하고 (임재 추구)

    ④ 악에서 떠나면 (회개)

    👉 그때 하나님은

    • 하늘에서 듣고

    • 죄를 사하고

    • 땅을 고치심

    겸손 → 회개 → 관계 회복 → 치유

    3.다니엘서 9장 / 다니엘의 금식 기도




    4

    🔎 특징

    ① 말씀에 근거

    •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을 붙듦

    ② 민족적 회개

    • “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

    • 공동체 책임

    ③ 하나님의 의에 호소

    • 우리의 의 ❌

    • 하나님의 긍휼 ⭕

    👉 천사가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응답이 나왔다”고 말함

    말씀 → 회개 → 긍휼 의지 → 즉각적 응답


    요한복음 15장 / 예수의 등답 원리

    “내 안에 거하라…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신약적 완성 구조

    ① 연합 (거함)

    • 관계가 먼저

    ② 말씀 내주

    • 말씀이 마음을 지배

    ③ 뜻의 일치

    • 내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으로 변함

    ④ 응답

    • 이미 하나님의 뜻이 되었기에 이루어짐


    종합정리 - 응답받는 기도의 7단계  
    합 정리 — 응답받는 기도의 7단 구조
    1. 하나님의 은혜적 초청

    2. 자기 인식과 겸손

    3. 말씀에 근거

    4. 회개와 정결

    5. 하나님의 뜻 중심

    6. 관계적 연합

    7. 하나님 영광 목적


     한 문장으로 요약 /  
    응답받는 기도는 내 뜻을 관철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내 뜻이 하나님의 뜻으로 변화되는 과정이다.


    (예화) 있어야 할 곳, 해야 할 것 

    세상에 태어난지 얼마 안된 아기 낙타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우리는 왜 발굽이 세 개로 갈라져 있죠?" 
    "그건 사막의 모래 위를 걸을 때도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란다." 
    아기 낙타가 다시 물었습니다. "우리 눈썹이 이렇게 긴 이유는요?" 
    "사막의 거센 바람에 날리는 모래를 막아내고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지." 
    아기 낙타는 그래도 궁금한 게 많다는 듯 다시 물었습니다. 
    "알겠어요. 그런데 등 위에 커다란 혹은 왜 있죠?" 
    "사막에는 물이 없기 때문에 물을 보관하기 위해서란다." 
    아기 낙타는 엄마의 설명을 들었지만 단 한 가지가 이해되지 않았습 니다. 
    "그런데 엄마,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사막이 아닌 동물원에 있죠?"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으면 필요한 능력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지만 또한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전에 모여 함께 예배하고, 하나님 을 찬양하며 은혜를 나눠야 합니다. 
    또한 받은 은혜와 말씀으로 세상에 나가 행동으로, 말로, 복음을 직접 전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전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서가장 중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리로 나아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십시오. 
    주님, 제게 주신 자리에서 꼭 필요한 소금과 빛의 성도가 되게 하소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지만 또한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합시다

    3월 5일(목) 열왕기상 3:1-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5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At Gibeon the LORD appeared to Solomon during the night in a dream, and God said, "Ask for whatever you want me to give you.


    기브온 산당에서 1,000번 번제를 드린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줄꼬 구하라 하셨을 때 솔로몬은 지혜를 구해서 
    지혜도 받고 구하지 않은 부귀영화와 전무후무한 축복을 받았다.

    그럼에도 믿으라 
     
    북아메리카의 체로키 인디언족(Cherokee)은 북미 인디언 중 유일하게 기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백인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었지만 체로키 인디언은 복음이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해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됐고, 백인들과도 우호적으로 지냈습니다. 
    그럼에도 초창기 미국인들은 체로키 인디언족을 척박한 땅으로 다섯번이나 강제 이주시켰고 그 과정에서 보상은커녕 재산을 빼앗기까지 했습니다. 
    코만치 최후의 추장이자 아메리카 원주민교회 운동의 창시자인 쿠 아나 파커(Quanah Parker)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다른 인디언 부족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도 오클라호마의 여러 인디언 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다섯번이나 터전을 옮겼다. 
    우리의 재산은 하나도 남지 않았으며 사랑하는 가족을 잃기도 했다. 
    백인들은 계속해서 우리를 척박한 땅으로 몰아냈다. 
    그럼에도 그들이 전해 준 복음은 잊을 수 없는 진리임이 분명하다. 
    이 복음이 우리가 받은 고난보다 더 크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 

    성경은 정말로 진리이며, 믿음은 유일한 구원의 방법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이 진리가 퇴색될 수 있기에 작은 몸가짐 하나라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구원의 기쁨을 아는 선한 행실로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주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진리임을 세상이 알게 하소서. 
    성경 말씀대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이 질문의 구조는 단순한 축복 제안이 아니라, 왕의 중심을 드러내는 시험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선언  /  “무엇을 줄꼬”

    →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먼저 밝히십니다.
    → 인생의 공급자는 하나님이라는 전제.

    인간의 선택 요청 / “너는 구하라”

    → 하나님은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 무엇을 원하는지 묻습니다.
    → 욕망의 방향을 드러내게 하십니다.

    솔로몬의 선택 /  솔로몬은 부나 장수나 원수의 생명을 구하지 않고 

    “듣는 마음(지혜)을 주옵소서” 라고 구합니다.

    그 결과 :  지혜,  부,  영광이 함께 주어집니다. 

    구속사적 의미 /  이 질문은 성경 전체 흐름 속에서 보면 

    “네가 어디 있느냐?” (존재 질문)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행위 질문)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욕망 질문)  
    즉,  존재 → 행위 → 욕망
    하나님은 결국 우리의 “무엇을 원하는가”를 다루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만약 하나님이 지금 묻는다면,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당신은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은 우리의 가장 깊은 중심을 드러내는 거울입니다.


    솔로몬의 기도문 구조적 해부 (열왕기상 3장 / 역대하 1장)

    1단계 : 자기 인식 (자기 비움)

    솔로몬은 먼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작은 아이와 같아서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합니다.”  

    구조 /  왕이지만 “어린아이”라고 고백
               지위보다 상태를 봄 
               능력보다 부족을 인정 

    기도의 출발은 ‘능력 과시’가 아니라 ‘자기 한계 인식’입니다.

    2단계 : 사명 인식

      
    “주의 백성을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구조 /  개인 성공이 아니라 
                맡겨진 백성 
                하나님의 통치 대리자 의식 

    기도의 방향이 자기 중심 →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전환됩니다.

    3단계 : 핵심 요청 – 듣는 마음 

    히브리어 원문은 “레브 쇼메아” (듣는 마음). 
    그는 부, 장수, 원수의 멸망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요청의 핵심 /  듣는 마음,  분별력,  선악 판단 

    지혜는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심장입니다.

    4단계 : 하나님의 응답 구조 

    하나님의 응답은 두 겹 구조입니다.

    1.   요청한 것 : 지혜  

    2.  요청하지 않은 것 : 부와 명예 

     올바른 중심을 구하면 주변적 축복은 따라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단계별 적용

    이제 적용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1단계 : 나는 누구인가?

    • 나는 이미 무엇이 부족한가?

    • 나는 아직 “어린아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2단계 : 무엇을 위해 사는가?

    • 내 기도는 생존인가?

    • 아니면 맡겨진 사람들을 위한 사명인가?

    3단계 : 무엇을 구하는가?

    • 환경 변화?

    • 사람 변화?

    • 아니면 듣는 마음?

    4단계 : 하나님의 응답을 신뢰하는가?

    •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것만이 아니라

    • 우리 중심에 따라 더하십니다. 

    • 📌 전체 구조 

    자기 인식
    → 사명 인식
    → 듣는 마음 요청
    → 중심에 따른 하나님의 더하심






    3월 4일(수) 출애굽기 4:1-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2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Then the LORD said to him, "What is that in your hand?" "A staff," he replied.

    인생의 의미

    나치가 헝가리에 군수 공장을 만들고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강제로 노역을 시켰습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연합군은 나치의 보급력을 약화시키려고 정밀 폭격으로 대부분의 공장을 폭파했습니다. 
    공장을 재건하기에는 너무나 큰 비용과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 한 나치는 헝가리의 공장들을 폐허로 두었고 수용소의 유대인들도 더 이상 노역에 동원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유대인들을 그냥 둘 수 없었 던 나치는 다음날부터 유대인들을 무너진 공장터로 매일 불러냈습니다. 
    하루는 이쪽의 폐허 잔해를 저쪽으로 옮기고 다음날은 저쪽의 폐허 잔해를 이쪽으로 옮기도록 지시했습니다.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의미 없는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저 이쪽에 있는 돌을 저쪽으로 옮기기만 하면 되는데도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유대인들이 급격히 늘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일부러 죽으려고 총을 든 군인에게 달려들기도 했고 벽돌로 달려들다 최후를 맞기도 했습니다.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의미 없는 삶은 때론 죽음보다 괴롭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의미는 바로 믿음에서 옵니다. 
    이 귀한 믿음을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꾸지 말고, 그 어떤 고난에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 어떤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이라도 주님이 없는 삶은 연기처럼 사라질 의미 없는 삶임을 기억하십시오.

    주님, 이 세상에서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소서,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주님만을 사랑하며 주님만을 닮아갑시다. 

    모세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인하여 모세의 정체성이 전환됩니다.
    이제까지 지팡이는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던 목자의 도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목자의 지팡이가 아니라 민족을 이끌어가는 지도자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지팡이 하나가 정체성의 전환을 위한 도구가 된 것처럼 사순절 경건의 시간을 보내며 성경이 열려진다면 우리들에게도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이 분명합니다.

    모세는 120년을 살았습니다.
    모세의 일생을 3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1단계는 1-40년 애굽 왕궁에서의 생활
    2단계는 41-80년 미디안 광야에서의 생활
    3단계는 81-120년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로 생활

    본문은 모세가 81세가 되었을 무렵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What is that in your hand?) 라는 질문을 듣게 됩니다. 
    이 질문은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던 호렙산(시내산) 사건 중에 나옵니다. 

    모세는 사명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1.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면 어떻게 합니까?
    2. 나는 말을 잘하지 못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묻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세는 대답합니다.
    “지팡이니이다.”  

    이 질문의 깊은 의미

    하나님의 안목(眼目) / 눈 안, 눈 목
    안목이란 사물을 보고 분별하는 견식
    discerning eye, discernment

    하나님은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보신다

    모세의 손에는 왕권도, 군대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저 목자의 지팡이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평범한 지팡이를 통해

    1. 나일강을 치고
    2. 홍해를 가르고
    3.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미 네 손에 있는 것을 사용하십니다.

    지팡이 = 모세의 정체성 

    그 지팡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닙니다.

    1. 미디안에서 40년간 양을 치던 인생
    2. 실패자처럼 보였던 세월
    3. 낮아진 자리

    하나님은 그 인생 전체를 사용하셨습니다.

    벳세다 들판에서 온종일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해가 질 무렵 배고픔을 해결하려고 하셨을 때 200데나리온의 돈이 있어도 이 들판에서는 아무 것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한 소년이 작은 멸치와 같은 것 2마리 보리떡 다섯 개를 내놓았을 때 그것을 갖고 축사하신 후에 남자 장정들만 5천명을 먹이셨고 12광주리를 거두었습니다.
    작은 양으로 많은 무리를 먹이시는 능력의 예수님께서 아주 작은 것을 사용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은 있는 것을 사용하신다는 교훈을 말씀합니다.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 지팡이를 던지면 뱀이 됩니다.
    다시 뱀을 집으면 지팡이가 됩니다.
    혼해를 가리키면 물이 갈라집니다.
    반석을 치면 물이 솟아납니다.

    지팡이가 능력이 아니라 지팡이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이 능력입니다.

    무엇을 갖고 계십니까?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내려 놓을 수 있는 믿음을 찾습니다.
    그 믿음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나와 같은 사람의 기도
    나와 같은 사람의 헌금
    나와 같은 사람의 작은 정성을 기억하십니다.

    구속사적 흐름 안에서의 질문

    이 질문은 앞서의 질문들과 연결됩니다.

    1.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2.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3.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4.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5.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처음 질문은 존재의 위치를 묻는 질문이었다면,
    이 질문은 사명의 도구를 묻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위치를 회복하신 후 사명을 맡기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면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시간?   재능?   물질?   상처?   경험?  작은 믿음? 
    하나님은 이미 당신의 손 안에 두셨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큰가”가 아니라  “하나님께 맡겨졌는가” 입니다.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출애굽기 4:2)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네 손에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물으셨다.
    모세는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다. 보잘 것 없는 지팡이를 통해서 홍해를 가르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하시고...기적을 행케 하셨다.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기적을 일으키신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질문들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던지신 질문들이 매우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이 질문들은 정보 부족 때문이 아니라, 깨닫게 하시기 위한 질문, 곧 계시적 질문입니다.

    아래에 대표적인 질문들을 흐름별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타락 직후 – 존재를 묻는 질문

    창세기 3:9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위치를 모르셔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진 상태 
    빛에서 숨은 상태 
    자기 정체성을 잃은 상태 
    이 질문은 모든 인간에게 계속 울립니다.

    “지금 너는 어디에 서 있는가?”

    죄의 확산 – 책임을 묻는 질문
    창세기 4:9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존재에서 관계로 질문이 이동합니다.
    형제에 대한 책임 
    공동체적 책임 
    사랑의 부재

    가인의 대답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나님의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너는 네 형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죄 이후 – 행위를 묻는 질문
    창세기 4:10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죄는 숨길 수 없음 
    행위는 하나님 앞에 드러남 
    양심을 깨우는 질문 

    이 질문은 도덕적 책임을 드러냅니다. 

    언약의 흐름 – 약속의 자리를 묻는 질문
    창세기 18:9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단순 위치 질문이 아닙니다. 

    약속의 통로가 어디에 있는가?  
    불가능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은 진행 중 
    인간의 웃음과 하나님의 약속의 대비  

     질문의 구속사적 흐름

    단계 질문 초점
    존재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과의 관계
    관계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형제 사랑
    행위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책임
    언약      사라가 어디 있느냐             약속 

    공통 특징
     
    하나님은 이미 아신다. 
     질문은 인간을 깨우기 위함이다. 
     질문은 심판 이전에 주어지는 은혜다. 
     질문은 회복의 문을 연다.


    미디안의 40년 —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출처 : 출애굽기 3장  
    상태  / 광야의 목자   침묵의 세월   잊혀진 지도자 

    떨기나무 사건  영·혼·몸 관점  /    몸 : 낮아짐        혼 : 자아 부서짐        영 : 비로소 깨어남 
     “나는 말 못합니다”
     자아가 무너질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림

    출애굽의 40년 — “하나님이 하신다”
    출처 : 광야 인도 (출 14장 이후)

    상태   /  기적의 지도자    중보자    율법 수여자  

    영·혼·몸 관점  /     영 : 하나님과 대면       혼 : 온유함 (민 12:3)      몸 : 사명 도구 

     더 이상 “모세가 한다”가 아님
     “하나님이 하신다”  

    정리 구조

    단계 자아 고백 영·혼·몸 상태       핵심 메시지
    애굽      나는 할 수 있다      혼 중심        자기 열심
    미디안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혼 파쇄           비움
    광야      하나님이 하신다      영 중심        사명 완성  

    이것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1단계 : 열심은 있는데 하나님이 중심이 아님
    2단계 : 광야를 지나며 자아가 무너짐
    3단계 :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가 됨


    모세의 120년 인생 ― 40년 × 3단계 구조 

    애굽의 40년 — “나는 할 수 있다” 
    출처 : 출애굽기 2장  
    상태 
    왕궁에서 성장 
    최고의 교육 
    능력, 혈기, 정의감

     영·혼·몸 관점  / 몸 : 힘 있음.   혼 : 자아 강함 (민족의식, 정의감).    영 : 아직 다뤄지지 않음 

     결과 : 애굽 사람을 쳐 죽임
     하나님 없이 사명 수행하려는 “자기 열심”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이 질문은 출애굽기 4장 2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본문 장면 /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을 치던 목자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을 때, 모세의 손에 있던 것은 지팡이 하나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묻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세가 대답하되 “지팡이니이다.”  

    이 질문의 깊은 의미  

    존재의 자리 확인

    하나님은 모세의 능력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학력도, 과거의 왕자 신분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네 현실에 무엇이 있느냐를 물으셨습니다.  

    평범한 것이 하나님의 도구가 됨

    그 지팡이는

    1. 뱀이 되었고
    2. 홍해를 가르는 도구가 되었고
    3. 반석을 치는 도구가 되었고
    4. 하나님의 권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지팡이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릴 때 역사의 지팡이가 됩니다.  

    구속사적 구조

    이 질문은 이전 질문들과 연결됩니다.  

    아담 — “네가 어디 있느냐?”  
    가인 —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모세 —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흐름은 이렇습니다.

    위치 → 관계 → 사명

    하나님은 존재를 찾으시고,  관계를 물으시고,  이제는 사명을 묻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직업, 재능, 시간, 영향력, 작은 순종 하나

    하나님은 없는 것을 묻지 않으십니다.
    이미 네 손에 쥐어진 것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What is that in thine hand?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성경 출애굽기 4장 2절에 나오는 질문으로, 
    히브리어 원문은 '마 제베아데카'(Mazehbeyadekha)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에게 실로 엄청난 도전을 던져줍니다. 
    영어 성경 중 킹 제임스 버전(KJV)을 비롯한 대부분의 번역본은 "What is that in thine hand?"라고 표현합니다.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개역개정이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번역하고, 
    새번역은 '들려있는'이라는 표현을 추가하여 "네 손에 들려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번역함으로써, 
    모세가 지팡이를 쥐고 있는 실제 상황을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부와 존귀는 어디에서 비롯될까요? 
    우리의 건강, 물질, 재능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역대상 29장 12절은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의 손에는 권세와 능력이 있으므로, 모든 사람을 만인 위에 높이시기도 하시고, 막강하게도 하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근원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와 그에 따른 책임을 강조합니다. 
    사무엘상 2장 6-10절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을 강조하지만, 이는 인간의 선택과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일으키시는 권능을 가지셨지만,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인간의 순종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악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책임은 더욱 중요해집니다. 
    악인들이 흑암에 잠잠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뿐만 아니라, 인간이 악에 저항하고 선을 택하는 책임적 결단을 통해 완성되는 구원의 서사이기도 합니다.

    부족함 속에서 시작되는 기적은 선택과 순종의 만남에 있습니다.

    가난한 사르밧 과부는 선지자 엘리야를 무엇으로 대접할 수 있었을까요? 
    엘리야는 떡 한 조각을 자신에게 먼저 가져오라고 요청했습니다. 
    과부는 절망 속에서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을 보여주며 자신과 아들의 마지막 식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녀에게 먼저 자신을 위해 떡을 만들라고 촉구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명령이 아니라, 절망이라는 현실에 대한 인간의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순간, 과부는 자신의 생존 본능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내어놓은 작은 떡 한 조각 때문에 과부는 놀라운 복을 받았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 기록된 대로, 그녀의 순종적인 행위는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는 기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로운 순종이라는 파트너십을 통해 기적을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네 손에 들려있는 것'은 자기 비움과 순종의 도구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은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자발적인 헌신을 기뻐하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셨을 때, 모세는 자신이 가진 보잘것없는 지팡이를 내어놓아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습니다. 
    이 지팡이는 양을 치던 평범한 도구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땅에 던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지팡이를 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안위와 통제권을 내려놓는 자기 비움을 상징합니다. 
    모세가 순종하여 지팡이를 던지자, 그것은 뱀으로 변했고 다시 하나님의 지팡이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받고도 주저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지금 너의 삶에서 나를 위해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도전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소유가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여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것은 특별한 의미와 힘을 갖게 됩니다. 
    사사 삼갈의 막대기, 삼손의 나귀 턱뼈, 다윗의 물맷돌, 그리고 어린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모두 인간이 가진 보잘것없는 것을 믿음으로 내어놓았을 때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증거합니다.

    사사기 3:31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사사기 15:15-16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천명을 죽이고.
    가로되 나귀턱뼈로 한더미, 두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턱뼈로 내가 일천명을 죽였도다.

    사무엘상 17:49
    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에 엎드러지니라. 

    요한복음 6: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손에 있는 것을 찾으시는 하나님 사사 삼갈의 막대기, 삼손의 나귀 턱뼈, 다윗의 물맷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예수님의 가르침은 평범함 속에서 충만한 파트너십을 구축하라는 것입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하셨다는 기록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이 담고 있는 중요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과 깊이 연결됩니다. 
    오병이어 기적 때, 제자들은 가진 것이 없다고 절망했지만,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가져온 보잘것없는 것을 축복하시어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이 사건은 인간의 작은 헌신이 하나님의 능력과 만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평범한 직업과 기술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위대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일상적 재능과 직업도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부족하다고 느꼈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네가 가진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교훈하시며, 그들의 평범한 배경과 가진 것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하여 일하는 관계를 보여줍니다.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단순히 우리가 가진 것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꺼이 내어놓을 준비가 되었는지에 대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시편 51편 17절의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겸손하고 상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온전히 내어드릴 때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오늘 우리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중대한 질문을 받은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모세는 어떻든지 이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해야만 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오늘 그 질문에 답해야 하는 사람은 모세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수천 년 전의 질문이라고 해도 우리들 또한 그 질문에 답을 해야만 합니다.
    모세가 받은 질문은 아주 단순해 보이는 질문이었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여러분, 하나님이 모세의 손에 들린 것이 지팡이라는 것을 모르셔서 이 질문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이 질문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의미심장한 질문입니다. 
    따라서 그 질문을 평면적으로 이해해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 질문의 속뜻이 뭔지 우리는 깊이 생각해 봐야만 합니다.

    성경에 보면 때때로 의심심장한 주님의 질문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고 타락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 하나님이 아담에게 물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때도 역시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한 질문이 아닙니다. 이러한 질문을 통하여 하나님이 아담에게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모세가 어떤 대답을 할까요? 우리는 그의 대답을 듣기 전에 먼저 모세의 현재 모습을 돌아봅시다. 오늘의 장면을 영화로 친다면 지금 스크린에 나오는 모세는 어떤 모습일까요? 광야에 맥이 쭉 빠진 채 털썩 주저앉아 있는 한 노인이 있습니다. 눈에 초점도 없이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삶의 어떤 꿈이나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 차 있고, 머리는 하얗게 새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노을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힘없는 늙은이입니다. 이 노인은 지난 40년 동안 양을 치면서 살아 왔습니다. 매일매일 하는 일이라고는, 어디 좋은 풀밭이 없나 두리번거리면서 양들에게 풀을 뜯기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그 양마저도 자기 양이 아니고 장인 것이었습니다. 벌써 40년 동안이나 처가살이를 하는 중입니다. 이마의 주름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고 있는데 매일의 일상은 그저 고달프기만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모세의 모습입니다. 그런 그에게 오늘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느닷없는 질문을 던지시고 있는 겁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즉 이 질문의 의미는 지금까지 모세가 80세의 인생을 살아왔는데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80 인생 가운데 무엇이 남았느냐, 80세의 인생을 살면서 어떤 보람이 있었느냐는 뜻입니다.
    이 질문에 모세는 대답합니다. "지팡이입니다." 당시 모세가 가지고 있는 지팡이는 황금이나 보석으로 치장된 지팡이가 아닙니다. 양을 치는 80세 노인이 자기의 몸을 의지하는 평범한 막대기입니다. 즉 지금까지 80세의 인생을 살면서 어떤 의미가 있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지팡이입니다."라고 대답한 것은 "Nothing!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저 그렇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누구입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이었지만 공주의 아들이 돼서 이집트 왕궁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왕이 될 수도 있었던 인물입니다. 당시의 왕에게는 후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공주의 아들이 왕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계속 애급에 남아 있었다면 왕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실제 모세는 거기에 걸맞은 자질과 실력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애급과 근동지방을 통치할 수 있는 힘과 능력과 배후를 가지고 있었고, 시대와 역사를 통찰하는 안목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다 왕년의 얘깁니다. 지금은 미디안 광야에서 그저 장인의 양을 치면서 사는 한 힘없는 노인입니다. 그런 노인에게 어느 날 하나님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얼토당토않은 사명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인도해 내라는 겁니다.
    늙은 모세는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거절이라기보다는 능력 자체가 되질 않았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재차 명령하시고 모세는 거기에 다시 반발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바로 오늘의 이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1. 이 질문은 "네가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의 결과가 무엇이냐?"는 의미입니다.
    모세가 40세가 될 때까지 그는 권력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는 힘과 능력, 권세, 거기다가 지식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동족을 위할 줄도 알았습니다. 주관과 소신과 의리까지 겸비한, 정말 너무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힘으로 한 일이 뭐였지요? 애매한 사람을 둘이나 죽였습니다.
    어찌 보면 당시의 사회상으로 볼 때 큰 권력을 가진 모세가 사람 둘을 죽인 것은 대수롭지 않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이 미묘한 정치적인 사건과 연루되면 이것이 꼬투리가 되어 권력에서 제거되어야 하는 중대한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죽인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당시 애급 사람의 노예로 있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이 살인은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죽인 또 다른 한 사람은 애급 사람이요, 정부 관리직인 감독관입니다. 상황이 아주 미묘하게 정치적인 사건으로 발전하여 꼬투리가 잡힐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 모세의 목숨이 위태로워졌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기 목숨 하나 건지려고 왕궁을 떠나 광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한때 왕자였고, 그래서 왕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는 사람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나름대로 몸부림치며 재기를 노렸겠지만, 결국 그는 지금 양치는 목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한 노인이라는 사실을 지난 40년 동안 처절하리만큼 느꼈습니다. 자신의 야망, 장밋빛 환상, 화려한 재기의 꿈... 이런 것들은 이젠 모두 다 저 광야에 묻어야만 했습니다. 그의 활동무대는 더 이상 왕궁이 아닙니다.
    그가 최선을 다해 살았던 삶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자기 꿈을 묻은 저 광야와, 지금 자기가 목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낡은 지팡이 하나, 그게 다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답합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팡이입니다." 모세에게 찾아 오셔서 질문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결과가 무엇이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옛날 광야의 모세처럼 여러분도 어느새 희망을 포기하고, 그저 하루하루 현실에 매여서 아무 꿈도 없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손에 들려 있는 게 뭡니까? 꿈과 희망 대신 답답함이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왕의 홀이 들려 있어야 될 모세의 손에는 그것 대신 지팡이가 쥐어져 있습니다. 그게 지금 여러분과 저의 모습은 아닌가요?
    하나님은 왜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모세를 홀로 두셨을까요? 도대체 뭘 가르치시려고 혼자 그렇게 긴긴 세월을 훈련시키셨을까요? 아니 이것은 훈련이라기보다도 그냥 썩히는 것이라고 표현해야 맞을 겁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그 광야에서 40년간 긴 세월동안 모세라는 사람을 썩히셨을까요? 딱 한 가지입니다.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 없는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 없는 인생의 결과는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은 이것 하나 가르치시려고 모세를 40년간 혼자 광야에 두신 겁니다. 즉 네 팔십 평생 살아 온 인생의 결과는 0,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 의미가 바로 "지팡이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모두가 제로, Nothing, 0입니다. 과거가 어떻던, 지금 무엇을 하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의 결과는 언제나 0로 표시됩니다.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나이가 80이 되어도 하나님 없이 산 인생은 허무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죽을 때가 다 돼서 깨닫는다면 비극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깨닫고 의미 있는 보람찬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간다운 인생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 지팡이뿐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했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2. 이 질문은 "너는 네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모세는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히브리 사람이었습니다. 왕궁에서의 훈련이 끝나면 자기 민족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자처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과 애급 사람이 싸울 때, 이스라엘 편을 들어서 애급 사람을 쳐 죽인 겁니다. 그 일 후에 이번에는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우는 것을 목격합니다. 같은 동족끼리 싸우지 말라고 말립니다. 그런 그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마디 합니다. "누가 너를 우리의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이것은 모세의 꿈을 깨뜨리는 한 마디가 되었습니다. 모세 스스로는 애급의 노예생활로부터 자기 민족을 해방시킬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그건 순전히 자기만의 생각이었습니다. 동족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세는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광야로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꿈도 목표도 사명도 다 접어버린 노인네 목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임을 알게 된 겁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이제 내가 너를 애급 왕 바로에게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모세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아니요. 그 일은 제 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과거 한 때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저는 애당초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저는 단지 목자일 뿐입니다. 내가 전에 배웠던 건 그 무엇이든 이제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저 이 양들과 뒹굴면서 좋은 풀밭이나 찾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민족을 구원하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명을 거절한 이유가 뭘까요? 자기는 평범한 목자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모세는 이제야 참 자기를 안 것인지도 모릅니다. 40년 동안 광야에 있으면서 이제야 모세는 그 사실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처음 그를 부르셨을 때, 모세는 하나님께 반문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누굽니까? 내가 누구기에 나를 부르십니까? 나는 단지 양치는 목자일 뿐입니다. 나를 부르지 마세요. 나를 괴롭게 하지 마세요. 이렇게 살다 죽게 그냥 내버려두세요."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은 이 질문을 통해서 모세, 그가 진정 누군가 하는 것을 알려주시길 원하셨습니다. 사람은 자신에 대해 크게 두 가지로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자신을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또 하나는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각자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우월감과 열등감의 경계에서 곡예를 하며 삽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 우리는 왜 하나님이 모세에게 40년의 왕궁생활과 40년의 광야생활을 하게 하셨는지 짐작이 가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누군가 하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앞의 40년과 뒤의 40년은 극과 극입니다. 비교를 하려고 해도 비교 자체가 되질 않습니다. "나는 대단한 존재야!" 이것과 "나는 별 볼일 없어!" 이 두 개의 자화상 중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할까요? 둘 다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자기를 평가하기 쉽습니다. 부자이고 지위나 명예가 높으면 귀한 존재요, 가난하고 실패하면 낙오자라고 여깁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왕자일 때는 대단한 존재요, 목자일 때는 별 볼일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었어요. "모세야, 환경에 따라 너의 가치가 존귀해지거나 비참해 지는 게 아니란다." 그 말씀을 하시고 싶은 거였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 질문을 통해서 주님은 첫째, "모세야, 나 없는 삶은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어. 0(제로) 이야!"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두 번째 이 질문을 통해서 "그래! 너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이제 내가 너와 함께 하는 이상, 너는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야. 너는 나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거야!" 이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가 언제입니까? 
    젊었을 때? 왕궁에 있을 때? 지혜와 배짱이 충천할 때?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자신 만만해 있을 때? 정말 인간적으로 쓸모 있다고 생각했을 때? 그때 오셨나요? 아닙니다. 다 늙어빠진, 그래서 이제는 스스로도 쓸모없는 폐품이 됐다고 여겼을 때, 또한 누구의 도움 없이는 설 수조차도 없을 것 같은 그때 나타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나에 대한 철저한 절망이 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내게 오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기를 인식하고, 자신에 대해 한없이 절망할 때,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시간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모세를 광야로 집어넣어 그로 하여금 너무도 평범한 시간을 오랫동안 보내게 했던 겁니다. 매일 똑같은 일상에, 매일 똑같은 풍경에, 매일 똑같은 사람에게 40년을 담가두셨습니다. 그로 인해 모세는 더 낮아지고, 더 작아지고, 더 쓸모없는 자신인 것을 깨우쳤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남들보다 더 특별해지기를 원합니다. 더 잘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환경은 도리어 나 자신이 더 낮아지고, 더 작아지고, 더 비천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저주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평범함 속에서, 아니 낮아짐과 작아짐을 통해서 진정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겸손해지라는 뜻입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너는 너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오! 하나님,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렁이만도 못합니다. 저는 저 자신에 대해 절망합니다. 하나님, 저를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이것이 이 질문에 들어있는 참뜻입니다. 아무쪼록 이곳 캘거리 땅에서 계속되는 평범한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이 질문은 "그러면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겠느냐?" 하는 의미입니다.
    과거는 지나갔습니다. 앞으로의 삶이 천 배, 만 배 더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네 지팡이를 던져 봐라."고 합니다. 그 지팡이가 어떤 지팡이입니까? 자기 자신의 처지를 잘 나타내고 있는 지팡이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던졌습니다. 그런데 지팡이가 갑자기 뱀이 됐습니다. 광야생활에 익숙한 모세는 뱀의 무서움을 잘 압니다.
    모세는 뱀으로 변한 지팡이를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자기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몰랐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뒤로 물러서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또한 뱀처럼 엄청난 애급을 상대로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은 광야로 도망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뱀은 머리를 잡아야지 꼬리를 잡으면 물립니다. 하지만 모세가 꼬리를 잡았을 때 뱀은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또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품에 넣으라." 그랬더니 그 손에 문둥병이 생겼습니다. 다시 한 번 품에 넣었다 꺼내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성한 손이 나왔습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 앞에서 이런 일을 하셨던 걸까요?

    본문 5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즉 모세에게 나타난 분이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지켜 오신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인생 중에 함께 하셨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시고,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모세도, 우리들도 지켜주시고, 인도하시고, 사용하시고, 축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지팡이는 모세의 실패와 깨어진 꿈의 상징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초라하고 늙어버린 그를 들어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초라한 지팡이로 넘실대는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고, 그 지팡이를 보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세의 40년 광야 연단은 그저 세월낭비가 아닙니다. 
    겉으로는 실패와 좌절의 세월처럼 보이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다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 정해놓은 섭리요, 과정이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곳 캘거리에서 보낸 그 동안의 세월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세월이 아름답지 못했다고, 혹은 쓰디쓴 추억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괜히 이곳에 왔다고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십시오. 
    모세의 광야 40년의 세월을 하나님이 유용하게 쓰시듯이,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곳에서 겪은 쓰디쓴 추억조차도, 별 볼일 없이 일어나는 평상의 일들도 아름답게 사용하십니다. 
    때로는 그것이 실패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손에 들려있다면 그것은 대단히 유용한 모습으로 사용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손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낡은 지팡이 하나입니까? 실패입니까? 허무입니까? 부족한 재능입니까? 연약한 믿음입니까? 당장 떨어진 은행의 잔고입니까? 
    자신에 대한 실망입니까? 또는 상처 주는 인간에 대한 지독한 실망입니까? 
    그게 뭐든 이 시간 다 주님 앞에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 낡은 지팡이를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그 지팡이로 여러분을 세우실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질문합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는 대답합니다. 
    "주여, 지팡이입니다."


    3월 3일(화) 창세기 18:9-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9절)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Where is your wife Sarah?" they asked him. "There, in the tent," he said.

    (예화) 에릭 H. 에릭슨(Erik H. Erikson)의 정체성 위기 이론(Identity Crisis Theory) : 
              청소년의 자아 찾기(Adolescents' Search for Self)

    '정체성 위기 이론'으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발달심리학자인 에릭 에릭슨(Erik Homburger Erikson)이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한 인디언 거주지를 찾았습니다. 
    에릭슨은 최근 몇 년 사이 폭발적으로 마약과 알코올 중독자가 늘어났고 특히 청소년 강력 범죄가 급증하고 있으니 원인을 밝혀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에릭슨은 가장 먼저 학생들의 가정을 조사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학교에서 배워온 내용들을 들으며 "왜 백인처럼 생각하고 말하느냐?"라고 호되게 야단을 쳤습니다. 
    다음에는 학교를 찾아갔습니다. 
    정부에서 파견된 교사들은 가정에서 교육받은 대로 행동하는 학생들에게 "왜 배운 대로 하지 않느냐? 
    아직도 벌판에서 살아가는 인디언인 줄 아느냐?"라고 훈육했습니다. 
    아이들은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가 야 하는지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에릭슨은 이곳에서 일어난 심각한 사회 문제의 원인은 '정체성을 잃어버린 아이들이 느끼는 무력감과 좌절감'이라고 말했습니다. 
    머무는 장소와 만나는 사람에 따라 변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바른 정체성을 지키십시오.  

    주님, 세상 가운데 방황하지 않고 진리의 길을 따라 살아가게 하소서. 
    세상과 주님 사이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정체성을 정합시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던지신 근원적 질문들이 소개되었습니다. 
    신학적으로 가장 많이 묵상되는 창세기의 4대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세기 3:9)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세기 4:9)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창세기 4:10)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창세기 18:9)

    “네가 어디 있느냐?”(창세기 3:9) 
    죄 이후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9절에서 아담에게 던지신 질문 
    위치를 묻는 것이 아니라 존재 상태를 묻는 질문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숨고 있는가?” 
    인간의 영적 위치에 대한 질문 
    타락 이후 첫 번째 하나님의 음성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창세기 3:13)

    하와에게 하신 말씀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질문  
    핑계와 전가가 시작되는 장면  
     인간의 책임 문제
     죄의 본질이 드러남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세기 4:9) 

    가인에게 던지신 질문 
    개인 죄를 넘어 관계의 책임을 묻는 질문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인간의 형제 책임
     공동체 윤리의 출발점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창세기 18:9)

    하나님(세 천사)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질문 
    언약의 씨에 대한 질문  
    사라의 웃음 속에 담긴 믿음과 불신의 긴장  
     구속사의 약속이 어디 있는가를 묻는 질문 
     인간의 불신 속에서도 진행되는 하나님의 계획

    네 질문의 흐름 (구속사적 구조)  

    존재의 위치
    – “네가 어디 있느냐?” 
    행위의 책임 –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관계의 책임 –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언약의 위치 – “약속의 씨가 어디 있느냐?” 

    ➡ 개인 → 행위 → 관계 → 구속사
    ➡ 타락 → 책임 → 공동체 → 약속  

    마므레 상수리나무 아래 나타난 세 사람 (창세기 18장)

    아브라함에게 세 사람이 나타난 사건은 창세기 1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언약의 확증과 심판의 예고가 동시에 선포되는 구속사적 분기점입니다. 

    세 사람은 누구인가?

    본문을 보면  처음에는 “세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곧 그 중 한 분은 여호와로 불립니다. 
    19장에서는 두 사람이 소돔으로 내려가며 천사로 명확히 드러납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이해합니다.
     한 분 → 여호와의 현현(神顯, Theophany)
     
    두 분 → 천사 
    이는 훗날 성육신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적 현현으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왜 세 사람의 형태로 나타났는가?

    1. 언약의 확증을 위해

    이 방문의 핵심 목적은: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의 확증

    아브라함은 이미 약속을 받았지만,
    이제는 구체적인 시기가 선언됩니다.

    이는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믿음을 최종적으로 완성시키는 방문입니다.

    성경에서 ‘증인’(히브리어: עֵד ʿēd, 헬라어: μάρτυς martys)은 진리를 증언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증인을 세우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와 진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백성을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증인이 필요한 이유

    증인의 개념은 공의와 진리의 확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불의와 죄악을 심판하시기 위해 거짓 증거를 엄격히 금지하시고, 오직 참된 증거만을 인정하셨습니다.

    신명기 19:15
    "사람의 모든 악에 대하여, 모든 죄에 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이 말씀은 인간 사회에서 진리가 왜곡되지 않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명령입니다. 또한 신약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온 세상에서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증인은 단순한 목격자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라도 진리를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2. 성경에서 등장하는 증인들

    1) 구약의 증인

    구약에서 ‘증인’이라는 개념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강조할 때 자주 사용됩니다.

    📖  이사야 43:10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받은 자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증인으로 부르십니다. 즉, 하나님을 알고 경험한 사람들이 그분의 존재와 구원을 세상에 증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① 두세 증인의 원칙

    구약에서는 공의로운 재판을 위해 반드시 두세 명의 증인이 필요했습니다.

    📖 신명기 17:6
    "죽일 자를 두세 증인의 입으로 죽일 것이요, 한 증인의 입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이것은 거짓 증언으로 억울한 사람이 희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법적 원칙입니다.

    ② 십계명과 거짓 증거 금지

    하나님께서는 증언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며, 거짓 증거를 금하셨습니다.

    📖 출애굽기 20: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증인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말해야 하며, 거짓 증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2) 신약의 증인

    신약에서 증인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① 예수님 자신이 증인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완전한 증인이십니다.

    📖 요한계시록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고, 십자가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② 사도들과 순교자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 요한복음 15:26-27
    "보혜사 곧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성령...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이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성경에서 ‘증인’은 단순한 목격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는 자입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역할을 맡았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포도나무의 비유는 참된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증인이 되기 위해 진리를 말하고, 성령 안에서 열매를 맺으며, 우리의 삶으로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하나님의 참된 증인이 되어 예수님의 복음을 끝까지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라의 웃음을 드러내기 위해

    사라는 속으로 웃습니다.
    하나님은 그 웃음을 지적하십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1. 인간의 의심
    2. 숨겨진 내면
    3.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취되는 은혜 
    즉, 이 방문은 양심을 비추는 방문입니다.

    소돔 심판 전 중보를 위해

    이 사건 직후, 아브라함은 소돔을 위해 중보합니다. 
    이는 단순한 역사 사건이 아니라 의인의 중보,  공의와 자비의 긴장,  장차 오실 중보자의 그림자 
    결국 이 장면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예표합니다.

    왜 “세 사람”인가? (상징적 해석)

    교부들 중 일부는 이를 삼위 하나님의 그림자로 보았습니다. 
    한 본질, 세 위격 
    물론 본문이 명확히 삼위일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상징적·계시적 구조 속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영적 구조로 정리하면

    단계 의미
    방문        은혜는 먼저 찾아온다
    식사        언약은 교제 속에서 확증된다
    약속        불가능이 가능으로 선포된다
    웃음        인간의 의심이 드러난다
    중보        의인은 세상을 위해 선다  


    핵심 결론 / 아브라함에게 세 사람이 나타난 이유는
    1. 언약의 성취를 확정하기 위해
    2. 사라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해
    3. 소돔 심판 전 중보를 준비시키기 위해
    4. 장차 오실 중보자를 예표하기 위해

    이 사건은 약속과 심판 사이에 서 있는 의인의 자리를 보여줍니다. 

    마므레 상수리나무에 나타난 세 사람 (창세기 18장)

    사건은 창세기 18장에서 일어납니다.
    장소는 헤브론 근처 마므레 상수리나무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에서 "세 사람"이 서 있습니다.

    세 사람은 누구인가?

    본문을 따라가면 점점 정체가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세 사람”
    대화가 진행되며 그 중 한 분은 여호와
    19장에 가면 두 사람은 소돔으로 가는 천사

    즉 구조는

    인물 정체
    한 분        여호와 (하나님)
    두 사람             천사

    여호와 + 두 천사  /  이 장면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매우 특별한 사건입니다. 

    왜 세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셨을까?

    1. 
    언약의 갱신과 생명의 약속

    이 방문의 핵심 목적은 사라에게 아들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내년 이맘때에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이는 단순한 출산 예고가 아니라
    언약 계보의 확정입니다.

    •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메시아 

    심판 전의 계시

    이 방문 직후 이어지는 사건은 소돔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즉,  의인에게는 미리 알리심
          중보 기회를 주심
          공의와 긍휼을 동시에 드러내심   

    구속사적 예표

    초대 교회 전통에서는 이 장면을 삼위 하나님의 예표로 보기도 했습니다. 
    특히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유명한 성화는 이 장면을 “삼위일체” 상징으로 표현했습니다.  

    영적 구조로 보면

    당신이 이전에 질문하셨던 “하나님의 질문들” 흐름과 연결하면

    질문       대상             목적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         타락 후 회복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가인           양심 고발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아브라함           언약 완성

     하나님의 방문은 항상 구속을 향합니다.

    깊은 상징

    상수리나무
    → 견고함, 오래됨, 언약의 자리

    장막
    → 나그네 인생

    떡과 송아지
    → 희생, 교제, 식탁 언약

    그리고  이어지는 소돔 심판,  → 생명과 심판의 갈림길 

    결정적 의미 / 
    마므레 상수리나무 사건은
    1. 하나님이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방문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2. 언약은 추상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3. 심판 전에는 반드시 은혜의 방문이 있습니다.



    아담 → 가인 → 아브라함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하면,
    하나님의 질문과 피(생명)의 흐름이 어떻게 구속사로 발전하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아담 — 존재의 상실 (관계의 붕괴)

    창세기 3:9 /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질문의 본질
    1. 위치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존재 상태를 묻는 질문
    2.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3. 수치 → 두려움 → 숨음  

    구속사적 의미

    죄의 시작 /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숨는 존재”가 됨,  문제는 ‘행동’ 이전에 존재의 이탈 

    핵심 : 관계의 상실

    가인 — 양심의 붕괴 (피의 외침)

    창세기 4:9 /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10 /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질문의 초점
    1.  
    존재가 아니라 책임
    2. 
    관계 파괴가 이제 형제 살해로 발전
    3. 피가 땅에서 외침 (양심의 외침)  

    구속사적 의미
    1. 
    죄는 개인을 넘어 공동체를 파괴
    2.  인간은 책임을 회피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3. 피는 심판을 요청 

    핵심 : 책임의 붕괴 + 심판을 부르는 피

    아브라함 — 약속의 시작 (은혜의 선택)

    창세기 18:9 /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질문의 방향
    1. 
    더 이상 심판 중심이 아니라 약속 중심
    2. 
    죽은 태 같은 사라 → 생명의 약속
    3. 숨은 사라 → 드러나는 약속

    구속사적 의미
    1.  
    하나님이 찾아오심
    2. 
    인간의 실패 위에 언약이 시작됨
    3. 
    생명의 씨(이삭) → 메시아 계보  

    핵심 : 은혜의 선택 + 약속의 씨

    구속사적 3단계 구조

    단계 질문 인간 상태      피의 의미          하나님의 방향
       아담        네가 어디 있느냐          숨음        아직 흘러야 할 피               찾으심
      가인       아벨이 어디 있느냐       책임 회피          심판을 부르는 피             심문하심
    아브라함       사라가 어디 있느냐        불가능          약속을 준비하는 피           언약을 세우심

    큰 흐름  

    아담 → 관계 상실 
    가인 → 형제 파괴 
    아브라함 → 언약 회복 시작

    타락 → 폭력 → 약속 
    심판의 피 → 언약의 피로 이동  

    그리고 완성
    히브리서  12:24 /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피”

    아벨의 피는 심판을 외치고
    예수의 피는 용서를 말합니다.

    아담의 숨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담대히 나아감”으로 회복됩니다. 

    사라를 찾으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의 집에 할례가 행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집을 방문하신 이야기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18장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식탁에 앉으셨고, 구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우리의 영원한 떡과 음료, 즉 참된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실 성찬의 의미를 미리 엿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손님들이 누구인지 깨닫자마자 급히 아내를 찾습니다. 
    성경은 그가 서둘러 사라에게 갔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사라에게 무려 세 스아(약 22리터)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밀가루로 떡을 만들라고 요청합니다. 
    이는 장정 한 사람이 한 달 내내 먹어도 다 먹지 못할 만큼 많은 양입니다. 
    세 분의 귀한 손님을 위해 아브라함이 얼마나 성대하고도 간절한 마음으로 잔치를 준비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라의 망설임과 하나님의 부르심

    그런데 이 이야기 가운데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요청에 따라 사라가 엄청난 양의 떡을 만들었고, 그것으로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그렇다면 음식을 직접 준비한 안주인이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혹자는 고대 근동 지방의 여인들이 외부에 잘 나서지 않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비가일과 다윗의 이야기나 사르밧 과부의 예를 보면, 안주인이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라는 손님 앞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달려가 사라에게 무엇이라고 말했을까요? 
    "지금 엄청난 양의 떡을 만들어야 하오!"라는 느닷없는 요구만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는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어주신 그분이 오셨소. 우리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곳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이 우리 집에 오신 것 같소!"

    그 증거는 잠시 후 드러납니다. 
    세 손님 중 한 분, 곧 여호와께서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분은 그녀의 이름이 '사라'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이 이름은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바꿔주신 이름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아내에게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꾸시고 어떤 약속을 하셨는지 이미 전했음을 의미합니다. 
    사라도 지금 찾아오신 분이 누구이며, 남편이 왜 이토록 서두르는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라는 선뜻 나아가지 못합니다. 
    무관심해서였을까요? 
    ‘하나님이 오셨다지만, 잠시 머물다 가시겠지’라고 생각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라는 장막 안에 머물면서도 문가에 바싹 다가서서 바깥의 대화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고 계셨지만, 그 모든 말씀은 사실상 사라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어디에 있는지 아셨고, 사라는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너무나 궁금해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라가 다시 경수를 시작하여 몸이 좋지 않아 사람들 앞에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나아가지 않은 것이 아니냐는 가설을 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에서 명확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성경이 보여주는 단어들은 조금 다른 접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라가 어디 있느냐?"라고 찾으시는 이 질문은 창세기 초반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던 장면입니다. 
    누군가를 "어디 있느냐?"라고 찾으시는 것은, 그가 숨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담은 왜 숨었습니까?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의 핵심은 사라 역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할 부끄러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남편을 통해 자신이 아들을 낳고, 그를 통해 자손이 번성하리라는 약속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보여주듯, 사라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그 예언을 하신 하나님이 바로 문 앞에 와 계시니, 우리말로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 심정으로 차마 나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약속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그녀는 그저 숨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 이름에 담긴 의미

    하나님께서 사라를 찾으실 때, 그녀의 새 이름인 '사라'로 부르셨다는 점은 "아담아, 어디 있느냐?"는 부르심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담을 부르실 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옛 이름인 '사래'가 아닌, 하나님이 직접 지어주신 새 이름 '사라'를 부르십니다.

    이는 마치 하와를 부르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와의 원래 이름은 '여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첫 복음을 선포하신 후에야, 아담은 그녀에게 '하와', 즉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새 이름을 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지금 '사라'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이름의 뜻은 '열국의 어머니'입니다. 
    만약 "여자여,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셨다면 심판의 의미가 강했겠지만, "하와야, 어디 있느냐?"라는 부르심에는 "내 약속을 받은 자여, 어디 있느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사라에게 "나의 약속을 품은 자, 열국의 어머니가 될 자여,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라는 여전히 자신이 열국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상태이기에, 그 부르심 앞에 나설 수 없었습니다.

    사라의 복잡한 마음과 문제

    본문을 보면, 사라는 장막 문 곁에 서서 대화를 엿듣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녀의 두 가지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부끄러움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판단과 처한 환경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녀의 문제는 복잡했지만, 가장 근원적인 것은 오랫동안 지속된 불임의 고통이었습니다. 무려 60여 년간 그녀를 짓눌러 온 문제였습니다.

    60년 동안 기도했지만 아무 소망도 보이지 않고, 이제는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낳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해진 몸이 되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지금 자식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얼마나 복잡한 심정일까요? 
    사라는 이미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자신의 몸을 보아도, 늙어버린 남편을 보아도 더는 기대할 것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남편 아브라함으로 인한 깊은 상처도 있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라에게 "인생에서 가장 큰 상처가 무엇이었나요?"라고 묻는다면, 그녀는 아마 이렇게 답할 겁니다. 
    "남편이 자신의 목숨을 위해 저를 누이라 속이고 다른 남자에게 내어주었던 일입니다. 여러분이라면 그 기억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생명의 위협 앞에서 아내를 방패 삼았던 이기적인 남편이었습니다. 
    그런 남편에게서 그녀가 무슨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사라는 오늘 속으로 말합니다.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그녀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자식도, 신뢰할 남편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포기하거나, 혹은 자기 자신을 설득하며 겨우 살아남으려 애쓰게 됩니다. "그래도 이만하니 다행이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말입니다. 사라는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담담한 척 살아갔을지 모르지만, 그 내면에는 여인으로서의 깊은 부끄러움과 고통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이었기에, 그녀는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듣고자 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음성

    하지만 사라의 마음속에는 단지 부끄러움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녀가 장막 문 뒤에서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과 두 천사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이것이 또 다른 그녀의 마음이었죠. 사라는 감히 나가지도 못하고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그 이야기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싶었고, 우리 식으로 말해 정말 믿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내가 받을 복은 뭘까? 내가 듣고 싶은 얘기가 있는 거야.' 아들을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자기가 기대하는 다른 이야기가 있었던 거죠. 여러분, 이 얼마나 가련한 여인입니까? 사라라는 여인의 인생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성경은 이제 하나님께서 이 사라를 '끄집어내고 있다', 즉 '불러내 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라는 어디에 있느냐?" 자신의 환경 때문에 뒤로 숨었던 여인, 자신의 처지 때문에 뒤로 숨었고, 눈물 뒤에 숨고, 한숨 뒤에 숨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자기 문제 속에 숨어 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 여인에게 주님이 물으시는 거죠. "사라야, 어디 있느냐?" 여러분, 이 이야기는 전부 아브라함에게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부 사라에게 하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앞에 두고 아브라함에게 말은 하지만, 실은 전부 사라에게 하고 있는 말이죠. 뻔히 모든 사정을 너무나 잘 아시면서도 이렇게 하시는 겁니다. 만약 "사라야, 너 거기 숨어 있잖아, 나와라"라고 하셨다면 무슨 할 말이 있었겠어요? 부끄러워하면서 사라가 걸어 나왔다고 나오겠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분명히 그 뒤에 서서 듣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시는데도 아브라함에게 얘기하듯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상상하고 생각해 보십시오. 한 인간을 향한 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신지 뻔히 아시면서 그렇게 '사라'라는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것도 일부러 '사라'라고 부르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지어주신 그 이름, 열국의 어머니. 하나님의 깊은 속내가 담겨 있는 거죠. "사라는 어디에 있느냐? 내 약속의 딸은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 이건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사라처럼 우리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숨어 있는 것 아닙니까? 믿지 못하고 여전히 우리도 문제 속에 숨어 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문제에 치여 하나님조차 찾지도 못할 정도로 힘들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께서 누구를 부르신 겁니까? "내 양들아, 내게로 오라. 내 아들과 내 딸들아, 이것이 바로 너희의 이름이다. 어디에 있느냐?" 주님은 우리를 끄집어내어 하나님의 음성 앞에 세우시는 겁니다. 문 뒤에 숨어 있는 우리들을 끄집어냅니다. 다 아시면서도 부르시며, 여전히 연약한 믿음 속에 있는 우리들, 그래서 너무나 뻔한 대답 속에 지친 우리들. 사라에게도 그 오랜 기간 동안이 그러했듯이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사라가 기도 한 번도 안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죠? 사라가 자식을 얼마나 원했겠어요? 어머니가 되고 싶었던 여인이었죠. 그런데 그녀에게는 자식을 낳을, 그리고 자식이 그녀를 통해 나온다는 아무런 소망도 없었고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제 90이 되었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처음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너를 통하여 내가 자식을 낳을 것이고 그 자식을 통하여 자손을 이룰 것이다." 이 대답이 그녀에게 위로가 됐을까요, 아니면 절망이 됐을까요? 여러분, 그녀는 너무나 지쳤을 겁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너무나 당연한 대답이면서도 너무나 속상한 대답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야" 혹은 "이 모든 것 다 지나갈 일들이야. 그러니까 조금만 참고 우리 지나가자"라고 말하는 것들이 때로는 위로가 될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더 화가 날 때도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지친 사람에게 더 지치게 하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장막 문 뒤에 서서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고 있는 이 사라에게 처음 하신 말씀이 얼마나 의미심장했을까요? 새로운 이름 "사라야"라고 부르면서 "사라는 어디에 있느냐?" 세상에서 건져낸 나의 사랑하는 딸들아, 사랑하는 아들들아, 너희가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 어쩌면 하나님이 멀다고 느낄 수도 있고 사라 역시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장막 천 하나가 막고 있었던 겁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라를 찾으셨고, 놀랍게도 하나님을 피한다고 생각하며 장막 문 옆에서 그 소리를 들으려 했던 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얼마나 우리가 많이 포기합니까? 여러분 어떠세요? 얼마나 우리가 많이 도망갑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멀게 느껴집니까?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우린 얼마나 속상해 합니까?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는 건지 안 들으시는 건지 모를 때가 있죠. 그런데 어느새 여러분 이런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지 않나요? 어느새 내가 하나님 곁에 와 있는 모습을 발견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이 왜 신자입니까? "내가 믿음이 너무 강해서 하나님이라면 나는 목숨도 걸 수 있으니까" 그러면 신자일까요? 아닙니다. 여러분이 신자인 것을 알 때가 언제입니까? 여러분이 화도 내고 원망도 합니다. "하나님,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나의 삶이 너무나 고달프고 힘듭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원망하고 소리 지르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아버지 앞에 와 있는 겁니다, 우리가요, 어느새. 우리가 신자인 것을 언제 알게 됩니까? 우리가 믿음 생활을 잘하고 있어서 하나님께 헌신하며 선교를 열심히 할 때, 또 여러분이 순종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을 때 그때만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데 하나님이 내 곁에 있기를 원합니다. 관심 없는 척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싶은 겁니다. "괜찮다 내 아들아, 사랑한다 내 딸아" 이 말을 너무 듣고 싶은 겁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피하거나 도망가지 마세요. 여러분이 피하고 도망간 그곳이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는 게 너무나 분명하니, 이제 오히려 여러분 무장 해제를 하는 게 어떠세요? 하나님을 향해서 그렇게 세워놓았던 비늘들, 그 날카로운 가시들, 그게 결국은 "하나님 봐주세요. 하나님, 내가 너무 힘듭니다. 하나님, 제 이 탄식을 들어 주십시오"라는 여러분의 소리가 아닌가요? 그러므로 여러분, 오히려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해 부르시는 그 음성을 들으세요. "사라야, 어디 있느냐?" 어디에 있어요? 그 음성이 들리는 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도망갔다고요? 파하신다고요? 속상하다고요? 답답하다고요? 아닙니다. 여러분은 속상해서 하나님 곁에 오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여러분이 확인하는 놀라운 자리입니다. 여러분, 이제 여러분이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을 아신다면 "사라야, 어디 있느냐"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딸아, 아들아, 어디에 있느냐" 이것을 들으신다면 이제 하나님의 기막힌 답을 들어 보실 차례입니다.

    하나님의 답: 약속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라에게 뭐라고 답을 주셨을까요? "사라야, 걱정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아라. 내가 이제 네 옆에 있지 않으냐"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고, "내가 하나 보여주겠다"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사라가 웃을 수밖에 없었던, 바로 "아들을 주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결국 그 이야기 아닙니까? 아들을 주겠다는 것. 누구에게 들었던 이야기인가요?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셨는데, 당신에게 약속했다. 당신을 통해서 아들을 줄 것이고, 그 아들을 통해 자손을 줄 것이다. 당신이 낳은 아들이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말해주었죠. 그런데 사라는 지금 그 말을 믿고 있나요, 안 믿고 있나요?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고 있지 않으니 웃었던 겁니다. 그전에도 믿지 않았고, 지금도 믿지 않는 말인데도, 하나님은 아들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라가 속으로 웃었다고 말합니다. 남편이 전해준 말이 무색할 정도였습니다.

    '30년 전에라도 얘기했으면 혹 내가 좀 기대를 가졌을까?' 하지만 지금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도저히 내가 가진 모든 생각과 경험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90살이 된 지금에야 주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약속이죠. 이 답은 사라가 기다리는 답이 아닙니다. 사라가 원하는 답이 아닙니다. 사라는 지금 아들을 낳으면 좋겠지만, 그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러니하죠. 문제의 해결을 하나님이 제시하셨는데도 우리에게는 답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 신자의 삶 속에서 이런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한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너무나 정확한 답을 주시는데, 그것이 우리에게는 답이 안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속이 상하고 답답해서 하나님 앞에 오히려 원망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사실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조차도 잘 모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 답을 구하는 겁니다. '하나님이니까 무슨 방법이 있겠지.'

    하나님이 주신 이 답은 사라가 생각한 답과는 다른 답입니다. 사라가 "아들을 나한테 주면 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라는 어떻습니까? "그건 안 돼." 하나님이 자신에게 아들을 주신다고 하는 그 대답은 사라에게 '답'이 아닌 겁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답'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답, 즉 하나님이 주신 답 역시도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답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대개 '이제 아들만 나오면 되는 거 아니야? 하나님 말씀대로 자식이 있으면 끝나는 문제 아니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너 아들이 없으니까 아들 하나 주겠다" 이런 답이 아닌 겁니다. 이 답은 열국의 어머니에 대한 답입니다. 이 답은 사라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 모든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답이고, 이방인까지도 사라를 통해 복을 얻게 하려는 답입니다. 이 답은 단순한 답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가장 깊고 가장 어려운 문제에 대한 답입니다. 이 답은 단순히 사라에게 주어진 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온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답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너희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라는 답이었습니다.

    우리의 진짜 문제와 하나님의 해답

    여러분, 사라의 문제도 다양하지만 우리 문제도 얼마나 다양합니까? 돈의 문제, 직장의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 가정의 아픔도 있습니다. 사라만큼이나 우리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우리도 답을 구하죠. 사라에게 "아들이 없으니까 아들만 주면 된다"는 것이 사라에게는 답인 것처럼, 우리도 돈이 없으면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고 돈벼락을 한 번 맞게 하면 된다" 이것이 우리의 답이 될 때가 있습니다. 아프면 "건강을 주시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응답일 수 있습니다. 사라로 친다면 어떤 것이 답일까요? "아브라함이 이제 너만을 사랑해 줄 것이다" 이것이 답이 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서 아무도 이제 너를 무시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답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답은 그런 답이 아닙니다. 아들을 주신다는 말은 맞지만, 이 '아들을 주신다'는 말은 그런 식의 답과는 다릅니다. "너에게 아들을 주어서 아무도 너를 무시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진정한 문제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주고 계신 것이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는 우리 문제를 아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죠. 나에게 뭐가 필요한지 잘 안다. '나에게는 이것이 필요하고 저것이 필요하다. 아마 조금의 물질만 있으면 내 인생은 괜찮을 거야.' 어떤 사람은 '배우자만 잘 만났으면', 어떤 사람은 '우리 자식이 말만 좀 잘 들었으면 내 인생은 훨씬 더 꽃필 거야'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문제와 여러분의 답에 대해 아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내 탓도 하죠. '내가 잘못한 게 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어떤가요? 남의 탓입니다. 교회 문제이건 가정 문제이건, 모든 문제에서 우리는 성경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가 내 눈에 있는 들보보다 커 보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문제들을 알고 지적하는 일에는 우리 모두가 다 잘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누가 무언가를 하면 그 일에 대해 "이건 이게 잘못되었고, 이것이 문제고, 당신은 이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문제고, 당신은 지금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다"라고 쉽게 이야기합니다. 정작 본인이 바로 그 일에 지금 같이 동참하고 있는 '들보가 있는 사람', '대들보가 자기 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자주 잊어버리는 거죠.

    여러분, 어떻게 보면 우리는 우리를 아는 것 같지만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누가 우리를 아느냐고요? 시편 139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신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6절에 가서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어찌 하나님을 피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만이 나를 온전히 아십니다. 분명하죠.

    여러분 자신도 모르는 '나'. 내가 왜 이 상처를 이렇게 다루지 못하는지, 내가 왜 알지 못하게 분노하고 있는지, 내가 왜 이 문제에만 부딪히면 이렇게 해결을 못 하는지, 내가 왜 이러한 것들이 있는지. 그래서 "나는 이런 기질을 타고 태어났나 봐"라고 이해하려고 하지만, 그럼 왜 그런 기질을 갖고 있는지,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도대체 나는, 그리고 내 인생은 왜 과거로부터 이렇게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들이 많은지. 나는 내가 받은 상처들을 왜 평생 안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나 자신에 대해서조차도 우리는 정확히 이해를 못 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하는, 그 사라의 인생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이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시작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돌아올 것이다." 우리나라 성경에 "다음 해에 이듬해의 이맘때 즈음에 내가 돌아올 것이다"라고 되어 있죠. 직역을 하면 훨씬 더 여러분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다음 생명의 때에 너를 찾을 것이다."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지금 사라와 사라가 처한 상황을 죽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이 태어나는 것을 생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약속의 아들이 태어남으로써 너에게 생명이 주어질 것이고, 그 문제의 가장 깊은 근원을 성경은 '아들이라는 문제'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이 너무 이상하지 않으세요? "야, 너의 진정 깊은 문제는 네가 어릴 때 어머니나 아버지로부터 받은 학대 때문이야"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너의 진정한 문제는 네가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그 가난을 이겨내지 못해서 항상 돈돈돈 하며 살았던 그 과거 때문이야." "너의 진짜 문제는 너의 어머니가 너에게 주었던 그 상처가 되는 그 말, 그 한마디가 너의 진짜 문제야"라고 우리가 대개 모든 문제를 과거나 혹은 내 삶 속에서 찾으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진짜 너의 문제와 너의 문제 해결 속에는 아들이 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지금요. 사라의 문제가 아들로부터 해결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아들이 누구였나요? 약속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이 아들이 바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 아닙니까?

    지금 자식이 없는 사람은 죽음과 같은 상황인데, 생명을 줄 아들을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합니다. 지금 숨어서 듣고 있는 사라에게 주는 하나님의 답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표현하면 정확하겠죠? "내가 아들을 주겠다." 그런데 그 아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겁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겠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뿌리에 무엇이 있습니까? 십자가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의 미움의 뿌리, 여러분의 자존심의 뿌리, 내가 왜 나 자신을 그렇게 자기 비하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자존감은 왜 이렇게 무너져 있는가? 나는 왜 계속되는 죄책감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가? 그 뿌리, 내 욕심의 뿌리. 나는 왜 조금만 나보다 나은 사람들을 보면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생기는가? 그 뿌리. 내 관계는 왜 이렇게 아프고 힘든가? 이 관계가 무너지는 그 뿌리,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느냐? 그 아들이 지었던 그 아들의 생애 속에 있었던 십자가, 그 십자가에 있다는 거죠.

    십자가, 진정한 해답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했을 때, 그 십자가가 말하는 그 죄가 마치 붕붕 떠다니는 추상적인 죄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성경이 말하지 않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여러분과 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말 많은 상처를 주면서 삽니다. 그 상처를 주는 이유 중 하나는 내 상처 때문입니다. 내가 입은 상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든요.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자주 잊어버리거나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 안에는 또 내 욕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욕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상처를 주는 여러분의 상처와 여러분의 욕심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나, 그래서 눈물을 흘리고 한숨을 쉬어도 변화되지 않는 나,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니까요.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살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지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 바로 그 나, 그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나밖에 몰라서 나를 위해 이 세상이 돌아가야만 하는 나를 위해서 주님이 죽으셨습니다.

    여러분, 이제 인생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었다는 말이 정말 어떤 의미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왜 주님이 여러분의 눈물을 닦아주신다고 말씀하실까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상처가 전부 다른 사람이 준 것뿐인가요? 아니잖아요. 여러분의 수많은 상처는 내가 만든 상처가 아마 상당히 많을 겁니다. 여러분 자식들이 부모로부터 상처를 입고 그것 때문에 평생을 아파하는 사람을 자주 보게 됩니다. 상담을 하다 보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힘들어하는 자식들을, 정말 그 마음속에 깊이 있던 아픔과 쓴 뿌리들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로 인해 서러워 울 때가 있어요. 그럼 부모는요? 자기를 미워하고 있는 자식 때문에 웁니다. 우리 왜 이렇게 서로 못 만나는 거죠? 서로 어떻게 이렇게 엇갈리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부모니까 내가 이해하고 살아야지, 그렇게 넘어가는 게 너무나 많습니다. 사실은 그 안에 너무나 아픈 상처들을 서로 주고 살았으면서 그것을 여전히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는 서로 찌르며 삽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찌르며 사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시퍼런 칼을 서로 들고 살죠. 어디를 찌르면 제일 아플지도 압니다. 그래서 거기만 또 전문적으로 찌릅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찌른 데 또 찌릅니다. 그리고 화를 내게 되죠.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여러분, 칼로 찌르다 안 되면 어떻게 해요? 한쪽에서 총을 들고 나옵니다. 그러면 다른 쪽에서는 대포를 들고 나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아세요? "너희들 그만 해라,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그러시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그 전쟁터에 들어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 칼로 나를 찔러라. 그 대포와 총으로 나를 쏘아라. 내가 죽겠다. 그 대신 너희는 행복하게 살아라. 내가 죽을 테니까, 내가 그 창을 맞을 테니까, 내가 그 칼에 찔릴 테니까 너희는 용서해라. 너희는 서로를 받아라. 그리고 너희는 행복해라. 이것으로 너희의 인생을 망치고 무너지게 하지 말고, 내가 너희를 짓고 창조한 진정한 목적이 뭔지를 왜 잊어버리고 사느냐? 그것으로 인해 너희의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내가 그것을 위하여 죽었으니 이제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이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 아닙니까? 이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주신 복음 아닌가요? 여러분의 인생의 해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대화를 잘하면, 혹은 그냥 '아, 뭐 어떻게 되겠어, 그냥 내가 참고 살아야지' 이렇게 하면 해결될까요? 아니요, 십자가에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왜 이렇게 집요하게 '아들 이야기'를 하시는지 아시겠어요? 아들 낳는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집요하게 하시나요? 하갈은 세 줄 만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지금 이삭 이야기는 창세기 12장부터 시작해서 20장에 가서야 아이를 낳습니다. 그 기간 동안 계속하는 이야기가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일까요?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뿌리를 건드리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여러분으로 하여금 참 화해와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단어이며, 여기서부터 출발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가정을 원하죠. 누구나 다 그 행복을 생각하고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세상은 여러분에게 속았다고 얘기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여러분에게 절대 속고 있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단지 말하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에게 왔냐고?"

    '목사님, 저는 왔는데 제 원수는 아직 안 왔어요.'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예수님이 상대방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해결된다고 하십니까? 크게 오해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가 들고 있는 이 시퍼런 칼을 맞으셨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다 살인자요, 예수를 죽인 사람들입니다. 그 대신 우리가 살았습니다. 그 대신 여러분이 평화를 누리게 된 겁니다.

    놀라우신 하나님, 진정한 웃음

    하나님께서는 이때 처음으로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에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이 말씀을 단순히 '너 자식 낳을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저는 이 단어가 "여호와께 놀랄 일이 있겠느냐?" 즉, '원더(wonder)'라는 단어로 번역하는 것이 이 본문에 훨씬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이 일 때문에 깜짝 놀라시겠느냐는 거죠. 왜 하나님이 놀라지 않으실까요?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원더풀(Wonderful)'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놀래 주시는 분입니다.

    "설마 하나님이 이곳까지 오실까?" 지옥까지 가십니다. 그곳까지 여러분과 여러분의 생명을 위해서 가십니다. "설마 내가 이렇게 망쳤는데 이것을 살려내실까?" 내 인생 다 무너졌다고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살려내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십니다. "설마 이 분노와 이 미움밖에 남지 않은 나의 마음속에?" 아닙니다. 바로 그곳에, 그곳에서 함께 우시고 아파하시며, 그곳에서 여러분을 세우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분노를 어찌할지 몰라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설마 이곳에, 죄밖에 없는 이곳에, 분노밖에 없는 이곳에, 내 모든 것이 갈기갈기 찢어진 이 마음밖에 없는 이곳에?" 네, 바로 그곳에 오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원더풀'입니다. 우리를 놀라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한 아기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 그의 이름은 '원더풀 카운셀러(Wonderful Counselor)'입니다. 
    그는 놀라움이며 우리를 상담하며 의논해 주시는 분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원하신 아버지이시고, 평강의 왕이십니다.

    사라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저는 안 웃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정말 주님 앞에 나와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맛본 바로 앞에서도 우리가 꼭 하는 이 말 때문에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아니요, 하나님, 괜찮아요. 하나님, 저 안 웃었는데요. 저는 하나님을 비웃은 적 없습니다." 
    그런데 '안 웃었다'는 말이 번역되면 어떻게 될까요? 
    '웃음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이삭이 없는 거죠. '이삭이 없어요.' 
    "괜찮습니다. 뭐, 하나님 그냥 언제나 함께 하셨다고 하셨으니까 지금처럼 그렇게 함께하시면 됩니다." 
    매달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서 해결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내 손과 내 실력을 믿죠. "나 안 웃었는데요."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나요? 예
    수님에게 소리를 질러야 하는데 끝까지 안 웃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하나님, 저 웃었습니다. 
    안 될 것 같아서, 말도 안 돼서 웃었어요.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라고 매달리지 않습니다. 
    "아, 나 웃은 적 없는데요." 
    하나님은 뭐라 그러세요? "아니, 웃었다. 너는 지금 아프고 너의 믿음은 약하다. 내가 그것을 보았다. 그래서 웃었다. 이삭이 올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올 것이다." 
    하나님은 이 가련한 여인의 대답 속에서 하나님의 답을 주십니다. "네가 웃었다. 너의 눈물을 내가 보았고 너는 울었다. 너는 아팠다. 너는 참으로 그 인생의 눈물과 한숨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가 너희에게 올 것이고 너희에게 왔다." 이 하나님이 사라를 부르셨고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내 딸아, 내 아들아, 어디에 있느냐? 네가 나를 비웃었으며, 네가 생각하기에 이 모든 것이 한심해 보이느냐?" "아니요, 하나님, 안 그랬습니다."

    "안 그랬다고? 아니다. 내가 분명히 보았다. 너의 믿음 없는 것을 내가 분명히 보았고, 너의 눈물을 보았고, 너의 한숨도 보았고, 네가 네 인생에 대해 가지고 있는 너의 모든 마음도 내가 보았다. 쓰리고 아팠던 인생, 그리고 어떤 것은 생각할수록 정말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 여러분의 인생, 내가 보았다. 네가 웃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내가 이삭을 보낸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 너의 생명이 될 것이고, 이삭이 너를 통하여 날 것이고, 너를 살릴 것이고, 너를 구원할 것이다." 여러분의 인생은 "안 웃었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주님이 주실 진정한 웃음에서 끝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대접을 받으신후 축복 받을 사람인 사라를 찿으셨고 사라는 9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창세기 18장 9절에서 하나님(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장소는 마므레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 아브라함의 장막 앞입니다. 
    세 사람이 방문했고, 그 중 한 분이 여호와로 나타나십니다.
     그때 하나님이 묻습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장막에 있나이다.”

    이 질문은 단순히 위치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언약의 대상 확인

    사라는 단순한 아내가 아니라
    약속의 아들을 낳을 언약의 주체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사라를 직접 언약의 중심에 세우십니다. 
    “약속은 너 혼자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아담을 향한 질문은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존재를 확인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가인을 향한 질문은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이 질문은 행동에 대한 책임을 확인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제까지는 한 가정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중심으로 질문을 제시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가정의 범주를 벗어나 민족을 향한 질문으로 발전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왜 사라에게 직접 묻지 않고 아브라함에게 질문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민족을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8: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단순한 위치 확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던지신 구속사적 전환 질문입니다.

    왜 “사라”를 묻는가? 

    언약의 초점은 “아브라함 개인”이 아니라 “부부”이기 때문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 혼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라를 통해 성취될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여러 번 약속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오랫동안 침묵 속에 있던 존재였습니다. 
    이 질문은 선언입니다.
    “약속은 네 능력이 아니라, 네 아내 사라를 통해 이루어진다.”  

    왜 그 순간에 이 질문을 하셨을까?

    당시 상황은 
    사라는 나이가 많음 
    출산은 불가능해 보이는 상태 
    인간적으로는 끝난 시간  
    그때 하나님은 묻습니다.  “사라가 어디 있느냐?”

    이는 사실상 이런 뜻입니다.  
    “너희가 불가능하다고 숨겨 둔 그 자리, 바로 그곳에서 내가 일을 시작하겠다.”

    창세기 질문의 흐름 속에서 보면

    대상 질문 의미
    아담      “네가 어디 있느냐?”                죄로 숨은 인간
    가인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책임을 잃은 인간
    아브라함     “사라가 어디 있느냐?”             약속을 통해 회복될 가정

    즉,  타락 → 단절 → 약속의 회복 이라는 구속사의 흐름입니다. 

    더 깊은 의미는 사라는 그때 어디 있었습니까? 
    장막 안에 있었습니다. 
    장막은 숨겨진 자리, 인간의 한계, 닫힌 공간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장막을 뚫고 약속을 선언하십니다. 
    곧 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그리고 그 아들은 이삭 입니다.

    이삭은 웃음, 불가능 속에서 터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결론 /  하나님이 사라를 묻는 이유는 
    언약은 부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고  인간의 끝에서 하나님의 시작이 드러나기 때문이며, 약속의 씨는 사라를 통해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숨은 자를 드러내는 질문

    사라는 장막 안에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웃습니다.

    이 질문은 보이지 않는 자를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장막 안에 있는 자,
    마음속에서 웃는 자,
    겉으로 말하지 않은 자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믿음의 전환점

    이 질문 직후 하나님은 선언하십니다. 
    “내년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의 웃음은 처음에는 불신의 웃음이었지만 나중에는 기쁨의 웃음(이삭)이 됩니다.   

    영·혼·몸 구조로 보면 
    → 장막 안에 있음 (물리적 위치) 
    → 속으로 웃음 (감정과 생각) 
    → 약속을 받을 자리로 부르심

    하나님은 지금 “네 아내가 어디 있느냐?”라고 묻지만 실은 묻고 계십니다. “약속을 받을 준비가 되었느냐?”

    이 세 질문은 우연히 흩어진 질문이 아니라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점점 확장되는 하나님의 추적(追跡) 질문입니다.  

    아담 – 존재의 자리 /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질문의 방향  → 하나님 ↔ 개인

    의미 

    죄 이후
    하나님 앞에서의 위치 상실
    두려움 속에 숨은 인간

    구속사적 의미

    구속의 시작은
    “네가 어디 있느냐?”
    존재 회복의 부르심

    하나님은 먼저 찾으십니다.  

    가인 – 관계의 자리 /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 4:9)

    질문의 방향

    → 하나님 ↔ 인간 ↔ 형제

    의미

    • 죄가 개인을 넘어 관계를 파괴

    • 책임 회피: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이까?”

    구속사적 의미

    구속은 단순히 나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형제를 향한 책임 회복

    아담은 숨었고 가인은 부인했습니다. 

    아브라함 – 언약의 자리 /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창 18:9)

    질문의 방향

    → 하나님 ↔ 언약 가정 ↔ 약속의 씨

    의미

    • 이제 질문은 개인과 형제를 넘어 언약의 통로(가정)로 이동 

    사라는 단순한 아내가 아닙니다.
    약속의 씨가 태어날 자리입니다.

    구속사적 의미

    구속은
    존재 회복 → 관계 회복 → 약속의 성취로 진행됩니다.

    세 질문의 구속사적 흐름

    단계 질문    회복 대상           구속사적 초점
    1 네가 어디 있느냐      존재           하나님과의 관계
    2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형제           인간 사이의 책임
    3 사라가 어디 있느냐      언약            구속 계획의 실현 

    더 깊은 구조 / 이 흐름은 결국 어디로 가는가?
     
    아담 → 잃어버린 인간 
     가인 → 피 흘린 형제 
     아브라함 → 약속의 씨 
     그리고 그 정점은  “아담의 자리”를 대신하시고,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피를 흘리시며,  “약속의 씨”로 오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3월 2일(월) 창세기 4:1-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10절)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The LORD said, "What have you done? Listen! Your brother's blood cries out to me from the ground.   

    핏소리(콜 데메) 피들의 소리 

    히브리어 의미 / 핏소리 (קוֹל דְּמֵי)   

    콜(qol)
    = 소리, 음성  
    데메(deme) = 피들 (복수형)

    단수가 아니라 복수형 “피들”입니다.
    이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폭력성과 억울함, 후손까지 이어질 생명의 가능성이 함께 끊어졌음을 암시합니다.

    피(담. dâm)    דָּם  Storng number 1818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  
    Pronunciation [ dâm ]  
    Etymology / 1826에서 유래  
    Old Testament / 360회 사용  
    관련 성경 /  피(창4:11, 왕하3:22, 겔35:6), 산혈(레12:4,5,7), 살인(시26:9), 살육(겔5:17), 피투성이(겔16:6,22), 피 값(겔3:18), 죄(겔33:6), 핏빛(욜2:31), 피 흘린 자[죄](레17:4, 신21:8),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시59:2).


    신학적 의미

    1. 피는 생명이다

    성경에서 피는 곧 생명입니다.
    아벨의 피는 단순한 체액이 아니라 억울하게 끊어진 생명의 외침입니다. 

    2. 땅이 증인이 된다

    땅은 인간의 죄를 덮어주지 않습니다.
    죄는 은폐될 수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드러납니다.  

    3. 하나님의 정의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회피했지만, 하나님은 이미 들으셨습니다.

     인간은 숨을 수 있어도  피는 하나님께 직접 말합니다. 

    구속사적 연결

    아벨의 피는 “호소하는 피”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가리킵니다.  

    아벨의 피 → 심판을 호소,  예수의 피 → 용서를 선포 

    아벨의 피는 정의를 외치고
    예수의 피는 은혜를 선포합니다.

    영적 적용  / 핏소리는 오늘 우리 안에서 이렇게 들립니다.

    1. 양심의 소리
    2. 억울한 자의 부르짖음
    3.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음성

     죄는 침묵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소리”가 납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구조 :  
    범죄 이전 → 시기 
    범죄 순간 → 살인 
    범죄 이후 → 부정(“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그러나 피가 대신 말함
    양심은 억눌렀지만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음

    양심 단계  
    빛을 받음,  찌름,  회피 ,  굳어짐

    아벨의 피는 정죄하는 소리, “죄가 있다”는 고발의 구조

    ② 사가랴 – 종교화된 양심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죽임. 
    여기서 양심은 더 무섭게 변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함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을 죽임

     양심이 신학으로 포장됨
     죄가 신앙으로 위장됨

    구조  
    빛을 거절,  반복 거절,  합리화,  제도화,  집단화,  

    이 단계가 되면 양심은 더 이상 아프지 않습니다. 

    “예수의 피와의 대조 구조”

    히브리서 12:24 /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피  

    예수 – 정결케 하는 양심

    예수 그리스도 의 피는

    아벨의 피처럼  고발하지 않고,  복수 요청하지 않고,  용서를 선언합니다. 

    세 피의 구조 비교

          구분    아벨의 피        사가랴의 피       예수의 피
         방향       하늘로 호소        심판 촉발       하늘로 중보
         기능        고발        누적 정죄           속죄
        양심        찌름          굳어짐           씻음
        결과      두려움       멸망 선언         새 언약 

    양심의 3단계 구조 

    살아 있는 양심  
    → 죄를 알면 아프다 
    왜곡된 양심  → 죄를 정당화한다  
    정결케 된 양심 
    → 피로 씻긴다

    결정적 차이

    아벨의 피 = “죄가 있다”
    예수의 피 = “값이 치러졌다”

    아벨의 피 = 정의
    예수의 피 = 은혜


    (놀이치료) 하나님의 울타리 

    아동 심리학에는 '놀이 치료'라는 요법이 있습니다. 
    놀이를 하며 아이들의 닫힌 마음을 열고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효과 가 뛰어난 방법입니다. 
    아이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놀 수 있지 만 다음의 세가지 상황의 경우에는 엄격히 제재를 받습니다. 

    1. 아이가 다칠 위험에 처할 때 
    2. 치료자인 선생님을 다치게 할 상황에 처할 때 
    3. 기물을 부수려고 할 때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아이들이 정말로 자유로운 것은 '울타리'가 있을 때라고 합니다. 
    울타리가 없는 넓은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중앙에서만 놀지만 울타리를 쳐놓으면 공간을 100% 활용해 훨씬 더 자유롭게 놀 수 있다고 합니다. 
    규율과 규칙이 없는 자유는 오히려 혼돈이 될 수도 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규칙은 정해놔야 합니다. 

    사람도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벗어난 자유는 우리를 쾌락만을 추구하는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만듭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를 때 죄를 미워하게 되고, 죄에서 돌아오게 됩니다. 참된 행복이 있는 하나님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십시오.  
    주님, 주님의 울타리 안에서 참된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하나님의 법도를 벗어난 잘못된 자유의 삶을 사는지 살펴봅시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에덴 동산에서 명령이란 울타리 안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울타리를 벗어날 때는 위험이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4장 10절, 히브리어 성경원문 단어 이해  
    וַיֹּאמֶר (바요메르) 
    מֶה (메) 
    עָשִׂיתָ (아시타) 
    קוֹל (콜) 
    דְּמֵי (드메)  
    אָחִיךָ (아히카) 
    צֹעֲקִים (초아킴) 
    אֵלַי (엘라이) 
    מִן־הָאֲדָמָה (민 하아다마)

    וַיֹּ֖אמֶר מֶ֣ה עָשִׂ֑יתָ ק֚וֹל דְּמֵ֣י אָחִ֔יךָ צֹעֲקִ֥ים אֵלַ֖י מִן־הָֽאֲדָמָֽה׃

    바요메르 메 아시타 콜 드메 아히카 초아킴 엘라이 민 하아다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וַיֹּאמֶר (바요메르) 
    의미 : 그리고 말씀하셨다

    동사 אָמַר(말하다)에 서사형 접속사 וַ가 결합된 형태입니다. 
    카인의 거짓 응답 이후, 하나님은 더 이상 질문을 이어가지 않고 직접적인 직면의 말씀으로 전환하십니다. 
    대화의 성격이 탐문에서 폭로로 바뀌는 지점입니다.  

    מֶה (메) 
    의미 : 무엇을

    의문대명사이지만, 실제로는 정보 요청이 아니라 행위의 본질을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결과가 아니라, 카인이 행한 바로 그 행위를 가리키며 묻고 계십니다.  

    עָשִׂיתָ (아시타) 
    의미 : 네가 행하였다

    동사 עָשָׂה(하다)의 완료형 2인칭 남성 단수입니다. 
    행위가 이미 끝났고 되돌릴 수 없음을 나타내며, 주어가 분명히 ‘너’임을 문법적으로 고정합니다. 
    책임의 귀속이 명확합니다.

     קוֹל (콜) 
    의미 : 소리, 음성

    히브리어에서 ‘소리’는 단순한 청각적 현상이 아니라, 의사 표현과 호소의 매개체입니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 증언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분명히 인식되는 증거로 기능합니다.  

    דְּמֵי (드메) 
    의미 : 피들, 피의 복수형

    단수 דָּם(피)가 아니라 복수형이 사용됩니다. 
    이는 단순한 유혈이 아니라, 생명 전체의 파괴, 혹은 흘려진 피가 가진 중첩된 책임과 무게를 암시합니다. 
    살인의 중대성이 언어적으로 증폭됩니다.

    דָּם Storng number 1818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  
    Pronunciation    [ dâm ]  
    Etymology / 1826에서 유래  
    Old Testament  /  360회 사용

    관련 성경  /  피(창 4:11, 왕하 3:22, 겔 35:6), 산혈(레 12:4,5,7), 살인(시 26:9), 살육(겔 5:17), 피투성이(겔 16:6, 22), 피 값(겔 3:18), 죄(겔 33:6), 핏빛(욜 2:31), 피 흘린 자[죄](레 17:4, 신 21:8),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시 59:2).

     אָחִיךָ (아히카) 
    의미 : 네 형제

    하나님은 다시 한번 ‘형제’라는 관계어를 사용하십니다. 
    범죄 이후에도 관계를 지워버리지 않으시고, 카인이 끊어버린 관계를 다시 호명하십니다. 
    죄의 무게가 관계 파괴에 있음을 드러냅니다.

     צֹעֲקִים (초아킴) 
    의미 : 외치고 있다, 부르짖고 있다

    현재 분사형으로, 외침이 과거에 그치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살인은 끝났지만, 그 결과는 멈추지 않았음을 문법적으로 보여줍니다.

     אֵלַי (엘라이) 
    의미 : 내게로

    외침의 방향이 명확히 설정됩니다. 
    정의의 호소는 사람에게 묻히지 않고, 하나님께 직접 도달합니다. 
    숨길 수 있는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מִן־הָאֲדָמָה (민 하아다마)  
    의미 : 그 땅으로부터

    전치사 מִן(~로부터)은 출처를 가리킵니다. 
    피가 흘러 스며든 땅이 침묵하지 않고 증언의 장소가 됩니다. 
    앞서 카인이 제물을 가져왔던 바로 그 ‘땅’이 이제는 고발의 근원이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가인은 분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벨을 들로 불러냈고 그를 죽였습니다. 
    왜 가인은 하나님께 드린 제사의 문제를 아벨에게 풀었던 것일까요? 

    네 아우(아히카) 아벨

    히브리어로 "네 아우"는 אָחִ֔יךָ(발음: 아히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4장 2절부터 등장한 아벨을 언급할 때마다 자주 이 "아우"라는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형제라는 단어는 이름이 아니라 특정인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계속해서 "아벨은 네 아우다"라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셨는데요, 이는 형제 관계에서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것과 또한 우애가 깊은 형제 관계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셨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벨은 가인의 형제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많은 시간을 함께 했고 한 부모를 둔 사이였는데 이 제사의 문제로 인해 그를 미워하고 시기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제사와 관련해서는 가인과 하나님 사이에 해결해야 할 문제였지 가인과 아벨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단지 미워서 그랬던 것일까요?

    선지자 아벨의 피

    예수님께서는 아벨을 선지자와 같은 위치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선지자들처럼 의를 행했고 하나님의 뜻을 전파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마태복음 23:35) 

    창세기 4장 8절에는 가인의 행동을 나타내는 연속적인 세 개의 히브리어 동사가 나타납니다. 
    바로 "말하다"는 의미의  וַיֹּ֥אמֶר(발음: 바요메르)
    "일어나다"는 의미의 וַיָּ֥קָם(발음: 바야캄), 
    "죽이다"는 의미의 וַיַּהַרְגֵֽהוּ(발음:바야하레게후)입니다. 
    먼저 가인은 아벨에게 말을 걸었는데 어떤 말을 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어떤 사본에는 "들로 나가자"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7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뒤에 나오는 "일어나다"는 단어를 고려해봤을 때, 그들은 들에서 제사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고 아벨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에 대해 올바른 얘기를 전했으나 가인은 그 말이 듣기 싫어서 "일어난 후"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가인은 자신의 살인 행위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숨기려고 했으나 그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호소하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צֹעֲקִ֥ים(발음: 초아킴)으로 현재 진행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해 의인의 피에 대해 신원해 주시기를 호소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참된 의에 대해서 말한 자신의 형제를 가인은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형제라는 가치를 무시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가인의 모습을 보며 나는 가정과 교회 안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돌이켜봅니다. 
    교회의 형제들 역시 같은 아버지를 둔 지체들인데 그들을 정말 사랑으로 대하고 있는지 아니면 시기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지... 하나님께서는 형제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죄의 파괴력
    1. 아담과 하와의 관계
    2. 가인과 아벨의 관계

    사람의 욕심이 낳은 죄는 부부 관계(아담과 하와)를 깨뜨리고 형제 관계(가인과 아벨)를 찢어버렸습니다. 
    항상 욕심을 경계하고 하나님 안에서 참된 의를 추구하는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What have you done?)
    아벨을 해친 것을 아시면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와 행위를 물으셨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무슨 일을 하며 살고 있는가?  

    말씀의 문자적 의미   /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직접 질문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책임과 행위에 대한 심판적 질문입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아벨의 죽음(가인이 살해함)의 결과가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들려온다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핏소리는 단순히 물리적 피의 울음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자의 정의로운 호소를 상징합니다.  
    “땅에서부터”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세상 모든 죄와 부정의 사건을 놓치지 않으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요한계시록 6:9-10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신학적 의미  

    죄의 보편성  
    가인의 죄는 단순히 형제 살해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 지닌 죄와 책임의 문제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은폐하려 할 때조차 모든 것이 드러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피의 호소와 정의
     
    억울한 피의 소리가 하나님께 올라간다는 개념은 하나님의 정의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나오는 피를 흘린 자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리와 연결됩니다. 

    책임과 회개의 필요성  
     하나님은 가인에게 행위에 대한 자각과 책임을 묻고 계십니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회피할 수 없으며, 진정한 회개가 요구됩니다.

    적용과 묵상
     
    우리의 작은 죄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억울하게 피해받는 이들의 호소가 하나님께 닿는다는 사실은 정의와 공의에 대한 신앙적 확신을 줍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는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자신의 행위와 선택을 돌아보게 하는 내면의 질문이 됩니다. 

    이 질문은 창세기 4장 10절에서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앞선 질문: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들에서 죽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묻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피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이 질문의 깊은 의미 

    정보 수집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이 질문은 사실 확인이 아니라 양심의 각성을 위한 것입니다. 
    “네 행동의 실체를 직면하라.”

    죄의 결과를 직시하게 하는 질문

    가인은 분노 → 시기 → 살인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결과를 보여 주십니다. 
    죄는 숨길 수 없음 
    피는 침묵하지 않음 
    행위는 반드시 소리를 냄  

    책임을 묻는 질문 /  
    아담에게는 “네가 어디 있느냐?” 
    가인에게는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질문의 차이점은  
    아담 → 존재의 위치 

    가인 → 행동의 책임

    죄가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질문은 존재 → 행위 → 결과로 내려옵니다. 

    영적 구조로 보면

    단계 질문           초점
    1단계     네가 어디 있느냐          존재
    2단계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관계
    3단계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책임

    이 세 질문은 인간 타락의 구조를 드러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이 질문은 단순히 가인에게만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 말과 태도는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는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지금도 묻고 계십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영· 혼· 몸 구조로 본 가인 (본문: 창세기 4장) 

    사건 배경 –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질문하십니다.   

    영(靈)의 차원 – 하나님과의 단절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음 
       하나님은 경고하심 :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그러나 가인은 영의 음성을 거절

    •  영이 닫히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차단됩니다.


     혼(魂)의 차원 – 감정의 폭발

    • 분노,  시기,  안색 변화,  비교의식

    여기서 이미 살인은 시작되었습니다.
    행동은 나중이고, 혼에서 먼저 피가 흐릅니다.

     몸(身)의 차원 – 행동으로 실현

    • 들로 유인,  실제 살해,   영 → 혼 → 몸
      이 흐름은 내면의 구조적 붕괴 과정입니다.

    가인의 내면 심리 단계로 본 분석

      1단계 – 비교 /  “왜 아벨은 받고 나는 거절되는가?” 
      2단계 – 수치심 / 자존감 손상 
      3단계 – 분노 / 외부 대상에게 투사  
      4단계 – 합리화 /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5단계 – 냉담화 / 하나님의 질문에 감정 없음

    이것은 양심이 점점 굳어지는 과정입니다. 

     두 분석의 차이

    영·혼·몸 분석      심리 단계 분석
    존재 구조 중심            감정 흐름 중심
    하나님과의 관계            자아의 반응
    영적 단절 → 행동         감정 왜곡 → 폭발

    신학적 해석
    이 구절은 가인의 범죄 이후, 하나님의 의도가 그 범죄에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23:35와 연결 지어 보면, 하나님은 의롭게 죽임당한 자들의 피가 어떻게 그들의 죄를 드러내는지를 강조하십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까지 위에서 흘린 의로운 가 다 너희에게 돌아 가리라."

    피는 생명을 상징하므로 생명을 죽인 것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고 합니다.

    신명기 12:23
    오직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아울러 먹지 못하리니.
    But be sure you do not eat the blood, because the blood is the life, and you must not eat the life with the meat. 

    피는 생명이다(the blood is the life)

    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For the life of a creature is in the blood, and I have given it to you to make atonement for yourselves on the altar; it is the blood that makes atonement for one's life.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the life of a creature is in the blood)

    레위기 17:14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because the life of every creature is its blood. That is why I have said to the Israelites, "You must not eat the blood of any creature, because the life of every creature is its blood; anyone who eats it must be cut off.

    성경의 한 문장, “피는 곧 생명이다”라는 구절이 시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의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대 율법서인 레위기(Leviticus)는 단순한 종교 지침을 넘어서 생명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어요. 혈액을 통한 죄 사함, 정결함, 그리고 생명력의 상징은 현대 의학에서도 놀랍게 일치하는 개념들이 있답니다.

    오늘은 레위기에서 말하는 피의 신학적 상징과 함께, 현대 의학에서 피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 놀라운 연결점을 살펴보며 고대와 현대를 잇는 '피의 진실'을 파헤쳐볼게요. 이 안에는 인간의 삶과 죽음, 구속과 치유, 나눔과 회복의 비밀이 담겨 있어요. 🔬⛪

    🩸 레위기의 '피는 생명' 구절 분석

    레위기 17장 11절은 이렇게 말해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이 짧은 구절은 구약 전체에서 피가 가지는 신학적 의미를 응축하고 있죠. 단순히 육체적 생명이 아닌, 속죄와 정결, 신과의 관계를 복원하는 수단으로서 피가 사용되고 있어요.

    이 구절은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원칙이자, 유대교 전통 전체에 영향을 미쳤어요. 동물의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써 인간의 죄를 정화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피는 곧 ‘신성한 생명’의 상징으로 여겨졌답니다. 이로 인해 유대율법은 피를 먹는 것을 철저히 금지했고, 피를 흘리는 행위는 생명을 훼손하는 죄로 간주했어요.

    또한 이 문장은 인간의 생명은 단순한 숨결이나 신체 기능이 아니라, 피를 통해 흘러가는 ‘살아 있는 에너지’로 이해했음을 보여줘요. 피를 보관하거나 따로 모으는 것도 금지되었고, 제사장만이 그것을 다룰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어요.

    이처럼 레위기에서 피는 ‘생명 그 자체’이자 ‘죄를 덮는 희생의 매개체’였어요. 고대인들에게 이는 단순한 상징을 넘어 실제 생명을 좌우하는 거룩한 질서였던 거예요.

    📘 레위기의 피에 대한 명령 요약

    구절 핵심 내용 의미
    레위기 17:11 피는 생명이며, 죄를 속한다 피 = 생명의 상징
    레위기 17:14 피를 먹지 말라 생명 보호의 율법

    🐑 고대 이스라엘의 생명관과 희생제사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생명은 단지 물리적 존재가 아니었어요. ‘네페쉬’(נֶפֶשׁ)라고 불리는 이 단어는 피, 숨, 혼 등 복합적 개념을 포함하는데, 이 중 피는 생명의 중심 매개체였죠. 그래서 인간이 범죄했을 때, 반드시 피를 흘려 속죄하는 제사 방식이 적용되었어요.

    희생제사는 양, 염소, 소와 같은 동물을 제물로 삼았고, 그 피를 제단에 뿌리거나 부어서 ‘죄 씻음’을 표현했어요. 이 때 피는 단순히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을 대신 희생시켜 죄인을 정화시키는 생명력의 상징이었답니다. 고대인은 피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가능하다고 믿었어요.

    이런 사고방식은 오늘날엔 다소 낯설지만, 당시엔 피를 흘림 = 죄의 사함 = 생명 보존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었죠. 그래서 피는 단순히 ‘붉은 액체’가 아니라 ‘거룩한 매개체’로 여겨졌고, 그것을 만지는 것도 금지되었어요. 제사장은 오직 피를 다루기 위해 특별히 정결하게 준비되어야 했고요.

    이처럼 고대의 제사 시스템은 ‘생명 순환의 원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어요. 죄를 용서받기 위해 반드시 누군가의 피가 필요했고, 그것이 곧 공동체를 정화하는 중요한 의식이었죠.

    🕊️ 희생제사의 핵심 구성요소

    요소 의미 현대적 대응
    동물 제물 죄 대신 죽는 생명 대속 개념
    피의 뿌림 속죄와 정화 정신적 카타르시스

    🧬 현대 의학에서 피의 의미와 기능

    현대 의학에서도 '피는 생명이다'라는 말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에요. 실제로 혈액은 우리 몸의 모든 조직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고, 이산화탄소와 노폐물을 운반하며 면역체계를 유지하는 생명의 핵심 요소랍니다. 혈액이 멈추면 곧 생명 활동도 멈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죠.

    혈액은 크게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혈장으로 구성돼요. 적혈구는 산소를 운반하고, 백혈구는 외부 침입자를 방어하며, 혈소판은 출혈 시 응고를 돕고, 혈장은 그 모든 요소가 이동할 수 있는 액체예요. 이 네 요소가 서로 긴밀히 작동해야 우리 몸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어요.

    특히 응급상황에서 피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돼요. 출혈성 쇼크나 심한 사고 시, 수혈은 생명을 구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기도 해요. 이 때문에 병원에서는 혈액의 재고가 생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로 간주되고 있어요.

    한편, 암이나 혈액질환 환자들에게는 정기적인 수혈과 성분제제가 생명 연장의 핵심이기도 해요. 의학이 발전한 지금도 혈액을 인공적으로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어요. 그만큼 피는 여전히 '생명 그 자체'로 여겨지고 있는 셈이죠.

    🧪 혈액 구성과 기능 정리

    구성 성분 역할
    적혈구 산소 운반, 탄소 배출
    백혈구 면역 반응, 감염 방지
    혈소판 지혈, 응고
    혈장 운반, 체온 조절

    🔗 성경과 의학, 의외의 접점들

    성경에서 말하는 ‘피 = 생명’이라는 개념이 현대 의학과 놀랍도록 일치한다는 점은 흥미로워요. 고대인은 과학적 지식 없이도 피가 생명 유지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셈이에요. 특히 유출된 피를 두려워하거나, 피를 금기시한 태도는 감염이나 죽음과의 연결을 암묵적으로 인식한 결과였을지도 몰라요.

    그뿐 아니라, 오늘날 혈액 검사로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것 역시 피를 ‘생명의 거울’로 보는 사고방식의 연장이에요. 간 수치, 당 수치, 면역 수치, 호르몬 수치 등 피 안에는 우리의 건강 정보가 모두 담겨 있죠. 마치 고대 제사가 죄와 정결을 확인하는 수단이었던 것처럼요.

    또한 혈액형 개념, 헌혈 문화, 수혈 기술 등은 ‘피를 통한 생명 나눔’이라는 성경의 사상과도 닮아 있어요. 우리가 누군가에게 피를 나눠줌으로써 생명을 살린다는 점에서, 현대의 헌혈은 일종의 ‘속죄와 생명 회복 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결국 과학과 종교는 각자의 방식으로 피를 존중하고, 피를 생명 그 자체로 바라보고 있었던 거예요. 시대는 다르지만, 피에 담긴 진리는 인간 모두에게 깊은 공통 감정을 불러일으킨답니다.

    📍 성경과 의학에서의 피의 역할 비교

    분야 피의 역할 공통 의미
    성경 (레위기) 속죄, 정결, 생명 생명을 전달하는 매개체
    현대 의학 산소 공급, 면역, 순환 생명의 핵심 운반자

    💉 혈액 기증과 생명 나눔의 실제

    현대 사회에서 혈액 기증, 즉 헌혈은 말 그대로 생명을 나누는 행위예요. 내가 흘린 한 봉지의 피가 누군가에게는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는 셈이죠. 이는 레위기에서 말하는 ‘피가 생명을 속죄하고 회복시킨다’는 개념과도 닮아 있어요.

    특히 수술, 사고, 출산, 혈액암 치료 등에서는 정기적인 수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헌혈은 인간 사이의 무형의 연대를 만들어주고, 피를 통해 이뤄지는 ‘생명의 순환’이 실제 사회 속에서 구현되고 있어요. 어떤 면에서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이타행위이기도 하답니다.

    의학적으로도 혈액은 오직 ‘사람에게서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헌혈의 가치는 줄어들지 않아요. 이는 ‘생명은 피에 있다’는 성경의 선언이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예요.

    그리고 헌혈은 단지 수치적인 보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이어주는 ‘실질적 생명선’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더 가치 있어요. 피가 담고 있는 생명력과 책임, 연대를 생각하면, 헌혈은 단순한 기부가 아니라 ‘거룩한 나눔’이라 부를 수도 있어요.

    🩸 혈액 기증과 수혈의 실제 데이터

    항목 내용
    1회 헌혈량 400ml (전혈 기준)
    헌혈 가능한 주기 전혈: 2개월 / 성분: 2주
    하루 평균 수혈 환자 수 (한국) 약 3,000명 이상

    🕊️ 종교적 상징과 과학의 융합

    많은 사람들이 종교와 과학은 서로 대립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보완적 관계가 될 수 있어요. ‘피는 생명이다’라는 이 단순한 명제를 두고 보면, 성경은 그것을 영적/의식적 차원에서 설명하고, 과학은 물리적/생리학적 차원에서 분석해요.

    둘은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공통적으로 피를 ‘생명을 운반하는 절대적인 요소’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접점을 형성해요. 오히려 신앙은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강화하고, 과학은 그 생명을 지키기 위한 실질적 도구가 되기도 하죠.

    예를 들어, 수혈이라는 과학 기술은 누군가에게 생명을 연장할 기회를 주지만, 신앙은 그 피를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희생’으로 해석할 수 있어요. 이는 피를 단순히 물리적 요소로만 보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의미까지 바라보는 시선이죠.

    결국, 레위기의 선언은 과학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깊은 진리를 담고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피를 어떻게 다루고, 나누고, 이해하는가에 따라 생명에 대한 태도도 달라질 수 있어요.

    🔬 종교와 과학의 피 해석 비교

    관점 해석 방식 공통 메시지
    성경 피 = 죄를 속하는 희생 피 = 생명의 본질
    과학 피 = 생리적 기능의 중심 피 = 생명의 본질

    🧛 피에 대한 오해와 금기의 문화사

    피에 대한 인류의 관점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매우 다양했어요. 어떤 문화에서는 피를 신성하게 여겨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사용했고, 반대로 어떤 곳에서는 피를 더럽고 위험한 것으로 금기시했죠. 이중적인 시선이 인간 역사 속에 동시에 존재했어요.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에서는 피가 영혼의 매개체로 여겨졌고, 고대 중국에서는 왕의 피에 신비한 권력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어요. 중세 유럽에서는 여성의 생리혈을 저주로 보는 시선도 존재했어요. 이처럼 피는 삶과 죽음, 순결과 저주의 경계선에 있는 상징이기도 했죠.

    특히 종교에서는 피를 다루는 방식이 문화적 규범을 형성했어요. 유대교나 이슬람교처럼 ‘할랄’과 ‘코셔’ 같은 식규정에서 피를 제거하는 것이 필수인 이유도 여기 있어요. 반대로 고대 아즈텍 문명에서는 인신 제사를 통해 피를 흘리는 것이 신에 대한 궁극적 헌신이었어요.

    결국 피는 인간에게 늘 두려움과 경외, 거부와 숭배의 대상이었어요. 현대에도 여전히 ‘피가 낭자한 장면’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감정적으로 강한 인상을 남기며, 때로는 사회적 금기를 건드리기도 하죠.

    🩸 문화권별 피에 대한 태도

    문화권 피에 대한 시선 적용 사례
    고대 유대교 신성한 생명, 금지 코셔 규정
    아즈텍 문명 신에 대한 제물 인신 제사

    📖 생명을 이해하는 창, 피의 진실

    우리는 매일 피를 보지 않으면서도, 피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어요. 성경은 그것을 가장 본질적으로 설명했고, 과학은 그것을 기능적으로 증명했죠. 이 두 영역이 만나면, 피에 대한 인간의 경외심이 왜 존재하는지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어요.

    피는 단지 신체 내부를 흐르는 액체가 아니라, 관계를 회복하고 생명을 지키고, 인간의 도덕적·영적 본질을 나타내는 심오한 상징이에요. 내가 생각했을 때, 피는 단순한 생물학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연결망이에요.

    이제 우리는 피를 더 이상 단순히 ‘붉은 액체’로만 보지 않아야 해요. 그것은 생명 그 자체이며, 고대인과 현대인이 모두 느끼는 근본적 진실이에요. 피에 담긴 이 연결성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생명을 대하는 태도가 바뀔 수 있어요.

    피는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나눔의 시작점이에요. 피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곧 생명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결정해요.

    💬 피와 생명의 통합적 이해 요약

    분야 핵심 메시지
    신학 피는 희생과 구속의 상징
    의학 피는 생명 유지의 필수 요소

    FAQ

    Q1. 레위기에서 왜 피를 먹지 못하게 하나요?

    A1. 피는 생명 그 자체이며, 속죄의 상징이기 때문에 먹는 것이 금지되었어요.

    Q2. 오늘날에도 피에 대한 종교 규정이 있나요?

    A2. 네, 유대교, 이슬람교 등에서는 여전히 코셔/할랄 기준으로 피 제거가 필수예요.

    Q3. 헌혈이 종교적으로도 의미 있나요?

    A3. 생명을 나누는 행위로 간주되어 종교적 선행으로 해석되기도 해요.

    Q4. 피는 왜 생명을 나타낸다고 하나요?

    A4. 산소, 면역, 영양 공급 등 생명 유지의 핵심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에요.

    Q5. 성경 외에 다른 고대 문서에서도 피는 신성했나요?

    A5. 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중국 문헌 등에서도 피는 종종 신적 속성으로 다뤄졌어요.

    Q6. 수혈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A6. 17세기 유럽에서 동물 간 수혈 실험으로 시작됐고, 20세기에 들어 실용화됐어요.

    Q7. 피에 대한 공포증도 존재하나요?

    A7. 네, '헤모포비아'라고 불리며 의외로 흔한 심리 반응이에요.

    Q8. 피는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나요?

    A8. 아직까지 완전한 인공 혈액은 없으며, 대체제로 일부 연구 중이에요.

    🔚 마무리: 피를 통해 본 생명의 본질

    ‘피는 생명이다’라는 레위기의 선언은 고대 문서에 그치지 않아요. 오늘날의 의학, 종교, 문화 모든 곳에서 피는 여전히 중요한 키워드예요.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고, 나누고, 이해하는 데 있어 피는 본질적인 역할을 하고 있어요.

    신학이든 과학이든, 피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일깨워주는 상징이에요. 이 단어 하나로 수천 년 전과 지금이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 정말 놀랍지 않나요?

    앞으로 피를 대할 때, 그 안에 담긴 생명, 고귀함, 그리고 책임을 기억하면 좋겠어요. 우리는 단지 피를 흘리는 존재가 아니라, 피를 통해 살아 있는 존재니까요. ❤️








    성경 구절 주석

    • 마태 헨리 주석 : 가인의 행위는 불의와 자아 중시가 어떻게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지를 잘 보여주며, 하나님의 정의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한다.

    • 알버트 바네스 주석 : 하나님은 죄의 심각성을 알리시며, 인간의 혈액이 그 분의 귀에 부르짖는 것처럼, 죄의 결과가 사람에게 미친다는 교훈을 제공한다.

    • 아담 클락 주석 : 이 구절은 하나님의 의의 기준과 형벌을 이야기하며, 인간의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절망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준다.

    성경 구절 교차 참조

    • 창세기 4:8 -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의 상황
    • 창세기 9:6 -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에 대한 법
    • 히브리서 12:24 - 아벨의 핏값, 그리스도의 피
    • 마태복음 23:35 - 의인의 피에 대한 언급
    • 누가복음 11:51 - 땅에서 죽임당한 모든 선지자들의 피
    • 레위기 17:10-14 - 피의 중요성과 생명의 상징으로서의 역할
    • 로마서 3:23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메시지

    창세기 4:10은 인류의 죄, 하나님의 공의, 그리고 인간의 도덕적 책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주제와 연결되는 성경 구절을 통해 더 깊은 이해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 죄의 본성 : 로마서 5:12
    • 회개와 용서 : 요한복음 1:9
    • 형제를 사랑하라는 명령 : 요한일서 3:15
    • 공의와 자비 : 미가서 6:8

    세기 4:10은 형제를 죽인 가인의 행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죄의 본질과 그로 인해 초래되는 결과를 명확히 드러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하며, 죄의 심각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죄에 의해 훼손될 수 있는지를 배우며, 이를 통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인도받아야 합니다.














    여행이 즐거우려면 세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첫째, 짐이 가벼워야 한다. 
    둘째, 동행자가 좋아야 한다. 
    셋째, 돌아갈 집이 있어야 한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사는 동안 잠시 빌려 쓰는 것이다.


    세상에는 없는 게 3가지가 있는데  

    1. 정답이 없다. 
    2. 비밀이 없다. 
    3. 공짜가 없다.

     

    죽음에 대해 분명한 것 3가지가 있는데 

    1. 사람은 분명히 죽는다. 
    2. 나 혼자서 죽는다. 
    3.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모르는 것 3가지 있다.

    1. 언제 죽을지 모른다. 
    2.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 
    3.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그래서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인간삼락

    공자의 인간삼악

    1. 배우고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2.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3.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군자 아니겠는가?

     

    노자의 인간삼악

    1. 쾌식(快食)

    2. 쾌변(快便)

    3. 쾌면(快眠)

     

    신흠의 三樂

    1. 문 닫고 마음에 드는 책을 읽는 것.

    2. 문 열고 마음 맞는 손님을 맞는 것.

    3. 문을 나서 마음에 드는 경치를 찾아가는 것.

     

    정약용의 三樂

    1. 어렸을 때 뛰놀던 곳에 어른이 돼어 오는 것.

    2. 가난하고 궁색할 때 지나던 곳을 출세해서 오는 것.

    3. 혼자 외롭게 찾던 곳을 마음 맞는 벗들과 어울려오는 것

     

    현대인 인간삼악

    1. 배우는 즐거움.

    2. 가르치는 즐거움.

    3. 봉사하는 즐거움.





    Yes' 대신 'Another'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지난 2003년부터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시대 상황을 진단하고 이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극동포럼을 갖고 있습니다. 한번은 이용훈 전 대법원장을 강사로 목포 지역에서 처음으로 포럼을 개최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포럼 당일 세찬 바람과 엄청난 양의 폭우가 내렸습니다. 열리는 장소의 관계자들조차도 이런 날씨 속에서는 사람들이 도저히 참석 할수 없을 거라며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저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포럼을 진행할 수 있도록 비와 바람을 잠잠케 해주십시오." 비바람은 그래도 그치지 않았으나 그 세찬 비바람을 뚫고 한 사람, 두 사람,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포럼이 시작됐을 때는 5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차고 넘쳐서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참석자들이 공통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너라도 그 자리를 채워야 되지 않겠느냐는 마음 을 주셔서 오게 되었습니다." 

    그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대해 원했던 날씨를 주시는 대신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주시는 놀라운 기적의 응답을 해주셨습니다.」 - 「김장환 목사의 인생 메모」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응답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응답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좋은 것입니다.  

    주님,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전폭적인 믿음을 주소서.  
    우리의 생각만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편견을 내려놓읍시다.





    네 가지 교만

     
    「세상과 기독교,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관계와 역할」에 대해서 평생을 연구한 신학자 리처드 니버(Helmut Richard Niebuhr)가 말한 「교만의 네 가지 종류」입니다. 

    첫째, 권력의 교만(Authority pride) 
    내 지위가 다른 사람보다 높다고 생각해 군림하는 교만입니다. 직장, 사회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만연한 교만의 모습입니다. 

    둘째, 지식의 교만(Intelligent pride)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지 않습니다.

    셋째, 도덕적 교만(Moral pride)
    남들보다 선행을 많이 하고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교만의 다른 모습입니다.

    넷째,  영적인 교만(Spiritual pride)
    내 신앙이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유독 하나님과 더 특별한 관 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적인 교만에 빠진 사람 입니다. 
     
    니버는 다른 무엇보다도 영적인 교만이 가장 위험하다고 경고했습니다. 
    영적인 교만은 죽음에도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겸손의 본을 따라갈 때 교만의 덫을 피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가르치는 지혜를 따라 사람 앞에, 또 주님 앞에 늘 겸손하십시오.
    주님, 영과 육이 교만에 빠지지 않고 오직 겸손으로 삶을 채워주소서. 
    위의 네 가지 교만 중에 내게 해당되는 것이 있는지 살피고 조심합시다.


    동문서답'과 '우문현답'의 유래를 살펴보자!

    '동문서답'은 질문과 전혀 관련 없는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것을 의미
    '우문현답'은 어리석은 질문에 대해 현명한 답변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고사성어의 유래는 각각 고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동문서답'은 중국 고사에서 유래했습니다. 
    옛날 중국에 한 어리석은 사람이 스승에게 "개가 왜 짖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스승은 "개가 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 짖는지 물을 필요가 있느냐?" 라고 답변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질문과 답변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며, '엉뚱한 대답' 또는 '논점을 벗어난 대답'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동문서답'이라는 고사성어가 탄생했습니다. 

    반면 '우문현답'은 우리나라 고사에서 유래했습니다. 
    조선시대 숙종 때의 학자인 이익은 어린 시절, "소가 왜 풀을 뜯어 먹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익은 "소는 풀을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간단하지만 명확한 답변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어리석은 질문에 대해 지혜로운 답변을 한 이익의 모습을 보여주며, '어리석은 질문에 대한 현명한 답변'을 의미하는 '우문현답'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습니다. 
    '동문서답'과 '우문현답'은 서로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고사성어이지만, 둘 다 우리말 속에서 질문과 답변의 관계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동문서답'은 비판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우문현답'은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며, 앞으로 두 고사성어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의사소통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임어당의 고백 / 봉우리 위의 종교 - 린위탕 林語堂 


    중국 작가 · 문명비평가 1895.10.10. ~ 1976.03.26.


    1968.6.18 서울에서 열린 제2회 세계대학총장회의 참석하다


    지금까지 우리말 번역판 수십 종이 나왔던 <생활의 발견>으로 유명한 린위탕. 그는 소설가, 중국 고전 번역가, 산문가, 문예비평가, 언어학자, 문명비평가였다. ‘생활과 사상의 소박함이야말로 문명과 문화의 숭고하고도 건전한 이상’이라 말했던 그는, 중국 문화를 서양에 널리 알린 사람이면서도 당대 중국의 현실에는 눈감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비틀즈풍은 부잣집 자식들이 복에 겨워 누리는 폐풍'


    “동양은 직관적인 통찰로 현실에 대한 전체적인 반응을 보이고, 서양은 분석적, 이론적 추리로 반응을 보인다. 동양은 그 철학에서 진실로 감정이 중요한 구실을 하지만, 서양에는 그런 철학이 거의 없다. 그리하여 동양에서는 서양처럼 군사, 정치 등 어떤 여건에서도 좀처럼 통계로 설명하지 않는다. 중국의 도(道)는 서양의 진리 개념처럼 추상적, 이론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적인 가치가 되어 인생과 관계되는 진리다. 오늘날에는 동양사상의 비중이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인생의 여유와 운치가 물씬 묻어나는 특유의 산문만큼이나 맑은 외모를 지닌 링위탕


    1968년 6월 18~20일 서울 경희대학교와 워커힐에서 31개국 154명의 대학 총장 및 학자들이 참석한 제2회 세계대학총장회의가 열렸다. 한국에서 열린 사실상 최초의 대규모 국제학술대회였기 때문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개막축사를 하는 등 큰 관심을 모았다.


    린위탕은 대학 총장은 아니었지만 세계적인 석학으로서 참석했다. 그는 6월 19일 서울시민회관 강연에서(‘전 인류 공동 유산의 추세’) 위와 같이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대한뉴스 681호가 전하는 린위탕의 다음과 같은 강연 내용


    “비틀즈풍은 부잣집 자식들이 복에 겨워 누리는 폐풍에 불과한 것이며, 건설도상 국가의 젊은이들이 흉내 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시 비틀즈가 전 세계적으로 젊은이들 사이에 얼마나 큰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는지 짐작케 해준다(대한뉴스가 린위탕의 진의를 제대로 옮겼는지 여부를 일단 접어두고 보면). 또한 린위탕이 지녔던 일종의 문화보수주의적 태도, 전통적 가치를 중시하는 태도를 엿보게 해준다. 그는 1970년 6월 서울에서 열린 제37차 국제펜클럽대회에도 참석해 ‘동서문화의 유머’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목사 아버지의 영향으로 기독교학교를 다니며 서양학문을 익히다


    린위탕은 복건성 평화(平和)현 남부 판자(坂仔)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허러(和樂)였고 중학교 때 위린(玉霖), 대학 입학 후에는 위탕(玉堂), 1925년 이후 위탕(語堂)이라는 이름을 썼다. 아버지는 상인 출신의 목사였다. 소학교부터 기독교학교를 다니며 서양문화의 세례를 받았고, 자신의 집에 기거한 미국인 전도사의 영향을 받아 12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1912년 17살 때 상하이 세인트존스대학에 입학하여(1916년 졸업) 광범위한 독서에 탐닉했고, 칭화학교(칭화대학의 전신)에서 영어교사로 일하며 비로소 중국 전통 문화와 고전 지식을 집중적으로 쌓았다.


    고향 마을 처녀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가 실명한 조부를 돌보느라 고향을 떠날 수 없어 이별해야 했다. 대학 시절에도 여대생을 사랑했지만 린위탕의 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여성 쪽 부모가 반대하여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부모의 권유로, 상하이 세인트메리학교를 졸업한 랴오추이펑과 1919년 유학을 떠나기 직전 결혼했다. 훗날 어느 서양인이 자유연애가 아니라 부모가 골라준 신부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당신은 부모를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부모님을 사랑하고 효도하나요?”


    칭화학교에서 유학 보조금을 받아 하버드대학에서 비교문학 석사학위를 받았지만 보조금이 끊어져 곤란을 겪다가 프랑스로 건너가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독일 예나대학에서 한 학기를 마친 뒤 라이프리치대학으로 옮겨 1923년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베이징대에서 비평과 언어학을 가르쳤고, 1925년에는 베이징사범대학 강사, 베이징여자사범대학 교수 및 교무처장이 됐다. 이 시절에 대한 회고다. “나도 학생들의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깃대와 벽돌을 들고 경찰들과 싸웠다. 경찰은 부랑아들을 고용하여 학생들에게 돌을 던지게 하여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때 나는 내 야구 솜씨를 발휘할 기회를 많이 가졌다.”


    30년 넘게 미국에서 살았지만 미국 국적 취득하지 않아


    1926년에 복건성 하문(厦門)대학 문과 주임교수로 옮겼지만 이듬해 1927년 3월 우한(武漢) 정부 외교부장 천유런(陳友仁)의 비서로 초빙 받아 한 때나마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같은 해 9월 우한정부가 소멸한 이후 상하이로 옮겨 문필가 생활로 일관했다. 귀국 후 1920년대 말까지 그는 루쉰이 주도하여 1924년 창간된 주간지 <어사>(語絲)를 무대로 활동했다. 그 시절에 대한 회고다. “배워서 여유가 생기면 벼슬이나 하려는 생각을 갖고 글을 쓰는 이들이 싫었다. 우리는 매 개인이 모두 자신의 진심에서 우러나는 말을 해야지 남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 스타일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어사>를 우리 마음에서 솟아나는 소리와 말이 자유롭게 뛰어 놀 수 있는 공원으로 여겼다.”


    1920년대 린위탕은 언어학자이자 문예평론가로서의 면모가 강했지만, 30년대 이후부터는 산문가, 번역가로서 중국 문화를 서양에 소개하는 일에 주력했다. 1936년 8월 린위탕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을 무대로 전업 문필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미국 이주에는 작가 펄 벅의 권유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린위탕은 이미 1935년에 미국에서 출간한 <내 나라 내 국민>으로 미국 독자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었고, 1937년에 내놓은 <생활의 예술>(영어 원제는 The Importance of Living. 우리나라에서는 <생활의 발견>)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국내에서도 한 두 해에 걸쳐 벅역판이 새롭게 출간되는 <생활의 발견>. 94년 일신서적,95년 범우사,99년 문예출판사,06년 혜원 출간(왼쪽부터)


    미국에서 린위탕은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하는 글을 자주 기고했고 1940년과 1943년에 잠깐 귀국해 강연했지만, 중국 문예계에서의 영향력은 크지 못했다. 그는 <경화연운>(1939), <풍성학려>(1941), <당인가>(1948), <주문>(1953) 외의 많은 소설과 <소동파전>(1947), <노자의 지혜>(1948), <장자>(1957), <측천무후>(1957) 등 중국 문학, 사상, 고전 관련 책도 발표했다. 그가 낸 책은 중문, 영문을 합쳐 50여 권에 달한다.


    1954년에는 싱가포르에 화교들이 세운 난양(南洋)대학 교장(총장)으로 추대되었지만 학교 측과의 마찰로 반 년 만에 그만 두었다. 1967년 홍콩 종원(中文)대학 연구교수로 초빙되어 <당대한영사전> 편찬 책임을 맡아 1972년에 출간했고, 1975년 <경화연운>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린위탕은 30년 넘게 미국에서 살았지만 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고 집도 사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미국 국적을 취득하라 권했지만, 이곳은 내가 뿌리를 내릴 곳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집을 사지 않고 월세를 내며 살았다고 말해주었다.”


    "중국은 정적인 문화고 서양은 동적인 문화다."


    『중국은 실천을 중시하고 서양은 추리를 중시한다. 중국은 정을 중시하고 서양인은 논리를 중시한다. 중국철학은 천명을 따라 마음의 평안을 얻는 임명안심(立命安心)을 중시하며, 서양인은 객관적인 이해와 해부를 중시한다. 서양은 분석을 중요하게 여기며 중국은 직감을 중요하게 여긴다. 서양인은 지식추구에 중점을 두고 객관적 진리를 추구한다. 중국인은 도의 추구를 중시하여 행동의 도를 추구한다.』(<동서 사상의 차이> 중에서)


    『중화 민족을 서양 국가와 비교해보면 진취성이 모자라고 보수적이며, 용감하고 의연한 정신이 모자란다. 반면 인내심이 매우 깊다. (…) 중국 문화는 정적인 문화고, 서양 문화는 동적인 문화다. 중국은 음(陰) 위주이고 서양은 양(陽) 위주다. 중국은 정(靜) 위주고 서양은 동(動) 위주다.』 (<중외의 국민성> 중에서)


    많은 서양인들에게 린위탕은 중국과 서양을 비교하면서 특히 중국 문화의 특징을 입담 좋게 해설해주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가 펼친 중서(中西) 문화비교론의 핵심을 위의 인용에서 엿볼 수 있다.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측면도 없지는 않지만, 중국과 서양의 문화적 특징을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단순하게 대비시킨다는 비판도 받는다. 물질의 서양과 정신의 중국,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서양과 보수적이고 정적인 중국이라는 통념적인 이분법이 자리 잡게 하는 데 린위탕의 역할이 컸다는 비판적 지적도 있으며, 그러한 이분법에 대해 이른바 오리엔탈리즘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하나의 경지를 이룬 문필가? 현실에서 도피한 딜레탕트?


    린위탕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재치, 위트, 유머, 풍류, 그리고 인생에 대한 여유로운 관조가 돋보이는 산문가이자 중국과 서양 문화의 가교 구실을 한 문명비평가. 중국의 복잡다난한 현실에서 사실상 도피하여 한가로운 글줄이나 희롱한딜레탕트. 이러한 상반된 평가에는 모두 일리가 있다. 굴곡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국의 현실과 미래를 고민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당시 중국의 많은 학자, 작가, 사상가들에 비하면 린위탕은 분명 한가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중국과 서양의 문화를 비교론적 시각에서 흥미롭게 논하고, 인생의 여유와 운치가 물씬 묻어나는 특유의 산문으로 하나의 경지를 이룬 문필가였다.


    만년의 그는 타이완과 홍콩을 오가며 생활했지만 타이베이 교외 양음산 기슭에 세낸 정원이 딸린 저택에서 은거하기를 좋아했다. 1971년 큰딸이 자살한 뒤로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고 급격히 병약해졌다. 1974년 타이완 문화계가 열어 준 80세 생일 파티 이후 외부 생활을 사실상 마감하고 1976년 82세를 일기로 홍콩에서 세상을 떠나 양음산 기슭에 묻혔다.






    20세기 중국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린위탕 박사는 자신의 대표작 「생활의 발견 . 에서 스스로를 이교도라고 불렀습니다. 
    린위탕 박사는 목사님인 아버지 밑에서 모태신앙으로 자랐으나 신앙에 의심을 품고 다른 종교에도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교도'라는 표현은 기독교에만 길이 있다는 진리를 비꼬기 위한 의도였습 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고 린위탕 박사는 「이교도에서 기독교인으로」 라는 자전적 수필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린위탕 박사는 이교도에서 다시 기독교인이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나는 그동안 다른 우물에 답이 있나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다 한 우물에 빠졌는데 그곳에서는 '네가 전생에 저지른 일 때문에 우물에 빠진 것이다'라는 말만 했습니다. 
    어떻게 기어 나와 다른 우물에 빠졌는데 이번엔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똑바로 살아!'라는 책망만 들었습니다. 
    우물에 빠진 나를 구하기 위해 누군가 직접 줄을 매고 내려온 종교는 기독교뿐이었습니다." 

    좋은 종교는 많지만 진리는 하나뿐입니다. 
    유일한 구원의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 떠나지 마십시오. 

    주님,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진리의 말씀을 힘써 전하게 하소서. 
    주님의 이름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임을 의심하지 맙시다.



















    2월 28일(토) 창세기 4:1-9
    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9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Then the LORD said to Cain, "Where is your brother Abel?" "I don't know," he replied. "Am I my brother's keeper?"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직후, 하나님은 이미 모든 사실을 아시면서도 묻습니다. 
    이 질문은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양심을 깨우는 존재의 위치를 묻는 질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담에게는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가인에게는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창 4:9) 

    아담의 질문은 자기 존재의 위치,
    가인의 질문은 관계의 위치를 묻습니다. 
    죄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사람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하나님이 질문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모르기 때문에 묻는 것이 아니라 가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고, 스스로 죄를 직면하게 하며, 양심을 흔드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합니다.
    가인의 대답에는 책임 회피, 냉소, 단절된 양심, 관계를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
    인생의 모든 문제는 두 가지만을 알면 해결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메멘토 도미니(Memento domini)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 1886.5.10-1968.12.10)
     ‘사람의 생의 단 한 번의 기회’라는 글에서 사람에게 많은 기회가 있는 것 같으나 가장 중요한 기회는 딱 한번 있다고 하며 그 기회는 죽음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생의 죽음이라는 기회를 잘 받아들이기 위해서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당신은 곧 죽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망각하고 살지 말고 오히려 죽음을 생각하며 잘 해석하면서 살라는 뜻이다.

    둘째는 메멘토 도미니(Memento domini) 

    “오직 주님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그저 생명이 있기에 목숨을 부지하며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최선을 다하여 행복하고 가치 있게 살아가려고 한다. 
    누구보다도 건강하고 멋지게 살려고 노력하며 삶을 영유하며 살려고 한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게 마련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믿음으로만이 영생을 살라고 소망과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어쩌면 죽음까지도 마음에 품고 살라는 지혜로운 가르침이며 명령이다. 
    이는 생명이라는 뜻이 ‘살라’(生)는 ‘명령’(命)이기 때문이다. 
    오직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무더운 날씨일지라도 이제 처서가 지나면서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의 순환 앞에서 우리는 삶의 열매를 기대하며 인생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새겨본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메멘토 도미니(Memento domini)!

    Wayfaring Stranger -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

     "메멘토모리(Memento Mori)"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메멘토 모리, 왜 우리는 죽음을 자주 떠올려야 할까?”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이 주는 아이러니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라틴어로 “자신이 언젠가 죽는 존재임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은 왠지 불길하거나 우울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장은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철학자, 성직자, 예술가, 군인, 심지어 기업가들까지 삶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는 가장 근본적인 진실의 문장으로 여겨졌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결국 삶을 더 깊이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메멘토 모리를 기억해야 하는 심리적 이유

    1. 현재의 삶을 선명하게 인식하게 해준다 

    우리는 종종 “언젠가는”이라는 말로 삶을 유예합니다. 
    하지만 죽음을 의식하는 순간,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 “내가 만약 내일 죽는다면, 오늘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할까?”

    이 질문은 삶에 우선순위를 정해주고, 불필요한 후회와 분노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2. 감사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솟아난다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종착지를 자각하면,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숨 쉬는 것, 가족의 미소, 햇살, 따뜻한 식사…
    그 모든 것이 ‘일상의 기적’처럼 느껴지기 시작하죠.
    메멘토 모리는 삶의 모든 순간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선물합니다.

    3. 삶의 허영과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명예, 돈, 권력 등 외적인 것에 집착합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의미를 잃습니다.

    ▶ 메멘토 모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토록 움켜쥐려는 것은 결국, 당신이 떠날 때 함께 가져갈 수 없는 것들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사람은 내면의 성장과 타인과의 진실된 관계에 집중하게 됩니다.

    4. 삶의 주도권을 되찾게 해준다 

    죽음을 기억하면 오히려 삶의 선택이 더 명확해집니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은 뭘까?” 
    이 질문은 지금의 삶이 진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검토하게 하며, 미루고 있던 꿈, 말하지 못한 진심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만듭니다. 

    5. 두려움을 ‘이해’로 전환시켜 준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렵고 낯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외면할수록 오히려 삶을 더 불안하게 만듭니다.
    정면으로 바라보고,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두려움은 차분한 이해로 바뀝니다.
    그때 우리는 인생을 훨씬 성숙하고 안정되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어니스트 베커(Ernest Becker, 『죽음의 부정』 저자)

    ​“죽음은 인간의 근본적인 공포이며, 이를 회피하려는 심리가 문화와 종교, 권력 추구로 나타난다. 
    그러나 죽음을 수용하고 직면한 사람은 가장 자유롭고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다.”

      팀 페리스(Tim Ferriss, 『4시간 근무 주』 저자)

    ​“나는 매일 아침 메멘토 모리를 생각한다. 
    그것이 내게 하루하루를 날카롭게 살게 만든다. 죽음을 자각하면 우선순위가 명확해진다.”

    ​라이언 홀리데이(Ryan Holiday, 『The Obstacle is the Way』 저자)

    ​“메멘토 모리는 스토아 철학의 핵심이다. 
    우리가 죽음을 자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진짜 가치 있는 것에만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천법설명

    *매일 아침 자신에게 묻기 : “내가 오늘 죽는다면, 후회할 일이 있을까?”

    *미루던 대화 시작하기 : 용기 내어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화해 시도하기

    *불필요한 욕망 정리하기 : 진짜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자문하기

    *유언장 써보기 : 죽음을 실제로 대비하면서 삶의 우선순위 정리

    *죽음에 대한 책 읽기 :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음의 부정』 등 통해 사고 확장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은 결코 우울하거나 비극적인 메시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삶을 깊이 사랑하라는 명령이며,
    하루하루를 후회 없이 살라는 가장 따뜻한 경고입니다.

    ​"메멘토 모리"는 우리가 단 한 번뿐인 삶을, 보다 정직하고, 겸허하고, 의미 있게 살아가도록 이끄는 나침반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삶의 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우리는, 더욱 진지하게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을 것임을 기억하라" 
    "네가 필멸자임을 잊지 말라" 등으로 번역되는 라틴어 문구이다. 
    어휘 'memento'는 'remember' , 
    'mori'는 '(to) die'에 대응한다.
    동양권에는 비슷한 말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예술 작품으로 표현한 구상도(構想圖) 등이 있다.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다.’는 뜻으로, 한 번(番) 성(盛)한 것이 얼마 못 가서 반드시 쇠(衰)하여짐을 비유적(比喩的)으로 이르는 말.
    계획(計劃)한 생각을 나타낸 바탕이 될 그림이나 도면(圖面).






    영· 혼· 몸 구조로 보면  

    영 /  형제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는 자리
     → 가인은 이 감각이 닫혀 있습니다. 

    혼 / 시기와 분노가 자리한 곳
    → 비교 의식이 살인을 낳았습니다. 

    몸 / 결국 행동으로 죄가 드러남
    → 죄는 내면에서 시작해 외적으로 폭발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묻는 질문 -  이 질문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1. 네 가족은 어디에 있는가? 
    2. 네 공동체는 어디에 있는가? 
    3. 네가 외면한 형제는 누구인가? 
    4. 네가 질투했던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단순히 타인의 위치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내 사랑의 위치, 내 책임의 위치, 내 양심의 위치를 묻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정보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이 질문은 위치를 묻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묻는 질문입니다. 

    네 형제는 어디 있느냐? 
    너는 지금 형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  
    너는 형제를 지키는 자냐, 해하는 자냐? 

    가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여기서 인간의 타락이 드러납니다. 

    책임 회피 
    관계 단절 
    양심 마비  

    “어디”라는 질문의 성경적 흐름

    이 질문은 이미 한 번 등장했습니다. 

    창세기 3:9 /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리고 4장에서 다시 묻습니다. 
    3장 : 너는 하나님 앞에 어디 있느냐
     
    4장 : 너는 형제 앞에 어디 있느냐

    죄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사람과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영·혼·몸 구조로 보면 

    영 /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가인의 영은 닫혀 있습니다.
    혼 / 시기와 분노가 혼을 지배합니다.
    몸 / 결국 행동으로 살인이 나타납니다.

    죄는 항상 영 → 혼 → 몸을 거쳐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질문은? 

    하나님은 지금도 묻습니다. 
    네 가족은 어디 있느냐? 
    네 교회 형제는 어디 있느냐?  
    상처받은 그 사람은 어디 있느냐?  
    그리고… 너는 그 곁에 있느냐?  

    이 질문은 단순히 과거의 가인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입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정보가 아니라 양심을 위한 질문  

    하나님은 모르셔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가인의 위치, 곧 그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죄를 지은 후, 그는 어디에 서 있는가? 
    형제를 죽인 후, 그는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  

    책임을 묻는 질문

    가인의 대답은 이렇게 나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여기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드러납니다. 
    회피 
    책임 전가 
    냉소 

    하나님은 묻습니다.
    너는 네 형제를 돌보는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느냐?

    관계의 파괴를 드러내는 질문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고,
    4장에서는 형제와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죄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수직 관계를 무너뜨리고 
    사람과의 수평 관계를 파괴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이 말씀은 단지 가인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네가 미워한 그 사람은 어디 있느냐? 
    네가 외면한 그 영혼은 어디 있느냐? 
    네 공동체 안에서 사라진 자는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지금도 묻고 계십니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호소하다(창 4:10) 차아크(tsâʽaq)  צָעַק Storng number  6817


    1.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다.   2. 피엘형 : 소리지르다.  3. 히필형: 소집하다  
    Pronunciation  [ tsâʽaq ]  
    Old Testament  /  55회 사용
    •  1. 원형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다, 창41:55, 신22:24,27, 삿4:3, 대하13:14, 욥19:7.
      •  a. 원형 피엘형 : 소리지르다, 왕하2:12.
      •  b. 원형 히필형: 소집하다, 불러모으다, 삼상10:17.
      •  c. 원형 니팔형: 소집되다, 불러모아지다, 왕하3:21. 
    • 관련 성경 / 소리지르다(출5:8, 신22:24, 왕상20:39), 부르짖다(왕하4:1, 애2:18, 사19:20), 외치다(왕하4:40, 시34:17, 렘22:20), 호소하다(창4:10, 출5:15, 왕하8:3), 소리를 높이다(렘22:20), 간구하다(출8:12), 울다(창27:34), 모이다(삿7:23, 삼상13:4, 왕하3:21), 통곡하다(사65:14), 모으다(삼상10:17). [명] 부르짖음(출22:23, 시88 : 1).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세기 4:8-15)

    가인은 벌이 죄보다 무겁다고 항의했다.

    창세기 4:13-14.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 이다.
    주께서 나를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 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죄벌이 너무 무겁다는 말은 하나님이 공의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내가 이렇게 중벌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잘못 파단 하셨기 때문입니다 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심판이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가혹하시며 불공정하신 분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러하듯이 자기가 저지른 죄보다 징벌이 무겁다고 생각하다. 
    그리고 자기는 살기를 바라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다.

    가인은 육신의 죽음은 두려워했다.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일 것입니다

    창세기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인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쫓아 내시온 즉 뵙지 못하리이다. 
    나는 하나님을 뵙고 살고 싶은데 하나님은 쫓아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쫓겨나는 것은 하나님의 너무 과하게 내리신 벌입니다. 했다. 
    쫓아 내는데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지 않았다.

    끝가지 죄를 인정하지 아니한 가인은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물려준 땅에서 평안하게 안전하게 잘 살았다. 
    그런데 유리하는 자가 되리이다.” 떠돌이 인생이 된다는 말이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쫓아내시면 결국 만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목숨만은 살려 주시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벌은 내리지만 죽이지는 않겠다고 했다.

    가인이 두려워하는 만나는 자들은 누구인가? 
    이중 창조를 주장하는 자들은 아담 이전에 창조한 인간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담 이전에 인간을 창조하였는데 그들이 타락하자 버려두고 아담을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그 버려둔 인간이 가인이 두려워하다 자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주장은 그릇된 주장이다. 
    왜냐 하면 성경 역사족보에 여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부부는 한 사람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여자를 창조할 때에 아담의 몸의 일부인 갈비뼈로 창조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한 몸임을 말씀하시고 둘이 연합하여 한몸을 이루라 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여자 남자 둘이 연합하면 한 몸이라는 말씀이다.

    ​창세기 5:3-4.
    아담은 백 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 삼십세를 살고 죽었더라.

    아담은 130세 이전에 가인과 아벨을 낳았고 그들이 장성했다. 
    그리고 팔백년 동안 살면서 자녀들을 낳았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셋을 낳기 이전에 딸들도 낳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사제건을 중심하여 성경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여자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것이고 또한 아벨 이루에 낳은 아들들이 있었으나 장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론되지 않았을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가인과 아벨 이전에 아들들이 없었더라도 후에 600년 동안 아들들을 낳았기 때문에 가인이 그 형제들을 만나면 형제를 주인자로 인식하기 때문에 형제들이 죽이려고 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자신의 형네들이 아니면 가인을 죽이려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시며 만약 가인을 죽인 죄는 가인에게 내린 형벌보다 일곱배나 더 정죄한다고 하셨고 그 약속의 표를 주셨다. 
    그래서 가인의 목숨은 살려 두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을 면하게 하신 것이다.

    가인의 생명을 해치지 못하도록 표를 주신 것은 가인을 용서해서가 아니라 가인은 형벌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예를 들면 아담 하와를 형벌하시고 목숨은 거두시지 않았다. 
    그리고 하와를 산자의 어머니라 칭하였다. 
    즉 아담 하와를 통하여 뱀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도 번성하게 하여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선언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기안의 목숨을 살려 주신 것은 가인을 통하여 번성할 후손 중에 택한 백성을 예상하셨기 때문이다. 
    아담의 후손도 모두 죄인의 후손이고 가인의 후손도 같은 죄인의 후손이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여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육신을 죽게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시고 표를 주셨다.

    표를 주셨다고 했는데 어떤 표를 주셨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가인도 또는 가인 이 만나는 인간도 알아 볼 수 있는 어떤 증거를 말하는 것이다. 
    표라는 말은 오트(תוָא 세메이온 σημειον 카라그마 καοιγμα) 인데 표시, 기적 표적, 인, 형상, 증거, 증명, 이다. 

    אוֹת Storng number 226
    1. 신호.  2. 군기.  3. 창 4:15.  

    Pronunciation [ ’ôwth ]
    Old Testament  /  79회 사용 
    관련 성경  / 징조(창1:14, 삼상10:7, 시78:43), 표(창4: 15, 신11:18), 증거(창9:13), 표징(창17:11, 출 31:13, 삼상2:34, 겔14:8), 이적(민14:22, 신 34:11), 표적(출12:13, 시74:4, 사19:20), 기호 (민2:2, 신6:8), 예표(사20:3).

    σημεῖον, ου, τό Storng number 4592
    1. 표징.  2. 표.  3. 기적  
    Pronunciation [ sēmĕiŏn ]
    관련 성경  /  표적(마12:38, 행2:22, 살후2:9), 징조(마24:3, 눅21:7, 행2:19), 군호(마26:48), 이적 (막13:22, 눅23:8), 표(롬4:11, 고후12:12).

    χάραγμα, ατος, τό Storng number 5480

    1. 표.  2. 형상  
    Pronunciation  [ charagma ]
    Etymology  /  5482와 동일어에서 유래  
     1. 표, 인, 계 13:16, 14:9. 
     2. 형상, 행 17:29.  
    관련 성경 / 표(계13:16, 16:2, 20:4), 새긴 것(행17:29). 

    그러므로 표는 도장과 같은 것 사인과 간은 것이로 이해된다. 
    또는 가인을 죽인 자는 칠배의 증벌을 내린다는 약속의 증거인 것이다. 
    가인이 멸망하게 된 것은 불신앙 자였고 사탄의 종으로 선을 대적했고 속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속이고 거짓말하고, 사랑을 거부했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고, 징벌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결국 죄에 속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등지고 떠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려 해도 용서할 수 없기에 저주해야 했다. 

    아담에게는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인류 최초의 첫번째 형제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가인 역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두 가지를 부정 했습니다.
    (없었던 일로 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첫째, 자신의 형제를 쳐 죽인 사실을 부정했습니다. 
    둘째, 형제와 가져야할 관계를 부정 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자신을 곧잘 속입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100 % 정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속이기 시작할 때 , 우리는 가끔 하나님 마저 속이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이 점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이유가 됩니다.

    성경은 가인도 이후에 하나님 앞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 하더니”(창 4:16)

    “ ~어디 있느냐” (Where is your brother Abel?)는 원어성경에서도 분명히 장소를 묻는 의문 부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질문에 장소가 어디인지를 묻고 계신 것으로만 해석하고 받아들인다면 참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며, 미련한 사람임을 인정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9절)

    하나님은 아담에게 물었던 질문을 그 아들 가인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또 질문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더 포함해서 말입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모릅니다.제가 그 아이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가인의 말투를 보니 아직도 하나님에 대한 가인의 불만은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즉 아벨을 사랑하신 하나님이 미워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반항심을 그는 이런 식으로 표현 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10절) 
    만약 하나님의 이 질문에 가인이 “철퍼덕” 주저 앉아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회복을 간청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는 하나님의 질문은? “네 형제는 어디 있느냐?” 
    “너는 네 형제와 서로 사랑하고 지내고 있니?” 라는 질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한 척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내는 열심의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이웃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한일서 4:20)

    교회 공동체 생활도 물론 중요 합니다. 
    기도와 금식, 찬양,묵상 역시 중요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참된 척도는 ,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드러나는 우리와 이웃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 분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이들, 내 주변에 있도록 하나님이 두신 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형제를 의미하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할 때, 아니 오히려 자기 몸보다 더 귀하게 여겨 자신을 내주신 예수님 처럼 사랑할 때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기 때문 입니다. 
    신앙과 생활(삶)의 참된 일치는 하나님이 우리 곁에 두신 이웃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이루어집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3-24)

    또한 이사야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란?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야 58:6-7)

    사도 바울도 로마서 12장 1절에서 “우리의 몸을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진정한 영적예배”라고 강조 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네 형제는 어디 있느냐?) 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무엇인가요? 


    생각하기  / 북극 지방의 사냥꾼들은 독특한 방법으로 곰을 사냥합니다. 
    사냥꾼들은 곰이 자주 다니는 길목에 있는 나무에 커다란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그러면 곰은 그곳을 지나가면서 돌덩이에 머리를 부딪치게 됩니다. 
    머리를 부딪친 곰은 자기가 가는 길을 막은 것이 화가 나서 돌덩이를 다시 이마로 들이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돌덩이는 저만큼 밀려갔다가 다시 곰을 향하여 세차게 밀려와 곰을 들이받습니다. 
    자신을 공격해오는 돌덩이에 더 화가 난 곰은 더욱 세게 돌덩이를 들이받습니다. 
    이러한 곰의 반복되는 무차별적인 공격은 그 도가 점점 더 심해지게 되고 결국 그 어리석은 힘겨루기로 인하여 곰은 머리가 터지고 녹초가 되어 그 자리에서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순간을 기다리던 사냥꾼들이 다가와서 죽어가는 곰을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리석은 힘겨루기로 인하여 자신을 파괴시켜 가고 있습니까? 
    스스로 분을 다스리지 못하는 미련한 곰처럼 문제를 들이받기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갈등 앞에서 먼저 나를 살펴보고 분노를 다스려 참아낼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참고 피해 가야 할 일을 깨닫지 못하고 분을 내어 충돌하는 것의 결국은 파멸입니다. 
    우리는 항상 분을 잘 다스려 파멸로 끝나는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생각하기 / 몸 안의 독소를 키우는 것은 화(火)  

    Elmer R. Gates (1859–1923) was an American scientist and inventor. 

    정신의학자 엘머 게이츠(Eelmer Gates) 감정 분석 실험 중 새롭게 발견한 이론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숨결을 시험관에 넣고 냉각하면 색이 있는 침전물이 생기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침전물은 감정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색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화를 내고 있으면 밤색,  고통과 슬픔을 느낄 때는 회색, 후회의 말을 내뱉을 때는 복숭아색을 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밤색으로 변한 침전물을 모아 실험용 흰쥐에게 주사하면 짧은 시간 안에 죽는다고 합니다.
    이 실험을 통해 화를 낼 때 우리 몸 내부에 엄청난 독소를 뿜어내고 이 독소는 의학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무서운 독극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감정 분석 실험을 통해 사람의 감정 상태에 따라 숨결의 성분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발견한 연구자입니다. 
    그는 분노, 슬픔 등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때의 숨결을 냉각하면 색이 있는 침전물이 생기며, 
    이는 몸에 해로운 독소로 작용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실험 내용 : 사람의 숨결을 시험관에 넣고 액체 공기로 냉각하여 침전물을 분석했습니다.   

    분노의 침전물 :
    분노한 상태의 숨결에서는 갈색 침전물이, 슬플 때는 옅은 회색, 평온할 때는 투명한 침전물이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연구의 시사점 :
     엘미게이스의 연구는 마음의 상태가 신체적 변화(독소)로 직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부정적인 감정(화)을 다스리는 것이 신체 건강에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자료로 인용됩니다. 

    참고 : 해당 내용은 주로 감정의 신체적 영향을 설명하는 인문학적/교육적 콘텐츠에서 주로 인용되는 내용입니다.







    사람의 감정 중에서 분노는

    상당히 격렬한 감정이라서

     

    화를 내는 것 자체만으로도
    몸에 독소가 쌓입니다.

    그리고 분노의 독소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화는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독이지만,


    실제로는 당신에게 가장 큰 해를 입힙니다.


    - 로버트 그린 –

    따뜻한 하루








    영국의 평론가 체스터톤(Gilbert Keith Chesterton.  29 May 1874 – 14 June 1936)
    영국의 기독교 평론가

    불교는 구심적(求心的) - 求心力
    불교는 내 안의 부처를 찾아내는 것

    기독교는 원심적(遠心的) - 遠心力
    기독교는 구원 받은 후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는 것 

    구약의 구심적 선교(centripetal mission)가 신약성경에서는 원심적 선교(centrifugal mission)으로 전환된다. 
    만국이 이스라엘로 오는 선교에서 신약에 구원받을 사람들을 찾아가는 선교로 바뀐 것이다. 
    불신자들에게 오라는 구심적 선교에서 불신자들을 찾아가는 원심적 선교로 그 의미를 바꿔 생각해 볼 수 있다.
    오경의 선교는 어떤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본토 친척을 떠나는 선교사의 삶을 살아가는데, 그것이 구심적 선교로서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으로 볼 수 있고, 구원의 대상을 만나러 떠나는 구심적 선교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삭과 야곱은 밧단 아람을 떠나는 원심적 선교에서 고향 팔레스틴(세겜)으로 돌아오는 구심적 선교의 모습이 있다. 
    떠돌이로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을 본다.
    요셉은 어떤가? 
    형들로부터 원치 않는 여정이지만 하나님의 계획하심의 애굽 땅 선교가 있었다. 
    애굽의 원심적 선교에서 돌아갈 가나안 땅으로 구심적 선교의 비전을 가졌다. 
    후손들에게 돌아갈 땅을 제시하며 자신의 시체를 가나안 땅에 묻게 하는 비전을 가졌다. 

    오경의 중요 인물들의 삶과 선교를 살펴보았다.
    창세기는 1-11장의 원역사의 이야기가 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삶(원심적 선교)이었다. 
    가인도 세상을 유리하고 떠도는 삶이었다(원심적 선교). 
    노아는 홍수의 재앙 속에 방주를 만들어 바다를 항해하는 삶(원심적 선교)이 있었다. 
    바벨탑의 사람들도 세상으로 흩어지는 삶이었다(원심적 선교). 
    원역사의 사람들은 죄와 벌이라는 구조 속에서 떠도는 삶(원심적 선교)이었지만 다시 돌아갈 땅(구심적 선교)이 기대되었다. 
    에덴, 아벨과의 만남, 물이 걷힌 육지, 시날 땅은 다시 환원할 곳이었다. 
    떠나지만 다시 돌아갈 곳, 원심적 선교로 나서지만 다시 돌아오는 구심적 선교가 구약의 선교의 패턴이다. 
    오경은 예루살렘으로 구원을 받기 위해 오지만 구원을 받을 사람을 찾아 떠나는 선교의 유형이 제시된다.
    창세기는 구심과 원심이 반복되는 책이고, 출애굽기와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구심적 선교의 책이다. 
    출애굽기와 레위기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정에서 받는 계명과 율법의 책이다. 신명기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듣는 모세의 설교이다. 구심적 선교의 책이 바로 출애굽기-신명기이다. 오경은 구심적, 원심적 선교의 책이며 가나안 땅을 중심으로 한 떠남과 돌아옴이 있었고, 바빌론 땅으로 포로로 붙잡혀 갔다 돌아오는 구심적 원심적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오경 안에 기록자 시대의 상황을 반영한다.
    따라서 우리는 선교로 늘 떠나야 하고, 다시 돌아와서 또 다른 선교지로 주님이 가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또 떠나야 한다. 
    주님은 이 피드백을 항상 하셨다. 
    복음을 전하러 세상으로 들어갔다. 
    또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났다. 
    오늘 우리는 이 복음을 들고 원심적 선교를 하러 떠나야 한다. 
    그러면 또 주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려 고향으로 돌려 보내시리라.


    안식일(샤바트)

    שַׁבָּת Storng number 7676

    1. 안식일.  2. 한 주일 
    Pronunciation    [ shabbâth ]
    Etymology  /  7673에서 유래
    Old Testament / 11회 사용
    •  1. Noun 안식일, 일주일의 일곱째 되는 날, 출16:25
    •  2. Noun 한 주일, 레23:15. [비교] 신16:9.
    • 문법설명 /  어미활용 שַׁבַּתּוֹ, 복수 שַׁבָּתוֹת
    • 관련 성경 / 안식일(출 16:23, 느 9:14, 암 8:5), 안식(레 25:4, 신 5:14), 안식년(대하 36:21). 
                         [동] 안식하다(레 25:2, 신 5:14).
    휴식, 안식처(메누하) 

    מְנוּחָה Storng number 4496

    1. 휴식.  2. 안식처. 3.  평안히  
    Pronunciation    [ menûwchâh ]  
    Old Testament  /  21회 사용
    •  1. Noun 휴식, 휴양, 안정, 평안, 평정, 신12:9,룻1:9, 시23:2, 95:11
    •  2. Noun 안식처, 휴식처, 거주지, 가정, 민10:33, 사11:10, 미2:10.
    •  3. Noun 평안히, 고요하게.
    Grammar Explanation  /  4495의 여성형

    • 문법설명 / 4495의 여성형
    • 관련 성경 / 쉴 곳(창 49:15, 시 132:14, 미 2:10), 위로(룻 1:9), 평안한 곳(시 132:8), 봉안(대상 28:2), 거한 곳(사 11:10), 안식(사66:1), 머뭄(슥 9:1),태평(왕상 8:56), 평안(대상 22:9), 병참(렘 51:59).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은 선악과 범죄를 저지르고 숨어있는 아담에게 질문으로 나타나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4장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것에 실패하고 질투에 눈이 멀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가인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을 발견하려 애쓰던 욥에게도 폭풍 같은 질문으로 다가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질문을 통해 우리를 만나려고 하셨습니다. 
    초청장인 셈이지요.

    하나님의 질문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복잡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질문을 들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질문을 들으라고 주신 게 바로 안식일, 주일입니다. 
    안식은 휴식이라는 뉘앙스가 강하지만 히브리어 ‘샤바트’는 멈춰 선다는 의미가 큽니다. 
    하나님의 질문 앞에 멈춰 서는 걸 의미합니다. 
    주일은 하나님의 질문을 제대로 듣기 위해 하나님 앞에 멈춰 서는 날이며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히브리어로 샤바트라고 한다. 
    이 명사는 동사 שָׁבַת(샤바트)에서 파생한 것이라고도 하고 또 동사가 명사에서 파생한 것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명사 샤바트에는 중간철자에 다게쉬(점)를 찍는데 동사에는 찍지 않는다. 
    피엘동사에서 연유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동사의 뜻은 중지하다, 그만두다이다. 이것을 쉬다 또는 안식하다라고도 번역한다. 
    여기에서 안식일이란 단어가 나왔는데 평소에 하던 일을 중지하고 쉬는 날을 가리키니 휴일이라고 번역하면 더 나을 것이다.

    오경(토라)에서 이 동사는 20번 나오고 명사는 46번 나오며 도합 66번 언급된다. 
    예언서(너비임)에는 명사와 동사가 합쳐서 80회 언급된다. 
    에스겔에 가장 많이 나오는데 28번, 그리고 이사야서에서 19번 나온다. 
    재미있는 현상은 신명기사가의 역사서에는 단 10번만 언급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왕국시대에 안식일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왕국시대에 여호야다 왕이 안식일을 폐지하였다고 비난하고 있는데 북왕국에서는 아예 안식일을 지켰다는 기록이 없다. 
    이로 미루어 안식일이 제정되어 지키도록 강조하게 된 시대는 포로기 내지 포로이후기였던 것 같다. 
    포로이후기에 오경을 최종으로 완성한 저자는 안식일의 준수를 무척 강조하여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존폐가 걸린 결정적인 문제로 제기하였던 것이다. 그 근거를 출애굽시대 광야유랑기 특히 시내산 계시 사건에서 그 기원을 찾았다. 
    그러므로 안식일(휴일) 사상은 오경에서 가장 큰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출애굽기 20:8-11에 나오는 안식일법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안식의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님이 6일동안 일하시고 쉬셨기 때문에 제 칠에는 반드시 일손을 멈추고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단에는 안식일이란 용어가 사용되지 않고 동사만 나온다. 
    안식일이란 전문용어 보다는 힘겨운 노동을 중단하고 심신의 건강을 회복하는 휴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창세기 2장은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신명기 5장에도 동일한 십계명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시킨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여 안식일을 지키라고 되어있다. 
    신명기는 고대노예제사회의 노예노동이 폐지된 사건을 기린다. 
    이처럼 출애굽기의 십계명과 신명기의 십계명은 안식일 준수의 근거를 다르지만 동일한 취지로 잡고 있다. 
    창조주를 강조할 경우에 관점은 노예노동의 혹독함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쉬게 하며 창조의 본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데 주안점을 둔 것이다. 
    출애굽사건을 기념하는 신명기의 십계명의 경우에도 이집트의 노예제도를 탈피하고 강제노동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리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전자는 계약의 백성을 강조하고 후자는 계약의 하나님을 강조한다.

    출애굽기 31장의 계약법 말미에도 안식일법이 장황하게 나온다. 
    안식일을 어기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는 무서운 형벌을 규정하고 있다. 
    십계명 자체에는 형벌규정이 없다. 
    그 바로 다음 장인 출애굽기 32장에서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섬기는 죽을 죄를 지었다. 
    이로 인해 계약이 깨어졌지만 모세의 피 어린 중보를 통하여 깨어진 언약을 새롭게 갱신하게 된다. 
    파기될 뻔한 성막법도 비로소 실행에 옮길 수가 있게 되었다(출 32-34장).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성막을 건립하는 장면은 출애굽기 35-39장까지 이어진다. 
    그 서두인 출 35:1-3에 안식법이 다시 짧게 나오는데 안식일에는 부엌에 불도 피우지 말라고 규정한다. 
    안식일을 준수한다는 조건으로 성막이 건립된 것이다. 
    주께서 백성 가운데 성막 안으로 내려오시는 사건은 안식일 준수를 전제로 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성막의 말씀예배를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을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는 서약이다. 
    안식일에는 부엌에 불도 피우지 말라는 말씀은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키는 휴식의 선언이다. 
    집안에 있는 모든 식구들이 노예들까지 포함하여 가축들까지도 다 안식하여야 한다. 
    이 안식법이야말로 고대 노예제 체제의 휴식 없는 노동을 전면 부정하는 해방과 자유의 선언이다. 
    안식일을 휴일이라고 번역하고, 안식을 쉼 내지 쉬다라고 번역하면 종교의 범주를 벗어나 일반사회의 상황에 매우 적절한 법사상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이와 같이 안식일 준수, 즉 휴일 제정의 토대 위에서 출발하였다. 

    민수기 15장에 안식일법이 한번 더 나온다. 
    안식일에 나무하러 갔다가 붙잡힌 사람이 구금되었다가 여호와의 명령으로 사형당하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는 모세의 중보기도가 없다. 
    문맥상 모세의 중보가 무척 강조되는 상황에서 이 문단에는 모세가 살려달라는 중보기도도 하지 않고 그냥 사형을 집행해 버린다. 
    본디 목이 뻣뻣하고 말을 듣지 않는 백성이 광야에서 수도 없이 거역하고 죄를 지었다. 

    다른 경우에 모세는 중보기도를 하지만 이 사건에서부터는 모세가 중보기도를 거의 하지 않는다.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의 용서해주시는 은혜 아래서 비로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주의 용서해주는 은혜가 없이는 안식일의 준수는 불가능하다. 민수기의 그 사람은 안식일에 밥 하려고 나무를 했던 것 같다. 안식일은 안식년의 토대가 되고, 안식년은 희년의 토대가 된다. 죄 많은 인간은 이 율려를 힘써 지키려 해 보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희년을 지키는 국가나 사회를 본 적이 있는가? 

    신약시대에 예수님은 안식일을 폐지하셨다. 이 때문에 바리새인의 미움을 받아 처형당했다. 로마제국과 헤롯체제가 이중으로 민중을 수탈하고 그 위에 예루살렘 성전체제가 더하여 삼중으로 백성은 고통을 당했다. 빈민이 양산되었으며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들이 즐비하였으며 농토에는 일용노동자로 일해야만 하루 하루 연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안식을 지킬 수 없었으며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안식일에도 나가서 일을 해야 했다. 가난한 백성은 안식을 어기는 죄인들이 되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안식일에 배가 너무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 먹다가 들켰다.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 인자라고 하시면서 안식일에 손 마름 병자를 고쳐주기 까지 하였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초대교회는 안식일 다음날을 주의 날로 지켜서 말씀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기독교의 주일성수의 기원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주일성수를 못하는 노동자와 빈민이 얼마나 많은지 온 세계를 둘러보면 알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주일은 온전히 용서와 화해와 회복과 평화의 휴일이어야 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주일성수라는 율법주의를 내려놓고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안식일 또는 주일이라는 주제를 더 넓은 보편적 사회적 지평에 적용하여 휴일의 사회 사상으로 확대 적용해야 마땅할 것이다. 


    메누하와 샤바트의 차이점 - 두 가지의 안식

    히브리어에서 '쉼'을 뜻하는 두 단어 메누하(Menuhah)와 샤바트(Shabbat)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신학적·실제적 뉘앙스가 상당히 다릅니다.

    솔로몬이 열왕기상 8:56에서 왜 하필 '메누하'를 선택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그 차이를 분석해 드릴게요. 

    1. 메누하 (מְנוּחָה, Menuhah) : "상태와 장소로서의 안식"

    이 단어는 '내려앉다', '머물다'라는 뜻의 어근 누아흐(nuach)에서 왔습니다. 

    정착과 안녕 :
     
    방랑이나 전쟁, 고통이 끝난 뒤에 찾아오는 평화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을 때' 사용된 단어가 이 계열입니다. 

    장소적 개념 :
     
    단순히 쉬는 행위가 아니라, '쉴 만한 장소'를 포함합니다. 
    시편 23편의 "쉴 만한(메누호트) 물가"가 대표적입니다.  

    솔로몬의 맥락 :
     
    열왕기상 8장에서 솔로몬이 말하는 안식은 광야의 이동식 성막 시대가 끝나고, 하나님이 성전에 '안주'하시며 이스라엘 백성도 적들로부터 벗어나 약속의 땅에 '정착'하게 된 완벽한 평강의 상태를 뜻합니다. 

    2. 샤바트 (שַׁבָּת, Shabbat) : "중단과 구별로서의 안식"

    이 단어는 '그치다', '중단하다'라는 뜻의 어근 샤바트(shavat)에서 왔습니다. 

    행위의 중지 :
     
    하던 일을 멈추는 행위에 초점이 있습니다. 
    창세기 2장 2절에서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그치신' 것에서 유래합니다. 

    시간적 리듬 :
     
    일주일 중 일곱 번째 날이라는 시간의 구별에 가깝습니다.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거룩함을 유지하는 계약적 의무가 강합니다. 

    영적 재생 :
     
    노동을 멈춤으로써 창조주를 기억하고 영혼을 회복하는 '의례적 쉼'입니다.


    2월 27일(금) 창세기 3:8-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어디 있느냐?(9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But the LORD God called to the man, "Where are you?"


    2026년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사순절 경건생활의 목표는 "성경을 열어주소서
    성경이 열린 사람을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복 받은 사람의 언어는 "아멘"과 "할렐루야"
    아멘은 하나님의 말씀위에 세워진 사람의 언어
    할렐루야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순종하는 사람(네페쉬)
    거룩한 언어는 거룩한 존재로부터 찾아야 합니다.
    거룩한 존재는 영과 혼과 육의 조화를 이루는 것
    영과 혼과 육의 조화를 이루는 과정을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육의 지배를 받는 단계
    둘째는 육신의 지배를 받는 단계
    셋째는 영의 지배를 받는 단계

    예수님 당시 두 개의 사상이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Gnosticism) 
    가현설(Docetism)
     

    영지주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사람이시라는 것을 주장
    가현설에서는 예수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주장
    따라서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심을 믿는 것이 곧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예레미야 10:10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열방이 능히 당치 못하느니라.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일서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에스라 1: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신령한 사람이란 거룩한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이끄는 삶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처음 하셨던 질문 /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세기 3:9)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의 의미

    하나님은 위치를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존재적 질문입니다.

    오래 전에 미국에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제가 동생에게 전화를 했더니 마침 동생의 아들 조카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조카에게 "지금 무엇 하느냐?" 라고 물었더니 "지금 전화를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묻는 내용은 전화를 받기 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라는 내용이었지만 조카는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살았기 때문에 전혀 질문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제가 생각한 것은 한국문화와 미국문화가 전화하는 내용에서도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의 문화와 에덴동산의 문화도 분명히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질문은 문책(問責)이 아니라 회복(回復. 恢復)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문책(問責) / 물을 문, 꾸짖을 책 - 잘못을 캐묻고 꾸짖음
    질책(叱責) / 꾸짖을 질, 꾸짖을 책 - 꾸짖어 나무람
    회복(回復) / 돌아올 회, 회복할 복 - 원래(元來ㆍ原來)의 상태(狀態)로 돌이키거나 원래(元來ㆍ原來)의 상태(狀態)를 되찾음.
    회복(恢復) / 넓을 회, 회복할 복 - 원래(元來ㆍ原來)의 상태(狀態)로 돌이키거나 원래(元來ㆍ原來)의 상태(狀態)를 되찾음.
    하나님의 관심을 왜 잘못했느냐" 이런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인 후에 예전의 어부 생활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에도 왜 나를 모른다고 했느냐? 이런 질문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회복을 위한 질문

    첫째는 관계의 회복

    “너는 지금 나와 어떤 관계의 자리에 있느냐?”

    죄를 짓기 전의 아담은 숨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후에는 숨었습니다.
    두려워했습니다. 
    나무 사이에 자신을 감추었습니다.

    둘째는 상태의 회복

    “너는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느냐?” 

    하나님 중심인가? 
    자기 보호 중심인가? 
    두려움 속에 있는가? 
    은혜 안에 있는가? 
    숨는 존재? 
    두려워하는 존재? 
    변명하는 존재? 
    즉, “어디”는 공간이 아니라 관계의 자리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이 질문은 단지 아담에게만이 아닙니다. 

    지금 나는 육에 속한 상태인가?
    아니면 영에 속한 상태인가?
    하나님 앞에 숨고 있는가? 
    아니면 빛 가운데 서 있는가?

    가장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심판 전에 먼저 찾으셨습니다.

    “왜 그랬느냐?”가 아니라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질문은 정죄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부르심입니다. 
    지금까지  영· 혼· 육에 속한 사람, 신령한 자, 아멘의 존재론, 이런 주제들이었기 때문에 사실 이 두 방향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존재론적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이 질문은 이렇게 됩니다.

    1. 나는 어떤 존재인가?
    2. 나는 육에 속한 존재인가, 혼에 지배되는 존재인가, 영으로 사는 존재인가?
     
    3.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존재의 자리 이동인가, 단지 신앙적 선언인가?  

    이 길로 가면 우리는 존재의 근원
    아담 안에 있음 vs 그리스도 안에 있음 
    영의 깨어남 
    존재의 전환(Being-shift) 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이건 뿌리를 파는 작업입니다.
    신학적으로 깊고, 구조를 바꾸는 접근입니다.

    오늘 삶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면 이 질문은 이렇게 됩니다.

    1. 왜 나는 아직도 육적으로 반응하는가?
    2. 왜 시기· 분쟁이 생기는가?
    3. 어떻게 영으로 반응할 수 있는가?
    4.  실제로 육에서 벗어나는 훈련은 무엇인가? 

    이건 열매를 다루는 작업입니다.
    지금 내 감정, 관계, 선택, 말, 반응을 다루는 접근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존재론 없이 적용만 하면 도덕주의가 됩니다. 
    적용 없이 존재론만 파면 관념 신학이 됩니다.

    성경은 항상 존재 → 의식 → 삶의 열매 이 순서로 움직입니다.  


    황덕영 목사
    <살리는 질문, 사는 대답 : 사명자를 향한 열여덟 가지 질문>(두란노 간)

    팀 켈러 목사
    <인생 질문>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던지신 최초의 질문

    하나님은 우리가 새로운 해를 시작할 때,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때, 아니 매일 우리의 삶에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오늘 뭘 할지, 무슨 옷을 입을지도 관심을 갖고 보십니다. 
    운전을 할 때도 이 길로 갈까 저 길로 갈까에도 관심을 가지십니다. 운전할 때 스피드를 낼까 안 낼까에도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법규를 지킬까 안 지킬까, 음식을 뭘 먹을까, 안 먹어야 하는 것을 먹는 건 아닌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관심(觀心) 볼 관, 마음 심 - 마음의 본성을 살핌
    관심(關心) 관계할 관, 마음 심 -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주의(注意)를 기울임. 또는 그런 마음이나 주의(注意).

    inter esse - 사이에 존재한다

    벗었으므로(5903) 예이롬 [ ʽêyrôm ] עֵירֹם Storng number 5903

    עֵירֹם Storng number 5903

    1. 벗은.  2. 벌거벗음 
    Pronunciation 예이롬 [ ʽêyrôm ]

    Etymology /  6191에서 유래
    Old Testament / 10회 사용
    • 1. Adjective, Noun [형용사] 벗은, 창3:7,10,11
    • 2. Adjective, Noun [명사] 벌거벗음, 벌거숭이, 겔16:7,22,39, 23:29.
    • 문법설명 / 복수 עֵירֻמִּים
    • 관련 성경 /  벗은(창3:7,10, 겔18:7), 헐벗은(신28:48),벌거벗은(겔16:7,22), 벌거벗긴(겔16:39, 23:29).


    עָרַם Storng number 6191

    1. 발가벗다.  2. 교활하다.  3. 히필형 
    Pronunciation  [ ʽâram ]  
    Old Testament  / 16회 사용

    관련 성경 / 간계를 꾀하다(시 83:3), 슬기[지혜]를 얻다(잠 15:5, 19:25), 지혜롭게 행동하다(삼상 23:22).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며 나아갈 때는 기뻐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어긋날 때는 안타까워하십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우리의 영적 현주소, 즉 우리가 영적으로 어디 있느냐에 관심이 크십니다. 
    하나님께서 최초로 인류에게 던지신 질문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9절)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죄를 범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이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영적으로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났을 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준엄한 음성으로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통해 모든 인류에게 하시는 질문입니다. 
    그러니까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질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과 영적으로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느냐가 우리 삶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아담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0절)

    아담은 죄를 짓고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멀어지자 하나님이 두려워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영적으로 자리를 이탈한 것입니다.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대답을 잘 보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담은 벗었기 때문에 두려웠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계속 벗고 살았는데, 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벗어서 두려워 숨습니까? 
    인간은 자기가 잘못하면 잘못을 인정하고 시인하기보다는, 항상 뭔가 다른 데서 이유를 찾으려고 합리화하거나, 실제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잘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줍니다. 

    아담과 하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벗고 있었고, 그것이 남자와 여자, 그리고 가정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하나 되어 사니까 벗고 있어도 괜찮고, 그것을 의식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나니까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7절)

    무화과나무 잎이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순간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몰랐는데 이제야 벗은 줄을 알았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둔감했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이전에는 벗고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고 괜찮았는데, 이제는 벗고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없는데 자기가 벗은 몸을 누가 봅니까? 
    자기 아내가 보고 남편이 봅니다. 이전에는 벗었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죄가 들어오니까 이제는 배우자가 자기 벗은 몸을 보면 수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 앞에서 가리게 되었습니다. 여기 가리는 게 누구에게서 가리는 겁니까? 서로에게서 가리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안 가렸는데 이제는 가리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는 완전한 공동체로 하나였던 두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만들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즉 성부 성자 성령이 완벽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스타일(모양)대로 지으셨습니다. 
    남자만 있으니까 ‘좋지 못하다’, 즉 ‘미완성’이라고 하시며 여자를 만들어 완벽한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나 되어 공동체가 될 때 온전한 존재가 됩니다.

    그렇게 온전한 공동체로 사니까 아무 문제가 없고, 사랑의 관계 안에서는 벗고 있어도 아무 상관이 없었는데, 두 사람의 관계가 죄 때문에 깨어졌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였을 때는 창피하지 않았는데, 상황은 똑같지만 이제 하나인 것이 깨지니까 창피한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벗었기 때문이 아니고 죄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서로의 관계도 수치스러운 관계가 된 것입니다.

    결국 아담이 하나님을 두려워한 진짜 이유는, 그가 죄를 범하여 죄의식과 죄책감과 수치심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에 죄를 짓고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다 죄를 지어봐서 알지만,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가 않습니다. 별로 기도나 말씀이 싫습니다. 인간관계도 똑같습니다. 부부 간에 잘못한 일이 있으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가 껄끄럽지 않습니까? 부모와 자녀 간에도 티격태격하면 됩니다.

    교회에서도 신앙에 문제가 생기면 목회자나 다른 성도들을 보고 싶어 하지 않게 됩니다. 만나기가 싫어집니다. 그래서 말씀의 자리와 예배의 자리에 오지 않고 자꾸 빙빙 겉돌게 됩니다. 교회 예배에 자꾸 가기 싫어지고 빠지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내 신앙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껄끄러워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처럼 사람은 죄를 범하면 마음속에 두려움과 부담감과 어색함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자리에 서게 되면,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 문이 닫히게 됩니다. 그 결과 다른 지체들을 향해서도 마음 문이 닫히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둘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이며, 그러나 첫째와 둘째라는 순서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첫째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이웃과의 관계도 잘못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여러 가지 두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의 문제, 질병, 경제적 어려움, 인간관계의 문제, 또 그 밖의 많은 문제들 때문에 세상 살기가 참 힘들고 두렵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진정한 이유는 단순히 어떤 어려움이 닥쳤기 때문이 절대 아닙니다. 어려움 때문에 두려워하는 게 아닙니다. 두려움의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나를 지켜주실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실까?’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그런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는, 우리가 마땅히 서 있어야 할 하나님의 자리에서 이탈하여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그 자리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어려움 때문에 두려운 게 아닙니다.

     

    사자 굴에 들어갔기 때문에, 풀무불 속에 던져졌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가고 그의 세 친구는 풀무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 어려운 환경에 처했지만 그들은 담대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의 세 친구를 풀무불에 던져 넣고 보니까 “우리가 던져 넣은 사람은 세 명이 아니냐? 그런데 왜 저기는 네 명이냐? 심지어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같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해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담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직면하는 여러 어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질 때 두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금 내가 두렵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삐걱거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하시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나?’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고 믿음이 흔들릴 때, 어느새 두려움이 다가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너는 지금 영적으로 네가 있을 자리에서 있느냐? 혹시 벗어났느냐? 그렇다면 빨리 돌아오라!”

     

     

    2.   끊임없이 추적하며 질문하시는 이유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 하며 계속해서 우리를 찾아와 질문하십니다. 무슨 스토커처럼 하나님이 쫓아다니시나 할 수 있지만, 그게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따라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해주시는 게 은혜입니다. 그게 없다면 버림을 받은 것인데, 그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찾아와 지금의 영적 주소가 어디인지를 끊임없이 물으십니까? 심판이나 저주나 멸망이나 죽음을 주시기 위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른 자리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깨닫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다는 소망과 능력을 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끊임없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계속 부르시는 소리가 들리면 우리를 고쳐주려고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3장 후반부인 2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하나님이 죄 가운데서 두려워 떨고 있는 아담을 찾아와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려면 짐승을 죽여서 가죽을 벗겨 입혀주어야 합니다. 이때 짐승이 피 흘려 죽는 모습을 처음 본 아담과 하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구약시대에 너무나 많은 짐승들이 인간의 죄를 대신한 제물로 드려지기 위해서 피 흘리며 죽었습니다. 고기는 각을 뜨고 제사장이 피를 뿌리는, 피 비린내 나는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죄가 이렇게 무섭다는 것을 깨닫고, ‘저 죄 없는 짐승이 내 죄 때문에 죽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 죄를 담당하고 죽으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찼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고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4-5)

     

    그분은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치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일어난 좋은 일을 주관하시는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손으로 만들지 않은 장막, 다시 말하면,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더 완전한 장막을 통과하여, 단 한 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는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히 9:11-12, 새)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요 14:6).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 생명의 길로 나아가며, 죄 사함의 은혜를 받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4-15절)

     

    여기서 특히 15절은 신학적으로 소위 ‘원시 복음’이라고 불립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벌써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1-13절)

     

    아담은 죄에 대한 핑계를 하와에게 돌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때 하나님은 왜 아내 핑계를 대느냐고 야단치지 않으십니다. 또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뱀을 심판하시면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실제로 그 여자의 후손이 나오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뱀에게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심으로 사탄의 머리를 깨뜨려 상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졌는데(눅 23:45),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인간에게 열어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부터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을 길을 마련해놓으셨고,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거나 많은 정도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가만히 보면, 정말로 사랑이 모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사랑이 모든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모든 시험과 유혹 가운데 승리하게 합니다.

     

    ‘주님을 믿습니까?’라고 하면 ‘믿슙니다!’ 하고 대답은 잘하는데, ‘주님을 사랑하십니까?’라고 하면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면 시험이 오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닙니다. 유혹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해 늘 기도하듯,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해주시고 또 악에서 구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시험과 수치와 죄책감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영원한 형벌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무슨 능력을 받거나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왜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와 “네가 어디 있느냐?” 질문하십니까?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롬 5:8, 새)

     

    예수님은 우리가 의인이 된 다음이 아니라 아직 죄인이었을 때 죽으셨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그것을 사도 요한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일 4:8-10, 새)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사랑으로 아담을 찾아와 “네가 어디 있느냐” 하며 그를 부르셨습니다. 책망하고 심판하려고 하시는 게 아니라, 사랑 때문에 그렇게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이 사랑을 가지고 찾아오셔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다시 말해 “너의 영적 현주소는 어디냐? 내 안에 머물러 있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어떤 유혹과 어려움과 두려운 일들이 찾아와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 때 그것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너는 누구냐? 
     

    놀랍게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질문은 “너는 누구냐” 하는 질문입니다. 
    누가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님 위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습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눅 3:21-22)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어떤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이후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은 이후에 예수님은 사탄의 모든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시험을 이기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어떤 시험과 유혹이 와도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확신하기만 하면 어떤 것이 와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확신이 없으니까 흔들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거짓의 아비인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살짝 바꾸고, 빼고, 틀어서 변질시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1절)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 살짝 흔듭니다. 그런데 그런 사탄의 말에 하와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2-3절)

     

    하와의 답을 듣고 뱀이 뭐라고 합니까?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4절)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앞선 창세기 2장 17절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인가를 보태거나 빼거나 살짝 트는 것이 사탄의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사탄은 예수님도 그러한 방법으로 시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짝 바꾸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랑받는 아들’인데 ‘사랑받는’이라는 단어를 쏙 뺐습니다. ‘사랑받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사랑받는’이라는 단어를 빼고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며 유혹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면 영적 전쟁에서 결코 무너지거나 쓰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영적 자리는 하나님 곁  

    아담은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데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대화하고 있는데도 두려워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죄와 어두움을 내어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11)라고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질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삶의 주인인 것들을 내려놓지 못하고 나의 죄와 허물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게 되면, 예배하고 봉사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고 다 해도 여전히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성전 안에 있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유와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다 맡기고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때 자유를 얻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예수님 앞에 온 여인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율법대로 돌을 들어서 그녀를 쳐서 죽일까 하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요 8:7).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자기들도 다 죄가 있기 때문에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한 명씩, 한 명씩 그 자리를 피해 떠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바닥에 글을 쓰셨는데, 거기 있는 사람들의 이름과 죄를 다 적으셨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때 여자는 거기 계속 있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있는 그 자리를 떠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거기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를 피해 도망갔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그냥 도망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피해선 안 됩니다. 
    내게 죄가 있다면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고 해결을 받고 떠나야 합니다. 
    그 여자처럼 자신의 삶을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피해 다니며 겉돌게 되면, 그런 우리를 향해 하나님은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 너는 누구냐? 너는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느냐?” 하고 질문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입니까? 먼저, 우리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면서 그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배의 자리, 말씀의 자리, 기도의 자리를 벗어나서 살면 하나님은 계속 우리를 부르시고 찾아오시면서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질문하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온 천하에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생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부르셨지만, 언제 데려 가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올 때는 순서가 있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우리는 기회가 언제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배를 안 해도 다음이 있겠지. 
    오늘 성경을 안 읽어도 다음이 있겠지. 
    오늘 기도 안 해도 내일 하면 되지.’ 
    그러나 기회가 언제까지 있을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영원히 기회가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기회가 있을 그때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아닌데 다음에 있겠다는 게 아니라, 지금 헌신하고 지금 충성해야 합니다. 
    그 기회가 영원히 주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염려할 것 없습니다. 
    혹시 우리가 영적 자리를 이탈하면 하나님이 어김없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기뻐하는 자리에서 네가 조금 멀어져 있구나. 속히 내게로 돌아와라.”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놀라운 역사를 분명히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제가 있습니다.” 하고 고백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천국을 바라보며 살지만, 사실은 천국을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을 살지만 천국을 맛보며 주님과 동행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로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보며 하나님 앞에서 대답을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은 하나님과 마주보며 지냈습니다. 

    하나님의 첫번째 질문 /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세기 3:1-21)

    창세기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너는 죽지 말고 나와 함께 영생하자”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그러든 어느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범죄한 후,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9) 

    이 질문은 신구약성경을 통 털어 하나님이 물어오신 첫 번째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아담을 찾으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모르셔서 찾으신 것일까요?  
    마치 숨바꼭질하는 어린아이처럼 꽁꽁 숨은 아담을 찾지 못해 부르신 걸까요?  
    물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만일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셔서 찾으셨다면 우리의 신앙은 뿌리부터 흔들릴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셔서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고백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나무 그늘에 숨은 인간을 찾지 못했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아담을 찾으신 것일까요?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신 그 질문은 단순히 장소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란 걸 우리는 잘 압니다.

    관계의 단절 : 하나님과의 멀어진 거리

    원래 하나님과 인간은 어떤 관계였습니까?  
    창세기 1, 2장을 보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특히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스리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위해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그곳을 다스리게 하셨으며,  흙으로 지은 모든 동물들의 이름을 아담으로 하여금 짓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 8절에서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 표현은 하나님과 인간이 친밀하게 교제해 왔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입니다. 
    그런데 왜 아담은 그 하나님을 피해 숨었을까요?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보면 달려나가 반가이 맞아야 할 아담이, 어째서 얼굴을 피하고 나무 사이에 몸을 숨겼을까요?  
    하나님께서 물으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이 질문은 하나님과 인간의 깨어진 관계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죄'를 뜻하는 '하마르티아'는 원래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뜻입니다. 
    아담은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 멀리 떨어진 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벗어나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숨어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가능할까요? 

    시편 139:1-4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그리고 이어 노래하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고 했습니다(8절).

    우리가 잘 아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가운데 ‘죄와 벌’이 있습니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쏘냐를 통해 자신의 범죄가 인간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의 문제임을 깨닫습니다. 
    또한 '두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 역시 집에 돌아와서 하는 말이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입니다. 
    아담의 범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단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너뜨린 심각한 문제였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담을 보시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묻기를 "너는 왜 나의 낯을 피해 숨어 있느냐?"고 물어오신 것입니다.

    순종의 실패 :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그렇다면 아담이 저지른 죄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 나무의 열매를 허락하시면서 단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든 것입니다(창세기 2:16-17). 

    그러나 뱀은 하와를 유혹하며  "결코 죽지 않고,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속였습니다(창세기 3:4-5). 
    하나님의 말씀과 사탄의 말은 정반대였습니다.  
    누가 옳았습니까? 
    분명한 사실은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담과 하와가 죽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담이 930세까지 살았으니 사탄의 말이 옳았다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930년은 한순간에 불과합니다.  
    만약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인간은 영생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5장은 아담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죽었더라"는 표현을 8번이나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는 곧 사탄의 말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표현입니다.  
    사탄은 결코 죽지 않는다 했으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사탄은 언제나 거짓이고, 하나님만이 참되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가끔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또는 "하나님처럼 된다는 게 왜 그렇게 큰 죄일까?"라고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질문 속에는 두 가지 중요한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만드신 것은 글자 그대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알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여기서 선이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악이란 '사탄의 말을 듣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불행하게도 사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믿었습니다. 
    그것이 곧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불순종이 바로곧 '죄'라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지식을 금하신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문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일 수 없는 자가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하는 오만함'입니다. 

    시편 1편이 이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분명한 한계와 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계시고, 인간은 인간의 자리에 있습니다.  
    에스겔서 28장에서도 교만하여 스스로를 '신'이라 칭한 두로 왕에게 심판이 임했다고 경고합니다. 

    또한 시편 1편 1-2절에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고 했습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란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자가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생각을 가리킵니다.

    아담과 하와가 바로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분수를 넘어 하나님 자리를 넘보는 교만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있어야 할 자리, 순종의 자리, 하나님과의 교제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회복의 자리 :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죄를 지은 인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자 행복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 아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8절과 10절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기록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바로 그렇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관계란 사랑하는 사람의 발소리만 들어도 달려 나가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미운 관계란 피하고 싶고, 멀리하고 싶은 관계, 불편한 관계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관계가 바로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관계란 아담이 이르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며 기뻐했던 관계입니다.

    그러나 죄를 범한 후 둘 사이는 멀어졌습니다. 
    아담은 하나님 앞에 고하기를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저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말하며 책임을 하와에게 전가한 것입니다. 

    서로 돕는 '배필'이었던 관계가 서로를 원망하는 고통스러운 관계로 변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자, 인간과 인간의 관계 마져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단순히 장소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네가 지금 있는 곳은 네가 있어야 할 자리는 여기가 아니다.  
    너는 왜 이렇게 황폐해졌느냐?"고 물어오신 것입니다.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던져집니다. 

    "사람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순종과 경배의 자리에 서 있습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순종의 자리입니까, 불순종의 자리입니까? 
    우리가 지금 직면한 자리, 곧 먹고사는 문제, 자녀 문제, 직장 문제, 이보다 더 시급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우리 삶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지금 하나님을 찾는 것이 싫고, 예배드리는 것이 귀찮고, 기도하는 것이 힘들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반드시 사람과의 관계도 깨지고, 우리 삶의 터전까지 흔들리게 됩니다. 
    노력해도 길이 막히고, 수고한 만큼 거두지 못하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우리의 모든 문제도 회복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일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 자신의 문제는 결국 하나님과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회복하십시오. 
    "사람아,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서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묻고 계십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그 자리는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등지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친밀한 자리입니까, 아니면 멀리 떠나온 자리입니까? 
    이 질문에 솔직히 대답하고,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세기 위대한 설교가 A. W. 토저가 남긴 열 가지 명언

    에이든 토저(Aiden W. Tozer) / 20세기 위대한 설교가 중 한 사람으로 작가이며 설교자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농장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독학을 했다. 
    문학과 신학 서적을 깊이 있게 접한 그는 이를 또한 깊이 생각했다. 
    그가 남긴 말 중에 "당신이 읽은 것보다 열 배 이상 생각해야 한다" 
    집중적인 기도의 삶을 살았다.

    그에게는 당시 문화와 성경에 대한 날카로운 식견을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달란트가 있었다. 
    영국 크리스천투데이 칼럼니스트 마크 우즈(Mark Woods)는 최근 토저가 남긴 10가지 명언을 소개했다. 오늘날에도 적용해 볼 수 있는 그의 명언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공간을 넘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소리칠 필요가 없다. 
    그분은 우리의 영혼과 가장 비밀스러운 생각보다 우리와 가까이 계신다.

    2. 여러분이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 이를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3.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못 박힌 손이 가져다 주신 것이고, 힘이 아닌 사랑으로, 복수가 아닌 용서로, 강제가 아닌 희생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4. 우리는 신학적 정신의 조심스러운 사고보다, 도취된 마음의 직관을 따를 만큼 지혜로울 수 있다.

    5.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 때,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 
    예배는 순수하며, 하나님에 대한 예배자의 생각의 높고 낮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6. 신앙을 가진 자에게 명령하지 않는 것은 진짜 믿음이 아니다. 
    갑자기 신앙을 깊이 직면하고 실제 삶의 고난 속에서 시험을 받게 될 경우, 우리 가운데 일부는 충격을 받을 수 있다.

    7. 오늘날 종교는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사람들에 의해 변화되고 있다. 
    종교가 사회의 도적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사회가 자신의 항복자(교회)를 웃으며 수용할 때, 이를 성공으로 여기면서 자축한다.

    8. 대중적인 복음주의의 십자가는 신약의 십자가가 아니다. 
    대신 자신감 있는 가슴 위에 놓인 빛나는 새 장신구이며, 손은 아벨의 손이지만 목소리는 가인의 목소리인 육적인 기독교이다. 
    오래된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지만, 새로운 십자가는 사람에게 재미를 준다. 
    오래된 십자가는 정죄하지만, 새로운 십자가는 즐겁게 한다. 
    오래된 십자가는 육체의 교만을 파괴하지만, 새로운 십자가는 이를 장려한다. 
    오래된 십자가는 눈물과 피를 가져다 주지만, 새로운 십자가는 웃음을 가져다 준다.

    9. 여러분의 가난한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영원을 위한 감사를 두셨다. 
    그 마음은 영생 대신 전자기기를 취하지 않는다.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은 매우 크고, 굉장하고, 위대하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영원을 넣어 두셨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순간일 뿐이며 사라진다.

    10. 만약 오늘날 교회에서 성령을 뺀다 해도, 우리가 하는 일의 95%가 계속될 것이고 아무도 차이를 알지 못할 것이다. 
    만약 신약 교회에서 성령을 뺀다면, 그들이 행했던 일의 95%는 멈췄을 것이고 모두 그 차이를 알았을 것이다.


    에이든 토저(A. W. Tozer, 1897-1963)

    Ⅰ. 서론

    20세기를 시작하는 시기에 미국은 많은 어려운 상황 속에 있었다. 또한 미국 교회 안에서도 신학에 있어 자유주의 사상이 그 영향을 끼치는 시대였다. 사회적•종교적 혼란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때 교회에서 성경적인 신앙과 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광야에 외치는 선지자처럼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바로 A. W. 토저 목사이다. 필자는 부흥을 갈망하는 현 시대에 토저 목사의 부흥사상을 추적하여 부흥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갖고자 한다. 
    그래서 토저의 생애와 회심을 진술하고, 토저 목사의 부흥 사상을 추적하여 분석하고, 다음으로 평가를 하여, 현 시대에 있어 부흥에 대한 갈급함에 접촉점을 찾고 적용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21세기 초엽에 있는 우리가 부흥에 대한 올바른 접근 방식을 갖고 나아가는데 토저 목사의 부흥사상을 통해 바른 부흥론을 소개하는데 그 의의가 있겠다. 
         
    Ⅱ. 본론

    1. 시대적 배경

    토저 목사(1897-1963)의 시대적 상황은 어둡다. 토저의 생애 중에 1차 세계대전(1900-1920), 2차 세계대전(1939-1945), 미국의 경제 대공황(세계 경제 공황, 1920-1939), 사상적 이데올로기의 양극화 현상, 한국전쟁•베트남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신학적인 배경은 19세기의 자유주의 사상이 1•2차 세계대전 이후 신학적 극단적 사상이 발전하게 되었다.

    1) 20세기 초에 미국의 신학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되었는데, 인본주의 세계관을 갖고 있는 실용주의적 복음주의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의 대공황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빠져 있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그 영향으로 어려움을 당하였다. 이런 시대적 암흑기 속에서 토저 목사의 신학과 철학이 형성되었다. 다음으로 토저의 생애와 회심사건을 추적 하였다.

    2. A. W. Tozer(1897-1963)의 부흥 운동

    1) 생애 및 회심 
    에이든 윌슨 토저(Aiden Wilson Tozer)는 1897년 4월 21일 라 호세(La Jose)의 서부 펜실베이니아 구릉 지대의 작은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섯 명의 자녀 중 세 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서부 펜실베이니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원적인 농가에서 성장했다. 
    그의 학교교육은 초등학교 교육만 받았다. 
    하지만 그는 책을 읽기를 좋아했다. 
    그는 고향을 15살 때인 1912년 애크런 도시로 나온다. 
    그는 거기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그곳에서 다양한 직업을 접한다. 
    토저의 고향 집 근처에 교회가 없었다. 
    다만 그의 집하고 멀리 떨어진 곳에 교회가 있었는데 그곳까지 가는데 어려움이 있어서 가지 못했다. 
    그는 이곳 애크런에 와서 그레이스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동생들과 함께 교회에 출석하였다.

    1915년 어느 날 오후, 애크런으로 이주한 지 3년 되었을 때, 그는 어떤 전도자의 말에 깜짝 놀랐다. 
    “여러분이 구원받는 법을 모른다면 단지 하나님께 ‘오, 하나님! 죄인인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기도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는 전도자의 말에 마음에 꽂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다락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하였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었다. 
    이것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그의 긴 여행의 시작이었다. 
    그의 회심 사건이후 그의 삶은 전체적으로 변화하였다. 
    회심의 순간부터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갈증과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굶주림으로 충만해졌다. 
    그는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기도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그는 지하실에 있는 보일러 뒤에서 경건의 장소를 택하였다. 
    그곳에 그의 신앙의 성장이 시작된 독특한 장소였다. 
    그는 그곳에서 기도하며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 그의 평생의 습관이 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직접 아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에게 없었다.
    개인의 회심 사건이 그의 사역에 있어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회심이후, 그의 경건의 시간은 그의 부흥 운동과 사상에 큰 도움을 주었다.

    2) 부흥운동 
    그는 회심한 후에 가족전도에 힘썼다. 
    그의 어머니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였으며, 훗날 그의 아버지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하였다. 
    이것은 부흥 운동에 있는 징후를 보여주고 있는 사건이다. 
    왜냐하면 그의 회심에 직접적인 변화를 보고 그들에 하나님께 돌아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의 회심의 사건이 부흥의 징후로 점차 주변에 영향을 끼치므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회심이후에 그에게 중요한 사건이 있다. 
    토저가 회심하고 1년 반이 지난 후에 케이트 포츠를 통해 성령 충만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 젊은이, 성령님이 그대를 충만케 하시기 전에 그대가 먼저 무릎을 꿇고 자신에 대해 죽어야 하네.”
    그리고 그들은 기도를 함께 하였고, 그 즉시 성령으로 충만해졌다. 
    그는 이렇게 회상 한다. 
    “내가 열아홉 살 청년으로 열심히 기도했을 때 나는 성령으로부터 강력한 세례를 받았다.”
    이와 같이 그의 회심 사건이후에 그의 사역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두 번째 사건으로 개인적인 성령 충만 사건이었다. 
    후에 토저는 성령 충만에 대한 광범위하게 논의하는 글을 썼다. 
    그것은 그가 부흥에 있어 얼마나 성령 충만이 중요한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였다. 

    그는 1918년 4월 26일 에이다 세실리아 포츠(Ada Cecelia Pfautz)13)와 결혼을 한다. 
    토저는 결혼 전부터 직장에서 휴가를 얻어 전도여행을 하였다. 
    그는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마운트 플레즌트로 몇 주에 걸친 전도 여행을 하였다. 
    이것은 그의 부흥운동의 징후라고 말할 수 있다. 
    초기 그의 사역은 가가호호, 천막 집회 등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레이스교회는 토저의 이런 활동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 후, 그는 기독교선교연합 교회(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Church)의  소속이 되었다.
    그는 1921년 모건타운 기독교선교연합 교회에 첫 사역지로 섬기게 되었다. 
    그의 사역은 점진적인 성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의 사례비에 있어 독특한 방식을 취했는데, 사례비는 매월 교회에서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 제공’이라는 방식으로 공급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방식에 대한 불평을 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하는 신앙의 훈련을 받았다는 자기 평가를 하였다.
    1924년 12월은 토저 목사의 생애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인디애나폴리스 교회로 부임한 이후 그는 설교를 위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고, 
    성경연구에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토저의 명성은 주변 여러 곳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청년집회, 성경을 사경회, 문서사역 등으로 그의 사역은 점점 부흥운동으로 나타났다. 
    또한 그의 사역에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왕성한 독서와 사색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설교에 명성을 얻었던 것의 배후는 지치지 않는 독서와 연구였다. 
    그가 발행한 소책자는 여러 교회에 인기를 얻었다. 
    이것은 그의 영향력이 주변에 끼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와 같이 토저의 사역은 미국에 있는 여러 교회를 흔들고 있었다.

    1928년 11월 4일 인디애나폴리스 교회에서 시카고 교회로 옮겼다. 
    시카고는 당시 D. L. 무디의 성경학교에 R. A. 토레이, 제임스 그레이(James M. Gray) 같은 저명한 교수들이 기라성처럼 있었다. 
    또한 이곳 시카고는 대 도시로 세계에 명성이 있었다. 
    토저 목사가 사역한 다른 지역과는 매우 여러 면에서 차이가 많이 났다. 
    그러나 이곳에서 토저의 목회 사역은 더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곳곳에서 토저의 설교와 서적을 찾았다. 
    이것은 그의 부흥운동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가름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였다. 

    그의 부흥운동은 미국에서 멈추지 않았다. 
    미국 옆에 있는 캐나다 애버뉴 로드 교회는 토저 목사를 청빙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은 모두 동원할 정도였다. 이 교회는 토저의 마지막 사역지였다. 
    그는 이곳에 ‘설교 목회자’로 사역을 하였다. 
    그는 교회 성장을 탁월하게 시켰다. 
    이때 그는 50대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설교의 질은 더 깊은 영성에서 나오고 있었다. 
    1963년 5월 12일 주일날, 그의 나이 66세에 심장마비로 하나님 품으로 들어갔다.  
    그의 묘비에는 “하나님의 사람(A MAN OF GOD)”이라는 간단하고 담백한 글이 새겨졌을 뿐이다. 
    그의 생애를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이 결코 가치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는 현대 정신사를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선지자처럼 시대정신을 흔들고 깨우는 사람이었다. 
    그의 부흥운동은 토론토에서 멈춘 것이 아니다. 사후에, 그의 서적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어권, 유럽권, 아시아 등 그의 서적을 통해 부흥의 단비를 맛보고 있다.

    3. A. W. Tozer의 부흥사상

    토저의 부흥사상은 그의 저서들을 통하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는 부흥사상에 대한 체계적인 학문을 우리에게 소개하지 않았지만, 그의 저서와 삶을 통하여 주고 있다. 
    그는 부흥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 부흥은 인간의 방법을 찾기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흥을 말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고 지적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부흥’을 말하기 전에 “개인적 부흥”을 전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흥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갈망하는 동일한 마음이다. 
    만약 그들이 부흥을 갈망할 때 자신의 부흥을 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감성적인 부흥이요, 심리학적인 부흥일 것이다. 
    개인적 부흥이 없이는 교회 부흥에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토저의 부흥사상 안에 적어도 네 가지 요소가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 기도의 중요성, 성령 충만(성령세례, 성령임재), 예배, 설교 등을 자주 언급한다. 
    그래서 이 네 가지 요소를 추적하여 토저의 부흥사상을 진술하였다.

    1) 기도 
    기도는 부흥의 뿌리이다. 
    토저의 전기 작가인 제임스 스나이더는 “토저의 글과 설교의 뿌리는 기도이다”고 하였다. 
    또한 토저의 막연한 친구인 데이비드 팬트는 “토저는 책상에서 보낸 시간보다 무릎을 꿇고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라고 증언한다. 
    앞서 언급하였지만 토저의 부흥운동은 그의 설교와 저서이다. 
    그것들의 원동력이 바로 기도에 있었다는 것이다. 
    토저 자신이 기도의 중요성을 자신의 저서에서 매우 자주 언급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적어도 토저의 부흥사상에 있어 기도는 다른 부흥사상 요소에 토양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부흥은 한밤중이 지난 후에 찾아온다”라는 의미를 이렇게 해석한다. 
    “부흥은 부흥을 너무나 사모하여 밤을 새워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온다”라는 뜻으로 해석 하였다. 
    또한 그는 습관적인 교회를 지적하면서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과 교회 안에 영향력이 적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부흥을 위해서 ‘기도의 영’을 사모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기도의 영의 결핍은 부흥에 치명적인 위험 요소임을 지적한다.
    이와 같이 토저 목사는 부흥에 있어 중요한 것이 ‘기도’라는 사실을 잘 지적하고 있다. 
    기도하는 삶은 개인의 신앙에 먼저 부흥이 온다. 
    자신을 점검하게 되고 자신의 죄악을 자복하고 회개하는 가난한 심령으로 변화된다. 
    다름으로 주변에 그 영향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2) 성령 충만(성령세례) 
    성령 충만(성령세례, 성령 임재)은 부흥에 중요하다. 
    토저의 저서에 성령론의 주제로 글을 많이 썼다. 
    뿐만 아니라 다른 책에서도 성령의 충만함을 언급을 자주 반복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개인적 부흥이든 교회적 사회적 부흥이든 먼저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성령 충만을 몇 가지로 그는 정리하고 있다. 
    성령은 도덕적 불꽃이다. 
    도덕적 불꽃이란 성령의 거룩성을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성령은 영적 불꽃이다. 
    성령만이 우리의 예배를 진정한 영적수준으로 이끌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의지의 불꽃이다. 
    성령은 비인격체가 아니라 주권적 의지가 있으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이시다.

    토저 목사는 현대 복음주의 교회가 붕괴된 원인을 진단하였는데 그는 하나님의 임재 훈련의 실종에서 찾고 있다. 
    그는 성령 충만을 구하지 않음은 바로 영적부흥을 우리가 볼 수 없다는 전제를 하고 있다. 
    그는 성령 임재를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 하나님의 복된 임재로 구분하여 체계화하여 소개하고 있다. 
    그는 이것들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추구하길 바라고 있다. 
    곧 부흥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임을 함축적으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성령을 의지하는 부흥은 거짓된 부흥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부흥은 ‘종교적 사기극’이다 라고 토저는 경고한다.  
    그러므로 토저는 성령 충만이 부흥에 있어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준다.

    3) 예배 
    부흥에 있어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는 예배이다. 
    토저는 예배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정의한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과 지극히 개인적인, 그리고 끊을 수 없는 사랑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뜻이다.” 
    형식적인 예배를 그는 거부한다. 
    주일날만 거룩한 날 나머지 주간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삶에 대하여 그는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기가 곤란하며, 모든 삶을 예배로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와 영적인 풍성한 복을 누리는 삶이 성령 안에서 예배자의 삶이라고 말했다.
    공적인 예배에 대한 그의 견해는 세속적인 문화와 교회 예배 요소들과 혼합한 것을 안타까워한다. 
    예배는 오락이 아니며, 인본주의적 예배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며, 이런 예배를 벗어버리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예배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갖기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님이 사람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의 시선이 그들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바뀌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이 부흥이다..., 부흥이 일어날 때 흔히 뒤따르는 현상은 예배의 열기가 고조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갈망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그분이 부어 주시는 것이다. 
    예배를 사모하는 복된 현상은 영적으로 새롭게 될 때 일어난다.” 
    그러므로 예배의 부흥은 영적인 부흥과 결코 동떨어진 개념이 아니다.

    4) 설교 

    부흥에 있어 중요한 개념은 바로 설교(설교자)이다. 
    토저 목사는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을 많이 투자하였다. 
    그는 설교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계속적인 성경연구를 하였다. 
    그리고 그는 설교 한편을 위해서 많은 시간 기도를 하였다. 
    기도의 연못에 푹 잠겼다 나온 설교가 그의 설교였다.
    그의 설교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왔으며, 교회 안에서 새로운 각성이 일어났다. 
    그는 설교자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것인가를 자신에게 질문을 할 때, 설교자는 선지자라고 믿고 그는 선지자적인 소명으로 설교를 하였다. 
    그는 설교자의 중요성에 대하여 자신의 목사 서약 기도문36)에 잘 나타나있다.

    4. 영향 및 평가 
    1) 영향 
    그의 영향은 그의 설교, 저서 등 크게 두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7세 때 개인적인 회심을 한 이후에 주변에 점진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먼저 그는 설교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특별히 청년들에게 큰 도전을 주었다. 
    그는 무디 성경학교와 휘튼 대학교에 있는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전도와 선교에 있어 누구보다 관심을 갖고 있던 토저는 자신의 생각들과 열정들을 미래의 주역인 청년들에게 도전을 주었다.37) 다음으로 그의 저서들을 통하여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의 책은 총 40권이다. 이 책들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참된 예배자의 삶, 성령 임재를 하는 삶, 기도의 삶 등을 그의 책을 통하여 영적 부흥운동이 현재진행형이다.

    2) 평가 
    토저의 생애 및 부흥사상을 살펴보았다. 이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그의 모든 것을 걸고 평생 그것을 위해서 연구하고 전했던 사람이라고 토저를 평가할 수 있다.38) 그의 많은 서적을 통해서 그는 끊임없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혼란스러운 시대적 배경을 안고 살았던 그는 그 현대정신사를 거부하고 오직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했던 선지자였다. 
    둘째, 그는 영적인 신비를 탐구했던 신비가였다. 과학적인 사고와 연구방법이 절대성을 거부하고 있었던 당시 시대에 그는 영적인 세계를 간과하지 않았다. 물론 극단적인 신비주의를 찬성하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 성경적인 신비가 이기를 그는 스스로 나타냈다39). 
    마지막으로 그는 성령의 사람이다.40) 그의 저서를 살펴보면, 그는 곳곳에서 성령 하나님에 대한 깊은 관심과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성령론에 대한 그의 탁월한 지식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라고 주장한다. 성령 충만을 받지 않고 이 세속 정신을 분별하고 거부하는 삶은 매우 어렵다고 말한다.41) 그는 성령 충만을 체험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 
     이것이 그의 부흥사상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


    Ⅲ. 결론

    토저의 삶과 부흥사상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의 교회 현실에 투시할 수 있을 것이다. 
    토저 목사는 자신의 회심 사건에서 체험했던 당시의 영적 성장과 독서 그리고 성령 세례 등으로 자신의 신학적 사상들을 정립하였다. 
    그의 사역은 철저한 성령의 다스림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설교를 통해서 교회와 세상에 하나님의 진리를 전했다. 
    자신 스스로가 인식하였듯이 당시 그 시대 속에 외치는 선지자로 남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더 알기를 갈망하였던 토저의 부흥사상은 작금의 교회들에게 도전을 준다. 
    그는 부흥을 갈망하는 것은 개인적인 부흥을 먼저 갖고 다음으로 교회적인 부흥을 갖기를 말한다. 
    개개인이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어 있지 않고 어떻게 교회를 부흥케 하는 도구가 될 수 있겠는가! 토저의 지적은 우리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부흥을 갈망하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들의 영적 부흥을 갈망해야 한다.

    Ⅳ. 참고문헌(Bibliography)

    마스든, 조지.「근본주의와 미국문화」. 박용규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7. 
    토저, A. W. 「패배를 통한 승리」. 권혁봉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9. 
               .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원하십니다」. 안보헌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 「하나님을 추구함」. 이영희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 「습관적 신앙에서 벗어나라」. 이태복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4. 
               . 「예배인가, 쇼인가?」. 이용복 역. 서울: 규장, 2004. 
               . 「세상과 충돌하라」. 이용복 역. 서울: 규장, 2005. 
               .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이용복 역. 서울: 규장, 2007. 
               . 「이것이 성공이다」. 이용복 역. 서울: 규장, 2007. 
               . 「홀리스피리트•성령님」. 이용복 역. 서울: 규장, 2007. 
               . 「임재 체험」. 이용복 역. 서울: 규장, 2007. 
               . 「보혜사」. 이용복 역. 서울: 규장, 2008 
               . 「이것이 성령님이다」. 이용복 역. 서울: 규장, 2008. 
               . 「이것이 예배이다」. 이용복 역. 서울: 규장, 2008. 
               . 「갓•하나님」. 이용복 역. 서울: 규장, 2008. 
               . 「내 자아를 버려라」. 이용복 역. 서울: 규장, 2008. 
    스나이더, 제임스. 「하나님이 평생 쓰신 사람」. 이용복 역. 서울: 규장, 2007.


    Aiden Wilson Tozer (April 21, 1897 – May 12, 1963) was an American Christian pastor, author, magazine editor, and spiritual mentor. 
    For his accomplishments, he received honorary doctorates from Wheaton and Houghton colleges.


    A.W. 토저가 외치는 치열한 신앙의 전투로의 초대
    믿음



    20세기 영적 거장 A. W. 토저의 통찰을 다시금 마주하는 특별한 신간이 출간되었다. 제목은 단순하다. 단 한 단어, ‘믿음’.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한 단어 안에 담긴 깊이와 무게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다’는 말 한마디로 신앙생활을 정의한다. 그러나 토저는 단호하게 말한다. “믿음은 결코 신앙의 목적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영적 인식 기관’이라는 것이다. 신간 <믿음>은 독자들이 익숙하게 생각해온 신앙의 정의를 뒤흔들며, 그 의미를 근본부터 다시 성찰하게 만든다.

    성령의 능력으로 싸우라

    이 책에서 토저는 성경의 핵심 본문 중 하나인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를 중심축으로 삼아, 독자들을 믿음의 경주와 전투로 초대한다. 그는 단호히 말한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반드시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 충돌하게 된다.”

    믿음은 고난을 피하게 해주는 마법 같은 방패가 아니라, 오히려 고난의 중심으로 우리를 이끄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난 속에서 굳건히 설 때, 비로소 참된 믿음이 불같이 연단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토저는 이 책을 통해 독자 각자가 처한 고난의 의미를 재해석하게 만든다. “십자가를 지다가 그 무게에 눌려 주저앉고 말았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신비로운 진리들”이 있음을 그는 강조하며, 독자들에게 단순히 고난을 이겨내라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라고 호소한다.

    승리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라

    책 전체에 흐르는 중심 메시지는 분명하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토저는 이 진리를 날카롭고도 따뜻하게, 때론 경고처럼, 때론 격려처럼 반복해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은 이성의 계산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믿음은 이성의 끝자락에서 시작되며, 성령의 능력으로 견고해진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이성이 끝나는 곳에서 믿음은 책임을 떠안는다. 신앙인에게 믿음은 이성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방대한 이해의 세계를 열어주는 인식 기관이다.”

    <믿음>은 이러한 영적 인식 기관으로서의 믿음을 어떻게 단련시킬 수 있는지를,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걸어가야 하는지를 안내한다.

    거룩한 삶을 위한 믿음의 훈련

    이 책은 단지 신학적 논증이 담긴 책이 아니다. 그것은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동시에 고난과 연단을 통해 그 사랑에 응답하게 만드는 내면의 훈련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치시고, 꾸짖고, 때로는 징계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은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각자 한 사람을 거룩하게 하여,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토저는 이 책에서 영적 완전함은 단순한 도덕적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보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독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생명을 닮아갈 때, 하나님은 비로소 우리를 향해 “잘하였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지금 각자의 믿음은 어디에 서 있는가

    <믿음>은 단지 신앙생활에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만 유익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믿음을 점검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영적 매뉴얼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자신의 삶에 여전히 남아 있는 ‘불완전한 것’들이 무엇인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고난을 통하지 않으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은 단지 위로의 말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단련시키는 도구로서 쓰이기를 바라는 토저의 간절한 바람이 담긴 영적 유산이다.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라!” <믿음>은 독자들에게 도전한다. 세상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라고. 삶의 방향을 이성이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결정하라고 외친다.

    하나님은 모두를 향해 다음과 같이 부르고 계신다: “빛의 자녀로서, 영원한 것을 위해 살라.”

    믿음은 단순한 확신이나 감정이 아니라, 삶의 전장을 관통하는 영적 무기다. 이제 이 책을 손에 든 당신에게 그 전쟁이 시작된다. <믿음>은 단단한 영적 무장을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깨어 있으라.

    물고기는 잠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는다.
    죽을 때도 눈을 뜬다.  
    사람들은 이 모습을 물고기 특유의 현상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준다.
    초대교회 시절,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피해 로마 외곽의 지하 동굴로 도피했다.
    이곳은 원래 시체를 매장하는 곳이었다.
    로마는 장례지를 신성불가침한 곳으로 여겼기 때문에 접근을 꺼렸다.
    결국 기독교인들은 10대에 걸쳐 300년 동안 이곳에서 생활했다.
    이곳이 바로 카타콤이다.
    사람들은 카타콤 벽면에 물고기 그림을 새겨 넣었다.
    그곳에 물고기를 그려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자나 깨나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메시지였는지도 모른다.

    * 물고기라는 헬라 단어 "익두스"
     -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의미
     - 물고기 생태의 의미


    ἰχθύς Storng number 2486

    1. 물고기.  2. 마 7:10.  3. 막 6:38  
    Pronunciation [ ichthüs ]
    Etymology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1. 물고기, 마 7:10, 막 6:38, 눅 5:6, 요 21:6. 
    관련 성경  /  생선(마 7:10, 15:36, 눅 11:11), 물고기(마 14:17, 막 6:41, 고전 15:39), 고기(마 17:27, 눅 5:9, 요 21:8).

    영의 사람(Spiritual Person) 고린도전서 2:14-15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영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1.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2. 하나님의 영(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사는 사람

    성경은 사람을 크게 세 가지 상태로 구분합니다:

    구분 상태 특징
    육의 사람      거듭나지 않음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함
    혼의 사람      자기 중심적 신앙                 감정· 이성 중심
    영의 사람         성령 중심             하나님의 뜻을 분별

    영의 사람의 구조 (영·혼·몸)  

    하나님은 사람을 세 부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영(靈) 
     프뉴마 → 하나님과 교통하는 부분 
    혼(魂)  푸쉬케 → 생각· 감정· 의지 
    몸(體)  소마 → 물질 세계와 접촉

    영의 사람은
    혼이 영 아래에 있고, 몸이 혼 아래에 있는 질서를 가집니다.

    즉,  성령 → 사람의 영 → 혼 → 몸
    이 순서로 다스림이 이루어집니다.

    영의 사람의 특징

    1.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함
    2. 겉의 소리보다 내면의 인도를 더 신뢰합니다.

    3. 분별력이 있음 /  “장성한 자는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히브리서 5:14
    4. 선과 악, 감정과 성령을 구별합니다.

    자아가 죽어 있음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자기 감정보다 하나님의 뜻이 우선입니다.  

    열매로 나타남 /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사랑·희락·화평…)가 삶에 나타납니다.

  • 오직 성령의 열매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오해하면 안 되는 것

    감정이 뜨거운 사람이 영의 사람은 아닙니다.
    신학 지식이 많은 사람이 영의 사람도 아닙니다.

    성령의 통치 아래 있는 사람이 영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의 적용

    영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1.  감정이 아니라 내면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는 것
    2.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
    3.  
    판단이 아니라 성령의 빛 안에서 분별하는 것


    혼의 사람(Psychikos Anthrōpos)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ψυχικός)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여기서 “육에 속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ψυχικός (프쉬키코스)
    직역하면 ‘혼에 속한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혼의 사람의 정의

    혼의 사람은 영(spirit)이 주도하지 않고, 혼(soul: 생각·감정·의지)이 주도하는 사람

    1. 
    이성적 판단
    2. 감정적 반응
    3. 자기 의지 중심 결정 

    이 세 가지가 삶의 중심이 됩니다. 

    구조적으로 보면

    구분 중심 기능 특징
    영의 사람 영 (하나님과 교통) 계시·분별·성령 인도
    혼의 사람 혼 (이성·감정·의지) 합리성·자기중심성
    육의 사람 육체 (본능·욕망) 죄성·정욕 중심

    혼의 사람은 육의 사람보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성령의 직접적 인도에는 둔감합니다.

    왜 문제인가?

    고린도전서 2:14 계속 보면  “그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됨이라”

    혼의 사람은

    1. 성경을 읽어도 지식으로만 이해
    2. 설교를 분석은 하지만 체험은 약함
    3. 하나님의 뜻보다 “내가 납득되는가?”가 기준 

    즉, 이성은 있으나 영적 통찰은 부족한 상태입니다.

    혼의 사람의 특징  7가지

    1. 
    말씀을 논리로만 접근
    2. 감정에 따라 신앙 기복
    3. 상처에 오래 묶임
    4. 자기 의가 강함
    5. 종교적이지만 변화는 적음
    6. 기도보다 생각이 앞섬
    7. “이해되면 순종”하는 태도

    혼은 나쁜 것인가?

    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기능입니다.
    문제는 혼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는 영 → 혼 → 몸

    혼은 영의 지배 아래 있을 때 건강합니다. 

    영적 성장 단계로 보면

    1. 
    육의 사람 – 죄 중심 
    2. 혼의 사람 – 자아 중심 
    3. 영의 사람 – 하나님 중심

    혼의 단계는 종종 신앙 성장의 중간 단계입니다. 

    결론

    혼의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만, 아직 자기 생각이 중심인 상태”

    그래서 신앙의 핵심 전환은 이것입니다:

    ‘이해’에서 ‘계시’로
    ‘자기 판단’에서 ‘성령 인도’로


    사순절 제8일 / 2월 26일(목) 고린도전서 2: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령한 자(프뉴마티코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The spiritual man makes judgments about all things, but he himself is not subject to any man's judgment.

    신령한 자 
    NIV.  The spiritual man
    KJV. NASB. spiritual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 '육에 속한 사람'과 대조적으로 '신령한 자'는 분명한 가치 기준이 있어서 판단의 주체자가 될수 있다. 
    '신령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스'는 '육에 속한 사람'의 헬라어 '프쉬키코스'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영에 속한 사람', '영적인 사람'으로 번역할 수 있다. 
    '프뉴마티코스'는 성령께서 내주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Hodge).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모든 가치 기준이 영적이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啓示)에 의존하여 판단한다. 
    그러므로 그의 판단은 정확하며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지 않는다.


    신령한 사람(고전 2:15) The Spiritual man. 푸뉴마티코스 

    πνευματικός, ἡ, όν Storng number4152

    1. 영에 관한.   2. 영으로 말미암은.  3. ㉠ 고전 15:46  
    Pronunciation [ pnĕumati-kŏs ]
     Etymology  /  4151에서 유래
    •  I. 영에 관한, 영적.
      •  1. 영으로 말미암은, 성령이 가득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령에 관한, 성령에 부합한.
        •  a. [형용사] ㉠ [예수에 대하여] 고전15:46. ㉡ [비인격적 존재에 대해서] 롬7:14, 엡1:3, 골3:16.
        •  b. [명사적으로] 롬15:27, 고전9:11. ㉠ 영적 선물, 은사, 고전12:1, 14:1, 고전15:46. ㉡ 성령을 가진 사람, 고전14:37. ㉢ 성령 충만한 사람, 고전3:1, 갈6:1.
      •  2. 영에 속한, 악의 영적 세력, 엡6:12.
    • 관련 성경  /  신령한(롬 1:11, 벧전 2:5), 영적인(고전 2:13, 엡 6:12).
    πνευματικῶς Storng number 4153

    1. 영적으로.   2. 성령의 감동으로.  3. 고전 2:14   
    Pronunciation [ pnĕumatikōs ] 
    Etymology  /  4152에서 유래
    •  1. 영적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고전2:14, 계11:8.
    • 관련 성경  /  영적으로(고전 2:14, 계 11:8).

    신령한 사람, 신령한 생활(고린도전서 3:1-3)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사람은 연령, 성별, 성격, 학력, 직업, 출신, 외모, 건강 상태, 인종, 시대, 지역, 국적 그 외에도 여러 형태의 조직이나 모임의 소속에 의해서 분류되어 집니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것은 성경적인 분류입니다. 
    가장 단순한 구분은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구원 얻은 자와 구원 얻지 못한 자, 의인과 죄인,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식, 천국 시민과 지옥 자식, 영생 얻은 자와 멸망의 자식으로 나뉘어 집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2장과 3장에서는 모든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 그리고 신령한 사람 이 세 종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째, 육에 속한 사람

    - 무신론자, 다신론자, 불가지론자, 혼합주의자 
    ‘육에 속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빛과 진리를 받지 못해 구원 얻지 못한 자연인을 뜻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깨닫지 못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 중에는 여러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가 있습니다. 
    많은 신을 인정하고 이를 믿는 다신론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고 주장하는 불가지론자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성경대로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며 혼잡 되고 거짓된 교리와 사상을 믿는 혼합주의자가 있습니다. 
    온갖 사이비 이단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육에 속한 사람으로서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둘째, 육신에 속한 사람

    - 어린 아이와 같은 삶(받는 것으로 만족), 믿음의 진보가 없다 

    ‘육신에 속한 자’를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났으나 성숙되지 못한 신앙 상태에 있어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행하기보다 자연인의 본성에 더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육신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의 진보와 향상이 없습니다. 
    시기심으로 일하며 분쟁을 일으키고, 원망을 잘 하고 불만스러운 말 전하기를 좋아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습니다.

    셋째, 신령한 사람

    - 신령한 분별력, 성경적 가치관 

    보통 사람들의 생활 현장을 떠나 깊은 산 속이나 외딴 곳에서 생활한다고, 금욕과 고행을 한다고 신령하게 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신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신령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으로 거듭나야 신령한 자가 됩니다. 
    물론 거듭난 자가 되었다고 하여 모두 신령한 사람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어린 아이를 면하지 못한 사람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신령한 사람은 회중예배에 참석하며 신령한 말씀 듣기를 사모합니다. 
    예배와 봉사를 중요하게 여기고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맡은 여러 가지 임무를 성실하게 행해야 하긴 하지만 세상 것에 과도한 욕망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령한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영적으로 날로 성숙해 갑니다. 
    말씀을 듣고 배운 대로 행합니다. 
    신령한 분별력이 있어서 모든 일에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를 압니다.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옳게 판단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가치 기준이 온전히 성경적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판단은 정확하여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지 아니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으로 일생을 마치는 인생보다 불행하고 가련한 사람은 없습니다. 
    설혹 그가 세상의 부귀공명을 다 누렸다 해도 그러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많은 세월을 낭비하고 허송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신령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주어진 세월에 영원한 의미와 가치를 더하고, 다른 사람의 귀감이 되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신령한 사람 (고린도전서 2:13~16)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약 일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후,복음을 믿고 삶이 변화된 사람들에게 처음 붇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바로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부르는 호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영적인 삶이란 무엇인지,참된 영적인 삶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영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지적들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참된 영적인 삶을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현실에 확실하게 발을 딛고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참된 영적인 삶이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질적인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완전히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해드린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닮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영적인 삶란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닮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중심의 종교입니다. 내가 성화된다는 것도 그리스도 중심이요,영적이라고 하는 것도 그리스도 중심이며,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 중심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참된 영적인 삶을 제대로 깨달은 분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모든 여건을 통해 모든 방법을 통해서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화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서는 이 순간에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성품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거룩됨 또는 성화라고 부릅니다.

       사람의 모습을 육에 속한 자 곧 육적인 사람,(고전2:14) 육신에 속한 자(고전3:1) 그리고 신령한 자 곧,영적인 사람(고전2:15)으로 말씀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프쉬코스 데 안드로스) 새 생명을 얻지 못한 상태의 자연인(표준역)을 뜻하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 자연인(현대인의 성경)으로 영적이지 못한 사람(공동번역)으로 불신자에 해당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육적인 삶을 삽니다. 그러나 영적인 삶에 있어서는,영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육으로 한번 태어난 자연인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미련하게 보이며,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인에케는 영적인 진리들이 바보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사도 바울이 지적한 말씀이 있습니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예수님께서도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네가 한 번 더 태어나야 하겠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 말씀이 이해가 안되어서 어머니의 배속에 들어 갔다 나와야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한번 태어난 육신과 지성으로,한 차원 위인 영적인 것에 대해 이해를 하려니 안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예수님을 찾아다닌 무리들이 그 전날 예수님께서 수 많은 사람을 먹이셨던 것 때문에 다시 찾아온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을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요6: 27).

    예수님이 떡을 먹이신 것은 떡에 목적을 두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명의 떡임을 알게 하려고 행하신 것입니다.
    자연인은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복음에 대해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요3: 3).
    따라서 안 믿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욕하는 것에 대해 속상해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해가 안되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육적인 사람의 본성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심지어 선한 일을 해도 그 안에 이기적인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 자아가 마음 보좌에 앉아 있고 예수님은 그의 삶 밖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을 뿐더러,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고전2 : 14). 
    이것은 자연인이 무식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목사님이 기독교에 대한 강의를 하는데. 한사람이 자꾸 엉뚱한 질문을 해대고 반론을 하면서 강의를 방해하더랍니다. 그래서 참다 참다 “전공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핵공학이라고 하여서 “핵이 소금으로 만들어진 것을 아시요?”했더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린가 하고 의아해하더랍니다. 그래서 ’핵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가 핵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 얼마나 웃깁니까?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대한 것은 내가 전공했으니 내가 좀 얘기하게 놔두시오”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무안해서 그냥 나가버리고 말더랍니다.
    육적인 사람 영적인 생명이 그 안에 없어 진리에 대하여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육신에 속한 자(사르키노이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하는 표현에서 보듯 성령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성숙하지 못한 신앙 때문에 성령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자연인의 본성에 더 지배 받아 육신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이들을 의미 한다고 봅니다.

    예수는 믿는데 생각하고 사는 모습이 예수 안 믿는 것같은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표준역)으로 아직도 영적인 신앙인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에게처럼 말해봤자 못 알아들을 것이므로 그 수준에 맞게 말하겠다고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본성은 자아가 마음 중심에 자리잡고 예수님은 한편구석에 위치하고 있는 세속적인 사람(현대인의 성경)입니다.

       거듭났다는 자체가 성화된 젓은 아닙니다. 이것이 가끔 혼동되는데,거듭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이지 영적으로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과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특징은  미성숙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 다루듯이 잘 보살피고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또한 영적인 진리를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잘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교인들에 대해 질투심이 많고 잘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남에 대해 못마땅한 것이 많습니다.

    신령한 사람

    (고전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신령한 자(프뉴마티코스) 성령께서 내주 하시는 영적인 사람(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성령으로 거듭난 새 생명의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마음의 중심 보좌에 주님을 모시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떡하든지 나 자신이 점점 없어지고 그 대신 예수님이 성령님이 점점 내 삶을 점령하시게 됩니다.

       성령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 합니다.

    그러나 내재하시되 얼마만큼 성령이 내 삶을 점령하셨는가는 또다른 이야기입니다.
    만약 내 가슴 속에 질투,분노 욕심 등이 확 차 있다면 성령님이 눌려서 활동하시기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자마자 마음속의 욕심,악독,분노,질투 같은 것을 자꾸 내버러서 비워 드릴 때 성령께서 더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화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만 철저히 알아도 성령의 뜻을 대부분 알 수가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외에는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신령한 사람 곧 영적인 사람은 진리릍 배우고 싶어할 뿐 아니라이해를 잘 합니다. 설교를 들은 후 그 설교가 귀에 쏙쏙 들어오며 참 좋은 것 배웠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자가 특별히 설교를 잘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 사람에게 들을 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들은 것들이 금방 가슴으로 전해 집니다.

         신령한 사람 영적인 사람은 또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를 닮아갑니다. 그것은 지식이 늘어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를 닮는 것과 지식이 느는 것이 비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는다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을 갖는 것,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지식적으로 하나님 아는가 얼마나 봉사하고 있는가를 놓고 우리의 신령성을 가늠하시지 않습니다. 

    평생 조용히 산골에 묻혀 살면서도 예수를 많이 닮아 신령성을 가진 사람이 기독교 역사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크게 이름 내며 일하지 않았어도 그저 자그마한 일이나마 예수님을 닮은 신앙으로 묵묵히 해내며 죽어간 사람들이 구석구석 많이 잇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모릍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셨고 그들을 통해 영광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devotioo)하였나로 신령성의 척도틀 삼으십니다.
    '헌신’(devotion)은 단순한 헌신이 아니라,헌신과 깊은 사랑이 합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나 자신을 바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자신을 바친다고 하는 것은 나의 재주와 찬송과 열정뿐 아니라 나의 고민과 슬픔도 바치는 것입니다. 찬송은 바치면서 고민은 내가 붇들고 있으면 온전한 헌신이 아닙니다. 제일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숨길 것 하나 없이 다 드리는 것,그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얼마나 친숙한가 하는 친숙도로 하나님은 신령성을 판단하십니다. 

       신령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숙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만큼 친숙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신령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친숙하며,하나님의 말씀과 친숙하며,하나님께 기도하기에 친숙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친숙합니다. 하나님과 더 깊이 친숙할수록 아들이 아버지를 닮아가듯 하나님을 더 많이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는가 하는 것으로 신령성을 분별하십니다. 신령성은 주님을 얼마나 닮았는가 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사랑을 나누는 두 부부가 서로를 닮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친숙할수록 부부는 더 깊은 사랑과 교제률 나누게 되며 마침내 얼굴과 식성과 성격까지 닮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인격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나 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가 신령성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신앙인인지 아닌지,또 어느 정도 영적인지 알아 보기릍 원한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내가 그 분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여기서‘안다’고 하는 것은 막연히 상대방의 배경이나 현실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친숙하게 상대방에 대해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스스로에게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새벽기도도 열심히히 다니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인 사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헛된 것입니다.
    신령성은 얼마나 그분을 닮았는가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딸도 어머니를 닯습니다. 아버지만큼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니만큼 자기 딸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알고 남편은 아내를 압니다. 부부 사이만큼 서로를 잘 알고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을 잘 알고 사랑한다면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을 닮아가게 됩니다.

       참된 영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예수님을 닮은 모습일 것입니다. 참된 영성이란 예수님을 닮아가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적인 사람 곧 신령한 사람은 성령에 감화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보이는 세계가 모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는 보이는 세계 저 너머에 보다 본질적이고 궁극적이며 영원한 세계가 있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관한 일보다는 저 세상에 관한 일에 삶의 비중을 두고 힘을 쓰고 노력을 합니다. 한마디로 그는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진 '육안'에 믿음의 눈인 '영안'을 하나 더 가진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영적 분별력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 세상과 저 세상,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구분합니다. 그는 이 세상일을 멸시하거나 포기하지 않지만 거기에 얽매이거나 크게 영향 받지 않습니다. 세상일을 추구하거나 쾌락에 몰두하는 일이 하나님과 원수가 됨을 알기 때문에(약 4:4)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삽니다. 

    반면 그는 하나님이 요구하고 성령이 불러일으키는 거룩한 소욕에는 적극적입니다. 그는 '영원'과 비교하여 이 세상에서의 삶이 지극히 짧다는 것을 앎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원'을 위하여 과감하게 투자합니다. 그는 삶에 있어서 모든 일의 우선순위를 압니다. 그에게는 모든 일의 판단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므로 그의 판단은 정확하며 오류가 없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만족할 만큼 실수 없이 사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로부터 지탄받고 비난받을 만큼 실수투성이의 삶은 살지 않습니다(15절).

    영에 속한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와 가르침의 진정성을 압니다. 그의 가르침에 동조하고 굴복하며 순복하며 그 뜻에 따릅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시는 영이 계시므로(롬 8:9) 그 영의 활동에 의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게 되며(11절) 그 뜻에 굴복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학 청년부가 잠자는 영성을 깨우라는 주제로 수련회를 갖습니다. 영성이란 말을 성경에 없습니다. 신령함이 영성입니다. 신령한 사람으로서 참된 영성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됩시다.









    사순절 제7일 / 2월 25일(수) 고린도전서 3: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육신에 속한 자(사르키노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Brothers, I could not address you as spiritual but as worldly--mere infants in Christ. 

    육신에 속한 사람(σάρκινος) 

    σάρκινος, η, ον Storng number 4560

    1. 살로 된.  2. 육신에 속한  
    Pronunciation [ sarkinŏs ]
     Etymology / 4561에서 유래 
     1. 살로 된, 살의, 고후3:3. 
     2. 육신에 속한, 롬 7:14, 고전 3:1, 히 7:16. 

    관련 성경  /  육(肉)의(고후 3:3).

    σαρκικός, ἡ, όν Storng number 4559

    1. 육체에 관한.  2. 지상적인.  3. 육으로 된. 
    Pronunciation [ sarkikŏs ]
    Etymology /  4561에서 유래  
    1. 육체에 관한, 육적인, 육신에 속한, 육신의 방식대로의, 육욕적인. 
     a. 지상적인, 물질적인, 롬 15:27, 고전 9:11. 
     b.  육으로 된. 
     c.  육신에 속한, 고전 3:3, 고후 1:12, 10: 4, 히 7:16. 
    관련 성경  /  육신의(고전 3:3, 9:11), 사람의(고전 3:4), 육체의(고후 1:12, 벧전 2:11).

    육신에 속한 자(고린도전서 3:1)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 할 수 없어서 -
     '신령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이스'는 2:14, 15과는 달리 본절에서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가리킨다. 
    2:14, 15에서는 이 단어가 구원받지 않은 사람과 대조되어 구원받은 사람을 의미하였지만, 본절에서는 영적으로 미숙한 상태에 있는 '어린아이'(네피오이스)와 대조되고 있다. 
    즉 본절에서 '신령한 자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숙해 가는 자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상태가 여전히 성숙되지 못하고 정체(停滯)되어 육적인 편견과 기준을 가지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수준에 있다고 규정한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중요한 점은 불신자에게 한 말이 아니라 성도에게 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왜 성도도 육신적으로 머물 수 있는가?

    구원은 받았지만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 
    거듭남은 순간적  
    성숙은 과정적 
    영은 살아났지만 혼(생각·감정·자아)은 여전히 옛 방식대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 시기

    • 비교

    • 사람 중심

    • 파벌

    • 인정 욕구

    이 남아 있습니다. 

    ② 십자가가 자아에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

    갈라디아서 2:20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러나 우리는 종종
    예수는 믿지만
    자아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이때 나타나는 특징:

    영적 상태 중심
    영의 사람 하나님 중심
    육신적 성도 자기 중심

    ③ 감정과 환경에 지배받기 때문

    육신적 상태의 특징은

    • 말씀보다 기분이 우선

    • 진리보다 관계가 우선

    • 하나님 뜻보다 내 판단이 우선

    이것이 지속되면
    영적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육신에 속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실제적 길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길을 보겠습니다.

     ① ‘인정’에서 ‘십자가’로 이동하라

    육신은 끊임없이 묻습니다:

    “내가 인정받는가?”

    영은 묻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자아의 반응이 올라올 때
    즉시 십자가로 가져가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② 말씀을 ‘정보’가 아니라 ‘빛’으로 받으라

    말씀을 많이 아는 것과
    말씀에 의해 깨지는 것은 다릅니다.

    영적 성장은
    지식 축적이 아니라
    자아 붕괴의 과정입니다.

     ③ 즉각적 순종 훈련

    영은 미세합니다.

    작은 감동에 순종하지 않으면
    점점 둔해집니다.

    • 미안하면 바로 사과

    • 감동 오면 바로 기도

    • 깨달음 오면 바로 적용

    이것이 영을 따라 사는 길입니다. 

    ④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게 하라

    고린도 교회 문제의 핵심은
    “관계 속에서 육신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는 영적인 것 같지만
    관계 안에서 본색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영적 성장의 훈련장입니다.

     🔥 정리
     왜 성도도 육신적으로 머무는가?

    • 구원은 받았으나 성숙이 멈춤

    • 자아가 십자가에 실제로 못 박히지 않음

    • 감정과 인정 욕구에 지배됨

    벗어나는 길은?

    • 십자가 적용

    • 말씀에 깨짐

    • 즉각 순종






    사순절 제6일 2월 24일(화) 고린도전서 2: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육에 속한 사람(프쉬키코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The man without the Spirit does not accept the things that come from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to him, and he cannot understand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discerned.

    육에 속한 사람(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 ψυχικός  ἄνθρωπος

    NIV.  
    The man without the Spirit
    KJV. NASB. The Natural Man


    ψυχικός, ἡ, όν Storng number 5591

    1. 목숨에 관한.   2. 고전 2:14.  3. 육체적인 것 
    Pronunciation [ psüchikŏs ]  
    Etymology /  5590에서 유래 

    1. 목숨에 관한.
     a. [형용사] 고전 2:14, 15:44. 
     b. [명사]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 고전 15:46, 유 1:19.

    관련 성경 /  정욕의(약 3:15), 육에 속한(고전 2:14, 유 1:19), 육의(고전 15:44, 46).

    ἄνθρωπος, ου, ὁ Storng number 444

    1. 인간.  2. 막 9:31.  3. 마 4:19 
    Pronunciation [ anthrōpŏs ] 
    Etymology / 435와 ὤψ ‘안색’에서 유래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 '육에 속한 사람'의 헬라어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빛과 진리를 받지 못하여 구원얻지 못한 자연인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들은 복음에 대한 이해가 저급한 수준에 있어서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정신을 가지고 단조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 용어가 신약성경과 교부 문헌에서는 성령과 초자연적인 세계와는 대조적인 자연 세계의 생명을 가리키는 말로 종종 사용되었다. 
    흠정역(KJV)에서는 이를 '자연인'(the natural man, KJV)으로 번역했는데, 
    자연인은 거듭나지 않은 생태적인 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은 성령의 일을 미련하게 보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1:23). 
    그들은 아무리 지혜롭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 지혜가 걸림돌이 된다.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 헬라어 본문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왜냐하면')가 있어서 본구절에 앞 구절의 이유가 됨을 나타낸다. 
    '미련하게'의 헬라어 '모리아'는 고대 헬라에서 신체적으로 둔하거나 장애가 있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정신적인 우둔함을 의미한다. 
    거듭나지 않는 자연인은 모든 가치를 육체적 물질적 기준에서 평가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무익하고 무가치하다고 인식된다.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 '영적으로라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스'는 '영'(프뉴마)의 부사형으로서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분변함이니라'의 헬라어 '아나크리네타이'는 13절의 '분별하느니라'의 헬라어 '슁크리논테스'와는 달리 법정 용어로서 진술을 듣기 전에 심문받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가 원래 '검사한다', '시험한다'는 의미를 가졌으며 나중에는 '판단하다', '평가하다' 등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바울은 육체에 속한 사람은 영적이 아님을 전제하고 성령의 일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이를 분별할 가치 기준도 가지지 못했다고 단언하고 있다.






    성경적 근거 

    고린도전서 3:1 /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로마서 8:5 /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이란 무엇인가?  

    헬라어 σάρξ (사르크스)  
    단순히 ‘몸(body)’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 본성, 하나님 없이 스스로 중심이 된 상태  

    구분 의미
    몸(σῶμα)                          물리적 육체
    육(σάρξ)             하나님 없이 자기 중심으로 사는 본성  


    육의 사람의 특징

    1. 자기 중심적 사고
    2. 감정과 욕망에 의해 결정
    3. 하나님의 뜻보다 현실 이익 우선
    4. 영적 분별이 둔함  

    고린도전서 2:14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육의 사람 vs 영의 사람

    구분         육의 사람          영의 사람
    기준            자기           하나님
    생각    육신의 욕구          성령의 인도
    반응       감정 중심         말씀 중심
    열매       시기·분쟁          사랑·화평

    중요한 점

    “육의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미 신자였지만
    바울은 그들을 “육신에 속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즉 상태의 문제입니다.
     존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나, 삶의 방식이 육적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  /  육의 사람은 이런 질문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1. “이게 나한테 유리한가?”
    2. “내 감정이 상했어.”
    3. “내가 왜 손해 봐야 하지?”
    4. 반대로 영의 사람은 묻습니다. 
        -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 
        - “이 선택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가?”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로마서 7:15∼23, 8:12∼17)

    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인생이라는 것은 모양은 하나이지만 두 가지 사람이 있다. 
    육의 사람이 있고 영의 사람이 있는 것이다. 
    신앙자로서 육에 속한 인격을 가질 때와 영에 속한 인격을 가질 때의 차이점은 사도 바울의 간증적인 글을 보아서 알 수 있다.

    1. 육의 사람 (7:15∼23)

    첫째 , 죄에 끌리는 사람이다 (15∼17)

    사람이라는 것은 죄에 끌리면 육에 속한 사람이요 영에 끌리면 영에 속한 사람이다. 아무리 신자라도 중심에는 죄를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만 죄에 끌리면 아직까지 그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죄가 그 몸에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몸에 죄의 역사가 있는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육에 끌려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둘째,  중심에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18∼20)

    마음에는 원해도 그 원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그 심령이 자라지 못하고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없는 연약한 심령이 된 증거이다. 그 영이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는 육에 있는 죄를 이길 수가 없는 것이 육에 속한 사람이다.

    셋째,  두 가지 법을 섬기게 되는 자이다 (21∼23)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도 하고 예배를 보지만 세상에 나가면 세상에 끌려서 살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가는 일도 있을 때가 있다. 육의 사람이라는 것은 도저히 진리대로 실천할 수가 없는 인격이다(8:7).


    2. 영의 사람 (8:12∼17)

    첫째,  영으로 육의 행실을 죽인 자이다 (12∼13)

    신앙 생활은 성신의 역사로 몸의 행실이 죽어지는 일이 있기 전에는 도저히 발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몸에 병이 있는 아이가 그 몸이 자랄 수 없는 것같이 심령에 죄가 남아 있는 자는 그 영이 자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몸의 행실이 다 죽게 될 때에 그 영은 자유롭게 승리의 생활을 하게 되므로 나날이 영적 발전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 영이 그 몸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성령의 인도가 같이 하는 자이다 (14∼15)

    성신의 인도라는 것은 육에 속한 사람에게 있을 수 없고 육의 행실이 완전히 죽게 될 때에 성령의 인도 하에서 움직이는 생활을 하게 된다. 성령은 역사할 때에 먼저 그 몸의 마귀세력을 없이 하고자 하는 것이 성신의 원하는 것이니 모든 육체의 행실을 죽이고자 노력할 때에 성신은 강하게 역사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은 마귀와 절대 타협할 수가 없으므로 조금이라도 죄를 용납하고 숨기는 생활을 할 때에는 성신은 그 사람을 인도하고 다스리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신의 인도라는 것은 거룩한 생활로 인도하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고 고난을 이기고 나가는 사람이다 (16∼17)

    육에 속한 사람은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극복할 자격이 없고 영의 사람이 죄악의 세력을 이기고 나가는 것이다. 영에 속한 사람이 될 때에 육의 안락을 요구치 않고 영원한 영광을 목적으로 하고 기뻐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이것은 억지가 아니요,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다.

    결 론

    첫째 아담이
     범죄하므로 육에 속한 사람이 되었고, 
    둘째 아담 그리스도가 승리하므로 성신의 역사가 타락한 인간에게 은혜로 올 때에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따라 움직이는 생활을 말한다. 
    영에 속한 사람이 되므로 승리의 열매가 있게 되고 승리의 열매가 있으므로 왕권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고린도전서 2:14-15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 The man without the Spirit does not accept the things that come from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to him, and he cannot understand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discerned.
  • The spiritual man makes judgments about all things, but he himself is not subject to any man's judgment.

    고린도전서 3:1-3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 Brothers, I could not address you as spiritual but as worldly--mere infants in Christ.
  • I gave you milk, not solid food, for you were not yet ready for it. Indeed, you are still not ready.
  • You are still worldly. For since there is jealousy and quarreling among you, are you not worldly? Are you not acting like mere men?

  • 육에 속한 사람(고전 2:14) The man without the Spirit. 푸쉬키코스 

    ψυχικός, ἡ, όν Storng number 5591

    1. 목숨에 관한.  2. 고전 2:14.  3. 육체적인 것  
    Pronunciation [ psüchikŏs ] 
    Etymology  / 5590에서 유래  

     1. 목숨에 관한. 
       a. [형용사] 고전2:14, 15:44. 
       b. [명사]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 고전15:46, 유1:19. 

     관련 성경  /  정욕의(약 3:15), 육에 속한(고전 2:14, 유 1:19), 육의(고전 15:44, 46).
















  • 육신에 속한 사람(고전 3:1) Worldly, The Men of Flesh, Carnal  사르키코스 

     
    σαρκικός, ἡ, όν Storng number 4559

    1. 육체에 관한.  2. 지상적인.  3. 육으로 된.  
    Pronunciation [ sarkikŏs ] 
    Etymology  / 4561에서 유래
    •  1. 육체에 관한, 육적인, 육신에 속한, 육신의 방식대로의, 육욕적인.
      •  a. 지상적인, 물질적인, 롬15:27, 고전9:11.
      •  b. 육으로 된.
      •  c. 육신에 속한, 고전3:3, 고후1:12, 10: 4, 히7:16.
    • 관련 성경  / 육신의(고전 3:3, 9:11), 사람의(고전 3:4), 육체의(고후 1:12, 벧전 2:11).

  • 영의 사람과 육신의 사람

    로마서 8장을 중심으로

    '육신에 있는 자냐 영에 있는 자냐(롬 8:8-9)'의 기준은, 거듭났느냐 아니냐로 결정됩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한 육으로 난 것과 영으로 난 것의 기준(요 3:6)이나 천국 입성의 자격도, 성령으로 거듭났느냐 여부에 있습니다(요 3:5). 
    바울 사도가 에서(Esau)를 '육체를 따라 난 자'로, 야곱(Jacob)을 '성령을 따라 난 자'로 구분한 기준도 거듭남 이었습니다(갈 4:29).

    영역본 성경은 거듭나지 못한 '육신에 속한 자'를 자연인(natural man)이라 번역했고(고전 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The spiritual did not come first, but the natural, and after that the spiritual.

    윌리엄 쉐드(William G. T. Shedd, 1820-1894) 역시 그의 명저 "Sermons to the Natural man"에서, 육신에 속한 자를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the natural man)으로 풀이했습니다.

    식품은 자연산 그대로가 좋지만, 사람은 아담으로부터 난 자연산 그대로는 부패하고 더럽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부정한 짐승의 상징으로 언급한 돼지는(마 7:6), 거듭나지 못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유대인처럼 율법에 완벽한 이들이 없다고 공인되던 시대에, 그들이 부정함의 상징이 된 것은 파격입니다. 
    이는 부정하고 정결함의 기준이 인간 윤리가 아닌 거듭남의 여부에 달려있음을 말해주며, 기독교 윤리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새 기준의 출현이었습니다.

    성경이 육신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한 것도(롬 8:8),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행위 이전에 존재 자체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는(롬 9:11) 원천적 이유 외에, 성령을 따라 났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이는 기독교 인간론이 행위론적(behavioral) 이전에 존재론적(ontological)이며 관계론적(relational)이라는 확증이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물이고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과 직결됩니다.

    인간은 고결한 덕행자냐 아니냐를 불문하고, 존재론적(ontological)으로 다시 나지 않는 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썩은 오물은 그 악취와 추한 몰골만으로도 능히 사람을 불쾌하게 하듯,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더 핑크(A. W. Pink, 1886-1952)가 "인간의 행위적인 죄는 부패한 인간 존재에서 나온 열매일 뿐,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근본 요인은 타락한 인간 존재 자체"라고 한 것은 올바른 지적입니다.

    "인간은 교양이 있고 교육받고 세련되었고 종교적이기 조차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심히 부패'하였다(렘 17:9).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은 하나도 없기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다 타락한 자들이고 인간의 존재의 모든 부분은 죄로 인해 오염돼 있다. ... 그의 성향은 변질되어 버려서 그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시는 것을 미워한다.

    그것은 몇 개의 잎사귀가 시들어버린 것이 아니라 나무 전체의 뿌리와 가지까지 썩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 인간 안에는 그 존재의 근원과 기질 안에 본래부터 부패되고 원래 악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그 열매에 지나지 않는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을 뿐더러, 그 자신도 하나님을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롬 3:10)"는 말씀은 다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소극적인 무관심(무지)을 넘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롬 1:28)' 의도적 반감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40)'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표하지 않는 단순 무관심자는 기독교의 적대자가 아니라는 낙관론을 폅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마 12:30)"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사실 그들의 무관심은 포장된 적대감의 표출입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우리 의식 세계는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대해선 의도적으로 눈을 감는 속성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께 대해 무관심(무지)으로 일관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책망대로 미물 짐승보다 못합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사 1:3)."

    성경이 하나님 무지(무관심)에 대한 인간의 변명이 심판 때에 그를 변호해주지 못할 것이라고 한 것은(롬 1:20), 그들의 숨겨진 적개심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직설 화법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을 심판받을 죄로 선언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 1:8)." 그들의 하나님 무지가 비의도적이고 소극적인 것이 아닌, 부러 잊으려는(willingly are ignorant, 벧후 3:5) 의도적인 것임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진주와 돼지 비유에서 사람이 진주를 던지면 돼지가 그것을 발로 밟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던져준 사람에게 덤비기까지 하는 것은(마 7:6),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무관심 뒤에 적개심이 도사리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 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드러내는 사람들의 냉소와 무반응은,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숨겨진 적개심의 표출입니다. 복음 전도자나 설교자들이 전도를 녹록한 태도로 접근할 수 없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반감으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이 하나님을 미워한 데서 연유됐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그는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이유 역시, 그들이 자신에게 속한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

    동생 아벨을 형 가인이 돌로 쳐 죽인 것은, 가인을 미워해서라기보다는 아벨이 믿는 하나님을 미워한 때문입니다. 동생의 제사는 받고 자신의 제사는 안 받는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 동생을 향한 질투심으로 나타났습니다(창 4:3-8). 그리스도를 전하는 스데반에게, 유대인들이 귀를 막고 달려들어 돌로 쳐 죽인 것은 스데반이 전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었습니다(행 7:57).

    그리고 성경이 육신에 속한 자를 '육신을 좇는 자(롬 8:5)'로 지칭하는 것은, 그가 유별나게 저급한 육욕을 좇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타고난 본성에 충실한 거듭나지 못한 모든 자연인을 뜻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신령한 것에 대한 감각과 갈망이 없기에 본성적인 것만을 쫓기 마련입니다.

    마치 사자가 풀을, 돼지가 진주를, 까마귀가 깨끗한 고기를 좋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창 8:7-9). 망령된 에서가 장자의 기업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는 것은(창 25:33-34), 영적인 것의 가치를 모르고, 땅의 것만 탐하는 거듭나지 못한 자의 속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어서 거듭나지 못한 자의 '육신의 생각'과 그것이 갖다 주는 '사망'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성경이 육신의 생각이 사망이라고 한 것은(롬 8:6),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의 생각의 허망함(엡 4:17)과 거기에 따르는 심판을 말한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의(엡 2:1) 모든 생각은 죽음같이 허망하고, 그 허망한 생각이 그를 사망에 빠뜨립니다.

    성경이 죄 된 행실을 죽은 행실과 동일시하고 있음도(히 6:1; 9:14) 같은 맥락이며, 그 생각의 내용은 선악을 불문합니다. 악하고 더러운 생각뿐만 아니라, 불쌍한 자들을 향한 선한 연민의 마음도 사망의 범주를 벗어나게 못합니다.

    이는 그 선한 마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동기의 발로가 아닌, 자연인의 본성과 자기 의(義)의 발로에서이고, 선행의 원천적인 힘도 육신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선악을 불문하고 본능으로 행하는 모든 것을 멸망 받을 짓거리로 폄하합니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유 1:10)."

    계신대학원대학교 설립자 이병규 박사가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을 해석하여-유별나게 짐승 같은 추잡한 속성을 쫓는 것이 아닌-짐승과 같이 오관(五官)으로 느껴지는 본능 따라 행하는 자기 자랑, 자기중심, 자기만족을 위해 하는 것이라 하고, '이성'을, 중생한 영혼이 사용하는 선한 기관으로 풀이한 것은 적절합니다.

    죄인은 악을 행하면서도 죄를 쌓을 뿐더러 선을 행하면서도 죄를 쌓습니다. 이는  그의 선행 동기가 자기 본성과 의의 구현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고 한 것도 같은 관점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참된 행위를, '성령으로 행하며 예수를 높이고 육체의 힘으로 하지 아니하는 것'이라 규정했습니다(빌 3:3). 이 기준에 맞출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거듭난 사람뿐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이, 다만 거듭나지 못한 자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임에도 그 안에 남아있는 옛사람이 내는 생각도 육신의 생각입니다. 베드로가 분노하며 말고의 귀를 자른 것(마 26:51), 외식(갈 2:13-14), 십자가를 지실 예수님의 대업 앞에서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것(마 16:22-23) 역시 다 육신의 생각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어 갈라선 것(행 15:39),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작정한 연보를 떼어먹은 것(행 5:1-10),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파당을 짓고 경쟁심과 교만에 빠진 것(고전 1:11-13)도 다 육신의 생각입니다.

    그런 육신의 생각들로 인해 사망의 악취를 풍겨내며 타인을 실족케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거듭나지 못한 자들의 육신의 생각처럼 사망의 판결을 받게 하지는 않습니다. 거듭난 자들에게는 성화의 판결은 있겠지만 더 이상 칭의의 심판은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갖는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 된다는 것도(롬 8:7) 말하고자 합니다. 죄로 죽은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고후 10:5). 성경이 사람의 계획하는 바가 어릴 때부터 악하고(창 8:21),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하다(창 6:5)는 말은, 단지 인간은 어려서부터 도덕적으로 부패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담의 원죄를 유전 받은 인간은 날 때부터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존재로 난다는 뜻입니다.

    존 번연(John Bunyun, 1628-1688)도 같은 견해를 피력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원수가 되나니(롬 8:7; 골 1:21)'는, '본래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원수이고 그의 마음에서 원수 된 자'라는 뜻이다."

    나아가 거듭나지 못한 자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롬 8:7)'에 굴복할 수 도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법은 단순히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구원 얻는 '믿음의 법(롬 3:27)'이 그 핵심이며, 오직 성령으로만 받아들여집니다(고전 12:3). 거듭나지 못한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고전 2:9). 동물이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없듯, 성령 없는 자연인에게는 믿음의 법이 어처구니없게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오직 예수가 위하여 죽은 구원 예정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 예수 믿고 구원 얻는 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반면 영의 사람이 갖는 '영의 생각(롬 8:6)'도 있습니다. 이는 타계주의자들의 세속사를 초탈한 생각, 혹은 신비주의자들의 소위 탈혼(입신) 상태에서 나오는 계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는 자연인의 본성에는 없는, 성령의 거듭남으로 우리 안에 부어진 하나님을 향한 생각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영적인 사람들이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것을 영혼이 의식하게 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마음에 전적으로 새로운 지각이나 감각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 참된 성도는 새로운 영적 지각과 감각의 원리가 생긴다, 그리고 참된 성도는 이 새로운 감각으로 영적이고 신령한 것들을 알게 된다."

    존 오웬(John Owen, 1616-1683)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마음 자세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마음 상태이다."

    '영과 영의 생각'에 대한 그의 견해도 탁월합니다. "성경에서 영은 '성령(롬8:9)'이나 '성령에 의해 신자 속에 생성되는 새로운 영적 생명(요 3:6)'을 뜻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영의 생각이란 '신자 속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영적 생명의 활동'을 뜻한다. 이 새로운 영적 생명은 신자가 영적인 생각을 하게하며 기뻐하게 한다. 회심하기 전에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불신자는 땅의 일들을 좋아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일들을 우선시한다."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나고 하나님과 화목한 영의 사람의 생각에는 생명과 평안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는 마인드 콘트롤(Mind-Control)이나 종교 수양으로 만들어진 심리학적인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화평과 초자연적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이루어진 하나님나라의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할렐루야!


    사람의 종류에는 육신(Flesh)을 쫓는 자가 있고, 영(Spirit)을 쫓는 자가 있다. 육신을 쫓는 자는 육의 사람(Flesh Man)으로 사망을 가져오고, 영을 쫓는 자는 영의 사람(Spiritual Man)으로 생명과 평안을 가져온다. 또한 육의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자이나, 영의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이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그저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을 쫓는 육의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을 본다. 
    로마서 8:5~8 '육신을 쫓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쫓는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일을 보면 거짓과 악이 판을 치고 있음을 실감한다. 한인 자영업자들에게 공사비를 미리 받고도 차일 피일 미루며 사기를 치고 달아나고, 또 나이가 드신 노인들에게 재정적 정신적으로 피해 주고도 갚지 않고 버젓이 잘 살고 있는 뻔뻔한 자들이 꽤 있다, 또한 거짓으로 권세와 명예를 얻는 자들,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나타나서 본인의 이름과 유명세를 노리는 자들...
    공중권세 잡은 악한 흑암의 세력들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광란의 칼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나의 영의 눈을 열어 주시고 보여주신 적이 있다.

    무섭고 흉측하게 생긴 전갈, 지네. 지렁이, 고릴라, 원숭이처럼 생긴 징그러운 벌레와 짐승 모습의 마귀 떼들 수천수만이 공중에 꽉 들어차더니 마치 눈송이 내리듯 공중에서 지상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즉 이 세상에 공중 권세 잡은 악한 흑암의 권세들이 꽉 들어차 있다는 뜻이었다. 

    이 마귀떼들이 하는 일들은 의롭고 선하고 신실한 자들에게 온갖 감언이설과 거짓말로 유혹하고 사기를 치며 그들의 영혼을 좀먹고 죽이려고 호시탐탐 엿보며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갈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처음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이민 와서 힘들어 싸워 기독교 국가로 우뚝 세워 놓은 순수하고 보수적이었던 이 아름다운 미국 나라가 점점 무너져 가고 있음을 본다. 동성연애, 트랜스젠더, 마약중독, 게임중독, 도박중독, 사기, 보이스피싱, 살인, 음란과 방탕함, 사탄의 종교나 이단에 빠진 자, 진정한 자유의 가치를 모르고 하나님이 증오하시는 공산주의가 좋다는 무리도 꽤 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분 중에도 믿는지 안 믿는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속은 회칠한 무덤 같은 바리새인들이 많이 있다. 자기 명예와 영광만을 추구하고 세상에서 유명해지기를 원하여 본인의 이름과 얼굴을 공중 미디어나 사람들 앞에 자주 나타내기를 즐기는 자기도취, 자기 숭배, 명예욕, 탐욕이 득실한 자들, 특히 가난하고 힘이 없는 자들이나 노약자들에게 물질적 정신적 손해를 입히고도 버젓이 잘 살고 있는 자들이 있음을 볼 때 가슴이 매우 답답하다. 

    이제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주님께서 오시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자가 한 사람도 없을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늘 동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카이(생명)'과 '샬롬(평안)'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령님을 환영하고 모셔드려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하려면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푯대를 향해 좁은 길을 지나서 좁은 문을 통과하여 천성을 향해 날마다 조금씩 걸어 나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령(Holy Spirit)이 온 지구상에 충만히 임할 때 영의 사람이 많아지고 생명과 평안이 넘치는 세상 나라가 될 것이다. 이 세상 사는 동안 하나님이 기뻐하실 아름다운 작품을 남기도록 힘쓰자. 불에 태우면 사라져 없어지고 썩어질 지푸라기나 풀로 하늘의 상급을 쌓지 말고 제련소 뜨거운 용광로의 불가마 속에 태워도 영원히 남아있는 순금 보석으로 하늘 상급을 쌓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자.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사망을 가져오는 육의 사람이 되지 않고, 생명과 평안을 가져오는 영의 사람이 되어 한 번뿐인 이 아름다운 인생길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 자세를 오늘도 다짐해 본다.


    사순절 제5일 / 2월 23일(월) 데살로니가전서 5: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혼육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May God himself, the God of peace, sanctify you through and through. May your whole spirit, soul and body be kept blameless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평강의 하나님”
     
    헬라어 : ho theos tēs eirēnēs
     
    단순한 감정적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상태 및 언약적 샬롬(shalom)

    거룩은 인간의 노력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일입니다.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온전히”(ὁλοτελεῖς) = 완전하게, 끝까지 
        성화는 부분적 변화가 아니라 존재 전체를 다루는 하나님의 사역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룩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점입니다.  

    “온 영과 혼과 몸”

    영(영)

    πνεῦμα, ατος, τό Storng number4151

    1. 불기.  2. 바람.  3. 숨 내쉬기  
    Pronunciation [ pnĕnuma ]
    Etymology  /  4154에서 유래
    • 1. 불기, 숨.
      • a. 바람, 요3:8, 히1:7.
      • b.  숨 내쉬기, 숨, 살후2:8.
    • 2. 기운, 목숨, 생명, 영혼, 마27:50, 눅8:55, 행7:59, 히12:23.
    • 3.  [인간의 인격의 일부분으로서의] 영.
      • a.  고후7:1, 골2:5.
      • b.  [통찰력, 감정, 의지의 원천 또는 좌 소, 사람의 내적 생활의 대표적인 부분] 막2:8, 눅1:47, 행17:16, 롬8:16, 고전16:18.
      • c.  영적 상태, 마음의 상태, 성질, 기질, 의향, 고전4:21, 갈6:1, 엡4:23, 벧전3:4.
    • 4.  [독립적 존재로서의] 영.
      • a.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 요4:24.
      • b. 영, 영물, 행23:8,9, 히1:14, 12:9, 계1:4, 3:1.
      • c.  유령, 눅24:37,39.
      • d.  악한 영, 귀신, 마12:43, 막1:23, 눅8:29, 행5:16.
    • 5.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모든 것과를 구별짓는] 참된 영.
      • a.  하나님의 영, 주의 영, 고전2:11, 롬8:11, 살전4:8.
      • b.  그리스도의 영, 주님의 영, 행16:7, 고후3:17, 갈4:6, 빌1:19.
      • c.  성령, 마12:32, 눅2:26, 행2:4, 히2:4.
    • 관련 성경  /  성령(마4:1, 막1:10, 눅2:27), 심령(마5:3, 눅1:17), 귀신(마8:16, 눅4:36, 요16:18), 마음(마26:41, 막8:12), 영혼(마27:50, 눅23:46, 요19:30), 중심(막2:8), 하나님의 말씀(행18: 5), 영(눅24:37,39, 엡1:17), 빛(엡5:9), 한마음(빌1:27), 기운(살후2:8), 바람(히1:7), 생 기(계11:11, 13:15).

    혼(魂)

    ψυχή, ῆς, ἡ Storng number 5590

    1. 영혼.  2. 생명력. 3.  혼    
    Pronunciation [ psüchē ]  
    Etymology  / 5594에서 유래
    • I. 영혼, 목숨, 생명:
      • 1. [문자적으로]
        • a.  [땅에서의 외면적이거나 육체적인 생에 대해서] 목숨, 생명력, 흙, 눅 12:20, 행2:27, 20:10, 계6:9, 20:4. [주] 세상의 목숨, 지상의 목숨, 마2:20, 막10:45, 빌2:30, 계12:11.
        • b. [사람의 내적 생활의 중심으로서의] 영혼, 혼, 마26:38, 막14:34, 눅12:19, 요12:27, 계18:14.
        • c.  [지상의 생을 초월한 생의 중심이 되는] 영, 영혼, 마16:26, 막8:37, 고후1:23, 12:15, 약1:21, 벧전1:9.
      • 2. [환유적으로] 목숨을 가진 것, 생물, 생명체, 고전15:45, 계16:3.
    • 관련 성경  / 목숨(마2:20, 막8:35, 롬11:3), 영혼(마10: 28, 눅12:20, 고후12:15), 마음(마11:29, 막14: 34, 행14:22), 생명(막3:4, 요12:25, 행20:10), 힘(막12:33), 뜻(행4:32), 인(행27:37), 영(고전15:45), 혼(살전5:23, 히4:12), 명(벧전3:20), 심령(벧후2:8), 사람(행7:14, 롬13:1).

    육(肉)  [질문]  헬라어 σώμα(소마) σaρξ(사르크스)를 혼용해서 쓸수있나요? 
    베드로전서 3:21로마서8:6의 사르크스를 소마로 적어도 되는지요.  

    [답변]  둘은 종종 혼용해서 사용하는 어휘로 그 사이에 크게 두드러지는 차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구분하자면 
    σώμα(소마)는 영혼 정신 등과 대비되는 신체를 일컬을 때 사용 
    σaρξ(사르크스)는 신체에서 뼈, 살, 피 등을 이야기할 때 ‘살’을 가리킵니다.


    σάρξ, σαρκός, ἡ Storng number 4561

    1. 육체.   2.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3. 몸 
    Pronunciation    [ sarx ]
    Etymology / 4563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함
    •  1. 육체.
      •  a. [문자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살, 고전15:39, 계19:18, 눅24:39, 약5:3.
      •  b. 몸, 신체, 행2:31, 2:26, 고전5:5, 고후7:1, 히9:13, 벧전3:21, 히10:20, 벧전3:18.
      •  c. 육신, 혈육을 가진 인간, 마16:17, 24: 22, 막13:20, 눅3:6, 요17:2, 행2:17, 롬3:20, 고전1:29, 갈1:16, 2:16, 엡6:12, 벧전1:24.
      •  d. 인간성, 세상적 혈통, 고전10:18, 롬4:1, 8:3, 히9:8, 11:14, 5:7, 12:9.
      •  e. 유형성, 구체성, 육체적 제한성, 이 세상 생활, 고전7:28, 고후10:3, 갈2:20, 빌1:24.
      •  f. 생의 외부적인면 [인간적 표준에 의하여], 외부적 환경, 고전1:26, 고후1:18.
      •  g. [바울 사상에 있어서] 육신[육신은 죄를 의도하는 기관으로 육신이 있는 곳에는 죄가 있다, 즉 육신대로 살면 좋은 것이 없다], 롬7:18, 7:25, 갈5:13, 골2:23.
      •  h. [성적 충동의 근원으로서] 육체, 요1:13.
    • 관련 성경 / 몸(마19:5, 막10:8), 육체(마24:22, 요8:15, 고후1:17), 육신(마26:41, 롬1:3, 딤전3:16), 살 (눅24:39, 요6:55,56), 육정(요1:13), 육(요3:6, 6:63, 고전15:50), 골육(롬11:14).
    σαρκικός, ἡ, όν Storng number 4559

    1. 육체에 관한.  2. 지상적인.  3. 육으로 된.  
    Pronunciation [ sarkikŏs ]  
    Etymology / 4561에서 유래
    • 1.  육체에 관한, 육적인, 육신에 속한, 육신의 방식대로의, 육욕적인.
      • a. 지상적인, 물질적인, 롬15:27, 고전9:11.
      • b.  육으로 된.
      • c.  육신에 속한, 고전3:3, 고후1:12, 10: 4, 히7:16.
    • 관련 성경 /  육신의(고전3:3, 9:11), 사람의(고전3:4), 육체의(고후1:12, 벧전2:11).
    σῶμα, ατος, τό Storng number 4983

    1. 몸.   2. 신체. 3. 시체  
    Pronunciation [ sōma ]  
    Etymology / 4982에서 유래
    • I.  몸.
      • 1.  [사람이나 동물의] 신체, 몸.
        • a.  시체, 마14:12, 27:52,58,59, 막15: 43,45, 눅17:37, 23:52,55, 24:3, 23, 요19:31,38, 행9:40, 히13:11, 유1:9.
        • b.  산 몸, 마5:29, 6:22, 26:12, 막5: 29, 14:8, 눅11:34, 요2:21, 롬1:24, 고전6:18.
      • 2. [복수로] 종들, 노예들, 계18:13.
      • 3.  [그림자를 만드는 것] 실재  , 사물, 자체, 골2:17.
      • 4.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 롬12:5, 고전10:17, 12:12,27, 엡1:23, 2:16, 4: 4,12,16, 5:23,30, 골1:18,24, 2:19, 3:15.
    • 관련 성경 / 몸(마5:29, 눅11:34, 고후4:10), 시체(마14:12, 요19:31, 유1:9), 주검(눅17:37), 육체(요2:21, 히13:11), 형체(고전15:37,38,40), 종(계18:13).


    이 구절은 성경에서 가장 명확하게 인간을 삼중 구조로 표현하는 본문입니다.

    구분 의미     기능
    영 (πνεῦμα)     하나님과 교통하는 차원          예배, 계시 수용
    혼 (ψυχή)       자아·의지·감정            인격적 결단
    몸 (σῶμα)              물질적 차원         역사 속 실존

    그러나 이것은 해부학적 분리라기보다  “존재 전체”를 강조하는 전인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강림하실 때에”  
    이 소망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Parousia) 입니다.

    기독교의 거룩은 현재의 도덕 수양이 아니라  
    재림을 향한 보존과 준비의 과정입니다.

    “흠없게 보전되기를”

      
    “보전되다” = 하나님이 지키신다 (수동태) 
      “흠없다” = 제사적 언어 (결점 없는 제물) 

    즉, 우리는 재림 때 하나님 앞에 드려질 제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구조적으로 정리하면

    평강의 하나님

    전인적 성화 (영·혼·몸)

    그리스도의 재림

    흠 없는 존재로 보존

    신학적 핵심

      
    거룩은 하나님의 사역
     
    구원은 전 존재적 사건
     
    목표는 재림의 날
     
    보존의 책임은 하나님께 있음


     “영·혼·몸”을 성경 전체적으로 정밀 구분

    → 존재 구조를 정확히 세운 후 

     그 다음 “오늘 삶의 실제 적용”으로 내려오는 것

    이 순서가 더 유익합니다.
    기초 구조 없이 적용으로 가면 모호해지고,
    구조가 정리되면 적용은 자연히 또렷해집니다.

    성경 전체에서 본 영·혼·몸의 정밀 구조

    핵심 본문  

    창세기 2:7 
    데살로니가전서 5:23  
    히브리서 4:12 

    몸 (σῶμα / בָּשָׂר) 소마, 바사르

     정의  /  물질 세계와 접촉하는 존재의 외적 기관
     기능  /  오감,  행동,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실존  
     특징 /  죽음으로 흙으로 돌아감 (창 3:19) 
                죄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의의 도구가 될 수도 있음 (롬 6장)

     혼 (ψυχή / נֶפֶשׁ) 푸쉬케, 네쉐마  

      정의  /  자아 의식과 인격 중심
      기능  / 생각 (지성) ,  감정,  의지,  선택
      특징  /   “내 영혼아”라고 말할 수 있는 자기 인식 영역 
                   상처·기억·정체성의 자리  
     
      혼은 ‘나’라고 느끼는 영역

     영 (πνεῦμα / רוּחַ) 프뉴마, 루아흐 

     정의  /  하나님과 직접 연결되는 존재의 가장 깊은 중심   
     기능  /  하나님 인식,  직관적 영적 분별,  성령과의 교통   
     특징  / 거듭남의 자리 (요 3장) 
                성령이 증거하시는 자리(롬 8:16) 

     영은 “하나님을 감지하는 기관”  

    세 영역 비교 구조

     구분 방향 죽음 시 타락 영향
    외부 세계 흙으로 약함
    자아 지속 왜곡
    하나님 죽음/단절 → 거듭남 가장 치명  

    중요한 신학적 포인트 

    성경은 항상 삼분설만 말하는가?

    아닙니다.
    때로는 영혼을 함께 묶어 말하기도 합니다.
    (히 4:12이 분리 가능성을 말함)

    기능적 구분이지 기계적 분리 개념은 아님. 

     타락의 구조
      
    몸이 먼저 범죄 
      혼이 합리화  
      영이 하나님과 단절  

     구원의 역순 구조
     
    영이 먼저 살아남 (중생) 
     혼이 점진적으로 변화 (성화) 
     몸은 마지막에 영화 (부활)

    이 구속의 순서는 바울 신학의 핵심입니다. 

    A. “영·혼·몸의 오작동 구조”

    왜 감정이 믿음처럼 느껴지는가?
    왜 영적 분별이 흔들리는가? 

    B. “오늘 삶의 실제 적용”

    기도는 어느 영역에서 일어나는가? 
    우울은 혼의 문제인가 영의 문제인가? 
    성령의 내적 증거는 어디서 작동하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육의 사람”

    성경에서 “육의 사람”은 단순히 몸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자기 본성과 욕망 중심으로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대표적으로 이 표현이 나오는 곳은 

    고린도전서 2:14 
    고린도전서 3:1–3 
    로마서 8장 

    영적 구분 : 자연인 · 육의 사람 · 신령한 사람

    구분 특징 중심
    자연인 (ψυχικός)     성령을 받지 못함         자기 이해, 이성
    육의 사람 (σαρκικός)     성령은 받았으나 육에 지배됨         감정, 욕망, 자아
    신령한 사람 (πνευματικός)     성령의 인도에 순종           하나님의 뜻

    “육의 사람”은 불신자라기보다, 구원은 받았으나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육(肉, 사르크스)의 의미 

    성경에서 “육”은 단순히 몸(body)이 아닙니다.

    1. 타락한 인간 본성
    2. 하나님 없이 스스로 중심이 되는 상태
    3. 자기 보호 · 경쟁 · 시기 · 분쟁 중심의 삶

    고린도전서 3:3  /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즉, 육의 사람은 관계 속에서 드러납니다.

    쉽게 상처받음 
    비교함 
    편 가름 
    자기 의를 주장

    로마서 8장의 구조 
    로마서 8장은 육과 영을 가장 선명하게 대비합니다.

    육의 생각 → 사망 
    영의 생각 → 생명과 평안 

    여기서 핵심은 ‘무엇에 마음을 두는가’ 입니다.

    육의 사람의 특징 정리

     감정 기복이 신앙을 좌우함
     상황이 좋으면 믿음이 좋은 것처럼 느껴짐
     말씀보다 경험이 기준이 됨
     성령의 책망을 오래 붙들지 못함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육의 상태는 “정체성”이 아니라 “현재 상태”입니다. 
    변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벗어나는가?

    육을 억지로 없애려 하지 말 것 
    영을 살리면 육은 약해짐 
    말씀 묵상 + 순종의 작은 실천 
    감정보다 진리를 먼저 인정 

    갈라디아서 5:16  /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혼의 사람”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특히 영·혼·몸의 구분 속에서 나오는 개념입니다. 
    핵심 본문은 다음입니다.

    1. 성경적 근거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헬. ψυχικός, 퓌시키코스)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여기서 “육에 속한 사람”은 직역하면  “혼적인 사람” (soulish person) 입니다.

    헬라어 : 
    πνευματικός (프뉴마티코스) → 영적인 사람
    ψυχικός (퓌시키코스) → 혼적인 사람
    σαρκικός (사르키코스) → 육적인 사람

    혼의 사람이란 무엇인가?

    혼(ψυχή, psyche)   생각,  감정,  의지,  자아 의식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혼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보다 자기 생각·감정·의지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 입니다.  

    세 부류 비교

    구분           중심                  특징
    영의 사람         하나님의 영                          계시, 순종, 분별
    혼의 사람     자기 생각·감정 합리성,          감정 중심, 종교성 가능
    육의 사람       육체 욕망                            죄, 충동, 세속성

    중요한 점은 혼의 사람은 반드시 “타락한 사람”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도덕적일 수도 있고,
    종교적일 수도 있고,
    열심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깊은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른 관련 구절  

    야고보서 3:15 /  
    이러한 지혜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귀신의 것이니  
    여기서 “정욕적”도 같은 어근(ψυχική, 혼적인)입니다.

    즉, 겉으로는 지혜 같으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 혼 차원의 지혜일 수 있습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혼은 중립 영역입니다.

    문제는  혼이 영의 지배를 받느냐 아니면 스스로 왕이 되느냐 입니다.

    혼이 주인이 되면 자기 해석,  자기 확신, 자기 의로 흐르기 쉽습니다. 
    혼이 영에 복종하면 생각이 새로워지고, 감정이 정화되고, 의지가 하나님 뜻에 맞춰집니다.

    적용 질문 
    스스로 점검해 보세요  
    나는 말씀을 이해하려 하는가, 아니면 의지하는가? 
    내 확신은 감정에서 오는가, 성령의 증거에서 오는가? 
    하나님의 뜻이 내 생각과 다를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영의 사람”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영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성령)에 의해 지배되고 인도되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 표현의 핵심 구절은 다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 고린도전서 2:14–15

    영의 사람 vs 육의 사람

    구분 중심 지배 영역 특징
    육의 사람 본능·자기중심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함
    혼의 사람 감정·이성 중심 판단은 하지만 영적 분별이 약함
    영의 사람 하나님의 영 중심 성령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함

    영의 사람은 단순히 감정이 뜨거운 사람이 아니라,
    성령께 지배받는 사람입니다.

    영의 사람의 특징

    ① 하나님과의 교통이 살아 있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 로마서 8:14

    영의 사람은 자신의 생각보다 성령의 인도를 우선합니다. 

    ② 내적 분별력이 있음

     
    “영들은 다 믿지 말고 시험하라” — 요한일서 4:1

    겉모습이 아니라 영적 근원을 봅니다. 

    ③ 열매가 나타남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 — 갈라디아서 5:22–23 

    은사가 아니라 열매가 기준입니다. 

    영·혼·몸 구조 안에서 본 영의 사람 

    성경은 인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5:23)  

    구조적으로 보면
     영 → 하나님과 교통
     혼 → 생각· 감정· 의지
     몸 → 물질 세계와 접촉

    영의 사람
    영이 혼과 몸을 다스리는 상태입니다.

    실제 적용 / 영의 사람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1. “이것이 내 기분인가, 성령의 인도인가?” 
    2. “내가 옳은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3. “결과가 좋은가, 아니면 하나님 뜻인가?”  

    한 문장 정의  /  영의 사람은 ‘성령이 주인이 된 존재’

    몸(소마 - σŵμα )과 육신(사르크스 - σάρξ )

    바울은 그의 영이 기운을 낸다든지 안심 한다고 말했을 때, 자신의 내적인 평안을 발견하였음을 의미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영(프뉴마 - πνεύμα)을 소유하는지 아니면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을 받음으로 소유하게 된 독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볼트만(Bultmann)은 인간이 구분되거나 분리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며, 몸 (소마–σώμα), 영(프뉴마), 그리고 혼(프쉬케 - ψυχὴ)은 인간 전체를 여러 방식으로 보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은 몸(소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바로 몸(소마)이다”라고 주장한다.

    인간, 그의 인격 전체는 소마로 지칭될 수 있다.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히 되게 하는 것은 나의 인격, 나 자신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 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관련 구절들을 출발점으로 삼는 불트만은 몸이란 “자신을 자신의 행위의 대상으로 삼거나 또는 자신을 어떤 상태의 주체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부장했다. 소마적인 존재는 표준적이며 고유한 존재양식으로 생각된다.

    소마는 인간존재의 덜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 본질적인 요소이다 혼 또는 영의 생명은 참되고 본질적인 생명이지만, 외적이며 우연적인 몸의 생명은 마치 인간의 참된 생명을 실현하는데 방해거리나 되는 것처럼 서로 대조되는 것이 아니다. 구속사역은 단순히 혼 또는 영의 구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몸의 구속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완전한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고안한 궁극적이며 완전한 삶의 양식은 소마적인 존재이다. 몸에 대해서 취하여야 할 태도를 가르친 바울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1. 몸은 비록 인간존재의 완전한 부분이지만 육의 몸은 부패하고 죽는 사망의 몸(롬 7:24).

     2. 죄는 죽을 몸에 왕노릇 할 수 있기 때문에(롬6:31), 죄의 도구인 몸은 죄의 몸으로 불리울 수 있으며, 따라서 영이 거주하는 인간은 몸의 죄된 행실을 죽여야 한다(롬8:14)[본문 롬8:13의 사르크스를 우리말 개역성경에서는 육신(flesh)으로 번역하였다. 영어성경에서도 육신으로 번역한 경우가 많다. NIV에서는 죄의 본성(sinful nature)으로, GNB(TEV)에서는 인간본성(human nature)으로 번역하였다.]

      3. 몸은 굴복되어야 한다. 사람의 영적인 생활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인간 존재의 최고 목적은 영의 영역에서 발견되어야 하며 따라서 몸은 영, 참된 자아의 종이 되어야 한다. 몸 그 자체는 참된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주인 행세를 할 수 없다. 몸이 훈련받아야 하는 것은 그것이 영적인 목적들을 좌절시키기 때문이다.

      4. 몸에 대한 자기 통제는 그것이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져야 한다(롬12:1). 
    그리스도인은 그의 몸 안에 성령이 내주(內住)하고 있음을 인정하여야 한다(고전6:19). 그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다(고전6:15).

      5. 몸 자체는 구원이 완성되는 날에 구속될 것이다(롬8:23). 육신(사르크스-σὰρξ)은 몸의 조직들이다. 육신은 흔히 몸을 구성하며 따라서 뼈와 피에 대조되는 조직들을 묘사 할 때 사용된다. 사르크스는 몸 자체이다. 자연적인 변화를 거치는 동안 부분은 전체를 지칭하게 되었고, 여러 구절에서 사르크스는 몸의 육적인 부분을 가리키기보다는 몸 전체의 동의어처럼 사용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몸으로 떠나 있다”고 말하든지(고전5:3), 아니면 “육신은 떠나 있다”(골2:5)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사르크스는 혈통과 관계를 맺은 인간이다. 구약의 용법에 따르면, 사르크스는 몸의 요소 또는 몸 자체를 지칭할 뿐만 아니라, 육으로 구성된 인간을 구체적으로 지칭할 때 사용된다. 이러한 용법에서 보면 사르크스는 특별히 인간적인 관계들,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묶어 두는 육신적인 가문과 자연적인 인연들을 지칭할 수 있다. 사르크스는 외적인 모습과 조건에서 본 인간이다.

    사르크스의 뜻은 인간의 육신적인 생명 너머로 확대되어 인간 존재에 있어서 불가분리적인 다른 요소들을 포함하게 되었다
    “육체를 신뢰하는 것”(빌 3:3)은 몸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외부 영역에 속하는 복합적인 모든 것들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의 유대적인 혈통, 그의 엄격한 종교교육, 유대 종교단체들 가운데서 뛰어난 그의 열심과 그의 탁월성 등을 포함한다. 
    사르크스의 윤리적 용법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육이 영과 대조되는 것처럼 인간은 악하며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육에 속한’ 자들과 ‘영에 속한’ 자들을 날카롭게 대조시킨다. 
    육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 하고 영에 있나니…”(롬 8:9) 
    로마서 8:8절에 ‘육신에’ 라는 말은 9절에 의하면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 자, 즉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킨다.

    로마서 / 사르크스와 소마 

    1. 육(사르크스)와 몸(소마)의 구별

    로마서의 큰 줄거리로 볼 때, 바울에게 소마(몸)는 인간 정신/영을 담는 그릇 정도입니다(논쟁의 소지가 있죠. 육과 몸의 의미가 겹치는 부분도 있슴네다.). 소마(몸)는 가치중립적이어요. 사람이 행하는 바에 따라 선한 것도 되고, 악한 것도 되죠(롬1: 24, 롬 12:1). 반면에 사르크스(육)는 그 속에 있는 죄의 지배(조정)를 받아 하나님의 법을 대항합니당(롬 7:18-25). 쉽게 말하면 죄가 사르크스(육)를 조정하여 죄를 저지르면 소마(몸)는 더러워집니다. 그렇지만 소마(몸)가 영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살아있는 제물이 됩니다.

    2. 하나님 법의 내용

    바울에게 하나님의 법은 tora(율법)를 말합니다.(빌 3:5-6, 롬 11;1) 바울이 생각하는 죄를 알아보기 위해, 율법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율법이 영적이고 거룩하다는 바울의 믿음과 더불어, 율법은 제의적 규범, 사회적 규범, 윤리적 규범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3. 바울을 괴롭힌 죄의 개념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 제의적 규범을 아주 잘 지켰지요(빌 3:5). 게다가 예수님을 알고는 제의적 규범에 융통성을 갖습니다(롬 2:28-29). 따라서 바울은 제의적 규범에 대해서는 자유로웠습니다. 바울은 사회적 규범도 잘 따랐습니다. 당시 사회의 수직적 체계(계급질서, 국가에 대한 복종)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없습니다(롬 13:1-7). 바울은 사회적 규범에 큰 갈등이 없었습니다.

    바울을 괴롭히던 죄는 윤리적 규범으로부터 나올 겁니다. 그 정황이 로마서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경고한 죄들은 과음, 분수에 맞지 않는 행동, 게으름, 상처주는 말, 베풀지 않음, 권세에의 대항, 간음, 살인, 도둑질, 탐심, 낭비, 음행, 방탕, 싸움, 시기 등등입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죄의 개념을 보여줍니다.

    바울이 사르크스(육) 속에 있는 죄에 무력함을 처절히 고백할 때(롬 7:22-24), 사적이거나 인간 본능에서 시작하는 죄의 개념을 갖았을 것입니다. 강박적으로 선교하는 바울에게 편안을 추구하는 사르크스는 죄가 많다고 생각했겠지요. 천막을 치며, 좋지 못한 환경에서 먹고 잘 때, 바울은 좋지 못한 환경에서 힘들어하는 사르크스를 한탄했겠지요. 바울은 결혼도 안 한 사람입니다. 이쁜 여자를 보면 성적 욕구도 일어났을 테구요. 돈이 모자를 때는 돈에 대한 욕구도 있었겠지요. 교회에서 말썽 부리는 사람을 보면, 분노에 차서 패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테구요.

    4. 바울의 소마와 사르크스에 대한 나의 생각

    바울은 소마(몸)와 사르크스(육)를 사용하여, 죄에 지배를 당하는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나를 절묘하게 조화시킵니다. 
    바울의 논리구조는 이원론적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도 아니고, 오히려 동양적 사고를 합니다. 
    저에게 몸(=육)은 하나입니다. 
    한 몸에서 선도 행하며, 악도 행합니다. 
    한 몸(=육)이 본능에도 충실하고, 하나님의 법도 지킵니다. 
    착한 일을 하고 기분이 좋을 때나, 남에게 혼나서 시무룩할 때나, 잘못하고 마음이 두근거릴 때나 모두 내 한 몸(=육)에서 느낍니다.

    인간의 몸을 사르크스와 소마로 나누어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굳이 나누자면, 몸 기준으로 나누지 말고, 과학자들의 말대로 자아를 기준으로 나누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저는 사회적 자아, 유전적 자아, 창조적 자아로 나누고 싶습니다. 
    사회적 자아는 교육과 사회에서 경험적으로 학습된 자아입니다. 
    유전적 자아에는 부모가 내려준 자아로 본능적 자아도 포합합니다. 
    창조적 자아는 사회적 자아와 유전적 자아를 통합하며,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가는 자아를 말합니다.

    바울의 죄 관념에도 부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 본능을 죄악시 합니다.(롬 13:14) 
    그러면서 그 본능을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말합니다.(롬 7:17-18) 
    본능은 자기와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아와 사회를 보존하는 역할도 합니다. 
    인간 몸(=육)이 편하고 싶다는 것은 피곤할 때 평형을 유지하고, 새로운 힘을 비축하도록 합니다. 
    인간이 성적 매력을 느끼는 이유 중에는 후손을 있도록 하기 위함도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과 동일한 본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물에게는 죄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습니다. 
    동물이기 때문에 본능대로 움직이는 것이 정당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 본능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능을 죄라고 생각하는 바울의 이해가 잘못된 것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인간의 몸을 죄를 담고 있는 사르크스와 가치중립적인 소마로 나누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죄에 대한 이해를 굳이 따라갈 필요가 없다. 

    성경에서 몸을 지칭하는 단어는 '소마, 사륵스'로 구분되어 사용되었다. 
    헬라어 '소마'(Soma)는 육체적 몸뿐만 아니라 인격적 구성체 등을 포함하는 의미로 쓰였다. 
    '사륵스'(Sarx)는 육체적 연약성, 영과 대립하는 죄성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몸, 육체, 육신’이라는 세 가지의 단어로 혼용되면서 몸을 지칭하는 ‘소마와 사륵스’의 각각 다른 의미를 구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어느 날 주일, '소마'(Soma)의 의미로 쓰인 대표적인 성경구절인 로마서 12장 1절을 ‘산 제물’(Living sacrifices)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들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롬 12:1).
    'Therefore, I urge you, brothers, in view of Gods mercy, to offer your bodies as living sacrifices, holy and pleasing to God -- this is your spiritual act of worship.'

    로마서 12장 1절에서 거룩한 산 제물(living sacrifices)로 드리라고 하는 '몸'은 우리의 영, 혼, 육을 모두 다 포함한다.

    신명기 6장 5절에서 말하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처럼 ‘나의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몸을 드린다는 것은 나의 전부를 드리는 것과 같다. 우리 인간은 나의 모든 것이 몸 안에 들어있고, 몸으로 존재하며 소통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기쁨과 감격을 표현할 때에도 몸을 사용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몸은 나의 육체, 육신, 껍데기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에 허락하신 삶을 살아가는 나, 그 자체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몸을 드리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 예배'라고 말한다. 우리의 몸이 영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 역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Soma)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한다.

    몸이 악하고 정신, 혼, 영 보다 못한 것이라면 어찌 감히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몸 역시 우리의 영혼육을 모두 포함한 '나'라는 존재 자체를 말한 것일테다.

    나의 관심사와 시간, 나의 애정과, 나의 생각까지, 나의 몸을 드린다는 것은 ‘나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단순히 육체, 껍데기, 썩어 없어질 것, 정신보다 못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그렇게 경히 여기지 않으셨다.

    그분은 직접 피조물을 만드셨고 보기에 좋다 하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의 모든 물질들을 인간에게 좋은 것이라 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몸으로 그것들을 감각하고 누리며 더욱 충만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

    태초에 지으신 의미에서 변질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의미로 되돌려야할 것이다(예술과 영혼 중).

    하나님이 지으신 몸에 대한 원래의 선한 의미를 이분법으로 나누어 비하할 수는 없다. 몸은 논의하기 껄끄러운 대상이 아니라 회복해야 할 대상이다.



    성경에서 가장 유명하거나 중요한 질문은 무엇입니까?

    성경 안에는 많은 질문들이 있습니다. 고대 히브리어와 코이네 헬라어는 구두점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에 얼마나 많은 질문이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사해 사본을 펼쳐 물음표를 셀 수도 없습니다! 어떤 문장이 질문인지를 확인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성경 학자들은 성경에 약 3,300개의 질문이 있다고 추정합니다.

    성경 안에 있는 질문 목록을 완전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다음은 성경에서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질문들을 조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 . . 하시더냐?”(창  3:1)

    이 질문은 성경의 첫 번째 질문이자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제기하는 첫 번째 사례입니다. 사탄은 하와를 유혹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대답합니다. “만지지도 말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그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나무나 열매를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사탄의 질문에 답합니다. 모든 것이 작은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질문하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물리적으로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이 질문은 그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네가 나에게 불순종했다. 네가 원하던 것이 이루어졌느냐, 아니면 내가 말한 대로 되었더냐?”라고 묻고 계셨습니다. 이 질문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데려오려는 목자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후에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눅 19:10).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아벨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시자 가인이 하나님께 한 질문이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사실 외에도, 가인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돌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예, 그렇습니다. 이 말은 형제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항상 알아야 한다는 의미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또 필요한 경우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

    예,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항상 정의를 행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의인을 구하고 심판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이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부당하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그 일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우리의 공의가 왜곡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 일을 허락하신 것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함과 의로우심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의에 관해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욥기 전체에 욥의 아내가 했던 이 질문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온전함을 지켰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반복해서 “네가 무엇인가 아주 나쁜 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네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셨을거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이 욥을 공격하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이용한 것에 관해 책망하십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하나님 한 분만이 완전하시다는 것을 욥에게 상기시켜 주십니다. 또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관해 설명하시며 많은 질문을 하십니다. 다음은 그 중 하나입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 38:4).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욥 14:14)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다면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을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삶이 있습니까? 누구나 어느 시점에서 이것을 궁금해합니다. 예, 죽음 이후에 삶이 있으며 모두가 그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어디에 존재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모든 길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입니까? 어떤 면에서는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은 후에 모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히 9:27). 한 사람이 어떤 길을 택하든 죽음 후에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2).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시 119:9)

    답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면” 말씀이 우리를 죄로부터 지켜줍니다(시 119:11).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것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포함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에 관해 말합니다(벧후 1:3).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 목적을 어떻게 달성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성경은 삶의 의미와 끝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입니다(딤후 3:16-17).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

    정답을 이사야가 말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러나 너무나도 자주 우리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보내세요”라고 대답합니다. 이사야 6:8은 국제 선교와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하나님은 누가 지구 반대편으로 갈 것이냐고 물어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군가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분의 메시지를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가 자신이 매일 만나는 사람들, 자신의 민족, 가족, 이웃, 친구들에게 진리를 선포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용서는 어려운 일입니다. 일곱 번까지 용서해야 하냐는 베드로의 제안은 베드로를 아주 은혜로운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의 용서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많이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골 3:13). 그 사람이 용서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격”은 은혜와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용서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합니다. 그 사람이 용서받을 자격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습니다.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마 27:22)

    이 질문은 예수님의 재판을 위해 무리들이 모였을 때 빌라도가 한 것이었습니다. 무리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며칠 전 무리들의 외침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 21:9). 충족되지 않은 기대와 무리의 압력이 여론을 변화시키는 모습은 놀라운 일입니다. 1세기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사명에 관해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그와 같이 오늘날에도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관해 잘못된 이해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믿음을 버릴 것입니다. 믿음을 나눌 때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며 기독교가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제시해야 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랴 하느냐?”(마 16:15)

    예수님께서 하신 이 질문은 우리가 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좋은 선생님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선지자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설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이 이 질문에 정확한 답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

    한 사람의 목숨이 그 대가라면 그 사람이 무엇을 얻든, 심지어 온 세상이라도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슬프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헛된 것” 즉, 이 세상의 것들입니다. 목숨을 잃는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더 명확한 의미로는 사람이 영원한 삶을 얻지 못하고 지옥에서 영원한 죽음을 경험한다는 말입니다. 온 세상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면, 이 땅에서 살면서도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풍성한 삶을 결코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요 10:10). 솔로몬은 즐거움을 추구하고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전혀 없었지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무익한 것이로다”(전 2:10—11).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8:18)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0)

    본질적으로 동일한 질문에 대해 예수님과 바울의 다른 답을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젊은 부자 청년의 독선적인 생각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그에게 계명에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청년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물질주의와 탐욕이 그 청년의 구원을 방해하고 있다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청년은 자신에게 구주가 필요하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간수가 구원받을 준비가 되었음을 알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선포했습니다. 그 간수는 예수님을 믿었고 온 가족이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였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영적 여정에서 어디에 있는지 인식해야만 그 사람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고 복음을 제시할 시작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4)

    이 질문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니고데모가 한 질문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거듭남이 무엇인지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듭남이란 것이 물리적으로 두 번째 태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이 단어의 전체적인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즉, 거듭남은 완전히 새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서 영적인 생명의 상태로 이동하는 것입니다(요 5:24). 또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고후 5:17). 거듭난다는 것은 기존의 삶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롬 6:1)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엡 6:8).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이 보장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새로운 주인이 생기게 되고 자신을 더 이상 섬기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새 생명 안에서 영적으로 서서히 성장해 갑니다. 은혜는 죄에 대한 허가가 아닙니다. 고의적이고 회개하지 않은 죄는 은혜를 조롱하고 그 사람의 구원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요일 3:6).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실패와 반란의 시기가 있습니다. 죄 없는 완전함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에서 이런 삶의 균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서 반대에 직면할 것입니다(요 15:18). 사탄과 마귀들은 우리를 반대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반대합니다. 세상의 철학, 가치, 우선 순위가 우리를 반대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서 우리는 힘이 들고, 패배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이길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일 5:4).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죽음입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죽음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곳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다른 질문들이 있습니다. 진리를 구하는 자들이 한 질문, 비웃는 자들이 한 질문, 낙담한 믿음의 형제들이 한 질문, 하나님께서 하신 질문들이 있습니다.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대답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십시오.




    사르크스

    세 번째 단어는 사르크스다. 신약성경에서 인간의 몸을 가리키는 단어는 소마와 사르크스다. 소마는 영과 대별되는 인간 속성이라고 한다면 사르크스는 소마의 성격이 있으면서도 단백질로 된 물성으로서의 인간 속성 자체를 가리킨다. 소마는 주로 ‘몸’으로, 사르크스는 주로 ‘육’나 ‘육체’로 번역된다. 신약성경은 소마와 사르크스를 구분할 때가 많지만 어떤 경우에는 서로 혼용하기도 한다.

    기독교 인간론에서 중요한 전통 중의 하나는 심령주의다. 인간의 몸을 낮춰보고 영혼을 높이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볼만한 성경 구절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성경은 인간의 육체를 하나님의 창조로 본다. 따라서 육체 역시 선한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은 모두 ‘보기에 좋았다.’고 하지 않는가. 이 세상에는 보기에 좋지 않은 것들도 물론 있다.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것들이다. 그것마저 하나님의 창조로 보기는 어렵다. 창조의 변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마귀나 사탄은 천사라 타락한 것이라고 말이다. 이런 문제는 신학이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어쨌든지 성경에 다양한 생각들이 들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육체 비하는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태초의 로고스인 예수가 사르크스가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진술은(요 1:14) 혁명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추상이 아니라 물성(物性)을 가리킨다. 인간의 육체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그게 성찬식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빵과 포도주, 빵을 찢고 받아드는 손, 성찬대 앞으로 모여드는 회중들, 바로 거기에 예수가 임재한다. 예수의 성육신과 성찬의 신비는 맞닿아 있다.





    사순절 제1일 / 2월 18일(수) 재의 수요일

    성경을 열어주옵소서(누가복음 24:13-35)

    저희가 서로 말하되 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32절)
    They asked each other, "Were not our hearts burning within us while he talked with us on the road and opened the Scriptures to us?

    διανοίγω Storng number 1272

    1. 열다.  2. 눅 2:23  
    Pronunciation [ dianŏigō ]
    Etymology
    제1부정과거 διήνοιξα, 제1부정과거 수동태 διηνοίχθην,, 1223과 3536에서 유래
    •  1. 열다.
      •  a. [문자적으로] 눅2:23, 행7:56.
      •  b. [상징적으로] [귀를] 열다, 막7:34, 35. [눈을] 뜨다, 눅24:31. [마음을] 열다, 눅24:45, 행16:14.
    •  2. 설명하다, 해석하다, [성경을] 눅24:32. 독립적인, 행17:3.
    • 관련 성경  /  열리다(막7:34,35), 나다(눅2:23), 풀다 (눅24:32, 행17:3), 열다(눅24:45, 행16:14), 밝아지다(눅24:31)

    뜨겁다  
    καίω Storng number 2545

    1. 불붙이다.  2. 등불을 켜다.  3. 마음이 타다  
    Pronunciation [ kaiō ]
    •  1. 불붙이다.
      •  a. [문자적] 등불을 켜다, 켜지다, 눅 12:35, 요5:35, 계4:5, 8:10.
      •  b. [비유적] 마음이 타다, 불붙다, 눅 24:32.
    •  2. 태우다, 불사르다, [수동] 불타다, 요15:6.
    • [기본형] 제1부정과거 ἔκαυσα, 완료 수동 분사 κεκαυμένος, 제1부정과거 수동태 부정사 καῆναι, 미래 수동태 καυθήσομαι, καυθήσωμαι

    • 관련 성경  /  켜다(마5:15, 요5:35, 계4:5), 뜨겁다(눅24: 32), 사르다(요15:6), 불사르다(고전13:3), 불붙다(히12:18), 타다(계8:10, 21:8), 붙다 (계19:20).

    미련하고  
    ἀνόητος, ον Storng number453

    1.  어리석은.  2.  딤전6:9.
    Pronunciation [ anŏētŏs ]
    Etymology
    1[부정불변사]과 3539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어리석은, 미련한, 이해력이 없는.
      • a. [사람에 대하여]. 《반》σο- φός, 눅24:25, 롬1:14, 갈3:1,3, 딛3:3.
      • b.  [사물에 대하여: 명사와 함께] 딤전6:9.
    • 관련 성경 / 미련한(눅24:25), 어리석은(갈3:1, 딤전6:9).
    βραδύς, εῖα, ύ Storng number1021

    1. 더딘.   2. 천천히.  3. 느리게. ταχύς  
    Pronunciation [ bradüs ]
    Etymology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  1. 더딘, 천천 히, 느리게.《반》ταχύς, 눅24:25, 약1:19.
    • 관련 성경  /  더딘(약 1:19). [부] 더디(눅 24:25).

    성경을 풀어주신다는 말씀은 영어 성경(NIV)에서 "opened the Scripture"라고 번역합니다.
    풀어주신다는 말은 열어주신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2026년 사순절을 시작하며 모든 성도들의 눈이 열려져서 늘 읽던 그 말씀들이 일어나서 춤을 추고 거리로 뛰쳐나가는 기쁨을 함께 누려보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이 열릴 때 나타나는 현상을 두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마음이 뜨겁다(눅 24:32)
    둘째는 깨닫는다(눅 24:45)

    마음이 뜨거워진 것은 감동을 받고 새로운 삶을 결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께닫는다는 것은 지식이 지혜로 바뀌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울이란 젊은이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다메섹을 향하여 길을 걷던 중 홀연히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빛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울의 일행들은 빛은 보면서도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성경이 열린다는 것은 문자가 소리로 들려지는 것과 흡사합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성경의 문자가 내 안에서 큰 음성처럼 울립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곧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진다는 것은 영적인 각성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인 각성이 일어날 때 차지도 않았고 뜨겁지도 않았던 믿음이 마치 화산이 솟구치는 것처럼 뜨겁게 치솟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삶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영원한 생명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으로 비로서 영원한 생명의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셨고 알게 하셨으며 믿을 수 있도록 깨우쳐주셨습니다.

    2026년 사순절을 시작하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처럼 마음이 뜨거워지고 문자로 기록된 그 말씀들이 깨달음으로 다가오는 은혜가 풍상하게 임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주여, 내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법을 알게 하옵소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 신 후 네번째 나타났던 사건을 소개한 말씀입니다.
    첫번째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두번째는 막달라 마리아 이외에 여인들에게 나타나셨으며
    세번째는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글로바)에게 나타나셨던 사건입니다.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엠마오의 거리를 25리 대략 11Km라고 합니다.
    한 시간 동안 대략 4Km를 걸어간다면 2시간 30분 정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성경을 열어주소서”는 단순히 책을 펼쳐 달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음과 눈을 열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성경 안에서도 같은 기도가 나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시편 119:18)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누가복음 24: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Then he opened their minds so they could understand the Scriptures.  

    성경이 “열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1. 글자가 의미로 바뀌는 것 
    2. 정보가 계시로 변하는 것 
    3. 지식이 확신으로 바뀌는 것 
    4. 말씀이 나를 읽는 순간이 오는 것

    성경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과 마음이 열릴 때 비로소 살아 움직입니다.

    함께 드릴 수 있는 기도

     
    주님,
    제 눈을 열어 주십시오.
    글자가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지식이 아니라 생명을 얻게 하소서.
    말씀 안에서 저를 만나 주소서. 아멘.  

    성경이 열리는 3단계

    눈이 열림 — “보게 하심” 
    “내 눈을 열어서…” — 시편 119:18  

    핵심  

    1. 글자를 읽는 단계  
    2. 역사· 문맥· 단어의 의미를 이해함 
    3. 객관적 내용 파악

    질문

    1. 이 본문은 누구에게 말하는가?
    2. 반복되는 단어는 무엇인가?
    3. 앞뒤 문맥은 무엇인가?

    이 단계는 ‘지적 이해’의 문이 열리는 단계입니다.

    마음이 열림 — “깨닫게 하심”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 누가복음 24:45  

    핵심 

    1. 정보가 연결됨  
    2. 그리스도 중심으로 보이기 시작함 
    3. 말씀이 나에게 말하는 느낌  

    질문

    1.  이 말씀은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2.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드러나는가?
    3.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 단계는 ‘계시적 이해’의 문이 열리는 단계입니다.  

    존재가 열림 — “변화됨”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 히브리서 4:12  

    핵심   

    1. 말씀에 찔림
    2. 회개 또는 확신
    3. 삶의 방향 전환

    질문

    1. 나는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가?
    2. 무엇을 믿고 순종해야 하는가?
    3.  지금 당장 실천할 한 가지는? 

     이 단계는 ‘존재적 변화’의 문이 열리는 단계입니다.

    한눈에 구조 보기

    읽음 → 깨달음 → 변화 눈 → 마음 → 존재 정보 → 계시 → 생명

    중요한 사실 :

    성경이 열린다는 것은 지식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여시는 사건입니다.

    “성경을 열어주소서”라는 기도는 단순히 책장을 여는 요청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눈을 열고, 존재를 여는 간구입니다.

    성경 속에서도 비슷한 기도가 있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시편 119:18)

    이 고백을 따라, 우리가 바라보는 성경의 장면을 함께 떠올려 보겠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 — 눈이 열리는 순간

    두 제자가 절망 가운데 길을 걸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곁에 오셨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떡을 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열릴 때도 같습니다.
    글자가 정보에서 계시로 바뀌는 순간이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 — 빛으로 열리는 눈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며 살았지만
    빛 가운데서 눈이 멀고 나서야 참된 시력을 얻었습니다.

    성경이 열릴 때는
    때로는 우리의 확신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빛이 들어옵니다.  

    “성경을 열어주소서”의 의미 

    1. 지식을 넘어 계시로
    2. 문자를 넘어 인격을 만나게 하시고
    3. 읽는 내가 말씀 안에서 읽히게 하소서

    성경은 단지 우리가 읽는 책이 아니라 우리를 읽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열리는 세 단계 기도

    말씀 → 성령 → 존재 변화로 이어지는 영적 메커니즘입니다.  

    1단계 : 눈을 여는 기도 (조명, Illumination)

    시편 119:18 /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1. 지식이 아니라  조명(illumination) 을 구하는 단계  
    2. 성경은 정보가 아니라 계시의 책 
    3. 
    성령의 빛이 없으면 글자에 머문다

     기도 예시  /  “성령님, 제 지식이 아니라 주님의 빛으로 보게 하소서.
                           이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보게 하소서.”

    여기서 열리는 것은 이해력입니다.  

    2단계 : 마음을 여는 기도 (수용, Reception)

    히브리서 4:12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말씀은 이미 살아 있습니다.
    문제는 말씀이 아니라 내 마음의 문입니다.  

    1.  방어하지 않기 
    2.  변명하지 않기
    3. 선택적으로 듣지 않기

     기도 예시  /  “주님, 이 말씀이 저를 찌를 때 도망가지 않겠습니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고치겠습니다.”

    여기서 열리는 것은 양심과 의지입니다.  

    3단계 : 존재를 여는 기도 (순종, Embodiment)

    야고보서 1:22 /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말씀이 열렸다는 증거는 감동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1.  작은 하 가지라도 실천
    2.  오늘 적용할 것  한 가지 결정 
    3.  행동으로 봉인하기  

    기도 예시  /  “오늘 이 말씀대로 한 가지를 반드시 행하겠습니다.
                          제 삶으로 말씀을 증명하게 하소서.”

    여기서 열리는 것은 삶의 방향입니다.  

    정리 구조

    단계      열리는 영역 결과
    1. 눈          이해      말씀의 의미가 보임
    2. 마음          양심         회개와 결단
    3. 존재           삶          순종과 변화

    중요한 진실

    많은 사람이 1단계에서 멈춥니다.
    어떤 사람은 2단계에서 불편해서 멈춥니다. 
    그러나 3단계까지 가는 사람만이 말씀이 “열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읽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는 것입니다.

    빛이 프리즘이란 도구를 통과할 때 일곱 가지 영롱한 색갈로 나타나듯이 성경이 열렸을 때 나의 삶이 이 세상에서 무지개처럼 
    아름답게 드러날 것입니다.

    사색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
    사색으로 얻은 진리는 진짜 손발과 같은 것

    '생각’과 ‘사색’의 차이를 아는가? 
    생각은 ‘보이는 것만 보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을 의미한다. 
    시각장애인이 아닌 이상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은 다 보는 게 정상이다. 
    또한 바쁜 세상에 보고 싶지 않은 것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이들이 바로 ‘생각하는 사람’의 특징을 가진 자들이다.

    이와 반면에 사색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을 말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히 설교자들은 ‘사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색보다는 ‘검색’을 주로 한다. 
    ‘사색’을 기독교적 용어로 바꾸면 ‘묵상’이 될 것이다. 
    성경을 읽거나 경건 서적을 한번 읽고는 그걸로 끝내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마음에 와닿거나 유익한 내용들은 계속해서 가슴에 담아두고선 자주자주 생각하고 되새겨야 하는데 말이다. 
    한마디로 ‘깊이 묵상해야 한다’는 말이다.

    책에 나오는 내용들은 ‘내 것’이 아니다. 남이 발견하거나 깨달은 지식이나 교훈을 적어둔 것이기 때문이다. 깊은 묵상과 되새김을 통해 자신이 깨닫고 체험한 내용이어야 ‘권위’와 ‘생명력’이 있다. 자신에게도 ‘확신’을 주겠지만, 다른 이에게도 큰 ‘힘’과 ‘신뢰’를 준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Schopenhauer)의 말이다. 
    “남이 가르쳐준 진리는 의수요, 의족이요. 의치요. 밀랍이나 남의 살로 만들어 붙인 코처럼 다만 너희에게 붙어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사색으로 얻은 진리는 진짜 손발과 같은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진짜 우리의 것이다.”

    세상에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별생각 없이 그저 한 구절씩 읽어나가는 걸 목적으로 하는 이들이 많다. 적어도 성경을 읽으려면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온전히 파악하려는 자세를 갖고 시작해야 한다. 우리말로 대하는 성경 속에 모순이나 오류가 꽤 많다.

    물론 모순과 오류가 없음에도 이해가 가지 않는 구절 또한 적지 않다. 그렇기에 의문을 가지고 깊이 관찰하고 묵상하면서, 궁금증을 발동해서 해결하려는 자세가 꼭 필요하다. 
    로마서 4:2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한 반면, 약 2:21절에서 야고보는 똑같은 사람인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완벽한 모순이다. 사본상의 오류도 아니고 번역상의 실수도 아니다.

    또 어째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열매의 때가 아님에도 열매 없다는 이유로 저주하셨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여러 학자들의 해석이 나왔지만,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는 구절에서 다 박살이 나고 만다. 제철이 아니었기에 무화과나무의 열매 없음에는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열매 없음을 지적하고자 하시진 않으셨단 말이다. 
    이런 의문들이 수없이 많음에도 아무 생각 없이 성경을 읽어나가면 되겠는가?

    성경을 읽을 때는 이처럼 깊은 관찰과 묵상을 발휘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위에서 소개한 것과 같은 의문과 질문들이 터져 나옴을 알게 된다. 그런 물음들이 쏟아져 나와야 남들이 깨닫지 못하는 성경의 진수(眞髓)를 알 수 있게 된다. 묵상이나 질문 없이 지나가거나 주석이나 책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과, 자신이 깊이 묵상하고 관찰해서 궁금해하다가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값지고 소중한 것일지 생각해 보라.

    고린도전서를 읽어나가는데,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 내용이 하나 눈에 띄었다. 
    고전 4:7절의 말씀이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이 구절을 읽고 의문이 생기지 않는다면 문제가 심각한 줄 알아야 한다. 무슨 의문일까? ‘네가 아주 많은 걸 받았는데, 어째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하느냐?’라고 되어 있다. ‘네가 어째서 많은 걸 받아놓고선 받지 않은 것처럼 불평하느냐?’라고 해야 의미가 통하지 않는가? 그렇다. 워낙 욕심이 많은 자여서 남에게 많은 걸 받아놓고도 받지 않은 것처럼 불평한다면 쉽게 이해가 되지만,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한다’는 표현은 도무지 말이 되질 않아야 정상이다.

    ‘불평하느냐’란 말을 ‘자랑하느냐’로 잘못 번역했나 싶어서 원어를 찾아보는데, 전혀 문제가 없는 번역이었다. 그래서 4장 전체를 계속 읽고 고심을 하다가 19절을 통해서 마침내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19절을 보면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의 교인 중 ‘교만한 자들’을 대상으로 7절의 말씀을 전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때문에 고전 4:7절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의역을 해야 한다. “누가 너를 다른 사람과 구별했다고 뻐기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으면서 어찌하여 그분께 받은 것이 아니라 네가 잘해서 얻은 것 같이’ 자랑하느냐?”(계 3:18-20, 신 교수 수정역).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놓고선 그분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잘해서 얻은 것 같이 자랑한다’라는 의미였다. ‘교만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축복임은 놓친 채 자기네가 잘나서 얻은 대가로 자랑했음을 보여준다.

    본 구절을 읽다가 말이 되질 않는다는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가는 이들과, 눈치채서 이모저모로 연구하고 묵상한 이들의 깨닫는 바는 천양지차(天壤之差)가 될 것이다. 이 본문으로 설교문을 작성한다면 그 설교의 내용 또한 하늘과 땅 차이가 날 것이 불을 보듯 훤하다. 묵상의 중요성을 이제야 알겠는가?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정호승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어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 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가는 어둔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그리움 만나 
    얼씨구나 부둥켜안고 웃어보아라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보아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사순절 제2일 / 2월 19일(목) 

    복 있는 사람(시편 1:1-6) 
    시편 1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복된 삶을 증거한다. 

    1-2 /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영적 분별력을 갖춘 사람

    첫째는 해야 할 것
    둘째는 하지 말아야 할 것

    해야 할 것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한다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첫째로, 복 있는 사람은,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을 멀리하는 사람이다. 그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로 묘사된다.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는 거의 동의어이다. 죄인은 악하고 오만하다. 꾀는 생각을, 길은 행위를, 자리는 교제를 나타낸다. 사람은 누구나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악인과 어울리면 악의 영향과 본을 받기 쉽다. 그러므로 성도는 악한 자들을 멀리해야 한다. 잠언 13:20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고 말했다.

    둘째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모세오경을 가리키든지,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모세오경의 율법도, 구약성경 전체도 세 가지를 가르친다. 첫째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이며, 둘째는 구주에 관한 것이며, 셋째는 의롭고 선한 삶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책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게 된다.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은 성경말씀을 규칙적이게 읽고 그 뜻을 항상 음미하는 것을 말한다.

    [3절]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본문은 복된 자, 즉 악인을 멀리하고 성경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나무로서 가장 복된 나무이다. 나무에게 필수적인 물이 풍부하기 때문에 나무로서 걱정거리가 없다. 이 물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과 함께 또 그 말씀 속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감동을 상징한다고 본다.

    이 나무는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다.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나무로서 제구실을 못하는 것이다. 사과나무는 사과를 많이 열어야 하고 포도나무는 포도를 많이 열어야 한다. 예수께서도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우리가 많은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을 교훈하셨다(요 15장). 열매는 성도의 좋은 인격과 선한 행실을 가리킨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 땅에는 때때로 가뭄이 있다. 땅이 가물면 나무 잎사귀가 마르게 되며 심하면 나무가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냇가에 뿌리를 박은 나무는 물 부족이 없고 시드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 시냇가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의 시냇가이며 그것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결코 영적 침체가 없다.

    또 이렇게 경건한 사람의 계획하고 행하는 일은 다 형통할 것이다. 이것은 이미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 교훈된 바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영육으로 복을 누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고 죄짓는 일을 두려워한 요셉과 함께하셨고 그를 형통케 하셨다(창 39:2-3, 23). 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연합하여 계명을 지킨 히스기야와 함께하셨고 그를 형통케 하셨다(왕하18:6-7).

    [4-5절]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 . . .

    본문은 악인 즉 불경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자가 복된 자와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즉 악인은 선한 열매를 맺지도 못하고 가뭄을 타고 범사에 형통하지도 못하다는 뜻이다.

    본문은 악인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말한다. 이 바람은 세상의 풍조나 환난의 바람 등을 가리킬 것이다. 악인은 세상의 풍조를 따라 이리저리 방황하고 또 환난의 때에 매우 당황할 것이다. 그렇지만,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 풍조와 환난 앞에서 든든히 설 수 있다. 잠언 10:25,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시편 125:1,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본문은 또 악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고 말한다. 평안한 때에는 악인과 의인이 별차이가 없어보일지도 모른다. 평시에는 악인도 번창하고 형통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악인은 그 앞에 서지 못하고 그 심판을 감당치 못할 것이다. 잠언 24:16의 말씀대로,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지만,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진다.

    본문은 또 악인 곧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고 말한다. 악인은 죽음과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과 영생을 가진 의인들의 회중인 참 교회에 들지 못한다. 물고기가 땅 위에서 살 수 없듯이, 악인은 참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없고 장차 영광의 천국에도 들어갈 수 없다.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람은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요 3:5). 의인과 악인은 본질상 차이가 있다. 그것은 생명과 죽음, 천국과 지옥의 차이이다.

    [6절]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길을 알고 계신다. ‘인정한다’는 원어(요데아 현재분사)는 ‘알고 있다’는 뜻이다. 길은 행위와 삶을 가리킨다. 의인의 삶은 불경건과 악을 버리고 미워하고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자를 멀리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항상 묵상하고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길을 알고 계신다. 그는 의인의 행위와 삶을 처음부터 또 마음의 깊은 것까지 속속들이 다 아신다(시 139:1-4; 히 4:12-13). 그는 단지 그것을 지식적으로 아시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인정하시고 의인을 사랑하시고 그에게 영생의 복을 주신다. 다윗은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했다(시 16:11).

    그러나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악인의 삶은 하나님을 모르고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뜻을 거슬러 불의와 악을 행하는 삶이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 삶이다. 즉 세상의 유행과 여론과 풍습과 가치관을 따라 사는 세상적인 삶이다.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이다. 그 육신은 늙고 병들고 쇠약하여 마침내 죽을 것이다. 그들이 쌓은 부와 재물은 허무하여 독수리처럼 날아갈 것이다(잠 23:5). 그 재물은 남에게로 돌아갈 것이다(눅 12:20). 또 그 영혼은 지옥에 던지울 것이며 마지막 날 부활하여 영원한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요한복음 5:29,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와 같이, 의인과 악인의 길은 확실히 다르다. 그 둘의 생활목표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생활방식이 다르고 그 결말이 다르다.

    복 있는 자는 악한 자를 멀리하고 성경말씀을 가까이하는 자이다. 우리는 악을 멀리하고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과 친근히 하지 말고, 오직 성경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의로운 교훈대로 살기를 힘쓰자.

    복 있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계절을 따라 좋은 열매들을 맺고 그 잎이 마르지 않고 그 하는 일들이 다 형통할 것이다.

    복이란 자기 분수를 알고 살아가는 것

    (예) 장미가 무궁화가 될 수 없고, 무궁화가 장미가 될 수 없듯이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본분이 있다.
    그 본분을 알고 살아가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자기 분수를 모르기 때문에 자주 다른 사람의 것을 마치 내가 누려야 할 것처럼 착각하므로 고통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었으면 영생의 복만을 붙잡아야 합니다.
    미다스 왕처럼 내가 손으로 만지는 모든 것이 금으로 바꿔지는 것을 기대했기에 마지막에는 그 왕이 사랑하는 딸도 금으로 변화되고 말았습니다.
    금이 좋은 것일지라도 딸만 하겠습니까?
    ​​

    אַ֥שְֽׁרֵי־הָאִ֗ישׁ אֲשֶׁ֤ר ׀ לֹ֥א הָלַךְ֮ בַּעֲצַ֪ת רְשָׁ֫עִ֥ים וּבְדֶ֣רֶךְ חַ֭טָּאִים לֹ֥א עָמָ֑ד וּבְמֹושַׁ֥ב לֵ֝צִ֗ים לֹ֣א יָשָֽׁב׃
    시 1:1 福(복) 있는 사람은 惡人(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罪人(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傲慢(오만)한 者(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Blessed is the man that walketh not in the counsel of the wicked, and standeth not in the way of sinners, and sitteth not in the seat of scorners;

    אֶשֶׁר Storng number 835

    1. 행복.  2. 시 1:1.  3. 2:12  
    Pronunciation [ ’esher ]  
    Etymology  /  833에서 유래
     Old Testament / 40회 사용
    • 1.명사, 남성 행복, 시1:1, 2:12, 32:1, 2, 33:12.
    Grammar Explanation

    연계형 אֲשְׁרֵי, 복수형으로만 쓰임

    • 관련 성경  / 행복한 사람(신 33:29). [동] 복되다(왕상 10:8, 대하9:7, 잠28:14), 복이 있다(시40:4, 단12:12).


    833.  אָשַׁר

    1. 곧다.   2. 직행하다.  3. 성공하다 
    Pronunciation [ ’âshar ]

    Old Testament  / 43회 사용
  • 관련 성경 / 행하다(잠9:6), 기쁘다(창30:13), 복되다 (말3:12, 시72:17, 잠3:18), 인도하다(잠23:19, 사9:16), 도와주다(사1:17), 축복하다(욥29: 11), 다니다(잠4:14), 감사하다(잠31:28), 복을 받다(시41:2). [명] 복된 자(아6:9), 인도자(사3:12).

  • 에쉐르(אֶשֶׁר)

    "아쉬레"

    시편은 1:1에서 복(아쉬레)으로 시작하고 150:6의 할렐루야로 끝을 맺는다. 

    “복 있는 사람은…” 

    하지 않는 것 (분리)  
    악인의 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생각–행동–자리로 내려가는 죄의 흐름을 끊는 사람.    

    하는 것 (집중)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  

    말씀을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삼는 사람.   

    결과 (열매)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으며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함  

    형통은 환경이 아니라 근원에 연결된 상태입니다.   

    복 있는 사람의 본질

    세상적 복 성경적 복
    환경이 좋음           하나님과 연결됨
    문제가 없음          문제 속에서도 뿌리가 깊음
    소유 중심                   존재 중심

    복은 “잘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심겨 있는 상태입니다.

     복 있는 사람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무엇을 하지 않는가?

    복 있는 사람은 먼저 길을 선택합니다.

    1. 악인의 를 따르지 않음 (생각의 방향)
    2. 죄인의 에 서지 않음 (삶의 방향)
    3.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음 (소속의 방향) 

    복은 환경이 아니라 방향에서 시작됩니다.  

    무엇을 하는가?  

    1.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함
    2.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함

    여기서 묵상은 단순한 읽기가 아니라  말씀이 나를 해석하도록 두는 것입니다.  

    어떤 상태가 되는가?

    1.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때를 따라 열매 맺음
    2. 
    잎사귀가 마르지 않음
    3. 형통함 (외적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상태)

    반대로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음

    뿌리가 없기에 흔들립니다.  

    정리 : 복 있는 사람의 본질

    기준           세상의 복        성경의 복
    출발점               상황              관계
    중심               소유               하나님
    지속성               변함           뿌리 깊음
    결과      일시적 만족          존재의 안정


    한 문장으로  /   복 있는 사람은 상황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뿌리내린 사람입니다.

    영적 분별력 (Spiritual Discernment)

    영적 분별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능력입니다.
    단순한 직감이나 예민함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는 내적 빛입니다.  

    성경적 근거  

    요한의 가르침 

    요한일서 4:1  “영들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믿음은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라 분별을 동반한 신뢰입니다.

    바울의 기도

    빌립보서 1:9–10  /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사랑이 더욱 풍성하여
    무엇이 지극히 선한 것인지 분별하게 하시고…”

    분별은 차가운 분석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라는 지적·영적 성숙입니다.  

    히브리서의 훈련 개념

    히브리서 5:14  /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

    분별력은 타고나는 감각이 아니라 훈련된 감각입니다. 

    영적 분별력 vs 감정

    감정 영적 분별
              순간적                   지속적
            상황 의존                 진리 의존
       강해도 틀릴 수 있음          조용해도 정확할 수 있음
           기분의 파도                   성령의 빛

    마음이 뜨거울 수도 있고 차분할 수도 있습니다.
    분별의 기준은 말씀과 성령의 증거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작동하는 영역

    1. 가르침 분별
    – 이 말씀이 복음의 중심(그리스도)에 합한가?
    2. 동기 분별 – 내 행동이 하나님 영광인가, 자아 과시인가?
    3. 상황 분별 – 지금은 말할 때인가, 침묵할 때인가?
    4. 내적 음성 분별 – 이것이 성령의 인도인가, 두려움인가?  

    분별력을 키우는 4단계

    1.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기

    말씀이 기준이 되지 않으면 분별은 감정이 됩니다.

    2. 기도로 내면을 고요히 하기
    시끄러운 영혼은 잘못된 소리를 크게 듣습니다.

    3. 순종의 훈련
    작은 순종이 감각을 예민하게 만듭니다.

    4. 공동체 안에서 확인
    하나님은 개인주의적으로만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중요한 구분

    영적 분별력은
      
    의심 많음 
      비판적 성향  
      예민한 성격이 아니다. 

     진리에 대한 민감함
     성령의 방향성에 대한 감수성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보는 눈 

    영적 분별력 (Spiritual Discernment)

    영적 분별력은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생각, 성령의 역사와 단순한 감정을 구별하는 능력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신앙의 핵심 능력으로 말합니다.

    분별의 기준 –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 히브리서 4:12

    말씀은  생각과 뜻을 드러내고 
                 동기를 비추며 
                 참과 거짓을 가릅니다 

    영적 분별은 느낌이 아니라 말씀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분별의 주체 – 성령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 요한복음 16:13

    성령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마음에 확증을 주시며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감정은 흔들리지만 성령의 증거는 말씀과 일치하며 지속적입니다.  

    분별의 내용 – 무엇을 구별하는가?

    구분 특징
    하나님의 음성 말씀과 일치, 겸손과 사랑을 낳음
    자기 생각 조급함, 자기 중심성
    감정적 충동 상황에 따라 급변
    유혹 달콤하지만 말씀과 어긋남   


    영적 분별력이 자라는 4단계  
    말씀을 지속적으로 읽기 
    기도 가운데 질문하기 
    열매를 관찰하기 (사랑·화평·절제 등) 
    시간을 두고 확인하기

    급한 결정일수록 분별이 약해집니다.
    하나님은 조급함보다 평강 가운데 인도하십니다. 

    분별의 핵심 한 문장  
    영적 분별력은 ‘느낌’이 아니라 ‘말씀에 비추어진 마음의 방향성’을 읽는 능력이다.


    사순절 제3일 / 2월 20일(금) 

    아멘의 신앙(민수기 5:22)  민수기 5:11-31

    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물이 네 창자에 들어가서 네 배로 붓게 하고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게 하리라 할 것이요 여인은 아멘 아멘 할찌니라. 
    May this water that brings a curse enter your body so that your abdomen swells and your thigh wastes away. " " 'Then the woman is to say, "Amen. So be it. 

    아멘이란 단어가 성경 전체에서 60회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한글개역성경의 경우)
    구약에서는 23회
    신약에서는 27회

    아멘이란 단어가 처음 사용된 구절은 민수기 5장 22절

    아멘이란 단어가 마지막으로 사용된 구절은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민수기 5장에서 사용된 아멘의 의미를 소개합니다.

    “의심의 소제” 혹은 "쓴 물의 의식"이라고 불리는 장면으로, 
    남편이 아내의 부정을 의심할 때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 진위를 맡기는 의식입니다. 

    본문의 구조 / 
    “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물이 네 창자에 들어가서 네 배로 붓게 하고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게 하리라…
    여인은 아멘 아멘 할지니라”

    “저주가 되게 하는 물”

     
    제사장이 흙과 물을 섞어 만든 상징적 물 
    하나님의 공의에 맡긴다는 의미 
    마법이 아니라 언약적 판결 상징

    “배가 붓고 넓적다리가 떨어진다”

    히브리어 표현은 상징적·완곡한 표현입니다.  

    “배” → 생명과 태의 상징 
    “넓적다리” → 생식 능력 상징 

    의미는  
    실제로 부정했다면 생식적 저주가 임한다. 
    무죄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이 직접 판단하신다는 구조입니다.  

    “아멘 아멘”의 의미

    여인이 두 번 “아멘” 하는 것은 
    하나님의 판결을 자발적으로 수용한다  
    “그 말이 내게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인정합니다” 
    자신의 결백을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 고백 
    여기서 “아멘”은 단순 동의가 아니라  언약적 책임을 수락하는 선언입니다.

    신학적 의미 / 이 본문은 단순히 저주의 장면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밀한 죄까지 감찰하신다는 것  
    인간의 의심을 폭력으로 해결하지 못하게 막는 장치 
    최종 판결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선언.     

    의심의 소제 (민수기 5장)

    “의심의 소제”는 민수기 5:11–31에 기록된 특별한 제사입니다.
    다른 소제(곡식제사)와 달리 간음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드려졌기 때문에 흔히 “질투의 소제”라고도 불립니다.

    제도의 배경

    상황 

    1. 남편이 아내의 부정(간음)을 의심함.
    2. 그러나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음.
    3. 감정만으로 정죄할 수 없는 상태. 

    이때 하나님 앞에서 공적으로 진위를 가리는 절차가 바로 이 제사입니다.  

    제사의 특징 (일반 소제와의 차이)

    일반 소제 의심의 소제
    기쁨과 감사의 제사         죄 여부를 밝히는 제사
    기름과 유향을 넣음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음
    하나님께 향기                  슬픔과 긴장
    자원적          의심 상황에서 강제적

    유향이 없는 이유
    → 이는 기쁨의 제사가 아니라 죄를 드러내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의 구조

    1. 
    남편이 아내를 제사장에게 데려옴
    2. 보리가루(1/10 에바)를 가져옴
    3. 제사장이 “저주의 물”을 만듦
    4. 여인이 맹세하고 “아멘 아멘”
    5. 물을 마심
    6. 하나님께서 죄 여부를 드러내심

    신학적 의미

    1. 하나님은 감정이 아니라 진리를 판단하신다. 
    사람의 의심은 불완전하지만 판단은 하나님께 속함

    2. 숨은 죄도 하나님 앞에는 드러난다. 
    이 제도는 “은밀함 = 안전함”이 아니라
    “은밀함도 하나님의 영역”임을 보여줍니다.  

    3. 공동체의 거룩 보호

    이것은 개인 처벌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결 유지 목적입니다. 

    복음적 관점에서

    구약에서는 죄가 있으면 저주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마셔야 할 저주의 잔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저주의 물”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분이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영적 적용

    의심의 소제는 단순히 부부 문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마음의 숨은 죄
    하나님보다 사람 눈을 더 의식하는 삶
    드러나지 않았다고 안심하는 태도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라는 초청입니다.  

    “아멘 아멘”의 법적· 언약적 의미 

    배경 /  본문에서 여인은 제사장이 선포한 저주의 맹세에 대해 “아멘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구조적 의미

    층위 의미
           법적 의미 “나는 이 판결에 동의한다”는 공식적 자기 확증
        언약적 의미 하나님의 공의에 자신을 맡기는 자발적 순복
         증언적 의미 하나님을 최종 재판관으로 인정하는 선언
            자기책임             선언  결과가 어떻든 수용하겠다는 법적 책임 수락

    왜 두 번인가?

    히브리어에서 반복은 강조 + 확정입니다.
    “아멘 아멘”은 단순 동의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신약에서 예수께서 자주 쓰신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도
    확정적 선언 구조입니다.  

    왜 보리 가루였는가?

    보리의 상징성

    요소 의미
    가난한 자의 곡식            보리는 밀보다 값이 낮음 → 낮아짐·수치 상징
    첫 열매의 곡식     봄에 가장 먼저 추수 → 드러남의 상징
    짐승 사료           인간 존엄성 훼손의 암시
    기름·유향 없음       기쁨·향기 제거 → 슬픔과 심판의 제물

    이 제물은 영광의 제사가 아니라 수치와 의심을 다루는 제사입니다.

    즉, 보리는 상징적으로 말합니다.   
    “숨겨진 것이 낮아진 자리에서 드러난다.”    

    저주의 물의 상징 구조 분석

    구성 요소

    요소 상징
              거룩한 물      하나님의 임재
            성막의 티끌     거룩한 공간의 증거
        저주를 기록한 두루마리        말씀의 객관성
          물에 씻어 넣음     말씀이 심판으로 작동
                  마심      내면화·내적 판결
    핵심 구조    

    말씀이 기록됨

    1. 그 
     말씀이 물에 녹아 들어감
    2. 
    그 물이 몸 안으로 들어감
    3. 
    죄가 있으면 내부에서 드러남

    외적 심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내면을 판결하시는 구조입니다.

    이 제도는 인간의 증거 부족 상황에서
    하나님을 최종 증인으로 세우는 법정 장치였습니다.  

    오늘날 신앙에 주는 경고

    이 제도는 문자적으로 반복되지 않지만, 그 영적 원리는 여전히 작동합니다.

    핵심 메시지

    1.  
    숨겨진 죄는 하나님 앞에서 숨을 수 없다.
    2. 말씀은 내면에서 작동한다.
    3. 하나님은 억울한 자의 변호자이시다.
    4. 언약 공동체는 거룩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신약적으로 보면,
    우리는 더 이상 저주의 물을 마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저주를 대신 받으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대신 언약의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심판이 아니라 회개의 기회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원리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국 우리 안에서 결과를 낸다.”  

    전체 구조 한눈에 보기

    의심 → 제사 → 맹세 → 말씀 기록 → 물에 녹음 → 마심 →
    죄가 있으면 드러남 / 없으면 보호  

    “아멘”의 본질적 의미

    히브리어 אָמֵן (Amen) 은 어근 ’aman 에서 나오며 의미는 :
    1. 견고하다
    2. 신실하다
    3. 확실하다
    4. 붙들다

    “아멘”은 감탄사가 아니라 존재를 고정시키는 말입니다. 

    성경 속에서 본 존재론적 아멘

    하나님 자신이 “아멘”

    요한계시록 3:14  /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아멘” 그 자체로 불립니다.

    존재의 근거 = 하나님
    하나님은 스스로 참되고 확정된 존재
    그러므로 “아멘”은 존재의 확정성입니다.   

    인간의 아멘 = 존재의 동의 

    민수기 5:22  /  “여인은 아멘 아멘 할지니라”

    여기서 아멘은 단순한 동의가 아니라 언약의 결과를 자신의 존재로 받아들이는 선언입니다.

    아멘은 말이 아니라
    “나는 이 말씀 아래 존재하겠습니다”라는 결단입니다.  

    존재론적으로 본 “아멘”

    아멘은 세 가지 차원에서 작동합니다. 

    1. 인식 차원

    “이 말씀이 참입니다.”  → 진리의 승인 

    2. 의지 차원

    “나는 그것을 따르겠습니다.”  → 방향의 선택  

    3. 존재 차원 (가장 깊은 층)

    “나는 이 진리 위에 존재하겠습니다.” → 존재의 재정렬 

    오늘 신앙고백에서의 존재론적 의미

    오늘 우리가 예배에서 “아멘” 할 때, 그것은:

     감정 표현이 아니라
     기도 끝맺음이 아니라
     설교 동의 표시도 아니라

     내 존재를 말씀 위에 다시 세우는 행위입니다.   

    구조로 정리하면

    단계   의미        존재 변화
    듣기      말씀을 받음          정보 수준
    믿기      진리로 인정         신뢰 형성
    아멘      존재를 맡김         존재의 정렬   

    더 깊은 차원 – 왜 아멘이 신앙의 완성인가?

    고린도후서 1:20  /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러므로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아멘 하여…”

    하나님이 “예” 하신 것을
    우리가 “아멘”으로 받습니다.

    구조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선언 → 그리스도의 성취 → 인간의 아멘 → 존재의 참여

    즉, 아멘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존재적으로 참여하는 문입니다.

    정리 – 존재론적 정의

    “아멘은 진리를 인정하는 말이 아니라 진리 위에 자신을 놓는 존재의 행위다.”  

    아멘의 신앙

    “아멘”은 단순한 종교적 마침말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אָמֵן (아멘)’*은 “확실하다, 진실하다, 신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아멘은 단순한 동의가 아니라 존재를 거는 신뢰의 고백입니다.

    아멘은 “동의”가 아니라 “동참”입니다

    1.  
    하나님 말씀이 옳다는 지적 동의
    2.  그 말씀이 나에게도 적용된다는 수용
    3.  그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단 

    민수기 5장에서 여인이 “아멘 아멘” 할 때 그것은 단순히 “네”가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을 내가 받아들이겠습니다”라는 존재적 서명입니다.

    아멘은 영적 계약 서명과 같습니다. 

    아멘은 믿음의 구조입니다

    신앙의 흐름을 보면 이렇게 됩니다:

    말씀 → 약속 → 믿음 → 아멘 → 삶의 순종

    아멘은 
    1. 믿음의 입술 표현이자
    2. 믿음이 현실로 내려오는 지점입니다. 

    로마서 4장 20절에서 아브라함은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의 삶 자체가 “아멘”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아멘

    요한계시록 3:14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아멘이시라”고 부르십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은 
    1.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
    2. 하나님의 말씀의 실체
    3.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구현

    그래서 고린도후서 1:20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아멘 하여…”

    즉, 하나님이 “예” 하신 것에 우리가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아멘의 신앙과 감정의 차이

    아멘은 감정이 뜨거워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1. 감정은 흔들릴 수 있습니다.
    2. 상황은 바뀔 수 있습니다.
    3. 이해되지 않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멘은 말합니다. 
    “나는 이해보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이것이 존재적 신뢰입니다.

    아멘 이후에 달라지는 3가지
    1. 원망이 줄어듭니다.
    2. 불안이 약해집니다.
    3. 순종이 구체화됩니다.

    아멘은 현실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현실 위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선언입니다.  

    “아멘”의 본래 의미 

    아멘”(히브리어 אָמֵן)은
     확실하다
     참되다
     굳게 서 있다
    라는 뜻을 가집니다.

    어원적으로는 “지탱하다, 신뢰하다”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아멘”은 단순한 마침말이 아니라 존재를 세우는 신뢰의 고백입니다.




    성경 속 “아멘”의 구조

    ① 동의의 아멘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 동의

    • “그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이다”

    📍 민수기 5장에서 여인이 “아멘 아멘” 하는 것은
    → 하나님의 판결에 자신을 맡기는 책임적 동의


    ② 찬양의 아멘

    • 기도나 송영 끝에서 “아멘”
      → “참으로 그렇습니다”

    ③ 존재적 아멘

    신약에서는 더 깊어집니다.

     예수님 자신이 “아멘”이십니다.

    • 요한계시록 3:14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이”

    여기서 “아멘”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
     진리의 최종 확증
     하나님의 신실함의 인격적 구현

    즉,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하나님의 ‘아멘’입니다.  


    어원적 의미 (히브리어 뿌리)

    히브리어 : אָמֵן (Amen)

    어근 : ‘אָמַן (아만)’ = 견고하다, 신실하다, 확실하다

    핵심 의미 
    1. 확실하다
    2. 참되다
    3. 신뢰할 만하다
    4.  굳게 세워지다 

    즉, “아멘”은 단순한 마침말이 아니라 “이것은 확실하다”라는 존재적 확증입니다.   

    구약에서의 아멘 (공동체적 동의)

    대표 장면 

    저주와 축복에 대한 백성의 응답 
    언약에 대한 동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증 

    예시  :  

    신명기 27장 – 백성이 “아멘”으로 응답
    느헤미야 8:6 –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구조

    하나님 말씀 선포
    → 백성의 동의
    → 언약적 책임 수용

    구약에서 아멘은
    “나는 이 말씀을 사실로 받아들입니다”라는 언약적 응답입니다. 

    시편과 예배 속 아멘 (찬양의 확증)

    시편 마지막 구절들에 자주 등장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아멘 아멘” 
    여기서 아멘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확증
     찬양의 결론
     영원성의 동의 

    예수님의 “아멘” (권위 선언)

    신약에서 놀라운 변화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말씀 시작에 “아멘”을 사용하십니다.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헬라어 : ἀμήν (아멘)

    구조적 의미

    구약 →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아멘”
    신약 → 예수님이 말씀 앞에 “아멘”을 붙이심

    이것은 선언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절대적 진리다.”

    예수님은 진리의 근원이심을 스스로 증거하십니다. 

    그리스도와 아멘의 완성

    고린도후서 1:20 /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러므로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아멘 하여…”

    구조 :

    하나님의 약속
    → 그리스도 안에서 “예”
    → 우리가 “아멘”

    여기서 아멘은
     구원의 확신
     약속의 수용
     믿음의 참여 

    계시록에서의 아멘 (존재적 선언)

    요한계시록 3:14
    예수님은 스스로를 이렇게 부르십니다: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이”

    여기서 아멘은 더 이상 응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존재 자체입니다.

    의미 :

    • 그는 진리 그 자체

    • 하나님의 약속의 확증

    • 역사의 결론 

    성경 전체 흐름 요약 구조
    구약: 하나님 말씀 → 백성의 아멘 (동의) 복음서: 예수님의 아멘 → 권위 선언 서신서: 하나님의 약속 → 그리스도 안에서 예 → 교회의 아멘 계시록: 예수님 = 아멘 (진리의 실체)

    존재적 정리

    “아멘”은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진리에 대한 동의
    약속에 대한 신뢰
    언약에 대한 참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확신 

    한 문장 요약 /
    아멘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인간의 신뢰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확증이다.

    “아멘”은 단순한 마침말이 아니라

    존재 전체로 드리는 동의입니다.

    성경에서 “아멘”은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 말씀이 내 삶에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나는 그 위에 서겠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공동체적 동의로,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진실로(아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특히 요한계시록 3:14에서는
    예수님을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 부릅니다.

    즉, 아멘은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서는 자리입니다.

    오늘 당신의 “아멘”은
    어떤 말씀 위에 서 있는 고백인가요?

    아멘.

    히브리어 **“אָמֵן (아멘)”**은
    “진실로”
    “확실합니다”
    “그대로 이루어지이다” 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아멘은 단순한 끝맺음이 아니라 믿음의 서명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동의
    2.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신뢰
    3.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

    특히 고린도후서 1:20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러므로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니라.

    그리고 요한계시록 3:14에서는
    예수님을 “아멘”이라 부르십니다.
    그분 자신이 신실함의 실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당신의 “아멘”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여는 문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아멘은
    감사의 아멘인가요?
    결단의 아멘인가요?
    아니면 붙드는 아멘인가요?


    아멘은 긍정을 나타내는 낱말이며, "정말로 그렇다"라는 뜻이다. 
    기독교 성경과 유대교 성경 전반에 걸쳐 등장한다. 
    아멘은 기도나 찬송의 마지막을 맺는 구절로 자주 사용되며, 예배를 드릴 때나 기도할 때에 동감을 나타내는 방식으로도 사용된다. 
    아멘은 또한 "그렇게 될지어다"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아멘은 영어권에서는 "에이멘"이라고 발음하기도 한다. 
    클래식 음악이나 정형화된 예식, 기도문에서는 "아멘"이라 발음하는 경우가 많으며, 복음주의와 영어 복음성가에서는 에미멘으로 많이 발음한다. 
    한국어에서도 드물게 에이멘이라 발음하는 경우가 있다.

    고대 유대 교회에서는 랍비가 성경의 한 구절을 읽을 때, 성도들이 그 구절을 따라 말함으로써 성서 교육을 베풀었다. 
    그러나 점차 구절을 되풀이하여 따라 말하는 것이 귀찮게 되어 성도들은 "아멘!" 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것이 유대교부터 파생한 기독교까지 그대로 이어져 목사가 설교의 중요한 구절을 말하거나 신부가 기원의 말을 한 뒤에 성도들이 "아멘"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2. 할렐루야와 아멘

    윗마을 목사님이 하루는 아랫마을 목사님의 말을 빌리러 왔다 아랫마을 목사님은 말을 빌려주면서 이런 부탁을 하였는데 이 말은 "할렐루야"하면 달리고 "아멘" 하면 선다는 것이었다.

    윗마을 목사님은 잘 알겠다고 인사하고 말에 올라 할렐루야 하니 말이 달리기 시작하였다. 한참 달리다보니 저앞에 낭떠러지가 보이는데 말을 멈추는 단어가 생각이 안 났다.

    이제 죽었구나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 하고 아멘 하니

    말이 낭떠러지 바로 앞에서 딱 멈추었다. 목사님은 너무 기쁜 나머지

    할렐루야! 하고 외쳤다......

    3. 아멘

    어떤 목사님이 설교 중에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모든 성도들이 “아멘! 아멘!” 했다. 
    그러던 어느날 목사님의 마음에 성도들이 정말 믿음이 있어 아멘을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주일,목사님은 설교를 시작하기 전 무조건 “믿습니까?”라고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모두 아멘이었다. 
    그러자 목사님이 “확신하십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런데 아무도 아멘을 하지 않았다. 
    목사님은 다시 “믿습니까?”라고 물었다. 
    역시 모두 아멘이었다. 
    목사님은 또 “확신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역시 아멘은 없었다.

    “여러분! ‘믿습니까’와 ‘확신합니까’가 무엇이 다릅니까? 
    그리고 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했는데 아멘이라고들 하셨습니까? 
    나는 아직 설교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이다.

    4. 아멘을 잘하는 성도가 공부도 잘한다”

    신경학적음악치료연구소 원장인 차영아 교수는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학교 음악석사, 순천향대학교 교육학 박사 수료,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M.div(영어과정), CBRM 신경학적 음악치료사 전문가 과정 수료 등을 마치고 서울대학교 협력병원 소아청소년 정신과 심리상담사, 전 영동세브란스 근육병 재단 음악치료사 등으로 활동했다.

    차영아 교수는 특히 뇌는 반응을 하고 자극을 줄수록 활성화된다고 설명하며 “교회에서 아멘 잘하는 성도가 뇌도, 신앙도, 건강도 좋아진다.”고 강조했다. 
    뇌는 외부의 자극에 적극적으로 반응할수록 활성화되고 호르몬도 활발히 분비된다는 것.

     

    5. 명약중의 명약 ' 아멘약 '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강하게 지으셨기에 우리 몸은 항상 건강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운동 후 한껏 올라갔던 혈압과 맥박이 정상으로 내려가고 체온이 올라가면 땀을 내서 체온을 올려서 몸이 건강하게 유지되도록 하는 것은, 체내 항상성(Homeostasis)이 몸의 균형을 조절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건강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기쁜 일이 생기면 즐거워하고 보고 싶음 사람을 만나면 반가워하는 그 마음이 바로 정상적인 마음입니다. 우스운 얘기가 나오면 웃고 슬픈 얘기가 나오면 눈물이 나오는 것, 우리의 몸이 이미 건강하기를 원하고 정상을 유지하려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표시입니다.

     6. 아멘약 주세요.

    한번은 황교수에게 어느 부부가 진료를 받기 위해 찾아와서 하는 말이, “박사님, 아멘 약 주세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실제로 아멘 약이라는 이름의 약이 있어서 자기가 그 약을 처방해 줄줄 알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들에게 한 10분쯤 아멘 약에 대해 설명하자 그 부인 입에서 연신 아멘 소리가 났습니다. 그 부인은 심장이 몹시 나빠 수술하기도 어려운 상태였는데, 이 아멘 약 처분을 받고 가서 8일 후에 다시 왔는데 완전 얼굴이 좋아졌고, 아멘 약 덕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부인은 계단을 오르면서도 아멘, 화장실에서도 아멘, 설거지하면서 아멘, 이렇게 3일쯤 계속하고 나니 얼굴에 윤기가 돌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부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분이셨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계속 아멘, 아멘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이 복음으로 여러분 인생 모든 문제가 처리되고 해답을 얻습니다. 아멘'하십시요. 명약 중의 명약이 ’아멘약‘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은 최고의 명약입니다. 이 복음을 받아 먹으십시요. 아멘하십시요. ‘아멘’이라는 이름을 가지신 예수님(계 3:14)은 즉시 치료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즉시 기도하고, 아멘의 삶을 사십시오. 여러분의 고질병이 치료되고 ‘아멘약’의 전도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7. 세 종류의 아멘

    '아멘'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입술로 하는 아멘, 
    마음으로 하는 아멘, 
    행동으로 옮기는 아멘' 이 그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어느 때 '아멘' 하고 소리쳤습니까?
      ⑴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아멘'을 합니다(느 5:13).
      ⑵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기 위해서도 '아멘'을 합니다(고후 1:20).
      ⑶하나님 앞에 축복 받기 위해 믿음으로 '아멘'을 합니다(엡 6:24).
      ⑷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확신할 때 '아멘'을 합니다(계 1:7; 22:20).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아무 일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아멘'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역경 속에서도 '아멘' 하고, 축복 속에서도 '아멘'해야 합니다. 건강할 때도 '아멘'이요, 아플 때도 '아멘'입니다.
      '아멘'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삼상15:22절에서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낳다"고 했습니다. 순종한 다윗은 복을 받았지만, 불순종한 사울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8. 아멘과 순종 ‘포테이토칩’

    뉴욕에 한 레스토랑이 있었습니다. 이 레스토랑에는 그 주변의 나이 드신 까다로운 손님들이 많이 왔는데, 주방장이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라, 때때로 손님들하고 다투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항상 주방장을 불러 놓고 “손님은 왕이다. 절대로 싸우지 말아라. 손님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해 주어라”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한 점잖은 할아버지가 오더니, 감자튀김을 주문했습니다.

    감자를 튀겨 오니까, 너무 두껍다고, 다시 썰어서 튀겨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썰어서 튀겨 오니까, 이번에는 더 얇게 썰어서 튀겨 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몇 번에 걸쳐서 주문을 하니 주방장이 화가 나서 씩씩거렸습니다. 그래도 주인은 옆에서 “순종, 순종, 순종” 하고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하는 수 없이 종잇장처럼 아주 얇게, 한 입에 쏙 들어가게 다시 튀겨서 갖다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손님이 감자튀김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가 먹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그 감자 튀김을 주문했습니다. 그래서 이 레스토랑은 그 감자튀김 때문에 유명해져서 손님이 많이 오게 되었고, 그로 인해 ‘포테이토칩’이라는 새로운 메뉴가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9. 순종과 아멘과 축복

    우리가 성공하고 승리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모님께 순종, 학교에서는 선생님께 순종, 사회에 나가면 직장에서 상사에게도 순종, 국민들은 대통령과 위정자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은 권위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첫째로 믿음의 종교이며 둘째는 ‘순종’의 종교입니다.

    순종이란 믿고 아멘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아무 일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아멘’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역경 속에서도 ‘아멘’ , 축복 속에서도 ‘아멘’, 건강할 때도 ‘아멘’ 아플 때도 ‘아멘’입니다. 특별히 기적의 말씀을 듣고서 ‘아멘’ ,‘축복’의 말씀에 아멘 하는 것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축복과 약속의 말씀을 이루어 주십니다.

     

    10.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아멘 하십시오. 그리고 그대로 따르십시오.

    당신 바로 앞에 있는 난로에 불이 났습니다. 당황한 당신의 눈에 소화기가 보였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소화기 사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불꽃은 계속 오르는데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당신은 소화기에 나온 사용법 설명대로 한 가지씩 따르면 됩니다. 소화기의 어떤 성분이 불을 끄게 하는지, 소화기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런 것들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 불이 난 지금은 그 소화기로 불을 끄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 생기는 크고 작은 많은 문제들, 왜 발생했는지 분석하고 대책을 간구하고, 그 결과 잘 수습될 지 예상해 볼 그럴 여유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대로 따르십시오.

    그 명령들이 적당한 처방인지 확인하고 점검해 보시렵니까? 평온한 때에 하십시오.

    그것이 결정되었다면 그대로 돌격하십시오. 이것이 지금 당장 당신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무슨 뜻이며, 왜 원어 그대로지?


    성경을 읽다 보면, 이상하게도 번역을 거부하는 단어들을 만난다. 수천 년 동안 언어가 바뀌고 제국이 무너져도, 고집스럽게 본래의 발음을 지켜온 말들. 마치 "이 형태를 잃으면 내 뜻도 함께 사라진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할렐루야, 아멘, 임마누엘, 골고다, 에바다…

    당신이 무심코 지나쳤던 이 단어들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남겨두신 언약의 흔적들이다. 그 오래된 소리 속에는, 식지 않은 사랑의 온도가 담겨 있다.

    1. 찬양과 응답의 언어 -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호흡

    성경은 말한다. 인간의 회복은 찬양에서 시작한다고. 첫 단어는 히브리어 할렐루야(הַלְלוּ־יָהּ). "야훼를 찬양하라." 이 명령형 동사는 시편 마지막 장을 열고 닫는 외침이다. 찬양은 단지 기분이 좋아서 하는 게 아니다. 찬양은 방향 전환이다. '나'를 중심에서 내려놓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일이다.

    또 다른 히브리어 아멘(אָמֵן)이다. 흔히 "그렇게 되기를"로 번역하지만, 원어의 뿌리는 "견고하다, 확고하다, 신뢰하다"이다. 그러니까 아멘은 문자 그대로 “그 말이 확고합니다”, “나는 그 말 위에 서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을 믿고, 내 삶을 걸겠습니다"라는 신앙의 고백이요, “주님, 이 말씀대로 살겠습니다.”라는 신앙의 결단이다.

    "평안하세요!"라는 의미로 쓰는 히브리어 샬롬(שָׁלוֹם)은 '온전함, 통합, 조화'를 뜻한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과 다시 같은 숨을 쉬는 상태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6)

    여기 '평강'이 바로 샬롬이다. 민수기의 제사장 축복은 기분 좋은 위로가 아니라 부서진 인간을 하나님의 질서 안으로 다시 끌어안는 행위다. 성경적 샬롬은 삶과 존재의 균열이 치유되는 하나님 나라의 현현이다. 그래서 진짜 의미는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더 가깝다. "당신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온전하게 되기를.", "당신의 존재가 하나님 질서 안에서 다시 하나 되기를.", "하나님의 다스림이 당신에게 임하기를."

    호산나(הוֹשִׁיעָה־נָ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수많은 군중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찬송하며 외친 구원의 환호였다. 시편 118편에서 나온 히브리어인 이 말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절박한 기도이자 메시아 고백의 절정이었다. 이 환호성은 기쁨이지만, 뿌리는 간절함이다. "하나님, 내 힘으로는 더 이상 안 됩니다." 그때 구원이 시작된다.

    2. 임재의 언어 - 오신 하나님, 머무시는 하나님

    카두쉬(קָדוֹשׁ), '거룩'이라는 단어는 흔히 도덕적 의미로 소비된다. 그러나 원어인 히브리어는 "전적으로 구별되다"에 가깝다. 하나님은 조금 나은 인간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존재다. 하나님의 거룩은 겁나서 피해야 하는 불이 아니라, 우리를 정화해 품에 안기게 하는 불이다. 거룩은 금욕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4~45, 19:2) 거듭난 자녀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다.

    임마누엘(עִמָּנוּ אֵ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히브리어인 이 단어는 성경 전체를 하나로 묶는 사랑의 문장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셨다’는 선언이며, 잃어버린 동행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복음의 첫 문장이다. 언제나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실 것이라는 언약을 믿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아람어 마라나타(מָרַנָא תָא). "주여, 오시옵소서(Come, Lord)."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한 번 언급된다. 다른 성경에 비슷한 뜻은 나오지만, 이 단어는 아니다. 마라나타는 초대교회가 예배를 끝낼 때마다 나누던 재림 소망 고백이었기 때문에 번역 없이 음성 그대로 기록했다고 한다. 박해 시대에 서로가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하는 암호 같은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과거 회상이 아니라 미래의 도래를 향한 소망이다.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름도 번역을 허락하지 않는다. 히브리어 엘로힘(אֱלֹהִים)은 복수형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하며, 영적 존재 중 으뜸이며, '충만해서 넘치는' 분이다. 전능하신 분, 창조하시는 하나님(창2:4)을 나타낸다.

    그리고 네 글자로만 표기되는 신비의 이름, 히브리어 야훼(YHWH)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 출 3:14)”로, 존재의 근원, 시간의 근원, 의미의 근원이다. 히브리 원문은 자음만 기록(YHWH) 되었기 때문에 발음이 사라졌다. 유대인들은 너무 거룩하여 발음하지 않았고, 낭독 시 아도나이(주님) 또는 엘로힘(하나님)으로 대체했다. 학자들이 2천 년의 자료를 통해 ‘야훼’로 복원했다. 즉, YHWH를 야훼로 읽는 것은 현대 학문적 재구성이다.

    3. 사랑과 구원의 언어 - 복음의 심장부

    ‘사랑’이라는 단어는 과소비된다. 그러나 성경의 사랑을 뜻하는 헬라어 아가페(ἀγάπη)는 결이 많이 다르다. 하나님의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근원적 사랑. 죄인에게 흘러간 자기희생적 사랑이며, 사랑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존재에게 흘러가는 사랑이다.

    메시아(מָשִׁיחַ)는 예언된 구원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Χριστός)는 그 히브리어 개념을 헬라어로 번역한 표현이다. 두 단어 모두 '기름 부음 받은 구원자'라는 동일한 의미를 담는다. 메시아는 구약의 뿌리, 그리스도는 신약의 열매. 이 두 단어가 연결될 때,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성취가 하나로 만난다. 하나님이 인간의 옷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 그리스도다. 이는 예수님의 직업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성취다.

    헬라어 로고스(Λόγος). '말씀'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요한복음에 등장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 1:14) 말씀이 살과 피를 입고, 창조주가 구세주가 되어 세상에 오신 사랑의 극치다. 개미를 살리기 위해 사람이 개미가 된 격이랄까. 그 로고스가 불러낸 공동체가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다. 헬라어로 ‘밖으로 불러내다’라는 의미의 이 단어는 “밖으로 불러낸 공동체”,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즉, 특정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형성된 존재다. 교회는 하나님이 복음의 휘파람으로 부르신 구원받은 자녀들의 모임이다.

    4. 지명에 새겨진 복음 - 공간에 기록된 하나님의 서사

    지명은 단순한 지도상의 표기가 아니다. 하나님은 때로 장소를 통해 이야기를 쓰신다. '하나님의 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벧엘(בֵּית־אֵל)은 야곱이 사닥다리 되신 예수님을 만난 곳이다. 잠에서 깬 그는 "여기가 하나님의 집(벧엘)이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라고 고백한다. 벧엘은 하나님이 도망자를 찾아오셔서 절망의 자리를 '하나님의 집'으로 바꾸신 곳이다. 인생의 바닥이 '벧엘'이 될 수 있다. '구부러진 곳', '비틀린 곳'을 의미하는 루스에 살던 우리에게 하나님이 오시는 순간, 그곳은 하늘의 문이 된다.

    '떡집, 빵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베들레헴(בֵּית־לֶחֶם). "나는 생명의 떡이라."(요6:35) '생명의 떡' 되신 예수님이 떡집에서 오셨다. 태어난 마을 이름이 '떡집'이라는 게 우연일까? 성경의 모든 지명은 언제나 섬세한 상징으로 채워져 있다. 겟세마네(גַּת־שְׁמָנֵי)는 히브리어로 '기름 짜는 곳, 기름 짜는 틀'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영혼이 눌리고 쥐어짜여 십자가를 향한 순종이 완성된 곳. 신약의 구원은 올리브처럼, 기름은 눌림을 통과해 흘러나온 순종의 향기다(마 26:36). 복음의 가장 깊은 기도는 화려하게 든 두 손이 아니라, 땅에 닿은 이마에서 시작된다.

    골고다(גֻּלְגֹּלֶת)는 히브리어/아람어 계열의 셈어 단어로 '해골의 언덕'을 의미한다. 골고다는 해골처럼 생긴 언덕으로, 사형수들이 공개 처형된 장소였다. 골고다는 죽음의 이미지가 구원의 이미지로 완전히 뒤집힌 공간이다. 구속사는 골고다에서 절정을 이루고,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라는 십자가 마지막 메시지가 울려 퍼진 곳이다. 골고다는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문이 열린 곳이다.

    5. 예수의 음성 - 번역되지 않은 능력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다음의 아람어 세 단어는 번역되지 않는다. 그 말 자체가 능력이기 때문이다. 아람어는 예수 시대 사람들의 '감정의 언어', '심장의 언어'였다. 히브리어가 성전의 언어였다면, 아람어는 삶과 눈물의 언어였다.

    에바다("열리라!", 막 7:34)는 닫힌 귀와 닫힌 마음을 동시에 여는 말이다. 예수님은 데가볼리 지방에서 귀먹고 말 못 하는 사람을 데려와 그의 양 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신 후 말씀하신다. "에바다." 헬라어로 번역하면 기적의 생생함이 사라진다. 예수님의 숨소리, 떨림, 기도의 무게가 담긴 말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달리다굼(막 5:41)는 죽음의 방으로 들어온 생명의 언어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자, 사람들은 "죽었습니다"라고 말하며 포기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은 아이의 손을 직접 잡고 말씀하신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복음서는 이 장면을 헬라어로 번역하지 않고 예수님의 아람어 원음 그대로 보존한다. 왜? 그 음성 자체가 기적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명령이라기보다 사랑의 호출, 부활의 언어였다. 죽음의 방은 생명의 방으로 바뀌었고, 절망의 현장은 소생의 현장이 되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6, 막15:34)는 십자가의 물리적 고통보다 인류의 죄가 만들어낸 절대 고독을 드러낸다.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에서 대신 경험하신 영적 단절의 절규이며, 동시에 시편 22편의 구원 완성을 여는 메시아적 선언이다.

    결론 - 단어가 아니라 복음

    스물한 개의 단어를 따라가다 보면, 한 편의 복음이 완성된다. 할렐루야로 시작해 아멘으로 닫히는 삶. 임마누엘로 시작해 마라나타로 이어지는 시간. 벧엘에서 열린 하늘이 베들레헴에서 내려오고, 겟세마네에서 눌리며, 골고다에서 터지고, 달리다굼과 에바다로 지금 이곳에서 현재형이 된다. 우리가 무심코 말하던 그 단어들은 사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남겨두신 언약의 표식이었다. 우리는 단어를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단어들이 가리키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성경 속 미번역 단어들은 모두 하나의 고백으로 모인다. 하나님, 당신이 하셨습니다. 



    2월 21일(토) 시편 150: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할렐루야(1절)

    1.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찌어다
    2.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찌어다
    3.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찌어다
    4.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찌어다
    5.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찌어다
    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찌어다 할렐루야
    1. Praise the LORD. Praise God in his sanctuary; praise him in his mighty heavens.
    2. Praise him for his acts of power; praise him for his surpassing greatness.
    3. Praise him with the sounding of the trumpet, praise him with the harp and lyre,
    4. praise him with tambourine and dancing, praise him with the strings and flute,
    5. praise him with the clash of cymbals, praise him with resounding cymbals.
    6. Let everything that has breath praise the LORD. Praise the LORD.

    시편 150편은 시편 전체의 마지막 장으로, 성경의 찬양이 절정에 이르는 장면입니다.
    구조는 매우 단순하지만 강력합니다. 

    어디서? → 왜? → 무엇으로? → 누가? → 결론 

    어디서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1절)

     
    “하나님을 그의 성소에서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찬양할지어다” 

      1. 성소
    → 예배의 자리 (땅) 
      2. 궁창 → 하나님의 통치 영역 (하늘) 

     하늘과 땅 전체가 찬양의 공간이 됩니다.
     찬양은 장소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왜 찬양하는가? (2절)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1. 하나님이 하신 일(구원, 역사)
      2.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존재, 성품)  

     찬양은 행동과 존재 둘 다에 대한 응답입니다.

    무엇으로 찬양하는가? (3–5절)

    나팔, 비파, 수금, 소고, 춤, 현악, 퉁소, 큰 소리 나는 제금… 

      1. 관악기 
      2. 현악기
      3. 타악기
      4. 몸(춤)  

     전 존재적 찬양
     영혼만이 아니라, 몸과 감각과 기술 전체가 동원됩니다.

    누가 찬양하는가? (6절)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여기서 “호흡”은 히브리어 네샤마 — 생명의 숨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목적은
    찬양입니다.

     구조적 흐름 요약

    질문 내용
      어디서                성소와 궁창
        왜        행하신 일 + 존재의 위대함
    무엇으로                모든 악기와 몸
      누가           호흡이 있는 모든 자
      결론     할렐루야   

     시편 150편의 위치와 구조 
     시편 150편은 시편 전체(150편)의 마지막 장입니다.
      즉, 시편 전체의 결론이자 절정입니다.

    구조는 매우 단순하지만 강력합니다.

    질문 내용
            어디서?           그의 성소에서,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왜?             그의 능하신 행동과 지극히 위대하심
          어떻게?           나팔, 비파, 수금, 소고, 현악, 큰 소리 나는 제금 등
          누가?                               호흡이 있는 자마다
          결론                                                             할렐루야

     이것은 단순한 찬양 권면이 아니라 우주적 예배 선언문입니다. 

    “할렐루야”의 어원과 의미 
     “할렐루야”는 히브리어 :

    • הַלְלוּ (할렐루) → “찬양하라”

    • יָהּ (야) → “여호와”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명령형 복수 

     개인 고백이 아니라
     공동체적 선포이며
     존재 전체를 향한 부름입니다.  

    신학적 핵심 의미


    존재론적 의미 – “존재의 목적”

    150편 마지막 구절: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여기서 “호흡”은 히브리어 네샤마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불어넣은 생기와 연결됩니다.

     호흡 = 하나님께 받은 존재의 근원

    따라서   숨 쉬는 이유 = 찬양하기 위함

    찬양은 선택적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목적 선언입니다.  

    언약적 의미 – “구속에 대한 응답”

    시편은 출애굽, 다윗 언약, 구원의 역사 위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먼저 행하셨고  백성은 찬양으로 응답합니다.

    이 구조는 신약에서도 이어집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19장은 “할렐루야”로 가득합니다.

    구속의 완성 → 할렐루야  

    예배론적 의미 – “전 존재적 예배”

    150편은 모든 악기를 동원합니다. 
    이는 단순히 음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1. 지성 (이해)
    2. 감정 (기쁨)
    3. 의지 (결단)
    4. 몸 (춤)
    5. 공동체 
    전 인격적 예배를 의미합니다.  

    종말론적 의미 – “역사의 마지막 음”

    성경의 마지막 찬양은 할렐루야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시편도
    신약의 마지막 예배도 모두 같은 단어로 닫힙니다.

    이것은 선언입니다. 역사의 끝은 침묵이 아니라 찬양이다. 

    시편 150편의 점층 구조

    150편에는 “찬양하라”가 13번 반복됩니다. 
    이는 점층적 상승 구조입니다.  
    성소 → 하늘 → 능력 → 위대하심 → 모든 악기 → 모든 존재 
    점점 확장되어 우주 전체가 예배하는 그림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에서의 의미

    “할렐루야”는 단순한 감탄사가 아닙니다. 

    1. 믿음의 선언
    2. 존재의 방향 설정
    3. 구속에 대한 동의
    4. 하나님 주권 인정

    당신이 “할렐루야”라고 말할 때  당신은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중심으로 존재한다.  

    한 문장 정리  

    시편 150편은 존재 전체가 하나님을 향해 열리는 우주적 예배의 절정이며,
    “할렐루야”는 인간 존재의 최종 목적을 선언하는 언약적·종말론적 고백이다.  

    할렐루야의 구조

    할렐루야 (הַלְלוּ־יָהּ)

    • 할렐루 (הַלְלוּ) → “너희는 찬양하라” (명령형, 복수)

    • 야 (יָהּ) → “여호와”의 축약형 (YHWH)

    직역하면  “너희는 야(여호와)를 찬양하라”

    이것은 단순 감탄사가 아니라 공동체적 명령형 예배 선언입니다. 

    어근 : 할랄 (הלל) 
    히브리어 할랄(הלל) 은 매우 풍부한 의미장을 가집니다.

    기본 의미 영역

    1. 
    빛나다, 빛을 발하다
    2. 자랑하다
    3. 찬양하다
    4. 미치다(과장된 행동)

    이 네 가지는 겉보기엔 흩어져 있지만 신학적으로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됩니다. 

    성경에서의 사용 구조 

    1. 빛나다 (to shine)

    • 욥기, 이사야서에서 “빛남”의 의미

    • 어떤 존재가 스스로 드러남

    찬양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행위

    2. 자랑하다 (to boast)

    • 인간은 자신을 자랑할 수 있음

    • 그러나 성경은 방향을 전환시킴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고전 1:31)

    자랑의 중심 이동
    자기 → 하나님

    3. 찬양하다 (to praise)

    시편에 약 100회 이상 사용. 
    시편 146–150편 → “할렐루야 시편”

    여기서 할랄은 예배의 폭발적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4. 미치다 (to act foolishly)

    놀랍게도 같은 어근이

    • 사무엘상 21:13
      다윗이 미친 체 하다 (יתהלל)

    여기서의 뉘앙스는
    “자기 통제를 내려놓은 과장된 행동”  

    신학적 통합 구조

    이제 네 의미를 하나로 묶어 봅시다.

    의미 방향
    빛나다      존재의 드러남
    자랑하다      중심의 선언
    찬양하다      영광의 외침
    미치다      자기 통제의 내려놓음

    결론 /  할랄은 ‘자기 중심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힌 상태’

    존재론적 의미

    할랄은 단순 노래가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 구조의 전환입니다.

    Before :  나는 나를 중심으로 산다.

    After :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산다.

    그래서 할렐루야는 “감정적 외침”이 아니라  존재의 재정렬 선언입니다.  

    왜 ‘미침’의 의미가 포함될까? 

    예 : 다윗이 언약궤 앞에서 춤출 때 (삼하 6장) 
     미갈은 그것을 “체통 없는 행동”으로 봄.

    그러나 다윗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내려놓은 상태

    진짜 할랄은 체면보다 영광을 선택하는 것.  

    할렐루야의 종말론적 의미

    요한계시록 19장에 신약에서 유일하게 “할렐루야”가 등장합니다.

    하늘의 무리가 외칩니다. 
    왜?
    1. 심판이 완성됨
    2. 구원이 완성됨
    3.  하나님 통치가 드러남

     할렐루야는  구원의 완성에 대한 우주적 선언

    정리

    할랄(הלל)은   빛 → 자랑 → 찬양 → 자기 포기로 흐르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할렐루야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의 중심이 되었다”는 공동체적 선언입니다.


    할렐루야라는 용어가 구약에서는 시편에서 23구절에서 사용되었고 신약에서는 오직 요한계시록 19장에서 4구절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할렐루야 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본문에는 할렐루야라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사실 신약성경에서 이 할렐루야라는 단어는 이 요한계시록 19장에만 나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말이 시편에 23회 나옵니다.
    원래 『할렐』이라는 말은 찬양하라를, 『루』는 사실 『유(르)』로서 너희들의를 그리고 『야』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할렐루야』는 너희들의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이 됩니다
    .
    요한계시록 6-18장에서는 마지막 때에 있을, 이 세상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19장에서 이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지나가면서 장면은 땅에서부터 하늘로 옮겨갑니다. 그리하여 하늘에서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광경은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할렐루야 음악회가 전개되고 있는 광경입니다.
    이 음악회에는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 하나님의 종들, 그리고 천천 만만의 많은 천사들이 출연하여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늘의 할렐루야의 의미

    역사의 마지막 때에 하늘나라에서 울려 퍼질 이 할렐루야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네 번 나오는 할렐루야의 의미는
    각각 다릅니다. 즉,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가 네 가지라는 것입니다. 

    첫째, 구원의 할렐루야(계 19: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이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어 가는 때가 가까워 온다는 데 대한 찬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지막 때는 구원이 완성되는 때를 의미합니다. 

    로마서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죄 때문에 지옥으로 가는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던 우리가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죄악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과거적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죄악의 형벌과는 상관없는 자가 되었지만 죄악의 세력과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죄악의 세력과 싸우고 있습니다. 
    죄악과 더불어서 싸우면서 번번이 넘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주님의 모습을 닮아 갑니다.
    이것을 성화(聖化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이루어 나가고 있는 「현재적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이 죄라는 존재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의 성화가 완성되고 영화로운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죄 지을 필요가 전혀 없는 인간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미래적 구원」입니다.
    우리는 죄악의 형벌에 관한 한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죄악의 세력과 싸우는 우리가 죄악과 상관없는 존재로서 인격이 완성되는 것은 마지막 때, 곧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때를 꼭 부정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다니 이 어찌 기뻐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구원이 완성될 그 시간이 가까왔기에 우리가 할렐루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도다(1절).
     
    우리를 구원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서 영광과 능력이 구원과 동시에 강조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세 단어가 다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구원의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가장 놀랍게 드러내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최대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감격과 기쁨을 잊어버리고 살기가 쉽습니다. 
    구원받은 사실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사건이 아닌 것처럼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기적은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기적입니다. 
    그보다 더 위대한 기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구원이라는 기적은 영적인 기적이라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간증을 듣고도 별 감동을 못 받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집회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났다고 하면 기적이라며 대단하게 여깁니다. 
    물론 하나님은 신유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구원이라는 엄청난 기적보다도 더 강조하는 집회가 있다면 이단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베소서 1장과 2장에서 바울 사도가 구원의 영광스러운 사건에 대해 언급한 것에 주목해 보십시오. 아주 감동적입니다.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엡 1:18-20)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보다 더 위대한 기적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그 능력이 우리에게 베풀어진 것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예수님을 부활시킨 그 능력으로 하나님은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죽었던이란 영적으로 죽었던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함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분과의 생동하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기적은 없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구원의 능력보다 위대한 능력도 없고 구원의 선물보다 더 위대한 선물도 없습니다. 이러한 구원을 선물로 받고 그 구원이 완성될 순간을 기다리는 우리가 마지막 날을 바라보면서 해야 할 일은 위대한 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둘째, 심판의 할렐루야(계 19:2-3) 

    그의 심판은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두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17, 18장에서 이 세상의 정치, 종교, 문화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심판이 다 끝나자 할렐루야 하는 찬양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을 통해서 자신의 참되심과 의로우심을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심판 속에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부조리한 이 세상과 역사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질문을 했습니까?
    하나님, 어찌하여 악인들이 잘되고 바르게 살아 보려고 하는 저에게는 이런 괴로움을 주시나요?
    그러나 마지막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정오의 태양처럼 밝게 나타나는 순간, 모든 불의와 불공평과 모순이 사라지고 지상의 모든 악이 심판받을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가 할 일은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밖에 없을 것입니다. 

    셋째, 완성(성취)의 할렐루야(계 19:4)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없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여기에서 아멘의 의미가 매우 중요합니다. 
    아멘이란 무슨 뜻입니까? 신약성경에는 아멘이라는 말이 다른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말씀 가운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자주 말씀하셨는데 거기서 진실로라는 말이 바로 아멘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멘이 기도문에서 쓰이게 되면 그때는 진실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끝마칠 때 우리가 아멘이라고 하는 것은 기도한 내용이 그대를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뜻인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아멘을 했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개인 문제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역사와 사회를 내다보면서,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그러한 열망과 소원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상황은 몹시도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고 구원이 완성되면 이 지상에 이루어져야 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각 개인을 향한 모든 기도를 이루시고 역사를 향한 자신의 뜻을 이루신 그 하나님께 우리는 세세토록 찬양과 경배를 드리면서 할렐루야를 외칠 것입니다. 

    넷째, 섭리(통치)의 할렐루야(계 19: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역사를 다스리셨다는 데 대한 찬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는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완성인 어린양 혼인 잔치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7절).
    어린양 예수님의 예비된 신부는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섭리 가운데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를 예비시키는 일에 중점을 두고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이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교회의 중요성을 종종 과소평가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안목에서 보면 엄청나게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여러 교파로 분열되어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리스도 안에 속한 모든 자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보십니다. 교회를 사랑의 대상으로 보십니다.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 1:21,22).
    맨 위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 다음에 교회가 있고 그 아래에 만물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즉, 부활 승천하신 주께서 교회를 통해서 만물을 섭리하신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통한다는 말은 곧 성도들을 통한다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통해 역사 속에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각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입니다. 하나
    님은 개개인을 쓰시기도 하지만 교회를 자신의 뜻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 여기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다운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주님은 가장 가슴 아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교회다운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교회를 준비시키십니다.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여러 사건과 경험들을 통해서, 교회에 속한 개개인인 우리 성도들을 끊임없이 정화시키십니다. 
    우리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쓰러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모든 과정을 통해서 점점 더 깨끗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점점 더 쓰임받고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다가 마침내는 이 세상에서 그분의 뜻을 이룰 뿐 아니라 모든 과정에서 우리를 다루시는 그 손길을 통해서 주님 앞에 온전한 자로 예비될 것입니다.
    재림하실 때 신랑 되신 주님은 우리 개개인의 혹은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내적인 아름다움, 곧 인격적인 거룩함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7, 8절).

    마지막에 주님이 우리에게서 보고 싶어하시는 것은 바로 의(義) 입니다. 
    우리가 얼마를 벌었고 우리가 얼마나 명예를 얻었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랑 되신 주님 앞에 서는 순간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주님이 원하시는 그 의로움이 우리의 삶 속에 얼마만큼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정결해졌을 때 비로소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거행되게 됩니다. 

    옛날 유대의 결혼에는 세 단계의 절차가 있었습니다. 
    우선 정혼식이 있었습니다. 
    옛날 유대인들에게는 정혼식이 결혼식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어렸을 때 일치감치 배필감을 정해 버립니다.
    그렇게 정해지면 그만이기 때문에 정혼식은 결혼식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혼할 때 반드시 신랑 집에서는 신부 집에 지참금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림의 때를 거친 뒤에 때가 다 차면 일단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리고 다시 신랑 집으로 옵니다. 
    그때 신랑 집에서 잔치가 열리는데 본문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바로 그 단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차를 우리에게도 적용해 봅시다. 언제 우리가 주님과 정혼을 했습니까? 에베소서 1장 4절을 보면 우리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들을 주님의 영원한 신부로 삼을 계획을 창세 이전부터 갖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혼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주님의 신부로 삼으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보
    혈을 흘리게 하셨습니다. 그 흘리신 피가 바로 지참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초림에서부터 재림까지의 시간이 기다림의 때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기다림의 때에 신부는 신랑의 기대에 합당하도록 자기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지금도 약혼 후에 신랑 신부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결혼 때까지 상대방을 위해 정성껏 준비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재림 때까지 하나님 앞에 점점 더 합당한 사람이 되어 가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에베소서에서는 어떻게 설명되어 있는 살펴봅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5-27).
    결혼식장에서 신부 예쁘다는 말에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당사자인 신부가 아니라 신랑입니다. 신부는 신랑의 자랑이기 때문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께서도 교회가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신부로 설 수 있도록 손수 화장품을 제공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도구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말씀으로 자신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여 점점 성화(聖化)되어 그 성화가 완성될 때 교회는 비로소 그리스도와 결혼식을 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기다려집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설레이는 일입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주님 곁에서 그분과 사랑을 나누는 삶이 몹시도 기다려지겠지만,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러한 삶을 이해조차 할 수 없습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다(9절)고 했습니다. 마지막 때가 왔다는 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마지막을 의미하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영원히 교제를 나눌 순간이 찾아온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 때에 할 일은 할렐루야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시편의 마지막 절정 ― 할렐루야 5중 반복의 완전수 구조

    본문 : 시편 146–150편

    1. 문학적 구조: 5편의 “할렐루야” 프레임

    히브리어 원문에서 시편 146–150편은 각 편이 ‘할렐루야(הַלְלוּ־יָהּ)’로 시작하고 끝납니다.

    구조는 이렇게 됩니다:

    시편 시작
    146 할렐루야      할렐루야
    147 할렐루야      할렐루야
    148 할렐루야      할렐루야
    149 할렐루야      할렐루야
    150 할렐루야      할렐루야

    10회 반복 (5편 × 2회)
    그러나 책 단위 구조로 보면 5개의 할렐루야 시편 
    이것은 단순 반복이 아니라 의도된 완결 구조입니다.

    2. 성경에서 ‘5’가 갖는 상징적 의미

    성경에서 숫자 5는 종종 다음과 연결됩니다. 

    율법 (토라) – 모세오경 5권 
    인간의 손가락 5개 → 행위/실천 
    제사 구조의 기본 단위들 

    은혜의 구조 (일부 신학 전통에서 5는 은혜의 수로 해석) 
    5는 “완전한 질서의 단위”를 의미합니다.

    시편 전체는 5권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범위
    1권    1–41
    2권    42–72
    3권    73–89
    4권    90–106
    5권    107–150

    마지막 5권의 결론이
    다시 5개의 할렐루야 시편 
    이는 마치 새로운 토라의 완성처럼 보입니다.

    3. 신학적 상승 구조 (146→150)

    할렐루야는 점점 확장됩니다.

    시편 찬양의 대상 확장
    146         개인의 영혼
    147           이스라엘
    148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
    149          성도 공동체
    150        호흡 있는 모든 것

    그리고 마지막 선언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이는 창세기 창조의 “생기(נשמה)”와 연결됩니다. 
    창조로 시작한 성경은 찬양으로 끝납니다.

    4.  5중 반복 = 종말론적 완성 구조

    5번의 할렐루야는 다음을 상징합니다. 
    고난의 역사 종료 
    탄식의 책 마감 
    심판 이후의 찬양 
    언약의 완성 
    하나님 통치의 확정

    특히 시편 3권(73–89편)에서 가장 깊은 탄식이 나오고,
    마지막은 순수한 찬양만 남습니다.

    구속사의 흐름  / 탄식 → 신뢰 → 회복 → 통치 → 할렐루야 ×5   

    5. 완전수 5의 문학적 봉인 효과

    5중 반복은 히브리 문학에서 “봉인 구조”를 형성합니다. 
    3 = 강조 
    7 = 완전 
    10 = 충만 
    5 = 구조적 완성

    시편은 150편으로 끝나는데,
    150 = 5 × 30

    그리고 30은 성숙과 사명의 수 (제사장·왕의 나이) 
    결국 구조는 이렇게 됩니다:

    시편 전체 (150)

    5권 구조

    5개의 할렐루야 시편

    각각 2회 반복

    완전한 찬양의 봉인

    6. 신약과의 연결

    신약에서 “할렐루야”가 등장하는 유일한 곳은 요한계시록 19장입니다. 
    그곳에서도 4번 반복됩니다. 
    이는 시편의 종말론적 구조를 이어받은 것입니다.

    시편의 마지막 할렐루야 →
    계시록의 하늘 할렐루야로 확장됩니다.  

    결론 : 5중 할렐루야의 완전수 의미

    5중 반복은 단순한 숫자놀이가 아니라,

    시편 5권 구조의 완성
    율법과 연결된 새 창조 질서
    탄식에서 찬양으로의 종말론적 전환
    언약사의 봉인
    피조세계 전체의 합창  

    왜 7이 아니라 5로 끝났는가?

    배경: 시편의 5권 구조

    시편은 의도적으로 5권 구조로 편집되었습니다. 이는 모세오경(토라) 5권과 평행 구조입니다.

    7과 5의 차이

    숫자 상징     방향
    7 창조의 완전성          하나님 중심
    5 언약적 질서        인간 참여 포함

    7은 하나님이 완성하신 창조 질서입니다.
    5는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이루는 언약 구조입니다.

    시편은 “하나님의 창조 완성”을 말하는 책이 아니라
    “언약 백성의 응답”을 담은 책입니다.

    따라서 7이 아니라 5로 끝나는 이유는 
    창조의 완성(7)이 아니라
    언약적 찬양의 완성(5)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율법(5권)에 대한 찬양의 응답 토라입니다.  

    150편의 악기 10종과 숫자 상징

    본문 : 시편 150편

    시편 150편에는 10개의 찬양 명령과 10종의 악기가 나옵니다. 

    등장 악기 요약  
    1. 나팔(쇼파르) 
    2. 비파
    3. 수금
    4. 소고
    5. 춤
    6. 현악기
    7. 퉁소
    8. 큰 소리 나는 제금
    9. 높은 소리 나는 제금
    10. (+ 성소와 권능의 궁창)

    10의 상징

    성경에서 10은
    1. 완전한 질서
    2. 법적 충만
    3. 하나님의 통치 단위

    예 :  십계명,  애굽 10재앙

    150편은 “예배의 십계명”처럼 보입니다.

    10은 통치의 수,
    5는 언약의 수.

    즉  5권 구조 × 10 악기 = 언약 안에서 완전한 통치적 찬양 

    할렐루야와 창조 7일 구조 비교

    창조 구조 : 창세기 1장 
    창세기는 7일 창조로 구성됩니다.

    창조 기능
    1–3일     공간 창조
    4–6일       채움
    7일       안식

    시편 146–150의 상승 구조 
    시편 확장 범위
    146      개인
    147 공동체
    148 우주
    149 성도
    150 호흡 있는 모든 것

    이것은 창조의 역방향 확장과 닮았습니다. 

     창조 : 하나님 → 세계 → 인간
     시편 : 인간 → 세계 → 하나님께 찬양

     창조는 “말씀으로 존재를 부름”
     시편은 “존재가 말씀에 응답”

    결정적 통찰

    창조 7일은 존재의 완성,
    시편 5중 할렐루야는 존재의 목적 완성입니다.

    창조의 마지막은 “안식”
    시편의 마지막은 “찬양”

    안식은 정지,
    찬양은 영원한 운동.

    그래서 계시록에서 다시 울립니다:

    요한계시록 19장 — “할렐루야”

    창조 → 타락 → 구속 → 새 창조 → 영원한 할렐루야 

    세 질문을 하나로 요약하면 

    1.  
    7은 존재의 완성
    2. 5는 언약의 완성
    3. 10은 통치의 완성

    시편은 존재의 목적을 선언하며 끝납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왜 150편에서 ‘호흡(נְשָׁמָה)’이 결정적으로 등장하는가?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히브리어 נְשָׁמָה (네샤마) 는 단순한 숨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창조의 순간과 직접 연결됩니다.

    연결 본문 : 창세기 2장 7절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기서 “생기”가 바로  נְשָׁמָה입니다.  

    신학적 의미

    시편의 마지막 단어는 사실상 “창조의 첫 숨”을 다시 호출합니다.

    구조는 이렇게 됩니다. 

    창세기 2:7 →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음
    시편 150:6 → 그 숨이 하나님을 찬양함
     존재의 시작 = 하나님의 숨
     존재의 목적 = 그 숨으로 찬양
     “존재는 찬양을 위해 숨 쉬고 있다.”

    시편은 탄식과 질문으로 가득하지만,
    결국 숨이 남아 있는 한 찬양이 남습니다.  

    시편 150편은 제사 구조인가, 왕정 구조인가?

    정답은 둘 다이지만, 제사 구조가 더 강합니다.

    제사 구조

    본문은 “성소에서 찬양하라”로 시작합니다.

    성소(מִקְדָּשׁ)
    궁창(רָקִיעַ)
    악기들
    제금 소리

    이는 전형적인 성전 예배 장면입니다.

    특히 역대기에서 레위인들이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과 구조가 유사합니다. 
    그러나 왕정 구조도 있다
    “그의 능하신 행동” 
    “지극히 위대하심” 

    이 표현은 왕의 업적을 찬양하는 고대 근동 찬가 형식과 닮았습니다.

    왕의 전쟁 승리 → 악기 연주 → 공적 찬양

    즉, 하나님은 성전의 제사장이면서 동시에 우주의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150편은 성전 예배 + 왕의 즉위 찬가가 결합된 종말론적 예배 장면입니다. 

    할렐루야의 히브리어 문법 (명령형 복수)의 신학

    할렐루야(הַלְלוּ־יָהּ)를 분석해 보면 
    הַלְלוּ (할렐루) → 2인칭 남성 복수 명령형
     
    יָהּ (야) → 여호와의 축약형

    직역하면   “너희 모두, 찬양하라, 야!”  

    왜 복수 명령형인가?

    1.  
    개인 경건을 넘는다 
    2. 공동체적 응답을 요구한다
    3. 우주적 합창을 요청한다

    시편 146–150의 흐름을 보면  

    처음에는 “내 영혼아”  
    마지막은 “호흡이 있는 모든 자” 
    명령형 복수는 점점 확장됩니다.  

    결정적 통찰

    하나님은 “찬양받으시는 존재”가 아니라
    “찬양을 명령하시는 왕”으로 등장합니다.

    명령은 강압이 아니라 존재의 본래 질서를 회복시키는 선언입니다. 
    마치 창세기에서  “빛이 있으라” 라고 하신 것처럼, 시편 마지막에는 “찬양하라”가 울립니다.  

    세 질문을 하나로 통합하면

    1. 
     숨은 창조의 선물
    2. 성전은 왕의 보좌
    3. 명령은 존재 회복의 선언

    그래서 시편은 이렇게 끝납니다.  

    창조의 숨 → 성전의 합창 → 왕의 명령 → 우주의 찬양



    히브리 예배 동사 7가지 비교 분석

    히브리어에는 “찬양”을 단일 단어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각 동사는 서로 다른 예배의 차원을 나타냅니다.

    동사 히브리어 핵심 의미        예배 차원
     1     Halal (הלל) 할랄      소리 높여 찬양하다             기쁨·선포
     2 Yadah (ידה) 야다   손을 들다, 고백하다         감사·공적 고백
     3 Barak (ברך) 바락   무릎 꿇다, 축복하다             겸손·경배
     4 Shachah (שחה) 솨아흐          엎드리다           완전한 경배
     5 Zamar (זמר) 자마르    악기로 찬양하다           음악적 예배
     6 Tehillah (תהלה) 테힐라       찬양의 노래           공동체 찬송
     7 Todah (תודה) 토다      감사 제사             감사의 헌신


    중요한 관찰
    • 시편 마지막은 Halal(할렐루야)로 끝납니다.

    • 이는 모든 예배 동사의 종합적 결론입니다.

    • 엎드림(Shachah), 감사(Todah), 악기(Zamar)까지 모두 동원한 후
      결국 남는 것은 “찬양하라!”는 명령형 외침입니다.
       

    신학적 결론

    시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은 설명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생은 찬양으로 완성된다.

    고난도, 의문도, 침묵도 마지막 언어는 할렐루야입니다.


    시편 146–150편

      
    “점층적 우주 찬양 구조” 해부  

    시편 146 — 개인의 영혼에서 시작


    구조 핵심
    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2. 통치자 의지 금지
    3. 하나님은 창조주· 정의의 하나님
    4. 가난한 자를 돌보시는 분

    찬양의 범위 /  개인 존재(영혼)

     시작은 “나”입니다.
     신앙은 군중이 아니라 영혼에서 출발합니다.  

    시편 147 — 공동체와 예루살렘

    구조 핵심
    1. 
    예루살렘 회복
    2. 흩어진 자 모으심
    3. 별의 수를 세시는 하나님
    4.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심

    찬양의 범위 / 공동체  언약 백성

      개인에서 → 언약 공동체로 확장

    시편 148 — 하늘과 땅 전체

    구조 핵심

    1. 
    하늘 위에서 찬양
    2. 천사, 해, 달, 별
    3. 바다, 산, 짐승
    4. 왕들과 모든 백성

    찬양의 범위  / 우주 전체

    이제 인간을 넘어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 참여합니다.  

    시편 149 — 구속받은 백성의 전투적 찬양

    구조 핵심

    1. 
    새 노래
    2. 춤과 악기
    3. 성도의 영화
    4. 양날 검을 손에 듦

    찬양의 범위  

    찬양이 단순 감정이 아니라 영적 통치 선포로 상승합니다. 

    시편 150 — 존재하는 모든 호흡

    구조 핵심

    1.  
    하나님의 성소에서
    2. 권능의 궁창에서
    3. 8종 악기 나열
    4. “호흡이 있는 자마다”

    찬양의 범위   

    시작 : “내 영혼”
     끝 : “모든 호흡”  

    점층 구조 시각 도식
    146 나(영혼)
    147 예루살 (공동체)
    148 하늘 + (우주)
    149 구속 공동체의 승리
    150 모든 호흡(존재 전체)

    확장 방향
    개인 → 공동체 → 피조세계 → 구속 공동체 → 전 존재 


    왜 ‘점층적 우주 찬양’인가?

    1.  
    시작은 주관적
    2.  점점 객관적 세계로 확장
    3.  창조 질서 전체를 포함
    4.  구속의 승리까지 포함
    5.  결국 존재 자체가 찬양이 됨  

    시편은 여기서 끝납니다.
    왜냐하면 찬양이 성경의 종착점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적 결론 
    시편 146–150은 단순한 5편이 아닙니다. 

    • 창조 → 구속 → 통치 → 영광

    • 개인 → 공동체 → 우주 → 영원으로 확장되는 종말론적 구조입니다.

    1. 들어가는 말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할렐루야!’ 라는 말을 모두 잘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할렐루야는 히브리어 문장을 그대로 음역한 표현입니다. 우리에게는 참 익숙한 문장이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할렐루야' 라는 말 자체는 성경에서 단 두 권에서만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할렐루야는 구약성경에서는 오로지 시편에서 나타나고, 신약성경에는 놀랍게도 요한계시록에서만 나타납니다. 

    할렐루야가 시편과 요한계시록에만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은 이 ‘할렐루야’ 라는 말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저는 할렐루야 라는 말의 히브리어 동사의 어원과 어근을 분석하고, 이것이 성경에서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 지를 살필 것입니다. 이 짧은 글이 여러분의 찬양생활, 찬양팀생활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2. 할렐루야 문장 분석을 통한 찬양의 맥락(context)

    먼저 할렐루야라는 말의 구성요소를 생각해봅니다. 

    할렐루야는 <할렐루 הַלְלוּ>라는 동사와 <야흐 יָהּ > 라는 고유명사의 합성어로 이루어진 문장입니다. 

    * <할렐루> 라는 말은 사실‘할를루'로 발음하는 것이 히브리어 원어에 더 가깝게 발음하는 것입니다만, 여기에서는 편의상 <할렐루>로 표기하도록 하겠습니다.  

    <할렐루>라는 말은 <할랄 חָלַל>이라는 동사에서 굴절된(변형된) 표현인데, 동사 <할랄> 의 명령형입니다. 즉, 찬양하라! 라는 명령인 것이지요. 동시에 할렐루는 ‘2인칭 복수’ 명령형입니다. 직역하면 “너희는 찬양하라!” 라는 문장이 됩니다. 그리고 이 동사의 목적어인 <야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 야훼의 짧은 형태입니다. 

    그래서 [할렐루-야]는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라는 문장이 되는 것이지요. 

    할렐루야의 배경에는 신앙공동체가 있습니다.

    이 할렐루야 라는 말의 문장을 정확히 해석하면서 알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할렐루야라는 말이 단수 명령형이 아닌 '복수' 명령형 이라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간과하는데요. 그러나 우리가 정확히 보아야할 것은 이 문장이 ‘여호와를 찬양하라!’ 라는 말이 아니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라는 문장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 문장은 예배하는 한 사람이 아닌 공동체를 전제로 한 외침입니다.  그것은 신앙공동체입니다. 성전에 모여 예배하는 ‘예배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는 명령의 외침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개인예배도 있고 삶에서의 예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전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성경의 찬양은 주로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예배와 찬양을 말씀합니다. 

    이러한 신앙공동체의 예배는 중앙성소에서 드려지는 공식적인 예배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전 공동체의 예배는 신약성서에서 교회 공동체의 공적인 주일예배로 이어집니다. 중앙성소에서 드려지는 공식적인 예배가 할렐루야의 맥락임과 동시에 시작인 것이지요. 

    앞에서 할렐루야 라는 말은 구약성서에서는 오직 시편에서만 나타난다고 했는데요. 시편에서 할렐루야를 외치는 사람은 찬양(예배)인도자입니다. 예배 인도자는 성전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 점에서 찬양인도자는 성전에 모인 예배자들을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면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무엇'을 찬양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도 회중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룰 것입니다. 

    3. 할렐루야의 기원

    그렇다면 이제 구체적으로 할렐루야의 동사 원형인 <할랄>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동사 <할랄>의 기본의미는 ‘칭찬하다’ 입니다.  히브리어에 영향을 미친 고대 셈어(semitic) 중에 하나인 우가릿어(Ugarit)에서 할랄은 '외치다(shout)'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런 어원들을 종합해보면, 할랄은 '칭찬'하되 큰 소리로 '외치는' 발화행위를 수반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1) 세속적인 의미로서의 <할랄>

    구약성경에서 할랄동사는 총 146번 나타나는데, 이 동사가 꼭 예배의 맥락에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속적인 의미로도 <할랄>이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이러한 문맥을 통해 <할랄>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 창세기 12장 15절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할랄 הל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 사무엘하 14장 25절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할랄 חלל)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위 두 성경구절은 모두 세속적인 의미로 할랄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한글 성경은 모두 ‘칭찬하다’로 번역하였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두 본문이 모두 사람의 외모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사 할랄이 꼭 사람의 외모를 칭찬하는 데만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잠언 12장 8절에서 칭찬받는 사람은 그의 좋은 센스, 통찰력(insight)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할랄은 사람의 외모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적인 것에도 사용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할랄은 ‘자랑하다’ 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아래의 성경구절이 그 예입니다.

    열왕기상 20:11 

    이스라엘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 같이 자랑하지(할랄 הלל) 못할 것이라 하라 하니라


    2) 종교적(제의적, ritual) 의미로서의 <할랄>

    앞에서 우리는 할렐루야의 어근인 <할랄> 동사가 구약성서에서 세속적인 의미로 쓰이는 용례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할랄> 동사는 대부분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동사는 여호와(야훼)의 이름과 함께 붙어서 할렐루-야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목적어로 여호와가 아닌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할랄의 목적어로 하나님의 행위, 성품들을 나타내는 구절들을 찾아보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무엇'을 찬양해야 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어떤 일'을 찬양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9:24

    자랑하는 자(할랄!)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할랄!)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바로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무엇’을 자랑해야하는 지를 말씀합니다. 3가지인데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정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이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 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랑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헤세드’(חסד)로서, 헤세드는 하나님께서 당신과 언약을 맺으신 백성에게 베푸시는 신실하신 사랑과 은혜를 가리키는 전문용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는 ‘구원하는 정의’(Saving Justice) 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할랄!(자랑)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자랑'하라!

    그런 점에서 <할랄>을  자랑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겠습니다. 할랄을 ‘자랑’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때, 이 문장은 예배 공동체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서도 확장됩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할랄>은 예배 안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향합니다. 

    시 71:15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אוֹדֶה יְהוָה בְּכָל־לִבִּי אֲסַפְּרָה כָּל־נִפְלְאוֹתֶיךָ׃

    시 9:1 내가 나의 온맘으로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당신이 행하신 놀라운 일을 말할 것입니다(!)

    시편에는 자랑이라는 말을 '전하다' 라는 말로도 사용합니다. 즉, 예배 안에서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말하고, 전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자랑’하고 있는가?

    진정한 예배자, 찬양인도자, 찬양팀이라면, 교회 안에서만 찬양하고 우리의 삶 속. 즉, 직장, 사회 속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부끄러워하고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할렐루야가 될 수 있을까요?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찬양은 교회 안에서만 우리끼리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널리 선포하고, 자랑할 때 진정한 할렐루야가 됩니다.

    4. 할렐루야는 종말론적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할랄'이라는 동사 원형이 아닌 온전한 '할렐루야' 라는 표현이 나오는 성경 본문을 찾아봅시다. 시편입니다. 

    할렐루야는 시편에서 24번 나타나는데, 104편에 처음 등장합니다. 104편부터 등장한다는 것은, 할렐루야라는 말은 시편의 5권에 가서야 나온다는 말이 됩니다. 시편은 총 5권으로 된 찬양(기도)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흥미롭게도 시편은 앞부분에는 탄식과 탄원시가 많고, 뒤로 갈 수록 그 비중은 줄어들고, 반대로 찬양하는 내용의 시편이 증가하는 흐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편의 5권부터 할렐루야라는 말이 나타난다는 것은 생각해볼 여지가 많겠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는 비록 탄식할 일이 많고, 탄원할 일이 많겠지만, 마침내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편집의 흐름은 예언적입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경험할 것이고,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기쁨과 환희가 가득해서 찬양이 절로 나올 것이기 때문이지요.

    Ps 112: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Ps 113:1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그러나 할렐루야는 위에서 살펴보았던 것 처럼, 공동체를 향한 명령문(!)입니다. 지금은 탄식과 고난이 가득한데, 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아직(not yet)은 구원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마침내 구원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 확실하기에, 이미(already)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다 보면, 하나님은 그 찬양대로, 그 믿음대로 당신의 구원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할렐루야!는 종말론적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도우심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그 구원을 경험한 것처럼, 그 미래의 구원을 앞당겨 현재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미래에 부를 찬양이지만, 시간을 초월하여 현재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찬양은 종말론적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조금 느낌이 오시나요? 왜 할렐루야가 '시편'과 '요한계시록'에만 나오는지 말입니다.  

    할렐루야(요한계시록 19:1-10)

    구약에는 시편에 약 30여 회 나와 있으나, 신약에서는 지금까지 침묵을 지켜오다가 바로 오늘에야 계시록이 끝나 가는 마지막 부분에 네 번이나 터져 나오고 말았습니다. 
    세상 축제의 절정을 이루는 순간에 불꽃놀이, firework이 터지듯 오늘부터는 축제 분위기가 시작되고 절정에 이르게 되므로 할렐루야가 네 번이나 연발하게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헨델의 메시야 곡을 많이 연주하게 되는데, 이 대곡이 첫 번 연주되게 되던 1759년에 연주를 듣던 자리에 있던, 영국의 유명한 King Georgia가 메시야 곡 중 할렐루야 합창이 나올 때 벌떡 일어났다고 해요. 그것이 유래가 되어 할렐루야 합창이 나올 때는 모두 일어나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게 됐다고 합니다. 오늘도 그 누군가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하여 벌떡 일어나 할렐루야을 외치게 되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할렐루야”란 희랍어 단어는 히브리어 음역으로 라틴어로는 “알렐루야”입니다. 알렐루야, 할렐루야는 같은 말이며, “할렐루”는 너는 찬양하라며, “야”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으로, 즉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란 의미로 활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대로 신약 성경에 유일하게 네 번 나타난 이 할렐루야란 단어가 시편에서는 세상에서 외치는 할렐루야이며, 계시록에 나타난 할렐루야는 하늘 나라에 외치는 할렐루야임을 마음에 두시고 할렐루야가 외쳐진 배경에 대해 소화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던 다섯 가지의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 완성된 구원(1)
    2. 완성된 심판(2,3)
    3. 하나님께 예배(4,5)
    4. 하나님의 통치(6)
    5. 어린양의 혼인잔치(7-10)입니다.

    완성된 구원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1).

    1절에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할렐루야를 외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시점은 일곱 대접 재앙이 쏟아져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들을 대적한 사단의 세력이 완전히 파멸된 상태입니다. 
    그 이상 사단의 유혹이란 있을 수 없는, 즉 지금 승리한 자는 영원한 승리자로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와 천국 천사들과 함께 영생을 누릴 수 있게된 상태인 것입니다. 
    진리를 지키고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집한 연고로 순교 당한 자들도 있고, 그리스도 때문에 많은 눈물과 고통과 가난과 핍박과 조롱과 수치를 당했던 자들이 끝까지 믿음 지켜 왔는데 드디어 세상은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된 순간입니다. 
    뒤를 돌아보며 구원해 주신 역사를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할렐루야를 외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이적의 효과는 길지 못해 한 평생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암이 나았던 기적도 별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고 기적이라고 말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므로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형벌을 받고 예수 믿은 사람은 영원히 살게됨으로 어느 순간에 예수를 믿었던 그 사건은 절대적인 기적이었음이 증명이 될 것입니다. 
    죽을 사람이 영원히 살게 되었다면 기적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면서 까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이 실현되어 있으니 우리가 구원되어 있는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또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이심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죽을 자가 살아났으니 “할렐루야”입니다. 
    이때 외친 할렐루야는 영원한 할렐루야 인 것입니다.

    완성된 심판에 대한 할렐루야입니다(2-3).

    2절에 보니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셨으니, 음녀 때문에 순교 당하고 어려움을 당한 모든 원수를 갚아 주셨으니 감사하여 “할렐루야” 한 것입니다.

    3절에 보니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고 했습니다. 
    불의가, 악이 계속 존재할 줄 알았는데 악의 세력이 멸망되고 형벌의 연기만 하늘로 계속 올라가는 것을 본 구원받은 자들이 악에 승리했던 쾌거를 생각하며 감사, 감사, 찬양하게 되므로 “할렐루야”가 터져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므로 할렐루야입니다(4,5).

    4절에 보니 24장로들과 네 생물이 하나님께 경배한다고 했습니다.

    5절에 보니 하나님께 찬양하라는 음성을 들려줍니다.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이 함께 한 자리에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새 노래로 할렐루야를 합창하게 되니 이 감격 어떠하겠습니까? 
    할렐루야가 터져 나오지 않겠어요? 
    그 많은 수가 질서 정연하게 같은 노래를 부르게 되니 세상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Event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할렐루야입니다(6).

    6절에 보니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라는 환호성이 소개됩니다. 
    민주화를 이루고 잘 살게 하겠다던 많은 대통령들이 최선을 다했다 해도 사람 통치자라는 만족할 만한 유토피아를 가져다주지 못했는데, 이젠 만 왕의 왕이시고 최고의 통치자 하나님이시며 어린양이 되시므로 그 누구도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것이며, 그 어디도 그늘진 곳이 없게 되었으니 할렐루야가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통치하시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이 사람 통치자 사람 왕을 세워달라고 하여 세워진 첫 왕이 사울 왕이었는데 악정을 베풀어 국민들을 못살게 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주님오시기 전까지 유능하다는 인물들 심지어는 사담 후세인, 김일성 같은 독재자들까지 백성들을 괴롭혔는데 하나님이 왕이 되시며 통치하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백성 노릇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첫날부터 아무런 착오 없이 편안하게 살게 해 주시는 나라 그 나라를 보게 되었으니 그 입에서 할렐루야가 나온 것입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대한 할렐루야입니다(7-10).

    계시록에서는 일곱 가지의 복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일곱 가지의 축복은 표현만 다르고, 그 내용은 같은 것이라 해도 될 것입니다. 
    일곱 가지 복 중 넷째 복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가 복이 있다고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 복이 있다고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가 복이 있습니다. 
    7절에 보니 그 아내가 예비 되었다고 되었으며, 그 아내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는데 세 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신랑으로, 성도들은 신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 몸으로서 불가분의 관계를 강조한 것입니다. 
    지상에서 신앙 생활하고 있는 우리 모두는 예비된 신부, 결혼식을 기다리는 신부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식에 신부로서 등장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좋은 신랑 만나려면 열쇠를 몇 개 가지고 가야 한다던데, 주님 신랑, 어린양 신랑은 아파트 열쇠도, 자가용 열쇠도, 지참금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을 나의 신랑으로 나의 구주로 받아드리는 믿음이면 됩니다. 
    돈도, 학벌도, 명예도, 가문도, 키, 뚱뚱함도, 빼빼함도, 인물도 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믿음만 보시겠다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보석으로 꾸미지 아니해도 좋답니다. 
    옳은 행실로 자기를 단장하는 사람이면 된답니다. 
    주님 오실 때 남자도, 여자도, 젊은이도, 늙은 사람들도 신부로서 새 신랑을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할머니들, 멋있는 신랑이 여러분들을 신부로 맞아들이겠다니 살맛 나지 않아요? 
    우리 집 아내는 늘 남편 잘 못났다고 억울해 하는데, 인간 남편 말고 주님 남편 맞아드리는 때가 곧 옵니다. 
    고생 조금만 더 하면 됩니다. 
    결혼식에 신랑, 신부 서있으면 정말 아름답지요? 
    그런데 주님 오실 때 세상에서 구원받은 수많은 성도들이 늙고 젊고 구별 없이 아름다운 의로운 행실로 꾸민 사람들의 신랑을 맞는 신부 마음으로 주님 영접하러 모여있는 모습이니 멋쟁이 신랑 맞는 신부, 할렐루야가 나오지 아니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복된 소망을 갖고 어려워도 참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그 잔치에 꼭 참예하여 영원히 행복한 생활을 하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 오셨을 때 구원받은 자들이 눈물, 근심, 걱정, 아픔, 배고픔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입성하여 할렐루야 하는 그 환호를 생각하며 세상에서 원수갚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 원수 갚아 주실 것을 믿고, 참아왔는데, 주님 오셔서 철저히 원수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벌 줄자를 벌주는 것을 직접 보면서 공평하신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들을 연상해보며, 하나님이 왕 되신 나라에서 살며 천국에 온 모든 성도들이 한 목소리로 새 노래한 것을 연상하며, 그 성도들이 신랑을 맞는 신부같이 기쁨으로 주님 영접하며 신랑의 대우를 받는 장면을 연상하며, 그 구원의 자리에 그 예배의 자리에 하나님 통치하시는 나라에 주님이 신랑 되신 혼인집 잔치에 초청되도록 세마포 옷, 즉 의로운 행실을 가지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복된 자리에 다 초청되는 할렐루야 “할렐루야”로 연발하는 성도들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הַ֥לְלוּ יָ֨הּ ׀ הַֽלְלוּ־אֵ֥ל בְּקָדְשֹׁ֑ו הַֽ֝לְל֗וּהוּ בִּרְקִ֥יעַ עֻזֹּֽו׃
    시 150:1 할렐루야 그의 聖所(성소)에서 하나님을 讚揚(찬양)하며 그의 權能(권능)의 穹蒼(궁창)에서 그를 讚揚(찬양)할지어다
    Hallelujah! Praise God in his sanctuary; praise him in the firmament of his power.

    הָלַל Storng number1984

    1. 명백해지다.  2. 빛나다.  3. 과시하다  
    Pronunciation [ hâlal ]

    할렐루야(Hallelujah)

    히브리어로는 ‘할렐루야흐’, 헬라어로는 ‘할렐루아아’로 (너희들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라틴어 읽기에 따라서는 ‘알렐루야’로 발음되기도 합니다. 
    예배 때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북돋우어 내어지르는 소리입니다. 
    즉, 하나님꼐 대한 감사와 경배의 외침으로 사용된 일종의 감탄사입니다. 
    이 말은 시편 104-106, 111-118, 120-136, 146-150편 등에서 사용되었는데, 이들 시편을 ‘할렐시’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3대 절기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에는 할렐시가 정기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성경

    그 중에서 유월절에 사용되는 시편 113-118편은 ‘애굽시편’이라고 불리는데,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또 ‘대할렐’이라 불리는 시편 120-136편(혹자는 135-136편만)은 여호와 하나님의 돌보심을 노래하고, ‘성전에 올라가는 시’라는 부제가 붙은 시편 120-134편은 성전에서 매일 아침 제사 지낼 때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신약성경

    신약성경에서는 세상 마지막 때에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사탄의 세력이 심판을 받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베풀어지는 때에 승리한 큰 무리가 구원과 영광과 능력의 하나님을 향하여 크게 외쳐 부를 때 ‘할렐루야’가 언급됩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시편 낭독의 호렴구로, 교회 절기에서, 기쁨이나 감격을 표현할 때 여전히 즐겨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할렐루야는 무슨 뜻입니까?

    헨델의 메시아, “할렐루야 합창곡”에서 나오는 할렐루야가 가장 우리에게 친숙합니다. 
    할레루야는 히브리어로 “야훼를 찬양하다”는 뜻입니다. 
    요즘 말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합니다.

    할렐루야라는 단어는 요한계시록 19장에서 허다한 무리가 하나님께서 직접 임재하신 보좌 앞에 모인 하늘나라에서 사용됩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입니다. 하나님의 대적은 몰락했고 복음이 승리했습니다.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하늘나라 전체가 찬양합니다. 모든 거룩한 자들이 모여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하나님의 대적에 대한 의로운 승리(요한계시록19:1-3)와 그분의 주인되심 (4-6절), 그리고 그분의 자녀들과의 영원한 교제(7절)에 대해 이러한 영광스러운 찬양을 퍼붓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렁찬 찬양과 찬송의 소리는 압도적이어서 사도 요한은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신랑과 교회인 신부를 위한 결혼 잔치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기쁨이 어마어마하여 오직 “할렐루야”만이 그 기쁨의 장려함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헨델의 할렐루야 합창이 제 아무리 웅장할 지라도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고 찬송하는 하늘나라의 합창에 비하면 한없이 미약할 것입니다.

    Old Testament / 

  • 관련 성경 / ☞비치다(욥29:3), 자랑하다(시10:3, 44:8),찬양하다(시119:164, 느12:24), 찬송하다(사62:9, 스3:10), 칭찬 받다(삼하14:25, 잠31:31), 송축하다(대상16:36), 칭송하다(대하30:21), 칭찬하다(창12:15), 우매하다(전7:7), 미치다(전2:2), 찬송 받다(삼하22:4, 시18:3), 유명하다(겔26:17), 빛나다(욥31:26), 발하다(욥41:18), 내다(사13:10), 자랑하다(시49:6,잠25:14), 달리다(렘46:9). [명] 오만한 자(시5:5, 75:4), 찬송(대하23:13), 어리석은 자(욥12:17), 노래(시78:63).

  • ​축하해 줄 때 쓰는 말로써 “축하합니다”“얼마나 행복하십니까”“참으로 기쁘시겠습니다”“아주 잘됐습니다”“복도 많으셔” 라는 뜻으로 쓰임.

    구약에 45회 나오는 이 단어는 세 가지로 쓰이는데 

    1. 번영을 누리거나 자식을 많이 둔 사람에게(8회)
    2. 성도가 물질의 복을 향유할 때(31회 사용)
    3. 물질이나 자식의 소유에 관계없이도 하나님의 법도 안에서 올바로 처신 할 때 사람들은“아쉬레” 하고 축하해주었다고 한다.(6회).

    ​70인역에서는 아쉬레를 마카리오스(makavrio")라고 번역했는데 주님은 산상수훈 팔복에서 이 헬라어 마카리오스를 8회 사용하셨습니다.

    아쉬레 - "당신은 복둥이" 라는 의미

    ​오늘은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시편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 시편 전체의 서론이며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시편 1편과 2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복 있는 사람' 또는 '복된 사람'이라 하시는지, '복된 사람'이 행할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시편'은 성경 전체의 핵심이다

    탈무드에서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5권의 율법서를 주었고 다윗은 5권의 찬양을 주었다고 하며 시편을 유대인들이 가장 중시하는 '토라(창, 출, 레, 민, 신)'에 비교합니다. 
    이는 시편이 내용적으로도 단순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개인적인 기도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핵심적인 내용과 구약의 역사, 공동체 삶의 방향과 내용을 충실하게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구약의 본문을 인용할 때 이사야(419번)와 함께 시편(414번)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편은 총 150편으로 되어 있는데 세부적으로 보면 5권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1권은 1편~42편, 2권은 42편~72편, 3권은 73편~89편, 4권은 90편~106편, 5권은 107편~159편입니다. 
    시편은 형식과 내용에 따라 찬양시, 탄식시, 감사시, 토라(말씀)시, 제왕시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구성은 그냥 마구잡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권별, 편별로 그 내용이나 저자 등을 고려해 위치가 정해진 것입니다. 
    시편은 앞부분이 탄식의 간구에서 점점 적들과의 상황에서의 구원에 대한 간구로 진행되다가, 감사 찬양으로 전개되어 갑니다. 
    특별히 시편 150편의 마지막을 '할렐루야(여호와를 찬양하라)'로 마치는 것은 전능자이시고, 창조자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마땅한 고백과 확신과 감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시편 1편'의 독특성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편의 위치와 내용은 독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은 그냥 우연히 150편 시편 중에 첫 번째로 배치된 것이 아닙니다.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이고 핵심 내용입니다.

    ​우리가 시집이나 찬양집을 발간할 때 편집자는 가장 첫 편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할 것입니다. 
    대체로 첫 편은 그 시집이나 찬양집의 내용을 포괄하는 것이나 개인이나 단체에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한 것을 넣을 것입니다. 
    시편 1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을 편집한 사람들은 깊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가장 먼저 넣을 시를 정했을 것이고 그 가운데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시편 1편이 시편의 서론이고 핵심 내용이라는 것은 시편이 성경 전체의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는 것을 참작하면 시편 1편이 성경 전체의 서론이고 핵심이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시편 1편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편 1편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시편, 아니 성경 전체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결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1편과 2편의 '아쉬레'

    그런데 시편 1편은 시편 2편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편 1편과 2편은 원래 하나의 시가 2개로 나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시편 1편과 2편에 3편부터 붙여져 있는 특정 '표제'가 없는 것에서도 알 수 있고 특정 단어로 두 시가 'Inclusio(수미쌍관)' 되어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내용적으로도 일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 시편 1편 1절에 있는 '복 있는 사람'은 히브리어로 '복되도다!' 또는 '얼마나 복된 지' 등의 일종의 감탄사 같은 말인 '아쉬레'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편 1절은 
    "복되도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 사람", 
    "복되도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의 의미이며, 
    또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은 얼마나 복된지"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쉬레'가 시편 2편의 마지막인 12절에도 등장합니다. 
    우리 성경에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고 한 것이 바로 '아쉬레'입니다. 
    즉 시편 1편과 2편은 '아쉬레'라고 하는 단어 사이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시편 1편과 2편은 '아쉬레' 즉, '복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며 바로 이 하나님 앞에서 '복된 사람'에 대한 내용이 시편 전체의 내용이고 성경 전체의 내용이며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뜻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가 복된 사람이 되어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과 민족과 국가에 복을 나누어 주는 복의 근원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창 12:2~3).

    '아쉬레'는 '하가'하는 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을 어떻게 받고 누리고 사는지 알고 싶으십니까? 오늘 시편 1편과 2편이 설명하는 '아쉬레(복된 사람)'에 대해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어떤 사람이 복된 사람이고 우리가 어떻게 복을 받고 누리고 살 수 있는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시편 1편 1절은 "복된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앉은 자"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어찌 그렇게 악인, 죄인, 오만한 자들이 많은지요. 악한 자들은 우리를 밤낮으로 꾀어 함께 속이고 불법을 하는 자로 살기를 요구합니다. 우리로 죄인의 길에 서게 함으로 '너도 똑같은 놈이야. 그러니 닥치고 있어, 시키는 대로 해, 좋은 게 좋은 거야' 라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보다 높아진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우리를 눌러앉게 합니다.

    ​시편 1편 2절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만이 이런 악인, 죄인, 오만한 자에게서 벗어나 '복된 사람'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알다시피 '토라'입니다. 이것은 시내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고 이를 지킴으로 제사장 나라요, 하나님 백성 삼겠다고 하신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이렇게 주신 율법을 지킴으로 노예이고, 죽을 수밖에 없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백성과 다르고, 가나안 족속과 다른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넓게 보면 오경(창, 출, 레, 민, 신)이고 좁게 보면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하가 1 - 읊조리다

    이 '토라'를 밤낮으로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묵상'은 히브리어로 '하가'입니다. '하가'라는 단어에 있는 여러 가지 뜻을 살펴보면, 복된 사람이 되기 위해, 아니 이미 복된 사람이 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묵상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가'의 첫 번째 뜻은 '읊조리다'입니다. 단지 마음으로 음미하거나 명상하듯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뜻을 음미하며 낮은 소리로 반복적으로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 동서고금 책을 읽을 때 눈으로만 읽지 않고 소리를 내어 읽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책 읽기)'라는 프로그램이 유행인데 렉시오 디비나는 뜻을 음미하며 소리 내어 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반복해서 읽는 것은 중요합니다. 
    성경 말씀 각 단어나 각 절, 권, 나아가 특정 주제에 대한 신학적인 뜻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성경 말씀 자체에 대한 각 책의 줄거리와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용도 모르는데 뜻과 의미를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경은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책이 아닙니다. 시간을 내서 읽어 보면 그 내용과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책이 두껍고 여러 권이다 보니 쉽게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다독입니다. 여러 번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서백독이면 의자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책을 백 번 읽으면 뜻이 스스로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성경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내용을 이해하는 데 좋습니다. 최소한 신앙 연수만큼 읽어야 합니다. 읽을 때 속으로 읽다 보면 잡생각도 많이 나고 졸리기도 하니 소리 내서 읽거나 여럿이서 읽는 것도 효과적입니다.

    ​'아쉬레', '복된 사람'은 말씀을 밤낮으로 틈만 나면 읽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읽다 보면 이해가 되고 힘이 나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을 밤낮으로 '읊조리는 것'은 '복된 사람'이 되는 길이며 사는 방법입니다.

    하가 2 - 으르렁거리다

    뜻밖에 '하가'의 두 번째 뜻은 '으르렁거리다'입니다. 이는 맹수가 사냥감을 앞에 두고 으르렁거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으르렁거리며 읽는다는 것은 전투하듯이 치열하게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큰 소리로 처절하게 읽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낮은 소리로 읊조리지만 읽는 태도나 자세가 마치 전쟁터에 나간 군사와 같고 먹을 것을 앞에 둔 맹수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은 '복된 사람'이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의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1절에 이미 등장한 것처럼 '악인', '죄인', '오만한 자'들이 득실거립니다. 그들은 조용히 자기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의인'들을 공격하고 함께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기를 사자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듯이 합니다.

    ​그래서 시편 1편과 연결된 시편 2편은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고…세상 군왕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는 자를 대적(시 2:1~2)"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의인'들이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리고 부수어야(시 2:9)"한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전쟁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터의 한가운데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 이하는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이 땅 가운데 우리에게 닥쳐오는 싸움을 위해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흉배),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등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방어 무기입니다. 유일한 공격 무기는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갖 악인, 죄인, 오만한 자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로 이끄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맹수가 먹이를 포획할 수 있는 강한 발톱이며 이빨입니다.

    하가 3 - 경영하다

    '하가'의 세 번째 의미는 한걸음 여기서 더 나갑니다. 시편 2편 1절은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라고 하는데, 이때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 개역개정에서 '꾸민다'로 번역한 말을 예전 성경 개역한글에서는 '경영하는가'라고 번역했습니다. 꾸민다, 경영한다, 이 단어가 바로 '하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내 삶과 상관없이 그저 음미하고 반복해서 읽고 으르렁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읊조리고 으르렁거리는 것은 내 삶의 구체적인 현실에 대해, 내가 닥친 문제에 대해, 내 직장 속에서, 내가 고민하는 어떤 선택의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경영하고 일을 꾸미는 것입니다.

    말씀에 길이 있고 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삶과 관계없이 그저 무슨 경전 읽듯이, 주문 외우듯이 읊조리는 것이 아니라 한 말씀 한 말씀이 내 삶의 현실과 직결되어 길이 되고 답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고 묵상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의인'이며, 그런 사람이 '복된 사람(아쉬레)'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같이 형통한다는 것입니다(시 1:3). 그런 사람을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는(시 1:6)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리고', '으르렁거리고', '경영'하며 '하가'하는 '복된 사람(아쉬레)'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진정한 '아쉬레'의 비결

    그러나 시편 1편과 시편 2편이 하나의 시편인 것을 고려해 연속해서 읽으며 묵상해 보면 '아쉬레(복된 사람)'가 단지 개인적으로 '하가(묵상)'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시편 1편과 달리 시편 2편은 그 범위를 개인에서 국가로, 국제적으로 확장시킵니다. 시편 2편은 이방 나라들과 민족들이, 그들의 군왕과 관원들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받은 자를 대적해 그의 통치를 벗어나겠다고 선언하며 시작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세운 왕을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우겠다(시 2:6)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자를 '내 아들'이라 칭하고 '내가 낳았다'고 선언하십니다(시 2:7). 그리고 그에게 이방 나라를 유업으로 주사 땅끝까지 이르게 하고, 대적자들을 철장으로 질그릇같이 부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행 13:33), 예수님이 천사보다 위대한 분이라는 것을 선언할 때(히 1:5), 예수님이 진정한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심(히 5:5) 등에 적용해 인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마지막 때에 예수님의 위대한 통치를 성취함에 대한 선언(계 12:5, 19:15~16)에 인용됩니다.

    '기름 부음받은 자', '아들'이 누구입니까? 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입맞춤으로 순종함으로, 완전히 항복함으로 '아쉬레(복된 사람)'가 되고 '의인'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아쉬레(복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리고 으르렁거리고 경영하며 '하가(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쉬레(복된 사람)'입니까? 기름 부음받은 자,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항복함으로 순종하며 그를 따르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하나님의 말씀을 '하가(묵상)'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그의 뜻을 쫓는 진정한 '아쉬레(복된 사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삶은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이자 눈물과 탄식과 좌절로 얼룩지는 괴로움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세계 자체가 욕망의 덩어리인지라 가지면 가질수록 목마름은 더해지고, 그러다 보니 숨쉬고 있는 동안에는 쉼 없이 무언가를 쫓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열정을 바쳐 겨우 이뤄 낸 성취라고 한들 기쁨은 언제나 기대에 못미치는 데다, 그 성취도 대개는 몇 번의 실패 끝에 얻은 것이어서 아쉬움은 커기만 합니다. 초라한 결과와 이에 따른 욕구불만은 늘 주위를 맴돌면서 정신을 어지럽힙니다.

    ​물론 욕심을 줄이면 불만도 줄어들고 그래서 삶의 만족도는 어느정도 높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본능에 가깝고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인 '욕망'을 줄이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욕망은 희망의 원천이라는 점에서도 필요 불가결한 삶의 요소이기 때문에 실존적 존재인 인간이 이를 배제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행복을 찾아야 할까요?

    ​인간에게는 머리 속의 이성과 마음 속의 감성이라는 두 축이 있는데 이들이 언행(言行)을 지배한다고 합니다. 이 둘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직업, 관계, 재물 등 다방면에서 실패하고 그럼으로써 불행을 맞이하게 된다는 거죠.

    ​현실의 삶에서 욕망은 끝없이 부풀어 오르는 연기같은 것이어서 얄팍한 이성만으로는 통제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이 때에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감성에서 우러나는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진 사람도 갖고 싶은 단 한가지가 없으면 불행하다고 여깁니다. 왜 일까요? 자신이 이미 가진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뭔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시시각각으로 마주하는 희·로·애·락은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눈높이를 낮추고, 역지사지의 자세를 견지한다면 상황을 좀 더 좋은 쪽으로 바꿀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결론은 내가 행복해야 타인에게 마음을 열 수 있으며, 그렇게 열린 마음이 모여야 사람 사는 세상으로의 희망의 끈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가끔은 속도를 늦춰 하늘을 쳐다 보는 여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복 있는 사람(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인의 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Blessed is the man who does not walk in the counsel of the wicked or stand in the way of sinners or sit in the seat of mockers.

    “복 있는 사람”은 시편 1편이 말하는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뿌리내린 사람을 뜻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피할 것을 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 생각(꾀) → 행동(길) → 정체성(자리)로 굳어지는 흐름을 거절합니다.

    • 죄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복은 선택의 방향에서 시작됩니다. 

     복 있는 사람은즐길 것을 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 억지로 지키는 계명이 아니라

    • 사랑해서 가까이하는 말씀입니다.

    이 부분은 요한일서 5장 3절과 연결됩니다.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사랑이 있으면, 순종은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됩니다. 

    복 있는 사람은뿌리가 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 환경이 아니라 근원이 다릅니다.

    •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이유는
      겉이 강해서가 아니라 속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내적 증거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겉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의 흐름이 복입니다.  

    복은 결과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 돈이 많아서 복이 아닙니다.

    • 일이 잘 풀려서 복이 아닙니다.

    •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복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은 말합니다.
    복은 상황이 아니라 뿌리의 문제라고.

    복 있는 사람과 형통의 차이

    구분 복 있는 사람 형통한 사람
            기준      하나님과 연결된 뿌리, 말씀과 성령               외적 성공, 상황적 성취
          지속성      시냇가 나무처럼 항상 생명 유지     상황 따라 변함 (부, 건강, 평판)
       내적 상태                   평안, 기쁨, 마음의 안정       불안, 두려움, 만족감 단기적
       성경 근거                  시편 1편 1–3절     전도서 2:11 “모든 것이 헛되다”

    요약 : 복 = 내적 뿌리 → 형통 = 외적 가지.
    형통이 없어도 복은 여전히 유지될 수 있습니다.

    왜 복 있는 사람도 고난을 겪는가?

    • 고난 = 뿌리를 깊게 만드는 과정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 뿌리를 내리면 나무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듯, 내적 생명은 강화됩니다.

    • 시험 = 선택의 기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선순위를 확인하는 순간이 됩니다.
      (야고보서 1:2–4 “시험을 인내로 받으라”)

    • 세상과의 마찰
      복 있는 삶은 세상 기준과 다르기에, 오히려 충돌과 반대를 겪을 수 있습니다.

     고난은 복을 깨뜨리지 않고, 오히려 깊게 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활신앙에서 복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 작은 선택의 연속

      • 말씀 읽기, 기도, 사랑 실천

      • 세상 기준으로는 미약해 보여도 하나님과 연결된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 관계의 풍성함

      • 가족, 이웃, 공동체와의 신실한 사랑

      • 겉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마음과 삶의 안정감을 줍니다.

    • 평안과 감사

      • 상황과 상관없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내적 기쁨

      • 성령과 말씀 안에서 나타나는 생활 속 ‘작은 기적’입니다. 


    핵심 메시지

    복 있는 사람 = 하나님과 연결된 뿌리 깊은 삶
    형통 = 외적 상황의 결과
    고난 = 뿌리를 더 깊게 만드는 과정
    생활신앙에서 복 = 작은 선택과 관계, 평안 속에서 나타나는 실질적 삶의 변화 

    “복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며, 상황과 문맥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일반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참된 행복과 만족을 누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몇 가지 핵심 관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시편에서 말하는 복 있는 사람

    • 시편 1:1-3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 핵심 의미 :

      1.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중심에 두는 사람

      2. 세상의 유혹과 죄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

      3. 영적 안정과 성장을 누리는 사람

    • 시적 이미지 : 강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기나 계절에 흔들리지 않고 열매를 맺는 삶.

    2.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복 있는 사람

    • 마태복음 5:3-12 (팔복)
      예수님은 “복 있다”라고 말씀하시며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예로 드십니다:

      • 마음이 가난한 사람

      • 애통하는 사람

      • 온유한 사람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 긍휼히 여기는 사람

      • 마음이 청결한 사람

      • 화평하게 하는 사람

      • 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

    • 핵심 의미:

      1. 외적 조건이 아니라 내적 상태와 하나님 중심의 가치가 중요함

      2. 세상의 관점과 반대로 하나님의 눈으로 복이 판단됨

      3. 현재 고난 속에서도 궁극적 기쁨과 상급이 보장됨

    3. 생활신앙 관점

    • 복 있는 사람은 단순히 물질적 풍요나 성공을 뜻하지 않습니다.

    •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며, 사람과 화목하게 살며,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 즉, 내적 평안, 관계의 화목, 삶의 의미가 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멘의 사람(민수기 5:22) 

    민수기 5:22
    저주가 되게 하는 이 이 네 창자에 들어가서 네 배로 붓게 하고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게 하리라 할 것이요 여인은 아멘 아멘 할찌니라.
    May this water that brings a curse enter your body so that your abdomen swells and your thigh wastes away. " " 'Then the woman is to say, "Amen. So be it."

    마태복음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I tell you the truth, until heaven and earth disappear, not the smallest letter, not the least stroke of a pen, will by any means disappear from the Law until everything is accomplished.


    아멘.

    지금 이 고백 안에는
    동의가 있고,
    신뢰가 있고,
    내어맡김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아멘”은 단순한 끝맺음이 아니라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 그대로 이루소서”라는 믿음의 서명입니다.

    오늘의 아멘은
     이해의 아멘일 수도 있고
     순종의 아멘일 수도 있고
     아직 다 모르지만 맡기는 아멘일 수도 있습니다.

    혹시 지금 마음에 담고 있는 기도 제목이 있나요?
    그 기도 위에 같이 한 번 더 아멘 할까요?

    지금까지 나눈 모든 주제—
    성령의 증거, 확신, 사랑과 계명, 생활신앙—
    결국 한 고백으로 모아지네요.

    아멘은 단순한 끝맺음이 아니라,
    “그 말씀을 내가 받습니다”라는 신앙의 서명입니다.

    오늘 이 고백이
     감정이 아니라 믿음이 되게 하시고
     이론이 아니라 삶이 되게 하시고
     순간이 아니라 방향이 되게 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은 단순한 끝맺음이 아니라,
    “그 말씀을 내가 받습니다”라는 신앙의 서명입니다.

    오늘 이 고백이
     감정이 아니라 믿음이 되게 하시고
     이론이 아니라 삶이 되게 하시고
     순간이 아니라 방향이 되게 하시길 축복합니다.

    원하시면
    “아멘 이후에 삶에서 실제로 달라지는 3가지”도 이어서 나눌까요?

    “아멘 이후에 삶에서 실제로 달라지는 3가지”


    “아멘” 이후에 삶에서 실제로 달라지는 3가지
    생활신앙의 관점에서 정리해보겠습니다.

    1. 방향이 달라집니다 — “내 뜻”에서 “하나님 뜻”으로

    아멘은 단순한 동의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틀겠다는 선언입니다. 

    이전 : “내가 원하는 길” 
    이후 :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은 무엇인가?” 

    변화의 핵심 질문  
    “이 선택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선택인가?”

    이 질문이 생기기 시작하면
    이미 삶의 중심축이 이동한 것입니다.  

    2. 반응이 달라집니다 — 상황보다 말씀에 반응

    아멘은 감정보다 말씀을 신뢰하겠다는 고백입니다. 
    화가 날 때 → 바로 반응하지 않음 
    두려울 때 → 먼저 기도함 
    억울할 때 → 복수 대신 맡김  

    특히 요한일서 5장이 말하듯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감정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붙드는 태도입니다. 

    변화의 표시 
    즉각적 반응이 줄고, 잠깐 멈춤이 생깁니다. 
    그 멈춤이 성령의 공간입니다.

    3. 관계가 달라집니다 — 하나님 사랑이 사람 사랑으로 흐름

    아멘은 하나님께만 드리는 말이 아닙니다.
    그 고백은 사람에게 흘러갑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이 반복하는 진리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 
    판단이 줄어들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생기고
    먼저 손 내미는 용기가 생깁니다

    이것이 “계명이 무겁지 않다”는 실제 경험입니다. 

    아멘 이후 달라지는 것 

    방향
    — 누구 뜻을 따를 것인가 
    반응 — 무엇에 먼저 반응할 것인가 
    관계 — 사랑이 어디로 흐르는가 

    사순절 제5일 / 2월 23일(월)

    영혼육

    “영혼육(靈魂肉)”은 인간 존재를 영(靈)–혼(魂)–육(肉/몸)의 세 차원으로 이해하는 구조입니다.
    성경신학·존재론·영성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죠. 구조적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기본 구조

    영(靈) — 하나님과의 관계 차원
    혼(魂) — 자아·의식·인격 차원
    육(肉/몸) — 물질·감각·행동 차원

    성경적 근거

    창조 구조

    창세기 2:7
    흙(육) + 생기(영) → 생령(혼)

    이 구절은 삼분 구조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삼분 언급 구절  

    데살로니가전서 5:23

    “너희의 영과 혼과 몸이…” 

    히브리서 4:12

    “혼과 영을 찔러 쪼개기까지…”

    각 차원의 기능

    ① 영 (Spirit) 
    하나님을 인식하는 기관 
    예배·계시·양심의 중심 
    성령과 교통하는 영역 

    죽으면? 하나님과 단절
    거듭나면? 살아남 (요 3장 개념)

    ② 혼 (Soul) 
    생각(지성) 
    감정 
    의지 
    “나”라고 느끼는 자아 영역
    믿음의 선택이 일어나는 자리

    ③ 육 (Body) 

    감각 기관 
    행동 
    물리적 세계와의 접촉

    관계 구조

    하나님







    세상

    타락 후에는 이 질서가 뒤집힙니다:

    세상





    영 (무감각)

    구원은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5️⃣ 이원론 vs 삼분론

    구분 이원론 삼분론
    구성 영혼 + 몸 영 + 혼 + 몸
    특징 영혼을 하나로 봄 영과 혼을 구별

    초대교회와 종교개혁 전통은 대체로 이원론,
    경건주의·오순절 전통은 삼분론을 더 강조합니다.  

    6️⃣ 핵심 신학적 질문  

    영과 혼은 실제로 구별되는가? 
    거듭남은 영에서만 일어나는가?  
    혼의 변화는 성화 과정인가?  
    육은 구속받는가? (부활)   

    7️⃣ 존재론적 요약 

    영 = 하나님을 향한 창 
    혼 = 나라는 자아의 자리 
    몸 = 세상 속 표현 통로 









    말씀의 사람(히브리서 4:12)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과 및 관절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For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active. Sharper than any double-edged sword, it penetrates even to dividing soul and spirit, joints and marrow; it judges the thoughts and attitudes of the heart.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설명하면서 그 말씀이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도달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부학적 구분”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침투력과 통찰력을 강조하는 표현이라는 점입니다.

    혼(푸쉬케) (ψυχή, soul)

     
    인격, 감정, 의지, 자아적 삶 
     인간의 “나”라고 느끼는 영역

    영(프뉴마) (πνεῦμα, spirit)  

     하나님과 관계 맺는 차원 
     하나님을 향한 영적 감각 

     성경은 어떤 곳에서는 혼과 영을 구분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거의 동일하게 사용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아주 깊은 내면까지”를 강조하는 표현적 대비입니다.

     “관절과 골수”의 의미

    관절과 골수는 신체에서 가장 깊은 내부를 상징합니다.

    • 관절 → 외부에서 보이는 구조

    • 골수 → 뼈 속 깊은 곳

    즉, 겉모습과 속마음, 외적 행동과 내적 동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꿰뚫는다는 뜻입니다. 

    핵심 메시지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다
     감정만 건드리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동기, 숨은 욕망, 진짜 중심을 드러낸다

    말씀 앞에 서면 “나는 괜찮다”는 자기 확신이 무너지고 진짜 모습이 드러납니다.  

    생활신앙 적용

    “성령의 증거”와 연결하면,  
     감정은 괜찮다고 말해도 
     말씀이 찌르면 불편해진다 
     그 불편함이 바로 성령의 내적 조명일 수 있다. 
     말씀은 우리를 정죄하려고 찌르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수술하는 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 말씀은 과거 기록이 아니라 현재형 능력입니다.

    • 읽는 순간, 설교를 듣는 순간, 묵상하는 순간에 하나님이 직접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 말씀은 정보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 생활신앙 적용
    말씀을 “공부 자료”가 아니라 나를 만지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대하고 있는가?

     2️⃣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당시의 양날 검은

    • 방어도 가능

    • 공격도 가능

    • 깊이 파고드는 무기였습니다.

    말씀은

    • 우리를 보호하기도 하고

    • 죄를 베어내기도 하고

    • 숨겨진 부분까지 파고듭니다.

    👉 위로도 하지만
    👉 동시에 핑계를 자르는 능력도 있습니다.

     3️⃣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이 표현은 해부학적 구분 설명이 아니라,
    “인간이 나눌 수 없는 가장 깊은 영역까지”라는 강조입니다.

    • 혼(감정·자아 영역)

    • 영(하나님과의 관계 영역)

    • 관절·골수(가장 깊은 내부)

    즉, 말씀은 겉 행동이 아니라 동기까지 건드린다는 뜻입니다. 

    4️⃣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 내가 왜 화났는지

    • 내가 왜 봉사하는지

    • 내가 왜 순종하는지

    • 내가 왜 낙심하는지

    말씀은 행동보다 동기를 비춥니다.  

    🔎 목회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

    ❓ 왜 말씀을 들으면 찔릴까?

    → 정죄하려는 게 아니라
    치유하기 위해 드러내는 것입니다.

    의사가 상처를 눌러보는 이유는 고통 주기 위함이 아니라
    정확히 치료하기 위함이듯이.

    생활신앙 적용 3단계

    1단계: 말씀을 “나에게” 적용하기

    “저 사람 이야기네”가 아니라
    “지금 하나님이 내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2단계: 찔림을 회피하지 말기

    불편함은 영적 마취가 풀리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3단계: 회개로 연결하기

    찔림 → 변명 → 자책 이 아니라
    찔림 → 인정 → 십자가로 가져가기  

    깊이 있는 질문 하나

    요즘 말씀을 들을 때
    위로가 더 많은가, 찔림이 더 많은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순절 제6일 / 2월 24일(화)

    믿음의 사람(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Therefore, since we have been justified through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말씀하신 구절은 로마서 5장 1절의 시작 부분입니다. 전체 문맥을 보면 이렇게 연결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 개역개정)

    이 구절의 핵심 의미를 단계별로 풀어보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사람이 스스로 선행이나 노력으로 의로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의롭다 하심’은 단순한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서게 됨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의롭다 하심은 예수님의 공로와 십자가를 통한 구속 사역 덕분에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결과는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이는 단순한 평화로운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회복되어 죄와 대적하지 않고 평화롭게 서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정리하면, 
    이 구절은 믿음 → 의롭다 하심 → 하나님과의 화평이라는 논리적 연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믿음은 단순히 마음의 신념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서게 만드는 실질적 변화의 출발점입니다.

    1.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 사람이 스스로 선행이나 노력으로 의로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 ‘의롭다 하심’은 단순한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서게 됨을 의미합니다.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이 의롭다 하심은 예수님의 공로와 십자가를 통한 구속 사역 덕분에 이루어집니다.

      •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3.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

      •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결과는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 이는 단순한 평화로운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회복되어 죄와 대적하지 않고 평화롭게 서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믿음 → 의롭다 하심 → 하나님과의 화평이라는 논리적 연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믿음은 단순히 마음의 신념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서게 만드는 실질적 변화의 출발점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음
    • 핵심 구절: 로마서 5:1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연관 구절

      • 갈라디아서 2:16 –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느니라”

      • 로마서 3:28 –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음이라”

    ✅ 의미: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관계를 회복함.
    💡 포인트: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연합으로 의롭게 됨.

     하나님과 화평을 누림

    • 핵심 구절: 로마서 5: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 연관 구절

      • 골로새서 1:20 – “그리스도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 에베소서 2:14-16 –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화평을 이루사 서로 원수가 된 것을 제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화목하게 하셨다”

    ✅ 의미: 화평은 관계적 회복, 단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 

    믿음과 결과 : 소망과 기쁨

    • 핵심 구절: 로마서 5:2 “또 우리가 그 안에서 믿음으로 서 있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소망을 즐거워하느니라”

    • 연관 구절

      • 요한일서 5:4 –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느니라”

      • 시편 85:10 – “진리와 인애가 서로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춤하였도다”

    ✅ 의미: 믿음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삶 속에서 화평과 기쁨, 소망으로 연결됨. 

    💡 시각적 흐름 (한눈에 보기)

    믿음 → 의롭다 하심 → 하나님과 화평 → 소망과 기쁨 │ │ └──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
    • 믿음 :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

    • 의롭다 하심 :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회복

    • 화평 : 삶 속에서 경험되는 하나님과의 화목

    • 소망/기쁨 : 세상과 미래 속에서 누리는 내적 열매



    말씀하신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은즉”이라는 구절은 로마서 5장 1절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 개역개정)

    이 구절에서 핵심 포인트를 몇 가지로 정리하면:

    1.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 사람이 자신의 노력이나 율법 준수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의미입니다.

      • 여기서 말하는 ‘의롭다’는 법적 판결에서 무죄 선언을 받음과 유사한 개념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회복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2. 의롭게 된 결과: 화평

      • 단순히 ‘죄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관계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 믿음은 단순 지식이 아니라 관계적 확신과 연결됩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의로움은 오직 예수님의 삶, 죽음, 부활을 통한 은혜에서 나옵니다.

      • 믿음은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응답 역할을 합니다.

    💡 생활 속 적용:

    • 우리가 어떤 문제나 죄책감에 빠졌을 때, 자기 노력보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의로움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이미 주어진 선물이라는 사실을 삶으로 체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하신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은즉”이라는 구절은 로마서 5장 1절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 개역개정)

    이 구절에서 핵심 포인트를 몇 가지로 정리하면:

    1.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 사람이 자신의 노력이나 율법 준수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의미입니다.

      • 여기서 말하는 ‘의롭다’는 법적 판결에서 무죄 선언을 받음과 유사한 개념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회복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2. 의롭게 된 결과: 화평

      • 단순히 ‘죄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관계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 믿음은 단순 지식이 아니라 관계적 확신과 연결됩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의로움은 오직 예수님의 삶, 죽음, 부활을 통한 은혜에서 나옵니다.

      • 믿음은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응답 역할을 합니다.

    💡 생활 속 적용:

    • 우리가 어떤 문제나 죄책감에 빠졌을 때, 자기 노력보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의로움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이미 주어진 선물이라는 사실을 삶으로 체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원하시면 제가 이 구절을 ‘믿음 → 의로움 → 화평’ 흐름으로 한눈에 보는 인포그래픽처럼 시각화해서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머릿속에 더 선명하게 남습니다.

    혹시 그렇게 만들어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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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요! 그럼 제가 ‘믿음 → 의로움 → 화평’ 흐름을 시각화한 인포그래픽 형태로 만들어서 보여드릴게요.

    이 그림에서는 각각의 단계가 성경적 의미와 실제 적용까지 한눈에 들어오도록 설계할 거예요.

    • 믿음 → 예수님을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단계

    • 의로움 →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단계

    • 화평 →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마음의 평안 경험









     









    성경의 난제는 크게 네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역사적 문제, 신학적 문제, 윤리적 문제, 해석학적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왜 전쟁을 명령하셨는가?

    httpswwwhistoryinthebiblecomsupplementary_pagesgraphicsSimple_Map_1200_by_1765webp

    대표 본문 :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난제

    • 사랑의 하나님이 왜 진멸(헤렘)을 명령하셨는가?

    주요 해석

    • 심판의 역사적 맥락 (가나안의 극심한 우상숭배와 아동제사)

    • 구속사적 단계적 계시

    • 고대 근동의 전쟁 과장 문학적 표현 가능성

    예정과 자유의지

    대표 본문 :

    • 로마서 9장

    • 에베소서 1장

    난제

    •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다면 인간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대표 입장

    • 개혁주의 :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

    • 알미니안 : 선행은총과 조건적 선택

    • 성경적 긴장 : 둘을 동시에 인정


    “믿음으로 구원” vs “행위로 심판”

    대표 본문 :

    • 로마서 3장

    • 야고보서 2장

    난제

    • 바울과 야고보는 서로 모순되는가?

    해석

    • 바울: 구원의 근거는 믿음

    • 야고보: 참된 믿음은 행위로 드러남
      → 원인과 열매의 차이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데 왜 “후회”하시는가?

    대표 본문 :

    • 창세기 6장

    • 사무엘상 15장

    난제

    • 하나님이 감정에 따라 바뀌시는가?

    해석

    • 인간 언어로 표현된 신인동형론

    • 하나님의 성품은 불변, 역사 속 방식은 가변적 표현 


    왜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

    대표 본문 : 욥기

    난제

    • 고난은 죄의 결과인가?

    •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핵심

    • 고난은 항상 인과응보가 아니다

    • 인간은 전부를 알 수 없다

    • 하나님 자신이 답이 되신다 


    성경 난제를 대하는 4가지 태도

    1. 긴장을 인정하라 (성경은 단순 철학책이 아님)

    2. 부분계시를 기억하라

    3. 구속사적 흐름 안에서 읽어라

    4.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라





    📖 성경의 가장 어려운 구절 TOP 10

    (신학적으로 논쟁이 많고, 성도들이 자주 묻는 본문)


    1️⃣ “물과 피로 임하신 이”

    📍 요한일서 5:6

    왜 어려운가?
    물은 세례인가? 십자가인가? 피는 무엇인가?

    목회적 질문
    “나는 정말 예수를 믿는가? 증거가 무엇인가?”

    생활신앙 적용
    →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 객관적 사건(십자가) 위에 선 신뢰입니다.


    2️⃣ “한번 빛을 받고 타락한 자”

    📍 히브리서 6:4–6

    왜 어려운가?
    구원 상실인가? 경고인가?

    목회적 질문
    “내가 실수했는데 구원 잃은 건가요?”

    생활신앙 적용
    → 이 본문은 불안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으라는 사랑의 경고입니다.


    3️⃣ “예정하신 자들을 미리 정하셨다”

    📍 로마서 8:29–30




    왜 어려운가?
    하나님의 예정 vs 인간의 자유의지

    목회적 질문
    “그럼 내 선택은 의미가 없나요?”

    생활신앙 적용
    → 예정은 “누가 탈락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끝까지 붙드신다는 약속입니다.


    4️⃣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 마태복음 7:23




    왜 어려운가?
    사역했는데 버림받는다고?

    목회적 질문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생활신앙 적용
    →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5️⃣ “하나님이 악한 영을 보내셨다”

    📍 사무엘상 16:14




    왜 어려운가?
    하나님이 악을 보내신다고?

    목회적 질문
    “하나님이 왜 이런 상황을 허락하시죠?”

    생활신앙 적용
    → 하나님은 악의 창조자가 아니라
    주권 가운데 허용하시는 분입니다.


    6️⃣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 고린도전서 14:34




    4

    왜 어려운가?
    여성 사역 금지인가?

    목회적 질문
    “성경은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나요?”

    생활신앙 적용
    → 당시 문화적 질서와 교회 질서 문제를
    본문 전체 맥락 속에서 봐야 합니다.


    7️⃣ “가나안 진멸 명령”

    📍 여호수아 6장




    4

    왜 어려운가?
    하나님이 왜 진멸을 명령하셨나?

    목회적 질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아닌가요?”

    생활신앙 적용
    →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적·언약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8️⃣ “믿음과 행함”

    📍 야고보서 2:24




    4

    왜 어려운가?
    로마서와 충돌하는가?

    목회적 질문
    “행함이 부족하면 구원 못 받나요?”

    생활신앙 적용
    → 행함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입니다.


    9️⃣ “용서받지 못할 죄”

    📍 마가복음 3:29




    왜 어려운가?
    혹시 내가 지은 건가?

    목회적 질문
    “돌이킬 수 없는 죄가 있나요?”

    생활신앙 적용
    →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미 그 죄의 상태가 아닙니다.
    완고한 거부가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출애굽기 9-10장)

    왜 어려운가?
    자유의지는 어디에?

    목회적 질문
    “하나님이 강제로 막으시는 건가요?”

    생활신앙 적용
    → 반복된 거부가 결국 마음을 굳게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선택된 방향을 확증하시는 것입니다.  

    생활신앙 관점에서 난제를 소화하는 5원칙

    1. 
    난제는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관계를 깊게하기 위한 초대
    2. 해석 이전에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 본문이 나를 어디로 이끄는가?
    3. 난제는 대부분 구원의 본질이 아니라 적용의 문제
    4. 모든 본문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로 모인다
    5. 이해보다 신뢰가 먼저입니다. 십자가가 해석의 기준




















































































































































































































































































































































































    2026년 사순절 고난주간 새벽묵상 자료 가상칠언 3월 28일


    3월 28일(토) 누가복음 23:3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누가복음 23:34)

    2026년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3월 29일을 종려주일로 지키면 그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고난주간을 지내게 될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선포하셨던 말씀들을 한 구절씩 소개하며 함께 묵상하려고 합니다.

    🌿 [주일] 종려주일 (Palm Sunday)

    •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 (마 21:1-11)
    •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외침
    • 예언 성취: 스가랴 9:9
    • 성전에 들어가 둘러보심 (막 11:11)
    • 베다니로 돌아가심 (막 11:11)

    🌿 [월요일] 성전 정화 (Holy Monday)

    •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 (막 11:12-14)
    •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심 (마 21:12-13)
    • 병든 자들을 고치심 (마 21:14)
    • 어린아이들이 성전에서 "다윗의 자손 호산나" 외침 (마 21:15)

    🌿 [화요일] 논쟁과 가르침의 날 (Holy Tuesday)

    •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을 제자들이 목격 (막 11:20-21)
    • 성전에서 종교지도자들과 격렬한 논쟁 (마 21-23장)
    • 세금, 부활, 율법에 대한 질문에 답하심
    •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화 있을진저 선포 (마 23장)
    • 감람산에서 종말과 재림에 대한 설교 (마 24-25장)

    🌿 [수요일] 침묵의 날 혹은 음모의 날 (Holy Wednesday) 스파이 수요일(Spy Wednesday)

    • 베다니에서 머무심 (추정)
    •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공모 (마 26:3-5)
    • 가룟 유다가 은 30에 예수님을 넘기기로 함 (마 26:14-16)

    🌿 [목요일] 최후의 만찬과 겟세마네 (Maundy Thursday)

    • 유월절 준비 (마 26:17-19)
    •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 (마 26:20-29)
    • 성찬 제정: 떡과 잔을 나누심
    • 발 씻김: 섬김의 본 (요 13:1-17)
    • 배신 예고: 유다의 배반, 베드로의 부인 예고
    •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마 26:36-46)
    • 유다의 인도로 체포되심 (마 26:47-56)

    🌿 [금요일] 십자가 처형 (Good Friday)

    • 산헤드린에서 신문 받음 (마 26:57-68)
    • 베드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함 (마 26:69-75)
    • 빌라도 앞에서 재판 받음 (마 27장)
    • 군중이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침
    • 채찍질과 조롱, 가시면류관 (마 27:27-31)
    • 골고다에서 십자가형 (마 27:32-56)
    • 오후 3시경 운명하심
    • 성소 휘장이 찢어짐, 무덤에 장사됨 (마 27:57-61)

    🌿 [토요일] 무덤에서의 안식 (Holy Saturday)

    • 안식일로 제자들과 유대 백성들이 조용히 지냄
    • 대제사장들이 무덤을 지키도록 군인을 요청 (마 27:62-66)
    • 예수님은 무덤에 머무심

    🌿 [주일] 부활주일 (Easter Sunday)

    • 이른 새벽,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여인들이 목격 (마 28:1-10)
    • 천사가 "그가 살아나셨다" 선포
    •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에게 첫 부활 현현
    •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심 (눅 24:13-35)
    •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심 (요 20:19-23)

    고난주간의 흐름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순종,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각 날의 사건을 따라가며 기도와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하는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가상칠언(架上七言) The Seven Last Words of Jesus on the Cross

    3월 28일(토)  • 1언.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3월 30일(월)  • 2언.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3월 31일(화)  • 3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27) 
    4월   1일(수)    • 4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8) 
    4월   2일(목)    • 5언. 내가 목마르다(요 19:28 ) 
    4월   3일(금)    • 6언. 다 이루었다(요 19:30) 
    4월   4일(토)    • 7언.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

    가상칠언은 단순한 고통의 기록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구속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용서 → 구원 → 사랑 → 버림 → 고통 → 완성 → 맡김


    [십자가 사건 - 가상칠언]

    1. 용서 → 칭의 (Justification)
    2. 낙원 약속 → 구원의 즉시성
    3. 관계 회복 → 교회 공동체
    4. 버림 → 대속 (Substitution)
    5. 고통 → 성육신 완성
    6. 다 이루었다 → 속죄 완성
    7. 맡김 → 하나님과 연합


    가상칠언 전체 구조 (한 장 도식)

    [십자가 7언 구조]

    1. 용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 죄 문제 해결 시작



    2. 구원 약속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개인 구원 적용



    3. 관계 회복
    “보라 네 어머니라”
    → 공동체 회복



    4. 버림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대속 (핵심)



    5. 고통
    “내가 목마르다”
    → 인간 대표성



    6. 완성
    “다 이루었다 (τετέλεσται)”
    → 구속 완성



    7. 위탁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 신뢰와 승리

     

    가상칠언 vs 구원론 전체 구조 연결

    이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 “십자가 사건이 구원론 전체를 어떻게 포함하는가”

     

    전체 구원 구조 (신학적 흐름)

    [인간 상태]
    죄 / 단절 / 죽음



    [십자가 사건 - 가상칠언]

    1. 용서 → 칭의 (Justification)
    2. 낙원 약속 → 구원의 즉시성
    3. 관계 회복 → 교회 공동체
    4. 버림 → 대속 (Substitution)
    5. 고통 → 성육신 완성
    6. 다 이루었다 → 속죄 완성
    7. 맡김 → 하나님과 연합



    가상칠언
    이 내용은 복음서 전반(특히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흩어져 기록되어 있으며, 기독교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용서의 말씀(누가복음 23:34)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용서의 말씀은 죄인을 향한 무조건적 용서와 원수까지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셨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좌우에 두 강도들도 함께 못 박혔습니다.






    두 강도 중에 한 강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이 말씀은 구원의 약속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강도짓을 행하다가 붙잡혀 십자가 형의 죽임을 당하는 사형수가 마지막 예수님을 향하여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을 때 믿는 자에게 즉각적인 구원이 이루어짐진다는 것을 확증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이란 행위가 아닌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과 위탁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요한복음 19:26–27)

    ✔ 의미

    • 인간 관계 속에서도 끝까지 사랑과 책임

    • 공동체 형성 (교회의 모델)

     

    버림받음의 외침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46 / 마가복음 15:34)

    ✔ 의미

    •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진 완전한 고통

    • 하나님과의 단절 경험 (속죄의 핵심

     

    고통의 표현

     “내가 목마르다”
    (요한복음 19:28)

    ✔ 의미

    • 예수님의 완전한 인간성

    • 육체적 고통의 절정

     

    완성 선언

     “다 이루었다” (τετέλεσται)
    (요한복음 19:30)

    ✔ 의미

    • 구속 사역의 완전한 성취

    • 빚이 완전히 지불되었다는 선언

     

    영혼의 위탁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누가복음 23:46)

    ✔ 의미

    •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

    • 순종의 마지막 단계

     

    전체 구조 한눈에 보기

     가상칠언은 단순한 고통의 기록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구속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용서 → 구원 → 사랑 → 버림 → 고통 → 완성 → 맡김

    ✔ 신학적 핵심 구조

    • 시작: 타인을 향한 은혜 (용서, 구원)

    • 중심: 속죄의 고통 (버림, 목마름)

    • 결론: 구원의 완성 + 하나님께 위탁

    헬라어 원문 중심 심층 해부 (핵심 단어 구조)

    📌 (1) “τετέλεσται” — 다 이루었다

    • 원형: τελέω (완성하다, 성취하다)

    • 형태: 완료 수동 직설법 (Perfect Passive Indicative)

    👉 의미 구조

    • 완료 시제 → 과거에 이루어졌고 지금까지 효력이 지속됨

    • 수동 →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완성됨

    • 직설법 → 선언 (사실 선포)

    👉 신학 핵심
    ✔ “구원이 가능해졌다”가 아니라
    ✔ 구원이 완성되었다

    📌 (2) “πάτερ, εἰς χεῖράς σου παρατίθεμαι τὸ πνεῦμά μου”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 παρατίθεμαι → 맡기다 (현재형, 중간태)

    👉 의미
    ✔ 지금 이 순간 계속적으로 맡긴다
    ✔ 완전한 신뢰

    📌 (3) “ἵνα τί με ἐγκατέλιπες”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ἐγκατέλιπες → 버리다 (아오리스트)

    👉 의미
    ✔ 단회적 사건
    ✔ 죄의 대속 순간

    📌 (4) “δίψω”

    (내가 목마르다)

    • 현재형

    👉 의미
    ✔ 단순 육체 고통이 아니라
    ✔ 인간의 완전한 상태를 짊어짐


    2️⃣ 가상칠언 전체 구조 (한 장 도식)

    [십자가 7언 구조]

    1. 용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 죄 문제 해결 시작



    2. 구원 약속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개인 구원 적용



    3. 관계 회복
    “보라 네 어머니라”
    → 공동체 회복



    4. 버림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대속 (핵심)



    5. 고통
    “내가 목마르다”
    → 인간 대표성



    6. 완성
    “다 이루었다 (τετέλεσται)”
    → 구속 완성



    7. 위탁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 신뢰와 승리

     

    가상칠언 vs 구원론 전체 구조 연결

    이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 “십자가 사건이 구원론 전체를 어떻게 포함하는가”

     

    전체 구원 구조 (신학적 흐름)

    [인간 상태]
    죄 / 단절 / 죽음



    [십자가 사건 - 가상칠언]

    1. 용서 → 칭의 (Justification)
    2. 낙원 약속 → 구원의 즉시성
    3. 관계 회복 → 교회 공동체
    4. 버림 → 대속 (Substitution)
    5. 고통 → 성육신 완성
    6. 다 이루었다 → 속죄 완성
    7. 맡김 → 하나님과 연합



    [구원론 확장]

    칭의 → 성화 → 영화
    (Justification → Sanctification → Glorification)

    핵심 대응 관계

    가상칠언

    헬라어 핵심

    구원론

    용서

    ἀφίημι

    칭의

    낙원

    παράδεισος

    즉각적 구원

    관계

    μήτηρ

    교회

    버림

    ἐγκαταλείπω

    대속

    목마름

    διψάω

    성육신

    다 이루었다

    τετέλεσται

    속죄 완성

    맡김

    παρατίθεμαι

    하나님과 연합

     핵심 통찰 (가장 중요)

    십자가 7언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 구원론 전체의 압축 구조
    ✔ 헬라어 문법으로 완성된 신학 선언
    ✔ 시간 흐름이 아니라 ‘구원의 단계’

     

    한 줄 요약

    👉 “τετέλεσται”는
    단순한 마지막 말이 아니라

    ➡️ 가상칠언 전체를 관통하는 결론이며
    ➡️ 구원론 전체의 종결 선언이다

     

    가상칠언 + 헬라어 시제 도식

    🔴 십자가 위 7언 (헬라어 시제 흐름)

    [현재 → 아오리스트 → 완료 → 미래적 선언]
    (진행 → 사건 → 성취 → 적용)

     

    ① 용서의 선언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눅 23:34)

    • 헬라어: ἄφες (아오리스트 명령)

    의미: “지금 단번에 용서하소서”
    👉 ✔ 사건적 용서 (법적 선언 시작)

    ② 구원의 약속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 23:43)

    • 미래 + 현재적 확정
    • ✔ 즉각적 구원 보장

     

    ③ 관계의 재구성

    “보라 네 어머니라” (요 19:26–27)

    • 현재형
    •  ✔ 공동체/언약 가족 형성

     

    ④ 버림받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 27:46)

    • 헬라어: ἐγκατέλιπες (아오리스트)
    •  ✔ 단회적 심판 사건 (대속)

     

    ⑤ 고통

    “내가 목마르다” (요 19:28)

    • 현재형
    •  ✔ 인간성 + 예언 성취 진행

     

    ⑥ 완성

    “다 이루었다” (요 19:30)

    τετεˊλεσται\text{τετέλεσται}τετεˊλεσται

    • 완료 시제 (perfect)
    •  ✔ 과거에 이루어졌고 지금도 효력 지속
    •  ✔ 구원은 “완료된 상태”

     

    ⑦ 맡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46)

    • παρατίθεμαι (현재)
    •  ✔ 신뢰의 현재 진행

     

    핵심 시제 흐름 요약

    현재 (고통/관계)

    아오리스트 (단번의 속죄 사건)

    완료 (영원한 효력)

    이것이 바로 구속사의 시제 구조

     

    십자가 → 부활 → 승천 (구원 타임라인)

    ⏳ 전체 구원 사건 흐름

    [십자가] → [부활] → [승천] → [현재 적용]


    🔴 1. 십자가 (속죄 사건)

    • 죄 해결 (atonement)

    • 시제: 아오리스트 + 완료 시작
    • 👉 “단번에 이루심”•

    🔵 2. 부활

    • 죽음 승리

    • 의롭다 하심 확증

    👉 로마서4:25
    “살아나심은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함”


    🟣 3. 승천

    • 왕권 등극

    • 중보 시작

    👉 로마서8:34
    “그는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심”


    🟢 4. 현재 (신자에게 적용)

    • 칭의 (완료)

    • 성화 (현재 진행)

    • 영화 (미래• )•

    📌 전체 타임라인 요약

    십자가 = 죄 해결 (과거 사건)
    부활 = 생명 시작 (새 창조)
    승천 = 통치 + 중보
    현재 = 구원 적용


    가상칠언 vs 로마서 1:1 대응 구조

    이게 핵심입니다.
    👉 “십자가 위 말씀이 바울 신학으로 해석됨”


    🔗 대응 구조

    가상칠언

    의미

    로마서 대응

    ① 용서

    죄 사함

    롬 3:24 (칭의)

    ② 낙원

    구원 보장

    롬 5:1 (화평)

    ③ 어머니

    공동체

    롬 8:15 (양자됨)

    ④ 버림

    대속

    롬 3:25 (화목제물)

    ⑤ 목마름

    고난 참여

    롬 8:17

    ⑥ 다 이루었다

    완성

    롬 8:1

    ⑦ 맡김

    신뢰

    롬 6:10

     

    구조 핵심

    가상칠언 = 사건 (복음의 핵심)
    로마서 = 해석 (신학적 설명)

    👉 예수님의 “말씀” → 바울의 “교리”

     

    전체 통합 도식 (한 장 요약)

    [가상칠언]
    현재 → 아오리스트 → 완료

    (십자가 사건)

    부활 (생명)

    승천 (통치)

    [로마서]
    칭의 → 화평 → 양자 → 성화 → 영화  

    핵심 통찰

    가상칠언은 단순한 마지막 말이 아니다
    → 구원론 전체의 “압축 선언”

    1. 헬라어 시제가 곧 신학이다

    o 아오리스트 = 단번 속죄

    o 완료 = 영원한 효력

    2. 로마서는 십자가의 해설서
    2. → 사건 → 교리 구조

     

    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누가복음 23:3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은 자신을 향해 죄악을 행하는 이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인간적인 동정이나 자비를 넘어, 십자가의 중심 메시지가 ‘용서’임을 보여줍니다. 
    이때 사용된 헬라어 아피에미(aphiemi)는 죄의 짐을 풀어주고 자유케 하며 법적인 의미에서 죄책을 면제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구속의 문을 여는 첫 열쇠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선 인류에게 극휼의 기회가 주어졌음을 선언하는 사건입니다. 
    즉, 십자가는 심판의 자리이자 동시에 용서의 문이 열리는 자리이며, 예수님은 인류 전체를 위한 대제사장으로서 그 첫 중보적 사명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는성경의 누가복음 23장 3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 원문 의미 (헬라어)
    • πάτερ (파테르) → 아버지여
    • ἄφες (아페스) → 용서하소서 (즉각적이고 단호한 명령형)
    • αὐτοῖς (아우토이스) → 그들에게
    • οὐ γὰρ οἴδασιν (우 가르 오이다신) →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τί ποιοῦσιν (티 포이우신) → 무엇을 하는지

    👉 직역하면: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 핵심 의미

    이 기도는 단순한 용서 요청이 아니라, 세 가지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1. 극한 상황에서의 용서

    십자가 처형이라는 가장 잔혹한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가해자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 사랑 (아가페)**의 표현입니다.

    2. 인간의 무지에 대한 이해

    “알지 못함”은 단순한 지식 부족이 아니라
    👉 영적 눈이 가려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 그들은 죄를 짓고 있지만
    • 동시에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

    3. 중보기도의 정점

    이 기도는 단순한 개인 기도가 아니라
    👉 인류 전체를 향한 중보기도입니다.

    • 인간 → 죄인
    • 하나님 → 거룩
    • 그 사이에서
      👉 예수 그리스도가 다리 역할을 하신 것
    🔥 한 줄 핵심
    👉 “가장 큰 고통 속에서도, 가장 큰 용서를 선택하신 기도”


    1️⃣ 설교용 1장 도식 이미지 구성

    중심 주제: 용서의 힘과 실제 적용

    ┌───────────────────────────────┐
    │ 예수님의 용서 │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
    └──────────────┬───────────────┘


    ┌───────────┴───────────┐
    │ │
    ▼ ▼
    행동적 측면 내면적 측면
    - 원수 사랑 - 마음의 겸손
    - 복수 포기 - 죄와 잘못 인정
    - 화해의 가능성 - 하나님 의지
    • 시각적 포인트:
      • 중앙 큰 원 → “예수님의 용서”
      • 좌우로 확장된 두 영역 → 행동과 마음
      • 화살표 → 실제 삶 속 적용 연결

    2️⃣ 헬라어 문법 심화

    원문:

    Πάτερ, ἄφες αὐτοῖς, οὐ γὰρ οἴδασιν τί ποιοῦσιν
    요소 품사/형태 문법 구조 신학적 의미
    Πάτερ 명사 호격 하나님을 친근하게 부름, ‘아버지’
    ἄφες 동사 명령형, 단수, aorist 능동태 “용서하라” 즉시적 명령, 과거적 결과 강조
    αὐτοῖς 대명사 여격, 복수 용서 대상: ‘그들’
    οὐ γὰρ 부정+접속사 이유 연결 왜 용서해야 하는지 설명
    οἴδασιν 동사 현재능동, 3인칭 복수 무지함 강조: 죄 인식 없음
    τί ποιοῦσιν 의문사+동사 현재, 능동, 3인칭 복수 실제 행위 강조
    • 핵심 포인트:
      • 명령형 + aorist → “단번에 결정적 용서”
      • 현재 시제 + 무지 → 인간의 죄 무지 강조
      • 하나님 중심 + 행동 중심 용서 → 신학적 균형

    3️⃣ 현대 적용: 용서가 어려운 상황

    실제 사례 연결:

    • 관계 갈등: 가족·직장·교회 내 갈등
      • 먼저 마음에서 화를 내려놓기 → 기도/묵상
      • 상대의 잘못 인정 전 용서 결단 → 행동적 화해 시도
    • 사회적 용서: 온라인/공적 상처
      • 용서를 통한 내적 평화 → 복수나 분노 감소
    • 적용 포인트 요약:
      1. 마음속에서 먼저 용서를 결정
      2. 상대의 이해와 무지 인정
      3. 행동으로 화해 시도, 상황 따라 점진적 진행



     





    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강도에게 예수님은 “오늘” 그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회개와 믿음을 통한 즉각적인 구원의 원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종말론에서 낙원(paradeisos)은 의인들이 안식하는 곳으로 이해되었으며, 예수님은 단순히 위로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구속의 실제적 적용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가 아닌, 전적인 은혜와 믿음에 근거한 구원이 가능함을 증거합니다. 죽음을 앞둔 이 강도에게 주어진 구원은 모든 죄인에게 열려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상징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단지 선택된 자만이 아닌 모든 회개자에게 유효함을 보여줍니다.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한복음 19:26–27)

    예수님은 고통의 절정 속에서도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염려하시며,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그녀를 부탁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가족적 책임을 넘어, 새 언약 공동체의 형성을 상징적으로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새로운 ‘가족’을 세우시며, 육신의 혈통이 아닌 믿음 안에서 하나 되는 교회 공동체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는 말씀은 교회의 상징인 마리아와 사도의 대표인 요한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됨을 의미하며, 이로써 십자가는 새로운 언약 공동체의 출발점이 됩니다. 또한,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속은 관계의 회복과 새로운 공동체의 창출을 포함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태복음 27:46, 마가복음 15:3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시편 22편 1절의 인용으로, 구약 예언의 성취이자 그 깊이를 더한 신비입니다. 이는 인류의 죄를 짊어진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는 경험을 상징하며,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를 보여줍니다. 이 절규는 하나님의 공의가 예수님 위에 임한 장면이며, 예수님은 우리 대신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라는 형벌을 온몸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이는 속죄론의 핵심으로, 예수님이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셨다는 대속적 죽음의 가장 극적인 표현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고통 중에도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시는 예수님의 신뢰와 순종을 통해,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끝까지 순복하신 모습을 드러냅니다.


    5. 내가 목마르다(요한복음 19:28)

     

    이 말씀은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을 나타내는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완성을 향한 갈망을 표현합니다. “목마르다”는 표현은 시편 69편 21절의 예언 성취이며, 고난받는 메시아의 고통에 대한 표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에게 생수를 주시는 분(요 4:14)이시지만, 이 순간에는 스스로 생명의 근원을 내려놓고 철저히 인간의 연약함을 겪으십니다. 이는 그분이 진정한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와 동일한 고통을 당하셨다는 성육신의 실제성을 드러내며, 동시에 예언된 메시아의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한 마지막 고백으로 나타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이루시는 예수님의 신실함과, 고통 가운데서도 성경의 성취를 완전하게 하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6.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

     

    헬라어 tetelestai는 상업적, 법적 문맥에서 “완불되었다”는 뜻으로 쓰이며,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완전하게 끝났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구속사의 완성 선언으로, 죄에 대한 속죄, 율법의 성취, 예언의 완성,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모두 이루어졌음을 알리는 말입니다. 이 한 마디는 구약의 모든 제사제도와 성막 시스템이 예수 안에서 실체를 드러내며 종결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 없이 완전하게 성취되었음을 밝히는 선언이며, 인간이 더 이상 율법이나 행위로 구원받을 필요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은혜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7.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 23:46)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하는 기도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31편 5절의 인용으로, 믿음과 순종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강탈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어주셨습니다(요 10:18). 이는 죽음마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선언이며, 구속 사역의 마지막 단계로서 그분의 전 생애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순종으로 마무리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순간은 예수님께서 대속의 죽음을 완성하고,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긴 사건으로, 부활을 향한 소망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도, 죽음 너머의 하나님 나라를 향한 확신과 위로를 전해주는 복음의 선포입니다.

     

    요한복음 19:30절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 선언의 의미와 우리의 완성된 구원
    십자가 위의 완성

    요한복음 19장 30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 중 하나인 "다 이루었다"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한마디는 인류의 구원 역사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있어 가장 결정적이고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구절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의미와 그 안에 담긴 놀라운 구원의 선물에 대해 깊이 탐구해 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