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혁목사 설교 원고 자료 2026년 2025 12 21 대림절 4주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God is love)
요한일서 4:8

2026년부터는 성경 읽기를 설교 주제 중심에 따라 진행하려고 합니다.
첫주간에 읽어야 할 성경은 요한일서 5장, 요한이서 1장, 요한삼서 1장 
매일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를 한번씩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주제에 따라 내가 읽고 묵상한 후에 얻은 결론을 정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기독교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머리에서는 사랑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실 생활에서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아는 것을 생활에 적용하도록 함께 실천하려고 합니다.

(도입 이야기) 
미워하는 관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느 여중생의 고민 
창신동 남부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사역할 때 경험한 사례

(전개하는 이야기)
당수나무에 정월 대보름을 맞아 전기불을 밝혀야 한다.
교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일에 교회가 전기를 빌려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을 맞고 한편은 틀리다는 것을 설명한다.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를 드리려고 교회 전기불을 밝히면 우상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엤는가?
절대로 우상이 그 자리에서 견디지 못하고 도망할 것이다.

(실천하는 방법)

사랑은 확장하는 것이다!
 1. 생각을 확장하라 - 사랑하려면 생각을 넓혀야 한다.

골로새서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Set your minds on things above, not on earthly things.

로마서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The mind of sinful man is death, but the mind controlled by the Spirit is life and peace.







 2. 행동을 확장하라 - 

베드로전서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But just as he who called you is holy, so be holy in all you do.




 3. 마음을을 확장하라 - 마음을 확장하는 것은 '보물 즉 물질을 확장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마음도 있느니라.
For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your heart will be also.









  






2026. 1. 4  / 성탄 후 제2주(흰색)

요한일서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Whoever does not love does not know God, because God is love. 


하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And so we know and rely on the love God has for us. God is love. Whoever lives in love lives in God, and God in him.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입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1️⃣ 조건 없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로마서 5:8)

잘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기 때문에 변화됩니다.

2️⃣ 희생적인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3:16)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사건입니다 ✝️

3️⃣ 변하지 않는 사랑

사람의 사랑은 흔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8–39)

4️⃣ 관계로 부르시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로 초대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경험할수록,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힘도 얻게 됩니다.







2025. 12. 21 대림절 제4주

2025년 성탄(聖誕) 화두(話頭) / 예수 이름을 회복하자!

예수 이름으로

2025년 성탄 화두(話頭)/ 예수 이름을 회복하자!

- 말씀 화, 머리 두 :
- 1. 이야기의 첫머리

   2. 관심을 두어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이야기할 만한 것

   3. 불교에서 수행을 위한 설법의 중요한 가르침(교훈)

해마다 성탄을 맞이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해를 거듭할수록 성탄 트리, 성탄 카드, 성탄 선물, 성탄 노래는 변함없이 계속되는데 성탄의 주인공이 되시는 예수님의 자리는 늘 비어있다는 느낌입니다.

이런 생일 잔치가 계속되면서 성탄의 의미가 구주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메시지가 없고 사람들끼리 즐거워하는 공휴일 또는 기념일이 되는 것같아 안타깝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세상 분위기에 교회도 그 흐름을 따라가면 안될 것같아 오늘 설교 주제를 “예수 이름을 회복하자!”라고 정했습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Jesus)”는 하나님이 주신 이름입니다.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리스도(Christ)”는 직분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기름 부음을 받는 직분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메시야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로 오셨습니다.

“임마누엘(Immanuel)”이란 인간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신 하나님, 곧 예수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신약은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성취되었음을 증거합니다(마 1:23).
임마누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또한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를 강조하는 거룩한 칭호라고 하겠습니다.

불교의 경전은 8만 대장경이라고 하여 그 양이 매우 많습니다.
따라서 불자들이 그 모든 경전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불교의 가르침은 간략하게 염불로 기도하게 합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나무아미타불은 6자 명호라고 하여 부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말하며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에게 모든 것을 맡깁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불교의 염불처럼 간략한 기도가 없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주기도문)가 있지만 처음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생소합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듣지 못하던 용어들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도 매우 생소합니다.
더구나 사도신조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제가 신대원을 졸업하기 전에 당시 교단 총회에서 교회수를 늘려야 한다는 정책에 따라 목사 안수를 받으려면 특수목회(학교, 기독교기관 등)를 하거나 아니면 개척을 해야만 안수를 받게한다는 정책에 따라 계획에도 없던 개척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지역이 경상남도 울주군 온산면 덕신리 625번지에 온산제일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서기태목사님께서 개척을 시도하였는데 마을 주민들이 너무 강력하게 반발하여 포기하고 부산 연산동으로 떠나셨습니다.
그때 주일마다 와서 설교를 부탁하여 주말이면 강남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울산행 고속버스를 타고 울산으로 내려가서 주일 설교를 한 후에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설교를 시작하면서 졸업후에는 교회를 맡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개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신경부락은 학성 이씨 문중 사람들이 모여 살던 지역입니다.
당시 학성 이씨 문중을 대표하는 인물이 이후락씨이었습니다.
청와대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사회적으로 명성이 높은 사람의 후손들이라 거침이 없었습니다.

다구나 신경부락에서는 한국전쟁도 모르고 지나갈 정도의 외지였습니다.
1959년 9월 사라호 태풍 때 온 마을이 홍수에 잠겼는데 그 마을에 450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있ㅇ었고 그 나무 바로 옆에 70평 땅을 구입하여 개척교회를 시작하므로 마을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교회 건물을 무너트렸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누가 목회를 하려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새벽기도회를 시작하려는데 교인들이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있는 몇몇 교인들에게 왜 새벽에 나오지 않느냐 하고 물었더니 교회로 오려고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아주 거대한 놈이 벌떡 일어나서 길을 막아버려서 도저히 무서워서 올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마을을 장악하고 있던 서울 무당은 신이 나서 교회 문 앞에 제사밥을 밤중에 몰래 떠놓고 가기도 했습니다.

이때 기독교에는 왜 불교와 같은 6자 명호 5자 기도가 없을까 생각하던 중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되겠구나 하며 예수의 이름에 대하여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1980년 쯤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그러므로 “예수 내 구주!”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그러므로 “예수 내 생명!”
기름은 곧 성령으로 성령을 받아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

임마누엘이란 명칭은 하나님이 누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예수 내 권세!”

이렇게 15자 기도문을 완성한 후에 새벽마다 마을의 입구를 막고 서있는 사탄에 대하여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라는 기도를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새벽마다 교인들이 기도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서울 무당은 마을 사람들에게 교회 때문에 마을을 지키던 수호신이 떠나려고 하므로 큰굿판을 벌려야 한다며 마을 사람들에게 굿을 위한 돈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 교회 때문에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그 자리를 떠나야 할 신을 믿지 말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면하며 예배할 때는 돈이 필요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이렇게 기도하라고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마을에서 돼지를 키우던 집에서 돼지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도 그 사람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이렇게 염불 대신에 계속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얼마 후 돼지를 키우던 집의 부인이 병이 나서 부산 고신병원에 가저 진단을 받았는데 말기암이라 가망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걱정하고 두랴워하느냐 아주 간단한 기도를 하라고 계속하여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를 주장하게 했습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기도가 놀라운 일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은 과거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그 이름의 능력은 변함이 없습니다.
문제는 오늘의 시대가 너무 편하기 때문에 간절함이 없습니다.
성탄의 위한 트리, 카드, 선물, 노래는 넘쳐납니다.
세속의 분위기에 쓸려가는 믿음이 아니라 이제라도 예수 이름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이름은 구원하는 이름입니다.
예수 이름은 치료하는 이름입니다.
예수 이름은 회복하는 이름입니다.
예수 이름은 능력의 이름입니다.
예수 이름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J C & I)

2025년 성탄절을 앞두고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믿음의 대상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와 임마누엘의 의미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그리스도
라는 명칭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구약 시대에 기름 부음을 받는 직분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임마누엘
이란 명칭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예수 / 1414구절 

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태복음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태복음 1: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태복음 2:1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그리스도 / 523구절

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태복음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태복음 2: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임마누엘 / 3구절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8:8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 하셨느니라.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불교에서 불자들은 간단하게 염월을 아뢸 수 있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물론 불교에도 경전이 있는데 무려 8만 대장경이라고 합니다.
불자들이 이 모든 경정은 읽고 묵상하지 않지만 아주 간단하게 염불을 외우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이렇게 간단한 기도가 없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 이름을 결정하는 때는 태어난 후에 작명을 합니다.
물론 요즈음에는 태명이라고 하여 부부 사이에 태어나기 전에 잉태된 생명을 부르기도 합니다.
때로는 아들을 낳기 위하여 아들의 이름을 정하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탄생할 때는 이름이 먼저 알려졌습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다하다

  • 1. 동사 - 어떤 것이 끝나거나 남아 있지 아니하다.
  • 2. 동사  - 어떤 현상이 끝나다.
  • 3. 동사 - 수명 따위가 끝나다. 또는 생명을 잇지 못하고 끝내다.







 
























인물 예화 / 스타인메츠<구조>. 한스 셀리에<스트레스>. 탈레스<서양철학의 아버지>, 태선 스님 김진규 목사, 토마스 아 켐페스



1. 스타인메츠<구조> - 구조를 알면 모든 것이 보인다 
2. 한스  셀리에<스트레스>
- 최초로 스트레스라는 용어를 사용 
3. 탈레스<서양철학의 아버지>
- 만물의 근원(아르케)은 "물"
4. 태선 스님 김진규 목사
- 임마누엘
5. 토마스 아 켐페스
- 그리스도를 본 받아 
6. 미즈노 겐조 -  
7. 마틴 로이드 존스




찰스 프로테우스 스타인메츠(Charles Proteus Steinmetz, 1865년-1923년)


찰스 프로테우스 스타인메츠(Charles Proteus Steinmetz, 1865년-1923년)
독일 출생의 미국 전기공학자로 그의 주요한 공헌은 자화(磁化)와 히스테리지스 손실과의 관계를 밝히는 '히스테리시스 법칙'의 발견, 복소수로 교류회로를 간단히 계산할 수 있는 기호법의 창안, 과도현상의 연구의 3가지로 귀착된다. 
 
생애

본명은 카를 아우구스트 루돌프 슈타인메츠(Karl August Rudolf Steinmetz)이다. 
1865년 4월 9일 독일 프로이센 브레슬라우 출생하였다. 
브레슬라우대학교와 취리히대학교에서 수학과 전기공학을 공부하였다. 
독일 학생사회운동의 선구자로서 독일 사회민주당에 소속해 있었기 때문에 경찰의 탄압을 피해 1889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개명(改名)한 후 1848년 독일혁명 때 독일로부터 망명했던 R.아이케마이어의 공장에 고용되었다. 
이 공장은 제너럴일렉트릭 설립 이듬해에 매수되어, 그도 그 회사의 고문기사로 임명되었다.

1902년 이후에는 유니온대학교의 전기공학과 교수를 겸임, 미국 최고의 전기공학자가 되었다. 
전기공학에 관한 그의 주요한 공헌은 자화(磁化)와 히스테리지스 손실(hysteresis loss)과의 관계를 밝히는 '히스테리시스 법칙'의 발견(1891), 복소수(複素數)로 교류회로를 간단히 계산할 수 있는 기호법의 창안(1893), 과도현상(過渡現象)의 연구(1909)의 3가지로 귀착된다.

10월 26일 향년 59세로 별세하였다.

저서로는 《Theory and Calculation of Alternating Current Phenomena》(1897) 《Engineering Mathematics》(1910) 《America and New Epoch》(1910) 등이 있다. 전기화(電氣化)의 사회적 의의에 관심을 가져 1922년 레닌에게 편지를 보내어, 혁명 도상의 소련에 기술적 원조를 제의하였다.

출저 : 네이버 백과사전

이 일 후에(요한계시록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After this I looked, and there before me was a door standing open in heaven. And the voice I had first heard speaking to me like a trumpet said, Come up here, and I will show you what must take place after this.

이 일 후에(요한계시록 4:1) /설교 원고(2019-05-05)

(도입 이야기)
‘스타인메츠(Charles Proteus Steinmetz, 1865. 4. 9~1923. 10. 26)’라는 미국의  전설적인 전기 기술자가 있었습니다. 원래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출생하여 브레슬라우, 취리히,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 전기 공학, 화학을 전공했습니다.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 회사의 기술자로 취업되었고 유니온 대학 물리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벼락을 연구하여 피뢰침을 개량했으며 발전기와 전동기에 관한 200개 이상의 특허를 받았다고 합니다.

어느 공장에서 발전기가 고장이 나서 작동되지 않을 때 여러 기술자들을 불러 발전기를 수리하도록 의뢰하였으나 도저히 수리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스타인메츠에게 발전기 수리를 의뢰하였다고 합니다. 
스타인메츠가 발전기 이곳저곳을 작은 망치로 두들겨 보더니 즉시 고장 난 부분을 알려주며 그곳에 하얀 분필로 표시한 후에 그곳을 뜯어서 고치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여러 날 동안 많은 기술자들이 동원되어 고장의 원인을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는데도 스타인메츠는 망치로 몇 번 두드리더니 고장 난 부분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공장 앞으로 발전기 수리비로 1만 불의 청구서가 배달되었습니다. 
공장장은 스타인메츠에게 작은 망치로 몇 번 두들겨 본 것이 전부인데 수리비용이 너무 비싸다고 하였더니 그 때 스타인메츠가 공장장에게 ‘분필로 고장 난 부분 표시한 수고비는 $100. 그리고 어디를 고쳐야 하는지를 찾아내는 기술은 $9,900 이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결국 공장장은 스타인메츠에게 1만 불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스타인메츠의 이야기는 ‘구조를 알고 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구약 성경의 구조는 모세와 엘리야
신약 성경의 구조는 예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스 셀리에 János Hugo Bruno Hans Selye(1907. 1. 26 - 1982. 10. 16)

한스 셀리에(János Hugo Bruno Hans Selye CC(/ sɛljeɪ /; 헝가리어 : Selye János; 1907. 1. 26 – 1982. 10. 16)

선구적인 헝가리-캐나다인으로 내분비계 생리학자였다. 
그는 스트레스 요인에 대한 유기체의 가상적 비특이적 반응에 대한 중요한 과학적 연구를 수행했다. 
비록 그가 글루코코르티코이드(glucocorticoids)의 많은 측면을 모두 인식하지는 못했을 모르지만, 셀리에(Selye)는 스트레스 반응에서 이들 역할의 주요한 측면을 알고있었다. 
샬롯 거슨(Charlotte Gerson)은 그를 생물학적 스트레스의 존재를 최초로 증명한 주요한 인물이라고 여긴다.[1][2]

셀리에(Selye)는 1907년 1월 2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비엔나에서 태어나 헝가리 코마 롬에서 자랐다.[3] 
셀리에(Selye)의 아버지는 헝가리의 의사였고 그의 어머니는 오스트리아인이었다. 
그는 1929년 프라하에서 의학 및 화학 박사가 되었으며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교, 캐나다 맥길 대학교, 몬트리올 대학교에서 스트레스(stress)와 내분비학 분야의 선구적인 일을 계속했다. 
그는 1949년에 처음으로 노벨 생리 의학상 후보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경력에서 총 17 개의 후보에 올랐지만 결코 수상하지 못했다.[4][5]

일반적응증후군(一般適應症候群,general adaptation syndrome)은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스트레스의 종류에 관계없이 일어나는 신체적ㆍ생리적 증상으로 3단계(경고반응단계,저항단계,탈진단계)의 과정을 일컫는다. 
일반적응증후군의 부작용으로는 피로, 두통, 불면증, 우울증, 분노, 불안 따위가 이에 해당한다.

  1. Healing the Gerson Way, Defeating Cancer and Other Chronic Diseases, New Edition. Charlotte Gerson with Beata Bishop, Gerson Health Media, 2010, p. 48.
  2. Kroker, Arthur (1984). 《Technology and the Canadian Mind: Innis/McLuhan/Grant》. Montreal: New World Perspectives. 73쪽. hdl:1828/7129. ISBN 978-0-920393-14-7.
  3. 〈Hans Selye〉 2008판. 《Encyclopædia Britannica》.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008년 6월 12일에 확인함.
  4. The Nomination Database for the Nobel Prize in Physiology or Medicine, 1901-1953
  5. “Nomination Archive” (미국 영어). 《NobelPrize.org》. 2018년 12월 1일에 확인함.
스트레스 연구의 선구자인
한스 셀리에(Hans Selye) 박사가 1958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으나, 사실과 다릅니다. 
한스 셀리에는 노벨상을 수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트레스' 개념을 처음 도입하고 '일반 적응 증후군(General Adaptation Syndrome)'이라는 스트레스 반응 단계를 정립하는 등 스트레스 연구의 "대가"로 불리지만, 실제로 노벨 위원회로부터 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노벨 위원회는 한스 셀리에 교수를 당연히 노벨상 수상자로 생각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언급하며, 그가 수상하지 못한 사실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다만, 스트레스와 관련된 다양한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밝혀낸 여러 다른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수상했습니다. 
예를 들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작용 방식이나 신경내분비학 분야에 기여한 연구자들이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스트레스'라는 용어를 정립한 한스 셀리에 본인은 노벨상 수상자가 아닙니다.

스트레스는 정신적, 신체적 자극에 대한 심신의 반응으로, 불안, 짜증, 집중력 저하 등의 심리적 증상과 두통, 어지럼증 등의 신체적 증상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과도한 스트레스는 면역력 저하와 뇌 기능(기억력, 감정 조절 등) 손상을 일으킬 수 있으며, 규칙적인 운동, 충분한 휴식, 건강한 식단, 심호흡 등으로 관리할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란?
  • 외부의 자극이나 변화에 대한 신체적, 심리적, 행동적 반응입니다.
  • '팽팽하게 죄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유래했으며, 삶의 긴장감을 뜻합니다. 
스트레스의 원인
  • 외적 요인 : 소음, 더위 같은 물리적 환경, 규칙이나 규정, 상사나 타인의 공격적인 태도 등.
  • 내적 요인 : 생로병사, 경제적 어려움, 실직, 사업 실패, 과도한 목표 설정 등 개인적인 사건. 
스트레스 증상
  • 심리적 증상 : 불안, 짜증, 신경과민, 우울, 건망증, 집중력 저하, 좌절감 등.
  • 신체적 증상 : 두통, 어지럼증, 무기력증, 면역력 저하, 수면 장애 등. 
스트레스 관리 및 해소 방법
  • 운동 : 가벼운 운동만으로도 스트레스 호르몬이 감소하며, 밖에서 하는 운동은 더 효과적입니다.
  • 휴식 : 규칙적으로 휴식하고, 충분한 수면을 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식습관 : 건강한 식단을 유지합니다.
  • 마음 챙김 : 심호흡을 하거나,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방해 요소를 최소화합니다.
  • 계획 : 하루 계획을 미리 세우고 일을 천천히 진행합니다.
  • 취미 활동 : 미술관 방문처럼 즐거운 활동을 통해 스트레스를 낮출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는 다양한 질병의 주요 원인 또는 악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 보고에 따르면 많은 질병이 직간접적으로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스트레스가 질병을 유발하는 원리
장기간 지속되는 만성 스트레스는 신체의 정상적인 방어 체계를 무너뜨리고 다양한 생리적 변화를 일으킵니다. 
  • 호르몬 불균형 : 스트레스를 받으면 신체는 '투쟁-도피 반응(fight-or-flight response)'을 위해 아드레날린, 코르티솔과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합니다. 급성 스트레스 시에는 유용하지만, 만성적으로 과다 분비되면 면역 기능을 억제하고 혈압을 상승시키는 등 악영향을 미칩니다.
  • 신경계 자극 : 스트레스는 자율신경계(특히 교감신경계)를 자극하여 심박수 및 호흡 증가, 혈압 상승, 소화 불량, 불면증 같은 다양한 신체적 증상을 유발합니다.
  • 염증 반응 증가 : 만성 스트레스는 염증 지표를 높여 신체 전반에 염증을 증가시킵니다. 이는 심혈관 질환, 당뇨병, 암 등 만성 질병으로 발전할 위험을 높입니다. 
스트레스와 관련된 주요 질병

스트레스는 신체적, 정신적 건강 모두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칩니다. 

신체 질환 :
  • 심혈관 질환 : 고혈압, 협심증, 심근경색, 뇌졸중 등 심장 및 혈관 질환의 주요 원인입니다.
  • 면역계 질환 : 면역력 저하로 인해 감염성 질환에 취약해지며, 알레르기나 자가면역 질환(예: 루푸스, 류마티스 관절염)의 발병 위험을 높입니다.
  • 소화기 질환 : 소화성 궤양, 기능성 위장 장애, 과민성 대장 증후군 등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킵니다.
  • 내분비계/기타 : 당뇨병, 갑상선 질환, 긴장성 두통, 만성 요통, 피부 질환(여드름, 두드러기) 등과 관련이 있습니다. 
정신 질환 :
  • 불안 장애, 우울증, 적응 장애, 수면 장애, 섭식 장애, 공황 장애 등 다양한 정신 건강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스트레스는 신체의 여러 시스템에 부담을 주어 다양한 질병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키는 만병의 근원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트레스 관리와 예방은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엔도르핀
과 아드레날린

모두 신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호르몬 및 신경전달물질이지만, 분비 상황과 기능이 매우 다릅니다. 

엔도르핀 (Endorphin)

엔도르핀은 "행복 호르몬" 또는 **"뇌 내 마약"**으로 불리며, 신체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천연 진통제 역할을 합니다. 
  • 기능: 강력한 진통 효과가 있으며(모르핀보다 수십에서 수백 배 강함), 행복감과 황홀감을 느끼게 합니다. 통증을 억제하고 스트레스를 줄여 면역력을 높이는 데 기여합니다.
  • 분비 조건:
    • 통증이나 심한 스트레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분비됩니다.
    • 격렬한 운동: 무산소 운동 상태가 되면 엔도르핀 분비가 급증하여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같은 쾌감을 유발합니다.
    • 웃음, 즐거운 생각: 긍정적인 감정 상태일 때도 분비가 촉진됩니다.
    • 매운 음식 섭취: 신체가 매운맛을 고통으로 인지하여 이를 상쇄하기 위해 분비됩니다.
아드레날린 (Adrenaline / 에피네프린 Epinephrine)

아드레날린은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투쟁-도피 반응(fight-or-flight response)" 호르몬입니다. 
  • 기능 : 교감 신경계를 활성화하여 신체가 갑작스러운 자극이나 위협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준비시킵니다.
  • 신체 영향 :
    • 심박수 및 혈압 증가 : 심장 박동과 혈압을 높여 혈액 순환을 빠르게 합니다.
    • 혈당 증가 : 근육과 뇌에 산소와 포도당 공급을 늘려 에너지를 즉각 사용할 수 있게 합니다.
    • 기타 : 동공을 확장하고, 소화 속도를 늦추며, 근육으로 가는 혈류량을 증가시킵니다.
  • 분비 조건 : 공포, 불안, 분노 등 감정을 느낄 때나 위급 상황 시 부신수질에서 분비됩니다. 
주요 차이점 요약

특징 

엔도르핀 (Endorphin)      아드레날린 (Adrenaline)
주요 역할   통증 완화, 행복감 유발, 이완       위기 대처(투쟁-도피 반응), 각성
분비 장소   주로 뇌하수체 및 시상하부      부신 수질
분비 상황   통증, 격렬한 운동, 웃음, 긍정적 감정      공포, 분노, 위협, 스트레스
느낌   황홀감, 쾌감, 안정감      긴장, 흥분, 에너지 급증

이 두 호르몬은 모두 스트레스 상황에서 분비될 수 있으며, 엔도르핀은 고통을 줄이고 아드레날린은 즉각적인 신체 능력을 끌어올려 생존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화되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탈레스(Θαλής, Thales, 기원전 7세기) 625년 - 624년경, 547년 - 546년경   

고대 그리스 철학자로 밀레토스 학파의 창시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칭했다. 
그리고 현재의 사람들한테 탈레스는 최초의 철학자, 최초의 수학자, 최초의 고대 그리스 7대 현인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확실하진 않지만, 탈레스가 피타고라스의 스승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운동 경기 관람 중에 탈수증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사망지는 알려지지 않음.)


탈레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지만, 믿을 만한 고대 저술가들의 이야기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탈레스는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의 밀레토스라는 도시 출신이며, 여러 분야에서 학식이 넓었다고 한다. 탈레스는 이집트 여행의 영향으로, 수학천문학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수학과 천문학에 관련된 업적들이 아주 많은데,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천문학을 이용해서 기원전 585년에 일어나는 일식을 예언한 것이 있다. 또한, 수학의 기하학적 방법을 빌어서 이집트에서도 가장 큰 피라미드라고 알려져 있는 쿠푸 왕대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한 업적도 유명하다.

철학자 플라톤테아이테토스에 따르면, 밤에 별을 보면서 걷다가 우물에 떨어졌는데, 이것을 본 영리한 트라키아 하녀가 "하늘의 이치를 알려고 하면서 바로 앞 우물은 보시지 못하는군요!"라고 비웃었다는 일화가 있다고 한다.

탈레스에 관해서는 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 날, 탈레스의 친구가 "이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 돈 있는 사람들만 잘 살고, 돈 없는 사람들은 못 사는 더러운 세상 같으니라고!"라고 말하자, "친구! 돈을 잘 벌 수 있는 방법은 널려 있어. 머리를 두 번 써보라구."라고 탈레스가 되받아쳤다. 그러자 그 친구는 "넌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겠지? 어디 내가 여행을 다녀올 때까지 돈을 많이 벌어 보게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탈레스는 그 말을 듣고, 돈 버는 일에 몰두하게 됐다. 그리고 친구가 돌아와서 보니, 탈레스는 친구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돈을 갖고 있었다. 과연 탈레스는 무슨 방법을 썼을까? 당시에는 올리브가 아주 귀한 것이었는데 쓰는 용도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가 여행을 떠난 후, 올리브의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유심히 관찰한 탈레스는 올리브의 생산량이 좋을 때와 좋지 않을 때는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탈레스는 마을을 돌아 다니면서 기름 압축기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마당만 차지하는 기름 압축기를 기꺼이 팔았다. 올리브가 풍작일 때, 탈레스는 마을의 거의 모든 압축기를 소유하고 있었다. 탈레스는 기름 압축기를 사람들한테 빌려 주면서, 큰 돈을 벌 수 있었던 거라고 한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따르면,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만물이 모두 물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땅도 물 위에 떠 있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탈레스에 관해서 그의 견해를 체계적으로 세워보기에는 알려진 바가 너무나 적다고 한다. 그러나 그 외에도 밀레토스 학파에 대해서는 더 많은 바가 알려져 있다. 그의 생각은 아낙시만드로스가 이어받아, "가장 1차적인 만물의 근원"을 찾으려 했으며, 아낙시만드로스의 친구인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근원을 "공기"라고 주장하게 된다.

한편,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탈레스가 직접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전기 발생 실험을 최초로 행한 사람이 바로 탈레스라고 한다. 
여담으로,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도자기가 진열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어서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

탈레스가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기하학의 정리 5가지가 있는데, 이것을 믿을 수 있는 저술가들의 글을 통해서 추측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임의의 지름에 의해서 이등분 된다.
2.  두직선 이 만나면 마주보는 두 각은 같은 각을 이룬다.
3. 반원에 대한 원주각은 항상 직각이다.
4. 삼각형의 한 변과 양 끝의 각이 다른 삼각형의 그것과 같으면 두 삼각형은 합동이다.(흔히, ASA 합동 정리라고 말한다.)
5. 이등변삼각형의 두 밑각은 서로 같다.


그리스 7현인

그리스 7현인(그리스어: οἱ ἑπτὰ σοφοί hoi hepta sophoi 호이 헤프타 소포이)은 기원전 620년부터 기원전 550년에 영리하다고 불린 고대 그리스의 인물들이다.

누구를 '7현인'에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대의 서적에 따라 제각기 다르며 일관된 것이 없고, '일곱'(7)이라는 숫자로 칭해지고 있지만, 플루타르코스는 '델포이의 Ε에 임해서'에서 본래는 다섯 명이었지만, 두 명의 참주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으로 현인의 이름을 강탈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누가 어떤 이유로 최초로 '현인'의 칭호를 얻었는지도 알 수 없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25명이나 거론하고 있다. 헤르미포스는 17명이라고 언급하였다. 이는 여러 그리스인들이 각기 서로 다른 명단을 만들었던 탓이다.[1]

기원전 400년경 플라톤이 《프로타고라스》 중에서 든 것은 다음과 같다. 플라톤이 언급한 일곱 명은 모두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살았던 인물들이다.

다만 플라톤은 코린토스의 페리안드로스 대신 케나이의 농부였던 뮤손을 거론했다. 뮤손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당대에 살아있는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스 7현인의 유명한 일화로는 그들의 사이에 벌어졌던 '지혜 가늠'이 있다.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다가 우연히 발견된,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황금 을 둘러싸고 코스와 미레토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그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지혜로 적시는 자"에게 솥이 돌아갈 때까지는 양국의 전쟁은 끝나지 않으리라는 델포이신탁에 따라 당시 현자로 이름이 나 있던 탈레스에게 솥을 주었지만, 그는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다른 현자에게 양보했다. 다른 현인들 역시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라며 사양했고, 그렇게 서로 돌아가면서 사양하는 사이에 탈레스에게로 돌아왔다. 결국 탈레스는 이 황금 솥을 아폴론에게 봉납했고, 델포이에서 신탁을 전하는 퓨티아(무녀)는 이후 이 솥에 앉아서 신탁을 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들이 당대의 현인으로 칭해지게 된 연유에 대해 "그들은 모두 스파르타의 문화를 동경한다. 그들의 지혜는 모두가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문장과 인상적인 격언을 사용하는 스파르타의 문화에 속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하였다.[2] 윌 듀란트에 따르면 그리스에서 가장 존경받는 현자는 이론가가 아니라 자기 지혜를 세상에서 적극 활용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현자의 말은 그리스인들 사이에 격언처럼 여겨졌고, 어떤 경우에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지기도 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가장 불행한 인간은 불운을 이겨 내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 "인간은 길거나 짧은 인생을 살도록 운명으로 정해진 것처럼 자신의 삶을 다스려야 한다" "지혜는 젊었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여행의 수단으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 다른 어떤 소유물보다 지혜가 더 오래 가기 때문이다" 등의 비아스의 경구를 자주 인용하곤 하였다.[1]

그리스 7현인으로 꼽히는 이들 모두는 조언, 리더십, 변호, 법제 개혁 등의 분야에서 같은 시대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 특출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조언자나 입법가, 개혁가 등의 역할을 많은 사람은 대단히 지혜로운 것으로 여겨졌다. 플라톤이나 플루타르코스 모두 이들 일곱 현인을 선출한 공통적 기준을 공들여 설명하였지만, 7현인이 어떤 식으로든 지혜롭기는 했지만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지혜롭지는 않았기에, 플라톤이나 플루타르코스 모두 그 '어떤 공통점'을 설명하는 용어에 제약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2]

  • 우치야마 가쓰토시 편저, '철학의 역사 1', 중앙공론 신사, 2008년
  • 트레버 커노 저, 정연우 옮김 《지혜의 역사 - 역사 속 지혜는 어떤 모습이었나》 도서출판 한문화, 2018년
  • 윌 듀런트 저, 김운한 역 《문명 이야기》2: 그리스 문명(1), 민음사, 2011년
  1. 이동: 가 윌 듀런트 저, 김운한 역 《문명 이야기》2: 그리스 문명(1), 민음사, 2011년
  2. 이동: 가 트레버 커노, 정연우 옮김 《지혜의 역사 - 역사 속 지혜는 어떤 모습이었나》도서출판 한문화, 2018



그리스 고전기 시대를 대표하는 7명의 지식인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의 언급을 볼 때, 본래 소피스트라는 명칭은 이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표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 우리가 익히 소피스트라고 알고 있는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 사이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활동한 일련의 인물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들이니 자신들 또한 소피스트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소피스트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보통은 밀레투스탈레스, 아테네솔론, 프리에네의 비아스, 미틸레네[2]의 피타코스[3], 스파르타의 킬론, 린도스[5]의 클레오불로스[6], 코린토스의 페리안드로스를 꼽는다.

그러나 참주로서 논란거리가 많은 페리안드로스[7]를 빼고 파이스토스[8]의 에피메니데스[9] 넣기도 하고, 그 이외에 경우나 기호에 따라 아나카르시스,[10] 뮈손[11], 페레큐데스를 넣기도 한다. 나중에 가면 아예 누구를 7현인로 치는지가 서술자 나름인지라 20명 정도가 거론되기도 했다.[12][13]

그래도 탈레스, 솔론, 비아스, 피타코스 이 네 사람을 7현인에 넣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 외에는 스승제자는 물론이고 지역과 역사가에 따라 의견이 엇갈린다. 결국은 서술자 나름.

이 7인의 선정은 바다에서 건진 세발 달린 솥의 소유권을 둘러싼 코스와 밀레투스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한 신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코스 섬 어부들이 그물을 걷다가 뭔가 묵직한 게 걸려서 애매해 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밀레투스 청년들[14]이 "거 뭐요?"라고 말을 걸다가 뭔가 느낌이 왔는지, 그물에 걸린 게 뭔지 확인도 안 하고 돈 주고 사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건져놓고 보니 황금으로 된 세발 달린 솥이었던 것이다.
어부들은 뭔가 계약조건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는지, 거래를 취소하려 했다고 한다. 
"이거 황금이잖아? 그물도 망가졌고, 값을 더 줬으면 하는데?" 
그러자 청년들은 "팔기로 했으면 그냥 팔지 이제 와서 왜 말을 바꿔?"라며 항의했고, 그 결과 청년들과 어부들은 언쟁을 벌였다고 한다. 열받은 어부들이 그냥 솥을 들고 코스로 돌아가버리자, 청년들은 당연히 밀레투스로 가서 "코스 놈들한테 사기당했음!! 이래도 됨??"이라고 분통을 터뜨린다. 
결국 밀레투스는 폴리스 차원에서 항의사절단을 보냈지만, 코스에서는 묵살하고, 결국 열받은 두 도시는 전쟁까지 벌였다고 한다.[15]

나중에 자기들이 생각해도 솥단지 하나 때문에 전쟁했다는 게 좀 어이 없었는지, 두 도시는 신탁에게 중재를 요청했는데,[16] 신탁은 가장 현명한 자에게 솥을 넘기라고 하였고, 이에 양측은 밀레투스의 현자인 탈레스에게 넘기는 데 합의했다고 한다. 코스 섬 사람들은 밀레투스 사람들은 꼴도 보기 싫지만, 탈레스라면 또 얘기가 달라서, 탈레스한테는 호감을 느꼈다고.

그러나 탈레스는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다른 현자들에게 돌렸고, 그 현자도 똑같은 생각에 다른 현자한테 돌리고, 그렇게 돌리고 돌리다가 결국은 탈레스한테 돌아오자, 탈레스는 그 솥을 델포이의 아폴론에게 봉헌했다고 한다.

다만 이 이야기는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존재하는데, 솥의 내력은 물론이고 솥이 한 바퀴를 다 돈 게 아니라 그냥 마지막 사람[17]이 아폴론에게 봉헌했다는 설도 있는가 하면, 정확히 봉헌된 아폴론 신전이 어디인지, 아폴론이 아니라 헤라클레스에게 봉헌되었다는 설도 있다. 심지어 솥이 아니라 술잔이나 머리에 쓰는 관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이때 7현자들은 그들이 서로에게 보여준 겸손과 호의로 인해 명성을 얻었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7현자들은 서로 제법 끈끈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설에 따르면 델포이와 코린토스에서 회합을 가진 적이 있다고 한다. 특히 델포이에서의 회합은 위에서 말한 솥단지를 봉헌하면서 모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플라톤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 따르면 그때 그들이 "너 자신을 알라"와 "모든 것은 적당하게 하라"는 두 격언을 새겼다고 한다. 코린토스에서의 회합은 코린토스의 참주 페리안드로스의 초청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18]

이들끼리 주고 받은 편지라고 전해지는 문헌들이 있는데, 이 문헌들을 보면 이들은 서로 활발한 학술교류를 희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서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조언을 보내기도 하는가 하면, 솔론이 아테네의 참주정을 피해 망명할 때에는 서로가 앞다투어 솔론을 각자 자기 도시에 초대하려고 초대장을 보냈다고도 한다.

대항해시대4의 패자의 증표 지도가 이들 7현인의 이름을 띄고 있다. 탈레스의 종이 지도, 쿠레오보로스의 무명 지도, 페리안도로스의 돌 지도, 솔론의 나뭇잎 지도, 비아스의 화폐 지도, 케이론의 대나무 지도, 피타코스의 칼날 지도가 바로 그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김진규 목사, "前 태선스님"

어느 날 꿈에 이상한 문자를 받았지요.
"임마누엘"
도대체 불경 어디에 이런 문자가 있는지 찾아내려고 팔만대장경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승들을 찾아다니며 물었지만 아무도 정확한 의미를 알려주지 않아 답답하던 차에 어느 산속에 도사님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그 도사님을 찾아가던 중 임마누엘이라는 기도원의 간판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기도원에 들어가 도대체 임마누엘이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스님을 살던 내게 왜 이런 문자를 보여주셨을까?
그 작은 기도원에서 성경을 주셔서 성경을 읽던 중 예수님을 영접하고 승복을 벗고 감리교 신학대학에 입할 후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 "중생선교회'를 설립하고 스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고 합니다.
 

저의 이름은 김진규 목사입니다. 저는 3대의 불교 가정에서 17년 동안을 중으로 있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서 나의 동료와 선후배 불교신도들에게 전도를 하기 위해 나와서 20년 동안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종교성이 강한 백성입니다. 여러 가지 종교가 많이 침투해 와 있지만, 그중에 가장 큰 종교는 바로 불교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1,600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600년 긴 세월 속에서 우리 조상들은 하나같이 절에 다니기도 하고 또 부처님께 절을 하고 복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보면, 문화유산을 남겨놓은 것은 있다 할지라도 우리 인간에게 가장 절실하게 해결해야 할 먹고 사는 가난의 문제는 해결을 못 했습니다. 왜 그러냐? 석가모니 부처는 불교를 창설했지만, 그는 죽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복을 주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1,600년 역사 속에서 모두 다 가난하게 살아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가 100년 밖에 안 됐지만, 기독교가 들어온 다음에는 우리 민족은 이렇게 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의 민족들이 우리나라를 우러러 보게 되었지 않습니까? 이것이 다 기독교 문화를 받아들였던 축복이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조상 대대로 불교를 믿던 사람이에요. 저희 할아버지는 강원도 지구의 불교 신도 회장을 했습니다. 백암온천에 백암사를 지으신 분이 우리 할아버지에요. 저희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가지고, 결혼을 했지만 한국불교 태고종 대처승 중이 되가지고, 경상도 일월사에서 74년 동안을 중으로, 주지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나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불교 신앙을 이어받아 가지고,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승복을 입어야 했고, 그리고 커가지고 성년이 되어서는 대한불교 조계종 승려가 되어서 17년 동안 중생 계도에 몸을 바쳤던 사람입니다.
저는 충청북도 속리산 법주사에 들어가서 3년 동안의 행자의 교육을 받았는데, 엄청난 고행을 했습니다. 불교에서는요, 중이 되려고 일주문에 한번 들어가면 3년 동안을 절 밖을 못 나와요. 그리고 바깥의 소식을 못 들어야 돼요. 자, 먹고 싶고, 입고 싶고, 가지고 싶고, 하고 싶고, 보고 싶은 108번뇌를 끊어야 돼요. 그리고 신문도 보면 안 돼요. TV도 못 봐요. 라디오도 못 들어요. 일반 책도 못 봐요. 그리고 시간만 있으면 불경을 독경해야 되고, 참선을 해야 됩니다. 편지가 오는 것도 받을 수가 없고, 편지 한 장도 하면 안 됩니다. 부모 형제가 찾아와도 만나지도 못하고, 가지도 않습니다. 완전히 바깥세상을 끊어야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걷는데, 두 눈동자도 좌우로 돌리지도 못하고, 벌레 새끼 한 마리 밟아 죽이지 않으려고 발끝만 보고 살아야 돼요. 이런 과정을 거쳐 가지고 수계를 받습니다. 그리고 나면 중생을 제도하고자 나오게 되는데, 저는 법명이 태선승려가 되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불자들에게 소원기도 올려줬습니다. 그리고 49제도 올려줬습니다. 그리고 운명에 따라가지고 부적도 붙여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불교 신도들을 위해서 중생제도에 몸 바치던 태선 승려 김진규가 왜 그 옷을 벗어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는가? 세 가지 문제가 나를 예수 믿게 했어요.

첫째로 예수를 만나게 된 동기는...
불교에는 중이 죽으면 불에 태워서 화장하는 다비식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중은 젊어서 죽든 늙어서 죽든 어떻게 죽든지, 죽으면 다 불에 타야 돼요. 저의 은사스님이, 84살 먹은 은사스님이 참선하다가 중풍에 걸렸습니다. 움직이지 못했어요. 자식이 없는 중들이라 제자들이 자식 대행을 하고, 밥상도 갖다 주고, 빨래도 해서 입히고, 목욕도 시켜 드립니다.
그런데 하루는 내 친구가 밥상을 갖다 주고, 소변 대변 받아놓은, 용변을 치우겠다고 요강을 들고 넘어오다가 절간 문턱에 걸려가지고 엎어져 버렸어요. 그 요강을 떨어뜨려 가지고 깨버렸어요. 그 속에 있는 배설물이 온 바닥에 쏟아져 버렸어요. 그걸 치우려고 하니까 화가 났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친구가 그 나이 많은 노인장을 보고 욕을 해버렸어요.
"빨리 뒤져라, 어이구, 오래 살아가지고 원수 되지 마라."
지겹다고 막 욕을 하면서 그걸 치웠단 말이에요. 그 소리를 들었던 그 노인장은 그 다음에 밥을 갖다 드리니까 고개를 내저으면서,
"나는 너희들이 욕을 하며 주는 법을 먹고 살고 싶지 않다. 난 안락사하기로 결심했으니 밥 가져오지 말아라!"
안락사라고 하는 것은 자살인데요. 불교는 정당한 자살은 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오늘부터 굶어 죽기로 마음먹었다. 가져오지 말아라!"
그래서 밥을 갖다드리니 먹지 않습니다. 그 노인이 죽음을 앞에 놓고 앉아 있는 그 모습이 참으로 처량합니다. 그래서 다른 스님들이,
"스님, 그러지 마시고 각서를 써가지고 도장을 찍으시면 빨리 안락사를 해 올리겠습니다."
"그래 좋다."
그래서 그분에게 각서를 받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러면 옛날에 그 중들은 바위 밑에다가요, 참나무 장작을 한 열 짐을 쌓아놔요. 그리고 아직도 생명이 끊어지지 않은 스님을 밧줄로 꽁꽁 묶어 가지고 장작 위에다 얹어놓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다 석유를 들이부어요. 그리고 연꽃으로 만들어 놓은 불교의 상징 가운을 보기 좋게 씌워 놓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비식이 진행됩니다. 우리는 그 당시 아직도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다비식을 견학을 하고 서 있었습니다. 큰스님들은 목탁을 들고 나와요. 이제 신호에 따라서 그 나무에다 불을 질러 버립니다. 그 기름에 불이 붙어 가지고 활활 타들어가요. 그 생명이 끊어지는, 그 소리치는 비명소리를 들을 때에 간장이 다 녹습니다. 이렇게 생명이 끊어지고 나면 가죽이 터지고 살이 터져서 송장 타는 냄새가 공중에 막 올라가요. 하... 불고기 굽다가 불 꺼진 마냥 기름과 살점이 주룩주룩 떨어집니다. 두 눈으로 못 봐요. 이걸 2탕, 3탕, 재탕, 또 해야 돼요. 저는 그것을 보고 그날 저녁에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눈만 감으면 그게 막 나타나요.
'나도 중인데 나도 죽으면 저렇게 타야 된다.'
도저히 있고 싶은 마음이 없어 가지고 나올 마음을 가지게 됐던 것이올시다. 여러분들은 중이 안 돼봤기 때문에 그런 처참한 모습을 안 보고 사는 것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나오게 된 동기는...
중들은 한 절에 오래 못 있어요. 여기저기 전국 순회를 하게 되어 있는데, 돈을 가지고 가면 대우 받고, 돈 안 가져가면 일만 직싸게 해야 돼요. 제가 영주 부석사에 가서 있었는데, 저녁잠을 자고 아침밥을 먹으려고 나갔더니 선배가,
"시주공양 받아 왔나?"
"아닙니다."
"밥 먹지 말고 나가! 공양도 안 받아가지고 와서 무슨 밥을 먹냐?"

이 절간에는요, 선후배 차이가 엄청나게 큽니다. 그래서 밥을 못 먹고 쫓겨났는데, 배가 고프니 어떻게 해요? 마을에 나가서 또 시주 공양을 받았지요. 쌀도 주고 돈도 주고 하는데, 한 군데 갔더니 왜 난데없는 젊은 청년이 나타나 가지고,
"스님, 염불하고 다니지 말고 예수 믿고 구원받으소."
제가 처음 듣는 말인데 구원이 뭔지 압니까?
"당신, 뭐 준다 그랬소?"
"구원 받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원히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뭐요? 예수 믿으면 영원히 살아요?"
그래서 내가 욕을 했어요.
"이 사람아, 거짓말하지 마라! 인생은 나면 고생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게 인간이다. 당신도 나도 인과응보에 따라 업보 중생해야 되는 법이다. 부처님도 그 일을 다 해결 못하고 열반했다. 당신, 그런 거짓말하고 다니면, 당신 죽어 지옥의 열 두 대문에 끌려가면 고통 받을 게야! 그런 거짓말을 하면 안 돼! 부처님, 저 어리석은 청년을 용서하옵소서. 나무아미타."
그리고 가는데, 이게 또 따라오네. 뭐하러 오냐고 하니까, 예수는 생각해보고 믿고, 이 책을 한번 읽어보라면서 주더라고요. 시주 쌀을 얻으려고 짊어지고 다니는 바랑 망태에다가 그 책을 쑥 집어넣어 버려요. 절에 와 가지고 펴보니까, 쌀이 막 묻어 있는 신약성경 책 한 권이 나왔어요. 기독교 신자가 이 책을 보고 예수 믿는데, 이게 그래도 뭔 진리가 있지 않겠나 싶어요. 그래서 다른 스님들 몰래 감춰 가지고 다니면서 여섯 번 봤어요. 이 성경책을 보고,
'기독교의 주인공은 살았다. 그러니 우리는 죽은 주인공에 복 달라고 빌 것이 아니라 산 주인공에 복 달라고 비는 것이 인간의 가치를 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래서 나도 믿어야 되겠다는 마음을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책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이 두 번째 동기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나올라고 생각해보니 못 나오겠어요. 중은 절에서 먹여주고 채워주고 다 공짜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나가면 누가 밥 먹여줄 겁니까? 그런데 한번은 염불하다가 졸음이 와가지고 법당 옆에 누워 잠들었다가 우리 주지스님한테 뒤지게 맞았어요.
"이놈아, 자려면 방에서 자지 왜 부처 옆에 발을 뻗쳤냐?"
사정없이 패는 바람에 얻어맞고 앉아가지고 생각해 보니 화가 나더라니까요. 자는 놈은 개도 안 때린다는데 깨워가지고 때릴 것이지. 그래 가지고 그렇게 두들겨 맞고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근데 이상해요. 신약성경 6번 읽었는데, 말씀 한마디가 내 머리 속에 떠 올라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야, 다 내게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석가모니 부처는 80을 살아도 그런 소리 한 번도 안 했어요. 그런데,
'예수는 자신이 있으니까 오라고 안 했겠느냐. 아이구, 모르겠다 가자!'
그래서 뛰쳐나와 버렸어요. 그렇게 그냥 뛰쳐 내려 와 가지고 저희 아버지 원구 스님께,
"아버님! 종교의 주인공이 산 주인공도 있고 죽은 주인공도 있는데, 아버님, 산주인공 따라 가십시다."
무슨 소리를 듣고 왔냐고 야단치대요.
"아니요, 나는 직접 체험했습니다."
큰절을 올리고, 아버지한테 붙잡힐까봐 도망쳐 버렸어요. 그 이후에 저는 부산 경성대학을 졸업하게 되었고, 서울 감신대학을 졸업해서 이제 감리교 목사 안수를 받게 된 거예요.

우리 아버지가 원구 스님이신데 74년 동안 주지로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 내가, 목사가 어떻게 전도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지요.
"구하면 주신다고 했지 않습니까? 천지는 없어져도 내 말은 안 없어진다고 했는데, 제가 목사 하려면 우리 아버지가 예수 믿어야 되겠사온대 아버지를 전도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옵소서."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에 아버님과 헤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인간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보고 싶었어요. 명절이 오면 시를 써보기도 하고, 글을 써보기도 하고, 편지를 써보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전부 다 모아가지고 하나의 노래를 만들었어요. 이것이 바로 효도가인데, 그걸 내가 베껴가지고 갔거든요.
"아버님, 그동안 만수무강 하셨습니까?"
아버지가 내 모습을 보고, 나하고 인연이 끝났는데 돌아가라고 그래요.
"아버님, 자식이 어떻게 인연이 끝났습니까? 아버님, 예수 믿고 구원 받으셔야 됩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라 그래요.
"안 갑니다. 언젠가는 아버지가 성령님의 감동 받으면 믿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 저는 아버님을 위해서 기도하렵니다."
그리고 나이가 74살 먹은 할아버지 앞에서 저녁마다 엎드려 가지고
"아버님, 제가 보고 싶어서 이 글을 써 가지고 왔는데 한번 들어 보실랍니까?"
필요 없다고 안 듣는다고 그래요.
"들어보세요."
그러면서 그 노래를 4개월 동안을 저녁마다 아버지 앞에서 불려 드렸습니다. 그 노래를 듣던 저희 아버지가 74살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4개월 동안을 하루 저녁도 안 빠지고 불렀더니요, 아버지가 은혜를 받아서 기독교에도 그런 효도관이 있느냐고 물어요.
"아버님, 기독교는 살았을 때 효도하는 종교올시다. 그래서 제가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그랬더니,
"너 같은 놈 인간 만들어 돌려보내는 거 보니까 기독교가 괜찮구나. 나도 젊을 때는 불교 신도들이 많이 왔는데, 늙어 빠지니까 안 온다. 인생은 늙어지면 다 헛것이다. 나이가 많으면 자식 따라 가야 되고, 나는 이미 끝나버렸다. 네가 하나님과 예수를 믿어 가지고 잘 된다면 나도 너를 따라 예수 믿지!" 

할렐루야! 저희 아버님은 74살에 74년을 입었던 승복과 염주, 그리고 책 같은 거 사정없이 불태워버리고 예수 믿게 됐습니다. 
이렇게 된 그 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 후에 우리 아버님이 가지고 있던 절간을 허물어 가지고 고등공민학교를 세웠습니다. 
왜 그랬느냐. 
그때 당시는 자녀들 중에 돈이 없어 중학교도 못가는 아이들이 엄청나게 많았어요. 
나는 그 아이들을 전도할 욕심으로 절간을 변화시켜서 학교를 만들었고, 부처를 들어내니까 벌레가 바글바글 부처 밑에 많이 있어요. 석유를 부어가지고 불로 태우니 꼬불탕꼬불탕 다 타 죽대요. 그리고요 그 자녀들을 돈 안 받고 공부 가르친다고 모아놨더니 엄청나게 아이들이 몰려왔어요. 책 살 돈도 없는 아이들이에요. 그래서 서울에 올라가서 미션스쿨들을 다니면서 책을 얻어다가 아이들에게 나눠주니까 12과목이 넘대요, 중학교 과목이. 그렇죠? 원래는 과목마다 선생님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내가 돈도 없는데, 내가 혼자 교장인데, 월급을 못 주니까 나 혼자 그걸 다 가르치는 겁니다. 교장도 되고, 담임도 되고, 과목선생도 되고. 그 12과목을 나 혼자 다 가르쳤으니 내가 얼마나 머리가 좋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가르쳤고, 저녁마다 모아가지고 특별 강의로 전도했어요. 그렇게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송 가르쳤어요. 그런데 그 아이들이 신앙을 받아들이니까요, 성령이 충만하니까요, 그래서 그 부모를 막 전도하는데, 생명 걸고 전도했어요.

4회 졸업생을 제가 얻었어요. 그 4회 졸업생 내고 나니까, 중학교가 평준화가 되니까, 고등공민학교가 필요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 고등공민학교를 지금은요, 십자가를 달아가지고 교회를 만들어 버렸어요. 그렇게 절이 변해서 학교가 되고, 학교가 변해서 교회가 된 곳이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사동이라고 하는, 절골 마을의 사동교회가 그렇게 세워진 교회에요. 그리고요, 그 아이들이 예수 믿어가지고 지금 잘 됐어요. 목사가 세 사람이 나오고요, 장로가 일곱 명이 나왔어요. 초등, 중등, 고등학교 교사가 나오고, 지금 대학교 교수가 나왔어요. 그 고등공민학교 출신 중에! 예수를 믿으니까요, 사람의 운명이 바뀝디다. 지금은 절 두 개가 싹 없어져 버렸어요. 내 가족이 예수 믿으면 가정이 바뀌고, 지역이 예수를 믿으면 지역이 바뀌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저는 그 지역을 복음화 했지요.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와서 중생교회를 세우고, 중생선교회를 세워가지고 중들을 전도했는데, 기독교로 돌아온 중이 92사람입니다. 이분들을 보면 돈 가져오는 분이 한 분도 없어요. 그러니 옷을 벗기고 다른 옷을 사 입혀야 되고, 고무신 벗기고 구두 신겨야 되고, 그 다음에 머리 기르니까 이발 시켜야 되고, 장가보내야 되고 시집보내야 되고요, 사명감 있는 사람 신학공부 시켜줘야 되고. 제가 22년 동안 지금 그 일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 들어가야 내보내고. 이런 일을 지금까지 하는데, 그래서 제가 이렇게 비쩍 말랐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정이 다 예수 믿어가지고요. 아버지도 지금 예수 믿어가지고 돌아가셨지만 소천했고, 우리 형님이 장로가 됐고요, 내 동생이 목사 됐고요, 우리 누님들이 부산에 사는데 보살이 변해가지고 집사가 되가지고요. 과거에는 염불하던 우리 가족들이 모이면 그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 찬송 할 때마다 너무 기쁘게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여, 다만 내가 여러분들에게 부탁드리는 것은 여러분만 구원받았다고 안심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구원받았으면 천국 가는 건 가요. 그러나 아직도 부모가 믿지 않는다든지, 또 자식이 믿지 않는다든지, 나와 함께 사는 남편이 믿지 않는다든지, 그분 지옥 간다는 말이에요. 금년에는요, 최대의 목적이, 소원이 뭐냐. 가족 전도에 가정 선교사 되시기를 바랍니다. 외국에 나가 선교사는 못해도 가장 가깝게 살고 있는 내 가족은 전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4개월 동안 엎드려 울부짖으니까요, 들어줍디다. 그러니 될 때까지 한번 매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저 눈 앞에 보이는 것들, 곧 인간은 태어나서 고생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생은 참으로 불쌍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생각해 보자...
생명을 부여받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인생은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가.
그 인생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고생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을 경험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가.
인생과 달리 인생을 둘러싼 자연의 꾸준함은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가.
이러한 놀라움과 신비가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얼마나 논리적이고 명확한가.
이러한 놀라움과 신비를 만드신 분이 계실 것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얼마나 논리적이고 명확한가.
그래서...
다시 한 번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이것이다.
(창세기 1:1)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개종인의 삶을 돌보는 것이 나의 소명”


“타종교를 믿거나 우상을 숭배하다 예수를 믿겠다며 돌아오는 개종인들을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특히 득도를 하겠다고 집을 나가 오랜 세월 불교전통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일반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죠. 우선은 이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것이 제일 시급한 문제랍니다.”

바랑 속에 든 성경으로 예수님 만나

1980년 4월 개종인선교회를 설립, 타종교인 선교에 앞장서고 있는 중생교회 김진규 목사(68세)는 조부가 강원도 지역 불교신도 연합회 회장이고, 부친이 경북 영양군 ‘한국불교 태고종’ 일월사 주지승(태고종은 결혼한 승려를 인정하는 대처승제도를 허용하고 있다)인 불교가정에서 자라났다.

어려서부터 절밥을 먹고 자란 김 목사는 24살에 자연히 태고종에서 승려가 됐다. 그러나 불교계에서 대처승을 인정해주지 않을 뿐 아니라, 승려들이 술과 담배• 육식 등을 거리낌 없이 해대면서 해탈하겠다고 하는 모습으로 보면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에 그는 진정한 부처의 법도를 깨닫고자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인 속리산 법주사에 입문해 ‘태선’이라는 법명으로 17년간 수행했다. 하지만 고령인데다 풍에 걸려 거동이 불편한 은사(82세) 승려에게 본인의 동의를 받아 ‘다비식’(불교 장례식)으로 거행하는 것을 보면서 또 한 번의 회의를 느끼게 됐다.

자신의 젊음을 바쳐 몸담고 있던 불자의 생활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고 있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성경을 선물 받았다. 김 목사는 “시주하러간 마을에서 한 청년이 바랑 속에 겁도 없이 성경을 넣었다”면서 “밤마다 남몰래 성경을 읽으면서 인간에 대한 속죄와 구원, 영생의 진리와 함께 기독교가 살아있는 종교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직접 체험하고 17년 동안 자기해탈을 위해 고행 길을 걸으며 함께 했던 승복을 벗어 던졌다.

삶이 안정될 수 있는 공간 마련해 줘야



하나님 품으로 돌아온 것이 너무나 감사했던 김진규 목사는 처음부터 덮어놓고 ‘불교인선교회’를 창립해 선교회 명칭대로 승려들을 전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그를 불교계에서 가만 놔둘리 만무했다. 대놓고 승려들을 선교한다고 데모와 압력 등으로 가는 곳 마다 쫓아 다니면서 방해했던 것이다.

이에 개종인들이 거듭났다고 해서 ‘중생인선교회’라고 개명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중생이라는 어감 때문에 이단같다고 기독교에서 거부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우상숭배 하거나 타종교에서 개종한 사람도 들어올 수 있도록 3년 전부터 ‘개종인선교회’로 개명해 선교 활동을 펼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이러한 가운데 김진규 목사는 지난 20년 동안 90여명의 승려들을 개종시키는 열매를 거두게 됐다. 그러나 이들 중 구원의 확신이 없거나 사회에서 발붙일 곳 없어 방황하던 사람들 30여명이 다시 절로 돌아가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60여명도 생활고로 인해 사방에 뿔뿔이 흩어져 사는 것을 보면서 이들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생활관 건립을 추진하게 됐다.

이에 지난 3월 강원도 원주에 생활관을 100평 규모로 개관해, 전직 승려들을 불러모아 이들이 안정된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김 목사는 “전직이 승려인 개종인들은 오랫동안 절에서 살았기 때문에 가정이 없을 뿐 아니라 기술도 없어 의식주 해결이 힘들다”며 “게다가 교회에서도 서로의 배타적인 심리 때문에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하기 어렵다”고 이들이 함께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따라서 이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그는 “이들이 불교의 경전과 전혀 다른 성경의 진리를 깨닫기 까지는 매우 힘이 들지만, 구원의 확신이 들어서면 절대로 사찰로 돌아가지 않는다”며 “믿음이 심어질 때까지 이들의 생활을 지원해 줘야 한다”고 밝혔다.



그가 이러한 생활관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개종한 승려 때문이다. 원주에 있는 백운사의 비구승이 김 목사의 간증테입과 비교종교학 책을 읽고 마음을 열어 예수를 영접하면서 사찰을 생활관 용도로 내놓은 것이다.

비구승이 개종한 것도 기쁜일이지만 그동안 생활관 터를 구하는 기도제목이 이뤄져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었다. 이에 김 목사는 불상을 직접 철거하고, 5층 석탑 위에 십자가를 세워 중생기도원을 설립한 후 숙원사업인 생활관을 건립하게 됐다.

내가 책임져야 할 과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20년을 선교해 왔어도 김진규 목사는 여전히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그는 “곧 70세가 되면 은퇴해야 되는데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다”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을 호소했다. 뜻있는 분들의 지원과 간증을 통해 받은 사례비로 재정을 충당하고 있지만 생활관을 이끌어 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한 생활관 건립에 들어간 비용의 일부를 아직까지 못 갚아 이자가 늘어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동안 지워해 오던 개종 후 신학을 하는 사람들의 학비와 생활비 일부를 지속적으로 도움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우상을 숭배하는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켜야 되는데 그 뜻을 이루는 데는 아직도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며 한국교회가 개종인들에 대해 관심 가져주기를 촉구했다.

그는 목사가 되면서부터 지금까지 타종교로부터 갖은 폭력과 협박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이들을 위해 사역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는 “중이 목사가 됐다는 이유로 많은 교회에서 초청을 받아 전국을 다니며 간증했는데, 그때마다 불교계에서 폭력과 데모 등으로 갖은 핍박을 했다”면서 “목사가 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내가 개종인들의 삶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세 가지 소원을 피력했다. 
“△우상의 재단들이 하나님의 재단으로 바꿔질 수 있도록, 
△부처가 되겠다는 승려들이 겸손한 자세로 돌아와 복음의 전도자가 되도록, 
△증가하는 개종자들의 생활 문제가 해결되도록….”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조계종 태선스님 17년간 의 삶을 청산하고 개종하여 목사가 되어 복음을 증거하는 김진규 목사와 사형수들의 교수형을 지켜본 한 교도관의 간증 영상

개종인선교회는 일천 육백년 불교역사와 전통 가운데 우리 민족은 우상을 숭배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본인이 승려 생활을 하다가 개종을 했기 때문에 불붙는 열정을 가지고 타종교 우상 숭배하는 이들을 구원시키고자 처음에는 불교인선교회로 시작하여 이후 우상인선교회로, 중생인선교회로, 그리고 지금은 개종인선교회로 범위를 확대해 선교하고 있습니다..

http://ca9191.org/bbs/view.php?id=board_19&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23

김진규 목사의  영상간증 
교도관으로 사형수들의 사형집행장면을 지켜 보면서 그들이 죽음 앞에 어떻게 반응을 했나를 자세히 영상처럼 묘사하는 간증

사형장에서도 생명얻는 회개의 역사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전한 예수 때문에 스데반처럼 담대하게 죽어가는 사형수를 부둥켜 안고 찬송과 기도의 봇물을 터트리고 말았던 박효진 장로!
어느 날에는 사형 집행 순간 대적하는 영의 눈빛을 보다 못해 목에 걸린 밧줄 밑에서 예수를 전하고 난 후, 죽음 5초 직전까지 같이 울어야만 했던 그 감동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모십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붙드시는 능력을 곧 체험하실 것이며,
누군가의 목에 걸린 죽음의 밧줄을 풀어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는 꼬불 꼬불 재를 넘어 찾아간 경북 청송 골짜기...
'죽은 자의 땅'이라 불리는 감옥(감호소)에서 집사 9년만에 껍데기 신앙인을 벗어 던지 박효진.
'갱생' 구호소리 음산한 열 닷섯자 높이 담장 안에서 희락의 기름을 부음받고 드디어 항복을 외치며 돌이킨 후에 자신의 두 번째 인생을 새로 시작합니다.
누구보다 더욱 훈련되어진 그는 하나님의 거대한 빛살이 영혼을 가까이 비춰주어 '주님의 증인'으로서 지구촌 모든 땅을 발바닥으로 밟으며 복음의 빛, 사랑의 열매를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그는 밀양 박가 규정공파 송당가문의 대 종갓집 종부, 어느 새벽에 들려온 종소리는 새벽닭 울 때 심히 통곡한 베드로처럼 한 여인을 회개하게 만듭니다.
그녀의 결단 이후 사당을 모셔놓고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살아온 집안이 구원의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만 섬기는 집으로 변화합니다.
낙망치않고 기도한 부인과 주변 사람들을 통해 다윗의 혈통으로 계보가 바뀐 박효진 장로의 가문을 만나보십시오.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끼는 복을 받으실 것입니다.

http://www.kcmusa.org/broadcast/viewer.php?idx=24&tn=broadcast_kcm&op=KCMTV&type=A  박효진 장로 간증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1380-1471


토마스 아 캠피스(1380~1471, T. A Kempis)는 독일에서 출생했다. 1399년 19세에 수도사가 되어 소박한 수도사로 평생을 살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명상하며 글을 썼다. 그의 작품은 많지만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로 명성을 얻었다. 영적 생활, 내적인 일, 내적인 위안, 성만찬 등 4부 108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영적 명상을 기록했다.

토마스 아 캠피스는 하나님의 세계에 젖어 살았다. 하나님, 그 분의 마음을 만나는 일은 그에게 즐겁고 감사한 일이었다. 기독교의 정신을 가장 깊게 고취시킨 정교한 문장으로 평가 받는다. 인간의 영혼에 대한 깊은 통찰력으로 쓴 글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지금까지 끼치고 있다. 어떤 이는 성경 다음으로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한평생 사는 동안 어느 누가 시험과 시련을 당하지 않고 살겠는가!

이 책은 이런 경우에 위로와 격려를 제공해 준다. ‘땅에서의 인생은 전쟁과 같으니 깨어 기도하라’고 한다. 시험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시험이 고통만 주는 것은 아니고 우리에게 영적 유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캠피스의 명상 기록에 나오는 말이다. “한 가지 시험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시험이 온다. 시험을 피하기만 해서는 이길 수 없다. 진정한 겸손과 인내로만 이길 수 있다. 시험은 불안정한 마음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한 데서 시작한다. 육신적인 욕망에서 출발이 된다. 유혹은 욕심에서 온다. 사소한 작은 생각에서 싹이 튼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은 시험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런 때 낙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을 더욱 열심히 찾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예수님을 피난처로 삼아야 한다.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 시험을 가져오는 삶의 역경에 대하여는 인내가 필요하다. 나만 혼자 힘든 인생이 아니다. 시험이 오기 전에 미리 저급(低級)한 세상 즐거움을 멀리하라고 캠피스는 말한다. 충동이 시작되면 싸우라고 한다. 나쁜 습관은 끊어 버리라고 한다. 영적으로 유익이 될 만한 말을 선택하라고 한다. 고난을 당해야 방심하지 않고 정신을 차리게 된다. 고난은 나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든다. 나는 지옥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언행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

수고와 슬픔이 떠나지 않는 인생길이다. 어디에 가든지 유혹의 함정과 영적 유혹들로 가득 차 있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하여 악평을 하더라도 화를 내지 말고 나보다 더 악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라”고 캠피스는 권면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에게 모함을 당할 때에 잠잠하다. “닥치는 시험을 대처하기 위해 깨어 있으라”라고 충고한다. ‘시험의 유익함’을 깨달아야 한다. 시험으로 인해 더 겸손해지고 더 깨끗해진다. 교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점검하게 된다. 시험을 당할지라도 그 곳에 성령님께서 함께 계시고 도와주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도와주시는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시험과 환난을 통해 우리를 천국 백성으로 거룩하게 빚어 가신다. 의인이 왜 고난을 당하는가? 어느 누구도 대답해 주지  않는다. 성경도 침묵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깊으신 지혜와 높은 길을 알지 못한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주의 성소(聖所)를 만들어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며,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순례자의 길을 가고 싶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

독일 가톨릭 수도사제이자 신비사상가로 알려진 토마스 아 켐피스는 1380년 라인 강 하류 쾰른 부근의 도시인 켐펜에서 태어났습니다. 1399년, 19살에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한 후, 일생을 거의 아드네텐베르크 수도원에서 보내는데요, 33살(1413년)에 사제 서품을 받아 신부가 됩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네덜란드의 신비사상가 헤르트 호르테와 그의 제자 플로렌티우스 라데빈스가 창설한 평신도 공동체인 ‘공동생활의 형제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형제회는 당시의 신비주의가 지나치게 현실을 배격하고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에 반대하여 현실 속에서 신비와 경건을 추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형제회는 속세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수도적인 청빈, 정결, 복종의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고, 재산을 공유하며, 스스로의 노동으로 그날그날의 양식을 벌었습니다.

수도와 노동 외에도 그들은 필사본을 만들고, 인쇄와 제본을 했습니다. 그들은 교육 활동도 했는데요, 특히 연소자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수도회에서 주로 수련수사들을 교육하는 일을 맡았고 설교와 저술활동에 주력했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 외에 이 형제회가 배출한 인물로는 르네상스 시대 네덜란드의 가톨릭 사제이자 인문주의자들을 대표하는 지식인 에라스뮈스(Erasmus, 1466-1536), 독일 신학자이자 근세철학의 선구적 사상가였던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 등이었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1425년 수도원의 부원장으로서 후진 지도에 진력했는데, 후진 지도를 위한 지도서로 쓴 책이 바로 《그리스도를 본받아》(《준주성범》으로도 번역됨)인데요, 그가 마흔 일곱 살 경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외에도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기도와 묵상》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성서 다음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이 읽힌 책이자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모두 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은 ‘영적 삶을 위한 거룩한 조언’, 
2장은 ‘내적 삶을 위한 거룩한 조언’, 
3장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위로’,
 4장은 ‘예수님의 거룩한 만찬 준비’입니다. 
다양한 주제에 대한 비교적 짧은 권면 형식의 글이기에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지침이 될 만한 주제들을 선택해서 소개하는 방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적 훈련 : 《그리스도를 본받아》 제1장

“성경의 내용을 잘 알고 또 온갖 철학자들의 말을 꿰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없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 외에는 그 어느 것도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될 뿐이다(전 1,2)”(1)

토마스 아 켐피스가 교권과 국가권력의 갈등기, 스콜라 철학의 절정기를 살았던 신비주의자였다는 것을 알면 왜 그가 이런 주장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시작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토마스 아 켐피스가 인간의 지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배움을 경멸하지는 마라! 지식은 선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렇지만 소중한 양심과 아름다운 삶에는 미치지 못한다.”(2)

지식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심판의 날이 닥치면 우리가 읽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동한 것에 관해, 또 어느 정도나 말을 잘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바르게 살았는지에 관해 질문을 받게 될 것임을 명심하라.”(3)고 토마스 아 켐피스는 말합니다.

평신도 형제회 활동을 했던 토마스 아 켐피스는 아마도 당시의 가톨릭 교황과 사제들의 부패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 앞에서의 겸손’, ‘지나친 정욕의 절제’, ‘순종을 통한 참된 자유’를 훈련 수사들에게 권면합니다.

그러면 이런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토마스 아 켐피스는 ‘침묵’을 권합니다. “입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매우 나쁜 습관이다”(4)이고, “악한 습관에서 손을 끊는 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역경의 유익함을 발견하기’, ‘시험의 인내’,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기’, ‘거룩한 사랑으로 선행을 베풀기’,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끈기 있게 감당하기’, ‘매일의 삶에서 영적 훈련을 수행하기’, ‘혼자만의 시간과 골방의 침묵을 사랑하기’,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기’, ‘죽음을 준비하기’를 훈련하라고 합니다.

‘역경’이 유익한 것은 역경이 “우리가 영적인 나그네이며, 세상에 속한 그 무엇도 신뢰해서는 안 되는 존재임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오해에서 오는 고통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교만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우리 내면의 삶은 외적으로 비난 받을 때 가장 크게 성장하기 때문입니다.(5)

‘시험’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험’으로 번역된 독일어는 ‘페어수헨’(versuchen)인데요, 전철 ‘페어’(ver-)는 ‘잘못된’을 의미하고, 동사 ‘수헨’(suchen)은 ‘찾다’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시험’은 우리가 ‘무엇인가 잘 못된 것을 찾는데서 온다’는 뜻이지요.

토마스는 ‘땅을 밟고 사는 사람은 시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시험은 두 가지 허점을 이용해 인간을 더욱 옥죄는데요, 우유부단한 마음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부족이 그것입니다. “키 없는 배가 물결에 밀려 요동하듯 부주의하고 결단력이 없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시험에 마주치게 된다.”는 것입니다.(6)

사실 시험은 피하는 것이 어떤 때는 하나의 답이 될지 모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시험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지면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해결책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토마스는 시험을 “피하는 것이 해답은 아니다.”고 합니다. “시험을 피하려고 들면 그리 멀리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토마스는 인내와 겸손으로 시험에 맞서 시험을 뿌리째 들어내라고 합니다.(7) 쉬운 일은 아니지만, 토마스는 시험과 어려움을 겪을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게(벧전 5,6), 간절히 기도하면서 도움을 구해야 한다고 권합니다.(8)

토마스는 “사랑이 없는 겉치레의 선행은 영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반면, “사랑으로 행하는 일은 아무리 작거나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충실한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선행을 했는지, 얼마나 많은 선행을 했는지 따지지 않으시고, 선행의 동기를 헤아리신다.”는 것이지요. 토마스는 선행이 자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행해지고, 자기 의로움의 근거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것이겠지요. 토마스는 “참된 진리와 완벽한 사랑을 소유한 사람은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만물 안에서 타오르는 것만을 바랄 뿐이다.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거만하거나 개인적인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는다.”(9)고 합니다.

영적인 삶을 위해서는 ‘영적 훈련’이 중요합니다. 토마스는 ‘영적 훈련’을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그 과정을 설정하되, 특히 자신의 최대 약점과 싸움을 벌이듯 치열하게 해야 한다.”(10)고 합니다. 훈련은 매일 계획에 따라 반복되어야 하고, 마치 싸움을 하듯 치열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군대에서 제식훈련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압니다. 절도와 규율을 가르치기 위해 줄과 열을 맞춰 행진하는 그토록 쉬운 일을 며칠이고 반복하면서 지루할 정도로 가르치지요.

물론 똑같은 종류의 훈련이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처한 상황에 따라 영적 훈련을 선택하는 것도 달라야 한다고 토마스는 비교적 융통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모든 훈련의 핵심은 이 땅을 후회 없이 떠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에 있다.”(11)고 합니다. 죽을 때 삶에 후회가 없다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죽음이 아닐까요! 이런 죽음, 매일의 영적 훈련이 없다면 아마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일 것 같습니다.

토마스는 이런 후회 없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아침이 되면 해질녘까지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라. 밤이 되면 새로운 아침을 기약하지 마라. 언제나 죽음을 준비하라”(12)고 합니다. “참으로 슬기롭고 행복한 사람은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평소처럼 변함없이 자신의 삶을 산다. 우리가 이 세상을 진심으로 경멸하고, 덕을 쌓는 일을 열망함으로 규율을 잘 지키고, 고통을 감내하면서 회개하고, 기꺼이 복종하고,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위해 어떤 고난이든지 끈기 있게 참아 나간다면 이처럼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13)고 합니다.

그런데 죽음이 언제, 어떻게 올지는 우리가 잘 모르지요. “우리가 잡고 있는 기회가 죽음 때문에 막을 내리게 될 순간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지금 행동하라.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바로 지금 하라. … 이 세상에서 나그네나 피난민처럼 지내라”(14)고 권합니다. 

토마스는 심판을 현재적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이 죄를 범하는 만큼 나중에 벌을 받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게으른 사람은 불채찍을 맞고, 음식을 탐하는 사람은 굶주리고 목마르는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사치하고 쾌락을 즐기는 사람은 뜨거운 불속에 들어가게 되고, 시기하는 사람은 마치 정신을 놓아버린 짐승처럼 울부짖게 될 것이다. 죄는 반드시 그 값을 치르기 마련이다. 교만한 사람은 온갖 혼란에 빠질 것이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릴 것이다. … 벌을 받는 사람에게는 휴식이나 위로가 없다.”(15)고 합니다.

심판의 때, “의로운 사람들이 과감하게 일어나 자신들을 괴롭히고 핍박하는 것에 맞서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은 크게 안심하지만 교만한 사람은 사방에서 밀려드는 두려움에 휩싸일 것이다. 그때에는 인내하면서 겪었던 모든 고통이 즐거움으로 바뀌고, 모든 악인이 자기 입을 봉하게 될 것이다. … 그때에는 초라한 의복이 빛을 발하고, 값비싼 의복이 빛을 잃을 것이다. 그때에는 오두막이 금으로 장식된 궁전보다 더 가치 있게 여겨질 것이다. 그때에는 변함없는 인내가 세상의 어떤 권력보다 더 유용할 것이다.”(16)

하나님의 심판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지,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일어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토마스는 하나님의 심판을 현재적이고 동시에 미래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내적 삶: 《그리스도를 본받아》 제2장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제2장은 ‘내적 삶을 위한 거룩한 조언’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내적 삶을 위해 “누가 자신의 편이고, 또 누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해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17)고 권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보호자가 되시고, 그리하면 그 누구도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것이기에, 굳이 사람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내적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의 평화를 유지해야’ 하고,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또 ‘단순함과 순수함’이라는 두 날개를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토마스는 여기서 ‘의도의 단순함’과 ‘감정의 순수함’을 의미합니다. 단순한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순수한 마음은 그분을 바라보고 헤아립니다.(18)

토마스는 행복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낮추는 법을 아는 사람에게 찾아온다(시 119,1-2)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다른 모든 사랑을 넘어서야 합니다.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근거로,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을 찾으면 분명히 그 분을 만날 것인데, 반대로 자신을 찾으면 오직 자신만 만나게 될 것이고 그 때문에 손해를 볼 것이라고 경고합니다.(19)

그런데 예수님의 하늘나라를 사랑하는 이들은 많지만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드문 현실을 토마스는 지적합니다. “누구나 예수님과 함께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지만 그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많은 사람이 떡을 나누어 주시는 한 그분을 따르려고 하지만 고통스러운 자기희생의 잔을 마시려고 머무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그분의 기적에 감명을 받지만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물다. …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어느 정도의 위로를 받는 한 그분을 찬양하고 축복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을 감추고, 심지어 잠시 그들을 떠나가기라도 하시면 그들은 불평하기 시작하고 금세 낙심한다.”(20)

‘문제해결의 신’, ‘도깨비 방망이 같은 신’을 믿는 신앙, 자기 이익이나 자기 사랑에 물들지 않은 신앙인을 찾기 어려운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토마스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하나님을 기꺼이 섬기고자 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21)고 합니다.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지요. 기적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아래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처럼, 기적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거나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지요.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도 그의 《기도시집》에서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을 찾는 이들은 저마다 당신을 시험합니다. … 그렇지만 나는 대지가 당신을 이해하듯 그렇게 당신을 이해하렵니다. 나의 성숙과 더불어 당신의 왕국도 성숙합니다. 나는 당신을 증명하려는 어떤 허영도 당신에게 바라지 않으렵니다. 시간이란 당신과는 다른 것임을 나는 알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어떤 기적도 행하지마소서.”(22)

내적 위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제3장

제3부,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위로’는 그리스도와 ‘따르는 자’ 사이의 대화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먼저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의 자녀야, 헌신을 은밀하게 유지하는 것은 더없이 좋은 일이다. 스스로를 높이지 말고 헌신을 자주 입에 담지 마라. 헌신의 수준 때문에 강박관념에 시달리지도 마라. … 은총을 누리고 있다는 감정에 너무 지나치게 매달리지 마라. … 영적인 삶은 위로의 은총을 누릴 때가 아니라 겸손과 자기 부정과 인내로써 은총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때 발전하게 된다. 또한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항상 경건의 시간을 조금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을 때 발전하게 된다.”(23)

“어떤 경솔한 사람들은 자신들 마음대로 황홀한 헌신을 경험하겠다며 시도하다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자신들의 취약함은 안중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이상을 시도하다가 쉽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만다. 스스로를 위해 하늘에 보금자리를 지으려고 하는 이들은 쓸모없는 일을 하는 것이다.”(24)

‘헌신강박증’,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나무랄 것 없고 흠이 없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경건과 헌신을 폄훼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의 헌신과 경건이 남에게 드러내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신 것이지요. 오늘의 교회 안의 갈등과 분열도 대게는 지나치게 열심인, 남의 평가를 의식한 헌신에서 비롯되지요.

그런데 ‘따르는 자’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저는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당신만을 바라보고, 당신만을 사랑할 때, 제 자신과 당신을 발견합니다.”(25) 자기만 바라보는 사람은 스스로를 잃어버리지만,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길을 찾는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요. 토마스 아 켐피스는 바라는 것을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고 권합니다: “주여, 만일 그것이 당신의 뜻이거든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약 4,15). 그렇게 되는 것이 당신을 영광되게 한다면 당신의 이름으로 그렇게 되게 하소서. 만일 당신이 그것을 좋다고 보시면 그것이 제게도 유익이 되게 해주시고, 저로 하여금 그것을 당신께 영광되게 사용할 수 있게 해주소서. 그러나 만일 그것이 해로운 것이라면 그 소원을 제게서 앗아가소서.”(26)

아무리 수도사들이 함께 사는 수도원이라고 해도 서로 남을 헐뜯고 비난하는 행태는 어디에나 있는가 봅니다. 헐뜯는 비난에 마음에 상처를 받고, 또 그에 대한 보복으로 험담을 퍼뜨리는 이들에게 토마스 아 켐피스는 “마음의 모든 불안과 괴로움은 절제를 모르는 사랑과 헛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27)고 합니다. 남에게 칭찬받으려는 욕망에서건, 비난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건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내적으로 자유롭고, 철저하게 스스로를 다스려야 한다.”(28)고 토마스는 권면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 입을 다물고, 들은 말이라고 해서 모두 무분별하게 믿지 않고, 그 말을 쉽게 퍼뜨리지 않아야 하고 … 가볍게 마음을 내보여서는 안 되며... 떠도는 말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 하늘의 은총을 간직하기 위한 가장 안전한 방법은 사람들의 평가를 기대하지 않고, 널리 칭송을 받으려고 노력하지 않아야 한다.”(29)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비난이나 칭찬에 이리 저리 흔들리고, 지극히 사소한 일에도 마음을 쓰면서,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사람들이 “멸시받기를 두려워하기 때문”(30)이라고 토마스는 말합니다. “신중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은 싫은 소리 한마디에도 쉽게 흔들립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과 무관할 수 있다.”(31)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심장을 샅샅이 살피시고, 얼굴이나 외모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사람들의 부당한 대우에 신경 쓰지 않는다.”(32)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평범하고 소심한 사람은 사소한 험담에도 크게 낙심하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SNS를 통한 ‘가짜뉴스’가 범람하는 현실에서 악의적인 험담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거짓말도, 가짜 뉴스도 선점하면, ‘아니면 말고’ 식의 악의적 무책임이 오히려 사실인 것처럼 퍼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옛날에도 그랬나 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냥 내버려 두어라. 그와 같은 일이 처음도 아니고, 새로울 것도 없다.”(33)고 합니다. “가능하면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도록 하고, 마음이 상해도 실망하지 말고, 오랫동안 매달리지 마라. … 듣고 싶지 않고, 분노가 솟구치거든 자신을 다스리고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말을 입에 담지 않도록 하라.”(34)고 합니다.

그럴 수 있는 힘, 견딜 수 있는 믿음은 “주님은 의로우시고, 주님의 판단은 정확하시다.”(시 119,137)는 말씀에 있습니다.

4권 성찬에 관한 경건한 권면

[3권과 비슷하게 4권은 제자의 질문과 주님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경어는 제자의 질문이고, 하대어는 주님의 대답입니다. 중요한 구절만을 발췌했습니다.]

주 나의 하나님께서 이 부족하고 가련한 자를 초대하셔서, 주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에 참여하라고 하시니, 그 말씀이 이 죄인의 귀에 너무나 달콤하고 향기롭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를 극진히 대해 주시며, 이렇게 지극한 사랑으로 초대해 주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성찬을 통해서 영적인 은혜가 수여되고, 잃어버렸던 영적인 능력이 회복되며, 죄로 흉측해졌던 아름다움이 되돌아옵니다.

보십시오. 주님은 거룩한 자들 중에서도 가장 거룩하신 분이시고, 나는 죄인들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죄인입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 앞에서 얼굴조차 들 수 없는 자인 데도, 주께서는 친히 몸을 굽혀 나를 바라보십니다.

주님, 내가 처음 죄를 짓게 된 날부터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주 앞에서와 주의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저질러 온 나의 온갖 죄악들과 범죄들을 주 앞에 내어 놓고, 주의 속죄의 제단 위에 올려 드리오니, 주의 사랑의 불로 그 모든 것들을 태우시고 사르셔서, 내 모든 죄의 더러움을 씻어 주옵소서.

경건한 사람은 성찬에 나아와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고난의 신비를 경건하게 묵상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되고, 그럴 때마다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교제를 통하여 보이지 않게 새롭게 세워져 가게 된다.

의문과 논란이 있는 어려운 길들을 버리고, 하나님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명하신 길을 정직하게 걸어가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무 심오한 것들을 천착하고자 하다가 신앙까지 잃어버린 사람이 많다. 하나님께 순복하고 너의 지각을 믿음 아래 종속시켜라.

모든 이성과 본성적인 탐구는 믿음보다 앞서가거나 믿음을 훼방해서는 안 되고, 도리어 믿음을 뒤따라가야 한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서 측량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시고 인간들의 탐구에 쉽게 포착될 수 없다. 하나님은 일들은 기이하고 인간의 언어로 모두 표현할 수 없다.

-끝-

3. 나가면서

중세의 고전을 읽어오면서 지금까지의 책들과 토마스 아 켐피스의 책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중세적 신비주의를 뛰어넘지는 못했지만 지나치게 신비주의를 추구하거나 관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아퀴나스처럼 집요하게 철학적 사유방식을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개신교인들이 읽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건전하고 바른 신앙관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책 속의 내용은 지나치게 세상과 결별하고 하나님만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의 삶은 현실에서의 경건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전에 신비주의자들이 현실에 과도하게 집착했음에도 관상을 통해 하나님을 추구한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중세 교회사를 집필한 R.W. 서던은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며 아쉬워합니다.

“세상을 등지지도 않았고 세상에 몸을 던지지도 않았다. 다만 세상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투쟁들에서 피신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그들은 일상생활을 훌륭히 해나간 모범적인 사람들이었는데도 폭풍과 같은 도시 생활에서 물러 나와 힘써 추구했던 삶을 세상에 소개할 만한 책은 한 권밖에 내놓지 못했다.”

저의 개인적인 사견이지만 기독교 역사 중에서 최고의 고전을 세 권을 선정하라고 한다면 어거스틴의 <고백록>과 존 번연의 <천로역정> 그리고 중세 시대를 대변하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고를 것입니다. 중세의 신비적 성향을 지니면서도 삶과 신앙을 격리시키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과도하게 상징적으로 해석하거나 이성적으로 추론하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이성을 믿음에 굴복시켜야 한다는 어거스틴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성경을 알기 위해 몸부림 쳐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않습니다. 분주하고 헛된 야망에 부추김을 당하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맑은 샘물과 같은 청량함을 선사해 줄 것입니다.

본성과 은총

600여 년 전, 수도사들을 위한 지침서로서 쓴 책이지만,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수도원 안에 있거나, 세상 안에 있거나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읽어야 할 고전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들 사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수도사건 세속인이건, 수도원 안이건 밖이건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 켐피스도 ‘본성’과 ‘은총’을 대비시킨 것 같습니다.(35)

본성은 교활해서 많은 사람을 유혹하고, 걸려 넘어지게 만들고, 속이고, 언제나 자신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은총은 소박하고, 전혀 악을 포장하지 않고, 속이려고 하지 않고, 모든 일을 순수하게 하나님을 위해서 하고, 하나님 안에서 최후의 안식을 누립니다.(36)

본성은 죽는 것을 꺼리고, 낮아지는 것을 싫어하고, 지배 받기를 바라지 않고, 복종하기를 거부하거, 쉽게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총은 고난을 자처하고, 육욕과 맞서고, 복종하려고 애쓰고, 패배하고 싶어하고, 혼자만의 자유를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37)

본성은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고, 누가 이익을 취하게 되는지 살핍니다. 그러나 은총은 스스로를 위해 도움이 되거나 유용한 것보다는 다수에게 도움이 되는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본성은 수치와 멸시를 두려워하지만 은총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수치를 당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행 5,41). 본성은 여가와 흥미롭고 아름다운 것들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값싸고 세련되지 않은 것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은총은 평범하고 겸손한 것을 즐거워하고, 거친 것을 비난하지 않고 낡고 기운 옷이라도 거부하지 않습니다.

본성은 일시적인 것들을 존중하고, 세상적인 이익을 즐거워하고, 손실을 슬퍼하고, 상처를 주는 말에는 예외 없이 화를 냅니다. 그렇지만 은총은 영원한 것들을 바라보고, 세상적인 것들을 멀리하고(고후 4,18), 손해를 볼지라도 괴로워하지 않고, 기분 나쁜 말에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38)

본성은 육신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외적인 위로를 기대합니다. 그렇지만 은총은 하나님에게서만 위로를 구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너머에 있는 더할 수 없는 선한 것을 즐거워하고 싶어 합니다.(39)

본성은 스스로의 이익과 도움을 위해 모든 것을 조종합니다. 본성은 보수를 받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하지만 은총은 하나님 이외에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습니다. 본성은 높은 지위와 좋은 출신 배경을 높이 사고, 권력을 잡은 사람에게 미소 짓고, 부자에게 아첨하고, 자신과 비슷한 것들을 칭찬합니다. 그러나 은총은 원수까지 사랑하고, 높은 지위나 좋은 출신 배경에 개의치 않습니다.(40)

본성은 부족하고, 어려움에 처하면 바로 불평합니다. 은총은 언제나 부족함을 견뎌냅니다. 본성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 돌리고, 자신을 내세우려고 애쓰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은총은 모든 것을 그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돌립니다.(41)

그렇다면 은총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일까요? 토마스는 “타고난 재능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 똑같이 허락되지만 은총과 사랑은 특별히 선택된 사람에게 주어진다.”(42)고 합니다. 그러므로 은총을 간구하고,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은총을 찾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지요.(43)

문은 두드려야 열리듯이, 은총은 찾는 이에게 주어지니, 본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은총을 찾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수도원 안에서나 밖에서나, 수도사건 세속인이건 마찬가지이겠지요.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 Christi

1. 토마스 아 켐피스의 생애

토마스는 1380년 라인강 하류 켐펜에서 요한과 겔트루테 해멜켄(해멜켄은 ‘작은 망치’란 뜻)의 아들로 태어나 1471년 7월 25일 하나님의 품에 안깁니다. 그는 독일의 신비 사상가이자 의도치 않았지만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데보티오모데르나(Devotio moderna)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토마스의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공동생활형제단이 운영하는 더벤터의 학교에 보냅니다. 화란(네덜란드)에 있는 더벤터는 타락한 수도원과 교회와 다르게 경건생활을 통해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의 형이었던 요한은 아그네스산 수도원에서 부원장으로 있었습니다. 당시 규칙에 의하면 형제가 동일한 수도원에 함께 머무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러나 두 형제의 바르고 온유한 성품은 모두에게 인정되어 함께 머물도록 허락이 됩니다. 그곳에서 청빈, 순결, 순종 서약을 하고 1413년 33세의 나이로 사제 직분을 받게 됩니다. 1425년에는 부원장으로 임명되었고, 새로운 수도사들을 훈련시키는 일도 맡게 됩니다. 수도원의 사무장도 맡게 되지만 그에게 행정적 재능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14세기 말과 15세기 초엽, 중세는 그야말로 흑 역사였습니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교황이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감금되다시피 하면서 프랑스 국왕의 꼭두각시 노릇을 합니다. 1377년 그레고리 11세가 로마로 귀환하면서 마무리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교황청의 수모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황청에 로마로 옮겨가자 프랑스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약해지는 것에 반발해 프랑스 추기경들이 콘클라베 무효를 선언하고 탈퇴하여 '대립 교황'을 세우게 됩니다. 새로운 대립 교황은 아비뇽에 두어 두 명의 교황이 있게 됩니다. 피사 공의회에서 다른 교황을 세우게 되면서 세 명의 교황이 있던 적도 존재합니다. 토마스가 활동했던 시기는 중세의 종말을 알리는 교황의 붕괴와 도덕적 타락이 극심한 시기였습니다. 1417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마르티노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여 서방교회의 분열은 막을 내리지만 그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중세가 무너지는 여진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시기를 살아갔던 토마스는 새로운 종교적 운동이 필요함을 체감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데보티오모데르나(Devotio moderna)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공동생활형제단은 부유한 상인이었던 헤르트 드 흐루트가 세속적 생활을 정리하고 공동체를 설립하면서 시작됩니다. 처음 시작은 비공식적 평신도 운동이었습니다. 1392년 토마스가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 시작한 이 운동은 집단이 아닌 다수의 사람들의 거룩한 열심에 대한 결심이었습니다. 운동은 점점 확산되고 동조하는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옛 사도들을 본받아 경건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공동생활형제단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작은 공동체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중세의 신비주의가 지나치게 현실을 배격하고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비현실적 신앙에 몰두하는 것에 반대해 현실 속에서 신비와 거룩을 추구했습니다. 이것이 후일에 일어난 종교개혁의 특징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루터가 기도원을 나와 세속에서 거룩을 추구하고, 칼빈이 소명을 세상 속에서의 ‘직업’과 연결한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수도원이 몸담고 있던 위트레흐트 시민들과 교황과의 갈등으로 인해 토마스는 형과 함께 1429년 6월 11일, 히링겐 부근의 구넨케르크 수도원으로 옮겨 갑니다. 이 일로 형 요한은 건강이 나빠져 3년 후에 죽게 되고 심각한 영혼의 상처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을 알 때 속세를 떠나라는 책의 내용은 지리적이고 공간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1448년 그는 부원장의 자리에 다시 선출되고 20년 동안 학생이자 상담사, 필사자 및 저자로 살아갑니다. 1471년 6월 25일, 마침내 토마스는 주님의 품에 안깁니다. 그의 나이 91세, 종교생활 63년째, 수도생활 58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가 살았던 시대는 중세 중에서 가장 어두운 암흑기였습니다. 그러나 어두울수록 아침은 가까워 오는 법, 종교개혁의 여명은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은 어두운 시대 속에서 개혁과 거룩의 기치(旗幟)를 높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수고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사상의 씨앗을 뿌린 것과 같았습니다. 그가 죽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구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를 붙임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됩니다. 이제 토마스 아 켐피스의 거룩한 열정이 스민 <그리스도를 본받아>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중요한 대목만을 직·간접적으로 옮깁니다. 박문재의 번역을 주인용 서적으로 삼았고, 필요에 따라 다른 번역자의 글도 첨가하였습니다.

2. 요약

[책은 4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1권은 25장, 2권은 12장, 3권은 59장, 4권은 18장으로 나누었습니다. 1권에서는 ‘영적 삶에 유익한 권면들’이란 주제로 영적 삶이 무엇인지 다룹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매혹적인 부분입니다. 2권은 ‘내면의 삶에 관한 권면들’이란 제목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3권은 ‘내적 위로’라는 제목으로 세상 속에서 평안을 누리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권면합니다. 마지막 4권은 ‘성찬에 관한 경건한 권면’이며, 성찬에 담긴 영적 의미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현대의 논문처럼 각권의 제목과 각장의 내용이 명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암울하고 타락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만을 추구하며 살았던 토마스의 생애는 세속에 대한 지나친 배타성을 드러냅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알지 못한다면 중세의 신비주의 사상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세상 속에서 배타적 거룩과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갈망은 타락한 세속에서 거룩함을 추구했던 토마스의 열정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거나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할 때에 위와 같은 것들을 마음에 새겨 두었다면, 독자는 이 책이 얼마나 귀중한 고전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해럴드 C. 가디너]

1권 영적 삶에 유익한 권면들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참된 빛을 받아서 마음의 온갖 눈먼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삶과 성품을 본받을 것을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힘써야 할 것은 예수님의 삶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지 않고 겸손하지 않아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고상한 말로 늘어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언젠가는 없어져 버릴 부를 추구하고 재물을 의지하는 것은 헛된 것입니다. 명예, 부귀, 권력, 육체의 욕망을 구하는 것 역시 헛된 것입니다.

자신을 아는 것, 자신이 하찮은 존재인 것을 아는 자는 타인의 칭찬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많이 알고, 많이 소유한다 하여 삶이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자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 없이는 아무도 바르게 깨달을 수도 없고 제대로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이 단순할수록 깊은 것들을 깨닫고, 순전할수록 영적인 것에 민감합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자는 복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십시오. 그가 진정 지혜자입니다.

지식을 얻으려고 성경을 읽지 말고 진리 자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명성이나 세상적 유익을 위해 성경을 읽지 마십시오. 평안은 욕망을 채울 때가 아니라 비울 때 찾아옵니다.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를 경계하십시오.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하면 후회하기 마련입니다. 헛된 호기심과 세상에 대한 쾌락적 지식을 추구하며 자신을 상처 나게 합니다.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하는 이유는 위로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내적 위로가 아닌 것은 헛된 것입니다. 도리어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많이 사랑하는 것이 많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람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다른 사람을 고치려 하지 말고 자신을 먼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당신은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 이유는 인내하고 수고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땅에서는 순례자와 나그네로 지내십시오. 늘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 땅은 인내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정화시키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날에는 단순한 순종이 탁월한 지혜보다 더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2권 내면의 삶에 관한 권면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내면에 그리스도가 거처할 곳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주님을 신랑으로 영접하십시오. 사람은 쉽게 변하고 힘이 금세 사라집니다. 그리스도만이 영원히 계시며 변함없이 함께하십니다. 내면이 잘 정돈되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괴하고 악한 행위들에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모욕과 수욕을 넉넉히 이깁니다. 자신을 변명하려 들지 말고 다른 사람을 먼저 용납하십시오. 사람은 단순함과 순수함이란 두 날개를 가질 때 하늘로 올라갑니다.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이킨 사람은 새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받은 고통은 곱씹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은 무감각합니다. 내면의 삶을 중시하는 사람은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자기 자신을 먼저 살피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예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가장 궁핍한 사람이고, 예수님과 함께 잘 살아가는 사람은 가장 부유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아는 것은 위대한 예술이고, 예수님과의 교제를 지속하는 법을 아는 것은 위대한 지혜입니다.

언제나 자신을 가장 낮은 곳에 두십시오. 그러면 가장 높은 곳이 당신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선물에 감사하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적습니다. 위로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자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위로를 받을 것이며 예수님을 찬송하고 감사드리고 싶어 할 것입니다.

3권 내적 위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기를 간절히 원해서 세상의 모든 방해물을 떨쳐 내버리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사무엘처럼 ‘주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선지자들은 말씀을 전할 수 있었지만 성령을 수여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은 물을 주지만 하나님은 자라게 하십니다. 하나님만이 듣는 사람을 깨닫게 하십니다.

[3권 저자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하대어를 사용했고, 그렇게 번역되었습니다.]

사랑은 신속하고 진실하며 경건하고 유쾌하며 온유하고 강하며 인내하고 신실하며 사려 깊고 오래 참으며 용감하고, 결코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에서 자신의 유익을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그 일에서는 사랑으로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에 자신이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다스림이나 지도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많이 배워 교만한 것보다 배우지 못하고 겸손한 것이 낫다.

스스로 선하다 생각하며 지나치게 애쓰다가 나중에 선하지 않은 일로 밝혀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단호하게 육신의 정욕과 맞서 싸워야 한다.

네 자신을 완전히 꺾고서 다른 사람들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네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낮고 비천한 자가 된 것은 너로 하여금 나의 겸손을 본받음으로써 네 자신의 교만을 이길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난을 더 잘 감당할수록, 너는 더 지혜롭게 행하는 것이고, 장차 더 큰 상을 받게 된다. 마음과 몸이 고난을 감당할 각오와 준비와 철저히 되어 있다면, 고난을 감당하는 일은 더 쉬워진다.

늘 많이 갖기보다는 적게 갖는 것을 택하라. 늘 가장 낮은 자리를 구하고, 모든 사람 아래에 있어라. 네게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늘 바라고 기도하라. 보라, 그런 사람은 평화와 안식의 땅으로 들어간다.

아들아, 호기심을 갖지 말고, 쓸데없는 일들에 관심을 갖지 말라. 이런저런 일들을 너와 무슨 상관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유명한 사람의 그늘에 그늘 아래 들어가고 하거나, 많은 사람들을 친구로 삼고자 하거나, 사람들의 사랑과 호의를 얻으려고 애쓰지 말라. 그런 것들에 힘을 쓰게 되면, 마음이 산란해지고, 많이 어두워지게 되기 때문이다.

생명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계명들을 지켜라. 진리를 알고자 한다면, 나를 믿으라. 온전해지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팔아라. 나의 제자가 되고 싶어 한다면, 네 자신을 부인하라.

4권 성찬에 관한 경건한 권면

[3권과 비슷하게 4권은 제자의 질문과 주님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경어는 제자의 질문이고, 하대어는 주님의 대답입니다. 
중요한 구절만을 발췌했습니다.]

주 나의 하나님께서 이 부족하고 가련한 자를 초대하셔서, 주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에 참여하라고 하시니, 그 말씀이 이 죄인의 귀에 너무나 달콤하고 향기롭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를 극진히 대해 주시며, 이렇게 지극한 사랑으로 초대해 주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성찬을 통해서 영적인 은혜가 수여되고, 잃어버렸던 영적인 능력이 회복되며, 죄로 흉측해졌던 아름다움이 되돌아옵니다.

보십시오. 주님은 거룩한 자들 중에서도 가장 거룩하신 분이시고, 나는 죄인들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죄인입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 앞에서 얼굴조차 들 수 없는 자인 데도, 주께서는 친히 몸을 굽혀 나를 바라보십니다.

주님, 내가 처음 죄를 짓게 된 날부터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주 앞에서와 주의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저질러 온 나의 온갖 죄악들과 범죄들을 주 앞에 내어 놓고, 주의 속죄의 제단 위에 올려 드리오니, 주의 사랑의 불로 그 모든 것들을 태우시고 사르셔서, 내 모든 죄의 더러움을 씻어 주옵소서.

경건한 사람은 성찬에 나아와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고난의 신비를 경건하게 묵상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되고, 그럴 때마다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교제를 통하여 보이지 않게 새롭게 세워져 가게 된다.

의문과 논란이 있는 어려운 길들을 버리고, 하나님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명하신 길을 정직하게 걸어가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무 심오한 것들을 천착하고자 하다가 신앙까지 잃어버린 사람이 많다. 
하나님께 순복하고 너의 지각을 믿음 아래 종속시켜라.

모든 이성과 본성적인 탐구는 믿음보다 앞서가거나 믿음을 훼방해서는 안 되고, 도리어 믿음을 뒤따라가야 한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서 측량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시고 인간들의 탐구에 쉽게 포착될 수 없다. 
하나님은 일들은 기이하고 인간의 언어로 모두 표현할 수 없다.

중세의 고전을 읽어오면서 지금까지의 책들과 토마스 아 켐피스의 책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중세적 신비주의를 뛰어넘지는 못했지만 지나치게 신비주의를 추구하거나 관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아퀴나스처럼 집요하게 철학적 사유방식을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개신교인들이 읽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건전하고 바른 신앙관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책 속의 내용은 지나치게 세상과 결별하고 하나님만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의 삶은 현실에서의 경건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전에 신비주의자들이 현실에 과도하게 집착했음에도 관상을 통해 하나님을 추구한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중세 교회사를 집필한 R.W. 서던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며 아쉬워합니다.

“세상을 등지지도 않았고 세상에 몸을 던지지도 않았다. 
다만 세상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투쟁들에서 피신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그들은 일상생활을 훌륭히 해나간 모범적인 사람들이었는데도 폭풍과 같은 도시 생활에서 물러 나와 힘써 추구했던 삶을 세상에 소개할 만한 책은 한 권밖에 내놓지 못했다.”

기독교 역사 중에서 최고의 고전을 세 권을 선정하라고 한다면 어거스틴의 <고백록>과 존 번연의 <천로역정> 그리고 중세 시대를 대변하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고를 것입니다. 
중세의 신비적 성향을 지니면서도 삶과 신앙을 격리시키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과도하게 상징적으로 해석하거나 이성적으로 추론하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이성을 믿음에 굴복시켜야 한다는 어거스틴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성경을 알기 위해 몸부림 쳐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않습니다. 
분주하고 헛된 야망에 부추김을 당하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맑은 샘물과 같은 청량함을 선사해 줄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











신성 로마 제국기독교 신학자이자 신비사상가. 가톨릭뿐 아니라 개신교에도 영향을 끼친 인물로, 지금의 네덜란드 빈더스헤임(Windesheim)과 즈볼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라인 강 하류 쾰른 부근의 도시인 켐펜에서 태어났다. 1392년 네덜란드로 유학을 떠났고, 1399년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 33세이던 1413년에 사제서품을 받아 신부가 되었다. 1425년에는 수도원의 부원장이 되었고, 경건한 생활로 모범이 되었다.

그는 수도회에서 주로 수련수사[1]들을 교육하는 일을 맡았고, 설교와 저술활동에 주력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준주성범(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기도와 묵상> 등이 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 이후, 토마스 아 켐피스가 살았던 수도원은 개혁교회(장로회)로 개조되었다.

준주성범

토마스 아 켐피스의 저서 <준주성범>(De imitatione Christi, 그리스도를 본받아)은, 성경 다음으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많이 읽힌 책이자 많은 영향을 끼친 서적으로 유명하다.

원래 라틴어로 쓰여진 <준주성범>은 그리스도교 신앙적 교훈에 따라 주제를 나누어 총 4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 ‘정신생활에 유익한 훈계’, ‘내적 생활로 인도하는 훈계’, ‘내적 위로에 대하여’, ‘존엄한 성체성사에 대하여’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정신생활에 유익한 훈계’에는 수도자의 순명과 수도생활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1913년도부터 부분이 번역되어 소개되어 오다가, 1923년 장로회의 조선야소교서회에서 이원모 장로에 의해서 <긔독셩범>이란 제목으로 1-4권이 최초 완역되었다. 이후 1924년 성공회의 허세실(Cecil Hedges) 신부에 의해서 <遵主聖範>(준주성범)이란 제목으로 전권이 출판되었으며, 라틴어 원문에 한자본, 일본어본, 영어본을 대조하여 번역되었다. 천주교에서는 해방 후, 1954년 천주교 서울대교구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에 의해 완역되었다.[2]

개신교에서는 마지막 장인 ‘존엄한 성체성사에 대하여’ 부분을 빼거나, ‘성체성사’를 ‘성찬례’로 바꾸어서 번역하였다. 가톨릭에서는 사제만이 성체성사를 집전할 수 있고 사제의 축성으로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성체와 성혈)로 성변화(聖變化)하며, 죄를 지었으면 고해성사를 본 후에 영성체해야 한다고 가르치고[3] 준주성범의 마지막 장도 그러한 내용들을 교육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개신교에서는 사제(성직자) 직분을 인정하지 않으며(만인사제설), 성변화와 성사(聖事)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1] 가톨릭 수도회에 입회하면 (수도회마다 다르지만 대개) 지원기-청원기-수련기-유기서원기를 거쳐 평생 수도자로 살겠다는 종신서원을 하여 정식 수도자가 된다(여기까지 대략 10년 가까이 걸린다). 수련기는 수도복을 입고, 수도명을 받고, 수도자가 되기 위한 본격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하는 시기로, 당연히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따라서 이러한 수련자들을 교육하는 수련장 수사/수녀 역시 권한과 책임이 막중할 수밖에 없다.[2] 윤 신부는 준주성범 번역 외에도 한국 천주교 최초의 박사 신부, 사회사업, 인보성체수녀회 창설 등의 업적을 남겼다.[3] 이와 같은 교리는 정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1380년 ~ 1471년 7월 25일)는 독일의 가톨릭 수도사제이자 신비사상가이다. 라인강 하류의 켐펜에서 태어나, 92년 동안의 일생을 거의 즈볼러에 가까운 아그네텐베르크 수도원에서 보냈다. 여기서는 네덜란드의 신비사상가 헤르트 호르테 및 제자 플로렌티우스 라데빈스가 창설한 '공동생활의 형제회'(Brethren of the Common Life)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토마스 아 켐피스도 이 회에 가담하여 모범적인 경건한 생활을 보냈다. 이 회는 속세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수도적인 청빈·정결·복종의 생활을 보내도록 노력하고 재산은 공유하며, 스스로의 노동으로 그날그날의 양식을 벌었다. 일은 사본(寫本) 및 인쇄·제본과 교육으로, 특히 연소자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으며, 후에 에라스무스, 니콜라우스 쿠사누스 등을 배출했다. 그들은 프란치스코회와는 달라서 자신의 양식을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신비주의의 조용한 실천활동이 강조되고 있다. 그보다 더 경건한 사람은 없다는 말까지 들은 토마스 아 켐피스는, 1425년 이후 부원장으로서 후진 지도에 진력했다. 그래서 후진 지도를 위한 지도서를 몇 가지 썼는데, 그 중 <준주성범>, 또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기독교 세계에서 널리 애독되는 책이 되었다.

1725년에 웨슬리는 온전한 거룩을 향한 구도자적 자세로의 전환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해였다. 이 때 그가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고 더욱 가속화되었다.[1]

  1. Kim, Kwang-nyŏl.; 김광열. (2000). 《Kŭrisŭdo ane innŭn kuwŏn kwa sŏnghwa》. Sŏul: Ch'ongsin Taehakkyo Ch'ulp'anbu. 117쪽. ISBN 89-8169-156-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미즈노 겐조


시인 미즈노 겐조(1937~1984)는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산과 들을 뛰어다닌 건강한 소년이었지만, 그해 여름 홍역이 돌아 감염이 되어 전신마비가 되고 언어의 능력조차 빼앗겨버린 것입니다. 
겐조가 열두 살이 된 어느 날, 마을의 한 교회 목사가 겐조의 집에 빵을 사러 왔다가 때마침 겐조를 알게 되어 한 권의 책을 주고 갔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으며 자신이 살아있어야 하는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면서 그의 얼굴은 웃음을 찾게 되었지요. 
14세에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되어 수백 편의 시를 남기고 4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눈 깜빡이는 시인 미즈노 겐조(水野源三 , 1937-1984), 그는 조용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산과 들을 뛰어 다니는 건강한 소년이었지만, 그해 여름 홍역이 돌아 겐조도 감염되고 말았다. 
고열이 내리고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이미 그 전의 겐조가 아니었다. 
전신이 마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어 능력 조차 빼앗겨버린 것이었다. 
이때부터 겐조의, 그리고 그 가족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겐조가 열두살 나던 어느 날, 마을의 한 교회 미야오 목사가 겐조의 집에 빵을 사러 왔다가 때마침 겐조를 알게 되어 한권의 책을 주고 갔는데, 그것은 성경이었다.

처음 읽어보는 성경. 소년 겐조에게는 자신을 몰입시키는 하나의 세계였다. 
매일 거르지 않고 성경을 읽어나가는 동안 겐조의 사고방식은 변화되고, 자신이 살아있어야 하는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여 그 얼굴은 날로 밝아져갔다.

겐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삶의 주관자로 마음에 영접했다.

그 후의 겐조는 더욱 변화되어갔고, 그의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면서 그의 얼굴은 웃음을 되찾게 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써 겐조는 누구에게나 만면의 웃음을 지어보이곤 했다.

몸이 부자유스럽고, 말조차도 하지 못하는 그가 어떻게 시를 짓게 되었을까?

그 계기가 된 것은 겐조를 진찰하던 의사가 "[예]라고 대답할 때는 눈을 감으라"는 주문을 한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겐조의 어머니는 이것을 단순한 대답뿐만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적용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물(水)을 뜻하는 일본어인 みず(미즈)를 찾을 경우, 오십음도(일본의 가나 문자를 순서대로 배열한 도표)를 사용하여 그의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아행(あ行)부터 차례대로 옆으로 짚어가면 아-카-사-타-나-하-마-야-라-와(あ-か -さ-た-な-は-ま-や-ら-わ)의 마(ま) 부분에 와서 겐조가 눈을 깜빡이면, 거기서부터는 밑으로 짚어가며 마-미-무-메-모(ま-み-む-め-も)의 미(み) 부분에 와서 또 한 번 눈을 깜빡이는 방식으로 한자 한자의 글을 찾으며 문장을 만들어 가는 엄청나게 고된 작업이었다.

이렇듯 정말 엄청난 작업을 통해 그때까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겐조의 내면 세계가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그의 눈 깜빡임을 통해서 수백편에 이르는 시가 탄생하게 되었다. 
미즈노 겐조가 [눈깜빡이는 시인]으로 불리우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시 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찬미와 기쁨이 가득 넘쳐흐르고 있다.

미즈노 겐조의 이야기는 NHK에 특집으로 다뤄졌고, 그의 시집은 일본 문단의 걸작이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미즈노의 시집 중에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또 원망해도 부족할 텐데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감사는 밥이다

저자 미즈노 겐조  출판 선한청지기 발매 2014.10.15.

몸이 부자유스럽고, 말조차도 할 수 없는 그가 어떻게 시를 짓게 되었을까요? 
겐조를 진찰하던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겐조 씨! '예'라고 대답할 때는 눈을 감으세요.
겐조의 어머니는 일본의 오십음도(일본의 가나 문자를 순서대로 배열한 도표)를 차례대로 짚어가면서 눈 깜빡이는 방식으로 한자 한자의 글을 찾아 문장을 만들어 내어 수백 편에 이르는 시가 탄생된 것입니다.

너무나도 공감이 되는 시 몇 편을 올립니다.

"오늘 하루도"


신문 냄새에 아침을 느끼고
냉수의 시원함에 여름을 느끼고
풍경 소리의 서늘함에
저녁을 느끼고
개구리 소리가 드높아
밤을 느끼네
오늘 하루도 끝이구나
한가지 한가지 일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며


가을
사과가 익어 가는 가을에 몸이 불편해졌고
코스모스가 필 즈음
처음으로 예수님 이야기를 들었고
성경을 읽었으며
귀뚜라미가 우는 밤
구원의 기쁨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산다
하나님의 크신 손안에서
달팽이는
달팽이답게 기며
반딧불 꽃은
반딧불 꽃답게 피고
청개구리는
청개구리답게 울며
하나님의 크신 손안에서
나는 나답게
산다

앨범
앨범 속에서
부모님의 음성이 들린다

시집 간 동생의
행복을 바라는 말
어린 조카딸을
달래는 소리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뻐하는 노래
지체장애인 나를
염려하는 기도

앨범 속에서
부모님의 음성이 들린다

엄마 고마워
나의 손이 되고 발이 되고
슬픔 고통을
함께해 주셨던
엄마

겐조를 천국으로 보낸 후에
가고 싶다고
언제나 말씀하셨던
엄마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시고
이른 봄 아침
천국으로 가 버리신
엄마


아버지 2
예순이 다 된 아버지
자동차 학원에
나가셨다

면허증을 받았지만
한 번도 운전하지 못하시고
하늘로 불려가 버리고 마셨다

일기장에는
면허증을 따서
겐조를 태우고 싶다고
쓰여있었다


단 하나만 변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신세를 지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서른한 해 동안
변하지 않았습니다
천국으로 불려 갈 때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단 하나만
변했습니다
3년 전부터
신세를 지는 분이
어머니에서 제수씨로
변했습니다

부수고 부수고 부수 소서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는 것임에도
자기 홀로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부수고 부수고 부수 소서

하나님께 깊이 사랑받고 있음에도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진실로
사랑할 수 없는 마음을
부수고 부수고 부수 소서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았음에도
남의 작은 잘못에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부수고 부수고 부수 소서


그렇지 않아
걷는 것은 나 혼자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나의 약함을 알고 계시는
주 예수가 이미 함께 계셔

괴로워하는 건 나 혼자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나의 약함을 알고 계시는
주 예수가 이미 함께 계셔

기도하는 건 나 혼자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아
나의 바람을 알고 계시는
주 예수가 함께 기도하셔

사랑의 손
건강하게 보낸 날들도
아픔에 괴로워했던 날들도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의 손 안이라

기쁨을 노래하는 아침도
눈물을 흘리는 밤도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의 손 안이라

기세등등한 때도
후회투성이 일 때도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의 손 안이라


해바라기
마당에서
꺾어 온
크고도 큰
해바라기 꽃이
작고 작은 일로
트집 잡고 있는 내 마음에
말을 건다

하나님의
크고 크신 사랑을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병으로 쓰러졌던 그때에는
눈물이 흐르고 슬펐지만
'영의 아픔을 치유하시는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이라는 걸 깨닫고
기쁨과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친구에게 외면당하는 그때에는
밤에 잠들지 못할 만큼 원망스러웠지만
'영원히 변치 않는 친구 되신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이라는 걸 깨닫고
기쁨과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실수했다는 그때에는
마음이 혼란스러웠지만
'모든 것을 속죄하신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이라는 걸 깨닫고
기쁨과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신문 냄새에 아침을 느껴 
차가운 물맛에 여름을 느껴 
풍경 소리에 선선한 해 질 녘을 느껴 
개구리 소리에 졸음을 느껴 
오늘 하루도 끝나지 않았어 
하나 하나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껴 

그저 감사할 뿐 
나는
가족
사람 
주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주님 
사람
가족의 풍성한 사랑에 
그저 감사할 뿐 
그저 감사할 뿐 

울지 마세요
어머니를 잃은 나를 위해서
울지 마세요 
더 이상 울지 마세요
마음속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합니다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계셔 주기 때문일까요

하나님 
33년 전에
뇌성마비가 되었을 때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닿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감사와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주님을 슬프게 한 것은 아닐까?" 


그때 그 사람에게 
사랑 없는 태도나 말이 
주님을 슬프게 한 것은 아닐까? 


그때 그 목소리에 마음이 
움직였던 생각, 소원이
주님을 슬프게 한 것은 아닐까? 


그때 그 일로 가슴 속에 일어난 
불안이나 투덜거림이 
주님을 슬프게 한 것은 아닐까? 


"그렇지는 않아"


걸어가는 사람은 나 혼자
그렇지는 않아
그렇지는 않아
나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걸어가신다.


고민을 하는 사람은 나 혼자
그렇지는 않아
그렇지는 않아
나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고뇌하신다.


기도드리는 사람은 나 혼자
그렇지는 않아
그렇지는 않아
나의 소원을 아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기도하신다 
Image result for


"하나님의 진실은 변함이 없다"


오는 해도 오는 해도 
상큼한 첫 여름에는 
은방울꽃이 피듯, 
하나님의 진실은 변함이 없다.


오는 해도 오는 해도 
하늘 맑게 갠 가을에 
용담꽃이 피듯 




미즈노 겐조는 11살의 어린 나이에 열병을 앓고 뇌성마비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몸을 움직일 수도 없게 되었고 ,언어 능력도 상실하고 말았지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수단은 오직 눈 깜박임 밖에 없었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 있던 그에게 어느 날, 미야오 목사님을 통해 생명의 빛이 비추이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도 시력과 청력은 잃지 않았기에, 그는 그때부터 성경을 읽고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사랑과 은혜를 외부에 나누고 싶어 했던 겐조. 오직 눈 깜박임으로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었기에, 벽에 붙인 오십음도표 글자를 어머니가 차례대로 가리키면, 자신이 원하는 글자에 이르렀을 때 신호를 보내 한 글자를 모으고, 다음 글자를 모아 단어를 만들고 결국엔 하나의 문장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하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감사 뿐이라는 놀라운 고백을 시(時)로 쏟아냅니다. 겐조의 옆에는 항상 그와 함께 기뻐하고, 울어주고, 기도해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어머니는 병으로 아들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절망적인 상황에 휩싸여 있었지만, 슬픔에 머무르지 않고 시를 통해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에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떠난 이후 겐조의 삶에는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습니다. 겐조 씨의 성경은 어린 조카딸이 한 장 한 장 넘겨주었고, 겐조의 눈 깜빡임을 해독하고 기록하는 일은 제수씨가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포기하지 않고 시를 써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하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감사 뿐이라는 놀라운 고백을 시(時)로 쏟아냅니다. 겐조의 옆에는 항상 그와 함께 기뻐하고, 울어주고, 기도해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어머니는 병으로 아들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절망적인 상황에 휩싸여 있었지만, 슬픔에 머무르지 않고 시를 통해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에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떠난 이후 겐조의 삶에는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습니다. 겐조 씨의 성경은 어린 조카딸이 한 장 한 장 넘겨주었고, 겐조의 눈 깜빡임을 해독하고 기록하는 일은 제수씨가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포기하지 않고 시를 써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분명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입니다.
전신마비 장애인, 눈을 깜박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미즈노 겐조 씨가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수가 있었을까요?
죽고 싶어서 흘린 그의 눈물이, 감사와 감격의 눈물로 바뀌자, 기적 같은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매일 감사 거리를 찾으며 나 답게 살아야겠어요.

미즈노 겐조는 47년의 짧은 생애를 마치고 198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시를 통해 평안과 감사를 노래했습니다. 몸이 자유롭지 못했기에 늘 집 안에 갇혀 살아야 했지만 제한된 환경에서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가족의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그의 글을 읽는 내내 아픔도 감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의 글을 통해 ‘감사의 조건’을 놓쳐버리고 사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내가 가진 행복을 깨달을 수 있길 소망해 봅니다.

시인 미즈노 겐조의 감사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다.’라고 괴테가 말했다. 
그만큼 감사하는 생각과 언행이 인간의 삶속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는 말이다.

 일본에 미즈노 겐조라는 시인이 있다. 
이 사람은 11살에 뇌성마비가 와서 전신이 흐물흐물한 해파리처럼 퍼져서, 말도 못하고 수족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유일하게 제 기능을 나타낼 수 있는 부위는 눈뿐이었다. 그는 검은 눈썹에 총기가 있는 눈동자를 가진 눈을 스스로 깜빡 거릴 수 있었는데, 그것이 그가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자리에 누워 꼼짝 못하는 전신마비 환자나 다름이 없었지만, 눈꺼풀만큼은 자신의 의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마저 안 되었다면, 그는 숨은 쉬지만 죽은 자나 별반 다름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미즈노 겐조는 모친의 도움을 받아 눈을 깜빡거리면서 한 자씩 글자를 선택하는 일을 반복했다. 
모친이 글자판을 벽에 걸어놓고 막대기로 한 자씩 글자들을 훑어나갈 때, 미즈노가 눈을 깜박하면, 그걸 신호로 해서 모친이 글자를 종이에 받아 적곤 했다. 
그런 방법으로 그는 아름다운 시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미즈노 겐조는 고통 속에서 창작한 시집을 세상에 발표했는데, 그 시집이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NHK 방송에서도 그 내용을 특집으로 보도했다.

깜빡거리는 눈으로 한 자씩 써내려간 그의 시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네 권의 시집들 중에서, 첫 번째로 그가 출간한 시집에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후 12:9)’라는 시가 있다. 
되짚어보면 그러한 최악의 조건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미즈노 겐조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족하다고 여길 수 있었던 건지, 다소 의문이 들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은 최악의 바닥상태에 놓여있는 처참한 자신의 신체적 조건까지도 감사할 수 있는 착하고 겸손하며 흔들림 없는 굳건한 믿음을 갖게 될 때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눈 깜빡이는 시인 미즈노 겐조(水野源三 , 1937-1984), 그는 조용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산과 들을 뛰어 다니는 건강한 소년이었지만, 그해 여름 홍역이 돌아 겐조도 감염되고 말았다. 고열이 내리고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이미 그 전의 겐조가 아니었다. 전신이 마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어 능력 조차 빼앗겨버린 것이었다. 이때부터 겐조의, 그리고 그 가족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겐조가 열두살 나던 어느 날, 마을의 한 교회 목사가 겐조의 집에 빵을 사러 왔다가 때마침 겐조를 알게 되어 한권의 책을 주고 갔는데, 그것은 성경이었다.

처음 읽어보는 성경. 소년 겐조에게는 자신을 몰입시키는 하나의 세계였다. 매일 거르지 않고 성경을 읽어나가는 동안 겐조의 사고방식은 변화되고, 자신이 살아있어야 하는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여 그 얼굴은 날로 밝아져갔다.

겐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삶의 주관자로 마음에 영접했다.

그 후의 겐조는 더욱 변화되어갔고, 그의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면서 그의 얼굴은 웃음을 되찾게 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써 겐조는 누구에게나 만면의 웃음을 지어보이곤 했다.

몸이 부자유스럽고, 말조차도 하지 못하는 그가 어떻게 시를 짓게 되었을까?

그 계기가 된 것은 겐조를 진찰하던 의사가 "[예]라고 대답할 때는 눈을 감으라"는 주문을 한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겐조의 어머니는 이것을 단순한 대답뿐만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적용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물(水)을 뜻하는 일본어인 みず(미즈)를 찾을 경우, 오십음도(일본의 가나 문자를 순서대로 배열한 도표)를 사용하여 그의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아행(あ行)부터 차례대로 옆으로 짚어가면 아-카-사-타-나-하-마-야-라-와(あ-か -さ-た-な-は-ま-や-ら-わ)의 마(ま) 부분에 와서 겐조가 눈을 깜빡이면, 거기서부터는 밑으로 짚어가며 마-미-무-메-모(ま-み-む-め-も)의 미(み) 부분에 와서 또 한 번 눈을 깜빡이는 방식으로 한자 한자의 글을 찾으며 문장을 만들어 가는 엄청나게 고된 작업이었다.

이렇듯 정말 엄청난 작업을 통해 그때까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겐조의 내면 세계가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그의 눈 깜빡임을 통해서 수백편에 이르는 시가 탄생하게 되었다. 미즈노 겐조가 [눈깜빡이는 시인]으로 불리우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시 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찬미와 기쁨이 가득 넘쳐흐르고 있다.

미즈노 겐조의 이야기는 NHK에 특집으로 다뤄졌고, 그의 시집은 일본 문단의 걸작이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미즈노의 시집 중에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또 원망해도 부족할 텐데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가 쓴 시 몇편을 소개한다.

내가 만일 괴롭지 않았더라면

내가 만일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모든 형제자매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하루도

신문 냄새에 아침을 느끼고  
냉수의 시원함에 여름을 느끼고  
풍경 소리의 서늘함에  
저녁을 느끼고  
개구리 소리가 드높아  
밤을 느끼네
오늘 하루도 끝이구나  
한 가지 한 가지 일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며

하나님의 크신 손 안에서  
달팽이는 달팽이답게 가고 
닭장 들꽃은 닭장 들꽃답게 피고  
청개구리는 청개구리답게 울고  
하나님의 크신 손 안에서  
나는 나답게 산다

평화

나는
나라도 말하는 언어도 생각하는 일도  
각각 다른 수십억의 인간들이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곁으로 돌아오도록  
아침에도 기도 드리고
저녁에도 기도 드린다.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기도 드려 구하세요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기도 드려 결정하세요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주님의 뜻대로만 행하세요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악마의 유혹에 조심하세요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주님의 은혜와 뜻을 찬양하세요

당신의 집 당신의 마음에

당신의 집 당신의 마음에  
사랑 어린 발길로 걸어오시는  
주 예수님 영접을 위하여  
준비를 서두르세요  
당신의 집 당신의 마음에  
사랑 어린 음성으로 나직이 부르시는  
주 예수님 영접을 위하여  
지금 곧 문을 여세요  
당신의 집 당신의 마음에  
사랑 어린 눈길을 보내시는  
주 예수님 영접을 위해  
모든 일을 다 끝마치세요


나의 마음 속에

나의 마음 속에 소망이 있네  
그리스도가 주셨다네  
근심 중에 있어도 변함이 없네

아직 안 보이는걸

기다리는 소망  
나의 마음 속에 기쁨이 있네  
그리스도가 베풀어 주셨다네  
세월 흘러 간데도 소멸치 않네  
세상에서 얻지 못할 기쁨 있다네  
내가 전진해나갈 한 길이 있네  
그리스도가 활짝 열어 주셨다네  
어둠이 드리워도 헤매지 않네  
저 천국에 이르는 기쁨이 있는 그 길

잊어버리기 전에

지금 들은 것 
본 것
마음에 느꼈던 것
잊어버리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주님의 아름다운 일을
찬양하는 시를 만든다.


그렇지는 않아

걸어가는 사람은 나 혼자
그렇지는 않아
그렇지는 않아
나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걸어가신다.

고민을 하는 사람은 나 혼자
그렇지는 않아
그렇지는 않아
나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고뇌하신다.

기도드리는 사람은 나 혼자
그렇지는 않아
그렇지는 않아
나의 소원을 아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기도하신다.


미즈노 겐조(水野源三. 1937~1984)

뇌성마비 장애를 가졌던 그는, 일본 나가노현에 埴科郡 坂城 출생하였고, 14세 때 세례 받고 크리스천이 되어 18세 경부터 시를 짓기 시작하여, 수백편의 시를 남기고, 향년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틴 로이드 존스 (Martyn Lloyd-Jones, 1899-1981) 목사는 누구인가?


20세기 최고의 설교자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辨證家)이며 문필가(文筆家)는 영국인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 1898-1963) 다. 그리고  20세기 최고의 복음 가수는 미국인 흑인 여(女) 가수인 마할리아 잭슨(Mahalia Jackson, 1911-1972)이다. 이것은 나의 주장이 아니다. 이렇게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루이스를 사탄이라고 험담하는 자들이 있기는 하나  그의 여러 책을 읽으면 다른 이들이 쓴 책들이 시시하게 여겨진다. 

기독교 평신도이면 누구나 위에서 언급한 존스의 설교와 책을 만나고,  루이스의 책을 읽어야 하며.  잭슨의 복음 성가를 들어 봐야 한다. 나는 로이드 존스의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 그에 관해 글을 쓴다. 이 글은 존 피터스가 지었고, 서문강이 번역했으며, 2007년 출판사 지평원이 펴낸 책, ‘마틴 로이드 존스 평전(評傳)’과 이안 머리가 지었고, 김귀탁이 번역했으며, 2010년 출판사 부흥과개혁사가 펴낸 ‘은혜의 설교자 로이드 존스 (이 책은 그의 전기(傳記)이다)를 읽고 쓴 글이다. 위 두 사람이 저술한 책들에 관해서는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그들이 어떤 책인가 금방 알 수 있다.  잭슨의 노래도 들을 수 있다. 그녀는 노래는 참 좋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1899년 영국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웨일스의 카티프에서 태어났다. 삼 형제 중 둘째다. 그는, 영락교회와 국내와 국외(國外)에 600개의 교회를 세운 한경직 (1902-2001) 목사보다 3년 먼저 이 세상에 왔는데, 그는 1963년, 그의 나이 82세 때 소천(召天)했다. 그는 스펄전 목사가 이 세상을 떠난 지 7년 후에 이 세상에 왔다. 그가 태어나고 2일 후 무디 목사가 이 세상을 떠났다.

로이드 존스는 부모와 두 형제와 함께 웨일스에서 자랐다. 가정 형편은 가난했다. 이 가난이 그의 가족이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던 1914년에 런던으로 이사하게 했다. 이 해에 그는 성 바돌로매 병원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한다. 이 병원은 당시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병원이었다. 후에 그의 부인이 된 베단도 역시 이 해에 웨스트민스터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한다. 그는 1921년에 왕립 의과대학 회원 자격과 왕립(王立) 내과 의사 자격을 취득하고 약학사 자격도 취득한다. 그는 신학에 관한 학위는 없다. 정규 신학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니는 가정에 태어났는데, 이런 가정적인 배경과 왕성한 독서와 뛰어난 두뇌가 설교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20세 중반에 회심(回心)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의사 자격을 취득한 1921년 그해에 당시 영국의 최고 의사로서 왕의 주치의(主治醫)였던 토머스 호더 경(卿)의 주목을 받고 그의 조수가 된다. 그는 1925년 왕립(王立) 의학협회가 주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M. R. C. P.라는 학위를 받는데, 그가 의학계에 계속 머물러 있었더라면 부와 명예가 그를 따랐을 것이고 유명한 그리고 성공한 의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로이드 존스는 1926년 그의 고향인 웨일스의 한 교회에서 설교했는데, 그 교회가 그의 설교에 매혹되어 그가 설교한 지 22일 만에 그 교회의 목사가 되어달라는 청빙을 받았다. 그는 이 청빙을 수락하고 의사의 직업을 버리고 목사의 길로 간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 뛰어난 의사로 촉망받던 의사, 연봉을 최소 2,500파운드를 받을 수 있었는데도 연봉 225파운드에 허름한, 노동자가 사는 집을 받고 목사가 되었다. 그가 의사의 직업을 버리고 목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그의 스승과 동료들은 매우 놀랐다.

로이드 존스는 그의 고향 웨일스에서 1938년까지 12년 동안 목회자로 사역했고, 런던의 중심가 웨스트민스터 채플(영국에서는 국교인 성공회에 소속되지 아니한 교회를 채플이라고 부른다)에서 1968년까지 30년간 목회자로 일했다. 그는 은퇴 후에도 80대가 될 때까지 영국에서 순회하면서 설교를 계속했다. 미국에서도 설교했다. 그는 영국의 두 교회에서만 40여 년을 설교자로, 목회자로 섬겼다. 그는 은퇴 후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교수로 연속 강좌를 하기도 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 평전’을 쓴 존 피터스는 로이드 존스가 그의 생애는 “먼저 설교에 바쳐졌다”라고 하면서 그를 설교자(說敎者)와 설교가(說敎家)로 묘사하고 있는데, ‘은혜의 설교자 로이드 존스’를 저술한 이안 머리는 존 피터스의 묘사에 불만을 표시하면서 그를 설교자이면서 목회자(牧會者) 자라고 묘사한다. 사전에 따르면, 설교자와 설교가를 어떤 일의 견해나 종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사람이고, 목회자는 교회 안팎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여 신도의 신앙생활을 이끌어 주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데, 사전적인 의미에서 볼 때, 로이드 존스를 목회자로 부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그는 예배가 끝나면 항상 광고를 통해서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를 찾아오라고 하였고 모든 사람을 언제나 직접 만나 그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했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를 ‘20세기 최고의 설교자’, ‘설교자들의 황태자’, ‘최상의 설교자’, 20세기의 사도’라고 부르는데, 그의 전기를 쓴 이안 머리는 ’종교 개혁 이후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던 조지 휫필드(G. Whitefield), 스펄전(C. H. Spurgean) 그리고 찰머스(Chalmers)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한다. 캔달 박사는 로이드 존스를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며, 의심 할 여지 없이 20세기 가장 위대한 설교자이다”라고 평했다.

신학교육을 전혀 받지 아니했던 스펄전도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로 그의 신도 5,000명의 이름을 일일이 다 기억했고, 그들의 개인사(個人事)를 다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로이드 존스의 기억력도 뛰어나서 성경 전체를 다 꿰들어 알고 있어서 그의 지식은 백과사전적이었다, 그의 기억력은 5년 전에 만난 사람들의 얼굴뿐 아니라 대화 하나까지 다 기억할 정도여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신학 수업을 받아 본 적이 없으면서도 성경의 근본을 포착하는 능력이 탁월하고 뛰어났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지 단순하게 설교자의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라고 말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설교했고, 지금도 설교하고 있다. 만일 하느님의 은혜가 허락한다면, 계속 설교할 것이다. 가난하고 지치고 주저하는 영혼을 그리스도의 집으로 인도하여 그 임금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라고 말했다. 그는 “내게 설교는 큰 신비입니다. 가장 신비스러운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라고 말했는데, 우리는 설교가 신비라고 밝히는 그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참된 설교는 하나님의 영이 역사한 결과이고 여기에 정확히 신비가 시작됩니다”라고 말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설교는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것을 조종하지 못한다고도 주장했다.

그가 설교할 때, 신도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는 설교는 설교 현장에 그리스도의 임재를 위한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청자들은 그의 설교를 듣고 있을 때는 전혀 다른 일을 생각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의 설교는 한 번만 들어도 10년이 지난 뒤에도 기억이 사라지지 않은 그런 명설교였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의 전기 작가 이안 머리는 로이드 존스가 휫필드와 같이 “강단에서는 사자를 닮았고, 강단 밖에서는 어린양을 닮았다”라고 평한다.

전기 작가 이안 머리는 로이드 존스의 설교가 권위 있었고, 성경적이었고, 분석적이었고, 설득력이 있었고, 실천적이었고 무엇보다 성령 충만하였다고 증언한다. 로이즈 존스는 참으로 비범해서 복음이 가져다주는 죄로부터의 자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소망에 대하여 어쩌나 담대하고도 확신 있게 증거 하는지 정말 놀라웠다고 기술한다. 예리한 그의 지성과 분석적이고, 논리적이고, 성경적인 그의 탁월한 그의 능력이 설교에서 찬란한 꽃을 피웠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설교였고, 청자들에게 주의의 산만을 허용하지 않는 설교였으며, 언어적으로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어린아이에게도 영향을 준 설교였으며, 그의 설교를 들은 많은 사람에게, 특히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일이 많았다. 처음으로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 중에는 그의 설교에 심한 혐오감과 반감을 품고 다시는 그 교회에 오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한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는 어떤 힘에 이끌리어 교회를 다시 찾게 되는 이들도 있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저 시골 먼 곳에서 런던의 그의 교회를 방문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의 교회, 웨스트민스터 채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를 갈망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구약성경이 현대 기독교에 해로운 영향을 준다고 무시하는 풍조가 난무하던 당대에, 로이드 존스는 이런 풍조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구역 성경은 신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전적인 신적 계시로 보았다. 그는 구약성경이 인간의 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계시하고, 하나님 없는 삶은 절대로 무익하며,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관한 책이라고 강조하면서 설교할 때 신약성경과 같은 비중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해서 설교했다. 그의 설교는 철저하게 성경에 기초했기 때문에 그를 비난하는 이들은 “로이드 존스가 지나치게 성경에 의존함으로써 불필요한 요구로 청자들을 괴롭혔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로이드 존스는 세상의 조류에 맞서면서 부와 명예를 멀리한 목회자로 살았는데, 일생 단 한 번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했고 단 한 번 TV 방송에 출연했을 뿐이다. 1970년대에 세계 50개 국가에서 백만 명이 넘는 독자들이 로이드 존스의 설교집을 읽었는데, 그의 나이 70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에베소서 강해와 로마서 강해가 책으로 출판되었다.

로이드 존스는 가족을 크게 사랑한 사람이었다. 두 딸과 의사인 그의 아내를 크게 사랑했다. 그가 일생에서 제일 잘한 일을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고, 두 번째로 잘한 일은 그의 아내와 결혼한 일이라고 그는 술회(述懷)했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 것은 그의 가족을 두고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었다. 그가 임종이 가까웠을 때 말을 하지 못하고 필담으로 가족과 대화했는데, 마지막 대화가 그의 아내한테 한 말이, “여보 이제 하나님께 내가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아요, 나 하나님께 가오"였다.

로이드 존스는 의사란 직업을 버린 것을 칭찬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 칭찬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더 큰 것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설교자로서의 칭찬도 받아들이지 않고, “저는 설교하기 위해 산 것이 아니라"라고 말하면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삶 자체가 설교의 한 부문이 되었는데, 그는 위대한 그리스도인답게 잠자는 중에 운명(殞命)했다.

로이드 존스는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돼라"라는 바울 사도의 명령을 따라 일생을 산, 역사상에 나타났던 가장 위대한 그리고 포괄적 목회 사역자 중의 하나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로이드 존스의 기도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있는데, 그는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항상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늘 그의 신도들에게 기도할 것을 당부했다.

다음의 두 이야기는 로이드 존스 목사가 그의 설교 중에 직접 밝힌, 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이야기와 다시금 헌신한 사람들의 예 중의 하나이다. 존 피터즈가 지었고, 서문강이 옮기었고, 2007년 12월 15일 출판사 지평원이 펴낸 마틴 로이드 존스 평전(評傳)의 57쪽과 58쪽에 있는 글을 그대로 여기에 적은 것이다. 이 글에서 ‘저’는 로이드 존스 자신을 말한다.

이야기 1:

“한번은 제가 준비한 설교의 반도 못 하고 강단에서 내려와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일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일이 그렇게 되었고, 그로 인해 어떤 의미에서는 다음 주일 설교를 이미 준비한 셈이 되었습니다.

다음 주일 아침에 저는 그전에 했던 설교 중 하지 못한 나머지 부분을 한 편의 설교로 구성하여 설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하면서 특별한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날 예배를 마쳤을 때, 한 사람이 제게 와서 저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는 목사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그 목사가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데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너무나 감동하여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 먼 데서 겨기까지 오게 하신 것은 바로 이 특별한 설교를 듣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확신하였습니다.저는 「믿음의 시련」(Faith on Trial)이라는 저의 책 서문에 이 일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복할 만큼 이 일은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지금도 저는 그 사람의 생각이 옳았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만일 제가 지난 주일에 준비했던 이 설교를 끝까지 모두 전해버렸다면, 그분이 그날 들었던 그 설교까지도 이미 전 주일에 다 해 버린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어를 당했고, 그 전 주일에 제가 준비한 설교 분량의 반만 전하도록 허락받은 것입니다. 그 나머지 반은 그다음 주일에 전하도록 보전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처음에 그 점에 대해서 약간 석연치 않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해졌습니다. 우리가 상황을 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

이야기 2:

“저는 가공(可恐)할 죄로부터 회심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된 한 가련한 남자를 알고 있습니다. 제가 남웨일즈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불행히도 낙심 자(backslider)가 되었고 죄에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와 자녀들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함께 런던으로 도망하였고, 거기서 가진 돈을 모두 써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를 설득하여 돈을 더 뜯어내려고 거짓말을 하고, 자기 아내와 공동명의로 되어 있던 집의 명의를 자기 이름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돈을 얻기 위해서 집을 팔고 아주 먼 고장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무섭게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돈도 다 떨어지고 그 여자도 그를 버렸습니다.

그는 너무나 철저하게 비참하게 되고 부끄럽기도 하여 감히 자살하기로 하였습니다. 깊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자신은 자기 가족에게 가까이 갈 권한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웨스트민스터 브리지를 향해 걸어가 자신의 몸을 템스강에 던지기로 단호하게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실행하기 위하여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가련한 영혼이 그 다리에 도착했을 때, 영국 국회의사당 시계탑에서 매시 30분에 치는 종이 울렸습니다.

그때 갑자기 한 생각이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하였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지금 저녁 예배를 위해 강단에 막 올라가고 있을 것이다.’ 그는 삶을 끝내기 전에 제 설교를 마지막으로 들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약 6분 후 웨스트민스터 채플에 도착했고, 계단을 올라와 복도로 들어서면서 ‘하나님이여 낙심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저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간구가 그가 그날 그곳에서 처음으로 들었던 말이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일이 즉시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는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런던 교외에 있는 한 교회의 장로가 되어 오랫동안 탁월하게 섬겼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

출생 1899년 12월 20일
사망 1981년 3월 1일
성별 남성
국적 영국
직업 복음주의 설교자, 의사

데이비드 마틴 로이드 존스(영어: David Martyn Lloyd-Jones, 1899년 12월 20일 ~ 1981년 3월 1일)은 영국의사 출신의 복음주의 설교자이다. 존 스토트와 함께 한국교회에 가장 영향력이 많았던 목회자였다.

청년 의사였던 로이드 존스는 40세가 되던 해에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그가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강연한 내용을 출판한 "목사와 설교"는 명저로 알려져 있다. 로이드 존스는 웨일스학파의 대표적인 회중교회의 목회자였다.

웨스트민스터 성당

로이드 존스는 기독교에 대해 불붙는 논리(logic on fire)라고 불렀다. 이는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감상적인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과 만나는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열정적인 집중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이 주장해야 하고, 또한 알아야 하며, 체험해야 하는 것은 어떤 일들을 하고 안 하는 것들에 대한 일반적인 아이디어나 행위들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만이 우리들의 목표이어야 합니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그리스도인의 목표 미달입니다.(복음의 핵심, 132쪽.).

마틴 로이드 존스는 사회에서 출세한 사람들이 간증하는 일부 개신교 교회들의 모습들에 대해 "종교오락"이라는 말을 썼다. 즉, 교인이라는 소비자들의 니즈에 맞게 설교하고 목회하는 종교서비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설교의 의미를 훼손시킬 수 있음을 꿰뚫어본 것이다.

간증자로 초대되는 사람들 중에는 해군 제독이나 육군 장성처럼 특별한 직함을 가진 이들도 있고, 야구선수나 연극배우, 영화배우, 가수처럼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이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설명하고 설교하는 일보다 그런 이들의 간증 듣는 일을 훨씬 더 가치 있게 여깁니다. 제가 이 모든 것을 ‘오락’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눈치 채셨습니까? 저는 이런 일들이 당연히 오락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설교에 등을 돌리고 이런 오락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설교와 설교자 26).

로이드 존스는 설교는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설교자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학문인 신학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설교를 잘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하거나, 교인들에게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가르치는 현대교회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특별히 조직신학과 교회사는 그의 설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1959년부터 1978년까지 웨스트민스터 청교도 연구회( Puritan and Westminster Conferences)에서 19회분을 강연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부으심이 말씀 선포로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령의 불을 끄는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부흥운동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며, 칼빈주의가 만일 메소디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지성주의와 스콜라주의로 흐른다고 경고하였다. 그렇게 함으로 신앙고백이 성경을 대체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질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는 열광주의 즉 감정 조절이 한되는 상태를 옹호하며, 이것을 칼빈주의자들이 반박한다고 주장하였다.[1]

로이드 존스의 저서로는

  • 목사와 설교, CLC
  • The Miracle of Grace, 은혜와 기적, 백합출판사, 1987
  • 영적 침체와 치유, 이용태 역, 기독교문서선교회(CLC), 2001
  • 하나님 나라(복있는 사람)
  • 사도행전 강해시리즈(승리하는 기독교 등, 복있는 사람)
  • 설교와 설교자(복있는 사람)
  • 내가 자랑하는 복음, 복있는 사람, 2008
  • 로마서 강해, 기독교문서선교회
  •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The Puritans: Their Origins and Successors) 서문강역, 생명의 말씀사 2002.

가 있으며, 특히 복있는 사람에서는 개혁주의 신학단체인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와 계약하여 로이드 존스의 책을 내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Christ-centered Preaching by Bryan Chapell)


"Fallen Condition Focus!" (타락된 상태에 초점!)

2015년 RTS Jackson에 온 Bryan Chapell 교수는 이것을 반복적으로 힘주어 강조했다.

그는 부드럽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로 강해설교의 지향점을 차분히 전달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를 강조하는 개혁주의 전통은 필연적으로 강해설교(Expository Sermon)에 대한 강조로 귀결된다. 설교는 성경의 적용이고, 예배의 중심이며, 지역교회의 풍향계다. 그만큼 설교에 대한 고전(古典)들도 많다. 로이드존스의 <설교와 설교자; Preaching and Preachers>, 조엘 비키가 엮은 <타오르는 강단; Pulpit Aflame), 그리고 팀 켈러의 <설교; Preaching>까지 강해설교의 원리와 적용을 세심하게 다룬 서적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미국 칼빈신학교 학장이자 실천신학 교수인 브라이언 채펠 박사의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Christ-centered Preaching>은 설교의 준비와 전달에 있어 매우 실용적이다. 책은 크게 (1) 강해설교의 원리, (2) 강해설교의 준비, 그리고 (3) 그리스도 중심 메시지의 신학,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1. 강해설교의 원리

이 부분에서 체펠 박사는 성경본문의 우선성을 말한다. 사실 설교자가 반드시 가져야 할 준비자세는 성경본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적극적인 의뢰다. 또한 그는 설교에 있어서 통일성 있는 원 포인트 설교를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How many things is a sermon about? One!) 하나의 명제(Proposition)를 제대로 전달하라! 그리고 체펠 박사는 그의 독창적인 개념이기도 한 FCF(타락상태초점; the Fallen Condition Focus)를 소개한다.

FCF is the mutual human condition that contemporary believers share with those to or about whom the text was written that requires the grace of the passage for God's people to glorify and enjoy him. (타락상태초점(FCF)이란 오늘날 신자들이 성경본문이 기록될 당시 그 대상이었던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필요한 은혜를 공유하는 공동의 인간적 관심사이다.)

Christ-centered Preaching, 50

정의(definition)에서 알 수 있듯이 FCF는 항상 부정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인간공통의 상태다. FCF는 성경본문이 고치거나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체펠 박사가 제시하는 설교론은 본질적으로 변증적(Apologetic)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설교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감추기보다 오히려 극대화해서 설득과 수긍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물론 그 자신이 복음진리의 전달에 있어서 Logos - Pathos - Ethos의 연결고리들을 언급하지만 FCF는 보다 Logos의 영역에 가깝다.

강해설교의 구조는 <설명(Explanation) - 예화(Illustration) - 적용(Application)>의 세 부분의 연결고리로 구성된다. 각 부분의 분량은 본문과 대상에 따라 상이하다. 체펠에 따르면, "설교를 하는데 있어서 구성 요소들의 비율을 결정하는 규칙은 없다.... 종교개혁 지도자들은 듣는 사람의 욕구와 능력에 맞추어 설교하라고 조언했다. [WLC, 159] 이 지혜로운 조언은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거나 명성을 드내기 위해 설교하지 말아야 할 것을 상기시켜준다." 우리는 체펠 박사의 조언에 따라 RTS Jackson 재학당시 Preaching Lab에서 각 대지마다 1개씩의 예화(Illustration)를 꼭 첨부할 것을 훈련받기도 했다. 그것은 생생한 심상을 가질 때에 본문과 교리의 의미를 보다 잘 기억하게 되는 청중을 위한 훈련이었다. 예수님과 바울이 몸소 보여주었듯이 대상이 달라지면 설교의 구성과 전달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2. 강해설교의 준비

체펠 박사는 설교 준비를 위한 6가지 질문을 제시한다. 특별히 4번째 질문은 FCF를 확정하는데 있어 중요하다.

1) 본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 본문의 의미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3) 어떤 관심사들 때문에 본문이 기록되었는가?

4) 본문을 기록한 사람 및 그 대상과 우리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5) 본문의 진리에 대해 오늘날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6) 본문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그 다음으로 설교준비의 4단계는 다음과 같다.

(1) 관찰 - (2) 질문(6하원칙, 담화분석; Discourse Analysis) - (3) 관련(청중과의 관련성) - (4) 구성(설교문)

설교의 도입부는 관심을 유발할 수 있는 영역이어야 한다. 흥미로운 예화로 시작할 수도 있겠으나 이 설교가 나오게 된 계기나 지향하는 목표, 곧 말씀을 갈망하게 하는 것과 맥락연결과 같은 선행주제(ante-theme)가 적절하다.

3. 그리스도 중심 메시지의 신학

이 부분에서 체펠 박사는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는 본질적으로 구속적 설교(Redemptive preaching)라고 말한다. 체펠은 제이 아담스(Jay Adams)의 말을 인용한다. "만약 당신이 유대교인이나 유니테리언주의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설교를 한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설교이다.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설교는 독특해야 한다. 설교를 독특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설교 전체에 구원하시고 성화시켜주시는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것이다. 당신이 전하는 설교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복음적인 설교와 교화적인 설교 모두에 적용된다.... 청중이 성경에서 요구하는 모든 것을 자력으로 행할 수 있다는 듯이 그것들을 행하라고 권면해서는 안된다. 청중은 십자가의 구원하는 능력과 성령 안에서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내주하시며 거룩하게 하시는 능력, 행하게 하시는 능력의 결과로서 성경이 요구하는 것들을 행할 수 있다."

이와같은 구속적 진리의 중심성은 지속적으로 강조된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체펠 박사는 결코 교화적인 설교, 이를테면 당신은 본받아야 하고, 더 거룩해져야 한다는 설교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그는 이와같은 설교가 인본주의와 도덕주의로 흐르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의 중심성이 항상 견고하게 견지되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암송 성구 자료(05-26-2024 /


파트리스 성구 암송 자료

05-26-2024(주일)
암송 성구 #. 1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06-02-2024(주일)
암송 성구 #. 2 사도행전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Salvation is found in no one else,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to men by which we must be saved.


06-09-2024(주일)
암송 성구 #. 3 에베소서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06-16-2024(주일)
암송 성구 #. 4 고린도후서 5: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So we make it our goal to please him, whether we are at home in the body or away from it.


06-23-2024(주일)
암송 성구 #. 5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having a form of godliness but denying its power. Have nothing to do with them.


06-30-2024(주일)
암송 성구 #. 6 고린도전서 9:16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Yet when I preach the gospel, I cannot boast, for I am compelled to preach. Woe to me if I do not preach the gospel!


07-07-2024(주일)
암송 성구 #. 7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07-14-2024(주일)
암송 성구 #. 8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Follow my example, 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t.


07-21-2024(주일)
암송 성구 #. 9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You diligently study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by them you possess eternal life. These are the Scriptures that testify about me.


07-28-2024(주일)
암송 성구 #. 10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08-04-2024(주일)
암송 성구 #. 11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What good will it be for a man if he gains the whole world, yet forfeits his soul? Or what can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08-11-2024(주일)
암송 성구 #. 12 베드로후서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Through these he has given us his very great and precious promises, so that through them you may participate in the divine nature and escape the corruption in the world caused by evil desires.

08-18-2024(주일)
암송 성구 #. 13  아모스 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But let justice roll on like a river, righteousness like a never-failing stream!


08-25-2024(주일)
암송 성구 #. 14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Therefore, my dear friends, as you have always obeyed--not only in my presence,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09-01-2024(주일)
암송 성구 #. 15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but of righteousness, peace and joyin the Holy Spirit,


09-08-2024(주일)
암송 성구 #. 16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09-15-2024(주일)
암송 성구 #. 17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Th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09-22-2024(주일)
암송 성구 #. 18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09-29-2024(주일)
암송 성구 #. 19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10-06-2024(주일)
암송 성구 #. 20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10-13-2024(주일) / 설교 6월 8일 성령강리주일
암송 성구 #. 21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 설교 / 06-08-2025.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1.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2.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3. 새것이 되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10-20-2024(주일)
암송 성구 #. 22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10-27-2024(주일)
암송 성구 #.23  고린도후서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For he says, "In the time of my favor I heard you, and in the day of salvation I helped you." I tell you,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11-03-2024(주일)
암송 성구 #.24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11-10-2024(주일) 구원의 확신
암송 성구 #.25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And this is the testimony: God has given us eternal life, and this life is in his Son.
He who has the Son has life; he who does not have the Son of God does not have life.

11-17-2024(주일) 기도 응답의 확신
암송 성구 #. 26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Until now you have not asked for anything in my name. Ask and you will receive, and your joywill be complete.

11-24-2024(주일) 승리의 확신
암송 성구 #. 27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No temptation has seized you except what is common to man. And God is faithful; he will not let you be tempted beyond what you can bear. But when you are tempted, he will also provide a way out so that you can stand up under it.


12-01-2024(주일) 사죄의 확신
암송 성구 #. 28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

12-08-2024(주일) 인도의 확신
암송 성구 #. 29  잠언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and lean not on your own understanding;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12-15-2024(주일)
암송 성구 #. 30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If a man remains in me and I in him, he will bear much fruit;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12-22-2024(주일)
암송 성구 #. 31  사도행전 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Now I commit you to God and to the word of his grace, which can build you up and give you an inheritanceamong all those who are sanctified.


12-29-2024(주일)
암송 성구 #. 32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because those who are led by the Spirit of God are sons of God.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1-05-2025(주일)
암송 성구 #. 33  고린도후서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01-12-2025(주일)
암송 성구 #. 34  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But if we walk in the light, as he is in the light, we have fellowship with one another, and the blood of Jesus, his Son, purifies us from all sin.


01-19-2025(주일)
암송성구 #. 35  베드로전서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But in your hearts set apart Christ as Lord. Always be prepared to give an answer to everyone who asks you to give the reason for the hope that you have. But do this with gentleness and respect.

01-26-2025(주일)

암송성구 #. 36. 고린도후서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Each man should give what he has decided in his heart to give, not reluctantly or under compulsion, for God loves a cheerful giver.

02-2-2025(주일)

암송성구 #. 37.  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y is a temple of the Holy Spirit, who is in you, whom you have received from God? You are not your own;


02-9-2025(주일)

암송성구 #. 38.  베드로전서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영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If you are insulted because of the name of Christ, you are blessed, for the Spirit of glory and of God rests on you


02-16-2025(주일)
암송성구 #. 39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The LORD bless you and keep you;
the LORD make his face shine upon you and be gracious to you;
the LORD turn his face toward you and give you peace.


02-23-2025(주일)
암송 성구 #. 40  요한복음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ask whatever you wish, and it will be given you.


03-02-2025(주일)
암송 성구 #. 41  고린도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Now the Lord is the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freedom.


03-09-2025(주일)
암송 성구 #. 42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03-16-2025(주일)
암송 성구 #. 43 역대상 16:11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찌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찌어다.
Look to the LORD and his strength; seek his face always.

03-23-2025(주일)
암송성구 #.44 에베소서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And pray in the Spirit on all occasions with all kinds of prayers and requests. With this in mind, be alert and always keep on praying for all the saints.

03-30-2025(주일)
암송성구 #.45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

04-06-2025(주일)
암송성구 #. 46 에베소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Devote yourselves to prayer, being watchful and thankful.

04-13-2025(주일)
암송성구 #. 47 시편 144:15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Blessed are the people of whom this is true; blessed are the people whose God is the LORD.

04-20-2025(주일)
암송성구 #. 48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and come out--those who have done good will rise to live, and those who have done evil will rise to be condemned.

04-27-2025(주일)
암송성구 #. 49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The LORD your God is with you, he is mighty to save. He will take great delight in you, he will quiet you with his love, he will rejoice over you with singing.


05-04-2025(주일) 어린이주일
암송성구 #. 50  마가복음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I tell you the truth, anyone who wi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like a little child will never enter it.


05-11-2025(주일) 어버이주일
암송성구 #. 51  레위기 19:32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Rise in the presence of the aged, show respect for the elderly and revere your God. I am the LORD.

05-18-2025(주일)
암송성구 #. 52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if my people, who are called by my name, will humble themselves and pray and seek my face and turn from their wicked ways, then will I hear from heaven and will forgive their sin and will heal their land.

05-18-2025(주일)
암송성구 #. 52 역대하 7:14

05-25-2025(주일)
암송성구 #. 53 시편 144:15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Blessed are the people of whom this is true; blessed are the people whose God is the LORD.

06-01-2025(주일)
암송성구 #.53  이사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but those who hope in the LORD will renew their strength. They will soar on wings like eagles; they will run and not grow weary, they will walk and not be faint.

06-08-2025(주일)
암송성구 #.54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He has showed you, O man, what is good. And what does the LORD require of you? To act justly and to love mercy and to walk humbly with your God.

06-15-2025(주일) 설교 7월 6일 성령강림 후 204주, 맥추감사주일
암송성구 #.55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06-15-2025(주일) 설교 7월 6일 성령강림 후 204주, 맥추감사주일
암송성구 #.55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믿음의 사람(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
 1. 영적 연합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 예수님과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디스마와 게스다)
 2. 영적 생활 :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
 3. 영적 믿음 :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06-22-2025(주일) 
암송성구 #.56 시편 18:30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As for God, his way is perfect; the word of the LORD is flawless. He is a shield for all who take refuge in him.


06-29-2025(주일) 
암송성구 #.57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Whoever has my commands and obeys them, he is the one who loves me. He who loves me will be loved by my Father, and I too will love him and show myself to him."

07-06-2025(주일) 
암송성구 #.58 전도서 12: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Remember your Creator in the days of your youth, before the days of trouble come and the years approach when you will say, "I find no pleasure in them.

07-13-2025(주일)
암송성구 #. 59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

성경의 시대적 구분

구약

1. 창조시대
2. 족장시대
3. 출애굽시대
4. 정복-정착시대
5. 통일왕국시대
6. 분열왕국시대
7. 단일왕국과 포로기
8. 재건시대
9. 신약과 구약의 중간시대 

신약

1. 예수의 탄생과 공생애
2. 사도시대
3. 교회 시대
4. 종말

07-20-2025(주일)
암송성구 #. 60. 베드로후서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For prophecy never had its origin in the will of man, but men spoke from God as they were carried along by the Holy Spirit.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 베드로는 예언의 말씀이 사사로이 해석되지 않아야 되는 근거로 성경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제시한다.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는 베드로의 진술은 성령의 이중적인 저작권을 암시한다. 
즉 원저자이신 성령께서 영감을 통해서 성경 기록자에게 오류가 없는 성경을 기록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고전 14:37;딤후 3:16;딤후 3:10-17 주제 강해 '성경 영감론' 참조). 

구약의 제자들도 역시 자신들의 예언이나 말씀이 자신의 뜻이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삼하 23:2;렘 1:7,9). 
그러나 당시의 거짓 교사들은 재림에 대한 구약성경의 예언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선지자 자신이 표적이나 꿈, 환상을 통하여 지어낸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16절). 
베드로는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하여 본절에서 구약성경의 예언에 대한 신적 기원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예언  προφητε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4394

1. 예언.  2. 예언적 활동.  3. 예언의 은사  
발음  [ prŏphētĕia ]  
어원 / 4396에서 유래
  •  1.  예언.
    •  a.  예언적 활동, 예언활동, 계11:6.
    •  b.  예언의 은사, 예언하는 은사, 롬12:6, 고전12:10, 계19:10.
    •  c.  예언의 말씀, 마13:14, 고전14:6, 벧후1:20, 살전5:20.
  • 관련 성경  /  예언(마 13:14, 살전 5:20, 계 22:7). 
                        [동] 예언하다(고전 12:10, 13:2). 


성경의 시대 구분과 특징

1. 창조 시대 (창세기 1-11장) 
    주요 사건  - 천지 창조,  아담과 하와의 창조와 타락,  가인과 아벨 이야기,  노아의 홍수,  바벨탑 사건 

특징 :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시기입니다. 창조, 인간의 타락, 죄의 확산, 그리고 노아의 홍수와 같은 사건들이 이 시기에 포함됩니다. 이 시기는 인류의 기원과 초기의 타락, 그리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과 구원의 시작을 다루고 있습니다.


2. 족장 시대 (창세기 12-50장)    
    주요 사건 - 아브라함의 부름,  이삭, 야곱, 요셉의 이야기,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

   특징 : 이 시대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과 같은 족장들의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를 통해 한 민족     (이스라엘)을 세우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이 시대는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시기입니다.

3. 출애굽과 광야 시대 (출애굽기-신명기)
    주요 사건 -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시내산 언약 (십계명),  광야에서의 40년,  모세의 죽음 ​

   특징 : 이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시기입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이 시기는 율법과 예배 제도의 도입과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경험한 시기입니다.

​    4. 가나안 정복과 사사 시대 (여호수아-사무엘상)
        주요 사건 -  여호수아에 의한 가나안 정복,  사사들의 통치,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타락과 회복
 
   특징 : 이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하는 시기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한 후,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이끈 시대입니다. 
   이 시기에는 이스라엘이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로 인해 외적의 침략을 받았다가 회개하고 구원받는 패턴이 나타납니다.


5. 왕정 시대 (사무엘상-열왕기, 역대기)
    주요 사건 -  사울, 다윗, 솔로몬의 통치,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예루살렘 성전 건축,  선지자들의 활동

​   특징 : 이 시대는 이스라엘이 왕을 세워 통치하던 시기입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첫 왕이 되었고, 다윗과 솔로몬을 거치며 왕국이 번       영하지만, 솔로몬 이후 왕국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됩니다. 
   이 시기는 하나님의 언약이 다윗 왕조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와, 선지자들이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 돌아가라고 외쳤던 시기입니다.

6. 포로기와 귀환 시대 (에스라-느헤미야, 에스더, 다니엘) 
   주요 사건 -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과 유다 포로, 페르시아에 의한 바벨론 정복, 고레스 칙령에 따른 귀환, 성전 재건과       예루살렘 성벽 재건

​   특징 :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많은 유대인이 포로로 잡혀간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다니엘과 같은 선지자가 활동했으며, 포로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약속이 강조됩니다. 
   이후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고,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이 이 시대에 포함됩니다.

7. 중간기 (말라기 이후-신약 시대 전까지)
    주요 사건 - 페르시아, 헬레니즘, 로마 제국의 지배,  유대 종파의 형성 (바리새인, 사두개인, 에세네파 등),  구약과 신약 사이        의  약 400년의 침묵기 

특징 : 이 시기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없는 기간으로, 약 400년 동안 선지자들이 침묵한 시기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시기 동안 유대교의 다양한 종파가 형성되고, 헬레니즘 문화와 로마의 지배 아래 유대인들의 종교적 정체성이 강하게 형성됩니다. 
이는 신약 시대에 예수님께서 오실 배경을 형성합니다.

8. 예수님의 사역 시대 (복음서)
    주요 사건 - 예수님의 탄생, 공생애, 십자가 죽음, 부활,  제자들의 부르심과 사역,  산상수훈, 비유, 기적,  십자가와 부활 사건​

   특징 : 이 시대는 예수님의 탄생부터 부활과 승천까지의 기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기적과 가르침을 통해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이 시대는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성취되는 시기이며, 인류를 위한 구원의 완성 단계로서의 시기입니다.

9. 사도 시대 (사도행전-요한계시록)
    주요 사건  -  성령 강림과 교회의 탄생 (오순절),  사도들의 선교 여행과 복음 전파,  초기 교회의 성장과 박해,  바울의 서신들,  
    요한계시록에서의 종말론적 비전​

   특징 : 이 시대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교회의 시대입니다. 
   사도들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이 시기는 교회의 탄생과 확장이 이루어진 시기이며, 초대 교회의 신앙과 실천이 형성되었습니다. 
   또한,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기록한 서신서들은 교회의 신앙과 생활을 지도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10. 종말과 새 하늘과 새 땅 (요한계시록) 
      주요 사건 -  마지막 심판과 새 예루살렘,  사탄의 최후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특징 : 이 시대는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마지막 때의 사건들을 다룹니다. 
종말의 사건들과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완성되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모든 악이 심판받고,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셔서 영원한 나라를 세우는 최종 구원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성경의 시대 구분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향해 펼치신 구원의 역사와 계획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각 시대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구속의 과정을 반영하며, 그 시대 속에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구분은 성경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이해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역사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1. 창조 시대 (창세기 1-11장) 
    주요 사건  - 천지 창조,  아담과 하와의 창조와 타락,  가인과 아벨 이야기,  노아의 홍수,  바벨탑 사건 

2. 족장 시대 (창세기 12-50장) 
  
    주요 사건 - 아브라함의 부름,  이삭, 야곱, 요셉의 이야기,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

   3. 출애굽과 광야 시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주요 사건 -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시내산 언약 (십계명),  광야에서의 40년,  모세의 죽음 ​

   4. 가나안 정복과 사사 시대 (여호수아-사무엘상)
        주요 사건 -  여호수아에 의한 가나안 정복,  사사들의 통치,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타락과 회복

   5. 왕정 시대 (사무엘상-열왕기, 역대기)
    주요 사건 -  사울, 다윗, 솔로몬의 통치,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예루살렘 성전 건축,  선지자들의 활동

​   6. 포로기와 귀환 시대 (에스라-느헤미야, 에스더, 다니엘) 
   주요 사건 -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과 유다 포로, 페르시아에 의한 바벨론 정복, 고레스 칙령에 따른 귀환, 성전 재건과  
   예루살렘 성벽 재건

​   7. 중간기 (말라기 이후-신약 시대 전까지)
    주요 사건 - 페르시아, 헬레니즘, 로마 제국의 지배,  유대 종파의 형성 (바리새인, 사두개인, 에세네파 등),  구약과 신약 사이        의          약 400년의 침묵기 

8. 예수님의 사역 시대 (복음서)
    주요 사건 - 예수님의 탄생, 공생애, 십자가 죽음, 부활,  제자들의 부르심과 사역,  산상수훈, 비유, 기적,  십자가와 부활 사건​

   9. 사도 시대 (사도행전-요한계시록)
       주요 사건  -  성령 강림과 교회의 탄생 (오순절),  사도들의 선교 여행과 복음 전파,  초기 교회의 성장과 박해,  바울의 서신들,  
       요한계시록에서의 종말론적 비전​

   10. 종말과 새 하늘과 새 땅 (요한계시록) 
       주요 사건 -  마지막 심판과 새 예루살렘,  사탄의 최후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07-27-2025(주일)
암송성구 #. 61. 요한복음 8: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He who belongs to God hears what God says. The reason you do not hear is that you do not belong to God.

하나님께 속한 자는 막연한 소속이 아니라 분명한 소속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성경에서는 "그 하나님에게 속한 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막연한 소속이 아니라 어느 단체이든지 그 안에서 주체적인 역활을 감당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부패하여 하나님께 속하지 못하고 타락한 삶을 즐기고 있다고 조롱하여 심지어 귀신이 들렸다고도 합니다.

권력의 귀신, 물질의 귀신, 명예의 귀신 등 온갖 귀신에게 사로잡힌 수 많은 군중들 가운데서 정신을 차리고 온전히 하나님에게 소속된 믿음의 사람으로 굳게 무장해야 하겠습니다. 

08-03-2025(주일)
암송성구 #. 62.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And without faith it is impossible to please God, because anyone who comes to him must believe that he exists and that he rewards those who earnestly seek him.

성경적 믿음(pistis)이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한자의 믿을 신(信)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信)자를 파자(破字)하면 '사람 인(人)'과 '말씀 언(言)'이 결합되어 하나의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헬라어에서는 "피스티스(πίστις)"라고 하며 그 의미는 "믿음, 신실성, 엄숙한 약속"이라고 합니다.
한글성경에서는 '피스티스'라는 단어를 "믿음(마 8:10, 롬 1:8, 히 10:22), 도(행 6:7), 충성(갈 5:22), 신앙(빌 1:27, 히 6:1)"으로 번역합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에무나(אֱמוּנָה)"라고 하며 그 의미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에무나의 어원은 아람어 "아만(אֲמַן)"입니다.
'아만'이란 "믿다, 신뢰하다, 확신하다"는 뜻으로 한글성경에서는 "의뢰하다(단 6:23), 확실하다(단 2:45), 충성되다(단 6:4)"라고 번역합니다.
파트리스교회 교우들이여,
어지럽고 거스리는 풍랑이 격동하는 시대에 진리의 말씀에 사로잡혀 거친 풍파를 진리의 말씀으로 극복하는 은혜를 함께 누려봅시다. 

󰃨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하나님께서 저를 옮기우셨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믿음과 필연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자는 그 '믿음'에 대해서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 (1)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 '그가 계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은 사단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약 2:19). 그것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지고 마지막 때에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1:1, 2) 하나님의 실존적(實存的) 존재를 뜻한다(Bruce).

󰃨 (2)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상 주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스다포도테스'(*)는 '보상하다'라는 의미로 '상'은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을 가리킨다(Bruce).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상의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시 43:4).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보답하시는 공의로우신 속성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08-10-2025(주일)

암송성구 #. 63.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He who does what is sinful is of the devil, because the devil has been sinning from the beginning. The reason the Son of God appeared was to destroy the devil's work.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 본문은 7절 하반절과 정반대되는 내용으로서 대조를 이룬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한다. 
반면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한다. 
요한은 이러한 대조법을 사용하여서 수신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누구에게 속하느냐'란 질문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며 동시에 영지주의자들이 방종을 통해 범죄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누구에게 속하였는가를 분별할 수 있도록 한다. 
한편 요한은 본문에서 마귀의 기원에 대해서는 어떠한 암시도 주지 않으며, 단지 죄의 기원이 마귀에게 있다는 사실만을 말한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을 암시하는 듯하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하는 자로서 진리가 그 안에 전혀 없기에(요 8:44) 속이는 자이며 사람들로 범죄하게 한다. 
이러한 죄의 기원에 대해 바울이 아담에게까지 소급시킨 것과 달리(롬 5:12-19), 요한은 그보다 더욱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Westcott).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 '마귀의 일'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람들을 미혹시켜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다(창 3:1-6). 
이러한 마귀의 일을 파괴하고 사람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죄인을 어둠에서 구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오셨다(5절; 히 9:28; 벧전 2:24). 
요컨대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죄를 없애고 동시에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함인 것이다(Plummer).


08-17-2025(주일)

암송성구 #. 64. 예레미야 17:14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Heal me, O LORD, and I will be healed; save me and I will be saved, for you are the one I praise.

08-24-2025(주일)

암송성구 #. 65.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Call to me and I will answer you and tell you great and unsearchable things you do not know.'


* 부르짖으라(카라. qârâ)  קָרָא
* 응답하리라(아나. ʽânâh) עָנָה    

* 보이리라(나가드. nâgad) נָגַד


08-31-2025(주일)

암송성구 #. 66. 예레미야애가 3: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Because of the LORD's great love we are not consumed, for his compassions never fail


첫째, 자비(慈悲) - 헤세드

자비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 자에게 벌을 면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헤세드’ 입니다. 

둘째, 긍휼(矜恤) - 라함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죄인들이 심판을 받아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에스겔서 18장 23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겔 18:23) 
히브리어로 ‘긍휼’이란 단어는 ‘레헴’ 입니다. 
이 단어는 여성의 ‘자궁’을 뜻합니다. 
히브리어로 ‘긍휼’이란 단어는 마치 어머니가 그 품 안에 몸 안에 있는 아기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 아기가 누군가에게는 단지 수십 억 명 중에 한 사람 정도 밖에 안되는 평범한 존재일지 모르지만, 엄마에게 만큼은 자신의 목숨을 다 주고서라도 지켜주고 싶은 사랑스런 존재 입니다. 
그것이 바로 레켐, 긍휼 입니다. 
하나님의 바로 이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로 인해 죽는 것을 그대로만 바라보고 계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 자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즉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놓듯이,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려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불쌍히 여기심, 죄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레켐의 사랑…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9월 7일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For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and acknowledgment of God rather than burnt offerings.

9월 14일

에스겔 36:26-27

  • 또 새 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 I will give you a new heart and put a new spirit in you; I will remove from you your heart of stone and give you a heart of flesh.
  • And I will put my Spirit in you and move you to follow my decrees and be careful to keep my laws.

  • 9월  21일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 Cast all your anxiety on him because he cares for you.

  • 9월 28일
  •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Therefore I tell you that no one who is speaking by the Spirit of God says, "Jesus be cursed," and no one can say, "Jesus is Lord," except by the Holy Spirit.

  • 10월 5일
    빌립보서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But our citizenship is in heaven. And we eagerly await a Savior from there, the Lord Jesus Christ.


    10월 12일
    이사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but those who hope in the LORD will renew their strength. They will soar on wings like eagles; they will run and not grow weary, they will walk and not be faint.


    10월 19일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역사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안에서 기업이되었으니.
    In him we were also chosen, having been predestined according to the plan of him who works out everything in conformity with the purpose of his will.

    10월 26일
    고린도전서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If anyone does not love the Lord--a curse be on him. Come, O Lord!

    11월 2일 

  •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He who testifies to these things says, "Yes, I am coming soon." Amen. Come, Lord Jesus. 

  • 11월 9일 

  • 이사야 46:9-10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이가 없느니라.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것이니 내가 모든 나의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 11월 16일 
  • 시편 6: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No one remembers you when he is dead. Who praises you from the grave?

    11월 23일 주일은 교회력으로는 2025년 마지막 주일이며 또한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며 한글개역성경에서 감사라는 단어가 사용된 말씀을 살펴보니 176구절이었습니다.
    구약에서 121구절 신약에서 55구절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영어로 Thanksgiving Sunday라고 합니다.
    감사는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2025년 감사주일 헌금은 강원도 문막에 건립된 은퇴 후 기거할 곳이 없는 여선교사들을 위한 안식관의 건축헌금으로 봉헌하려고 합니다.
    건물을 완공하였으나 아직 건축비를 정산하지 못한 안타까운 소식을 들으며 정성을 모아 속히 건축비를 해결하는 일에 동참하려고 합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마치 음부의 골짜기에 떨어진 인생이라고 시편 기자는 외칩니다.


  • 천국과 지옥의 차이

    어릴때 부처님을 열심히 신봉할 때 내가 읽었던 불교의 가르침 중 아직도 기억나는 스토리가 있다. 
    천국에서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아가고 지옥에서는 온갖 형벌을 다 받지만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바로 단체로 식사하는 시간이다. 

    일단 천국이든 지옥이든 식사할 때가 되면 하늘에서 맛있는 음식이 담긴 거대한 국그릇이 내려온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천국이든 지옥이든 젓가락과 숟가락이 매우 길다고 한다. 
    즉, 젓가락과 숟가락이 너무 길기 때문에 절대 자신의 입에 음식을 넣을 수가 없고 남을 떠먹여주거나 나도 남이 떠먹여줘야만 식사를 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천국과 지옥의 모습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천국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평화롭게 식사를 하는데 식사시간에 서로 정답게 떠먹여주면서 정답게 식사를 한다고 한다. 
    지옥은 반대로 남에게  떠 먹여주지 않고 자기 자신이 직접 길다란 젓가락과 숟가락을 어떻게든 입에 갖다대서 혼자 식사를 독차지하려고 하다 보니 서로 붙잡고 밀치고 싸운다고 한다. 
    그래서 지옥에서의 식사시간은 난장판이 되는 것은 기본이고 그 누구도 배부르게 식사를 하지 못해 모든 사람이 늘 불만에 차있고 굶주려 있다고 한다. 

    실제로 천국과 지옥이 그런 모습일지는 모르겠으나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지구의 자원은 한정적이므로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려면 한정된 자원을 서로 잘 나눠가져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힘센 나라들이 지구상의 대부분의 자원을 독식하는 구조로 되어 있어 자원의 배분이 균형있게 이뤄지지 않고 있고 그래서 지구 반대편에는 지금도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같은 국가 내에서도 빈부의 격차가 극심한 편이다. 
    (지구상의 상위 1%부자들이 나머지 인구 99%의 부를 독식하고 있다는 얘기는 이미 잘 알려진 얘기다. 
    더 슬픈 것은 그 비율이 점점 더 극단치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지구상의 상위 0.1% 부자들이 나머지 99.9% 인구가 가진 부를 다 차지하게 될 것이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주어지는 자원(식사량)은 동일하다고 한다. 
    단지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 개개인의 됨됨이가 다르기에 나타나는 결과 또한 극명하게 엇갈릴 뿐이다. 

    지옥과 천국의 식사시간 

    한 평범한 남자가 죽었다. 
    그는 생전에 착한 일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악한 일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심판을 받고 즉시 지옥으로 보내졌다.
    지옥에서는 악귀가 기다리고 있다가 그의 팔에 부목을 대었다. 
    그는 부목 때문에 팔을 구부릴 수 없었다. 
    지옥에서는 항상 팔을 편 채로 생활해야 한다고 했다. 
    이윽고 식사시간이 되어 남자는 식당으로 끌려갔다. 
    물론 팔에는 여전히 부목이 대어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나팔이 울리자, 지옥에 사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도 모두 팔에 부목을 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영양실조에 걸린 듯 눈이 움푹 패어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렇게 음식이 많은데, 어째서? 
    재차 나팔이 울렸다. 
    사람들은 모두 얼굴을 음식에 들이 대고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굴을 들이대고 하는 식사로는 좀처럼 음식을 입안으로 집어넣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세 번째의 나팔이 울렸다. 
    그러자, 아직 변변히 먹지도 않았는데 모두 밖으로 쫓겨났다.  
    이것을 본 남자는 이런 곳에 있게 되면 큰일이다 싶어 악귀에게 애원했다.
    ˝저는 지옥으로 보내질 만큼 나쁜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착오가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부탁합니다. 다시 한 번 심판해 주십시오.˝
    남자가 너무도 간절히 애원하므로 악귀는 어쩔 수 없이 재심을 청구해 주었고, 남자는 무죄가 되어 천국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천국에서는 성 베드로가 남자를 맞아 주었다.

    베드로가 말했다. 
    ˝그 부목은 여기에서도 사용합니다. 그대로 대고 계십시오.˝ 
    이윽고 식사시간이 되어 남자는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테이블 위에는 역시 마찬가지로 많은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팔이 울리자 천국 사람들이 조용히 들어왔다.
    놀랍게도 그들의 팔에도 역시 부목이 대어져 있었다. 
    하지만 모두 혈색이 좋고 행복해 보였다. 
    이유는 곧 밝혀졌다. 
    그들은 부목이 대어진 손으로 음식을 잡고는 서로 먹여 주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지옥 사람들과 달리 맛있는 음식을 항상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 11월 23일 
  • 시편 9: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I will praise you, O LORD, with all my heart; I will tell of all your wonders.


  • 11월 30일 

  •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Who will have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unto the knowledge of the truth.
    Who desire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the knowledge of the truth.




  •  







  • 감사(야다. yâdâh)     יָדָה Storng number3034

    1.  던지다.  2. 피엘형: 미완료형 וַיַדּוּ   3. 히필형 미완료형 יְהוֹדֶה  
    Pronunciation [ yâdâh ]  
    Old Testament  /  117회 사용
    • 1.원형 던지다, 내던지다.
      • a.원형 피엘형: 미완료형 וַיַדּוּ, 애3:53, 부정사 יַדּוֹת, 슥2:4(1:21): 던지다, 내던지다[돌을].
      • b. 원형 히필형 미완료형 יְהוֹדֶה ,יוֹדֶה: 시28:7,45:18(17), 느11:17
      • c.원형 주장하다, 신앙하다, 고백하다, 보여주다, 지적하다, 시32:5, 잠28:13
      • d.원형 감사하다, 경축하다, 찬양하다, 창29:35, 49:8, 대상29:13, 왕상8:33, 스3:11, 시7:18(17), 30:13(12), 54:8(6),75:2(1), 106: 47, 122:4.
      • e. 원형 힛파엘형 הִתְוַדָּה
      • f.원형 고백하다[자신에 관하여, 죄], 단9:4, 느1:6, 9:2, 레5:5, 16:21, 26:40
      • g. 원형 경축하다, 찬양하다, 감사하다, 대하30:2.
    • 문법설명  /  명령형 יַדּוֹת, 렘50:14

    • 관련 성경 / 쏘다(렘50:14), 떨어지다(슥1:21), 던지다(애3:53), 인정하다(왕상8:33, 대하6:24), 감사하다(시75:1, 대상16:4, 23:30, 느12:24), 찬송하다(창 29:35, 대하 7:6, 시 45:17), 자복하다(민5:7, 시32:5, 단9:4), 찬양하다(시43:4,71:22, 사38:18), 칭찬을 받다(시49:18), 아뢰다(레16:21).





    사망(마베트. mâveth)   מוֹת
    4194

    1. 죽음.  2. 시 7:14.  3. 깊은 잠에 대해 사용] 삼상20:31
    Pronunciation [ mâveth ]
    Etymology
    4191에서 유래
    Old Testament
    161회 사용
    • 1.
      명사, 남성 죽음, 사망.
      • a.
        명사, 남성 [가공할 무기에 대해 사용] 시7:14(13).
      • b.
        명사, 남성 깊은 잠에 대해 사용] 삼상20:31,26:16, 시13:4(3).
      • c.
        명사, 남성 [무거운 죄에 대해 사용] 삼하19:29(28), 왕상2:26
    • 2.
      명사, 남성 죽은 자들이 사는 곳, 지옥, 욥28:22,시9:14(13), 잠7:27.
    • 3.
      명사, 남성 고질병, 악역, 악질, 흑사병, 전염병,욥27:15, 렘15:2, 18:21, 43:11.
    • 4.
      명사, 남성 파멸, 멸망, 소멸, 절멸, 파괴, 출10:17,잠11:19, 12:28.

    מוֹת


    • 문법설명 /  연계형 מוֹת

    • 관련 성경 / 죽음(출10:17, 민16:29, 시89:48), 주검(레11:31,32), 사망(신30:15, 삼상5:11, 시6:5), 스올(시116:3, 잠5:5), 무덤(사53:9). [동] 죽다(창21:16, 신21:22, 욘4:3), 돌아가다(창50:16), 죽이다(신19:6, 시7:13, 렘43:11).





  •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Who will have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unto the knowledge of the truth.
    Who desire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the knowledge of the truth.


  • 12월 7일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 '무엇보다도'는 어떠한 일보다 사랑을 먼저 할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열심으로'(에크테네)는 '힘껏 노력하는', '전심 전력하는'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 힘써서 할 사랑은 감정적으로 하는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을 가지고 행동을 수반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을수 있다. 즉 피차간에 있는 허물을 덮어 주고 서로를 세워주고자 하는 사랑은 죄를 가리운다(잠 10:12). '죄를 덮느니라'에 대해서 혹자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친절한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그 보상으로 자신의 잘못이 가리워질 수있다고 주장하나(Tertullian, Origen) 여기서의 사랑은 친절한 행위를 함으로 오는 반대급부를 바라는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을 하고 있는 주체자의 죄가 가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있는 객체자의 죄가 가리워짐을 의미한다.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무조건적으로 용서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 12월 14일

    마가복음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 12월 21일

  • 고린도전서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And now these three remain: faith, hope and lov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 고린도전서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But eagerly desire the greater gifts. And now I will show you the most excellent way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마라나타(Maranatha)
    아람어 מרנא תא: maranâ thâ'  또는 מרן אתא: maran 'athâ'
    그리스어 Μαραναθα, Our Lord has come,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2개의 아람어가 합쳐진 공식인데 신약성경에 두 번 나온다. 

    성경에서 "마라나타(מרנא תא, maranâ thâ))"라고 하는 용어는 고린도전서 16:22. 요한계시록 22:20에 두 번 나온다. 
    이것은 본래는 아람어로 기도문에 쓰인 것으로 헬라어로 표기한 것이다.
    이 용어는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디다케(가르침이라는 뜻)"의 예식문(10:14)에서도 발견되며,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우리 주여 오소서(Our Lord(10:14) come 혹은 Our Lord has come)"라는 의미이다.

  • “마라나타”(고전 16:22, 계 22:20)라는 표현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믿음과 기도의 외침으로, 보통 “주여, 오소서!”로 번역됩니다. 
    이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마 6:11)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 23:39)의 기도와 연결됩니다.

    이 단어는 신약의 헬라어 원문에서 발견되지만 헬라어가 아니라 아람어입니다. 
    율법과 선지서(타낰흐)는 아람어로 된 몇 부분(대부분 다니엘서)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부분이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란”이라는 단어는 주님을 의미하고, “아타”는 오다를 뜻합니다.

    선지서에는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두 가지 묘사가 있습니다. 
    하나는 스가랴 9장 9절의 “겸손한” 버전입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복음서에서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함으로써 성취된 것으로 이해됩니다(마 21:5).

    또 다른 묘사는 영광 속 메시아입니다. 
    다니엘 7:13-14 “보라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예슈아는 대제사장들 앞에서 증거하신 말씀(마 26:64)과 종말에 대한 설교(마 24:30)에서 자신을 영광을 입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인용문은 모두 다니엘 7장의 예언을 다시 언급한 것입니다.

    다니엘의 이 구절은 아람어로 되어 있으며 “오다”를 뜻하는 단어는 “아타”입니다. 
    신약에 나오는 “마라나타”의 외침도 다니엘 7장에 대한 언급입니다. 
    본질적으로 “예슈아, 당신은 주님 곧 “마란”이십니다”라는 신앙의 선포입니다. 
    우리는 다니엘 7장 13-14절에 묘사된 대로 주님께서 하늘 구름을 타고 권능과 영광으로 오실(“아타”)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 예언이 성취되기를 기도하며 주님께 다시 오시기를 간청합니다.”


  •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본문은 본장 내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세번째 확증이며(7, 12절) 동시에 그 재림의 확증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응답을 나타낸다. 본서의 마지막에 '내가 속히 오리라'는 그리스도 자신의 재림에 대한 언급은 이제까지 진술해 온 본서의 예언의 말씀을 보장함과 동시에 고난과 핍박 속에서 인내하는 구속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로를 준다. 한편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는 초대 교회의 예배 의식에서 자주 사용되던 기도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간절한 소마을 시사한다(Morris). 

    이것은 고전 16:22에 나타난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마라나 다)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이 '마라나 다'는 아람어 '마라나타'(*)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과 모든 인간사를 주관하시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고백을 나타낸다.






  •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10개 성경 구절, 해석 및 적용

    서론: 하나님의 주권은 성경 전체에 걸쳐 가장 중요한 주제로 나타나며,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그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짐을 강조한다. 로마서 11장 36절을 비롯한 다양한 성경 구절과 개혁신학자들의 해석을 통해하나님의 주권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1. 로마서 9장 15-16절: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 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리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느니라."

    * 해석: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강조하며, 그의 긍휼과 자비가 인간의 노력이나 원함에 의존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존 칼빈(John Calvin):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일의 주관자이시며, 인간의 구원도 그의 은혜와 자비에 달려있음을 역설한다.

    * 적용:우리는 결코 인간의  노력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신뢰하며 살아야한다.

    2. 골로새서 1장16-17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것 들과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안에 함께 섰느니라."

    * 해석: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자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나타낸다.

    *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주장하며, 그가 모든 것의 창조주이자 주인임을 강조한다.

    * 적용: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야한다.

    * 3. 에베소서 1장 11절: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역사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안에서 기업이되었으니."

    * 해석: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짐을 나타낸다.

    *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그의 뜻 이세상의 모든 일에  작용한다고 하였다.

    *적용: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음을 믿고, 그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야 한다.

    4. 다니엘 4장 35절: "땅의 모든 주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든지 땅의 주민에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할 자가 없고 그의 일을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없도다."

    * 해석: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것에 주권을 가지시며, 그의 뜻대로 행하심을 강조한다.

    *죤 오웬(John Owen):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그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적용: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그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5. 이사야 46장 9-10절: "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나 같은이가 없느니라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것이니 내가 모든 나의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 해석: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계획이 시초부터 종말까지 존재함을 강조한다.

    * R.C.스프로울(R.C.Sproul):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계획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 적용: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의 삶 전체를 주관하고 계심을 믿고, 그의 뜻에 따라 살아야한다.

    6. 욥기 42장 2절:  "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므로 주의 뜻을 이루지 못하실 것이 없는 줄아오니."

    * 해석: 하나님이 무소불능하시며, 그의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음을강조한다.

    * 벤자민 B.워필드(B.B. Warfield): 하나님의 전능성과 그의 주권적인 계획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주장한다.

    * 적용: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그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한다.

    7. 시편 115편 3절: "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며 그의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도다."

    * 해석: 하나님의 주권적 권세를 강조하며,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행하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세와 그의 절대적인 능력을 강조한다.

    * 적용: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8. 사도행전 17장 24-26절: "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신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슨 피조물의 경배를 받으시는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 해석: 하나님이 우주의 주인이시며, 모든 만물과 인류의 주권을 가지심을 강조한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그의 창조적 능력을 강조한다.

    * 적용: 하나님의 창조 주이시며 주권자이심을 인정하고, 그의 뜻에 따라 살아야한다.

    9. 로마서11 장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 해석: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와 그의 영광을 위해 존재함을 강조한다.

    *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영광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 역설하였다.

    * 적용: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함을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10. 에베소서 1장 21절: " 모든 통치자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하시고."

    * 해석: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그의 통치가 모든 것 위에 있음을 강조한다.

    * 존오웬(John Owen):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그의 통치가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 적용: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통치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결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우리의 삶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모든 계획과 행동이 하나님께서계획하신대로 이루어짐을 믿고, 그분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주님의 주권을 매일의 삶에서 체험하고감사하는 마음과 순종하는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











    [필수 암송구절] 복음 성구 100 구절


    1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3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4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5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6 창세기  3:5~6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골로새서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8 이사야 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9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10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11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할 것이니라 하시고

    12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3 마태복음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아들이시니이다

    14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나음을 받았도다

    15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6 고린도전서 15:3~4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17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18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9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0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1 베드로전서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22 빌립보서 2:9~11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23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주셨으니



    24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5 로마서 10:9~10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26 고린도전서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27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28 요한복음 14:16~17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29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이사야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31 누가복음 10: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32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33 히브리서 1: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34 빌립보서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35 마태복음 28:18~20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36 요한일서 5:11~13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37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38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39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40 잠언 3:5~6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41 요한복음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42 고린도후서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43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44 에베소서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45 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46 요한계시록 12: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47 사도행전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48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49 로마서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50 로마서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51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52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53 딤모데후서 3:16~17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54 마태복음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55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56 이사야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57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58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59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60 로마서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61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62 요한복음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63 요한복음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64 요한복음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65 요한일서 5: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66 마가복음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67 예레미야 33:2~3 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68 마태복음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9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70 빌립보서 4:6~7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71 로마서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72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원하시느니라

    73 마가복음 16:16~17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74 마가복음 3:13~15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마태복음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76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77 사도행전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78 이사야 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79 마태복음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80 사도행전 5: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81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82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83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84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85 요한일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86 로마서 8:1~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7 고린도전서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88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89 에베소서 2:8~9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90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91 고린도전서 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92 야고보서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93 벧전 5:7~8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4. 이사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but those who hope in the LORD will renew their strength. They will soar on wings like eagles; they will run and not grow weary, they will walk and not be faint.


    95 전도서 12: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96 빌립보서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97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98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99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00 디모데후서 2:1~2 

    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강하고
    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질문 / 성경은 총 몇 권 몇장 몇절로 구성되었나?

    성경의 정확한 장, 절, 단어 수는 어떻게 되나요?

    답변 /  권수 66권 (구약 39권. 신약 27권)

              장수  1,189장(구약 929장. 신약 260장)

              절수 31,102절(구약 23,145절.  신약 7,957절)

    영어 킹제임스성경의 단어 수

             788,258단어(구약 609,247 단어.   신약 179,011 단어)

    *우리말의 경우에는 조사도 한 단어로 취급하기 때문에 영어와 같이 단어 수를 세는 것이 용이하지 않으며 아직 통계가 없습니다.
    다음의 표에 제시된 성경의 장, 절, 단어는 영어 <킹제임스성경>을 기준으로 한 것이며 <한글킹제임스성경> 역시 장, 절이 동일합니다.

    <구약>

    성경이름/장-절-단어

    창세기/50-1,533-38,262

    출애굽기/40-1,213-32,685

    레위기/27-859-24,541

    민수기/36-1,288-32,896

    신명기/34-959-28,352

    여호수아/24-658-18,854

    재판관기/21-618-18,966

    룻기/4-85-2,574

    사무엘상/31-810-25,048

    사무엘하/24-695-20,600

    열왕기상/22-816-24,513

    열왕기하/25-719-23,517

    역대기상/29-942-20,365

    역대기하/36-822-26,069

    에스라/10-280-7,440

    느헤미야/13-406-10,480

    에스더/10-167-5,633

    욥기/42-1,070-18,098

    시편/150-2,461-42,682

    잠언/31-915-15,038

    전도서/12-222-5,579

    솔로몬의노래/8-117-2,658

    이사야/66-1,292-37,036

    예레미야/52-1,364-42,654

    예레미야애가/5-154-3,411

    에스겔/48-1,273-39,401

    다니엘/12-357-11,602

    호세아/14-197-5,174

    요엘/3-73-2.033

    아모스/9 146-4,216

    오바댜/1-21-669

    요나/4-48-1,320

    미카/7-105-3,152

    나훔/3-47-1,284

    하박국/3-56-1,475

    스파냐/3-53-1,616

    학개/2-38-1,130

    스카랴/14-211-6,443

    말라키/4-55-1,781

    구약 합계/929장-23,145절-609,247단어

    <신약>

    성경이름/장-절-단어

    마태복음/28-1,071-23,343

    마가복음/16-678-- 14,949

    누가복음/24-1,151-25,640

    요한복음/21-879-18,658

    사도행전/28-1,007 24,229

    로마서/16-433-9,422

    고린도전서/16-437-9,462

    고린도후서/13-257-6,046

    갈라디아서/6-149-3,084

    에베소서/6-155-3,022

    빌립보서/4-104-2,183

    골로새서/4-95-1,979

    데살로니가전서/5-89-1,837

    데살로니가후서/3-47-1,022

    디모데전서/6-113-2,244

    디모데후서/4-83-1,666

    디도서/3-46-896

    빌레몬서/1-25- 430

    히브리서/13-303- 6,897

    야고보서/5-108- 2,304

    베드로전서/5-105- 2,476

    베드로후서/3-61 1,553

    요한일서/5-105- 2,517

    요한이서/1-13-298

    요한삼서/1-14-294

    유다서/1-25-608

    요한계시록/22-404-11,952

    신약 합계/260장-7,957절-179,011단어

    신구약 총계/1,189장-31,102절-788,258단어








    유대교 성경이나 기독교 성경의 원본에는 장과 구분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구분은 성경 의 단락 본문의 일부를 구성한다.
    13세기 초 이래로 대부분의 성경 사본과 판에는 가장 짧은 경전 을 제외한 모든 이 일반적으로 한 페이지 정도의 장 (책) 으로 구분되어 나와 있다.
    16세기 중반부터 편집자들은 장을 구절로 세분화했다.
    구절은 몇 줄의 짧은 줄이나 하나 이상의 문장으로 구성되었다.
    킹 제임스 성경 (KJV)에서는 에스더 8장 9 이 가장 길고 요한복음 11장 35절 이 가장 짧다.
    때로는 에베소서 2장 8-9절의 경우처럼 한 문장이 한 절 이상에 걸쳐 있을 때도 있고, 창세기 1장 2절의 경우처럼 한 절에 두 문장 이상이 있는 경우도 있다.

    히브리어 본문의 유대인 구분은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구분과 여러 점에서 다르다. 예를 들어, 유대인 전통은 많은 시편의 귀속을 독립된 절이나 후속 절의 일부로 간주하는 반면, 확립된 기독교 관행은 각 시편의 귀속을 독립적이고 번호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여 기독교 본문보다 유대인 역본에 116개 더 많은 구절이 있다. 일부 장 구분은 다른 장소에서도 발생한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역대상 5장 27~41절이 있고, 기독교 번역에는 역대상 6장 1~15절이 있다.



    성경의 장과 절

    구약의 장, 절 구분

    1. 열린 문단, 닫힌 문단

    구약 히브리어 본문의 장과 절 구분이 있기 전부터
    일찍이 쿰란에서 발견된 사본에도 문단 구분이 나타납니다.
    마소라 본문 사본을 보면, 시편을 제외한 구약 전체가 문단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두 종류의 문단 구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열린 문단(프툭하 open paragraph)이고 다른 하나는 닫힌 문단(쓰투마 closed paragraph)입니다.
    열린 문단이란 완전히 행(行)을 바꾸어서 쓴 새로운 문단을 일컫습니다. 
    현대적 의미의 새로운 문단과 같은 것입니다.
    닫힌 문단이란 같은 행 안에서 몇 자를 띄어서 새로운 문단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앞 문단과 뒤 새 문단이 행으로 구분되지 않고 몇 자를 띄운 공간으로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2. 세다림 (Sedarim)

    구약 본문에는 452개의 세다림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쎄데르는 순서(order), 혹은 차례(sequence)를 일컫는 말입니다.
    문단보다는 더 큰 단위로서 단원(section)에 해당합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토라를 삼 년에 다 읽도록 매주 읽을 분량을 쎄다림으로 구분하였습니다.

    바빌로니아에서는 토라를 일 년에 독파(讀破)하도록 단원을 구분하였는데
    이것을 파라쇼트(Parashoth)라고 합니다. 
    토라는 모두 54 (혹은 53) 파라쇼트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절 구분은 이미 탈무드 시대부터 알려져 있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전통과 팔레스타인 전통이 약간 다릅니다.
    장 구분이 숫자로 표기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경입니다.
    장 구분의 체계는 일찍이 스티븐 랭톤(Stephen Lengton 1150-1228)에서 시작되었고, 
    이것을 14세기에 라틴어역 불가타가 받아드림으로써 정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약의 장, 절 구분

    파리의 유명한 인쇄업자 스테파누스(1503-1559)의 '그리스어 신약'에서 처음 장절 구분이 보입니다.
    1551년에 제네바에서 나온 스테파누스의 '그리스어 신약' 제 4판은 숫자로 절 구분이 되어 있는
    최초의 그리스어 신약으로 유명합니다.

    '제네바성서'(1557/1560)는 영어 성서로서는 처음으로 절 구분이 되어 나온 성서입니다.
    로버트 에스티엔 (Robert Estienne)이 그의 '그리스어 신약전서'에 적용했던 절 구분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개신교 쪽에서는 1535년에 올리베땅(Olivetan)으로 알려진 삐에르 로버트(Pierre Robert)가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몇 차례 개정을 거듭하였고, 1546년판을 낼 때에는 칼빈이 서문을 썼습니다.
    1553년에 인쇄업자 스테파누스 (Robert Stephanus 일명 Robert Estienne)가 이 번역을
    제네바에서 출판할 때 원문에 장과 절을 구분하여 출판하였습니다.

    '제네바성서'의 신약은 1557년에 나옵니다.
    신.구약전서가 다 번역되어 나온 것은 1560년입니다. 
    이것이 로마자로 인쇄되고 절 구분이 된 최초의 영어 성경전서인 '제네바성서' 초판입니다.

    장절 구분의 차이의 예

    공동번역 성서를 보시면, 출 7:26-8장 끝까지의 장절 구분에 이중의 표기가 있는 것을
    확인하실 수있습니다. 
    이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장절 표기 방식을 함께 나타내준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과 라틴어 성경의 장절 구분이 다른 것입니다.

    절 수의 차이의 예

    시편의 경우에는 소제목 부분을 1절로 표시하는 경우와(독일어 루터 성경 참조),
    소제목으로 보고 절로 구분하지 않는 경우에(성경전서개역한글판 참조) 따라서 절 수가 달라집니다.

    성경 본문이 처음 기록될 당시에는 문장을 구분하는 아무런 체계가 없었습니다.
    장을 구분한 최초의 성경은 신약의 경우,
    제4세기의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 :B)의 가장 자리에 표시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마태복음이 170구분, 마가복음이 62구분, 누가복음이 152구분, 요한복음이 50구분으로 되어있습니다. 

    또 다른 구분체계는 제5세기의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andinus :A)에서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마태복음 68, 마가복음 48, 누가복음 83, 요한복음 18구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어떤 경우에도 첫장이 책 서두에 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아마 서기관들이 책의 시작부분을 머리말로 생각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사도행전도 사본에 따라 36, 69, 40, 83 등 여러 장으로 구분되고,
    서신들도 여러 부분으로 구분되며, 계시록은 24장로를 따라 24강화로 나누고,
    다시 그 각각을 인간의 세 요소를 반영하여 72장으로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구약의 경우는 라틴어역 Valgata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은 1204-5에 캔터베리대 주교인 스테판 랑톤(Stephan Langton) 이 시도했으며,
    그 후 1330년에 나온 솔로몬 벤 이스마엘(Solomon Ben Ishmael)의
    히브리어 성경의 일부 필사본(筆寫本)이에 랑톤의 장 표시를 난외(欄外)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쇄본으로 장 표시를 했던 최초의 히브리어 성경은 1517년 7월 10일에 나온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 70인역 등의 대역 성경인 Complutension Polyglot 입니다.
    그러나 장 표시는 본문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난외에 표기되었습니다.

    그 후로 1569-1572년에 베니토 아리아스 몬타노(Benito Arias Montano)가 편집한
    Polyglot 에는 인쇄판 성경으로서는 처음으로 본문에 장 구분이 표시되었고,
    또한 구약의 장 구분에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절에 대한 구분

    구약 성경의 경우 절 구분은 장 구분보다 앞서서 시행되었습니다.
    절 구분의 시직은 히브리어 본문을 회중들 앞에서 낭독하고
    그것을 아람어로 통역하던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낭독자는 일정량의 히브리어 본문을 끊어서 낭독했고,
    통역관은 그것을 듣고서 아람어로 통역하는 방법이 계속되어 오다가
    어느 단계에서 부터 절구분이 확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낭독과 통역의 분위기를 느 8:1-8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일상생활에서는 아람어를 썼으나,
    율법은 히브리어로 쓰여 있었기 때문에 통역관들이 통역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매 절 끝에 그침표(:)를 붙인 것은 주후 500년경 부터라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절구분이 MT에 확립된 것은
    10세기에 아론 벤 모세 벤 아세르(Aron Ben Moshe Ben Asher)가 편집한 역본부터라고 하며,
    총 절수는 5,845절로 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절 구분은 1551년
    프랑스의 인쇄업자 로버트 스테파누스(Robert Stephanus)에 의해 표기 되기 시작했으며
    현재 까지도 통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말 개역성경의 장 절 구분은 MT나 LXX이 아닌 Latin Vulgata를 많이 따르고 있습니다.
    (월간 원어성서 9호 .pp165-166)

    참고 - MT ; 맛소라 학파(유대인 학자들)에 의한 히브리어 구약성경 
    LXX ; 70인경, 구약의 헬라어 역본 
    Vulgata ; 신구약 성경의 라틴어 역본. 

    성경의 장절(章節 : chapters and verses of Bible)은 처음부터 구분되어 있던 것은 아니다.
    현재의 모습으로 장 구분을 한 이는 대체로
    영국교회의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랭튼(Stephen Langton)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한편 스테파누스(Stephanus Robertus)는 신약성경을 절로 구분하여 1551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출판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스테파누스는 파리에서 리용으로 가는 마상(馬上)에서 절을 나누었다고 한다. 
    신,구약성경 모두에 장절이 붙여져 처음 출판된 해는 1555년인데,
    스테파누스의 라틴역 불가타(Vulgata) 성경이다. 

    오늘날의 성경은 1560년판 제네바 성경의 장절 구분을 받아들이고 있다. 
    랭튼 (Langton, Stephanus 1150년경-1228. 7. 9 영국신학자, 역사가, 시인.) 
    오랫동안 파리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또한 성경주석을 집필했다.
    불가타역 구약을 장(章)으로 나누었다.
    1207년 켄터베리 대주교가 되고,
    영국 존왕(John, Lackland ; 1199-1216 재위)의 반대자로 '대헌장'(大憲章 : Magna Carta)의 성립에 관여했다. 
    스테파누스 (Stephanus Robertus [프] Etienne Robert 1503-1559 프랑스의 궁정 인쇄 기술자.) 
    그의 집안은 아버지 앙리 이래 16∼17세기, 파리 및 제네바에서 인쇄업에 종사했다.
    특히 성서의 인쇄로 유명했는데,
    1539년 프랑소와 1세의 인쇄사가 되어 1546년에는
    그리스어 학자인 아들 앙리(Henri ; 1528/31)의 협력을 얻어 그리스어 신약성경 소책자 2부를 간행했다.
    본문(本文)은 주로 에라스무스판 신약본문 제5판(1535)에 의거하고,
    콤플루툼판(Gomplutum : 1514)을 참조했다.
    1550년에는 인쇄본문사상 큰 역할을 한 대형 호화판(궁정판)으로도 불리는 제3판을 냈다.
    이것은 이문자료(異文資料)를 첨부한 최초의 판으로 영국에 있어서
    '공인본문'(公認本文 : Textus Receptus)의 근거가 되었다.
    그의 성경주해가 소르본느에서 비난을 받게되어 제네바에 도피, 칼빈파로 개종했다.
    그해 다시 소책 2부의 본문을 간행했는데, 이것은 장절을 나누어 쓴 최초의 판이다.
    그는 이 절분류를 파리에서 리용으로 기마여행(마차여행?)을 하는 가운데 시행했다고 전한다. 

    이상을 정리하면

    1. 히브리어 성경은 절 구분이 먼저 되었다. 10세기에 아론 벤 아쉐르 때부터 확립되었다.
    2. 히브리어 성경 장 구분은 13세기 초에 랭튼이 했다.
    3. 헬라어 성경 장 구분은 13세기 초에 랭튼이 했다.
    4. 헬라어 성경 절 구분은 16세기에 스테파누스가 말 위에서 했다.
    5. 신,구약 성경 모두에 장절이 붙여져 처음 출판된 해는 1555년인데,
    스테파누스의 라틴역 불가타(Vulgata) 성경이다. 
    6. 오늘날의 성경은 1560년판 제네바 성경의 장절 구분을 받아들이고 있다.


    성경 66권의 각 권별 주제 요약

    성경은 기독교의 중요한 성서로,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집니다. 각 권의 주요 주제를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구약은 39권, 신약은 27권으로 총 66권이 모여서 성경책이 됩니다. 

    구약 (Old Testament):

    1. 창세기 (Genesis) : 창조와 유래에 관한 책으로 하나님의 창조, 아담과 이브,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의 이야기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 출애굽기 (Exodus) :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과 모세를 통한 출애굽, 십계명, 회막과 예배에 관한 이야기가 주요 주제입니다.

    3. 레위기 (Leviticus) : 여호와와 백성과의 관계, 제사와 의식들, 신성한 생활의 지침 등이 담겨져 있습니다.

    4. 민수기 (Numbers) : 여러 유대인 지파들의 인구 조사와 여정, 그리고 모세의 지시와 여러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5. 신명기 (Deuteronomy) : 모세의 마지막 연설과 율법 갱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교훈과 지시사항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6. 여호수아 (Joshua): 모세의 사후, 여호수아가 이끌어 가며 공약 땅을 점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가 주요 주제입니다.

    7. 사사기 (Judges): 이스라엘의 사사들이 이끄는 시기의 역사, 백성들의 순종과 패역, 그리고 여호와의 벌과 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8. 룻기 (Ruth): 무민족 룻과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의 이야기로 인류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됩니다.

    9. 사무엘상 (1 Samuel): 사무엘이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의 기사와 다윗 왕의 성장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0. 사무엘하 (2 Samuel): 다윗 왕의 통치와 실수,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집니다.

    11. 열왕기상 (1 Kings): 솔로몬 왕과 다른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와 역사, 이스라엘과 유다 나라의 분열과 여러 선지자들의 역사가 담겨져 있습니다.

    12. 열왕기하 (2 Kings): 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과 사로잡힘,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 등이 주요 주제입니다.

    13. 역대상 (1 Chronicles): 아담에서 다윗까지의 기록과 역사가 가족과 함께 담겨져 있습니다.

    14. 역대하 (2 Chronicles): 다윗 왕에서 바벨론 사로잡혀 갈 때까지의 유다 왕들의 통치와 그들의 행실이 담겨져 있습니다.

    15. 에스라 (Ezra): 바벨론에서 유다로 돌아온 백성들의 이야기와 성전의 건축과 관련된 기록이 주요 내용입니다.

    16. 느헤미야 (Nehemiah): 예루살렘 성벽의 수축과 유대인들의 회개와 회개의식 등이 다루어집니다.

    17. 에스더 (Esther): 바사 왕국의 왕비 에스더가 유대인들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주요 주제입니다.

    18. 욥기 (Job): 욥의 시험과 고통, 신의 뜻과 의의 문제에 관한 시문적인 책입니다.

    19. 시편 (Psalms): 다양한 시인들에 의해 쓰여진 시들로, 기도, 찬양, 감사, 슬픔 등 다양한 감정과 경험이 담겨져 있습니다.

    20. 잠언 (Proverbs): 솔로몬 왕을 비롯하여 여러 지혜적인 사람들의 격언과 교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1. 전도서 (Ecclesiastes): 선지자의 눈을 통해 세상의 헛된 것들과 진리를 탐구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22. 아가 (Song of Solomon): 신부와 신랑 사이의 사랑과 애정을 시적으로 표현한 노래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3. 이사야 (Isaiah): 이스라엘의 미래와 메시아의 오심에 관한 예언과 트라우마적인 경험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4. 예레미야 (Jeremiah): 선지자 예레미야의 사명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과 허무함을 다루는 책입니다.

    25. 예레미야애가 (Lamentations): 예루살렘의 파괴와 애도에 관한 시인적인 글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26. 에스겔 (Ezekiel): 이스라엘의 죄와 멸망,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재건에 관한 예언과 비전입니다

    27. 다니엘 (Daniel): 다니엘의 소년 시절부터 바벨론 왕국에서 섬기는 동안의 이야기와 예언적인 꿈들이 주요 내용입니다.

    28. 호세아 (Hosea): 선지자 호세아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설명하는 책입니다.

    29. 요엘 (Joel): 재앙과 회개에 관한 선지자 요엘의 메시지가 주요 내용으로 다루어집니다.

    30. 아모스 (Amos): 빈민족 출신의 목자 아모스가 사회적 불의와 유대국의 죄에 대해 비판하는 책입니다.

    31. 오바댜 (Obadiah): 에돔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에 관한 짧은 선지자의 글입니다.

    32. 요나 (Jonah): 요나가 니느웨로 보내지만 도망가는 이야기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회개하는 민족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33. 미가 (Micah): 미가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 선언하는 예언과 교훈이 담겨져 있습니다.

    34. 나훔 (Nahum): 니느웨의 멸망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짧은 선지자의 글입니다.

    35. 하박국 (Habakkuk): 선지자 하박국이 유다의 패역과 하나님의 신비로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답을 받는 이야기가 주요 내용입니다.

    36. 스바냐 (Zephaniah): 스바냐가 유다와 여러 나라에 대한 심판과 회개에 관한 선언을 하는 책입니다.

    37. 학개 (Haggai):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에게 성전 건축을 독려하는 선지자 학개의 메시지가 주요 내용입니다.

    38. 스가랴 (Zechariah): 선지자 스가랴가 유다의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적인 시상을 다루는 책입니다.

    39. 말라기 (Malachi): 말라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과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제사장과 백성들에게 훈계하는 글입니다.


    이로서 구약 성경의 주요 권들과 그들의 주제를 설명해 드렸습니다. 이제 신약 성경의 권들에 대해서도 설명드리겠습니다:

    1. 마태복음 (Matthew):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 사역, 죽음, 부활에 관한 기록과 그의 가르침이 주요 내용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2. 마가복음 (Mark):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기적, 십자가 부활에 관한 짧고 간결한 기록입니다.

    3. 누가복음 (Luke):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삶과 사역, 감화의 기록과 복음에 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4. 요한복음 (John):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깊은 논의와 기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5. 사도행전 (Acts):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 사도들의 사역과 교회의 초기 역사가 담겨져 있습니다.

    6. 로마서 (Romans): 성도에게 보낸 로마서 서신으로, 구원의 길과 믿음의 의의에 관한 중요한 교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7. 고린도전서 (1 Corinthians):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으로 다양한 문제들과 교회 구성원들에게 주어지는 교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8. 고린도후서 (2 Corinthians):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번째 서신으로 사도 바울의 사역과 교회에 대한 열정적인 강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9. 갈라디아서 (Galatians):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서신으로,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는 교리가 주요 내용입니다.

    10. 에베소서 (Ephesians): 에베소 교회에 보낸 서신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관한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1. 빌립보서 (Philippians):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으로, 기쁨과 감사, 믿음과 봉사에 관한 사도 바울의 훈계가 주요 내용입니다.

    12. 골로새서 (Colossians): 골로새 교회에 보낸 서신으로, 그리스도의 지위와 교회의 단일성, 그리고 거짓 교리에 대한 경고와 진리를 향한 우리의 초점이 주요 내용입니다.

    13. 데살로니가전서 (1 Thessalonians):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첫 번째 서신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믿는 자들에 대한 희망, 성도들끼리의 사랑과 봉사가 강조됩니다.

    14. 데살로니가후서 (2 Thessalonians):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두 번째 서신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날의 사건들에 대해 강조하는 글입니다.

    15. 디모데전서 (1 Timothy):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으로, 교회의 감독들과 그들의 역할, 교리, 기도와 경건 등에 관한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6. 디모데후서 (2 Timothy):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서신으로, 사도의 사명과 복음 전파의 중요성에 대해 다루는 글입니다.

    17. 디도서 (Titus):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보낸 서신으로, 교회의 감독들의 자격과 역할에 관해 가르치는 글입니다.

    18. 빌레몬서 (Philemon): 빌레몬에게 보낸 짧은 서신으로,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를 사랑과 용서로 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통일에 관한 글입니다.

    19. 히브리서 (Hebrews):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익명의 서신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옛 언약의 신상들과 어떻게 다른지, 새 언약의 중요성, 믿음의 의의와 견고한 믿음을 지키는 중요성에 대해 강조합니다.

    20. 야고보서 (James):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 야고보가 보낸 서신으로, 실천적인 믿음과 행실, 언어의 힘과 지혜로운 삶에 관한 가르침이 주요 내용입니다.

    21. 베드로전서 (1 Peter): 사도 베드로가 전국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신으로, 고난 속에서의 삶과 희망, 그리스도의 예언과 부활에 대해 다루는 글입니다.

    22. 베드로후서 (2 Peter): 사도 베드로가 직접 보낸 두 번째 서신으로, 거짓 교리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미래의 언약에 관한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3. 요한일서 (1 John): 사도 요한이 보낸 첫 번째 서신으로, 사랑과 진리, 의로움과 미움에 관해 가르치며,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로 하고 머무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24. 요한이서 (2 John): 사도 요한이 보낸 두 번째 서신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거기에 따라 행함으로써 머물도록 권하는 글입니다.

    25. 요한삼서 (3 John): 사도 요한이 보낸 세 번째 서신으로, 성도를 환대하고 형제들에 대한 사랑과 지지에 대해 칭찬하는 글입니다.

    26. 유다서 (Jude): 유다 가문의 유다가 보낸 서신으로, 거짓 교리와 사생활,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에 관한 경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7. 요한계시록 (Revelation): 사도 요한이 보낸 계시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미래의 사건들, 마지막 심판과 새 천지에 관한 예언적인 책입니다.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

    1. 어린이는 건전하게 태어나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 속에 자라야 한다.

    2. 어린이는 고른 영양을 섭취하고,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받으며, 맑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

    3. 어린이는 좋은 교육시설에서 개인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교육을 받아야 한다.

    4. 어린이는 빛나는 우리 문화를 이어받아, 새롭게 창조하고 널리 펴나가는 힘을 길러야 한다.

    5. 어린이는 즐겁고 유익한 놀이와 오락을 위한 시설과 공간을 제공받아야 한다.

    6. 어린이는 예절과 질서를 지키며, 한겨레로서 서로 돕고 스스로를 이기며, 책임을 다하는 민주시민으로 자라야 한다.

    7. 어린이는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과학을 탐구하는 마음과 태도를 길러야 한다.

    8. 어린이는 해로운 사회환경과 위험으로부터 먼저 보호되어야 한다.

    9. 어린이는 학대를 받거나 버림을 당해서는 안 되고, 나쁜 일과 힘겨운 노동에 이용되지 말아야 한다.

    10. 몸이나 마음에 장애를 가진 어린이는 필요한 교육과 치료를 받아야 하고, 빗나간 어린이는 선도되어야 한다.

    11. 어린이는 우리의 내일이며 소망이다.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인으로 자라야 한다.



    스바냐의 주제

    스바냐는 요시야 시대에 예언한 선지자이며, 히스기야 왕의 현손으로 왕족이 선지자가 되는 경우는 특이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스바냐는 유다의 멸망 이전에 기록된 선지서입니다. 
    핵심적인 주제와 단어는 '주의 날' 또는 '여호와의 날' 입니다. 
    대게 주의 날은 여호와께서 강림하시는 날 또는 진정한 통치자로서의 위엄을 드러내는 날입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의 날을 종말론적 환상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는 축제의 날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날은 희생의 날이며, 진노의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위한 날이라 착각한 주의 날은 오히려 재앙과 심판의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지 않은 '남은 자'들은 구원의 날이며, 회복의 날이 될 것입니다.






    󰃨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 본 구절은 남은 자들이 손을 늘어뜨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구원자되신 하나님께서 그들가운데 거하며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는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 '너를 보호하시는 전사와 같은'(like warrior, to keep you safe, NEB), 혹은 '승리하시는 전사'(a warrior who givesn victory, RSV)이며 (2) '승리한 전사'(victorious warrior, JB). 혹은 '전능한 구원자'(mighty savior, NAB)이다. 결국 남은 자들과 함께 거하시는 여호와는 승리하신 구원자이시며 전능하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다.

    󰃨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 본 구절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나뉜다. KJV에서는 '그가 자신의 사랑안에서 안식하실 것이다'(he will rest in his love)라고 번역하였으며, RSV에서는 '그가 자신의 사랑 안에서 너를 새롭게 하실 것이다'(he will renew you in his love)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사본에 따라 '잠잠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하리쉬'가 다른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맛소라 본문에서는 '야하리쉬'를 그대로 사용하여 KJV처럼 '안식할 것이다'라는 의미로 보나, 다른 사본에서는 RSV가 따르는 것처럼 '하다쉬'(새롭게 하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굳이 RSV처럼 해석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맛소라 본문의 '야하리쉬'로 보아도 본 구절의 의미가 이어지기 때문이다(L.L.Walker). 하나님은 남은 자들로 인해서 즐거워 하시며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안식하실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선한 일"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으므로 나타낸 선한 열매를 가리키고, 일반 도의적 선을 말함이 아니다(3:19-21).
    여기 "선한 일을 행한"이란 말의 "행한"이란 자는 헬라 원어로 포이에-산테스(*)니, 반드시 상습적으로 완전히 행함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나 "악한 일을 행한"이란 어귀에 있어서 "행한"의 헬라어 원형은 프라쏘(*)이니, 상습적으로 행한것, 혹은 일생의 행습(行習)을 말함이다.
    악을 행하기는 이렇게 쉽고 상습적이다. 이 귀절이 말한 두 가지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될 것이다.
    이런 두 가지 부활에 대하여 성경은 종종 말하였다(행24:15; 고후5:10; 계20:12, 13; 단12:2).
    이 말씀은, 명백하게도 세계 종말에 있을 대심판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불트만(Bultmann)은, 이 부분 말씀을 본래의 원본으로 생각지 않고 후대인의 삽입구라고 한다(Johannes Evangelium, pp. 196-197).
    그러나 불트만(Bultmann)의 이같은 주장은 억측에 불과하다.
    (1) 이 귀절들에 대하여 사본상 일치하지 않는 것은 전연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사본들이 다 함께 같은 내용을 가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 내용이 저작자의 기록 그대로인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권위있는 신약 학자들은, 이 부분(5:28-29)말씀이 문맥상으로도 본래의 원본인 사실을 알려준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부분 말씀보다 앞서 벌써 27절이 미래의 심판을 말한다고 하며, 이 부분 말씀은 그것의 연속이라고 하였다.
    그 뿐 아니라, 슐라델(Schlatter)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5:19이하의 말씀은, 예수님의 살리시는 역사롸 심판하시는 일이 현세에 벌써 실행된다고 강조하는데, 그와 같은 역사(役事)의 권세는, 곧바로 28-29절에 기록된 그의 장차 행하실 심판 권세와 같은 것이라는 의미로 말하였다(Der Evangelist Johannes, p. 152).
    (2)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이 5:28-29에서 두 가지 사상의 병립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한다.
    곧, 영생(또는 심판)의 현재적 실시와 및 세상 끝날의 실시를 병립시키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병립 사상은, 특별히 요한 복음 저자의 사고 방식이다.
    6:40에도 이와 같은 취급이 나타나 있다. 거기 말하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여기 나타난 사상은, 신자들이 현세에서 벌써 영생을 소유한다는 사실과 또한 그들이 대종말에도 부활의 형태로 영생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하여 6:44, 54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이라는 말까지 사용하시면서 그의 수평선적(水平線的)인 종말관(終末觀)을 표현하셨다.
    그리고 그는, 12:48에서도 "마지막 날"이라는 말을 사용하셨다.
    거기서도 그는, 현재적 심판과 미래의 심판을 병립시켜 말씀하셨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땅 위에서 하신 말씀이 미래의 심판 권위를 가졌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그 현재에도 그 말씀이 심판과 같은 종말관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은 종말관적 성격 있는 최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의 심판 성격은 현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상 끝날에도 그러하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 즉, 12-14절에 묘사된 상황 가운데 사는 백성은 행복하다는 의미이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 여호와를 예배하고 그들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이다.
    14절에 자세히 언급된 번영과 평화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봉사의 결과로 나타난다.
    도처에 있는 평화, 질서, 풍성함, 민족의 번영을 위한 최고의 안전 장치는 하나님 예배이다.
    하나님 예배의 핵심은 단순한 제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유일하고 참된 신으로 인정하고 그의 율례를 지키는 데 있다(Barnes).











    깨어있으라(1127) 그래고레오(grēgŏreʹō) γρηγορέω 스트롱번호1127

    1. 깨어 있다.  2. 마 24:43. 3. 정신차리고 있다
    발음 [ grēgŏreʹ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γρήγορα, 1453에서 유래
    • 1. 깨어 있다, 경성하다.
      • a. [문자적으로] 마24:43, 26:38,40, 막13:34, 14:34,37, 눅12:37,39.
      • b. [상징적으로] 정신차리고 있다, 지켜보고 있다, 마24:42, 25:13, 26:41, 막13:35,37, 14:38, 행20:31, 고전16:13, 살전5:6,10, 벧전5:8, 골4:2, 계3:2,3, 16:15.
    • 관련 성경  /  깨어 있다(마 24:43, 막 13:34, 눅 12:37), 일깨다(행20:31, 계3:2,3), 깨다(살전5:6, 벧전5:8, 계16:15).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 바울은 본절에서 ‘기도’에 대해 권면한다.
    ‘힘쓰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 카르테레이테’(*)는‘끈질기게 매달리는’, ‘지속적인’을 의미한다(Persevering, JB).
    이는기도의 열심과 지속성을 시사한다(Vaughan, Lightfoot).
    본절의 ‘기도’에 사용된 ‘테 프로수케’(*)는 신구약에서 ‘탄원’(Petirion)을 의미한다(왕하 19:4 ; 기 4:1 ; 막 9:29 ; 행 10:31 ; 롬 1:10 ; 약 5:17).
    이것은 바울이 다음 절에서 골로새 교인들에게 중보 기도를 부탁하는 것과 연결된다.
    한편 ‘영적인 자각’을 의미하는 ‘깨어 있으라’의 헬라어 ‘그레고룬테스’(*)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기도와는 다른 독립적인 명령으로 간주한다(Lohse, Lohnmeyer).
    2. ‘깨어 있음’을 유지하는 방법으로서의 기도를 의미한다(Meyer, Abbott. Martin).
    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깨어 있음’이 또 다른 명령이라 할지라고 그 명령은 ‘기도’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5-26-2024(주일)
    암송 성구 #. 1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06-02-2024(주일)
    암송 성구 #. 2 사도행전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Salvation is found in no one else,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to men by which we must be saved.

    06-09-2024(주일)
    암송 성구 #. 3 에베소서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06-16-2024(주일)
    암송 성구 #. 4 고린도후서 5: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So we make it our goal to please him, whether we are at home in the body or away from it.


    06-23-2024(주일)
    암송 성구 #. 5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having a form of godliness but denying its power. Have nothing to do with them.

    06-30-2024(주일)
    암송 성구 #. 6 고린도전서 9:16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Yet when I preach the gospel, I cannot boast, for I am compelled to preach. Woe to me if I do not preach the gospel!

    07-07-2024(주일)
    암송 성구 #. 7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07-14-2024(주일)
    암송 성구 #. 8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Follow my example, 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t.


    07-21-2024(주일)
    암송 성구 #. 9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You diligently study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by them you possess eternal life. These are the Scriptures that testify about me.


    07-28-2024(주일)
    암송 성구 #. 10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08-04-2024(주일)
    암송 성구 #. 11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What good will it be for a man if he gains the whole world, yet forfeits his soul? Or what can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08-11-2024(주일)
    암송 성구 #. 12  베드로후서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Through these he has given us his very great and precious promises, so that through them you may participate in the divine nature and escape the corruption in the world caused by evil desires.

    08-18-2024(주일)
    암송 성구 #. 13  아모스 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But let justice roll on like a river, righteousness like a never-failing stream!


    08-25-2024(주일)
    암송 성구 #. 14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Therefore, my dear friends, as you have always obeyed--not only in my presence,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09-01-2024(주일)
    암송 성구 #. 15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but of righteousness,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09-08-2024(주일)
    암송 성구 #. 16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09-15-2024(주일)
    암송 성구 #. 17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Th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09-22-2024(주일)
    암송 성구 #. 18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09-29-2024(주일)
    암송 성구 #. 19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10-06-2024(주일)
    암송 성구 #. 20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10-13-2024(주일)
    암송 성구 #.21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10-20-2024(주일)
    암송 성구 #.22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10-27-2024(주일)
    암송 성구 #.23  고린도후서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For he says, "In the time of my favor I heard you, and in the day of salvation I helped you." I tell you,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11-03-2024(주일)
    암송 성구 #.24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11-10-2024(주일) 구원의 확신
    암송 성구 #.25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And this is the testimony: God has given us eternal life, and this life is in his Son.
    He who has the Son has life; he who does not have the Son of God does not have life.


    11-17-2024(주일) 기도 응답의 확신
    암송 성구 #.26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Until now you have not asked for anything in my name. Ask and you will receive, and your joy will be complete.

    11-24-2024(주일) 승리의 확신
    암송 성구 #.27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No temptation has seized you except what is common to man. And God is faithful; he will not let you be tempted beyond what you can bear. But when you are tempted, he will also provide a way out so that you can stand up under it.

    12-01-2024(주일) 사죄의 확신
    암송 성구 #.28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

    12-08-2024(주일) 인도의 확신
    암송 성구 #.29  잠언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을 지도하시리라.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and lean not on your own understanding;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12-15-2024(주일)
    암송 성구 #. 30 
    12-15-2024(주일) 암송성구 #.30 그리스도 안의 생활(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If a man remains in me and I in him, he will bear much fruit;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12-22-2024(주일)
    암송 성구 #. 31
    12-22-2024(주일) 암송성구 #.31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생활(사도행전 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Now I commit you to God and to the word of his grace, which can build you up and give you an inheritance among all those who are sanctified.


    12-29-2024(주일)
    암송 성구 #. 32
    12-29-2024(주일) 암송성구 #.32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생활(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because those who are led by the Spirit of God are sons of God.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1-05-2025(주일)
    암송 성구 #. 33

    01-05-2025(주일) 암송성구  #. 33  믿음에 의한 생활(고린도후서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01-12-2025(주일)
    암송 성구 #. 34  그리스도인의 교제하는 생활(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But if we walk in the light, as he is in the light, we have fellowship with one another, and the blood of Jesus, his Son, purifies us from all sin.


    01-19-2025(주일)
    암송성구 #. 35   증인으로서의 생활(베드로전서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01-26-2025(주일)
    암송성구 #. 36. 후히 드리는 생활(고린도후서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Each man should give what he has decided in his heart to give, not reluctantly or under compulsion, for God loves a cheerful giver.

    02-2-2025(주일)
    암송성구 #. 37. 성령의 전으로서의 몸(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y is a temple of the Holy Spirit, who is in you, whom you have received from God? You are not your own;

    02-9-2025(주일)
    암송성구 #. 38.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베드로전서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If you are insulted because of the name of Christ, you are blessed, for the Spirit of glory and of God rests on you

    2월 16일 /  금주 암송 성구  
     아론의 축복 기도(Aaron's Blessing Prayer)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The LORD bless you and keep you;
    the LORD make his face shine upon you and be gracious to you;
    the LORD turn his face toward you and give you peace.



    2월 23일

    요한복음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ask whatever you wish, and it will be given you.


    3월 2일

    고린도후서 3:17
    주는 이시니 주의 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Now the Lord is the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freedom.


    3월 9일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3월 16일
    역대상 16:11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찌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찌어다.
    Look to the Lord and his strength; seek his face always.

    3월 23일
    에베소서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And pray in the Spirit on all occasions with all kinds of prayers and requests. With this in mind, be alert and always keep on praying for all the saints.

    03-30-2025(주일)
    암송성구 #.45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든 성경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사 그라페'(*)의 문자적인 뜻은 '모든 책'으로 구약성경을 의미한다.
    그런데 '모든'의 헬라어 '파사'에 대한 견해는 두가지이다.
    (1) '파사'는 '단일체로서의 전체'(all)를 의미한다(Lenski).
    (2) '그라페' 앞에 관사 '헤'(*)가 없으므로 '각각의 개별 성경을 강조하는 모든'(Lenski).
    (2) '그레페' 앞에 관사 '헤'(*)가 없으므로 '각각의 개별 성경을 강조하는 모든'(every)을 의미한다(Bernard, Simpson, Guthrie).
    두 가지 견해의 차이는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으로 의미에는 별 차이가 없다(Calvin).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하나님의 감동'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오프뉴스토스'(*)는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호흡하시는'의 의미로 사람이 하나님의 생기로 생령(生靈)이 된 것같이(창 2:7) 성경의 말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성경의 절대 영감설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된다(벧후1:21).
    이에 대하여는 딤후 3:16,17 주제강해 '성경 영감론'을 참조하라.

    교육하기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데이아'(*)는 '모든 삶 가운데 어린아이를 올바로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교훈 -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딤전 5:17).

    책망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레그몬'(*)은 '유죄 판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Lenski) 잘못된 교리나 행동의 오류를 바로잡고 이단자들의 거짓을 밝혀내는 것을 시사한다(엡 5:18;딛 2:15).

    바르게 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노르도신'(*)은 '추를 바로 세우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성도들을 진리와 사랑으로 바로잡고 그들이그 길로 더욱 매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시사한다(단 12:3;요 21:15-17).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쉬네'(*) 는 법률적인 용어로 '엄격한 정의'(正義)를 뜻한다.



    본절은 접속사 '히나'(*, '...하기위해')로 시작되는 문장이다. 이것은 본절이 앞절의 4개의 항목으로 교육한 결과임을 시사한다(Lenski).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 '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일반 신자들을 가리킨다(Hendriksen).
    (2)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교사들을 가리킨다(딤전 6:11, Guthrie).
    두가지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하나님의 사람'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선지자에게 적용되었다.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교사는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선포해야 한다(Scott).
    한편 '온전케 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오스'(*)는 '아로'(*, '적합하다')에서 파생된 것으로 '완전히 적합한'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교사는 성경 즉 말씀을 통해서 그 사역에 완전히 적합한 일꾼으로 변화된다.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 본절은 성경으로 교육한 또 다른 결과이다.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의 헬라어 '엑세르티스메노스'(*)는 '완전히 구비된', '완전히 공급된'이란 의미로 '아르티오스'와 어원은 같으나 더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성경으로 교육을 받아서 '모든 선한 일'(2:21;딤전 5:10;딛 3:1)을 행하기에 충분히 준비된 사람으로 변화됨을 시사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세 가지 기도의 자세를 강조합니다.

    첫째는 무시로 기도하라
    무시로 라는 헬라 단어는 "엔 판티 카이로(εν παντι καιρω)"라고 합니다.
    무시로는 "모든 시간에"라는 의미로 항상 기도해야 함을 의미합니다(살전 5:17)

    둘째는 성령안에서 기도하라
    성령안에서 라는 헬라 단어는 "엔 프뉴마티(εν πνευματι)"라고 합니다.
    성령안에서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는 의미로 성령입니다.

    셋째는 깨어 기도하라
    깨어라는 헬라 단어는 "아그룹눈테스(αγρυπνουντες)"라고 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눅 21:36).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기도 생활은 늘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배가 파선되어 생명이 위태로울 때에도, 복음을 위하여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평안한 길을 걸을 때에도,....
    세상의 거센 물결이 나라와 민족을 마구 흔들지라도 생명의 주가 되신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현장에서 기도하는 십자가 군병으로 굳게 세워지는 은혜의 한 주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 바울은 본절에서 두 가지 분사 즉 '기도하고'와 '깨어'를 통해 권면한다.
    이 두 개의 분사는 전신 갑주의 종류는 아니나 14절의 '서서'와 연결된다(Lincoln, Bruce).
    먼저, 바울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기'를 권면한다. '성령 안에서'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Kent, Foulkes,Bruce).
    이러한 기도가 필요한 때에 대해서 바울은 '무시로'라고 기술한다.
    '무시로'의 헬라어 '엔 판티 카이로'(εν παντι καιρω)는 문자적으로 '모든 시간에'라는 의미로 항상 기도해야 함을 의미한다(살전 5:17).
    다음으로, 바울은 '깨어있기'를 권면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기도하기 위함이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으로(눅 21:36) 그리스도인들은 인내를 가지고 깨어 있어야 한다(롬 12:12; 골 4:2, Bruce, Lincoln).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성도라 불리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그들의 기도와 관심사를 확대시킬 것과 그들과의 연합을 통해 열매를 맺도록 권면하고 있다(1:15;3:18, Bruce, Lincoln).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구할지어다
    - 여호와를 삶의 제일 원리로 삼고 그를 사랑하여 섬기라고 요구하고 있는 구절이다(신 6:5; 마 22:37).
    여기서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시며 능력의 근원이 되시기를 간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얼굴을 항상 구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늘 함께 동행하시기를 간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간구에는 먼저 스스로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분의 말씀대로 신실되이 살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선행(先行)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얼굴(6440) 파님(pânîymפָּנִים   

    1. 얼굴.  2. 활용 예 :  3. 대면㉠ פָּנִים אֶל פָּנִים
    발음 [ pânîym ]
    어원  / 643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038회 사용


    능력(5797) 오즈(ʽôzעֹז    |

    1. 강함.   2. 욥 12:16. 3. 시 29:11
    발음 [ ʽôz ]
    어원  / עוֹז로도 쓰임[잠31:17,25], 어미활용 עָזְּךָ ,עֻזְּךָ ,עָזִּי ,עֻזִּי. 5810에서 유래
    구약 성경  /  93회 사용

    구할지어다(1875) 다라쉬(dârash) דָּרַשׁ  

    1. 문지르다.  2. 어떤 장소를 가다. 3. 구하다
    발음 [ dârash ]
    구약 성경  / 164회 사용

    구할지어다(1245)  바카쉬(bâqash) בָּקַשׁ   

    1. 찾다.  2. 추구하다.  3. 피엘형 בִּקֵּשׁ
    발음 [ bâqash ]
    구약 성경  / 225회 사용

    항상(8548) 타미드( tâmîydתָּמִיד   

    1. 계속성.   2. 속격이 명사 뒤에 와서 형용사로 쓰임.  3.  장기간의 사람들  אַנְשֵׁי תָמִי

    발음 [ tâmîyd ]
    어원  /  ‘펴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03회 사용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
    본 구절은 본서의 여러 곳에 거듭 언급되는 내용으로(1:4; 3:1,13; 6:12,14)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초대 교회의 가르침의 초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본절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변화와 율법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신학적인 논증을 나타낸다.
    실로 그토록 교만하고 자존심 강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유대교에 철저했던 그에게 있어 종래의 모든 삶과 사랑에 대한 부정이요 새로운 삶을 향해 전환(轉換)을 이루는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이 변화된 삶은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지고 고난 가운데서도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후에 그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고통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과 승리의 삶이었다(W.G.Coltman). 한편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스타우로마이'(*)는 성도가 그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에 영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본서에 처음 등장하는 '십자가'는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는 의미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 함이며(롬 8:4), 또한 실존적으로 구약의 모든 율법적 요구들을 완성한 역사적 사건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이제까지 자기가 메고 있던 율법의 요구들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


    영적인 연합 - 영적 생활 <예수께서 못 박혀 죽으신 그 십자가에 나도 못 박혔다는 믿음>
    개인적은 삶의 변화에서 시작 -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이 짧은 구절 안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모두 언급되고 있다.
    바울은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시고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롬 6:4). 그리스도와 바울의 완전한 연합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것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옛 사람의 자기 교만과 바리새인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잠시 동안 자신에게 패배감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심으로 인하여 얻은 자유와 평화는 그 고통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롬 8:18).

    󰃨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본절에는 세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1) '나' 대신에 '그리스도',(2) '율법' 대신에 '믿음',(3) 과거의 '옛 사람' 대신에 현재의 '새 사람'으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로 하여금 모든 변화를 경험하게 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의와 사랑의 종이 되었으며(롬 6:19), 비록 제한된 육체 가운데 살지만 더이상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으며, 성령을 좇는 삶을 살게 되었다(롬 8:4).

    󰃨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 안에서'사는 것이다. 이는 과거에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애썼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예수께서는 '내 말이 너희 안에'(요 15:7)라고 말씀하셨지만, 바울은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라고 말한다. 이는 주께서 우리 안에 계실때에는 말씀으로 존재하시며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그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主는 靈이시다

    바울의 성령론과 기독론을 올바로 이해하고 바울서신을 올바른 견지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후 3:17 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 (主는 靈이시다: Now the Lord is the Spirit. NASB)의 뜻을 알아야한다.

    이 구절은 많은 주석가들의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구절이다.
    우리들의 관심은 바울 사도가 어떻게 호 퀴리오스토 프뉴마를 본문에서 동일시 할 수 있었느냐하는 것을 밝혀내는데 있다.
    그러나 호 퀴리오스와 토 프뉴마가 동일시 되어지는 이유를 밝히기 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두 가지 문제는
    첫째로, 본문에서 퀴리오스가 그리스도를 가리키느냐하는 것
    둘째로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키느냐 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 문제의 결과가 긍정적으로 나타날 때 우리들은 왜 바울 사도가 주님(호 퀴리오스)과 성령(프뉴마)을 동일시 하고 있는가 하는 이유를 밝히는데 착수할 수 있게 된다.
     
    첫째는 퀴리오스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가를 연구하기로 하겠다.
    일반적으로 이 문제에 있어서 두 가지로 견해를 달리한다.
    퀴리오스가 그리스도를 가리키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본문의 퀴리오스는 여호와(Yahweh)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퀴리오스가 여호와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사도 바울이 출애굽기 34:29-35절을 그 자신의 시대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고 믿는데 있다.
    Dunn은 사도 바울이 출애굽기 34:30절에 나타난 단어 독사(히. 카란, LXX: 엔 데독사스뭬네, 주:광채, 영광)을 취하여 고후 3:7-11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출애굽기 34:33에 나타난 칼륌마(히:미스베, 주:수건,너울)를 취하여 고후3:12-14에서 그 의미를 전개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두 개 용어(광채, 수건)는 출 34:34f의 중심된 귀절에 대한 준비적인 역할을 한다.
    출 34;34f는 다음과 같다.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Dunn의 주장은 출애굽기 34;34f절 이전의 구절들이 출 34:34f을 설명하기 위한 준비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고린도후서 3장에 있어서도 고후 3:16절 이후의 구절들에 있어서 바울의 해석은 고후 3:16절을 설명하기 위한 준비적인 역할을 한 것이라고 한다.
    즉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후 3:16)를 설명하기 위한 준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그 이전 구절들이다.
    Dunn은 본문에 나타난 수건이 모세 당시에 유대인들의 눈을 어둡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세의 얼굴을 가리웠던 같은 수건(토 아우토 칼륌마)이라고 주장한다(고후 3:14).
    그러므로 그 수건을 제거할 행위는 마땅히 같은 행위여야만 한다.
    이와같이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이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16절)했을때 그 뜻은 모세 당시에 그 수건을 벗기기 위해 되어졌던 같은 행위임에 틀림이 없다.
    이는 고후 3:16이 출34;34에서 인용한 것임을 설명하고 따라서 고후3:16절의 주(Lord: 퀴리오스)는 여호와(Yahweh)를 가리킴이 확실하다.

    바울 사도는 그람마의 옛 계약과 프뉴마의 새로운 계약을 비교한 다음 출애굽기 34장의 중심된 구절이 그의 논리에 있어서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즉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주가 성령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호3:16,17절의 주(Lord)는 여호와(Yahweh)를 가리킴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Dunn의 논리는 구약(O.T)과 신약(N.T) 사이에 서로 상충됨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물론 구약과 신약은 그 사상에 있어서 상충될 수가 없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여주고자 노력한 사도 바울의 논리의 중요성은 두 계약 사이의 유사성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두 계약 사이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본문에서 퀴리오스가 여호와(Yahweh)를 가리킨다고 해석함으로 얻을 수 있는 유익함은 예수님과 성령을 동일시하는 이 어려운 진술(statement)과 부딪쳐 보지 않고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에 열거하는 몇가지 이유는 퀴리오스가 여호와(Yahweh)를 가리킨다고 하는 해석이 본문에서 적당한 해석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1. Dunn이 주장한대로 사도 바울은 출애굽기의 구절들을 기초로 새로운 계약의 사역을 해석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Dunn의 주장에서 결여된 점은 사도 바울이 구약의 본문을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바울이 구약과 신약을 비교할때는 언제든지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관점에서 신약이 취급되어진 것이다.(3절 이하; 14절).
    이와같은 이해의 결핍은 고후3:17절을 문맥 안에서 다루지 못한데서부터 기인된다.
    고후 3:17절은 결코 문맥에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이는 성경해석의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문맥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본문을 고찰하면, 사도 바울은 고후 3:1-4:6에서 사역(ministry)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고후 4:5절에서 바울은 명백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크리스토온 이에수은 퀴리온)을 전파한다고 말한다.
    고후 3:14절은 또한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다”(엔 크리스토 카타르게이타이)라고 말하며 16절에서는 사람이“퀴리온(主)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라고 설명한다. 이와같이 문맥에 나타난 퀴리오스를 연구할 때 퀴리오스는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음이 명백하다.

    이와같은 사상은 빌2:9 이하에 타나탄 사상과 일치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인 퀴리오스(主)라는 이름을 예수님에게 주시므로 모든 입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또한 베드로도 그의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主(퀴리오스)가 되셨다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主(퀴리온)와 그리스도(크리스톤)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라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 후에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본문을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관점에서 설명한다고 생각할 때 고후3:16,17에 나타난 퀴리오스는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킴이 확실한 것이다.

    2. 출애굽기에서는 없어질 영광에 대해서 언급이 없지만 바울사도는 고후3장에서 의문의 사역이 없어질 영광과 의의 사역의 풍성한 영광(혹은 성령의 사역의 풍성한 영광)과 비교하고 있다. 

    바울은 정죄의 사역(직분)과 의의 사역(직분)을 비교하고 있다(9절). 로마서 5:16절에서도 바울 사도는 아담으로 말미암은 정죄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칭의를 비교하고 있다. 이와같은 사상은 구약 자체가 진리의 완전한 뜻을 설명하지 못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완전한 뜻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의의 사역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면 본문의 퀴리오스는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본문 퀴리오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문맥을 통해서 증명을 하였다. 문맥의 뜻에 비추어 생각할 때 퀴리오스는 여호와를 가리키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제 우리들은 두 번째 질문을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질문은 고후3:17절의 프뉴마가

    진정으로 성령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Hughes 박사는 고후3:17절의 토 프뉴마가 성령(the Holy Spirit)을 가리키지 않고 靈(spirit)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주는 영이시다! 즉 그리스도는 빛과 생명의 원천이시다. 그에게 돌아감으로 오해의 수건을 제거할 수 있게 되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 있게 된다”라고 했다. 따라서 Hughes는 고전15:45; 고후3:6; 롬8:15절에 나타난 프뉴마도 성령으로 해석하지 않고 靈으로 해석한다. Hughes는 또한 말하기를 “이 귀절 전체를 통하여 우리들은 대문자로 성령(the Spirit)을 쓰지 말고 소문자로 靈(spirit)을 써야한다. 비록 우리들의 판단으로 여기서 성령을 직접적으로 가리키지는 않지 --- 主는 靈이시다 32쪽 --- 만 그러나 바울의 논리 가운데 성령의 작용이 암시된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별히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성도들의 마음에 적용하는 것이 성령의 직무(office)라는 바울의 명백한 교훈을 생각할 때 성령의 작용이 암시된 것을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Hugghes 박사의 입장은 다음의 이유로 본문맥에서 타당하지 않다.


    1) 바울은 고후3:3에서 먹(멜라니=ink)과 성령(프뉴마티 데오 조온토스)을 비교하고 있다. 또한 바울 사도는 의문(그람마=letter)과 성령(토 프뉴마)을 6절에서 비교하고 있다(cf. 롬2:29). 그러므로 본 6절에서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말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특히 프뉴마의 역할을 설명하기 위해 같이 사용된 조오포이에이(give life)는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이 사실은 바울서신 다른 곳에서도 명시된 것처럼 특히 생명은 성령으로부터 기인된다는 사상과 일치하는 것이다(롬8:2,6,11;cf.고전15:45). 바울은 다음으로 헤 디아코니아 테스 카타크리세오스(정죄의 직분=정죄의 사역)와 헤 디아코니아 테스 디카이오쉬네스(의의 직분=의의 사역)을 비교하고 있으며(9절), 이 헤 디아코니아 테스 디카이오쉬네스는 바로 헤 디아코니아 소우 프뉴마토스인 것을 말하고 있다(9절). 여기서 디카이오쉬네스와 프뉴마토스가 동격으로 사용되어졌다.(주: 의의직분과 영의직분에서 의와 영이 동격으로 사용되었다는뜻) 그런데 다른 곳에서 바울은 성령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전6;11)고 말함으로 성령과 의를 밀접하게 연관시킨다. 그러므로 고후3:8의 프뉴마토스가 성령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성령을 가리키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타당한 것이다. 17절 하반절의 토 프뉴마도 자유 개념과 관련하여 사용되어졌다. 이 사실은 토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서신에서 성령과 자유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참 자유는 성령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롬8:2; 고전12:13; 갈5:13ff.). --- 主는 靈이시다 33쪽 ---


    이상에서 “主는 靈이시다”(호 데 퀴리오스 토 프튜마 에스틴-17a)를 둘러싼 가까운 문맥에서 투 프뉴마의 용법을 관찰해 볼 때 토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키고 있음이 명백해졌다. 그렇다면 고후3:17a의 토 프뉴마만 구태여 성령이 아니라고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2) 우리들은 이미 퀴리오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증명하였다. 퀴리오스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생각할 때 17절 하반절의 토 프뉴마 퀴리오나 18절의 퀴리오 프뉴마토스와 같은 표현들에 나타나는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표현들이 바울 서신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데 모두 성령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롬8:9; 갈4:6/ cf. 행5:9; 8:39; 16:7).


    이상에서 증명한 대로 고후3:17a에 나타난 토 퓨뉴마는 Hughes의 주장대로 靈(spirit)을

    가리키지 않고 오히려 성령(The Holy Spirit)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서 고후3:17a의 호 퀴리오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토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확증하였으니 이제 우리들은 바울 사도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다른말로 표현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하는 본질이 무엇인가? 이렇게 그리스도와 성령이 동일시 되어졌다는 사실은 본문이 뚜렷하게 증명하지만 무슨 의미로 동일시 되었는가 하는 것은 명백하지 않다. 고후3:17절은 교리적인 정의가 가득찬 머리를 가지고 바울 서신을 대하고 증거자료로서 확증을 찾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실로 극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광범위한 문백을 고찰할 때 바울 사도는 그의 사도직의 진실성을 옹호하고 있다. 바울의 소명은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거짓 사도들 보다도 훨씬 탁월한 것이다. 그러나 그 탁월성은 그의 개인 인격에 의존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진정한 문제는 그의 직무의 탁월성과 합법성에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의 직무(office)가 모세의 직무보다 탁월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 바울 사도는 그가 계약 역사에 있어서 더 탁월한 시대에 살고 있으며 또 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울 사도 --- 主는 靈이시다 34쪽 ---


    는 옛 계약과 새로운 계약을 비교한다. 먹(ink=멜라니)은 성령과 비교되어졌고(3절) 그리고 성령은 다시 의문(토 그람마)과 비교되어졌다(6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6절). 이 명제가 뒤따라 나오는 구절들에서 더욱 확장되어 진다. 사도 바울은 새로운 계약의 영광(독사)의 초월성을 제시하면서 반면에 옛 계약의 영광(독사)은 사라져 갔다고 말한다(7,11절). 바울 사도는 분명히 여기서 기독교인의 사역의 본질과(3:3,4:1) 모세를 使者로 한 죽음의 사역(직분)을 비교하고 있다(3:7,12,13). 옛 계약은 정죄와 죽음의 사역(직분=ministry)으로서 모세와 관련이 되어졌고 반면에 새로운 계약은 의와 생명의 사역으로서 성령과 관련이 되어졌다(7절 이하 참조). Smedes는 말하기를 “여기 옛 계약과 새 계약이 있다. 그리고 후자는 전자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초월하다. 새 계약은 광대하게 초월한 영광을 가지고 있다. 새 계약은 생명이 사망에서 다르고, 자유가 속박에서 다르며, 확신이 공포에서 다른 만큼, 혹은 소망이 절망에서 다른 만큼, 옛 계약과 다르다. 새 계약은 세상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가져다주었다. 바울의 사도직은 계약 역사의 새 시대, (즉 새 계약 시대)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의 사도직은

    더 초월한 사도직인 것이다”라고 했다.


    바울의 전체적인 논리는 구속 역사의 실재(reality)에 의존되어 있다. 본문에서 제시된 대칭은 역사적이다. “그 대칭은 구속 역사에 있어서 구 질서와 새 질서 사이의 계속되는 국면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에 의해 구별된 것이 바로 새 질서인 것이다. 성령은 새 시대에 있어서 대단히 활동적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성령의 사역(ministry)이라고 말한다(8절).


    고후3:12절 이하에서 바울 사도는 불신하는 유대인들의 마음에 덮여졌고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벗겨질 수 있는 수건(칼륌마)에 --- 主는 靈이시다 35쪽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 구절들은 옛 계약이 무슨 이유로 정죄와 죽음의 사역인지를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하고 있으며 반면 새로운 계약의 효력을 나타내고 있다. 옛 계약이 정죄와 죽음의 사역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완고하게 되었기 때문이며(14절) 그들의 마음에 수건이 덮여져 있었기 때문이다(15절). 그러나 새로운 계약의 효력은 그 수건이 그리스도 안에서 제거되어진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14절). 그 수건은 언제든지 사람이 주께로 돌아가면 제거되어진다(16절).


    이상에서 명백한 사실은 사도 바울이 그의 논리 가운데 17절에 당도하기도 전에(3절 참고) 이미 성령과 그리스도와의 연관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관찰을 통해 확실해진 것은 새로운 계약의 유익은 넘치는 영광과 생명과 의로움이다. 이 사실은 바로 새로운 계약이 성령의 사역이라는 사실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성령이 새 질서안에서 사역하심으로 의와 생명과 영광과 같은 은사를 산출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이와같은 성취들을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돌릴 수 있겠는가하는 질문이 제기되어진다.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하여 바울은 새로운 계약의 효력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 기능을 고찰할 때 주와 성령을 동일시하여 “主는 靈이시다”(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17a)라고 말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바울이 “主는 靈이시다”했을때 퀴리오스가 완전하고 철저하게 프뉴마의 개념에 의해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주와 성령을 동일시 하는 것은 메시야 시대가 바로 성령의 시대라는 종말적인 의미로 동일시 하는 것이다. Hamilton은 말하기를 “여기에서 동일시하는 것은 본체론적이거나 존재에 있어서의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고 동력적(dynamic)이며 구속적 행위에서 발생된 동일함을 뜻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Hamilton은 계속해서 언급하기를 “성령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취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그의 직무를 효과적으로

    이행하기 때문에 믿음의 모든 의지와 목적을 위해 주님 자신이 그의 백성위에 임재하셔서 은혜를 부여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라고 했다. 성령이 새 질서를 주관하시기 때문에 새 질서는

     바로 성령의 질서라고 불리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광범위한 문맥을 통해 관찰해 볼 때 “主는 靈이시다”(17a)라는 표현을 주관하고 있는 사상은 구속적 역사적 전망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성령과 그리스도를 동일시 하는 것은 본체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요 경륜적인 의미로 이해해야만 한다. 동일시 하는 것은 그 성격상 구속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신자들의 경험에 관한한 성령과 그리스도의 기능이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새 질서에서는 동일시 되어질 수 있다는 구속적 역사적인 의미로

    “主는 靈이시다”(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


    17절 하반절의내용도 성령과 그리스도를 동일시 하는 것이 본체론적인 의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자유(엘류데리아)의 개념이 17절 하반절에 언급되었는데 바로 이 사실이 바울이 경륜적인 면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갈5:1;롬8:2). 영광, 생명, 의, 평화 등의 개념과 더불어 자유 역시 새로운 계약의 특징들 중의 하나로서 성령의 사역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갈4:21과 5:1;5:13과 5:16ff 비교 참조). 18절에 기술된 대로 주와 성령 사이를 밀접히 연결시키는 것은 17절에서 이미 언급한 내용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결국 주와 성령은 구속의 사역을

    적용하는데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종합해 보면 바울의 사상은 역사적이다. 새로운 시대는 옛 시대보다 탁월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신 분이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벗겨졌다. 성령은 창조적이고 활동적인 영으로서 새 시대를 주관하시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의 생활은 성령에 의해 조정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영으로서 계속해서 역사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인 것이다. --- 主는 靈이시다 37쪽 ---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主는 靈이시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신자들의 경험을 설명할 때 그리스도의 기능과 성령의 개념을 교대로 사용하는 예를 바울서신 내에서 찾아 비교함으로 지금까지의 증명이 더 확실해질 것이다.


    신자들의 생명 - 죄의 결과는 죽음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 죽음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비결은 예수를 생명의 주로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성령을 통해 생명을 가졌다(롬 8:11)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가졌다(골로새서 3:4)
    -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신자들의 소망
    죄의 결과 에덴동산에서 쩣겨난 사람은 일을 해야하는 수고와 해산하는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고통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을 때 소망이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됩니다.

    우리들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소망을 가졌다(롬 5:5; 15:13)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졌다(고전 15:19).

    신자들의 성화 - 세속에서 거룩하게 되는 것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다(롬 15:16)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다(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신자들의 기쁨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기쁨을 가졌다(롬 4:17; 갈 5:22)
    우리들은 主님 안에서 기쁨을 가졌다(빌 3:1; 4:4)

    신자들의 자유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다(고전 12:13; 롬 8:2)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다(갈 5:1).

    신자들의 칭의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의롭다 인정받았다(고전 6:11)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인정받았다(갈 2:17; 고전 6:11).


    신자들의 인침

    우리들은 성령안에서 인치심을 받았다(엡 4:30)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치심을 받았다(엡 1:13)

    신자들의 교제

    우리들은 성령의 교제로 축복을 받는다(고후 13:13)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교제 안으로 불리움을 받았다(고전 1:9)

    신자들의 행위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행해야 한다(갈 5:25)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야 한다(골 2:6; 1:10).

    신자들의 하나님께 대한 접근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간다(엡 2:18)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간다(엡 3:12)

    신자들의 확신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굳게 서야 한다(빌 1:27).
    우리들은 한 주님 안에서 굳게 서야 한다(빌 4:1).

    신자들의 율법 이행

    성령은 죄와 사망의 법을 대치시켰다(롬 8:2)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법을 대치시켰다(롬10:4)


    이상에 열거한 병행 구절들은 신자들의 경험을 설명할 때 바울 사도가 성령과 그리스도를 교대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자들의 생활과 성령 안에서의 신자들의 생활 사이에 구분을 두지 않았다.
    이와같이 성령과 그리스도를 신자들의 경험과 관련하여 교대로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의 현상으로서 공관복음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들에서 “성령 안에 있는 우리들”(롬 8:8a),
    "너희 안에 있는 성령“(롬 8:9a;11c),
    "너희 안에 있는 그리스도”(롬 8;10)등의 표현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하나님의 영”(롬 8:9b)이나
    “그리스도의 영”(롬 8:9c)을 교대로 사용할 수 있으며
    “주는 영이시다”(고후 3:17a)라고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해서 표현할 수 있었다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자유는 감옥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자유란 갇힌 곳에서부터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감옥에 갇힌 사람은 감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은 질병으로부터 건강을 되찾는 것입니다.
    사람을 옭아매는 것들이 다양합니다.
    예로부터 사람을 옭아매는 것을 "생노병사(生老病死)"라고 하여 태어나서 나이가 들어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으면서 가장 힘든 것은 죄에 붙잡힌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죄가 나를 흔들어댈 때 어느 누구도 그 고통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으로 나를 붙잡아 줄 때라고 하겠습니다.

    오직 하나의 참된 기쁨은 자기라는 감옥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동시에 자유도 주셨다.(토마스 제퍼슨)





    주는 영이시니
    - 본절은 `의문(儀文)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는 6절 내용과 연관하여 바로 이해될 수 있다.
    즉 바울은 '의문'과 '영', '옛 언약'과 '새언약', '율법'과 `복음'을 대조하면서 후자(後者)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많은 주석가들이 주장하듯이 본절의 내용이 삼위 일체론의 교리를 뒷받침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Bousset, Scott), 보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본절에서 관심을 두고 있는 초점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 및 대조에 있다는 사실이다(Hughes).
    이렇게볼 때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빛과 생명의 원천이시므로 그분께 돌아오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운 바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유함이 있느니라
    -
    주의 영이 있는 곳, 그리하여 마음의 수건이 벗겨지고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난 곳에는 복음 즉 새 언약으로 말미암는 자유가 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옛 언약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을 '종의 자녀'로, 새 언약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을 '자유자의 자녀'로 비유한 적이 있다(갈 4:24-31).
    여기서의 '자유'는 율법의 지배 하에서의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가리킨다.
    고린도전서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졌던 '자비'에 대한 언급이(고전 9:1, 19;10:29) 후서에서는 이곳에서만 언급되고 있다.
    자신들의 마음속에 새 언약이 영으로 새겨진 그리스도인들은 정죄와 구속의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는데 이 자유는 확신(4절)과 담대함(12절)을 주는 자유이다.
    바울은 사도로서 이 자유의 영을 받았으므로 인간적인 추천서에 의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의 자유와 자기를 자랑하고자 하는 명예욕으로부터의 자유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1. 주는
    2. 영이시니
    3.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 주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셨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이것이 ‘주는’이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이것이 ‘주는’이다.

    2장 영이시니

    1.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살려 주는 영이 되셨다. 이것이 ‘영이시니’이다.

    2.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셨다. 그러므로 역(逆)으로 말하면,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이것이 ‘영이시니’이다.

    3장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1:7-13)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하셨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우리가 그 인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이것이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이다.

    2.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기름을 부으시고(제사장 직책과 선지자 직책과 왕 직책을 세우시고) 보내사 ❶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육신의 연약한 자<롬5:6, 롬6:19>를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롬8:9> 생기 있는 자가 되게), ❷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는 죄인 된 자<롬5:8, 롬11:30>를 하나님께 순종하는<롬1:5> 의인이 되게), ❸눌린 자를 자유케(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롬5:10, 롬8:7>를 영의 생각<롬8:6>으로 하나님과 화목(동행)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눅4:18). 이것이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이다.

    (문답)

    문1: ‘주는’은 무엇인가?

    답: ➊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1:14). ➋그리스도 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빌2:5-8).

    문2: ‘영이시니’는 무엇인가?

    답: ➊예수 그리스도는 살려 주는 영이 되셨다(고전15:45). ➋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다(롬8:9).

    문3: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는 무엇인가?

    답: ➊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우리가(엡1:7) 그 인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엡1:13). ➋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셨으니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신다(눅4:18).

    (결론)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주는 영이시니(고후3:17)’ 하셨으니 그러므로 ‘주는 영이시다’라고 말하면 비성경적으로써 틀린 것이다. 그런 것은 주(主)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로 알지 못하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요1:14)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빌2:5-8)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그렇기에 ‘주는 영이시니(고후3:17)’ 하셨으니 그러므로 ‘주는 영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요1:14) 예수 그리스도’와 배치되는 것이며,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빌2:5-8) 그리스도 예수’와 배치되는 것이다.

    (골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다. 그렇기에 ‘주는 영이시니(고후3:17)’ 하셨으니 그러므로 ‘주는 영이시다’라고 말하면 비성경적으로써 틀린 것이다.

    (눅24:35-43)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하셨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영으로 생각할 때에 예수님께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셨다. 그렇기에 ‘주는 영이시니(고후3:17)’ 하셨으니 그러므로 ‘주는 영이시다’라고 말하면 비성경적으로써 틀린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1-26-2025(주일)
    암송성구 #. 36. 후히 드리는 생활(고린도후서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금주 암송 성구  
     후히 드리는 생활(고린도후서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헌금(獻金)이란 한자는 “드릴 헌(獻)” “쇠 금(金)이란 ”“훈(訓)”으로 “쇠 즉 엽전(돈)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돈이 필요해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육신으로 살아가야 할
    연약한 인간이지만 돈을 바침으로 받은 사랑에 대한
    고백이며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헌금은 얼마를 바쳤느냐 하는 그 양을 계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헌금은 아직도 얼마를 갖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부자는 연보궤에 많은 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한 고드란트)를 넣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가난한 과부는 모든 사람들보다 많이 넣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 넣었지만 과부는 구차한 중에 자고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막 12:41-44. 눅 21:1-4).
    헌금은 얼마를 바쳤느냐 하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아직도
    얼마가 남아 있느냐 하는 것에 따라 주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2025년 영적 무브먼트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는 거룩한 순례자가 되자!
    나의 태신자(胎信者)를 찾으라!

    02-2-2025(주일)
    암송성구 #. 37. 성령의 전으로서의 몸(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4가지 구조로 구분하는 것(세포, 조직, 기관, 계통)은 과학적인 방법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몸을 3가지로 구분하는 것(영, 혼, 육)은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물론 사람의 구조에 대한 이분법(영혼, 육체)과 삼분법(영, 혼, 육)으로 설명하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의 기능과 혼의 기능과 육의 기능이 동일한 내용이라면 이분법이든지 삼분법이든지 서로 다른 주장이 아니라 이분법은 기능을 기준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존재론적 방법은 영혼과 육체로 구분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의 몸은 "성령의 전"이라고 강조합니다.
    영혼육과 같은 삼분법으로 구분하든지 아니면 영혼과 육과 같은 이분법으로 구분하든지 그 안에 주의 영이 없다면 그것은 사람의 몸이 아니라 짐승과 같은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첫째, 세포는 생명을  이루고 있는 가장 작은 최소화 기능 단위라고 합니다.
    인체는 60에서 100개의 세포로 이루어진다.

    둘째, 조직은 공통의 기능을 수행하는 유사한 세포들의 집단으로 이루이져 신체는 상피조직과 그리고 근육조직, 신경조직, 결합조식 등 네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셋째, 기관으로 2개 이상의 조직으로 심장과 난소 그리고 위장 등이 있다고 합니다.

    ​넷째, 계통으로  유사하고 연관된 기능을 가진 다양한 기관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성막의 구조를

    인체의 모든 계통은 유기적이며 서로 상호관계를 가집니다.

    금주 암송 성구  
     성령의 전으로서의 몸(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4가지 구조로 구분하는 것은 과학적인
    방법입니다(세포, 조직, 기관, 계통).
    반면에 사람의 몸을 3가지로 구분하는 것은
    성경적인 방법입니다(영, 혼, 육).
    물론 사람의 구조에 대하여 이분법(영혼, 육체)과
    삼분법(영, 혼, 육)으로 설명하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의 기능과 혼의 기능과 육의 기능이 동일한 내용이라면 이분법이든지 삼분법이든지 서로 다른 주장이 아니라 이분법은 기능을 기준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존재론적 방법은 영혼과 육체로 구분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의 몸은 "성령의 전"이라고 강조합니다.
    영혼육과 같은 삼분법으로 구분하든지 아니면 영혼과 육과 같은 이분법으로 구분하든지 그 안에 주의 영이 없다면 그것은 사람의 몸이 아니라 짐승과 같은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2025년 영적 무브먼트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는 거룩한 순례자가 되자!
    나의 태신자(胎信者)를 찾으라!


    02-9-2025(주일)
    암송성구 #. 38.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베드로전서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2월 16일 /  금주 암송 성구  
     아론의 축복 기도(Aaron's Blessing Prayer)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축도(祝禱)”란 “축복기도(祝福祈禱)”라는 한자의 약자로 “빌 축(祝)”“빌 도(禱)”라는 훈(訓)입니다.

    축도를 위한 기도문은 구약에서 대제사장 아론의 축도와
    신약에서 사도 바울이 선포하는 바울의 축도가 있습니다.

    축도란 하나님이 내리시는 선물과 축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기도는 성도가 하나님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아래서 위로 드리는 것이고, 축도는 하나님께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주시는 선물입니다. 축도는 하나님의 복을
    회중에게 선포하는 귀중한 말씀이며, 영어로 'Benediction' 
    즉 '복을 빌어주는 기도'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축도는 하나님이 지키시고 은혜 베푸시며 평강 주심을 알리는 것이고,
    신약에서는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역사하심이 있음을
    알리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2월 23일

    요한복음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ask whatever you wish, and it will be given you.

    기도(祈禱)의 재미는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닐까요?
    만일 응답이 없는 기도를 계속하는 것은 형식(形式) 또는 습관(習慣)이 될 것입니다.
    응답 받는 기도의 비결은 기도자가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예수님 안에 거하려면 예수님의 가르침 즉 그 말씀이 내 안에 새겨져야 합니다.
    내 안에서 주의 말씀이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그 말씀에 따라 순종하면서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을 "내면적 경건이 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외면적 경건에는 관심을 갖지만 보이지 않는 내면적 경건에 대해서는 소홀(疏忽)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성구를 암송(暗誦)하는 것은 주의 말씀을 내 안에 새기는 것이며 동시에 내면적 경건을 강화(强化)하는 훈련이 됩니다.
    이번 주간에 암송할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것을 찾아서 그것을 구하는 재미를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기도가 기도의 지경(地境)을 넓히는 것입니다.


    거하다(메노. mĕnō) μένω 스트롱번호 3306

    1. 남아있다.  2. 기다리다.
    발음 [ mĕnō ]

    관련 성경  /  머물다(마10:11, 요1:32, 행21:8, 딤후4:20), 유하다(막6:10, 눅24:29), 거하다(눅8:27, 요8:35, 요일2:27), 계시다(요1:38, 2:12, 히7:24), 머물러 있다(요3:36), 붙어있다(요15:4), 두다(요19:31, 행5:4), 붙다(행27:41), 지내다(고전7:8,40), 영존하다(히12:27), 계속하다(히13:1).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여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그 아래 말씀이 알려주는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 속에 가진 자이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란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의 왕좌를 점령하였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을 그의 대리(代理)로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 권위를 높이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살아 계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거한 생활의 유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약에 참여한 자로서 신종(信從)하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신분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쓸 수 있고, 또한 성령께서 그런 신자의 의지를 성화(聖化)시켜 주님의 뜻대로만 기도할 수 있게 하신다. 곧,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만 위하여 기도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할 진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상반절에서 벌써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생활이,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 되어 있다. 신자가 주님과 연합한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주님의 계약 행위, 곧, 선택이 그 기본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순종이 그 실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외부적 생활에서만 근근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얕은 경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깊은 계약과 생명에서 움직이는 내면적인 경건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무엇이든지 응답 받는다는 진리는, 요한이 그 시선에서도 말씀한 바 있다.
    곧,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한 말씀이 그것이다(요일 5:14).
    기도 응답을 받는자들은 저렇게 내면적인 경건의 소유자들이다.

    기도 응답을 많이 받은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고(신 34:10),
    히스기야는, 기도 하여 자기의 병을 고침 받았다(사 38:2-5; 왕하 20:5-6).
    그는 기도하여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을 파멸시켰는데(왕하 19:14-19, 35),
    하나님 앞에서 자백한대로,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할 만큼, 경건하였다.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사도들을 위시하여 일반 신자들 전체에게 허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짐을 져 주시는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이다.
    히 4:14-16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다.

    약 5:17에 말하기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비가 아니로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큰 죄인들도 회개하며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데, 구약 시대에도 그러하였고(대하 33:10-13), 신약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눅 18:13-14에 말하기를,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였고,

    계 3:19-20에는 말하기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가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지침

    12-15-2024(주일) 암송성구 #.30 그리스도 안의 생활(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If a man remains in me and I in him, he will bear much fruit;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12-22-2024(주일) 암송성구 #.31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생활(사도행전 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Now I commit you to God and to the word of his grace, which can build you up and give you an inheritance among all those who are sanctified.

    그 은혜의 말씀 / 그 은혜의 그 말씀
    토 로고 테스 카리토스(τω λογω της χαριτος)

    호(3588)  로고스(3056)  호(3588)  카리스(5485)

    λόγος χάρις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라는 구절을 직역하면 "그 은혜의 그 말씀께 부탁하노니"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사람의 모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바로 그 말씀 즉 세상에 내려오신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문자의 말씀은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려는 의도로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문자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믿는다는 것은 곧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라는 질문은 "주 예수께서 생명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믿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믿습니까?" 라는 질문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믿습니까?" 라는 질문은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셨던 예수님께서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것을 믿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따라서 '믿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아멘!" 이라고 화답하는 것은 신앙의 내용을 함축성 있게 묻고 답하는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
    흉악한 이리들과 배교의 여러 세력들로 인해 갖가지 공격을 받게 될 교회의 어려움을 예견한 바울은 여러 권면으로 지도자들의 성실함을 촉구했지만 마지막에 바울이 부탁한 것은 바울의 모범도 지도자들의 충성스러움도 아니었다. 이런 것들은 교회를 세워가는 데 필요한 하나의 방도 도구일 뿐 근본적(根本的)으로는 교회를 배교의 세력에서 지키지 못할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한테 맡겨야 옳단 말인가? 바울은 안전의 원천을 알았으니 곧, 주와 그분의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인간 지도자들의 모든 수고를 쓰셔서 친히 교회를 세워가시는 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교회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몸된 교회를 친히 다스리고 계신 것이다. 이때 그 방법은 오직 말씀으로이다. 그 말씀이 능력이 있어서교회롤 모든 악의 세력에서 지켜주고 거룩하게 서 가게 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교회가 누구의 교회이며 무엇으로 교회가 거룩하게 서 갈 수 있는가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다. 한편 여기서 부탁한다는 '파라티데마이'(*)는 '넘겨주다', '위탁한다', '맡긴다', '의뢰한다'(딤후 2:2;벧전 4:19 등)는 뜻이다.

    12-29-2024(주일) 암송성구 #.32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생활(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because those who are led by the Spirit of God are sons of God.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인 삶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핵심은 세상(땅)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소금과 빛이 될 수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해야만 합니다(롬 8:9).
    그리스도의 영을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비결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의 가르침을 믿고 따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2025년에는 성경 일독을 위하여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요한계시록까지 함께 읽어가려고 합니다.
    말씀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기둥의 성자 시므온처럼 삶의 현장에 우뚝 세워지는 은혜를 함께 사모하며 기도하는 2025년으로 기록을 세워갑시다.


    하나님의 영으로...하나님의 아들이라

    -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이기에 당연히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사랑'(9절)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께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가르치셨다.
    성도는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

    인도함을 받는(71) 아고(agō) ἄγω   

    1. 인도하다. 2. 데리고 가다
    발음 [ agō ]
    • 1. 인도하다.
      • a.  [문자적으로, 4격과 함께 쓰여] 인도 하다, 데려오다, 가져오다, 가져가다, 마21:7, 요8:3, 행20:12.
      • b.  데리고 가다, 가져가다, 행11:26, 딤후4:11.
      • c.  [상징적으로] 인도하다, 들어가게 하다, 롬2:4, 히2:10.
    • 2. 끌어넣는다, 잡아가다, 체포하다, 막13:11, 눅22:54, 요7:45, 행5:26.
    • 3. 인도하다[성령의 사역을 통해], 인도되다[수동태로], 롬8:14, 딤후3:6.
    • 4. [시간을] 보내다, 허비하다, 눅24:21, 행19:38.
    • 5. 가다, 마26:46, 막1:38, 14:42, 요11:16.
    • 관련 성경  / 끌려가다(마 10:18), 끌고 오다(마 21:2, 눅 19:30), 이끌리다(눅 4:1), 이끌다(눅 4:9, 히 2:10), 이끌다(눅 4:29), 데리다(요 19:4, 행 17:15), 끌어가다(행 9:21), 잡아오다(요 7:45, 행 5:21), 인도하다(요 10:16, 롬 2:4), 붙들다(행 17:19), 데려가다(행 21:34), 데려오다(행 25: 6), 들어가다(행 23:10).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베드로전서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성령,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 영

    8장에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살펴봅니다.

    I. 성령

    1. 그리스도의 영 (9), 하나님의 영(9)

    9절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 혹은 ‘하나님의 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하십니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꼭 집어 소개한 것은 초대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아닌 ‘다른 영’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1-3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서 ‘다른 예수’와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권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아닌 다른 영을 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영지주의라고 하는 이단이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다른 영, 적그리스도의 영을 전했습니다. 오늘날엔 알파코스, 신사도운동, 관상기도와 같은 영성 프로그램들을 통해 다른 영들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영적인 역사가 나타난다고 이를 다 믿지 말고 이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그리스도의 영” 또는 “하나님의 영”이라고 부른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주요한 사역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야 그리스도를 알 수 있고, “진리의 영”(요 16:13)을 받아야 진리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를 아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9)인 것입니다.

    2. 양자의 영 (15)

    15절부터는 성령을 “양자의 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15) 하십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아직도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면 ‘종의 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겁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항상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몰아갑니다. “이것저것을 행하고 지키지 않으면 지옥 간다.”라고 끊임없이 위협하고 협박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만족시킬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는 항상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종노릇하는 ‘종의 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a. 하지만 율법주의라고 하는 ‘종의 영’이 아닌,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 (15)

    “아바 아버지”라 할 때, “아바”는 “아빠”라는 뜻입니다. 어린 아이가 처음 말을 배우면서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아바”입니다. 율법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경건한 행위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친근히 부르며 또 그렇게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아빠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 말씀을 묵상하면 사랑하는 자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이 양자의 영을 받은 성도들을 이와 같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b. 양자의 영을 받으면,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의 자격을 얻게 됩니다.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하십니다.

    ‘후사’란 상속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기 위해서는 주님과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17)하십니다.

    예수님도 친히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제자의 길은 고난의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18)하십니다. 양자의 영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된 후사”로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성령의 역할

    이제는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요, 양자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일들을 살펴봅니다.

    1.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신다. 

    지난 시간에도 살펴본 것처럼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십니다. 본문에서 율법을 ‘죄와 사망의 법’으로 묘사한 것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은 결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새 생명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겁니다.

    2. 우리를 인도하신다(14, 28)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하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수님의 약속을 붙들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이 ‘성령 충만’(행 2:4)을 받았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령 충만(filled with the Holy Spirit)이 무엇일까요 ? 어떤 신학자는 ‘성령 충만’을 ‘성령에 붙들리는 삶’으로 표현합니다. 성령에 붙들려 성령의 인도하시는 데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이라는 겁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한 뒤, 스데반 집사는 성령에 붙들려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빌립 집사는 성령에 붙들려 광야로 나갔다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행 8:26,27) 사도 바울도 본래는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할 계획을 세웠지만, 성령께서 막으시자 드로아 지방으로 내려가 기도하다가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행 16:10) 유럽으로 발걸음을 돌려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고린도, 에베소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14)이라 하십니다. 내 욕심과 생각이 아니라, 날마다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는 자가 곧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과연 어떤 길로 인도하시는 것일까요? 28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하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하심은 과정 속에는 어려움이 있어도 그 결과를 아름답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사서 애굽 땅으로 팔려가 억울한 종살이 옥살이를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사건들을 통해 요셉은 바로 왕 앞에 설 수 있게 되었고, 바로왕의 꿈을 해석해 줌으로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요셉은 훗날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한 형제들을 만나 그가 꾸었던 꿈처럼 형제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요셉의 실패와 고난도 합력하여 하나님의 더 큰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삶에도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자들은 언제나 그 결과를 좋게 하시는 즉,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3.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26)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소개한 성령님의 또 다른 이름 ‘보혜사’(파라클레토스, 요 15:26)는 “옆에 서서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Counselor(NIV), Comforter(KJV) 혹은 Helper(NASB)라고 번역해놓았습니다. 상담자, 위로자,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온전한 믿음 생활을 할 수 없음을 아셨기에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하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믿음을 지키고 사명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데,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신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하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고, 또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생각과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27) 기도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모든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으로 구하는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을 근심케 만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 응답 받는 바른 기도를 드리려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결론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요 양자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시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이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날마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고” (13), “육신의 생각이 아니라 영의 생각을 좇으며”(6) 육체의 소욕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3,14절) 하십니다.





    01-05-2025(주일) 암송성구  #. 33  믿음에 의한 생활(고린도후서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믿음으로 행하고...아니함이로라
    - 본절은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친밀성이 재림 이후의 완전함에 못미친다는 현실적인 경험이기에 세상에서 육을 입고 사는 삶이란 그리스도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의 삶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세계의 삶인 것이다(고전 13:12).

    고린도전서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Now we see but a poor reflection as in a mirror; then we shall see face to face. Now I know in part; then I shall know fully, even as I am fully known.



    믿음이란 헬라어는 “피스티스(pistis. πίστις”라고 합니다.

    πίστ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4102

    1. 믿음.   2. 신실성. 3. 엄숙한 약속
    발음 [ pistis ]
    어원  / 3982에서 유래


    περιπατέω
    스트롱번호 4043

    1. 돌아다니다.  2. 두루 다니다. 3. 나타나다
    발음 [ pĕripatĕō ]

    신약 성경에서는 “믿음(마 8:10, 롬 1:8, 히 10:22), 도(행 6:7),
    충성(갈 5:22), 신앙(빌 1:27, 히 6:1).”이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믿음(信)이란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삶을 일컬어 믿음이 좋다고
    합니다. 믿음을 사람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에도
    합당하지 않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2025년을 맞이하여 매일 성경 읽기에 따라
    말씀을 읽고 묵상의 주제를 내 삶에 적용하는
    경건 훈련을 통하여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한 해를 마감할 때 착하고 충성된 일꾼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영적으로 도약하는 일에  헌신합시다.
    2025년 영적 무브먼트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는 거룩한 순례자가 되자!

     
    나의 태신자(胎信者)를 찾아라!





    5. 사랑에 의한 생활(요한일서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 '이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는 9,10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현시된 방법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한편 '하셨은즉'의 헬라어 '에이'(*)는 사실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것으로 사실상의 이유나 근거를 의미한다. 이것은 본문이 이후에 언급되는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의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께서 주신 계명으로(요13:34,35; 15:12,17)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요한의 이 권면은 당시 사랑의 계명을 평가절하하는 이단적 교리가 수신자들 사이에 팽배해진 것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Smalley). 한편 '마땅하도다'로 번역된 헬라어 '오페일로멘'(*)은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시사한다. 물론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선택 사항은 아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당연히 나타나야 할 실천 행위이다.

    01-12-2025(요한일서 1:7)
    그리스도인의 교제하는 생활(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월 19일(베드로전서 3:15)
    증인으로서의 생활(베드로전서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월 26일(고린도후서 9:7)
    후히 드리는 생활(고린도후서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2월 2일(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월 9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리스도인의 생활 지침

    12-15-2024(주일) 암송성구 #.30 그리스도 안의 생활(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구약에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소개합니다.
    목자와 양(시 23:1), 포도나무와 농부(사 5:1-2), 왕과 백성(출 19:6), 남편과 아내(렘 3:14), 아버지와 자녀(신 32:6),
    토기장이와 진흙(렘 18:6), 독수리와 새끼(신 32:11), 반석과 피난처(시 18:2), 빛과 백성(사 60:19), 의사와 환자(렘 30:17),
    목자와 잃어버린 양(겔 34:11), 불과 쇠(슥 13:9).

    이러한 다양한 비유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단순한 계약적 관계가 아닌, 사랑과 보호, 인도와 회복의 깊은 관계임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돌봄과 보호 속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을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표현됩니다.

    신약에서 대표적인 관계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 가지(2814)
    κλῆ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2814

    1. 가지.  2. 포도나무가지. 3. 요 15:2, 4, 5, 6.
    발음 [ klēma ]
    어원  / 2806에서 유래
    • 1. 가지, 포도나무가지, 요 15:2, 4, 5, 6.
    • 관련 성경  / 가지(요 15:2, 4, 6).
    2806. κλάω    
    1. 떼다.   2. 뜯다. 3. 깨뜨리다
    발음 [ klaō ]
    1. 떼다, 뜯다, 깨뜨리다, 마 14:19, 15:36, 26:26, 막 8:6, 눅 22:19, 행 2:46, 고전 11:24.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

    성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는 여러 은유와 비유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표현들은 하나님의 사랑, 보호, 인도, 심판, 그리고 이스라엘의 배반과 회복의 과정을 깊이 있게 설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은유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며, 동시에 그 관계의 영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최고의 선물

    1. 목자와 양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양으로 자주 비유된다. 목자는 양들을 돌보고 보호하며,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양들은 목자의 보호 없이는 쉽게 길을 잃거나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목자로서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돌보심을 강조하는 은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보호자이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의 보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 은유는 하나님의 돌보심, 인도, 그리고 보호하심을 강조한다.

    2. 포도나무와 농부

    이사야 5:1-2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그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가 좋은 포도를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하나님은 농부로, 이스라엘은 그분이 심고 가꾸는 포도나무 또는 포도원으로 비유된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돌보아졌으나, 그들이 올바른 열매를 맺지 못할 때 심판을 받는 모습을 묘사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심하게 돌보고 키우셨지만, 이스라엘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불순종할 때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신다. 이 은유는 하나님의 기대와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책임을 상징한다.

    3. 왕과 백성

    출애굽기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의 신민(백성)으로 비유된다. 이 은유는 하나님께서 통치자이시며, 이스라엘은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존재임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고 지키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과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은 왕으로서 백성을 다스리시며, 이스라엘은 그분의 통치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이 비유는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충성, 순종,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강조한다.

    4. 남편과 아내

    예레미야 3: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의 남편임이라." 

    하나님은 남편, 이스라엘은 아내로 비유된다. 이 은유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상징하며, 때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충실할 때 ‘배신’과 ‘간음’으로 묘사된다. 이 관계는 언약적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남편처럼 그들을 보호하고 돌보셨으나, 이스라엘은 종종 다른 신들에게 마음을 빼앗기며 불충실한 아내로 묘사된다. 이 은유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과 이스라엘의 불성실을 대비시킨다.

    5. 아버지와 자녀

    신명기 32:6 "너희는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그는 네 아버지시니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하나님은 아버지로, 이스라엘은 그분의 자녀로 비유된다. 이 은유는 하나님의 보호, 훈육, 사랑을 강조하며, 이스라엘은 그분의 아버지 같은 돌봄 속에서 살아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로서 그들을 사랑하고 돌보시며, 때로는 그들의 잘못을 훈계하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중하며 그분의 지시를 따르는 자녀로 비유된다.

    6. 토기장이와 진흙

    예레미야 18:6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너희에게 행할 수 없겠느냐?"

    하나님은 토기장이, 이스라엘은 진흙으로 비유된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처럼 이스라엘을 원하는 대로 형성하고 빚어가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이스라엘을 빚으시며,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신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주권과 이스라엘의 순종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형성되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변화되고 완성된다.

    7. 독수리와 새끼

    신명기 32:11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하나님은 독수리, 이스라엘은 그분의 새끼처럼 비유된다. 독수리가 자신의 새끼를 보호하며 돌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그들을 위해 싸우시는 모습이 강조된다. 하나님은 강한 독수리처럼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그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도록 돌보시는 보호자의 역할을 한다.

    8. 반석과 피난처

    시편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반석 또는 피난처로 비유된다. 반석은 안전하고 견고한 보호처를 상징하며, 이스라엘은 그 반석 안에서 안전을 얻는다. 피난처는 하나님이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곳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모든 위험과 위기 속에서 보호하시는 피난처이시며,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안전을 얻는다. 이 비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주심을 강조한다.

    9. 빛과 백성

    이사야 60:19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하나님은 빛으로, 이스라엘은 그 빛 안에서 걷는 백성으로 비유된다. 빛은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역할을 상징하며, 이스라엘은 그 빛 안에서 길을 찾고 인도받는 존재로 묘사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빛이 되어 그들을 어둠에서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영광과 진리를 비추신다. 이스라엘은 그 빛을 따르며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10. 의사와 환자

    예레미야 30:1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의 상처로부터 너를 고치며 너의 질병을 낫게 하리라." 

    하나님은 치유자이시며, 이스라엘은 영적, 육적으로 상처를 입은 환자로 비유된다. 이스라엘이 병들고 연약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신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힘으로는 치유될 수 없는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치료자이자 회복자가 되신다. 이 비유는 하나님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임을 상징한다.

    11. 목자와 잃은 양

    에스겔 34:11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하나님은 목자, 이스라엘은 길을 잃은 양으로 비유된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끝까지 찾으시며, 돌아온 양을 기뻐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들을 찾으시고, 회복시키려는 은혜와 사랑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길을 잃은 이스라엘을 찾으시며, 그들이 돌아오도록 인도하신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돌아올 수 없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끝까지 찾아내신다.

    12. 불과 쇠

    스가랴 13:9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하나님은 불, 이스라엘은 그 불 속에서 연단되는 금속이나 쇠로 비유된다. 불은 이스라엘을 정결하게 하며, 그들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은 불처럼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고, 정결하게 하신다. 이 은유는 이스라엘이 고난을 통해 정결케 되고, 더욱 순수해지는 과정을 상징한다.

    이러한 다양한 비유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단순한 계약적 관계가 아닌, 사랑과 보호, 인도와 회복의 깊은 관계임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돌봄과 보호 속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을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표현된다.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If a man remains in me and I in him, he will bear much fruit;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12-08-2024(주일) 인도의 확신
    암송 성구 #.29  잠언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을 지도하시리라.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and lean not on your own understanding;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성도들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험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바른 길을 가도록 돕는 하늘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위하여 구원의 확신(요일 5:11-12)과 기도 응답의 확신(요 16:24)과 승리의 확신(고전 10:13)과 사죄의 확신(요일 1:9)과 더불어 인도의 확신을 갖고 생명의 길을 따라 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두운 바다에 등대의 빛이 방향을 찾아가도록 안내하는 것처럼 성도들은 진리의 말씀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발에 등은 현재의 길을 위한 것이며 내 길에 빛은 미래의 길을 위한 것입니다.
    날마다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상에서도 올바른 길을 가도록 돕는 보혜사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여 예수 이름으로 승리합시다. 

    12-01-2024(주일) 사죄의 확신
    암송 성구 #.28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

    흔들림이 없는 신앙생활을 위하여 다섯 가지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다섯 가지 확신이란 구원의 확신(요일 5:11-12), 기도 응답의 확신(요 16:24), 승리의 확신(고전 10:13)에 이어 사죄의 확신을 갖춰야 합니다.
    사죄(赦罪)는 내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는 것을 말합니다.
    용서(容恕)를 받으려면 먼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망각(妄覺)하기 때문에 내가 범한 모든 죄(원죄와 자범죄)를 고백하려면 하나님이 알고 있는 죄의 목록을 모두 고백해야 하므로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모든 것을 기억하도록 돕기 때문입니다(요 14:26).
    "보혜사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자백이란 헬라 단어는 "호모로게오"라고 합니다.
    '호모로게오'의 뜻은 "같은 말을 한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막연한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기억하게 하시고 그 죄를 온전히 고백할 때 용서받는 은혜를 경험할 때 비로서 사죄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11-24-2024(주일) 승리의 확신
    암송 성구 #.27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No temptation has seized you except what is common to man. And God is faithful; he will not let you be tempted beyond what you can bear. But when you are tempted, he will also provide a way out so that you can stand up under it.


    "시험(試驗)"이란 헬라어는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ός)'는 주로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하였으며, 의학적으로는 "실험한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신약에서 '시험(페이라스모스)'이란 "유혹(誘惑. Temptation)"과 "시련(試鍊. Trial)"으로 구분합니다.
    '유혹'이란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에 빠지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마 6:13, 눅 11:4, 계 2:10).
    '시련'이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연단하기 위하여 잠시동안 어려운 과정을 허락하신 것을 의미합니다(마 5:4. 10, 약 1:12, 벧전 4:12).
    '시련'을 다른 말로 '테스트(Test)"라고 합니다.
    테스트란 공장에서 상품을 세상으로 출고하기 전에 완전한 제품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으로 이 과정을 거쳐야만 소비자들이 안전하게 제품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의 품안에서 빼앗고자 할지라도 시련을 통하여 완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가시려고 잠시동안 흔들지만 그 결과는 반드시 이기도록 붙잡아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입니다.
    미쁘시다는 헬라어는 "피스토스(πίστις)"라고 하며 "신실하다"는 의미로 "믿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길에 갑자기 닥쳐온 시험 때문에 시험에 빠지지 말고 항상 함께 하시는 미쁘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승리하는 길을 선택합시다.




    '미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πίστις)는'신실(信實)하다'는 말로서 '믿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복음에 대한 지식이나 경건의 생활로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써만 그들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ός)는 종교적인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고 의학적으로는 실험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신약에서는 주로 '유혹'(temptation)이나 '시련'(trial)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유혹'이라는 것은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고(마 6:13;눅 11:4;계 2:10)
    '시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연단하기 위하여 허락하시는 것을 의미한다(마 5:4, 10;약 1:12;벧전 4:12).

    πειρασμός, οῦ, ὁ 스트롱번호 3986

    1. 시험(Test).  2. 유혹(Temptation).  3. 눅 4:13.
    발음 [ pĕirasmŏs ]
    어원  / 3085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시험(마 6:13, 행 20:19, 계 3:10), 시험하는 것(갈 4:14, 히 3:8), 시련, 재앙, 재난, 불행(눅 22:28).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 '미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πίστις)는'신실(信實)하다'는 말로서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복음에 대한 지식이나 그들이 자처하는 경건의 생활로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는것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써만 그들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었다(Hendriksen).


    πίστ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4102

    1. 믿음.  2. 신실성. 3. 엄숙한 약속
    발음 [ pistis ]
    어원  /  3982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믿음(마 8:10, 롬 1:8, 히 10:22), 도(행 6:7), 충성(갈 5:22), 신앙(빌 1:27, 히 6:1).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 본절에서 나오는 '시험 당함'의 의미를 '유혹'(temptation)과 '시련'(trial)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나누어 양자 택일의 개념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의미가 복합된 일원론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Grosheide).

    약 1:14의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 됨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욕심에 끌려 유혹을 받고 시련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러한 시련을 통하여 그들을 연단하시고 훈계하신다.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 이 말씀을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1. 시험이 임할 때 우리에게 회할 길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다는 의미로 하나님은 시험과는 무관한 분이심을 전제한다.
    2.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실 때 피할 길도 함께 예비하신다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시는 주관자이심을 전제한다(Hendriksen).
    그런데 본절에서는 '즈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쉰'(*,'...와 함께')이 사용되어 후자의 해석이 더욱 타당함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허락지 않으시며 또한 직면한 시험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시는 신실한 분이시다.












    11-17-2024(주일) 기도 응답의 확신
    암송 성구 #.26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Until now you have not asked for anything in my name. Ask and you will receive, and your joy will be complete.

    기도한다는 것은 신앙생활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기도를 구하다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구하다는 헬라어는 "아이테오( aitĕō. αἰτέω)"라고 합니다.
    '아이테오'라는 단어가 성경에서는 "구하다(마 5:42, 요일 3:22), 달라 하다(마 7:9, 눅 12:48), 달라다(마 14:7, 행 16:29), 청하다(행 25:3), 묻다(벧전 3:15)"라고 번역합니다.
    '아이테오'라는 단어와 "에로타오(ĕrōtaō. ἐρωτάω)"를 구별해야 합니다.
    '아이테오'는 "요구하다"라는 의미로' 에로타오'는 "질문하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구하라고 하였을 때의 기도는 내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요구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것과 일치하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해결하려고 구했으니 오히려 하나님은 육체의 가시를 그대로 갖고 지내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의 생각과 전혀 다른 길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내가 구하는 것이 하늘의 뜻과 일치할 때 응답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αἰτέω 스트롱번호154
    1.

    구하다

    2.

    묻다

    3.

    요청하다

    발음 [ aitĕō ]
    어원
    명령 αἴτει, 중간태 αἰτοῦ, 미래 αἰ- τήσω, 제1부정과거 ᾔτησα, 완료 ᾔτη- κα, 요일5:15, 미완료중간태 ᾐτούμην, 제1부정과거 중간태 ᾐτησάμην, 제1부정과거명령법 αἴτησαι, 미래중간태 αἰτήσομαι, 불확실한 파생어에서 유래
    • 1.
      구하다, 묻다, 요청하다[능동태와 중간태의 구별 없이 사용됨], 마7:10, 18:19, 27:58, 막15:43, 눅23:52, 행12:20, 고전1:22.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구하다(마5:42, 요일3:22), 달라 하다(마7:9, 눅12:48), 달라다(마14:7, 행16:29), 청하다(행25:3), 묻다(벧전3:15).


    ἐρωτάω 스트롱번호2065

    1.

    묻다

    2.

    요구하다

    발음 [ ĕrōtaō ]
    어원
    미래 ἐρωτήσω, 제1부정과거 ἠρώ- τησα, 2046에서 유래된 듯
    • 1.
      묻다, 질문하다, 눅22:68, 요1:25, 8:7, 9:21, 16:19,30, αὐτὸν τὰς παραβολάς: 비유에 대하여 그에게 물어보다, 막4:10, 요16:30.
    • 2.
      요구하다, 간청하다, 마15:23, 눅14:32, 요14:16, τινὰ πε- ρί τινος: 누구에게 무엇을 간청하다, 눅4:38, 요16:26, 17:9등.

    연관 단어

    󰃨 지금까지는...구하지 아니하였으나 - 여기서 '구하다'로 번역된 '아이테오'(*)는 '구하다', '질문하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에로타오'(*)와는 달리 '요구하다'란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그리고 후반절의 내용이 기도와 관련된 것이 분명하므로 본절에서는 '구하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리고 특히 '구하다'란 말이 현재형으로 언급되어 '지속적으로 기도하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L. Morris). 그리고 이 지속적인 기도는 다른 이름으로써는 소용없고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 질 때 응답이 있을 것이다. 한편 '지금까지는...아니다'라는 구절은 미래적 시간에는 어떤 일들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증보자 개념은 본절에서 아직은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아직 십자가 상에서 피흘림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성전의 휘장은 그대로 드리워져 있었으며, 신성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다(Calvin). 그러나 그의 구속 사역이 완성될 그날 곧 '조금 있으면' 제자들은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11-10-2024(주일)
    암송 성구 #.25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And this is the testimony: God has given us eternal life, and this life is in his Son.
    He who has the Son has life; he who does not have the Son of God does not have life.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생활에 성공하려면 다섯 가지 확신(確信)을 가져야 합니다.
    첫째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행하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를 믿음으로 은혜로 받은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것은 자랑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할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 받은 후에는 구원 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내 뜻을 세상에 펼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영접(迎接)"이란 한자는 " 맞을 영(迎)", "이을 접(接)"라는 뜻입니다.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맞이하여 연결한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내가 죄 가운데서 방황하며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내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내 마음을 비우면 그 빈 마음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이렇게 찾아온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합니다.

    좀 더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높은 하늘에 맑은 태양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 태양 빛을 손바닥으로 가리면 태양빛이 내게 비추이지 않습니다.
    다시 손바닥을 치우면 태양빛은 나를 비추게 될 것입니다.

    내 손바닥이 태양보다 더 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태양빛을 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양처럼 크고 빛나고 아름답게 반짝입니다.
    문제는 내 안에 감추어진 작은 손바닥과 같은 죄가 나에게 다가오는 태양빛을 멈추게 할 수 있고 가리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합니다.

    먼저 나의 죄를 깨닫고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주님을 모셔들여야 합니다.
    내 안에 주님을 모셔들이는 것을 "영접한다"고 합니다.
    천재 수학자요 물리학자인 블레즈 파스칼(Pascal, Blaise 1623.6.19~1662.8.19).


    수학자이며 철학자이었던 파스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로 올라가셨는가?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믿는다고 하는데 왜 나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을까?
    이러한 의문을 갖고 기도하며 또 질문하기를 반복하던 중에 드디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파스칼이 남긴 유명한 작품이 "'팡세'(Pensées,"생각"이라는 뜻)"라는 명상록입니다.
    파스칼은 '팡세'라는 그의 명상록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철학자와 수학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예수의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2:7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Are they not the ones who are slandering the noble name of him to whom you belong?

    만약 저와 여러분이 입만 살아 있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예수란 이름은 사람들 가운데 조롱당할 것입니다.

    2.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 받아야 합니다(베드로전서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비방을 받으면 행복한 자로다. 이는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심이라. 그분께서 그들 편에서는 비방을 받으시나 너희 편에서는 영광을 받으시느니라.


    보혈(寶血) precious blood
    성혈(聖血) holy blood


    1. 예수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영화롭게 되도록 해야 합니다(행 19:17, 살후 1:12)

    사도행전 19:17
    이 일이 에베소에 거하는 모든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에게 알려지니 그들 모두에게 두려움이 임하고 주 예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니라.

    데살로니가후서 1: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너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2. 예수의 이름으로 말해야 합니다(사도행전 4:16-18, 5:40-41)

    사도행전 4:16-18

    ...그들을 불러 명령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결코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라.

    사도행전 5:40-41
    이에 그들이 그의 말에 동의하고 사도들을 불러서 때리고 명령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 하고 놓아 주니라. 

    3.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행9:27-29).
    [바나바가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마스커스에서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선포한 것을 밝히 말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그리스파 유대인들을 논박하매 그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하거늘](행9:27-29).


    5. 예수의 이름으로 죽어야 합니다(행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슬피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죽는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노라, 하니](행21:13).

    6.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요13:13-14,요15:26,요16:23).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3,24).

    7.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야 합니다(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한 가운데 있느니라.]

    8.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골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골3:17).





    예수란 이름은....

    예수란 이름은 신약 성경에서 935회나 나옵니다.
    마리아가 처음으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이 이름을 들었습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1). 그 다음으로 요셉이 꿈에서 예수란 이름을 들었습니다. [이 일들을 생각할 때에, 보라, 주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녀에게 수태된 이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임이라, 하니라.](마1:20,21).

    예수란 이름의 예(JE)는 여호와(JEHOVA)의 준말입니다.
    예수는 여호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란 뜻으로 신성을 나타냅니다.
    수(SUS)는 SAVIOUR의 준말입니다.
    이는 주님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1. 예수란 이름은 구원의 근거(사도행전 4:12)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하늘 아래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느니라.]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among men, whereby we must be saved.
    이 이름으로 우리는 구원받아야만 하리라.(직역)
    MUST란 말에 주목하라.**

    2. 예수란 이름은 설교의 주제(사도행전 8:35, 고린도후서 4:5)

    오늘날 교회가 급속히 타락하는 것은 설교의 주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속화된 설교, 심리학적인 설교,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 설교,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설교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이에 빌립이 입을 열어 그 성경 기록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에게 예수님을 선포 하니라.](행 8:35)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다 정작 예수님을 선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전도의 주제, 설교의 주제는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선포하고 또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었음을 선포하노라.] 한글 성경에 오역이 되어 있어서 바로 잡았다.(고후4:5).

    3. 예수란 이름은 사역의 목표(사도행전 15:26)

    [이 사람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자들이니라.](행 15:26).  
    우리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일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서 일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4. 예수란 이름은 모든 것을 굴복시키는 권위(빌립보서 2:9-1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들로 하여금 다 예수라는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빌 2:9-10)

    5. 예수란 이름은 섬김의 동기(

    [...이는 그들의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들에게서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하였음이라.](요삼 5-8). 사도 요한은  주님의 사역자들을 물질로 후원하는 이들을 칭찬하였습니다.

    6. 예수란 이름은 기도의 힘(요한복음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3-14).

    7. 예수란 이름은 모든 말과 행동의 기준(골로새서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



    예수의 이름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예수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영화롭게 되도록 해야 합니다(행19:17,살후1:12).
    [이 일이 에베소에 거하는 모든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에게 알려지니 그들 모두에게 두려움이 임하고 주 예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니라.](행19:17).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너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1:12).

    2. 예수의 이름으로 말해야 합니다(행4:16-18,5:40-41)
    [...그들을 불러 명령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결코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라.](행4:16-18),
    [이에 그들이 그의 말에 동의하고 사도들을 불러서 때리고 명령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 하고 놓아 주니라.](행5:40-41)

    3.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행9:27-29).
    [바나바가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마스커스에서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선포한 것을 밝히 말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그리스파 유대인들을 논박하매 그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하거늘](행9:27-29).

    4.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 받아야 합니다(벧전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비방을 받으면 행복한 자로다. 이는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심이라. 그분께서 그들 편에서는 비방을 받으시나 너희 편에서는 영광을 받으시느니라.](벧전4:14).

    5. 예수의 이름으로 죽어야 합니다(행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슬피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는 것 뿐만 아니라 죽는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노라, 하니](행21:13).

    6.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요13:13-14,요15:26,요16:23).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3,24).

    7.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야 합니다(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한 가운데 있느니라.]

    8.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골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골3:17).

    9. 예수의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약2:7).
    만약 저와 여러분이 입만 살아 있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예수란 이름은 사람들 가운데 조롱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너희가 일컬음을 받는 그 귀한 이름을 모독하지 아니하느냐?](약2:7)
    예화) 알렉산더 이야기- Change your name, or Change your ways.





    고린도후서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For he says, "In the time of my favor I heard you, and in the day of salvation I helped you." I tell you,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이 구절은 이사야 49장 8절을 인용한 것으로 여호와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백성들이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의 의미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이다(Lowery).
    둘째는 구원의 때가 도래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Harris, Barrett).
    셋째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때가 도래했을 뿐만 아니라 그 때의 긴급성을 강조하는 것이다(Tasker).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이며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은혜를 받아야 할 시기는 바로 지금입니다.
    왜냐하면 한치 앞을 모르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런 죽음을 알리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죽음이 점점 더 가깝게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를 확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이란 다섯 가지 내용을 갖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도의 응답과 영적 싸움에서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것과 모든 죄악을 용서받았다는 것과 알 수 없는 내일도 주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 이 구절은 이사야 49:8의 인용이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으로 바벨론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이 놓임을 받고 완전히 회복된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바울은 이 예언의 말씀을 복음 시대에 적용하고 있다.
    바울의 이 인용이 뜻하는 바는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Lowery), 그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는 때가 도래(到來)했음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Harris, Barrett).
    바울은 본절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때가 도래했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 때의 긴급성을 강조하고 있다(Tasker).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본절의 앞 부분에서 언급한 바, 구원의 때가 도래했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 구원은 바로 '지금'(*, 뉜) 바울이 전하는 화해의 복음을(5:18-21)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나 이 '때'는 항상 지속되지는 않는다.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없어지는 날 곧 주께서 재림하실 날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눅 12:40), 도적같이 임할 것이다(살전 5:2).
    따라서 바울이 복음을 선포하는 그 순간은 곧 종말론적인 '결단의 때'라고 할 수 있다((Cullmann).
    또한 이 '결단의 때'는 각 개인에게 올바로 선택해야 할 책임이 부과된 '책임의 때'이다.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라는 외침을 듣는 사람들이 그 메시지와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을 경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며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Hughes).






    10-20-2024(주일)
    암송 성구 #.22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영광(榮光) -

    7. [요한복음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8. [요한복음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9. [요한복음 12: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10. [사도행전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16. [빌립보서 1: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께 영광(榮光)

    영광(榮光) - 영화 영(榮), 빛날 광(光)

     불 화(火) + 불 활(火),
     덮을 멱(冖)
    나무 목(木) = 사람 인(人) + 열 십(十)

    * 영화 영자는 사람이 십자가와 같은 무거운 짐 또는어려운 짐을 짊어진 후에 내가 하였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리면
      그 후에 불꽃이 피어오르듯이 하나님께 희생 제물이 연기가 되어 올라가듯(번제, 올라)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빛 광(光) = 작을 소(小) + 어진 사람인 발(儿)

    * 빛이 되려면 먼저 내가 작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작은 마음과 생각이 어진 사람의 흔적으로 새겨져야 합니다.
      사람은 욕망이 강하여 내가 무엇을 행한 후에 내가 하였다는 자기 의(義)에 도취되기 쉽습니다.

    헬라어의 영광 - 독사(dŏxa) δόξα, ης, ἡ 스트롱번호 1391

    1. 광명.   2. 눅 2:9.  3. 위엄
    발음 [ dŏxa ]
    어원  / 1380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광(마 4:8, 막 8:38, 눅 2:9), 광채(행 22:11), 영화(榮華)(요 17:5).
    • 1380. 도케오(dŏkĕō) δοκέω   

      1. 생각하다.
      2. ἐδό κουν πνεῦμα θεω- ρεῖν : 그들은 귀 신을 보는 것으로 믿었다
      3. εἴ τις δοκεῖ σοφὸς εἶνα ι: 만일 누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한다면
      발음 [ dŏkĕō ]
      관련 성경 / 
      생각하다(마 3:9, 눅 17:9, 요 11:13), 주관하다(막 10:42), 알다(눅 1:3, 요 20:15, 행 15:28), 가결하다(행 15:22), 유력하다(갈2 :6), 보이다(고전 12:22), 여기다(고후 11:16). [명] 생각(마 17:25, 21:28, 요 11:56), 의견(눅 10:36).


    * 헬라어의 영광이란 스쳐가는 가벼운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깊은 생각 즉 묵상의 결과라고 하겠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를 당했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다쳤는가? 보험금이 얼마나 되는가? 이런 생각을 먼저 한다.
      그러나 영광을 돌리려는 사람은 어려운 사건과 사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가?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혹시 어긋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줄 아는 것이라고 하겠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어로는 ‘카보드’,
    헬라어로는 ‘독사’

    세상 모든 피조물과는 전혀 다른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완전성과 탁월성을 뜻합니다.
    특별히 당신께서 신자에게 임재하실 때에 찬란한 빛이 동반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glory, 한글로는 영화로운 빛(榮光)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실체를 인간은 결코 상면할 수 없습니다.
    추악한 것과는 단 일초도 공존하지 않으시는 완전한 선이신 그분의 존전 앞에 죄로 찌든 인간이 서면 당장 소멸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매개체를 통해서 혹은 천사를 대신 보내어서 인간을 만나주십니다.

    대표적인 예로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또 시내 산을 덮은 구름이나 이스라엘의 성막위에 머문 구름을 통해 당신의 임재를 보여주시고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출 24:16, 40:35) 그러다 성자 하나님 예수는 사람이 직접 뵙고 만나도 죽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사랑을 받아 누릴 수 있도록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스데반이 순교할 때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회심시킬 때에 실제로 영광스런 빛 가운데 임재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실제적인 임재 앞에 서게 되면 엄청난 경외감에 사로잡혀서 아무 말도 못하고 얼어붙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그분께 내어드리며 그분의 처분만 기다리며 겸손히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자 자기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으로 망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듯이 말입니다.(사 6:3)
    그런 고백을 받으신 하나님은 진노의 형벌 대신 은혜의 구원을 베푸시고 당신의 자녀와 종으로 세워주십니다.
    그럼 넘치는 감격과 기쁨으로 저절로 그분을 향해 감사 찬양 경배를 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골고다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완전하게 실현되었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죄인들의 죄 값을 감당하시고 구원해주시는 은혜는 인간은 상상도 못할 하나님만의 완전한 의이자 탁월한 선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에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헬라어로 영광-‘독사’의 타동사형 ‘독사조’, 영어로 gloryfy로 번역됨)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라고 기도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주님이 이제 곧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서 성부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감당하심으로써 성부와 성자 모두가 영화롭게 된다고 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사실상 당신의 가르침, 섬기는 사역, 기적들, 그리고 십자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는데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그분이 자기 땅에 왔는데도 자기 백성들이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1:9-18) 사탄은 자기 종들을 충동시켜서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으나 사탄의 그 모략마저 당신의 영광을 온 천하에 완전하게 드러내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진리의 영, 성령님이 오셔서 제자들로 십자가에 드러난 그 영광의 실체에 대해 정확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셨던 천국 복음과 십자가 구원의 의미를 풀어서 성경으로 저작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의미를 밝힌 성경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기에 필요 충분한 영적 진리가 온전히 계시된 것입니다. 거기다 신자에게 그 진리를 잘 분별하여 자기 삶에 반영할 수 있도록 성령님이 평생토록 내주해주십니다. 신약시대에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하나님이 굳이 매개체나 천사의 모습으로 신자에게 영광 가운데 임재 해주실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사역이 이뤄지기 전이었고 성경도 완비되지 않았으며 성령님도 일시적 부분적으로만 역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통으로 계시하거나 직접 임재해서 당신의 뜻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던 때와 신약시대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 이후의 영광

    바꿔 말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개념을 바꿀 필요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단순히 당신의 위엄과 권능을 과시하려고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서 보듯이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특별히 이 땅과 인간을 다스리는 뜻과 계획을 밝혀서 보여주기 위해서만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신약성경으로 당신의 뜻이 온전히 계시되었으니까 더 이상 가시적인 존재로는 거의 임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신약신자들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그 영광을 인식할 수 없게 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가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절감하면 바로 그분을 대면한 것이고 그분의 영광도 가시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영적으로 접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어떤 일이 하나님이 아니고는 절대로 행할 수 없는 그분의 역사라는 확신이 들면 사실상 그분을 대면한 것입니다. 맨 처음 성령으로 거듭날 때부터가 그러합니다. 신자는 인식하지 못해도 연약한 피조물인데도 그분의 주권적 택함을 받아서 거부할 수 없는 그분의 불가항력적인 구원의 은혜를 입는 것부터 그분의 영광이 강력하게 임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성령의 중생의 은혜를 입은 신자는 자연히 “어찌 나 같은 천하의 죄인에게 이런 구원의 크신 은혜를 베푸시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아주 뛰어난 업적을 쌓은 존경 받을 만한 인물을 대면해도 “제게 너무나 큰 영광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분이 나를 만나주어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그런 차원과도 비교조차 안 되는 너무나 고귀한 은혜이므로 자연히 감사 찬양 경배를 올리게 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배 중에 십자가 은혜를 감사하는 찬양을 부른 후에 성도들은 진심으로, 단순히 종교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만의 탁월함과 완전함입니다. 신약시대에는 눈에 안 보이지만 그분의 영광은 더 다양한 방식으로 더 빈번하게 신자에게 비춰집니다. 대표적으로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깨닫고 소름이 끼치도록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 깨달은 대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신다고 절감하면 감격은 두 배로 늘어납니다.

    예배, 설교, 성경공부, 찬양, 기도, 성도교제, 전도나 선교, 교회와 지역사회에서 봉사, 이웃 사랑, 사회적인 선행 등등 신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면 반드시 그분이 함께 동행해주십니다. 신자도 지금 그분이 분명히 나와 함께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자신이 전혀 계획 의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내 인생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더 확실히 인식되고 그분의 뜻까지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그럼 그 자리에 엎드리고 눈물이 절로 흐르도록 감사와 경배를 돌리게 됩니다. 영광이라는 히브리어 카도사는 원래 ‘무게’나 ‘중압감’이라는 뜻인데 하나님이 신자에게 임재하면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기에 영광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고난 가운데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것입니까? 이 또한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통해서 당신다우심을 드러내신다면 그분의 영광이 함께 한 것입니다. 물론 전적으로 신자의 죄나 잘못으로 일어난 고난이라면 고난 자체에 그분의 영광은 없습니다. 죄 자체의 부작용과 폐해가 고난으로 닥쳤고 신자로서 그분의 징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 잘못으로 인한 고난 중에도 신자가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의 기도를 하면서 그 잘못을 고쳐나가면 하나님이 고난을 없애주고 더 거룩한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그런 구원을 인식하고 자신의 회개마저도 당신께서 간섭해주신 은혜라고 확신하면 그분의 영광을 대면한 것입니다. 그분께 한층 더 깊어진 감사 찬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욥처럼 믿음을 성숙시키기 위해서 또 아브라함처럼 열방 앞에 복의 근원으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의도적으로 신자에게 연단을 겪게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도대체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도 못하며 하나님께 원망만 하게 됩니다. 그러다 끈질기게 기도하며 그분과 영적인 씨름을 해나가면서 그 연단의 의미를 깨닫고 잘 순응하면 고난 중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대면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신자가 진정으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동행을 이어가면 그분의 영광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로 그분을 만나서 영광을 보려고 간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영광을 돌리는 방법

    그럼 신약 신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접한 신자는 자연히 감사 찬양 경배를 돌리게 된다고 이미 말씀드렸지만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다 가르쳐주셨습니다.

    마지막 만찬 때에 기도하신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었고 또 성자로서 성부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더러 전부 십자가에 죽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늘날 그런 정도의 핍박은 없으며 굳이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십자가에서 절정으로 드러났기에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을 자신의 삶에 구현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이 땅과 인간을 다스리는 목적과 방향은 오직 하나입니다.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베풀려는 것입니다. 창조 때부터 신구약시대를 거쳐서 마지막 날까지 인류의 전 역사는 십자가 구속사입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으면 온 동네에 잔치가 벌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이 한 명이라도 구원 받을 때에 하나님은 가장 영광스럽게 여기고 또 신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그 일에 기여하면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 개인의 인생이나 그가 속한 공동체에 현실적으로 풍요를 주던 고난을 겪게 하던 당신만의 구속역사를 이뤄나가는 것입니다. 신자가 겪는 어떤 고난이라도 그런 방향으로 그분의 역사가 임하면 그분의 영광도 함께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단지 현실적 축복을 받고 그에 상응한 감사헌금 혹은 교회봉사를 더 많이 한다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고난을 겪게 했으니 그분께 영광을 돌릴 것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틀린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이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10:31-33)

    ‘그런즉’이라고 시작하니까 바로 앞에서 설명한 내용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신자들이 시중에 파는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알다시피 당시에는 고기가 귀해서 우상 신전의 음란한 예배에 바쳐진 후에 판매되었습니다. 신자로선 그런 고기를 사먹기가 꺼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우상 자체는 실존하지 않으니까 그에 바쳐진 것도 아무 의미가 없으므로 신자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전제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믿음이 그 정도까지 확고하지 않는 연약한 신자나, 우상이 있다고 믿는 주변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가 자기들 계명을 위반한다고 비방할 가능성이 있다면 먹지 않는 것이 좋다고 권면했습니다. 신자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나 좋은 일을 다른 사람의 믿음을 위해서 또 복음 전파에 방해되지 않도록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스스로도 그런 위험이 있다면 평생 동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후에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라고 말했기에 바로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처럼”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종교적 관습이나 의식에 따른 경건한 행동보다는 오직 십자가 복음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가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행을 많이 하고 종교적 활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특별히 하나님께 헌금 헌물을 많이 바치고 종교적 행위를 열심히 뜨겁게 행한다고 해서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지는 모습이 드러나야만 합니다. 신자가 자신의 삶과 하는 일을 통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주변에 전파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신자부터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며 그분이 이 땅에서 살았던 삶대로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믿음이 연약한 신자는 그런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또 삶의 여러 측면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모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분의 탁월하심과 완전하심을 있는 그대로 순전하게 인정하면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 일은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라고 인식할 수 있다면 그분께 진정으로 감사하면 됩니다.

    그런 인식이 안 되어 당장은 잘 이해할 수 없는 경우라도 반드시 그분만의 거룩한 뜻이 있을 것이라고, 최소한 그분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진리 하나라도 겸허하고도 확고하게 인정하면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난 중에 원망과 의심을 앞세우기 보다는 그분의 뜻을 묻고 또 묻는 것부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다섯 솔라 – 오직 하나님께 영광

    Five Solas 다섯 솔라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다섯 솔라’ 시리즈의 마지막인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라틴어를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혹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차치하고, 최소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나는 내가 제일 중요해.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 하나님의 영광은 나하고 관계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고, 그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하시며 우리에게도 그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은 성경에서 우리가 놓칠 수 없는 분명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시작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선포합니다(창 1:1).
    누구도 아무런 의미나 목적 없이 무언가를 만들지 않습니다.
    더구나 인격체이신 하나님께서 또 다른 인격체인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창조의 목적은 시편을 비롯한 다른 말씀들에서 계속해서 나오는데, 이사야서에서는 특별히 하나님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동일합니다. 구원은 마치 ‘재창조’와 같아서, 성경은 구원을 새로운 창조로 말하기도 하고 창조에 사용된 언어를 그대로 구원에 적용하여 사용하기도 합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엡 2:8-10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목적도 창조의 목적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성경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이렇게 명령합니다.

    시 96:1-3 [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2]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3]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 당시의 가톨릭 교회도 하나님의 영광을 표면적으로 부정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가르침과 실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져 있었고 다른 것들이 영광을 (하나님과 함께) 얻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교회의 믿음과 삶에 있어 가장 높은 권위의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황과 의회가 결정한 전통이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이신데, 마리아나 다른 성인들, 사제들이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구원인데, 우리가 무언가를 거기에 더해야 하고 더할 수 있다고 가르쳐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과 실천에는 공통으로 하나님과 그분께서 하시는 일에 사람과 사람의 행위가 더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결과적으로는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이 함께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오직’은 이런 것들을 바로 잡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쯤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완전하고, 다른 피조물과는 구분되고, 무한히 위대하신 하나님의 속성이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하고 구분되며 무한히 위대하신 속성, 즉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거룩이라고 말하고,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겉으로 표현되는 것을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잘 드러난 말씀은 이사야 6장 2~3절입니다.

    사 6:2-3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스랍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분을 ‘거룩하다’고 선포했고, 온 땅에 충만한 그분의 거룩하심을 ‘영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어떤 면이 겉으로 드러나면 그것이 영광보다는 수치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완전하시고 무한히 위대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어떠하심이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그분께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결국,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혹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잘’ 혹은 ‘그대로’ 드러나게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말씀에 따라 모든 것을 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일입니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중보자가 되신 것을 인정하고 그리스도께만 나아가는 것이 그렇게 하는 일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내가 무엇을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믿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 구원임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시고, 하나님이 구원자시고, 하나님이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오늘날에 적용할 때, 두 가지 주의할 점을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첫째는, (당연한 얘기지만)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성취에 도취하여서 마치 내가 모든 것을 이뤄낸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말만 그렇게 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 생각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아름다움, 위대하심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더 말씀을 배우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그분께서 우리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중 단 하나라도 ‘내가’ 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합니다.

    두 번째는, 마치 우리가 무언가를 성취해서 얻어낸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 쉽게 말해 “하나님 덕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약간은 생각의 방향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핵심은 우리가 무엇을 해냈느냐, 성취했느냐가 아닙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잘’ 드러나셨냐가 핵심입니다. 내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잘 드러났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직장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고백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니가 거기까지 가려고 얼마나 아부를 떨고 돈을 갖다 바쳤는지 내가 아는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어떨까요? 아무리 잘 포장해서 말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직장에서는 말단 사원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도 눈속임으로 일하지 않고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한다면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늘나라의 소망 가운데 기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분명 영광 받으십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이루었느냐, 앞으로 무엇을 이룰 것이냐가 아니라, 지금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모습을 드러내고 있느냐입니다.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길 원합니다. “내 생각, 말, 삶에서 하나님은 바르게 드러나고 계신가? 나를 통해 보여지는 하나님의 모습은 왜곡되어 있지 않은가?” 유명한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한 헨델은 악보의 끝에 “S. D. G.”라는 약어를 기록했습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입니다. 우리 삶의 매 순간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 우리 삶의 끝에 “S. D. G.”라는 세 글자를 힘차게 외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마음가짐이나 언행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우리를 대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말과 품행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도 있고 드러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장 16절

    우리들의 착한 행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회개시키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동기가 된다면 그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흐뭇하시겠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성도들에게 선행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벧전 2장 12절

    진리가 아무리 옳다 해도 성도들의 행실이 악하다면 복음의 빛은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도 옳고,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의 됨됨이도 아름답다면 복음의 빛은 더욱 밝아질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많은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고전 3장 16절). 하나님과 하나 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닮아갈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장 5절

    “…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 1장 4~7절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이와 같은 아름다운 행실들을 교회 안팎에서 행한다면 믿음의 식구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선하다는 증거를 얻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본받지 말라 경고하고 있습니다(롬 12장 2절). 그러므로 이 악한 세대 속에서도 우리는 세상의 풍조에 동요될 것이 아니라 고운 말씨와 착한 마음씨, 아름다운 행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생각할 문제

    1.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선한 행실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한 행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33)

    유명한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쓴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유명한 논문이 있습니다. 
    루터는 이 논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요점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자유로운 만물의 지배자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충성스러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이 말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에서 자유함을 얻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유롭게 된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만물의 지배자로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육신적으로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웃과의 관계에서 종처럼 그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러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교훈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본문에 앞서 성도는 자기의 신앙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자유가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부터 삶의 중요한 문제까지 결정하며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상의 문제들을 선택하고 결정하는데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31절 말씀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최종적인 결론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삶의 목적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참된 성도의 신앙과 생활을 정확하게 요약한 핵심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모든 행위의 기준, 전 인생의 기반 역시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아주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 즉 그것이 먹는 것이든지 마시는 것이든지 생업의 일이든지 봉사의 일이든지 무슨 일이든지 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급함과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오늘 중추절을 맞이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하나님이 영광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목적을 바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존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그 목적인 무엇인지 알아야 분명한 삶을 살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을 상실하고 있다면 존재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존재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치창조의 수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적을 상실하면 자연히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는 마치 땅만 허비하고 세월만 허송하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목사님은 말하기를 "실패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목적이 잘못된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가장 잘 인식한 사도 바울은 빌 1:20-2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이 고백을 통해 자신의 존재목적이 예수님을 존귀하게 해드리기 위함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존재목적도 역시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우리 한국교회에 ‘목적이 이끄는 삶’ 열풍이 불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새들백 교회 릭 워렌 목사님을 통해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열풍이 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우리 한국교회가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되었다면 지금쯤 우리 한국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아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세상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을 모든 사람들이 살기 좋은 천국, 즉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것이 교회의 소명이고 사명이며 교회의 존재목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그 목적을 잊었습니다. 
    세상을 등졌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잊었습니다. 교회가 교회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부흥, 교회의 성장이 교회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성장이 목적이 되고, 교회의 부흥이 목적이 되어 온 교회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느 정도 그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세계에서 제일 큰 장로교회, 세계에서 제일 큰 감리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점점 커지는데 교회는 점점 그 생명력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는 점점 그 아름다움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의 존경을 받고 인정을 받던 교회는 점점 세상의 지탄을 받고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교회로 추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교회가 교회의 존재목적을 잃으면서 교인들도 존재의 목적을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자 되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은 목적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목적을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겠다고 하는 것만 달라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처럼 소중한 소명을 잊었습니다. 사명을 잊었습니다. 자신의 존재목적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잃어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의 능력은 상실한 사람들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삶의 목표와 목적을 수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성공만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과 소명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어리석은 삶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목적을 다시 한 번 세우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개념이 무엇인지는 잘 알아야 합니다. 영광의 개념을 생각할 때 항상 두가지 개념 즉, 하나님과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표현도 있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의 영광의 개념은 “하나님의 임재나 나타내심”의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2장에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행하실 때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11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갈릴리 가나의 한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드러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과 사랑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내고, 알려주고, 보여주며, 높이는 방편이 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신원 에벤에셀 박성철 회장은 장로님입니다. 20여 년 전 남의 건물 얻어서 조그맣게 봉제공장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물질의 복을 주시면 수입의 30%를 하나님 영광을 위해 쓰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오늘날 그 기업은 신흥재벌의 순위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사업을 하든, 운동을 하든, 공부를 하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일차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드러내고 보여주며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의 전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데 두었습니다. 

    롬 14: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제일의 목적이 바로 인간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목표를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말씀합니다. 사 43:7절에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 목적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나타나는 중요한 열매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32-33절에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자유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성도든지 아니든지, 아니면 나와 관계있는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관계없이 그들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유익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거미같이 자기만 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손해나게 하며 해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개미와 같이 부지런히 살기는 하는데 전적으로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부지런히 일하는 꿀벌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꿀벌은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갑니다만 그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삶의 결과는 반드시 영혼을 구원하는 것으로 연결되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여 영생 얻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은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 6:39-40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구원받아 영생을 소유한 우리 성도들의 삶은 어찌하든지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일에 목표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믿기를 권하고, 예수 믿게 하여, 우리와 같이 영생을 얻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 생애의 최대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한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해 그들의 영혼을 건져야합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서 시간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고 재능을 바치는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실 때 복음을 위해 생명까지 바친다면 최고의 영광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무슨 일을 하든지 궁극적인 목표를 영혼구원에 두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무엇을 하든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과 박해와 핍박을 각오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내 가족, 내 친지,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혹 아직도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어둠의 세계에서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습니까? 






    10-13-2024(주일)
    암송 성구 #.21  고린도후서 5:17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호스테 에이 티스 엔 크리스토 카이네 크티시스 타 아르카이아 파렐덴 이두 게고넨 카이
    ωστε ει τις εν χριστω καινη κτισις τα αρχαια παρηλθεν ιδου γεγονεν καινα τα παντα

    신약 성경의 언어 헬라어에서 "새롭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는 "카이노스(kainŏs)"와 "네오스(nĕŏs)"라고 합니다.
    '카이노스'는 질적으로 온전하게 새롭게 된 변화를 말합니다.
    반면에 '네오스'는 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휴대전화의 새로운 제품이 소개될 때 그 신제품을 가리켜 '네오스'의 변화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후에 그의 삶이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면 그 사람의 변화를 일컬어 '카이노스'의 변화라고 합니다.

    현대인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목회자가 목회자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을 때
    둘째는 교회가 지역사회에 유익이 되지 못할 때
    셋째는 교인들의 비신앙적인 삶

    이러한 이유의 근본적인 원인은 '네오스'의 변화에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카이노스의 변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지는 카이노스의 변화'를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표현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의미한다. 이 연합의 비밀에 대해 사도 요한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관계로 설명했다(요 15:1-7).

    새로운 피조물(크티시스. ktisis.  κτίσις)
    - 새로운 피조물이란 외적인 모양이 아니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있는 내적 능력을 갖는 것이다.

    2537. 카이노스  καινός, ἡ, όν 

    1. 새로운.  2. 쓰지 않은.  3. 알려지지 않은
    발음 [ kain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 1. 새로운.
      • a. 쓰지 않은, 써보지 않은, 마9:17, 막2:22, 눅5:38.
      • b. [전에는 없었던 이라는 뜻으로] 알려지지 않은, 낯설은, 놀라운, 막1:27, 요13:34, 행17:19, 계2:17.
      • c. [옛 것이나 낡은 것의 반대] 마26:28, 막14:24, 눅22:20, 고전11:25, 고후5:17, 갈6:15, 엡4:24, 벧후3:13, 계21:1.
    • 관련 성경 /  새(마9:17, 눅5:36, 계2:17, 마13:52, 막2:21, 고후5:17), 새로운(고후5:17, 계21:5), 새로 되는(행17:21).



    카이노스 정의

      1. 형식에 관하여
        1. 최근에 만든, 신선한, 최근의, 사용하지 않은, 입지 않은
      2. 실체에 관하여
        1. 새로운 종류의, 전례 없는, 참신한, 흔하지 않은, 들어본 적이 없는

    성경의 맥락에서 그리스어로 '카이노스'는 무엇을 뜻합니까?

    Kainos는 종종 "새로운"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로 성경 본문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의 맥락에서 Kainos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뿐만 아니라 신선하고 질적으로 다른 것을 가리킵니다.
    시간적 의미에서 단순히 젊거나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neos"라는 단어와 달리 Kainos는 더 큰 영적 갱신이나 변형을 의미합니다.

    νέος, α, ον 스트롱번호 3501

    1. 새로운.  2. 상징적으로 쓰일 경우. 3. ἐνδύσασθαι τὸν ν. : 새사람을 입다
    발음 [ nĕŏs ]
    관련 성경  /  젊은(요21:18, 행5:6, 딤전5:11). [명] 젊은 이(딤전5:1,14), 젊은 자(눅22:26).

    성경에 나오는 언어의 중요성

    언어는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됩니다.
    신약의 원래 언어인 그리스어는 뉘앙스와 의미가 풍부합니다.
    각 단어는 사용법, 맥락 및 역사적 배경에 따라 다른 측면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Kainos와 Neos와 같은 단어의 구별은 독자가 의도한 메시지를 더 충분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신약성경에서의 카이노스의 용법

    1. 예수의 가르침 속의 카이노스

    복음서에서 카이노스는 예수의 중요한 가르침에 등장하여 그의 메시지의 변형적 측면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9:17에서 예수는 새(카이노스) 포도주를 새(카이노스) 포도주 부대에 넣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은유는 단순히 기존 전통에 패치할 수 없는 새로운 신앙 접근 방식의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예수는 그의 언약이 모든 것을 바꾸는 새로운 관점을 가져온다고 강조합니다.

    2. 바울서신의 카이노스

    사도 바울은 그의 글에서 자주 카이노스를 사용했습니다.
    고린도후서 2:5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 창조물(카이노스)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고 보라 새 것(카이노스)이 왔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믿음을 통해 일어나는 완전한 변화를 강조합니다.
    그것은 옛 생활 방식에서 성령으로 활기차고 능력을 받은 생활 방식으로의 변화를 나타냅니다.

    3. 새 언약 개념과의 연결

    카이노스는 또한 새 언약에 대한 논의에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실 때, 그것은 카이노스 원칙을 낳습니다.
    히브리서 8:13에서 저자는 옛 언약이 쓸모없게 되고 있으며, 암묵적으로 카이노스 언약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새 언약은 용서, 내적 변화, 그리고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제공합니다.

    Kainos를 다른 그리스어 용어와 비교

    Kainos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다른 그리스어 단어와 비교하는 것이 좋습니다.
    Kainos는 신선함과 변화를 강조하는 반면, 시대나 시간에서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Neos는 그 변화의 깊이를 전달하지 않습니다.

    Kainos가 Neos와 다른 점

    Neos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것, 아마도 최신 자동차 모델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변형보다는 연대기와 더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Kainos는 심오한 갱신을 암시합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후 Kainos가 된 사람은 단순히 새로운 삶의 단계로 나이를 먹은 것이 아니라 영적 상태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카이노스

    요한계시록은 카이노스의 궁극적인 표현을 요약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서 "나는 새(카이노스) 하늘과 새(카이노스) 땅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흥분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혁신이 아니라 창조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완전히 회복됩니다.
    죄와 고통으로 점철된 옛 질서는 순수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자리를 내줍니다.

    카이노스의 영적 의미

    1. 갱신과 변형

    성경의 카이노스 개념은 신자들이 변화를 받아들이도록 격려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갱신에 대한 부름이며, 믿음에 뿌리를 둔 새로운 정체성을 위해 오래된 습관과 사고방식을 벗어던지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개인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계와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2. 미래에 대한 희망

    Kainos는 다가올 것에 대한 희망을 구현합니다. 신자들은 그들의 영적 삶의 궤적이 새롭게 되고 더 나은 것을 향한 길을 따른다는 것을 상기합니다. 이 희망은 시련과 고난 중에 인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3. 참여 초대

    Kainos를 이해하는 것은 또한 신자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 성경 읽기, 영적 각성을 촉진하는 커뮤니티의 일원이 됨으로써 성장을 기르도록 격려받습니다. 매일 Kainos 경험을 위한 기회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힘을 드러내는 은혜의 순간입니다.

    결론

    Kainos는 성경 이야기에서 엄청난 깊이를 드러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요 성경에서 마주치는 용어로, 피상적인 방식으로 새로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완전한 개혁을 나타냅니다. 이 단어를 이해하면 신자들은 신앙의 변화시키는 힘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도록 격려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갱신이 절실히 필요한 세상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공합니다.

    Q. 카이노스의 문자적 번역은 무엇입니까?
      A. Kainos는 종종 "새로운"으로 번역되며, 단순한 연대순의 새로움을 넘어 신선하고 질적으로 다른 것을 나타냅니다.

    Q. 신약성서에서 카이노스는 어디에 자주 언급됩니까?
      A. 카이노스는 마태복음 9:17, 고린도후서 2:5, 요한계시록 17:21 등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Q. 카이노스는 새 언약의 개념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A. 카이노스는 쓸모없는 옛 언약과 대조적으로, 예수를 통해 확립된 새롭고 변혁적인 관계를 구현합니다.

    Q. 카이노스는 신자들의 영적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나요?
      A. 카이노스를 이해하는 것은 신자들이 믿음과 행동을 통해 삶에서 개인적 변화와 갱신을 받아들이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

    Q. 카이노스는 신약에만 나오나요?
      A. 카이노스는 주로 신약성서에서 발견되지만, 그 개념은 다양한 형태로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공명합니다.

    Q. 카이노스는 신학적 토론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요?
      A. 카이노스는 새로운 삶, 재생, 그리고 신자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역의 본질에 대한 토론을 촉진합니다.

    Q. 카이노스는 성경적 맥락 밖의 일상 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까?
      A. 네, 새로운 시작과 변화라는 개념은 일상적인 결정과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Q. Kainos는 성경의 죄 개념과 어떻게 관련이 있습니까?
      A. 카이노스는 죄에 지배받던 옛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의로움으로 능력을 얻은 새로운 삶을 소개합니다.

    Q. Kainos와 Neos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차이점을 이해하면 독자는 기독교 신앙에서 요구되는 변화의 깊이를 인식하고 변화에 대한 오해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Q. 신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카이노스 생활을 추구할 수 있습니까?
      A. 신자들은 기도, 성경 공부, 지역 사회 참여, 그리고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반영하는 봉사 활동을 통해 Kainos의 삶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2937. 크티시스 κτί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2937

    1. 창조.  2. 창조하는 동작. 3. 창조된 것
    발음 [ ktisis ]
    어원 / 2936에서 유래
    창조(막 10:6, 히 9:11, 계 3:14), 피조물(롬 1: 25, 고후 5:17), 창세(롬 1:20), 제도(벧전 2:13), 지으신 것(히 4:13), 지음을 받는 것(갈 6:15), 만민(골 1:23).



    - 인종과 성(性)을 초월하여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여(14절)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을 이루면(갈 2:19, 20)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여기서 '피조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티시스'(*)는 창조행위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롬 1:20).
    즉 본 구절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영적인 교제를 갖게 되었을 때 그에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로운 창조 행위가 일어나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창조 행위를 오해하여 새로운 질료(質料)로 만들어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상상해서는 안된다.
    그는 여전히 육의 몸을 입고 있고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육체의 욕망과 죄에 굴복당할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롬 6:12,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그가 그리스도와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16절).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사람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을 따라 살게 된다.
    과거에는 그리스도를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 과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인정했으나 지금은 그런 차별을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만이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롬 2:28, 29; 고전 5:12, 13; 갈 3:28; 엡2:11-22; 골 3:11).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헬라어 직역 / 24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으니, 심판에 이르지 않고 반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 


    αμην αμην λεγω υμιν οτι ο τον λογον μου ακουων και πιστευων τω πεμψαντι με εχει ζωην αιωνιον και εις κρισιν ουκ ερχεται αλλα μεταβεβηκεν εκ του θανατου εις την ζωην.
    아멘 아멘 레고 휘민 호티 호 톤 로곤 무 아쿠온 카이 피스튜온 토 펨프산티 메 에케이 조엔 아이오니온 카이 에이스 크리신 우크 에르케타이 알라 메타베베켄 에크 투 다나투 에이스 텐 조엔.

    듣고(아크온. ακουων) - 현재분사형

    믿는(피스테우온. πιστευων) - 현재분사형

    얻었고(에케이. εχει) - 현재형

    옮겼느니라(메타베베켄. μεταβεβηκεν) - 현재완료형
     
    현재완료 : 어떤 동작이 과거에 이미 완료되었으나 그 결과가 현재에 남아있는 시상


    일으켜 세움 : 듣고 믿음

    그렇다면,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들을 어떻게 일으켜 세우십니까? 24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다면 영생(ζωὴν αἰώνιον)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가 일어나기 위해서, 예수가 요구하시는 능동적 사건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그리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나를 위해 파견하신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두 동사 모두 현재 분사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듣고 있는, 믿고 있는 그 상태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것은 바로 일으켜 세움을 받은 상태를 뜻합니다.

    듣는 것

    “듣는다”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 백성에게 요구하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헬라어 ‘아쿠오’(ἀκούω)에서 번역되는 듣는 행위는 인간의 선택적 행위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은혜 안에서, 사람이 능동적이며 자발적으로 듣고자 하는 결단이며, 순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듣다’는 것은 그냥 소리가 귀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귀가 듣는 그런 뉘앙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한 의식이 있는 들음이며, 분별력을 가진 들음이며, 앎의 들음이며, 깨달음의 들음이며, 따라서 결단에 준거한 순종이 뒤따르는 들음입니다.

    예를 들면,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무조건 들려오는 것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별하여 듣는 것입니다. 아쿠오, 알아서 식별하여 듣는 것입니다. 진짜와 가짜 음성을 분별하는 능력으로 듣는 것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과 삯꾼의 음성을 가려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 얼마나 깊이 내 영혼이 박혀있느냐에 따라서 들림과 그 들림에 의한 울림이 다릅니다. 잘 모르면서 들을 때에는 거역, 반역, 분쟁과 다툼만이 일어납니다.

    믿는 것

    또 하나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믿는다”(πιστεύω)는 어원적으로, 설득 당하여 믿게 되는 행위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에 의해서 주님을 믿도록 설득 당하여, 이제는 내가 주체적으로 믿겠다고 결단하는 자신의 능동적 행위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이란 당신을 설득하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와 함께, 그 은혜로 말미암아 당신 스스로가 의지적으로 결단하여 믿는 능동성이 오의적(奥義的)으로 결합된 구원적 사건입니다. 하여, 그곳에는 결단코 교만이 설 자리를 얻지 못합니다.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해서 인격적인 믿음 관계가 성립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죽은 자가 바르게 세워지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시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세움(듣고/믿음)은 영생의 현재성

    그런데 믿고 들음으로 세움 받은 자들을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로 간주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생이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는 미래형이 아니라, 완료형을 사용하면서, 저자는 듣고 믿는 것은 죽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따라서 이미 영생에 거하고 있다는 구원의 현재성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옮기다”로 번역된 헬라어 ‘메타바이노’(μεταβαίνω)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는 실제적 공간 이동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동사입니다. 말하자면 소속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마치, 군인들이 자신들의 소속부대가 있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망 군대가 아니라, 생명 군대로 전속 배치받은 것입니다. 소속이 바뀌면 지휘관도 바뀌도, 생활 규칙도 바뀝니다. 즉, 인생관과 세계관이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메타바이노의 ‘메타’라는 접두어는 변화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적인 효과를 강조합니다. 즉, 육적 체질에서 성령 중심의 체질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 주님을 믿는 자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원리로 삶을 살아갑니다. 영생이란 시간적인 면보다도, 지금의 상태, 현재 소속되어 있는 어떤 상태가 강조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말씀을 듣고 믿는 그 상태(현재분사형)가 바로 영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생의 미래성

    더욱이 요한복음은 영생 그 자체의 현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미래성으로 이어갑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을 듣고 주님을 믿는” 것이 영생이지만, 이러한 현재성은 미래로 향하여 열려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을 향해 열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29절 해석

    29절에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구절은 해석의 의견들이 다양하고 주장들 또한 많습니다. 그러나 부산고백교회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 좋겠습니다.

    실로, “선을 행한다”는 글귀에는 저자의 아주 중요한 신앙적 해석과 의도가 담겨져 있습니다. “행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포이에오’(ποιέω)는 단순히 뭔가를 행하다는 뜻을 넘어서, 어떤 원인이 있는 행위, 즉 창조적 행위를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특히 5장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역 관계를 표현할 때 사용되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누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하였는가?(5장11절), 여기에 포이에오가 사용되었습니다. 15절에서는, 자기를 고친(포이에오)이가 예수라로 하며, 16절 안식일에 행하는 일로 등장하며, 19절에서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포이에오)을 아들도 그와 같은 일 행한다(포이에오)고 합니다.

    선한 일은 분명 아버지 하나님만이 하시는 사역입니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의미에서 “선”은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께만 있기 때문입니다(막 10:17-8). 따라서 하나님만이 선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29절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들은” 다름 아닌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행하는 일은 아들만 행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포이에오는 아들의 포이에오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방식으로

    따라서 선을 행하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오로지 이 분만이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 “나오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포레우오마이(ἐκπορεύομαι)는 어떤 특별한 과정과 진행을 통과하여 나온다는 의미를 지닌 용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특별한 방식, 즉 십자가라는 고유한 방식으로 생명의 부활로 나오시는 것입니다.

    더욱이 여기서 “선을 행한 자들”이라는 복수형이 사용된 것은 선을 행하시고 생명의 부활로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이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보내신 분을 믿는 우리 그분이 걸어가신 특별한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생명의 부활나오게 된다는 증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영생을 가진 우리에게 미래형으로 열려져 있는 축복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보내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은 영생의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언젠가 그분이 걸어가신 특별한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시고, 지금 당신에게 주어진 영생의 축복을 누리시는 삶을 살아내시길 소망합니다.


    요한복음 5:24-29 / 사망에서 생명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 하시는 일들이 많지마는 그 중에서 두 가지, 즉 생명을 주는 일과 심판하는 일을 하십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일은 죄인들의 마음속에 거듭남으로 생명을 주시는 회개와 구원의 역사를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일은 종말의 때에 무덤에서 일어날 일입니다.
    (요 5:28-29)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사람이 죽는다는 것만큼 가슴아프고 슬픈 일이 없습니다.
    죽어 볼품 없이 시들어 버린 육체가 관속에 뉘어 차가운 흙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절망적인 것이 없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망이라는 말, 즉 죽음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사용되어지는 죽음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10-06-2024(주일)
    암송 성구 #.20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성경은 사람이 죽는 것을 죄의 결과라고 합니다(롬 6:23).
    그렇다면 성경은 죄(罪)를 무엇이라고 정의합니까?
    성경은 죄를 네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불신(不信) 요 16:9"
    둘째는 "불선(不善) 약 4:17"
    셋째는 "불의(不義) 요일 5:17"
    넷째는 "불법(不法) 요일 3:4"

    죄로 인하여 흙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육체의 삶이 끝이 났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죄는 세 가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아도취와 현실만족에 따라 더 이상 노력하기를 싫어합니다.
    둘째는 양심이 화인을 맞아 잘못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어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합니다.
    셋째는 영적 무지로 인하여 육체적인 삶을 선호하여 신령한 세계를 찾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죄를 회개한 후에 비록 육신에 갇혀 있는 제한적인 삶을 살아갈지라도 영원한 소망을 갖고 날마다 노력하며 수시로 반성과 회개를 통하여 보다 더 높은 세상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죄(罪)
    1. 불신(不信) 요한복음 16:9. 로마서 14:23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2. 불선(不善) 야고보서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3. 불의(不義) 요한일서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4. 불법(不法)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죄의 결과는 사망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무엇이 죽었는가?

    1. 노력하는 것
    - 현실만족, 자아도취

    2. 느끼는 것
    - 양심의 마비 / 죄와 고통에 대한 것
    - 회개를 모른다

    3. 생각하는 것
    - 육은 죽이는 것, 영은 살리는 것
    영의 생각


    성경학자 바클레이에 의하면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은

    첫째, 노력하는 것(effort)을 중단해 버린 것

    자기의 현실을 만족히 여기면서 더 이상의 전진을 포기해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자아도취(自我陶醉)
    실수와 실패는 더이상 조절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에베소서 4:13, 1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정지하거나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느낌(feeling)을 중단해 버린 상태

    이 말은 죄에 대한 느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감정이 정지된 상태입니다.
    고통에 대하여 무디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악을 보고 의분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입니다.
    슬픈 일을 보고 마음에 연민의 정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느낌, 감정이 죽었을 때에 그 사람은 분명히 그 마음도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심마비(良心麻痺) - 삼 마, 저릴 비


    셋째, 생각(thinking)을 중단해 버린 상태

    사람의 정신이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어서 더 이상 다른 새로운 진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정신이 폐쇄되어 새로운 진리를 거부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심한 말로 하면 정신이상자와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어도 영적으로는 죽은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한 진리, 곧 구원에 이르는 복음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는 새로운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묵상을 하지 않습니다.

    넷째, 회개하기를(repent) 중단한 상태

    사람이 편안한 마음으로 죄를 짓는 그 날이 바로 영적으로 죽는 날입니다.
    사람이 무슨 죄를 짓거나 짓지 않거나 간에 죄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질 때 그 날이 바로 영적 죽음의 날입니다.
    악을 행하고 죄를 지을 때 정상적인 사람은 두려워하고 고통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마음이 패역해지고 완악해짐으로 죄악에 대한 회개가 없어지게 됩니다.
    오늘의 시대가 바로 사람을 무시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악한 시대를 살아가도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두 가지 조건을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 말을 듣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또 하나는 "또 나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자가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믿되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상은 인격체가 아닙니다.
    돌부처는 인격이 없습니다.
    커다란 바위나 나무, 광대한 바다가 인격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사랑하십니다.
    때로는 죄악을 행할 때에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미국에서는 평생교회에 세 번만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세상에 태어나서 세례를 받기 위해서 교회에 가고,
    두 번째는 결혼할 때 주례를 받기 위하여 교회에 가고,
    세번째는 사람이 죽어서 장례식 때 교회에 간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름만 신자이지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신자가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거하므로 공포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주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열어놓으신 그 길이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또는 어떠한 희생이 따른다 할지라도 그 생명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예수의 길을 거부하는 것은 곧 죽음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게는 생명의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만 생명이 주어집니다.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도록 아들에게 권세를 위임하셨습니다.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복음 이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고난당하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아버지에게 있는 생명의 권한을 아들에게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심판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요 5: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심판의 권세를 아버지가 맡기셨습니다.
    일을 하시되 아들을 통해 모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권세를 아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뿐만 아니라 무덤속에 있는 자들을 모두 깨워 일으키는 권세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승리의 부활이지만 인간의 부활은 심판의 부활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조금도 다를바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잠자는 우리들을 큰 소리로 깨우실 때 우리는 각자 행위대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주님은 심판하십니다.
    이 모든 심판에서 그 기준은 "아버지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요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내 고집, 내 방식대로만 아닙니까?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오직 아버지께서 하시는 그대로 따라서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는 모든 권세를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For the Son of Man came to seek and to save what was lost.

    *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자의 온 것은...구원하려 함이니라

    -
    삭개오에 대한 구원 선언 후 그 선언에 대한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즉 이미 앞절의 주석에서 밝힌 바 있듯이 잃어버린 자에 대한 구원이란 소외되고 비뚤어진 인간을 다시 공동체로 복귀시켜 당당하고 품위있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 말은 온갖 죄악과 허물로 말미암아 혼돈과 파멸에로 향하는 인간들을 구해내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로 인도하시는 것을 뜻한다.
    이같은 선언은 사실 에수의 전체적 삶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병에 걸려 정상적인 인간 삶이 불가능한 귀신들린자(마 17:18), 문둥병자(17:14), 벙어리,귀머거리(막 9:25), 소경(막 8:23) 등과 같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며 삭개오와 같은 죄인들을 용서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는 모든 행위는 땅위의 평화(平和)를 위한 사랑의 치유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사람다와 질 수 있도록 하는 예수의 구원 행위는 오늘의 기독교가 우선적으로 따라야 할 과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의 선언이 이미 5:31, 32에서 언급되었는데 결국 삭개오는 이와 같은 선언의 실천적 모델(model)이 된 셈이다.


    10-06-2024(주일)
    암송 성구 #.20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은 죄의 결과 때문입니다(롬 6:23).
    지식을 얻기 위한 과정을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배움의 단계
    둘째는 경험의 단계
    셋째는 신앙의 단계

    배움으로도 경험으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단계가 곧 "죽음 이후의 세계"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죽음 이후의 세계는 학문적인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의 세계는 그 세계를 다녀온 사람에 의해서 알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경험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그가 경험했던 그 세계를 설명해야 합니다.
    문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그 세계를 진실되게 알려준 사례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영역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고만 합니다.
    유교에서는 효(孝)를 강조하여 생전에 지극정성으로 섬기지 못했기 때문에 제사(祭祀)로 모셔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듯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할 줄 아는 믿음을 다짐합시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의 최종적인 완전성을 증명하는 예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며 하나님의 섭리이다.
    이 죽음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며 최종적인 것이다.
    죽음 이후에 모든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



    09-29-2024(주일)
    암송 성구 #.19  요한복음 17:3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Now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ay know you,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you have sent.

    영생(헤 아이오니오스 조에. η αιωνιος ζωη) the eternal life.

    영(166)

    αἰώνιος, ον 스트롱번호166

    1. 영원한.  2. 시작이 없는  3. 시작이나 끝이 없는.
    발음 [ aiōniŏs ]
    어원  / 16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원한(마 18:8, 계 14:6), 영생의(눅 18:30, 요 17:2).


    생(2222)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명(마 7:14), 이 세상의 삶(고전 15:19), 생기(계 11:11).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앙 = 믿는 것(행 16:31) + 아는 것(요 17:3) + 행하는 것(약 2:26)
                       Believe         Know                                   Deed
                     πιστεύω           γινώσκω                         ἀκροατήριον
                   신(信)               지(知)                                     행(行)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유월절, 무교절, 오순절, 초실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이시다
    - 하나님과 본체가 되셨으나 땅으로 오시려면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셔야 하므로 사람의 몸을 잠시 입으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참 빛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은혜 언약(恩惠 言約) The Covenant of Grace
    행위 언약(行爲 言約)


    은혜의 언약 (The Covenant of Grace)

    Soli Deo Gloria!

    내가 너로 [뱀으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 3:15

    네 [아브라함의]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창 22:17-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신 18:18-1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39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 8:56

    믿음으로 모세는 […]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히 11:24,26,28

    우리는 위에서 인용한 창세기 3장 15절이라든지, 창세기 22장 17-18절, 그리고 신명시 18장 18-19절 말씀들을 읽으면서 구약 성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여자의 후손’, ‘아브라함의 씨’, 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약속 되어 있고, 또한 약속의 그 자손이 우리의 구원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약속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위에서 인용한 요한복음 5장 39절과 8장 56절과 같은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성경(특히 구약성경)의 이 중요한 약속들이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있고, 예수님이 약속의 그 자손임을 증거하셨다.

    이처럼, 타락 직후로부터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고 간직해 온 이 중요한 약속, 간단히 말해 하나님께서 구원의 자손을 보내시고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이 은혜로운 약속을 ‘은혜의 언약‘(covenant of grace)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은 이 은혜의 언약을 믿은 사람들과 그들에게 이 은혜의 언약이 점점더 구체적으로 계시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신약성경은 약속대로 오신 언약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 언약을 이루셨으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현실화 되어 나가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경은 약속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이며, 그에 대한 약속인 은혜의 언약을 이해하는 것이 성경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중요한 주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일한 언약을 여러번 확인하여 주심으로 새롭게 하심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은혜의 언약을 역사 속에서 여러번 재언급하시고, 그 때 마다 조금 더 살이 붙은 표현으로 계시해 주셨다는 것을 발견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약속의 자손에 대한 맨 처음 언급은 앞서 본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이다. 그 다음 창세기 18장 18-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사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따라 한 나라를 건설하시고, 거기서 천하 만민이 얻을 복이 흘러 나올 것임을 밝혀주셨다. 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건설하시려는 그 나라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도를 지키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또한 밝히셨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고 칭하실 하나님의 나라를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 후 창세기 22장 17-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시사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라고 하심으로 첫 조상 아담이 믿었던 “여자의 후손”이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나올 것임을 말씀해주셨다. 이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재확인시켜 주셨다.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지금 나열한 하나님의 약속들이 모두 똑같은 말씀들은 아니지만, 각 약속 속에 들어 있는 뼈대가 되는 내용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약속과 약속의 그 자손’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하나님께서 동일한 언약 곧 은혜의 언약을 여러번 확인하여 주심으로 새롭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은혜의 언약을 새롭게 확인해 주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장면이 출애굽기 19장에 나온다. 이집트(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시고 시내산 밑에서 공식적으로 하나의 나라로서 세워주시는 장면이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장면이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세운 언약 때문이라고,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때문임을 출애굽기 2장 2425절은 말한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것이 언약을 지키는 것임

    앞서 우리는 아담 때 부터 믿어 온 동일한 은혜의 언약을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여러번 새롭게 하셨다는 것을 보았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신 것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새롭게 해주셨던 그 은혜의 언약을 이루어 나가시는 일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보았다 (출애굽기 2장 24-25절). 과연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밑에 모인 이스라엘 민족을 “야곱의 집”이라고 부르셨다 (출애굽기 19장 3절).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시내산에서의 언약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약속으로서 은혜의 언약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틀린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을 지킨다는 것과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똑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 출애굽기 19장 5-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지켜야 언약의 백성으로 살게해주신다고 하셨다.
    2. 같은 장 8절에 보면 이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겠다고 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언약공동체로 출범하게 된 것이다.
    3. 그런 후에 출애굽기 20장 이후에 나오는 계명들은 하나님의 언약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할 실정법을 내리시는 것이다. 계명을 지켜야 언약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약을 지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자체에 하나님께서 그 분의 은혜와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약속 만이 있지, 우리 보고 무엇을 하라는 내용이 없다. 즉 구원과 관련된 이 복된 약속을 우리로서는 그저 믿는 수 밖에 없지 달리 무엇을 할 것이 없다. 그렇다, 사도 바울은 은혜의 언약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로마서 4장 16절

    구체적인 예로서 아브라함의 아들 중에 언약의 백성 가운데서 끊어진 예를 상기해 보자. 그것은 다름 아닌 이스마엘이다. 사도 바울이 그에 대해 성령으로 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갈라디아서 4장 22-31절). 이스마엘은 언약의 증표인 할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쫓겨났다.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 대로 이삭이 태어났을 때, 특히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사람들은 큰 기쁨 가운데 있었지만, 이스마엘은 이삭을 조롱했다. 이로 보건데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마음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러므로 믿을 수도 없었다. 이스마엘이 쫓겨난 것이 하나님의 어떤 명령을 어겨서가 아니었다.

    물론 이것은 그리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는 약속이 무엇인지에 따라 결정된다. 약속이 일방적인 선언이냐, 아니면 쌍방간의 의무에 대한 것이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네가 시장에 가서 국거리를 사오면 내가 국을 끓이마”하는 식의 약속이라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자식이 해야 할 것은 국거리를 사오는 것이 되겠지만, 부모가 “내가 시장에 가서 국거리를 사와서 국을 끓여주마” 하는 일방적인 약속이라면 자식이 부모의 약속을 믿고 국을 끓여주실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 약속을 마음 속에 지키는 것이다. 즉 ‘지킨다’는 것에는 ‘명령을 따른다’는 식의 의미도 있지만, ‘믿고 간직한다’는 의미도 있다.

    시내산에서 은혜의 언약을 새롭게 하신 이야기가 나온 김에, 모세 시대에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게하셨다는 이상한 이론도 돌아다니는데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잠시 적고 넘어간다.

    •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면 살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3장 20절)
    •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다 지켜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라디아서 3:21)
    • 오히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표준에 심히 못 미친다는 것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갈라디아서 3:24)
    • 과연 율법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죄 없이 함을 받으려면 나 자신의 그 무엇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을 가르친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위기 17:11) 이 말씀에는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서는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는 속죄의 법과,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그 속죄 제물을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다는 복음을 본다. 사람이 무엇을 준비해서 하나님을 만족케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을 사람이 의지하는 것임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 구약의 선지자들 역시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을 유일한 방법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임을 가르쳤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장 4절)

    예레미아 31장의 ‘새 언약’ 역시 은혜의 언약을 새롭게 하신 것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은혜의 언약을 다시 선언하시고, 때로는 더 구체적인 내용을 담아, 언약을 새롭게 하신 것을 보았다. 그것의 한 예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임을 보았다. 그런데, 예레미아 3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또 다시 언약을 새롭게 하실 것임을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아 31:31-33

    여기서 언급하신 ‘새 언약’의 핵심적 내용은 여전히 은혜의 언약임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알 수 있다:

    • 새 언약의 큰 내용은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의 내용이었다 (창세기 18장 18-19절).
    • 히브리서 8장에서 보듯이 이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맺어졌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 것이다.
    • 이 새 언약의 수혜자인 우리는 다름 아닌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의 상속자라고 로마서 4장 16절은 가르친다.

    그러므로, 예레미아 31장에 언급된 새 언약은 은혜의 언약과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은혜의 언약을 새롭게 하신 것이라는 의미에서 “새 언약”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우에 조금 더 풍성한 내용을 덧붙여서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다름 아니라 예전 시내산에서 새롭게 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능력’의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히 하신 말씀이 없으셨는데,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기록하시겠다는 독특한 은혜를 말씀하셨습니다.

    언약의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

    이처럼 은혜의 언약은 첫 조상인 아담 때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유일한 구원의 언약이다. 그 언약을 믿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이룰 자손이 왕이요,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로서 하나님 앞에 영원히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다 (신명기 18:18-19, 삼하 7:12-16, 시 110:4).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약속된 그 자손임을 증거하셨다 (요한복음 5:39, 8:56). 성경 역시 수차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약속된 그 자손이라고 증거한다 (누가복음 1:72; 마태복음 1:1,21; 히 10:12-18). 특히 예수께서는 마지만 만찬의 자리,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그 분의 피로 그 분에게 속한 사람들의 죄를 씻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 되는 은혜의 언약을 이루실 것임을 선언하셨다 (고린도전서 11:25).

    성경 전체를 통해 흐르는 유일한 구원의 언약

    과연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를 위해 다시 살아나시사 영원한 왕, 제사장,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중보적 왕권을 행사하시는 새 시대를 여셨다. 그로써 그림자 역할을 하던 모세적 제도, 다시 말 해 예수님 오시기 전의 언약공동체에게 주셨던 여러가지 실정법과 제도에 종료를 고하셨다. 그렇다고 예수님 오신 이후 새롭게 된 언약공동체 곧 신약 교회가 구약 교회와는 전혀 다른 언약 아래 있는 것은 아니다. 신구약 교회는 형식만 다를 뿐 본질은 동일한 은혜의 언약 아래 있는, 한 백성, 한 몸이다 (로마서 4:16; 11:17-18; 갈라디아서 3:7).


    행위언약이란 무엇인가? The covenant of Works

    창세기 2:15-17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 대부분은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언약들을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구속 언약, 행위 언약 그리고 은혜 언약으로 칭하였습니다. 

         구속 언약(팍툼 살루티스, pactum salutis, covenant of redemption, covenant of salvation)은 영원 안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성부·성자·성령 사이에 맺어진 협약입니다. 구속 언약에서 성부는 택자들의 구속자가 되도록 성자를 주시고 성자에게 택자들의 구속을 위한 조건들을 요구하시며, 성자께서는 기꺼이 이 조건들을 이루시는 데 동의하시고, 성령께서는 기꺼이 성자의 구속 사역을 택자들에게 적용하시기로 협약하셨습니다. 이 구속 언약은 창세 전(시간 전) 곧 영원에서 성부·성자·성령 사이에 이루어진 ‘내재적 삼위일체의’(intratrinitarian) 언약입니다.

         행위 언약은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첫 사람이자 인류의 대표자로서의 아담과 맺은 언약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관하여) 2항에서 행위 언약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처음 맺은 언약은 행위 언약이었습니다. 이 언약에서는 완전하고(perfect) 인격적(개인적, 전인적, personal)인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에게 또한 아담 안에서 그의 후손에게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행위 언약’(covenant of works)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 언약의 조건이 완전하고 전인적(全人的) 순종이었기 때문입니다. 행위 언약의 원리는 ‘행하라 그러면 산다’는 것입니다. 이 행위 언약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2문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20문에서는 ‘생명의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2장과 3장에 ‘행위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언약의 특징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언약들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특징적 요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언약의 양 당사자가 있습니다. 둘째는 언약 내용에 약속이 있습니다. 셋째는 약속에 따르는 조건이 있습니다. 넷째는 조건을 어기고 파기한 데 대한 벌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3장에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언약을 성립하는 네 가지 특징적 요소들은 나타납니다. 언약의 당사자로는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인 첫 사람이자 모든 인류의 대표인 아담입니다. 언약의 내용으로 약속된 것은 생명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약속과 관련된 조건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고 전인적(全人的)인 순종입니다. 이 조건을 어길 경우에는 사망의 벌이 선포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 관계에 더하여 언약 관계를 가지게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어 언약 관계 안에 산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의 복되고 영광스러움을 성경에서는 종종 혼인 관계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성경은 언약의 하나님과 그의 언약의 파트너인 언약 관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과의 관계를 결혼 관계로 말씀합니다(에스겔 16장; 호세아 2-3장).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 3:19).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피조물 관계에 더하여 언약 관계를 가지고 살 수 있게 해 주신 것은 참으로 크고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 7장은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관하여 말해 줍니다. 2장에서는 행위 언약(covenant of works)에 관하여 말하고, 3항에서는 은혜 언약(covenant of grace)에 관하여 말합니다. 이에 앞서 1항에서는 이 언약들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에 근거한 것임을 알려줍니다. “비록 이성 있는 피조물들이 그들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마땅히 순종해야 할 의무를 지니지만,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간격이 심히 크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자신을 자발적으로 낮추어(voluntary condescension) 주시지 않으면, 피조물은 결코 하나님에게서 그들의 복과 상급으로 어떤 것도 경험할 수 없는데, 그것을 하나님은 언약의 방식으로(by way of covenant) 나타내기를 기뻐하셨습니다”(1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1항은 지극히 높으시고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 언약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하나님 편에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어 주시지 않으면 이 언약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려 줍니다. 언약 관계를 맺기 위하여 하나님 편에서 자발적으로 낮추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인자하심, 선하심)이 언약 관계의 배경에 있음을 잘 이해하고 명심해야 합니다. 은혜 언약뿐만 아니라 행위 언약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based on) 기초하고(grounded on) 있습니다.

         행위 언약은 하나님이 타락 이전의 아담과 맺은 언약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언약을 행위 언약(foedus operum)이라고 일컫는 데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 본문에 ‘언약’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과, 행위라는 이름을 붙이면 이 언약에는 하나님의 은혜(또는 사랑)는 전혀 없고 인간의 행위만 강조함으로 이 언약을 순전히 율법적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순종 행위를 약속된 생명을 얻는 공로로 오해하기 쉽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1항에서는 2항에서 말하는 행위 언약과 3항에서 말하는 은혜 언약은 둘 다 하나님 편에서 그분 자신의 자발적인 낮추심(by some voluntary condescension on God’s part)에 근거(기초)된 것임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 언약과 행위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어 사람과 언약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에 근거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행위 언약을 “생명의 언약”(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20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2문)으로, 사랑의 언약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아담이 대표한 그의 모든 후손인 인류와)과 맺은 첫 언약을 일반적으로는 ‘행위 언약’으로 일컫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언약을 아담과의 언약, 율법 언약, 생명 언약, 자연 언약, 창조 언약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 아담과의 언약을 행위 언약이라고 하면, 이 언약에는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없고 인간의 행함만 강조한다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작성자들인 17세기 청교도 신학자들은 ‘은혜’라는 말은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곧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묘사하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타락하기 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나타내는 말로는 ‘은혜’라는 말 대신에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은혜’라는 말도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타락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 곧 구원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 구별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은혜 언약만이 아니라 행위 언약도 하나님의 자발적 낮추심(voluntary condescension)에 근거한 것임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1항에서 강조합니다. 지극히 높으시고 영화로우시며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피조물 관계(creator-creature relationship)에 더하여 언약 관계(covenantal relationship)를 가져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그의 언약 백성으로 살게 해 주신 그 자체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행위 언약(covenant of works)이란 첫 사람 아담(아담이 대표한 아담 안에 있는 그의 후손)과 맺은 언약인데, 완전하고 전인적인 순종에는 영원한 생명을, 불순종에 대해서는 영원한 죽음을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첫 아담과 맺은 행위 언약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빛을 비추어 줍니다. 성례(성찬과 세례)는 인류의 대표인 첫 아담이 실패한 것을 회복하여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구원을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우리를 위하여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성취하신 구속을 나타내고 보증하는 것입니다.


    언약(행위언약, 구속언약, 은혜언약)

    Ⅰ. 서 론

    성경은 언약(言約)의 책이다. 성경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때 구약과 신약을 말한다. 이 구분을 언약적 관점에서 말하면, 구약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고 신약은 예언대로 오신 메시야에 대한 성취의 말씀이다. 그리고 다시 신약은 재림(再臨)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으며, 초대교회 이래로 인류의 역사를 포함하는 교회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언약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성취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언약과 성취의 역사로 해석할 수 없다면, 성경해석에 있어서 많은 난관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초대교회 이래로 종교개혁시대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경해석의 관심은 언약이 항상 그 중심을 이루어왔다.
     
    교부(敎父) 시대에 터툴리안(Turtulian)이 신약(Novum Testamentum)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래로 성경이 언약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확증되었고, 오늘에도 성경의 이름을 구약과 신약이라고 사용하고 있으니 그 증거는 더욱 확실하다.
     
    그런데 성경의 틀을 이루는 언약 중에서도 창세기를 배경으로 한 세 가지의 언약인 행위언약과 구속언약 그리고 은혜언약은 이후의 모든 언약의 원형(原形)이며 근거라는 데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언약은 장차 오실 완전하고 영원한 성취자이신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指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의 완전하고 영원한 성취자로서, 오늘의 우리뿐만 아니라 과거의 열조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기 위한 영적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히 11:13)
     
    이러한 지식은 단순히 상상으로 얻어진 추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심으로 알려진 지식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뜻은 언약관계로서의 신(神)-인(人) 관계 안에서 유기적이고 점진적으로 인간 역사 속에서 드러내어지고 선명해진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와 언약의 관계는 구원과 구원의 역사 즉, 구속사(救贖史)를 이해함에 있어서 불가분(不可分)의 관계 속에 놓여지게 된다. 그러므로 언약은 창조- 타락- 구속으로 이어지는 구속 역사(구속사)에 있어서 중심에 놓여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 소고(小考)는 이 세 가지의 언약이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언약의 개념과 함께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 론

     언약은 구속역사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이어주는 연결체이다. 언약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과 피조물로서의 인간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격을 이어주는 다리와도 같다.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로서의 인간과 관계를 맺으신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과 언약 관계를 맺으신 그 관계 안에서 알려진다.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 관계를 맺으심을 통해서 그 자신과 그의 구원과 관계된 그의 뜻을 인간에게 계시하신다.

     1. 언약의 개념(槪念)

     1) 구약에서
     
    언약, 「한국컴퓨터선교회」, 기독정보검색, 2005. 인용 편집
    “언약”은 히브리어로는 베리트(????)인데 이 말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다. 통상적으로는 “자르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바라(???)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추측에 의거하면 창 15:17에 기록된 의식이 언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에서 언약은 어느 한 편이 다른 편에 부과하는 약정(約定)의 성격을 띤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세우실 때에는 일방적 성격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간은 동등한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법령을 인간에게 부과하시는 주권자이시다.
     
    「신학사전」, 신학사전편집위원회,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 445
    이런 점에서 볼 때 계약(testament)이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언약(covenant)이라고 함이 좋을 것이다. 즉 언약이란 신학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세우신 약속인데, 이를 세상 사람들이 상거래(商去來)에 많이 쓰는 계약이란 말로 쓰면 신학적 사상이 사실상 약해지기 때문이다.
     
    2) 신약에서
     
    70인역(LXX)에서 “베리트”는 신 9:15(μαρτυριον)과 왕상 11:11(εντολη)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서 디아데케(διαθ?κη)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일반적인 헬라어 용법에서 언약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지 않고 단지 하나의 약정 양도 계약서를 가리키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유언(遺言) 또는 유언장을 가리킬 뿐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이와 같은 용법은 좀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Ibid. p. 446
     
    그러나 고전(古典) 헬라어에서는 두 집단 가운데 한 집단이 압도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어 그 다른 집단에게 자신의 요구 조건을 명령할 수 있는 그러한 두 집단 사이의 협정에 이 말이 쓰인 예가 가끔 있었다. 그러므로 신약에 쓰인 “디아데케(διαθ?κη)”는 구약에 쓰인 “베리트(????)”보다 훨씬 더 특수한 뜻을 가지며, 이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한 집단에 의해 일방적으로 제기되고, 다른 한 집단은 그저 순응할 뿐 거절할 수 없는 협약 또는 협정(agreement)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하여 디아데케(διαθ?κη)라는 단어는 많은 다른 단어들과 같이 하나님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 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았다. 많은 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어 왔지만 이 단어는 유언보다는 언약으로 번역되었다.
     
    3) 태초 - 언약의 원형(原形)으로서 아담과의 언약
     
    언약의 개념은 계시를 통해서 이 개념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전에 이미 역사에서 발전 되었다. 하나님께서 노아 및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기 전에 이미 인간들 사이에서 언약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태초의 에덴에서 맺은 아담 언약(창 1:28)의 발전이었다. 그 후로 인간들은 이 같은 준비과정을 거쳐서 죄로 분열된 세상에서 언약을 맺는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고, 하나님이 계시를 통하여 인간과의 관계를 언약관계로 제시할 때 그것을 곧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언약의 개념이 인간에게서 시작되었다거나 하나님이 자신과 인간의 상호관계를 서술하기 위하여 이 개념을 빌려다 쓰셨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언약 생활의 원형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존재 안에서 발견된다. 인간에게서 발견되어지는 것은 원형의 희미한 모형(模型)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인간의 삶을 이와 같은 언약 관계의 삶으로 제정하셨기 때문에 언약 개념은 사회생활의 여러 가지 기둥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언약 관계가 이미 발전된 이상 하나님은 공식적으로 이 관계를 자신과 인간과의 실존하는 관계의 표현으로 소개하셨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 관계는 아브라함과의 공식적인 계약 이전 곧 태초의 아담부터 존재 했었다.
     
    4) 언약의 당사자(當事者) 언약,
     
    「한국컴퓨터선교회」, 기독정보검색, 2005. 인용 편집언약의 당사자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된다. 어떤 학자들은 언약의 당사자를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으로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인간은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을 때도 있고 때로는 “죄인”, “선민(選民)”,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 이라는 한정어(限定語)가 붙을 때도 있다.
     
    다른 학자들은 삼위일체를 대표하는 성부 하나님과 선민(選民)을 대표하는 그리스도를 언약의 당사자라고 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학자들은 두 개의 언약을 말한다. 곧 성부와 성자 사이에 채결된 구속 언약(Pactum Salutis)과 이 언약에 근거해서 맺어진 하나님과 선민 또는 택함을 받은 죄인 사이에 맺어진 은혜 언약을 구분한다.
     
    조직신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언약의 당사자를 하나님과 인간이라고 보는 것보다 성부와 성자로 보는 것은 더 적합한 사실이다. 이 표현은 롬 5:12-21과 고전 15:21-22, 47-49의 지지(支持)를 받고 있으며 구속 언약과 은혜 언약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언약의 통일성을 말하고 있다.
     
    구속 언약과 은혜 언약을 구분하는 이 같은 생각이 성경의 지원(支援)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행위언약에 대립되는 두 개의 별개의 독립된 언약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즉 은혜 언약과 구속 언약은 하나의 복음적인 긍휼의 언약의 두 양상(樣相)으로서의 메시야 언약인 것이다.

     2. 행위(行爲) 언약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맺은 언약 즉 선악과를 금지한 것에 관련된 언약을 16세기 말에 이르러 행위계약 또는 생명의 언약 혹은 법적 언약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말에 보다 체계적으로 나타난 행위 계약 교리의 역사적 연대기(年代記)를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행위 계약 교리가 언약신학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인(否認)할 수 없다. 「신학사전」, 신학사전편집위원회,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 448
     
    그리고 이 언약 관계에서 하나님은 일정 기간 동안의 순종을 조건으로 미래를 완전하고 복되게 만드셨다.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7 장 -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관하여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해설, A.A.하지 著, 편집부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pp. 160-161
     
    1절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는 멀어졌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낮추시사 은총의 계약을 인간과 맺으심으로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셨다. 비록 이성과 의지와 양심을 지닌 인간이 창조자로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과 보상을 받는 것은 이 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은혜의 계약이 순종을 가져온다.(사40:13-17, 욥9:32-33, 삼상 2:25, 시100:2-3,113:5-6, 욥22:2-3, 35:7, 눅 17:10, 행 17:24-25)
     
    2절 - 인간과 맺어진 첫 번째 계약은 행위의 계약이다.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완전하고 개인적인 순종에 의하여 생명을 약속받았다.(갈 3:12, 호 6:7, 창 2:16-17)
     
    2) 행위 언약의 성경적 근거
     
    “행위 언약”이라는 용어는 성경에 없기에, 일부 학자들은 행위 언약을 부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행위 언약의 개념은 성경 전반(全般)에 걸쳐서 표현되어 있다.
     
    ① 창세기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먼저 계약을 체결하는 양측(兩側), 즉 하나님과 인간이 있다. 그리고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과하신 순종의 조건이다. 그리고 약속, 즉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이 있다. 「벌코프 조직신학개론」, 루이스 벌코프 著, 박희석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p. 117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신 것”(창 3:24)은 언약을 범한 자가 영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교시(敎示)하는 것이다.
     
    ② 로마서 5:12-21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對比)하여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이 많은 사람을 죄인 되게 한 것 같이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이 많은 사람을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였다고 가르치고 있다. 아담의 범죄는 자신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죽게 했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생명 안에서 왕 노릇(롬 5:17)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담이 인간을 대표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만일 아담 한 사람이 순종했다면 영생이 모든 사람에게 왕 노릇하게 되었을 것이다. Ibid. p. 117
     
    그러므로 죄의 전가(轉嫁)와 다른 한편으로는 의(義)의 전가를 관련지어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한 내용은 아담이 그리스도처럼 언약의 머리였다고 생각해야만 설명할 수 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표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의를 공유(共有)하고 있다면, 우리가 같은 이유에서 아담의 죄책(罪責)을 공유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③ 호세아 6:7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는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행위언약이 맺어졌고, 아담이 이를 지키지 못함으로써 인류의 죽음이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행위 언약은 타락 후에도 유효한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알미니안주의자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했다는 의미에서 폐기되었고, 행위 언약은 영생을 얻기 위한 지정(指定)된 수단으로서 폐기된 것이다” -「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 문화사, 2004. p. 56 - 와 개혁주의자 사이에 상당한 견해의 차이가 있다.
     
    알미니안주의자에 의하면 아담이 타락하여 계약을 범함으로 말미암아 이 계약은 완전히 폐기되었으므로 아담의 후손들은 그 계약을 지킬 능력도 없지만 지킬 의무도 없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행위 언약을 맺기 이전에 이미 정해진 창조의 질서 “본래 교의신학(조직신학) 아래 전통적으로는 인간의 타락을 기점으로 행위언약(타락 전)과 은혜언약(타락 후)으로 나누어 성경의 언약을 이해해 왔다. 그러다가 성경신학의 발전과 함께 타락 전 창조 당시에 맺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창조언약으로, 타락 후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을 구속언약으로 부르게 되었다.” -「구약성경과 그리스도」, 김두석, 칼빈대학교출판부, 2003. p. 93 - 에 속한다.
     
    언약의 유무(有無)와는 관계없이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의 명령에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한 번 언약을 범한 후부터 어떤 인간도 행위 언약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기독교 교리개설」, 김성린,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p. 113-114
     
    4) 행위 언약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다.
     
    행위 언약은 영생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는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이 언약은 폐기된 것이다. 아담 이후 행위 언약의 조건을 충족시킴으로써 영생을 얻은 자는 한 사람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받은 자는 순종을 통하여 믿음을 증거 하게 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진정한 순종으로서의 금식령(禁食令)(창 1:17)을 성취하는 것이다. 첫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창 3:5)
     
    그러나 둘째 아담은 광야에서 부딪친 사탄의 유혹에서 승리하셨다.(마 4:1-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빌 2:6-8) 이렇게 둘째 아담은 첫째 아담에게 주어졌던 금식을 온전한 “자기 비움”으로 성취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에게 주어졌던 행위 언약 또한 장차 언약대로 오셔서 성취하실 그 분 즉 메시야에 대한 언약인 것이다.

     3. 구속(救贖) 언약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7 장 -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관하여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해설」, A.A.하지 著, 편집부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pp. 165-166
     
    3절 -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첫 번째 계약에 의해서는 생명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두 번째 계약을 맺으신 바 보통 우리는 이것은 은혜의 계약이라고 부른다.(갈 3:21, 롬 3:20-21, 8:3, 창 3:15, 사 42:6) 이 은혜의 계약이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과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을 말한다. 이때에 하나님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이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고(막 16:15-16, 요 3:16, 롬 10:6-9, 갈 3:11) 생명을 얻기로 정해진 모든 사람들에게(겔 36:26-27, 요 6:44-45, 5:37) 성령을 주시고 믿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시고 믿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4절 - 이 은혜의 계약은 성경에서 종종 유언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언자로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의 유언을 효과 있게 하였으니, 그는 그의 유언대로 영원한 기업을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상속해주셨다.(히9:15-17,7:22, 눅22:20, 고전11:25)
     
    2) 구속 언약의 필요성 - 은혜 언약의 토대(土臺) 위에서
     
    인간이 범죄 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영적 교류는 사실상 단절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언약을 맺음에 있어서 종전처럼 인간과의 직접적인 언약을 맺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은혜 언약을 맺기에 앞서서 구속의 언약을 맺을 필요가 생긴 것이다. 구속 언약은 은혜 언약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하나로 볼 수 있다. 다만 은혜 언약은 구속 언약의 토대 위에 세워진 언약이다. 「기독교 교리개설」, 김성린,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p. 132-133 편집
     
    3) 구속 언약의 성경적 근거
     
    성자께서는 자발적으로 범죄 한 인간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고, 성부께서는 그것을 조건으로 구속의 축복을 성자를 통하여 택한 자에게 주며 더불어 성자에게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시겠다는 성경적 근거이다.
     
    ① 구속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영원 전부터 있었다.(엡1:4, 3:11, 살후 2:13)
    ② 그 계획은 언약의 성격을 지녔다.(요5:30, 17:4-6)
    ③ 메시야 예언 가운데는 언약의 요소들인 당사자(시2:7-8)와 조건(시40:7-8)과 약속(요 17:5, 24)이 들어 있다.(삼하 7:12-13, 시 89:3-4)
    ④ 「벌코프 조직신학개론」, 루이스 벌코프 著, 박희석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p. 138
     
    언약 개념을 메시야와 직접 연결하는 구절로서 여호와의 종에 관해서 말하는 시편 89:3과 이사야 42:6이 있는데, 이 연결은 여호와의 종이 단순히 이스라엘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더욱이 메시야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말하는 절들이 있는데, 이것은 언약적 용어이다.(시 22:1-2, 시 40:8)
     
    4) 구속 언약의 당사자 - 메시야
     
    성자(聖子)는 구속함을 받도록 영원 전부터 예정된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다.(엡 1:4)하나님은 아담의 범죄 직후 은혜의 언약을(창 3:15) 아담에게 하셨고, 그 후 아브라함과 족장들을 통해 계승시켜 왔다. 그리고 이 구속 언약은 장차 다윗의 자손으로(마 1:1)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구약과 신약 모두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은혜 언약인 것이다.
     
    5) 보증인으로서 언약을 성취하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구속 언약에 있어서 선택함을 받은 자를 대표하여 성부와 언약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이 언약의 보증인이 되신다.(히 7:22)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범죄 한 인간의 신분으로 낮아지심으로써 마지막 아담이 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구속의 언약은 속죄함을 받은 죄인들에게 있어서는 은혜 언약의 근원이 되지만,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행위 언약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속 언약으로 말미암아 성자를 희생의 제물로 받으시는 것은 “공의(公儀)”의 속성 때문이다. 죄가 있음에도 아무 근거가 없이 죄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참으로 구속의 언약은 은혜 언약을 성취시키기 위한 법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개설」, 김성린,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p. 135-136 -
     
    이처럼 성부 하나님과 구원 받을 자의 대표인 성자 사이에 설정(設定)된 인간 구원을 위한 언약이 구속 언약이다.
     
    6) 선택으로 인한 구속의 제한(制限)
     
    구속의 언약이 선택의 작정과 혼동되는 일이 가끔 있지만, 둘은 동일하지 않다. 선택의 작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의 후사(後嗣)들이 될 사람들의 수(數)를 결정하는 반면에, 구속의 언약은 은혜와 영광이 죄인들을 위해서 마련되는 길을 나타낸다. 논리적으로는 선택이 구속의 의논(議論)에 앞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보증이 되신 것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람들만 제한적 “특별한 구속 혹은 제한적 속죄 -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택자들만 구원하려는 것이며 또한 실제적으로 그들만이 구원을 획득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어떤 특정한 죄인들 대신에 당하신 형벌에 대한 대속의 인내였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는 것에 부가해서 자기와 그들을 연합하는 믿음을 포함하여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획득하셨다.
     
    믿음의 은총은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가 위해서 돌아가신 모든 자들에게 빠짐없이 적용되며 그러므로 해서 그들의 구원을 보증하신다.”-「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D.스틸/C.토마스 共著, 김남식 譯, 도서출판 엠마오, 1992. p. 20 - 으로 구원하신다.
     
    「벌코프 조직신학개론」, 루이스 벌코프 著, 박희석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p. 139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 17:6)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 17:12)
     
    7) 구속 언약의 성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약속으로서의 예언
     
    그러므로 언약의 당사자인 성부께서 언약의 또 다른 당사자인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고(요3:16), 성자로 하여금 언약의 조건에 따라 세속적인 고난과 죽음을 당하게 하셨고(롬3:26), 언약의 약속에 따라 부활케 하시고 승천(昇天)케 하여 성부 우편에 앉히시고(벧전3:22), 보혜사(保惠師) 성령을 보내어 교회를 교훈하시고, 지도하시고, 보호하시다가(요14:26) 마침내 성자의 재림과 심판을 통하여 성자와 택한 자를 영화롭게 함으로써(엡5:6,12) 구속 언약을 성취하신다.
     
    과연 이로 보건대 구속의 언약은 은혜의 언약이다. 오직 죄 밖에는 지은 일이 없는 우리가 오직 구속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그저 “은혜”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더구나 “택(擇)함과 불택(不擇)함”이라는 “이중 예정” “이는 선택(Election)과 유기(Reprobation)로서, 인류 중 얼마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기로 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말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간과하기로 결정하시고 그들의 죄를 벌하기로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이다.” -「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문화사, 2004. p. 43 편집 - 의 일이 이미 창세전에 아버지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작정과 예정의 섭리(엡 1:3-14)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없는 감사와 소망과 위로를 주는 것이다.

     4. 은혜(恩惠) 언약

     은혜 언약의 사상은 종교 개혁 당시부터 거듭 강조되어졌다. 아담의 범죄 직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셨고, 그 후 아브라함과 족장들을 통해 재천명(再闡明)되어 왔고, 마침내 새 언약 “주께서 가라사대 볼찌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렘 31:31이하)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 8:13) - 에서 완전한 실현에 이른 것으로 간주하였다. “블링거”는 이를 “유일하고 영원한 계약” 또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중의 언약”이라 불렀다. 또한 칼빈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맺은 언약 관계의 대표적인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는 이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셨고, 그리스도의 성취가 새 언약을 이룬다고 하였다.「신학사전」, 신학사전편집위원회,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p. 449
     
    1) 은혜 언약의 특징
     
    은혜 언약은 구원에 관하여 인간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은혜로운 언약이며, 구원의 계획과 성취와 적용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이 모두 동원된 언약이다.(엡1:3-5, 요 19:30, 요 16:7-8) 또한 시간이 흘러도 효력이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언약이며(창 17:9, 삼하 23:5), 세상사람 모두가 아니라 택함을 받은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특수 언약이다. 그리고 신앙과 순종을 조건으로 하지만, 인간의 공로가 필수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조건적이며(엡2:8), 계약 당사자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방적인 호의(好意)로 성립된 편무(片務)계약이다(히6:17).
    또한 은혜 언약은 시대에 따라 여러 형태로 주어졌으나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요, 너희는 내 백성”이라는 약속의 내용(창17:7, 출19:5-6, 렘31:33)과 약속의 조건이 “믿음”이라는 사실(창15:6, 롬4:9-11) 그리고 중보자가 언제나 동일하다는(딤전2:5,갈3:19-20,히13:8) 일치점을 갖는다.
     
    2) 은혜 언약의 계약 당사자「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 분화사, 2004. p. 65제 1 당사자는 하나님으로서 제 2 당사자인 인간이 당신에게 대해 가지실 관계를 솔선하여 은혜롭게 결정하시는 당사자이다. 인간은 목적 자체(생명의 교통의 언약)로 볼 때는 피택자이다. 그러나 목적에 대한 수단(합법적 관계의 언약)으로서 넓은 의미의 언약에서는 객관적 협약(協約)이므로 언약의 생명을 받지 못하는 자들도 포함된다. 그렇지만 구원의 실현이라는 수단적 의미에서는 신자들과 그 자녀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은혜 언약의 약속과 요구
     
    은혜 언약의 약속으로서는 하나님과 백성의 참된 관계 회복, 영적 상징으로서의 현세적 축복의 약속, 죄의 사유(赦宥)와 양자(養子), 칭의(稱義)의 약속, 최종적 영광의 약속(영생) 등이 있다. 또한 은혜 언약에는 믿음과 순종의 요구가 있다. 믿음으로 언약과 그 약속들을 받아 언약의 생명에 들어가고, 새 생명의 원리에 따라 새로운 순종으로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 Ibid. p. 65
     
    그러나 이 요구는 약속 이행(移行)의 조건으로서가 아니고 약속의 결과인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자에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언약의 약속이 이루어지면 새로운 생의 원리에 따라서 힘주시는 자 안에서 하나님께 복종하며 헌신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까지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엡 1:8)
     
    4) 은혜 언약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리스도는 언약의 중보자이다. 그리스도는 특별한 중보자이신데, 그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개재(介在)하셔서 중재(仲裁)만 함이 아니라 실제적인 능력을 가지고 보증인과 율법의 완성자로서 그가 대표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정상(正常) 관계를 갖도록 회복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말로써 우리의 죄를 변호하시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 지불해야 할 죄책을 대신 지불함으로써 율법의 의를 완성시키신 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리신다.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속한 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며 진리에 따라서 생활함으로써 구원을 완전하게 하도록 인도하며 촉구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그를 대신하여 사신(使臣) “바울의 직책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화해의 메시지를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환이요, 증인으로서의 직책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QA시스템 성경연구시리즈」, 강병도, 기독지혜사, 1991. p. 213 - 을 세워서 봉사하게 하심으로 이 일을 계속하신다.(고후 5:20)
     
    5) 언약 안에 있는 회원(會員)
     
    ① 성인(成人)
    성인은 신앙과 신앙 고백을 통해서 합법적 협정으로서의 언약에 들어갈 수 있다. 신앙은 유일한 방법이다.
     
    ② 신자의 자녀들
    신자의 자녀들은 합법적 관계로서 언약에 들어간다. 그 자체가 생명의 교통으로서의 언약관계가 아니고 조만간 현실이 되리라는 합법적인 관계이다.
     
    ③ 비중생자(非重生者)
    합법적 협약으로서 언약에 참여된 비중생자는 회개하고 신앙을 가진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언약의 파기자(破棄者)로서 심판 받게 된다. 「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문화사, 2004. p. 66
     
    은혜 언약 안에 있는 회원에 대하여 논의할 때, 명심해야 할 것은 단순히 법적인 협정으로서의 언약과 하나님과의 친교를 통하여 실현되는 언약과를 구별하는 것이다. 저들의 믿음이 참 믿음이 못되고 고백이 진실 되지 못할 때는 진정한 의미에서 언약 관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신앙고백을 하지 않거나 언약에 수반(隨伴)하는 책임을 감당하기를 거부한다면 이는 언약을 파기한 자로 간주(看做)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민이나 교회 안에 끝까지 중생하지 않다가 언약의 대열에서 이탈하는 자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무조건적 선택 -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을 위하여 특정한 개인들을 하나님이 선택하심은 다만 그 자신의 주권적 의지일 뿐이다. 특정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믿음, 회개 등과 같은 이런 예지(預知)된 반응이나 그들 편에 대한 순종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그가 선택하신 각 개인에게 믿음과 회개를 주신다.
     
    이러한 행위들은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택은 인간에게 있는 어떤 덕성(德性)이나 예지된 행위에 의해서 결정되거나 제약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가 주권적으로 택하신 자들을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죄인을 택하심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의 원인이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D.스틸/C.토마스 共著, 김남식 譯, 1992. p. 19 -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약속한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된다.
     
    6) 여러 경륜(經綸) 시대의 언약
     
    은혜언약은 본질상 하나이다. 그러나 은혜 언약은 시간 속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계시되었다. 그 형태를 크게 나누면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된다.
     
    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7 장 -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A.A.하지 著, 편집부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pp. 171-172
     
    5절 - 이 계약이 맺어지는 방법에 있어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는 서로 다르다.(고3:6-9)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의 계약은 약속들, 예언들, 희생제사들, 할례, 유월절 어린 양 및 다른 유형들과 제정들에 의해서 특징 지워졌으니, 이 모든 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것으로서(히 8-10장, 롬 4:11, 골 2;11-12, 고전 5:7)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피택자(被擇者)들에게 약속된 메시야(고전 10:1-4, 히 11:13, 요 8:56)를 신앙하도록 교훈하고 세우는 일에 있어서 그 당시로는 충분하였고 효과적이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이 약속된 메시야에 의하여 충분한 속죄와 영원한 구원을 얻었으니, 이 계약을 우리는 구약이라 부르는 것이다.
     
    6절 - 신약에는 구약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되었는데, 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이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와 세례와 성만찬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제도에 의하여 맺어지게 되었다.(갈 2:17, 골 2:17, 마 28:19-20, 고전 11:23-25, 고후 3:7-11) 이 제도는 수적으로 구약에서보다 더 적고 외견상으로 구약에서보다 덜 화려하게 보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제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백성들에게 보다 충만히, 보다 명백히, 그리고 보다 효과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틀림없다.(마 28:19, 엡 2:15-19, 히 12:22-28, 렘 31:33-34) 우리는 이 계약을 신약이라 부른다.(눅 22:20, 히 8:7-9) 그러므로 본체(本體)가 다른 두 은혜의 계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본체를 지닌 은혜의 계약이 있을 뿐이지만 그것이 집행되는 방법에 있어서만 구약과 신약이 다른 것이다.
     
    ② 아담과의 원시(原始) 언약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꺾을 것이라는 원(源)복음(창 3:15). 그러나 더 근원적으로는 타락 이전에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하셨다.(창 1:28) 이 언약의 주로서 하나님은 전능자의 자리에서 아담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는 주(the Lord)가 되시고 여호와가 되셨다. 바로 이 사람의 하나님 되시고 언약의 주가 되심을 표시시하기 위하여 창세기 2장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기명(記名)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첫 언약 체결 후에도 사람과 관계를 맺으실 때 이 여호와 이름으로 일하셨고, 그 언약에 근거해서 그 언약의 약속들을 이행하실 때에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타나시고 일하셨다. 또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실 때에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타나시고 일을 시작하시고 결말(結末)하셨다.(출 3장 이하)「하나님의 구속경륜」, 서철원, 성문당, 1993. pp. 25-26
     
    ③ 노아와의 이중(二重) 언약
    홍수 이전에 택한 자의 구원에 대한 암시가 깃들인 언약을 맺으셨고(창 6:18), 홍수 후에 다시 땅을 침몰시키는 홍수가 없으며(창 9:8-10) 일반 은총적인 언약을 주셨다. Ibid. pp. 28-29이는 첫 언약이 하나님의 백성 됨이 그 목표였음이, 이 목표 달성을 위한 갱신된 언약 체결에서 분명히 계시되었다. 이 진리는 노아에게 주신 말씀과 언약에서 분명히 나타났다.(창 9:1) 노아와의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다 회복되는 역사의 끝에까지 지속(持續)되고 유효할 것이다.
     
    ④ 아브라함과의 언약
    가나안에 대한 현세적(現世的) 축복과 메시야에 대한 영적 축복을 받았으며(창 15:4-5), 믿음으로 의롭다 여겨졌다(창 15:6). 이는 신약의 성도들도 창대(蒼大)하여지며 영적 가나안, 즉 천국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을 보여준다(롬 4:12). Ibid. pp. 30아브라함과의 언약체결은 낙원에서의 첫 언약체결의 목적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언약의 주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임이 분명하고 확실함을 나타낸다.
     
    ⑤ 시내산 언약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덕적, 의식적, 국가적 율법을 주었다(출 20장 이하). 이는 인간에게 죄의식을 갖게 하는 것으로서(롬 3:20, 4:15, 5:13, 갈3:19)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몽학(蒙學) 선생의 역할을 한다(갈 3:24).
     
    ⑥ 신약시대의 언약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세워진 새 언약으로서 구약시대의 언약이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것인데 반(反)하여 이는 모든 국가, 모든 백성에게 확대되는 보편성과 성령의 강림(降臨)으로 인한 충만을 지닌다.
     
    7) 은혜 언약의 완성자로서의 메시야「계약신학과 그리스도」
     
    팔머 로벗슨 著, 김의원 譯,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p. 278아담 이후로 이스라엘이 비록 계약적 책임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은 한 위대한 백성을 일으켜 그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위대한 나라를 이룩하는 그의 목적에 실패하지 않으실 것이다. 타락한 인간 가운데에서 백성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목적은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멸망을 뛰어넘는 이런 희망어린 기대는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예언자들은 약속의 땅으로의 복귀, 받아들여질 예배로의 회복, 메시야적 왕의 혈통의 재생 등에 대하여 가장 빈번히 말하였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 계약적 약속의 다양한 흐름들을 한데 모으는 독특한 역할 때문에 이 마지막 하나님 계약은 “완성의 계약”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계약은 하나님의 이전(以前) 계약 사역들을 대신한다. 동시에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들 역사를 통해 경험했던 다양한 계약들의 핵심을 총괄적으로 실현하게 된다. 완성은 이 마지막 계약의 내용을 특징 지운다.
     
    이 완성하는 실현의 중심은 한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약속들(행위, 구속, 은혜)의 성취자로서 그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렘 31:33)라는 계약 원칙의 핵심을 친히 이루신다. 그러므로 그는 언약을 완성하는 그리스도로 나타나실 수 있다.

     Ⅲ. 결 론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어 노아를 거쳐서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그리고 이삭과 야곱을 거쳐서 계승(繼承)된 언약들은 모세에 이르러 시내산 언약으로 구체화 되었다. 이 언약들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신학자들에 의해)그 이름들을 달리 했지만, 결국 본질은 모두 은혜 언약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약속의 당사자는 인간이 아니라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언약은 사실 인간이 행함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언약을 하신 당사자인 여호와 하나님이 스스로 이루어 내실 언약이었다. 그래서 은혜 언약인 것이다. 또한 이 언약은 택자들에게서 반드시 하나님 스스로 이루어 내실, 인간이 조금이라도 기여(寄與) “불가항력적 은총 -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 구원을 위한 외적 소명에 부가해서 성령은 택자들을 필연적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특별한 내적 소명을 계속하신다.
     
    외적 소명(구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은 거부될 수 있고, 또 종종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내적 소명(택자에게만 하시는)은 거부되어질 수 없다. 그것은 항상 회개를 초대한다. 이러한 특별한 소명에 의하여 성령께서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 그는 인간의 의지에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사역에 있어서 제한을 받지 않으며 또한 성공을 인간의 협동에 의존하지도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은헤스럽게도 택한 죄인을 협동하게 하시며, 믿게 하시며, 회개시키시며, 자유롭게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에게로 오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도무지 거부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이 미쳐지는 사람들의 구원을 반드시 이루신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D.스틸/C.토마스 共著, 김남식 譯, 1992. p. 21 - 할 수 없는, 은혜의 언약으로서 내적(內的)인 것이다.
     
    장차 오실 메시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실 언약은,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율법으로(바울의 표현대로 “몽학선생”) 그림자적인 역할을 수행해낸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의 견고하고 화려한 왕국의 성취도 은혜 언약의 결과였지만,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모형에 불과했다. 이렇게 구약의 언약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이루어지고 통치가 이루어지는 외적 모습이었지만, 이제 그 언약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속사람 혹은 생각과 마음)안에 내적 모습으로 성취되었고 또 성취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은혜 언약 안에 행위 언약과 구속 언약이 있는 것이고, 이들 언약 모두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몫이었으며, 이제 우리는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소망 중에,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영원천국의 맛들을 보고 있는 현세천국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앞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의와 능력을 손톱만큼이라도 내세울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약을 통하여 당신만을 의지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意圖)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하게 그리고 영원히 성취되었다. 이 성취 아래서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성도의 견인 - 하나님에 의해서 택정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고 성령으로부터 믿음을 얻은 자는 모두 영원토록 구원을 받는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을 유지하여 끝까지 인내한다.”- Ibid. pp. 21-22영원천국을 향하여 가는 발걸음을 쉬지 않게 될 것이다.

      < 참고 도서 >
     
    1. 「벌코프 조직신학개론」, 루이스 벌코프 著, 박희석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2. 「기독교 교리개설」, 김성린,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3. 「챠트로 본 조직신학」, 박해경, 아가페문화사, 2004.
    4.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D.스틸/C.토마스 共著, 김남식 譯, 도서출판 엠마오, 1992.
    5. 「계약신학과 그리스도」, 팔머 로벗슨 著, 김의원 譯,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6. 「QA시스템 성경연구시리즈」, 강병도, 기독지혜사, 1991.
    7. 「구약성경과 그리스도」, 김두석, 칼빈대학교출판부, 2003.
    8.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해설」, A.A.하지 著, 편집부 譯,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
    9. 「하나님의 구속경륜」, 서철원, 성문당, 1993.
    10.「신학사전」, 신학사전편집위원회, 개혁주의신행협회, 1988.

    출처 : 블로그 >반석위에기쁨





    영생은...아는 것이니이다

    - 십자가의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을 바라보며 예수는 '영생'에 대하여 정의를 내린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어 왔었다(Bernard).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호 6:3)
    예레미야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다'(렘 9:24)

    '안다'(기노스코.  ginōskō. γινώσκω)는 것은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하며 본절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수식하는 말로 사용됨으로 예수와 하나님의 인격적 하나 됨을 증거한다(Lenski).

    γινώσκω 스트롱번호 1097

    1. 알다.  2. 신비를~  3. 하나님을~
    발음 [ ginōskō ]

    관련 성경 /
    알아보다(막 6:38), 알다(마 6:3, 12:5, 7, 막 5:43, 8:17, 눅 20:19, 요 1:40), 알게 하다(마 9:30, 요 19:4), 알려지다(마 10:26, 눅12:2), 깨닫다(마 24:39, 막 5:29), 알리다(막 9:30, 요 7:17), 동침하다(마 1:25), 주다(막 4:11)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인생들에게 가장 쉽게 그리고 충분하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앎으로써 행복과 영생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주인으로서 영생의 주체(主體)가 되신다(11:35; 행 3:15).
    한편 기도중에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저희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식하는 것'이란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Lenski) 그렇게 해석하면 헬라어 원문에 무리가 따르게 된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시기 위해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이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이 견해는 무난하게 채택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표현은 메시야의 자기 증거인 셈이다(Godet).
    (3)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예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표현이라고 하는 주장이었다(Westcott, Hegnstenberg). 예수께 대한 요한의 고백은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반복 기록되었다(요일 1:3;2:22;4:3;5:20 등). 그러나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그날밤의 기억들을 잊어버렸다고 구태여 가정할 필요는 없다.







    09-22-2024(주일)
    암송 성구 #.18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Above all, love each other deeply, because love covers over a multitude of sins.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ἐκτενής, ές 스트롱번호 1618

    1. 열심 있는.  2. 진지한. 3. 행 12:5
    발음 [ ĕktĕnēs ]
    어원  / 161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간절한(행 12:5), 뜨거운(벧전 4:8).


    καλύπτω 스트롱번호 2572

    1. 덮다.  2. 마 8:24. 3. 덮어 버리다
    발음 [ kaluptō ]

    관련 성경 /
    덮이다(마 8:24), 숨다(마 10:26), 덮다(눅 8:16, 약 5:20, 벧전 4:18), 가리다(고후 4:3).

    - '무엇보다도'는 어떠한 일보다 사랑을 먼저 할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열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열심으로'(에크테네. 1618)는 '힘껏 노력하는', '전심 전력하는'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이 힘써서 할 사랑은 감정적으로 하는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을 가지고 행동을 수반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을수 있다.
    즉 피차간에 있는 허물을 덮어 주고 서로를 세워주고자 하는 사랑은 죄를 가리운다(잠 10:12).

    '죄를 덮느니라'에 대해서 혹자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친절한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그 보상으로 자신의 잘못이 가리워질 수있다고 주장하나(Tertullian, Origen) 여기서의 사랑은 친절한 행위를 함으로 오는 반대급부를 바라는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을 하고 있는 주체자의 죄가 가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있는 객체자의 죄가 가리워짐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무조건적으로 용서되었기 때문에 더욱더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헬라어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아가패(ἀγάπη), 필리아(φιλία), 에로스(Έρως), 스토르게" 사용합니다.

    사랑의 종류 4가지: 에로스(Eros), 스토르게(Storge), 필리아(Philia), 아가페(Agape)


    . "인간은 <에로스>에 의해 태어나고 <스토르게>에 의해서 양육받으며, <필리아>에 의해서 다듬어지고, <아가페>에 의해서 완성된다"

    1. 에로스(Eros)

    Eros is the god of love and lust whose other name is Cupid. 에로스는 큐피드라고도 불리는 사랑과 정욕의 신이다.

    Eros, the sex drive, and Thanatos, the death instinct. 에로스는 성적 본능이고, 타나토스는 죽음의 본능이다.

     EROS was the mischievous god of love, a minion and constant companion of the goddess Aphrodite.

    The poet Hesiod first represents him as a cosmic who emerged self-born at the beginning of time to spur procreation. (See the Protogenos Eros and Phanes, for more information.) The same poet later describes two love-gods, Eros and Himeros (Desire), accompanying Aphrodite at her birth from the sea-foam. Some classical authors interpreted this to mean they were born of the goddess at her birth, or alongside her in the sea-foam. The scene was particular popular in art, where the pair flutter around the goddess seated in her floating conch-shell.

    Eventually Eros was multiplied by ancient poets and artists into a host of Erotes or Cupids, as they are commonly called in English. The one Eros, however, remained distinct in myth. It was he who lighted the flame of love in the hearts of the gods and men, armed either with a bow and arrows or else a flaming torch. He was also the object of cult. Eros was often portrayed as a child, the disobedient, but fiercely loyal, son of Aphrodite.

    In ancient vase painting Eros is depicted as either a handsome youth or as a child. His attributes were varied: from the usual bow and arrows, to the gifts of a lover--a hare, a sash, or a flower. Sculptors preferred the image of the bow-armed boy, whereas mosaic artists favored the figure of a winged putto (plump baby).

    2. 스토르게(Storge)

    스토르게는 혈족애(血族愛)를 말한다. 
    부모 자식 사이의 피로 얽힌 사랑이다.

    피는 물보다도 짙고 호르몬보다도 강하다. 그러므로 부모 자식간의 혈족애(血族愛)는 어느 사랑보다도 강(强)하다.

    친자(親子)간(間)의 사랑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

    그것은 인륜(人倫)을 넘어서 천륜(天倫)이다. 우정이나 애정은 상대방의 장점이나 매력(魅力) 때문에 생긴다.

    만일 장점(長點)이나 매력(魅力)이 없어지면 사랑은 소멸(消滅)하거나 약화(弱化)된다. 

    아름답던 애인(愛人)이 추악(醜惡)한 불구자(不具者)가 되면 그 애정(愛情)은 고갈(枯渴) 된다.

    그러나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그렇지 않다. 자식이 불구자가 되어도 부모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자식을 측은(惻隱)히 여기는 마음은 더욱 강(强)해진다.

    자식이 불명예와 죄과(罪過)를 범하여도 부모의 사랑은 변(變)하지 않고 한결같다.

    가장 확실하고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부모의 사랑이다.

    가장 순수하고 이기적(利己的) 욕망을 떠난 사랑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의 사랑"이 사랑 중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

    3. 필리아(Philia)

    -philia: (명사에서) (특히 섹스와 관련하여 비정상적으로) …에 대해 갖는 이상 성욕[성애]  <참고 -phobia> paedophilia: 소아성애.

    Philia: Brotherly love, closer than that based on principles, denotes affection, close friend or family.

    'PHILIA'는 그리스어로 친구간의 우정 혹은 사랑을 의미한다. 

    그 어원에서 출발하는 는 특히 사춘기 시절의 열정과 불안, 순수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친구관계, 그리고 그 관게에서 묻어나는 이야기들을 더듬어 가며 지나간 기억을 떠올린다. 

    4. 아가페(Agape)

    아가페(그리스어: αγάπη)은 사랑을 뜻하는 여러 개의 그리스어 낱말 가운데 하나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지금까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여 왔지만, 보통 거룩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한다. 아가페라는 용어는 고대 사본에서는 드물에 쓰이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용어를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으로 부르고 있다. 또, 아가페는 수많은 기독교 작가들이 기독교적인 상황에서 서술해왔다. 아가페(agape)는 쉽게 말해 '절대적인 사랑 '을 뜻한다.


    1. 에로스(Eros)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활과 화살을 가진 나체의 어린이로 나타나는데, 

    그가 쏜 금화살을 맞으면 사랑에 빠지고 납 화살을 맞으면 증오하게 된다고 한다. 

    로마 신화의 큐피드와 아모르에 해당한다.

    <네이버 국어사전 출처>

     

     - 열정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2. 플라토닉(Platonic love)

    - 플라톤의 '대화'<향연> 편에 따르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올바른 방법은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즉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진정한 플라토닉 러브란 마음과 영혼을 고무시키고

    정신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위키백과 출처>

     

    - 순수하고 강한 형태의 비성적(非性的)인 사랑을 말한다.

     

     

     

    3. 아가페(Agape)

    - 신약성경에서 사랑을 가리키는 두 단어 중 대표적인 말.

    - 절대적인 사랑을 뜻하는 말.

     

    아가페 사랑은 절대적이라는 말, 성격적인 의미가 있다 보니

    성경에 나와있는 사랑에 대해 설명되어 있는 글을 더 적어볼게요-

     

    사랑을 뜻하는 헬라어에는,

    에로스 - 남녀 간의 육정적이고 성적인 사랑. ‘열정’이 내포되어 있는 단어.

    필리아 - 친구 간의 사랑. 우정이나 우애(약 4:4).

    스트로게 - 가족 간의 사랑, 부모 자식 간의 사랑. 특히 자식을 향한 부모의 다함없는 사랑.

    아가페 -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롬 5:5)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 아가페 [Agape] (라이프 성경사전) 출처>

     

     

     

    4. 루두스(Ludus)

     

    루두스는 라틴어 사전에 찾아보면 장난, 경기, 대단치 않은 일로 검색이 됩니다.

    그래서 루두스에 사랑에 대해 검색을 해보면 연인보단 친구 같은 사랑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가벼운 관계를 뜻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5. 스토르지(Storge)

     

    - 형제자매 사이나 친구 간에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무르익는 사랑의 감정을 뜻한다

    - 고대 그리스어 Storgay(스토르게이)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 가족 간의 사랑을 뜻한다고 한다. 

    - 스토르게 사랑은 우정이나 연민을 생활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느끼고 사랑의 감정으로 발전한 경우이다.

    -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의 사랑은 아니지만 서서히 진행되고 깊고 오래가는 사랑을 표현한 것 같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랑을 하고 계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6. 마니아(Mania)

     

    Mania를 사전적 검색을 해보면 1. 열광 2. 조병, 조광증이라고 검색이 됩니다.

    풀어져 있는 정의를 정리하자면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강한 집착 및 소유욕을 가진 사랑이라고 표현되는 거 같습니다.

    보통 마니아층이 있다 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많이 사용하는 것 같아요

     

    가볍게는 마니아, 마니아층이라고 표현할 수 도있지만 

    마니아 사랑의 찾아보면서 마니아의 타입의 사랑을 하시는 분들은

    의존성이 강하고 불안해하는 일이 잦으며,

    사랑받고 있다는 걸 자주 확인하고 싶어 하고 외로움을 많이 타며,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고 정리한 글도 보이네요

    <출처 : 연애의 과학 >

     

     

     

     

    7. 프라그마(Pragma)

     

    pragma의 사전적인 검색을 해보면 나라마다 조금 다르게 나오긴 하지만

    실제적인, 실용적인 등의 사전적 의미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하면서, 하게 되면서 마음도 중요하지만 현실을 직시하며,

    사랑을 하시는 분들을 표현하게 되는 사랑의 유형인 거 같습니다. 

     

    - 현실적인, 합리적인, 가슴보단 머리로 가 먼저 생각나는 사랑의 유형인 거 같네요

     

     

     

    이 사랑의 유형을 찾아보다가 너무 잘 보게 된 블로그가 하나 있어 블로그 작성자분께

    허락을 맡고 글을 조금 더 끄적여봅니다-♡

     

    에로스, 루두스, 스토르게는 일차적인 사랑

    마니아, 프라그마, 아가페는 이차적인 사랑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러면서 

    마니아의 사랑은 에로스와 루두스가 합쳐진 사랑

    프라그마는 스토르게와 루두스가 합쳐진 사랑

    아가페는 에로스와 스토르게가 합쳐진 사랑

    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09-15-2024(주일)
    암송 성구 #.17 마태복음 16:24
     
    참조 / 마가복음 8:34.  누가복음 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Th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따른다'는 것은 스승의 삶과 가르침에 온전히 순복하는 참 제자가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참된 제자의 조건을 전제한 것은 당신의 임박한 수난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그와 유사한 수난과 고초를 당하게 될 것을 익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직은 예수님을 따르기에는 너무 미흡한 제자들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며 수난당할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려면 내적으로는 자기 부인과 외적으로는 역경 가운데서도 적극적인 순종이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요구되는 소극적 측면으로서 자기의 이기적 욕망과 생각과 주장, 그리고 부패한 옛자아, 옛사람을 철두철미 굴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육신(사르크스)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죄인됨 인간 그 자체(롬 7:14, 18)가 됨으로써 그의 이성, 감정, 의지 등이 완전히 부패되었다(참조, 렘 17:9; 롬 1:18-32).
    바로 이러한 본성적 존재로서는 예수의 제자로 결코 따라 나설 수 없다.
    한편 이러한 제자의 요건을 망각(妄却)했던 베드로는 훗날 자기를 부인하는 대신 예수를 부인하고야 만다.

    부인하다(아파르네오마이) ἀπαρνέομαι 스트롱번호 533

    1. 부정하다.  2. 부인하다. 3. 마 26:34, 35, 75. 막 14:30, 31.  눅 22:61
    발음 [ aparnĕŏmai ]
    어원 / 미래 ἀπαρνήσομαι, 제1부정과거 ἀπηρνησάμην, 완료수동태 ἀπήρνημαι, 미래수동태 ἀπαρνηθή- σομαι, 575와 720에서 유래

    자기 십자가

    -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살던 팔레스틴의 유대인이라면 십자가 형벌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야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27:32).
    더불어 유다의 대반란으로 인해 수많은 십자가 형틀을 목격해야 했던 그들로서는(Josephus, 행 5:37) 죽음의 짐이요,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를 메라는 참의미가 무엇인지를 뼈 속 깊이 이해했을 것이다(10:38).
    한편 예수께서 친히 골고다 험한 언덕에서 이 십자가 형을 당하신 이후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엄숙한 제자로서의 결단의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신 일은 인류 구속의 대업을 완성하시는 유일, 단회적인 행위였으나 제자들의 십자가 짐은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 생겨나는 다양하고도 지속적인 행위일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제자들은 각자의 십자가를 거룩한 기쁨과, 무한한 감격과 감사로, 그리고 가장 가치있는 일로 받아들이며 끝까지 지고 예수의 발자취를 좇아가야 할 것이다(빌 3:12-14).

    지다(아이로)  αἴρω 스트롱번호 142

    1. 들어올리다.  2. 돌을 올리다. 3. 뱀을 집어 올리다
    발음 [ airō ]

    좇을 것이니라(아코루데이토)

    - 시제는 현재 명령형으로서 한두 번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좇아오라는 강한 명령이다.
    실로 주의 제자된 자는 억지로, 이따금씩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심전력으로 부단한 노력과 헌신을 통해 계속 좇아가야만 한다.




    09-08-2024(주일)
    암송 성구 #.16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강조한 까닭은 빌립보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겸손"을 권면했습니다.(3절)
    그리고 그와 같은 실제적인 증거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제시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번역된 단어는 "프로네오( phrŏnĕō) φρονέω)" 라고 하는데 '프로네오'의 의미는 "생각하다" "에 몹시 마음을 두다" "생각을 가지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예수님처럼 생각하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나의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생각의 전환이라고 합니다.

    생각의 전환은 우리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변화시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할 때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가능성을 제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그러나 생각의 전환을 통해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어려운 상황에서 "절대로 해결할 수 없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이것은 도전적이지만 극복할 수 있어: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것은 우리의 자신감과 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1. 자기를 비우는 마음

    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 자기를 낮추는 마음 

    8절상=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3.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

    8절하=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본절은 앞에서 빌립보 교회의 일치를 위해 '겸손'을 권면한 것에 대한 예증으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전환절이다.
    그리스도는 궁극적인 모델로서 이 땅에 오셔서 '겸손'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인들에게 모델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권면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자기를 부정하심으로 십자가를 지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서로가 겸손하고 자신을 부정할 때 다툼이나 허영은 사라지고 '교회의 일치'를 낳게 될 것이다(Martin, Kent, Hawthorne).

    마음을 품으라(프로네오. phrŏnĕō) φρονέω 스트롱번호 5426

    1. 생각하다.  2. ~에 몹시 마음을 두다. 3. 생각을 가지다
    발음 [ phrŏnĕō ]
    어원 / 미완료 ἐφρόνουν, 미래 φρονήσω, 제1 부정과거 ἐφρόνησα, 542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생각하다, 의견을 가지다, 판단하다, 롬12:3, 고전13:11, 빌1:7.
     2. ~에 몹시 마음을 두다, ~에 전념하다, ~에 몰두하다, 롬12:16, 빌3:16, 골3:2.
     3.생각을 가지다, 태도를 가지다, 빌2:5.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생각하다(롬8:5, 빌1:7, 골3:2), 여기다(롬14:6), 뜻이 같게 하다(롬15:5),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이다(롬12:16, 빌2:2,5), [명] 사상(행28:22).


    09-01-2024(주일)
    암송 성구 #.15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but of righteousness,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義)와 평강(平康)과 희락(喜樂)이라고 합니다.
    의(義)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 상태를 의미합니다(디카이오수네)
    평강(平康)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 상태를 계속적으로 유지하는 힘을 말합니다(에이레네)
    희락(喜樂)은 의와 평강을 이 세상에서도 마음껏 누리며 즐기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카라)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 한글 개역 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가르'(*, '왜냐하면')가 사용되어 본절이 15절 하반절과 16절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논거(論據)를 변화시켜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본질을 언급하고 있다(Sanday and Headlam). 강한 자들이 특정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것을 먹지 못한 약한 형제의 영적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 그리고 그로 인해 서로 판단하고 나아가 거룩한 믿음의 공동체가 좋지 않은 평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비쳐볼 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 바실레이아 투 데우,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는 먹는 것과 마시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즉, 이 땅위에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臨在)를 입증하는 것은 어떤 특정 음식을 먹느냐 못 먹느냐의 시시비비를 가리며 또한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외고집적으로 주장하는데 있지 않음을 책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는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바울은 여기서 전체의 논의를 단순히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다.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의 특징적인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성격으로 나타나는지를 진술한다.

    '의'(*, 디카이오쉬네)는 속죄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부름받은 올바른 행동, 즉 '도덕적 의'를 말한다(Godet, Murray, Meyer, 6:13, 16, 18).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활 헌장으로 선포하신 산상 수훈(山上垂訓)의 결론에서도 나타난 '의'이다.
    그리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나란히 취급한 데서 더욱 확인된다.

    '평강'(*, 에이레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을 믿을 때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Calvin, 5:1;빌 4:7).

    '희락' 또는 '기쁨'(*, 카라)은 '의'를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의 관계를 누리는 성도의 정서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영혼의 기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Calvin, Hodge) 성령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모든 관계에서 오는 사귐의 기쁨도 포함한다(Godet, Meyer, Murray).

    따라서 성도의 삶에서 누리는 총체적인 기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기쁨은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반드시 다른 성도와의 참다운 사귐에서 오는 기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즉 구원의 기쁨과 다른 사람과의 정상적인 교제에서 오는 기쁨과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는 것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보이는 형제인 다른 사람과의 진실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이처럼 '의'와 '평강'과 '기쁨'의 공동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 알라 엔 프뉴마티 하기오)만 가능하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오직'(*, 알라)이란 접속사가 '...만', 또는 '...외에는'이란 뜻으로서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서는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2)의, 평강, 기쁨 세 명사가 모두 '엔 프뉴마티 하기오'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Kasemann).
    (3) 갈 5:22, 23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에 '평강과 기쁨(희락)'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Harrison).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는 누구든지 성령을 의지하여 적극적으로 의와 평강과 기쁨의 열매를 나타내야 한다.
    본절을 통해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로 형제끼리 서로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얼마나 거리가 먼 어리석은 모습인가를 알 수 있다(본장 주제 강해 '아디아포라' 참조).






    08-25-2024(주일)
    암송 성구 #.14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Therefore, my dear friends, as you have always obeyed--not only in my presence,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구원을 이루라(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구원을 계속 이루어 가십시오(현대인)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새번역)
    구원을 위해 힘쓰십시오(공동번역)

    사도 바울은 이미 구원을 받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합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을 받은 것을 유지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구원의 은혜를 확산시키라는 것입니다.
    개인 구원에 만족하지 말고 개인 구원을 공동체 구원으로 확산시켜야 합니다.
    공동체 구원을 사회 구원을 넓혀가야 합니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성도들은 개인 구원의 은혜에 만족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개인 구원의 차원에서 공동체 구원 즉 가족 구원, 친족 구원,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의 구원 그리고 이러한 은혜를 세상을 더 넓게 확장해야 합니다.
    사회 구원이란 의미가 사회를 향한 투쟁으로 반복되어 마치 정부를 향한 쓴소리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사회 구원이란 개인 구원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구원을 이루라

    - '사랑하는 자들아'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목양하는 자로서 친근감있게 부르는 호칭이다.
    친근한 호칭과 더불어 바울은 본절에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한다.
    이 '구원을 이루라'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차원에서 본절을 이해한다(Muller, Kent).
     칭의 이후에 오는 성화의 과정에서 신인협동(神人協同)의 차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미 구원의 확증은 얻었지만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구원의 증거들을 실증하며 살아가야 함을 시사한다고 한다.

    2. '그리스도인의 연합적인 차원'에서 본절을 이해한다(Hawthorne, Martin, Michael, Gnilka, Collan-ge).
    바울은 4절에서 이미 개인적인 삶만 집착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돌보아 주라고 권면하고 있으며 본절 이하에서 개인적 구원의 문제를 생각한 종말론적인 분위기가 전혀 나타나지 않기에 교회 전체의 집합적, 공동체적 권면으로 볼 수 있다고 한(Hawtho-rne).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Lenski).
    왜냐하면 '구원'에있어서 '개인'과 '교회'는 분리할 수 없는 불가 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완성을 향해 계속해서 성숙해가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협력하여 나아가야 한다(엡 4:1-6).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 구원을 이루어가는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전적으로 의지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명령에 늘 순종하는 것이다(Martin, Kent).

    이루라(카테르가조마이) work out

    κατεργάζομαι 스트롱번호2716

    1. 성취하다
    2. 가져오다
    3. 억누르다
    발음 [ katĕrgazŏmai ]
    어원  / 디포넌트. 제1부정과거 κατειργασάμην, 제1부정과거 수동태 κατειργάσθην, 2596과 2038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성취하다, 완수하다, 행하다, 롬1:27, 2:9, 7:15, 15:18, 고전5:3, 고후12:12, 엡6:13, 벧전4:3.
    2. 가져오다, 이루다, 산출하다, 창조하다, 롬4:15, 5:3, 7:8, 고후4:17, 7:10,11, 9:11, 빌2:12, 약1:3.
    3. 억누르다, 압도하다, 정복하다, 엡6:13.

    관련 성경
    행하다(롬 1:27, 고후 12:12, 엡 6:13), 이루다(롬 7:8, 고후 7:10), 만들다(롬 7:13, 약 1:3), 역사하다(롬 15:18).


    08-18-2024(주일)
    암송 성구 #.13 아모스 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자유대한민국이란 나라가 무너지기 일보직전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동안 자유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일들을 생각해보자!
    첫째, 선교의 짧은 역사속에서 교회가 급성한 나라
    둘째, 피선교국가에서 선고국가로 발돋움한 나라
    셋째, 한강의 기적을 일으켜 선진대국으로 발전한 나라
    넷째, 자유민주의가 아름답게 꽃을 피운 나라
    다섯째, 훌륭한 정치 지도자가 배출된 나라(이승만대통령, 박정의대통령)
    여섯째, 한류의 바람을 일으킨 나라
    그런데 이런 자랑스런 나라가 붕괴되려고 한다.
    그것도 자유민주주의 체재에서 김일성주의 체재로........
    문제는 이러한 변화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급작스런 변화는 공법과 정의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선지자 아모스와 같은 외침을 강조해야 한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

    사회기강이 흔들리고 있는 까닭은 교회의 예배가 신령과 진정의 자리를 버리고 영광과 축복으로 변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라도 의식이 있는 교회와 성도들을 통하여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그루터기를 만들어야 솟아날 수 있는 자리가 다듬어지기 때문이다.




     
    - 본절에 의하면, 백성들의 잘못된 예배는 공법과 정의의 결여라고 볼 수 있다.
    '공법'과 '정의'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기도 하지만(사 10:22), 아모스는 인간 사회에 구현되어야 할 원리로 보았다(7,15절.  6:12).
    즉, 사회 질서와 관계있는 것으로 율법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 사회구조 속에서 구현되고 정직하게 이웃을 대할 때에야 비로소 그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흘릴지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이갈'(*)은 '굴리다'(roll)는 뜻의 '갈랄'(*)에서 온 나팔형 동사로 굽이치는 강물처럼 격렬하게 흐르게 하라는 명령형이다(BDB).
    또한, 히브리어 원문에는 '끊임없는'(perpetual)이라는 뜻을 가진 '에이탄'(*)이라는 형용사가 있어서 그 강도를 더해준다.
    그러므로 공법과 정의가 적극적이고도 계속적으로 흘러야만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사가 의미있고 가치있음을 보여준다.

    공법(公法) 4941 미쉬파트[ mishpâṭ ] מִשְׁפָּט 스트롱번호 4941

    1. 판단.  2. 레 19:15. 3. 욥 9:32
    발음 [ mishpâṭ ]
    어원  / 819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24회 사용

    레위기 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찌며.

    욥기 9:32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정의(正義) 6666 여성명사  체다카 [ tsedâqâh ] צְדָקָה 스트롱번호 6666

    1. 올바름.  2. 정의. 3. 의로움
    발음 [ tsedâqâh ]
    어원 / 666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57회 사용

    ☞의(창 15:6, 삼하 8:15, 잠 11:5), 의로움(신 6:25, 24:13, 사 5:7), 공의(신 33:21, 왕상 3:6, 사 10:22), 권리(느 2:20), 정의(암 5:7, 6:12, 슥 8:8).
    [형] 의로운(삿 5:11, 대하 6:23, 시 11:7),옳은(삼하 19:28), 적당한(욜 2:23).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잠언 11:5
    완전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그 이 곧게 되려니와 악한 자는 그 악을 인하여 넘어지리라.



    08-11-2024(주일)
    암송 성구 #.12 베드로후서 1:4

    신의 성품
    베드로후서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성품은 타고난 성격이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성격과 성품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신의 성품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삼위로 존재하는 다양성과 온전한 하나로 존재하는 신비한 현상은 마치 다양한 성격의 그리스도인들이 한 영으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고 또한 다양한 지체들로 각자의 맡은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고유한 신분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신의 성품이란 성령의 지배를 받아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삶을 통하여 드러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아직도 성령화되지 못한 나의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습관을 성령의 지배를 받아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덕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의 일들 즉 그리스도의 재림(3:4,9,12), 새 하늘과 땅(3:13)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11절)에 참여케 되는 것을 가리킨다.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 '피하여'의 헬라어 '아포퓌곤테스'(*)는 부정 과거 분사로서 '피한 이래로'라는 의미이다(Bigg, Blum).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침례를 받은 후부터 죄와 정욕과 거리가 멀어지며 피하게 된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스데데이아스 코이노노이 퓌세오스'(*)에서 헬라어 '데이아스'(*, '신에게 속한')는 성경적 용어라기보다는 헬라 사상에 따른 이교적 표현이다(Richardson). 베드로는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그의 논쟁을 전개시키고 있다(Kasemann). 그러나 본문은 이교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내면에 본래부터 신과 같은 거룩한 성품이 있어서 이것을 잘 계발하면 성인(聖人)이 되고 거스리게 되면 악인(惡人)이 된다는 사상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참된 연합을 통해서 성령의 교제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됨을 시사한다(Bigg, Green).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 거듭나게 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된 영적 교제를 나누며(요 14:16,17,26), 장차 나타날 영광과 축북에 참여하게 된다(롬 8:18).



    08-04-2024(주일)
    암송 성구 #.11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What good will it be for a man if he gains the whole world, yet forfeits his soul? Or what can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목숨의 소중함(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신약 성서는 종말론적 관심이 옥중에서 해방을 기다리고, 밤중에 새벽을 기다림같이 열망적입니다.
    재림에 관련된 곳이 318번이나 썼고 천국과 지옥과 부활과 영혼 구원문제는 백주의 태양처럼 강렬한 현실이었습니다.

    "온천하를 얻고도 네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현세주의자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하시고 말세에 사람들이 노아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마 24:38)하는 현세가 전부이며, 유물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가치관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말세 인간들은 예수 재림을 기롱합니다(벧후 3:3).
    복음적 신앙을 오히려 반사회, 반문명, 반지성, 혹은 피안주의니 현실도피니 하는 낙인을 찍어 냉소하는 풍조를 만듭니다.
    그것도 진화론 공작과 함께 악마의 반성서적, 반내세적, 반종말적정신 풍토 조성을 위한 고등공작의 가장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오늘도 영적인 세계를 알고 깨어 근신하며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숨(5590. 프쉬케)

    ψ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5590

    1. 영혼.  2. 생명력. 3. 혼
    발음 [ psüchē ]
    어원 / 5594에서 유래

    뜻풀이부 / I. 영혼, 목숨, 생명
    관련 성경 /  목숨(마 2:20, 막 8:35, 롬 11:3), 영혼(마10: 28, 눅12:20, 고후12:15), 마음(마11:29, 막14: 34, 행14:22), 생명(막3:4, 요12:25, 행20:10), 힘(막12:33), 뜻(행4:32), 인(행27:37), 영(고전15:45), 혼(살전5:23, 히4:12), 명(벧전3:20), 심령(벧후2:8), 사람(행7:14, 롬13:1).




    얻고도...잃으면

    - 여기에서 '잃으면'(제미오데)이란 '해를 입히다' '손해 보다'는 뜻의 '제미오오'(*)의 부정과거 가정법으로서 아직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는 표현이다.
    이는 '얻고도'(*, 케르데세)라는 말이 능동태를 취하고 있는데 비해 수동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고 할 것이다.
    즉 비로소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얻는다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어떤 유익이 있겠느냐는 역설적 대구인 것이다(눅 9:25).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 이는 인간 영혼(생명)의 최고 가치성과 유일성 및 단회적 생명성을 강조한 말이다.
    즉 예수께서는 비록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온갖 부와 명예는 잃고 난 뒤에도 다시 취할 수 있지만 인간의 영혼은 한번 상실하면 도무지 회복할 수 없는 고귀한 것임을 강조하셨다.
    이제 현존하는 모든 사람들은 '온 천하'냐 '자기 목숨'이냐 라는 종말론적 선택을 해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선택하기 원하신다(룻 1:16, 17; 왕상 18:21; 히 11:25).




    07-28-2024(주일)
    암송 성구 #. 10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카이 엔뒤사스다이 톤 카이논 안드로폰 톤 카타 데온 크티스덴타 엔 디카이오쉬네 카이 호시오테티 테스 알레데이아스.
     και ενδυσασθαι τον καινον ανθρωπον τον κατα θεον κτισθεντα εν δικαιοσυνη και οσιοτητι της αληθειας

    엔두오 호 카이난 안드로포스

    입으라 (1746) 엔두오 [ ĕndüō ] ἐνδύω 스트롱번호 1746

    1. 입히다.  2. 옷 입다. 3. 마가복음 6:9(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발음 [ ĕndüō ]
    입다(마 6:25, 막 1:6, 계 1:13), 입히다(마 27: 31, 막 15:17, 눅 12:22), 붙이다(엡 6:14, 살전 5:8).


    그(3588)

    ὁ, ἡ, τόpl. οἱ, αἱ, τά 스트롱번호3588

    1. 이 사람
    2. τοῦ γὰρ καὶ γέ νος ἐσμέν : 왜냐하면 우리도 그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3. ὁ μὲν..
    발음 [ hŏ ]


    새(2537) καινός, ἡ, όν 스트롱번호 2537

    1. 새로운.  2. 쓰지 않은.  3. 알려지지 않은
    발음 [ kain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새(마 9:17, 눅 5:36, 계 2:17, 마 13:52, 막 2:21, 고후 5:17), 새로운(고후 5:17, 계 21:5), 새로 되는(행 17:21).

    사람(444)

    ἄνθρωπος, ου, ὁ 스트롱번호444

    1. 인간.  2. 강 막 9:31.  3. 마 4:19
    발음 [ anthrōpŏs ]
    어원 / 435와 ὤψ ‘안색’에서 유래
    사람(마 4:4, 막 1:17, 고후 4:16), 남(눅 6:31, 남에게 마 7:12), 인자(마 8:20, 막 2:28, 눅 1:25), 인간(행 4:12), 범인(행 4:13, 고전 15:32).




    새 사람(the New Self)이란 누구인가?

    하나님을 따라...지으심을 받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카타 데온 크티스덴타'(*)는 문자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창조된'이란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되었음'을 시사한다(골 3:10, Bruce,Lincoln).
    하나님은 죄로 잃어버렸던 그의 형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현시켰고 그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심으로(Bruce, Wood)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하셨다(Lincoln).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디카이오쉬네 카이 호시오테티 테스 알레데이아스'(*)는 문자적으로 '진리로부터 나온 의와 거룩함 안에서'를 의미한다.
    '의와 거룩함'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함을 받는 새사람의 윤리적 덕목이며 자질(資質)이다(Lincoln).
    '의'는 모든 생활 가운데 올바르고 충실하게 사는 것을 의미
    '거룩함'은 세상으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속한 삶으로 악에 물들지 않는 성결한 삶을 의미

    두 가지 덕목은 '진리'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진리'는 복음과 사도적 전승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실재다(21절;1:13).

    새 사람을 입으라

    본절은 22절의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와 대조된다.
    '새 사람'은 문자적으로 '갓 만들어낸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2:15)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통해 재창조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이러한 '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된 자에 합당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4)

    입는다는 동사는 주로 옷을 입을 때 사용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마치 무슨 탈을 뒤집어 쓰는 것이 아닙니다.

    1930년대 미국의 대경제공항 때에 경제적인 위기가 점점 심각해지므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이 동물원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도 먹고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때에 동물들을 제대로 먹이는 것에 많은 재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도 살리고 동물원도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던 관계자들은 한 가지 좋은 생각을 제시했습니다.
    동물의 탈을 쓰고 마치 살아있는 동물처럼 하루 종일 우리 안에서 지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숭이 우리에는 원숭이의 탈을 쓴 사람이 원숭이처럼 지내고 있었고 그 옆에 호랑이 우리에서는 호랑이 탈을 쓴 사람이 호랑이 흉내를 내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동물원의 관리인은 탈을 쓴 사람들에게 절대로 다른 우리로 넘어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한 번은 원숭이 우리에서 원숭이의 탈을 쓴 사람이 원숭이처럼 재롱을 부리다가 그만 호랑이 우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호랑이 한 마리가 어슬렁 어슬렁 원숭이 곁으로 다가옵니다.
    절대로 사람의 소리를 내지 말라는 관리인의 주의사항을 기억한 원숭이는 다가오는 호랑이를 두렵게 바라봅니다.
    이때 호랑이가 원숭이 곁에 와서 속삭이더랍니다.
    "너도 나처럼 하루종일 원숭이 탈을 쓰고 고생하는구나!" 하며 원숭이 주위를 한 바퀴 돌더나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예수 탈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겉은 예수처럼 성자와 같은 흉내를 내고 있지만 그 속에서는 온갖 추하고 더러운 것들이 득시글 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예수의 탈을 쓰고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온전한 예수의 생각과 마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처럼 무장할 수 있을까요?

    어느 날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매우 심각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결론으로 예수님의 대답은 "거듭나라!"고 하셨습니다.

    거듭나다는 헬라 단어는 팔링게네시아()라고 합니다.
    팔링게네시아는 "거듭남" 이란 명사형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첫째, 다시 시작하라

    새 출발이란 의미는 새로운 사람이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결혼한 후에 서로 헤어졌습니다.
    그런다가 각자 헤어진 후에 살아보니 그래도 예전에 함깨 하였던 사람이 더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직도 혼자서 지내던 두 사람이 다시 결합하기로 약속하면서 함께 생활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새 출발이라고 합니다.

    비슷한 사례이지만 두 사람이 헤어진 후에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지냈습니다.
    역시 구관이 명관이라는 옛말이 맞구나! 하고 느낄 때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현재 살고 있는 두 사람이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도 새 출발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새 출발보다 더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혼자사 쓸쓸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했었는데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이제부터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그 이전의 사람을 위하여 잘 살아야 한다고 중보기도도 합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먼저 생각하고 기도할 수 있을 때 이것도 새 출발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더 높은 것을 생각하라

    사람들은 현재의 위치에서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러한 삶은 육체에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육체에 붙잡혔다는 증거가 육신적인 기준에 의해서 판단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반차 투정, 신발 투정, 옷 투정, 자동차 투정......
    그러나 육신의 가치가 아니라 보더 한차원 높은 정신적 차원에서 생각해 봅니다.

    반찬이 싱겁구나 내가 소금을 더 먹어야지
    옷이 더럽구나 내가 손으로 직접 빨아어 입어야지
    왜 나는 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시킵니까?


    그런데 이것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고 상대방 중심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월남전이 한창 치열하게 전개될 때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이 월남 전선을 방문하여 장병들을 위로하는 위문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맨 앞줄이에 앉은 두 사병에 눈길이 쏠렸습니다.
    한 사람은 오른 손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왼손이 없습니다.
    다른 장병들이 손뼉을 치며 즐거워 할 때 두 사람은 서로 완손과 오른손을 마주치며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παλιγγενε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3824

    1. 중생.  2. 마 19:28. 3. 딛 3:5.
    발음 [ palingg ĕ- nĕsia ]
    어원 / 3825와 1078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중생, 재생, 거듭남.
     a. [세계에 대해서] 마 19:28.
     b. [구속받은 사람의 재생에 대해서] 딛 3: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중생(딛 3:5), 새롭게 됨(마 19:28).

    * 3825.  πάλιν 스트롱번호 3825

    1. 다시. 2. 돌아가다. 3. 요 4:13
    발음 [ palin ]
    어원 / 3823과 동일어에서 유래한 듯

    뜻풀이부

    1. 다시, 돌아, 도로.
     a.  [가다, 보내다, 돌아서다, 부르다 등의 동사와 함께] 돌아가다, 막11:3, 요6:15, 11:7, 갈2:1.
     b.  [전에 있던 상태로 다시 떨어지거나 전에 하던 동작으로 돌아가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 요4:13, 고전7:5, 갈2:18.

    2. [이미 한 일을 반복하거나 어떤 일이 전에 생겼던 것과 같은 식으로 생긴다 든가, 어떤 존재 상태가 전과 같이 다시 일어날 때] 다시, 또 한 번, 또 다시, 새로, 막2:13, 눅23:20, 요1:35.

    3. 그 위에, 더욱이, 더군다나, 거기서, 마5:33, 13:45, 19:24, 눅13:20, 롬15:10-12, 고전3:20.

    4. 반면에, 차례로, 마4:7, 요12:22, 고전12:21, 고후10: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또(행 10:15), 다시(갈 1:9), 또한(고전 12:21).

    * 1078. 게네시스  γένε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1078

    1. 기원.  2. 존재. 3. 마 1:1의 βίβ- λος γενέσεως는
    발음 [ genesis ]
    어원 / 1074와 동일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기원, 태초, 족보, 혈통, 탄생, 마 1:18, 눅 1:14.
    2. 존재, 약 1:23.
    3. 마 1:1의 βίβ- λος γενέσεως는, 창 2:4, 5:1에서 온 것이다. 기원의 역사, 족보, 역사의 책.
    4. ὁ τροχὸς τῆς γενέσεως : 인간 기원의 수레 바퀴, 인생 여정, 약 3:6.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계보(마 1:1), 출생(생긴)(약 1:23), 삶(약 3:6).







    07-21-2024(주일)
    암송성구 #.9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You diligently study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by them you possess eternal life. These are the Scriptures that testify about me.

    상고(詳考)라는 헬라 단어는 "에류나오(ĕrĕunaō. ἐρευνάω)" 라고 하여 사도행전 17:11에서 소개한 "상고(아나크리노. anakrinō) ἀνακρίνω)"와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나크리노'는 "탐색하다, 조사하다, 체로 쳐서 골라내다" 라는 의미로 사용하였고, '에류나오'는 "찾다, 추적하다, 조사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상고한다는 것은 예전부터 전해오는 것에서부터 찾아내고 밝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상고하는 방법은 말씀을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말씀과 연결되는 37-38절을 읽어봅시다(개역 개정판으로 소개합니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성경에서 영생을 얻으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께 친히 증언하신 말씀을 찾고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곧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언이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미리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장차 메시아가 이 세상에 임하실 것이라는 예언(預言)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말씀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신약의 말씀은 구약의 예언에 대한 성취(成就) 및 응답(應答)을 말합니다.


    상고하다(에류나오. ĕrĕunaō)  ἐρευνάω 스트롱번호 2045

    1. 204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 찾다.  2. 추적하다.  3. 조사하다
    발음 [ ĕrĕunaō ]

    뜻풀이부

    1. 204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 찾다, 추적하다, 조사하다, 탐구하다, 살피다, 요 5:39, 7:52, 롬 8:2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생각하다(요 5:39), 상고하다(벧전 1:11), 살피다(롬 8:27), 통달하다(고전 2:10).

    * 2046.
    ἐρέω 스트롱번호 2046

    1. 4483의 보다 완전한 형태 : 언급하다.  2. 대화하다.  3. 말하다
    발음 [ ĕrĕō ]

    뜻풀이부
    1. 4483의 보다 완전한 형태 : 언급하다, 대화하다, 말하다, 부르다, 요 4:18, 계 17:7등.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말하다(마 7:4, 눅 23:29, 롬 3:5), 명하다(마 17:20), 묻다(마 21:24, 눅 19:31), 이르다(막 11:29, 고후 12:9, 계 17:7), 말씀하다(눅 2:24, 요12:50, 행 2:16).

    * 4483.

    ῥέω 스트롱번호4483

    1. 말하다.  2. 지시하다
    발음 [ rhĕō ]

    뜻풀이부

    1. 말하다, 마 3:3, 5:21.
    2. 지시하다, 명하다.

    참고 정보/  문법설명 / 미래 ῥεύσω, 4482와 유사

    관련 성경
    말하다(마 2:15, 5:21, 12:17, 24:15), 이르다(롬 9:12).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 이 말씀은, 윗 귀절들(37-38)의 정당성을 증거한다.
    곧, 구약 성경은 영생을 주는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는데, 유대인들이 그 성경을 상고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그와 같은 행동은 성경을 바로 앎이 아니다.
    곧,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과 같다.





    07-14-2024(주일)
    암송성구 #.8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Follow my example, 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t.

    미메타이 무 기네스데 카도스 카고 크리스투
    μιμηται μου γινεσθε καθως καγω χριστου.

    본 받는자(3402) 미메테스(mimētēsμιμητής, οῦ, ὁ 스트롱번호 3402

    1. 모방자.   2. 본받는 사람.  3. 고전 4:16
    발음 [ mimētēs ]
    어원 /  340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모방자, 본받는 사람, 고전 4:16, 엡 5:1, 살전 1:6, 히 6:12.

    연관 단어 관련 성경
    본받은 자(고전 4:16, 엡 5:1, 살전 2:14), 행하는 자(벧전 3:13).

    * 3401.
    μιμέομαι 스트롱번호 3401

    1. 모방하다.  2. 본따다.  3. 본받다
    발음 [ mimĕŏmai ]
    어원 / 명령 μιμοῦ, 미완료 ἐμιμοῦμην, 미래 μιμήσομαι, 제1부정과거 ἐμιμησάμην, ‘흉내내다’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모방하다, 본따다, 본받다, 따르다, 살후 3:7,9, 히 13:7, 요삼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본절을 10장에 속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1. 2절에서부터 새로운 주제 즉 교회의 예배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2. 문맥상 본절은 10:3과 상관성(相關性)을 갖는다.
    바울은 10장에서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와 우상의 제물을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으며 그 권면의 모델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즉 바울은 8장의 경고와 권면에 대한 결론으로 본절에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본받는 그리스도는 유일하고도 완벽한 모델로서(Godet) 그분의 삶은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이었다(빌 2:4, 5).
    그러나 그리스도나 바울의 삶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이타적인 삶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이타적인 삶이었다(10:33).

    오늘 본문에서 ‘본’이라는 말이 영어 단어로는 두 가지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example’이라는 말과 다른 하나는 ‘pattern’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인데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나서 하신 말씀입니다. 조금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길 수 있습니까? 아니 단순히 선생이 아닌 “주님”인데 말입니다. 당시의 풍습에 의하면 하인이 주인이나 손님의 발을 씻는 것이 관례였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기를 원하시는 새로운 ‘pattern’입니다.

    모든 경기에는 rule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도 새로운 룰이 적용됩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것은 ‘본’이 되는 삶을 산다는 것이 우리가 가진 기존의 관념을 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는 관념도 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를 잘 믿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조금은 유별나게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남들이 뭐라고 해도 식사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도 성경을 묵상합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닮고 싶어 하느냐? 아니면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하고 심지어는 혐오하느냐? 하는 것이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우리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유익이 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닮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점점 더 혐오하게 될 것입니다.

    “본”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가 “거룩함”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생활에서 적어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는 가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교인들과 선교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것입니다. 선교팀들이 여기저기서 기도하는 모습을 봅니다. 식당에서도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은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신앙에 관한 한 열정적인지를 드러내야 합니다. 좀 “유별나다!”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제가 좀 믿음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저는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으면 개인 기도를 하고 먹거나, 작은 소리로 기도를 하고 식사를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식사 기도하는 것이 본이 되어야지, 다른 사람들의 식사를 방해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닌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터기에 성지순례를 하면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에베소의 원형극장에 갔을 때, 얼마나 울림이 좋은지 화음을 넣어서 성가를 부르면 사람들이 손뼉을 칩니다. 그래서 자꾸 노래를 더 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 소리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가이드가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합니다. 가이드 소리에 집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 찬양 소리 때문에 하나님이 손가락질을 당한다면 우리의 행동을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싶어 하셨던 새로운 삶의 스타일이 있다면 “섬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요한복음 13장 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때가 언제냐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것을 아시고, 바로 죽음을 앞에 놓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때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마지막까지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 끝까지 사랑하시던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오늘 본문을 가리켜 “때를 가리지 않는 섬김”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힘이 들어도 섬기지 못할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조금만 돈을 벌고 권력을 잡아도 섬기지 못할 이유가 됩니다. 가진 것 없어서, 지위가 없어서, 가진 것이 많아서 그 모든 이유가 섬기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데, 예수님은 가장 힘든 순간에 섬김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의 가장 진지한 모습이 드러나는 때가 극한 상황이라고 하지요.

    제가 조금 무모한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던 광야를 실제로 체험하면서 설교 준비를 해 보려고 합니다. 제가 직접 애급에서부터 출발해서 시내 광야를 머물며 광야 체험을 하고 가나안까지 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나눠보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을 나누는데, 누가 함께 가야 할까? 추운 밤, 더운 낮 물도 없이 지나야 하는데, 건강한 남자들로 팀을 모으고, 12 지파의 모습들을 성경을 보면서 철저하게 재현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여자들도 데려가서 정말 현실감 있게 불평하는 모습도 담아야 합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아야 하니까요.”

    여행사를 하시는 권사님이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광야 체험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렇게 온전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하루 코스에 하이라이트가 있는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무장한 강도들에 의해 납치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끌고 다니다가 호텔에 데려다 줍니다. 그러면 그 과정 중에 리얼하게 사람들의 본 모습이 다 드러납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그분이 누구이신지 우리가 분명히 압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신 것, 수없이 많은 기적을 행하신 일들이 결국은 섬기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섬김의 본이 위대한 것은 섬김의 대상에서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롯 유다도 예수님이 발을 씻기시는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에게 예수님을 팔려는 계획을 마음에 감춘 가롯 유다 앞에도 수건을 들고 대야를 놓고 발을 씻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섬김에서 누구도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을 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가장 강력한 크리스천의 영향력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은 늘 자기편과 반대편을 갈라놓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도 그런 나뉨이 존재합니다. 진리 때문에 나뉘는 것이 아니라 내 성향에 따라 갈라지는 것이죠. 나눠진 우리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라는 주석가는 "예수님은 겸손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마디로 말하면 겸손할 필요가 없는 시간에 겸손하셨습니다. 겸손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겸손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이 보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것이 무엇인가요? 오늘 본문에 다시 한 번 집중합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고 우리가 따라 하기를 원하셨고, 그렇게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우리를 보고 따라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한 번 상상을 해보세요. 우리가 상황에 관계없이 대상에 관계없이 섬기기를 시작했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또 다른 가치관을 누군가 보여 줄 수 있다면, 또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연히 읽게 된 책이 있습니다. 데이빗 케이프가 쓴 [주님의 음성에 그대로 순종한 예수를 위한 바보]입니다.

    그가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백인과 흑인이 딱 갈라져서 서로 싸우고 죽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현장에서, 그것도 석탄 연기 가득한 빈민들과 깡패들이 사는 ‘소웨토’라는 곳에서 “예수님이 씻긴 발은 행복한 발입니다!”라는 문구를 새긴 티셔츠와 반바지, 두꺼운 고무 깔창을 댄 운동화에 양말을 발목까지 접어내리고, 등에는 큰 장비를 지고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라는 음성 말입니다.

    자신의 모습이 너무 우습기도 하고, 정말 바보 같은 모습 실현 가능성이 없는 그 모습임에도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소웨토에서 만난 4명의 건장한 폭력배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이 발을 내놓았고, 그 중 한 명이 데이빗과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일어난 변화의 스토리 기적의 이야기가 그 책에 나와 있습니다.
    그의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속도로에서 또는 샛길에서 만나 그들의 발을 씻겼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족히 수천 명은 될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성공이나 실패가 없고 오직 순종만 있을 뿐이다. 내가 하루에 이삼십 명의 발을 씻기면 그날은 성공적인 날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찾는 단 한 가지는, 우리가 그분의 신실한 자녀로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다.”

    새로운 패턴의 삶을 살기 위해 순종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 세상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절대로 이 세상의 가치를 가지고 세상이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죠.

    오스트리아의 애들러라는 의사는 자기를 찾아오는 우울증 환자를 치료할 때 이런 처방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가서 2주일 동안 매일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할까 그것만 골똘히 생각하고 한번 실천해 보세요. 2주일 동안만 그렇게 살면 당신 병은 깨끗이 낫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새롭게 하고, 세상을 치유할 유일한 길이 있다면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셨던 그런 삶을 말입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믿음을 본받기 원합니다. 적어도 제 생각에 세상 사람이 우리를 보고 본받기를 원하고 감동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을 볼 때입니다. 평상시의 삶에서 우리의 신앙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모습”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반대로 평상시에는 예수를 잘 믿는 것 같은데 위기 가운데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면 우리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평상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성경을 읽거나 전도하는 우리의 모습보다, 불합리하게 진급에서 떨어졌을 때 대응하는 우리의 모습, 부당하게 꾸지람을 듣거나, 누가 봐도 힘들게 하는 못된 상사를 만났을 때 처신하는 우리의 모습, 모두가 실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회사가 위기에 처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보이는 신앙인의 의연한 모습과 소망으로 인내하는 모습 말입니다.

    자녀의 진로문제를 놓고 안달하고, 입시의 당락을 가지고 일희일비할 때,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자녀에 대한 소망의 끈을 놓지 않으며 기도하는 모습, 군대에서 진급 철이 되면 교회와 절과 성당에 사람들이 모이고 진급 발표가 나면 사람들이 쫙 빠져나가고 기뻐하거나 실망할 때,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며, 진급되었을 때, 그렇지 못한 사람을 위로하는 모습과 반대로 내가 실패했을 때에, 선한 길을 인도하실 하나님을 굳게 믿으며 잘 된 사람을 축복할 수 있는 모습 말입니다.

    내가 목사고, 장로고, 권사고, 집사인데, 예수를 잘 믿는데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일이 잘 안 풀릴 때, 우리를 주목해 보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어려운 일이 찾아올 때,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우리의 행동을 바라보지 않겠습니까?

    임은미 선교사가 쓴 [최고의 날 최고의 그리스도인]이란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 잘 믿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예수님을 잘 믿지 않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면 하나님을 떠나버리지 않을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친하게 여겨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주님, 이 고통을 저와 함께 나누기로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친구가 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주님의 고통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을 품는다. 어려움이 찾아온다면, 당신도 이런 마음으로 감사하며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어찌 보면 참 쉬운 일들 같은데 이런 모습이 세상이 바라는 모습입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본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받은 축복보다, 의인이 넘어졌을 때 일어나는 모습입니다.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넘어져서 일어나는 사람, 시험 가운데 견디는 사람, 죄 가운데서 용서받은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완전함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완전함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크리스천의 모습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의 [주님과 동행하십니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볼만한 묘기 가운데 하나는 공중그네 타기입니다. 우리는 숨을 죽여가면서 곡예사들이 한 그네에서 다른 그네로 옮겨가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천막의 가장 높은 곳에서 묘기를 펼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 사람을 다른 곳으로 밀어 보냅니다.

    그러면 당신은 "저러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하며 조마조마합니다. 한 번은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그처럼 완벽하게 공연을 할 수 있습니까? 한 번도 떨어지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떨어집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공연마다 떨어집니다. 하지만 눈치를 못 채시는 거죠. 왜냐하면 우리는 떨어졌을 때 어떻게 만회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거든요. 우리는 떨어졌을 때 재빨리 다시 뛰어 오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도 공연의 일부라고 생각하지요."
    그들은 밑에다 그물을 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될 때, 우리는 절대로 완전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안전합니다. 이 안전하다는 신뢰감이 모든 일을 성공하게 하는 힘이 되어줍니다.


    교회가 본이 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요, 그 하나님의 우리의 행동을 바라보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시고 그대로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믿음 안에서 우리의 행동이 결정되고, 교회의 모습이 결정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더 큰 도전이 되는 것은 우리 개인의 삶의 문제일 뿐 아니라 크리스천들이 모여 있는 교회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보인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교회를 보면 세상 사람이 용서하시는 하나님,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싸우시는 하나님, 정죄하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용서하거나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조바심내고 안달하며 자기 것을 차지하려는, 섬기는 본이 아니라, 죽어도 자신의 것을 희생하지 않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기적인 교회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운동을 하며 기독교 TV를 보다가 포항중앙교회 서임중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축복과 저주의 부메랑”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우리가 잘 아는 어떤 교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서울에 있는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 담임목사님이 재임 당시 쓰러지셨을 때, 교회당회원들의 사랑과 배려는 온 세계를 감동시킨 위대하고 아름다운 역사로 지금 남아 있습니다.

    1988년에 ○○○ 목사님이 뇌출혈로 쓰러지셨습니다. 3년 동안 말씀을 못 하셨습니다. 몸은 절반만 사용되는 불구가 되었습니다.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는 치명적으로 기억과 모든 의식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얼굴은 뒤틀려서 의사도 돌아올 확률이 없다고 진단을 내린 상황이었습니다. 웬만하면 포기할 법 한데, 그 교회 장로님들은 포기하지 않고, 3년 동안 목사님을 병원에 눕혀놓고, 매일 24시간 기도하면서 조를 짜서 병원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장로님들이….

    목사님이 스스로 견디기 어려워 죽고 싶다고 하니까 장로님들은 그 목사님을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그렇게 죽고 싶은 것이 소원이시면 저하고 손잡고 한 번이라도 일어섰다 죽으십시오.”

    그렇게 하면서 강권하여 담임목사를 운동시키는 조를 짜서 3년을 뒷바라지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목사님을 회복시킬까?’ 이것만 생각했습니다.

    그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한 번은 제주도로 목사님을 모시고 가서 만장굴 앞에 세워놓고 이쪽으로 걸어와 보라고 합니다. 비실비실하면서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목사님이 사모님 손을 잡고 몇 발자국 움직여 장로님 앞으로 오게 될 때, 장로님들은 “우리 목사님 만세!” 하면서 울고 또 울며 그렇게 기뻐했다는 이야기는 잊을 수 없는 감동스토리가 되었습니다.

    노회는 교회가 강단을 너무 오래 비운다고 설교 목사를 파송하려고 결의합니다. 그때 ○○○○교회 장로님들은 “누구도 우리 교회에 오지 못한다. 만약 노회가 설교 목사를 파송하면 우리는 ○○○○교회는 노회를 탈퇴한다고, 우리 목사님이 회복되어서 이 강단에 설 때까지는 누구도 ○○○○교회 강단에 설 수 없다.”라고 노회를 향하여 항거하기도 했습니다. 노회도 이 장로님들의 행위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습니다.

    장로님들은 목사 지키기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드디어 3년 만에 목사님이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반신불수의 몸으로 어눌하지만 처음 설교를 하게 되었을 때 교회는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 목사님은 우리 한국교회사에서 설교 잘하기로 유명한 목사님이셨습니다. 말이 빠르면서도 발음이 정확하게 전달되는 어른이셨습니다. 그러나 병중의 설교는 알아듣기도 어렵고 어눌한 말이었지만, 그 소리를 듣는 교인들은 행복해했습니다.

    뇌출혈 당시에 모든 기억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성경을 읽다 보니까 “태초”라는 말이 뭔지 몰랐습니다. 사전을 펴보니까 “맨 처음”이라고 되어 있었답니다. 창조라는 말이 뭔 말인지 몰랐답니다. 사전을 펴보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 이런 식으로 새롭게 어린아이같이 글을 익혀가는 가운데 너무 속이 터져서 “이게 사는 길이냐고, 죽자고” 포기를 하려고 했답니다. 그때 하나님이 소리치셨습니다.

    “이놈아, 너는 살아있지 않느냐? 반은 쓸 수 있지 않느냐? 책은 읽을 수가 있지 않느냐? 밥은 먹을 수가 있지 않느냐? 남아 있는 것 붙들고 감사하지 못하고 없는 것 때문에 왜 불평을 하느냐고” 거기서 목사님이 깨어집니다.

    어눌하게 성경을 읽기 시작하여 두 주일에 성경을 한 번씩 읽어내니까 1년에 25번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 읽는 어느 날, 갑자기 뇌 경이 마치 전기 스파크가 팍! 팍! 일어나듯이 온 뇌를 흔들더니만 기억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잃어버렸던 모든 언어가 회복되었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옛날에 암송해 두었던 성경구절이 다 회복이 되어 생각이 났습니다. 교인들은 행복했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예배당이 건축되었습니다. 쓰러질 때 교인 수가 1,500명이었는데, 3년 동안 교인 수가 불어나지 않았습니다. 강단에 선 목사님이 3년 동안 교회가 침체되었으니 오늘부터 하나님, 3년 만에 교회가 배가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정말로 출석교인 3,000명으로 부흥시켜 주셨습니다.

    당시 예배당 좌석 수가 600석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설교를 다섯 번, 여섯 번 하니 장로님들이 목사님 설교 한 번만 하시라고 했더니 목사가 설교를 해야지 하면서 계속하니까 장로님들이 놀라운 결정을 합니다.

    “우리 목사님 살리려면 여섯 번 설교할 것이 아니라 한번만 설교하게 하자. 그러려면 3,000명 들어가는 예배당을 짓자.”

    그렇게 해서 세운 성전이 지금 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목사로 하여금 설교 한 번 하게 하기 위하여 시작한 성전이 잘 지어져 3,000석 좌석의 예배당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다가 2005년 2월 13일, 미국 남가주 안디옥 교회에서 집회 인도하시다가 마지막 부분에 성도들 얼굴도 보이지 아니하는 희미해져 가는 가운데, 마지막 설교를 끝내고 강단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열흘 후에 23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이게 단순히 어느 잘된 교회의 이야기, 쓰러진 목사님께 잘해라! 이런 이야기로 들리시나요? 이제는 싸우는 교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런 훈훈한 교회의 이야기가 들려야 합니다. 교회가 축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경험이 서로 섬기게 하여 줍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이 이런 일들을 경험하고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본을 보아야 배우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본을 보여줘야 세상이 배우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배운 것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Nachfolge”라는 독일어의 단어입니다. ‘제자’란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섬김을 받았기에 우리도 섬길 수 있습니다.

    [고통이라는 선물]이라는 책을 쓴 폴 브랜드는 나병 환자를 치료하는 전문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생을 나병환자를 위해 살아온 분이었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나병환자를 치료하는 전문의가 된 것이죠.
    그는 사람들에게 나병환자와 접촉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을 설득했고, 많은 사람이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참여하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자리에 들게 되었습니다.
    순간 자신의 한쪽 발에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폴 브랜드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바늘을 가지고 찔러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는 나병을 치료하다가 나병 환자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바늘로 발뒤꿈치를 찔러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통으로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너무 피곤해서 잠시 마비현상이 왔던 것 같았습니다.
    그는 그 순간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하나님, 고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폴 브랜드가 감사했던 것은 나병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나병환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들이 왜 자신들의 신체 일부분을 뜨거운 불에 넣는지, 신체 일부를 칼로 자르려고 하는지를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폴 브랜드는 일평생 나병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에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을 잘 섬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본을 보여주셨는지 이해가 가십니까?
    그래야 제자들이 섬기는 자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으십니까?
    이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고 싶으십니까?
    이런 섬김의 본이 경험되고 반복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선한 영향력이 나를 통해 이 세상에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07-07-2024(주일)
    암송성구 #. 7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악에게 지지 말고
    - '
    악에게 진다'는 것은 원수의 악한 행위로 번민하거나 원수에 대해 악으로 갚으려고 악한 행위를 계획하는 것이다.
    즉 원수의 악한 행위로 인해 선한 상태를 떠난 것을 의미한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 이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삶으로 곧 선행 구절에서 말한 겸손(3, 16절), 봉사(6-8절), 평화를 유지하는 것(18절)을 가리킨다.
    또한 20절의 원수에게도 친절을 베푸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는 현재 삶에서 승리하는 생활을 말한다.
    이 승리는 자신의 노력, 열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는 믿음과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의 힘으로 이뤄진다.

    * 악(256)

    * 선(18)

    * 이기라(3528)


    06-30-2024(주일)
    암송성구 #. 6 고린도전서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Yet when I preach the gospel, I cannot boast, for I am compelled to preach. Woe to me if I do not preach the gospel!

    06-23-2024(주일)
    암송성구 #. 5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having a form of godliness but denying its power. Have nothing to do with them.


    06-16-2024(주일)
    암송성구 #. 4 고린도후서 5:9-10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So we make it our goal to please him, whether we are at home in the body or away from it.
    For we must all appear before the judgment seat of Christ, that each one may receive what is due him for the things done while in the body, whether good or bad.


    06-09-2024(주일)
    암송성구 #. 3 에베소서 4:4-6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게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There is one body and one Spirit--just as you were called to one hope when you were called--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one God and Father of all, who is over all and through all and in all.




    06-02-2024(주일)
    암송성구 #. 2 사도행전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Salvation is found in no one else, for there is no other name under heaven given to men by which we must be saved.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암송 송구 설교 자료

    05-26-2024(주일)
    암송성구 #. 1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 본 구절은 17세기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논쟁의 주요 쟁점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본절을 두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 구원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의 보편 구원론적 해석은 타당치 않다.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해 예비되었지만 그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만 구원을 얻는다(Earle).
    그래서 칼빈(Calvin)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사실은 '구원을 받으며'의 헬라어 '소데나이'(*)가 수동형으로서 구원의 주체는 오직 '우리구주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일 때 구원을 얻는다는 점을 시사한다는 것에서 지지를 받는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본절을 통해 어떤 계층이나 종족의 특성 때문에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지는 않음을 말하는 것이지 개별적으로 모든 인간이 구원받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Lenski).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진리에 대한 지식은 구원의 뿌리요, 열매이다.
    이러한 지식은 인간의 자의적(自意的)인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획득된다(마 16:17; 딤후 2:25).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겔 33:11)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마태복음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디모데후서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에스겔 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와 칼빈주의(Calvinism)의 비교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는 예정론, 자유 의지, 하나님 주권의 본질과 같은 교리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개신교 내의 두 가지 신학 체계입니다. 칼빈주의는 16세기 프랑스 신학자이자 개혁가인 존 칼빈(John Calvin)의 신학적인 가르침을 따르는 개신교의 한 분파이고, 알미니안주의는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자 야코부스(Jacobus Arminius)의 신학사상에 기초하여 17세기 초에 시작된 개신교 운동입니다.

    칼빈과 알미니우스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 둘 사이의 몇 가지 주요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정론과 선택론

    칼빈주의는 무조건적인 선택을 주장합니다. 즉, 하나님은 창세 전에 구원을 위해 특정한 개인을 선택하셨으며, 이는 그들이 행할 어떤 일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근거하여 선택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알미니안주의는 조건부 선택을 고수합니다. 즉, 하나님의 선택은 누가 자유롭게 그분을 믿기로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은혜에 응답할 사람을 미리 아시고 그들을 선택하십니다.

    2. 속죄의 범위

    칼빈주의는 제한 속죄를 가르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속죄 희생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선택하신 자들, 즉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알미니안주의는 무제한 속죄를 옹호하며, 그리스도의 희생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며 누구든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3. 구원

    칼빈주의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은혜는 택하신 자들에게는 저항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하나님께서 먼저 허락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알미니안주의는 저항할 수 있는 은혜 사상을 지지하며,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죄가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4. 성도의 인내

    칼빈주의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도 알려진 성도의 견인 교리를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선택하시고 거듭나게 하신 사람들은 믿음을 견지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알미니안주의는 배도의 가능성을 주장하며, 신자들이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함으로써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구원은 지속적인 믿음과 순종을 조건으로 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상은 단순화된 설명이며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내에서도 다양한 해석들이 있습니다. 둘 다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의 신비를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차이


    알미니안주의 : 칼빈주의

    1. Sinner, Can do good & respond to God.
    죄인은 선을 행하고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습니다.

    Sinner, Can do good & respond to God.
    God elects on basis of foreseen faith.
    Christ died for all.
    Man can resist God.
    Believer may lose.

    죄인은 선을 행하고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견된 믿음에 기초하여 선택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잃을 수도 있습니다.

    Man unable of self to respond to God.
    God elects according to His good pleasure.
    Christ died for elect.
    Irresistible election.
    Elect can never lose.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응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기쁘신 뜻에 따라 선택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선택된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선택.
    선택된 사람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질문 /

    칼빈주의 대 알미니안주의, 어느 견해가 옳은가?

    답변 /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계를 설명해 보려는 두 가지 신학 체계입니다.
    칼뱅주의는 프랑스 신학자 존 칼뱅(1509-1564)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고, 알미니안주의는 네델란드 신학자 야코뷔스 아르미누스(1560-1609)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두 체계는 다섯 가지 핵심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칼뱅주의는 인간의 완전한 타락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부분적 타락

    완전한 타락을 고수하는 칼뱅주의 교리는 인간의 모든 면이 죄로 말미암아 부패되어 사람은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부분적인 타락을 말하는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모든 면이 죄에 오염되어 있지만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정도까지 오염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타락의 정도와 의미는 알미니안주의 진영 내에서도 논쟁이 되고 있지만) 고전적 알미니안주의는 부분적인 부패를 거부하고 칼뱅주의의 “전적 타락”과 매우 유사한 견해를 고수한다는 사실입니다.
    대체적으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완전한 타락과 구원 사이에 어떤 ‘중간’ 상태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죄인들이 선행적 은총에 의해 그리스도께 이끌리는 것이 가능하며, 또한 하나님이 주신 능력에 의해 구원을 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칼뱅주의는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적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선택은 조건적

    무조건적인 선택은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타고난 어떠한 가치와는 상관없이 자신만의 전적인 뜻에 근거하여 구원할 사람들을 택하신다는 견해입니다.
    반면에 조건적 선택은 누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를지 미리 아심으로 그 예지에 근거해서 구원 받을 사람을 택하신다고 말합니다.

    칼뱅주의는 속죄를 제한적이라고 보지만 알미니안주의는 무제한적이라고 봅니다.
    이 점이 다섯 가지 쟁점 중에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입니다.

    제한적 속죄는 예수께서 오직 택자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믿습니다.
    무제한적 속죄는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나 사람이 믿음으로 그분을 영접하기 전까지는 그분의 죽음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칼뱅주의는 하나님의 은혜는 거부될 수 없다
    알미니안주의는 개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

    거부될 수 없는 은혜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부르시면, 그 사람은 필연적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거부할 수 있는 은혜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부르시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부름을 반대하고 거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칼뱅주의는 성도의 견인
    알미니안주의는 조건적 구원

    성도의 견인이란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은 사람은 믿음 안에서 인내하며 영원토록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그분으로부터 돌아서지 않는다는 개념을 말합니다.
    조건적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도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리스도로부터 돌아설 수 있고 따라서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견해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많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조건적인 구원”을 부인하고 그 대신에 “영원한 보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의 논쟁 가운데 누가 옳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의 다양성 안에서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혼합된 온갖 종류의 견해들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다섯 가지 칼뱅주의 핵심을 전부 고수하는 칼뱅주의자들이 있고 다섯 가지 알미니안주의를 고수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 가지 핵심만 고수하는 칼뱅주의자들도 있고 두 가지 핵심만 고수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도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 두 견해가 혼합된 유형에 동조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입장은 두 체계 모두가 각각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러한 개념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주권적이며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인간은 구원을 얻기 위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결정을 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이 두 사실은 우리에게 모순되어 보일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는 완벽하게 이치에 맞습니다.


    Calvinism vs. Arminianism - which view is correct?

    translate podcast video dot blog Calvinism vs Arminianism audio
    Answer


    Calvinism and Arminianism are two systems of theology that attempt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God’s sovereignty and man’s responsibility in the matter of salvation. Calvinism is named for John Calvin, a French theologian who lived from 1509-1564. Arminianism is named for Jacobus Arminius, a Dutch theologian who lived from 1560-1609.


    Both systems can be summarized with five points. Calvinism holds to the total depravity of man while Arminianism holds to partial depravity. Calvinism’s doctrine of total depravity states that every aspect of humanity is corrupted by sin; therefore, human beings are unable to come to God on their own accord. Partial depravity states that every aspect of humanity is tainted by sin, but not to the extent that human beings are unable to place faith in God of their own accord. Note: classical Arminianism rejects “partial depravity” and holds a view very close to Calvinistic “total depravity” (although the extent and meaning of that depravity are debated in Arminian circles). In general, Arminians believe there is an “intermediate” state between total depravity and salvation. In this state, made possible by prevenient grace, the sinner is being drawn to Christ and has the God-given ability to choose salvation.

    Calvinism includes the belief that election is unconditional, while Arminianism believes in conditional election. Unconditional election is the view that God elects individuals to salvation based entirely on His will, not on anything inherently worthy in the individual or on any act performed by the individual. Conditional election states that God elects individuals to salvation based on His foreknowledge of who will believe in Christ unto salvation, thereby on the condition that the individual chooses God.

    Calvinism sees the atonement as limited, while Arminianism sees it as unlimited. This is likely the most controversial of the five points. Limited atonement is the belief that Jesus only died for the elect. Unlimited atonement is the belief that Jesus died for all, but that His death is not effectual until a person receives Him by faith.

    Calvinism includes the belief that God’s grace is irresistible, while Arminianism says that an individual can resist the grace of God. Irresistible grace argues that when God calls a person to salvation, that person will inevitably come to salvation. Resistible grace states that God calls all to salvation, but that many people resist and reject this call.

    Calvinism holds to perseverance of the saints while Arminianism holds to conditional salvation. Perseverance of the saints refers to the concept that a person who is elected by God will persevere in faith and will not permanently deny Christ or turn away from Him. Conditional salvation is the view that a believer in Christ can, of his/her own free will, turn away from Christ and thereby lose salvation. Note: many Arminians deny "conditional salvation" and instead hold to "eternal security."

    So, in the Calvinism vs. Arminianism debate, who is correct? It is interesting that in the diversity of the body of Christ, there are all sorts of mixtures of Calvinism and Arminianism. There are five-point Calvinists and five-point Arminians and three-point Calvinists and two-point Arminians. Many believers arrive at some sort of mixture of the two views. Ultimately, it is our opinion that both systems fail in that they attempt to explain the unexplainable. Human beings are incapable of fully grasping a concept such as this. Yes, God is absolutely sovereign and knows all. Yes, human beings are called to make a genuine decision to place faith in Christ unto salvation. These two facts seem contradictory to us, but in the mind of God they make perfect sense.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조직신학 -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비교

    알미나안주의의 탄생 배경은 네덜란드 정부가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쿠른헤르트(Coornhert)에 대항하기 위해서 아르미니우스를 시켜 쿠른헤르트의 신학사상을 반론하라 한 것에 기인합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는 오히려 쿠른헤르트의 신학사상에 동조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아르미니우스와 고마르 사이에 신학논쟁이 있었는데, 논쟁의 내용은 '타락 전 예정론'과 '타락 후 예정론'이었습니다.

    1608년 아르미니우스 사후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신학사상을 더욱 체계화하여 발전시켰고 마침내 40여명의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은 종교적 관용을 강조하는 네덜란드의 정치인 올덴바르네벨트의 요구에 따라 Remonstrance(항의서)라 불리는 신앙성명을 작성하였으며, 이에 대한 도르트회의(1619년)의 신학적 응답이 바로 칼빈주의의 5대 강령입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그 내용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분       칼빈주의                     알미니안주의

    인성      전적 타락                  자유의지 인정
    예정    무조건 예정                예지하여 예정
    속죄    제한된 선택 구원       무한 선택 구원
    은총    불가항적 은총               가항적 은총
    성도  성도의 견인(보호)       성도 보호 불확실

    결국 1618년 11월 13일-1619년 5월 9일까지 도르트회의가 열려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 승리하여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편 알미니안주의는 네덜란드를 벗어나 영국교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유니테리언주의와 침례교,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논쟁은 5세기경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을 연상시킬 정도로 17세기 초를 뜨겁게 달구었던 개신교 역사상 가장 거대한 신학 논쟁의 하나였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4년 주일 설교 / 암송 성구를 중심으로

    1월 7일(주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1월 14일(주일)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만(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시편 33:12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Blessed is the nation whose God is the LORD, the people he chose for his inheritance.

    시편 144:15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Blessed are the people of whom this is true; blessed are the people whose God is the LORD.


    사도행전 20:24
    나의 달려갈 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However, I consider my life worth nothing to me, if only I may finish the race and complete the task the Lord Jesus has given me--the task of testifying to the gospel of God's grace.


    고린도전서 3:16-17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Don't you know that you yourselves are God's temple and that God's Spirit lives in you?
    If anyone destroys God's temple, God will destroy him; for God's temple is sacred, and you are that temple.

    고린도전서 6:19-20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광을 돌리라.

    Do you not know that your body is a temple of the Holy Spirit, who is in you, whom you have received from God? You are not your own;
    you were bought at a price. Therefore honor God with your body.

    고린도후서 13:13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May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God, and the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be with you all.

    신명기 7:6-7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For you are a people holy to the LORD your God. The LORD your God has chosen you out of all the peoples on the face of the earth to be his people, his treasured possession.
    The LORD did not set his affection on you and choose you because you were more numerous than other peoples, for you were the fewest of all peoples.
































































    ‘독생자’에 대한 바른 쓰기와 의미는 무엇인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언제 태어나서 얼마 동안 살다가 어느 시점에 죽는다. 즉 인간의 출생과 생존과 사망 이 세 가지는 인생의 불가피한 사실이거니와, 그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말할 것도 없이 출생이다. 왜냐하면 생존과 사망은 또한 출생의 상황 계속이요, 그 결과와 마침이기 때문이다. 동양 역학(易學)에서 보면 인간의 삶(생존)과 죽음 등이 사주 팔자 (四柱 八字) 즉 출생의 년, 월, 일, 시에 좌우된다고 하는 것만 보아도 출생의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출생은 모두가 부모의 결혼(남녀 양성의 결합)에 의한 결과이거니와, 단 한 번의 예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이다. 성탄은 그 역사적인 사실로서도, 그 의미에 있어서도 유일 무이(唯一 無二)한 사건이며, 그것을 나타내는 어휘에 있어서도 독특하다. 역사적인 사실로서 유일무이하다는 것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어머니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신 사실을 가리키며, 그 의미에 있어 독특하다고 하는 것은 성육신 즉 본질상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요한복음에서의 태초의 ‘로고스’)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요 1:14), 따라서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마 1:18-23)이라는 사실이다. 흔히 인류 역사상 특출한 위인이나 성현의 전기에서는 그들의 출생에 얽힌 전설로 큰 별이 나타나고 하늘로부터 무슨 음성이 들렸다는 등의 기록이 있으나, 그것은 거의가 전설에 그칠 뿐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에 관해서는 복음서에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로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는 그것을 나타내는 어휘 자체부터 독특성을 가진다. 즉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만 ‘성탄’(聖誕)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성’(聖) 자를 붙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사항에 적용되는 것 중의 한 가지일 뿐이다. 예를 들면, 성일(聖日), 성전(聖殿), 성회(聖會), 성민(聖民), 성경(聖經), 성서(聖書), 성구(聖句), 성직(聖職), 성당(聖堂), 성물(聖物), 성수(聖水), 성가(聖歌), 성부(聖父), 성모(聖母), 성자(聖子), 성녀(聖女), 성도(聖徒), 성도(聖都), 성전(聖典) 성전(聖戰), 성례, 성묘(聖廟) 성빈(聖貧) 성소(聖所), 성소(聖召), 성시(聖屍), 성야(聖夜), 성언(聖言), 성업(聖業), 성역(聖域), 성지(聖地), 성찬(聖餐), 성체(聖體), 성품(聖品), 성화(聖畵), 성호(聖號), 등 많이 있다.

    ‘독생자’에 대한 원어(헬라어)는 ho monogenes huios 로서, 신약성경 요 1:14, 18; 3:16, 18등 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독특한 관계를 나타내는 어휘이다. 이 어휘는 구약에 그 배경을 두고 있는 바, 곧 시편 2:7의 “너는 내 아들이라 ... ”라는 문구에 기초해 있다고 본다. 유대교에서는 이 문구를 하나님과 메시야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데,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ho monogenes huios 는 여기에 사상적인 유래를 가지는 것으로 본다.

    그러면 이 어휘의 핵심부분인 monogenes 란 낱말의 뜻은 무엇인가? 이 말은 고전 헬라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데, 그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독특한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서 특별히 쓰인 어휘임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이 낱말을 어원적으로 풀어보면 monogenes 는 monos(유일한) 와 genos(종류) 의 합성어로서 흔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출생을 뜻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유래(derivation)을 뜻하는 말이다. 먼저 genos 라는 말에는 1) 후손, 2) 가족 또는 친족, 3) 민족, 백성, 4) 종류(kind, class) 등의 뜻이 있는데, 이 중 monogenes 의 어원으로서는 넷째 것이라 이해된다. 다음, mono- 는 어떤 유래의 성격 (the nature of derivation) 을 뜻하는 말로서, 결국 monogenes 의 중요한 뜻은 유일성(only) 과 독특성(unique) 을 나타내는 데 있다.

    신약에서 monogenes 는 두 가지 용법으로 쓰인다. 하나는 신성(divinity) 에 관련해 쓰이는 것으로,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요 1:14, 18, 3:16, 18, 요일 4:9). 다른 하나는 인성(humanity) 에 관련해 쓰이는 것으로서, 이 경우는 형제자매 없는 유일한 자손(sole descendant) 이란 뜻이며, 신약의 용례로는 눅 7:12의 나인성 과부의 아들, 눅 8:42의 야이로의 딸, 눅 9:38의 간질병 든 아이, 히 11:17의 이삭에 관하여 쓰이고 있다. 이제 이 낱말의 전자의 용법을 그것과 유사한 개념을 가진 다른 낱말과 비교해 본다.

    1) 바울서신 히브리서 요한계시록 등에서 그리스도의 신분에 관하여 요한복음의 monogenes 에 대응되는 낱말은 prototokos (first born, 처음 난 자)로서, 롬 8:29, 히 1:6에서는 ‘맏아들’로, 골 1:15, 18; 계 1:5에서는 ‘먼저 나신 자’로, 히 11:28, 12:23에서는 ‘장자’로 번역되었는데(개역본), 이 말은 요한복음에서의 monogenes 와 뜻에 있어 다소간 차이가 있다. 즉 monogenes 는 그리스도(성자)가 하나님(성부)과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유일하고 독특(unique)하다는 뜻인데 대해, prototokos 는 그리스도가 우주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라는 뜻이며, 전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를 피조물과 구별할 때 강조점이 있는데 대하여, 후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가 피조물 이전의, 또는 최초의 존재라는 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2) 요한복음에서 monogenes 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tekna 라는 말과 구별된다. 이 구별은 요한복음 본문에서 분명히 보이는 바, 하나님의 자녀 (tekna tou theou, children of God) 는 어떠한 때에 그렇게 되는 데 (genesthai, become) 대해서 (요 1:12),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en arche) 유일하고 독특하게 존재했던 (en, was) 것이다(요 1:1, 2). 따라서 monogenes 는 성육신 (incarnation, 요 1:14)의 범주 안에서 이해될 것이 아니고 그의 존재의 영원성(nature of eternal being, 요 1:1, 2)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요한의 ho monogenes huios 는 공관복음에서의 ho huios mou ho agapetos (나의 사랑하는 아들) 와, 하나님의 유일하신 메시야적인 아들이라는 점에서 의미상 관련된다. (마 3:17, 17:5, 막 1:11, 9:7, 눅 3:22). 다만 전자가 요한의 증언인 데 대해서 후자는 하나님 자신의 선언이라는 데 서술상의 차이가 있다 (단 요 3:16이 요한의 증언이냐 예수 자신의 말씀이냐에 대해서는 학자 간에 논란이 있다).

    이상과 같은 독특한 의미를 가진 monogenes 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origin)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독생자’(獨生子; 오직 한 분으로 출생한 아들, the only begotten Son)라고 한다. 따라서 ho monogenes huios 는 단지 ho huios tou theou 의 특별한 표현양식의 하나라고 본다. 그리고 monogenes 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출생을 뜻하는 것은 요한일서 5:18에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 (ho gennetheis ek tou theou) 에 비추어 이해된다고 본다.

    그러나 요일 5:18의 gennetheis 가 gennao (낳는다)에 유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 3:16의 monogennes 는 gennao 와 결합한 형이 아니기 때문에 어원적으로 보면 ‘독생자’로 번역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우리말 번역에서의 ‘독생자’는 영어역 King James Version 의 the only (독) begotten (생) Son (자) 의 직역이고, 중국어역 ‘獨生子’와는 문자적으로 일치하는데, 우리말 번역은 영어역이나 중국어역 성경으로부터의 중역(重譯)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 낱말의 의미에 대해서 성경사전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은 King James Version 의 ‘the only begotten Son’ 이 헬라어 ‘monogenes’ 에 대한 오역이라고 분명히 지적한다(Vol. III. 604면 참조). ‘독생’(獨生)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monogenes’가 아니라 ‘monogennetos’(monos+genao)이다. King James Version(1611년) 은 라틴어의 권위본인 Vulgata의 영향으로 요 3:16, 18의 ‘unicus’(유일한)을 ‘unigenitus’(독생한)로 바꾼 것이다. 그러나 King James Version 이후의 영어성경에서는 ‘begotten’(생)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대개가 ‘the only Son 만으로 나타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토테 호 예수스 에이펜 토이스 마데타이스 아우투 에이 티스 델레이 오피소 무 엘데인
    아파르네사스도 헤아우톤 카이 아라토 톤 스타우론 아우투 카이 아콜루데이토 모이




    마태복음 16:2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자부(自不) 자십(自十)  :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어려서 숨바꼭질 놀이를 할 때 "여기 없다!" 하고 소리친다.
    내가 여기 있으면서도 내가 여기 없다고 외치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표현이다.
    숨어야 하는 놀이를 하면서도 인간은 철이 없을 때부터 나를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에 익숙한 성인이 되면 무슨 일에든지 자기를 드러내야만 마음이 편하다.
    이런 나를 없다고 하려면 철저하게 나를 낮춰야 한다.
    내가 낮아져서 뭇 사람들에게 짓밟힐지라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그 아픔을 몸으로 받으드릴 수 있을 때 자기 부인이 가능하다.

    유명한 일화를 생각해 봅시다.
    길선주목사가 평양의 난봉군으로 살아오던 중 미국 선교사의 전도지를 받고 회개한 후에 옛날 같으면 너는 벌써 죽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 있는 길선주는 그 옛날의 길선주가 아니다.

    자기 십자가

    나의 십자가는 무엇일까?
    우선은 내가 나를 부인하는 것을 바르게 감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먼저 나를 부인한 후에 비로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자기 부인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십자가를 얹어주면 당장 튀어오를 것이 분명하다.
    왜 내게 이런 무거운 짐을 주느냐?
    그런데 죽은 사람위에 아무리 무거운 바위를 올려놓아도 죽은 사람은 그 무게를 느낄 수 없다.
    나의 십자가는 먼저 내가 죽는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 자기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다.
    예수 십자가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죽음이 없는 십자가는 장식품이 될 것이다.

    호주머니 속의 십자가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짤막한 영문으로 출판된 소책자를 기억합니다.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멋으로 생각한다.
    얼마나 멋이 있으면 목걸이, 반지, 금뱃지 등으로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그런데 십자가는 결코 멋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너무 고통스럽고 무겁고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를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아직도 온전하게 나의 십자가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 여기서 '따른다'는 것은 스숭의 삶과 가르침에 온전히 순복하는 참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참된 제자의 요건을 전제한 것은 당신의 임박한 수난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그와 유사한 수난과 고초를 당하게 될 것을 익히 아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 당신을 따르기에는 너무 미흡한 제자들에게 당신을 전적으로 순종하며 수난당할 각오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힘주어 가르치셨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를 따르는 데는 내적으로는 자기 부인과 외적으로는 역경 가운데서의 적극적 순종이 수반되어야 한다.

    󰃨 자기를 부인하고 - 이는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 요구되는 소극적 측면으로서 자기의 이기적 욕망과 생각과 주장, 그리고 부패한 옛자아, 옛사람을 철두철미 굴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사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육신(*, 사르크스)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죄인됨 인간 그 자체(롬 7:14,18)가 됨으로써 그의 이성, 감정, 의지 등이 완전히 부패되었다(참조, 렘 17:9;롬 1:18-32). 바로 이러한 본성적 존재로서는 예수의 제자로 결코 따라 나설 수 없다. 한편 이러한 제자의 요건을 망각(妄却)했던 베드로는 훗날 자기를 부인하는 대신 예수를 부인하고야 만다.

    󰃨 자기 십자가 -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살던 팔레스틴의 유대인이라면 십자가 형벌을 선고받은 죄수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야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27:32) 더불어 유다의 대반란으로 인해 수많은 십자가 형틀을 목격해야 했던 그들로서는(Josephus, 행 5:37) 죽음의 짐이요,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를 메라는 참의미가 무엇인지를 뼈 속 깊이 이해했을 것이다(10:38). 한편 예수께서 친히 골고다 험한 언덕에서 이 십자가 형을 당하신 이후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엄숙한 제자로서의 결단의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신 일은 인류 구속의 대업을 완성하시는 유일, 단회적인 행위였으나 제자들의 십자가 짐은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 생겨나는 다양하고도 지속적인 행위일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제자들은 각자의 십자가를 거룩한 기쁨과, 무한한 감격과 감사로, 그리고 가장 가치있는 일로 받아들이며 끝까지 지고 예수의 발자취를 좇아가야 할 것이다(빌 3:12-14).

    󰃨 좇을 것이니라(*, 아코루데이토) - 시제는 현재 명령형으 로서 한두 번 따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좇아오라는 강한 명령이다. 실로 주의 제자된 자는 억지로, 이따금씩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심전력으로 부단한 노력과 헌신을 통해 계속 좇아가야만 한다.




    자기 부정

     

    저가 집회 할때에 사람들이 은혜를 받을 때면 때때로 성령의 임재(臨在)를 느낍니다. 제 자신의 부족한 설교의 톤에도 대단한 확신으로 가득 차며 듣는 교인들도 지나칠 정도로 집중하여 듣고 은혜로 감동한 표정들로 진지해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집회 후 집에 돌아와서도 받은 감동과 인상은 한 동안 여운으로 가동으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 때 마음의 다른 쪽에서부터 자신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자부심과 자긍심이 갑자기 생기며 자신이 마치 설교에 대단한 능력을 가진 목회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 때 황홀할 정도로 재 자신을 다시 보게 됩니다. 자신감과 확신 그리고 이에 따라 동반하는 기쁨이 제 자신을 사로잡으려 합니다. 순간적으로 이런 것들 속에 감추어진 영적 위험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황급하게 나의 능력과 자부심과 자긍심을 부인하고 모든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나옴을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온전히 말씀가운데 행하시는 은혜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열정으로, 하나님의 열심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이 집회에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거짓 확신과 자긍심을 부정하며 집회를 끝날때마다 물리쳐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며 그리고 병자들을 고쳤다(마4:23-25절). 이렇게 예수님은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자신을 감추었다. 자신을 밝히려는 귀신을 막고 잠잠하라고 명했다(막1:24-25절). 그리고 이적들을 행한 후에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고 성전의 제사장을 찾아가 받은 은혜를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요구했다(마8:4절). 왜 자신을 알리지 말라고 요구하였을까?

     

    성경을 보면 헤롯에 대한 기사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화려한 옷을 입고 두로와 시돈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들은 청중들은 신의 소리라고 말하며 그를 높였습니다.
    헤롯은 이 연설에 자부심과 자긍심으로 충만하였습니다.
    헤롯은 모든 영광을 자신이 취하고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주의 사자의 침을 받아 갑자기 죽었습니다(행 12:20-23).

    우리는 이러한 거짓에 사로잡히는 영적 체험이 목회 성공에 엄청난 위험으로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설교를 잘하는 목회자일수록 이러한 유혹에 쉽게 빠지기 쉽습니다.
    아무리 경건한 목회자라도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대신 자신을 높이며 사단이 주는 시험과 유혹에 얼마든지 떨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외형적인 결과를 보면서 목회자도 자신의 능력으로 이 모든 결과가 나온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며 자긍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함으로 서서히 파멸에 이르는 잘못된 시험에 자신도 모르게 빠질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에서 느브갓네살 왕은 자신의 엄청난 왕국을 바라보며 자긍심에 빠졌습니다.
    자신이 위대하여 위대한 제국을 세웠다고 생각하며 우월감과 교만에 빠졌습니다(단 4:30-31).
    이런 일은 역사상 대제국을 세운 모든 왕들과 황제들에 그대로 반복되었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은 느브갓네살에게 꿈과 이상을 주어 그가 무력한 자이며 모든 일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작정되고 진행됨을 깨닫게 했습니다(34-35).

    성공과 형통을 열망하며 지독히 노력하는 자의 소원대로 성공을 하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성공과 형통을 관리할 수 있는 신앙적 그리고 정신적 성숙이 그에게 없다면 성공과 형통이 오히려 파멸의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낙원으로 이끌려 올라가 그곳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계시들을 들은 사도 바울에게 고쳐지지 않는 가시를 하나님이 허락한 것은 축복 자체입니다(고후12:1-9절). 그러므로 구원 받고 난 이후에도 우리에게 짊어져야 할 멍에는 반드시 필요합니다(마11:29-30절). 이것이 없으면 우린 은혜를 받은 후 교만해지며 스스로 파멸의 길로 걸어갈 것입니다.

    우린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거룩한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파멸에 이르는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존재임을 다시 한번 더 깨닫습니다. 예수님과 3년 넘게 함께 한 제자들도 이런 유혹에 빠졌는데(마 16:23)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하나님께로 간다는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믿으면서도 타락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지만 눈에 안 보이기에 쉽게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2025 새벽 묵상 / 창세기


    창세기 장별 요약

    창세기 개요

    구약의 첫 성경이자 모세 오경의 시작인 창세기를 장별 요약한 것입니다. 창세기는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시하며 권위있게 생각하는 모세 오경에 속하며 ‘토라’로 불리는 성경입니다. 창세기를 읽을 때는 연대기적으로 읽어서는 안 되며 출애굽으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즉 출애굽의 이유와 목적, 기원을 조명하기 위해 창세기가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후에 창세기 개론에서 좀 더 깊이 다루고 오늘은 창세기를 간략하게 장별로 요약하도록 합니다. 각장 강해가 완성되면 제목 아래에 강해 링크가 추가됩니다.

    창세기 구조

    창세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아브라함의 이전의 시대로 창조와 타락, 노아의 홍수와바벨탑 사건까지를 다룹니다. 12장부터 50장까지는 족장 시대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요셉의 생애까지 다룹니다. 더 세분화 할 수는 있지만 여기서는 이 정도로 넘어갑니다.

    • 1-11장 창조에서 바벨탑까지
    • 12-50장 족장 시대

    창세기 장별 요약

    창세기 1장 요약

    •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다.

    하나님께서 육일동안 천지를 창조하신다. 첫날에 빛을, 둘째 날에는 궁창을, 셋째 날은 땅을, 넷째 날은 광명체를, 다섯째 날은 새와 물고기를, 여섯째 날은 땅 위에 거하는 동물과 사람을 창조하신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어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신다.

    창세기 2장 요약

    • 창조 7일째 안식하시고,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 여자를 만드신다.

    창조 7일째 안식함으로 창조가 완성된다. 7일째 되는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신다. 사람의 창조 내력이 소개된다. 아담을 먼저 창조하셨고,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창조하신다. 아담에게 모든 나무의 실과는 임의대로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금하신다.

    창세기 3장 요약

    • 3장은 뱀의 유혹으로 사람이 타락한다.

    하나님이 만드시 가장 간교한(지혜로운) 동물인 뱀이 하와를 유혹하여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도록 한다. 하와는 자신도 먹고 같이 있던 남편에게도 준다. 결국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다. 뱀은 평생 기어 다니고, 여자는 남자의 지배를 받으면 아이를 낳은 고통을 더한다. 남자는 땅이 저주 받아 일한대로 얻지 못하게 된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란 예언을 하시고 그들을 동산에서 쫓아 내신다.

    • 창세기 3장 강해

    창세기 4장 요약

    • 아담과 하와의 첫 아들인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인한다.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가인과 아벨을 낳는다. 가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양을 친다. 어느날 둘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사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는다. 시기한 가인은 아벨을 들로 불러내어 그를 돌로 쳐 죽인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땅에서 유리하는 저주를 내린다. 하지만 가인은 유리하기를 거절하고 놋(유리하다) 땅에 아들 에녹의 이름으로 성을 짓고 산다. 아담의 후손들이 번창한다. 그 중에 라멕은 두 아내를 두고 많은 사람을 살인한 것을 자랑한다. 아담과 하와가 다시 동침하여 셋을 낳는다. 셋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

    창세기 5장 요약

    • 아담부터 노아까지의 족보가 소개된다.

    아담부터 시작하여 노아까지 이어지는 족보가 소개된다. 족보는 태어나고 낳고 살다가 죽는다는 규칙으로 되었다. 에녹만이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다. 마지막으로 노아가 소개되고, 노아의 죽음은 9장 28-29절로 이어진다. 5장의 족보 안에 6-9장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창세기 6장 요약

    • 사람들이 번성하지만 악을 행하자 홍수로 심판할 계획을 세우시고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명령하신다.

    사람들이 번성하며 악을 행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여 타락한다.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여 그들을 심판하시려 한다.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명령하신다. 노아에게 방주를 어떻게 지을 것인지를 설명하신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대로 행한다.

    창세기 7장 요약

    • 방주가 완성되고 노아의 가족이 방주로 들어가자 홍수가 시작된다.

    방주가 완성되자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로 들어가라 하신다. 정결한 짐승 7쌍과 부정한 짐승 한쌍이 함께 방주 안으로 들어간다. 방주의 문이 닫히고 칠일 후에 40일 동안 홍수가 일어난다. 홍수로 물이 불어나고 땅에 있던 코로 호흡하는 짐승들과 사람들이 모두 죽는다. 비가 오는 동안 노아는 방주에 계속 거한다.

    창세기 8장 요약

    • 홍수가 그치자 노아는 까마귀로 비둘기를 통해 사정을 알아본다. 방주에서 내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드디어 홍수가 그친다. 방주는 아라랏산에 머문다. 홍수 후 열째 달 초하루에 산 봉우리들이 보인다. 사십 일이 지나 까마귀를 내 보내고, 이후에 비둘기를 내 보낸다. 비둘기가 감람잎을 물로 들어온다. 육백일 년 둘째 달 27일에 방주에서 나온다. 노아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한다.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 인류를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창세기 9장 요약

    • 하나님은 노아와 무지개 언약을 맺으신다. 노아는 포도주 농사를 짓는다.

    하나님은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가족들에게 다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1절) 축복하신다. 고기를 먹 되 피째 먹지 말라 하신다. 무지개를 통해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야속하신다. 노아는 땅에 내려와 포도주 농사를 짓는다. 포도주를 마시고 옷을 벗고 누운 모습을 함이 발견한다. 셈과 야벳이 가려 준다. 노아는 함의 행동을 알게 되어 그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한다. 노아는 홍수 후 350년을 살고 950세에 죽는다.

    창세기 10장 요약

    • 야벳, 함, 셈의 족보가 소개된다.

    홍수 이후 세 아들의 후손들이 소개된다. 야벳의 후손들은 고멜, 마곡, 마대, 야완, 두발, 메섹, 디라스다. 함의 아들은 구스, 마스라임, 붓과 가나안이다. 셈의 아드은 엘람, 앗수르, 아르박삿, 룻, 아람이다. 이들에게서 많은 족속으로 갈리고 후손들이 일어난다.

    창세기 11장 요약

    • 사람들이 동방으로 가다 시날 평지에 머물며 바벨탑을 쌓는다. 하나님이 내려와 그들을 흩으신다.

    11장은 창조시대의 마지막 장이다 족장 시대로 넘어가는 관문이다. 노아의 후손들이 번성하여 일부의 사람들이 동방으로 옮겨 간다. 시날 평지를 만나 그곳에서 도시를 건설한다. 그들은 성을 쌓으면서 하늘 꼭대기까지 쌓자고 한다. 하나님이 보시고 강림하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흩으신다.

    창세기 12장 요약

    •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소명을 주신다. 아브람은 말씀을 쫓아간다.

    12장은 족장 시대가 시작되는 첫 장이다. 바벨탑 공동체 안에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언약하신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순종한다. 하지만 가나안에 기근이 일어나 애굽으로 내려가고 사래를 바로에게 빼앗긴다. 하나님께서 바로 궁에 저주를 내리시고, 다시 사래를 찾아 많은 재물을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간다.

    창세기 13장 요약

    • 애굽으로 돌아온 아브람과 롯은 가축이 불어나 서로 다툼이 일어나고 결국 롯은 요단들을 선택하고 아브람과 헤어진다.

    애굽에서 많은 재물을 얻은 아브람과 롯은 가나안에 도착해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은 불어난 가축으로 인해 목자들이 서로 초장을 얻기 위한 다툼이 일어나고 결국 아브람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롯을 부른다. 롯에게 원하는 곳을 선택하라고 하고 자신은 그 반대로 가기로 한다. 롯은 요단들을 보니 애굽과 같고 하나님의 동산 같이 아름다워 보여 그곳으로 향한다. 안타깝게 그곳은 하나님 보시기에 큰 죄인이었다.(13절) 롯이 떠난 하나님은 아브람을 찾아와 동서남북을 보라하시고 모두 주겠다고 위로하신다. 아브람은 헤브론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는다.

    창세기 14장 요약

    • 가나안에 전쟁이 일어나 그돌라오멜 연합군이 소돔에 살던 롯을 붙잡아 가자 아브람이 가서 구출한다.

    롯은 아브람을 떠난 후 소돔에 살게 된다.(13:12) 그런데 하필이면 그돌라오멘 연합군이 소돔과 주변을 공격한다. 소돔에 살던 롯과 가족들이 붙잡혀 간다.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동맹한 사람들과 사병들을 이끌고 추격하여 급습한다. 롯과 그의 재물, 사람들을 구출해 데려온다. 그때 살렘(후에 예루살렘)왕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찾아와 축복한다.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다.

    창세기 15장 요약

    • 전쟁 후에 두려워하던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와 햇불 언약을 맺으신다.

    전쟁 후 걱정에 쌓인 아브람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찾아와 ‘두려워하지 말라 나느 ㄴ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1절)이라 말씀하신다. 아브람에게 후손을 재차 약속하신다. 아브람에게 삼년 된 암소, 암염소,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를 바치라 하신다. 밤이 깊을 때 하나님이 햇불 사이로 지나면서 언약을 맺으신다. 후손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 사백 년 후에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라 약속하신다.

    창세기 16장 요약

    사래는 자신이 출산하지 못하자 자신의 몸종인 애굽 사람 하갈을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다. 아브람은 하갈과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부른다. 하갈이 임신을 하자 하갈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주인 사래를 조롱한다. 화가 난 사래는 하갈을 핍박한다. 하갈은 사래를 피해 도망을 가게 되고 결국 광야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다.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하갈에게 후손이 번성할 것을 약속한 다음으로 다시 사래에게 돌아가라 명한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아이를 낳으면 ‘이스마엘'(하나님께서 들으신다)로 짓도록 한다. 하갈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 샘의 이름을 브엘라해로이라 부른다.

    창세기 17장 요약

    아브람의 99세에 하나님께서 나타나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바꾸러 주신다.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명한다. 할례는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행하도록 하신다. 할례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표징이 되게 하신다. 이에 아브라함은 자신과 종들, 이스마엘에게도 할례를 행한다. 이때 이스마엘의 나이는 13세(25절)였다.

    창세기 18장 요약

    아브라함의 집에 세 사람이 찾아온다. 그들은 천사들과 하나님이시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집 근처를 지나자 아브라함이 가서 집에 초대한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많은 음식으로 대접한다. 손님들은 아브함에게 내년 이 맘 때에 아들이 있을 것이라 말한다. 사라가 뒤에서 듣고 속으로 웃는다. 하나님이 사라가 웃었다면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말씀하신다.(14절) 두 명이 떠나고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대화한다. 소돔을 멸하는 가는 길이라 말하자 아브라함은 롯을 위해 간구한다. 결국 의인 10명이 없어 소돔을 멸망하게 된다.

    창세기 19장 요약

    두 천사가 소돔을 찾아간다. 롯이 성문에서 보고 나그네를 대접한다. 하지만 저녁이 되자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에 찾아가 두 사람을 내어 놓으라 한다. 롯은 자신의 딸들을 줄테니 손님에게 손대지 말라 한다. 두 천사가 소돔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롯에게 빨리 소돔성을 빠져 나라가 말하며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 경고한다. 하지만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나 소금 기둥이 된다. 소돔과 고모라 근방에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멸망당한다. 롯과 두 딸은 산의 동굴로 피신한다. 두 딸은 롯에게 술을 먹기고 동침하여 아이를 낳는다. 이들은 모암과 암몬의 조상들이 된다.

    창세기 20장 요약

    아브라함이 그랄에 거할 때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간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꿈이 현몽하여 사라로 인하여 죽을 것이라 경고하신다. 깜짝 놀란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불러 책망하고 사라를 놓아 준다. 아브라함에게 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냐고 묻는다. 아비멜렉은 많은 가축을 상으로 주고 아브라함을 보낸다. 아브라함이 기도하자 아비멜렉의 집에 자녀가 생긴다.

    창세기 21장 요약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던해 사라가 임신하여 아들을 출생한다. 이름을 이삭(웃음)이라 부른다. 이삭이 자라자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고 괴롭힌다. 화가 난 사라는 아브라함을 찾아가 하갈과 그의 아들을 쫓아 내라고 한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 낸다. 쫓겨난 하갈은 광야에서 죽을 지경에 이르지만 천사가 나타나 도와 준다. 이야기는 다시 아비멜렉으로 돌아간다. 아비멜렉의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을 찾아가 언약하고 그곳 이름을 브엘세바라 한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나무를 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

    창세기 22장 요약

    어느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지시살 땅으로 가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명령한다. 아브라함은 아무런 말도 없고 다음 날 일찍 일어나 이삭을 데리고 삼일삼야를 지나 지시할 산에 도착한다. 산 밑에서 종을 두고 이삭에게 번제할 나무를 지게하고 산으로 올라간다. 산에서 제단을 쌓고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할 때 천사가 나타난 막는다. 아브라함이 주변을 둘러보다 숫양을 발견하고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린다. 아브라함은 이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부른다.

    창세기 23장 요약

    사라의 나이 127세에 숨을 거둔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무덤을 헷 족속의 에브론에게서 은 사벡 세겔을 주고 산다. 막벨라 굴에 사라를 장사한다. 후에 이곳에 아브라함과 이삭 야굽이 묻힌다. 마므레 앞 막벨라 굴이다. 마므레의 다른 이름은 헤브론이다.

    창세기 24장 요약

    사라의 장사를 마친 아브라함은 이삭을 장가 보내기 위해 종을 하란에 보낸다. 그곳에서 리브가를 만나 데려 온다. 리브가가 헤브론에 도착할 때 묵상하고 온 이삭을 보고 얼굴을 가린다. 둘은 결혼하여 사라의 장막에 거한다.

    창세기 25장 요약

    아브라함은 노년에 그두라와 결혼하여 자녀들을 낳는다. 그두라는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를 낳는다. 175세에 아브라함이 숨을 거두고, 이삭이 막벨라 굴에 장사 한다. 리브가가 아이를 낳지 못하가 이삭이 20년 동안 기도해 쌍둥이를 낳는다. 형은 에서이고 동생은 야곱니다. 야곱은 사냥을 하고 돌아온 에서에게 밭죽을 팔아 장자권을 얻는다.

    창세기 26장 요약

    이삭의 때에 기근이 찾아 온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 명하신다. 이삭은 그랄 땅에 거주한다. 이삭은 리브가는 누이가 속인다. 아비멜렉이 데려갔다 하나님이 벌하셔서 다시 데려 온다.

    이삭이 그곳에서 농사를 지어 백 배를 얻는다.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우물을 막아 버린다. 그곳 이름을 다른 곳에서 우물을 팠으나 또 막는다. 다시 옮겨 우물을 파서 거한다. 다시 막자 다른 곳으로 옮겨 우물을 판다. 그곳은 오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삭에게 나타나 복을 줄 것이 말씀하신다. 얼마 후에 아비멜렉이 찾아와 사과하고 화해한다.

    창세기 27장 요약

    이삭이 에서에게 사냥하라 요리하라 한다. 요리를 먹고 장자의 축복을 할 것이라 한다. 밖에서 리브가가 듣고 야곱을 꼬드겨 대신 축복을 받게 한다. 후에 에서가 들어가 통곡하며 분해 한다. 에서가 야곱을 죽이겠다고 말한다. 밖에서 리브가가 듣고 야곱을 하란으로 보낼 생각을 한다.

    창세기 28장 요약

    이삭은 야곱을 불러 축복하고 밧단아람(아람의 들)인 하란으로 보낸다. 루스 즉 벧엘에 도착하여 돌을 베개하여 꿈을 꾼다. 꿈 속에서 천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하늘에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본다. 사다리 끝에 하나님께서 서서 야곱에게 함께 하시겠다 약속의 말씀을 하신다.

    창세기 29장 요약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인 하란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이는 여인 라헬을 발견한다. 라헬이 라반의 딸임을 알고 야곱은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라헬이 아버지 라반에게서 가서 고하고 야곱을 집으로 데려 온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여 칠년을 봉사하고 결혼하지만 아침에 보니 그의 언니 레아였다. 야곱이 라반에게 따지 칠 년을 더 봉사하라 하여 14년을 봉사하여 라헬과 결혼한다. 레아에게서 자녀들이 태어난다.

    창세기 30장 요약

    라헬이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자신의 몸종 빌하를 주어 아이를 낳게 한다. 레아도 자신의 몸종 실바를 야곱에게 주어 아이를 낳게 한다.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구해 어머니 레아에게 주고 야곱을 데려 간다. 잇사갈, 스불론, 디나를 낳는다. 라헬이 임식하여 요셉을 낳는다.

    야곱이 라반의 양을 키우다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자 라반이 품삭을 정하고 야곱을 붙잡는다. 점박이 양들을 야곱이 가져간다. 하지만 라반이 다시 조건을 바꾸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이 선택한 가축들만 새끼를 잘 낳게하여 야곱의 가축이 엄청나게 불어난다.

    창세기 31장 요약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이 자신의 아버지의 가축을 도둑질한다고 생각하여 시기한다. 꿈에 하나님 나타나 야곱에게 고향 가나안을 돌아가라 한다. 드디어 라반이 양털을 깎을 때 모든 가족과 가축을 데리고 야반도주한다. 라반이 소식을 듣고 쫓아가 만나다. 야곱을 만나기 하루 전 밤에 하나님이 라반의 꿈에 나타나 야곱을 건드리면 죽을 것이라 경고하신다. 라반과 야곱은 언약을 맺고 각각 되돌아 간다.

    창세기 32장 요약

    가나안 접경에 다다를 때 두 진영의 천사가 야곱의 앞을 지나친다. 야곱은 그곳 이름을 두 진영이란 뜻으로 ‘마하나님’이라 부른다. 에서를 만날 것이 두려운 야곱은 밤새워 기도한다. 밤에 천사와 씨름하고 축복해 달라고 한다. 천사에게 허벅지 관절을 맞아 어긋난다. 그곳으 이름을 하나님이 얼굴이란 뜻의 ‘브니엘’이라 부른다.

    창세기 33장 요약

    날이 밝자 얍복강은 건너 에서를 만난다. 에서에게 엎드려 절을 하고 준비한 제물을 바친다. 에서는 거절하지만 강요하여 갖게 한다. 가족들을 소개한다. 에서가 호휘하겠다고 하지만 거절하고 에서는 먼저 앞서 간다. 야곱은 숙곳에 도착하여 장막을 친다.

    창세기 34장 요약

    레아의 딸 디나가 세겜 성에 놀라 다니다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다. 이 소식을들은 야곱은 분노하고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를 받게하여 세겜 성의 남자들을 모조리 학살한다. 이 일로 죽음의 위기를 느낀 야곱은 두려워하며 레위와 시므온을 책망한다.

    창세기 35장 요약

    야곱이 가족들에게 우상을 제하게 하고 벧엘로 올라간다. 벧엘에 올라가 자신의 맹세를 따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벧엘을 떠나 에브랏(베들레헴) 길을 가다 라헬이 산통으로 괴로워하며 아이를 낳고 그의 이름을 베노리라 하지만 야곱이 베냐민으로 바꾼다. 베냐민을 낳고 라헬은 숨을 거둔다. 라헬은 베들레헬 길에 장사하고 비를 세운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소개되고, 이삭이 죽고 장사 된다. 이삭은 180세에 숨을 거둔다.

    창세기 36장 요약

    창세기 36장은 에서의 족보와 그의 자손들이 세운 에돔 민족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가나안을 떠나 세일 산지에 정착하였고, 그의 자손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에돔 족속을 이루었습니다. 이 장은 에서의 아내들, 자녀들, 족장들, 그리고 에돔 땅의 왕들에 대한 목록을 상세히 나열하며, 하나님의 약속이 야곱과 에서 모두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37장 요약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이 꿈을 꾼다. 하늘의 별들과 들의 곡식단에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다.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야곱의 심부름을 올때 요셉을 애굽에 팔아 버린다. 요셉의 애굽의 바로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린다.

    창세기 38장 요약

    유다는 가나안 여인과 결혼해 세 아들 엘, 오난, 셀라를 낳았다. 큰아들 엘이 악하여 죽자, 둘째 아들 오난도 다말과 결혼했으나 후사를 잇지 않으려 해 죽었다.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가 성장할 때까지 다말을 기다리게 했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다말은 창녀로 변장해 유다를 속여 그의 아이를 임신했고,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 이는 예수님의 족보에 중요한 사건이다.

    창세기 39장 요약

    창세기 39장은 요셉이 이집트에서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가는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셔서 그는 모든 일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보디발은 그의 집과 재산을 모두 요셉에게 맡겼다.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으나, 요셉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그녀는 요셉이 자신을 범하려 했다고 거짓으로 고발했다. 결국 요셉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요셉과 함께하시며 감옥에서도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창세기 40장 요약

    요셉이 아직 옥에 있을 때 바로의 술관원장과 떡관원장이 옥에 들어온다. 그들이 꿈을 꾸고 요셉에게 해몽을 부탁한다. 요셉이 그들의 꿈을 해몽한다. 해몽대로 술관원장은 복직하고, 떡관원장은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요셉은 다시 잊혀진다.

    창세기 41장 요약

    사건 후 만 이 년이 지난 후 바로가 두 번의 불길한 꿈을 꾸고 술사들에게 해몽을 부탁하지만 아무도 풀지 못한다. 그때서야 술관원장이 나서서 자신의 옥에서 요셉을 만난 이야기를 한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서서 꿈을 해몽한다. 먼저는 7년 풍년이 들 것이고, 후에는 7년 흉년이 들 것이다. 바로는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임명한다.

    창세기 42장 요약

    요셉의 형들이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가 곡식을 산다. 요셉이 형들을 발견한다. 그들을 정탐꾼으로 몰아 옥에 가두고 심문하는 척 하면서 캐 묻는다. 그들의 곡식 자루에 그들이 지불한 모든 돈을 다시 넣어 둔다. 시므온을 볼모로 잡아 가두고 다른 형들은 가나안으로 돌려 보낸다. 다시 내려올 때 베냐민을 데려 오라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므온을 죽일 것이라 말한다. 가나안으로 돌아간 형들이 야곱에 모든 사정을 아뢰자 야곱이 고통스러워 한다.

    창세기 43장 요약

    곡식이 떨어진 형들이 두 번째 애굽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요셉의 청대로 베냐민을 데려가야 한다. 야곱은 어쩔 수 없이 베냐민을 함께 보낸다. 요셉은 형들을 만나고 옥에 갇힌 시므온을 풀어 준다. 집으로 초대해 식사 대접을 한다. 베냐민을 보고 안방으로 몰래 들어가 운다.

    창세기 44장 요약

    요셉을 청지기를 불러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게 하여 형들을 시험에 빠뜨리게 한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형들을 추격한 요셉의 신하들이 각자의 배낭을 뒤져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을 발견한다. 다시 요셉에게 붙잡혀 와서 베냐민을 옥에 가두려 한다. 이때 유다가 베냐민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변론을 한다.

    창세기 45장 요약

    유다의 목숨 건 변명을 들은 요셉은 그제서야 형들이 베냐민을 얼마나 아끼는지를 알게 된다. 형들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자 형들이 두려워 떤다. 서로 입맞추고 화해한다.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식들은 바로가 축복하고 자신의 수레를 내어주며 아버지를 모셔오라 말한다. 가나안으로 돌아간 형들이 아버지 야곱에 요셉 이야기를 전하지만 믿지 못한다. 그러자 바로가 보낸 마차를 보고 기뻐한다.

    창세기 46장 요약

    야곱이 모든 가족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약속의 땅을 떠난다는 것이 불안해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가라 말씀하시며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라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상시키신다. 애굽에 있던 가족까지 합하면 모두 70명이다. 요셉은 바로를 만나기전 바로에게 자신들을 목축하는 자라 소개하도록 한다. 애굽에서 목축 업자는 비천한 자들로 여긴다.

    창세기 47장 요약

    야곱의 가족들은 바로에게 가서 인사하고 축복해 준다. 야곱의 가족들은 고센 땅에 머문다.(바로는 라암셋을 주었다고 말한다. 11절) 기근이 더욱 심해지자 애굽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축과 곡식을 바꾼다. 하지만 기근이 멈추지 않자 결국 자신의 토지를 팔아 곡물을 산다. 이후 모든 토지는 바로의 것이 되어 새로운 토지법이 만들어 진다. 수확의 1/5을 바로에게 마치게 한다. 하지만 제사장들의 토지를 빼앗지 않는다.

    창세기 48장 요약

    야곱이 나이들이 병이들자 요셉이 자신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려간다. 야곱은 요셉에게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양자로 입양한다고 밝힌다. 둘을 축복하는데 장자인 므낫세는 왼손을, 차남인 에브라임에게는 오른손으로 얻자 요셉이 바꾸려 하지만 야곱이 알고 있다면 그대로 축복해 준다. 이후 에브라임은 장자와 같은 권한을 갖게 된다.

    창세기 49장 요약

    야곱이 나이들어 조상들에게 돌아갈 때가 되자 아들들을 불러 축복해 준다. 르우벤은 장자권을 빼앗기고 유다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역대상 기자는 장자권이 요셉에게 넘어갔다 말한다. 역대상 5:1-2)

    •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축복을 마친 야곱은 자신을 아브라함이 샀던 막벨라 굴에 자신을 묻어 달라 부탁하며 숨을 거둔다.

    창세기 50장 요약

    야곱이 죽자 바로는 슬퍼하며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한다. 애굽의 병거와 기병이 따르고, 요단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서 요셉이 칠일 동안 애곡한다. 가나안 백성들이 듣고 ‘아벨 미스라임’이라 부른다. 야곱은 마므레 앞 막벨라 굴에 장사된다.

    장례를 마치고 애굽으로 내려오자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어 요셉이 자신들에게 복수할까 두려워하며 종들을 보내 용서해 달라고 부탁한다. 요셉이 그 소리를 듣고 울자 깜짝 놀란 형들이 직접 찾아와 요셉에게 용서를 구한다. 요셉은 걱정 말라며 자신이 돌보겠다 말한다. 요셉은 죽으면서 후손들에 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내어 가실 때 자신의 뼈를 가지고 가 달라고 부탁하며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110세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Then, Professor Jackson explains the four relationships that dominate the Book of Genesis: God and creation, God and man, man and man, and man and creation.

    These relationships are explored in the narratives of Adam and Eve, Abraham and Sarah, Abraham and Isaac, Jacob and Esau, and finally, Joseph.

    잭슨 교수는 창세기를 지배하는 네 가지 관계, 
    하나님과 창조,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창조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아담과 이브, 아브라함과 사라,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셉의 이야기에서 탐구됩니다.

    족장(族長)

    נָשִׂיא 스트롱번호 5387

    1. 방백.  2. 특정한 지파의 지도자. 3. 창 17:20.
    발음 [ nâsîyʼ ]
    어원  / 537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29회 사용

    • 관련 성경 / 두령, 고관(창 17:20. 방백, 겔 32:29), 추장(창 34:2), 지도자(출 22:28), 어른(출 34:31), 족장(출 35:27, 민 27:2, 대하 5:2), 귀족(수13:21), 총독(스 1:8), 구름(잠 25:14, 렘 10:13), 족속(겔 12:10), 왕(겔 12:12, 39:18, 48:21), 통치자(겔 45:9).

    창세기 36:15
    에서 자손중 족장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의 자손에는 데만 족장, 오말 족장, 스보 족장, 그나스 족장과.

    אַלּוּף  스트롱번호 441

    1. 친밀한.  2. 황소.
    발음 [ ’allûwph ]
    어원  / 50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9회 사용

    관련 성경 / 족장(창 36:15, 대상 1:51, 54), 두령(출 15:15), 친우(시 55:13), 수소(시 144:14), 짝(잠 2:17), 벗(잠 16:28, 17:9), 보호자(렘3:4), 우두머리 (렘 13:21), 이웃(미 7:5), 지도자(슥 9:7, 12:5, 6).

    성경 속 '족장 이야기'의 역사를 찾아서

    창세기 1~11장은 워낙 오래된 이야기로 역사성을 증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기에 12장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데라의 아들 아브람이 조상 대대로 살던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우르(Ur, 오늘날 유프라테스 강 하류 서쪽으로 약 16㎞)를 떠나면서 족장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창세기 14장에는 평원에 있는 다섯 도시(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벨라 혹은 소알)의 왕들이 메소포타미아 동쪽에 있던 엘람의 왕 그돌라오멜이 이끄는 네 왕의 연합군에 대항하여 싸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돌라오멜, 시날 왕 아므라벨의 이름은 메소포타미아 기록에서 찾을 수 없으며 살렘 왕 멜기세덱 역시 성서를 벗어나면 흔적도 없습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창 20장, 26장)도 마찬가지일 뿐만 아니라 헤브론의 유지였던 헷 사람 에브론(23장), 세겜의 지도자인 하몰(34장), 보디발(39장), 그리고 창세기 36:31~39의 에돔의 왕들도 찾을 수 없습니다.

    족장 이야기의 '역사성'을 찾아서

    족장 이야기는 적어도 3단계의 기록 층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장 이른 것은 기원전 10세기이며 가장 늦은 것은 바벨론의 예루살렘 함락(기원전 587년~6년) 이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모든 기록의 층들은 제2성전 시대(기원전 538년 이후), 또는 일러야 바벨론 포로기(기원전 587~6년~538년)에 한데 모아져서 오늘날의 형태로 편집되었습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족장 이야기가 비록 후대에 쓰인 것이기는 해도 이러한 자료들이 더 이른 시기(족장 이야기의 실제 배경이 되는 시기)부터 유래하는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전승들에 기초하고 있다고 봅니다.

    올브라이트 학파

    탁월하고 위대한 신학자인 윌리엄 F. 올브라이트(William F. Albright)와 그의 제자들은 족장 이야기에 나오는 세부 자료(사람 이름, 사회적 관습, 법적 절차, 생활 풍속)는 기원전 2000년대의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가나안 등의 문화 특징과 잘 들어맞는다고 보았습니다.

    "전반적으로 창세기의 묘사는 역사적(historical)이다. 전기적 세부 사항의 일반적인 정밀도와 족장들의 생생한 삶의 묘사는 의심할 이유가 없다." -올브라이트

    올브라이트의 수제자인 G. 라이트(G. Ernest Wright)에 따르면,

    "아브람이 실존 인물이라거나, 이런 저런 일을 했다거나, 이런 저런 말을 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마도 결코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에 관한 이야기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그의 삶과 시대가 제2000년대 초기와는 완벽하게 들어맞지만, 그 이후의 다른 시대와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은 증명할 수 있다." - 라이트

    성경은 이스라엘이 모압, 암몬, 에돔(창 19:30~38, 36장)만이 아니라 미디안과 아라비아 부족들(25:1~5, 12~18)과도 혈연관계가 있다고 묘사합니다. 이스라엘은 특히 아람인들(기원전 2000년대에 메소포타미아에서 대규모로 이집트로 이동)과 강한 혈연관계가 있는데, 그들의 메소포타미아 친척들의 고향은 아람-나하라임이나 밧단아람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라반은 거듭 아람 사람으로 불립니다(창 25:20, 28:1~7, 31:20, 24). 창세기 22:20~24에는 아람 사람과 갈대아 사람이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홀의 후손으로 나와 있습니다. 신명기에서도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신 26:5)"라는 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이를 근거로 해서 학계에서는 성서의 족장들을 아모리 사람(아람 사람)과 같은 인물들로 보며 이것을 '아모리 가설(Amorite hypothesis)'이라고 합니다. 올브라이트는 자신이 기원전 2100~1900년으로 잡은 이 시기를 중기 청동기 시대(Middle Bronze I: MB I)로 불렀습니다.

    라이트의 제자인 존 브라이트는 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첫째,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예언 형상과 유사한 현상들이 마리 문서(시리아, 유프라테스 강 중류의 '마리' 지역 유적에서 발견된 2만 장 이상 되는 점토판 문서. 대부분 기원전 18세기의 야스마하 아다드 왕 시대와 짐릴림 왕 시대의 것으로, 외교·의식·역사·상업·행정 문서 등)에서도 나온다. 이러한 문헌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관습과 제도들이 이스라엘 선조들의 그것과 비슷한 점이 많다. 마리(Mari) 문서에서도 볼 수 있는 예언 제도는 이스라엘에서 사사 시대(드보라, 사무엘 등)에는 이미 확립되어 있었고, 처음부터 이스라엘 종교 생활의 특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곧 비슷한 문화 환경으로부터 이주해 온 선조들에 의해서 이스라엘에 전해졌을 것이다.

    둘째, 계약 법전(출 21~23장)으로 알려진 이스라엘의 판례법이 에쉬눈나(Eshnunna)법전과 함무라비 법전을 통해 잘 드러나는 메소포타미아의 법률 전승과 비슷하다. 따라서 기원전 2000년대에 메소포타미아의 사법 전승들을 알고 있었던 이들이 이주해 오면서 팔레스타인지역으로 전해졌다고 추론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셋째, 창세기 2장의 창조 설화와 6~9장의 홍수 이야기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온 자료와 놀랄 만큼 비슷하다. 이런 이야기는 가나안이나 이집트의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메소포타미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창세기 시원사(창세기 1~11장) 배후에 있는 전승들은 기원전 2000년대 전반에 이주해 온 집단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물론 이를 입증할 방법은 없지만, 이스라엘의 선조들도 끼어 있었던 일부 아모리인들이 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족장들이 2000년대에 그 지역으로부터 이주해 왔다는 성경 전승의 역사성은 근거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브라이트는 성경 자체에서 나오는 증거 자료가 지닌 여러 가지 한계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인정합니다. 그러면서도 브라이트가 창세기 족장 이야기의 역사성을 주장하는 강력한 이유는, "고고학 역시 족장 이야기의 실제성을 부정하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폅니다.

    또 다른 시도들

    많은 학자가 올브라이트처럼 엄격하게 족장 시대의 아브라함 단계를 MB Ⅰ(중기 청동기 Ⅰ)로, 야곱 단계를 MB ⅡB(중기 청도기 ⅡB)로 추정하지 않고 좀 더 포괄적인 연대를 제시합니다. G. E. 라이트는 "간단히 말해, 족장 이야기는 제2000년대 초의 배경에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올브라이트가 주장한 MB Ⅰ시대에는 실제로 '도시'와 연관된 고고학 유적이 나오지 않는 난감한 상황을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성서의 아브라함 시기에는 몇몇 도시 이야기가 나온다. 요단 계곡의 여러 도시들(창 14:2), 블레셋 도시 그랄(창 20:1), 요새화 된 도시 헤브론(창 23:2)). 그러므로 그것보다는 더 나중 시기인 MB ⅡB로의 재도시화 시대와 족장 시대를 동일시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중심 도시들 가까운 곳에서 장막 생활을 한 것으로 나오는데요, 이는 MB ⅡB의 마리(Mari)나 다른 도시들에서 볼 수 있는 유목민과 도시민의 공존 생활과 비슷한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기에 타당한 듯 보입니다.


    연대-기원전
     
    고고학적 시대
     
    올브라이트의 분류
     
    올브라이트의 연대
     
    2250~2000
     
    EBⅣ(Early Bronze)
     
    MBⅠ(아브라함?)
     
    2100~1900
     
    2000~1800
     
    MBⅠ(Middle Bronze)
     
    MBⅡA
     
    1900~1750
     
    1800~1630
     
    MBⅡ
     
    MBⅡB(야곱?)
     
    1700~1600
     
    1630~1550
     
    MBⅢ
     
    MBⅡC
     
    1600~1550
     

    그들은 성서의 족장들과 제2000년대(특히 MB ⅡB)의 연관성을 보여 주기 위해 특히 창세기 12~50장에 나오는 "사람의 이름이 비슷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첫째, '야곱'이라는 이름은 제2000년대 초기 자료에 일곱 번 나타나며 '아브람'이라는 이름도 같은 시기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삭'이나 '요셉'과 같은 예는 남아 있지 않지만 두 이름 모두 '모리어 형태'이므로 이 주장은 족장 시대에 나오는 성서 인명이 제2000년대 초의 역사적 맥락과 잘 맞아떨어진다는 주장이죠.

    둘째, 올브라이트나 에프레임 A. 스파이저(E. A. Speiser)는 제2000년대의 성서 이외의 문서에 나오는 사회, 법률 관행들이 족장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보았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누지(Nuzi)에서 나온 설형문자 문서들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겼는데, 누지 토판은 제2000년대 중기에 동 티그리스 지역에서 번영했던 민족인 후리 사람들(Hurrians)의 관행과 관습을 반영하고 있는 토판입니다. 족장들을 후리 왕국 미타니(Mitanni)와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려는 학자는 없었지만 이 시기에 후리 사람들이 시리아와 가나안 지역까지 널리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보수적인 학자들은 후리 사람들과 족장들 사이에 수많은 연결 고리를 제안했습니다. 누지의 결혼 계약서에 보면 자녀를 낳지 못하는 부인은 남편에게 여종을 주어 자녀를 낳도록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이것은 창세기 16:1~4의 하갈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이렇게 태어난 아들은 나중에 쫓아낼 수가 없으며 이는 창세기 21:10~11의 이스마엘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주장입니다.

    "실질적인 혈연관계와 무관하게 아내를 남편의 누이로 동시에 인정하고 있는 법을 보면, 후리 사회에서 한 남편의 아내는 특별한 지위와 보호를 누리고 있었다…. 이러한 이중 역할은 아내에게 사회적 지위를 부여했다." -스파이저

    그에 따르면 창세기에서 아브라함(12:10~20, 20:1~18)이, 그리고 나중에 이삭(26:6~11)이 자기 아내를 누이로 소개하는 일화들의 배경에 이 관습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전반적으로, 창세기에 나오는 많은 사회‧법률 관습이 제2000년대 중기나 초기의 관행과 비슷하지만, 그 후대의 관행과는 유사점이 없기에 성서 전승이 제2000년대의 '실질적 역사성'을 담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어떤 학자는 창세기 14:14의 히브리어 '하닠'(훈련된)과 14:23의 '미후트 베아드 쉐록-나알(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과 같은 낱말이 기원전 15세기에 쓰인 표현이기에 창세기 14장이 고대의 것임을 입증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히브리어 נשיא 나시/지휘관. 족장의 뜻


    민 7:2. 이스라엘 지휘관들 곧 그들의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들이요 그 지파의 지휘관으로서 그 계수함을 받은 자의 감독된 자들이 헌물을 드렸으니(개혁개정)

    민 7:2. 이스라엘 족장들 곧 그들의 종족의 두령들이요 그 지파의 족장으로서 그 계수함을 입은 자의 감독된 자들이 예물을 드렸으니 (개혁성경)

    민 7:2. 이스라엘의 대표자, 각 가문의 어른들이 예물을 바쳤다. 이들은 각 지파의 대표로서 등록하는 일을 맡아보던 사람들이다.(공동번역)

    נשיא 나시 = 방백, 특정한 지파의 지도자, 족장, 종족의 두령, 왕, 치리자, 지휘관, 감독, 지파의 대표

    복수형 נשיאים 네시임 : 땅으로부터 올라온 증기, 구름

    유래 נשא 나사 = 들어 올리다, 쳐들다, 깃발을 세우다, 맹세하다

    נשא 나소 = 총계하다, 계수하다

    토라의 깃발을 높이 들자들입니다(시 20:5)

    여호와의 깃발을 높이 들자들입니다(시 60:4)

    이스라엘 지파를 대신하는 자들입니다(민 7:2)

    땅을 갈아엎어서 옥토로 만들 자들입니다(롬 8:22)

    주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에 동참하는 자입니다(롬 8:17)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입니다(계 1:2)

    나라와 제사장을 삼아 땅에서 왕노릇할 자들입니다(계5:10)

    하나님의 종들로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서 인맞을 자들입니다

    어린양의 피와 예수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이기는자(계 12:11)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입니다(계 12:17)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베임을 받은자들(계 20:4)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왕노릇 할 자(계 20:6)

    1. 지휘관들은 이스라엘 자손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들의 족장들입니다

    민 4: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민 7:2. 이스라엘 지휘관들 곧 그들의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들이요 그 지파의 지휘관으로서 그 계수함을 받은 자의 감독된 자들이 헌물을 드렸으니

    민 7:3. 그들이 여호와께 드린 헌물은 덮개 있는 수레 여섯 대소 열두 마리이니 지휘관 두 사람에 수레가 하나씩이요 지휘관 한 사람에 소가 한 마리씩이라 그것들을 장막 앞에 드린지라

    144,000의 인맞은 종들(지휘관, 족장)을 유추 할 수 있습니다(히브리뿌리 관점)

    1) 이스라엘 지휘관 12명

    덮개 있는 수레 여섯

    소 열 둘(12)

    족장 둘에 수레가 하나 = 2x6(수레 여섯) = 족장 12명(12지파)

    족장 12명(12지파) x 소 열 둘(12제자) =144

    144 x 1,000(완전) =144,000(열방을 대표하는 족장들, 왕 같은 제사장)

    2) 이스라엘의 집의 하나님의 종들

    계 7: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계 7: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천년왕국은 열방에서 택한자 중에 제사장을 세웁니다

    이사야 66:2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열방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약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이사야 66:21. 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왕 같은 제사장들

    벧전 2: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3) 계수함을 받은 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들어 올리는 자입니다

    “נשא나소/총계하다” “운반하다”“들어올리다”와 어원이 같다

    총계하다 = 운반하다(나사) = 원형(들어올리다, 깃발을 세우다)

    레위자손을 총계하여 성막을 이동하는 일을 맡겼으며, 성막의 이동은 바로 하나님을 높이 들어 올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자”

    민 4:27. 게르손 자손은 그 모든 일 곧 멜(나사) 것과 처리할 것에 아론과 그 아들들의 명대로 할 것이니 너희는 그들의 멜(나사) 짐을 그들에게 맡길 것이니라

    결국 레위인들이 총계함을 받아 짐을 메는 궁극적인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 들어 올리는자,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는자 에 있습니다

    민 4:49. 그들이 그 할 일과 멜 일을 따라 모세에게 계수함을 입었으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들이 계수함을 입었더라

    12지파의 지휘관, 족장들 나시נשיא의 뜻은 “올림을 받은자” 입니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2. 진 밖으로 쫒겨난 자가 있습니다

    민 5: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모든 문둥병 환자와 유출병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케 된 자를 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되

    진 안에는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장소로 거룩한 곳입니다

    민 5:3. 무론 남녀하고 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어 그들로 진을 더럽히게 말라 내가 그 진 가운데 거하느니라 하시매

    진 밖으로 내어보냄을 받은 자는 “잃어버린 이스라엘”입니다

    문둥병환자, 유출병이 있는자, 주검으로 부정케 된자

    3.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회복

    눅 17:11~17은 본문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눅 17: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눅 17: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눅 17: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눅 17: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눅 17:16.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눅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 예슈아께서 잃어버린 이스라엘 집의 양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마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열 명의 문둥병자는 열방에 잃어버린 이스라엘입니다

    예슈아를 만난 자는 이스라엘의 집으로 돌아올수가 있습니다

    2)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이방인이라 말합니다

    이방인이 예슈아를 만났다면 이스라엘로 돌아와야 합니다

    3) 예슈아를 만나 고침 받은 열 명중에 한명만이 진 안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방인이 예슈아를 만난 것은 고침 받은 것입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이스라엘로 돌아와야 합니다

    4) 이스라엘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이 없으면 아직은 소경입니다

    눅 17: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분명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가지고 토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사야 55: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예레미야 3: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예레미야 25:5
    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





    1월 17일(금) 창세기 49-5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입관하였더라(50:24)

    요셉이 일백 십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So Joseph died at the age of a hundred and ten. And after they embalmed him, he was placed in a coffin in Egypt.

    요셉의 입관으로 창세기가 막을 내립니다.
    더 이상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관심을 갖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세기는 막을 내린 것이 아니라 요셉이 입관한 후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관심을 갖는 인물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창세기 51장의 주인공으로 살아야 합니다.
    창세기 51장의 주인공이 되려면 사람은 영화 혼과 육으로 구분된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영과 혼과 육이 온전한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마감하면서 두 개의 히브리 단어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창조하시니라에 해당하는 "바라"
    둘째는 입관하였더라에 해당하는 "아론"
    아론이란 단어

    바라와 아론



    창조(創造)  בָּרָא 스트롱번호 1254

    1. 새기다.  2. 창조하다. 3. 창 1:1.
    발음 [ bârâʼ ]
    구약 성경  / 48회 사용


    입관(入棺)(727)하였더라(3455)

    입관(아론. ’ârôwn)  אָרוֹן 스트롱번호 727

    1. 궤,  2. 왕하 12:10, 3. 창 50:26.
    발음 [ ’ârôwn ]
    구약 성경  / 201회 사용
    • 1.명사 궤, 상자
      • a. 명사 [돈 상자를 나타내는 경우] 왕하12: 10(9), 11(10).
      • b. 명사 [시체를 넣는 관을 나타내는 경우] 창50:26.
      • c. 명사 [그러나 대부분 율법이 기록된 두 돌판을 담고 있는 언약궤를 나타냄], 출 25:22, 26:33, 신10:8, 31:9,25, 수 3:6, 4:9, 삼상5:3,4, 6:8.
    • 문법설명
      혼성[남성, 삼상 6:8, 여성, 삼상 4:17, 대하 8:11]
    • 관련 성경 /  궤(출 25:10, 민 4:5, 신 10:1), 언약궤(삼하 11:11).

    모세의 형 "아론"과 발음이 비슷하지만 히브리어로는 구별이 됩니다.
    모세의 형 아론은 "아하론"이라고 발음합니다.


    אַהֲרוֹן 스트롱번호 175

    1. 모세의 형 ‘아론’   2. 출 6:20.  3. 7:7.
    발음 [ ’Ahărôwn ]
    어원  / 아람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구약 성경  / 347회 사용
    • 1. 고유명사 모세의 형 ‘아론’, 출6:20, 7:7.
    • 관련 성경  /  아론(출 6:20, 7:7).


      야삼(yâsam) יָשַׂם 스트롱번호 3455

      1. 놓다.  2. 놓여지다
      발음 [ yâsam ]
      구약 성경  / 3회 사용
      • 1. 원형 놓다, 두다, 배치하다, 삿 12:3
      • 2. 원형 놓여지다, 두어지다, 배치되다.
      문법설명  / 미완료형 יַיִּישֶׂם, 창 50:26, 24:33
      • 관련 성경  /  베풀다(창 24:33), 입관하다(창 50:26).



      󰃨 몸에 향 재료를 넣고 - 요셉의 시신(屍身)을 미이라로 만든 것을 가리킨다.

      󰃨 입관하였더라 - 요셉의 장례 행사는 야곱의 장례행사에 관한 기록과는 달리 매우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업적을 남긴 애굽의 총리였으므로 성대한 장례 예식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미이라 관에 안치된 유해는 약 400년 후 가나안 땅 세겜에 완전히 묻히게 된다(수 24:32).

      성경 첫 번째 책은 창세기입니다.
      창세기의 시작은 천지창조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건을 기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창세기의 끝은 한 인간의 죽음과 입관으로 마무리됩니다.
      태어날 때, 자랄 때, 한창 잘 나갈 때가 있었지만 죽고 나면, 입관 즉 관속에 들어가게 한 줌의 흙으로 남는 것이 인간입니다.

      ​창세기 마지막에 등장하는 요셉은 야곱의 아들로서 이집트의 국무총리였습니다.
      이집트는 요셉이 살던 시대는 세상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였습니다.
      고대의 대제국 이집트의 국무총리라고 할지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임종의 때가 가까운줄 알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24절에 보시면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창 50:24).

      ​그 땅은 요셉의 증조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약속받았던 땅입니다.
      가나안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4대가 지난 요셉이 믿고 있었고, 또 그 약속을 그 후손들의 때에 이루게 될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즉,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지킬 것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은 곧 언약입니다.
      성경에는 언약이라는 말이 무려 294번이나 사용됩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목숨을 담보로한 약속을 의미합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신뢰를 잃지만,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목숨을 잃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맺은 언약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실 때, 그 약속을 유업으로 받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또한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잠간이고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인생은 말 그대로 신속히 날아갑니다.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합니다(전 9:5).
      산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죽을 죽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입니다.
      모든 분들은 살아있기 때문에 언젠가 죽을 때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생각보다 빨리 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끝나는 그 시점이 있을 것을 기억하고 그날을 위하여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 김은신님은 하늘에 나 아갈 소망을 끝까지 간직하고 살았습니다.
      파트리스교회 권사님으로서 긴 시간 수고와 봉사로 교회를 섬기셨고, 또한 믿음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이제 김은신권사님께서 잠들었다는 사실이 슬픔을 주지만 동시에 소망가운데 잠드셨기에 저와 파트리스교회 성도들 그리고는 말할 것도 없고 여러분에게도 큰 위로가 될 줄로 확신합니다.
      혹시 이자리에 예수님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분이 계신다면 김은신권사님이 누리신 복을 함께 누리시도록, 예수님을 믿어 이 확신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입관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삶이 잠깐임을 말해줍니다.
      영원할 것 같아도 영원하지 않고, 늙지 않을 것 같아도 곧 늙고,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아니겠습니까?
      안개 같은 인생임을 기억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은총이 유족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길 바라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으로 가신 고인의 영정 앞에서 그동안 신앙생활을 같이 해 왔던 성도들이 함께 모여 남겨두신 유족들을 위로하며 예배로 모였습니다.
      장례의 절차에 은혜를 구하옵고 또 슬픈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머리 교우들과 자녀와 가족분들에게 무한한 위로와 긍휼을 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_______님은 눈물 많고 근심 많던 이 세상길을 마치고 주님의 품안에 안기셨음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우리들 또한 그 안식을 바라며 소망가운데 있게 하시고, 우리 _______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과 헌신을 본받아 자녀들의 삶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게 하옵시고, 남은 장례 절차 가운데 안전으로 보살펴 주시고, 남은 절차가운데 은혜를 주시되, 부활의 소망을 품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여 생명 길로 인도하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요셉의 영성(창세기 50:15-21)

      성경의 인물 중에서 예수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 요셉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셉은 가나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마치 왕자처럼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 중에서 요셉에게만 특별한 사랑을 주었습니다.
      채색옷을 입혔다는 것은 가장 좋은 옷을 입혔다는 의미보다 더 강한 "상속자"로 인정하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셨습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내려가서 고난을 당하고 애굽과 주변 국가들을 7년 흉년으로부터 구원했습니다. 
      이는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인류의 구원자가 되시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요셉은 은 20냥에 상인들에게 팔렸는데 우리 주님은 은 30냥에 팔렸습니다. 
      요셉을 판 형의 이름이 유다인데 예수님의 제자 중에 예수님을 판 사람이 유다입니다. 
      우리는 그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요셉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영성입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에베소서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야 하지만 요셉이 예수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기 때문에 오늘 설교는 요셉을 통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순종의 영성 

          창 37:12 이하에 보면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야곱과 요셉은 헤브론에 살고 있었고 요셉의 형들은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양을 치고 있는 아들들과 양떼가 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양을 치고 있는 형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보고오라고 명합니다. 

      야곱의 말을 들은 요셉은 아버지에게 순종해서 세겜으로 갑니다. 헤브론에서 세겜까지의 거리가 약 100km입니다. 100km의 거리를 걸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룻길이 30km이고 요셉은 어린 나이였으니 족히 4일은 걸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겜에 가보니 형들이 없습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명한대로 순종해서 세겜까지 갔으나 형들이 없다고 그냥 돌아가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아버지가 보낸 목적을 알기 때문에 들에서 적극적으로 형들을 찾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요셉에게 무엇을 찾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형들이 도단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도단은 세겜에서 약 30km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요셉은 나흘을 걸어서 세겜에 왔으니 많이 피곤하고 지쳤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30km가 떨어진 도단까지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형들을 만납니다. 지금이야 웬만한 사람들은 자동차가 있고 또 대중교통이 발달해서 130km 거리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걸어서 130km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서 100km를 걸어서 세겜까지 가고 세겜에서 형들을 만날 수 없으니 또 30km를 걸어서 도단까지 가는 적극적인 순종의 모습을 보입니다.

          요셉이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셔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빌 2:7에 보면 종의 형체를 가지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그분이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종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의 극치는 십자가입니다. 주님도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앞두고 고민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넷 동산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이 잔’은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분명히 아셨기 때문에 자신의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편을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결국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쏟으시며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두 가지를 잘 하면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아느냐로 영성을 측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얼마나 순종할 수 있느냐가 그 사람의 영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운전을 잘하는 사람은 자동차에 대해서 잘 알고 교통법규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동차의 용도에 맞게 그리고 교통법규를 따라서 안전하게 자동차를 몰 줄 아는 사람이 운전을 잘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기록한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중요합니다. 하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무슨 일인가를 판단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올바른 판단과 올바른 선택이 우리를 복된 길로 인도합니다. 잘못된 판단을 내리거나 올바른 판단을 내렸지만 육신을 따라 형편을 따라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그 잘못된 판단과 잘못된 선택이 우리를 저주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내적인 갈등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가야 되는지 가지 말아야 하는지, 만나야 하는지 만나지 말아야 하는지 등등의 갈등이 끊임없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 갈등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힘든 상황이 벌어져도 그리고 물질적으로 손해가 되어도, 심지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제가 오금동에서 목회 할 때 일입니다. 한 달 월세가 530만원이었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교회 빚도 좀 있는 상태였고 그 달에는 교회 재정이 400만 원 정도 마이너스였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제게 예배당 인테리어와 지역노인을 위한 제주도 무료효도관광을 명하셨습니다. 저희 형편으로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단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을 했습니다. 예배당 인테리어를 새로 하고 지역노인 80분을 모시고 무료효도관광을 제주도로 다녀왔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빚을 져야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은혜로 인테리어 비용도 채워졌고 효도관광도 잘 다녀왔고 교회 재정은 오히려 400만원이 남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울 왕이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했습니다. 그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이스라엘이 아말렉을 물리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울은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의 마음에 욕심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병들과 약한 짐승들은 죽였지만 건강한 짐승들은 남겨두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남겨두었다고 말했지만 그 불순종 때문에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여러분들은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내 뜻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 갈등 속에서 내 뜻을 선택하면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여 순종하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영성은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2. 성장하는 영성 

          요셉은 여러 면에서 성장했습니다. 육체적인 성장이야 당연한 것이고 신앙적인 성장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에게서 나타나는 성장 중에 중요한 것이 관계의 성장입니다.

          오늘 요셉의 영성을 설교하면서 제가 창 50:15-21을 분문으로 잡은 이유가 있습니다. 창 37장에 보면 요셉은 아버지에게 사랑은 받았지만 관계적인 면에서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보면 그것을 아버지에게로 달려가서 고자질을 했습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상인들에게 팔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관계의 영성이 부족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형들은 그의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기꺼이 형들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때 형들에게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과거에 자기들이 요셉에게 행했던 일을 생각하니 요셉이 복수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이 요셉을 만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을 팔아가면서 자신들의 안전을 위하여 요셉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아버지가 죽더라도 요셉이 형들에게 원수를 갚지 말라고 유언을 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요셉은 형들이 거짓을 말하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형들을 위로합니다. 본문 19-21절을 보겠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 하였더라” 

      요셉은 원수를 사랑으로 갚았습니다. 아버지 곁에 있을 때 요셉은 이 정도로 넓은 마음의 소유자는 아니었습니다.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는 속 좁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내면이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후에는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성장의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눅 2:52에 보면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키도 자라셨고 지혜도 자라셨고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도 성장하셨습니다. 성경이 당연히 자라야 할 예수님의 키 까지 언급하면서 예수님의 성장을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신앙이 자라야 함을 교훈하기 위함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교회생활을 몇 십 년 씩 했지만 신앙성장 전혀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다보니까 세례도 받고 직분도 받고 교회에서 사역도 하지만 여전히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중생은 했으나 영적인 어린 아이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전 3:1-3에서 사도 바울은 영적인 어린아이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영적인 어린 아이들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소화력이 약합니다. 바울은 영적인 어린아이들의 특징은 밥을 먹을 수 없고 젖만 먹는다고 말했습니다. 젖 먹는 어린아이에게 어느 날 밥을 먹이면 어떻게 될까요? 소화하지 못하고 토해버립니다. 갑자기 고기를 먹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일 납니다. 소화력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영적인 어린아이는 소화력이 약하기 때문에 설교를 듣다가 시험에 잘 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화해내지 못해서 생명의 말씀을 듣다가 시험에 듭니다.

          또 영적인 어린아이는 사람들을 잘 소화해 내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서 영적인 어린아이가 소화해내지 못하는 A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는 A가 시험거리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을 잘 소화해냅니다. 전혀 시험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차이는 그가 A를 소화해 낼만큼 성장하지 못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영적인 어린아이의 특징 두 번째는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이 말은 그의 생활은 영이 중심이 되어 영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중심이 되어 육신이 끄는 대로 끌려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대한 사인(sign)을 보내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은 하나님께 받은 사인을 우리의 혼에 전달을 합니다. 그러면 혼이 육체에게 명령해서 영이 받은 하나님의 사인을 육체가 행하게 합니다. 이것이 신령한 생활이고 영중심의 생활입니다. 그런데 육신에 속한 자들은 영이 받은 하나님의 사인이 혼을 통해 몸에 전달이 될 때 순종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영이 받은 사인과 반대되는 몸이 원하는 일들을 합니다.

          고전 3:3에서 육신에 속한 자의 특징을 두 가지 말합니다. 시기와 분쟁입니다. 시기심은 분쟁을 일으키고 결국은 자기를 죽이게 됩니다. 잠 14:30에 보면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죽이려고 하다가 상인에게 팔아버린 것입니다.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도 시기심 때문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도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시기심은 상대를 괴롭게 하는 것만 아니라 결국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영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을 따라 살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이죠. A팀과 B팀이 줄다리기를 합니다. 두 팀 다 이기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어느 팀이 이길까요? 당연히 힘이 좋은 팀이 이기는 것입니다. 영과 육의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이 약하면 영이 육에게 끌려 다니기 때문에 육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영이 강하면 영이 육을 끌고 다니기 때문에 영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이 강해지는 비결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딤전 4:5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날마다 밥을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고 날마다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영적인 근육이 풍성해지고 강해지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영혼에 힘이 생기게 되면 육신이 원하는 일들을 부인하게 되고 영이 육을 끌고 다닐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 3:3에 보면 영적인 어린아이의 특징이 하나 더 나옵니다. 사람을 따라 행합니다. 진리를 따라 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지 않고 사람을 따라 행합니다. 능력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고 행하거나 다수를 따라 행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어린아이의 특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 오직 성경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의 은혜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성 

          요셉의 영성 중에 가장 알려진 부분이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창 39장에 보면 4번이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동행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했다’고 말씀 합니다.

          요셉을 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면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형통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형통합니다. 여러분! 형통하기를 바랍니다. 모두 형통하기를 원하시죠? 형통의 비결이 뭔지 압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창 39:2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창 39:3입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 39:23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과 하나님은 항상 함께 계십니다. 사 41:10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구속 받은 자기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승천하시기 직전에 주님께서는 마 28:20에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요 14:17에서는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 말씀을 근거로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에녹이나 요셉 등 몇 사람들에게만 사용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표현이 적은 이유는 사람의 입장에서 표현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요셉에게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모든 믿는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동행한다고 표현하신 이유는 요셉이 하나님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편에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창 39에 보면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상처 입은 요셉, 외로운 요셉을 보디발의 아내가 동침하자고 유혹합니다. 9절에 보니 그 때 요셉은 하나님이 그곳에 계심을 인정합니다. 요셉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은 그 집에 보디발의 아내와 자기 둘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창 40장에 보면 요셉이 감옥에서 두 관원의 꿈을 해석해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두 관원은 요셉의 해몽대로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요셉의 해몽대로 3일 만에 복직이 되어 왕을 섬기게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요셉의 해몽대로 3일 만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 때도 요셉이 꿈을 해몽할 때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창 40:8입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요셉은 꿈을 해몽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능력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 41장을 보면 요셉이 애굽의 왕인 바로의 꿈을 해몽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요셉의 해몽대로 애굽에 7년 풍년이 들었다가 다시 7년 흉년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요셉이 꿈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창 41:16입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역시 요셉이 여기서도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창 45장을 보면 요셉이 애굽의 총리인 자기가 요셉이라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하는 형들 앞에서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창 45:5,7,8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창 50장에 보면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형들이 자기를 두려워하여 살기 위해서 비굴하게 아버지를 팔고 있을 때 요셉은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창 50:19,20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내 편에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인정해드릴 때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시고 언제나 무엇을 하든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잠 3:6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음식을 먹으면 조미료가 들어간 것과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것의 맛의 차이를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주님이 들어간 일과 주님이 들어가지 않는 일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윤리적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 없이도 선한 생각을 할 수 있고, 사랑도 할 수 있고, 좋은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주님이 빠지면 모든 것이 짝퉁에 불과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최근에 천주교의 교황이 된 프란시스 교황은 하나님 없는 평화의 시대를 열겠다고 설교했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신앙인이 하나님이 배제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네,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골 3:17에 보니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없는 선한 생각, 주님이 없는 사랑, 주님이 없는 좋은 일, 주님이 없는 평화는 가짜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요셉처럼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요셉의 영성의 특징 세 가지를 살펴봤습니다.

      첫째, 순종(順從) 

      • obey, be obedient (to)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שָׁמָע 스트롱번호8091

      1.

      순종하는: 한 이스라엘인 ‘사마’

      2.

      대상11:44.

      발음 [ Shâmâʽ ]
      어원
      8085에서 유래
      구약 성경
      1회 사용
      • 1.
        고유명사 순종하는: 한 이스라엘인 ‘사마’, 대상11:44.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사마(대상11:44).



      둘째, 성장(成長) Growth 
      영도 성장하고 관계도 성장하고 인격도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רָבָה 스트롱번호7235

      1.

      증가하다

      2.

      확대되다

      3.

      위대해지다

      발음 [ râbâh ]
      구약 성경
      176회 사용



      צְמִיחָה


      셋째, 동행(同行)  accompany, go with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인정해야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과 동행하기를 바랍니다.


      הָלַךְ 스트롱번호1980

      1.

      가다

      2.

      ㉠ 창7:18.㉡ 대하26:8.㉢ 수16:8.㉣ 느6:17.

      3.

      ㉠ אֶל

      발음 [ hâlak ]
      구약 성경
      1549회 사용






      요셉 생애

      대흉년 2년차이자 요셉 나이 39세였을 때, 요셉의 형들은 이집트에 오자 얼굴을 땅에 대고 백성에게 곡물을 파는 이인 요셉에게 절한다. 졸지에 과거에 꿨던 꿈이 현실이 된 셈이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 때 요셉은 아직 형들이 과거에 자신을 노예로 판 일이 생각나 형들이 잘못을 뉘우쳤는지 아닌지 시험도 하고 아버지 야곱과 친동생 베냐민의 생사도 알고 싶었기에, 정체를 밝히지 않고 형들을 가리켜 "너희들은 이 땅의 약한 곳을 살피러 온 첩자"로 몬다. 형들은 "우리는 첩자가 아니며, 고향에 계신 아버지와 동생을 위해 곡물을 사러 온 것뿐"이라며 해명하나, 요셉은 "그렇다면 그 막내를 데리고 와 보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돌아갈 수 없다"라며 사흘 간 전부 옥에 가두어 버린다. 사흘 뒤 요셉은 형제들을 풀어주며 "내가 이집트의 총리이지만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이니 너희가 살 방법을 말해주겠다. 너희 중 한사람은 볼모로 남고 나머지는 식량을 사서 일단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후에 식량을 다시 사러 올 때 그 막내를 데려와 내게 보여준다면 모두 살게 될 것이다"라고 지시한다. 형제들은 "우리가 요셉에게 못된 짓을 해서 벌을 받는 것"이라 불안해하며 르우벤은 '내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이 하더니 결국 그 핏값을 치르는 것이다'하고 동생들을 야단치는데, 사이에 통역관을 세워뒀던지라 요셉이 자기들의 말을 알아듣는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요셉은 자리를 피해 혼자서 몰래 통곡한 뒤 다시 돌아와서 시므온을 체포해 데려간 뒤 나머지 형제들에게 식량을 팔아서 돌려보내고, 시종을 시켜 그들의 식량자루에 곡식 값을 도로 넣어두도록 몰래 지시한다. 이집트를 떠나고 얼마 후 자루 속에서 곡식 값을 발견한 형제들은 '하느님이 진짜 벌을 내리시려는가보다'하고 두려워하며 고향에 돌아가 아버지 야곱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장남 르우벤은 '만약 제가 베냐민을 무사히 데려오지 못한다면 제 두 아들을 죽이셔도 좋습니다'라는 선언까지 하며 약속했으나 야곱은 "너희들이 아주 형제들을 다 말아먹으려고 작정했느냐? 전에는 요셉을 잃어버리더니 이번에는 시므온을 잃어버리고, 그 다음은 베냐민까지 빼앗아가겠다고?"라고 노발대발하며 거부한다.

      고향에 돌아오고 얼마 후, 사 온 식량이 다 떨어져 다시 이집트에 곡물을 사러 가게 된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를 다시 한 번 설득한다. 야곱은 "대체 왜 그 사람에게 베냐민 얘기를 해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느냐?" 고 한탄하는데, 넷째 유다가 "베냐민을 보내주셔야 우리가 다 살 수 있습니다. 제가 담보가 될 테니 만약 제가 베냐민을 데려오지 못하면 제가 아버지 앞에 영원한 죄인이 되겠습니다." 라며 간곡히 호소했다. 형제들로서는 이집트에서 사온 곡식 자루들마다 지불했던 돈이 그대로 들어있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가진 것도 있고, 무엇보다 야곱은 과거 요셉을 잃었던 아픔도 있었기에, 또 다시 자식을 잃기 무서웠던 것도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사온 곡식도 전부 소진되고,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시므온은 죽은 목숨이기 때문에 야곱은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베냐민을 함께 보내기로 한다. 야곱은 그 총리에게 성의를 보여야 할 테니 꿀, 향품, 몰약, 유향나무 열매, 감복숭아 등을 선물로 들려보내며, 자루에 들어가있던 곡식 값은 2배로 챙겨 사죄비로 다시 지불하도록 한다.

      이집트에 도착한 형제들은 약속대로 요셉에게 베냐민을 제시한다. 요셉은 시종을 시켜 형제들을 자기 집으로 들인 뒤 연회를 열어 형제들과 호화로운 점심식사를 함께 한다. 형제들은 관리인에게 지난번 곡식자루에서 나온 돈을 돌려주며 상황을 설명하자, 미리 요셉에게 지시받은 관리인은 "그것은 하느님의 선물일 것이다. 나는 지난번 곡식값을 벌써 받았다."고 하며 돈을 받지 않으며 시므온을 데려온다. 시므온도 그간 감옥에 갇히지 않고 방에서 편히 지내고 있었다. 요셉은 형들에게 '너희 아버지는 잘 지내시냐'고 아버지의 안부를 묻고, 특히 친동생 베냐민을 보고 '네게 하느님이 은혜 베푸시길 바란다'고 축복까지 하며 총애한다.[20] 그리고 형제들 순으로 자리를 앉힌 후 식사를 하게 했다.[21] 요셉은 형제들의 곡식자루에 가져갈 수 있을 만큼 곡물을 채워 주지만 막내인 베냐민의 곡식자루에는 몰래 자기 은잔을 집어넣도록 지시한다. 형들이 옛날에 자신을 팔아버린 것처럼 막내 베냐민도 버리고 가는지 시험해보고 싶어서였다.

      형제들은 기분 좋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집트 병사들이 따라와 "너희가 어째서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냐? 총리께서 술 잡수시거나 점 칠 때 쓰시는 은잔을 훔쳐가다니!" 라고 호통을 친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던 형제들은 "은잔 같은 걸 훔칠 거였으면 우리가 지난번 자루에 들어가있던 곡식 값을 두 배나 챙겨서 돌려드리러 가져왔겠습니까? 만약 우리 중에 그런 자가 있다면 그는 죽어 마땅하며, 우리가 모두 총리의 노예가 되어도 좋습니다." 라고 역설한다.[22] 이에 대장이 좋다고 하며 각자 짐을 풀도록 시키는데, 당연히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자 형제들은 절망하고, 결국 또다시 요셉 앞에 끌려가게 된다. 물론 사실은 위에 나온대로 요셉이 형들을 상대로 옛날 자신이 당했듯 베냐민을 버릴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바뀌어 베냐민을 지켜주려 할 지 우애를 시험해 본 것. 다행히 형들은 예전과는 달리 베냐민을 팔지 않았고, 넷째 형 유다가 나서 "변명할 여지조차 없습니다. 베냐민 뿐 아니라 우리들도 베냐민과 같이 종이 되어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요셉은 "그럴 것 없고 잘못한 베냐민만 남고 나머지는 아버지께로 돌아가라." 고 명한다. 그러자 유다는 자신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유독 아끼시던 한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죽고 그 동생인 베냐민이 남아 아버지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었고, 그 형이 죽었을 때 아버지가 '나도 죽어 저승에서 아들을 만나겠다.' 라고 슬퍼하셨는데 베냐민마저 잃는다면 이번엔 정말 그리될 것이니 베냐민을 보내주시고 차라리 자신이 베냐민 대신 종으로 남겠다고 간청한다.[23]

      결국 견디지 못하고 감정이 폭발해버린 요셉은 고함을 질러 주위의 모든 이를 물린 후 파라오가 있는 편전까지 들릴 정도로 목놓아 울면서 마침내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형들은 경악하며 요셉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하고 애굽으로 팔아 넘기기까지 했던 형들을 차례차례 포옹하며 기꺼이 용서한다. 이후 요셉은 아버지를 모셔와서 이집트에 살게 하겠다고 말한다. 자초지종을 들은 파라오는 매우 기뻐하며 형들을 불러와 '좋은 수레들을 빌려 줄테니 가져가서 너희 가족과 재산들을 챙겨 이집트로 데려오라'며 요셉의 가족들을 이집트로 이주하도록 장려한다. 요셉은 형들에게 각각 좋은 옷을 한 벌 씩 선물하고,[24] 그들이 가나안 집으로 갔다가 다시 오면서 먹을 양식과 선물까지 넉넉히 챙겨서 형제들을 돌려보낸다. 돌아온 형제들은 앞다투어 아버지에게 요셉이 살아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요셉이 아버지를 태워 모셔오게 한 좋은 가마까지 보여주자 야곱은 다시 기력이 되살아났으며, '이제 됐다.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요셉을 다시 만나고야 말겠다.' 고 마음먹는다.

      곧 가나안에 있던 야곱의 부족들이 모두 막사를 정리하고 짐을 챙기고 가축들을 몰아 이집트로의 대이주를 시작한다. 가던 도중 브엘세바에 도착한 야곱은 문득 불안했는지 밤에 제사를 드리는데, 이에 응답한 하느님은 '이집트로 가는 걸 무서워할 것 없다. 너의 일족이 이집트에서 대성할 것이고, 네가 거기서 편안히 죽어 요셉이 네 눈을 감겨줄 것이다.' 라고 야곱을 위로한다. 이윽고 이들이 이집트에 도달하자 요셉은 고센 땅까지 마중을 나오러 달려와 꿈에도 그리워하던 아버지와 얼싸안고 울며 재회한 뒤 아버지와 형제들과 둘러 앉아서 '이제 파라오를 만날건데, 이집트인들은 목축업을 천시하니 직업이 목축업이라고 하면 이집트인들에게 크게 엮이지 않고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조언한 뒤 형들 중 다섯을 데리고서 파라오를 알현한다.

      형들은 요셉의 조언대로 파라오에게 자신들을 목자라 소개했고, 파라오는 이들을 배려해 이집트 고센 땅에 머무르게 하며, 그들 중 실력 좋은 자를 뽑아 자신의 가축들도 관리하게 한다. 이어서 아버지 야곱도 파라오에게 소개한 이후 요셉은 파라오의 명을 받아 비옥한 라암세스 지역을 받아 가족들이 살게 했다.

      파란만장했던 가족사가 이렇게 마무리가 되고, 요셉은 업무로 복귀한다. 자신이 예견했던대로 흉년이 점점 심해지고, 백성들이 매년 대량의 곡식을 사 가다 보니 국가의 경제력이 왕실 재정으로 몽땅 몰리기 시작했다. 끝내 백성들이 곡식을 살 돈조차 없어지고 마는데, 이에 백성들이 찾아와 호소하자 요셉은 '그렇다면 돈 대신 각자 가축들을 끌어오면 그 가축 값대로 곡식을 대신 팔겠다'고 선언하고 덕분에 백성들은 다시 기근을 넘겼다. 하지만 이 또한 1년뿐이었고 이듬해 다시 식량이 떨어진 백성들은 다시 찾아와 '이제 남은 건 몸과 밭밖에 없으니 차라리 우리 몸을 파라오에게 팔아 종이 되고 식량을 받겠다'고 한다. 이에 요셉이 수락하여 '이제 여러분의 토지는 공식적으로 파라오의 소유가 될 것이며, 여러분은 파라오의 소작농이 될 것입니다. 씨앗과 모를 나누어줄테니 밭을 일구어 식량을 얻고, 추수 때마다 수확물의 1/5을 떼어 파라오께 세금으로 납부하시고 나머지를 쓰도록 하십시오'라고 선포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야곱은 사망하기 전 자신의 열두 아들을 불러 각자에게 축복을 내려줘야 했는데, 이때 형제들 모르게 요셉과 요셉의 두 아들을 따로 불러내고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들여서 야곱의 다른 아들들과 같은 몫을 차지하게 해준다. 야곱의 임종이 다가오자 요셉은 두 아들을 데리고 야곱에게 가는데, 야곱은 남은 기력을 쥐어짜내 일어나 두 손자에게 축복의 입맞춤을 하고 포옹한 뒤 나란히 세우고, "내가 살아서 요셉 너를 다시 만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는데, 하느님께서는 한 술 더 떠서 너의 아들들까지 내 눈으로 살아서 보게 해주셨구나"라고 기뻐하며 팔을 X자로 펴서 오른손을 둘째 에브라임에게, 왼손을 장남 므낫세의 머리에 올린다. 이를 본 요셉은 '아버지, 얘가 장남 므낫세입니다. 오른손을 므낫세에게 얹으시죠'라 했지만[25] 야곱은 '나도 안다. 므낫세도 잘 되어 크게 번성할 것이다. 하지만 에브라임이 형보다 더 크게 될테고 이 아이에게서 수많은 핏줄들이 갈라져 나올 것이다'라고 예언하며 두 손자를 축복한다. 어쨌든 이로써 이집트 여인과의 혼혈인 요셉의 아들들 역시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인정받았고, 요셉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12지파 중 두 지파의 선조가 된 셈이다. 이후 형제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축복할 때에 요셉은 "무성한 가지"라는 표현으로 축복을 받았고 그 후 야곱은 아들들이 둘러모여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사망한다. 요셉은 아버지의 시신을 40일에 걸쳐 방부처리하고, 이집트의 지인들이 70일간 애곡하는 기간을 가진 뒤, 파라오의 윤허를 받아 요단강의 동쪽으로 운구해 가는데, 왕실의 문무백관, 궁중 장로, 가문 사람들, 대규모 호위 군사들까지 붙어 왕의 장례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의 형들은 "이제 아버지가 없으니, 요셉이 아버지 생전에 애써 숨기던 적개심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라 여겨 요셉에게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며 위로하였다.

      이 말은 즉, 요셉이 자신의 가문을 통해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라는 언약을 잡고 자신의 모든 힘들었던 여정이 언약의 여정이었음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실제 예수 그리스도는 요셉의 넷째 형 유다족속을 통해 탄생하셨다.

      외경 중에 요셉의 언약에서는 요셉이 꿈에서 유다 지파의 여자와 어린 양에 대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후 요셉은 110세까지 살게 되는데, 죽기 전 "언젠가 자손들이 고향에 돌아가면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리하여 죽을 때는 이집트에 묻히나,[26] 후손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가나안 땅으로 옮겨진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나중에 세월이 지나 탈출기의 시대로 가면 요셉의 공적이 잊혀져서, 요셉과 형제들의 후손들은 단순한 이방인에 노예 취급을 받는다. 탈출기 후기설을 채택하여 해석하면, 이것은 요셉이 총리로 있을 때 파라오가 외부 유목민인 힉소스 계통의 혈통이었는데[27] 이집트인들이 요셉이 죽은 후 힉소스인들을 몰아내면서 지배층이 바뀌어 그렇게 된 것이었다.[28]

      팔레스타인의 나블루스에는 실제 요셉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은 20세기 들어와서 수난을 겪었는데 6일 전쟁 이후 이 지역은 이스라엘의 소유가 되었지만 오슬로 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의 소속으로 하되 유대인들이 계속 현장 방문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 나블루스를 재관할하면서 무덤 참배객들이 계속 총격을 받는가 하면 훼손 또한 자주 일어났다.

      [1] 참고로 요셉이 입은 색동옷은 이름처럼 여러 색으로 되어있다는 뜻이 아니라 소매가 길고 술이 달린 외투/겉옷을 말한다.[2] 철장은 우리말로 하면 쇠 막대기 또는 쇠 지팡이.[3] 말이 좋아 꿈쟁이지 좀 거칠게 말하자면 꿈이나 꾸는 자식 같은 멸칭에 가깝다.[4] 성경에서는 '이스마엘의 사람들(미디안인)'이라고 언급하였다.[5] 정확한 직책은 가정 총무이다.[6] 고대 노예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노예 제도와 조금 다르다. 노예 신분이라도 전문직에 종사한 사례가 많다. 일반 가정에서도 막일하는 노예부터 가정교사나 집사를 담당하는 노예 등 다양한 일을 했다. 로마의 경우 자유민이 된 노예에게 부모가 없다면 옛 주인이 법적인 부모 역할을 해야 하는 법도 있었다.[7] 성경에도 매일 요셉을 유혹하였다고 기록한다.[8] 이 부분은 고대 이집트에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 '두 형제 이야기'와 유사성을 보인다.[9] 이를 보면 보디발도 요셉이 그러지 않았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감옥행으로 끝낸 것 같다[10] 북한에 있는 것 같은 그런 살인 수용소라기보다는 소위 말하는 '범털' 전용 감옥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만일 북한의 수용소 수준이었다면 요셉은 죽거나 최소한 그런 전개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어차피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보호해주시긴 했겠지만...[11] 다만 성서 원문에서는 그냥 투옥시킨 게 아니라 분노해서 투옥시켰다고 언급되므로 문맥상 아내의 모함을 믿고 요셉한테 분노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아니면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려고 했고 총애하던 요셉을 모함함으로 분노했을 수도 있다.[12] 주류 역사학계는 이 당시의 파라오를 상이집트(제 17왕조)의 파라오였던 세누스레트 4세로 본다.[13] 소의 암컷[14] 皮骨, 살가죽과 뼈.[15] 相接, 살가죽과 뼈가 맞붙을 정도로 몹시 마르다[16] 성경에서는 '파리한'이라고 쓰여 있다.[17] 파라오는 신분만 높을 뿐, 통치권은 거의 모두 요셉에게 위임하였다. 성경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 내가 너보다 높은 이유는 그저 이 옥좌 하나 때문이다"라는 파라오로서는 놀라운 발언을 했다. 전근대시대에 왕이 직접 의전과 집무실을 빼면 나와 동급이라고 공인한거다.[18] 재물을 다 바치고도 식량을 충분히 구하지 못해 나중엔 가축을 바쳐야 했고, 그것마저 떨어지자 나중엔 땅까지 내야 했다. 땅을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수확의 1/10를 바쳐야 했기에 사실상 소작농 신세가 되어버린다. 다르게 보면 지방 귀족들을 몰락시켜서 왕권을 강화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역사적으로 토지를 가진 지역 귀족들이야말로 왕조교체의 주역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지방 귀족들의 경제 기반이 붕괴되어서 중앙집권을 성사시킨 것.[19] 최초의 마이너스 금리 시행자로 보는 주류 역사학자들도 있다.[20] 그를 만났을 때 감격하여 뒷방으로 가서 한참 조용히 울기도 했다.[21] 형제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겼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식사를 맛있게 했다고 하며, 베냐민에게는 다른 형제들보다 5배의 음식이 제공되었다.[22] 요셉이 점치는 데 쓰는 잔이라고 하는데 요셉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말로 점을 쳤을 리는 없고, 형들을 상대로 자신의 신분을 위장할 겸 형들을 시험하기 위해 꺼낸 말일 것이다. 이집트에는 그릇에 기름을 넣어 퍼지는 모양으로 점을 치는 미신이 있었다. 그래서 레위기 19장 26절에서는 점을 치는 미신을 금하고 있다. 천주교 주교회의, 창세기, 154쪽[23] 이집트로 오기 전 유다가 아버지께 "만약 베냐민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평생 그 죄를 짊어지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24] 베냐민에게는 다섯 벌을 주었고 덤으로 은 삼백 냥까지 얹어준다.[25] '오른쪽'이 '서열 1위의 권위, 권력자의 권력'을 상징하기 때문이다.[26] 이때 요셉의 유해 역시 미라로 만들어졌다. 창세기 50장에서도 해당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27] 기원전 1600년경 제15왕조 말기 무렵.[28] 그러니까 빗대자면, 마치 원나라 시기에 고려양 전파나 기황후 처럼 요셉도 힉소스 궁중이었기에 고관으로 기용이 가능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실제로 명나라는 중기부터 의도적으로 고려식 복색을 규제해간다.)


      아름다운 마무리(창세기50장)

      본문은 야곱의 죽음 후에 요셉에게 있었던 일과 요셉의 죽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죽음을 맞이하자 요셉은 아들로서 의무를 다하는데 아버지 야곱의 유언에 따라 장례를 치릅니다. 요셉이 장례를 치르는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장례를 치르는 기간과 그 규모입니다. 시신이 썩지 않도록 40일에 걸쳐서 향으로 처리를 하고 슬퍼하며 곡을 하는데, 애굽 사람들이 곡을 하는 기간이 무려 70일입니다. 바로가 죽었을 때 애곡하는 기간이 72일인 것과 비교하면 요셉의 아버지는 바로의 애도 기간보다 불과 2일이 적은 기간입니다.

      장례 기간뿐만 아니라 요셉이 바로의 허락을 받아 가나안으로 떠나는데 규모를 보면 그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7~9)

      장례의 기간이나 규모를 통해 애굽에서 요셉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만큼 높은 위치에 있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것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성대하게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브라함이 구입했던 매장지에 아버지를 장사합니다. 아버지를 장사하기 위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요셉, 열일곱 살에 떠나 대략 39년 만에 고향 땅을 밟는 겁니다.

      야곱의 장례를 보면서 또 하나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슬픔입니다. 애굽에서 70일의 애도의 기간이 지나고 요셉은 가나안 땅으로 와서 다시 7일 동안 슬퍼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면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고 부릅니다. 요셉은 자신의 체면이나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슬픔을 표한 것이 아니라 정말 큰 슬픔에 빠져 울면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것입니다.

      이렇게 슬퍼하는 요셉을 보고 있으면 상대적으로 요셉의 형들은 별로 슬프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슬퍼하는 요셉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요셉의 형들에 대해서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요셉은 큰 슬픔에 빠졌지만, 요셉의 형들은 슬픔보다 다른 것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두려움에 빠져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15)

      그들이 행한 악을 요셉이 되갚을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요셉은 두려움에 빠진 형들을 건져내기 위해서, 반복해서 두려워하지 마소서”(19, 21)하고 말해야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죽이려했고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동생에게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열일곱 살이었던 요셉이 당한 충격과 괴로움은 당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보통 기대하는 이야기는 어떤 걸까요?

      밑바닥까지 떨어진 주인공이 이를 악물고 복수를 다짐해서 치밀한 계획과 준비를 마치고 통쾌하게 갚아주는 것, 그런 걸 기대합니다.

      이제 요셉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때가 왔습니다. 요셉과 형들의 입장은 완전히 바뀌었고 요셉의 말 한 마디면 형들은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자신을 외면했던 형들에게 자신이 당했던 고통을 돌려 줄 수 있습니다. 곁에서 요셉을 말릴 수 있는 아버지는 안계십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형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셨던 말씀을 요셉에게 전합니다. 야곱이 죽기 전에 한 말입니다.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17) 형들은 아버지가 남긴 말씀을 전하고 요셉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합니다.

      죄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렇게 어렵게 만듭니다.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자신을 애굽으로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그들을 받아주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형들에게는 죄책감이 남아있었고 불안했던 겁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또 다시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대가 없이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그냥 혼나면서 그에 대한 대가를 조금이라도 치르고 나면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니까 불안하고 언제라도 터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들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라면 이렇게 할 거 같으니까 상대방도 이렇게 할 거라 생각합니다. 내가 요셉이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지금이 기회인데 분명 복수할거야! 당한 만큼 돌려줄 거야!‘ 이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는 겁니다.

      사람들의 당연한 반응이 아닙니까? 내가 당한 만큼 갚아주고 싶고, 나를 아프게 한 사람 그 사람도 아팠으면 좋겠고,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은 더 힘들었으면 좋겠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래 하나님은 살아계셔!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야,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고 마음에 불만과 원망이 생깁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악한 본성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악한 본성을 나 혼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들 가지고 있고 그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데 어떻겠습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미움과 다툼이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요셉처럼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요셉이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19)

      하나님을 대신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상황을 아시고 나의 어려움을 아시고, 나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악을 행했을 때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 사이에 죄로 인해 어려움이 생겼을 때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않고 그 모든 상황을 통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가능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20)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해치려고 했지만, 그들은 요셉에게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요셉은 그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믿음으로 행할 수 있었습니다.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않고, 그들에게 복수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상황은 우리를 속입니다. 그 상황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요셉이 처했던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나를 미워해서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 자유를 빼앗긴 나의 상황, 거짓말로 나를 비참하게 만든 그 여자,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힌 나의 상황, 상황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답답한 상황들은 우리를 속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러니 그런 속임에 넘어가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내 상황 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 문제보다 더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 어려움을 모두 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복수하고픈 마음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 속삭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에 내가 뭐라고 반대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나에게는 어려움 일 수 있지만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뜻을 이루신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만족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내가 도구로 사용된다면 감사한 일 아닙니까?

      하나님이 요셉을 사용하셔서 수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하셨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큰 민족이 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요셉 입장에서 그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괴로웠지만, 아픔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그 과정을 통과했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놀라운 일을 이루셨고, 그 일에 요셉을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상황은 어떠십니까? 어떤 상황이 여러분을 속이려고 합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돼!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 말 못할 아픔으로 가슴앓이를 하기도 하고, 앞뒤에 꽉 막힌 상황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고, 남들과 비교되는 나의 처지 때문에 낙심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와 계획안에서 여러분의 인생을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그 뜻대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가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 과정에서 그림을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구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했습니다. 복수하는 것, 어떻게든 다른 사람의 죄를 심판하는 것,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을 갚아 주는 것, 요셉은 이런 것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그분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요셉의 믿음은 그의 마지막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그의 자손들에게 유언의 말을 전합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24~25)

      요셉의 유언은 두 가지 내용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그들을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여 주실 거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땅에 이를 때에 자신의 뼈를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하나님 약속에 대한 요셉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요셉의 유언에서 반복되는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표현입니다. 요셉은 특별히 강조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돌보신다는 단어의 원래 의미는 방문한다’, ‘찾아온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반드시 그들을 찾아오실 거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오셔서 약속하신 것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킬 것이니 하나님이 오시기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그 약속의 말씀을 자손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라 명하며 자신의 삶을 마무리합니다.

      이와 같은 요셉의 삶을 우리는 아름다운 삶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셉의 삶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어려움을 이기고 총리가 되어 성공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요셉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그가 삶의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을 신뢰했고,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요셉이 자신의 삶을 믿음으로 아름답게 가꾼 결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요셉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요셉의 삶이 하나님이 빚으신 작품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빚어 가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KBS 다큐에 방영된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채팅방에도 공유된 적이 있는데 교회오빠라는 제목의 다큐입니다.

      젊은 한 부부가 나오는데 남편이 어느 날 배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습니다.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하며 투병 생활을 하는데, 다음해에는 아내가 산후 조리를 마치고 나와서 검사를 받았는데 림프종 혈액암 4기 판정을 받습니다. 남편의 항암치료가 끝나자 마치 릴레이 경주를 하듯이 아내의 항암치료가 시작됩니다.

      남편은 그 과정 속에서 이런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주님 살려주세요. 이러다 저희 가정 다 죽겠습니다.’ 그러면서 부부는 서로가 그 아픔을 알기에 배우자가 투병 중에 있을 때 어떤 마음인지 서로를 이해하며 격려합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되었고 치료는 종료됩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14개월 만에 남편의 암은 재발되었고 상태는 아주 심각합니다. 복막에서부터 여러 장기에까지 전이된 것입니다. 의사의 표현으로 모래를 뿌려 놓은 것과 같다는 겁니다.

      제가 이 영상을 보는데, 그냥 눈물이 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렇게 고생하다가 죽으면 어떡하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안 좋게 생각할 텐데 걱정이 되는 겁니다. 암에서 나아서 건강해져야 될 텐데

      그런데 남편이 이런 말을 합니다. 그 말이 제 마음을 울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어리석은 생각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보면 내가 이 질병에서 완치되어야지 기적이라고 생각할거야 그런 기적들만을 바라고 있으니까, 우리가 질병을 만나서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이고 은혜인지 우리는 암이라는 질병을 통해서 깨달았잖아. 그래서 암 자체는 축복은 아니지만, 암을 통해 우리가 얻은 유익인거 같아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저보고 하루라도 더 살아야 되냐고 물어봤을 때는 하루라는 시간을 통해서 제가 조금이라도 더 온전해지는 기회를 얻고 싶은 거예요

      하루하루 눈뜨고 호흡하고 있음에 감사하고 잠자리에 들 때는 오늘 하루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있음을 감사하고 우리 부부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명, 그렇게 사명을 잘 감당하고 죽는 죽음이라면 삶에 대한 후회가 없을 것 같고

      그의 아내가 대답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수명을 살지 못하고 부르심을 받는다 해도 하고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남은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아닌 걸 우리는 알잖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가 우리에게 펼쳐질 영원한 하늘나라를 기다리며 삽니다. 약속을 기다립니다. 주님이 우리를 돌보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믿음으로 약속을 바라보고 주어진 상황 속에서 주님을 신뢰하며 산다면, 그 때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을 만날 날을 기다리며 산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내가 조금 더 성숙하는 기회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기회로,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간다면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요셉의 입관(창세기 50:24~26)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창세기의 하나님의 역사는 50장에서 요셉의 죽음과 입관으로 끝이 난다.
      하나님은 태초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이 땅에 계획과 목적이 있으셨다.
      특별히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그 기대와 마음은 매우 특별하다는 것을 창세기를 보면서 본다.
      아브라함을 보면서, 이삭을 보면서, 야곱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그 사람 일생의 작고 어두운 일까지도 때론 매우 섬세하게 때론 매우 역동적으로 기술하며 보여준다.

      오늘 5~6,000년이 지나서까지 우리 모두는 그들이 어떻게 태어나고, 자라고 하나님의 손안에 무엇을 체험하고 배우고 잃으면서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로 살았는지를 보고 있다.
      이 두꺼운 성경책에 하나님은 사람의 일생에 대해 계속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이 무슨 책인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디모데후서에서는 말한다.

      하나님이 관심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의 일생을 관심하신다.
      우리의 일상을 관심하신다.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감사하고, 체험하는 지를 관심하신다.
      이제 하나님은 그분의 역사와 계획과 완성이 사람안에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창세기의 끝은 요셉의 입관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이 땅에서 역사가 요셉의 죽음과 입관으로 끝난다는 것은 매우 인상이 깊다.

      창세기(Genesis)는 창조에 관한 기록이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하신 역사이다.
      그 역사가 오늘날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사람의 일생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삶을 관심하시며, 기억하시며, 간섭하신다. 당신의 근심에서, 당신의 원함에서, 당신의 기쁨과 만족에서, 당신의 두려움에서, 당신의 간절함에서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신다. 당신의 창세기는 아마도 당신이 죽고 입관하게 될 때 끝날지 모른다. 책이 끝날때는 그 책의 주제와 흐름과 방향이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책이 시작될 때 거기엔 이미 다른 주제와 내용과 흐름이 있는 것이다. 창세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창세기의 주인공은 하나님이 아니다.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의 인도와 역사와 돌보심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도 우리 사람의 인생을 통해 그분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구보다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을 응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응원하시지 않겠는가? 누구는 응원하고 누구는 저주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한 사람에 대한 사랑과 긍휼을 넘치도록 갖고 계신다.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요한복음에서 말하지 않는가? 그분은 우리를 응원하고 계신다. 다만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을 위해 제물을 드리는 가인을 본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장자권을 가볍게 여긴 에서를 본다. 그리고 하나님의 꿈을 우습게 여기는 요셉의 형제들을 본다. 가인과 아벨의 차이가 무엇이겠는가? 에서와 야곱의 차이는 무엇이겠는가?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차이는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만을 받으시고, 야곱만을 사랑하셨고, 요셉에게만 꿈을 주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왜 그럼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했는가? 왜 다른 이들은 성경에 기록하지 않는가?

      그 차이를 성경에서는 ‘믿음’이라고 말한다. 제물을 그냥 드리면 되지 않는가? 내가 잘 준비해서 드리면 되는 것이지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이 바로 가인이다. 아벨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마음으로 감동하고 감사하고, 고민하여 드린 것이다. 제물을 드리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아직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가? 보이지도 않는 ‘장자권’이 보이는 팥죽보다 가치가 있는가? 이것이 에서의 생각이다. 내가 첫째인데, 내가 열심히 사냥하고 노력하고 수고하면 되는것이지, 넌 무슨 ‘장자권’... 그래 그것을 네가 가진들 무엇이 달라지는데? 그것을 네가 어떻게 쓸건데? 기집애같이 약하고 팥죽이나 만들지 사냥도 못하면서 뭘 어떻게 할건데? 야곱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싶었다. 그가 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축복 만큼은 받고 싶었다. 어쩌면 에서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장자권이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하지만 그러한 사모함과 간절한 믿음이 야곱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왜 이러한 마음이 있었겠는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신것과 분명 그분이 축복하심을 받기를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꿈을 요셉에게만 주었겠는가? 요셉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형들이 그를 미워했는지도 모른다. 너는 왜 그런생각을 하니? 너는 왜 그런 것을 바라니? 하나님께 그런 것을 바란다고 이루어질 것 같니? 사람들은 자기와 같지 않으면 무시하고 조롱하고 심지어 미워한다. 요셉은 하나님과 함께 꿈을 꾸었다. ‘요셉아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건데, 너 나를 믿고 따라올수 있겠니? 네가 포기하지 않으면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이 있는데, 네가 순종할수 있겠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씩씩하게 반응하였을 것이다. ‘하나님 주님이 주신다면 제가 순종하며 따라갈께요’.

      하나님은 오늘 사람을 관심하신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관심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관심을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을 관심하시기에, 누군가 하나님을 관심하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창세기가 사람의 일생을 기록했다는 것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오늘 하나님은 당신을 관심하신다. 당신이 반응한다면, 당신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다면 하나님은 오늘 다시 그분의 창세기를 기록하실 것이다.

      창세기가 요셉의 죽음과 입관으로 끝난다는 것은 슬픈일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아무도 하나님을 관심하거나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음책인 출애굽기를 보면 430년간 애굽에 있으면서 그들은 이제 애굽의 종이 되어버린다.
      요셉이 있을 때 그들은 왕과 같은 지위를 가졌지만 이제 430년이 흐를 때 그들은 노예의 신분으로 변해버렸다.
      이것이 무엇인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의지하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때 우리의 신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도, 능력도 없는 세상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가운데 하나님의 창세기가 이어질수 있기를 원한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하는 책이다.
      다시말하지만 이제 하늘과 땅을 만드는 그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우리의 삶가운데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이 땅에 보여주고 싶어하신다.
      그일을 위해 오늘 이 땅에 있는 것이다.
      창세기는 끝나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역사와 그분의 움직임은 계속되어야 한다.

      오늘 요셉의 죽음과 입관을 가장 슬퍼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찾지 못할 때 그 때가 바로 창세기가 끝나는 것이다.
      오늘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창세기가 계속되기를 소망한다.





      1월 16일(목) 창세기 46-4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고센 땅(46:28)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Now Jacob sent Judah ahead of him to Joseph to get directions to Goshen. When they arrived in the region of Goshen,


      고센(Gôshen) גֹּשֶׁן 스트롱번호 1657

      1. 히브리인들이 야곱 때부터 모세 때까지 거주하던 애굽의 땅 ‘고센’
      2. 유다 지파의 영역과 이웃하고 있던 성 ‘고센’
      발음 [ Gôshen ]
      어원 / 애굽어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5회 사용
      • 1. 고유명사 히브리인들이 야곱 때부터 모세 때까지 거주하던 애굽의 땅 ‘고센’, 창45:10, 46:28,34, 47:27, 50:8, 출9:26
      • 2. 고유명사 유다 지파의 영역과 이웃하고 있던 성 ‘고센’, 수10:41, 11:16, 15:51.
      • 관련 성경  /   고센(창 45:10, 46:28, 34, 47:27, 50:8, 출 9:26, 수 10:41, 11:16, 15:51).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 2차 애굽 방문 때의 공적(44:18 -34)으로 인해 야곱은 유다를 매우 신임하였으므로 가족을 대표하여 그를 요셉에게 보낸것 같다.


      고센(Goshen) 야곱과 요셉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터전으로 삼은 애굽땅

        "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의 며느리들 외ㅇ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태어난 자이며   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두 명이니 야곱의 집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 (창세기 46:26-27) 



      고센 땅의 위치는 애굽의 국경지대로서 야곱의 고향인 가나안 땅과 가까운 지역으로  야곱과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며 생활터전을 좋은 땅-고센으로 정한다.
      고센은 나일삼각주에 위치해 비옥하고 강우량이 양호하며 나일강이 가까워 관개가 용이한 풍요의 땅이요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다. 

      모세의 출애굽시기까지 430년간 애굽에 거하며 번성하여 전쟁나갈 수 있는 장성한 남자만 60만(603,550명)이 넘고 온 백성은 250~300만에 이른 대민족이 되어 애굽을 두렵게 한다.


       *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지역의 7년 기근으로 요셉의 아버지 야곱과 그의 형제들은 팔려간 요셉이 총리가 되어 있는 애굽으로 온다.

      애굽으로 이주했던 야곱의 가족 수는 70명인가 75명인가?

      성경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숫자는 1이 2가 될 수 없고 2가 1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애굽으로 이주했던 야곱의 가족 수는 70명(창 46:27)이 옳은가? 아니면 75명(행 7:14)이 옳은가?
      아니면 둘 다 옳은가?
      70명이 옳고 75명은 틀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 기록이 잘못이라는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성경은 거짓이 없고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만 사도행전 7장에서 말하는 75명의 숫자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니, 스데반 집사의 개인 설교 내용 중 잘못된 부분이 있을 뿐이다.
      만약 성경이 스데반 집사의 설교 중 실수한 부분을 올바로 고쳐서 기록했다면 성경이 잘못(유오) 된 것이다.
      성경은 스데반 집사의 설교 내용 중 그가 실수(mistake)한 부분도 그대로 인용했기에 전혀 거짓이 없고 무오한 것이 된다.
      성경은 많은 믿음의 조상들의 장점을 기록해 줄뿐만 아니라 단점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사도 바울도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고 말해주고 있으며, 유명한 모세, 다윗, 사울(바울)도 살인하는 죄를 범하였고, 아브라함도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성경은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에 더욱 우리 자신을 점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한다.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자세히 살펴본 결과 그의 설교에 다음과 같은 실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코 스데반 집사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전혀 아님을 이해하여 주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이 글을 쓴다.

      스데반 집사 설교 내용 중에 잘못(mistake) 된 것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갈대아에 있을 때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 명했는가? Not Sure.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 즉 갈대아에 있을 때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고 하셨다고 했는데, 구약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다. 구약에는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가 가족과 함께 갈대아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에 하란에 머물게 되었고 거기에서 정착했다고 말한다. 그러면 왜 데라는 갈대아를 떠나려 했을까? 성경엔 기록이 없으나 필자의 견해로는 데라가 자기 아들 하란이 죽은 충격으로 가나안으로 가려 했다. 가던 도중 머물게 된 곳의 이름을 자기 아들 이름인 ‘하란’이라 지어서 정착했을 것이다. 하란에서 오랫동안 머물게 되자,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종)들, 아내와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떠나게 된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지시할 땅으로 떠나라고 하셨던 때와 장소는 갈대아에서 아브라함이 젊은 청년의 때가 아니라 하란에서 가장으로 부요하게 되었을 때라고 보여진다.



      둘째, 아브라함이 그 아비 데라가 죽으매 가나안으로 떠났다? No.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는 아브라함이 ‘그 아비가 죽으매’(행7:4) 떠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의 사건들의 숫자 계산을 해보면 분명히 그의 아비 데라가 살아 있을 때 떠났다. 왜냐하면 데라는 70세에 아브라함,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창11:26),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향해 떠난 때는 아브라함의 나이 75세(출 12:4)였다. 그 당시 데라는 145세 였고, 데라가 죽은 때는 205세(창11:32)이므로 데라가 죽고 나서 떠난 것은 아니다.
      데라가 70세에 세 쌍둥이를 낳았다고 보지 않는다. 만약 아브라함이 큰아들이었다면,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떠날 때 아버지 데라는 살아 있었으며 그 후에도 하란에서 데라는 60년을 더 살았다는 것이며, 아브라함이 큰아들이 아니고 둘째나 셋째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그 형제들의 나이 차이가 60살이 된다고 하는 것은 납득하기 아주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향해 떠날 때 그의 아버지가 죽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아브라함이 아비집을 떠났다는 것이 더욱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셋째, 야곱과 그 가족들이 애굽에 이주한 숫자가 75명이었다? No.

      창세기 46장 26절에는 야곱과 함께 애굽에 내려간 숫자는 야곱의 자부를 제외하고 66명이며, 27절에는 야곱과 요셉, 그 아들 둘 모두 4명을 합하여 정확하게 70명이었다고 말해 준다. 그러니 이 70명은 야곱을 포함한 직계 가족의 숫자가 분명하며 며느리들과 손자 며느리들까지 모두 합하면 필자의 견해로는 100여명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75명이란 숫자는 스데반 집사가 잘못 알고 설교했던 것이다.

      넷째, 야곱과 그 조상들이 세겜에 장사되었다? No.

      창 23장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127세에 죽었을 때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 마르레 앞 막벨라 굴을 에브론에게서 사서 그곳에 장사지냈다. 그후 아브라함, 이삭과 그 아내 그리고 야곱과 그 아내 레아도 그곳에 장사 되었다(창49:30-33). 그러므로 야곱과 그 조상들이 세겜에 장사 되었다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는 틀린 것이며 세겜은 그 당시에 사마리아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요셉의 후손들이 차지한 땅에 속하며 이 세겜에는 요셉이 장사됐다(수24:32).

      스데반 집사의 이러한 잘못된 언급은 공회원들의 큰 반감과 분노를 갖게 되었고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다. 왜냐면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아주 업신여겼으며 상종도 하지 않았는데, 야곱과 그 조상들이 세겜 즉 사마리아 지역에 장사되었다고 하는 잘못된 말에 공회원들은 악감을 갖게 된 것이다. 당시에 유다지역과 갈릴리 지역을 통행하던 사람들이 중간에 위치한 사마리안 지역의 땅을 밟지도 않으려고 우회해서 요단강 동편의 길을 통해 왕래했던 상황인데 자기 조상들이 그러한 땅에 묻혔다고 말했으니 얼마나 분개했겠는가?

      다섯째, 야곱과 그 조상의 장지는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샀다? No.

      아브라함이 산 땅은 세겜이 아니요, 마므레 앞 즉 헤브론이며, 에브론에게서 은 400세겔을 주고 샀던 땅이다(창23:15). 세겜 땅은 야곱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 100개로 샀던 땅이다(창33:19). 그러므로 스데반 집사는 야곱과 그 조상의 장지도 틀리고, 누구에게서 구입하였던 땅인 것도 틀리게 말한 것이다.

      모든 인간들의 설교에는 실수가 있을 수 있다. 첫 순교자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도 실수가 발견된다. 이와 같은 인간들의 과오나 실수를 통해 “성경은 거짓 없고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이 더욱 증명된다. 그리고 그 기록된 숫자들을 통해 성경이 진정 하나님의 말씀임을 우리는 더욱 깨달아가게 된다.

      베드로는 믿음으로 물위를 걸었으나 곧 물에 빠진다. 어부 출신인 베드로는 수영을 잘할 수 있었지만 손을 내밀어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고, 주님의 손에 붙잡힌 베드로는 다시 물에 빠지지 않는다.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의 능력과 영광은 더욱 나타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스데반 집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스데반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과 그 우편에 예수께서 나타나 보여 주셨다. 스데반 집사는 주님의 영광이 모든 자들에게 선포하며, 기쁨으로 순교의 길을 걷게 됐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말하며 잠을 자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부지 중이건 무지 중이건 말에 실수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겸손(Humble)하고 정직(Honest)한 믿음(Faithfulness)의 사람들에겐 저들의 실수마저 아름답게 만들어 자기(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 보이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고백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1〕

      나일 강의 삼각주의 동쪽 지역이다.  야곱의 애굽 이주로부터 출애굽까지 이스라엘 사람이 살은 목축에 적합한 땅이었다(창 45:10,46:28,29,34,47:1, 4, 6, 27,50:8, 출 8:22,9:26).

      범위는 분명치 않은데, 구약 외전 유디드서(Book of Judith) 1:9에는 다바네스와 라암셋을 고센 땅에 포함하고 있다(창 47:6의 `고센 땅'과 11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세스'는 이름은 다르나 같은 땅이다).

      유다계 문서에 의하면,

      이스라엘 사람은 이 지방에 살면서 애굽인과의 접촉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에브라임계 문서와 제사전(祭司典)에 의하면, 고센은 목축생활의 최적지로서 농경지로서는 대체적으로 부적합한 곳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고센은 나일 강 본류로부터 멀고 관개에 불편한 곳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는 경작되고 있었음이 민수기 11:5로 짐작된다. 헬라역(LXX)은 창세기 45:10,46:34을 Gevsm jArabivas(아랍의 게셈)이라고 하였다.

      이 아랍은 희랍, 로마 시대의 하부 애굽의 정치적 분할 23개 도의 하나인 nomosArabia(아라비아 도)를 가리키고 고대의 상형문자의 도표(舊柰)에는 하부 애굽의 제 20도셉드(Sept)라 불리우고 있던 것이다(고대에는 20도로 분할되어 있었지만, 희랍,로마 시대에는 23도로 늘었다).  아랍도는 하부 애굽의 동단을 이루는 도인데, 스트라보(Strabo)는 이것을 나일과 펠루시움(Pelusium), 그리고 고호(苦湖, Bitter Lake) 사이에 두고 도레미는 부바스틱(Bubastic), 즉 펠루사익(Pelusaic) 지류의 동쪽에 두고 있다.

      또 헬라역(LXX)은 창세기 46:28에서는 헤오른 볼리스(`Hrwvwn povli)를 그 도성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 헤오른 볼리스는 이스마리아의 서쪽 20㎞, 와 디 두밀랏(wady Tumilat)에 있는 오늘날의 델마슈구다(Tell-Mashkuta=像丘)와 동일시된다. 그리고 1883년과 85년에 나빌(E. Naville)에 의해 조직적으로 발굴되었다.그러나 지리학자 톨레미(Ptolemaeus)에 의하면, 아라비아도의 서울은 바쿠사(Fakou'ssa,Phacussa)였다고 한다.

      이것은 애굽어의 `市'를 의미하는 바(pa)를 같이 읽는 것으로서 게셈(kes^em)의 음역(音譯)이라고 생각된다. 게셈은 상형문자의 도표(道表)에는 바소보드(Pa-Sopt)라 기록되고 소브드도의 서울인데, 자가직그(고대의 부바스데스)의 동쪽 13㎞, 운하의 우안에 있는 오늘날의 사프텔헨나(Saftel-Hennah)에 옛 그림자를 남기고 있는데, 이유적과 동일시된다.

      나빌은 여기서 람세스 Ⅱ세(Ramesses Ⅱ)의 화강암의 거상(巨像)을 발굴했다. 가장 흥미있는 것은, 제 30왕조의 넥타네보 Ⅱ세(Nec-tanebo Ⅱ, C. 350 B.C.)에 의해 소프트(Sopt) 신에게 헌납된 신전의 유물이다.  그 비문의 하나에는 왕은 게스(Qes)에행차 후 게스 제신의 영광을 위해 이같은 것들을 하라고 명했다라고 되어 있다. BC 350년 경에는 이 성읍의 이름이 `게스'(Qes=K ^esem)라고 불리웠다는 것올 알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바 소프트'(PaSopt)라고 불리웠을 것이다.

      스테인돌프(Steindorff)는, 애굽에서도의 서울이 종종 한 성읍에서 다른 성읍으로 옮겨지곤 하였다는 관례를 생각한다면, 이 곤란은 설명되리라고 믿는다고 말한다. 여하튼 고센의 땅은 대략 부바스데스의 동쪽에 있는일대인데, 서쪽은 사프트 엘헨나(Saft el-Hennah), 남쪽은 벨베스(Belbes), 동쪽은델 엘 게빌(Tell el-Kebir)을 잇는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면적 155-207㎢였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2〕

      유대의 남부(네게브)의 성읍 또는 그 지방이다(수 10:41,11:16). 아납의

      동쪽 2㎞, 에다하 리예(ed-Dahariyeh)와 동일시된다.

      〔3〕

      헤브론의 남쪽에 있던 성읍인데, 위치는 불명이다(수 15:51)


      고센 땅(אֶרֶץ גֹּשֶׁן, ʾEreṣ Gōšen)히브리어 성경에서 요셉파라오가 히브리인들에게 준 이집트의 장소로 명명되었다(창세기, 창 45:9~10). 그들은 나중에 출애굽할 때 이집트를 떠났다. 이 지역은 이집트 하류의 나일강 삼각주 동부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힉소스 왕들의 권좌인 아바리스(Avaris)나 그 근처일 것으로 추정된다.

      고센 땅은 성경의 창세기출애굽기에 언급되어 있다. 창세기의 마지막 장을 구성하는 요셉의 이야기에서 족장 야곱은 기근에 직면하여 곡식을 사러 그의 아들 열 명을 이집트로 보낸다. 야곱의 또 다른 아들인 요셉은 이집트의 고위 관리였으며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이집트에 정착하도록 허락했다. 창세기 45장 10절에서는 고센을 바로의 궁정에 사는 요셉과 가까운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창세기 47장 5절에서는 고센을 이집트 땅의 “가장 좋은 곳”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요셉이 그의 가족에게 가축을 지키는 자로서 파라오에게 나아와 '너희가 고센 땅에 거하게 하리니 이는 모든 목자를 가증히 여기기 때문이라'라고 한 것처럼 이는 이집트의 나머지 사람들과 어느 정도 구별됨을 암시하기도 한다. 창세기 47장 11절은 "라암셋 땅"을 고센과 바꾸었다. "요셉이 그 아비와 형들에게 바로의 뜻과 같이 이집트 땅의 가장 좋은 라암셋 땅에서 그 아비와 형들에게 땅을 주어 기업을 주게 하였느니라"라고 지시했다.

      출애굽기에서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해서 애굽에 거주하며 번성한다.
      고센이라는 이름은 출애굽기에서 애굽의 재앙에 대한 이야기에서 단 두 번만 등장한다.
      여기서 고센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는 곳으로서 이집트인들을 괴롭히는 파리 재앙과 우박 재앙을 면했다.



      고센의 뜻은 ‘땅의 언덕’으로 교회(기독교)에 대한 예표

      성경 말씀을 보면 생명(生命)과 사망(死亡), 영생(永生)과 영사(永死) 등 대조되는 극단적 두 개념이 있습니다.
      생각이나 믿음은 여당 야당, 보수 진보처럼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완전히 생각은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8: 44- 45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나님은 진리이시므로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것은 진리가 아니고 진리가 아닌 것은 마귀로부터 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사람의 생각으로 가는 길은 영생과 영사의 T형 갈림길에서 생명이 아닌 사망의 길이 됩니다.

      그런데 총론 불변의 진리의 틀(거울)로 보면 어떤가?

      택자와 불택자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따라서 복음교실은 누가 주어인가?
      즉 누가 자신의 주님인가를 깊이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체(실상)가 아닌 그림자(예표, 허상)에 소망을 두고 그림자를 붙들고 가서 그 결국은 영사에 이르게 되고 썩을 씨와 썩지 않을 씨(벧전 1:23)를 분별하지 못하고 본향(히 11:14-16)을 향해 가는 삶이 아닌 나그네(행인. 벧전 2 :11)의 삶을 살면서 그것이 본향인 것으로 착각하는 나그네 믿음의 삶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생명과 사망의 T형 갈림길은 중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을 해서 광야로 인도하신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유교병이 아닌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름다운교회 복음교실은 총론 불변의 진리와 성경의 주제인 구원과 심판을 거울에 비춰보는 분별을 할 것을 계속 말씀드립니다.

      복음교실 첫째 틀 :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진리로 알려주시는 총론 불변의 진리.

      1. 생각 ;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참고 : 하나님이 말씀만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생각할 것.

      2. 속성 : 온전성은 오직 하나님(창조성, 전지성, 전능성, 주권성, 거룩성 등등)과 예수님(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속성만 온전성이 있고,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진 3차원 물질로 된 현재의 세상이나 피조물은 온전성 속성은 있을 수 없다.

      3.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4. 천국은 조금 간다.

      복음교실 둘째 틀 : 성경 전체로 구원과 심판.

      이렇게 분별할 기준에 대한 말씀을 드려도 분별과 깨달음은 사람의 영은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오직 성령이 몸에 들어와 깨닫게 하셔야만 깨달을 수 있고‘ 성령이 몸에 들어오시려면 죄 사함을 얻어야 하고, 죄 사함을 얻으려면 죄 사함의 비밀을 하나님이 깨닫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성경말씀이나 사건 지명 등등을 아무로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알려주시는 총론 불변의 진리만이 진정한 참 진리인 것입니다.

      막 4 : 9-13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13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그리고 성령으로 거듭난 바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갈 2 : 9-14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성경지명 강해 - 고센(Goshen)

      고센(Goshen)은 뜻이 ‘땅의 언덕’입니다.
      고센은 어떻게 땅의 언덕이 되는가?
      땅은 본체가 아닌 잠시 있다 사라질 신천신지 그림자(예표)입니다.

      성경지명에서 고센은 세 곳이 있는데 애굽에 속한 고센이 성경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애굽은 세상에 대한 예표입니다.
      이것을 머리에 두고 고센을 생각합니다.

      첫째 고센은 여호수아가 점령한 고센 땅(여호수아 10:41-42)

      여호수아가 또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사까지와 온 고센 땅을 기브온에 이르기까지 치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고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과 그 땅을 단번에 취하니라

      둘째 고센은 하나님의 백성인 열두지파 중 유다가 받은 기업 (여호수아 15:20, 51)

      20. 유다 자손의 지파가 그 가족대로 얻은 기업은 이러하니
      51. 고센과 홀론과 길로니 모두 십일 성읍이요 또 그 촌락이었으며

      셋째 고센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 아닌 세상을 예표하는 애굽의 고센

      애굽에 있는 고센은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고센이 땅의 언덕이 되는 성경적 과정

      1.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난 사기꾼 야곱

      야곱은 '뒤를 쫓는 자', 혹은 '발뒷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에서 뒤를 따라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아버지 이삭이 눈이 어두워지자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죽 한 그릇으로 사기를 쳐서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은 사기꾼이 야곱입니다.
      이런 사기꾼 야곱이 비슷한 사기꾼인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이런 저런 훈련과정을 거친 후 다시 가나안으로 되돌아오면서 하나님이 언약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 얍복강 가에서 어떤 사람과 밤새 씨름을 합니다.
      그리고 환도뼈가 위골이 되면서 겨루어서 이겼는데 이때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과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는 뜻인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리고 이런 야곱의 열두 자녀들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됩니다.

      창세기 32: 22-28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2. ‘땅의 언덕’ 고센(Goshen)

      성경에서 땅은 애굽과 함께 세상의 예표입니다.
      이런 세상에 속한 애굽에 있는 땅인 고센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환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피난처로 머물게 됩니다.

      창세기 46:24-34

      24 납달리의 아들 곧 야스엘과 구니와 예셀과 실렘이라.
      25 이들은 라반이 그 딸 라헬에게 준 빌하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니 합이 칠 명이라.
      26 야곱과 함께 애굽에 이른 자는 야곱의 자부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며.
      27 애굽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 명이었더라
      28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29 요셉이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아비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 목을 어긋맞겨 안고 얼마 동안 울매
      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
      31 요셉이 그 형들과 아비의 권속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비의 권속이 내게로 왔는데
      32 그들은 목자라 목축으로 업을 삼으므로 그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33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34 당신들은 고하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게 되리이다

      요셉은 야곱의 막내아들로 야곱이 막내인 요셉만을 예뻐하자 야곱이 낳은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합니다.
      그러면서 요셉을 죽이려고 들판에 데리고 나가서 구덩이를 파서 구덩이 속에 빠뜨렸는데 지나가던 대상들이 요셉을 발견을 해서 애굽에 있는 애굽 사람에게 노예로 팝니다.
      그런데 요셉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꿈 해몽을 잘 해서 애굽 왕 바로에게 신임을 받고 애굽 왕 바로 밑에서 승승장구 출세를 해서 총리까지 되었는데 이런 와중에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서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이루는 야곱의 자손들이 먹고 살기 힘이 들어지면서 애굽 땅 고센에 들어가고, 애굽에서 바로의 신임을 받아서 승승장구한 요셉이 아버지 이스라엘과 자기 형제들을 맞아 모두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었다는 성경 말씀입니다.
      그래서 고센은 땅의 언덕이 되었다는 지명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과 사건이나 지명 등을 진리의 일관성으로 마지막 때를 맞는 오늘의 기독교에 적용을 하면 이 세상에서 형편없고 부족한 나(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계획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에 따라 자기 백성을 저희 죄들에서 구원하기 위해 친히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서 오셔서 십자가 대속을 하심으로써 죄 사함을 얻게 해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이땅의 교회를 땅의 언덕을 삼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살게 하신 것은, 세상을 예표하는 애굽의 고센이 왜 땅의 언덕인 것인지 고센을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경적 및 기독교 진리와 복음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지체로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강해가 중요한 것은 성경의 주제인 구원에서 구원은 협의의 구원과 광의의 구원으로 크게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전하는 진리와 복음에서 협의적 구원의 핵심이 죄 사함이라면 광의의 구원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금의 시간과 공간에서 구원을 해서 영원으로 들어가는 구원하는 구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적 및 기독교 진리와 복음으로의 구원은 지금의 시간과 공간에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구원을 해서 하나님의 재창조로 시간과 공간이 없는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재창조되는 다시는 죽음이 없는 생명의 부활로 신천신지에서 이루어지는 예수가 친히 그리스도가 되는 왕국입니다. 마지막 심판은 영원한 그리스도의 왕국과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지는 분리가 예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오늘 고센 2 강해는 대단히 중요한데 문제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많은 내용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겨우 A4 용지 몇 장으로 이런 내용을 설명을 하려고 하니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예표적으로)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야곱 등으로 이어지면서 신천신지(새 하늘과 새 땅)의 예표인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있었던 일이 야곱의 얍복강 사건입니다. 야곱의 얍복강 사건은 간교한 외삼촌 라반에게 야곱이 많은 일을 당한 후 다시 고향 땅 가나안으로 되돌아오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얍복강에서 야곱이 날이 새도록 어떤 사람과 씨름을 하며 겨룹니다. 그리고 환도 뼈가 위골이 되는 불구의 몸으로 그 사람을 이기는데 하나님은 이때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인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리고 야곱 즉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야곱의 열두 자녀들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열두지파가 되는 야곱의 자녀들이 이스라엘(야곱)의 막내인 요셉을 미워해서 광야에 데리고 가서 죽이려고 구덩이에 빠뜨려놓고 왔는데 이곳을 지나가던 대상이 요셉을 구해서 애굽 사람에게 노예로 팝니다. 그리고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하나님이 꿈 해몽을 잘 하도록 지혜를 주셔서 애굽 왕 바로가 꾼 꿈 해몽을 잘해 애굽 왕 바로의 신임을 받고 승승장구를 하면서 애굽의 총리가 되고 가나안 땅에 살던 이스라엘 가족들이 기근이 들어 먹고 살기 힘들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백성을 예표하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이루는 아스라엘(야곱) 자손들이 애굽의 고센으로 갔는데 형들이 죽이려고 했던 요셉이 애굽에서 바로 왕에게 신임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고센에서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는 기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렇게 있습니다.

      창 45 : 1-11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2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

      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 하더라 하소서

      따라서 이 말씀과 사건을 통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지명 고센을 통해 땅의 언덕이 되는 것에 대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복음교실은 이런 것으로 강해를 합니다.

      성경 기록의 3단계.

      1단계 구약단계 - 구약시대 -  예표(그림자) 단계

      2단계 신약단계 - 성령시대 - 예표와 본체의 혼재 단계

      3단계 영원단계 - 생명의 부활과 신천신지로 이루어지는 예수가 그리스도로 통치하는 왕국 -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완전한 본체로 구원의 완성을 이룸

      예표와 본체를 이렇게 3단계로 나누어 생각하면 기독교시대는 성령시대로 예표와 본체가 혼재한 뒤섞여 있는 단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47장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창 47 : 23-27

      23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날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전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24 추수의 오분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사분은 너희가 취하여 전지의 종자도 삼고 너희의 양식도 삼고 너희 집 사람과 어린아이의 양식도 삼으라

      25 그들이 가로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26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까지 이르니라

      27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하며 거기서 산업을 얻고 생육하며 번성하였더라

      성경지명으로 나오는 세 곳 고센은 하나님이 택하신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열두지파와 신약시대 예수님 열두제자로 이어지는 기독교에 대한 예표로서 예수님과 동일한 성령이 오셔서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시대지만 3차원 물질로 된 육을 가진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진 상태로는 구원의 완성은 이루어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마지막 심판이 있은 후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하나님의 재창조에 의한 생명의 부활과 신천신지(새 하늘과 새 땅)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 왕국과 둘째 사망으로 표현되는 무저갱과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지는 심판이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기독교에 기복신앙, 율법신앙, 신비주의신앙이 만연해 있는 것은 창세기 47장에서 예표로 알려주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2. 하나님 언약의 결국 신천신지에서 완성이 되는 구원.

      계 21 : 1-4 ; 12-14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14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3. 애굽의 고센은 하나님의 재앙이 임했을 때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지 않고 간과된 성읍.

      출 8 : 20-32

      2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직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로 나오리니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21 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과 네 집들에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의 거하는 땅에도 그러하리라

      22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23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두리니 내일 이 표징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24 여호와께서 그와 같이 하시니 무수한 파리 떼가 바로의 궁에와 그 신하의 집에와 애굽 전국에 이르니 파리 떼로 인하여 땅이 해를 받더라

      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26 모세가 가로되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의 미워하는 바이온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희생을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27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28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모세가 가로되 내가 왕을 떠나가서 여호와께 기도하리니 내일이면 파리 떼가 바로와 바로의 신하와 바로의 백성을 떠나려니와 바로는 이 백성을 보내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일에 다시 거짓을 행치 마소서 하고

      30 모세가 바로를 떠나 나와서 여호와께 기도하니

      31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사 파리를 바로와 그 신하와 그 백성에게 몰수히 떠나게 하시니라

      32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마음을 완강케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세상을 예표하는 애굽의 고센을 오늘의 기독교에 이 말씀을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간과는 히브리어에서는 ‘파스카(Pascha)’이고 헬라어로 원형이 ‘파레시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을 시키실 때 하나님의 사자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죽지 않는다고 해서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파스카 즉 간과되어 지나감으로서 하나님이 내릴 재앙을 받지 않고,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애굽 사람은 그들의 맏아들을 모두 하나님이 죽여 버립니다. 맏아들은 대표성 원리로 세상에 속한 사람들(백성들, 자손들)입니다.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서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지 않게 한 ‘파스카’는 우리말 ‘간과’로 번역된 것인데, 히브리어 파스카가 헬라어 ‘파레시스’로 번역이 된 것은 ‘페레시스’는 ‘옆에서’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파라’와 ‘보내다’라는 뜻을 가진 ‘헤미’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우리말 간과로 번역된 페레시스는 ‘옆으로 보냄’라는 뜻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에 대해 이렇게 증거합니다.

      롬 3 : 19-28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4. 성경적으로 하나님의 간과(파스카=페레시스)하심이 연결되는 하나님이 죄를 기록하는 곳 두 군데.

      성경전체의 주제는 구원이고 구원의 결국인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이 지금의 시간과 공간에 가두어져 창조된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구원을 해서 영원한 생명의 부활과 신천신지로 재창조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로 통치하는 영원한 그리스도 왕국이 구원의 완성인 구원의 결국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핵심에 죄 사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어디에 기록해 놓는가에 대해 이렇게 성경에서 알려줍니다.

      레 17 : 1, 11

      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

      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의 예표가 되는 유다의 죄를 절대로 잊을 수 없도록 금강철필로 새겨서 두 군데에 새겨놓는데 마음 판과 단 뿔에 두 군데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첫째, 예표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가 죄를 지었을 때 단 뿔에 기록해 놓은 것은 죄와 죄 사함의 방법을 율법으로 정해서 짐승을 대속 제물로 죽여서 그 피를 발라서 안 보이게 함으로써 죄를 간과하심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한 것이고,

      둘째, 본체적으로는 마음 판에 새겨놓은 죄들은 본체이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피로 죄를 덮으셔서 하나님이 그 죄를 없다고 간과하심으로써 죄 사함을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띠라서 이런 하나님을 예표적이 아닌 본체적으로, 모든 죄가 사해지는 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을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서 예수님은 새 언약으로 하신 언약이 신약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으면 하나님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을 따른 의롭다 칭하시는 칭의인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이 기쁜 소식이 복음인 것입니다. 온전히 율법을 지키고 행해서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칭함을 받을 육체는 없기 때문입니다.





      1월 15일(수) 창세기 41-4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이 그 하실 일(41:25)

      요셉바로에게 고하되 바로은 하나이라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Then Joseph said to Pharaoh, "The dreams of Pharaoh are one and the same. God has revealed to Pharaoh what he is about to do.


      요셉이 바로에게 고하되

      -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감히 대국의 왕인 바로와 이런 방식으로 대면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만 의지한 요셉은 신적 권위로서 바로와 대면하고 있다.
      즉 요셉은 종의 신분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스승의 자격으로 제국의 왕 바로를 대면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보이심이니이다
      - 요셉은 먼저 바로의 두 가지 꿈이 같은 의미임을 밝혔다.
      또한 이 꿈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시되 그 사실성을 확신시킬 목적으로 반복해 주셨다는 증언을 첨가하였다.

      바로의 꿈은 하나이라
      - 비록 꿈을 두 번 겹쳐 꾸었기는 하나 그것들은 모두 동일한 사실을 강조하여 나타내고 있는 것이란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 일하심으로써 그의 하나님되심을 보이시기를 기뻐하시며,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일하시는 것은 항상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 이전에도 있고 그 아래에도 있고 그 안에도 있다는 진리는 나를 참으로 큰 기쁨에 사로잡히게 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고 하면, 자칫 우리를 높이고 하나님을 비하하는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것이 마치 고용인이 고용주를 위해 일하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 (이사야 64:4)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신다는 표현에 담긴 의미를 적절하게 이해하면 이렇습니다. 이는 내가 파산선고를 받아 긴급구제가 필요한 상황과 같습니다. 내가 위험에 처하여 보호해 줄 분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내가 어리석기에 지혜로운 분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길을 잃었기에 구조해 줄 분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즉,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신다"는 말은 내가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로 인해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나에게는 아무 영광이 없습니다. 베푸는 이께서 영광을 얻습니다. 능력있는 이께서 찬양을 얻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표현한 성경구절들을 기념하면서, 아래에 요약한 목록을 읽고, 각자 저마다의 짐으로부터 자유케 되기를 바랍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시편 55:22). 하나님이 그 일을 하게 하십시오.

      1.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이사야 64:4)

      2.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사도행전 17:25)

      3.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10:45)

      4.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역대하 16:9)

      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편 50:15)

      6.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이사야 46:4)

      7.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10)

      8.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시편 127:1)

      9.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베드로전서 4:11)

      10.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12–13)

      11.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린도전서 3:6-7)

      하나님이 하시는 일(요한복음 9:1-7)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숱한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간단한 문제를 만나서 가볍게 해결하게 될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도무지 이해하기도 힘든 문제에 직면해서 고민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 마음속에 하나의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주어지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도무지 풀 길 없는 문제에 직면해서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내가 이 다음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긴히 여쭈어 볼 말씀이 너무나 많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우리들은 숱한 문제들을 안고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얼마 전에 흉악한 택시 강도에게 화를 당한 어떤 여인의 어머니가 "왜 하필 내 자식인가, 세상에는 악한 사람도 많고 죄인도 많은데, 그렇게 착하던 내 딸이 왜 그들의 손에 무참하게 죽어야 했는지 나는 모르겠다"하고는 탄식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 이유를 모릅니다.
      흉악한 사람의 손에 목적 없이 죽어야 한다면 이 땅에 값없이 죽을 사람도 많고 죄인도 많은데 왜 죄없는 어린 아리들이 죽어야 하고, 죄 없는 선한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이유가 있고 혹시 거기에 하나님의 어떤 섭리가 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첫 번째는 이 사람이 왜 소경으로 태어났느냐?

      이 사람이 병을 앓다가 시력을 잃었다면 이해가 가겠는데, 또 사고로 눈을 다쳐서 소경이 되었다면 납득이 가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아예 태어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났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이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

      히브리인들은 어떤 사건을 보며 그 원인을 꼭 묻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은, 어떤 불행을 당하게 되면 그것이 누군가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것은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들도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다가 일이 잘 안 되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 그리고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졌길래" 그러면서 한탄을 합니다.
      모르긴 해도 여러분들도 이렇게 생각해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 응보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불교를 믿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불교 문화권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들 역시 자연스럽게 이런 발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되는 수도 없지 않아 있기는 합니다.
      아이에게 어떤 불행이 닥치고, 불치의 병을 얻게 되는 것이 부모의 죄 때문인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자신의 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문란하게 외도를 하고, 방탕 생활을 하다가 병을 얻어서 마침내 시력을 상실하고 눈이 멀었다고 하면 그것은 물론 자신의 죄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생활이 문란하고 무질서하고, 외도를 해서 성병을 얻은 부모가 아이를 낳았을 때 어떤 아이는 기형아로 태어날 수도 있고, 또 어떤 아이는 시력을 잃은 채 소경으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부모의 죄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모가 임신중인데도 술을 과음하거나, 담배를 많이 피우고, 마약을 복용하고 그러면 그 아이가 온전하게 태어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불구아가 태어났다고 하면 그것도 분명 부모의 죄 때문입니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은 하나님의 징계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부모의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께 그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제자들의 물음에 예수님은 제3의 원인을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것은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의 죄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어서 그가 소경된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적어도 이 사건 속에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어떤 섭리가 들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를테면 이 사건에는 세상적인 어떤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좀더 높은 차원의 섭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일하십니다.
      그 방법은 사람들이 하는 방법과 다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이사야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은 너희 과 달라서.
      하늘이 보다 높음 같이 내 은 너희 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For my thoughts are not your thoughts, neither are your ways my ways," declares the LORD.
      "As the heavens are higher than the earth, so are my ways higher than your ways and my thoughts than your thoughts.

      성경적 사고는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을 생각할 줄 아는 것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

      - 하나님의 생각
      - 하나님의 길(방법)


      첫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그 뜻이 미래적이라는 것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의 특징

      첫째, 미래적 - 목적, 결과
      둘째, 소망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원인이나 목적이나 결과가 모두 미래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소망적입니다.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모든 일의 원인을 과거에 둡니다.

      예를 들면 내가 병들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병 문안하러 와서 그 병의 원인을 한결같이 과거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왜 병들었느냐, 어쩌다가 그랬느냐"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대답하기를 "내가 죄가 많아서" 그렇게 대답합니다.
      지금 이 사람도 병든 원인을 과거에 두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질문했던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은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고, 자신의 죄 때문도 아니고,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은 미래에 어떤 뜻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마 이 소경이 살면서 한을 많이 품고 살았을 것입니다.
      "나는 왜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었을까?"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한 사람일까?"
      이 사람이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을 하고 살았을테니 얼마나 불행한 세월을 살았습니까?

      그런데 오늘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에게 미래를 위한 어떤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게 어떤 특별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 자신에게서 풀리지 않던 문제를 풀었으니 얼마나 기쁘고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지금까지 자기 자신의 문제가 풀리지 않아서 고민을 하면서 살아왔는데 오늘 비로소 그 해답을 깨닫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난 후에 이 소경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신앙인은 모든 문제를 미래에 두고 해석해야 합니다.
      모든 문제를 미래에 두고 해석을 하면 모두가 소망적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그 결과가 이렇게 소망적이고 미래적입니다.

      가끔 약혼 주례를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 약혼식은 결혼식과는 그 뜻이 조금 다릅니다.
      약혼식을 집례하다 보면 결혼식보다 더 소망적이다 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약혼하는 두 사람은 결혼해서 살면 분명히 싸우게 될 것입니다.
      또 다투게도 될 것이고, 미워하기도 할 것이고, 때로는 결혼한 것을 후회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함께 몇 년을 살면 덤덤해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약혼할 때 보면 그런 것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에게 있어서 미래에 대한 소망이 현재보다도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신 좋아합니다.
      예물을 서로 교환할 때 보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부끄러워할 줄도 모릅니다.
      계속 싱글 벙글합니다.
      땀흘리고 당황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이 젊은이들이 그렇게 기뻐하는 것은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이 미래가 있어야 합니다.
      삶은 오늘에 초점을 맞추어 놓고 살고, 뜻은 언제나 미래에 초점을 맞추어 놓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미래적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 나온 소경을 통해서 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목적이 모두 선하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두 번째 특징입니다.
      여기 이 소경의 일생을 보면 잠시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그런 후에 엄청난 결과를 보게 됩니다.
      그 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예수가 메시아인 것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이렇게 소망적으로 발전하고, 결과가 유익함으로 주어집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젊은 나이에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들이 슬퍼하고, 동네 사람들이 애도하고, 예수님도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런데 일은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나중에는 나사로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 나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11을 보면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특징입니다.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도 손해를 보지 않고 나사로도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결국 그 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다른 차원의 생각과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을 통해서도 이렇게 일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죽을 병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그 본인에게 있어서는 분명히 큰 시련이고 불행한 일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래서 본인은 물론 온 가족이 함께 심각한 기도를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가서 기적같이 병이 나았습니다. 정말 깊은 기도를 하는 중에 하나님의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병이 감쪽 같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건강해졌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은 그때부터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소위 간증입니다. 이 간증이 잘만 되면 아주 좋은 전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돌아다니며 하나님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는 일은 그 결과가 모두 유익한 것입니다.
      내가 지금 가난한 것도 거기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부한 것도 거기에 하나님의 어떤 계획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약한 것도 거기에 그럴 만한 이유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그 일 후에는 반드시 유익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이 같은 이유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그 어떤 처지에 처해도 삶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경에게서 이것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대부분 이런 과정을 거쳐서 옵니다. 또 하나님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나 세상을 전체에서 한 부분을 보려고 하지 말고 한 부분으로 전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주 무익한 사람 같아 보이는 사람이 세상을 오래 사는 경우를 보게 될 때입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오래 살아 있을 이유가 없는 사람 같은데도 오래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모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심각한 병 중에 있어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아직도 내게 할 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필요로 하시기 때문에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어떤 분이 임종할 때가 되었는데도 숨을 거두지 못하고 죽지를 않습니다.
      그러다가 멀리 떨어져 살고 있던 아들이 오면 그때서야 아들의 손을 잡고 한마디 하고는 편안히 눈을 감습니다.
      그분은 그 한마디를 못했기 때문에 눈을 감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은 이렇게 해야 할 일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모습을 모두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보고, 해석하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나의 인생이 소중하고 값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소경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눈도 멀고, 거기다 거지이고, 보잘것없은 그의 인생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지만,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비한 인생입니까?
      이것이 바로 나의 이야기고, 나의 인생입니다.
      이렇게 나에게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섭리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소경을 통해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보고 값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도 이 같은 하나님의 신비한 은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1월 14일(화) 창세기 37-4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형통한 자(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The LORD was with Joseph and he prospered, and he lived in the house of his Egyptian master.


      형통한 자(6743.  376)

      찰라흐(tsâlachצָלַח 스트롱번호 6743

      1. 돌진하다.  2. 침범하다. 3. 잘되어가다
      발음 [ tsâlach ]
      구약 성경  / 65회 사용
      • 1. 원형 돌진하다, 통하여 가다, 삼하19:18(17)
      • 2. 원형 침범하다, [עַל을 수반하여] 여호와의 영이 사람에게 내리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삿14:19, 15:14, 삼상10:10, 11:6,[אֶל을 수반하여] 삼상16:13, 18:10,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게 스스로 나타나심에 사용되어, 암5:6.
      • 3. 원형 잘되어가다, 번영하다, 성공하다, 시45:5(4), 사53:10, 렘22:30, 식물이 번성하다, 겔17:9,10, [לְ을 수반하여]~에 적당한, 알맞는, 렘13:7,10.
        • a. 원형 히필형
        • b. 원형 번영하다, 성공하게 하다. ㉠ [~의 일에] 창24:21,56, 39:3,23. ㉡ [인칭대명사의 목적격을 수반하여]대하26:5, [לְ를 수반하여] 느1:11,2:20
        • c. 원형 잘 성취하다, 끝내다, 신28:29, 삿18:5,왕상22:12, 대하7:11, 시37:7, 잠28:13, 렘2:37, 단8:12.

      미완료형 יִצְלַח

      • 관련 성경  /  ☞임하다(삿14:19, 15:14, 삼상10:6), 건너다(삼하19:17), 건너가다(삼하19:18), 형통하다(대하20:20, 렘12:1, 겔17:15, 대하20:20), 감동되다(삿14:6, 삼상11:6, 16:13), 힘있다(삼상18:10), 성취하다(사53:10), 쓸데없다(렘13:10), 번성하다(겔17:9,10), 평탄하다(창24:21,40), 행하다(단11:36), 윤택하다(렘5:28), 승리하다(렘32:5), [명] 소용(겔15:4).


      אִישׁ 스트롱번호 376

      1. 사람.   2. 남자. 3. 남편
      발음 [ ’Îysh ]
      어원  / 60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179회 사용

      관련 성경 /  ☞ 남자(창2:23, 신22:22, 렘44:7), 사람(창4: 23, 삼상20:15, 겔9:2), 남편(창3:6, 신25:11, 삼상25:19), 농사(창9:20), 임자(창38:25, 출 22:14), 청지기(창43:19), 각 사람(창49:28), 양쪽(출18:16), 백성(출33:10, 삼하16:15), 아무(출34:3, 레21:9, 시49:7), 쌍방(신1:16), 노인(신32:25, 삼하19:17), 명(수7:3, 삿1:4), 하나(삼하16:5, 왕상18:40), 인생(욥12:10, 시4: 2, 렘52:7), 시체(왕하13:21). [부] 서로(창11: 3), 피차(창31:49), 아무든지(출16:19), 무릇 (출30:33, 레21:17), 균등하게(레7:10), 누구든지(레13:40, 17:3, 신22:13).


      אִשָה 스트롱번호 802

      1. 연계형 נְשֵׁי
      2. 여자
      3. 여성
      발음 [ ’ishshâh
      구약 성경  /  782회 사용
      관련 성경  /  ☞ 여자(창2:22, 출21:28, 느8:2), 아내(창2:24, 20:7, 스2:61), 여인(창12:14, 출21:22, 욥14:1), 첩(창16:3, 삿19:1), 부인(창24:36), 시집(민 36:8), 기생(수2:1, 6:22), 과부(삼하14:5), 계집(잠2:16), 어머니(왕하8:5, 사45:10).

      אָנַשׁ 스트롱번호 605

      1. 병든.  2. 렘 15:18. 3. 사 17:11.
      발음 [ ’ânash ]
      구약 성경  / 782회 사용
      • 1. 원형 병든
        • a. 원형 [거의 치료불가능한 병이나 상처에 대해 쓰임], 렘15:18, 미1:9, 욥34:6.
        • b. 원형 [고통에 대해 쓰임], 사17:11.
        • c. 원형 [재난을 당한 경우에 쓰임], 렘17:16.
        • d. 원형 [악한 마음에 대해 쓰임], 렘17:9.
        • e. 원형 니팔형: 몸이 매우 약하다, 삼하12:15.
      • 관련 성경  / 
        ☞상처를 입다(욥34:6), 낫지 아니하다(렘 15:18), 부패하다(렘17:9), 고칠 수 없다(렘 30:12, 미1:9), 앓다(삼하12:15). [명] 재앙(렘 17:16).



      형통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찰레아흐’입니다.

      형통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찰레아흐’입니다.
      이 말은 ‘번성한’(prosperous)이란 뜻입니다.
      영어성경에는 ‘번성한’ 또는 ‘성공적’(successful)이란 말로 번역돼 있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삶을 형통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써 형통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성실하여 그의 형통함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보게 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또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인정하면서 살았습니다. 

      로리 베스 존스는 ‘주식회사 예수’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성공에 대한 정의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형통의 뜻이 성공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형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 

      ‘형통한다’는 국어사전적 의미는 ‘온갖 일이 뜻과 같이 잘되고 번영함’을 가리킵니다. ‘목적한 바를 이룬다’는 ‘성공’의 의미가 강합니다. 예를 들어 ‘뼈대있는 가문’ ‘인품이 있고 덕망 있는 자’ ‘적당히 베풀 줄도 알고 돈과 명예를 소유한 자’를 세상 사람들은 형통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경적 형통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 그 자체가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형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축복의 땅으로 믿음의 전진을 할 때 형통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원해내시고 광야의 유랑생활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 즉,형통의 복을 허락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 여호와께서 주신 땅으로 가야 형통합니다. ‘마이 웨이’가 아닙니다 

      . 하나님께서 정한 길,하나님을 위한 길을 믿음으로 전진할 때 형통하게 됩니다. 둘째,머무르거나 후퇴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전진할 때 형통합니다.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라” “내가 주는 땅으로 가라”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주리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행동강령을 수반합니다. 

      ‘건너라,가라,밟으라’는 신앙생활의 3대 명령은 광야에 머물러 있지도 말고,애굽으로 되돌아갈 생각도 말고,오직 하나님이 예비하고 준비하신 땅으로 전진할 때 형통한다는 뜻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형통한다는 뜻은 무슨 의미일까요? 목적 없이 되는 대로 가도 형통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오직 여호와께서 주신 땅으로만 걸어가야 함을 말합니다.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요 14:6)만 따라가야 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전진해야만 형통할 수 있습니다. 오른편의 물질을 볼 것 없고 왼편의 명예도 볼 것 없습니다. 오직 치우치지 말고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향해 믿음으로 전진하면 누구든지 형통할 수 있습니다.


      주어진 환경이 어떠하든지 그 자리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 가운데 믿음의 역사가 주어집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형통은 성공입니다. 소위 잘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다릅니다.

      요셉을 보면 ‘형통’이란 단어의 성경적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꿈을 가지고 살다가 그 꿈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타국에 종으로 팔려갑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애굽으로 팔려가 종살이를 하고 있는 요셉을 두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니 형통하다’고 합니다.

      또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순결을 지키려다가 자신의 주인이자 애굽 왕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부인에게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도 성경은 ‘하나님이 감옥에 있는 요셉과 함께하시니 요셉이 형통하다’고 합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바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환경과는 상관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셨던 전체적인 그림 안에서 보면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고 감옥에 갔기 때문에 훗날 애굽의 국무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시련들이 없었다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순간, 요셉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상황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전체적인 그림 안에 있지만 세부적인 순간순간들이 너무나 힘들고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속에 여전히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그것이 형통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삶을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생은 좋지 않지만 하나님은 좋으시다.” 요셉의 인생이 어땠습니까? 이렇게 억울하고 아픈 일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의 인생은 결코 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세부적인 상황 속에 여전히 함께하시며 그 순간순간들을 모아 큰 그림을 그려나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가 처한 환경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상황을 본 것이 아니라 위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 다음 요셉의 할 일은 그 자리에서 충성되게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충성되게 일했고, 감옥에 있을 때에도 그 자리에서 충성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주어진 자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자리가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자리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환경을 바라보거나, 우리 자신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자꾸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고, 주변을 바라보며‘이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살필 때 그 자리에서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 믿음의 역사가 회복되기를, 더 영광스럽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 이후 애굽에서의 요셉의 성공은 족장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15:13-16;  26:4; 28:14)이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성취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언약의 신을 강조하는 여호와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Quarry).

      형통한 자(*, 이쉬마츠리아흐)
      - '사람'을 뜻하는 '이쉬'와 '번성하다'란 뜻을 지닌 동사 '찰레아흐'의 사역형 분사가 합쳐져 '번영의 사람'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요셉이 하는 일마다 눈에 띄도록 현저하게 나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그 주위 사람들에게 분명히 요셉과 함께 하는 어떤 신적 축복과 가호가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감지케 했다.

      요셉이 형통했다는 의미는?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3)

      보디발(비신자)이 여호와께서 요셉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다고 했는데 문득 그 형통은 무엇일까 궁금해졌습니다.
      매순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그 자체가 형통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신자)와 달리 비신자는 매사에 내가 잘 되는 것 즉, 출세하고 성공해 부자가 되는 것이 형통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보디발이 여호와가 요셉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다면 비신자가 생각하는 그런 형통하는 모습이 요셉에게 보였다는 것일 텐데 과연 그런 뜻일까요?

      또 만약 요셉의 형통이 그런 것이라면 현재의 믿음의 자녀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텐데,  제 짧은 생각으로도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요셉에게만 주신 특별한 형통인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에게 현재에도 그런 형통을 주시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말하자면 저도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고 있다고 믿기에 스스로는 제가 형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제 주위사람은 저를 형통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질문의 내용에 대해서 좀 더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비신자가 신자의 어떤 모습, 또는 신자가 행해서 나타나는 어떤 결과를 보고 하나님께서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고 말할 수 있는가가 정확히 정리되지 않아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삶이 예배가 되게 또 삶으로 주의 증거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정작 주의 증거가 되는 일들이 저에게는 아주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나는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창세기 39:2-6)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세기 39:21-23)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하게 했다는 성경기록 둘을 인용했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성경의 모든 사건과 진술은 반드시 관련 문맥 안에서 뜻을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두 기사 안에 형통의 구체적인 의미가 사실상 부연 설명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상기 두 기사를 자세히 묵상해보면 성경이 말하는 형통이 어떤 것인지 추정해 낼 수 있습니다.  

      불법 동남아 노동자보다 못한 요셉

      두 기록에 사용된 ‘형통’의 히브리어 ‘짜라흐’는 ‘돌발하다’, ‘(세차게)오다’, ‘건너가다’, ‘좋다’, ‘적당하다’, ‘유익하다’, ‘번영하다’ 등의 뜻을 가졌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인 용례는 ‘번영하다’입니다. 본문에서도 3절과 23절에선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케”(prosper) 하셨다는 사역동사 용법으로, 또 2절 “형통한(prosperous) 자”에선 형용사 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럼 그 번영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현실적으로 세상에서 출세하여 재물, 권력, 명예를 남들보다 더 많이 가졌다는 것입니까? 본문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와 정반대입니다. 첫 번 형통은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의 신분이었고, 두 번째 형통은 감옥에 갇힌 죄수 신분이었습니다. 그것도 애굽인도 아닌 이방인으로서 말입니다.  

      쉽게 비유하면 한국에 돈 벌러 온 불벌체류 동남아 노동자보다 더 못한 신분입니다. 그들은  비록 불법체류 신분이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족쇄가 되지만 일상적으로는 자기 뜻대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또 언제든 한국생활이 싫어지면 고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며, 만약 단속에 걸리더라도 국외추방의 벌만 받으면 됩니다.

      반면에 요셉은 노예이자 죄수이기에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재량권을 행사할 자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고대사회에선 언제든 주인이나 왕의 말 한마디로 목숨이 날아갈 수 있습니다. 부모 형제가 있는 가나안으로 자의로 돌아갈 수는 절대 없습니다. 설령 탈출에 성공한다 해도 애굽에선 외국인 청년인지라 금방 들켜 잡혀서 처형당할 것입니다.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더러 어느 누구도 형통했다고 평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가 오히려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성경은 그보다 훨씬 못한 처지에 있는 요셉을 형통하다고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형통케 했다고 선언합니다.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될 큰 꿈(vision)을 품고서 고난을 감수하고 있기 때문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요셉을 믿음으로 큰 꿈을 실현한 자로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성경해석입니다. 이에 대해선 [잘못 가르쳐진 성경] 사이트의 #3 “요셉은 꿈꾸는 자가 아니었다.”의 글도 참조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 저자가 인간의 상황을 기록했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생각이 담겨있습니다. 세상에선, 심지어 21세기 현대교회 내에서조차 요셉의 처지를 형통했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여길 텐데도 성경은 두 번이나 그렇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는 분명 형통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당신께서 그를 그런 모습으로(?) 형통케 했다고 확정적으로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신자의 형통과 인간이 이해하는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문맥에서의 의미  

      상기 두 기사에서 요셉이 사람들에게 보여준 가장 큰 특성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이 볼 때에 요셉이 자기들과 가장 다르다고 여겨지는 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두 기사가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초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추정하기 힘들면 두 기록의 결론을 보면 됩니다. 참고로 성경의 진술과 사건의 의미가 애매모호할  때에는 결론이 어떻게 내려지는지 유심히 살피면  바로 그것이 핵심 주제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6절)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23절) 두 사람 다 요셉에게 일상적인 사무를 전부 맡기고 전혀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할 일을 완전히 대신하게 했습니다. 요셉은 주인과 전옥으로부터 무한한 신뢰를 얻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하는 일 마다 다 번창, 형통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은 물론, 경영의 귀재가 아니었기에 하는 일마다 성공했을 리는 없습니다. 물론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5절)고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모습이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요셉이 경영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감옥에선 특별히 번창할 즉, 경영을 해서 이익을 낼 일이 없지 않습니까?

      주인이 전 소유를 맡겨 대신 관리하도록 한 것은 요셉이 그전부터 하던 행사를 죽 지켜보고 나서 결정한 것입니다. 그의 관리 혹은 장사 수완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장점을  보고 가정 총무로 맡겼던 것입니다. 또 그랬더니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아주 잘해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좋게 평가한 그의 특성은 앞뒤 문맥의 흐름 상 아무래도 성실성, 특별히 정직성일 개연성이 가장 높습니다. 주인의 재산 관리나 감옥의 사무 처리를 전적으로 맡길 수 있으려면 이 두 요소가 절대적 전제입니다. 절대로 주인을 속일 사람이 아니며, 게으름부리지도 않는다는 확신이 든 것입니다. 주인이 자기 식료(食料) 외에는 챙기지 않은 것도 자신의 기호, 감정, 기분은 본인만이 알기 때문이지 요셉을  못 믿어서가 아닙니다.

      그런 확신을 가지기까지 틀림없이 그 주인과 전옥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요셉을 시험해 봤을 것이며, 요셉은 어떤 경우도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아내를 범하려 했다는 물증(物證)까지 있음에도 보디발이 그를 죽이지 않고 옥에 가두기만 했던 이유가 강간 미수에 그쳤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요셉을 그간에 아주 좋아했었고 또 그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 때문에 오히려 아내의 말을 완전히 수긍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실성과 정직성의 근원

      요셉이 그 시대에는 도무지 없는, 지금도 눈 닦고 찾아보기 힘든 그런 성실성과 정직성을 가지게 된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그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성실히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인생은 형들의 시기를 불러일으켜 광야 구덩이에 빠졌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정반대로 바뀌었다고 봐야 합니다. 자기 자랑만 하던 철부지에서 하나님만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로 말입니다.  

      당시 상황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살아날 수 없는 광야의 구덩이에 빠졌었습니다. 그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이유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할 재간이 없습니다. 마침 바로 그 때에 미디안 상고가 그 곁을 지나고 있었던 것(창37:25)과 그 일행을 본 형 유다의 마음이 움직인 것(창37:26)이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 마련해 놓은 계획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반면에 요셉 개인적으로는 틀림없이 구덩이에 빠져있던 그 잠시 동안에 평생에 할 수 있는 기도를 다 했을 것입니다. 기도의 시간적 양이 아니라 철저한 회개가 동반되는 간절함을  볼 때 말입니다. 자기가 형들을 무시하고 설쳤던 것이 너무나 큰 잘못이니 한번만 살려달라고, 그럼 정말 주님의 뜻대로만 살겠다고 헌신하며 눈물로 매달렸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비록 노예로 파려가는 모습이었지만 그 기도에 응답하여 살려주었습니다. 아니 반드시 노예로 보디발에게 팔려가야만 하나님의 이미 마련되어 있는 원대한 계획에 쓰임 받는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새롭게 바뀐 인생은 보디발의 집에서부터 믿음의 열매를 활짝 맺었을 것입니다. 엄청난 사건을 겪었고 여전히 노예로서 척박한 여건에 처해 있는데도, 무엇보다 모든 것이 낯선 이방 땅에서 혈혈단신 고아로 살아야 함에도, 그는 틀림없이 전혀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와 기쁨으로 생활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죽었다 살아났는데 더 이상 무엇이 힘들고 두렵겠습니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기에 날마다 순간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 기도, 경배했을 것입니다.  

      보디발이나 주위 애굽 사람들이 그런 그를 신기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들과 분명 뭔가 다르다고 여기면서 호기심을 갖다가, 차츰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기쁨으로 성실하게 일하고 또 절대로 남을 속이지 않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환경 가운데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를 위해 여호와께 기도해주고 성심껏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3절) 성경은 기록한 것입니다. 주인이 그에게서 여호와의 형통함을 보았던 것은 분명히 가정총무를 맡기기(4절) 전이며, 또 주인의 모든 소유에 여호와의 복이 미치기(5절) 전이었습니다. 감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에게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21절)는 3절의 의미를 다르게 표현한 것뿐입니다. 또 그 일도 전옥이 감옥의 사무를 그에게 맡기기(22절) 전이었습니다.

      여호와가 주인의 소유에 복을 내린 형통의 의미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우선 요셉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즉,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가정의 일과 사업을 경영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만약 개인적 욕심을 가지고 주인의 재산을 부정한 방법으로 빼돌리려 들었다면, 속이지는 않아도 주인의 일이니까 게으름 부리며 대충 건성으로 했다면 하나님이 결코 복을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goodwill, 기쁘고 친절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엡6:5-8) 노예 요셉은 그때 이미 신약의 계명대로 살고 있었던 것이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신구약 시대에 동일하신 오직 한 분 하나님인 것입니다.  

      거기다 요셉은 온갖 우상들을 음란하게 숭배하는 당시의 세계 최강국 애굽에서 참 하나님 여호와를 알고 따르는 오직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다른 이들의 눈에는 흠모할 것 하나 없는 연약하고 비천한 모습이었지만, 그 사악한 도성에 비취는 한 줄기 빛이었고 참 생명의 호흡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기도하며 정직하게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총무 일을 하는데 하나님이 번영케 해주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라도 요셉을 형통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그 이방의 땅에서도 상천하지에 범사를 주관하는 오직 한분 하나님만 계심을 스스로 보이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신자는 이미 형통한 자

      그런데 성경은 더욱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순전함과 성실함과 정직함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보이기도 전에 그를 이미 “형통한 자”라고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2절) 보디발의 집에 팔려갈 때에 이미 형통한 자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그렇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를 믿는 모든 신자가 이미 형통한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럼 우리가 과연 형통합니까?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니 도무지 형통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까? 또 하나님은 요셉을 형통케 해주셨는데 그분이 나를 형통케 해주신 적이 거의 없습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형통과 우리가 이해하는 형통을, 특별히 기복신앙을 강조하는 목사님들의 가르침과 혼동해선 안 됩니다.

      신자는 요셉처럼 되었기에 형통한 자가 된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또 그래서 신자의 기도에 응답하여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번영케 해주시니까 형통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옛 자아가 완전히 깨어져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성령의 씻음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거듭난 자에게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 즉, 형통한 자입니다. 단순히 기독교 교리를 객관적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교회 생활에 충성한다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또 그래서 이제는 오직 나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살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만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세상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그분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며 살고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온전한 정직함과 순전함과 성실함을 갖고 세상의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뒤바꾼 자는 비록 그 실천이 더딜지라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직도 연약하여 수시로 실패하더라도, 그럴수록 영적으로 애통해하며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 쪽으로 살아가는 목적과 방식을 완전히 바꾼 자는 이미 형통한 자요,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면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면 요셉 같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정말로 요셉 같은 인생을 산다면, 백 프로 순전하고 정직하게 세상을 대한다면 현실적 번영에 대해서 욕심 아니 관심조차 갖겠습니까? 또 하나님이 그런 자를 보호 인도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인생이 오직 하나님의 의로운 손에 잡혀 있고 그분의 뜻대로 이끌고 있음을 확신한다면 더 이상 세상의 어떤 문제, 고난, 상처, 멸시,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요셉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즉,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신자의 형통은 하나님 당신의 뜻대로 그 인생이 이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쓰임 받는 것 외에 신자의 형통을 찾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자의 소원도, 그 인생의 목적도 전적으로 하나님 뜻대로 따라가게 되는 바로 그것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불신자나, 일부 신자가 자기 뜻대로 인생이 번영하며 잘 풀리는 것을 형통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아예 다르게 말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바울의 이 고백이 단순히 절제하며 검소하게 사는 비결을 배웠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풍족할 때도 있었습니다. 또 기도했더니 무슨 일이든 이뤄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반대로 분명히 배고프고 궁핍할 때도 있었습니다. 자기 믿음과 능력으로 큰 비전을 달성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뜻대로 쓰임 받기를 원하고 어떤 여건에서든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순종했더니 그분이 자기에게 맡기신 일을 그분이 다 이루시더라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세상을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회심 후로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기로 헌신한 즉, 여호와가 함께 하는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처럼 순전함으로 주님 뜻대로만 행했더니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당신의 일을 형통케 했던 신약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남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을 겪었고(고후11:23-27), 마지막을 로마 감옥에서 비참하게 지내다 처형당했습니다. 신자가 가장 형통한 대표적 예입니다.  

      신자의 형통에 진짜 중요한 모습

      요셉의 형통하는 모습에서 진짜로 중요한 사항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살펴본 대로 요셉 개인적으로 번영해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주인과 전옥의 신임을 얻었다 하더라도 개인 재물, 권력, 명예가 늘어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형통케 하셨는데도 그는 여전히 노예와 죄수의 신분이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은 훨씬 다른 의미입니다. 서두에 인용한 그 글을 잘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 대신에 주인과 전옥이 형통했습니다. 주인의 소유가 늘어났을 것입니다. 최대한 양보해도 그전처럼 가정 총무에게 속아서 뒤로 빠져나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전보다 훨씬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에게 모든 사무를 맡겨 놓은 전옥도 아주 편하게 지내며 남는 시간을 개인적으로 활용했을 것입니다. 정작 바쁘고 힘들게 고생했던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미 형통한 자”가 되어 있는 요셉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1-3)

      믿음의 조상이자 요셉의 증조부인 아브라함이 또 다른 형통한 자의 예입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케 된 것 즉, 현실적 번영 때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그 이름만 창대케 되어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 뿐이지, 죽을 때에 자식은 하나였고 얻은 땅도 무덤뿐이었습니다. 그의 형통의 실체는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요셉처럼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이 복을 받은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되는 것이 그의 후손으로 부름 받은 모든 신자의 인생에 하나님이 주신 목적이자 소명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들은 다 복을 받았습니다. 당시 가나안과 애굽 땅에서 전혀 생소한 인물이었던 그의 어떤 점을 보고 축복했겠습니까? 바로 요셉처럼 그가 의롭고 신실하고 정직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아무 존경할 만한 요소가 없는데도 외국인을 축복할 리는 없습니다. 또 그의 흔들림 없고 경건한 신앙 때문 아니겠습니까? 비록 서로 믿고 있는 신의 이름과 그 믿음의 내용은 달라도 아브라함이 믿는 신과 그의 신앙이 뭔가 권능이 있고 의롭다는 점은 인정했을 것 아닙니까?

      오늘날의 신약 신자의 형통도 그래야 합니다. 요셉과 아브라함처럼 신자로 인해 다른 이에게 하나님의 지복을 나눠주는 통로가 되는 것, 자기는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더라도 불쌍하고 미혹된 이웃이 살아나는 그것이 바로 형통입니다. 또 그러려면 그 전에 실제 삶에서 정말로 성실하고 정직하고 순전하게 살아야 합니다. 다른 이에게서 언제든 무엇이든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어져야 하고, 또 어떤 기막힌 고난도 털어놓고 상의할 수 있을 정도로 신뢰 받아야 합니다. 고충 토로나 현실적 충고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기도를 받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도록 이웃들 앞에 신자는 신령하고 경건해져야 합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4-16)

      성경이 말하는 신자의 형통은 그래서 바울의 바로 이 고백과 같은 모습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는” 것 이상의 신자의 형통이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가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서 드러나게 하는 것이 신자의 형통입니다. 신자는 자신은 궁핍에 처하든 부요에 처하든 아무 관계없이 말입니다. 또 그래서 남들로 어떤 멸시, 비방, 반발, 핍박을 받더라도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서 주님의 긍휼을 간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위 사람이 상식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심정적으로 바라는 대로 현실이 술술 풀려져나가는 것이 결코 신자의 형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기대하고 인도하는 그대로 살고 있는 것만이 신자의 형통입니다.

      성서에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형태의 생애와 삶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될 사람으로 살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을 대립하거나 대적하는 모습으로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징벌의 대상으로 살았고 많은 사람에게 피해와 고통을 안겨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 가룟 사람 유다에게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고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무의미한 삶을 살아간 사람도 있습니다. 뚜렷한 삶의 목적이나 특성 없이 주어진 일상성의 그대로의 삶을 산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거나 피해를 주지도 않고, 도움을 받거나 도움을 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안에서 안주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는 없어서는 안될 사람으로 누구에게나 소중한 자로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을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대상으로 산 사람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러한 삶의 선두자로 사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예수님을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가리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마17:5)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서 400년간 생활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보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애굽에 살게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주도하여 이끌어간 야곱의 아들 요셉입니다. 우리는 이 요셉의 생애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창세기 39장 23절의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39장 2절에서는 요셉을 '형통한 자'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형통한 사람이었으며, 범사를 형통케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형통한 삶이란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았다는 표현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꼭 귀중하고 필요한, 없어서는 안될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형통한 자의 삶은 아브라함과 같이 모든 사람에게 축복의 근원자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범사를 형통케 하는 자는 그가 있는 곳에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일들이 나타나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변화의 역사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형통은 어떤 투기나 우연한 사건으로 횡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형통은 어떤 고난이나 역경이 없는 좋은 환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난과 역경 중에도 그 사건에서 나타나는 가치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삶이었습니다. 요셉의 생애 중에 그 어렵고 힘든 과정이 모두에게 귀하고 유익하게 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형통한 삶이었습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39:5)
      그런데 성서본문은 요셉의 형통한 삶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39:2)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39:23)
      그렇다면 하나님게서 요셉을 형통케 하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성실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에 대하여 하나님을 향한 요셉의 믿음은 성실하였습니다. 그는 매사에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생활은 어떤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 성실함이 생활의 성실함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 진실함이 생활의 성실함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요셉의 행복했던 환경은 불행한 환경으로 바뀌었습니다. 야곱의 12 아들 중 가장 큰사랑을 받았던 아들에서 노예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형들의 시기와 미움으로 애굽의 미디안 상인에게 팔려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가정에 노예로 팔려 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불행하고 억울한 환경 중에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성실함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 성실함의 자세는 주어진 불행한 환경을 비관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 고난의 환경을 하나님께서 주신 과정으로 받아드리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성실함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보디발에게 신임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보디발은 그의 모든 소유를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보디발의 가정에 요셉으로 인하여 더 큰복이 성취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요셉에게는 더 큰 시련의 고난이 찾아 왔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반하여 요셉을 성적으로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요셉을 모함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옥에 갇혔습니다. 노예에서 죄수로 전락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곳에서도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성실함에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이러한 믿음의 성실함은 형통케 하는 자의 삶을 이룬 것입니다.

      금발 미녀 제인이 왼쪽 젖가슴을 내 놓은 채 급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경찰관이 호루라기를 불며 달려왔습니다. "아가씨, 당신의 왼 쪽 젖가슴이 노출됐다는 것을 아십니까? 노출 죄로 당신을 체포할 수도 있습니다. "오 마이 갓! 너무 서두르다가 아기를 버스에 내려 놓았어요"
      우리의 현재의 삶은 바쁜 세속의 삶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성실함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차에 내려놓고 부끄러움을 드러내면 사는 불성실한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성실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실함에서 나오는 진실함으로 주어진 자기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투자가 아닙니다. 믿음은 최선을 다하지 않고 얻어지는 도박의 횡재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최선의 모습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축복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노동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성실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성실함이 주어진 환경에 성실함으로 드러나게 하십시오. 그곳에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시는 삶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죄악에 대하여 단호하고 분명한 태도입니다.
      죄악은 하나님과 분리됨에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등진 행동이 죄악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는 더욱 큰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을 따라가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이 죄악입니다.
      요셉의 용모의 준수함과 성실함에 반한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유혹하였습니다. 요셉에게 동침하기를 요구하는 여인에게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치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39:8-9)

      요셉은 죄악에 대한 분명하고 단호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죄악의 유혹에 대하여 주저하거나, 망설이거나, 기웃거림이 없었습니다. 요셉은 계속되는 죄악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옷을 잡아당기며 동침하기를 요구하는 보디발의 아내에게서 자신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죄악의 유혹을 단호히 거부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죄악의 즐거움 보다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요셉에게 보디발의 아내의 요구를 물리친 것이 패배를 안겨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감옥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에게 감옥의 생활로 애굽을 지배하는 총리가 되는 길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죄의 뿌리침은, 결국 더 큰일을 만드시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계획에 참여하도록 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범사를 형통케 하는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심은 죄의 능력에 패하신 것 같지만 하나님은 십자가 다음에 부활의 영광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죄악에 대하여 단호하고 분명한 태도를 가지는 사람이 되십시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이러한 생활이 형통한 삶의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주어진 조건을 하나님의 섭리에 비추어 사는 삶이었습니다.
      인간 삶의 전문가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생애를 다루십니다. 모든 사람의 생애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치 있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애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과정인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그 섭리안에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향한 고백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애굽이 총리가 되어 식량을 얻으러 온 형들과 만났을 때 말했던 것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45:5-8)
      또한,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이 혹시 자신들을 미워하여 과거의 자신들의 죄악에 보복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형제들에게 같은 표현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50:19-20)

      요셉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야곱의 자손들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자손인 언약의 백성과 수많은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요셉이 7년 흉년에 앞서 노예로 팔리는 과정과 죄수가 되는 과정이 필요했던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후손가운데서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가 태어나시게 하기 위해 약속의 백성들을 7년 흉년의 어려움 속에서 보호하셔야 했고, 거기에 요셉을 필요로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불행한 환경 중에도 원망하지 않고 감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러한 사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중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는 사람이 현실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소중한 생애의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비추어 살아가는 사람이 범사를 형통케 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골 가난한 농부의 아들인 한 젊은이가 사진기술을 배우고자 도시의 큰 책방에 우편으로 사진술교본을 주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서점의 착오로 복화술에 관한 책이 배달되었습니다. 가난함으로 반송할 수도 없고 하여 복화술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고 복화술에 대하여 흥미를 갖게되어 복화술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 젊은이는 후에 유명한 복화술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에드가 베른'입니다. 그가 자신이 조각하여 만든 인형으로 복화술을 구사하며 연기할 때,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폭소를 터뜨리며 즐거워하며 삶의 시름을 잊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사건들은 그 어느 하나라도 우연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역사에 의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많은 삶의 사건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에 비추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속에 나의 삶의 의미와 함께 가치와 형통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각자의 생활의 정황은 어떻습니까? 어렵고 힘든 모든 과정을 감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삶의 과정을 어떻게 걸어가고 있습니까? 감사의 사건으로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모두에게 유익함을 전해주는 삶의 역사로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바로 형통케 하시는 역사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에서 비롯됩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의 역사는 믿음의 성실함을 가짐으로서 입니다. 죄악에 대한 단호한 태도의 생활에서입니다. 주어진 조건을 하나님의 섭리에 비추어 보는 지혜로움에서입니다. 바로 여러분 모두가 범사를 형통케 하는 자의 삶으로 승리하십시오. 아멘.


      형통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이 세상에서 형통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았으므로 장차 누려야 할 은혜를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사형통을 강조하는 이유는 사람을 유혹하는 세속적인 미끼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육체가 요구하는 것을 만족시킬만한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만사형통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통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믿음 좋은 사람들의 뜻을 성취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일하시기 때문에 결코 개인의 뜻과 목적이 성취되는 만사형통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기독교 신앙이 세상에서의 형통을 지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고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현대 기독교의 신앙형태는 자본주의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믿음에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고난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랄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대로만 살면 모든 일이 잘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목적이 이끄는 삶’(릭 워렌)이나 ‘긍정의 힘’(오스틴)과 같은 서적들이 교회 안에서 신앙필독서로 변모되어 권장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 과연 신자를 ‘만사형통’으로 이끌어 갈까?
      성경을 아무리 봐도 그러한 형통은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 ‘믿으면 형통한다’는 주장은 비성경적이며 반기독교적인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혹 필자의 이러한 말이 개인의 복을 부정하는 것이어서 반발심이 일어난다면 조용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한다.
      예수님이 과연 현세의 복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그러한 십자가는 존재하지 않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 신자가 아니다.

      형통을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요셉을 예로 들지만 그것이 현대 기독교가 말씀에 관심이 없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왜냐하면 요셉의 형통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39:2을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23절에서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는 말을 한다.

      성경은 분명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이 형통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지만 중요한 것이 여기서 말하는 ‘형통’의 의미는 세상에서의 형통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다는 것 때문에 여호와가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성공한 형통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긴 하였지만 어쨌든 애굽 왕인 바로의 신하다. 그렇다면 누가 더 복을 받았으며 형통한 사람인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정말 세상에서의 형통의 복을 주신 것이라면 이왕이면 국무총리가 아니라 애굽의 왕이 되게 했어야 맞지 않는가?

      이것만이 아니다. 요셉이 형통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의 인생은 그의 뜻대로 된 것이 아니다. 요셉은 하나님에 의해서 꿈을 꾼 것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사서 결국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고, 유다의 개입으로 인해서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으나 미디안 사람 상인에게 팔리는 처지가 되었다. 이것이 요셉의 형통인가?

      또한 요셉이 보디발의 신임을 받아서 그의 가정총무가 되긴 하였지만 이것을 형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종으로 팔린 요셉이 주인의 신임을 받아 가정총무가 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형편에서는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형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쨌든 요셉은 형들로 인해 종의 신분이 되어 타국에서 고생을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통한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다. 그리고 역시 옥에서도 간수장의 신임을 받아 옥중의 죄수를 관리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것 역시 옥에 갇힌 당시 형편에서는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디발의 가정총무로 있던 것에 비하면 형통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이 심하게 꼬인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성경은 이러한 요셉을 두고 형통한 것으로 말한다.  

      이렇게 요셉의 인생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갈수록 꼬여만 갔는데도 불구하고 종이지만 가정총무가 되었고, 옥에 갇혔지만 죄수를 관리하는 직책을 맡아서 편하게 지냈으니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하게 한 것이 아니냐? 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인도하신다고 해도 과연 형통의 복으로 간주하며 기뻐할지 묻고 싶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통하게 하셨다는 의미는 창 45:4-8절의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는 구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셉은 자신의 지금까지의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여 계셨음을 깨닫는다. 꿈을 꾼 것이나 형들에 의해서 상인들에게 팔린 것 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애굽으로 보내시기 위한 조치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야곱과 형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결국 요셉에게 있어서 형통이란 하나님이 인도하신 삶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 자체가 신자에게는 형통이라는 뜻이다.

      제자 베드로는 형통한 삶을 살았지만 가룟 유다는 형통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베드로가 세상에서 안락하게 살았다고 할 수 없지만 형통한 삶을 살았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도하신 삶이라면 그 삶은 분명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향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을 형통으로 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형통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가치없게 보기 때문이다.

      신자는 분명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 삶을 살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어코 자기 백성을 영원한 생명의 자리로 인도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재의 삶이 원하는 것과는 달리 고난과 고통이 계속되는 현실이라고 해도 신자가 믿을 것은 하나님은 그러한 고난과 고통을 동원하여 나를 생명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가 이것이 진정한 현실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을 때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만사형통을 말하는 현대 기독교는 분명 비성경적이며 비신앙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주어진 영원한 생명에 가치를 두지 않고 세상의 형통에 가치를 두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피를 값없게 여기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타인보다 형편이 나아진 것을 가지고 형통이라고도 복받았다고도 말할 수가 없다. 신자의 참된 복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형편이 나아진 것을 형통한 것으로, 복받은 것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는 것 밖에 안된다. 이것은 결국 형편이 나아진 것으로 인해 오히려 저주에 이를 자임이 증거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있고 성경을 외면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피보다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고, 십자가보다는 돈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기 때문에 만사형통이라는 말이나 ‘믿는자에게 불가능은 없다’ ‘하면 된다’는 말이나 ‘믿으면 복받는다’는 말들이 난무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 교회에 필요한 것은 성경의 바른 해석이다. 청중들의 귀를 만족시켜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계시하시는지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가감없이 그대로 전달되어야 한다.



      만사형통(萬事亨通) 소개

      '만사형통(萬事亨通)'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다'라는 의미로, 모든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길 바라는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인생의 여러 길에서 발생하는 도전과 어려움을 극복하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 성어는 희망과 응원의 메시지로 전달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꿈과 목표가 있더라도, 그 길은 항상 순탄치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사형통'의 마음가짐으로 장애물을 극복하고, 성공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만사형통의 의미와 유래, 그리고 이 성어가 사용되는 실제 사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만사형통(萬事亨通)의 뜻과 유래

      ‘만사형통(萬事亨通)’은 고대 중국 문헌에서 유래한 성어로, 직역하면 '만 사물이 형통하다'는 뜻입니다.

      이 성어는 모든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이 말은 인생의 다양한 분야에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기원하거나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보통 사업, 관계, 학업, 가정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거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사업을 시작하면서 모든 계획이 순리에 따라 진행되고 성공하는 상황에서 "만사형통"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개인의 인생에서도 모든 일이 원만하게 풀리는 것을 기원할 때나, 친구나 지인에게 긍정적인 에너지와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할 때 사용되곤 합니다.

      "만사형통"이라는 말은 중국의 고사성어로서 고대로부터 인간의 삶과 세상의 동향에 대한 이해를 깊게 담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활력 넘치는 에너지를 상징하며, 부정적인 장애물이나 어려움 없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각자의 목표와 꿈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그 과정에서 얻는 성공과 만족감을 상징하는 긍정적인 성어로, 현대에 와서도 이를 기원하는 말로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만사형통은 인생의 길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이 어려움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길 바라는 진심어린 기원이자,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과 의지, 그리고 희망을 담은 성어로 여겨져 현대인들에게도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한자풀이

      각 한자의 뜻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萬(만): 만, 많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모든'을 의미합니다.
      • 事(사): 사물, 일을 의미합니다.
      • 亨(형): 원활하다, 순조롭다는 뜻입니다.
      • 通(통): 통하다, 관통하다는 의미로 여기서는 '순조롭게 진행되다'를 의미합니다.

      실생활 예시

      1.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지금은 만사형통이다."
      2. "그는 학업과 운동, 인간관계까지 만사형통으로, 정말 부러워할 만하다."
      3. "결혼 초반엔 많은 충돌이 있었지만, 서로를 이해하게 된 후에는 만사형통이 되었다."
      4. "회사 프로젝트가 처음에는 험난했지만, 팀원들의 노력 덕분에 만사형통으로 마무리되었다."
      5. "처음엔 거침없던 그는 성격 개선 노력 덕분에 사회생활이 만사형통이 되었다."
      6. "어려운 시기를 극복한 후, 그의 삶은 이제 만사형통이다."
      7. "학교 선후배와의 관계가 만사형통인 그는 모두에게 사랑받는다."
      8. "우리 팀은 처음부터 만사형통이었으므로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9. "건강을 회복한 후로는 일도, 가정도 만사형통이다."
      10. "그녀의 디자인 능력 덕분에 회사의 판매는 만사형통이 되었다."
      11. "자신의 노력을 통해 실력을 키운 그는 이제 직장에서 만사형통이다."
      12. "신입사원 시절 힘들었던 그가 이제는 회사에서 만사형통으로 일하고 있다."
      13. "어린 시절 교육의 기회가 없었던 그는 노력으로 학문과 직업에 만사형통하게 되었다."
      14. "가족들의 도움과 응원 덕분에 그의 사업은 만사형통이 되었다."
      15. "그는 인생의 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이제는 만사형통의 삶을 살고 있다."

      마무리

      오늘은 '만사형통(萬事亨通)'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 성어는 '만사' 즉 모든 일이 '형통' 잘 풀리는 것을 의미하며,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무엇이든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상황을 가리키며, 비즈니스나 개인의 삶에서 흔히 사용됩니다.

      이 성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노력과 능력을 믿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며,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게 합니다.

      긍정적인 마인드와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루어진 성공은 '만사형통'의 가장 큰 특징이며, 그로 인해 얻어진 성취감과 만족감은 개인과 팀, 그리고 조직 전체에 큰 자부심을 안겨줍니다.

      이 성어는 긍정의 힘을 강조하며, 힘든 상황에서도 지속적인 노력으로 성공을 이끌어내는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고대의 지혜와 현대의 열정이 만나 탄생한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오늘 배운 '만사형통'을 일상에서 활용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향해야 할 긍정적인 마인드와 지향점을 제시합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성어와 그 뜻을 소개하며 여러분과 함께 배워가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
      단지 그 일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릴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 벤저민 프랭클린 -


      성공은 준비와 기회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제이슨 크리스 -

      이 표현은 《주역(周易)》이라는 고대 중국의 철학서에서 유래합니다. 《주역》은 음양과 오행의 이론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사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 책인데, 그 안에서 "亨通"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주역》의 '형통': 《주역》에서 '亨(형)'은 '흉통'이 아니라 '형통'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잘 풀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불통하지 않고, 길이 열리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형통'은 《주역》의 64괘 중에서 '건(乾)' 괘와 '태(泰)' 괘에서 나오는 중요한 개념으로, 특히 사람이 자수성가하고 모든 일에서 번영을 이루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亨通"이란 말은 '사방이 막히지 않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상태'를 상징하는 개념입니다.


      ◇ 문화적 배경


      "만사형통"은 중국의 명절이나 중요한 행사에서 축복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 특히 새해를 맞이하거나 사람들의 사업이나 개인적인 성공을 기원할 때 자주 사용됩니다. 이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기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새해 인사나 출사(出仕) 또는 승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종종 사용되며, 어려운 일이 많을 때, 모든 것이 잘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쓰입니다.

      3. 만사형통(萬事亨通)의 현대적 해석


      만사형통

      ① 문제 해결과 순탄한 진행


      현대적 해석에서 "만사형통"은 단순히 일이 잘 풀린다는 의미를 넘어, 어려운 문제들이 원활하게 해결된다는 의미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특히,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때 "만사형통"은 문제 해결능력이나 위기 극복을 잘 해내고 결과적으로 순조로운 상황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② 개인적인 성장과 발전


      현대에서는 사람들이 자아실현이나 개인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만사형통"은 개인의 목표 달성과 관련하여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의 승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의 성공, 또는 개인적인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만사형통"은 자신이 설정한 목표가 계획대로 잘 풀린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③ 사회적 관계와 협력


      현대 사회는 사람들이 협력과 소통을 통해 성공을 이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 "만사형통"은 개인 간의 갈등이나 소통의 문제 없이, 협력과 조화를 통해 모든 일이 잘 풀린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팀워크가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서로 잘 협력하고, 원활하게 소통하여 목표를 달성하는 상황에서 "만사형통"이 사용될 수 있습니다.

      ④ 행복과 평화로운 삶


      "만사형통"은 또한 행복과 평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바람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의 만족과 심리적 안정을 기원하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스트레스와 불안을 많이 겪는 가운데, "만사형통"은 내면의 평화와 균형을 이루어, 삶이 안정적이고 순조롭게 흘러간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⑤ 디지털 및 글로벌 시대에서의 의미


      디지털화된 현대 사회에서 "만사형통"은 글로벌 네트워크와 기술 발전을 통해 사업이나 개인적인 일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연결되고,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국제적인 사업 확장, 원활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통한 문제 해결 등에서 "만사형통"은 빠르고 효율적인 연결과 진행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4. 만사형통(萬事亨通) 한자풀이


      만사형통

      萬 (만): '많을 만', 즉 '많다', '무수하다'라는 뜻입니다.

      事 (사): '일 사', '일', '사건', '일어난 일'을 의미합니다.

      亨 (형): '형통할 형', '길하다', '잘 풀리다'라는 의미입니다.

      通 (통): '통할 통', '통하다', '원활하다', '잘 연결되다'는 뜻입니다.

      만사형통


      ▣ 형통한 축복

       

      성경: "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단 6:28)

       

      형통이란 ‘처음보다 끝이 좋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은 처음 포로생활 동안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철저한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자굴에 들어가는 위협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다니엘은 남들보다 형통한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비록 처음에는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끝은 형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다니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은혜로 인해 범사가 형통한 축복을 받게 될 줄로 확신합니다.

      형통한 삶 / 

      형통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찰레아흐’입니다.
      이 말은 ‘번성한’(prosperous)이란 뜻입니다.
      영어성경에는 ‘번성한’ 또는 ‘성공적’(successful)이란 말로 번역돼 있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삶을 형통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써 형통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성실하여 그의 형통함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보게 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또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인정하면서 살았습니다.

      로리 베스 존스는 ‘주식회사 예수’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성공에 대한 정의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성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형통의 뜻이 성공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형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형통한 삶(여호수아 1:1-8) /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7절)

      "형통한다"는 국어사전적 의미는 "온갖 일이 뜻과 같이 잘되고 번영함"
      "목적한 바를 이룬다"
      성공의 의미가 강합니다.
      예를 들어 뼈대있는 가문, 인품이 있고 덕망 있는 자, 적당히 베풀 줄도 알고 돈과 명예를 소유한 자를 세상 사람들은 형통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경적 형통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 그 자체가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형통의 뜻이 성공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형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형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축복의 땅으로 믿음의 전진을 할 때 형통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원해내시고 광야의 유랑생활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 즉, 형통의 복을 허락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 여호와께서 주신 땅으로 가야 형통합니다.
      마이 웨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길, 하나님을 위한 길을 믿음으로 전진할 때 형통하게 됩니다.

      둘째, 머무르거나 후퇴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전진할 때 형통합니다.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라.
      내가 주는 땅으로 가라.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주리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행동강령을 수반합니다.

      건너라, 가라, 밟으라는 신앙생활의 3대 명령은 광야에 머물러 있지도 말고, 애굽으로 되돌아갈 생각도 말고, 오직 하나님이 예비하고 준비하신 땅으로 전진할 때 형통한다는 뜻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형통한다는 뜻은 무슨 의미일까요?
      목적 없이 되는 대로 가도 형통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오직 여호와께서 주신 땅으로만 걸어가야 함을 말합니다.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요 14:6)만 따라가야 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전진해야만 형통할 수 있습니다.
      오른편의 물질을 볼 것 없고 왼편의 명예도 볼 것 없습니다.
      오직 치우치지 말고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향해 믿음으로 전진하면 누구든지 형통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축복의 땅으로 믿음의 전진을 하게 하옵소서.
      때로는 힘들고 어려워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오직 형통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의인의 형통(잠언 11:10)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공격하던 당시 세계 역사학자 회의가 있었는데 그 때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 토인비 박사와 일본의 역사학자가 함께 식사를 하며 서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토인비 박사가 일본의 역사학자에게 “일본이 대동아 전쟁을 일으킴으로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하자, 일본 학자는 “대동아 전쟁을 통해 온 아시아 사람들이 더 잘살게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토인비 박사는 그 사람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일본이 행한 침략적 악행은 일본 패망의 씨앗을 심은 것으로, 그 열매로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후 일본은 대동아 전쟁을 통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평화를 파괴했습니다.
      그러나 토인비의 말과 같이 그렇게도 흥왕하던 일본의 제국주의는 곧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사람들 사이를 이간하고 중상하며, 가정을 불화하고 파탄케 하며, 사회와 국가에 불신과 멸망을 가져다주는 사특한 자를 싫어하고 그들이 잘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패망하면 온 성읍 사람이 기뻐 환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온 성읍에 덕을 쌓아 그 형통으로 이웃의 기쁨이 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악인이 형통할 때(시편 73편)  /  악인의 형통함이 의인의 실족함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 주변에서 악인이 오히려 건강하게 살고, 재물을 얻고 번영하는 것을 봅니다.
      악인이 더 출세하고 승진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의롭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병들고 재산을 잃고 인생의 싸움에서 패배자로 밀려나는 것을 목격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렇다면 그는 공평하신 분이십니까?

      시편기자는 이 질문으로 인하여 그가 거의 실족할 뻔하였다고 말합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가해성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하나님을 향한 질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직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직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질문을 끌어안고 성소에 들어가 엎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해답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이 다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악인이 자랑하던 것들이 졸지에 소멸하는 진리를 깨우친 것입니다.
      인생이 아무리 길어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 순간 한 바탕의 꿈인 것을 깨우친 것입니다.
      그리고 꿈이 깨이면 우리는 더 이상 간밤의 꿈을 인하여 고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이 형통해 보일 때 그로 인하여 질시가 내 안에 일어날 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지각해야 합니다.
      그의 영원하신 임재와 실재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악인의 번영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가를 깨움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악인의 번영을 시기하거나 구함이 아니요, 주를 가까이 함인 것입니다.

      주여, 악인의 번영이 부러워 보일 때 오히려 예배에 힘쓰게 하시고 주안에 거하는 행복을 더욱 충만히 누리는 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유태영 박사의 형통  /  유태영 박사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들은 형편 때문에 교육시킬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유 박사는 어릴 때 동네 사람들로부터 똑똑하다는 인정을 받아 겨우 국민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5학년 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하나님께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신다는 교회학교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는 중학교를 다니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통신중학교를 다녔으며 그 후에 서울로 올라와서 낮에는 구두닦기를 하면서 저녁에는 야간 고등학교를 다녀 졸업했습니다.

      그는 여러 번 굶어 보았으며 남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을 것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한강이 얼어 붙은 추운 겨울에는 냉방에서 내의도 없이 있어야 했는데 너무 추워 잠을 못 자고 방안을 돌아다니다가 새벽에는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햇볕이 나면 교회 담 밑에서 몸을 녹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믿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의지하자 비록 과정은 힘들었지만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미국, 이스라엘, 덴마크로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유 박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꿈을 가지고 기도에 힘쓴 것이 형통의 비결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행사가 형통하려면(이사야 14:24-27)  /  우리의 행사가 형통하려면
      첫째,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잘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시각에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를 때에는 우리의 행사가 형통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맞추기 위해서는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가운데 기록된 대로 지키려고 힘쓸 때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될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의 모든 행사를 야웨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일을 우리의 일로 만들지 말고 하나님의 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길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형통으로 인도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생각을 성경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셨사오니 늘 묵상하게 하시고 모든 경영을 맡겨 드림으로 형통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심은 대로 거둔다 / 레오나르도 킬러 박사거짓말 탐지기를 발명하고 25,000명을 시험한 후, 인간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성경은 정직하고 진리는 단순하다.
      내 손이 수고할 때 먹고 복되고 형통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를 속이면서 겉으로 그렇게 사는 척만 한다면 결코 그 열매를 맛볼 수 없다.

      프랑스 혁명 때 로베스피에르는 사람들을 처단하기 위해 단두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이 만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은 무엇을 말하는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성경 말씀을 그대로 증명하는 것이다.

      당신이 성숙하고 싶다면 셈 레벤슨의 말에 귀 기울여라.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다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다면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다면 너희 음식을 배고픈 사람에게 나눠 주고, 아름다운 머릿결을 갖고 싶다면 어린아이에게 하루 한 번씩 네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다면 결코 혼자서는 걷지 말라.”

      이제 영적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경건의 시간을 심고 경건의 습관을 갖고 눈물로 씨를 뿌리라.
      그러면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둘 수 있다.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이승엽 선수가 국민타자라는 별명에 걸맞지 않게 2할 4푼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역대 선수 중 타이거브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통산 타율은 3할6푼7리입니다.
      세계 최강의 타자도 평균 3타수 1안타에 불과합니다.
      만약 모든 야구선수의 타율이 5할대 이상이라면 무슨 재미로 야구를 하고 또 야구 구경을 하겠습니까?
      인생도 야구와 같지 않나 생각합니다.
      모자람 속에서 세상을 사는 의욕과 재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케 하셨습니다.
      인생에는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습니다(전 3:4).
      순탄한 날과 험난한 날 등이 번갈아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일생 동안 성공만 거듭하는 사람도 없고 실패만 거듭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공했다고 자만할 것도 없고 실패했다고 좌절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3분의 1이라도 이루어졌다면 그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쉽게 성취된다면 그것은 참 재미없는 인생입니다.



      무병장수(無病長壽) 소개

      '무병장수(無病長壽)'라는 표현을 오늘 소개하겠습니다.

      이는 '병이 없이 오래 사는 것'이라는 의미로, 건강한 삶을 오래 누리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목표와 소망을 설명할 때 사용됩니다.

      장수와 건강은 인간의 고대부터 바라던 가치로, 이 성어는 건강하게 살아감에 있어 올바른 생활 습관과 균형 잡힌 식단, 마음의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합니다.

      건강한 생활습관, 균형 잡힌 식사, 적절한 운동 등으로 이루어지는 무병장수는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가치입니다.

      무병장수의 이상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이며, 건강한 삶의 기반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무병장수를 위한 다양한 노력과 실천, 그리고 이 표현이 사용되는 실제 사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무병장수(無病長壽)의 뜻과 유래

      '무병장수(無病長壽)'라는 표현은 병 없이 오랫동안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가치를 나타냅니다.

      이는 오래 살되 질병이나 건강 문제 없이 튼튼하게 생활하는 것을 표현하는 성어입니다.

      유래를 보면, 동양 문화에서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왔으며, 건강과 장수에 대한 중요성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철학, 의학, 영양학과 심리학을 접목시켜 무병장수의 이상을 달성하려 했습니다.

      기원전의 동양 의학에서는 몸과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졌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건강한 삶의 기반으로 간주됩니다.

      예로, 중국의 고대 의학인 도인은 신체, 마음, 영혼의 조화를 통해 무병장수를 추구했습니다.

      무병장수는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번영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건강한 국민은 강한 나라를 만든다는 신념이 있었으며, 여러 왕조에서는 무병장수를 국가의 목표로 삼기도 했습니다.

      무병장수의 개념은 요가, 명상, 올바른 식습관, 일상적인 운동 등을 통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는 현대의 건강 추구와도 연결됩니다.

      건강과 웰니스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현재, 무병장수의 철학은 다양한 분야에서 반영되고 있습니다.

      또한 무병장수는 질병이나 노화로 인해 삶의 질이 저하되는 것을 방지하고, 인생을 최대한 즐기고 활용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목표로 여겨집니다.

      이는 모든 세대와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의 꿈입니다.

      결론적으로 '무병장수'는 병 없이 오래 살아가는 것을 넘어서 인생의 질을 높이고, 개인과 사회가 함께 번영하고 발전하는 길을 제시하는 현명한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는 오늘날의 건강과 웰니스 추구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와 꿈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한자풀이

      각 한자의 뜻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無(무): 없다를 의미합니다.
      • 病(병): 병, 질병을 의미합니다.
      • 長(장): 길다, 오래를 의미합니다.
      • 壽(수): 장수, 수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무병장수'는 병 없이 오랫동안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가치를 나타냅니다.

      마무리

      오늘은 '무병장수(無病長壽)'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것은 병 없이 오래 사는 것을 의미하며, 건강한 삶과 오래 사는 데 중요한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무병장수는 우리 생활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며, 규칙적인 운동, 올바른 식습관, 스트레스 관리 등을 통해 추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활 습관은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더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즐길 수 있습니다.

      오늘 배운 '무병장수'의 의미를 일상에서 찾아보고, 실천해보시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성어와 그 뜻을 소개하며 여러분과 함께 배워가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1월 13일(월) 창세기 34-3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벧엘로 올라가자(35: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Then come, let us go up to Bethel, where I will build an altar to God, who answered me in the day of my distress and who has been with me wherever I have gone."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let us go up to Bethel)

      벧엘(
      Bêyth-ʼÊl) בֵּית־אֵל 스트롱번호 1008

      1. 하나님의 집 : 팔레스타인의 한 장소 ‘벧엘’.  2. 수 16:1
      발음 [ Bêyth-ʼÊl ]
      어원  / 1004와 410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0회 사용
      • 1. 고유명사 하나님의 집 : 팔레스타인의 한 장소 ‘벧엘’ [가나안 족의 고대 도시였으나 훗날 베냐민 지파에 부속되었다], 수16:1,2, 삼상13:2.
      • 관련 성경  /   벧엘(수 16:1, 2, 삼상13:2).

      기둥 - 기둥 주(柱) / 열 십(十) + 사람 인(人) + 주인 주(主)

      올라가자( ʽâlâh) עָלָה 스트롱번호 5927

      1. 올라가다.  2. 사 14:14. 3. 출 24:13
      발음 [ ʽâlâh ]
      구약 성경  / 890회 사용
      관련 성경  /  ☞동트다(창19:15, 삼상9:26), 치솟다(창19:28, 삿20:38), 새다(창32:26), 피다(창40:10), 오르다(창49:4, 신5:5), 올라가다(창49:9, 수2:8, 암9:2), 가다(출1:10, 수18:11, 호8:9), 올라오다(출8:3, 삿12:3, 아8:5), 나오다(출13:18, 아4:2), 뽑다(레16:9), 메다(민19:2, 삼상6:7), 나아가다(신25:7, 삿4:5), 닿다(수8:20, 욥20:6), 이르다(수15:6, 삿21:5), 대다(삿16:18), 일어나다(삿20:40, 호13:15), 들리다(왕하19:28, 사37:29), 들어오다(삼상14:21), 기록하다(대상27:24), 중수되다(느4:7), 나타내다(시78:31), 퍼지다(잠24:31), 들다(잠26:9,슥14:13), 뛰어나다(잠31:29), 기어오르다(렘4:29), 덮다(사8:7), 생각하다(렘7:31), 두다(렘32:35), 치료받다(렘8:22), 뜻하다(렘19:5), 넘치다(렘51:42), 올리다(왕상10:29, 에1:14), 솟아오르다(사34:3, 암8:8), 상달하다(출2:23, 욘1:2), 돌다(수6:15), 드리다(왕상18:29, 왕하3:20), 미치다(대하36:16), 달다(시62:9), 움돋다(암7:1), 솟아나다(민21:17), 타다(창31:10, 렘46:4), 달리다(렘46:9),치다(렘49:31), 올려 보내다(창44:33), 마르다(출16:14), 떠오르다(출19:18, 사34:10), 행하다(출33:5), 입다(레19:19, 겔44:17), 지나가다(민20:19), 높아지다(신28:43), 사무치다(삼상5:12), 물러가다(삼하23:9), 맹렬하다(왕상22:35, 대하18:34), 승천하다(왕하2:11), 떠나가다(왕하12:18, 렘34:21), 진척되다(대하24:13), 일으키다(전10:4), 날리다(사5:24), 자라나다(사53:2), 떠나다(렘21:2, 겔11:24), 날아오다(렘49:22), 들이다(겔14:7), 자라다(겔47:12), 강성하다(단8:8), 뛰다(암3:5), 가리다(욘4:6), 통하다(대상26:16), 품다(겔20:32), 지존하다(시47:9), 초월하다(시97:9), 머물러 있다(민9:22), 데리고 오다(스1:11), 인도하다(창50:24, 출17:3), 가지다(출13:19), 켜다(출27:20, 민8:3), 이끌어내다(민16:13, 수24:32), 나오게 하다(민20:5), 주다(삼상2:19), 메어올리다(대상15:12),데리다(대하8:11), 가지고 오다(스1:11), 기도하다(욥42:8), 끌어내다(시30:3, 겔29:4),인도하여내다(출32:4, 삿6:8, 렘16:15), 인도하여 올리다(민21:5, 왕상12:28, 암3:1), 무릅쓰다(애2:10, 겔27:30), 입히다(겔37:6), 거느리다(겔23:46), 굽이치다(겔26:3), 옮기다(삼상7:1, 렘27:22), 옮겨가다(삼상6:21), 가져오다(삼상19:15), 불러올리다(삼상28:8),몰아오다(렘51:27), 새기다(대하3:5), 쌓다(대하32:5), 고치다(렘30:17), 키우다(겔19:3), 건지다(욘2:6), 새김질하다(레11:3,5, 신14:7),채우다(삼하1:24), 제사하다(렘48:35), 충돌하다(나3:3), 기록되다(대하20:34), 끌려가다(나2:7), 서다(렘51:3).



      벧엘 & 루스

      벧엘 ㅡ 하나님의 집

      히브리어로 '집'을 뜻하는 '벳(Beth, 혹은 Beit)'과 '하나님'을 뜻하는 '엘(El)'을 합쳐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

      역사

      야곱이 형 에서/에사오의 칼부림을 피해 도망다니다가 루스/루즈 지역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는데, 꿈 속에서 하늘까지 닿은 층계가 보였고 이를 통해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야곱이 그 모습을 보고 있자 하나님인 야훼가 그의 옆에 나타나 이렇게 계시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하나님이 계신 집이니 진정 두려운 곳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음 날 아침 베개 삼던 돌을 세워 단을 쌓고 기름을 부어 기도를 올려 그곳을 벧엘/베델이라고 불렀다.

      여호수아 8:12, 8:17

      ㅡ이스라엘 족속이 아이와 "벧엘"의 사람들과 전쟁을 하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기원전 1240-35년 사이에 강성한 도시였던 벧엘은 무참히 파괴되었으며,

      이스라엘 핀켈스타인을 포함한 학자들은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인들의 소행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나무위키)

      ​벧엘 / 베델(Bethel)

      ㅡ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지명

      ㅡ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17~19km 지점

      본래 ‘루스’로 알려졌던 성읍(창 28:19). 예루살렘 북쪽 세겜 방향으로 약 17~ 19㎞,

      실로 남쪽 약 29㎞, 아이 성의 서쪽 약 3㎞ 지점에 위치한 곳.

      가나안 정복 전쟁 후 에브라임 지파가 차지하게 되었고(삿 1:22-25; 4:4-5)

      사사 시대 말기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길갈에서 이곳 벧엘로 옮겨져 성막이 세워짐으로써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지기 되기도 했다(삿 20:18, 26-28).

      사무엘은 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있는 동안 이곳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하면서 이스라엘 전역을 치리하였다(삼상 7:15-16). 그리고 훗날 엘리야 시절에는 이곳에 선지자 학교가 있었으며(왕하 2:1-3),

      또 이곳 젊은 아이들이 엘리사를 조롱하다가 42명이 암콤에게 죽임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왕하 2:23-25).

      한편, 이곳은 아브라함 이후(창 12:8) 구약 족장들이 일찍부터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경배했던 곳이다.

      특히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가던 길에 꿈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본 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벧엘’이라 이름하였다(창 28:19).

      왕국 분열 후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이곳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워 범죄의 온상으로 만들어 버렸다(왕상 12:29-33; 13:1-22; 왕하 10:29). 그러자 아모스 선지자와 호세아 선지자는 이곳의 우상 숭배 행위를 엄하게 지적하면서 회개치 않을 경우 당할 멸망을 경고하였다(암 3:14; 5:5-6; 7:10-13; 호 4:15; 5:8; 10:5, 8).

      특히 호세아는

      ㅡ ‘벧엘’(하나님의 집)을

      벧아웬’(사악한 집, 우상 숭배의 집)이라 고쳐 불러 그 죄악상을 고발하기도 했다(호 4:15).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남유다의 요시야 왕은 이곳에 있던 우상 제단을 부수고 여호와 예배를 회복시켰다(왕하 23:15-23). 신구약 중간 시대에는 수리아의 바키데스(Bacchides) 장군이, 신약 당시 유대 전쟁 때에는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장군이 점령하였다.

      이후 벧엘은 비잔틴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며 도시가 매우 발달하였는데, 이슬람 제국의 침공 이후 폐허화되었다.

      ​성경에는 이외에도 일명 ‘브둘’(수 19:4), ‘브두엘’(대상 4:30)이라 일컬어지는 시므온 지파에 속한 벧엘(삼상 30:27)이 있는데 그 위치는 분명치 않다.(라이프성경사전)

      ■ 루스(Luz) ​

      뜻 : 편도나무(살구나무)​

      1.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도피하던 중 하나님을 만난 장소. ‘벧엘’이라고도 한다(창 28:11-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창28/19

      가나안 정복 후 영토 분배시 베냐민 지파의 북쪽 경계지가 되었다(수 16:2; 18:13). 수 16:2에는 벧엘과 루스가 별개 지역으로, 루스는 벧엘에 속한 남쪽 산맥에 위치한 가나안 성읍이었는데,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두 지역을 합쳐서 벧엘로 부르게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벧엘은 야곱에게 신앙적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특별한 장소이었습니다.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치듯 집을 떠났을 때 노중에서 하룻밤을 보내려고 길가의 돌을 취하여 베개를 삼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언제 다시 부모님을 뵈올 지 알 수 없는 막막한 밤이었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지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잊혀졌던 벧엘의 기억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두 개의 자리가 분명해야 합니다.
      첫째는 기도의 자리
      둘째는 말씀의 자리

      왜냐하면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전투를 벌일 때 모세는 지팡을 들고 아론과 훌과 더불어 산위로 올라갔습니다.
      여호수아는 칼을 들고 아말렉과 싸우려고 나갔습니다.
      지팡이는 기도를 상징합니다.
      칼은 말씀을 상징합니다.

      기도의 자리와 말씀의 자리를 갖는 사람을 일컬어 교회의 기둥이라고 합니다.
      기둥 주(柱)자를 보세요.
      사람이 어려운 십자가를 내 몫이라고 믿음으로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기둥이 모여서 맡은 자리를 지킬 때 기둥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큰 건물을 세울 수 있습니다.

      왜 벧엘로 올라가야 할까요?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이 삶의 환경으로는 아주 적합한 곳이며 만족할만한 지역일지라도 벧엘로 가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지난 날 야곱을 믿음으로 세웠던 은혜의 자리이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만족에 도취한 삶이 아니라 영적으로 새롭게 변화될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을 향하여 나가야 합니다.

      벧엘 회복을 위해 필요한 조치 세가지가 제시됩니다. 
      이것을 "영육간의 회개"라고 하겠습니다.

      첫째, 이방 신상을 버리라

      여호와 이외의 다른 신들과 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형상화된 신상(神像) 뿐 아니라(사 45:20; 렘 10:5; 행 17:29; 롬 1:22, 23) 유일신 여호와를 배척하는 모든 세력과 사상까지(범신론, 샤마니즘, 애니미즘 등)를 포함합니다.

      한편 어떻게 우상 숭배가 야곱의 집안에 행해질 수 있었던 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1. 라헬이 자기 부친의 드라빔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31:19)
      2. 야곱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얻은 노비(30:43)중에 우상 숭배자가 있었을 가능성
      3. 세겜 성의 약탈물 중 이방 신상이 섞여 있을 소지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을 정결케 하라

      몸과 마음의 동시적 정결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과 관계 맺는 자에게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레 11:45).
      이것은 모세 때 결례 의식으로 표현된(출 19:14; 민 19:12-13; 레 14:8) 헌신과 순종을 상징하는 행위를 말합니다(벧전 1:22).

      세째, 의복을 바꾸라

      출애굽 직후 모세에게도 내려진 이 명령은(출 19:10) 영적, 도덕적 정결상태를 외형적으로도 나타내라는 뜻으로 '회개'를 상징합니다(겔 36:25; 히10:22; 유 1:23; 계 19:2).
      사실 의복은 그 사람의 신분과 삼의 양태를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서 의복을 바꾸는 것은 곧 현재의 삶과 신분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삶에로의 전진을 위한 결단이라고 하겠습니다(고후 5:17).

      하나님이...이르시되 - 자신들의 힘으로 선민의 명예 회복을 추구하다가 끝내 피의 복수자와 약탈자라는 오명을 쓰게 된 야곱 가정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를 죄악과 위경의 올가미로 묶어버린 야곱 가정에 찾아오셔서 그들의 허물을 정확히 지적하시고 그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셨다. 태초부터 선포되고(1:3), 택한자에게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들려주시는(6:13;12:1;26:2) 창조주 하나님(엘로힘)의 말씀만이 죄악의 진흙속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며 새 삶을 살게 하신다.

      일어나( 쿰)
      - 큰 일을 앞에두고 그것을 향하여 떠날 것을 촉구할 때 발(發)하시는 하나님의 의미 심장한 분부이다(신 17:8).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제 일 조처로 절망적인 현실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을 명하신다(12:1;출3:10-12).

      벧엘로 올라가서
      - 벧엘은 야곱에게 있어 자신의 생애중 (1) 가장 괴로울 때 가장 뜨겁게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한 장소이자 (2) 가장 순수한 심정으로 가장 진실되게 신앙을 고백하였던 서원의 장(場)이었다(28:10-22).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바로 그곳으로 올라가라고 명한 것은 야곱이 벧엘에서 서원했던 내용들(28:20-22)을 이제 이행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다. 더우기 하나님은 언약 후손의 가문이 세속에 휩쓸려 당신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을 더이상 좌시하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바른 관계 정립을 위해 은혜의 처소 벧엘로 부르셨다. 이처럼 인간의 구원과 변화의 주도권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다.

      거하며( 웨쉐브)
      - '야사브'(체재하다)의 명령형으로 서원했던 '단'(28:22)을 쌓기까지 그곳에 머물라는 말씀이다.

      단을 쌓으라
      - 옛날 벧엘에 하나님의 전(집)을 건축키로 서원한(28:22) 야곱에게 제단 수축을 명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전에서 가장 핵심되는 부분이 바로 이 제단이기 때문이다. 제단은 회생의 피를 통해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복된 곳이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 이 외침은 파란 만장했던 야곱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온갖 괴로움 속에서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그 은혜, 그 언약을 되새기며(신 32:7; 욘 2:7) 다시 한번 신앙 결단을 촉구하는 말이다.
      과거 야곱의 때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숱한 세월 동안 이것은 성도들의 신앙 회복 운동의 모토(Motto)가 되어왔던 의미깊은 구호이다.
      한편 벧엘은 숙곳보다(33:17) 해발 300m이상의 고지대이기 때문에 '올라가자'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다.

      단을 쌓으려 하노라
      - 하란에서 돌아온 지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야곱은 자신의 집안을 번창케 하는데 전력한 나머지 아직까지 벧엘 서원(28:22)을 이행치 않고 있었다. 아마 세겜 성의 비극적인 사건(34:25)의 원인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영력있는 그리스도인(출애굽기 17:8-16)


      기둥 주(柱), 버틸 주(柱) : 나무 목(木) + 주인 주(主)
                                               나무 목(木) = 열 십(十) + 사람 인(人)

      1. 기둥, 2. 기러기발(거문고, 가야금, 아쟁 따위의 줄을 고르는 기구), 3. 줄기,  4. 풀의 이름, 자운영(紫雲英), 
      5. 버티다, 괴다,  6. 막다,  7. 비방하다(誹謗--), 헐뜯다,  8. 어기다(지키지 아니하고 거스르다), 순종(順從)하지 않다

      柱자는 ‘기둥’이나 ‘줄기’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柱자는 木(나무 목)자와 主(주인 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主자는 촛대에 불이 켜져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주인’이라는 뜻이 있다.
      柱자는 이렇게 ‘주인’이라는 뜻을 가진 主자에 木자를 결합한 것으로 ‘중심이 되는 나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즉 柱자는 방 중앙에서 불을 밝히던 촛대처럼 집의 중심을 잡아주는 ‘기둥’이라는 뜻이다.


      영력(靈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성(靈性)이라고도 합니다.
      영력은 영적인 능력, Spiritual Power를 말합니다.
      좁은 의미에서의 영력은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능력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능력이 있어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말씀의 권위와 능력이 있어서 말씀을 선포하기만 해도 역사가 일어납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영력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능력을 말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 하나님이 주시는 영력으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영력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영력이 있어야 합니다.
      교인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력이 있어야 신앙생활을 잘할 수가 있고, 영력이 있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고, 영력이 있어야 기도도 할 수가 있고, 영력이 있어야 세상에서 힘있고 능력있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인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성도는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의 학문이나 재물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지식,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 하나님이 주시는 재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을 공격해 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말하지요.
      "나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산에 올라가 기도할테니 장정들을 뽑아서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시오"
      이스라엘 백성의 아주 특별한 전투방법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말대로 전쟁터로 나가고 모세는 아론과 훌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모세는 산에 올라가서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기고, 모세의 손이 내려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론과 훌이 모세 곁으로 다가가서 모세를 돌 위에 앉히고 양쪽에서 팔을 붙잡습니다.
      모세의 팔이 해가 질 때까지 내려오지 않습니다.
      결국은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됩니다.

      모세가 손을 높이 들어 기도한 것 - 기도의 자리
      여호수아가 칼로 싸운 것 - 삶의 자리

      11절에 "모세가 그의 팔을 들면 이스라엘이 더욱 우세하다"
      13절에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그 백성을 칼로 무찔렀다"

      손을 높이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했다는 말
      여호수아의 칼은 무기의 칼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칼입니다.
      기도와 말씀이 전쟁을 이기는 유일한 무기였던 겁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기도해야 승리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기도하는 동안에만 승리합니다. 그 이상하지요. 하나님은 능력있는 분이지만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주시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가 있을 때에만 역사하시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해야 영력을 얻고 기도해야 신앙생활을 근사하게 할 수가 있고, 기도해야 능력있게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오래 전에 이스라엘의 베긴 수상이, 지금은 고인이 된 레이건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서 미국에 왔었습니다.
      베긴 수상이 White House에 와서 보니까 전화기가 세 대가 있는데, 붉은 색 전화기, 은색 전화기, 금색 전화기가 있는 겁니다.
      베긴 수상이 이상하다 싶어서 물었습니다.
      "이 세 대의 전화기가 각기 다른 색깔인데 무슨 특별한 뜻이라도 있습니까?"

      레이건 대통령이 하는 말이 "예, 뜻이 있지요. 여기 붉은 색 전화기는 소련과 전화할 때, 지금 러시아지요, 소련과 전화할 때에 사용하는 것이고, 은색 전화기는 일반적인 전화 통화를 할 때 사용하는 것이고, 금색 전화기는 하나님과 대화할 때 사용하는 전화기입니다."

      베긴 수상이 다시 물었어요.
      "하나님과 통화하시려면 전화비가 많이 나오겠네요?"
      그러자 레이건 대통령이 미국의 국력을 은근히 자랑하는 의미로 말합니다.
      "네, 많이 나옵니다. 한 통화에 1만 달러 정도가 됩니다."

      얼마 후에 베긴 수상이 레이건 대통령을 이스라엘로 초청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가서 보니까 베긴 수상의 집무실에도 색깔이 다른 세 대의 전화기가 있는 겁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이유를 물었더니 베긴 수상이 설명합니다.
      "붉은 색은 공산 국가와 통화할 때 쓰는 전화기고, 은색은 우방이나 업무 관계로 통화할 때 쓰는 전화기고, 금색의 전화기는 하나님과 통화할 때 쓰는 전화기입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다시 묻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통화하려면 요금은 얼마나 냅니까?"
      베긴 수상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전화하면 미국 돈으로 1센트 정도 나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깜짝 놀랐어요.
      "아니, 전화 요금이 왜 그렇게 쌉니까?"
      베긴 수상이 의미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미국의 하나님은 장거리에 계시기 때문에 한 통화에 1만 달러씩 나오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가까운 곳에 계시기 때문에 요금이 아주 쌉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동행하십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동행하십니다.
      오늘부터 가까이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영력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 영력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영력으로 직장 생활하고, 그 영력으로 공부하고, 그 영력으로 자녀를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그 영력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영력은 성경을 가까이 할 때에 생기는 겁니다.
      에베소서 6장 17절에 보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검이에요.
      오늘 성경에 나오는 여호수의 칼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한 거예요.
      베드로처럼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하는 자세를 여호수아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 하나님의 영감을 얻어서 영력이 생기는 겁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 칼보다도 더 날카롭다고 했습니다.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내고,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낸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경을 믿고 가까이 하면 하나님의 살아계신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우고 나가면 언제든지 승리했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앞세우고 영력이 생겨서 세상에 나아가면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확실하게 승리하게 된다는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어린이 동화 가운데 "개미들의 사랑"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자 청년 개미 하나가 길 건너편에 사는 여자 청년 개미를 사랑했습니다.
      어느 날 남자 청년 개미가 용기를 내서 애인을 만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개미가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더니 아버지는 길다란 지푸라기 두 개를 등에 업혀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도로가 오래되고 위험하니까 이것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게다. 꼭 가져가거라."
      염려되었던 거지요.
      아들 개미는 왜 이렇게 무거운 것을 지고 가야만 하느냐고 불평했지만, 아버지의 명령이라서 어쩔 수 없이 등에 업고 집을 떠납니다.

      청년 개미가 조금 가다가 보니까 도로에 틈새가 났는데, 얼마나 깊이 파였는지 개미가 보니까 그랜드 캐년의 계곡 같더랍니다.
      애인을 만나러 가던 청년 개미는 깊은 벼랑 때문에 좌절하게 됐습니다.
      개미는 낙담하여 땅에 주저앉습니다.
      순간 등에 업고 있던 두 개의 지푸라기가 떨어졌습니다.
      청년 개미는 두 개의 지푸라기를 계곡 위에다 놓고선 다리를 만들고 계곡을 무사히 건너갔습니다.
      애인을 만나서 데이트하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승리하며 힘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말씀과 기도의 두 기둥 밖에 없어요.
      말씀과 기도의 두 기둥이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이길 수 있는 무기가 되는 거예요.
      개미가 지푸라기로 계곡을 무사히 건너간 것처럼, 성도에게는 말씀과 기도가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는 거예요. 때로는 말씀과 기도가 힘들고 부담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말씀과 기도 때문에 우리가 살게 됩니다. 말씀과 기도가 우리 삶에 있어서 구원의 다리가 되는 거예요. 언제 어디서나 말씀과 기도로, 기도와 말씀을 지니고 살아서 영력을 얻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력을 주셔서 능력있게 살아가게 하시고 능력있는 신앙 생활하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언제 어디서든지 기도와 말씀을 지니고 살아서 영력을 얻고 세상에 나가서 승리하는 모든 교우들이 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벧엘로 올라가자(창세기 35:1~8)

      레이건이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시절, 당시 이스라엘의 수상이었던 베긴이 백악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레이건 대통령의 집무실에 들어가 보니 붉은 색 은색 그리고 금색 전화기가 있었습니다.
      베긴 수상이 물었습니다.
      “이 세 대의 전화기를 각각 어떤 용도를 쓰십니까?”
      “예, 여기 붉은 색 전화기는 소련과 전화할 때 쓰는 것이고, 은색 전화기는 일반적인 통화를 할 때 사용합니다. 
      특별히 이 금색 전화기는 하나님과 통화할 때 쓰는 전화기입니다.”

      농담으로 한 얘기이지요.
      베긴 수상이 다시 물었습니다.
      “하나님과 통화하시려면 전화비가 많이 나오겠네요?”
      그러자 레이건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그렇지요. 한 통화에 1만 달러 정도는 될 것입니다.”

      얼마 후 베긴 수상이 레이건 대통령을 이스라엘로 초청했습니다.
      베긴 수상의 집무실에도 색깔이 다른 세 대의 전화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레이건 대통령은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저기 금색의 전화기는 하나님과 통화할 때 사용하시겠군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과 통화하려면 요금은 얼마나 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베긴 수상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1 센트밖에 들지 않습니다. 
      미국의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시기 때문에 한 통화에 1만 달러가 나오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아주 가까운 곳에 계시기 때문에 요금이 싼 것이지요.”

      두 지도자들은 진담 섞인 농담을 서로 주고 받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느 정도 멀리 떨어져있나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 하나님의 숨소리가 느껴지나요?
      아니면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잊고 사나요?
      그러다가 주일이면 화들짝 놀라 성경 찾아들고 부랴부랴 나오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본문의 표현을 빌리면, 여러분은 벧엘로부터 어느 정도 멀리 떨어져있나요?

      벧엘에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벧엘은 여러분에게 낯선 곳입니까?

      삶을 살다보면, 열심히 살아보려고 무진장 애를 쓰지만 일이 이상하게 꼬일 때가 있습니다.
      문제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기나긴 날들이 있습니다.
      마치 수렁에 빠진 사람처럼 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싶으면 사업에 문제가 생기고, 사업이 어느 정도 굴러간다고 싶으면 종업원들이 문제를 일으켜 힘들게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무수한 인물 중에 야곱만큼 악착같이 산 사람이 없습니다.
      요즘 말로 한다면 야곱은 ‘악발이’입니다.
      그런데 그의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요.
      평안한 날이 없어요.
      오늘 우리가 취급하려고 하는 사건은 그 중의 하나입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모든 문제는 벧엘로 올라가라는 신호이고, 벧엘은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라는 것입니다.(함께 따라하자)

      1. 야곱이 당한 어려움은?

      야곱이 세겜성에 이르러 그곳에서 장막을 치고 정착을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곳에서 큰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야곱이 만난 위기는 이렇습니다.
      창 34장에 나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바깥출입을 했다가 그 땅 추장의 눈에 들었습니다. 
      디나가 얼마나 예뻤는지 그 추장은 디나에 대한 연모가 지나쳐 그만 강제로 욕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디나의 오라비들이 들에서 이 얘기를 듣고 화가 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희들이 우리 누이 디나를 욕보였어! 어디 두고 보자!’ 
      그래서 형제들이 꾀를 냈습니다.
      “너희가 우리의 누이 디나를 가지려면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할례 지 않은 족속과 혼사를 맺을 수 없다.”

      세겜의 아들들이 할례를 받고 삼 일째 되는 날, 고통이 가장 심하여 움직일 수조차 없는 그날에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가지고 뛰어들어 그 모든 남자들을 죽였습니다.
      디나의 강간사건을 순리대로 신앙으로 풀어야 하는데 ‘욱’ 치미는 감정으로 복수를 해놨으니까 이게 될 일입니까? 
      복수는 복수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입니다.
      그 본토 사람들이 이런 일을 당하고 “이 웬 뜨내기들이 남의 땅에 와서 행패를 부려! 싹 쓸어버리자!” 이렇게 나온 거예요. 
      기껏해야 야곱의 숫자는 한 가족에 불과합니다. 

      우선 숫자적으로 열세입니다. 
      야곱가족이 몰살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야곱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만난을 겪었습니다. 
      형 에서로부터 쫓겨보기도 했고,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해보기도 했고, 이런 저런 시련을 다 겪어 보았지만 전 가족이 몰살당할 위기는 당해보지 않았습니다. 

      정말 처음입니다! 
      야곱은 아찔했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근심이 태산 같습니다.
      창 34:30을 보세요! 야곱의 심경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 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야곱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있었을 수 있겠지요.
      하나는, 밤에 도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 가족을 이끌고, 많은 짐승을 몰고 정처도 없이 도망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얘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선제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원래 공격과 방어는 1:3 비율이니까 적이 세 배정도라면 해볼 만한 싸움입니다.
      그러나 몇 안 되는 야곱의 가족이 가나안 부족들과 싸운다는 것은 애당초부터 말이 되지 않습니다.
      꾀 많고 약삭빠른 야곱일지라도 그에게 마땅한 묘책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방법이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동서남북이 꽉 막혔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은 이런 삶의 위기를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2. 야곱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벧엘로 올라가자!”
      객관적으로 볼 때 전혀 해결책이 되지 않을 듯한 결심을 했습니다.
      창 35:3절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갑니다.
      사실 야곱의 생애를 살펴보면 문제가 터질 때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몇 군데 살펴보겠습니다.
      창31:13절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창35:1절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벧엘’이란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집’을 말합니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더 쉬운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전인 교회로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교회에 나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나름대로 한번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던 사람입니다. 
      형 에서의 장자권을 가장 배고팠을 때를 노려 팥죽 한 그릇으로 낚아챈 사람, 
      자기 몸에 털을 붙여 형처럼 꾸민 다음 늙어 안력이 좋지 않은 아버지를 속여 축복기도를 받은 사람,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교묘한 방법으로 얼룩진 양과 염소를 낳게 하여 자기 재산을 불려간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야곱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산 인생의 결론이 무엇이냐 이겁니다. 
      일가족이 몰살당할 위기에 봉착한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 위기의 순간에, 모든 것을 다 잃을 그 순간에, 야곱은 인생살이의 기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기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벧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을 읽는 우리 모두가 마음 속 깊이 새겨야할 말씀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른 곳을 두리번거리지 말고, 머리 싸매고 누워있지 말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야곱은 두 마디로 그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3절) 
      야곱은 염치없는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은 한결 같이 이런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고백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①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환난을 당하면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겠어요? 
      그때 하나님은 모른 체하시는 분이 아니라, 들어도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분이 아니라 ‘내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언젠가 곽선희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소개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삶이 너무 힘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 심호흡을 하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라고 세 번만 불러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②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 말씀보다 더 좋은 말씀이 어디 있겠어요? 
      Wesley 목사형제의 기념비에는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라는 말과 함께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새벽기도회 때 한 적이 있는 얘기입니다.
      사우디의 왕이 유명한 프로골퍼를 초청하여 골프 라운딩을 했습니다.
      왕은 골프 선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시간이 돈인 프로선수가 시간을 내서 왕에게 서비스를 했으니까........
      “무슨 선물을 받고 싶습니까?”
      “골프채 한 세트를 부탁드립니다.”
      “ 아, 그래요.”

      기다리고 기다려도 골프채가 오지 않던 어느 날 편지 봉투가 날아왔습니다.
      골프 선수는 실망했습니다.
      “왕이 꽤 쩨쩨하구먼. 기껏 감사장이야?”
      뜯어보았더니 골프선수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선물이 들어있었습니다.
      그것은 골프장 한 곳을 통째로 선물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골프선수의 스케일과 왕의 스케일은 다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스케일과 하나님의 스케일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믿습니까?
      그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데 어찌 좋지 않겠어요?
      하나님께 돌아가십시오.

      3. 그 결과로 받은 축복은?

      야곱이 벧엘로 올라간 결과로 받은 축복은 무엇입니까?
      우리도 하나님께 나아왔을 때 이런 축복을 기대합니다.

      1) 평안히 길을 갔습니다.
      5절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누가 사람들을 두렵게 하여 야곱의 아들들이 평안히 길을 갔다고 했습니까? 
      하나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봐주시는 데 누가 감히 시비를 걸겠습니까?

      2) 참된 예배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7절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하나님은 기어이 야곱을 예배자로 부르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야곱 스토리의 중심 주제입니다.
      지금까지 야곱과 관련된 크고 작은 일들은 사실 부차적인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라는 한 인간이 그 무엇보다도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원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찾으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요4:23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바로 예배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돈 많은 사람도 아니고, 인격 높은 사람도 아니고, 권력 있는 사람도 아니고, 인물 잘난 사람도 아니고.......

      참되게 예배하는 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우리를 참 예배자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미국 캘빈 신학교의 로저 그린웨이(Roger S. Greenway)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선교는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예배가 궁극적인 목표이다. 선교는 예배가 없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수많은 회심자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그들의 얼굴을 숙이게 되면 선교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됩니다.
      선교는 단기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축복은 언제나 예배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와 땅의 기름진 축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참 예배자가 되십시오.
      이런 은혜는 언제나 예배를 통하여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배를 양보하지 마십시오.
      예배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3) 이름을 바꿔 불러주셨습니다.

      10절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이름을 바꿔 불러주셨습니다.
      ‘붙잡는다.’라는 뜻의 야곱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꿔 불러주셨습니다.
      우리의 이름도 바꿔졌습니다.

      우리의 옛 이름은 죄인, 사탄의 종, 마귀의 자녀였습니다.
      그래서 이름대로 죄를 범하고, 사탄의 종노릇하다가 멸망 받는 것이 우리의 정해진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우리의 이름을 바꿔주셨습니다.
      우리의 새 이름은 의인,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신부,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이 이름 속에는 우리를 향한 현재의 축복과 미래의 축복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러주시면 우리의 현재와 미래는 그렇게 됩니다.

      모든 문제는 벧엘로 올라가라는 신호이고, 벧엘은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입니다.
      야곱은 문제를 만나 벧엘로 올라갔고, 벧엘에서 문제를 풀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문제는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신호입니다.
      문제를 만나거든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꼭 그렇게 하십시오.
      그 때 문제는 엄청난 축복으로 변하게 될 줄 믿습니다.


      "르까프"라는 상표의 신발이 있지요.
      "르"는 전치사인데 "....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까프"는 "발"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르까프'라는 신발의 상표는 "발에" 또는 "발의"라는 의미의 히브리어로 만들 상표라고 하겠습니다.

      야곱이란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발음하면 "야콥"이라고 하지요.
      '야'는 "잡다"는 뜻
      "콥"은 "까프"라고 합니다.
      그래서 야곱이란 이름은 "발 뒤꿈치를 붙잡다"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야곱이란 인물은 태어날 때부터 복잡했습니다.
      에서와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서로 먼저 나오려고 하였는지 야곱은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나왔다고 합니다.


      사람의 인생이 원래 다사다난하지만, 야곱 또한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을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창세기 25장 22절부터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형과 싸우기를 시작했구요, 결국은 먼저 나오고 있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따라 나왔습니다.  
      야곱은 태어나기 전부터 형과 싸우고, 태어날 때는 형의 발을 잡고 따라 태어난 사람입니다.  
      욕심이 참 많은 사람이죠.  
      그리고 이어지는 그에 관한 이야기는 팥죽 사건입니다.  
      배고픈 형에게 떡과 팥죽을 주면서 장자권을 달라고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보면 욕심이 많을 뿐만 아니라 잔꾀, 잔머리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창세기 27장을 보면 야곱의 잔머리는 어머니 리브가에게서 유전된 것 같습니다.  
      27장 3절에 이삭은 늙어 언제 죽을 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에서를 불러 사냥하여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그것을 들은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다가 염소를 잡게 하고,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리브가가 직접 만듭니다.  
      눈이 어두운 남편 이삭을 속이기 위해 염소 새끼 가죽으로 둘째 아들 야곱을 꾸며 털이 많은 첫째 아들 에서처럼 꾸미고 또한 에서의 옷을 입혀 냄새도 속입니다.  
      이삭은 잔꾀 많은 모자에게 속아 넘어가서 맏이 에서에게 빌어 줄 복을 막내인 야곱에게 주게 됩니다.  
      급기야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을 죽이고자 했고, 그래도 아버지 이삭이 살아 있을 동안에 하기보다 돌아가신 뒤에 실행하려 했습니다.  

      남편 이삭의 말을 엿들었던 리브가는 이번에는 아들 에서의 이런 계획도 듣고 야곱을 자기 친정, 하란으로 도망가게 합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들어오기 전 머물던 바로 그 땅, 메소포타미아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도상으로 확인해보니까 약 500마일, 8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한국으로 치자면 부산에서 평양까지의 거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27장 28절부터 보시면 이삭이 야곱에게 빌어 준 아주 멋진 복의 내용이 나옵니다.  
      사실 이 복은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에게로 이어져오던 복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거의 백 년 전에, 아브람이 저 메소포타미아 지방 우르라는 곳에 살고 있을 때부터 큰 나라와 민족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늙을 때까지 자식이 없다가 귀한 외아들 이삭으로 간신히 연결되었고, 이제 이삭대에서는 쌍둥이가 태어나서 좀 나아지나 했는데 아우는 아버지와 형을 속이면서 축복을 가로채고, 형은 그러한 동생을 죽이려고 하고,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있는 어머니는 결국 막내 아들을 자기 친정으로 피신시킵니다.  
      그리고 이러한 축복을 받은 야곱은 지금 도망가고 있습니다.

      28장 10절 이하를 보시면, 만민이 너를 섬길 것이라는 축복을 받은 야곱은 도망가다 어느 한 곳에서 노숙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꿈에 여호와 하나님을 만납니다.  
      13절부터 1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복, 아버지 이삭이 빌어주었던 그 복을 이번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직접 해주십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지금 도망가는 막막한 여정을 앞에 두고 너무나 감사한 약속을 받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너를 지켜 줄 것이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부모, 친척, 고향에서 도망치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약속이 어디 있습니까?  
      ‘너를 무사히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하겠다.’  

      16절에서 19절을 보겠습니다.  
      이 곳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보려고 하는 곳 벧엘입니다.  
      ‘벧’은 ‘집’이라는 뜻이구요, ‘엘’은 ‘하나님’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그러니까 ‘벧엘’은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전’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서원합니다.  
      20절부터 22절입니다.  
      의식주가 잘 해결되고, 안전하게 돌아오면 꿈에 나타난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그 여호와라는 신을 곧 나의 신으로 섬길 것이고, 내가 십일조를 바치겠습니다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말의 뜻은 아직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은 아니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외삼촌 라반의 집입니다.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결혼도 하고 일가를 이루게 됩니다.  
      잘 아시는 내용이지만 이 외삼촌 라반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야곱의 잔머리를 능가하는 사람이죠.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를 닮은 것 같다고 했는데, 라반은 바로 어머니 리브가의 오빠입니다.  
      여기에서 야곱은 아버지의 어두운 눈을 속였던 대가를 한 번 치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하여 7년을 하루같이 여기며 라헬을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 봉사합니다.  
      그러나 첫 날밤에 외삼촌 라반은 라헬의 언니 레아를 들여보냅니다.  
      야곱은 그것도 모른 채 첫 날밤을 보내고 날이 밝은 다음에야 라헬이 아니라 레아인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소설적 상상력을 조금 발휘해서 생각해볼까요?  
      어두운 사막의 밤, 신혼 장막 안으로 술이 거나하게 취한 신랑 야곱이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7년을 기다려 온 자기의 사랑, 라헬에게 온갖 사랑의 고백을 하며 첫 날밤을 보냅니다.  
      그리고 행복한 단 꿈을 꾸고 아침에 일어나 옆을 돌아보니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였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제 밤에 한 모든 고백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일어나서 외삼촌에게 가서 따지지만, 너무나 태연하게 해결책을 제시하고 1주일 후 약속했던 둘째 딸 라헬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 대가로 다시 7년의 봉사를 약속합니다.  
      그 1주일 동안 집안 분위기 참 안 좋았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라헬을 두고 마음에도 없는 레아와 잠을 자러 들어갑니다.  
      레아는 어떻게 하든 그러한 야곱의 마음을 얻어보고자 하고, 라헬은 또한 질투가 납니다.  
      레아와 라헬의 질투는 결국 아들 낳기 경쟁으로 이어지고 열 두 아들과 한 딸이 태어납니다.  
      인간의 모든 것들, 심지어 이런 질투마저도 결국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데에 쓰여지는 것을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31장 13절을 봅시다.  
      벧엘의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이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외삼촌 라반이 순순히 보내 줄 것 같지는 않고 라반이 멀리 떠나 있을 동안 도망치듯 나옵니다.  
      고향에서도 도망쳐왔는데 이제 20년을 살아온 하란에서 온 가족과 함께 다시 도망칩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외삼촌에게 추격을 당합니다.  
      29절입니다.  라반은 너무나 아쉬워하면서 야곱일가를 떠나보냅니다.  

      야곱 입장에서 보면, 조금 치사한 외삼촌 라반에게서 도망나와 이제 가야할 곳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 에서가 있는 곳입니다.  
      20년이 지났기 때문에 화가 풀렸는지 아니면 여전히 야곱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형이 거주하고 있는 땅 세일이라는 곳에 먼저 사람을 보냅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소식은 형이 400명을 이끌고 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세일이라는 곳은 원래 야곱이 살았던 곳보다 
      한참은 더 남쪽 지방입니다.  

      세일에서 지금 야곱이 있는 마하나임까지는 부산에서 만주보다도 더 먼 거리입니다.  
      차라리 조금 속으면서 외삼촌에게 있는 게 낫지 400명을 이끌고 저 먼 곳에서부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 오고 있을 형의 모습은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그냥 세일에서 기다리면 되지 아니면 몇 명과 함께 오면 덜할텐데 무슨 전쟁을 치를 것도 아니고 400명이나 함께 오는 건 또 뭡니까?  

      야곱은 다시 잔머리를 굴리면서 가축을 여러 떼로 나누어 선물로 바치면서 에서의 마음을 녹이려고 합니다.  
      가족들도 먼저 보냅니다.  
      그리고는 혼자 얍복강 나루에서 밤을 보냅니다.  
      거기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로 이 야곱의 열 두 아들을 기반으로 열 두 지파가 되는 것이고, 야곱대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하나의 민족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에서와의 재회는 야곱이 걱정했던 것 보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33장 16, 17절입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에는 의미가 조금 확실하지 않은데 다른 번역본을 보면16절과 17절 사이에 ‘그러나’가 있습니다.  에서는 세일로 함께 가자고 하고 야곱은 곧 따르겠다고 하고 그래서 에서는 먼저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숙곳, 세겜 땅 근처에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곳에 정착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렸듯이 에서가 사는 세일 땅과 현재 야곱이 거주하려고 하는 세겜 땅은 부산과 만주만큼이나 떨어져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단을 쌓고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이제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20년만에 고향 땅으로 무사히 그것도 열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걱정했던 형과의 만남도 무리없이 해결되었습니다.  치사한 외삼촌 라반도 없고, 무서운 형 에서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두 다리 뻗고 행복하게 살 날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34장에 바로 엄청난 비극이 일어납니다.  애지중지 하나 뿐인 딸 디나가 그 동네 추장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추장 아들 세겜은 그래도 신사적이라 정당한 절차를 밟아 아내로 맞아들이겠다고 합니다.  야곱은 아들들이 가축들을 먹이러 멀리 나갔기 때문에 아들들이 돌아올 때까지 잠잠히 기다립니다.  잔머리 좋은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를 조건으로 내세워 세겜 땅 남자들을 다 할례받게 하고, 둘째 아들 시므온과 셋째 아들 레위가 그 틈을 타 잔인한 복수극을 펼칩니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어떻게 한다고, 남의 나라에 온 하 가족이 한 성을 완전히 몰살시켜 버린 엄청난 사건입니다.  34장 3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산전수전을 겪은 야곱도 놀랍니다.  바로 이러한 배경 아래 오늘의 본문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를 언급하십니다. 야곱이 일촉즉발 위기의 상황이 닥치자 하나님은 야곱을 다시금 벧엘로 부르시고, 그들이 벧엘까지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게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보호해 주셨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이고 도망나올 때나, 야곱의 두 아들의 심한 복수극으로 일가족의 몰살 위기에서나 야곱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야곱을 부르십니다.  야곱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세겜은 벧엘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레딩과 옥스포드보다 가깝습니다.  여기서 비스터보다 조금 먼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왕 돌아온 거, 조금만 더 가면 되는 그 벧엘인데 왜 가지 않고 굳이 세겜에서 머물렀을까요?  궁금한 일입니다만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미루어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두 가지 대비가 나옵니다. 2절에서 너희와 함께 하는 이방신을 버리고, 3절에서 내가 어디를 가든 나와 함께 한 하나님께 단을 쌓자로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자기 집안의 신앙을 책임져야 합니다.  지난 20년간 대가족을 이루었는데 그 가족들이 이방신을 섬기고 있는 것을 방치해 왔습니다.  심지어 라헬은 아버지의 드라빔, 일종의 우상을 훔쳐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한 가족들의 신앙상태를 쇄신해야 했습니다.  2절, 3절입니다.  이방신상을 버려라, 스스로를 정결케 하라,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돌아가자입니다.  가장 힘들고 급박했던 순간에 만나주신 하나님이 다시 부르십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다윗이 지은 시편의 많은 부분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적들이 저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수 많은 전쟁터를 누볐고, 사울왕에게 쫓겼고, 노년에는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기도 했습니다.  그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외쳤습니다. 물론 노래의 마지막들은 나의 피난처시오, 바위시오, 반석이신 하나님을 찬양했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 하면서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 또한 지금 온 가족의 몰살의 위기 앞에서 20년전 그 벧엘, 형 에서의 손아귀에서 도망가던 그 벧엘의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부르시기 때문에 너무나 반갑고 감사합니다.  여러분에게 생명을 걸만한 사건이 없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세월 가장 급박하게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던 순간이 없었습니까?  우리가 먼저 찾았던 것 같은 그 때,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찾고 기다리고 계셨던 곳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의 벧엘, ‘하나님의 집’에 대한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정말 이것만 해 주시면 제가 이렇게,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면서 야곱이 에서로부터 도망갈 때 서원하듯 그렇게 기도하신 적도 있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곳이 바로 여러분의 벧엘입니다.  그 벧엘!  자주 찾아가십니까?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꼭 맞아야 정신 차리는게 보통의 사람입니다만, 그러기 전에 벧엘로 올라갈 수 없을까요?  물론 평안할 때 지금 야곱이 가진 절박한 심정처럼 벧엘로 올라가기는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는 말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세겜 땅과 벧엘은 그야말로 지척입니다.  야곱은 애써 애면하고 세겜에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기만 가면 벧엘인데… 내가 20년전 도망가던 길에 하나님을 저기서 만났었는데… 하면서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바쁜 일이 끝나면 다음 주에 한 번 가볼까하면서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해야 되는데, 말씀 읽어야 되는데 하면서 하루, 이틀 보내고 있는 저희들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이번 바쁜 일만 끝나면, 시험 끝나면 혹은, 이번에 영국 가면 말씀 많이 읽어야겠다, 신앙생활 다시 해야겠다라고 생각하시다가 그냥 하루, 이틀 보내고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영국에 가기만 하면, 비자만 무사히 나오면 어떻게, 어떻게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신 적 없습니까?  영국에 가기만 하면 열심히 공부해서 영어는 네이티브처럼 하리라 그런 생각 없었습니까?  학교에 합격만 하면, 아니면 학위만 무사히 끝낼 수 있다면, 직장만 잡으면 등등 여러 가지 만약에 어떻게 하기만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야곱이 20년 전 벧엘에서 했던 그런 기도를 하신 적이 없으십니까? 하나님이 무사히 돌아오게 해 주셨는데 세겜에 눌러 앉아 있는 야곱처럼, 그 일들을 해결해 주셨는데 내일부터 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벧엘이 아닌 세겜에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런 기도를 했는데 기억조차 못하는 겁니다. 

      야곱은 자금 급박하게, 정신 바짝 차리고 벧엘로 올라갑니다.  20년만에 돌아왔습니다.  진작 올 것을 꼭 사고가 나고 옵니다. 지난 20년간의 생활을 정리하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벧엘입니다.  지난 20년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겁니다.  나를 이곳에서 만나주시고, 나를 다시금 이곳으로 안전하게 인도하여 주신 벧엘의 하나님을 이제 나의 주로 섬기리라 다짐하고 내렸왔을 겁니다.  이젠 정말 모든 게 안정되는 줄 알았습니다.  형과의 문제도 해결됐고, 벧엘의 하나님도 만났고, 이제 정말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벧엘에서 고향 땅으로 가는 길에 사랑하는 아내 라헬은 막내 베냐민을 낳다가 죽습니다.  이어서 큰 아들 르우벤은 자신의 첩 빌하와 동침합니다.  약간 웃기는 이야기입니다만, 20년 전 곧 죽을 것 같다던 이삭은 야곱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죽게 되고 에서와 야곱은 함께 장사지냅니다.  여하튼 다시금 신앙을 점검하던 벧엘에서 내려온 야곱은 아내를 잃고, 장남은 자신의 첩과 동침하고, 장수하긴 했지만 아버지의 장례를 치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 아들은 요셉을 시기해서 죽이려다 팔아버립니다.  

      레아와 라헬의 질투가 얼마나 강했는지, 아버지 편애가 얼마나 심했는지, 여하튼 요셉은 배다른 형들에 의해 팔려갑니다.  많은 유산을 놓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왕위를 위한 다툼도 아니고 배 다른 동생 요셉을 죽일만큼 미워했습니다.  여기에서 야곱은 다시금 아버지를 속이던 장면대로 아들에게 속임을 당합니다.  눈 먼 아버지를 속이던 장면처럼 어두운 밤에 라반에게 동생과 언니를 바꿔치기 당했습니다.  짐승과 옷으로 아버지를 속이던 야곱은 이번에는 아들들에게 짐승의 피가 묻은 요셉의 옷으로 속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넷째 아들 유다는 며느리와 동침해서 아들을 낳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태어난 베레스가 결국 다윗과 예수님에게로 연결되는 왕통라인이 됩니다만 야곱은 현재 정말 험악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어느 누구의 이야기보다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욕심 많고, 꾀 많은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이스라엘로 만들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그 중심에 오늘 이 벧엘로 올라가자는 야곱의 외침이 있습니다.  
      35장 전까지는 야곱이 자신의 뜻대로, 어쩌면 하나님보다 한 발 앞서서 움직이는 듯 합니다.  
      팥죽으로 장자권을 사려고 했고, 아버지의 어두운 눈를 속여 축복도 가로채는 등 기도하며 기다리는 사람이기 보다는 자기의 계획대로 온갖 머리를 굴리며 움직이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35장 이후 야곱은 자신이 저질렀던 일들을 되갚음 당하면서 또한 사랑하는 이들, 아내 라헬, 아버지 이삭, 아들 요셉을 차례로 떠나보내면서 점점 하나님의 손 아래서 다듬어지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이 벧엘의 하나님이 새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가족의 큰 아픔 앞에서 신앙의 아버지로 굳건히 서게 되는 것입니다.  
      48장, 49장에서 야곱의 유언은 이 모든 삶을 담은 신앙고백입니다.  

      48장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무지막지한 인생여정이라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결국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나의 고비고비마다 벧엘에서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기근 때문에 현재 우리가 잠시 애굽, 이집트에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라고 확신에 차 있습니다.  
      자신의 지난 삶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은 항상 신실하게 지켜져 왔었다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요셉 또한 그 약속을 굳게 믿어 자신의 시신을 보존하여 이 땅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으로 가게 될 때 꼭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사실 총리 요셉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이집트 국립묘지에 묻힐 수도 있을 정도였을 겁니다.  
      하지만 요셉 또한 야곱 못지 않게 힘든 세월을 살면서 하나님의 손에 다듬어진 사람입니다.  
      그러는 동안 요셉도 하나님의 약속을 누구보다 강하게 믿게 된 것 같습니다.  
      50장 24절에서 26절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400여년이 지나 모세를 통해 성취됩니다.  출애굽기 13장 18절부터 19절입니다.  그리고 땅 분배가 끝나는 여호수아 마지막 24장 32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과정을 간략하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중심에 벧엘의 하나님이 서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야곱을 길러가셨습니다.  야곱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겠지만 동시에 믿음이 단련되어지는 필수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욥의 고백도 기억납니다.  욥기 23장 10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리고 조금 밑에 14절을 보시면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일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고 고백합니다.

      나의 벧엘은 어디인가?
      내가 이곳에 오기 전 혹은 아니면 어려웠던 지난 어느 날 나를 만나주셨고, 그에 따라 내가 다짐했던 그 벧엘, 그 벧엘의 하나님을 기억하십니까?  
      신앙의 많은 선배들, 평안하다고 외치던 그 많은 선배들, 하나님을 찬양하던 그 선배들은 사실 이러한 하나님의 손 아래서 힘든 길들을 걸으며 다듬어져왔습니다. 
      그 길이 욥처럼 하나님에게서부터 왔을 수도 있고, 야곱처럼 자신의 욕심으로 빚어진 일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을 통해 결국은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빚어나가십니다.  
      그리고 그 길들을 지나며 신앙의 선배들은 결국 그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벧엘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찾고, 만나시고, 회복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월 11일(토) 창세기 31-3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벧엘의 하나님(31:13)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I am the God of Bethel, where you anointed a pillar and where you made a vow to me. Now leave this land at once and go back to your native land.' "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I am the God of Bethel)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아노키 하엘 벧엘)   אָנֹכִי הָאֵל בֵּית 

      - '나'를 강조하는 일인칭 대명사 '아노키'와 '하나님'인 '엘'에 정관사 '하'가 붙어 '나는 벧엘의 그 하나님이다'란 뜻이다.
      이는 시간을 초월한 연계성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말로서 도피 중인 야곱에게 나타나 언약을 맺은 장소인 그 벧엘을(28:19) 2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으로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불변의 신실성을 확증해 주는 선언이다.

      지금 일어나
      - 신앙적인 결단은 항상 지금 이 순간이어야 함을 촉구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생은 언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뜰지 모르는 그림자이자 안개이기 때문이다(전 6:12; 약 4:14)

      칼 야스퍼스의 한계상황

      한계 상황이란 말그대로 인간이 한계에 부딪힌 것을 느끼는 순간이다.
      죽음, 질병, 가난, 그 외 여러가지 극단적인 어려움의 상황들.
      이러한 한계상황에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좌절이야 초월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은 실존주의의 대가 중 한 명인 칼 야스퍼스의 한계상황에 대해 알아보고 실존과의 관계를 탐색해 본다. 

      한계상황의 정의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상황. 한계상황은 죽음, 고통, 우연, 죄책, 투쟁 등과 같은 상황을 의미한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한계상황은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직면하게 하는 상황이다.
      한계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과 무능력을 경험하게 되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즉, 한계상황은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인식하고, 실존적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한계상황의 숨은 정의는 인간의 한계와 무한한 가능성이 교차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존재가 한계와 무한한 가능성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는 개념으로 해석된다. 한계상황은 인간이 자유로움과 책임, 불확실성과 불안에 직면할 때 나타나는 특별한 상황으로 간주된다.


      한계상황에 대한 대처 방법

      1. 자유로움과 책임의 수용 /  야스퍼스는 자유로움이 책임을 수반한다고 강조했다.
      한계상황에서는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자유로움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이를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2. 불확실성과 불안의 이해 /  한계상황에서는 불확실성과 불안이 더욱 두드러진다.
      야스퍼스는 이를 통해 진정한 존재적 경험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불확실성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한계와 존재의 무한한 가능성을 인식하게 되며, 이를 통해 성장과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다.

      3. 존재적 자기극복과 창조적 행동 / 한계상황에서는 존재적인 자기극복이 필요하다.
      야스퍼스는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창조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봤다.
      어떤 어려운 상황이라도 인간은 자신의 존재적 자원을 동원하여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4. 타자와의 상호작용과 소통 /  다른 이들과의 상호작용과 소통은 한계상황에서의 대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야스퍼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인간은 자아를 발견하고 확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상호작용과 소통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를 찾을 수 있다.

      5. 존재적 선택의 중요성  /  야스퍼스는 존재적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선택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자아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봤다.
      한계상황에서도 선택을 통해 인간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칼 야스퍼스의 관점에서, 한계상황은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를 이해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자유로움과 책임, 불확실성과 불안을 이해하며, 이러한 상황에서 자아를 찾아낼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살면서 열심히 해도 무언가가 너무너무 안되고 힘든 시기를 맞이한다.
      단순히 죽음이나 질병 이런것보다는 일적으로 혹은 인간관계적으로 바닥을 치는 힘든 때가 누구에게나 온다.
      바로 그것이 한계 상황이라할 때 인간은 한 번쯤 진지하게 자신과 삶, 존재 자체에 대해 심오한 탐색을 하게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러한 심오한 탐색은 곧 자유이며 또 자유로 가는 길이다.
      그 자유를 통해 한계에서 가능성으로의 전이가 일어나는 순간을 경험해 보고 싶다면 야스퍼스의 한계상황을 생각해보고 그에 대한 자신만의 대처법으로 한계상황에서의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역설을 맛보기 바란다.


      ‘한계상황(Grenzsituation)’은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인데, 극한상황이라고도 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변화시키거나 만들어가는 여러 가지 현실적 상황과 달리, 변화시킬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예를 들면 우리가 매일의 생활세계에서 겪는 꿈과 젊음의 좌절∙ 질병∙ 타인으로부터의 거절 등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스퍼스는 사람들이 한계상황을 맞아 어쩔 수 없는 벽에 부딪쳐 좌절함으로써 진정한 자기 자신을 각성하고 초월에 닿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존주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입니다.
      2차 세계대전을 겪기 전 까지 사람들은 인간의 합리성과 존엄성을 신뢰하여 인류가 계속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여 나갈 것으로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인간의 집단적인 광기와 야만성을 체험한 후 인류의 미래에 대한 그동안의 희망과 낙관이 무너지게 되었고 그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된 철학이 바로 실존주의 철학입니다.

      야스퍼스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정권으로부터 유태계 출신인 아내와 헤어지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기 때문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직을 박탈당했습니다.
      반면 자신의 친구인 하이데거는 나치에 적극 협력하며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총장으로까지 출세하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야스퍼스는 친구인 하이데거를 통해 ‘학자의 절개 혹은 변절’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상황’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실존의 과제’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사람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 즉 한계상황을 다음의 다섯 가지라고 합니다.

      1. 생로병사(生老兵死)
      . Birth, aging, illness, and death
      2. 고독(孤獨) Loneliness
      3. 방황(彷徨) Wandering
      4. 투쟁(鬪爭) Struggle
      5. 죄악(罪惡) Sin

      첫째, 생로병사
      -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다는 것, 사람인 이상 누구나 이 생로병사의 벽을 넘어 설 수 없습니다.

      둘째, 고독
      -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해도 고독하고, 자식을 낳아 길러도 고독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아도 고독합니다.
      인간인 이상 고독감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셋째, 방황
      - 실존주의에서는 끊임없는 방황도 인간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한계상황이라고 보았습니다.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거나 분명한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인간 내면의 모습을 지적한 것입니다.
      한 가지에 만족할 수 없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 방황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넷째, 투쟁
      - 인간은 둘만 만나도 다툼이 일어나는데 그것도 한계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에서 그리고 이 지구상에서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다섯째, 죄악
      - 모든 사람은 죄를 짓고 삽니다.
      인간은 숨을 쉬고 있는 한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성자처럼 산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역시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상황인 것이지요.

      칸트와 헤겔에 의하면 ‘이성’이 비록 시행착오를 반복하기는 하지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이성은 계속된 진보를 통해 완전에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야스퍼스는 “인간은 한계상황에서 비롯된 ‘좌절’을 통해서 비로소 이성의 진정한 한계를 자각하며, 그 좌절을 직시함으로써 ‘초월자의 세계’로 나아가 존재 실현의 길을 열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이 한계상황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가운데서도 초월자(절대자)를 향해 마음을 열고 나아감으로써 진정한 자기 존재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인간존재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왜 한계상황이 존재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한계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가?
      실존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휴머니즘적인 정치 저술가로이며 정신과 의사로도 활동했던 독일의 실존철학자인 칼 야스퍼스(1883-1969)는 자신의 철학을 <키에르케고르>와 <니체>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응답으로서 이해한다.

      ​그는 나치 정권이 자기 아내가 유태계 출신이라는 이유로 헤어질 것을 요구하자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직을 박탈당한다.
      그런데 자신의 친구 하이데거는 오히려 나치에 적극 협력하며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총장으로까지 출세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신과 하이데거의 경우에서처럼, 학자의 절개 혹은 지식인의 변절이라고 쉽게 속단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상황>이 있음을 절감하고 이를 <실존의 과제>로 발전시키게 된다.

      1. 한계상황(Grenzsituation)  /  야스퍼스가 지적한 <한계상황 Grenzsituation>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앞에 섰을 때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일종의 벽 같은 것이다.
      그 구체적인 예로는 <죽음>과 <투쟁>, 그리고 이에 관한 <고뇌> 등을 우선 생각할 수 있다.
      아울러 우리가 매일의 생활세계에서 겪는 꿈과 젊음의 좌절, 질병, 타인으로부터의 거절 같은 것 등도 그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한계상황 앞에 섰을 때, 인간은 대체적으로 도피하려 하거나 현실에 눈을 감아버림으로써 자기 존재가 상실되는 길로 빠져든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이 그와 같은 한계상황 가운데서도 진지하게 그 과정을 성찰하면, <하나 뿐>이며 <한 번 뿐>인 <자기 존재의 자각>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야스퍼스의 개인적 삶에서, 확실히 한계상황에 처한 인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나치에 협력하기를 거절하고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유태계 부인과 결별하지 않았다는 삶의 진지함이 그가 말하는 한계상황의 전부를 의미하거나 그의 실존철학의 내용을 확실히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한계상황>은 이런 상황에서의 좌절을 직시함으로써 <초월자의 세계>로 나가려는 태도이다. 야스퍼스는 이 세계에는 결코 합리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며 <초월자>를 강력히 요청한다.

      잘 알려진 대로 20세기에 인류가 겪은 대부분의 비극은 <이성의 기획>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나치의 유태인 대량학살은 <가스>를 통한 살상이라는 과학적 산업 형태가 주조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원자폭탄은 태평양의 군도에서 일본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는 미군 병사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과학적 성과의 주도하에 기획, 투하되었다. 즉 지난 세기의 중요한 결정들이, 이와 같이 합리적인 결정이라는 이성의 테두리 안에서 비롯되었다.

      원래 칸트에 의해 시작되고 헤겔에 의해 완성된 <독일관념론>은 <이성>이 시행착오를 반복하더라도 이런저런 식으로 지식의 진보를 이룩해 가다 보면 진리의 최종 형태인 객관적인 <물 자체 Dinge an Sich>까지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즉 이성은 진보를 통해 완전에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반해 야스퍼스는, <이성적 세계>와 <비합리적인 세계>는 서로 단절되어 있어서 나치시대와 같은 <부조리>와 <비합리적인 존재>의 해명을 위해서는 다른 차원의 학문적 작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인간이 이성을 통해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전제이다. 오히려 인간은 한계상황에서 비롯된 좌절을 통해서 비로서 이성의 진정한 한계를 자각하며, 아울러 존재 실현의 길을 열 수 있다.

      야스퍼스는 자신의 실존사상 전체를 나타내는 첫 번 저서인 <철학 1932>에서 <세계가 모든 것>이며 <과학적 인식이 확실성의 전부>라고 하는 소위 <세계 내재적>인 기존의 학문적 인식이 가지는 한계를 통렬이 비판한다.

      2. 실존(Existenz) / “나는 학문을 통해 나 자신의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의 내부에서만이 나 자신에 대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철학의 과제는 그것 보다 <세계>로부터 <초월자>에게로 초월해가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야스퍼스의 주장은 <실존>의 과제로 파악된다.

      야스퍼스에게서 <실존>은 우선 <자기 존재>로서 본질적으로 자아를 형성하는 모든 것이다. <인간 실존>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죽음>, <투쟁>, <고통> 그리고 <죄>와 같은 <한계상황>에 인간을 가두어 두고 스스로 절망하게도 하지만 아울러 <초월자>에게 시선을 돌리게 함으로써 <본래적 자기존재>가 되살아나게도 한다.

      < 초월>은 실존적 자유의 근원이자 가능성이다. <실존>은 <초월>에서 방향을 찾는다. 즉 인간은 한계 상황 가운데서 <외적 생활 조건>에 전면적으로 의존해 있는 자신을 깨트려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올 수 있음이 명백하다.

      인간은 <현존재>로서 자신이 설정하지 않은 자연적, 문화적, 역사적인 기존의 제약에 묶여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자기 자신이 본질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 결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야스퍼스가 말하는 <실존>은 혼자서는 자기 실현에 도달하지 못하고 <타자>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 <인간의 의사소통>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실존의 의사소통> 양태 중의 하나가 <사랑의 투쟁 Liebender Kampf>이다. <투쟁>은 인간이 겪을 수 밖에 없는 한계상황이어서 누구를 막론하고 그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적대적 투쟁>을 <사랑의 투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자유가 부여되어 있으며, 이의 실현을 통해서 보편적 진리 형태가 드러난다. 즉 <실존간의 내적 평화>를 통해서 <외적 세계평화 조건>의 달성도 가능한 것이다.

      3. 포괄자 Umgreifende

      인간은 원래 칸트가 말한 대로, 세계 안에서 주관일 뿐만 아니라 아울러 객관적 존재이기도 하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주관으로서의 인간은 실존으로서, 현존재로서, 의식일반으로서, 정신으로서, 또한 현존으로서의 <포괄자>의 양태로 존재한다. 아울러 이 인간에 맞서 있는 대상으로서의 <세계>와 <초월>이 객관적 <포괄자>로 상정되어 있다.

      포괄자의 양태는 다음과 같다.

      1. <현존>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 내에서의 나의 삶이다.
      <존재>를 위해서는 <현존>이라는 <경험 공간>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2. <의식 일반>은 보편 타당하고 객관적인 사유의 매체이다.

      ​3. <전체>로서 이해되는 <정신>은 <나 자신>이기도 하다.

      ​4. 존재하는 모든 것이 드러나는 <대상 공간>으로서의 <세계>가 <정신>에 맞서 있다.

      ​5. <포괄자>의 이 같은 내재적 양태들은 <실존>과 <초월>로 채워진다.

      ​6. <초월>은 <포괄자의 포괄자>로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고 부른다.

      ​7. <초월>은 <실존>에 의해서만 경험될 수 있고 <내재>는 <초월>을 향해 더욱 자신을 드러낸다.

      ​이 모든 통합된 진리를 추구하는 힘은 여전히 <이성>에게서 비롯된다.

      ​이와 같은 <포괄자>의 모든 양태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즉 각 양태들은 다른 양태들에 의존하는 데서 진리를 생산한다.
      그러나 여러 양태 중의 하나가 고립되면 그 가운데 <비진리>가 생겨난다.

      4. 마무리하며 /  야스퍼스가 이와 같이 인간이 한계상황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가운데서도 초월을 향해 마음을 열고 나아감으로써 진정한 자기 존재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언뜻 보아 <케에르케고르>와 <니체>의 정태적인 <실존 조명>과 유사한 주장을 펴는 것 같지만 이미 언급한 실존의 사귐형태(의사소통)와 적대적 투쟁을 사랑의 투쟁으로 바꿀 수 있는 자유가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다고 강조하는 데서 그의 철학은 사변이 아니라 즉 실존에 대한 탐구 를 사회변혁과 인간 구원의 역동적인 에너지로 승화하려 했음을 확신하게 된다.

      벧엘의 하나님(창세기 27:15∼17)

      모태신앙인 야곱이 벧엘에서 겪은 경험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다신에서 유일신 사상으로 가치관이 바뀌게 되는 중요한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죽이려고 하자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다 광야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됩니다.
      강도의 위험, 맹수의 위험, 그리고 장래에 대한 두려움과 부모를 떠난 어린 청년이 쉽게 잠들 수 있었을까요?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겨우 잠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돌베개는 바로 고난의 인생여정을 의미합니다.
      돌이 얼마나 딱딱합니까?
      물론 성경에서 돌은 하나님, 혹은 예수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보다 바로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며 겪는 고난과 시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며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절망의 나락, 즉 앞이 안보이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위기들을 겪게 됩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은 밤에 잠이 오지 않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다고 고백합니다.
      목회자인 저 역시 살아오며 너무 고민하고 슬퍼하여 위출혈을 여러 번 경험하고 정말 잠 못 이루는 밤을 여러 번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야곱이 처한 상황은 바로 그걸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어두움의 정점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말했듯 신을 만날 수 있는 ‘한계상황’인 것입니다.
      이처럼 한계상황에 이를 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어쨌든 야곱도 바로 그런 상황에서 힘들게 잠들다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가 잠든 곳으로부터 하늘에 사닥다리가 닿았고 하늘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천사는 오르락내리락하며 자신과 하나님 사이를 교통하였습니다.
      야곱은 깜짝 놀랐습니다.
      꿈속에서 보니 하나님이 고향 동네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계속 따라오셨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신관은 각 민족마다 지배하는 신이 있고 그 신들은 그들의 영토를 통치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말로만 들었던 자신들의 부족신 여호와가, 바알의 영토까지 따라오셨고 바로 그곳도 통치하신다는 것을 꿈속에서 보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러면 바알은 가짜인가? 아니면 우리 여호와 하나님에게 쫓겨났나?’ 바로 그 순간 야곱의 신관과 신앙이 바뀌게 됩니다. 다음의 고백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창 28:15∼17)

      야곱은 잠에서 일어나자 그곳 이름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엘’은 바로 히브리어 ‘알렙’에서 왔으며 알렙은 힘센 자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을 말하고 그분이 바로 우주의 가장 힘센 분이십니다.
      그래서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따라다니시며 눈동자처럼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국경이 없습니다.
      바로 전 우주가 바로 그분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28: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오늘은 가나안 땅에서 하란 땅으로 가는 야곱에 관하여 성경 말씀을 풀어 보겠습니다.
      이 사건의 내용은 창세기 28장 10~22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말씀인데 대략 적인 줄거리를 요약하면 야곱이 가나안 땅에서 형에서의 장자의 명분을 어머니 리브가와 합동하여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가 받아야할 축복을 동생 야곱이 받아 형 에서에게 쫓겨서 하란 땅 라반 외삼촌의 집으로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보내는 사건이며 리브가가 에서의 분이 사그라질 때 까지 피신시키는 내용이 기록 되어있습니다.

      야곱이 하란 땅으로 가는 도중에 날이 저물어 벧엘 (하나님의 집) 이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유숙 하게 되는데 그 밤에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셨고 야곱이 아침에 자고일어나 자기가 베고 잤던 돌을 아침에 기둥으로 세워 기름을 붓는 사건입니다. 이정도만 성경을 보지 않고 줄거리를 설명하면 아마 성경을 많이 알고있는 사람으로 평가 받을수 있을 것입니다. 보통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이런 원리로만 야곱의 벧엘 사건을 알고 있는 것이 신앙인들의 일반적인 상식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신구약 성경 말씀은 이 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중심되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벧엘 사건이 야곱이 주체가 되어 있을지라도 반드시 우리는 예수그리도와 연관을시켜 깨달아야 이사건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알게되고 이 사건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는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말씀을 많이 들어도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이 말씀이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 전체에 하신 말씀입니다. (요5:39) 너희가(현재 신앙인들)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성경 말씀이 예수그리스도로 깨달아지지 아니하면 영생 얻지 못함) 성경을 상고하거니와(아무리 연구해도 예수님을 모르면 허사라는 것)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성경 전체의 기록된 말씀은 예수님 자신에 관한 내용 이라는 것)

      그럼 오늘 본문 말씀을 한 단어 한단어를 해석하여 풀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세상 해석과 완전히 다른 방향의 신비한 내용의 말씀을 경험 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럼 본문말씀을 한 번 더 인용 하겠습니다. (창28: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성경에 등장하는 우리가 말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세 사람은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상징적인 그림자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그림자는 바로 하나님의 상징적인 그림자입니다.

      아브라함은 구약 하나님을 상징하고 이삭은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실 예수님의 그림자이며 야곱은 오순절날 다시 오실 성령님의 예표적인 그림자입니다. 세 사람을 다 설명 할려면 엄청난 시간이 소비될 것입니다. 이 내용에 관하여는 다음에 시간이 나는대로 자세하게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야곱이 성령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면 야곱이 벧엘에서 유숙하는 이 사건속에 예수님과 직접적인 사건이 연결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야곱은 예수님을 예표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야곱이 가나안 땅 아버지 이삭의 집에서 하란으로 가는 사건은 가나안땅은 하늘나라를 상징하며 이삭은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상징이며 어머니 리브가는 성령님을 상징하며 야곱은 하늘나라에서 이 세상으로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이삭에게 축복의 안수를 받는 내용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축복의 말씀을 가지고 이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하나님의 장자는 마리아 몸속에서 먼저나신 율법의 예수님이 아니시고 두 번째 하나님의 몸으로 거듭나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장자이기 때문에 뒤에 태어난 야곱이 장자의 축복인 성령 세례를 이삭에게 받는 것입니다. (마12:18)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한 곳을 더 참고 하겠습니다. 아래 구절에 육신의 율법의 예수님과 복음의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습니다.
      (롬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럼 결론적으로 하란땅은 이 세상을 예표 한 것이고 라반은 사단의 상징이며 라반의 두 딸과 딸들의 종 실바와 빌하 네 여자가 야곱의 아내가 됩니다. 이 뜻은 넷 숫자는 동서남복 사방에 있는 신부 믿음을 지킨 처녀들이 마지막 심판날 성령 그리스도의 아내가 되어 가나안땅인 하늘나라로 데리고 들어가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20년 동안 종살이는 두 딸을 위하여 십 사년은 성령이 오시기전 율법시대 칠칠절 49일의 상징이며 짐승들을 위한 6년 또한 성령이 오시전 율법의 숫자인 천지 창조의 숫자인 것입니다.

      넷 아내들은 결론적으로 오늘날 이 땅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을 신부로 예표하신 것입니다. 이정도 해석이 되면 어느정도 사건의 윤곽이 영적으로 잡혀지질 않습니까?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문맥적으로 이 말씀을 그대로 해석하면 우리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내용이 되어버립니다. 성경이 이 세상에 남아있는 이유는 우리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말씀이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본문 첫 단어입니다. 아침에 일찍이 성경이 증거하는 아침은 무덤 속에서 새벽 아침에 부활하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아침에 일찍 부활 하셨습니다.

      다음단어입니다. 일어나 일어났다는 단어는 누워 죽어 계시든 율법에 예수님이 주일날 새벽에 부활하셔서 일어나실 것을 상징 하신 것입니다. (계22:16)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계속해서 성경은 우리에 증거합니다. (베후1: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위에 구절들이 아침에 일찍 부활하실 예수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증거 하신 것입니다. 베개 하였던 돌을 가져 신비한 내용이 숨겨져있는 비밀입니다. 야곱이 베개한 돌은 무덤속에 죽어계시는 율법의 예수님이 십니다 베게는 누워 있습니다 벤엘의 어두운 밤은 예수님이 해가 질 무렵에 죽은 시신이 무덤속에 들어가 캄캄한곳에 누워 장사되어 있는 장면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돌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시 118: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여기 소개하는 건축자의 버린돌은 야곱이 베고잔 베개를 상징합니다.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에게 합동하여 십자가에 버려진 예수님이십니다. (행 4: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계속해서 다음 소절입니다.
      기둥으로 세우고 기둥으로 세웠다는 것은 죽어 계시든 예수그리스도께서 아침에 부활하셔서 기둥으로 세워지는 장면입니다.
      구약성경 출애굽기와 신명기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두 돌판을 깍아 다듬어가지고 아침에 일찍 시내산으로 가지고 올라오라는 사건이 바로 예수님 부활사건입니다.
      결론적으로 버려진 돌은 십자가에 못박은 율법의 예수님이 십니다.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예수님이 삼 일날 새벽에 무덤 속에서 성령 세례를 받는 사건입니다.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붓는 것은 기둥은 예수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구약시대 때에 광야생활 사 십년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 하신분이 바로 오순절날 오실 성령의 말씀이 이 땅에 성령 받은 사람들을 말씀으로 인도 하실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상으로 우리들에게 미리보여 주신 것입니다.
      광야는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있는 이 세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모세는 율법의 예수님의 상징이고 모세를 대신한 두 번째 인도자인 여호수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모세는 가나안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론이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율법에 장사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하늘나라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오직 여호수아의 실체가 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데리고 가나안땅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위에 라는 뜻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무덤속에서 성령세례 받으실 장면을 미리 보여 주실 때에성령이 비둘기 형체로 그 위에 임합니다.
      그리고 오순절날 성령도 일백 이십명 위에 임합니다.
      돌 기둥 위에 야곱이 기름과 전제 부은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무덤 속에서 기름부음을 받는 장면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기름은 성령의 말씀입니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인류 최초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이 말씀이 기름부음을 받는 것입니다 (눅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이 내용의 말씀은 오순절 성령 사건입니다.
      저녁 먹은 후 라는뜻은 오순절 성령이 저녁때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신 그 장소에 저녁때에 오실 것을 미리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은 피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계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흘리신 피는 오순절날 오실 성령의 말씀에 그림자입니다. 성령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서 깨달아 질 때에 내 속에 사단이 바깥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하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바로 피의 실체이신 성령에 말씀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참고(엡2:13) 이제는(복음시대) 전에(율법시대) 멀리 있던 너희가(율법시대는 성령이 오시지 않았기에 말씀과 만날 수 없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성령의 말씀과 함께)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리스도는 부활하신분이 십니다. 여기에 신비한 비밀이 숨겨 져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는 2019년 동안 하늘나라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시는 또 채찍 맞고 고통 속에 다시 피흘러 죽는 분이 아니십니다. 자 그럼 여기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피는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이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피의 근본이 되는 말씀으로 사람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깨닫지 못하면 다 비밀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피가 말씀으로 관련되는 성경말씀을 참고 하겠습니다.
      (마26:27) 또 잔을 가지사 (잔은 성령을 가지신 예수님 자신) 사례하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심) 저희에게 주시며(오순절날 제자들 일백이십명 에게 주실것)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인류전체 중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성령의 말씀을 다 마시라는 뜻)

      (26:28) 이것은(포도주는 성령의 말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성령의 말씀이 사단의 죄를 이김) 많은 사람을 위하여(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전체)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오순절날 오실 언약의 성령의 말씀 새 언약) 야곱이 하란으로 가는 사건이 우리들이 단순한 세상적인 사람이 알고 있는 원리의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야곱을 통해서 예수님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장사 되셨다가 다시 부활하시는 사건에 관하여 말씀을 풀어 보았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1월 10일(금) 창세기 27-3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전(창세기 28: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and this stone that I have set up as a pillar will be God's house, and of all that you give me I will give you a tenth.

      고린도전서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בַּיִת 스트롱번호 1004

      1. 집.  2. 장막. 3. 왕하 23:7.
      발음 [ bayith ]
      구약 성경  /  2036회 사용

      전도서 5:1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하나님의 전
      - 이는 솔로몬 왕이 지은 예루살렘 성 안의 성전을 말하는 것 같다(왕상 6:1-38).
      성전을 본절처럼 '하나님의 전'(the house of God) 또는 '여호와의 전'(the house of the Lord, 왕하 6:37; 7:48) 등으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전의 지성소에 임재하시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고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같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시는 상징적인 처소를 정하신 것은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성막을 짓도록 계시하신 데에서부터 엿볼 수 있다(출 25:8, 2).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창 28:21~22)

      3.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꿈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음(창 28:10~22).

      21절.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게게 하시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거이요는 그렇게 하시면 라는 조건이 아니다.

      “평안”은 히브리어로“샬롬”인데“온전하다, 건전하다, 안전하다”을 뜻하는“샬람”에서 유래한 것으로“안전함, 건전함, 충분함, 평화, 평강, 친목, 화평, 형통, 건강, 안녕”등등을 말한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의 번영을 구하거나 빌 때(창 43:27, 출 4:18, 삿 19:20) 혹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화친할 때(수 9:15, 왕상 5:12). 또 누군가가 어떤 도시나 어떤 나라의 평안을 구할 때(시 122:6, 렘 29:7)사용했다.
      물질적인 번영이나(시 73:3) 육체적인 안전(시 4:8), 육체의 쉼, 근심 걱정 없음(창 15:15)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영적인 안녕도 배제하지 않는다.
      한편 이 말은 의와 진리와 항상 연합 한다(마 27:29, 28:9, 막 15:18, 요 19:3).

      본문에서 야곱의 이 간구는 문자적으로는“그리고 나에게 하나님이 되시고”로서 야곱의 상호 교환식 서원을 지지한 듯하나 전체 문맥으로 보아 야곱이 어떤 조건으로 하나님과 값싼 흥정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따라서 본절을 부연 설명으로 보아“여호와께서 내게 하나님이 되시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Hengstenberg).
      이 서원은 여호와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평생 섬기며 살겠다는 의지의 발로(發露)이자 신앙 고백이다.

      22절.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내가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야곱은 자기가 무사히 귀환 하게 된다면 이후에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이곳에 제단을 쌓겠다는 뜻으로 훗날 이 서원을 지킨다(35:7). 따라서 이곳 벧엘(5:14, 15)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임재하심을 뜻하는 기념 처소가 될 뿐만 아니라, 오는 세대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영적 예배의 장소를 상징하는 영원한 모형이 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역사적 사건을 교회와 연관지어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와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5)고 묘사하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십분 일”은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이란 전제가 붙어 있다.
      즉 내게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겸허한 신앙 고백의 행위이다.
      비록 야곱이 십일조를 바쳤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지만, 후에 세운 제단과 헌물이 그의 십일조 헌납을 암시한다(35:1~7).
      한편 야곱의 십일조 서원은 조부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른 것 임에 분명하며(14:20).
      후에 이것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삯으로 율법에 명시되어 있다.

      “반드시”는 우리말로 틀림없이, 기필코, 또는 꼭 한다는 말이다.
      영어로 surely(슈얼리)는“분명히, 확실히, 물론, 정말로, 틀림없이, 반드시, 거짓이 없이, 정녕히, 진실하게 대하는 태도가 친절하다”을 말한다.
      히브리어에서는 한 단어를 강조할 때 같은 말을 반복하는 말을 뜻하는“슈브”인데 문자적으로나 상징적으로 반드시, 기필코, 시작했던 지점으로“방향을 돌리다, 돌아서다, 돌이키다, 회복한다”을 뜻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벧엘의 사닥다리(창세기 28:10~22)

      이스라엘의 족장 야곱은 살던 곳 브엘세바에서 외가가 있는 하란으로 가다가 벧엘 들판에서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쓸쓸한 광야에서 밤이슬을 맞으며 곤하게 잠이 들었을 때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닥다리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 위로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광경을 보았고 그 위에서 제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펼치게 될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입니다.

      야곱이 본 벧엘의 사닥다리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나타내 주시는 계시의 환상이며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곳을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하였습니다(17절).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닥다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 한 것은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신령한 교제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 교회의 참모습입니다.

      이 후 야곱은 중동 천지를 유랑하는 나그네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언제나 그곳 벧엘의 환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곧 벧엘의 사닥다리 환상은 야곱 인생의 초점이었고 삶의 구심점이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삶의 원리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언약의 현장

      야곱이 벧엘 광야에서 본 환상 곧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닥다리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 자리에서 사닥다리 위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고 동시에 하늘로부터 선포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본문 13절에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약속에 앞서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셨던 것을 야곱을 통하여 실현하시겠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자손의 번성을 약속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시조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창 1:28).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선민의 조상으로 삼으시고 그들에게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자손이 번성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창 15:5).

      지금 야곱은 혈혈 단신으로 방랑자의 길을 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장래와 후손들에 대한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가 누운 벧엘을 중심으로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도 백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후손을 약속하셨고(창 15:4), 이삭도 결혼 후 이십 년 동안 자식이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쌍둥이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창 25:21). 야곱도 역시 하나님의 축복으로 열두 명의 아들을 두어 족장이 되게 하였습니다.

      2. 복의 기관이 될 것을 약속

      14절에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자손의 복을 약속하실 때 수적으로 많게 하는 것과 질적으로 우수한 민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2:17에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땅의 티끌」이나 「바닷가의 모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자손을 뜻하지만 다른 면으로는 사람들에게 밟히고 박해를 받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별」은 숫적으로도 무한대이지만 질적인 면에서 존귀하고 뛰어나게 된다는 축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14절). 창세기 12:2-3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 중에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약속은 그의 후손을 통해서 세상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게 하는 축복의 통로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훗날 모세가 율법을 반포할 때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고 하였습니다.

      3. 언제까지나 함께 하실 것을 약속

      15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집을 떠난 야곱이 가족이나 이웃과 격리된 채 삭막한 광야에서 홀로 내동댕이 처져있는 상태이고 보면 가장 절실한 것이 외로움과 내일의 불안을 해소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사닥다리 환상과 함께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지키시고 언제까지나 함께 하시겠다는 언약을 주셨으니 그로서는 최상의 기쁨이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후 야곱이 가는 길에는 수없이 많은 어려움과 난관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서가시며 그의 길을 열어주셨고(창 29:9-14), 그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저를 위험에서 건져내시며 더 안전한 길로 인도하여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창 31:42, 33:4, 35:1).

      Ⅱ. 서원의 현장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시고 장래의 비밀한 계획을 알려주실 때 이를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무한한 은혜요 축복이 됩니다. 그렇다면 자신도 하나님께 자기의 뜻을 나타내며 감사와 헌신의 서원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기 사닥다리의 환상이 있는 벧엘의 현장에는 야곱과 그 후손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고 이어서 하나님을 향한 야곱의 기도와 서원이 있었습니다.

      1. 감사와 감격의 표현

      16절에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고 하였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뜻밖의 장면을 목격하고는 너무나 큰 감격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17절에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그 사닥다리의 현장을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요, 하나님과 교통하는 관문이라고 믿었습니다. 18절에 보면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어떤 경우이든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와 환상의 은혜를 받게 되면 가장 먼저 감사하는 마음과 감격의 표시가 있어야만 됩니다. 그것이 때로는 찬송으로 기도로 또는 여러 가지 모양의 헌신으로 나타나지게 됩니다. 이와 같은 감사와 감격이 있는 사람이 언제나 자기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게 됩니다(롬 12:1). 이것이 성도의 예배적 삶이 되는 것입니다.

      2. 기도와 소원을 아뢰다

      20-21절에는 야곱이 자기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이나 구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신약의 야고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였습니다(약 1:5).

      여기 야곱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을 보면 지금 당장 자기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것들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시며 그의 가는 길을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의식주(衣食住) 문제는 가장 시급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요소입니다. 셋째는 저를 평안히 아비 집에 돌아올 수 있도록 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성도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역대상 4:10에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고 하였습니다.

      3. 헌신의 약속

      야곱은 하나님께 간곡한 소원을 아뢰면서 자기가 하나님께 할 수 있는 헌신의 약속을 드렸습니다. 21-2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때나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아버지께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와 같은 태도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의 신앙적 자세이기도 합니다. 여기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삶의 목표를 밝히는 것으로써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겠다는 뜻입니다(고전 10:31).

      또한 그가 하나님의 전을 짓겠다고 하는 약속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삶의 의지입니다. 야곱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로 가든지 항상 성막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제단 쌓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훗날 솔로몬에 의하여 건축된 예루살렘 성전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서약한 것도 역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약속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고 하므로써 하나님께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십일조가 율법으로 제정되기(레 27:30)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행위로 시행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Ⅲ. 은혜의 현장

      성도가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마주 대하게 되면 어떤 형태로든지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되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를 하게 됩니다.

      친구의 권유에 못이겨 따라 갔던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요 1:49). 이때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였습니다(요 1:51).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과 만남의 체험을 가지게 되는 것과 그 순간의 감격은 평생을 두고 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잊혀질 수 없는 은혜의 추억이 됩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도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고 하면서 그곳을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불렀습니다(16-17절).

      1. 시은소(施恩所)

      옛날 모세가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 때 십계명의 돌 비가 들어 있는 증거궤를 안치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을 지성소(至聖所)라고 부르는데 거기서 하나님이 모세와 만날 수 있도록 구별해 놓았습니다(출 30:6).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 거룩한 곳이며(출 3:5), 하나님과 대면하고 만나게 되는 것은 최상의 축복입니다.

      구약시대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성소를 사모하며 그 은혜를 그리워하였습니다. 시편 84:3에는 하나님의 성소를 참새의 집과 제비의 보금자리로 비유하였습니다. 그것은 저희가 항상 주의 얼굴을 뵈옵고 찬송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84:5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고 하였습니다.

      2. 회복의 은혜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던 야곱이 숙곳에 머물다가 그곳 추장의 아들에게 딸 디나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창 34:7). 이때 야곱의 아들들이 칼을 가지고 가서 세겜성 사람들을 도륙해 버렸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야곱은 눈앞이 캄캄하여 큰 공포에 떨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35:3에 보면 야곱이 가족을 모아 놓고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극심한 환난과 죽음의 고통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저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며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시 17:6).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속에 품어 주듯이 세상사에 지치고 피곤해진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은혜의 날개 아래 품으시고 새 힘을 얻도록 회복시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룻기 2:12에 보면 보아스가 룻을 향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룻은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모압 땅에서 가족과 재산을 잃고 패가 망신한 나오미의 가정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것을 하나님의 날개 아래 들어왔다고 보았고 그 결과 상상할 수 없는 축복으로 회복되었습니다(룻 4:18-22).

      3.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삶의 중심

      벧엘의 사닥다리는 이상적인 그리스도 교회의 모형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 곧 교회를 뜻하며 거기 나타난 사닥다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계시와 축복의 언약이 주어집니다.
      동시에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와 찬양과 예배로 헌신을 약속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신령한 삶이요 비길 데 없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비록 광야 같은 세상에서 방랑자의 생활을 할지라도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성소가 있고 주님과 만남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눈물 골짜기를 통과하면서도 깊음의 샘과 이른 비의 은택을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시 84:5).

      이런 것이 이상적인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삶의 중심이요 이상향(理想鄕)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시편 84:4)

      여기에 나오는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인가?
      하나님의 성전에 나가 경배하는 모든 백성들인가?
      둘 다 가리키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복되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주의 성전에 나가는 자들만 복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복이 있는 자들은 주의 성전에 나가는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들은 복된 자들이고, 이런 자들은 주의 성전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늘 하나님을 찬송할 것입니다.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늘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억지로 찬송을 불러서는 안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자기 자신을 뽑내기 위해서 찬송을 불러서도 안됩니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찬송을 불러도 안됩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이고 신앙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가수처럼 잘 부르지 않아도 됩니다. 음정 박자가 틀려도 상관없습니다.
      물론 음정 박자를 잘 맞춘다면 더 아름다운 노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 신앙에서 드리는 찬송이면 됩니다.
      성도는 항상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을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복을 노래합니다(5-12)

      이제 시인은 하나님과 동행한 자의 복을 노래합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5)

      원문은 ‘복이 있다 주님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이 있는 자는 주님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을 사모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구원받은 자들의 태도입니다.
      신앙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은 주의 성전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사고방식, 생활 방식을 그리스도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 신앙의 태도입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제 시인은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고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준다고 고백합니다(6).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날 것입니다(7).

      눈물 골짜기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주어지는 고난과 고통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장소를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샘이 있다는 말은 1차적으로 빗물을 저장해 두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작은 웅덩이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여행자들의 샘이 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고난의 인생 여정 중에서도 진정한 기쁨을 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지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무한한 은총입니다.

      이른 비는 가나안 땅의 파종기인 9-10월 경에 내리는 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복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길을 가는 자들에게 신령한 복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힘을 얻는다는 말은 영적인 힘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면 영적인 힘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날 것이라는 말은 당시 순례자들이 긴 순례의 여행을 하여 성전에 도달하게 되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기쁨을 말합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하나님 앞에서 얻는 기쁨, 영생의 기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시 84:8-9)

      만군의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자, 통치자라는 의미이고,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유다의 조상 야곱을 부르시고 그에게 언약을 주시고 신실하게 그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방패이신 하나님은 전쟁에서 자신의 목숨을 보호해주는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보호해주시는 생명의 보호자라는 의미입니다. 주의 기름 부으신 자는 왕을 의미하는데 이는 장차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얼굴을 살펴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주의 궁정, 다른 곳은 대조를 나타냅니다. 또 한 날과 천 날은 대조를 이룹니다. 또 악인의 장막과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도 대조를 이룹니다. 이는 비록 눈에 보기에 비천해 보이나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것이 기쁘고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성전의 문지기는 가장 비천한 신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11-12절에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11-12)

      다시금 강조합니다.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합니다. 원문은 ‘만군의 여호와여 복이 있다 주님께 의지하는 자는’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복이 있는 자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이것이 참 구원받은 복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받은 복된 자는 하나님을 늘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의지하는 자는 분사형입니다. 즉 계속해서 의지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결론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복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리스도만 신앙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 믿음이 변함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이사야 2:1-4)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세상은 가치 있는 것은 환영을 하고 가치 없는 것은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해서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가치 있고 없고의 판단 기준이 자신을 중심으로 되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가치 있는 것이고, 이익이 되지 않고 손해가 되는 것은 가치 없는 것이고 버려야 할 것으로 간주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치관 속에서 교회를 바라보고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교회도 진리의 판단 기준을 내 교회에 이익이 되고 안되고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나를 유익 되게 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진리가 세상적인 가치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교회에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진리를 따르고 진리대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접해야 하고, 무시를 당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더욱 어려운 것은 진심으로 진리를 깨닫고 그 말씀대로 세상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찾아보기가 힘들고 대다수의 교회가 진리 아닌 것을 진리로 내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약하고, 비진리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강하다는 것입니다. 약자는 강자에게 눌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기 때문에 결국 이 땅에서는 진리가 비진리에 눌리고 공격당하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진리임을 알기 때문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곧 참된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생각합니다.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내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싫어하고 멀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참된 신자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에 눌린다고 해도 결코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에게만 모든 가치를 두고 사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가치가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에게 가치를 두게 되면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해야 하고, 눌려야 하고, 어렵고 힘들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에 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하는 것이 잘하는 일인가에 대한 의심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가치 없는 인간이다.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지옥갈 인간이었는데 남들이 욕한다고 그것을 못참고 원망을 하는가?'하면서 모든 것을 견디어 갈 때 그리스도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포기하여도 결코 버릴 수 없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는 모든 것이 판가름 날 것입니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였는가가 드러나게 됩니다. 참된 것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무너지고 사라지게 됩니다. 그때를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힘들다고 진리를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절에 보면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 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고 합니다. 말일이라는 것은 마지막 때라는 의미입니다. 마지막 때에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서고 작은 산 위에 뛰어난 것이 있는데 그것을 여호와의 전의 산이라고 합니다. 즉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만이 모든 산위에 굳게 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가 피해야 할 곳은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입니다. 이곳으로 피할 자는 이곳을 아는 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것을 알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는 자가 따로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만이 여호와의 전의 산으로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전의 산이란 오늘날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3절을 보면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전을 야곱의 하나님의 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이삭을 속여서 축복을 받고 에서를 피하여 도망을 칠 때 꿈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곳을 '하나님의 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때 야곱은 하나님의 전에 대해서 오해를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며 자기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어 주실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신 것은 그에게 참된 복이 무엇인가를 알리고 장자란 섬기는 자임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야곱은 자기 인생에 개입하셔서 간섭하신 하나님을 통해서 복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에서에게 절함으로 장자의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전이란 우리에게 세상에서 참된 것이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해서 가르치는 말씀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은 성전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성전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성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을 때 그것을 성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전이 있는 여호와의 산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지고 말씀이 다스리고 있는 그 자리를 여호와의 산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산에서 마지막 때까지 남는 신자는 세상의 다른 것에는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말씀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을 향해서 올라가며 '이것이 진리의 말씀입니다'하면서 참된 말씀을 증거하는 자입니다. 여호와의 산은 참된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다스림 받는 그 자리가 여호와의 산입니다.

      신자가 여호와의 산에서 말씀에 의해서 다스림 받을 때 다른 산은 작은 산으로 보여져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마지막 때에 여호와의 산이 모든 작은 산 위에 굳게 선다고 합니다. 여기서 작은 산은 무엇을 말합니다. 말씀에 의해서 다스려지지 아니한 모든 것을 작은 산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이 없는 것을 작은 산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아니한 모든 것은 마지막 때에는 모두 작은 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작은 산에 불과한 것은 아주 큰산으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씀에 의해서 다스려지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큰산인지를 판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높은 자리에 앉는 모든 것이 작은 산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을 큰산으로 여기며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고 헌금이 많아지고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작은 산에 불과한데 말씀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큰산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근심과 걱정으로 살아가는 이유도 큰산을 보지 못하고 작은 산을 큰산으로 여기며 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 모든 작은 산 위에 곧게 설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작은 산에 서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못견뎌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 있는 자들을 작은 산에 서 있는 자들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힘을 자랑하고 돈을 자랑해도 마지막 때에는 말씀 위에 서 있는 자가 굳게 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에 서서 세상을 바라봅시다. 작은 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생의 전부가 시집가고 장가가고 돈벌고 잘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산에 서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인생의 전부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작은 산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것을 자랑하고 내세운다고 그것 때문에 기가 죽거나 낙심하겠습니까? 오히려 작은 산에서 그것이 최고인줄 알고 자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사는 사람은 세상이 부럽지가 않습니다. 신자는 언제나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4절의 말씀과 같이 경쟁과 다툼이 아니라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보여주며 살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이 은석교회가 말씀이 다스리는 여호와의 산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도 여러분 각자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전(역대상 22:1- )

      성전을 건축할 장소가 정하여졌습니다(1절).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그리고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고백으로써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이라” 고 다윗은 말하였습니다.
      만일 성전이 하나님을 위해 세워지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친히 장소를 택하는 것이 합당한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땅이 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택하신 그 터전은 이방사람들 사이에도 복음의 교회를 세우게 되리라는 것을 나타낸 행복한 전조가 되었습니다(행 15:16-17).
      그 땅은 타작마당입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는 바로 그의 마당이며 그의 타작물이며 또한 “그의 마당의 곡식”이기 때문입니다(사 21:10).
      그리스도는 그의 마당을 온전히 정결케 하기 위해 그 손에 키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집은 바로 제단을 위해 세워질 집이었습니다.
      성전이란 바로 제단을 위해 세워진 집입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오래전부터 이미 제단은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이미 다윗 때부터 조직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장차 이스라엘의 수도가 될 예루살렘으로 옮겨다가 장막에 모시고(대상 16:4) 그 앞에서 섬기기 위해 제사장들, 레위인들, 성가대 악대를 조직했습니다(대상 16:4, 25:1-7).
      그러나 나단에게 성전 지을 의사를 표시하자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그것을 짓게 하려고 했습니다(대상 17:1-12). 다윗은 성전을 위해 많은 돈과 재물을 그 아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대상 18:5-13, 22:6-17).
      아버지의 유물과 자기의 모든 것으로 솔로몬(주전 960-922)은 그의 치세 제4-11년간에 아담한 성전을 건립했습니다.
      그것은 헤롯 성전보다 적으나 아름답고 화려한 건물로 처음에는 작은 예배당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일반의 예배처소는 아니었고 대제사장도 1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지정소에 들어갔습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도 기름, 향, 떡을 보급하는 정도였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에게는 성전 구내가 전부 집이었습니다(시 66:13).
      솔로몬의 성전은 400년을 못갔습니다.
      주전 587년에 느부갓네살이 성전을 불살랐습니다.
      11년 후 유다의 젊은 왕 여호야긴과 예루살렘 시민들을 바벨론으로 잡아갈 때(왕하 24:10-16) 성전 보물도 (25:13-17)다 옮겨 갔습니다. 시바의 여왕도 솔로몬의 성전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놀랐습니다(왕상 10:4).
      솔로몬 성전은 베니게 직공들이 지었는데 베니게, 가나안, 애굽, 신전들의 영향을 맡이 받았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좁은 정방형으로 동편에는 문이 있고 서편에는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길이가 약 33.33m, 넓이가 9m 가량이요 약 3m 높은 지대 위에 서 있었습니다.
      히브리, 베니게 노동자 수천명을 풀어 흰 석회석을 갈아서 아름답게 지었습니다(왕상 5:6, 6:7).
      내부는 레바논 백향목으로 목수들을 시켜서 아름답게 장식했습니다(6:5-36, 5:6).
      출입구로 올라가는 층계는 10계단이 있었고 층계 좌우에는 상징적인 두 기둥(야긴과 보아스)이 벽과 따로 서있었습니다.
      좁은 출입문(10×4.5m)은 백향목으로 짰고 그 위에 그룹,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핀 꽂은 금으로 박았습니다(왕상 6:18-35).
      문지기가 있었습니다(시 84:10).

      1. 성전은 3부로 나누었습니다(울람)
      (1) 울람-제사장이 들어오는 입구의 홀
      (2) 헤칼-본관 곧 성소인데 붙박이 교창에서 빛이 스며듭니다(왕상 6:4).
      성소는 높이가 약 13.63m 넓이가 약 9m 길이가 18.2m였습니다.
      돌로 마루를 깔고 그 위에 백향목으로 덮었습니다.
      성소 내부는 백향목으로 두르고 지붕은 백향목 서까래에 마루로 덮었습니다(왕상 6:9).
      백단목 벽기둥들이 운치를 더 했습니다(10:12).
      기둥에는 생명나무를 조각하고 금으로 입혔습니다(16:21).
      (3) 드빌 - 지성소로 올라가는 층계 앞에 백향목으로 만든 작은 향단이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창도 없고 굴 같은 9m정방형 방인데 주님의 거하시는 방이었습니다(대하 3:8-13).
      지성소는 성소보다 마루가 높으며 4.5m 높이 감람나무로 만들고 금으로 장식한 두 그룹이 법궤 위에 마주 섰습니다.
      그룹은 베니게에서 들어온 날개 돋힌 스핑크스(여자 머리에 사자 몸)거나 베니게화한 천사신이었습니다(겔 9:22-25).
      성전 남서북삼면에 있는 이층방들은 창고실로 썼는데 올라가는 문들과 좁은 충계가 안과 밖에 있었습니다.

      2. 성전 비품 성전 비품은 두로의 건축 기술자 허람(그 어머니는 출애굽 납달리 족속)이 많이 만들었습니다.
      성전 앞 마당 우편에는 큰 번제단이 있었는데 어떤 이는 그것을 큰 바위 위에 만들어진 것이라 합니다(겔 43:14).
      또 어떤 이는 대하 4:1에 묘사한대로 만든 것인데 층계있는 거룩한 탑 모양이었다 합니다.
      제단 4귀에 뿔이 있었습니다.
      제단 남쪽에는 큰 놋으로 부어만든 “바다”가 있었는데(대하 4:1) 그 두께가 1m 직경이 4.5m 고가 약 2.25m 되었습니다.
      그 가장자리는 백합꽃처럼 아름답게 굽었습니다(왕상 7:23).
      놋으로 만든 12마리의 황소등에 놓였는데 3마리씩 4방(춘하추동의 암시)을 향했습니다.
      그 황소들은 모양 뿐 아니라 생식력의 상징인 동시에 비를 주는 신으로 중동에서 널리 믿는 바알에도 관련되었습니다.
      거룩하게 생각한 동물들이 왕의 보좌나 거룩한 것을 바친 것은 옛적 철시대에 흔히 있던 일이었습니다.
      그 놋바다는 원래 제사장들이 깨끗케 하는 의식에 쓰려한 것보다 물이나 바다는 생명의 근본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3. 성전 안에 불박이로 놓여 있던 것은
      (1) 후대 제사 규칙에 의한(레 24:1-4, 민 8:1-4) 7촛대의 전신인, 10개의 금촛대 (왕상 7:49, 대하 4:7) 이 촛대란 사실, 3다리 달린 동경(등잔)으로 그 위에 불심지 7있는 등잔을 놓은 것이었습니다.
      성막에는 촛대가 하나뿐이었습니다(출 37:17).
      제 2성전에도 하나였는데 안디오커스 에피피네스에게 도적맞고 마카비 시대에 다시 만들었더니 주후 70년에 로마군대가 가져갔습니다. 그 모형만은 티도 개선문 조각에서 볼 수 있습니다.
      (2) 진설병 상을 12개 만들어 떡 12개를 차례로 놓을 때 상도 차례로 하나씩 썼습니다.
      이 떡상은 왕상 6:20-22의 제단과 일치하며 안식일마다 새 떡으로 바꾸어 놓고, 전 것은 제사장들이 먹었습니다.
      (3) 움직일 수 있는 향단은 금으로 장식했으며 뿔이 있었습니다.

      4. 솔로몬 성전은 초막절에 봉헌되었습니다(왕상 8:12)
      솔로몬의 기도는 넉줄의 시였으나 주전 550년경의 포로 후의 부연하여 봉헌기도를 유창하고 가장 높은 것이었습니다.
      그 내부는 때를 따라 변했을 것입니다.
      르호보암 때(주전 922-915) 애굽 왕 시삭이 노래했으며 (왕상 14:25) 악한 여왕 아달야(주전 842-837)가 바알 예배를 성전에서 행했습니다.
      아하스(주전 735-715)는 성전 내부를 개조하고 제단도 고쳤습니다(왕하 16:10-18).
      히스기야(주전 715-687)는 모세의 율법의 놋뱀을 버렸습니다(왕하 18:4).
      므낫세(주전 687-642)가 앗수르 방식을 따라 성전을 주력했더니(왕하 21:4) 요시야(주전 640-609) 왕이 연보궤에서 율법책을 찾은 후 그것을 폐지했습니다(대하 34:14).
      솔로몬 때 시작한 예루살렘성전 중심주의를 강화하여 지방성소들을 폐지하고 그 제사장들에게 예루살렘에서 할 일을 주었습니다(신 12:2-28).


      하나님의 전(God's house)과 십일조(tenth)는 야곱의 서원이었습니다.

      왜 야곱이 이런 서원을 했을까요?

      십일조는 구약의 산물이므로 은혜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의무가 아니라고 강조하는 주장을 자주 듣게 됩니다.
      그러나 나는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야곱처럼 내가 받은 은혜가 너무 귀하기 때문에 그 은혜에 대한 감사와 믿음을 위한 최소한의 고백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지만 육체의 몸을 유지하며 살아야 할 연약함 때문에 모든 것을 바치지 못하고 최소한의 것을 드림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간다는 고백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가족을 이루었고 가족들과 많은 가축을 몰고 고향 땅으로 돌아갈 때 예전에 형으로부터 빼앗은 장자의 축복을 생각하면 초조하고 불안했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던 길에 노숙하려고 돌을 베개로 삼아 자리에 누웠을 때 땅위에 세워진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는 신기한 꿈을 꾸게 됩니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난 후에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곳은 하늘의 문이며 하나님의 전" 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배게로 삼았던 돌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땅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루스(편도나무, 아몬드나무)"라는 땅에서 하룻밤을 잔 후에 신비한 꿈을 통하여 야곱은 그곳을 '벧엘'이라고 블렀던 것처럼 오늘날도 믿음의 사람은 두려움의 자리에서 능력의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만나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 야곱 이후에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이곳에 제단을 쌓겠다는 뜻으로 훗날 이 서원을 지킨다(35:7).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따라서 이곳 벧엘(5:14, 15)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임재하심을 뜻하는 기념 처소가 될 뿐만 아니라, 오는 세대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영적 예배의 장소를 상징하는 영원한 모형이 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역사적 사건을 교회와 연관지어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와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고 묘사합니다(딤전 3:15).

      십분 일
      -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겸허한 신앙 고백의 행위이다.
      비록 야곱이 십일조를 바쳤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지만, 후에 세운 제단과 헌물이 그의 십일조 헌납을 암시한다(35:1-7).
      한편 야곱의 십일조 서원은 조부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른 것임에 분명하다(14:20).





      1월 9일(목) 창세기 24-2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장자의 명분(창세기 25: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Then Jacob gave Esau some bread and some lentil stew. He ate and drank, and then got up and left. So Esau despised his birthright.

      장자의 명분(1062)

      베코라(bekôwrâh)  בְּכוֹרָה 스트롱번호 1062

      1. 초태생.   2. 느 10:37. 3. 창 4:4
      발음 [ bekôwrâh ]
      구약 성경  / 7회 사용
      관련 성경  /  첫 새끼(창4:4), 장자의 명분(창 25:31, 27:36, 대상 5:1), 처음 난 것(신 12:17, 14:23, 느10:36).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장자의 명분(베코라. bekôwrâh)"이란 "태를 열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로 사람이나 짐승의 '초태생'을 말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장자의 상속권"을 말하기도 합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의 처음 출생한 자가 갖는 특권과 책임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외적 특권(外的 特權)

      1. 아비의 뒤를 승계하여 가장이 되어 가문의 대소사(大小事)를 처리할 수 있는 주도권(창 27:1-45. 대하 21:3)
      2. 다른 형제에게 할당된 유산의 두 몫을 분배받을 수 있는 자격(신 21:15-17)

      둘째, 내적 특권(內的 特權) 

      1.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한 가정의 대표자로서 모든 일을 수행
      2. 언약 관계에서 영적 축복의 후계자가 되며, 또한 책임도 병행하는데 그것은 부친의 노후나 사후, 모친과 미혼 자매들을 부양해야 할 의무를 갖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대하여 "신앙의 명분(The responsibility of faith)"을 가진 자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향하여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본분과 책임과 의무를 바르게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명분이 무엇일까요?

      1.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라(고후 2:15-16)
      2.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라(고후 3:3)
      3. 세상의 본이 되라(벧전 2:9)
      4. 천국의 시민으로 살아가라(빌 3:20)

      이러한 명분을 바르게 감당할 때 비로서 하나님의 자녀된 본분을 드러낼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나를 세워가는 삶에 성공하는 승리의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리스도인의 명분(마태복음 5:13-14)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it be made salty again?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by men.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on a hill cannot be hidden.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라고 하셨을 때 세상이란 헬라 단어는 "게"라고 합니다.
      "게"라는 헬라 단어는 "땅" "지면"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땅의 소금, 지면의 소금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시대가 어지러운 것은 땅의 소금으로 지면의 소금으로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이 된 것처럼 신앙생활과 생활신앙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땅(게)의 소금

      γῆ, γῆς, ἡ 스트롱번호 1093

      1. 땅.   2. 흙  3. 지면
      발음 [ gē ]
      • I.  땅.
        • 1.  흙, 땅, [씨를 받아들이는~] 마13:5,8, 23, 막4:5,8,20,26,28,31, 요12:24, [비에 젖은~] 히6:7. [열매맺는~] 약5:7. [낭비된~] 눅13:7.
        • 2. 지면, 땅, 마10:29, 15:35, 25:18,25, 막8:6, 9:20, 14:35, 눅22:44, 24:5, 요8:6,8, 행9:4,8, 계12:16.
        • 3. 육지[바다의 반대로서], 막4:1, 6:47, 눅5:3,11, 요6:21, 21:8,9,11, 행27: 39,43,44, 지역, 나라, 행7:3,4,6. 지역적 의미에서 이스라엘, 마2:20,21. 게네사렛, 마14:34. 미디안, 행7:29. 유다, 마2:6. 스불론과 납달리, 마4:15. 유다, 요3:22. 가나안, 행13:19. 에집트, 행7:36,40, 13:17, 히8:9. 조국, 행7:3. ἡ γῆ [독립적으로] 팔레스 타인, 마27:45, 막15:33, 눅4:25.
        • 4. 지구.
          • a. 하늘과 대조되는, 마5:18,35, 6:10, 19, 16:19, 눅2:14, 21:25, 골1:16, 히1:10, 11:13, 벧후3:5,7,10. 땅에 있는 것들, 골3:2,5, 벧후3:13, 계21:1.
          • b. 사람이 거주하는 지구, 눅21:35, 행10:12, 11:6, 17:26. 사람, 인류, 마5:13, 10:34, 눅12:49,51. ἐπὶ τῆς γῆς: 세상에서[지상의 사람들 중에서], 눅18:8, 요17:4, 롬9:28, 엡6:3, 약5:5. ἀπὸ τῆς γῆς: 세상에서 부터[땅에서부터] 행8:33, 22:22, 계14:3.
      • 관련 성경 /  땅(마 2:6, 막 2:10, 행 1:8), 세상(마 5:13, 9:6, 막 9:3), 흙(마 13:5, 막 4:5), 뭍(막 6:47), 육지(마 4:1, 눅 5:3, 요 21:8),
                           지구(눅 21:35), 지면 (계 20:9), 천하(계 16:14).



      땅의 소금, 세상의 빛(마태복음 5:13-16)

      역사적으로 애굽에서 나온 히브리 민족들은 가나안 땅에서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이 되려면 반드시 언약을 지켜야 합니다.
      문제는 가나안 땅이 우상 숭배가 가득한 땅이었는데 그 백성들이 언약을 지키지 않고 우상 숭배에 깊이 참여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시대에 장자는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장자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지요.

      출애굽기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레위기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 

      민수기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

      역대하 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것이 아니냐

      땅의 소금은 맛을 잃어 버렸고 거룩한 땅을 더럽혔다(렘 2:7, 3:9). 
      땅의 소금은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짓밟혔다(렘 52).
      땅의 소금 /  이스라엘의 남은 자(롬 9:6, 27, 11:5).

      로마서 9:27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로마서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세상의 빛. 예수님은 세상의 빛, 생명의 빛, 참 빛이시다(요 1:4, 5:9:5).

      요한복음 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이라.
      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이로라.

      크리스천들은 세상의 빛이다(엡 5:8, 살전 5:5).

      에베소서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이라 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5
      너희는 다 의 아들이요 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장자의 명분(장자 상속권)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맏아들이 누리는 권리를 ‘장자의 명분’ 또는 ‘장자 상속권’이라 부른다.

      특별한 권리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장자는 형제들 중에서 특별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맏아들은 평소의 식탁에서도 아버지를 이어 높은 자리에 앉았고 일상 생활에서도 다른 형제들에 비해 주도적인 위치를 누렸다.

      아버지가 죽을 때에는 장자에게 특별한 축복이 주어졌고 유산상속도 다른 형제들 보다 두 배 많은 몫을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를 이어 가문의 대표가 되며 왕족의 경우 당연히 왕위 계승권을 가졌다.

      당시의 장자 상속권은 성경에 기록된 족장들뿐만 아니라 바빌론, 앗수르에서도 정착된 제도였다. 이미 발굴된 고대 바빌론, 앗수르의 기록물들에서도 이런 사실이 확인된다.

       

      특별한 책임

      장자에게 주어진 책임도 크다. 부친이 사망할 경우 어머니는 물론이고 다른 형제나 결혼하지 않은 여자 형제들도 부양 할 책임이 있었다.

       

      장자권의 이동

      장자의 권리는 심각한 죄를 저지르면 박탈될 수 있었다. 성경에 기록된 사례로는 르우벤이 있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였으나 아비의 침상을 더럽힌 죄로 장자의 명분을 누리지 못했다.

      장자의 권리는 매매를 통해서 다른 형제에게 넘겨질 수 있었는데 흔한 일은 아니었고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있을 수는 있는 일이지만 손가락질 받는 행위였다(에서의 경우). 첩이나 종의 자식들에게는 먼저 태어났어도 장자의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이스마엘의 경우).

      • 출애굽 이후 주어진 율법에서는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초태생, 곧 장자는 하나님의 소유였다.

      에서의 장자권과 가나안

      에서는 이삭의 맏아들로서 장자의 명분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장자 상속권을 ‘가벼이’ 여겼다.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은 당장의 배고픔 앞의 죽 한그릇 보다 못한 것이었다. 장자의 명분을 팔라는 야곱의 제안을 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삭의 하나님”이 에서의 하나님이 아닌 야곱의 하나님이 되는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에서가 물려 받을 장자의 명분에서 가장 크고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물려 받는 것이었다. 후손에 대한 약속, 그 후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은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게서 이삭의 장자권을 가진 아들에게로 이어질 것이었다. 에서는 억울할지 모르지만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구입한 것은 절차에 있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은 속여서 받았지만 훗날 장자의 명분을 소유한 아들로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고 에서는 가나안을 떠나 세일산에 정착한다.


      장자의 명분이란 무엇인가. 먼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장자의 명분이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상속권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약속이란 무엇인가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주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속권이다. 야곱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에 결국 복의 자손이 되었고, 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없었기에 결국 복을 빼앗겼다.

      사실 에서가 원하던 복은 하나님 나라와 정반대였다. 아래의 대화를 보면 이것을 좀더 면밀하게 살필 수 있다. 에서는 이생에서의 축복, 즉 부와 권력을 원했다. 야곱이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뒤 에서가 분노를 하는데, 이때 에서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조금이라도 축복을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축복은 번영에 대한 축복이었고, 이것을 얻을 수 없자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한다. 또한 에서가 결혼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보면 에서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볼 수 있다. 에서는 자신의 번영을 위해 결혼한다.

      그런데 성경을 제대로 살펴보면 결국 에서는 원하던 것을 얻는다. 야곱과 에서의 부유함을 비교하면, 야곱이 자신의 재산 절반을 에서에게 주었기 때문에 부유함에서만큼은 에서와 야곱이 같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 에서는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즉, 에서는 자기가 원했던 이 땅에서의 부귀 영화를 얻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잃어버린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된 하나님 나라란 무엇인가? 이것을 여기서 다루는 것은 글이 너무 비대해질 것 같기에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겠다. 간단하게만 다루자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을 하셨다. 약속된 땅 위에 아브라함과 이삭의 후손들이 살게 될 것인데, 그들로 인해 이방 민족들이 복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간단하게 세 가지로 구분하자면, 1) 자손에 대한 약속, 2) 땅에 대한 약속, 그리고 3) 이방의 복이 될 거라는 약속이다.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은 이방의 복이 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약속에 대한 이야기는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부터 여러 번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나온다.

      과연 야곱은 장자권에 대해서 알았을까? 에서는 장자권의 의미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야곱은 확실히 이 약속에 대해 알고 있었다. 최소한 그의 말년에는 그렇다.

      [1]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2]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창세기 46장 1-4절

      창세기 46장을 보면, 죽은 줄 알았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성공에 대해서 들은 야곱이 두려워하고 있다.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는가, 바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왜냐하면 약속된 땅은 애굽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인도하여 올라올 것이라는 확신을 주신 뒤에야 야곱은 기쁜 마음으로 성공한 아들을 만나러 떠난다.

      즉, 말년의 야곱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이 어려서부터 원하고 바랐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속권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야곱은 어려서부터 이 사실을 알았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약간의 추측이 필요하다.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창세기 25장 20절

      아브라함이 100세 때 이삭이 태어났으니, 이삭이 40세 때 아브라함은 140세였다. 그리고 이삭은 40세 때 결혼하였다. 그리고 아래의 말씀을 보면 야곱과 에서가 태어난 것은 이삭이 60세였을 때였다. 곧, 이 당시 아브라함은 160세였다. 즉, 아브라함 160세, 이삭 60세, 야곱과 에서 0세이다.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창세기 25장 26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175세에 사망하였다. 즉, 이때 이삭은 75세, 에서와 야곱은 15세였다.

      [7]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8]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창세기 25장 7-8절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은 창세기 26장에서 나타난다. 26장에 아브라함이 아직 살아 있다. 그리고 이때 가장은 이삭이었다. 그 사실은 그랄로 이사를 간 주체가 아브라함이 아니라 이삭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하나님이 이삭에게 나타나 약속을 주신다.

      [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3]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창세기 26장 1-4절

      여기서 이제 우리는 추측을 해야 한다. 25장에 에서와 야곱의 탄생이 등장하고, 그 뒤 야곱이 에서의 장자의 명분을 산다. 26장, 아직 아브라함이 살아 있을 때 이삭이 온 가족을 데리고 애굽 땅으로 가려는 계획을 세우는데, 하나님이 이 계획을 막으시고 그랄 땅에 남아 있게 하신다. 그뒤 에서의 결혼을 언급하는데, 이때 에서의 나이 40이다. 그리고 27장에 야곱이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창세기 26장 34절

      즉, 우리는 야곱과 에서의 탄생(25장)과 야곱이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사건(26장) 사이에 두 가지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죽었고, 다른 하나는 이삭이 이사를 가려다가 가지 않았다.

      먼저 이사(moving)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온 가족이 그랄 땅으로 갔다가 애굽으로 가려다가 가지 않았던 일. 갑자기 왜 이사를 가려다 말았을까? 이에 대한 이유, 곧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주셨던 새로운 약속을 야곱과 에서가 듣지 않았을까? 어떤 가장이 사업을 하던 중에 그것을 접고 목회자가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온 가족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미칠 이 사건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장성한 자녀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사건을 말이다.

      두 번째는,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은 에서와 야곱이 열다섯이 될 때까지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자기가 받았던 소명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아마 최소한 야곱은 나이가 들어 장막 밖으로 잘 나가지 못하는 아브라함의 장막에 종종 방문하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하면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라 장막에 거주했기 때문(창세기 25장 27절)이다.

      결국 아브라함과 이삭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약속을 야곱이 알았을 거라는 사실은 있음직하다. 특히 야곱이 어렸을 때 가정의 중대사를 결정하게 만든 "땅과 자손에 대한 이 약속"을 전혀 듣지 못했을 거라고 가정하는 것이 좀 무리가 있게 느껴진다.

      물론 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과 상반된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서가 이 약속에 대해 전혀 듣지 못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에서가 이 약속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약속의 방향과 정 반대로 나아가는 에서를 보고 근심하는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34]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35]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창세기 26장 34-35절

      에서의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가 근심만 하고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서는 이 약속을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 오늘날 (*, 카욤) - 직역하면 '오늘처럼'이나 여기서는 '빨리' '우선적으로'를 뜻한다(삼상 2:16; 왕상 1:51).

      󰃨 팔라 (*, 마칼) - '팔다' '양도하다'의 강조 명령형이다. 야곱이 이런 장자권의 소유를 위한 흥정을 하게 된 배경에는 (1) 그가 평소에 장막에 머물때 장자권의 영적 축복을 부모로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반면, 에서는 장자권의 가치에 관해 무지하므로 가능했고 (2) 과거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기는 언행을 자주하는 것을 눈여겨 보아 왔었고 (3) 사전(事前)에 이 문제를 놓고 농담조의 대화가 빈번하여 에서의 경계심이 해이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행위에 있어서 굶주림에 처한 형의 처지를 이용해 장자권을 흥정한 처사는 정당시될 수 없다. 이 사실은 향후 그의 고달픈 인생의 여정이 잘 반증해 준다.


      󰃨 내가 죽게 되었으니(*, 히네 아노키 호레크라모트) - 직역하면 '보라 나는 죽음의 지경에 이르렀으니'이다. 에서의 이 대답에 대한 해석들로서는 에서가 (1) 너무 굶주려 죽어가는 급박한 위경에 도달했다는 것과(Calvin) (2) 사나운 짐승을 쫓음으로 인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말과 (3) 삶의 종국적 결과가 죽음이니 장자권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란 견해 중 에서가 평소 취했던 경박한 태도를 보아 지금 당장 배고파 죽게 되었는데 장자권이 무슨 소용이냐는 식의 현실 지상주의의(Keil) 세째 견해가 타당성이 있다.

      󰃨 무엇이 유익하리요(*, 라마 제) - 직역하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이다. 에서가 한 이 말의 의도는 (1) 지금 아사(餓死) 직전에 있는데 장자권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2) 내가 죽으면 야곱이 대신 장자권을 차지할텐데 장자의 명분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는 순간적 욕망을 추구하는 두 의중이 복합된 듯하다.

      주제2: [사고 판 장자의 명분]

      󰃨 맹세하고 (*, 솨바) - 완전 수인 '일곱'이란 명사에서 유래하여 '일곱번 말하다' 즉 '서약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맹세는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 아래 쌍방간에 맺은 약속을 신실히 이행할 것을 서약하는 성스러운 의식으로서 그 약속한 바에 대한 신뢰성을 높이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출22:11; 민5:19).

      󰃨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 구약 당시 장자권의 상실은 (1) 본절처럼 본인의 의사로 맹세를 통하여 직접 양도할 때 (2)서자가 장자일 경우 합법적인 아내가 그후 아들을 낳아 장자의 명분을 요구할 때(21:10) (3) 아비의 직권으로 다른 아들을 선택할 때(48:22, 대상 26:10) (4) 중죄에 대한 징벌로 박탈당할 때(49:3, 4 ;대상 5:1) 합법적으로 가능했다. 성경 기록과 유사한 풍습이 기록된 아카드어 토판인 누지서판(Nuzi Tablets)에는 한 형제가 상속받은 숲을 다른 형제에게 세 마리의 양을 받고 팔고 있는 상속권 거래에 관한 실례가 소개되어 있다.

      󰃨 떡(*, 레헴) - 어근 '먹다'에서 유래하여 식량, 곡물, 빵 등을 포괄하는 말이나 여기서는 죽과 함께 먹는 빵을 의미한다.

      󰃨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와야칼 와예쉐트 와야캄 와예라크) -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먹었다. 그리고 그가 마셨다. 그리고 그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갔다'. '와우'(*, 그리고) 용법으로 계속 이어지는 본절은 자신의 행동에 관하여 생각할 여지를 두지 않고 일을 해치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목전의 욕심만 채우기에 급급한 육적 사람의 상태를 생생히 묘사했다.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바자)
      - '업신여기다' '경멸하다'는 뜻이다.
      본절에서는 와우 용법으로 앞의 문장인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에 연결됐다.
      어리석은 행위에 대하여 전혀 뉘우치는 빛이 없는 에서의 강퍅한 태도를 보여 준다.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영생을 금단의 열매와 바꾼 이래(3:6)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지정의(知情意)가 마비되어(엡 2:1-3; 4:8) 무분별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히12:16은 에서를 가리켜 '망령된'(*, 베베로스)자라 일컫는데 이는 '속된' 혹은 '불경건한'이란 뜻으로 속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축복의 기회를 하찮게 다루는 자란 뜻이다.






      1월 8일(수) 창세기 21-2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말씀대로(창세기 21:1)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Now the LORD was gracious to Sarah as he had said, and the LORD did for Sarah what he had promised.


      창조를 뜻하는 네 가지 히브리 단어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와 관련하여 한글 성경에서는 모두 창조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히브리어로 쓰여진 원어 성경을 보면 창조라는 단어가 네 가지로 구분되어 상황에 맞게 쓰이고 있다.

      바라 בָּרָא Bara

      자르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곧 이전에 있는 것을 완전히 잘라낸 상태를 의미한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창조행위를 나타낸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

      아사 עָשָׂה Asah

      바라와 비슷하지만 과거에 있던 재료들을 써서 새로운 생명이나 물질을 만들어 내는 느낌을 강조할 때 쓰인다.
      영어 단어로는 'make'와 뜻이 비슷하다.
      넷째 날에 해, 달, 별을 창조하실 때 아사가 쓰였는데, 이들이 첫째 날에 만들어진 빛을 이용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지으실 때도 흙을 이용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사가 쓰였다.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창 1:1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 1:26)

      야차르 יָצַר Yatsar

      토기장이가 흙을 빚어 만드는 느낌을 떠올리면 된다.
      영어 단어로는 'form'과 뜻이 비슷하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몸을 창조하실 때 쓰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 2:7)

      바나 בָּנה Bana

      재료를 이용해서 성을 쌓아가듯 세밀하고 점진적으로 만들어 가는 의미를 강조한다.
      영어 단어로는 'build'와 뜻이 비슷하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를 이용해 하와를 창조하실 때 쓰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인간이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인 이유

      네 가지의 창조의 표현이 모두 쓰인 것은 오직 인간을 창조하실 때 뿐이다.
      바꿔 말하면 그가 만드신 것 중에서 최고로 정성을 들인 걸작품이 바로 나, 너, 우리인 것이다.
      한글 성경으로는 쉽게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정교함과 세밀함을 히브리어 원어들을 통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고영민. 『히브리어·헬라어 원문 번역·주석 성경(구약)』. 쿰란출판사, 2018.


      פָּקַד 스트롱번호 6485

      1. ~에게 가다.   2. 방문하다.  3. 찾으러 가다
      발음 [ pâqad ]
      구약 성경  / 225회 사용


      עָשָׂה 스트롱번호 6213

      1. 노동하다.  2. 만들다.  3. 생산하다
      발음 [ ʽâsâh ]
      구약 성경  /  2627회 사용


      말씀이 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입니까? 말씀이 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0%이어야 합니다. 오늘 내가 왜 살고 있습니까? 말씀이 살라고 하시니 사는 것입니다. 내가 회사에 갑니다. 왜 갑니까? 말씀이 가라하시니 가는 것입니다. 말씀은 빛입니다. 말씀으로 비추지 않은 삶은 어둠이요 거짓이며, 말씀으로 비춘 삶은 진리가 됩니다. 우리의 삶을 말씀으로 비추고 있습니까?

      그 말씀대로에서 그는 지시대명사, 말씀은 명사, 대로는 조사라고 합니다.
      그 말씀은 막연한 내용이 아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에게 하나님이 하셨던 말씀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래에게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내년 이 때쯤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셨을 때 사래는 그 말씀을 듣고 헛웃음을 웃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래는 이미 경수가  멈추었고 남편 아브람은 나이가 많아 노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래는 자기의 몸 상태와 남편 아브람의 몸 상태가 어떤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년에 아들을 얻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에게는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엘 샤다니)"고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고, 말씀을 따라 사는 아브라함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말씀이 드디어 21장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더욱더 말씀에 따라 삽니다.
      말씀이 이루어지고, 말씀의 열매를 맺는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우리도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며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말씀대로 

      객관적 사실(Objective facts)과 주관적 사실(subjective facts)
      절대적 사실(
      Absolute facts)

      객관적 사실은 사래는 아들을 낳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객관적 사실을 믿고 따라갑니다.
      그러나 신앙은 특히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은 객관적 사실보다는 절대적 진리를 신뢰합니다.

      가장 쉬운 예가 처녀 마리아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객관적 사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절대적 진리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1절에는 “말씀대로”라는 구절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1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역사하셔서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객관적인 상황으로 볼 때 사라는 아들을 낳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말씀하신 대로 사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됩니다.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보편적 진리(Universal Truth)와 창조적 진리(Creative Truth)
      - 보편의 반대어는 특수라고 합니다.


      세상은 보편적 진리에 의해서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그러나 세상보다 더 크고 광대한 우주적 진리(Cosmic Truth)는 세상의 진리를 능가합니다.
      우주적 진리를 다른 말로 창조적 진리라고 합니다.

      어떻게 경수가 끊긴 사래가 아들을 낳을 수 있습니까?
      기력을 잃어버린 아브람이 어떻게 아들의 씨를 아내 사래에게 줄 수 있습니까?
      이러한 진리는 보편적 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주적 진리 창조적 진리는 아파르와 같은 흙먼지에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너무 쉬운 일입니다.
      신앙이란 보편적 진리의 틀에 갇혀 있으면서도 창조적 진리를 확신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믿습니까?
      문제는 나에게 그 말씀이 들려졌는가?
      아니면 내게 그 말씀이 주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을 읽으세요!
      그리고 읽던 말씀 중에서 이 말씀을 나를 위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기도하세요!
      주님, 이 말씀은 곧 나를 위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주여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일시적인 것(temporary)과 영원한 것(eternal)

      세상의 가르침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영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진리는 시대에 따라 그 가치와 본질이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참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철학의 명제는 희랍의 철학의 아버지가 만물의 아르케는 "물" 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헬라 철학자들은 "물" 아니라 "불" 또는 "공기" 이렇게 주장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르침은 언제 바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살아서 승천한 에녹과 엘리야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주으셨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어떤 학문에서도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리를 계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대로 라는 교훈은 절대적 사실, 창조적 진리, 영원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분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그 마음속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들을 얻었다는 기쁨보다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더욱더 크게 놀라며 기뻐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우리는 모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깊이 깨달아야합니다. 말씀 하나가 이루어지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면 나머지 모든 말씀도 그래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말씀을 믿습니다.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합니다. 순종할 때 말씀의 복이 임합니다. 말씀대로 복을 얻는 사람은 말씀에 순종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하신 복이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말씀이 나의 생각과 기분에 맞고 나에게 유익할 때는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 쉽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나의 생각과 기분에 맞지 않고 나의 유익에 상치된다고 여겨질 때는 어렵습니다. 순종이라는 것은 그렇게 맞지 않을 때 순종해야 순종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이 젖을 뗀 날 잔치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삭이 3살쯤 되어 젖을 떼던 날 이삭의 어머니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데리고 희롱하며 장난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그를 집에서 쫒아낼 것을 요구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매우 고민을 합니다. 이스마엘도 엄연히 그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 사라의 말대로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마엘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을 하시며 보내라 하셨지만 그래도 아브라함의 마음이 이스마엘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에 순종하여 이스마엘을 즉시 보냅니다. 말씀을 믿는다면 어떻게 할까요? 말씀을 더 알기 위해 노력하고,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보기에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무엇이든지 이루어지기 전에는 별 볼일 없어 보입니다) 말씀을 믿기에 그것을 중요하게 여겨 마음속으로 깊이 사랑하고, 말씀이라 하면 무조건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믿는 사람은 말씀대로 복을 받을 것입니다. 살다보면 근심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근심의 일이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아니라 그 때 말씀대로 하였느냐 그렇지 못하였느냐 입니다. 자신을 돌아볼 때 무엇을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말씀을 이루었느냐를 보십시오. 말씀대로 살고 있다면 그럼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라도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기준이 되고 중요합니다.

      말씀을 믿기에 더 알고자 노력하고 있고, 순종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까?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화가 임하고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는 오늘 더욱더 말씀을 알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지금 당장 내가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할지를 잘 판단해야합니다. 무엇보다 매일 말씀을 읽으십시오. 묵상하십시오. 순종하십시오.   

      말씀의 열매

      나의 뜻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고 말씀의 열매를 맺으십시오.
      그것이 믿음의 결정체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은 후 더욱더 지속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아비멜렉 왕이 아브라함에게 와서 군사동맹을 맺기를 청합니다. 전에는 아비멜렉이 강자였습니다. 지금도 강자입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보면서 아브라함이 이후에 강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약정 맺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22절)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았기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가 하는 모든 것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크고 분명하여 믿음이 없는 아비멜렉도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을 실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말씀의 열매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성경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오늘을 사는 우리 삶 안에서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말씀도 그냥 헛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말씀을 들을 때 그 어떤 것도 허튼 것으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내 안에서 자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자라서 큰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자라서 큰 나무가 되듯이 말씀이 우리 안에 떨어져 자라 나무가 됩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다른 사람이 먹고 그들이 행복하고 건강해집니다. 말씀의 씨앗이 우리 안에 떨어져 죽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러려면 기도와 묵상을 잘해야 합니다. 들은 말씀, 깨달은 말씀을 묵상해야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자라고 열매를 맺게 해야 합니다. 말씀을 많이 들으십시오. 농부가 씨앗을 뿌릴 때도 많은 씨앗을 뿌립니다. 그래야 때로는 어떤 것은 죽어도 어떤 것은 살아나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말씀의 실현을 위해 존재합니다. 인생은 말씀 실현의 자리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삶은 구체적으로 말씀의 어떤 것을 실현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삶이 얼마나 많이 말씀이 실현될 수 있는 현장이며, 우리가 얼마나 많이 말씀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한참 조개를 캐러 다녔던 적이 있습니다. 바다에서 호미로 갯벌을 긁으면 조개가 나오는 것이 신기하고 좋았습니다. 작은 수고로 그렇게 조개를 얻을 수 있으니 기뻤습니다. 저는 조개를 먹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조개를 얻는다는 것이 마냥 좋았습니다. 그렇게 열매를 얻어야 행복합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우리의 삶속에서 열매로 맺어지는 것을 볼 때 행복합니다. 삶을 말씀으로 긁으면 말씀의 열매라는 열매를 얻습니다. 말씀의 열매는 말씀을 더 깨닫게 되고, 말씀이 더 깊어지고, 말씀이 이루어지며, 말씀에 감사하고, 말씀이 힘이 되고, 말씀이 위로가 되며, 말씀이 빛이 되는 것 등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말씀의 열매를 얻으십시오. 그러면 행복해집니다. 삶이 행복해집니다. 말씀 읽기가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이 행복이 될 때 그 사람의 삶은 말씀의 열매가 가득한 복된 삶이 됩니다. 세상 속에는 말씀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습니다. 그것을 따십시오.

      말씀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다른 열매는 필요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말씀이 실현되어 열매를 맺을 때 그것이 진정한 열매입니다. 그것이 천국까지 이어지는 열매입니다. 말씀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구체적으로 내 삶에서 말씀의 어떤 것을 더 깨닫고 실현하는지 그것을 아는 삶이 되십시오. 어느 한 날 특별히 은혜를 발견하는 것을 배우고, 은혜를 더 발견하는 열매를 맺었으면 또한 그 다음날은 은혜 위에 은혜를 발견하는 그 위에 더 추가적으로 무엇을 배우고 열매를 맺을지 기대되는 삶을 사십시오.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세상 모든 것이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 땅을 살고 있는 우리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진실로 믿으며 그 말씀대로 살아야합니다. 말씀대로 살면 말씀대로 복을 받습니다. 말씀은 신실하신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필연코 이루어집니다. 커다랗게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기에  오늘 말씀대로 사십시오.

      말씀의 열매를 맺으십시오. 지금 세상은 별의별 말들이 많고,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말씀을 깨달으며, 말씀을 실현하는 일에 마음을 쏟으십시오. 구체적으로 매일매일 말씀의 열매를 맺으십시오. 살다가 말씀이 생각나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그것이 복입니다. 말씀이 생각나면 화내지 못하고 인내하여야 하기에 손해인 것 같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이 힘든 것이기에 괜히 손해 보는 것 같으나 실상은 그것이 가장 복입니다. 말씀을 알기 위해 씨름하고, 말씀을 지키기 위해 씨름하는 것이 복입니다. 말씀이 내 손에서, 머리에서, 내 가슴에서 떠나지 않게 하십시오.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여 말씀의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할 때는 성령의 예리한 바늘로 온 몸과 마음을 찔러 깨닫게 하옵소서
      이전 보다 더 주님 사랑하는 일에 열중하게 하시고 흔들림이 없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더구나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율법서를 읽을 때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타나면 그 단어를 발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회중들은 침묵하는 그 순간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율법서에서 나타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만큼 하나님의 명칭을 거룩하고 존중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말씀으로 인식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언약의 하나님" 또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그 말씀대로"라고 하겠습니다.
      첫번째 그 말씀대로에서 말씀은 "아마르"라는 히브리 단어를 사용합니다.
      두번째 그 말씀대로에서 말씀은 "다바르"라는 히브리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 말씀대로"라는 신앙은 주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처녀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게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씀이며 또한 당시 풍속에 의하면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위태로운 사건입니다.
      어떻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마리아는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눅 1:38).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인물이었습니다.
      어느 날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니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을 때 요셉과 마리아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려고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때 시므온은 그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눅 2:29).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지금 나에게 닥쳐온 고통과 시련이 있습니까?
      그 고통과 시련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이 고통과 시련을 통하여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간구하며 성경에서 답을 얻기까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내게 약속된 말씀을 집중적으로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어느 순간 그 말씀이 나로 하여금 내 안에 참된 평안을 회복하고 그 평안에 따라 말씀이 성취되는 과정을 겪으며 마리아처럼 시므온처럼 믿음의 선진들이 누렸던 그 은혜와 복을 직접 경험하고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었구나!
      이것이 나를 향한 주님의 계획이었구나!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렇게 간구하며 믿음으로 고난과 시련과 역경을 넘어서는 그 날을 기다려 봅시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그 말씀(아마르. 559)

      אָמַר 스트롱번호559

      1. 말하다.  2. 소명하다. 3. 권고하다
      발음 [ ’âmar ]
      구약 성경  /  5298회 사용



      그 말씀(다바르. 1696)

      דָּבַר 스트롱번호1696

      1. 정돈하다.  2. 안내하다. 3. 뒤따르다
      발음 [ dâbar ]
      구약 성경  / 1137회 사용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 여기서 '그 말씀'이란 일전에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셨던 언약(17:19-22; 18:9-15)을 가리킨다.
      이제 예고하셨던 기간이 이르자(2절) 그 언약을 말씀대로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성을 증거해 준다.

      권고하셨고(*, 파카드)
      - 문자적인 뜻은 '방문하다'. 이 말은 종종 특별한 인물에 대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혹은 호의의 행동을 가리키기도 하고(50:24; 롯 1:6; 삼상 2:21), 반대로 심판의 행위(사 24:21; 렘 9:25; 호 12:2)를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전자의 의미로 사용되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잊지 않고 사라를 돌보신 것을 뜻한다.

      행하셨으므로
      - 사라가 잉태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히 배후에서 역사하신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생명의 잉태와 죽음 등과 같은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테(사 44:2) 특히 90세에 이르는 사라가 단산(斷産)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같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히 11:11).


      그 말씀대로 라는 말씀에서 "대로"라는 단어를 문법에서는 "조사"라고 합니다.
      조사를 우리말로 설명하면 "토씨"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말씀대로, 믿음대로, 행하는대로......
      영어로 번역하면 어코딩 투(according to)라고 하겠지요.

      "...대로"라고 하면 앞에 있는 단어가 기준이 되는 것이고, 영어로는 국어와 순서가 반대로 ’according to‘라고 하면 뒤에 나오는 단어가 기준이 됩니다. 그러니까 '...대로‘는 기준을 나타내는 조사입니다.
       
      신앙생활의 기준은 성경입니다.
      성경 기준에 맞추어 신앙생활을 하면 잘하는 것이고, 이 성경 기준에 맞추지 않고 자기 멋대로 신앙생활을 하면 못하는 겁니다.
       

      그 말씀대로
      창세기 21장 1절을 여러 번역으로 살펴봅니다.


      개역개정,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새번역,1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다. 사라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님께서 그대로 이루시니,

      우리말성경,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아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사라에게 이뤄 주셔서 

      가톨릭성경,1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라에게 해 주시니,



      1. ‘믿음대로’입니다.

      특히 신약성경에 보면 ‘믿음대로’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 ‘믿음대로’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 믿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행함대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거 아닙니다. ‘믿음대로’입니다. 그리고 병 고침을 받을 때도 ‘믿음대로’라는 법칙이 적용됩니다.

      로마의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와 고백합니다.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마8:8) 이에 대해 예수님이 그를 크게 칭찬하시면서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8:10)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느니라.“(마8:13) 아멘! 여러분들도 백부장처럼 믿음의 고백을 하시므로 그 믿음대로 병이 낫는 기적이 반드시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다른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실 때에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9:27) 예수님이 그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주여, 그러하오이다.”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의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마9:29-30) 아멘!

      즉 병 고침을 받는 방법은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나의 병이 나았다(사53:5)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야고보도 언급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약5:15) 혹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을 믿고 병을 고치는 것을 미신이라고 하며, 혹은 그런 일은 예수님 시대 때나 일어난 것이고 오늘날에는 안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렇게 말하는 신학자도 자기 자녀가 몹시 아파서 다 죽어갈 상황이 되면 “하나님, 우리 아들 좀 제발 고쳐주세요.” 하고 아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니 왜요? 그렇게 병 고치는 기적은 오늘날에는 안 일어난다면서요. 그건 미신이라면서요.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성경은 오늘날에도 믿는 자에게는 병 고침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 병 고침의 기적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16:17-18) 아멘!

      2. ‘행함대로’입니다.

      이전부터 많은 목사님들이 외치는 아주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구원은 믿음대로, 축복은 행함대로”입니다.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받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주시는 선물 즉 은혜입니다. 그러나 더 큰 축복과 상급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땅에 있을 때에 주님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즉 행한대로, 수고한대로, 헌신한대로, 노력한대로, 일한대로, 심은대로, 뿌린대로 보답해 주시겠다는 것도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사상입니다. 로마서 2:6-8에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또한 예수님도 말씀합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마16: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주리라.”(계22:12) 세상 격언들 중에도 이와 똑같은 의미의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즉 자기가 심은대로, 뿌린대로, 행한대로 그 열매를 자기가 먹게 된다는 겁니다. 이에 대한 성경 말씀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여러분, 우리가 여기 캐나다 캘거리에 와서 종종 밤중에나 혹은 새벽에 무심코 하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탄성이 저절로 나옵니다. “와- 여기 하늘엔 별들이 참 많이 있구나!“ 캐나다 땅에 와서 누리는 축복의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한국처럼 미세먼지와 황사 혹은 공해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늘도 참 맑습니다.

      이곳 캐나다 땅에 와서 이렇게 하늘의 별들을 보고 산다는 것이 건강은 물론이고, 낭만스럽기도 하고, 내가 캐나다에 와서 산다는 것에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특권을 받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고로 밤중에 혹은 새벽에 종종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시면서 그 특권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거 압니까? 별도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이 있고,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태양은 스스로 빛을 내는 별입니다. 이를 가리켜 ‘항성’이라고 합니다. 반면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별들이 많습니다. 태양계를 중심으로 일정하게 움직이는 ‘수금지화 목토천해’ 즉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은 ‘행성’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단지 태양빛을 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어느 별의 주위를 맴도는 별을 가리켜 ‘위성’이라고 하는데, 지구를 맴도는 달도 지구의 위성입니다. 또한 인공적으로 로켓을 쏘아 올려 지구 주위를 돌면서 각종 자료를 보내는 것을 가리켜 ‘인공위성’이라고 합니다. 지구의 위성인 달도 우리 눈에는 밝게 보이지만 사실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태양 빛을 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소행성이나 혜성과 같은 다른 별들도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별들입니다. 이에 대해 혹 어떤 분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니, 별이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면 그거 이상하다. 너 진짜 별이 맞아?” 그래서 어떤 분은 우스갯소리로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별을 가짜별이라고 하고,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을 진짜 별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12:3) 즉 저와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행한대로 하늘에서 차별적으로 갚아주겠다는 겁니다. 같이 예수님을 믿어도 옳은 일, 바른 일, 선한 일을 많이 한 사람, 특히 전도를 많이 한 사람은 영원토록 찬란하게 빛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은 받았지만 이 땅에 있을 때 하나님 속을 지지리 썩인 사람은 그날에 반딧불처럼 잠시 반짝하고 금방 사라지는 것처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순복음 교회의 특징은 예수님을 아주 열심히 믿는다는 겁니다. 제가 처음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집이 이사를 해서 순복음 교회에 가니까 아- 이것들이 얼마나 미친 듯이 열심히 믿는지 저와 저의 어머니가 크게 쇼크를 받았습니다.

      장로교에 있을 때에는 저의 어머니가 여전도회 전도부장이었고, 제가 청년회 전도부장으로 가장 전도를 잘했습니다. 그런데 아- 순복음 교회에 오니까 저와 저의 어머니가 등수에도 못 드는 겁니다. 그래서 “이거 안 되겠다. 더 열심히 전도하자.” 하고 미친듯이 전도에 애를 쓰다 보니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왜요? 아- 하나님이 행한대로 갚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곳 우리 캘거리 순복음 중앙교회에 오신 여러분들 한분 한 분이 하나님을 열심히 믿을 뿐만 아니라, 기왕이면 바른 일, 옳은 일, 착한 일, 주의 일, 특히 전도의 일, 영혼 살리는 일에 보다 열심히 하므로 그 행한대로 더 큰 축복과 상급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말씀대로‘입니다.

      작년(2023년) 10월 7일에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여 1200명을 살해하고, 251명의 인질을 잡아갔습니다. 그때 제가 수요예배 때에 이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해 예언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때에 전한 말씀은 하마스가 완전히 박살이 나고, 이스라엘 위에 있는 헤즈볼라를 비롯해 이스라엘 주변의 적들이 박살이 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말씀처럼 지금 그대로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예언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은 뭐- 제가 특별히 하나님께 예언의 능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이에 대해 성경에 기록이 되었기 때문에 그 기록된 성경 말씀을 그대로 전해준 것뿐입니다.

      에스겔 38:8에 보면 말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약속한 땅에 다시 돌아와 그 땅에서 평안히 거하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38:11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도 없고 문이나 빗장이 없어도 염려 없이 다 평안히 거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에스겔 38:14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평안히 거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이스라엘 상황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밑에는 하마스가 있고, 위에는 헤즈볼라가 있어서 툭하면 미사일이나 로켓이나 드론이 날아옵니다. 도저히 평안하지 않습니다. 잠도 제대로 평안히 잘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예언대로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평안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래에 있는 하마스나, 위에 있는 헤즈볼라나 그 어떤 세력들도 이스라엘을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적들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무너져야만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 여러 번 기록이 되었기에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기록한대로, 작정한대로 되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이 밖에 말세에 대한 성경의 예언이 참 많습니다. 옛날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됩니다. 그 옛날 노아 시대에 죄악이 관영하자 홍수가 갑자기 들이닥쳐서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물로 멸망을 당했듯이, 앞으로의 세상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불로써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우리들은 심판 전에, 환난 전에 예수님의 공중 재림과 함께 부활이 되고, 공중으로 휴거가 되어 예수님과 더불어 하늘나라에 가서 예수님과 같이 24보좌에 앉아 세상을 같이 심판하고, 7년 동안 혼인잔치를 하게 됩니다. 이런 예언들은 어느 용하고 신령한 점쟁이의 말이 아닙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그대로 됩니다. 그리고 말세에는 인간들의 성적 타락이 극도로 심해지고, 특히 동성애가 만연하는 롯의 때와 소돔과 고모라의 때가 오며, 사람들의 인성이 매우 안 좋게 변하므로 심히 고통 하는 때가 온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딤후3:1-5)

      결론입니다. 여러분, 요즘 살기가 좀 어떻습니까? 많은 분들이 아- 살기가 참 힘들다고 합니다. 특히 사람 간의 관계가 아주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요? 성경은 말세로 가면 갈수록 더욱 살기가 힘든 고통의 세상이 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로 이 고통 하는 때에 사는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위로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 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도저히 살기가 힘들어지는 세상이 옵니다. 그리고 말세가 되면 마귀와 귀신들이 자신들의 심판 날이 가까워지므로 인간들을 더욱 괴롭히려고 합니다. 고로 우리는 마귀를 이기고 귀신들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철저히 무장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과 병 고침을 받으시고, 바른 행함으로 말미암아 축복과 상급도 많이 받으시고, 말씀대로 되는 이 말세의 고통의 시기를 하나님의 도움으로 잘 극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행복하시고, 더욱 더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성경의 기준인 “믿음대로, 행함대로, 말씀대로”의 법칙을 배웠습니다. 이 법칙을 잘 실천하고 적용하므로 약속한 하나님의 구원과 병 고침과, 축복과 상급을 확실히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기록된 말씀대로 되는 이 말세의 고통의 세상을 바라보며 더욱 깨어 기도하며, 한 영혼이라도 더 전도할 수 있도록 계속 힘을 쓰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의 말씀대로 삽시다(시 119:25-32)

      그리스도인의 가장 아름다운 삶은 어떤 삶일까요?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일까요?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제일 아름답고 존귀한 삶은, 주의 말씀대로 사는 삶일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나, 또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가 주의 말씀대로 산 사람들입니다. 물론 주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무척 어렵습니다.

      주의 말씀은 어떤 경우에는 꿀처럼 달콤하지만, 또 쓴 뿌리처럼 쓸 때도 있고, 비단결처럼 부드럽게 우리를 감싸고 어루만져 줄 때도 있지만, 비수처럼 날카롭게 우리를 찌르고, 우리 가슴을 후벼 댈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1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신앙은 병든 신앙일 뿐만 아니라, 그 병을 고칠 수도 없습니다. 또 성경을 많이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그러나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오늘 주시는 이 말씀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가끔 설교를 하다보면, 열심히 설교를 들으면서도, 곁에 있는 사람의 표정을 살피는 분이 있습니다. 그 설교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곁에 있는 사람이, 듣고, 깨닫고, 회개했으면 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는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언제든지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이 말씀은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라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하는 말씀이다. 다른 사람이 은혜 받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듣고 깨달아야 한다” 혹시 이러한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면, 모두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나는 지금 은혜 받아야 한다. 나는 지금 축복받아야 한다”

      이런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고, 복 주실 줄 믿습니다.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마트 시식코너에서, 지나가면서, 음식 하나 집어 맛보듯이, 말씀을 대충 맛보지 말고, 하나하나 직접 요리하여 먹고 소화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맛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한 자리에 앉아 입에 넣고 씹으면서, 소화를 잘 해야,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고, 성장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주의 말씀대로 살았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풍성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12: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만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가서 살아야 할 땅에 대하여도 정확하게 그 위치를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여기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까? 여기 있으면 복 안 주십니까? 꼭 떠나야만 복 주실 것입니까? 아버지랑 함께 가면 안됩니까? 아버지가 함께 가야지 가겠습니다. 아니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때 떠나면 안되겠습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왜 떠나야 하는지, 정확한 장소가 어디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떠나라는 말을 듣고, 정든 고향을 그대로 떠났습니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떠나라는 말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2:2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준 모리아 땅으로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따랐습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럴싸한 핑계를 대고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불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왜 아들을 바쳐야 합니까? 건강한 소 열 마리 정도 바치면 안됩니까? 잘 생긴 종 바치면 안됩니까? 다른 것 바치라고 하면 쉽게 바치겠는데, 밤새도록 생각해 보았지만, 이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엄마인 사라 생각도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바치고 싶어도 엄마인 사라가 바치지 말라고 하면 어쩔 도리가 없네요. 내 마음 아시지요.”

      아브라함은 따지지 않았습니다. 쉽게 따를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주의 말씀대로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그가 받은 축복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었고, 그 후손이 번영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되었으며, 세계 민족 구원의 은총을 받았고,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친한 친구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비록 가난했지만, 항상 가정이 화목했고, 또 한 사람은 생활은 넉넉했으나, 늘 가정이 화목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늘 가정 불화로 속이 상하던 사람이, 친구에게 가정 화목의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집에 가서 가르쳐 주겠다”며, 그 친구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두 사람이 그 집에 도착하자, 아들, 며느리, 손자 모두 나와서 인사를 하는가 하면, 밥상을 차려 오는 것이었습니다.

      식사가 끝난 후 아버지가 아들 내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얘야, 마당에 있는 송아지를 지붕 위로 올려라”고 하자, 온 가족이 총동원하여 사다리를 걸치고, 지붕 위로 올라가 멍석을 펴더니, 송아지를 끌어올렸습니다.

      아버지가 “다시 끌어내려라”고 하자, 온 가족은 다시 달라 붙어, 지붕에 올려 놓은 송아지를 끌어내렸습니다.

      그 수고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만, 어느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시 아버지가 “얘야, 엊그제 사온 소금 가마 있지 않느냐? 그것을 내어다가 냇가에 담가라”고 하자, 그 아들은 그 자리에서 지게에 지고, 냇가로 나가 담그고 돌아왔습니다.

      그런 후에 그 친구는 “이것이 우리 집에 화목한 비결일세”라고 말했습니다.

      따라갔던 친구가, 그 정도라면 자기 자식들도 해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 친구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기침을 하고 들어서도, 어느 누구 하나 나와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녁 상을 억지고 차리게 해서, 먹고 난후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 “얘야, 마당에 있는 송아지를 지붕 위로 올려라”고 말하자, 온 식구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아직 노망들 나이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면서 삿대질을 해대는 것이었습니다.

      기가 꺾인 아버지가, 그러면 그보다는 좀 쉬운 것을 해보라며 “엊그제 사 온 소금을 강에 내다 담가라”고 하자, “김장 소금으로 사 온 것을 미쳤다고 버리느냐, 소금 한 가마는 흙 퍼 주고 사는 줄 아느냐”면서 정신이 돌았다고, 마구 다그쳤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옛 이야기 속에서 행복과 불행의 기준과 성공과 실패의 비결이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부모 말씀대로 순종하는 집안은 잘되는 집안입니다.
      어른 말씀을 존중하고 따르는 가문은 행복한 가문입니다.

      라디오의 다이얼이 맞지 않을 때, 잡음이 나고, 맞을 때 제 소리가 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다이얼을 정확하게 맞추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행복한 교회가 되고, 아름다움 신앙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은 사울왕입니다. 처음으로 왕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였습니다. 보통 왕이 죽으면 그 아들이 자연스럽게 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처음으로 사울을 왕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아무렇게나 뽑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서, 사울을 왕으로 뽑으셨을 것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까? 말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최고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그런데 왜 그 큰 사랑과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왕은 버림을 받게 되었을까요? 왜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게 되었을까요? 신중하게 고르고 골랐던 사울을 왜 하나님은 버리셔야만 했을까요?

      사무엘상 15:23절을 보면,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사울왕을 버린 이유를 말씀해 주시는데, 사울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시고, 그의 아들도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이, 복의 근원입니다. 받은 복을 계속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 때,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신명기 10:13절을 보면,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을 버리지 마시고, 언제나 주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주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책망하고, 우리를 억압하고자,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의 말씀대로 살면, 어떤 행복을 우리에게 주실까요?

      첫째, 주의 말씀대로 살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25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아멘.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며칠간 먹지 못해, 배가 고프다 못해, 배 가죽이 달라 붙어 있는 사람이 뭔가 먹고 난 다음에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제 좀 살 것 같다”는 말이 아닙니까?

      한 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장시간 일을 하다보면, 목이 마르고, 더 나아가 목이 타지 않습니까? 그때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시게 되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제 좀 살 것 같다”는 말이 아닙니까?

      히브리서 4:1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죽은 책이 아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활력이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수없이 많은 책들이 발행되어 왔지만, 대부분은 나왔다가 사라졌고, 알려지지 않고, 죽은 책들도 있습니다. 살아서 활력이 있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의 말씀이 아닙니다. 죽은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았던 성경의 위대한 사람들만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다시 태어났습니다.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거듭났습니다. 육적인 삶밖에 몰랐던 사람들이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23절 말씀에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변화 받는 것도 모두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27살이 되었을 때, 신경쇠약증에 걸렸습니다. 그는 더 이상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어, 정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낙담과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그의 병은 오히려 더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정신병으로 죽을 것을 생각하자, 겁이 났습니다.

      그는 자신을 도와 줄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며,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읽어나가다가 요한복음 11:25-26절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는 말씀을 읽고, 호흡을 하듯, 약을 먹듯, 그 말씀을 복창하며 외웠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서 정신병에서 서서히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회고하기를 “내가 성경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완전히 미치광이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의 자신의 정신병에 대한 고통을 책으로 써서,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과 죄악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현대의학이 치료할 수 없는 질병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귀신이 쫓겨갔습니다. 육체가 살아 났을 뿐만 아니라 영혼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한 놀라운 역사는 과거에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방송에서 간증하는 것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음 문턱에서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모든 질병을 치유받고, 건강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실패하고 다시 일어설 수 없었는데,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수없이 많습니다.

      여러분!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믿고 순종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해가 되기 때문에 믿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믿고 순종하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의 말씀대로 살면 어떤 행복을 우리에게 주실까요?

      둘째, 주의 말씀대로 살면,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28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아멘.

      “나를 세우소서”

      “세운다”는 말은, “뿌리를 깊게 한다. 든든하게 한다. 흔들리지 않게 한다. 일하게 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이 되려면, 주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 다니다가 시험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5-6절을 보면,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다”고 했습니다.

      밭에 씨앗을 뿌리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싹이 나오기는 나왔지만, 해가 돋은 후에는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라 버렸다고 했습니다.

      왜 씨앗이 타 버리고 말았습니까? 뿌리가 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 다니다가 시험에 듭니까? 말씀에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단이 어떻게 접근합니까? 최근에 어떤 교회에서 편지 한 장이 왔습니다. 그 교회를 다녔던 여자 집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신천지에 빠져서 도저히 회복불능 상태여서, 그 교회에서 “출교 정지”를 시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법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벌이 무엇인줄 압니까? 출교정지입니다. 교회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습니다. 즉 예수 믿고 하늘나라에 갑니다. 그러데 교회 나오지 말라는 소리는 무엇입니까? 예수 믿을 필요 없이 하늘나라 말고 다른 데 가라는 소리입니다. 한 마디로 지옥가라는 소리입니다. 도저히 예수님께 돌아올 가망이 없을 때, 큰 죄를 지어 회복불가능하다고 판단할 때, 출교정지를 시킵니다. 이러한 법이 교회법에 분명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교회에서 이 법을 시행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교회에 나오지 말고, 차라리 지옥이나 가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교회에서 출교정지를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교회에 가서는 그 교회 집사라고 하면서, 신천지 성경공부하러 가자고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여자를 조심하라고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여러분! 대부분 이단들이 성경공부 하는 대로 데리고 갑니다. 여호와의 증인들도 성경 말씀 가르쳐 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보여 주면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이상한 책 가지고 오지 않습니다. 성경책 들고 와서, 성경책 펴 보여주고, 성경책에 기록된 말씀 찾아가면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뿌리가 깊게 내려 있지 않으면, 무너지고 맙니다. 이단에 빠지고 맙니다.

      여러분! 성경공부는 어떠한 경우라 하더라도 본 교회에서 하여야 합니다. 다른 데 가서 성경공부 하자고 누군가 말한다면, 절대로 따라가지 마십시오. 혹시 그런 사람이 주위에 있으면, 즉시 신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세워 줍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사람이 사람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세워 주는 그 사람도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은 나를 세워 줍니다. 주의 말씀은 나를 사람답게 세워 주고, 나를 성도답게 세워 주고, 나를 주의 종답게 세워 줍니다.

      베드로전서 5:10절을 보면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 80%가 요통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허리가 아파서 길게 고생을 했든지, 아니면 잠깐 동안 아팠든지간에, 요통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통의 원인 중 60%가, 본인의 자세 때문이라고 합니다. 평상시 본인이 취하는 자세 때문에, 요통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방바닥이나 의자에 앉을 때, 정좌하지 않고, 비뚤어진 자세로 앉는다든지, 다리를 꼬고 앉는다든지, 옆으로 비스듬히 앉는 따위의 자세가, 반복되고 습관화되면서, 요통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의학 상식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영적인 자세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앙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말씀을 듣는 마음의 자세라든지, 말씀을 먹는 영적인 자세가 비뚤어져 있으면, 요통환자가 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사모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은혜를 갈급해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어디 앞뒤가 안맞는 곳은 없나, 의심의 눈초리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비판의 눈초리로 뚫어지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비뚤어진 마음을 가지고 들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 있습니까? 말씀은 하나님께서 내게 들려주시는 음성입니다. 말씀을 대할 때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모하는 마음,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깨닫고, 놀라운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어린이들이 있는 집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머니가 정성껏 마련한 밥상 앞에 앉아서, 반찬 투정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밥 먹어가면서 꾸중 들을 것은 뻔한 이치 아닙니까? “그래 맛 없으면 먹지 마. 밥 먹지마” 엄마의 화난 목소리만 더욱 커질 것입니다. 그러나 반찬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 없이 잘 먹어 주면, 얼마나 고맙습니까? 맛있게 차려 주었는데, 반찬 투정하면, 성질 좋은 엄마라도, 나중에는 잘 안 차려 줍니다. “너가 알아서 차려 먹어”

      그러나 없는 반찬에도 잘 먹어 주면, 부모는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될 수 있으면, 더 잘 차려 주려고 하지 않습니까? “뭐 해 줄까? 뭐 먹을래. 말해. 다 해 줄께”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더하거나 빼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더하거나 뺄 계획도 없습니다. 2천년전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던 말씀 그대로 우리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들었던 말씀 그대로 우리도 듣고 있습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병든 사람일수록 잘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빨리 회복할 수 있습니다.
      먹지 않고 계속 음식 투정만 한다면, 병은 더욱더 깊어만 갈 뿐입니다.
      잘 먹어야 합니다. 음식을 잘 먹어야 육체적으로 건강할 수 있는 것처럼, 말씀도 잘 먹어야 영적 건강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밥은 밥상에 차려 놓을 수는 있습니다. 병든 사람에게는 억지로 먹여 줄 수도 있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억지로 먹일 수는 없습니다. 먹는 것은 각자 개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 강제로 먹일 수도 없고, 내가 대신 먹어 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억지로 먹여 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 것은, 각자 개인이 할 일입니다. 밥상은 차려져 있습니다. 먹고 건강한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먹지 않고 병든 삶을 살 것인가는, 밥상 앞에 앉은 각자 개인이 할 일입니다. 열심히 먹으면 있던 병도 사라지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으면, 은혜를 받게 되고, 날 향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깨닫게 되고, 날마다 믿음이 잘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흔들리거나 요동함이 없이 바르게 세워지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말씀으로 찾아오시며 다가오시는 하나님 아버지!
      갈급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된 길을 걸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월 7일(화) 창세기 18-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브라함을 생각하사(창 19: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So when God destroyed the cities of the plain, he remembered Abraham, and he brought Lot out of the catastrophe that overthrew the cities where Lot had lived.

      아브라함을 생각하사(he remembered Abraham)
      하나님이 롯이 거주하는 성을 불로 심판하실 때 아브람의 조카 롯을 그 성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그 이유를 아브라함을 생각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교회라는 헬라단어 "에클레시아(ĕkklēsia)"를 기억하십니까?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전치사 "에크(ἐκ)"와 동사 "칼레오(καλέω)"가 합성하여 만든 아주 특별한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에크'라는 전치사는 "밖으로" 라는 뜻이며, '칼레오'라는 동사는 "불러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교회(에클레시아)"는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죄악으로 인하여 불의 심판을 받아야 할 때에 아브라함은 그의 조자를 그곳에서 불러내는 일을 감당하였기 때문에 교회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사명은 죄 가운데 머물던 인생을 죄 밖으로 불러내는 곳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파크리스교회의 시대적 사명은 "불낙지교회"로 발돋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불신자(不信者)들을 찾아내어 믿음의 영역으로 불러내야 합니다.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이 세상에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불신자(고린도전서 10:27. 디모데전서 5:8)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둘째는 낙심자(落心者)들을 찾아내어 희망의 영역으로 불러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또는 교인들과 직분자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곧 낙심자라고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3: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데살로니가후서 3: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히브리서 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셋째는 지체(遲滯)하는 사람을 찾아내어 결단의 영역으로 불러내야 합니다.

      지체라는 한문자는 "더딜 지(遲)" 와 "막힐 체(滯)"라는 문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황하는 인생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지체자(遲滯者)"라고 하겠습니다.

      창세기 19:16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세상에서 소망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곧 지체하고 있는 인생입니다.

      대분의 교회들은 지방에서 도시로 이동한 교인들에 의해서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때로는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이동한 교인들에 의해서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바람직한 교회는 불신자들과 낙심자들과 지체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을 복음의 자리로 은혜의 자리로 진리의 자리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매우 중요한 믿음의 사명을 갖고 모였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힘을 모아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조카 롯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자에게 요청하기를 만일 그곳에 의로운 사람 오십 명이 있다면, 45명이 있으면, 40명이 있으면, 30명, 20명, 10명으로 그 수를 줄여가며 조카를 위하여 몸부림을 쳤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하여 롯을 그 성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파트리스교회 성도들도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아 불신자와 낙심자와 지체하는 사람을 찾아내어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은혜의 2025년이 되기를 함께 기도하며 영혼 구원을 위한 일에 기꺼이 참여하셔서 하늘의 위로와 땅의 보람을 함께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온 세상 위하여



      ἐκκλη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1577

      1. 회.   2. 모임, 운집.  3. 행7:38
      발음 [ ĕkklēsia ]

      교회(마16:18, 행2:47, 롬16:4), 모인 무리 (행19:32), 민회(행19:39), 모임(행19:41).

      ἐκ 스트롱번호1537

      1. 모음 앞에서는 ἐξ.   2. 마 2:15.  3. 요 15:19
      발음 [ ĕk ]

      καλέω 스트롱번호2564

      1. 부르다.  2. ㉠ ~라고 부르다. 3. 초대하다
      발음 [ kalĕō ]


      창세기 20:6
      아브라함은 선지자(나비. 5030)

      아비멜렉의 행위는 그의 도덕 양심과 당시의 윤리 기준으로 볼 때에는 악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신성한 섭리에 누(累)를 끼쳤기 때문에 선지자의 중재를 통해서만 죄 용서 받을 수 있었다.

      선지자(*, 나비)
      - 원뜻은 '쉬임없이 말하다'로 신적 영감을 받아 말하는 '대언자'(출 7:1)를 가리킨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는 일차적 사명 외에 하나님과 사람을 중재하는 역할도 맡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칭하신 까닭은 하나님의 뜻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또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 아브라함이 선지자인 이상, 아비멜렉이 그의 아내를 취하려고 한 것은 선지자의 거룩성과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범죄 행위였다.
      따라서 이러한 아비멜렉의 죄는 아브라함의 중재 기도를 통해서만 용서받을 수 있었다.
      한편 이 같은 아브라함의 선지자적 기능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이미 소돔에 사는 조카 롯을 위한 중재 기도에서 발휘된 적이 있었다(19:29).

      נָבִיא 스트롱번호 5030

      1. 선지자.   2. 선지자의 직분을 하도록 뽑힌 자들.  3.  בְּנֵי הנְּבִאִים
      발음 [ nâbîyʼ ]
      어원   / 아람어
      구약 성경  / 315회 사용
      • 관련 성경  /  선지자(창20:7, 신18:22, 왕상18:4), 대언자(출7:1), 예언자(렘28:9), 예언(단9:24), 예언하는 자(겔13:2,3).


      창세기 18:2

      사람 셋
      - 13절과 19:1에 의거할 때 이 중 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나머지 둘은 천사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과 천사가 이처럼 가시적(可視的)인 사람의 형상을 입고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까닭은 어디까지나 계시 내용을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무형상적이며 시.공간을 초월하는 초월자이시므로 그 본연의 모습으로서는 뜻하는 바 계시 내용을 유한한 인간에게 적절하게 전달할 수 없으므로 이처럼 사람의 형상을 입고 나타나신 것이다.

      달려나가
      - 생면 부지의 나그네들에 대하여 적극적이고도 진실된 사랑으로 영접한 행위이다.
      여행 중에 지친 나그네를 대접하며 그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당시 히브리인들의 관례로 굳어진 아름다운 풍습이긴 하지만(출 22:21;욥 31:32; 마 25:35; 딤전 5:10) 이처럼 아브라함이 그들을 보자마자 달려나가 따뜻하게 영접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친절이자 그의 삶이 항상 나그네 대접하기를 힘쓰는 삶이었음을 드러내 준다.

      몸을 땅에 굽혀
      - 귀한 방문자에 대하여 갖추는 근동의 인사 양식이다.
      야곱이 에서를 맞이할 때(창 33:3), 요셉이 그의 아버지를 환영할 때(창 48:12) 또한 선지 생도들이 엘리사를 맞이할 때(왕하 2:15)에도 이러한 인사가 행하여졌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의 신분이나 연령 등을 묻지도 않고 이러한 예우를 표한 것은 그의 인격이 평소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증명해 준다.




      체험적 신앙(體驗的 信仰)

      기독교 신앙은 ‘체험적’이라는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사도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중간에 부활의 예수를 만나는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 사도들은 부활의 예수를 체험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도 역시 일종의 체험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영적인 체험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들이 예수에게서 어떤 절대적인 사건을 경험했다는 사실에서도 그렇고, 그 뒤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지금도 많은 교회의 설교자들이 신앙의 체험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면, 사과가 있습니다.
      사과를 아무리 설명해준다고 하더라도 직접 먹어보지 않는다면 실제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아무런 설명이 없다고 하더라도 직접 먹기만 하면 사과의 실체를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오렌지를 가져와서 사과라고 하면서 먹어보라고 하면 그것을 먹은 사람은 실제로는 오렌지를 먹었지만 말로는 사과라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사과와 오렌지는 쉽게 구별되기 때문에 이런 착각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종교적인 경험에서는 이런 착각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납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믿는 것을 어떻게 체험하는가?
      술 담배를 즐기다가 완전히 끊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은 기독교 신앙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삶의 평화를 체험했다면 그것은 예수를 잘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평화를 경험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다양한 체험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부수적인 것이 전체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병을 고침 받았다. 문제가 해결 되었다. 등등

      상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방언을 한다. 예언을 한다.  등등

      부활 생명을 확신한다면 이것보다 더 귀한 체험은 없습니다.

      18세기의 훌륭한 목회자인 요한 웨슬리는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건전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머리 둘째 가슴 셋째 손입니다.
      머리는 지식을 말하고 가슴은 체험을 말하며 손은 실천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과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결단이 있게 되면 체험적 신앙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체험되어지면 신앙의 힘은 굉장한 것이 됩니다.

      웨슬리 이야기를 더 해 보겠습니다.
      웨슬리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고 선교지인 미국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만 배가 파선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존 웨슬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여기서 죽는구나’하는 생각을 하니까 눈앞이 캄캄하고 죽음의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 한 모퉁이에서 몇몇이 모여 이런 와중에도 아주 담대하게 찬송을 하며 기도를 드리는 무리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생사를 초월한 저들의 행동에 웨슬리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목사인 나도 이런 와중에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떨고 있는데 저들을 전혀 두려움 없이 찬송과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 무리들은 바로 모라비안 형제단들 이였습니다.
      이 모라비안 형제단은 침례교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웨슬리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이 모라비안 지도자인 스팽킹버거를 찾아갔습니다.
      물론 모라비안 경건주의자의 아버지는 진젠도르프이지요.

      스팽킹버거를 찾아간 웨슬리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하면서 어떻게 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웨슬리의 말을 듣고 있던 스팽킹버거목사는 웨슬리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모르십니까?’‘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또 그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풍랑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신앙으로 자라났고 명문대인 옥스퍼드대학 신학부를 졸업했습니다.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독실한 신자라고 자부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여름철 신앙인 이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웨슬리는 좋을 때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쁜 때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팽킹버거목사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들의 신앙은 겨울신앙입니다. 어떤 두려움과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만 향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스팽킹버거는 다시 웨슬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정말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아십니까? ’이제 긍정적인 질문을 합니다. ‘그거야 모든 인류를 구원하신 구세주 아닙니까?’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세 번째 묻기를 ‘당신은 예수그리스도를 체험했습니까?’이 질문은 당신은 지금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지식으로 믿는 신앙이지 체험적 신앙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대화에 충격을 받은 웨슬리는 모든 신앙을 백지로 하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미국선교를 실패하고 도망하다시피 영국으로 다시 돌아오지요. 그리고 가끔씩 모라비안 형제단의 모임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러든 어느 날 이였습니다. 자세히 말씀드리면 1738년 5월 14일 모라비안 교도의 모임에 참석을 했는데 그날 간증이 있는 날 이였습니다. 어떤 성도가 간증을 하는데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더니 온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순간 웨슬리에게 깊은 깨달음이 왔던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예수를 개념적으로 믿었는데 이 순간에는 나 같은 흉악한 죄인이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가 된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런 극적인 영적체험이 새로운 선교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된 것이지요. 그는 영적체험을 통한 강력한 능력으로 영국의 잠자는 신앙을 깨었고 부패한 사회를 정화했든 것입니다.

      요엘3장17절을 보면 ‘너희가 내 성산 시온에 거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인 줄 알리라’이제는 너희가 알리라고 합니다. 그 동안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너희들이 나를 잘 모른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존 칼빈은 안다고 하는 이 부분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요 또 하나는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저가 ‘알다’하는 이 단어가 굉장히 중요하기에 성경공부시간에 몇 번이고 말씀드린 것이 있습니다. 이 알다는 헬라어로 ‘디다스코’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그냥 우리가 아는 것의 의미와는 좀 다릅니다. 우리가 노무현대통령을 아는 것과 노무현대통령 어머니나 부인이 아는 것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니까 ‘알다’ 라고 쓴 이‘디다스코’의 단어의 뜻은 본질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제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성탄절 날이 어떤 날인지는 세상 사람들도 다 잘 압니다. 그러데 그들이 알고 있는 성탄의 의미와 우리가 알고 있는 성탄의 의미는 틀립니다. 그들은 어떤 행사로 여기며 놀고먹고 즐기는 날로 볼 수 있지만 우리는 그 날만이라도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축하며 경건한 예배와 삶으로 이 날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 이 ‘알다’는 것이 이론적인 앎이냐 아니면 주님의 본질을 아는 앎이냐는 것입니다.

      본질에 대한 앎은 체험에서 나오는 앎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이렇게 공부 안하고 빈둥빈둥 놀면 장차 커서 아무 일도 할 수없을 것이다’ 는 것을 알고 계속 노는 학생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있다면 누가 진정으로 알고 있는 학생입니까? 알면서 실천을 하지 않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후두암에 걸려서 담배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 담배를 피운다면 이것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앎이란 실천을 동반한 앎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디다스코’의 앎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창조과학회가 많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노아가 홍수 후 머물렀던 아라랏산의 방주조각을 탄소측정 방법으로 연대를 측정해 보니까 몇 천 년 전의 나무 조각이 분명하여 그렇다고 하면 노아의 방주가 틀림없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대 유적을 발굴하다가 당시의 기록 속에서 성경의 인물들의 이름이 소개될 때 ‘그래, 성경은 진실이고 역사적인 뒷받침이 분명해...’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확정하는 일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지금도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등의 지역도 고고학적인 발굴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 하란을 통해 가나안땅으로 들어왔던 것을 성서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리아지역에서 아브라함 시대에 그 지역의 이름과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성서고고학의 쾌거를 이룬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들이 입증될 때마다 기쁨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과학적인 입증은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계속해서 연구되고 발굴되면서 성경의 말씀을 과학적으로 입증되어 질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발굴 작업과 과학적인 근거로 객관적인 경험을 가지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꾸 객관적인 증거를 대라고 말합니다. 보여 달라는 것이지요. 보면 더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다 요구하는 사항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먼저 믿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욱 복 되도다’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객관적인 증거를 보여 달라는 말에 쇄기를 박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깨닫고 실천할 수 있도록 지금도 성령께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매일 보는 사람이나 성경공부를 통해 체계적으로 배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말씀을 보고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꼬마가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할아버지, 할머니 나를 누가 만들었어요?’ 하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 그야 하나님이 만들었지,’그래서 이 꼬마는 나를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꼬마 아버지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본 꼬마가 하는 말이 ‘하나님 들어오신다. 그러더랍니다. 우스개 소리지만은 저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정리 되지 않은 지식은 잘못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단으로 빠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리되지 않은 성경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알고는 있지만 그것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웨슬리처럼 여름신앙이 될 수 도 있고 어렵고 힘들거나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공부가 체계적으로 필요한 것이지요.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가면 나 되신 성령이 오실 것이다. 그러니 그 성령을 받으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시다시피 다락방에서 120명이 기도할 때 그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 발짝도 밖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그들만이 모여 기도하며 찬양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성령이 임하니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밖으로 뛰쳐나가 복음을 전했지요.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은 자들 앞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면서 잘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이 참 많지 않습니까? 물론 안다고는 하지만 ‘디다스코’의 앎이 아니란 말도 했습니다. 본질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성탄절을 알듯이 겉의 이론을 아는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알지만 실천하는 능력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알지만 체험되어지지 않는 앎이란 말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확인되어지지 않은 앎이란 말이지요. 그래서 성령이 확인시키는 작업을 지금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이 하는 일은 많습니다. 그 중에 우리를 예수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이나 깨닫게 하는 일들을 하고계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데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성령님을 초청하십시오. 성령의 충만을 받기위해 간구 하십시오. 성령을 받을 때 증인이 되듯이 성령을 받아야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해 낼 뿐만 아니라 말씀을 깨닫게 되며 우리가 아는 지식이 체험적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리니’여기서 믿는 것과 아는 것은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 아는 것이란 말이지요. 그러면 믿음이란 야고보서에 의하면‘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믿음이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체험적 지식과 믿음을 말하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아는 것 즉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에 믿음을 가지는 행함으로 체험적 신앙을 소유하는 복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체험적 신앙이란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이 땅에 임했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개념적인 지식은 절대로 능력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적용시키지 못하는 신앙은 실천의 능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체험적인 신앙으로 성화되기도 굉장히 힘들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예를 들어 제자들은 객관적인 지식은 많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수 없는 기적과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한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자들에게는 개관적인 지식으로 끝나니까 어떤 현상이 나타났습니까?  예수님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아무도 항거하지 않았습니다. 다 그 현장에서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체험이 없는 지식은 무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알고 믿고 체험해야합니다. 체험은 깨달음입니다. 말씀을 현장에 늘 놓아보십시오. 그러면 세상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원리를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주관적인 체험을 가지니까 다 나가서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는 것 아닙니까? 제자들은 다락방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는 속수무책 이였지만 모여서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기다리고 인내했기에 성령의 뜨거움을 체험할 수 있었든 것이지요.

      우리가 실천하지 못하는 지식이 있습니다. 이런 개념적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은 모여서 기도로 성령을 초청하고 예배를 통해 주님의 말씀에 집중한다면 성령의 뜨거운 깨달음이 있을 것입니다. 개념적 말씀이 체험적 말씀으로 확실히 믿는 역사를 맛볼 것입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잠언서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하면 체험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알아야 그 앎에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지식이 나무라면 믿음은 불입니다. 나무가 있어야 불을 붙일 수 있고 나무는 있는데 불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먼저 말씀을 알아야합니다. 체계적인 말씀을 공부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 개념적 지식이 성령을 통해 깨달아지고 체험되어져서 우리의 인생이 주님을 붙들고 승리하며 축복의 역사를 이루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믿음 없는 지식은 돌덩이처럼 굳어서 냉혹합니다. 지식 없는 신앙은 마른 풀과 같아서 오래 가지 못합니다. 신앙 없는 지식은 무능합니다. 지식 없는 신앙은 미신에 빠지거나 이단에 빠져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신앙 없는 지식은 이웃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신앙 없는 문명은 시들고 말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총각사공이 교수한분을 태우고 갑니다. 둘이서 말없이 가는 것이 적적했던지 교수가 사공에게 묻습니다. ‘결혼을 했는가?’아니요. 교수가 다시 묻습니다. ‘철학을 아는가?’ 사공이 대답합니다. ‘뱃사공이 무슨 철학을 알겠습니까?’그러니까 교수가 하는 말이 ‘자네는 인생의 1/4을 잃어 버렸네.’ 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묻습니다. ‘심리학이 무엇인지 아나?’‘저 그런 것 모릅니다.’‘그러면 인생의 1/2을 잃어 버렸네.’ 교수가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천문학을 아는가? 사공이면 천문학 정도는 알아야지?’‘그런 것 잘 모릅니다’‘그러면 인생의 3/4을 잃어 버렸네.’그러면서 교수가 하는 말이 ‘사람의 인생의 3/4을 잃어버리면 죽음목숨이나 다름없네.’

      그런데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는 것입니다. 갑자기 거센 바람에 못 이겨 배는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 다 물에 빠졌습니다. 대학교수는 당황하면서 허우적거립니다. 그 모습을 본 사공이 대학교수에게 물었습니다. ‘교수님 헤엄칠 줄 아십니까?’그랬더니 교수가 ‘아니 이 사람아 내가 헤엄을 칠 줄 알면 이렇게 허우적거리고 있겠는가?’그 말을 들은 사공이 한마디 던집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전부를 잃어버렸습니다.’

      신앙 없는 지식, 신앙 없는 문명, 신앙 없는 과학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19세기에 낙관주의자들이 판을 쳤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지식과 과학 기술을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H.D 월슨은 낙관주의의 대표인물입니다. 그가 나이 들어 인생의 지친 모습으로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허무하다’

      하나님 없는 재물, 하나님 없는 권세, 하나님 없는 육체는 오래 못갑니다. 마태복음 7장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집은 연속성의 문제입니다. 이 연속성을 위해서는 기초가 중요한데 이 기초가 믿음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아는 것을 개념적으로 이해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고 행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말씀은 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알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개념적으로만 알고 있고 그것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알고 있는 것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언제든지 무너지고 만다는 말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동떨어진 생활을 한 것을 성경을 통해 봅니다. 형인 에서의 장자권을 교묘한 방법으로 빼앗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냥을 하고 돌아온 형이 배가 고프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야곱이 팥죽으로 유혹해서 거래를 한 것이요. 아버지인 에서를 속여 축복 권을 빼앗았습니다. 라반 외숙집에서 외숙를 속여 재산을 축척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속인 대가로 집을 떠나 외숙집으로 향할 때 벧엘에서 꿈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께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속에게 주리니 제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펀만 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그런데 이 말씀을 개념적으로 듣고 맙니다. 순간적인 위로에 불과했지 이 말씀이 야곱을 따라다닌 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이 후로의 삶을 보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계속 속이는 인생이였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라반외숙을 속이고 도망 나오게 될 때 뒤에서는 외숙이 쫓아오고 앞에서는 형인 에서가 야곱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삼백용사를 거느리고 죽이러 오고 있습니다. 이제 야곱은 오갈 때 없이 사방으로 둘려 쌓여 포위되다 시피한 사건을 맞이 하게됩니다. 이때 얍복강의 씨름이 나오게 되지요.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야곱에게 씨름을 겁니다. 이것을 우리는 기도로 알고 있는데 기도라기보다 야곱과 하나님의 고집 싸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 ‘내 말대로 살래 아니면 네 고집대로 살래’하는 싸움이지요. 여기서 야곱이 끝까지 자기 고집을 버리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환도뼈를 부러트립니다. 환도뼈를 맞고 난후에 그는 하나님을 재대로 본 것이지요. 그는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개념적인 지식에서 체험적인 지식으로 바뀐 것입니다. 얍복강의 사건 이후에 야곱이 고난당한 일은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그로 인해 오빠들이 세겜족속들의 남자들을 다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고 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야곱은 인간적인 방법을 강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시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서 단을 쌓은 모습을 봅니다. 그러니까 그가 어떤 어려움을 당하면 그 어려움을 자기 지혜로 풀려고 한 삶에서 이제 하나님께 맡기고 예배의 삶을 통해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이 이후의 야곱의 삶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왕이 바로를 만날 때도 그 바로 앞에 축복을 합니다. 감히 왕 앞에 축복할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쉽게 이야기하면 애굽에 얻어먹기 위해 와 놓고 요셉 때문에 바로를 볼 수 있는 영광을 얻었는데도 왕 앞에 축복하는 이유는 네가 아무리 왕이지만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면 삶에 평화를 얻을 수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기독교인들이 힘을 잃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모이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고 성도의 숫자도 줄어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성도 침체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을 지식으로만 개념적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믿고 행하는 성도가 됩시다. 그래서 체험적인 신앙 증명된 신앙 확고한 신앙으로 주의 뜻을 이루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체험적 신앙을 가지려면(누가복음 7:11~17)

      함께 “길을 가던 세 사람이 뱀을 보았는데, 첫째 사람은 조금 놀랐지만 침착하게 멀리” 피했습니다.
      둘째 사람은 “과거 뱀에 물린 상처 때문에, 비명을 치며 줄행랑을” 칩니다.
      셋째 사람은 “땅꾼이어서! 뱀의 종류가 무엇인지 보고, 손으로 뱀을” 잡았습니다.
      이를 보면 “어떤 상황에 대한 반응은 사람이 겪은 체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을 체험했는가! 이는 현재와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삶에서 “성장은 배움과 학습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경험과 체험을 통한 배움이 더” 확실합니다. 이는 “죄인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례로 “교회 마당만 밟는 영혼과 주님을 체험적으로 만난 영혼의 신앙생활이 어떻게” 같겠어요? 말만 “하는 신앙생활과 직접 고생하며 은혜를 체험한 영혼의 신앙생활이 같을 수” 없습니다. 결국 “영적 성장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 나를 사랑하심을 직접 체험함에서 시작”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나인 성에서 이미 죽었던 과부의 독자를” 살리셨습니다. 과거 “주님은 야이로 딸과 나사로를 살리셨기에, 이 청년은 세 번째 살린 경우가” 됩니다. 구약의 경우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자를 살렸지만, 이는 본문과 무려 900년 시차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16절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말씀합니다. 본문에서 “주님 주변에 세 부류의 사람들, 제자와 무리, 나인 성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주의 은혜를 누가 가장 깊이” 체험했을까요? 제자와 “많은 무리도 죽은 자가 살아남을 보고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하나님 은혜를 가장 깊게 체험한 영혼은 나인 성 과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은혜를 보고 듣기보다, 오히려 내 것으로 깊이 체험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영혼이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보고 듣지만, 깊은 영적 체험이 너무도” 부족합니다. 과거 “우리 선조들은 성경에 기록된 능력을 직접 체험하며 신앙생활” 했습니다. 선교지에서도 “주께서 상식을 깨고 일하심을 직접 체험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존재하는 은혜를 직접 체험하는 영혼이 점점” 줄어갑니다.

      하나님께서 “변하거나, 성경의 교훈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 영적 태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고 은혜받으려면, 보고 들음을 넘어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체험은 “성경의 이야기,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내 삶에 들어와서, 내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체험! 간증은 악한 세상에서 내 믿음을 굳게 붙들어주는 힘이” 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체험적 신앙을 가지려면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픔을 아신다는 확신 

      본문에서 “주님의 일행과 장례 행렬이 우연히! 들어가고 나가는 중 만나게” 됩니다. 당시 “나인 성 과부는 독자를 잃은 상실감으로, 어쩌면 아무것도, 누구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과부가 독자를 잃고, 또한 자신의 기구한 처지를 생각하고 얼마나 서럽게” 울었겠어요? 그런데 “주께서 먼저 그런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특히 “불쌍히 여기다! 원어는 창자가 뒤틀리듯 함께 아파하는 모습을” 뜻합니다.

      주님은 “과부의 아픔을 보시고, 창자가 뒤틀리듯 아파하시며 먼저 다가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14절에서, 관에 손을 대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말씀합니다. 율법은 “죽은 자를 만지면 부정하다! 여겨서, 시신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주님도 “이를 잘 아셨지만, 과부를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파서, 율법까지 깨며 다가가셨던 것”입니다. 과부는 “누구보다, 자신의 아픔을 깊이 아시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함이 큰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어른들이 “우리 자녀에게, 과거에 겪은 6.25와 보릿고개를 말하면 그 반응이” 어떨까요? 많은 경우 “피자 먹으면 된다. 물이 없으면 음료수를 마시면 된다! 기막힌 말을 할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과거 어른 세대의 아픔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상상도 못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누군가 내 아픔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함부로 말할 때! 큰 상처가” 됩니다. 반면에 “내가 당하는 아픔을 공감하고, 같이 아파할 때!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제한적 존재이기에! 내 아픔을 전부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알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 주님은 내 창조주시기에! 나의 모든 사정과 아픔, 눈물과 기도 제목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낱낱이” 아십니다. 또한, “주님은 만왕의 왕이지만, 낮고 낮은 구유에 오셔서! 가난한 자와 부한 자, 천민과 귀족, 모두의 아픔을 가장 잘 아시는 분”입니다. 게다가 “주님은 그 아픔을 불쌍히 여기고, 친히 나를 도우시려 십자가까지!” 지셨습니다.

      우리가 “체험적 신앙을 가지려면, 주께서 내 모든 아픔을 다 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주께서 내 아픔을 다 알기에! 절대로 낙심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영혼이 나를 아는 주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지” 못합니다. 말은 “주께서 나를 가장 잘 아신다 인정해도! 실제 삶은 반대로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신앙생활은 “어떤 경우에도! 주께서 나를 가장 잘 아시고 도우심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학생 때! “어떤 교수님이 예배 시간에 하신 말씀이 참 많이” 아팠습니다. 설교 중! “바르게 목회하려면! 반드시 세 가지 중보 기도 그룹이 필요한데! 첫째! 생명 걸고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중보 기도자! 부모와 배우자를” 언급했습니다.

      둘째! “시간을 정해서, 나를 위해 기도할 수십 명이 필요하다!” 말했습니다. 셋째! “기도할 때마다, 나를 빼놓지 않고 기도하는 그룹 백 명은 넘어야 한다!” 말했습니다. 당시 “저는 불신 가정에서 신학교에 입학했기에! 세 가지 중 어느 중보 기도 그룹도” 없었습니다. 불신 “가정에서 믿음의 개척자였기에! 그 말씀은 제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날 “예배 후! 모두가 예배당을 빠져나간 후! 혼자 남아서 참 많이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정말 어렵게 신학교에 왔는데! 저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때 “주님께서 제게 주신 답변이 지금도 제 귀에” 쟁쟁합니다. “내가 있잖아! 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니!” 그 후 “저는 불신 가정에서 목회자가 되었다는 열등감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내 아픔을 가장 잘 아시고, 이해하시고, 나를 가장 따뜻하게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문제는 “이 체험을 한 영혼보다, 영적 체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영혼이 더” 많습니다.

      영적 “성장은 내 아픔과 내 기쁨도 아시는 주님! 나와 동행하는 주님을 만나는 깊이와” 비례합니다. 또한 “내 아픔을 아는 주의 사랑을 체험하면, 악한 세상에서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내 아픔을 아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얼마나 깊이” 체험하셨나요? 힘들다고 “나와 함께 하는 하나님을 외면함은 가장 큰불 신앙”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떤 경우에도, 내 아픔을 아는 주님을 깊이 체험해서 항상 승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회복시킬 것을 확신하라

      본문 12절은 “죽은 자가 과부의 독자이다! 많은 이가 장례 행렬에 함께 있었다!” 말씀합니다. 당시 “장례 행렬에 함께한 많은 사람이 독자가 이미 죽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과부에게 울지 말라! 말씀하고 관에 손대며, 본문 4절에서” 말씀합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마침내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게” 되었습니다. 의사인 “누가는 죽었던 영혼이, 아네카디센! 일어나서 똑바로 앉았다!” 말했습니다.

      이는 “주께서 애달프게 울었던 과부의 아픔, 장례 행렬의 아픔을 온전히 치유하셨음을” 말합니다. 실제로 “죽었던 독자를 살리셔서! 일어나 앉았고, 말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이처럼 놀라운 은혜를 직접 체험한 과부의 신앙은 더 깊어졌을 것”입니다. 또한 “죽었다가 살아난 이 청년이 체험한 은혜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삶도 “마치 죽은 독자처럼, 이제는 가망 없다. 끝났다. 좌절하고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이룬 것도 없고, 게다가 더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사에 자신감을 잃고, 얼굴이 어두워지고, 상처로 소극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내가 정말 없어서 힘들었다는 그것이 채워지면, 내 삶이 더” 나아질까요? 일례로 “물질로 고생한 영혼이, 물질이 차고 넘치게 되면, 모든 문제가 다” 회복될까요?

      인간은 “천하보다 귀하기에! 천하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온전한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내 삶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 어려움, 눈물과 절망은 오직 하나님만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루만지심, 회복하게 하심, 긍휼히 여겨주심만이 넘어진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이 회복의 “은혜는 개인은 물론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한 소망교회 “모든 교인은 누구나 교회가 더 나아지고 회복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회복은 일부 중직자와 당회의 희생과 수고로만 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회복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루만지고, 은혜를 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신앙인조차 하나님의 위로보다 세상의 위로를 더 사모하며” 삽니다. 실제로 “연약한 인간은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누가 문제야! 누구 때문이야! 원망부터” 많아집니다. 그러나 “정말 회복을 원한다면! 사람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 은혜만 구해야!” 합니다.

      죄인인 “인간은 주께서 나를 일으켜 세워준 체험이 깊을수록 누리는 은혜도” 커집니다. 문제는 “모든 영혼이 주님께서 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내 믿음, 평안함, 기쁨과 감사는 모두 하나님께서 내게 회복의 은혜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회복된 체험을 깨닫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기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살기등등함으로 기독교인을 박해했기에! 자신을 죄인 중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주님을 만난 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박해자 바울을 버리지 않으시고, 회복의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인 중 괴수를 “용서하셨고, 덮어주셨고, 위로와 은혜로,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온전한 회복의 체험이 있었기에, 신실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나도 바울처럼 많은 영혼을 넘어뜨리고 아프게 한 죄인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아십니까?

      그런데도 “주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회복시켜 주셨지만, 우리는 이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재철 목사의 “새 신자반!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주께서 가시관을 쓰심은 내가 머리로 지은 죄를 씻어주기 위함이다. 주께서 로마 군인의 채찍으로 가슴을 맞음은 우리 마음의 죄를 씻어주기 위함이다. 주께서 손에 못이 박힌 이유는 내 손이 범죄 한 것을 씻어주기 위함이다. 주께서 두 발에 피를 흘린 이유는 가서는 안 될 곳을 간 내 발의 죄를 씻어주기 위함이다. 주께서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심은 내 모든 죄를 다 씻어주기 위함이다.”

      놀랍게도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모든 사역은 죽어가는 나를 살리고, 은혜로 회복시켜 주심에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해도! 이 회복의 은혜를 체험하면 절대로 영적 곁길로 빠지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삶의 모든 순간마다 주님 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체험해서, 영적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체험적 신앙인 도마(요한복음 20:24-29)

      체험의 함정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F.Bacan)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편견과 망상을 우상이라고 표현하고, 대표적인 네 가지 우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그는 참된 경험과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이 네 가지 우상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종족의 우상’이란 맹목적인 습관, 감정, 신앙에서 오는 편견을 뜻합니다.
      ‘동굴의 우상’이란 개인적인 취미, 성격, 환경에서 오는 편견을 뜻합니다.
      ‘시장의 우상’이란 인간의 접촉, 언어에 의하여 나타나는 편견을 뜻합니다.
      ‘극장의 우상’이란 전통, 역사, 권위를 무비판적으로 믿는 편견을 뜻합니다.

      철학자들은 쉬운 말을 어렵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이 네 가지 우상도 말이 어려워서 그렇지 그 내용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말 공감이 가는 내용들입니다. 지금 네 가지 우상을 다 설명할 시간은 없고 이 가운데 두 번째 우상인 ‘동굴의 우상’만 생각해 봅니다. 이 ‘동굴의 우상’은 오늘날 우리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마치 동굴 속에 묶여 있는 포로들처럼 자기가 있는 좁은 세계만 바라보고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뜻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말에 아주 이 ‘동굴의 우상’과 딱 들어맞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뭘까요? 바로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입니다.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는 우물이 세상의 다인 줄 알고 삽니다. 하늘도 자기가 보는 우물 입구의 둥그런 부분만 하늘인 줄 알고 삽니다. 그래서 이 ‘동굴의 우상’이나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은 모두 자기의 경험과 지식만 의존해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편견, 넓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 ‘동굴의 우상’이나 ‘우물 안 개구리’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중세의 사람들은 모두 지구가 평편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평편한 지구 끝을 지나면 낭떠러지로 떨어진다고 생각했고 자기네가 사는 유럽대륙만이 세계의 전부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갈릴레이가 지구가 둥글다는 말을 했을 때 이단으로 몰아붙여 재판을 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 뿐 아니라 자기가 체험한 것만 인정하고 자기 경험에 비추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은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절대 믿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지금부터 살펴보려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 도마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경험만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으로 자신이 직접 보지 않고 만져보지 않으면 믿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흔히 우리가 도마를 ‘의심 많은 제자’라고 부릅니다만 엄밀하게 따지면 이 도마는 의심이 많다기보다 자기 체험에만 의존하는 편협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체험주의자에서 체험신앙으로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면서 자신이 제자들을 떠나 천국으로 가야하지만 영원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는 것이므로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도마는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요 14:5)라고 묻습니다. 한 마디로 그 길이 어디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이 도마는 ‘디두모’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요즈음도 이 도마와 쌍둥이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천국이라는 것이 어디 있느냐, 못 믿겠다, 있다면 한 번 보여줘 바라. 그래서 천국에 가봤다는 사람들이 뭔가 천국의 증거를 대보려고 이런 저런 책을 많이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책이 뭐가 필요합니까? 안 가 보면 없는 것입니까? 저는 중국이나 영국은 한 번도 안 가봤지만 당연히 있는 줄 압니다. 어떻게 아나요? 있다고 배웠으니까 있는 줄 아는 것입니다. 솔솔 부는 바람은 눈으로 본 적이 없지만 분명 있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안 봤어도 바람을 몸으로 느끼고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 봐도 얼마든지 느끼고 믿을 수 있는데도 어리석게 천국은 내가 안 가봤으니 있는지 없는지 못 믿겠다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것입니다. 도마와 쌍둥이 벌 되는 사람들이지요.

      또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이 때 하필 도마라는 제자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도마가 나중에 나타나자 제자들은 기쁜 마음에 우리가 주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도마가 어떤 사람입니까? 안 보면 절대 안 믿는 사람이라고 했지요? 그러니 도마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

      교회에서 보면 꼭 이런 분이 있습니다. 소위 ‘당당한 결석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모임에 안 와서 중요한 말 할 때 못 듣고 나중에 와서 “왜 나 없을 때 그런 중요한 말 했느냐?”고 따지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서 모처럼 선물을 줬더니 “왜 하필 나 없을 때 선물 주느냐?”고 따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결석은 왜 했습니까? 그 자리 지키고 있었으면 받을 것 다 받고 아무 문제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합니다. “저는 예수 믿은 후 교회에 한번도 빠져본 적이 없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나 없을 때 은혜 받으면 어떻게 하나, 나 빼놓고 전부 다 은혜 받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어서입니다.” 재미있는 이유지만 건전한 신앙인 것 같습니다. 이 정도는 돼야 은혜도 받지요.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 나타나셨을 때 결석하고는 남이 하는 말 안 믿고 우기는 것입니다. 사실 하필 자기 없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말씀도 가르치고 성령도 주셨는데 얼마나 손해가 막심합니까? 그런데 도마는 이 사실을 안타까워하지는 않고 난 못 봤으니 못 믿겠다고 우기기만 합니다. 정작 받을 은혜는 못 받은 채 내 눈으로 안 보면 못 믿겠다니 참 답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오늘 본문 26절을 보니 그로부터 8일이 지난 후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한번 나타나십니다. 왜 다시 한번 나타나신 것일까요? 특별히 도마를 만나기 위해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27절부터 보면 도마하고만 대화를 나누신 것입니다. 어떤 대화입니까? 27절을 보세요. 예수님이 도마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네가 못 보고 못 만져보면 안 믿겠다고 하니 한번 직접 보고 직접 만져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이 말씀 속에 왜 주님이 다시 나타나셨는지, 왜 특별히 도마를 만나기 위해 오신 것인지 이유가 나타납니다. 맹목적인 경험주의자 도마를 변화시켜서 주님의 사람으로 쓰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이와 같이 각기 다른 성격, 다른 특성을 지닌 제자들을 이렇게 하나하나 만나 설득하고 변화시켜 각자 위대하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생깁니까? 28절을 보세요.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에게 어떤 변화가 온 것입니까? 여전히 도마는 체험을 중요시 합니다. 자기가 직접 보고 직접 만져보더니 그제야 “당신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입니다.”하고 고백합니다. 체험을 중요시하는 자세는 별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그의 태도는 변합니다. 어떻게 변하는가? 자기 체험만 믿던 맹목적인 체험주의자,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기 경험만 믿던 어리석은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후 건전한 체험신앙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도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체험신앙’입니다.

      체험의 힘

      이와 같이 영적인 세계에서 체험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도마는 자기 눈으로 직접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자기 손으로 직접 예수님 손의 못자국, 허리의 창자국을 만져본 후 그 놀라운 체험을 바탕으로 열정적인 사도가 됩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신앙은 체험입니다! 체험이 없는 신앙은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체험이 없는 신앙은 그저 머리로만 믿는 것이기 때문에 뿌리가 없고 조금만 시련이 와도 금방 무너집니다.

      우리도 체험신앙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세계를 직접 체험해야만 은혜를 진심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체험은 말로 설명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도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도 도마를 제외한 나머지 열한 제자는 다 예수님을 직접 보았는데 그 열한 명이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다고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해도 도마 한 사람 설득하지 못합니다. 체험해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이런 경험 해보셨을 것입니다. 부흥회 가서 은혜 받았는데 부흥회 안 간 남편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를 못 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는데 내가 만난 주님에 대해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상대방은 고개만 갸우뚱,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답답해도 할 수 없지요. 이 체험이라는 것이 말로 설명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체험만 하면 아무리 의심 많고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반드시 믿게 됩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손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만져보는 체험만 하면 제 아무리 도마 같은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 많을 것입니다. 본디 이 ‘벤허’라는 영화는 루이스 월리스라는 퇴역군인이 쓴 소설을 영화화 한 것입니다. 월리스는 1827년 미국 인디애나 주지사의 아들로 태어나 변호사를 거쳐 남북전쟁 때에는 북군의 장군으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월리스가 어느 날 한 친구와 대화하던 중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 아들임을 밝히는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메시아니 초능력적인 인물이니 하는 허구를 다 벗기고 순수한 인간 예수를 조명하는 것이 그의 집필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저 “기독교는 얼마 후에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출 것이다.”는 친구의 말만 믿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소설을 쓰는 동안에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소설을 쓰면서 예수님의 생애를 추적하고 연구하며 그 배경을 알려고 성경을 읽는 동안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게 되었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시인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믿게 되었습니다. 월리스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고스란히 소설의 주인공에게 투영시켜 1880년 ‘벤허’라는 제목으로 출판합니다. 이 소설이 1959년 영화화돼 많은 이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특히 불신자들 중에서도 이 영화를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식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월리스는 성경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의 사랑과 구원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체험이 담긴 소설과 영화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고 그들의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체험에서 우러러 나온 힘, 이것이 바로 체험신앙의 능력입니다.

      나만의 체험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영적 체험을 가지고 계십니까?

      체험이라고 하면 다들 겁부터 먹습니다. “체험은 무슨 체험, 난 그런 거 없어. 남들은 죽을 병 걸렸다가 살아난 체험도 하고, 완전히 망했다가 다시 일어난 체험도 있다지만 난 그런 체험 없다구. 그냥 교회 나가고 그냥 믿는 거지 뭐.” 맞습니다. 우리에게 거창한 체험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간증할만한 거리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도 누구에게 간증할만한 큰 체험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목사님들 보면 죽을 병 걸렸다가 기도하면서 나았다는 분도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분도 많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참 신기합니다. 하지만 저에게 이런 체험은 없는지 몰라도 나름대로 참 귀한 체험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주님의 은혜를 뜨겁게 느낀 일, 말씀을 읽다가 마음이 뜨거워진 일, 어렵고 힘들 때,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 주님이 까마귀를 보내주셔서 도움을 주고 힘을 주신 일들 등등 비록 초자연적이고 남에게 자랑할만한 대단한 체험은 아니지만 이 모든 것이 저만의 체험, 제 나름대로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체험입니다. 그리고 저는 무엇보다 주님을 만난 체험을 했습니다. 영적으로 주님을 만났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고3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영적으로 십자가를 체험했습니다. “거기 너 있었는데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하는 찬송가 136장 가사처럼 저도 영적으로 그 십자가의 현장에 서있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 손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만져보았습니다. 나를 위해 찔리신 그 못자국과 창자국을 만져보고 나를 위해 흘리신 그 보혈의 피를 느껴보았습니다. 이만큼 소중하고 귀한 경험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영적인 체험이 어찌 죽을 병 나은 체험보다 못하다고 하겠습니까?

      이런 체험들이 차곡차곡 쌓여 오늘의 제가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저 자신의 성격을 보면 감성적인 면보다 이성적인 면이 더 발달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빌립이나 오늘 본 도마처럼 이성적이고 차분하고 때론 냉정하며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편입니다. 자칫하면 차가운 이성주의자나 체험주의자가 될 위험이 많은 성격이지요. 그런데 이런 저의 성격이 이 작은 체험들을 통해 뜨거움을 경험하고 변화된 것입니다. 목회에 열정을 가지고 뜨거운 은혜와 체험을 경험할 수 있는 목회자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체험이 꼭 있어야 합니다. 체험이 없는 신앙은 연약합니다. 체험이 없는 신앙인은 정말 불행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신앙은 체험입니다. 도마처럼 체험주의자가 되어 자신의 좁은 경험만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체험이 없는 신앙 또한 정말 위험합니다. 건전한 신앙적 체험을 통해 우리 신앙이 탄탄해지고 뜨겁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고 자기 체험만 믿다가 체험적 신앙인으로 변화된 도마는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도마는 성령강림 이후에 페르시아를 지나 인도까지 가서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인도가 힌두교 국가라고만 알고 있지만 인도 남부지방에 가면 소수의 진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이 세운 교회가 있습니다. 다 도마의 후예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도마는 열두 제자 중 가장 멀리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 사람입니다. 정말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순종해서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된 사람이 도마입니다. 그는 마지막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창에 찔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주님이 허리에 창을 찔리신 것처럼 자신도 창에 찔려 순교한 것입니다. 내 삶으로 예수님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하고, 또 내 죽음으로 주님의 고난을 그대로 체험한 사람이 도마입니다. 오늘날 인도 마드라스의 케나이 공항 근처에 도마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자그마한 언덕도 있고 그를 기념한 성 도마 교회도 세워져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체험적 신앙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저 머나먼 인도까지 복음 들고 가서 순교까지 당할 수 있는 능력은 그의 특별한 체험 때문에 가능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머리로만 믿지 말고 체험적 신앙인이 되기 바랍니다. 다른 어떤 체험보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 예수님 손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만져보는 체험, 나도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서 보혈의 피를 느껴보는 경험을 하기 바랍니다. 이런 체험을 하면 어떤 근심이나 두려움도 사라지고, 어떤 제약이나 장애물도 걱정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체험신앙의 힘인 것입니다.




      결혼 - 결국은 혼자
      이혼 - 이제부터 혼자


      1월 6일(월)
      본문 / 창세기 14-17장
      주제 / 나는 전능한 하나님(17:1)
      성구 /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When Abram was ninety-nine years old, the LORD appeared to him and said, "I am God Almighty ; walk before me and be blameless.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I am God Almighty)
      전능한 하나님을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el Shadday. שַׁדַּי אֵל)"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등장되는 하나님의 이름은 다양합니다.
      주로 야훼(Yhwh)와 엘로힘(Elohim)이 사용되었는데, 야훼가 약 6700회, 엘로힘이 약 2500회 정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엘 샤다이 (El Shaddai)(창 17:1, 출 6:3), 엘 엘리욘 (El  Elyon)(창14:19), 엘 로이 (El Roi)(창 16:13)와 같은 "엘"이 들어간 복합적인 명칭을 사용합니다.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이란 의미를 소개합니다.
      "엘(El)"은 "유일신 하나님"을 의미하고 "샤다이(Shaddai)"에 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엘 샤다이'는 주로 "전능하신 하나님(God Almighty)"로 번역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샤다이(ShaDai)"가 "파괴하다", "압도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리슈도드(leShDoD)"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도둑, 강도를 뜻하는 히브리어 "쇼데드-ShodDeD" 역시 같은 어근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엘 샤다이(El Shdai)의 ShaDai는 문법적으로 봤을 때 "가슴"을 뜻하는 ShaD와 더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히브리어에서는 어미에 "i"나 "ai"가 오게 되면  대부분 "나의"라는 의미가 됩니다.
      위와 같이 해석했을 때, 엘샤다이는 "하나님은 나의 가슴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어머니의 가슴 즉 어머니의 품을 생각해 보면 그 가슴은 따뜻하고 정감이 넘치는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전능하신 하나님 즉 엘 샤다이는 하나님의 따뜻한 가슴으로 세상에서 실패한 인생이 찾아올 때 반갑게 맞아주실 것입니다.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고 온갖 어려움과 힘든 모든 것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은혜가 눈폭풍이 쏟아지듯 퍼부어주시기를 소망합시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창세기 17:1
      아브람
      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출애굽기 6:3
      내가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엘 엘리욘 (El  Elyon) - 창14:19
      엘 로이 (El Roi) - 창 16:13
      등의 엘(El)이 들어간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엘(’el) אֵל  스트롱번호 413

      1. 어떤 것을 지향하다.  2. ~으로. 3. 사 38:2.
      발음 [ ’el ]
      구약 성경  / 5464회 사용
      • 1. 전치사 [전치사] 어떤 것을 지향하다, 어떤 곳을 향하다.
        • a. 전치사 [한 장소로의 운동: ‘가다’는 동사와 함께 쓰임] ~으로, ~을 향해, 삼상 6:11.
        • b. 전치사 [어떤 것에 대한 전환] ~으로, 사 38:2.
        • c. 전치사 [운동이나 전환이 적대적일 때] ~에 반하여, 창4:8.
        • d. 전치사 [어떤 점이나 표시까지 도달할 경우] ~까지, ~까지도, 렘51:9.
        • e. 전치사 [어떤 경계 안으로 들어갈 때] ~안으로, 신23:25(24).
        • f. 전치사 ~이외에도, 레18:18.
        • g. 전치사 ~에 관하여, 출14:5.
        • h. 전치사 ~에 따라서, 수15:13.
      • 2. 전치사 [어떤 사람이 바라는 한 장소에 머무를 때 사용]
        • a. 전치사 ~곁에, ~근방에, 삼상17:3.
          b. 전치사 ~안에서, ~가운데, 신16:6.

      • 관련 성경 /  ~에게, ~향하여, ~안으로, ~으로, 대하여(창 30:40, 삼상 3:12, 렘 22:11), 때문에(삼상 4:21), [부] 서로(렘 36:16).
      샤다이(Shadday) שַׁדַּי  스트롱번호  7706

      1. 가장 능력있는 자.  2. 전능자. 3. 창 17:1
      발음 [ Shadday ]
      어원  / 770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8회 사용
      • 1. 명사, 남성 가장 능력있는 자, 전능자, 창17:1, 28:3, 출6:3, 욥5:17,6:4.
      • 관련 성경  /  전능자(민 24:4, 욥 37:23, 사 13:6), 전능(출 6:3), 전능하신 이(욥 8:3, 5). [형] 전능하다(창 17:1, 48:3, 겔 10:5).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שַׁדַּי אֵל

      엘 샤다이( ’el Shadday) שַׁדַּי אֵ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시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1-3) .

      이 때 아브람은 75세였고, 그의 아내 사래는 65세이었습니다. 
      더 이상 자녀를 얻을 수 없는 육체의 한계에 부딪친 나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여서 이내 자식이 생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속절없이 가는 세월에 점점 늙어만 가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아브람이 후손에 대한 기대가 점점 희미해져갈 때,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지키고 너에게 큰 상을 주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에게 주의 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께서 나에게 자식을 주시지 않았으므로 내 집안의 종이 내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라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고 말씀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이 말씀을 믿었습니다.(창 15:1-6) 

      이후 10년이 지난 아브람 나이 85세 때에, 사래가 10년이 넘도록 자식이 생기지 않자 남편 아브람에게 말합니다. “(창16:2) 
      여호와께서 나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시니 당신은 내 여종과 함께 잠자리에 드세요. 
      아마 그녀를 통해서 자식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사래가 자기 몸종을 첩으로 내준 것입니다. 
      아브람은 아내의 이러한 요구가 분명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어긋나는 것으로 철저히 인간적인 방법임을 알고서도 아내에게 한 마디 반대도 없이 아내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인 방법과 잔꾀로 성취해보려는 아내와 그 뜻을 같이 한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신의 뜻과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한 인격체인 여종 하갈을 생산의 도구로 이용한 죄악,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질서인 일부일처제를 파괴한 죄를 범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지 못하고 스스로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섣부르게 행동하므로 장차 큰 비극의 씨앗을 뿌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브람의 기대와는 달리 아브람 가정은 하갈의 몸을 통해 태어난 이스마엘로 인해 긴장과 불화가 생겨났고, 아브람과 사래와 하갈 이 세 사람 모두 심각한 갈등과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스마엘이 잉태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창 16:12)

      이 말씀대로 훗날 첩의 소생 이스마엘은 오늘날 아랍 민족의 시조가 됨으로 해서 중동 전쟁의 뿌리 깊은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인간의 얄팍한 지혜로 이뤄보고자 하는 것은 교만일 뿐 아니라 이웃을 고통에 빠지게 하는 악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라고 약속한 자식은 아브람과 한 몸인 사래에게서 태어난 자식입니다. 
      첩의 자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래가 낳은 자식과 여종 하갈을 통해 낳은 자식을 분명히 분별해서 말씀하십니다. 

      갈라디아서 4:22-23을 보겠습니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 9:7-8)

      사래의 뜻을 따라 하갈이 낳은 자식은 ‘육체를 따라 낳은 자식’이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사래가 낳은 자식이 “하나님의 자녀”, ‘약속의 자녀’입니다. 아브람의 상속자는 ‘약속의 자녀’라야만 합니다. 

      2. 오늘 본문은 아브람이 종의 자식을 낳은 후 13년이 지난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새롭게 확신케 하시는 말씀입니다. 후손에 대한 약속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자 끝까지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조급하게 하갈과 동침하여 가정 분란의 갈등과 고통을 초래했던 아브람에게, 그의 나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창17:1-2)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아브람은 ‘육체를 따라’ 태어난 이스마엘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문제아로 자라가는 것을 볼 때마다 자신의 믿음 없었던 행동에 대해 후회되기도 했지만 지난 13년 동안, 즉 나이 100세가 다 되어가는데도 하나님께서 후손에 대해 한 마디 말씀이 없었던 것이 불안했습니다. 몸은 날로 노쇠해져 가고 마음 역시 가정 갈등으로 인해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지난 날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고자 했던 자신의 생각, 그리고 아내 사래의 뜻에 따라 종의 자식을 낳은 일 등으로 하나님께서 혹시 자신을 버리신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으로 좌절하고 낙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후손에 대한 모든 소망을 접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백수(白壽)의 나이 99세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 el shad·dai)으로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언약을 다시 한 번 확신시켜 주신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제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며 절망할 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며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새롭게 하시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라.”(창 12:3)는 언약을 확실하게 이루시겠다는 뜻으로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창17:4-5)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한 가정의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람’을 ‘열국의 아버지’, 곧 ‘모든 민족의 아버지’라는 ‘아브라함’으로 개명(改名)하신 것입니다. 이는 아브람을 단순히 한 가문의 존경받는 조상이 아니라, ‘모든 믿음을 가진 사람의 조상’,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을 받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갈3:7-9)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이름도 언약에 걸맞는 이름, 즉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뜻의 ‘사라’로 개명하셨습니다. 분명히 90세의 할머니 사라의 몸을 통해 아들을 낳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7:15-16을 보겠습니다. 

      (창17:15-16)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그리고 정확히 1년 후,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가 되었을 때 ‘약속의 자녀’, ‘이삭’을 낳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 나이 99세에 찾아오셔서 언약을 재확인하시고 그 이름을 ‘아브라함’, 즉 ‘모든 민족의 아버지’라고 개명해주셨을 때, 아브라함은 온전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약속의 자녀’, 이삭을 낳았습니다. 로마서 4:19-22을 보겠습니다. 

      (롬4:19-22)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들을 이루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입니다. “엘”(EL)은 ‘전능하신 하나님’(The Strong One)이란 뜻이고, “샤다이”(Shadday)는 ‘어머니의 젖가슴’(the breast)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엘 샤다이”는 ‘어머니 젖가슴처럼 따뜻한 가슴으로 기적을 행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1) 먼저, “샤다이”(Shadday)는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셔서 우리 인생들을 얼마든지 풍족하게 양육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따라 나왔던 이방인들이 광야에서 날마다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었음에도 애굽에서 살던 때 먹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괜히 나왔다며 이렇게 원망불평을 터트렸습니다. ‘애굽에서 생선을 공짜로 먹던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그 밖에도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에 선한데,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입맛마저 떨어졌도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이같은 원망불평이 금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염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영양 실조되어 죽어가는 것처럼 소리쳐 울며 모세에게 대들어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가 견디다 못해 하나님 앞에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어찌하여 주께서는 주의 종을 이렇게도 괴롭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주님의 눈 밖에 벗어나게 하시어, 이 모든 백성을 저에게 짊어지우십니까? 이 모든 백성을 제가 잉태하기라도 했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했습니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저 혼자서는 도저히 이 모든 백성을 짊어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 무겁습니다.”(민11:1-14) 

      이러한 모세의 간구에 하나님께서 ‘이제부터 백성들을 돌보는 짐을 너 혼자 지도록 하지 않고 장로들 중 70명을 세워 함께 지도록 하겠노라. 그러면 너 혼자서 애쓰지 않아도 될 것이니라. 그리고 또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라. 내일 너희가 고기를 먹게 될 것이니라. 하루만 먹고 그치지는 아니할 것이니라. 이틀만도 아니고, 닷새만도 아니고, 열흘만도 아니고, 스무 날 동안만도 아니라, 한 달 내내, 냄새만 맡아도 먹기 싫을 때까지, 줄곧 그것을 먹게 될 것이니라.’ 

      그러자 모세가 되물었습니다. ‘장정만 60만명입니다. 애들과 노인들, 여자들을 모두 하면 200만명이 넘습니다. 그들을 먹이려고 애굽에서 나올 때 끌고 나온 양과 소를 다 잡는다 해도 턱도 없이 부족합니다. 바다에 있는 고기를 모두 잡은들,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나의 손이 짧아지기라도 하였느냐? 이제 너는 내가 말한 것이 너에게 사실로 이루어지는지 그렇지 아니한지를 볼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람을 일으켜 바다 쪽에서 메추라기를 몰아, 진을 빙 둘러 이쪽으로 하룻길 될 만한 지역에 떨어뜨리시어, 땅 위로 두 자쯤 쌓이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왠 떡이냐며 정신없이 주워 먹는데 씹지도 않고 삼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원망불평을 일삼았던 무리들을 진노하시자 그들이 고기를 입에 문채 죽음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땅에 묻고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습니다. ‘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원망불평하다 식탐(食貪)으로 죽음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을 양육하시되 하나님 말씀으로 양육하시고자 때로 광야 길을 걷게 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면 부족함이 없이 양육하시는 분이십니다.

      신명기8:1-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인생들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엘 샤다이”, 모든 인생들의 ‘양육자’이심을 믿고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샤다이”(Shadday)는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셔서 우리 인생들에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강한 힘을 베풀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 유명한 삼손이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힘의 상징인 머리털이 밀리고 말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들이닥쳐 삼손을 결박하자 과연 힘을 전혀 쓸 수 없었습니다. 

      삼손은 그 길로 블레셋에 끌려가 감옥에서 멧돌을 돌리는 비참한 노예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마치고 축제를 시작할 때 삼손을 불러 재주를 부리게 하기 우상숭배 신전에 세웠습니다. 
      삼손이 믿는 하나님보다 자기들이 숭배하는 우상 ‘다곤’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하나님을 조롱하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삼손이 신전 기둥 사이에 세워졌습니다. 
      그 신전에는 블레셋의 모든 지도자들과 수많은 백성들로 가득했는데 신전 지붕에만 3천명이 있었습니다. 

      이때 삼손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그리고 신전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자 신전이 한 순간에 무너져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전부 압사당했습니다. 그 때 죽은 자들이 삼손이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습니다.(삿16:1-31) 

      삼손은 자기 민족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 힘을 구하고 장렬하게 전사(戰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앙망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을 이기는 ‘새 힘’을 주십니다. 이사야 40:28-31을 보겠습니다.

      (사40:28-31)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전능하사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에게 베푸시는 ‘새 힘’이 날마다 충만하여 모든 일에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샤다이”(Shadday)는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셔서 우리 인생들을 만족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He is the Satisfier, who pours himself into believing lives). 
      ‘만족케 하신다.’는 것은 ‘풍족하게 하신다’(sufficiency), 
      ‘충만하게 하신다’, ‘부요하게 하신다’(enrich),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하신다’(fruitful) 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2:16-18을 보겠습니다. 

      (창22:16-18)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그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히 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이처럼 ‘엘 샤다이’는 구하고 생각하는 것에 더 차고 넘치도록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에베소서 3:19-21을 보겠습니다. 

      (엡3:19-21)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B.C.853년경 모압과 암몬, 마온이 연합군을 만들어 유다를 공격하고자 했습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은 즉시 전 백성에게 금식명령을 내려 기도에 동참하도록 하고 성전에 나가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주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세계 만민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분이 아니십니까? 권세와 능력이 주께 있으니, 아무도 주께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 이 땅을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시지 아니하셨습니까? 이 땅에 주의 이름을 위해 주의 성전을 건축하고 만일 전쟁이나 전염병이나 기근과 같은 재난이 닥쳐온다면, 하나님 앞, 곧 주의 이름을 빛내는 이 성전 앞에 모여 서서, 재난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겠고, 그러면 주께서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고 말씀하셨나이다. 이제, 암몬과 모압과 마온이 우리를 저렇게 공격하려고 하나이다. 우리를 치러 온 저 큰 대군을 대적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고, 어찌할 바도 알지 못하고, 이렇게 주님만 바라보나이다.’ 

      이같은 기도에 즉각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셨습니다. 

      “너희는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이러한 하나님 말씀에 찬양드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가 여호사밧이 백성들에게 외칩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그리고 거룩한 찬양대를 만들어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소리높여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며 감사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연합군으로 하여금 서로를 공격하도록 만들어 전멸시켜버렸습니다. 연합군 중 살아남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백성들을 데리고 가서 전리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전리품 가운데는 상당히 많은 재물과 옷과 보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자가 마음껏 탈취했는데, 전리품이 너무 많아서 운반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리품이 이처럼 많아서, 그것을 다 거두어들이는 데만 사흘이나 걸렸습니다. 

      나흘째 되던 날, 그들은 그 골짜기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브라가’ 골짜기라 불렀습니다. ‘찬양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적군을 이기심으로 유다 백성을 기쁘게 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연합대군을 치셨다는 소문을 주변 국가들이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사밧이 다스리는 동안 나라가 태평성세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에게 구하는 것 이상으로 축복하셔서 전승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전리품을 거두게 하시고 나라의 태평성세를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뜻대로 잘 통치할 수 있도록 지혜와 지식을 구했을 때, 지혜와 지식뿐만 아니라 구하지 아니한 부귀영화까지 베풀어주시되 전무후무할 정도로 축복하셨습니다.(대하1:9-12)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에게 ‘엘 샤다이’의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므로 온갖 구하고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베풀어주시는 은총과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엘 샤다이(El Shaddai)는 하나님의 히브리어 이름 중 하나입니다. 

      구약에서 등장되는 하나님의 이름은 다양한데요, 주로 야훼(Yhwh) 엘로힘(Elohim)이 사용되는데, 야훼가 약 6700회, 엘로힘이 약 2500회 정도 등장한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엘 샤다이 (El Shaddai) - 창 17:1, 출 6:3

      창세기 17:1
      아브람
      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출애굽기 6:3
      내가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엘 엘리욘 (El  Elyon) - 창14:19
      엘 로이 (El Roi) - 창 16:13
      등의 엘(El)이 들어간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1월 4일(토)

      본문 / 창세기 10-13장
      주제 / 복의 근원(창 12:2)
      성구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복의 근원이 될지라(You will be a blessing)
      사람들은 누구나 복을 받기를 원하며 복을 주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복은 무엇인가?
      어떻게 복을 받을 수 있는가?
      이 두 가지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바라크의 복
      복을 히브리어로 “바라크(bârak)라고 합니다.
      바라크라는 단어는 "무릎을 꿇다" "하나님께 기원하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복이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기원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물질의 복과 육체의 강건이 우선이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참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복을 영생이라고 선언합니다(133:3).
      따라서 영생의 복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요 17:3).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복은 무엇일까요?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일곱 가지 복을 살펴보겠습니다(창 12:2∼3)
      1. 자손의 축복: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2. 물질의 축복: 복을 주어
      3. 명성과 명예의 축복 :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4. 복된 존재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5. 하나님 편에 서는 것: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6. 보호를 받는 축복 :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리니
      7.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으로부터 우리가 받아야 할 복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그 복을 누리기 위하여 순종해야 합니다.
      복을 주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순종한 후에 복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아브람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옛 생활의 정든 곳을 포기할 때 복을 받을 수 있는 순종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은 먼저 내가 즐기던 세상의 것들을 포기하고 버려야만 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은 내가 포기하고 버려야 할 것들을 살필 줄 아는 믿음으로 하루를 시작해 봅시다.
      ♪ 찬송 / 예수 따라 가며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바라크(bârak) בָּרַךְ  스트롱번호 1288

      1. 무릎을 꿇다.  2. 하나님께 기원하다.  3. 피엘형 בֵּרֵךְ
      발음 [ bârak ]
      구약 성경  / 256회 사용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종류의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존재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는 사람이 이에 속합니다.
      두 번째 종류의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재앙을  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하고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만 하면 하던 일도 잘 안되고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세기 12:1-4)

      예로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은 복 받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래서 수저에도 ‘복(福)’자를 새기고, 사람 이름에도 ‘복’자를 넣습니다.

      복(福) : 복 복(福) / 시(示) 보일 시. 한 일(一). 입구(口). 밭 전(田)


      또 어떤 사람은 대문에다 ‘복’자를 써서 붙였습니다.
      ‘개문복래(開門福來)’라 해서 대문을 열면 복이 들어온다고, 다들 잠자는 이른 새벽에 문을 활짝 열어놓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복 받기를 원하는 것은 정상적인 것입니다.
      성공하고, 행복하고, 장수하며, 자손이 번창하는 것, 이런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복 받기 원치 않는 다면 저주가 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을 받겠습니까, 아니면 저주를 받겠습니까?
      우리는 마음속에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가지고 우리 개인적인 삶이나 직장, 사업,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 자체가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과, 복에 대한 약속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하나님은 과연 우리에게 어떻게 복을 주실 지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체적인 예를 들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아서 아브라함 같이 복 받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은 B.C. 2241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데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75세 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러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거부가 되었고, 100세에 자식을 얻었으며, 175세까지 살다가 평안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족보를 보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에서와 야곱을 낳고, 야곱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축복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게 되었고 온 인류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말씀에 기록된 대로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만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봉독한 성경말씀을 네 가지로 분류해서 축복 받는 비결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둘째,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셋째,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넷째, 아브라함이 그 말씀에 순종해서 따라갔다. 

      1.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 과거의 죄악된 삶에서 떠나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창 12:1a) 

      여러분, 이 말씀은 결코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본토’는 무엇입니까? 갈대아 우르 지역은 달의 신 ‘난다(Nannda)’와 그의 아내 ‘닌갈(Ningal)’여신을 숭배하는 도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살던 그 지역은 우상을 숭배하는 죄악의 도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본토’를 떠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우상과 죄를 버리고 떠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친척들’로부터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친척들로부터 떠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 당시는 친족 공동체였습니다. 친척들이 모여서 함께 일하고 생활하며, 그 공동체 안에서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친척들이 모여서 기득권을 행사하고, 서로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여태까지는 이렇게 친척을 의지하고, 친척의 도움을 받고 살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도움보다 하나님의 도움이 더 크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알게 하셨습니다. 

      게다가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유산, 상속, 이 모든 것도 버리고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더 큰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부모의 유산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부모가 주는 유산보다 몇십 배 더 많이, 더 풍족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토도 떠나고, 친척도 떠나고, 아비 집을 떠나면, 직접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쉽습니까? 여러분, 정말 이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아마 이 말씀을 듣고 갈등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정말 고향을 떠날 것인가? 친척을 떠날 것인가? 아버지의 집을 떠날 것인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세상을 택할 것인가 선택하는 과정에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택했습니다. 

      역대하 7장 14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악한 길에서 떠나 하나님의 전에 나와 겸비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땅을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악한 길에서 떠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겸손한 삶이요, 의로운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 말씀에도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나쁜 것, 좋지 않은 것, 도움이 되지 않는 것, 버릴 것은 버리고 새 것을 추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떠날 때는 떠나고, 버릴 때는 버려야 합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버려야 되겠습니까? 

      우상숭배를 버려야 됩니다(왕하 10:29). 돈이 우상입니까? 돈을 버려야 합니다. 명예가 우상입니까? 명예를 버려야 합니다. 권세가 우상입니까? 권세의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분노를 버리고(시 37:8), 거짓 행위를 버리고(시 119:29), 속이는 것을 버리고(잠 4:24), 악한 행동을 버리고(사 1:16), 악한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사 55:7). 욕심도 버리고(엡 4:22), 불의도 버리고(딤후 2:19), 세상 정욕도 버려야 합니다(딛 2:12). 

      순종하는 삶, 세상 것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가는 삶이 축복의 시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사람은 돌아설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올바른 길로, 의의 길로, 하나님께로 향할 줄 아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회개한 사람입니다. 

      한사람이 간증을 했습니다. 교회는 다니면서도 신앙생활은 별로 열심히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몸에 병이 걸렸습니다. 발에 딱지가 생겨 처음에는 ‘괜찮겠지’하고 생각했다가 나중에 병원에 가보니 피부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의사는 암이 퍼질지도 모르니 수술을 해야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마음에 두려움과 공포가 생겼습니다. 

      평소에는 기도하지 않다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수요예배, 금요일 예배, 주일 예배는 물론 새벽예배까지 나가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몸에서 암 증세가 다 떠나게 하시옵소서.” 

      그런데 한 번은 새벽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온 몸에 샤워를 하는 것 같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나니 마음속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나는 병에서 고침 받았다. 하나님께서 내 병을 고쳐주셨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병원을 다시 찾았습니다. 암 증상이 다 사라졌음을 확인했습니다. 기적적으로 병을 고침 받게 된 것입니다. 

      평소에 신앙이 좋지 않았다 하더라도 병에 걸리고,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을 당하면, 다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하게 됩니다. 그 때라도 겸손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죄악을 버리고, 불신앙을 버리고,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이젠 하나님 앞에 손들고 나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박대하시면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제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내 기도에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나가면 하나님께서 사랑과 은총으로 영접하시고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병을 고쳐주십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의 갈 길을 비춰 올바른 길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2.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나아가라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b) 

      가고 싶은 대로, 제멋대로 아무 데나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땅’은 앞으로 가서 살 땅, 비전(vision), 미래를 말합니다. 과거를 통해서 역사 하셨던 하나님은 현재도 역사 하시고, 미래에 앞으로 일어날 일도 말씀하시고 인도하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2000년대 하나님의 지시대로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은 과거의 죄악된 우상, 또 과거에 의존하던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삶을 향해서 신앙의 개척자요, 인생의 모험가로서 새로운 축복을 기대하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창세기 26장 2절 말씀에 이삭이 흉년이 들어 그랄 지역을 떠나 애굽으로 가려고 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그곳을 떠나지 말라고 지시 하셨습니다. 그곳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그 말씀에 순종한 결과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축복을 주셔서 백 배의 수확을 거두게 하시고, 창대하고 왕성하여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은 거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마다 축복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나와서 믿는다고 하면서도 가난하고 병들고, 어려움 당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습니까? 순종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영적인 축복, 물질적인 축복을 주시고, 환경과 생활을 통해서 역사 하시고 복의 길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잠언 3장 6절 말씀에도 솔로몬 왕이 말했습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내 생각, 내 지식보다도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문제나 큰 문제나 하나님 앞에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 뜻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뜻대로 행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결재를 받고 움직여야 합니다. 종이 상관의 허락 없이 제 멋대로 하면 나중에 어떤 결과가 옵니까?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결재를 받고, 인정을 받고, 허락을 받고, 하나님의 계시대로,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시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하시길 원하십니다. 꿈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창 20:6), 음성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왕상 19:12), 마음의 소원으로(시 21:2), 또는 환상을 통해서(시 89:19), 평강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교를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롬 8:16)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경시하거나 경홀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비록 내가 해 보지 않은 새로운 분야라 할지라도 희망과 꿈을 가지고, 비전을 가지고,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기 위해서 앞서 나가야 되겠습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Aquinas, Thomas ; 1225∼1274)는 “완전한 축복은 하나님의 비전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가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삶을 책임지시고 인도하여 주십니다. 

      어떤 청년이 신경쇠약을 앓고 있었습니다. 의사도 병명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청년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희망을 가지세요. 만약, 희망을 갖지 않는다면 당신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간곡하게 말했는데 청년은 ‘희망을 가지라’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죽는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이 청년은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죽을 거야. 나는 죽을 거야. 나는 죽을 거야.” 

      그런데 정말 몸이 점점 더 수척해 지고 눈이 퀭해지더니 자기가 말한 대로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하여 만족케 되느니라”고 했습니다(잠 18:20).
      ‘행복하다, 행복하다’하는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있지만, ‘아!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한가?’하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공한다’하는 사람은 성공하지만 ‘실패한다’하는 사람은 실패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하는 사람은 사랑 받지만,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해. 나는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거야.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셔.’하는 사람은 미움밖에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꿈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나가야 됩니다. 땅을 쳐다보지 말고, 하늘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는 사람은 땅을 쳐다봅니다. 그러나 땅을 쳐다보지 말고 하늘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인간들만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 인간 역사만 바라보면 낙심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을 쳐다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우리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새시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희망을 주십니다. 천국이 임박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셔서 부르짖는 자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승리를 허락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 7가지 축복을 받는 복된 존재가 된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2∼3) 

      창세기 12:2∼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일곱 가지 축복

      1. 자손의 축복 -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2. 물질의 축복 - 복을 주어,
      3. 명성과 명예의 축복  -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4. 복된 존재 -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5. 하나님은 나의 편이 되는 축복  -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하나님이 내편이 되고 내가 하나님 편이 되는, 하나님과 한편이 되는 축복입니다.
      6. 보호를 받는 축복 -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리니,
      하나님께서 모든 저주를 막아주시고 또, 보호하시는 축복입니다.
      7.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면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시고, 내편이 되신다면, 우리는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자 요셉은 가는 곳마다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보디발의 집에 팔려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을 축복하시니까 보디발의 집도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9장 5절 말씀에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고 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축복이 따라옵니다. 회사를 가면 그 회사가 잘 됩니다. 집안에 있으면 그 집이 잘 됩니다. 나라도 형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여러분이 복 있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꾸 남편에게 의존해서 복을 받겠다고 하지 말고, 여러분 자신이 축복을 받아서 남편을 도와주고, 부모에게 효도하시고, 많은 사람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신명기 28장 2∼6절 말씀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즉 조건부입니다. 무조건이 아닙니다. 축복은 조건부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물질로 순종하면 물질의 축복을 주시고, 몸으로 순종하면 건강의 축복을 주시고, 시간 드려 예배를 드리면 구원을 베풀어주시고, 기도하면 응답을 주십니다. 축복은 조건부입니다. 누구를 원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축복을 받느냐 안 받느냐는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1900년대는 어렵게, 가난하게, 궁핍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이제 2000년대는 하나님 앞에 풍족한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에 사도 베드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유업으로, 상속으로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모든 종류의 축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번성케 하시는 복(창 1:28), 자녀의 복(창 49:25), 대적으로부터 승리하는 복(출 23:22), 건강의 복(출 23:25), 형통케하시는 복(왕상 2:3), 구원의 복(시 3:8), 평강의 복(시 29:11), 장수의 복(시 34:12∼14), 물질의 복(시 132:15), 영생의 복(시 133:3), 지혜의 복(잠 19:8), 이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으로 풍족하게 채워 주십니다.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은 내가 복을 받아서 다른 사람도 축복 받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도 성공하고 당신도 성공하고, 나도 행복하고 당신도 행복합니다. 내 복을 타인에게,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그런 역사를 베풀어야 합니다. 

      기독교 국가는 많은 나라들을 도와줍니다. 기독교 회사도 많은 회사들을 도와줍니다. 우리도 교회에 나와서 집사, 권사, 장로 되어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으면,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많은 사람을 도와주고, 전도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인간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항상 현실보다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자기 계획보다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택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기적적인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충남 부여에서 한 교회 장로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간증했습니다. 그는 포도 농사를 지었는데 그 포도나무들 중에서 한 나무를 정해 놓고 ‘이 포도나무는 하나님 것입니다. 여기서 열리는 포도는 교회에 바쳐서 성찬식을 하겠습니다. 이 포도나무는 성찬식 하는 포도나무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드릴 포도나무를 정해놓고 포도농사를 시작했는데 얼마나 포도농사가 잘 되는지 풍작일 뿐 아니라, 질도 좋아서 포도농사로 아주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TV에 출연하게 되고, 일본연수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린다고 정해놓았던 그 포도나무 한 그루 때문에 온 포도원이 다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수박농사도 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교회 가기 전에 수박밭을 돌아보니 수박꽃이 만발하였습니다. 이럴 때 인공수정을 시켜야 하는데 교회는 가야 되겠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집사 시절에 ‘나는 꼭 주일성수 하겠다.’고 선포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장로가 되었으니 ‘성도들에게, 제직들에게 더욱 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게다가 주일 학교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수박농사를 망친다 하더라도 먼저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내 사명을 감당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수박은 하나님께 맡기고 교회로 갔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부랴부랴 수박밭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수박밭에 웬 개미떼가 그렇게 많은지 사방이 다 개미떼였습니다. 동태를 가만히 살펴보니 개미가 수박꽃에 붙어서 수정을 시켜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먼저 예배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개미를 통해서 수정시켜주시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수박농사, 포도농사가 모두 다 잘 되니 여기저기서 강의 요청이 오고, TV, 라디오에도 출연하고, 300개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간증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믿어도 올바로 믿으면, 진짜로 믿으면,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축복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믿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순종하는 척하면서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과 물질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브라함같이 하나님 말씀에 진정으로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 주시고, 많은 축복을 받게 하셔서 사람들 앞에 간증하도록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4.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다 - 말씀에 순종하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창 12:4)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아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어느 때라도 하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나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 물질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 중심, 자아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 순종했습니다.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고, 가라면 가고, 있으라면 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도 하나님의 역사 하심에 순종했습니다. 불기둥이 움직이면 자기도 움직이고, 불기둥이 멈추면 자기도 멈췄습니다.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자기도 움직이고, 구름기둥이 멈추면 자기도 멈췄습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는 대로, 역사 하시는 대로 따라서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약속과 축복을 성취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었고, 아브라함은 큰 축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 이름이 창대케 되어서 하나님의 벗, 믿음의 조상, 선지자, 열국의 아비, 그리스도의 조상, 여호와의 종 등 각종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을 통해서 예수께서 나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인류가 구원받고, 천국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축복 받았으니 우리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서 복의 근원이 되어야겠습니다. 

      신명기 15장 4∼5절에 모세는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강남교회에는 가난한 자 한 사람도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서 1장 19-20절 말씀에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순종 아니면 배반밖에 없습니다. 순종하려면 끝까지 순종하십시오. 

      어떤 사람은 한번 순종했다가 한번 배반하고, 다시 순종했다가 또 배반하고 그러니까 만날 제자리걸음입니다. 될 듯 될 듯 하면서도 안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안되고 현상유지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단 순종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역사 하십니다. 

      시몬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그러자 누가복음 5장 5절 이하에 보면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역사 하시면 차고 넘치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순종하는 자에게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는 자손의 축복을 받고(창 26:4∼5), 질병에 걸리지 않고(출 15:26), 은혜를 받습니다(출 20:6; 신 5:10). 장수합니다(신 4:40). 물질의 축복을 받습니다(신 15:4∼5).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만들어 주시고(신 28:1), 형통케 만들어 주십니다(신 29:9). 가정이 행복하고 잘 되고(왕상 11:38),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나며(요 14:23), 성령으로 충만함받고(행 5:32), 또한 순종하는 사람의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십니다(요일 3:22). 

      그러나 불순종하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합니다(신 28:15). 재앙과 질병이 닥칩니다(신 28:58∼59), 번영하지 못합니다(신 28:62), 하나님께 버림을 당합니다(삼상 15:23). 교회에서도 버림을 당합니다. 가진 것도 빼앗깁니다(삼상 28:18∼19). 죽음을 당합니다(왕상 20:36), 곤고에 들어갑니다(시 107:10∼11).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요 3:36). 그 사람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살후 1:8∼9). 

      하나님 앞에 순종한다는 것은 축복을 받는 특권입니다.
      여러분, 이 특권을 버리지 말고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순종할 줄 몰라서, 순종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탐욕과 욕심과 교만과 거짓과 도적질과 속임수로 그들은 복을 받은 척하지만, 그러나 오래가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만이 영원한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1월 3일(금)

      본문 / 창세기 7-9장
      주제 / 방주로 들어가라(창세기 7:1)
      성구 /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The LORD then said to Noah, "Go into the ark, you and your whole family, because I have found you righteous in this generation.

      방주로 들어가라(Go into the ark)

      방주로 들어간 노아의 가족들은 모두 여덟 명이었습니다.
      노아와 아내, 세 아들(세, 함, 야벳) 그리고 자부들(세 며느리들)

      한자의 "배 선(船)"자를 파자(破字)하면 "배 주(舟)" "여덟 팔(八)" "입 구(口)"라는 세 문자가 결합된 문자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여덟 명의 입이 배에 올랐다는 뜻으로 노아의 가족 여덟 명이 방주에 들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상형문자(象形文字)는 문자 자체에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문자인데 그 대표적인 문자를 "한문자(漢文字)"라고 합니다.
      따라서 어떤 학자는 한문자에 나타난 의미가 성경적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믿음의 가족들이여!
      만일 지금 노아 홍수 때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면 나의 가족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의 방주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는지 가늠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사건은 이미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이지만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나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믿음의 눈으로 헤아려 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시대에 방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느 교회를 선택해야 할까요?
      어느 목사를 따라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안으로(In Christ)"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는 입으로 예수를 구세주로 시인하라!(빌립보서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둘째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하라!(로마서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셋째는 온 몸과 마음으로 예수님처럼 살아가라!(디도서 1: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행 2:21).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로 들어가서 물로 심판을 하실 때 구원을 얻었다면 오늘의 시대는 오직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의 방주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직 구원의 방주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가족은 없는지요?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들도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나서야 하겠습니다.

      날 구원하신 예수를














      마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눅17: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히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벧전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후2: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창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방주(方柱) 테바(têbâh) תֵּבָה    

      1. 궤.  2. 방주. 3. 상자
      발음 [ têbâh ]
      구약 성경 / 28회 사용
      • 1. 명사, 여성  - 궤, 방주.
        • a. 명사, 여성 [노아가 만든] 방주, 창 6:14이하
        • b. 명사, 여성 [갓난 모세를 두었던] 상자, 출 2:5.
      • 관련 성경 / 방주(창 6:14, 7:1, 9:10), 갈 상자(출 2:3), 상자(출 2:5)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1백 20년 동안 신실하게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칭찬과 이해를 받을 수 있는 일을 하기는 쉽습니다.
      누가 들어도 상식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방주는 배가 아니었습니다.
      이상한 모양의 방주를 1백 20년 동안 짓고 있는 노아를 어느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고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말 중에 가장 이해되지 않는 말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이해되지 않는 말입니다. 2천년 전에 죽은 어느 한 청년의 이름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은 상식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7장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방주를 다 지은 노아에게 하나님은 ‘너와 네 집은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복입니다. 날이 좋고 심판이 없을 때에는 방주안에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류에 심판이 임할때에는 방주에 들어가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방주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장 1절을 보면 노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신앙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6장에서는 노아를 가리켜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7장 1절에서 또 다시 하나님은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보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는 변함이 없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여러분도 변함없는 신앙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폭풍과 비바람이 치고, 회사가 망하고, 자녀들에게 어려움이 생길지라도, 건강에 위기가 올지라도 여러분의 믿음이 변함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내가 너의 의로움을 보았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언젠가 하나님앞에 설 때 ‘너는 내 앞에서 의로왔다’고 평가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드디어 노아는 자기가 지은 방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다는 말은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신다는 의미입니다.

      6장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하나님이 1백20년 전에 노아에게 ‘내가 세상을 심판하리라’고 약속했습니다. 세상에 죄가 관영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는 방법입니다. 옛 것을 버려야 새 것이 나옵니다. 노아시대에는 물로 심판을 받았지만 노아시대 이후 인류가 쌓은 죄는 불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노아를 통해 구원을 계획하시고 방주를 지어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약속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인간은 배신합니다. 아무리 신실하고 착한 사람일지라도 한 두 번은 배신하고 몇 번씩은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몇천년을 지나도 배신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 부릅니다. 구약은 옛 적의 약속을 말하며 신약은 새로운 약속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모든 약속은 신약에서 모두 성취되었고 신약의 약속은 앞으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라는 사람을 택하여 구원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이 지금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곧 불의 심판이 올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로운 사람이 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노아입니다. 노아와 그 가정이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자신도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그 가족도 구원받습니다.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가정이 구원받을 줄 믿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심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속과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변함이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3장 19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하나님은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 적도 없고 만져본 적도 없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약속은 여러분에게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 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 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공중의 새도 암 수 일곱씩을 취하며 공중의 새도 암 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
      6장 19절을 보십시오.
      혈육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하나님은 동물의 모든 종을 보존케 하기 위하여 암수 한 마리씩 남겨 두었습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정결한 짐승은 일곱마리씩 들어가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방주는 광야와 같은 곳입니다. 방주는 그리스도인의 현주소입니다. 방주 안은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방주에 들어가는 자만이 은혜를 받고 복을 받으며 구원을 받습니다.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마리씩을 데리고 들어가라고 말했습니다. 정결한 짐승은 번식을 더 많이 시키려고 하는 것일까요? 짝을 지어 데리고 들어간 이유는 종족보존을 위한 것이었지만 정결한 짐승 일곱쌍은 제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정결한 짐승이란 제사를 드리기에 합당한 짐승을 의미합니다. 제사는 방주안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제사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 갖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그분에게 영광과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림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광 가운데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예배는 제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우리의 몸을 정결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하신 산제사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피의 제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 필요한 제사는 피의 제사입니다. 그래서 아벨이 동물의 피로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참 제사는 아벨은 비록 에덴동산을 쫓겨난 죄인이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죄인으로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복과 영광이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곳은 감옥도 영광의 자리로 변합니다. 예배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과 영광과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할 수 있는 정결한 짐승을 하나님이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여러분도 눈치챘을 것입니다. 좋을 것 같아 보였던 결혼생활도, 아이가 태어나는 일도, 돈을 버는 일도 죽을 때까지 고생입니다.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병에 걸릴 수도 있고 우리가 하는 사업은 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현실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예배드리는 자는 아무리 세상이 험해도 천국처럼 승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라는 사실을 이 험악한 세상 한복판에서 소리높여 외칠 수 있습니다.
      방주는 광야와 같습니다. 광야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듯이 방주 안에는 노아가 드리는 예배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과 기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 영혼이 소생하고 육체가 새로와지고 여러분의 삶에 풍성한 복이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그 열쇠는 바로 예배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지금부터 칠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에게는 기적의 7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믿는 여러분에게도 놀라운 기적의 7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적을 예배하는 7일입니다. 이 7일동안 하나님께서는 약속한 혈육있는 모든 동물들을 노아의 방주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용이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그 많은 짐승들이 어떻게 7일 동안 방주안으로 모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 많은 동물을 모두 방주안에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자연법칙이나 상식과 이성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의심하게 됩니다. 상식과 이성으로는 심판이 온다는 말을 믿을 수 없고 일주일안에 모든 동물들을 방주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영적인 법칙과 믿음의 법칙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쉬운 일입니다. 개미떼를 보면 먹이를 물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줄을 잘 맞추어서 지나갑니다. 하늘에 날아가는 기러기떼도, 꿀을 따는 벌도 정확히 자신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짐승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동물들이 한 순간에 짝을지어 쌍쌍의 모습으로 나타나 줄을 지어 방주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만일 노아가 동물을 잡아 방주안으로 넣겠다고 시작했다면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이와같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쉽게 해결됩니다. 그 많은 동물들이 때가 되자 방주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노아가 한 일은 그저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면 모든 일이 그저 힘이 들고 어려울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면 기쁘고, 쉽고,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동물들은 제각기 방주 안으로 들어왔고 무게의 균형을 맞추어 1층과 2층과 3층으로 나누어 자리잡았습니다. 기온이 낮고 햇빛도 없고 산소가 부족하면 동물들은 동면을 취합니다. 방주 안의 동물들은 1년동안 동면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방주안의 동물들을 다스렸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아주 쉽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생애에 하나님이 간섭하게 되시기를 원합니다. 8장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권념했다’라는 단어는 ‘기억했다’ 혹은 ‘간섭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안의 동물들을 간섭했다는 말입니다. 자녀를 키우기가 힘이 듭니다. 사춘기를 겪는 아이들도, 결혼한 자녀들도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돌봐주시면 스스로 알아서 성장합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복받고 살 수 있는 비밀입니다. 방주는 은혜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기 때문에 방주 안이 복받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방주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이 마지막시대에 노아의 방주와 같은 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교회를 떠나지 마십시오. 방주 안이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이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납니다.

      사실 방주안은 그렇게 행복한 장소는 아닙니다. 창도 없이 동물과 살아야 하는 곳입니다. 재미도 없고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 방주 안에 있는 기간은 고작 1년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일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광야의 삶은 40년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곳입니다. 방주는 노도 없고 돛도 없습니다. 방주는 의지대로 갈 수 없습니다. 그저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임의로 빠르게 혹은 늦게 가게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방주는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키가 없습니다.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갈 수 없습니다. 방주 안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믿는 것 뿐입니다. 만일 방주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다면 한 순간도 생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인생을 살아본 사람들의 결론은 ‘내 인생을 산 적이 없이 끌려 다녔다’라는 고백입니다. 인생 여정동안 회사에 의해, 어떤 사람에 의해 평생 노예처럼 끌려다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마칠 때 우리가 하는 말은 ‘허무하다’ 입니다. 자신이 인생을 운전한 것 같지만 계획한 대로 된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속고 있습니다. 인생의 결론은 죽음외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뢰할 때에만 인생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배를 운전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을 믿고 경배하며 찬양하며 그 분앞에 나아갈 때 자연의 법칙과 이성의 법칙을 넘어서서 초자연적으로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근심과 걱정이 내앞을 우겨쌌더라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만나도 답답하지 아니합니다. 홍해가 갈라집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 만나를 주십니다. 물이 없을때 바위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해주십니다. 절망이라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해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의 간섭하심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직장문제도, 자녀문제도, 이웃간의 문제도 하나님이 간섭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돈을 따라 다니지 말고 따라오게 하십시오. 이것이 방주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기준과 전혀 다른 새로운 기준, 영적인 법칙과 놀라운 믿음의 세계가 여기에 있습니다. 6-9절을 보십시오.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세라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대로 암 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7일동안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는데 비가 올 징조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억울하게 들어갔을 때에도 요셉에게 미리 총리대신이 되기 위한 각본이라며 미래의 일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믿음을 보십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기도할 때 사환에게 지중해 저편에 구름이 있는지 몇번이고 확인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일을 하지만 많은 갈등과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섬기면서 갈등과 의심이 나는 것은 정상입니다. 엘리야가 포기하지 않고 일곱번 기도했을때 지중해 저편에 손바닥만한 구름이 보인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 구름은 폭풍과 비바람을 몰고오는 하나님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갈등과 고민 속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일인가’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성에 순종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말하는 사람인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말하는지 확인해 보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칠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비 한방울도 오지 않더니 정확히 7일후에 홍수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사는 동안 의심과 갈등도 있고 사람들로부터 비판의 소리가 있을 지라도 여러분이 선택한 것을 의심하지 마시고 뒤돌아서지 마십시오. 그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여러분이 선택하신 일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기뻐하는 길인지 확신이 있다면 고난이 따르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이라면 사람의 박수소리가 없을지라도 그 길을 계속 가십시오. 11-12절을 보십시오.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하늘이 창을 열고 물을 쏟아 부었고 바다와 땅의 경계가 흐트러졌습니다. 사십주야동안 비가 내렸습니다. 방주를 짓는 1백20년동안 이 사실을 믿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홍수는 인간의 이성과 자연법칙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성의 속삭임이나 세상사람들의 이론에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역사는 곧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전도입니다. 이 세상을 구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이루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불의한 세계를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고, 깨어있어 게으르지 말고, 방관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같이 여러분을 통해 방주를 예비하시고 구원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2천/1만비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렵고 힘들어도, 환율이 올라도 선교사를 보내는 것입니다.


      방주로 들어가라(창세기 7:1—24)

      네피림의 시대

      1. 사람들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6:2)
      2.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6:2)
      3.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6:3)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6:4)
      5. 그들은 용사라(6:4)
      6. 고대 명성이 있는 사람이었더라(6:4)

      우리의 유일한 방주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1. 영세전에 그리스도(창 1:1-3)
      2. 성육신한 그리스도(요 1:14. 빌 2:5-9)
      3. 부활하신 그리스도(행 1:2, 고전 15:3-4)
      4. 재림하실 그리스도(행 1:11. 마 24:14)
      5. 심판주 그리스도(히 4:1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되는 것(마 16:16-20)

      인생의 근본문제

      1. 옛 뱀 - 만왕의 왕(요일 3:8)
      2. 원죄 - 대제사장(롬 8:1-2)
      3. 하나님 떠난 지옥배경 - 참 선지자(요 14:6)
      4. 성삼위 하나님의 비밀(마 28:18-20)

      방주의 특징

      1. 2절 - 모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것을 네게로 데려오며
      2. 10절 -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3. 16절 -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4. 18절 - 물이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5. 23절 -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자들만 남았더라.

      방주로 들어가라(누림)

      신앙의 본질 - 누림

      복음이해(방주를 만들라) - 복음화(방주로 들어가라)

      복음화(롬 1:1, 갈 2:20)

      복음화된 증거 - 문제, 위기, 갈등이 문제가 되지 않으며 소화시킴

      1. 방주의 열쇠(요 14:13-14)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2. 성삼위 하나님의 비밀(마 28:18-20) - 예배와 말씀 회복
      3. 보좌의 축복 -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일(9가지) - 기도회복
      4. 3시대 증인 - 현장회복

      방주로 들어가라(창세기 7:1—24)

      창세기에는 크게 네 사건과 네 인물이 나옵니다.

      창 1장 창조
      창 3장 타락
      창 6장 네피림과 노아홍수
      창 11장 바벨탑

      그리고 그 이후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창 3장은 하나님을 믿지 말고 네 스스로 하나님이 되라는 것입니다.
      창 6장은 나의 것을 찾으란 것입니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고 철학입니다.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어 스스로 생불, 부처가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진짜 불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메혹적이고 좋은 말입니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네 눈이 밝아져 깨달음을 얻어 하나님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3단체는 더 나아가 너 안에 다른 세계가 있다.
      다른 힘이 있다.
      다른 내가 있는데 그것을 찾으라 합니다.
      전부 네피림의 가르침들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정말 과연 가능할까요?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떠났는데 인간이 과연 눈이 밝아져 선악과 깨달음을 얻어 하나님이 되었습니까?
      파멸이었습니다.
      저주입니다.

      여러분 공산주의 사상이 이론상 얼마나 좋습니까?
      다 같이 생산하여 공평하게 나누어 똑같이 살자 얼마나 메혹적이 이념입니까?
      그러나 공산주의 이론대로 되면 정말 지상낙원이 되어야 합니다.
      단 한번도 그렇게 된 적이 없습니다.
      창 3. 6. 11장 나, 나의 것, 나의 성공, 네피림에 각인된 인간은 그런 존재가 절대 될 수 없습니다.

      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떠난 가인이 후예들이 나, 나의 것. 나의 성공을 주장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고 전쟁을 하여 네피림의 문화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네피림의 문화는 어떤 것일까요?

      서론-네피림의 시대

      네피림이란 말은 나팔이란 말로서 ‘위에서 떨어지다’ 동사가 명사화된 말입니다. 위에서 떨어져 공중권세를 잡고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세상 어둠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악한 영을 부리며 인생을 끊임없이 도적질하며 죽이며 멸망으로 끌고 가는 존재가 과연 누굽니까? 사단입니다. 이 사단이 나, 나중심, 성공중심의 문화를 깊숙이 심어 놓았는데 이 사단의 문화를 가르켜 ‘네피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대를 조금만 주목해 보세요. 완전히 네피림의 시대입니다.

      전부 ‘인권’이란 미명하에 극단적 이기주의 팽배하여 그 어느 시대보다도 나, 나의 것, 나의 성공중심의 시대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시대가 없었습니다.

      특히 요즘 MZ 세대들은 심각합니다. 비혼주의 청년들이 60%가 넘습니다. 페미니즘에 빠져 결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대용으로 애완동물을 키웁니다. 그래서 지금 온통 세상이 개판입니다. 자녀를 내 마음대로 결정하기 위해 정자은행, 난자은행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일단 살아 보고 결정하자는 동거 문화가 자연스럽게 정착 되었습니다. 결혼해도 아기를 낳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구 역사상 전쟁이나 큰 전염병의 재앙시대보다도 인류 역사상 출산율이 가장 낮아졌다는 것입니다. 기성세대는 이런 MZ 문화를 응원하는 사회적 분위기입니다. 여러분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참사랑이 아닙니다. 참 가정이 아닙니다. 전부 네피림의 문화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부패하고 포악한지 보험을 타기 위해 자기 친자식조차도 다치게 만들어 사고로 위장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이 시대를 보고 한탄하시고 근심하사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게 멸하리라(창6:12-13) 다 썩어 그 부패함이 온 땅에 가득합니다. 다치고 부러지고 생채기가 것은 치료하면 되지만 부패하여 썩어 문들어지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단호하게 잘라버려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네피림의 문화는 어떤 것일까요?

      (1)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6:2)

      언약가진 하나님의 아들들 셈의 후손들이 네피림의 문화 속에서 가인의 후손들이 낳은 딸들이 아름다움은 보고 매력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재앙의 시작입니다. 재앙 막을 언약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들이 네피림의 문화에 동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2)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6:2) 네피림의 절대 가치는 전부 나, 나의 것, 나의 성공입니다.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물질만능주의입니다. 최고의 우상이 맘몬, 돈입니다.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살아도 그 수준이 영적어린 아이들입니다.

      바울은 이 네피림의 시대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는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한 자들을 눈여겨 보라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은 자기 영광의 몸의 형제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3:20-21)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네피림이란 말속에는 위에서 떨어지다 라는 말도 있지만 거인, 장부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네피림의 모든 가치들은 물질의 크기와 양이 기준입니다. 남 들보다 더 크게 웅장하게 멋있게 만들어 이것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게 하여 문화를 만들고 흐름을 주도하여 세상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프리메이슨이 아닙니까?

      (5) 그들은 용사라 네피림의 정의는 힘이 기준입니다. 힘의 논리입니다. 약육강식입니다.

      (6) 고대 명성이 있는 사람이었더라. 자기 이름을 드러내어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피림의 문화입니다. 재앙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노아야 너를 위하여, 네 가문과 가정을 위하여, 생명보존을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 하였습니다.

      오늘은 이제 방주를 만들었으면 ‘방주로 들어가라.’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더니 이 방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 우리의 유일한 방주(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배경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일까요?

      (1) 영세 전에 그리스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태초에 ‘베레쉬트’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로부터 계신 하나님, 생명의 빛이십니다.

      (2) 성육신한 그리스도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을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게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예수 그리스도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기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2:5-9)

      (3) 부활하신 그리스도

      ‘데텔레스타’이 내가 다 이루었다(요19:30) 그가 고난을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1:3)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증거로 아무도 따라 할 수 없는 유일한 증거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 생명입니다.

      (4) 재림하실 그리스도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 이 천국 복음의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도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예수 그리스도는 세계복음화 되는날 반드시 재림하실 것입니다.

      (5) 심판주가 되시는 그리스도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3) 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방주가 되시며 피난처가 되시며 온전한 배경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방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중에 주 안에서. 그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되는 것(마16:16-20)

      인생의 근본문제는 하나님을 떠나 죄와 사단에 장악된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다른 것으로 절대 해결이 안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해결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마귀의 일을 멸한 만왕의 왕이십니다.(요일3:8)

      크라쉬-박살내다. 가루로 만들다. 흔적도 없게 하다.하는 뜻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단번에 완전히 영원히 해방시키신 대제사장이십니다. (롬8:1-2)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떠난 지옥배경 속에 살던 우리에게 하나님 만날 수 있는 새롭고 살 길을 여신 참 선지자이십다. (요14:6)

      (4) 예수 그리스도는 성삼위 하나님의 비밀을 누리는 열쇠, 키입니다.(마28:18-20)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말씀이 성취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좌의 능력 천군천사가 동원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좌의 권능 모든 흑암이 결박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좌의 배경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좌의 증인 땅끝까지 증인되는 것입니다.

      3. 방주의 특징

      (1) 2-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만약 제가 하나님이라면 부패하고 패역한 세상를 멸하기로 작정한 이상 이참에 모든 부정한 짐승은 아예 씨를 말려야겠다. 하겠는데 방주 안에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함께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정결한 짐승이든 부정한 짐승이든 무조건 방주 안에 들어가면 삽니다. 구원의 기준이 선행, 열심, 노력, 공로가 아니라 방주가 유일한 구원의 기준입니다.

      (2) 10-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저는 이 구절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자마자 홍수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방주 안에 들어간 후 칠 일 뒤에 시작되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제 생각인데 노아가 이런 생각을 한 번쯤은 했을 것 같아요. 혹시 홍수가 나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한편 멀쩡한 날이 산꼭대기에 방주를 짓고 그 안에 7일 동안 들어가 있는 노아를 보고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저 미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받드시 성취됩니다. 묵묵히 언약을 붙잡고 남은 자. 순례자, 정복자의 길을 우리는 가야 합니다.

      (3) 16-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마지막 방주의 문을 노아가 닫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문을 닫으셨습니다. 그래서 한 번 닫힌 방주의 문을 아무도 열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번 닫히면 더 이상 구원의 기회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을 다해 전도해야 합니다. 살려야 합니다.

      (4) 18-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드디어 홍수가 나서 물난리가 난 것입니다. 방주를 예비한 노아에게 물은 구원의 수단이 되었지만, 방주를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물은 멸망이요

      (5) 23-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자들만 남았더라. 여러분 오늘 말씀을 그냥 대충 들으시면 안됩니다. 이 방주의 특징은 ‘오직’입니다. 유일성입니다. 절대입니다. 다른 것으로 절대 안됩니다. 그냥 물에만 뜨면 되지 그래서 패타이어 주부나 고무보트를 만들면 안됩니다. 반드시 방주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특징입니다. 성경은 오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이 아닌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오직이 아니면 네피림을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방주로 들어가라

      1. 방주로 들어가라
      이것은 중요한 복음의 본질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종교의 본질은 노력과 열심이지만 복음의 본질은 피난처와 배경이요 그래서 누림입니다.
      방주 밖에 사람은 발부치고 오만 수고를 다 하지만 방주안에 있는 사람은 그 방주를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두 번째 중요한 메시지는 방주를 만드는 것은 복음 이해를 말하는 것이요 방주로 들어가란 복음화를 말씀합니다.

      ③ 복음화가 되었다는 말은 방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노예가 됨을 말합니다.(롬 1:1, 갈 2:20)

      ④ 복음화가 된 증거는 모든 문제, 위기, 갈등을 다 소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주되신 그리스도를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요?

      (1) 방주의 열쇠(요 14:13-14)-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2) 성삼위 하나님의 비밀을 누리는 것입니다.(마 28:18-20)-예배와 말씀의 키는 성삼위 하나님의 비밀을 누리는 것입니다.

      (3) 보좌의 축복-하나님의 나라와 그 일(9가지)

      (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현장을 회복하여-3시대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치명적 함정은 3가지는 무엇인가?

      2. 네피림의 문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하나님은 왜 노아시대에 홍수심판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4. 네피림의 시대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 방주는 어디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5.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되는 것은 무엇인가?

      6. 방주의 특징을 말하라

      7. 신앙의 본질은 무엇이며 어떻게 누려야 하는가?


      사람의 딸들과 결혼한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일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가?
      그동안 제기된 주장들을 정리하면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 상대적으로 급이 낮은 신들
      둘째, 왕족이나 귀족 등 지체 높은 집안의 청년
              이 경우 ‘사람의 딸’들은 천민 출신의 후궁들을 가리킨다.
      셋째, 타락한 천사들
            이 경우 ‘사람의 딸들’은 인간 여인들이다.
      넷째,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인 셋의 후손들
           이 경우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들이다.

      첫 번째 견해는 성경을 로마나 그리스 신화와 같은 내용으로 보지 않는 한 해당되지 않는 견해이다.
      성경은 다신론 신화에서나 볼 수 있는 신들의 계급 개념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두 번째 견해는 유대인 랍비들이 가장 선호하는 해석으로 천사들은 성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확신에서 출발하였다.
      그런 주장의 근거로는 시편 82편 1절에서 재판장들이 신들이나 지존자의 아들들과 동일시되고 있다는 사실, 또 다윗 혈통의 왕은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삼하 7:14; 시 2:7), 그리고 우가리트(Ugarit)의 왕 케렛(Keret)을 엘(El)의 아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 등이 제시된다.
      이 해석은 왕들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음으로써, 즉 백성의 아내와 딸들을 강제로 후궁을 삼음으로써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역사 이래 부도덕한 정치가들의 폭력에 분노하는 대중의 구미에는 맞지만 통치자들의 그런 죄가 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이 되는지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왕들의 죄와 인류에 대한 심판인 대홍수와는 인과관계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세 번째 견해는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지지를 받고 있다.
      필로(Philo)나 요세푸스(Josephus)와 같은 유대인 학자들, 클레멘트(Clement)나 오리게네스(Origenes)같은 유수한 초기 기독교 학자들, 심지어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까지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그런 주장의 근거로는 구약에서 하늘의 영적 존재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욥 1:6; 2:1; 38:7; 시 29:1), 베드로후서 2장 4~5절에서 ‘범죄한 천사들을 심판하신 것’과 ‘홍수로 세상을 심판한 것’을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 유다서 6절에서 천사의 타락과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을 나란히 언급한다는 사실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
      여호와의증인이나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등에서는 현재에도 그들의 중요한 교리 중의 하나로 가르치고 있다.
      특히 여호와의증인들은 이 창세기 6장 2절을 인용한 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천사들은 육체를 입었으며 아름다운 여자들과 성적 관계를 갖기 위하여 땅으로 내려왔던 것입니다…이들 천사들과 그들의 아내에게서 아기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아기들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거인이 될 때까지 그것도 악한 거인이 될 때까지 성장하였습니다…천사들은 익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버리고 영물로서 하늘로 돌아갔습니다”(「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93~94).
      그들은 네피림도 곧 천사와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나온 반신반인(半神半人)적인 거인으로 본다.
      그러나 이 견해는 다음과 반론들을 직면하고 있다.

      1. 창세기 6장의 본문은 문제 당사자들이 ‘인간임’을 분명히 한다.
      2절에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문제가 언급된 다음, 3절에서 여호와는 그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한다.
      문제 당사자인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라면 왜 하나님은 그 책임을 ‘사람’에게서만 찾으시는가?
      이어지는 홍수 기사는 인간에게 내린 심판의 내용이다.

      2. 비록 구약에서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린 희미한 증거들이 있지만 히브리서 1장 5절은 선명하게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하셨느냐”고 묻는다.
      이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천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조하여 강조하는 것이다.

      3. 예수는 천사들은 본질적으로 성관계를 맺는 존재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결혼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대답하셨다(마 22:30).
      같은 내용을 누가복음 20장 35~36절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라고 대답하였다.
      어떤 이들은 여기 천사와 같다는 말은 ‘죽지 않는다’는 말을 받는다고 하지만 본문은 분명히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도 없고’ ‘죽지도 않는 것’이 ‘천사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4. 예수께서는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무절제한 식욕과 성욕에 탐닉할 것을 예언하시면서 그것이 “노아의 때와 같이”(마 24:38) 되는 일이라고 하셨다.
      만일 노아의 때의 범죄를 천사들과 사람 사이의 범죄로 이해한다면 결국 예수께서는 재림 전에 또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 된다.
      예수는 마지막 때에 있을 사람들의 식욕과 성욕의 타락을 홍수 때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네 번째 견해는 어거스틴, 제롬, 칼뱅 등이 지지하는 전통적인 기독교 견해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은 그의 백성들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표현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아들 내 장자”(출 4:22)라고 불렀으며, 또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른다(신 14:1; 32:5; 시 73:15; 호 1:10).
      이들의 죄가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 일부다처주의인데 가인의 후손인 라멕에게서 바로 그 죄가 시작되었다(창 4:19~23).

      이러한 이해는 지금 이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신학적 메시지 즉, 하나님께서 홍수를 통해 세상을 멸할 수밖에 없다는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과 일치된다.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대홍수의 심판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 즉 ‘사람들의 도덕적인 타락’에 관한 것이다.
      창세기 4장 26절에 기록된 대로 마치 그리스도를 섬기기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것처럼 여호와를 섬기기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던 셋의 자녀들이 어떻게 타락해 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사람들을 존재케 하는 것은 거룩한 그의 백성을 통해 그분의 뜻을 실현하기 위함인데 그 일을 감당할 그의 백성이 타락했기 때문에 세상을 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여 에덴에서 추방한 것처럼 셋의 후손이 타락하여 세상을 멸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경우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을 의미한다.
      엘렌 G. 화잇도 이 이해를 지지하였다.

      “셋 자손이 가인의 후손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미혹하여 그들과 통혼함으로 여호와를 불쾌하게 하였다”(부조, 81).

      이들의 죄는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 것이었다.
      여기에 사용된 ‘보았다(saw)…아름다움(good)…삼는지라(took)’는 창세기 3장 6절에 묘사된 하와의 범죄, 즉 금단의 나무를 ‘보았다(saw)…직 하고(good)…따 먹고(took)’와 밀접한 평행을 이루고 있다.

      4절 하단에 이 결혼으로 탄생한 후손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그 후에도’라는 부사는 이러한 결혼이 지속적으로 이어졌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용사’란 단지 ‘용기 있는 자’란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폭력을 행하는 힘 있는 자’라고 보는 것이 문맥과 어울린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문장에서 홍수를 내릴 수밖에 없는 근본원인으로 제시된 것이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6:11, 13)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왜 셋의 후손의 경우는 늘 아들들이고 가인의 후손의 경우는 늘 딸들인가?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즉, 셋의 후손의 딸들이 가인의 후손의 아들들의 ‘멋진 모습’을 보고 그들과 통혼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을 주어로 삼은 것은 셋의 후손들이 수동적으로 유혹당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그런 선택을 하였음을 강조하는 표현기법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것은 죄가 될 수가 없다.
      문제는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 행위였다.
      그야말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성적 문란의 범죄 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1월 2일(목)

      본문 / 창세기 4-6장
      주제 /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창 6:2)
      성구 /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the sons of God saw that the daughters of men were beautiful, and they married any of them they chose.

      대한성서공회에서 발행한 인명 사전에 의하면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수가 대략 1,888명이라고 합니다.
      만일 사람들의 이름만 기록하여도 지금의 성경책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대에 따라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필요한 사람의 이름과 그들이 행한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것을 계시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등장한 이후 수 많은 사람들이 땅(아다마)에 번성하였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만 구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이렇게 구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참 복잡합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성도들 중에서도 서로 생각이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생각이 비성경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주장에 몰두하는 성도들을 하나님을 좋아하실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요즈음처럼 교회안에서도 좌파의 주장을 옹호하는 성도들도 있고 우파의 주장에 동조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단지 생각의 차이가 아니라 그 생각의 결과를 예측한다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의 차이가 세상을 어지럽힐 때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이라는 용어가 더 심각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면 이러한 현상은 불행한 사례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이해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복잡한 해석 보다는 이해를 돕는 결과를 중심으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사람의 딸들'이란 "경건하지 못한 가문의 딸들"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경건한 가문의 아들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나는 어떤 계열의 가문에 속할까를 생각하며 오늘도 경건한 믿음의 가문을 형성하는 일을 위하여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예수 따라가는 십자가의 군병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경건한 계열의 남자들
      사람의 딸들이라는 불경건한 계열의 여자들로 구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대표적인 해석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1.
      지체 높은 집안의 아들들이라는 유대 랍비들의 해석
      히브리어의 일반적인 용례로 볼 때 비성서적이라고 하겠습니다.

      2. 성경의 일반적 용례에 따른 천사라는 해석
      본문의 전후 문맥 관계상 합당하지 않습니다.

      3. 셋 계통의 경건한 자녀들이라는 해석 
      가장 유력한 해석으로 경건한 신앙인들을 지칭할 때에도 사용되었기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합니다(신 32:5. 시 73:15. 80:17. 호 1:10).

      사람의 딸들에 대한 대표적인 해석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1. 지체 낮은 천민 계층의 딸들이라는 해석
      2. 인간의 딸들이라는 해석
      3. 가인 계통의 불경건한 자녀들이라는 해석
      세 가지 해석 중에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자연스럽게 대응하는 세번째 해석이 가장 많이 선호하는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세기 6:1-4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체에 대한 세 가지 주요 견해
      1. 타락한 천사들
      2. 힘 있는 인간 통치자들
      3. 사악한 가인의 후손들과 결혼한 거룩한 셋의 후손들

      첫 번째 가설에 비중을 두는 것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어구는 항상 천사들을 지칭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욥 1:6; 2:1; 38:7).
      이 견해의 잠재적 문제는 마태복음 22장 30절에서 천사들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지적입니다.
      성경은 천사들이 성별을 지녔거나 또는 자녀를 생산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다른 두 견해들은 이 문제를 만들지 않습니다.

      2와 3의 견해의 약점은 평범한 남성들이 평범한 여성들과 결혼하는데 왜 그들의 자손이 “거인” 혹은 “고대에 유명한 용사들, 명성이 있는 자들”이 되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힘있는 남성들이나 셋의 후손들이 평범한 여성들이나 가인의 후손들과 결혼하는 것을 결코 금한 적이 없으셨는데 왜 이 땅에 홍수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셨냐는 것입니다(창 6:5-7).
      창세기 6장 5-7의 다가오는 심판은 창세기 6장 1-4절에서 발생한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직 타락한 천사들과 인간인 여성들의 음란하고 비뚤어진 결혼만이 그러한 가혹한 심판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첫 번째 견해의 약점은 마태복음 22:30에서 선언한 내용입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하지만 본문은 “천사들은 결혼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단지 천사들은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할 뿐입니다.

      둘째, 마태복음 22:30은 “천국에 있는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이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관해 신경 쓰지도 않고, 하나님의 계획을 훼방할 방법들을 적극적으로 찾는 타락한 천사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천사들이 결혼 및 성적인 관계들을 맺지 않는다는 사실이 사탄과 그의 마귀들도 그렇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첫 번째 견해가 가장 나은 것 같습니다.
      천사는 성별이 없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로부터 자식을 얻었던 타락한 천사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흥미로운 ‘모순’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영적인 존재인 반면에(히 1:14), 그들은 인간의 육체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막 16:5).
      소돔과 고모라의 남성들은 롯과 함께 있었던 두 천사와 성관계를 갖기를 원했습니다(창 19:1-5).
      천사들이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심지어 성적인 존재로 변해서 자녀까지 낳을 가능성은 있다는 견해는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왜 타락한 천사들은 이런 일을 좀 더 자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 이런 악한 죄를 저질렀던 타락한 천사들을 옥에 가두심으로 말미암아 다른 타락한 천사들은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유다서 1:6에 묘사된 것처럼).
      초기 히브리 해석자들과 외경, 그리고 위경은 타락한 천사들이 창세기 6:1-4에 묘사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데 전부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로 결코 논쟁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창세기 6:1-4을 타락한 천사들과 인간 여성들과의 관계로 보는 견해는 강력한 문맥과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

      네피림,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딸은 각각 누구인가요? (창세기 6장 4절)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1. 네피림 (Nephilim) : 성경의 이 부분에서는 "네피림"이라는 단어는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의 결합으로 인해 네피림이 탄생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네피림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성경에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적인 전통과 학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해석이 이뤄져 왔습니다. 이는 초자연적인 존재, 권력이 강한 사람들, 혹은 다른 종류의 신화적인 존재 등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아들들 : 이 부분은 종종 천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을 지칭하는 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신성하고 영적인 신하로 간주되며, 종종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자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3. 사람의 딸들 : "사람의 딸들"은 인간 여성을 나타냅니다.
        이 문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결합하여 네피림을 낳았다고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성경의 비유적이거나 상징적인 내용일 수도 있으며, 여러 해석이 가능한 복잡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종교적인 전통과 학문적인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제시될 수 있습니다.

         네피림이 거인인지에 대해서는 성경 자체에서 명확한 답변이 제시되지 않아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합니다.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네피림은 거인"이라고 기술되는 부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에 관한 해석들이 존재하며, 종교적인 전통과 학자들 간에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일부 종교적인 전통과 학자들은 네피림을 거인으로 이해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네피림을 그저 권력이나 영향력이 강한 사람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종교적인 신화나 상징으로 해석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창세기  6:1-8)

      1.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본문이 중요한 이유는 본문의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로 모든 생명을 심판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5: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말씀대로 재림 전의 마지막 심판 때에도 (벧후 3:6-7) 노아 때에 있었던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그래서 노아 때에 있었던 일들이 어떤 일들이었는가를 아는 것이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은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난해 구절이다.

      ① 하나님의 아들들이 어떤 자들이길래 자기들이 좋아하는 대로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을 수 있었을까?

      ②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들이 낳은 자식이 네피림 (거인족 또는 포악한 사람들)이 되어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4절)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에 대한 해석에는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

        기독교 전통적 해석

            셋의 경건한 후손(남자들)

                 가인의 불경건한 후손 (딸들)      

         유대교 전통적 해석

                타락한 천사들

                        인간의 딸들

      기독교 전통적 해석

      하나님의 아들들을 셋의 경건한 후손, 사람의 딸은 가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 하나님의 백성 (성도)을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다(출 4:22-23 갈 3:26, 롬 8:19, 롬 9:25-26)

      출애굽기 4:22-23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갈라디아서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로마서 8:1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9:25-26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둘째. 예수님께서 천사는 결혼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에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마 22:30, 눅 20:34-36)

      마태복음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누가복음 20:34-36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셋째. 하나님은 경건한 셋의 후손들끼리 결혼하여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셨는데, 셋의 후손 남자들이 자신의 정욕이 이끄는 대로 가인의 후손들 (요즘 말로 불신자들)과 결혼하여 타락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유대교 전통적 해석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사람의 딸들은 인간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욥기에서는 천사를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다. (욥 1:6, 2:1, 38:7)

      욥기 1: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욥기 2:1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욥기 38: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② 창 19장에서 나오는 천사들은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롯과 함께 식사를 하였으며. 소돔 사람들이 천사들에게 성관계를 시도했다.
      그래서 천사들이 땅으로 내려와서 여자들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이다.

      ③ 경건한 남자와 불경건한 여자가 결혼한다고 네피림 (거인, 장수)이 나올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를 지칭한다.

      ④ 당시 세상의 지배층은 가인의 후손들이다(창 4:20-24).
         
      그런데 어떻게 사회적 약자인 셋의 후손들(남자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대로 지배층인 가인의 후손(딸들)을 아내로 삼을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천사와 관계를 맺으면 아주 특출한 자식(네피림)을 낳아 세상의 권력과 부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으므로 어떤 여자도 천사의
          청혼을 거부하지 않고 천사의 아내가 되었다.

      창세기 4:20-24
      아다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⑤ 사람과 천사가 결합함으로써 더 이상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 수 없는 (DNA가 완전히 변질되어버린) 별종의 인간이 나왔기 때문에, 홍수로 심판하셨다는 주장이다.

      ​2. 본문의 교훈

      안타깝게도 기독교 안에서 위 두 주장이 자신의 해석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상대방을 사단이라고 비판하면서 논쟁을 벌이고 있다.
      두 주장 다 일리가 있지만, 동시에 시원한 해석을 주지는 못하고 있다.
      따라서 말씀 앞에서 '나는 잘 알지 못합니다'라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벧후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오늘 본문이 주는 메시지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네피림이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 때 임했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저 세상에서 뛰어나고 위대하고 똑똑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 살 때 바로 그때가 마지막 때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주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노아 때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 장가가는 것이 그들 삶의 목적이었다'라고 표현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이유는 당신의 생명을 주어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는 삶의 목적이 완전히 바뀐 자들이다. (고후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믿는 자의 가장 간절한 소원은 예수님과 사랑 가운데 온전히 하나가 되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엡 1:4, 롬 8:29)

      에베소서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나 크리스천들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똑같이 산다면 (네피림이 되어 내 이름 내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 한다면) 그것이 바로 영적 간음이고, 그것이 바로 현대판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합일 것이고 마지막 때의 징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십자가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한 곳인가?

      ①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신 곳이요

      ② 네피림이 되고 싶어 하는 나의 옛사람을 못 박은 곳이다.

      ​십자가에서 네피림이 되고 싶어 하는 나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이미 함께 죽었음을 알 때 내 안의 옛사람의 본성이 힘을 잃게 되고 예수님의 생명이 자라기 시작한다(롬 6:6).

      로마서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교회만 다닌다고 마지막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네피림이 되고 싶어서 선악과를 먹었던 아담의 본성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처리되어야 한다.
      이때 예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심판이 지나간다.
      물론 내 노력과 결단으로 옛사람의 본성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처리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네피림이 되고 싶어 다들 미쳐있을 때 노아 한 사람은 바보처럼 살았다.

      노아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목표로 살았더니(9절) 심판으로부터 구원받는 은혜를 입었던 것이다(8절).

      창세기 6:8-9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이 세상은 네피림을 요구한다.
      실력과 능력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도 이 땅 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능력과 실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세상에서 잘 먹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 다른 사람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실력을 갖추는 것이다.

      ​크리스천의 인생 목표는 네피림이 되어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과 마음을 가져서 내가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되어 삶의 목표가 바꾸어진 자만이 참 크리스천이고, 그때 심판이 지나가게 되고(요 5:24), 참 안식과 참 평강을 누리게 된다(히 4:10)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히브리서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주님!
      네피림이 되어
      내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는 아담의 본성이
      날마다 십자가에서 처리되고,
      살든지 죽든지 우리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인지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1)지체 높은 집안의 아들들이라는 유대 랍비들(Onkelos, Symmachus, Aben Ezra)의 견해
      (2)성경의 일반적 용례(욥1:6; 2:1; 38:7; 단3:25)에 따른 '천사'란 견해(Lxx, Josephus, Tertullian, Luther, Baumgarten, Kurtz, Alford)
      (3)셋 계통의 경건한 자녀들이란 견해(Augustin, Calvin, Lange, Keil, Wordsworth).
      이 중 (1)은 히브리어의 일반적 용례로 볼 때 비성경적이며
      (2)는 본문의 전후 문맥 관계상 상치된다.
      그리고 구속사적으로 보더라도 이들을 천사들로 볼 경우, 향후 전개되는 타락사는 인간의 타락사가 아니라 천사의 타락사가 된다는 견지에서도 이 견해는 합당치 못하다.
      따라서 세번째 견해가 가장 유력시되는데 이는 신학적 의미와도 부합되며 또한 이와 유사한 표현이 경건한 신앙인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성경 관례(신 32:5; 시 73:15;80:17; 호1:10)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는다.

      사람의 딸들
      -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에 대해서도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지체 낮은 천민 계층의 딸들
      (2)인간의 딸들
      (3)가인 계통의 불경건한 자녀들.
      이 중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과 자연스레 대응을 이루는 견해는 역시 세번째 것이다.

      아름다움(*, 토브)
      - '좋은', '선한', '아름다운' 등의 뜻을 지닌 단어로 성격상에 있어서의 사랑스러운 면을 뜻할 수도 있으나 여기선 외견상의 '미모'를 의미한다(24:16; 단 1:15).

      보고(*, 라아)
      - 단순히 보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세히 주목하거나 인지하는 것을 의미한다(왕상 20:7; 시 31:7).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신앙과 선한 행실, 아름다운 마음씨 등과 같은 응당 주의를 기울여야 할 내면적 아름다움은 외면한 채 인간의 외모에만 관심을 집중하였다는 것은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곧 하나님을 아는 자든 모르는 자든 간에 당시의 모든 사람이 전도된 가치관을 갖고 있었음을 증거해 주는데 이처럼 온 사회가 타락 일변도로 흘러갈 때 그 결국은 필연적으로 패망일 수밖에 없다(7절).

      좋아하는
      - '선택하다', '지정하다'는 뜻.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들의 안목의 정욕을 좇아 고르는 것을 의미한다(고후 10:7).

      아내(*, 나쉼)
      - '이솨'(2:24; 3:20; 4:17)와 교체하여 쓸 수 있는 단어로 '아내' '부인'(4:19; 삿 8:30)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여인'(신 20:14; 느 8:3)을 뜻하기도 한다.

      삼는지라(*, 라카흐)
      - 4:19에서는 '취하였으니'로 번역되었다. 일반적으로 결혼하는 것을 뜻하는 관용적 표현이다(출 6:25; 민 12:1).



      창세기 3:1 / 그런데 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Now the serpent was more crafty than any of the wild animals the LORD God had made. He said to the woman, "Did God really say, 'You must not eat from any tree in the garden'?"

      간교하니라 - עָרוּם 스트롱번호6175

      1. 교묘한.  2. 신중한
      발음 [ ʽârûwm ]
      구약 성경  / 11회 사용
      • 1. 형용사, 남성 교묘한, 창3:1, 욥5:12, 15:5
      • 2. 형용사, 남성 신중한, 잠12:16,23.
      • 관련 성경 /  간교한(창3:1), 간사한(욥15:5), 교활한(욥5:12), 슬기로운(잠12:16, 22:3), 지혜로운(잠14:8).




    • 창세기 2:7(개역 개정) /  여호와 하나님이 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 땅의 흙으로(עָפָר מִן־הָאֲדָמָה - 아파르 민 하아다마)

      여기서 '땅'(아다마)은 '붉다'(애 4:7; 나 2:3)란 뜻이 있는 '아담'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땅이 붉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표현이다.
      또한 '흙'(아파르)은 '재'(민 19:17), '진토'(삼상 2:8), '가루'(왕하 23:15)로도 번역되며, 동사로 사용될 때는 '부스러지다'(왕상 20:10)는 뜻도 지닌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가 없다면 흙과 같이 부스러지기 쉬운 보잘것 없는 존재이며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존재이다.

      * 사람(הָאָדָם - 하아담)

      성경에서 히브리어 '아담'이라는 단어는 약 560회 가량 나온다.
      그런데 이 단어는 본절에서와 같이 '사람'(man)을 뜻하기도 하고,
      19절 이하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과 같이 최초의 사람인 '아담'(Adam)이란 특정한 인물의 이름을 뜻하기도 한다. 

      이 단어의 어원과 거기 담긴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아담'이 '땅'을 의미하는 '아다마'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본절의 기록과 일맥 상통하며,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이다. 

      둘째, '만들다'(make), '짓다'(build)란 뜻을 지닌 앗수르어 '아다무'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즉 아담이란 뜻은 사람이 '지음을 받는 존재' 즉 피조물임을 강조하는 이름이라는 견해이다.  

      셋째, 히브리어 첫번째 알파벳인 '알렙'과 '물' 혹은 세계의 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바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알파벳 '멤' 그리고 두 글자 사이에 '중심'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알파벳 '달렛'을 사용하여, 처음과 끝이 의미하는 모든 피조 세상의 중심에 사람이 위치함을 보여 준다는 견해이다.  

      넷째,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로힘'의 히브리어 알파벳 '알렙'과 짐승이란 뜻을 지닌 '베헤마'의 히브리어 알파벳 '멤'사이의 존재가 사람임을 보여 준다는 주장이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신적 요소를 지닌 반면 육체의 정욕대로 살 때는 짐승과 같은 존재로 타락할 수도 있다는 견해이다.  

      다섯째, '빛이 나다'라는 의미가 있는 아람어에서 유래하여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존귀한 존재임을 나타낸다는 견해이다.

      여섯째, '결합시키다'라는 의미가 있는 아람어에서 유래하여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살았던 전 인류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자임을 나타낸다는 견해이다.  

      일곱째, '붉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사람의 피부 빛을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이다.  

      이 중에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첫 번째 견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견해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창세기 1:26-27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전인격적인 창조에 관한 기술이라면 본문은 특별히 사람의 육신의 창조에 관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 생기를(נִשְׁמַת חַיִּים - 니쉬마트 하임)

      본문의 '생기'는 '숨'(왕상 17:17), '호흡'(신 20:6), '기운'(욥 4:9), '영혼'(잠 20:17) 등으로도 번역되는 '네솨마'의 연계형 '니쉬마트'와 '살다'(23:1), '활발하다'(시 38:19) 등에서 유래해 '생명'(1:30; 신 28:66)으로 번역되는 '하이'의 복수형인 '하임'이 결합된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생명들의 기운'이며, 곧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방법으로 부여하신 '생기'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 생령(לְנֶפֶשׁ חַיָּה - 레네페쉬 하야)

      '숨', '호흡'을 뜻하는 '네페쉬'와 '생존', '존재'를 의미하는 '하야'가 합해서 된 말로 '살아 있는 존재'란 뜻이다. 물론 '네페쉬'가 다른 곳에서 '혼'(Soul) 또는 '영혼'(Spirit)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였으나 여기서는 '호흡'(breath)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생령'이라는 말은 사람이 '영혼'을 지닌 존재임을 직접적으로 증거하는 구절은 아니다. 사람의 영혼은 오히려 1:26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란 말에 강력히 암시되어 있다. 그런데 번역 성경에서는 왜 동일한 단어를 일반 짐승을 가리킬 때는 '생물'(RSV, living creature)로, 사람을 가리킬 때는 '생령'(KJV, living soul)으로 번역했을까? 이러한 차이는 히브리어 단어 때문이 아니라 문맥의 차이를 반영하여 번역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짐승들은 말씀을 통하여 육체와 생명을 동시에 창조하신 반면 특별히 사람만은 그 육체를 흙으로 지으시고 그 생명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있게 하셨다. 이러한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여 창조된 사람은 살아 숨쉰다는  점에서 '네페쉬 하야'인 다른 동물들과 차이가 없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애정으로 그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생령'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1:27).


      *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לֹא־טֹוב הֱיֹות הָאָדָם לְבַדֹּו - 로 토브 헤요트 하아담 레바도)

      이 말씀은 분명히 1:31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하나님의 최종 평가가 있기 전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즉 본문은 인간의 자연 발생적인 고독과 완전한 만족의 결핍을 나타내 보인 것으로,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아직 창조 사역을 완성하기 전의 상태를 나타내 주고 있다.
      실로 하나님은 인간의 아직 채워지지 않은 내적 갈망을 만족시킬 '돕는 배필'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Yates).
      그리고 여기서 '좋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토브'는 상대적으로 '더 낫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신 뜻을 좇아 지으신 피조물 중에 보시기에 좋지 못한 것은 본래 하나도 없었다(1:31). 
      따라서 이 말은 다만 아담이 혼자 지내는 것보다 하와와 함께 거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낫다는 의미이다.

      창세기 1:31 /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이니라.
                            (God saw all that he had made, and it was very good. And there was evening, and there was morning--the sixth day.)

      * 돕는 배필(עֵזֶר כְּנֶגְדֹּו - 에제르 케네그도)

      '조력자', '반려자', '응답하는 자'(one who answers)라는 뜻
      성품과 신분에 있어서 남자와 같고 언제나 그 곁에 살면서 상호 위로와 기쁨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라는 뜻. 
      동시에 이 말은 남편과 책임을 나눠 지며, 이해와 사랑으로써 남편의 본성에 대응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섬기는 데 남편과 혼연일체가 되어 협조하도록 지음을 받은 존재란 의미도 지닌다.
      더불어 남편에 대한 아내의 역할을 암시하는 말로, 곧 아내의 일반적 기능이 '조력'에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말이 남성 우위론의 근거로 오용(誤用)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남녀의 차이는 신체적, 기능적 차이이지 인격적 차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다 그분의 성품을 함께 나눠 받은 동등한 인격체일 뿐이다(고전 11:11).

      고린도전서 11:11 /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In the Lord, however, woman is not independent of man, nor is man independent of woman.)


      1월 1일(수)

      본문 / 창세기 1-3장
      주제 /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창 2:7) - 아다마와 아파르
      성구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生氣)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

      이제까지 대부분의 성도들이 사람을 흙으로(아다마) 만들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을 기록한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합니다.
      이때 땅은 "아다마"라고 하며, 흙은 "아파르"라고 합니다.
      따라서 사람은 흙(아마다)으로 만든 존재가 아니라 아파르(먼지, 티끌)로 만든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는데 이때 흙은 아파르(먼지, 티끌)를 말합니다(창 3:19).
      "필경은 흙으로(아다마)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아파르) 흙으로(아파르) 돌아갈 것이니라."

      사람은 먼지와 같은 티끌로 만들어진 존재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생의 결말은 아파르 즉 티끌과 같은 먼지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대한성서공회에서 발행하는 인명 사전에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을 1,888명이라고 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2025년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에 모두 성공하기 위하여 “말씀따라 살고 말씀따라 순종”하는 신앙적으로 발돋움 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 못하면 그 결말은 ‘아파르’로 만들었으니 ‘아파르’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면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천국 백성이 될 것입니다(빌 3:20).

      "형상"이란 히브리 단어는 "체렘"이라고 합니다.
      체렘이란 거대한 돌덩어리가 조각가의 손에 의해서 어떤 모양의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작품이 될 수 없는 떨어져 나가는 조각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내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내가 갖고 있었던 잘못된 버릇과 행실과 언어와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모두 벗겨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회복하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 오롯이(모자람이 없이 온전하게) 세워지는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일에 성공하는 복된 2025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송 /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형상(체렘. tselem) 스트롱번호צֶלֶם 6754

      1. 그림자.  2. 형상
      발음 [ tselem ]
      어원 / ‘그늘지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7회 사용
      • 1. 명사, 남성  - 그림자, 시 39:7(6), [은유적으로] 헛된 것, 시 73:20
      • 2. 명사, 남성  - 형상, 창 1:27, 5:3, 9:6, 우상, 형상, 왕하 11:18, 암 5:26.
      • 관련 성경 / 형상(창 1:26, 삼상 6:5, 시 73:20), 석상(민 33:52), 우상(왕하 11:18, 겔 7:20, 암 5:26), 그림자(시 39:6).




































































       

























































































      그리스 로마 신화



      한눈에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태초의 신)

      그리스 로마 신화는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과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오랜 옛날 세상이 암흑이었을 때 한 신이 탄생하게 되니 그녀가 바로 태초의 여신 이자 대지의 여신, 가이아입니다.

      가이아는 여러 명의 자식을 낳는데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바다의 신 폰토스를 낳고, 
      우라노스와 사랑을 나누어 우라노스가 1대 왕이 된 것입니다.

      가이아는 우라노스와도 자식을 낳는데요. 
      12명의 잘생긴 티탄을 낳습니다. 
      그리고 눈이 하나 달린 키클롭스 3형제와 얼굴이 50개, 팔이 100개나 달린 헤카톤케이레스라는 신을 3명이나 낳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우라노스는 키클롭스와 헤카톤케이레스를 괴물이라고 여겨, 타르타로스라는 아주 깊은 지하 강옥에 떨어트립니다.
      그러자 가이아는 매우 화가 나서 커다란 낫을 만들어 티탄에게 말합니다. 

      "너희들 중 누가 타르타로스의 갇힌 형제들을 풀어주고 이 낯으로 우라노스를 치겠느냐? 만일 성공하면 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우라노스는 너무 강한 신이기 때문에 감히 아무나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제가 가겠습니다!" 라고 하는 용감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티탄 중 막내 크로노스입니다.
      그래서 크로노스는 낫을 들고 가서 우라노스의 생식기를 잘라버립니다. 
      드디어 우라노스가 물러가고 크로노스의 시대가 열립니다.
      크로노스는 과연 가이아와의 약속을 지킬까요?
      아닙니다.
      크로노스는 웬일인지 약속을 어깁니다.
      그러자 화가 난 가이아는 크로노스에게 저주를 내리는데요.
      "네가 나 아버지를 왕위에서 내렸듯이 너도 자식에게 쫓겨 날것이다."
      참 듣기만 해도 무서운 저주죠?
      아무튼 크로노스는 미치광이가 되어 자신의 아내 레아(티탄)이 낳는 5명의 자식들을 다 먹어버립니다.

      ​참 살벌하죠?

      그리고 레아는 6번째 자식마저 낳습니다. 
      이 아이마저 뺏길 수 없다고 생각한 레아는 최후의 방법을 생각합니다. 
      과연 그 수는 무엇일까요? 
      또 그 수는 성공할까요?


      레아는 제우스를 크레타섬으로 숨기고, 돌덩이를 포대로 싸서 크로노스에게 바칩니다.
      크로노스는 아무 의심도 하자 않고, 돌덩이를 꿀꺽 삼켜 버립니다. 
      한 편 제우스는 크레타섬에서 님프들의 보호 아래 무럭무럭 자랍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가이아를 통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다 듣게 되죠. 
      제우스는 고민 끝에 아버지를 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래서 가이아는 제우스에게 구토제를 주며 말합니다.
      "이것을 음식에 타 크로노스에게 먹여 네 형제들을 토해내 개 해라!"
      그래서 제우스는 레아를 찾아가 크로노스의 시중을 들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음식에 구토제를 타고, 크로노스는 구토제를 먹고 돌덩이와 형제들을 토해 냅니다.
      그리고 크로노스는 도망갑니다.
      제우스와 형제는 크로노스를 쫓아내고 제우스가 3대 왕이 됩니다.
      그리고 올림포스 산에 궁전을 짓고 밤 낮으로 연회를 엽니다.

      ​​

      제우스의 형제들


        

      제우스 포세이돈

        

      하데스 헤라

        

      데메테르 헤스티아

      ​너무 대단하죠?

      하지만 크로노스는 티탄에게 가서 티탄과 같이 올림포스로 쳐들어 옵니다. 
      과연 제우스는 티탄을 막을 수 있을까요?


      https://blog.naver.com/history_story365/223722055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