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혁목사 설교 원고 자료 2026년 2025 12 21 대림절 4주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God is love)
요한일서 4:8

2026년부터는 성경 읽기를 설교 주제 중심에 따라 진행하려고 합니다.
첫주간에 읽어야 할 성경은 요한일서 5장, 요한이서 1장, 요한삼서 1장 
매일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를 한번씩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주제에 따라 내가 읽고 묵상한 후에 얻은 결론을 정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기독교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머리에서는 사랑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실 생활에서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아는 것을 생활에 적용하도록 함께 실천하려고 합니다.

(도입 이야기) 
미워하는 관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느 여중생의 고민 
창신동 남부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사역할 때 경험한 사례

(전개하는 이야기)
당수나무에 정월 대보름을 맞아 전기불을 밝혀야 한다.
교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일에 교회가 전기를 빌려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을 맞고 한편은 틀리다는 것을 설명한다.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를 드리려고 교회 전기불을 밝히면 우상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엤는가?
절대로 우상이 그 자리에서 견디지 못하고 도망할 것이다.

(실천하는 방법)

사랑은 확장하는 것이다!
 1. 생각을 확장하라 - 사랑하려면 생각을 넓혀야 한다.

골로새서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Set your minds on things above, not on earthly things.

로마서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The mind of sinful man is death, but the mind controlled by the Spirit is life and peace.







 2. 행동을 확장하라 - 

베드로전서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But just as he who called you is holy, so be holy in all you do.




 3. 마음을을 확장하라 - 마음을 확장하는 것은 '보물 즉 물질을 확장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마음도 있느니라.
For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your heart will be also.









  






2026. 1. 4  / 성탄 후 제2주(흰색)

요한일서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Whoever does not love does not know God, because God is love. 


하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And so we know and rely on the love God has for us. God is love. Whoever lives in love lives in God, and God in him.







하나님의 사랑
ChatGPT의 말: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며,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과 행동을 드러내는 사랑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일서 4:8)

이는 하나님이 사랑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행동—창조, 구원, 심판, 회복—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2. 조건 없는 사랑 (아가페)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 인간의 자격이나 공로에 근거하지 않음

  • 죄인일 때에도 먼저 사랑하심

  • 변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3.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역사적 사건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3:16)

십자가는

  •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자리

  •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신 사랑의 절정입니다.

4. 징계 속에서도 나타나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방임이 아닙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히브리서 12:6)

  • 징계는 버림이 아니라 자녀됨의 증거

  • 하나님은 우리를 망하게 두지 않기 위해 때로 아프게 다루십니다. 

5.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

하나님의 사랑은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삶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1. 믿음으로 받아들임

  2. 정체성의 회복 — “나는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

  3. 이웃 사랑으로의 실천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일서 4:19)

핵심 요약

  • 하나님의 사랑은 본질이다

  •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음이다

  •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증명되었다

  • 하나님의 사랑은 삶을 변화시킨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입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1️⃣ 조건 없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로마서 5:8)

잘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기 때문에 변화됩니다.

2️⃣ 희생적인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3:16)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사건입니다 ✝️

3️⃣ 변하지 않는 사랑

사람의 사랑은 흔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8–39)

4️⃣ 관계로 부르시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로 초대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경험할수록,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힘도 얻게 됩니다.







2025. 12. 21 대림절 제4주

2025년 성탄(聖誕) 화두(話頭) / 예수 이름을 회복하자!

예수 이름으로

2025년 성탄 화두(話頭)/ 예수 이름을 회복하자!

- 말씀 화, 머리 두 :
- 1. 이야기의 첫머리

   2. 관심을 두어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이야기할 만한 것

   3. 불교에서 수행을 위한 설법의 중요한 가르침(교훈)

해마다 성탄을 맞이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해를 거듭할수록 성탄 트리, 성탄 카드, 성탄 선물, 성탄 노래는 변함없이 계속되는데 성탄의 주인공이 되시는 예수님의 자리는 늘 비어있다는 느낌입니다.

이런 생일 잔치가 계속되면서 성탄의 의미가 구주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메시지가 없고 사람들끼리 즐거워하는 공휴일 또는 기념일이 되는 것같아 안타깝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세상 분위기에 교회도 그 흐름을 따라가면 안될 것같아 오늘 설교 주제를 “예수 이름을 회복하자!”라고 정했습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Jesus)”는 하나님이 주신 이름입니다.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리스도(Christ)”는 직분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기름 부음을 받는 직분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메시야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로 오셨습니다.

“임마누엘(Immanuel)”이란 인간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신 하나님, 곧 예수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신약은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성취되었음을 증거합니다(마 1:23).
임마누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또한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를 강조하는 거룩한 칭호라고 하겠습니다.

불교의 경전은 8만 대장경이라고 하여 그 양이 매우 많습니다.
따라서 불자들이 그 모든 경전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불교의 가르침은 간략하게 염불로 기도하게 합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나무아미타불은 6자 명호라고 하여 부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말하며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에게 모든 것을 맡깁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불교의 염불처럼 간략한 기도가 없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주기도문)가 있지만 처음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생소합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듣지 못하던 용어들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도 매우 생소합니다.
더구나 사도신조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제가 신대원을 졸업하기 전에 당시 교단 총회에서 교회수를 늘려야 한다는 정책에 따라 목사 안수를 받으려면 특수목회(학교, 기독교기관 등)를 하거나 아니면 개척을 해야만 안수를 받게한다는 정책에 따라 계획에도 없던 개척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지역이 경상남도 울주군 온산면 덕신리 625번지에 온산제일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서기태목사님께서 개척을 시도하였는데 마을 주민들이 너무 강력하게 반발하여 포기하고 부산 연산동으로 떠나셨습니다.
그때 주일마다 와서 설교를 부탁하여 주말이면 강남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울산행 고속버스를 타고 울산으로 내려가서 주일 설교를 한 후에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설교를 시작하면서 졸업후에는 교회를 맡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개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신경부락은 학성 이씨 문중 사람들이 모여 살던 지역입니다.
당시 학성 이씨 문중을 대표하는 인물이 이후락씨이었습니다.
청와대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사회적으로 명성이 높은 사람의 후손들이라 거침이 없었습니다.

다구나 신경부락에서는 한국전쟁도 모르고 지나갈 정도의 외지였습니다.
1959년 9월 사라호 태풍 때 온 마을이 홍수에 잠겼는데 그 마을에 450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있ㅇ었고 그 나무 바로 옆에 70평 땅을 구입하여 개척교회를 시작하므로 마을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교회 건물을 무너트렸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누가 목회를 하려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새벽기도회를 시작하려는데 교인들이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있는 몇몇 교인들에게 왜 새벽에 나오지 않느냐 하고 물었더니 교회로 오려고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아주 거대한 놈이 벌떡 일어나서 길을 막아버려서 도저히 무서워서 올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마을을 장악하고 있던 서울 무당은 신이 나서 교회 문 앞에 제사밥을 밤중에 몰래 떠놓고 가기도 했습니다.

이때 기독교에는 왜 불교와 같은 6자 명호 5자 기도가 없을까 생각하던 중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되겠구나 하며 예수의 이름에 대하여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1980년 쯤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그러므로 “예수 내 구주!”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그러므로 “예수 내 생명!”
기름은 곧 성령으로 성령을 받아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

임마누엘이란 명칭은 하나님이 누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예수 내 권세!”

이렇게 15자 기도문을 완성한 후에 새벽마다 마을의 입구를 막고 서있는 사탄에 대하여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라는 기도를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새벽마다 교인들이 기도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서울 무당은 마을 사람들에게 교회 때문에 마을을 지키던 수호신이 떠나려고 하므로 큰굿판을 벌려야 한다며 마을 사람들에게 굿을 위한 돈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 교회 때문에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그 자리를 떠나야 할 신을 믿지 말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면하며 예배할 때는 돈이 필요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이렇게 기도하라고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마을에서 돼지를 키우던 집에서 돼지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도 그 사람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이렇게 염불 대신에 계속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얼마 후 돼지를 키우던 집의 부인이 병이 나서 부산 고신병원에 가저 진단을 받았는데 말기암이라 가망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걱정하고 두랴워하느냐 아주 간단한 기도를 하라고 계속하여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를 주장하게 했습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기도가 놀라운 일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은 과거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그 이름의 능력은 변함이 없습니다.
문제는 오늘의 시대가 너무 편하기 때문에 간절함이 없습니다.
성탄의 위한 트리, 카드, 선물, 노래는 넘쳐납니다.
세속의 분위기에 쓸려가는 믿음이 아니라 이제라도 예수 이름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이름은 구원하는 이름입니다.
예수 이름은 치료하는 이름입니다.
예수 이름은 회복하는 이름입니다.
예수 이름은 능력의 이름입니다.
예수 이름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J C & I)

2025년 성탄절을 앞두고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믿음의 대상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와 임마누엘의 의미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그리스도
라는 명칭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구약 시대에 기름 부음을 받는 직분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임마누엘
이란 명칭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예수 / 1414구절 

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태복음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태복음 1: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태복음 2:1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그리스도 / 523구절

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태복음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태복음 2: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임마누엘 / 3구절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8:8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 하셨느니라.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불교에서 불자들은 간단하게 염월을 아뢸 수 있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물론 불교에도 경전이 있는데 무려 8만 대장경이라고 합니다.
불자들이 이 모든 경정은 읽고 묵상하지 않지만 아주 간단하게 염불을 외우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이렇게 간단한 기도가 없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 이름을 결정하는 때는 태어난 후에 작명을 합니다.
물론 요즈음에는 태명이라고 하여 부부 사이에 태어나기 전에 잉태된 생명을 부르기도 합니다.
때로는 아들을 낳기 위하여 아들의 이름을 정하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탄생할 때는 이름이 먼저 알려졌습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다하다

  • 1. 동사 - 어떤 것이 끝나거나 남아 있지 아니하다.
  • 2. 동사  - 어떤 현상이 끝나다.
  • 3. 동사 - 수명 따위가 끝나다. 또는 생명을 잇지 못하고 끝내다.







 

























인물 예화 / 스타인메츠<구조>. 한스 셀리에<스트레스>. 탈레스<서양철학의 아버지>, 태선 스님 김진규 목사, 토마스 아 켐페스



1. 스타인메츠<구조> - 구조를 알면 모든 것이 보인다 
2. 한스  셀리에<스트레스>
- 최초로 스트레스라는 용어를 사용 
3. 탈레스<서양철학의 아버지>
- 만물의 근원(아르케)은 "물"
4. 태선 스님 김진규 목사
- 임마누엘
5. 토마스 아 켐페스
- 그리스도를 본 받아 
6. 미즈노 겐조 -  
7. 마틴 로이드 존스




찰스 프로테우스 스타인메츠(Charles Proteus Steinmetz, 1865년-1923년)


찰스 프로테우스 스타인메츠(Charles Proteus Steinmetz, 1865년-1923년)
독일 출생의 미국 전기공학자로 그의 주요한 공헌은 자화(磁化)와 히스테리지스 손실과의 관계를 밝히는 '히스테리시스 법칙'의 발견, 복소수로 교류회로를 간단히 계산할 수 있는 기호법의 창안, 과도현상의 연구의 3가지로 귀착된다. 
 
생애

본명은 카를 아우구스트 루돌프 슈타인메츠(Karl August Rudolf Steinmetz)이다. 
1865년 4월 9일 독일 프로이센 브레슬라우 출생하였다. 
브레슬라우대학교와 취리히대학교에서 수학과 전기공학을 공부하였다. 
독일 학생사회운동의 선구자로서 독일 사회민주당에 소속해 있었기 때문에 경찰의 탄압을 피해 1889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개명(改名)한 후 1848년 독일혁명 때 독일로부터 망명했던 R.아이케마이어의 공장에 고용되었다. 
이 공장은 제너럴일렉트릭 설립 이듬해에 매수되어, 그도 그 회사의 고문기사로 임명되었다.

1902년 이후에는 유니온대학교의 전기공학과 교수를 겸임, 미국 최고의 전기공학자가 되었다. 
전기공학에 관한 그의 주요한 공헌은 자화(磁化)와 히스테리지스 손실(hysteresis loss)과의 관계를 밝히는 '히스테리시스 법칙'의 발견(1891), 복소수(複素數)로 교류회로를 간단히 계산할 수 있는 기호법의 창안(1893), 과도현상(過渡現象)의 연구(1909)의 3가지로 귀착된다.

10월 26일 향년 59세로 별세하였다.

저서로는 《Theory and Calculation of Alternating Current Phenomena》(1897) 《Engineering Mathematics》(1910) 《America and New Epoch》(1910) 등이 있다. 전기화(電氣化)의 사회적 의의에 관심을 가져 1922년 레닌에게 편지를 보내어, 혁명 도상의 소련에 기술적 원조를 제의하였다.

출저 : 네이버 백과사전

이 일 후에(요한계시록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After this I looked, and there before me was a door standing open in heaven. And the voice I had first heard speaking to me like a trumpet said, Come up here, and I will show you what must take place after this.

이 일 후에(요한계시록 4:1) /설교 원고(2019-05-05)

(도입 이야기)
‘스타인메츠(Charles Proteus Steinmetz, 1865. 4. 9~1923. 10. 26)’라는 미국의  전설적인 전기 기술자가 있었습니다. 원래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출생하여 브레슬라우, 취리히,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 전기 공학, 화학을 전공했습니다.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 회사의 기술자로 취업되었고 유니온 대학 물리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벼락을 연구하여 피뢰침을 개량했으며 발전기와 전동기에 관한 200개 이상의 특허를 받았다고 합니다.

어느 공장에서 발전기가 고장이 나서 작동되지 않을 때 여러 기술자들을 불러 발전기를 수리하도록 의뢰하였으나 도저히 수리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스타인메츠에게 발전기 수리를 의뢰하였다고 합니다. 
스타인메츠가 발전기 이곳저곳을 작은 망치로 두들겨 보더니 즉시 고장 난 부분을 알려주며 그곳에 하얀 분필로 표시한 후에 그곳을 뜯어서 고치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여러 날 동안 많은 기술자들이 동원되어 고장의 원인을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는데도 스타인메츠는 망치로 몇 번 두드리더니 고장 난 부분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공장 앞으로 발전기 수리비로 1만 불의 청구서가 배달되었습니다. 
공장장은 스타인메츠에게 작은 망치로 몇 번 두들겨 본 것이 전부인데 수리비용이 너무 비싸다고 하였더니 그 때 스타인메츠가 공장장에게 ‘분필로 고장 난 부분 표시한 수고비는 $100. 그리고 어디를 고쳐야 하는지를 찾아내는 기술은 $9,900 이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결국 공장장은 스타인메츠에게 1만 불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스타인메츠의 이야기는 ‘구조를 알고 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구약 성경의 구조는 모세와 엘리야
신약 성경의 구조는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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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셀리에 János Hugo Bruno Hans Selye(1907. 1. 26 - 1982. 10. 16)

한스 셀리에(János Hugo Bruno Hans Selye CC(/ sɛljeɪ /; 헝가리어 : Selye János; 1907. 1. 26 – 1982. 10. 16)

선구적인 헝가리-캐나다인으로 내분비계 생리학자였다. 
그는 스트레스 요인에 대한 유기체의 가상적 비특이적 반응에 대한 중요한 과학적 연구를 수행했다. 
비록 그가 글루코코르티코이드(glucocorticoids)의 많은 측면을 모두 인식하지는 못했을 모르지만, 셀리에(Selye)는 스트레스 반응에서 이들 역할의 주요한 측면을 알고있었다. 
샬롯 거슨(Charlotte Gerson)은 그를 생물학적 스트레스의 존재를 최초로 증명한 주요한 인물이라고 여긴다.[1][2]

셀리에(Selye)는 1907년 1월 2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비엔나에서 태어나 헝가리 코마 롬에서 자랐다.[3] 
셀리에(Selye)의 아버지는 헝가리의 의사였고 그의 어머니는 오스트리아인이었다. 
그는 1929년 프라하에서 의학 및 화학 박사가 되었으며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교, 캐나다 맥길 대학교, 몬트리올 대학교에서 스트레스(stress)와 내분비학 분야의 선구적인 일을 계속했다. 
그는 1949년에 처음으로 노벨 생리 의학상 후보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경력에서 총 17 개의 후보에 올랐지만 결코 수상하지 못했다.[4][5]

일반적응증후군(一般適應症候群,general adaptation syndrome)은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스트레스의 종류에 관계없이 일어나는 신체적ㆍ생리적 증상으로 3단계(경고반응단계,저항단계,탈진단계)의 과정을 일컫는다. 
일반적응증후군의 부작용으로는 피로, 두통, 불면증, 우울증, 분노, 불안 따위가 이에 해당한다.

  1. Healing the Gerson Way, Defeating Cancer and Other Chronic Diseases, New Edition. Charlotte Gerson with Beata Bishop, Gerson Health Media, 2010, p. 48.
  2. Kroker, Arthur (1984). 《Technology and the Canadian Mind: Innis/McLuhan/Grant》. Montreal: New World Perspectives. 73쪽. hdl:1828/7129. ISBN 978-0-920393-14-7.
  3. 〈Hans Selye〉 2008판. 《Encyclopædia Britannica》.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008년 6월 12일에 확인함.
  4. The Nomination Database for the Nobel Prize in Physiology or Medicine, 1901-1953
  5. “Nomination Archive” (미국 영어). 《NobelPrize.org》. 2018년 12월 1일에 확인함.
스트레스 연구의 선구자인
한스 셀리에(Hans Selye) 박사가 1958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으나, 사실과 다릅니다. 
한스 셀리에는 노벨상을 수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트레스' 개념을 처음 도입하고 '일반 적응 증후군(General Adaptation Syndrome)'이라는 스트레스 반응 단계를 정립하는 등 스트레스 연구의 "대가"로 불리지만, 실제로 노벨 위원회로부터 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노벨 위원회는 한스 셀리에 교수를 당연히 노벨상 수상자로 생각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언급하며, 그가 수상하지 못한 사실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다만, 스트레스와 관련된 다양한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밝혀낸 여러 다른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수상했습니다. 
예를 들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작용 방식이나 신경내분비학 분야에 기여한 연구자들이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스트레스'라는 용어를 정립한 한스 셀리에 본인은 노벨상 수상자가 아닙니다.

스트레스는 정신적, 신체적 자극에 대한 심신의 반응으로, 불안, 짜증, 집중력 저하 등의 심리적 증상과 두통, 어지럼증 등의 신체적 증상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과도한 스트레스는 면역력 저하와 뇌 기능(기억력, 감정 조절 등) 손상을 일으킬 수 있으며, 규칙적인 운동, 충분한 휴식, 건강한 식단, 심호흡 등으로 관리할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란?
  • 외부의 자극이나 변화에 대한 신체적, 심리적, 행동적 반응입니다.
  • '팽팽하게 죄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유래했으며, 삶의 긴장감을 뜻합니다. 
스트레스의 원인
  • 외적 요인 : 소음, 더위 같은 물리적 환경, 규칙이나 규정, 상사나 타인의 공격적인 태도 등.
  • 내적 요인 : 생로병사, 경제적 어려움, 실직, 사업 실패, 과도한 목표 설정 등 개인적인 사건. 
스트레스 증상
  • 심리적 증상 : 불안, 짜증, 신경과민, 우울, 건망증, 집중력 저하, 좌절감 등.
  • 신체적 증상 : 두통, 어지럼증, 무기력증, 면역력 저하, 수면 장애 등. 
스트레스 관리 및 해소 방법
  • 운동 : 가벼운 운동만으로도 스트레스 호르몬이 감소하며, 밖에서 하는 운동은 더 효과적입니다.
  • 휴식 : 규칙적으로 휴식하고, 충분한 수면을 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식습관 : 건강한 식단을 유지합니다.
  • 마음 챙김 : 심호흡을 하거나,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방해 요소를 최소화합니다.
  • 계획 : 하루 계획을 미리 세우고 일을 천천히 진행합니다.
  • 취미 활동 : 미술관 방문처럼 즐거운 활동을 통해 스트레스를 낮출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는 다양한 질병의 주요 원인 또는 악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 보고에 따르면 많은 질병이 직간접적으로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스트레스가 질병을 유발하는 원리
장기간 지속되는 만성 스트레스는 신체의 정상적인 방어 체계를 무너뜨리고 다양한 생리적 변화를 일으킵니다. 
  • 호르몬 불균형 : 스트레스를 받으면 신체는 '투쟁-도피 반응(fight-or-flight response)'을 위해 아드레날린, 코르티솔과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합니다. 급성 스트레스 시에는 유용하지만, 만성적으로 과다 분비되면 면역 기능을 억제하고 혈압을 상승시키는 등 악영향을 미칩니다.
  • 신경계 자극 : 스트레스는 자율신경계(특히 교감신경계)를 자극하여 심박수 및 호흡 증가, 혈압 상승, 소화 불량, 불면증 같은 다양한 신체적 증상을 유발합니다.
  • 염증 반응 증가 : 만성 스트레스는 염증 지표를 높여 신체 전반에 염증을 증가시킵니다. 이는 심혈관 질환, 당뇨병, 암 등 만성 질병으로 발전할 위험을 높입니다. 
스트레스와 관련된 주요 질병

스트레스는 신체적, 정신적 건강 모두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칩니다. 

신체 질환 :
  • 심혈관 질환 : 고혈압, 협심증, 심근경색, 뇌졸중 등 심장 및 혈관 질환의 주요 원인입니다.
  • 면역계 질환 : 면역력 저하로 인해 감염성 질환에 취약해지며, 알레르기나 자가면역 질환(예: 루푸스, 류마티스 관절염)의 발병 위험을 높입니다.
  • 소화기 질환 : 소화성 궤양, 기능성 위장 장애, 과민성 대장 증후군 등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킵니다.
  • 내분비계/기타 : 당뇨병, 갑상선 질환, 긴장성 두통, 만성 요통, 피부 질환(여드름, 두드러기) 등과 관련이 있습니다. 
정신 질환 :
  • 불안 장애, 우울증, 적응 장애, 수면 장애, 섭식 장애, 공황 장애 등 다양한 정신 건강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스트레스는 신체의 여러 시스템에 부담을 주어 다양한 질병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키는 만병의 근원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트레스 관리와 예방은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엔도르핀
과 아드레날린

모두 신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호르몬 및 신경전달물질이지만, 분비 상황과 기능이 매우 다릅니다. 

엔도르핀 (Endorphin)

엔도르핀은 "행복 호르몬" 또는 **"뇌 내 마약"**으로 불리며, 신체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천연 진통제 역할을 합니다. 
  • 기능: 강력한 진통 효과가 있으며(모르핀보다 수십에서 수백 배 강함), 행복감과 황홀감을 느끼게 합니다. 통증을 억제하고 스트레스를 줄여 면역력을 높이는 데 기여합니다.
  • 분비 조건:
    • 통증이나 심한 스트레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분비됩니다.
    • 격렬한 운동: 무산소 운동 상태가 되면 엔도르핀 분비가 급증하여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같은 쾌감을 유발합니다.
    • 웃음, 즐거운 생각: 긍정적인 감정 상태일 때도 분비가 촉진됩니다.
    • 매운 음식 섭취: 신체가 매운맛을 고통으로 인지하여 이를 상쇄하기 위해 분비됩니다.
아드레날린 (Adrenaline / 에피네프린 Epinephrine)

아드레날린은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투쟁-도피 반응(fight-or-flight response)" 호르몬입니다. 
  • 기능 : 교감 신경계를 활성화하여 신체가 갑작스러운 자극이나 위협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준비시킵니다.
  • 신체 영향 :
    • 심박수 및 혈압 증가 : 심장 박동과 혈압을 높여 혈액 순환을 빠르게 합니다.
    • 혈당 증가 : 근육과 뇌에 산소와 포도당 공급을 늘려 에너지를 즉각 사용할 수 있게 합니다.
    • 기타 : 동공을 확장하고, 소화 속도를 늦추며, 근육으로 가는 혈류량을 증가시킵니다.
  • 분비 조건 : 공포, 불안, 분노 등 감정을 느낄 때나 위급 상황 시 부신수질에서 분비됩니다. 
주요 차이점 요약

특징 

엔도르핀 (Endorphin)      아드레날린 (Adrenaline)
주요 역할   통증 완화, 행복감 유발, 이완       위기 대처(투쟁-도피 반응), 각성
분비 장소   주로 뇌하수체 및 시상하부      부신 수질
분비 상황   통증, 격렬한 운동, 웃음, 긍정적 감정      공포, 분노, 위협, 스트레스
느낌   황홀감, 쾌감, 안정감      긴장, 흥분, 에너지 급증

이 두 호르몬은 모두 스트레스 상황에서 분비될 수 있으며, 엔도르핀은 고통을 줄이고 아드레날린은 즉각적인 신체 능력을 끌어올려 생존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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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스(Θαλής, Thales, 기원전 7세기) 625년 - 624년경, 547년 - 546년경   

고대 그리스 철학자로 밀레토스 학파의 창시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칭했다. 
그리고 현재의 사람들한테 탈레스는 최초의 철학자, 최초의 수학자, 최초의 고대 그리스 7대 현인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확실하진 않지만, 탈레스가 피타고라스의 스승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운동 경기 관람 중에 탈수증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사망지는 알려지지 않음.)


탈레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지만, 믿을 만한 고대 저술가들의 이야기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탈레스는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의 밀레토스라는 도시 출신이며, 여러 분야에서 학식이 넓었다고 한다. 탈레스는 이집트 여행의 영향으로, 수학천문학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수학과 천문학에 관련된 업적들이 아주 많은데,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천문학을 이용해서 기원전 585년에 일어나는 일식을 예언한 것이 있다. 또한, 수학의 기하학적 방법을 빌어서 이집트에서도 가장 큰 피라미드라고 알려져 있는 쿠푸 왕대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한 업적도 유명하다.

철학자 플라톤테아이테토스에 따르면, 밤에 별을 보면서 걷다가 우물에 떨어졌는데, 이것을 본 영리한 트라키아 하녀가 "하늘의 이치를 알려고 하면서 바로 앞 우물은 보시지 못하는군요!"라고 비웃었다는 일화가 있다고 한다.

탈레스에 관해서는 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 날, 탈레스의 친구가 "이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 돈 있는 사람들만 잘 살고, 돈 없는 사람들은 못 사는 더러운 세상 같으니라고!"라고 말하자, "친구! 돈을 잘 벌 수 있는 방법은 널려 있어. 머리를 두 번 써보라구."라고 탈레스가 되받아쳤다. 그러자 그 친구는 "넌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겠지? 어디 내가 여행을 다녀올 때까지 돈을 많이 벌어 보게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탈레스는 그 말을 듣고, 돈 버는 일에 몰두하게 됐다. 그리고 친구가 돌아와서 보니, 탈레스는 친구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돈을 갖고 있었다. 과연 탈레스는 무슨 방법을 썼을까? 당시에는 올리브가 아주 귀한 것이었는데 쓰는 용도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가 여행을 떠난 후, 올리브의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유심히 관찰한 탈레스는 올리브의 생산량이 좋을 때와 좋지 않을 때는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탈레스는 마을을 돌아 다니면서 기름 압축기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마당만 차지하는 기름 압축기를 기꺼이 팔았다. 올리브가 풍작일 때, 탈레스는 마을의 거의 모든 압축기를 소유하고 있었다. 탈레스는 기름 압축기를 사람들한테 빌려 주면서, 큰 돈을 벌 수 있었던 거라고 한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따르면,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만물이 모두 물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땅도 물 위에 떠 있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탈레스에 관해서 그의 견해를 체계적으로 세워보기에는 알려진 바가 너무나 적다고 한다. 그러나 그 외에도 밀레토스 학파에 대해서는 더 많은 바가 알려져 있다. 그의 생각은 아낙시만드로스가 이어받아, "가장 1차적인 만물의 근원"을 찾으려 했으며, 아낙시만드로스의 친구인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근원을 "공기"라고 주장하게 된다.

한편,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탈레스가 직접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전기 발생 실험을 최초로 행한 사람이 바로 탈레스라고 한다. 
여담으로,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도자기가 진열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어서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

탈레스가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기하학의 정리 5가지가 있는데, 이것을 믿을 수 있는 저술가들의 글을 통해서 추측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임의의 지름에 의해서 이등분 된다.
2.  두직선 이 만나면 마주보는 두 각은 같은 각을 이룬다.
3. 반원에 대한 원주각은 항상 직각이다.
4. 삼각형의 한 변과 양 끝의 각이 다른 삼각형의 그것과 같으면 두 삼각형은 합동이다.(흔히, ASA 합동 정리라고 말한다.)
5. 이등변삼각형의 두 밑각은 서로 같다.


그리스 7현인

그리스 7현인(그리스어: οἱ ἑπτὰ σοφοί hoi hepta sophoi 호이 헤프타 소포이)은 기원전 620년부터 기원전 550년에 영리하다고 불린 고대 그리스의 인물들이다.

누구를 '7현인'에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대의 서적에 따라 제각기 다르며 일관된 것이 없고, '일곱'(7)이라는 숫자로 칭해지고 있지만, 플루타르코스는 '델포이의 Ε에 임해서'에서 본래는 다섯 명이었지만, 두 명의 참주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으로 현인의 이름을 강탈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누가 어떤 이유로 최초로 '현인'의 칭호를 얻었는지도 알 수 없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25명이나 거론하고 있다. 헤르미포스는 17명이라고 언급하였다. 이는 여러 그리스인들이 각기 서로 다른 명단을 만들었던 탓이다.[1]

기원전 400년경 플라톤이 《프로타고라스》 중에서 든 것은 다음과 같다. 플라톤이 언급한 일곱 명은 모두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살았던 인물들이다.

다만 플라톤은 코린토스의 페리안드로스 대신 케나이의 농부였던 뮤손을 거론했다. 뮤손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당대에 살아있는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스 7현인의 유명한 일화로는 그들의 사이에 벌어졌던 '지혜 가늠'이 있다.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다가 우연히 발견된,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황금 을 둘러싸고 코스와 미레토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그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지혜로 적시는 자"에게 솥이 돌아갈 때까지는 양국의 전쟁은 끝나지 않으리라는 델포이신탁에 따라 당시 현자로 이름이 나 있던 탈레스에게 솥을 주었지만, 그는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다른 현자에게 양보했다. 다른 현인들 역시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라며 사양했고, 그렇게 서로 돌아가면서 사양하는 사이에 탈레스에게로 돌아왔다. 결국 탈레스는 이 황금 솥을 아폴론에게 봉납했고, 델포이에서 신탁을 전하는 퓨티아(무녀)는 이후 이 솥에 앉아서 신탁을 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들이 당대의 현인으로 칭해지게 된 연유에 대해 "그들은 모두 스파르타의 문화를 동경한다. 그들의 지혜는 모두가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문장과 인상적인 격언을 사용하는 스파르타의 문화에 속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하였다.[2] 윌 듀란트에 따르면 그리스에서 가장 존경받는 현자는 이론가가 아니라 자기 지혜를 세상에서 적극 활용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현자의 말은 그리스인들 사이에 격언처럼 여겨졌고, 어떤 경우에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지기도 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가장 불행한 인간은 불운을 이겨 내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 "인간은 길거나 짧은 인생을 살도록 운명으로 정해진 것처럼 자신의 삶을 다스려야 한다" "지혜는 젊었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여행의 수단으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 다른 어떤 소유물보다 지혜가 더 오래 가기 때문이다" 등의 비아스의 경구를 자주 인용하곤 하였다.[1]

그리스 7현인으로 꼽히는 이들 모두는 조언, 리더십, 변호, 법제 개혁 등의 분야에서 같은 시대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 특출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조언자나 입법가, 개혁가 등의 역할을 많은 사람은 대단히 지혜로운 것으로 여겨졌다. 플라톤이나 플루타르코스 모두 이들 일곱 현인을 선출한 공통적 기준을 공들여 설명하였지만, 7현인이 어떤 식으로든 지혜롭기는 했지만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지혜롭지는 않았기에, 플라톤이나 플루타르코스 모두 그 '어떤 공통점'을 설명하는 용어에 제약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2]

  • 우치야마 가쓰토시 편저, '철학의 역사 1', 중앙공론 신사, 2008년
  • 트레버 커노 저, 정연우 옮김 《지혜의 역사 - 역사 속 지혜는 어떤 모습이었나》 도서출판 한문화, 2018년
  • 윌 듀런트 저, 김운한 역 《문명 이야기》2: 그리스 문명(1), 민음사, 2011년
  1. 이동: 가 윌 듀런트 저, 김운한 역 《문명 이야기》2: 그리스 문명(1), 민음사, 2011년
  2. 이동: 가 트레버 커노, 정연우 옮김 《지혜의 역사 - 역사 속 지혜는 어떤 모습이었나》도서출판 한문화, 2018



그리스 고전기 시대를 대표하는 7명의 지식인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의 언급을 볼 때, 본래 소피스트라는 명칭은 이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표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 우리가 익히 소피스트라고 알고 있는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 사이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활동한 일련의 인물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들이니 자신들 또한 소피스트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소피스트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보통은 밀레투스탈레스, 아테네솔론, 프리에네의 비아스, 미틸레네[2]의 피타코스[3], 스파르타의 킬론, 린도스[5]의 클레오불로스[6], 코린토스의 페리안드로스를 꼽는다.

그러나 참주로서 논란거리가 많은 페리안드로스[7]를 빼고 파이스토스[8]의 에피메니데스[9] 넣기도 하고, 그 이외에 경우나 기호에 따라 아나카르시스,[10] 뮈손[11], 페레큐데스를 넣기도 한다. 나중에 가면 아예 누구를 7현인로 치는지가 서술자 나름인지라 20명 정도가 거론되기도 했다.[12][13]

그래도 탈레스, 솔론, 비아스, 피타코스 이 네 사람을 7현인에 넣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 외에는 스승제자는 물론이고 지역과 역사가에 따라 의견이 엇갈린다. 결국은 서술자 나름.

이 7인의 선정은 바다에서 건진 세발 달린 솥의 소유권을 둘러싼 코스와 밀레투스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한 신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코스 섬 어부들이 그물을 걷다가 뭔가 묵직한 게 걸려서 애매해 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밀레투스 청년들[14]이 "거 뭐요?"라고 말을 걸다가 뭔가 느낌이 왔는지, 그물에 걸린 게 뭔지 확인도 안 하고 돈 주고 사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건져놓고 보니 황금으로 된 세발 달린 솥이었던 것이다.
어부들은 뭔가 계약조건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는지, 거래를 취소하려 했다고 한다. 
"이거 황금이잖아? 그물도 망가졌고, 값을 더 줬으면 하는데?" 
그러자 청년들은 "팔기로 했으면 그냥 팔지 이제 와서 왜 말을 바꿔?"라며 항의했고, 그 결과 청년들과 어부들은 언쟁을 벌였다고 한다. 열받은 어부들이 그냥 솥을 들고 코스로 돌아가버리자, 청년들은 당연히 밀레투스로 가서 "코스 놈들한테 사기당했음!! 이래도 됨??"이라고 분통을 터뜨린다. 
결국 밀레투스는 폴리스 차원에서 항의사절단을 보냈지만, 코스에서는 묵살하고, 결국 열받은 두 도시는 전쟁까지 벌였다고 한다.[15]

나중에 자기들이 생각해도 솥단지 하나 때문에 전쟁했다는 게 좀 어이 없었는지, 두 도시는 신탁에게 중재를 요청했는데,[16] 신탁은 가장 현명한 자에게 솥을 넘기라고 하였고, 이에 양측은 밀레투스의 현자인 탈레스에게 넘기는 데 합의했다고 한다. 코스 섬 사람들은 밀레투스 사람들은 꼴도 보기 싫지만, 탈레스라면 또 얘기가 달라서, 탈레스한테는 호감을 느꼈다고.

그러나 탈레스는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다른 현자들에게 돌렸고, 그 현자도 똑같은 생각에 다른 현자한테 돌리고, 그렇게 돌리고 돌리다가 결국은 탈레스한테 돌아오자, 탈레스는 그 솥을 델포이의 아폴론에게 봉헌했다고 한다.

다만 이 이야기는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존재하는데, 솥의 내력은 물론이고 솥이 한 바퀴를 다 돈 게 아니라 그냥 마지막 사람[17]이 아폴론에게 봉헌했다는 설도 있는가 하면, 정확히 봉헌된 아폴론 신전이 어디인지, 아폴론이 아니라 헤라클레스에게 봉헌되었다는 설도 있다. 심지어 솥이 아니라 술잔이나 머리에 쓰는 관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이때 7현자들은 그들이 서로에게 보여준 겸손과 호의로 인해 명성을 얻었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7현자들은 서로 제법 끈끈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설에 따르면 델포이와 코린토스에서 회합을 가진 적이 있다고 한다. 특히 델포이에서의 회합은 위에서 말한 솥단지를 봉헌하면서 모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플라톤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 따르면 그때 그들이 "너 자신을 알라"와 "모든 것은 적당하게 하라"는 두 격언을 새겼다고 한다. 코린토스에서의 회합은 코린토스의 참주 페리안드로스의 초청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18]

이들끼리 주고 받은 편지라고 전해지는 문헌들이 있는데, 이 문헌들을 보면 이들은 서로 활발한 학술교류를 희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서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조언을 보내기도 하는가 하면, 솔론이 아테네의 참주정을 피해 망명할 때에는 서로가 앞다투어 솔론을 각자 자기 도시에 초대하려고 초대장을 보냈다고도 한다.

대항해시대4의 패자의 증표 지도가 이들 7현인의 이름을 띄고 있다. 탈레스의 종이 지도, 쿠레오보로스의 무명 지도, 페리안도로스의 돌 지도, 솔론의 나뭇잎 지도, 비아스의 화폐 지도, 케이론의 대나무 지도, 피타코스의 칼날 지도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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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규 목사, "前 태선스님"

어느 날 꿈에 이상한 문자를 받았지요.
"임마누엘"
도대체 불경 어디에 이런 문자가 있는지 찾아내려고 팔만대장경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승들을 찾아다니며 물었지만 아무도 정확한 의미를 알려주지 않아 답답하던 차에 어느 산속에 도사님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그 도사님을 찾아가던 중 임마누엘이라는 기도원의 간판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기도원에 들어가 도대체 임마누엘이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스님을 살던 내게 왜 이런 문자를 보여주셨을까?
그 작은 기도원에서 성경을 주셔서 성경을 읽던 중 예수님을 영접하고 승복을 벗고 감리교 신학대학에 입할 후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 "중생선교회'를 설립하고 스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고 합니다.
 

저의 이름은 김진규 목사입니다. 저는 3대의 불교 가정에서 17년 동안을 중으로 있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서 나의 동료와 선후배 불교신도들에게 전도를 하기 위해 나와서 20년 동안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종교성이 강한 백성입니다. 여러 가지 종교가 많이 침투해 와 있지만, 그중에 가장 큰 종교는 바로 불교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1,600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600년 긴 세월 속에서 우리 조상들은 하나같이 절에 다니기도 하고 또 부처님께 절을 하고 복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보면, 문화유산을 남겨놓은 것은 있다 할지라도 우리 인간에게 가장 절실하게 해결해야 할 먹고 사는 가난의 문제는 해결을 못 했습니다. 왜 그러냐? 석가모니 부처는 불교를 창설했지만, 그는 죽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복을 주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1,600년 역사 속에서 모두 다 가난하게 살아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가 100년 밖에 안 됐지만, 기독교가 들어온 다음에는 우리 민족은 이렇게 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의 민족들이 우리나라를 우러러 보게 되었지 않습니까? 이것이 다 기독교 문화를 받아들였던 축복이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조상 대대로 불교를 믿던 사람이에요. 저희 할아버지는 강원도 지구의 불교 신도 회장을 했습니다. 백암온천에 백암사를 지으신 분이 우리 할아버지에요. 저희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가지고, 결혼을 했지만 한국불교 태고종 대처승 중이 되가지고, 경상도 일월사에서 74년 동안을 중으로, 주지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나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불교 신앙을 이어받아 가지고,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승복을 입어야 했고, 그리고 커가지고 성년이 되어서는 대한불교 조계종 승려가 되어서 17년 동안 중생 계도에 몸을 바쳤던 사람입니다.
저는 충청북도 속리산 법주사에 들어가서 3년 동안의 행자의 교육을 받았는데, 엄청난 고행을 했습니다. 불교에서는요, 중이 되려고 일주문에 한번 들어가면 3년 동안을 절 밖을 못 나와요. 그리고 바깥의 소식을 못 들어야 돼요. 자, 먹고 싶고, 입고 싶고, 가지고 싶고, 하고 싶고, 보고 싶은 108번뇌를 끊어야 돼요. 그리고 신문도 보면 안 돼요. TV도 못 봐요. 라디오도 못 들어요. 일반 책도 못 봐요. 그리고 시간만 있으면 불경을 독경해야 되고, 참선을 해야 됩니다. 편지가 오는 것도 받을 수가 없고, 편지 한 장도 하면 안 됩니다. 부모 형제가 찾아와도 만나지도 못하고, 가지도 않습니다. 완전히 바깥세상을 끊어야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걷는데, 두 눈동자도 좌우로 돌리지도 못하고, 벌레 새끼 한 마리 밟아 죽이지 않으려고 발끝만 보고 살아야 돼요. 이런 과정을 거쳐 가지고 수계를 받습니다. 그리고 나면 중생을 제도하고자 나오게 되는데, 저는 법명이 태선승려가 되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불자들에게 소원기도 올려줬습니다. 그리고 49제도 올려줬습니다. 그리고 운명에 따라가지고 부적도 붙여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불교 신도들을 위해서 중생제도에 몸 바치던 태선 승려 김진규가 왜 그 옷을 벗어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는가? 세 가지 문제가 나를 예수 믿게 했어요.

첫째로 예수를 만나게 된 동기는...
불교에는 중이 죽으면 불에 태워서 화장하는 다비식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중은 젊어서 죽든 늙어서 죽든 어떻게 죽든지, 죽으면 다 불에 타야 돼요. 저의 은사스님이, 84살 먹은 은사스님이 참선하다가 중풍에 걸렸습니다. 움직이지 못했어요. 자식이 없는 중들이라 제자들이 자식 대행을 하고, 밥상도 갖다 주고, 빨래도 해서 입히고, 목욕도 시켜 드립니다.
그런데 하루는 내 친구가 밥상을 갖다 주고, 소변 대변 받아놓은, 용변을 치우겠다고 요강을 들고 넘어오다가 절간 문턱에 걸려가지고 엎어져 버렸어요. 그 요강을 떨어뜨려 가지고 깨버렸어요. 그 속에 있는 배설물이 온 바닥에 쏟아져 버렸어요. 그걸 치우려고 하니까 화가 났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친구가 그 나이 많은 노인장을 보고 욕을 해버렸어요.
"빨리 뒤져라, 어이구, 오래 살아가지고 원수 되지 마라."
지겹다고 막 욕을 하면서 그걸 치웠단 말이에요. 그 소리를 들었던 그 노인장은 그 다음에 밥을 갖다 드리니까 고개를 내저으면서,
"나는 너희들이 욕을 하며 주는 법을 먹고 살고 싶지 않다. 난 안락사하기로 결심했으니 밥 가져오지 말아라!"
안락사라고 하는 것은 자살인데요. 불교는 정당한 자살은 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오늘부터 굶어 죽기로 마음먹었다. 가져오지 말아라!"
그래서 밥을 갖다드리니 먹지 않습니다. 그 노인이 죽음을 앞에 놓고 앉아 있는 그 모습이 참으로 처량합니다. 그래서 다른 스님들이,
"스님, 그러지 마시고 각서를 써가지고 도장을 찍으시면 빨리 안락사를 해 올리겠습니다."
"그래 좋다."
그래서 그분에게 각서를 받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러면 옛날에 그 중들은 바위 밑에다가요, 참나무 장작을 한 열 짐을 쌓아놔요. 그리고 아직도 생명이 끊어지지 않은 스님을 밧줄로 꽁꽁 묶어 가지고 장작 위에다 얹어놓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다 석유를 들이부어요. 그리고 연꽃으로 만들어 놓은 불교의 상징 가운을 보기 좋게 씌워 놓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비식이 진행됩니다. 우리는 그 당시 아직도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다비식을 견학을 하고 서 있었습니다. 큰스님들은 목탁을 들고 나와요. 이제 신호에 따라서 그 나무에다 불을 질러 버립니다. 그 기름에 불이 붙어 가지고 활활 타들어가요. 그 생명이 끊어지는, 그 소리치는 비명소리를 들을 때에 간장이 다 녹습니다. 이렇게 생명이 끊어지고 나면 가죽이 터지고 살이 터져서 송장 타는 냄새가 공중에 막 올라가요. 하... 불고기 굽다가 불 꺼진 마냥 기름과 살점이 주룩주룩 떨어집니다. 두 눈으로 못 봐요. 이걸 2탕, 3탕, 재탕, 또 해야 돼요. 저는 그것을 보고 그날 저녁에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눈만 감으면 그게 막 나타나요.
'나도 중인데 나도 죽으면 저렇게 타야 된다.'
도저히 있고 싶은 마음이 없어 가지고 나올 마음을 가지게 됐던 것이올시다. 여러분들은 중이 안 돼봤기 때문에 그런 처참한 모습을 안 보고 사는 것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나오게 된 동기는...
중들은 한 절에 오래 못 있어요. 여기저기 전국 순회를 하게 되어 있는데, 돈을 가지고 가면 대우 받고, 돈 안 가져가면 일만 직싸게 해야 돼요. 제가 영주 부석사에 가서 있었는데, 저녁잠을 자고 아침밥을 먹으려고 나갔더니 선배가,
"시주공양 받아 왔나?"
"아닙니다."
"밥 먹지 말고 나가! 공양도 안 받아가지고 와서 무슨 밥을 먹냐?"

이 절간에는요, 선후배 차이가 엄청나게 큽니다. 그래서 밥을 못 먹고 쫓겨났는데, 배가 고프니 어떻게 해요? 마을에 나가서 또 시주 공양을 받았지요. 쌀도 주고 돈도 주고 하는데, 한 군데 갔더니 왜 난데없는 젊은 청년이 나타나 가지고,
"스님, 염불하고 다니지 말고 예수 믿고 구원받으소."
제가 처음 듣는 말인데 구원이 뭔지 압니까?
"당신, 뭐 준다 그랬소?"
"구원 받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원히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뭐요? 예수 믿으면 영원히 살아요?"
그래서 내가 욕을 했어요.
"이 사람아, 거짓말하지 마라! 인생은 나면 고생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게 인간이다. 당신도 나도 인과응보에 따라 업보 중생해야 되는 법이다. 부처님도 그 일을 다 해결 못하고 열반했다. 당신, 그런 거짓말하고 다니면, 당신 죽어 지옥의 열 두 대문에 끌려가면 고통 받을 게야! 그런 거짓말을 하면 안 돼! 부처님, 저 어리석은 청년을 용서하옵소서. 나무아미타."
그리고 가는데, 이게 또 따라오네. 뭐하러 오냐고 하니까, 예수는 생각해보고 믿고, 이 책을 한번 읽어보라면서 주더라고요. 시주 쌀을 얻으려고 짊어지고 다니는 바랑 망태에다가 그 책을 쑥 집어넣어 버려요. 절에 와 가지고 펴보니까, 쌀이 막 묻어 있는 신약성경 책 한 권이 나왔어요. 기독교 신자가 이 책을 보고 예수 믿는데, 이게 그래도 뭔 진리가 있지 않겠나 싶어요. 그래서 다른 스님들 몰래 감춰 가지고 다니면서 여섯 번 봤어요. 이 성경책을 보고,
'기독교의 주인공은 살았다. 그러니 우리는 죽은 주인공에 복 달라고 빌 것이 아니라 산 주인공에 복 달라고 비는 것이 인간의 가치를 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래서 나도 믿어야 되겠다는 마음을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책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이 두 번째 동기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나올라고 생각해보니 못 나오겠어요. 중은 절에서 먹여주고 채워주고 다 공짜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나가면 누가 밥 먹여줄 겁니까? 그런데 한번은 염불하다가 졸음이 와가지고 법당 옆에 누워 잠들었다가 우리 주지스님한테 뒤지게 맞았어요.
"이놈아, 자려면 방에서 자지 왜 부처 옆에 발을 뻗쳤냐?"
사정없이 패는 바람에 얻어맞고 앉아가지고 생각해 보니 화가 나더라니까요. 자는 놈은 개도 안 때린다는데 깨워가지고 때릴 것이지. 그래 가지고 그렇게 두들겨 맞고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근데 이상해요. 신약성경 6번 읽었는데, 말씀 한마디가 내 머리 속에 떠 올라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야, 다 내게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석가모니 부처는 80을 살아도 그런 소리 한 번도 안 했어요. 그런데,
'예수는 자신이 있으니까 오라고 안 했겠느냐. 아이구, 모르겠다 가자!'
그래서 뛰쳐나와 버렸어요. 그렇게 그냥 뛰쳐 내려 와 가지고 저희 아버지 원구 스님께,
"아버님! 종교의 주인공이 산 주인공도 있고 죽은 주인공도 있는데, 아버님, 산주인공 따라 가십시다."
무슨 소리를 듣고 왔냐고 야단치대요.
"아니요, 나는 직접 체험했습니다."
큰절을 올리고, 아버지한테 붙잡힐까봐 도망쳐 버렸어요. 그 이후에 저는 부산 경성대학을 졸업하게 되었고, 서울 감신대학을 졸업해서 이제 감리교 목사 안수를 받게 된 거예요.

우리 아버지가 원구 스님이신데 74년 동안 주지로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 내가, 목사가 어떻게 전도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지요.
"구하면 주신다고 했지 않습니까? 천지는 없어져도 내 말은 안 없어진다고 했는데, 제가 목사 하려면 우리 아버지가 예수 믿어야 되겠사온대 아버지를 전도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옵소서."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에 아버님과 헤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인간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보고 싶었어요. 명절이 오면 시를 써보기도 하고, 글을 써보기도 하고, 편지를 써보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전부 다 모아가지고 하나의 노래를 만들었어요. 이것이 바로 효도가인데, 그걸 내가 베껴가지고 갔거든요.
"아버님, 그동안 만수무강 하셨습니까?"
아버지가 내 모습을 보고, 나하고 인연이 끝났는데 돌아가라고 그래요.
"아버님, 자식이 어떻게 인연이 끝났습니까? 아버님, 예수 믿고 구원 받으셔야 됩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라 그래요.
"안 갑니다. 언젠가는 아버지가 성령님의 감동 받으면 믿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 저는 아버님을 위해서 기도하렵니다."
그리고 나이가 74살 먹은 할아버지 앞에서 저녁마다 엎드려 가지고
"아버님, 제가 보고 싶어서 이 글을 써 가지고 왔는데 한번 들어 보실랍니까?"
필요 없다고 안 듣는다고 그래요.
"들어보세요."
그러면서 그 노래를 4개월 동안을 저녁마다 아버지 앞에서 불려 드렸습니다. 그 노래를 듣던 저희 아버지가 74살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4개월 동안을 하루 저녁도 안 빠지고 불렀더니요, 아버지가 은혜를 받아서 기독교에도 그런 효도관이 있느냐고 물어요.
"아버님, 기독교는 살았을 때 효도하는 종교올시다. 그래서 제가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그랬더니,
"너 같은 놈 인간 만들어 돌려보내는 거 보니까 기독교가 괜찮구나. 나도 젊을 때는 불교 신도들이 많이 왔는데, 늙어 빠지니까 안 온다. 인생은 늙어지면 다 헛것이다. 나이가 많으면 자식 따라 가야 되고, 나는 이미 끝나버렸다. 네가 하나님과 예수를 믿어 가지고 잘 된다면 나도 너를 따라 예수 믿지!" 

할렐루야! 저희 아버님은 74살에 74년을 입었던 승복과 염주, 그리고 책 같은 거 사정없이 불태워버리고 예수 믿게 됐습니다. 
이렇게 된 그 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 후에 우리 아버님이 가지고 있던 절간을 허물어 가지고 고등공민학교를 세웠습니다. 
왜 그랬느냐. 
그때 당시는 자녀들 중에 돈이 없어 중학교도 못가는 아이들이 엄청나게 많았어요. 
나는 그 아이들을 전도할 욕심으로 절간을 변화시켜서 학교를 만들었고, 부처를 들어내니까 벌레가 바글바글 부처 밑에 많이 있어요. 석유를 부어가지고 불로 태우니 꼬불탕꼬불탕 다 타 죽대요. 그리고요 그 자녀들을 돈 안 받고 공부 가르친다고 모아놨더니 엄청나게 아이들이 몰려왔어요. 책 살 돈도 없는 아이들이에요. 그래서 서울에 올라가서 미션스쿨들을 다니면서 책을 얻어다가 아이들에게 나눠주니까 12과목이 넘대요, 중학교 과목이. 그렇죠? 원래는 과목마다 선생님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내가 돈도 없는데, 내가 혼자 교장인데, 월급을 못 주니까 나 혼자 그걸 다 가르치는 겁니다. 교장도 되고, 담임도 되고, 과목선생도 되고. 그 12과목을 나 혼자 다 가르쳤으니 내가 얼마나 머리가 좋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가르쳤고, 저녁마다 모아가지고 특별 강의로 전도했어요. 그렇게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송 가르쳤어요. 그런데 그 아이들이 신앙을 받아들이니까요, 성령이 충만하니까요, 그래서 그 부모를 막 전도하는데, 생명 걸고 전도했어요.

4회 졸업생을 제가 얻었어요. 그 4회 졸업생 내고 나니까, 중학교가 평준화가 되니까, 고등공민학교가 필요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 고등공민학교를 지금은요, 십자가를 달아가지고 교회를 만들어 버렸어요. 그렇게 절이 변해서 학교가 되고, 학교가 변해서 교회가 된 곳이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사동이라고 하는, 절골 마을의 사동교회가 그렇게 세워진 교회에요. 그리고요, 그 아이들이 예수 믿어가지고 지금 잘 됐어요. 목사가 세 사람이 나오고요, 장로가 일곱 명이 나왔어요. 초등, 중등, 고등학교 교사가 나오고, 지금 대학교 교수가 나왔어요. 그 고등공민학교 출신 중에! 예수를 믿으니까요, 사람의 운명이 바뀝디다. 지금은 절 두 개가 싹 없어져 버렸어요. 내 가족이 예수 믿으면 가정이 바뀌고, 지역이 예수를 믿으면 지역이 바뀌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저는 그 지역을 복음화 했지요.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와서 중생교회를 세우고, 중생선교회를 세워가지고 중들을 전도했는데, 기독교로 돌아온 중이 92사람입니다. 이분들을 보면 돈 가져오는 분이 한 분도 없어요. 그러니 옷을 벗기고 다른 옷을 사 입혀야 되고, 고무신 벗기고 구두 신겨야 되고, 그 다음에 머리 기르니까 이발 시켜야 되고, 장가보내야 되고 시집보내야 되고요, 사명감 있는 사람 신학공부 시켜줘야 되고. 제가 22년 동안 지금 그 일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 들어가야 내보내고. 이런 일을 지금까지 하는데, 그래서 제가 이렇게 비쩍 말랐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정이 다 예수 믿어가지고요. 아버지도 지금 예수 믿어가지고 돌아가셨지만 소천했고, 우리 형님이 장로가 됐고요, 내 동생이 목사 됐고요, 우리 누님들이 부산에 사는데 보살이 변해가지고 집사가 되가지고요. 과거에는 염불하던 우리 가족들이 모이면 그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 찬송 할 때마다 너무 기쁘게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여, 다만 내가 여러분들에게 부탁드리는 것은 여러분만 구원받았다고 안심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구원받았으면 천국 가는 건 가요. 그러나 아직도 부모가 믿지 않는다든지, 또 자식이 믿지 않는다든지, 나와 함께 사는 남편이 믿지 않는다든지, 그분 지옥 간다는 말이에요. 금년에는요, 최대의 목적이, 소원이 뭐냐. 가족 전도에 가정 선교사 되시기를 바랍니다. 외국에 나가 선교사는 못해도 가장 가깝게 살고 있는 내 가족은 전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4개월 동안 엎드려 울부짖으니까요, 들어줍디다. 그러니 될 때까지 한번 매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저 눈 앞에 보이는 것들, 곧 인간은 태어나서 고생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생은 참으로 불쌍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생각해 보자...
생명을 부여받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인생은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가.
그 인생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고생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을 경험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가.
인생과 달리 인생을 둘러싼 자연의 꾸준함은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가.
이러한 놀라움과 신비가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얼마나 논리적이고 명확한가.
이러한 놀라움과 신비를 만드신 분이 계실 것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얼마나 논리적이고 명확한가.
그래서...
다시 한 번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이것이다.
(창세기 1:1)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개종인의 삶을 돌보는 것이 나의 소명”


“타종교를 믿거나 우상을 숭배하다 예수를 믿겠다며 돌아오는 개종인들을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특히 득도를 하겠다고 집을 나가 오랜 세월 불교전통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일반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죠. 우선은 이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것이 제일 시급한 문제랍니다.”

바랑 속에 든 성경으로 예수님 만나

1980년 4월 개종인선교회를 설립, 타종교인 선교에 앞장서고 있는 중생교회 김진규 목사(68세)는 조부가 강원도 지역 불교신도 연합회 회장이고, 부친이 경북 영양군 ‘한국불교 태고종’ 일월사 주지승(태고종은 결혼한 승려를 인정하는 대처승제도를 허용하고 있다)인 불교가정에서 자라났다.

어려서부터 절밥을 먹고 자란 김 목사는 24살에 자연히 태고종에서 승려가 됐다. 그러나 불교계에서 대처승을 인정해주지 않을 뿐 아니라, 승려들이 술과 담배• 육식 등을 거리낌 없이 해대면서 해탈하겠다고 하는 모습으로 보면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에 그는 진정한 부처의 법도를 깨닫고자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인 속리산 법주사에 입문해 ‘태선’이라는 법명으로 17년간 수행했다. 하지만 고령인데다 풍에 걸려 거동이 불편한 은사(82세) 승려에게 본인의 동의를 받아 ‘다비식’(불교 장례식)으로 거행하는 것을 보면서 또 한 번의 회의를 느끼게 됐다.

자신의 젊음을 바쳐 몸담고 있던 불자의 생활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고 있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성경을 선물 받았다. 김 목사는 “시주하러간 마을에서 한 청년이 바랑 속에 겁도 없이 성경을 넣었다”면서 “밤마다 남몰래 성경을 읽으면서 인간에 대한 속죄와 구원, 영생의 진리와 함께 기독교가 살아있는 종교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직접 체험하고 17년 동안 자기해탈을 위해 고행 길을 걸으며 함께 했던 승복을 벗어 던졌다.

삶이 안정될 수 있는 공간 마련해 줘야



하나님 품으로 돌아온 것이 너무나 감사했던 김진규 목사는 처음부터 덮어놓고 ‘불교인선교회’를 창립해 선교회 명칭대로 승려들을 전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그를 불교계에서 가만 놔둘리 만무했다. 대놓고 승려들을 선교한다고 데모와 압력 등으로 가는 곳 마다 쫓아 다니면서 방해했던 것이다.

이에 개종인들이 거듭났다고 해서 ‘중생인선교회’라고 개명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중생이라는 어감 때문에 이단같다고 기독교에서 거부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우상숭배 하거나 타종교에서 개종한 사람도 들어올 수 있도록 3년 전부터 ‘개종인선교회’로 개명해 선교 활동을 펼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이러한 가운데 김진규 목사는 지난 20년 동안 90여명의 승려들을 개종시키는 열매를 거두게 됐다. 그러나 이들 중 구원의 확신이 없거나 사회에서 발붙일 곳 없어 방황하던 사람들 30여명이 다시 절로 돌아가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60여명도 생활고로 인해 사방에 뿔뿔이 흩어져 사는 것을 보면서 이들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생활관 건립을 추진하게 됐다.

이에 지난 3월 강원도 원주에 생활관을 100평 규모로 개관해, 전직 승려들을 불러모아 이들이 안정된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김 목사는 “전직이 승려인 개종인들은 오랫동안 절에서 살았기 때문에 가정이 없을 뿐 아니라 기술도 없어 의식주 해결이 힘들다”며 “게다가 교회에서도 서로의 배타적인 심리 때문에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하기 어렵다”고 이들이 함께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따라서 이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그는 “이들이 불교의 경전과 전혀 다른 성경의 진리를 깨닫기 까지는 매우 힘이 들지만, 구원의 확신이 들어서면 절대로 사찰로 돌아가지 않는다”며 “믿음이 심어질 때까지 이들의 생활을 지원해 줘야 한다”고 밝혔다.



그가 이러한 생활관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개종한 승려 때문이다. 원주에 있는 백운사의 비구승이 김 목사의 간증테입과 비교종교학 책을 읽고 마음을 열어 예수를 영접하면서 사찰을 생활관 용도로 내놓은 것이다.

비구승이 개종한 것도 기쁜일이지만 그동안 생활관 터를 구하는 기도제목이 이뤄져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었다. 이에 김 목사는 불상을 직접 철거하고, 5층 석탑 위에 십자가를 세워 중생기도원을 설립한 후 숙원사업인 생활관을 건립하게 됐다.

내가 책임져야 할 과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20년을 선교해 왔어도 김진규 목사는 여전히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그는 “곧 70세가 되면 은퇴해야 되는데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다”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을 호소했다. 뜻있는 분들의 지원과 간증을 통해 받은 사례비로 재정을 충당하고 있지만 생활관을 이끌어 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한 생활관 건립에 들어간 비용의 일부를 아직까지 못 갚아 이자가 늘어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동안 지워해 오던 개종 후 신학을 하는 사람들의 학비와 생활비 일부를 지속적으로 도움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우상을 숭배하는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켜야 되는데 그 뜻을 이루는 데는 아직도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며 한국교회가 개종인들에 대해 관심 가져주기를 촉구했다.

그는 목사가 되면서부터 지금까지 타종교로부터 갖은 폭력과 협박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이들을 위해 사역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는 “중이 목사가 됐다는 이유로 많은 교회에서 초청을 받아 전국을 다니며 간증했는데, 그때마다 불교계에서 폭력과 데모 등으로 갖은 핍박을 했다”면서 “목사가 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내가 개종인들의 삶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세 가지 소원을 피력했다. 
“△우상의 재단들이 하나님의 재단으로 바꿔질 수 있도록, 
△부처가 되겠다는 승려들이 겸손한 자세로 돌아와 복음의 전도자가 되도록, 
△증가하는 개종자들의 생활 문제가 해결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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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태선스님 17년간 의 삶을 청산하고 개종하여 목사가 되어 복음을 증거하는 김진규 목사와 사형수들의 교수형을 지켜본 한 교도관의 간증 영상

개종인선교회는 일천 육백년 불교역사와 전통 가운데 우리 민족은 우상을 숭배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본인이 승려 생활을 하다가 개종을 했기 때문에 불붙는 열정을 가지고 타종교 우상 숭배하는 이들을 구원시키고자 처음에는 불교인선교회로 시작하여 이후 우상인선교회로, 중생인선교회로, 그리고 지금은 개종인선교회로 범위를 확대해 선교하고 있습니다..

http://ca9191.org/bbs/view.php?id=board_19&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23

김진규 목사의  영상간증 
교도관으로 사형수들의 사형집행장면을 지켜 보면서 그들이 죽음 앞에 어떻게 반응을 했나를 자세히 영상처럼 묘사하는 간증

사형장에서도 생명얻는 회개의 역사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전한 예수 때문에 스데반처럼 담대하게 죽어가는 사형수를 부둥켜 안고 찬송과 기도의 봇물을 터트리고 말았던 박효진 장로!
어느 날에는 사형 집행 순간 대적하는 영의 눈빛을 보다 못해 목에 걸린 밧줄 밑에서 예수를 전하고 난 후, 죽음 5초 직전까지 같이 울어야만 했던 그 감동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모십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붙드시는 능력을 곧 체험하실 것이며,
누군가의 목에 걸린 죽음의 밧줄을 풀어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는 꼬불 꼬불 재를 넘어 찾아간 경북 청송 골짜기...
'죽은 자의 땅'이라 불리는 감옥(감호소)에서 집사 9년만에 껍데기 신앙인을 벗어 던지 박효진.
'갱생' 구호소리 음산한 열 닷섯자 높이 담장 안에서 희락의 기름을 부음받고 드디어 항복을 외치며 돌이킨 후에 자신의 두 번째 인생을 새로 시작합니다.
누구보다 더욱 훈련되어진 그는 하나님의 거대한 빛살이 영혼을 가까이 비춰주어 '주님의 증인'으로서 지구촌 모든 땅을 발바닥으로 밟으며 복음의 빛, 사랑의 열매를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그는 밀양 박가 규정공파 송당가문의 대 종갓집 종부, 어느 새벽에 들려온 종소리는 새벽닭 울 때 심히 통곡한 베드로처럼 한 여인을 회개하게 만듭니다.
그녀의 결단 이후 사당을 모셔놓고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살아온 집안이 구원의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만 섬기는 집으로 변화합니다.
낙망치않고 기도한 부인과 주변 사람들을 통해 다윗의 혈통으로 계보가 바뀐 박효진 장로의 가문을 만나보십시오.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끼는 복을 받으실 것입니다.

http://www.kcmusa.org/broadcast/viewer.php?idx=24&tn=broadcast_kcm&op=KCMTV&type=A  박효진 장로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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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1380-1471


토마스 아 캠피스(1380~1471, T. A Kempis)는 독일에서 출생했다. 1399년 19세에 수도사가 되어 소박한 수도사로 평생을 살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명상하며 글을 썼다. 그의 작품은 많지만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로 명성을 얻었다. 영적 생활, 내적인 일, 내적인 위안, 성만찬 등 4부 108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영적 명상을 기록했다.

토마스 아 캠피스는 하나님의 세계에 젖어 살았다. 하나님, 그 분의 마음을 만나는 일은 그에게 즐겁고 감사한 일이었다. 기독교의 정신을 가장 깊게 고취시킨 정교한 문장으로 평가 받는다. 인간의 영혼에 대한 깊은 통찰력으로 쓴 글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지금까지 끼치고 있다. 어떤 이는 성경 다음으로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한평생 사는 동안 어느 누가 시험과 시련을 당하지 않고 살겠는가!

이 책은 이런 경우에 위로와 격려를 제공해 준다. ‘땅에서의 인생은 전쟁과 같으니 깨어 기도하라’고 한다. 시험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시험이 고통만 주는 것은 아니고 우리에게 영적 유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캠피스의 명상 기록에 나오는 말이다. “한 가지 시험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시험이 온다. 시험을 피하기만 해서는 이길 수 없다. 진정한 겸손과 인내로만 이길 수 있다. 시험은 불안정한 마음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한 데서 시작한다. 육신적인 욕망에서 출발이 된다. 유혹은 욕심에서 온다. 사소한 작은 생각에서 싹이 튼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은 시험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런 때 낙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을 더욱 열심히 찾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예수님을 피난처로 삼아야 한다.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 시험을 가져오는 삶의 역경에 대하여는 인내가 필요하다. 나만 혼자 힘든 인생이 아니다. 시험이 오기 전에 미리 저급(低級)한 세상 즐거움을 멀리하라고 캠피스는 말한다. 충동이 시작되면 싸우라고 한다. 나쁜 습관은 끊어 버리라고 한다. 영적으로 유익이 될 만한 말을 선택하라고 한다. 고난을 당해야 방심하지 않고 정신을 차리게 된다. 고난은 나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든다. 나는 지옥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언행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

수고와 슬픔이 떠나지 않는 인생길이다. 어디에 가든지 유혹의 함정과 영적 유혹들로 가득 차 있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하여 악평을 하더라도 화를 내지 말고 나보다 더 악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라”고 캠피스는 권면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에게 모함을 당할 때에 잠잠하다. “닥치는 시험을 대처하기 위해 깨어 있으라”라고 충고한다. ‘시험의 유익함’을 깨달아야 한다. 시험으로 인해 더 겸손해지고 더 깨끗해진다. 교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점검하게 된다. 시험을 당할지라도 그 곳에 성령님께서 함께 계시고 도와주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도와주시는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시험과 환난을 통해 우리를 천국 백성으로 거룩하게 빚어 가신다. 의인이 왜 고난을 당하는가? 어느 누구도 대답해 주지  않는다. 성경도 침묵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깊으신 지혜와 높은 길을 알지 못한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주의 성소(聖所)를 만들어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며,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순례자의 길을 가고 싶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

독일 가톨릭 수도사제이자 신비사상가로 알려진 토마스 아 켐피스는 1380년 라인 강 하류 쾰른 부근의 도시인 켐펜에서 태어났습니다. 1399년, 19살에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한 후, 일생을 거의 아드네텐베르크 수도원에서 보내는데요, 33살(1413년)에 사제 서품을 받아 신부가 됩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네덜란드의 신비사상가 헤르트 호르테와 그의 제자 플로렌티우스 라데빈스가 창설한 평신도 공동체인 ‘공동생활의 형제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형제회는 당시의 신비주의가 지나치게 현실을 배격하고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에 반대하여 현실 속에서 신비와 경건을 추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형제회는 속세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수도적인 청빈, 정결, 복종의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고, 재산을 공유하며, 스스로의 노동으로 그날그날의 양식을 벌었습니다.

수도와 노동 외에도 그들은 필사본을 만들고, 인쇄와 제본을 했습니다. 그들은 교육 활동도 했는데요, 특히 연소자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수도회에서 주로 수련수사들을 교육하는 일을 맡았고 설교와 저술활동에 주력했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 외에 이 형제회가 배출한 인물로는 르네상스 시대 네덜란드의 가톨릭 사제이자 인문주의자들을 대표하는 지식인 에라스뮈스(Erasmus, 1466-1536), 독일 신학자이자 근세철학의 선구적 사상가였던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 등이었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1425년 수도원의 부원장으로서 후진 지도에 진력했는데, 후진 지도를 위한 지도서로 쓴 책이 바로 《그리스도를 본받아》(《준주성범》으로도 번역됨)인데요, 그가 마흔 일곱 살 경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외에도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기도와 묵상》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성서 다음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이 읽힌 책이자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모두 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은 ‘영적 삶을 위한 거룩한 조언’, 
2장은 ‘내적 삶을 위한 거룩한 조언’, 
3장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위로’,
 4장은 ‘예수님의 거룩한 만찬 준비’입니다. 
다양한 주제에 대한 비교적 짧은 권면 형식의 글이기에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지침이 될 만한 주제들을 선택해서 소개하는 방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적 훈련 : 《그리스도를 본받아》 제1장

“성경의 내용을 잘 알고 또 온갖 철학자들의 말을 꿰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없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 외에는 그 어느 것도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될 뿐이다(전 1,2)”(1)

토마스 아 켐피스가 교권과 국가권력의 갈등기, 스콜라 철학의 절정기를 살았던 신비주의자였다는 것을 알면 왜 그가 이런 주장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시작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토마스 아 켐피스가 인간의 지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배움을 경멸하지는 마라! 지식은 선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렇지만 소중한 양심과 아름다운 삶에는 미치지 못한다.”(2)

지식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심판의 날이 닥치면 우리가 읽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동한 것에 관해, 또 어느 정도나 말을 잘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바르게 살았는지에 관해 질문을 받게 될 것임을 명심하라.”(3)고 토마스 아 켐피스는 말합니다.

평신도 형제회 활동을 했던 토마스 아 켐피스는 아마도 당시의 가톨릭 교황과 사제들의 부패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 앞에서의 겸손’, ‘지나친 정욕의 절제’, ‘순종을 통한 참된 자유’를 훈련 수사들에게 권면합니다.

그러면 이런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토마스 아 켐피스는 ‘침묵’을 권합니다. “입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매우 나쁜 습관이다”(4)이고, “악한 습관에서 손을 끊는 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역경의 유익함을 발견하기’, ‘시험의 인내’,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기’, ‘거룩한 사랑으로 선행을 베풀기’,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끈기 있게 감당하기’, ‘매일의 삶에서 영적 훈련을 수행하기’, ‘혼자만의 시간과 골방의 침묵을 사랑하기’,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기’, ‘죽음을 준비하기’를 훈련하라고 합니다.

‘역경’이 유익한 것은 역경이 “우리가 영적인 나그네이며, 세상에 속한 그 무엇도 신뢰해서는 안 되는 존재임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오해에서 오는 고통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교만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우리 내면의 삶은 외적으로 비난 받을 때 가장 크게 성장하기 때문입니다.(5)

‘시험’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험’으로 번역된 독일어는 ‘페어수헨’(versuchen)인데요, 전철 ‘페어’(ver-)는 ‘잘못된’을 의미하고, 동사 ‘수헨’(suchen)은 ‘찾다’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시험’은 우리가 ‘무엇인가 잘 못된 것을 찾는데서 온다’는 뜻이지요.

토마스는 ‘땅을 밟고 사는 사람은 시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시험은 두 가지 허점을 이용해 인간을 더욱 옥죄는데요, 우유부단한 마음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부족이 그것입니다. “키 없는 배가 물결에 밀려 요동하듯 부주의하고 결단력이 없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시험에 마주치게 된다.”는 것입니다.(6)

사실 시험은 피하는 것이 어떤 때는 하나의 답이 될지 모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시험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지면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해결책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토마스는 시험을 “피하는 것이 해답은 아니다.”고 합니다. “시험을 피하려고 들면 그리 멀리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토마스는 인내와 겸손으로 시험에 맞서 시험을 뿌리째 들어내라고 합니다.(7) 쉬운 일은 아니지만, 토마스는 시험과 어려움을 겪을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게(벧전 5,6), 간절히 기도하면서 도움을 구해야 한다고 권합니다.(8)

토마스는 “사랑이 없는 겉치레의 선행은 영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반면, “사랑으로 행하는 일은 아무리 작거나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충실한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선행을 했는지, 얼마나 많은 선행을 했는지 따지지 않으시고, 선행의 동기를 헤아리신다.”는 것이지요. 토마스는 선행이 자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행해지고, 자기 의로움의 근거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것이겠지요. 토마스는 “참된 진리와 완벽한 사랑을 소유한 사람은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만물 안에서 타오르는 것만을 바랄 뿐이다.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거만하거나 개인적인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는다.”(9)고 합니다.

영적인 삶을 위해서는 ‘영적 훈련’이 중요합니다. 토마스는 ‘영적 훈련’을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그 과정을 설정하되, 특히 자신의 최대 약점과 싸움을 벌이듯 치열하게 해야 한다.”(10)고 합니다. 훈련은 매일 계획에 따라 반복되어야 하고, 마치 싸움을 하듯 치열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군대에서 제식훈련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압니다. 절도와 규율을 가르치기 위해 줄과 열을 맞춰 행진하는 그토록 쉬운 일을 며칠이고 반복하면서 지루할 정도로 가르치지요.

물론 똑같은 종류의 훈련이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처한 상황에 따라 영적 훈련을 선택하는 것도 달라야 한다고 토마스는 비교적 융통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모든 훈련의 핵심은 이 땅을 후회 없이 떠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에 있다.”(11)고 합니다. 죽을 때 삶에 후회가 없다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죽음이 아닐까요! 이런 죽음, 매일의 영적 훈련이 없다면 아마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일 것 같습니다.

토마스는 이런 후회 없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아침이 되면 해질녘까지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라. 밤이 되면 새로운 아침을 기약하지 마라. 언제나 죽음을 준비하라”(12)고 합니다. “참으로 슬기롭고 행복한 사람은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평소처럼 변함없이 자신의 삶을 산다. 우리가 이 세상을 진심으로 경멸하고, 덕을 쌓는 일을 열망함으로 규율을 잘 지키고, 고통을 감내하면서 회개하고, 기꺼이 복종하고,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위해 어떤 고난이든지 끈기 있게 참아 나간다면 이처럼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13)고 합니다.

그런데 죽음이 언제, 어떻게 올지는 우리가 잘 모르지요. “우리가 잡고 있는 기회가 죽음 때문에 막을 내리게 될 순간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지금 행동하라.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바로 지금 하라. … 이 세상에서 나그네나 피난민처럼 지내라”(14)고 권합니다. 

토마스는 심판을 현재적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이 죄를 범하는 만큼 나중에 벌을 받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게으른 사람은 불채찍을 맞고, 음식을 탐하는 사람은 굶주리고 목마르는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사치하고 쾌락을 즐기는 사람은 뜨거운 불속에 들어가게 되고, 시기하는 사람은 마치 정신을 놓아버린 짐승처럼 울부짖게 될 것이다. 죄는 반드시 그 값을 치르기 마련이다. 교만한 사람은 온갖 혼란에 빠질 것이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릴 것이다. … 벌을 받는 사람에게는 휴식이나 위로가 없다.”(15)고 합니다.

심판의 때, “의로운 사람들이 과감하게 일어나 자신들을 괴롭히고 핍박하는 것에 맞서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은 크게 안심하지만 교만한 사람은 사방에서 밀려드는 두려움에 휩싸일 것이다. 그때에는 인내하면서 겪었던 모든 고통이 즐거움으로 바뀌고, 모든 악인이 자기 입을 봉하게 될 것이다. … 그때에는 초라한 의복이 빛을 발하고, 값비싼 의복이 빛을 잃을 것이다. 그때에는 오두막이 금으로 장식된 궁전보다 더 가치 있게 여겨질 것이다. 그때에는 변함없는 인내가 세상의 어떤 권력보다 더 유용할 것이다.”(16)

하나님의 심판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지,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일어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토마스는 하나님의 심판을 현재적이고 동시에 미래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내적 삶: 《그리스도를 본받아》 제2장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제2장은 ‘내적 삶을 위한 거룩한 조언’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내적 삶을 위해 “누가 자신의 편이고, 또 누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해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17)고 권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보호자가 되시고, 그리하면 그 누구도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것이기에, 굳이 사람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내적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의 평화를 유지해야’ 하고,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또 ‘단순함과 순수함’이라는 두 날개를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토마스는 여기서 ‘의도의 단순함’과 ‘감정의 순수함’을 의미합니다. 단순한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순수한 마음은 그분을 바라보고 헤아립니다.(18)

토마스는 행복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낮추는 법을 아는 사람에게 찾아온다(시 119,1-2)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다른 모든 사랑을 넘어서야 합니다.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근거로,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을 찾으면 분명히 그 분을 만날 것인데, 반대로 자신을 찾으면 오직 자신만 만나게 될 것이고 그 때문에 손해를 볼 것이라고 경고합니다.(19)

그런데 예수님의 하늘나라를 사랑하는 이들은 많지만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드문 현실을 토마스는 지적합니다. “누구나 예수님과 함께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지만 그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많은 사람이 떡을 나누어 주시는 한 그분을 따르려고 하지만 고통스러운 자기희생의 잔을 마시려고 머무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그분의 기적에 감명을 받지만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물다. …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어느 정도의 위로를 받는 한 그분을 찬양하고 축복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을 감추고, 심지어 잠시 그들을 떠나가기라도 하시면 그들은 불평하기 시작하고 금세 낙심한다.”(20)

‘문제해결의 신’, ‘도깨비 방망이 같은 신’을 믿는 신앙, 자기 이익이나 자기 사랑에 물들지 않은 신앙인을 찾기 어려운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토마스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하나님을 기꺼이 섬기고자 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21)고 합니다.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지요. 기적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아래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처럼, 기적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거나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지요.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도 그의 《기도시집》에서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을 찾는 이들은 저마다 당신을 시험합니다. … 그렇지만 나는 대지가 당신을 이해하듯 그렇게 당신을 이해하렵니다. 나의 성숙과 더불어 당신의 왕국도 성숙합니다. 나는 당신을 증명하려는 어떤 허영도 당신에게 바라지 않으렵니다. 시간이란 당신과는 다른 것임을 나는 알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어떤 기적도 행하지마소서.”(22)

내적 위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제3장

제3부,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위로’는 그리스도와 ‘따르는 자’ 사이의 대화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먼저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의 자녀야, 헌신을 은밀하게 유지하는 것은 더없이 좋은 일이다. 스스로를 높이지 말고 헌신을 자주 입에 담지 마라. 헌신의 수준 때문에 강박관념에 시달리지도 마라. … 은총을 누리고 있다는 감정에 너무 지나치게 매달리지 마라. … 영적인 삶은 위로의 은총을 누릴 때가 아니라 겸손과 자기 부정과 인내로써 은총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때 발전하게 된다. 또한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항상 경건의 시간을 조금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을 때 발전하게 된다.”(23)

“어떤 경솔한 사람들은 자신들 마음대로 황홀한 헌신을 경험하겠다며 시도하다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자신들의 취약함은 안중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이상을 시도하다가 쉽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만다. 스스로를 위해 하늘에 보금자리를 지으려고 하는 이들은 쓸모없는 일을 하는 것이다.”(24)

‘헌신강박증’,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나무랄 것 없고 흠이 없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경건과 헌신을 폄훼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의 헌신과 경건이 남에게 드러내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신 것이지요. 오늘의 교회 안의 갈등과 분열도 대게는 지나치게 열심인, 남의 평가를 의식한 헌신에서 비롯되지요.

그런데 ‘따르는 자’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저는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당신만을 바라보고, 당신만을 사랑할 때, 제 자신과 당신을 발견합니다.”(25) 자기만 바라보는 사람은 스스로를 잃어버리지만,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길을 찾는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요. 토마스 아 켐피스는 바라는 것을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고 권합니다: “주여, 만일 그것이 당신의 뜻이거든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약 4,15). 그렇게 되는 것이 당신을 영광되게 한다면 당신의 이름으로 그렇게 되게 하소서. 만일 당신이 그것을 좋다고 보시면 그것이 제게도 유익이 되게 해주시고, 저로 하여금 그것을 당신께 영광되게 사용할 수 있게 해주소서. 그러나 만일 그것이 해로운 것이라면 그 소원을 제게서 앗아가소서.”(26)

아무리 수도사들이 함께 사는 수도원이라고 해도 서로 남을 헐뜯고 비난하는 행태는 어디에나 있는가 봅니다. 헐뜯는 비난에 마음에 상처를 받고, 또 그에 대한 보복으로 험담을 퍼뜨리는 이들에게 토마스 아 켐피스는 “마음의 모든 불안과 괴로움은 절제를 모르는 사랑과 헛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27)고 합니다. 남에게 칭찬받으려는 욕망에서건, 비난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건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내적으로 자유롭고, 철저하게 스스로를 다스려야 한다.”(28)고 토마스는 권면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 입을 다물고, 들은 말이라고 해서 모두 무분별하게 믿지 않고, 그 말을 쉽게 퍼뜨리지 않아야 하고 … 가볍게 마음을 내보여서는 안 되며... 떠도는 말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 하늘의 은총을 간직하기 위한 가장 안전한 방법은 사람들의 평가를 기대하지 않고, 널리 칭송을 받으려고 노력하지 않아야 한다.”(29)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비난이나 칭찬에 이리 저리 흔들리고, 지극히 사소한 일에도 마음을 쓰면서,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사람들이 “멸시받기를 두려워하기 때문”(30)이라고 토마스는 말합니다. “신중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은 싫은 소리 한마디에도 쉽게 흔들립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과 무관할 수 있다.”(31)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심장을 샅샅이 살피시고, 얼굴이나 외모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사람들의 부당한 대우에 신경 쓰지 않는다.”(32)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평범하고 소심한 사람은 사소한 험담에도 크게 낙심하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SNS를 통한 ‘가짜뉴스’가 범람하는 현실에서 악의적인 험담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거짓말도, 가짜 뉴스도 선점하면, ‘아니면 말고’ 식의 악의적 무책임이 오히려 사실인 것처럼 퍼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옛날에도 그랬나 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냥 내버려 두어라. 그와 같은 일이 처음도 아니고, 새로울 것도 없다.”(33)고 합니다. “가능하면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도록 하고, 마음이 상해도 실망하지 말고, 오랫동안 매달리지 마라. … 듣고 싶지 않고, 분노가 솟구치거든 자신을 다스리고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말을 입에 담지 않도록 하라.”(34)고 합니다.

그럴 수 있는 힘, 견딜 수 있는 믿음은 “주님은 의로우시고, 주님의 판단은 정확하시다.”(시 119,137)는 말씀에 있습니다.

4권 성찬에 관한 경건한 권면

[3권과 비슷하게 4권은 제자의 질문과 주님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경어는 제자의 질문이고, 하대어는 주님의 대답입니다. 중요한 구절만을 발췌했습니다.]

주 나의 하나님께서 이 부족하고 가련한 자를 초대하셔서, 주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에 참여하라고 하시니, 그 말씀이 이 죄인의 귀에 너무나 달콤하고 향기롭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를 극진히 대해 주시며, 이렇게 지극한 사랑으로 초대해 주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성찬을 통해서 영적인 은혜가 수여되고, 잃어버렸던 영적인 능력이 회복되며, 죄로 흉측해졌던 아름다움이 되돌아옵니다.

보십시오. 주님은 거룩한 자들 중에서도 가장 거룩하신 분이시고, 나는 죄인들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죄인입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 앞에서 얼굴조차 들 수 없는 자인 데도, 주께서는 친히 몸을 굽혀 나를 바라보십니다.

주님, 내가 처음 죄를 짓게 된 날부터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주 앞에서와 주의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저질러 온 나의 온갖 죄악들과 범죄들을 주 앞에 내어 놓고, 주의 속죄의 제단 위에 올려 드리오니, 주의 사랑의 불로 그 모든 것들을 태우시고 사르셔서, 내 모든 죄의 더러움을 씻어 주옵소서.

경건한 사람은 성찬에 나아와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고난의 신비를 경건하게 묵상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되고, 그럴 때마다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교제를 통하여 보이지 않게 새롭게 세워져 가게 된다.

의문과 논란이 있는 어려운 길들을 버리고, 하나님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명하신 길을 정직하게 걸어가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무 심오한 것들을 천착하고자 하다가 신앙까지 잃어버린 사람이 많다. 하나님께 순복하고 너의 지각을 믿음 아래 종속시켜라.

모든 이성과 본성적인 탐구는 믿음보다 앞서가거나 믿음을 훼방해서는 안 되고, 도리어 믿음을 뒤따라가야 한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서 측량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시고 인간들의 탐구에 쉽게 포착될 수 없다. 하나님은 일들은 기이하고 인간의 언어로 모두 표현할 수 없다.

-끝-

3. 나가면서

중세의 고전을 읽어오면서 지금까지의 책들과 토마스 아 켐피스의 책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중세적 신비주의를 뛰어넘지는 못했지만 지나치게 신비주의를 추구하거나 관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아퀴나스처럼 집요하게 철학적 사유방식을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개신교인들이 읽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건전하고 바른 신앙관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책 속의 내용은 지나치게 세상과 결별하고 하나님만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의 삶은 현실에서의 경건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전에 신비주의자들이 현실에 과도하게 집착했음에도 관상을 통해 하나님을 추구한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중세 교회사를 집필한 R.W. 서던은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며 아쉬워합니다.

“세상을 등지지도 않았고 세상에 몸을 던지지도 않았다. 다만 세상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투쟁들에서 피신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그들은 일상생활을 훌륭히 해나간 모범적인 사람들이었는데도 폭풍과 같은 도시 생활에서 물러 나와 힘써 추구했던 삶을 세상에 소개할 만한 책은 한 권밖에 내놓지 못했다.”

저의 개인적인 사견이지만 기독교 역사 중에서 최고의 고전을 세 권을 선정하라고 한다면 어거스틴의 <고백록>과 존 번연의 <천로역정> 그리고 중세 시대를 대변하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고를 것입니다. 중세의 신비적 성향을 지니면서도 삶과 신앙을 격리시키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과도하게 상징적으로 해석하거나 이성적으로 추론하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이성을 믿음에 굴복시켜야 한다는 어거스틴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성경을 알기 위해 몸부림 쳐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않습니다. 분주하고 헛된 야망에 부추김을 당하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맑은 샘물과 같은 청량함을 선사해 줄 것입니다.

본성과 은총

600여 년 전, 수도사들을 위한 지침서로서 쓴 책이지만,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수도원 안에 있거나, 세상 안에 있거나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읽어야 할 고전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들 사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수도사건 세속인이건, 수도원 안이건 밖이건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 켐피스도 ‘본성’과 ‘은총’을 대비시킨 것 같습니다.(35)

본성은 교활해서 많은 사람을 유혹하고, 걸려 넘어지게 만들고, 속이고, 언제나 자신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은총은 소박하고, 전혀 악을 포장하지 않고, 속이려고 하지 않고, 모든 일을 순수하게 하나님을 위해서 하고, 하나님 안에서 최후의 안식을 누립니다.(36)

본성은 죽는 것을 꺼리고, 낮아지는 것을 싫어하고, 지배 받기를 바라지 않고, 복종하기를 거부하거, 쉽게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총은 고난을 자처하고, 육욕과 맞서고, 복종하려고 애쓰고, 패배하고 싶어하고, 혼자만의 자유를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37)

본성은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고, 누가 이익을 취하게 되는지 살핍니다. 그러나 은총은 스스로를 위해 도움이 되거나 유용한 것보다는 다수에게 도움이 되는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본성은 수치와 멸시를 두려워하지만 은총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수치를 당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행 5,41). 본성은 여가와 흥미롭고 아름다운 것들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값싸고 세련되지 않은 것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은총은 평범하고 겸손한 것을 즐거워하고, 거친 것을 비난하지 않고 낡고 기운 옷이라도 거부하지 않습니다.

본성은 일시적인 것들을 존중하고, 세상적인 이익을 즐거워하고, 손실을 슬퍼하고, 상처를 주는 말에는 예외 없이 화를 냅니다. 그렇지만 은총은 영원한 것들을 바라보고, 세상적인 것들을 멀리하고(고후 4,18), 손해를 볼지라도 괴로워하지 않고, 기분 나쁜 말에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38)

본성은 육신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외적인 위로를 기대합니다. 그렇지만 은총은 하나님에게서만 위로를 구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너머에 있는 더할 수 없는 선한 것을 즐거워하고 싶어 합니다.(39)

본성은 스스로의 이익과 도움을 위해 모든 것을 조종합니다. 본성은 보수를 받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하지만 은총은 하나님 이외에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습니다. 본성은 높은 지위와 좋은 출신 배경을 높이 사고, 권력을 잡은 사람에게 미소 짓고, 부자에게 아첨하고, 자신과 비슷한 것들을 칭찬합니다. 그러나 은총은 원수까지 사랑하고, 높은 지위나 좋은 출신 배경에 개의치 않습니다.(40)

본성은 부족하고, 어려움에 처하면 바로 불평합니다. 은총은 언제나 부족함을 견뎌냅니다. 본성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 돌리고, 자신을 내세우려고 애쓰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은총은 모든 것을 그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돌립니다.(41)

그렇다면 은총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일까요? 토마스는 “타고난 재능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 똑같이 허락되지만 은총과 사랑은 특별히 선택된 사람에게 주어진다.”(42)고 합니다. 그러므로 은총을 간구하고,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은총을 찾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지요.(43)

문은 두드려야 열리듯이, 은총은 찾는 이에게 주어지니, 본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은총을 찾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수도원 안에서나 밖에서나, 수도사건 세속인이건 마찬가지이겠지요.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 Christi

1. 토마스 아 켐피스의 생애

토마스는 1380년 라인강 하류 켐펜에서 요한과 겔트루테 해멜켄(해멜켄은 ‘작은 망치’란 뜻)의 아들로 태어나 1471년 7월 25일 하나님의 품에 안깁니다. 그는 독일의 신비 사상가이자 의도치 않았지만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데보티오모데르나(Devotio moderna)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토마스의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공동생활형제단이 운영하는 더벤터의 학교에 보냅니다. 화란(네덜란드)에 있는 더벤터는 타락한 수도원과 교회와 다르게 경건생활을 통해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의 형이었던 요한은 아그네스산 수도원에서 부원장으로 있었습니다. 당시 규칙에 의하면 형제가 동일한 수도원에 함께 머무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러나 두 형제의 바르고 온유한 성품은 모두에게 인정되어 함께 머물도록 허락이 됩니다. 그곳에서 청빈, 순결, 순종 서약을 하고 1413년 33세의 나이로 사제 직분을 받게 됩니다. 1425년에는 부원장으로 임명되었고, 새로운 수도사들을 훈련시키는 일도 맡게 됩니다. 수도원의 사무장도 맡게 되지만 그에게 행정적 재능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14세기 말과 15세기 초엽, 중세는 그야말로 흑 역사였습니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교황이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감금되다시피 하면서 프랑스 국왕의 꼭두각시 노릇을 합니다. 1377년 그레고리 11세가 로마로 귀환하면서 마무리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교황청의 수모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황청에 로마로 옮겨가자 프랑스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약해지는 것에 반발해 프랑스 추기경들이 콘클라베 무효를 선언하고 탈퇴하여 '대립 교황'을 세우게 됩니다. 새로운 대립 교황은 아비뇽에 두어 두 명의 교황이 있게 됩니다. 피사 공의회에서 다른 교황을 세우게 되면서 세 명의 교황이 있던 적도 존재합니다. 토마스가 활동했던 시기는 중세의 종말을 알리는 교황의 붕괴와 도덕적 타락이 극심한 시기였습니다. 1417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마르티노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여 서방교회의 분열은 막을 내리지만 그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중세가 무너지는 여진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시기를 살아갔던 토마스는 새로운 종교적 운동이 필요함을 체감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데보티오모데르나(Devotio moderna)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공동생활형제단은 부유한 상인이었던 헤르트 드 흐루트가 세속적 생활을 정리하고 공동체를 설립하면서 시작됩니다. 처음 시작은 비공식적 평신도 운동이었습니다. 1392년 토마스가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 시작한 이 운동은 집단이 아닌 다수의 사람들의 거룩한 열심에 대한 결심이었습니다. 운동은 점점 확산되고 동조하는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옛 사도들을 본받아 경건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공동생활형제단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작은 공동체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중세의 신비주의가 지나치게 현실을 배격하고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비현실적 신앙에 몰두하는 것에 반대해 현실 속에서 신비와 거룩을 추구했습니다. 이것이 후일에 일어난 종교개혁의 특징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루터가 기도원을 나와 세속에서 거룩을 추구하고, 칼빈이 소명을 세상 속에서의 ‘직업’과 연결한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수도원이 몸담고 있던 위트레흐트 시민들과 교황과의 갈등으로 인해 토마스는 형과 함께 1429년 6월 11일, 히링겐 부근의 구넨케르크 수도원으로 옮겨 갑니다. 이 일로 형 요한은 건강이 나빠져 3년 후에 죽게 되고 심각한 영혼의 상처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을 알 때 속세를 떠나라는 책의 내용은 지리적이고 공간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1448년 그는 부원장의 자리에 다시 선출되고 20년 동안 학생이자 상담사, 필사자 및 저자로 살아갑니다. 1471년 6월 25일, 마침내 토마스는 주님의 품에 안깁니다. 그의 나이 91세, 종교생활 63년째, 수도생활 58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가 살았던 시대는 중세 중에서 가장 어두운 암흑기였습니다. 그러나 어두울수록 아침은 가까워 오는 법, 종교개혁의 여명은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은 어두운 시대 속에서 개혁과 거룩의 기치(旗幟)를 높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수고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사상의 씨앗을 뿌린 것과 같았습니다. 그가 죽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구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를 붙임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됩니다. 이제 토마스 아 켐피스의 거룩한 열정이 스민 <그리스도를 본받아>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중요한 대목만을 직·간접적으로 옮깁니다. 박문재의 번역을 주인용 서적으로 삼았고, 필요에 따라 다른 번역자의 글도 첨가하였습니다.

2. 요약

[책은 4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1권은 25장, 2권은 12장, 3권은 59장, 4권은 18장으로 나누었습니다. 1권에서는 ‘영적 삶에 유익한 권면들’이란 주제로 영적 삶이 무엇인지 다룹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매혹적인 부분입니다. 2권은 ‘내면의 삶에 관한 권면들’이란 제목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3권은 ‘내적 위로’라는 제목으로 세상 속에서 평안을 누리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권면합니다. 마지막 4권은 ‘성찬에 관한 경건한 권면’이며, 성찬에 담긴 영적 의미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현대의 논문처럼 각권의 제목과 각장의 내용이 명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암울하고 타락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만을 추구하며 살았던 토마스의 생애는 세속에 대한 지나친 배타성을 드러냅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알지 못한다면 중세의 신비주의 사상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세상 속에서 배타적 거룩과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갈망은 타락한 세속에서 거룩함을 추구했던 토마스의 열정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거나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할 때에 위와 같은 것들을 마음에 새겨 두었다면, 독자는 이 책이 얼마나 귀중한 고전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해럴드 C. 가디너]

1권 영적 삶에 유익한 권면들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참된 빛을 받아서 마음의 온갖 눈먼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삶과 성품을 본받을 것을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힘써야 할 것은 예수님의 삶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지 않고 겸손하지 않아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고상한 말로 늘어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언젠가는 없어져 버릴 부를 추구하고 재물을 의지하는 것은 헛된 것입니다. 명예, 부귀, 권력, 육체의 욕망을 구하는 것 역시 헛된 것입니다.

자신을 아는 것, 자신이 하찮은 존재인 것을 아는 자는 타인의 칭찬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많이 알고, 많이 소유한다 하여 삶이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자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 없이는 아무도 바르게 깨달을 수도 없고 제대로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이 단순할수록 깊은 것들을 깨닫고, 순전할수록 영적인 것에 민감합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자는 복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십시오. 그가 진정 지혜자입니다.

지식을 얻으려고 성경을 읽지 말고 진리 자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명성이나 세상적 유익을 위해 성경을 읽지 마십시오. 평안은 욕망을 채울 때가 아니라 비울 때 찾아옵니다.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를 경계하십시오.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하면 후회하기 마련입니다. 헛된 호기심과 세상에 대한 쾌락적 지식을 추구하며 자신을 상처 나게 합니다.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하는 이유는 위로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내적 위로가 아닌 것은 헛된 것입니다. 도리어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많이 사랑하는 것이 많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람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다른 사람을 고치려 하지 말고 자신을 먼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당신은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 이유는 인내하고 수고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땅에서는 순례자와 나그네로 지내십시오. 늘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 땅은 인내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정화시키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날에는 단순한 순종이 탁월한 지혜보다 더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2권 내면의 삶에 관한 권면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내면에 그리스도가 거처할 곳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주님을 신랑으로 영접하십시오. 사람은 쉽게 변하고 힘이 금세 사라집니다. 그리스도만이 영원히 계시며 변함없이 함께하십니다. 내면이 잘 정돈되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괴하고 악한 행위들에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모욕과 수욕을 넉넉히 이깁니다. 자신을 변명하려 들지 말고 다른 사람을 먼저 용납하십시오. 사람은 단순함과 순수함이란 두 날개를 가질 때 하늘로 올라갑니다.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이킨 사람은 새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받은 고통은 곱씹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은 무감각합니다. 내면의 삶을 중시하는 사람은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자기 자신을 먼저 살피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예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가장 궁핍한 사람이고, 예수님과 함께 잘 살아가는 사람은 가장 부유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아는 것은 위대한 예술이고, 예수님과의 교제를 지속하는 법을 아는 것은 위대한 지혜입니다.

언제나 자신을 가장 낮은 곳에 두십시오. 그러면 가장 높은 곳이 당신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선물에 감사하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적습니다. 위로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자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위로를 받을 것이며 예수님을 찬송하고 감사드리고 싶어 할 것입니다.

3권 내적 위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기를 간절히 원해서 세상의 모든 방해물을 떨쳐 내버리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사무엘처럼 ‘주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선지자들은 말씀을 전할 수 있었지만 성령을 수여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은 물을 주지만 하나님은 자라게 하십니다. 하나님만이 듣는 사람을 깨닫게 하십니다.

[3권 저자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하대어를 사용했고, 그렇게 번역되었습니다.]

사랑은 신속하고 진실하며 경건하고 유쾌하며 온유하고 강하며 인내하고 신실하며 사려 깊고 오래 참으며 용감하고, 결코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에서 자신의 유익을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그 일에서는 사랑으로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에 자신이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다스림이나 지도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많이 배워 교만한 것보다 배우지 못하고 겸손한 것이 낫다.

스스로 선하다 생각하며 지나치게 애쓰다가 나중에 선하지 않은 일로 밝혀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단호하게 육신의 정욕과 맞서 싸워야 한다.

네 자신을 완전히 꺾고서 다른 사람들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네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낮고 비천한 자가 된 것은 너로 하여금 나의 겸손을 본받음으로써 네 자신의 교만을 이길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난을 더 잘 감당할수록, 너는 더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고, 장차 더 큰 상을 받게 된다. 마음과 몸이 고난을 감당할 각오와 준비와 철저히 되어 있다면, 고난을 감당하는 일은 더 쉬워진다.

늘 많이 갖기보다는 적게 갖는 것을 택하라. 늘 가장 낮은 자리를 구하고, 모든 사람 아래에 있어라. 네게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늘 바라고 기도하라. 보라, 그런 사람은 평화와 안식의 땅으로 들어간다.

아들아, 호기심을 갖지 말고, 쓸데없는 일들에 관심을 갖지 말라. 이런저런 일들을 너와 무슨 상관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유명한 사람의 그늘에 그늘 아래 들어가고 하거나, 많은 사람들을 친구로 삼고자 하거나, 사람들의 사랑과 호의를 얻으려고 애쓰지 말라. 그런 것들에 힘을 쓰게 되면, 마음이 산란해지고, 많이 어두워지게 되기 때문이다.

생명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계명들을 지켜라. 진리를 알고자 한다면, 나를 믿으라. 온전해지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팔아라. 나의 제자가 되고 싶어 한다면, 네 자신을 부인하라.

4권 성찬에 관한 경건한 권면

[3권과 비슷하게 4권은 제자의 질문과 주님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경어는 제자의 질문이고, 하대어는 주님의 대답입니다. 
중요한 구절만을 발췌했습니다.]

주 나의 하나님께서 이 부족하고 가련한 자를 초대하셔서, 주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에 참여하라고 하시니, 그 말씀이 이 죄인의 귀에 너무나 달콤하고 향기롭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를 극진히 대해 주시며, 이렇게 지극한 사랑으로 초대해 주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성찬을 통해서 영적인 은혜가 수여되고, 잃어버렸던 영적인 능력이 회복되며, 죄로 흉측해졌던 아름다움이 되돌아옵니다.

보십시오. 주님은 거룩한 자들 중에서도 가장 거룩하신 분이시고, 나는 죄인들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죄인입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 앞에서 얼굴조차 들 수 없는 자인 데도, 주께서는 친히 몸을 굽혀 나를 바라보십니다.

주님, 내가 처음 죄를 짓게 된 날부터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주 앞에서와 주의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저질러 온 나의 온갖 죄악들과 범죄들을 주 앞에 내어 놓고, 주의 속죄의 제단 위에 올려 드리오니, 주의 사랑의 불로 그 모든 것들을 태우시고 사르셔서, 내 모든 죄의 더러움을 씻어 주옵소서.

경건한 사람은 성찬에 나아와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고난의 신비를 경건하게 묵상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되고, 그럴 때마다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교제를 통하여 보이지 않게 새롭게 세워져 가게 된다.

의문과 논란이 있는 어려운 길들을 버리고, 하나님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명하신 길을 정직하게 걸어가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무 심오한 것들을 천착하고자 하다가 신앙까지 잃어버린 사람이 많다. 
하나님께 순복하고 너의 지각을 믿음 아래 종속시켜라.

모든 이성과 본성적인 탐구는 믿음보다 앞서가거나 믿음을 훼방해서는 안 되고, 도리어 믿음을 뒤따라가야 한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서 측량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시고 인간들의 탐구에 쉽게 포착될 수 없다. 
하나님은 일들은 기이하고 인간의 언어로 모두 표현할 수 없다.

중세의 고전을 읽어오면서 지금까지의 책들과 토마스 아 켐피스의 책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중세적 신비주의를 뛰어넘지는 못했지만 지나치게 신비주의를 추구하거나 관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아퀴나스처럼 집요하게 철학적 사유방식을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개신교인들이 읽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건전하고 바른 신앙관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책 속의 내용은 지나치게 세상과 결별하고 하나님만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의 삶은 현실에서의 경건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전에 신비주의자들이 현실에 과도하게 집착했음에도 관상을 통해 하나님을 추구한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중세 교회사를 집필한 R.W. 서던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며 아쉬워합니다.

“세상을 등지지도 않았고 세상에 몸을 던지지도 않았다. 
다만 세상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투쟁들에서 피신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그들은 일상생활을 훌륭히 해나간 모범적인 사람들이었는데도 폭풍과 같은 도시 생활에서 물러 나와 힘써 추구했던 삶을 세상에 소개할 만한 책은 한 권밖에 내놓지 못했다.”

기독교 역사 중에서 최고의 고전을 세 권을 선정하라고 한다면 어거스틴의 <고백록>과 존 번연의 <천로역정> 그리고 중세 시대를 대변하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고를 것입니다. 
중세의 신비적 성향을 지니면서도 삶과 신앙을 격리시키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과도하게 상징적으로 해석하거나 이성적으로 추론하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이성을 믿음에 굴복시켜야 한다는 어거스틴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성경을 알기 위해 몸부림 쳐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않습니다. 
분주하고 헛된 야망에 부추김을 당하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맑은 샘물과 같은 청량함을 선사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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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기독교 신학자이자 신비사상가. 가톨릭뿐 아니라 개신교에도 영향을 끼친 인물로, 지금의 네덜란드 빈더스헤임(Windesheim)과 즈볼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라인 강 하류 쾰른 부근의 도시인 켐펜에서 태어났다. 1392년 네덜란드로 유학을 떠났고, 1399년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 33세이던 1413년에 사제서품을 받아 신부가 되었다. 1425년에는 수도원의 부원장이 되었고, 경건한 생활로 모범이 되었다.

그는 수도회에서 주로 수련수사[1]들을 교육하는 일을 맡았고, 설교와 저술활동에 주력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준주성범(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기도와 묵상> 등이 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 이후, 토마스 아 켐피스가 살았던 수도원은 개혁교회(장로회)로 개조되었다.

준주성범

토마스 아 켐피스의 저서 <준주성범>(De imitatione Christi, 그리스도를 본받아)은, 성경 다음으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많이 읽힌 책이자 많은 영향을 끼친 서적으로 유명하다.

원래 라틴어로 쓰여진 <준주성범>은 그리스도교 신앙적 교훈에 따라 주제를 나누어 총 4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 ‘정신생활에 유익한 훈계’, ‘내적 생활로 인도하는 훈계’, ‘내적 위로에 대하여’, ‘존엄한 성체성사에 대하여’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정신생활에 유익한 훈계’에는 수도자의 순명과 수도생활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1913년도부터 부분이 번역되어 소개되어 오다가, 1923년 장로회의 조선야소교서회에서 이원모 장로에 의해서 <긔독셩범>이란 제목으로 1-4권이 최초 완역되었다. 이후 1924년 성공회의 허세실(Cecil Hedges) 신부에 의해서 <遵主聖範>(준주성범)이란 제목으로 전권이 출판되었으며, 라틴어 원문에 한자본, 일본어본, 영어본을 대조하여 번역되었다. 천주교에서는 해방 후, 1954년 천주교 서울대교구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에 의해 완역되었다.[2]

개신교에서는 마지막 장인 ‘존엄한 성체성사에 대하여’ 부분을 빼거나, ‘성체성사’를 ‘성찬례’로 바꾸어서 번역하였다. 가톨릭에서는 사제만이 성체성사를 집전할 수 있고 사제의 축성으로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성체와 성혈)로 성변화(聖變化)하며, 죄를 지었으면 고해성사를 본 후에 영성체해야 한다고 가르치고[3] 준주성범의 마지막 장도 그러한 내용들을 교육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개신교에서는 사제(성직자) 직분을 인정하지 않으며(만인사제설), 성변화와 성사(聖事)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1] 가톨릭 수도회에 입회하면 (수도회마다 다르지만 대개) 지원기-청원기-수련기-유기서원기를 거쳐 평생 수도자로 살겠다는 종신서원을 하여 정식 수도자가 된다(여기까지 대략 10년 가까이 걸린다). 수련기는 수도복을 입고, 수도명을 받고, 수도자가 되기 위한 본격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하는 시기로, 당연히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따라서 이러한 수련자들을 교육하는 수련장 수사/수녀 역시 권한과 책임이 막중할 수밖에 없다.[2] 윤 신부는 준주성범 번역 외에도 한국 천주교 최초의 박사 신부, 사회사업, 인보성체수녀회 창설 등의 업적을 남겼다.[3] 이와 같은 교리는 정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1380년 ~ 1471년 7월 25일)는 독일의 가톨릭 수도사제이자 신비사상가이다. 라인강 하류의 켐펜에서 태어나, 92년 동안의 일생을 거의 즈볼러에 가까운 아그네텐베르크 수도원에서 보냈다. 여기서는 네덜란드의 신비사상가 헤르트 호르테 및 제자 플로렌티우스 라데빈스가 창설한 '공동생활의 형제회'(Brethren of the Common Life)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토마스 아 켐피스도 이 회에 가담하여 모범적인 경건한 생활을 보냈다. 이 회는 속세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수도적인 청빈·정결·복종의 생활을 보내도록 노력하고 재산은 공유하며, 스스로의 노동으로 그날그날의 양식을 벌었다. 일은 사본(寫本) 및 인쇄·제본과 교육으로, 특히 연소자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으며, 후에 에라스무스, 니콜라우스 쿠사누스 등을 배출했다. 그들은 프란치스코회와는 달라서 자신의 양식을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신비주의의 조용한 실천활동이 강조되고 있다. 그보다 더 경건한 사람은 없다는 말까지 들은 토마스 아 켐피스는, 1425년 이후 부원장으로서 후진 지도에 진력했다. 그래서 후진 지도를 위한 지도서를 몇 가지 썼는데, 그 중 <준주성범>, 또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기독교 세계에서 널리 애독되는 책이 되었다.

1725년에 웨슬리는 온전한 거룩을 향한 구도자적 자세로의 전환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해였다. 이 때 그가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고 더욱 가속화되었다.[1]

  1. Kim, Kwang-nyŏl.; 김광열. (2000). 《Kŭrisŭdo ane innŭn kuwŏn kwa sŏnghwa》. Sŏul: Ch'ongsin Taehakkyo Ch'ulp'anbu. 117쪽. ISBN 89-8169-1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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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노 겐조


시인 미즈노 겐조(1937~1984)는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산과 들을 뛰어다닌 건강한 소년이었지만, 그해 여름 홍역이 돌아 감염이 되어 전신마비가 되고 언어의 능력조차 빼앗겨버린 것입니다. 
겐조가 열두 살이 된 어느 날, 마을의 한 교회 목사가 겐조의 집에 빵을 사러 왔다가 때마침 겐조를 알게 되어 한 권의 책을 주고 갔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으며 자신이 살아있어야 하는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면서 그의 얼굴은 웃음을 찾게 되었지요. 
14세에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되어 수백 편의 시를 남기고 4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눈 깜빡이는 시인 미즈노 겐조(水野源三 , 1937-1984), 그는 조용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산과 들을 뛰어 다니는 건강한 소년이었지만, 그해 여름 홍역이 돌아 겐조도 감염되고 말았다. 
고열이 내리고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이미 그 전의 겐조가 아니었다. 
전신이 마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어 능력 조차 빼앗겨버린 것이었다. 
이때부터 겐조의, 그리고 그 가족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겐조가 열두살 나던 어느 날, 마을의 한 교회 미야오 목사가 겐조의 집에 빵을 사러 왔다가 때마침 겐조를 알게 되어 한권의 책을 주고 갔는데, 그것은 성경이었다.

처음 읽어보는 성경. 소년 겐조에게는 자신을 몰입시키는 하나의 세계였다. 
매일 거르지 않고 성경을 읽어나가는 동안 겐조의 사고방식은 변화되고, 자신이 살아있어야 하는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여 그 얼굴은 날로 밝아져갔다.

겐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삶의 주관자로 마음에 영접했다.

그 후의 겐조는 더욱 변화되어갔고, 그의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면서 그의 얼굴은 웃음을 되찾게 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써 겐조는 누구에게나 만면의 웃음을 지어보이곤 했다.

몸이 부자유스럽고, 말조차도 하지 못하는 그가 어떻게 시를 짓게 되었을까?

그 계기가 된 것은 겐조를 진찰하던 의사가 "[예]라고 대답할 때는 눈을 감으라"는 주문을 한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겐조의 어머니는 이것을 단순한 대답뿐만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적용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물(水)을 뜻하는 일본어인 みず(미즈)를 찾을 경우, 오십음도(일본의 가나 문자를 순서대로 배열한 도표)를 사용하여 그의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아행(あ行)부터 차례대로 옆으로 짚어가면 아-카-사-타-나-하-마-야-라-와(あ-か -さ-た-な-は-ま-や-ら-わ)의 마(ま) 부분에 와서 겐조가 눈을 깜빡이면, 거기서부터는 밑으로 짚어가며 마-미-무-메-모(ま-み-む-め-も)의 미(み) 부분에 와서 또 한 번 눈을 깜빡이는 방식으로 한자 한자의 글을 찾으며 문장을 만들어 가는 엄청나게 고된 작업이었다.

이렇듯 정말 엄청난 작업을 통해 그때까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겐조의 내면 세계가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그의 눈 깜빡임을 통해서 수백편에 이르는 시가 탄생하게 되었다. 
미즈노 겐조가 [눈깜빡이는 시인]으로 불리우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시 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찬미와 기쁨이 가득 넘쳐흐르고 있다.

미즈노 겐조의 이야기는 NHK에 특집으로 다뤄졌고, 그의 시집은 일본 문단의 걸작이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미즈노의 시집 중에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또 원망해도 부족할 텐데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감사는 밥이다

저자 미즈노 겐조  출판 선한청지기 발매 2014.10.15.

몸이 부자유스럽고, 말조차도 할 수 없는 그가 어떻게 시를 짓게 되었을까요? 
겐조를 진찰하던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겐조 씨! '예'라고 대답할 때는 눈을 감으세요.
겐조의 어머니는 일본의 오십음도(일본의 가나 문자를 순서대로 배열한 도표)를 차례대로 짚어가면서 눈 깜빡이는 방식으로 한자 한자의 글을 찾아 문장을 만들어 내어 수백 편에 이르는 시가 탄생된 것입니다.

너무나도 공감이 되는 시 몇 편을 올립니다.

"오늘 하루도"


신문 냄새에 아침을 느끼고
냉수의 시원함에 여름을 느끼고
풍경 소리의 서늘함에
저녁을 느끼고
개구리 소리가 드높아
밤을 느끼네
오늘 하루도 끝이구나
한가지 한가지 일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며


가을
사과가 익어 가는 가을에 몸이 불편해졌고
코스모스가 필 즈음
처음으로 예수님 이야기를 들었고
성경을 읽었으며
귀뚜라미가 우는 밤
구원의 기쁨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산다
하나님의 크신 손안에서
달팽이는
달팽이답게 기며
반딧불 꽃은
반딧불 꽃답게 피고
청개구리는
청개구리답게 울며
하나님의 크신 손안에서
나는 나답게
산다

앨범
앨범 속에서
부모님의 음성이 들린다

시집 간 동생의
행복을 바라는 말
어린 조카딸을
달래는 소리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뻐하는 노래
지체장애인 나를
염려하는 기도

앨범 속에서
부모님의 음성이 들린다

엄마 고마워
나의 손이 되고 발이 되고
슬픔 고통을
함께해 주셨던
엄마

겐조를 천국으로 보낸 후에
가고 싶다고
언제나 말씀하셨던
엄마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시고
이른 봄 아침
천국으로 가 버리신
엄마


아버지 2
예순이 다 된 아버지
자동차 학원에
나가셨다

면허증을 받았지만
한 번도 운전하지 못하시고
하늘로 불려가 버리고 마셨다

일기장에는
면허증을 따서
겐조를 태우고 싶다고
쓰여있었다


단 하나만 변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신세를 지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서른한 해 동안
변하지 않았습니다
천국으로 불려 갈 때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단 하나만
변했습니다
3년 전부터
신세를 지는 분이
어머니에서 제수씨로
변했습니다

부수고 부수고 부수 소서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는 것임에도
자기 홀로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부수고 부수고 부수 소서

하나님께 깊이 사랑받고 있음에도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진실로
사랑할 수 없는 마음을
부수고 부수고 부수 소서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았음에도
남의 작은 잘못에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부수고 부수고 부수 소서


그렇지 않아
걷는 것은 나 혼자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나의 약함을 알고 계시는
주 예수가 이미 함께 계셔

괴로워하는 건 나 혼자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나의 약함을 알고 계시는
주 예수가 이미 함께 계셔

기도하는 건 나 혼자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나의 바람을 알고 계시는
주 예수가 함께 기도하셔

사랑의 손
건강하게 보낸 날들도
아픔에 괴로워했던 날들도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의 손 안이라

기쁨을 노래하는 아침도
눈물을 흘리는 밤도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의 손 안이라

기세등등한 때도
후회투성이 일 때도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의 손 안이라


해바라기
마당에서
꺾어 온
크고도 큰
해바라기 꽃이
작고 작은 일로
트집 잡고 있는 내 마음에
말을 건다

하나님의
크고 크신 사랑을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병으로 쓰러졌던 그때에는
눈물이 흐르고 슬펐지만
'영의 아픔을 치유하시는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이라는 걸 깨닫고
기쁨과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친구에게 외면당하는 그때에는
밤에 잠들지 못할 만큼 원망스러웠지만
'영원히 변치 않는 친구 되신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이라는 걸 깨닫고
기쁨과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실수했다는 그때에는
마음이 혼란스러웠지만
'모든 것을 속죄하신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이라는 걸 깨닫고
기쁨과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신문 냄새에 아침을 느껴 
차가운 물맛에 여름을 느껴 
풍경 소리에 선선한 해 질 녘을 느껴 
개구리 소리에 졸음을 느껴 
오늘 하루도 끝나지 않았어 
하나 하나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껴 

그저 감사할 뿐 
나는
가족
사람 
주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주님 
사람
가족의 풍성한 사랑에 
그저 감사할 뿐 
그저 감사할 뿐 

울지 마세요
어머니를 잃은 나를 위해서
울지 마세요 
더 이상 울지 마세요
마음속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합니다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계셔 주기 때문일까요

하나님 
33년 전에
뇌성마비가 되었을 때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닿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감사와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주님을 슬프게 한 것은 아닐까?" 


그때 그 사람에게 
사랑 없는 태도나 말이 
주님을 슬프게 한 것은 아닐까? 


그때 그 목소리에 마음이 
움직였던 생각, 소원이
주님을 슬프게 한 것은 아닐까? 


그때 그 일로 가슴 속에 일어난 
불안이나 투덜거림이 
주님을 슬프게 한 것은 아닐까? 


"그렇지는 않아"


걸어가는 사람은 나 혼자
그렇지는 않아
그렇지는 않아
나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걸어가신다.


고민을 하는 사람은 나 혼자
그렇지는 않아
그렇지는 않아
나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고뇌하신다.


기도드리는 사람은 나 혼자
그렇지는 않아
그렇지는 않아
나의 소원을 아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기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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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진실은 변함이 없다"


오는 해도 오는 해도 
상큼한 첫 여름에는 
은방울꽃이 피듯, 
하나님의 진실은 변함이 없다.


오는 해도 오는 해도 
하늘 맑게 갠 가을에 
용담꽃이 피듯 




미즈노 겐조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열병을 앓고 뇌성마비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몸을 움직일 수도 없게 되었고 ,언어 능력도 상실하고 말았지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수단은 오직 눈 깜박임 밖에 없었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 있던 그에게 어느 날, 미야오 목사님을 통해 생명의 빛이 비추이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도 시력과 청력은 잃지 않았기에, 그는 그때부터 성경을 읽고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사랑과 은혜를 외부에 나누고 싶어 했던 겐조. 오직 눈 깜박임으로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었기에, 벽에 붙인 오십음도표 글자를 어머니가 차례대로 가리키면, 자신이 원하는 글자에 이르렀을 때 신호를 보내 한 글자를 모으고, 다음 글자를 모아 단어를 만들고 결국엔 하나의 문장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하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감사 뿐이라는 놀라운 고백을 시(時)로 쏟아냅니다. 겐조의 옆에는 항상 그와 함께 기뻐하고, 울어주고, 기도해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어머니는 병으로 아들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절망적인 상황에 휩싸여 있었지만, 슬픔에 머무르지 않고 시를 통해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에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떠난 이후 겐조의 삶에는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습니다. 겐조 씨의 성경은 어린 조카딸이 한 장 한 장 넘겨주었고, 겐조의 눈 깜빡임을 해독하고 기록하는 일은 제수씨가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포기하지 않고 시를 써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하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감사 뿐이라는 놀라운 고백을 시(時)로 쏟아냅니다. 겐조의 옆에는 항상 그와 함께 기뻐하고, 울어주고, 기도해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어머니는 병으로 아들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절망적인 상황에 휩싸여 있었지만, 슬픔에 머무르지 않고 시를 통해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에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떠난 이후 겐조의 삶에는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습니다. 겐조 씨의 성경은 어린 조카딸이 한 장 한 장 넘겨주었고, 겐조의 눈 깜빡임을 해독하고 기록하는 일은 제수씨가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포기하지 않고 시를 써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분명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입니다.
전신마비 장애인, 눈을 깜박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미즈노 겐조 씨가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수가 있었을까요?
죽고 싶어서 흘린 그의 눈물이, 감사와 감격의 눈물로 바뀌자, 기적 같은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매일 감사 거리를 찾으며 나 답게 살아야겠어요.

미즈노 겐조는 47년의 짧은 생애를 마치고 198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시를 통해 평안과 감사를 노래했습니다. 몸이 자유롭지 못했기에 늘 집 안에 갇혀 살아야 했지만 제한된 환경에서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가족의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그의 글을 읽는 내내 아픔도 감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의 글을 통해 ‘감사의 조건’을 놓쳐버리고 사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내가 가진 행복을 깨달을 수 있길 소망해 봅니다.

시인 미즈노 겐조의 감사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다.’라고 괴테가 말했다. 
그만큼 감사하는 생각과 언행이 인간의 삶속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는 말이다.

 일본에 미즈노 겐조라는 시인이 있다. 
이 사람은 11살에 뇌성마비가 와서 전신이 흐물흐물한 해파리처럼 퍼져서, 말도 못하고 수족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유일하게 제 기능을 나타낼 수 있는 부위는 눈뿐이었다. 그는 검은 눈썹에 총기가 있는 눈동자를 가진 눈을 스스로 깜빡 거릴 수 있었는데, 그것이 그가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자리에 누워 꼼짝 못하는 전신마비 환자나 다름이 없었지만, 눈꺼풀만큼은 자신의 의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마저 안 되었다면, 그는 숨은 쉬지만 죽은 자나 별반 다름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미즈노 겐조는 모친의 도움을 받아 눈을 깜빡거리면서 한 자씩 글자를 선택하는 일을 반복했다. 
모친이 글자판을 벽에 걸어놓고 막대기로 한 자씩 글자들을 훑어나갈 때, 미즈노가 눈을 깜박하면, 그걸 신호로 해서 모친이 글자를 종이에 받아 적곤 했다. 
그런 방법으로 그는 아름다운 시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미즈노 겐조는 고통 속에서 창작한 시집을 세상에 발표했는데, 그 시집이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NHK 방송에서도 그 내용을 특집으로 보도했다.

깜빡거리는 눈으로 한 자씩 써내려간 그의 시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네 권의 시집들 중에서, 첫 번째로 그가 출간한 시집에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후 12:9)’라는 시가 있다. 
되짚어보면 그러한 최악의 조건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미즈노 겐조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족하다고 여길 수 있었던 건지, 다소 의문이 들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은 최악의 바닥상태에 놓여있는 처참한 자신의 신체적 조건까지도 감사할 수 있는 착하고 겸손하며 흔들림 없는 굳건한 믿음을 갖게 될 때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눈 깜빡이는 시인 미즈노 겐조(水野源三 , 1937-1984), 그는 조용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산과 들을 뛰어 다니는 건강한 소년이었지만, 그해 여름 홍역이 돌아 겐조도 감염되고 말았다. 고열이 내리고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이미 그 전의 겐조가 아니었다. 전신이 마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어 능력 조차 빼앗겨버린 것이었다. 이때부터 겐조의, 그리고 그 가족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겐조가 열두살 나던 어느 날, 마을의 한 교회 목사가 겐조의 집에 빵을 사러 왔다가 때마침 겐조를 알게 되어 한권의 책을 주고 갔는데, 그것은 성경이었다.

처음 읽어보는 성경. 소년 겐조에게는 자신을 몰입시키는 하나의 세계였다. 매일 거르지 않고 성경을 읽어나가는 동안 겐조의 사고방식은 변화되고, 자신이 살아있어야 하는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여 그 얼굴은 날로 밝아져갔다.

겐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삶의 주관자로 마음에 영접했다.

그 후의 겐조는 더욱 변화되어갔고, 그의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면서 그의 얼굴은 웃음을 되찾게 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써 겐조는 누구에게나 만면의 웃음을 지어보이곤 했다.

몸이 부자유스럽고, 말조차도 하지 못하는 그가 어떻게 시를 짓게 되었을까?

그 계기가 된 것은 겐조를 진찰하던 의사가 "[예]라고 대답할 때는 눈을 감으라"는 주문을 한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겐조의 어머니는 이것을 단순한 대답뿐만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적용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물(水)을 뜻하는 일본어인 みず(미즈)를 찾을 경우, 오십음도(일본의 가나 문자를 순서대로 배열한 도표)를 사용하여 그의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아행(あ行)부터 차례대로 옆으로 짚어가면 아-카-사-타-나-하-마-야-라-와(あ-か -さ-た-な-は-ま-や-ら-わ)의 마(ま) 부분에 와서 겐조가 눈을 깜빡이면, 거기서부터는 밑으로 짚어가며 마-미-무-메-모(ま-み-む-め-も)의 미(み) 부분에 와서 또 한 번 눈을 깜빡이는 방식으로 한자 한자의 글을 찾으며 문장을 만들어 가는 엄청나게 고된 작업이었다.

이렇듯 정말 엄청난 작업을 통해 그때까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겐조의 내면 세계가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그의 눈 깜빡임을 통해서 수백편에 이르는 시가 탄생하게 되었다. 미즈노 겐조가 [눈깜빡이는 시인]으로 불리우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시 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찬미와 기쁨이 가득 넘쳐흐르고 있다.

미즈노 겐조의 이야기는 NHK에 특집으로 다뤄졌고, 그의 시집은 일본 문단의 걸작이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미즈노의 시집 중에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또 원망해도 부족할 텐데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가 쓴 시 몇편을 소개한다.

내가 만일 괴롭지 않았더라면

내가 만일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모든 형제자매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하루도

신문 냄새에 아침을 느끼고  
냉수의 시원함에 여름을 느끼고  
풍경 소리의 서늘함에  
저녁을 느끼고  
개구리 소리가 드높아  
밤을 느끼네
오늘 하루도 끝이구나  
한 가지 한 가지 일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며

하나님의 크신 손 안에서  
달팽이는 달팽이답게 가고 
닭장 들꽃은 닭장 들꽃답게 피고  
청개구리는 청개구리답게 울고  
하나님의 크신 손 안에서  
나는 나답게 산다

평화

나는
나라도 말하는 언어도 생각하는 일도  
각각 다른 수십억의 인간들이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곁으로 돌아오도록  
아침에도 기도 드리고
저녁에도 기도 드린다.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기도 드려 구하세요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기도 드려 결정하세요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주님의 뜻대로만 행하세요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악마의 유혹에 조심하세요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주님의 은혜와 뜻을 찬양하세요

당신의 집 당신의 마음에

당신의 집 당신의 마음에  
사랑 어린 발길로 걸어오시는  
주 예수님 영접을 위하여  
준비를 서두르세요  
당신의 집 당신의 마음에  
사랑 어린 음성으로 나직이 부르시는  
주 예수님 영접을 위하여  
지금 곧 문을 여세요  
당신의 집 당신의 마음에  
사랑 어린 눈길을 보내시는  
주 예수님 영접을 위해  
모든 일을 다 끝마치세요


나의 마음 속에

나의 마음 속에 소망이 있네  
그리스도가 주셨다네  
근심 중에 있어도 변함이 없네

아직 안 보이는걸

기다리는 소망  
나의 마음 속에 기쁨이 있네  
그리스도가 베풀어 주셨다네  
세월 흘러 간데도 소멸치 않네  
세상에서 얻지 못할 기쁨 있다네  
내가 전진해나갈 한 길이 있네  
그리스도가 활짝 열어 주셨다네  
어둠이 드리워도 헤매지 않네  
저 천국에 이르는 기쁨이 있는 그 길

잊어버리기 전에

지금 들은 것 
본 것
마음에 느꼈던 것
잊어버리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주님의 아름다운 일을
찬양하는 시를 만든다.


그렇지는 않아

걸어가는 사람은 나 혼자
그렇지는 않아
그렇지는 않아
나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걸어가신다.

고민을 하는 사람은 나 혼자
그렇지는 않아
그렇지는 않아
나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고뇌하신다.

기도드리는 사람은 나 혼자
그렇지는 않아
그렇지는 않아
나의 소원을 아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기도하신다.


미즈노 겐조(水野源三. 1937~1984)

뇌성마비 장애를 가졌던 그는, 일본 나가노현에 埴科郡 坂城 출생하였고, 14세 때 세례 받고 크리스천이 되어 18세 경부터 시를 짓기 시작하여, 수백편의 시를 남기고, 향년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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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로이드 존스 (Martyn Lloyd-Jones, 1899-1981) 목사는 누구인가?


20세기 최고의 설교자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辨證家)이며 문필가(文筆家)는 영국인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 1898-1963) 다. 그리고  20세기 최고의 복음 가수는 미국인 흑인 여(女) 가수인 마할리아 잭슨(Mahalia Jackson, 1911-1972)이다. 이것은 나의 주장이 아니다. 이렇게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루이스를 사탄이라고 험담하는 자들이 있기는 하나  그의 여러 책을 읽으면 다른 이들이 쓴 책들이 시시하게 여겨진다. 

기독교 평신도이면 누구나 위에서 언급한 존스의 설교와 책을 만나고,  루이스의 책을 읽어야 하며.  잭슨의 복음 성가를 들어 봐야 한다. 나는 로이드 존스의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 그에 관해 글을 쓴다. 이 글은 존 피터스가 지었고, 서문강이 번역했으며, 2007년 출판사 지평원이 펴낸 책, ‘마틴 로이드 존스 평전(評傳)’과 이안 머리가 지었고, 김귀탁이 번역했으며, 2010년 출판사 부흥과개혁사가 펴낸 ‘은혜의 설교자 로이드 존스 (이 책은 그의 전기(傳記)이다)를 읽고 쓴 글이다. 위 두 사람이 저술한 책들에 관해서는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그들이 어떤 책인가 금방 알 수 있다.  잭슨의 노래도 들을 수 있다. 그녀는 노래는 참 좋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1899년 영국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웨일스의 카티프에서 태어났다. 삼 형제 중 둘째다. 그는, 영락교회와 국내와 국외(國外)에 600개의 교회를 세운 한경직 (1902-2001) 목사보다 3년 먼저 이 세상에 왔는데, 그는 1963년, 그의 나이 82세 때 소천(召天)했다. 그는 스펄전 목사가 이 세상을 떠난 지 7년 후에 이 세상에 왔다. 그가 태어나고 2일 후 무디 목사가 이 세상을 떠났다.

로이드 존스는 부모와 두 형제와 함께 웨일스에서 자랐다. 가정 형편은 가난했다. 이 가난이 그의 가족이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던 1914년에 런던으로 이사하게 했다. 이 해에 그는 성 바돌로매 병원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한다. 이 병원은 당시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병원이었다. 후에 그의 부인이 된 베단도 역시 이 해에 웨스트민스터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한다. 그는 1921년에 왕립 의과대학 회원 자격과 왕립(王立) 내과 의사 자격을 취득하고 약학사 자격도 취득한다. 그는 신학에 관한 학위는 없다. 정규 신학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니는 가정에 태어났는데, 이런 가정적인 배경과 왕성한 독서와 뛰어난 두뇌가 설교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20세 중반에 회심(回心)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의사 자격을 취득한 1921년 그해에 당시 영국의 최고 의사로서 왕의 주치의(主治醫)였던 토머스 호더 경(卿)의 주목을 받고 그의 조수가 된다. 그는 1925년 왕립(王立) 의학협회가 주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M. R. C. P.라는 학위를 받는데, 그가 의학계에 계속 머물러 있었더라면 부와 명예가 그를 따랐을 것이고 유명한 그리고 성공한 의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로이드 존스는 1926년 그의 고향인 웨일스의 한 교회에서 설교했는데, 그 교회가 그의 설교에 매혹되어 그가 설교한 지 22일 만에 그 교회의 목사가 되어달라는 청빙을 받았다. 그는 이 청빙을 수락하고 의사의 직업을 버리고 목사의 길로 간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 뛰어난 의사로 촉망받던 의사, 연봉을 최소 2,500파운드를 받을 수 있었는데도 연봉 225파운드에 허름한, 노동자가 사는 집을 받고 목사가 되었다. 그가 의사의 직업을 버리고 목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그의 스승과 동료들은 매우 놀랐다.

로이드 존스는 그의 고향 웨일스에서 1938년까지 12년 동안 목회자로 사역했고, 런던의 중심가 웨스트민스터 채플(영국에서는 국교인 성공회에 소속되지 아니한 교회를 채플이라고 부른다)에서 1968년까지 30년간 목회자로 일했다. 그는 은퇴 후에도 80대가 될 때까지 영국에서 순회하면서 설교를 계속했다. 미국에서도 설교했다. 그는 영국의 두 교회에서만 40여 년을 설교자로, 목회자로 섬겼다. 그는 은퇴 후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교수로 연속 강좌를 하기도 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 평전’을 쓴 존 피터스는 로이드 존스가 그의 생애는 “먼저 설교에 바쳐졌다”라고 하면서 그를 설교자(說敎者)와 설교가(說敎家)로 묘사하고 있는데, ‘은혜의 설교자 로이드 존스’를 저술한 이안 머리는 존 피터스의 묘사에 불만을 표시하면서 그를 설교자이면서 목회자(牧會者) 자라고 묘사한다. 사전에 따르면, 설교자와 설교가를 어떤 일의 견해나 종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사람이고, 목회자는 교회 안팎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여 신도의 신앙생활을 이끌어 주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데, 사전적인 의미에서 볼 때, 로이드 존스를 목회자로 부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그는 예배가 끝나면 항상 광고를 통해서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를 찾아오라고 하였고 모든 사람을 언제나 직접 만나 그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했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를 ‘20세기 최고의 설교자’, ‘설교자들의 황태자’, ‘최상의 설교자’, 20세기의 사도’라고 부르는데, 그의 전기를 쓴 이안 머리는 ’종교 개혁 이후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던 조지 휫필드(G. Whitefield), 스펄전(C. H. Spurgean) 그리고 찰머스(Chalmers)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한다. 캔달 박사는 로이드 존스를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며, 의심 할 여지 없이 20세기 가장 위대한 설교자이다”라고 평했다.

신학교육을 전혀 받지 아니했던 스펄전도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로 그의 신도 5,000명의 이름을 일일이 다 기억했고, 그들의 개인사(個人事)를 다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로이드 존스의 기억력도 뛰어나서 성경 전체를 다 꿰들어 알고 있어서 그의 지식은 백과사전적이었다, 그의 기억력은 5년 전에 만난 사람들의 얼굴뿐 아니라 대화 하나까지 다 기억할 정도여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신학 수업을 받아 본 적이 없으면서도 성경의 근본을 포착하는 능력이 탁월하고 뛰어났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지 단순하게 설교자의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라고 말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설교했고, 지금도 설교하고 있다. 만일 하느님의 은혜가 허락한다면, 계속 설교할 것이다. 가난하고 지치고 주저하는 영혼을 그리스도의 집으로 인도하여 그 임금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라고 말했다. 그는 “내게 설교는 큰 신비입니다. 가장 신비스러운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라고 말했는데, 우리는 설교가 신비라고 밝히는 그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참된 설교는 하나님의 영이 역사한 결과이고 여기에 정확히 신비가 시작됩니다”라고 말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설교는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것을 조종하지 못한다고도 주장했다.

그가 설교할 때, 신도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는 설교는 설교 현장에 그리스도의 임재를 위한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청자들은 그의 설교를 듣고 있을 때는 전혀 다른 일을 생각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의 설교는 한 번만 들어도 10년이 지난 뒤에도 기억이 사라지지 않은 그런 명설교였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의 전기 작가 이안 머리는 로이드 존스가 휫필드와 같이 “강단에서는 사자를 닮았고, 강단 밖에서는 어린양을 닮았다”라고 평한다.

전기 작가 이안 머리는 로이드 존스의 설교가 권위 있었고, 성경적이었고, 분석적이었고, 설득력이 있었고, 실천적이었고 무엇보다 성령 충만하였다고 증언한다. 로이즈 존스는 참으로 비범해서 복음이 가져다주는 죄로부터의 자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소망에 대하여 어쩌나 담대하고도 확신 있게 증거 하는지 정말 놀라웠다고 기술한다. 예리한 그의 지성과 분석적이고, 논리적이고, 성경적인 그의 탁월한 그의 능력이 설교에서 찬란한 꽃을 피웠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설교였고, 청자들에게 주의의 산만을 허용하지 않는 설교였으며, 언어적으로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어린아이에게도 영향을 준 설교였으며, 그의 설교를 들은 많은 사람에게, 특히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일이 많았다. 처음으로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 중에는 그의 설교에 심한 혐오감과 반감을 품고 다시는 그 교회에 오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한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는 어떤 힘에 이끌리어 교회를 다시 찾게 되는 이들도 있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저 시골 먼 곳에서 런던의 그의 교회를 방문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의 교회, 웨스트민스터 채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를 갈망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구약성경이 현대 기독교에 해로운 영향을 준다고 무시하는 풍조가 난무하던 당대에, 로이드 존스는 이런 풍조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구역 성경은 신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전적인 신적 계시로 보았다. 그는 구약성경이 인간의 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계시하고, 하나님 없는 삶은 절대로 무익하며,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관한 책이라고 강조하면서 설교할 때 신약성경과 같은 비중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해서 설교했다. 그의 설교는 철저하게 성경에 기초했기 때문에 그를 비난하는 이들은 “로이드 존스가 지나치게 성경에 의존함으로써 불필요한 요구로 청자들을 괴롭혔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로이드 존스는 세상의 조류에 맞서면서 부와 명예를 멀리한 목회자로 살았는데, 일생 단 한 번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했고 단 한 번 TV 방송에 출연했을 뿐이다. 1970년대에 세계 50개 국가에서 백만 명이 넘는 독자들이 로이드 존스의 설교집을 읽었는데, 그의 나이 70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에베소서 강해와 로마서 강해가 책으로 출판되었다.

로이드 존스는 가족을 크게 사랑한 사람이었다. 두 딸과 의사인 그의 아내를 크게 사랑했다. 그가 일생에서 제일 잘한 일을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고, 두 번째로 잘한 일은 그의 아내와 결혼한 일이라고 그는 술회(述懷)했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 것은 그의 가족을 두고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었다. 그가 임종이 가까웠을 때 말을 하지 못하고 필담으로 가족과 대화했는데, 마지막 대화가 그의 아내한테 한 말이, “여보 이제 하나님께 내가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아요, 나 하나님께 가오"였다.

로이드 존스는 의사란 직업을 버린 것을 칭찬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 칭찬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더 큰 것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설교자로서의 칭찬도 받아들이지 않고, “저는 설교하기 위해 산 것이 아니라"라고 말하면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삶 자체가 설교의 한 부문이 되었는데, 그는 위대한 그리스도인답게 잠자는 중에 운명(殞命)했다.

로이드 존스는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돼라"라는 바울 사도의 명령을 따라 일생을 산, 역사상에 나타났던 가장 위대한 그리고 포괄적 목회 사역자 중의 하나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로이드 존스의 기도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있는데, 그는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항상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늘 그의 신도들에게 기도할 것을 당부했다.

다음의 두 이야기는 로이드 존스 목사가 그의 설교 중에 직접 밝힌, 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이야기와 다시금 헌신한 사람들의 예 중의 하나이다. 존 피터즈가 지었고, 서문강이 옮기었고, 2007년 12월 15일 출판사 지평원이 펴낸 마틴 로이드 존스 평전(評傳)의 57쪽과 58쪽에 있는 글을 그대로 여기에 적은 것이다. 이 글에서 ‘저’는 로이드 존스 자신을 말한다.

이야기 1:

“한번은 제가 준비한 설교의 반도 못 하고 강단에서 내려와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일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일이 그렇게 되었고, 그로 인해 어떤 의미에서는 다음 주일 설교를 이미 준비한 셈이 되었습니다.

다음 주일 아침에 저는 그전에 했던 설교 중 하지 못한 나머지 부분을 한 편의 설교로 구성하여 설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하면서 특별한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날 예배를 마쳤을 때, 한 사람이 제게 와서 저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는 목사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그 목사가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데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너무나 감동하여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 먼 데서 겨기까지 오게 하신 것은 바로 이 특별한 설교를 듣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확신하였습니다.저는 「믿음의 시련」(Faith on Trial)이라는 저의 책 서문에 이 일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복할 만큼 이 일은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지금도 저는 그 사람의 생각이 옳았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만일 제가 지난 주일에 준비했던 이 설교를 끝까지 모두 전해버렸다면, 그분이 그날 들었던 그 설교까지도 이미 전 주일에 다 해 버린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어를 당했고, 그 전 주일에 제가 준비한 설교 분량의 반만 전하도록 허락받은 것입니다. 그 나머지 반은 그다음 주일에 전하도록 보전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처음에 그 점에 대해서 약간 석연치 않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해졌습니다. 우리가 상황을 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

이야기 2:

“저는 가공(可恐)할 죄로부터 회심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된 한 가련한 남자를 알고 있습니다. 제가 남웨일즈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불행히도 낙심 자(backslider)가 되었고 죄에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와 자녀들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함께 런던으로 도망하였고, 거기서 가진 돈을 모두 써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를 설득하여 돈을 더 뜯어내려고 거짓말을 하고, 자기 아내와 공동명의로 되어 있던 집의 명의를 자기 이름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돈을 얻기 위해서 집을 팔고 아주 먼 고장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무섭게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돈도 다 떨어지고 그 여자도 그를 버렸습니다.

그는 너무나 철저하게 비참하게 되고 부끄럽기도 하여 감히 자살하기로 하였습니다. 깊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자신은 자기 가족에게 가까이 갈 권한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웨스트민스터 브리지를 향해 걸어가 자신의 몸을 템스강에 던지기로 단호하게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실행하기 위하여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가련한 영혼이 그 다리에 도착했을 때, 영국 국회의사당 시계탑에서 매시 30분에 치는 종이 울렸습니다.

그때 갑자기 한 생각이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하였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지금 저녁 예배를 위해 강단에 막 올라가고 있을 것이다.’ 그는 삶을 끝내기 전에 제 설교를 마지막으로 들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약 6분 후 웨스트민스터 채플에 도착했고, 계단을 올라와 복도로 들어서면서 ‘하나님이여 낙심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저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간구가 그가 그날 그곳에서 처음으로 들었던 말이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일이 즉시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는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런던 교외에 있는 한 교회의 장로가 되어 오랫동안 탁월하게 섬겼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

출생 1899년 12월 20일
사망 1981년 3월 1일
성별 남성
국적 영국
직업 복음주의 설교자, 의사

데이비드 마틴 로이드 존스(영어: David Martyn Lloyd-Jones, 1899년 12월 20일 ~ 1981년 3월 1일)은 영국의사 출신의 복음주의 설교자이다. 존 스토트와 함께 한국교회에 가장 영향력이 많았던 목회자였다.

청년 의사였던 로이드 존스는 40세가 되던 해에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그가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강연한 내용을 출판한 "목사와 설교"는 명저로 알려져 있다. 로이드 존스는 웨일스학파의 대표적인 회중교회의 목회자였다.

웨스트민스터 성당

로이드 존스는 기독교에 대해 불붙는 논리(logic on fire)라고 불렀다. 이는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감상적인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과 만나는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열정적인 집중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이 주장해야 하고, 또한 알아야 하며, 체험해야 하는 것은 어떤 일들을 하고 안 하는 것들에 대한 일반적인 아이디어나 행위들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만이 우리들의 목표이어야 합니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그리스도인의 목표 미달입니다.(복음의 핵심, 132쪽.).

마틴 로이드 존스는 사회에서 출세한 사람들이 간증하는 일부 개신교 교회들의 모습들에 대해 "종교오락"이라는 말을 썼다. 즉, 교인이라는 소비자들의 니즈에 맞게 설교하고 목회하는 종교서비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설교의 의미를 훼손시킬 수 있음을 꿰뚫어본 것이다.

간증자로 초대되는 사람들 중에는 해군 제독이나 육군 장성처럼 특별한 직함을 가진 이들도 있고, 야구선수나 연극배우, 영화배우, 가수처럼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이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설명하고 설교하는 일보다 그런 이들의 간증 듣는 일을 훨씬 더 가치 있게 여깁니다. 제가 이 모든 것을 ‘오락’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눈치 채셨습니까? 저는 이런 일들이 당연히 오락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설교에 등을 돌리고 이런 오락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설교와 설교자 26).

로이드 존스는 설교는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설교자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학문인 신학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설교를 잘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하거나, 교인들에게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가르치는 현대교회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특별히 조직신학과 교회사는 그의 설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1959년부터 1978년까지 웨스트민스터 청교도 연구회( Puritan and Westminster Conferences)에서 19회분을 강연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부으심이 말씀 선포로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령의 불을 끄는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부흥운동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며, 칼빈주의가 만일 메소디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지성주의와 스콜라주의로 흐른다고 경고하였다. 그렇게 함으로 신앙고백이 성경을 대체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질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는 열광주의 즉 감정 조절이 한되는 상태를 옹호하며, 이것을 칼빈주의자들이 반박한다고 주장하였다.[1]

로이드 존스의 저서로는

  • 목사와 설교, CLC
  • The Miracle of Grace, 은혜와 기적, 백합출판사, 1987
  • 영적 침체와 치유, 이용태 역, 기독교문서선교회(CLC), 2001
  • 하나님 나라(복있는 사람)
  • 사도행전 강해시리즈(승리하는 기독교 등, 복있는 사람)
  • 설교와 설교자(복있는 사람)
  • 내가 자랑하는 복음, 복있는 사람, 2008
  • 로마서 강해, 기독교문서선교회
  •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The Puritans: Their Origins and Successors) 서문강역, 생명의 말씀사 2002.

가 있으며, 특히 복있는 사람에서는 개혁주의 신학단체인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와 계약하여 로이드 존스의 책을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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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Christ-centered Preaching by Bryan Chapell)


"Fallen Condition Focus!" (타락된 상태에 초점!)

2015년 RTS Jackson에 온 Bryan Chapell 교수는 이것을 반복적으로 힘주어 강조했다.

그는 부드럽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로 강해설교의 지향점을 차분히 전달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를 강조하는 개혁주의 전통은 필연적으로 강해설교(Expository Sermon)에 대한 강조로 귀결된다. 설교는 성경의 적용이고, 예배의 중심이며, 지역교회의 풍향계다. 그만큼 설교에 대한 고전(古典)들도 많다. 로이드존스의 <설교와 설교자; Preaching and Preachers>, 조엘 비키가 엮은 <타오르는 강단; Pulpit Aflame), 그리고 팀 켈러의 <설교; Preaching>까지 강해설교의 원리와 적용을 세심하게 다룬 서적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미국 칼빈신학교 학장이자 실천신학 교수인 브라이언 채펠 박사의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Christ-centered Preaching>은 설교의 준비와 전달에 있어 매우 실용적이다. 책은 크게 (1) 강해설교의 원리, (2) 강해설교의 준비, 그리고 (3) 그리스도 중심 메시지의 신학,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1. 강해설교의 원리

이 부분에서 체펠 박사는 성경본문의 우선성을 말한다. 사실 설교자가 반드시 가져야 할 준비자세는 성경본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적극적인 의뢰다. 또한 그는 설교에 있어서 통일성 있는 원 포인트 설교를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How many things is a sermon about? One!) 하나의 명제(Proposition)를 제대로 전달하라! 그리고 체펠 박사는 그의 독창적인 개념이기도 한 FCF(타락상태초점; the Fallen Condition Focus)를 소개한다.

FCF is the mutual human condition that contemporary believers share with those to or about whom the text was written that requires the grace of the passage for God's people to glorify and enjoy him. (타락상태초점(FCF)이란 오늘날 신자들이 성경본문이 기록될 당시 그 대상이었던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필요한 은혜를 공유하는 공동의 인간적 관심사이다.)

Christ-centered Preaching, 50

정의(definition)에서 알 수 있듯이 FCF는 항상 부정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인간공통의 상태다. FCF는 성경본문이 고치거나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체펠 박사가 제시하는 설교론은 본질적으로 변증적(Apologetic)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설교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감추기보다 오히려 극대화해서 설득과 수긍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물론 그 자신이 복음진리의 전달에 있어서 Logos - Pathos - Ethos의 연결고리들을 언급하지만 FCF는 보다 Logos의 영역에 가깝다.

강해설교의 구조는 <설명(Explanation) - 예화(Illustration) - 적용(Application)>의 세 부분의 연결고리로 구성된다. 각 부분의 분량은 본문과 대상에 따라 상이하다. 체펠에 따르면, "설교를 하는데 있어서 구성 요소들의 비율을 결정하는 규칙은 없다.... 종교개혁 지도자들은 듣는 사람의 욕구와 능력에 맞추어 설교하라고 조언했다. [WLC, 159] 이 지혜로운 조언은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거나 명성을 드내기 위해 설교하지 말아야 할 것을 상기시켜준다." 우리는 체펠 박사의 조언에 따라 RTS Jackson 재학당시 Preaching Lab에서 각 대지마다 1개씩의 예화(Illustration)를 꼭 첨부할 것을 훈련받기도 했다. 그것은 생생한 심상을 가질 때에 본문과 교리의 의미를 보다 잘 기억하게 되는 청중을 위한 훈련이었다. 예수님과 바울이 몸소 보여주었듯이 대상이 달라지면 설교의 구성과 전달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2. 강해설교의 준비

체펠 박사는 설교 준비를 위한 6가지 질문을 제시한다. 특별히 4번째 질문은 FCF를 확정하는데 있어 중요하다.

1) 본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 본문의 의미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3) 어떤 관심사들 때문에 본문이 기록되었는가?

4) 본문을 기록한 사람 및 그 대상과 우리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5) 본문의 진리에 대해 오늘날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6) 본문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그 다음으로 설교준비의 4단계는 다음과 같다.

(1) 관찰 - (2) 질문(6하원칙, 담화분석; Discourse Analysis) - (3) 관련(청중과의 관련성) - (4) 구성(설교문)

설교의 도입부는 관심을 유발할 수 있는 영역이어야 한다. 흥미로운 예화로 시작할 수도 있겠으나 이 설교가 나오게 된 계기나 지향하는 목표, 곧 말씀을 갈망하게 하는 것과 맥락연결과 같은 선행주제(ante-theme)가 적절하다.

3. 그리스도 중심 메시지의 신학

이 부분에서 체펠 박사는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는 본질적으로 구속적 설교(Redemptive preaching)라고 말한다. 체펠은 제이 아담스(Jay Adams)의 말을 인용한다. "만약 당신이 유대교인이나 유니테리언주의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설교를 한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설교이다.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설교는 독특해야 한다. 설교를 독특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설교 전체에 구원하시고 성화시켜주시는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것이다. 당신이 전하는 설교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복음적인 설교와 교화적인 설교 모두에 적용된다.... 청중이 성경에서 요구하는 모든 것을 자력으로 행할 수 있다는 듯이 그것들을 행하라고 권면해서는 안된다. 청중은 십자가의 구원하는 능력과 성령 안에서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내주하시며 거룩하게 하시는 능력, 행하게 하시는 능력의 결과로서 성경이 요구하는 것들을 행할 수 있다."

이와같은 구속적 진리의 중심성은 지속적으로 강조된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체펠 박사는 결코 교화적인 설교, 이를테면 당신은 본받아야 하고, 더 거룩해져야 한다는 설교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그는 이와같은 설교가 인본주의와 도덕주의로 흐르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의 중심성이 항상 견고하게 견지되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르틴 루터 소요리문답·대요리문답 차이

마르틴 루터 소요리문답·대요리문답 차이와 핵심 내용 정리 - 마르틴 루터의 모든 것

마르틴 루터의 소요리문답·대요리문답(1529)은 종교개혁 이후 교회와 가정에서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핵심 교리서다. 
두 문답의 차이, 공통 핵심(십계명·사도신경·주기도문), 오늘의 적용까지 한 번에 정리한다. 


Table of Contents

요리문답이 왜 중요한가: 종교개혁의 ‘교육 인프라’

종교개혁은 “교회의 구조를 바꾸는 사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신앙을 다시 가르치는 운동”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오직 성경과 오직 믿음을 외쳤지만, 이것이 실제 삶에 자리 잡으려면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 성경은 번역되어도, 읽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멀어지고
  • 설교를 들어도, 신앙의 기초 틀이 없으면 흔들리며
  • 공동체가 바뀌어도, 가정과 다음 세대가 붙들지 않으면 지속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종교개혁 이후 “기초 신앙을 표준화하여 가르칠 수 있는 텍스트”로서 소요리문답·대요리문답을 만들었습니다. 쉽게 말해, 이 두 문답은 개신교의 ‘기초 커리큘럼’입니다.

소요리문답 vs 대요리문답: 한눈에 비교

아래 비교만 잡아도 글의 80%는 이해됩니다.

목적과 대상

  • 소요리문답: 아이·초심자·가정용 / 암기·반복 학습 중심
  • 대요리문답: 교사·목회자·지도자용 / 설명·해설·적용 확장

문체와 분량

  • 소요리문답: 짧고 명료(질문-답 형식이 분명)
  • 대요리문답: 길고 해설적(설교/강의처럼 풀어줌)

사용 환경

  • 소요리문답: 가정 예배, 어린이/입문 교육, 기초 교리 교육
  • 대요리문답: 설교 준비, 교리 강의, 지도자 훈련, 성인 교육

정리하면:

소요리문답은 “외우며 세우는 뼈대”, 대요리문답은 “이해하며 깊이는 해설서”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문답서를 쓴 배경(1520s의 현실)

마르틴 루터가 1529년에 요리문답을 낸 이유는 단순히 “교리 정리”가 필요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현장을 돌아보니 현실이 심각했습니다.

  • 교회 개혁이 진행되는데도, 기본 신앙 내용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고
  • 성직자/교사들의 교육 수준도 지역에 따라 들쭉날쭉했고
  • 가정에서 신앙 교육이 거의 작동하지 않는 곳도 많았습니다

루터는 “제도만 바꾸고 교육이 없으면, 개혁은 금방 무너진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기본을 누구나 따라 배울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는 형태”로 만든 것이 요리문답입니다.


두 문답의 공통 뼈대 3가지(십계명·신경·기도)

소요리문답과 대요리문답은 분량과 문체가 다르지만, 중심 뼈대는 동일합니다.

십계명: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과 죄의 거울

  •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윤리적 방향을 제시합니다

사도신경: “무엇을 믿는가”의 핵심 요약

  • 창조(성부), 구원(성자), 성화/교회(성령)로 구조가 잡힙니다

주기도문: “어떻게 기도하는가”의 기본 틀

  • 신앙이 머리 지식으로 끝나지 않고
  • 하나님과의 관계(기도)로 이어지게 합니다

이 3가지는 각각 다음 질문에 답합니다.

  • 십계명: 어떻게 살아야 하나?
  • 사도신경: 무엇을 믿나?
  • 주기도문: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나?

소요리문답 핵심 정리: 가정·아이·초심자용

소요리문답의 특징

소요리문답은 “짧은 질문과 답”으로 설계되어 반복 학습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루터의 목적은 명확했습니다.

  •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가르칠 수 있도록
  • 누구나 최소한의 신앙 뼈대를 암기할 수 있도록

소요리문답의 핵심 구성(요약)

  1. 십계명: 죄를 깨닫고 삶의 방향을 배움
  2. 사도신경: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무엇을 하셨는지 고백
  3. 주기도문: 신앙의 응답이 기도로 이어지게 함
  4. 세례: 은혜의 표지, 새 삶의 시작
  5. 성만찬: 그리스도의 약속과 공동체의 은혜 경험
    (+ 전통에 따라 고해/열쇠의 직무가 포함되기도 함)

소요리문답은 “외우는 교리”가 아니라, 신앙생활의 기본 언어를 만드는 도구입니다.


대요리문답 핵심 정리: 교사·설교자·지도자용

대요리문답의 특징

대요리문답은 같은 내용을 다루지만, 목표가 다릅니다.

  • “왜 그렇게 믿는가”를 설명하고
  • “현장에서는 어떻게 적용하는가”를 풀어주며
  • 지도자들이 가르칠 때 사용할 논리와 예시를 제공합니다

대요리문답의 핵심 흐름

  • 십계명: 단순 금지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과 이웃 사랑의 실제로 확장
  • 사도신경: 구원의 사건(성자)과 은혜의 흐름을 더 풍성하게 설명
  • 주기도문: 각 간구의 의미를 삶의 현실과 연결
  • 성례: 의식 자체가 아니라 **말씀의 약속(복음)**에 근거한 은혜의 방식으로 정리

대요리문답은 ‘교리 해설서’이면서 동시에 ‘목회 현장 매뉴얼’에 가깝습니다.


성례(세례·성만찬) 파트는 무엇을 말하나

마르틴 루터의 요리문답에서 성례 파트는 단지 예식 설명이 아닙니다. 핵심은 “성례의 효력은 무엇에 근거하는가?”입니다.

세례

  • 물 자체가 마법처럼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결합된 은혜의 표지라는 관점이 강조됩니다
  • 세례는 ‘새 출발’이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신앙의 표지’로 이해됩니다

성만찬

  • 성만찬은 신앙인의 위로와 확신을 돕는 은혜의 자리로 설명됩니다
  • 단지 상징 논쟁을 넘어, “그리스도의 약속”과 “공동체”가 함께 강조됩니다

요리문답은 성례를 ‘공로’가 아니라 ‘약속’으로 돌려놓는 교육 텍스트입니다.


자주 생기는 오해 6가지(문답=암기?)

  1. 요리문답은 암기만 하면 된다 (X)
    → 암기는 시작이고, 목표는 이해·삶의 적용입니다.
  2. 요리문답은 옛날 문서라 쓸모없다 (X)
    → 오히려 “신앙의 최소 공통 언어”를 제공합니다.
  3. 교리는 차갑고 현실과 무관하다 (X)
    → 루터 문답은 기도·예배·윤리로 이어지게 설계되었습니다.
  4. 대요리문답은 전문가만 보는 책이다 (X)
    → 성인 신앙의 기초를 깊게 세우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5. 문답은 성경 대신이다 (X)
    → 문답은 성경을 읽고 이해하기 위한 ‘지도’에 가깝습니다.
  6. 문답을 따르면 율법주의가 된다 (X)
    → 루터는 십계명을 복음과 함께 가르치며 은혜의 순서를 강조합니다.

오늘의 적용: 가정·교회·개인 신앙 루틴으로 쓰는 법

요리문답을 “책장 장식”이 아니라 “생활 도구”로 쓰는 방법을 정리해봅니다.

가정에서(부모/부부/1인)

  • 주 1회, 십계명 1개 + 짧은 적용 대화
  • 사도신경을 함께 읽고 “이번 주 감사”를 한 문장씩 나누기
  • 주기도문 간구 하나를 골라 현실 기도로 바꾸기

교회 소그룹에서

  • 소요리문답 Q&A를 10분씩 나누고
  • 대요리문답의 해설을 1개 사례로 연결하기(직장·관계·돈·말)

개인 루틴으로

  • 월요일: 십계명(양심 점검)
  • 수요일: 사도신경(복음 재정렬)
  • 금요일: 주기도문(기도 훈련)
  • 주말: 성례 의미 묵상(예배 준비)

이렇게 하면 문답은 “신앙의 체력 훈련”이 됩니다.


자주묻는질문(FAQ)

Q1. 소요리문답과 대요리문답 중 무엇부터 읽어야 하나요?

초보자라면 소요리문답으로 큰 틀을 잡고, 이해가 깊어질 때 대요리문답으로 확장하는 순서가 가장 좋습니다.

Q2. 요리문답의 핵심은 결국 무엇인가요?

십계명(삶), 사도신경(믿음), 주기도문(기도) — 이 세 기둥이 신앙의 기본 골격입니다.

Q3. 문답을 읽으면 성경을 덜 읽게 되지 않나요?

오히려 반대입니다. 문답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프레임”을 제공해 성경 읽기를 더 체계적으로 돕습니다.


핵심 요약 10줄

  • 마르틴 루터의 소요리문답·대요리문답은 종교개혁 이후 신앙 교육을 위한 핵심 교리서다.
  • 소요리문답은 가정·아이·초심자용, 대요리문답은 지도자·성인 교육용 해설서다.
  • 둘 다 십계명·사도신경·주기도문을 중심 뼈대로 삼는다.
  • 십계명은 삶의 방향과 죄의 거울, 신경은 믿음의 핵심, 주기도문은 기도의 틀이다.
  • 소요리문답은 짧고 명료하여 암기와 반복 학습에 적합하다.
  • 대요리문답은 같은 내용을 더 깊게 설명하고 적용까지 확장한다.
  • 세례·성만찬은 의식이 아니라 말씀의 약속에 근거한 은혜로 가르친다.
  • 요리문답은 성경 대체물이 아니라 성경 이해를 돕는 교육 도구다.
  • 문답은 암기에서 끝나지 않고 이해·기도·삶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 오늘도 가정과 교회가 신앙의 기초를 세우는 데 매우 유용하다. 

암송 성구 자료(05-26-2024 /


파트리스 성구 암송 자료

05-26-2024(주일)
암송 성구 #. 1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06-02-2024(주일)
암송 성구 #. 2 사도행전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Salvation is found in no one else,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to men by which we must be saved.


06-09-2024(주일)
암송 성구 #. 3 에베소서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06-16-2024(주일)
암송 성구 #. 4 고린도후서 5: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So we make it our goal to please him, whether we are at home in the body or away from it.


06-23-2024(주일)
암송 성구 #. 5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having a form of godliness but denying its power. Have nothing to do with them.


06-30-2024(주일)
암송 성구 #. 6 고린도전서 9:16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Yet when I preach the gospel, I cannot boast, for I am compelled to preach. Woe to me if I do not preach the gospel!


07-07-2024(주일)
암송 성구 #. 7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07-14-2024(주일)
암송 성구 #. 8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Follow my example, 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t.


07-21-2024(주일)
암송 성구 #. 9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You diligently study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by them you possess eternal life. These are the Scriptures that testify about me.


07-28-2024(주일)
암송 성구 #. 10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08-04-2024(주일)
암송 성구 #. 11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What good will it be for a man if he gains the whole world, yet forfeits his soul? Or what can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08-11-2024(주일)
암송 성구 #. 12 베드로후서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Through these he has given us his very great and precious promises, so that through them you may participate in the divine nature and escape the corruption in the world caused by evil desires.

08-18-2024(주일)
암송 성구 #. 13  아모스 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But let justice roll on like a river, righteousness like a never-failing stream!


08-25-2024(주일)
암송 성구 #. 14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Therefore, my dear friends, as you have always obeyed--not only in my presence,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09-01-2024(주일)
암송 성구 #. 15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but of righteousness, peace and joyin the Holy Spirit,


09-08-2024(주일)
암송 성구 #. 16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09-15-2024(주일)
암송 성구 #. 17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Th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09-22-2024(주일)
암송 성구 #. 18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09-29-2024(주일)
암송 성구 #. 19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10-06-2024(주일)
암송 성구 #. 20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10-13-2024(주일) / 설교 6월 8일 성령강리주일
암송 성구 #. 21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 설교 / 06-08-2025.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1.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2.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3. 새것이 되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10-20-2024(주일)
암송 성구 #. 22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10-27-2024(주일)
암송 성구 #.23  고린도후서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For he says, "In the time of my favor I heard you, and in the day of salvation I helped you." I tell you,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11-03-2024(주일)
암송 성구 #.24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11-10-2024(주일) 구원의 확신
암송 성구 #.25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And this is the testimony: God has given us eternal life, and this life is in his Son.
He who has the Son has life; he who does not have the Son of God does not have life.

11-17-2024(주일) 기도 응답의 확신
암송 성구 #. 26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Until now you have not asked for anything in my name. Ask and you will receive, and your joywill be complete.

11-24-2024(주일) 승리의 확신
암송 성구 #. 27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No temptation has seized you except what is common to man. And God is faithful; he will not let you be tempted beyond what you can bear. But when you are tempted, he will also provide a way out so that you can stand up under it.


12-01-2024(주일) 사죄의 확신
암송 성구 #. 28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

12-08-2024(주일) 인도의 확신
암송 성구 #. 29  잠언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and lean not on your own understanding;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12-15-2024(주일)
암송 성구 #. 30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If a man remains in me and I in him, he will bear much fruit;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12-22-2024(주일)
암송 성구 #. 31  사도행전 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Now I commit you to God and to the word of his grace, which can build you up and give you an inheritanceamong all those who are sanctified.


12-29-2024(주일)
암송 성구 #. 32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because those who are led by the Spirit of God are sons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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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5-2025(주일)
암송 성구 #. 33  고린도후서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01-12-2025(주일)
암송 성구 #. 34  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But if we walk in the light, as he is in the light, we have fellowship with one another, and the blood of Jesus, his Son, purifies us from all sin.


01-19-2025(주일)
암송성구 #. 35  베드로전서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But in your hearts set apart Christ as Lord. Always be prepared to give an answer to everyone who asks you to give the reason for the hope that you have. But do this with gentleness and respect.

01-26-2025(주일)

암송성구 #. 36. 고린도후서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Each man should give what he has decided in his heart to give, not reluctantly or under compulsion, for God loves a cheerful giver.

02-2-2025(주일)

암송성구 #. 37.  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y is a temple of the Holy Spirit, who is in you, whom you have received from God? You are not your own;


02-9-2025(주일)

암송성구 #. 38.  베드로전서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영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If you are insulted because of the name of Christ, you are blessed, for the Spirit of glory and of God rests on you


02-16-2025(주일)
암송성구 #. 39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The LORD bless you and keep you;
the LORD make his face shine upon you and be gracious to you;
the LORD turn his face toward you and give you peace.


02-23-2025(주일)
암송 성구 #. 40  요한복음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ask whatever you wish, and it will be given you.


03-02-2025(주일)
암송 성구 #. 41  고린도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Now the Lord is the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freedom.


03-09-2025(주일)
암송 성구 #. 42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03-16-2025(주일)
암송 성구 #. 43 역대상 16:11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찌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찌어다.
Look to the LORD and his strength; seek his face always.

03-23-2025(주일)
암송성구 #.44 에베소서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And pray in the Spirit on all occasions with all kinds of prayers and requests. With this in mind, be alert and always keep on praying for all the saints.

03-30-2025(주일)
암송성구 #.45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

04-06-2025(주일)
암송성구 #. 46 에베소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Devote yourselves to prayer, being watchful and thankful.

04-13-2025(주일)
암송성구 #. 47 시편 144:15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Blessed are the people of whom this is true; blessed are the people whose God is the LORD.

04-20-2025(주일)
암송성구 #. 48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and come out--those who have done good will rise to live, and those who have done evil will rise to be condemned.

04-27-2025(주일)
암송성구 #. 49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The LORD your God is with you, he is mighty to save. He will take great delight in you, he will quiet you with his love, he will rejoice over you with singing.


05-04-2025(주일) 어린이주일
암송성구 #. 50  마가복음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I tell you the truth, anyone who wi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like a little child will never enter it.


05-11-2025(주일) 어버이주일
암송성구 #. 51  레위기 19:32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Rise in the presence of the aged, show respect for the elderly and revere your God. I am the LORD.

05-18-2025(주일)
암송성구 #. 52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if my people, who are called by my name, will humble themselves and pray and seek my face and turn from their wicked ways, then will I hear from heaven and will forgive their sin and will heal their land.

05-18-2025(주일)
암송성구 #. 52 역대하 7:14

05-25-2025(주일)
암송성구 #. 53 시편 144:15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Blessed are the people of whom this is true; blessed are the people whose God is the LORD.

06-01-2025(주일)
암송성구 #.53  이사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but those who hope in the LORD will renew their strength. They will soar on wings like eagles; they will run and not grow weary, they will walk and not be faint.

06-08-2025(주일)
암송성구 #.54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He has showed you, O man, what is good. And what does the LORD require of you? To act justly and to love mercy and to walk humbly with your God.

06-15-2025(주일) 설교 7월 6일 성령강림 후 204주, 맥추감사주일
암송성구 #.55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06-15-2025(주일) 설교 7월 6일 성령강림 후 204주, 맥추감사주일
암송성구 #.55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믿음의 사람(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
 1. 영적 연합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 예수님과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디스마와 게스다)
 2. 영적 생활 :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
 3. 영적 믿음 :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06-22-2025(주일) 
암송성구 #.56 시편 18:30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As for God, his way is perfect; the word of the LORD is flawless. He is a shield for all who take refuge in him.


06-29-2025(주일) 
암송성구 #.57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Whoever has my commands and obeys them, he is the one who loves me. He who loves me will be loved by my Father, and I too will love him and show myself to him."

07-06-2025(주일) 
암송성구 #.58 전도서 12: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Remember your Creator in the days of your youth, before the days of trouble come and the years approach when you will say, "I find no pleasure in them.

07-13-2025(주일)
암송성구 #. 59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

성경의 시대적 구분

구약

1. 창조시대
2. 족장시대
3. 출애굽시대
4. 정복-정착시대
5. 통일왕국시대
6. 분열왕국시대
7. 단일왕국과 포로기
8. 재건시대
9. 신약과 구약의 중간시대 

신약

1. 예수의 탄생과 공생애
2. 사도시대
3. 교회 시대
4. 종말

07-20-2025(주일)
암송성구 #. 60. 베드로후서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For prophecy never had its origin in the will of man, but men spoke from God as they were carried along by the Holy Spirit.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 베드로는 예언의 말씀이 사사로이 해석되지 않아야 되는 근거로 성경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제시한다.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는 베드로의 진술은 성령의 이중적인 저작권을 암시한다. 
즉 원저자이신 성령께서 영감을 통해서 성경 기록자에게 오류가 없는 성경을 기록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고전 14:37;딤후 3:16;딤후 3:10-17 주제 강해 '성경 영감론' 참조). 

구약의 제자들도 역시 자신들의 예언이나 말씀이 자신의 뜻이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삼하 23:2;렘 1:7,9). 
그러나 당시의 거짓 교사들은 재림에 대한 구약성경의 예언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선지자 자신이 표적이나 꿈, 환상을 통하여 지어낸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16절). 
베드로는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하여 본절에서 구약성경의 예언에 대한 신적 기원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예언  προφητε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4394

1. 예언.  2. 예언적 활동.  3. 예언의 은사  
발음  [ prŏphētĕia ]  
어원 / 4396에서 유래
  •  1.  예언.
    •  a.  예언적 활동, 예언활동, 계11:6.
    •  b.  예언의 은사, 예언하는 은사, 롬12:6, 고전12:10, 계19:10.
    •  c.  예언의 말씀, 마13:14, 고전14:6, 벧후1:20, 살전5:20.
  • 관련 성경  /  예언(마 13:14, 살전 5:20, 계 22:7). 
                        [동] 예언하다(고전 12:10, 13:2). 


성경의 시대 구분과 특징

1. 창조 시대 (창세기 1-11장) 
    주요 사건  - 천지 창조,  아담과 하와의 창조와 타락,  가인과 아벨 이야기,  노아의 홍수,  바벨탑 사건 

특징 :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시기입니다. 창조, 인간의 타락, 죄의 확산, 그리고 노아의 홍수와 같은 사건들이 이 시기에 포함됩니다. 이 시기는 인류의 기원과 초기의 타락, 그리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과 구원의 시작을 다루고 있습니다.


2. 족장 시대 (창세기 12-50장)    
    주요 사건 - 아브라함의 부름,  이삭, 야곱, 요셉의 이야기,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

   특징 : 이 시대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과 같은 족장들의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를 통해 한 민족     (이스라엘)을 세우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이 시대는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시기입니다.

3. 출애굽과 광야 시대 (출애굽기-신명기)
    주요 사건 -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시내산 언약 (십계명),  광야에서의 40년,  모세의 죽음 ​

   특징 : 이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시기입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이 시기는 율법과 예배 제도의 도입과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경험한 시기입니다.

​    4. 가나안 정복과 사사 시대 (여호수아-사무엘상)
        주요 사건 -  여호수아에 의한 가나안 정복,  사사들의 통치,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타락과 회복
 
   특징 : 이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하는 시기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한 후,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이끈 시대입니다. 
   이 시기에는 이스라엘이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로 인해 외적의 침략을 받았다가 회개하고 구원받는 패턴이 나타납니다.


5. 왕정 시대 (사무엘상-열왕기, 역대기)
    주요 사건 -  사울, 다윗, 솔로몬의 통치,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예루살렘 성전 건축,  선지자들의 활동

​   특징 : 이 시대는 이스라엘이 왕을 세워 통치하던 시기입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첫 왕이 되었고, 다윗과 솔로몬을 거치며 왕국이 번       영하지만, 솔로몬 이후 왕국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됩니다. 
   이 시기는 하나님의 언약이 다윗 왕조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와, 선지자들이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 돌아가라고 외쳤던 시기입니다.

6. 포로기와 귀환 시대 (에스라-느헤미야, 에스더, 다니엘) 
   주요 사건 -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과 유다 포로, 페르시아에 의한 바벨론 정복, 고레스 칙령에 따른 귀환, 성전 재건과       예루살렘 성벽 재건

​   특징 :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많은 유대인이 포로로 잡혀간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다니엘과 같은 선지자가 활동했으며, 포로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약속이 강조됩니다. 
   이후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고,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이 이 시대에 포함됩니다.

7. 중간기 (말라기 이후-신약 시대 전까지)
    주요 사건 - 페르시아, 헬레니즘, 로마 제국의 지배,  유대 종파의 형성 (바리새인, 사두개인, 에세네파 등),  구약과 신약 사이        의  약 400년의 침묵기 

특징 : 이 시기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없는 기간으로, 약 400년 동안 선지자들이 침묵한 시기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시기 동안 유대교의 다양한 종파가 형성되고, 헬레니즘 문화와 로마의 지배 아래 유대인들의 종교적 정체성이 강하게 형성됩니다. 
이는 신약 시대에 예수님께서 오실 배경을 형성합니다.

8. 예수님의 사역 시대 (복음서)
    주요 사건 - 예수님의 탄생, 공생애, 십자가 죽음, 부활,  제자들의 부르심과 사역,  산상수훈, 비유, 기적,  십자가와 부활 사건​

   특징 : 이 시대는 예수님의 탄생부터 부활과 승천까지의 기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기적과 가르침을 통해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이 시대는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성취되는 시기이며, 인류를 위한 구원의 완성 단계로서의 시기입니다.

9. 사도 시대 (사도행전-요한계시록)
    주요 사건  -  성령 강림과 교회의 탄생 (오순절),  사도들의 선교 여행과 복음 전파,  초기 교회의 성장과 박해,  바울의 서신들,  
    요한계시록에서의 종말론적 비전​

   특징 : 이 시대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교회의 시대입니다. 
   사도들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이 시기는 교회의 탄생과 확장이 이루어진 시기이며, 초대 교회의 신앙과 실천이 형성되었습니다. 
   또한,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기록한 서신서들은 교회의 신앙과 생활을 지도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10. 종말과 새 하늘과 새 땅 (요한계시록) 
      주요 사건 -  마지막 심판과 새 예루살렘,  사탄의 최후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특징 : 이 시대는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마지막 때의 사건들을 다룹니다. 
종말의 사건들과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완성되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모든 악이 심판받고,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셔서 영원한 나라를 세우는 최종 구원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성경의 시대 구분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향해 펼치신 구원의 역사와 계획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각 시대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구속의 과정을 반영하며, 그 시대 속에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구분은 성경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이해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역사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1. 창조 시대 (창세기 1-11장) 
    주요 사건  - 천지 창조,  아담과 하와의 창조와 타락,  가인과 아벨 이야기,  노아의 홍수,  바벨탑 사건 

2. 족장 시대 (창세기 12-50장) 
  
    주요 사건 - 아브라함의 부름,  이삭, 야곱, 요셉의 이야기,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

   3. 출애굽과 광야 시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주요 사건 -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시내산 언약 (십계명),  광야에서의 40년,  모세의 죽음 ​

   4. 가나안 정복과 사사 시대 (여호수아-사무엘상)
        주요 사건 -  여호수아에 의한 가나안 정복,  사사들의 통치,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타락과 회복

   5. 왕정 시대 (사무엘상-열왕기, 역대기)
    주요 사건 -  사울, 다윗, 솔로몬의 통치,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예루살렘 성전 건축,  선지자들의 활동

​   6. 포로기와 귀환 시대 (에스라-느헤미야, 에스더, 다니엘) 
   주요 사건 -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과 유다 포로, 페르시아에 의한 바벨론 정복, 고레스 칙령에 따른 귀환, 성전 재건과  
   예루살렘 성벽 재건

​   7. 중간기 (말라기 이후-신약 시대 전까지)
    주요 사건 - 페르시아, 헬레니즘, 로마 제국의 지배,  유대 종파의 형성 (바리새인, 사두개인, 에세네파 등),  구약과 신약 사이        의          약 400년의 침묵기 

8. 예수님의 사역 시대 (복음서)
    주요 사건 - 예수님의 탄생, 공생애, 십자가 죽음, 부활,  제자들의 부르심과 사역,  산상수훈, 비유, 기적,  십자가와 부활 사건​

   9. 사도 시대 (사도행전-요한계시록)
       주요 사건  -  성령 강림과 교회의 탄생 (오순절),  사도들의 선교 여행과 복음 전파,  초기 교회의 성장과 박해,  바울의 서신들,  
       요한계시록에서의 종말론적 비전​

   10. 종말과 새 하늘과 새 땅 (요한계시록) 
       주요 사건 -  마지막 심판과 새 예루살렘,  사탄의 최후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07-27-2025(주일)
암송성구 #. 61. 요한복음 8: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He who belongs to God hears what God says. The reason you do not hear is that you do not belong to God.

하나님께 속한 자는 막연한 소속이 아니라 분명한 소속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성경에서는 "그 하나님에게 속한 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막연한 소속이 아니라 어느 단체이든지 그 안에서 주체적인 역활을 감당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부패하여 하나님께 속하지 못하고 타락한 삶을 즐기고 있다고 조롱하여 심지어 귀신이 들렸다고도 합니다.

권력의 귀신, 물질의 귀신, 명예의 귀신 등 온갖 귀신에게 사로잡힌 수 많은 군중들 가운데서 정신을 차리고 온전히 하나님에게 소속된 믿음의 사람으로 굳게 무장해야 하겠습니다. 

08-03-2025(주일)
암송성구 #. 62.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And without faith it is impossible to please God, because anyone who comes to him must believe that he exists and that he rewards those who earnestly seek him.

성경적 믿음(pistis)이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한자의 믿을 신(信)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信)자를 파자(破字)하면 '사람 인(人)'과 '말씀 언(言)'이 결합되어 하나의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헬라어에서는 "피스티스(πίστις)"라고 하며 그 의미는 "믿음, 신실성, 엄숙한 약속"이라고 합니다.
한글성경에서는 '피스티스'라는 단어를 "믿음(마 8:10, 롬 1:8, 히 10:22), 도(행 6:7), 충성(갈 5:22), 신앙(빌 1:27, 히 6:1)"으로 번역합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에무나(אֱמוּנָה)"라고 하며 그 의미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에무나의 어원은 아람어 "아만(אֲמַן)"입니다.
'아만'이란 "믿다, 신뢰하다, 확신하다"는 뜻으로 한글성경에서는 "의뢰하다(단 6:23), 확실하다(단 2:45), 충성되다(단 6:4)"라고 번역합니다.
파트리스교회 교우들이여,
어지럽고 거스리는 풍랑이 격동하는 시대에 진리의 말씀에 사로잡혀 거친 풍파를 진리의 말씀으로 극복하는 은혜를 함께 누려봅시다. 

󰃨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하나님께서 저를 옮기우셨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믿음과 필연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자는 그 '믿음'에 대해서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 (1)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 '그가 계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은 사단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약 2:19). 그것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지고 마지막 때에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1:1, 2) 하나님의 실존적(實存的) 존재를 뜻한다(Bruce).

󰃨 (2)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상 주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스다포도테스'(*)는 '보상하다'라는 의미로 '상'은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을 가리킨다(Bruce).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상의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시 43:4).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보답하시는 공의로우신 속성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08-10-2025(주일)

암송성구 #. 63.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He who does what is sinful is of the devil, because the devil has been sinning from the beginning. The reason the Son of God appeared was to destroy the devil's work.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 본문은 7절 하반절과 정반대되는 내용으로서 대조를 이룬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한다. 
반면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한다. 
요한은 이러한 대조법을 사용하여서 수신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누구에게 속하느냐'란 질문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며 동시에 영지주의자들이 방종을 통해 범죄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누구에게 속하였는가를 분별할 수 있도록 한다. 
한편 요한은 본문에서 마귀의 기원에 대해서는 어떠한 암시도 주지 않으며, 단지 죄의 기원이 마귀에게 있다는 사실만을 말한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을 암시하는 듯하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하는 자로서 진리가 그 안에 전혀 없기에(요 8:44) 속이는 자이며 사람들로 범죄하게 한다. 
이러한 죄의 기원에 대해 바울이 아담에게까지 소급시킨 것과 달리(롬 5:12-19), 요한은 그보다 더욱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Westcott).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 '마귀의 일'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람들을 미혹시켜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다(창 3:1-6). 
이러한 마귀의 일을 파괴하고 사람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죄인을 어둠에서 구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오셨다(5절; 히 9:28; 벧전 2:24). 
요컨대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죄를 없애고 동시에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함인 것이다(Plummer).


08-17-2025(주일)

암송성구 #. 64. 예레미야 17:14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Heal me, O LORD, and I will be healed; save me and I will be saved, for you are the one I praise.

08-24-2025(주일)

암송성구 #. 65.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Call to me and I will answer you and tell you great and unsearchable things you do not know.'


* 부르짖으라(카라. qârâ)  קָרָא
* 응답하리라(아나. ʽânâh) עָנָה    

* 보이리라(나가드. nâgad) נָגַד


08-31-2025(주일)

암송성구 #. 66. 예레미야애가 3: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Because of the LORD's great love we are not consumed, for his compassions never fail


첫째, 자비(慈悲) - 헤세드

자비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 자에게 벌을 면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헤세드’ 입니다. 

둘째, 긍휼(矜恤) - 라함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죄인들이 심판을 받아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에스겔서 18장 23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겔 18:23) 
히브리어로 ‘긍휼’이란 단어는 ‘레헴’ 입니다. 
이 단어는 여성의 ‘자궁’을 뜻합니다. 
히브리어로 ‘긍휼’이란 단어는 마치 어머니가 그 품 안에 몸 안에 있는 아기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 아기가 누군가에게는 단지 수십 억 명 중에 한 사람 정도 밖에 안되는 평범한 존재일지 모르지만, 엄마에게 만큼은 자신의 목숨을 다 주고서라도 지켜주고 싶은 사랑스런 존재 입니다. 
그것이 바로 레켐, 긍휼 입니다. 
하나님의 바로 이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로 인해 죽는 것을 그대로만 바라보고 계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 자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즉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놓듯이,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려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불쌍히 여기심, 죄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레켐의 사랑…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9월 7일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For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and acknowledgment of God rather than burnt offerings.

9월 14일

에스겔 36:26-27

  • 또 새 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 I will give you a new heart and put a new spirit in you; I will remove from you your heart of stone and give you a heart of flesh.
  • And I will put my Spirit in you and move you to follow my decrees and be careful to keep my laws.

  • 9월  21일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 Cast all your anxiety on him because he cares for you.

  • 9월 28일
  •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Therefore I tell you that no one who is speaking by the Spirit of God says, "Jesus be cursed," and no one can say, "Jesus is Lord," except by the Holy Spirit.

  • 10월 5일
    빌립보서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But our citizenship is in heaven. And we eagerly await a Savior from there, the Lord Jesus Christ.


    10월 12일
    이사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but those who hope in the LORD will renew their strength. They will soar on wings like eagles; they will run and not grow weary, they will walk and not be faint.


    10월 19일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역사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안에서 기업이되었으니.
    In him we were also chosen, having been predestined according to the plan of him who works out everything in conformity with the purpose of his will.

    10월 26일
    고린도전서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If anyone does not love the Lord--a curse be on him. Come, O Lord!

    11월 2일 

  •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He who testifies to these things says, "Yes, I am coming soon." Amen. Come, Lord Jesus. 

  • 11월 9일 

  • 이사야 46:9-10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이가 없느니라.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것이니 내가 모든 나의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 11월 16일 
  • 시편 6: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No one remembers you when he is dead. Who praises you from the grave?

    11월 23일 주일은 교회력으로는 2025년 마지막 주일이며 또한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며 한글개역성경에서 감사라는 단어가 사용된 말씀을 살펴보니 176구절이었습니다.
    구약에서 121구절 신약에서 55구절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영어로 Thanksgiving Sunday라고 합니다.
    감사는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2025년 감사주일 헌금은 강원도 문막에 건립된 은퇴 후 기거할 곳이 없는 여선교사들을 위한 안식관의 건축헌금으로 봉헌하려고 합니다.
    건물을 완공하였으나 아직 건축비를 정산하지 못한 안타까운 소식을 들으며 정성을 모아 속히 건축비를 해결하는 일에 동참하려고 합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마치 음부의 골짜기에 떨어진 인생이라고 시편 기자는 외칩니다.


  • 천국과 지옥의 차이

    어릴때 부처님을 열심히 신봉할 때 내가 읽었던 불교의 가르침 중 아직도 기억나는 스토리가 있다. 
    천국에서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아가고 지옥에서는 온갖 형벌을 다 받지만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바로 단체로 식사하는 시간이다. 

    일단 천국이든 지옥이든 식사할 때가 되면 하늘에서 맛있는 음식이 담긴 거대한 국그릇이 내려온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천국이든 지옥이든 젓가락과 숟가락이 매우 길다고 한다. 
    즉, 젓가락과 숟가락이 너무 길기 때문에 절대 자신의 입에 음식을 넣을 수가 없고 남을 떠먹여주거나 나도 남이 떠먹여줘야만 식사를 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천국과 지옥의 모습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천국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평화롭게 식사를 하는데 식사시간에 서로 정답게 떠먹여주면서 정답게 식사를 한다고 한다. 
    지옥은 반대로 남에게  떠 먹여주지 않고 자기 자신이 직접 길다란 젓가락과 숟가락을 어떻게든 입에 갖다대서 혼자 식사를 독차지하려고 하다 보니 서로 붙잡고 밀치고 싸운다고 한다. 
    그래서 지옥에서의 식사시간은 난장판이 되는 것은 기본이고 그 누구도 배부르게 식사를 하지 못해 모든 사람이 늘 불만에 차있고 굶주려 있다고 한다. 

    실제로 천국과 지옥이 그런 모습일지는 모르겠으나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지구의 자원은 한정적이므로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려면 한정된 자원을 서로 잘 나눠가져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힘센 나라들이 지구상의 대부분의 자원을 독식하는 구조로 되어 있어 자원의 배분이 균형있게 이뤄지지 않고 있고 그래서 지구 반대편에는 지금도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같은 국가 내에서도 빈부의 격차가 극심한 편이다. 
    (지구상의 상위 1%부자들이 나머지 인구 99%의 부를 독식하고 있다는 얘기는 이미 잘 알려진 얘기다. 
    더 슬픈 것은 그 비율이 점점 더 극단치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지구상의 상위 0.1% 부자들이 나머지 99.9% 인구가 가진 부를 다 차지하게 될 것이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주어지는 자원(식사량)은 동일하다고 한다. 
    단지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 개개인의 됨됨이가 다르기에 나타나는 결과 또한 극명하게 엇갈릴 뿐이다. 

    지옥과 천국의 식사시간 

    한 평범한 남자가 죽었다. 
    그는 생전에 착한 일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악한 일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심판을 받고 즉시 지옥으로 보내졌다.
    지옥에서는 악귀가 기다리고 있다가 그의 팔에 부목을 대었다. 
    그는 부목 때문에 팔을 구부릴 수 없었다. 
    지옥에서는 항상 팔을 편 채로 생활해야 한다고 했다. 
    이윽고 식사시간이 되어 남자는 식당으로 끌려갔다. 
    물론 팔에는 여전히 부목이 대어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나팔이 울리자, 지옥에 사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도 모두 팔에 부목을 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영양실조에 걸린 듯 눈이 움푹 패어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렇게 음식이 많은데, 어째서? 
    재차 나팔이 울렸다. 
    사람들은 모두 얼굴을 음식에 들이 대고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굴을 들이대고 하는 식사로는 좀처럼 음식을 입안으로 집어넣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세 번째의 나팔이 울렸다. 
    그러자, 아직 변변히 먹지도 않았는데 모두 밖으로 쫓겨났다.  
    이것을 본 남자는 이런 곳에 있게 되면 큰일이다 싶어 악귀에게 애원했다.
    ˝저는 지옥으로 보내질 만큼 나쁜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착오가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부탁합니다. 다시 한 번 심판해 주십시오.˝
    남자가 너무도 간절히 애원하므로 악귀는 어쩔 수 없이 재심을 청구해 주었고, 남자는 무죄가 되어 천국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천국에서는 성 베드로가 남자를 맞아 주었다.

    베드로가 말했다. 
    ˝그 부목은 여기에서도 사용합니다. 그대로 대고 계십시오.˝ 
    이윽고 식사시간이 되어 남자는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테이블 위에는 역시 마찬가지로 많은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팔이 울리자 천국 사람들이 조용히 들어왔다.
    놀랍게도 그들의 팔에도 역시 부목이 대어져 있었다. 
    하지만 모두 혈색이 좋고 행복해 보였다. 
    이유는 곧 밝혀졌다. 
    그들은 부목이 대어진 손으로 음식을 잡고는 서로 먹여 주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지옥 사람들과 달리 맛있는 음식을 항상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 11월 23일 
  • 시편 9: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I will praise you, O LORD, with all my heart; I will tell of all your wonders.


  • 11월 30일 

  •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Who will have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unto the knowledge of the truth.
    Who desire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the knowledge of the truth.




  •  







  • 감사(야다. yâdâh)     יָדָה Storng number3034

    1.  던지다.  2. 피엘형: 미완료형 וַיַדּוּ   3. 히필형 미완료형 יְהוֹדֶה  
    Pronunciation [ yâdâh ]  
    Old Testament  /  117회 사용
    • 1.원형 던지다, 내던지다.
      • a.원형 피엘형: 미완료형 וַיַדּוּ, 애3:53, 부정사 יַדּוֹת, 슥2:4(1:21): 던지다, 내던지다[돌을].
      • b. 원형 히필형 미완료형 יְהוֹדֶה ,יוֹדֶה: 시28:7,45:18(17), 느11:17
      • c.원형 주장하다, 신앙하다, 고백하다, 보여주다, 지적하다, 시32:5, 잠28:13
      • d.원형 감사하다, 경축하다, 찬양하다, 창29:35, 49:8, 대상29:13, 왕상8:33, 스3:11, 시7:18(17), 30:13(12), 54:8(6),75:2(1), 106: 47, 122:4.
      • e. 원형 힛파엘형 הִתְוַדָּה
      • f.원형 고백하다[자신에 관하여, 죄], 단9:4, 느1:6, 9:2, 레5:5, 16:21, 26:40
      • g. 원형 경축하다, 찬양하다, 감사하다, 대하30:2.
    • 문법설명  /  명령형 יַדּוֹת, 렘50:14

    • 관련 성경 / 쏘다(렘50:14), 떨어지다(슥1:21), 던지다(애3:53), 인정하다(왕상8:33, 대하6:24), 감사하다(시75:1, 대상16:4, 23:30, 느12:24), 찬송하다(창 29:35, 대하 7:6, 시 45:17), 자복하다(민5:7, 시32:5, 단9:4), 찬양하다(시43:4,71:22, 사38:18), 칭찬을 받다(시49:18), 아뢰다(레16:21).





    사망(마베트. mâveth)   מוֹת
    4194

    1. 죽음.  2. 시 7:14.  3. 깊은 잠에 대해 사용] 삼상20:31
    Pronunciation [ mâveth ]
    Etymology
    4191에서 유래
    Old Testament
    161회 사용
    • 1.
      명사, 남성 죽음, 사망.
      • a.
        명사, 남성 [가공할 무기에 대해 사용] 시7:14(13).
      • b.
        명사, 남성 깊은 잠에 대해 사용] 삼상20:31,26:16, 시13:4(3).
      • c.
        명사, 남성 [무거운 죄에 대해 사용] 삼하19:29(28), 왕상2:26
    • 2.
      명사, 남성 죽은 자들이 사는 곳, 지옥, 욥28:22,시9:14(13), 잠7:27.
    • 3.
      명사, 남성 고질병, 악역, 악질, 흑사병, 전염병,욥27:15, 렘15:2, 18:21, 43:11.
    • 4.
      명사, 남성 파멸, 멸망, 소멸, 절멸, 파괴, 출10:17,잠11:19, 12:28.

    מוֹת


    • 문법설명 /  연계형 מוֹת

    • 관련 성경 / 죽음(출10:17, 민16:29, 시89:48), 주검(레11:31,32), 사망(신30:15, 삼상5:11, 시6:5), 스올(시116:3, 잠5:5), 무덤(사53:9). [동] 죽다(창21:16, 신21:22, 욘4:3), 돌아가다(창50:16), 죽이다(신19:6, 시7:13, 렘43:11).





  •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Who will have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unto the knowledge of the truth.
    Who desire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the knowledge of the truth.


  • 12월 7일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 '무엇보다도'는 어떠한 일보다 사랑을 먼저 할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열심으로'(에크테네)는 '힘껏 노력하는', '전심 전력하는'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 힘써서 할 사랑은 감정적으로 하는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을 가지고 행동을 수반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을수 있다. 즉 피차간에 있는 허물을 덮어 주고 서로를 세워주고자 하는 사랑은 죄를 가리운다(잠 10:12). '죄를 덮느니라'에 대해서 혹자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친절한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그 보상으로 자신의 잘못이 가리워질 수있다고 주장하나(Tertullian, Origen) 여기서의 사랑은 친절한 행위를 함으로 오는 반대급부를 바라는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을 하고 있는 주체자의 죄가 가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있는 객체자의 죄가 가리워짐을 의미한다.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무조건적으로 용서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 12월 14일

    마가복음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 12월 21일

  • 고린도전서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And now these three remain: faith, hope and lov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 고린도전서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But eagerly desire the greater gifts. And now I will show you the most excellent way


    12월 28일
    요한일서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Whoever does not love does not know God, because God is love. 



  •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메 아가폰'(*)에는 앞절의 '사랑하는 자마다'(*, 파스 호 아가폰)에 삽입되어 있는 '파스'가 생략되어 있다. 본절에서 '파스'가 생략된 것은 본절의 사랑이 개인적인 권면을 가리키는 앞 절과는 달리 일반적인 의미임을 암시한다(Smalley). 한편 '알지'의 헬라어 '에그노'(*)는 부정 과거로 현재 시상을 사용한 앞절의 '기노스케이'(*, '알고')와 대조를 이룬다. '기노스케이'가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을 시사하는 반면에 본절의 '에그노'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하나님을 전혀 알거나 경험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Marshall). 사랑하는 자가 모두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자는 반드시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요한은 이러한 사실을 앞절과의 대조를 통해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ο θεος αγαπη εστιν) 
    - 본문은 7절의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보다 더 발전된 표현이다. 요한은 7절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랑의 근원이심을 밝힌데 이어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심을 선언한다. 즉 이것은 사랑이 하나님의 모든 행위들 중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가 사랑임을 시사한다. 요한은 본서에서 사랑을 언급할 때 행위와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이 사실은 수신자들 사이에 존재한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인 가르침, 즉 신령한 지식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공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신령한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나 사실상 그들의 삶에서는 사랑의 행위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상 사랑이시기에 그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마라나타(Maranatha)
    아람어 מרנא תא: maranâ thâ'  또는 מרן אתא: maran 'athâ'
    그리스어 Μαραναθα, Our Lord has come,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2개의 아람어가 합쳐진 공식인데 신약성경에 두 번 나온다. 

    성경에서 "마라나타(מרנא תא, maranâ thâ))"라고 하는 용어는 고린도전서 16:22. 요한계시록 22:20에 두 번 나온다. 
    이것은 본래는 아람어로 기도문에 쓰인 것으로 헬라어로 표기한 것이다.
    이 용어는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디다케(가르침이라는 뜻)"의 예식문(10:14)에서도 발견되며,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우리 주여 오소서(Our Lord(10:14) come 혹은 Our Lord has come)"라는 의미이다.

  • “마라나타”(고전 16:22, 계 22:20)라는 표현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믿음과 기도의 외침으로, 보통 “주여, 오소서!”로 번역됩니다. 
    이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마 6:11)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 23:39)의 기도와 연결됩니다.

    이 단어는 신약의 헬라어 원문에서 발견되지만 헬라어가 아니라 아람어입니다. 
    율법과 선지서(타낰흐)는 아람어로 된 몇 부분(대부분 다니엘서)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부분이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란”이라는 단어는 주님을 의미하고, “아타”는 오다를 뜻합니다.

    선지서에는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두 가지 묘사가 있습니다. 
    하나는 스가랴 9장 9절의 “겸손한” 버전입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복음서에서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함으로써 성취된 것으로 이해됩니다(마 21:5).

    또 다른 묘사는 영광 속 메시아입니다. 
    다니엘 7:13-14 “보라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예슈아는 대제사장들 앞에서 증거하신 말씀(마 26:64)과 종말에 대한 설교(마 24:30)에서 자신을 영광을 입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인용문은 모두 다니엘 7장의 예언을 다시 언급한 것입니다.

    다니엘의 이 구절은 아람어로 되어 있으며 “오다”를 뜻하는 단어는 “아타”입니다. 
    신약에 나오는 “마라나타”의 외침도 다니엘 7장에 대한 언급입니다. 
    본질적으로 “예슈아, 당신은 주님 곧 “마란”이십니다”라는 신앙의 선포입니다. 
    우리는 다니엘 7장 13-14절에 묘사된 대로 주님께서 하늘 구름을 타고 권능과 영광으로 오실(“아타”)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 예언이 성취되기를 기도하며 주님께 다시 오시기를 간청합니다.”


  •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본문은 본장 내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세번째 확증이며(7, 12절) 동시에 그 재림의 확증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응답을 나타낸다. 본서의 마지막에 '내가 속히 오리라'는 그리스도 자신의 재림에 대한 언급은 이제까지 진술해 온 본서의 예언의 말씀을 보장함과 동시에 고난과 핍박 속에서 인내하는 구속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로를 준다. 한편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는 초대 교회의 예배 의식에서 자주 사용되던 기도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간절한 소마을 시사한다(Morris). 

    이것은 고전 16:22에 나타난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마라나 다)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이 '마라나 다'는 아람어 '마라나타'(*)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과 모든 인간사를 주관하시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고백을 나타낸다.






  •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10개 성경 구절, 해석 및 적용

    서론: 하나님의 주권은 성경 전체에 걸쳐 가장 중요한 주제로 나타나며,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그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짐을 강조한다. 로마서 11장 36절을 비롯한 다양한 성경 구절과 개혁신학자들의 해석을 통해하나님의 주권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1. 로마서 9장 15-16절: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 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리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느니라."

    * 해석: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강조하며, 그의 긍휼과 자비가 인간의 노력이나 원함에 의존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존 칼빈(John Calvin):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일의 주관자이시며, 인간의 구원도 그의 은혜와 자비에 달려있음을 역설한다.

    * 적용:우리는 결코 인간의  노력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신뢰하며 살아야한다.

    2. 골로새서 1장16-17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것 들과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안에 함께 섰느니라."

    * 해석: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자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나타낸다.

    *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주장하며, 그가 모든 것의 창조주이자 주인임을 강조한다.

    * 적용: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야한다.

    * 3. 에베소서 1장 11절: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역사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안에서 기업이되었으니."

    * 해석: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짐을 나타낸다.

    *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그의 뜻 이세상의 모든 일에  작용한다고 하였다.

    *적용: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음을 믿고, 그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야 한다.

    4. 다니엘 4장 35절: "땅의 모든 주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든지 땅의 주민에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할 자가 없고 그의 일을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없도다."

    * 해석: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것에 주권을 가지시며, 그의 뜻대로 행하심을 강조한다.

    *죤 오웬(John Owen):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그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적용: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그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5. 이사야 46장 9-10절: "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나 같은이가 없느니라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것이니 내가 모든 나의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 해석: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계획이 시초부터 종말까지 존재함을 강조한다.

    * R.C.스프로울(R.C.Sproul):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계획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 적용: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의 삶 전체를 주관하고 계심을 믿고, 그의 뜻에 따라 살아야한다.

    6. 욥기 42장 2절:  "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므로 주의 뜻을 이루지 못하실 것이 없는 줄아오니."

    * 해석: 하나님이 무소불능하시며, 그의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음을강조한다.

    * 벤자민 B.워필드(B.B. Warfield): 하나님의 전능성과 그의 주권적인 계획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주장한다.

    * 적용: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그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한다.

    7. 시편 115편 3절: "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며 그의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도다."

    * 해석: 하나님의 주권적 권세를 강조하며,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행하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세와 그의 절대적인 능력을 강조한다.

    * 적용: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8. 사도행전 17장 24-26절: "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신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슨 피조물의 경배를 받으시는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 해석: 하나님이 우주의 주인이시며, 모든 만물과 인류의 주권을 가지심을 강조한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그의 창조적 능력을 강조한다.

    * 적용: 하나님의 창조 주이시며 주권자이심을 인정하고, 그의 뜻에 따라 살아야한다.

    9. 로마서11 장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 해석: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와 그의 영광을 위해 존재함을 강조한다.

    *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영광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 역설하였다.

    * 적용: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함을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10. 에베소서 1장 21절: " 모든 통치자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하시고."

    * 해석: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그의 통치가 모든 것 위에 있음을 강조한다.

    * 존오웬(John Owen):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그의 통치가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 적용: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통치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결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우리의 삶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모든 계획과 행동이 하나님께서계획하신대로 이루어짐을 믿고, 그분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주님의 주권을 매일의 삶에서 체험하고감사하는 마음과 순종하는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











    [필수 암송구절] 복음 성구 100 구절


    1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3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4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5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6 창세기  3:5~6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골로새서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8 이사야 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9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10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11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할 것이니라 하시고

    12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3 마태복음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아들이시니이다

    14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나음을 받았도다

    15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6 고린도전서 15:3~4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17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18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9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0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1 베드로전서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22 빌립보서 2:9~11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23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주셨으니



    24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5 로마서 10:9~10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26 고린도전서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27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28 요한복음 14:16~17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29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이사야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31 누가복음 10: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32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33 히브리서 1: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34 빌립보서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35 마태복음 28:18~20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36 요한일서 5:11~13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37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38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39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40 잠언 3:5~6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41 요한복음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42 고린도후서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43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44 에베소서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45 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46 요한계시록 12: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47 사도행전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48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49 로마서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50 로마서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51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52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53 딤모데후서 3:16~17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54 마태복음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55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56 이사야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57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58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59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60 로마서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61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62 요한복음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63 요한복음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64 요한복음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65 요한일서 5: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66 마가복음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67 예레미야 33:2~3 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68 마태복음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9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70 빌립보서 4:6~7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71 로마서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72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원하시느니라

    73 마가복음 16:16~17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74 마가복음 3:13~15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마태복음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76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77 사도행전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78 이사야 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79 마태복음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80 사도행전 5: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81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82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83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84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85 요한일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86 로마서 8:1~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7 고린도전서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88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89 에베소서 2:8~9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90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91 고린도전서 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92 야고보서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93 벧전 5:7~8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4. 이사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but those who hope in the LORD will renew their strength. They will soar on wings like eagles; they will run and not grow weary, they will walk and not be faint.


    95 전도서 12: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96 빌립보서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97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98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99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00 디모데후서 2:1~2 

    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강하고
    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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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성경은 총 몇 권 몇장 몇절로 구성되었나?

    성경의 정확한 장, 절, 단어 수는 어떻게 되나요?

    답변 /  권수 66권 (구약 39권. 신약 27권)

              장수  1,189장(구약 929장. 신약 260장)

              절수 31,102절(구약 23,145절.  신약 7,957절)

    영어 킹제임스성경의 단어 수

             788,258단어(구약 609,247 단어.   신약 179,011 단어)

    *우리말의 경우에는 조사도 한 단어로 취급하기 때문에 영어와 같이 단어 수를 세는 것이 용이하지 않으며 아직 통계가 없습니다.
    다음의 표에 제시된 성경의 장, 절, 단어는 영어 <킹제임스성경>을 기준으로 한 것이며 <한글킹제임스성경> 역시 장, 절이 동일합니다.

    <구약>

    성경이름/장-절-단어

    창세기/50-1,533-38,262

    출애굽기/40-1,213-32,685

    레위기/27-859-24,541

    민수기/36-1,288-32,896

    신명기/34-959-28,352

    여호수아/24-658-18,854

    재판관기/21-618-18,966

    룻기/4-85-2,574

    사무엘상/31-810-25,048

    사무엘하/24-695-20,600

    열왕기상/22-816-24,513

    열왕기하/25-719-23,517

    역대기상/29-942-20,365

    역대기하/36-822-26,069

    에스라/10-280-7,440

    느헤미야/13-406-10,480

    에스더/10-167-5,633

    욥기/42-1,070-18,098

    시편/150-2,461-42,682

    잠언/31-915-15,038

    전도서/12-222-5,579

    솔로몬의노래/8-117-2,658

    이사야/66-1,292-37,036

    예레미야/52-1,364-42,654

    예레미야애가/5-154-3,411

    에스겔/48-1,273-39,401

    다니엘/12-357-11,602

    호세아/14-197-5,174

    요엘/3-73-2.033

    아모스/9 146-4,216

    오바댜/1-21-669

    요나/4-48-1,320

    미카/7-105-3,152

    나훔/3-47-1,284

    하박국/3-56-1,475

    스파냐/3-53-1,616

    학개/2-38-1,130

    스카랴/14-211-6,443

    말라키/4-55-1,781

    구약 합계/929장-23,145절-609,247단어

    <신약>

    성경이름/장-절-단어

    마태복음/28-1,071-23,343

    마가복음/16-678-- 14,949

    누가복음/24-1,151-25,640

    요한복음/21-879-18,658

    사도행전/28-1,007 24,229

    로마서/16-433-9,422

    고린도전서/16-437-9,462

    고린도후서/13-257-6,046

    갈라디아서/6-149-3,084

    에베소서/6-155-3,022

    빌립보서/4-104-2,183

    골로새서/4-95-1,979

    데살로니가전서/5-89-1,837

    데살로니가후서/3-47-1,022

    디모데전서/6-113-2,244

    디모데후서/4-83-1,666

    디도서/3-46-896

    빌레몬서/1-25- 430

    히브리서/13-303- 6,897

    야고보서/5-108- 2,304

    베드로전서/5-105- 2,476

    베드로후서/3-61 1,553

    요한일서/5-105- 2,517

    요한이서/1-13-298

    요한삼서/1-14-294

    유다서/1-25-608

    요한계시록/22-404-11,952

    신약 합계/260장-7,957절-179,011단어

    신구약 총계/1,189장-31,102절-788,258단어








    유대교 성경이나 기독교 성경의 원본에는 장과 구분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구분은 성경 의 단락 본문의 일부를 구성한다.
    13세기 초 이래로 대부분의 성경 사본과 판에는 가장 짧은 경전 을 제외한 모든 이 일반적으로 한 페이지 정도의 장 (책) 으로 구분되어 나와 있다.
    16세기 중반부터 편집자들은 장을 구절로 세분화했다.
    구절은 몇 줄의 짧은 줄이나 하나 이상의 문장으로 구성되었다.
    킹 제임스 성경 (KJV)에서는 에스더 8장 9 이 가장 길고 요한복음 11장 35절 이 가장 짧다.
    때로는 에베소서 2장 8-9절의 경우처럼 한 문장이 한 절 이상에 걸쳐 있을 때도 있고, 창세기 1장 2절의 경우처럼 한 절에 두 문장 이상이 있는 경우도 있다.

    히브리어 본문의 유대인 구분은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구분과 여러 점에서 다르다. 예를 들어, 유대인 전통은 많은 시편의 귀속을 독립된 절이나 후속 절의 일부로 간주하는 반면, 확립된 기독교 관행은 각 시편의 귀속을 독립적이고 번호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여 기독교 본문보다 유대인 역본에 116개 더 많은 구절이 있다. 일부 장 구분은 다른 장소에서도 발생한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역대상 5장 27~41절이 있고, 기독교 번역에는 역대상 6장 1~15절이 있다.



    성경의 장과 절

    구약의 장, 절 구분

    1. 열린 문단, 닫힌 문단

    구약 히브리어 본문의 장과 절 구분이 있기 전부터
    일찍이 쿰란에서 발견된 사본에도 문단 구분이 나타납니다.
    마소라 본문 사본을 보면, 시편을 제외한 구약 전체가 문단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두 종류의 문단 구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열린 문단(프툭하 open paragraph)이고 다른 하나는 닫힌 문단(쓰투마 closed paragraph)입니다.
    열린 문단이란 완전히 행(行)을 바꾸어서 쓴 새로운 문단을 일컫습니다. 
    현대적 의미의 새로운 문단과 같은 것입니다.
    닫힌 문단이란 같은 행 안에서 몇 자를 띄어서 새로운 문단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앞 문단과 뒤 새 문단이 행으로 구분되지 않고 몇 자를 띄운 공간으로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2. 세다림 (Sedarim)

    구약 본문에는 452개의 세다림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쎄데르는 순서(order), 혹은 차례(sequence)를 일컫는 말입니다.
    문단보다는 더 큰 단위로서 단원(section)에 해당합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토라를 삼 년에 다 읽도록 매주 읽을 분량을 쎄다림으로 구분하였습니다.

    바빌로니아에서는 토라를 일 년에 독파(讀破)하도록 단원을 구분하였는데
    이것을 파라쇼트(Parashoth)라고 합니다. 
    토라는 모두 54 (혹은 53) 파라쇼트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절 구분은 이미 탈무드 시대부터 알려져 있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전통과 팔레스타인 전통이 약간 다릅니다.
    장 구분이 숫자로 표기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경입니다.
    장 구분의 체계는 일찍이 스티븐 랭톤(Stephen Lengton 1150-1228)에서 시작되었고, 
    이것을 14세기에 라틴어역 불가타가 받아드림으로써 정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약의 장, 절 구분

    파리의 유명한 인쇄업자 스테파누스(1503-1559)의 '그리스어 신약'에서 처음 장절 구분이 보입니다.
    1551년에 제네바에서 나온 스테파누스의 '그리스어 신약' 제 4판은 숫자로 절 구분이 되어 있는
    최초의 그리스어 신약으로 유명합니다.

    '제네바성서'(1557/1560)는 영어 성서로서는 처음으로 절 구분이 되어 나온 성서입니다.
    로버트 에스티엔 (Robert Estienne)이 그의 '그리스어 신약전서'에 적용했던 절 구분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개신교 쪽에서는 1535년에 올리베땅(Olivetan)으로 알려진 삐에르 로버트(Pierre Robert)가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몇 차례 개정을 거듭하였고, 1546년판을 낼 때에는 칼빈이 서문을 썼습니다.
    1553년에 인쇄업자 스테파누스 (Robert Stephanus 일명 Robert Estienne)가 이 번역을
    제네바에서 출판할 때 원문에 장과 절을 구분하여 출판하였습니다.

    '제네바성서'의 신약은 1557년에 나옵니다.
    신.구약전서가 다 번역되어 나온 것은 1560년입니다. 
    이것이 로마자로 인쇄되고 절 구분이 된 최초의 영어 성경전서인 '제네바성서' 초판입니다.

    장절 구분의 차이의 예

    공동번역 성서를 보시면, 출 7:26-8장 끝까지의 장절 구분에 이중의 표기가 있는 것을
    확인하실 수있습니다. 
    이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장절 표기 방식을 함께 나타내준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과 라틴어 성경의 장절 구분이 다른 것입니다.

    절 수의 차이의 예

    시편의 경우에는 소제목 부분을 1절로 표시하는 경우와(독일어 루터 성경 참조),
    소제목으로 보고 절로 구분하지 않는 경우에(성경전서개역한글판 참조) 따라서 절 수가 달라집니다.

    성경 본문이 처음 기록될 당시에는 문장을 구분하는 아무런 체계가 없었습니다.
    장을 구분한 최초의 성경은 신약의 경우,
    제4세기의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 :B)의 가장 자리에 표시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마태복음이 170구분, 마가복음이 62구분, 누가복음이 152구분, 요한복음이 50구분으로 되어있습니다. 

    또 다른 구분체계는 제5세기의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andinus :A)에서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마태복음 68, 마가복음 48, 누가복음 83, 요한복음 18구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어떤 경우에도 첫장이 책 서두에 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아마 서기관들이 책의 시작부분을 머리말로 생각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사도행전도 사본에 따라 36, 69, 40, 83 등 여러 장으로 구분되고,
    서신들도 여러 부분으로 구분되며, 계시록은 24장로를 따라 24강화로 나누고,
    다시 그 각각을 인간의 세 요소를 반영하여 72장으로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구약의 경우는 라틴어역 Valgata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은 1204-5에 캔터베리대 주교인 스테판 랑톤(Stephan Langton) 이 시도했으며,
    그 후 1330년에 나온 솔로몬 벤 이스마엘(Solomon Ben Ishmael)의
    히브리어 성경의 일부 필사본(筆寫本)이에 랑톤의 장 표시를 난외(欄外)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쇄본으로 장 표시를 했던 최초의 히브리어 성경은 1517년 7월 10일에 나온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 70인역 등의 대역 성경인 Complutension Polyglot 입니다.
    그러나 장 표시는 본문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난외에 표기되었습니다.

    그 후로 1569-1572년에 베니토 아리아스 몬타노(Benito Arias Montano)가 편집한
    Polyglot 에는 인쇄판 성경으로서는 처음으로 본문에 장 구분이 표시되었고,
    또한 구약의 장 구분에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절에 대한 구분

    구약 성경의 경우 절 구분은 장 구분보다 앞서서 시행되었습니다.
    절 구분의 시직은 히브리어 본문을 회중들 앞에서 낭독하고
    그것을 아람어로 통역하던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낭독자는 일정량의 히브리어 본문을 끊어서 낭독했고,
    통역관은 그것을 듣고서 아람어로 통역하는 방법이 계속되어 오다가
    어느 단계에서 부터 절구분이 확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낭독과 통역의 분위기를 느 8:1-8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일상생활에서는 아람어를 썼으나,
    율법은 히브리어로 쓰여 있었기 때문에 통역관들이 통역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매 절 끝에 그침표(:)를 붙인 것은 주후 500년경 부터라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절구분이 MT에 확립된 것은
    10세기에 아론 벤 모세 벤 아세르(Aron Ben Moshe Ben Asher)가 편집한 역본부터라고 하며,
    총 절수는 5,845절로 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절 구분은 1551년
    프랑스의 인쇄업자 로버트 스테파누스(Robert Stephanus)에 의해 표기 되기 시작했으며
    현재 까지도 통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말 개역성경의 장 절 구분은 MT나 LXX이 아닌 Latin Vulgata를 많이 따르고 있습니다.
    (월간 원어성서 9호 .pp165-166)

    참고 - MT ; 맛소라 학파(유대인 학자들)에 의한 히브리어 구약성경 
    LXX ; 70인경, 구약의 헬라어 역본 
    Vulgata ; 신구약 성경의 라틴어 역본. 

    성경의 장절(章節 : chapters and verses of Bible)은 처음부터 구분되어 있던 것은 아니다.
    현재의 모습으로 장 구분을 한 이는 대체로
    영국교회의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랭튼(Stephen Langton)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한편 스테파누스(Stephanus Robertus)는 신약성경을 절로 구분하여 1551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출판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스테파누스는 파리에서 리용으로 가는 마상(馬上)에서 절을 나누었다고 한다. 
    신,구약성경 모두에 장절이 붙여져 처음 출판된 해는 1555년인데,
    스테파누스의 라틴역 불가타(Vulgata) 성경이다. 

    오늘날의 성경은 1560년판 제네바 성경의 장절 구분을 받아들이고 있다. 
    랭튼 (Langton, Stephanus 1150년경-1228. 7. 9 영국신학자, 역사가, 시인.) 
    오랫동안 파리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또한 성경주석을 집필했다.
    불가타역 구약을 장(章)으로 나누었다.
    1207년 켄터베리 대주교가 되고,
    영국 존왕(John, Lackland ; 1199-1216 재위)의 반대자로 '대헌장'(大憲章 : Magna Carta)의 성립에 관여했다. 
    스테파누스 (Stephanus Robertus [프] Etienne Robert 1503-1559 프랑스의 궁정 인쇄 기술자.) 
    그의 집안은 아버지 앙리 이래 16∼17세기, 파리 및 제네바에서 인쇄업에 종사했다.
    특히 성서의 인쇄로 유명했는데,
    1539년 프랑소와 1세의 인쇄사가 되어 1546년에는
    그리스어 학자인 아들 앙리(Henri ; 1528/31)의 협력을 얻어 그리스어 신약성경 소책자 2부를 간행했다.
    본문(本文)은 주로 에라스무스판 신약본문 제5판(1535)에 의거하고,
    콤플루툼판(Gomplutum : 1514)을 참조했다.
    1550년에는 인쇄본문사상 큰 역할을 한 대형 호화판(궁정판)으로도 불리는 제3판을 냈다.
    이것은 이문자료(異文資料)를 첨부한 최초의 판으로 영국에 있어서
    '공인본문'(公認本文 : Textus Receptus)의 근거가 되었다.
    그의 성경주해가 소르본느에서 비난을 받게되어 제네바에 도피, 칼빈파로 개종했다.
    그해 다시 소책 2부의 본문을 간행했는데, 이것은 장절을 나누어 쓴 최초의 판이다.
    그는 이 절분류를 파리에서 리용으로 기마여행(마차여행?)을 하는 가운데 시행했다고 전한다. 

    이상을 정리하면

    1. 히브리어 성경은 절 구분이 먼저 되었다. 10세기에 아론 벤 아쉐르 때부터 확립되었다.
    2. 히브리어 성경 장 구분은 13세기 초에 랭튼이 했다.
    3. 헬라어 성경 장 구분은 13세기 초에 랭튼이 했다.
    4. 헬라어 성경 절 구분은 16세기에 스테파누스가 말 위에서 했다.
    5. 신,구약 성경 모두에 장절이 붙여져 처음 출판된 해는 1555년인데,
    스테파누스의 라틴역 불가타(Vulgata) 성경이다. 
    6. 오늘날의 성경은 1560년판 제네바 성경의 장절 구분을 받아들이고 있다.


    성경 66권의 각 권별 주제 요약

    성경은 기독교의 중요한 성서로,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집니다. 각 권의 주요 주제를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구약은 39권, 신약은 27권으로 총 66권이 모여서 성경책이 됩니다. 

    구약 (Old Testament):

    1. 창세기 (Genesis) : 창조와 유래에 관한 책으로 하나님의 창조, 아담과 이브,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의 이야기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 출애굽기 (Exodus) :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과 모세를 통한 출애굽, 십계명, 회막과 예배에 관한 이야기가 주요 주제입니다.

    3. 레위기 (Leviticus) : 여호와와 백성과의 관계, 제사와 의식들, 신성한 생활의 지침 등이 담겨져 있습니다.

    4. 민수기 (Numbers) : 여러 유대인 지파들의 인구 조사와 여정, 그리고 모세의 지시와 여러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5. 신명기 (Deuteronomy) : 모세의 마지막 연설과 율법 갱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교훈과 지시사항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6. 여호수아 (Joshua): 모세의 사후, 여호수아가 이끌어 가며 공약 땅을 점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가 주요 주제입니다.

    7. 사사기 (Judges): 이스라엘의 사사들이 이끄는 시기의 역사, 백성들의 순종과 패역, 그리고 여호와의 벌과 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8. 룻기 (Ruth): 무민족 룻과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의 이야기로 인류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됩니다.

    9. 사무엘상 (1 Samuel): 사무엘이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의 기사와 다윗 왕의 성장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0. 사무엘하 (2 Samuel): 다윗 왕의 통치와 실수,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집니다.

    11. 열왕기상 (1 Kings): 솔로몬 왕과 다른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와 역사, 이스라엘과 유다 나라의 분열과 여러 선지자들의 역사가 담겨져 있습니다.

    12. 열왕기하 (2 Kings): 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과 사로잡힘,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 등이 주요 주제입니다.

    13. 역대상 (1 Chronicles): 아담에서 다윗까지의 기록과 역사가 가족과 함께 담겨져 있습니다.

    14. 역대하 (2 Chronicles): 다윗 왕에서 바벨론 사로잡혀 갈 때까지의 유다 왕들의 통치와 그들의 행실이 담겨져 있습니다.

    15. 에스라 (Ezra): 바벨론에서 유다로 돌아온 백성들의 이야기와 성전의 건축과 관련된 기록이 주요 내용입니다.

    16. 느헤미야 (Nehemiah): 예루살렘 성벽의 수축과 유대인들의 회개와 회개의식 등이 다루어집니다.

    17. 에스더 (Esther): 바사 왕국의 왕비 에스더가 유대인들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주요 주제입니다.

    18. 욥기 (Job): 욥의 시험과 고통, 신의 뜻과 의의 문제에 관한 시문적인 책입니다.

    19. 시편 (Psalms): 다양한 시인들에 의해 쓰여진 시들로, 기도, 찬양, 감사, 슬픔 등 다양한 감정과 경험이 담겨져 있습니다.

    20. 잠언 (Proverbs): 솔로몬 왕을 비롯하여 여러 지혜적인 사람들의 격언과 교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1. 전도서 (Ecclesiastes): 선지자의 눈을 통해 세상의 헛된 것들과 진리를 탐구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22. 아가 (Song of Solomon): 신부와 신랑 사이의 사랑과 애정을 시적으로 표현한 노래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3. 이사야 (Isaiah): 이스라엘의 미래와 메시아의 오심에 관한 예언과 트라우마적인 경험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4. 예레미야 (Jeremiah): 선지자 예레미야의 사명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과 허무함을 다루는 책입니다.

    25. 예레미야애가 (Lamentations): 예루살렘의 파괴와 애도에 관한 시인적인 글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26. 에스겔 (Ezekiel): 이스라엘의 죄와 멸망,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재건에 관한 예언과 비전입니다

    27. 다니엘 (Daniel): 다니엘의 소년 시절부터 바벨론 왕국에서 섬기는 동안의 이야기와 예언적인 꿈들이 주요 내용입니다.

    28. 호세아 (Hosea): 선지자 호세아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설명하는 책입니다.

    29. 요엘 (Joel): 재앙과 회개에 관한 선지자 요엘의 메시지가 주요 내용으로 다루어집니다.

    30. 아모스 (Amos): 빈민족 출신의 목자 아모스가 사회적 불의와 유대국의 죄에 대해 비판하는 책입니다.

    31. 오바댜 (Obadiah): 에돔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에 관한 짧은 선지자의 글입니다.

    32. 요나 (Jonah): 요나가 니느웨로 보내지만 도망가는 이야기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회개하는 민족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33. 미가 (Micah): 미가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 선언하는 예언과 교훈이 담겨져 있습니다.

    34. 나훔 (Nahum): 니느웨의 멸망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짧은 선지자의 글입니다.

    35. 하박국 (Habakkuk): 선지자 하박국이 유다의 패역과 하나님의 신비로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답을 받는 이야기가 주요 내용입니다.

    36. 스바냐 (Zephaniah): 스바냐가 유다와 여러 나라에 대한 심판과 회개에 관한 선언을 하는 책입니다.

    37. 학개 (Haggai):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에게 성전 건축을 독려하는 선지자 학개의 메시지가 주요 내용입니다.

    38. 스가랴 (Zechariah): 선지자 스가랴가 유다의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적인 시상을 다루는 책입니다.

    39. 말라기 (Malachi): 말라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과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제사장과 백성들에게 훈계하는 글입니다.


    이로서 구약 성경의 주요 권들과 그들의 주제를 설명해 드렸습니다. 이제 신약 성경의 권들에 대해서도 설명드리겠습니다:

    1. 마태복음 (Matthew):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 사역, 죽음, 부활에 관한 기록과 그의 가르침이 주요 내용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2. 마가복음 (Mark):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기적, 십자가 부활에 관한 짧고 간결한 기록입니다.

    3. 누가복음 (Luke):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삶과 사역, 감화의 기록과 복음에 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4. 요한복음 (John):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깊은 논의와 기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5. 사도행전 (Acts):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 사도들의 사역과 교회의 초기 역사가 담겨져 있습니다.

    6. 로마서 (Romans): 성도에게 보낸 로마서 서신으로, 구원의 길과 믿음의 의의에 관한 중요한 교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7. 고린도전서 (1 Corinthians):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으로 다양한 문제들과 교회 구성원들에게 주어지는 교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8. 고린도후서 (2 Corinthians):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번째 서신으로 사도 바울의 사역과 교회에 대한 열정적인 강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9. 갈라디아서 (Galatians):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서신으로,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는 교리가 주요 내용입니다.

    10. 에베소서 (Ephesians): 에베소 교회에 보낸 서신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관한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1. 빌립보서 (Philippians):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으로, 기쁨과 감사, 믿음과 봉사에 관한 사도 바울의 훈계가 주요 내용입니다.

    12. 골로새서 (Colossians): 골로새 교회에 보낸 서신으로, 그리스도의 지위와 교회의 단일성, 그리고 거짓 교리에 대한 경고와 진리를 향한 우리의 초점이 주요 내용입니다.

    13. 데살로니가전서 (1 Thessalonians):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첫 번째 서신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믿는 자들에 대한 희망, 성도들끼리의 사랑과 봉사가 강조됩니다.

    14. 데살로니가후서 (2 Thessalonians):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두 번째 서신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날의 사건들에 대해 강조하는 글입니다.

    15. 디모데전서 (1 Timothy):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으로, 교회의 감독들과 그들의 역할, 교리, 기도와 경건 등에 관한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6. 디모데후서 (2 Timothy):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서신으로, 사도의 사명과 복음 전파의 중요성에 대해 다루는 글입니다.

    17. 디도서 (Titus):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보낸 서신으로, 교회의 감독들의 자격과 역할에 관해 가르치는 글입니다.

    18. 빌레몬서 (Philemon): 빌레몬에게 보낸 짧은 서신으로,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를 사랑과 용서로 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통일에 관한 글입니다.

    19. 히브리서 (Hebrews):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익명의 서신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옛 언약의 신상들과 어떻게 다른지, 새 언약의 중요성, 믿음의 의의와 견고한 믿음을 지키는 중요성에 대해 강조합니다.

    20. 야고보서 (James):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 야고보가 보낸 서신으로, 실천적인 믿음과 행실, 언어의 힘과 지혜로운 삶에 관한 가르침이 주요 내용입니다.

    21. 베드로전서 (1 Peter): 사도 베드로가 전국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신으로, 고난 속에서의 삶과 희망, 그리스도의 예언과 부활에 대해 다루는 글입니다.

    22. 베드로후서 (2 Peter): 사도 베드로가 직접 보낸 두 번째 서신으로, 거짓 교리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미래의 언약에 관한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3. 요한일서 (1 John): 사도 요한이 보낸 첫 번째 서신으로, 사랑과 진리, 의로움과 미움에 관해 가르치며,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로 하고 머무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24. 요한이서 (2 John): 사도 요한이 보낸 두 번째 서신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거기에 따라 행함으로써 머물도록 권하는 글입니다.

    25. 요한삼서 (3 John): 사도 요한이 보낸 세 번째 서신으로, 성도를 환대하고 형제들에 대한 사랑과 지지에 대해 칭찬하는 글입니다.

    26. 유다서 (Jude): 유다 가문의 유다가 보낸 서신으로, 거짓 교리와 사생활,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에 관한 경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7. 요한계시록 (Revelation): 사도 요한이 보낸 계시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미래의 사건들, 마지막 심판과 새 천지에 관한 예언적인 책입니다.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

    1. 어린이는 건전하게 태어나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 속에 자라야 한다.

    2. 어린이는 고른 영양을 섭취하고,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받으며, 맑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

    3. 어린이는 좋은 교육시설에서 개인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교육을 받아야 한다.

    4. 어린이는 빛나는 우리 문화를 이어받아, 새롭게 창조하고 널리 펴나가는 힘을 길러야 한다.

    5. 어린이는 즐겁고 유익한 놀이와 오락을 위한 시설과 공간을 제공받아야 한다.

    6. 어린이는 예절과 질서를 지키며, 한겨레로서 서로 돕고 스스로를 이기며, 책임을 다하는 민주시민으로 자라야 한다.

    7. 어린이는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과학을 탐구하는 마음과 태도를 길러야 한다.

    8. 어린이는 해로운 사회환경과 위험으로부터 먼저 보호되어야 한다.

    9. 어린이는 학대를 받거나 버림을 당해서는 안 되고, 나쁜 일과 힘겨운 노동에 이용되지 말아야 한다.

    10. 몸이나 마음에 장애를 가진 어린이는 필요한 교육과 치료를 받아야 하고, 빗나간 어린이는 선도되어야 한다.

    11. 어린이는 우리의 내일이며 소망이다.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인으로 자라야 한다.



    스바냐의 주제

    스바냐는 요시야 시대에 예언한 선지자이며, 히스기야 왕의 현손으로 왕족이 선지자가 되는 경우는 특이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스바냐는 유다의 멸망 이전에 기록된 선지서입니다. 
    핵심적인 주제와 단어는 '주의 날' 또는 '여호와의 날' 입니다. 
    대게 주의 날은 여호와께서 강림하시는 날 또는 진정한 통치자로서의 위엄을 드러내는 날입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의 날을 종말론적 환상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는 축제의 날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날은 희생의 날이며, 진노의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위한 날이라 착각한 주의 날은 오히려 재앙과 심판의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지 않은 '남은 자'들은 구원의 날이며, 회복의 날이 될 것입니다.






    󰃨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 본 구절은 남은 자들이 손을 늘어뜨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구원자되신 하나님께서 그들가운데 거하며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는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 '너를 보호하시는 전사와 같은'(like warrior, to keep you safe, NEB), 혹은 '승리하시는 전사'(a warrior who givesn victory, RSV)이며 (2) '승리한 전사'(victorious warrior, JB). 혹은 '전능한 구원자'(mighty savior, NAB)이다. 결국 남은 자들과 함께 거하시는 여호와는 승리하신 구원자이시며 전능하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다.

    󰃨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 본 구절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나뉜다. KJV에서는 '그가 자신의 사랑안에서 안식하실 것이다'(he will rest in his love)라고 번역하였으며, RSV에서는 '그가 자신의 사랑 안에서 너를 새롭게 하실 것이다'(he will renew you in his love)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사본에 따라 '잠잠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하리쉬'가 다른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맛소라 본문에서는 '야하리쉬'를 그대로 사용하여 KJV처럼 '안식할 것이다'라는 의미로 보나, 다른 사본에서는 RSV가 따르는 것처럼 '하다쉬'(새롭게 하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굳이 RSV처럼 해석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맛소라 본문의 '야하리쉬'로 보아도 본 구절의 의미가 이어지기 때문이다(L.L.Walker). 하나님은 남은 자들로 인해서 즐거워 하시며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안식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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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선한 일"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으므로 나타낸 선한 열매를 가리키고, 일반 도의적 선을 말함이 아니다(3:19-21).
    여기 "선한 일을 행한"이란 말의 "행한"이란 자는 헬라 원어로 포이에-산테스(*)니, 반드시 상습적으로 완전히 행함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나 "악한 일을 행한"이란 어귀에 있어서 "행한"의 헬라어 원형은 프라쏘(*)이니, 상습적으로 행한것, 혹은 일생의 행습(行習)을 말함이다.
    악을 행하기는 이렇게 쉽고 상습적이다. 이 귀절이 말한 두 가지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될 것이다.
    이런 두 가지 부활에 대하여 성경은 종종 말하였다(행24:15; 고후5:10; 계20:12, 13; 단12:2).
    이 말씀은, 명백하게도 세계 종말에 있을 대심판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불트만(Bultmann)은, 이 부분 말씀을 본래의 원본으로 생각지 않고 후대인의 삽입구라고 한다(Johannes Evangelium, pp. 196-197).
    그러나 불트만(Bultmann)의 이같은 주장은 억측에 불과하다.
    (1) 이 귀절들에 대하여 사본상 일치하지 않는 것은 전연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사본들이 다 함께 같은 내용을 가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 내용이 저작자의 기록 그대로인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권위있는 신약 학자들은, 이 부분(5:28-29)말씀이 문맥상으로도 본래의 원본인 사실을 알려준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부분 말씀보다 앞서 벌써 27절이 미래의 심판을 말한다고 하며, 이 부분 말씀은 그것의 연속이라고 하였다.
    그 뿐 아니라, 슐라델(Schlatter)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5:19이하의 말씀은, 예수님의 살리시는 역사롸 심판하시는 일이 현세에 벌써 실행된다고 강조하는데, 그와 같은 역사(役事)의 권세는, 곧바로 28-29절에 기록된 그의 장차 행하실 심판 권세와 같은 것이라는 의미로 말하였다(Der Evangelist Johannes, p. 152).
    (2)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이 5:28-29에서 두 가지 사상의 병립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한다.
    곧, 영생(또는 심판)의 현재적 실시와 및 세상 끝날의 실시를 병립시키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병립 사상은, 특별히 요한 복음 저자의 사고 방식이다.
    6:40에도 이와 같은 취급이 나타나 있다. 거기 말하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여기 나타난 사상은, 신자들이 현세에서 벌써 영생을 소유한다는 사실과 또한 그들이 대종말에도 부활의 형태로 영생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하여 6:44, 54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이라는 말까지 사용하시면서 그의 수평선적(水平線的)인 종말관(終末觀)을 표현하셨다.
    그리고 그는, 12:48에서도 "마지막 날"이라는 말을 사용하셨다.
    거기서도 그는, 현재적 심판과 미래의 심판을 병립시켜 말씀하셨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땅 위에서 하신 말씀이 미래의 심판 권위를 가졌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그 현재에도 그 말씀이 심판과 같은 종말관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은 종말관적 성격 있는 최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의 심판 성격은 현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상 끝날에도 그러하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 즉, 12-14절에 묘사된 상황 가운데 사는 백성은 행복하다는 의미이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 여호와를 예배하고 그들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이다.
    14절에 자세히 언급된 번영과 평화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봉사의 결과로 나타난다.
    도처에 있는 평화, 질서, 풍성함, 민족의 번영을 위한 최고의 안전 장치는 하나님 예배이다.
    하나님 예배의 핵심은 단순한 제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유일하고 참된 신으로 인정하고 그의 율례를 지키는 데 있다(Barnes).











    깨어있으라(1127) 그래고레오(grēgŏreʹō) γρηγορέω 스트롱번호1127

    1. 깨어 있다.  2. 마 24:43. 3. 정신차리고 있다
    발음 [ grēgŏreʹ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γρήγορα, 1453에서 유래
    • 1. 깨어 있다, 경성하다.
      • a. [문자적으로] 마24:43, 26:38,40, 막13:34, 14:34,37, 눅12:37,39.
      • b. [상징적으로] 정신차리고 있다, 지켜보고 있다, 마24:42, 25:13, 26:41, 막13:35,37, 14:38, 행20:31, 고전16:13, 살전5:6,10, 벧전5:8, 골4:2, 계3:2,3, 16:15.
    • 관련 성경  /  깨어 있다(마 24:43, 막 13:34, 눅 12:37), 일깨다(행20:31, 계3:2,3), 깨다(살전5:6, 벧전5:8, 계16:15).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 바울은 본절에서 ‘기도’에 대해 권면한다.
    ‘힘쓰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 카르테레이테’(*)는‘끈질기게 매달리는’, ‘지속적인’을 의미한다(Persevering, JB).
    이는기도의 열심과 지속성을 시사한다(Vaughan, Lightfoot).
    본절의 ‘기도’에 사용된 ‘테 프로수케’(*)는 신구약에서 ‘탄원’(Petirion)을 의미한다(왕하 19:4 ; 기 4:1 ; 막 9:29 ; 행 10:31 ; 롬 1:10 ; 약 5:17).
    이것은 바울이 다음 절에서 골로새 교인들에게 중보 기도를 부탁하는 것과 연결된다.
    한편 ‘영적인 자각’을 의미하는 ‘깨어 있으라’의 헬라어 ‘그레고룬테스’(*)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기도와는 다른 독립적인 명령으로 간주한다(Lohse, Lohnmeyer).
    2. ‘깨어 있음’을 유지하는 방법으로서의 기도를 의미한다(Meyer, Abbott. Martin).
    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깨어 있음’이 또 다른 명령이라 할지라고 그 명령은 ‘기도’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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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26-2024(주일)
    암송 성구 #. 1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06-02-2024(주일)
    암송 성구 #. 2 사도행전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Salvation is found in no one else,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to men by which we must be saved.

    06-09-2024(주일)
    암송 성구 #. 3 에베소서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06-16-2024(주일)
    암송 성구 #. 4 고린도후서 5: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So we make it our goal to please him, whether we are at home in the body or away from it.


    06-23-2024(주일)
    암송 성구 #. 5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having a form of godliness but denying its power. Have nothing to do with them.

    06-30-2024(주일)
    암송 성구 #. 6 고린도전서 9:16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Yet when I preach the gospel, I cannot boast, for I am compelled to preach. Woe to me if I do not preach the gospel!

    07-07-2024(주일)
    암송 성구 #. 7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07-14-2024(주일)
    암송 성구 #. 8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Follow my example, 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t.


    07-21-2024(주일)
    암송 성구 #. 9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You diligently study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by them you possess eternal life. These are the Scriptures that testify about me.


    07-28-2024(주일)
    암송 성구 #. 10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08-04-2024(주일)
    암송 성구 #. 11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What good will it be for a man if he gains the whole world, yet forfeits his soul? Or what can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08-11-2024(주일)
    암송 성구 #. 12  베드로후서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Through these he has given us his very great and precious promises, so that through them you may participate in the divine nature and escape the corruption in the world caused by evil desires.

    08-18-2024(주일)
    암송 성구 #. 13  아모스 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But let justice roll on like a river, righteousness like a never-failing stream!


    08-25-2024(주일)
    암송 성구 #. 14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Therefore, my dear friends, as you have always obeyed--not only in my presence,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09-01-2024(주일)
    암송 성구 #. 15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but of righteousness,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09-08-2024(주일)
    암송 성구 #. 16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09-15-2024(주일)
    암송 성구 #. 17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Th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09-22-2024(주일)
    암송 성구 #. 18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09-29-2024(주일)
    암송 성구 #. 19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10-06-2024(주일)
    암송 성구 #. 20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10-13-2024(주일)
    암송 성구 #.21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10-20-2024(주일)
    암송 성구 #.22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10-27-2024(주일)
    암송 성구 #.23  고린도후서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For he says, "In the time of my favor I heard you, and in the day of salvation I helped you." I tell you,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11-03-2024(주일)
    암송 성구 #.24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11-10-2024(주일) 구원의 확신
    암송 성구 #.25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And this is the testimony: God has given us eternal life, and this life is in his Son.
    He who has the Son has life; he who does not have the Son of God does not have life.


    11-17-2024(주일) 기도 응답의 확신
    암송 성구 #.26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Until now you have not asked for anything in my name. Ask and you will receive, and your joy will be complete.

    11-24-2024(주일) 승리의 확신
    암송 성구 #.27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No temptation has seized you except what is common to man. And God is faithful; he will not let you be tempted beyond what you can bear. But when you are tempted, he will also provide a way out so that you can stand up under it.

    12-01-2024(주일) 사죄의 확신
    암송 성구 #.28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

    12-08-2024(주일) 인도의 확신
    암송 성구 #.29  잠언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을 지도하시리라.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and lean not on your own understanding;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12-15-2024(주일)
    암송 성구 #. 30 
    12-15-2024(주일) 암송성구 #.30 그리스도 안의 생활(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If a man remains in me and I in him, he will bear much fruit;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12-22-2024(주일)
    암송 성구 #. 31
    12-22-2024(주일) 암송성구 #.31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생활(사도행전 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Now I commit you to God and to the word of his grace, which can build you up and give you an inheritance among all those who are sanctified.


    12-29-2024(주일)
    암송 성구 #. 32
    12-29-2024(주일) 암송성구 #.32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생활(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because those who are led by the Spirit of God are sons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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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05-2025(주일)
    암송 성구 #. 33

    01-05-2025(주일) 암송성구  #. 33  믿음에 의한 생활(고린도후서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01-12-2025(주일)
    암송 성구 #. 34  그리스도인의 교제하는 생활(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But if we walk in the light, as he is in the light, we have fellowship with one another, and the blood of Jesus, his Son, purifies us from all sin.


    01-19-2025(주일)
    암송성구 #. 35   증인으로서의 생활(베드로전서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01-26-2025(주일)
    암송성구 #. 36. 후히 드리는 생활(고린도후서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Each man should give what he has decided in his heart to give, not reluctantly or under compulsion, for God loves a cheerful giver.

    02-2-2025(주일)
    암송성구 #. 37. 성령의 전으로서의 몸(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y is a temple of the Holy Spirit, who is in you, whom you have received from God? You are not your own;

    02-9-2025(주일)
    암송성구 #. 38.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베드로전서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If you are insulted because of the name of Christ, you are blessed, for the Spirit of glory and of God rests on you

    2월 16일 /  금주 암송 성구  
     아론의 축복 기도(Aaron's Blessing Prayer)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The LORD bless you and keep you;
    the LORD make his face shine upon you and be gracious to you;
    the LORD turn his face toward you and give you peace.



    2월 23일

    요한복음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ask whatever you wish, and it will be given you.


    3월 2일

    고린도후서 3:17
    주는 이시니 주의 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Now the Lord is the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freedom.


    3월 9일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3월 16일
    역대상 16:11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찌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찌어다.
    Look to the Lord and his strength; seek his face always.

    3월 23일
    에베소서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And pray in the Spirit on all occasions with all kinds of prayers and requests. With this in mind, be alert and always keep on praying for all the saints.

    03-30-2025(주일)
    암송성구 #.45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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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성경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사 그라페'(*)의 문자적인 뜻은 '모든 책'으로 구약성경을 의미한다.
    그런데 '모든'의 헬라어 '파사'에 대한 견해는 두가지이다.
    (1) '파사'는 '단일체로서의 전체'(all)를 의미한다(Lenski).
    (2) '그라페' 앞에 관사 '헤'(*)가 없으므로 '각각의 개별 성경을 강조하는 모든'(Lenski).
    (2) '그레페' 앞에 관사 '헤'(*)가 없으므로 '각각의 개별 성경을 강조하는 모든'(every)을 의미한다(Bernard, Simpson, Guthrie).
    두 가지 견해의 차이는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으로 의미에는 별 차이가 없다(Calvin).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하나님의 감동'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오프뉴스토스'(*)는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호흡하시는'의 의미로 사람이 하나님의 생기로 생령(生靈)이 된 것같이(창 2:7) 성경의 말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성경의 절대 영감설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된다(벧후1:21).
    이에 대하여는 딤후 3:16,17 주제강해 '성경 영감론'을 참조하라.

    교육하기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데이아'(*)는 '모든 삶 가운데 어린아이를 올바로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교훈 -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딤전 5:17).

    책망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레그몬'(*)은 '유죄 판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Lenski) 잘못된 교리나 행동의 오류를 바로잡고 이단자들의 거짓을 밝혀내는 것을 시사한다(엡 5:18;딛 2:15).

    바르게 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노르도신'(*)은 '추를 바로 세우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성도들을 진리와 사랑으로 바로잡고 그들이그 길로 더욱 매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시사한다(단 12:3;요 21:15-17).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쉬네'(*) 는 법률적인 용어로 '엄격한 정의'(正義)를 뜻한다.



    본절은 접속사 '히나'(*, '...하기위해')로 시작되는 문장이다. 이것은 본절이 앞절의 4개의 항목으로 교육한 결과임을 시사한다(Lenski).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 '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일반 신자들을 가리킨다(Hendriksen).
    (2)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교사들을 가리킨다(딤전 6:11, Guthrie).
    두가지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하나님의 사람'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선지자에게 적용되었다.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교사는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선포해야 한다(Scott).
    한편 '온전케 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오스'(*)는 '아로'(*, '적합하다')에서 파생된 것으로 '완전히 적합한'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교사는 성경 즉 말씀을 통해서 그 사역에 완전히 적합한 일꾼으로 변화된다.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 본절은 성경으로 교육한 또 다른 결과이다.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의 헬라어 '엑세르티스메노스'(*)는 '완전히 구비된', '완전히 공급된'이란 의미로 '아르티오스'와 어원은 같으나 더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성경으로 교육을 받아서 '모든 선한 일'(2:21;딤전 5:10;딛 3:1)을 행하기에 충분히 준비된 사람으로 변화됨을 시사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세 가지 기도의 자세를 강조합니다.

    첫째는 무시로 기도하라
    무시로 라는 헬라 단어는 "엔 판티 카이로(εν παντι καιρω)"라고 합니다.
    무시로는 "모든 시간에"라는 의미로 항상 기도해야 함을 의미합니다(살전 5:17)

    둘째는 성령안에서 기도하라
    성령안에서 라는 헬라 단어는 "엔 프뉴마티(εν πνευματι)"라고 합니다.
    성령안에서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는 의미로 성령입니다.

    셋째는 깨어 기도하라
    깨어라는 헬라 단어는 "아그룹눈테스(αγρυπνουντες)"라고 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눅 21:36).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기도 생활은 늘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배가 파선되어 생명이 위태로울 때에도, 복음을 위하여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평안한 길을 걸을 때에도,....
    세상의 거센 물결이 나라와 민족을 마구 흔들지라도 생명의 주가 되신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현장에서 기도하는 십자가 군병으로 굳게 세워지는 은혜의 한 주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 바울은 본절에서 두 가지 분사 즉 '기도하고'와 '깨어'를 통해 권면한다.
    이 두 개의 분사는 전신 갑주의 종류는 아니나 14절의 '서서'와 연결된다(Lincoln, Bruce).
    먼저, 바울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기'를 권면한다. '성령 안에서'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Kent, Foulkes,Bruce).
    이러한 기도가 필요한 때에 대해서 바울은 '무시로'라고 기술한다.
    '무시로'의 헬라어 '엔 판티 카이로'(εν παντι καιρω)는 문자적으로 '모든 시간에'라는 의미로 항상 기도해야 함을 의미한다(살전 5:17).
    다음으로, 바울은 '깨어있기'를 권면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기도하기 위함이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으로(눅 21:36) 그리스도인들은 인내를 가지고 깨어 있어야 한다(롬 12:12; 골 4:2, Bruce, Lincoln).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성도라 불리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그들의 기도와 관심사를 확대시킬 것과 그들과의 연합을 통해 열매를 맺도록 권면하고 있다(1:15;3:18, Bruce, Lincoln).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구할지어다
    - 여호와를 삶의 제일 원리로 삼고 그를 사랑하여 섬기라고 요구하고 있는 구절이다(신 6:5; 마 22:37).
    여기서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시며 능력의 근원이 되시기를 간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얼굴을 항상 구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늘 함께 동행하시기를 간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간구에는 먼저 스스로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분의 말씀대로 신실되이 살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선행(先行)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얼굴(6440) 파님(pânîymפָּנִים   

    1. 얼굴.  2. 활용 예 :  3. 대면㉠ פָּנִים אֶל פָּנִים
    발음 [ pânîym ]
    어원  / 643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038회 사용


    능력(5797) 오즈(ʽôzעֹז    |

    1. 강함.   2. 욥 12:16. 3. 시 29:11
    발음 [ ʽôz ]
    어원  / עוֹז로도 쓰임[잠31:17,25], 어미활용 עָזְּךָ ,עֻזְּךָ ,עָזִּי ,עֻזִּי. 5810에서 유래
    구약 성경  /  93회 사용

    구할지어다(1875) 다라쉬(dârash) דָּרַשׁ  

    1. 문지르다.  2. 어떤 장소를 가다. 3. 구하다
    발음 [ dârash ]
    구약 성경  / 164회 사용

    구할지어다(1245)  바카쉬(bâqash) בָּקַשׁ   

    1. 찾다.  2. 추구하다.  3. 피엘형 בִּקֵּשׁ
    발음 [ bâqash ]
    구약 성경  / 225회 사용

    항상(8548) 타미드( tâmîydתָּמִיד   

    1. 계속성.   2. 속격이 명사 뒤에 와서 형용사로 쓰임.  3.  장기간의 사람들  אַנְשֵׁי תָמִי

    발음 [ tâmîyd ]
    어원  /  ‘펴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03회 사용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
    본 구절은 본서의 여러 곳에 거듭 언급되는 내용으로(1:4; 3:1,13; 6:12,14)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초대 교회의 가르침의 초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본절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변화와 율법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신학적인 논증을 나타낸다.
    실로 그토록 교만하고 자존심 강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유대교에 철저했던 그에게 있어 종래의 모든 삶과 사랑에 대한 부정이요 새로운 삶을 향해 전환(轉換)을 이루는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이 변화된 삶은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지고 고난 가운데서도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후에 그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고통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과 승리의 삶이었다(W.G.Coltman). 한편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스타우로마이'(*)는 성도가 그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에 영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본서에 처음 등장하는 '십자가'는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는 의미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 함이며(롬 8:4), 또한 실존적으로 구약의 모든 율법적 요구들을 완성한 역사적 사건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이제까지 자기가 메고 있던 율법의 요구들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


    영적인 연합 - 영적 생활 <예수께서 못 박혀 죽으신 그 십자가에 나도 못 박혔다는 믿음>
    개인적은 삶의 변화에서 시작 -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이 짧은 구절 안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모두 언급되고 있다.
    바울은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시고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롬 6:4). 그리스도와 바울의 완전한 연합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것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옛 사람의 자기 교만과 바리새인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잠시 동안 자신에게 패배감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심으로 인하여 얻은 자유와 평화는 그 고통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롬 8:18).

    󰃨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본절에는 세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1) '나' 대신에 '그리스도',(2) '율법' 대신에 '믿음',(3) 과거의 '옛 사람' 대신에 현재의 '새 사람'으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로 하여금 모든 변화를 경험하게 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의와 사랑의 종이 되었으며(롬 6:19), 비록 제한된 육체 가운데 살지만 더이상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으며, 성령을 좇는 삶을 살게 되었다(롬 8:4).

    󰃨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 안에서'사는 것이다. 이는 과거에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애썼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예수께서는 '내 말이 너희 안에'(요 15:7)라고 말씀하셨지만, 바울은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라고 말한다. 이는 주께서 우리 안에 계실때에는 말씀으로 존재하시며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그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主는 靈이시다

    바울의 성령론과 기독론을 올바로 이해하고 바울서신을 올바른 견지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후 3:17 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 (主는 靈이시다: Now the Lord is the Spirit. NASB)의 뜻을 알아야한다.

    이 구절은 많은 주석가들의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구절이다.
    우리들의 관심은 바울 사도가 어떻게 호 퀴리오스토 프뉴마를 본문에서 동일시 할 수 있었느냐하는 것을 밝혀내는데 있다.
    그러나 호 퀴리오스와 토 프뉴마가 동일시 되어지는 이유를 밝히기 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두 가지 문제는
    첫째로, 본문에서 퀴리오스가 그리스도를 가리키느냐하는 것
    둘째로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키느냐 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 문제의 결과가 긍정적으로 나타날 때 우리들은 왜 바울 사도가 주님(호 퀴리오스)과 성령(프뉴마)을 동일시 하고 있는가 하는 이유를 밝히는데 착수할 수 있게 된다.
     
    첫째는 퀴리오스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가를 연구하기로 하겠다.
    일반적으로 이 문제에 있어서 두 가지로 견해를 달리한다.
    퀴리오스가 그리스도를 가리키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본문의 퀴리오스는 여호와(Yahweh)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퀴리오스가 여호와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사도 바울이 출애굽기 34:29-35절을 그 자신의 시대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고 믿는데 있다.
    Dunn은 사도 바울이 출애굽기 34:30절에 나타난 단어 독사(히. 카란, LXX: 엔 데독사스뭬네, 주:광채, 영광)을 취하여 고후 3:7-11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출애굽기 34:33에 나타난 칼륌마(히:미스베, 주:수건,너울)를 취하여 고후3:12-14에서 그 의미를 전개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두 개 용어(광채, 수건)는 출 34:34f의 중심된 귀절에 대한 준비적인 역할을 한다.
    출 34;34f는 다음과 같다.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Dunn의 주장은 출애굽기 34;34f절 이전의 구절들이 출 34:34f을 설명하기 위한 준비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고린도후서 3장에 있어서도 고후 3:16절 이후의 구절들에 있어서 바울의 해석은 고후 3:16절을 설명하기 위한 준비적인 역할을 한 것이라고 한다.
    즉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후 3:16)를 설명하기 위한 준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그 이전 구절들이다.
    Dunn은 본문에 나타난 수건이 모세 당시에 유대인들의 눈을 어둡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세의 얼굴을 가리웠던 같은 수건(토 아우토 칼륌마)이라고 주장한다(고후 3:14).
    그러므로 그 수건을 제거할 행위는 마땅히 같은 행위여야만 한다.
    이와같이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이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16절)했을때 그 뜻은 모세 당시에 그 수건을 벗기기 위해 되어졌던 같은 행위임에 틀림이 없다.
    이는 고후 3:16이 출34;34에서 인용한 것임을 설명하고 따라서 고후3:16절의 주(Lord: 퀴리오스)는 여호와(Yahweh)를 가리킴이 확실하다.

    바울 사도는 그람마의 옛 계약과 프뉴마의 새로운 계약을 비교한 다음 출애굽기 34장의 중심된 구절이 그의 논리에 있어서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즉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주가 성령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호3:16,17절의 주(Lord)는 여호와(Yahweh)를 가리킴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Dunn의 논리는 구약(O.T)과 신약(N.T) 사이에 서로 상충됨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물론 구약과 신약은 그 사상에 있어서 상충될 수가 없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여주고자 노력한 사도 바울의 논리의 중요성은 두 계약 사이의 유사성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두 계약 사이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본문에서 퀴리오스가 여호와(Yahweh)를 가리킨다고 해석함으로 얻을 수 있는 유익함은 예수님과 성령을 동일시하는 이 어려운 진술(statement)과 부딪쳐 보지 않고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에 열거하는 몇가지 이유는 퀴리오스가 여호와(Yahweh)를 가리킨다고 하는 해석이 본문에서 적당한 해석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1. Dunn이 주장한대로 사도 바울은 출애굽기의 구절들을 기초로 새로운 계약의 사역을 해석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Dunn의 주장에서 결여된 점은 사도 바울이 구약의 본문을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바울이 구약과 신약을 비교할때는 언제든지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관점에서 신약이 취급되어진 것이다.(3절 이하; 14절).
    이와같은 이해의 결핍은 고후3:17절을 문맥 안에서 다루지 못한데서부터 기인된다.
    고후 3:17절은 결코 문맥에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이는 성경해석의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문맥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본문을 고찰하면, 사도 바울은 고후 3:1-4:6에서 사역(ministry)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고후 4:5절에서 바울은 명백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크리스토온 이에수은 퀴리온)을 전파한다고 말한다.
    고후 3:14절은 또한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다”(엔 크리스토 카타르게이타이)라고 말하며 16절에서는 사람이“퀴리온(主)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라고 설명한다. 이와같이 문맥에 나타난 퀴리오스를 연구할 때 퀴리오스는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음이 명백하다.

    이와같은 사상은 빌2:9 이하에 타나탄 사상과 일치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인 퀴리오스(主)라는 이름을 예수님에게 주시므로 모든 입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또한 베드로도 그의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主(퀴리오스)가 되셨다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主(퀴리온)와 그리스도(크리스톤)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라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 후에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본문을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관점에서 설명한다고 생각할 때 고후3:16,17에 나타난 퀴리오스는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킴이 확실한 것이다.

    2. 출애굽기에서는 없어질 영광에 대해서 언급이 없지만 바울사도는 고후3장에서 의문의 사역이 없어질 영광과 의의 사역의 풍성한 영광(혹은 성령의 사역의 풍성한 영광)과 비교하고 있다. 

    바울은 정죄의 사역(직분)과 의의 사역(직분)을 비교하고 있다(9절). 로마서 5:16절에서도 바울 사도는 아담으로 말미암은 정죄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칭의를 비교하고 있다. 이와같은 사상은 구약 자체가 진리의 완전한 뜻을 설명하지 못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완전한 뜻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의의 사역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면 본문의 퀴리오스는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본문 퀴리오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문맥을 통해서 증명을 하였다. 문맥의 뜻에 비추어 생각할 때 퀴리오스는 여호와를 가리키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제 우리들은 두 번째 질문을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질문은 고후3:17절의 프뉴마가

    진정으로 성령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Hughes 박사는 고후3:17절의 토 프뉴마가 성령(the Holy Spirit)을 가리키지 않고 靈(spirit)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주는 영이시다! 즉 그리스도는 빛과 생명의 원천이시다. 그에게 돌아감으로 오해의 수건을 제거할 수 있게 되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 있게 된다”라고 했다. 따라서 Hughes는 고전15:45; 고후3:6; 롬8:15절에 나타난 프뉴마도 성령으로 해석하지 않고 靈으로 해석한다. Hughes는 또한 말하기를 “이 귀절 전체를 통하여 우리들은 대문자로 성령(the Spirit)을 쓰지 말고 소문자로 靈(spirit)을 써야한다. 비록 우리들의 판단으로 여기서 성령을 직접적으로 가리키지는 않지 --- 主는 靈이시다 32쪽 --- 만 그러나 바울의 논리 가운데 성령의 작용이 암시된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별히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성도들의 마음에 적용하는 것이 성령의 직무(office)라는 바울의 명백한 교훈을 생각할 때 성령의 작용이 암시된 것을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Hugghes 박사의 입장은 다음의 이유로 본문맥에서 타당하지 않다.


    1) 바울은 고후3:3에서 먹(멜라니=ink)과 성령(프뉴마티 데오 조온토스)을 비교하고 있다. 또한 바울 사도는 의문(그람마=letter)과 성령(토 프뉴마)을 6절에서 비교하고 있다(cf. 롬2:29). 그러므로 본 6절에서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말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특히 프뉴마의 역할을 설명하기 위해 같이 사용된 조오포이에이(give life)는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이 사실은 바울서신 다른 곳에서도 명시된 것처럼 특히 생명은 성령으로부터 기인된다는 사상과 일치하는 것이다(롬8:2,6,11;cf.고전15:45). 바울은 다음으로 헤 디아코니아 테스 카타크리세오스(정죄의 직분=정죄의 사역)와 헤 디아코니아 테스 디카이오쉬네스(의의 직분=의의 사역)을 비교하고 있으며(9절), 이 헤 디아코니아 테스 디카이오쉬네스는 바로 헤 디아코니아 소우 프뉴마토스인 것을 말하고 있다(9절). 여기서 디카이오쉬네스와 프뉴마토스가 동격으로 사용되어졌다.(주: 의의직분과 영의직분에서 의와 영이 동격으로 사용되었다는뜻) 그런데 다른 곳에서 바울은 성령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전6;11)고 말함으로 성령과 의를 밀접하게 연관시킨다. 그러므로 고후3:8의 프뉴마토스가 성령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성령을 가리키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타당한 것이다. 17절 하반절의 토 프뉴마도 자유 개념과 관련하여 사용되어졌다. 이 사실은 토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서신에서 성령과 자유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참 자유는 성령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롬8:2; 고전12:13; 갈5:13ff.). --- 主는 靈이시다 33쪽 ---


    이상에서 “主는 靈이시다”(호 데 퀴리오스 토 프튜마 에스틴-17a)를 둘러싼 가까운 문맥에서 투 프뉴마의 용법을 관찰해 볼 때 토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키고 있음이 명백해졌다. 그렇다면 고후3:17a의 토 프뉴마만 구태여 성령이 아니라고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2) 우리들은 이미 퀴리오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증명하였다. 퀴리오스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생각할 때 17절 하반절의 토 프뉴마 퀴리오나 18절의 퀴리오 프뉴마토스와 같은 표현들에 나타나는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표현들이 바울 서신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데 모두 성령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롬8:9; 갈4:6/ cf. 행5:9; 8:39; 16:7).


    이상에서 증명한 대로 고후3:17a에 나타난 토 퓨뉴마는 Hughes의 주장대로 靈(spirit)을

    가리키지 않고 오히려 성령(The Holy Spirit)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서 고후3:17a의 호 퀴리오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토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확증하였으니 이제 우리들은 바울 사도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다른말로 표현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하는 본질이 무엇인가? 이렇게 그리스도와 성령이 동일시 되어졌다는 사실은 본문이 뚜렷하게 증명하지만 무슨 의미로 동일시 되었는가 하는 것은 명백하지 않다. 고후3:17절은 교리적인 정의가 가득찬 머리를 가지고 바울 서신을 대하고 증거자료로서 확증을 찾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실로 극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광범위한 문백을 고찰할 때 바울 사도는 그의 사도직의 진실성을 옹호하고 있다. 바울의 소명은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거짓 사도들 보다도 훨씬 탁월한 것이다. 그러나 그 탁월성은 그의 개인 인격에 의존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진정한 문제는 그의 직무의 탁월성과 합법성에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의 직무(office)가 모세의 직무보다 탁월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 바울 사도는 그가 계약 역사에 있어서 더 탁월한 시대에 살고 있으며 또 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울 사도 --- 主는 靈이시다 34쪽 ---


    는 옛 계약과 새로운 계약을 비교한다. 먹(ink=멜라니)은 성령과 비교되어졌고(3절) 그리고 성령은 다시 의문(토 그람마)과 비교되어졌다(6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6절). 이 명제가 뒤따라 나오는 구절들에서 더욱 확장되어 진다. 사도 바울은 새로운 계약의 영광(독사)의 초월성을 제시하면서 반면에 옛 계약의 영광(독사)은 사라져 갔다고 말한다(7,11절). 바울 사도는 분명히 여기서 기독교인의 사역의 본질과(3:3,4:1) 모세를 使者로 한 죽음의 사역(직분)을 비교하고 있다(3:7,12,13). 옛 계약은 정죄와 죽음의 사역(직분=ministry)으로서 모세와 관련이 되어졌고 반면에 새로운 계약은 의와 생명의 사역으로서 성령과 관련이 되어졌다(7절 이하 참조). Smedes는 말하기를 “여기 옛 계약과 새 계약이 있다. 그리고 후자는 전자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초월하다. 새 계약은 광대하게 초월한 영광을 가지고 있다. 새 계약은 생명이 사망에서 다르고, 자유가 속박에서 다르며, 확신이 공포에서 다른 만큼, 혹은 소망이 절망에서 다른 만큼, 옛 계약과 다르다. 새 계약은 세상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가져다주었다. 바울의 사도직은 계약 역사의 새 시대, (즉 새 계약 시대)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의 사도직은

    더 초월한 사도직인 것이다”라고 했다.


    바울의 전체적인 논리는 구속 역사의 실재(reality)에 의존되어 있다. 본문에서 제시된 대칭은 역사적이다. “그 대칭은 구속 역사에 있어서 구 질서와 새 질서 사이의 계속되는 국면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에 의해 구별된 것이 바로 새 질서인 것이다. 성령은 새 시대에 있어서 대단히 활동적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성령의 사역(ministry)이라고 말한다(8절).


    고후3:12절 이하에서 바울 사도는 불신하는 유대인들의 마음에 덮여졌고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벗겨질 수 있는 수건(칼륌마)에 --- 主는 靈이시다 35쪽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 구절들은 옛 계약이 무슨 이유로 정죄와 죽음의 사역인지를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하고 있으며 반면 새로운 계약의 효력을 나타내고 있다. 옛 계약이 정죄와 죽음의 사역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완고하게 되었기 때문이며(14절) 그들의 마음에 수건이 덮여져 있었기 때문이다(15절). 그러나 새로운 계약의 효력은 그 수건이 그리스도 안에서 제거되어진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14절). 그 수건은 언제든지 사람이 주께로 돌아가면 제거되어진다(16절).


    이상에서 명백한 사실은 사도 바울이 그의 논리 가운데 17절에 당도하기도 전에(3절 참고) 이미 성령과 그리스도와의 연관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관찰을 통해 확실해진 것은 새로운 계약의 유익은 넘치는 영광과 생명과 의로움이다. 이 사실은 바로 새로운 계약이 성령의 사역이라는 사실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성령이 새 질서안에서 사역하심으로 의와 생명과 영광과 같은 은사를 산출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이와같은 성취들을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돌릴 수 있겠는가하는 질문이 제기되어진다.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하여 바울은 새로운 계약의 효력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 기능을 고찰할 때 주와 성령을 동일시하여 “主는 靈이시다”(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17a)라고 말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바울이 “主는 靈이시다”했을때 퀴리오스가 완전하고 철저하게 프뉴마의 개념에 의해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주와 성령을 동일시 하는 것은 메시야 시대가 바로 성령의 시대라는 종말적인 의미로 동일시 하는 것이다. Hamilton은 말하기를 “여기에서 동일시하는 것은 본체론적이거나 존재에 있어서의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고 동력적(dynamic)이며 구속적 행위에서 발생된 동일함을 뜻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Hamilton은 계속해서 언급하기를 “성령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취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그의 직무를 효과적으로

    이행하기 때문에 믿음의 모든 의지와 목적을 위해 주님 자신이 그의 백성위에 임재하셔서 은혜를 부여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라고 했다. 성령이 새 질서를 주관하시기 때문에 새 질서는

     바로 성령의 질서라고 불리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광범위한 문맥을 통해 관찰해 볼 때 “主는 靈이시다”(17a)라는 표현을 주관하고 있는 사상은 구속적 역사적 전망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성령과 그리스도를 동일시 하는 것은 본체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요 경륜적인 의미로 이해해야만 한다. 동일시 하는 것은 그 성격상 구속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신자들의 경험에 관한한 성령과 그리스도의 기능이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새 질서에서는 동일시 되어질 수 있다는 구속적 역사적인 의미로

    “主는 靈이시다”(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


    17절 하반절의내용도 성령과 그리스도를 동일시 하는 것이 본체론적인 의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자유(엘류데리아)의 개념이 17절 하반절에 언급되었는데 바로 이 사실이 바울이 경륜적인 면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갈5:1;롬8:2). 영광, 생명, 의, 평화 등의 개념과 더불어 자유 역시 새로운 계약의 특징들 중의 하나로서 성령의 사역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갈4:21과 5:1;5:13과 5:16ff 비교 참조). 18절에 기술된 대로 주와 성령 사이를 밀접히 연결시키는 것은 17절에서 이미 언급한 내용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결국 주와 성령은 구속의 사역을

    적용하는데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종합해 보면 바울의 사상은 역사적이다. 새로운 시대는 옛 시대보다 탁월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신 분이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벗겨졌다. 성령은 창조적이고 활동적인 영으로서 새 시대를 주관하시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의 생활은 성령에 의해 조정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영으로서 계속해서 역사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인 것이다. --- 主는 靈이시다 37쪽 ---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主는 靈이시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신자들의 경험을 설명할 때 그리스도의 기능과 성령의 개념을 교대로 사용하는 예를 바울서신 내에서 찾아 비교함으로 지금까지의 증명이 더 확실해질 것이다.


    신자들의 생명 - 죄의 결과는 죽음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 죽음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비결은 예수를 생명의 주로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성령을 통해 생명을 가졌다(롬 8:11)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가졌다(골로새서 3:4)
    -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신자들의 소망
    죄의 결과 에덴동산에서 쩣겨난 사람은 일을 해야하는 수고와 해산하는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고통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을 때 소망이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됩니다.

    우리들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소망을 가졌다(롬 5:5; 15:13)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졌다(고전 15:19).

    신자들의 성화 - 세속에서 거룩하게 되는 것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다(롬 15:16)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다(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신자들의 기쁨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기쁨을 가졌다(롬 4:17; 갈 5:22)
    우리들은 主님 안에서 기쁨을 가졌다(빌 3:1; 4:4)

    신자들의 자유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다(고전 12:13; 롬 8:2)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다(갈 5:1).

    신자들의 칭의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의롭다 인정받았다(고전 6:11)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인정받았다(갈 2:17; 고전 6:11).


    신자들의 인침

    우리들은 성령안에서 인치심을 받았다(엡 4:30)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치심을 받았다(엡 1:13)

    신자들의 교제

    우리들은 성령의 교제로 축복을 받는다(고후 13:13)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교제 안으로 불리움을 받았다(고전 1:9)

    신자들의 행위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행해야 한다(갈 5:25)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야 한다(골 2:6; 1:10).

    신자들의 하나님께 대한 접근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간다(엡 2:18)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간다(엡 3:12)

    신자들의 확신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굳게 서야 한다(빌 1:27).
    우리들은 한 주님 안에서 굳게 서야 한다(빌 4:1).

    신자들의 율법 이행

    성령은 죄와 사망의 법을 대치시켰다(롬 8:2)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법을 대치시켰다(롬10:4)


    이상에 열거한 병행 구절들은 신자들의 경험을 설명할 때 바울 사도가 성령과 그리스도를 교대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자들의 생활과 성령 안에서의 신자들의 생활 사이에 구분을 두지 않았다.
    이와같이 성령과 그리스도를 신자들의 경험과 관련하여 교대로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의 현상으로서 공관복음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들에서 “성령 안에 있는 우리들”(롬 8:8a),
    "너희 안에 있는 성령“(롬 8:9a;11c),
    "너희 안에 있는 그리스도”(롬 8;10)등의 표현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하나님의 영”(롬 8:9b)이나
    “그리스도의 영”(롬 8:9c)을 교대로 사용할 수 있으며
    “주는 영이시다”(고후 3:17a)라고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해서 표현할 수 있었다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자유는 감옥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자유란 갇힌 곳에서부터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감옥에 갇힌 사람은 감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은 질병으로부터 건강을 되찾는 것입니다.
    사람을 옭아매는 것들이 다양합니다.
    예로부터 사람을 옭아매는 것을 "생노병사(生老病死)"라고 하여 태어나서 나이가 들어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으면서 가장 힘든 것은 죄에 붙잡힌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죄가 나를 흔들어댈 때 어느 누구도 그 고통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으로 나를 붙잡아 줄 때라고 하겠습니다.

    오직 하나의 참된 기쁨은 자기라는 감옥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동시에 자유도 주셨다.(토마스 제퍼슨)





    주는 영이시니
    - 본절은 `의문(儀文)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는 6절 내용과 연관하여 바로 이해될 수 있다.
    즉 바울은 '의문'과 '영', '옛 언약'과 '새언약', '율법'과 `복음'을 대조하면서 후자(後者)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많은 주석가들이 주장하듯이 본절의 내용이 삼위 일체론의 교리를 뒷받침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Bousset, Scott), 보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본절에서 관심을 두고 있는 초점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 및 대조에 있다는 사실이다(Hughes).
    이렇게볼 때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빛과 생명의 원천이시므로 그분께 돌아오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운 바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유함이 있느니라
    -
    주의 영이 있는 곳, 그리하여 마음의 수건이 벗겨지고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난 곳에는 복음 즉 새 언약으로 말미암는 자유가 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옛 언약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을 '종의 자녀'로, 새 언약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을 '자유자의 자녀'로 비유한 적이 있다(갈 4:24-31).
    여기서의 '자유'는 율법의 지배 하에서의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가리킨다.
    고린도전서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졌던 '자비'에 대한 언급이(고전 9:1, 19;10:29) 후서에서는 이곳에서만 언급되고 있다.
    자신들의 마음속에 새 언약이 영으로 새겨진 그리스도인들은 정죄와 구속의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는데 이 자유는 확신(4절)과 담대함(12절)을 주는 자유이다.
    바울은 사도로서 이 자유의 영을 받았으므로 인간적인 추천서에 의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의 자유와 자기를 자랑하고자 하는 명예욕으로부터의 자유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1. 주는
    2. 영이시니
    3.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 주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셨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이것이 ‘주는’이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이것이 ‘주는’이다.

    2장 영이시니

    1.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살려 주는 영이 되셨다. 이것이 ‘영이시니’이다.

    2.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셨다. 그러므로 역(逆)으로 말하면,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이것이 ‘영이시니’이다.

    3장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1:7-13)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하셨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우리가 그 인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이것이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이다.

    2.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기름을 부으시고(제사장 직책과 선지자 직책과 왕 직책을 세우시고) 보내사 ❶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육신의 연약한 자<롬5:6, 롬6:19>를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롬8:9> 생기 있는 자가 되게), ❷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는 죄인 된 자<롬5:8, 롬11:30>를 하나님께 순종하는<롬1:5> 의인이 되게), ❸눌린 자를 자유케(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롬5:10, 롬8:7>를 영의 생각<롬8:6>으로 하나님과 화목(동행)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눅4:18). 이것이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이다.

    (문답)

    문1: ‘주는’은 무엇인가?

    답: ➊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1:14). ➋그리스도 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빌2:5-8).

    문2: ‘영이시니’는 무엇인가?

    답: ➊예수 그리스도는 살려 주는 영이 되셨다(고전15:45). ➋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다(롬8:9).

    문3: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는 무엇인가?

    답: ➊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우리가(엡1:7) 그 인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엡1:13). ➋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셨으니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신다(눅4:18).

    (결론)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주는 영이시니(고후3:17)’ 하셨으니 그러므로 ‘주는 영이시다’라고 말하면 비성경적으로써 틀린 것이다. 그런 것은 주(主)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로 알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요1:14)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빌2:5-8)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그렇기에 ‘주는 영이시니(고후3:17)’ 하셨으니 그러므로 ‘주는 영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요1:14) 예수 그리스도’와 배치되는 것이며,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빌2:5-8) 그리스도 예수’와 배치되는 것이다.

    (골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다. 그렇기에 ‘주는 영이시니(고후3:17)’ 하셨으니 그러므로 ‘주는 영이시다’라고 말하면 비성경적으로써 틀린 것이다.

    (눅24:35-43)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하셨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영으로 생각할 때에 예수님께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셨다. 그렇기에 ‘주는 영이시니(고후3:17)’ 하셨으니 그러므로 ‘주는 영이시다’라고 말하면 비성경적으로써 틀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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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26-2025(주일)
    암송성구 #. 36. 후히 드리는 생활(고린도후서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금주 암송 성구  
     후히 드리는 생활(고린도후서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헌금(獻金)이란 한자는 “드릴 헌(獻)” “쇠 금(金)이란 ”“훈(訓)”으로 “쇠 즉 엽전(돈)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돈이 필요해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육신으로 살아가야 할
    연약한 인간이지만 돈을 바침으로 받은 사랑에 대한
    고백이며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헌금은 얼마를 바쳤느냐 하는 그 양을 계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헌금은 아직도 얼마를 갖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부자는 연보궤에 많은 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한 고드란트)를 넣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가난한 과부는 모든 사람들보다 많이 넣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 넣었지만 과부는 구차한 중에 자고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막 12:41-44. 눅 21:1-4).
    헌금은 얼마를 바쳤느냐 하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아직도
    얼마가 남아 있느냐 하는 것에 따라 주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2025년 영적 무브먼트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는 거룩한 순례자가 되자!
    나의 태신자(胎信者)를 찾으라!

    02-2-2025(주일)
    암송성구 #. 37. 성령의 전으로서의 몸(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4가지 구조로 구분하는 것(세포, 조직, 기관, 계통)은 과학적인 방법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몸을 3가지로 구분하는 것(영, 혼, 육)은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물론 사람의 구조에 대한 이분법(영혼, 육체)과 삼분법(영, 혼, 육)으로 설명하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의 기능과 혼의 기능과 육의 기능이 동일한 내용이라면 이분법이든지 삼분법이든지 서로 다른 주장이 아니라 이분법은 기능을 기준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존재론적 방법은 영혼과 육체로 구분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의 몸은 "성령의 전"이라고 강조합니다.
    영혼육과 같은 삼분법으로 구분하든지 아니면 영혼과 육과 같은 이분법으로 구분하든지 그 안에 주의 영이 없다면 그것은 사람의 몸이 아니라 짐승과 같은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첫째, 세포는 생명을  이루고 있는 가장 작은 최소화 기능 단위라고 합니다.
    인체는 60에서 100개의 세포로 이루어진다.

    둘째, 조직은 공통의 기능을 수행하는 유사한 세포들의 집단으로 이루이져 신체는 상피조직과 그리고 근육조직, 신경조직, 결합조식 등 네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셋째, 기관으로 2개 이상의 조직으로 심장과 난소 그리고 위장 등이 있다고 합니다.

    ​넷째, 계통으로  유사하고 연관된 기능을 가진 다양한 기관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성막의 구조를

    인체의 모든 계통은 유기적이며 서로 상호관계를 가집니다.

    금주 암송 성구  
     성령의 전으로서의 몸(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4가지 구조로 구분하는 것은 과학적인
    방법입니다(세포, 조직, 기관, 계통).
    반면에 사람의 몸을 3가지로 구분하는 것은
    성경적인 방법입니다(영, 혼, 육).
    물론 사람의 구조에 대하여 이분법(영혼, 육체)과
    삼분법(영, 혼, 육)으로 설명하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의 기능과 혼의 기능과 육의 기능이 동일한 내용이라면 이분법이든지 삼분법이든지 서로 다른 주장이 아니라 이분법은 기능을 기준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존재론적 방법은 영혼과 육체로 구분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의 몸은 "성령의 전"이라고 강조합니다.
    영혼육과 같은 삼분법으로 구분하든지 아니면 영혼과 육과 같은 이분법으로 구분하든지 그 안에 주의 영이 없다면 그것은 사람의 몸이 아니라 짐승과 같은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2025년 영적 무브먼트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는 거룩한 순례자가 되자!
    나의 태신자(胎信者)를 찾으라!


    02-9-2025(주일)
    암송성구 #. 38.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베드로전서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2월 16일 /  금주 암송 성구  
     아론의 축복 기도(Aaron's Blessing Prayer)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축도(祝禱)”란 “축복기도(祝福祈禱)”라는 한자의 약자로 “빌 축(祝)”“빌 도(禱)”라는 훈(訓)입니다.

    축도를 위한 기도문은 구약에서 대제사장 아론의 축도와
    신약에서 사도 바울이 선포하는 바울의 축도가 있습니다.

    축도란 하나님이 내리시는 선물과 축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기도는 성도가 하나님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아래서 위로 드리는 것이고, 축도는 하나님께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주시는 선물입니다. 축도는 하나님의 복을
    회중에게 선포하는 귀중한 말씀이며, 영어로 'Benediction' 
    즉 '복을 빌어주는 기도'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축도는 하나님이 지키시고 은혜 베푸시며 평강 주심을 알리는 것이고,
    신약에서는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역사하심이 있음을
    알리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2월 23일

    요한복음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ask whatever you wish, and it will be given you.

    기도(祈禱)의 재미는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닐까요?
    만일 응답이 없는 기도를 계속하는 것은 형식(形式) 또는 습관(習慣)이 될 것입니다.
    응답 받는 기도의 비결은 기도자가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예수님 안에 거하려면 예수님의 가르침 즉 그 말씀이 내 안에 새겨져야 합니다.
    내 안에서 주의 말씀이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그 말씀에 따라 순종하면서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을 "내면적 경건이 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외면적 경건에는 관심을 갖지만 보이지 않는 내면적 경건에 대해서는 소홀(疏忽)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성구를 암송(暗誦)하는 것은 주의 말씀을 내 안에 새기는 것이며 동시에 내면적 경건을 강화(强化)하는 훈련이 됩니다.
    이번 주간에 암송할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것을 찾아서 그것을 구하는 재미를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기도가 기도의 지경(地境)을 넓히는 것입니다.


    거하다(메노. mĕnō) μένω 스트롱번호 3306

    1. 남아있다.  2. 기다리다.
    발음 [ mĕnō ]

    관련 성경  /  머물다(마10:11, 요1:32, 행21:8, 딤후4:20), 유하다(막6:10, 눅24:29), 거하다(눅8:27, 요8:35, 요일2:27), 계시다(요1:38, 2:12, 히7:24), 머물러 있다(요3:36), 붙어있다(요15:4), 두다(요19:31, 행5:4), 붙다(행27:41), 지내다(고전7:8,40), 영존하다(히12:27), 계속하다(히13:1).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여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그 아래 말씀이 알려주는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 속에 가진 자이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란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의 왕좌를 점령하였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을 그의 대리(代理)로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 권위를 높이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살아 계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거한 생활의 유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약에 참여한 자로서 신종(信從)하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신분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쓸 수 있고, 또한 성령께서 그런 신자의 의지를 성화(聖化)시켜 주님의 뜻대로만 기도할 수 있게 하신다. 곧,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만 위하여 기도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할 진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상반절에서 벌써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생활이,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 되어 있다. 신자가 주님과 연합한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주님의 계약 행위, 곧, 선택이 그 기본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순종이 그 실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외부적 생활에서만 근근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얕은 경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깊은 계약과 생명에서 움직이는 내면적인 경건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무엇이든지 응답 받는다는 진리는, 요한이 그 시선에서도 말씀한 바 있다.
    곧,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한 말씀이 그것이다(요일 5:14).
    기도 응답을 받는자들은 저렇게 내면적인 경건의 소유자들이다.

    기도 응답을 많이 받은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고(신 34:10),
    히스기야는, 기도 하여 자기의 병을 고침 받았다(사 38:2-5; 왕하 20:5-6).
    그는 기도하여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을 파멸시켰는데(왕하 19:14-19, 35),
    하나님 앞에서 자백한대로,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할 만큼, 경건하였다.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사도들을 위시하여 일반 신자들 전체에게 허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짐을 져 주시는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이다.
    히 4:14-16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다.

    약 5:17에 말하기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비가 아니로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큰 죄인들도 회개하며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데, 구약 시대에도 그러하였고(대하 33:10-13), 신약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눅 18:13-14에 말하기를,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였고,

    계 3:19-20에는 말하기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가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지침

    12-15-2024(주일) 암송성구 #.30 그리스도 안의 생활(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If a man remains in me and I in him, he will bear much fruit;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12-22-2024(주일) 암송성구 #.31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생활(사도행전 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Now I commit you to God and to the word of his grace, which can build you up and give you an inheritance among all those who are sanctified.

    그 은혜의 말씀 / 그 은혜의 그 말씀
    토 로고 테스 카리토스(τω λογω της χαριτος)

    호(3588)  로고스(3056)  호(3588)  카리스(5485)

    λόγος χάρις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라는 구절을 직역하면 "그 은혜의 그 말씀께 부탁하노니"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사람의 모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바로 그 말씀 즉 세상에 내려오신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문자의 말씀은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려는 의도로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문자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믿는다는 것은 곧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라는 질문은 "주 예수께서 생명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믿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믿습니까?" 라는 질문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믿습니까?" 라는 질문은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셨던 예수님께서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것을 믿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따라서 '믿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아멘!" 이라고 화답하는 것은 신앙의 내용을 함축성 있게 묻고 답하는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
    흉악한 이리들과 배교의 여러 세력들로 인해 갖가지 공격을 받게 될 교회의 어려움을 예견한 바울은 여러 권면으로 지도자들의 성실함을 촉구했지만 마지막에 바울이 부탁한 것은 바울의 모범도 지도자들의 충성스러움도 아니었다. 이런 것들은 교회를 세워가는 데 필요한 하나의 방도 도구일 뿐 근본적(根本的)으로는 교회를 배교의 세력에서 지키지 못할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한테 맡겨야 옳단 말인가? 바울은 안전의 원천을 알았으니 곧, 주와 그분의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인간 지도자들의 모든 수고를 쓰셔서 친히 교회를 세워가시는 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교회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몸된 교회를 친히 다스리고 계신 것이다. 이때 그 방법은 오직 말씀으로이다. 그 말씀이 능력이 있어서교회롤 모든 악의 세력에서 지켜주고 거룩하게 서 가게 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교회가 누구의 교회이며 무엇으로 교회가 거룩하게 서 갈 수 있는가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다. 한편 여기서 부탁한다는 '파라티데마이'(*)는 '넘겨주다', '위탁한다', '맡긴다', '의뢰한다'(딤후 2:2;벧전 4:19 등)는 뜻이다.

    12-29-2024(주일) 암송성구 #.32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생활(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because those who are led by the Spirit of God are sons of God.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인 삶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핵심은 세상(땅)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소금과 빛이 될 수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해야만 합니다(롬 8:9).
    그리스도의 영을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비결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의 가르침을 믿고 따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2025년에는 성경 일독을 위하여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요한계시록까지 함께 읽어가려고 합니다.
    말씀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기둥의 성자 시므온처럼 삶의 현장에 우뚝 세워지는 은혜를 함께 사모하며 기도하는 2025년으로 기록을 세워갑시다.


    하나님의 영으로...하나님의 아들이라

    -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이기에 당연히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사랑'(9절)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께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가르치셨다.
    성도는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

    인도함을 받는(71) 아고(agō) ἄγω   

    1. 인도하다. 2. 데리고 가다
    발음 [ agō ]
    • 1. 인도하다.
      • a.  [문자적으로, 4격과 함께 쓰여] 인도 하다, 데려오다, 가져오다, 가져가다, 마21:7, 요8:3, 행20:12.
      • b.  데리고 가다, 가져가다, 행11:26, 딤후4:11.
      • c.  [상징적으로] 인도하다, 들어가게 하다, 롬2:4, 히2:10.
    • 2. 끌어넣는다, 잡아가다, 체포하다, 막13:11, 눅22:54, 요7:45, 행5:26.
    • 3. 인도하다[성령의 사역을 통해], 인도되다[수동태로], 롬8:14, 딤후3:6.
    • 4. [시간을] 보내다, 허비하다, 눅24:21, 행19:38.
    • 5. 가다, 마26:46, 막1:38, 14:42, 요11:16.
    • 관련 성경  / 끌려가다(마 10:18), 끌고 오다(마 21:2, 눅 19:30), 이끌리다(눅 4:1), 이끌다(눅 4:9, 히 2:10), 이끌다(눅 4:29), 데리다(요 19:4, 행 17:15), 끌어가다(행 9:21), 잡아오다(요 7:45, 행 5:21), 인도하다(요 10:16, 롬 2:4), 붙들다(행 17:19), 데려가다(행 21:34), 데려오다(행 25: 6), 들어가다(행 23:10).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베드로전서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성령,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 영

    8장에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살펴봅니다.

    I. 성령

    1. 그리스도의 영 (9), 하나님의 영(9)

    9절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 혹은 ‘하나님의 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하십니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꼭 집어 소개한 것은 초대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아닌 ‘다른 영’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1-3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서 ‘다른 예수’와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권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아닌 다른 영을 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영지주의라고 하는 이단이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다른 영, 적그리스도의 영을 전했습니다. 오늘날엔 알파코스, 신사도운동, 관상기도와 같은 영성 프로그램들을 통해 다른 영들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영적인 역사가 나타난다고 이를 다 믿지 말고 이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그리스도의 영” 또는 “하나님의 영”이라고 부른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주요한 사역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야 그리스도를 알 수 있고, “진리의 영”(요 16:13)을 받아야 진리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를 아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9)인 것입니다.

    2. 양자의 영 (15)

    15절부터는 성령을 “양자의 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15) 하십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아직도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면 ‘종의 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겁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항상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몰아갑니다. “이것저것을 행하고 지키지 않으면 지옥 간다.”라고 끊임없이 위협하고 협박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만족시킬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는 항상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종노릇하는 ‘종의 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a. 하지만 율법주의라고 하는 ‘종의 영’이 아닌,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 (15)

    “아바 아버지”라 할 때, “아바”는 “아빠”라는 뜻입니다. 어린 아이가 처음 말을 배우면서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아바”입니다. 율법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경건한 행위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친근히 부르며 또 그렇게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아빠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 말씀을 묵상하면 사랑하는 자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이 양자의 영을 받은 성도들을 이와 같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b. 양자의 영을 받으면,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의 자격을 얻게 됩니다.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하십니다.

    ‘후사’란 상속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기 위해서는 주님과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17)하십니다.

    예수님도 친히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제자의 길은 고난의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18)하십니다. 양자의 영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된 후사”로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성령의 역할

    이제는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요, 양자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일들을 살펴봅니다.

    1.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신다. 

    지난 시간에도 살펴본 것처럼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십니다. 본문에서 율법을 ‘죄와 사망의 법’으로 묘사한 것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은 결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새 생명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겁니다.

    2. 우리를 인도하신다(14, 28)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하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수님의 약속을 붙들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이 ‘성령 충만’(행 2:4)을 받았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령 충만(filled with the Holy Spirit)이 무엇일까요 ? 어떤 신학자는 ‘성령 충만’을 ‘성령에 붙들리는 삶’으로 표현합니다. 성령에 붙들려 성령의 인도하시는 데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이라는 겁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한 뒤, 스데반 집사는 성령에 붙들려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빌립 집사는 성령에 붙들려 광야로 나갔다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행 8:26,27) 사도 바울도 본래는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할 계획을 세웠지만, 성령께서 막으시자 드로아 지방으로 내려가 기도하다가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행 16:10) 유럽으로 발걸음을 돌려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고린도, 에베소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14)이라 하십니다. 내 욕심과 생각이 아니라, 날마다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는 자가 곧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과연 어떤 길로 인도하시는 것일까요? 28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하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하심은 과정 속에는 어려움이 있어도 그 결과를 아름답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사서 애굽 땅으로 팔려가 억울한 종살이 옥살이를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사건들을 통해 요셉은 바로 왕 앞에 설 수 있게 되었고, 바로왕의 꿈을 해석해 줌으로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요셉은 훗날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한 형제들을 만나 그가 꾸었던 꿈처럼 형제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요셉의 실패와 고난도 합력하여 하나님의 더 큰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삶에도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자들은 언제나 그 결과를 좋게 하시는 즉,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3.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26)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소개한 성령님의 또 다른 이름 ‘보혜사’(파라클레토스, 요 15:26)는 “옆에 서서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Counselor(NIV), Comforter(KJV) 혹은 Helper(NASB)라고 번역해놓았습니다. 상담자, 위로자,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온전한 믿음 생활을 할 수 없음을 아셨기에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하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믿음을 지키고 사명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데,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신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하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고, 또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생각과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27) 기도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모든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으로 구하는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을 근심케 만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 응답 받는 바른 기도를 드리려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결론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요 양자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시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이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날마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고” (13), “육신의 생각이 아니라 영의 생각을 좇으며”(6) 육체의 소욕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3,14절) 하십니다.





    01-05-2025(주일) 암송성구  #. 33  믿음에 의한 생활(고린도후서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믿음으로 행하고...아니함이로라
    - 본절은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친밀성이 재림 이후의 완전함에 못미친다는 현실적인 경험이기에 세상에서 육을 입고 사는 삶이란 그리스도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의 삶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세계의 삶인 것이다(고전 13:12).

    고린도전서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Now we see but a poor reflection as in a mirror; then we shall see face to face. Now I know in part; then I shall know fully, even as I am fully known.



    믿음이란 헬라어는 “피스티스(pistis. πίστις”라고 합니다.

    πίστ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4102

    1. 믿음.   2. 신실성. 3. 엄숙한 약속
    발음 [ pistis ]
    어원  / 3982에서 유래


    περιπατέω
    스트롱번호 4043

    1. 돌아다니다.  2. 두루 다니다. 3. 나타나다
    발음 [ pĕripatĕō ]

    신약 성경에서는 “믿음(마 8:10, 롬 1:8, 히 10:22), 도(행 6:7),
    충성(갈 5:22), 신앙(빌 1:27, 히 6:1).”이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믿음(信)이란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삶을 일컬어 믿음이 좋다고
    합니다. 믿음을 사람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에도
    합당하지 않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2025년을 맞이하여 매일 성경 읽기에 따라
    말씀을 읽고 묵상의 주제를 내 삶에 적용하는
    경건 훈련을 통하여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한 해를 마감할 때 착하고 충성된 일꾼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영적으로 도약하는 일에  헌신합시다.
    2025년 영적 무브먼트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는 거룩한 순례자가 되자!

     
    나의 태신자(胎信者)를 찾아라!





    5. 사랑에 의한 생활(요한일서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 '이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는 9,10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현시된 방법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한편 '하셨은즉'의 헬라어 '에이'(*)는 사실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것으로 사실상의 이유나 근거를 의미한다. 이것은 본문이 이후에 언급되는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의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께서 주신 계명으로(요13:34,35; 15:12,17)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요한의 이 권면은 당시 사랑의 계명을 평가절하하는 이단적 교리가 수신자들 사이에 팽배해진 것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Smalley). 한편 '마땅하도다'로 번역된 헬라어 '오페일로멘'(*)은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시사한다. 물론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선택 사항은 아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당연히 나타나야 할 실천 행위이다.

    01-12-2025(요한일서 1:7)
    그리스도인의 교제하는 생활(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월 19일(베드로전서 3:15)
    증인으로서의 생활(베드로전서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월 26일(고린도후서 9:7)
    후히 드리는 생활(고린도후서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2월 2일(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월 9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리스도인의 생활 지침

    12-15-2024(주일) 암송성구 #.30 그리스도 안의 생활(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구약에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소개합니다.
    목자와 양(시 23:1), 포도나무와 농부(사 5:1-2), 왕과 백성(출 19:6), 남편과 아내(렘 3:14), 아버지와 자녀(신 32:6),
    토기장이와 진흙(렘 18:6), 독수리와 새끼(신 32:11), 반석과 피난처(시 18:2), 빛과 백성(사 60:19), 의사와 환자(렘 30:17),
    목자와 잃어버린 양(겔 34:11), 불과 쇠(슥 13:9).

    이러한 다양한 비유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단순한 계약적 관계가 아닌, 사랑과 보호, 인도와 회복의 깊은 관계임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돌봄과 보호 속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을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표현됩니다.

    신약에서 대표적인 관계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 가지(2814)
    κλῆ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2814

    1. 가지.  2. 포도나무가지. 3. 요 15:2, 4, 5, 6.
    발음 [ klēma ]
    어원  / 2806에서 유래
    • 1. 가지, 포도나무가지, 요 15:2, 4, 5, 6.
    • 관련 성경  / 가지(요 15:2, 4, 6).
    2806. κλάω    
    1. 떼다.   2. 뜯다. 3. 깨뜨리다
    발음 [ klaō ]
    1. 떼다, 뜯다, 깨뜨리다, 마 14:19, 15:36, 26:26, 막 8:6, 눅 22:19, 행 2:46, 고전 11:24.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

    성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는 여러 은유와 비유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표현들은 하나님의 사랑, 보호, 인도, 심판, 그리고 이스라엘의 배반과 회복의 과정을 깊이 있게 설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은유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며, 동시에 그 관계의 영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최고의 선물

    1. 목자와 양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양으로 자주 비유된다. 목자는 양들을 돌보고 보호하며,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양들은 목자의 보호 없이는 쉽게 길을 잃거나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목자로서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돌보심을 강조하는 은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보호자이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의 보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 은유는 하나님의 돌보심, 인도, 그리고 보호하심을 강조한다.

    2. 포도나무와 농부

    이사야 5:1-2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그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가 좋은 포도를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하나님은 농부로, 이스라엘은 그분이 심고 가꾸는 포도나무 또는 포도원으로 비유된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돌보아졌으나, 그들이 올바른 열매를 맺지 못할 때 심판을 받는 모습을 묘사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심하게 돌보고 키우셨지만, 이스라엘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불순종할 때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신다. 이 은유는 하나님의 기대와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책임을 상징한다.

    3. 왕과 백성

    출애굽기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의 신민(백성)으로 비유된다. 이 은유는 하나님께서 통치자이시며, 이스라엘은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존재임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고 지키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과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은 왕으로서 백성을 다스리시며, 이스라엘은 그분의 통치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이 비유는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충성, 순종,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강조한다.

    4. 남편과 아내

    예레미야 3: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의 남편임이라." 

    하나님은 남편, 이스라엘은 아내로 비유된다. 이 은유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상징하며, 때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충실할 때 ‘배신’과 ‘간음’으로 묘사된다. 이 관계는 언약적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남편처럼 그들을 보호하고 돌보셨으나, 이스라엘은 종종 다른 신들에게 마음을 빼앗기며 불충실한 아내로 묘사된다. 이 은유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과 이스라엘의 불성실을 대비시킨다.

    5. 아버지와 자녀

    신명기 32:6 "너희는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그는 네 아버지시니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하나님은 아버지로, 이스라엘은 그분의 자녀로 비유된다. 이 은유는 하나님의 보호, 훈육, 사랑을 강조하며, 이스라엘은 그분의 아버지 같은 돌봄 속에서 살아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로서 그들을 사랑하고 돌보시며, 때로는 그들의 잘못을 훈계하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중하며 그분의 지시를 따르는 자녀로 비유된다.

    6. 토기장이와 진흙

    예레미야 18:6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너희에게 행할 수 없겠느냐?"

    하나님은 토기장이, 이스라엘은 진흙으로 비유된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처럼 이스라엘을 원하는 대로 형성하고 빚어가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이스라엘을 빚으시며,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신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주권과 이스라엘의 순종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형성되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변화되고 완성된다.

    7. 독수리와 새끼

    신명기 32:11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하나님은 독수리, 이스라엘은 그분의 새끼처럼 비유된다. 독수리가 자신의 새끼를 보호하며 돌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그들을 위해 싸우시는 모습이 강조된다. 하나님은 강한 독수리처럼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그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도록 돌보시는 보호자의 역할을 한다.

    8. 반석과 피난처

    시편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반석 또는 피난처로 비유된다. 반석은 안전하고 견고한 보호처를 상징하며, 이스라엘은 그 반석 안에서 안전을 얻는다. 피난처는 하나님이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곳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모든 위험과 위기 속에서 보호하시는 피난처이시며,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안전을 얻는다. 이 비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주심을 강조한다.

    9. 빛과 백성

    이사야 60:19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하나님은 빛으로, 이스라엘은 그 빛 안에서 걷는 백성으로 비유된다. 빛은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역할을 상징하며, 이스라엘은 그 빛 안에서 길을 찾고 인도받는 존재로 묘사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빛이 되어 그들을 어둠에서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영광과 진리를 비추신다. 이스라엘은 그 빛을 따르며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10. 의사와 환자

    예레미야 30:1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의 상처로부터 너를 고치며 너의 질병을 낫게 하리라." 

    하나님은 치유자이시며, 이스라엘은 영적, 육적으로 상처를 입은 환자로 비유된다. 이스라엘이 병들고 연약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신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힘으로는 치유될 수 없는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치료자이자 회복자가 되신다. 이 비유는 하나님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임을 상징한다.

    11. 목자와 잃은 양

    에스겔 34:11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하나님은 목자, 이스라엘은 길을 잃은 양으로 비유된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끝까지 찾으시며, 돌아온 양을 기뻐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들을 찾으시고, 회복시키려는 은혜와 사랑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길을 잃은 이스라엘을 찾으시며, 그들이 돌아오도록 인도하신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돌아올 수 없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끝까지 찾아내신다.

    12. 불과 쇠

    스가랴 13:9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하나님은 불, 이스라엘은 그 불 속에서 연단되는 금속이나 쇠로 비유된다. 불은 이스라엘을 정결하게 하며, 그들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은 불처럼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고, 정결하게 하신다. 이 은유는 이스라엘이 고난을 통해 정결케 되고, 더욱 순수해지는 과정을 상징한다.

    이러한 다양한 비유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단순한 계약적 관계가 아닌, 사랑과 보호, 인도와 회복의 깊은 관계임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돌봄과 보호 속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을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표현된다.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If a man remains in me and I in him, he will bear much fruit;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12-08-2024(주일) 인도의 확신
    암송 성구 #.29  잠언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을 지도하시리라.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and lean not on your own understanding;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성도들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험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바른 길을 가도록 돕는 하늘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위하여 구원의 확신(요일 5:11-12)과 기도 응답의 확신(요 16:24)과 승리의 확신(고전 10:13)과 사죄의 확신(요일 1:9)과 더불어 인도의 확신을 갖고 생명의 길을 따라 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두운 바다에 등대의 빛이 방향을 찾아가도록 안내하는 것처럼 성도들은 진리의 말씀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발에 등은 현재의 길을 위한 것이며 내 길에 빛은 미래의 길을 위한 것입니다.
    날마다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상에서도 올바른 길을 가도록 돕는 보혜사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여 예수 이름으로 승리합시다. 

    12-01-2024(주일) 사죄의 확신
    암송 성구 #.28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

    흔들림이 없는 신앙생활을 위하여 다섯 가지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다섯 가지 확신이란 구원의 확신(요일 5:11-12), 기도 응답의 확신(요 16:24), 승리의 확신(고전 10:13)에 이어 사죄의 확신을 갖춰야 합니다.
    사죄(赦罪)는 내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는 것을 말합니다.
    용서(容恕)를 받으려면 먼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망각(妄覺)하기 때문에 내가 범한 모든 죄(원죄와 자범죄)를 고백하려면 하나님이 알고 있는 죄의 목록을 모두 고백해야 하므로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모든 것을 기억하도록 돕기 때문입니다(요 14:26).
    "보혜사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자백이란 헬라 단어는 "호모로게오"라고 합니다.
    '호모로게오'의 뜻은 "같은 말을 한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막연한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기억하게 하시고 그 죄를 온전히 고백할 때 용서받는 은혜를 경험할 때 비로서 사죄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11-24-2024(주일) 승리의 확신
    암송 성구 #.27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No temptation has seized you except what is common to man. And God is faithful; he will not let you be tempted beyond what you can bear. But when you are tempted, he will also provide a way out so that you can stand up under it.


    "시험(試驗)"이란 헬라어는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ός)'는 주로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하였으며, 의학적으로는 "실험한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신약에서 '시험(페이라스모스)'이란 "유혹(誘惑. Temptation)"과 "시련(試鍊. Trial)"으로 구분합니다.
    '유혹'이란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에 빠지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마 6:13, 눅 11:4, 계 2:10).
    '시련'이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연단하기 위하여 잠시동안 어려운 과정을 허락하신 것을 의미합니다(마 5:4. 10, 약 1:12, 벧전 4:12).
    '시련'을 다른 말로 '테스트(Test)"라고 합니다.
    테스트란 공장에서 상품을 세상으로 출고하기 전에 완전한 제품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으로 이 과정을 거쳐야만 소비자들이 안전하게 제품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의 품안에서 빼앗고자 할지라도 시련을 통하여 완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가시려고 잠시동안 흔들지만 그 결과는 반드시 이기도록 붙잡아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입니다.
    미쁘시다는 헬라어는 "피스토스(πίστις)"라고 하며 "신실하다"는 의미로 "믿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길에 갑자기 닥쳐온 시험 때문에 시험에 빠지지 말고 항상 함께 하시는 미쁘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승리하는 길을 선택합시다.




    '미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πίστις)는'신실(信實)하다'는 말로서 '믿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복음에 대한 지식이나 경건의 생활로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써만 그들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ός)는 종교적인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고 의학적으로는 실험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신약에서는 주로 '유혹'(temptation)이나 '시련'(trial)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유혹'이라는 것은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고(마 6:13;눅 11:4;계 2:10)
    '시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연단하기 위하여 허락하시는 것을 의미한다(마 5:4, 10;약 1:12;벧전 4:12).

    πειρασμός, οῦ, ὁ 스트롱번호 3986

    1. 시험(Test).  2. 유혹(Temptation).  3. 눅 4:13.
    발음 [ pĕirasmŏs ]
    어원  / 3085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시험(마 6:13, 행 20:19, 계 3:10), 시험하는 것(갈 4:14, 히 3:8), 시련, 재앙, 재난, 불행(눅 22:28).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 '미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πίστις)는'신실(信實)하다'는 말로서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복음에 대한 지식이나 그들이 자처하는 경건의 생활로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는것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써만 그들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었다(Hendriksen).


    πίστ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4102

    1. 믿음.  2. 신실성. 3. 엄숙한 약속
    발음 [ pistis ]
    어원  /  3982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믿음(마 8:10, 롬 1:8, 히 10:22), 도(행 6:7), 충성(갈 5:22), 신앙(빌 1:27, 히 6:1).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 본절에서 나오는 '시험 당함'의 의미를 '유혹'(temptation)과 '시련'(trial)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나누어 양자 택일의 개념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의미가 복합된 일원론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Grosheide).

    약 1:14의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 됨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욕심에 끌려 유혹을 받고 시련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러한 시련을 통하여 그들을 연단하시고 훈계하신다.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 이 말씀을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1. 시험이 임할 때 우리에게 회할 길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다는 의미로 하나님은 시험과는 무관한 분이심을 전제한다.
    2.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실 때 피할 길도 함께 예비하신다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시는 주관자이심을 전제한다(Hendriksen).
    그런데 본절에서는 '즈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쉰'(*,'...와 함께')이 사용되어 후자의 해석이 더욱 타당함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허락지 않으시며 또한 직면한 시험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시는 신실한 분이시다.












    11-17-2024(주일) 기도 응답의 확신
    암송 성구 #.26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Until now you have not asked for anything in my name. Ask and you will receive, and your joy will be complete.

    기도한다는 것은 신앙생활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기도를 구하다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구하다는 헬라어는 "아이테오( aitĕō. αἰτέω)"라고 합니다.
    '아이테오'라는 단어가 성경에서는 "구하다(마 5:42, 요일 3:22), 달라 하다(마 7:9, 눅 12:48), 달라다(마 14:7, 행 16:29), 청하다(행 25:3), 묻다(벧전 3:15)"라고 번역합니다.
    '아이테오'라는 단어와 "에로타오(ĕrōtaō. ἐρωτάω)"를 구별해야 합니다.
    '아이테오'는 "요구하다"라는 의미로' 에로타오'는 "질문하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구하라고 하였을 때의 기도는 내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요구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것과 일치하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해결하려고 구했으니 오히려 하나님은 육체의 가시를 그대로 갖고 지내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의 생각과 전혀 다른 길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내가 구하는 것이 하늘의 뜻과 일치할 때 응답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αἰτέω 스트롱번호154
    1.

    구하다

    2.

    묻다

    3.

    요청하다

    발음 [ aitĕō ]
    어원
    명령 αἴτει, 중간태 αἰτοῦ, 미래 αἰ- τήσω, 제1부정과거 ᾔτησα, 완료 ᾔτη- κα, 요일5:15, 미완료중간태 ᾐτούμην, 제1부정과거 중간태 ᾐτησάμην, 제1부정과거명령법 αἴτησαι, 미래중간태 αἰτήσομαι, 불확실한 파생어에서 유래
    • 1.
      구하다, 묻다, 요청하다[능동태와 중간태의 구별 없이 사용됨], 마7:10, 18:19, 27:58, 막15:43, 눅23:52, 행12:20, 고전1:22.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구하다(마5:42, 요일3:22), 달라 하다(마7:9, 눅12:48), 달라다(마14:7, 행16:29), 청하다(행25:3), 묻다(벧전3:15).


    ἐρωτάω 스트롱번호2065

    1.

    묻다

    2.

    요구하다

    발음 [ ĕrōtaō ]
    어원
    미래 ἐρωτήσω, 제1부정과거 ἠρώ- τησα, 2046에서 유래된 듯
    • 1.
      묻다, 질문하다, 눅22:68, 요1:25, 8:7, 9:21, 16:19,30, αὐτὸν τὰς παραβολάς: 비유에 대하여 그에게 물어보다, 막4:10, 요16:30.
    • 2.
      요구하다, 간청하다, 마15:23, 눅14:32, 요14:16, τινὰ πε- ρί τινος: 누구에게 무엇을 간청하다, 눅4:38, 요16:26, 17:9등.

    연관 단어

    󰃨 지금까지는...구하지 아니하였으나 - 여기서 '구하다'로 번역된 '아이테오'(*)는 '구하다', '질문하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에로타오'(*)와는 달리 '요구하다'란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그리고 후반절의 내용이 기도와 관련된 것이 분명하므로 본절에서는 '구하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리고 특히 '구하다'란 말이 현재형으로 언급되어 '지속적으로 기도하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L. Morris). 그리고 이 지속적인 기도는 다른 이름으로써는 소용없고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 질 때 응답이 있을 것이다. 한편 '지금까지는...아니다'라는 구절은 미래적 시간에는 어떤 일들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증보자 개념은 본절에서 아직은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아직 십자가 상에서 피흘림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성전의 휘장은 그대로 드리워져 있었으며, 신성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다(Calvin). 그러나 그의 구속 사역이 완성될 그날 곧 '조금 있으면' 제자들은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11-10-2024(주일)
    암송 성구 #.25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And this is the testimony: God has given us eternal life, and this life is in his Son.
    He who has the Son has life; he who does not have the Son of God does not have life.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생활에 성공하려면 다섯 가지 확신(確信)을 가져야 합니다.
    첫째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행하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를 믿음으로 은혜로 받은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것은 자랑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할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 받은 후에는 구원 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내 뜻을 세상에 펼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영접(迎接)"이란 한자는 " 맞을 영(迎)", "이을 접(接)"라는 뜻입니다.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맞이하여 연결한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내가 죄 가운데서 방황하며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내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내 마음을 비우면 그 빈 마음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이렇게 찾아온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합니다.

    좀 더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높은 하늘에 맑은 태양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 태양 빛을 손바닥으로 가리면 태양빛이 내게 비추이지 않습니다.
    다시 손바닥을 치우면 태양빛은 나를 비추게 될 것입니다.

    내 손바닥이 태양보다 더 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태양빛을 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양처럼 크고 빛나고 아름답게 반짝입니다.
    문제는 내 안에 감추어진 작은 손바닥과 같은 죄가 나에게 다가오는 태양빛을 멈추게 할 수 있고 가리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합니다.

    먼저 나의 죄를 깨닫고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주님을 모셔들여야 합니다.
    내 안에 주님을 모셔들이는 것을 "영접한다"고 합니다.
    천재 수학자요 물리학자인 블레즈 파스칼(Pascal, Blaise 1623.6.19~1662.8.19).


    수학자이며 철학자이었던 파스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로 올라가셨는가?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믿는다고 하는데 왜 나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을까?
    이러한 의문을 갖고 기도하며 또 질문하기를 반복하던 중에 드디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파스칼이 남긴 유명한 작품이 "'팡세'(Pensées,"생각"이라는 뜻)"라는 명상록입니다.
    파스칼은 '팡세'라는 그의 명상록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철학자와 수학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예수의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2:7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Are they not the ones who are slandering the noble name of him to whom you belong?

    만약 저와 여러분이 입만 살아 있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예수란 이름은 사람들 가운데 조롱당할 것입니다.

    2.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 받아야 합니다(베드로전서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비방을 받으면 행복한 자로다. 이는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심이라. 그분께서 그들 편에서는 비방을 받으시나 너희 편에서는 영광을 받으시느니라.


    보혈(寶血) precious blood
    성혈(聖血) holy blood


    1. 예수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영화롭게 되도록 해야 합니다(행 19:17, 살후 1:12)

    사도행전 19:17
    이 일이 에베소에 거하는 모든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에게 알려지니 그들 모두에게 두려움이 임하고 주 예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니라.

    데살로니가후서 1: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너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2. 예수의 이름으로 말해야 합니다(사도행전 4:16-18, 5:40-41)

    사도행전 4:16-18

    ...그들을 불러 명령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결코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라.

    사도행전 5:40-41
    이에 그들이 그의 말에 동의하고 사도들을 불러서 때리고 명령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 하고 놓아 주니라. 

    3.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행9:27-29).
    [바나바가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마스커스에서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선포한 것을 밝히 말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그리스파 유대인들을 논박하매 그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하거늘](행9:27-29).


    5. 예수의 이름으로 죽어야 합니다(행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슬피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죽는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노라, 하니](행21:13).

    6.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요13:13-14,요15:26,요16:23).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3,24).

    7.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야 합니다(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한 가운데 있느니라.]

    8.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골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골3:17).





    예수란 이름은....

    예수란 이름은 신약 성경에서 935회나 나옵니다.
    마리아가 처음으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이 이름을 들었습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1). 그 다음으로 요셉이 꿈에서 예수란 이름을 들었습니다. [이 일들을 생각할 때에, 보라, 주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녀에게 수태된 이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임이라, 하니라.](마1:20,21).

    예수란 이름의 예(JE)는 여호와(JEHOVA)의 준말입니다.
    예수는 여호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란 뜻으로 신성을 나타냅니다.
    수(SUS)는 SAVIOUR의 준말입니다.
    이는 주님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1. 예수란 이름은 구원의 근거(사도행전 4:12)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하늘 아래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느니라.]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among men, whereby we must be saved.
    이 이름으로 우리는 구원받아야만 하리라.(직역)
    MUST란 말에 주목하라.**

    2. 예수란 이름은 설교의 주제(사도행전 8:35, 고린도후서 4:5)

    오늘날 교회가 급속히 타락하는 것은 설교의 주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속화된 설교, 심리학적인 설교,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 설교,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설교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이에 빌립이 입을 열어 그 성경 기록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에게 예수님을 선포 하니라.](행 8:35)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다 정작 예수님을 선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전도의 주제, 설교의 주제는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선포하고 또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었음을 선포하노라.] 한글 성경에 오역이 되어 있어서 바로 잡았다.(고후4:5).

    3. 예수란 이름은 사역의 목표(사도행전 15:26)

    [이 사람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자들이니라.](행 15:26).  
    우리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일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서 일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4. 예수란 이름은 모든 것을 굴복시키는 권위(빌립보서 2:9-1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들로 하여금 다 예수라는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빌 2:9-10)

    5. 예수란 이름은 섬김의 동기(

    [...이는 그들의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들에게서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하였음이라.](요삼 5-8). 사도 요한은  주님의 사역자들을 물질로 후원하는 이들을 칭찬하였습니다.

    6. 예수란 이름은 기도의 힘(요한복음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3-14).

    7. 예수란 이름은 모든 말과 행동의 기준(골로새서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



    예수의 이름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예수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영화롭게 되도록 해야 합니다(행19:17,살후1:12).
    [이 일이 에베소에 거하는 모든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에게 알려지니 그들 모두에게 두려움이 임하고 주 예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니라.](행19:17).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너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1:12).

    2. 예수의 이름으로 말해야 합니다(행4:16-18,5:40-41)
    [...그들을 불러 명령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결코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라.](행4:16-18),
    [이에 그들이 그의 말에 동의하고 사도들을 불러서 때리고 명령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 하고 놓아 주니라.](행5:40-41)

    3.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행9:27-29).
    [바나바가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마스커스에서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선포한 것을 밝히 말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그리스파 유대인들을 논박하매 그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하거늘](행9:27-29).

    4.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 받아야 합니다(벧전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비방을 받으면 행복한 자로다. 이는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심이라. 그분께서 그들 편에서는 비방을 받으시나 너희 편에서는 영광을 받으시느니라.](벧전4:14).

    5. 예수의 이름으로 죽어야 합니다(행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슬피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죽는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노라, 하니](행21:13).

    6.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요13:13-14,요15:26,요16:23).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3,24).

    7.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야 합니다(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한 가운데 있느니라.]

    8.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골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골3:17).

    9. 예수의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약2:7).
    만약 저와 여러분이 입만 살아 있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예수란 이름은 사람들 가운데 조롱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너희가 일컬음을 받는 그 귀한 이름을 모독하지 아니하느냐?](약2:7)
    예화) 알렉산더 이야기- Change your name, or Change your ways.





    고린도후서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For he says, "In the time of my favor I heard you, and in the day of salvation I helped you." I tell you,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이 구절은 이사야 49장 8절을 인용한 것으로 여호와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백성들이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의 의미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이다(Lowery).
    둘째는 구원의 때가 도래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Harris, Barrett).
    셋째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때가 도래했을 뿐만 아니라 그 때의 긴급성을 강조하는 것이다(Tasker).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이며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은혜를 받아야 할 시기는 바로 지금입니다.
    왜냐하면 한치 앞을 모르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런 죽음을 알리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죽음이 점점 더 가깝게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를 확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이란 다섯 가지 내용을 갖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도의 응답과 영적 싸움에서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것과 모든 죄악을 용서받았다는 것과 알 수 없는 내일도 주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 이 구절은 이사야 49:8의 인용이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으로 바벨론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이 놓임을 받고 완전히 회복된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바울은 이 예언의 말씀을 복음 시대에 적용하고 있다.
    바울의 이 인용이 뜻하는 바는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Lowery), 그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는 때가 도래(到來)했음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Harris, Barrett).
    바울은 본절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때가 도래했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 때의 긴급성을 강조하고 있다(Tasker).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본절의 앞 부분에서 언급한 바, 구원의 때가 도래했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 구원은 바로 '지금'(*, 뉜) 바울이 전하는 화해의 복음을(5:18-21)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나 이 '때'는 항상 지속되지는 않는다.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없어지는 날 곧 주께서 재림하실 날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눅 12:40), 도적같이 임할 것이다(살전 5:2).
    따라서 바울이 복음을 선포하는 그 순간은 곧 종말론적인 '결단의 때'라고 할 수 있다((Cullmann).
    또한 이 '결단의 때'는 각 개인에게 올바로 선택해야 할 책임이 부과된 '책임의 때'이다.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라는 외침을 듣는 사람들이 그 메시지와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을 경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며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Hughes).






    10-20-2024(주일)
    암송 성구 #.22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영광(榮光) -

    7. [요한복음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8. [요한복음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9. [요한복음 12: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10. [사도행전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16. [빌립보서 1: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께 영광(榮光)

    영광(榮光) - 영화 영(榮), 빛날 광(光)

     불 화(火) + 불 활(火),
     덮을 멱(冖)
    나무 목(木) = 사람 인(人) + 열 십(十)

    * 영화 영자는 사람이 십자가와 같은 무거운 짐 또는어려운 짐을 짊어진 후에 내가 하였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리면
      그 후에 불꽃이 피어오르듯이 하나님께 희생 제물이 연기가 되어 올라가듯(번제, 올라)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빛 광(光) = 작을 소(小) + 어진 사람인 발(儿)

    * 빛이 되려면 먼저 내가 작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작은 마음과 생각이 어진 사람의 흔적으로 새겨져야 합니다.
      사람은 욕망이 강하여 내가 무엇을 행한 후에 내가 하였다는 자기 의(義)에 도취되기 쉽습니다.

    헬라어의 영광 - 독사(dŏxa) δόξα, ης, ἡ 스트롱번호 1391

    1. 광명.   2. 눅 2:9.  3. 위엄
    발음 [ dŏxa ]
    어원  / 1380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광(마 4:8, 막 8:38, 눅 2:9), 광채(행 22:11), 영화(榮華)(요 17:5).
    • 1380. 도케오(dŏkĕō) δοκέω   

      1. 생각하다.
      2. ἐδό κουν πνεῦμα θεω- ρεῖν : 그들은 귀 신을 보는 것으로 믿었다
      3. εἴ τις δοκεῖ σοφὸς εἶνα ι: 만일 누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한다면
      발음 [ dŏkĕō ]
      관련 성경 / 
      생각하다(마 3:9, 눅 17:9, 요 11:13), 주관하다(막 10:42), 알다(눅 1:3, 요 20:15, 행 15:28), 가결하다(행 15:22), 유력하다(갈2 :6), 보이다(고전 12:22), 여기다(고후 11:16). [명] 생각(마 17:25, 21:28, 요 11:56), 의견(눅 10:36).


    * 헬라어의 영광이란 스쳐가는 가벼운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깊은 생각 즉 묵상의 결과라고 하겠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를 당했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다쳤는가? 보험금이 얼마나 되는가? 이런 생각을 먼저 한다.
      그러나 영광을 돌리려는 사람은 어려운 사건과 사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가?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혹시 어긋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줄 아는 것이라고 하겠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어로는 ‘카보드’,
    헬라어로는 ‘독사’

    세상 모든 피조물과는 전혀 다른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완전성과 탁월성을 뜻합니다.
    특별히 당신께서 신자에게 임재하실 때에 찬란한 빛이 동반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glory, 한글로는 영화로운 빛(榮光)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실체를 인간은 결코 상면할 수 없습니다.
    추악한 것과는 단 일초도 공존하지 않으시는 완전한 선이신 그분의 존전 앞에 죄로 찌든 인간이 서면 당장 소멸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매개체를 통해서 혹은 천사를 대신 보내어서 인간을 만나주십니다.

    대표적인 예로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또 시내 산을 덮은 구름이나 이스라엘의 성막위에 머문 구름을 통해 당신의 임재를 보여주시고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출 24:16, 40:35) 그러다 성자 하나님 예수는 사람이 직접 뵙고 만나도 죽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사랑을 받아 누릴 수 있도록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스데반이 순교할 때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회심시킬 때에 실제로 영광스런 빛 가운데 임재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실제적인 임재 앞에 서게 되면 엄청난 경외감에 사로잡혀서 아무 말도 못하고 얼어붙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그분께 내어드리며 그분의 처분만 기다리며 겸손히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자 자기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으로 망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듯이 말입니다.(사 6:3)
    그런 고백을 받으신 하나님은 진노의 형벌 대신 은혜의 구원을 베푸시고 당신의 자녀와 종으로 세워주십니다.
    그럼 넘치는 감격과 기쁨으로 저절로 그분을 향해 감사 찬양 경배를 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골고다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완전하게 실현되었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죄인들의 죄 값을 감당하시고 구원해주시는 은혜는 인간은 상상도 못할 하나님만의 완전한 의이자 탁월한 선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에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헬라어로 영광-‘독사’의 타동사형 ‘독사조’, 영어로 gloryfy로 번역됨)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라고 기도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주님이 이제 곧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서 성부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감당하심으로써 성부와 성자 모두가 영화롭게 된다고 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사실상 당신의 가르침, 섬기는 사역, 기적들, 그리고 십자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는데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그분이 자기 땅에 왔는데도 자기 백성들이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1:9-18) 사탄은 자기 종들을 충동시켜서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으나 사탄의 그 모략마저 당신의 영광을 온 천하에 완전하게 드러내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진리의 영, 성령님이 오셔서 제자들로 십자가에 드러난 그 영광의 실체에 대해 정확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셨던 천국 복음과 십자가 구원의 의미를 풀어서 성경으로 저작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의미를 밝힌 성경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기에 필요 충분한 영적 진리가 온전히 계시된 것입니다. 거기다 신자에게 그 진리를 잘 분별하여 자기 삶에 반영할 수 있도록 성령님이 평생토록 내주해주십니다. 신약시대에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하나님이 굳이 매개체나 천사의 모습으로 신자에게 영광 가운데 임재 해주실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사역이 이뤄지기 전이었고 성경도 완비되지 않았으며 성령님도 일시적 부분적으로만 역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통으로 계시하거나 직접 임재해서 당신의 뜻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던 때와 신약시대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 이후의 영광

    바꿔 말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개념을 바꿀 필요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단순히 당신의 위엄과 권능을 과시하려고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서 보듯이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특별히 이 땅과 인간을 다스리는 뜻과 계획을 밝혀서 보여주기 위해서만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신약성경으로 당신의 뜻이 온전히 계시되었으니까 더 이상 가시적인 존재로는 거의 임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신약신자들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그 영광을 인식할 수 없게 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가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절감하면 바로 그분을 대면한 것이고 그분의 영광도 가시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영적으로 접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어떤 일이 하나님이 아니고는 절대로 행할 수 없는 그분의 역사라는 확신이 들면 사실상 그분을 대면한 것입니다. 맨 처음 성령으로 거듭날 때부터가 그러합니다. 신자는 인식하지 못해도 연약한 피조물인데도 그분의 주권적 택함을 받아서 거부할 수 없는 그분의 불가항력적인 구원의 은혜를 입는 것부터 그분의 영광이 강력하게 임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성령의 중생의 은혜를 입은 신자는 자연히 “어찌 나 같은 천하의 죄인에게 이런 구원의 크신 은혜를 베푸시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아주 뛰어난 업적을 쌓은 존경 받을 만한 인물을 대면해도 “제게 너무나 큰 영광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분이 나를 만나주어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그런 차원과도 비교조차 안 되는 너무나 고귀한 은혜이므로 자연히 감사 찬양 경배를 올리게 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배 중에 십자가 은혜를 감사하는 찬양을 부른 후에 성도들은 진심으로, 단순히 종교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만의 탁월함과 완전함입니다. 신약시대에는 눈에 안 보이지만 그분의 영광은 더 다양한 방식으로 더 빈번하게 신자에게 비춰집니다. 대표적으로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깨닫고 소름이 끼치도록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 깨달은 대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신다고 절감하면 감격은 두 배로 늘어납니다.

    예배, 설교, 성경공부, 찬양, 기도, 성도교제, 전도나 선교, 교회와 지역사회에서 봉사, 이웃 사랑, 사회적인 선행 등등 신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면 반드시 그분이 함께 동행해주십니다. 신자도 지금 그분이 분명히 나와 함께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자신이 전혀 계획 의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내 인생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더 확실히 인식되고 그분의 뜻까지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그럼 그 자리에 엎드리고 눈물이 절로 흐르도록 감사와 경배를 돌리게 됩니다. 영광이라는 히브리어 카도사는 원래 ‘무게’나 ‘중압감’이라는 뜻인데 하나님이 신자에게 임재하면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기에 영광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고난 가운데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것입니까? 이 또한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통해서 당신다우심을 드러내신다면 그분의 영광이 함께 한 것입니다. 물론 전적으로 신자의 죄나 잘못으로 일어난 고난이라면 고난 자체에 그분의 영광은 없습니다. 죄 자체의 부작용과 폐해가 고난으로 닥쳤고 신자로서 그분의 징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 잘못으로 인한 고난 중에도 신자가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의 기도를 하면서 그 잘못을 고쳐나가면 하나님이 고난을 없애주고 더 거룩한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그런 구원을 인식하고 자신의 회개마저도 당신께서 간섭해주신 은혜라고 확신하면 그분의 영광을 대면한 것입니다. 그분께 한층 더 깊어진 감사 찬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욥처럼 믿음을 성숙시키기 위해서 또 아브라함처럼 열방 앞에 복의 근원으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의도적으로 신자에게 연단을 겪게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도대체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도 못하며 하나님께 원망만 하게 됩니다. 그러다 끈질기게 기도하며 그분과 영적인 씨름을 해나가면서 그 연단의 의미를 깨닫고 잘 순응하면 고난 중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대면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신자가 진정으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동행을 이어가면 그분의 영광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로 그분을 만나서 영광을 보려고 간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영광을 돌리는 방법

    그럼 신약 신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접한 신자는 자연히 감사 찬양 경배를 돌리게 된다고 이미 말씀드렸지만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다 가르쳐주셨습니다.

    마지막 만찬 때에 기도하신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었고 또 성자로서 성부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더러 전부 십자가에 죽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늘날 그런 정도의 핍박은 없으며 굳이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십자가에서 절정으로 드러났기에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을 자신의 삶에 구현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이 땅과 인간을 다스리는 목적과 방향은 오직 하나입니다.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베풀려는 것입니다. 창조 때부터 신구약시대를 거쳐서 마지막 날까지 인류의 전 역사는 십자가 구속사입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으면 온 동네에 잔치가 벌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이 한 명이라도 구원 받을 때에 하나님은 가장 영광스럽게 여기고 또 신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그 일에 기여하면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 개인의 인생이나 그가 속한 공동체에 현실적으로 풍요를 주던 고난을 겪게 하던 당신만의 구속역사를 이뤄나가는 것입니다. 신자가 겪는 어떤 고난이라도 그런 방향으로 그분의 역사가 임하면 그분의 영광도 함께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단지 현실적 축복을 받고 그에 상응한 감사헌금 혹은 교회봉사를 더 많이 한다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고난을 겪게 했으니 그분께 영광을 돌릴 것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틀린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이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10:31-33)

    ‘그런즉’이라고 시작하니까 바로 앞에서 설명한 내용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신자들이 시중에 파는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알다시피 당시에는 고기가 귀해서 우상 신전의 음란한 예배에 바쳐진 후에 판매되었습니다. 신자로선 그런 고기를 사먹기가 꺼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우상 자체는 실존하지 않으니까 그에 바쳐진 것도 아무 의미가 없으므로 신자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전제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믿음이 그 정도까지 확고하지 않는 연약한 신자나, 우상이 있다고 믿는 주변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가 자기들 계명을 위반한다고 비방할 가능성이 있다면 먹지 않는 것이 좋다고 권면했습니다. 신자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나 좋은 일을 다른 사람의 믿음을 위해서 또 복음 전파에 방해되지 않도록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스스로도 그런 위험이 있다면 평생 동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후에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라고 말했기에 바로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처럼”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종교적 관습이나 의식에 따른 경건한 행동보다는 오직 십자가 복음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가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행을 많이 하고 종교적 활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특별히 하나님께 헌금 헌물을 많이 바치고 종교적 행위를 열심히 뜨겁게 행한다고 해서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지는 모습이 드러나야만 합니다. 신자가 자신의 삶과 하는 일을 통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주변에 전파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신자부터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며 그분이 이 땅에서 살았던 삶대로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믿음이 연약한 신자는 그런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또 삶의 여러 측면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모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분의 탁월하심과 완전하심을 있는 그대로 순전하게 인정하면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 일은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라고 인식할 수 있다면 그분께 진정으로 감사하면 됩니다.

    그런 인식이 안 되어 당장은 잘 이해할 수 없는 경우라도 반드시 그분만의 거룩한 뜻이 있을 것이라고, 최소한 그분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진리 하나라도 겸허하고도 확고하게 인정하면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난 중에 원망과 의심을 앞세우기 보다는 그분의 뜻을 묻고 또 묻는 것부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다섯 솔라 – 오직 하나님께 영광

    Five Solas 다섯 솔라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다섯 솔라’ 시리즈의 마지막인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라틴어를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혹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차치하고, 최소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나는 내가 제일 중요해.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 하나님의 영광은 나하고 관계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고, 그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하시며 우리에게도 그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은 성경에서 우리가 놓칠 수 없는 분명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시작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선포합니다(창 1:1).
    누구도 아무런 의미나 목적 없이 무언가를 만들지 않습니다.
    더구나 인격체이신 하나님께서 또 다른 인격체인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창조의 목적은 시편을 비롯한 다른 말씀들에서 계속해서 나오는데, 이사야서에서는 특별히 하나님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동일합니다. 구원은 마치 ‘재창조’와 같아서, 성경은 구원을 새로운 창조로 말하기도 하고 창조에 사용된 언어를 그대로 구원에 적용하여 사용하기도 합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엡 2:8-10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목적도 창조의 목적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성경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이렇게 명령합니다.

    시 96:1-3 [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2]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3]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 당시의 가톨릭 교회도 하나님의 영광을 표면적으로 부정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가르침과 실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져 있었고 다른 것들이 영광을 (하나님과 함께) 얻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교회의 믿음과 삶에 있어 가장 높은 권위의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황과 의회가 결정한 전통이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이신데, 마리아나 다른 성인들, 사제들이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구원인데, 우리가 무언가를 거기에 더해야 하고 더할 수 있다고 가르쳐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과 실천에는 공통으로 하나님과 그분께서 하시는 일에 사람과 사람의 행위가 더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결과적으로는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이 함께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오직’은 이런 것들을 바로 잡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쯤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완전하고, 다른 피조물과는 구분되고, 무한히 위대하신 하나님의 속성이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하고 구분되며 무한히 위대하신 속성, 즉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거룩이라고 말하고,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겉으로 표현되는 것을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잘 드러난 말씀은 이사야 6장 2~3절입니다.

    사 6:2-3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스랍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분을 ‘거룩하다’고 선포했고, 온 땅에 충만한 그분의 거룩하심을 ‘영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어떤 면이 겉으로 드러나면 그것이 영광보다는 수치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완전하시고 무한히 위대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어떠하심이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그분께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결국,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혹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잘’ 혹은 ‘그대로’ 드러나게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말씀에 따라 모든 것을 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일입니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중보자가 되신 것을 인정하고 그리스도께만 나아가는 것이 그렇게 하는 일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내가 무엇을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믿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 구원임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시고, 하나님이 구원자시고, 하나님이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오늘날에 적용할 때, 두 가지 주의할 점을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첫째는, (당연한 얘기지만)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성취에 도취하여서 마치 내가 모든 것을 이뤄낸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말만 그렇게 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 생각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아름다움, 위대하심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더 말씀을 배우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그분께서 우리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중 단 하나라도 ‘내가’ 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합니다.

    두 번째는, 마치 우리가 무언가를 성취해서 얻어낸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 쉽게 말해 “하나님 덕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약간은 생각의 방향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핵심은 우리가 무엇을 해냈느냐, 성취했느냐가 아닙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잘’ 드러나셨냐가 핵심입니다. 내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잘 드러났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직장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고백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니가 거기까지 가려고 얼마나 아부를 떨고 돈을 갖다 바쳤는지 내가 아는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어떨까요? 아무리 잘 포장해서 말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직장에서는 말단 사원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도 눈속임으로 일하지 않고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한다면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늘나라의 소망 가운데 기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분명 영광 받으십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이루었느냐, 앞으로 무엇을 이룰 것이냐가 아니라, 지금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모습을 드러내고 있느냐입니다.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길 원합니다. “내 생각, 말, 삶에서 하나님은 바르게 드러나고 계신가? 나를 통해 보여지는 하나님의 모습은 왜곡되어 있지 않은가?” 유명한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한 헨델은 악보의 끝에 “S. D. G.”라는 약어를 기록했습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입니다. 우리 삶의 매 순간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 우리 삶의 끝에 “S. D. G.”라는 세 글자를 힘차게 외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마음가짐이나 언행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우리를 대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말과 품행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도 있고 드러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장 16절

    우리들의 착한 행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회개시키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동기가 된다면 그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흐뭇하시겠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성도들에게 선행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벧전 2장 12절

    진리가 아무리 옳다 해도 성도들의 행실이 악하다면 복음의 빛은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도 옳고,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의 됨됨이도 아름답다면 복음의 빛은 더욱 밝아질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많은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고전 3장 16절). 하나님과 하나 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닮아갈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장 5절

    “…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 1장 4~7절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이와 같은 아름다운 행실들을 교회 안팎에서 행한다면 믿음의 식구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선하다는 증거를 얻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본받지 말라 경고하고 있습니다(롬 12장 2절). 그러므로 이 악한 세대 속에서도 우리는 세상의 풍조에 동요될 것이 아니라 고운 말씨와 착한 마음씨, 아름다운 행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생각할 문제

    1.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선한 행실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한 행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33)

    유명한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쓴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유명한 논문이 있습니다. 
    루터는 이 논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요점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자유로운 만물의 지배자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충성스러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이 말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에서 자유함을 얻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유롭게 된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만물의 지배자로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육신적으로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웃과의 관계에서 종처럼 그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러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교훈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본문에 앞서 성도는 자기의 신앙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자유가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부터 삶의 중요한 문제까지 결정하며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상의 문제들을 선택하고 결정하는데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31절 말씀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최종적인 결론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삶의 목적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참된 성도의 신앙과 생활을 정확하게 요약한 핵심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모든 행위의 기준, 전 인생의 기반 역시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아주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 즉 그것이 먹는 것이든지 마시는 것이든지 생업의 일이든지 봉사의 일이든지 무슨 일이든지 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급함과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오늘 중추절을 맞이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하나님이 영광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목적을 바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존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그 목적인 무엇인지 알아야 분명한 삶을 살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을 상실하고 있다면 존재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존재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치창조의 수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적을 상실하면 자연히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는 마치 땅만 허비하고 세월만 허송하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목사님은 말하기를 "실패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목적이 잘못된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가장 잘 인식한 사도 바울은 빌 1:20-2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이 고백을 통해 자신의 존재목적이 예수님을 존귀하게 해드리기 위함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존재목적도 역시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우리 한국교회에 ‘목적이 이끄는 삶’ 열풍이 불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새들백 교회 릭 워렌 목사님을 통해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열풍이 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우리 한국교회가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되었다면 지금쯤 우리 한국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아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세상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을 모든 사람들이 살기 좋은 천국, 즉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것이 교회의 소명이고 사명이며 교회의 존재목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그 목적을 잊었습니다. 
    세상을 등졌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잊었습니다. 교회가 교회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부흥, 교회의 성장이 교회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성장이 목적이 되고, 교회의 부흥이 목적이 되어 온 교회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느 정도 그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세계에서 제일 큰 장로교회, 세계에서 제일 큰 감리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점점 커지는데 교회는 점점 그 생명력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는 점점 그 아름다움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의 존경을 받고 인정을 받던 교회는 점점 세상의 지탄을 받고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교회로 추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교회가 교회의 존재목적을 잃으면서 교인들도 존재의 목적을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자 되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은 목적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목적을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겠다고 하는 것만 달라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처럼 소중한 소명을 잊었습니다. 사명을 잊었습니다. 자신의 존재목적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잃어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의 능력은 상실한 사람들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삶의 목표와 목적을 수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성공만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과 소명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어리석은 삶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목적을 다시 한 번 세우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개념이 무엇인지는 잘 알아야 합니다. 영광의 개념을 생각할 때 항상 두가지 개념 즉, 하나님과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표현도 있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의 영광의 개념은 “하나님의 임재나 나타내심”의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2장에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행하실 때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11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갈릴리 가나의 한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드러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과 사랑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내고, 알려주고, 보여주며, 높이는 방편이 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신원 에벤에셀 박성철 회장은 장로님입니다. 20여 년 전 남의 건물 얻어서 조그맣게 봉제공장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물질의 복을 주시면 수입의 30%를 하나님 영광을 위해 쓰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오늘날 그 기업은 신흥재벌의 순위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사업을 하든, 운동을 하든, 공부를 하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일차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드러내고 보여주며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의 전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데 두었습니다. 

    롬 14: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제일의 목적이 바로 인간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목표를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말씀합니다. 사 43:7절에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 목적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나타나는 중요한 열매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32-33절에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자유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성도든지 아니든지, 아니면 나와 관계있는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관계없이 그들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유익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거미같이 자기만 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손해나게 하며 해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개미와 같이 부지런히 살기는 하는데 전적으로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부지런히 일하는 꿀벌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꿀벌은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갑니다만 그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삶의 결과는 반드시 영혼을 구원하는 것으로 연결되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여 영생 얻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은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 6:39-40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구원받아 영생을 소유한 우리 성도들의 삶은 어찌하든지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일에 목표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믿기를 권하고, 예수 믿게 하여, 우리와 같이 영생을 얻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 생애의 최대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한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해 그들의 영혼을 건져야합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서 시간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고 재능을 바치는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실 때 복음을 위해 생명까지 바친다면 최고의 영광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무슨 일을 하든지 궁극적인 목표를 영혼구원에 두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무엇을 하든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과 박해와 핍박을 각오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내 가족, 내 친지,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혹 아직도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어둠의 세계에서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습니까? 






    10-13-2024(주일)
    암송 성구 #.21  고린도후서 5:17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호스테 에이 티스 엔 크리스토 카이네 크티시스 타 아르카이아 파렐덴 이두 게고넨 카이
    ωστε ει τις εν χριστω καινη κτισις τα αρχαια παρηλθεν ιδου γεγονεν καινα τα παντα

    신약 성경의 언어 헬라어에서 "새롭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는 "카이노스(kainŏs)"와 "네오스(nĕŏs)"라고 합니다.
    '카이노스'는 질적으로 온전하게 새롭게 된 변화를 말합니다.
    반면에 '네오스'는 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휴대전화의 새로운 제품이 소개될 때 그 신제품을 가리켜 '네오스'의 변화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후에 그의 삶이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면 그 사람의 변화를 일컬어 '카이노스'의 변화라고 합니다.

    현대인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목회자가 목회자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을 때
    둘째는 교회가 지역사회에 유익이 되지 못할 때
    셋째는 교인들의 비신앙적인 삶

    이러한 이유의 근본적인 원인은 '네오스'의 변화에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카이노스의 변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지는 카이노스의 변화'를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표현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의미한다. 이 연합의 비밀에 대해 사도 요한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관계로 설명했다(요 15:1-7).

    새로운 피조물(크티시스. ktisis.  κτίσις)
    - 새로운 피조물이란 외적인 모양이 아니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있는 내적 능력을 갖는 것이다.

    2537. 카이노스  καινός, ἡ, όν 

    1. 새로운.  2. 쓰지 않은.  3. 알려지지 않은
    발음 [ kain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 1. 새로운.
      • a. 쓰지 않은, 써보지 않은, 마9:17, 막2:22, 눅5:38.
      • b. [전에는 없었던 이라는 뜻으로] 알려지지 않은, 낯설은, 놀라운, 막1:27, 요13:34, 행17:19, 계2:17.
      • c. [옛 것이나 낡은 것의 반대] 마26:28, 막14:24, 눅22:20, 고전11:25, 고후5:17, 갈6:15, 엡4:24, 벧후3:13, 계21:1.
    • 관련 성경 /  새(마9:17, 눅5:36, 계2:17, 마13:52, 막2:21, 고후5:17), 새로운(고후5:17, 계21:5), 새로 되는(행17:21).



    카이노스 정의

      1. 형식에 관하여
        1. 최근에 만든, 신선한, 최근의, 사용하지 않은, 입지 않은
      2. 실체에 관하여
        1. 새로운 종류의, 전례 없는, 참신한, 흔하지 않은, 들어본 적이 없는

    성경의 맥락에서 그리스어로 '카이노스'는 무엇을 뜻합니까?

    Kainos는 종종 "새로운"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로 성경 본문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의 맥락에서 Kainos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뿐만 아니라 신선하고 질적으로 다른 것을 가리킵니다.
    시간적 의미에서 단순히 젊거나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neos"라는 단어와 달리 Kainos는 더 큰 영적 갱신이나 변형을 의미합니다.

    νέος, α, ον 스트롱번호 3501

    1. 새로운.  2. 상징적으로 쓰일 경우. 3. ἐνδύσασθαι τὸν ν. : 새사람을 입다
    발음 [ nĕŏs ]
    관련 성경  /  젊은(요21:18, 행5:6, 딤전5:11). [명] 젊은 이(딤전5:1,14), 젊은 자(눅22:26).

    성경에 나오는 언어의 중요성

    언어는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됩니다.
    신약의 원래 언어인 그리스어는 뉘앙스와 의미가 풍부합니다.
    각 단어는 사용법, 맥락 및 역사적 배경에 따라 다른 측면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Kainos와 Neos와 같은 단어의 구별은 독자가 의도한 메시지를 더 충분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신약성경에서의 카이노스의 용법

    1. 예수의 가르침 속의 카이노스

    복음서에서 카이노스는 예수의 중요한 가르침에 등장하여 그의 메시지의 변형적 측면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9:17에서 예수는 새(카이노스) 포도주를 새(카이노스) 포도주 부대에 넣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은유는 단순히 기존 전통에 패치할 수 없는 새로운 신앙 접근 방식의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예수는 그의 언약이 모든 것을 바꾸는 새로운 관점을 가져온다고 강조합니다.

    2. 바울서신의 카이노스

    사도 바울은 그의 글에서 자주 카이노스를 사용했습니다.
    고린도후서 2:5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 창조물(카이노스)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고 보라 새 것(카이노스)이 왔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믿음을 통해 일어나는 완전한 변화를 강조합니다.
    그것은 옛 생활 방식에서 성령으로 활기차고 능력을 받은 생활 방식으로의 변화를 나타냅니다.

    3. 새 언약 개념과의 연결

    카이노스는 또한 새 언약에 대한 논의에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실 때, 그것은 카이노스 원칙을 낳습니다.
    히브리서 8:13에서 저자는 옛 언약이 쓸모없게 되고 있으며, 암묵적으로 카이노스 언약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새 언약은 용서, 내적 변화, 그리고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제공합니다.

    Kainos를 다른 그리스어 용어와 비교

    Kainos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다른 그리스어 단어와 비교하는 것이 좋습니다.
    Kainos는 신선함과 변화를 강조하는 반면, 시대나 시간에서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Neos는 그 변화의 깊이를 전달하지 않습니다.

    Kainos가 Neos와 다른 점

    Neos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것, 아마도 최신 자동차 모델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변형보다는 연대기와 더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Kainos는 심오한 갱신을 암시합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후 Kainos가 된 사람은 단순히 새로운 삶의 단계로 나이를 먹은 것이 아니라 영적 상태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카이노스

    요한계시록은 카이노스의 궁극적인 표현을 요약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서 "나는 새(카이노스) 하늘과 새(카이노스) 땅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흥분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혁신이 아니라 창조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완전히 회복됩니다.
    죄와 고통으로 점철된 옛 질서는 순수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자리를 내줍니다.

    카이노스의 영적 의미

    1. 갱신과 변형

    성경의 카이노스 개념은 신자들이 변화를 받아들이도록 격려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갱신에 대한 부름이며, 믿음에 뿌리를 둔 새로운 정체성을 위해 오래된 습관과 사고방식을 벗어던지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개인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계와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2. 미래에 대한 희망

    Kainos는 다가올 것에 대한 희망을 구현합니다. 신자들은 그들의 영적 삶의 궤적이 새롭게 되고 더 나은 것을 향한 길을 따른다는 것을 상기합니다. 이 희망은 시련과 고난 중에 인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3. 참여 초대

    Kainos를 이해하는 것은 또한 신자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 성경 읽기, 영적 각성을 촉진하는 커뮤니티의 일원이 됨으로써 성장을 기르도록 격려받습니다. 매일 Kainos 경험을 위한 기회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힘을 드러내는 은혜의 순간입니다.

    결론

    Kainos는 성경 이야기에서 엄청난 깊이를 드러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요 성경에서 마주치는 용어로, 피상적인 방식으로 새로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완전한 개혁을 나타냅니다. 이 단어를 이해하면 신자들은 신앙의 변화시키는 힘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도록 격려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갱신이 절실히 필요한 세상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공합니다.

    Q. 카이노스의 문자적 번역은 무엇입니까?
      A. Kainos는 종종 "새로운"으로 번역되며, 단순한 연대순의 새로움을 넘어 신선하고 질적으로 다른 것을 나타냅니다.

    Q. 신약성서에서 카이노스는 어디에 자주 언급됩니까?
      A. 카이노스는 마태복음 9:17, 고린도후서 2:5, 요한계시록 17:21 등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Q. 카이노스는 새 언약의 개념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A. 카이노스는 쓸모없는 옛 언약과 대조적으로, 예수를 통해 확립된 새롭고 변혁적인 관계를 구현합니다.

    Q. 카이노스는 신자들의 영적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나요?
      A. 카이노스를 이해하는 것은 신자들이 믿음과 행동을 통해 삶에서 개인적 변화와 갱신을 받아들이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

    Q. 카이노스는 신약에만 나오나요?
      A. 카이노스는 주로 신약성서에서 발견되지만, 그 개념은 다양한 형태로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공명합니다.

    Q. 카이노스는 신학적 토론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요?
      A. 카이노스는 새로운 삶, 재생, 그리고 신자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역의 본질에 대한 토론을 촉진합니다.

    Q. 카이노스는 성경적 맥락 밖의 일상 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까?
      A. 네, 새로운 시작과 변화라는 개념은 일상적인 결정과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Q. Kainos는 성경의 죄 개념과 어떻게 관련이 있습니까?
      A. 카이노스는 죄에 지배받던 옛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의로움으로 능력을 얻은 새로운 삶을 소개합니다.

    Q. Kainos와 Neos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차이점을 이해하면 독자는 기독교 신앙에서 요구되는 변화의 깊이를 인식하고 변화에 대한 오해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Q. 신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카이노스 생활을 추구할 수 있습니까?
      A. 신자들은 기도, 성경 공부, 지역 사회 참여, 그리고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반영하는 봉사 활동을 통해 Kainos의 삶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2937. 크티시스 κτί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2937

    1. 창조.  2. 창조하는 동작. 3. 창조된 것
    발음 [ ktisis ]
    어원 / 2936에서 유래
    창조(막 10:6, 히 9:11, 계 3:14), 피조물(롬 1: 25, 고후 5:17), 창세(롬 1:20), 제도(벧전 2:13), 지으신 것(히 4:13), 지음을 받는 것(갈 6:15), 만민(골 1:23).



    - 인종과 성(性)을 초월하여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여(14절)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을 이루면(갈 2:19, 20)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여기서 '피조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티시스'(*)는 창조행위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롬 1:20).
    즉 본 구절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영적인 교제를 갖게 되었을 때 그에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로운 창조 행위가 일어나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창조 행위를 오해하여 새로운 질료(質料)로 만들어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상상해서는 안된다.
    그는 여전히 육의 몸을 입고 있고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육체의 욕망과 죄에 굴복당할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롬 6:12,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그가 그리스도와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16절).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사람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을 따라 살게 된다.
    과거에는 그리스도를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 과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인정했으나 지금은 그런 차별을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만이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롬 2:28, 29; 고전 5:12, 13; 갈 3:28; 엡2:11-22; 골 3:11).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헬라어 직역 / 24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으니, 심판에 이르지 않고 반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 


    αμην αμην λεγω υμιν οτι ο τον λογον μου ακουων και πιστευων τω πεμψαντι με εχει ζωην αιωνιον και εις κρισιν ουκ ερχεται αλλα μεταβεβηκεν εκ του θανατου εις την ζωην.
    아멘 아멘 레고 휘민 호티 호 톤 로곤 무 아쿠온 카이 피스튜온 토 펨프산티 메 에케이 조엔 아이오니온 카이 에이스 크리신 우크 에르케타이 알라 메타베베켄 에크 투 다나투 에이스 텐 조엔.

    듣고(아크온. ακουων) - 현재분사형

    믿는(피스테우온. πιστευων) - 현재분사형

    얻었고(에케이. εχει) - 현재형

    옮겼느니라(메타베베켄. μεταβεβηκεν) - 현재완료형
     
    현재완료 : 어떤 동작이 과거에 이미 완료되었으나 그 결과가 현재에 남아있는 시상


    일으켜 세움 : 듣고 믿음

    그렇다면,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들을 어떻게 일으켜 세우십니까? 24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다면 영생(ζωὴν αἰώνιον)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가 일어나기 위해서, 예수가 요구하시는 능동적 사건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그리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나를 위해 파견하신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두 동사 모두 현재 분사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듣고 있는, 믿고 있는 그 상태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것은 바로 일으켜 세움을 받은 상태를 뜻합니다.

    듣는 것

    “듣는다”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 백성에게 요구하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헬라어 ‘아쿠오’(ἀκούω)에서 번역되는 듣는 행위는 인간의 선택적 행위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은혜 안에서, 사람이 능동적이며 자발적으로 듣고자 하는 결단이며, 순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듣다’는 것은 그냥 소리가 귀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귀가 듣는 그런 뉘앙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한 의식이 있는 들음이며, 분별력을 가진 들음이며, 앎의 들음이며, 깨달음의 들음이며, 따라서 결단에 준거한 순종이 뒤따르는 들음입니다.

    예를 들면,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무조건 들려오는 것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별하여 듣는 것입니다. 아쿠오, 알아서 식별하여 듣는 것입니다. 진짜와 가짜 음성을 분별하는 능력으로 듣는 것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과 삯꾼의 음성을 가려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 얼마나 깊이 내 영혼이 박혀있느냐에 따라서 들림과 그 들림에 의한 울림이 다릅니다. 잘 모르면서 들을 때에는 거역, 반역, 분쟁과 다툼만이 일어납니다.

    믿는 것

    또 하나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믿는다”(πιστεύω)는 어원적으로, 설득 당하여 믿게 되는 행위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에 의해서 주님을 믿도록 설득 당하여, 이제는 내가 주체적으로 믿겠다고 결단하는 자신의 능동적 행위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이란 당신을 설득하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와 함께, 그 은혜로 말미암아 당신 스스로가 의지적으로 결단하여 믿는 능동성이 오의적(奥義的)으로 결합된 구원적 사건입니다. 하여, 그곳에는 결단코 교만이 설 자리를 얻지 못합니다.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해서 인격적인 믿음 관계가 성립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죽은 자가 바르게 세워지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시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세움(듣고/믿음)은 영생의 현재성

    그런데 믿고 들음으로 세움 받은 자들을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로 간주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생이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는 미래형이 아니라, 완료형을 사용하면서, 저자는 듣고 믿는 것은 죽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따라서 이미 영생에 거하고 있다는 구원의 현재성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옮기다”로 번역된 헬라어 ‘메타바이노’(μεταβαίνω)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는 실제적 공간 이동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동사입니다. 말하자면 소속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마치, 군인들이 자신들의 소속부대가 있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망 군대가 아니라, 생명 군대로 전속 배치받은 것입니다. 소속이 바뀌면 지휘관도 바뀌도, 생활 규칙도 바뀝니다. 즉, 인생관과 세계관이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메타바이노의 ‘메타’라는 접두어는 변화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적인 효과를 강조합니다. 즉, 육적 체질에서 성령 중심의 체질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 주님을 믿는 자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원리로 삶을 살아갑니다. 영생이란 시간적인 면보다도, 지금의 상태, 현재 소속되어 있는 어떤 상태가 강조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말씀을 듣고 믿는 그 상태(현재분사형)가 바로 영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생의 미래성

    더욱이 요한복음은 영생 그 자체의 현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미래성으로 이어갑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을 듣고 주님을 믿는” 것이 영생이지만, 이러한 현재성은 미래로 향하여 열려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을 향해 열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29절 해석

    29절에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구절은 해석의 의견들이 다양하고 주장들 또한 많습니다. 그러나 부산고백교회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 좋겠습니다.

    실로, “선을 행한다”는 글귀에는 저자의 아주 중요한 신앙적 해석과 의도가 담겨져 있습니다. “행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포이에오’(ποιέω)는 단순히 뭔가를 행하다는 뜻을 넘어서, 어떤 원인이 있는 행위, 즉 창조적 행위를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특히 5장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역 관계를 표현할 때 사용되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누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하였는가?(5장11절), 여기에 포이에오가 사용되었습니다. 15절에서는, 자기를 고친(포이에오)이가 예수라로 하며, 16절 안식일에 행하는 일로 등장하며, 19절에서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포이에오)을 아들도 그와 같은 일 행한다(포이에오)고 합니다.

    선한 일은 분명 아버지 하나님만이 하시는 사역입니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의미에서 “선”은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께만 있기 때문입니다(막 10:17-8). 따라서 하나님만이 선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29절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들은” 다름 아닌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행하는 일은 아들만 행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포이에오는 아들의 포이에오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방식으로

    따라서 선을 행하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오로지 이 분만이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 “나오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포레우오마이(ἐκπορεύομαι)는 어떤 특별한 과정과 진행을 통과하여 나온다는 의미를 지닌 용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특별한 방식, 즉 십자가라는 고유한 방식으로 생명의 부활로 나오시는 것입니다.

    더욱이 여기서 “선을 행한 자들”이라는 복수형이 사용된 것은 선을 행하시고 생명의 부활로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이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보내신 분을 믿는 우리 그분이 걸어가신 특별한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생명의 부활나오게 된다는 증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영생을 가진 우리에게 미래형으로 열려져 있는 축복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보내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은 영생의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언젠가 그분이 걸어가신 특별한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시고, 지금 당신에게 주어진 영생의 축복을 누리시는 삶을 살아내시길 소망합니다.


    요한복음 5:24-29 / 사망에서 생명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 하시는 일들이 많지마는 그 중에서 두 가지, 즉 생명을 주는 일과 심판하는 일을 하십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일은 죄인들의 마음속에 거듭남으로 생명을 주시는 회개와 구원의 역사를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일은 종말의 때에 무덤에서 일어날 일입니다.
    (요 5:28-29)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사람이 죽는다는 것만큼 가슴아프고 슬픈 일이 없습니다.
    죽어 볼품 없이 시들어 버린 육체가 관속에 뉘어 차가운 흙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절망적인 것이 없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망이라는 말, 즉 죽음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사용되어지는 죽음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10-06-2024(주일)
    암송 성구 #.20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성경은 사람이 죽는 것을 죄의 결과라고 합니다(롬 6:23).
    그렇다면 성경은 죄(罪)를 무엇이라고 정의합니까?
    성경은 죄를 네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불신(不信) 요 16:9"
    둘째는 "불선(不善) 약 4:17"
    셋째는 "불의(不義) 요일 5:17"
    넷째는 "불법(不法) 요일 3:4"

    죄로 인하여 흙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육체의 삶이 끝이 났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죄는 세 가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아도취와 현실만족에 따라 더 이상 노력하기를 싫어합니다.
    둘째는 양심이 화인을 맞아 잘못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어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합니다.
    셋째는 영적 무지로 인하여 육체적인 삶을 선호하여 신령한 세계를 찾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죄를 회개한 후에 비록 육신에 갇혀 있는 제한적인 삶을 살아갈지라도 영원한 소망을 갖고 날마다 노력하며 수시로 반성과 회개를 통하여 보다 더 높은 세상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죄(罪)
    1. 불신(不信) 요한복음 16:9. 로마서 14:23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2. 불선(不善) 야고보서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3. 불의(不義) 요한일서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4. 불법(不法)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죄의 결과는 사망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무엇이 죽었는가?

    1. 노력하는 것
    - 현실만족, 자아도취

    2. 느끼는 것
    - 양심의 마비 / 죄와 고통에 대한 것
    - 회개를 모른다

    3. 생각하는 것
    - 육은 죽이는 것, 영은 살리는 것
    영의 생각


    성경학자 바클레이에 의하면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은

    첫째, 노력하는 것(effort)을 중단해 버린 것

    자기의 현실을 만족히 여기면서 더 이상의 전진을 포기해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자아도취(自我陶醉)
    실수와 실패는 더이상 조절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에베소서 4:13, 1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정지하거나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느낌(feeling)을 중단해 버린 상태

    이 말은 죄에 대한 느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감정이 정지된 상태입니다.
    고통에 대하여 무디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악을 보고 의분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입니다.
    슬픈 일을 보고 마음에 연민의 정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느낌, 감정이 죽었을 때에 그 사람은 분명히 그 마음도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심마비(良心麻痺) - 삼 마, 저릴 비


    셋째, 생각(thinking)을 중단해 버린 상태

    사람의 정신이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어서 더 이상 다른 새로운 진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정신이 폐쇄되어 새로운 진리를 거부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심한 말로 하면 정신이상자와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어도 영적으로는 죽은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한 진리, 곧 구원에 이르는 복음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는 새로운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묵상을 하지 않습니다.

    넷째, 회개하기를(repent) 중단한 상태

    사람이 편안한 마음으로 죄를 짓는 그 날이 바로 영적으로 죽는 날입니다.
    사람이 무슨 죄를 짓거나 짓지 않거나 간에 죄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 그 날이 바로 영적 죽음의 날입니다.
    악을 행하고 죄를 지을 때 정상적인 사람은 두려워하고 고통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마음이 패역해지고 완악해짐으로 죄악에 대한 회개가 없어지게 됩니다.
    오늘의 시대가 바로 사람을 무시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악한 시대를 살아가도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두 가지 조건을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 말을 듣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또 하나는 "또 나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자가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믿되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상은 인격체가 아닙니다.
    돌부처는 인격이 없습니다.
    커다란 바위나 나무, 광대한 바다가 인격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사랑하십니다.
    때로는 죄악을 행할 때에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미국에서는 평생교회에 세 번만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세상에 태어나서 세례를 받기 위해서 교회에 가고,
    두 번째는 결혼할 때 주례를 받기 위하여 교회에 가고,
    세번째는 사람이 죽어서 장례식 때 교회에 간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름만 신자이지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신자가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거하므로 공포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주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열어놓으신 그 길이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또는 어떠한 희생이 따른다 할지라도 그 생명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예수의 길을 거부하는 것은 곧 죽음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게는 생명의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만 생명이 주어집니다.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도록 아들에게 권세를 위임하셨습니다.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복음 이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고난당하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아버지에게 있는 생명의 권한을 아들에게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심판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요 5: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심판의 권세를 아버지가 맡기셨습니다.
    일을 하시되 아들을 통해 모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권세를 아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뿐만 아니라 무덤속에 있는 자들을 모두 깨워 일으키는 권세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승리의 부활이지만 인간의 부활은 심판의 부활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조금도 다를바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잠자는 우리들을 큰 소리로 깨우실 때 우리는 각자 행위대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주님은 심판하십니다.
    이 모든 심판에서 그 기준은 "아버지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요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내 고집, 내 방식대로만 아닙니까?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오직 아버지께서 하시는 그대로 따라서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는 모든 권세를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For the Son of Man came to seek and to save what was lost.

    *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자의 온 것은...구원하려 함이니라

    -
    삭개오에 대한 구원 선언 후 그 선언에 대한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즉 이미 앞절의 주석에서 밝힌 바 있듯이 잃어버린 자에 대한 구원이란 소외되고 비뚤어진 인간을 다시 공동체로 복귀시켜 당당하고 품위있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 말은 온갖 죄악과 허물로 말미암아 혼돈과 파멸에로 향하는 인간들을 구해내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로 인도하시는 것을 뜻한다.
    이같은 선언은 사실 에수의 전체적 삶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병에 걸려 정상적인 인간 삶이 불가능한 귀신들린자(마 17:18), 문둥병자(17:14), 벙어리,귀머거리(막 9:25), 소경(막 8:23) 등과 같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며 삭개오와 같은 죄인들을 용서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는 모든 행위는 땅위의 평화(平和)를 위한 사랑의 치유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사람다와 질 수 있도록 하는 예수의 구원 행위는 오늘의 기독교가 우선적으로 따라야 할 과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의 선언이 이미 5:31, 32에서 언급되었는데 결국 삭개오는 이와 같은 선언의 실천적 모델(model)이 된 셈이다.


    10-06-2024(주일)
    암송 성구 #.20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은 죄의 결과 때문입니다(롬 6:23).
    지식을 얻기 위한 과정을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배움의 단계
    둘째는 경험의 단계
    셋째는 신앙의 단계

    배움으로도 경험으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단계가 곧 "죽음 이후의 세계"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죽음 이후의 세계는 학문적인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의 세계는 그 세계를 다녀온 사람에 의해서 알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경험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그가 경험했던 그 세계를 설명해야 합니다.
    문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그 세계를 진실되게 알려준 사례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영역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고만 합니다.
    유교에서는 효(孝)를 강조하여 생전에 지극정성으로 섬기지 못했기 때문에 제사(祭祀)로 모셔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듯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할 줄 아는 믿음을 다짐합시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의 최종적인 완전성을 증명하는 예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며 하나님의 섭리이다.
    이 죽음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며 최종적인 것이다.
    죽음 이후에 모든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



    09-29-2024(주일)
    암송 성구 #.19  요한복음 17:3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영생(헤 아이오니오스 조에. η αιωνιος ζωη) the eternal life.

    영(166)

    αἰώνιος, ον 스트롱번호166

    1. 영원한.  2. 시작이 없는  3. 시작이나 끝이 없는.
    발음 [ aiōniŏs ]
    어원  / 16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원한(마 18:8, 계 14:6), 영생의(눅 18:30, 요 17:2).


    생(2222)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명(마 7:14), 이 세상의 삶(고전 15:19), 생기(계 11:11).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앙 = 믿는 것(행 16:31) + 아는 것(요 17:3) + 행하는 것(약 2:26)
                       Believe         Know                                   Deed
                     πιστεύω           γινώσκω                         ἀκροατήριον
                   신(信)               지(知)                                     행(行)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유월절, 무교절, 오순절, 초실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이시다
    - 하나님과 본체가 되셨으나 땅으로 오시려면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셔야 하므로 사람의 몸을 잠시 입으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참 빛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은혜 언약(恩惠 言約) The Covenant of Grace
    행위 언약(行爲 言約)


    은혜의 언약 (The Covenant of Grace)

    Soli Deo Gloria!

    내가 너로 [뱀으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 3:15

    네 [아브라함의]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창 22:17-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신 18:18-1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39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 8:56

    믿음으로 모세는 […]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히 11:24,26,28

    우리는 위에서 인용한 창세기 3장 15절이라든지, 창세기 22장 17-18절, 그리고 신명시 18장 18-19절 말씀들을 읽으면서 구약 성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여자의 후손’, ‘아브라함의 씨’, 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약속 되어 있고, 또한 약속의 그 자손이 우리의 구원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약속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위에서 인용한 요한복음 5장 39절과 8장 56절과 같은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성경(특히 구약성경)의 이 중요한 약속들이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있고, 예수님이 약속의 그 자손임을 증거하셨다.

    이처럼, 타락 직후로부터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고 간직해 온 이 중요한 약속, 간단히 말해 하나님께서 구원의 자손을 보내시고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이 은혜로운 약속을 ‘은혜의 언약‘(covenant of grace)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은 이 은혜의 언약을 믿은 사람들과 그들에게 이 은혜의 언약이 점점더 구체적으로 계시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신약성경은 약속대로 오신 언약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 언약을 이루셨으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현실화 되어 나가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경은 약속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이며, 그에 대한 약속인 은혜의 언약을 이해하는 것이 성경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중요한 주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일한 언약을 여러번 확인하여 주심으로 새롭게 하심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은혜의 언약을 역사 속에서 여러번 재언급하시고, 그 때 마다 조금 더 살이 붙은 표현으로 계시해 주셨다는 것을 발견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약속의 자손에 대한 맨 처음 언급은 앞서 본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이다. 그 다음 창세기 18장 18-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사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따라 한 나라를 건설하시고, 거기서 천하 만민이 얻을 복이 흘러 나올 것임을 밝혀주셨다. 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건설하시려는 그 나라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도를 지키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또한 밝히셨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고 칭하실 하나님의 나라를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 후 창세기 22장 17-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시사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라고 하심으로 첫 조상 아담이 믿었던 “여자의 후손”이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나올 것임을 말씀해주셨다. 이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재확인시켜 주셨다.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지금 나열한 하나님의 약속들이 모두 똑같은 말씀들은 아니지만, 각 약속 속에 들어 있는 뼈대가 되는 내용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약속과 약속의 그 자손’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하나님께서 동일한 언약 곧 은혜의 언약을 여러번 확인하여 주심으로 새롭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은혜의 언약을 새롭게 확인해 주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장면이 출애굽기 19장에 나온다. 이집트(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시고 시내산 밑에서 공식적으로 하나의 나라로서 세워주시는 장면이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장면이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세운 언약 때문이라고,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때문임을 출애굽기 2장 2425절은 말한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것이 언약을 지키는 것임

    앞서 우리는 아담 때 부터 믿어 온 동일한 은혜의 언약을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여러번 새롭게 하셨다는 것을 보았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신 것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새롭게 해주셨던 그 은혜의 언약을 이루어 나가시는 일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보았다 (출애굽기 2장 24-25절). 과연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밑에 모인 이스라엘 민족을 “야곱의 집”이라고 부르셨다 (출애굽기 19장 3절).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시내산에서의 언약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약속으로서 은혜의 언약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틀린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을 지킨다는 것과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똑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 출애굽기 19장 5-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지켜야 언약의 백성으로 살게해주신다고 하셨다.
    2. 같은 장 8절에 보면 이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겠다고 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언약공동체로 출범하게 된 것이다.
    3. 그런 후에 출애굽기 20장 이후에 나오는 계명들은 하나님의 언약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할 실정법을 내리시는 것이다. 계명을 지켜야 언약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약을 지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자체에 하나님께서 그 분의 은혜와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약속 만이 있지, 우리 보고 무엇을 하라는 내용이 없다. 즉 구원과 관련된 이 복된 약속을 우리로서는 그저 믿는 수 밖에 없지 달리 무엇을 할 것이 없다. 그렇다, 사도 바울은 은혜의 언약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로마서 4장 16절

    구체적인 예로서 아브라함의 아들 중에 언약의 백성 가운데서 끊어진 예를 상기해 보자. 그것은 다름 아닌 이스마엘이다. 사도 바울이 그에 대해 성령으로 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갈라디아서 4장 22-31절). 이스마엘은 언약의 증표인 할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쫓겨났다.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 대로 이삭이 태어났을 때, 특히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사람들은 큰 기쁨 가운데 있었지만, 이스마엘은 이삭을 조롱했다. 이로 보건데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마음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러므로 믿을 수도 없었다. 이스마엘이 쫓겨난 것이 하나님의 어떤 명령을 어겨서가 아니었다.

    물론 이것은 그리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는 약속이 무엇인지에 따라 결정된다. 약속이 일방적인 선언이냐, 아니면 쌍방간의 의무에 대한 것이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네가 시장에 가서 국거리를 사오면 내가 국을 끓이마”하는 식의 약속이라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자식이 해야 할 것은 국거리를 사오는 것이 되겠지만, 부모가 “내가 시장에 가서 국거리를 사와서 국을 끓여주마” 하는 일방적인 약속이라면 자식이 부모의 약속을 믿고 국을 끓여주실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 약속을 마음 속에 지키는 것이다. 즉 ‘지킨다’는 것에는 ‘명령을 따른다’는 식의 의미도 있지만, ‘믿고 간직한다’는 의미도 있다.

    시내산에서 은혜의 언약을 새롭게 하신 이야기가 나온 김에, 모세 시대에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게하셨다는 이상한 이론도 돌아다니는데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잠시 적고 넘어간다.

    •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면 살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3장 20절)
    •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다 지켜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라디아서 3:21)
    • 오히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표준에 심히 못 미친다는 것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갈라디아서 3:24)
    • 과연 율법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죄 없이 함을 받으려면 나 자신의 그 무엇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을 가르친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위기 17:11) 이 말씀에는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서는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는 속죄의 법과,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그 속죄 제물을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다는 복음을 본다. 사람이 무엇을 준비해서 하나님을 만족케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을 사람이 의지하는 것임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 구약의 선지자들 역시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을 유일한 방법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임을 가르쳤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장 4절)

    예레미아 31장의 ‘새 언약’ 역시 은혜의 언약을 새롭게 하신 것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은혜의 언약을 다시 선언하시고, 때로는 더 구체적인 내용을 담아, 언약을 새롭게 하신 것을 보았다. 그것의 한 예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임을 보았다. 그런데, 예레미아 3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또 다시 언약을 새롭게 하실 것임을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아 31:31-33

    여기서 언급하신 ‘새 언약’의 핵심적 내용은 여전히 은혜의 언약임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알 수 있다:

    • 새 언약의 큰 내용은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의 내용이었다 (창세기 18장 18-19절).
    • 히브리서 8장에서 보듯이 이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맺어졌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 것이다.
    • 이 새 언약의 수혜자인 우리는 다름 아닌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의 상속자라고 로마서 4장 16절은 가르친다.

    그러므로, 예레미아 31장에 언급된 새 언약은 은혜의 언약과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은혜의 언약을 새롭게 하신 것이라는 의미에서 “새 언약”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우에 조금 더 풍성한 내용을 덧붙여서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다름 아니라 예전 시내산에서 새롭게 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능력’의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히 하신 말씀이 없으셨는데,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기록하시겠다는 독특한 은혜를 말씀하셨습니다.

    언약의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

    이처럼 은혜의 언약은 첫 조상인 아담 때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유일한 구원의 언약이다. 그 언약을 믿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이룰 자손이 왕이요,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로서 하나님 앞에 영원히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다 (신명기 18:18-19, 삼하 7:12-16, 시 110:4).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약속된 그 자손임을 증거하셨다 (요한복음 5:39, 8:56). 성경 역시 수차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약속된 그 자손이라고 증거한다 (누가복음 1:72; 마태복음 1:1,21; 히 10:12-18). 특히 예수께서는 마지만 만찬의 자리,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그 분의 피로 그 분에게 속한 사람들의 죄를 씻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 되는 은혜의 언약을 이루실 것임을 선언하셨다 (고린도전서 11:25).

    성경 전체를 통해 흐르는 유일한 구원의 언약

    과연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를 위해 다시 살아나시사 영원한 왕, 제사장,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중보적 왕권을 행사하시는 새 시대를 여셨다. 그로써 그림자 역할을 하던 모세적 제도, 다시 말 해 예수님 오시기 전의 언약공동체에게 주셨던 여러가지 실정법과 제도에 종료를 고하셨다. 그렇다고 예수님 오신 이후 새롭게 된 언약공동체 곧 신약 교회가 구약 교회와는 전혀 다른 언약 아래 있는 것은 아니다. 신구약 교회는 형식만 다를 뿐 본질은 동일한 은혜의 언약 아래 있는, 한 백성, 한 몸이다 (로마서 4:16; 11:17-18; 갈라디아서 3:7).


    행위언약이란 무엇인가? The covenant of Works

    창세기 2:15-17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 대부분은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언약들을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구속 언약, 행위 언약 그리고 은혜 언약으로 칭하였습니다. 

         구속 언약(팍툼 살루티스, pactum salutis, covenant of redemption, covenant of salvation)은 영원 안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성부·성자·성령 사이에 맺어진 협약입니다. 구속 언약에서 성부는 택자들의 구속자가 되도록 성자를 주시고 성자에게 택자들의 구속을 위한 조건들을 요구하시며, 성자께서는 기꺼이 이 조건들을 이루시는 데 동의하시고, 성령께서는 기꺼이 성자의 구속 사역을 택자들에게 적용하시기로 협약하셨습니다. 이 구속 언약은 창세 전(시간 전) 곧 영원에서 성부·성자·성령 사이에 이루어진 ‘내재적 삼위일체의’(intratrinitarian) 언약입니다.

         행위 언약은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첫 사람이자 인류의 대표자로서의 아담과 맺은 언약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관하여) 2항에서 행위 언약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처음 맺은 언약은 행위 언약이었습니다. 이 언약에서는 완전하고(perfect) 인격적(개인적, 전인적, personal)인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에게 또한 아담 안에서 그의 후손에게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행위 언약’(covenant of works)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 언약의 조건이 완전하고 전인적(全人的) 순종이었기 때문입니다. 행위 언약의 원리는 ‘행하라 그러면 산다’는 것입니다. 이 행위 언약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2문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20문에서는 ‘생명의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2장과 3장에 ‘행위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언약의 특징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언약들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특징적 요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언약의 양 당사자가 있습니다. 둘째는 언약 내용에 약속이 있습니다. 셋째는 약속에 따르는 조건이 있습니다. 넷째는 조건을 어기고 파기한 데 대한 벌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3장에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언약을 성립하는 네 가지 특징적 요소들은 나타납니다. 언약의 당사자로는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인 첫 사람이자 모든 인류의 대표인 아담입니다. 언약의 내용으로 약속된 것은 생명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약속과 관련된 조건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고 전인적(全人的)인 순종입니다. 이 조건을 어길 경우에는 사망의 벌이 선포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 관계에 더하여 언약 관계를 가지게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어 언약 관계 안에 산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의 복되고 영광스러움을 성경에서는 종종 혼인 관계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성경은 언약의 하나님과 그의 언약의 파트너인 언약 관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과의 관계를 결혼 관계로 말씀합니다(에스겔 16장; 호세아 2-3장).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 3:19).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피조물 관계에 더하여 언약 관계를 가지고 살 수 있게 해 주신 것은 참으로 크고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 7장은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관하여 말해 줍니다. 2장에서는 행위 언약(covenant of works)에 관하여 말하고, 3항에서는 은혜 언약(covenant of grace)에 관하여 말합니다. 이에 앞서 1항에서는 이 언약들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에 근거한 것임을 알려줍니다. “비록 이성 있는 피조물들이 그들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마땅히 순종해야 할 의무를 지니지만,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간격이 심히 크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자신을 자발적으로 낮추어(voluntary condescension) 주시지 않으면, 피조물은 결코 하나님에게서 그들의 복과 상급으로 어떤 것도 경험할 수 없는데, 그것을 하나님은 언약의 방식으로(by way of covenant) 나타내기를 기뻐하셨습니다”(1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1항은 지극히 높으시고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 언약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하나님 편에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어 주시지 않으면 이 언약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려 줍니다. 언약 관계를 맺기 위하여 하나님 편에서 자발적으로 낮추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인자하심, 선하심)이 언약 관계의 배경에 있음을 잘 이해하고 명심해야 합니다. 은혜 언약뿐만 아니라 행위 언약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based on) 기초하고(grounded on) 있습니다.

         행위 언약은 하나님이 타락 이전의 아담과 맺은 언약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언약을 행위 언약(foedus operum)이라고 일컫는 데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 본문에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과, 행위라는 이름을 붙이면 이 언약에는 하나님의 은혜(또는 사랑)는 전혀 없고 인간의 행위만 강조함으로 이 언약을 순전히 율법적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순종 행위를 약속된 생명을 얻는 공로로 오해하기 쉽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1항에서는 2항에서 말하는 행위 언약과 3항에서 말하는 은혜 언약은 둘 다 하나님 편에서 그분 자신의 자발적인 낮추심(by some voluntary condescension on God’s part)에 근거(기초)된 것임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 언약과 행위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어 사람과 언약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에 근거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행위 언약을 “생명의 언약”(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20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2문)으로, 사랑의 언약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아담이 대표한 그의 모든 후손인 인류와)과 맺은 첫 언약을 일반적으로는 ‘행위 언약’으로 일컫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언약을 아담과의 언약, 율법 언약, 생명 언약, 자연 언약, 창조 언약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 아담과의 언약을 행위 언약이라고 하면, 이 언약에는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없고 인간의 행함만 강조한다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작성자들인 17세기 청교도 신학자들은 ‘은혜’라는 말은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곧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묘사하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타락하기 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나타내는 말로는 ‘은혜’라는 말 대신에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은혜’라는 말도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타락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 곧 구원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 구별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은혜 언약만이 아니라 행위 언약도 하나님의 자발적 낮추심(voluntary condescension)에 근거한 것임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1항에서 강조합니다. 지극히 높으시고 영화로우시며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피조물 관계(creator-creature relationship)에 더하여 언약 관계(covenantal relationship)를 가져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그의 언약 백성으로 살게 해 주신 그 자체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행위 언약(covenant of works)이란 첫 사람 아담(아담이 대표한 아담 안에 있는 그의 후손)과 맺은 언약인데, 완전하고 전인적인 순종에는 영원한 생명을, 불순종에 대해서는 영원한 죽음을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첫 아담과 맺은 행위 언약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빛을 비추어 줍니다. 성례(성찬과 세례)는 인류의 대표인 첫 아담이 실패한 것을 회복하여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구원을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우리를 위하여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성취하신 구속을 나타내고 보증하는 것입니다.


    언약(행위언약, 구속언약, 은혜언약)

    Ⅰ. 서 론

    성경은 언약(言約)의 책이다. 성경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때 구약과 신약을 말한다. 이 구분을 언약적 관점에서 말하면, 구약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고 신약은 예언대로 오신 메시야에 대한 성취의 말씀이다. 그리고 다시 신약은 재림(再臨)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으며, 초대교회 이래로 인류의 역사를 포함하는 교회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언약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성취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언약과 성취의 역사로 해석할 수 없다면, 성경해석에 있어서 많은 난관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초대교회 이래로 종교개혁시대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경해석의 관심은 언약이 항상 그 중심을 이루어왔다.
     
    교부(敎父) 시대에 터툴리안(Turtulian)이 신약(Novum Testamentum)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래로 성경이 언약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확증되었고, 오늘에도 성경의 이름을 구약과 신약이라고 사용하고 있으니 그 증거는 더욱 확실하다.
     
    그런데 성경의 틀을 이루는 언약 중에서도 창세기를 배경으로 한 세 가지의 언약인 행위언약과 구속언약 그리고 은혜언약은 이후의 모든 언약의 원형(原形)이며 근거라는 데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언약은 장차 오실 완전하고 영원한 성취자이신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指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의 완전하고 영원한 성취자로서, 오늘의 우리뿐만 아니라 과거의 열조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기 위한 영적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히 11:13)
     
    이러한 지식은 단순히 상상으로 얻어진 추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심으로 알려진 지식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뜻은 언약관계로서의 신(神)-인(人) 관계 안에서 유기적이고 점진적으로 인간 역사 속에서 드러내어지고 선명해진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와 언약의 관계는 구원과 구원의 역사 즉, 구속사(救贖史)를 이해함에 있어서 불가분(不可分)의 관계 속에 놓여지게 된다. 그러므로 언약은 창조- 타락- 구속으로 이어지는 구속 역사(구속사)에 있어서 중심에 놓여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 소고(小考)는 이 세 가지의 언약이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언약의 개념과 함께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 론

     언약은 구속역사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이어주는 연결체이다. 언약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과 피조물로서의 인간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격을 이어주는 다리와도 같다.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로서의 인간과 관계를 맺으신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과 언약 관계를 맺으신 그 관계 안에서 알려진다.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 관계를 맺으심을 통해서 그 자신과 그의 구원과 관계된 그의 뜻을 인간에게 계시하신다.

     1. 언약의 개념(槪念)

     1) 구약에서
     
    언약, 「한국컴퓨터선교회」, 기독정보검색, 2005. 인용 편집
    “언약”은 히브리어로는 베리트(????)인데 이 말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다. 통상적으로는 “자르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바라(???)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추측에 의거하면 창 15:17에 기록된 의식이 언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에서 언약은 어느 한 편이 다른 편에 부과하는 약정(約定)의 성격을 띤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세우실 때에는 일방적 성격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간은 동등한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법령을 인간에게 부과하시는 주권자이시다.
     
    「신학사전」, 신학사전편집위원회,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 445
    이런 점에서 볼 때 계약(testament)이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언약(covenant)이라고 함이 좋을 것이다. 즉 언약이란 신학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세우신 약속인데, 이를 세상 사람들이 상거래(商去來)에 많이 쓰는 계약이란 말로 쓰면 신학적 사상이 사실상 약해지기 때문이다.
     
    2) 신약에서
     
    70인역(LXX)에서 “베리트”는 신 9:15(μαρτυριον)과 왕상 11:11(εντολη)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서 디아데케(διαθ?κη)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일반적인 헬라어 용법에서 언약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지 않고 단지 하나의 약정 양도 계약서를 가리키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유언(遺言) 또는 유언장을 가리킬 뿐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이와 같은 용법은 좀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Ibid. p. 446
     
    그러나 고전(古典) 헬라어에서는 두 집단 가운데 한 집단이 압도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어 그 다른 집단에게 자신의 요구 조건을 명령할 수 있는 그러한 두 집단 사이의 협정에 이 말이 쓰인 예가 가끔 있었다. 그러므로 신약에 쓰인 “디아데케(διαθ?κη)”는 구약에 쓰인 “베리트(????)”보다 훨씬 더 특수한 뜻을 가지며, 이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한 집단에 의해 일방적으로 제기되고, 다른 한 집단은 그저 순응할 뿐 거절할 수 없는 협약 또는 협정(agreement)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하여 디아데케(διαθ?κη)라는 단어는 많은 다른 단어들과 같이 하나님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 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았다. 많은 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어 왔지만 이 단어는 유언보다는 언약으로 번역되었다.
     
    3) 태초 - 언약의 원형(原形)으로서 아담과의 언약
     
    언약의 개념은 계시를 통해서 이 개념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전에 이미 역사에서 발전 되었다. 하나님께서 노아 및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기 전에 이미 인간들 사이에서 언약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태초의 에덴에서 맺은 아담 언약(창 1:28)의 발전이었다. 그 후로 인간들은 이 같은 준비과정을 거쳐서 죄로 분열된 세상에서 언약을 맺는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고, 하나님이 계시를 통하여 인간과의 관계를 언약관계로 제시할 때 그것을 곧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언약의 개념이 인간에게서 시작되었다거나 하나님이 자신과 인간의 상호관계를 서술하기 위하여 이 개념을 빌려다 쓰셨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언약 생활의 원형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존재 안에서 발견된다. 인간에게서 발견되어지는 것은 원형의 희미한 모형(模型)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인간의 삶을 이와 같은 언약 관계의 삶으로 제정하셨기 때문에 언약 개념은 사회생활의 여러 가지 기둥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언약 관계가 이미 발전된 이상 하나님은 공식적으로 이 관계를 자신과 인간과의 실존하는 관계의 표현으로 소개하셨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 관계는 아브라함과의 공식적인 계약 이전 곧 태초의 아담부터 존재 했었다.
     
    4) 언약의 당사자(當事者) 언약,
     
    「한국컴퓨터선교회」, 기독정보검색, 2005. 인용 편집언약의 당사자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된다. 어떤 학자들은 언약의 당사자를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으로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인간은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을 때도 있고 때로는 “죄인”, “선민(選民)”,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 이라는 한정어(限定語)가 붙을 때도 있다.
     
    다른 학자들은 삼위일체를 대표하는 성부 하나님과 선민(選民)을 대표하는 그리스도를 언약의 당사자라고 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학자들은 두 개의 언약을 말한다. 곧 성부와 성자 사이에 채결된 구속 언약(Pactum Salutis)과 이 언약에 근거해서 맺어진 하나님과 선민 또는 택함을 받은 죄인 사이에 맺어진 은혜 언약을 구분한다.
     
    조직신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언약의 당사자를 하나님과 인간이라고 보는 것보다 성부와 성자로 보는 것은 더 적합한 사실이다. 이 표현은 롬 5:12-21과 고전 15:21-22, 47-49의 지지(支持)를 받고 있으며 구속 언약과 은혜 언약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언약의 통일성을 말하고 있다.
     
    구속 언약과 은혜 언약을 구분하는 이 같은 생각이 성경의 지원(支援)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행위언약에 대립되는 두 개의 별개의 독립된 언약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즉 은혜 언약과 구속 언약은 하나의 복음적인 긍휼의 언약의 두 양상(樣相)으로서의 메시야 언약인 것이다.

     2. 행위(行爲) 언약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맺은 언약 즉 선악과를 금지한 것에 관련된 언약을 16세기 말에 이르러 행위계약 또는 생명의 언약 혹은 법적 언약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말에 보다 체계적으로 나타난 행위 계약 교리의 역사적 연대기(年代記)를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행위 계약 교리가 언약신학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인(否認)할 수 없다. 「신학사전」, 신학사전편집위원회,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 448
     
    그리고 이 언약 관계에서 하나님은 일정 기간 동안의 순종을 조건으로 미래를 완전하고 복되게 만드셨다.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7 장 -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관하여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해설, A.A.하지 著, 편집부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pp. 160-161
     
    1절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는 멀어졌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낮추시사 은총의 계약을 인간과 맺으심으로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셨다. 비록 이성과 의지와 양심을 지닌 인간이 창조자로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과 보상을 받는 것은 이 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은혜의 계약이 순종을 가져온다.(사40:13-17, 욥9:32-33, 삼상 2:25, 시100:2-3,113:5-6, 욥22:2-3, 35:7, 눅 17:10, 행 17:24-25)
     
    2절 - 인간과 맺어진 첫 번째 계약은 행위의 계약이다.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완전하고 개인적인 순종에 의하여 생명을 약속받았다.(갈 3:12, 호 6:7, 창 2:16-17)
     
    2) 행위 언약의 성경적 근거
     
    “행위 언약”이라는 용어는 성경에 없기에, 일부 학자들은 행위 언약을 부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행위 언약의 개념은 성경 전반(全般)에 걸쳐서 표현되어 있다.
     
    ① 창세기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먼저 계약을 체결하는 양측(兩側), 즉 하나님과 인간이 있다. 그리고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과하신 순종의 조건이다. 그리고 약속, 즉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이 있다. 「벌코프 조직신학개론」, 루이스 벌코프 著, 박희석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p. 117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신 것”(창 3:24)은 언약을 범한 자가 영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교시(敎示)하는 것이다.
     
    ② 로마서 5:12-21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對比)하여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이 많은 사람을 죄인 되게 한 것 같이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이 많은 사람을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였다고 가르치고 있다. 아담의 범죄는 자신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죽게 했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생명 안에서 왕 노릇(롬 5:17)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담이 인간을 대표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만일 아담 한 사람이 순종했다면 영생이 모든 사람에게 왕 노릇하게 되었을 것이다. Ibid. p. 117
     
    그러므로 죄의 전가(轉嫁)와 다른 한편으로는 의(義)의 전가를 관련지어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한 내용은 아담이 그리스도처럼 언약의 머리였다고 생각해야만 설명할 수 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표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의를 공유(共有)하고 있다면, 우리가 같은 이유에서 아담의 죄책(罪責)을 공유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③ 호세아 6:7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는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행위언약이 맺어졌고, 아담이 이를 지키지 못함으로써 인류의 죽음이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행위 언약은 타락 후에도 유효한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알미니안주의자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했다는 의미에서 폐기되었고, 행위 언약은 영생을 얻기 위한 지정(指定)된 수단으로서 폐기된 것이다” -「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 문화사, 2004. p. 56 - 와 개혁주의자 사이에 상당한 견해의 차이가 있다.
     
    알미니안주의자에 의하면 아담이 타락하여 계약을 범함으로 말미암아 이 계약은 완전히 폐기되었으므로 아담의 후손들은 그 계약을 지킬 능력도 없지만 지킬 의무도 없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행위 언약을 맺기 이전에 이미 정해진 창조의 질서 “본래 교의신학(조직신학) 아래 전통적으로는 인간의 타락을 기점으로 행위언약(타락 전)과 은혜언약(타락 후)으로 나누어 성경의 언약을 이해해 왔다. 그러다가 성경신학의 발전과 함께 타락 전 창조 당시에 맺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창조언약으로, 타락 후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을 구속언약으로 부르게 되었다.” -「구약성경과 그리스도」, 김두석, 칼빈대학교출판부, 2003. p. 93 - 에 속한다.
     
    언약의 유무(有無)와는 관계없이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의 명령에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한 번 언약을 범한 후부터 어떤 인간도 행위 언약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기독교 교리개설」, 김성린,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p. 113-114
     
    4) 행위 언약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다.
     
    행위 언약은 영생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는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이 언약은 폐기된 것이다. 아담 이후 행위 언약의 조건을 충족시킴으로써 영생을 얻은 자는 한 사람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받은 자는 순종을 통하여 믿음을 증거 하게 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진정한 순종으로서의 금식령(禁食令)(창 1:17)을 성취하는 것이다. 첫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창 3:5)
     
    그러나 둘째 아담은 광야에서 부딪친 사탄의 유혹에서 승리하셨다.(마 4:1-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빌 2:6-8) 이렇게 둘째 아담은 첫째 아담에게 주어졌던 금식을 온전한 “자기 비움”으로 성취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에게 주어졌던 행위 언약 또한 장차 언약대로 오셔서 성취하실 그 분 즉 메시야에 대한 언약인 것이다.

     3. 구속(救贖) 언약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7 장 -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관하여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해설」, A.A.하지 著, 편집부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pp. 165-166
     
    3절 -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첫 번째 계약에 의해서는 생명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두 번째 계약을 맺으신 바 보통 우리는 이것은 은혜의 계약이라고 부른다.(갈 3:21, 롬 3:20-21, 8:3, 창 3:15, 사 42:6) 이 은혜의 계약이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과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을 말한다. 이때에 하나님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이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고(막 16:15-16, 요 3:16, 롬 10:6-9, 갈 3:11) 생명을 얻기로 정해진 모든 사람들에게(겔 36:26-27, 요 6:44-45, 5:37) 성령을 주시고 믿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시고 믿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4절 - 이 은혜의 계약은 성경에서 종종 유언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언자로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의 유언을 효과 있게 하였으니, 그는 그의 유언대로 영원한 기업을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상속해주셨다.(히9:15-17,7:22, 눅22:20, 고전11:25)
     
    2) 구속 언약의 필요성 - 은혜 언약의 토대(土臺) 위에서
     
    인간이 범죄 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영적 교류는 사실상 단절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언약을 맺음에 있어서 종전처럼 인간과의 직접적인 언약을 맺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은혜 언약을 맺기에 앞서서 구속의 언약을 맺을 필요가 생긴 것이다. 구속 언약은 은혜 언약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하나로 볼 수 있다. 다만 은혜 언약은 구속 언약의 토대 위에 세워진 언약이다. 「기독교 교리개설」, 김성린,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p. 132-133 편집
     
    3) 구속 언약의 성경적 근거
     
    성자께서는 자발적으로 범죄 한 인간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고, 성부께서는 그것을 조건으로 구속의 축복을 성자를 통하여 택한 자에게 주며 더불어 성자에게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시겠다는 성경적 근거이다.
     
    ① 구속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영원 전부터 있었다.(엡1:4, 3:11, 살후 2:13)
    ② 그 계획은 언약의 성격을 지녔다.(요5:30, 17:4-6)
    ③ 메시야 예언 가운데는 언약의 요소들인 당사자(시2:7-8)와 조건(시40:7-8)과 약속(요 17:5, 24)이 들어 있다.(삼하 7:12-13, 시 89:3-4)
    ④ 「벌코프 조직신학개론」, 루이스 벌코프 著, 박희석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p. 138
     
    언약 개념을 메시야와 직접 연결하는 구절로서 여호와의 종에 관해서 말하는 시편 89:3과 이사야 42:6이 있는데, 이 연결은 여호와의 종이 단순히 이스라엘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더욱이 메시야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말하는 절들이 있는데, 이것은 언약적 용어이다.(시 22:1-2, 시 40:8)
     
    4) 구속 언약의 당사자 - 메시야
     
    성자(聖子)는 구속함을 받도록 영원 전부터 예정된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다.(엡 1:4)하나님은 아담의 범죄 직후 은혜의 언약을(창 3:15) 아담에게 하셨고, 그 후 아브라함과 족장들을 통해 계승시켜 왔다. 그리고 이 구속 언약은 장차 다윗의 자손으로(마 1:1)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구약과 신약 모두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은혜 언약인 것이다.
     
    5) 보증인으로서 언약을 성취하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구속 언약에 있어서 선택함을 받은 자를 대표하여 성부와 언약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이 언약의 보증인이 되신다.(히 7:22)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범죄 한 인간의 신분으로 낮아지심으로써 마지막 아담이 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구속의 언약은 속죄함을 받은 죄인들에게 있어서는 은혜 언약의 근원이 되지만,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행위 언약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속 언약으로 말미암아 성자를 희생의 제물로 받으시는 것은 “공의(公儀)”의 속성 때문이다. 죄가 있음에도 아무 근거가 없이 죄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참으로 구속의 언약은 은혜 언약을 성취시키기 위한 법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개설」, 김성린,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p. 135-136 -
     
    이처럼 성부 하나님과 구원 받을 자의 대표인 성자 사이에 설정(設定)된 인간 구원을 위한 언약이 구속 언약이다.
     
    6) 선택으로 인한 구속의 제한(制限)
     
    구속의 언약이 선택의 작정과 혼동되는 일이 가끔 있지만, 둘은 동일하지 않다. 선택의 작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의 후사(後嗣)들이 될 사람들의 수(數)를 결정하는 반면에, 구속의 언약은 은혜와 영광이 죄인들을 위해서 마련되는 길을 나타낸다. 논리적으로는 선택이 구속의 의논(議論)에 앞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보증이 되신 것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람들만 제한적 “특별한 구속 혹은 제한적 속죄 -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택자들만 구원하려는 것이며 또한 실제적으로 그들만이 구원을 획득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어떤 특정한 죄인들 대신에 당하신 형벌에 대한 대속의 인내였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는 것에 부가해서 자기와 그들을 연합하는 믿음을 포함하여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획득하셨다.
     
    믿음의 은총은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가 위해서 돌아가신 모든 자들에게 빠짐없이 적용되며 그러므로 해서 그들의 구원을 보증하신다.”-「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D.스틸/C.토마스 共著, 김남식 譯, 도서출판 엠마오, 1992. p. 20 - 으로 구원하신다.
     
    「벌코프 조직신학개론」, 루이스 벌코프 著, 박희석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p. 139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 17:6)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 17:12)
     
    7) 구속 언약의 성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약속으로서의 예언
     
    그러므로 언약의 당사자인 성부께서 언약의 또 다른 당사자인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고(요3:16), 성자로 하여금 언약의 조건에 따라 세속적인 고난과 죽음을 당하게 하셨고(롬3:26), 언약의 약속에 따라 부활케 하시고 승천(昇天)케 하여 성부 우편에 앉히시고(벧전3:22), 보혜사(保惠師) 성령을 보내어 교회를 교훈하시고, 지도하시고, 보호하시다가(요14:26) 마침내 성자의 재림과 심판을 통하여 성자와 택한 자를 영화롭게 함으로써(엡5:6,12) 구속 언약을 성취하신다.
     
    과연 이로 보건대 구속의 언약은 은혜의 언약이다. 오직 죄 밖에는 지은 일이 없는 우리가 오직 구속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그저 “은혜”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더구나 “택(擇)함과 불택(不擇)함”이라는 “이중 예정” “이는 선택(Election)과 유기(Reprobation)로서, 인류 중 얼마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기로 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말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간과하기로 결정하시고 그들의 죄를 벌하기로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이다.” -「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문화사, 2004. p. 43 편집 - 의 일이 이미 창세전에 아버지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작정과 예정의 섭리(엡 1:3-14)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없는 감사와 소망과 위로를 주는 것이다.

     4. 은혜(恩惠) 언약

     은혜 언약의 사상은 종교 개혁 당시부터 거듭 강조되어졌다. 아담의 범죄 직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셨고, 그 후 아브라함과 족장들을 통해 재천명(再闡明)되어 왔고, 마침내 새 언약 “주께서 가라사대 볼찌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렘 31:31이하)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 8:13) - 에서 완전한 실현에 이른 것으로 간주하였다. “블링거”는 이를 “유일하고 영원한 계약” 또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중의 언약”이라 불렀다. 또한 칼빈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맺은 언약 관계의 대표적인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는 이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셨고, 그리스도의 성취가 새 언약을 이룬다고 하였다.「신학사전」, 신학사전편집위원회,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 449
     
    1) 은혜 언약의 특징
     
    은혜 언약은 구원에 관하여 인간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은혜로운 언약이며, 구원의 계획과 성취와 적용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이 모두 동원된 언약이다.(엡1:3-5, 요 19:30, 요 16:7-8) 또한 시간이 흘러도 효력이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언약이며(창 17:9, 삼하 23:5), 세상사람 모두가 아니라 택함을 받은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특수 언약이다. 그리고 신앙과 순종을 조건으로 하지만, 인간의 공로가 필수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조건적이며(엡2:8), 계약 당사자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방적인 호의(好意)로 성립된 편무(片務)계약이다(히6:17).
    또한 은혜 언약은 시대에 따라 여러 형태로 주어졌으나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요, 너희는 내 백성”이라는 약속의 내용(창17:7, 출19:5-6, 렘31:33)과 약속의 조건이 “믿음”이라는 사실(창15:6, 롬4:9-11) 그리고 중보자가 언제나 동일하다는(딤전2:5,갈3:19-20,히13:8) 일치점을 갖는다.
     
    2) 은혜 언약의 계약 당사자「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 분화사, 2004. p. 65제 1 당사자는 하나님으로서 제 2 당사자인 인간이 당신에게 대해 가지실 관계를 솔선하여 은혜롭게 결정하시는 당사자이다. 인간은 목적 자체(생명의 교통의 언약)로 볼 때는 피택자이다. 그러나 목적에 대한 수단(합법적 관계의 언약)으로서 넓은 의미의 언약에서는 객관적 협약(協約)이므로 언약의 생명을 받지 못하는 자들도 포함된다. 그렇지만 구원의 실현이라는 수단적 의미에서는 신자들과 그 자녀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은혜 언약의 약속과 요구
     
    은혜 언약의 약속으로서는 하나님과 백성의 참된 관계 회복, 영적 상징으로서의 현세적 축복의 약속, 죄의 사유(赦宥)와 양자(養子), 칭의(稱義)의 약속, 최종적 영광의 약속(영생) 등이 있다. 또한 은혜 언약에는 믿음과 순종의 요구가 있다. 믿음으로 언약과 그 약속들을 받아 언약의 생명에 들어가고, 새 생명의 원리에 따라 새로운 순종으로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 Ibid. p. 65
     
    그러나 이 요구는 약속 이행(移行)의 조건으로서가 아니고 약속의 결과인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자에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언약의 약속이 이루어지면 새로운 생의 원리에 따라서 힘주시는 자 안에서 하나님께 복종하며 헌신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까지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엡 1:8)
     
    4) 은혜 언약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리스도는 언약의 중보자이다. 그리스도는 특별한 중보자이신데, 그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개재(介在)하셔서 중재(仲裁)만 함이 아니라 실제적인 능력을 가지고 보증인과 율법의 완성자로서 그가 대표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정상(正常) 관계를 갖도록 회복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말로써 우리의 죄를 변호하시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 지불해야 할 죄책을 대신 지불함으로써 율법의 의를 완성시키신 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리신다.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속한 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며 진리에 따라서 생활함으로써 구원을 완전하게 하도록 인도하며 촉구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그를 대신하여 사신(使臣) “바울의 직책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화해의 메시지를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환이요, 증인으로서의 직책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QA시스템 성경연구시리즈」, 강병도, 기독지혜사, 1991. p. 213 - 을 세워서 봉사하게 하심으로 이 일을 계속하신다.(고후 5:20)
     
    5) 언약 안에 있는 회원(會員)
     
    ① 성인(成人)
    성인은 신앙과 신앙 고백을 통해서 합법적 협정으로서의 언약에 들어갈 수 있다. 신앙은 유일한 방법이다.
     
    ② 신자의 자녀들
    신자의 자녀들은 합법적 관계로서 언약에 들어간다. 그 자체가 생명의 교통으로서의 언약관계가 아니고 조만간 현실이 되리라는 합법적인 관계이다.
     
    ③ 비중생자(非重生者)
    합법적 협약으로서 언약에 참여된 비중생자는 회개하고 신앙을 가진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언약의 파기자(破棄者)로서 심판 받게 된다. 「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문화사, 2004. p. 66
     
    은혜 언약 안에 있는 회원에 대하여 논의할 때, 명심해야 할 것은 단순히 법적인 협정으로서의 언약과 하나님과의 친교를 통하여 실현되는 언약과를 구별하는 것이다. 저들의 믿음이 참 믿음이 못되고 고백이 진실 되지 못할 때는 진정한 의미에서 언약 관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신앙고백을 하지 않거나 언약에 수반(隨伴)하는 책임을 감당하기를 거부한다면 이는 언약을 파기한 자로 간주(看做)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민이나 교회 안에 끝까지 중생하지 않다가 언약의 대열에서 이탈하는 자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무조건적 선택 -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을 위하여 특정한 개인들을 하나님이 선택하심은 다만 그 자신의 주권적 의지일 뿐이다. 특정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믿음, 회개 등과 같은 이런 예지(預知)된 반응이나 그들 편에 대한 순종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그가 선택하신 각 개인에게 믿음과 회개를 주신다.
     
    이러한 행위들은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택은 인간에게 있는 어떤 덕성(德性)이나 예지된 행위에 의해서 결정되거나 제약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가 주권적으로 택하신 자들을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죄인을 택하심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의 원인이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D.스틸/C.토마스 共著, 김남식 譯, 1992. p. 19 -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약속한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된다.
     
    6) 여러 경륜(經綸) 시대의 언약
     
    은혜언약은 본질상 하나이다. 그러나 은혜 언약은 시간 속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계시되었다. 그 형태를 크게 나누면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된다.
     
    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7 장 -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A.A.하지 著, 편집부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pp. 171-172
     
    5절 - 이 계약이 맺어지는 방법에 있어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는 서로 다르다.(고3:6-9)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의 계약은 약속들, 예언들, 희생제사들, 할례, 유월절 어린 양 및 다른 유형들과 제정들에 의해서 특징 지워졌으니, 이 모든 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것으로서(히 8-10장, 롬 4:11, 골 2;11-12, 고전 5:7)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피택자(被擇者)들에게 약속된 메시야(고전 10:1-4, 히 11:13, 요 8:56)를 신앙하도록 교훈하고 세우는 일에 있어서 그 당시로는 충분하였고 효과적이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이 약속된 메시야에 의하여 충분한 속죄와 영원한 구원을 얻었으니, 이 계약을 우리는 구약이라 부르는 것이다.
     
    6절 - 신약에는 구약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되었는데, 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이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와 세례와 성만찬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제도에 의하여 맺어지게 되었다.(갈 2:17, 골 2:17, 마 28:19-20, 고전 11:23-25, 고후 3:7-11) 이 제도는 수적으로 구약에서보다 더 적고 외견상으로 구약에서보다 덜 화려하게 보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제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백성들에게 보다 충만히, 보다 명백히, 그리고 보다 효과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틀림없다.(마 28:19, 엡 2:15-19, 히 12:22-28, 렘 31:33-34) 우리는 이 계약을 신약이라 부른다.(눅 22:20, 히 8:7-9) 그러므로 본체(本體)가 다른 두 은혜의 계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본체를 지닌 은혜의 계약이 있을 뿐이지만 그것이 집행되는 방법에 있어서만 구약과 신약이 다른 것이다.
     
    ② 아담과의 원시(原始) 언약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꺾을 것이라는 원(源)복음(창 3:15). 그러나 더 근원적으로는 타락 이전에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하셨다.(창 1:28) 이 언약의 주로서 하나님은 전능자의 자리에서 아담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는 주(the Lord)가 되시고 여호와가 되셨다. 바로 이 사람의 하나님 되시고 언약의 주가 되심을 표시시하기 위하여 창세기 2장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기명(記名)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첫 언약 체결 후에도 사람과 관계를 맺으실 때 이 여호와 이름으로 일하셨고, 그 언약에 근거해서 그 언약의 약속들을 이행하실 때에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타나시고 일하셨다. 또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실 때에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타나시고 일을 시작하시고 결말(結末)하셨다.(출 3장 이하)「하나님의 구속경륜」, 서철원, 성문당, 1993. pp. 25-26
     
    ③ 노아와의 이중(二重) 언약
    홍수 이전에 택한 자의 구원에 대한 암시가 깃들인 언약을 맺으셨고(창 6:18), 홍수 후에 다시 땅을 침몰시키는 홍수가 없으며(창 9:8-10) 일반 은총적인 언약을 주셨다. Ibid. pp. 28-29이는 첫 언약이 하나님의 백성 됨이 그 목표였음이, 이 목표 달성을 위한 갱신된 언약 체결에서 분명히 계시되었다. 이 진리는 노아에게 주신 말씀과 언약에서 분명히 나타났다.(창 9:1) 노아와의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다 회복되는 역사의 끝에까지 지속(持續)되고 유효할 것이다.
     
    ④ 아브라함과의 언약
    가나안에 대한 현세적(現世的) 축복과 메시야에 대한 영적 축복을 받았으며(창 15:4-5), 믿음으로 의롭다 여겨졌다(창 15:6). 이는 신약의 성도들도 창대(蒼大)하여지며 영적 가나안, 즉 천국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을 보여준다(롬 4:12). Ibid. pp. 30아브라함과의 언약체결은 낙원에서의 첫 언약체결의 목적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언약의 주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임이 분명하고 확실함을 나타낸다.
     
    ⑤ 시내산 언약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덕적, 의식적, 국가적 율법을 주었다(출 20장 이하). 이는 인간에게 죄의식을 갖게 하는 것으로서(롬 3:20, 4:15, 5:13, 갈3:19)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몽학(蒙學) 선생의 역할을 한다(갈 3:24).
     
    ⑥ 신약시대의 언약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세워진 새 언약으로서 구약시대의 언약이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것인데 반(反)하여 이는 모든 국가, 모든 백성에게 확대되는 보편성과 성령의 강림(降臨)으로 인한 충만을 지닌다.
     
    7) 은혜 언약의 완성자로서의 메시야「계약신학과 그리스도」
     
    팔머 로벗슨 著, 김의원 譯,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p. 278아담 이후로 이스라엘이 비록 계약적 책임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은 한 위대한 백성을 일으켜 그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위대한 나라를 이룩하는 그의 목적에 실패하지 않으실 것이다. 타락한 인간 가운데에서 백성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목적은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멸망을 뛰어넘는 이런 희망어린 기대는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예언자들은 약속의 땅으로의 복귀, 받아들여질 예배로의 회복, 메시야적 왕의 혈통의 재생 등에 대하여 가장 빈번히 말하였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 계약적 약속의 다양한 흐름들을 한데 모으는 독특한 역할 때문에 이 마지막 하나님 계약은 “완성의 계약”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계약은 하나님의 이전(以前) 계약 사역들을 대신한다. 동시에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들 역사를 통해 경험했던 다양한 계약들의 핵심을 총괄적으로 실현하게 된다. 완성은 이 마지막 계약의 내용을 특징 지운다.
     
    이 완성하는 실현의 중심은 한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약속들(행위, 구속, 은혜)의 성취자로서 그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렘 31:33)라는 계약 원칙의 핵심을 친히 이루신다. 그러므로 그는 언약을 완성하는 그리스도로 나타나실 수 있다.

     Ⅲ. 결 론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어 노아를 거쳐서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그리고 이삭과 야곱을 거쳐서 계승(繼承)된 언약들은 모세에 이르러 시내산 언약으로 구체화 되었다. 이 언약들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신학자들에 의해)그 이름들을 달리 했지만, 결국 본질은 모두 은혜 언약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약속의 당사자는 인간이 아니라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언약은 사실 인간이 행함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언약을 하신 당사자인 여호와 하나님이 스스로 이루어 내실 언약이었다. 그래서 은혜 언약인 것이다. 또한 이 언약은 택자들에게서 반드시 하나님 스스로 이루어 내실, 인간이 조금이라도 기여(寄與) “불가항력적 은총 -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 구원을 위한 외적 소명에 부가해서 성령은 택자들을 필연적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특별한 내적 소명을 계속하신다.
     
    외적 소명(구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은 거부될 수 있고, 또 종종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내적 소명(택자에게만 하시는)은 거부되어질 수 없다. 그것은 항상 회개를 초대한다. 이러한 특별한 소명에 의하여 성령께서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 그는 인간의 의지에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사역에 있어서 제한을 받지 않으며 또한 성공을 인간의 협동에 의존하지도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은헤스럽게도 택한 죄인을 협동하게 하시며, 믿게 하시며, 회개시키시며, 자유롭게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에게로 오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도무지 거부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이 미쳐지는 사람들의 구원을 반드시 이루신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D.스틸/C.토마스 共著, 김남식 譯, 1992. p. 21 - 할 수 없는, 은혜의 언약으로서 내적(內的)인 것이다.
     
    장차 오실 메시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실 언약은,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율법으로(바울의 표현대로 “몽학선생”) 그림자적인 역할을 수행해낸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의 견고하고 화려한 왕국의 성취도 은혜 언약의 결과였지만,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모형에 불과했다. 이렇게 구약의 언약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이루어지고 통치가 이루어지는 외적 모습이었지만, 이제 그 언약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속사람 혹은 생각과 마음)안에 내적 모습으로 성취되었고 또 성취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은혜 언약 안에 행위 언약과 구속 언약이 있는 것이고, 이들 언약 모두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몫이었으며, 이제 우리는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소망 중에,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영원천국의 맛들을 보고 있는 현세천국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앞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의와 능력을 손톱만큼이라도 내세울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약을 통하여 당신만을 의지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意圖)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하게 그리고 영원히 성취되었다. 이 성취 아래서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성도의 견인 - 하나님에 의해서 택정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고 성령으로부터 믿음을 얻은 자는 모두 영원토록 구원을 받는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을 유지하여 끝까지 인내한다.”- Ibid. pp. 21-22영원천국을 향하여 가는 발걸음을 쉬지 않게 될 것이다.

      < 참고 도서 >
     
    1. 「벌코프 조직신학개론」, 루이스 벌코프 著, 박희석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2. 「기독교 교리개설」, 김성린,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3. 「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문화사, 2004.
    4.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D.스틸/C.토마스 共著, 김남식 譯, 도서출판 엠마오, 1992.
    5. 「계약신학과 그리스도」, 팔머 로벗슨 著, 김의원 譯,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6. 「QA시스템 성경연구시리즈」, 강병도, 기독지혜사, 1991.
    7. 「구약성경과 그리스도」, 김두석, 칼빈대학교출판부, 2003.
    8.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해설」, A.A.하지 著, 편집부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9. 「하나님의 구속경륜」, 서철원, 성문당, 1993.
    10.「신학사전」, 신학사전편집위원회,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출처 : 블로그 >반석위에기쁨





    영생은...아는 것이니이다

    - 십자가의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을 바라보며 예수는 '영생'에 대하여 정의를 내린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어 왔었다(Bernard).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호 6:3)
    예레미야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다'(렘 9:24)

    '안다'(기노스코.  ginōskō. γινώσκω)는 것은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하며 본절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수식하는 말로 사용됨으로 예수와 하나님의 인격적 하나 됨을 증거한다(Lenski).

    γινώσκω 스트롱번호 1097

    1. 알다.  2. 신비를~  3. 하나님을~
    발음 [ ginōskō ]

    관련 성경 /
    알아보다(막 6:38), 알다(마 6:3, 12:5, 7, 막 5:43, 8:17, 눅 20:19, 요 1:40), 알게 하다(마 9:30, 요 19:4), 알려지다(마 10:26, 눅12:2), 깨닫다(마 24:39, 막 5:29), 알리다(막 9:30, 요 7:17), 동침하다(마 1:25), 주다(막 4:11)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인생들에게 가장 쉽게 그리고 충분하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앎으로써 행복과 영생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주인으로서 영생의 주체(主體)가 되신다(11:35; 행 3:15).
    한편 기도중에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저희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식하는 것'이란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Lenski) 그렇게 해석하면 헬라어 원문에 무리가 따르게 된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시기 위해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이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이 견해는 무난하게 채택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표현은 메시야의 자기 증거인 셈이다(Godet).
    (3)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예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표현이라고 하는 주장이었다(Westcott, Hegnstenberg). 예수께 대한 요한의 고백은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반복 기록되었다(요일 1:3;2:22;4:3;5:20 등). 그러나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그날밤의 기억들을 잊어버렸다고 구태여 가정할 필요는 없다.







    09-22-2024(주일)
    암송 성구 #.18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ἐκτενής, ές 스트롱번호 1618

    1. 열심 있는.  2. 진지한. 3. 행 12:5
    발음 [ ĕktĕnēs ]
    어원  / 161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간절한(행 12:5), 뜨거운(벧전 4:8).


    καλύπτω 스트롱번호 2572

    1. 덮다.  2. 마 8:24. 3. 덮어 버리다
    발음 [ kaluptō ]

    관련 성경 /
    덮이다(마 8:24), 숨다(마 10:26), 덮다(눅 8:16, 약 5:20, 벧전 4:18), 가리다(고후 4:3).

    - '무엇보다도'는 어떠한 일보다 사랑을 먼저 할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열심으로'(에크테네. 1618)는 '힘껏 노력하는', '전심 전력하는'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 힘써서 할 사랑은 감정적으로 하는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을 가지고 행동을 수반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을수 있다.
    즉 피차간에 있는 허물을 덮어 주고 서로를 세워주고자 하는 사랑은 죄를 가리운다(잠 10:12).

    '죄를 덮느니라'에 대해서 혹자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친절한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그 보상으로 자신의 잘못이 가리워질 수있다고 주장하나(Tertullian, Origen) 여기서의 사랑은 친절한 행위를 함으로 오는 반대급부를 바라는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을 하고 있는 주체자의 죄가 가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있는 객체자의 죄가 가리워짐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무조건적으로 용서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헬라어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아가패(ἀγάπη), 필리아(φιλία), 에로스(Έρως), 스토르게" 사용합니다.

    사랑의 종류 4가지: 에로스(Eros), 스토르게(Storge), 필리아(Philia), 아가페(Agape)


    . "인간은 <에로스>에 의해 태어나고 <스토르게>에 의해서 양육받으며, <필리아>에 의해서 다듬어지고, <아가페>에 의해서 완성된다"

    1. 에로스(Eros)

    Eros is the god of love and lust whose other name is Cupid. 에로스는 큐피드라고도 불리는 사랑과 정욕의 신이다.

    Eros, the sex drive, and Thanatos, the death instinct. 에로스는 성적 본능이고, 타나토스는 죽음의 본능이다.

     EROS was the mischievous god of love, a minion and constant companion of the goddess Aphrodite.

    The poet Hesiod first represents him as a cosmic who emerged self-born at the beginning of time to spur procreation. (See the Protogenos Eros and Phanes, for more information.) The same poet later describes two love-gods, Eros and Himeros (Desire), accompanying Aphrodite at her birth from the sea-foam. Some classical authors interpreted this to mean they were born of the goddess at her birth, or alongside her in the sea-foam. The scene was particular popular in art, where the pair flutter around the goddess seated in her floating conch-shell.

    Eventually Eros was multiplied by ancient poets and artists into a host of Erotes or Cupids, as they are commonly called in English. The one Eros, however, remained distinct in myth. It was he who lighted the flame of love in the hearts of the gods and men, armed either with a bow and arrows or else a flaming torch. He was also the object of cult. Eros was often portrayed as a child, the disobedient, but fiercely loyal, son of Aphrodite.

    In ancient vase painting Eros is depicted as either a handsome youth or as a child. His attributes were varied: from the usual bow and arrows, to the gifts of a lover--a hare, a sash, or a flower. Sculptors preferred the image of the bow-armed boy, whereas mosaic artists favored the figure of a winged putto (plump baby).

    2. 스토르게(Storge)

    스토르게는 혈족애(血族愛)를 말한다. 
    부모 자식 사이의 피로 얽힌 사랑이다.

    피는 물보다도 짙고 호르몬보다도 강하다. 그러므로 부모 자식간의 혈족애(血族愛)는 어느 사랑보다도 강(强)하다.

    친자(親子)간(間)의 사랑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

    그것은 인륜(人倫)을 넘어서 천륜(天倫)이다. 우정이나 애정은 상대방의 장점이나 매력(魅力) 때문에 생긴다.

    만일 장점(長點)이나 매력(魅力)이 없어지면 사랑은 소멸(消滅)하거나 약화(弱化)된다. 

    아름답던 애인(愛人)이 추악(醜惡)한 불구자(不具者)가 되면 그 애정(愛情)은 고갈(枯渴) 된다.

    그러나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그렇지 않다. 자식이 불구자가 되어도 부모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자식을 측은(惻隱)히 여기는 마음은 더욱 강(强)해진다.

    자식이 불명예와 죄과(罪過)를 범하여도 부모의 사랑은 변(變)하지 않고 한결같다.

    가장 확실하고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부모의 사랑이다.

    가장 순수하고 이기적(利己的) 욕망을 떠난 사랑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의 사랑"이 사랑 중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

    3. 필리아(Philia)

    -philia: (명사에서) (특히 섹스와 관련하여 비정상적으로) …에 대해 갖는 이상 성욕[성애]  <참고 -phobia> paedophilia: 소아성애.

    Philia: Brotherly love, closer than that based on principles, denotes affection, close friend or family.

    'PHILIA'는 그리스어로 친구간의 우정 혹은 사랑을 의미한다. 

    그 어원에서 출발하는 는 특히 사춘기 시절의 열정과 불안, 순수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친구관계, 그리고 그 관게에서 묻어나는 이야기들을 더듬어 가며 지나간 기억을 떠올린다. 

    4. 아가페(Agape)

    아가페(그리스어: αγάπη)은 사랑을 뜻하는 여러 개의 그리스어 낱말 가운데 하나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지금까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여 왔지만, 보통 거룩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한다. 아가페라는 용어는 고대 사본에서는 드물에 쓰이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용어를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으로 부르고 있다. 또, 아가페는 수많은 기독교 작가들이 기독교적인 상황에서 서술해왔다. 아가페(agape)는 쉽게 말해 '절대적인 사랑 '을 뜻한다.


    1. 에로스(Eros)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활과 화살을 가진 나체의 어린이로 나타나는데, 

    그가 쏜 금화살을 맞으면 사랑에 빠지고 납 화살을 맞으면 증오하게 된다고 한다. 

    로마 신화의 큐피드와 아모르에 해당한다.

    <네이버 국어사전 출처>

     

     - 열정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2. 플라토닉(Platonic love)

    - 플라톤의 '대화'<향연> 편에 따르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올바른 방법은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즉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진정한 플라토닉 러브란 마음과 영혼을 고무시키고

    정신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위키백과 출처>

     

    - 순수하고 강한 형태의 비성적(非性的)인 사랑을 말한다.

     

     

     

    3. 아가페(Agape)

    - 신약성경에서 사랑을 가리키는 두 단어 중 대표적인 말.

    - 절대적인 사랑을 뜻하는 말.

     

    아가페 사랑은 절대적이라는 말, 성격적인 의미가 있다 보니

    성경에 나와있는 사랑에 대해 설명되어 있는 글을 더 적어볼게요-

     

    사랑을 뜻하는 헬라어에는,

    에로스 - 남녀 간의 육정적이고 성적인 사랑. ‘열정’이 내포되어 있는 단어.

    필리아 - 친구 간의 사랑. 우정이나 우애(약 4:4).

    스트로게 - 가족 간의 사랑, 부모 자식 간의 사랑. 특히 자식을 향한 부모의 다함없는 사랑.

    아가페 -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롬 5:5)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 아가페 [Agape] (라이프 성경사전) 출처>

     

     

     

    4. 루두스(Ludus)

     

    루두스는 라틴어 사전에 찾아보면 장난, 경기, 대단치 않은 일로 검색이 됩니다.

    그래서 루두스에 사랑에 대해 검색을 해보면 연인보단 친구 같은 사랑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가벼운 관계를 뜻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5. 스토르지(Storge)

     

    - 형제자매 사이나 친구 간에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무르익는 사랑의 감정을 뜻한다

    - 고대 그리스어 Storgay(스토르게이)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 가족 간의 사랑을 뜻한다고 한다. 

    - 스토르게 사랑은 우정이나 연민을 생활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느끼고 사랑의 감정으로 발전한 경우이다.

    -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의 사랑은 아니지만 서서히 진행되고 깊고 오래가는 사랑을 표현한 것 같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랑을 하고 계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6. 마니아(Mania)

     

    Mania를 사전적 검색을 해보면 1. 열광 2. 조병, 조광증이라고 검색이 됩니다.

    풀어져 있는 정의를 정리하자면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강한 집착 및 소유욕을 가진 사랑이라고 표현되는 거 같습니다.

    보통 마니아층이 있다 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많이 사용하는 것 같아요

     

    가볍게는 마니아, 마니아층이라고 표현할 수 도있지만 

    마니아 사랑의 찾아보면서 마니아의 타입의 사랑을 하시는 분들은

    의존성이 강하고 불안해하는 일이 잦으며,

    사랑받고 있다는 걸 자주 확인하고 싶어 하고 외로움을 많이 타며,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고 정리한 글도 보이네요

    <출처 : 연애의 과학 >

     

     

     

     

    7. 프라그마(Pragma)

     

    pragma의 사전적인 검색을 해보면 나라마다 조금 다르게 나오긴 하지만

    실제적인, 실용적인 등의 사전적 의미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하면서, 하게 되면서 마음도 중요하지만 현실을 직시하며,

    사랑을 하시는 분들을 표현하게 되는 사랑의 유형인 거 같습니다. 

     

    - 현실적인, 합리적인, 가슴보단 머리로 가 먼저 생각나는 사랑의 유형인 거 같네요

     

     

     

    이 사랑의 유형을 찾아보다가 너무 잘 보게 된 블로그가 하나 있어 블로그 작성자분께

    허락을 맡고 글을 조금 더 끄적여봅니다-♡

     

    에로스, 루두스, 스토르게는 일차적인 사랑

    마니아, 프라그마, 아가페는 이차적인 사랑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러면서 

    마니아의 사랑은 에로스와 루두스가 합쳐진 사랑

    프라그마는 스토르게와 루두스가 합쳐진 사랑

    아가페는 에로스와 스토르게가 합쳐진 사랑

    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09-15-2024(주일)
    암송 성구 #.17 마태복음 16:24
     
    참조 / 마가복음 8:34.  누가복음 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Th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따른다'는 것은 스승의 삶과 가르침에 온전히 순복하는 참 제자가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참된 제자의 조건을 전제한 것은 당신의 임박한 수난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그와 유사한 수난과 고초를 당하게 될 것을 익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직은 예수님을 따르기에는 너무 미흡한 제자들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며 수난당할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려면 내적으로는 자기 부인과 외적으로는 역경 가운데서도 적극적인 순종이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요구되는 소극적 측면으로서 자기의 이기적 욕망과 생각과 주장, 그리고 부패한 옛자아, 옛사람을 철두철미 굴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육신(사르크스)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죄인됨 인간 그 자체(롬 7:14, 18)가 됨으로써 그의 이성, 감정, 의지 등이 완전히 부패되었다(참조, 렘 17:9; 롬 1:18-32).
    바로 이러한 본성적 존재로서는 예수의 제자로 결코 따라 나설 수 없다.
    한편 이러한 제자의 요건을 망각(妄却)했던 베드로는 훗날 자기를 부인하는 대신 예수를 부인하고야 만다.

    부인하다(아파르네오마이) ἀπαρνέομαι 스트롱번호 533

    1. 부정하다.  2. 부인하다. 3. 마 26:34, 35, 75. 막 14:30, 31.  눅 22:61
    발음 [ aparnĕŏmai ]
    어원 / 미래 ἀπαρνήσομαι, 제1부정과거 ἀπηρνησάμην, 완료수동태 ἀπήρνημαι, 미래수동태 ἀπαρνηθή- σομαι, 575와 720에서 유래

    자기 십자가

    -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살던 팔레스틴의 유대인이라면 십자가 형벌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야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27:32).
    더불어 유다의 대반란으로 인해 수많은 십자가 형틀을 목격해야 했던 그들로서는(Josephus, 행 5:37) 죽음의 짐이요,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를 메라는 참의미가 무엇인지를 뼈 속 깊이 이해했을 것이다(10:38).
    한편 예수께서 친히 골고다 험한 언덕에서 이 십자가 형을 당하신 이후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엄숙한 제자로서의 결단의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신 일은 인류 구속의 대업을 완성하시는 유일, 단회적인 행위였으나 제자들의 십자가 짐은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 생겨나는 다양하고도 지속적인 행위일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제자들은 각자의 십자가를 거룩한 기쁨과, 무한한 감격과 감사로, 그리고 가장 가치있는 일로 받아들이며 끝까지 지고 예수의 발자취를 좇아가야 할 것이다(빌 3:12-14).

    지다(아이로)  αἴρω 스트롱번호 142

    1. 들어올리다.  2. 돌을 올리다. 3. 뱀을 집어 올리다
    발음 [ airō ]

    좇을 것이니라(아코루데이토)

    - 시제는 현재 명령형으로서 한두 번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좇아오라는 강한 명령이다.
    실로 주의 제자된 자는 억지로, 이따금씩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심전력으로 부단한 노력과 헌신을 통해 계속 좇아가야만 한다.




    09-08-2024(주일)
    암송 성구 #.16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강조한 까닭은 빌립보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겸손"을 권면했습니다.(3절)
    그리고 그와 같은 실제적인 증거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제시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번역된 단어는 "프로네오( phrŏnĕō) φρονέω)" 라고 하는데 '프로네오'의 의미는 "생각하다" "에 몹시 마음을 두다" "생각을 가지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예수님처럼 생각하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나의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생각의 전환이라고 합니다.

    생각의 전환은 우리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변화시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할 때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가능성을 제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그러나 생각의 전환을 통해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어려운 상황에서 "절대로 해결할 수 없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이것은 도전적이지만 극복할 수 있어: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것은 우리의 자신감과 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1. 자기를 비우는 마음

    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 자기를 낮추는 마음 

    8절상=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3.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

    8절하=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본절은 앞에서 빌립보 교회의 일치를 위해 '겸손'을 권면한 것에 대한 예증으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전환절이다.
    그리스도는 궁극적인 모델로서 이 땅에 오셔서 '겸손'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인들에게 모델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권면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자기를 부정하심으로 십자가를 지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서로가 겸손하고 자신을 부정할 때 다툼이나 허영은 사라지고 '교회의 일치'를 낳게 될 것이다(Martin, Kent, Hawthorne).

    마음을 품으라(프로네오. phrŏnĕō) φρονέω 스트롱번호 5426

    1. 생각하다.  2. ~에 몹시 마음을 두다. 3. 생각을 가지다
    발음 [ phrŏnĕō ]
    어원 / 미완료 ἐφρόνουν, 미래 φρονήσω, 제1 부정과거 ἐφρόνησα, 542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생각하다, 의견을 가지다, 판단하다, 롬12:3, 고전13:11, 빌1:7.
     2. ~에 몹시 마음을 두다, ~에 전념하다, ~에 몰두하다, 롬12:16, 빌3:16, 골3:2.
     3.생각을 가지다, 태도를 가지다, 빌2:5.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생각하다(롬8:5, 빌1:7, 골3:2), 여기다(롬14:6), 뜻이 같게 하다(롬15:5),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이다(롬12:16, 빌2:2,5), [명] 사상(행28:22).


    09-01-2024(주일)
    암송 성구 #.15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but of righteousness,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義)와 평강(平康)과 희락(喜樂)이라고 합니다.
    의(義)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 상태를 의미합니다(디카이오수네)
    평강(平康)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 상태를 계속적으로 유지하는 힘을 말합니다(에이레네)
    희락(喜樂)은 의와 평강을 이 세상에서도 마음껏 누리며 즐기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카라)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 한글 개역 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가르'(*, '왜냐하면')가 사용되어 본절이 15절 하반절과 16절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논거(論據)를 변화시켜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본질을 언급하고 있다(Sanday and Headlam). 강한 자들이 특정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것을 먹지 못한 약한 형제의 영적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 그리고 그로 인해 서로 판단하고 나아가 거룩한 믿음의 공동체가 좋지 않은 평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비쳐볼 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 바실레이아 투 데우,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는 먹는 것과 마시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즉, 이 땅위에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臨在)를 입증하는 것은 어떤 특정 음식을 먹느냐 못 먹느냐의 시시비비를 가리며 또한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외고집적으로 주장하는데 있지 않음을 책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는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바울은 여기서 전체의 논의를 단순히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다.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의 특징적인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성격으로 나타나는지를 진술한다.

    '의'(*, 디카이오쉬네)는 속죄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부름받은 올바른 행동, 즉 '도덕적 의'를 말한다(Godet, Murray, Meyer, 6:13, 16, 18).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활 헌장으로 선포하신 산상 수훈(山上垂訓)의 결론에서도 나타난 '의'이다.
    그리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나란히 취급한 데서 더욱 확인된다.

    '평강'(*, 에이레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을 믿을 때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Calvin, 5:1;빌 4:7).

    '희락' 또는 '기쁨'(*, 카라)은 '의'를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의 관계를 누리는 성도의 정서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영혼의 기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Calvin, Hodge) 성령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모든 관계에서 오는 사귐의 기쁨도 포함한다(Godet, Meyer, Murray).

    따라서 성도의 삶에서 누리는 총체적인 기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기쁨은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반드시 다른 성도와의 참다운 사귐에서 오는 기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즉 구원의 기쁨과 다른 사람과의 정상적인 교제에서 오는 기쁨과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는 것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보이는 형제인 다른 사람과의 진실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이처럼 '의'와 '평강'과 '기쁨'의 공동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 알라 엔 프뉴마티 하기오)만 가능하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오직'(*, 알라)이란 접속사가 '...만', 또는 '...외에는'이란 뜻으로서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서는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2)의, 평강, 기쁨 세 명사가 모두 '엔 프뉴마티 하기오'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Kasemann).
    (3) 갈 5:22, 23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에 '평강과 기쁨(희락)'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Harrison).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는 누구든지 성령을 의지하여 적극적으로 의와 평강과 기쁨의 열매를 나타내야 한다.
    본절을 통해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로 형제끼리 서로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얼마나 거리가 먼 어리석은 모습인가를 알 수 있다(본장 주제 강해 '아디아포라' 참조).






    08-25-2024(주일)
    암송 성구 #.14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Therefore, my dear friends, as you have always obeyed--not only in my presence,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구원을 이루라(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구원을 계속 이루어 가십시오(현대인)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새번역)
    구원을 위해 힘쓰십시오(공동번역)

    사도 바울은 이미 구원을 받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합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을 받은 것을 유지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구원의 은혜를 확산시키라는 것입니다.
    개인 구원에 만족하지 말고 개인 구원을 공동체 구원으로 확산시켜야 합니다.
    공동체 구원을 사회 구원을 넓혀가야 합니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성도들은 개인 구원의 은혜에 만족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개인 구원의 차원에서 공동체 구원 즉 가족 구원, 친족 구원,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의 구원 그리고 이러한 은혜를 세상을 더 넓게 확장해야 합니다.
    사회 구원이란 의미가 사회를 향한 투쟁으로 반복되어 마치 정부를 향한 쓴소리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사회 구원이란 개인 구원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구원을 이루라

    - '사랑하는 자들아'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목양하는 자로서 친근감있게 부르는 호칭이다.
    친근한 호칭과 더불어 바울은 본절에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한다.
    이 '구원을 이루라'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차원에서 본절을 이해한다(Muller, Kent).
     칭의 이후에 오는 성화의 과정에서 신인협동(神人協同)의 차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미 구원의 확증은 얻었지만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구원의 증거들을 실증하며 살아가야 함을 시사한다고 한다.

    2. '그리스도인의 연합적인 차원'에서 본절을 이해한다(Hawthorne, Martin, Michael, Gnilka, Collan-ge).
    바울은 4절에서 이미 개인적인 삶만 집착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돌보아 주라고 권면하고 있으며 본절 이하에서 개인적 구원의 문제를 생각한 종말론적인 분위기가 전혀 나타나지 않기에 교회 전체의 집합적, 공동체적 권면으로 볼 수 있다고 한(Hawtho-rne).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Lenski).
    왜냐하면 '구원'에있어서 '개인'과 '교회'는 분리할 수 없는 불가 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완성을 향해 계속해서 성숙해가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협력하여 나아가야 한다(엡 4:1-6).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 구원을 이루어가는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전적으로 의지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명령에 늘 순종하는 것이다(Martin, Kent).

    이루라(카테르가조마이) work out

    κατεργάζομαι 스트롱번호2716

    1. 성취하다
    2. 가져오다
    3. 억누르다
    발음 [ katĕrgazŏmai ]
    어원  / 디포넌트. 제1부정과거 κατειργασάμην, 제1부정과거 수동태 κατειργάσθην, 2596과 2038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성취하다, 완수하다, 행하다, 롬1:27, 2:9, 7:15, 15:18, 고전5:3, 고후12:12, 엡6:13, 벧전4:3.
    2. 가져오다, 이루다, 산출하다, 창조하다, 롬4:15, 5:3, 7:8, 고후4:17, 7:10,11, 9:11, 빌2:12, 약1:3.
    3. 억누르다, 압도하다, 정복하다, 엡6:13.

    관련 성경
    행하다(롬 1:27, 고후 12:12, 엡 6:13), 이루다(롬 7:8, 고후 7:10), 만들다(롬 7:13, 약 1:3), 역사하다(롬 15:18).


    08-18-2024(주일)
    암송 성구 #.13 아모스 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자유대한민국이란 나라가 무너지기 일보직전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동안 자유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일들을 생각해보자!
    첫째, 선교의 짧은 역사속에서 교회가 급성한 나라
    둘째, 피선교국가에서 선고국가로 발돋움한 나라
    셋째, 한강의 기적을 일으켜 선진대국으로 발전한 나라
    넷째, 자유민주의가 아름답게 꽃을 피운 나라
    다섯째, 훌륭한 정치 지도자가 배출된 나라(이승만대통령, 박정의대통령)
    여섯째, 한류의 바람을 일으킨 나라
    그런데 이런 자랑스런 나라가 붕괴되려고 한다.
    그것도 자유민주주의 체재에서 김일성주의 체재로........
    문제는 이러한 변화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급작스런 변화는 공법과 정의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선지자 아모스와 같은 외침을 강조해야 한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

    사회기강이 흔들리고 있는 까닭은 교회의 예배가 신령과 진정의 자리를 버리고 영광과 축복으로 변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라도 의식이 있는 교회와 성도들을 통하여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그루터기를 만들어야 솟아날 수 있는 자리가 다듬어지기 때문이다.




     
    - 본절에 의하면, 백성들의 잘못된 예배는 공법과 정의의 결여라고 볼 수 있다.
    '공법'과 '정의'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기도 하지만(사 10:22), 아모스는 인간 사회에 구현되어야 할 원리로 보았다(7,15절.  6:12).
    즉, 사회 질서와 관계있는 것으로 율법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 사회구조 속에서 구현되고 정직하게 이웃을 대할 때에야 비로소 그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흘릴지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이갈'(*)은 '굴리다'(roll)는 뜻의 '갈랄'(*)에서 온 나팔형 동사로 굽이치는 강물처럼 격렬하게 흐르게 하라는 명령형이다(BDB).
    또한, 히브리어 원문에는 '끊임없는'(perpetual)이라는 뜻을 가진 '에이탄'(*)이라는 형용사가 있어서 그 강도를 더해준다.
    그러므로 공법과 정의가 적극적이고도 계속적으로 흘러야만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사가 의미있고 가치있음을 보여준다.

    공법(公法) 4941 미쉬파트[ mishpâṭ ] מִשְׁפָּט 스트롱번호 4941

    1. 판단.  2. 레 19:15. 3. 욥 9:32
    발음 [ mishpâṭ ]
    어원  / 819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24회 사용

    레위기 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찌며.

    욥기 9:32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정의(正義) 6666 여성명사  체다카 [ tsedâqâh ] צְדָקָה 스트롱번호 6666

    1. 올바름.  2. 정의. 3. 의로움
    발음 [ tsedâqâh ]
    어원 / 666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57회 사용

    ☞의(창 15:6, 삼하 8:15, 잠 11:5), 의로움(신 6:25, 24:13, 사 5:7), 공의(신 33:21, 왕상 3:6, 사 10:22), 권리(느 2:20), 정의(암 5:7, 6:12, 슥 8:8).
    [형] 의로운(삿 5:11, 대하 6:23, 시 11:7),옳은(삼하 19:28), 적당한(욜 2:23).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잠언 11:5
    완전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그 이 곧게 되려니와 악한 자는 그 악을 인하여 넘어지리라.



    08-11-2024(주일)
    암송 성구 #.12 베드로후서 1:4

    신의 성품
    베드로후서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성품은 타고난 성격이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성격과 성품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신의 성품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삼위로 존재하는 다양성과 온전한 하나로 존재하는 신비한 현상은 마치 다양한 성격의 그리스도인들이 한 영으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고 또한 다양한 지체들로 각자의 맡은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고유한 신분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신의 성품이란 성령의 지배를 받아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삶을 통하여 드러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아직도 성령화되지 못한 나의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습관을 성령의 지배를 받아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덕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의 일들 즉 그리스도의 재림(3:4,9,12), 새 하늘과 땅(3:13)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11절)에 참여케 되는 것을 가리킨다.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 '피하여'의 헬라어 '아포퓌곤테스'(*)는 부정 과거 분사로서 '피한 이래로'라는 의미이다(Bigg, Blum).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침례를 받은 후부터 죄와 정욕과 거리가 멀어지며 피하게 된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스데데이아스 코이노노이 퓌세오스'(*)에서 헬라어 '데이아스'(*, '신에게 속한')는 성경적 용어라기보다는 헬라 사상에 따른 이교적 표현이다(Richardson). 베드로는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그의 논쟁을 전개시키고 있다(Kasemann). 그러나 본문은 이교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내면에 본래부터 신과 같은 거룩한 성품이 있어서 이것을 잘 계발하면 성인(聖人)이 되고 거스리게 되면 악인(惡人)이 된다는 사상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참된 연합을 통해서 성령의 교제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됨을 시사한다(Bigg, Green).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 거듭나게 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된 영적 교제를 나누며(요 14:16,17,26), 장차 나타날 영광과 축북에 참여하게 된다(롬 8:18).



    08-04-2024(주일)
    암송 성구 #.11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What good will it be for a man if he gains the whole world, yet forfeits his soul? Or what can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목숨의 소중함(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신약 성서는 종말론적 관심이 옥중에서 해방을 기다리고, 밤중에 새벽을 기다림같이 열망적입니다.
    재림에 관련된 곳이 318번이나 썼고 천국과 지옥과 부활과 영혼 구원문제는 백주의 태양처럼 강렬한 현실이었습니다.

    "온천하를 얻고도 네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현세주의자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하시고 말세에 사람들이 노아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마 24:38)하는 현세가 전부이며, 유물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가치관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말세 인간들은 예수 재림을 기롱합니다(벧후 3:3).
    복음적 신앙을 오히려 반사회, 반문명, 반지성, 혹은 피안주의니 현실도피니 하는 낙인을 찍어 냉소하는 풍조를 만듭니다.
    그것도 진화론 공작과 함께 악마의 반성서적, 반내세적, 반종말적정신 풍토 조성을 위한 고등공작의 가장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오늘도 영적인 세계를 알고 깨어 근신하며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숨(5590. 프쉬케)

    ψ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5590

    1. 영혼.  2. 생명력. 3. 혼
    발음 [ psüchē ]
    어원 / 5594에서 유래

    뜻풀이부 / I. 영혼, 목숨, 생명
    관련 성경 /  목숨(마 2:20, 막 8:35, 롬 11:3), 영혼(마10: 28, 눅12:20, 고후12:15), 마음(마11:29, 막14: 34, 행14:22), 생명(막3:4, 요12:25, 행20:10), 힘(막12:33), 뜻(행4:32), 인(행27:37), 영(고전15:45), 혼(살전5:23, 히4:12), 명(벧전3:20), 심령(벧후2:8), 사람(행7:14, 롬13:1).




    얻고도...잃으면

    - 여기에서 '잃으면'(제미오데)이란 '해를 입히다' '손해 보다'는 뜻의 '제미오오'(*)의 부정과거 가정법으로서 아직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는 표현이다.
    이는 '얻고도'(*, 케르데세)라는 말이 능동태를 취하고 있는데 비해 수동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고 할 것이다.
    즉 비로소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얻는다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어떤 유익이 있겠느냐는 역설적 대구인 것이다(눅 9:25).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 이는 인간 영혼(생명)의 최고 가치성과 유일성 및 단회적 생명성을 강조한 말이다.
    즉 예수께서는 비록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온갖 부와 명예는 잃고 난 뒤에도 다시 취할 수 있지만 인간의 영혼은 한번 상실하면 도무지 회복할 수 없는 고귀한 것임을 강조하셨다.
    이제 현존하는 모든 사람들은 '온 천하'냐 '자기 목숨'이냐 라는 종말론적 선택을 해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선택하기 원하신다(룻 1:16, 17; 왕상 18:21; 히 11:25).




    07-28-2024(주일)
    암송 성구 #. 10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카이 엔뒤사스다이 톤 카이논 안드로폰 톤 카타 데온 크티스덴타 엔 디카이오쉬네 카이 호시오테티 테스 알레데이아스.
     και ενδυσασθαι τον καινον ανθρωπον τον κατα θεον κτισθεντα εν δικαιοσυνη και οσιοτητι της αληθειας

    엔두오 호 카이난 안드로포스

    입으라 (1746) 엔두오 [ ĕndüō ] ἐνδύω 스트롱번호 1746

    1. 입히다.  2. 옷 입다. 3. 마가복음 6:9(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발음 [ ĕndüō ]
    입다(마 6:25, 막 1:6, 계 1:13), 입히다(마 27: 31, 막 15:17, 눅 12:22), 붙이다(엡 6:14, 살전 5:8).


    그(3588)

    ὁ, ἡ, τόpl. οἱ, αἱ, τά 스트롱번호3588

    1. 이 사람
    2. τοῦ γὰρ καὶ γέ νος ἐσμέν : 왜냐하면 우리도 그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3. ὁ μὲν..
    발음 [ hŏ ]


    새(2537) καινός, ἡ, όν 스트롱번호 2537

    1. 새로운.  2. 쓰지 않은.  3. 알려지지 않은
    발음 [ kain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새(마 9:17, 눅 5:36, 계 2:17, 마 13:52, 막 2:21, 고후 5:17), 새로운(고후 5:17, 계 21:5), 새로 되는(행 17:21).

    사람(444)

    ἄνθρωπος, ου, ὁ 스트롱번호444

    1. 인간.  2. 강 막 9:31.  3. 마 4:19
    발음 [ anthrōpŏs ]
    어원 / 435와 ὤψ ‘안색’에서 유래
    사람(마 4:4, 막 1:17, 고후 4:16), 남(눅 6:31, 남에게 마 7:12), 인자(마 8:20, 막 2:28, 눅 1:25), 인간(행 4:12), 범인(행 4:13, 고전 15:32).




    새 사람(the New Self)이란 누구인가?

    하나님을 따라...지으심을 받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카타 데온 크티스덴타'(*)는 문자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창조된'이란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되었음'을 시사한다(골 3:10, Bruce,Lincoln).
    하나님은 죄로 잃어버렸던 그의 형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현시켰고 그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심으로(Bruce, Wood)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하셨다(Lincoln).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디카이오쉬네 카이 호시오테티 테스 알레데이아스'(*)는 문자적으로 '진리로부터 나온 의와 거룩함 안에서'를 의미한다.
    '의와 거룩함'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함을 받는 새사람의 윤리적 덕목이며 자질(資質)이다(Lincoln).
    '의'는 모든 생활 가운데 올바르고 충실하게 사는 것을 의미
    '거룩함'은 세상으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속한 삶으로 악에 물들지 않는 성결한 삶을 의미

    두 가지 덕목은 '진리'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진리'는 복음과 사도적 전승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실재다(21절;1:13).

    새 사람을 입으라

    본절은 22절의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와 대조된다.
    '새 사람'은 문자적으로 '갓 만들어낸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2:15)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통해 재창조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이러한 '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된 자에 합당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4)

    입는다는 동사는 주로 옷을 입을 때 사용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마치 무슨 탈을 뒤집어 쓰는 것이 아닙니다.

    1930년대 미국의 대경제공항 때에 경제적인 위기가 점점 심각해지므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이 동물원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도 먹고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때에 동물들을 제대로 먹이는 것에 많은 재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도 살리고 동물원도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던 관계자들은 한 가지 좋은 생각을 제시했습니다.
    동물의 탈을 쓰고 마치 살아있는 동물처럼 하루 종일 우리 안에서 지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숭이 우리에는 원숭이의 탈을 쓴 사람이 원숭이처럼 지내고 있었고 그 옆에 호랑이 우리에서는 호랑이 탈을 쓴 사람이 호랑이 흉내를 내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동물원의 관리인은 탈을 쓴 사람들에게 절대로 다른 우리로 넘어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한 번은 원숭이 우리에서 원숭이의 탈을 쓴 사람이 원숭이처럼 재롱을 부리다가 그만 호랑이 우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호랑이 한 마리가 어슬렁 어슬렁 원숭이 곁으로 다가옵니다.
    절대로 사람의 소리를 내지 말라는 관리인의 주의사항을 기억한 원숭이는 다가오는 호랑이를 두렵게 바라봅니다.
    이때 호랑이가 원숭이 곁에 와서 속삭이더랍니다.
    "너도 나처럼 하루종일 원숭이 탈을 쓰고 고생하는구나!" 하며 원숭이 주위를 한 바퀴 돌더나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예수 탈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겉은 예수처럼 성자와 같은 흉내를 내고 있지만 그 속에서는 온갖 추하고 더러운 것들이 득시글 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예수의 탈을 쓰고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온전한 예수의 생각과 마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처럼 무장할 수 있을까요?

    어느 날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매우 심각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결론으로 예수님의 대답은 "거듭나라!"고 하셨습니다.

    거듭나다는 헬라 단어는 팔링게네시아()라고 합니다.
    팔링게네시아는 "거듭남" 이란 명사형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첫째, 다시 시작하라

    새 출발이란 의미는 새로운 사람이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결혼한 후에 서로 헤어졌습니다.
    그런다가 각자 헤어진 후에 살아보니 그래도 예전에 함깨 하였던 사람이 더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직도 혼자서 지내던 두 사람이 다시 결합하기로 약속하면서 함께 생활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새 출발이라고 합니다.

    비슷한 사례이지만 두 사람이 헤어진 후에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지냈습니다.
    역시 구관이 명관이라는 옛말이 맞구나! 하고 느낄 때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현재 살고 있는 두 사람이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도 새 출발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새 출발보다 더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혼자사 쓸쓸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했었는데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이제부터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그 이전의 사람을 위하여 잘 살아야 한다고 중보기도도 합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먼저 생각하고 기도할 수 있을 때 이것도 새 출발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더 높은 것을 생각하라

    사람들은 현재의 위치에서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러한 삶은 육체에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육체에 붙잡혔다는 증거가 육신적인 기준에 의해서 판단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반차 투정, 신발 투정, 옷 투정, 자동차 투정......
    그러나 육신의 가치가 아니라 보더 한차원 높은 정신적 차원에서 생각해 봅니다.

    반찬이 싱겁구나 내가 소금을 더 먹어야지
    옷이 더럽구나 내가 손으로 직접 빨아어 입어야지
    왜 나는 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시킵니까?


    그런데 이것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고 상대방 중심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월남전이 한창 치열하게 전개될 때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이 월남 전선을 방문하여 장병들을 위로하는 위문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맨 앞줄이에 앉은 두 사병에 눈길이 쏠렸습니다.
    한 사람은 오른 손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왼손이 없습니다.
    다른 장병들이 손뼉을 치며 즐거워 할 때 두 사람은 서로 완손과 오른손을 마주치며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παλιγγενε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3824

    1. 중생.  2. 마 19:28. 3. 딛 3:5.
    발음 [ palingg ĕ- nĕsia ]
    어원 / 3825와 1078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중생, 재생, 거듭남.
     a. [세계에 대해서] 마 19:28.
     b. [구속받은 사람의 재생에 대해서] 딛 3: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중생(딛 3:5), 새롭게 됨(마 19:28).

    * 3825.  πάλιν 스트롱번호 3825

    1. 다시. 2. 돌아가다. 3. 요 4:13
    발음 [ palin ]
    어원 / 3823과 동일어에서 유래한 듯

    뜻풀이부

    1. 다시, 돌아, 도로.
     a.  [가다, 보내다, 돌아서다, 부르다 등의 동사와 함께] 돌아가다, 막11:3, 요6:15, 11:7, 갈2:1.
     b.  [전에 있던 상태로 다시 떨어지거나 전에 하던 동작으로 돌아가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 요4:13, 고전7:5, 갈2:18.

    2. [이미 한 일을 반복하거나 어떤 일이 전에 생겼던 것과 같은 식으로 생긴다 든가, 어떤 존재 상태가 전과 같이 다시 일어날 때] 다시, 또 한 번, 또 다시, 새로, 막2:13, 눅23:20, 요1:35.

    3. 그 위에, 더욱이, 더군다나, 거기서, 마5:33, 13:45, 19:24, 눅13:20, 롬15:10-12, 고전3:20.

    4. 반면에, 차례로, 마4:7, 요12:22, 고전12:21, 고후10: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또(행 10:15), 다시(갈 1:9), 또한(고전 12:21).

    * 1078. 게네시스  γένε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1078

    1. 기원.  2. 존재. 3. 마 1:1의 βίβ- λος γενέσεως는
    발음 [ genesis ]
    어원 / 1074와 동일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기원, 태초, 족보, 혈통, 탄생, 마 1:18, 눅 1:14.
    2. 존재, 약 1:23.
    3. 마 1:1의 βίβ- λος γενέσεως는, 창 2:4, 5:1에서 온 것이다. 기원의 역사, 족보, 역사의 책.
    4. ὁ τροχὸς τῆς γενέσεως : 인간 기원의 수레 바퀴, 인생 여정, 약 3:6.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계보(마 1:1), 출생(생긴)(약 1:23), 삶(약 3:6).







    07-21-2024(주일)
    암송성구 #.9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You diligently study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by them you possess eternal life. These are the Scriptures that testify about me.

    상고(詳考)라는 헬라 단어는 "에류나오(ĕrĕunaō. ἐρευνάω)" 라고 하여 사도행전 17:11에서 소개한 "상고(아나크리노. anakrinō) ἀνακρίνω)"와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나크리노'는 "탐색하다, 조사하다, 체로 쳐서 골라내다" 라는 의미로 사용하였고, '에류나오'는 "찾다, 추적하다, 조사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상고한다는 것은 예전부터 전해오는 것에서부터 찾아내고 밝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상고하는 방법은 말씀을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말씀과 연결되는 37-38절을 읽어봅시다(개역 개정판으로 소개합니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성경에서 영생을 얻으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께 친히 증언하신 말씀을 찾고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곧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언이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미리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장차 메시아가 이 세상에 임하실 것이라는 예언(預言)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말씀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신약의 말씀은 구약의 예언에 대한 성취(成就) 및 응답(應答)을 말합니다.


    상고하다(에류나오. ĕrĕunaō)  ἐρευνάω 스트롱번호 2045

    1. 204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 찾다.  2. 추적하다.  3. 조사하다
    발음 [ ĕrĕunaō ]

    뜻풀이부

    1. 204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 찾다, 추적하다, 조사하다, 탐구하다, 살피다, 요 5:39, 7:52, 롬 8:2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생각하다(요 5:39), 상고하다(벧전 1:11), 살피다(롬 8:27), 통달하다(고전 2:10).

    * 2046.
    ἐρέω 스트롱번호 2046

    1. 4483의 보다 완전한 형태 : 언급하다.  2. 대화하다.  3. 말하다
    발음 [ ĕrĕō ]

    뜻풀이부
    1. 4483의 보다 완전한 형태 : 언급하다, 대화하다, 말하다, 부르다, 요 4:18, 계 17:7등.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말하다(마 7:4, 눅 23:29, 롬 3:5), 명하다(마 17:20), 묻다(마 21:24, 눅 19:31), 이르다(막 11:29, 고후 12:9, 계 17:7), 말씀하다(눅 2:24, 요12:50, 행 2:16).

    * 4483.

    ῥέω 스트롱번호4483

    1. 말하다.  2. 지시하다
    발음 [ rhĕō ]

    뜻풀이부

    1. 말하다, 마 3:3, 5:21.
    2. 지시하다, 명하다.

    참고 정보/  문법설명 / 미래 ῥεύσω, 4482와 유사

    관련 성경
    말하다(마 2:15, 5:21, 12:17, 24:15), 이르다(롬 9:12).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 이 말씀은, 윗 귀절들(37-38)의 정당성을 증거한다.
    곧, 구약 성경은 영생을 주는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는데, 유대인들이 그 성경을 상고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그와 같은 행동은 성경을 바로 앎이 아니다.
    곧,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과 같다.





    07-14-2024(주일)
    암송성구 #.8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Follow my example, 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t.

    미메타이 무 기네스데 카도스 카고 크리스투
    μιμηται μου γινεσθε καθως καγω χριστου.

    본 받는자(3402) 미메테스(mimētēsμιμητής, οῦ, ὁ 스트롱번호 3402

    1. 모방자.   2. 본받는 사람.  3. 고전 4:16
    발음 [ mimētēs ]
    어원 /  340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모방자, 본받는 사람, 고전 4:16, 엡 5:1, 살전 1:6, 히 6:12.

    연관 단어 관련 성경
    본받은 자(고전 4:16, 엡 5:1, 살전 2:14), 행하는 자(벧전 3:13).

    * 3401.
    μιμέομαι 스트롱번호 3401

    1. 모방하다.  2. 본따다.  3. 본받다
    발음 [ mimĕŏmai ]
    어원 / 명령 μιμοῦ, 미완료 ἐμιμοῦμην, 미래 μιμήσομαι, 제1부정과거 ἐμιμησάμην, ‘흉내내다’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모방하다, 본따다, 본받다, 따르다, 살후 3:7,9, 히 13:7, 요삼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본절을 10장에 속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1. 2절에서부터 새로운 주제 즉 교회의 예배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2. 문맥상 본절은 10:3과 상관성(相關性)을 갖는다.
    바울은 10장에서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와 우상의 제물을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으며 그 권면의 모델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즉 바울은 8장의 경고와 권면에 대한 결론으로 본절에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본받는 그리스도는 유일하고도 완벽한 모델로서(Godet) 그분의 삶은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이었다(빌 2:4, 5).
    그러나 그리스도나 바울의 삶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이타적인 삶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이타적인 삶이었다(10:33).

    오늘 본문에서 ‘본’이라는 말이 영어 단어로는 두 가지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example’이라는 말과 다른 하나는 ‘pattern’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인데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나서 하신 말씀입니다. 조금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길 수 있습니까? 아니 단순히 선생이 아닌 “주님”인데 말입니다. 당시의 풍습에 의하면 하인이 주인이나 손님의 발을 씻는 것이 관례였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기를 원하시는 새로운 ‘pattern’입니다.

    모든 경기에는 rule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도 새로운 룰이 적용됩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것은 ‘본’이 되는 삶을 산다는 것이 우리가 가진 기존의 관념을 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는 관념도 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를 잘 믿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조금은 유별나게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남들이 뭐라고 해도 식사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도 성경을 묵상합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닮고 싶어 하느냐? 아니면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하고 심지어는 혐오하느냐? 하는 것이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우리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유익이 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닮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점점 더 혐오하게 될 것입니다.

    “본”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가 “거룩함”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생활에서 적어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는 가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교인들과 선교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것입니다. 선교팀들이 여기저기서 기도하는 모습을 봅니다. 식당에서도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은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신앙에 관한 한 열정적인지를 드러내야 합니다. 좀 “유별나다!”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제가 좀 믿음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저는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으면 개인 기도를 하고 먹거나, 작은 소리로 기도를 하고 식사를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식사 기도하는 것이 본이 되어야지, 다른 사람들의 식사를 방해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닌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터기에 성지순례를 하면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에베소의 원형극장에 갔을 때, 얼마나 울림이 좋은지 화음을 넣어서 성가를 부르면 사람들이 손뼉을 칩니다. 그래서 자꾸 노래를 더 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 소리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가이드가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합니다. 가이드 소리에 집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 찬양 소리 때문에 하나님이 손가락질을 당한다면 우리의 행동을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싶어 하셨던 새로운 삶의 스타일이 있다면 “섬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요한복음 13장 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때가 언제냐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것을 아시고, 바로 죽음을 앞에 놓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때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마지막까지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 끝까지 사랑하시던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오늘 본문을 가리켜 “때를 가리지 않는 섬김”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힘이 들어도 섬기지 못할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조금만 돈을 벌고 권력을 잡아도 섬기지 못할 이유가 됩니다. 가진 것 없어서, 지위가 없어서, 가진 것이 많아서 그 모든 이유가 섬기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데, 예수님은 가장 힘든 순간에 섬김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의 가장 진지한 모습이 드러나는 때가 극한 상황이라고 하지요.

    제가 조금 무모한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던 광야를 실제로 체험하면서 설교 준비를 해 보려고 합니다. 제가 직접 애급에서부터 출발해서 시내 광야를 머물며 광야 체험을 하고 가나안까지 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나눠보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을 나누는데, 누가 함께 가야 할까? 추운 밤, 더운 낮 물도 없이 지나야 하는데, 건강한 남자들로 팀을 모으고, 12 지파의 모습들을 성경을 보면서 철저하게 재현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여자들도 데려가서 정말 현실감 있게 불평하는 모습도 담아야 합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아야 하니까요.”

    여행사를 하시는 권사님이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광야 체험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렇게 온전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하루 코스에 하이라이트가 있는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무장한 강도들에 의해 납치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끌고 다니다가 호텔에 데려다 줍니다. 그러면 그 과정 중에 리얼하게 사람들의 본 모습이 다 드러납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그분이 누구이신지 우리가 분명히 압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신 것, 수없이 많은 기적을 행하신 일들이 결국은 섬기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섬김의 본이 위대한 것은 섬김의 대상에서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롯 유다도 예수님이 발을 씻기시는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에게 예수님을 팔려는 계획을 마음에 감춘 가롯 유다 앞에도 수건을 들고 대야를 놓고 발을 씻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섬김에서 누구도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을 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가장 강력한 크리스천의 영향력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은 늘 자기편과 반대편을 갈라놓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도 그런 나뉨이 존재합니다. 진리 때문에 나뉘는 것이 아니라 내 성향에 따라 갈라지는 것이죠. 나눠진 우리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라는 주석가는 "예수님은 겸손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마디로 말하면 겸손할 필요가 없는 시간에 겸손하셨습니다. 겸손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겸손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이 보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것이 무엇인가요? 오늘 본문에 다시 한 번 집중합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고 우리가 따라 하기를 원하셨고, 그렇게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우리를 보고 따라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한 번 상상을 해보세요. 우리가 상황에 관계없이 대상에 관계없이 섬기기를 시작했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또 다른 가치관을 누군가 보여 줄 수 있다면, 또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연히 읽게 된 책이 있습니다. 데이빗 케이프가 쓴 [주님의 음성에 그대로 순종한 예수를 위한 바보]입니다.

    그가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백인과 흑인이 딱 갈라져서 서로 싸우고 죽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현장에서, 그것도 석탄 연기 가득한 빈민들과 깡패들이 사는 ‘소웨토’라는 곳에서 “예수님이 씻긴 발은 행복한 발입니다!”라는 문구를 새긴 티셔츠와 반바지, 두꺼운 고무 깔창을 댄 운동화에 양말을 발목까지 접어내리고, 등에는 큰 장비를 지고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라는 음성 말입니다.

    자신의 모습이 너무 우습기도 하고, 정말 바보 같은 모습 실현 가능성이 없는 그 모습임에도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소웨토에서 만난 4명의 건장한 폭력배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이 발을 내놓았고, 그 중 한 명이 데이빗과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일어난 변화의 스토리 기적의 이야기가 그 책에 나와 있습니다.
    그의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속도로에서 또는 샛길에서 만나 그들의 발을 씻겼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족히 수천 명은 될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성공이나 실패가 없고 오직 순종만 있을 뿐이다. 내가 하루에 이삼십 명의 발을 씻기면 그날은 성공적인 날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찾는 단 한 가지는, 우리가 그분의 신실한 자녀로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다.”

    새로운 패턴의 삶을 살기 위해 순종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 세상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절대로 이 세상의 가치를 가지고 세상이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죠.

    오스트리아의 애들러라는 의사는 자기를 찾아오는 우울증 환자를 치료할 때 이런 처방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가서 2주일 동안 매일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할까 그것만 골똘히 생각하고 한번 실천해 보세요. 2주일 동안만 그렇게 살면 당신 병은 깨끗이 낫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새롭게 하고, 세상을 치유할 유일한 길이 있다면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셨던 그런 삶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믿음을 본받기 원합니다. 적어도 제 생각에 세상 사람이 우리를 보고 본받기를 원하고 감동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을 볼 때입니다. 평상시의 삶에서 우리의 신앙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모습”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반대로 평상시에는 예수를 잘 믿는 것 같은데 위기 가운데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면 우리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평상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성경을 읽거나 전도하는 우리의 모습보다, 불합리하게 진급에서 떨어졌을 때 대응하는 우리의 모습, 부당하게 꾸지람을 듣거나, 누가 봐도 힘들게 하는 못된 상사를 만났을 때 처신하는 우리의 모습, 모두가 실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회사가 위기에 처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보이는 신앙인의 의연한 모습과 소망으로 인내하는 모습 말입니다.

    자녀의 진로문제를 놓고 안달하고, 입시의 당락을 가지고 일희일비할 때,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자녀에 대한 소망의 끈을 놓지 않으며 기도하는 모습, 군대에서 진급 철이 되면 교회와 절과 성당에 사람들이 모이고 진급 발표가 나면 사람들이 쫙 빠져나가고 기뻐하거나 실망할 때,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며, 진급되었을 때, 그렇지 못한 사람을 위로하는 모습과 반대로 내가 실패했을 때에, 선한 길을 인도하실 하나님을 굳게 믿으며 잘 된 사람을 축복할 수 있는 모습 말입니다.

    내가 목사고, 장로고, 권사고, 집사인데, 예수를 잘 믿는데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일이 잘 안 풀릴 때, 우리를 주목해 보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어려운 일이 찾아올 때,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우리의 행동을 바라보지 않겠습니까?

    임은미 선교사가 쓴 [최고의 날 최고의 그리스도인]이란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 잘 믿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예수님을 잘 믿지 않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면 하나님을 떠나버리지 않을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친하게 여겨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주님, 이 고통을 저와 함께 나누기로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친구가 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주님의 고통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을 품는다. 어려움이 찾아온다면, 당신도 이런 마음으로 감사하며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어찌 보면 참 쉬운 일들 같은데 이런 모습이 세상이 바라는 모습입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본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받은 축복보다, 의인이 넘어졌을 때 일어나는 모습입니다.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넘어져서 일어나는 사람, 시험 가운데 견디는 사람, 죄 가운데서 용서받은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완전함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완전함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크리스천의 모습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의 [주님과 동행하십니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볼만한 묘기 가운데 하나는 공중그네 타기입니다. 우리는 숨을 죽여가면서 곡예사들이 한 그네에서 다른 그네로 옮겨가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천막의 가장 높은 곳에서 묘기를 펼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 사람을 다른 곳으로 밀어 보냅니다.

    그러면 당신은 "저러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하며 조마조마합니다. 한 번은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그처럼 완벽하게 공연을 할 수 있습니까? 한 번도 떨어지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떨어집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공연마다 떨어집니다. 하지만 눈치를 못 채시는 거죠. 왜냐하면 우리는 떨어졌을 때 어떻게 만회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거든요. 우리는 떨어졌을 때 재빨리 다시 뛰어 오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도 공연의 일부라고 생각하지요."
    그들은 밑에다 그물을 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될 때, 우리는 절대로 완전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안전합니다. 이 안전하다는 신뢰감이 모든 일을 성공하게 하는 힘이 되어줍니다.


    교회가 본이 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요, 그 하나님의 우리의 행동을 바라보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시고 그대로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믿음 안에서 우리의 행동이 결정되고, 교회의 모습이 결정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더 큰 도전이 되는 것은 우리 개인의 삶의 문제일 뿐 아니라 크리스천들이 모여 있는 교회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보인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교회를 보면 세상 사람이 용서하시는 하나님,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싸우시는 하나님, 정죄하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용서하거나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조바심내고 안달하며 자기 것을 차지하려는, 섬기는 본이 아니라, 죽어도 자신의 것을 희생하지 않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기적인 교회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운동을 하며 기독교 TV를 보다가 포항중앙교회 서임중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축복과 저주의 부메랑”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우리가 잘 아는 어떤 교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서울에 있는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 담임목사님이 재임 당시 쓰러지셨을 때, 교회당회원들의 사랑과 배려는 온 세계를 감동시킨 위대하고 아름다운 역사로 지금 남아 있습니다.

    1988년에 ○○○ 목사님이 뇌출혈로 쓰러지셨습니다. 3년 동안 말씀을 못 하셨습니다. 몸은 절반만 사용되는 불구가 되었습니다.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는 치명적으로 기억과 모든 의식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얼굴은 뒤틀려서 의사도 돌아올 확률이 없다고 진단을 내린 상황이었습니다. 웬만하면 포기할 법 한데, 그 교회 장로님들은 포기하지 않고, 3년 동안 목사님을 병원에 눕혀놓고, 매일 24시간 기도하면서 조를 짜서 병원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장로님들이….

    목사님이 스스로 견디기 어려워 죽고 싶다고 하니까 장로님들은 그 목사님을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그렇게 죽고 싶은 것이 소원이시면 저하고 손잡고 한 번이라도 일어섰다 죽으십시오.”

    그렇게 하면서 강권하여 담임목사를 운동시키는 조를 짜서 3년을 뒷바라지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목사님을 회복시킬까?’ 이것만 생각했습니다.

    그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한 번은 제주도로 목사님을 모시고 가서 만장굴 앞에 세워놓고 이쪽으로 걸어와 보라고 합니다. 비실비실하면서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목사님이 사모님 손을 잡고 몇 발자국 움직여 장로님 앞으로 오게 될 때, 장로님들은 “우리 목사님 만세!” 하면서 울고 또 울며 그렇게 기뻐했다는 이야기는 잊을 수 없는 감동스토리가 되었습니다.

    노회는 교회가 강단을 너무 오래 비운다고 설교 목사를 파송하려고 결의합니다. 그때 ○○○○교회 장로님들은 “누구도 우리 교회에 오지 못한다. 만약 노회가 설교 목사를 파송하면 우리는 ○○○○교회는 노회를 탈퇴한다고, 우리 목사님이 회복되어서 이 강단에 설 때까지는 누구도 ○○○○교회 강단에 설 수 없다.”라고 노회를 향하여 항거하기도 했습니다. 노회도 이 장로님들의 행위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습니다.

    장로님들은 목사 지키기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드디어 3년 만에 목사님이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반신불수의 몸으로 어눌하지만 처음 설교를 하게 되었을 때 교회는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 목사님은 우리 한국교회사에서 설교 잘하기로 유명한 목사님이셨습니다. 말이 빠르면서도 발음이 정확하게 전달되는 어른이셨습니다. 그러나 병중의 설교는 알아듣기도 어렵고 어눌한 말이었지만, 그 소리를 듣는 교인들은 행복해했습니다.

    뇌출혈 당시에 모든 기억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성경을 읽다 보니까 “태초”라는 말이 뭔지 몰랐습니다. 사전을 펴보니까 “맨 처음”이라고 되어 있었답니다. 창조라는 말이 뭔 말인지 몰랐답니다. 사전을 펴보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 이런 식으로 새롭게 어린아이같이 글을 익혀가는 가운데 너무 속이 터져서 “이게 사는 길이냐고, 죽자고” 포기를 하려고 했답니다. 그때 하나님이 소리치셨습니다.

    “이놈아, 너는 살아있지 않느냐? 반은 쓸 수 있지 않느냐? 책은 읽을 수가 있지 않느냐? 밥은 먹을 수가 있지 않느냐? 남아 있는 것 붙들고 감사하지 못하고 없는 것 때문에 왜 불평을 하느냐고” 거기서 목사님이 깨어집니다.

    어눌하게 성경을 읽기 시작하여 두 주일에 성경을 한 번씩 읽어내니까 1년에 25번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 읽는 어느 날, 갑자기 뇌 경이 마치 전기 스파크가 팍! 팍! 일어나듯이 온 뇌를 흔들더니만 기억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잃어버렸던 모든 언어가 회복되었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옛날에 암송해 두었던 성경구절이 다 회복이 되어 생각이 났습니다. 교인들은 행복했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예배당이 건축되었습니다. 쓰러질 때 교인 수가 1,500명이었는데, 3년 동안 교인 수가 불어나지 않았습니다. 강단에 선 목사님이 3년 동안 교회가 침체되었으니 오늘부터 하나님, 3년 만에 교회가 배가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정말로 출석교인 3,000명으로 부흥시켜 주셨습니다.

    당시 예배당 좌석 수가 600석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설교를 다섯 번, 여섯 번 하니 장로님들이 목사님 설교 한 번만 하시라고 했더니 목사가 설교를 해야지 하면서 계속하니까 장로님들이 놀라운 결정을 합니다.

    “우리 목사님 살리려면 여섯 번 설교할 것이 아니라 한번만 설교하게 하자. 그러려면 3,000명 들어가는 예배당을 짓자.”

    그렇게 해서 세운 성전이 지금 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목사로 하여금 설교 한 번 하게 하기 위하여 시작한 성전이 잘 지어져 3,000석 좌석의 예배당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다가 2005년 2월 13일, 미국 남가주 안디옥 교회에서 집회 인도하시다가 마지막 부분에 성도들 얼굴도 보이지 아니하는 희미해져 가는 가운데, 마지막 설교를 끝내고 강단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열흘 후에 23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이게 단순히 어느 잘된 교회의 이야기, 쓰러진 목사님께 잘해라! 이런 이야기로 들리시나요? 이제는 싸우는 교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런 훈훈한 교회의 이야기가 들려야 합니다. 교회가 축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경험이 서로 섬기게 하여 줍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이 이런 일들을 경험하고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본을 보아야 배우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본을 보여줘야 세상이 배우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배운 것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Nachfolge”라는 독일어의 단어입니다. ‘제자’란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섬김을 받았기에 우리도 섬길 수 있습니다.

    [고통이라는 선물]이라는 책을 쓴 폴 브랜드는 나병 환자를 치료하는 전문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생을 나병환자를 위해 살아온 분이었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나병환자를 치료하는 전문의가 된 것이죠.
    그는 사람들에게 나병환자와 접촉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을 설득했고, 많은 사람이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참여하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자리에 들게 되었습니다.
    순간 자신의 한쪽 발에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폴 브랜드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바늘을 가지고 찔러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는 나병을 치료하다가 나병 환자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바늘로 발뒤꿈치를 찔러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통으로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너무 피곤해서 잠시 마비현상이 왔던 것 같았습니다.
    그는 그 순간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하나님, 고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폴 브랜드가 감사했던 것은 나병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나병환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들이 왜 자신들의 신체 일부분을 뜨거운 불에 넣는지, 신체 일부를 칼로 자르려고 하는지를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폴 브랜드는 일평생 나병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에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을 잘 섬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본을 보여주셨는지 이해가 가십니까?
    그래야 제자들이 섬기는 자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으십니까?
    이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고 싶으십니까?
    이런 섬김의 본이 경험되고 반복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선한 영향력이 나를 통해 이 세상에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07-07-2024(주일)
    암송성구 #. 7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악에게 지지 말고
    - '
    악에게 진다'는 것은 원수의 악한 행위로 번민하거나 원수에 대해 악으로 갚으려고 악한 행위를 계획하는 것이다.
    즉 원수의 악한 행위로 인해 선한 상태를 떠난 것을 의미한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 이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삶으로 곧 선행 구절에서 말한 겸손(3, 16절), 봉사(6-8절), 평화를 유지하는 것(18절)을 가리킨다.
    또한 20절의 원수에게도 친절을 베푸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는 현재 삶에서 승리하는 생활을 말한다.
    이 승리는 자신의 노력, 열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는 믿음과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의 힘으로 이뤄진다.

    * 악(256)

    * 선(18)

    * 이기라(3528)


    06-30-2024(주일)
    암송성구 #. 6 고린도전서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Yet when I preach the gospel, I cannot boast, for I am compelled to preach. Woe to me if I do not preach the gospel!

    06-23-2024(주일)
    암송성구 #. 5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having a form of godliness but denying its power. Have nothing to do with them.


    06-16-2024(주일)
    암송성구 #. 4 고린도후서 5:9-10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So we make it our goal to please him, whether we are at home in the body or away from it.
    For we must all appear before the judgment seat of Christ, that each one may receive what is due him for the things done while in the body, whether good or bad.


    06-09-2024(주일)
    암송성구 #. 3 에베소서 4:4-6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게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There is one body and one Spirit--just as you were called to one hope when you were called--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one God and Father of all, who is over all and through all and in all.




    06-02-2024(주일)
    암송성구 #. 2 사도행전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Salvation is found in no one else,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to men by which we must be saved.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암송 송구 설교 자료

    05-26-2024(주일)
    암송성구 #. 1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 본 구절은 17세기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논쟁의 주요 쟁점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본절을 두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 구원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의 보편 구원론적 해석은 타당치 않다.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해 예비되었지만 그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만 구원을 얻는다(Earle).
    그래서 칼빈(Calvin)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사실은 '구원을 받으며'의 헬라어 '소데나이'(*)가 수동형으로서 구원의 주체는 오직 '우리구주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일 때 구원을 얻는다는 점을 시사한다는 것에서 지지를 받는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본절을 통해 어떤 계층이나 종족의 특성 때문에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지는 않음을 말하는 것이지 개별적으로 모든 인간이 구원받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Lenski).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진리에 대한 지식은 구원의 뿌리요, 열매이다.
    이러한 지식은 인간의 자의적(自意的)인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획득된다(마 16:17; 딤후 2:25).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겔 33:11)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마태복음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디모데후서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에스겔 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와 칼빈주의(Calvinism)의 비교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는 예정론, 자유 의지, 하나님 주권의 본질과 같은 교리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개신교 내의 두 가지 신학 체계입니다. 칼빈주의는 16세기 프랑스 신학자이자 개혁가인 존 칼빈(John Calvin)의 신학적인 가르침을 따르는 개신교의 한 분파이고, 알미니안주의는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자 야코부스(Jacobus Arminius)의 신학사상에 기초하여 17세기 초에 시작된 개신교 운동입니다.

    칼빈과 알미니우스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 둘 사이의 몇 가지 주요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정론과 선택론

    칼빈주의는 무조건적인 선택을 주장합니다. 즉, 하나님은 창세 전에 구원을 위해 특정한 개인을 선택하셨으며, 이는 그들이 행할 어떤 일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근거하여 선택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알미니안주의는 조건부 선택을 고수합니다. 즉, 하나님의 선택은 누가 자유롭게 그분을 믿기로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은혜에 응답할 사람을 미리 아시고 그들을 선택하십니다.

    2. 속죄의 범위

    칼빈주의는 제한 속죄를 가르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속죄 희생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선택하신 자들, 즉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알미니안주의는 무제한 속죄를 옹호하며, 그리스도의 희생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며 누구든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3. 구원

    칼빈주의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은혜는 택하신 자들에게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하나님께서 먼저 허락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알미니안주의는 저항할 수 있는 은혜 사상을 지지하며,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죄가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4. 성도의 인내

    칼빈주의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도 알려진 성도의 견인 교리를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선택하시고 거듭나게 하신 사람들은 믿음을 견지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알미니안주의는 배도의 가능성을 주장하며, 신자들이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함으로써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구원은 지속적인 믿음과 순종을 조건으로 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상은 단순화된 설명이며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내에서도 다양한 해석들이 있습니다. 둘 다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의 신비를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차이


    알미니안주의 : 칼빈주의

    1. Sinner, Can do good & respond to God.
    죄인은 선을 행하고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습니다.

    Sinner, Can do good & respond to God.
    God elects on basis of foreseen faith.
    Christ died for all.
    Man can resist God.
    Believer may lose.

    죄인은 선을 행하고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견된 믿음에 기초하여 선택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잃을 수도 있습니다.

    Man unable of self to respond to God.
    God elects according to His good pleasure.
    Christ died for elect.
    Irresistible election.
    Elect can never lose.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응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기쁘신 뜻에 따라 선택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선택된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선택.
    선택된 사람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질문 /

    칼빈주의 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견해가 옳은가?

    답변 /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계를 설명해 보려는 두 가지 신학 체계입니다.
    칼뱅주의는 프랑스 신학자 존 칼뱅(1509-1564)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고, 알미니안주의는 네델란드 신학자 야코뷔스 아르미누스(1560-1609)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두 체계는 다섯 가지 핵심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칼뱅주의는 인간의 완전한 타락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부분적 타락

    완전한 타락을 고수하는 칼뱅주의 교리는 인간의 모든 면이 죄로 말미암아 부패되어 사람은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부분적인 타락을 말하는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모든 면이 죄에 오염되어 있지만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정도까지 오염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타락의 정도와 의미는 알미니안주의 진영 내에서도 논쟁이 되고 있지만) 고전적 알미니안주의는 부분적인 부패를 거부하고 칼뱅주의의 “전적 타락”과 매우 유사한 견해를 고수한다는 사실입니다.
    대체적으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완전한 타락과 구원 사이에 어떤 ‘중간’ 상태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죄인들이 선행적 은총에 의해 그리스도께 이끌리는 것이 가능하며, 또한 하나님이 주신 능력에 의해 구원을 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칼뱅주의는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적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선택은 조건적

    무조건적인 선택은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타고난 어떠한 가치와는 상관없이 자신만의 전적인 뜻에 근거하여 구원할 사람들을 택하신다는 견해입니다.
    반면에 조건적 선택은 누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를지 미리 아심으로 그 예지에 근거해서 구원 받을 사람을 택하신다고 말합니다.

    칼뱅주의는 속죄를 제한적이라고 보지만 알미니안주의는 무제한적이라고 봅니다.
    이 점이 다섯 가지 쟁점 중에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입니다.

    제한적 속죄는 예수께서 오직 택자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믿습니다.
    무제한적 속죄는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나 사람이 믿음으로 그분을 영접하기 전까지는 그분의 죽음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칼뱅주의는 하나님의 은혜는 거부될 수 없다
    알미니안주의는 개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

    거부될 수 없는 은혜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부르시면, 그 사람은 필연적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거부할 수 있는 은혜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부르시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부름을 반대하고 거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칼뱅주의는 성도의 견인
    알미니안주의는 조건적 구원

    성도의 견인이란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은 사람은 믿음 안에서 인내하며 영원토록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그분으로부터 돌아서지 않는다는 개념을 말합니다.
    조건적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도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리스도로부터 돌아설 수 있고 따라서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견해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많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조건적인 구원”을 부인하고 그 대신에 “영원한 보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의 논쟁 가운데 누가 옳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의 다양성 안에서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혼합된 온갖 종류의 견해들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다섯 가지 칼뱅주의 핵심을 전부 고수하는 칼뱅주의자들이 있고 다섯 가지 알미니안주의를 고수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 가지 핵심만 고수하는 칼뱅주의자들도 있고 두 가지 핵심만 고수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도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 두 견해가 혼합된 유형에 동조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입장은 두 체계 모두가 각각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러한 개념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주권적이며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인간은 구원을 얻기 위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결정을 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이 두 사실은 우리에게 모순되어 보일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는 완벽하게 이치에 맞습니다.


    Calvinism vs. Arminianism - which view is corr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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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swer


    Calvinism and Arminianism are two systems of theology that attempt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God’s sovereignty and man’s responsibility in the matter of salvation. Calvinism is named for John Calvin, a French theologian who lived from 1509-1564. Arminianism is named for Jacobus Arminius, a Dutch theologian who lived from 1560-1609.


    Both systems can be summarized with five points. Calvinism holds to the total depravity of man while Arminianism holds to partial depravity. Calvinism’s doctrine of total depravity states that every aspect of humanity is corrupted by sin; therefore, human beings are unable to come to God on their own accord. Partial depravity states that every aspect of humanity is tainted by sin, but not to the extent that human beings are unable to place faith in God of their own accord. Note: classical Arminianism rejects “partial depravity” and holds a view very close to Calvinistic “total depravity” (although the extent and meaning of that depravity are debated in Arminian circles). In general, Arminians believe there is an “intermediate” state between total depravity and salvation. In this state, made possible by prevenient grace, the sinner is being drawn to Christ and has the God-given ability to choose salvation.

    Calvinism includes the belief that election is unconditional, while Arminianism believes in conditional election. Unconditional election is the view that God elects individuals to salvation based entirely on His will, not on anything inherently worthy in the individual or on any act performed by the individual. Conditional election states that God elects individuals to salvation based on His foreknowledge of who will believe in Christ unto salvation, thereby on the condition that the individual chooses God.

    Calvinism sees the atonement as limited, while Arminianism sees it as unlimited. This is likely the most controversial of the five points. Limited atonement is the belief that Jesus only died for the elect. Unlimited atonement is the belief that Jesus died for all, but that His death is not effectual until a person receives Him by faith.

    Calvinism includes the belief that God’s grace is irresistible, while Arminianism says that an individual can resist the grace of God. Irresistible grace argues that when God calls a person to salvation, that person will inevitably come to salvation. Resistible grace states that God calls all to salvation, but that many people resist and reject this call.

    Calvinism holds to perseverance of the saints while Arminianism holds to conditional salvation. Perseverance of the saints refers to the concept that a person who is elected by God will persevere in faith and will not permanently deny Christ or turn away from Him. Conditional salvation is the view that a believer in Christ can, of his/her own free will, turn away from Christ and thereby lose salvation. Note: many Arminians deny "conditional salvation" and instead hold to "eternal security."

    So, in the Calvinism vs. Arminianism debate, who is correct? It is interesting that in the diversity of the body of Christ, there are all sorts of mixtures of Calvinism and Arminianism. There are five-point Calvinists and five-point Arminians and three-point Calvinists and two-point Arminians. Many believers arrive at some sort of mixture of the two views. Ultimately, it is our opinion that both systems fail in that they attempt to explain the unexplainable. Human beings are incapable of fully grasping a concept such as this. Yes, God is absolutely sovereign and knows all. Yes, human beings are called to make a genuine decision to place faith in Christ unto salvation. These two facts seem contradictory to us, but in the mind of God they make perfect s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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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신학 -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비교

    알미나안주의의 탄생 배경은 네덜란드 정부가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쿠른헤르트(Coornhert)에 대항하기 위해서 아르미니우스를 시켜 쿠른헤르트의 신학사상을 반론하라 한 것에 기인합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는 오히려 쿠른헤르트의 신학사상에 동조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아르미니우스와 고마르 사이에 신학논쟁이 있었는데, 논쟁의 내용은 '타락 전 예정론'과 '타락 후 예정론'이었습니다.

    1608년 아르미니우스 사후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신학사상을 더욱 체계화하여 발전시켰고 마침내 40여명의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은 종교적 관용을 강조하는 네덜란드의 정치인 올덴바르네벨트의 요구에 따라 Remonstrance(항의서)라 불리는 신앙성명을 작성하였으며, 이에 대한 도르트회의(1619년)의 신학적 응답이 바로 칼빈주의의 5대 강령입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그 내용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분       칼빈주의                     알미니안주의

    인성      전적 타락                  자유의지 인정
    예정    무조건 예정                예지하여 예정
    속죄    제한된 선택 구원       무한 선택 구원
    은총    불가항적 은총               가항적 은총
    성도  성도의 견인(보호)       성도 보호 불확실

    결국 1618년 11월 13일-1619년 5월 9일까지 도르트회의가 열려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 승리하여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편 알미니안주의는 네덜란드를 벗어나 영국교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유니테리언주의와 침례교,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논쟁은 5세기경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을 연상시킬 정도로 17세기 초를 뜨겁게 달구었던 개신교 역사상 가장 거대한 신학 논쟁의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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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주일 설교 / 암송 성구를 중심으로

    1월 7일(주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1월 14일(주일)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만(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시편 33:12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Blessed is the nation whose God is the LORD, the people he chose for his inheritance.

    시편 144:15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Blessed are the people of whom this is true; blessed are the people whose God is the LORD.


    사도행전 20:24
    나의 달려갈 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However, I consider my life worth nothing to me, if only I may finish the race and complete the task the Lord Jesus has given me--the task of testifying to the gospel of God's grace.


    고린도전서 3:16-17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Don't you know that you yourselves are God's temple and that God's Spirit lives in you?
    If anyone destroys God's temple, God will destroy him; for God's temple is sacred, and you are that temple.

    고린도전서 6:19-20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광을 돌리라.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y is a temple of the Holy Spirit, who is in you, whom you have received from God? You are not your own;
    you were bought at a price. Therefore honor God with your body.

    고린도후서 13:13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May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God, and the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be with you all.

    신명기 7:6-7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For you are a people holy to the LORD your God. The LORD your God has chosen you out of all the peoples on the face of the earth to be his people, his treasured possession.
    The LORD did not set his affection on you and choose you because you were more numerous than other peoples, for you were the fewest of all peoples.
































































    ‘독생자’에 대한 바른 쓰기와 의미는 무엇인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언제 태어나서 얼마 동안 살다가 어느 시점에 죽는다. 즉 인간의 출생과 생존과 사망 이 세 가지는 인생의 불가피한 사실이거니와, 그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말할 것도 없이 출생이다. 왜냐하면 생존과 사망은 또한 출생의 상황 계속이요, 그 결과와 마침이기 때문이다. 동양 역학(易學)에서 보면 인간의 삶(생존)과 죽음 등이 사주 팔자 (四柱 八字) 즉 출생의 년, 월, 일, 시에 좌우된다고 하는 것만 보아도 출생의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출생은 모두가 부모의 결혼(남녀 양성의 결합)에 의한 결과이거니와, 단 한 번의 예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이다. 성탄은 그 역사적인 사실로서도, 그 의미에 있어서도 유일 무이(唯一 無二)한 사건이며, 그것을 나타내는 어휘에 있어서도 독특하다. 역사적인 사실로서 유일무이하다는 것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어머니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신 사실을 가리키며, 그 의미에 있어 독특하다고 하는 것은 성육신 즉 본질상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요한복음에서의 태초의 ‘로고스’)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요 1:14), 따라서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마 1:18-23)이라는 사실이다. 흔히 인류 역사상 특출한 위인이나 성현의 전기에서는 그들의 출생에 얽힌 전설로 큰 별이 나타나고 하늘로부터 무슨 음성이 들렸다는 등의 기록이 있으나, 그것은 거의가 전설에 그칠 뿐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에 관해서는 복음서에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로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는 그것을 나타내는 어휘 자체부터 독특성을 가진다. 즉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만 ‘성탄’(聖誕)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성’(聖) 자를 붙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사항에 적용되는 것 중의 한 가지일 뿐이다. 예를 들면, 성일(聖日), 성전(聖殿), 성회(聖會), 성민(聖民), 성경(聖經), 성서(聖書), 성구(聖句), 성직(聖職), 성당(聖堂), 성물(聖物), 성수(聖水), 성가(聖歌), 성부(聖父), 성모(聖母), 성자(聖子), 성녀(聖女), 성도(聖徒), 성도(聖都), 성전(聖典) 성전(聖戰), 성례, 성묘(聖廟) 성빈(聖貧) 성소(聖所), 성소(聖召), 성시(聖屍), 성야(聖夜), 성언(聖言), 성업(聖業), 성역(聖域), 성지(聖地), 성찬(聖餐), 성체(聖體), 성품(聖品), 성화(聖畵), 성호(聖號), 등 많이 있다.

    ‘독생자’에 대한 원어(헬라어)는 ho monogenes huios 로서, 신약성경 요 1:14, 18; 3:16, 18등 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독특한 관계를 나타내는 어휘이다. 이 어휘는 구약에 그 배경을 두고 있는 바, 곧 시편 2:7의 “너는 내 아들이라 ... ”라는 문구에 기초해 있다고 본다. 유대교에서는 이 문구를 하나님과 메시야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데,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ho monogenes huios 는 여기에 사상적인 유래를 가지는 것으로 본다.

    그러면 이 어휘의 핵심부분인 monogenes 란 낱말의 뜻은 무엇인가? 이 말은 고전 헬라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데, 그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독특한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서 특별히 쓰인 어휘임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이 낱말을 어원적으로 풀어보면 monogenes 는 monos(유일한) 와 genos(종류) 의 합성어로서 흔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출생을 뜻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유래(derivation)을 뜻하는 말이다. 먼저 genos 라는 말에는 1) 후손, 2) 가족 또는 친족, 3) 민족, 백성, 4) 종류(kind, class) 등의 뜻이 있는데, 이 중 monogenes 의 어원으로서는 넷째 것이라 이해된다. 다음, mono- 는 어떤 유래의 성격 (the nature of derivation) 을 뜻하는 말로서, 결국 monogenes 의 중요한 뜻은 유일성(only) 과 독특성(unique) 을 나타내는 데 있다.

    신약에서 monogenes 는 두 가지 용법으로 쓰인다. 하나는 신성(divinity) 에 관련해 쓰이는 것으로,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요 1:14, 18, 3:16, 18, 요일 4:9). 다른 하나는 인성(humanity) 에 관련해 쓰이는 것으로서, 이 경우는 형제자매 없는 유일한 자손(sole descendant) 이란 뜻이며, 신약의 용례로는 눅 7:12의 나인성 과부의 아들, 눅 8:42의 야이로의 딸, 눅 9:38의 간질병 든 아이, 히 11:17의 이삭에 관하여 쓰이고 있다. 이제 이 낱말의 전자의 용법을 그것과 유사한 개념을 가진 다른 낱말과 비교해 본다.

    1) 바울서신 히브리서 요한계시록 등에서 그리스도의 신분에 관하여 요한복음의 monogenes 에 대응되는 낱말은 prototokos (first born, 처음 난 자)로서, 롬 8:29, 히 1:6에서는 ‘맏아들’로, 골 1:15, 18; 계 1:5에서는 ‘먼저 나신 자’로, 히 11:28, 12:23에서는 ‘장자’로 번역되었는데(개역본), 이 말은 요한복음에서의 monogenes 와 뜻에 있어 다소간 차이가 있다. 즉 monogenes 는 그리스도(성자)가 하나님(성부)과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유일하고 독특(unique)하다는 뜻인데 대해, prototokos 는 그리스도가 우주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라는 뜻이며, 전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를 피조물과 구별할 때 강조점이 있는데 대하여, 후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가 피조물 이전의, 또는 최초의 존재라는 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2) 요한복음에서 monogenes 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tekna 라는 말과 구별된다. 이 구별은 요한복음 본문에서 분명히 보이는 바, 하나님의 자녀 (tekna tou theou, children of God) 는 어떠한 때에 그렇게 되는 데 (genesthai, become) 대해서 (요 1:12),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en arche) 유일하고 독특하게 존재했던 (en, was) 것이다(요 1:1, 2). 따라서 monogenes 는 성육신 (incarnation, 요 1:14)의 범주 안에서 이해될 것이 아니고 그의 존재의 영원성(nature of eternal being, 요 1:1, 2)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요한의 ho monogenes huios 는 공관복음에서의 ho huios mou ho agapetos (나의 사랑하는 아들) 와, 하나님의 유일하신 메시야적인 아들이라는 점에서 의미상 관련된다. (마 3:17, 17:5, 막 1:11, 9:7, 눅 3:22). 다만 전자가 요한의 증언인 데 대해서 후자는 하나님 자신의 선언이라는 데 서술상의 차이가 있다 (단 요 3:16이 요한의 증언이냐 예수 자신의 말씀이냐에 대해서는 학자 간에 논란이 있다).

    이상과 같은 독특한 의미를 가진 monogenes 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origin)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독생자’(獨生子; 오직 한 분으로 출생한 아들, the only begotten Son)라고 한다. 따라서 ho monogenes huios 는 단지 ho huios tou theou 의 특별한 표현양식의 하나라고 본다. 그리고 monogenes 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출생을 뜻하는 것은 요한일서 5:18에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 (ho gennetheis ek tou theou) 에 비추어 이해된다고 본다.

    그러나 요일 5:18의 gennetheis 가 gennao (낳는다)에 유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 3:16의 monogennes 는 gennao 와 결합한 형이 아니기 때문에 어원적으로 보면 ‘독생자’로 번역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우리말 번역에서의 ‘독생자’는 영어역 King James Version 의 the only (독) begotten (생) Son (자) 의 직역이고, 중국어역 ‘獨生子’와는 문자적으로 일치하는데, 우리말 번역은 영어역이나 중국어역 성경으로부터의 중역(重譯)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 낱말의 의미에 대해서 성경사전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은 King James Version 의 ‘the only begotten Son’ 이 헬라어 ‘monogenes’ 에 대한 오역이라고 분명히 지적한다(Vol. III. 604면 참조). ‘독생’(獨生)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monogenes’가 아니라 ‘monogennetos’(monos+genao)이다. King James Version(1611년) 은 라틴어의 권위본인 Vulgata의 영향으로 요 3:16, 18의 ‘unicus’(유일한)을 ‘unigenitus’(독생한)로 바꾼 것이다. 그러나 King James Version 이후의 영어성경에서는 ‘begotten’(생)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대개가 ‘the only Son 만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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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테 호 예수스 에이펜 토이스 마데타이스 아우투 에이 티스 델레이 오피소 무 엘데인
    아파르네사스도 헤아우톤 카이 아라토 톤 스타우론 아우투 카이 아콜루데이토 모이




    마태복음 16:2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자부(自不) 자십(自十)  :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어려서 숨바꼭질 놀이를 할 때 "여기 없다!" 하고 소리친다.
    내가 여기 있으면서도 내가 여기 없다고 외치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표현이다.
    숨어야 하는 놀이를 하면서도 인간은 철이 없을 때부터 나를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에 익숙한 성인이 되면 무슨 일에든지 자기를 드러내야만 마음이 편하다.
    이런 나를 없다고 하려면 철저하게 나를 낮춰야 한다.
    내가 낮아져서 뭇 사람들에게 짓밟힐지라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그 아픔을 몸으로 받으드릴 수 있을 때 자기 부인이 가능하다.

    유명한 일화를 생각해 봅시다.
    길선주목사가 평양의 난봉군으로 살아오던 중 미국 선교사의 전도지를 받고 회개한 후에 옛날 같으면 너는 벌써 죽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 있는 길선주는 그 옛날의 길선주가 아니다.

    자기 십자가

    나의 십자가는 무엇일까?
    우선은 내가 나를 부인하는 것을 바르게 감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먼저 나를 부인한 후에 비로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자기 부인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십자가를 얹어주면 당장 튀어오를 것이 분명하다.
    왜 내게 이런 무거운 짐을 주느냐?
    그런데 죽은 사람위에 아무리 무거운 바위를 올려놓아도 죽은 사람은 그 무게를 느낄 수 없다.
    나의 십자가는 먼저 내가 죽는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 자기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다.
    예수 십자가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죽음이 없는 십자가는 장식품이 될 것이다.

    호주머니 속의 십자가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짤막한 영문으로 출판된 소책자를 기억합니다.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멋으로 생각한다.
    얼마나 멋이 있으면 목걸이, 반지, 금뱃지 등으로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그런데 십자가는 결코 멋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너무 고통스럽고 무겁고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를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아직도 온전하게 나의 십자가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 여기서 '따른다'는 것은 스숭의 삶과 가르침에 온전히 순복하는 참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참된 제자의 요건을 전제한 것은 당신의 임박한 수난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그와 유사한 수난과 고초를 당하게 될 것을 익히 아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 당신을 따르기에는 너무 미흡한 제자들에게 당신을 전적으로 순종하며 수난당할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힘주어 가르치셨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를 따르는 데는 내적으로는 자기 부인과 외적으로는 역경 가운데서의 적극적 순종이 수반되어야 한다.

    󰃨 자기를 부인하고 - 이는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요구되는 소극적 측면으로서 자기의 이기적 욕망과 생각과 주장, 그리고 부패한 옛자아, 옛사람을 철두철미 굴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사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육신(*, 사르크스)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죄인됨 인간 그 자체(롬 7:14,18)가 됨으로써 그의 이성, 감정, 의지 등이 완전히 부패되었다(참조, 렘 17:9;롬 1:18-32). 바로 이러한 본성적 존재로서는 예수의 제자로 결코 따라 나설 수 없다. 한편 이러한 제자의 요건을 망각(妄却)했던 베드로는 훗날 자기를 부인하는 대신 예수를 부인하고야 만다.

    󰃨 자기 십자가 -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살던 팔레스틴의 유대인이라면 십자가 형벌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야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27:32) 더불어 유다의 대반란으로 인해 수많은 십자가 형틀을 목격해야 했던 그들로서는(Josephus, 행 5:37) 죽음의 짐이요,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를 메라는 참의미가 무엇인지를 뼈 속 깊이 이해했을 것이다(10:38). 한편 예수께서 친히 골고다 험한 언덕에서 이 십자가 형을 당하신 이후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엄숙한 제자로서의 결단의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신 일은 인류 구속의 대업을 완성하시는 유일, 단회적인 행위였으나 제자들의 십자가 짐은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 생겨나는 다양하고도 지속적인 행위일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제자들은 각자의 십자가를 거룩한 기쁨과, 무한한 감격과 감사로, 그리고 가장 가치있는 일로 받아들이며 끝까지 지고 예수의 발자취를 좇아가야 할 것이다(빌 3:12-14).

    󰃨 좇을 것이니라(*, 아코루데이토) - 시제는 현재 명령형으 로서 한두 번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좇아오라는 강한 명령이다. 실로 주의 제자된 자는 억지로, 이따금씩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심전력으로 부단한 노력과 헌신을 통해 계속 좇아가야만 한다.




    자기 부정

     

    저가 집회 할때에 사람들이 은혜를 받을 때면 때때로 성령의 임재(臨在)를 느낍니다. 제 자신의 부족한 설교의 톤에도 대단한 확신으로 가득 차며 듣는 교인들도 지나칠 정도로 집중하여 듣고 은혜로 감동한 표정들로 진지해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집회 후 집에 돌아와서도 받은 감동과 인상은 한 동안 여운으로 가동으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 때 마음의 다른 쪽에서부터 자신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자부심과 자긍심이 갑자기 생기며 자신이 마치 설교에 대단한 능력을 가진 목회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 때 황홀할 정도로 재 자신을 다시 보게 됩니다. 자신감과 확신 그리고 이에 따라 동반하는 기쁨이 제 자신을 사로잡으려 합니다. 순간적으로 이런 것들 속에 감추어진 영적 위험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황급하게 나의 능력과 자부심과 자긍심을 부인하고 모든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나옴을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온전히 말씀가운데 행하시는 은혜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열정으로, 하나님의 열심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이 집회에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거짓 확신과 자긍심을 부정하며 집회를 끝날때마다 물리쳐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며 그리고 병자들을 고쳤다(마4:23-25절). 이렇게 예수님은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자신을 감추었다. 자신을 밝히려는 귀신을 막고 잠잠하라고 명했다(막1:24-25절). 그리고 이적들을 행한 후에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고 성전의 제사장을 찾아가 받은 은혜를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요구했다(마8:4절). 왜 자신을 알리지 말라고 요구하였을까?

     

    성경을 보면 헤롯에 대한 기사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화려한 옷을 입고 두로와 시돈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들은 청중들은 신의 소리라고 말하며 그를 높였습니다.
    헤롯은 이 연설에 자부심과 자긍심으로 충만하였습니다.
    헤롯은 모든 영광을 자신이 취하고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주의 사자의 침을 받아 갑자기 죽었습니다(행 12:20-23).

    우리는 이러한 거짓에 사로잡히는 영적 체험이 목회 성공에 엄청난 위험으로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설교를 잘하는 목회자일수록 이러한 유혹에 쉽게 빠지기 쉽습니다.
    아무리 경건한 목회자라도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대신 자신을 높이며 사단이 주는 시험과 유혹에 얼마든지 떨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외형적인 결과를 보면서 목회자도 자신의 능력으로 이 모든 결과가 나온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며 자긍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함으로 서서히 파멸에 이르는 잘못된 시험에 자신도 모르게 빠질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에서 느브갓네살 왕은 자신의 엄청난 왕국을 바라보며 자긍심에 빠졌습니다.
    자신이 위대하여 위대한 제국을 세웠다고 생각하며 우월감과 교만에 빠졌습니다(단 4:30-31).
    이런 일은 역사상 대제국을 세운 모든 왕들과 황제들에 그대로 반복되었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은 느브갓네살에게 꿈과 이상을 주어 그가 무력한 자이며 모든 일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작정되고 진행됨을 깨닫게 했습니다(34-35).

    성공과 형통을 열망하며 지독히 노력하는 자의 소원대로 성공을 하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성공과 형통을 관리할 수 있는 신앙적 그리고 정신적 성숙이 그에게 없다면 성공과 형통이 오히려 파멸의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낙원으로 이끌려 올라가 그곳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계시들을 들은 사도 바울에게 고쳐지지 않는 가시를 하나님이 허락한 것은 축복 자체입니다(고후12:1-9절). 그러므로 구원 받고 난 이후에도 우리에게 짊어져야 할 멍에는 반드시 필요합니다(마11:29-30절). 이것이 없으면 우린 은혜를 받은 후 교만해지며 스스로 파멸의 길로 걸어갈 것입니다.

    우린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거룩한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파멸에 이르는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존재임을 다시 한번 더 깨닫습니다. 예수님과 3년 넘게 함께 한 제자들도 이런 유혹에 빠졌는데(마 16:23)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하나님께로 간다는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믿으면서도 타락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지만 눈에 안 보이기에 쉽게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2026 새벽 묵상 자료


    요한일서 – 요한계시록 신학적 연결

    요한계시록은 요한일서의 종말적 완성
    요한일서는 요한계시록의 현재적 적용

    핵심 주제 연결표

    요한일서

           요한계시록

              신학 연결

    하나님은 빛

       어린양의 영광

            빛은 인격이며 심판 기준

    하나님은 사랑

        어린양의 피   

             사랑은 십자가에서 정의로 드러남

    적그리스도

    짐승·거짓선지자

              영의 미혹 → 제국적 체계

    세상과 구별

    바벨론 심판

              세상 사랑의 종말

    이기는 자

    이기는 자의 상급

                  믿음 = 승리

    담대함

    인 맞은 성도

                 심판 앞에서의 담대함

    적그리스도 개념의 확장

    • 요한일서
    • →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가 세상에 있다”
    • (교리·영적 미혹)

    • 요한계시록
    • → 그 영이 정치·경제·종교 체계로 구체화됨
    • (짐승, 바벨론)

    즉, 적그리스도는 한 인물로 시작되지 않는다.
         먼저 ‘영’으로 오고, 나중에 ‘체계’로 완성된다.

    Ⅳ.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

    • 천년왕국→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 일곱 교회→ “교회는 종말을 기다리며 지금 심판받는다”

    • 요한 신학→ “사랑 안에 거하지 않는 진리는 거짓이고,
    • 진리 안에 서지 않는 사랑은 미혹이다”



    1월 8일(목) 요한일서 2: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적그리스도



    적그리스도(敵基督, Antichrist)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대적하며, 그 자리를 대신하려는 거짓 세력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성경은 이를 한 인물로만 한정하지 않고, 영(정신)· 사상· 운동· 체계까지 포함해 다층적으로 설명합니다.

    1️⃣ 성경에서 ‘적그리스도’라는 용어

    👉 ‘적그리스도’라는 단어 자체는 요한서신에만 직접 등장합니다.

    • 요한일서 2:18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 요한일서 2:22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누구냐…”

    • 요한일서 4: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라”

    • 요한이서 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 적그리스도라”

    📌 핵심 요지

    • 예수의 성육신, 메시아 되심, 주권을 부인

    • 교회 안에서 일어나 성도를 미혹함


    2️⃣ 적그리스도의 핵심 특징 (성경 종합)

    구분 내용
    정체 예수를 그리스도로 부인
    방식 거짓 가르침, 미혹, 대체
    위치 종종 교회 안에서 활동
    본질 “적(反)”이자 “대신(代)”
    시대성 말세 전반에 지속적으로 존재

    ※ ‘anti’는 반대 + 대신하다 두 의미를 모두 가짐 

    3️⃣ 적그리스도 vs 관련 종말 개념

    성경은 여러 표현으로 같은 실체를 다른 각도에서 설명합니다.

    표현 성경 강조점
    적그리스도 요한서신 그리스도 부인
    불법의 사람 살후 2장 하나님 대적, 자기를 신격화
    작은 뿔 다니엘 7장 권세·박해
    짐승 계시록 13장 정치·종교적 체계
    거짓 선지자 계 13, 19장 기적을 통한 미혹

    👉 서로 다른 인물이라기보다, 같은 악의 세력을 다른 측면에서 묘사 

    4️⃣ “한 사람인가, 여러 사람인가?”

    성경적 균형은 둘 다입니다.

    • ✔️ 현재적:
      → 이미 세상에 있는 ‘적그리스도의 영’

    • ✔️ 종말적:
      → 마지막 때 집약적으로 드러날 대표적 인물/체계

    📖 요한일서 2:18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5️⃣ 오늘 교회에 주는 분별 기준

    요한은 적그리스도를 미래 추측 대상이 아니라
    👉 현재 신앙을 점검하는 기준으로 제시합니다.

    ❓ 분별 질문

    • 예수를 **주(主)**로 고백하는가?

    • 십자가와 성육신을 왜곡하지 않는가?

    • 복음보다 다른 대안적 구원을 말하지 않는가?

    • 은혜 없이 권력·성공·체험을 절대화하지 않는가?

    📌 적그리스도의 핵심 전략

    “그리스도를 밀어내고, 다른 것을 중심에 두는 것” 

    6️⃣ 요약 한 문장

    적그리스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대체하려는 모든 영과 가르침이며, 말세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1. 용어의 의미

    • 적그리스도(ἀντίχριστος)

      • anti = “대적하여”, “대신하여”

      •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그리스도를 대신하려는 자/영

    • 단순히 “예수님을 반대하는 인물”이 아니라
      👉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모든 거짓 영적 권세를 포함합니다. 

    2. 요한일서의 핵심 가르침

    요한은 적그리스도를 단수 인물보다 현재 역사 속에 이미 활동하는 영적 실재로 설명합니다.

    📖 요한일서 2:18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 적그리스도는 이미 왔고, 여럿입니다.

    📖 요한일서 2:22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

    ✔ 핵심 기준:

    • 예수 = 그리스도이심을 부인

    •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부인 

    3. 적그리스도의 특징 (요한서신 중심)

    1. 교회 안에서 나옴

      •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일 2:19)

    2. 정통 신앙의 언어를 사용함

      • 겉모습은 경건, 내용은 왜곡

    3. 그리스도의 인격·사역을 훼손

      • 참 하나님·참 인간이심을 부인

    4. 성도를 미혹함

      • 특별한 지식, 새 계시, 다른 복음 주장 

    4. 단수 적그리스도 vs 복수 적그리스도

    구분 설명
    복수 지금도 활동 중인 거짓 교사·영
    단수 종말에 나타날 최종적 대적자 (계 13장, 살후 2장)

    ➡ 요한은 현재적 분별에 초점을 둡니다.
    “언젠가 올 인물”보다 지금 속이고 있는 영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5. 성도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요한일서의 흐름에 따르면:

    1. 기름 부음(성령)을 의지함 (요일 2:20, 27)

    2. 처음부터 들은 복음에 거함

    3. 사랑과 진리로 행함

    4.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함

    👉 적그리스도를 이기는 방식은
    논쟁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함입니다. 

    6. 한 문장 요약

    적그리스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대신하려는 모든 영과 가르침이며, 이미 세상과 교회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짐승’과 ‘적그리스도’의 관계
    동일 개념이라기보다 기능적으로 연결된 종말론적 실체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 전체 흐름에 가장 정확합니다. 

    1. 기본 결론 한 줄

    요한계시록의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종말론적·정치적 구현이며, 적그리스도의 영이 역사 속에서 최종적으로 집약된 형태이다. 

    2. 성경 용어 비교

    구분 적그리스도 짐승
    주요 본문 요한일서 요한계시록
    초점 영·가르침 권세·체제
    성격 미혹하는 영 핍박하는 권력
    많음 주로 단수
    활동 영역 교회 안 세상 권력

    ➡ 요한은 서신에서는 교리적 미혹,
    계시록에서는 제도·권력의 박해를 보여줍니다. 

    3. 두 짐승의 구조 (계 13장)

    ① 바다에서 나온 짐승

    • 정치·군사·경제 권력

    • 사단에게서 권세를 받음

    • 온 세상을 다스림

    • 성도를 핍박함

    👉 적그리스도의 ‘왕적(王的) 모습’ 

    ② 땅에서 나온 짐승 (거짓 선지자)

    • 종교적·영적 미혹 담당

    • 첫째 짐승을 경배하게 함

    • 표적과 기사를 행함

    • 짐승의 표를 강요

    👉 적그리스도의 ‘선지자적 모습’

    📌 요한일서의 “거짓 교사” 개념과 직접 연결됨 

    4. 사탄의 모조 삼위일체

    참 하나님 사탄의 모조
    성부 용(사탄)
    성자 바다 짐승
    성령 땅 짐승(거짓 선지자)

    ➡ 적그리스도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모방입니다.
    대적이라기보다 대체하려는 존재입니다. 

    5. ‘666’과 적그리스도

    • 불완전의 극치 (7에 미치지 못함)

    • 하나님의 인을 모방한 가짜 표

    • 신앙과 경제·삶을 결합한 통제 수단

    👉 단순한 숫자 암호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인간 권세를 절대화하는 체제”**의 상징  

    6. 요한일서와의 신학적 연결

    요한일서 요한계시록
    예수의 성육신 부인 짐승 숭배
    거짓 가르침 거짓 기적
    교회 안 미혹 세상 통치
    성령의 기름 부음 하나님의 인

    같은 영, 다른 무대 

    7. 성도에게 주는 경고

    1. 충성의 대상이 분명한가?

      • 편리·안전·번영 vs 어린양

    2. 경배의 방향은 어디인가?

      • 성공·권력·체제 vs 하나님

    3. 표를 선택하는 삶인가, 인을 지킨 삶인가?

    👉 적그리스도와 짐승의 싸움은 정보 전쟁이 아니라 예배 전쟁입니다.  

    8. 한 문장 종합

    요한계시록의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영이 정치·종교 권세로 집약된 종말의 모습이며, 궁극적으로 성도를 ‘경배의 대상’에서 떠나게 하려는 사탄의 모조 왕국이다.


    적그리스도(ἀντίχριστος) 
    성경, 특히 요한일서에서 핵심적으로 다뤄지는 개념입니다. 요지를 정리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용어의 의미

    • ἀντί(안티): ‘반대하여’뿐 아니라 ‘대신하여’라는 뜻도 포함

    • 그리스도를 부정하거나, 그리스도 자리를 대신하려는 존재 

    2️⃣ 요한일서의 가르침 (핵심 본문)

    📖 요한일서 2:18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 단수 + 복수 모두 사용

    • 말세에 나타날 최종적 적그리스도

    • 동시에 이미 활동 중인 많은 적그리스도들

    📖 요한일서 2:22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누구냐 그가 적그리스도니…”

    👉 정의가 분명함

    • 예수 =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핵심을 부정

    •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부인

    📖 요한일서 4: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라”

    ➡️ 적그리스도는 **한 인물만이 아니라 ‘영(spirit)’**으로 역사 

    3️⃣ 적그리스도의 본질 (요한 신학 관점)

    구분 내용
    출처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요일 2:19)
    특징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거짓 가르침
    핵심 문제 그리스도론 왜곡
    상태 빛이 아닌 어둠, 진리가 아닌 거짓

    👉 즉, 적그리스도는 노골적 무신론자보다,
    예수를 말하지만 참 예수를 왜곡하는 자로 나타남 

    4️⃣ 바울·요한계시록과의 연결

    • 살후 2장: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

    • 계 13장: 짐승(권세·숭배·기적)

    ➡️ 요한일서: 현재적·영적 분별 강조
    ➡️ 계시록/바울: 종말적·권세적 실체 강조

    👉 서로 모순이 아니라 관점의 차이 

    5️⃣ 신앙적 적용 (요한일서 맥락)

    요한일서에서 적그리스도 논의는 항상 이것과 연결됩니다:

    • 빛 vs 어둠

    • 진리 vs 거짓

    • 사랑 vs 미움

    • 아이–청년–아비의 영적 성숙

    📌 결론:

    적그리스도를 두려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너희가 기름부음을 받아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1월 7일(수) 요한일서 2:15-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The world and its desires pass away, but the man who does the will of God lives forever.


    이 표현은 요한일서 2:16에 나오는 말씀으로, 성경이 말하는 세상에 속한 삶의 본질을 세 가지로 요약한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1. 육신의 정욕 (ἡ ἐπιθυμία τῆς σαρκὸς)

    • 타락한 육체가 원하는 욕망  

    • 하나님을 배제한 채 쾌락·본능·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욕구

    내용 예

    • 음란, 방탕, 탐식, 중독

    • “하고 싶다”, “느끼고 싶다”가 기준이 되는 삶

    특징

    • 감각 중심

    • 즉각적 만족을 추구

    • 성령의 다스림과 반대됨(갈 5:16–17)  

    2. 안목의 정욕 (ἡ ἐπιθυμία τῶν ὀφθαλμῶν)

    • 눈으로 보고 소유하려는 욕망

    • 외형·비교·소유에 집착하는 마음

    내용 예

    • 재물, 명품, 성공, 외적 조건

    • 남과 비교하며 생기는 탐심·시기

    특징

    • “보는 것”이 가치 판단 기준

    • 소유가 곧 행복이라는 착각

    • 믿음이 아닌 시야(보이는 것)으로 사는 삶(고후 5:7과 대조) 

    3. 이생의 자랑 (ἡ ἀλαζονεία τοῦ βίου)

    • 현재의 삶(지위·능력·성취)을 자랑하는 교만

    •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자기 확신

    내용 예

    • 학벌, 권력, 업적, 영적 교만

    • “나는 남들과 달라”, “나는 괜찮아”

    특징

    • 자기중심성

    • 의존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나’

    • 바리새인의 태도와 연결(눅 18:11–12) 

    세 가지의 공통점

    공통 특징 설명
    출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님”
    방향 하나님이 아닌 자기 중심
    결과 영적 생명 약화, 하나님 사랑과 충돌
    종말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감”(요일 2:17) 

    창세기·예수님의 시험과의 연결

    이 세 가지는 성경 전체에 반복되는 유혹의 구조입니다.

    • 하와의 타락 (창 3:6)

      • 먹음직 → 육신의 정욕

      • 보암직 → 안목의 정욕

      •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움 → 이생의 자랑

    • 예수님의 시험 (마 4장)

      • 돌로 떡 만들라

      • 세상 영광 보여줌

      •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 예수님은 말씀으로 모두 이기심 

    요한의 결론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

    이는 세상을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 삶의 기준과 사랑의 방향을 분명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 세상에 살되

    • 세상에 속하지 않고

    •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로 살라
      (요일 2:17)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성경에서 단순한 종교 행위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 뜻이 삶으로 드러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1. 핵심 성경 구절

    •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신앙의 고백(말)보다 **순종(행함)**이 기준임을 분명히 합니다.

    • 마태복음 12:50 / 마가복음 3:35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예수와의 참된 가족 관계에 들어갑니다.

    • 요한일서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하나님의 뜻을 행함은 영원성과 연결됩니다.

    2.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추상적으로 두지 않습니다.

    ① 구원의 뜻

    • 요한복음 6:40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 믿음이 하나님의 뜻의 출발점

    ② 거룩함의 뜻

    •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 삶의 방향과 성품의 변화

    ③ 사랑과 순종의 뜻

    •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 계명 준수 = 사랑의 표현

    3. ‘말하는 자’ vs ‘행하는 자’

    구분 말만 하는 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신앙 고백 중심 순종 중심
    기준 자기 확신 말씀
    열매 외적 행위 삶의 변화
    결과 주님이 “모른다” 하심 주님과의 참된 관계

    (마 7:22–23 참조)

    4. 영적 성숙 단계와의 연결

    (요한일서의 아이–청년–아비 구조와 연결하면)

    • 아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단계

    • 청년: 하나님의 뜻을 싸우며 행하는 단계

    • 아비: 하나님의 뜻과 하나가 된 단계
      →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은 성숙의 결과이지 단번의 행위가 아닙니다.

    5. 한 문장 요약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믿음을 말로 증명하는 자가 아니라, 순종으로 드러내는 자이며, 그에게서 영원한 생명의 열매가 나타난다.”


    핵심 본문 정리

    📖 고린도전서

    • 육신에 속한 사람 (σάρκινος / σαρκικός)

      • 고전 2:14, 3:1–3

    • 신령한 사람 (πνευματικός)

      • 고전 2:15, 3:16

    📖 요한일서

    • 아이 – 청년 – 아비

      • 요일 2:12–14

    👉 두 서신은 같은 성령의 관점에서,  구원 이후, 사람이 어떻게 자라야 하는가를 설명함 

    통합 구조 한눈에 보기

    육신적 신자 → 싸우는 신자 → 신령한 성숙자 

     단계별 통합 비교표 (핵심)

    통합 단계 고린도전서       요한일서 영적 특징         핵심 문제 / 열매
    ① 미성숙 단계   육신에 속한 자 (고전 3:1)        아이 구원받았으나 육의 지배 큼        분쟁·시기·사람 자랑
    ② 성장 단계 신령함을 배워감 (고전 2:12)        청년 말씀으로 육을 이김           영적 전투와 승리
    ③ 성숙 단계 신령한 자 (고전 2:15)        아비 성령의 분별과 안정           하나님을 깊이 앎

     본질적 연결 설명

    🔹 ① 육신에 속한 자 = 요한일서의 ‘아이’

    고전 3:1–3

    “내가 너희를 신령한 자로 말하지 못하고 육신에 속한 자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말하노라”

    • 아이의 특징

      • 젖을 먹음 (기본 진리만 반복)

      • 사람 중심: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 겉으로는 교회 안에 있으나 육의 논리로 판단

    👉 요한일서의 아이 = 고린도전서의 육신적 신자 

    🔹 ② 싸우는 단계 = 요한일서의 ‘청년’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 청년의 핵심:

      • 말씀이 안에 거함

      • 악한 자와의 실제 전투

    • 고린도전서에서는:

      • 하나님의 영을 받음

      • 세상 지혜를 분별하기 시작

    👉 육에서 성령으로 이동하는 전환 구간 

    🔹 ③ 신령한 자 = 요한일서의 ‘아비’

    고전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 아비의 특징:

      •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

      • 흔들리지 않는 중심

    • 신령한 자의 특징:

      • 성령의 분별

      • 십자가의 지혜로 판단

    👉 사역이나 감정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증거 

     신학적으로 중요한 균형

    ❗ 오해하면 안 되는 점

    • 육신에 속한 자 ≠ 불신자

    •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풍성했으나 육신적

    • 요한일서의 아이도 죄 사함을 받은 자

    👉 문제는 *“구원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누가 지금 나를 다스리고 있는가”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하면

    고린도전서는 ‘누가 나를 지배하는가’를 묻고,
    요한일서는 ‘그 지배 아래서 얼마나 자랐는가’를 보여준다.

    7️⃣ 자기 점검 질문

    • 내 판단 기준은 사람·감정·환경인가?

    • 말씀과 성령이 내 안에 거하고 있는가?

    • 나는 여전히 논쟁하는 신자인가, 분별하는 성숙자인가?







    1️⃣ 큰 구조 한눈에 보기

    육에 속한 상태 → 영적 성장 → 성령에 속한 성숙

    요한일서의 세 단계는
    👉 육을 벗어나는 과정,
    👉 성령 안에서 자라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2️⃣ 단계별 연결 설명

    🔹 ① 아이 (τεκνία / παιδία) — 구원은 있으나 미성숙

    (육의 영향이 강한 단계)

    본문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요일 2:12)

    특징

    • 죄 사함의 은혜는 분명함 (구원의 확신)

    • 그러나 여전히:

      • 감정 중심

      • 환경에 쉽게 흔들림

      • 말씀보다 경험·사람에 의존

    • 고린도전서의 **‘육신에 속한 신자’**와 유사 (고전 3:1–3)

    연결
    👉 구원은 받았으나 여전히 ‘육에 속한 영향’ 아래 있는 상태
    👉 신앙의 기준이 “느낌·사람·상황”

    🔹 ② 청년 (νεανίσκοι) — 영적 전쟁과 승리의 단계

    (육을 이기기 시작하는 단계)

    본문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심이요”(요일 2:13–14)

    특징

    • 말씀이 안에 거함 (암송·순종·적용)

    • 시험과 유혹이 있으나 싸워서 이김

    • 신앙이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

    •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 vs 육의 실제 전투 경험

    연결
    👉 육에 속한 삶에서 벗어나, 성령을 따라 살기 시작
    👉 “육신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단계”

    🔹 ③ 아비 (πατέρες) — 하나님을 아는 깊은 성숙

    (육을 초월한 성령의 성숙 단계)

    본문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라”(요일 2:13–14)

    특징

    • ‘무엇을 아느냐’보다 ‘누구를 아느냐’

    • 상황·사역·감정에 흔들리지 않음

    • 말씀, 능력, 체험을 넘어 하나님 자신을 앎

    • 로마서 8장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

    연결
    👉 더 이상 육이 중심이 아님
    👉 존재 자체가 성령의 열매가 됨


    3️⃣ 핵심 비교 표

    단계 영적 상태 육과의 관계 중심 특징
    아이 구원받음 육의 영향 큼 죄 사함의 기쁨
    청년 성장 중 육과 싸워 이김 말씀과 전투
    아비 성숙 육을 초월 하나님을 앎

    4️⃣ 중요한 신학적 포인트

    • 아이 단계 ≠ 정죄 대상
      출발점

    • 문제는 아이에 머무르는 것

    • 요한일서는 계속해서 말함:

      “어둠에서 빛으로, 육에서 성령으로,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5️⃣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 나는 지금 아이의 안정, 청년의 싸움, 아비의 깊이 중 어디에 있는가?

    • 내 신앙의 중심은
      👉 *‘죄 사함’*인가,
      👉 *‘말씀의 능력’*인가,
      👉 *‘하나님 자신’*인가?
















    육에 속한 사람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이 아닌 ‘육(타락한 인간 본성)’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1️⃣ 의미

    • 육(σάρξ, sarx): 단순한 몸이 아니라
      👉 하나님을 떠난 자기중심적 본성,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 상태

    • 따라서 육에 속한 사람
      👉 성령의 인도 없이, 인간적 욕망·이성·세상 가치에 의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

    2️⃣ 핵심 성경 구절

    •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 로마서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 유다서 1:19

      “육에 속한 자요 성령이 없는 자라”

    3️⃣ 특징 정리

    •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판단과 감정을 우선함

    • 영적인 진리를 어리석게 여기거나 이해하지 못함

    • 신앙이 있어 보여도 능력은 부인함 (형식적 신앙)

    • 갈라디아서 5장의 육체의 일이 드러남
      (시기, 분쟁, 분노, 탐심 등)

    4️⃣ 대비 개념

    구분 육에 속한 사람 성령에 속한 사람
    지배 원리 육, 자아 성령
    판단 기준 세상 지혜 하나님의 지혜
    열매 혼란, 분열 사랑, 화평
    영적 상태 미성숙 성장·성숙

    5️⃣ 신앙적 적용

    • 육에 속한 사람불신자만을 말하지 않음
      👉 고린도교회처럼 구원은 받았으나 영적으로 미성숙한 신자도 포함

    • 핵심 질문:

      “나는 지금 육을 따라 반응하는가, 성령을 따라 순종하는가?”

    원하시면
    👉 ‘육에 속한 신자 vs 영에 속한 신자’,
    👉 요한일서의 ‘아이·청년·아비’ 단계와의 연결,
    👉 설교용 요약으로도 정리해 드릴 수 있습니다.






    교인의 종류는 크게
    교적 상태에 따른 분류(원입교인, 유아세례교인, 세례교인), 신앙생활 참여도/태도에 따른 분류(감투교인, 인력거교인, 오락교인 등), 교단 내 직분에 따른 분류(장로, 집사, 권사 등), 그리고 신앙적 성숙도에 따른 분류(영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등)로 나눌 수 있으며, 이는 교파나 교회마다 다르게 표현되기도 합니다. 
    1. 교적 상태에 따른 분류 (일반적 구분)
    • 원입교인: 교회에 등록하여 출석하지만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
    • 유아세례교인: 유아기에 세례를 받고 성장하는 교인.
    • 세례교인 (입교인):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교회의 일원이 된 사람. 

    2. 신앙생활 태도 및 참여에 따른 분류 (유머/비유적 표현)
    • 감투교인: 직책(감투)을 받아야만 교회에 나오는 교인.
    • 인력거교인: 심방을 가야 겨우 교회에 오는 교인.
    • 오락교인: 친목회, 야유회 등 행사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교인.
    • 벙어리교인: 오래 신앙생활해도 기도생활이 없는 교인.
    • 종이교인: 비 오면 안 나오는 등 출석이 잦지 않은 교인. 

    3. 교단 내 직분에 따른 분류 (한국 개신교 일반적)
    • 항존직: 장로, 집사, 권사 등 직분이 유지되는 직분.
    • 임시직: 전도사, 서리집사 등 임기가 있는 직분. 

    4. 신앙적 성숙도에 따른 분류 (성경적 표현)
    • 영에 속한 사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신실한 사람.
    • 육신에 속한 사람: 세상적이고 육체적 정욕을 끊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인.
    • 불신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육에 속한 사람으로도 표현). 

    5. 교파에 따른 분류
    •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교회, 성공회 등 교리 및 역사적 배경에 따라 다양한 교파가 존재하며, 각 교파 안에도 다양한 교단이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가?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5년 08월호>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가?

    <한글킹제임스성경>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

    But the natural man receiveth not the things of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unto him: neither can he know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discerned.
    <한글개역성경>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The man without the Spirit does not accept the things that come from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to him, and he cannot understand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discerned.

    이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을 세 부류로 분류하심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자연인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며, 둘째, 육신적인 사람은 구원은 받았어도 성경적 기준대로 살지 않고 자기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며, 셋째로 영적인 사람은 구원받고 난 후 자기 기준을 버리고 성경적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말한다. 자연인과 육신적인 사람을 구별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자연인들도 교회에 다닐 수 있고 새벽 기도에 나갈 수 있으며 심지어 제도화된 교단 교회들과 은사주의 교회에서는 그들이 사회적 지위나 돈 많이 내는 일이나 교회 일에 쏟는 열성들을 고려해 집사, 권사, 장로 등의 제직을 맡기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 초, 중, 고, 대학부, 청년부 교사로도 임명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각 부서장으로도 임명하여 써먹고 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 자연인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구원받았다는 그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다른 것이 없다. 구원받은 성도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될 때 그에게는 성령의 열매도 없고 구령의 열매도 없으며 십 년, 이십 년 교회 생활을 했다 해도 귀로 얻어들은 것 외에는 성경을 체계적으로 알지도 못하며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기보다는 육신의 냄새를 풍기게 된다. 자신이 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했는지에 대해서도 때로는 회의적이며 믿음보다는 기분이 앞서 있어 자기의 감정의 고저에 따라 믿음의 생활이 달라지게 된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먼저 영적 배고픔을 느낀다. 자기 안에 새로이 태어난 속 사람도 먹어야 살 수 있는데 겉 사람처럼 물질적 양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영적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다. 겉 사람은 하루에 적어도 세 끼 이상을 먹는다. 속 사람도 자기가 원하는 분량을 먹어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는 구약성경부터 읽지 말고 요한복음,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데살로니가전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이렇게 읽어 가는 것이 좋으며 처음부터 너무 많은 분량을 읽지 말고 3장 정도만 읽고 그 안에 어떤 주제가 있었는가를 음미하는 것이 좋다. 말씀을 읽을 때는 의심하지 말고 기록된 그대로를 믿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긴다(롬 10:17). 말씀 외에 기도도해야 한다. 기도는 성도의 호흡이다. 숨쉬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고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것이다. 구원받은 것만을 알고 성경을 읽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았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되겠는가? 육신 안에 있는 속 사람이 고사(枯死)해 버리지 않았겠는가? 구원을 잃어버렸다는 말이 아니라 말라져 버린 것이다. 핏덩어리를 낳았으면 물로 씻기고 젖을 먹여야 자라지 않겠는가? 영적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났으면 말씀의 물로 씻고(엡 5:26) 순수한 젖을 먹어야 한다(벧전 2:2). 『그러므로 모든 악의와 모든 속임수와 위선과 시기와 온갖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로서 순수한 말씀의 젖[개역성경 삭제]을 사모하라. 이는 너희가 그것으로 인하여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2:1,2).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지 않은 어린 아기라고 한다(고전 3:1-4). 어린 아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이 나라 교단 교회들에서는 많은 아기들이 가르치고 설교하고 있다. 그들이 마귀를 대적해서 싸울 수 있겠는가? 마귀는 그런 어린 아기들을 건드리지도 않는다. 건드릴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아기들은 영적 전쟁이란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영적 어린 아기들이 떼지어 몰려다니면서 자기들 나름대로 성령의 능력을 말하고 있는데 대부분은 마귀의 능력을 성령의 능력으로 착각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영적 아기들과 교제하실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일들을 시킬 수도 없기에 맡기지도 않으신다. 그래서 제도화된 교단 교회들과 은사주의 교회들은 쓸데없는 일들에 관여하면서 그런 것들을 하나님의 일로 가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이겨오는 일이다. 당신의 교회는 한 달에 몇 명의 혼을 그리스도께로 이겨오는가? 아직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을 만나지 못했는가? 아니면 끝까지 견뎌야 알 수 있는데 아직도 날짜가 다 차지 않았는가? 그런 엉터리 교리가 성경 어디에 있던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에 오해한 것 아닌가!(막 12:24) 또 한 가지 일은 혼들을 구령했으면 그 혼들을 진리의 지식으로 양육시켜야 한다. 이때 썩은 음식인 틀린 성경이나 성경적 교리가 아닌 교단 교리로 양육하게 되면 머리가 혼미해져 방언이나 하고, “주여!” 삼창을 부르며, 거리로 산으로 방황하게 된다. 그런 자들 중 상당수가 미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들이 각종 회의, 성결서약, 효 운동, 구제, 반정부데모, 심지어 기독교 정당까지 만들고 있겠는가?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거의 육신적인 사람들이다. 자연인과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차이란 쓰레기통에 페인트 칠하지 않은 것과 페인트 칠한 것의 차이일 뿐이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은 수치스러운 것이기에 그렇게 불리지 않도록 처신을 고쳐, 자기 기준에서 성경 기준으로 확실히 돌이켜야 한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고 말씀을 매일같이 읽고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께 자기 몸을 드리고 말씀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여 자기의 은사대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구령의 열매는 물론이요 성령의 열매를 내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산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세워 주고 교회의 기둥으로서 자기 몫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세상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마음의 변화를 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산다. 무엇보다도 진리로 오류를 판단하며 죄들을 질책하고 다가올 심판과 지옥을 설교하는 것이다. 그가 성경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판단하지 않게 된다(고전 2:15).

    <한글개역성경>에는 자연인(Natural man)을 육에 속한 사람이라 했고 육신적인 사람(Carnal man)을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 했다. 이렇게 된 성서를 가지고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개역성경>을 가지고 교리를 설교하는 설교자들은 모두 엉터리라는 점을 이제야 알 것 같은가? 성경은 진리인데 진리를 말해야 할 자들이 오류를 말하면서 진리인 체했을 때 거기에 무엇이 살아남아 있겠는가? 이것은 <개역성경>이 몸, 혼, 영(갈 5:23)을 몸과 영혼이라고 써서 성경의 진리를 플라톤의 철학으로 바꿔치기한 어거스틴과 존 칼빈의 신학과 같다. 왜 이런 일들이 가능했겠는가? 신학교 교수, 교단 교회 목사들이 모두 영적인 사람들(Spiritual man)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자연인(Natural man)이거나 아니면 구원은 받았을지 모르나 영적 양식으로 먹고 마시며 숨쉬지 않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 즉 아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젖 외에 꿀, 사과, 빵, 고기를 먹을 수 없는 체질인데도 청장년 행세를 하며 겉멋을 부리고 강단에 올라서서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며 돈벌이 하고 있는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기에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어 있다(마 15:14). 성경 순서도 모르는 목사들, 성경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제직들, 성경이 필요 없는 교인들이 5만 개의 교회를 점유하고 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BB





    1월 6일(화) 요한일서 2:12-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자녀들(2:12) 

  •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I write to you, dear children, because your sins have been forgiven on account of his name.
  • I write to you, fathers, because you have known him who is from the beginning. I write to you, young men, because you have overcome the evil one. I write to you, dear children, because you have known the Father.
  • I write to you, fathers, because you have known him who is from the beginning. I write to you, young men, because you are strong, and the word of God lives in you, and you have overcome the evil one.

  • 사도바울

    육에 속한 사람(고전 2:14) -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고전 3:1, 3) - 시기 분쟁과 같은 사람을 따라 행하는 사람 
    신령한 사람(고전 2:15) -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

    사도 요한 

    하나님의 자녀(요일 2:12) - 예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은 사람
    아비들(요일 2:13a) -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사람
    청년들(요일 2:13b) - 악한 자를 이긴 사람
    아이들(요일 2:14) - 아버지를 아는 사람 





  • 용서(forgiven)와 승리(overcome)

  •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비결은 예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어야 합니다.
    아비들은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 청년들은 악한 자를 이겨야 합니다.
    청년들이 악한 자를 이길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주하여 강한 자가 된 것입니다.
  • 이 표현은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영적 분류로, 신앙의 연령·성숙 단계를 상징적으로 말합니다.

    1️⃣ 아이들 (τεκνία / παιδία)

    • 의미 : 영적으로 거듭난 자, 믿음의 시작 단계

    • 특징

      • 죄 사함을 받은 은혜를 앎

      •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관계의 출발

      • 보호와 양육이 필요한 시기

    • 핵심 말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라”

    👉 신앙의 출발점: 관계와 은혜 중심 

    2️⃣ 청년들 (νεανίσκοι)

    • 의미: 영적으로 성장하고 싸우는 단계

    • 특징

      • 말씀으로 강건함

      • 악한 자(사탄)를 이김

      • 영적 전쟁과 사명에 적극적

    • 핵심 말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신앙의 실천기: 말씀과 싸움 

    3️⃣ 아비들 (πατέρες)

    • 의미: 영적으로 성숙한 단계

    • 특징

      • “태초부터 계신 이”(그리스도)를 깊이 앎

      • 경험과 분별, 영적 권위

      • 가르치고 세우는 역할

    • 핵심 말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라”

    👉 신앙의 완숙기: 인격적·관계적 깊이 

    ✨ 정리 한눈에

    구분 중심 초점 핵심 특징
    아이들 관계 죄 사함, 아버지를 앎
    청년들 싸움 말씀, 승리
    아비들 깊이 그리스도를 앎

    이 분류는 나이가 아니라 영적 성숙도를 말합니다. 
    한 교회 안에 이 세 단계가 모두 건강하게 존재할 때 공동체가 균형을 이룹니다.


  • 영적 성장과 성숙의 단계(요한일서 2:12-14)

  • 오늘 우리는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14절 말씀을 통해 사도 요한이 성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해 깊이 살펴보려 합니다. 이 말씀은 영적 성장과 성숙의 단계를 묘사하고 있으며, 우리 각자가 신앙 생활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자각하게 합니다.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와 인근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으로, 이들은 모두 초대 교회 시대의 신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초대 교회는 이단의 도전과 외부 압박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강화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성도들에게 신앙의 다양한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성도들이 더욱 확고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고자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 삶에서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제공하며,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돌아보는 중요한 기회가 됩니다.

    1. 자녀들아,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다 (12절)

    사도 요한은 먼저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녀들’은 신앙의 첫 단계를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영접할 때 받은 구원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이 구절은 신앙의 첫 단계에서 우리가 확신해야 할 중요한 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우리의 죄가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진리를 받아들이고, 우리의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첫걸음입니다.

    현대적 적용: 오늘날 우리는 이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매일의 삶 속에서 확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죄에서 자유로워졌음을 믿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2. 아비들아,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 (13절)

    그 다음, 요한일서 2장 13절에서 사도 요한은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비들’은 신앙의 성숙한 단계에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깊이 알고,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란 하나님을 의미하며, 신자들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졌음을 상징합니다.

    신앙의 성숙한 단계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욱 깊이 추구하며, 그분의 말씀과 뜻을 따르기 위해 헌신합니다. 이들은 신앙생활에서 많은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이 깊어졌습니다. 이러한 성숙한 신자들은 교회의 리더가 되기도 하며, 다른 신자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현대적 적용: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이러한 신앙의 아비들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들은 젊은 신자들에게 영적인 길잡이가 되어주고, 그들의 신앙 성장을 도와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신앙의 성숙을 이루어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성숙을 위해 노력하는 자들에게 존경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3. 청년들아, 너희가 악한 자를 이겼다 (13절)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 13절에서 또한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청년들’은 신앙의 중간 단계에 있는 자들을 의미하며, 이들은 영적인 전투와 시험을 겪으며 성장해 나가는 단계에 있습니다. 청년들은 신앙생활에서 마주치는 여러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신앙의 힘을 성장시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기로 사용하며, 영적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정에서 수많은 시험과 유혹을 마주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이겨내야 합니다. 사탄의 계략을 꿰뚫어보고,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적 적용: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청년들과 같은 불굴의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마주하는 유혹과 시험을 이겨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로 무장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격려하며,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4. 영적 성숙의 단계와 그 중요성 (14절)

    요한일서 2장 14절에서 사도 요한은 다시 한 번 ‘아이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러한 반복은 영적 성숙의 각 단계를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14절은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기 때문이라.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기 때문이라.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이라’ 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반복해서 각 단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신앙생활에서 이 단계를 이해하고 성장하는 것이 중요함을 상기시킵니다. 신앙의 시작에서부터 성숙까지, 우리는 각 단계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통해 성장해야 합니다.

    현대적 적용: 오늘날 우리 각자는 자신의 신앙 상태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어린아이 단계에 머물러 있지 말고, 말씀을 통해 성장하며, 더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청년들처럼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힘을 기르고, 성숙한 신앙의 아비들처럼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며, 그들을 이끌어줄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오늘 우리는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14절 말씀을 통해 사도 요한이 말하는 영적 성장과 성숙의 단계를 깊이 살펴보았습니다. 신앙의 시작 단계인 자녀들, 신앙의 중간 단계인 청년들, 그리고 신앙의 성숙한 단계인 아비들 각각의 특징을 이해하며, 우리는 우리 자신이 현재 어떤 단계에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성숙해 나가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은 자들이며,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고,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며 강해지는 신앙생활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성숙한 신앙의 아비들처럼, 다른 이들에게 영적인 본보기가 되며 그들을 이끄는 역할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묵상과 나눔

    기도문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14절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 생활을 되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자녀들처럼 죄 사함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게 하시고, 청년들처럼 강한 믿음으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시며, 아비들처럼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믿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각자가 신앙의 단계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고, 끊임없이 말씀을 통해 힘을 얻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영적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우리가 각자의 신앙 단계를 인정하고, 그 단계에 맞는 성장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서로를 격려하고 도우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 우리 교회가 되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우리 모두가 성숙한 신앙인이 되길 소망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사도 요한이 성도들에게 쓰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씻음을 받았기 때문임 (12절)
  • 아비들에게는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함 (13절)
  • 청년들에게는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임 (13절)
  • 아이들에게는 아버지를 알았기 때문임 (14절)
  • 아비들에게는 다시 한 번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함 (14절)
  • 청년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하시며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이라고 말함 (14절)
  • 나는 지금 신앙의 어느 단계에 있는가? 자녀, 청년, 아비 중 어디에 속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 신앙의 성숙을 위해 나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봅시다.
  • 우리 교회 안에서 서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 자녀 아비 청년(요한일서 2:12-14)

    성경에서 ‘하라’는 말씀을 대할 때 쉽게 떠오르는 것은 ‘이것을 내가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일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있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내가 실천할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시각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라’는 말씀은 나에게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고, 따라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내가 신자라는 증거가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러분의 신앙을 어긋나게 하는 위험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내가 실천해야 할 몫으로 여길 때 감히 인간으로서 실천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이러한 수준을 목표로 삼고 살 것을 요구하신 것’으로 여기면서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위험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이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나에게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깨닫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께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그냥 십자가에 죽으셔서 여러분을 천국으로 보내주는 역할을 하신 분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저주를 짊어지기 위해 오신 분이고, 또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십자가 아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연약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다만 나의 죄만 생각하고 넘어가면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내가 실천할 수 없어 그래서 나는 죄인이야’라는 생각에 머무는 것이 말씀이 요구하는 전부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형제 사랑을 생각해 보면 사실 우리들의 힘으로는 실천할 수 없는 내용일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은 어려운 사람을 조금 도와주고 친절을 베푸는 수준의 것이 아니라 그 누구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의로 구원받을 죄인이라는 입장에서 대해야 하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즉 차별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지만 평생을 좋은 일을 하며 산 사람이 살인을 하고 악한 짓만 일삼은 죄수 앞에서 그런 마음을 가지기가 쉽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우리가 실천할 수 없는 것을 말함으로써 다만 우리가 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자칫 잘못하면 ‘나는 죄인이다’라는 인정을 하는 것으로 끝나 버리고 정작 형제 사랑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애당초 내가 실천해야 할 몫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 성경은 우리가 죄인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철저히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왜 중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죄인임을 인식함으로써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 바른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바르게 깨달았을 때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제자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죄인임을 안 것이 전부가 아니라 죄인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사랑은 우리에게서 생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도덕이나 인격, 감정 등을 가지고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내가 사랑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도가 형제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실천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신자란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하여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받은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는 신자를 ‘자녀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라는 세가지 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호칭을 두고 신자의 신앙 수준을 세단계로 구분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에 자녀와 같은 신앙, 아비와 같은 신앙, 청년과 같은 신앙이란 없습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 있음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깨달음의 차이로 보는 것이 옳은 것이지 신앙의 높고 낮음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만약 신앙의 세 단계를 의도한 말씀이라면 ‘아비들아’ 다음에 ‘청년들아’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청년의 호칭 다음에 아비의 호칭이 오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본문에서 세 호칭이 신앙의 수준 차이를 의미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왜 이러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도는 앞에서 형제 사랑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이어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사랑에 대한 내용 사이에 본문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본문은 사랑과 연관이 있는 내용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가르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아무리 자세하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가르친들 배우고 듣고 기억한 대로 실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랑의 문제가 정작 우리에게 짐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치 못하는 것이 짐이 되고 부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본문의 말씀을 함으로써 사랑이란 짐이 아님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12-13절을 보면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죄가 사함을 얻는 것과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것 중 어느 것이 수준 높은 신앙입니까? 분명 본문의 내용을 가지고 신앙의 수준을 따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 호칭은 신앙의 수준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호칭을 사용하여 말씀하는 것입니까? 사실 자녀, 아비, 청년이란 호칭은 모두 나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자녀, 청년, 아비는 하나의 표현법입니다.

    예수님으로 죄사함을 얻은 것은 신앙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로 표현한 것이고,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을 아는 것을 아비로 표현한 것은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아비로서 예수님을 아는 자가 예수님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를 이기는 것을 청년으로 표현한 것은 청년의 힘을 의미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사랑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사도는 그리스도로 죄사함을 얻지 못하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고 악한 자를 이기는 자로 살지 못한다면 형제 사랑을 할 수 없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우리에게서 나와지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얻은 자로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자로 살아갈 때 사랑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내가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 있는 자로서 사랑하게 되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죄사함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용서 받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용서 받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이미 우리를 용서 안에 있게 한 것입니다. 자격을 따지면 우린 용서 받을 수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주님의 용서함으로 형제를 용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짐을 지워주시는 분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거운 집으로 고통 받는 자들을 쉬게 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은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실천 여부에 따라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차별의식이 있다면 결국 형제에 대해서도 차별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예수 안에서 이미 이긴자입니다. 어떤 죄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실천 여부를 보면서 낙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몫이나 지키기 힘든 문제로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용서를 알고 사랑을 안다면 여러분은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자로 살게 하시는 분이 우리에게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이, 청년, 아비(요한일서 2:12-14)


  •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에 관해 세 가지 주요 견해가 있다. 먼저 세 호칭은 세 개의 각각 다른 그룹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세 호칭은 육체적 혹은 영적인 연령을 가리킨다고 본다. 둘째, 세 호칭 중에 ‘자녀들’은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고, ‘아비들’과 ‘청년들’은 수신자 전체 안에 있는 두 개의 그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셋째, 세 호칭 모두 각각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최근 다수 학자는 두 번째 견해를 주장하지만,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세 번째 견해를 지지한다.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의 특징은 요한일서 전체 문맥에서 어느 특정 그룹이 아니라 수신자 전체의 특징을 가리킨다. 전체 수신자들은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 악한 자와 싸워 이겼다. 또한, 요한의 글쓰기 특징이 하나의 그룹을 지지한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는 서로 다른 단어가 같은 뜻을 의미하는 경우가 종종 등장한다. 표현을 다르게 하여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의 특징은 새 언약적 요소를 담고 있다. 죄 용서, 신지식, 말씀의 내재화 그런데 이 세 요소는 종말에 새 언약의 백성이 누릴 복으로서 모든 자가 구분 없이 함께 누릴 복이다. (렘 31:33-34) 따라서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 사이에 어떤 구분을 두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런 이유로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은 하나의 그룹으로서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저자는 수신자들이 사랑받는 자녀, 성숙한 아비, 승리한 청년이라고 칭찬하면서 그들이 믿음과 신분에 맞게 살도록 격려한다.

    1. 시작하는 말

    요한일서에는 단순한 헬라어 문장이나 분명한 표현 뒤에 해석하기 까다로운 난제들이 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요한일서 2:12-14이다.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13)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14)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저자는 2:12-13에서 ‘자녀들’(teknia), ‘아비들’(paterej), ‘청년들’(neaniskoi)을 차례대로 언급한 후 2:14에서도 ‘아이들’(paidia), ‘아비들’(paterej), ‘청년들’(neani,skoi)을 언급한다. ‘자녀들’(teknia)에서 ‘아이들’(paidia)로 바뀌지만, 기본적으로 둘 사이에 차이는 없다. 그렇다면 ‘자녀들’/‘아이들’, ‘아비들’, ‘청년들’, 이 세 호칭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저자는 왜 세 호칭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지난 2천 년 동안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아직까지 만족할만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그동안 제기되었던 주장들을 검토해 보고 좀 더 설득력 있는 주장과 근거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2. 학자들의 견해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세 가지다. 
    세 호칭을 각각의 구분된 세 그룹으로 보기도 하고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한 그룹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이라고 보기도 한다. 다른 한편 한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두 그룹으로 보기도 한다.

    가. 세 그룹

    세 호칭에 대한 가장 전통적인 해석은 육체적인 혹은 영적인 연령대의 청중으로 보는 것이다. 육체적인 연령대로 본다는 것은 교회 안에 어린이와 청년과 아버지와 같은 연령대의 구성원들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구성원을 포괄하면서 그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각각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른 한편 이것을 영적인 연령으로 보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자녀들’, ‘청년들’, ‘아비들’로 불린다는 것이다. 자녀는 믿음이 어린 초기 단계의 신앙인을 가리킨다. 예수를 믿어 죄 용서를 받은 가장 기초적인 신앙의 단계이다. 청년들은 그보다 더 영적으로 성숙한 이를 가리키는데, 잘못된 가르침과 싸워 이긴 성숙한 사람이다. 아비는 가장 성숙한 사람인데, 그리스도에 대한 보다 깊은 차원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자녀들’/‘아이들’이라는 호칭이 요한일서에서 전체 성도를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 의해 반박된다. (요일 2:1, 12, 28; 3:7, 18; 4:4; 5:21 / 2:14, 18) 저자는 수신자들을 ‘자녀들아’ 혹은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르면서 편지 전체에 걸쳐 권면하고 있다. 이 호칭은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요 13:33; 21:5) 저자 요한은 이제 예수의 마음으로 그의 성도들을 ‘자녀들’/‘아이들’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의 용례는 ‘자녀들’/‘아이들’이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어느 특정 연령이나 단계를 대변한다는 주장을 무력화시킨다. 더욱이 스몰리(Smalley)가 적절히 지적하듯이 저자가 왜 자녀들-청년들-아비들이라는 순서를 따르지 않고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이라는 순서를 취했는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자녀들’/‘아이들’이라는 호칭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를 포괄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 두 그룹

    다수 학자에 의해 지지를 받는 이 주장은 ‘자녀들’/‘아이들’이라는 호칭이 요한일서에서 성도 전체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는 해석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주장의 학자들은 ‘자녀들’/‘아이들’과 달리 ‘아비들’과 ‘청년들’은 특정 그룹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다른 신약 성경에서도 교회 안의 장년 그룹과 청년 그룹을 가리키는 각각의 표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라며 교회 구성원을 늙은이와 젊은이로 나눈다. (딤전 5:1) 베드로도 또한 한편으로는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라고 하고(벧전 5:1), 다른 한편으로는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라고 한다. (벧전 5:5) 따라서 요한이 수신자들을 아비들과 청년들로 구분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한다.

    다른 한편 두 그룹을 주장하는 학자들 안에서도 두 그룹의 성격에 대해 다양한 주장이 있다. 트레빌코(Trebilco)는 ‘아비들’과 ‘청년들’이 남자만 가리킨다고 한다. 하울던(Houlden)은 ‘아비들’과 ‘청년들’은 교회 지도자를 가리킨다고 한다. 크루즈(Kruse)는 육체적 연령에 따라 아비들과 청년들로 나뉜 것이라 한다.

    그러나 다른 신약 본문에서도 정확하게 ‘아비들’과 ‘청년들’이라는 두 그룹으로 나뉜 용례는 없다. 늙은이와 젊은이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그 어떤 용례에도 ‘아비들아’라는 호칭은 찾아보기 힘들다. 브라운(Brown)은 ‘아비들아’라는 호칭이 장로를 가리킬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장로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공동체에서 아버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이 스스로에게는 장로라 부르면서(요이 1; 요삼 1) 왜 다른 장로들에게는 장로 대신에 아비라 부르는지 설명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그런 용례도 찾기 힘들다.

    또한, 제일 앞에 나오는 ‘자녀들’/‘아이들’은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고 같은 가족 코드의 단어인 ‘아비들’과 ‘청년들’은 바로 앞의 ‘자녀들’/‘아이들’과 다른 성격으로 읽는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자녀들’/‘아이들’ ‘아비들’ ‘청년들을 같은 선상에 놓고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두 그룹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반문에 직면할 수도 있다. 각 특정 그룹이 과연 자신들의 고유한 신앙적 특성이 있었을까? 청년들만 악한 자와 싸워 이긴 것일까? 아비들만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안 것일까?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청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몰랐을까? 아비들은 악한 자와 싸워 이기지 않았을까? 이런 반문이 가능하다.

    다. 한 그룹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세 호칭을 하나의 그룹에 대한 각기 다른 호칭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다드(Dodd)가 대표적인 학자였으며, 마샬(Marshall)도 이 주장을 따른다. 다드는 ‘태초부터 계신 이’를 성부 하나님으로 보고 결국 2:14에서 아이들의 특징과 아비들의 특징이 같기 때문에 세 호칭은 모두 한 그룹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브라운이 잘 지적했듯이 이것은 틀린 해석이다. 아래에서 밝히겠지만, ‘태초부터 계신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마샬은 다드가 수사적 표현에 근거해 세 호칭을 하나의 그룹으로 본 것을 받아들이며, 모든 수신자가 용서를 받은 자녀의 특성,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안 아비의 특성 그리고 ‘악한 자와 싸워 이긴 청년’의 특성이 있다고 한다.

    왓슨(Watson)은 두 그룹 견해를 지지하며, 한 그룹 견해의 약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아비들’이나 ‘청년들’이 공동체 전체를 대변하는 용어로 쓰인 예가 다른 신약 본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비들’이나 ‘청년들’을 ‘자녀들’과 같은 레벨의 호칭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한다.

    이처럼 세 견해는 각각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지난 2천 년 동안 어떤 견해도 100% 만족할 만한 답변이나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학자들은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스몰리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양면적 표현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두 그룹과 한 그룹의 가능성을 모두 긍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에 따르면 핵심은 요한의 수신자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정통 교훈에 확실하게 머물러 있다는 사실 자체라고 한다. 그러나 본 연구는 위의 세 견해 중 세 번째가 좀 더 유력한 주장이라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자녀들’/‘아이들’ 뿐만 아니라 ‘아비들’과 ‘청년들’도 각각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호칭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3. 요한일서 문맥

    자녀들뿐만 아니라 아비들과 청년들도 요한일서 수신자들의 일반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성도의 일반적인 특징이 아비들과 청년들에게 나타난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는 가장 뚜렷한 이유는 요한일서 전체에서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의 특징은 서로 구분되지 않고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일서 문맥이 한 그룹 해석을 지지한다.

    가. 앞서 자녀들은 요한일서에서 성도를 가리키는 호칭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사도는 계속해서 그의 수신자들을 ‘자녀들’/‘아이들’이라 부르면서 권면한다. (요일 2:1, 12, 28; 3:7, 18; 4:4; 5:21 / 2:14, 18) 요한일서 2:12-14에서 자녀들의 특징은 죄 용서를 받은 것이고(요일 2:13), 아버지를 안 것이다. (요일 2:14) 그런데 자녀들의 이 두 특징은 요한일서 다른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연결된다. 예수께서 죄인을 위한 화목제물이심을 알고 믿는 자가 죄 용서를 받는다. (요일 2:2)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요일 1:7) 이러한 죄 용서의 은혜는 아버지 하나님께 그 기원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화목제물로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요일 4:10) 우리가 죄를 자백할 때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요일 1:9) 따라서 자녀들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용서를 받고, 그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녀들의 특징은 아비들의 특징과 다르지 않다. 잠시 후 밝히겠지만, 아비들의 특징은 ‘태초부터 계신 이’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자녀들의 특징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를 알고, 죄 용서를 받는 것이라면 이것은 아비들의 특징과 연결된다. 다른 본문들도 아버지와의 관계는 아들과의 관계에 기초한다는 것을 계속 보여준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없고,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 아버지도 계신다 (요일 2:23) 자녀들의 특징이 아버지를 아는 것이라면 이것은 결국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는 말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항상 함께 있다. 따라서 자녀들의 사귐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하는 사귐이다. (요일 1:3) 적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다. (요일 2:22) 결국, 아버지를 아는 ‘자녀들’과 아들을 아는 ‘아비들’의 차이는 없다. 다른 한편 ‘자녀들’/‘아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연결된다. 자녀들의 특징은 아버지를 아는 것인데, 이때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아버지와 함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이 핵심이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요일 3:1)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다. (요일 4:10; 요 3:16)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요 1:12).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지식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이것은 곧 요한일서 2:12-14에서 자녀들의 특징이고 아비들의 특징이다.

    나. 아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 ‘태초부터 계신 이’를 하나님 아버지로 보는 사람도 있다. 스토트(Stott)는 ‘태초부터 계신 이’가 로고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한다. 브루스도 ‘태초부터 계신 이’를 하나님으로 본다. 그러나 ‘태초부터 계신 이’는 1:1에 비춰봤을 때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일 가능성이 크다. 요한은 편지를 시작하며 ‘태초부터 계신 이’를 보고 듣고 만졌다고 한다. (요일 1:1) 그리고 이어서 ‘태초부터 계신 이’가 생명의 말씀이고,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다. (요일 1:1-2) 물론, ‘태초부터 계신 이’(o] h=n avp V avrch/j)에는 중성 관계대명사가 나오는데, 이것은 남성 관사가 쓰인 ‘태초부터 계신 이’(o` a vpV avrch/j)와 다르다. 그런데도 중성 관계대명사는 이 편지가 생명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브라운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말씀과 사역을 포괄한다고 보고, 스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message)로 본다. 따라서 ‘태초부터 계신 이’는 아버지 하나님보다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아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 자들이다.

    요한일서 수신자들은 사도가 전해준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여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자들이다. 이런 내용이 요한일서 전체에 걸쳐 전반적으로 나온다. 그들은 하나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이다. (요일 5:13) 그런데 2:13-14은 이런 자들을 아비들이라 부르지만, 요한일서 다른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라 한다. (요일 5:1)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이고, 요한이 ‘자녀들’이라 부르는 자이다. (요일 4:4) 따라서 아비들은 자녀들과 다르지 않다. 그 사람의 나이에 상관없이 그 사람의 신앙 햇수에 상관없이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사람은 자녀요, 아비다. 사도는 수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고 있는 ‘아비’라고 칭찬한다. ‘아비’라는 호칭을 통해 그들의 성숙한 신앙을 격려하고 있다.

    다. 청년들은 악한 자를 이겼다. (요일 2:13) ‘악한 자’(o`ponhroj)는 남성 관사와 형용사가 사용되어 마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어둠과 혼돈과 죽음의 세계를 주관한다. 요한복음 17:15에서는 남성일 수도 있고, 중성일 수도 있게 쓰여서 ‘악한 자’를 뜻할 수도 있고, ‘악’을 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요한일서에서는 남성임이 분명히 드러나 마귀를 가리킨다. 물론, 스몰리가 적절하게 밝혔듯이 남성과 중성, 즉 ‘악한 자’와 ‘악’ 사이에 의미상의 큰 차이는 없다. 요한은 사탄 혹은 마귀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계속 ‘악한 자’를 사용한다. (요일 5:18-19)

    청년들이 악한 자를 이긴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 어떤 이들은 그들의 회심을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해 그들이 악한 자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승리에 근거해 그들이 승리한 것이다. 예수는 공생애 기간에 자신이 세상을 이겼다고 선언하셨다. (요 16:33) 이제 믿음으로 그와 연합한 그리스도인은 그와 같이 세상을 이긴 자이다. 세상을 주관하는 악한 자를 이긴 자다. 다른 한편 청년들의 이김을 거짓 교사를 물리친 것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악한 자는 적그리스도, 즉 거짓 교사를 통해 요한일서 수신자 공동체에 들어와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렸다. 그러나 수신자들은 사도가 전해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굳게 붙들고 믿음을 지켰다. (요일 4:1-4; 5:4-5) 그리고 마침내 거짓 교사들은 공동체를 떠났다. (요일 2:18-19) 이에 사도는 수신자들에게 그들이 악한 자를 이겼다고 말하며, 청년들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런 두 종류의 이김은 사실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참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고 그를 지속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이때 잘못된 가르침을 옳게 분별하여 거짓을 배격하고 참된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요한일서 전체에서 수신자들은 ‘이긴 자’ 혹은 ‘이기는 자’로 묘사된다. 그런데 이때 수신자들은 ‘자녀들’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로 불린다. 자녀들은 세상에 있는 자의 조종을 받는 거짓 교사들을 이긴 자이다. (요일 4:4)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역이며, 마귀의 통치 아래 있는 영역이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세상을 이겼고 지금도 이기고 있다. (요일 5:4) 따라서 이기는 것은 청년의 특징이면서 동시에 자녀의 특징이다. 다른 한편 아비의 특징으로 나온 기독론적 지식과 세상을 이기는 것이 연결된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가 세상을 이긴다. (요일 5:5) 결국, 자녀와 아비와 청년은 악한 자를 이기고 적그리스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측면에서 같은 사람들이다 요한일서 수신자들이다.

    2:14에서 청년들의 또 다른 특징이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있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수신자들이 죄 용서를 받은 자녀들이라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말씀이 없는 자의 특징이 죄 고백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일 1:10) 이런 측면에서 청년들의 특징은 자녀들의 특징과 연결된다. 또한, 죄를 짓는 자는 악한 자, 마귀에게 속한 자다. (요일 3:8) 그러나 죄를 짓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씨가 있기 때문이다. (요일 3:9) 하나님의 씨의 정체에 대해서는 해석학적 논란이 있다. 다만 말씀을 가리킬 확률이 좀처럼 배제되지 않는다. 이처럼 청년들의 특징은 곧 수신자들의 특징이고 자녀들의 특징이다. 요한은 사람의 연령이나 체력에 상관없이 악한 자를 이긴 사람을 청년이라고 한다. 그들이 악한 자를 이긴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라. 소결론

    요컨대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은 각각 요한일서 모든 수신자를 일컫는 호칭이다. 이들 각각의 특징은 요한일서에서 수신자 일반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요한은 수신자들을 자녀와 아비와 청년이라 칭찬하면서 수신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기 원했던 것 같다. 그들에게 정체성에 기초해서 사도의 권면을 받으라고 한다.

    두 그룹이나 세 그룹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있다. 자녀들의 특징은 기초적인 신앙의 성격을 가지고, 청년들이나 아비들의 특징은 더욱 성숙한 신앙의 특징을 말한다고 본다. 그러나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은 기초적이며, 태초부터 계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좀 더 성숙한 신앙 특징일까? 아들에 대해 잘못된 가르침을 전파하는 거짓 교사들을 이기는 청년들의 특징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아비들의 신앙특징보다 덜 성숙한 모습일까? 과연 요한은 여기서 신앙의 단계 혹은 차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수신자들의 신앙의 모습을 확인해 주며 그들을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수신자 공동체는 모두 죄 용서를 받고 아버지를 아는 사랑 받는 자녀들이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성숙한 자들이다. 그리고 거짓 교사들을 이긴 패기 넘치는 청년들이다.

    4. 저자의 표현 기법

    ‘자녀들’/‘아이들’ 뿐만 아니라 ‘아비들’과 ‘청년들’도 각각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호칭이라는 주장에 대한 또 다른 근거는 요한 문헌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글쓰기 특징이다. 요한은 같은 의미의 다른 단어를 번갈아 사용하며 자주 표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가. 요한복음

    같은 의미의 다른 단어를 번갈아 쓰는 예는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등장한다. 요한은 “알다”(ginw,skw), “영접하다”(paralambanw), “믿다”(pisteu,w)라는 세 동사를 번갈아 사용하며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요 1:10-12) 이러한 특징은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를 기록한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에도 등장한다. ‘어린양’(avrnion)/‘양’(probaton), “먹이다”(boskw)/“치다”(poimainw), “사랑하다”(avgapaw)/“사랑하다”(filew)라는 단어가 번갈아 가며 사용된다. (요 21:15-17) 각각의 단어는 원래 조금씩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내용상의 차이가 거의 없다. 혹자는 avgapa,w/file,w를 구분하여 예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에 담긴 함의를 주장한다. avgapa,w는 신적인 차원의 사랑을, file,w는 친구 간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요한복음의 글쓰기 특징에 대한 오해다. 요한복음은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f ile,w로 나타내기도 하고(요 5:20; 16:27), 사람이 세상을 사랑한 것도 avgapaw로 말하기도 한다. (요 3:19; 12:43)

    나. 요한일서 전체

    이러한 요한 문헌의 글쓰기 특징은 요한일서에도 그대로 등장한다. 1:1-4에서 요한은 그가 보고 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편지를 쓰면서 “전하다”(avpagge,llw)와 “쓰다” (gra,fw)라는 말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글쓰기 특징은 편지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죄’(amartia)와 ‘불의’(avdikia)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요일 1:9; 5:17) 의를 행하지 않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요일 3:10) “시인하다”(omologew,요일 4:15)와 “믿다”(pisteu,w, 요일 5:5)도 문맥에서는 같은 뜻으로 쓰인다. 물론, 시인하는 것은 공개적인 고백을 의미하고 믿는 것은 내면적 변화를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실제 문장에서 두 단어를 바꾸어 써도 두 구절의 의미에는 큰 차이가 없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과 시인하는 것은 같은 의미다. 또한,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라는 예수의 타이틀도 서로 바꿔가며 사용한다. (요일 5:1, 5)

    다. 요한일서 2:12-14

    요한의 이러한 글쓰기 방식은 심지어 2:12-14안에도 나타난다. 요한은 tekni,a와 paidi,a를 바꿔가며 사용한다. 그뿐만 아니라 gra,fw의 시상을 바꿔가며 같은 표현을 반복한다. 2:12-13은 현재형인 grafw를 사용하고 2:14은 아오리스트형인 egraya를 사용한다. gra,fw와 e;graya를 어떻게 이해할지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영어권의 대표적인 번역 성경들이 각각 서로 다르게 번역한다. ESV는 현재 진행형(I am writing과 단순 현재형(I write)으로 번역한다. 이와 달리 NASB는 현재 진행형(I am writing)과 현재 완료형(I have written)으로 번역한다. NIV는 모두 동일하게 단순 현재형으로 번역한다. (I write) 한글 성경도 서로 다르다. 개역개정은 단순 현재(‘쓰는 것은’)와 과거(‘쓴 것은’)로 번역한다. 새번역은 모두 단순 현재로 번역한다. (‘쓰는 까닭은’) 공동번역도 모두 단순 현재로 번역한다. (‘씁니다’)

    다른 한편 혹자는 현재형은 저자가 지금 쓰고 있는 요한일서를 가리키지만, 아오리스트형은 그가 이미 쓴 요한복음이나 요한이서 아니면 다른 잃어버린 문서를 가리킬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요한삼서 9절에 나오는 e;graya는 저자가 이미 쓴 문서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Egraya ti th/| evkklhsia |\ avllVo filoprwteu,wn auvtw/n Diotre,fhj ouvk evpide,cetai h`ma/jÅ /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요삼 9) 그러나 브라운이 잘 반박하였는데 만약 요한일서 2:14에 나오는 아오리스형이 어떤 앞선 문서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왜 아오리스트형을 현재형보다 뒤에 썼는지 설명하기 쉽지 않다. 이미 쓴 것을 먼저 언급하고 지금 쓰고 있는 것을 나중에 언급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수의 학자는 gra,fw와 e;graya는 문체의 변형(stylistic variant)일 뿐 의미상으로는 특별한 차이가 없다고 한다. 만약 있다면 아오리스트형 e;graya는 좀 더 강조 반복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두 동사는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해리스(Harris)는 반복의 특성상 gra,fw는 좀 더 현재 쓰고 있는 행동에 초점을 두고 있고, e;gra ya는 상대적으로 저자가 이미 쓴 것을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한편 리우는 grafw를 ‘I am writing’으로 e;graya를 ‘I have written’으로 각각 번역하면서 서신서로서 요한일서 문체의 특징을 언급한다. gra,fw는 저자의 관점에서 현재 쓰고 있다는 말이고, e;graya는 독자의 관점에서 이미 쓴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일종의 서신적 아오리스트(epistolary aorist) 라는 말이다. 그러나 포터(Porter)는 현재 행동을 위해 사용되는 아오리스트(aorist for present action)의 신약 용례를 조사하며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아오리스트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포터에 따르면 서신을 쓸 때 저자는 자신과 독자의 관점을 시제를 사용하여 복잡하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고유한 시간 관점에서 적절한 시상(verbal aspects)을 가지고 표현한다. 이때 서신적 아오리스트는 전체 포괄적 글쓰기 과정을 가리킨다. 따라서 2:12-14에 나오는 grafw와 egra ya 둘 다 전체 서신을 가리킨다고 한다.

    gra,fw에 대한 설명은 해리스의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 현재 동사의 진행적 성격은 요한일서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다. 예를 들면 요한은 현재 동사 a`marta,nw를 사용하여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한다. (요일 3:6)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도무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다. 요한은 동사의 현재형을 사용하여 이 점을 드러내고 있다. 다른 한편 e;graya에 대한 설명은 포터의 설명이 일리가 있어 보인다. 요한은 편지의 이곳저곳에서 자신의 글쓰기를 아오리스트 egra ya를 사용하여 나타내고 있다. (요일 2:21, 26; 5:13) 이때 요한은 자신의 편지 전체를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사용한다. 따라서 gra,fw는 현재 글 쓰는 과정을, e;graya는 전체 글쓰기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해리스의 견해든지 리우의 견해든지 포터의 견해든지 본 연구의 논지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즉, graf w와 e;graya가 요한일서 자체를 가리키는 것은 변함이 없고, 저자의 반복 강조 의도가 드러나는 것도 분명하다.

    라. 소결론

    요컨대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 전체 혹은 요한일서 2:12-14 자체에 나타난 요한 문헌의 글쓰기 예들을 볼 때 ‘자녀들’/‘아이들’, ‘아비들’, ‘청년들’도 또한 같은 대상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상의 특징을 풍성하게 드러내기 위한 요한의 전형적인 글쓰기 방식이다. 다시 말하면 요한일서 수신자들은 자녀도 되고, 아비도 되고, 청년도 된다. 그들은 자녀로서 죄 용서 받고, 아버지를 아는 자들이며, 아비로서 태초부터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이며, 청년으로서 악한 자와 싸워 이긴 자들이다.

    5. 새 언약적 요소

    세 호칭의 특징들은 모두 새 언약의 내용을 담고 있다. 언약이라는 말 자체는 요한일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일서에는 새 언약적 요소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2:12-14도 새 언약적 요소를 담고 있는데, 결국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은 모두 새 언약 백성으로 묘사된다. 새 언약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모두에게 구분 없이 새 언약의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 사이에 어떤 단계나 차등을 두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이 부분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위해 먼저 구약에 나오는 새 언약의 내용을 살펴보자.

    가. 새 언약의 세 가지 요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새 언약의 약속을 주셨다. 새 언약의 첫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법인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되는 것이다. 둘째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편만해진다. 셋째 우주적인 죄 용서가 일어난다. 죄 용서 신지식 말씀의 내재화 등이 새 언약의 내용이다.

    “(33)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1:33-34)

    하나님의 법이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된다는 것은 성령을 통한 마음의 변화로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참고 겔 36:27) 옛 언약에서는 의무나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따랐다면 이제 새 언약에서는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 기꺼이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새 언약 하에서 모든 이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진다. 이러한 종말론적 약속은 이사야도 언급한다. -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 11:9) 다만 예레미야는 이러한 신지식이 새 언약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죄 용서와 함께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여호와께 죄 용서를 받은 사람, 즉 여호와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새겨져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게 된다.

    나. 요한일서에 나오는 새 언약적 요소

    카슨(Carson)은 요한일서 2:20, 27이 구약에 나오는 새 언약을 배경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카슨은 먼저 요한일서가 얼마나 구약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밝힌다. 직접적인 구약 인용은 없지만, 요한일서는 구약 본문을 군데군데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화목제물이나 계명에 순종하는 개념 등은 구약과 깊이 연관되어 있고, 또한 언약적 요소를 담고 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너희 안에 기름 부음이 있다는 요한의 권면을 새 언약 관점에서 해석한다. (요일 2:20, 27)

    옛 언약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왕과 같은 중보적 교사(intermediary teachers)가 필요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제 그러한 교사가 필요 없고 모든 이가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 하신다. (렘 31:34) 요한은 바로 이러한 새 언약의 배경에서 새로운 지식을 가르치는 영지주의적 교사가 필요 없다고 한다. 이미 성령의 기름 부음이 그들 안에 있어 사도들이 전해 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김진태는 요한일서 2:12-14을 새 언약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요한일서에 나오는 속죄(atonement) 개념을 광범위하게 조사한 다음 2:12에 나오는 죄 사함이 예레미야 31:34을 반영하는 것이라 한다. 수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죄 용서를 받는 것은 새 언약의 성취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2:14에 나오는 아버지를 아는 것도 예레미야 31:34의 성취, 즉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여호와를 알게 되는 새 언약의 성취로 해석한다.

    그런데 김진태보다 앞서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새 언약적 요소에 주목한 대표적인 이는 말라테스타(Malatesta)이다. 그는 먼저 요한일서에 나오는 새 언약적 요소를 광범위하게 분석한다. 요한일서에 빈번하게 나오는 ei=nai evn와 me ,nein evn의 용례를 분석하여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이루어지는 신앙의 내면화를 연구하였다. 이러한 내면화는 곧 구약에 예언된 새 언약의 약속이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새 언약 백성은 바로 이러한 교제와 내면화 속에서 살아간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죄 사함,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말씀의 내주가 예레미야 31장에 예언된 새 언약의 요소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한다.

    물론, 예레미야 31:33-34(70인 경, 렘 38:33-34)과 요한일서 2:12-14 사이에 언어적 유사성이 그렇게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70인 경 예레미야 38:33은 말씀의 내재화를 위해 dwswno,mouj mou eivj thn dia,noian auvtw/n라고 하지만, 요한일서 2:14은 o logoj tou/qeou/ evn u`mi/n me,nei라고 한다. 또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위해 70인 경 예레미야 38:34은 oida를 사용하는 반면에 요한일서 2:13-14은 ginw,skw를 쓴다. 그리고 죄 사함을 위해 70인 경 예레미야 38:34은 i[lewj e;somai tai/j avdiki aij auvtw/n kai . t w/n a `ma rt i w/n a uvt w/n o uv mhmnhsqw/ eti라고 하는데, 요한일서 2:12은 avfewntai u`mi/n ai ama rtiai dia to onoma auvtou라고 한다.

    그러나 주제적 유비는 분명하다. 앞서 다른 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2:12-14에는 죄 용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말씀의 내주라는 새 언약의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일서의 다른 본문에도 새 언약 개념이 등장한다. 새 언약의 백성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통해 모든 것을 아는 자이다. (요일 2:20, 27) 그들에게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 언제든지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요일 2:2) 또한,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말씀을 따라 살며 죄짓지 않도록 한다. (요일 3:9) 이처럼 요한일서와 예레미야의 유비에 근거해서 2:12-14을 새 언약의 성취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면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 사이에 어떤 차등이나 구분을 두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새 언약 아래에서 모든 사람이 새 언약의 복을 동일하게 함께 누린다.

    다. 반론과 재반론

    그런데 새 언약적 배경을 주장하며 본 연구의 논지와 다른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톰슨(Thompson)은 예레미야 31:34에 나오는 ‘작은 자’와 ‘큰 자’가 요한일서에 나오는 청년들과 아비들로 치환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말라테스타도 예레미야 31:34에 비춰봤을 때 청년들과 아비들은 자녀들 안에 있는 하위 단위의 두 그룹을 나타낸다고 한다.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는 모두를 포괄하는 말인데, 이것이 요한일서에서 청년들과 아비들로 나타난다고 한다. 따라서 청년들과 아비들은 공동체 안의 청년과 노인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새 언약에 나오는 작은 자와 큰 자는 결국 언약적 복을 누림에 있어 차이가 없다. 작은 자나 큰 자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지식에 충만하다. 그러나 소위 두 그룹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요한일서에 나오는 청년들과 아비들은 육체적 혹은 영적 성숙에 있어 구별된다. 아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고, 청년들은 악한 자와 싸워 이겼다. 이들은 각각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새 언약에 나오는 ‘작은 자’와 ‘큰 자’는 모두 차별 없이 공통된 복을 누린다. 결국, 한 그룹 견해를 지지한다. 하나의 공동체가 누리는 구원의 복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요한일서에 나오는 청년들과 아비들이 ‘작은 자’와 ‘큰 자’를 각각 가리킨다면 청년들과 아비들 순서로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막상 요한일서는 아비들을 먼저 언급한 후 청년들을 언급한다. 이것도 예레미야 34장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순서상으로도 자연스럽지 않다.

    라. 소결론

    따라서 자녀들과 청년들과 아비들은 새 언약의 복을 공동으로 누리는 새 언약 백성을 가리킨다. 이들 사이에 어떤 구분을 짓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요한의 수신자들은 모두 죄 용서를 받은 자녀들이고,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아비들이고, 악한 자와 싸워 이긴 청년들이다.

    6. 왜 세 호칭일까?

    지금까지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은 서로 다른 그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각각 요한일서 전체 수신자 일반을 가리킨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요한 문헌에서 가족 용어를 사용하여 성도를 묘사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이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말씀 중 특별히 영적 가족에 관한 말씀을 기록한다. 예수는 그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를 새로운 가족으로 엮어 주신다. (요 19:26-27)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에 의해 ‘형제’라 불림을 받고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된다고 소개받는다. (요 20:17) 이러한 제자들의 정체성은 이미 서문에서 밝혀진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te,kna qeou/)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이서에도 가족 용어가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 나타난다. 사도는 그의 수신자들을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이라 한다. (요이 1) ‘부녀’로 번역된 “kuria”는 특정 개인 수신자라기보다 교회공동체를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앞에 관사가 없을 뿐 아니라 요한이서의 내용이 특정 개인의 문제를 다루기보다 교회공동체의 문제를 언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한이서의 특징은 마지막 절에도 나타난다.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 (요이 13) 요한은 가족 용어를 사용하여 교회를 묘사하며 끝인사를 한다. ‘네 자매’(h` avdelfh/j sou)는 저자가 속한 교회를 일컬으며, ‘자녀들’(tatekna)은 그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요한일서 2:12-14에서 가족 용어인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을 사용하여 교회공동체를 묘사하는 것은 요한 문헌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왜 수신자들을 이러한 호칭으로 부른 것일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격려일 것이다. 수신자의 믿음과 신분을 칭찬하고 확신시켜서 그들의 믿음과 신분에 맞게 살아가도록 권면하기 위한 것이다. 문맥이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2:12-14의 내용은 수신자의 믿음과 신분을 격려하는 내용이고 이어지는 2:15-17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신자의 삶에 대한 권면을 말한다.

    2:12-14이 격려의 표현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 학자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슈나켄버그(Schnackenburg)는 2:12-17을 앞 단락과 구분되는 하나의 단락으로 보면서 2:12-14은 2:15-17에 나오는 명령을 준비하는 격려로 본다. 다시 말하면 저자는 수신자들의 구원을 먼저 확신시킨 후에 그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격려한다. 톰슨은 아예 2:12-14의 단락 제목을 “Encouragement to the Faithful”이라고 하며 2:15-17에 나오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와 연결된다고 한다. 리우는 2:12-17에 대한 제목을 “Encouragement to Persevere”라 하면서 격려의 기능으로서 2:12-14을 강조한다. 마샬은 신자가 새로운 신분으로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2:12-17의 주제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2:12-14에서 신자의 신분을 확신시킨 다음에 신자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도록 권면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이라는 호칭도 이러한 격려의 문맥에 맞게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저자는 수신자들을 사랑하는 자녀로 대하면서 그들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받아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자라고 칭찬한다. 또한, 태초부터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는 성숙한 자, 곧 아비들이라고 칭찬한다. 그리고 악한 자와 싸워 이긴 패기를 칭찬하며 그들을 청년들이라 부른다. 이러한 칭찬을 기초로 이어지는 문맥에서 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도록 권면한다. (요일 2:15-17)

    7. 결론

    ‘자녀들’/‘아이들’, ‘아비들’, ‘청년들’, 이 세 호칭의 대상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지만, 다음의 세 가지 이유로 이 세 호칭은 하나의 그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요한일서 문맥, 저자의 표현 기법, 새 언약적 요소.

    첫째,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요한일서 전체 문맥에서 요한일서 수신자 일반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요한일서 수신자들은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용서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들이다. 그들은 또한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거부하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바르게 아는 자들이다. 그들은 또한 사도들을 통해 그리스도 복음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 안에 거하며 악한 자를 이긴 자들이다. 따라서 마치 세 그룹 혹은 두 그룹 사이에 어떤 육체적, 영적 차이가 있는 것처럼 구분하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다.

    둘째, 요한 문헌은 자주 같은 의미의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여 표현을 풍성하게 한다. 

    요한복음에서 “알다”(ginwskw), “영접하다”(paralambanw), “믿다”(pisteuw)는 믿음을 나타내는 서로 다른 표현이다. (요 1:10-12) ‘어린 양’(avrnion)/‘양’(probaton), “먹이다”(bo,skw)/“치다”(poimai,nw), “사랑하다”(avgapa,w)/“사랑하다”(file,w)도 모두 각각 번갈아 가며 같은 뜻을 나타낸다. (요 21:15-17) 요한일서 안에서도 “전하다”(avpaggellw)와 “쓰다”(grafw, 요일 1:1-4), ‘죄’(a`martia)와 ‘불의’(avdikia, 요일 1:9; 5:17), “의를 행하지 않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요일 3:10), “시인하다”(o`mologe,w, 요일 4:15)와 “믿다”(pisteu,w, 요일 5:5)가 문맥에서는 같은 뜻으로 쓰인다. 심지어 2:12-14 안에서도 “gra,f w”와 “e;graya”는 그 뜻의 차이가 크지 않으면서 반복 강조하는 표현으로 나온다. 이처럼 ‘자녀들’/‘아이들’, ‘아비들’, ‘청년들’은 단어는 다르지만, 모두 요한일서 수신자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런 다른 표현을 통해 요한일서 수신자의 특성을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다.

    셋째,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예레미야 31:33-34에 약속된 새 언약의 복이다. 

    새 언약의 복은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모두가 구분 없이 누릴 종말론적 복이다. 다시 말하면 새 언약 아래에서 자녀들이 누릴 복이 다르고, 아비들이 누릴 복이 다르고, 청년들이 누릴 복이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구분 없이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며 말씀의 내주를 경험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요한일서 2:12-14에 나오는 세 호칭은 각각 어느 특정 그룹을 가리킨다기보다 요한일서 전체 수신자 일반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요한은 수신자들을 사랑받는 자녀로 대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음을 상기시킨다. 그들은 또한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성숙한 자라 격려한다. 그리고 마음에 심겨진 말씀을 통해 악한 자를 이겼다고 칭찬해 준다. 이런 칭찬을 기초로 2:15부터 나오는 권면을 받아들이게 한다. 곧,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가족을 비유해서 3가지 호칭으로 구분해서 불렀습니다. 요한일서 2장 12절에 보면, 죄 용서를 강조할 때는 “자녀들아”라고 불렀고, 오늘 본문에서는 “아이들아”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리고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을 강조할 때는 “아비들아”라고 불렀고, 흉악한 자를 이겼다는 것을 강조할 때는 “청년들아”라고 불렀습니다.

    1) 아이들

    요한일서 2장 12절에 “자녀들아”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테크니아’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갓 태어난 아이를 빗대어 영적으로 갓 태어난 아이들을 가리킵니다. 영적으로 갓 태어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게 되는 순간에 영적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영적으로 갓 태어나는 것은 이 땅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린 성령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지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게 하시는 것이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장 12절에서 “자녀들아”의 말은, 너희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고, 용서받았기 때문에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속하게 되었다는 표현으로 “자녀들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본문 14절에서 “아이들아”라는 또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죄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무시무시한 심판관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무한한 사랑과 긍휼의 대상이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이들은 수많은 특권을 누리면서 일생을 행복하고 보람있게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이 세상을 떠나가 될 때 천국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사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아비들

    여러분~! 가족 구성원 중에서 아비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장하는 자녀들의 인생관도 가장인 아비가 어떻게 가르치냐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 “아비들”의 특징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는 창세기 1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도 사도 요한은 “아비들”이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비들이 올바른 지식을 갖고 있어야 가족들을 보호하고, 지키고, 바르게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도 요한 당시에 잘못된 가르침을 강조하는 이단 세력이 교회 안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번 믿었으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고 잘못 가르쳤습니다(요일 1:8, 10). 또한 계명을 무시하면서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요일 2:4, 11).

    그들 중에는 기독교 신앙의 뿌리를 흔드는 이단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자들이 영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믿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은혜의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인 지식을 많이 쌓아가면 결국, 구원에 이른다는 잘못된 가르침을 유포시켰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이단들에 대해서 올바르게 대항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단에 꼬임에 넘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 “아비들”의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아비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 곧 하나님을 확실하게 경험했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인 하나님의 가족들에게 분명한 가르침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분 아니라, 신앙의 가족들을 이단 사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보호막 역할을 했습니다.

    “아비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경험적으로 아는 중요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요즘은 신학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이 아비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신앙적으로 성숙한 “아비들”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이 보존되고 전수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 영적인 아비들과 목회자를 존귀하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목회자가 아닐지라도 성경, 기도, 예배, 교제, 전도를 통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경험한 “아비”의 단계에 이르게 된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과 “청년들”에게 지금까지 올바른 신앙이 전수되었습니다.

    3) 청년들

    “청년들”은 “아비들”로부터 “태초부터 계신 이”를 잘 배워서 제법 성장한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청년들”의 특징을 “악한 자”를 이긴 것으로 요한일서 2장 13절에서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14절에서도 “흉악한 자”를 이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의 힘만으로는 악하고, 흉악한 사탄과의 싸움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청년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어둠의 권세인 사탄을 완전히 짓밟으셨습니다. 그래서 “청년들”도 악하고 흉악한 사탄을 이길 수 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다고 “청년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14절에서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강했다”는 것은 평소에 영적 건강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는 사실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기도 생활도 많이 했고, 주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깊은 신앙의 교제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무기로 마귀의 궤계를 대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전신 갑주 중에서 공격용 무기인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에베소서 6장에서 권면 했습니다(엡 6:11-17). 그러니까 “아이들”의 단계에서 “청년들”의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뒀을 때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겁니다. “청년들”이야말로 영적 싸움에서 맨 앞에 선봉에 서서 적군인 사탄과의 혈투를 통해서 승리를 쟁취하는 영적 군사였습니다.

    그런 “청년들”이 없다면 하나님의 가족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게 됩니다. 영적 최전방에서 과감하게 사탄과 그 세력들을 무너뜨리는 주의 “청년들”이 우리 교회에 많이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용서 받은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통해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우리는 “아이들”의 신앙에서 “청년들”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서 악한 자들과 흉악한 자들을 계속해서 물리치면서 결국 “아비”의 단계로 성숙해야만 합니다. 잘못된 이단 사상으로부터 우리 교회를 굳건하게 지키고, “아이들”과 “청년들”을 성장시킬 수 있는 영적 “아비들”로 견고하게 세워지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게헨나(지옥)  γέεννα, ης, ἡ Storng number 1067

    1.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  2. 예루살렘 남쪽 계곡.  3. 지옥  
    Pronunciation  [ gĕĕnna ]  
    Etymology  /  히브리어 1516과 2011에서 유래
    •  1.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 예루살렘 남쪽 계곡 [후기 유대 민중 신앙에 의하면 거기서 최후의 심판이 있다. 
      복음서에서는 내세의 형벌을 받는 장소를 상징한다], 
      지옥, 마5:29,30, 10:28, 18:9, 23:15,33, 막9:43,47, 눅12:5, 불의 지옥, 마5:22, 18:9. [상징적으로] 약3:6.
    • 관련 성경  /  지옥 불(마 5:22, 18:9, 약 3:6), 지옥(마 5:29, 막 9:45, 눅 12:5).

    1516. 가이(골짜기) גַּי Storng number 1516

    1. 협곡.  2. 계곡.  3. 평평한 곳  
    Pronunciation  [ gayʼ ]   
    Etymology  /  혼성. 연계형 גֵּי ,גֵּיא, 복수 ניאות, 어미활용 גֵּיאוֹתֶיךָ, 1466과 동일한 어원에서 유래한 약어
    Old Testament  /  30회 사용
    •  1. Noun 협곡, 계곡, 평평한 곳, 저지대, 왕하2:16, 겔6:3, 35:8.
    • 관련 성경  / 골짜기(민21:20, 삼상13:18, 겔39:11), 가이(삼상17:52), (소금) 골짜기(왕하14:7, 시60편표제).

    2011. 희놈(Hinnôm) הִנֹּם  Storng number 2011  
    Pronunciation  [ Hinnôm ]

    Old Testament  /  2회 사용
    •  1. 고유명사, 남성 여부스 족 사람으로 보임 ‘힌놈’.
    • 관련 성경  / 힌놈(수 15:8, 18:16).


    천국(天國)  παράδεισος

    1월 5일(월) 요한일서 2:7-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새 계명(2: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Yet I am writing you a new command; its truth is seen in him and you, because the darkness is passing and the true light is already shining.

    새 계명(엔토렌 카이넨) εντολην καινην
    옛 계명(old command) εντολην παλαιαν

    다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팔린'을 본문과 같이 '다시'라고 번역할 수도 있으나(again, KJV)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yet, NIV, RSV).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로 참된 것이라
    - 본문의 '새 계명'은 앞절에서 사랑의 계명을 옛 계명으로 지칭한 것과 모순되는 듯 보인다. 
    여기서의 '계명'은 예전부터 수신자들이 전해들었다는 의미에서의 옛 계명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새 계명'이다. 
    그 이유는 네 가지이다(Stott, Smalley, Barker). 
    1.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인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셨다(4:9; 요 3:16). 
    2. 예수께서는 순종으로 모든 계명의 완성인 사랑을 행하셨다(요 12:27; 롬 10:4). 
    3. 예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삶, 즉 영생을 부여하셔서 자신이 행했던 바와 같이 사랑의 계명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신다(4:8-11; 5:11, 12). 
    4.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시고 모든 믿는 자들로 행하도록 역사하시는 사랑의 계명을 자각하고 성취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의 계명은 한편으로 옛계명이지만 새 계명이 된다. 
    이러한 새 계명은 그리스도와 모든 믿는 자에게 성취되어 분명한 실체로 나타났다(Barker, Stott).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 본문은 새 계명이 그리스도와 믿는 자 안에서 성취될 수 있는 이유이다. 
    본문에서 '어두움'과 '참빛'의 대조는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 방법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참빛, 즉 실재하는 빛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어두워진 이 세상에 오셨다(1-5-7; 요 8:12). 
    한편 '비췸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네이'는 현재 시사이다. 
    이것은 빛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에 빛을 비추셨으며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구속의 빛을 비추심을 의미한다. 이 빛은 완전한 빛이 비추는 다가올 세대, 즉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Smalley).

    새 계명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랑의 계명입니다.

    성경 근거(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왜 ‘새’ 계명인가?

    • 구약에도 “이웃 사랑”은 있었습니다(레 19:18).

    •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의 기준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즉, 십자가의 희생적· 무조건적 사랑이 기준입니다. 

    새 계명의 핵심 특징

    1. 기준의 새로움 : 자기중심적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

    2. 관계의 초점 : 율법 준수보다 서로를 향한 삶의 태도

    3. 증거의 역할 : 사랑이 곧 제자됨의 표지 

    옛 계명과의 관계

    • 새 계명은 옛 계명을 폐기하지 않음

    • 오히려 율법의 완성(마 22:37–40, 롬 13:10) 

    오늘의 적용

    •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기

    • 말이 아닌 행동으로 섬기기

    • 교회 안팎에서 그리스도의 성품 드러내기

    새 계명은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계명입니다.


    새 계명은 기독교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핵심 가르침을 말해요.

    • 내용 :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 의미 : 이전의 율법을 폐기한다기보다, **예수님의 사랑(희생·용서·섬김)**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방식의 사랑을 강조한 거예요.

    • 핵심 포인트 :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 조건 없는 사랑

      • 그 사랑이 제자됨의 표지가 됨

    성경에서는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이렇게 전해져요(짧게 인용):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원하면 이 계명이 일상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학교, 친구 관계 등)도 예로 설명해 줄게요.


    옛 계명(옛 계명, Old Commandment)은 성경에서 주로 이미 주어졌고 처음부터 알고 있던 하나님의 계명
    특히 율법과 사랑의 계명을 가리킵니다.

    1. 성경적 근거

    • 요한일서 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을 쓰노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라”

    2. 의미 정리

    • 처음부터 주어진 계명
      → 하나님의 뜻은 새롭게 바뀐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선포됨

    • 율법의 핵심
      →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신 6:5, 레 19:18)

    • 말씀으로 이미 들은 계명
      → 새로 창안된 규칙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다시 확인된 진리

    3. 옛 계명과 사랑

    옛 계명의 핵심도 결국 사랑입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라

    • 이웃을 사랑하라

    즉, 내용은 옛 것이지만, 그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해짐

    4. 새 계명과의 관계

    구분              옛 계명 새 계명
    시점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용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
    기준            율법             십자가의 사랑
    성격            명령            본을 따른 삶

    5. 핵심 요약

    • 옛 계명 : 처음부터 있던 하나님의 사랑의 명령

    • 새 계명 :  그 사랑이 예수 안에서 구체적 삶으로 드러난 것

    요약

    • 새 계명 : 예수님처럼 사랑하라

    • 사랑의 기준 :  십자가

    • 사랑의 목적 :  하나님의 영광과 공동체의 증거

    새 계명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핵심적인 사랑의 계명입니다. 

    성경 근거(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왜 ‘새’ 계명인가?

    구약에도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레 19:18)는 계명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계명은 기준과 깊이에서 새롭습니다.

    구분              기존 계명 새 계명
    사랑의 기준              나 자신        예수님의 사랑
    사랑의 범위           이웃 중심       제자 공동체 → 모든 사람
    사랑의 방식         윤리적 요구       십자가적 자기희생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가 새로움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특징

    • 자기희생적 사랑 :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내어주심

    • 무조건적 사랑 : 배신할 제자들까지 사랑

    • 끝까지 사랑 :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신앙적 의미

    1. 제자의 표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5)

    2. 교회의 본질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3. 성령 안에서 가능한 계명
      인간의 노력만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사랑입니다(롬 5:5). 

    요약

    • 새 계명 :  예수님처럼 사랑하라

    • 사랑의 기준 : 십자가

    • 사랑의 목적 : 하나님의 영광과 공동체의 증거

    요한서신에서 본 ‘새 계명’의 확장

    “옛 계명이며 새 계명” (요일 2:7–8)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서 참된 것이라”

    해석 포인트

    • 옛 계명 :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핵심(예수님의 가르침)

    • 새 계명 :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됨

      • 성령 안에서 현재적으로 살아 움직임

    👉 새로움은 내용이 아니라 실체와 능력에 있음 

    빛과 어둠의 기준 :  형제 사랑 (요일 2:9–11)

    상태 기준
    빛 가운데 있음             형제를 사랑함
    어둠 가운데 있음            형제를 미워함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요한의 논리

    • 신앙 고백 ≠ 참 신앙의 증거

    • 사랑의 실천 = 빛 가운데 거함의 증거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를 드러냄 

    계명의 요약과 완성 (요일 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요한 신학의 핵심 구조
    믿음 → 사랑 → 순종

    • 예수를 믿는 믿음은 반드시

    • 형제 사랑이라는 열매로 나타남 

    설교용 정리 (3대지 구조)

    제목 예시

    「새 계명, 빛 가운데 사는 삶의 기준」

    대지 1. 새 계명은 ‘옛 계명’이다 (요일 2:7)

    • 새 계명은 갑작스러운 윤리가 아니다

    •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본질

    📌 적용

    우리는 더 새로운 가르침을 찾기보다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대지 2. 새 계명은 ‘지금 살아 있는 계명’이다 (요일 2:8)

    • 예수 안에서 이미 성취됨

    • 성령 안에서 지금도 역사함

    📌 적용

    사랑은 이상이 아니라
    현재의 순종이다 

    대지 3. 새 계명은 신앙의 ‘판별 기준’이다 (요일 2:9–11, 3:23)

    • 빛과 어둠은 말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분됨

    • 믿음 없는 사랑은 인본주의

    • 사랑 없는 믿음은 거짓 신앙

    📌 적용

    “나는 옳은가?”보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가?”를 점검하라 

    Ⅲ. 묵상용 요약 (개인·소그룹)

    묵상 질문

    1. 나는 형제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있지는 않은가?

    2. 나의 신앙은 말에 머무는가, 삶으로 증명되는가?

    3.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방식이 내 사랑의 기준이 되고 있는가? 

    묵상 기도문

    주님,
    말로만 빛에 있다 하지 않게 하시고
    사랑으로 빛 가운데 거하게 하소서.
    예수님이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오늘 한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아멘. 

    한 줄 묵상

    “새 계명은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사랑하며 살라는 부르심이다.”


    새 계명, 말이 아니라 삶이다(요한일서 2:7–11, 3:23)

    Ⅰ. 들어가는 말 (도입)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말은 신앙적인데 마음은 차가워질 때가 있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나는 정통입니다.”
    “나는 교회에 충성합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은 식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빛 가운데 있느냐, 어둠 가운데 있느냐?”

    그 기준은 사랑입니다.

    Ⅱ. 본문 해설과 대지

    1️⃣ 새 계명은 옛 계명입니다 (요일 2:7)

    요한은 말합니다.

    “내가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옛 계명이라”

    사랑은 새로운 유행이 아닙니다.
    복음의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본질입니다.

    🔔 예화 ① –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부부
    결혼 초에는 작은 일에도 고맙다 말하던 부부가
    시간이 지나면 “그 정도는 당연하지”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당연해져 버린 것입니다.

    👉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새 진리를 찾기보다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2️⃣ 새 계명은 지금 살아 있는 계명입니다 (요일 2:8)

    요한은 이어서 말합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서 참된 것이라”

    사랑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현재의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후
    즉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 예화 ② – 말로만 하는 신앙
    어떤 성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성격이 원래 이래서 사랑 표현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성격 문제가 아니라
    순종의 문제입니다.

    👉 사랑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입니다.

    3️⃣ 새 계명은 신앙의 진짜 기준입니다 (요일 2:9–11, 3:23)

    요한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면서 빛 가운데 있다 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니라”

    요한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부족하다”
    “어둠에 있다”

    🔔 예화 ③ – 교회 안의 어둠
    교회 안에서
    말씀과 봉사는 열심인데
    서로 미워하고 정죄하며
    말로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느니라”

    👉 사랑 없는 신앙은
    방향을 잃은 신앙입니다. 

    Ⅲ. 결론과 적용

    요한일서 3:23은 이렇게 요약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

    ✔ 믿음 없는 사랑은 인본주의요
    ✔ 사랑 없는 믿음은 거짓입니다

    🔔 오늘의 적용

    1. 오늘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십시오

    2. 마음으로 미워했던 사람이 있다면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3. 말이 아니라 작은 행동 하나로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Ⅳ. 맺는 기도

    사랑의 주님,
    우리가 빛 가운데 있다 말하면서
    어둠의 마음을 품고 살았음을 용서하옵소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오늘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삶으로
    새 계명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 줄 결론

    “새 계명은 설교하는 말씀이 아니라, 살아내는 복음입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호세아 6:6의 동일한 구절을 두 번 인용하셨는데, 거기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자비 부족을 지적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복음서를 읽은 우리 대부분이 잘 알고 있는 계층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자비를 베풀지 않을 때 바리새인들과 같다는 점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자비(혹은 그 결여)라는 주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주님께서 호세아의 그 구절을 처음 사용하신 것은 당시 세리였으며 후에 사도이자 복음사가가 된 마태를 부르실 때였습니다. 마태 자신이 그 장면을 묘사합니다:
     
    마태복음 9:9-13
    “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이 잘못한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서 함께 식사하신 사람들은 참으로 죄인들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주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너희는 가서 내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한다는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서 함께 식사하신 사람들은 참으로 죄인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그들에게 가까이 가지 마라. 그들은 죄인들이다”라고 말할 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과 먹고 마시리라. 내가 그들을 찾아 회개하도록 부르러 왔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우리 자신도 죄인이 아닌 양 “죄인”들을 피한다면,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같습니다. 그들의 교만은 스스로를 “죄 없는 자”로 분류하게 했고, 그들이 “죄인”으로 여기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니, 이는 구약에서 인용된 구절로 신약에서 두 번 인용되었습니다(잠언 3:34, 칠십인역(참고: 칠십인역은 구약의 고대 그리스어 번역본으로, 신약에 나오는 구약 본문 약 2/3가 이 번역본에서 유래함)):
     
    야고보서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리고 베드로전서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겸손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리새인과 그들과 같은 자들이 부족했던 것이며, 우리 역시 종종 부족한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의 예는 누가복음 18:9-14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니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강탈하고 불의하며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겸손한 마음을 사랑하시고 교만한 자를 멸하시느니라. 그분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선한 일을 이루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보지 않으시느니라. 우리가 한 일이 겸손한 마음에서 나오지 않고, 타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면, 그것은 교만한 바리새인들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아무 가치도 없느니라. 주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나니”라고 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를 무시했고, 우리도 자비 없는 종교적 행위를 추구하며 종종 이를 외면한다.
        주님께서 호세아 6:6의 동일한 구절을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두 번째 장면은 마태복음 12장에 나온다.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12:1-8
    “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殿)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陳設餅)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해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죄 하지 않았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글자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율법의 글자에 따르면, 그들은 옳았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대로:
     
    고린도후서 3:5-6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났느니라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누군가 영 없이 글자만 고집하면, 그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바리새인이 됩니다. 예를 들어, 글자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자비가 요구할 때는, 예를 들어 안식일에 누군가 치유받기 위해서라면, 이 계명은 효력을 잃었습니다. 자비는  어떤 계명보다도 컸고 지금도 큽니다왜냐하면 가장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2:37-40이 말하듯: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요한일서 4:20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계명이지만,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만 진정으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다. 바리새인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온 율법과 선지자가 하나님과 서로를 사랑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안식일 계명이나 다른 모든 계명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보다 하위였다. 이것이 율법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문자만 알고 받아들였다. 그들은 율법의 문자에 대해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알고 있었다.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날짜와 계절과 양에 관한 요구사항까지. 그들은 율법의 문자적 규정에는 정통했으나, 율법의 정신, 즉 겸손과 자비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마태복음 23:23
    “화 있을진저 위선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내는 데는 첫째였으나, 정의와 자비와 신앙에는 막내였다. 그러나 정의와 자비와 신앙이 율법의 핵심이자 더 중하고 더 중요한 사항이다. 이 또한 겸손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들로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마음의 종류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십일조를 내거나 다른 어떤 희생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만일 우리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거부한다면 우리 역시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우리가 바리새인인지 하나님의 참된 종인지를 가르는 유일한 기준은 우리의 희생이 아니라 서로에게 베푸는 자비와 사랑입니다참된 하나님의 종들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풉니다반면 바리새인들은 자비 없이 희생만 합니다. 바리새인과 그와 같은 자들에게는 종종 외적인 것, 특히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행동이 중요합니다. 이는 그들의 교만과 이기심을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1-7, 13-14이 말하듯이:
     
    “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없음)”
     
        바리새적 행위의 주요 특징은 위선이다. 바리새인은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지만 마음은 불경건하다. 겸손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교만으로 가득 차 있다. 남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도 자신은 그 짐을 만지려 하지 않는다. 길고 끝없는 기도를 드리면서도 동시에 과부의 집을 삼켜 버린다. 겉으로는 경건하고 신실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자비심 하나 없이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는 정도만큼 우리도 바리새인이다. 그리고 이것이 거짓 종교가 종종 행하는 바이다: 바리새적 즉 위선적이고, 부담스럽고, 무자비하며, 교만한 것이다. 반면 참된 종교는 야고보서 1:27이 정의하는 바와 같다:
     
    야고보서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아 주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이것이니라
     
        하나님 앞에 참되고 흠 없는 경건은 완벽한 교리나 수많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오직 자비와 사랑의 경건입니다.
        바리새인들로 돌아가 그들의 행동과 그들을 흉내 내는 자들을 예수님의 행동과 비교해 보라. 그들은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며 그들을 고치려 하셨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모든 일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면서도 자신을 숨기셨거나 치유받은 자들에게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가르치신 대로 사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6:1-6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가 가르치신 바가 이러하니 그가 행하신 바도 이러하니라 그러므로 그가 기적을 행하신 후에 숨어 계셨느니라
     
        결론하자면: 정의, 자비, 믿음, 그리고 서로 사랑함이 중요합니다. 희생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 무엇이라도 바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종교적 축제나 규칙은 우리가 자비를 베풀지 않을 때 그분께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무자비한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의 사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이 불의한 세상에서 우리는 정의를 행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없는 시대에 그분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길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신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마태복음 5:13-16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추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여 그들이 너희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자비와 정의와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들 덕분에 이 세상에는 여전히 빛, 우리의 빛이 있습니다. 이 빛을 지키고, 주님의 빛이 우리를 통해 이 세상에 비추어 우리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도록 합시다. 죽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자비와 정의와 믿음으로 행하며, 우리 주님께서 하신 그대로 행합시다. 미가 6:8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듯이: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보혜사, 대언자(파라클레토스.  )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Storng number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일 2:1.  3. 요 14:16,26
    Pronunciation [ paraklētŏs ]  
    Etymology  / 3870에서 유래
    •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  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2:1.
      •  b. [성령을 가리켜서] 요14:16,26, 15:26, 16:7.
    •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 26, 16:7), 대언자(요일 2:1).


    중보자(메시테스.  mĕsitēs ) μεσίτης, ου, ὁ Storng number 3316

    1. 중재자.  2. 갈 3:19, 20.  3. 딤전 2:5
    Pronunciation [ mĕsitēs ]  
    Etymology  /  3319에서 유래
    • 1. 중재자, 갈 3:19,20, 딤전 2:5, 히 8:6, 9:15, 12:24.
    • 관련 성경  / 중보자(갈 3:19, 딤전 2:5, 히 12:24).






     대언자 · 중보자 · 보혜사 비교 표

    구분 대언자 (Advocate) 중보자 (Mediator) 보혜사 (Paraclete)
    기본 의미 대신 말해 주는 자, 변호자     두 관계 사이를 잇는 자    위로자, 돕는 자, 변호자
    성경 원어 παρά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    μεσίτης (메시테스)     παρά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
    주요 대상 하나님 앞에서 성도        하나님 ↔ 인간    성도
    사역의 방향    위로 (하늘을 향함)     양방향 (하나님과 인간 사이)    내적 (성도 안에서)
    주된 역할 죄인을 변호함          관계를 화목케 함    진리로 인도하고 위로함
    대표 성경 요일 2:1           딤전 2:5      요 14:16
    담당 위격 성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
    사역 근거 십자가의 의        속죄와 언약     예수의 말씀
    지속성 영원함     단회적·완전함     성도 안에 항상 거하심
    신자의 경험 담대함, 용서의 확신      하나님과의 화평      위로, 인도, 능력

     핵심 차이 요약

    • 대언자 : 법정적 이미지
      → 하나님 앞에서 “이 사람은 내 피로 의롭다”고 말씀하심

    • 중보자 : 관계적·언약적 이미지
      → 끊어진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잇는 유일한 다리

    • 보혜사 : 목회적·내적 이미지
      → 성도 안에 거하시며 가르치고 위로하심 

    한 문장 통합 정리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우리의 대언자이자 중보자이시며, 성령은 땅에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이시다.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하며 변호하시는 분이라는 신앙 고백적 표현.

    1. 대언자(代言者)의 의미

    • 대언자는 말 그대로 대신 말해 주는 자, 변호자, 중보자를 뜻합니다.

    • 헬라어 성경에서는 주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로 표현되며,
      변호인, 위로자, 중재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2. 성경적 근거

    • 요한일서 2:1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로마서 8:34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 히브리서 7:25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3. 예수 그리스도는 왜 대언자이신가

    1. 완전한 의로우심
      → 죄 없으신 분만이 죄인을 변호할 수 있음

    2. 속죄의 근거를 가지심
      →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 값을 이미 지불하심

    3. 하나님 우편에서 사역하심
      → 지금도 살아 계셔서 성도를 위해 중보하심

    4. 구약의 중보와의 차이

    • 구약의 제사장: 반복적 제사, 불완전한 중보

    • 예수 그리스도:
      단번의 제사 + 영원한 대언자
      (히브리서 9:12)

    5. 신앙적 의미

    • 우리는 정죄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음

    • 실패와 연약함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게 함

    •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언에 근거함

    •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교사가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시며 간구하시는 영원한 대언자이십니다.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Storng number 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일 2:1.  3. 요 14:16, 26
    Pronunciation [ paraklētŏs ] 
    Etymology  /  3870에서 유래
    •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  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2:1.
      •  b. [성령을 가리켜서] 요14:16,26, 15:26, 16:7.
    •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 26, 16:7), 대언자(요일 2:1).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

    죄 지은 인류를 위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변호하고 중재하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예수님의 중요한 역할을 의미하며, 특히 요한일서 2:1절에서 강조되듯, 우리가 죄를 범할 때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고 화목하게 하시는 구원자이자 중보자로서의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주요 의미 : 

    중보자(Advocate / Paraclete) :

     '파라클레토스(Paracletos)'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했으며, '위로자', '돕는 자', '변호사'를 뜻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변호하고 긍휼을 구해주시는 분입니다.   

    화목제물(Propitiation) :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 죄 사함의 길 :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으며, 죄에 빠지지 않고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 구원자 : '예수'는 '구원자',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으로, 이 둘이 합쳐져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즉 '대언자'로서의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성경적 근거 :
    • 요한일서 2:1 (요1:2) :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예수님의 가르침 : 요한복음 14:16, 26 등에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 보혜사 성령도 넓은 의미에서 '대언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결론적으로,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넘어지고 죄를 지을 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며,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영원한 중보자이십니다.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
    는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고 죄를 사하게 하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이는 주로 요한일서 2장 1-2절에 근거하며, '파라클레토스'(위로자, 변호자)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합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의 변호자이자 화목제물이 되어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주요 의미
    • 중보자 및 변호자: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화목제물이 되시는 분입니다.
    • 죄 사함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 성령과의 관계: '파라클레토스'(대언자/보혜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성령을 모두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성경적 근거
    • 요한일서 2장 1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
    •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오셨으며(요한일서 1:7),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십니다. 

    요약
    예수 그리스도가 대언자라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우리를 용서받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변호자'이자 '중보자'라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입니다


    보혜사(保惠師)는
    주로 기독교에서 성령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그리스어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를 음역하여 번역한 단어이며 '곁에 부름을 받아 돕는 자', 즉 변호사, 조력자, 위로자, 상담자라는 뜻을 가집니다. 예수님이 승천 후 아버지께 구하여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은 신자들 곁에 머물며 죄를 깨닫게 하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돕는 역할을 하십니다. 
    주요 의미 및 역할
    • 어원: '파라클레토스'는 '곁으로 부름 받은 자'를 의미하며, 고대 법정에서 변호사를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했습니다.
    • 예수님의 약속: 예수님은 자신과 동일한 성질을 가진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6장).
    • 성령님의 사역:
      • 죄와 의에 대해 세상과 사람을 책망하고 깨우치심 (요한복음 16:8-11).
      •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가르치심 (요한복음 14:26).
      • 연약함을 도우시고 친히 간구하심 (로마서 8:26).
      • 사단의 세력에 맞설 힘과 용기를 주심.
    • 번역어 논란: 한자어 '보혜사'(保護, 惠, 師)는 '보호하고 은혜를 베푸는 스승'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원어적 의미와 성경적 맥락을 고려하면 '조력자' 또는 '대언자'의 역할에 더 중점을 둡니다. 

    요약
    보혜사는 성령 하나님을 지칭하며, 예수님을 대신하여 신자들의 곁에서 진리를 가르치고, 위로하며,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돕는 인격적인 조력자입니다


    1. 보혜사의 뜻

    • 헬라어 :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 의미 :

      • 곁에서 돕는 자 
        위로자
        변호자
        중보자
        돕는 분(Helper)

    👉 법정 용어로는 변호인, 삶의 현장에서는 동행하는 돕는 분이라는 뜻을 함께 가집니다. 

    2. 성경적 근거

    예수님의 약속

    •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

    • 요한복음 16:7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3. “또 다른 보혜사”의 의미

    • “또 다른” = 알로스(ἄλλος)
      본질과 성격이 동일한 또 다른 분

    •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첫 번째 보혜사

    • 성령은 예수님과 같은 본질의 또 다른 보혜사

    👉 그래서

    • 예수님: 하늘에서 대언자

    • 성령님: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 

    4. 보혜사의 사역

    1. 가르치심 – 진리로 인도 (요 14:26)

    2. 생각나게 하심 – 말씀을 기억나게 함

    3. 위로하심 – 환난 중에 동행

    4. 책망하심 – 죄·의·심판에 대해 깨닫게 함 (요 16:8)

    5. 증언하심 –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6. 능력 주심 – 증인의 삶을 살게 함 (행 1:8) 

    5.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 성령(보혜사)
    하늘에서 중보 우리 안에 내주
    아버지 앞에서 대언 성도를 도우며 인도
    단번의 속죄 그 구원을 적용 

    한 문장 요약

    보혜사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지금도 성도와 함께 하시며, 진리로 인도하고 위로하며 변호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보혜사(Parakletos)
    는 '곁에 부름받은 자'라는 뜻으로 위로자, 조력자, 변호사, 대언자 등을 의미하며, 성경에서는 주로 성령님을 가리키고, 대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하는 자'로 예언자를 뜻하지만, 넓게는 성령의 역할을 통해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보혜사의 역할 중 하나(대언)를 포함합니다. 즉, 보혜사는 성령의 다양한 사역(위로, 인도, 보호, 대언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며, 대언자는 그 사역 중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에 초점을 둔 명칭입니다. 

    보혜사 (Parakletos)
    • 그리스어 의미: 곁에 불러 도움을 주는 자 (변호사, 조력자, 위로자, 상담자, 친구).
    • 성경적 의미: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로, 성령님을 지칭하며 신자들과 함께 거하며 인도하고 위로하고 가르치는 분.
    • 한자 의미: '보호할 보(保)', '은혜 혜(惠)'로 '은혜로 보호하고 돕는 분'이라는 의미도 포함. 
    대언자 (Prophetes, 예언자)
    • 의미: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맡아 대신 전하는 자.
    • 역할: 미래를 말하기도 하지만, 주로 현재와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역할. 
    • 포괄성: 보혜사는 성령님의 모든 사역을 담는 더 넓은 개념이고, 대언자는 보혜사 성령님이 하시는 여러 일 중 '말씀을 선포하는' 특정 사역에 집중된 명칭.
    • 일치: 보혜사 성령님이 바로 '대언자'의 역할을 수행하시므로, 성령님을 대언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 결론: 성령님은 보혜사이시며, 그 보혜사로서 '대언자'의 사명을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보혜사와 대언자의 차이

    1. 공통점

    • 둘 다 헬라어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에서 나온 말

    • 뜻: 변호자, 중보자, 돕는 자

    •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곁에 서서” 일하신다는 의미 

    2. 차이점 핵심 정리

    구분 대언자 보혜사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 성령
    어디서 일하시는가 하나님 아버지 앞(하늘) 성도 안과 곁(땅)
    주된 사역 죄에 대한 변호와 중보 삶 속에서의 도움과 인도
    근거 십자가의 피와 의 내주하시는 성령의 임재
    초점 구원의 확보 구원의 적용

    3. 성경 근거

    • 대언자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한일서 2:1)

    • 보혜사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한복음 14:16)

    4. 한 문장 요약

    대언자는 하늘에서 우리를 변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보혜사는 땅에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5. 신앙적 적용

    • 실패했을 때 → 대언자는 “이미 용서되었다”고 말씀하시고

    • 낙심했을 때 → 보혜사는 “내가 너와 함께한다”고 붙드십니다.




    1월 3일(토) 요한일서 2: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My dear children, I write this to you so that you will not sin. But if anybody does sin, we have one who speaks to the Father in our defense--Jesus Christ, the Righteous One.

    대언자(3875) 파라클레토스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Storng number 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일 2:1.
    3. 요 14:16, 26  
    Pronunciation [ paraklētŏs ]

    Etymology  /  3870에서 유래
    •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  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2:1.
      •  b. [성령을 가리켜서] 요14:16,26, 15:26, 16:7.
    •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 26, 16:7), 대언자(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 '나의 자녀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니아 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을 수신자들을 향한 요한의 자비롭고 따뜻한 사랑을 암시한다((Stott, Smalley). 
    한편 '이것을'이 가리키는 것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1:6-10을 가리킨다. 
    (2) 1장 전체를 가리킨다. 
    (3)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 
    가능한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영원한 생명을 보고 듣고 만지며 계속적으로 사귐이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치 말아야한다. 왜냐하면 죄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과의 사귐을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당시 영지주의자 들처럼 사귐이나 사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게 하기 때문이다((Barker). 
    요한은 본문에서 본서 전체의 기록 목적이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유지하며 단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임을 제시한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 '
    죄를 범하면'이 헬라어 '하마르테's 상반절의 '하마르테테'('죄를 범치')와 마찬가지로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는 범죄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된 행위들'을 나타낸다. 
    한편 '대언자'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위로자 또는 옹호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요 14:16, 26;15:26;16:7)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중보하심을 시사한다. 
    이와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과 본절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행 16:7; 롬 8:9; 빌 1:19), 
    요 14:16에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되어 있어 예수께서 '파라클레토스'이심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중보하시는 분이시며 '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 존전에서 그리스도인의 죄를 중보하신다(Stott).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예순 크리스톤 디카이온'(*)은 문자적으로 '의로운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디카이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존전에서 주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셔서 흠이 없고 깨끗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다. 
    예수의 이러한 의로움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게 되며 그것을 근거로 하나가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롭지 못한 모습을 깨끗하게 하신다(롬 3:26, Smalley).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부정하던 예수의 인간되심을 강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이심을 나타내어 죄인들을 중보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드러낸다.



    빛의 성질 

    빛은 직진, 반사, 굴절, 분산의 기본 성질을 가지며,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모두 갖는 이중성을 보입니다. 
    빛이 똑바로 나아가는 직진
    표면에서 튕기는 반사
    다른 매질에서 꺾이는 굴절
    파장에 따라 색이 나뉘는 분산이 대표적이며, 
    이는 빛이 파동(전자기파)이면서 동시에 입자(광자)의 성질을 모두 갖기 때문입니다. 
    빛의 기본 성질을 설명하는 이 영상은 빛의 직진, 반사, 굴절, 분산 현상에 대해 설명합니다:

    주요 빛의 성질
    • 직진(Rectilinear Propagation) : 
      빛은 특별한 장애물이 없으면 항상 곧게 나아가는 성질로, 바늘구멍 사진기 원리가 이에 해당합니다.

    • 반사(Reflection) 
      빛이 물체의 표면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현상으로, 거울에 상이 맺히는 이유입니다. 입자처럼 행동하는 빛의 성질을 잘 보여줍니다.

    • 굴절(Refraction) 
      빛이 서로 다른 매질(공기, 물 등)의 경계면을 통과할 때 진행 방향이 꺾이는 현상으로, 물속의 물체가 실제보다 떠 보이는 이유입니다.

    • 분산(Dispersion) 
      굴절 시 빛의 파장(색깔)에 따라 꺾이는 정도가 달라져 빛이 여러 색으로 나뉘는 현상으로, 프리즘을 통과하며 무지개가 생기는 원리입니다.

    • 회절(Diffraction) : 파동인 빛이 장애물의 모서리나 좁은 틈을 지날 때 휘어 퍼져나가는 현상입니다.

    • 간섭(Interference) & 회절(Diffraction) 
      파동의 성질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빛이 파동처럼 중첩되거나 휘어지는 현상입니다.

    • 산란(Scattering) 
      빛이 불규칙한 입자나 표면에 부딪혀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는 현상으로,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이유(레일리 산란)입니다. 
    빛의 이중성 (입자성 & 파동성)
    • 파동성 : 
      맥스웰에 의해 빛이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 수직으로 진동하며 진행하는 '전자기파'임이 밝혀졌습니다. 굴절, 간섭, 회절 현상은 파동으로 설명됩니다.

    • 입자성 
      아인슈타인은 빛이 '광자(photon)'라는 에너지 덩어리(입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설명했습니다. 광전효과와 같은 현상은 빛의 입자성을 보여주며, 반사 현상도 입자처럼 튕겨 나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빛의 성질은 물리학에서 매우 핵심적인 주제이며,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파동성과 입자성 (이중성)

    • 빛은 파동처럼 간섭·회절 현상을 보이면서도

    • 동시에 **입자(광자)**처럼 에너지의 최소 단위로 작용합니다.
      → 이를 파동-입자 이중성이라 합니다. 

    2. 직진성

    • 균일한 매질에서는 빛이 직선으로 진행합니다.

    •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3. 반사

    • 빛이 물체 표면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현상입니다.

    • 거울에서 “입사각 = 반사각”의 법칙이 성립합니다. 

    4. 굴절

    • 빛이 서로 다른 매질(공기 → 물 등)을 통과할 때 속도 변화로 방향이 꺾이는 현상입니다.

    • 렌즈, 안경, 현미경의 원리입니다. 

    5. 분산

    • 빛은 파장에 따라 굴절 정도가 달라져 여러 색으로 나뉩니다.

    • 프리즘에서 무지개색이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6. 간섭과 회절

    • 간섭: 두 빛이 겹칠 때 밝아지거나 어두워지는 현상

    • 회절: 좁은 틈이나 가장자리를 지날 때 빛이 퍼지는 현상
      → 빛의 파동성을 잘 보여줍니다. 

    7. 편광

    • 빛의 진동 방향이 한쪽으로 정렬된 상태입니다.

    • 선글라스, LCD 화면에 활용됩니다. 

    8. 속도

    • 진공에서 빛의 속도는 약 초속 30만 km로, 자연계에서 가장 빠릅니다.  

    9. 에너지와 파장

    • 파장이 짧을수록 에너지가 크고(자외선, X선),

    • 파장이 길수록 에너지가 작습니다(적외선, 라디오파).


    빛의 3대 성질 

    1. 굴절 : 렌즈, 간이 사진기
    2. 반사 : 거울
    3. 직진 : 그림자, 일식, 월식, 바늘구멍 사진기, 엑스선

    -물체를 본다=빛을 감지한다=광원(스스로 빛을 내는 물체)의 빛이 직접 눈에 들어오거나, 광원에서 나온 빛이 물체에 부딪혀 반사되어 눈에 들어옴.(망막에는 뒤집힌 형태로 상 맺히지만, 뇌는 똑바로 인식)

     

    -달은 광원 X > 달이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태양빛을 반사하기 때문임.

    -달에서 밝게 보이는 부분을 육지(대륙, 달의 바다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이라 부르는데, 이곳에는 운석구덩이가 많이 분포되어 있음.(달이 공기가 없어서 풍화작용, 기상작용 없고 운석 구덩이가 그대로 존재)
    -수성도 대기 없어서 바람 안 불고, 온도차 크며 운석구덩이 있음.
    -금성은 이산화탄소 대기로 뒤덮여서 더움.
    -지구는 공기가 있어서 하늘이 파랗게 보임.(파장이 짧은 파란빛은 멀리가지 못하지만 많이 산란됨.)

    -태양과 물체 사이의 거리가 매우 멀기 때문에 물체의 위치와 상관없이 그림자의 크기는 거의 변하지 않음.
    -일식(태양-달-지구)은 달그림자가 생기는 좁은 범위에 있는 지역에서만 관찰되지만 월식(태양-지구-달)달이 뜨는 모든 지역에서 관찰할 수 있음.

     

    -속력이 느린 매질에서는 굴절각이 더 작음.(입사각, 반사각, 굴절각은 각각 수직선(법선)을 기준으로 함)
    -빛을 통과시키면 투명하고, 빛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흡수 또는 반사하면 불투명함.(불투명할 때 색깔은 반사된 빛의 색임)
    -하얀색은 모든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빛이 모두 섞여 하얀색으로 보이는 것임.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빛의 창조가 갖는 의미와 상징

    1. 서론

    빛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며,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첫 단계로 등장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는 단순히 물리적 빛의 창조를 넘어, 하나님의 본성과 구속사적 의미를 깊이 담고 있다. 

    빛의 창조가 성경 전체에서 갖는 의미와 상징을 성경신학적으로 탐구하고, 이를 통해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과 실천적 함의를 논하고자 한다.

    2. 빛의 창조 : 성경적 배경과 맥락

    1) 창조 이야기에서 빛의 첫 번째 위치

    창세기 1장에서 빛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첫 번째 피조물로 묘사된다. 
    이는 빛이 혼돈과 흑암(창 1:2)을 물리치고 창조 질서를 확립하는 시작임을 보여준다. 
    빛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기초적 요소로 자리 잡는다.

    2) 빛과 어둠의 구분

    창세기 1:4는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과 함께 빛과 어둠을 구분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기록한다. 
    이는 질서의 하나님께서 혼돈을 물리치고 조화와 구조를 부여하시는 창조적 능력을 드러낸다. 
    빛과 어둠의 구분은 성경 전체에서 선과 악, 구속과 심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중요한 주제로 이어진다.

    3. 빛의 신학적 의미

    1) 하나님의 본성의 표현

    요한일서 1:5은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선언한다. 
    이는 빛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순결함, 그리고 진리와 생명의 본질을 나타냄을 의미한다. 
    빛의 창조는 단순히 물리적 현상의 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의 창조 세계에 대한 주권적 통치를 드러낸다.

    2) 생명과 소망의 상징

    빛은 생명과 소망의 상징으로 성경 곳곳에서 나타난다. 
    요한복음 1:4-5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기록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구원의 빛을 강조한다. 
    빛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서 생명을 제공하고, 죄로 인해 어둠에 갇힌 인간에게 소망을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4. 성경 전체에서 빛의 상징적 의미

    1)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빛
    시편 119:105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하며, 빛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함을 보여준다. 말씀은 성도에게 올바른 길을 비추며,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를 제공한다.

    2) 구속사적 빛 :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서 빛으로 묘사된다. 
    요한복음 8:12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시며, 죄와 죽음의 어둠 속에 있는 인류에게 구원의 빛을 제공하신다. 이는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성취를 연결하며, 구속사의 중심에 있는 예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사 9:2, 마 4:16).

    3)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상징
    빛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출애굽기 13:21에서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다. 이 빛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분의 거룩한 임재를 상징한다. 또한, 요한계시록 21:23은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이 그곳의 빛이 된다고 묘사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와 구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5. 빛과 인간의 역할

    1) 성도의 빛된 삶
    예수님은 마태복음 5:14-16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며, 성도들이 어둠 속에서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책임을 부여하신다. 이는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세상에 드러내고, 선행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부르심을 의미한다.

    2) 복음 전파의 빛
    사도행전 13:47은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세웠나니”라는 말씀을 통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을 예언한다. 빛은 복음의 전달과 구원의 확장을 상징하며, 성도들이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상기시킨다.

    6. 빛과 어둠의 대조: 종말론적 의미

    1) 심판과 구원의 상징
    빛과 어둠은 종말론적 문맥에서도 중요한 대조를 이룬다. 데살로니가전서 5:5은 성도들을 “빛의 자녀”로 부르며, 심판 날에 구원받을 자들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반면, 어둠은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으로 나타난다(마 8:12). 이는 최후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될 때 빛의 자녀들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2)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빛
    요한계시록 22:5에서 “다시는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빛이 종말론적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을 예언한다. 이는 창조에서 시작된 빛의 의미가 종말에 완성됨을 나타내며,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를 상징한다.

    7. 결론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빛의 창조는 하나님의 본성과 구속사의 핵심을 드러내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다. 
    빛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생명과 소망,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구속의 상징으로 성경 전반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성도의 삶과 복음 전파에 있어서 빛의 역할은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실천적 도전을 제공한다. 

    종말론적 관점에서 빛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 그리고 새 창조의 완성을 상징하며, 성도들에게 영원한 소망을 준다. 
    이러한 성경적 통찰은 빛의 창조가 단순한 우주의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적 계획의 서막임을 분명히 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이 짧은 문장이 성경 전체의 핵심이자 시작이야. ‘태초’는 시간의 시작이고, ‘천지’는 공간과 모든 존재를 뜻해.
    즉, 시간과 공간, 우주 전체가 이 순간에 하나님의 의지로 시작된 거야. 

    ✨ 6일 동안의 창조 과정 요약

    하나님은 총 6일 동안 창조 활동을 하시고, 7일째는 쉬셨어

    ☀️ 제1일 – 빛의 창조

    “빛이 있으라!” - 오르 / 동사형 - 드러내다 

    • 혼돈과 흑암뿐이었던 세상에 빛이 생김
    • 빛과 어둠이 구분됨 → 낮과 밤의 개념 등장
    • 아직 해, 달, 별은 없음! 이건 ‘빛’ 그 자체야 (하나님의 임재나 질서의 상징)

    📝 포인트: 빛은 모든 창조의 시작, 어둠 속에서 질서를 만드는 첫 걸음!

    אוֹר Storng number 216

    1. 빛.  2. 아침빛.  3. 태양빛 혹은 태양 자체  
    Pronunciation [ ’ôwr ]  
    Etymology  / 215에서 유래
     Old Testament / 122회 사용 

    🌊 제2일 – 하늘의 창조

    • 물을 나눔: 위의 물(구름, 하늘)과 아래의 물(바다, 지면의 물)로
    • 이 사이를 궁창(하늘)이라 부르심

    📝 포인트: 공간 창조! 혼돈의 물에서 하늘을 분리해 내셨다는 점이 중요. 

    🌱 제3일 – 땅과 식물의 창조

    • 바닷물을 한곳에 모으고, 육지와 바다 구분
    •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 등장

    📝 포인트: 땅이 처음 등장하고, 식물부터 자라기 시작해! 생명체의 시작! 

    🌞 제4일 – 해, 달, 별의 창조 / 광명체 - 마오르

    • 낮을 주관할 해, 밤을 주관할 달, 계절과 시간 측정할 별 창조
    • “징조와 사시와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 포인트: 빛 자체(1일)와 광명체(4일)는 다름!
    시계와 달력이 생긴 날이기도 해.


    מָאֹר Storng number 3974

    1. 빛.  2. 등잔  
    Pronunciation  [ mâʼôwr ]  
    Etymology  / 복수אוֹר,מְאֹרֹות,מְאֹרִים에서 유래
    Old Testament  / 19회 사용 

    🐟 제5일 – 물고기와 새 창조

    • 바다엔 물고기, 하늘엔 가 가득
    •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이 처음 등장

    📝 포인트: 바다와 하늘 생물이 드디어 생겨남. 축복의 첫 언급!  

    🐘 제6일 – 동물과 사람 창조

    • 육지 동물 창조 (짐승, 기는 것들 등)
    • 가장 마지막에 사람 창조 (하나님의 형상대로!)
    •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라”
    • 사람에게 식물 먹을 것을 주심

    📝 포인트: 인간은 창조의 하이라이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 생각하고, 사랑하고, 창조하는 능력의 상징  

    🛏️ 제7일 – 안식

    •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쉬심
    •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 포인트: 안식일(Sabbath)의 기원이 이 날!
    우리 삶에도 쉼과 균형이 중요하다는 걸 알려줘.  

    📌 정리 요약표

     일     창조 내용                              포인트 요약

    1일       빛           질서의 시작, 낮과 밤 구분
    2일    궁창 (하늘)              위와 아래 공간 분리
    3일  육지, 바다,  식물           생명이 뿌리내릴 공간
    4일   해, 달, 별              계절과 시간의 질서
    5일  물고기, 새             생물의 시작과 축복
    6일  육지 동물, 인간     창조의 완성,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7일     안식            쉼과 거룩함, 균형의 시작 

     창세기 천지창조의 메시지

    • 혼돈 → 질서 : 하나님의 창조는 무질서에서 질서로 향함
    • 빈 곳 → 채움 : 공간을 만든 후, 그 공간에 생명을 채움
    • 축복과 안식 : 창조된 세계는 축복받았고, 쉬는 것도 중요하다는 가르침


    1월 2일(금) 요한일서 1:5-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This is the message we have heard from him and declare to you: God is light; in him there is no darkness at all.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의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으로, 1세기 말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적 가르침에 대응하고 참된 신앙의 본질을 가르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1장 5절은 이 서신의 핵심 선언 중 하나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라"로 번역된 '호 테오스 포스 에스틴'(ὁ θεὸς φῶς ἐστιν)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선언입니다. 
    이는 빛이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가 아니라, 그분의 본질 자체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빛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빛 그 자체이십니다.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로 번역된 '스코티아 엔 아우토 우크 에스틴 우데미아'(σκοτία ἐν αὐτῷ οὐκ ἔστιν οὐδεμία)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이중 부정('우크... 우데미아')의 사용으로, 이는 '전혀, 절대로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안에는 어둠의 흔적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의 핵심은 하나님의 본질이 완전한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떠한 형태의 어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 순수성, 진실성, 거룩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투명하시고, 그분 안에는 어떠한 속임이나 악도 없으십니다.

    이 말씀은 스가랴 14:7과 깊이 연결됩니다.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이 있으리로다."
     
    스가랴는 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고, 요한은 그 빛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심을 선언합니다. 
    두 구절 모두 빛이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본질을 나타내는 영적 실재임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종종 절대적 진리와 도덕적 명확성이 상대화되고 있습니다. 
    "당신의 진리"와 "나의 진리"라는 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지며, 빛과 어둠의 경계가 흐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1:5는 우리에게 하나님 안에는 이러한 모호함이 없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분은 완전한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으십니다.

    현대 기독교 작가이자 신학자인 팀 켈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것은 그분이 완전히 진실하시고, 완전히 선하시며, 완전히 아름다우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 안에는 숨겨진 의제나 어두운 비밀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위안은 엄청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 이상으로 다른 무언가를 숨기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켈러의 이 통찰은 요한일서 1:5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빛 되심은 우리가 그분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깊이 연결됩니다. 
    요한복음 1:4-5에서 요한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기록합니다. 
    그리스도는 빛이신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시며, 그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직접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4:6은 "어두운 데에서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빛을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현대적 예로, 미국의 기독교 작가이자 활동가인 코넬 웨스트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인종 차별과 사회적 불의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빛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발전시켰습니다. 웨스트는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진리는 단순한 신학적 주장이 아니라, 어둠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우리의 용기의 근원입니다. 그분 안에 어둠이 없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이 세상의 어둠에 맞서 담대히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삶과 활동은 요한일서 1:5의 진리를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한일서 1:5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완전한 빛이시며 그분 안에 어둠이 전혀 없다는 진리를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하고 있습니까? 
    이 진리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우리의 도덕적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 빛 되신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요?

    진리 안에서 걷기
    요한일서 1:6-7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라고 말합니다. 빛의 자녀는 진실하게 살며, 어둠의 행위를 피합니다.

    지속적인 정화 추구하기 :  
    요한일서 1:7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빛의 자녀는 지속적인 정화와 성화를 추구합니다.

    위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빛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확신에서 옵니다. 시편 139:11-12는 "내가 말하기를 어둠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는 어둠이 어둡지 아니하며 밤이 낮과 같이 밝으리니 어둠과 빛이 주에게는 같으니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어떤 어둠을 경험하든, 하나님의 빛은 여전히 비추고 있습니다.

    도전은 우리가 이 빛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7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그 빛 안에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성경(요한일서 1:5)의 선언으로,
    하나님은 거룩하고 완전하며 죄가 없으시고, 진리와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어둠(악, 죄)과 대비되며, 믿는 자는 그 빛을 따라 삶이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빛을 경험하고 따르게 됩니다. 
    주요 의미
    • 하나님은 빛이시라 (요한일서 1:5) | 새빛교회 홈페이지
      • 거룩함과 완전함: 하나님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며, 이는 죄나 악이 없으심을 의미합니다.
      • 진리와 계시: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를 보고, 자신을 알 수 있도록 영적인 빛을 주시는 분입니다.
      • 생명의 근원: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며, 그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요 8:12).
    • 믿는 자의 삶: 하나님이 빛이시기에, 믿는 자들은 빛 가운데 행해야 하며, 이는 진리를 이해하고 의롭게 사는 삶을 뜻합니다.
    • 죄와 어둠의 대조: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면서 죄를 지으면 거짓말하는 것이며, 빛이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요 1:5-7). 

    요약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은 하나님 본성의 거룩함과 완전함을 나타내며,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시는 진리의 근원이심을 선포하는 성경의 핵심 진리입니다.




    서론 │ Introduction

    하나님의 속성은 크게 ‘비소통 속성’(Incommunicable Attributes) 
    ‘소통 속성’(Communicable Attributes)으로 범주화할 수 있음. 
    각각의 속성은 성경 본문과 개혁신학의 정의를 통해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음. 

    1. 비소통 속성 │ Incommunicable Attributes

    1.1 자존성 (Aseity)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עַצְמוּת’가 직접적 사용은 없으나,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 אֶהְיֶה אֲשֶׁר אֶהְיֶה)’에서 자존성이 드러남 (출애굽기 3:14)임.
    • 성경 배경: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닌, 스스로 존재하심을 계시하심.
    • 개혁신학 정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CF) 제4문,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달리 지으신 이 없이 스스로 계시는 분임.”

    1.2 불변성 (Immutability)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לֹא תִמּוֹט’(창조 이전부터 변함 없음) 개념이 잠언 10:29 등에서 간접 언급됨.
    • 성경 배경: 말라기 3:6 “내가 여호와라 변하지 아니함”으로 확증됨.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본질·지식·의지·언약에서 영원히 변함없음(WCF 제2장).

    1.3 전지성 (Omniscience)

    • 원어 분석: 헬라어 ‘παντογνῶσις’(파롭시 사용 없으나 ‘πᾶν’(모든) + ‘γινώσκειν’(알다) 어근) 개념이 시편 139편에 나타남.
    • 성경 배경: 시편 139:1–4, “주의 알지 못하심이 없나이다.”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현재·과거·미래에 걸쳐 완전하고 즉각적으로 아심(WCF 제2장 해설).

    1.4 전능성 (Omnipotence)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שַׁדַּי’(전능하신 자, Shaddai) 어원은 ‘산의 하나님’ 또는 ‘전능하신 분’ 의미가 논의됨.
    • 성경 배경: 창세기 17:1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그의 뜻을 실행함에 있어 무한한 능력으로 제한받지 않음(WCF 제2장).

    1.5 편재성 (어디에나 계심, Omnipresence)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שָׁמַיִם וּשְׁאוֹל’(시편 139:8) 언어에서 모든 공간에 함께 하심을 표현함.
    • 성경 배경: 시편 139:7–10, “주의 영이 가는 곳마다…”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물리적·영적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만유에 충만하심(WCF 제2장 해설)

    1.6 영원성 (Eternity)

    • 성경 근거: 시편 90:2, 이사야 57:15
    • 하나님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시작과 끝이 없으심.

    2. 소통 속성 │ Communicable Attributes

    2.1 거룩 (Holiness)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קֹדֶשׁ’(קָדַשׁ, ‘구별하다’) 
    • 성경 배경: 이사야 6:3,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모든 죄와 더럽힘에서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구별됨(WCF 제2장).

    2.2 사랑 (Love)

    • 원어 분석: 헬라어 ‘ἀγάπη’(아가페)와 히브리어 ‘אַהֲבָה’(아하바)에서 ‘호의’와 ‘헌신’의 의미가 결합됨.
    • 성경 배경: 요한일서 4:8, “하나님은 사랑이심.”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본성상 사랑이시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선택된 자들을 사랑하심(WCF 제2장 해설).

    2.3 은혜 (Grace)

    • 원어 분석: 헬라어 ‘χάρις’(카리스), ‘은총·호의’ 의미.
    • 성경 배경: 에베소서 2:8–9,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음…”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그의 거룩과 정의에 반해 긍휼을 베푸시는 속성임(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호의).

    2.4 긍휼 (Mercy)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רַחֲמִים’(라하밈), ‘자애·연민’ 강조.
    • 성경 배경: 출애굽기 34:6,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죄인에 대한 동정과 자비를 간절히 나타내심.

    2.5 정의 (Justice)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צֶדֶק’(쎄덱), ‘올바름·공정함’.
    • 성경 배경: 시편 89:14, “정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임.”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과 법에 따라 모든 피조물에게 올바른 보응을 행하심.

    2.6 진리 (Truth)

    • 원어 분석: 헬라어 ‘ἀλήθεια’(알레테이아), ‘감추어짐에서 벗어난 실재’.
    • 성경 배경: 요한복음 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모든 지식과 말씀에 있어서 오류가 없으심.

    2.7 지혜 (Wisdom)

    • 원어 분석: 히브리어 ‘חָכְמָה’(호크마), ‘분별·조화’.
    • 성경 배경: 로마서 11:33,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얼마나 풍성한가!”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실현함에 있어 가장 알맞은 방식을 아심.

    2.8 주권 (Sovereignty)

    • 원어 분석: 특별한 단어 대신, ‘통치’(מַלְכוּת, 말쿠트) 개념으로 표현됨.
    • 성경 배경: 다니엘 4:35, “하늘의 군대를 다스리는 이가…”
    • 개혁신학 정의: 하나님은 모든 일의 주인이며, 그의 뜻이 절대적으로 이루어짐.

    Conclusion

    하나님의 속성은 비소통 속성과 소통 속성으로 나뉘며, 각각 성경이 계시하는 바와 개혁신학의 정의가 일치함을 알 수 있음. 히브리어·헬라어 원어 분석을 통해 깊이를 더했음.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며 신뢰할 수 있음.

    Introduction 

    The attributes of God can be broadly categorized into two groups: Incommunicable Attributes and Communicable Attributes. Each of these attributes is clearly revealed in Scripture and defined in depth by Reformed theology. In the following main section, we will organize these attributes systematically, providing their biblical backgrounds and etymological analysis in the original biblical languages (Hebrew and Greek).

    하나님의 속성은 크게 ‘비소통 속성’과 ‘소통 속성’으로 나눌 수 있음. 각각의 속성은 성경에서 명확히 계시되며, 개혁신학에서 깊이 있게 정의됨. 다음 본론에서는 이 속성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성경적 배경 및 히브리어·헬라어 원어 분석을 함께 제시함.


    1. Incommunicable Attributes │ 비소통 속성

    1.1 Aseity (자존성)

    • Etymology: While the Hebrew word עַצְמוּת (self-existence) does not appear directly in Scripture, the concept is clearly revealed in Exodus 3:14: “I AM WHO I AM” (אֶהְיֶה אֲשֶׁר אֶהְיֶה).
    • Biblical Background: God declares His self-existence and independence from all created things.
    • Reformed Theology: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Q4 – God is not created but exists of Himself eternally and independently.

    1.2 Immutability (불변성)

    • Etymology: Hebrew concept לֹא תִמּוֹט (not to be moved or changed) conveys the immutability of God's being, as in Proverbs 10:30.
    • Biblical Background: Malachi 3:6 – “For I the Lord do not change.”
    • Reformed Theology: God is eternally unchanging in His being, will, knowledge, and promises (WCF Chapter 2).

    1.3 Omniscience (전지성)

    • Etymology: Greek term παντογνῶσις (pan–all + gnosis–knowledge) reflects God's infinite knowledge, although not used directly in Scripture.
    • Biblical Background: Psalm 139:1–4 – “You have searched me, Lord, and you know me…”
    • Reformed Theology: God perfectly and eternally knows all things past, present, and future.

    1.4 Omnipotence (전능성)

    • Etymology: The Hebrew word שַׁדַּי (Shaddai) is commonly translated “Almighty,” possibly derived from “mountain” or “all-powerful.”
    • Biblical Background: Genesis 17:1 – “I am God Almighty…”
    • Reformed Theology: God is all-powerful and nothing can prevent Him from accomplishing His sovereign will.

    1.5 Omnipresence (편재성)

    • Etymology: Expressions like שָׁמַיִם וּשְׁאוֹל (heaven and Sheol) in Psalm 139:8 convey that God is present everywhere.
    • Biblical Background: Psalm 139:7–10 – “Where shall I flee from your presence?”
    • Reformed Theology: God is fully present in all places, transcending time and space.

    2. Communicable Attributes │ 소통 속성

    2.1 Holiness (거룩)

    • Etymology: Hebrew קֹדֶשׁ (qodesh) from root קָדַשׁ (qadash), meaning “to set apart.”
    • Biblical Background: Isaiah 6:3 – “Holy, holy, holy is the Lord of hosts…”
    • Reformed Theology: God is completely and absolutely separate from all sin and impurity.

    2.2 Love (사랑)

    • Etymology: Greek ἀγάπη (agapē) and Hebrew אַהֲבָה (ahavah) both reflect deep, sacrificial, covenantal love.
    • Biblical Background: 1 John 4:8 – “God is love.”
    • Reformed Theology: God is by nature love and pours out this love particularly on His elect.

    2.3 Grace (은혜)

    • Etymology: Greek χάρις (charis), meaning unmerited favor or kindness.
    • Biblical Background: Ephesians 2:8–9 –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
    • Reformed Theology: God shows unearned favor to undeserving sinners according to His sovereign will.

    2.4 Mercy (긍휼)

    • Etymology: Hebrew רַחֲמִים (rachamim), meaning compassion or tender affection.
    • Biblical Background: Exodus 34:6 – “A God merciful and gracious…”
    • Reformed Theology: God demonstrates pity and compassion especially toward the miserable and sinful.

    2.5 Justice (정의)

    • Etymology: Hebrew צֶדֶק (tsedeq), meaning righteousness or fairness.
    • Biblical Background: Psalm 89:14 – “Righteousness and justice are the foundation of your throne…”
    • Reformed Theology: God rewards and punishes all in accordance with His holy law and perfect judgment.

    2.6 Truth (진리)

    • Etymology: Greek ἀλήθεια (alētheia), meaning that which is unconcealed, real, or trustworthy.
    • Biblical Background: John 14:6 –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 Reformed Theology: God is utterly reliable in all His words and revelations—without error or deceit.

    2.7 Wisdom (지혜)

    • Etymology: Hebrew חָכְמָה (chokhmah), meaning discernment and applied knowledge.
    • Biblical Background: Romans 11:33 – “Oh, the depth of the riches both of the wisdom and knowledge of God!”
    • Reformed Theology: God always chooses the best means to achieve His perfect ends.

    2.8 Sovereignty (주권)

    • Etymology: Expressed biblically through concepts like מַלְכוּת (malkuth), meaning kingship or rule.
    • Biblical Background: Daniel 4:35 – “He does according to his will among the host of heaven…”
    • Reformed Theology: God governs all things according to His eternal decree, accomplishing His perfect will.

    Conclusion │ 결론

    God’s attributes are rightly categorized into incommunicable and communicable types, both of which are thoroughly rooted in Scripture and explained in Reformed theology. Through the study of biblical languages, deeper insight is gained into the nature of God. This study leads believers to deeper reverence, worship, and trust in the triune God.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분류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분류

    속성

    정의

    성경구절

    단일성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신 6:4

    무한성

    하나님은 제한도 종료도 없으시다.

    왕상 8:27,

    행 17:24

    영원성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끝이 없으시다.

    창 21:33,

    시 90:2

    영성

    하나님은 보이시지도 나눠질 수도 없다.

    요 1:18,

    딤전 1:17

    불변성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불변하시다.

    말 3:6,

    약 1:17

    주권성

    하나님은 어느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 최고의 통치자이시다.

    엡 1:21

    전지성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시 147:4-5,

    마 11:21

    전능성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신다.

    마 19:26,

    계 19:6

    편재성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

    시 139:7-12,

    렘 23:23-24

    사랑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을 베푸신다.

    엡 2:4-5,

    요 4:8

    유복성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신 7:7-8

    정의성

    하나님은 편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로우시다.

    행 10:34-35

    은혜성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때를 따라 은혜를 입히신다.

    출 34:6,

    딛 2:11

    하나님의 속성 도표

    하나님의 속성 도표

    능력

    전지, 전능, 무한성, 불변성, 주권성, 완전성, 무오성, 단일성, 초월성, 단순성, 영성, 생명성, 내재성, 불가시성

    도덕

    사랑, 정의성, 자비, 유복성, 거룩성, 진실성, 거룩, 공평, 성, 선, 자비, 은혜, 인내, 신뢰성, 도덕적 존재

    시공간

    영원성, 자존성, 편재성, 무한성

    믿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자로서 마땅히 알아야도 하겠지만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아서 그 분의 인격과 성품 즉, 그 분의 속성을 닮아야 만이 장차 우리가 갈 신령세계에서 닮은 그 양에 따른 그 나라의 누림과 영광과 존귀가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에 있어서 신학자들이 분류하기를 자연적 속성과 도덕적 속성, 또는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 또는 본원적 속성과 파생적 속성, 또는 적극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 또는 자동적 속성과 타동적 속성, 그런가 하면 특별히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본성을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으로 분류를 하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에는.

    ① 무한하심: 성경은 하나님의 무한성, 즉 하나님의 본성이 무한하심을 가르쳐줍니다.

    ② 영이심: 성경이 강조하는 또 다른 하나님의 본성은 그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③ 인격이심: 하나님의 인격성. 하나님은 마음 지성 의지 이성 개별성 자의식 자기결정 등을 가지신 분입니다.

    ④ 통일체이심: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의 통일체라는 사실도 가르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본성에서 나온 속성을 다음과 같이 분류합니다.(로이드존스 목사) 비공유적 속성(인격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도덕적 속성)으로 크게 분류하는데 이것을 분류한 것을 보면.

    1. 비공유적(인격적) 속성.

    ① 영원성과 불변성: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십니다. 그분은 영원하십니다.

    ② 편재성: 하나님은 모든 곳에 존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③ 전지하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하나님의 지식은 언제나 절대적인 지식입니다.

    ④ 전능하심: 하나님은 모든 능력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⑤ 완전하심: 성경은 하나님의 철저하고 절대적인 완전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탁월함의 총합입니다.

    ⑥ 영광: 이것은 성경에서 그 분의 위대하심, 그 분의 광휘, 그분의 엄위하심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2. 공유적(도덕적) 속성.

    ① 거룩하심: 우리는 거의 대부분 거룩함을 소극적 의미로 다루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거룩함의 의미가 하나님께서 죄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계시며 관계가 없으시다는 의미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거룩함에는 적극적 의미도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이고 완벽한 순결입니다.

    ② 의로우심, 공의로우심: 의는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 가운데 나타내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사법적 거룩하심입니다. 공의에 의해 하나님은 그의 율법을 어기고 죄를 범한 죄인들에게 형벌을 내리십니다. 또 하나의 다른 정의는 하나님의 의는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라는 것입니다.

    ③ 선하심과 사랑: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모든 피조물을 관대하고 친절하게 다루도록 하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롬11:22)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이 자신을 다른 존재에게 영원토록 전달하도록 만드는 속성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 스스로가 자신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밝힙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이십니다. 은혜는 자비는 인내와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④ 신실하심: 이 속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의와 공의 안에 포함되며, 하나님의 불변성의 개념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이 당신이 안전하게 기댈 수 있는 분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분이 부르신 모든 사람들을 악한 자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셔서 그들 안에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들을 강하게 하시고 굳게 하시리라는 사실을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이상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분류인데, 기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분류는 이와 대등소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석준목사님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전체를 인격성이라 하고, 이 인격성에는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이 있는데, 인격성이라 하면 그의 활동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활동성 이전에 마치 인간에 비하면 내적 정신적 느낌을 말하는 것이니 이 신의 인격성이란 인간의 지식으로 혹은 용어로 형언키 어려운 생존적 활동적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1. 비공유적 속성에는 ① 자존성 ② 영원성 ③ 완전성 ④ 단일성으로 이 속성은 인간은 가질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2. 그리고 공유적인 속성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을 때 가질 수 있는 속성으로 여기에는 크게 (1) 지혜지식성 (2) 도덕성 (3) 능력성으로 분류하고.

    이것을 다시,

    (1) 지혜지식성은 ①지식성 ② 지혜성으로 분류합니다. 이것을 조직신학에서는 속성이라고 말합니다.

    (2) 도덕성은 ①선 ② 사랑 ③ 거룩 ④ 진실로 분류합니다. 이 도덕성은 신적인 도덕인데 신 자신이 자신을 규제하는 도덕이 아닌 근원적 발생적 신 자체적 도덕성으로 이 도덕성은 상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신의 이 도덕성은 자기를 위한 자위적 자애적 도덕이 아니고 상대적 도덕입니다.

    (3) 능력성은 ①의 ② 주권으로 분류합니다. 이 신의 능력은 완전적 능력으로 이 완전적 능력은 수동적 능력이 아니고 자체적 능동적 능력입니다.

    이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을 세밀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비공유적 속성.

    (1) 자존성: 신은 자존자가 되어야 하는 고로 자존성이라는 용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유출물이거나 발생물이 아니고 자존자인고로 자존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영원성: 자존자이신 이 하나님은 영원성을 가졌으니 과거적 영원, 미래적 영원입니다. 이 영원성이라는 말은 그의 존재만이 영원이라는 말이 아니고 속성적 존재적 영원을 말합니다.

    (3) 완전성: 완전성이라는 말은 지혜 지식 인격성의 성질적 완전을 말합니다. 학자들 중에는 완전성 대신에 무한성 불변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변성에는 모순성이 있습니다. 완전성이 가장 적절한 용어입니다. 이 완전성 속에 절대성이 들어있습니다.

    (4) 단일성: 단일성이라는 말은 흔히 사용하지 않는 용어입니다. 완전성은 필연코 단일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로 이 단일성을 부인하거나 무식하면 하나님을 이해치 못하게 되니 하나님을 바로 알 길이 없고 구원과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신의 속성 중에 중요한 것이 이 단일성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과 직접 관계가 됩니다. 고로 이 단일성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구원은 잘못됩니다. 실은 우리의 구원이라는 이 구원이 이 단일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속성에서 단일성을 제하면 우리의 구원은 바른 구원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곧 통일성을 이룹니다.(엡1:10)

    이상의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지 다른 어떤 존재도 이 속성이 없고 가질 수가 없습니다.

    2. 공유적인 속성.

    공유적인 속성이란 하나님 외의 피조물들도 가질 수 있는, 혹 가지고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공유적인 신의 속성을 가진 하나님을 신학적 용어로는 인격적 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신이신고로 물질적 고정적 형체를 가진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용어는 계시목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1) 지식성: 과거와 현재를 아는 것을 지식성이라고 합니다. 즉 과거의 어떤 존재성이나 사건성에 대하여 아는 것을 지식성이라고 말합니다. 신은 완전한 지식성의 분이신데 완전한 지식성은 완전한 인격성이란 말입니다. 완전한 지식성이란 과거와 현재를 절대 정확하게 아심을 말합니다.

    (2) 지혜성: 지혜성은 미래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예정도 계획도 설계도 이 지혜지식성에서 나옵니다. 지혜지식성이란 앞으로 어떻게 되어질 미래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 것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물질계에서의 성장을 보고 천국에서의 누림을 압니다. 농부가 가을추수를 내다보고 종자를 뿌리는 것은 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완전한 지혜성이란 완전한 인격성이란 말인데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완전 정확하게 아심을 말합니다.

    (3) 선성: 일반적으로 선이란 남에게 유익을 입혀준다는 말인데, 이 속성은 단순히 남에게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자타가 다 유익이 되는 선입니다. 갑에게는 유익이 되고 을에게는 손해가 되면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참 선은 그 사건과 관련성이 있는 존재는 다 선이라고 말합니다. 이 선은 자기가 자기를 유익 되게 하는 어떤 사건이 있을 때 그 사건이 상대와 관련 없는 자기의 단독적 관련적 사건일 경우 자기가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선이요, 이 사건이 他에게 미쳐서 他에게 관련됐을 때에 자타가 유익이 되는 선입니다.

    어떤 사역을 자타에게 유익을 줄 목적으로 했더라도 천국에 들어가서 그것이 자타에게 유익과 행복이 아니면 선이 아닌 것입니다. 최종적 영원적 결과적인 목적이 아닐 때는 선이 아닙니다. 영원히 유익하고 행복한 것이 선입니다. 선성이란 영원히 행복하고 즐겁게 해주는 성질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인격성에서 선성이라고 말합니다.

    (4) 애성(愛性): 이 애성은 선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애성은 선행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성이 충만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수동적 동화적인 사랑이 아닌 내발적 발생적 사랑입니다.

    한국어로는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지만 원어로는 아가페 스톨게 필레아 애로스 등으로 각각 표현합니다. 사랑이라는 이 용어는 인간이 쓰는 용어로 번역하기가 빈약합니다. 과거분사 현재 진행형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이라는 의사가 이 애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구원의 발작 선택 예정 진행 방편 결과가 사랑이십니다. 예정도 사랑으로, 진행도 사랑으로, 도성인신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한 것 모두는 사랑의 발작에서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가 되는 것입니다.

    (5) 성성(聖性): 하나님의 성성은 외래적 평가적 상대적 성성이 아니고 당신 자체로서 구별함을 받은 자체적 능력적 성성입니다. 하기오스: 자체적 절대적 영원적인 거룩입니다.

    거룩이란 말은 구별이란 말인데 동사로 구별한다는 말보다는 명사형으로 구별이라는 말입니다. 또 존재적으로 구별되었다 라기 보다도 자체가 구별성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구별성을 가진다는 말은 다른 어떤 존재가 소유할 수 있는 그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객관적 혹 피동적 수동적 구별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누가 구별해놓은 것이 아니고 자체적으로 구별되어 있는 구별된 존재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 도덕성은 일반적인 도덕성과 구별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고 어떤 인간이, 어떤 능력자가 하나님을 혹은 하나님의 성품을 혹은 도덕성을 혼잡 혼돈을 시킨다 해도 혼돈도 혼잡도 될 수 없는 자체적 완전 구별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구별성은 인간의 용어로는 정확히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거룩은 자체적 구별인고로 혼잡 혼돈 시킬지라도 혼잡 혼돈되지 않고, 지옥 같은 죄악의 소굴에서도 그것이 감염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거룩을 입혀 당신과 같은 거룩한 자로 만들어 거룩한 곳에서 살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6) 진실성: 이 진실성은 자체적 능력성을 가진 것, 독단적인 가치성을 가진 것, 자체적 가치성을 가진 것입니다. 진리가 활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주님은 자체적으로 진리시요 우리에게 대하심도 진실이십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참이라는 말입니다. 이 참이라는 말은 절대 정확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시대의 어떤 존재도 여기에 맞지 않는 것은 전부가 부족이요 비뚤어진 것입니다. 성질적으로 진실이 아닌 것은 이질이요 전부가 죄라는 말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정확에 절대성을 가진 말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존재적으로 사건적으로 성질적으로 능력적으로 진실이란 말이니 영원히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진(眞)이다. 참이다’ 하는 절대 정확의 표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영원히 절대 표준입니다. 성질적으로 성분적으로 성격적으로 분량적으로 이 진실성이 아닌 것은 기쁨도 향락도 명예도 영광도 사랑도 행복도 부요도 모두는 자기에게 앙화요 고통이요 불행이요 눈물이요 심판거리입니다.

    (7) 의성(義性): 이 의성은 완전적 의, 생명적 의성입니다. 의적인 능력이란 말은 하나님의 성품적 의성이 아닌 모든 의는 그 어떤 의도 하나님의 의를 능가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의 의와 동등 동질인 의도 없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모든 의라고 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본성적인 본질적인 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의와 합치되는 의는 없습니다. 모든 의라고 하는 그 의는 하나님의 의 앞에는 전부가 정죄를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모든 존재가 의라고 해도 그 의라고 하는 것을 정죄하는 주권성을 말합니다. 의라고 인정을 해 줄 수 있는 그 주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의는 절대적인 의인고로 이 의가 아닌 모든 의는 이 하나님의 의 앞에 전부가 악으로 정죄를 받게 됩니다.

    (8) 주권성: 이 주권성은 절대적인 주권성입니다. 이 신의 능력은 주권적 자체적 능동적 능력이니 이 주권성은 그 무엇에게도 그 어떤 존재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 능력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능력을 침해치 않고 외계의 그 무엇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 주권적 능력입니다. 이런 주권적 능력인고로 당신은 외계의 그 어떤 의사에게 제재를 받지 않고 당신 자체와 다른 어떤 의사에게도 침해를 받음이 없습니다.

    이상이 김석준목사님이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볼 때 주의할 사항.

    하나님의 속성을 생각할 때 그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따로 분리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그 모든 속성을 전부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속성을 다른 속성과 대치시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자비를 대조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면서 언제나, 그리고 동시에 자비로우십니다.

    이것을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찌하든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아서 그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덧입기 위해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이런 저런 분류를 하는 것이지만 이는 어떻게 분류를 하건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역적인 면에서 볼 때는 비록 어느 한 면의 속성이 두드러져 보이거나 혹은 각 속성이 각각의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동시에 한 활동을 하는 것을 부정하는 듯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유한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아무리 잘 분류를 한다고 해도 우리의 제한된 지성과 제한된 이해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쭈그러뜨려 놓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 때문이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알아서 그 하나님의 속성을 좀 더 많이 닮아보겠다는 뜻에서 이론이나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분류를 한다고 할지라도 분명히 할 것은 하나님은 이 모든 속성 안에 다른 모든 속성을 전체로, 그리고 동시에 소유하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분의 공의와 대립시키는 것은 크나큰 비극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언제나 공의롭고 의롭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균형의 완전성을 우리의 사고에도 항상 유지해야만 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배울 때 단순히 지식충전에 머물거나 이론이나 학문에 그치지 않고 그분의 속성을 믿는 내가 배운 바대로 정신과 사상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김석준목사님이 분류한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가 성화구원을 이루는데 있어서 실질적으로 실천 실행에 도움이 되는 가장 유익한 분류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1)

    ■본문 롬11:36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은 인간과 유사한 인격적인 면을 가지고 계시면서 동시에 인간과 전혀 다른 무한한 면을 가지고 계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으로서 가지고 계신 특성을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이성적 탐구에 의한 합리적 방법이나 경험적 방법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계시된 말씀을 통해서만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통하여 그분을 더욱 깊이 알 수 있습니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의 속성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인간과 유사한 면이 전혀 없는 비공유적 속성과 인간 속에서도 비슷한 특성을 찾을 수 있는 공유적 속성으로 나눕니다. 이번 과에서는 하나님의 비공유적인 속성에 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자존(自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분,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가 외부의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며(출 3:14), 그 독립성에 의해 모든 행위를 스스로 행하심으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의존하게 만드는 속성입니다. 천지는모두 없어지나 하나님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사라지지 않으며, 하나님을 믿는 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분에게  기대는 모든 존재는 영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2. 불변(不變)하신 하나님


    인간은 변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시간의 예속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시간 안에 있는 모든 존재는 모두 변합니다. 인간과 피조물은 생성, 발전, 쇠퇴, 소멸의 운명을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존재나 목적, 약속 그리고 완전성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영원히 동일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불변하시므로 하나님의 뜻도 영원하며, 하나님의 말씀도 영원하고 불변합니다.


    시 102:26-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하나님의 불변하심에 대한 12대 증거]


    1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출3:15)
    2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풂(신5:10)
    3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는정확히 성취됨 (왕상8:56)
    4 태초부터 영원까지 영원토록 하나님이심 (시90:2)
    5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름(시103:17)
    6 태초부터 영원까지 우주의 주권자이심 (사41:4)
    7 택하신 백성을 영원토록 변함 없이 선대하심(애3:31-33)
    8 한번 맺으신 언약은 결코 변개치 않으심 (단9:4)
    9 한번 행하신 일은 결코 후회하시지 않음 (롬11:29)
    10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불변하심(히13:8)
    11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음 (벧후3:8)
    12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분 (계1:8)


    3. 전능(全能)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의 전능성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범위에 있어서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하는 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을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감당하며 품어주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하나님의 전능성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있어서 영원토록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 하는 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사랑한 대상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세상이 뒤집어지고, 세상의 끝이 올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4. 무한(無限)하신 하나님


    무한성은 외부의 어떤 요소로부터도 전혀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가리킵니다. 무한성에는 세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본질적 무한성 : 절대자로서의 무한한 완전성을 보여주는 이 속성은 하나님이 무궁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시 145: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2) 시간적무한성: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시간적 제한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께서 가지신 영원성(eternity)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시간을 현재, 과거, 미래로 파악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현재로 소유하십니다.


    시 90: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공간적 무한성: 하나님께서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으심으로 모든 공간의 각 부분에 임재하심을 가리키며

    또한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공간에 계심을 편재성이라고 합니다.


    시 139:7-10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 능력의 특징]


    1 모든것이 가능함 (마19:26)
    2 지극히 큼 (시79:11)
    3 매우 강력함 (시89:13)
    4 지극히 영광스러움(사63:12)
    5 영원하여 소멸치 않음(사26:4)
    6 주권적임 (롬9:21)
    7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음 (롬15:11)
    8 도저히 측량할 수 없음(욥5:9)
    9 모든 능력의 근원임(시62:11)
    10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없음 (합3:6)
    11 대적할 자가 없음 (욥11:10)
    12 탁월함 (신32:39)


    하나님의 속성(성품)(2)

     
    ■본문 벧후1:4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창 1:27).
    그러기에 하나님과 유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공유적 속성’ 또는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며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1. 사랑이신 하나님


    1)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성품을 의미합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위하여 자신의 존재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가장 선명한 묘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는 묘사입니다.


    요일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2)하나님의 사랑의 최대의 극치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사건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피조물의 운명을 자신과 동일시 하시며, 피조물을 가슴에 품으셔서 대신에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갚으셨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기에 또한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된 것은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 때문만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변화된 것은 기적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매우 더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더딘 것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3. 은혜로우신 하나님


    은혜는 아무런 보상 없이 베푸시는 혜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로 인해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으나 구원의 대상이 된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을 가리킵니다. 성도에게 주어지는구원이나 영적 행복은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결과입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신인 동성론적 표현들]
    1. 좋아하심(창1:31)

    2. 휴식하심(창2:2-3)

    3. 근심하심(창6:6)

    4. 후회하심(창6:7)

    5. 기억하심(창9:16)

    6. 살피심(창18:21)

    7. 진노하심(출22:24)

    8. 질투하심(출24:14)

    9. 싫어하심(잠6:16)

    10. 미워하심(신16:22)

    11. 염려하심(신32:27)

    12. 선한 싸움을 하심 (신33:27)

    13. 아심(왕상8:39)

    14. 웃으심(시2:4)

    15. 주무심(시44:23)

    16. 슬퍼하심(시78:40)

    17. 보복하심(렘51:56)

    18. 뜻을 돌이키심 (욘3:10)

    19. 원수를 갚으심 (롬12:19)

    20. 사랑하심(계3:19)

    4. 거룩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함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카도쉬’는 ‘분리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거룩성은 하나님의 가장 하나님다운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한 분으로 지칭되며, 성부, 성자 성령으로 불립니다. 하나님은 다른 존재와 구별되어 존재하십니다.


    계 4:8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2)거룩함이란 하나님의 이름일 뿐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성도(聖徒), 곧 거룩한 무리라고 부릅니다. 사도신경에서 교회는 거룩한 공회라고 불리며,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은 성일(聖⽇)이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며 운명입니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엡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5. 의로우신 하나님


    성경에서 ‘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체데크 ’는 ‘기준에 부합함’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하나님 의 의로움이란 하나님이 불의를 행하지 않으며 죄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내적인 거룩함에 합당한 성품을 갖고 계시는데, 이를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 율법, 사망에 반대가 되는 분으로서 의로우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적대적인 세력으로부터 분리됩니다.


    신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


    【마무리】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인간에게 자신의 영광을 부어주시고 자신을 찬양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최고의 기쁨이며 의무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생각과 마음속에 모시며, 하나님의 성품이 자신의 존재 속에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동화되어 그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 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 성품에 동화되는 것은 모든 성도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공로 없는데도 행복을 베풀어 주실 때에는 그것은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범 했음에도 행복을 베풀어 주실 때에 그것은 ‘자비’이다. 하나님께서 분노하게 하는 반역을 참으 실 때에는 그것은 ‘오래 참으심 ’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이행하실 때에는 그것은 ‘진리 ’이다. 하나님께서 고통당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길 때에는 그것은 ‘긍휼’이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때에는 그것은 ‘후대’이다.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를 도와주실 때에는 그것은 ‘의’이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실 때에는 그것은 ‘자비’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선하심이라는 한 가지 이름으로 통합되어진다.    -E.스탠리 존스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은 요한일서 1장 5절에 나오는 매우 핵심적인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

    이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1. 빛 = 하나님의 성품

    성경에서 빛은 주로 다음을 의미합니다.

    • 거룩함 : 하나님은 죄와 타협하지 않으시는 분

    • 진리 : 거짓과 속임이 없으신 분

    • 순결과 의로움 : 도덕적·영적 완전성

    • 계시 :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시는 분

    그래서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말은
    👉 하나님 안에는 죄, 거짓, 불의, 혼합됨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2. 빛 가운데 행하라는 부르심

    이 선언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요구합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요일 1:7)

    • 믿음은 말이 아니라 삶의 태도로 드러남

    • 죄를 숨기는 삶 = 어둠

    •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진리 안에 사는 삶 = 빛 가운데 행함

    3. 예수 그리스도와 빛

    요한복음에서는 이 빛이 예수 그리스도로 구체화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요 8:12)

    •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예수 안에서 완전히 보여주심

    • 빛이 어둠 속에 오셨으나, 어둠이 이기지 못함 (요 1:5)

    4. 오늘의 신앙적 적용

    • 나는 하나님 앞에서 숨기고 있는 어둠은 없는가

    • 진리보다 편리함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은가

    • 빛 되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 있는가

    👉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우리를 정죄하기보다, 드러내어 치유하시고 살리기 위해 빛을 비추십니다.


    Front Cover
    생명의 말씀사, May 15, 2004 - Religion - 279 pages
    영어권에서만 100만 부 이상, 20여 개 언어로 출판되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성령 충만한 삶으로 인도한 장기 스테디셀러다. "왜 나는 이렇게 행동하는가?"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는가?" 누구나 이런 질문을 해보았을 것이다. 본서에서 제시하는 해답은 바로 '기질'이다. 기질은 타고나는 것이다. 각 기질에는 강점도 있지만 약점도 있다. 이를 알고 성령 안에서 약점을 극복하여 놀랍게 변화될 수 있다.

    성령과 기질

    팀 라헤이

    서론

    1. 성격은 변화될 수 있다.

    2. 네 가지 형태의 기질

    네 가지 기질의 장단점

    1. 다혈질의 장점

    단점

    2. 담즙질의 장점

    단점

    3. 우울질의 장점

    단점

    4. 점액질의 장점

    단점

    기질TEST

    성격은 변화될 수 있다.

    기질TEST

    약점을 극복하려면

    극복하여야 한다.

    어떻게?

    I. 서론

    1. 성격은 변화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근본적으로 타고난 기질만큼 묘한 것도 없다. 눈송이의 모양이 천태만상을 이루듯이 인간은 이 기질로 인해 주위 사람들과 구별되고 그 사람 나름의 특징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좌우하는 근원으로서 잘 훈련되고 조절되지 못할 때 그의 정상적이고 건설적인 인품까지 비정상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인간의 기질에는 강하고 약한 면이 있다. 누구나 강한 면만 생각하고 싶겠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약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본래의 강한 면을 살리고 약점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셨다.

    • 기질(氣質:temperament) : 타고난 성품의 결합체, 유전학적으로 국민성, 인종, 성별, 그외 어떤 유전 적인 요인에 의해 형성

    • 성격(性格:character) : 앞에 말한 기질 + 어렸을 때의 훈련, 교육, 근본적 태도, 신앙, 원칙등이 가미되어 형성. 곧 닦이고 훈련된 기질

    • 인격(人格:personality) :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표면에 나타나는 태도.

    2. 네 가지 형태의 기질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의 체내에 있는 네 가지 체액 - 혈액, 황색담즙, 흑색담즙, 가래 - 에 비유하여 네 가지 기질의 이름을 정하였는데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 자신의 기질이 어떤 형태인지 파악하려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잠재적 능력과 약점들을 연구할 수 있고 또 주님의 도우심을 통해 우리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네 가지 형태의 기질에 대해 발표하고 연구하는 일은 자칫하면 위험한 공부가 된다. 친구들에 대해 분석적인 태도로 나아가려 하고 "그 아이는 어떤 타입의 아이지?" 하는 생각을 갖기 쉽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비도덕적이고 위험한 일이다. 우리의 연구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분석하는 데에만 사용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단점과 약점을 이해하는 데에 사용되어서는 안되겠다.

    II. 네 가지 기질과 장단점

    1. 다혈질

    1) 장점

    다혈질보다 더 인생을 즐기는 사람은 없다. 자기 주위 사물에 대해서 어린애 같은 호기심을 항상 품고 있으며, 환경으로 인한 감정이 예민하여 불쾌했던 일도 환경이 바뀌면서 곧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생기가 없거나 발랄하지 못할 때가 극히 드물며 웬만한 환경에선 항상 휘파람을 불거나 노래를 부르며 행복하게 지내는 사람이다. 권태라는 단어는 그에게서 먼 단어이고 권태를 느끼기 전에 그는 이미 재미있는 일로 돌아서곤 한다.

    그는 지나간 일을 쉽게 잊어버려 과거에 골치 아프고 복잡했던 문제들을 머리 속에 남겨두는 법이 없다. 또한 미래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므로 다가 올 곤경에 대해서도 실망하거나 두려워하질 않는다. 그저 현재에 따라 살기 때문에 낙관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 사소한 일에도 희열을 느낀다. 그는 쉽게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그의 풍부한 정열은 때로 다른 사람까지도 그의 일에 함께 참여하게 하곤 한다. 그는 서로의 슬픔과 기쁨을 나누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친구 사귀기를 또한 좋아한다.

    그는 사람을 좋아한다. 부드러움과 동정심이 많은 것은 다혈질의 훌륭한 재산중의 한가지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다혈질보다 더 순수하게 대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는 문자 그대로 다른 사람의 좋고 나쁜 기분을 함께 나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라"는 명령을 그는 쉽게 지킬 수 있는 성품이다. 특히 의사인 경우 그는 훌륭한 태도로 환자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다혈질 사람의 엄숙한 태도는 가끔 타인들로부터 오해를 받을 때가 있다. 다혈질의 감정이 너무 급속도로 변환하기 때문이다. 다혈질은 누구보다도 더 당신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다. 세상은 이러한 쾌활하고 반응이 빠른 사람들로 인해 재미있게 된다. 하나님에 의한 훈련과 동기가 주어진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다.

    2) 약점

    다혈질의 끝없는 활동은 사실 자세히 보면 휴식 없는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때로는 비 실제적이고 무질서할 때가 있다. 그의 감정은 쉽게 그를 흥분시켜서 일의 전체를 심각히 분석해보기도 전에 그릇된 방향으로 이미 일을 진전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침착치 못한 성격 때문에 좋은 학생이 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런데 이런 성질은 그의 신앙생활에도 나타나 정신을 집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일이 퍽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그의 불안정한 활동상태가 일생동안 계속될 때 그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자기의 잠재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때로 그의 생활은 극에서 극으로 움직이며,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하면 끝내 열매 없는 생애를 보내게 될 것이다. 다혈질은 항상 박력 있고 동적인 성격에 따라 행동한다. 이런 태도가 때론 그의 약점을 보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그에게 있어 가장 크고 근본적인 문제는 의지가 약한 점과 세련된 면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는 일은 곧잘 시작하면서 끝마무리를 제대로 못 맺는 위인이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 내에서 주일학교의 반을 맡아달라는 부탁이 있을 때 그의 즉각적인 대답은 "예"이다. 자신의 시간문제, 능력, 그 외의 여러가지 책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일은 그의 일이 아니다. 자기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몇몇 사람의 앞잡이로 훌륭히 일을 하고 있지만 그 그룹의 일을 조직적으로 한다는 것은 어렵다. 고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기의 약속과 결실과 책임들을 쉽게 잊는다.

    그에게서는 정확한 시간약속 이행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의 약한 의지가 가장 위험한 결과로 나타날 때는 그의 도덕관이 주위의 환경과 동료들에 의해 변할 때이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결실하는 사람이 아니고 충성스러운 사람도 아니다.

    쾌활한 성격과 대인관계로 인해 동료들 가운데 일찍 사회적으로 훌륭한 지위에 앉게 되는데 여기서도 역시 그의 타고난 개인주의적 태도를 볼 수 있다. 대화에 있어서도 자기자신 뿐만 아니라 자기가 관심을 가지는 일들에 대해 혼자 떠들게 되고, 남들도 모두 다 그 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으려니 하는 생각이 극단으로 흐르다가 주위 사람들의 비난을 받기 일쑤다.

    다혈질은 감정적 불안정성 때문에 쉽게 용기를 얻는 반면에 자신의 약점을 몹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성격이 온화해도 화를 버럭 내는 경우가 있고 한번 폭발한 후에는 그것에 대해 잊어버린다. 곧 사과도 잘한다. 남에게 쉽게 상처를 입히고는 자신은 건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영적인 의미로 보면 다혈질은 똑같은 일에 대해서 여러 번 후회하고 고백하는 버릇이 있다고 보겠다. 다혈질처럼 육욕의 유혹을 많이 받는 사람도 없다. 그는 정서적으로 매우 감수성이 예민하기 때문에 다른 타입의 사람보다 쉽게 유혹을 받는다. 그리고 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이 유혹에 더 많은 생각을 쏟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성령께 간구해야 할 것은 "절제"와 "자제력"이다. 다른 세 가지 천성과 마찬가지로 다혈질도 가장 긴급하고 큰 문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일이다.

    2. 담즙질

    1) 장점

    담즙질은 의지가 강하고 독립적이며, 자신의 능력을 크게 신뢰하는 편이며 투쟁력 이 강하다. 항상 활동하는 사람이지만 그의 계획은 다혈질의 계획과 달리 조직적이고 의의가 있는 것이다. 한번 시도했던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목적을 향해 줄기차게 밀고 나가는 사람이다. 그야말로 "이번엔 이 한가지 일만 해 봐야지"하는 식으로 일에 골몰한다. 복잡한 게획 대신 단순한 계획하에서 그는 그 일을 성취하고야 만다. 그의 성공의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훌륭한 계획보다도 『결단력』 과 『일에 대한 집착력』때문이다.

    담즙질의 기질은 어느 면에서 보면 생활의 실제적인 면에 너무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사물은 실리성(實利性)을 기준으로 다루고, 자기가 가치 있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행복감을 느낀다. 단체적인 일에 대해선 무척 호감을 갖고 참여하고자 하지만 실무적인 일에서는 실증을 느낀다. 예민한 관찰력이 있어 순간 순간의 상황을 파악하고 가장 실질적인 방법으로 그 일을 해결해 내는 능력도 있다. 담즙질의 소유자가 의사라면 특별히 긴급환자들을 잘 돌볼 수 있다.

    그가 내리는 결정들은 이성적인 분석보다는 직감에 의한 경우가 많다. 담즙질은 원래 "지도자적인 자질"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강력한 그의 의지는 그룹을 이끌기에 충분하고 모든 사람들의 훌륭한 판단자가 되며, 긴급 사태에는 빠르고 대담한 태도로 일을 처리한다. 지도자로 임명되면 곧 이를 수락하거니와 때로는 자진해서 일을 맡고 나서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가끔『모든 일을 떠맡는 사람』으로 불리운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거만하게 대하지만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를 협조할 것이다.

    담즙질 역시 천성적인 자기 신뢰로 인해 항상 『낙관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또한 새로운 일을 시도해보기 위해서 자기의 안전한 환경까지도 기꺼이 떠날 만큼『모험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고, 때로는 남보다 앞장 선 사고방식을 가지고 앞서간다. 어떤 일의 상황을 평가할 때에도 그는 도중의 함정과 잠재되어 있는 문제점을 보지 않고 오로지 목표에만 중점을 둔다. 어떤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그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역경은 그를 실망시키지 못하고 그는 도리어 역경을 통해 그 일을 꼭 완수해야겠다는 욕망을 더욱 갖게 된다.

    2) 단점

    담즙질에게도 큰 약점이 있다. 가장 큰 것으로는 그의 "딱딱함과 화를 잘 내는 것과 성급하고 오만"한 점이다. 담즙질은 감정적으로 너무 무딘 사람이다. 그는 동정심 같은 것에 대해 감상적인 쓸데없는 짓이라고 멸시하기도 하며, 그는 뻔뻔스러운 행동을 많이 한다. 그는 급한 성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곧잘 화를 내며, 한번 화를 낸 후에는 그가 불쾌하게 느꼈던 일에 대해『계속 원한을 품는』버릇이 있다. 심한 복수심 때문에 실제로 자기에게 해를 입힌 사람에게 다시 보복하기를 꺼리지 않을 사람이다.

    이렇게 분개하는 성질은 그의 생활을 편안치 못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바람직한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한다. 육체적인 병으로는 40세 이전에 궤양으로 고생하게 되는 수가 많고, 영적인 병으로는 분노와 화를 내는 일로 성령을 거스리는 일이 많다. 담즙질에는 묘한 "잔인성"이 있어 자기의 목적 성취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권리를 무단히 무시하고 짓밟는 경향이 있다. 그에게 강한 도덕적 기준이 제시되지 않는 한 성공을 위해서는 법률을 어기거나 어떤 교활한 방법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몰염치한 죄수들과 독재자들이 이 담즙질 타입의 사람들이었다.

    담즙질의 강한 결단력은 또한 너무 강렬할 때가 있어 오히려 골치 아픈 문제 또는 나중에 그가 후회할 과격한 문제에 그를 몰아 넣곤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완강하게 이런 문제들에 대해 끝장을 보고 만다. 그가 사과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많은 경우 인정이 없고 퉁명스럽고 또 냉소적인 말을 냉정하게 내뱉는다. 남에게 동의하는 것도 그에겐 어려운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가 결혼할 때 그의 배우자가 갖는 가장 큰 문제거리도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아마 자제력을 발휘하여 자기 아내를 때리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더 잔인한 방법으로 아내를 다룰 것이다.(폭력이 아닌)

    담즙질의 강한 독립심과 자만심은 그로 하여금 "거만한" 사람이 되게 한다. 어떤 일에 좀 성공하기만 하면 그는 매우 거만하고 그 일에 대해 세도를 부려 드디어는 불쾌할 정도에까지 이른다. 그가 여러 가지 능력을 가졌음에도 그의 이러한 불쾌한 성품은 그에 대해 주위의 사람들이 실증을 느끼게 하고 또한 그들에게 "우리는 저 사람의 비위를 맞출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저지른 나쁜 행동보다도 성공 그 자체를 더 좋은 일로 보고 거기에만 중점을 둔다.

    그는 어린 나이가 아니면 어른이 된 이후 신앙을 가지기 힘들며, 그리스도를 믿고 난 이후에도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가 몹시 어렵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려고 할 때 그의 마음은 곧잘 그날의 계획을 세우는 일로 꽉 차고 그가 성령에 깊이 감화되고 초자연적인 힘을 체험해 보지 못하는 한 규칙적인 예배시간은 쓸데없고 시간낭비인 것처럼 생각 될 것이다.

    3. 우울질

    1) 장점

    다른 어떤 기질보다도 가장 풍만하고 예민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다른 기질에서보다 더 많이 그리고 깊숙이 감상하며, 또한 예술에도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다. 정서적으로 예민하나 다혈질과는 달리 자기의 감정을 통해서 심사숙고하는 사람이다.

    우울질의 소유자는 창작적인 추리에도 능란하여 한창 상상력이 활발할 때는 가치 있고 건전한 창작물을 내기도 한다. 그는 또한『완전주의자』로서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 "훌륭함"의 기준을 두고 있으며, 어느 분야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그의 포용력은 다른 사람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앞으로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며, 과거에 이루어진 일들과 결정들을 다시 생각하면서 "만약 기회가 새로이 주어진다면 좀더 훌륭히 그 일을 처리할 수 있을텐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우울질의 "분석력"은 그의 완전주의자적인 성품과 합성되어 일의 세부적인 내용을 파악하는데 능력이 있게 하였다. 다혈질이나 담즙질같은 사람으로부터 어떤 기획이 제안되면 우울질은 그것을 즉시 분석하여 그들이 부딪치게 될 여러가지 숨은 문제들을 골라내곤 한다. 그래서 그는 때로 그가 분석해서 나온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그 일을 반대할 경우가 많은데 이 문제들이라는게 그에게는 퍽 중요한 것이다.

    그의 분석적인 능력과 태도로 보아 그에게는 수학, 이론과학, 의학, 건축학, 철학, 창작문학, 그 외 면밀한 것을 요하는 일이 적합하다. 다행스럽게도 우울질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충성스러워지려고 일부러 애쓸 필요가 없다. 그 기질 자체가 "충성스럽기"때문이다. 우울질은 다혈질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을 사귀려 들진 않지만 한번 사귄 사람은 문자그대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정도로 그 친구들을 포용한다. 어떤 일을 주어진 시간에 끝까지 이끌고 나가서 완성시켜 놓은 일에서는 그를 언제나 신임해도 좋다.

    우울질은 앞에 나서서 일하기보다는 뒤에서 하는 일을 더 좋아한다. 때로는 지극히 희생적인 직장을 택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이는 자기동료들의 발전과 이익을 위해서 자기자신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그의 강렬한 욕망을 잘 보여준다. 그는 자기 능력의 한도를 잘 알아서 자기가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일은 맡지 않는다.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자진해서 발표하려하지 않고 덮어두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의견을 발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의 독특한 의견을 발표하며, 다혈질처럼 함부로 말을 많이 하지 않지만 자기의 의견을 발표하는 데에는 꽤 야무지다.

    2) 단점

    우울질은『자기중심적』이다. 할레스비 박사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어떤 타입의 사람들보다도 가장 자기 중심적이다. 항상 『심사숙고』하고 『반성』을 하는 형인데 그의 이런 성품은 오히려 그의 의지와 정력을 마비시켜 버린다. 그는 항상 자기자신과 자기의 정신적인 상황을 해부하고 양파껍질을 벗기듯이 자신을 한층 두층 계속 벗겨 마침내는 그의 생활에 직접적이고 자연스러운 면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 오로지『영구한 자기반성』만 남게 된다. 그러나 이런 자기반성은 이익이 못되고 오히려 해로운 것이다. 우울질은 병적인 정신상태에 빠져 들어갈 때가 많다. 그들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관심을 갖는다. 접하는 문제마다 그에게는 큰 문제로 보인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우울질은 유난히 쉽게 우울증환자가 된다. 이런 자기 중심적인 태도는 그의 예민한 성격과 합해져서 공격적이고 모욕적인 언행을 가끔 저지르게 한다. 그는 기분을 자주 변동하는 자로 문자 그대로 "감정을 항상 팔에 걸고 다닌다." 때로는 곧잘 남을 의심하여 좋지 못한 방면으로 계속 상상한다. 만일 어떤 두 사람이 소근소근 얘기하는 것을 보면 그는 대뜸 그들이 자기에 관해 얘기한다고 단정한다. 이런 생각은 심한 경우엔 남을 변태적으로 냉대하고 박대하는 컴플렉스를 나타낸다. 우울질은 그의 완전주의자적이고 분석적인 성품 때문에 비관적인 사람이 된다.

    그는 목적을 내다 보기도 하지만 도중에 생길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비관적이기 때문에 우울질은 어떤 일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자기가 생각하는 "완전"이라는 기준에 미달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비판적인 면에선 우울질을 따를 사람이 없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최선에 도달하지 않으면 그들을 영접하지 않는다. 많은 완전주의자들이 그들의 배우자가 그들이 기대했던 바의 90%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행복했던 결혼생활을 파괴했다. 자그마한 실수도 그의 완전주의자라는 안경을 통해 모두 드러나게 되어 그는 "많은 좋은 점을 보는 대신에 나쁜 점을 과장해서 보게" 마련이다. 결혼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는 최종적인 결정을 못 내리고 주저할 때가 있다.

    멀리서 여자를 보고 이상화시켜 그 여자와 사귀게 되면 그녀가 아무리 아름답게 생겼을지라도 역시 단점을 지닌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바로 그 단점 때문에 그녀와 결혼하기를 주저한다. 기분의 변화에 있어서도 우울질을 따를 사람이 없다. 시시때때로 고조된 감상에 빠져 있곤 한다.

    또한 우울질의 변덕스러움은 때로 좋지 못한 일을 발생시키는 요인이 된다. 즉 그가 정상적으로 활동할 때 그를 좋아했던 사람들도 그가 아무 이유 없이 심한 우울증에 빠져있을 땐 그를 싫어하게 된다. 그러면 자연히 우울질을 피하게 되고 우울질은 예민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아채고 더욱 우울하게된다. 이 한가지 사실은 능히 우울질의 전 일생을 망치고도 남음이 있다. 만일 그가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지 않을 경우에만 말이다.

    우울하고 감정이 쉽게 변하는 우울질 타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고 위대한 사명을 어깨에 짊어진 채 자기자신보다 남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며 좋은 목적을 지니고 살아나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잘 알 수 있게 된다. 또 한가지 우울질의 특성을 들자면 그의 "보복심"이다. 그에겐 모욕을 용서해 주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그는 표면상으로 볼 때는 조용하고 평온해 뵈지만 마음속으로 격렬한 증오심과 불길같은 적의가 있다. 담즙질처럼 직접 행동으로 옮기진 않겠지만 수년간을 이런 증오심과 보복감을 품은 채 지낸다. 이렇게 남을 용서해 주지 못하는 성품과 보복하려는 그릇된 욕망은 때로 그의 훌륭한 자질을 지배하여 자질이 드러나지 못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편견에 근거를 둔 결정을 하게끔 한다. 우리는 우울질의 장. 단점을 모두 보아왔다.

    한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여기서도 나타나는데, 즉 매우 훌륭한 장점과 잠재능력이 있는 천성에는 또한 가장 큰 단점이 따른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평범한 우울질』은 없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울질은 자기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하여 동료들보다 우수한 위치에 서던가, 그렇지 않으면 약점으로 인해 신경질과 수심에 뒤덮히고, 자신을 즐기지도 못하고 남을 즐겁게도 못하는 우울증환자가 되어 동료들보다 열등한 위치로 떨어지게 된다.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뛰어난 인물들이 심한 우울질 타입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우울질의 소유자들은 큰 위안을 받아야겠다. 그러나 성경의 그 인물들은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공할 수 있었음을 알아야한다. 그리스도안에서의 신앙은 그로 하여금 자기의 타고난 성품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새 생애를 보낼 수 있게 한다.

    4. 점액질

    1) 장점

    점액질의 거침없는 "유모어"는 그가 어떤 일을 신중히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며, 그는 세속적인 일에서 재미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시치미를 떼고 하는 그의 거칠은 듯한 유모어가 다른 사람들을 곧잘 웃기는 것을 보면 그는 유모어와 상상력의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의 기질은 "카운셀러"가 되기엔 안성맞춤이다. 다혈질이나 담즙질같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고민을 오랫동안 앉아 듣지 못하는 반면에 느리고 태평스러우면서 유연한 점액질의 태도는 그로 하여금 남의 얘기를 다 들을 수 있게 한다. 또한 자기 자신과 고민을 말하는 사람과 늘 동일시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듣는다. 그리고는 충고의 말을 불쑥 쏟아 내놓는 게 아니고 차근차근 대화를 나눈다.

    점액질의 경우, 그의 명랑하고 훌륭한 성품뿐 아니라, 그의 책임감과 시간적 계획을 잘 지키는 면에서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우울질처럼 이 사람은 퍽 충실한 친구가 될 수 있고 친구에게 완전히 빠지지는 않지만 불충실하게 대하지도 않는다. 점액질도 역시 실제적이며 능력있는 사람이다. 그는 사고하는 데에 많은 정력을 소비하므로 그 결과 어떤 일의 상황을 잘 분석할 수 있게 한다. 그는 기분에 따라 즉흥적인 결정을 내릴 사람이 아닌 반면에 적은 노력을 들여 일을 완수할 실제적인 방법을 찾는 사람이다. 그는 괴로움 속에서도 일을 잘한다.

    실제로 그는, 다른 사람들은 꼼짝 못 할 환경에서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한다. 그의 일의 결과는 항상 훌륭하고 깨끗한 결과가 된다. 비록 완전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도 역시 꽤 높은 수준의 정확성과 정밀성을 지니고 있다. 항상 바쁘고 크나큰 일을 하면서도 그의 책상이 항상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다른 능동적이고 소란스런 성품의 사람들은 항상 놀라게 마련이다. 그러나 점액질은 모든 것을 적재적소에 놓고 일하면 훨씬 쉽고 시간도 절약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 한마디로 말해 정돈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 단점

    점액질의 가장 큰 단점은 "게으름"이다. 가끔『발을 질질 끄는 상태』로 나타나는데, 그는 자기 의사와는 반대로 자극을 받아 행동하는 것을 싫어하며 가능한 한 느리게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목적 없는 그의 생활은 "방관자"의 생활이고 될 수 있는 한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 이런 성품 때문에 그는 그가 생각하고 있고 또 능히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의 인도자가 되지 못한다. 그에겐 모든 일이 오로지 "너무 지나친 일"로 보이는 모양이다. 다혈질의 불안정성과 담즙질의 활동은 그를 때로 괴롭힌다. 점액질은 그들이 그를 자극시켜 일을 하게 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점액질은 또한 "이기심"이라는 단점을 보이기도 하는데 해가 거듭할수록 자기자신을 옹호하려는 본능 때문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때로는 어떤 일을 변경하려고 "심한 고집"을 부릴 때가 있는데 이는 자기가 그 일에 너무 휩쓸려 들어갈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에너지를 아끼는 면에서 보수적이기를 원한다. 점점 성장하면서 그는 더욱 고집이 많아지지만 그의 태평스런 유모어로 자기의 완고한 점을 감출 수 있게 된다. 주위사람들의 계획과 활동에 가담하기를 강요받을 때마다 그 일이 제대로 되어가지 않는 것이라면 그는 더욱 거절하는 태도를 취하며 그 일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의 이런 완고성은 결코 그를 "인색하고 이기적인"사람으로 만든다. "이것은 얼마의 비용이 들까?" 혹은 "이것은 내게서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 를 항상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기심"은 점액질에 있어 정말 큰 문제 거리다.

    점액질에겐 해가 갈수록 더 결단력이 약해질 수 있는데 그것은 기본적으로 어떤 일에 가담할 것인가에 대해 선뜻 나서지 않는 성질 때문이다. 그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과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마음 사이에서 늘 동요한다. 그의 결단력 없는 태도는 곧 뿌리깊은 습관이 되어 그의 장점 즉 실용적인 태도를 능가해 버리기까지 한다. 그의 실제적인 관점과 조용하고 분석적인 태도는 때로 어떤 일에 대한 더 좋은 해결 방법을 고안해 내지만, 그가 그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쯤에는 이미 다른 활동가가 그 일을 계획하고 그룹을 조직하여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이다.

    그렇지만 점액질은 마음속에 자기계획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만 "부분적으로"가담하려 한다.

    5. 네 기질에 대한 정리

    위의 네 가지 기질의 여러가지 변화가 이 세상을 움직여 나가고 있다. 어느 것도 다른 성품보다 더 낫다고는 할 수 없다. 모두가 그것대로의 장점을 갖고있어 사회에 도움을 주고있기 때문이다. 각 기질이 지닌 장점은 그 기질을 매력적으로 만들며 우리도 모두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얘기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장점이 중요하듯이 우리가 지닌 약점도 중요하다. 어느 면에서는 더 중요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약점을 분석 해 보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약점은 보완되어야 하고 개선되어야 한다.

    III. 기질테스트

    1. 성격은 변화될 수 있다

    앞의 내용에서 우리는 각 기질의 장. 단점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는 "나는 다혈질이야""나는 담즙질이군"라고 자신을 평가하곤 하는데, 사실상 우리는 100%다혈질, 혹은 100%우울질 같은 사람은 없다. 우리의 기질은 이 네 가지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것이다. 예를 들면 다혈질20% + 담즙질50% + 우울질10%+점액질20% 식으로 말이다. 자신의 기질상의 특성들을 잘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단점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아래의『기질테스트』가 여러분들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되기를 원한다. 이 단어 연상 테스트는 플로렌스 리타우어와 프레드 리타우어가 발전시켜 그들이 개최한 『인격플러스(Personality Plus)』세미나에 참가한 수많은 이들에게 시행한 바 있는 테스트이다.

    2. 기질 테스트

    1) 각 열의 네 단어들 가운데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단어 하나 앞에 V표를 하라. 때로는 정확히 자신에게 들어맞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하더라도 가장 근사한 단어 앞에 V표를 하도록 하라.

    1

    2

    3

    4

    5

    6

    7

    8

    9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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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17

    18

    19

    20

    ( )활발함,

    ( )의지강함,

    ( )복종적,

    ( )사려깊음,

    ( )새로운생각,

    ( )만족해함,

    ( )계획가,

    ( )자신에참,

    ( )질서정연,

    ( )친절함,

    ( )과감함,

    ( )괘활함,

    ( )이상적,

    ( )과시적,

    ( )중재자,

    ( )신중함,

    ( )듣기잘함,

    ( )만족잘함,

    ( )완전주의자

    ( )활기참

    ( )모험적,

    ( )쾌활함,

    ( )자기희생적,

    ( )자기통제적,

    ( )공손함,

    ( )감수성예민,

    ( )인내심강함,

    ( )충독적,

    ( )자상함,

    ( )신실함,

    ( )유쾌함,

    ( )일관적,

    ( )독립적,

    ( )결단력,

    ( )음악적,

    ( )끈질김,

    ( )충직함,

    ( )우두머리

    ( )허용적,

    ( )과감함,

    ( )분석적,

    ( )설득력있음,

    ( )사교적,

    ( )경쟁력,

    ( )수줍어함,

    ( )자기신뢰,

    ( )적극적임,

    ( )계획적,

    ( )솔직함,

    ( )익살스러움,

    ( )싹싹함,

    ( )점잖음,

    ( )유순함,

    ( )천연덕스럼,

    ( )의견제안잘함,

    ( )말을많이함,

    ( )지도자타입,

    ( )도표잘그림,

    ( )생산적,

    ( )행동적,

    ( )융통성없음 .

    ( )조용함.

    ( )자기의지강함

    ( )설득력있음.

    ( )꽤많음

    ( )활발함

    ( )주동적

    ( )부끄러워함.

    ( )낙천적.

    ( )강력함.

    ( )세심함.

    ( )확신에참.

    ( )고무적.

    ( )심오함.

    ( )쉽게어울림

    ( )관용적

    ( )생동적

    ( )귀여움

    ( )인기좋음

    ( )균형잡힘

    21

    2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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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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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37

    38

    39

    40

    ( )뻔뻔스러움.

    ( )절제못함,

    ( )마지못해함

    ( )까다로움,

    ( )참을성없음,

    ( )인기없음,

    ( )완고함,

    ( )평범함,

    ( )쉽게성냄,

    ( )순진함,

    ( )근심많음,

    ( )지나치게예민,

    ( )결단력약함,

    ( )일관성없음,

    ( )지저분함,

    ( )느림,

    ( )고독즐김,

    ( )행동이느림

    ( )복수심이강함,

    ( )타협적

    ( )명령형보스기질,

    ( )냉정함,

    ( )성잘냄,

    ( )두려움많음,

    ( )불안정,

    ( )끼어들기싫음,

    ( )되는대로의성격,

    ( )비관적,

    ( )목표없음,

    ( )부정적태도

    ( )내향적,

    ( )무뚝뚝함,

    ( )무질서함,

    ( )편협함,

    ( )침울함,

    ( )고집셈,

    ( )남위에올라 섬,

    ( )의심많음,

    ( )불안함,

    ( )비판적,

    ( )수줍음,

    ( )열정없음,

    ( )반항적,

    ( )잘잊음,

    ( )우유부단,

    ( )예상못하는성격,

    ( )즐겁게해주기힘듬

    ( )교만 힘든성격

    ( )변론적,

    ( )신경질적,

    ( )일에미침,

    ( )소심함,

    ( )지배적,

    ( )비관용적,

    ( )불평잘함,

    ( )과시적,

    ( )게으름,

    ( )성미급함,

    ( )억지로함,

    ( )교활함,

    ( )맥없음

    ( )용서안함

    ( )장황함

    ( )솔직함

    ( )끼어들기잘함

    ( )사랑없음

    ( )주저함

    ( )허용적

    ( )외톨이

    ( )냉담함

    ( )공을차지하고싶음.

    ( )말많음

    ( )낙심잘함

    ( )무관심

    ( )남이용잘함

    ( )회의적

    ( )목소리큼

    ( )침착못함

    ( )신중치못함

    ( )변화무쌍

    2) 이제, 위에 표시한 대로 아래의 페이지에 다시 표시하고, 장단점의 합계를 내어 보라.

    ◆ 장점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 )활발함,

    ( )쾌할함,

    ( )사교적,

    ( )설득력있음,

    ( )새로운생각,

    ( )활발함,

    ( )주동적

    ( )충동적,

    ( )낙천적,

    ( )익살스러움

    ( )유쾌함,

    ( )괘활함,

    ( )고무적,

    ( )과시적,

    ( )쉽게어울림

    ( )말많이함

    ( )생동적,

    ( )귀여움,

    ( )인기좋음

    ( )활기참,

    ( )모험적,

    ( )설득력,

    ( )자기의지강함,

    ( )경쟁적임

    ( )꾀많음,

    ( )자기신뢰

    ( )적극적

    ( )자신감

    ( )솔직함,

    ( )강력함,

    ( )과감함,

    ( )확신에참

    ( )독립적,

    ( )결단력,

    ( )의견제안잘함,

    ( )끈질김,

    ( )지도자타입

    ( )우두머리

    ( )생산적,

    ( )과감함,

    ( )분석적,

    ( )의지강함,

    ( )자기희생적,

    ( )사려깊음,

    ( )공손함,

    ( )감수성예민,

    ( )계획가,

    ( )계획가,

    ( )질서정연,

    ( )신실함,

    ( )세심함,

    ( )점잖음,

    ( )애상주의적,

    ( )심오함,

    ( )음악적,

    ( )신중함,

    ( )충직함,

    ( )도표잘그림,

    ( )완전주의자,

    ( )행동적,

    ( )융통성

    ( )조용함.

    ( )복종적

    ( )자기통제적

    ( )수줍어함

    ( )만족해함

    ( )인내심많음

    ( )부끄러워함

    ( )자상함

    ( )친절함.

    ( )싹싹함.

    ( )일관적.

    ( )유순함

    ( )천연덕스럼.

    ( )중재자

    ( )관용적

    ( )듣기잘함

    ( )만족잘함

    ( )허용적

    ( )균형잡힘





    ◆ 단점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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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 )뻔뻔스러움

    ( )무절제함

    ( )장황함

    ( )잘잊음

    ( )끼어들기

    ( )예측불허

    ( )되는대로성격

    ( )허용적

    ( )쉽게성냄

    ( )순진함

    ( )공을차지하고싶음

    ( )말많음

    ( )무질서함

    ( )일관성없음

    ( )지저분함

    ( )과시적

    ( )목소리가큼

    ( )침착치못함

    ( )불안함

    ( )변화무쌍

    ( )명령형보스기질

    ( )냉정함

    ( )반항적

    ( )솔직함

    ( )참을성없음

    ( )사랑없음

    ( )완고함

    ( )교만함

    ( )변론적

    ( )신경질적

    ( )일에미침

    ( )무뚝뚝함

    ( )지배적임

    ( )편협함

    ( )남이용잘함

    ( )고집셈

    ( )남위에올라섬

    ( )성미급함

    ( )신중치못함

    ( )교활함

    ( )수줍어함

    ( )용서안함

    ( )성잘냄

    ( )까다로움

    ( )불안정

    ( )인기없음

    ( )즐겁게해주기힘듬

    ( )비관적

    ( )외톨이

    ( )부정적태도

    ( )내향적

    ( )지나치게예민

    ( )낙심잘함

    ( )비관용적

    ( )침울함

    ( )회의적

    ( )고독즐김

    ( )의심많음

    ( )복수심강함

    ( )비판적

    ( )맥없음

    ( )열정없음

    ( )마지못해함

    ( )두려워함

    ( )우유부단함

    ( )끼어들기

    ( )주저

    ( )평범함

    ( )목표없음

    ( )냉담함

    ( )근심많음

    ( )소심함

    ( )결단력약함

    ( )무관심

    ( )불평잘함

    ( )느림

    ( )게으름

    ( )행동느림

    ( )억지로함

    ( )타협적





    전체 합계

    장점합계

    ( )개

    단점합계

    ( )개

    다혈질

    ( )개

    담즙질

    ( )개

    우울질

    ( )개

    점액질

    ( )개

    IV. 결론

    1. 약점은 극복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런 기질에 대해 공부하는 근본목적은 우리 안에 있는 장점을 잘 활용하고,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어 성령 충만함을 받기 위함이다. 헨리 브란트 박사는 『성숙한 사람』을 가리켜 말하기를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아 장점과 단점을 구분할 수 있고,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계획을 세울 줄 아는 사람" 이라고 했다. 우리는 성장해야 한다. 지금의 단계에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자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수 년전, 혹은 수 십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가진 채 여전히 이웃들에게 상처를 입히며 고집과 내키는 대로의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 자신이 어떤 타입의 사람이어서 어떤 장점과 어떤 단점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선명하고도 확실하게 객관적으로 알고있을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단점들은 개선되어져야 한다. 당신의 천성이 꼭 사라져 버려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당신의 개성이 살아있는 채 당신의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자신의 약점을 세심히 솔직하게 연구하면 자신의 생활에 있어 하나님의 힘을 필요로 하는 부분을 쉽게 지적해 낼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기억하자. 하나님은 그의 계획하에 인간을 그의"영광을 위해"창조하셨다.(계4:11)그러므로 아무도 자기의 타고난 성품을 탓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선 당신의 기질 전체를 뜯어 고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본래의 성품을 십분 활용하신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탄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우리의 약점에 굴복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스리는 결과와 동일하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약점을 극복할 것인가?

    2.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1) 약점을 죄로 여겨야 한다.

    약점을 단순히" 그게 내 천성인걸!," "나도 어쩔 수 없어! 나라는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라는 식으로 변명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단점과 약점을 죄로 여기지 않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약점 쓰레기 더미를 방치하고 있거나 회피하려고 한다. 죄가 무엇인가? 그것은『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을 말한다. 의지박약, 불안, 이기심, 자만, 성급, 잔인, 우울, 자기중심적, 비판적, 비관, 게으름, 조롱, 고집, 우유부단...! 아름다운 것인가? 미안하지만 이런 것은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선 당신의 백성들이 이런 누더기들을 걸치고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심지어 그것은 우리인간도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말다툼과 비방과 모든 악의를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대하 며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엡4:30- 32)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근심거리라는 것이다. 버려야 할 쓰레기라는 것이다.

    인간약점의 근원: 이기심

    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

    의지의 박약

    불안

    자아중심

    감정적 불안정

    자기만족

    성급함

    잔인성

    격한 성격

    우울

    자기중심적

    비판적

    비관적

    게으름

    조롱

    고집

    우유부단














    분 노



    공 포












    이 기 심



    위의 도표는 우리의 각 기질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단점들이 어디로부터 궁극적으로 비롯되고 있는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모든 단점들은 크게는 분노와 두려움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고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모든 요소들이 다 이 분노와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 분노의 변형된 16가지 : 격분, 증오, 폭동, 시기, 공격, 험담, 야유, 앙심, 비통, 악의, 불평, 질투, 후회, 편협, 비난, 원한

    • 공포의 여러가지 표현 : 근심, 의심, 소심, 우유부단, 미신, 움추림, 고집, 시비, 걱정, 열등감, 비겁, 혐의, 주저, 실망, 교만, 수줍음

    다혈질과 담즙질이 가지기 쉬운『분노』의 여러 유형들과 우울질과 점액질이 가지기 쉬운『두려움(공포)』의 여러가지 유형들을 살펴보라. 이 소름끼치는 더러운 것들은 왜, 무엇 때문에 우리의 심령속에 생성하는가?

    그렇다. 그 냄새나는 흙탕물의 근원에는 바로『이기심』이라는 독샘이 자리하고 있다. 이기심이란 자기 본위주의, 자기 중심주의를 말한다. 이기심이란, 말 그대로 『나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다. 내가 가지고 싶고, 내가 누리고 싶고, 내가 받고싶은 것에 대해 충족이 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분노한다. 시기하고 불평한다. 내게 있는 것을 잃게될까, 내가 손해보게될까, 내가 인정받지 못할까, 나의 기득권이 달아나게 될까 싶기 때문에 우리에게 덤벼드는 것이 두려움이다. 공포요 염려요 수줍음이며 열등감이다. 이것이 이기심이다.

    이기심은 사탄(사14), 아담과 이브(창3), 그리고 가인이 근본죄악이기도 했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생기는 비인도적인 잔인성, 태고 적부터 20세기에 이르는 동안 일어났던 모든 문제와 슬픈 사건들은 모두 바로 이 이기심 때문이었다. 이기심이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물론 여러 형태로 나타나겠지만 결국은 사탄이 노리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利己心)이다. 하나님과 이웃을 배제하고 오직 나 자신만을 모든 사고와 행동의 중심으로 삼는것.. 이것이 죄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선 결코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누릴 길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이 이기심이 바로 우리 인간자신들을 분노케 하고 두렵게 하는,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불행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주범(主犯)임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이것을 치유하기를 원하신다.

    기억하라. 이기심이라는 근원에서 나오는 모든 이러한 쓰레기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내리셨던 축복이 아니다. 그것들을 하나님은 싫어하시고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분명히 죄이다. 이것들은 사탄의 작품들이다. 이것들과 우리는 대항해야 한다. 바로 우리의 적인 것이다. 우리의 죄(적)가 무엇인지 알아야 그것에 대한 치유를 하나님께 의뢰할 수가 있다. 자! 당신은 이 죄들을 인정하라!

    (제안) 솔직하고도 객관적으로 자신에게서 인정되는 약점들의 목록을 작성하여 보라. 그리고 그것들을 기억하라. 가능하다면 그 목록을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면 더 좋겠다.

    2) 죄를 언제나 고백하라

    요한1서 1장 9절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 귀절은 주로 구원이 필요한 죄인을 위해 많이 인용되는 귀절이긴 하지만 사실은 애초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요한은『나의 자녀들아』이라는 말을 쓰고있는데 이는 그가 믿음으로 인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시편 66:18에서는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고백하지 않은 죄가 남아 있을때 그리스도인의 기도생활은 효과가 없게된다.

    분노와 두려움을 죄로 여기지 않아도 기도는 효과를 상실한다. 당신의 죄에 대해 하나님 앞에 그것이 잘못된 죄임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요한 1서 1:9절은 몇 번이나 사용할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하는 이가 있는데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당신이 죄를 지을 때마다, 또 죄를 의식하고 있을 때마다"이다. 죄를 지은 시간과 고백하는 시간사이에 아무 시간적 공간을 두지 않도록 하자. 당신이 화를 낼 때 마다, 두려워하고 낙심해있을 때마다 언제나 그것이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악을 범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즉시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리하였을때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실 것인가에 대한 약속이 바로 요한1서 1:9의 뒷부분이다. 하나님께선 그 죄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제대로 알고있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시인하는 자체만으로도 용서의 조건이 되심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분의 약속을 우리는 믿어야한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장이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3) 하나님께 나쁜 습관과 죄를 없이해 주실것을 간구하라.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6:14-15)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분노와 공포로부터 승리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가 주님께 간구만 하면 그의 뜻에 따라 간구한 것은 틀림없이 응답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내 천성인데 난들 어떡하겠어요?" 그렇다. 우리의 약점이나 결점이 우리의 힘이나 노력으로 고쳐질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마는 그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불가능한 일인가를 우리는 알고있고 또 인정해야 한다.

    위의 말씀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간구가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을 또한 확신해야한다. 우리보다도 하나님은 더욱 우리의 약점들을 고치고 싶어하시는 분이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실 수 없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분" (마28:18)임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분을 신뢰하라.

    4) 성령충만을 간구하고 그리스도안에 거하라.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은 엄격히 다르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무슨 특별한 신비한 체험이나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구세주로 모셔 들일 때 동시에 일어나는, 평생에 단 1회적인 사건이다. 우리는 우리안에 성령이 들어오시도록 요구할 필요가 없다.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主)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결단하는 순간 성령은 이미 우리안에 들어와 계시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3:20의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이 사실이 분명히 기록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때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 예수의 영(성령)이시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천지 차이이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성령이 그 안에 계시다고는 아무도 단정할 수 없다. 로마서 8:9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말은 성령이 그 안에 계시지 않은 이는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만약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잘 알고 있기도 하고 교회도 오래 다녔으나, 그분을 당신을 구원할 구세주 그리고 당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지 못했다면 우선 당장 할 일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마음속에 영접해 들이는 일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자에게만 계시며, 이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수 있다. 그리고 더욱 분명한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이 성령님의 도움에 의해서만 우리의 약점을 고칠수 있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다.

    한번 우리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우리안에 계신 그분은 우리를 진리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요16:13), 우리의 죄를 책망하시며(요1 6:18), 하나님의 사역과 계획과 미래에 대해 알려주신다.(요16:13). 그분은 우리를 도우시며(롬8:26/막13:11)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하시며(갈5:22),우리가 옳은 일을 하도록 도우시기도 한다.(요일2:2 7). 예수께서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성령이라는 제3인칭의 존재로 믿는 자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이 "내게 성령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경은 "성령충만"을 요구할 따름이다. 그것(성령충만)은 단순한 제안이나 요청이 아니다.

    에베소서 5:18에서 주님은 "오직 성령충만을 받으라.(Be filled with the Spirit)" 라고 분명한 명령형 문장을 사용하셔서 말씀하셨다. 오늘날엔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일에 있어서 가장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이 큰 문제이다. 훌륭한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성령의 충만함과 방언을 말하거나 어떤 환상적인 체험을 하는 것을 동등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령충만이란 어떤 체험이나 느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성경은 이 에베소서 5:18에서 "성령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하면서 현재 시제를 사용함으로써 계속적인 의미로 『성령충만』은 우리 일생의 일회적인 경험이 아니라 매순간마다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명령이다. 원어인 그리이스어를 보면 이 귀절은 "당신들은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하시오"의 뜻을 지닌다. 이 성령충만은 하나의 삶의 양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자리에 누울 때까지 계속 성령충만 하도록 명령받았다.

    성령으로 충만하도록 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 우리를 두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활동이 우리 삶의 전 영역에 걸쳐 나타나게 하라는 의미이다. 왜 우리는 우리 삶의 주도권을 성령님께 넘겨드려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애초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구원자요 주인(主, Lord)으로 모셔들였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자의에 의해 우리 삶의 주권을 가지시도록 영접 되어졌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지배(통치)아래에 놓여있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노예나 꼭두각시가 되어 로보트처럼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 무지한 탓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압제나 횡포가 아니다. 우리는 100%의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자유로운 도덕적 행동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 격려하시지만 행동은 우리가 해야한다. 애초부터 성령께선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우리를 강압적으로 마음의 문을 부수고 들어오신 이후 에도 그분은 결코 우리를 압제하시지 않으신다. 우리의 인격으로 그분의 뜻에 동의하여 그분의 능력을 힘입어 바로 우리가 사는 것이다.

    교통표지판이나 이정표를 따라 자동차 연료의 힘을 입어 우리가 성루로 간다고 해서 우리는 교통표지판이나 휘발유, 자동차의 노예인가? 교통법의 꼭두각시인가? 우리가 기쁨으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가르침과 인도와 책망에 순종하는 것은 그 성령하나님의 인격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우리를 향한 그 전폭적인 사랑과 신실성을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시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모든 방법(法)과 길을 훤히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분이야말로 우리가 우리인생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데 있어 유일한 진정한 안내자이시며 또한 원동력이시다.

    성령충만이란 우리 인생 삶의 길을 성령의 지시에 전적으로 따라 우리가 운전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충만은 느낌이나 별난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감정적인 쇼킹한 경험을 동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한 사람과 육신적인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려고 오셨다. 에베소서 5장은 우리가 성령충만할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써(엡5:20)그분을 영화롭게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육신의 힘으로 기쁨과 사랑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육신의 힘으로 우리들의 기질상의 많은 약점들을 개선시키고 변화시키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성령충만한 사람에겐 오히려 아름다운 성품들의 열매가 맺히게 된다.

    갈라디아서 5:22-23에는 "성령님이 지배하는 생활에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함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힙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현대인의 성경 번역판) 여기에 나오는 목록들을 보라. 앞에서 우리의 이기심 때문에 가지게 된 우리 안의 쓰레기들과 어떻게 다른가? '증오. 시기. 험담. 야유. 앙심. 비통. 불평. 질투. 후회. 비난/근심. 의심. 우유부단. 움츠림. 소심. 고집. 열등감. 비겁. 주저. 실망. 교만...'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기질을 갖고 있든 성령이 충만하기만 하며 그의 삶에는 이 아홉 가지의 삶의 특성이 열매로 맺히고 점차 자라가게 되는 것이다.

    󰋯 사랑, 곧 모든 이들(원수까지도)을 향한 사랑이다.

    󰋯 희락, 곧 기쁨(joy),환경을 초월한 변함없는 기쁨이다.

    󰋯 화평(peace),곧 모든 두려움과 근심 대신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평안이다.

    󰋯 오래참음(long suffering:인내), 즉 모든 모욕과 고통과 비난중에서도 묵묵히 일을 수행하는 능력이다.

    󰋯 자비(gentleness), 곧 부드러운마음에서 나온 사려깊고 예의 바르고 젊잖고 신중하고 이해하려는 자세이다.

    󰋯 양선(goodness), 즉 자신과 소유물에 대해 인색하지 않고 관대한 마음, 이기심 없는 모든 친절과 선한 일이다.

    󰋯 충성(faith) 즉,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의지하는 태도, 신뢰성, 성실한 자세를 말한다.

    󰋯 온유(meekness),악을 악으로 갚지않는, 따뜻하고 겸손한 마음이다.

    󰋯 절제(self-control), 즉 자신의 기질상의 약점을 자제하는 능력, 자기훈련, 자기조절 능력을 말한다.

    성령께선 우리가 그분의 활동을 무시하고 지속적으로 그분의 존재와 능력을 우습게 여기지 않는 한 언제나 우리 삶의 한부분 한부분에 개입하실 것이다.

    고함을 지르고 꽃병을 집어 던진 다혈질 사람에게 성령께선 즉각적으로 그 분노가 잘못된 죄임을 지적하신다."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알겠지? 그 방법은 이 문제의 해결의 좋은 방법일 수 없어! 자 지금 곧 그와의 화해를 시도해라. 전화를 걸어!" 성령의 사람은 그 말씀에 동의하고 순종하게 된다. 그는 곧 전화기 앞으로 달려간다.

    다혈질의 사람으로부터 폭언과 꽃병세례를 받았던 우울질의 사람은 모욕감과 증오감에 시달린다. 두통을 느끼고 이를 갈며 침대에 누워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께선 내버려두실리 없다. "나는 네가 그 흉칙한 증오심으로 그렇게 몸과 마음에 깊은 고통을 느끼며 있는 것이 싫다. 너의 평안이 내 기쁨이다. 그를 용서해라. 나도 너의 모든 죄들을 용서해 주지 않았니? 자! 일어나거라. 그에게 화해를 청해라. 그가 너의 화해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너에겐 평화가 있게 될게다. 어서 전화를 걸어라."--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찌꺼기를 남겨두지 않는다.

    자신의 약점으로 인한 실수들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싫어하므로 그는 신속히 그 실수들을 시인하고 해결한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옛날의 그 편협적이고 고집과 독선과 혈기와 자기학대와 근심걱정의 지저분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전율할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더 이상 주인이나 통치자로 모시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고 성령의 지시에 계속 불순종함으로 성령의 능력을 소멸시켜 버렸다. 그들의 직분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근심걱정으로 우울증에 걸린 목사님이나 분노와 혈기로 위궤양을 앓고있는 장로님도 사실은 성령을 무시하고 인정치 않으며 성령의 활동을 훼방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통해선 하나님께 선 기쁨과 영광을 얻으실 수가 없다. "내가 분명히 말해둔다.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님에 대한 모독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15:31) 개역성경은 여기의 성령모독을『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그 인격이 변화되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아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계신 성령의 능력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였으니 그는 분명히 성령을 모독한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심각한 범죄인가!

    V. 결론

    물론 우리의 옛 성품과 자아를 상대하여 싸우는 싸움은 쉬운 것은 아니다. 자신의 약점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성령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다가도 또 여전히 옛 자리로 되돌아와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는 우리는 실망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포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노리는 점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실망하지 아니하고, 죄를 지었을 때마다 또 죄를 깨달았을 때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요청하고 그분의 지시에 순종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 결국에 가선 옛 습관이 더이상 당신을 괴롭히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느날 문득 되돌아 보았을때 당신은 과거와는 달라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우울질과 다혈질이 혼합된, 극도의 소심함과 신경질적인 포악함의 사람이었다. 사람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과 이기심, 예민한 성격등으로 인해 언제나 소극적이고 박약한 모습으로 지내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성령께선 너무나 많은 부분들 속에서 기적을 일으키셨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나의 기질상의 약점 때문에 이 공동체 속에서 지체들에게 아픔을 주고 그 때문에 나 스스로 자학에 빠지곤 하는, 여전히 변함없는 우울질과 다혈질의 사람이긴 하지만, 불과 지난 몇 년 전과 비교만 해보아도 나의 기질적 약점들은 많이 깍이고 다듬어진 것을 선명하게 확인하게 된다. 나 자신이 이를 위해 이를 악문 고행과 수양을 쌓았기 때문인가? 기껏 내가 한 것이라곤 주님을 떠나지 않고 그분과의 교제를 중단하지 않은 것밖에 없다.

    나는 기대한다. 지금까지도 나를 조금씩 변화시켜 오신 주님께서 앞으로도 나의 남은 날 동안 변함없이 나를 지도하시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다듬어 가실 것을 말이다. 나는 나의 약점들을 매일 점검하고 있다. 그것들은 나의 적이다. 내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들이다. 여러번의 실패와 좌절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내가 담대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이 적들이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라는 확신 때문이다. 예수 안에서 나는 능히 이 약점들을 물리칠 수 있음을 확신한다. 그것은 여러분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담대하라. 승리를 확신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원본 : 생명의 말씀사 / 팀 라헤이 “성령과 기질”, 기질TEST는 책과 무관.

    요약 : 낮, 해, 밤, 달 의 발췌문을 재 편집하여 인용함.



    팀 라하이, 아름다운 애정생활


    책은 원명은 [Act of Marriage] 
    미국의 1976년과 1977년 종교출판계에서 베스트셀러 랭킹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결혼 행위]또는 [부부의 사랑 행위]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나 우리에게는 너무 직선적인 것 같아 [아름다운 애정생활]로 했다. 
    결혼 적령기에 미달되는 모든 미성년자들은 이 책을 읽을 수 없으며 성신 부부들과 내일의 결혼을 준비하는 단계에 있는 분은 누구나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은 여러분의 인생을 즐겁게 해줄 것이며 더 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팀 라하이 박사는 결혼문제에 있어서 세계적인 전문가로 그를 통해 파탄지경에 이른 많은 가정들이 다시 모여 행복을 찾았으며 불행을 되씹어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찾았다. 
    아름다운 애정생활은 당신의 생활에 무한의 가능성을 안겨다 줄 것이다

    저자소개

    [행복한 결혼생활], [성경공부의 비결]등 수많은 저서로서 우리에게 알려진 팀 라헤이 박사는 스콧드 메모리얼 침례고회의 목사님이며 미국 샌 디아고에 소재한 크리스천 헤리티지 대학의 총장이다

    "나는 모든 부부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과 알 필요가 있는 사실들을 저들로 하여금 호의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내 아내 비벌리의 도움으로 본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나는 목사의 아내로, 세미나의 강사로 그리고 크리스천 헤리티지 대학의 사무주임인 아내의 광범위한 상담경험에 힘입은 바 컸습니다." 

    "많은 부부들과 상담한 결과 우리 둘은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예정해 주신 모든 축복을 향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다른 많은 부부들이 저들의 성관계를 불쾌하고 혐오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수년 간의 연구와 실험 그리고 상담을 통하여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그러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몇가지 교수원칙을 개발했습니다. 우리는 카운슬러와 목사님들의 요구를 받고, 이와 동일한 원칙을 책으로 발간하는 경우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교회가 참 좋다 
    혼인전 목사님께서 과제를 준다. 
    하나는 화남금여이고 또 하나는 이 책이었다. 
    화남금여를 통해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이 책을 통해 실제적인 애정생활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뜨거운 감자와 같은 주제를 다룬 책이지만, 세속적인 책과 달리 통속적이지 않고 성경적 가치관에서 실제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옛날에는 표현이 안되었지만 갈수록 성문제는 가정 행복과 부부행복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20대에서 40대 부부들에 대한 갤럽 조사에 의하면 성적인 불만을 가진 부부가 74퍼센트에이르는 반면 부부생활에 만족하는 부부는 10퍼센트 밖에 안된다고 한다. "

    더욱 심각한 것은 만족하지 못한 부부들 중에서 해결방법을 찾기 위해 함께 노력하지 않는 부부가 56퍼센트나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혼사유의 90퍼센트가 솔직하게 알고보면 성적 부조화와 불만 때문이라는 충격적인 통계가 나오고 있다.

    성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첫째, 종족 보존
    둘째, 사랑의 표현
    셋째, 인생의 환희와 즐거움

    우리는 이 하나님의 목적을 다 이룰 때에 행복하게 살 수있다.
    성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경은 성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기도시간 외에는 절대로 분방하지 말고 성생활을 피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잠언  5장 15절에서 20절은 가정에서 부부간의 성적 즐거움의 샘물을 가정 밖으로 넘치게 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구약의 아가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랑을 메시지로 담고 있지만 성생활에 적극적인 테크닉도 가르치고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다.

    성공적인 성생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배우자와 성에 대한 자세와 실제 성생활을 위한 테크닉의 개발이 필요하다. 우선 부부생활에 대한 자세는 성경적인 원리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 몸을 자신이 주장하지 못하고 배우자가 주장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즉 상대방이 섹스를 요구할 때에는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 성경적 자세다. 거절할 수밖에 없을 때는 상대방이 충분히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도록 지혜롭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특히 성적으로 아내보다 더 충동적인 남편의 요구에 아내는 가급적 거절하지 말아야한다.

    남편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내로부터 충족받기를 원하는 필수조건의 제1위는 '성적인 만족감'이라는 연구조사가 나와 있다.

    만약 남편이 아내에게 성적인욕구와 만족을 얻지 못한다면 아내를 사랑하는 여부와 관계없이 남편은 다른 방면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아내들은 명심해야 한다.

    남편의 성적 요구에 아내가 단호하게 거절할 때 남편들은 아내들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극심한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 거절당했을 때의 남편들의 심정을 모아본 자료를 소개한다

    "심한 모멸감을 맛보았다. 다시는 내가 요구하나봐라 하는 심정이 들었다."

    "자존심이 상해 죽고 싶을 정도였다." "미워서 죽이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아내가 보기 싫었고, 다른 여자를 사귀고 싶었다."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두고보자라는 복수심이 불탔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의 성적 특성을 이해하여 아내가 만족감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관계는 평등한 것이며 서로 보답하는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서로의 만족을 위하여 성교를 시도하며 애무하고 성행위에 참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만아니라 우리의 권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남자를 백열전구에 여자는 전기다리미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여자의 경우에는 충동보다도 분위기와 접촉을 통한 애정표현에 더 의지하고, 남자보다 더 여유있는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부부는 잠자리에서 열정적이고 적극적이 되도록 노력하고 변화를 시도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다양한 기교와 테크닉을 위해 서로 합의하에 협력한다.

    한국 교회가 성생활에 대한 언급을 터부시하고 있지만, 건전한 성생활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배우고 훈련받아 세속적인 성문화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성생활에 성공하라

    관심있는 분은 팀 라하이 목사가 지은 <아름다운 애정생활>이라 는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성생활의 성공은 행복한 부부의 아름다운 특징이다. 


    팀 라헤이(Tim LaHaye, 1926년 4월 27일 ~ 2016년 7월 25일) 
    기독교 목사, 소설가로, 제리 B. 젱킨스와 함께 쓴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로 알려져 있다.

    종말론적 소설인 <레프트 비하인드>의 저자 팀 라헤이가 지난 7월 25일 별세했다(2016. 7. 25).
    7월 25일 소설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로 수백만 명의 독자에게 영향을 미친 목회자이자 저자, 라디오 진행자인 팀 라헤이가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했다. 향년 90세. 그가 설립한 사역 단체에서는 라헤이가 뇌졸증으로 쓰러진 후 며칠 후에 숨졌다고 발표했다.
    라헤이와 제리 젠킨스는 1995년부터 16권의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를 출간했다. 세상의 종말을 주제로 다루는 이 시리즈는 6천5백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최근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되기도 했다.
    라헤이는 소설을 쓰기 전 목회자로 왕성히 활동했다. 그는 샌 디에고 크리스천 칼리지와 십여 개의 기독교 초중등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목회자들을 조직해 조지 W. 부시 등 정치인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보수 단체인 '미국을 걱정하는 여성들'을 설립하기도 했던 그는 아내 비벌리와 함께 라디오 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타임> 지는 그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복음주의자 25명 중 한 명으로 선정한 바 있다.
    그와 <레프트 비하인드>를 공동 저술한 젠킨스는 성명서를 통해 라헤이가 “영적 거인”이었다고 발표했다.
    젠킨스 “내가 아는 팀 라헤이는 목회자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며 자신의 신앙을 나누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나이와 성, 사회적 지위와 상관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염려를 함께 나눴다.”라고 말했다.


    1월 1일(목) 요한일서 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생명의 말씀(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at and our hands have touched--this we proclaim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생명의 말씀(the Word of Life) 

    투 로구 테스 조에스(του λογου της ζωης)
    호 로고스 호 조에(ὁ λόγος ὁ ζωή)

    설교 제목 / 말씀이 살아 역사할 때

    핵심 본문 / 히브리서 4:12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 요한복음 6:63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1️⃣ 서론 : 왜 어떤 말씀은 지나가고, 어떤 말씀은 나를 바꾸는가

    • 우리는 말씀을 자주 듣지만, 삶이 바뀌지 않을 때가 있다

    • 말씀이 정보로 끝날 때 vs 살아 역사할 때의 차이

    • 질문: 오늘 나는 말씀을 ‘듣는 사람’인가, ‘경험하는 사람’인가? 

    2️⃣ 본론 ① 말씀이 살아 있다는 뜻

    •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의 글이 아니라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은:

      • 마음을 찌르고

      • 생각을 드러내며

      • 방향을 바꾼다

    • 👉 말씀이 우리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다룬다 

    3️⃣ 본론 ② 말씀이 역사하지 못하는 이유

    • 마음이 닫혀 있을 때

    • 이미 답을 정해 놓고 말씀을 들을 때

    • 순종 없는 듣기만 반복할 때

    • 👉 말씀이 문제가 아니라, 말씀 앞에 서는 태도가 문제일 수 있다  

    4️⃣ 본론 ③ 말씀이 살아 역사할 때 일어나는 변화

    1. 생각이 변한다 – 세상 기준에서 하나님 기준으로

    2. 마음이 깨어난다 – 무감각에서 회개와 소망으로

    3. 삶이 움직인다 – 결단과 순종이 생긴다

    말씀은 감동으로 끝나지 않고 결정을 낳는다

    5️⃣ 결론 : 오늘 말씀이 역사하게 하라

    • 작은 순종 하나가 말씀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

    • “이 말씀을 오늘 어떻게 살 것인가?”를 붙잡자

    • 기도 : “하나님, 말씀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소서.” 

    ✍️ 한 줄 정리 /  말씀이 살아 역사할 때, 사람은 변하고 삶은 새로워진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진 그분!
    말씀: 요한일서 1장 1절(맥체인 성경읽기, 12월 2일, 화)
    기독교 신앙은 추상적 교리가 아니라 접촉의 신앙이다. 요한은 자신의 서신을 거대한 신학 체계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는 먼저 경험을 말한다.

    요한일서 1:1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청각              시각                                                    촉각 

    복음은 이렇게 감각의 언어로 시작된다. 
    하나님은 멀리서 응시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우리의 몸과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오신 분이다. 
    요한은 이 진리를 세 개의 동사로 압축해 낸다. 
    듣다(청각), 보다(시각), 만지다(촉각)

    사람의 다섯 감각 기관 : 청각(聽覺) 2%, 시각(視覺) 5%, 후각(嗅覺) 35%, 촉각(觸覺) 1%, 미각(味覺) 15%

    들었다 : 하나님이 먼저 말을 걸어오신 사건

    신앙은 인간이 신을 찾아 나선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신 계시 사건이다. 
    우리의 ‘들음’은 하나님의 먼저 말씀하셨다는 증거다. 
    듣는 신앙은 '순종하는 귀'를 가진 신앙이다. 
    여기서 듣기는 지적 동의를 넘어 영혼의 개방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굳은 마음을 깨뜨리고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는 영적 소환장이다.
    오늘 우리는 소음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말은 넘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희미해진 시대다. 
    그래서 듣는다는 것은 곧 세상 소음에 대한 영적 저항이다. 
    복음의 첫 문은 언제나 경청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자리에서 인간은 비로소 다시 살아난다.

    보았다 : 눈이 열릴 때 시작되는 신앙

    요한은 두 개의 '보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하나는 시각적 확인이고, 다른 하나는 깊은 관찰과 응시다. 
    보는 것은 단순한 시각적 작용을 넘어 계시적인 현실을 인식하는 해석 행위이다. 
    "그의 영광을 보니"(요 1:14)라는 요한의 말은 예수님의 외모가 빛났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 곧 사랑, 진리, 은혜가 드러났다는 뜻이다.
    흥미롭게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외모를 전혀 묘사하지 않는다. 
    그분의 키, 얼굴형, 피부색, 머리색 등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침묵이다. 
    예수님의 얼굴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면, 그 얼굴은 어느 특정 문화와 인종에 갇히고 말았을 것이다. 
    신약은 그 길을 거부한다. 
    보지 못함으로 진정으로 보게 하려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예수님의 참된 얼굴은 종교적 초상이 아니라 갈보리의 사랑, 즉 자기 비움의 영광이다. 
    보는 신앙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읽어내는 신앙이다. 
    고난 속에서 열리는 인식, 눈물이 마른 자리에 드러나는 새로운 시각, 이 모든 것이 요한이 말하는 ‘보았다’의 세계다.

    만졌다 : 촉각을 가능하게 한 성육신의 신비

    ‘만졌다’는 동사는 요한 신학의 정점이다. 
    당시 어떤 이들은 물질은 악하다고 말하며 ‘예수님의 몸은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가현설. Docetism). 
    요한은 이 한 문장으로 그것을 산산조각 냈다. 
    "우리가 그분을 만졌다."
    촉각은 실재의 가장 강한 증거다. 
    귀는 속고, 눈은 착시를 경험하지만, 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몸을 만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물질 세계 속으로 들어 오셨다는 선언이다. 
    먹고 마시고 피곤해하며, 상처 입고 피 흘리며,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실제의 몸으로 오셨다는 증언이다.

    신약은 예수님의 외모에는 침묵하지만, 몸의 실재에는 침묵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비현실적 영성’을 꿈꾸는 종교가 아니다. 
    몸으로 오시고, 몸으로 사랑하시고, 몸으로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예배하는 신앙이다. 
    무엇보다 성찬은 이 ‘만짐의 신학’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식이다. 
    떡을 떼고 잔을 마실 때 우리는 "그분의 몸을 만지는 신앙"을 체험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로의 상처를 만지고,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일, 그 자체가 깊은 신앙 행위다. 
    사랑은 언제나 몸을 가지고 온다.

    생명의 말씀은 개념이 아니라 인격이다.
    "우리가 보았고, 들었고, 만진 그분…" 그분이 바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기독교는 정보의 종교가 아니라 관계의 종교, 데이터가 아니라 접촉의 신앙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설명이 아니라 몸으로, 눈물로, 사랑으로 다가오셨다. 그래서 요한은 선언한다.
    “우리는 들었고, 우리는 보았고, 우리는 만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언하지 않을 수 없다“
    세 동사는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오늘 우리 신앙을 다시 묻는 질문이다.

    생명의 말씀은 오늘도 우리의 귀를 두드리고, 우리의 시선을 붙들고, 우리의 손을 잡고 우리 삶으로 들어오신다. 
    그분은 우리가 보았고, 들었고, 만진 바로 그분이시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이 오늘도 가슴 벅찬 이유이다.

    들리고, 보이고, 만져지는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
    우리로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우리 눈을 밝히사 당신 몸의 흔적을 보게 하소서.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마음의 손으로 당신을 만지게 하소서.
    오늘도 우리 삶을 예수님의 생명으로 채워주옵소서. 아멘.


    λόγος, ου, ὁ Storng number 3056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Pronunciation [ lŏgŏs ]  
    Etymology / 3004에서 유래


    λέγω Storng number 3004

    1. 말하다.  2. 글로 말하다.  3. 묻다  
    Pronunciation [ lĕgō ]

    ζωή, ῆς, ἡ Storng number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 네가 살아있는 동안
    Pronunciation [ zōē ]
     Etymology /  2198에서 유래


    ζάω Storng number 2198

    1. 살다.  2. 롬 7:1-3.  3. 다시 살게 되다  
    Pronunciation [ zaō ]  

    생명의 말씀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육신(Ενσάρκωση) 

    성육신(Incarnation) Incarnatio. Ενσάρκωση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 고난의 시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고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시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보다 (to look on) : 호라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보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호라오'는 깨달아 안다는 의미에서  
    '눈으로 보다, 마음으로 보다, 인지하다, 알다, 경험하다, 주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어에는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여러 개가 있다.

    먼저 '그냥 응시하다, 보여지다'라는 / '옵타노마이',

    단지 기계적이고 수동적이거나 우연한 응시를 표현하는 '겉을 보고 깨닫다,  지식을 갖다, 확신하다,  발견하다, 보다, 알다'라는 '에이도'

    ('우상'이라는 '에이돌론'에서 유래되었으며,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형태, 외모를 보고 확신해 버리면 우상이 되어 버린다)가 있다.

    또한 좀 더 진지하게 본다는 의미에서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보고 배우다, 방문하다'라는 뜻을 가진 '데아오마이',

    크게 뜬 눈으로, 현저한 어느 것을 향한 것처럼 자발적인 관찰이라는 의미에서 '경험으로 알다, 마음의 눈으로 보다,  이해하다, 생각하다'라는 뜻을 가진  '블레포'가 있다.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들을 정리하면,

    단지 응시하는(옵타노마이) 단계에서 그대로 보고 판단해 버리는(에이도) 단계로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보아(데아오마이) 경험과 마음으로 아는(블레포) 단계를 통하여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는(호라오) 것이다.

    성경은 원래부터 항상 하나님을 본(호라오) 사람이 없다(요 1:18)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호라오)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마 5:8)

    청결하고 흠 없는(카타로스) 자는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으로만 청결하고 흠없게 될 수 있다(요 15:3)

    선악의 주체가 된  '나'의 말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섬김을 받는 자가 비로소 하나님을 '호라오'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호라오)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다(에이도)(1:39).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보려고(에이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보이는(옵타노마이) 만물을 통하여 말씀을 보는(호라오)자가 하늘 백성인 성도이며, 바로 그가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는(호라오)자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며 그리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갈 2:20)이고, 영원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영생을 보는(호라오)자(요3:36)인 것이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은 성육신 교리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구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표현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말씀(로고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그는 창조와 구원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본체입니다. 성육신을 통해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입으셨지만, 여전히 신성을 가지신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단순히 인간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말합니다. 헬라어 "스케노오"는 "장막을 치다"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하나님이 성막을 통해 백성과 함께하신 것처럼, 이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만남의 장소가 되셨음을 상징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와 고통에 직접 참여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며 구원의 길을 여셨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는 표현은 성육신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온전히 드러내셨음을 말합니다. 그의 은혜와 진리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나타내며, 성육신이야말로 그 영광의 최고 표현임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1:14은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과 가까이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구체적이고도 신비로운 사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2.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 1:23은 성육신의 본질을 명확히 보여주는 구절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은 이사야 7:14의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으로,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이 인류 역사 속에 실현되었음을 드러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탄생, 즉 성령의 역사로 잉태되셨다는 점에서 성육신의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특성을 강조합니다. 처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신 예수님은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지만, 죄로 물들지 않은 완전한 인성을 가지셨습니다. 동시에 그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신성과 인성을 온전히 결합한 존재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성육신의 목적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와 고통에 동참하시고, 인간과 함께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은 성육신이 단순한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구원의 역사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셨다는 은혜의 표현이며, 성육신을 통해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길을 여신 구세주로 임하셨음을 보여줍니다.

    3.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 4:4-5는 성육신의 목적과 의의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먼저, "때가 차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되는 정해진 시점에 성육신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섭리 속에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탄생으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음을 가리킵니다. 이는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간의 연약함과 고난을 경험하셨지만, 그의 탄생이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암시하며 그의 신성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또한,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완벽히 순종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시고, 율법의 정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라는 구절은 성육신의 구속적 의미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순종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인간을 율법의 얽매임에서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완성을 이루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얻게 되었으며, 단순한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은 은혜의 놀라운 표현입니다. 갈라디아서 4:4-5는 성육신이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과 사랑이 집약된 신비로운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4. 빌립보서 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5. 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시믄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6.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7. 로마서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서 죄를 정하사."

    8. 요한일서 4:2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9.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0. 누가복음 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니라."

    11. 요한복음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12. 히브리서 10: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사람은 본성의 죄성과 연약성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는’ 죄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연약 때문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셨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며 복음의 중심적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육신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자가 되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을 묘사한다. ‘그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이들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 율법의 요구는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킴으로 얻는 의, 곧 완전한 의(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이 의를 이루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믿는 자들에게 이 의를 은혜로 주셨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 본문은 9절에 서술한 성육신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육신'(사르크스)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 4:13). 
    따라서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보였으나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수난도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라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은 '육신'이라는 한 단어로 여지없이 붕괴시킨다.

    한편 '사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 '소마'와는 다른 뉘앙스로 쓰였다. 즉 '사르크스'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이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롬 1:3,4). 
    즉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 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고전 1:24-31; 고후 10:4).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는 결코 부합될 수 없다(롬 9:8). 그러나 이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 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으며(고후 5:21), 단지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히 4:15).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성육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보여준다.

    (1) 피곤(4:6) 
    (2) 갈증(4:7) 
    (3) 하나님께 의존(5:19) 
    (4) 슬퍼 눈물을 흘리심(11:35) 
    (5) 분노하심(11:38) 
    (6) 갈등(12:27) 
    (7) 수난과 죽으심(18, 19장)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우리 가운데'(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천막을 치다'란 뜻의 동사 '스케노오'의 부정과거 능동태인 '에스케노센'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실증한다. 
    따라서 본절은 마 1:18-2:23과 눅 2:1-20의 성육신 기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다.

    한편 '에스케노센'이란 표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 장면과 본문의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해 준다.

    (1)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임시적으로' 이 땅에 계셨음을 가리킴. 
    (2)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방랑할 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정해진 곳이 바로 '장막'이었으며, 특히 요한이 곧이어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영광과 장막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40:34이하). 
    (3)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예수에 의해 확연히 밝혀졌음을 보여줌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 뜻의 '데아오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놀라운 상태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아마도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변모(Transfiguration, 마 17:2-8; 막 9:2-8; 눅 9:28-36)에 대한 회상을 기초로 하여 사용한 용어인 것 같다. 
    그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을 저희 자신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라는 간구를 연상케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부활은 그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고전 2:7; 벧전 5:4).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즉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이 본문에서도 '... 같이', '... 만큼'이란 뜻을 지닌 부사 '호스'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생자'(공동번역, '외아들')라고 번역된 '모노게누스'는 '모노스'('유일한')와 '게노스'('종류', '혈족')의 합성어로서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외아들'(눅 7:12; 9:38; 히 11:17) 또는 '외동딸'(눅 8:42)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3:16, 18; 요일 4:9),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 중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3:17; 갈 3:26)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3:18; 5:18; 10:30; 17:5, 24) 
    (3)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14:9; 빌 2:6, 7)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부 학자들은 1:1-3절의 내용을 무시하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요일 5:18의 내용을 증거로 하여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됨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요일 5:18)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은혜와 진리'(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삼하 2:6). 
    사도 요한은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등질적(等質的) 임을 묘사한 후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 사역을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셨음을 시사한다(10:30).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한편 '가득 차서 넘치는'이란 뜻의 헬라어 서술적 형용사 '플레레스'는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복음(유앙게리온. ĕuanggĕ- liŏn)

    εὐαγγέλιον, ου, τό Storng number 2098


    1. 좋은 소식에 대한 보상.  2. τὸ εὐαγ- γέλιον.  3. ὁ λόγος τοῦ εὐ.  
    Pronunciation [ ĕuanggĕ- liŏn ]
    Etymology  /  2095와 32에서 유래

    εὖ Storng number2095
    1. 잘.  2. 좋게.  3.  εὖ ποιεῖν: 좋게 행하다
    Pronunciation [ ĕu ]  
    1. 잘, 좋게, εὖ ποιεῖν: 좋게 행하다, 친절을 보이다, 막14:7, 잘하다, 올바르게 행하다, 마25:21,23, 눅19:17, 엡6:3.

    ἄγγελος, ου, ὁ Storng number 32

    1. 사자.  2. 사람이 보낸 사신.  3. 하나님이 보낸 사자: 메시아의 예고자
    Pronunciation [ anggĕlŏs ]
    Etymology  /  ‘소식을 가져 오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자(使者)(마1:20, 행5:19, 약2:25), 천사 (마13:39, 히1:4, 계1:1).

     '생명'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에스'는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는 말씀의 내용(행 5:20; 빌 2:16).
    둘째는생명을 얻게 하는 것(요 8:12; 6:35, 48:4:10, 11; 계 21:6; 22:1)

    생명이란 조에스는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에 대한 본질적인 선포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합니다.
    '들은 바'(아케코아멘)와 '본 바'(헤오라카멘)는 문법적으로 완료시제라고 합니다.
    완료시제란 생명의 말씀이 예수 안에서 마침내 실현되었으며 그것을 사도들이 예수께서 설교하셨을 때 듣고, 예수께서 사역하셨을 때 눈으로 보고 확인하였음을 의미합니다(히 1:1,2). 

    '듣고'와 '본'은 요한복음에서 '믿음'과 연결된다(요 10:27; 20:29). 
    '만진 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살라페산'은 부정과거 시제로 과거 한때 직접 만져서 느낀 것을 가리킨다. 
    요한은 이러한 관계절, 즉 '들은 바요'. '본 바요', '만진 바라'는 표현을 통해서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역사 속에 현현하신 하나님을 드러내셨으며 그의 사역과 설교를 통해 자신 안에 실현될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강조한다.

    생명의 말씀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4:6).
    생명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주고 유지하며 회복시키는 능력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적인 근거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생명의 말씀을 이 세상에 밝히 드러내어 알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빌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생명의 말씀을 이 세상에 드러내어 알리려면 먼저 내가 생명의 말씀에 대한 확실한 체험과 증거를 가져야만 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확신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빛과 생명과 사랑으로 경험하였다고 고백합니다.

    2026년 병오년을 출발하며 내가 만났던 예수님을 날마다 삶의 터전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증거하고 전파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말씀은 지금도 우리의 속사람을 살립니다.



    군주적 유일신론과 삼위일체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반삼위일체론자들(Antrinitariers)은 이 교리를 비성경적, 비이성적 교리라고 주장합니다. 
    많은 이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그리스 형이상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삼위일체가 신앙의 최고 권위로 믿어져 온 성경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면 결코 공교회의 정통교리로 자리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삼위일체 신조는 그리스 형이상학적 일신론과 논쟁하면서 성경적 신론을 확고히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의 형이상학적 유일신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당시의 시인들의 노래와 희극을 통해 전달되는 신론을 비판하였습니다.
    철학자들은 당시 시인들의 노래나 연극에 등장하는 인간동형론적 다신 신론을 비판하면서 모든 존재자들의 기원 또는 궁극적 원리인 일자에 대해 말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전통안에서 신은 초시간적, 초역사적 실재인 유일자로 간주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 모든 운동의 궁극적 원인) 또는 플로티누스(Plotinus, 250-270)의 일자(一者, the One)개념이 그렇습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us Martyr, 100-165 )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 of Alexandria,150-215)와 같은 고대 교회의 변증가들은 기독교적 유일신신앙을 다신론적 신화에 대항하는 철학적 단일신론과 동일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의 형이상학적 일신론은 양자론(또는 종속론)과 양태론이라는 기독교 삼위일체 신론의 가장 큰 두가지 이단들의 원인제공자가 되었습니다.

    ◈종속론적 또는 군주론적 단일신론(Monarchianism)의 두가지 오류들

    삼위일체 신론은 단일신성과 삼위의 개별성을 동시에 받아들여야만 설명가능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다신론적 종교와 신화가 유행하던 이방세계에서 기독교는 그 본래적인 유일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군주론적 단일신론(Mornarchianism)을 더 강조하게 됩니다.
    이 사상은 최고통치권자는 오직 한 분이기 때문에, 우주 만물에 대한 통치권자는 오직 성부 한 분 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오직 성부만이 영원 불변한 신성이시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의 본질과 동일하지 않고, 그 능력은 성부에게 종속된다고 주장하는(Justin Martyr, First Apologia, 13) 이러한 종속론적 삼위일체론은 그리스의 전제 군주적 유일신론과 그 궤를 같이 합니다.
    이 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면서 단일신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양자론(Adoptionism; 역동적 군주신론, Dynamic Mornarchianism)이라고 하고, 반대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만, 개별적 실체성을 부인하는 입장을 양태론적 군주신론(Modalistic Mornarchianism)이라 합니다.
    양자론과 양태론은 모두 신의 단일성 및 군주성을 강조하기 위해 삼위의 다양성을 반대한 대표적인 삼위일체 이단사상들입니다.

    【양자론(Adoptionism) 및 역동적 군주신론】(dynamic mornarchianism)

    양자론 또는 역동적 군주신론은 고대의 에비온파(Ebionites), 170년경 소아시아의 알로그파,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 로마의 테오도투스(Theodotus of Rome), 아리우스(Arius) 등에 의해 주장된 단일신론입니다.
    이들의 주장이 모든 면에서 일치하지는 않지만, 양자론, 또는 “역동적 군주론”이라고 부를 만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알로그파(헬라어로 “정신없는 자들”)는 로고스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기를 거부하며, 로고스기독론을 주장하는 요한복음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테오도투스는 로마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배교한 일에 대해 변명하며 “나는 인간을 부인한 적은 있어도 하나님은 부인한 일은 없다”고 답하였습니다. 로마의 휘폴리투스(Hippolytus of Rome,170-235)에 의하면, 테오도투스는 하나님의 능력(듀나미스)은 성령이 그리스도에게 강림하여 나타나기 전에는 그의 안에서 역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Refutation of All Heresies, 7, 23). 휘폴리투스는 그를 알로그파의 “부스러기”라고 비난합니다.
    양자론을 역동적 단일신론으로 부르는 이유는 테오도투스를 위시한 양자론자들이 예수님께서 세례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4세기에 더욱 세련된 아리우스주의로 발전한 양자론은 결국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부인하고, 모든 피조물보다 앞선 피조물로 여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양태론적 군주신론】
    (Modalistic Mornachianism)
    고대의 노에투스(Noetus), 프락세아스(Praxeas), 사벨리우스(Sabellius) 등으로 대변되는 양태론은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정하지만, 아버지와 구별된 개별적 실체성은 부정합니다.
    노에투스는 사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조화시키려 하였습니다. 양자론자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인간으로 보지만, 노에투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양자론자들이 그리스도의 세례를 강조한 것과 달리, 노에투스는 성육신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육신을 성자가 아닌 성부 자신의 성육신으로 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면 그리스도는 성부와 구별되는 개별적 존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른 현현 형태(modus)로 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성자는 불가시적인 하나님(성부)께서 가시적인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이고, 낳음을 받지 않으신 분이 동정녀에게 나심으로 낳음을 받으신 분이 되신 것이죠(Hypolytus, Refutation of All Heresies, 9,5). 이런 이유로 양태론은 성부수난설(Patripassianism)로도 불립니다.
    위와 같은 역동적 군주신론은 경륜적 삼위일체를 강조한 동방교회에서, 양태론적 군주신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를 강조한 서방교회에서 더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삼위의 개별성으로부터 신적 단일성을 사유하려 했고, 내재적 삼위일체는 신의 단일성으로부터 개별성을 설명하려 하였기에, 경륜적 삼위일체는 양자론에, 내재적 삼위일체는 양태론에 더 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르게 보이는 이 두가지 잘못된 삼위일체 이단사상의 배후에는 바로 그리스 군주적 단일신론이 있었던 것이죠. 그러므로, 공교회의 정통 교리로 채택된 삼위일체 신조는 그리스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 신화와 철학적 신론에 대한 성경적 신론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심리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Psychology)』

    1890년에 출간된 심리학의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근대 심리학의 기초를 다진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은 철학적이면서도 과학적인 심리학을 다루며,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제임스는 심리학을 단순히 과학적 방법론으로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 경험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심리적 과정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심리학의 원리』의 주요 개념과 이론을 설명하고, 제임스의 심리학이 현대 심리학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1. 의식과 경험의 흐름 (Stream of Consciousness)

    윌리엄 제임스의 가장 유명한 개념 중 하나는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입니다.
    제임스는 의식을 고정된 것이나 분리된 단위로 보지 않았으며, 연속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으로 보았습니다. 
    이 흐름은 각 개인이 경험하는 주관적 감각, 감정, 생각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입니다. 
    제임스는 이를 통해 의식이 단순히 사건들의 집합이 아닌, 시간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하나의 과정임을 강조했습니다.
    의식의 흐름은 인간의 경험을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으로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제임스는 사람들이 생각할 때 그들이 고정된 개념이나 단일한 사고 패턴을 따르기보다는, 다양한 자극에 반응하면서 변화하는 사고 흐름을 따르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의식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정확하게 분리하여 분석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 제임스의 주장입니다.

    이 개념은 후일 문학과 심리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의식의 흐름을 묘사하는 제임스의 방식은 이후 실존주의 철학과 문학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가 되었으며,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등의 작가들이 의식의 흐름 기법을 문학적으로 활용하게 됩니다.

    2. 주의(attention)와 선택적 지각

    제임스는 "주의(attention)"와 선택적 지각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한 번에 모든 자극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특정 자극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선택적으로 정보를 처리합니다. 
    주의는 우리의 의식이 특정 대상에 집중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반응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제임스는 주의가 단순한 감각 수용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과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주의는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내면의 욕구, 필요, 목표에 따라 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관심사나 목표에 따라 어떤 정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떤 것을 무시하는 선택적 과정을 통해 세상을 인식합니다.  
    주의의 이론은 현대 인지심리학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정보처리 이론(information processing theory)과 주의 집중 능력에 대한 연구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선택적 지각은 인지심리학, 학습 이론, 심리 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 주제로 남아 있습니다.

    3. 감정 이론 (James-Lange 이론)

    제임스는 심리학에서 중요한 기여 중 하나로 감정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감정이 단순히 마음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신체적 변화와 반응에 의해 생겨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제임스-랑게 이론(James-Lange Theory of Emotion)"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외부 자극에 대해 신체적으로 먼저 반응하고, 그 신체 반응을 인식한 후에 감정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위험한 상황에서 우리는 먼저 심장이 빠르게 뛰거나, 손이 떨리는 등의 신체 반응을 경험하고, 그 신체적 변화를 인식한 후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제임스는 "우리는 슬퍼서 울지 않고, 울기 때문에 슬프다"고 주장하며, 감정이 신체적 반응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이론은 이후 감정 연구의 기초가 되었으며, 현대 심리학에서 여전히 중요한 논쟁의 주제로 남아 있습니다.
    제임스는 감정이 단순히 마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신체적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신체와 마음의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4. 습관(Habit)의 형성과 역할

    제임스는 인간의 행동에 있어 습관(Habit)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습관이 삶의 전반적인 흐름을 결정하며, 의식적인 사고나 결정 없이도 행동을 반복하게 만드는 주요 기제라고 보았습니다.습관은 행동을 자동화시키고, 에너지를 절약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인류가 복잡한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제임스는 특히 어린 시절의 습관 형성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습관이 한번 형성되면 그것을 바꾸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며, 어렸을 때부터 올바른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삶은 반복적인 습관의 총합"이라고 말할 정도로 습관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중시했습니다.
    이러한 습관에 대한 연구는 이후 행동주의 심리학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제임스는 인간 행동이 단순히 외부 자극에 의한 반응뿐만 아니라, 습관이라는 내면적 기제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후의 행동 심리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라는 구절은 윌리엄 제임스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William James / 1842. 1. 11-1910. 8. 26
    The Principles of Psychology
    <습관의 형성과 역활>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까지도 바뀐다.
    So an action and you reap a habit
    So a habit and and you reap a character
    So a character and you reap a destiny.


    5. 자아(self)와 정체성

    제임스는 인간의 자아(self)에 대한 연구도 심도 있게 다루었습니다.
    그는 자아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경험하는 자아(Subjective Self)로, 이는 내가 나를 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는 부분입니다.
    둘째는 객관적인 자아(Objective Self)로, 내가 나 자신을 하나의 대상처럼 바라보는 부분입니다.
    제임스는 이 두 가지 자아가 상호작용하며,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보았습니다.
    제임스는 자아를 여러 차원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그는 자아를 물질적 자아(material self), 사회적 자아(social self), 그리고 정신적 자아(spiritual self)로 나누었으며, 이 각각의 자아가 인간이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세상과 상호작용하는지를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물질적 자아는 우리의 신체나 소유물, 
    사회적 자아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된 자아, 
    정신적 자아는 우리의 정신적 경험과 내면적 성찰에서 비롯된 자아를 말합니다.
    이러한 자아에 대한 제임스의 개념은 오늘날의 자아 심리학과 정체성 연구의 기초가 되었으며,
    인간의 자아가 단일한 것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6. 의지(Will)와 자유의지

    제임스는 의지(will)자유의지(free will)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논의를 펼쳤습니다. 
    그는 인간이 단순히 환경의 영향을 받아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를 통해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제임스는 인간이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제임스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력을 통해 목표를 성취할 수 있으며, 이는 반복적인 훈련과 실천을 통해 강화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그는 "행동하지 않으면 의지가 약해지고,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의지가 강해진다"고 말하며, 의지가 훈련을 통해 발달할 수 있는 중요한 능력임을 강조했습니다.
    제임스는 인간의 의지와 자유의지가 결코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환경의 영향을 넘어서 개인이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이후 실존주의 철학과 심리학에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논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7. 현대 심리학에 미친 영향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는 현대 심리학의 많은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의식의 흐름, 감정 이론, 주의, 습관, 자아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심리학 연구의 기초가 되었으며, 그가 강조한 경험주의적 접근은 이후 심리학이 과학적 방법론을 채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제임스는 철학과 심리학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했으며, 그의 심리학은 인간 경험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탐구하려는 심리학자들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했습니다. 
    특히 제임스의 감정 이론은 현대 신경과학과 심리학에서 감정의 생리적 기초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그의 주의 이론은 인지심리학 연구의 기초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자아 이론은 심리학뿐만 아니라 사회학, 철학에서도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되었습니다.

    결론 : 인간 심리의 복합성과 통찰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는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하는 저작으로, 심리학뿐만 아니라 철학, 사회학, 문학 등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책입니다. 
    제임스는 인간의 의식과 감정, 습관, 자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며, 인간 경험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연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현대 심리학 연구의 기초를 마련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6).

     





    1. [사도행전 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 [빌립보서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3. [요한1서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