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장 / 이른비(가을비, 요레흐) & 늦은비(봄비, 말코쉬)


스가랴서에서는 메시야의 재림에 관하여 어떤 말씀을 하고 있을까?
메시야의 재림에 관한 다섯가지 말씀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스가랴 선지자는 B.C.520년경 학개 선지자와 함께 제2의 성전인 스룹바벨성전 공사를 독려했던 선지자였다.
그는 아주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선지자가 되었으니, 그의 나이 약 20세쯤이었다.
그런데 그가 보았던 환상들은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것들이었다.
그래서 천사의 도움으로 8가지 환상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유다백성들에게 전달하였다(1~6장).
그리고 금식에 관한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하였으며(7~8장),
이어서 메시야의 공생애와 재림에 관한 예언을 할 수 있었다(9~14장).

스가랴서는 어떤 예언서인가?

스갸랴서는 내용상 크게 "환상"과 "예언"으로 구분된다.

전반부는 성전건축에 관한 환상들이 주류를 이루며(1-8장)
후반부는 메시야에 예언들로 구성되어 있다(9-14장).
그리고 그 중간에 벧엘사람들이 물어본 금식에 관한 질문들과 그 답변이 들어있다(7~8장).

스가랴서를 메시야에 관한 예언에 관한 관점에서 구분해 본다면, 스가랴서는 메시야의 신분에 관한 예언(슥 3, 6장, 9장,13장)과 메시야의 공생애와 수난에 관한 예언(9~13장), 메시야의 재림에 관한 예언(14장)으로 나눠볼 수 있다.

메시야의 신분에 관한 예언으로는 3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싹"에 대한 예언(3장, 6장),
"왕"에 대한 예언(9장),
"목자"에 대한 예언(13장) 

스가랴서를 요한계시록과 비교해서 견주어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스가랴가 보았던 첫번째 환상(1:7~17, 붉은 말과 자줏빛 말, 흰 말)와 여덟번째 환상(6:1~8, 붉은 말과 흰 말과 검은 말과 어룽진 말)은 요한계시록의 6:1~8에 나오는 네 가지 말탄 자들(흰 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로 등장하고 있다. 둘째, 두번째 환상인 "네 뿔"에 관한 예언은 요한계시록 12장, 13장, 17장에 나오는 "열 뿔"에 대한 배경으로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뿔"은 세상에 있는 권세를 상징한다.

셋째, 세번째 환상은 측량줄을 잡은 소년의 환상(2:1~13)은 요한계시록 11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성전을 측량하는 사도요한의 모습과 흡사다(계11:1~2). 넷째, 다섯번째 환상인 일곱개의 "순금등대"와 "두 감람나무"의 환상은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일곱금촛대와 소아시아 일곱교회와 연결이 되어진다.


특히 두 개의 감람나무는 일곱교회에게 기름을 보충하는 존재로서, 스가랴서는 "제사장인 여호수아"와 왕으로 특징지워진 "스룹바벨"을 가리키고 있는데, 요한계시록 11장에서 두 감람나무는 두 증인이자 두 선지자로서, 구약의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와 예언자의 대표인 엘리야를 예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계11:3~14).

다섯째, 여섯번째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은 요한계시록 5장과 10장에 나오는 두루마리와 연관이 매우 깊다.
왜냐하면 이 두루마리의 안팎에는 온갖 저주들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곧 말세에 있을 일을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섯째, 스가랴 14:1~3과 12절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19장에 나오는 "아마겟돈전쟁"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스가랴서에 나오는 메시야의 재림 예언에 관한 5가지 예언은 무엇인가?

스가랴 14장에는 메시야에 재림에 관한 5가지 예언이 담겨 있다.

첫째, 마지막날 전쟁
에 관하여 예언되어 있다.
이는 메시야께서 그날에 강림하시어 이방나라들을 치실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슥14:1~3). 이것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그것은 곧 '아마겟돈전쟁(혹은 곡과 마곡의 전쟁)'인 것이다(계19:15, 20:8~9). 그럼, 그날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의 말에 속아서 하나님을 대적할 것인데, 그때에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악의 무리들을 치실 것이다. 이때는 여호와이신 예수께서 나가서 이방나라들을 직접 쳐단할 것이다.

둘째, 메시야의 재림장소
가 예언되어 있다(슥14:4). 그곳은 스가랴선지자는 "예루살렘 앞 동쪽 감람산"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에 흰옷 입은 두 명의 천사들이 어떤 말을 하였는가? 예수께서 승천하시던 산 곧 감람산(행1:12)에서 말하기를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진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고 하였다. 고로 예수께서는 재림하실 때에 결코 동방의 땅 곧 한국에 오시지도 아니할 것이며, 과천의 청계산으로도 오시지 아니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늘로 좇아 공중으로 오실 것이며, 그때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광경을 지켜볼 것이며, 재림하실 장소는 예루살렘 앞에 감람산이 될 것이다.

셋째, 재림하실 메시야의 두 무리의 군대
에 관하여 예언되어 있다(슥14:5). 장차 메시야께서 재림하실 때에 주님의 뒤를 따라오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스가랴선지자는 그들을 "거룩한 자들"이라고 말했다.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들은 누구인가? 요한계시록 19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을 백마르 타고 그를 따르더라(계19:14)" 이들은 "천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혼자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보낸 첫번째 편에서 주님과 동행할 "거룩한 또다른 무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들(거룩한 자들)과 함께 강림하실 때에...(살전3:13)" 그렇다. 주님께서는 재림하실 때에 한 편으로는 이미 구원받아 천국에서 왕노릇하고 있던 성도들을 데리고 오시고, 또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시는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이 세상 사람들과 전쟁하기 위해 오는 것이고, 천사들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탄과 그의 부하들인 귀신들과 전쟁하기 위해 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날에 성도들이나 천사들이 칼 들고 싸우지는 않는다. 백마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칼로 한 방에 끝장내버리실 것이기 때문이다(계19:15).

 넷째, 메시야의 재림 시간에 대하여 예언되어 있다(슥14:6~7).
독특하게도 구약성경 중에서 메시야의 재림에 관하여 그 시간을 알려주는 예언은 바로 스가랴서에 나온다. 스가랴 선지자는 "그날에는 빛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슥14:6). 광명한 것들이 떠나갈 것이기 때문이다(슥14:6). 여기서 "광명한 것들"이란 해와 달과 별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예수께서도 재림직전에 그러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마24:29), 사도요한도 환상 중에 본 여섯째인 가운데(계6:12~13)에서 그런 일들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메시야의 재림의 때에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계21:1). 그러므로 해와 달과 별들도 응당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재림하실 그 날짜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마24:36). 그것은 오직 아버지의 권한에 있을 뿐이다(행1:6~7). 그러나 그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래서 스가랴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는 빛이 있으리로다(슥14:7)"고 예언했던 것이다.

다섯째, 마지막 전쟁시 메시야의 무기에 관하여 예언되어
있다(슥14:12~15).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주께서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어떤 무기를 사용하실까? 그것은 곧 "말씀의 칼"을 사용하신다. 말씀 한 마디에 그냥 초토화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때 예루살렘을 치러온 이방백성들은 메시야의 말씀의 칼에 의해 우선적으로 살이 썩고 눈동자가 썩고 혀가 썩는 재앙으로 죽게 될 것이다(슥14:12). 그리고 이것을 지켜보는 자들이 도망치다가 서로가 서로를 치게 될 것이다(슥14:13). 이것은 기드온시대에 미디안족속이 도망칠 때에 서로가 서로를 찔러 죽이는 모습과 흡사하다(삿7:22). 그러므로 그때에 주께서는 땅의 사방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보화 곧 은금과 의복을 전리품으로 취하실 것이다(슥14:15). 그리고 더불어 그들이 이동하며 사용했던 운송수단들 곧 동물들과 육축에게도 같이 재앙이 임할 것이다(슥14:15).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무리들은 아마겟돈전쟁에서 모두가 다 썩는 재앙을 당하면서 패망하고 말 것이다.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원대한 뜻은 무엇이었는가?

주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다시 말씀하셨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다시 제사장나라로 쓰임을 받는 일이다(슥14:16~21). 그리고 이후로는 레위지파만이 쓰임받는 것이 아니라 유다사람 전체가 제사장으로 쓰임받기를 원하셨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치신 재앙으로 말미암아 살아남은 자들이 해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여호와를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고 했다(슥14:16). 만약 올라오지 않는 땅의 백성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다(슥14:17). 거기에는 애굽족속이나 모든 이방민족이 동일하다고 했다(슥14:18~19). 그리고 그날에는 부정한 동물들까지도 다 거룩함을 지향하게 될 것이며, 심지어 유다사람이 사용하는 모든 솥도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처럼 거룩하게 쓰여질 것이라고 했다(슥14:20~21). 왜냐하면 그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다 거룩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슥14:16~21에 대한 말씀을 "지상에 세워질 천년왕국의 실현"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아주 많다. 특히 세대주의자들이나 환난전휴거론자들, 여호와증인, 신천지 등이 그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 말씀은 과연 지상 천년왕국의 실현으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육적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를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본문을 지상세 세워질 천년왕국으로 보는 견해가 강하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린 채,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까지 거부하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민족주의가 너무 강했다. 자기에게 주어진 특권을 강조할 뿐 그것을 이용하여 다른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도록 인도하는 직책을 수행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육적인 이스라엘은 버림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시 이 세상의 역사에서 쓰임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육적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한 기대가 하나님의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원감람나무의 가지가 꺾이고 돌감람나무의 가지과 원감람나무에게 접붙힘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래서 극상품포도가 맺히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이들을 위하여 포도원을 만들어주고 술틀을 파주고 돌을 제거해주어 그들이 좋은 포도맺기를 기다리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들포도만을 맺였을 뿐이다(사5:1~7). 그러므로 슥14:16~21의 말씀은 이제 교회가 이어받아 그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

스가랴서는 구약성경 가운데 많은 메시야 예언을 담고 있는 예언서이자 또한 묵시서에 해당한다.
우리는 스가랴서에 나오는 8가지 환상들을 통하여 요한계시록을 푸는 열쇠들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상징들을 푸는 실마리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메시야의 공생애와 수난 그리고 재림에 관해 알기를 원하는 분은 스가랴서를 꼭 같이 공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보다 더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도 스가랴서는 꼭 공부해야 할 책이 아닌가 싶다. 또한 우리는 스가랴서를 통하여 우리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계시도 발견하게 된다. 스가랴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경륜과 메시야의 비밀을 알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스가랴 12:1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

경고(4853)
מַשָּׂא 스트롱번호4853

1. 실어나름, 2. 짐, 3. 고양
발음 [ massâʼ ]
어원 / 537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짐(출23:5, 사46:2, 렘17:21), 누(삼하15: 33,19:35), 일(왕하9:25), 노래(대상15:22), 경책(대하24:27), 해(욥7:20), 잠언(잠30:1, 31:1),경고(사13:1, 나1:1, 슥9:11), 중벌(렘23:36),묵시(겔12:10).
[동] 메다(민4:15, 대하35:3),싣다(왕하5:17, 8:9), 노래하다(대상15:27), 바치다(대하17:11), 탈취하다(대하20:25), 엄중하다(렘23:33,34,36).
구약 성경 / 66회 사용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 여기 "경고"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맛사"이니 "협박하는 예언(threatening Prophecy)"을 가리킨다.
이것은 경성 하지 않는 자를 깨우치기 위한 교훈이다.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
- 사 43:15; 암 4:13 참조. 이렇게 하나님을 창조자로 칭호 하는 목적은, 그가 창조적 능력으로써 이 아래 관설된 위대한 일을 하실 자이심을 알리려는 것이다. "하늘을 펴신"다 함은, 천공에 무수한 천체들을 유지하심을 이름이다. 하나님 께서 물질계에 하신 일들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이 일이다. 오늘날 발달된 문명도 천체들의 세계 곧, 우주를 지향하고 새로운 발달을 도모 하고 있다. 그 세계는 크고 오묘하다.

"땅에 터를 세우심"
또 한 가지 그의 일의 장관이다. 땅은 어떻게 그 궤도 대로 운전되도록 구조 되었는가?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초로 한 것이다.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도 전능하신 하나님 밖에 없다.
심령은 위에서 마랗다 하늘이나 땅 보다 오히려 만들기 어렵다.

스가랴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루아흐 헨 훼타하누님 / רוּחַ חֵן וְתַחֲנוּנִים)

은총(2580) 헨(chên)  חֵן 

1. 자비,   2. 품위, 3. 탄원
발음 / 헨[ chên ]
어원 / 26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은혜(창6:8, 삼상1:18, 렘31:2), 은총(출33:12, 삼상16:22, 잠3:4), 사랑(삼상20:29, 에2:15,잠28:23), 장식(잠3:22), 덕(잠22:11). [형] 은혜롭다(전10:12), 유덕하다(잠11:16), 사랑스럽다(창30:27), 아름답다(잠1:9, 4:9).
구약 성경 / 69회 사용



간구(8469) 타하눈(tachănûwn) תַּחֲנוּן 

1. 기도,  2. תַּחֲנוּנוֹת
발음 / 타하눈[ tachănûwn ]
어원 / 26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간구함(대하 6:21, 시 28:2, 86:6, 슥12:10), 간구(시116:1, 단9:17), 기도(단9:23). [동] 구하다(잠18:23).
구약 성경 / 18회 사용




은총(5278) 노암(noʽam)  נֹעַם 

1. 즐거움
2. 총명
3. אִמְרֵי נֹעַם 적당한 말
발음 / 노암[ noʽam ]
관련 성경 / 아름다움(시 27:4), 즐거움(잠 3:17),
[형] 정결한(잠 15:26), 선한(잠 16:24).
구약 성경 / 7회 사용


연락(2254) 하발( châbal)  חָבַל 스트롱번호2254

1. 단단히 감다
2. ~와 맹세하다
3. 욥기 22:6
발음 / 하발[ châbal ]
관련 성경 / 악을 행하다(느 1:7), 잡다(겔 18:16), 전당잡다(출 22:26, 신 24:6,17, 암 2:8), 볼모 잡다(욥 22:6, 24:3, 9, 잠 20:16), 범죄하다(욥 34:31), 멸하다(전 5:6, 사 13:5, 미 2:10), 고생하다(아 8:5), 진멸하다(사 54:16), 낳다(시 7:14), 헐다(아 2:15), 쇠하다(욥 17:1), 떠나다(사 10:27).
[명] 연합(슥 11:7, 14), 패망(잠 13:13).
구약 성경 / 14회 사용

스가랴 11:7
내가 이 잡힐 양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떼를 먹일쌔.
So I pastured the flock marked for slaughter, particularly the oppressed of the flock. Then I took two staffs and called one Favor and the other Union, and I pastured the flock.

스가랴 11:14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Then I broke my second staff called Union, breaking the brotherhood between Judah and Israel.

잠언 13:13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
He who scorns instruction will pay for it, but he who respects a command is rewarded.








이른비(가을비, 요레흐) & 늦은비(봄비, 말코쉬)   봄비(말코쉬) - 늦은 비, 봄비


스가랴 10:1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봄비(말코쉬) - 늦은 비, 봄비,

봄비(말코쉬) - 늦은 비, 봄비

신명기 11:14-15
14.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 늦은 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이른 비(3138) 요레흐(yôwreh)  יוֹרֶה

이른 비(3138) 요레흐(yôwreh)  יוֹרֶה

1. 흩뿌리기,  2. 물 뿌리기,  3. 물 끼얹기
발음 / 요레흐[ yôwreh ]
관련 성경 / 이른 비(신 11:14, 렘 5:24)
구약 성경 / 1회 사용

예레미야 5:24-25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와 늦은 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 이른 비(4175) 모레흐(môwreh)  מוֹרֶה  

1. 궁사,  2. 이른 비, 3. 가르치는 사람
발음 / 모레흐[ môwreh ]
어원 / 33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비(욜 2:23), 이른 비(시 84:6)
구약 성경 / 7회 사용

* 3384. 야라(yârâh)  יָרָה 
1. 던지다,  2. 분사 יוֹרֶה : 사수, 3. 기초를 놓다
발음 / 야라[ yârâh ]
관련 성경 / 던지다(출 15:4, 욥 30:19), 뽑다(수 18:6), 쏘다(삼상 20:36, 잠 26:18), 놓다(욥 38:6), 활 쏘다(대하 35:23), 적시다(호 6:3), 가르치다(출 4:12,13, 잠 4:11), 교훈하다(왕하 12:2), 가리키다(출 15:25), 점치다(미 3:11), 윤택하다(잠 11:25), 알게 하다(잠 6:13).
[명] 선생(잠 5:13), 스승(사 30:20, 합 2:18), 교훈(합 2:19, 욥 36:22), 활 쏘는 자(삼상 31:3, 대상 10:3)
구약 성경 / 81회 사용

이른비(가을비, 요레흐)


시편 84:6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4175. 모레흐(môwreh) מוֹרֶה 
1. 궁사,   2. 이른 비,  3. 가르치는 사람
발음 / 모레흐[ môwreh ]
어원 / 33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비(욜 2:23), 이른 비(시 84:6).
구약 성경 / 7회 사용


예레미야 5:24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이른 비(3138. 1653)

3138. 요레흐(yôwreh)  יוֹרֶה 

1. 흩뿌리기,  2. 물 뿌리기, 3. 물 끼얹기
발음 / 요레흐[ yôwreh ]
관련 성경 / 이른 비(신 11:14, 렘 5:24).
구약 성경 / 1회 사용

1653. 게셈(geshem) גֶּשֶׁם

1. 소나기,  2. 슥 10:1, 3. 욥 37:6
발음 / 게쉠[ geshem ]
어원/ 165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비(창 7:12, 아 2:11, 암 4:7), 폭우(겔 13:11, 13, 38:22), 소낙비(슥 10:1)
구약 성경 / 35회 사용


늦은 비(4456)
מַלקוֹשׁ 스트롱번호4456
1. 늦은 비, 2. 봄비, 3. 신명기 11:14
발음 / 말코쉬[ malqôwsh ]
어원 / 39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늦은 비(신 11:14, 잠 16:15, 욜 2:23), 봄비(슥 10:1).
구약 성경 / 8회 사용




요엘 2: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이른 비(4175. 1653)

야고보서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신명기 11:14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이른비(3138)
יוֹרֶה 스트롱번호3138
1. 흩뿌리기
2. 물 뿌리기
3. 물 끼얹기
발음 / 요레흐[ yôwreh ]
관련 성경 / 이른 비(신 11:14, 렘 5:24)
구약 성경 / 1회 사용


늦은비(4456) 말코쉬(malqôwsh)  מַלקוֹשׁ 

늦은비(4456) 말코쉬(malqôwsh)  מַלקוֹשׁ 

1. 늦은 비
2. 봄비
3. 신 11:14
발음 / 말코쉬[ malqôwsh ]
어원 / 39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늦은 비(신 11:14, 잠 16:15, 욜 2:23), 봄비(슥 10:1)
구약 성경 / 8회 사용

늦은비(봄비, 말코쉬) 


늦은 비

욥기 29:23
그들이 나 바라기를 비 같이 하였으며 입을 벌리기를 늦은 비 기다리듯 하였으므로.

4456. 늦은비(4456) 말코쉬(malqôwsh)  מַלקוֹשׁ 

잠언 16:15
왕의 희색에 생명이 있나니 그 은택이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으니라.

4456. 늦은비(4456) 말코쉬(malqôwsh)  מַלקוֹשׁ 

예레미야 3:3
그러므로 단 비가 그쳐졌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4456. 늦은비(4456) 말코쉬(malqôwsh)  מַלקוֹשׁ 


예레미야 5:24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이른 비(3138. 1653)

늦은 비(4456) 늦은비(4456) 말코쉬(malqôwsh)  מַלקוֹשׁ 

호세아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4456. 늦은비(4456) 말코쉬(malqôwsh)  מַלקוֹשׁ 


요엘 2: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4456. 늦은비(4456) 말코쉬(malqôwsh)  מַלקוֹשׁ 

야고보서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이른비(4406. 5205)

4406.  πρώῒμος 스트롱번호4406
1. 이른.
2. 이른 비
발음 / [ prōïmŏs ]
어원 / 440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이른(약 5:7).

5205.
ὑετός, οῦ, ὁ 스트롱번호5205
1. 비
2. 행 14:17
3. 28:2
발음 / [ hüĕtŏs ]
어원/ ὕω ‘비오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비(행 14:17, 히 6:7, 약 5:7, 계 11:6).
신약 성경 / 5회 사용


늦은비(3797)
ὄψιμος, ον 스트롱번호3797
1. 늦은
2. 늦은 이
3. 야고보서 5:7.
발음 [ ŏpsimŏs ]
어원 / 379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늦은(약 5:7).
신약 성경 / 1회 사용





@ 기도는 어린 아이들이 부모에게 칭얼 거리는 것이 아니다.
바람직한 기도는 사령관 앞에서 명령을 준수하고 돌아와서 다음의 명령을 기다리는 용사와 같은 자세이어야 한다.
때로는 명령을 모두 준수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명령을 모두 준수하지 못하였다고 사령관의 부하가 아니라 부하이기에 다음 명령을 듣고 다시 복종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특징은 번영신학에 의한 부흥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병이 고침을 받고, 부유한 삶을 누려야 하며, 성공적인 삶을 즐기는 것으로 가르쳤고 이해하였다.
번영신학의 문제는 고난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없기 때문에 위기가 닥쳐오면 쉽게 흩어지고 무너지고 있다.




비(마타르)
소낙비(게쉠)

때(6256) 에트(ʽêth)  עֵת 

1. 시간,  2. 정한 시간, 3. 어떤 시간
발음 / 에트[ ʽêth ]
어원/ 어미활용 עִתִּי, 복수 עִתּוֹת ,עִתִּים ,57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때(창 21:22, 욥 39:1, 렘 3:17), 철(레 26:4), 당시(왕하 16:6), 시세(대상 12:32), 역사(대상 29:30), 기한(스 10:14, 느 10:34, 렘27:7), 전례(에 1:13), 시대(사 33:6), 기회(시 32:6), 날(사 17:14), 낮(렘 27:7).
[부] 아무 때나(레 16:2), 때때로(대하 24:11), 당장(스 8:34), 항상(시 106:3, 잠 5:19, 전 9:8)
구약 성경 / 294회 사용

봄비(4456) 말코쉬(malqôwsh)  מַלקוֹשׁ

1. 늦은 비,  2. 봄비,  3. 신명기 11:14
발음 / 말코쉬[ malqôwsh ]
어원 / 39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늦은 비(신 11:14, 잠 16:15, 욜 2:23), 봄비(슥 10:1)
구약 성경 / 8회 사용
비(4306) 마타르(mâṭâr) מָטָרה   
1. 비,  2. 강우,  3. 출애굽기 9:33
발음 / 마타르[ mâṭâr ]
어원 / 430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비(출 9:33, 신 11:11, 왕상 8:35), 풍우(사 4:6), 비오는 것(잠 26:1).
구약 성경 / 38회 사용

소낙비(메타르 게쉠)

소낙(1653) 게쉠(geshem) גֶּשֶׁם 

1. 소나기,  2. 스가랴 10:1, 3. 욥기 37:6
발음 / 게쉠[ geshem ]
어원 / 165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비(창 7:12, 아 2:11, 암 4:7), 폭우(겔 13:11, 13, 38:22), 소낙비(슥 10:1).
구약 성경 / 35회 사용

* 1652. 비가오다 / 가삼(gâsham) גָּשַׁם 
1. 비가 오다,  2. 히필형 : 비 오게 하다
발음 / 가솸[ gâsham ]
관련 성경 / 비를 내리게 하다(렘 14:22).
구약 성경 / 2회 사용

비(4306) 마타르(mâṭâr) מָטָרה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 '봄비 때에'는 실상 '늦은 비의 시절'을 의미하니 팔레스틴에는 추수하기 전에 결실케하기 위해 오는 비다.
'번개를 내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비가 내릴 준비로 일어나는 번개를 하나님이 만들어주신다는 뜻이다.
성경은 자연 현상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립되는 것임을 가르친다.
'비'는 하나님이 주시는 자연계의 축복을 상징하지만 영적 은혜도 비유한다.
영적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성령의 감화를 이름이다.
이 귀절은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할 것을 강조한다.
우리에게 축복하실 이는 하나님밖에 없으니 그에게 부르짖으라는 것이다.
야훼 하나님 : 구원하시는 하나님
엘로힘 하나님 : 창조주 하나님
복수형태의 단수 - 엘로힘


스가랴 10:9
내가 그들을 열방에 뿌리려니와 그들이 원방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의 자녀와 함께 다 생존하여 돌아올찌라.
(새번역) 내가 그들을, 씨를 뿌리듯이, 여러 백성들 가운데 흩어 버려도, 그들은 멀리서도 나를 기억할 것이며, 아들딸과 함께 살아 있다가 돌아오게 될 것이다.





































에스겔(Ezekiel)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God Makes You Strong) 09-08-2023(금) -



에스겔 48:1
모든 지파의 이름대로 이 같을찌니라 극북에서부터 헤들론 로 말미암아 하맛 어귀를 지나서 다메섹 지계에 있는 하살에논까지 곧 북으로 하맛 지계에 미치는 땅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분깃이요.

몫(분깃) 259 에하드 [ ’echâd ] אֶחָד 
 
1. 똑같은.  2. 첫째의.   3. 어떤 사람.
발음 [ ’echâd ]
관련 성경 / 첫째(창 1:5, 욥 42:14), 일(창 8:13, 민 1:1, 왕하14:23), 자(者)(창19:9), 하루(창27:45, 신 1:2, 왕상20:29), 한 가지(출11:1), 서로(출36: 10), 윗고리(출36:29, 민1:44), 초하루(출 40:17), 한 개(레8:26), 동일(레24:22), 한 번 (레16:34, 수6:3,14), 단번(수10:42), 일제히 (삿20:1), 같음(삼상6:4), 한 번씩(왕상10:22, 대하9:21), 홀로(왕상18:6, 대상29:1), 합계 (스2:64, 느7:66), 낱낱이(전7:27), 하나하나 (사27:12), 함께(사65:25), 손바닥 넓이(겔 40:43), 한 가지(습3:9), 동일하다(출12:49), 일정하다(욥23:13), 비상하다(겔7:5)
구약 성경  / 699회 사용

에스겔 48:9
곧 너희가 여호와께 드려 예물로 삼을 땅의 장이 이만 오천척이요 광이 일만척이라.

예물. 8641 테루마[ terûwmâh ]  תְּרוּמָה 스트롱번호8641
1. 헌납.  2. 요제
발음 [ terûwmâh
어원 / 731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제물(출 25:2, 삼하1:21), 요제물(출29:27),성물(레22:12, 민5:9), 예물(출36:3, 신12:17, 겔20:40), 거제(민15:19, 신12:6, 느10:39), 거제물(민18:8, 느12:44), 뇌물(잠29:4), 봉헌물(말3:8).
구약 성경 / 76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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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의 비교

에스겔 1:1 -   요한계시록 19:11
에스겔 1:5 -   요한계시록 4:6
에스겔 1:10 - 요한계시록 4:7
에스겔 1:22 - 요한계시록 4:6
에스겔 1:24 - 요한계시록 1:15
에스겔 1:28 - 요한계시록 4:3
에스겔 2:9 -   요한계시록 5:1
에스겔 3:1, 3 - 요한계시록 10:10
에스겔 7:2 -     요한계시록 7:1
에스겔 10:2 -   요한계시록 8:5
에스겔 14:21 - 요한계시록 6:8
에스겔 26:13 - 요한계시록 18:22
에스겔 27:28-30 - 요한계시록 18:17-19
에스겔 37:10 -      요한계시록 11:11
에스겔 37:27 -      요한계시록 21:3
에스겔 38:2-3 -     요한계시록 20:8
에스겔 40:2 -   요한계시록 21:10
에스겔 40:3 -   요한계시록 11:1
에스겔 43:2 -   요한계시록 1:15
에스겔 43:16 - 요한계시록 21:16
에스겔 47:1, 12 - 요한계시록 22:1-2
에스겔 48:31 -     요한계시록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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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장별 요약(1-48장)

1장 / 4생물의 형상(the shapes of four living creatures)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위에 있다고 말하며 에스겔은 네 생물의 형상을 보게 되고 영이 있어 어떤 쪽으로 가면 생물들도 가는 환상을 본다.
또한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다는 말씀에서 이는 인간의 형상을 입고 오시는 주님의 형상이다.

1장 -  네 생물과 여호와의 영광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환상을 보여 주십니다.
네 생물(four living creatures)의 환상, 사람, 사자, 소, 그리고 독수리의 얼굴을 하고 있고 날개와 손이 있습니다.
그 내 생물의 머리 위에 하늘로부터 보좌(throne)와 하나님 영광의 형상이 있습니다.

2장 / 두루마리 책(애가, 애곡, 재앙의 말)(scroll book)

영이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고 말하며 에스겔에게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낸다고 말한다. 또한 그들이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또한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고 말한다.

2장 -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심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2: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명령하시며, 에스겔에게 애가(lamentation), 애곡(mourning), 그리고 재앙의 글이 담긴 두루마리 책을 주십니다. 그리고 에스겔에게 그 책을 먹게 하십니다.

3: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3장 /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고하라(Eat the scroll and go and tell)

하나님의 말씀을 창자에 채우라는 말씀을 에스겔은 순종한다.
칠일 후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을 세우셔서 백성들을 깨우치게 하신다.
또한 들로 나가게 하셔서 여호와의 영광이 머물게 하시고 에스겔의 혀를 입천장에 붙여 말 못하는 자가 되게 하셔서 그들을 꾸짖지 못하게 하신다.

3장 - 에스겔, 이스라엘의 파수꾼(watchman)

3: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또한 에스겔을 말 못 하는 자로 만들어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3:26. 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그들을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 (4-24장)

예루살렘 함락(4-5장)

하나님은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 여러 가지 상징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그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4장 /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는 세 가지 징조(Three Signs of the Siege of Jerusalem)

하나님께서 토판을 가져다가 그것을 앞에 놓고 예루살렘과 성읍을 에워싸게 만드신다.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과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에 대한 규정도 정해주신다.
마지막으로 떡과 물이 부족하여 피차에 두려워하여 떨며 그 죄악 중에 쇠패한다고 말씀하신다.

4장 -  예루살렘 성 모형의 상징

흙으로 예루살렘 성의 모형을 만들고 그 성이 곧 무너질 것을 상징합니다.

4:3. 또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북이스라엘은 390년 그리고 남유다가 40년간 행한 죄를 담당하여, 에스겔은 390일 동안 왼쪽으로, 40일 동안 오른쪽으로 누워 근신하게 합니다.
또한 그날 동안 음식을 제한하고, 똥으로 음식을 준비하여 먹으며 예루살렘에 내릴 심판을 상징합니다.

4:16.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백성이 근심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두려워 떨며 물을 되어 마시다가.

5장 /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라(shave your hair and beard)

하나님께서는 또한 날카로운 칼을 가져다가 삭도로 삼아 머리털과 수염을 깎으라고 말씀하시고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며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였으며 모든 가증한 일로 성소를 더럽혔기에 형벌하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죄에 형벌에 대해서 모욕거리가 되게 하고 양식을 끊을 것이며 전염별과 살육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5장 - 머리카락과 수염을 자르는 상징

에스겔이 머리카락과 수염을 잘라서 1/3은 태우고, 1/3은 칼로 베고, 그리고 1/3은 바람에 날립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1/3은 전염병으로, 1/3은 칼로, 1/3은 사방으로 흩으시며 죽이는 심판의 상징입니다.

5:13.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을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가라앉으리라 내 분이 그들에게 다한즉 나 여호와가 열심으로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

우상 숭배와 심판 (6-11장)

우상 숭배하며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보여주며 경고하십니다.

6장 / 산당을 멸하리라(I will destroy the high places.)

에스겔은 이스라엘 산들에게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며 곧 칼이 임하여 산당을 멸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칼을 피하여 이방인 들 중에 살아남은 자가 있게 한다고 말하며 우상을 섬겨 하나님을 근심하게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할 때 여호와인 줄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6장 - 우상 숭배에 대한 심판

6:11.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는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할지어다 오호라 이스라엘 족속이 모든 가증한 악을 행하므로 마침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망하되

심판의 목적은 그들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하는 것입니다.

6:14.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7장 / 끝났도다(임박한 재앙의 원인과 결과)(The Ends)

에스겔은 또한 이 땅 사방의 일이 끝났다고 말하며 이제는 끝이 이르렀고 진노를 나타내어 행위를 심판하고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 한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전쟁에 나갈 사람이 없으며 밖에는 칼이 있고 안에는 전염병과 기근이 있어서 밭에 있는 자는 칼에 죽고 성읍에 있는 자는 기근과 전염병에 도망한다고 말한다.

7장 / 하나님 진노의 날

이스라엘에 하나님 심판의 날이 왔다고 경고합니다.

7:3. 이제는 네게 끝이 이르렀나니 내가 내 진노를 네게 나타내어 네 행위를 심판하고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

7:27. 왕은 애통하고 고관은 놀람을 옷 입듯 하며 주민의 손은 떨리리라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그 죄악대로 그들을 심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7장 -  하나님 진노의 날

이스라엘에 하나님 심판의 날이 왔다고 경고합니다.

7:3. 이제는 네게 끝이 이르렀나니 내가 내 진노를 네게 나타내어 네 행위를 심판하고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

7:27. 왕은 애통하고 고관은 놀람을 옷 입듯 하며 주민의 손은 떨리리라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그 죄악대로 그들을 심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8장 / 이 담을 헐라(Take down this wall)

주 여호와의 권능이 내리기로 보니 불같은 형상이 있었다. 이스라엘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있는데 들에서 본 모습과 같았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북쪽을 바라보게 하시고 여전히 질투의 우상이 있음을 알게 하신다. 하나님은 분노로 갚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며 소리도 듣지 아니하신다.

8장 - 예루살렘 성전 우상 숭배의 환상

곤충, 짐승과 우상, 담무스(Tammuz), 동쪽 태양에 절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환상으로 보여주십니다.

9장 / 이마에 표하라(mark on forehead)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고 하신다. 그리고 모두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신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두 멸하려 하냐고 묻고 있다.

9장 - 예루살렘을 향한 분노

하나님께서 분노와 심판을 표하십니다.

9:9.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죄악이 심히 중하여 그 땅에 피가 가득하며 그 성읍에 불법이 찼나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으며 여호와께서 보지 아니하신다 함이라

10-11장  /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환상을 봅니다.

10장 / 숯불을 흩으라(Scatter burning coals)

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고 하였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물렀다.
에스겔은 그 그룹들이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래에 있던 생물임을 알게 된다.

10장  -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환상을 봅니다.

11장 / 일치한 마음

11장  -  예루살렘 심판을 말씀하시며 또한 회복의 희망을 주십니다.

11:19-20.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은 야아사냐블라댜를 보았고 그들은 백성의 고관이었다.
그들은 불의를 품고 이 성 중에서 악한 꾀를 꾸미는 자였다.
하나님은 그들을 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심판하신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고 약속하신다.

12장 / 패역한 족속

포로 상징 (12)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이스라엘(열왕기하 24장, 역대하 36장)
에스겔에게 포로의 모습으로 다니게 하며 이스라엘이 포로 됨을 상징으로 보여줍니다.

12:4. 너는 낮에 그들의 목전에서 네 포로의 행장을 밖에 내놓기를 끌려가는 포로의 행장 같이 하고 저물 때에 너는 그들의 목전에서 밖으로 나가기를 포로되어 가는 자 같이 하라.

떨면서 먹고 마시는 상징도 명령하십니다.

12:19. 이 땅 백성에게 말하되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주민과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그들이 근심하면서 그 음식을 먹으며 놀라면서 그 물을 마실 것은 이 땅 모든 주민의 포악으로 말미암아 땅에 가득한 것이 황폐하게 됨이라

그리고 하나님 심판이 임박했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12:28.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아니할지니 내가 한 말이 이루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12장. 에스겔에게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한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포로의 행장을 꾸리고 낮에 그들의 목전에서 끌려가라고 말한다.
또한 그들이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면 이스라엘 온 족속에 대한 묵시라 하셨다 하라고 말하며 떨면서 음식을 먹고 놀며 근심하면서 물을 마시라고 말한다.

13장 / 들으라

13장.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자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전하며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어리석은 선지자에게 화 있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손이 쳐서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여호와 인줄을 알게 하신다고 말한다.

거짓 선지자에 대한 심판 (13)

하나님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13:16.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보았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의 거짓말들은 하나님 백성의 영혼을 사냥하는 것이라 표현하십니다. 그러므로,

13:23.  너희가 다시는 허탄한 묵시를 보지 못하고 점복도 못할지라 내가 내 백성을 너희 손에서 건져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오직 의인 만 살리라 (14-15)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 장로들(elders)이 우상을 섬기고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따르는 것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14:6.  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려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하나님은 노아, 다니엘, 욥을 예를 들어, 모든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에 있어, 오직 의인만 살리신다 말씀하십니다.

14:20.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5장) 불에 던져질 땔감으로 예루살렘 주민을 비유합니다.



14장 / 떠나라

14장. 하나님께서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려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고 말하라고 하신다.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시는 미혹되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며 죄를 더럽히지 아니하게 한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자기 생명만 건진다고 말한다.



15장 /

15장.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결국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게 되었다. 그들은 포도나무 가지처럼 쓸모없는 존재가 되겠다고 하셨다. 또한 하나님이 대적 자가 되시겠다고 하셨으며 그 땅은 황폐하게 한다고 말씀하셨다.





16장 /


16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보시며 양육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기를 비유하여 애굽에서 양육해 주신 것, 구원해 주신 것, 광야에서 연단시키신 것을 상기 시키신다. 또한 이스라엘과 유대 배성들이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배반하여 하나님을 더럽혀 하나님은 침략을 받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가증한 예루살렘 그러나 영원한 언약 (16)

한 여인으로 비유된 예루살렘

탯줄도 떼지 못한채 피투성이로 길가에 버려진 한 여자 아기가 있어 지나가던 사람이 데려다가 들의 풀같이 픙성히 잘 양육했습니다. 그 아이는 소녀가 되고 사랑할 만한 때가 되어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 분은 물로 피를 씻어 없애고, 기름을 바르고, 수 놓은 옷을 입히고, 가죽 신을 신키고, 온갖 패물로 화려하게 그녀를 치장하게 해 주었고 왕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 명성이 주변국에 퍼지자 지나가는 자들과 행음하는 음란한 여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여인에 비유하며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것으로 산당을 짓고 여러 나라의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은 남편을 두고 간음하는 여인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 (16:43) 네가 어렸을 때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이 모든 일로 나를 분노하게 하였은즉 내가 네 행위대로 네 머리에 보응하리니 네가 이 음란과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다시는 행하지 아니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을 또한 남편과 자녀를 싫어하는 어머니의 딸이라 비유하며 그녀의 형제는 사마리아고 소돔이며 이스라엘의 행위가 그들보다도 더 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이 사랑하셨기에 음녀가 된 이스라엘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또 다시 회복시키고 행위를 용서하셔서 하나님되심을 보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 (16:60)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17장 /



17장. 인간의 거짓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불변성과 진실을 나타낸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회개하기를 싫어했으며 인간의 수단을 의지했다. 시드기야 왕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바벨론을 배반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멸망을 선고하셨다.


독수리와 포도나무의 비유와 설명 (17)

큰 독수리가 레바논에서 백향목 높은 가지를 꺽어 장사하는 땅 상인의 성읍에 두고, 그 땅의 종자를 꺽어 옥토 큰 물가에 심었더니 포도나무가 자라 가지가 독수리를 향하고 독수리 아래에 있었다. 또 다른 독수리가 있는데 그 포도나무가 물을 받으려고 그 물가 옥토를 버리고 그 심어진곳에서 그를 향하여 뿌리가 뻗고 가지가 퍼지자 이 포도나무가 열매를 따며 번성할 수 없을 것이다.

처음 독수리는 바벨론 왕이며 높은 가지인 이스라엘 왕과 고관들을 바벨론으로 끌어갔고 그 땅 예루살렘에 한 왕족을 세워 바벨론과 언약을 맺어 이스라엘을 낮춰 다시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큰 독수리인 애굽을 의지하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배반한 이스라엘이 결코 애굽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망하리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친히 높은 가지를 꺽어다가 높은 산에 심어 그 나무가 크고 열매를 맺어 각종 새들이 깃들이게 하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연한 가지(young twigs)는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18장 /

18장. 사람은 자신의 죄악이나 선행에 대하여 결과적으로 그 책임을 지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개개인의 행위에 따라 상과 벌을 받게 된다. 악인은 반드시 죽이며 의인은 반드시 살게 된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율례를 지켜 행하며 죄에서 돌이켜 떠나야 한다.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나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해야한다.

아버지의 죄악과 아들의 의 (18)

  • (18: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하나님께서 선택한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이라도 그들은 우상을 섬기는 큰 악을 저질렀기에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긍휼히 많으신 하나님은 비록 악인이라도 죄를 회개하고 의를 따르면 모든 죄를 기억하시지 아니하시고 그가 돌이킨 것으로 기뻐할 테니 이스라엘 각 사람이 죄로 심판받기 전에 회개하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 (18:3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19장



19장.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성실하게 순종하는 자는 번영을 누린다. 불순종은 몰락을 부르며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다. 주어진 복을 깨닫지 못하고 사명을 저버린 포도나무는 가장 무서울 심판을 받았다. 분노 중에 뽑힌 포도나무, 땅에 버려진 포도나무, 소망이 끊어진 포도나무가 되었다.


이스라엘 고관들을 위한 애가 (19)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교관 즉 왕족들을 위한 슬픈 노래를 지으라고 하십니다. 이 애가에 등장하는 사자는 왕권을 상징합니다. 젊은 사자는 애굽으로 끌려가고(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아하스) 또 다른 젊은 사자(시드기야)도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들은 물가에 심겨진 포도나무같았지만 생명의 물 되신 하나님을 져버렸기에 분노 중에 뽑혀서 땅에 던짐을 당하고 그 열매는 동풍에 마르고 그 강한 가지들은 꺾이고 말라 불에 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위가 끝이 난 겁니다.

  • (19:14) 불이 그 가지 중 하나에서부터 나와 그 열매를 태우니 권세 잡은 자의 규가 될 만한 강한 가지가 없도다 하라 이것이 애가라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





20장

20장.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겨 하나님을 진노하게 했다. 선택받은 은혜, 구속받은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죽을 죄인들에게 은혜로 용서를 베푸신다. 광야에서 그들의 자손들에게 규례를 지키며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하였지만 조상들의 죄악을 답습한다.


이스라엘의 반역, 불타는 숲 (20)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에스겔을 찾아 왔으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응답하지 않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하여 언약을 맺은 후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을 반역해왔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조상들의 풍속을 따라 자신을 더럽히며 모든 가증한 일로 행음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 (20:3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반드시 다스릴지라
  • (20:37)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심판은 하지만 여러 나라에서 모은 자들을 맹세한 땅 이스라엘로 인도하여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남쪽의 숲이 불이나 마른가지나 푸른가지에나 불이 꺼지지 않고 완전히 태우는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남유다에 남아 있는 주민들이 바벨론의 침략으로 완전히 망하리라는 예언입니다.

여호와의 칼, 벌 받을 예루살렘 (21-22)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의 칼집에서 칼을 빼었으니 심판의 긴박성을 슬피울고 부르짖으며 이스라엘에게 알리라고 합니다. 땅에 바벨론 왕의 칼이 올 그림을 그리는데 암몬 족속의 랍바와 유대의 예루살렘이 나뉘는 지시표를 그리게 합니다. 여호아의 말씀이 그 갈림길에서 바벨론이 점을 쳐서 예루살렘이 뽑히고 그들이 쳐들어 올 것을 계시합니다. 예루살렘의 고통을 기뻐하는 암몬은 심판을 받아 영원히 기억되지 않을 겁니다.

예루살렘은 우상을 섬기고 피를 흘린 성읍으로 모든 민족의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행한 죄악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십시다.. 왕들은 생명의 피를 흘렸고,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해하였습니다. 유다 가운데 하나님이 금한 성적 타락과 뇌물과 고리 대금과 사기 등 하나님도 배역한 것 뿐만 아니라 사람과도 관계도 악이 가득하여서 하나님은 유다를 각 민족으로 흩어서 수치를 당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상황이 된것은 반역한 선지가들과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성물을 더럽힌 제사장들, 그리고 피 흘린 왕들, 즉 지도자들의 죄악이 크다고 하시며 이 성읍은 하나님이 진노의 불로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1장

21장. 하나님은 심판의 도구를 칼로 비유하신다. 죄인을 심판하시며, 예외없이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은 인간들로 회개하여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속성이다.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난다는 부분에서 빠르고 무서운 심판임을 알게 되며 규는 예수그리스도의 왕권을 예표하기에 메시야를 통해 심판한다고 말한다.


22장

22장.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가증함을 알리도록 명하셨고 죄는 피를 흘린 것과 우상을 만든 것임을 밝히었으며 그 결과고 이방의 능욕과 조롱거리가 되게 하셨다. 유다는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하였다. 그 심판은 풀무 불속에 넣고 불을 불어 녹이는 것 같이 노여움과 분으로 모두 녹인다고 말씀하신다.


23장


23장.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앗수르를 의지하였고 이 세상과 그 가운데 있는 것들을 사랑하였다.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의 손에 붙여 멸망케 하셨다. 그러나 사마리아의 멸망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였다. 오홀라와 오홀리바에게 학대와 약탈을 당하게 하시고 자녀들을 죽이며 집들을 불 살리셨다.

오홀라와 오홀리바 (23)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여인에 비유한 것으로 둘 다 젊어서 남편(하나님)을 두고 젊어서는 애굽과 행음(우상숭배와 이방 문화)하다가 오홀라는 앗수르와 행음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녀의 정든 자 앗수르의 손에 망하였습니다. 그녀의 동생 오홀리바는 그런 언니를 보고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오히려 앗수르와도 연애하고 바벨론과도 행음하니 언니보다 더 부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동생을 바벨론의 손에 넘겨 징벌하실 겁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므로 유다에게 진노의 잔을 주셔서 모든 음란을 그치게 하고 모든 여인이 정신이 깨어 그들을 본받지 않게 하실겁니다.



24장



24장.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의 패만원인은 피 흘린 죄라고 말씀하시며 에스겔을 통해 경고하실 때 돌이키길 바라신다. 여호와는 또한 에스겔의 기뻐하는 아내를 쳐서 빼앗으시며 에스겔은 주의 명령을 따라 슬픔을 나타내지 아니한다. 에스겔의 이상한 행동에 백성들이 관심을 가진다.

녹슨 가마, 에스겔 아내의 죽음 (24)

(24:1-14) 녹슨 가마

하나남은 아홉째 달 열째 날에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바벨론의 침공이 가까이 온 오늘 날짜를 기록하도록 했습니다. 또 비유를 주셨는데 녹슨 가마에 고기와 뼈를 넣고 가마아래에 많은 나무로 불을 지펴 삶아 녹이고 쫄이고 뼈를 태우고 빈 가마를 달궈서 녹을 없애신다는 것 입니다. 녹슨 가마는 죄악이 가득한 예루살렘이며 불은 바벨론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징벌하셔서 깨끗하게 하실 수밖에 없지만 지금이라도 회개하기를 원해서 선지자를 통해 계속 말씀하십니다.

(15-27) 아내의 죽음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그의 아내가 죽을 것을 예언하시며 그러나 죽음을 슬퍼하지도, 울지도 말며 탄식만 하라고 하십니다. 아침에 백성에게 전하니 저녁에 아내가 죽었습니다. 백성이 이 예언이 자기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묻자 에스겔이 유다가 성소를 영광과 기쁨으로 생각하나 하나님이 그곳을 더럽히고 너희의 버려둔 자녀를 칼에 죽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너희는 예루살렘의 패망을 보며 에스겔이 아내가 죽었을 때 보인것 처럼 탄식만 하게 될 것이고 그 때야 하나님이신 줄 알게 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방(Nations)에 대한 심판 예언 (25-32장)

25장


25장. 죄악은 쉬지 않고 계속된다. 모압이 하나님을 모독하였으며 에돔이 유다를 쳐서 복수하였다. 그것의 결과로 데만에서부터 황폐하게 하며 드단까지 칼에 엎드려진다고 말하며 블레셋 사람 위에 손을 펴서 그렛 사람을 끊으며 해변에 남은 자를 진멸하되 분노의 채벌로 원수를 크게 갚는다고 말한다.

암몬, 에돔, 모압, 세일, 블레셋 (25)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혀 졌을 때, 이스라엘이 황폐 할 때, 유다 족속이 사로잡 힐 때 암몬이 기뻐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동방 사람에게 넘기고 다른 민족으로 멸하게 할 것입니다. 모압은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다름이 없다 하였으르모 모압이 동방 사람에게 넘겨주어 기업을 삼게 할 것입니다. 에돔과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원수로,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아 줄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 (26-28)

26장


26장. 얼굴에 잔악한 분을 바르고 무죄한 피로 입술을 그리며 향락을 찬양하던 두로가 최후를 맞게 된다. 큰 군대가 쳐들어오고, 전략적으로 쳐들어오며, 행군으로 쳐들어왔다. 두로는 하늘과 땅을 치고 통곡해야 할 처지에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로 낙인찍히고 파멸의 길을 가야 한가고 한다.

(26장) 두로가 받을 심판

  • (26:2) 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르기를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

하나님께서 두로를 심판하시는 이유는 예루살렘 성이 무너졌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상업적으로 더 유익이 있다고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고대 지중해의 부유한 해양 상업 도시 두로는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여러 나라의 침략을 당하여 마침내는 주변 도시로부터 그 부유한 도시가 어찌 저렇게 되었나 하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사람이 더 이상 살지 못하는 역사 속에서 그 이름이 사라지고 말 도시가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27장



27장. 하나님을 배반하고 헛된 일에만 기울인 까닭으로 망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애가를 짓게 하셨다. 두로의 아름다움, 값비싼 것, 지식이나 용사가 헛되다는 것을 말하며 지금 육에 속한 형통함, 영화, 욕망에 취한 나머지 그 뒤에 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허무를 이기지 못해 몸부림치는 두로의 심판은 영원한 심판이었다.


(27장) 두로에 대한 애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완전히 멸망할 두로를 위해 애가를 지을 것을 에스갤에게 말합니다. 두로는 어떤 나라입니까? 27장은 여러 절을 이용하여 두로가 얼마나 많은 민족과 댜양하고 귀한 물품들을 교역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가 두로를 열국의 시장(이사야:23:3)이라 표현한 것처럼 그들은 해상무역으로 엄청난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3절의 말씀처럼 그런 자신들을 가리켜 “나는 온전히 아름답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족함이 없고 완전하여서 이 영광이 영원할 것처럼 교만하여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풍(바벨론)을 일으켜 바다 한가운데서 그들을 무찔러서 주변 민족들을 놀라게 할 것입니다. 또 그들과의 교역으로 이익을 보던 도시들은 통곡하지만, 또한 많은 민족의 상인들이 그를 비웃고 두로는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8장



28장. 하나님은 두로 왕이 자신의 재물과 지혜로 교망해져 자신을 신격화 했기에 단호히 심판하실 것을 예언 했다. 두로는 옛적 에덴과 같은 영적 속에서 괘락을 누렸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시돈에 의해 큰 치욕을 당하셨기에 전쟁과 전염병을 내리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대적의 손에서 보호하시고 회복시키신다.

(28장) 두로왕, 시돈이 받을 심판

  • (28:2)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거늘

두로왕은 무역으로 번영한 것과 자기의 지혜 때문에 교만하여 스스로 신같이 생각하였기에 하나님이 심판하실 겁니다. 두로의 멸망은 주변 국가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두로는 영원히 다시 기억되지 않을 겁니다.

시돈 가운데 전염병과 칼을 보내서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낼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민족들을 없애고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을 고국 땅에 돌아와 평안히 살게 하여 하나님인 줄을 알게 할 것입니다.

애굽 (29-32)

29장



29장. 하나님은 바로의 교만을 꺾고 이스라엘이 다시는 세상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애굽을 심판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애굽은 20년동안 황폐하여 어떤 것도 기거하지 못할 것이나 다시 회복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언약을 지키시기 위하여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이용하여 애굽을 치셨다.

(29장) 애굽이 받을 심판

  • (29:2)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나일강에서 가장 힘센 악어로 표현한 애굽의 왕을 하나님은 갈고리로 꿰어 내고 강을 황무지 사막이 되게 하셔서 여호와 하나님인 줄 알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애굽을 의지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들이 쓸모없는 갈대 지방이였음을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애굽은 흩으셨다가 다시 모으겠으나 이스라엘이 의지할 수 없는 미약한 나라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바벨론느부갓네살을 사용하실 것이며 그 복수로 애굽을 정복하게 하실 것입니다.

  • (29:21) 그 날에 나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한 뿔이 돋아나게 하고 나는 또 네가 그들 가운데에서 입을 열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30장


30장. 느부갓네살 왕의 군대에 의하여 멸망하게될 애굽을 향하여 여호와의 날이 가깝도다, 애굽에 칼이 임할 것이다, 그 날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된다고 말하며 예언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언대로 느부갓네살 왕의 손을 통해 애굽을 심판하신다. 오랜 세월 견고한 애굽이 신생국 바벨론에 의하여 꺾여졌다.

(30장) 통곡하라

하나님은 심판의 날이 가까이 왔으니 통곡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애굽과 그의 동맹국들을 칠 것이며 그들의 우상들도 모두 부숴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이 바벨론의 팔을 드시고 애굽 왕의 팔을 꺾어 칼도 쥘 수 없게 하셔서 여호와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31장


31장. 앗수르는 레바논의 백향목 같다,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인다, 내가 그 가지를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다는 말씀을 통하여 앗수르의 번영을 예언한다. 바로의 멸망 원인이 그의 교만에 있었듯이 앗수르 왕의 몰락도 교만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잠시 꽃을 피웠던 앗수르는 영원학 몰락이 있게 된다.

(31장) 애굽의 번영과 교만

애굽과 비슷한 앗수르의 번영과 교만과 그리고 심판을 보여주며 애굽도 이와 같게 될 거라는 것이 주제입니다. 앗수르를 가지가 아름다운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나무는 물이 많은 좋은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키가 크고 굵은 가지가 번성하였고 그늘이 많아 새와 짐승이 그 아래 거주하였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스라엘)과 다른 나무도 그만하지 못했고 에덴의 모든 나무(여러 열방)가 시기할 정도로 번영하였습니다.

  • (31:9) 내가 그 가지를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u>

그 아름다움과 번성을 이룬 것은 바로 “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교만해졌으므로 여러 나라의 능한 자의 손에 넘겨 그를 찍어 버리고 떨어트리고 그늘에 있던 새와 짐승들도 넘어진 나무와 함께 멸망될 것입니다. 그 나무는 다른 죽음에 넘겨진 자들과 같이 스올에 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31:18) 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32장


32장. 에스겔에게 애굽의 바로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고 말하며 악어가 그물에 걸리고 공중의 새와 들짐승에게 먹히는 불행이 온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애굽의 멸망을 예언하며 황폐에서 회복의 과정을 보여 주기도한다. 그러나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게 되는 애굽을 보여준다.

(32장) 애굽 왕을 위한 애가

애굽 왕을 여러 나라에서는 사자라 불렀지만, 실상은 큰 악어라고 하시며 많은 백성의 무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그물로 끌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악어의 사체는 짐승과 새의 먹이가 되고 피는 개천을 채울 것입니다. 모든 빛이 사라진 애굽의 패망 소문은 여러 나라에 근심과 두려움이 될 것입니다. 바벨론 왕의 칼이 그에게 오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또다시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예언이 임하여 말씀하시기를 한때 강력한 왕들과 용사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미 죽임을 당한 할례받지 못 한 자들과 같이 바로 역시 칼에 죽어 그들과 함께 있게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소망 예언 (33-48장)

33장



33장.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삼으신다. 파수꾼이 하는 일은 재앙이 임하는 것을 보고 나팔을 부는 것이다. 여호와는 에스겔이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기를 원하셨다. 여호와는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셨다. 이스라엘이 불평하여 하나님은 심판하시고 함락시키신다.

파수꾼 에스겔 (33)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파수꾼의 역할은 위험을 알려주어서 경고를 듣고 방비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만약 경고를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파수꾼에게 죄는 없습니다. 그러나 파수꾼이 경고하지 않으면 그것은 파수꾼의 잘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으셨습니다.

  • (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의인이라도 범죄하면 그 죄로 죽을 것이지만 악인이라도 회개하고 공의를 행하면 살 것이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죄에서 돌이키라고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포로 된 지 열두째 해 열째 달 다섯째 날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에스겔이 들었는데 그 전날 저녁에 하나님이 에스겔의 입을 여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녀이니 그 땅을 계속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죄악으로 인해 그 땅을 황폐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한편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에스겔이 말한 예루살렘의 함락이 이루어지자 그에게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익만 따를 뿐 에스겔의 경고에도 회개나 행위 없이 좋은 노래 듣듯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경고가 응할 때 그들에게 한 선지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4장


34장. 이스라엘의 목자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질책하신다. 목자들의 직무는 모든 대적과 위험들로부터 보호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목자들은 살찐 양을 잡아 그 털을 입는 데만 힘썼다. 주께서 양 떼를 찾고 찾아 모으시며 친히 양 무리의 목자가 되어 주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화평의 언약을 말씀하신다.

자기만 먹는 목자들, 양 떼를 구원하실 하나님 (34)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양은 먹이지 않고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예언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양에게서 이익만 챙기고 돌보지 않고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은 흩어지고 모든 들짐승의 밤이 되었는데 찾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이 목자가 되어 양을 찾고 찾아 건져내고 본토로 데리고 가서 좋은 꼴을 먹이고 누워 있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 (34:12)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양과 양사이와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서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목자, 다윗의 자손을 세워 그들의 왕이 되게 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평안히 거주하며 하나님이 함께 있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백성이 되리라 예언하셨습니다.

  • (34:24)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35장


35장. 에돔에 내려진 심판을 언급하면서 에돔 족속은 에서의 후손으로 세일산이 기업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죄악으로 인해 세일산을 쳐서 영원히 황폐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함께하시며 온 땅을 감찰하신다.

세일산과 에돔의 심판 (35)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세일 산을 향해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옛날부터 한을 품고 이스라엘 족속의 환난 때 곧 죄악의 마지막 때에 칼의 위력에 그들을 넘겼습니다. 또한 그들은 이스라엘을 미워하고 질투하며 입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피가 따라다니고 그 땅도 황무지와 폐허가 되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할 것입니다.



36장

36장. 이스라엘이 받을 복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회복의 약속을 지키신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열매를 맺으며 그들을 성읍들에 거주하게 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은 이스라엘의 죄로 더럽혀졌지만 명예를 회복하시고 정결하게 하신다. 그리고 주의 영을 그들 속에 두시며 백성이 되게 하신다.

이스라엘이 받을 축복 (36)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입니다. 이방에게 수치 당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똑같은 수치로 그들에게 갚아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즐거워하는 마음과 멸시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의 땅을 노략질하고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황폐했던 이스라엘 땅에는 다시 사람들이 모이고 수치와 비방을 듣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 백성을 넘어뜨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부정한 여인 같았고 피를 쏟고 우상을 섬겨서 각국으로 흩어졌고 그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더럽혀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그들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고국 땅으로 돌아올 때 맑은 물을 뿌려 정결하게 하고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실 것이며 악한 길과 행위를 기억하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밉게 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죄악에서 정결하여질 때 회복되고 번성할 것입니다.

  • (36:37)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37장

37장.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에스겔에게 마른 뼈들에게 대언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뼈들이 일어나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뼈가 들어맞아 연결되었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이고 생기에게 대언하니 생기가 들어가 군대를 이루었다.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말하며 군대 이스라엘 민족의 소망을 말하고 있다.

37장

- 마른 뼈 환상

하나님이 에스겔을 데리고 한 골짜기에 갔는데 마른 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뼈들이 살 수 있을 찌 묻자 에스겔은 하나님이 아신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뼈에게 명령하신 대로 에스겔이 대언 하니 뼈가 붙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나 생기(breath or spirit)는 없었습니다.
또다시 생기에게 대언하니 생기가 살아나서 일어나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마른 뼈와 같이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을 위해 무덤을 열어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하나님의 영을 두어 살아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막대기(37:15-28)

37:16.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렇게 쓴 두 막대기를 붙여서 그의 손에서 하나가 되게 하고 무리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로 통합하시고 한 임금, 하나님의 종 다윗이 그들이 왕이 되어 모두의 목자가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의 왕위가 영원할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이것은 메시아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해석합니다.

37:22.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38-39장

- 마곡 땅과 곡의 심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주신 마곡 땅의 곡에 대한 예언입니다.
구약의 다른 책에는 언급되지 않은 (신약, 요한계시록 20:8, 언급) 곡에 대하여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교회사 속에서 어떤 해석들이 있었는지 몇 권의 에스겔 주석에서 옮겨보겠습니다.

4세기 말엽의 교부 암브로시우시는 곡이 고트족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7세기 때는 성지를 위협했던 아랍의 군대가 곡과 마곡이 되었습니다.
13세기경에는 동쪽의 몽골 유목민을 지칭하는 암호가 되었습니다.
16세기의 루터는 터키를 곡과 마곡으로 보았습니다.
17세기의 윌리엄 그린힐의 저술에서는 곡을 로마 황제 혹은 교황 혹은 터키족으로 보았습니다.
19세기의 빌헬름 게세니우스는 로쉬를 러시아로 보았습니다.

이 견해는 후에 “메섹”과 “두발”을 러시아의 도시인 모스크바와 토볼스키라고 주장했던 다른 자료들의 사상과 더불어 스코필드 관주성경에 의해 유명하여졌습니다.
이 곡이라는 인물은 특정한 한 시대의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대의 대적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38장



38장.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때에 마곡과 그 연합군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게 하신 것이다. 많은 대적이 쉴새 없이 침략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편이 되어 주시며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침략자를 멸망시키신다. 그리고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위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낸다고 말씀하시며 영광을 드러내신다.

38:16. 구름이 땅을 덮음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 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눈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이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통해 말한 이가 곡이라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을 치러 오도록 한 이유는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칼로 서로를 칠 것이며 전염병과 피로 심판하며 폭우와 큰 우박 덩어리와 불과 유황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이 부분은 요한계시록 20장 7절-10절까지 마곡과 곡에 대한 이야기와 아주 흡사합니다.


39장



39장.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평화를 회복하실 것을 선포하신다. 곡의 파멸이 선언되고 곡의 무기가 일곱해 동안의 땔감이 된다. 그리고 곡의 시체를 일곱 달 동안 매장한다고 말한다. 가장 두려운 심판은 매장하지 못한 시체가 새들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복에 대한 약속을 언급하신다.

39장도 곡에 대한 예언으로 곡과 그의 모든 무리를 북쪽 끝에서 이끌어 내어 침략하게 한 후에 그들의 손에 활과 화살을 떨어뜨려 이스라엘 산 위에서 죽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불을 마곡과 및 섬에 평안히 거주하는 자에게 내려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버려둔 무기만으로 7년 동안 땔감으로 쓰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 동쪽 골짜기를 매장지로 삼아 7개월 동안 매장을 하여 그곳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와 짐승들은 그 시체로 인해 잔치가 열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여러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과 권능을 보게 하시고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줄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해 원수의 손에 넘겼다는 것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39:25.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사랑을 베풀지라

이스라엘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셔서 자신의 거룩함을 보이고 이스라엘은 회개할 것이며 하나님의 영을 그 속에 주시고 다시는 여호와의 얼굴을 가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성전과 성읍 형상 (40-48)

성전 조감도
  • A. 성소 (The Temple House)
  • B. 번제단 (Altar of Burnt Offering)
  • C. 안뜰 (Inner Court)
  • D. 안뜰 문 (Gates to Inner Court)
  • E. 성전 뜰 (Separate Place)
  • F. 성전 뜰 뒤쪽 건물 (Hinder Building)
  • G. 제사장의 부엌 (Priest's Kitchens
  • H. 제사장들의 방들 (Chambers for Priests)
  • I. 박석위의 방들 (Chambers)
  • K. 백성들의 부엌 (People's Kitchen)
  • L. 바깥 문 (Gates into Outer Court)
  • M. 박석 깔린 땅 (Pavement)
  • N. 바깥 뜰에 있는 방들 (Chambers in Outer Court 30)
  • O. 바깥 뜰 (Outer Court)





40장


40장. 에스겔은 환상을 통해 새 성전에 대한 설계도를 하나님께 받았다. 새로운 성전 바깥뜰의 동쪽 문에 관해 설명하며 다음으로 바깥뜰과 북쪽을 향한 문에 대해 언급한다. 하나님께서 제시한 방법대로 안뜰로 들어가는 문에 대해 설명하며 북쪽 문의 구조와 그 곁에 있는 번제물을 씻는 방과 제사장들의 방을 언급한다.

(40장)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에스겔에게 임하여 그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서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셨는데 남쪽에 있는 성전 형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에스겔을 그 곳으로 데려가셨는데 놋 같은 빛난 사람이 삼줄과 장대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 (40:4)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

에스겔이 본 것은 성전 바깥 뜰 세 개의 문, 바깥뜰, 안뜰로 향하는 문들, 희생 제사를 준비하는 방, 제사장의 방을 보았습니다.


41장


41장. 성소와 골방에 관한 설명이 묘사되고 있으며 서쪽 건물과 성전의 넓이를 측량하며 나무제단과 성전의 문들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성전의 환상은 말세에 자기 백성을 위하여 성취하실 성전의 그림자임을 보여준다.


(41장) 성소와 지성소와 골방들, 서쪽 건물과 성전의 넓이, 나무 제단과 성전의 문들


42장


42장. 성직자의 직분은 구별되어 있으며 여호와를 가까이 모시는 자들이며 여호와께로부터 생계를 공급받는 자들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성전의 사면 담을 측량하며 하나님의 교회가 견고하고 안정되어 영원불변할 것을 상징하고 있다.


(42장) 제사장 방, 성전의 사면 담

  • (42:20) 그가 이같이 그 사방을 측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길이가 오백 척이며 너비가 오백 척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43장


43장.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이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며 이 제단을 만드는 날에 그 위에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의로운 제사를 드리고 칠일 동안 매일 염소 한 마리를 갖추어 완전한 제사를 드리고 소금을 쳐서 언약대로 드리라고 말한다.

43장) 동편 문을 통해 성전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가득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기에 노하여 멸망시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43:9) 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거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 가운데에 영원히 살리라

번제단의 환상을 보았고 이 제단을 만든 날(봉헌)의 규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에게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를 주어 속죄제물을 삼게 하고 그 피로 제단의 네 뿔과 아래층 네 모퉁이와 사방 가장자리에 발라 속죄하여야 합니다. 그 속죄제물의 수송아지를 가져다가 성전의 정한 처소 곧 성소 밖에서 불사르고 다음 날에는 흠 없는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삼아 드려서 그 제단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그 후에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떼 가운데에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를 드리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칠 일 동안은 매일 염소 한 마리를 갖추어 속죄제물을 삼고 또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를 흠 없는 것으로 갖출 것이며 이같이 칠 일 동안 제단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려 정결하게 하며 드릴 것입니다. 이 모든 날이 찬 후 제팔일부터 제사장이 제단 위에서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입니다.

44장


44장. 에스겔이 본 새 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하였다. 이 문은 다시 열지 못할 문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열려진 성전 문을 통하여 출입하는 무리를 진심으로 살펴서 속된 것이 출입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신다. 또한 거룩함을 지키며 거룩한 직분을 지키며 거룩함을 기업으로 삼는 제사장을 통한 교훈을 말씀하신다.

(44장) 여호와 하나님이 성전 동쪽 문으로 들어 오셨기에 그 문을 닫아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44:3) 왕은 왕인 까닭에 안 길로 이 문 현관으로 들어와서 거기에 앉아서 나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고 그 길로 나갈 것이니라

에스겔이 북문을 통해 성전 앞에 이르니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여 엎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이 이방인을 데려오고 제물을 드릴 때에 그들로 하나님의 성소 안에 있게 하여 성전을 더럽혔으며 가증한 일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 사람도 그릇 행하여 그 우상을 따라 하나님을 멀리 떠났으니 죄를 담당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44:15)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 행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5장


45장. 한 구역과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라는 말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구별하여 드려야 함을 말한다. 또한 포악하지 말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속여 빼앗는 것을 그치라고 말한다. 속죄하기 위하여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 제물을 갖추라고 말씀하신다.

45장

45:1.  너희는 제비 뽑아 땅을 나누어 기업으로 삼을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지니 그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는 만 척이라 그 구역 안 전부가 거룩하리라

그중에서 성소에 속할 땅을 가장 먼저 구별하고 그 안에 성소를 두고 그 주변에 성소에서 섬길 제사장들을 위해 집을 지을 땅을 두니 성소를 위한 거룩한 곳입니다.
이것을 중심으로 위쪽에 레위 사람들의 거주지 20개 마을을 둘 것입니다.
성소를 중심으로 제사장들의 거주지와 경작지 아래에 둡니다.
그리고 구별된 지역 위와 아래가 이스라엘 지파가 살게 될 땅이고, 오른쪽과 왼쪽이 왕의 소유지입니다.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백성들을 공평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새 땅에서 예물을 드릴 때 제사장에게 직접 드리지 않고, 군주를 통해서 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절기와 그때 드릴 제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46-47장

- 안식일과 초하룻날 제사 관련 그리고 성소 문지방 밑에 흐르는 물의 환상을 봅니다.

46장


46장. 여호와께 드릴 번제는 흠 없는 어린양이라고 말씀하시며 군주가 자원하여 번제를 준비하거나 혹은 자원하여 감사제를 준비하는 것과 영원한 규례로 삼아 항상 나 여호와께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아들에게 기업으로 줄 것은 자기 산업으로만 하라고 말씀하시며 구별된 방에서 주님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47장


47장. 심령을 비옥하게 하는 강물, 영적 풍요와 결실을 가져다주는 강물은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이다. 황폐한 인간의 마음에 성령을 통한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면 생명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날리라고 말씀하시며 이 강물이 이르는 곳 마다 모든 생명이 산다고 말씀하신다.

48장 

에스겔이 본 환상은 포로 중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공평하시며 백성은 순종해야 하고 모든 생활의 중심은 하나님이심을 말하는 말씀이다. 또한 땅을 분배받는 다는 것은 영생의 기업에 참여한다는 영적의미가 있음으로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뽑아 하나님의 약속대로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 각 지파의 몫과 거룩한 땅

48:1.  모든 지파의 이름은 이와 같으니라 북쪽 끝에서부터 헤들론 길을 거쳐 하맛 어귀를 지나서 다메섹 경계선에 있는 하살에논까지 곧 북쪽으로 하맛 경계선에 미치는 땅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단의 몫이요.


여호와 삼마 

-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The LORD Is There)

48:35b.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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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의 비교

에스겔 1:1 -  요한계시록 19:11
에스겔 1:5 - 요한계시록 4:6
에스겔 1:10 - 요한계시록 4:7
에스겔 1:22 - 요한계시록 4:6
에스겔 1:24 - 요한계시록 1:15
에스겔 1:28 - 요한계시록 4:3
에스겔 2:9 - 요한계시록 5:1
에스겔 3:1, 3 - 요한계시록 10:10
에스겔 7:2 - 요한계시록 7:1

에스겔 9:4   - 요한계시록 7:3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하라 하시고.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에스겔 9:11 - 요한계시록 1:13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 먹 그릇을 찬 사람이 복명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게 명하신대로 내가 준행하였나이다 하더라.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에스겔 10:2 - 요한계시록 8:5
에스겔 14:21 - 요한계시록 6:8
에스겔 26:13 - 요한계시록 18:22
에스겔 27:28-30 - 요한계시록 18:17-19
에스겔 37:10 - 요한계시록 11:11
에스겔 37:27 - 요한계시록 21:3
에스겔 38:2-3 - 요한계시록 20:8
에스겔 40:2 - 요한계시록 21:10
에스겔 40:3 - 요한계시록 11:1
에스겔 43:2 - 요한계시록 1:15
에스겔 43:16 - 요한계시록 21:16
에스겔 47:1, 12 - 요한계시록 22:1-2
에스겔 48:31 - 요한계시록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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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의 수니파와 시아파의 차이 쉽게 이해하자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수니파 / 종교적인 시아파

 이슬람교의 시작과 분열

이슬람교는 7세기 초 '무함마드'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모든 신들을 부정하며 유일신 '알라'를 숭배하는 것이 기본 교리이다.
창시자이며 예언자이고 최고 지도자였던 '무함마드'가 죽은 후 후계자 문제로 갈등이 시작되었다.
선거에 의해 최고 지도자(칼리프)를 뽑으려는 기존세력('무함마드'의 측근들과 그의 협력자들)에 대항해 '무함마드'의 가계를 중심으로 지도자가 계승되어야 한다는 친'무함마드'계 세력이 충돌하면서 분열되었다.

여기서 기존세력은 '수니파'('무함마드'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란 의미로 스스로를 '정통파'라 생각한다)로 불리우며 친'무함마드'계 세력은 '시아파'(분파란 의미)로 불리게 된다. 

이슬람교의 최고지도자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권력다툼에서 분열되게 된것이다.

세속 권력화된 수니파와 더욱 종교화된 시아파

당시 중동을 강력한 무력으로 평정하며 이슬람교를 안착시킨 '무함마드'의 성공은 그 혼자의 힘만으로 이룬것이 아니었다.
그에겐 강력한 동료들과 강한 힘을 지닌 지지세력들이 있었다.
이들은 무함마드가 만든 지역과 혈연, 민족을 뛰어넘을수 있는 권력. 즉 종교중심국가의 최고 지도자 자리를 단순히 '무함마드'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요구하는 시아파에게 양보할 마음이 없었다.

결국 양쪽은 무력충돌을 벌였으며 결과 수니파는 주도권을 잡게되고 시아파는 종교적 이단자로 치부되어 수니파에의한 박해를 받기 시작한다.

'무함마드'가 만든 '이슬람교'를 단순히 자신들의 정치권력으로 이용하려는 기존 세력인 수니파.

'무함마드'를 더욱 특별한 존재로 부각시켜 '무함마드 왕가'를 만들고자 했던 세력인 시아파.

하지만 둘의 대결에서 몇몇 결정적인 치명상을 입은 시아파는 힘의 균형에서 급격히 밀리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지하로 숨어들기에 이르른다.
이 과정에서 시아파의 종교적 색체는 더욱 진해지고 신비주의적인 교리를 발전해 나간다. 

굳이 비교하자면

주도권을 잡은 수니파가 더욱 세속적 권력화가 되어가는 반면, 시아파는 더욱 종교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맘'으로 불리우는 이슬람교 종교지도자가 수니파와 시아파에서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는것만으로도 쉽게 알수 있다. 

먼저 수니파에서의 '이맘'은 단순히 종교예배를 관장하는 종교지도자에 불과하며 '이맘'이 될 수 있는 자격 또한 별다른 특별함이 없다.

반면 시아파에서의 '이맘'은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스승이며, 신성한 존재이다.
또한 실수를 할수 없는 초인적인 존재로서 이슬람율법에 대한 해석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다.
이는 종교는 물론 정치와 사법권의 모든 권력을 소유함을 뜻한다.

혹시 과거 이란에 관한 뉴스에서 단골 등장하던 '호메이니'를 아는가?

바로 이사람이 시아파의 '이맘'이다.

과거 그는 이란에서 신을 대표하여 이땅에 내려온 초인적인 존재같이 추앙을 받았고 힘을 행사했다.

다수의 수니파와 소수의 시아파

오늘날 수니파는 이슬람의 약 90%를 차지하고 있으며 시아파는 약 10%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이슬람엔 이 두파 말고도 다른 파들도 존재는 하나 그 존재가 극히 미미하여 대부분 이슬람교를 이야기할땐 이 두파만을 일컫는다.

< 위의 지도에서 진한 녹색이 시아파이며 그보다 연한 녹색이 수니파이다 >

IS의 수니파와 이란혁명의 시아파

보통 우리를 비롯한 서방의 주요 국가들에겐 IS의 등장 이전까지만 해도 주로 이란으로 대표되던 시아파를 더 세계평화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인식해왔다.

이는 미국의 지원으로 이란을 통치했던 '팔레비왕조'를 '호메이니'를 주축으로한 시아파 종교세력이 무너뜨렸고 이 과정에서 '미국'측에 의해 태러로 일컬어지는 여러 사건들이 일어나게된 배경이 있다. 급기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나 실패로 끝나고 이란은 더욱더 서방국가들과 멀어지며 반서방지역과 관계를 키워나간다. 이후 이란은 아니, 시아파는 미국을 선두로한 서방국가들에의해 악의 세력으로 불리우며 여러 제재에 시달렸고 이는 IS의 등장때까지 계속된다.

IS는 수니파로 이루어져있다.

IS는 시아파를 이단자라 칭하며 발견족족 처형해버린다.

이때문에 이란은 IS를 증오하며 서방 그 어느 국가들보다도 IS 소탕작전에 적극적이다.
결국 시아파인 이란은 수니파인 IS를 소탕하기위해 이라크등에 직,간접적 혹은 공개,비공개적으로 지상군을 투입했으며 현재 쿠르드군과 함께 IS소탕작전에서 실질적인 주력으로 싸우고 있다.

이런 배경이 미국과 서방이 이란에 대한 제재를 풀고 화해 무드를 조성하게된 직접적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물(4325) 마임 [ mayim ]  מַיִם

1. 물,  2. 즙,  3. 소변

발음 / [ mayim ]

관련 성경 / 물(창1:6, 출15:8, 사1:22), 샘물(창21:19, 수15:9), 강물(출4:9), 물가(민24:7, 신32:51),시내(신10:7, 삼하17:20), 비(신11:11, 삼하21:10), 샘(왕하3:19, 시107:33), 소변(왕하18:27,사36:12), 수문(느3:26, 8:16), 수면(욥26:10), 원천(사35:7), 못(사41:18), 홍수(사54:9), 바다(겔27:34), 창수(합3:10). [형] 축축한(레11:34).

구약 성경 / 580회 사용


스미어 나오더라(6379) 파카[ pâkâh ]   

1. 피엘형 : 물이 떨어지다
2. 겔 47:2.
발음 [ pâkâh ]
관련 성경 / 스미어 나오다(겔 47:2).
구약 성경 / 1회 사용


11-2-2023(목) 에스겔 4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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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48장 각지파에게 나누어준 분깃

하나님은 바벨론에 있는 에스겔에게 성전을 보여주고 제사장과 예배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배를 들릴 때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셨습니다. 생수의 강이 흐르는 범위를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땅을 분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인류역사상 중요한 것은 생산과 분배의 문제입니다. 생산을 강조하는 것이 자본주의요 분배를 강조하는 것이 공산주의입니다. 생산과 분배의 균형을 잡아야하는데 어려운 문제입니다. 자발적으로 생산하고 자발적으로 분배하는 일을 이루어야 그 해결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이 땅을 분배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도장을 찍습니다. 이 땅을 사고 팔 수 있는 땅이 아닙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일곱지파 남쪽으로 다섯지파가 있습니다. 민수기에는 개인까지 공정하게 땅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잘 가꾸고 어떤 사람은 잘 가꾸지 못합니다. 땅을 사고 팔기도합니다. 희년이 되면 땅을 원주민에게 돌립니다.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땅의 관리자입니다. 내가 떠날 때는 하나님께 땅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스웨덴과 같은 나라는 땅은 국유화합니다.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고 집을 짓고 사고팔지 못합니다. 이런 나라는 열심히 일하지 않는 단점이 있습니다. 시편 16편의 말씀을 보면 5,6절에 보면 하나님이 줄로 재어준 구역이 있습니다. 어떤 땅은 산지요 박토가 있습니다. 평야도 있고 강이 있는 곳도 있습니다. 땅이 좋은 곳에 있는 사람은 좋을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에덴동산과 같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러나 범죄하고 타락하여 황폐한 곳이 되었습니다. 자연 여건이 좋은데 사는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북은 부자요 남은 가난합니다. 동은 공산주의고 서는 자본주의입니다. 어떤 나라든 북쪽이 잘 살고 남쪽이 못삽니다. 바닷바람이 불어서 농사짓기 어려운 곳인데 전나무나 대나무를 심어서 농사를 짓습니다. 키가 크고 못생긴 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아주 못생긴 사람은 성형수술을 하지 않습니다 지능도 분깃입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도 분깃입니다. 그 중심에는 여호와의 땅이 있습니다. 그 한 가운데 성전이 있습니다. 성전 중심으로 살아야합니다.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살아야합니다. 유대인은 어디에 살든지 창문 하나를 향하여 성전을 향하여 만듭니다. 집에서 기도할 때도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각 지파의 몫(1-9절)

지파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장 북쪽에서부터 시작하여, 헤브론 길을 따라, 르보하맛을 지나서 다마스쿠스와 하맛에 접경한 경계선을 타고 하살에논에까지, 곧 북쪽으로 하맛 경계선에 이르는 땅의 동쪽에서 서쪽까지의 땅은 단 지파의 몫입니다.

단 지파의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아셀 지파의 몫입니다.
단지파는 땅을 빼앗기자 이사가서 살게 됩니다.
단지파는 밑에는 아셀지파의 땅입니다.
아셀 지파의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납달리 지파의 몫입니다.
납달리 지파의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므낫세 지파의 몫입니다.
므낫세 지파는 빅 3에 속하는 지파입니다.
므낫세 지파의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에브라임 지파의 몫입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르우벤 지파의 몫입니다.
르우벤 지파의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유다 지파의 몫입니다.
유다 지파의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그들이 거룩하게 바쳐야 할 땅입니다.
유다는 실질적인 장자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땅입니다.
그 너비는 이만 오천 자이고, 그 길이는 다른 지파들의 몫과 같이 동쪽에서 서쪽까지이고, 그 한가운데 성소를 세워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없는 이스라엘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주께 거룩하게 바쳐야 할 땅은, 길이가 이만 오천 자요, 너비가 만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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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땅(10-14절)

거룩하게 바친 이 땅은 제사장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줄 땅은, 북쪽으로 길이가 이만 오천 자, 서쪽으로 너비가 만 자, 동쪽으로 너비가 만 자, 남쪽으로 길이가 이만 오천 자입니다. 그 한가운데 주의 성소가 있어야 합니다.
이 땅은 거룩히 구별된 제사장들, 곧 사독의 자손에게 주어야 합니다.

아비아달은 다윗 때는 충성하였나 그는 솔로몬 때에 아도니야에게 붙었던 자손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잘못된 길로 갔을 때에, 레위 지파의 자손이 잘못된 길로 간 것처럼 하지 않고, 하나님이 맡겨 준 직책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압살롬이나 아도니애 편에 서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다윗과 솔로몬 편에 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룩하게 바친 땅 가운데서도 가장 거룩한 땅을 받아야 하고, 레위 지파의 경계선과 인접해 있어야 합니다. 레위 지파가 차지할 땅도 제사장들의 경계선 옆에 그 길이가 이만 오천 자요, 너비가 만 자입니다. 그 전체의 길이는 이만 오천 자요, 너비는 이만 자입니다. 그들은 이 땅을 팔거나 다른 땅과 바꿀 수가 없고, 또 가장 좋은 이 부분을 다른 사람의 손에 넘겨 주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주의 거룩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레위 사람에게 주신 땅이 성적입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은 생명보다 귀한 것입니다. 이 기업을 반드시 지켜야합니다.

속된 땅(15-20절)

너비가 오천 자요, 길이가 이만 오천 자인 나머지 땅은 성읍을 세울 속된 땅입니다.
이 땅은 제사장이나 레위지파의 땅보다는 덜 거룩한 땅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각지파별로 뽑아서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도와줍니다.
이들은 일정기간 봉사하고 돌아가고 다시 새로운 사람들이 와서 봉사합니다.
그들이 기거하는 땅입니다.
그 한가운데 있는 땅은 성읍을 세워서 거주지로 사용하고, 그 나머지는 빈 터로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 성읍의 크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북쪽의 길이도 사천오백 자, 남쪽의 길이도 사천오백 자, 동쪽의 길이도 사천오백 자, 서쪽의 길이도 사천오백 자입니다.
이 성읍 빈 터의 크기는 북쪽의 너비가 이백오십 자, 남쪽의 너비가 이백오십 자, 동쪽의 너비가 이백오십 자, 서쪽의 너비가 이백오십 자입니다.
거룩하게 바친 땅과 인접한 나머지 땅의 길이는 동쪽으로 만 자가 되고, 서쪽으로도 만 자입니다.
그 땅은 거룩하게 바친 땅과 인접하여야 하며, 그 농산물은 성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먹을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서 뽑혀 와서 성읍에서 일하는 사람들만이 그 땅을 경작할 수가 있습니다.
거룩하게 바친 땅 전체는 길이도 이만 오천 자요, 너비도 이만 오천 자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그 성읍의 소유지를 포함하여 거룩하게 바친 땅을 네모 반듯하게 구별해 놓아야 합니다.

군주의 땅(21-22절)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친 땅의 양 옆과 성읍에 딸린 소유지의 양 옆에 있는 나머지 땅은 왕에게 돌아갈 몫입니다.
왕은 공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이들에게 좌우에 빈 땅을 줍니다.
거룩하게 바친 땅, 곧 이만 오천 자가 되는 지역에서 동쪽 국경까지와 이만 오천 자가 되는 지역에서 서쪽 국경까지 다른 지파들의 몫과 평행되게 뻗어 있는 나머지 땅이 왕의 몫입니다.
나라에 세금을 내야합니다.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친 땅과 성전의 성소가 그 땅의 한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의 유산과 성읍에 딸린 소유지는 왕의 소유지의 가운데 있게 됩니다.
왕의 소유지는 유다 지파의 경계선과 베냐민 지파의 경계선 사이에 있습니다.

나머지 지파들의 몫(23-29절)

나머지 지파들이 차지할 땅은 다음과 같습니다.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베나민 지파의 몫입니다.
베냐민 지파의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시므온 지파의 몫입니다.
시므온 지파의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잇사갈 지파의 몫입니다.
잇사갈 지파의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스불론 지파의 몫입니다.
스불론 지파의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갓 지파의 몫입니다.
갓 지파의 경계선은, 남쪽의 국경선이 다말에서부터 시작하여 므리바가데스 샘에 이르고, 거기서 이집트 시내를 따라 지중해에 이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이 제비를 뽑아 유산으로 이스라엘의 지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땅입니다.
이 땅들이 바로 그 지파들의 몫입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입니다.

예루살렘 성읍의 문들(30-35절) 

그 성읍의 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북쪽 성벽은 너비가 사천오백 자입니다.
이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에 따라 부른 것입니다.
북쪽에 문이 셋 있는데, 하나는 르우벤 문, 하나는 유다 문, 하나는 레위 문입니다.
동쪽 성벽도 너비가 사천오백 자이고, 문이 셋 있는데, 하나는 요셉 문이고, 하나는 베냐민 문이고, 하나는 단 문입니다.
남쪽 성벽도 너비가 사천오백 자이고, 문이 셋 있는데, 하나는 시므온 문이고, 하나는 잇사갈 문이고, 하나는 스불론 문입니다.
서쪽 성벽도 너비가 사천오백 자이고, 문이 셋 있는데, 하나는 갓 문이고, 하나는 아셀 문이고, 하나는 납달리 문입니다.
이렇게 그 둘레가 만 팔천 자입니다.
이 성읍의 이름이 이제부터는 여호와 삼마라고 불릴 것입니다.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께서 거기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하시는 그곳에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 될 때 함께 하십니다.
여호와삼마는 임마누엘의 개념입니다.

그 날에 소망을 가질 것

에스겔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함께 계셔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포로된 자에게 소망은 없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왜 이스라엘이 망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바른 교육법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똑 같이 역할을 합니다.
아버지는 율법이고 어머니는 은혜입니다.
아버지는 공의를 행하고 어머니는 위로해줍니다.
어머니는 왜 맞는지를 설명해줍니다.
아버지가 미워하여 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여 때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위로의 설명합니다.
사랑하여 때리고 미래에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소망을 주고 때린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보혜사 성령의 역할입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큰 재앙을 만났습니다.
역사가 끝나는 것 같은 큰 시련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성전의 한복판에 우상이 있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성전 안에서 우상을 섬겼으니 그냥 둘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이 망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남은 사람들이나 포로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이나 애굽도 무너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합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마른뼈가 일어나 큰 군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성전이 회복될 것을 보여줍니다.
성전의 크기를 보고 그곳에서 예배드립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땅을 분배합니다.
성전의 문이 열두 문이 있습니다. 각지파는 그 지파의 문을 통과하여 나갑니다.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모든 생활의 기초는 하나님의 성전에 있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땅을 나누어줍니다.
스블론과 납달리는 산지입니다.
좋은 땅이나 나쁜 땅이나 원망하고 불평하지 말아야합니다.
여호와가 주신 땅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땅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우리의 얼굴 키 지능도 하나님이 주신 분깃입니다.

지능이 70이하면 감기가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건강하고 잘 먹고 잠을 잘 잡니다.
지능이 높아서 생각이 많고 괴로워 자살합니다.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합니다.
그것이 불행입니다 지능도 분깃이고 성품도 분깃이고 직업도 분깃입니다.
낮은데서 일해도 감사함으로 하고 높은데서 일해도 감사함으로 해야합니다. 남과 같지 못하다고 불평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하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사도바울을 괴롭힙니다.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도 사도바울은 그 날에 너희는 나의 자랑이 되고 나는 너희 자랑이 되리라고 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예수님 앞에 가서 사도바울을 주신 것을 감사할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 앞에 가서 고린도 교회와 같은 좋은 교회를 세워주신 것을 감사할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확고한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고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포로된 것 같은 엄청난 사건 속에서도 구원을 믿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현재를 살아도 우리의 관심과 소망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살아야합니다.

11-1-2023(수) 에스겔 4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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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He then brought me out through the north gate and led me around the outside to the outer gate facing east, and the water was flowing from the south side.

물이 나오더라(the water was flowing)
마임 메팤킴(מַיִם מְפַכִּים)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한 파괴로부터 재창조를 약속하신 것처럼 에스겔서의 구조도 창조, 파괴, 재창조의 형태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에스겔은 환상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죄로 더럽혀지고 무너진 성전 대신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다시 가득 찬 새 성전을 보았습니다. 44장에서는 예배를 수종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회복에 대하여 그리고 45-46장에서는 예배가 회복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47장에서는 성전으로부터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여 밖으로 미치게 될 것을 예고합니다.
내적으로 회복된 후에 비로서 물이 흘러나와 성전 밖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방향이 전환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에스겔을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렀을 때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렸습니다.
에스겔은 그것을 통과하여 갈 수 없으므로 북문 곁을 지나 그 문의 남쪽에서 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은 바깥뜰의 동편 문을 지나 밖으로 흐르는 것을 보게 되는데, 넘실거리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스며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언뜻 보기에 물이 적어 보입니다.
그러나 채소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이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던 것처럼, 스며 나오는 물은 에스겔이 그곳을 따라 돌아볼수록 점점 더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물의 깊이가 발목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허리까지 그리고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습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은 신비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강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간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의 은사들과 능력들의 열매를 맺게 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여기에 나오는 강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하여 구원의 은혜와 기쁨이 시작되어 삶의 자리에서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시간과 경험이 날마다, 해마다 점점 깊어지시길 소망합니다.

주님 안에 있는 나의 신앙의 깊이가 발목인지, 무릎인지, 허리인지, 온 몸이 잠겨 있는 지 점검해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두 종류의 사랑이 있는데 하나는 자신을 잊어버리게 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하는 자신에 대한 사랑” 이라고 말했습니다.

강물같이 흐르는 성령의 역사가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자연재해와 전염병과 온갖 고난의 사슬로부터 구원하시는 은혜가 풍성한 삶을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전에서 나오는 생수의 강

1-32장은 죄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33-39장은 이스라엘 회복의 말씀입니다.
37장은 마른 뼈의 환상이고 47장은 성전의 회복 환상입니다.
40-4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성전이 회복되고 제사장이 회복되고 예배가 회복될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회복된 성전에서 물이 나오는 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앙의 중심은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이 임재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에 그 성전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성전의 회복은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19-21을 보면 이 성전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이 환상은 하나님이 장차 우리의 진정한 성전 되신 예수님을 통해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올 것을 보여주시는 비전입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그 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1-2절)

에스겔이 성전의 환상을 보여주던 사람을 따라 성전 문에 이르러 보았습니다.
성전의 문지방 밑에서 물이 조금씩 스며 나왔습니다.
생수의 강은 왕궁에서 흘러내리지 않고 성전에서 흘러내립니다.
그 물은 동쪽으로 흐르다가 제단의 남쪽으로 흘렀습니다.
그분이 에스겔을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이르렀습니다.
물이 바깥문 오른쪽에서 세어나왔습니다.

동쪽은 여호와의 영광이 들어가던 곳입니다.

여호와가 계신 곳에서 성령의 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은 연간 강수량이 250-300미리 정도입니다.
물이 부족한 국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면 물이 풍부하게 흐릅니다.

에덴동산에도 사대 강물이 흘렀습니다.
에덴은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성막이 생기고 솔로몬을 통해서 성전을 지었습니다.
지금은 성전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오면 스룹바벨 성전이 이루어집니다.
이 성전도 에스겔이 본 성전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에스겔이 본 그 성전이 완성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생수의 강이 흐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수정같이 맑은 생수의 갈이 흐릅니다.

성전의 크기와 금으로 된 그릇과 집기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전의 생명은 생수가 흘러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의 교회가 성전이요 우리의 마음이 성전입니다.
우리의 교회에서 우리의 마음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쳐야합니다.
바이칼 호수는 깊이가 1700미터라고 합니다.
바닥이 바위로 되어서 물이 깨끗하다고 합니다.
깨끗한 물이 흘러야합니다.
우리는 순수성을 회복해야합니다.
혼합주의를 경계해야합니다.
물질주의 음란문화 인본주의가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합니다.

세상의 더러운 물이 성전에 역류하지 말게 해야합니다.

북한 김일성이 남극 지하 200미터의 광천수를 먹으면 건강해진다고 그 물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물을 먹어도 죽습니다.
성령의 물은 우리가 부활하여 영생하기까지 우리의 마음에서 솟아납니다.
성령의 물이 마르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성도의 수가 줄게 됩니다 건기가 되어 초목이나 동물들이 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기가 되면 초목이 우거지고 고기가 생겨납니다.
물은 죽음의 땅을 생명의 땅으로 바뀝니다.
그러면 어부와 농부가 살아나게 됩니다.
물은 생명입니다.
우리의 몸에도 대부분이 물입니다.

점점 불어나는 물(3-5절)

에스겔이 북문으로 나가서 동문에 이르자, 그 사람은 줄자를 가지고 동쪽으로 나가면서 일천 척, 약 500m를 재더니 그 물을 건너라고 했습니다.
그 물은 어느새 개울물이 되어 에스겔의 발목까지 올랐습니다.
그 사람은 다시 500m를 재더니 또 건너라 했습니다.
건너보니 물이 무릎까지 올라 왔습니다.
또 500m를 가서 반복 하니 이번에는 허리에 닿았습니다.
다시 한번 500m를 재고 나가보니 이제 물은 엄청나게 불어나 헤엄이나 치면 몰라도, 걸어서는 도저히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그 사람은 다시 건너라고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이 깊어지는 것은 성령이 깊어지고 은혜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얕은 곳에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면 내가 하는 것이 적어집니다.
모든 것을 은혜 아래서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내가 교회 나가고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깊은 세계에 살면 은혜가 나를 지배합니다.
내가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게 했다고 합니다.
성령의 술중독이 되어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술먹을 때도 억지로 먹다가 여러 번 먹으면 술에 빠집니다.
예수 믿는 것도 술취한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러면 성전에서 스미어 나온 물은 점점 많아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생수의 강물

물이 없는 곳을 사막이라고 하고 황무지라고 말합니다.
물이 없으면 저주입니다.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가 기아에 시달리는 큰 이유도 물이 없어 식물이 자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은 곧 생명입니다.
물이 있는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달나라나 화성에도 물이 있다면 생명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7:37, 38절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배에서 생수의 강에서 흘러 넘친다는 것은 성령이 흘러 넘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또 예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을 믿는자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 주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40일간 계시다가 승천하시며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에스겔서 40장 이후에 성전의 모든 크기를 자세히 척량하는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성전을 자세히 잰다는 의미는 성전을 자세히 알게 된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성전이신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생수도 처음에는 스미어 나올 정도로 미약합니다.
그러나 갈수록 불어나서 큰 강이 됩니다.
그 물은 처음 예수님의 열 두 제자에게서 조금씩 스미어 나왔고 그 후 예수님이 승천하시던 해의 오순절 날에 이르러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적실만한 물이 되었고 마침내는 복음역사를 잔혹하게 핍박하던 거대한 로마제국을 휩쓸고 지나갈 만큼 큰 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길고 큰 강을 이루며 유럽으로, 미국으로, 전 세계로 흘러갔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온 생수는 처음에는 스미어 나왔지만 점점 불어나서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큰 강을 이루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살던 당시 하나님의 역사가 어떠합니까?
에스겔이 보는 시대의 현실은 너무나 절망적입니다.
그는 망해 가는 이스라엘을 지켜보았고,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끌려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흩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거기서 끝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절망가운데 있는 그에게 성전이 완전히 회복되며, 거기서 스며 나온 생수가 마침내는 생수의 강이 되어 온 세계를 향해 도도하게 흘러가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포로를 통하여 그들의 죄를 정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제거하십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십니다.
그들을 순결한 백성으로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그 환상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성령이 오심으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살아나는 생명들(6-10절)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건너지 못할 만큼 큰 강이 되자 천사가 이번에는 에스겔을 데리고 강가를 둘러보게 했습니다.
강가의 좌우 편에는 나무가 심히 많았습니다.
그만큼 강가는 비옥하고 풍요했습니다.
나무가 우거지니 공기도 맑고 보기도 좋았습니다.
사람만 아니라 동물도 살아나게 됩니다.
천사는 이 강가에서 에스겔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물은 동쪽으로 흘러 아라바라로 가서 바다에 이르렀습니다.

아라바 바다는 지금의 사해를 말합니다.
사해는 남북이 80km, 동서가 18km, 이며 최대 수심이 396m에 달하는 큰 호수입니다.
사해에는 요단강에서 매년 약 5억 4천만 톤의 물이 흘러 들어오고 또 그 외 몇 개의 강으로부터 물이 흘러 들어오는데 흘러나가는 곳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물이 넘치기는커녕 항상 지중해의 수면보다 395m 나 낮다고 합니다. 이유인 즉 물이 흘러나가지 않고 그대로 증발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해의 물은 지중해보다 다섯 배가 짜고, 사해의 염분 농도는 표면수가 29% 심층수는 30%나 되는 정도로 비중이 워낙 커서 사람이 들어가도 물에 뜨는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물이 너무 짜기 때문에 그곳은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합니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성전에서 흘러나온 생수의 강이 이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물이 흘러 들어가자 그 바다가 소성 했습니다. 생수는 사해의 짠물을 흘려 보내버리고 단물이 되게 했습니다. 이제 사해는 더 이상 죽음의 바다가 아니라 생명의 바다였습니다. 이 강에 고기가 살자 강가에는 어부가 살게 됩니다. 어부들은 엔게디에서 에네글리임까지 그물을 칩니다. 큰 바다의 고기같이 각종 종류의 고기가 삽니다. 숭어 농어, 연어, 잉어들이 떼지어 다녔습니다. 하나님은 이 강이 흐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물이 사해에 흘러 들어가면 사해와 그 주변이 살아나고, 아라비아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 전쟁의 포화에 고통하는 아프카니스탄이 살아납니다. 생수의 강만이 힘이 있고 세계를 살릴 수 있는 위력이 있습니다.

살아나지 못하는 자들(11절)

진펄과 개펄은 소성 되지 못하고 계속 소금 땅으로 남게 됩니다.
진펄은 수렁, 개펄은 물웅덩이를 말합니다.
그곳은 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소금물에 절어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 사람, 은혜를 받기만 하고 주지는 않는 사람은 진펄과 개펄 같은 사람입니다.
교만과 불신으로 끝까지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받은 은혜도 까먹고 마침내는 소금 땅과 같이 말라버리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치 못하고, 회개치 않는다면 우리는 소금 땅과 같이 말라버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 물이 사람의 마음에 흘러 들어가면 모든 사람이 소성합니다.
사실 이 세상은 거대한 죽음의 바다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육신의 죽음 뿐 아니라 영적인 죽음이 더 심각합니다.
원조교제, 부모살인, 부모의 자녀에 대한 성폭행등 세상의 죄악은 사해보다도 짜고 시궁창의 물보다 더럽습니다.
세상은 거룩함은 증발해 버리고 욕심과 정욕이 베어 있습니다.
사랑이 증발해 버리고 이기심과 미움만이 가득합니다.
절대 진리가 증발해 버리고 죄악 되고 거짓된 인간들의 지식과 정보가 바다를 이루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모두가 무의미, 무기력 등의 죽음의 병을 앓습니다.
또 치열한 경쟁 때문에 짜디짠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다가 모두들 그 마음이 짠돌이와 짠순이가 됩니다.
사람은 이렇게 세상이라는 죽음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결국에는 모두 죽습니다.
그 후에는 불과 유황으로 가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생수가 세상에 흘러 들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온 맑고 깨끗한 성령의 강물은 차고 넘치도록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성령의 강물이 흘러야 생명이 살아납니다.
물이 있어야 생명이 사는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만 강물이 막히면 다른 곳으로 돌아 갈 뿐입니다.

역사속에서 생수의 강물

역사적으로 봐도 어느 교회든 단체이든 성령의 강물을 공급받지 못하면 그 모임은 마르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왔습니다.
선교단체가 30년을 주기로 흥망을 거듭한 사실은 우리에게 큰 경종이 됩니다.

첫째, 성령의 강물의 근원 되신 예수님께 뿌리를 두고 뿌리 내려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에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부활하여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산제사를 드려야합니다.
성령의 강물이 발원지가 살아 있어야 물이 끊이지 않고 마르지 않습니다.
모임이나 사람에게 뿌리를 둘 때 모임이든 개인이든 근원이 마르고 생명이 자라지 못합니다.

38년된 병자의 경우 베데스타 연못에 뿌리를 둘때 무기력하고 의존적이며 짜디짠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강물이 막힘없이 콸콸 흘러야 합니다.
성령의 강물이 흐르면 양들이 몰려오게 되있습니다. 아무리 신세대 양들이라도 하나님을 떠나 심령이 마른뼈와 같이 갈급한 양들은 "물 좋은 곳을 찾아 모이게 마련입니다.
사실 21세기 들어 서며 영적환경이 어려워지고 교회 성장이 주춤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지금도 맑고 깨끗한 성령의 강물이 흐르는 곳은 양들로 넘쳐 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강물이 이처럼 좋은 것을 아는데 성령의 강물이 흐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령의 근원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과 부활에 신앙의 뿌리를 내리지 않는데서 심령이 메마릅니다.
이런 이유로 신앙 연륜이 있는 목자라도 넘어집니다.
또한 성령의 강물의 흐름을 막는 죄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그릇이 안 이뤄지며, 모임 깊숙히 정욕의 죄가 침투해 성령의 강물이 말랐을 때 양들이 흩어졌습니다.
양들 편에서 보면 생수의 강물이 없으니 생수를 찾아 떠난 것으로 우리가 회개할 문제 였습니다.
반면 양들이 몰려오고 성령의역사가 불붙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철저한 회개역사 가운데 부르짖어 기도하며 성령이 충만한 때였습니다.

성령의 근원되신 예수님께 뿌리가 없고 사람에게 뿌리내린 우리의 죄를 징계하시고 돌이키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훈련이었습니다.
사람을 우상숭배하며, 인정을 구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하고, 인간적인 연애감정을 즐기다 근원이 말라 죽게 두실 수 없는 사랑의 훈련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성령을 주시되 넘치도록 주시고자 인본주의와 정욕을 죄를 뿌리 뽑고 깨시고자 책망시고 징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병을 치료하는 잎새들(12절)

사해가 살아날 때 사해 주변의 황무한 땅들도 살아납니다.
그 땅에서 각종 실과나무들이 자라납니다.
망고, 파파야, 바나나 나무가 자랍니다.
올리브 야자 파인애플 코코넛나무도 자랄 것입니다.
나무들은 그 잎이 시들지 않고 끊임없이 열매를 맺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열매를 맺는지 모든 나무가 달마다 새 실과를 맺습니다.

요한복음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한계시록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계시록에는 생수의 강이 흐르는 곳에 생명의 나무가 자라고 열두 가지 실과가 계절을 따라서 열렸습니다.
나무 잎새는 만국을 치료하였습니다.
우리는 깨끗한 물을 마셔야합니다.
물을 많이 마셔야합니다.
목자의 심정이 순결하고 세상 죄와 싸워서 마음을 지켜야합니다.
우리 목자가 살아나면 양들도 살아나게 됩니다.

나무의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어 피곤할 때 이 잎사귀를 끓여 마시면 피로가 싹 가십니다.
이 잎사귀를 말아서 코에 넣으면 감기가 낫습니다.
이 잎사귀로 즙을 내어 마시면 위장병도 낫습니다.
산삼 녹용은 저리 가라 입니다.
그런데 이 잎사귀의 약효는 특히 영혼의 병에 잘 나타납니다.
무기력, 무의미, 허무 등의 죽음에 이르는 병도 낫고, 시기심, 교만된 마음의 병도 낫고, 인정을 좇아 사는 정욕된 마음의 병도 낫고, 사람들로부터 받는 상처도 낫고, 자기 의를 주장하는 은혜 망각증의 병도 낫게 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이렇게 남을 치료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의 생수의 강은 이렇게 좋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능력은 그렇게 위대합니다.

10절 말씀에 "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에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강에 고기가 많아질 것은 교회에 성도들이 충만하게 될 것을 의미하며, 어부가 선다는 것은 복음의 일꾼들이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강물이 흐르는 곳에 반드시 고기들이 몰려옵니다.
성령의 강물이 흐르는 곳에 양들이 모려오게 되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날이 임박할수록 시대는 어려워지고 사람들은 갈급 하여져서 말씀 있는 목자들에게 몰려듭니다.
우리가 고기들이 모여드는 환상을 가지고 사람 낚는 어부를 양성해야 하겠습니다.

생명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11-12절)

사해의 진펄과 개펄은 깨끗하게 고쳐지지 않고, 계속 소금에 절어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생명수의 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생명수의 물이 흐르는 그 강가에는 이쪽이나 저쪽 언덕에 똑같이 온갖 종류의 먹을 과일 나무가 자랄 것입니다.
그 모든 잎도 시들지 않고, 그 열매도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나무들은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을 것인데, 그것은 그 강물이 성소에서부터 흘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과일은 사람들이 먹고, 그 잎은 약재로 쓸 것입니다.
이 나무 열매는 생명 나무 열매입니다.
이 열매를 먹은 사람들은 어떤 병에 걸려도 살아나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회복될 땅의 분배(13-14절)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에 이 땅을 차지 합니다.
그런데 실제는 이 땅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땅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이스라엘의 동서남북 경계선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땅의 면적은 강원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세상 것에 비하면 별것 아닌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계를 점령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따라서 유산으로 나누어 가져야 할 땅의 경계선은 다음과 같습니다.
요셉은 두 몫을 주십니다.
나머지 지파들은 그 땅을 서로 똑같이 유산으로 나누어 가져야 합니다.
동등하게 차별없이 나누어야합니다.
어떤 지파가 피해를 당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땅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나쁜 땅이 있습니다.
서로 불만이 없이 분배해야합니다.
그 땅은 여호와가 그들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땅을 이제 그들이 유산으로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차지하게 하십니다.

땅의 경계선(15-20절)

북쪽 경계선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중해에서 헤들론을 거쳐 르모하맛에 이르렀다가 스닷, 브로다, 시브라임에 이릅니다.
(시브라임은 다마스쿠스 지역과 하맛 지역의 중간에 있습니다.)
거기에서 하우란의 경계선에 있는 하셀 핫디곤에까지 이릅니다.
이렇게 북쪽 경계선은 지중해에서 동쪽으로 하살에논에까지 이르는데, 다마스쿠스와 하맛에 접경하고 있습니다.

동쪽 경계선은 은 하우란과 다마스쿠스 사이에서 시작하여, 길르앗과 이스라엘 땅 사이의 경계인 요단 강을 따라, 멀리 사해의 다말에까지 이릅니다.

남쪽 경계선은 다말에서 시작하여 므리봇가데스의 샘을 지나 이집트 시내를 거쳐 지중해에 이릅니다.

서쪽 경계선은 지중해입니다.
이 바다가 경계가 되어 르보하맛으로 건너편에까지 이릅니다. 

땅을 차지하는 사람들(21-23절)

이 땅을 그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별로 나누어 가지라고 합니다.
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 가운데 거류하는 외국 사람들, 곧 그들 가운데서 자녀를 낳으면서 몸붙여 사는 거류민들도 함께 그 땅을 유산으로 차지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거류민들을 본토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족속과 똑같이 여겨야 합니다.
그들도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끼어서 제비를 뽑아 유산을 받아야 합니다.
거류민은 그들이 함께 살고 있는 그 지파에서 땅을 유산으로 떼어 주어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민족과 인종의 차별이 없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생수의 강

성전에서 나오는 물은 사람을 소성케 하고 번성케 하는 위대한 물입니다.
예수님의 생수는 그 모든 것을 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수는 다시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수의 강은 항상 흐릅니다.
항상 흐를 뿐 아니라 점점 더 큰 강이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영적인 환경이 힘들어도 좌절하지 않고 환상과 비전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생수가 그렇게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악 영향을 받아 죽어가는 세상에 맑고 깨끗한 생수를 공급해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뜨겁게 역사하여 이 비전을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합니다.


10-31-2023(화) 에스겔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경배한 후에(에스겔 46:2)

왕은 바깥 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와서 문 벽 곁에 서고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요 왕은 문통에서 경배한 후에 밖으로 나가고 그 문은 저녁까지 닫지 말 것이며.
The prince is to enter from the outside through the portico of the gateway and stand by the gatepost. The priests are to sacrifice his burnt offering and his fellowship offerings. He is to worship at the threshold of the gateway and then go out, but the gate will not be shut until evening.

경배한 후에(After worshiping)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 왕이라 할지라도 제사의 제물을 바치려면 성전으로 나와야 합니다.
헌신을 의미하는 번제와 또한 감사제를 드려야 하며 그 제사를 마친 후에는 왕이 들어왔던 문으로 나간 후에  그 문을 저녁까지 닫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까다로운 규정으로 왕을 통제할까요?
최고의 통치자 왕 보다도 더 높은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배의 자리에는 왕도 백성도 모두 같은 위치에 머물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동등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아직도 어느 교회에서는 장로석을  별도로 구분하여 특별 우대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만일 아직도 교회안에서 직분에 따라 자리가 배정된다면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언제인가 독일을 여행 중에 독일 교회에서 주일 예배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목사가 예배를 마친 후에는 목사 가운에서 설교자가 앞에 걸피는 작은 스톨을 떼내고 단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며 예배를 마친 후에는 모두가 동등한 자리에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간다는 결단의 표시를 보여주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권위는 직분을 상징하는 가운이 아니라 내적 영향력이 아닐까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와 같은 내적 영향력을 찾아볼 수 있다면 세상은 아직도 삶의 기쁨을 제공하는 터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내적 영향력을 찾아볼 수 없다면 이제부터라도 새롭게 다짐하고 회복하여 세상을 향한 내적 영향력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한 제사를 드린 후에 즉 경배한 후에 삶의 터전에서 매 순간 주와 동행하는 거룩한 삶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 제사와 예배는 형식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요?

어미 게가 옆으로 기어가면서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반드시 앞으로 가야한다고 강조하고 가르쳐도 효력이 없는 것은 가르치는 위치에서 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열 마디의 말 보다는 한 번의 실천과 순종과 행함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사람으로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오 주님
세상을 변화시킬
믿음의 삶을 결단하오니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11-2-2023(목) 에스겔 4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 삼마(에스겔 48:35)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척이라 그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The distance all around will be 18,000 cubits. "And the name of the city from that time on will be: The LORD is There."

여호와 삼마(The Lord is There)
여호와 삼마란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곧 하늘 나라이며 천국의 시작이 됩니다.

에스겔서는 남 유다 백성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환상으로 선지자 에스겔에게 장차 일어날 일을 보여주신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함께 계셔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포로된 자에게 소망은 없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왜 유다가 망했는지 알려주셨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자기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환상으로 인하여 절망의 자리에서 소망의 자리로 이끌어주십니다.
그리고 에스겔 48장은 백성들에게 땅을 분배한 후에  "여호와 삼마"라고 하시며 너희들이 거주하는 그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지난 날의 잘못을 들추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말씀합니다.
새로운 기회는 성전에서 새로운 예배로 시작해야 합니다.
성전 중심의 생활을 유지해야 합니다.
성전 중심은 곧 하나님 중심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땅을 분배할 때 성전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으로 각 지파들이 얻을 기업을 말씀하셨습니다.
새 시대의 중심은 성전입니다.

오늘의 시대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중심의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주님 중심의 삶은 말씀 중심이며, 말씀 중심은 섬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 또한 섬김의 자리를 굳게 지켜야 하겠습니다.
섬김을 통한 변화와 승리를 기도하며 새 날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큰 재앙을 만났습니다.
역사가 끝나는 것 같은 큰 시련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성전의 한복판에 우상이 있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성전 안에서 우상을 섬겼으니 그냥 둘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이 망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남은 사람들이나 포로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이나 애굽도 무너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합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마른뼈가 일어나 큰 군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성전이 회복될 것을 보여줍니다.
성전의 크기를 보고 그곳에서 예배드립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땅을 분배합니다.
성전의 문이 열두 문이 있습니다. 각지파는 그 지파의 문을 통과하여 나갑니다.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모든 생활의 기초는 하나님의 성전에 있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땅을 나누어줍니다.
스블론과 납달리는 산지입니다.
좋은 땅이나 나쁜 땅이나 원망하고 불평하지 말아야합니다.
여호와가 주신 땅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땅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우리의 얼굴 키 지능도 하나님이 주신 분깃입니다.

지능이 70이하면 감기가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건강하고 잘 먹고 잠을 잘 잡니다.
지능이 높아서 생각이 많고 괴로워 자살합니다.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합니다.
그것이 불행입니다 지능도 분깃이고 성품도 분깃이고 직업도 분깃입니다.
낮은데서 일해도 감사함으로 하고 높은데서 일해도 감사함으로 해야합니다. 남과 같지 못하다고 불평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하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사도바울을 괴롭힙니다.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도 사도바울은 그 날에 너희는 나의 자랑이 되고 나는 너희 자랑이 되리라고 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예수님 앞에 가서 사도바울을 주신 것을 감사할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 앞에 가서 고린도 교회와 같은 좋은 교회를 세워주신 것을 감사할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확고한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고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포로된 것 같은 엄청난 사건 속에서도 구원을 믿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현재를 살아도 우리의 관심과 소망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살아야합니다.


땅을 분배하는 일 / 에스겔의 환상

땅의 경계에 관한 정확한 묘사는 유배자들에게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땅이 반드시 회복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환상에서 어떤 교훈점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까?
이 환상의 두 가지 부면을 살펴보겠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모든 유배자들은 회복된 약속의 땅에서 상속지를 받게 될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영적 낙원에는 여호와의 종들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습니다.
조직 내에서 우리가 하는 역할이 매우 작게 느껴진다 해도, 이 영적 땅에는 분명히 우리의 자리가 있으며, 우리는 이곳에서 가치 있는 임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모든 종을 똑같이 귀중하게 여기십니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모든 지파는 약속의 땅의 자연환경으로부터 동일한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종들 모두가 영적 낙원의 축복을 동일하게 누리게 해 주십니다.


심리학자들이 여러 마리의 쥐를 상자에 넣은 다음 빛이 전혀 들어가지 않도록 밀폐 시키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안의 쥐들은 모두 3분 안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밀봉한 상자 뚜껑에 바늘만한 구멍을 뚫어 빛이 조금 들어가게 해주자, 이 경우의 쥐들은 3일이나 살아 있었습니다. 똑같은 여건이었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바늘구멍으로 들어오는 빛입니다. 그 빛이 쥐들에게 살아야 할 소망을 제공한 것입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했을 때 영국의 한 문인이 나무판을 끌어안고 파도와 매서운 추위와 싸우며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추위와 탈진으로 이제는 손가락에 힘마저 사라져 판을 놓고 생명을 포기하려는 안타까운 순간이 왔습니다.

그 때에 하늘에 1인승 비행기 한대가 빙글빙글 돌며 이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사라져 갔습니다. 순간 그의 손가락에 다시 힘이 들어갔고 놓아 버리려던 나무판을 힘껏 끌어 않은 채 반나절을 더 버티었습니다.

마침내 구조선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분명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탈진한 상태였습니다. 살기를 포기하려는 절망적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무판을 붙들고 반나절 이상 더 버틸 수 있는 힘이 갑자기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누군가가 자신을 보았기에 살 수 있다는 소망이 힘이었습니다.

독일의 작가 에른스트 블로흐는 “인간은 끊임없이 희망을 품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에게 극한 상황에서도 인내와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만드는 힘은 희망입니다. 인간에게 희망이 있는 한, 어떠한 시련이라도 기꺼이 견뎌낼 수 있습니다.

신학자 에밀 브루너는 “허파에 산소가 필요하듯 삶에는 소망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좌절 합니까? 왜 자살 합니까? 생활고에 시달려서가 아닙니다.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고달파도 희망이 있으면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구비되었다 할지라도 희망이 없다면 끝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사는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에서부터 소망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것이 힘의 원천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다가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을 때에,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갔을 때에, 온 우주에 혼자 서 있는 커다란 고독에 신음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나를 보고 있다. 나의 모든 형편을 보고 계신다.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 이것이 용기를 줍니다.

오늘 분문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 35절을 보면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에스겔의 마지막 절이면서, 에스겔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절입니다. 에스겔은 앞부분에서 성전의 척수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루고, 성전에서 수종을 드는 자들의 임무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다룹니다. 그리고 성회와 절기에 드릴 예물과 제사법에 대한 규례를 다루고, 새로운 땅에 대한 분배를 다루고 이어서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삼마’는 에스겔의 환상 중에 하늘의 예루살렘에 붙여진 명칭으로 ‘바로 거기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여호와의 영광이 떠난 것을 보았으나, 이제 새로운 언약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토록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실 것임을 보았고, 그것을 보고 ‘여호와 삼마’라고 외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 이름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다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정확하고 풍성하게 알려주시기 위한 배려입니다.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 게시면 다른 곳에는 계시지 않다는 말인가?’라는 의문을 갖도록 합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곳에는 계시지 않으시고 그 곳에만 계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지만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어떤 장소나 어떤 사람에게 특별히 역사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139편에 보면 시편기자가 하나님을 피해 보려고 했으나 실패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셨고, 음부에 자리를 펼지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셨습니다. 그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갈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편재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는 특별한 경우, 특정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삼마’는 곧 ‘임마누엘’과 같은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여호와 삼마’의 약속은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성취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시거만, 우리는 하나님을 늘 잊고 살아갑니다. 평안할 때는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일이 잘 풀릴 때에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내 힘으로 한 것 같고,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지 않아도 넉넉히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것 같이 생각합니다. 평상시에는 내 힘대로 살아가다가, 힘들고 어려울 때, 지치고 고단할 때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찾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우리를 버린 적이 없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쁘고 즐거울 때에나, 힘들고 어려울 때에나, 언제나 함께 하여 주십니다.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약속하신 것을 어기신 법이 없습니다.

민수기 23장 19절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을 보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지난 일주일 동안 어떤 길을 걸어오셨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이 계셨던 바로 거기에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 함께 하여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매순간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여호와 삼마’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 삼마’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에스겔 선지자는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주전 597년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여호야긴 왕과 왕족 및 귀족들, 그리고 유다의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사로잡아 갈 때 그 포로들 가운데 섞여 있었습니다.

그는 바벨론에서 그발 강가 근처에 살았습니다.
그는 포로 후 5년 되던 해에, 선지자로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0여세로 포로 중 선지자였습니다.

에스겔은 예레미야나 다니엘처럼, 팔레스타인 역사의 격동기에 활동을 했습니다.
당시 주변 정세는 대단히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복잡하고 긴 역사를 간략하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주전 722년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신흥 바벨론 제국의 세력에 압도되어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유다 왕 요시아반 앗수르 정책을 쓰게 되었고, 한참 세월이 흐른 후 여호야김이 바벨론을 배반하였습니다.

이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친 바벨론 정책을 하라고 했지만, 여호야김이 거절을 했습니다.
그러자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공격했습니다.
이때 여호야김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 뒤를 이어 여호야긴이 왕이 되었으나, 겨우 100일 만에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느브갓네살이 다시 공격해 왔을 때, 여호야긴 왕과 왕족들과 귀족, 유명 인사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는데, 이때 에스겔도 사로잡혀 갔고, 그 후 예루살렘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에스겔은 크게 세 가지를 외쳤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게 된 것은 범죄 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외쳤습니다.
둘째는 이스라엘을 괴롭힌 주변 국가들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외쳤습니다.
셋째는 징계 중에 있는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들을 회복시키고, 그들을 축복하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에스겔 48장은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겔이 외쳤던 세 가지 메시지 가운데 가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에스겔이 가장 하고 싶었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가장 하고 싶었던 말씀입니다.
‘여호와 삼마’,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는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고 싶으셨습니다.

여호와 삼마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에 있을 때에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있을 때에나, 변함없이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1. 아메리카 인디언의 성인식은 특별하게 치른다고 합니다.
인디언 소년이 13살이 되면 아버지는 그에게 사냥하는 법, 정찰하는 법, 칼 쓰는 법, 낚시하는 법등을 가르친 후 만으로 13살이 되는 날 밤에 그를 깊은 숲속으로 데리고 가서 숲에 홀로 버려둡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늘 가족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던 이 소년은 이날 밤만은 눈을 가린 채로 숲속 깊고 먼 곳으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숲속 깊이 가서는 눈가리개를 풀어준 후 울창하게 우거진 깊고 어두운 숲속 한 가운데 혼자 있게 됩니다.

이때부터 소년은 그 기나긴 공포의 밤을 그 숲속에서 홀로 지새워야 합니다. 가지가 스산하게 찰싹거릴 때마다 갑자기 달려들 사나운 동물들이 떠오릅니다. 동물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면 금방이라도 늑대가 어둠속에서 뛰쳐나올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바람이 세게 불기라도 하면 더욱 불길한 예감이 들기도 합니다. 너무나 무서워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자신을 그 깊은 밤 깊은 숲속에 홀로 둔 아버지에 대하여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태어나서 가장 길게 느껴지던 시간이 지난 후, 도무지 찾아올 것 같지 않던 새벽 여명이 밝아오면서 이제 주위에 있는 나무나 풀, 길이 보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됩니다. 그 때 소년의 눈에는 밤새 자기와 몇 미터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한 건장한 사내가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다름 아닌 소년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그 깊고 어두운 숲속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홀로 버려둔 것이 아니라 밤새 그의 곁에서 그를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년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홀로 내버려 두었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아버지는 밤새 그의 곁을 지키며 거기에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2. 미국에 어느 중년부부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이 부부는 금실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해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큰 부러움을 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의 시력이 책을 보기 힘들 정도로 나빠져서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수술이 잘못되어 실명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내는 좌절했지만, 결코 직장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그 후 남편은 매일 같이 아내를 직장까지 출근시켜 주고 퇴근시간에 다시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아내에게 서로 직정이 너무 떨어져 있다며 내일부터는 혼자 출근하라는 겁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너무나 섭섭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에게서 그런 말을 들어 배신감까지 느꼈습니다.

아내는 남편 없이도 혼자서 직장을 다닐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결심을 한 다음날부터 아내는 혼자 출근하기 시작했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버스를 타고 내리면서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설움이 북받쳐서 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조금씩 혼자 다니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내가 버스를 타고 직장으로 가던 중에 운전기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머니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매일 남편이 버스에 항상 함께 타시고 함께 옆에 앉아 주시고 부인이 직장 건물에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다가 손을 흔들어 주시니 얼만 좋겠습니까?” 운전기사로부터 이 말을 들은 아내의 눈에서는 행복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우리 인생길에도 때로는 주위에 모두가 떠나버려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은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인생의 깊은 골짜기를 지나면서 ‘하나님께서도 나를 버리셨구나’하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 곁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항상 우리 곁에 계셔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3. 유대인들이 참혹하게 학살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 중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만 경배하며 따랐던 많은 유대인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끔찍한 상황 속에서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료들이 가스실에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며, 한 사람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수용소 벽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God is no where!” 많은 사람들이 그 글귀를 보며 더더욱 절망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때 한 유대인이 그 내용을 “God is now here!”로 바꾸었습니다. 어디에도 없는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 때부터 죽음에 직면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희망을 찾으며 삶을 이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각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가정에 함께 하십니다.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나라와 함께 하십니다.

‘여호와 삼마’
하나님과 함께 하면 어떻게 될까요?

여호와 삼마’라는 명칭은 구약에서 항상 구원사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존(스스로 계심), 영원한 존재를 드러내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던 것입니다.

(1) 노아 홍수의 심판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으로, 노아와 그 식구들과 함께 해 주셨습니다. 방주를 짓고 방주 안에서 홍수 심판의 기간을 보낼 때도 ‘그 곳에’ 하나님은 늘 함께 해 주셨던 것입니다.

(2) 멸망하는 소돔, 고모라에서 롯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존재를 증명하신 것도 ‘여호와 삼마’의 역사였습니다.

(3) 멸망당하는 여리고 성의 함락에서 기생 라합과 그의 가정이 체험한 구원의 은총도 ‘여호와 삼마’의 축복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여리고 성 사람들은 이스라엘에게 함락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데, 기생 라합은 ‘그 곳에’ 거하셨던 하나님의 존재로 인해 유일하게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4) 블레셋 장군 골리앗의 침노에서 다윗이 승리하였던 것도 ‘여호와 삼마’의 은혜였습니다. 칼과 창을 들고 나서는 골리앗에, 다윗은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당당히 맞섰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믿음에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해 주시는 것으로 보응해 주셨습니다. 바로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5)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풀무 불 속에서 체험한 것도 ‘여호와 삼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평일보다 7배나 뜨거운 불로 인해 그들을 집어넣은 병사들이 타 죽을 정도로 뜨거운 풀무 불 속에서도 그들이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은 풀무 불 속에서까지 그들과 함께 해 주셨던 ‘여호와 삼마’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단 3:24-27).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놀랍습니다. 뜨거운 풀무 불 속, 그 곳에도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천국은 원치 않고, 하나님이 계시면 지옥이라도 나는 가겠습니다”라고 고백했던 어느 목사님의 신앙 고백처럼, 아무리 지옥 같은 풀무불이라도 하나님께서 거하실 때 그곳이 바로 천국이요 축복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6)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 앞에 섰을 때 ‘여호와 삼마’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앞에서 백성을 인도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급히 진 뒤로 옮겨갈 때 구름기둥도 함께하여, 밤새도록 애굽의 군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방어해 주고 있는 현장, 그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해 주셨던 것입니다(출 14:15-20).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요, 애굽의 군대가 있는 곳에는 캄캄한 흑암만 있었다는 것은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거하는 곳에 함께 하셔서 그들을 지켜 주고 보호해 주시고 계셨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여호와 삼마’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한 개인의 건강과 형통도 ‘여호와 삼마’의 축복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 사람이 어찌 건강할 수 있으며 형통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인다 할지라도, 아무리 좋은 건물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찬양이 뜨겁다 할지라도, 아무리 기도 소리가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람이 많이 모이든 많이 모이지 못하든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좋은 건물이든, 형편없는 건물이든,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여호와 삼마’
하나님과 함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 두시고 날마다 그들을 만나시고 교제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아브라함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들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함께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고 그 일을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셨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강제로 행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들이 마음을 열고 그분을 모셔 들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틈만 있으면 밀고 들어가서 주인이 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어주면 들어오시고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들어오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하나님의 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실 때 우리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되지만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에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명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지만 불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씨를 뿌리라고 하실 때 순종하여 뿌려야 합니다. 순종하면 때가 되면 열매를 따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되지만 불순종하여 씨를 뿌리지 않으면 축복의 열매를 다지 못하게 됩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사르밧 과부가 받은 축복이 나옵니다. 몇 년간 비가 오지 않아서 양식이 떨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명령이 사르밧 과부에게 임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엘리야 선지자를 대접하라는 명령입니다. 인간적으로 잔인한 명령 같습니다. 먹을 것이 다 떨어져가고 남은 것이라고는 한 끼 정도의 양식이 전부인데 그것을 하나님의 종을 공궤하라는 것입니다.

명령은 하나님이 하셨지만 순종할 것인가 불순종할 것인가는 사르밧 과부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축복을 위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드렸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지면에 비를 내리는 날 까지 가루 통에 가루가 다하지 않고 기름병에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2. 기도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3장 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시는데 7절에 보면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이유를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금심을 알고”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어 기도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시도행전 2장에 보면 하나님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께서 임하셔서 택한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전에 믿음의 사람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전혀 기도에 힘을 썼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놀랍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가족 구원을 원하시는 분들은 교회로 나와서 기도하십시오. 생업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원하시면 나와서 기도하십시오. 특별한 문제를 해결 받기 원하시는 분들도 나와서 기도하십시오.

3.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 놀라운 비전이 임하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스가랴서 4장 6절을 보면 힘으로도 능으로도 아니 되는 일이 성령으로 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큰 산 같은 문제도 성령이 함께 하시면 평지가 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보면 성령을 받기 전과 성령을 받은 후에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성령 받기 전에는 주님을 보인하고 저주가지 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난 후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삼손에게 성령께서 머물러 계실 때와 성령께서 그를 떠나셨을 때도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그에게 가장 큰 차이는 능력의 차이입니다. 성령이 머무실 때는 엄청난 능력을 행하던 삼손이 성령이 떠나고 나니 무기력한 존재가 되어 적들에게 잡혀 눈이 뽑히는 비참한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4. 깨끗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더러움이 조금도 없으신 분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깨끗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임재 하시기 전에 먼저 정결함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십계명을 받기 전에 목욕하고 정결하게 준비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들의 내면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깨끗한 존재로 서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며 이미 더러워졌다는 것입니다. 더러워진 인간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하시는 주님을 누리려면 깨끗해 져야 합니다.

감사한 일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게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받아드리면 거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지은 죄도 자백하기만 하면 다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일 1:7,9).

5. 하나님이 계신 곳을 찾아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 올라갔던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라는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을 보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믿는 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을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건물에서 매주 정해진 시간 주님의 이름으로 모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였기 때문에 우리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모이기는 해도 주님의 이름이 아닌 우리들의 이름으로 모인다면 우리의 모임은 교회가 아닙니다.

저를 만나려면 제가 있는 곳을 찾아오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교회를 찾아와야 합니다.

6. 하나님의 일을 하는 현장에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을 보면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신 후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가 주어질 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 온전하게 순종하십시오. 헌금도 할 수 있을 때가 있습니다. 봉사도 할 수 있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농사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파종할 때가 있고 추수할 때가 있습니다. 파종할 때 파종하지 않다가 때가 지난 후에 파종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추수할 대 추수 해야지 때를 놓치면 곡식이 썩어서 추수할 수 없게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주님의 재림에 관한 비유적 예언입니다. 세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세 가지 모두 준비할 때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할 수 있을 때 일해야 합니다. 대가 지나면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 삼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실패하고 병들고 외로울 때, 나 혼자라고 생각할 때 불행합니다. 다 나를 버리고 나 혼자 남았다고 생각할 때 불행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당했다고 생각할 때 불행합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끝까지 나와 항상 함께 있어 준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은 정말로 행복한 일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온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버려도 ‘여호와 삼마’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존재일지라도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범죄한 다윗은 회개하면서 기도하기를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라고 애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져버린 개인, 민족, 교회는 영원히 버림받은 존재일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 버림 당한다는 것은 최고의 저주요 최고의 불행인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욕이 무엇이냐 하면 ‘갓뎀 유(Goddamn You)’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이 너를 떠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떠난다는 것은 결국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욕이 가장 저주스러운 욕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느 곳에 가든지 나와 항상 함께 계신다고 하는 ‘여호와 삼마’는 가장 큰 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삼마’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2.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아기를 임신한 임신부들은 여러 가지를 조심합니다. 너무 요란한 곳에 가면 태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음식도 삼갑니다. 너무 자극적인 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감기가 들어도 태아에게 나쁜 영향이 미칠까봐 감기약을 먹지 않습니다.

하물며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신데, 내가 어떻게 함부로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술이나 담배 같이 정결하지 않은 것들을 어떻게 내 안에 넣을 수 있겠습니까?

혼자서 자동차를 운전할 때는 별로 조심하지 않습니다. 속도 줄이라고 만들어 놓은 턱을 보고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덜커덩 그대로 넘어갑니다. 신호도 슬쩍슬쩍 위반합니다. 그러나 자동차에 귀한 손님이 타고 있으면 조심조심 운전을 합니다. 파인 곳은 피해 가고 안전하게, 안전하게 운전하기를 힘씁니다.

‘여호와 삼마’ 하나님께서 거기에, 내 안에 계시는데 어찌 거칠게 행동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까지도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것을 더욱 분명히 알고 하나님을 모신 사람답게 경건하게 살아가겠다고 다짐을 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내 안에 성령이 계신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곳에 ‘여호와 삼마’ 하나님이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여호와 삼마’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가정의 이름도 오늘 이후로는 ‘여호와 삼마’가 되어야합니다.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 집안이 되어야 합니다. 명문 집안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케네디 가문, 부시 가문, 록펠러 가문, 안동 김씨 가문 등의 이름을 갖고 그 가문을 빛내고자 힘쓰고 조심합니다.

믿는 사람들의 가정은 ‘여호와 삼마’라라는 이름을 가진 가문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명문 가문의 이름보다도 영광스러운 이름이고 존귀한 가문의 이름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가정들은 오늘 이후로부터 ‘여호와 삼마’의 가문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문을 빛내기 위하여 조심하고 선한 일에 힘쓰며 살아야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자신이 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는 말인데, 이는 여호와께서 새 이스라엘 공동체와 항상 함께 하시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삼마’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예배드리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 구석구석 가득 넘쳐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바로 여기에 계십니다. 위험한 곳에 있을 때에도, 안전한 곳에 있을 때에도, 건강한 몸으로 있을 때에도, 아픈 몸으로 힘들어 할 때에도, 바로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십니다. 우리도 ‘여호와 삼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에스겔 48장 각지파에게 나누어준 분깃

하나님은 바벨론에 있는 에스겔에게 성전을 보여주고 제사장과 예배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배를 들릴 때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셨습니다. 생수의 강이 흐르는 범위를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땅을 분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인류역사상 중요한 것은 생산과 분배의 문제입니다. 생산을 강조하는 것이 자본주의요 분배를 강조하는 것이 공산주의입니다. 생산과 분배의 균형을 잡아야하는데 어려운 문제입니다. 자발적으로 생산하고 자발적으로 분배하는 일을 이루어야 그 해결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이 땅을 분배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도장을 찍습니다. 이 땅을 사고 팔 수 있는 땅이 아닙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일곱지파 남쪽으로 다섯지파가 있습니다. 민수기에는 개인까지 공정하게 땅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잘 가꾸고 어떤 사람은 잘 가꾸지 못합니다. 땅을 사고 팔기도합니다. 희년이 되면 땅을 원주민에게 돌립니다.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땅의 관리자입니다. 내가 떠날 때는 하나님께 땅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스웨덴과 같은 나라는 땅은 국유화합니다.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고 집을 짓고 사고팔지 못합니다. 이런 나라는 열심히 일하지 않는 단점이 있습니다. 시편 16편의 말씀을 보면 5,6절에 보면 하나님이 줄로 재어준 구역이 있습니다. 어떤 땅은 산지요 박토가 있습니다. 평야도 있고 강이 있는 곳도 있습니다. 땅이 좋은 곳에 있는 사람은 좋을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에덴동산과 같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러나 범죄하고 타락하여 황폐한 곳이 되었습니다. 자연 여건이 좋은데 사는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북은 부자요 남은 가난합니다. 동은 공산주의고 서는 자본주의입니다. 어떤 나라든 북쪽이 잘 살고 남쪽이 못삽니다. 바닷바람이 불어서 농사짓기 어려운 곳인데 전나무나 대나무를 심어서 농사를 짓습니다. 키가 크고 못생긴 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아주 못생긴 사람은 성형수술을 하지 않습니다 지능도 분깃입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도 분깃입니다. 그 중심에는 여호와의 땅이 있습니다. 그 한 가운데 성전이 있습니다. 성전 중심으로 살아야합니다.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살아야합니다. 유대인은 어디에 살든지 창문 하나를 향하여 성전을 향하여 만듭니다. 집에서 기도할 때도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각 지파의 몫(1-9절)

지파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장 북쪽에서부터 시작하여, 헤브론 길을 따라, 르보하맛을 지나서 다마스쿠스와 하맛에 접경한 경계선을 타고 하살에논에까지, 곧 북쪽으로 하맛 경계선에 이르는 땅의 동쪽에서 서쪽까지의 땅은 단 지파의 몫입니다.

단 지파의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아셀 지파의 몫입니다.
단지파는 땅을 빼앗기자 이사가서 살게 됩니다.
단지파는 밑에는 아셀지파의 땅입니다.
아셀 지파의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납달리 지파의 몫입니다.
납달리 지파의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므낫세 지파의 몫입니다.
므낫세 지파는 빅 3에 속하는 지파입니다.
므낫세 지파의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에브라임 지파의 몫입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르우벤 지파의 몫입니다.
르우벤 지파의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유다 지파의 몫입니다.
유다 지파의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그들이 거룩하게 바쳐야 할 땅입니다.
유다는 실질적인 장자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땅입니다.
그 너비는 이만 오천 자이고, 그 길이는 다른 지파들의 몫과 같이 동쪽에서 서쪽까지이고, 그 한가운데 성소를 세워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없는 이스라엘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주께 거룩하게 바쳐야 할 땅은, 길이가 이만 오천 자요, 너비가 만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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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땅(10-14절)

거룩하게 바친 이 땅은 제사장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줄 땅은, 북쪽으로 길이가 이만 오천 자, 서쪽으로 너비가 만 자, 동쪽으로 너비가 만 자, 남쪽으로 길이가 이만 오천 자입니다. 그 한가운데 주의 성소가 있어야 합니다.
이 땅은 거룩히 구별된 제사장들, 곧 사독의 자손에게 주어야 합니다.

아비아달은 다윗 때는 충성하였나 그는 솔로몬 때에 아도니야에게 붙었던 자손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잘못된 길로 갔을 때에, 레위 지파의 자손이 잘못된 길로 간 것처럼 하지 않고, 하나님이 맡겨 준 직책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압살롬이나 아도니애 편에 서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다윗과 솔로몬 편에 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룩하게 바친 땅 가운데서도 가장 거룩한 땅을 받아야 하고, 레위 지파의 경계선과 인접해 있어야 합니다. 레위 지파가 차지할 땅도 제사장들의 경계선 옆에 그 길이가 이만 오천 자요, 너비가 만 자입니다. 그 전체의 길이는 이만 오천 자요, 너비는 이만 자입니다. 그들은 이 땅을 팔거나 다른 땅과 바꿀 수가 없고, 또 가장 좋은 이 부분을 다른 사람의 손에 넘겨 주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주의 거룩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레위 사람에게 주신 땅이 성적입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은 생명보다 귀한 것입니다. 이 기업을 반드시 지켜야합니다.

속된 땅(15-20절)

너비가 오천 자요, 길이가 이만 오천 자인 나머지 땅은 성읍을 세울 속된 땅입니다.
이 땅은 제사장이나 레위지파의 땅보다는 덜 거룩한 땅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각지파별로 뽑아서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도와줍니다.
이들은 일정기간 봉사하고 돌아가고 다시 새로운 사람들이 와서 봉사합니다.
그들이 기거하는 땅입니다.
그 한가운데 있는 땅은 성읍을 세워서 거주지로 사용하고, 그 나머지는 빈 터로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 성읍의 크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북쪽의 길이도 사천오백 자, 남쪽의 길이도 사천오백 자, 동쪽의 길이도 사천오백 자, 서쪽의 길이도 사천오백 자입니다.
이 성읍 빈 터의 크기는 북쪽의 너비가 이백오십 자, 남쪽의 너비가 이백오십 자, 동쪽의 너비가 이백오십 자, 서쪽의 너비가 이백오십 자입니다.
거룩하게 바친 땅과 인접한 나머지 땅의 길이는 동쪽으로 만 자가 되고, 서쪽으로도 만 자입니다.
그 땅은 거룩하게 바친 땅과 인접하여야 하며, 그 농산물은 성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먹을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서 뽑혀 와서 성읍에서 일하는 사람들만이 그 땅을 경작할 수가 있습니다.
거룩하게 바친 땅 전체는 길이도 이만 오천 자요, 너비도 이만 오천 자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그 성읍의 소유지를 포함하여 거룩하게 바친 땅을 네모 반듯하게 구별해 놓아야 합니다.

군주의 땅(21-22절)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친 땅의 양 옆과 성읍에 딸린 소유지의 양 옆에 있는 나머지 땅은 왕에게 돌아갈 몫입니다.
왕은 공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이들에게 좌우에 빈 땅을 줍니다.
거룩하게 바친 땅, 곧 이만 오천 자가 되는 지역에서 동쪽 국경까지와 이만 오천 자가 되는 지역에서 서쪽 국경까지 다른 지파들의 몫과 평행되게 뻗어 있는 나머지 땅이 왕의 몫입니다.
나라에 세금을 내야합니다.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친 땅과 성전의 성소가 그 땅의 한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의 유산과 성읍에 딸린 소유지는 왕의 소유지의 가운데 있게 됩니다.
왕의 소유지는 유다 지파의 경계선과 베냐민 지파의 경계선 사이에 있습니다.

나머지 지파들의 몫(23-29절)

나머지 지파들이 차지할 땅은 다음과 같습니다.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베나민 지파의 몫입니다.
베냐민 지파의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시므온 지파의 몫입니다.
시므온 지파의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잇사갈 지파의 몫입니다.
잇사갈 지파의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스불론 지파의 몫입니다.
스불론 지파의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갓 지파의 몫입니다.
갓 지파의 경계선은, 남쪽의 국경선이 다말에서부터 시작하여 므리바가데스 샘에 이르고, 거기서 이집트 시내를 따라 지중해에 이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이 제비를 뽑아 유산으로 이스라엘의 지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땅입니다.
이 땅들이 바로 그 지파들의 몫입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입니다.

예루살렘 성읍의 문들(30-35절) 

그 성읍의 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북쪽 성벽은 너비가 사천오백 자입니다.
이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에 따라 부른 것입니다.
북쪽에 문이 셋 있는데, 하나는 르우벤 문, 하나는 유다 문, 하나는 레위 문입니다.
동쪽 성벽도 너비가 사천오백 자이고, 문이 셋 있는데, 하나는 요셉 문이고, 하나는 베냐민 문이고, 하나는 단 문입니다.
남쪽 성벽도 너비가 사천오백 자이고, 문이 셋 있는데, 하나는 시므온 문이고, 하나는 잇사갈 문이고, 하나는 스불론 문입니다.
서쪽 성벽도 너비가 사천오백 자이고, 문이 셋 있는데, 하나는 갓 문이고, 하나는 아셀 문이고, 하나는 납달리 문입니다.
이렇게 그 둘레가 만 팔천 자입니다.
이 성읍의 이름이 이제부터는 여호와 삼마라고 불릴 것입니다.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께서 거기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하시는 그곳에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 될 때 함께 하십니다.
여호와삼마는 임마누엘의 개념입니다.

그 날에 소망을 가질 것

에스겔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함께 계셔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포로된 자에게 소망은 없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왜 이스라엘이 망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바른 교육법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똑 같이 역할을 합니다.
아버지는 율법이고 어머니는 은혜입니다.
아버지는 공의를 행하고 어머니는 위로해줍니다.
어머니는 왜 맞는지를 설명해줍니다.
아버지가 미워하여 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여 때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위로의 설명합니다.
사랑하여 때리고 미래에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소망을 주고 때린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보혜사 성령의 역할입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큰 재앙을 만났습니다.
역사가 끝나는 것 같은 큰 시련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성전의 한복판에 우상이 있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성전 안에서 우상을 섬겼으니 그냥 둘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이 망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남은 사람들이나 포로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이나 애굽도 무너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합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마른뼈가 일어나 큰 군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성전이 회복될 것을 보여줍니다.
성전의 크기를 보고 그곳에서 예배드립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땅을 분배합니다.
성전의 문이 열두 문이 있습니다. 각지파는 그 지파의 문을 통과하여 나갑니다.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모든 생활의 기초는 하나님의 성전에 있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땅을 나누어줍니다.
스블론과 납달리는 산지입니다.
좋은 땅이나 나쁜 땅이나 원망하고 불평하지 말아야합니다.
여호와가 주신 땅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땅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우리의 얼굴 키 지능도 하나님이 주신 분깃입니다.

지능이 70이하면 감기가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건강하고 잘 먹고 잠을 잘 잡니다.
지능이 높아서 생각이 많고 괴로워 자살합니다.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합니다.
그것이 불행입니다 지능도 분깃이고 성품도 분깃이고 직업도 분깃입니다.
낮은데서 일해도 감사함으로 하고 높은데서 일해도 감사함으로 해야합니다. 남과 같지 못하다고 불평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하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사도바울을 괴롭힙니다.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도 사도바울은 그 날에 너희는 나의 자랑이 되고 나는 너희 자랑이 되리라고 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예수님 앞에 가서 사도바울을 주신 것을 감사할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 앞에 가서 고린도 교회와 같은 좋은 교회를 세워주신 것을 감사할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확고한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고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포로된 것 같은 엄청난 사건 속에서도 구원을 믿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현재를 살아도 우리의 관심과 소망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살아야합니다.

11-1-2023(수) 에스겔 4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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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He then brought me out through the north gate and led me around the outside to the outer gate facing east, and the water was flowing from the south side.

물이 나오더라(the water was flowing)
마임 메팤킴(מַיִם מְפַכִּים)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한 파괴로부터 재창조를 약속하신 것처럼 에스겔서의 구조도 창조, 파괴, 재창조의 형태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에스겔은 환상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죄로 더럽혀지고 무너진 성전 대신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다시 가득 찬 새 성전을 보았습니다. 44장에서는 예배를 수종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회복에 대하여 그리고 45-46장에서는 예배가 회복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47장에서는 성전으로부터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여 밖으로 미치게 될 것을 예고합니다.
내적으로 회복된 후에 비로서 물이 흘러나와 성전 밖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방향이 전환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에스겔을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렀을 때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렸습니다.
에스겔은 그것을 통과하여 갈 수 없으므로 북문 곁을 지나 그 문의 남쪽에서 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은 바깥뜰의 동편 문을 지나 밖으로 흐르는 것을 보게 되는데, 넘실거리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스며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언뜻 보기에 물이 적어 보입니다.
그러나 채소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이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던 것처럼, 스며 나오는 물은 에스겔이 그곳을 따라 돌아볼수록 점점 더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물의 깊이가 발목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허리까지 그리고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습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은 신비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강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간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의 은사들과 능력들의 열매를 맺게 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여기에 나오는 강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하여 구원의 은혜와 기쁨이 시작되어 삶의 자리에서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시간과 경험이 날마다, 해마다 점점 깊어지시길 소망합니다.

주님 안에 있는 나의 신앙의 깊이가 발목인지, 무릎인지, 허리인지, 온 몸이 잠겨 있는 지 점검해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두 종류의 사랑이 있는데 하나는 자신을 잊어버리게 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하는 자신에 대한 사랑” 이라고 말했습니다.

강물같이 흐르는 성령의 역사가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자연재해와 전염병과 온갖 고난의 사슬로부터 구원하시는 은혜가 풍성한 삶을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전에서 나오는 생수의 강

1-32장은 죄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33-39장은 이스라엘 회복의 말씀입니다.
37장은 마른 뼈의 환상이고 47장은 성전의 회복 환상입니다.
40-4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성전이 회복되고 제사장이 회복되고 예배가 회복될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회복된 성전에서 물이 나오는 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앙의 중심은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이 임재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에 그 성전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성전의 회복은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19-21을 보면 이 성전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이 환상은 하나님이 장차 우리의 진정한 성전 되신 예수님을 통해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올 것을 보여주시는 비전입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그 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1-2절)

에스겔이 성전의 환상을 보여주던 사람을 따라 성전 문에 이르러 보았습니다.
성전의 문지방 밑에서 물이 조금씩 스며 나왔습니다.
생수의 강은 왕궁에서 흘러내리지 않고 성전에서 흘러내립니다.
그 물은 동쪽으로 흐르다가 제단의 남쪽으로 흘렀습니다.
그분이 에스겔을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이르렀습니다.
물이 바깥문 오른쪽에서 세어나왔습니다.

동쪽은 여호와의 영광이 들어가던 곳입니다.

여호와가 계신 곳에서 성령의 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은 연간 강수량이 250-300미리 정도입니다.
물이 부족한 국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면 물이 풍부하게 흐릅니다.

에덴동산에도 사대 강물이 흘렀습니다.
에덴은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성막이 생기고 솔로몬을 통해서 성전을 지었습니다.
지금은 성전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오면 스룹바벨 성전이 이루어집니다.
이 성전도 에스겔이 본 성전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에스겔이 본 그 성전이 완성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생수의 강이 흐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수정같이 맑은 생수의 갈이 흐릅니다.

성전의 크기와 금으로 된 그릇과 집기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전의 생명은 생수가 흘러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의 교회가 성전이요 우리의 마음이 성전입니다.
우리의 교회에서 우리의 마음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쳐야합니다.
바이칼 호수는 깊이가 1700미터라고 합니다.
바닥이 바위로 되어서 물이 깨끗하다고 합니다.
깨끗한 물이 흘러야합니다.
우리는 순수성을 회복해야합니다.
혼합주의를 경계해야합니다.
물질주의 음란문화 인본주의가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합니다.

세상의 더러운 물이 성전에 역류하지 말게 해야합니다.

북한 김일성이 남극 지하 200미터의 광천수를 먹으면 건강해진다고 그 물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물을 먹어도 죽습니다.
성령의 물은 우리가 부활하여 영생하기까지 우리의 마음에서 솟아납니다.
성령의 물이 마르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성도의 수가 줄게 됩니다 건기가 되어 초목이나 동물들이 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기가 되면 초목이 우거지고 고기가 생겨납니다.
물은 죽음의 땅을 생명의 땅으로 바뀝니다.
그러면 어부와 농부가 살아나게 됩니다.
물은 생명입니다.
우리의 몸에도 대부분이 물입니다.

점점 불어나는 물(3-5절)

에스겔이 북문으로 나가서 동문에 이르자, 그 사람은 줄자를 가지고 동쪽으로 나가면서 일천 척, 약 500m를 재더니 그 물을 건너라고 했습니다.
그 물은 어느새 개울물이 되어 에스겔의 발목까지 올랐습니다.
그 사람은 다시 500m를 재더니 또 건너라 했습니다.
건너보니 물이 무릎까지 올라 왔습니다.
또 500m를 가서 반복 하니 이번에는 허리에 닿았습니다.
다시 한번 500m를 재고 나가보니 이제 물은 엄청나게 불어나 헤엄이나 치면 몰라도, 걸어서는 도저히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그 사람은 다시 건너라고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이 깊어지는 것은 성령이 깊어지고 은혜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얕은 곳에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면 내가 하는 것이 적어집니다.
모든 것을 은혜 아래서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내가 교회 나가고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깊은 세계에 살면 은혜가 나를 지배합니다.
내가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게 했다고 합니다.
성령의 술중독이 되어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술먹을 때도 억지로 먹다가 여러 번 먹으면 술에 빠집니다.
예수 믿는 것도 술취한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러면 성전에서 스미어 나온 물은 점점 많아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생수의 강물

물이 없는 곳을 사막이라고 하고 황무지라고 말합니다.
물이 없으면 저주입니다.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가 기아에 시달리는 큰 이유도 물이 없어 식물이 자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은 곧 생명입니다.
물이 있는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달나라나 화성에도 물이 있다면 생명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7:37, 38절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배에서 생수의 강에서 흘러 넘친다는 것은 성령이 흘러 넘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또 예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을 믿는자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 주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40일간 계시다가 승천하시며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에스겔서 40장 이후에 성전의 모든 크기를 자세히 척량하는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성전을 자세히 잰다는 의미는 성전을 자세히 알게 된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성전이신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생수도 처음에는 스미어 나올 정도로 미약합니다.
그러나 갈수록 불어나서 큰 강이 됩니다.
그 물은 처음 예수님의 열 두 제자에게서 조금씩 스미어 나왔고 그 후 예수님이 승천하시던 해의 오순절 날에 이르러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적실만한 물이 되었고 마침내는 복음역사를 잔혹하게 핍박하던 거대한 로마제국을 휩쓸고 지나갈 만큼 큰 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길고 큰 강을 이루며 유럽으로, 미국으로, 전 세계로 흘러갔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온 생수는 처음에는 스미어 나왔지만 점점 불어나서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큰 강을 이루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살던 당시 하나님의 역사가 어떠합니까?
에스겔이 보는 시대의 현실은 너무나 절망적입니다.
그는 망해 가는 이스라엘을 지켜보았고,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끌려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흩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거기서 끝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절망가운데 있는 그에게 성전이 완전히 회복되며, 거기서 스며 나온 생수가 마침내는 생수의 강이 되어 온 세계를 향해 도도하게 흘러가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포로를 통하여 그들의 죄를 정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제거하십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십니다.
그들을 순결한 백성으로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그 환상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성령이 오심으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살아나는 생명들(6-10절)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건너지 못할 만큼 큰 강이 되자 천사가 이번에는 에스겔을 데리고 강가를 둘러보게 했습니다.
강가의 좌우 편에는 나무가 심히 많았습니다.
그만큼 강가는 비옥하고 풍요했습니다.
나무가 우거지니 공기도 맑고 보기도 좋았습니다.
사람만 아니라 동물도 살아나게 됩니다.
천사는 이 강가에서 에스겔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물은 동쪽으로 흘러 아라바라로 가서 바다에 이르렀습니다.

아라바 바다는 지금의 사해를 말합니다.
사해는 남북이 80km, 동서가 18km, 이며 최대 수심이 396m에 달하는 큰 호수입니다.
사해에는 요단강에서 매년 약 5억 4천만 톤의 물이 흘러 들어오고 또 그 외 몇 개의 강으로부터 물이 흘러 들어오는데 흘러나가는 곳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물이 넘치기는커녕 항상 지중해의 수면보다 395m 나 낮다고 합니다. 이유인 즉 물이 흘러나가지 않고 그대로 증발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해의 물은 지중해보다 다섯 배가 짜고, 사해의 염분 농도는 표면수가 29% 심층수는 30%나 되는 정도로 비중이 워낙 커서 사람이 들어가도 물에 뜨는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물이 너무 짜기 때문에 그곳은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합니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성전에서 흘러나온 생수의 강이 이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물이 흘러 들어가자 그 바다가 소성 했습니다. 생수는 사해의 짠물을 흘려 보내버리고 단물이 되게 했습니다. 이제 사해는 더 이상 죽음의 바다가 아니라 생명의 바다였습니다. 이 강에 고기가 살자 강가에는 어부가 살게 됩니다. 어부들은 엔게디에서 에네글리임까지 그물을 칩니다. 큰 바다의 고기같이 각종 종류의 고기가 삽니다. 숭어 농어, 연어, 잉어들이 떼지어 다녔습니다. 하나님은 이 강이 흐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물이 사해에 흘러 들어가면 사해와 그 주변이 살아나고, 아라비아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 전쟁의 포화에 고통하는 아프카니스탄이 살아납니다. 생수의 강만이 힘이 있고 세계를 살릴 수 있는 위력이 있습니다.

살아나지 못하는 자들(11절)

진펄과 개펄은 소성 되지 못하고 계속 소금 땅으로 남게 됩니다.
진펄은 수렁, 개펄은 물웅덩이를 말합니다.
그곳은 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소금물에 절어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 사람, 은혜를 받기만 하고 주지는 않는 사람은 진펄과 개펄 같은 사람입니다.
교만과 불신으로 끝까지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받은 은혜도 까먹고 마침내는 소금 땅과 같이 말라버리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치 못하고, 회개치 않는다면 우리는 소금 땅과 같이 말라버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 물이 사람의 마음에 흘러 들어가면 모든 사람이 소성합니다.
사실 이 세상은 거대한 죽음의 바다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육신의 죽음 뿐 아니라 영적인 죽음이 더 심각합니다.
원조교제, 부모살인, 부모의 자녀에 대한 성폭행등 세상의 죄악은 사해보다도 짜고 시궁창의 물보다 더럽습니다.
세상은 거룩함은 증발해 버리고 욕심과 정욕이 베어 있습니다.
사랑이 증발해 버리고 이기심과 미움만이 가득합니다.
절대 진리가 증발해 버리고 죄악 되고 거짓된 인간들의 지식과 정보가 바다를 이루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모두가 무의미, 무기력 등의 죽음의 병을 앓습니다.
또 치열한 경쟁 때문에 짜디짠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다가 모두들 그 마음이 짠돌이와 짠순이가 됩니다.
사람은 이렇게 세상이라는 죽음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결국에는 모두 죽습니다.
그 후에는 불과 유황으로 가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생수가 세상에 흘러 들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온 맑고 깨끗한 성령의 강물은 차고 넘치도록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성령의 강물이 흘러야 생명이 살아납니다.
물이 있어야 생명이 사는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만 강물이 막히면 다른 곳으로 돌아 갈 뿐입니다.

역사속에서 생수의 강물

역사적으로 봐도 어느 교회든 단체이든 성령의 강물을 공급받지 못하면 그 모임은 마르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왔습니다.
선교단체가 30년을 주기로 흥망을 거듭한 사실은 우리에게 큰 경종이 됩니다.

첫째, 성령의 강물의 근원 되신 예수님께 뿌리를 두고 뿌리 내려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에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부활하여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산제사를 드려야합니다.
성령의 강물이 발원지가 살아 있어야 물이 끊이지 않고 마르지 않습니다.
모임이나 사람에게 뿌리를 둘 때 모임이든 개인이든 근원이 마르고 생명이 자라지 못합니다.

38년된 병자의 경우 베데스타 연못에 뿌리를 둘때 무기력하고 의존적이며 짜디짠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강물이 막힘없이 콸콸 흘러야 합니다.
성령의 강물이 흐르면 양들이 몰려오게 되있습니다. 아무리 신세대 양들이라도 하나님을 떠나 심령이 마른뼈와 같이 갈급한 양들은 "물 좋은 곳을 찾아 모이게 마련입니다.
사실 21세기 들어 서며 영적환경이 어려워지고 교회 성장이 주춤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지금도 맑고 깨끗한 성령의 강물이 흐르는 곳은 양들로 넘쳐 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강물이 이처럼 좋은 것을 아는데 성령의 강물이 흐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령의 근원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과 부활에 신앙의 뿌리를 내리지 않는데서 심령이 메마릅니다.
이런 이유로 신앙 연륜이 있는 목자라도 넘어집니다.
또한 성령의 강물의 흐름을 막는 죄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그릇이 안 이뤄지며, 모임 깊숙히 정욕의 죄가 침투해 성령의 강물이 말랐을 때 양들이 흩어졌습니다.
양들 편에서 보면 생수의 강물이 없으니 생수를 찾아 떠난 것으로 우리가 회개할 문제 였습니다.
반면 양들이 몰려오고 성령의역사가 불붙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철저한 회개역사 가운데 부르짖어 기도하며 성령이 충만한 때였습니다.

성령의 근원되신 예수님께 뿌리가 없고 사람에게 뿌리내린 우리의 죄를 징계하시고 돌이키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훈련이었습니다.
사람을 우상숭배하며, 인정을 구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하고, 인간적인 연애감정을 즐기다 근원이 말라 죽게 두실 수 없는 사랑의 훈련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성령을 주시되 넘치도록 주시고자 인본주의와 정욕을 죄를 뿌리 뽑고 깨시고자 책망시고 징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병을 치료하는 잎새들(12절)

사해가 살아날 때 사해 주변의 황무한 땅들도 살아납니다.
그 땅에서 각종 실과나무들이 자라납니다.
망고, 파파야, 바나나 나무가 자랍니다.
올리브 야자 파인애플 코코넛나무도 자랄 것입니다.
나무들은 그 잎이 시들지 않고 끊임없이 열매를 맺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열매를 맺는지 모든 나무가 달마다 새 실과를 맺습니다.

요한복음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한계시록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계시록에는 생수의 강이 흐르는 곳에 생명의 나무가 자라고 열두 가지 실과가 계절을 따라서 열렸습니다.
나무 잎새는 만국을 치료하였습니다.
우리는 깨끗한 물을 마셔야합니다.
물을 많이 마셔야합니다.
목자의 심정이 순결하고 세상 죄와 싸워서 마음을 지켜야합니다.
우리 목자가 살아나면 양들도 살아나게 됩니다.

나무의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어 피곤할 때 이 잎사귀를 끓여 마시면 피로가 싹 가십니다.
이 잎사귀를 말아서 코에 넣으면 감기가 낫습니다.
이 잎사귀로 즙을 내어 마시면 위장병도 낫습니다.
산삼 녹용은 저리 가라 입니다.
그런데 이 잎사귀의 약효는 특히 영혼의 병에 잘 나타납니다.
무기력, 무의미, 허무 등의 죽음에 이르는 병도 낫고, 시기심, 교만된 마음의 병도 낫고, 인정을 좇아 사는 정욕된 마음의 병도 낫고, 사람들로부터 받는 상처도 낫고, 자기 의를 주장하는 은혜 망각증의 병도 낫게 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이렇게 남을 치료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의 생수의 강은 이렇게 좋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능력은 그렇게 위대합니다.

10절 말씀에 "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에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강에 고기가 많아질 것은 교회에 성도들이 충만하게 될 것을 의미하며, 어부가 선다는 것은 복음의 일꾼들이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강물이 흐르는 곳에 반드시 고기들이 몰려옵니다.
성령의 강물이 흐르는 곳에 양들이 모려오게 되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날이 임박할수록 시대는 어려워지고 사람들은 갈급 하여져서 말씀 있는 목자들에게 몰려듭니다.
우리가 고기들이 모여드는 환상을 가지고 사람 낚는 어부를 양성해야 하겠습니다.

생명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11-12절)

사해의 진펄과 개펄은 깨끗하게 고쳐지지 않고, 계속 소금에 절어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생명수의 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생명수의 물이 흐르는 그 강가에는 이쪽이나 저쪽 언덕에 똑같이 온갖 종류의 먹을 과일 나무가 자랄 것입니다.
그 모든 잎도 시들지 않고, 그 열매도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나무들은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을 것인데, 그것은 그 강물이 성소에서부터 흘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과일은 사람들이 먹고, 그 잎은 약재로 쓸 것입니다.
이 나무 열매는 생명 나무 열매입니다.
이 열매를 먹은 사람들은 어떤 병에 걸려도 살아나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회복될 땅의 분배(13-14절)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에 이 땅을 차지 합니다.
그런데 실제는 이 땅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땅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이스라엘의 동서남북 경계선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땅의 면적은 강원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세상 것에 비하면 별것 아닌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계를 점령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따라서 유산으로 나누어 가져야 할 땅의 경계선은 다음과 같습니다.
요셉은 두 몫을 주십니다.
나머지 지파들은 그 땅을 서로 똑같이 유산으로 나누어 가져야 합니다.
동등하게 차별없이 나누어야합니다.
어떤 지파가 피해를 당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땅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나쁜 땅이 있습니다.
서로 불만이 없이 분배해야합니다.
그 땅은 여호와가 그들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땅을 이제 그들이 유산으로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차지하게 하십니다.

땅의 경계선(15-20절)

북쪽 경계선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중해에서 헤들론을 거쳐 르모하맛에 이르렀다가 스닷, 브로다, 시브라임에 이릅니다.
(시브라임은 다마스쿠스 지역과 하맛 지역의 중간에 있습니다.)
거기에서 하우란의 경계선에 있는 하셀 핫디곤에까지 이릅니다.
이렇게 북쪽 경계선은 지중해에서 동쪽으로 하살에논에까지 이르는데, 다마스쿠스와 하맛에 접경하고 있습니다.

동쪽 경계선은 은 하우란과 다마스쿠스 사이에서 시작하여, 길르앗과 이스라엘 땅 사이의 경계인 요단 강을 따라, 멀리 사해의 다말에까지 이릅니다.

남쪽 경계선은 다말에서 시작하여 므리봇가데스의 샘을 지나 이집트 시내를 거쳐 지중해에 이릅니다.

서쪽 경계선은 지중해입니다.
이 바다가 경계가 되어 르보하맛으로 건너편에까지 이릅니다. 

땅을 차지하는 사람들(21-23절)

이 땅을 그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별로 나누어 가지라고 합니다.
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 가운데 거류하는 외국 사람들, 곧 그들 가운데서 자녀를 낳으면서 몸붙여 사는 거류민들도 함께 그 땅을 유산으로 차지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거류민들을 본토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족속과 똑같이 여겨야 합니다.
그들도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끼어서 제비를 뽑아 유산을 받아야 합니다.
거류민은 그들이 함께 살고 있는 그 지파에서 땅을 유산으로 떼어 주어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민족과 인종의 차별이 없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생수의 강

성전에서 나오는 물은 사람을 소성케 하고 번성케 하는 위대한 물입니다.
예수님의 생수는 그 모든 것을 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수는 다시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수의 강은 항상 흐릅니다.
항상 흐를 뿐 아니라 점점 더 큰 강이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영적인 환경이 힘들어도 좌절하지 않고 환상과 비전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생수가 그렇게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악 영향을 받아 죽어가는 세상에 맑고 깨끗한 생수를 공급해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뜨겁게 역사하여 이 비전을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합니다.


10-31-2023(화) 에스겔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경배한 후에(에스겔 46:2)

왕은 바깥 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와서 문 벽 곁에 서고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요 왕은 문통에서 경배한 후에 밖으로 나가고 그 문은 저녁까지 닫지 말 것이며.
The prince is to enter from the outside through the portico of the gateway and stand by the gatepost. The priests are to sacrifice his burnt offering and his fellowship offerings. He is to worship at the threshold of the gateway and then go out, but the gate will not be shut until evening.

경배한 후에(After worshiping)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 왕이라 할지라도 제사의 제물을 바치려면 성전으로 나와야 합니다.
헌신을 의미하는 번제와 또한 감사제를 드려야 하며 그 제사를 마친 후에는 왕이 들어왔던 문으로 나간 후에  그 문을 저녁까지 닫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까다로운 규정으로 왕을 통제할까요?
최고의 통치자 왕 보다도 더 높은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배의 자리에는 왕도 백성도 모두 같은 위치에 머물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동등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아직도 어느 교회에서는 장로석을  별도로 구분하여 특별 우대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만일 아직도 교회안에서 직분에 따라 자리가 배정된다면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언제인가 독일을 여행 중에 독일 교회에서 주일 예배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목사가 예배를 마친 후에는 목사 가운에서 설교자가 앞에 걸피는 작은 스톨을 떼내고 단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며 예배를 마친 후에는 모두가 동등한 자리에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간다는 결단의 표시를 보여주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권위는 직분을 상징하는 가운이 아니라 내적 영향력이 아닐까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와 같은 내적 영향력을 찾아볼 수 있다면 세상은 아직도 삶의 기쁨을 제공하는 터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내적 영향력을 찾아볼 수 없다면 이제부터라도 새롭게 다짐하고 회복하여 세상을 향한 내적 영향력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한 제사를 드린 후에 즉 경배한 후에 삶의 터전에서 매 순간 주와 동행하는 거룩한 삶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 제사와 예배는 형식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요?

어미 게가 옆으로 기어가면서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반드시 앞으로 가야한다고 강조하고 가르쳐도 효력이 없는 것은 가르치는 위치에서 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열 마디의 말 보다는 한 번의 실천과 순종과 행함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사람으로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오 주님
세상을 변화시킬
믿음의 삶을 결단하오니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날 대속하신 예수께

 









에스겔 46장 예배드리는 방법

바벨론에서 고생하는 에스겔에게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성전을 지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성전에 들어가보고 성전의 크기를 측량하고 구석구석 돌아봅니다.
성전을 이렇게 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미래가 설계되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는 청사진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내것으로 만들어야합니다.

안식일(1- 5절)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안뜰의 동쪽 중문은 일하는 엿새 동안 잠가 두었다가 안식일에 열고, 또 매달 초하루에도 열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안식일과 초하루에는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은 우리의 형편에 따라서 해서는 안 됩니다.
정해진 절기에 해야합니다.
왕도 안식일과 초하루에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왕은 바깥 마당에서 동쪽 중문의 현관으로 들어와서, 문설주 곁에 서 있어야 합니다.
제사장들이 그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바치는 동안에는, 왕은 그 대문의 문지방 앞에서 엎드려 경배하고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성소에 들어오면 안됩니다.
웃시야 왕은 성전에 들어와 제사드리다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그 문은 저녁때까지 닫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의 백성도 안식일과 매월 초하루에는 이 문 어귀에서 주 앞에 엎드려 경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은 왕과 백성이 동일합니다.
왕이 안식일에 주께 바쳐야 할 번제물은, 흠 없는 어린 양 여섯 마리와 흠 없는 숫양 한 마리입니다.
최상으로 드려야 합니다.
곡식제물은, 숫양 한 마리에는 밀가루 한 에바를 곁들여 바칩니다.
어린 숫양에는 밀가루를 원하는 만큼 곁들여 바쳐야 합니다.
사람의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서 해야합니다.
정성을 다하여 섬겨야 합니다.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을 곁들여 바쳐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때는 힘과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예배해야 합니다

초하루(6-8절)

월삭이란 매월 초하루를 말합니다.
새로운 달을 어떤 마음으로 맞아야 할까요?
하나님이 새로운 달이 시작되는구나 생각해야 합니다.
새로운 달을 시작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합니다.
매달 초하루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어린 양 여섯 마리와 숫양 한 마리를 흠 없는 것으로 바쳐야 합니다.
또 곡식제물로는 수송아지 한 마리에는 밀가루 한 에바를 바쳐야 합니다.
숫양 한 마리에도 밀가루 한 에바를 바쳐야 합니다.
어린 양에는, 그가 원하는 만큼 곁들여 바칠 것입니다.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을 곁들여 바쳐야 합니다.
왕이 성전에 들어올 때에는, 중문의 현관으로 들어왔다가, 나갈 때에도 그 길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의 출입방법(9-10절)

그러나 이 땅의 백성이 성회 때에 주 앞에 나아올 경우에는, 북쪽 문으로 들어와서 경배한 사람은 남쪽 문으로 나가야 합니다.
남쪽 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북쪽 문으로 나가야 합니다.
누구든지 들어온 문으로 되돌아 나가서는 안 되며, 반드시 똑바로 앞쪽으로 나가야 합니다.
백성이 들어올 때에, 왕도 그들과 함께 들어왔다가, 그들이 나갈 때에 왕도 나가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신분의 고하가 없습니다.
성전문을 가로질러 제단을 거쳐 나가야합니다.
하나님은 가까이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가까이서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부모님에 왔는데 신발장에 섰다가 삐끔이 보고 가서는 안됩니다.
깊이 만나야합니다.
등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길 때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성전쪽으로 와서는 성전을 향하여 가야 합니다.
예전에 임금에게 올 때도 뒷걸음질하여 나갔습니다.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해야합니다.

명절 소제의 규례(11-12절)

모든 절기와 성회 때에 바칠 곡식제물은 수송아지 한 마리에는 밀가루 한 에바를 곁들이고, 숫양 한 마리에도 밀가루 한 에바를 곁들입니다.
어린 숫양에는 원하는 만큼 힘대로 곁들여 바쳐야 합니다.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을 곁들여 바쳐야 합니다.
왕이 스스로 하고 싶어서 번제물이나 화목제물을 주에게 바치려고 하면, 그에게 동쪽으로 난 대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하여 하여야 합니다.
그는 안식일에 자신의 번제물이나 감제제물을 바친 것과 같이 하고, 밖으로 나간 다음에는 그 문을 닫아야 합니다.
항상 감사해야합니다.

매일 드리는 제사(13-15절)

에스겔은 매일 주에게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양 하나를 번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에스겔은 아침마다 그것을 바쳐야 합니다.
새벽기도를 일상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침마다 바치는 번제물에는 밀가루 육분의 일 에바와 그것을 반죽할 기름 삼분의 일 힌을 곁들여 바쳐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 바치는 곡식제물로서 영원히 지킬 규례입니다.
이렇게 제사장들은, 아침마다 어린 양과 곡식제물과 기름을 준비하여, 정규적으로 드리는 번제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예배를 일상화해야합니다. 항상 드러야 합니다.

군주와 그의 기업(16-18절)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만일 왕이 자신의 아들 가운데서 어떤 아들에게 유산을 떼어서 선물로 주면, 그것은 아들의 재산이 됩니다.
이런 것은 유산으로서 아들의 재산이 됩니다. 그러나 만일 왕이 어떤 신하에게 유산을 떼어서 선물로 주면, 그것은 희년까지만 그 신하의 소유가 됩니다. 희년이 지나면 왕에게로 되돌아 갑니다. 왕의 유산은 그의 아들들의 것으로서, 오직 그들의 차지가 되어야 합니다. 종이 죽으면 이제 다시 왕에게 주어야합니다. 종은 관리권만 있는 것이지 상속권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평생임대합니다. 땅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소유한다는 것은 관리권만 있는 것입니다.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은 백성의 유산을 빼앗고 그들을 폭력으로 내쫓아서, 그들의 유산을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다고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백성에게 준 권리를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권리를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고용한 사람은 노동력을 산것이지 사람을 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는 것을 허락지 않습니다.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왕이라도 그 산업에서 쫓아내지는 못합니다. 왕은 자신의 재산만을 떼어서,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백성 가운데서는 아무도, 자신의 재산을 잃고 멀리 흩어져 다니는 일이 없게 하여야 합니다.

[성전 부엌]

“19.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 곁 통행구를 통하여 북쪽을 향한 제사장의 거룩한 방에 들어가시니 그 방 뒤 서쪽에 한 처소가 있더라 20.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는 제사장이 속건제와 속죄제 희생제물을 삶으며 소제 제물을 구울 처소니 그들이 이 성물을 가지고 바깥뜰에 나가면 백성을 거룩하게 할까 함이니라 하시고 21. 나를 데리고 바깥뜰로 나가서 나를 뜰 네 구석을 지나가게 하시는데 본즉 그 뜰 매 구석에 또 뜰이 있는데 22. 뜰의 네 구석 안에는 집이 있으니 길이는 마흔 척이요 너비는 서른 척이라 구석의 네 뜰이 같은 크기며 23. 그 작은 네 뜰 사방으로 돌아가며 부엌이 있고 그 사방 부엌에 삶는 기구가 설비되었는데 24.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는 삶는 부엌이니 성전에서 수종드는 자가 백성의 제물을 여기서 삶을 것이니라 하시더라” 그런 다음에 그가 에스겔을 데리고 중문 곁에 있는 통로로, 북쪽에 있는 제사장들의 거룩한 방에 이르렀는데, 거기에서 보았습니다. 그 거룩한 방들의 뒤편 서쪽에 빈 터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가 에스겔에게 일러주었습니다. "여기가 제사장들이 속건제물과 속죄제물을 삶으며, 곡식제물을 굽는 부엌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그 제물을 바깥 뜰로 들고 나갔다가 그 거룩한 제물에 백성이 해를 입게 하는 일이 없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제물을 만드는 것도 거룩해야합니다. 또 그가 에스겔을 바깥 뜰로 데리고 나가서, 그 뜰의 네 구석으로 나를 데리고 다녔는데, 보니, 구석마다 뜰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그 뜰의 네 구석에는 담으로 둘린 작은 뜰들이 있었고, 그 길이는 마흔 자요 너비는 서른 자였다. 이렇게 네 뜰의 크기가 같았습니다. 그 작은 네 뜰에는 돌담이 둘러쳐 있었고, 그 돌담 밑으로 돌아가며, 고기를 삶는 솥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가 에스겔에게 일러주었습다. "이 곳은 성전에서 시중드는 사람들이 백성의 희생제물을 삶는 부엌이라“ 고 하십니다.


46장: 예배의 방식

[1-8절]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안뜰 동향한 문을 일하는 6일 동안에는 닫되 안식일에는 열며 월삭(매월 초하루)에도 열고 왕은 바깥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와서 문벽(메주자)[문기둥](gate-post) 곁에 서고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요 왕은 문통(미프탄)[아마 ‘문 복도’](threshold)에서 경배한 후에 밖으로 나가고 그 문은 저녁까지 닫지 말 것이며 이 땅 백성도 안식일과 월삭에 이 문통(페사크)[문 입구]에서 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안식일에 왕이 여호와께 드릴 번제는 흠 없는 어린양 여섯과 흠 없는 숫양 하나라. 그 소제는 숫양 하나에는 밀가루 한 에바요 모든 어린양에는 그 힘대로 할 것이며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약 4리터]씩이니라. 월삭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하나와 어린양 여섯과 숫양 하나를 드리되 모두 흠 없는 것으로 할 것이며 또 소제를 갖추되 수송아지에는 밀가루 한 에바요 숫양에도 밀가루 한 에바며 모든 어린양에는 그 힘대로 할 것이요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씩이며 왕이 올 때에는 이 문(바깥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오고 나갈 때에도 그리할지니라.

왕은 안식일과 월삭에 성전의 안뜰 동쪽 문 복도에서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또 백성들은 그 문 입구에서 경배해야 했다고 보인다.







10-30-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땅을 나누어(에스겔 45:1)

너희는 제비 뽑아 땅을 나누어 기업을 삼을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찌니 그 장은 이만 오천척이요 광은 일만척이라 그 구역 안 전부가 거룩하리라.
'When you allot the land as an inheritance, you are to present to the LORD a portion of the land as a sacred district, 25,000 cubits long and 20,000 cubits wide; the entire area will be holy.

현대인의 성경 / 너희가 땅을 분배할 때에는 한 구역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 여호와에게 바쳐라. 그 땅은 길이가 13.1킬로미터이며 폭이 10.5킬로미터이다. 그 구역 전체가 거룩한 땅이 될 것이다.

땅을 나누라(divide the land)

우베핲피레켐 엩 하아레츠(וּבְהַפִּילְכֶם אֶת־הָאָרֶץ)

땅(776) 에레츠 [ ’erets ]  אֶרֶץ   

1. 땅. 2. 창세기 1:1. 3. 창세기 9:19
발음 [ ’erets ]
어원 / 혼성 어미활용 אַרְצִי, ‘확고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땅(창 1:2, 레 26:20, 대상 16:14), 들(창 2:5, 겔 29:5), 세상(창6:5, 출9:29, 신4:32), 지방(창 10:31, 레20:2, 수9:9), 지면(출16:14, 욥28:5, 아2:12), 접경(출16:35), 고향(민10:30, 렘50: 16), 세계(출19:5, 민14:21, 신28:1), 나라(창 42:6, 출23:26, 왕상10:6), 천지(출31:17, 시 69:34, 사37:16), 육지(레11:2), 이방(창15: 13, 스9:11), 천하(창18:18, 왕상4:34, 사25:8), 본토(왕하18:32, 단11:28), 토지(창41:47, 레23: 39, 삿6:4), 사방(창47:13, 민34:2), 전국(레 19:29), 소유지(수22:4,19), 밭(삿9:37, 시141:7), 백성(삿18:30), 본국(왕상10:13, 왕하19:7), 고국(왕상11:21, 왕하3:27), 본향(왕상22:36), 위치(왕하2:19), 성읍(대하6:28), 토산(대하7:13), 열국(사34:1), 열방(느9:30, 겔1:21), 고토(욥 30:8, 사37:7), 흙(시12:6, 렘17:13), 진토(시 22:29), 여러 나라(시106:27), 지상(사18:3), 길바닥(애2:21), 뭍(겔32:4), 각국(겔36:19), 평원(겔38:11).
구약 성경 / 2504회 사용


나누어(5307) 나팔 [ nâphal ] נָפַל 

1. 떨어지다.  2. 분사  נֹפֵל: 삿 3:25. 3. 출생하다.  4. 제비를 뽑아 나누다 에스겔 45:1
발음 [ nâphal ]
관련 성경 / 변하다(창 4:5, 6), 거주하다(창 25:18), 죽다(출19:21, 삼하3:38), 눕다(출21:18, 삼상19:24), 빠지다(출21:33), 떨어지다(레11:38,5:2, 삿15:18), 엎드러지다(레26:7, 삿5:27),망하다(민14:43, 왕하14:10), 무너져 내리다(수6:5), 남다(수21:45), 틀리다(수23:14), 어기다(수23:14), 쓰러지다(삿7:13, 삼하2:16),얻다(삿18 :1), 자다(삼상26:12), 미치다(시69:9), 항복하다(왕하25:11, 렘21:9), 돌아오다(대상12:19), 죽임을 당하다(왕하5:22), 엎드리다(창17:3, 대하20:18), 넘어지다(시10:10, 렘51:8), 무너지다(사9:10, 렘50:15), 떠들다(사16:9), 함락되다(사21:9), 이르다(렘48:35), 뽑다(겔24:6), 꺾어지다(겔31:12),임하다(삼상11:7, 단10:7), 망명하다(삼상29:3), 굴욕을 당하다(에6:13), 잠들다(욥4:13), 엎드러뜨리다(렘51:49), 내리다(창24:64, 삼하17:12), 어긋맞기다(창33:4), 안다(창45:14),구푸리다(창50 :1), 습격하다(수11:7), 돌아가다(수17:5, 대상12:19), 흐르다(삼상26:20), 쳐죽이다(대상5:10), 당첨되다(대상26:14),낙담하다(느6:16), 패망하다(잠11:28, 사54:15), 베임을 당하다(사10:34), 출산하다(사26:18), 드리다(렘36:7), 받다(렘37:20), 떨어뜨리다(겔30:25), 부딪치다(욜2:8), 치이다(암3:5), 당하다(욘1:7), 사로잡아가다(왕하25:11), 못하다(욥12:3), 제비뽑다(수 23:4, 겔 45:1), 그치다(삿2:19), 던지다(시73:18, 렘22:7), 헐다(삼하20:15), 분배하다(수13:6),빠뜨리다(출21:27), 베다(왕하3:19), 뽑히다(대상24:31, 26:13), 무색하다(욥29:24), 내놓다(사26:19), 향하다(렘3:12), 멸하다(신9:25, 겔32:12), 간구하다(렘38:26, 단9:20),의지하다(단9:18), 끌려들다(창43:18).
구약 성경 / 434회 사용


אֵת 에트 [ ’êth ]  853. 

1. 자신.  2. 그와 같은. 3. 지시적인 의미가 강한 이 단어는 고대 히브리어에서 잘 사용되지 않았으나 일상 언어 속에는 보전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에는 널리 통용되었다.
발음 [ ’êth ]
관련 성경 / 자신, 동등(수 7:15, 왕하 6:5), 이것, 그것 자체(겔 43:7), 그 일 자체, 그 일
구약 성경 / 11059회 사용





유대 백성들은 지금 바벨론의 포로가 된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땅을 분배하여 회복하라는 놀라운 계시를 전달합니다.
포로가 된 백성들은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갇혀 마음대로 활동할 수 없는 비참한 현실에 놓여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들에게 고향 땅으로 돌아가서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환상의 계시는 매우 충격적인 선언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언제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향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지 알 수 없는 막막한 현실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을 나누어 분배하되 한 구역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께 바치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바쳐야 할 땅의 규모는 길이가 25000척(13.1km), 폭은 10000척(10.5km)으로 구역 전체가 거룩한 땅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림의 떡이라는 속담처럼 포로가 된 백성들에게 고향 땅을 나눠준다는 것은 믿음이 없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하무맹랑한 이야기처러 들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땅을 분배하라는 명령에서 땅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땅은 인간의 생활을 위한 기본적인 공간이기 때문 입니다.

인간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공간의 제약을 받고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입니다(창 2:7, 3:19).
따라서 인간에게 땅은 생계를 위한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기업(땅)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땅을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바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는 인간의 삶의 목표와 방향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과 몸 전체를 거룩을 위해 바칠 것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목표를 위하여 사도 바울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아갈 것이라 고백합니다(로마서 14:8).

나의 영원하신 기업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에스겔서 40장부터 48장은 새 성전과 새 제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40장-43장은 새 성전에 관한 말씀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한다고 합니다.
44장부터 46장은 새 제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44장에서는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를 위하여 동문을 폐쇄하라고 합니다.
45장은 새 땅의 통치와 절기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45장 1절부터 8절은 새 땅은 거룩한 곳이라고 증거합니다.

너희는 제비 뽑아 땅을 나누어 기업으로 삼을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지니 그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는 만 척이라 그 구역 안 전부가 거룩하리라(1절).

본장은 하나님의 땅과 백성들의 지도자의 땅의 구분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전장이 주로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어 전개되고 있다면, 본장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축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다. 즉 전장에서 밝히고 있는 레위인과 사독 가문의 제사장들의 성결은 그 자체로서의 의미보다 하나님을 향한 신성한 목적의 맥락 안에 있음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의 내용이 주로 성전의 척량과 성전 내부에 대한 식양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면, 본장은 성전 외부인 땅에 초점을 돌림으로써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 성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영역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본장은 성별된 구역에 대한 언급(1-8절), 치리자에 대한 권면(9-12절), 왕에게 바칠 예물(13-17절), 절기들에 관한 규례(18-25절)로 구성되어 있다.  


앞장에서는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해야하며 그것을 충실히 수행할 때 어떤 상급을 받게 되는가 하는 내용이 다루어졌습니다. 이어지는 본장에서는 일반 백성들이 하나님께 무엇을 바쳐야 하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것은 그의 소유물과 성의와 시간과 정성입니다. 즉 성도는 하나님께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본장은 말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위한 땅

땅은 인간의 생활을 영위하는 가장 기본적인 공간입니다.
인간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창 2:7, 3:19).
인간은 공간의 제약을 받고 사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 땅은 가장 중요한 필요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땅을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드릴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과 몸 전체를 거룩을 위해 바칠 것을 요구합니다.

중앙에 세워질 성소(에스겔 48:10)

이 드리는 거룩한 땅은 제사장에게 돌릴찌니 북편으로 장이 이만 오천척이요 서편으로 광이 일만척이요 동편으로 광이 일만척이요 편으로 장이 이만 오천척이라 그 중앙에 여호와의 성소가 있게 하고.

성전 되신 하나님(요한계시록 21: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제사장을 위한 땅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위해서 운만 아니라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수고하는 제사장을 위해서도 땅을 바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은 제사장이 그의 온 능력과 시간을 하나님을 위해 바치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없으므로, 그의 제사 수직 활동과 생계를 위해 그에게 경제적 뒷받침을 제공하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날에도 목자들은 양들을 위해 경성합니다.
따라서 양들은 그들이 복음 전파에 전념할 수 있도록 경제적 뒷받침을 해주어야 합니다.  

레위 지파에게 주어진 땅(여호수아 21:41)

레위 사람의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 중에서 얻은 성읍이 모두 사십 팔 성읍이요 또 그 들이라.

제사장에게 주어지는 땅(에스겔 48:11)

이 땅으로 사독의 자손 중 거룩히 구별한 제사장에게 돌릴찌어다 그들은 직분을 지키고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할 때에 레위 사람의 그릇한 것처럼 그릇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왕을 위한 땅

왕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권세를 이양받아 백성의 안녕과 평강을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따라서 백성 된 자들은 그러한 수고를 하는 왕들에게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재물을 바쳐야 합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세금을 거짓 없이 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왕이 세금을 공의롭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지만 어쨌든 백성 된 자는 일단 세금 내는 일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왕에게 주어질 땅(에스겔 48:21)

거룩히 구별할 땅과 성읍의 기지 좌우편에 남은 땅은 왕에게 돌릴찌니 곧 거룩히 구별할 땅의 동향한 그 지계 앞 이만 오천척과 서향한 그 지계 앞 이만 오천척이라 다른 분깃들과 연접한 땅이니 이것을 왕에게 돌릴 것이며 거룩히 구별할 땅과 전의 성소가 그 중간에 있으리라.



선을 이루는 자(로마서 13: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유다(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로운 땅을 나누어서 각 지파의 기업으로 삼을 때, 그 방법은 ‘제비를 뽑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와 땅을 나눌 때도 ‘제비를 뽑는 방법’으로 했습니다. 제비를 뽑는다는 것은 각 지파의 능력대로 땅을 차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비뽑기가 아니라 능력대로 했다면, 영향력이 큰 지파는 수자원이 풍부하고, 넓은 평야가 있는 좋은 땅을 차지하려고 했을 것이고, 영향력이 작고 인구수도 미미한 지파는 산간 지방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비를 뽑으면 어느 지파에게 어떤 땅이 떨어질지 알지 못합니다. 가장 연약한 지파가 가장 좋은 땅을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제비를 뽑는 것의 중요성은 그 땅이 자신들이 마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이 자신들에게 가장 적절하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물론 ‘제비뽑기만이 성경적이다’라고 주장하면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제비뽑기는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뽑은 맛디아가 마지막입니다. 안디옥교회가 바나바와 사울(바울)을 뽑을 때, 제비를 뽑지 않고, 성령님께서 따로 세우라고 하는 사람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업으로 제비 뽑은 땅 중에서 한 구역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는데, 그 땅의 길이가 25,000척(13km)이고, 너비가 10,000척(5.2km)입니다. 면적으로 하면 67.6㎢(2,045만 평)입니다. 이 면적은 서울시의 10분의 1이 좀 넘고, 우리 교회가 있는 마포구의 약 3배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제비뽑은 땅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라고 하는 것은, 구별하여 드린 땅 뿐만 아니라 모든 땅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마치 주일예배시에 인도자가 봉헌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중에 일부를 예물로 올려드립니다.”와 같이 고백하는데, 그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2) 그 중에서 성소에 속할 땅은 길이가 오백 척이요 너비가 오백 척이니 네모가 반듯하며 그 외에 사방 쉰 척으로 전원이 되게 하되

제비 뽑은 땅 중에서 하나님께 드릴 부분을 먼저 정했는데, 그 중에서 성소에 속할 땅을 가장 먼저 구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크기는 길이와 너비(가로와 세로)가 각각 500척(260m), 성소 외부의 길이와 너비 50척을 더하면, 성소의 크기는 길이와 너비가 각각 550척(286m)입니다. 면적으로 하면 약 81,800㎡(24,743평)입니다.

(4) 그 곳은 성소에서 수종드는 제사장들 곧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수종드는 자들에게 주는 거룩한 땅이니 그들이 집을 지을 땅이며 성소를 위한 거룩한 곳이라

길이 25,000척, 너비 10,000척의 광활한 땅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예물로 드리라고 한 이유는, 제사장들의 주거지와 성소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땅이 제사장의 기업(유산)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사장들에게는 기업(유산)도 주지 말고, 산업도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업과 산업이 된다고 하셨습니다(44:28). 이 땅은 제사장들의 주거공간으로만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제사장들에게 주거공간을 확보해 준다는 것은 그들이 더욱 자신들의 기본 사역인 온전한 예배(제사)를 드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온전한 예배가 드려지는 곳이 새 땅의 가장 중요한 의미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5) 또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을 너비는 만 척을 측량하여 성전에서 수종드는 레위 사람에게 돌려 그들의 거주지를 삼아 마을 스물을 세우게 하고

또 다른, 길이 25,000척, 너비 10,000척의 땅은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서 마을 20개를 세우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면적은 마포구의 3배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마포구에는 16개의 동이 있습니다. 그러니 굉장히 큰 20개의 마을을 세울 수 있습니다. 레위 사람들 역시 성전에서 예배(제사)를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새 땅에서의 예배가 그만큼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6) 구별한 거룩한 구역 옆에 너비는 오천 척을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을 측량하여 성읍의 기지로 삼아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돌리고

레위 사람들의 20개의 마을 옆에 그 땅의 절반에 해당하는 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곳에 ‘여호와삼마_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거기에 계시는 여호와’라고 불리게 될 성읍이 만들어질 곳입니다.

(7-8) 드린 거룩한 구역과 성읍의 기지 된 땅의 좌우편 곧 드린 거룩한 구역의 옆과 성읍의 기지 옆의 땅을 왕에게 돌리되 서쪽으로 향하여 서쪽 국경까지와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국경까지니 그 길이가 구역 하나와 서로 같을지니라 이 땅을 왕에게 돌려 이스라엘 가운데에 기업으로 삼게 하면 나의 왕들이 다시는 내 백성을 압제하지 아니하리라 그 나머지 땅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그 지파대로 줄지니라

왕의 땅에 관한 내용입니다. 1-8절을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정사각형이 가로세로 각각 5개씩 25개의 칸으로 된 땅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첫째 줄과 둘째 줄, 10개 칸은 ‘레위 사람들의 거주지_20개 마을’입니다. 그리고 셋째 줄과 넷째 줄 10칸은 제사장들의 거주지인데, 셋째 줄 중간에 성전이 있습니다. 전체의 중심에 성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5째줄 5칸은 경작지입니다.
그리고 25칸 위와 아래가 이스라엘 지파가 살게 될 땅이고, 25칸 오른쪽과 왼쪽이 왕의 소유지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왕이 다시는 백성을 압제하지 않고(아합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것처럼), 보호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통치자들의 통치 법칙(9-17절)
9-17절은 통치자들이 백성들을 공평하게 다스려야 함과 통치자들이 백성에게 받은 것을 다시 예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규정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9)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아 너희에게 만족하니라 너희는 포악과 겁탈을 제거하여 버리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속여 빼앗는 것을 그칠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통치자가 버려야 하는 것은 ‘포악’과 ‘겁탈’이고, 행해야 하는 것은 ‘정의’와 ‘공의’라고 합니다.
‘포악’은 법을 어기거나 무시하고 짓누르는 것이고, ‘겁탈’은 포악의 결과로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정의(미슈파트)’는 올바르게 재판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이고, ‘공의(체데크)’는 이웃을 긍휼히 여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행하는 것입니다.

10절부터는 다양한 무게 단위가 나옵니다.
- 에바(고체 부피) = 밧(액체 부피) ⇒ 약 22ℓ
- 호멜(낙타 한 마리가 질 수 있는 무게) = 고르 = 10에바 또는 10밧 ⇒ 약 220ℓ(108-162kg)
- 세겔(4일치 임금, 11.5g) = 20게라 / 5게라 = 1일치 임금
- 마네(신약의 므나) = 60세겔(240일치 임금)

정의롭고 공의로운 사회, 신실한 사회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은, 바른 저울을 사용하고, 속이지 않는 것, 즉 모두가 법과 원칙을 지키는 것에서 출발하고 완성이 됩니다.

(13-15) 너희가 마땅히 드릴 예물은 이러하니 밀 한 호멜에서는 육분의 일 에바를 드리고 보리 한 호멜에서도 육분의 일 에바를 드리며 기름은 정한 규례대로 한 고르에서 십분의 일 밧을 드릴지니 기름의 밧으로 말하면 한 고르는 십 밧 곧 한 호멜이며 (십 밧은 한 호멜이라) 또 이스라엘의 윤택한 초장의 가축 떼 이백 마리에서는 어린 양 한 마리를 드릴 것이라 백성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것들을 소제와 번제와 감사 제물로 삼을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밀이나 보리를 1호멜(10에바) 수확하면 ⅙에바를 드리고 합니다. 즉 수확량의 60분의 1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기름을 1고르(1호멜, 10밧) 수확하면 ⅒밧을 드리라고 합니다. 즉 수확량의 100분의 1을 드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축 떼 중에서는 200마리를 목축하면 1마리를 드리라고 합니다. 즉 키운 것의 200분의 1을 드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설명이 좀 더 붙어 있습니다. ‘윤택한 초장’에서 키운 것입니다.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물이 넉넉한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은 목초가 풍성한 지역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물이 잘 흐르는 곳에서 좋은 목초를 먹고 짐승들이 잘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의 결과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지금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 땅에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빌론에서 압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16-17) 이 땅 모든 백성은 이 예물을 이스라엘의 군주에게 드리고 군주의 본분은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명절과 초하루와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명절에 갖추는 것이니 이스라엘 족속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 제물을 갖출지니라

그런데 새 땅에서 예물을 드릴 때에 제사장에게 직접 드리지 않고, 군주를 통해서 드리고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바쳐야 한다는 것과 그 땅에서는 군주(왕)도 섬기는 사람이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전에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을 드리지 않았고, 왕도 군림하기만 했고, 우상숭배를 조장했기 때문에 그런 삶에서 떠나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유월절과 일곱째 달 열다섯째 날(18-25절)
18-25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절기와 그 때에 드릴 제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8)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첫째 달 초하룻날에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를 가져다가 성소를 정결하게 하되
(20) 그 달 칠일에도 모든 과실범과 모르고 범죄한 자를 위하여 역시 그렇게 하여 성전을 속죄할지니라

정월 초하루와 7일에 흠 없는 수송아지 1마리를 드려서, 그 피를 성전 문설주, 제단 아래 네 모퉁이, 안뜰 문설주에 바르라고 합니다. 새 땅에서 새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라는 의미입니다. 민수기에 의하면 속죄 제물이 숫염소였는데, 수송아지로 이것은 더 많이 바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 후의 삶이 이전의 삶보다 훨씬 더 풍성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1) 첫째 달 열나흗날에는 유월절을 칠 일 동안 명절로 지키며 누룩 없는 떡을 먹을 것이라
(25) 일곱째 달 열다섯째 날에 칠 일 동안 명절을 지켜 속죄제와 번제며 그 밀가루와 기름을 드릴지니라

유월절과 초막절(장막절)을 지킬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을 떠난 것을, 초막절은 광야 생활을 상징합니다. 새 땅에서 살게 되더라도, 처음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지금 유다 백성들은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성전도 없었고, 자기 명의로 된 땅 한 평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새 땅에 들어가거든 을 갖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비 뽑은 땅에 제사장들의 주거지와 성전을 짓고, 레위 사람들이 살 마을을 만들며, 정직한 저울을 사용하고, 유월절이나 초막절과 같은 중요한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회복은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이며, 지금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인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것과 하나님의 백성이 걸어야 할 길을 신실하게 걸을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전에는 그렇게 살지 않아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삶의 자리에서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 삼고, 하나님의 자녀의 길, 그리스도인의 길을 신실하게 걷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유다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포로로 끌려온 지 25년이나 지나고, 예루살렘과 성전이 무너진 지도 14년이나 지나, 더 이상 돌아갈 소망이 없다고 여길 때에, 하나님께선 제비로 뽑은 땅에 성소와 제사장들의 거처를 지을 것과 레위 사람들의 마을들을 세울 것을 명하시고,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실 땅에 대해서 말씀하여 주심으로 소망을 주셨습니다.
또한 저울을 바르게 사용할 것과 절기들을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전에 저울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았으며, 여러 절기들을 신앙의 명절로 바르게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우리가 그런 것들을 가지고 누릴만한 능력과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비 뽑아 주셨기 때문임을 잊지 않게 하여주시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절기를 바르게 지킴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걸어야 할 길을 걷는 ‘믿음의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는 제비 뽑아 나누어 주는 땅은 거룩한 곳이며, 성소를 위한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거룩’은 ‘구별’입니다. 당신의 삶의 영역에 구별된 곳은 어디입니까? 당신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별하고 있습니까?
2.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정직한 행함은 저울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삶에서 바른 저울(원칙)을 사용함으로 얻은 유익과 바르지 못한 저울(원칙)을 사용함으로 겪은 낭패는 무엇이었습니까?
3. 하나님께서는 새 땅에서도 유월절(무교절)과 초막절(장막절, 수장절) 등을 지킬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당신이 얻은 구원을 어떻게 승화시키고 있습니까?
4. 삶의 자리를 거룩되게(구별되게) 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의 길을`` 걸으며,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에스겔 45장 이스라엘의 중심인 성전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땅을 나누어줍니다.
그들은 지금은 바벨론의 포로가 된 상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에 돌아가서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미 지어진 성전을 보여줍니다.
확실하게 측량까지 하게 하십니다.
조감도를 보고 성전 모형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땅에다 옮겨놓습니다.

오늘 말씀은 땅을 회복할 때 이렇게 땅을 분배하라고 합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데 그것이 이루어질 때 이렇게 하라고 합니다.
44장에는 제사장들의 임무를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 주실 복이 나옵니다.
45장은 땅의 분배와 그들이 드릴 예물을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구역(1절)

이스라엘 사람은 제비를 뽑아 땅을 나누어 유산을 삼을 것입니다.
그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주께 예물로 드려야 합니다.
그 땅의 길이는 이만 오천 자요, 너비는 이만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구역 전체는 사방으로 어디나 거룩합니다.
먼저 성전을 지을 땅을 정하라고 합니다.
그들이 얻을 땅 중에 성전을 먼저 정하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땅을 분배한 것을 무효화합니다.
이제 다시 분배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통일되어 북한에 가면 그곳에는 그 소유권은 정부가 가지고 있습니다.
땅문서를 가지고 가면 그 땅과 집이 내 것이라고 하면 문제가 많아집니다.
지금까지 소유권은 무효화하고 다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은 망한 것으로 모든 소유권은 무효입니다.
나의 모든 소유권은 깨끗이 버리고 예수님 믿은 후 다시 시작합니다.
가치관도 새로 시작해야합니다.
예전의 것은 다 없어지고오늘 받는 것은 다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 가졌던 모든 것은 다 무효입니다.
예수님 믿고 지어지는 것만이 새롭게 받는 선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가치의식입니다.
그때 먼저 성전을 정하라고 합니다.
미국을 개척한 청교들이 먼저 지은 것이 교회입니다.
다음에 학교를 지었습니다.
다음에 집을 지었습니다.
제일 좋은 자리가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다음에 자녀들입니다.
다음이 나 자신입니다

죠이 선교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Joy Mission).
죠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째, 제이(J)는 예수(Jesus)
둘째, 오(O)는 다른 사람들(Others)
셋째, 와이(Y)는 네 자신(Yourself)라고 강조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순서는 먼저 예수님을 위하여 그 다음에는 이웃들을 위하여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를 위하라는 교훈입니다.
성경적인 이해라고 하겠습니다.


성소의 땅과 레위인의 땅(2-6절)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그 한가운데를 성소로 배정합니다.
그 땅은, 길이가 오백 자요 너비도 오백 자로서, 사방으로 네모 반듯 하여야 합니다.
그 둘레에는 사방으로 너비가 쉰 자인 빈 터를 두어야 합니다.
그들이 재어 놓은 전체 구역의 한가운데를 성소로 삼습니다.
그 길이가 이만 오천 자요 너비가 만 자 되는 땅을 재어 놓고, 그 한가운데를 성소, 곧 가장 거룩한 곳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 곳은 그 땅에서 거룩한 구역입니다.
이 땅은 성소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제사장들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직무를 수행하려고 주께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곳은 그들이 집 지을 자리와 성소를 앉힐 거룩한 구역이 될 것입니다.
이런 땅의 분배는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땅의 분배입니다.
그 땅중에 가운데를 구별하여 하나님의 땅으로 드러야합니다.
그 가운데를 제사장에게 주고 성소를 지어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먹고 살아야하므로 항상 제사장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레위인과 제사장을 대신 삼아서 자신을 대신하여 드리게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먹는 것과 자는 것은 일반성도들이 책임져야합니다.
일반평신도들이 열심히 돈을 벌어서 십분의 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드립니다.
그것은 전임사역자를 위해서 사용합니다.
성도들이 주님께 드리므로 성도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도 거룩한 일입니다.
그것도 예배입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도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건강도 주시고 일할 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으므로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평일날 일하는 것도 주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길이가 이만 오천 자에 너비가 만 자 되는 나머지 땅을, 성전에서 시중드는 레위 사람들에게 재산으로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 안에 레위인이 성읍을 세우게 해야 합니다.
그들은 거룩하게 구별하여 예물로 드린 구역 옆에, 너비가 오천 자요 길이가 이만 오천 자인 땅을, 그 성읍의 재산으로 지정해야 합니다. 그 땅은 이스라엘 사람 전체의 몫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체 가운데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 차지합니다.
그들은 가운데에서 시작하여 제사장의 땅-레위인의 땅- 성전을 섬기는 이스라엘 사람의 땅을 분배하여 줍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중심이고 하나님을 가까이서 섬기는 사람들이 그 중심을 이루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은 농사짓는 곳입니다.
집을 짓고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땅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 땅을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땅의 주인입니다.
우리에게 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땅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헤로 주신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표시로 가운데는 하나님께 드려야합니다.
레위사람들을 위해서도 구별하여 드러야 합니다.
나머지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서 주어 살게 해야합니다.
열두지파에서 착출되어 성전이나 성읍을 위해서 하는 일을 합니다.
서로 돌아가며 일을 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대청소를 할 때 서로 돌아가며 일을 합니다.
그들이 머무는 것입니다.
그들도 주의 일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왕의 땅(7-8절)

거룩하게 구별하여 예물로 드린 땅과 그 성읍의 소유지의 양쪽으로 펼쳐진 구역은, 왕의 몫입니다.
이 구역은 서쪽으로 서쪽의 해안선까지이고, 동쪽으로 동쪽의 국경선에 이르기까지입니다.
그 길이는, 서쪽의 경계선에서 동쪽의 경계선에 이르기까지, 들의 구역과 같아야 합니다.
이 땅이, 이스라엘에서 왕이 차지할 땅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세운 왕들이 더 이상 땅 때문에 내 백성을 탄압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에게도 그들의 각 지파에 따라서 땅을 차지하게 할 것입니다.
왕에게 주는 땅이 넓습니다.
전국토의 삼십분의 일을 줍니다.
이전에는 이스라엘 전체의 땅이 왕의 땅이었습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일정한 지역만을 가져야합니다.
그는 치안 국방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잘 유지되려면 치안 국방을 섬겨야합니다.
이들은 정부이고 공공 기관들입니다.
이 공공기관들이 잘 운영되는 대로 서포트합니다.
우리는 이들을 위해서 세금을냅니다.
세금을 내는 것도 예배입니다.
교회가 예배드리고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 공공기관이 필요합니다.
그 일을 일반 백성들이 해야합니다.
왕에게 바치는 것도 세상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예배입니다.
세금을 포탈하여 하나님께 십일조내는 것은 안 됩니다.
왕에게 돌릴 것은 왕에게 돌려야 합니다.
왕이 더 이상의 욕심이 내지 못하게 해야합니다.
왕은 왕대로 일반백성은 백성대로 살게 해야합니다.

공평한 통치(9-12절)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이제는 폭행과 탄압을 그만해야 합니다.
그들은 만족해야합니다.
그들은 폭행과 탄압을 그치고, 공평과 공의를 실행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착취하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충분히 받았다고 하십니다.
왕이 가난하면 백성을 괴롭힙니다. 배고픈 사람을 정치가 만들면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그 땅으로 족하게 해야합니다. 백성들을 빼앗아 먹지 말게 해야합니다. 충분한 땅을 주어 백성을 괴롭히지 말아야합니다. 말단 경찰들이 매우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월급이 얼마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살기 어려울 정도가 되면 부정의 대상이 됩니다. 왕과 공무원도 정직해야합니다. 이스라엘은 공의로워야 합니다. 그들은 정확한 저울과 정확한 에바와 정확한 밧을 써야 합니다. 에바와 밧은 용량이 같아야 합니다. 한 밧은 호멜의 십분의 일을 담고, 한 에바도 호멜의 십분의 일을 담도록 하여야 합니다. 호멜을 표준으로 삼고, 에바와 밧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한 세겔이 이십 게라가 되게 하고, 이십 세겔 짜리와 이십오 세겔 짜리와 십오 세겔 짜리를 합하여 한 마네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저울이나 자가 정확해야합니다. 공의가 나라를 평안하게 합니다. 의를 떠나면 아무도 권력자의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회를 정직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 밖에서 하는 일도 다 주의 일입니다. 우리 주위를 다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야합니다.

마땅히 드릴 예물(13-15절)

이스라엘 사람이 마땅히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칠 제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밀은 한 호멜 수확에 육분의 일 에바를 바치고, 보리도 한 호멜 수확에 육분의 일 에바를 바쳐야 합니다.
기름에 대한 규례를 말하면, 기름은 한 고르 수확에 십분의 일 밧을 바쳐야 합니다.
한 고르가 한 호멜 또는 열 밧과 같은 것은, 열 밧이 한 호멜이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세금을 내야합니다.
이스라엘의 물이 넉넉한 초장에서, 양 떼의 수가 이백 마리가 될 때마다, 백성은 어린 양을 한 마리씩 바쳐서, 그들을 속죄하는 곡식제물과 번제물과 화목제물로 삼도록 하여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왕이 드려야할 예물(16-17절)

왕도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입니다.
자신의 본분을 따라서 예물을 다 드려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왕이나 제사장이나 백성 앞에서 다 예배자입니다.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치는 이 제물은 이스라엘의 백성 전체가 이스라엘 왕에게 넘겨 주어야 합니다.
왕은,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성회 때마다 번제물과 곡식제물과 부어 드리는 제물을, 공급할 책임을 집니다.
그는 속죄제물과 곡식제물과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공급하여, 이스라엘 족속이 속죄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유월절(18-22절)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첫째 달 초하루에는 언제나 소 떼 가운데서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를 골라다가 성소를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의 피를 받아다가 성전의 문설주들과 제단 아래층의 네 모서리와 안뜰 문의 문설주에 발라야 합니다.
제사장은 그 달 초이렛날에도, 고의가 아닌 사람이나, 알지 못해서 범죄한 사람을 속죄할 때에, 그와 같이 하여야합니다.
이렇게 성전을 속죄해야 합니다.
첫째 달 열나흗날에는,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켜야 합니다.
이 절기에는 이레 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어야 합니다.
그 날 왕은 자기 자신과 이 땅의 모든 백성을 위하여 송아지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유월절 예배(23-24절)

그는 이 절기를 지내는 이레 동안 주님께 드릴 번제물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레 동안 날마다 흠 없는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와, 숫염소 한 마리를 날마다 속죄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곡식제물을 함께 갖추어서 바쳐야 하는데, 수송아지 한 마리에는 밀가루 한 에바이고, 숫양 한 마리에도 밀가루 한 에바이고, 또 밀가루 한 에바마다 기름 한 힌씩을 바쳐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초막절(25절)

그는 일곱째 달 보름에 시작되는 초막절에도 이레 동안 똑같이 하여, 속죄제물과 번제물과 곡식제물과 기름을 바쳐야 합니다.
그들은 사십년 광야 생활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하나님이 계획한 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에스겔 44장요약

에스겔 44장은 하나님이 들어오신 동편 문에 대한 출입제한으로 시작합니다.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와 바벨탑사건처럼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철저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속도제한이 운전자의 안전운행에 목적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한계 곧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실존을 아는 것은 에덴의 조건, 곧 행복한 삶을 위한 조건입니다.

이스라엘의 타락은 예배의 타락이었고 이스라엘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에 달려있다.
제사장에게 엄격한 자격을 요구하시는 까닭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척도가 바로 예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제사장에게 본래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책무가 있음을 밝히며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권리를 보장해주고 있다.
제사장은 목회로 돈 벌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예배자는 제사장이 고유에 업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마땅히 힘써야 한다.

1.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리

➀ (1절~3절)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찌니 아무 사람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 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찌니라’

▶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 문을 통해 성소에 임재하신 후에 문은 폐쇄 되고 ‘아무 사람도’ 출입하지 못하게 제한되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분은 하나님의 무한성과 인간의 유한성 곧 인간의 한계를 증거 한다.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선악과 사건(창3:5)과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려했던’ 바벨탑 사건(창11:4)은 하나님과 같이 되어 하나님 노릇하려는 인간의 교만으로 인한 실낙원의 근본원인을 고발한다. 속도제한의 목적이 운전자의 안전운행에 있는 것처럼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을 구분하는 지혜가 행복한 삶의 조건임을 증거 한다. 3절 ‘왕인 까닭에’는 왕에 대한 예외규정이 아니라 세상의 어떤 권세자조차도 하나님의 문으로는 출입할 수 없음을 나타내며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위를 드러내고 있다.

➁ (4절~5절) ‘너는 전심으로 주목하여 내가 네가 말하는바 여호와의 전의 모든 규례와 모든 율례를 귀로 듣고 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를 전심으로 주의하고’

▶ ‘북문을 통하여 전 앞에 이르시기로’ 제사장이며 대언자인 에스겔조차 출입제한 규정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인간이 취할 마땅한 자세다. ‘전심으로 주목하여 전심으로 주의하고’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예배자인 인간의 관계 곧 에스겔 성전이 전하는 메시지는 참고사항이나 선택사항이 아니라 전심으로 주목해야만 하는 생사가 달린 필수사항임을 경계한다.

2. 레위인의 패역

➀ (6절~9절)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이 족하니라’

▶ 이스라엘의 타락은 예배의 타락이었고 예배의 타락은 성전과 그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들의 타락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소에서 범한 추악하고 역겨운 짓을 세 가지로 기록한다. (7절)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을 성소에 들인 것, (8절) 성물의 직분을 지키지 아니한 것, (9절) 내 성소에 사람을 두어 너희 직분을 대신 지키게 한 것 등이다. (막11:16)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누구나 성소에 들어갈 길이 열려있지만 아무나 성소의 일을 감당할 순 없다. 자기부인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무자격자들에 의해 예배가 타락했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예배를 안 드린 것이 아니다. 온전하고 합당한 예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➁ (10절~11절)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 레위 사람도 그릇하여 그 우상을 좇아 나를 멀리 떠났으니 그 죄악을 담당하리라’

▶ (출32:1~4)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의 우상은 백성들의 강요로 시작되었다. (출32:21~25)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아론은 우상숭배의 원인을 백성들의 완악함으로 돌려 책임을 전가하려 했지만 백성의 타락은 지도자인 제사장의 과실에 있었다. 한국교회의 기복주의와 성장주의는 타락한 제사장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의 요구대로 지도자들을 길들이는 타락한 백성들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책임은 백성들을 무분별하게 추종했던 타락한 제사장들에게 있다.

③ (12절~14절) ‘내게 가까이 나아와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며 내 성물 곧 지성물을 가까이 못하게 하리니...그러나 내가 그들을 세워 전을 수직하게 하고 전에 모든 수종 드는 일과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맡기리라’

▶ 레위인들은 본래 성물과 지성물을 드리는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백성들을 견인하지 못한 우상숭배에 대한 모든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본래적인 역할은 박탈되고 역할이 강등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회를 주시지만 부르심에 합당하지 못하면 그 책임과 죄과를 면할 수 없다.

3. 제사장의 자격

➀ (15절)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찌니라’

▶ 고위공직자들에게 엄격한 기준을 요구되는 이유와 제사장의 철저한 자격을 강조하는 이유는 동일하다. 공정한 국가를 위해 공정한 관리의 등용이 요구되는 것처럼 거룩한 성전의 회복은 거룩한 제사장들의 출현에 달려있다. 제사장의 자격을 이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척도는 ‘예배’다. 예배의 회복은 제사장들에게서 시작된다. 사람(제사장)이 아니라 역할(예배)의 중요성이다. 제사장은 세속적인 권위나 특권이 아니라 고유한 역할에 따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막중한 권한과 지위를 행사하는 고위공직자(공무원)에 대한 철저하고 엄격한 규제와 자격이 요구되는 것처럼 거룩하고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는 제사장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필수다.

➁ (16절~19절) ‘수종들 때에는 양털 옷을 입지 말고 가는 베옷을 입을 것이니...그들이 바깥뜰 백성들에로 나갈 때에는 수종드는 옷을 벗어 거룩한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을찌니’

▶ 제사장은 값 비싸고 사치스러운 의복이 아니라 사무엘처럼 세마포 에봇을 입는 청빈함과 백의종군하는 겸비한 태도가 요구된다. 제사장의 예복에 대한 환복의 규례는 성전 안에서 예배의 목적으로만 써야지 자기자랑이나 자기과시의 수단으로 삼으면 안 된다.(스톨과 클러지셔츠)

③ (20절~27절) ‘그 머리털을 깎기만 할 것이며...시체를 가까이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못할 것이로되’

▶ 단순히 헤어스타일이 아니라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단정함, 절제(포도주), 결혼, 가르치며, 규례대로, 절기를 지킬 것을 강조한다. 솔선수범은 모든 지도자의 기본 자질이다. 제사장은 신앙생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본보기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삶으로 전하는 것만 남는다. 직분이 아니라 직분에 합당한 삶 곧 인격(도덕성)과 역량(자질), 기준(자격)을 요구한다. 겉만 번듯한 함량미달의 거짓선지자를 분별하는 기준은 열매(삶)로 나무를 알 수 있다. 말이 아니라 삶을 보면 숨은 정체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4. 제사장의 생업 – “목사로 돈 벌 생각 하지 마라”

➀ ‘그들은 기업이 있으리니 내가 곧 그 기업이라...나는 그 산업이 되리라’

기업이나 산업은 ‘생업’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일에만 전무하는 제사장의 생계수단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친히 먹이시고 입히시겠다는 약속이다.
앞서 제사장으로써의 지엄한 책무와 더불어 그에 따른 제사장에 주어진 정당한 권리를 증거하고 있다.

(고전 9:7~14)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사도바울은 사역자들의 의무(헌신)만 강요하고 권리(생활)를 보장하지 않는 야박하고 이기적인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전임사역자의 생존권을 역설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척도인 예배(제사장), 곧 영혼의 문제는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다.
사역자는 필요이상의 것을 구하지 말고 자족해야 하고 공동체는 필요를 채워서 본연의 역할에 전무할 수 있는 책임을 담당해야 한다.
전임사역자의 사례는 교육공무원(교사) 수준이 적절하다.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주지 말고 신앙생활에 초점을 두게 하고 교인들은 영혼의 교사인 목회자의 중요성을 알고 처지와 형편을 자신의 삶처럼 돌아보는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➁ (29절~30절)
‘또 각종 처음 익은 열매와 너희 모든 예물 중에 각종 거제제물을 다 제사장에게 돌리고 너희가 또 첫 밀가루를 제사장에게 주어 그들로 네 집에 복이 임하도록 하게하라’

제사장과의 관계에서 복이 온다는 말은 제사장의 특권이 아니라 예배(제사장)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예배의 성공은 삶의 성공으로 연결된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말씀은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데 두라는 데 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리라’는 말씀은 마음(영혼)에서 참된 삶이 나온다는 말이다. 제사장이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본뜻은 여기에 있다. 학교생활의 원칙은 교사를 신뢰하고 존중해야 배움이 있고 유익이 있다. 수업시간이 즐겁고 재미있어야 학습능률도 오른다. 제자훈련의 제1원칙 ‘지도자를 신뢰하고 존중하라 그렇지 않으면 별 유익이 없을 것이다’ 교사가 학습의 통로인 것처럼 목사와의 관계가 풍성한 신앙생활의 열쇠라는 의미다.

누가복음 10:1~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고위공직자(공권력)의 권위가 본래적인 직무에만 국한 되듯이, 복음을 전하는 자는 오직 보내신 분의 뜻만을 ‘그대로’ 전달하는 책무를 수행해야 한다. 자기 생각과 판단, 사리사욕 내세우면 안 된다. 이것이 전제될 때 비로소 말씀을 전해 듣는 사람은 메신저의 말이 아니라 보내신 분의 말로 경청해야 한다.

③ ‘무릇 새나 육축의 스스로 죽은 것이나 찢긴 것은 다 제사장이 먹지 못할 것이니라’

유한양행의 설립자인 유일한박사의 조카 유승흠 이사장(한국의료지원재단)은 <유일한 정신의 행로> 라는 책을 소개하며 ‘의사로 돈 벌 생각마라’는 백부의 말씀을 늘 새겼다고 말한다.
재개발지역 건물매입으로 인한 청와대 대변인 사퇴는 일반인과의 구별되는 고위공직자의 엄중한 책무를 보여준다.
정치(공직)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본문이 전하는 제사장에 관한 모든 규례는 한마디로 ‘목회로 돈 벌 생각 말라’는 뜻이다.
‘사자는 썩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 생존의 본능이자 생존의 원칙이다.

목회자는 구별하여 감사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 믿음의 헌신으로 드려진 예물로 자족해야 한다.
사리사욕을 버리고 자존감을 지키고 눈앞에 이익보다 자부심을 지켜내야 한다.

오늘날 목회현장의 비극은 제사보다 젯밥에만 관심 있는 제사장들이 판을 치는 까닭에 존중과 신뢰할 만한 목회자를 찾기 힘든 현실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예배)는 뒷전에 두고 장자의 축복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에서’와 같은 신앙인들, 본래적인 사명을 망각한 세상일에만 빠져 있는 교인들이 더 많은 현실이다.
사도바울과 데살로니가교인들의 관계처럼 목회자는 교인들을 하나님 앞에 결산할 대상처럼 섬기고, 교인들은 목회자를 존중하고 신뢰하는 아름다운 동행이 이루어지도록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천사, 그룹, 스랍의 차이

1. 천사들(angels) 

천사는 하나님의 심부름꾼과 같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을 도와 천국의 것을 이 땅에 전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천사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악한 세력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막으며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마태복음 18: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천사는 본질적으로 육신을 갖고 있지 않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지만 천사는 헬라어 <앙겔로스>로 남성명사로 쓰여진 것과 같이 천사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에 주로 남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세기 18:1-2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성경에서는 천사의 수가 무수히 많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천사의 수는 무수히 많지만 그룹이나 스랍과 같은 천사는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 그룹(cherub), 그룹들(체루빔-cherubim) 

그룹에 대한 첫번째 언급은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해 더 이상 에덴동산에서 살 수 없을 때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에덴동산에 근접하지 못하게 막기 위해 화염검과 그룹을 두셨습니다. 

창세기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그룹'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케루브>인데 이곳에 남성 복수형 어머인 <>이 붙어 <케루빔>으로 불려집니다.
그래서 <케루빔>이라고 하면 '그룹들'이란 복수형태가 됩니다. 

그룹은 성경에 자주 언급이 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매우 친밀하게 다가오는 것은 지성소의 그룹들입니다.
지성소에는 언약궤(Ark of Covenant)가 있고 언약궤의 뚜껑을 시은좌(mercy seat) 혹 속죄소라고 부르는데 그 속죄소에는 두 그룹이 붙어 있습니다.
두 그룹이 속죄소와 함께 정금으로 만들어져서 마치 언약궤를 감싸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5:20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그룹은 하나님을 보좌하였습니다.
그룹은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마다 함께 했습니다.
일종의 하나님의 호위군사와 같은 성격을 띄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삼상 4:4)"
또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삼하 6:2),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왕하 19:15),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사 37:16)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삼하 22:11),
"그룹을 타고 다니심이여"(시 18:11)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확연하게 운행하는 그룹들을 보았는데 그룹들은 모두 네 날개와 네 얼굴을 지닌 생물(living creatures)이었습니다.

에스겔 1:5-10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 같이 빛나며.
그 사면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그 네 생물의 얼굴과 날개가 이러하니.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에스겔이 본 그룹은 에스겔 10장에서도 다시한번 보게 됩니다.
에스겔이 본 그룹은 네 생물의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사람, 소, 사자, 독수리의 모양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각 생물에 네 개의 형상을 띄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사도요한이 바라본 네 생물과는 약간 다른 점이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바라본 네 생물 역시 사람, 소, 사자, 독수리의 모양을 띄고 있기는 하지만 각각의 생물마다 한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에스겔이 본 그룹은 네 개의 날개가 있는 반면에 사도요한이 보았던 네 생물은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3. 스랍(Seraphs)

스랍(Seraphs)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사라프>로서 '불뱀(fiery serpent)' 또는 '스랍'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랍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천사로서 언제나 주님의 보좌에 함께 합니다.
만일 스랍이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다면 그는 '불뱀'이 되고 맙니다.
사탄은 원래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새벽별'이라 불리울 정도로 천사들 중에 매우 뛰어난 존재였지만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을 거부하였음으로 그는 '불뱀'이 된 것입니다. 

이사야 14:12-14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이처럼 스랍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경배하지 않는 스랍은 '불뱀'이 되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도 똑 같이 적용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아니하고 경배하지 않을 때 우리 역시 '불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물어 죽임으로  더 이상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스랍은 그룹과 상당히 비슷한 천사계급입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부분이 있는데 그룹이 하나님의 호위 군사라고 한다면 스랍은 성가대원과 같습니다.
그룹은 하나님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큰 임무이지만 스랍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은 '그룹'의 임무와 '스랍'의 임무를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서 6장에 언급되고 있는 스랍은 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였으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정결케 하였다.

이사야 6:2-3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도요한은 열린 하늘 문으로 이끌리어 그곳에 계신 주님을 보았으며 보좌에 함께 하고 있는 네 생물을 보았습니다.
네 생물을 보았다고 해서 그 네 생물이 에스겔이 보았던 네 생물과 같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에스겔이 본 네 생물은 그룹이었지만 사도요한이 본 네 생물은 스랍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사도요한이 본 네 생물이 그룹이 아닌 스랍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6-8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 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사도 요한이 바라 본 네 생물은 이사야가 바라 본 스랍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였습니다.
스랍은 그룹과 달리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데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날개로는 공중에 날 수 있었습니다.
저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린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존경심과 두려움에 의한 것입니다.
또한 저들이 발을 가린 것은 존귀하시고 고귀하신 주님 앞에서 스스로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스랍처럼 주님께 나아갈 때 존경심과 두려움과 함께 겸손함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城)의 8개 문

성경에 미문, 양문, 동문 등 예루살렘 성의 문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곳이 있다.
예루살렘의 8개 성문을 동쪽에 있는 사자문에서 시작해서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 마지막 동문까지 돌아본다.
지금 예루살렘 성의 8개 문 중 7개의 문은 현재까지 사람이 드나들고 있다.

예루살렘 성의 8개 문

예루살렘 성의 8개 문

사자문은 성경에서는 양문(Sheep Gate)으로 나오며. 스데반문(St. Stephen's Gate) 등의 이름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비아 돌로로사, Via Dolorosa)의 시작점이다.

​이 문을 사자문이라 하는 것은 문 꼭대기 좌우에 각각 두 마리씩 전부 4마리의 사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자문은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건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자문은 스데반문이라고도 한다.
그 이유는 예수 복음을 전하던 스데반이 이 문밖으로 끌려 나와서 청년 사울(바울) 앞에서 돌에 맞아 순교한 곳이기 때문이다(행 7:54-60).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양문(사자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앉아 있었던 38년 된 병자를 말씀으로 고치신 기록이 나온다(요 5:1-11). 이 베데스다 연못이 양문 바로 옆에 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날은 안식일이니.​

요한복음 5:-11

오늘날의 베데스다 연못이다. 연못 물은 말랐지만 연못터는 여전히 남아 있다.

양문 안에 있는 오늘날의 베데스다 연못

사자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까지 가셨던 길인 십자가의 길,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의 시작점이다. 사자문 바로 안에 그 당시의 빌라도 법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빌라도 법정 터는 지금은 초등학교(Umariya Elementary School)가 세워져 있다.

빌라도 법정 자리에 있는 초등학교, 비아 돌로로사 1지점

이스라엘 성(城) 북쪽에 있는 이 문을 헤롯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근처에 예수님 당시 유대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의 집과 집무실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 문의 히브리 이름은 꽃문(Flowers Gate)이다.

유대인의 고소로 빌라도 앞에 끌려온 예수님을 심문한 빌라도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이유로 예수님을 당시 유대 왕이었던 헤롯에게 보내는데(눅23:1-7) 그때 헤롯의 집무실이 이 문 근처에 있었다.

꽃문, 헤롯문

예루살렘 성 북쪽에 있는 다메섹(다마스쿠스) 문은 수리아(시리아)의 수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있는 문이다. 이 문을 통해서 세겜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유대인 세겜문(Shechem Gate)이라고 부른다.

사도행전 9장에 예수를 믿는 자를 잡아 가두던 일에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의 영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사울이 통과한 길이 현재 다메섹 문이 있는 길이다.

새문은 1889년 건축된 것으로 예루살렘 성문 중 가장 최근에 생긴 문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예루살렘 성 외부의 기독교인들이 당시 술탄에게 예수님 무덤이 있는 기독교인 구역으로 들어가는 문을 만들어 달라고 청원해서 만들어진 문이다.

예루살렘 성의 8개 문

영어식 발음은 자파 게이트가 맞는데, 성경에서 욥바로 번역해서 욥바문으로 적는다. 욥바는 지중해 해안에 있는 항구도시로 선지자 요나가 다시스로 떠난 항구이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내륙의 니느웨(Nineveh, 당시 앗수르 제국의 수도, 현재 이라크 지역)로 가서 회개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요나는 지중해를 건너 다시스(Tarshish, 현재 스페인 남부 지브롤터 근처)로 가려고 항구도시인 욥바로 가서 배를 탄다. 예루살렘에서 욥바로 가는 길에 있는 문이 욥바문이다.

예루살렘 성이 시온산에 지어졌는데, 시온산의 정상은 시온문 앞에 있다. 시온산 정상 앞에 있는 문이 어서 시온문이라고 한다. 현재 시온문과 옆의 성벽을 보면 총탄 자국이 많은데, 이는 1967년 발발한 3차 중동전쟁(6일 전쟁) 때의 탄흔이다. 1967년 이전에는 예루살렘 성이 요르단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6일 전쟁 때 이스라엘이 무력으로 점령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 문을 분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2세 경 이곳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 내의 오물(분뇨, Dung)을 버렸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의 남동쪽에 있는 문으로 지금은 성전산이나 통곡의 벽으로 갈 때 대부분 이 문을 통과한다.

동문은 성경에서 황금문(Golden Gate), 수산문(Shushan Gate), 미문(Beautiful Gate) 등 아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 문은 예루살렘 성 외부에서 예루살렘(솔로몬) 성전으로 바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인데, 지금은 예루살렘 8개 문 중 유일하게 폐쇄된 문이다. 동문 바로 앞에는 기드론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 건너는 겟세마네 동산이 있는 감람산이 있다.

예루살렘 성 동문의 위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찍은 동문 사진. 굳게 닫혀 있다.

하나님 영광이 들어가는 문

동문은 성경에서 의미가 매우 깊은 문이다. 구약성경 에스겔서 43장을 보면 에스겔이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것을 기록하고 있다.

동문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으로 임하는 문이다.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그 모양이 내가 본 환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환상 같고 그발 강가에서 보던 환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

에스겔 43:1-5

닫혔으나 열린 문

그런데 에스겔 44장에서 여호와께서 친히 동문을 닫아 두어라고 말씀하셨다(겔 44:1-2). 하지만 이어서 44장 3절에는 왕은 이 문으로 들어와서 음식을 먹을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왕은 영어 성경에서는 왕자(Prince)로 번역되어 있는데. 반즈 주석(Barnes Note)에서는 이 왕자가 메시아(Messiah)이며, 메튜헨리주석(Mattew Henry's Commentary)에서는 죄인을 천국으로 인도할 그리스도(Christ)임에 분명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천국 성전의 문은 죄인에게는 닫힌 문이지만 메시아, 그리스도가 여실 문이라는 말이다. 메시아,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만 천국 문(동문) 안으로 들어가실 수 있고, 우리는 그의 은혜로에 힘입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장면은 종려주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전 입성으로 역사의 현장에서 성취되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의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돌아오시니 그 문이 닫혔더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지니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지니라

왕은 왕인 까닭에 안 길로 이 문 현관으로 들어와서 거기에 앉아서 나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고 그 길로 나갈 것이니라

에스겔 44:1-3

천국으로 가는 황금문

그래서 동문을 천국으로 가는 황금문으로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480장(천국에서 만나보자)은 영어 찬송가 The Eastern Gate(동문)를 번역한 것이다.

찬송가 1절 첫 부분 가사가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날 아침 거기서'인데, 영어 찬송가 가사는 'I will meet you in the morning. Just inside the Eastern Gate.'로 되어 있다.
번역한 우리 찬송가에서 '천국에서 만나보자'를 영어 찬송가 원문에는 '동문 안에서 만나자.'로 되어 있다.

종려주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문

또한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에 이 땅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는데, 그때 동문을 통해 성전으로 바로 들어가셨다.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인 예수님께서 동문을 통해 예루살렘 입성을 하신 것이다(막 11:15).

예수님의 동문을 통한 입성은 에스겔 43과 44장의 환상이 역사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장면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에 힘입어 담대히 천국 성전에 입성할 자격을 얻는 것이다.

종려주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경로. 베다니 → 벳바게 → 예루살렘 동문 → 성전

미문

동문은 미문(Beautiful Gate)으로도 불리는데,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으로 가다 미문에 앉아 있는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고쳐주는 장면이 나온다. 미문은 예루살렘 성 밖에서 성전으로 바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기 때문에 미문에서 구걸을 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사도행전 3:6-10

폐쇄된 문

그런데 천국으로 가는 문인 황금문, 동문, 미문이 지금은 굳게 폐쇄되어 있다. 문이 잠긴 게 아니라 아예 돌로 막아서 성벽처럼 되어 있다.

유대인들과 무슬림은 메시아가 오면 성전 동문을 통해 온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이슬람교도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810년에 무슬림에 의해서 이 문이 폐쇄되었다. 그러다 십자군 전쟁 때 1102년 십자군에 의해 다시 문이 열렸는데 1187년 무슬림에 의해 다시 폐쇄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무슬림들은 성문 폐쇄에 더해서 동문 앞을 완전히 공동묘지로 만들었다.
유대인의 메시아는 부정한 시체를 넘어오지 못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동문은 완전 성벽이 되어 있고 그 앞은 무슬림들의 공동묘지가 감람산 게세마네 동산 앞까지와 기드론 계곡 전체를 덮고 있다.







10-28-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죄악을 담당하리라(에스겔 44:10)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레위 사람도 그릇하여 그 우상을 좇아 나를 멀리 떠났으니 죄악을 담당하리라.
'The Levites who went far from me when Israel went astray and who wandered from me after their idols must bear the consequences of their sin.

그 죄악을 담당하리라(bear the consequences of their sin)
웨나세우 아오남 (וְנָשְׂאוּ עֲוֹנָם)

에스겔 44장부터 46장은 새 성전에서 새 예배에 관한 메시지를 소개합니다.
44장은 에스겔을 인도한 여호와의 권능이 굳게 닫힌 동문을 보여줍니다.
동문은 여호와께서 들어오신 문으로 어느 누구도 그 문을 들어올 수 없습니다.
심지어 왕이라 할지라도 그 문으로 들어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북문을 통하여 전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의 영광(카보드 아도나이)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였으므로 에스겔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전의 모든 규례와 율례를귀로 들어라!
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를 전심으로 주의하라!
패역한 백성들에게는 가증한 일이 족하니라!
심지어 이방인을 성전으로 데려와 전을 더럽혔기 때문에 그 죄악을 담당해야 한다고 선포합니다.

지난 날의 잘못은 반드시 깨닫고 뉘우쳐야 합니다.
그리고 새 성전에서는 백성들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분별하게 해야 합니다.
공의로운 재판을 진행해야 합니다.
모든 법도 율례를 지켜야 합니다.
안식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제사장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단 친족의 경우 즉 부모, 자녀, 형제, 출가하지 않은 누이는 예외라고 하였으나 반드시 정결케 한 후에 칠일을 더 지낸 후 안 뜰과 성소로 들어갈 때는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제사장의 직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거듭 거듭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담당하다(5375) 나사[ nâsâʼ ]  נָשָׂא   

1. 들어올리다.  2. ‘물이 많아서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3. 깃발을 세우다
발음 [ nâsâʼ ]
관련 성경 / 넉넉하다(창 13:6,7), 용서하다(창 18:26, 출 10:17), 듣다(창 19:21), 데려오다(창 45:19), 맹세하다(출6:8), 불러들이다(출10:13), 담당하다(출 18:22, 민 11:17), 메다(출 28:12, 왕상 2:26), 원하다(출36:2), 돌아가다(레5:1),당하다(레5:17, 24:15, 시88:15), 메이다(민4:25), 지다(레16:22, 사22:6), 사하다(민14:19, 시32:5), 이끌다(민31:49), 움키다(삼상17:34), 안다(신1:31, 삼하4:4), 받다(왕상8:31, 신33:3), 들다(삼하18:28, 대상12:24, 사40:26), 실어오다(왕상10:11), 들어가다(왕하2:16), 예언하다(왕하9:25), 교만하다(왕하14:10), 가져가다(왕하23:4), 조사하다(대상27:23), 교만하다(대하25:19), 비방하다(시15:3), 두다(시24:4), 높이다(시93:3, 사52:8), 칭하다(시139:20), 받들다(시143:8), 세우다(사5:26), 짓다(사14:5), 들어올리다(겔3:14), 무성하다(겔17:23), 부르다(겔26:17), 품다(겔39:26), 맺다(욜2:22, 학2:19), 가져가다(암6:10), 제하여 버리다(말2:3), 견디다(창4:13),싣다(창44:1), 태우다(창45:27), 집계하다(민4:2), 일어나다(시89:9), 참다(렘44:22,시55:12), 빼앗다(삼하14:14, 겔38:13), 일으키다(창21:18), 계수하다(민1:2, 31:26), 떠오르다(창 7:17), (소리) 내다(창21:16), 떠나다(창29:1), 눈짓하다(창39:7), 몰아넣다(출10:19), 일컫다(출 20:7, 신 5:11), 전파하다(출 23:1), 운반하다(민 1:50), 돌아보다(신 28:50),(소리를) 높이다(삿21:2, 삼하13:36), 허락하다(삼상25:35), 대면하다(삼하2:22), 나오다(삼하6:3), 보내다(왕상5:9), 떠들다(왕상 13:29), 이끌어가다(왕상 18:12), 뜨다(왕하 19:22), 긷다(대상 11:18), 장가들다(대상 23:22, 24:3), 노략하다(대하 14:13), 운반하다(대하 16:6), 베풀다(에2:9), 소리지르다(욥 2:12), 따르다(욥 13:8), 물다(욥 13:14), 노래하다(욥 21:12), 보다(욥 32:21, 시 82:2), 내다(욥 40:20), 부르다(시16:4), 들리다(시 63:4), 주다(시 72:3), 기쁘게 하다(시 86:3), 치다(시 133:9) 건너다(사 15:7), 날리다(사41:16),탈취하다(호5:14), 제거하다(호14:2), 제하다(단 1:16), 솟아오르다(나 1:5), 쓰다(학 2:12), 받아 주다(말 1:8), 긍휼히 여기다(말 1:9), 실리다(창 45:23), 사모하다(신24:15), 잡다(수6:18, 삿9:54), 이끌다(삼상10:3), 바치다(삼하8:6, 대상18:2), 실어오다(왕상10:22), 짐을 나르다(느4:17), 뿌리다(시126:6), 사유하다(미7:18), 치우치게 하다(말2:9), 존귀하다(왕하5:1, 대하32:23, 욥22:8), 사함을 얻다(시 32:1), 사죄함을 받다(사 33:24), 달하다(렘 51:9), 사로잡다(단 11:12), 돋우다(사 40:4), 안기다(사 66:12), 뛰어나다(사 2:2), 자고하다(사 2:12), 거룩하다(사57:15), 높다(사57:7), 제공하다(왕상 9:11), 끌어가다(암 4:2), 형벌받다(레 22:16), 높아지다(단 11:14), 높은 체하다(잠 30:32), 흥왕하다(민 24:7).
[부] 높이(에 3:1)
구약 성경 / 650회 사용


죄악(5771) 아본[ ʽâvôn ]  עָוֹן 

1. 사악.  2. 부패한 행동. 3. 죄에 대한 징계
발음 [ ʽâvôn ]
어원 / 연계형 עֲווֹן ,עֲוֹן, 대상21:8, 복수 연계형 עֲוֹנוֹת, 57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벌(창 4:13), 죄악(창 15:16, 삼상 3:13, 겔 4:6), 죄(출 20:5, 민 30:15, 애 4:6), 죄책(출 28:38), 악(출 34:7, 신 19:15, 잠 5:22), 허물(레 5:1, 삼하 3:8, 욥 7:21), 불의(레 16:21, 욥 33:9, 사 27:9), 형벌(레 26:41, 느 19:29), 벌(삼상 28:10, 왕하 7:9), 범죄(시 89:32, 겔 4:5), 죄짐(사 43:24), 불의함(호 14:1)
구약 성경 / 229회 사용

이사야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나사)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발)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나가)
    하나님에게 맞으며(나카)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아나)

지고(5375)



당하였거늘(5445)

סָבַל 스트롱번호5445

1.

지다

2.

슬픔이나 죄 등을 지다

3.

푸알형 분사:새끼를 밴

발음 [ çâbal ]
관련 성경
☞당하다(사53:4), 담당하다(사53:11, 애5:7),메다(창49:15), 품다(사46:4), 들다(사46:7),싣다(시144:14). [명] 짐(전12:5).
구약 성경
9회 사용



당한다(6031)

עָנָה 스트롱번호6031

1.

어떤 것에 노력을 가하다

2.

괴롭혀지다

3.

니팔형

발음 [ ʽânâh ]
관련 성경
☞애쓰다(전3:10), 수고하다(전1:13), 곤란하다(시119:67), 고난당하다(시119:71, 사53:4,슥10:2), 겸비하다(출10:3, 스8:21), 굴복하다(사31:4), 괴롭다(사53:7), 괴로워하다(사58:10), 욕보이다(신21:14, 삿20:5), 굴복하게 하다(삿16:5, 시90:15), 쇠약하다(시102:23), 상하다(시105:18), 고생하다(애3:33), 관계하다(겔22:10,11), 해롭다(출22:23), 노래하다(출32:18), 낮추다(신8:2,16), 학대하다(창16:6), 박대하다(창31:50), 학대받다(출1:12), 굽히다(욥37:23), 괴로움 받다(시64:12), 근심하다(시132 : 1), 벌받다(왕상8:35, 대하6:26), 복종하다(창16:9). [명] 곤란(시116:10), 고난(시119:107), 온유함(삼하22:36),
구약 성경
80회 사용



נָגַע 스트롱번호5060

1.

닿다

2.

범하다

3.

여자와 동침하기 위하여 만지다

발음 [ nâgaʽ ]
관련 성경
☞닿다(창3:3, 레5:3, 6:11, 11:24이하, 민4:15사6:7, 단8:5, 학2:12), 모이다(스3:1, 느7:73),때리다(창32:26,33, 삼상6:9, 욥19:21), 부딪히다(겔17:10).
구약 성경
150회 사용



נָכָה 스트롱번호5221

1.

치다

2.

니팔형: 매맞은

3.

피엘형: 피엘형 부정사로 언급된 말 נַכֶּה

발음 [ nâkâh ]
관련 성경
☞맞아 죽다(삼하11:15), 상하다(창37:21, 출9:31), 치다(창32:8, 대상18:9, 말4:6), 죽이다(창34:30, 신19:6), 때리다(민22:28, 신25:3), 쳐죽이다(민35:16), 찔러 넣다(삼상2:14), 살육하다(수10:20, 삼상14:14), 맞다(왕하8:29, 대하22:6), 패하다(렘46:2), 공격을 받다(렘49:28), 멸하다(창8:21), 쳐부수다(창14:17),채찍질하다(민22:23,25), 녹이다(삿20:31), 취하다(렘40:14), 격파하다(수11:8), 죽임을 당하다(민25:14, 삼상4:2), 이기다(삼상17:50), 박다(삼상18:11, 19:10), 찔리다(삼상24:5, 26:8), 찌르다(삼하2:23, 4:6), 자책하다(삼하24:10), 쏘다(왕하9:24, 대하18:33), 박수하다(왕하11:12), 쬐다(욘4:8), 살인하다(민35:11,15, 사66:3), 암살하다(신27:24), (실수로)죽이다(수20:3), 함락되다(겔33:21, 40 : 1),내어주다(렘18:21). [명] 죽임(창4:15), 태형(신25:2), 상처(슥13:6).
구약 성경
504회 사용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αἴρω 스트롱번호142
1.

들어올리다

2.

돌을 올리다

3.

뱀을 집어 올리다

발음 [ airō ]
관련 성경
받들다(마4:6), 가지다(마20:14, 막2:11), 당기다(마9:16), 메다(마11:29), 빼앗다(마25:29), 가져가다(마14:12), 거두다(마15:37, 막8:8), 지다(마16:24, 요1:29), 던지다(막11:23), 깨닫다(마24:39), 뽑다(막15:24), 집다(막16:18), 높이다(눅17:13), 취하다(눅19: 21), 없이하다(눅23:18, 요19:15), 들다(요5:9), 끌어올리다(행27:17), 옮겨놓다(요11: 39), 제하다(요15:2), 데려가다(요17:15), 치우다(요19:31).
신약 성경
101회 사용



새 성전에서의 레위인들의 직무가 그들의 이전 행위에 대한 책망과 함께 기술된다.

레위 사람도 그릇하여...그 죄악을 담당하리라

- 레위 사람들은 우상 숭배에 앞장섰던 죄악(렘 2:8)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 직분을 박탈당하고 대신 더 천한 봉사직으로 격하되었다(11, 13, 14절).

예레미야 2:8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지 아니하며 법 잡은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를 항거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을 좇았느니라.

11.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13.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14.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15. 어린 사자들이 너를 향하여 부르짖으며 소리를 날려 네 땅을 황무케 하였으며 네 성읍들은 불타서 거민이 없게 되었으며.


한편 여기서 책망 대상이 된 레위인은 성전의 모든 잡일을 처리하는 일반 레위인이 아니라 제사 수행의 직책을 맡았던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는 그 제사 직분이 사독의 자손에게 이임된 사실에서 입증된다(15절; 43:19).

43:19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를 가까이 하여 내게 수종드는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에게 너는 어린 수송아지 하나를 주어 속죄 제물을 삼되.

에스겔 43:10
인자야 너는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이 자기의 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

에스겔 43:11
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성전의 제도와 구조와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그들로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


10절에서 언급된 그 죄의 결과가 구체적으로 기술된다.

본절은 문장 초두의 '그러나'가 암시하듯 레위인들의 범죄 결과가 그들의 완전한 파멸이 아닌 직분의 격하에 국한된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 대한 지속적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드러내준다(딤전 1:12 비교).

디모데전서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백성 앞에 서서 수종들게 되리라

- 이러한 직무는 민 16:9에서도 언급된 바 있듯이 일반 레위인들의 직무였다(대상 23:2-5, 24-32;26:20-28;대하 29:34).


에스겔 40장부터 48장까지는 새 성전, 새 예배, 새 땅 등에 관한 에스겔 선지자의 환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 성전의 평면도를 그려볼 수 있는 40장부터 43장에서 성소와 지성소, 출입문, 골방과 제사장의 방, 뜰 등의 위치와 구조를 살펴보았습니다.
40장부터 43장까지는 새 성전의 구조(성소, 지성소, 출입문, 골방, 제사장의 방, 뜰...)
44장부터 46장까지는 새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릴 새 예배의 규례가 나옵니다.

다시 열지 못할지니(1-3절)

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의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돌아오시니 그 문이 닫혔더라

‘그’는 천사이며, ‘나’는 에스겔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천사가 에스겔 선지자를 성소의 동문 밖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동문을 보니 닫혔다고 합니다.
동문이 닫힌 이유를 하나님께서 2절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지니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지니라.

하나님께서 동문을 의도적으로 닫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동문을 통해 성소에 들어오셨는데 그 동문을 닫게 하신 이유는 앞으로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명령을 내리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새 성전을 만드셨고 그 성전에 임재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셨다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해 은혜를 받아 큰 기쁨을 누리도록 하시는 것이 자연스러운 전개입니다.
그렇기에 동문을 닫도록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막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전 밖으로 나가시지 않겠다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은 동문이 아닌 성전의 다른 문을 이용해서 성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성전에서 택한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 하시며 다시는 떠나지 않으시겠다는 조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미래에 예수 그리스도로 세워질 교회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영원히 함께 하심을 예표하시는 것입니다.

3. 왕은 왕인 까닭에 안 길로 이 문 현관으로 들어와서 거기에 앉아서 나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고 그 길로 나갈 것이니라

이는 왕이 하나님 앞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특권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왕이라도 하나님께서 닫으신 동문으로 들어올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왕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다른 문을 통해 성전에 들어와야 합니다. 왕이라도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야 함으로 세상의 높은 권력과 지위를 가지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겸허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전심으로, 주목하여, 귀로 듣고(4-8절)

4.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을 통하여 성전 앞에 이르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한지라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

천사가 동문 밖에서 에스겔 선지자를 데리고 북문을 통해 성전 안뜰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였기에 에스겔 선지자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하나님의 임재로 하나님의 영광을 감지한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가짐은 분명히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가짐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다는 반증입니다. 같은 공간에 교우들과 함께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의 은혜를 다함께 누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에스겔 선지자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5.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전심으로 주목하여 내가 네게 말하는 바 여호와의 성전의 모든 규례와 모든 율례를 귀로 듣고 또 성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를 전심으로 주목하고

하나님께서 성전의 모든 규례와 모든 율례를 지킬 것을 강조하십니다. 5절에서 “전심으로”가 2회, “주목하여”가 2회, “귀로 듣고”가 1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인 성전에서 지켜야할 규례와 율례가 있는데 이 모든 법을 마음을 다하여 눈으로 주목하고 귀로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5절의 표준새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표준새번역) 5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주의 성전에 대한 모든 규례와 그 모든 율례를 너는 명심하고, 네 눈으로 확인하고, 귀담아 들어라. 그리고 성전으로 들어가는 어귀와 성소의 모든 출구들을 명심하여라.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에서 지켜야할 모든 법을 ‘마음’과 ‘눈’과 ‘귀’로 집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5절 끝에 성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를 전심으로 주목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출입이 금지된 문과 제사장이 아닌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는 문을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예배자로서 지켜야할 법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어떻습니까? 에스겔 선지자 환상은 구약 성전 개념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예배, 집회, 모임 등에 확대 적용됩니다. 우리가 주일 예배시간에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드린다고 한다면 성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도 모를 정도의 무분별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6절의 “반역하는 자”, “가증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거룩한 곳에서 과거 이스라엘이 범했던 죄는 과거로 충분했으니 앞으로는 더 이상 그런 가증한 일을 행하는 반역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가증한 일의 구체적인 내용이 7절에 있습니다.

7 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내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내 성전을 더럽히므로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 외에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하게 하는 것이 되었으며

이방인을 성전에 데려온 것 자체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회중에 이방인이 참여하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이방인이 할례를 받아야지만 이스라엘 회중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할례를 받은 이방인은 유월절의 떡을 먹을 수 있고 제사도 드릴 수 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문제를 제기하시는 부분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에게 성전출입과 제사를 위한 성소출입을 허용했던 것입니다. 할례도 형식적인 육체적 할례만을 언급하지 않으시고 마음의 할례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형식이 중요하지 않고 마음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마음의 중심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형식을 갖추더라도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형식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형식이 갖추어질 것입니다.

수종들게 되리라(9-14절)

9절부터 14절의 말씀을 보면 레위 사람들 중 제사장들의 '그릇 행함'에 대해서 나옵니다. 레위 사람들 중 제사장들이 자신의 지켜야할 사명을 어이없게 다른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이로 인해 거룩한 장소에 들어가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0절을 보면, 레위 사람들 중 제사장들이 자신의 일을 부적격한 사람에게 맡긴 '그릇 행함' 이외에도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악에 대한 죄악을 담당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2절을 보면 제사장들은 우상을 위해 수종을 들어 자신들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죄악에 걸려 넘어지게 만들었는데 그 죄악도 그들이 담당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증한 일을 범한 레위 사람들 중 제사장들에게 제사장의 직분을 박탈하시겠다고 합니다. 13절입니다.

13 그들이 내게 가까이 나아와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며 또 내 성물 곧 지성물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들이 자기의 수치와 그 행한 바 가증한 일을 담당하리라

레위 사람들 중에 제사장들이 자기의 수치와 그 행한 바 가증한 일을 담당할 것인데 10절과 14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성전에서 모든 수종드는 일과 그와 관련된 일을 행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성전 일에 귀천이 없겠으나 제사장이 죄악으로 인해 제사 업무를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는 수치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제사장이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제사 업무를 하지 못하겠지만 영구히 성전 밖으로 쫓겨나지 않고 성전에 남아 수종드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완전히 손 놓지 않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하나님의 뜻대로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 귀한 사명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실 것입니다.

직분을 지켰은즉(15-31절)

15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 행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5절의 말씀은 과거 이스라엘 죄악의 역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레위 사람 제사장들 중 사독의 자손은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았습니다.(민25:1-13, 왕상1:38-53, 왕상2:26-27) 이들은 성소의 직분을 지켰습니다. 사독 계열은 엘르아살 계열입니다. 제사장 사독과 달리 이다말 계열의 제사장 아비아달은 하나님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에 섰다가 솔로몬 왕으로부터 파면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 왕을 통해서 성소의 직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레위 사람들 중 이다말 계열 제사장들에게 제사 업무를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다양한 봉사의 직분이 있습니다. 직분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모든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중심의 봉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봉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처소의 직분을 맡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17절에서는 안뜰에서는 양털 옷을 입지 말고 가는 베옷을 입으라고 하십니다. 19절에서는 바깥뜰로 나갈 때에는 거룩한 옷인 베옷을 벗고, 들어오기 전에 입고 들어왔던 옷으로 다시 갈아입으라고 하십니다. 20절에서는 머리털을 밀지도 말고 길게 자라게도 말고 적절한 길이로 이발하라고 하십니다. 21절에서는 안뜰로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십니다. 22절에서는 처녀나 제사장의 과부와 결혼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제사장이 솔선수범할 때에 백성들에게 바른 신앙교육을 시킬 수 있습니다.

23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

제사장이 먼저 구별되어 거룩해질 때에 거룩한 것과 속된 것,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구별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바른 재판을 할 수 있습니다.(24절) 목회자가 바로 서야 교우들이 바로 설 수 있고, 선생님이 바로 서야 학생들이 바로 설 수 있고, 부모가 바로 서야 자녀들이 바로 설 수 있고, 정치인 경제인 법조인 공무원 언론인이 바로 서야 국민이 바로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교회 밖에서도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교회 안팎에서 평화의 연결고리, 평화의 경작자가 될 수 있습니다.

28. 그들에게는 기업이 있으리니 내가 곧 그 기업이라 너희는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그들에게 산업을 주지 말라 내가 그 산업이 됨이라

28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새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의 생활 지원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맡은 자들의 생계는 제사의 제물과 각종 처음 익은 열매로 유지되도록 하셨습니다.
어떤 물질적 지원보다 더 중요한 말씀은 “내가 곧 그 기업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기업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어떠한 경제 활동도 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생계를 책임져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지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시다.
본 구절은 제사장으로부터 축복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물론 복의 수여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물질을 기부한 사람에게 제사장은 복을 빌 뿐입니다.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는 성전 맡은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져 주시듯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기업이 되어 주신다는 점입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 안에 거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 앞에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함을 입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하나님께서 주신 교회 직분을 잘 감당하심으로 교우, 가족, 이웃과 함께 지어져 가시길 바랍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새 성전과 새 예배의 환상을 통해 신약 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보게 하시고, 죄인을 영벌에 처하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바른 예배,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처럼 이 시대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직분과 봉사의 일을 잘 감당하게 하시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잘 섬기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경제적인 어려움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게 하시옵고 오직 하나님께서 나의 기업이 되심을 기억하게 하시옵소서.
오늘 하루,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함을 입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1. 하나님께서 동문을 닫으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 에스겔 선지자가 성전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의 성전에서 “전심으로”, “귀로 듣고”, “주목하여”할 모든 법을 오늘날 예배에 적용해 본다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4.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않는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합당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5.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사명)을 잘 감당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넘긴 레위 사람들의 행동과 그 결과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함께 잘 지어져 가기 위하여 교회에서 맡은 직분과 봉사의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겠습니까?

에스겔 44장 성전에서 제사장이 섬기는 법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가 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그리워하고 사랑합니다.
에스겔에게 앞으로 지어질 성전을 보여주십니다.
들어가보고 측량하고 사방을 둘러봅니다.
단순한 건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에스겔에게 큰 감격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말씀을 들으면 이스라엘은 튼튼합니다.
이스라엘은 국방력으로 튼튼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가 함께 하심으로 강건합니다.

이제 제사장이 성전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새로운 예배를 가르쳐야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일반적인 집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이 계십니다.
그곳에 출입하는 제사장은 거룩해야합니다.

성전 동쪽 문은 닫아 두라(1-3)

그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에스겔을 동쪽으로 난 성소의 바깥 문으로 다시 데리고 가셨는데, 그 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과거에 주님이 떠났던 문입니다.
이제는 주님이 들어간 문이십니다.
주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문은 잠가 두어야 한다.”
문은 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도 이 문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 문으로 들어왔으므로, 이 문은 잠가 두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전에 다시는 나가지 않고 영원히 계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영광과 존귀를 받으십니다.
왕은 인간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왕도 동문으로 들어오지는 못합니다.
왕은, 그가 왕이므로, 남문으로 들어와서 주 앞에서 음식을 먹을 때에 이 문 안에 앉을 수가 있습니다.
성전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왕도 하나님 앞에서 한 인간입니다.
왕도 하나님 앞에서 평등합니다.
왕도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입니다.
왕은 문 현관 쪽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그 길로 나가야 합니다.
성전 안에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증한 일은 족하다(4-5)

또 그가 에스겔을 데리고 북쪽 문으로 들어가서, 성전 앞에 이르렀는데, 거기에서 에스겔이 보니, 주의 영광이 주의 성전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래서, 죄악된 에스겔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예배자는 하나님께 옆드려 경배해야합니다.
주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인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일러주는 주의 성전에 대한 모든 규례와 그 모든 율례를 에스겔은 명심하라고 하십니다.
성전을 섬기는 법을 마음으로 명심해야합니다.
그의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하고,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전으로 들어가는 어귀와 성소의 모든 출구들을 명심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규례를 따라서 바른 예배를 드러야합니다.
에스겔은 저 반역하는 자들, 곧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해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지금까지 역겨운 일을 해도 너무 많이 했습니다.
그들이 행하는 일은 그만해도 충분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행한 역겨운 일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죄가 있으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려야합니다.
이제는 새로운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성전 섬기는 일을 이방인에게 맡긴 제사장들(7-8)

이스라엘 족속은 여호와의 음식과 기름과 피를 여호와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고, 육체에도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 사람들을, 여호와 성소 안에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여호와 성전을 이렇게 더럽혀 놓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지른 온갖 역겨운 일들 때문에, 여호와와 세운 언약을 위반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곤충의 모양을 성전에 그려놓았습니다.
애굽의 우상을 그리기 위해서 우상숭배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또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의 거룩한 물건들을 맡은 직분을 수행하지 않고, 그 일을 이방 사람들에게 맡겼습니다.
그들이 여호와 성소에서 이스라엘 대신에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습니다.
성전에는 할레를 받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궂은 일을 자신들이 하지 않고 이방인에게 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돈 몇푼 주고 하게 하였습니다.
그 일을 아무나 하게 하였습니다.
마음과 몸에 할례를 하지 않은 자는 성전에서 수종들지 못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돈벌기 위해서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는 어떤 일이든지 전부 경건한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예배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은 사람이 해야합니다.
청소도 믿는 사람이 믿는 마음으로 거룩한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전혀 신앙이 없는 사람이 고용되어 일하면 성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성전을 그런 이유로 했습니다.
이들은 우상숭배하는 자입니다.
이방인은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경건하지 않습니다.
이방인이라도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으면 성소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궂은 일이라고 아무나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정성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은 하나님이 택하신 레위인만이 해야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을 거룩히 구별해야 복을 받습니다.

어떤 분이 성전 건축과 정치 경제적인 안정을 주제로 논문을 썼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당을 지을 때 정치 경제가 발전합니다.
예배당이 망하면 나라도 망합니다.
러시아와 동구권을 보면 영광을 누릴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예배당을 미술관으로 술집으로 쓰니 망하였습니다.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려야 그들이 복을 받습니다.
레위인이 성전에서 거룩하게 섬겨야 복을 받습니다.

선교사 역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의사로서 선교하러 갔습니다.
어느날 먼 데서 환자하나가 치료하러 왔습니다.
그의 집이 하루를 걸어도 올 수 없는 길입니다.
새벽이 출발하여 저녁에 왔습니다.
그 중간에 병원이 있는데 여기까지 왔느냐고 합니다.
약은 같지만 의사가 다르다고 합니다.
약을 주는 사람의 마음이 달라서 왔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치료해주어야 낳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느 직분으로 봉사를 하든지 항상 경건함과 정성과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이것이 없이 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고 해야합니다. 성전에 들어갈 때는 발을 삼가야합니다.
이 경건이 중요합니다.
레위 사람이 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거하시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을 통해서 세상일을 하듯이 성전을 섬기게 합니다

레위 제사장들이 타락함(9-11)

그러므로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하십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고 육체에도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여호와 성소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할례는 나의 생식기가 없어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하늘의 뭇별처럼 많은 자손이 되게 하십니다. 과거의 죄악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진정한 할례는 마음에 받는 것이요 마음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겠다고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세례식은 마치 결혼식을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사는 이방 사람도 들어올 수 없다고 하십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를 버리고 떠나서, 우상들을 따라 잘못된 길로 갔을 때에, 레위 제사장들도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갔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우상숭배를 막아야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레위 제사장들도 우상을 섬깁니다. 이방인이 레위인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하는데, 레위인이 그들의 물이 들었습니다. 그들에게 감화를 주지 못하고 영향을 받았습니다. 모든 백성이 타락해도 레위인은 타락해서는 안 됩니다. 레위인이 바로 서야 나라에 소망이 있습니다. 나라에 핵심이 성전에 있고 성전의 핵심은 레위인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면 성전은 무의미합니다. 우리는 성전의 거룩함을 지켜야합니다. 그래서 레위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의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을 잃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을 완전히 쫓아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이제 제사장이 아니라 여호와 성소에서 성전 문지기가 되고, 성전에서 시중드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백성이 바치는 번제물이나 희생제물을 잡고, 백성 앞에서 시중을 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을 회복시킬 가능성을 두십니다.

레위 제사장들을 다시 세우심(12-14)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전에 우상을 섬기는 백성들 앞에서 시중을 들면서, 이스라엘 족속이 죄를 범하게 하였으므로, 이제 여호와가 손을 들어 그들을 쳐서, 그들이 지은 죄의 벌을 받게 하십니다.
레위제사장들은, 이제, 여호와 앞에 가까이 나오지 못하고,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가장 거룩한 것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거룩한 물건에도 가까이 가지 못합니다.
이처럼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수치스러운 일과, 자기들이 저지른 그 역겨운 일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도 여호와는 그들에게, 성전 안에서 해야 할 모든 일들, 곧 성전에서 시중드는 일들을 맡아 보게 할 것입니다.
선택된 자라도 합당하지 않으면 직분을 박탈합니다.
그러나 박탈하는 목적은 그들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독 제사장들(15)

다시 지어질 성전에서 제사장이 해야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에스겔은 포로로 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성전에서 제사장이 해야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신앙인은 이제 끝났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멀리 가야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성전을 보여주고 측량하게 하십니다.
에스겔은 제사장이므로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하나님을 선택해야합니다.
레위인은 첫째 경건입니다.
둘째는 그 일을 마다하지 않아야합니다.
마당을 쓸든지 피를 닦든지 모든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제사 지낼뿐 아니라 부속된 일도 거룩합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모든 규례와 율례를 지켜야합니다.
성전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 거룩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므로 거룩해야합니다.
제사장들은 죄를 지어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에게서 떠나 잘못된 길로 갔을 때에도, 레위 지파 가운데서 사독의 자손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성소에서 맡은 직분을 지켰습니다.
성전이 무너지는 데도 사독의 자손은 거룩함을 지켰습니다.
제사장에는 아히멜렉의 계열과 사독의 계열이 있습니다.
아히멜렉은 반역자 압살롬 편에 서고 아도니야 편에 섰습니다.
솔로몬은 아히멜렉을 수종들지 못하게 하고 아나돗으로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사독은 반역을 들 때마다 항상 다윗 편에 섰습니다.
사독 계열은 계속하여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자입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은 사독계열에게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사독제사장들은 여호와에게 가까이 나아와서 여호와를 섬길 수 있고, 여호와 앞에 서서 여호와에게 기름과 피를 바칠 수 있습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약에 사두개인이 사독의 후손들을 말합니다.
사독이라는 제사장이 많은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 거룩을 지켜서 직무를 다 하였습니다.
제사장 중에 목숨을 걸고 직분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후손이 만든 무리가 사두개인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의미는 퇴색하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바리새교인도 처음에는 구별된 자입니다.
남보다 달리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자들입니다.
세월이 가면서 퇴색하고 교만해진 자들입니다.
사독은 예루살렘이 무너질 때 제사장 직분을 지켰습니다.
그들의 의가 전부를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이 선하였습니다.
그는 이 성은 망한다는 역사의식이 있었습니다.
천사를 어떻게 하든지 대접하고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롯의 의가 소돔고모라를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롯도 그렇게 의로운 사람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는 자신 하나만 구원합니다.
사독은 롯처럼 예루살렘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맡겨진 직분을 생명을 다했습니다.
그는 우상을 섬기지 않았고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사독과 후손이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고 합니다.

제사장들의 구별된 옷(16-19)

사독의 후손들이 여호와 성소에 들어올 수가 있으며, 그들이 여호와 상에 가까이 와서 여호와를 섬길 수가 있으며, 또 여호와가 맡긴 직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안뜰 문으로 들어올 때에나, 안뜰 문 안에서나, 성전 안에서 직무를 수행할 때에는, 양털로 만든 옷을 입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모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성전에서 봉사할 때는 땀이 많이 흐릅니다.
지금처럼 에어컨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와서는 일반적인 털옷을 입으라고 하십니다.
머리에도 모시로 만든 관을 써야 하고, 모시 바지를 입어야 합니다.
허리에도 땀이 나게 하는 것으로 허리띠를 동여서는 안 됩니다.
정결하고 깨끗하게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들이 바깥 뜰에 있는 백성에게로 나갈 때에는, 여호와 앞에서 직무를 수행할 때에 입은 옷을 벗어서 거룩한 방에 두고, 다른 옷을 갈아 입어야 합니다.
백성이 제사장의 거룩한 예복에 닿아 해를 입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나갈 때와 세상으로 갈 때는 구별된 모습을 가져야합니다.
주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목욕도 해야하고 돈도 깨끗한 것으로 구별해야 합니다.

제사장의 구별된 삶(20-22)

제사장들은 머리카락을 바싹 밀어서도 안 되고, 머리카락을 길게 자라게 해서도 안 됩니다.
우상숭배자들은 머리를 밀었습니다.
그들은 머리를 단정하게 잘 깎아야 합니다.
어떤 제사장이든지, 안뜰로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를 마셔서는 안 됩니다.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여야 합니다.
그들은, 일반 과부나 이혼한 여자와는 결혼을 할 수가 없고, 다만 이스라엘 족속의 혈통에 속하는 처녀나, 또는 제사장의 아내였다가 과부가 된 여자와 결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내 백성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도록 백성을 가르치고,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도록 백성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과부와 하지 말고 처녀와 결혼해야 합니다.
혹시 제사장의 과부는 괜찮습니다.
제사장 직분을 결혼보다 더 중시해야합니다.
제사장이 온전한 마음으로 성전에서 섬겨야합니다.
그의 전임으로 성전을 섬겨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이 있는데 가정을 섬기는 부인도 한평생 제사장과 함께 해야합니다.
같은 뜻을 가져야 합니다.
제사장은 사적인 것보다 하나님의 일을 우선시 해야합니다.
부인이 목사 직분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가 분열되고 어지러워집니다.
교회를 섬기는데는 같은 마음으로 섬겨야합니다.
외국에는 교역자들이 이혼하는 경우가 40프로나 됩니다 .
부인이 교역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목사를 계속하면 이혼하겠다고 합니다.
그때 가정보다 교회를 선택하여 이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를 섬길 사람을 구하여 결혼합니다.
가정보다는 교회를 우선시해야합니다.
가정생활이 중요한 것이 뭉쳐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사명(23)

제사장은 항상 제사를 드리고 백성을 거룩하게 해야합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가르쳐야합니다.
제사를 드리고 많은 사람들의 병을 치료도 했습니다.
문둥병의 진단은 제사장이 합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성전에서 가르칩니다.
안식일에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일을 가르쳐야합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들을 수 있는 물건의 무게, 걷는 거리를 가르칩니다.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습니다.
이런 판단을 하는 것이 제사장이 할 일입니다.
거룩하고 속된 것을 제사장에게 물어야합니다.
직장을 해야하는지 옷을 입는 것도 제사장이 판단합니다.
제사장이 이것을 가르쳐야합니다.
생각과 생활을 가르쳐야합니다.

제사장의 정결(24-27)

제사장은 소송이 제기되면, 그들이 판결을 내려 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여호와가 정하여 준 법대로 재판하여야 합니다.
또 내 모든 성회를 지킬 때마다, 여호와의 모든 법도와 율례를 지켜야 하고, 여호와 안식일은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제사장들은 죽은 사람에게 접근하여 제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오직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 형제나 시집 가지 않은 누이가 죽었을 경우에는, 제사장들도 제 몸을 더럽힐 수 있습니다.
그 때에는 제사장인 제 몸을 정하게 한 다음에도, 이레를 지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성소에서 직무를 수행하려고 안뜰에 들어갈 때에는, 자신의 몫으로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제사장도 먼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합니다.
주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야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사장의 기업(28-31)

제사장들에게도 유산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기업을 주십니다.
여호와가 바로 그들의 유산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제사장들에게 아무 산업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가 바로 그들의 산업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책임져야합니다.
그들은 곡식제사와 속죄제와 속건제로 바친 제물을 먹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구별하여 바친 모든 예물이 제사장들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온갖 종류의 첫 열매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것과, 그들이 받들어 바친 온갖 제물은 다 제사장들의 몫으로 돌려야 합니다.
또 그들은 첫 밀가루를 제사장에게 주어서, 제사장으로 말미암아 너희 집안에 복을 내리게 하여야 합니다.
제사장은 직업이 없습니다.
그의 산업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제물로 먹게 합니다.
하나님께 처음 익은 열매를 바치라고 합니다.
좋은 것을 하나님께 바쳐서 제사장이 먹게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복을 받게 하라고 합니다.
제사장 굶어죽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야 복이 임합니다.
제사장들은 새나 짐승들 가운데서 저절로 죽었거나 찢겨서 죽은 것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10-27-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영광(에스겔 43:2)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
not to become easily unsettled or alarmed by some prophecy, report or letter supposed to have come from us, saying that the day of the Lord has already come.


영광(榮光) : 영화 영(榮), 빛 광(光)
- 불 화(火), 덮을 멱(冖), 나무 목(木) =  사람 인(人) + 열 십(十)
- 작을 소(小) + 우뚝할 올(兀)

영광이란 한자를 파자(破字)하면
작은 불이 타오를 때 그것을 덮으면 빛이 된다고 합니다.
작은 불이란 사람이 어렵고 힘든 십자가를 짊어진 후에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감당하도록 도와주셨다는 고백이 덮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영광(榮光)

우케보드 아도나이(וּכְבֹוד יְהוָה)

영광(3519) 카보드[ kâbôwd ]  כָּבוֹד   

1. 무거움.  2. 영광. 3. 사무엘상 4:21
발음 [ kâbôwd ]
어원 / 351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재물(창 31:1), 영화(창 45:13, 삼상 6:5, 시 8:5), 영광(창 49:6, 출 33:18, 대하 1:11, 에 5:11), 존귀(잠 15:33), 귀(貴)(대상29:12, 잠 3:16), 존영(잠 11:16), 영예(잠 25:2, 29:23), 위력(사 8:7), 심령(시 108:1).
구약 성경 / 199회 사용

3068. 여호와[ Yehôvâh ]  יְהֹוָה    

1. 자존자.  2. 영원한 자 : 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발음 [ Yehôvâh ]
어원 / 196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여호와(출 20:7, 레 24:13)
구약 성경 / 7020회 사용


하나님의 영광

여호와의 영광(케보드 엘로헤)  כְּבֹוד אֱלֹהֵי 

영광(3519) 카보드[ kâbôwd ]  כָּבוֹד   

1. 무거움.  2. 영광. 3. 사무엘상 4:21
발음 [ kâbôwd ]
어원 / 351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재물(창 31:1), 영화(창 45:13, 삼상 6:5, 시 8:5), 영광(창 49:6, 출 33:18, 대하 1:11, 에 5:11), 존귀(잠 15:33), 귀(貴)(대상29:12, 잠 3:16), 존영(잠 11:16), 영예(잠 25:2, 29:23), 위력(사 8:7), 심령(시 108:1).
구약 성경 / 199회 사용

하나님(430) 엘로힘 [ ’ĕlôhîym ]  אֱלֹהִים  

1. 신들.  2. 신과 같은 모습.  3.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
발음 [ ’ĕlôhîym ]
관련 성경 /  하나님(창 1:1, 시 109:1, 욘 4:6), 엘엘로헤 이스라엘(창 33:20), 신상(창 35:2, 출 20:23, 신 7:25), 신(출 7:1, 신 4:34, 삼상17:43), 재판 장(출 21:6), 여호와(레 21:7), 여신(왕상 11:5)
구약 성경 / 2603회 사용

1:28. 무지개와 같으니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보좌(寶座) : 왕, 위엄, 통치, 주관자
1:26,  10:1,  26:16,  43:7

43:7a.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이라.


가는 베옷을 입은 사람 : 어린 양 - 구원, 심판
9:2, 3. 11
10:2, 6, 7

10:2.
하나님이 가는 베옷 입은 사람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그룹 밑 바퀴 사이로 들어가서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 들어가더라.

그룹 : 천사
9:3
10:1, 2, 3, 4, 5, 6, 7, 8, 9, 11, 12, 14, 15, 16, 18, 19, 20
11:22
28:14, 16
41:18, 20, 25

10:1.
이에 내가 보니 그룹들 머리 위 궁창남보석 같은 것이 나타나는데 보좌 형상 같더라.

10:3-4.
그 사람이 들어갈 때에 그룹들은 성전 우편에 섰고 구름은 안 뜰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 성전 문지방에 임하니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화로운 광채가 뜰에 가득하였고.


성전의 외적인 양식들을 척량하고 그 용도를 설명한 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의 현현을 위한 준비적인 단계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사전 작업을 마치고 드디어 에스겔 43장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해야만 성전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충만하게 임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성전 건물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성전의 진정한 가치는 성전을 짓는 재료와 건축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전제되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게 합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성령의 전이되었으므로 날마다 믿음으로 온전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로 인한 죄 문제가 온전히 해결될 때에만 하나님과의 온전한 화목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성령의 전이라고 할 수 있는 성도의 몸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해 그 가치가 드러나게 됩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탁월하고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을지라도 근본의 죄는 어느 누구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의 피로 우리를 죄 가운데서 자유케 하셨다고 증거합니다.
이 말씀에 아멘하십니까?
만일 이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하거나 아멘하지 못한다면 아직도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영광의 임재가 임할 수 있는 죄인은 용서 받은 죄인입니다.

용서받은 죄인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라 내 삶의 자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소금과 빛의 기능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복된 자리로 다듬어가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스겔 43장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한 성전

바벨론의 포로가 된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전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지을 수 있을 수 있다는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환상 가운데 성전을 보여주시며 성전에서 섬길 것이라고 합니다.
에스겔 43장은 미래에 들어설 성전에 들어가 측량하고 번제를 드리는 내용입니다.

성전에 하나님이 오시고 하나님이 영원토록 함께 하시도록 제사를 가르쳐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성전에 들어가시다(1-3)


그 뒤에 그가 에스겔을 데리고 동쪽으로 난 문으로 갔습니다.
10장 19절에 여호와의 영광이 떠난 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습니다.
동문은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그의 음성은 많은 물이 흐르는 소리와도 같고, 땅은 그의 영광의 광채로 환해졌습니다.
그 모습이, 에스겔이 본 환상, 곧 주께서 예루살렘 도성을 멸하러 오셨을 때에 본 모습과 같았습니다.
또 에스겔이 그발 강 가에서 본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시고 죄사함을 받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시는 은혜가 먼저이고 회개하는 것이 나중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성전(4-5)

그러자 주께서 영광에 싸여서,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성전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에 주의 영이 에스겔을 들어 올려, 안뜰로 데리고 갔는데, 주의 영광이 성전을 가득 채웠습니다.
성전은 주님이 계셔야 성전입니다.
주님이 계시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성전을 깨끗게(6-9)

그 사람이 에스겔 곁에 서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사람인 에스겔에게 이 곳 성전은 하나님 보좌가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발을 딛는 곳, 여호와가 여기 이스라엘 자손 한가운데서 영원히 살 곳이라고 하십니다.
건물의 규모나 화려함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전은 바벨론 왕궁에 비하여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전에 함께 하셔서 성전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에스겔 8장 6절부터 에스겔에게 가증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전에는 천사와 종려나무를 그렸던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10절에는 각양 곤충과 짐승과 우상을 사면에 그렸습니다.
하나님은 견딜수 없어서 이들을 떠나십니다.
이제 여호와가 다시 오셨습니다.
여호와가 오신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다시는 더럽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백성이나 왕들이 음란을 피우거나, 죽은 왕들의 시체를 성소 근처에 묻어서,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됩니다.
성전 근처에서 왕들이 높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거룩한 하나님만이 높아질 것입니다.
교회에서 건물이나 목사나 프로그램이 주목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만이 주목 받아야합니다.
사람들은 왕궁의 문지방을 여호와의 성전의 문지방과 나란히 만들었습니다.
왕궁의 문설주를 여호와 성전의 문설주와 나란히 세워 놓았습니다.
여호와와 왕들 사이에는 벽 하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왕을 동일시하였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역겨운 일들로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혀 놓았기 때문에, 여호와가 당신의 분노로 그들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음란한 행실을 멀리하고, 시체들을 여호와 앞에서 치워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그들 한가운데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죄악을 회개하는 자에게 보이시는 성전(10-11)

사람인 에스겔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 성전을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앞으로 있을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해야합니다.
그들이 그 영광을 보며 지금 자기들의 온갖 죄악을 부끄럽게 여기게 하고, 성전 모양을 측량해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저지른 모든 일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거든, 에스겔은 이 성전의 설계도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라고 하십니다.
성전의 배치도, 성전의 출입구, 이 성전의 건축 양식 등 모든 규례와 법도와 모든 율례를 그들에게 알려 주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도록 가르치라고 합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글로 써 주어서, 그들이 이 성전의 건축 설계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고 행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지극히 거룩한 성전의 법(12)

성전의 법은 이러합니다.
성전이 자리잡고 있는 산꼭대기 성전터 주변은 가장 거룩한 곳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전의 법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보여주었습니다.
제사장이 기도하고 옷 갈아 입는 곳 제사하는 곳을 보여줍니다.
그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을 보여주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마누엘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지 않으면 성전도 제사도 쓸데 없습니다. 많은 희생만 있을 뿐입니다.

번제단의 모양과 크기(13-17)

자로 잰 제단의 크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 자는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 끝에다 손바닥 너비만큼 더한 것입니다.) 제단 밑받침의 높이는 한 자이고, 그 사방 가장자리의 너비도 한 자입니다. 그 가에는 빙 돌아가며, 높이가 한 뼘 되는 턱이 있는데, 이것이 제단의 밑받침입니다. 이 땅바닥에 있는 밑받침의 표면에서 아래층의 높이는 두 자요, 너비는 한 자입니다. 이 아래층의 표면에서 이 층의 높이는 넉 자요, 너비는 한 자입니다 그 제단 화덕의 높이는 넉 자요, 화덕의 네 모서리에는 뿔이 네 개 솟아 있습니다. 그 제단 화덕은 길이가 열두 자요, 너비도 열두 자여서, 사면으로 네모가 반듯합니다. 그 화덕의 받침인 아래층의 길이와 너비는 열넉 자로서, 사면으로 네모가 반듯합니다. 그 받침을 빙 두른 턱의 너비는 반 자이고, 그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자입니다. 제단의 계단들은 동쪽으로 나 있습니다.

번제단의 봉헌(18-26)

그가 에스겔에게 또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이 사람인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번제물을 바치고 피를 뿌릴 제단을 만들 때에 지킬 번제단의 규례는 이러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에스겔은 사독의 자손 가운데서, 여호와를 섬기려고 여호와에게 가까이 나오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에게,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를 주어서, 속죄제물로 삼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그 피를 가져다가, 제단의 네 뿔과 아래층의 네 귀퉁이와 사방의 가장자리에 발라서 속죄하여, 제단을 정결하게 해야합니다.
또 속죄제물로 바친 수송아지를 가지고 가서, 성소 바깥, 성전의 지정된 곳에서 그것을 태워야 합니다.
이튿날에는 에스겔이 흠 없는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바쳐서, 수송아지의 제물로 제단을 정결하게 한 것처럼, 그 제단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에스겔이 정결하게 하기를 마친 다음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양 떼 가운데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를 바쳐야 합니다.
제사장이 그것들을 주 앞에 바칠 때에는, 제사장들이 그 짐승들 위에 소금을 뿌려서, 여호와 주에게 번제물로 바치게 해야합니다.
에스겔은 이레 동안 매일 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마련하여 놓고,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와 양 떼 가운데서 숫양 한 마리를, 흠 없는 것으로 마련하여 놓아야 합니다.
이레 동안 제단의 부정을 벗기는 속죄제를 드려서, 제단을 정결하게 하며 봉헌하도록 해야 합니다.
성전의 중요한 것은 제사입니다.
제사는 죄사함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제사법 민법 도덕법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법은 제사법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죄를 지으면 죄의 값을 받아야합니다.
그냥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죄값은 사망입니다.
값을 치러야합니다.
내가 치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치러야합니다.
다른 사람이 치르는 것은 대속법(代贖法) 입니다.
반드시 죄값을 치러야합니다.
어떻게 보면 내 소원이 이루어지고 내가 원하는 것을 받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내 죄대신 벌을 받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으십니다.
하나님이 이 사랑을 허락하셨습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죽을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살 사람이 죽어야합니다.
하나님이 대신 희생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제사입니다.
성전의 목적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 대신 희생하는 것입니다.
죄없는 소와 양이 죽어 타오릅니다.
이것을 보면서 내 죄를 사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의 계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죄를 지어서 오래 고생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죄사함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희생으로 용서받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짓고 산간벽지에서 조용히 산다고 죄사함받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선한 일을 많이 해서 사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용서해야 우리는 용서받습니다.
하나님의 희생을 보고 확증하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요 십자가입니다.

번제와 감사제를 드리라(27)

이 모든 날이 다 찬 뒤에는, 여드렛날 이후부터는 제사장들이 그 제단 위에 너희의 번제와 감사제를 드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너희를 기쁘게 받아들이십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와 경건을 받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충만하게 하십니다.
성전에는 하나님이 거하셔야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도 제물도 성전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성전이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고 제물을 받으시기 위해서 성전을 짓게 하십니다.
성전이 지었다고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이 받으셔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임해야합니다.
제사장이 있고 벽 하나를 두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캄캄한 지성소에 벌건 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임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교회와 나라는 평안합니다.
하나님이 떠나면 성전이 망하고 나라가 망합니다.
하나님의 속죄 긍휼이 함께 해야 생명이고 구원이고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있는 에스겔에게 성전을 짓고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받으시고 복을 내리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미래에 지어질 교회를 예표로 보여주십니다.
가증한 것을 씻으시고 새로 시작합니다.
더러운 성전을 깨끗이 하시고 정결케 하시고 다시 지으십니다.
우리가 죄를 깨끗이 씻으면 하나님이 오십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나와 함께 하심이 성전에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성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영광이 가득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즐겁게 받으십니다.





10-26-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거룩한 것과 속된 것(에스겔 42:20)

그가 이와 같이 그 사방을 척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장과 광이 오백척씩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So he measured the area on all four sides. It had a wall around it, five hundred cubits long and five hundred cubits wide, to separate the holy from the common.

거룩한 것과 속된 것(the Holy & the unclean)
the sanctuary and the profane
the holy and the profane.

거룩한것(6944) 코데쉬 [ qôdesh ]   קֹדֶשׁ   

1. 거룩함.  2. 거룩한 것.  3. 지성소
발음 [ qôdesh ]
어원 / 69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회(출12:16, 레23:35, 민28:18), 성소(출26:33, 레20:3, 민8:19), 지성소(출26:33, 레16:16, 왕상6:16), 성결(출28:36, 말2:11), 성물(출28:38, 레22:12, 민6:20), 거룩한 패(출29:6), 성의(출29:29, 레16:32), 거룩한 산(시43:3), 성산(겔28:14), 지성물(레21:22, 민4:4), 거룩한 날(출31:14), 성일(사58:13), 성소(레4:6), 성호(대상16:35, 시105:3, 145:21), 예물(대하31:12), 성전(시5:7, 138:2, 욘2:4), 거룩한 곳(렘31:40), 성도(단12:7). [형] 거룩한(출3:5, 레2:3, 시2:6), 성결한(출15:13, 삼상21:5).
구약 성경 / 477회 사용



속된 것(2455) 홀[ chôl ]  חֹל   

1. 불경스러운.  2. 모독적인.  3. 더럽혀진
발음 [ chôl ]
어원 / 24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속된(레 10:10, 겔 22:26, 48:15), 보통의(삼상 21:4, 5).
구약 성경 / 7회 사용


거룩해야 할 것
창세기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 자체를 복되게 하셨다는 것은 이 날의 안식을 통해 피조물들에게 복을 베푸신다는 뜻이다.
즉, 안식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장차 인간에게 주어질 안식일 제도가 인간을 위한(막 2:27) 복된 것임을 증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여기서 '거룩하다'(카다쉬. 6942. קַדֵּש)는 '깨끗케 하다'(삼하 11:4), '구별하다'(출 27:26), '드리다'(대상 18:11)로도 번역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안식하신 날을 거룩한 목적으로 특별히 구별하셨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날을 무엇보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는 날로 삼아야 한다.

6942. קָדַשׁ 카다쉬 [ qâdâsh ]   

1. 거룩하다
2. 신성하다.
3.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에게 사용되어
발음 [ qâdâsh ]
관련 성경 / 거룩하다(출 29:21, 사 29:23, 학 2:12), 빼앗기다(신22:9), 성별하다(느3:1), 준비하다(렘22:7, 미3:5), 예비시키다(렘51:27,28),구별하다(민8:17, 대상26:27), 드리다(대상18:11), 빼앗다(대상18:11), 예비하다(렘12:3), 깨끗하게 하다(삼하11:4). [명] 성물(레22:2, 대상26:28), 성회(욜1:14, 2:15), 성호(레22:32), 성소(대하26:18, 겔7:24), 거룩한 자(사29:23).
구약 성경 / 171회 사용

에스겔 42:13
그가 내게 이르되 좌우 골방 뜰 앞 곧 북편 편에 있는 방들은 거룩한 방이라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이 지성물을 거기서 먹을 것이며 지성물 곧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거기 둘 것이며 이는 거룩한 곳이라.

제사장들이 지성물을 거기서 먹을 것이며

- 그 방의 첫 번째 용도이다.
여기서 '지성물'(코드쉐 하카다쉼)은 제단에서 불사르지 아니하였던 소제물(레 2:3, 10;6:14-18; 10:12)과 대제사장과 회중을 위해 바쳐진 속죄물을 제외한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 그리고 전 밖에서 태울 제물들의 거룩한 부분들을 가리킨다(레 6:19-23; 7:6).
곧 이러한 제물들은 여자를 포함한 그 가족 모두가 먹을 수 있었던 '거제'나 '요제'의 제물(레 10:14)과는 달리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것이다(Delitzsch).
한편 이전 성전에 있어서 제사장들은 그 제사 음식을 성소, 그것도 안뜰의 제단 곁에서만 먹을 수 있었다(레 10:12,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구절에서 제사장들에게 이러한 방이 주어진 것은 그들의 편의를 위한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거기 둘 것이며

- 그 방의 두 번째 용도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5대 제사(번제, 소제, 속죄제, 화목제, 속건제) 중 3가지만이 언급된 것은 이 3가지 제사의 제물만이 제사장들에게 거룩한 분깃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거룩한 곳이라

- 이 방들이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에서의 절대적인 성결(거룩) 유지를 위하여 주어졌음을 시사해준다.
한편 여기서의 '거룩'(코데쉬)은 신적 거룩에 부합되는 철저하고도 절대적인 '거룩'을 의미한다(Shroder).

에스겔 42:14
제사장의 의복은 거룩하므로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 바로 바깥 뜰로 가지 못하고 수종드는 그 의복을 그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고 백성의 뜰로 나갈 것이니라 하더라.

제사장의 의복은 거룩하므로

- 제사장들이 제사시의 예복과 평상복을 엄격하게 구분해야 함을 지시하는 구절로, 그들의 직무의 거룩성을 보여준다.
제사장은 평상복을 입고 제사를 드릴 수 없듯이 제사 예복을 입고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에 제사 직분을 마친 후 이 '거룩한 방'에서 이 예복을 벗어 보관시키고 평복으로 갈아입은 후에야 바깥 뜰로 나올 수 있었다.
한편 여기서 '성소에 들어갔다가'의 '들어갔다가'(베보암)는 제사장들이 제사를 집행하기 위해 제단이나 성소에 오는 것을 가리킨다(Delitzsch).



성경에서 ‘거룩’이란 무슨 뜻인가?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뜻이다.
교회 공동체가 거룩하지 못할 때 어떻게 열방과 세상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교회가 먼저 거룩해야 한다.
내가 거룩하지 못한데 교회가 거룩할 수 있겠나?
먼저 내가 거룩해져야 한다.

​예수믿는 사람들을 성도(聖徒) ‘거룩한 무리’라고 부른다.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구별된 무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우리가 거룩한가?
우리는 여전히 죄가 있고, 거룩하지 못하고 부정한 존재들이다.
사실 우리가 죄가 하나도 없어서 성도가 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을 죄 없는 것을 봐주시기 때문에 성도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십자가에 대신 달리신 아들 예수님처럼 보시기 때문에 예쁘고 거룩하게 봐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우리는 더욱 거룩해져야 한다.  

우리 신앙은 두 가지 측면에서 거룩해지고 성숙해져야 한다.
한 가지는 영성이고, 다른 한 가지는 도덕성이다.

기독교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거룩함은 영성과 도덕성이란 두개의 기둥에 놓인 아치와 같아서 두 기둥 중 어느 하나가 가라앉으면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
예배와 삶이 같이 해야 한다는 얘기다.
기도와 실천이 함께 있어야 한다.
신앙과 도덕성이 같이 가야 한다.   

누가 예수 잘 믿는 사람인가?
우리는 흔히 예배에 안 빠지고 기도를 많이 하고 교회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을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교인들 중에 괴팍하고 무서운 사람들이 있다.
기도 많이 하는 권사님이 기도 안한다고 남들을 정죄하고 그럴 때 무섭기조차 하다.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기도는 열심히 하는 데, 도덕성이 낮은 사람들이 있다. 거짓말을 쉽게 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돈밖에 모르고 이기심에 가득차있다.

최근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 중에 교회 목사나 장로나 신실한 중직자들이 많다.
수년간 고등학생을 성폭행한 선교단체 대표, 방산비리의 중심에 있던 전 참모총장, 교회에 밀실을 만들어 놓고 돈세탁을 했던 무기중개상 그룹회장, 그리고 자원외교 비리의 수사대상이었던 기업회장이 다 교회 목사요 장로요 기독실업인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야말로 제임스 패커의 말대로 영성은 있는 것 같았으나 도덕성이란 기둥이 빈약하니까 결과적으로 전체가 무너진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영성과 실천적인 도덕성이 함께 견고하게 세워지지 않으면, 기독교의 지붕은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다.
이 견고한 두 기둥에 세워진 신앙만이 성숙하게 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아름다운 삶으로 건축되는 것이다.
그럴 때 복음 전도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 이루어지게 된다.
도덕성이 결여된 영성은 사상누각과 같은 것이다.
실천이 없으면 아무리 종교적으로 꾸민다 해도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도덕성에 있어서는 상식 이하 일 수가 있을까?
어떻게 공중도덕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 있나?
세상사람들의 눈이 더 무섭다.
한국교회가 세상의 질타를 받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그런 면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잘 가르쳐준다.

1. 먼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vv2-3,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증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되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무엇보다 우선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는 말씀에 집중하자.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면서 모세를 통해 성막(회막)을 건축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광야길을 가면서 구름기둥의 이동에 따라 행진하기도 하고 진을 치고 자리잡기를 반복했다. 이 때 이동을 멈추고 진을 칠 때, 성막을 둘러서 레위인들이 진을 치고, 그 밖으로 이스라엘 12지파가 동서남북 각각 3지파씩 진을 치게 했다. 이 성막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성막을 중심으로 하는 진영이 거룩해야만 했던 것이다.  

성막은 왕정시대가 되자 더 이상 이동하지 않는 솔로몬 성전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성막, 성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솔로몬 성전이 있던 자리에는 회교 모스크가 자리잡고 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 성전이 회복되기를 기도하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오셨고, 이제 더 이상 성막이나 성전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신약 시대에 성전은 무엇인가? 성전은 곧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을 의미한다. 그러니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우리 성도들이 성전이다. 고전 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뿐만 아니라 그런 성도가 모인 가정과 목장과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 영적인 성전이다.

​요한사도는 하늘나라의 이상을 보면서 하늘나라를 성전으로 묘사하고 있다. 계속 성전을 묘사하고 얘기하다가 사도는 계 21: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성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왜 그렇다는 걸까?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성전 그 자체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전이 따로 필요없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 왕을 거부하고 자기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범한 인간은 인간들은 누구나 다 그 속성이 ‘왕이 되기’를 추구한다. 여러분, 대통령만 왕이 되려고 하는 게 아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대신 자신이 왕이 되려고 한다. 그래서 여건만 주어지면 욕심과 탐욕과 약육강식을 한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주인이 되어 결정하며 산다. 가정에서 왕처럼 군림하려고 하고, 목장과 교회에서도 왕노릇하느라 삐걱거린다.

​누군가 재미있게 말하길, 사람들은 모두 ‘왕’ 되기를 추구하며 사물이나 동물에도 ‘왕’자를 붙이는 걸 좋아한단다.
“왕거미, 왕벌, 왕파리, 왕새우, 왕오징어, 왕문어, 왕밤, 왕바위, 왕모래, 왕소금, 왕방울, 왕고집, 왕눈이, 왕초, 왕뚜껑, 왕만두, 왕갈비, 왕순대, 왕족발, 심지어 왕따까지.”  

그러나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부터 예수님이 왕이 되시고 주님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삼위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왕노릇하신다.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통치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다.
그래서 내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우리 가정과 목장과 교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진영이다. 
이 하나님 나라가 점점 세상 속으로 확장되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진영 가운데 계시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 우리 속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시면 당연히 부정한 것들과 죄악들이 다 물러나야 한다.
빛이 밝혀지면 어둠은 자동적으로 물러난다.
우리 안에 삼위 하나님이 계시다.

2. 부정(不淨)한 것들을 진영 밖으로 몰아내라.

2-3.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증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되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나병이나 유출병(피나 고름이 계속 나오는 병)이나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들을 다 진영 밖으로 몰아내라는 것이다.
이같은 지침은 매우 가혹해보인다.
하지만 위생적으로나 영적으로 이스라엘의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한 매우 당연한 조치였다.  

지금 우리가 사는 환경은 위생적으로 깨끗하지만, 당시 광야를 이동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환경은 극도로 열악했다.
광야에는 먹을 물도 변변히 없었으니 잘 씻기를 했겠나?
위생이 엉망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만약에 나병환자나 유출병 환자를 방치하면 금새 다른 사람에게 전염이 되는 것이다.
온 진영의 백성들이 감염될 위험이 농후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진영 밖으로 분리해놓도록 하셨다.
싸스 시신을 만진 사람과 가까이 있어서 부정해진 사람도 마찬가지로 조치했다.
전염이나 감염은 공기를 타고, 침분비물을 타고, 접촉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런 환자들이나 주검으로 부정해진 사람들을 진영 밖으로 분리조치한 것이다.
여기서 부정은 不淨(uncleanliness)이다.
깨끗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위생적인 이유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그렇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에 나병과 유출병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부정한 병으로 여겼다.
부정함과 거룩함은 함께 공존할 수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진 안에 거하시기에 그 안에는 어떤 부정한 것도 함께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 율법에 따르면 정결한 짐슴과 부정한 짐승을 나눴다.
소고기는 정결하지만, 돼지고기는 부정한 짐슴이었기에 먹지 못하게 했다.
제사를 지낼 때에도 정결한 양과 소로 제사를 지내야지, 상하거나 부정한 양과 소를 제물로 바치는 것을 금지했다.
성막에 들어갈 때 제사장은 수족을 씻도록 했다.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도록 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에, 어떠한 부정도 용납될 수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훗날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와 부정함의 치유자로 오셨다.
문둥병자들을 깨끗케 하시고, 혈루병 앓는 여인을 고치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셨다.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정결케 씻어주셨다.
이렇게 예수님에게 부정과 죄를 씻김 받은 성도와 교회 공동체는 늘 영적 정결함을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각자가 진영밖으로 몰아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정신과 몸과 영혼을 감염시킬 위험요소가 무엇일까?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척을 진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더라도 꼭 지켜내야 하는 것이 공동체의 정결이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정결하지 않으면 공동체 전체가 쉽사리 부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거룩함을 위해 나 한사람부터 부정한 문화와 습관을 끊고 죄와 단절해야 한다.  

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누룩은 금새 퍼진다.
여기 누룩은 잘못되고 왜곡된 교훈을 뜻한다.
오늘로 하면 이단의 거짓 교훈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걸 조심해야 한다.
진영 밖으로 격리조치해야 한다.
이단과는 인사도 하지 말라고까지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거짓복음을 믿기에 불쌍하지만, 그 거짓교훈은 정말 경계해야 한다.
혹해서 듣고 있지 말고 경계해라.

2. 기복신앙, 탐심도 우리 시대에 전염병과 같다.
기복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예수 믿어서 내가 잘 되겠다는 생각이다.
예수 믿어서 돈 많이 벌고 건강하고 자녀들 축복받고 거기에다가 천국도 가겠다는 것이다.
죄를 짓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 복음을 위해 섬기고 희생하는 것, 이런 건 관심도 없다.
비신자가 오는 걸 싫어하는 교회 이런 기복신앙은 우리를 병들게 하고 썩어 문드러지게 만든다.
헌금을 하는 것도 구원과 사랑에 대한 감사와 기쁨보다는 항상 앞으로 더 많은 축복을 얻기 위해서 한다.
이게 다 그 마음속 깊은 곳에 탐심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을 빙자한 탐심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신앙을 경고한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 3:5b)   

3. 관행이라고 불리는 부정한 것들이 있다.
부패 부조리 불공정, 금수저 흙수저 논쟁이나 외모 지상주의, 물질지상주의 자유로운 혼전 성관계나 성문화 등 사회가 관행으로 여기는 것들 중에 분명히 사회를 좀먹고 감염시키는 악한 생각이나 가치관 등이 있다.
술문화, 특히 신입생 MT 같은 데서 억지로 술을 먹이는 이런 문화는 정말 배격해야 한다.

4. 극도로 태만하고 게으른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는 “게으른 게 뭐 죄냐? 습성일 뿐이지.”
그러면서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혹은 게으름뿐만 아니라 무슨 죄든지 다 마귀가 공격하는 것이라 생각하고는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게으름의 마귀야, 물러가라!” 그렇게 쫓아내기만 한다.
혹은 게으름을 놓고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게으릅니다. 용서해주세요.” 기도만 한다.
그런데 그런다고 게으름이 해결되나?

성경은 뭐라고 하시나?

잠언 6: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개미가 하는 걸 보고 지혜를 얻어서 네 의지를 발동해 게으름과 싸우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신다.
은혜도 강조하지만, 인간의 책임도 강조하고 계신다.  

5.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라.

데살로니가전서 5:21-22,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담배 같은 것이나 마약이나 포르노 등이 다 포함된다. 
어떤 모양의 악이라도 추호도 용납하지 마라.
거룩하지 않은 부정한 것들을 내 속에서 몰아내고 가정과 목장과 교회 밖으로 몰아내라! 내가 진영밖으로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3. 죄를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6-7a,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나 사람들이 범하는 죄를 범하여 여호와께 거역함으로 죄를 지으면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여기서 사람들이 범하는 죄는 이웃들에게 범하는 죄, 특별히 금전적인 손해를 주는 죄를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이웃에게 범하는 죄는 곧 하나님에게 범하는 죄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부부 간에 서로 싸우고 이혼 얘기나 하고 그러면 부부끼리만 죄를 짓는 거냐? 아니다. 하나님에게도 죄를 짓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언약하고 결혼했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 사랑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성도로서 마땅한 일이고 그게 자녀의 행복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행복한 가정을 통해서 vip를 구원할 힘이 나온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면 그 사람에게만 죄를 짓는 것인가? 아니다. 기독교에서는 그것이 곧 하나님에게 죄를 짓는 일이 된다. 왜 그런가? 그 사람이 곧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사람이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분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십계명 중 5~10계명은 사람에게 대한 계명이다. 그것을 범하면 곧 하나님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새번역 성경이 vv6-7a을 잘 번역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라. 남자나 여자를 가릴 것 없이, 남에게 어떤 잘못이든지 저질러서 그 일로 주를 배신하였을 때에, 그런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는 대로,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고백하고” 남에게 잘못한 일이 곧 주를 배신하는 것이 된단 얘기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The Nessage’번역 성경에서 이렇게 의역했다. “남자든 여자든 어떤 잘못을 저질렀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를 끊은 것이므로 유죄다. 그는 반드시 자기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  

이런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1. 자복해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공개적이고 진실하게 죄과를 인정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에게 속죄제의 수양을 드림으로써 회개해야 한다. 죄를 인정하고 자신이 잘못했다고 시인하는 것이다.

2. 죄 값을 지불하고 보상해야 한다.
vv7b-8,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의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지었던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이요. 만일 죄 값을 받을 만한 친척이 없으면 그 죄 값을 여호와께 드려 제사장에게로 돌릴 것이니 이는 그를 위하여 속죄할 속죄의 숫양과 함께 돌릴 것이니라.” 훔친 원금이나 파손한 물건 뿐아니라 그것의 20%를 더한 값을 갚아서 물질적 피해와 정신적 피해를 보상하라고 하신다. 만약 피해 당사자가 죽었다면, 피해자를 대신할 친척에게 갚고, 친척조차 없을 경우에라도 보상의 의무에서 면제될 수 없다. 그때에는 그 죄값을 하나님에게 거제로 드린 후에 제사장에게 바쳐야 했다. 이렇게 구별되어 제사장에게 주어진 물건은 제사장의 몫이 되게 하셨다. 이것은 이웃에게 손해 끼친 것이 곧 하나님에게 손해끼친 거란 의미다.   

이 내용은 한 마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얘기다.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에게만 용서를 구하면 당사자가 용서가 되는가? 어떤 사람에게 간음죄를 짓거나, 도적질하거나, 살인하거나, 거짓말하거나, 이웃의 소유를 탐하는 죄를 짓고는 하나님께 “잘못 했습니다.” 죄를 자백했다고 끝나나? 아니다. 당사자에게도 역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죄를 인정하고 사과하고 사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매듭이 풀려진다. 당사자와 관계를 회복하는 데까지 가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도 하나님이 구원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가 뭐라고 했나? 자신이 부정하게 남의 재산을 취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다짐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다. 신앙과 삶이 일치할 때 우리의 복음은 힘을 얻는 것이다.  

10여년 전에 신문에 난 기사 내용이다.
기사 제목은 ‘25년 만에 돌아온 훔친 공구 값 3만원’, 어느 점심시간에 대전시 건설관리본부 사무실로 30대 중반의 한 남자가 찾아와 A4용지 크기의 편지지 한 장을 직원들에게 건네주고 사라졌다.
‘잠깐의 한국 방문을 위해서 온 이’라는 발신인 명의로 된 접혀진 편지지 속에는 현금 3만원과 함께 다음과 같은 가슴 따뜻한 사연이 적혀 있었다.

“수년 만에 돌아보는 한국 땅의 정겨움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초등학교 2~3학년이던 25년 전 한 도로 공사장에서 펜치 하나를 몰래 가져온 아픈 과거를 용서받고 싶다. 마음 속에 행한 악함을 얼마 전에야 겨우 기억하고 이를 갚으려고 이제야 찾아왔다. 절차는 모르지만, 시와 저 자신에게 용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용기를 냈다. 내 조국과 이 땅이 정직한 삶으로 행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정작 저는 부끄럽게 살아왔던 것 같다. 분실됐던 펜치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때 제 자신의 양심도 제자리로 돌아올 것 같다.”며 용서를 빌었다.  

‘양심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이것이 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신앙인의 모습이다. 고백하고 배상하라는 것이다. 요한 웨슬레 목사님은 “호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진짜 회개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책 빌리고 돌려주지 않은 분 안 계신가? 작은 것이라도 보상하고 갚으라! 

혹시 ‘나 하나 쯤 뭐 좀 더럽고 죄 짓는다고 교회 공동체에 무슨 영향을 끼칠까?’ 생각하는가? 가나안 정복 당시 이스라엘은 크고 강한 성읍이었던 여리고는 아주 가볍게 정복했다. 그러나 이어진 그 옆에 있던 작은 아이성 점령에서 패배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나? 바로 한 사람 아간의 범죄 때문이었다. 그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진영을 떠나셨고, 그들은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거룩하고 정결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부정하게 된 자들을 진영 밖으로 쫓아버려야 했다. 지금은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이 결코 떠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더욱 거룩해야 하지 않겠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혜가 ‘값싼 은혜’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치 하나님의 은혜가 시장에서 팔리는 값싼 물건처럼 여긴다.
오직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하면서, 순종이나 책임이나 희생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신앙생활을 한다. 세례와 죄의 용서가 너무나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되어서, 고의적이고 의도적인 죄를 범한 죄인에게조차 “회개하라!”는 책망 대신에, 위로와 격려의 말들을 무책임하게 남발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런 현상을 ‘본 회퍼’란 독일 신학자는 ‘값싼 은혜’라고 비판했다.  

물론 은혜란 말은 ‘무조건적인 크신 사랑’을 의미하니까, 어떤 대가나 가격이 붙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은혜를 위해서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라는 고귀한 희생이 지불되었다. 그러니 ‘값싼 은혜’가 아니라 사실상 ‘값진 은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내어주고 나같은 죄인을 사셨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면, 과연 우리가 그 은혜를 값 싼 싸구려 취급을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소중하고 값비싼 십자가 사랑, 은혜를 받은 우리들은 어떻게 사는 게 마땅한가? 그 은혜에 감사, 감격하여 거룩한 삶, 부정과 죄와 싸우며 사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내 안에 내주하시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진영 밖으로 내 보내야 한다. 여전히 미련을 두고 남겨 놓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들을 청산하고 끊어버리자. 지은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자복하고 보상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살자. 거룩한 나,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해 피흘리기까지 싸우자!






그가 이와 같이 그 사방을 척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장과 광이 오백척씩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거룩한 것과 속된 것(the Holy & the unclean)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으로 본 성전의 특징은 성전 둘레의 담의 장과 광이 오백척이라고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규모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사방을 다 측량하였는데 그 둘레에는 사면에 담이 있었으며 그 길이와 폭이 다 같이 262.5미터였고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리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새 성전의 둘레에 담을 세웠는데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담의 기능은 담장 안에 있는 백성들을 보호하며 지켜주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거룩함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성경은 거룩함의 비결을 오직 기도와 말씀이라고 강조합니다(딤전 4:5).

거룩이란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려면 하나님을 닮은 모델이 필요합니다.
그 모델이 곧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거룩이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려면 예수님께서 이 새상에 오실 때 성령으로 잉태되셨던 것처럼 먼저 내 안을 주의 영으로 채워야 합니다.
주의 영으로 채워지려면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의 임재를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도 성령의 채움과 인도하심을 받아 거룩한 길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일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스겔서 1-24장 하나님의 심판(성전을 떠나신 하나님)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기 전(BC 586)에 예언한 내용이고,
33-48장 하나님의 영광 회복(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시는 하나님과 영원한 성전)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한 이후 에스겔이 예언한 내용입니다. 

에스겔 40-48장은 ‘새롭게 회복될 예루살렘과 새 성전’에 대한 환상입니다.
솔직히 아무리 읽어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것을 글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정말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성전을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보여주신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새 예루살렘과 성전을 보고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고, 성전의 설계도를 보여주어서 법도와 규례를 지키고 행하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에스겔 40:4

“너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 성전을 설명해 주어서, 그들이 자기들의 온갖 죄악을 부끄럽게 여기게 하고, 성전 모양을 측량해 보게 하여라. 그들이 저지른 모든 일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성전의 설계도 그들에게 가르쳐 주어라.”(에스겔 43:10

“성전의 배치도, 성전의 출입구, 이 성전의 건축 양식 등 모든 규례와 법도와 모든 율례를 그들에게 알려 주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글로 써 주어서, 그들이 이 성전의 건축 설계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고 행하게 하여라. 성전의 법은 이러하다. '성전이 자리잡고 있는 산꼭대기 성전터 주변은 가장 거룩한 곳이어야 한다.' 이것이 '성전의 법'이다.”(에스겔 43:11

에스겔이 새 예루살렘과 성전을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본 성전에 관해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새 예루살렘과 성전을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전의 설계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서 그 설계대로 성전을 짓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들에게 에스겔을 통해 새 예루살렘과 성전의 환상을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자세하게 전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예루살렘의 성전 환상을 통해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은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나라를 잃고,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성전마저 파괴된 상황이었습니다.
에스겔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를 게 없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었습니다.
마치 골짜기에 가득 쌓여 있던 마른 뼈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새로운 예루살렘 성과 새로운 성전을 보여주시면서, 곧 구원(회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에스겔이 그 약속을 보았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 환상은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이요, 용기를 주는 메시지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새로운 성전은 에스겔이 제사장으로 평생 섬길 꿈에도 그리던 직장 아닙니까? 에스겔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예배할 성전이라고 생각만 해도 얼마나 감격스러울까요? 에스겔이 본 새 예루살렘과 성전 환상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영원한 천국의 모습입니다.

성전 환상      영원한 성전/새 예루살렘(40-48)

40장 - 환상 중에 본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

41장 - 새 성전의 구조

42장 - 제사장들의 방과 사방 담

  에스겔 42장은 제사장들의 방과 사방 담을 측량한 내용입니다.

 에스겔 42:1-14절은 제사장들의 방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에스겔 42:1-14절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42:1-9 북쪽 뜰에 있는 두 방


42:10-12

남쪽 뜰에 있는 두 방

42:13,14

제사장들의 방의 용도

에스겔 42:1-9절은 북쪽 뜰에 있는 제사장들의 방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 사람이 나를 데리고 북쪽으로 길이 난 바깥 뜰로 나가서, 두 방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는데, 방 하나는 성전 뜰을 보고 있고, 또 하나는 북쪽 건물을 보고 있었다. 북쪽을 향한 그 방을 재니, 길이가 백 자이고, 너비가 쉰 자였다. 스무 자 되는 안뜰의 맞은쪽과 돌을 깔아 놓은 바깥 뜰의 맞은쪽에는, 삼 층으로 된 다락이 있었다.”

또 그 방들 앞에는, 내부와 연결된 통로가 있었는데, 그 너비가 열 자요, 그 길이가 백 자였다. 그 문들은 북쪽으로 나 있었다. 삼 층의 방들은 가장 좁았는데, 일 층과 이 층에 비하여, 삼 층에는 다락들이 자리를 더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이 방들은 삼 층이어서, 바깥 마당의 현관에 있는 기둥과 같은 기둥이 없었으므로, 삼 층은 일 층과 이 층에 비하여 더 좁게 물려서 지었다. 이 방들 가운데 한 방의 바깥 담, 곧 바깥 뜰 쪽으로 이 방들과 나란히 길이 쉰 자가 되는 바깥 담이 있었다. 바깥 뜰을 보고 있는 방들의 길이는 쉰 자였고, 성전을 보고 있는 방들의 길이는 백 자(53m)였다. 이 방들 아래층에는 동쪽에서 들어오는 문이 있었는데, 바깥 뜰에서 그리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에스겔 42:10-12절은 남쪽 뜰에 있는 제자장들의 방에 대한 설명입니다. 

“뜰을 둘러 싼 벽이 바깥 뜰에서 시작되었다. 건물 앞 공터 남쪽으로도 방들이 있었다. 이 방들 앞에도 통로가 있는데, 그 모양이 북쪽에 있는 방들과 같은 식으로 되어 있고, 길이와 너비도 같고, 출입구 모양과 구조도 같고, 문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 남쪽에 있는 방들 아래, 안뜰 담이 시작하는 곳에 출입구가 있었다. 동쪽에서 들어오면, 빈 터와 건물 앞에 이 출입구가 있었다.” 

에스겔 42:13,14절은 제사장들의 방의 용도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빈 터 맞은쪽에 있는 북쪽 방들과 남쪽 방들은 거룩한 방들로서, 주께 가까이 나아가는 제사장이 가장 거룩한 제물을 먹는 곳이다. 그 방들은 거룩하기 때문에, 제사장은 가장 거룩한 제물과, 제물로 바친 모든 음식과, 속죄제물과, 속건제의 제물을, 모두 그 곳에 두어야 한다.”

“제사장이 그 거룩한 곳으로 들어가면, 그 거룩한 곳에서 직접 바깥 뜰로 나가서는 안 된다. 그들이 주님을 섬길 때에 입은 옷이 거룩하기 때문에, 그 곳에서 자기들의 예복을 벗어 놓고 다른 옷을 입은 다음에, 백성이 모여 있는 바깥 뜰로 나가야 한다.” 

에스겔 42:15-20절은 성전의 사면 담을 측량한 내용입니다. 

“그 사람이 성전의 내부 측량을 마친 다음에, 나를 데리고 바깥 동쪽 문으로 나와서, 사면의 담을 측량하였다.” 

“그가 장대로 동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재어서 오백 자(265m)였다. 북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오백 자였다. 남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오백 자였다. 그가 서쪽으로 와서 서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오백 자였다. 그가 이렇게 성전의 사방을 재니, 사방으로 담이 있어서, 길이가 각각 오백 자였다. 그 담은 거룩한 곳과 속된 곳을 갈라놓았다.”


에스겔 42장 강해 에스겔에게 보여준 제사장 방

에스겔서의 마지막에는 환상을 봅니다. 그에게 특별한 계시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에스겔은 바벨론에 포로로 가 있습니다. 이 계시는 그림을 보고 구경하고 그 크기를 측량합니다. 방에 들어가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전은 지금 없습니다. 앞으로 지어질 성전입니다. 성전은 무너져서 다시 세워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래의 성전을 구경시켜주시고 안방 뒷방을 다 구경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미래의 성전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설계하고 조감도를 보여주십니다. 들어가보고 측량하게 하십니다. 이런 집에 들어가 제사장으로 섬길 것이라고 합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설게도가 먼저고 모델하우스가 나옵니다. 설계사의 마음 속에 집이 지어지고 현실에 지어집니다. 하나님의 마음 속의 집을 에스겔의 마음에 옮겨놓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시간은 점이 모여서 선으로 가는 것입니다. 어떤 예민한 사람이 시계 앞에서 시계소리를 들었습니다. 조용할 때 집중하여 들으면 딱딱 소리가 납니다. 그는 시계소리를 듣다가 굳어져 죽었습니다. 이 시간이 어디로 가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떠났습니다. 옷을 세탁소에 맡깁니다. 어떤 때는 나이가 들면 이것도 싫어졌습니다. 이제는 옷을 해 입을 생각이 없어집니다. 춥지만 않으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집도 떠나야합니다. 현재에서 우리는 멀어지고 미래를 향합니다. 미래는 미지수고 불확실합니다. 하나님께는 확실한 미래를 보여줍니다.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 오늘 이루어집니다. 드라마에서 왕건이 감옥에 들어갑니다. 왕건은 죽지 않습니다. 그는 안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앞에 있는 결정적인 설계를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얼마나 충만히 사느냐 허무하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곳을 향하여 달려가는 마음으로 삽니다. 우리의 마음은 조급하게 그곳에 가 있습니다. 이것이 충만입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 지향적입니다. 미워하고 한이 맺히고 후회합니다. 그때 그 남자를 만나지 말고 결혼하지 말아야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허무입니다. 그렇게 해야 남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계시를 향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 생활하는 에스겔에게 미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측량합니다.

기도하는 방(1-12)

그 사람이 에스겔을 데리고 북쪽으로 길이 난 바깥 뜰로 나갔습니다.
두 방으로 에스겔을 데리고 들어갔는데, 방 하나는 성전 뜰을 보고 있고, 또 하나는 북쪽 건물을 보고 있었습니다.
북쪽을 향한 그 방을 재니, 길이가 백 자이고, 너비가 쉰 자였습니다.
스무 자 되는 안뜰의 맞은쪽과 돌을 깔아 놓은 바깥 뜰의 맞은쪽에는, 삼 층으로 된 다락이 있었습니다.
또 그 방들 앞에는, 내부와 연결된 통로가 있었는데, 그 너비가 열 자요, 그 길이가 백 자였다.
그 문들은 북쪽으로 나 있었습니다.
삼 층의 방들은 가장 좁았는데, 일 층과 이 층에 비하여, 삼 층에는 다락들이 자리를 더 차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방들은 삼 층이어서, 바깥 마당의 현관에 있는 기둥과 같은 기둥이 없었으므로, 삼 층은 일 층과 이 층에 비하여 더 좁게 물려서 지었습니다.
이 방들 가운데 한 방의 바깥 담, 곧 바깥 뜰 쪽으로 이 방들과 나란히 길이 쉰 자가 되는 바깥 담이 있었습니다.
바깥 뜰을 보고 있는 방들의 길이는 쉰 자였고, 성전을 보고 있는 방들의 길이는 백 자였습니다.
이 방들 아래층에는 동쪽에서 들어오는 문이 있었는데, 바깥 뜰에서 그리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뜰을 둘러 싼 벽이 바깥 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건물 앞 공터 남쪽으로도 방들이 있었습니다.
이 방들 앞에도 통로가 있는데, 그 모양이 북쪽에 있는 방들과 같은 식으로 되어 있고, 길이와 너비도 같고, 출입구 모양과 구조도 같고, 문들도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남쪽에 있는 방들 아래, 안뜰 담이 시작하는 곳에 출입구가 있었습니다.
동쪽에서 들어오면, 빈 터와 건물 앞에 이 출입구가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백성들이 기도하는 방을 보여줍니다.
제사지내기 전에 회개부터 먼저 합니다.
제사드리고 나서 이 방에 모여서 다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 후에는 제사장들만을 위해서 만든 방입니다.
문제는 성전에서 제사의식이 이루어지지만 먼저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하고 깨우치고 명상해야합니다.
몸은 성전에 왔지만 마음은 오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성전의 것을 가득채워야합니다.
우리의 마음 가득채워야합니다.
우리의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저기에 있습니다.
앞의 일을 생각해야합니다.
그것을 미리 준비하면 지혜로운 것입니다.
기도 속에서 명상 속에서 미래를 수용합니다.

제사장의 방(13-14)

그 사람이 에스겔에게 일러주었습니다.
빈 터 맞은쪽에 있는 북쪽 방들과 남쪽 방들은 거룩한 방들로서, 주께 가까이 나아가는 제사장이 가장 거룩한 제물을 먹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방들은 거룩하기 때문에, 제사장은 가장 거룩한 제물과, 제물로 바친 모든 음식과, 속죄제물과, 속건제의 제물을, 모두 그 곳에 두어야 합니다.
제사장이 그 거룩한 곳으로 들어가면, 그 거룩한 곳에서 직접 바깥 뜰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주님을 섬길 때에 입은 옷이 거룩하기 때문에, 그 곳에서 자기들의 예복을 벗어 놓고 다른 옷을 입은 다음에, 백성이 모여 있는 바깥 뜰로 나가야 합니다.

에스겔이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이곳은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 마음과 생각이 거룩해야 합니다.
가정이나 직장의 것을 생각하면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제사드린 음식만 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거룩한 옷을 입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입을 옷은 특별한 옷입니다.
그 옷을 입고 백성에게 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 옷에서 피비린 내가 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거룩한 옷입니다.
백성 앞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가야합니다.
장소도 시간도 마음도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 어떠해야하는가를 생각해야합니다.
생각도 마음도 뜻도 하나님만 섬겨야합니다.
백성에게 가기도 하고 밖으로 나가기도 할 때는 옷을 갈아입습니다.
목사는 강단에 올라갈 때 신는 구두를 따로 둘 수도 있습니다.
바깥에 나가 때는 신도 갈아신습니다.
구별하는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생각도 구별해야합니다.
옷도 구별해야합니다.
옛날 어른 들은 주일 날 오는 옷은 달랐습니다.
우리는 어짜피 구별될 것인데 우리는 여기서 훈련해야합니다.
제사장은 바로 바깥뜰로 가지 말고 옷을 갈아입고 나가라고 합니다.
거룩이 옷을 입는데 표현되는 것입니다.

성전의 사면 담을 측량하다(15-20)

그 사람이 성전의 내부 측량을 마친 다음에, 에스겔을 데리고 바깥 동쪽 문으로 나와서, 사면의 담을 측량하였습니다.
그가 장대로 동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재어서 오백 자였습니다.
북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오백 자였습니다.
남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오백 자였습니다.
그가 서쪽으로 와서 서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오백 자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성전의 사방을 재니, 사방으로 담이 있어서, 길이가 각각 오백 자였습니다. 그 담은 거룩한 곳과 속된 곳을 갈라 놓았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충만함으로 살아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늘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날에 성도를 만날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푯대로 살았습니다.
현세는 지나가고 과거로 갈 것입니다.
우리는 밝은 미래를 지향하며 하나님의 설계도를 세기며 충만하게 살아야 합니다.




10-25-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소를 척량하라(에스겔 41:2)

그 문통의 광이 십척이요 문통 이편 벽의 광이 오척이요 저편 벽의 광이 오척이며 그가 성소를 척량하니 그 장이 사십척이요 그 광이 이십척이며.
The entrance was ten cubits wide, and the projecting walls on each side of it were five cubits wide. He also measured the outer sanctuary; it was forty cubits long and twenty cubits wide.

성소를 측량하라(Do measure the sanctuary)

성소(1964) (헤이칼.  hêykâl )  הֵיכָל    / 내전(41:23)

1. 거대한 건물. 2.  여호와의 전
발음 [ hêykâl ]
어원 / 혼성. 복수 וֹת ,ים[1회만 사용], 호 8:14, 3201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너비’의 뜻에서]
관련 성경 / 전(殿)(삼상1:9, 왕상7:21, 슥6:12), 성소(왕상 6:17, 겔 41:1, 왕상 21:1), 왕궁(왕하 20:18, 잠 30:28, 단 1:4), 내전(대하4:7,22), 신당(대하36:7), 성전(사6:1, 44:28, 렘50:28), 신전(욜3:5).
구약 성경 / 80회 사용


측량하다(4058) (마다드. mâdad)

1. 내뻗다.  2. 측정하다.
발음 [ mâdad ]
관련 성경 / 측량하다(민 35:5, 겔 43:10, 호 1:10), 재다(신 21:2, 삼하 8:2), 헤아리다(사 40:12), 되다(출 16:18), 지워주다(룻 3:15), 진동하다(합 3:6)
구약 성경 / 53회 사용

외전(6944) 코데쉬[ qôdesh ] קֹדֶשׁ   

1. 거룩함.  2. 거룩한 것. 3. 지성소
발음 [ qôdesh ]
어원  / 69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회(출 12:16, 레 23:35, 민 28:18), 성소(출 26:33, 레 20:3, 민  8:19), 지성소(출 26:33, 레 16:16, 왕상 6:16), 성결(출 28:36, 말 2:11), 성물(출 28:38, 레 22:12, 민 6:20), 거룩한 패(출 29:6), 성의(출 29:29, 레 16:32), 거룩한 산(시 43:3), 성산(겔 28:14), 지성물(레21:22, 민 4:4), 거룩한 날(출 31:14), 성일(사 58:13), 성소(레 4:6), 성호(대상 16:35, 시 105:3, 145:21), 예물(대하 31:12), 성전(시 5:7, 138:2, 욘2:4), 거룩한 곳(렘31:40), 성도(단12:7).
[형] 거룩한(출 3:5, 레 2:3, 시 2:6), 성결한(출 15:13, 삼상 21:5)
구약 성경 / 477회 사용

골방(6763) 첼라  [ tsêlâʽ ]  צֵלָע  

1. 갈빗대.  2. 측면.  3. 욥기 18:12
발음 [ tsêlâʽ ]
어원 / 676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갈빗대(창 2:21, 22), 양쪽(출 25:14), 비탈(삼하 16:13), 골방(왕상 6:5, 겔 41:5, 26), 널판(왕상 6:15), 짝(왕상 6:34)
구약 성경 / 40회 사용

외전(17절)  2351. 후츠 [ chûts ]  חֻץ 스트롱번호2351

1. 바깥
2. 밖에 있는 것.
3. 거리
발음 [ chûts ]
어원 / ‘에워싸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바깥(출26:35, 레6:11, 왕하23:6), 다른 곳(레18:9), 거리(수2:19, 시18:42, 나2:4), 밖(삿12:9), 외면(왕상7:9), 길(시31:11), 밭(욥5:10), 길거리(잠1:20, 사10:6), 들(시144:13, 잠8:26), 길바닥(애2:21), 외전(外殿)(겔41:17), 광장(암5:16). [동] 나가다(창39:12,15,18), 내다(삿19:25, 삼하13:17).
구약 성경 / 164회 사용


에스겔 40장부터 48장성전을 회복하시는 은혜로운 계시의 말씀입니다.
흔히 성전을 말하면 눈으로 볼 수 있는 건물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의 성전은 지구상에 건축되지 않았던 것으로 장차 완성될 성전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울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요 2:19).
그러므로 성전은 또는 "예수님" 자신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몸을 가리켜 주의 영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라고 깨우쳤습니다(고전 6:19).

에스겔은 성전 안뜰을 지나 성전 본체로 들어갑니다.
에스겔은 제사장 출신이라 성소까지 들어 올 수 있습니다.
한걸음씩 조심스럽게 성전에 들어온 에스겔은 성전의 두 기둥을 바라봅니다.
이 기둥을 본 에스겔은 과거 솔로몬 성전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열왕기상 7장에 기록된 두 기둥의 의미는 각각 ‘그가 세우신다’, ‘그에게 능력이 있다’란 의미를 가집니다.
‘야긴’은 성전과 함께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를 세우신다는 의미를 상징하며, ‘보아스’는 성전과 다윗 왕조의 견고함과 안정성을 상징하고, 다윗 왕조에 힘과 능력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란 진리를 나타냅니다.

다윗 왕조는 바벨론에게 멸망하였고, 심지어 성전도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그 성전의 기둥인 ‘야긴과 보아스’는 전리품으로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의심하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견고하게 세우시는 분인가?
그러나 이 의심은 하나님께서 진정 세우고 견고하게 붙드시는 나라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진정한 나라는, 혈통적인 다윗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언약 위에 세워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나라 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조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보존하게 하셨고, 결국 다시 돌아오게 하사,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결국은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약속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에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습니다.
기쁠때도 있지만,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시는 가정, 하나님 붙드시는 가정은 세상의 풍파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과 통치 안에 거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권능을 의지하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으며, 영원히 세워지고 견고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이전에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던 이유는 그들의 요란한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다워지려는 열심이 아닌, 하나님을 망각하고, 내가 모든 삶을 통제하려는 교만하고 요란한 ‘열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그 열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사모하며,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워지는 ‘열심’을 갖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41장에는 에스겔이 성전 안뜰을 지나 성전 본체로 들어가게 됩니다.

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에 이르러 그 문 벽을 측량하니 이쪽 두께도 여섯 척이요 저쪽 두께도 여섯 척이라 두께가 그와 같으며

성소(헤이칼.  hêykâl.  הֵיכָל )에 들어갈 수 있는 제사장 에스겔
에스겔은 제사장 출신이라 성소까지 들어 올 수 있습니다.
한걸음씩 조심스럽게 성전에 들어온 에스겔은 성전의 두 기둥을 바라봅니다.
이 기둥을 본 에스겔은 과거 솔로몬 성전의 두 기둥 ‘야긴’ ‘보아스’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야긴(3199) [ Yâkîyn ]  יָכִין 

1. 하나님이 강하게 하시다.  2. 시므온의 한 아들 ‘야긴’. 3. 솔로몬 성전의 현관 앞에 있는 오른쪽기둥 ‘야긴’
발음 [ Yâkîyn ]
어원 / 355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야긴(창 46:10, 왕상 7:21).
구약 성경 / 8회 사용

보아스(1162)  [ Bôʽaz ]  בֹּעַז 

1. 룻과 결혼한 베들레헴 사람 ‘보아스’
2. 솔로몬 성전 앞에 세워진 한 기둥의 이름 ‘보아스’
발음 [ Bôʽaz ]
어원 / 불확실한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보아스(룻 2:1, 왕상 7:21, 대하 3:17).
구약 성경 / 3회 사용


열왕기상 7장에 기록된 두 기둥의 의미는 각각 ‘그가 세우신다’, ‘그에게 능력이 있다’란 의미를 가집니다.
‘야긴’은 성전과 함께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를 세우신다는 의미
‘보아스’는 성전과 다윗 왕조의 견고함과 안정성을 상징
다윗 왕조에 힘과 능력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란 진리를 나타냅니다.

진리는 무엇입니까?
과거 다윗 왕조는 바벨론에게 멸망하였고, 심지어 성전도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그 성전의 기둥인 ‘야긴과 보아스’는 전리품으로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의심하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견고하게 세우시는 분인가?
그러나 이 의심은 하나님께서 진정 세우고 견고하게 붙드시는 나라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진정한 나라는, 혈통적인 다윗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언약 위에 세워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나라 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조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보존하게 하셨고, 결국 다시 돌아오게 하사,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결국은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약속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에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습니다.
환난풍파, 우환질고, 생노병사......
기쁠때도 있지만,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시는 가정, 하나님 붙드시는 가정은 세상의 풍파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과 통치 안에 거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권능을 의지하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으며, 영원히 세워지고 견고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이전에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던 이유는 그들의 요란한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다워지려는 열심이 아닌, 하나님을 망각하고, 내가 모든 삶을 통제하려는 교만하고 요란한 ‘열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그 열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사모하며,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워지는 ‘열심’을 갖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3-4. 그가 안으로 들어가서 내전 문 통로의 벽을 측량하니 두께는 두 척이요 문 통로가 여섯 척이요 문 통로의 벽의 너비는 각기 일곱 척이며 그가 내전을 측량하니 길이는 스무 척이요 너비는 스무 척이라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지성소니라 하고.

성전을 측량하는 ‘놋과 같이 빛난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서 ‘내전 문 통로의 벽’을 측량했다고 합니다.
즉 ‘그가 내전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인데, 여기서 내전은 지성소를 의미합니다.

원래 40장에서부터 그 천사가 계속 에스겔을 데리고 다니면서, 성전 외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측량했습니다.
그러나 3절부터는 에스겔을 성소에 머물게 하고, 천사 혼자서 측량하며 그 내용을 에스겔에게 전해주는 것으로 변경됩니다.
왜냐하면 지성소는 대제사장만 출입할 수 있었고, 대제사장일지라도 레위기 1:1-17에 기록된 대로 대속죄일만 출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스겔은 제사장 신분이지만 지성소에 출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성소는 성전에서 가장 거룩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직접 머물러 있는 곳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아무리 희생 제사를 드려도 주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에는 절대 가지 못합니다.
구약에는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에 ‘사이’가 있었고, 하나님과 인간에 ‘거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오염됨으로 철저하게 구분되었습니다.
이를 구별해주는 것이 ‘성전의 휘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졌다고 합니다.
휘장은 두께가 얇은 천이 아닙니다.
휘장은 두께가 약 20cm이었다고 합니다.
어른 손바닥 너비 만큼의 두께가 찢어졌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며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 막혀있던 그 두꺼운 휘장을 찢어주신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충격적이며 신비롭게 다가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휘장은 예수님의 몸이며, 그 몸의 찢어짐으로 인하여 우리가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생명의 길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5-6. 성전의 벽을 측량하니 두께가 여섯 척이며 성전 삼면에 골방이 있는데 너비는 각기 네 척이며 골방은 삼 층인데 골방 위에 골방이 있어 모두 서른이라 그 삼면 골방이 성전 벽 밖으로 그 벽에 붙어 있는데 성전 벽 속을 뚫지는 아니하였으며.

이어서 성전 벽 삼면의 골방들과 건물 후면의 독립 건물에 대한 측량을 보도합니다.
여기서 총 90개의 크기가 다른 골방들이 나옵니다.
이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골방의 크기가 달랐다는 것은 성도의 능력과 위치, 은사 등에 다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골방들이 크기에 상관없이 모두 교회의 중심인 예수님을 상징하는 성전과 연합되어 있습니다.
또한 골방들은 성전뿐만 아니라 다른 골방들과도 상, 하, 좌, 우로 연결되어 결국 하나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연합되는 것, 하나가 되는 것이 참으로 힘듭니다.
어찌 보면 하나가 되는 것보다, 하나 됨을 지켜나가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하나 되는 비결은, 우리에게 화평이 있어야 한다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8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합니다.

로마서 14:19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화평을 방해하는 것은 내 이기심과 욕심입니다.
이기심과 욕심이라는 것은, 결국 내 자아가 크고 내 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12:3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온유함이라는 히브리어 ‘아나브’는 ‘대답하다’는 뜻인데, 당시 고대 근동에서 대답하는 사람은 오직 종입니다.
주인만 질문할 수 있고, 대답은 종에게만 주어진 몫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온유함'이란 하나님 앞에서 종으로서, 자신을 낮추는 겸허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을 낮추는 겸허함의 습관을 가질 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 됨을 깨는 자가 아니라, 하나 됨을 이루어 나가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13. 그가 성전을 측량하니 길이는 백 척이요 또 서쪽 뜰과 그 건물과 그 벽을 합하여 길이는 백 척이요

13-15절은 성전 본체와 뒤뜰에 있는 부속건물의 총 규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3절에 그가 성전을 측량하니, 놋과 같이 빛난 사람은 성전의 모든 부분을 측량합니다.
측량하는 사람, 즉 천사를 대부분의 신학자는 하나님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전을 친히 측량하여 그 어떠한지를 에스겔에게 보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서아시아 일곱 교회를 측량하셔서 칭찬하시기도 하고, 때론 책망하시거나, 징벌하시는 것처럼, 오늘날 교회를 측량하며 그들의 어떠함을 보십니다.
측량의 목적은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입니다.
교회를 측량하신다는 것은 그 지체인 성도들의 삶도 측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말씀으로, 내 삶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고 재건해야 합니다.

번성하게 만드는 장식(16-26절)

16절 21절까지는 성전의 내부 장식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신기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솔로몬 성전에는 없던, 종려나무가 새 성전에서는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16. 땅에서부터 문 통로 위에까지 그룹들과 종려나무들을 새겼으니 성전 벽이 다 그러하더라

먼저 본문에 나오는 새 성전이란 이 세상의 현실 속에서 지어질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징적 계시입니다.
그리하여 새 성전에 그룹들 외에 ‘종려나무 한 그루’가 있다는 것은 승리를 상징합니다.

종려나무(8561) 티모르[ timmôr ]  תִּמֹּר  
발음 [ timmôr ]
어원 / 32, 35, 겔 41:18,19, 8558과 같은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종려(왕상 6:29, 32), 종려나무(왕상 7:36, 대하 3:5, 겔 41:18)
구약 성경 / 6회 사용



에스겔  7:6
끝났도다! 이 땅 사방의 일이 끝났도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이 끝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장차 최후 승리를 거두고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장차 경험할 영원한 승리, 완전한 승리를 확신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23. 내전과 외전에 각기 문이 있는데

22-26절은 성전에 있는 두 개의 문, 내전문과 외전문에 관한 설명입니다.
내전문은 지성소문이며, 외전문은 성소문입니다.

이는 지성소에 들어가려면 성소문과 지성소문을 통과해야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양들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허황되고 죄된 것을 보고 말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직 내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소망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종려나무’입니다. 18절부터 마지막 절에 이르기까지 성전벽과 성문에 유독 종려나무가 많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단어입니다. 지난 5월,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탔는데, 그 종려상이 바로 종려나무입니다. 종려나무는 ‘타마르’라고 하며, ‘꿀처럼 달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시편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나이다’

말씀을 꿀보다 더 단 것이라고 여기며, 말씀의 달콤함을 얘기합니다.
성전의 곳곳에 종려나무를 새긴 것은, 불사조 피닉스라는 별칭을 가진 종려나무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결국은 승리와 영광 가운데 거할 것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가까이 함으로써, 인생에 넘치는 달콤한 은혜를 맛보는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혹여나 쓴 맛 혹은 매운 맛이 입안에 가득 찰 때, 이를 잠재우는 것은 그보다 더 강한 단 맛을 머금을 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길에서 근심과 슬픔의 쓴맛과 매운맛을 덮는 것은 꿀보다 더 달콤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 새겨주셨듯이, 우리의 심령 속에 새겨 놓으신 종려나무를 생각해봅시다.
그 종려나무 열매 보다 더 달콤한 말씀을 우리 마음에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열매를 맺듯이 번성해야 합니다.
그 열매가 말씀의 열매며, 바른길로 인도하는 은혜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에 취한 인생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바른길을 걸어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에스겔서 1-24장 하나님의 심판(성전을 떠나신 하나님)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기 전(BC 586)에 예언한 내용이고, 33-48장 하나님의 영광 회복(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시는 하나님과 영원한 성전)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한 이후 에스겔이 예언한 내용입니다. 

남 유다 멸망 전까지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망한 이유,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과 거룩한 성전이 무너진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라고 선포했었습니다. 

하지만 에스겔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완전히 멸망 당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에스겔의 예언은 이제 심판에서 구원과 회복으로 바뀝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파수꾼의 역할을 맡기셨다고 선언한 후(33장), 이스라엘이 회복될 거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에스겔 33-39장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거라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볼 에스겔 40-48장은 ‘새롭게 회복될 예루살렘과 새 성전’에 대한 환상입니다. 솔직히 아무리 읽어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것을 글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정말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성전을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보여주신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새 예루살렘과 성전을 보고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고, 성전의 설계도를 보여주어서 법도와 규례를 지키고 행하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에스겔 40:4; 43:10,11입니다.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에스겔 40:4) 

“너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 성전을 설명해 주어서, 그들이 자기들의 온갖 죄악을 부끄럽게 여기게 하고, 성전 모양을 측량해 보게 하여라. 그들이 저지른 모든 일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성전의 설계도 그들에게 가르쳐 주어라.”(에스겔 43:10) 

성전의 배치도, 성전의 출입구, 이 성전의 건축 양식 등 모든 규례와 법도와 모든 율례를 그들에게 알려 주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글로 써 주어서, 그들이 이 성전의 건축 설계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고 행하게 하여라. 성전의 법은 이러하다. '성전이 자리잡고 있는 산꼭대기 성전터 주변은 가장 거룩한 곳이어야 한다.' 이것이 '성전의 법'이다.”(에스겔 43:11)

에스겔이 새 예루살렘과 성전을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본 성전에 관해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새 예루살렘과 성전을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전의 설계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서 그 설계대로 성전을 짓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들에게 에스겔을 통해 새 예루살렘과 성전의 환상을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자세하게 전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예루살렘의 성전 환상을 통해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은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나라를 잃고,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성전마저 파괴된 상황이었습니다. 에스겔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를 게 없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었습니다. 마치 골짜기에 가득 쌓여 있던 마른 뼈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새로운 예루살렘 성과 새로운 성전을 보여주시면서, 곧 구원(회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에스겔이 그 약속을 보았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 환상은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이요, 용기를 주는 메시지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새로운 성전은 에스겔이 제사장으로 평생 섬길 꿈에도 그리던 직장 아닙니까? 에스겔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예배할 성전이라고 생각만 해도 얼마나 감격스러울까요? 에스겔이 본 새 예루살렘과 성전 환상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영원한 천국의 모습입니다. 


성전 환상(2) 영원한 성전 / 새 예루살렘(40-48)

40장

환상 중에 본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

41장

새 성전의 구조

에스겔 41장은 새 성전에 대한 자세한 설명입니다.

에스겔 41:1-4절은 성소와 지성소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으로 들어가서 벽을 재니, 그 벽 두께가 양쪽이 각각 여섯 자(3.18m)였다.
그 문의 통로는 너비가 열 자이고, 그 문의 통로 옆의 벽 너비는 양쪽이 각각 다섯 자였다.
그가 성소를 재니, 길이가 사십 자(21.2m)요, 너비가 스무 자(10.6m)였다.” 

“또 그가 지성소로 들어가서 문 통로의 벽을 재니, 그 두께가 두 자였다. 그 문의 통로는 너비가 여섯 자이고, 그 벽의 너비는 양쪽이 각각 일곱 자였다. 그가 지성소의 내부를 재니, 길이가 스무 자(10.6m)이고, 너비도 스무 자(10.6m)였다. 그가 나에게 "이 곳이 지성소다!" 하고 일러주었다.” 


에스겔 41:5-11절은 성소와 지성소의 골방들(곁방)에 대한 설명

“또 사람이 성전의 벽을 재니, 두께가 여섯 자였다. 성전에는 삼면으로 돌아가며 방들이 있는데, 너비가 각각 넉 자였다. 그 곁방들은 방 위에 방이 있어서 삼 층을 이루고 있으며, 층마다 방이 서른 개씩 있었다. 그런데 그 곁방들은 성전을 돌아가면서 성전의 벽에 부착되어 있어서, 성전의 벽 자체를 파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 둘러 있는 곁방들은, 그 층이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졌다. 이 곁방의 건물이 성전의 주위로 올라가며 위층까지 건축되었다. 그래서 이 건물은 아래층에서 중간층을 거쳐 맨 위층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내가 또 보니, 성전의 둘레에 지대가 더 높이 솟아 있었는데, 곧 곁방들의 기초의 높이였다. 그 높이는 한 장대인 여섯 자였다.”

“곁방들의 외부에도 담이 있었는데, 그 두께가 다섯 자였다. 또 성전의 곁방들 밖에는 빈 터가 있는데, 그 너비는 스무 자이며, 성전을 빙 돌아가는 뜰이었다. 그 곁방 건물의 문이 이 공간쪽으로 났는데, 하나는 북쪽으로 났고, 또 하나는 남쪽으로 났다. 둘러 있는 이 빈 터의 너비는 다섯 자였다.”

에스겔 41:1-11 /  성소와 지성소,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를 둘러싸고 있는 골방들을 설명
에스겔 41:12-26 / 성전의 외부 시설과 문들에 관해 설명

성전의 서쪽 건물과 성전 측량(12-14)

“또 성전의 서쪽 뜰 뒤로 건물이 있는데, 그 너비가 일흔 자였다. 그 건물의 벽은 사방으로 두께가 다섯 자였다. 그 건물 자체의 길이는 아흔 자였다. 그가 성전을 재는데, 그 길이가 백 자이고, 서쪽 뜰과 건물과 그 양쪽 벽까지 합해서 또 길이가 백 자였다. 성전의 정면 너비와 동쪽 뜰의 너비도 각각 백 자였다.” 

성전 뒤뜰 너머 건물과 성전 지성소와 성전 뜰 현관과 벽과 창문과 다락(15-20)

“그가 이어서 성전 뒤뜰 너머 있는 건물을 그 양편의 다락까지 함께 재니, 그 길이도 백 자였다. 성전 지성소와 성전 뜰 현관과 문 통로의 벽과 창문과 삼면에 둘러 있는 다락에는, 바닥에서 창문에 이르기까지, 돌아가며 나무 판자를 대 놓았다. 그러나 창문은 틀만 있는 것이었다.”

“문 통로의 위와 성전 내부와 외부의 벽까지 재어 본 곳에는, 다 판자를 대 놓았다.
그 판자에는 그룹과 종려나무들을 새겼는데, 두 그룹 사이에 종려나무가 하나씩 있고, 그룹마다 두 얼굴이 있었다.” 

“사람의 얼굴은 이쪽에 있는 종려나무를 바라보고, 사자의 얼굴은 저쪽에 있는 종려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전 벽 전체가 이와 같았다. 성전 바닥에서 문의 통로의 윗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든 벽에 그룹과 종려나무들을 새겨 두었다.”

판자(널 판자)에 새겨 넣은 그룹들과 종려나무에 대해 설명을 드립니다.
그룹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호위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일을 하는 천사들입니다.
그룹들은 천상의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종려나무는 많은 열매와 나무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인해 성경에서 ‘아름다움과 번성’을 상징합니다(시 92:12,13; 아 7:7,8).
그래서 종려나무는 지상의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그룹들과 종려나무는 하늘과 땅의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에스겔 41:21-26 / 제단과 성전에 있는 문들에 대한 설명

성전 본당의 문 통로는 네모가 나 있었다.
그리고 지성소 앞에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한 것이 있었다.
나무로 만든 제단이 있는데, 그 높이는 석 자요, 그 길이는 두 자였다.
그 모퉁이와 그 받침대와 옆 부분도 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그가 나에게 일러주었다. “이것이 주님 앞에 차려 놓는 상이다.”” 

“성전 본당과 지성소 사이에는 문을 두 번 열고 들어가야 하는 겹문이 있었다.
문마다 좌우로 문짝이 둘이 있고, 각 문짝에는 아래 위로 두 개의 돌쩌귀가 붙어 있었다.
네 개의 문짝에는 모두 그룹들과 종려나무들이 새겨져 있어서, 성전의 모든 벽에 새겨진 모습과 같았다.
성전 바깥의 정면에는 나무 디딤판이 있었다.
또 현관의 양쪽 벽에는 곳곳에 틀만 있는 창과 종려나무의 그림이 있고, 성전의 곁방과 디딤판에도 모두 같은 장식이 되어 있었다.”








10-24-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척량하는 장대(에스겔 40:3)


나를 데리시고 거기 이르시니 모양이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서 있더니.
He took me there, and I saw a man whose appearance was like bronze; he was standing in the gateway with a linen cord and a measuring rod in his hand.


척량하는 장대(a measuring rod)
우케네 함믿다( וּקְנֵה הַמִּדָּה)

장대(7070) 카네(qâneh)  קָנֶה  

1. 갈대.  2. 줄기.  3. 저울대 
발음 [ qâneh ]
관련 성경 / 줄기(창 41:5, 출 25:31, 욥 40:21), 가지(출 25:32, 37:18,21), 갈대(왕상14:15, 왕하18:21,사42:3), 창포(아4:14, 겔27:19), 향품(사43:24, 렘6:20), 저울(사46:6), 장대(겔40:3,7, 42:16), 팔뼈(욥31:22), 갈밭(시68:30).
구약 성경 / 61회 사용



척량(4060) 미다(middâh)  מִדָּה    

1. 확장.  2. 치수.  3. 옷
발음 [ middâh ]
관련 성경 / 크기(겔 46:22), 자(대상 23:29), 부분(느 3:11, 21, 3:30), 세금(느 5:4), 분량(욥28:25), 옷깃(시133:2), 장대(사45:14), 측량줄(렘31:39), 길이와 너비(겔 40:22), 측량(슥2:1), 장단(출36:9),
[형] 큰(렘 22:14).
[동] 측량하다(겔 40:5, 21, 42:15)
구약 성경 / 56회 사용

의상으로 보여진(계시된 성전(천년시대).
1-4 에스겔이 이상중에 성읍 같은 것을 보다.
5-27 바깥 뜰과 문 입구.
28-47 그 안뜰과 문 입구.
48-49 성전의 현관.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가고,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습니다.
에스겔 40장은 바벨론으로 처음 유수되어 갔을 때로부터 25년이 지났고,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14년째 해라고 합니다.
바로 그 때 에스겔은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셔서 대단히 높은 산 위에 두셨습니다.
마치 이것은 율법을 받기 위해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간 것과 비슷합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전한 인물도 모세와 에스겔 뿐입니다.

그 산 위에서 에스겔은 천사와 같은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에스겔에게 성전으로 안내합니다.
에스겔이 성전을 안내받으며 둘러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에스겔 8장에서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전과 그 성전의 가증한 것들을 둘러보았습니다.
그 환상은 결국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새 성전에 돌아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회복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끝난 줄 알았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회복을 말씀하십니다.
심판 중에도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심판을 받는 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그것을 숨기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이었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 이후에 구원의 은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과 어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장시키시기 위해 고난을 주시기도 하지만 나의 죄로 인해 어려움이 찾아올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나를 죄의 구덩이에 밀어넣고, 성령이 아닌 세상의 쾌락을 좇은 것이 나에게 화로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을 반드시 건져내십니다.
주께서 택한 자를 잊지 않고 찾아올리신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감싸고 있는 고난과 어려움이 주께서 나를 성장시키시기 위해 주신 것인지 나의 죄로 인한 것인지를 점검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께서 회복시켜 주실 날을 기대하는 이 한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5절에서는 에스겔이 처음으로 본 곳을 소개합니다.
그 곳은 바로 담입니다.
성전 지역의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담을 말하는 것이죠.
본문에 나오는 담은 아주 큰 담이었습니다.
두께와 높이가 6척이었습니다.
약 3.2m 정도 되는 것이죠.
아주 크고 두꺼운 담이었습니다.
담이 무엇입니까?
담은 공간을 통제하고 경계를 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밖과 성전의 속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속된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입니다.
단절하는 것입니다.

한국은 예절과 의식을 중요시하다 보니 이것이 지나쳐 ‘허례허식’이 될 때도 있습니다.
겉만 번드르르하게 꾸미는 것이죠.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다 보니까 스몰웨딩 등의 새로운 결혼문화가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교회도 보이는 것에 힘을 많이 뺐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건물을 갖지 않는 것 아닙니까?
화려하게 장식한 건물에 투자하지 않고 그것으로 나누고 섬김을 실천하는 것이죠.

그러나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담을 높이자는 것이 아닙니다.
건물 등으로 우리의 화려함을 드러내고, 우리의 규모를 자랑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외적인 것을 강조할 필요는 없지만 외적인 것을 지나치게 파기하면 내적인 것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이 되면 공예배를 드립니다.
공동체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그 예배에는 형식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순서가 있습니다.
딱딱하기도 하고, 지루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형식을 많이 간소화 시킨 예배가 등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형식이 왜 존재합니까?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형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형식을 너무 평가절하할 때가 있습니다.
설교 전의 순서는 마치 오프닝 무대처럼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믿는 것을 사도신경을 통해 한 마음으로 고백하고, 우리의 마음을 모아 대표자가 나와 기도를 하는 시간을 마치 다음 프로그램 중간에 방영되는 TV 광고정도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
형식만 있는 예배는 종교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형식만 강조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담이 무너지면 내적인 것을 지킬 수 없습니다.
외적인 것을 버리고 내적인 것만 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형식과 내용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옳바른 방법이 아니죠.
율법에 얽매여서 자유와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얽매이지 않겠다며 담을 무너뜨려 아무런 경계없이 살아가는 모습도 바람직한 신앙인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의 형식과 내용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참된 주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그리스도인으로써 나의 모습에 담이 있습니까?


에스겔 40~48장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환상을 담고 있습니다.
‘심판과 회복’이라는 패러다임은 모든 선지서들이 가지고 있지만, 특별히 에스겔은 다른 선지서에 비해 이스라엘의 신앙적인 회복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부터 제시되는 에스겔 성전 환상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스라엘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범위에 있어 더욱더 확장된다는 것을 보여주게 됩니다.

환상의 시작과 바깥 뜰과 그 문들(1-27)

에스겔서에 나오는 마지막 날짜 관용구인 ‘우리가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해,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달 열째날”이라는 표현을 통해 에스겔의 마지막 부분이 시작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환상을 통해서 여호와의 공의롭고 날카로운 칼이 심판과 파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 이후, 구원과 회복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점을 40장을 시작하면서 기대해보게 됩니다.

40~42장은 이스라엘의 성전이 회복될 것임을 새성전의 환상을 통해 보여줍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인 40장에서는 ‘놋 같이 빛나는 사람’ 즉, 한 천상적인 존재가 에스겔을 성전의 경내와 그 주위로 데리고 다니면서, 성전 바깥뜰의 문과 방들, 안뜰의 문과 방들, 성전문 현관을 보여줍니다.

에스겔을 데리고 다니는 천상적인 존재는 그를 이스라엘의 땅 중에서 매우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 성읍의 형상 같은 것을 보여주며 말합니다.

(4)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

환상을 보여주기에 앞서, ‘보고’, ‘들으며’, ‘생각할지어다’, ‘전할지어다’라는 네가지 동사를 통해 에스겔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끊임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보여줄 환상을 통해 지금의 징계의 기간이 끝나게 되면, 다시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회복의 소망을 주시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회복은 철저하고 섬세했습니다.

(3) 나를 데리시고 거기에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더니

삼줄은 큰 공간을, 장대는 작은 공간을 측정하는 기구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천상적인 존재는 기존 건물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완성된 성전 공간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것을 측정하고 있으며, 이 성전의 건축자 하나님을 성전에서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아무런 도구 없이도 한치의 오차가 없는 성읍을 지으실 수 있는 능력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눈대중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줄과 막대기로 정확하게 계측해서 지은 완벽한 성읍으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가 가진 측량하는 막대기의 길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그 길이는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한 손바닥 너비가 더한 자로 여섯척'에 이른다고 합니다.
팔꿈치에서 손가락까지의 길이는 ‘1규빗’으로 불립니다.
보통 1규빗은 45.6cm를 의미하는데 에스겔이 사용하는 자는 1규빗에 한 손바닥의 너비를 더한 것임으로 52cm 정도로 계산합니다.
개역개정은 이 단위를 규빗과 구분하기 위해 '척'이라고 하고 새번역은 '자'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여섯 척에 이르는 이 측량하는 장대는 3.1m정도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도구로 계측하는 이 도구에서도 새로운 성전으로 지어질 에스겔성전에 대해 기대해보게 됩니다.

에스겔과 함께한 천상적인 존재는 이 도구들을 가지고 먼저, 담의 두께와 높이를 측량합니다.
그 두께와 높이는 한 장대(3.1m)였습니다.
담 아래로부터 동쪽을 향한 문 앞까지는 일곱개의 계단이 있었고, 이 계단을 올라가게 되면 문이 나오게 되는데, 그 문의 통로는 한 장대(3.1m)의 크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문 안쪽으로는 한 장대(3.1m) 크기의 문지기들의 방이 좌우양쪽으로 각각 3개씩 있었으며, 각 방 사이에는 5척( 2.6m) 크기의 벽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문지기들의 방 끝에는 안 쪽 문의 현관, 즉 성전으로 향하는 문의 현관의 크기도 역시, 한 장대(3.1m)였습니다. 그리고 현관의 크기를 8척(4.2m)이었습니다. 그 현관 앞에는 곁기둥이 있는데 2척(1m)의 두께를 가지고 있는 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의 통로를 측량하니 10척(5.2m)였고, 통로의 길이는 13척(6.8m)가량 되었습니다. 그리고 문지기 방 앞에는 높이와 폭이 1척(52cm)되는 난간이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동문의 문간의 크기, 곧 왼쪽 문지기 방의 지붕 끝과 오른쪽 문기방의 지붕끝의 폭을 측량하게 되면 25척(13m)가 되었습니다.
성전 뜰을 향하는 현관 폭은 20척(10.4m)가량 되었습니다.
또한 그 문의 길이는 50척(26m)가량이 되었습니다.

또한 현관과 모든 문지기 방의 벽과 그 방들 사이에 있는 벽에는 창이 있었고 현관 양쪽 기둥에는 종려나무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동문을 자세하게 측량하면서 봤던 에스겔은 동문 통과하면 펼쳐지는 바깥뜰로 인도를 받습니다.
바깥뜰의 삼면이 모두 박석, 곧 넓적한 돌로 포장이 잘 되어 있었습니다. 이 포장은 동문의 폭과 같은 폭으로 깔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들 위에는 30개에 이르는 방이 있었고 양쪽 그 중앙에는 동문과 같은 형태의 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그문을 북쪽을 향한 문과 남쪽을 향한 문이라 지칭합니다. 바깥뜰 문을 마주하고 안뜰 문이 있었는데, 그 사이의 거리는 100척(52m)이었습니다.
바깥뜰을 살펴본 에스겔은 이제 다시 북쪽을 향한 문과 남쪽을 향한 문의 순서로 인도를 받았으며, 그 크기와 구조에 있어 동문과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성전 안 뜰의 문과 방들(28-49)
바깥뜰의 남쪽을 향한 문에 대한 환상을 마치고 이제 안뜰의 남쪽문을 보게 됩니다.
안쪽 문의 크기도 바깥 문의 크기와 동일합니다.
길이기 50척(26m)이고, 너비가 25척(13m)입니다. 내부의 구조 또한 바깥문과 동일합니다.
같은 형태의 두문, 바깥 문과 안쪽 문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으며, 그 사이는 100척(52m)의 거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문이 있는 위치상의 높이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바깥뜰과 안 뜰의 경계로 존재하는 8개의 계단을 올라야 안뜰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안뜰 남쪽 문을 본 에스겔은 이제 같은 형태의 동쪽 문과 북쪽 문을 살펴보게 되며, 이후 안뜰 북쪽 문의 부속 건물들과 물건들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먼저, 문 곁에는 문이 있는 방이 있었습니다.
그 방은 번제물을 씻는 방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의 현관, 즉 안쪽에는 양쪽에 각각 상이 2개씩 있었습니다.
이 상은 번제와 속죄제, 속건제의 희생제물을 잡기 위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같은 형태의 상이 문 밖에 양쪽에도 2개 씩 있었습니다.
이 또한 희생제물을 잡기 위한 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총 8개의 상이 이쪽과 저쪽에 4개씩, 안쪽과 바깥쪽에 4개씩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8개의 상은 다듬은 돌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길이와 너비는 모두 1척 반(78cm)이었고, 높이는 1척(52cm)이었습니다. 잘 다듬어진 돌 상 위에는 희생제물을 잡는 도구들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문의 현관 안에는 손바닥 넓이만한 갈고리가 사방에 박혀 있었으며, 상 위에는 희생제물의 고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뜰 문 옆에는 번제물을 씻는 방 외에 노래하는 자의 방이 두개가 있었는데, 북쪽에 있는 방은 남쪽을 향하고 있고, 남쪽에 있는 방은 북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방들은 문이 안뜰을 바라보는 형태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방에 대해서 천상적인 존재가 말합니다. “남쪽을 향한 방은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쓸 것이요, 북쪽을 향한 방은 제단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쓸 것이라 이들은 레위의 후손 중 사독의 자손으로서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 수종드는 자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안 뜰을 측량했습니다. 그 뜰은 그 길이와 너비가 모두 100척(52m)의 정사각형의 형태였으며, 성전의 앞 뜰 안에는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성전 문의 현관으로 인도를 받았습니다. 성전 문 현관에 이르러 벽을 재어보니 너비는 5척(2.6m)이고 그 폭은 3척(1.6m)이었으며, 총 현관의 너비는 20척(10.4m)이고 폭은 11척(5.7m)이었습니다. 그리고 안뜰에서 성전문으로 가는데에는 또 한번 계단을 올라야 했고, 계단 위에는 문 벽 곁에 두개의 기둥이 있었습니다.

에스겔 40장에는 새롭게 지어질 에스겔성전의 외관을 중심으로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성막, 솔로몬성전, 스룹바벨성전, 헤롯성전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했지만, 에스겔성전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에스겔성전을 미래에 완성될 성전의 모습으로 여깁니다.
또한 에스겔성전에는 다른 성전들과 특별한 차이점이 있는데, 동문만 있는 다른 성전들과 달리, 에스겔성전은 성전으로 가는 문이 동문, 남문,북문, 3개가 있습니다.

이는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이제 에스겔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만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것임을 예표하고 있다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이는 성전의 개방성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음을 보여주고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개방된 성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온 자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바로 성전이며, 우리 안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지어지지 않았던 이 에스겔성전이 있습니다.
에스겔성전이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 안에서 한치의 오차없이 설계되고 완공되어졌던 것과 같이, 완전하게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세워져 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전된 우리의 본분을 잊은채,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하심의 삶이라는 것을 망각한채 우리의 삶을 제멋대로 지어가는 것은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고 고백하는 삶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전된 본분을 잊지 않고, 우리의 삶을 계획하시고 함께 지어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가며, 우리의 삶 전체가 거룩하게 세워져 나가게 되어, 참된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비록 환상 가운데였지만, 에스겔성전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계획하시고 완벽하게 완공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완공된 이 성전을 에스겔에게 보여주시며, 이제 이스라엘에게 회복을 말하라 말씀하신 은혜를 되뇌어봅니다.
아버지, 우리와 우리의 삶이 이 에스겔성전이 되어, 우리를 통해 만방이 아버지를 깨닫고, 우리를 통해 아버지께로 열방이 나아오는 역사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이를 위해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답지 못한 우리의 삶을 끊어낼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성전되기 위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낼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에스겔성전의 모습을 상상하며 천천히 본문을 다시 묵상해봅시다.
2. 바깥뜰 문 밖에서 안뜰 문 앞까지 걸어오르는 계단과 100척의 거리에 희생제물을 끌고오는 사람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회개할 죄가 무엇인지를 묵상해봅시다.
3. 에스겔성전 앞에 선 천상적인 존재의 손에 들려 있는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기억하며,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은 치밀한 계획하심이 무엇인지를 묵상해봅시다.
4. 에스겔성전된 나의 삷을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에스겔 40:1
이스라엘 땅(삼마)

שָׁם 스트롱번호8033

1.

샴부 거기

2.

창2:8

3.

שָׁם־שָׁם 여기

발음 [ shâm ]
구약 성경
831회 사용

에스겔 40:1
여호와의 권능(애드, 손)

יָד 스트롱번호3027

1.

사람의 손.

2.

전치사와 함께 쓰이는 경우.

3.

בְּיָדִי.㉠ 내 손에

발음 [ yâd ]
관련 성경
☞손(창3:22, 출6:1), 수중(창16:6, 신33:3), 범사(창39:3), 팔(창48:14, 출17:12), 일(출14:31), 수하(출21:16, 민4:33), 힘(레5:7, 민6:21), 위치(민2:17), 해변(민24:24), 권능(민33:3, 신34:12, 시78:42), 능력(신3:24, 왕상18:46), 손목(신6:8, 11:18), 채주(신15:2), 변소(신23:12), 수단(신32:27), 강 가(삿11:26), 기념비(삼상15:12, 삼하18:18), 발톱(삼상17:37), 권세(삼하8:3, 대상18:3, 욥5:20), 밭(삼하14:30), 축(왕상7:32), 버팀대(왕상7:35,36), 규례(왕상10:13), 팔걸이(왕상10:19, 대하9:18), 지계(대상7:29), 명령(대상25:2), 배(단1:20), 재앙(욥23:2), 세력(시22:20, 63:10), 기념물(사56:5), 처소(렘6:3), 길(겔21:19), 손뼉(겔25:6), 어귀(겔48:1), [부] 말미암아(학1:1), 수고로이(창5:29), 담대히(출14:8), 고의로(민15:30). [동] 용납하다(창34:21), 행하다(출29:35), 안수하다(레1:4, 민27:18, 신34:9),맡기다(레16:21), 계수하다(민31:49), 복종하다(대상29:24), 항복하다(렘50:15), 통하다(호12:10).
구약 성경
1617회 사용






요한계시록 11:1-2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

마지막 때에는 성전 밖을 척량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알곡과 죽정이를 구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경고의 말씀입니까?
과연 나는 하나님 앞에서 알곡과 같은 신앙생활을 유지하였는가?
아니면 가라지와 같은 신앙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는가?


로리 베스 존스(Laurie Beth Jones) | 최고경영자(CEO)

로리 베스 존스는 '주식회사 예수'라는 책에서 "성공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오늘도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성공에 목말라 있는데 성공이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인생에 그분의 뜻을 이룸으로서 범사에 형통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신명기 29:9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대적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그분이 도와주신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영적 전쟁의 현장에서 대적을 철저히 물리쳐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마음껏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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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기독교인들로 뒤덮일 수 있었던 기적의 경영!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이자 반전의 전문가,
예수가 실천한 경영자적 삶과 경영 철학을 만나다!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기독교인들로 뒤덮일 수 있었던 기적과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 <지저스 씨이오>는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인류 역사상 최고의 리더들로 키워낸 예수의 경영자적 삶을 통해 시대를 초월한 경영 철학을 깊이 있게 풀이하고 있다. 예수가 불과 3년 만에 이뤄낸 기적의 사역을 자아 극복, 행동, 인간관계 형성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그 강점을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 기술함으로써 CEO와 리더, 그리고 리더를 꿈꾸는 자들에게 최고의 가이드를 제공한다.

스프링클러 바로 주변에 있는 잔디들만 누렇게 말라버린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스프링클러는 강력한 에너지와 추진력으로 먼 구석까지 물을 뿌리지만, 정작 가까운 곳에는 물을 대지 못한다. 그래서 물의 원천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잔디들이 말라 죽어버리는 것이다. … 예수는 자신의 사람들을 먼저 교육하고 계발해야 한다는 원리를 알고 있었다. ‘파문형 경영’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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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경영자 예수>의 저자 로리베스 존스의 기적의 사명선언문

 

당신이 사는 이유, 당신에게 꼭 맞는 사명을 찾아라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미래가 불안하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면 사명선언문을 작성하라!

"이것이 바로 나다"라는 확고 부동한 사명선언문을 갖게 되면 직작을 잃거나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말끔히 사라진다. 진정한 사명을 따른 일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기 때문이다.

 

사명이 있는 삶은 어려움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는다. 의사결정은 쉽고 빨라지며 놀랄 만큼 강한 추진력이 생긴다. 성공적인 삶,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다면 먼저 나에게 꼭 맞는 사명을 찾아내고, 그것을 선언하라! 내가 누구이며 왜 사는지 그 이유를 선포하는 순간 당신의 인생은 180도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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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팀보다 더 훌륭한 팀을 건설할 수 있다면...?! 현대는 팀워크의 시대다. 개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하다 하더라도, 팀원들이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어 내지 못한다면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해낼 수 없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최고의 팀을 구축해낸 예수, 아마 당신도 그러한 팀에서 일하기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어떤 조직에 속해 있건, 팀워크는 이제 당신이 풀어야할 최대의 과제이다. 오늘부터 당신이 속한 팀이 달라진다! 이 책은 팀워크를 증진시키고 당신의팀이 보다 나은 성과를 도출해낼수 있도록 영감을 제시하고 있다. 성경에서 퍼올린 고대의 지혜와 현실에서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어 내고 있는 팀들의 생생한 사례를 통해 오늘부터 당신의 팀은 삶과 사고방식, 그리고 영혼까지도 공동체로 변화한다!






에스겔 39장 곡에 대한 심판과 멸망

39:1-7, 곡과 마곡에 임한 형벌.
39:8-10, 이스라엘의 승리.
39:11-16, 적군의 시체의 처분.
39:17-20, 각종 새와 들짐승에의 향응.
39:21-29, 하나님의 영광이 열국민에게 나타나고 이스라엘은 일찍이 죄로 인하여 포로되었으나 긍휼(연민)에 의해 회복된 일

더럽혀진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36:23)

하나님의 심판(1-24장) - 하나님의 영광 상실

소명

(1-3장)

하나님 보좌의 환상(1장)

에스겔의 부르심(2,3장)

유다에

대한 심판

(4-24장)

유다의 심판에 관한 상징적 행동(4-7장)

성전 환상(1)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심(8-11장)

유다에 대한 심판 경고와 이유(12-24장)

하나님의 회복(25-48장) - 하나님의 영광 회복

열방에

대한 심판

(25-32장)

두로와 열국에

대한 심판

(25-28장)

암몬, 모압, 에돔, 블레셋에 대한 심판(25장)

두로에 대한 심판(26장)

두로를 위한 애가(27장)

두로와 시돈이 받을 심판(28장)

애굽에 대한 심판

(29-32장)

애굽이 받을 심판(29,30장)

애굽의 영광과 교만이 폐함(31,32장)

이스라엘

회복

(33-48장)

회복의 소망

(33-39장)

죄에 대한 심판과 예루살렘의 함락(33장)

거짓 목자와 참된 목자(34장)

세일 산과 에돔의 황폐함(35장)

이방의 수치가 된 이스라엘 회복(36장)

이스라엘의 회복과 통일에 대한 환상(37장)

& 마른 뼈 환상

곡에 대한 심판과 멸망(38,39장)

성전 환상(2)

영원한 성전(새 성전)

(40-48장)

이상 중에 본 성읍의 형상(40장)

새로운 성전의 구조(41,42장)

성전에 임한 여호와의 영광(43장)

제사장의 직분(44장)

거룩한 구역과 지킬 절기, 제사(45,46장)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47장)

이스라엘 지파의 기업(48장)

에스겔서 1-24장 하나님의 심판(성전을 떠나신 하나님)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기 전(BC 586)에 예언한 내용
33-48장 하나님의 영광 회복(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시는 하나님과 영원한 성전)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한 이후 에스겔이 예언한 내용입니다. 

남 유다 멸망 전까지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망한 이유,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과 거룩한 성전이 무너진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라고 선포했었습니다. 

하지만 에스겔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완전히 멸망 당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에스겔의 예언은 이제 심판에서 구원과 회복으로 바뀝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파수꾼의 역할을 맡기셨다고 선언한 후(33장), 이스라엘이 회복될 거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에스겔 33-39장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거라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회복의 소망(33-39장)

33장

죄에 대한 심판과 예루살렘 함락

34장

거짓 목자(이스라엘 목자)와 참 목자(하나님)

35장

세일 산과 에돔의 황폐함

36장

이방의 수치가 된 이스라엘 회복

37장

이스라엘 회복과 통일에 관한 환상 & 마른 뼈 환상

38장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1)

39장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2)

바다 동편 사람의 통행하는 골짜기(게 하오브림 키드마트 하얌)

- 혹자는 '게 하오브림'을 문자적 유사성에 근거해 민수기 27:12; 신명기 32:49에 언급된 '아바림 산'으로 해석하기도 하며(Michaelis),
본절의 심판적 의미를 강조해 욜 3:2에 언급된 '여호사밧 골짜기'로 보기도 한다(Kliefoth, Havernick).
또한 어떤 학자는 이를 '게 하아바임'으로 읽어 슥 14:4에 언급된 골짜기와 연관시킨다(Hitzig).
그러나 이는 이 매장지가 하반절에 '곡의 무리들의 골짜기'를 뜻하는 '하몬곡의 골짜기'로 새롭게 명명된 사실에 비추어 원전 그대로 당시 애굽과 갈대아 사이의 무역로가 위치한 사해 앞쪽의 요단 골짜기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Delitzsch).

이 지역은 길르앗에서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지리적 요충지로 골짜기의 지형이 넓어서 많은 곡 군대의 시체를 매장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여겨진다.

실로 본 구절은 그토록 중요한 무역로가 곡 군대의 매장지로 막혀버릴 것이란 예고를 통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의 권능을 재삼 주지시키고 있다.

"하몬곡 골짜기(the Valley of Hamon Gog)"는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곡 왕과 그를 추종하던 많은 무리들이 장사되는 곳을 말합니다(11절).
'하몬곡 골짜기'는 "곡의 무리들의 골짜기" 라는 뜻입니다.



곡(Gog)은 메섹과 두발을 통치한 마곡의 왕입니다(겔 38:2).
곡은 에스겔 38, 39장과 요한계시록 20:8-10절에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악의 세력의 지도자로 나타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북방으로부터 내려보내셨지만(겔 38:15), 나중에는 이스라엘의 산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재앙으로 인해 멸망 당하는 인물입니다(겔 39:2-6). 

곡(Gog)이 실제로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600여 년경에 살았던 오늘날의 터키인 소아시아 북쪽에 위치한 리디아의 ‘기게스’, 라스샴라 문헌에 나오는 이방인 ‘가가’, 시리아의 셀류쿠스 왕조의 악명높은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알렉산더 대왕’ 등 다양한 인물이 거론되는데, 다수가 리디아 왕 ‘기게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곡이라는 사람 자체가 누구인가보다 곡이 상징하는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곡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고 달려드는 악한 적대 세력을 상징합니다.

에스겔 39장은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에 관한 내용입니다.

에스겔 39:1-6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곡을 대적하여 친히 싸우시겠다는 내용입니다. 

“너 사람아, 곡을 규탄하여 예언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너 로스와 메섹과 두발의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한다. 내가 너를 돌려 세우고 이끌어 내겠다. 너를 북쪽 끝에서 이끌어 내서 이스라엘의 산야를 침략하게 하겠다. 그렇게 해 놓고서, 나는 네 왼손에서는 활을 쳐서 떨어뜨리고, 네 오른손에서는 네 화살을 떨어뜨리겠다.”

“너는 네 전군과, 너와 함께 한 연합군과 함께 이스라엘의 산야 위에서 쓰러져 죽을 것이다. 나는 날개 돋친 온갖 종류의 사나운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너를 넘겨 주어서, 뜯어 먹게 하겠다. 내가 말하였으니, 너는 틀림없이 들판에서 쓰러져 죽을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내가 또 마곡과 여러 섬에서 평안히 사는 사람들에게 불을 보내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에스겔 39:7,8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알려주셔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다시는 더럽혀지지 않게 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내 거룩한 이름을 알려 주어서, 내 거룩한 이름이 다시는 더럽혀지지 않게 하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뭇 민족이, 내가 주인 줄, 곧 이스라엘에서 거룩한 하나님인 줄 알 것이다. 그대로 되어 가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 날이 바로 내가 예고한 날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에스겔 39:9,10절은 곡이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완전히 진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잘 싸워서 이기는 건 아니고요, 하나님께서 친히 곡과 싸워 승리를 얻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적군이 버린 무기들을 땔감으로 그것도 무려 7년 동안 넉넉히 쓸 수 있을 정도로 승리하게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서 성읍마다 주민이 바깥으로 나가서, 버려진 무기들을 땔감으로 주울 것이다. 큰 방패와 작은 방패, 활과 화살, 몽둥이와 창을 모아 땔감으로 쓰면, 일곱 해 동안은 넉넉히 쓸 것이다.” 

“그 무기들을 땔감으로 쓰기 때문에, 들에 나가서 나무를 주워 오지 않아도 될 것이며, 숲에서 나무를 베어 올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또 전에 자기들에게서 약탈해 간 사람들을 약탈하고, 노략질해 간 사람들을 노략질할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에스겔 39:11-16절은 전쟁에서 죽은 곡의 군대 매장지 – 하몬곡 골짜기(곡의 무리가 묻힌 골짜기) - 에 관한 설명입니다.

곡의 군대가 전멸해서 묻힌 매장지가 있는 그 마을의 이름을 ‘하모나’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이스라엘 땅, 사해의 동쪽, ‘아바림 골짜기’에 곡의 무덤을 만들어 주겠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곡과 그의 모든 군대를 거기에 묻으면, 여행자들이 그리로는 못 다니게 될 것이고, 그 곳 이름은 ‘하몬곡 골짜기’라고 불릴 것이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시체를 다 거두어다 묻어서 땅을 깨끗하게 하는 데는, 일곱 달이 걸릴 것이다.”

“그 땅 온 백성이 모두 나서서 시체를 묻을 것이며, 내가 승리하는 날에는 그들이 매장한 일로 영예를 떨칠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일곱 달이 지난 다음에도, 백성은 시체를 찾아 묻는 일을 전담할 사람들을 뽑아서, 그 땅을 늘 돌아다니게 할 것이며, 그들은 시체를 묻는 사람들과 함께 돌아다니면서, 지면에 남아 있는 시체들을 샅샅이 찾아 묻어서, 그 땅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그들이 그 땅을 돌아다니다가, 누구라도 사람의 뼈를 발견하여 그 곁에 표시를 해 두면, 시체를 묻는 사람들이 그 표시를 보고 시체를 찾아, 그것을 가져다가 ‘하몬곡 골짜기’에 묻을 것이다. 그 부근에는 ‘하몬곡 골짜기’라는 이름을 딴 ‘하모나’라는 성읍이 생길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그 땅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에스겔 39:17-20절은 하나님께서 새와 들짐승들에게 큰 잔치를 베푸시는 내용입니다. 

“너희는 모여 오너라. 내가, 너희들이 먹을 수 있도록 이스라엘의 산 위에서 희생제물을 잡아서, 큰 잔치를 준비할 터이니, 너희가 사방에서 몰려와서, 고기도 먹고 피도 마셔라. 너희는 용사들의 살을 먹고, 세상 왕들의 피를 마셔라. 바산에서 살지게 기른 가축들, 곧 숫양과 어린 양과 염소와 수송아지들을 먹듯이 하여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려고 준비한 잔치의 제물 가운데서 기름진 것을 배부르도록 먹고,피도 취하도록 마셔라. 또 너희는 내가 마련한 잔칫상에서 군마와 기병과 용사와 모든 군인을 배부르게 뜯어 먹어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에스겔 39:21-24절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하시기 전에, 여러 민족을 향해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은 예루살렘이 죄를 지은 결과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내가 이와 같이 여러 민족 가운데 내 영광을 드러낼 것이니, 내가 어떻게 심판을 집행하며, 내가 어떻게 그들에게 내 권능을 나타내는지, 여러 민족이 직접 볼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이스라엘 족속이, 나 주가 그들의 하나님임을 그 날로부터 영영 알게 될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여러 민족은, 이스라엘 족속도 죄를 지었기 때문에 포로로 끌려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나를 배반하였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모른 체 하고 그들을 원수의 손에 넘겨 주어, 모두 칼에 쓰러지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더러움과 그들의 온갖 범죄에 따라서 그들을 벌하였고, 그들을 외면하였다.” 

에스겔 39:25-29절은 하나님께서 사로잡힌 자들을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사랑을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이제는 내가 포로된 야곱의 자손을 돌아오게 하고, 이스라엘 온 족속을 불쌍히 여기며, 내 거룩한 이름을 열심을 내어 지키겠다.” 

“이스라엘이 고국 땅으로 돌아와서 평안히 살고, 그들을 위협하는 사람이 없게 될 때에, 그들은 수치스러웠던 일들과 나를 배반한 모든 행위를 부끄러워하며 뉘우칠 것이다.” 

“내가 그들을 만민 가운데서 돌아오게 하고, 원수들의 땅에서 그들을 모아 데리고 나올 때에, 뭇 민족이 보는 앞에서,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내 거룩함을 나타낼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뭇 민족이 나 주 이스라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여러 민족에게 포로가 되어 잡혀 가게 하였으나, 그들을 고국 땅으로 다시 모으고,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도 다른 나라에 남아 있지 않게 한 줄을 알 것이다. 내가 이스라엘 족속에게 내 영을 부어 주었으니, 내가 그들을 다시는 외면하지 않겠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10-23-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몬곡 골짜기(에스겔 39:11)



에 내가 을 위하여 이스라엘 땅 곧 바다 동편 사람의 통행하는 골짜기를 매장지로 주리니 통행하던 것이 막힐 것이라 사람이 거기서 과 그 모든 무리를 장사하고 그 이름을 하몬곡의 골짜기라 일컬으리라.
'On that day I will give Gog a burial place in Israel, in the valley of those who travel east toward the Sea. It will block the way of travelers, because Gog and all his hordes will be buried there. So it will be called the Valley of Hamon Gog.

"하몬곡 골짜기(the Valley of Hamon Gog)"
게 하몬 고그(גֵּיא הֲמֹון גֹּוג)

골짜기(1516) 가이(gayʼ) גַּי   

1. 협곡.  2. 계곡.  3. 평평한 곳
발음 [ gayʼ ]
어원 / 혼성. 연계형 גֵּי ,גֵּיא, 복수 ניאות, 어미활용 גֵּיאוֹתֶיךָ, 1466과 동일한 어원에서 유래한 약어
관련 성경 / 골짜기(민 21:20, 삼상 13:18, 겔 39:11), 가이(삼상 17:52), (소금) 골짜기(왕하 14:7, 시 60편 표제).
구약 성경 / 30회 사용
하몬(1995) 하몬(hâmôwn)  הָמוֹן  

1.  소음 시끄러운 소리.  2. 왕상 18:41.  3. 겔 26:13
발음 [ hâmôwn ]
어원 / [여성으로 쓰이는 경우는 단 한 번 있음, 욥 31:34]. 199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여러 (민족)(창 17:4,5), 무리(삿 4:7, 시 42:4, 단 10:6), 소동(삼상 14:19), 군대(왕상 20: 28, 겔 31:18, 단 11:10), 대군(단11:13), 소요(騷擾)(시 65:7), 풍요(전 5:10), 인구(사 32:14), 열성(사 63:15), 소리(렘 47:3, 겔 26:13, 암 5:23), 떠드는 소리(삼상4:14), 모든 물건(대상 29:16), 많이 쌓임(대하 31:10), 지껄이는 소리(욥 39:7), 요란함(겔 5:7, 사 33:3), 떠듦(사31:4, 렘3:23).
구약 성경 / 81회 사용


곡(1463) 고그(Gôwg )  גּוֹג   

1. 마곡 땅 뿐 아니라 로스와 메섹과 두발의 왕인 ‘곡’. 2. 한 이스라엘 사람 ‘곡’
발음 [ Gôwg ]
관련 성경  / 곡(겔 38:2, 3, 14, 16, 18, 39:1,11, 대상 5:4)
구약 성경 / 12회 사용






겔38장은 곡이 북방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진군하나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장은 그에 이어 곡이 멸망할 것과 그 멸망의 참상이 어떠한지를 노래 형태로 예언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포로로 잡혀 간 이스라엘의 회복을 소망하는 노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장은 전장에 이어 마곡에 대한 심판을 연속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본장의 예언은 전장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전장에서 밝힌 마곡에 대한 심판 예언을 다른 각도에서 전망하고 있으며, 곡의 완전한 멸망을 선언한다. 이러한 본장은 곡의 완전한 멸망을 예언하는 전반부(1-8절), 멸망 이후의 상황을 예언하고 있는 중반부(9-20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예언하고 있는 후반부(21-29절)로 구성되어 있다. 본장에는 마곡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이 동시에 발생하게 됨을 알려 주는데, 이러한 사실은 마곡의 심판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촉진케 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됨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마곡에 대한 심판의 목적.
하나님께서 마곡의 연합군을 멸망시키시는 목적은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즉,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가 유일한 하나님임을 알게 하는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승리를 통하여 이방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계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심판은 부정적인 의미로 주어진다기보다는 긍정적인 입장에서 선포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전보다 더욱 여호와만을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열방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자신의 영광을 온 세계에 선포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에 대하여 밝히기 이전에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의 잘못을 간단하게 언급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확인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간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범죄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미래의 회복은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과정을 통해서도 자신의 백성들이 깨닫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신다. 성도들은 항상 자신의 죄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게 유지되기 때문이다. 


에스겔 38장은 최후의 전쟁에 대한 것이었다면 39장은 마지막 악의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악에 대한 심판은 곧 하나님의 백성의 최종적 승리와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곡"이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대적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심판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대적하시면 어떻게 될까요?
활을 왼손에서, 살을 오른손에서 떨어트리겠다고 하셨습니다(3절).
하나님은 그들을 무장해제를 시켜버리실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그들이 위협적으로 보일지라도 그들에게는 무기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편이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대적 곡을 무장해제 시킨 것은 하나님의 백성중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7절).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거룩히 여김을 받는 다는 것은 상대적이 아닌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결국 은혜의 회복을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깨달을 때에 그 앞에 설 수 없는 죄악된 우리의 모습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신 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주십니다.
 

은혜의 회복!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길때, 즉 오늘 우리의 예배속에서 은혜가 회복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될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만이 아니라, 온 열방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며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그 은혜의 회복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은 무엇인가 하면. 

9절부터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첫번째 하나님은 모든 무기를 다 불에 태우실 것입니다. 9절에 보면 모든 무기를 하나님께서 불태우는데, 7년이라는 시간이 걸릴 만큼 이 세상은 많은 무기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 무기가 필요했을까요?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기 때문에 무기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 은혜가 회복되면, 이 땅에 더이상 무기가 필요없어지는 것입니다. 왜요? 서로를 미워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지요.

오늘 어떤 시대보다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세대간의 심한 갈등을 보게 됩니다. 젊은 세대는 어른 세대를 꼰대라고 하며 무시하고, 어른 세대는 요즘 젊은 것들은 너무 몰라.. 라고 하면서 나무랍니다. 진보와 보수는 함께 밥도 못먹습니다. 그렇게 갈등이 심화되어진 시대속에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은혜의 회복, 그것만이 세대간의 갈등과, 진영의 갈등.. 그것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과 일터에 있는 모든 갈등들을 해결할 수 있음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우리 가정안에, 교회안에, 사회안에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그렇기 위해.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심, 그 은혜가 우리안에 회복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회복되어질 때, 우리를 통해 열방이 주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게 될 것입니다.

두번째는 무기가 사라짐 뿐만 아니라, 11-16절을 통해 우리는 보게 됩니다. 무엇을요? 악의 흔적조차도 남기지 않는 정결함의 회복을 말입니다. 바다동편 사람이 통행하는 골짜기는 왕의 대로를 말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야망을 품고 걸어가던 그 길.. 왕의 대로는 그 시대 가장 활발했던 무역로이자 전쟁을 위한 길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어떻게요? 곡의 무리의 매장지가 됩니다. 시체가 쌓여서 더 이상 사람들이 오고가지 않습니다. 7달동안 그 길에서 뼈들이 발견될때마다 그것을 모두 매장하고 장사지냅니다. 모든 부정한 것들을 철저하게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욕심과 욕망으로 버무려진 그 왕의 대로를 막으시고, 시온의 대로만을 남겨놓으십니다. 욕망과 욕심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삶으로 살아가게 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에스겔을 통해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욕망과 욕심이 사로잡힌 인간의 참다운 회복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길, 그 길을 따라 걸어갈때 만이 우리는 그 노예의 삶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의 삶으로, 그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우리의 무기를 불태워지고, 정결함을 회복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25절은 “하나님께서 열심을 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 그것이 바로 회복의 근거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열심으로 우리로 포로된 삶에서 끌어내실 것이고, 우리로 참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얼굴을 가리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며 응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를 돌보시고 지켜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29절.. 하나님의 열심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이요 회복은,  우리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충만히 거하시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 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 즉 자신을 전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이 오늘 우리속에 성취되어 이루어져 있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오늘도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 그분과 함께 살아가며 오늘 우리가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할 그 하나님의 나라. 모든 무기가 사라져, 가정이 회복되고, 이 세상의 모든 갈등이 회복되며…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의 욕심과 욕망의 노예가 하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우리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속에 서서, 그 거룩하신 하나님앞에 서게하시는 은혜를 회복하게 하여주시옵소서. 
  2. 우리안에 있던 무기들을 다 불태우고, 화평의 사람으로 세우신 그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명을 따라, 나와 다른 이들까지도 사랑하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3. 우리의 욕심과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소명에 붙들려 살아가는 삶 되게하여주시옵소서.
  4. 이땅에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어지는데 있어, 우리가 주의 손과 발이 되게하시고, 이 땅을 회복시켜주시옵소서.




[구약관통 1] 블레셋 평야 | 성서지리(1) | 역사드라마로 읽는 성경
류모세목사



마틴 니묄러(Martin Niem ller, 1892~1984) 목사의 고백

독일의 고백 교회를 창설했던 마틴 니묄러(Martin Niem ller, 1892~1984) 목사.
그는 히틀러의 나치정권 하에서 목사들과 긴급동맹을 결성하고 조직적으로 히틀러의 나치정권이 교회 일에 간섭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또 그는 무고한 유대인들의 학살에 대해 항거하다 체포당해 8년 동안 감옥에서 옥고를 치러다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연합군에 의해서 가까스로 구출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 그는 ‘전쟁책임 고백서’라는 한 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는 니묄러 목사의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전쟁의 책임은 히틀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인 나에게 있다!”는 내용입니다.

니뮐러 목사는 감옥에서 같은 꿈을 무려 7번이나 반복해서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줄을 서서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니묄러 목사님도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은 죄를 고백하지도 않고 회개도 하지 않은 채 자꾸만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니묄러 목사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귀에 익은 음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그를 자세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기 때문입니다.

같은 꿈을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꾸던 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니묄러야! 너는 목사로서 히틀러를 미워하며 항거했을 뿐, 한 번이라도 그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하거나 그에게 복음을 전한 적이 있느냐? 네가 히틀러에게 전도했더라면 그가 무서운 폭군이 되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 목사님을 향해 질책하는 음성이었습니다.

니묄러 목사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렇다. 전쟁의 책임은 히틀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지 않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은 나에게 더 큰 책임이 있구나!”
그렇게 해서 니뮐러 목사는 참회하는 심정으로 ‘전쟁책임 고백서’를 저술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아름답지 못한 잘못된 일들의 책임을 남에게서만 찾으려 하기 때문에 우리의 사회는 더 큰 혼란 속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남을 비난하기 앞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몫을 제대로 다 했는지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을 ‘빚진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구원의 소식을 남에게 전하지 않아 구원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그의 책임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밥 걱정 - 마경덕 시 by 담수쓰다 2022. 2. 7.

밥 걱정 - 마경덕(1954년 전남 여수 출생)

 

묵직한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면
우리집 건너 건너 반지하방 외눈박이 할머니
주워온 폐지를 접으며
응, 이제 일나가는구먼
잘 댕겨와유

골목 어귀 어물전 맞은편
전봇대에 기대앉은 좌판 노인도 도라지를 까다 말고 아는 체를 한다
뭐 하러 댕기시오
공장에 일 나가는 거요?

단골 신발가게 아줌마도 지나가는 나에게 말을 붙인다
밥벌이는 좀 되나요?

24시 순댓국집에 밤일 나가는 아래층 다솜이 엄마도
내가 시인이라는 걸 얼마 전에 알았다
시는 써서 뭐한대요
요즘 누가 그런 걸 읽어요?

다들 살기 어렵다고 내 밥을 걱정해 주는
착한 이웃들이다.


10-21-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스스로 예비하라(에스겔 38:7)

너는 스스로 예비하되 너와 네게 모인 무리들이 다 스스로 예비하고 너는 그들의 대장이 될찌어다.
Get ready; be prepared, you and all the hordes gathered about you, and take command of them.

에스겔 38장과 39장은 매우 독특한 장입니다.
왜냐하면 두 장은 회복된 이스라엘이 어느 때에 곡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의해 침략을 당하나 승리할 것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회복 예언에 의하면 회복된 이스라엘은 다시 범죄함으로 징계에 이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말세에 일어날 악의 세력의 교회 핍박과 교회의 최후 승리를 예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은 곡에 대한 심판 예언의 첫번째 부분입니다.
여기서 '마곡'은 구체적인 지명을 언급한다기보다는 세상 세력의 상징으로서 묘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결국 본장의 심판 예언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 세력들에 대한 궁극적인 심판을 예표하는 것으로 본문의 내용을 세 단락으로 구분합니다.
 
곡의 전쟁 준비(1-9절)
곡이 이스라엘 민족을 멸망시키려는 의도(10-16절)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17-23절)

이방 연합과 이스라엘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언약 백성이 대승을 거두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안과 밖으로 많은 대적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항상 깨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마곡 연합군의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은 외적인 침공 행위였지만 그것을 자초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에서 이탈하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믿음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잠들어 있으면 우리를 향한 공격은 여지 없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있어서 하나님 말씀만을 붙잡고 믿음으로 당당하게 전진하는 일에 앞장서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곡과 곡에 대한 이해.

마곡은 창세기 10:2에서 야벳의 후손으로 나오는 데, 후에 유대인들은 마곡을 '마게도냐'라고 하기도 했다.
요세푸스와 제롬은 '스구디아'라고 보았다.

그러나 본장의 마곡은 어떤 특징한 지역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방해했었던 여러 세력들의 집합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마곡의 왕 곡은 본장과 역대상 5:4에 두 번 나타난다.
그래서 이 곡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가를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70인역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일반적인 이름으로서 곡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여하튼 곡의 정체에 대해서 분명히 파악할 수 없으나 곡이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세력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창세기 10:2
야벳의 아들고멜마곡마대야완두발메섹디라스요.

* 유대인들은 "마곡"을 "마게도니아"라고 한다.

역대상 5:4
요엘의 아들스마야요 그 아들은 이요 그 아들은 시므이요.

70인역에서는 ""을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일반적인 이름으로 사용한다.




청어(靑魚) Herring
- 윤은기 한국협업진흥협회장

건강 백세라는 말이 실감 나는 세상이다.
철학자 김형석 교수님은 올해 104세이신데
열심히 강의하고 신문 칼럼을 쓰신다.

몇 달 전 강사로 모셨는데
강의 내용이 좋아서 큰 박수를 받았다.

강의가 끝나고 서울역으로 가신다기에
이유를 물어봤다.   

“내일 아침 포항에서 조찬 강의가 있어
KTX를 타러 가야 합니다.”

100세가 넘으신 분이
서울에서 저녁 강의를 하고
곧바로 열차로 포항에 가서 잠깐 주무시고
조찬 강의를 하신다니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한달 전
이길녀 가천대학교 총장을 찾아뵈었다.

지난해 말에  ‘길을 묻다’ 라는
자전적 책을 내셨는데 큰 화제가 됐다.

시골 소녀가 큰 뜻을 품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가고
미국 유학 후 귀국해 길병원을 열어
의술을 펼친 이야기부터
가천대를 명문대로 키우기까지
진솔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총장의 인생철학은 ‘박애’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꾸준히 박애를 실천하려면
먼저 스스로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총장은 남들보다 수십 배 더 노력하며
역량과 성과를 쌓아온 분이다.

도전과 열정의 화신이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자고 연락을 주셔서
총장실로 찾아뵈었더니
특유의 밝고 시원시원한 모습 그대로였다.

이날 한시간 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놀라운 것은 비단 열정만이 아니었다.
대화 내용의 70% 이상이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새로운 인재 교육의 방향,
새롭게 펼쳐지는 바이오산업과
우주산업,
대학의 미래상 등을 말씀하시고
끝없이 질문하신다.

올해 92세이시다.
나이가 80, 90, 100세가 되어도
청년처럼 사는 분이 늘어난다.

나는 이런 분을 ‘청어’ 라고 이름 붙였다.

‘청년처럼 사는 어르신’ 을 줄인 말이다.
넓고 푸른 바다를 마음껏 헤엄치는
등푸른생선 청어(靑魚)가 저절로 떠오른다.

청년처럼 사시는 어르신 ‘청어’를 보면
나도 모르게 존경심이 우러나오고 힘이 솟는다.

내 주위에는 어떤 분이 청어일까 꼽아봤다.

 한국의 ‘탑건’이라는 영화
‘빨간마후라’의 주인공
신영균 선생님,

국민 건강을 위해
세로토닌 문화를 이끄시는
이시형 박사님,

6·25전쟁 때
이미 100회 출격의 대기록을 세운
호국 영웅 김두만 총장님,

활기찬 목소리로
가요무대를 진행하시는
김동건 아나운서님,

봉사활동을 활발히 하시며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김상희 가수님,

베스트셀러 ‘식객’에 이어
요즘은 TV프로그램 ‘백반기행’으로
전국을 누비시는 허영만 화백님 등이
모두 청어로 부를 만한 분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청어 DNA가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자세히 살펴봤더니
몇가지가 나왔다.

첫째, 늘 미래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다.   
둘째, 공익적이고 이타심이 크다.
셋째, 긍정적이고 잘 웃는다.

나이 들었다고
과거 전성기 추억을 먹고살면
청어가 아니다.

자기 혼자 잘되겠다고
열심히 살아도 청어가 될 수 없다.

긍정적 열정이 식으면
더 이상 청어가 아니다.

나이 들어 갑자기 청바지를 입는다고
청어가 되는 게 아니다.

청어가 되려면
젊은 시절부터 몸과 마음에
청어 DNA를 심고 가꿔야 한다.
이게 내가 찾아낸
‘청어로 사는 방법’이다.

매력적인 시니어가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다.

나이가 들어서도
건강한 삶을 유지하며
세상을 위해
활기차게 활동하는 분이 많으면
이 자체가
젊은이들에게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나도 청어로 살고 싶다.
끝없이 다가오는
미래라는 바다를 향해
힘차게 헤엄치고 싶다.

요즘 내 마음속에는
청어 떼가 뛰놀고 있다.◇

☆  사람은 마음이 즐거우면
종일 걸어도 싫지 않으나,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잠깐 걸어도 실증이 난다.

 인생 행로도 이것과 마찬가지니
언제나 명랑하고 유쾌한 마음으로
인생의 길을 걸어라.
- 세익스피어

이세상에서 열정없이 이루어진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

오늘도 즐겁고 건강하게
웃으면서 보내요.
늘 감사합니다.




에스겔서 1-24장 하나님의 심판(성전을 떠나신 하나님)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기 전(BC 586)에 예언한 내용이고, 33-48장 하나님의 영광 회복(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시는 하나님과 영원한 성전)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한 이후 에스겔이 예언한 내용입니다. 

남 유다 멸망 전까지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망한 이유,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과 거룩한 성전이 무너진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라고 선포했었습니다. 

하지만 에스겔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완전히 멸망 당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에스겔의 예언은 이제 심판에서 구원과 회복으로 바뀝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파수꾼의 역할을 맡기셨다고 선언한 후(33장), 이스라엘이 회복될 거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에스겔 33-39장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거라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회복의 소망(33-39장)

33장

죄에 대한 심판과 예루살렘 함락

34장

거짓 목자(이스라엘 목자)와 참 목자(하나님)

35장

세일 산과 에돔의 황폐함

36장

이방의 수치가 된 이스라엘 회복

37장

이스라엘 회복과 통일에 관한 환상 & 마른 뼈 환상

38장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1)

곡(Gog)은 메섹과 두발을 통치한 마곡의 왕입니다(겔 38:2).
곡은 에스겔서 38, 39장과 요한계시록 20:8-10절에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악의 세력의 지도자로 나타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북방으로부터 내려보내셨지만(겔 38:15), 나중에는 이스라엘의 산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재앙으로 인해 멸망 당하는 인물입니다(겔 39:2-6). 

곡(Gog)이 실제로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600여 년경에 살았던 오늘날의 터키인 소아시아 북쪽에 위치한 리디아의 ‘기게스’, 라스샴라 문헌에 나오는 이방인 ‘가가’, 시리아의 셀류쿠스 왕조의 악명높은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알렉산더 대왕’ 등 다양한 인물이 거론되는데, 다수가 리디아 왕 ‘기게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곡이라는 사람 자체가 누구인가보다 곡이 상징하는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곡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고 달려드는 악한 적대 세력을 상징합니다. 이상 곡에 대한 내용은 비전 성경사전(두란노) p. 45에 나오는 내용을 참고한 것입니다. 

에스겔 38장은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에 관한 내용입니다.

에스겔 38:1-6절은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에 관한 말씀인데, 하나님께서 직접 곡과 싸우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곡과 함께 여러 나라를 심판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사람아, 너는 마곡 땅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로스와 메섹과 두발의 왕 곡을 규탄하여 예언하여라. 너는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너 로스와 메섹과 두발의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한다.”

“내가 너를 돌려 세우고, 갈고리로 네 아가미를 꿰고 너와 네 모든 군대, 곧 군마와 기마병과, 곧 완전무장을 한 군대,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들고 칼을 잡은 대 병력을, 내가 끌어내겠다. 방패와 투구로 무장을 한 페르시아와 에티오피아와 리비아를 끌어내고, 고멜과 그의 전군과, 북쪽 끝에 있는 도갈마 족속과 그의 전군과, 수많은 백성을 너와 함께 끌어내겠다.” 

에스겔 38:7-9절은 여러 날 후 말년에 곡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거라는 내용입니다.

“너는 네게로 집결된 온 군대와 함께,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들을 잘 지휘하여라. 네가 공격 명령을 받기까지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여러 해가 지난 다음에 때가 되면, 너는, 오래 걸려 전쟁의 상처를 다 씻은 한 나라를 침략하게 될 것이다.” 

“그 나라는,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져 살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던 이스라엘의 산야에 다시 세운 나라다. 그 나라 백성은 타국 백성들 사이에서 살다가 돌아온 뒤에, 그 때쯤에는 아주 안전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그 때에 네가 쳐올라갈 것이며, 너와 네 모든 군대와 너와 함께 한 많은 나라의 연합군이 폭풍처럼 몰려들고, 구름처럼 그 땅을 덮을 것이다.”

에스겔 38:10-13절은 하나님께서 곡이 그날에, 평안한 백성을 노략하고 겁탈하겠다는 악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을 지적하시는 내용입니다.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그 날이 오면, 네 마음 속에서 온갖 생각이 떠올라, 네가 흉악한 생각을 꾀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너는 혼자 속으로, 성벽이 없이 사는 마을로 쳐올라가겠다고, 평안히 살고 있는 저 평화로운 사람들에게로 쳐들어가겠다고, 성벽도 없고 성문도 없고 문빗장도 없이 사는 사람들을 덮쳐서 물건을 약탈하며 노략하겠다고 하는 악한 생각을 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살다가 돌아와서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던 땅에 다시 정착하여 가축과 재산을 늘려 가며 살고 있는 백성을, 손을 들어 칠 때에, 스바와 드단과 다시스의 상인들과 젊은 용사들이 너를 비난할 것이다.” 

“네가 노략질이나 하려고 가는 것이냐고, 네가 강탈이나 하려고 군대를 동원하였느냐고, 은과 금을 탈취해 가려고, 가축과 재산을 빼앗아 가려고, 엄청난 전리품을 약탈해 가려고 원정길에 나섰느냐고 비난할 것이다.”

에스겔 38:14-16절은 하나님께서 허락 하에 그날이 되면, 곡이 이스라엘을 치러올 거라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사람아, 너는 예언하여 곡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 백성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사는 그 날을 네가 어찌 알지 못하겠느냐? 그 때가 되면, 너는 네 나라 북쪽 끝에서 원정길에 나설 것이다. 그 때에 너는 대군을 이끌고 떠날 것이다. 놀라운 규모를 지닌 기마대와 많은 보병을 이끌고 정복길에 오를 것이다.”

“마치 구름이 땅을 덮는 것같이,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칠 것이다. 곡아,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때가 되면 내가 너를 끌어들여서, 내 땅을 치게 하겠다. 뭇 민족은, 내가 내 거룩함을 밝히 나타내려고 너를 이렇게 부리고 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내가 누구인지를 알 것이다.” 

에스겔 38:17-23절은 하나님께서 곡을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거라는 내용입니다.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곡아, 내가 옛날에 내 종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시켜서 말하여 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너다. 예언자들이 여러 해 동안 예언하기를, 내가 너를 끌어들여서, 이스라엘을 치게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곡이 이스라엘 땅을 쳐들어오는 그 날에는, 내가 분노와 격분과 울화를 참지 못할 것이다. 불 같이 격노하면서, 그 때에 내가 선언하여 이스라엘 땅에 큰 지진이 일어나게 할 것이다.”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들의 짐승과,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벌레와, 땅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내 앞에서 떨 것이며, 산이 무너지고, 절벽이 무너지고, 모든 성벽이 허물어질 것이다.”

“그리고 내가 곡을 칠 칼을 내 모든 산으로 불러들이겠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칼을 든 자가 저희끼리 죽일 것이다. 내가 전염병과 피비린내 나는 일로 그를 심판하겠다. 또 내가, 억수 같은 소나기와 돌덩이 같은 우박과 불과 유황을, 곡과 그의 전군과 그와 함께 한 많은 연합군 위에 퍼붓겠다. 내가 이렇게 뭇 민족이 보는 앞에서 내 위엄을 떨치고 나서 거룩함을 밝히 나타내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10-20-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희가 살리라(에스겔 37: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to these bones: I will make breath enter you, and you will come to life.

너희가 살리라(You will come to life)
위흐이템(וִחְיִיתֶם)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
'생기'(루아흐)는 인간 창조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불어 넣으셨던 '생기'(네솨마, 창 2:7)와 동일한 의미로 생명의 동인이 되는 '숨', '호흡'등을(Breath, KJV, NIV, LB) 가리키는 말이다(창 6:17;7: 17).
이는 본 사건이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해준다.
한편 성령이 창세로부터 모든 생명의 근간이 된다는 사실과(창 1:26) 36:27과의 내용적 연결상 본절의 '생기'는 '성령'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Havernick, Schroder).

너희가 살리라(2421) 하야(châyâh)  חָיָה    

1. 살다.  2. 생존하다. 3. 다시 살다
발음 [ châyâh ]
관련 성경 / 보존하다(창 12:13, 민 4:19, 렘 38:20), 생존하다(민 14:38, 슥 10:9), 삶(느 9:29), 살다(에4:11), 살게 하다(겔37:14, 시119:17), 낫다(수5:8, 왕하8:8), 살리다(창20:7, 겔37:5), 지내다(창5:7), 보존되다(창19:20), 생활하다(창27:40, 왕하4:7), 소생하다(창45:27, 삿15:19), 거주하다(창47:28), 살려주다(왕상20: 32), 살아나다(왕상17:22), 희생하다(왕하13:21), 살려두다(민31:15, 삿21:14), 구원하다(겔3:18), 유전하다(창7:3), 부흥하게 하다(합3:2), 전하다(창19:32), 기르다(삼하12:3, 사7:21), 중수하다(대상11:8), 일으키다(느4:2), 소생하게 하다(시80:18, 7:12), 보전하다(겔18:27), 풍성하다(호14:7), 생존하게 하다(수14:10),구원하다(창19:19), 보존하게 하다(창6:20), 살려주다(사38:16),
[명] 만세(삼상 10:24, 왕하 11:12), 생명(전 7:12),
[부] 정녕(겔 3:21, 왕상 8:10)
구약 성경 / 283회 사용

생기(7307) rûwach  רוּחַ     

1. 영.   2. 입 기운. 3. 호흡
발음 [ rûwach ]
어원 / 730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창 1:2, 삼상 10:10, 사 11:2), 기운(창6:17,7:15), 바람(창8:1, 삼하22:11, 시11:6), 마음(창26:35, 수2:11, 전1:17), 콧김(출15:8, 시18:15, 애4:20), 의심(민5:14,30), 생명(민16:22), 노여움(삿8:3, 잠29:11), 정신(삿15:19, 왕상10:5, 대하9:4), 성령이 하시는 역사(왕하2:9,15), 큰 바람(욥1:19), (콧)김(욥4:9), (입)기운(시33:6), 호흡(시104:29, 전3:19), 영혼(욥7:11, 시143:7, 사26:9), 광풍(시148:8, 사32:2), 숨(욥9:18, 19:17), 혼(전3:21), (입)김(욥15:30), 심령(시 77:3, 잠 16:2), 폭풍(시 55:8, 사 27:8), 성품(잠17:27), 생기(렘 10:14, 겔37:9), 분(전 10:4), 사면(렘 52:23), 사방(겔 5:10, 17:21, 단 11:4), 바람이 불 때(창 3:8), 헐떡거림(렘 2:24).
[부] 허망하게(미 2:11).
[동] 헐떡이다(렘 14:6).
구약 성경 / 378회 사용

대언하다(5012) 나바(nâbâʼ)  נָבָא  

1. 부글부글 끓게 하다.  2. 니팔형  נִבָּא
3. 신성한 능력으로 말하다
발음 [ nâbâʼ ]
관련 성경 / 예언하다(삼상 10:11, 대하 18:11, 렘 14:14), 신령한 노래를 하다(대상 25:2,3), 대언하다(겔 37:7,10, 38:14), 장래 일을 말하다(욜 2:28), 정신없이 떠들어대다(삼상 18:10), 미친듯이 떠들다(왕상 18:29), 선지자 노릇을 하다(렘 29:26, 27).
구약 성경 / 115회 사용

생기(5397) 네솨마(neshâmâh)  נְשָׁמָה   

1. 호흡.  2. 지혜와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영. 3. 사람의 정신
발음 [ neshâmâh ]
어원  / 539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기(창 2:7), 호흡(신 20:16, 사 2:22, 단 10:17), 호흡이 있는 자(수 11:11,14, 시 150:6), 콧김(삼하22:16, 시18:15), 생명(왕상15:29), 숨(왕상17:17), 기운(욥4:9, 33:4, 37:10), 정신(욥26:4), 영혼(잠20:27), 혼(사57:16).
구약 성경 / 24회 사용


"생기","생령"이란 무엇인가? - 창조1 - 천사가해석한성경

~2분

"생기","생령"이란 무엇인가?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새번역 :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공동 :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사람의 창조

성경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신이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증거한다.
그런데 번역상의 문제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혼란을 주는 대목이 있는데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 를 불어 넣으시니 사림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한 두 부분이다.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한 어구를 깊이 연구하지 않고 언뜻 보면 하나님의 영이 사람 안에 넣어져 사람이 영이 되었다는 말씀으로 착각을 일으킬수 있다.

그러나 원문에는 "령이 아니라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산 혼 즉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대해서 모든 성경 연구가들이 같은 뜻으로 보고 있다.

​사람이"생령" 되었다는 말씀을 잘못 이해 하면 사람이 마치 살아 있는 "영"이 된 것이라는 말로 곡해 할수 있고 더 나아가 진리에서 빗나간 교리로 발전 하여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오늘날 실제로 곡해된 교리가 전파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생령" 이란 말은 "생명, 기력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네페쉬"는 "호흡하다, 생존하다라는 "하야"와 결합한 말로 "네페쉬 하야" "살아 있는 존재가 되다라는 뜻이다.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을 새 번역에서는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로 번역 되었고, 공동 번역 에서는 사람이 "숨을 쉬었다, 라고 번역했는데 모두 같은 뜻으로 "살아있는 혼"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살아있는 "혼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은 전인적인 사람을 가리킨다.
전인적인 생명체라 함은 사람 안에 "영 이나, 혼 같은 구별된 존재가 사람안에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전인적인 사람을 살아있는 혼이라고 한다.
즉 영과 혼과 몸이 구분되어 별개로 존재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에스겔 36장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먼저 사람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이 회복되려면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회복된 사람들이 거주하는 그 땅은 마치 에덴동산과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될 때 사람도 땅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뀔 것을 기대해보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에스겔 37장에서는 두 가지 내용으로 회복을 말씀합니다.
첫번째는 마른 뺘들이 살아나는 상징적 환상입니다(1-14절)
두번째는 두 막대기가 하나로 함쳐지는 상징적 환상입니다(24-28절).

이와 같은 상징적 환상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전개 방향과 그 방법 그리고 하나님 백성들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이와 같은 상징적 환상은 성경 전체에 대한 안목과 신약 시대 교회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지평을 열어 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우리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생들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가 죽어 버린 마른 뼈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통하여 우리들도 철저하게 부패된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자라야만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전적으로 의탁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만이 참된 통치자가 되심을 믿고 따를 때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로 인도하신 후에 이 뼈들에게 생기가 들어가므로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하셨습니다.

마른 뼈들은 마치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그 마른 뼈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므로 살아나는 생명이 되는 것처럼 지금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으나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는 그 날에 포로의 신분에서 자유인의 신분으로 탈바꿈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은혜가 언제 회복되었을까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후에 부활의 신령한 몸으로 하늘로 올라가시고 약속한 보혜사 성령께서 임재하여 초대교회의 시대가 펼쳐질 때 비로써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신비한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 없기 때문에 날마다 주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여 성령 충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져가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0-19-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새 영 새 마음(에스겔 36:26)

또 새 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I will give you a new heart and put a new spirit in you; I will remove from you your heart of stone and give you a heart of flesh.

새 영, 새 마음(New Spirit, New Heart)

에스겔서는 전반부에서는(1-32장) 유대와 이방 족속의 멸망에 대한 내용입니다.
후반부에서는(33-48장) 회복에 대한 내용입니다.
국가를 회복시키는 방법은 먼저 지도자를 바르게 세운 후에 그 영토(땅)를 회복시키며 더불어 백성들을 회복시켜 갑니다.
에스겔서 36장은 회복의 방법으로 새 영과 새 마음을 강조합니다.

새 영(루하흐 하다쉬) רוּחַ חֲדָשָׁה
새 마음(레브 하다쉬)  לֵב הָאֶבֶן

새로운 - 하다쉬(2319) [ châdâsh ]  חָדָשׁ     

1. 새로운.  2. 삼상6:7.  3. 신 20: 5
어원  / 231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새(레 23:16, 삼하 6:3, 사 65:17, 42:9, 43:19, 렘 31:22), 새로워진(욥29:20), 새로운(애3:23).
구약 성경 / 53회 사용

영 - 루아흐(7307) [ rûwach ] רוּחַ

1. 영.  2. 입 기운. 3. 호흡
어원  / 730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창 1:2, 삼상 10:10, 사 11:2), 기운(창6:17,7:15), 바람(창8:1, 삼하22:11, 시11:6), 마음(창26:35, 수2:11, 전1:17), 콧김(출15:8, 시18:15, 애4:20), 의심(민5:14,30), 생명(민16:22),노여움(삿8:3, 잠29:11), 정신(삿15:19, 왕상10:5, 대하9:4), 성령이 하시는 역사(왕하2:9,15), 큰 바람(욥1:19), (콧)김(욥4:9), (입)기운(시33:6), 호흡(시104:29, 전3:19), 영혼(욥7:11, 시143:7, 사26:9), 광풍(시148:8, 사32:2), 숨(욥9:18, 19:17), 혼(전3:21), (입)김(욥15:30), 심령(시77:3, 잠16:2), 폭풍(시55:8, 사27:8), 성품(잠17:27), 생기(렘10:14, 겔37:9), 분(전10:4), 사면(렘52:23), 사방(겔5:10, 17:21, 단11:4), 바람이 불 때(창3:8), 헐떡거림(렘2:24).
[부] 허망하게(미 2:11).
[동] 헐떡이다(렘 14:6).
구약 성경 / 378회 사용

마음 - 레브(3820) [ lêb ] לֵב

관련 성경 / 마음(창 6:5, 삼상 4:13, 시 61:2), 심중(신 29:19, 에 7:5), 숨(출 8:15), 콧김(출 15:8), 가슴(출 28:29), 감동(출 35:34), 간담(수14:8), 결심,생각(삿5:15, 시33:11), 진심(삿16:17), 기력(삿19:5), 관념(삼상4:20), 인심(삼하15:13),심장(삼하18:14, 시38:10), 염통(왕하9: 24, 시45:5), 한마음(대상12:38, 시83:5), 성심(대상29:9), 전심(대하17:6, 시119:10, 겔44:5), 뜻(대하24:4), 충심(시34:18), 총명(욥12:24), 지혜(욥36:5, 잠10:8, 전1:17), 지식(잠10:21), 의사(잠18:2), 생각(잠24:32), 명철(전7:7), 지각(렘5:21), 굳센 자(암2:16). [동] 말하다(창42:28), 간곡하다(창50:21), 낙심하다(민32:7),염려하다(삼상9:20), 개의하다(삼상25:25),낙담하다(삼상17:32, 겔21:15), 근심하다(삼하7:27, 애3:33), 상심하다(삼하13:33), 깨닫다(왕상8:47), 감동시키다(대하30:12), 위로하다(대하30:22), 주의하다(욥1:8, 전7:2), 담대하다(시27:14), 살피다(시48:13), 무지하다(잠6:32), 간교하다(잠7:10), 착심하다(잠23:12), 진술하다(사41:22), 기억하다(사46:8), 낙심하다(렘4:9).
[부] 다정하게(삿19:3), 뜻대로(삼하7:21, 대상17:19), 담대히(렘30:21).
구약 성경 / 599회 사용

율례(호크) [ chôq ] חֹק  스트롱번호 2706

1. 제한된 것.  2. 과업.  3. 경계
발음 [ chôq ]
어원 / 27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녹(창 47:22), 법(창 47:26), 규례(출 12:24, 레 6:22), 수효(출 5:14), 법도(출 15:25, 왕상 3:14), 율례(출18:16, 민30:16, 수24:25), 소득(레6:18, 레10:13), 몫의 음식(민18:8), 명령(레10:15, 잠8:29, 습2:2), 경계(욥26:10), 한계(욥38:10, 잠8:29, 렘5:22), 명령(시2:7, 148:6), 일(잠31:15), 한량(사5:14), 일용할 양식(겔16:27), 지경(미7:11).
[동] 작정하다(욥23:14). [형] 정하다(욥23:12), 필요하다(잠30:8).
구약 성경 / 129회 사용

규례(미쉬파트) [ mishpâṭ ] מִשְׁפָּט 스트롱번호 4941

1. 판단.  2. 레위기 19:15. 3. 욥기 9:32
발음 [ mishpâṭ ]
어원 / 819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정의(창 18:19), 법(렘 30:11), 공의(신16:18,시25:9), 율례(왕상9:4), 양식(출26:30, 왕상6:38), 판결(출28:15, 민27:11, 삼상8:3), 규례(레5:10, 민15:16, 삼상30:25), 법도(레18:4, 신4:1), 재판(레19:35, 신1:17), 법(레24:22, 왕하17:26,27), 사연(민27:5), 판결법(민27:21), 몫(신18:3), 권리(신21:17), 송사(신24:17, 왕상3:11), 방식(수6:15), 관습(삼상2:13), 계명(왕상2:3), 직무(왕상4:28), 일(왕상8:45,59), 모양(왕하1:7), 풍속(왕하17:33,34,40), 반열(대상6:32), 판단(대상16:12), 사정(욥13:18, 사40:27), 응답(욥19:7), 정당함(욥27:2), 판단력(시72:1), 뜻(습3:8), 작정(잠29: 26), 권리(사10:2, 렘32:7), 재판석(사28:6), 보응(사49:4), 심문(사53:8), 형벌(렘49:12, 습3:15), 화(렘51:9), 죄(겔7:23), 죄악(겔7: 27), 의로움(렘12:1). [동] 합당하다(신19:6), 공의롭다(신32:4), 재판받다(수20:6, 삿4:5), 심문하다(왕하25:6), 재판하다(욥14:3), 옳다(욥34:4), 정직하다(욥34:6), 공판하다(시35:23), 심판하다(시119:84, 사3:14), 정직하다(잠12:5), 작정하다(잠16:33), 적당하다(사28:26), 바르게 하다(사32:7), 송사하다(사54:17).
구약 성경 / 424회 사용

25. 정결케 하여(2891) 타헤르[ ṭâhêr ]  טָהֵר 스트롱번호 2891
1. 빛나다.  2. 깨끗하다. 3. 왕하 5:12
발음 [ ṭâhêr ]
관련 성경 / 정하다(레 11:32, 14:7, 겔 24:13), 깨끗하다(레 12:7, 민 31:23, 왕하 5:10), 정결하다(레 12:8, 16:30), 정결하게 하다(민 19:12, 대하 34:5, 겔 37:23), 순전하다(시 51:4), 정결함을 얻다(겔 22:24).
구약 성경 / 94회 사용



맑은 물로...정결케 하되 - 이는 속죄 제물을 태운 재를 넣어 만든 제사용 물을 그 속죄의 대상에 뿌리는 이스라엘의 정결 의식에서(민 8:7;19:9) 인용된 구절이다. 이러한 제사 의식이 모든 죄된 요소를 제거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본 구절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정결의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Delitzsch, Hengstenberg). 또한 이는 죄의 정결이란 측면에서 신약 시대의 물침례를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행 19:3). 한편 혹자는 '맑은 물'의 이러한 제의적 용도를 배격하고 단지 오염된 것을 씻어낸다는 일반적인 물의 특성에 국한시켜 해석하나(Schroder, Havernick), '맑은 물'의 '맑은'(*, 타호르)이 원어상 '(의식적, 도덕적 의미에서의) 깨끗한, 순결한'이란 뜻을 가지며 특별히 성경에서 레위인의 정결에 관련되어 쓰여졌다는 점에서 타당치 않다.

새 영이란 악한  영의 지배를 받던 영이 거룩한 영의 지배 곧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따라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새 마음이란 예전의 삶을 주도하던 습관적인 마음을 새 영의 지배를 받아 새로운 결단의 삶을 말합니다.
새 영의 지배를 받는 새로운 삶은 새로운 피조물의 시작이라고 강조합니다(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은 "위하는 대상"이 바뀐 것에서 출발합니다(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새로운 피조물은 예전에는 자신을 위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후에는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죽었다가 다신 사신 자를 위하여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변화된 것으로 시작합니다.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은 "위하는 대상"이 바뀌어야 합니다.
'위하는 대상'을 바꾸는 것은 삶의 중심의 축을 바꾸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옛 사람은 삶의 중심의 축이 "나" 라고 하는 개인주의적인 삶이었다면 새 사람의 삶의 중심의 축은 "예수"라고 하겠습니다.
새 영과 새 마음은 "오직 예수 중심"의 삶을 말합니다(렘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유지하려면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고전 15:31).


이스라엘 회복의 의의

회복 내용의 점진적 전개로 고토 귀환, 죄의 정결에 이어 이스라엘의 내적 갱신이 기술된다.
곧 하나님의 이스라엘 회복 사역은 단순히 귀환과 죄사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 갱신까지 이르는 완전한 것임을 시사한다.

새 영...새 마음

- 성경의 용례상 '영'(루아흐)은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 행위를 제어하는 내적 본질(살전 5:23)
'마음'(레브)은 인간의 지, 정, 의를 포괄하는 인성의 좌소.

이 두 단어는 인간의 전인격을 총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단어 앞에 '새'라는 형용사가 첨가된 것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온전한 영적 갱신을 예고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새 언약 백성의 반열에 들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렘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앞장에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을 소원하다가 멸망을 보자 기뻐하고 조롱한 이방에 대한 멸망을 에돔의 멸망으로 대표화시켜 언급했습니다.
본장에서는 그처럼 이방의 시기와 조롱을 받은 이스라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받은 뒤 새 언약하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살 것과, 다시는 옛 언약하에서와 같은 범죄-멸망-수욕의 과정이 없을 것을 예언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본서 34장에서부터 시작된 새로운 지도자의 출현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회복 예언은 본장에 와서 땅과 백성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다. 즉 이스라엘의 회복은 지도자, 땅, 백성을 축으로 하여 이루어질 것임을 밝힌다. 본장의 내용이 주로 이스라엘의 회복에 집중되어 있는 만큼 회복의 주체가 누군가에 대한 묘사도 다른 장보다 많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지자는 열 번씩이나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표현은 회복의 주체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언의 성취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본장은 새롭게 회복될 땅과 백성(1-15절), 하나님의 성호를 위하여(16-21절), 이스라엘 회복의 의의(22-38절)로 구성되어 있다. 본장을 통해 이스라엘 땅은 하나님의 소유라는 인식을 더욱 확고히 나타내고 있다. 비록 이스라엘 땅이 에돔과 이방 국가들의 침략을 받았지만, 여전히 그 땅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기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본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회복의 약속은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본국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용된다. 그러나 신약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본문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백성으로 인정된 성도들에게도 적용된다. 사실 성도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본토에서 쫓겨났던 이스라엘 백성이나, 경작자가 없어서 황무한 곳으로 버림받았던 땅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던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령의 기경함을 입은 것이다. 죄악의 밭이 갈아 일구어지고 천국 복음이 뿌려진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이전에는 육체의 정욕과 죄악을 토해 내던 우리 삶이 성령의 열매를 내는 것으로 변화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회복된 이스라엘의 모양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이 갖는 의의.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이 갖는 의의는 여호와의 이름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의 원인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지 않고 여호와의 이름 때문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이들의 회복은 백성들의 의로움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주권적인 행위에 의거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선택한 백성을 끝까지 보호할 것이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은 여호와가 그들 가운데 거하기 위함이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이 여호와의 완전한 내적 임재를 통해 가능함을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여호와의 내적 임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회복의 약속이 내포되어 있는 회복인 것이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은 총체적인 변화를 수반한다. 저자는 이스라엘 땅과 백성의 회복에 대하여 묘사하고 나서 궁극적으로 총체적인 변화에 관심을 가진다. 특히 '너희를 죄악에서 정결케 하는 날에 성읍들이 건축될 것' (33절)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과 이스라엘의 총체적 변화가 동시에 일어날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변화의 모습을 '에덴 동산같이'라고 묘사함으로써 회복의 상태가 총체적이며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일 것을 보여 주고 있다.  









10-18-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죄악의 끝(에스겔 35:5)

네가 옛날부터 한을 품고 이스라엘 족속의 환난 때 곧 죄악의 끝 때에 칼의 권능에 그들을 붙였도다.
Because you harbored an ancient hostility and delivered the Israelites over to the sword at the time of their calamity, the time their punishment reached its climax.

에스겔 35장은 에돔의 멸망에 관한 말씀입니다.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33장에서는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파수꾼"의 본분을 바르게 감당하라고 하셨습니다.
34장에서는 "목자(라아)"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목자의 본보기는 곧 다윗과 같은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항상 예수님을 닮아가는 신앙으로 무장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구원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만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구원 받은 삶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없고 읽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파수꾼처럼' 그리고 '목자처럼' 세상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거룩한 삶을 회복할 때 비로서 세상을 흔들고 주의 백성들을 괴롭히던 에돔과 같은 세력들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라고 합니다.

험준한 산악 지대에 거주하던 에돔은 비옥한 팔레스타인에 대하여 항상 눈독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되는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자 바벨론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의 영토를 소유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는 거기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에돔의 모습처럼 항상 성도들을 자신의 통치권 아래에 두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항상 세상 속에서 곤경에 빠질 위험을 피할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곤경에 처할지라도 우리 곁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유혹에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조심해야 하지만 또한 세상을 향해 담대히 하나님의 진리를 외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끝은 죽음이며 멸망이고 영벌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거룩한 성도들의 삶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길로 인도하신다는 믿음과 확신을 갖고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성공적인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하는 에돔에 대한 심판.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있는 상황이지만,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주권적인 능력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사실 에돔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증하는 가시적 증거로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선언인 것이다.
이스라엘과 에돔의 적대 선언인 것이다. 이스라엘과 에돔의 적대 관계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갖고 있다.
야곱과 에서는 출생부터 시작해서 지속적으로 갈등을 가져왔다.
또한 에서의 후손 에돔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향해 갈 때 적대 세력으로 등장했다.
남북 왕조 시대에도 계속적으로 갈등 관계는 유지되었으나 이스라엘의 멸망의 시기에는 결정적으로 나타나게 외었다.
결국 에돔은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되었다.
에돔은 이스라엘에게 피를 흘리게 하였으므로 동일하게 피 흘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본장에는 에돔의 '세일 산'을 인격적인 대상으로 표현하고, 피를 흘리는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거민들을 죽여 여러 곳에 흩어 놓았기 때문에 동일하게 살육을 당할 것이며, 성읍을 훼파하였기 때문에 성읍이 파괴당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심판은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보응하는 당시의 관행과 모세 율법의 정신(참조, 신19:21)에 따라 보응한 것이다. 또한 궁극즉으로 선과 악에 대해 정확하게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본장은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술하고 있다. 전장이 '선한 목자'라는 은유적 기법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희망적인 미래상에 대해 묘사한 반면 본장은 에돔의 심판이 역사적으로 성취될 것임을 기술하고 있다.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땅을 황무케 하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땅의 황무함에 대한 선언적인 진술(1-4절), 옛적부터 있었던 에돔의 적대감에 대한 심판의 예언(5-9절), 이스라엘 땅을 소유하려는 에돔의 의도(10-13절), 온 땅이 즐거워할 때 소외되어 고통을 당할 에돔 족속에 대한 언급(14-15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해 에돔의 심판이 필연적이며, 결과적으로 참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에돔의 잘못은 그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뿌리 깊은 적대감을 갖고 있다는 것과, 다른 국가들과 공모하여 이스라엘의 멸망에 협력한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였으므로 그들이 심판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와 하나님에 대한 적대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겔2-24장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과 멸망 예언을, 25-32장까지는 이방의 죄악과 멸망 예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33-39장까지는 멸망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의 내용이 언급됩니다. 따라서 에돔의 죄악과 멸망 예언을 말하고 있는 본장은 겔25-32장에 속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이 이스라엘 회복을 말하고 있는 부분에 언급되고 있는 것은 이방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대조시키기 위함입니다.









10-17-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목자들아 들을찌어다(에스겔 34:7)

그러므로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Therefore, you shepherds, hear the word of the LORD :

목자(라아. râʽâh ) רָעָה 스트롱번호 7462

1. 방목하다. 2. 다스리다. 3. 먹이를 주다
발음 [ râʽâh ]
관련 성경 / 먹다(사5:17, 렘50:19, 겔34:3), 치다(창36:24, 출3:1, 사61:5), 양육하다(렘3:15), 먹이다(삼하7:7, 아1:8, 겔34:8), 기르다(욥24: 2,시78:71, 렘23:4), 뜯어먹다(창41:2), 양치다(창4:2, 37:16), 방황하다(민14:33), 지키다(삼상16:11, 17:34, 25:16), 박대하다(욥24:21),사귀다(잠13:20, 22:24).
[명] 목자(창 13: 8, 겔 34:2, 미 5:6), 먹을거리(시 37:3), 목자장(삼상 21:7), 사귀는 자(잠 29:3), 관리(렘 2:8), 인도자(렘 25:34, 35,36),
친구(삿 14:20).
구약 성경 / 319회 사용


33:1-10. 불충실한 이스라엘의 목자에 대한 견책과 그 심판.
33:11-16. 하나님 스스로 목자이신 것.
33:17-22. 양과 양 사이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33:23-31. 목자 다윗(메시야)이 세워진 일과 그 나라의 안전 축복.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

선한 목자는
양떼를 푸른 초장으로
잔잔하고 쉴만한 물가로
이끌고 갑니다.

삯군 목자는
양떼를 거친 들판으로
가시와 엉겅퀴가 뒤섞인 땅으로
내쫓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한 때가 되면 회복될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의 방백들은 너무도 악했기에 이제 더 이상 회복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시는 유다 백성의 지도자 자리에 앉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한 사람, 메시야가 그 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원한 가운데 풍요와 평강으로 통치하게 됩니다.

본장은 전장에서의 비관적인 내용과는 달리 선한 목자를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매우 낙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희망적인 전망이 가능한 것은 과거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을 거쳐 하나님과 백성들이 인정하는 새로운 지도자가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참된 지도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미래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본장은 거짓 지도자들이 백성을 돌보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는 모습과 그에 대한 심판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전반부와(1-10절), 참된 지도자를 세워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도를 밝히고 있는 후반부(11-31절)로 구성되어 있다.

'선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 목자는 이 세상의 지도자들이 실패하고 감당하지 못했던 언약 공동체의 참된 회복을 실현하게 된다고 밝힌다.
참된 회복은 곧 화평의 언약을 가리키는 것으로, 궁극적인 평안을 보증하는 언약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궁극적인 평안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참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거짓된 목자들의 특징.

거짓된 목자들은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을 비유하기보다는 이스라엘의 왕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 이유는 왕을 목자로 비유하고 있는 언급들이 다른 곳에서도 자주 나타나고, 본장에 나오는 목자직의 박탈이 이스라엘 왕들의 폐위되는 모습을 염두에 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목자에 대하여 '자기만 먹이는'이라는 수식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목자들의 이기적인 동기를 지적한다.
이러한 이기적인 모습은 양의 기름과 털을 빼앗고, 도움이 필요한 양들을 강포로 다스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이기적인 자세는 목자가 근본적으로 양의 주인 즉, 하나님으로부터 양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양들의 참된 소유자는 하나님뿐이다. 


일본에 이학 박사인 마츠무라(松村)선생이 있었다.

그는 북해도에 있는 제국대학의 전신인 농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영광스럽게도 교장으로부터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러나 마츠무라는 교수 중에 친근한 이도 별로 없고 또 자기의 학업성적이 우수하지도 못한데 어떻게 하여 학교에서 자신을 선택하였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감사하며 직무에 충실하고 연구에 몰두하여 크게 대성하였다.
그 후 1935년경에 제네바로 유학 갔을 때 은사인 니토베 박사의 저녁 초대를 받았다.
그래서 같이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하다가 자기가 왜 모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니토베 박사가 마츠무라에게 말했다.

"자네가 지금까지 기억할지 모르나 내가 마츠무라 군에게 크게 감사할 일이 있다네."
마츠무라는 도무지 아무 기억도 없다고 말했다.
니노베 박사는 웃는 얼굴로 마츠무라 교수에게 말했다.

"내 처가 무더운 여름 날 부채를 들고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때에 그만 실수하여 부채를 아래로 떨어뜨렸다네.
그 때에 한 학생이 조용히 나와서 부채를 접어서 선생님에게 드렸네.
그 학생이 바로 자넬세.
그 후에도 내 처는 자네를 칭찬 했다네.
부채를 접어서 선생님에게 드리는 것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내 처는 그 학생의 태도와 인품을 보고 과연 장래가 촉망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 했다네."


미국의 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 1914-2009)
공간과 거리를 연구하는 학문인 공간학(proximics)의 대가이다.

그는 사람들이 상황에 따라 공간의 거리를 어떻게 유지하는지 밝혀냈다.

첫째로 친밀한 거리(intimate distance)

45cm 이내의 거리이다.
상대방의 숨결을 느껴질 정도의 거리로 애인이나 엄마와 아기 사이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둘째로 사적 거리(personal distance)

45~120cm정도의 팔을 뻗어 닿을 수 있는 거리로 친구와 가까운 지인끼리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셋째는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

120~360cm 정도인데 보통목소리로 말할 때 들을 수 있는 거리이다.
사무적인 대화로 정중한 격식과 예의가 요구되는 업무나 일로 맺어진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넷째로 공적 거리(public distance)

360cm 이상의 거리이다.
큰 소리로 이야기해야 들을 수 있는 거리인데 공연장의 가수와 청중 사이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10-16-2-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를 대신하여 경고하라(에스겔 33:7)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찌어다.
Son of man, I have made you a watchman for the house of Israel; so hear the word I speak and give them warning from me.

나를 대신하여 경고하라( I speak and give them warning from me)

파수꾼(6822) 차파[ tsâphâh ]  צָפָה   

1. 빛나다.  2. 바라보다. 3. 조사하다
발음 / [ tsâphâh ]
관련 성경 / 살피다(창 31:49, 시 66:7), 감찰하다(잠15:3), 파수하다(삼하13:34, 나2:1), 엿보다(시37:32), 보살피다(잠31:27), 기다리다(삼상4:13, 욥15:22), 바라다(시5:3, 애4:17), 바라보다(애4:17, 미7:7, 합2:1), 지키다(렘48:19).
[명] 파수꾼(삼하 18:25, 사 21:5, 겔 3:17), 망대(아 7:4).
구약 성경 / 36회 사용

* 경고하다(2094) 자하르(zâhar) זָהַר

에스겔 3: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파수꾼의 사명은 백성들을 깨우쳐야 하는 것.

* 깨우치다(2094) 자하르(zâhar) זָהַר 

1. 빛나다.  2. 히필형 הִזְהִיר
3. 빛나게 하다. ㉠ 가르치다
발음 / [ zâhar ]
관련 성경 / 경고하다(전 4:13, 겔 33:6,7,9), 가르치다(출 18:20), 경계하다(왕하 6:10, 대하 19:10), 깨우치다(겔 3:17, 19, 21), 이르다(겔3:18), 빛나다(단 12:3), 경계를 받다(전 12:12), 경고를 받다(시 19:11).
구약 성경 / 22회 사용



현대인을 속박하는 4가지 M이 있다.

첫째, Machine

머쉰(machine, 기계)
기계가 삶을 편리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친 기계화는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둘째, Mass

매스(mass, 대량)
크기와 숫자의 신에 농락당하면 극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모두 큰 손해를 입는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다수에 휩쓸린 자신의 의미가 지극히 왜소해졌음을 깨닫지만 그렇게 깨달을 때는 대개 늦는다.


셋째, Might

마잇(might, 힘) 
사람들은 힘을 숭상한다.
힘으로 세운 것은 결국 힘으로 무너진다.

넷째, Money

머니(money, 돈)
인간의 거의 모든 문제가 돈과 관련이 있다.
사람의 평가 기준과 성공 기준이 다 돈이다.
강력한 돈에 속박되면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줄 안다.
그래서 돈 때문에 도리와 윤리와 의리를 팽개치지만 돈으로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돈이 자유를 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욕망과 쾌락의 자유를 주면서 참된 자유를 빼앗는다.
돈은 영혼을 노예로 만드는 강한 마력이 있다.


에스겔 4장부터 32장까지는 하나님께 범죄한 모든 족속과 나라와 왕들이 받을 심판에 대한 내용을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내용을 대언할 에스겔에게 주신 파수꾼 사명이 에스겔 3장에 이어 33장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예언은 33장에서부터 마지막까지 새로운 예언 곧 이스라엘과 모든 이방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에 대한 내용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할 파수군으로 임명을 받습니다.

첫째, 파수꾼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해야 합니다.

파수꾼의 비유를 통하여 선지자의 위치와 책임을 집중적으로 강조합니다.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 말씀은 공동체의 생사가 걸려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둘째, 파수꾼은 악인의 회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에스겔은 표면적으로는 예언의 대상이 '의인과 악인'이라고 말하지만 궁극적인 관심은 악인의 회개를 강조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악인의 회개를 기뻐하신다는 선언적인 언급과 아울러 회개의 가능성에 대하여 여러 차례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셋째, 파수꾼은 설득하는 자세로 전해야 합니다.

파수꾼은 백성들에 대하여 정죄하는 자세가 아니라 합리적으로 설득하는 자세로 깨우쳐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 올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시고 전인격적 반응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선지자를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갇혀 있으면서도 환상 가운데서 계시하신 말씀으로 먼저 위로를 받은 후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을 것" 이라고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와 보는 눈과 실천하는 몸과 마음으로 새 날을 기다리는 승리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의 문단은 아래와 같습니다.
33:1-9. 파수꾼의 임무
33:10-20. 회개의 촉구
33:21-29. 본토에 남은 자들에 대한 심판
33:30-33. 선지자의 말을 듣고도 행치 않는 백성

여호와의 변함없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적으로 심각해지고 있었습니다.

에스겔 33장 12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

에스겔서의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에스겔서에서 선지자의 책임과 그 말씀을 듣는 자의 책임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은 현재 예루살렘에 있는 자와 바벨론에 있는 자의 책임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복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파수꾼을 세우는 이유(1-3절)

주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인 에스겔은 그의 민족의 자손 모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하라고 하십니다.
만일 여호와가 어떤 나라에 전쟁이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건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전쟁이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전쟁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위기의 때만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단 한사람이라도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전쟁이 나기 전에 회개하였다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하고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그 나라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서, 파수꾼으로 세웠다고 가정합니다. 온 군인이 깨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잠을 자야 합니다. 잠을 잘 자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입니다. 잠을 자지 못하면 건강하지 못합니다. 잠에서 깨어 일어났는데 정신이 몽롱하면 그는 건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눈만 감으면 잘 잡니다. 눈만 뜨면 말짱한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잠을 자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쟁의 최일선에서도 잠을 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자고 먹어야합니다. 적이 쳐들어와도 자고 행진하면서도 잠을 잡니다. 자면서 걷습니다. 잠이라는 것은 참 신비한 것입니다. 잠을 잘자야 전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을 재웁니다. 무덤가에서도 잡니다. 다 자게 하고 파수꾼을 세웁니다. 파수꾼이 보초병입니다. 몇사람은 깨어있어야합니다. 파수꾼이 잠을 자지 않습니다. 파수꾼이 깨어 있습니다. 이 파수꾼은 자기 나라로 적군이 접근하여 오는 것을 보고 나팔을 불어, 자기 백성에게 경고를 하였습니다.

경고를 받지 않은 자의 책임(4-5절)

어떤 사람이 파수꾼의 그 나팔 소리를 분명히 듣고서도 경고를 무시하였습니다.
적군이 이르러 그를 덮치면, 그가 죽은 것은 경고를 무시한 자기 탓입니다.
그는 나팔 소리를 듣고서도 그 경고를 무시하였으니, 죽어도 자기 탓인 것입니다.
그러나 파수꾼의 나팔 소리를 듣고서 경고를 받아들인 사람은 자기의 목숨을 건질 것입니다.
파수꾼이 경고를 했을 때는 그 경고를 듣느냐 무시하느냐에 따라서 생사가 갈립니다.
다 자도 한 사람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선지자는 깨어 있어야합니다.
선지자는 깨어 있는 대표입니다.
그는 결정적인 위기에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해야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선지자의 최후통첩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게 됩니다.
주변 나라들이 망하는 것을 보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전쟁 앞에서 나오는 경고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어 마땅합니다.

파수꾼의 책임(6절)

그러나 파수꾼이 잠을 잤습니다.
그 파수꾼이, 적군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서도 나팔을 불지 않았습니다.
그 파수꾼은 죽어 마땅합니다.
그 백성이 경고를 받지 못하고, 적군이 이르러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을 덮쳤습니다.
그러면, 죽은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은 여호와가 파수꾼에게 물으십니다.
파수꾼이 나팔을 불지 않아서 깨어나지 못하였다면 그 책임은 파수꾼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파수꾼에게서 피값을 찾으십니다.
파수꾼이 나팔을 불었다면 깨는 사람이 있었을텐데 그들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전도해야하는 이유는 구원받을 자에게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잠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구원받을 사람이 많으니 외치라고 합니다.
내가 전도해서 그들이 믿지 않았으면 내 책임은 다하였습니다.
내가 전도하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하였다면 그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이 생전 처음으로 예수 믿고 파티를 합니다.
교인을 모아서 점심을 냅니다.
삭개오와 같이 잔치를 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주위 사람들 가운데 예수믿으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사온 사람은 만날 때마다 예수 믿으라고 만날 때마다 얘기하였다고 합니다.
예의 상 한번 교회에 나왔는데 그때 예수 믿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전의 친구들이 원망스럽다고 합니다.
우리는 관상보고 예수 믿을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를 만나도 예수를 증거해야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전도하면 내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파수꾼 에스겔과 듣는 자의 책임(7-8절)

하나님은 사람인 에스겔 자신을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여호와가 하는 말을 듣고, 여호와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합니다.
여호와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그 악인에게 말하여 그가 악한 길을 버리고 떠나도록 경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악인은 자신의 죄가 있어서 죽을 것이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은 여호와가 에스겔에게 물으십니다.
파수꾼은 신실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파수꾼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분을 다해야합니다.
내가 해야할 일은 내가 해야합니다.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는 독일 히틀러 정권에 항거하다가 수용소에 수감 되었다.
1945년 4월 8일 주일 아침 기도 중에 간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본 회퍼는 이것이 자기의 마지막인 것을 알았다.
이 때 같은 감옥에 있던 한 영국장교가 본 회퍼 목사님을 향해 말했다.
"목사님, 마지막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본 회퍼 목사는 미소를 머금고 평화스러운 표정으로 감방에 있던 동지들에게 인사를 했다.

"동지 여러분! 이제 나에게는 죽음이 왔소. 그러나 기억하시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고 시작이오. 주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아버지의 집에서 만날 때까지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감방을 떠나는 그에게서 평안과 기쁨이 흘러넘쳐 감옥 속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이 흘러넘쳤다.


경고하였으면 파수꾼은 책임이 없다(9절)

에스겔이 악인에게, 그의 길에서 떠나서 거기에서 돌이키도록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신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습니다.
그러나 파수꾼인 에스겔은 목숨을 보존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살 수 있는길(10-11절)

그러므로 사람인 에스겔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온갖 허물과 우리의 모든 죄악이 우리를 짓눌러서, 우리가 그 속에서 기진하여 죽어 가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살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에스겔은 그들에게 살 수 있는 길을 전해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여호와가 당신의 삶을 두고 맹세합니다. 여호와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은헤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 살길을 예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돌이켜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야 합니다.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죽으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현재의 중요성(12-16절)

사람인 에스겔은 민족의 자손 모두에게 전해야합니다. 의인이라고 해도 죄를 짓는 날에는 과거의 의가 그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악인이라고 해도 자신의 죄악에서 떠나 돌이키는 날에는 과거의 악이 그를 넘어뜨리지 못한다고 전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의인도 범죄하는 날에는 과거에 의로웠다는 것 때문에 살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그는 반드시 살 것이다 하였어도, 그가 자신의 의를 믿고 악한 일을 하면, 그가 행한 모든 의로운 행위를 여호와가 전혀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그가 범한 바로 그 죄 때문에 죽을 것입니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조들의 죄 때문에 끌려왔다고 생각하고 선조들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조를 원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그들이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여주십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가 자기의 죄에서 떠나 돌이켜서, 법과 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전당물을 돌려 주고, 탈취한 물건을 보상하여 주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규정들을 따라 살아, 악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입니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여호와가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법과 의를 따라서 사는 사람이니, 반드시 살 것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17절)

그런데도 이스라엘 민족 모두가 주께서는 하시는 일이 공평하지 못하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공평하지 못한 것은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적인 공의와 은혜적인 공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행위를 따라서 생각합니다. 얼마나 의롭게 진실하게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심을 따라서 사회적인 정의를 따라서 살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서 사는 공의가 있습니다. 이런 공의는 행위적인 공의입니다. 행하지 않으면 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삶으로 복을 받고 준행하지 못함으로 저주를 받습니다. 이런 공의를 따라서 하면 살아남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죄인입니다. 둘째 은혜의 공의가 나타납니다. 자기 보기에 의롭다고하는 것이지만 하나님보시기에 깨끗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는 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상숭배하고 간음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불공평하다고 원망합니다. 이것에 대한 대답이 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망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마지막 말씀을 들었습니다. 니느웨 성이 요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한 것과 같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불평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그래서 내가 오지 않을려고 했다고 합니다. 왜 안 망했느냐고 대듭니다. 그가 망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율법적인 공의입니다. 마지막 회개할 때 의로 보고 구원해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적인 공의입니다. 의인은 망하고 악인은 망하지 않아서 공평치 않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조금 나은 것이 무슨 의가 되겠느냐고 합니다.

현재의 의가 중요하다(18-20절)

의인이 의로운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서 악한 일을 하면, 그것 때문에 그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도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서 떠나, 돌이켜 법과 의를 따라서 살면, 그것 때문에 그는 살 것입니다. 과거에 의를 행했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과거에 죄가 많아도 의롭게 살았으면 살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은 공평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해야합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인정해야합니다. 다시 돌아오는 자를 구원하는 은혜적인 공의를 이해해야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가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적인 의가 인정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적인 의는 십자가의 의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아를 돌아보아 양자를 삼듯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를 삼습니다. 전혀 자격이 없는데 엄청난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인이었지만 탕자처럼 영접합니다. 여기서 나는 죄인아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적인 공의를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 공평하지 못하다 하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너희 각 사람이 한 일에 따라서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들이 죄를 회개했느냐 하지 않느냐를 보고 싶판하십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율법적으로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은혜적으로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아멘!

예루살렘의 함락 소식(21-22절)

에스겔과 이스라엘 사람이 포로로 잡혀 온 지 십이년째가 되는 해의 열째 달 오일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도망하여 온 사람이 에스겔에게로 와서, 그 성읍이 6개월 쯤 전에 함락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고 왕궁과 집들과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와서 소식을 전함으로 에스겔이 예루살렘은 망할 것이라고 예언한 그 말씀이 성취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들이 에스겔에게 오기 전날 저녁에, 주의 권능이 에스겔을 사로잡아서, 에스겔의 입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사람이 아침에 에스겔에게로 올 즈음에는 에스겔 입이 열려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더 이상 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잘못된 낙관주의(23-24절)

사람인 에스겔은 이스라엘 땅의 저 폐허 더미에 사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고 있음을 듣고 있습니다. 당시 학자들에 의하면 이만명 정도가 남았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한 개인인데도 이 땅을 차지하였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하시고 기업을 주셨습니다. 나라도 군사도 없는데 보호해주셨습니다. 한평생 나그네로 살지만 기업을 주셨습니다. 하물며 수가 많은 우리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느냐? 합니다. 우리는 수가 많음으로 기업을 넉넉히 지킬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자기들의 소유로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땅까지 차지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을 주신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주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악한 무화과 나무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들은 남은 자라는 영적인 교만에 빠져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땅을 차지 하지 못하는 이유(25-26절)

그러므로 에스겔은 그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피를 빼지 않은 고기를 먹었습니다. 생명을 존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온갖 우상에게 눈을 팔았습니다. 사람들이 피를 흘리게 하는 악한 죄를 범하였습니다. 강자들은 약자들을 짓밟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땅을 차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칼을 의지하였고, 역겨운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서로 이웃 사람의 아내를 더럽혀 놓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땅을 차지하려고 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의인 하나가 소중합니다. 악인은 수가 많은 것이 소용없습니다. 우리는 정치력 경제력을 많이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믿음으로 사는 한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노아 홍수때 많은 사람을 쓸어버립니다. 인간이 육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숫자로 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숫자가 많아서 설 것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 아브라함은 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믿음이 없습니다. 지금도 지식도 돈도 있지만 심성이 없습니다. 범죄하는 사람들이 머리가 좋고 능력 있습니다. 인간 속에 영혼이 타락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믿음으로 사는 아브라함 한 사람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은 교만 속에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황폐케 하시는 하나님(27-29절)


에스겔은 그들에게 또 전해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가 당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예루살렘의 폐허 더미 속에 있는 사람들은 칼에 쓰러질 것입니다. 들판에 있는 사람들은, 여호와가 들짐승들에게 잡혀 먹도록 하십니다. 산성과 동굴에 있는 사람들은 전염병에 걸려서 죽게 하십니다. 여호와가 예루살렘 땅을 황무지와 폐허로 만들어 놓으면, 그 거만하던 권세도 끝장이 날 것이고, 이스라엘의 모든 산은 메말라서, 사람이 얼씬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땅을 차지하겠다고 하였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은 망하여 죽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저지른 그 모든 역겨운 일 때문에, 여호와가 그 땅을 황무지와 폐허로 만들어 놓으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여호와가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는 공의로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백성들(30-31절)

여기서부터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인 에스겔은 자신의 민족의 자손 모두가 담 밑이나 집 문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자기들끼리 서로 말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서 가서, 주께서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들어나 보자고 합니다. 마치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무슨 구경거리를 보러 오듯이 에스겔에게 찾아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에스겔이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입으로는 달갑게 여기면서도, 마음으로는 자기들의 욕심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해관계에 따라서 움직였습니다. 우리는 이해관계보다 말씀을 따라서 움직여야합니다. 손해가 나도 말씀이면 행하고 이익이 되어도 말씀이 아니면 하지 말아야합니다.

때가 되면 선지자를 알게 됨(32-33절)

에스겔을 찾아온 사람들은 에스겔을 악기를 잘 다루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사랑의 노래나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주의 종을 배우나 가수처럼 생각합니다.
그들은 관람객 입장에 있습니다.
그들은, 에스겔이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의 종은 배우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입니다.
여호와가 에스겔에게 시켜서 한 그 말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 말씀이 이루어지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할례 받지 못한 자
살륙 당하는 자


할레받지 못한 자(알렐림) : 복수형

아렐( ʽârêl)  עָרֵל 스트롱번호 6189

1. 할례 받지 않은.  2. 창 17:14.  3. 출 6:12
발음 [ ʽârêl ]
어원 / 연계형 עֶרֶל 겔44:9, עֲרַל 출6:12,618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할례 받지 아니한(창17:14, 사52:1, 겔32:21), 할례 받지 못한(출12:48, 삼하1:20, 렘6:10), 할례 없는(삼상14:6, 31:4).
구약 성경 / 35회 사용

살륙 당하는 자

חָלָל 스트롱번호2491

1. 꿰뚫린. 2. 상처받은.  3. 살해된 신21:1
발음 [ châlâl ]
어원 / 24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중상 당한(겔21:29), 부정한(레21:7), 더러운(레21:14), 죽은(민19:16), 죽임을 당한(민19:18, 왕상11:15, 사22:2), 피살된(신21:2,3), 살륙하는(수13:22), 상한(삿9:40, 잠7:26), 죽임을 당한(겔6:4, 35:8), 죽이는(겔21:14), 엎드러져 죽은(단11:26). [명] 시체(창34:27, 겔9:7), 죽임을 당한 사체(민31:19), 피살자(신32:42), 죽은 자(삼상31:8, 삼하1:22, 렘14:18).
구약 성경
94회 사용
에스겔 31:18
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할례 받지 못하고 칼에 살륙당한 자 중에 누우리라

'할례받지 못한 자' (아렐림)는 경건치 않은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
'살륙당한 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죽어간 자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할례받지 못하고 살륙당한 자'는 곧 이미 멸망한 앗수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세상적인 힘에만 의지한 채 자고했던 모든 교만한 이방 세력들을 가리킨다.

또한 '누우리라'(솨카브)는 '내던지다'란 뜻을 함축하고 있는데 극히 무관심하게 내던저져 나뒹구는 시체의 처참한 모습을 연상시키는 표현이다.

이는 그 교만한 이방 세력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성을 재삼 주지시켜 주고 있다.
한편, 혹자는 할례의 기원이 애굽이라는 고대 사가 헤로도투스의 기록을 빌어 본 구절을 할례받은 애굽 왕조차 그들의 교만으로 할례받지 못한 자와 함께 눕게 될 것이라고 해석한다(Schroder, Hitzig).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본절의 '할례받지 못한 자'가 교만한 이방 세력을 지시하며 또한 애굽의 통상적으로 그러한 세력을 대표하는 상징 중의 하나라는 점에 비추어 타당하지 않다.


교만(驕慢) : 교만할 교, 거만할

1347. 가온(gâʼôwn)  גָּאוֹן

1. 장대함.  2. 장식.  3. 교만
발음 / [ gâʼôwn ]
어원 / 13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위엄(출 15:7, 욥 37:4, 미 5:4), 교만(레 26:19, 잠 16:18, 겔 7:20), 영화(시 47:4, 사 14:11), 거만(잠 8:13), 오만(사 13:11), 영광(사1 3:19, 암 6:8, 나 2:2), 아름다움(사 60:15), 자고(렘 48:29)
구약 성경 / 49회 사용

* 1342. 가아(gâʼâh) גָּאָה  

1. 올라가다.  2. 에스겔 47:5.  3. 욥기 8:11-10:16
발음 / 가아[ gâʼâh ]
관련 성경 / 높다(출 15:1), 가득하다(겔 47:5), 영화롭다(출 15:1)
구약 성경 / 7회 사용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부르짖으라(7121) 카라[ qârâʼ ]  קָרָא    

1. 부르다. 2. 사사기 18:23.  3. 도움을 청하다.
발음 [ qârâʼ ]
관련 성경 / 부르다(창 16:14, 삼상 3:6, 사 41:9, 호 11:7), 선포하다(출33:19, 애1:21), 청하다(출34:15,삿14:15, 삼상9:24), 공포하다(레23:21, 삿21:13), 읽다(신17:19, 왕하22:16), 호소하다(신15:9), 선언하다(신20:10, 렘34:8), 낭독하다(수8:34, 렘36:6), 외치다(삼상26:14, 왕상13:32), 불러가다(왕하5:11), 전하다(왕하23:16,17), 일컫다(대상11:7, 대하20:26, 사30:7), 부르짖다(시34:6, 렘3:4), 간구하다(시138:3), 부르다(사6:3,4), 기도하다(시116:2, 렘10:25),여기다(애1:15, 사1:13), 선전하다(느6:7), 전파하다(사61 : 1), 유명하다(룻4:11, 겔23:23), 불러오다(왕하4:12, 렘9:17), 읽어보다(사34:16), 불다(욜2:15), 널리 선포하다(욜3:9, 암4:5), 구하다(욘1:6), 주다(창2:20), 소리지르다(창39:14), 이르다(창49:1, 출19:3), 소집하다(신29:2), 아뢰다(삼상12:17, 대상4:10), 기록하다(대상6:65), 자랑하다(잠20:6), 명령하다(사22:12, 암7:4), 펴놓다(사37:14), 베풀다(렘36:18), 부름을 받다(욜2:32), 초대하다(슥3:10), 불러내다(사41:4), 일컬음을 받다(잠16:21, 렘7:10), 묻다(삼상9:9), 기록되다(대상23:14)
구약 성경 / 755회 사용

응답하겠고(6030) 아나[ ʽânâh ]  עָנָה 스트롱번호6030

1. 노래하다. 2. 노래로 찬양하다. 3. 외치다
발음 [ ʽânâh ]
관련 성경 / 판명되다(신19:18), 이르다(신25:9), 아뢰다(신26:5), 응답하다(신27:14, 대상21:28, 시34:4), 징벌하다(룻1:21), 증언하다(삼하1:16,사3:9), 대답하다(왕상2:30, 스10:12), 응답하다(시22:21), 부르짖다(출32:18, 사13:22),응대하다(호2:15), 높이다(렘51:14), 노래하다(민21:17), 찬양하다(시147:7), 말씀하다(창18:27), 화답하다(출15:21, 스3:11), 회답하다(신20:11), 노래하다(삼상18:7), 명령하다(왕상1:28), 들으심을 입다(욥12:4), 듣다(시55:19, 슥10:6), 이용되다(전10:19), 낮추다(사25:5), 응하다(호2:21, 슥1:12), 외치다(렘25:30), 묻다(슥4:4).
구약 성경 / 316회 사용

보이리라(5046) 나가드( nâgad ]  נָגַד 

1. 앞에 두다. 2. 히필형  הִגִּיד
3. 빛 가까이 가져오다
발음 [ nâgad ]
관련 성경 / 보이다(창 41:25, 시 111:6, 미 6:8), 묻다(민17:9), 이르다(삿13:6), 토하다(삿16:18), 나타내다(삼상24:18, 삼하19:6), 고발하다(에6:2), 선포하다(시97:6, 렘50:28), 전하다(신5:5, 왕하9:15), 예언하다(사48:14), 풀다(삿14:14), 전파하다(사66:19), 공포하다(왕상1:20), 밝히다(스2:59, 느7:61), 가르치다(삼상9:18), 일러주다(삼상23:11), 대답하다(왕상10:3, 대하9:2), 보고하다(왕상20:17), 비난하다(욥17:5).
구약 성경 / 369회 사용

애급

애굽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미츠라임"입니다.
미츠라임은 함의 아들이며 그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미스라임(창 10:6) 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미츠라임<미 + 챠르 + 임>
1. 미는 명사형을 나타내는 접두어
2. '좁다'는 뜻의 동사 챠라르에서 온 '챠르'는 본디 좁은 곳, 협곡을 가리키는데, 그 뜻이 발전하여 원수, 적대자, 시련 등을 뜻합니다.
3. 임은 복수(plural)을 표시하는 어미

아주 작은(좁은)땅에 사는 히브리인이 아주 큰(넓은) 영토를 가진 이집트를 '좁은 곳'이라 부르는 뜻은?
미츠라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담겨있는 '의도적' 호칭이라고 하겠습니다.

미스라임은 많은 자녀들을 낳았는데 성경에는 루딤, 아나밈, 르하빔, 납두힘, 바드루심, 가슬루힘, 갑도림 등 미스라임 후손들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 중 가슬루힘블레셋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팔레스틴(창 10:14)

애급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미츠라임은 "묶다, 포위하다, 제한하다, 대적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검은 땅"이라는 뜻인 "케메트" 라고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고대에는 검은색이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나일강이 범람하면서 나타나는 비옥한 땅이 검었기 때문에 이집트에서는 풍요로운 이미지라고 합니다.

"가나안" 역시 함의 아들입니다.
가나안의 히브리어는 "카난"으로 "겸손하다, 낮아지다, 아래에 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역시 "검다"라는 뜻을 지니고도 있습니다.

이렇듯 미츠라임이나 가나안이나 두 곳 모두 함의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치는 다르지만 동일한 본질에 속한 것이지요.
그러기에 구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은 가나안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의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 란 존재 자체가 가나안 땅이자 애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가나안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의 여정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현재 광야를 살고 있죠.
우리는 보이는 세상인 애굽을 나와 광야를 지나도 본질은 애굽이라는 실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애굽 그 자체이지만 그 약속, 언약, 그 진리를 가지게 되면 그 언약을 가진 것 자체가 바로 "약속의 땅"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가나안 땅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보이는 어떤 곳으로 인식하여 젓과 꿀을 꿈꾸며 가나안 땅에 어떻게든 들어가 보고자 하는 그 열정은 그 가나안 땅도 다시 애굽으로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 나라를 가기위한 열정과 수고는 믿음이 아니라 목적이 있는 행위에 불과한 것 뿐이죠.

많은 이들이 착각합니다.
천국가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그것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나를 위해 그 나라에 가고 싶은 것 뿐입니다.

인간은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죽음을 눈 앞에 두고서도 자신을 포장하며 자신이 믿었던 믿음도 자신을 위해 눈감아버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신다구요?
어떤 하나님 나라입니까?
젖과 꿀이 흐르고 세상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누리는 그런 하나님 나라를 꿈꾸십니까?
그곳에 가기위해 자신을 헌신이라는 명분으로 투신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십니까?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가기위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자신도 모르게 "사랑"이라는 것에 함몰되어 은혜로 믿는 것 뿐입니다.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기위한 보증수표라는 어처구니 없는 협박에 교회는 놀아난 것 뿐입니다.
거기서 자신은 구원받았다며 은혜를 말하고 노래를 하며 춤을 춥니다. 자신의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죠. 은혜라 착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로하고 안심 시키기 위해 포장하기에 여기서 이 말, 저기서 저 말을 하는 어리석은 짓거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진리를 담고 있는 자들은 진리로 인해 괴롭고, 그 진리를 알고 그 진리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자신을 보며 괴롭고, 세상에 부적응하는 것이 힘든 자 들입니다.
그 괴로움속에서 은혜를 말하고 사랑을 말하는 것이기에 침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그렇게 광야에서 되어졌으면 그곳이 바로 "약속의 땅"인 것입니다.
광야에서 가나안 땅 자체인 내가 빵만으로 살지않고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완성의 말씀"으로 현재 살고 있으면 그것이 약속의 땅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알게하시려고 예수그리스도는 마음의 상태의 문제를 그토록 다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속해 있는 것 같습니까?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애굽 역시 가나안이고 가나안이 애굽이라 할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가나안이요, 애굽 입니다.
그렇게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자신의 믿음을 써서 무엇을 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자신을 여호수아의 양날검인 말씀으로 도륙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2장
10-14-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애급을 위한 애가(에스겔 32:2)

인자야 너는 애굽바로에 대하여 애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열국에서 젊은 사자에 비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 큰 악어라 강에서 뛰어 일어나 발로 을 요동하여 그 강을 더럽혔도다.
Son of man, take up a lament concerning Pharaoh king of Egypt and say to him: " 'You are like a lion among the nations; you are like a monster in the seas thrashing about in your streams, churning the water with your feet and muddying the streams.

애급을 위한 애가(Lament for Egypt)

키나 알 미스라임(
קינה על מצרים)

애가(7015)  키나[ qîynâh ] קִינָה  
   

1. 애가.  2. 비가. 3. 예레미애 7:29

발음 [ qîynâh ]
어원 / 696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슬픈 노래(삼하 1:17), 통곡(렘 7:29), 슬퍼함(렘 9:10), 슬피 부름(겔 32:16).
[부] 슬피(대하 35:25)
[명] 슬픈 노래(렘 9:20, 겔 2:10, 암 5 : 1), 애통(암 8:10)
구약 성경 / 18회 사용

애급(4714)  미스라임 [ Mitsrayim ]  מִצְרַיִם 스트롱번호4714

1. 애굽.  2. 애굽 땅  3. 창세기 45:20
발음 [ Mitsrayim ]
관련 성경 / 애굽(창 45:20, 46:34, 47:6,13, 50:11)
구약 성경 / 680회 사용
알(5921) 알 [ ʽal ]  עַל

1. 옷을 입은.  2. 사무엘하 4:7
발음 [ ʽal ]
구약 성경 / 5772회 사용


1-16 애굽왕 바로 위한 애가.
2-10 멸망된 악어의 비유.
11-16 그 설명. 애굽은 바벨론 왕에게 멸망되다.
17-32 바로와 애굽의 군중을 슬퍼하기 위한 만가(장송곡; 다른 나라의 용사들과 함께 받는 음부의 고초).


에스겔 29-31장에서는 애급과 애급 백성들이 지은 죄악과 그 죄악으로 인해 받게 될 진노의 심판을 말씀합니다.
애급의 심판에 서 진노를 받아야할 세 부류에 대해서 언급합니다(애급, 애급 백성, 애급 왕).
이제까지는 애급과 애급 백성에 대한 심판을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32장에서는 애급 왕에 대한 심판 내용을 말씀합니다.

특히 에스겔 32장은 애급을 비롯한 및 이방 심판 예언의 최종적인 결론이라고 하겠습니다.
32장에서는 에스겔 선지자가 심판의 대상을 왕과 백성으로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선지자가 이전의 내용에서는 애급의 심판의 원인을 공동체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32장에서는 심판의 책임을 더욱 개인화, 세분화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심판의 양상이 다른 것이 아니라 담당한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선지자는 다른 이방 국가들에 대한 심판 예언과는 달리 애급의 최종적 상태를 이 세상 질서를 벗어난 스올의 상태로 묘사함으로써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력들의 최후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애굽 백성을 향한 애가

애굽 백성들의 최종적 상태를 지하세계 즉 스올로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심판의 강도를 나타내 주고 있다.
에스겔은 애굽과 열방에 대한 심판의 근본적인 원인이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데에 있음을 밝힌다.
곧 12절에서는 애굽의 심판 원인을 '교만'으로 밝히고 있고, 19절에서는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자의 상태는 반드시 교만으로 드러나게 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은 할례받지 못한 자들로서, 칼에 살육당한 자, 생존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한 자, 지하에 내려간 자 등과 동일시되고 있다.
하나님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자는 결코 형통할 수 없으며, 비록 일시적으로 성공하는 듯이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실패를 맛볼 뿐이다. 그때서 선지자는 하나님을 끝까지 인정치 않는 자들은 결국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묘사한다.
이러한 사실은 구덩이 지하, 음부, 등의 표현에서 알 수 있다.
이 단어들은 구약에 있어서 지옥을 가리키는 말들이다.
선지자는 이와 같은 지옥의 실제성을 선포함으로써 이방 세력의 회개와 돌이킴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애굽 백성은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스스로 교만에 빠져 있다가 결국은 지옥으로 갈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본장에 기록된 에스겔의 애가를 통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세상 왕들의 교만을 심판하신 것처럼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약 4:6).
왜냐하면 교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도록 유도하므로 온 죄악이기 때문이다(잠 16:18).
성도들은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분명한 심판이 있음을 알고,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한다(빌 2:12).
성경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삶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성도들의 사명인 것이다.
하나님 없이 이 세상의 방법으로 성공하려 한다면 비록 세상적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실패한 삶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얼마나 충실하게 살았는가로 결정되어지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삶만이 성공한 삶이 되는 것이다. 




내 그물을 네 위에 치고(1-16절)

애굽에 대한 심판이 29장부터 시작해서 32장으로 끝이 납니다. 29장부터 시작된 애굽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여섯 번 각각 다른 날 에스겔 선지자에게 임하였습니다. 29장에 두 번째 순서로 기록된 심판에 대한 말씀을 제외하고 에스겔 선지자에게 임했던 시간의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32장에는 두 번의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열두째 해 열두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시각이 연월일 표기로 되어 있습니다. 년도의 기준은 이전 본문에서 여러 차례 들었던 바 있듯이 남 유다 왕 여호야긴이 바벨론에 의해 사로잡힌 해입니다. 32장 1절에서 16절은 애굽의 패망을 악어의 죽음으로 비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17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애굽이 죽어서 가는 곳, 죽음의 세계 안의 상황을 묘사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

하나님께서 2년 전 에스겔 선지자에게 애굽 왕을 큰 악어로 비유하시며 애굽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신 바가 있었습니다.(겔29:3)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이 애굽의 강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말한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강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애굽 왕의 교만을 책망하셨습니다. 본문 2절 말씀에서도 애굽 왕의 교만을 책망하시는데 애굽 왕이 스스로 ‘의인’이나 ‘용감하고 정의로운 통치자’로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십니다. 여러 나라들이 애굽 왕을 사자로 생각했다고 한 것은 애굽 왕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 과시했기 때문입니다. 고대 애굽에는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스핑크스라는 석상이 있었습니다. 어떤 것은 그 길이가 약 70미터, 높이가 약 20미터가 될 정도로 거대하며, 그 형상은 머리가 사람이고 몸은 사자입니다. 애굽 왕이 만들었던 스핑크스 석상을 보더라도 애굽 왕은 자신을 ‘의인’이나 ‘용감하고 정의로운 통치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강물을 더럽히는 큰 악어에 지나지 않음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강물을 더럽혔다는 것은 애굽이 이리저리 설치고 다니면서 주변 나라들을 못살게 굴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악행을 일삼았던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3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많은 백성의 무리를 거느리고 내 그물을 네 위에 치고 그 그물로 너를 끌어오리로다 4 내가 너를 뭍에 버리며 들에 던져 공중의 새들이 네 위에 앉게 할 것임이여 온 땅의 짐승이 너를 먹어 배부르게 하리로다 5 내가 네 살점을 여러 산에 두며 네 시체를 여러 골짜기에 채울 것임이여 6 네 피로 네 헤엄치는 땅에 물 대듯 하여 산에 미치게 하며 그 모든 개천을 채우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을 상징하는 큰 악어를 그물로 잡을 것이고 물 밖으로 끌어내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공중의 새들과 땅의 짐승들이 악어를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악어의 살점들을 골짜기에 두어, 모든 땅이 물대듯 피로 물들 것이라고 합니다. 한 때 애굽이 나일 강물을 공급받아 어떤 나무와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무성한 백향목과 같았지만, 심판의 날에는 나일 강이 피로 변해 더 이상 백향목이 살 수 없는 비참한 상태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출애굽할 때 애굽의 첫 번째 재앙, 나일 강이 피로 변한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7,8절에는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심판 역시 과거 이스라엘이 출애굽 당시 애굽에 임했던 9번째 재앙인 어두움을 연상하게 합니다. 빛이 없는 어둠의 세상은 죽음의 세상과 다름이 없습니다. 해와 달과 하늘에 빛나는 별 등 빛을 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완전히 차단된 어둠이 임하면 사람은 잠시 동안 생존할 수는 있을지언정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 것입니다. 왜 죽음의 세계를 어둠의 세계라고 말하겠습니까? 어둠은 곧 죽음이나 매한가지입니다.

9 내가 네 패망의 소문이 여러 나라 곧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들에 이르게 할 때에 많은 백성의 마음을 번뇌하게 할 것임이여 10 내가 그 많은 백성을 너로 말미암아 놀라게 할 것이며 내가 내 칼이 그들의 왕 앞에서 춤추게 할 때에 그 왕이 너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할 것이며 네가 엎드러지는 날에 그들이 각각 자기 생명을 위하여 무시로 떨리로다

애굽의 패망 소문이 여러 나라를 두렵게 하는 이유는 애굽이 패망한 것처럼 자기 나라에도 화가 닥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결코 패망하지 않을 것 같았던 나라, 애굽이 비참하게 패망한다면 애굽보다 약한 나라들이 어찌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은 애굽과 같이 경제력과 군사력이 강한 나라를 두려워합니다. 그러기에 그 나라와 협력하여 같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개인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과 잘 어울려 그것을 의지하여 잘 살아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나라와 그 사람이 영원한 안전장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투자하고 협력한 기업이나 기관, 그리고 사람에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면 마음이 심란하고 번뇌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의지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11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바벨론 왕의 칼이 네게 오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심판할 도구로 바벨론을 정하셨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애굽이 패망할 것인데 그 이유가 교만 때문이라고 합니다.(12절) 애굽의 교만은 자신의 부강함이 자신으로부터 기인하였다는 생각입니다. 큰 악어가 자신의 영역인 물에서는 괴력을 발휘하겠지만 하나님의 그물에 잡혀 물 밖으로 나오게 되면 더 이상 물을 흐리지 못합니다.(3절,13절) 악어가 물을 흐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악어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악어가 사라지면 물이 탁해질 이유가 없습니다. 14절에 물이 맑아지고 강이 기름 같이 흐르게 될 것이라는 것은 애굽에 의해 억압받는 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회복이라는 좋은 뜻이지만 애굽의 입장에서는 큰 악어로 비유된 애굽 왕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애굽의 권력자가 죽고 애굽이 패망하게 되었으니 애굽 땅은 황폐하게 되어 사막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나라 사람들이 애굽의 패망을 슬피 노래 부를 것이라고 합니다.(16절)

함께 누울지어다(18-32절)

17 열두째 해 어느 달 열다섯째 날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애굽 심판에 대하여 마지막 여섯 번째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섯 번째 말씀처럼 에스겔 선지자에게 임한 시각이 같은 해, 열두째 해에 있었습니다.
‘어느 달’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에는 정관사가 붙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달’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섯 번째 기록된 애굽에 대한 심판의 말씀은 다섯 번째 심판의 말씀 이후 불과 14일 만에 에스겔 선지자에게 다시 임했습니다. 이 심판의 말씀은 이때까지 여러 나라들의 심판의 예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사후 세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18 인자야 애굽의 무리를 위하여 슬피 울고 그와 유명한 나라의 여자들을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지하에 던지며

하나님께서 2절 말씀처럼 에스겔 선지자에게 슬퍼하라고 합니다.

“유명한 나라의 여자들”이란 애굽과 운명을 같이해 온 나라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이들은 애굽처럼 심판을 받을 정도의 악을 행한 사람들입니다. 누구와 친하게 지내느냐에 따라 빛의 세계로 갈 수도 있고 어둠의 세계로도 갈 수 있습니다. 누구와 친밀해야 하겠습니까? 세상에서 강하다고 하는 것, 최고라고 하는 것,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에는 애굽이 빠졌던 구덩이가 기다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구덩이에 빠지면 죽음의 길로 갑니다. 죽음의 길로 인도하는 구덩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지 않고 주님의 길을 가야 합니다.

32장 후반부 말씀은 죽음의 세계를 알려주고 있는데 반복적인 표현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구덩이”, “무덤”, “스올”

이는 어둠의 세계, 곧 죽은 자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너의 아름다움이 어떤 사람들보다 뛰어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지 못한다면 그 아름다움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애굽처럼 구덩이에 내려간다면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학식이 많고 아무리 명예가 높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둘째는 “할례 받지 아니한 자”

할례 받지 아니한 자는 단순히 남성 생식기의 포피를 베지 않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할례는 구원받은 자의 표징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며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멸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구덩이”, “무덤”, “스올”,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뛰어난 아름다움을 가졌던 애굽이 갈 곳은 할례 받지 아니한 자 옆입니다.

셋째는 “죽임을 당한 자”

죽임을 당한 자는 단순히 죽은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해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칼에 죽임을 당했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그 칼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의 칼입니다. 애굽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어둠의 세계로 들어갔는데 거기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22절에 앗수르, 24절에 엘람, 26절에 메섹과 두발, 29절에 에돔, 30절에 시돈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힘만 믿고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죽음의 세계에 있었다는 것은 모든 불의한 나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를 보면, 불의한 나라와 불의한 사람들에 대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해칠 정도까지 그들을 증오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불의한 나라와 불의한 사람들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나라가 불의한 나라가 되지 않으며 나 자신이 불의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해야 하겠습니다.

넷째는 “눕다” 

애굽이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서 함께 누울 자들이 누구입니까?
할례 받지 않는 자들입니다.
애굽처럼 악한 자들이며 세상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사람들을 두렵게 한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권력을 휘두르고 사람들을 두렵게 했지만 죽음의 세계에서는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들끼리 같이 누워있게 됩니다. 32절을 보면, 애굽 왕 바로가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모든 권력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군사대국과 경제대국의 통치자들의 권력을 누가 주셨겠습니까?
그들이 애굽처럼 교만에 빠져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약소국가들을 지속적으로 억압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나라들과 사람들이 애굽이 갔던 “구덩이”, “무덤”, “스올”, “할례 받지 아니한 자”의 세계, “죽임을 당한 자”의 세계에 눕게 되지 않도록 오늘 하루도 주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전하는 주님의 증인이 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 영원한 강대국이 없으며 일평생 권력을 가진 사람도 없음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내리셨던 애굽의 멸망에 관한 말씀을 듣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시옵소서.
이 시대에 애굽과 같이 부와 힘을 가진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따르며 친하게 지내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 되게 하시옵소서.
애굽과 같은 나라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길을 걷는 자가 되어 구덩이에 빠지려고 하는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주님의 귀한 도구가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에스겔 31장
10-13-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 큰 위엄을 뉘게 비하랴(에스겔 31:2)


인자야 너는 애굽바로와 그 무리에게 이르기를 네 큰 위엄을 뉘게 비하랴.
"Son of man, say to Pharaoh king of Egypt and to his hordes: " 'Who can be compared with you in majesty?

네 큰 위엄을 뉘게 비하랴?(Who can be compared with you in majesty?)

엘 미 다미타 베가들레카 ( אֶל־מִי דָּמִיתָ בְגָדְלֶךָ׃ )

엘(413) [ ’el ]  אֵל   

1. 어떤 것을 지향하다.  2. ~으로
3. 사 38:2.
발음 [ ’el ]
관련 성경 / ~에게, ~향하여, ~안으로, ~으로, 대하여(창 30:40, 삼상3:12, 렘22:11), 때문에(삼상4:21), [부] 서로(렘36:16).
구약 성경
5464회 사용
누구(4310) 미[ mîy ] מִי   

1. 의문대명사.  2. 누구? 창 24:65. 3. 창세기 33:8
발음 [ mîy ]
구약 성경 / 423회 사용


위엄(威嚴) : 위엄 위, 위엄스러울 복
- 위세가 있어 의젓하고 엄숙한 태도나 기세

위엄(1433) 고델[ gôdel ] גֹּדֶל 

1. 위엄.  2. 장대함. 3. 에스겔 31:2
발음 / 고델[ gôdel ]
어원 / 14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광대함(민 14:19, 시 150:2, 겔 31:18), 큼(신 3:24, 시 79:11, 겔 31:7), 완악함(사 9:9, 10:12), 위엄(신 5:24, 32:3, 겔31:2)
구약 성경 / 13회 사용

신명기 5:24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비하랴(1819) 다마[ dâmâh ] דָּמָה 

1. 닮다.  2. 시편 102:7. 3. 에스겔 31:8.
발음 / 다마[ dâmâh ]
관련 성경 / 비(比)하다(겔 31:2, 아 1:9), 생각하다(민 33:56, 시 48:9, 50:21), 모해(謀害)하다(삼하 21:5), 비교하다(사 40:25, 46:5, 애2:13), 비유를 베풀다(호 12:10), 생각하다(에 4:13)
구약 성경 / 30회 사용

에스겔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때로부터 제십일년 삼개월이 되는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에스겔에게 또 다시 말씀이 전해졌습니다.
그 말씀은 레바논 백향목과 같이 크고 평화로웠던 앗수르와 같은 애급이 그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앗수르의 영광과 몰락을 애급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애급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패망을 예견하라고 경고 합니다.
앗수르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권세와 풍요로 열국의 지배자가 되었으나 그로 인해 교만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멸망을 받게 됩니다.

에스겔은 이러한 앗수르의 흥망을 통하여 애급의 왕 바로에게 경고하며 애급 멸망의 당위성과 필연성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앗수르의 영광과 파멸을 통해 애급을 경고하면서, 인간의 권세가 아무리 높아도 하나님의 통치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히브리인들의 음부 개념은 죽은 자의 거처에 대한 고대 근동인들의 견해와 비슷합니다.
첫째는 어둡고 그늘진 장소(욥 10:21-22,  시 143:3)
둘째는 침묵의 장소(시 94:17,  시 115:17)
셋째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는 자들의 장소(시 6:5,  시 88:10-12)
넷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깨닫지도 못하는 장소(욥 14:21,  전 9:5-10)
 
이와 같은 음부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인들은 다른 고대 이방 민족과는 달리 독특한 음부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음부란 멸절의 장소가 아니라 계속되는 실존의 장소로서 하나님의 힘이 미치는 곳이라고 합니다(욥 26:6,  시 139:8).
한편 죽은 선인과 악인간의 거처의 구별이 없는 초기 구약 시대 히브리인들의 음부 개념은 신구약 중간 지대에 이르러서부터 점차 선인과 악인 사이를 분리하는 사상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신구약 중간 지대의 묵시 문학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 특히 외경 에녹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음부 개념은 악인의 영혼들이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기 전에 임의로 대기하는 장소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톨릭에서 말하는 '연옥'처럼 실제한다고 단정 짓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앗수르처럼 더없이 좋은 여건과 환경을 부여받았으나 결국 멸망의 문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흥왕했으나 그 결국이 쇠잔한 자들로서, 이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교만의 죄를 지은 자들의 결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악인의 결말을 통해서 우리는 현재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은 그와 같은 악인들의 유혹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기에, 하나님을 향한 겸손한 자세를 잠시라도 놓치면 그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멸망을 통해 자신의 삶을 항상 단속해야 한다. 

이방 민족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 중에서 애급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애급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이 그만큼 컸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애급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될 수 있었던 못자리와 같은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기틀이 갖추어지기 전 하나님은 모세를 이집트의 왕실에서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한 때 세계의 중심이었던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일개 부족에서 한 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는 어쩌면 민족 이스라엘을 세우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그러한 이집트였기에 이집트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이스라엘 주변의 여느 민족들과는 사뭇 달랐을 것입니다.
29장에서 시작된 이집트의 메시지는 모두 일곱 개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곱 개의 단락들은 단지 이집트의 죄상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을 낱낱이 언급하는 데서 그치고 있지 않습니다.
31장에서는 특별히 바벨론 제국 이전에 세계를 제패했던 앗수르를 이집트의 반면교사로 삼고 있습니다.









에스겔 31장 강해 에덴의 나무와 애굽의 나무들 비교
에스겔 31 장 에스겔 31장 18
요절 에스겔 31장 3 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에덴의 나무들은 애굽의 나무들에 비하여 부족하였습니다. 그들을 부러워하고 열등감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레바논백향목)

“1 열한째 해 셋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과 그 무리에게 이르기를 네 큰 위엄을 누구에게 비하랴 3 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4 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5 그 나무가 물이 많으므로 키가 들의 모든 나무보다 크며 굵은 가지가 번성하며 가는 가지가 길게 뻗어 나갔고 6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 에스겔이 잡혀온지 제 십일년 셋째 달 초하루에 주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일개월전입니다 숨넘어가기 바로 직전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애굽같았으면 안 망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애굽은 망한다고 합니다. 사람인 에스겔은 이집트 왕 바로와 그의 무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위엄찬 모습을 앗수르와 비교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애굽이 앗수르같이 위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전 605년에 앗수르가 바벨론과 메대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기 전까지 어느 누구도 이 거대 제국의 멸망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앗시리아는 한 때 레바논의 백향목이었습니다. 그들은 레바논 백향목처럼 그 가지가 아름답고, 그 그늘도 숲의 그늘과 같았습니다. 그 나무의 키가 크고, 그 꼭대기는 구름 속으로 뻗어 있었습니다. 아주 멋진 나라였습니다. 강대한나라였고 영향력이 있는 나라였습니다. 앗수르는 유라테스 티그리스강 옆에서 성장한 비옥한 나라합니다. 앗수르는 물을 넉넉히 먹고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깊은 물줄기에서 물을 빨며 크게 자랐습니다. 백향목은 25미터 정도 자란다고 합니다. 앗수르가 서 있는 사방으로는 강물이 흐르고, 개울물이 흘러, 들의 모든 나무가 물을 마셨습니다. 앗수르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잘 자랐습니다. 앗수르는 들의 모든 나무보다 더 높게 자랐습니다. 다른 나라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흐르는 물이 넉넉하여 굵은 가지도 무수하게 많아지고, 가는 가지도 길게 뻗어 나갔습니다. 앗수르의 큰 가지 속에서는 공중의 모든 새가 보금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가는 가지 밑에서는 들의 모든 짐승이 새끼를 낳고, 그 나무의 그늘 밑에 모든 큰 민족이 자리잡았습니다. 새들이 그 그늘에서 자랐습니다. 그들은 잘 먹고 잘 삽니다.

(하나님 동산의 백향목)

“7 그 뿌리가 큰 물 가에 있으므로 그 나무가 크고 가지가 길어 모양이 아름다우매 8 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지 못하며 잣나무가 그 굵은 가지만 못하며 단풍나무가 그 가는 가지만 못하며 하나님의 동산의 어떤 나무도 그 아름다운 모양과 같지 못하였도다 9 내가 그 가지를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다 시기하였느니라” 앗수르가 크게 자라서 아름다워지고, 그 가지들이 길게 자라 뻗친 것은, 앗수르가 물이 많은 유브라데스 티그리스 강가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동산에 있는 백향목들도 앗수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은 유대인을 의미합니다. 가나안땅의 잣나무들도 앗수르의 굵은 가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고, 단풍나무들도 앗수르의 가는 가지들만 못합니다. 가나안이 있는 하나님의 동산에 있는 어떤 나무도 앗수르처럼 아름답지는 못하였습니다 여호와가 앗수르의 가지들을 많게 하고, 그를 아름답게 키웠더니 하나님의 동산에 있는 가나안의 나무들이 모두 앗수르를 시기하고 부러워하였습니다. 유다에 사는 사람들이 앗수르의 사람들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하였습니다. 그들은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예수 믿는 부자와 미인과 믿지 않는 부자와 미인과 비교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세상사람들이 더 부자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부러워하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동산에는 다양한 나무가 있습니다 백향목 나무 단풍나무 잣나무들의 역할이 있습니다. 이름없는 아무 나무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각자의 역할을 하면 됩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면 결코 잘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십니다. 병든 자를 부르러오십니다. 연약한 자를 부르러 오십니다. 교회는 죄인 병자 연약한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교회 안에는 문제가 항상 있습니다. 교회 있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과 비교하면 속이 상합니다. 우리도 세상에 잘난 사람들을 보면서 투기하고 질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동산에 있는 것에 대해서 긍지를 가져야합니다. 동산 밖의 나무는 멸망하지만 하나님의 동산 안의 나무는 이름없는 아무 나무라도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한 가지 종류이지만 하나님의 동산에는 여러 나무가 있습니다.

(앗수르 나무의 파멸)

“1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의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아서 높이 솟아났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은즉 11 내가 여러 나라의 능한 자의 손에 넘겨 줄지라 그가 임의로 대우할 것은 내가 그의 악으로 말미암아 쫓아내었음이라 12 여러 나라의 포악한 다른 민족이 그를 찍어 버렸으므로 그 가는 가지가 산과 모든 골짜기에 떨어졌고 그 굵은 가지가 그 땅 모든 물 가에 꺾어졌으며 세상 모든 백성이 그를 버리고 그 그늘 아래에서 떠나매 13 공중의 모든 새가 그 넘어진 나무에 거주하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지에 있으리니 14 이는 물 가에 있는 모든 나무는 키가 크다고 교만하지 못하게 하며 그 꼭대기가 구름에 닿지 못하게 하며 또 물을 마시는 모든 나무가 스스로 높아 서지 못하게 함이니 그들을 다 죽음에 넘겨 주어 사람들 가운데에서 구덩이로 내려가는 자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게 하였음이라” 앗수르나무와 에덴의 나무는 시간이 지나면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앗수르 나무의 키가 커지고, 그 꼭대기가 구름 속으로 뻗치면서, 키가 커졌습니다. 앗수르 나무는 자라면서 그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그 나무를 민족들의 통치자에게 넘겨 주고, 앗수르는 그 나무가 저지른 악에 맞는 마땅한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확실히 파괴합니다. 여호와는 앗스르 나무를 내버렸습니다. 그래서 뭇 민족 가운데서 잔인한 다른 백성들이 그 나무를 베어서 버렸습니다. 앗수르는 잔인한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게 됩니다. 그 가는 가지들은 산과 모든 골짜기에 쓰러져 있습니다. 굵은 가지들은 그 땅의 모든 시냇물 가에 부러져 있고, 세상의 모든 백성이 그 나무의 그늘에서 도망쳐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그 나무를 떠나 버렸습니다. 앗수르를 의지하던 나라가 앗수르를 떠납니다. 그 쓰러진 나무 위에 공중의 모든 새가 살고, 그 나무의 가지 사이에서는 들의 모든 짐승이 삽니다. 앗수르를 심판하신 이유는 물가의 나무들이 다시는 자란 키 때문에 교만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꼭대기가 구름 속으로 치솟아 오르지도 못하게 하며, 물을 빨아들이는 모든 나무가 자신의 교만에 머물지 못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꺾으십니다. 그것들은 모두 죽음에게 넘겨 주어, 지하로 내려가고, 깊은 구덩이로 내려가는 사람들 속에 들어 있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앗수르 파멸의 슬픔)

“15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가 스올에 내려가던 날에 내가 그를 위하여 슬프게 울게 하며 깊은 바다를 덮으며 모든 강을 쉬게 하며 큰 물을 그치게 하고 레바논이 그를 위하여 슬프게 울게 하며 들의 모든 나무를 그로 말미암아 쇠잔하게 하였느니라 16 내가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스올에 떨어뜨리던 때에 백성들이 그 떨어지는 소리로 말미암아 진동하게 하였고 물을 마시는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지하에서 위로를 받게 하였느니라”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앗수르의 그 나무가 스올로 내려갈 때에, 여호와가 지하수를 말리고, 강물을 막고, 흐르는 큰 물을 모두 멈추게 하십니다. 앗수르를 성장하게 하던 물근원을 없이하십니다. 또 여호와가 레바논 산으로는 그 산에 자란 앗수르 나무를 애도하여 통곡하게 하십니다. 앗수를 의지하였던 온 누리의 모든 나라의 나무는 그 나무를 애도하고 물이 없어 시들어 죽게 됩니다. 여호와가 앗수르의 나무를 스올로 내려 보낼 때에는, 깊은 구덩이로 내려가는 사람들과 함께 그 나무를 그리로 보낼 것입니다. 앗수르의 나무가 스올로 떨어지는 큰소리를 듣고서, 뭇 민족이 벌벌 떨 것입니다. 이미 스올에 가 있는 에덴의 모든 나무와, 물을 흠뻑 먹으며 자란 레바논 산의 가장 좋은 나무들이, 앗수르 나무가 이렇게 심판을 받는 것을 보고는, 스올에서 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앗수르도 망하자 이미 망한 나라들도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앗수르도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살아갈 때 대통령이나 회장인 사람은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듯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무덤에 가보면 무덤이 대단하고 크지만 결국은 썩은 시체가 있습니다. 아무리 권세가 있어도 결국은 시체입니다. 시체는 잠언에 보면 산개만도 못한 것입니다. 산 개가 시체보다 낫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난다 긴다해도 구덩이로 갑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모르고 높아지고 가지려고 합니다. 죽으면 소유나 명예나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승에서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느냐 벌 받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에게 인생 살다가 그 따위로 왔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산 자는 하나님이 잘하였도다 충성된 종아하는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애굽도 가야하는 스올

에덴과 레바논의 나무들도 앗수르의 나무와 함께 스올로 내려갑니다.
이미 거기에 먼저 와 있던 나무들, 곧 칼에 찔려서 살해된 자들, 살아 생전에 그 나무의 그늘 밑에서 살다가 스올로 들어온 자들에게로 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다 죽는다는 점에서 평등합니다.
여호와는 지금까지 앗수르를 이야기했습니다.
다시 앗수르에서 애굽으로 돌아와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앗수르를 너는 애굽을 의미합니다.
에덴의 나무들 가운데서 어떤 나무가 애굽처럼 화려하고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애굽도 이제는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스올로 끌려가서, 할례받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섞여, 칼에 찔려 죽은 사람들과 함께 누울 것입니다. 바로와 그의 백성 모두가 이렇게 앗수르처럼 될 것입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애굽의 나무도 하나님의 동산의 나무와 같이 저승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동산에 나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찍혀 불에 던져집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은 안 망할 줄 생각합니다 그들이 이스라엘과 비교하면 휠씬 잘났습니다. 그러나 애굽도 망합니다. 애굽을 부러워하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애굽이 지금은 찬란하지만 그들도 지하로 내려갑니다. 그들이 별 것 아니라고 합니다.

결국은 지하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거지 나사로와 같은 자입니다.
이 시대에서는 냉대 받지만 하나님 나라에 가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부요함은 부자와 같이 죽은 후에 지옥에서 고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에스겔 30장
10-12-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날이 가까 왔도다(에스겔 30:3)


이 가까왔도다 여호와의 이 가까왔도다 구름일 것이요 열국의 때이리로다.
For the day is near, the day of the LORD is near-- a day of clouds, a time of doom for the nations.

그 날이 가까 왔도다
The day is near.
카롭 욤(קָרֹוב יֹום)

 그 날이(3117)
욤(3117) [ yôwm ]  스트롱번호3117
1. 낮. 2. 날마다
발음 / 욤[ yôwm ]
어원 / 어미활용 יוֹמְךָ ,יוֹמִי, 쌍수 יוֹמַיִם, 복수 יָמִים, 복수 연계형 יְמֵי, 덥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낮(창 1:5, 시 136:8), 날(창1:8, 출6:28, 시89:45), 일자(창1:14), 때(창3:5, 출19:1), 세월(창4:3), 오늘(창4:14, 출5:14, 민22:30), 당시(창6:4, 신17:9, 삼상17:12), 항상(창6:5, 신5:29,삼하19:13), 나이(창18:11, 수23:2), 오늘날(창19:37, 신1:10), 며칠(창24:55), 어느 날(창27:2), 기한(창25:24, 레12:6), 해(창29:7), 지금(창35:20, 삼상9:9), 여러 날(창40:4), 생명(출20:12, 신5:15, 시34:12), 매일(출29:36, 민28:3), 일(창7:4, 출34:28), 날수(신1:46, 시90:15), 평생(신12:1, 삼상1:11), 종일(신28: 32,시74:22), 장수(신30:20), 시기(수3:15), 얼마(삿11:4), 매년(삿21:19, 삼상1:3), 곧(삼상9:13), 평일(삼상18:10, 왕상5:1), 요즈음(삼상25:10), 일생(삼상25:28), 볕(삼하4:5), 수한(삼하7:12), 시대(삼하21:1, 왕상21:29), 전(삼하21:12), 한번(왕상1:6), 세대(왕상11:12), 일평생(왕상11:25, 욥15:20), 여러 날(왕상17:15), 하루(왕상19:4), 햇수(왕하10:36), 생전(대상22:9), 기간(대상29:27), 초하루(스10:16), 생일(욥1:4), 연한(시39:4), 옛날(시44:1), 연수(시109:8), 광명(잠4:18), 보름(잠7:20), 여생(사38:10), 태초(사43:13), 옛적(겔38:17, 암9:11), 시일(호2:13), 아침(암5:8). [부] 종신토록(창3:14), 날마다(39:10, 왕상8:59), 영원히(왕상11:39), 영영히(창44:32, 신18:5, 삼상28:2), 오래(민20:15), 처음(신10:10), 종일토록(수10:13, 삿9:45), 해마다(삿11:40), 먼저(삼상2:16), 때마다(삼상2:19), 영원토록(삼상2:32), 영구히(삼상2:35), 이제(삼상9:27, 삼하18:18), 오래(삼하14:2), 때때로(대하24:11), 당장(잠12:16), 부지런히(렘7:25). [동] 장수하다(신22:7), 장수하게 하다(시61:6).
구약 성경 / 2291회 사용
가까 왔도다(7138)

קָרוֹב 스트롱번호7138
1. 가까운. 2. 창 19:20. 3. 사 13:6
발음 / 가롭[ qârôwb ] קָרוֹב
어원 / 712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까운(룻 2:20, 창 19:20, 민 24:17, 습 1:14), 임박한(욜 2:1).
[부] 속히(겔7:8), 함께(출12:4), 가까이(왕상8:59, 시119:151), 잠시(욥20:5),잠깐(욥20:5), 근래에(신32:17). [명] 이웃(출32:27, 시15:3), 살붙이(레21:2), 종친(삼하19:42), 가까운 기업 무를 자(레25:25), 이웃(수9:16), (원)근(왕상8:46, 렘25:26), 근처(대상12:40), 연락(느13:4), 친척(시 38:11)
구약 성경 / 78회 사용

그 날이 가까왔도다( the day is near)

그 날이란 애급이 멸망하는 날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그 날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1. 여호와의 날(day of the LORD)
2. 구름의 날(day of clouds)
3. 열국의 때(time of doom for the nations)

그 날에 일어날 일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1. 애굽에 칼이 임할 것(sword will come against Egypt)
2. 애굽에서 살륙 당한 자들이 엎드러 질 것( the slain fall in Egypt)
3. 애굽의 무리가 옮겨지며 그 기지가 헐릴 것(her wealth will be carried away and her foundations torn down)

선지자들에 의해 선포된 여호와의 날은 우주적인 격변을 포함하는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애굽과 애굽의 동맹국들이 멸망하는 날을 말합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친히 바벨론을 일으켜서 교만한 국가를 처벌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부를 가지고 교만하여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들의 죄악의 공범자로 만든 애굽이 심판받을 것을 예언합니다.

심판을 받아 멸망의 처참한을 경험해야 할 애굽에 대한 애가를 통하여 애굽의 멸망이 얼마나 슬프고 죄인이 받을 고통과 수치가 얼마나 큰가를 깨우치려고 합니다.

애굽의 심판의 날은 '여호와의 날, 구름의 날, 열국의 때라고 하며, 이 날은 애굽 뿐만 아니라 동맹국들인 구스(에디오피아), 붓(리비아), 룻(리디아), 애굽의 백성들이 함에 두려워하며 멸망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애굽과 동맹을 맺고 정치적, 군사적인 보호를 받으려는 국가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심판을 행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애굽이 단순히 한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대항하는 세상 세력의 총체적 상징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애굽을 의지하는 국가들은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을 암사합니다.
사실 당시 유다는 선지자들의 거듭되는 충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애굽을 통해 당면한 바벨론의 침공을 해결하려고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결코 애굽의 힘에 현혹되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말도록 촉구합니다.
그 동맹국들은 여호와의 날에 남김없이 파멸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이들 국가는 애굽과 정치적 결속을 맺음으로써 애굽의 보호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결국 악의 세력에 동참하여 하나님을 대적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악의 세력과 연합한 자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악은 보지도, 만지지도 말 것이며 그것의 모양까지도 버리라고 강조합니다(살전 5:22).




‘찰스 스윈돌’ 목사는 책 <은혜의 각성 (Awakening Grace)>에서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일곱 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우리는 모든 사실을 다 알지는 못한다.

우리는 늘 제한된 사실과 지식만 가지고 하는 비판은 늘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우리는 그 동기를 다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사람의 동기를 100%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3. 완전히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의 각자의 판단은 늘 어느 정도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의 주관적인 비판은 해서는 안 됩니다.

4. 상황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

어떤 사실이나 사건은 모두 상황과 그 맥락이 있습니다.

5.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

우리의 인식은 늘 제한적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6. 우리는 편견이 있으며 시야가 흐려질 수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편견이 있습니다.

7. 우리 자신은 불완전하며 일관성이 없다.

인간은 늘 불완전합니다.




에스겔 29장
10-11-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에스겔 29:3)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애굽바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중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내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Speak to him and say: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 'I am against you, Pharaoh king of Egypt, you great monster lying among your streams. You say, "The Nile is mine; I made it for myself."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I am against you.

힌니 아레카(הִנְנִי עָלֶיךָ
)

내가(2005) 헨(hên)  הֵן    

1. 보라!    2. ~인지   3. 만약~이면
발음 / 헨[ hên ]
관련 성경 / 보라!(창 3:22)
구약 성경 / 16회 사용

대적하노라(5921) 알(ʽal)  עַל   

1. 삼하 4:7.  2. 옷을 입은
발음 / 알[ ʽal ]
구약 성경 / 5772회 사용


자기의 강들 중에 누운 큰 악어라

תַּנִּים 스트롱번호8577

1.

큰 뱀

2.

복수 תָּנַן

발음 [ tannîym ]
어원
8565와 동일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이리(욥30:29), 승냥이(시44:19, 사13:22, 렘9:11), 악어(겔29:3, 32:2), 들개(애4:3, 미1:8), 바다 짐승(창1:21), 뱀(출7:9, 신32:33,사27:1, 렘51:34), 용(사51:9).
구약 성경
14회 사용



여기서 '자기의 강들'은 곧 고대 사람들이 생기의 원천으로 여겼던 동시에(Champollion) 애굽의 심장이라고 일컬어지는 '나일 강'과 그 지류들 또는 그곳에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운하들을 일컫는 것이다(Delitzsch, Schroder, Gesenius).

한편 '악어'는 문자적으로는 '긴 짐승', '기다란 뱀', '용'등을 가리키는 말이나 여기서는 나일 강의 생태적 특성상 개역성경의 번역이 타당한 듯하다.

특히 이 말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애굽의 상징으로 쓰여졌다(시 74:13, 14; 사 27:1; 51:9).
곧 본 구절을 교만한 악어가 자신이 나일 강의 주인인양 물 속에 가만히 누워 있는 모습을 빗대어 자신을 애굽의 절대적 주권자로 자처하며 그 권력 속에서 자고하는 바로를 탁월한 문학적 표현 양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강은 내 것이라

- 혹자는 이 표현을 바로가 자신의 권력을 바탕으로 인위적인 공사를 통해 나일을 생명의 원천으로 만들었다는 뜻으로 해석하나(Hitzig), 원어상 소유의 의미를 나타내는 '리'가 일반적인 소유의 개념을 넘어서 자신이 만들고 소유한다는 뜻의 절대적인 소유의 권한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본 구절은 자신을 신성을 가진 창조자로 자처한 바로의 교만을 더러낸 말이다.

실로 이러한 교만이 바로와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한편 고대 애굽의 비문들은 바로를 신적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Duncker).







에스겔 28장부터 32장은 애급의 심판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애급의 멸망에 관한 예언을 무려 4개 장에서 소개하는 이유는 애급의 심각한 죄악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에스겔은 바로 왕을 악어로 비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국력과 부에 도취되어 있는 바로 왕을 나일 강과 그 지류에서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악어에 비유한 것입니다.
사실 악어는 나일 강에서 가장 포악하고 사나운 짐승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처럼 바로 왕도 팔레스타인에서 패권을 잡고 있음을 근거로 하여 약소국들과 이스라엘을 괴롭히며 애급을 섬기라고 요구했습니다.
특별히 바로는 자신을 절대 군주로 자처하며 심지어 신으로 숭배하도록 요구하므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신성 모독으로 간주되어 엄한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되었음을 망각하고 교만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처벌을 받게 될 것을 예고합니다.
또한 에스겔은 애굽을 갈대 지팡이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이 이스라엘과의 동맹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갈대 같은 존재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전에도 이스라엘 족속에게 애굽을 의지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으나 이스라엘은 선지자를 통해 선포된 말씀을 거역하고 애굽과 동맹을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군사 원조를 부탁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악어와 같은 죄악을 범한 애굽이 몰락할 때 이스라엘도 몰락할 것이라고 합니다.

바로는 자신을 신격화하여 숭배하도록 강요하는 교만을 저질렀고, 유다는 이러한 애굽 왕을 하나님보다 더욱 의지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여 주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이 얼마나 무지하였는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 애굽 왕을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본장은 애굽의 파멸과 황폐에 대해 예언하는 전반부와(1-12절), 애굽의 회복에 대해 예언하는 중반부(13-16절), 그리고 느부갓네살의 분깃과 이스라엘을 향한 긍휼을 약속하는 후반부(17-21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에스겔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한 애굽의 심판을 선언함으로써 인간적인 힘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신뢰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에스겔은 바로 왕을 악어로 비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국력과 부에 도취되어 있는 바로 왕을 나일 강과 그 지류에서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악어에 비유하였다.
사실 악어는 나일 강에서 가장 포악하고 사나운 짐승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처럼 바로 왕도 팔레스타인에서 패권을 잡고 있음을 근거로 하여 약소국들과 이스라엘을 괴롭히며 자신을 섬기도록 요구하였다. 특별히 바로는 자신을 절대 군주로 자처하여 신으로 숭배하도록 요구했으므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신성 모독으로 간주되어 엄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되었음을 망각하고 교만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에스겔은 애굽을 갈대 지팡이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애굽이 이스라엘과의 동맹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갈대 같은 존재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하나님은 이전에도 누누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애굽을 의지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선지자를 통해 선포된 말씀을 거역하고 애굽과 동맹을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군사 원조를 부탁했다. 그리하여 악어와 같은 죄악을 범한 애굽이 몰락할 때 이스라엘도 몰락한 것이다.  



본장 9절에는 애굽 왕이 자기의 권위와 능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강은 내가 만들었다'라고 하는 말이 그것이다.
이는 당시의 애굽의 권세와 영광이 순전히 자력에 의한 것이라는 뜻으로, 자기 과시의 단계를 넘어 창조주의 권위에 도전하는 교만이 내포된 것이다.
결국 그러한 범죄 때문에 애굽은 몰락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공했을 때일수록 더욱 머리를 조아려 하나님의 도우심에 감사하는 겸손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애굽을 향한 예언

에스겔 29장부터 32장까지는 애굽에 대한 심판 이야기입니다. 애굽은 한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러워하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더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역사를 보면, 남유다가 멸망한 후, 16년 후에 애굽도 바벨론 과의 싸움에서 패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1절입니다.
‘열째 해 열째 달 열두째 날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말씀으로 당시 에스겔의 나이가 35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스겔 1장에 보면, ‘서른째 해’에 바벨론 그발 강가에 에스겔이 있었다고 합니다. ‘서른째 해’라는 표현은 에스겔 나이가 30살이라는 말입니다. 그때는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에 사로잡힌 지 ‘오 년’ 된 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스겔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 나이는 25살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에 ‘열째 해’라는 말은 포로로 잡혀온 지 10년이 되었다는 뜻이기에 25살에 포로로 잡혀온 에스겔은 현재 35살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야긴 왕이 잡혀온 후 그 뒤를 이어 시드기야가 남유다의 왕이 되었기에 시드기야가 남유다의 왕이 된지 10년째 되는 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시드기야는 남유다를 11년 동안 통치하고 바벨론에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시 남유다가 멸망하기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애굽의 심판을 예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절입니다.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과 온 애굽으로 얼굴을 향하고 예언하라’
하나님은 애굽이 당할 심판을 예언하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애굽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 25장부터 이스라엘 주변국 심판의 예언 말씀이 나옵니다. 암몬과 모압, 세일과 에돔, 블레셋과 두로, 그리고 오늘 본문은 애굽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이방민족에게 심판의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은 은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흔히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은 이스라엘이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아이가 잘못을 하면 꾸짖지 않습니다. 나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왜 훈계하겠습니까? 버릇없는 행동을 보면 부모가 누구길래 아이를 저리 버릇없게 키웠을까 그냥 속으로 생각하고 맙니다. 내가 직접 그 아이를 훈계하지 않습니다. 나와 상관없는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못을 행한 아이가 내 아이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잘못하면 바로 훈계합니다. 잘못을 깨닫게 합니다.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도록 사랑과 관심을 갖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주변국을 향해 하나님께서 심판의 메세지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열방의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들을 사랑하시기에 그들을 훈계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도 그런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잘못했기에 그 잘못에 대한 댓가를 받아야 한다는 관점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훈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에게 예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3절입니다.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애굽을 큰 악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나일강을 할보하며 다니는 동물 가운데 악어만큼 강한 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악어가 생각하기를 이 강은 자기가 만들었다고 호령하면서 이 강에서 자신이 최고라고 떠벌리고 있지만, 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교만하게 나일강을 활보하고 다니는 악어, 애굽을 향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5절입니다.
‘내가 갈고리로 네 아가미를 꿰고 너의 강의 고기가 네 비늘에 붙게 하고 네 비늘에 붙은 강의 모든 고기와 함께 너를 너의 강들 가운데에서 끌어내고 너와 너의 강의 모든 고기를 들에 던지리니 네가 지면에 떨어지고 다시는 거두거나 모으지 못할 것은 내가 너를 들짐승과 공중의 새의 먹이로 주었음이라’
여호와가 갈고리로 애굽의 바로의 아가미를 꿰고, 나일강의 물고기들이 바로의 비늘에 달라붙게 하십니다. 그리고 바로의 비늘에 달라붙은 모든 물고기와 함께 바로를 강 한복판에서 끌어내십니다. 다시 말해서 바로와 그 백성들을 다 함께 사막에 던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호와께서 바로를 들짐승과 공중의 새의 먹이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6~7절입니다.
‘애굽의 모든 주민이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 그들이 너를 손으로 잡은 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어깨를 찢었고 그들이 너를 의지한 즉 네가 부러져서 그들의 모든 허리가 흔들리게 하였느니라’
그때야 비로소 애굽의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가 이 나일강의 주인인줄 알게 됩니다. 애굽은 튼튼한 지팡이가 아니라 갈대처럼 속이 텅 빈 갈대 지팡이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그런 갈대 지팡이에 불과한 애굽을 의지한 이스라엘도 함께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애굽은 남유다가 주전 586년에 망하고 그로부터 16년 후에 바벨론에게 망합니다. 그러나 40년 후에 하나님께 애굽에도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하십니다.

13~14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십 년 끝에 내가 만민 중에 흩은 애굽 사람을 다시 모아 내되 애굽의 사로잡힌 자들을 돌이켜 바드로스 땅 곧 그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 그들이 거기에서 미약한 나라가 되되’
이 말씀은 바벨론 제국이 페르시아 제국에 멸망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왕 고레스에 의해 자유를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고레스 왕은 바벨론 제국의 포로로 잡혀왔던 모든 백성들을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 주었습니다. 그 마음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레스를 나의 종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애굽은 고레스 왕에 의해 본국으로 돌아왔지만, 별볼일 없는 나라가 됩니다. 더이상 이스라엘 같은 주변국이 부러움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그런 강국이 아니었습니다.

17~21절까지는 애굽이 어떻게 바벨론에 의해 정복 당하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7~19절입니다.
‘스물입곱째 해 첫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그의 군대로 두로를 치게 할 때에 크게 수고하여 모든 머리털이 무지러졌고 모든 어깨가 벗어졌으나 그와 군대가 그 수고한 대가를 두로에서 얻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애굽 땅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넘기리니 그가 그 무리를 잡아가며 물건을 노략하여 빼앗아 갈 것이라 이것이 그 군대의 보상이 되리라’
‘스물일곱째 해’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합니다. 좀 전에 ‘열째 해’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으니까, 그때로부터 17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그러니까 29장 1~16절까지와 17~21절까지는 17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이 있는 겁니다. 즉 17년 전에 애굽이 바벨론에 의해 망할 것이라 예언한 말씀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두로를 공격했습니다. 근데 두로는 페니키아 연안의 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이 공격을 하자 두로는 배로 보물들을 실어서 도망을 갔습니다. 결국 바벨론이 두로를 점령했으나 보물창고는 텅텅 비어있었습니다. 두로를 정복했지만 그에 대한 보상은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이어서 애굽을 공격했고, 두로에서 받지 못한 보상을 애굽을 정복한 후에 받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21절입니다.
‘그 날에 나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한 뿔이 돋아나게 하고 나는 또 네가 그들 가운데에서 입을 열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그 날에’ 여기서 ‘그 날’은 여호와의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시는 날입니다. ‘한 뿔’은 바로 ‘구원의 뿔’ ‘메시야, 그리스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뿔은 구원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율법에는 고의가 아니라 부지중에 살인을 한 사람을 보호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도피성으로 피신하면 그 사람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처럼 제단 사면에 뿔이 있는데,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제단의 뿔을 잡으면 그의 생명이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죄로 인해 멸망당한 이스라엘과 그 백성을 위해 구원의 뿔, 바로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고 하나님은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징계를 위한 심판이 아니라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라고 주시는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바른 길을 걸어가길 원하십니다. 걸어가야 할 길을 걷지 않을 때 우리에게 사인을 주십니다. 그 사인이 고난과 시련일 수도 있고, 경고의 메세지 일 수도 있습니다. 돌이킬 기회를 주실 때 그 음성에 순종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의 발걸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하루가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에스겔 28장
10-10-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는 신이라(에스겔 28:2)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체 할찌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어늘.
"Son of man, say to the ruler of Tyre,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 'In the pride of your heart you say, "I am a god; I sit on the throne of a god in the heart of the seas." But you are a man and not a god, though you think you are as wise as a god.


나는 신이라
I am a god.
아니 모솹 엘로힘(אָנִי מֹושַׁב אֱלֹהִים (אָנִי מֹושַׁב)

모삽(
môwshâb)  מוֹשָׁב 스트롱번호4186

1. 자리.  2. 착석. 3. 주거
발음 / 모삽[ môwshâb ]
어원 / 342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거하는 곳(창 10:30, 출 10:23, 레 23:21), 유하는 곳(출 12:20), 거주(출 12:40), 사는 곳(레 13:46), 주소(창 27:39, 대상 4:33), 거처(창 36:43, 민 24:21), 처소(출 35:3, 레 3:17), 자리(삼상 20:18, 25, 시 1:1), 좌석(왕상 10:5), 터(왕하 2:19), 거주지(겔 34:13)
구약 성경 / 44회 사용

나는(589) 아니(’ănîy)

אֲנִי 스트롱번호589
1. 나.   2. 나로서는.  3. 때때로 존재 동사를 내포한다
발음 / 아니[ ’ănîy ]
구약 성경 / 871회 사용

뜻풀이부

  • 1.
    대명사 나[보통 주격으로 사용된다].
  • 2.
    대명사 나로서는, 나의 것, 나 자신, 전2:1, 11,12.
    • a.
      대명사 [주] 때때로 존재 동사를 내포한다, 창15:7.




본문은 두로 왕 개인에 대한 책망과 시돈의 멸망에 대한 내용입니다.
두로 왕은 자신의 경제적인 성공을 바탕으로 이방의 명성을 얻자 신으로 자처하면서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이러한 두로 왕의 교만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발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시돈 또한 부정한 무역 거래와 우상 숭배로 인해 범죄했기에 그들도 똑같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28:1-10.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교만한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
28:11-19. 에덴에 있음 같이 번영한 두로를 위한 애가
28:20-24. 시돈의 멸망을 예언
28:25-26.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

두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그 어떤 나라도 부러워할 물질적 풍요를 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로는 은총을 주신 하나님께 교만하여 은혜로 받은 풍요를 육신의 쾌락 곧 죄악을 일삼는 데 사용했습니다.
한편 두로가 그와 같은 죄악의 길을 걷도록 하는 데는 두로 왕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로 왕을 두로 거민 가운데서도 특별히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나는 신이라

- '신'(엘)이란 직역하면 '전능자', '강한 자'란 뜻이다.
이는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할 때 쓰이기도 했다(창 14:20, 22;35:3, 11;49:25;신 4:31;시 52:1, 5).
이 용어는 고대 셈족 계통의 족속들에게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가나안 족속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을 이같이 불러, 지고(至古)의 신으로 여긴 것으로 알려졌다.
두로 왕이 자신을 '신'이라 함은 경제적인 부로 교만하여 자신을 최고 존재로 높인 행위이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주요 이유가 된다(12-19절).

하나님께서는 두로 왕에게 마음이 교만하여 졌다고 말씀하십니다. 두로는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고, 주변의 나라들이 두려워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로가 강해질수록 두로 왕은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행세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였습니다. 교만한 모습을 보이는 두로 왕에게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라고 명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두로 왕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할 정도로 교만해진 이유를 3-5절이 증거합니다.

(3-5)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워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두로 왕은 자신이 다니엘보다 지혜롭다고 말하며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자신의 큰 지혜로 재물을 더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두로 왕이 정말 다니엘과 같이 지혜로웠다면 지혜와 재물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인 것을 깨달아야 했지만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쌓아둔 재물로 말미암아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자리까지 올라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지혜와 재물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것은 나에게 지혜와 재물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 분별하여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6절에 ‘그러므로’라고 말씀하시며 두로 왕이 교만함과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했던 행동으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됨을 말씀하십니다. 두로 왕이 교만함으로 인해 받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10절이 증거합니다.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거늘.

주께서 에스겔에게 두로의 죄를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은 두로의 통치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로의 마음이 교만해져서 말하기를 자신은 자신이 신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바다 한가운데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바다 한가운데 있다는 말은 땅의 사람들과 관계없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아무도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는 곳에 산다고 합니다.
그는 바다 한 가운데 있어 아무도 자신을 공격할 수 없다고 합니다.
아무도 우리를 해롭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바벨론이나 애굽도 우리를 해롭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신이라도 된듯이 우쭐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로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신론은 신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신론을 주장하는 순간 자신이 신이 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신을 부정합니다.
신을 만나보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못보았으니까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무신론은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므로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하니까 내가 신이라고 합니다.
무신론은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생각만해도 죄입니다.
사람들은 내뜻대로 안되면 근심 걱정합니다.
근심 걱정 불안은 불신앙의 죄가 됩니다.
이것도 또하나의 교만입니다.
내가 왕이 되고 내가 신이 되면 걱정하고 근심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달나라갔다 오고 화성탐방한다고 교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죄를 짓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면 된다는 말은 좋습니다.
안되면 되게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새신을 신고 펄쩍 뛰면 하늘에 닿겠다는 것도 교만입니다.
돈좀 모으고 바다에 항해를 하면 나는 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에스겔 28장의 두로 왕 예언은 사탄을 언급하는 것인가요?

에스겔 28:11-19 의 예언은 인간 왕을 언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로는 성경에서 가장 강력한 예언적 정죄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이사야 23:1-18, 예레미야 25:22, 27:1-11, 에스겔 26:1-28:19, 요엘 3:4-8, 아모스 1:9,10).
두로는 이웃들을 착취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고대 저자들은 두로 시를 부도덕한 상인들로 가득 찬 도시로 언급했습니다.
두로는 종교적 우상 숭배와 음란한 행위의 중심지였습니다.
성경의 예언들은 두로 시가 막대한 재산과 전략적 위치로 인해 교만해졌다고 책망했습니다.
에스겔 28:11-19은 특별히 선지자 에스겔 당시, 끝 없이 교만하고 탐욕스러웠던 두로 왕을 책망하기 위한 강력한 고소장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에스겔 28:11-19의 묘사 중 어떤 부분은 단순한 인간 왕을 넘어섭니다.
어떤 의미로도 이 땅의 왕이 “에덴 안에” 있었다거나, 스스로를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이라거나, “하나님의 동산 위에” 있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성경 해석자들은 에스겔 28:11-19이 두로 왕의 교만을 사탄의 교만에 비유하는 이중 예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둘 사이에 더욱 강력하고 적용 가능한 연결점을 만들어 두로 왕이 실제로 사탄에게 사로잡혔다고 주장합니다.

사탄이 타락하기 전에는 정말 아름다운 피조물이었습니다(에스겔 28:12-13).
아마도 그는 모든 천사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자였을 것입니다.
“지키는 그룹”이라는 표현은 사탄이 하나님의 임재를 “지켰던” 천사였음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사탄의 타락은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사탄은 자신을 아름답게 창조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자기 힘으로 그렇게 높아졌다고 생각하며 교만에 빠졌습니다.
사탄은 반항한 결과로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쫓겨났고, 결국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영원한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0:10).

인간 두로 왕도 사탄처럼 교만했습니다.
두로 왕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보다, 자신의 지혜와 힘 덕분에 두로가 풍요로워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사치스러운 지위에도 만족하지 못한 두로 왕은 점점 더 많은 것을 구하며 다른 나라의 이익을 취하고,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신의 부를 축적했습니다.
하지만 사탄의 교만이 사탄으로 하여금 타락하게 하고 결국 영원한 파멸로 이끌었듯이, 두로 시 또한 그 부와 권력, 지위를 잃게 될 것입니다.
두로의 완전한 파멸에 대한 에스겔의 예언은 부분적으로는 느부갓네살에 의해 (에스겔 29:17-21), 최종적으로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훔치는 교만 (에스겔 28장)

‘교만’의 본질은 무엇인가?

스스로 신(神)이라 자부하며 마침내 하나님의 자리까지 높아지는 것이다.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은 ‘많이 소유하면 행복하다’는 신념과 ‘물질이 많아지면 영혼은 저절로 평안해진다’는 거짓신화를 좇는 허망한 삶의 최후를 폭로한다.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는 교만은 단순히 두로만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던 아담’과 ‘타락한 그룹(천사)’의 예를 통해서 인류 역사와 모든 세대에 걸쳐 드러나고 있음을 증거 한다.

이를 통해 생명과 물질, 건강과 재능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도리어 교만해져서 창조주 노릇하다가 마침내 비참하게 타락하는 이들의 최후를 준엄하게 경고하고 있다.

1. 하나님의 자리

① (1절~2절)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의 중심에 앉았다”

두로의 죄악은 교만이다.
교만의 본질은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며 하나님의 자리를 훔치는 것이다.
신앙의 출발은 인간의 유한성 즉 생명의 한계, 의의 한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할 때 시작된다.
이러한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존재적 고백이 바로 ‘죄인’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피조물의 유한한 실존을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만’이다.

② (3절~6절)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네 큰 지혜와 장사함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인하여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유한한 인간을 교만에 빠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증거 한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재물 곧 물질적인 풍요가 ‘장사’ 곧 자기 자신의 노력과 수고로 얻었기에 자신의 소유로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마치 교회부흥과 성장을 자신의 능력으로 이룬 것처럼 행세 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없이 인간의 수고와 노력만으로 성취했다는 생각은 착각일 뿐만 아니라 결국 교만에 이르게 된다.

③ (7절~10절) “내가 외인 곧 열국의 강포한 자들을 거느리고 와서 너를 치리니...네가 그래도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이라 하겠느냐 너를 치는 자의 수중에서 사람일 뿐이요 신이 아니라”

하나님은 강포한 자들 곧 질병, 사고, 죽음, 실패를 통해서 교만을 심판하신다.
이를 통해 스스로 신이라 자부하던 이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신다.
이것이 다윗이 고백했던 ‘고난이 주는 유익’이다. (시편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2. 에덴동산과 타락천사

① (11절~13절)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 창세기의 에덴동산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의 원형으로 성경 안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에덴동산의 원리는 ‘네가 지음 받던 날에’ 에덴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지으시고 온갖 만물을 그 안에 두신(창2:7~9),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데 있다. 아담이 그토록 완벽하고 아름다운 에덴을 잃어버리고 실낙원 했던 이유는 에덴을 허락하신 하나님 자리에 앉으려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중심에 있는 ‘배꼽’이 우리가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난 존재임을 증거 하듯이, 동산 중앙에 있던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분명한 증거였다.

② (14절~19절)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은 그룹임이여...내가 너를 세우매...”

▶ 하나님의 법궤를 날개로 덮고 있는 그룹(케루브)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수행하는 천사를 가리킨다. 한마디로 특별한 사명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주님의 사자(使者, 일꾼)다. “너 덮는 그룹아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보내심을 받은 일꾼의 사명은 보내신 분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있어야 하는데 교만해져서 본분을 망각하고 타락한다. 선지자 이사야는 계명성(Lucifer)을 자신을 하나님처럼 여기며 지존자로 자칭한 바벨론 왕에게 빗대어 사용하였다(사 14:4, 12) 단테는 신곡에서 이 계명성(루시퍼)을 하나님을 대적하다 땅으로 쫓겨난 천사장으로 묘사했다. 추락하는 것에는 반드시 날개가 있다. 타락하는 것들은 부요와 성공을 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신 물질과 권세, 지혜와 능력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던 모든 것들의 최후는 바로 타락 곧 추락이다.

3. 시돈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

① (26절~31절) “네 가운데 내 영광이 나타나리라”

▶ 시돈이 멸망한 원인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두로와 동일한 죄악을 저지른 까닭이다. 부귀와 영화로 인해서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저버리는 일은 두로와 시돈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축복을 받고 결국 교만해져서 타락하는 것은 특정한 이단교주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② (24절~26절) “그들이 그 가운데 평안히 거하며 집을 건축하며 포도원을 심고 그들의 사면에서 멸시하던 모든 자를 내가 국문할 때에 그들이 평안히 살며 나를 그 하나님 여호와인줄 알리라”

▶ 두로와 시돈을 심판하신 중요한 목적은 부귀와 영화를 추구하는 삶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데 있다. 이와 더불어 두로와 시돈처럼, 하나님을 저버리고 멸망했던 이스라엘을 마침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으로 온전하게 회복시키시기 위함이다.


“자칭 스스로 된 두로 왕”(겔28:1-10)

체데크
10–13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에스겔 28장 설교문 중에서 자칭 스스로 된 두로 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자칭 스스로 된 두로 왕”(겔28:1-10)

● 명제 : 두로 왕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율법주의자들을 의미한다.

● 목적 : 율법주의자들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이다.

인간들은 자신을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기를 좋아합니다. 원죄의 죄인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높이기를 원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높여 주님의 자리에 앉아 있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로운 행실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인간의 의로는 절대 나올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의 의로 자신 스스로 왕이 된 자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로 하나님께서 세워준 구원받은 왕 같은 족속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세전에 선택받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전해야 합니다. 율법의 의로 거룩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두로 왕의 심판에 관하여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서 이방의 왕인 두로 왕을 하나님께서 왜 심판하시는지를 낱낱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두로 왕이 왜 심판당하여 죽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 앞에 두로 왕과 같은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고 하나님이 두로 왕을 왜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가 두로라는 도시를 알아야 합니다. 두로는 육지에서 800m 정도 떨어진 섬입니다. 두로는 느부갓네살 왕에 의하여 내륙도시는 파괴가 됩니다. 그 이후에 육지에서 도망쳐 섬에다 다시 도시를 재건합니다. 이 도시는 바다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침공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로 왕이 교만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예언하신 대로 그대로 무너지게 됩니다. 이 예언의 성취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성취됩니다. 알렉산더는 약 60m가 되는 둑길을 만들었습니다. 이 둑길이 완성이 되자 두로의 도시에 들어가 8,000명의 저항군을 죽이고 3만 명의 거민들을 붙잡아 노예로 팔아 버렸습니다. 그럼 우리가 두로 도시가 멸망당하고 두로 왕이 왜 죽었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상세하게 알아보겠습니다.

두로 왕이 멸망당해 죽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두로 왕은 마음이 교만하고 하나님과 같은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겔28:2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거늘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로 왕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자신이 신이라고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하면서 두로 도시를 통치하고 있다고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로’ צר(초르 6865) 두로, 돌, 반석,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צור(추르 6696) 괴롭다, 대적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두로 왕은 이미 바다 가운데의 섬을 난공불락의 성으로 만들었습니다.
두로 자체는 이미 반석 위에 세워진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로 왕은 스스로 자신이 기초 돌이 되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로 왕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을 무시하고 자신 스스로 구원자가 되어 자신이 반석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 17:6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 도착했을 때에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때에 호렙 산에 있는 반석 위 거기서 반석을 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물이 나오는데 백성들이 마시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반석’이라는 단어가 צור(추르 6697)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고난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어근이 ‘두로’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호렙 산의 반석에서 흘러나온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생수를 상징합니다.

고전 10:4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료를 뒤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음료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나왔는데 이 반석은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반석’이라는 단어가 צור(추르)입니다. 그렇다면 두로의 왕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자신이 메시아라고 말하는 자입니다. 자신이 복음의 생수를 주는 자라고 선언한 사람입니다.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자들이 바로 두로 왕과 같은 자들입니다.

살후 2: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하나님은 마지막 날이 되면 두로 왕과 같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입니다. 자신을 신이라고 불려지게 되고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을 이들은 싫어합니다. 자신을 높이기를 원하여 자신이 숭배함을 받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이라고 내세우게 됩니다.

지금 현재 이런 자들이 누구입니까?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교묘하게 믿음이 아닌 행위를 주장하는 자들이 결국은 인간의 의를 주장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교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아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인간의 의로도 얼마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하나님의 은혜도 인간이 거부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심리 속에는 자신이 왕이 되려고 하는 심리가 농후합니다.

‘마음이 교만하여’ גבה(가바 1361 동사, 칼,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높다, 고귀하다, 라는 뜻입니다. 두로 왕은 마음에 이미 자신을 높이는 마음이 들어온 사람입니다. 자신을 고귀하게 생각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없이도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진실된 사람이라고 말하는 자입니다.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자신의 율법적 행위로 거룩하게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만이 오직 깨끗하게 됩니다. 두로 왕의 마음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은 거룩하고 깨끗하며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그 이유가 칼, 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음을 절대 고쳐먹지 않겠다는 다짐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져 사는 것을 말합니다. 두로 왕은 이렇게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착각에 빠져 두로 도시를 치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를 자신의 아방궁으로 만들어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거짓 복음을 가르쳐서 설교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를 전파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로 왕과 같이 교만한 자입니다. 우리들은 행위주의에 빠지면 안 됩니다. 결국 자신의 의를 나타내어 구원의 주권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드러내려 하기 때문입니다.

‘앉아있다 하도다’ ישב(야샤브 3427 동사, 칼, 완료, 공성, 1인칭, 단수) 앉다, 머무르다, 살다, 거주하다, 라는 뜻입니다. 두로 왕은 하나님의 자리 바다 가운데 앉아서 거주하면서 살다시피 한다고 말씀합니다. 바다 가운데는 두로의 도시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두로 도시를 통치하고 있는 모습을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로 왕은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면서도 구원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말합니다. 두로 왕은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처럼 군림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칼, 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절대 하나님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내주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자신이 앉아 있겠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부인하고 자신의 의를 내세워 하나님의 은혜도 거부할 수 있고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은 두로 왕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홀로 앉아서 군림하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행위를 열심히 하여 구원받고 그렇지 않으면 구원이 탈락된다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입양된 자녀는 부모나 아니면 자식이 파양 하기를 원하면 파양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혈통으로 난 자녀는 파양 하고 싶어도 파양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두로 왕과 같이 자신의 의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자들은 자녀는 맞지만 결국 거룩한 행위를 하지 못하면 파양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하늘로부터 거듭난 자녀는 파양 하고 싶다고 해서 파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나의 속 사람이 온전하게 구원받아 하나님께서 의롭게 해 주신 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 두로 왕은 다니엘보다 지혜로워서 자신 스스로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겔28:3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워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

두로 왕은 다니엘보다 지혜롭다고 스스로 자만에 빠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밀한 것을 나는 모두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영적 교만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영적 교만에 빠져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인간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생은 비밀이기 때문에 아무나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두로 왕은 다니엘보다 더 지혜로워서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고 영적 교만에 빠져 있습니다.

골1:26-27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지금은 성도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이 비밀이 이방인 가운데서 나타났는데 이 비밀은 바로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두로 왕과 같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비밀로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이 깨달을 수 있다고 자만하는 영적 교만에 빠져 있습니다. 인간의 의로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자신의 지혜로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결국 이런 자들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영원한 지옥의 불 못으로 던져지게 됩니다.

‘은밀한 것을’ סתם(사탐 5640 동사, 칼, 분사수동, 남성, 단수) 막다, 폐쇄하다, 간수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감추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어떻게 두로 왕과 같은 자가 인간의 지혜로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것을 어떤 사람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도록 폐쇄하여 온전하게 봉인해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로는 절대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유가 분사 수동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은밀하게 간직하여 막아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막아서 폐쇄했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로는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고 깨달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비밀을 폭로하여 주셨기 때문에 내가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계시입니다.

셋째, 두로 왕은 속 사람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겉 사람의 삶을 살았습니다.

겔28:4-5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두로 왕은 자신의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습니다.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고 자신의 영업적인 지혜로 무역을 하여 재물을 축적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따라 살아가는 자들은 속 사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겉 사람만 잘 되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겉 사람이 잘 되면 하나님께 교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겉 사람은 날마다 화려해지고 많은 재물을 축적해 나가지만 속 사람은 날마다 더러워지고 추악해져 가게 됩니다.

눅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는 미워하고 하나는 사랑하고 혹 하나는 귀하게 여기고 하나는 경히 여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두로 왕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행위의 의를 함께 겸하여 섬기지 못합니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어 교만하게 하나님을 끌어내리는 이런 것들과 복음을 섞을 수 없습니다.

고전10: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우리는 주님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성화를 이루지 못하면 결국 구원은 취소된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함께 겸하여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고백해 놓고 마지막은 자신의 율법적인 행위의 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구원이 취소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로 재물을 쌓아놓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고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실 수 없습니다. 참 복음과 거짓 복음을 겸하여 전할 수 없고 들을 수도 없습니다.

두로 왕의 최후는 어떻게 됩니까?

첫째, 하나님은 두로 왕의 아름다운 자신의 의를 쳐서 영화를 더럽게 하십니다.

겔28:7 그런즉 내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의 강포한 자를 거느리고 와서 너를 치리니 그들이 칼을 빼어 네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치며 네 영화를 더럽히며

두로 왕의 최후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 곧 여러 나라의 강포한 자를 거느리고 와서 두로 왕을 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이방인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마지막은 알렉산더 대왕이 주변 국가들을 동원하여 두로 도시를 완전히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네 영화를 더럽히며’ חלל(할랄 2490 와우접속사. 동사, 피엘, 완료, 공성, 3인칭, 복수) 꿰뚫다, 꿰찌르다, 더럽히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두로 왕이 자신이 하나님인 척하면서 구원자라고 외치면서 자신 스스로 영화롭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자를 더럽히겠다고 말씀합니다. 두로 왕과 같은 자들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난을 당하고 꿰뚫림 당한 것처럼 자신의 고통과 거룩한 의로 하나님 노릇을 하는 자들입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는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찔림’이라는 단어가 חלל(할랄)입니다. 이것은 두로 왕과 같은 율법주의자들이 자신의 의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면서 주님의 고난당하신 것을 부정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고통과 괴로움으로 얼마든지 거룩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마지막 날에 반드시 두로 왕이 멸망을 당하듯이 심판을 받아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둘째, 두로 왕은 구덩이에 던져지게 됩니다.

겔28:8 또 너를 구덩이에 빠뜨려서 너를 바다 가운데에서 죽임을 당한 자의 죽음 같이 바다 가운데에서 죽게 할지라

하나님은 두로 왕을 심판하셔서 구덩이에 빠뜨려 던져버리겠다고 말씀합니다. 너를 바다 가운데서 죽임을 당한 자의 죽음 같이 바다 가운데서 죽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구덩이는 유대인의 개념에 죽은 자들이 가는 음부를 의미합니다. 신약에서는 이것이 무저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다 가운데서 죽는다는 표현은 두로의 도시가 바다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이 섬을 파괴하여 바다 가운데서 두로 왕을 죽이겠다는 의미입니다.

‘구덩이’ שחת(샤하트 7845) 구덩이, 무덤, 파멸,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두로 왕을 구덩이에 던져버리는 것은 파멸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아서 호령했던 것을 보복하게 됩니다. 두로 왕은 속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자를 의미합니다. 겉은 화려했지만 속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자입니다. 두로 왕과 같은 자들은 영원한 심판의 구덩이에 던져지게 됩니다.

눅8: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거라사인의 땅에 예수님이 들어가셨을 때에 군대 귀신 들린 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으로부터 군대 귀신들을 쫓아주시는데 예수님이 귀신들에게 명령하니 군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무저갱은 바닥이 없고 끝이 없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그곳에 하나님은 사탄을 가두었습니다. 이렇게 두로 왕처럼 자신의 의를 가지고 구원을 얻으려고 했던 자들과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았던 자들을 무저갱에 집어던져버리게 됩니다. 귀신들조차도 들어가기 싫어하는 곳으로 하나님은 집어던져버립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올라가 앉아 있는 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두로 왕은 이방인들 앞에서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죽음 같이 죽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겔28:10 네가 이방인의 손에서 죽기를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죽음 같이 하리니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셨다 하라

두로 왕이 이방인의 손에서 죽는데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죽음 같이 죽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두로 왕은 할례를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 당시에 두로 사람들은 할례를 시행했는데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을 야만인으로 취급했다고 합니다. 할례 받은 자들이 할례 받지 못한 자들처럼 죽었다는 것은 영적 수치를 의미합니다. 두로 왕은 할례를 받았지만 약속의 자녀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중에 이스마엘의 할례를 의미합니다. 육적 할례만 받았지 이삭처럼 약속의 영적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세례만 받아서는 안 됩니다.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나게 됩니다. 물세례는 구원받았다는 증표이지 실제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세례를 받고 구원의 확신을 얻어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가 되면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영적 수치가 사라지게 됩니다. 이런 확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가능합니다. 두로 왕은 자신이 할례를 받았다고 교만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드러냈지만 이것은 결국 구원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도 두로 왕처럼 구원받았다고 착각 속에서 살면 안 됩니다. 그러니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말하고 내가 구원받았어도 거룩한 행실을 해야 한다는 이런 거짓 복음에 미혹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거듭난 자녀는 끝까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내 자식이 인생을 살다가 마약을 하여 감옥에 들어갔다 왔다고 해서 내 자식이 아니라고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이미 내 자녀로 탄생되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들은 성령세례를 받았으니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높이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나의 의는 죽이고 하나님의 의를 높이고 나는 점점 낮아지고 예수 그리스도는 점점 높아지는 신앙을 해야 합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면 나는 점점 작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두로 왕과 같은 자들은 자신이 스스로 할례를 받았으니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서 교만하게 신앙생활하다가 결국은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로부터 거듭난 자녀이기 때문에 끝까지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날마다 거룩한 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기쁨이 되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스겔 27장
10-09-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두로를 위한 애가(에스겔 27:2)


인자야 너는 두로를 위하여 애가를 지으라.
Son of man, take up a lament concerning Tyre.

두로를 위한 애가( lament concerning Tyre)
알 촐 키나(עַל־צֹר קִינָה)

애가(키나.
qîynâh) 7015. קִינָה 

1. 애가.  2. 비가. 3. 예레미야 7:29
발음 / 키나[ qîynâh ]
어원 / 696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슬픈 노래(삼하 1:17), 통곡(렘 7:29), 슬퍼함(렘 9:10), 슬피 부름(겔 32:16).
[부] 슬피(대하 35:25). [명] 슬픈 노래(렘 9:20, 겔 2:10, 암 5:1), 애통(암 8:10).
구약 성경 / 18회 사용

두로(초르. Tsôr) 6865.  צֹר   

1. 바위 : 팔레스틴의 한 장소 ‘두로’. 2.  열왕기상 7:14.
발음 / 초르[ Tsôr ]
관련 성경 / 두로(왕상 7:14).
구약 성경 / 1회 사용

지으라(나사.  nâsâʼ) 5375.  נָשָׂא 

1. 들어올리다  2. ‘물이 많아서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3. 깃발을 세우다
발음 / 나사[ nâsâʼ ]
관련 성경 / 넉넉하다(창 13:6, 7), 용서하다(창 18:26, 출 10:17), 듣다(창 19:21), 데려오다(창 45:19),맹세하다(출6:8), 불러들이다(출10:13), 담당하다(출18:22, 민11:17), 메다(출28:12, 왕상2:26), 원하다(출36:2), 돌아가다(레5:1),당하다(레5:17, 24:15, 시88:15), 메이다(민4:25), 지다(레16:22, 사22:6), 사하다(민14:19, 시32:5), 이끌다(민31:49), 움키다(삼상17:34), 안다(신1:31, 삼하4:4), 받다(왕상8:31, 신33:3), 들다(삼하18:28, 대상12:24, 사40:26), 실어오다(왕상10:11), 들어가다(왕하2:16), 예언하다(왕하9:25), 교만하다(왕하14:10), 가져가다(왕하23:4), 조사하다(대상27:23), 교만하다(대하25:19), 비방하다(시15:3), 두다(시24:4), 높이다(시93:3, 사52:8), 칭하다(시139:20), 받들다(시143:8), 세우다(사5:26), 짓다(사14:5), 들어올리다(겔3:14), 무성하다(겔17:23), 부르다(겔26:17), 품다(겔39:26), 맺다(욜2:22, 학2:19), 가져가다(암6:10), 제하여 버리다(말2:3), 견디다(창4:13),싣다(창44:1), 태우다(창45:27), 집계하다(민4:2), 일어나다(시89:9), 참다(렘44:22,시55:12), 빼앗다(삼하14:14, 겔38:13), 일으키다(창21:18), 계수하다(민1:2, 31:26), 떠오르다(창7:17), (소리) 내다(창21:16), 떠나다(창29:1), 눈짓하다(창39:7), 몰아넣다(출10:19), 일컫다(출20:7, 신5:11), 전파하다(출23:1), 운반하다(민1:50), 돌아보다(신28:50),(소리를) 높이다(삿21:2, 삼하13:36), 허락하다(삼상25:35), 대면하다(삼하2:22), 나오다(삼하6:3), 보내다(왕상5:9), 떠들다(왕상13:29), 이끌어가다(왕상18:12), 뜨다(왕하19:22), 긷다(대상11:18), 장가들다(대상23:22, 24:3), 노략하다(대하14:13), 운반하다(대하16:6), 베풀다(에2:9), 소리지르다(욥2:12), 따르다(욥13:8), 물다(욥13:14), 노래하다(욥21:12), 보다(욥32:21, 시82:2), 내다(욥40:20), 부르다(시16:4), 들리다(시63:4), 주다(시72:3), 기쁘게 하다(시86:3), 치다(시133:9) 건너다(사15:7), 날리다(사41:16),탈취하다(호5:14), 제거하다(호14:2), 제하다(단1:16), 솟아오르다(나1:5), 쓰다(학2:12), 받아 주다(말1:8), 긍휼히 여기다(말1:9), 실리다(창45:23), 사모하다(신24:15), 잡다(수6:18, 삿9:54), 이끌다(삼상10:3), 바치다(삼하8:6, 대상18:2), 실어오다(왕상10:22), 짐을 나르다(느4:17), 뿌리다(시126:6), 사유하다(미7:18), 치우치게 하다(말2:9), 존귀하다(왕하5:1, 대하32:23, 욥22:8), 사함을 얻다(시32:1), 사죄함을 받다(사33:24), 달하다(렘51:9), 사로잡다(단11:12), 돋우다(사40:4), 안기다(사66:12), 뛰어나다(사2:2), 자고하다(사2:12), 거룩하다(사57:15), 높다(사57:7), 제공하다(왕상9:11), 끌어가다(암4:2), 형벌받다(레22:16), 높아지다(단11:14), 높은 체하다(잠30:32), 흥왕하다(민24:7).
[부] 높이(에 3:1).
구약 성경 / 650회 사용

에스겔 27:3
너는 두로를 향하여 이르기를 바다 어귀에 거하여 여러 섬 백성과 통상하는 자여 주 여호와의 말씀에 두로야 네가 말하기를 나는 온전히 아름답다 하였도다.

아니 켈리라트 요피(אֲנִי כְּלִילַת יֹפִי)

온전히(3632) 카리일(kâlîyl)  כָּלִיל 

1. 완전한.  2. 전체.  3. 번제
발음 / 카리일[ kâlîyl ]
어원/ 여성형 כְּלִילָה, 363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순청색(민 4:6), 전부(출 39:22).
[부] 온전히(레 6:22, 사 2:18, 겔 27:3).
[형] 온전한(신 33:10, 삼상 7:9, 애 2:15).
구약 성경 / 15회 사용

아름답다(3308) 요피(yŏphîy)  יֳפִי   

1. 빛남.  2. 이사야 33:17.  3. 시편 50:2
발음 / 요피[ yŏphîy ]
어원 / 330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아리따움(에 1:11), 아름다움(시 50:2, 겔 27:3, 31:8, 사 3:24), 화려함(겔 16:14, 15), 아름다움(시 45:11, 겔 16:25, 슥 9:17), 영광(사 33:17,애 2:15).
구약 성경 / 19회 사용

교만(驕慢) - 교만할 교, 거만할 만

착각(錯覺) - 어긋날  착, 깨달을 각

에스겔 27:4
네 지경이 바다 가운데 있음이여 너를 지은 자가 네 아름다움을 온전케 하였도다.

너를 지은 자(1129)
너를 지은 자가
- '너를 지은 자'(보나이크)는 복수형으로 '너를 지은 자들'의 뜻이다.
이것은 두로인들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그들을 인위적으로 단장하고 화려한 모습과 번성한 상태로 만든 자들을 가리킨다.


בָּנָה 스트롱번호1129

1. 짓다.  2. 열왕기상 6:15.  3. ~위해 집을 짓다] 예레미애 24:6
발음 / 바나[ bânâh ]
관련 성경 / 쌓다(창 11:5, 신 27:5, 애 3:5), 건축하다(민 32:37, 대하 6:2, 느 2:18), 만들다(신 20:20, 겔 27:5, 창 2:22), 세우다(룻 4:11, 왕상11:38, 렘45:4), 증축하다(대하27:3), 짓다(욥27:18,전2:4, 렘35:9), 건설하다(시122:3, 사25:2), 건축되다(겔36:33, 잠24:3, 슥1:16), 번성하다(말3:15), 얻다(창16:2, 30:3), 복구시키다(사44:26).
[명] 건축(왕상6:9), 건축자(왕상5:18, 스3:10).
구약 성경 / 373회 사용






두로에 대한 멸망 심판 예언은 에스겔 26장, 27장, 28장에서 소개합니다.
26장은 두로의 멸망 심판 예언
27장은 두로를 위한 슬픈 노래(애가)
28장은 두로 왕의 멸망과 시돈의 심판

왜 두로에 대하여 이렇게 상세하고 길게 말씀하셨을까요?
에스겔 25장에서는 암몬, 모압, 에돔과 블레셋에 대하여 멸망 심판을 말씀하셨을 때는 매우 간략하게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두로(Tyre)에 대해서 많은 분량으로 심판 예언을 하신 이유는 그만큼 두로의 죄가 중대하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두로의 영광과 아름다움과 강한 군사력을 먼저 찬양한 후에 두로의 몰락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두로는 모든 나라가 부러워하는 부와 힘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멸망 후 그 어떤 나라에도 비교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와 같은 극한 대비를 통해 악의 말로가 어떤지를 깨우쳐 알려주고 있습니다.  

두로의 패망은 열국들에게 두려움과 함께 기쁨을 주었습니다.
두로에 대해 부러움과 시기의 눈길을 보내던 주변 국가들은 두로의 돌연한 패망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부귀영화가 순식간에 사라짐을 보면서 허망함을 느낀 동시에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경외심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자신들도 머지 않아 동일한 운명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또한 경쟁국들은 두로의 패망을 기뻐하며 조롱했습니다.
마치 이전에 두로가 예루살렘의 패망을 보면서 조소와 멸시를 보냈던 것처럼, 처참하게 멸망한 두로의 모습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악인은 당장 보기에는 번영하는것 같을지라도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또한 세상적인 풍요로 인하여 자만하는 나라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국제 교역을 통해 세계적인 상업 도시로 발돋움한 두로는 자신들의 돈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근동 지방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나는 온전히 아름답다'라는 착각에 빠져 피조물로서의 겸허함을 상실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없는 외적 성공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순식간에 허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물질적 번영은 반드시 그 한계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두로의 멸망을 통해 명심해야 할 것은 교회의 물질주의가 대단히 위험한 현상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질적 번영보다 가장 앞선 것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던 능력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큰 것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것처럼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세상에서 비록 보이지 않지만 배후에서 가장 큰 영향력으로 세상을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며 오늘도 믿음의 흔적을 새기며 저 천성을 향하여 앞으로 전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로의 아름다움은 지은 자가 온전케 한 것이다.

에스겔 27:3-4
너는 두로를 향하여 이르기를 바다 어귀에 거하여 여러 섬 백성과 통상하는 자여 주 여호와의 말씀에 두로야 네가 말하기를 나는 온전히 아름답다 하였도다.
네 지경이 바다 가운데 있음이여 너를 지은 자가 네 아름다움을 온전케 하였도다.



 

바다 어귀에 거하여

복수로 표현된 '어귀'(*, 메보트)의 문자적인 뜻은 '입구들'인데 당시 두로인들이 해상 무역을 하기 위해 드나들었던 항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혹자에 의하면 당시 두로 왕국에는 북쪽으로는 시돈인과 무역하고 남쪽으로는 애굽인과 무역하는 항구가 있었다 한다(Cooke, Wycliffe).

여러 섬 백성과 통상하는 자

당시 두로 왕국은 동서양의 여러 나라와 무역업을 하였다.
이사야는 이 사실과 롼련하여 두로 왕국을 '열국의 시장'(사 23:3)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통상하는 자'란 단순히 '상인'(商人)을 듯하기보다는 외국과 무역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다.

나는 온전히 아름답다(아니 켈리라트 요피 / אֲנִי כְּלִילַת יֹפִי) I am perfect in beauty.

이것은 두로 왕국이 스스로를 자화 자찬(自畵自讚)한 말이다.
아마 그들이 무역업을 통한 경제적 부로 인해 자신들을 화려하고 영화롭게 단장한 데서 비롯된 말로 보인다(4-11절).
그렇지만 이 말은 본질적으로 두로 왕국이 자신의 교만을 나타낸 말로서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는 근본적 요인이 되었다(28:11-19).




두로에 대한 애가[겔 27장]
  
[내용개요]
본장에는 두로의 멸망을 슬퍼하는 애도의 노래가 기록되어 있다. 에스겔은 두로의 영광과 아름다움과 강한 군사력을 먼저 찬양하고 난 후에 성읍의 몰락에 대해 애도한다. 이것은 두로의 멸망에 대한 우호적 연민이 아니라 멸망의 비참함과 확실성을 대조적으로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본장은 두로의 영광과 힘에 대해 격찬하고 있는 전반부와(1-11절) 두로가 국제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사실에 대해 설명하는 중반부(12-25절), 그리고 자신의 영광에 도취되어 있다가 결국 멸망하는 두로의 모습을 보여 주는 후반부(26-36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  해]
겔26장에서는 여러 가지 죄악을 범한 두로에게 심판이 내려질 것이 선언되었습니다. 그 다음 장인 본장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폐허가 될 두로에 대한 애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로는 모든 나라가 부러워하는 부와 힘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멸망 후 그 어떤 나라에도 비교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본장은 이 극한 대비를 통해 악의 말로가 어떤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학주제]
두로의 멸망과 열국의 통곡.
부국 두로의 패망은 열국들에게 두려움과 함께 기쁨을 주었다. 두로에 대해 부러움과 시기의 눈길을 보내던 주변 국가들은 두로의 돌연한 패망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꼈다. 그들은 인간적 영화가 순식간에 사라짐을 보면서 허망함을 느낀 동시에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경회심을 소유하게 되었다. 아울러 자신들도 머지 않아 동일한 운명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경쟁국들은 두로의 패망을 기뻐하며 조롱했다 마치 이전에 두로가 예루살렘의 패망을 보면서 조소와 멸시를 보냈던 것처럼, 처참하게 멸망한 두로의 모습을 잔인하게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악인은 당장 보기에는 번영하는것 같을지라도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다. 또한 세상적인 풍요로 인하여 자만하는 나라는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됨을 경고하고 있다.  


[영적교훈]
국제 교역을 통해 세계적인 상업 도시로 발돋움한 두로는 자신들의 돈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근동 지방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나는 온전히 아름답다'라는 착각에 빠져 피조물로서의 겸허함을 상실하였다. 이처럼 하나님 없는 외적 성공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순식간에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 없는 물질적 번영은 반드시 그 한계에 부딪힌다. 오늘날 성도들도 두로의 멸망을 통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교회의 물질주의가 대단히 위험한 현상임을 깨달아, 하나님을 물질적 번영보다 더욱 우선시해야 할 것이다. 

두로(Tyre. 타이레) & 시돈(Sidon)

두로(Tyre. 타이레)

고대에는 시돈 남쪽으로 약 40㎞, 악고 북쪽으로 45㎞지점에서 바다 쪽으로 나가 있는 어떤 섬에 위치한 뵈니게의 주요 성읍이었지만, 오늘날은 반도에 위치한 '추르'를 가리킨다.

​B.C. 19세기 애급의 저주 문서와 14세기 아마르나 서신에서는 두로가 독립 왕국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으나, 그 성읍이 B.C. 3000년 이전에도 존재하였다는 고대 전승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성읍은 약 1200년경 시돈 사람에 의해 재발견된 것으로 보인다.
쐐기 문자 기록으로 '우슈'로서 언급된 그 섬 맞은편 본토 정착지는 헬라인에 의해 '고대 두로'로 알려졌고, 그 섬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로 역사의 상당 부분은 성쇠하는 애굽 세력의 그늘 밑에서 일어났다.
힉소스 왕가가 애굽에서 축출된 후 여러 바로 왕들은 온갖 성공의 척도로서 뵈니게를 휘둘렀다.

​이런 상황하에서 두로 사람들은 염색 상품, 목재, 곡식, 기름, 포도주, 금속 상품, 노예 등을 싣고 지중해 무역로를 바삐 왕래하였다.
그들도 수많은 중요한 상업 식민지를 두었으며, 그 가장 성공한 예가 카르타고였다.
히람 1세, 다윗 및 솔로몬과 친분을 가졌던 10세기 두로 왕(삼하 5:11. 왕상  5)은 지중해 동부에 두로 왕국을 찬연히 세웠고 두로 제1황금기를 구가하였다.
그는 두로에서 괄목할만한 건축 사업을 시작하였고, 근처의 헤르쿨레스(Hercules) 섬을 합병시켰다(현재는 물에 잠겨 있다).

​에트바알(Ethbaal) 1세 (B.C. 약 887-856년)는 외교에서와 같이 상업에서도 두로의 영향력을 확대시켰고, 그 섬 남단에 750m나 되는 긴 방파제를 갖춘 새로운 주요 항구 '애굽 항'을 설치하였다.
'시돈 왕'이라 칭하는 에트바알하에서 두로는 뵈니게 성읍 중 제일의 성읍으로 떠올랐고 능동적으로 식민지화하는 일에 들어갔다.
에트바알의 딸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아합과 결혼하였고 이세벨의 딸 아달랴는 유다 왕 요람과 결혼하였다.
그 결과 이방의 종교적 풍습들이 도입되었다(왕상 16:29-19:18).

이러저러한 죄들로 인해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두로의 멸망을 예고하였다(사 23장. 겔 26:2-28:9.  암 1:9-10).

​앗수르 제국 군대는 B.C. 10세기 초엽 수리아와 뵈니게를 약탈하기 시작하였고, B.C. 9세기부터 두로는 수많은 앗수르 통치자들에게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B.C. 612년 앗수르의 패망으로도 두로는 해방되지 않았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13년 동안(B.C. 586-573년) 그 성읍을 포위하고 주종 계약을 맺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페르시아 제국의 출현으로 두로는 더욱 약화되어 시돈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포기하였고, B.C. 520년 카르타고는 두로와의 관계를 종식하였다.
그러나 두로는 계속 무역에 종사하였다(에 3:7 ; 느 13:16).

​B.C. 333년 알렉산더 대제잇수스(Issus)에서 페르시아인들을 격퇴함으로써 두로는 또 다른 제국과 부딪히게 되었다.
알렉산더가 지중해 연안으로 진출할 때 두로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그는 일곱 달 동안 두로를 에워쌌다.
헬라인이 섬 주변에 둑길을 만들려고 '고대 두로'의 건물과 기념비들을 잡석으로 사용한 후 그 성읍은 마침내 몰락하고 말았다.

​그 성읍의 많은 거민은 죽임을 당하였거나 노예가 되었다.
두로 경제는 셀류코스 왕조하에서 다소 회복되었고, 헬라 문화가 유입되었다.
로마 시대엔 그 성읍이 수리아 관할 아래 있었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역 중 한동안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나신 적이 있었다(마 15:21-29).

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은 말씀을 듣기 위해 갈릴리에서 온 '허다한 무리' 가운데 섞여 있었다(막 3:8).

종말론적 선언에서, 예수님은 그의 사역에 반응을 보이지 않은 팔레스타인 성읍들의 운명을 이 이방인 성읍이 받을 심판과 대조시키셨다(마 11:21-22).

​바울은 그의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 여로에서 두로에 사는 그리스도인들과 며칠을 보냈다(행 21:3-7).

행 12:20-23에 의하면, 두로에서 온 대표자들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죽음 이야기 가운데 언급되고 있다.

* 참고 문헌 H.J. Katzenstein. The History of Tyre(Jerusalem : 1973).

시돈

고대 페니키아 사람들의 도시 국가이다. 베이루트에서 남쪽으로 약 36km 떨어진 오늘날의 '사이다'(Saida)에 위치하였는데, 두로에서는 북쪽으로 약 36km 떨어져 있는 셈이다. 창 10:15에서는 가나만의 장자로도 일컬어지고 있다(대상 1:13, KJV "Zidon").

이 성읍은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과 호머의 저작들 가운데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이곳은 바다를 항해하기 위한 페니키아 제일의 항구였다. 초창기에는 이집트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가 뒤에 힉소스가 그들을 지배하였지만 그 후에 다시 이집트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애굽의 19왕조).

B.C. 1200년경에 해양 민족들에 의하여 페니키아가 붕괴하였는데, 그 전까지는이곳 시돈이 페니키아의 주요 도시였다. 그 후로부터는 두로가 좀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시돈은 재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상징적인 도시로 남아있게 되었다.

그 후 이곳의 역사는 수리아, 팔레스타인의 작은 국가들과 공통된 운명을 밟게 된다. B.C. 677년에 앗수르의 에살핫돈에 의하여 멸망 되었으며, B.C. 7세기 말경에 잠시 애굽의 지배 아래 놓이기도 한다. 그러나 곧장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정복 되었으며, 그 후 페르시아에 의하여 다시 지배를 당하였다.

아닥사스다 3세 때의 반란은 단명으로 끝났으며, 오히려 그 성읍은 불타고 수천의 인명만 손실을 입게 되었다. B.C. 332년에는 마게도냐의 알렉산더에 의하여 정복 되었으며, 그후 셀류코스 왕조와 로마시대에는 상업의 중심지로 다시금 번영과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구약에서는 페니키아 사람들을 보통 시돈 사람으로 칭하고 있다(참조. 신 3:9, 삿 10:12, 왕상 5:6).

예수님과 바울도 시돈을 방문한 적이 있다(막 7:31, 행 27:3).

예수께서는 그분의 가르침에 대하여 반응을 나타내지 못하였던 갈릴리 지방의 이스라엘 도시들보다 오히려 이방의 시돈을 더 높게 평가하셨다(마 11:21-22).

바울은 시돈에 살고있는 친구를 방문하였다.




시돈(Sidon) : 노략물

두로와 같이 동 지중해 연안에서 제일 큰 항구이다.
현재는 그곳을 사이다라고 한다.
베이루트에서 남쪽으로 41Km에 있는 지중해 연안도시이다.

고대 베니게의 옛 도시로 상업이 번창했다.

1. 시돈의 종교(아스다롯 여신)가 이스라엘 나라에 침투하였다(왕상 11:5, 33.  왕하 23:13)
2. 아합 왕은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하여 바알신 숭배를 공인하고 장려 하였다(왕상 16:31-33,  18:17-40)
3. 포로 시대가 지난 후 제 2신전을 다시 재건할 때 시돈에서 좋은 백향목을 실어왔다(스 3:7)
4. 주전 351년 시돈 사람들은 바사에 반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스스로 이 도시를 불살라 버렸다.

그때 그 비참한 광경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후일담으로 전해 내려왔고 예수님도 이 세상 종말 에 있을 비유를 이 사건을 들어 말씀하셨다(마 11:21)

5. 로마 시대에는 두로와 같이 자유 도시가 되었고 예수의 선교와 사도들의 선교 활동에 관계되었던 곳이기도 하다(막 3:8,  7:31,  눅 6:17,  행 12:20,  27:3)

시돈 일대에는 오랜지, 바나나 농원들이 있다.
시돈은 낚시란 의미로 페니키아 시대의 바이블로스, 타이레와 3대도시의 하나로 중요한 해상진출의 요충지였다.
다리우스에서 B.C 6세말엽 까지는 페르시아 5총독의 수도였다.

47일 전쟁으로 십자군에 의해 점령당하기도 하였으나 70년 후 살라딘이 회복한 곳이다.
1228년 십자군이 건설한 바다의 요새, 대사원, 성 루이스 성, 에스마운 신전, 지하묘지 카타콤베, 예루살렘 병원 등 유적이 남아있다.








에스겔 26장
10-07-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두로의 엎드러지는 소리(에스겔 26:15)


주 여호와께서 두로를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의 엎드러지는 소리에 모든 섬이 진동하지 아니하겠느냐 곧 너희 중에 상한 자가 부르짖으며 살륙을 당할 때에라.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to Tyre: Will not the coastlands tremble at the sound of your fall, when the wounded groan and the slaughter takes place in you?

엎드러지는 소리(레초르  밐콜 맢팔르테크( לְצֹור מִקֹּול מַפַּלְתֵּךְ  )
 

두로(6865)  צֹר  

1. 바위 : 팔레스틴의 한 장소 ‘두로’
2. 왕상 7:14.
발음 / 초르[ Tsôr ]
관련 성경 / 두로(왕상 7:14)
구약 성경 / 1회 사용


소리(6963)  קוֹל 

1. 목소리 욥기 4:10
2. 소리를 발하다
3. 소리를 내서 ~을 말하다
발음 / 콜[ qôwl ]
어원 / 복수 קוֹלוֹת, ‘부르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음성(신 4:33, 욘 2:2), 소리(창 3:10, 신 1:45, 렘 2:15), 말(창 3:17, 신 21:18, 렘 35:8), 소문(창 45:16), 표징(출 4:8), 우렛소리(출 9:23, 삼하 22:14), 우레(출 20:18, 삼상 7:10, 12:18), 목소리(출 23:21, 삼상 12:14, 사 7:23), 말소리(신 1:34, 5:28), 말씀(신 13:18, 28:1, 삼상 15:1), 공포(대하 36:22, 스 1:1), 울음소리(시 6:8), 함성(렘 4:29), 소동(렘 11:16), 명령(습 3:2).
[동] 소리(내어 울다)(창 21:16, 45:2), 소리내다(창 29:11, 시 142:1), 소리지르다(창 39:15,18, 왕하 18:28), 지껄이다(삿 5:11, 겔 23:42), (큰) 소리(로 울다) (삿21:2, 삼하15:23, 스3:12), 불다(대상15:28), 공포하다(스10:7, 느8:15, 대하24:9, 30:5), 노래하다(욥21:12), 소리치다(시 98:6), 울다(나 2:7), 떠들다(애 2:7), 외치다(미 6:9).
구약 성경 / 505회 사용

엎드러지는(4658)  מַפֶּלֶת   

1. 타락
2. 잠언 29:16.
3. 에스겔 26:15
발음 / 마펠렛[ mappeleth ]
어원 / 530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주검(삿 14:8), 엎드러짐(겔 26:15, 32:10),무너짐(겔 26:18, 31:13), 패망(겔 27:27), 떨어짐(겔 31:16)
구약 성경 / 7회 사용

두로(Tyre) : 바위

시돈 항구에서 약 40km지점 레바논과 이스라엘에서 약 24km북쪽에 위치해 있다.

1. 지중해 동해안에 있는 베니게의 유명한 성(겔 27:3)
2. 아셀지파에게 여호수아가 나누어 주었으나 방비가 견고함으로 쳐서 취하지 못함(수 19:29, 삿 1:31-32)
3. 공업과 학술이 발달된 곳으로 다윗과 솔로몬 궁을 지을때 건축 재료와 기술자를 여기서 구하였다(삼하 5:11, 왕상 5:7)
4. 아합왕이 그 왕녀 이세벨을 취하고 바알까지 취하여 섬기다가 여호와의 징벌을 받았다(왕상 21:23-26)
5. 조개 종류에서 취하는 고귀한 자색 염료를 생산하여 여러나라와 무역이 성행되고(겔 27:16-25)
6. 주전 331년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포위하고 석로를 쌓고 처들어가 함락하고 백성 주민을 여러 나라에 노예로 팔고 시가는 불탔다.
후에 로마 국이 점령하고 재건 하였다
7. 예수님이 그 성에 가셨을 때 가나안 여인의 독실한 신앙을 보시고 그 딸에게 들린 악령을 쫓아 주셨다(마 15:21-28)
8. 바울이 7일간 유하며 전도하는 중에 이곳 주민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권고 하였으나 작별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였 다(행 21:2-7)


두로의 엎드러지는 소리(The Sound of Tyre's Falling)
두로의 엎드러지는 소리란 두로가 망하는 소리라는 뜻입니다.

모든 섬이 진동하지 아니하겠느냐
- 난공 불락이라고 여겨졌던 두로가 허무하게 멸망하는 것을 보고 섬들, 곧 두로에게 경제적, 정치적으로 의존하거나 교류하였던 지중해 연안 지역 전체가 공포와 당혹감에 휩싸이게 된다는 예언이다.


왜 두로가 망한다고 하셨습니까?
두로가 망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을 다른 이방 국가들보다 길게 언급합니다.
그 이유는 두로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국가이었기 때문입니다.
25장에서는 암몬과 모압과 에돔과 블레렛에 대한 심판 예언은 포괄적으로 암시하셨지만 두로에 대해서는 아주 상세하게 말씀합니다.

두로는 베니게의 중요한 성읍으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으므로 다른 이방 족속들과 같이 적개심 과 증오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로는 예루살렘이 멸망하자 경제적 이익을 생각하며 매우 기뻐했습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업신여기는 태도이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태도가 됩니다.
따라서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을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암몬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인 몰락을 보고 기뻐하였으나 두로는 예루살렘의 정치적, 경제적 몰락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어 철저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서로간에 선의의 경쟁 의식을 갖는 것은 필요하지만 서로 시기하고 지나친 경쟁 의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 같은 행위는 두로와 같은 범죄를 행하는 것임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남북한의 긴장 관계는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어느 한 방향으로 결정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조선인민민주의 공화국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로 갈 것인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아직도 우리 주위에서 이미 무너져버린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을 동경하는 사상도 없고 국가관마저 없는 철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간혹 어떤 사람은 왜 목사가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느냐 하며 비난합니다.
만일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무너진다면 공산국가에서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비극적인 현상이 닥쳐오는데도 오직 말씀만 강조한다면 그 결과는 소 잃고 외양간을 고쳐야 할 비극적인 역사의 무대에 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분명한 방향과 목표를 따라 바른 길을 가도록 깨우치고 가르쳐야 합니다.
신앙의 자유를 자손대대로 누릴 수 있는 그 날을 위하여 오늘도 역사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믿음의 길을 찾아나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스겔 26장 /  두로에 대한 심판

북쪽에 위치해 있는 두로에 대한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이 두로에 대한 심판 예언을 다른 이방 국가들보다 길게 언급하였는데 이는 이 도시가 정치적,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함을 암시한다. 전장에서 암몬이나 모압, 블레셋에 대한 심판 예언을 포괄적으로 묘사한 데 반해, 본장에서는 두로에 대한 예언을 상세하고 치밀하게 다루고 있다.

두로에 대한 심판을 신탁의 형식을 사용하여 강조(1-14절),
두로의 멸망에 대한 이웃 국가들의 반응(15-18절),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을 기술(19-21절)

25-32장까지는 이스라엘 주변에 있으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고, 또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 우상과 물질을 숭배하도록 미혹한 이방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장은 그 가운데서 두로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두로는 매우 큰 영향을 이스라엘에 미쳤기에 세 장에 걸쳐 예언이 언급됩니다.

이방 국가들의 심판에 대한 신학적 의미

구약 선지자들 중 남북 왕국 말기의 예언자들은 주로 이스라엘과 이방 국가들에 대한 심판을 주로 예언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이방 국가들에 대한 심판 예언이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방 국가들에 대한 심판을 통해 하나님만이 이 세계의 진정한 통치자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존재가 아니라 전우주를 통치하시는 분임을 드러내 줌과 동시에, 심판은 동시적이나 심판의 기준은 다르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이 기준이지만, 이방 국가들에 대한 심판의 기준은 일반적인 도덕률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태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적하는 것에 대한 보응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이방에 대한 심판은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는 소극적인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로 방해하는 세력에 대한 응징이라는 적극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두로에 대한 심판의 이유 역시 이스라엘과 관련되어 있다.
두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망을 보고 즐거워하였다.
그런데 암몬이 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인 몰락을 보고 기뻐하였다면, 두로는 예루살렘의 정치적, 경제적 몰락을 보고 기뻐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어 철저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도 서로간에 선의의 경쟁 의식을 갖는 것은 좋지만, 서로 시기하고 지나친 경쟁 의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 같은 행위는 두로와 같은 범죄를 행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시돈에 대한 심판.
에스겔 선지자는 시돈에 대한 심판을 기술함에 있어서 구체적인 예증 없이 간략한 진술만을 사용하였다. 이는 시돈의 잘못도 두로와 동일하여서 똑같은 내용을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시돈은 두로의 자매 도시로서 상호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고, 지리적으로도 지중해 연안에서 불과 20마일 정도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시돈은 두로처럼 다른 나라와 무역할 때 많은 불법을 자행했으며 여러 우상 중 아스다롯을 섬기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겔은 시돈에 대한 심판의 목적이 여호와를 계시하는 것임을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드러낸다. 사실 시돈은 두로와 마찬가지로 베니게 왕국의 도시로서 세계 적 명성을 누리고 있었지만 그들도 역시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임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또한 시돈에 대한 심판은 이스라엘 족속에 대한 긍휼의 표현이기도 하다.  



본장 후반부에는 모든 나라들이 벌을 받는 와중에서도 이스라엘의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약속한 땅은 취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으로 귀환하여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평안과 번영을 만끽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본토로 귀환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그 약속이 실행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고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해 언약에 충실한 자만이 축복을 받으므로, 항상 언약 속에 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로, 에돔, 암몬, 모압의 심판 예언(아모스 1:9-2:3)

두로의 심판(9-12)

두로 역시 심판받기에 마땅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중 제일 잘못한 일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맺었던 좋은 관계, 특히 솔로몬과 두로 왕 히람이 맺은 계약을 깨트린 것이었다(왕상 5:12).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고로 히람솔로몬이 친목하여 두 사람이 함께 약조를 맺었더라.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에돔에 팔아넘기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못된 짓을 한 민족이 심판을 면한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주님께서 지금 나를 위해 하시는 일들을 가끔이라도 생각하십니까?​

두로가 당할 심판

하나님은 두로가 심판받는 이유가 무엇이라 하십니까?

에스겔 26장 1,2절을 보십시오.
“1.열한째 해 어느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르기를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

두로가 심판당하는 이유는 두로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르기를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했기 때문입니다.
두로는 유다의 멸망을 자신의 충만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두로를 어떻게 심판하십니까?

에스겔 25장 3-6절을 보십시오.
“3.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두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여 바다가 그 파도를 굽이치게 함 같이 여러 민족들이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4.그들이 두로의 성벽을 무너뜨리며 그 망대를 헐 것이요 나도 티끌을 그 위에서 쓸어 버려 맨 바위가 되게 하며
5.바다 가운데에 그물 치는 곳이 되게 하리니 내가 말하였음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가 이방의 노략 거리가 될 것이요
6.들에 있는 그의 딸들은 칼에 죽으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나님은 여러 민족들이 와서 두로를 치게 합니다.
그들은 두로의 성벽을 무너뜨리며 그 망대를 헐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로에게서 티끌을 쓸어버려 맨 바위가 되게 하며 바다 가운데 그물치는 곳이 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통해 두로를 멸망시킵니다.

에스겔 26장 7-12절을 보십시오.

“7.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왕들 중의 왕 곧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으로 하여금 북쪽에서 말과 병거와 기병과 군대와 백성의 큰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두로를 치게 할 때에
8.그가 들에 있는 너의 딸들을 칼로 죽이고 너를 치려고 사다리를 세우며 토성을 쌓으며 방패를 갖출 것이며
9.공성퇴를 가지고 네 성을 치며 도끼로 망대를 찍을 것이며
10.말이 많으므로 그 티끌이 너를 가릴 것이며 사람이 무너진 성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이 그가 네 성문으로 들어갈 때에 그 기병과 수레와 병거의 소리로 말미암아 네 성곽이 진동할 것이며
11.그가 그 말굽으로 네 모든 거리를 밟을 것이며 칼로 네 백성을 죽일 것이며 네 견고한 석상을 땅에 엎드러뜨릴 것이며
12.네 재물을 빼앗을 것이며 네가 무역한 것을 노략할 것이며 네 성을 헐 것이며 네가 기뻐하는 집을 무너뜨릴 것이며 또 네 돌들과 네 재목과 네 흙을 다 물 가운데에 던질 것이라.”

하나님은 바벨론 느부갓네살을 보내어 두로를 치게 하십니다.
그들은 두로의 성을 멸망시키고, 두로의 재물을 빼앗을 것입니다.
무역한 것을 노략하며 그 성을 헐며, 그가 기뻐하는 집을 무너뜨리며, 돌들과 재목과 흙을 물 가운데 던질 것입니다.

에스겔 26장 13,14절을 보십시오.

“13.내가 네 노래 소리를 그치게 하며 네 수금 소리를 다시 들리지 않게 하고
14.너를 맨 바위가 되게 한즉 네가 그물 말리는 곳이 되고 다시는 건축되지 못하리니 나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두로를 다시 건축되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두로를 위해 애가를 지어부르라 하십니다.

에스겔 25장 15-18절을 보십시오.
“15.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두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가 엎드러지는 소리에 모든 섬이 진동하지 아니하겠느냐 곧 너희 가운데에 상한 자가 부르짖으며 죽임을 당할 때에라
16.그 때에 바다의 모든 왕이 그 보좌에서 내려 조복을 벗으며 수 놓은 옷을 버리고 떨림을 입듯 하고 땅에 앉아서 너로 말미암아 무시로 떨며 놀랄 것이며
17.그들이 너를 위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이르기를 항해자가 살았던 유명한 성읍이여 너와 너의 주민이 바다 가운데에 있어 견고하였도다 해변의 모든 주민을 두렵게 하였더니 어찌 그리 멸망하였는고
18.네가 무너지는 그날에 섬들이 진동할 것임이여 바다 가운데의 섬들이 네 결국을 보고 놀라리로다 하리라.”

두로가 엎드러질 것이며 바다의 모든 왕이 이를 인해 놀랄 것입니다. 그들은 두로를 위해 애가를 지어부를 것입니다.

두로가 패망하여 영원히 멸망당하고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십니다.

에스겔 26장 19-21절을 보십시오.
“19.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너를 주민이 없는 성읍과 같이 황폐한 성읍이 되게 하고 깊은 바다가 네 위에 오르게 하며 큰 물이 너를 덮게 할 때에
20.내가 너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내려가서 옛적 사람에게로 나아가게 하고 너를 그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땅 깊은 곳 예로부터 황폐한 곳에 살게 하리라 네가 다시는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 되지 못하리니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
21.내가 너를 패망하게 하여 다시 있지 못하게 하리니 사람이 비록 너를 찾으나 다시는 영원히 만나지 못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두로를 황폐하게 하여 다시는 사람이 거주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두로는 살아있는 자의 땅에서 영광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두로를 패망하여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며 사람이 두로를 찾으나 영원이 다시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두로에 대한 심판을 길게 말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두로를 심판하는 이유는 그들이 유다의 멸망을 기뻐하고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두로에 대한 심판은 암몬과 모압, 블레셋과 에돔에 대한 심판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곤경을 기뻐하고 이를 이용하는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편에 서야 합니다.
두로는 무역함으로 이 세상의 부를 축적하였기 때문에 두로에 대한 심판은 이 세상에서 부를 축적한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부유한 자를 공수로 보내시고 가난한 자들에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유한 자가 되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을 한 분만을 의지하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열방을 심판하시는 분이시며 모든 굽은 것을 펴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열방을 심판하시는 심판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모스 1:9-10 / 두로에 대한 심판(9-10절)
두로의 죄를 하나님꼐서 심판하실 것이다.

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나 주가 선고한다. 두로가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형제의 언약을 기억하지 않고 사로잡은 사람들을 모두 끌어다가, 에돔에 넘겨 주었기 때문이다.

10. 내가 두로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그러므로 내가 두로 성에 불을 보내겠다. 그 불이 요새들을 삼킬 것이다."





에스겔 25장
10-06-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암몬족속에게 이르기를(에스겔 25:2)


인자야 암몬 족속을 향하여 그들을 쳐서 예언하라 너는 암몬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성소를 더럽힐 때에 네가 그것을 대하여, 이스라엘 땅이 황무할 때에 네가 그것을 대하여, 유다 족속이 사로잡힐 때에 네가 그들을 대하여 이르기를 아하 좋다 하였도다.

2. "Son of man, set your face against the Ammonites and prophesy against them.
3. Say to them, 'Hear the word of the Sovereign LORD.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Because you said "Aha!" over my sanctuary when it was desecrated and over the land of Israel when it was laid waste and over the people of Judah when they went into exile,

에스겔서는 전체 내용을 세 단락으로 구분합니다.
1-24장. 이스라엘의 멸망
25-39장. 열방의 멸망
40-48장. 이스라엘의 회복과 새로운 성전

북 왕국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 제국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남은 남 왕국 유다마저 바벨론의 포로가 됩니다.
왜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들에 의해서 무너져야 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이와 같은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의도하는 목적을 따라 바르게 세워지기를 원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에스겔 25장에서는 암몬과 모압 그리고 에돔과 블레셋에 대한 심판을 예고합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이 먼저 징계를 받고 그 후에 그 주위 여러 나라들이 징계를 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최대한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기한에 그들이 돌아오지 않을 때는 강압적인 징계를 통하여 회복의 길을 열어갑니다.
따라서 아직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삶을 회복하지 않았다면 속히 그 길로 돌아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친 징계의 방법에 따라 돌아온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기질이기 때문입니다.

매를 맞은 후에 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을 반성하고 고치는 것보다는 매를 맞기 전에 먼저 깨닫고 바른 길로 돌아가는 것이 인격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길에 서 있습니까?
매를 맞아야 할 위태로운 길에 놓여 있습니까?
아니면 칭찬을 받을 선한 길을 걷고 있습니까?

믿음이란 나를 살필 줄 알고 다른 사람의 본이 되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오늘도 순전한 믿음으로 모두가 인정하고 칭송할 수 있는 진실되고 거룩한 길을 펼칠 수 있는 승리의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방 국가에 대한 심판이 이스라엘의 운명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과 아울러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전과정 속에서 이방 국가와 이스라엘이 서로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저자는 하나님이 전세계의 운명을 좌우하는 참된 통치자임을 보여 주고 있다.
암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1-7절)
모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8-11절)
에돔에 대한 심판을 묘사(12-14절)
블레셋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15-17절)

이방 나라들은 이스라엘이 처음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에 멸시하고 조롱했던 당사자들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들을 심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만방에 선포하는 것이다.


에스겔 1장부터 24장까지는 범죄한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심판과 회복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25장부터는 이스라엘과 유다 주변에 있으면서 여러 경로를 통해 이스라엘과 유다로 범죄하도록 미혹하고 그들을 괴롭히며 조롱한 이방 여러 나라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 기록됩니다.
25장에서는 압몬과 모압, 에돔, 그리고 블레셋에 대한 심판의 내용을 말씀합니다. 

12절에 '에돔이 유다 족속을 쳐서 원수를 갚았고' 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에돔이 이방인과 한 패가 되어 유다와 사마리아를 멸망시키는 데 동참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역사상 에돔은 사마리아를 멸망시킬 때에는 앗수르와 연합하고, 예루살렘을 침략할 시에는 바벨론과 동맹하였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그들이 형제국인 유다의 성읍을 훼파하고 그 백성들의 재물에까지 손을 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에돔의 침공 행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와 다름없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 역시도 사사로운 감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다른 성도를 해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암몬

창세기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두 딸들이 아버지를 역강간 해서 낳은 모압과 벤암미 중 벤암미를 시조로 하는 민족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두 민족을 까내리기 위해 써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신명기에서는 이들이 잠줌밈이라는 거인족을 멸하고 그들이 살던 땅에 자리잡았다고 나온다.
그리고 다른 아브라함 계통 민족과 마찬가지로 신에게서 정복이 허락되지 않아 이스라엘 인들은 그들을 그저 지나친다.

사사기 입다 시기에 이스라엘을 침범했다가 격퇴당했다.
다윗 시기에는 다른 이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통일 왕국에 정복 당했다.
솔로몬 시기에 '나아마'라는 암몬 여인이 후궁이 되어, 이스라엘 분열 후 남 유다 왕국 초대 임금인 르호보암을 낳았다.
이후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 및 주변국들과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아시리아바빌로니아에 함께 정복당했다. 고고학적으로는 북이스라엘이 망한 후 경제적·문화적으로 크게 융성하고, 남유다가 망할 때 경제적으로는 조금 더 번창했던 걸로 나온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횡액을 당했을 때 잘 나가게 되었다는 얘기. 다만 신바빌로니아에게 멸망당했을 때 큰 피해를 입었었으나, 이후로 정치적인 장벽이 없어졌기에 유다인들이 끌려가서 주인이 없어진 토지에 대거 침투해와서 남유다 영토에 꽤 많은 인구가 이주했던 걸로 분석된다.

그러나 일단 고고학적 조사 및 문헌학적 조사로 인해 나온 현재의 결론은, 모압·암몬·에돔 등이 실은 언어·문화·혈연적으로 이스라엘·유다 등과 그렇게 큰 차이가 없었다[1]는 것이며, 물론 종교적으로는 차이가 다른 분야보다는 컸지만 적어도 성경에서 묘사하는 수준보다 그 갭은 훨씬 덜했다는 게 중론이다. 보다 쉽게 얘기하자면, 한국사의 부여·고구려·마한·진한·변한 등 수준의 차이였다는 얘기. 유럽사에 비교하자면 이탈리아 반도 내의 라틴 계열 군소 국가, 발칸 반도 내 그리스 계열 도시 국가들 사이의 차이, 그 정도였다.

뒷시기에 나오는 또 다른 유명한 암몬 인은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 시절에 느헤미야를 열심히 중상모략해가며 그의 예루살렘 부흥을 방해하던 그 지역 본토 유지 도비야인데, 오늘날 이 도비야는 실제로는 유다 사람이었던 걸로 판명되었다. 다만 느헤미야가 그걸 몰라서 도비야를 시종일관 암몬 인이라고 적었던 건 아니었다. 이 부분은 느헤미야 참조.

이들 암몬 인들은 나름대로 유대인과는 구별되는 정체성을 갖고 존재했지만, 의외로 이들의 종말은 엉뚱한 곳에서 찾아오게 된다. 유다 민족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했던 셀레우코스 조 시리아에 대항해서 마카베오 가문이 치열하게 투쟁했었는데, 이 마카베오 가문이 마침내 승리를 거두고 하스몬 왕조를 세운 후 유대인들 자신이 시리아 당국에게 당했던 정책을 그대로 암몬 인들에게 적용하게 되었다. 즉, 종래의 신앙을 완전히 버리고 유대교로 개종하게 했다. 물론 거부하면 죽음…이긴 했는데 의외로 순순히 유대교로 개종해서 결국, 유대와 이스라엘에게 대항하여 적어도 천 년 정도는 보존했던 정체성을 이 시점에서 완전히 잃게 된다. 구약에서 끈질기게 등장하던 암몬이 신약에서 철저하게 자취를 감취었던 건 이것이 이유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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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압과 암몬 족속


신 23: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 뿐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모압과 암몬, 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을까?

그 대답은 그들의 조상이 누구이며, 그들이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에게 행한 짓을 보아야 한다.

1)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조상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이다는 것이다.

롯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가나안으로 올때부터 줄 곧 그와 함께 한 조카였다. 롯의 아비 하란이 일찍 죽자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거두어 친 아들처럼 양육했다(데라가 아브라함, 나홀, 하란을 낳았다). 흉년으로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갈 때도 롯은 함께 했다. 그는 늘 아브라함의 품 안에 거하는 피붙이 였다.

"롯도 함께 하여"(창 13:1).

애굽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던 롯이 여기서 다시 나타난다. 이는 아브람과의 언약 관계 속에서만 롯이 그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는 대목 이다. 이것은 그의 후손 암몬과 모압 족속 역시 항상 이스라엘과의 관계 하에서만 신정사에 그 모습을 나타낸 것과 같다(신23:3; 삿3;13,14; 왕하24;2).

2) 롯이 근친상간으로 낳은 자녀들
*창 19:36-38/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

술취함으로 인한 한순간의 실수가 당대 뿐 아니라 후대에 이르기 까지 두고 두고 롯의 생애 최대의 치욕으로 남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즉 (1) 모압('아버지로 말미암아'란 뜻)과 암몬('네 아비의 아들'이란 뜻)은 근친상간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조상 롯의 수치를 영원히 후세에 전하고 있으며 (2) 그 결과 롯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성경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신약에 얼핏 기록된(눅 17:28,29,32; 벧후 2:7,8) 그에 관한 이야기는 단지 경고를 하기 위한 의미만 담고 있을 뿐이다. 본 기사는 일부 자유주의 학자의 주장처럼 모압과 암몬 족속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우월성이나 혹은 증오를 나타내기 위하여 허위로 꾸며낸 기사가 아니라, 사실 그대로의 진실만을 구속사적 측에서서 진솔히 기록한 기사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도 바로 모압 여인 롯에게서 나왔으며(마 1:5,6), 뿐만 아니라 그의 혈통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나셨기 때문이다(눅 3:23-31).

• 오늘날의 모압과 암몬의 위치
*암몬의 수도인 랍바(삼하12:26), 랍바는 현재 요르단 수도 암만이다.

*모압의 수도는 구약의 길하레셋(사16:7.11)이다.
길하레셋은 아르논 남쪽 28.4㎞, 사해 동쪽 17.6㎞ 지점에 자리한 고대 모압의 수도로 현재의 케라크(Kerak)이다. 해발 933m 고원에 위치한 이곳은 주변의 언덕과 깊은 계곡들로 인해 천혜의 요새이다.

랍바와 길하레셋은 모두 오늘 날 요르단에 속해 있다.

3) 출애굽 당시의 모압과 암몬

모압의 죄

그들은 크게 두 가지 죄를 저질렀다. 모압왕 발락은 거짓선지자 발람을 매수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였다.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여인들을 이용해 이스라엘이 행음하게 만들었다.

*모압 귀족들이 일어나 발락에게로 가서 고하되 발람이 우리와 함께 오기를 거절하더이다(민 22:14)

*이스라엘은 광야 여행 중 싯딤에 머물 때 모압 여인들의 초청에 응해서 우상 제물을 먹고, 신들에 절하며, 행음까지 하였다(민 25:1-3).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미디안 적과 작당하여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케 하려 하였다. '발락'(Balak, '약탈자', '파괴 자'란 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진행하여 모압 평지에 진 쳤을 당시의 모압 왕이었다. 때에 발락은 이스라엘이 아모리 사람들에게 행한 모든 두려운 일들을 보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기 위해 당시 이방의 유명한 술사(術士) '발람'(Balaam)을 고용했었다(민 22:1-6).

한편 '발람'(Balaam)은 그 이름의 의미가 '탐닉하는 자', '멸망시키는 자'를 뜻하는데, 이러한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고자 했던 그의 행동과 잘 부합된다. 즉 그는 하나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탑욕에 눈이 어두워(벧후 2:1-22;계 2:14), 결국 발락의 제의를 받아들여 3번이나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였다(민 23:1-24:9). 이와갈이 발람이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하지 못하고 축복을 하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때문이었는데, 결국 이로 인해 발람의 저주를 통해 이스라엘을 패망시키려 한 모압 왕 발락의 계획을 좌절시켰던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르는 사이 그 막후에서 일어난 이 발람의 사건에까지 하나님께서 적극 간섭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주위의 온갖 사악한 세력들의 손으로 부터 건져 내었던 것이다.

암몬의 죄

암몬은 요건강 동편에 거주하였다(신 2:19). 그들은 이스라엘이 어려움에 처해 도움을 요청할 때 거절했다.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케 하려 하였으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너의 평생에 그들의 평안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찌니라"(신 23:4-6)

암몬은 미디안족속과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4) 가나안 정복 이후의 모압과 암몬
1) 모압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두 지파 반에게 주었던 요단 동편의 기업을 주었다(수 13:8-13 참조). 즉, 므낫세 반, 갓, 르우벤 지파에게 모압땅을 분깃으로 주었다.

모압과 암몬은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삿 3:13 Kor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2) 암몬
"암몬 자손의 땅 절반"이 갓자손에게 할당되었다(수 13: 25). 본래 암몬은 모압과 더불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예들인 관계로(창 19:36-38),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을 좇아 암몬의 땅을 결코 침범하지 않았다(신 2:19, 37).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게 말라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신 2: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암몬 자손의 땅 절반 가량이 갓 지파에게 할당된 것은 당시 암몬이 이 땅들을 시혼(Sihon)에게 빼앗겨 시혼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암몬은 블레셋과 엽합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과롭혔다(삿 10.7-9,17-1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정신차리도록 징계의 수단으로 사용하셨다.

*삿 10:7-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그 해부터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하니 요단 저편 길르앗 아모리 사람의 땅에 거한 이스라엘 자손이 십 팔년 동안 학대를 당하였고

이후에도 암몬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욕보였다.
*삼상 11:1-2 /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를 대하여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눈을 다 빼어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 삼하 10:1-4/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다윗이 가로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 아비가 내게 은총을 베푼것 같이 하리라 하고 그 신복들을 명하여 그 아비 죽은 것을 조상하라 하니라 다윗의 신복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 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그 주 하눈에게 고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 신복을 보내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복들을 잡아 그 수염 절반을 깎고 그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

*

솔로몬의 아들 여로보암 왕의 모친은 암몬여인이었다. 여로보암의 어리석은 통치와 정책 때문에 이스라렐은 두 조각이 난다.

왕상 14:21/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유다 왕이 되었으니 르호보암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사십일세라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서 빼신 성 예루살렘에서 십 칠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라 암몬 사람이더라

* 느헤미야를 괴롭히다
느 2:10/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느 2:19 Kor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비웃어 가로되 너희의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하기로

5. 모압과 암몬의 신들

모압의 우상, 그모스

그모스는 모압 민족의 수호신으로 태양의 신이자 전쟁의 신이다.
그리고 ' 그모스'(Chemosh)란 명칭은 '정복자'라는 뜻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이 그모스는 암몬의 신 몰륵과 쌍둥이 형제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우상을 섬기는 제사 의식은 매우 잔인하며 음란하였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그모스'는 그 양 옆에는 횃불이 불타고 있으며 손에는 창과 칼과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민 21:29; 삿 11:24 참조).

이스라엘이 그모스 우상숭배의 죄악에 빠진다.
*왕상 11:7/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이러한 죄악에는 솔로몬의 영향이 크다.
*왕상 11:1/ 솔로몬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암몬처럼 이스라엘은 모압 여인과 결혼하여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느 13.23-27).

선지자들이 모압의 멸망을 예언하였다(렘 48:1-47, 암 2.1-3 등).

2) 암몬의 신, 밀곰
밀곰은 암몬의 민족신으로 인신 제사로 유명하며 '몰록' 혹은 '몰렉'과 동일시 된다(7절). 그런데 '밀곰'은 히브리어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파생된 명칭이다(레18:21; 20:2 참조).

유아 인신 제사로 유명한 암몬 족속의 가증한 우상 '몰렉'(Molech)은 소머리 형상과 사람의 몸의 형상이 합쳐진 청동 우상으로서 가나안 땅에들어와 크게 확산된 우상이다. 따라서 후일 그곳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는데, 유다 왕국 후기에 이르러서는 선지자들의 주된 경고 대상이 되었다(사57:9;렘32:35). 이 몰렉 신은 두 팔을 앞으로 쭉 펴고 있는데, 이는 희생 제물로 바쳐진 아이를 받기 위한 것이다. 한편, 제의(祭義)시 유이를 몰렉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는 방법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살아있는 아이를 불에 달아오른 몰렉의 팔에 얹었다가 불타는 함정에 빠뜨리는 법, 둘째, 아이를 먼저 죽여서 몰렉에게 제물로주는 법. 세째, 아이를 불타고 있는 몰렉의 양 팔 사이로 지나게 하여 정화(淨化)시키는 법이다.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 우상 숭배자에 대한 공개 처형 방법이다. 돌로쳐죽이는 것은 히브리 사회에서 가장 극악한 죄에 대한 일종의 공개적 사형법으로서구약 시대 때 널리 유포(流布)된 형벌이다.그런데 그 형벌 집행은 범죄자와 지연, 학연, 혈연 혹은 증인 등 그범죄 유발 형태와 밀접히 연관된 사람들로 하여금 시행토록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공동체의 연대 책임성을 가르치고, 우상숭배의 가증함을 여러 사람에게 교훈하여 범죄 예방의 효과를 거두기 위함때문이었다(13:10).

특히 솔로몬은 세계 각처의 우상을 숭배했는데 그중 암몬의 신 밀곰도 있었다.

"왕상 11:5/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솔로몬은 암몬 여인 나아마와 결혼하였고 그녀가 솔로몬에게 낳아준 여로보암 솔론몬이 죽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왕상 14.21). 그의 어리석은 통치로 이스라엘은 둘로 나뉘어 북왕국과 분열하게 된다.

이후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암몬 연인들과 결혼하여 사회적인 문제가 된다(에스라 9.1,2; 느 13.23-27).

암몬의 멸망이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된다(렘 49.1-5 등).

6. 모압 여인 룻이 하나님의 총회에 들다

룻기의 주인공 룻이 모압여인 이었다.
그녀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국진히 섬겼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보아스와 결혼하여 다윗왕의 조상이 되었다.

하나님은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시는" 인자가 풍성하신 신이시다(출 34:7).


암몬 족은 누구인가요?

이스라엘 초기 역사를 보면 암몬 족속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이며, 어디서 온 것이며,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요? 암몬 족은 셈 족이며 이스라엘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스라엘의 친구보다는 적으로 여겨질 때가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이 암몬 족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서로 떠난 이후(창세기 13장) 롯은 소돔이라는 도시에 정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그들의 사악함으로 인해 멸하셨을 때 롯과 그의 딸들은 사해의 남쪽 끝에 있는 언덕으로 도망갔습니다. 롯의 딸들은 그들만이 이 땅의 유일한 생존자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아버지인 롯을 술 취하게 하여 아이를 출산하기 위한 목적으로 근친상간을 합니다(창세기 19:30-38). 그리하여 큰 딸은 아들을 낳아 모압(“아버지로부터”란 뜻)이라 부르고 작은 딸도 아들을 나아 벤암미(“내 근친의 아들”란 뜻)라고 이름 짓습니다. 벤암미의 후손인 암몬 족은 오늘날의 요르단 영토에 살던 유목 민족이었으며 암만이라 불리는 수도의 이름은 그 당시 거주하던 조상들의 이름을 반영한 것입니다.

모세의 때에 요르단 강 골짜기의 비옥한 평야를 점령한 자들은 아모리 족, 암몬 족과 모압 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떠날 때 암몬 족은 그들을 돕기를 거절했고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처벌을 내리셨습니다(신명기23:3-4). 그러나, 이후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에 도달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히지 말고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신명기2:19)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지파 중 갓, 르우벤, 므낫세의 반은 암몬 족의 땅과 경계선에 있는 영토를 가져갔습니다.

암몬 족은 밀곰과 몰렉 신을 섬긴 이방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거짓 신을 섬기게 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이들과의 결혼을 금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이를 어기고 암몬 사람 나아마(열왕기상 14:21) 뿐만 아니라 다른 이방인 여성들과 결혼하여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대로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열왕기상11:1-8). 몰렉은 소의 머리를 가진 불의 신이었습니다. 몰렉은 제물로 바쳐지는 아이들을 받기 위해 팔을 뻗은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만큼이나 암몬 족은 잔인했습니다. 암몬 사람 나하스는 언약을 맺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사무엘상 11:2) 이스라엘 사람들의 오른 눈을 다 빼야 언약하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아모스 1:13에 의하면 그들은 자신이 점령한 땅에 있는 임신한 여인들의 배를 갈랐습니다.

사울 왕의 지휘 아래 이스라엘은 암몬 족과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여 그들을 종속국으로 만듭니다. 다윗은 이를 이어 암몬을 통치했고 향후 수도를 포위하여 통치를 강화합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분단된 이후 암몬은 이스라엘의 대적들과 동맹을 맺기 시작합니다. 암몬 부족은 기원전 7세기에 통치권을 어느 정도 되찾지만 그로부터 약 100년 후 느부갓네살 왕에게 점령당합니다. 암몬 사람 도비야는(느헤미야2:19) 페르시아 통치 하에 그 지역의 통치자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주민은 암몬 사람, 아랍 사람과 기타 다른 민족들로 섞여있었습니다. 신약 시대에 유대인들이 그곳에 정착했고 그곳은 페레아로 알려졌습니다. 암몬 사람들을 독립적인 부족으로 언급한 마지막 사람은 2세기 때 순교자였던 유스티누스였습니다. 그는 암몬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고 말했습니다. 암몬 사람들은 로마 시대 어느 시점에 아랍 사회에 흡수된 것으로 보입니다.


모압 족속은 누구인가요?

모압 사람들은 롯이 맏딸과 근친상간으로 낳게 된 모압의 후손입니다(창세기19:37). 사해의 남동쪽 경계에 위치하며 이 족속이 기원한 곳인 소알로부터 점차적으로 요단 동쪽까지 확산되었습니다. 출애굽기 직전, 호전적인 아모리 족속이 시혼 왕의 지휘 아래 요단 강을 건너 모압 사람들을 아르논 강 골짜기와 얍복 강 사이의 지역에서 몰아내고 점령하여 그들의 수도 시혼을 세웁니다. 모압 족속은 아르논 골짜기의 남쪽 영토에 갇히게 됩니다(민수기21:26-30).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모압을 통과하진 않았으나 “광야”를 통해 동쪽으로, 결국 아르논 북쪽으로 모압에 도달합니다. 모압 사람들은 무척 두려워했고 모압 왕 발락은 미디안 족속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민수기22:2-4). 이때 발람이 발락을 방문하게 됩니다(민수기22:2-6).

아모리 족속의 소유였던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의 어린 자손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야영합니다(민수기 22:1; 여호수아 13:32). 역대 가장 강력한 선지자였던 모세가 약속의 땅을 내려다 봤던 곳이 바로 비스가 산 꼭대기입니다. 모세가 홀로 죽음을 맞이한 곳이 바로 이곳 네보입니다. 벳브올 산 맞은편에 있는 바로 이 골짜기에서 모세가 장사됩니다(신명기 34:5-6).

예루살렘의 독일 선교사 클레인은 1868년 모압 왕 메사의 업적을 새긴 현무암 돌(메사 석비)을 디본에서 발견합니다. 비문은 히브리어와 페니키아어로 34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메사 석비는 기원전 900년 경에 메사가 자신의 업적을 기록하고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비문에는 오므리와의 전쟁, 그가 지은 공공 건물들, 호로나임 사람들과의 전쟁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열왕기하 3:4-27에 기록된 내용들을 보완 또는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히브리 유물로써도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알파벳 문자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글이라는 측면에서 언어학적 중요성도 상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압 자손 중 가장 중요한 성경 속 인물은 아마도 룻일 것입니다. 그녀는 모압의 자손이나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을 통해 이스라엘과 유전적으로 연결되어있습니다(룻기1:4; 창세기11:31;19:37). 룻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방향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길 수 있으신지를 보여주시며, 그분의 모든 자녀에게 그러하시듯 룻의 삶에 대한 그분의 완벽한 계획을 이루시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룻이 비록 모압의 이방인 출신이지만 룻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산 증인이 되었습니다. 모압 사람인 룻은 예수님의 계보에 언급된 몇 안되는 여성 중 한 명입니다(마태복음 1:5).

에돔 사람은 누구입니까?

에돔 사람들은 이삭의 맏아들이자 야곱의 쌍동이 형인 에서의 후손입니다.
리브가의 뱃속에서 에서와 야곱이 서로 싸웠습니다.
주님께서는 엄마인 리브가에게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25:23).
성인이 된 에서는 경솔하게도 팥죽을 먹기 위해 야곱에게 자신의 장자권을 팔아 버립니다(창세기 25:30-34).
그리고는 그 후부터 그의 동생 야곱을 증오합니다.
에서는 에돔 사람의 아버지가 되고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가 됩니다.
그리고 두 나라는 끝없이 싸웁니다.
성경에서 “세일”(여호수아  24:4), “보스라”(이사야 63:1)와 “셀라” (열왕기하 14:7)는 에돔 땅과 수도를 말합니다.
셀라는 오늘날 페트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에돔”이라는 이름은 “붉은”을 뜻하는 셈 족 언어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또한 사해의 남쪽을 에돔이라 부른 이유는 지형학적으로 붉은 사암이 너무나 두드러졌기 때문입니다.
장자권을 밭죽과 맞바꾼 바람에 에서는 에돔이라고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가족을 데리고 같은 이름의 구릉지대로 이사를 갑니다.
창세기 36장은 에돔 사람들의 초기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아직 없을 때에 왕들이 차례로 에돔 땅을 다스렸습니다(창세기 36:31).
에돔 사람들의 종교는 풍요의 신을 섬긴 다른 이방 족속들과 비슷했습니다.
에서의 후손들은 결국 남쪽 땅을 점령하고 농사와 무역으로 생계를 꾸립니다.
고대 무역로 중 하나인 임금님의 땅(민수기  20:17)은 에돔을 통과했으며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당시 그 통로를 이용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강제로 거부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에돔 족속과 가까운 친척이었으므로 에돔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되었습니다(신명기 23:7).
그러나 에돔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했고 그로 인해 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사울 왕이 에돔과 전쟁을 치를 때 다윗이 그들을 물리치고 에돔에 군사기지를 세웁니다.
에돔 영토를 통치하면서 솔로몬 때 이스라엘은 홍해에 에시온 게벨 항구를 건설하여 많은 원정을 보냈습니다.
솔로몬의 통치 이후 에돔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잠시 자유를 누리다가 티글라스-필레세르 3 세가 이끄는 아시리아인들에 의해 진압당했습니다.

마카베오 전쟁 동안 에돔 사람들은 유대인에게 토벌 당하여 유대교로 강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에돔인은 유대인에 대한 오래된 미움을 계속 갖고 있었습니다.
헬라어가 공용어가 되었을 때 에돔 사람들은 이두메 사람으로 불리었습니다.
로마제국의 탄생과 함께 유대교로 개종한 한 이두메 사람이 유대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이두메 사람이 바로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에 학살을 명령한 폭군 헤롯 대왕입니다(마태복음 2:16-18).

헤롯이 사망한 이후 이두메 사람들은 서서히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35장에서 이미 에돔 사람들의 파멸을 예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의 기업이 황폐하므로 네가 즐거워한 것 같이 내가 너를 황폐하게 하리라 세일 산아 너와 에돔 온 땅이 황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무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에스겔  35:15).

이스라엘이 에돔보다 강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니, 유대인들을 지배하려는 지속적인 에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하신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는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


블레셋 족속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블레셋 사람은 공격적이고 전쟁을 도발하는 사람들로 지중해와 요르단 강 사이의 팔레스타인의 서남부 지역에서 거주했습니다.
블레셋이란 이름은 히브리어 “필리스티아(Philistia. 속물)”에서 기인하며 헬라어 표현으로 palaistinei가 되어 현재의 “팔레스타인(Palestine)”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성경의 각 족속의 목록에 가장 먼저 기록된 족속입니다.
각 족속의 목록은 노아의 후손인 일곱 족속을 창시한 족장들의 목록입니다(창세기 10:14).

블레셋 사람들은 크레타 섬의 히브리어 이름인 갑돌과 에게해 지역에서 기인하였습니다(아모스 9:7; 예레미야 47:4).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들은 가자 근처의 지중해 연안으로 이주합니다.
그들의 해양사로 인해 블레셋 사람들은 종종 “바닷 사람들”로 연관됩니다.
성경에 의하면 기원전 2000년에 블레셋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접촉합니다(창세기 21:32, 34;  26:1, 8).

이삭과 블레셋 사람들의 인연 이후에는(창세기 26:18),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후 곧 출애굽기에서 지나가는 말로 언급됩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출애굽기 13:17).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이란 이후 비아 마리스, 또는 “바다의 길”로 알려진 길이며, 고대 이스라엘의 3대 주요 무역로 중 하나였습니다. 이 해안도로는 가나안과 시리아와 그 위쪽을 나일강 델타와 연결하여 서남 아시아의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연결합니다.

구약성경은 기원전 13세기 경, 즉 사무엘과 삼손의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내륙에서 가나안의 해안으로 이주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문명화되어 다섯 개 도시인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가드, 에그론을 만듭니다(여호수아 13:3).
이 도시들은 각 “왕” 또는 “군주”(히브리어로 “세렌”이며 “폭군”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에 의해 통치되었습니다.
이 왕들은 동등한 연합 관계를 맺었습니다.
각 왕은 가드의 왕 아기스가 다윗과 거래했을 때와 같이 도시에 대한 자주적 통치권을 얻었습니다(사무엘상 27:5-7).
그러나 국가적 위기에 처했을 때는 함께 협력했습니다(사사기 16:5).

맨 처음부터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동맹군 아니면 숙적이었습니다.
삼손과(사사기 13:1; 14:1) 사무엘(사무엘상 4:1), 사울(사무엘상 13:4), 다윗(사무엘상 17:23)의 삶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사용한 청동보다 우수한 철을 혁신적으로 사용해 무기와 기구들을 만들었습니다.
기원전 1050-1010년 사울의 때마저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철 기구를 갈거나 수리하는 데 블레셋 사람들에게 의지해야 했습니다(사무엘상 13:19-21).
더 발전된 무기와 공격적인 군사 정책으로 블레셋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의 국가로써의 발전을 훼방했습니다.
근 200년간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히고 억압하고 종종 이스라엘 영토를 침략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블레셋의 엄청난 군사력을 감당하기 힘들어했습니다.
사무엘, 그 후에는 다윗이 하나님의 인도로 블레셋을 무찌를 수 있게 해주셨을 때에야 그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사무엘상 7:12-14; 사무엘하 5:22-25).

구약성경은 블레셋이 아스다롯, 다곤, 바알세붑, 이 세 가지 신을 모셨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신들은 다양한 도시에 신전을 갖고 있었습니다(사사기 16:23; 사무엘상 31:10; 열왕기하 1:2).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블레셋의 군사들은 전쟁을 할 때 자신이 섬기는 신의 형상을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사무엘하 5:21).
반면, 이스라엘의 언약궤의 힘을 믿는 미신적인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사무엘상 5:1-12).

블레셋 사람들은 술, 특히 맥주를 생산하고 마시기 좋아하는 사람들로 유명했습니다.
고대 블레셋 사람들의 폐허에는 수많은 맥주와 포도주 양조장들, 맥주잔과 그 외 술을 담는 그릇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사사기에 의하면 삼손의 결혼식 축제에서 일주일 간 술잔치를 벌이는 블레셋의 관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사기에서 잔치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미스테(misteh)의 뜻은 “술잔치”입니다.

מִשְׁתֶּה 스트롱번호 4961

1. 잔치.  2. 연회. 3. 향연
발음 / 미스테[ mishteh ]
어원 / 835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잔치(단 5:10).
구약 성경 / 1회 사용

이스라엘 민족들이 블레셋 사람들을 종종 “할례받지 않은 자들”이라고 부르는데(사사기 15:18; 사무엘상 14:6; 사무엘하 1:20),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악한 영향을 주는 피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블레셋이라는 단어는 교양 없고 둔한 사람들에 대한 별칭으로 쓰입니다.
실제로는 블레셋의 역사는 세련되지 못하거나 교양 없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진화된 바다 사람들로 몇 세대 동안이나 이스라엘보다 몇 년간 앞섰습니다.

예레미야 47장을 제외하고는 블레셋에 대해 예언한 내용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결국 블레셋은 가나안 문화권으로 흡수됩니다.
결국, 그들은 성경의 기록과 역사에서 사라졌고,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만 남아 그들의 존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http://gyusikjung.blogspot.com/2021/03/25.html


에스겔 25장 / 암몬, 모압, 에돔, 블레셋에 대한 심판 예언



더럽혀진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36:23)

하나님의 심판(1-24장) - 하나님의 영광 상실

소명

(1-3장)

하나님 보좌의 환상(1장)

에스겔의 부르심(2,3장)

유다에

대한 심판

(4-24장)

유다의 심판에 관한 상징적 행동(4-7장)

성전 환상(1)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심(8-11장)

유다에 대한 심판 경고와 이유(12-24장)

하나님의 회복(25-48장) - 하나님의 영광 회복

열방에

대한 심판

(25-32장)

두로와 열국에

대한 심판

(25-28장)

암몬, 모압, 에돔, 블레셋에 대한 심판(25장)

두로에 대한 심판(26장)

두로에 대한 애가(27장)

두로와 시돈이 받을 심판(28장)

애굽에 대한 심판

(29-32장)

애굽이 받을 심판(29,30장)

애굽의 영광과 교만이 폐함(31,32장)

이스라엘

회복

(33-48장)

회복의 소망

(33-39장)

죄에 대한 심판과 예루살렘의 함락(33장)

거짓 목자와 참된 목자(34장)

세일 산과 에돔의 황폐함(35장)

거룩한 이름을 위한 이스라엘의 회복(36장)

이스라엘의 회복과 통일에 대한 환상(37장)

마른 뼈 환상

곡에 대한 심판과 멸망(38,39장)

성전 환상(2)

영원한 성전(새 성전)

(40-48장)

이상 중에 본 성읍의 형상(40장)

새로운 성전의 구조(41,42장)

성전에 임한 여호와의 영광(43장)

제사장의 직분(44장)

거룩한 구역과 지킬 절기, 제사(45,46장)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47장)

이스라엘 지파의 기업(48장)


에스겔 1-24장은 하나님의 심판 -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난 이야기입니다. 오늘부터 읽을 에스겔 25-48장은 하나님의 회복 -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는 이야기, 하나님께서 다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오시는 이야기입니다.

@ 에스겔서 한눈에 보기

하나님의 심판(1-24장) - 하나님의 영광 상실

소명(1-3장)

1-3장

에스겔의 소명과 임무

 유다에 대한 심판

(4-24장)

4-7장

유다의 심판에 관한 상징적 행동들

8-11장

성전 환상(1)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심

12-24장

유다에 대한 심판 경고와 이유

하나님의 회복(25-48장) - 하나님의 영광 회복

열방에 대한 심판

(25-32장)

25-28장

두로와 열국에 대한 심판

29-32장

애굽에 대한 심판

이스라엘 회복

(33-48장)

33-39장

회복의 소망

40-48장

성전 환상(2) 영원한 성전/ 새 성전

 

에스겔 25-32장은 여호와께서 열방을 심판하시는 내용인데, 에스겔 25-28장은 하나님께서 암몬, 모압, 에돔, 블레셋과 두로를 심판하실 거라는 말씀이고, 에스겔 29-32장은 하나님께서 애굽을 심판하실 거라는 말씀입니다. 

열방에 대한 심판(25-32장)

25장

열국(암몬, 모압, 에돔, 블레셋)에 대한 심판 예언


에스겔 25장은 여호와께서 열방을 심판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에스겔 25장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열방은 암몬, 모압, 에돔, 블레셋입니다.

에스겔 25:1-7 /  암몬에 대한 심판 예언

“사람아, 암몬 자손이 있는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그들을 규탄하는 예언을 하여라. 너는 암몬 자손에게 전하여라. ‘그들에게 나 주 하나님의 말을 들으라고 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 성전이 더럽혀졌을 때에, 너는 그것을 보고 잘 되었다고 하였고, 이스라엘 땅이 황폐하게 되었을 때에,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잘 되었다고 하였고, 유다 백성이 포로로 잡혀 끌려갔을 때에도, 그들을 보고 잘 되었다고 소리쳤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동방 사람들의 소유로 넘겨 주겠다. 그들이 네 땅에 들어와서 진을 치고, 네 땅 가운데 자기들이 살 장막을 칠 것이다. 그들이 네 땅에서 나는 열매를 먹고, 네 땅에서 나는 우유를 마실 것이다. 내가 랍바를 낙타의 우리로 만들고, 암몬 족속이 사는 곳을 양 떼가 눕는 곳으로 만들겠다. 그 때에야 너희가 비로소, 내가 주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이스라엘 땅이 황폐 해졌을 때에, 너는 이것을 고소하게 여겨,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좋아하였고, 경멸에 찬 마음으로 기뻐하였으므로, 내가 내 손을 뻗쳐서 너를 치고, 네가 여러 민족에게 약탈을 당하도록 너를 넘겨 주겠다. 내가 이렇게 너를 만민 가운데서 끊어 버리며, 여러 나라 가운데서 너를 망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망하게 놓아 두겠다. 그 때에야 너는 비로소,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에스겔 25:8-11 / 모압에 대한 심판 예언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모압이 말하기를, 유다 족속도 모든 이방 백성이나 다름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내가 모압의 국경지역에 있는 성읍들, 곧 그 나라의 자랑인 벳여시못과 바알므온과 기랴다임이 적의 공격을 받도록, 내가 허용하겠다. 나는 암몬 족속과 함께 모압도 동방 사람들의 소유로 넘겨 주어, 이방 백성 가운데서 암몬 족속이 다시는 기억되지 않게 하겠다. 이렇게 내가 모압을 심판하면, 그 때에야 그들이 비로소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에스겔 25:12-14 /  에돔에 대한 심판 예언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에돔이 지나친 복수심을 품고 유다 족속을 괴롭히며, 그들에게 지나치게 보복함으로써 큰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손을 뻗쳐서 에돔을 치고, 그 땅에서 사람과 짐승을 없애 버리며, 그 땅을 데만에서부터 드단에 이르기까지 황무지로 만들어 버리겠고, 백성은 모두 전화를 입고 죽을 것이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손으로 에돔에게 원수를 갚겠다. 그들이 내 노여움과 분노에 따라서 보복하면, 그 때에야 에돔이 비로소, 내가 보복하였음을 알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에스겔 25:15-17 /  블레셋에 대한 심판 예언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블레셋 사람이 옛날부터 품어 온 원한으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고, 복수심에 불타서, 마음속에 앙심을 품고, 지나치게 보복하였다. 

그러므로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손을 펴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렛 사람들을 없애 버리며, 바닷가에 살아남은 사람들까지도 멸망시키겠다. 내가 노하여 무섭게 벌하며 그들에게 크게 보복하겠다. 내가 그들에게 나의 원한을 갚으면, 그 때에야 그들은 비로소,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에스겔 24장
10-05-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녹슨 가마(에스겔 24:6)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피 흘린 성읍, 녹슨 가마 곧 그 속의 녹을 없이 하지 아니한 가마여 화 있을찐저 제비 뽑을 것도 없이 그 덩이를 일일이 꺼낼찌어다.
'For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 'Woe to the city of bloodshed, to the pot now encrusted, whose deposit will not go away! Empty it piece by piece without casting lots for them.

rusty kiln
NIV / the pot now encrusted
NASB / the pot in which there is rust
KJV / the pot whose scum

시르 아쉘 헬아타(סִיר אֲשֶׁר חֶלְאָתָה)

가마(834) 아쉐르(’asher) אֲשֶׁר 

1. 민 22:6.  2. 관계대명사 앞에 전치사가 붙을 경우 대명사가 생략된 것으로 볼 수 있다. 3. לַאֲשֶׁר
발음 / 아쉐르[ ’asher ]
관련 성경 / 말미암아(전 3:9), 일반(전 9:2, 사 24:2), 여전히(사 29:8), 어떻게(창 30:29, 삼하 19:35), 무슨(창 38:18), 누구든지(출 32:33).구약 성경 / 5495회 사용

가마(5518) 시르(çîyr) סִיר 

1. 주전자.   2. 복수 סִירוֹת 왕상 7:45.  3. 복수 סִירִים
발음 / 시르[ çîyr ]
어원 / 혼성 ‘끓어오르다’는 뜻의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마(출 16:3, 시 58:9, 겔 11:11), 통(출 27:3, 38:3, 시 60:8), 솥(왕상 7:45, 대하 4:16, 슥 14:20), 가시나무(전 7:6, 사 34:13), 가시(호 2:6),낚시(암 4:2), 가시덤불(나 1:10).
구약 성경 / 29회 사용


녹슨(2457) 헤라(chelʼâh) חֶלְאָה
발음 / 헤라[ chelʼâh ]
어원 / 245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녹(겔 24:6, 11, 12). [형] 녹슨(겔 24:6).
구약 성경 / 5회 사용


에스겔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기대도 없고 미래도 소망도 없는 매일의 삶을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몸만 노예가 아니라 생각도 신앙도 노예화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 있는 선지자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말씀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선지자는 미리 아는 사람입니다.
선견자는 미리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먼저 말씀을 받은 사람입니다.

포로가 된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미래에 대한 소망의 눈을 열게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70년 후에 반드시 돌아갈 것이라고 합니다. 
비록 지금은 시련을 겪고 있지만 너희는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노예로 살아도 너는 선민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왜 이렇게 하나님의 선민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야 했을까요?
그 이유를 끓는 가마로 비유합니다.

24:1- 14. 고기를 삶는 가마의 비유로 예루살렘의 심판을 예언
24:15-24. 에스겔의 부인의 죽음에 대한 표징
24:25-27. 선지자의 말을 기꺼이 듣는 청중들에 대한 표징

에스겔 22장에서는 예루살렘 거민들의 죄상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23장에서는 사마리아보다 더 범죄한 예루살렘의 우상 숭배와 강대국 숭배의 실상을 폭로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죄상을 근거로 하여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외 없이 철저하게 진멸될 것을 두 개의 비유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자신의 아내의 죽음을 통하여 예루살렘의 멸망을 비참하게 묘사합니다. 
이 비유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나 하나님께 극도의 슬픔을 가져다 주는 사건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여기서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아내는 예루살렘을 각각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장례 의식까지도 상세하게 언급한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임박해 있음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에스겔이 아내의 죽음을 보면서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한다고 언급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도 어떠한 대책도 마련할 수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이루어지며, 어떠한 인간적인 노력이나 수고로도 결코 막아낼 수 없음을 말합니다.  

에스겔의 아내의 죽음이 시사하는 교훈은 개인이든 국가든 모두 종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진 아내의 돌연한 죽음은 에스겔로 하여금 인생에 대해 다시 한번 숙고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 사실을 통해서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부름 앞에 어느 때고 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 세상 모든 것의 종말이 좌우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적 수단으로 바꾸어 보려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 명의 시험관 / 감독 교수와 하나님

미국의 밴더빌트 대학(Vanderbilt University)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매디슨 새럿이란 교수가 있었는데, 그는 아주 존경받는 경건한 크리스천 교수였습니다.

그는 강의를 시작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었는데, 특히 시험을 칠 때는 어김없이 이 말을 함으로써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시험 감독관은 두 분입니다.
나 매디슨 교수와 함께 시험을 감독하실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이 두 분을 다 의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두 가지 시험을 치르는 것입니다.
하나는 수학 시험이고 또 하나는 정직이라는 시험입니다.
여러분은 수학 시험보다도 정직이라는 시험에 패스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직한 인생, 이것은 인생 전체를 살아가는 여러분의 중요한 테스트가 되기 때문입니다.”

밴더빌트 대학(Vanderbilt University)
미국 남부 테네시주 내슈빌에 위치한 최상위권 명문사립대학교이다.
1873년 해운업계의 재벌 코넬리어스 밴더빌트가 설립했다.


에스겔 23장
10-04-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홀라와 오홀리바(에스겔 23:4)


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
The older was named Oholah, and her sister was Oholibah. They were mine and gave birth to sons and daughters. Oholah is Samaria, and Oholibah is Jerusalem.

오홀라(Oholah. אָהֳלָה)와 오홀리바(Oholibah. אָהֳלִיבָה)
오홀라는 사마리아를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오홀라는 '장막을 가진 여인'이란 뜻이며, 오홀리바는 '그녀 안에 있는 나의 장막'이란 뜻입니다.
장막이란 하나님의 성소를 가리키는 곳으로 본문에서는 우상을 숭배하려고 세운 처소를 말합니다.

오홀라는 북이스라엘 왕국을 상징합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의하여 무너졌습니다(BC 722)

오홀리바는 남 왕국 유다를 상징합니다.
남 왕국 유다는 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무너졌습니다(BC 586)

애굽에서 나온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지나 약속의 땅에 정착하여 하나님을 대신 할 왕을 요구하므로 선지자 사무엘은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는데 왜 왕을 요구하느냐 하며 백성들을 깨우쳤습니다.
그러나 끈질긴 백성들의 요구에 하나님은 나라를 세우도록 허락하셨고 그 나라가 통일 이스라엘 왕국으로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을 거쳐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이렇게 분단된 나라가 결국 모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우상숭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상 숭배가 그토록 무서운 죄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구약의 교훈에서 우상 숭배가 무서운 죄악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이란 무엇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 중심
둘째는 예수님 중심
셋째는 성령님 중심
넷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홀라...오홀리바

- '오홀라'는 '장막을 가진 여인'이란 뜻이며, '오홀리바'는 '그녀안에 있는 나의 장막'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장막'이란 구약에서 하나님의 성소를 가라키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Eichrodt).
그런데 여기서는 우상을 숭배하기 위하여 세운 처소라는 뜻을 함축한다. 한편, 에발트(Ewald)는 그 두 이름과 관련하여 언급하기를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형제들 또는 자매들이 서로 유사한 이름을 갖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 이는 이스라엘 족속들이 하나님과 언약함으로 아주 밀접하고 불가분의 관계, 즉 통치하시는 하나님과 통치를 받는 백성들 간의 관계를 맺어 이 관계 속에서 그의 자손들을 낳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였음을 암시한다(20:7, 20).

특히 여기서 북왕국의 사마리아를 나타내는 오홀라가 하나님께 속하여 자녀를 낳았다고 언급한 것은 북왕국이 남왕국과 갈라진 후 시종 일관 우상 숭배를 비롯한 범죄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들을 당신의 언약 백성으로 여기시고 계심을 잘 보여준다.

사마리아

- 사마리아는 예루살렘 북방 56km, 지중해에서 내륙으로 35km 들어간 곳으로서 91m 가량의 높은 구릉 지역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남북 왕국으로 갈라지기 전부터 존재했던 성읍 지역으로 보이나(왕상 13:32), 북왕국 오므리 왕에 의해 본격적으로 건설되고(왕상 16:23, 24)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해졌으며 북왕국이 멸망당할 때(B.C. 722)까지 융성했다.

예루살렘

- 사마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대표한다면 예루살렘은 남왕국 유다를 대표한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죄와 심판을 말한 음부의 비유

1-4. 두 음부 자매.
5-10. 언니 오홀라(사마리아)의 음행과 그 형벌.
11-35. 동생 오홀리바(예루살렘)의 음행과 그 형벌.
36-49. 그들의 죄를 책망하여, 그 심판을 선언하다.

두 음녀
  
본장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죄를 두 여인의 행음 사건으로 비유하고 있다.
에스겔은 행음 사건을 소재로 채택하여 이스라엘의 죄를 묘사함으로써 그들의 범죄가 얼마나 더럽고 수치스러운 범죄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비유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간의 관계가 신랑과 신부의 관계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역을 일삼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행음하는 여인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에스겔은 비유를 통하여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우상 숭배와 배교로 물들었으며, 그로 인해 심판이 필연적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특히 남유다는 북왕국의 멸망의 현장을 목격하고서도 동일한 전철을 밟았다는 점에서 음행의 정도 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본장은 두 여인의
정체를 밝히는 부분(1-4절)
사마리아의 행음을 밝히는 부분(5-10절)
예루살렘의 행음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11-35절)
행음에 대한 심판을 진술하고 있는 부분(36-49절)  


솔로몬 이후로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갈라졌습니다.
하나는 북이스라엘이고 다른 하나는 남유다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하였고 남유다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나라는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두 나라가 하나같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악의 길을 걸었습니다.
본장은 이 악한 두 나라를 음녀 자매로 비유하여 그들의 죄악을 드러내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장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구체적이면서 사실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 본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비유적인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는 것은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죄악의 나열보다 그 죄악이 가져다 준 신학적인 의미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장에서 '한 어미'는 이스라엘이 연합된 하나의 국가였음 을 밝히는 비유이다.
그리고 북방 왕국은 사마리아로 통칭되었고, 남방 왕국은 예루살렘으로 통칭되었듯이 본장에서의 '오홀라'는 사마리아로,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으로 그 정체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오홀라와 오홀리바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 동기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이스라엘의 총체적인 범죄의 근원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여기서 '오홀라'의 문자적인 의미는 '그녀의 장막'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장막이 아니고 자기가 제마음대로 만든 장막인 것이다.

오홀리바의 문자적인 의미는 '나의 장막이 그녀에게 있다'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장소가 모두 이스라엘 죄악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을 중점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죄악이 그들의 역사 초기부터 저질러졌고 계속해서 반역이 자행되었음을 의미해 준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하여 자신을 알리신다.
이스라엘이 열방을 의지했던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영적인 음행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순히 징계만을 위한 벌을 내리시지 않고, 심판을 통하여 당신을 계시하기를 원하신다.
마치 출애굽의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이 구원의 하나님임을 드러내셨던 것처럼 구원과 심판의 주관자임을 명백히 하신다.
그러므로 심판을 예언한 후 마지막으로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심판을 통해서도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심판 속에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음행(에스겔 23:1-21)

23장 요약

16장과 마찬가지로 비유로써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지적하고 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목격한 유다는 마땅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에 하나님은 유다 역시 북 이스라엘처럼 멸망당할 것임을 경고하셨다.

​23:1-49

23장의 내용은 앞장(21-22장)을 더 확대한 것이며, 16장에서처럼 풍자적인 수사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16장이 주로 이스라엘의 역사적 맥락에서,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태도에 관하여 금하고 있는 반면, 본장에서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죄악상을 여인의 행음에 비유하여 포괄적인 방법으로 서술하고 있다.

​23:5-21. 유다의 역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반항하는 역사였다.

북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이방을 따라 그들과 동맹을 맺었으며, 종교적으로는 이방의 우상들을 들여와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런 행위를 자행하였다.
곧 그들은 한때 앗수르를 의지하였으며(왕하 15:19 ; 호 5:13 ; 7:11 ; 8:9 ; 12:1),
때로는 애굽과 동맹을 맺어 앗수르의 멍에를 벗어 버리려고 하였다(왕하 17:4 ; 호 7:11 ; 12:1).

한편 유다는 북 이스라엘이 받은 징계를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마리아보다 더욱 심하게 이방과 관계를 맺었다.
곧 앗수르는 물론 바벨론, 애굽과도 왕래하며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왕하 16:8 ; 24:1 ; 사 7:7-17 ; 렘 37:5).
이러한 정치적 책략은 쉽사리 이방 종교를 수입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위의 사건들의 실상은 매력적인 이방인과 간음을 행하는 여인의 연애 사실로 비유되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23:22-35.  유다가 징계를 받는 이유는 북 이스라엘보다 더 악했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그분의 사랑을 거절하며, 자신의 사리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유다에 대한 징벌의 결과 북 이스라엘처럼 처참한 파멸을 맞이할 것이다. ​

23:36-49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죄악과 그들에 대한 징계를 다시 정리해서, 그들의 죄악과 징벌의 유사성을 논하고 있다.
곧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였으며(36-39절), 하나님이 아닌 이방 나라에 자신들을 의탁하려 하였으므로(40-42절), 그들은 완전히 패망하게 될 것이다(43-49절).

- 출처 /  아가페 큰글성경

​23장의 세 문단에서는 남북 선민의 동반 심판 비유를 보도한다. 

​좀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전반부 1-21절에서는 예루살렘의 사마리아 음행 답습을 지적한다.
여기서 선지자는 먼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각각 ‘그녀 자신의 장막’이라는 의미인 오홀라와 ‘내 장막이 그녀 안에 있다’라는 의미인 오홀리바라는 이름을 가진 자매에 비유하며 그들이 모두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었음을 밝히고(1-4절),
이중 오홀라 곧 사마리아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방과 우상을 추종하는 음행을 저질러 그들이 음행의 대상으로 삼았던 앗수르를 심판의 도구로 삼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음을 지적한다(5-10절).
그리고 오홀라 곧 사마리아의 전례에도 불구하고 오홀라의 행위를 그대로 답습할 뿐만 아니라 더욱 심해진 오홀리바 곧 예루살렘의 이방과 그 우상 추종을 지적한다(11-21절). 

​중반부 22-3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오홀라 곧 사마리아의 음행을 답습한 오홀리바 곧 예루살렘을 오홀라를 심판한 것과 동일한 방법, 즉 사마리아를 그들이 추종하였던 앗수르를 통하여 심판하신 것처럼 예루살렘을 그들이 추종하는 바벨론을 통하여 심판하실 것이라는 예언을 보도한다.

​후반부 36-49절에서는 동일한 죄를 범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한 동반 심판 선언을 보도한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약 136년 전에 이미 앗수르를 심판의 도구로 삼으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예루살렘과 더불어 심판이 선언된 것은 이미 심판을 받아 멸망한 사마리아와 같이 예루살렘의 멸망도 확정적인 일임을 보여주기 위한 수사학적 표현이다.

출처 /  옥스퍼드 주석 


하나님이 아닌 다른 의지할 대상을 좇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두 여인의 비유를 들어 돌아오라 하십니다.

질문 1 ; 두 여인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누구를 상징합니까? (4절)

두 여인의 비유(1-4) 하나님의 백성이 무언가에 홀린 듯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을 압제하고 괴롭혔던 애굽을 애써 찾아가려 합니다. 마치 철부지 여자 아이들이 뭐가 뭔지도 모를 때 못된 남자에게 홀려 허랑방탕하게 지내다 인생을 망치는 것과 같습니다(3절).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입니다(4절).

참으로 안타깝고 한심한 그들이 아닙니까? 언뜻 하나님은 지금 철부지 여자 아이들의 비유를 들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것 같습니다. 자극적인 말을 해서라도 그들을 돌이키고자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그 안에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차마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언사들이 곳곳에 나오지만 애써 더 매몰찬 말로 자극하여 끝내 돌아오도록 하려는 부모의 모습 딱 그대로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매섭게 몰아붙인다 생각될 때가 없나요?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돌이키고자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읽히지 않나요?

질문 2 ; 두 여인은 어떤 일을 일삼았습니까? (3,5-7,11-13절)

정신차려(5-21) 한 부모에게 두 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되면 오죽 좋을까요. 그런데 둘 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떠나 허랑방탕하게 지냅니다. 언니가 문제가 있으면 동생이라도 정신을 차리면 좋으련만 동생도 언니와 진배없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한결같이 못났을까요? 하나님이 항복하라고 하는 나라에는 기를 쓰고 반항하고 하나님이 의지하지 말라고 하는 나라에게는 어떻게든 의지하려는 그들의 청개구리 심보를 어떻게 고쳐줄 수 있을까요? 곁에서 봐도 답답해 “정신 차려!" 한마디 거들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지금 나와 우리 가정이 그렇지는 않은지 모를 일입니다. 한결같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면서 가끔 정말 답답해져야만 하나님을 찾는우리네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 가정에서 한 사람이라도 정신을 차려야겠습니다. 혹 언니가 부족하면 동생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서로를 향해 정신 차리자고 말해줍시다. 그런 관계가 되도록 서로 기도합시다.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2. 인자야 두 여인이 있었으니 한 어머니의 딸이라

"사람아, 두 여인이 있는데, 그들은 한 어머니의 딸들이다.

한 어머니의 딸 ; 한 하나님의 백성인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말한다.

3. 그들이 애굽에서 행음하되 어렸을 때에 행음하여 그들의 유방이 눌리며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나니

그들은 이집트에서부터 이미 음행을 하였다. 젊은 시절에 벌써 음행을 하였다. 거기서 이미 남자들이 그들의 유방을 짓눌렀고, 거기서 이미 남자들이 그 처녀의 젖가슴을 어루만졌다.

4. 그 이름이 형은 오홀라요 아우는 오홀리바라 그들이 내게 속하여 자녀를 낳았나니 그 이름으로 말하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요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니라

그들의 이름은, 언니는 오홀라요, 동생은 오홀리바다. 그들은 내 사람이 되어, 나와의 사이에서 아들딸을 낳았다. 그들을 좀 더 밝히자면, 오홀라는 사마리아이고,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이다.

오홀라 오흘리바 ; 둘 다 천막, 텐트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오헬에서 파생한 이름이다.
특별히 오홀리바는 ‘내 텐트가 그녀 안에 있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장막이 이 여인(예루살렘)에 있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를 의미한다. 하지만 23장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고 있다.

오홀라 ; 히브리어 뜻은 '그녀의 장막'이다.
오홀라가 의미하는 것은 사마리아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거짓 장막, 곧 우상을 숭배했던 사당들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오홀리바 ; 오홀라와는 대조적으로 이 말의 히브리어의 뜻은 '내 장막이 그녀 안에 있음'이다.
사마리아와는 달리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다.
비슷한 발음을 가진 두 개의 상징적인 이름을 도입한 까닭은, 이름이 비슷하듯이 그들이 행한 죄악도 같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13절).

형, 아우 ; 형은 사마리아로서 북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아우는 예루살렘으로서 남 유다를 대표한다.

​5. ○오홀라가 내게 속하였을 때에 행음하여 그가 연애하는 자 곧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사모하였나니

그런데 오홀라는 나에게 속한 여인이었으면서도, 이웃에 있는 앗시리아의 연인들에게 홀려서 음행하였다.

6. 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준수한 청년이요 말 타는 자들이라

그들은 모두 자주색 옷을 입은 총독들과 지휘관들이요, 모두 말을 잘 타는 매력 있는 젊은이들과 기사들이었다.

7. 그가 앗수르 사람들 가운데에 잘 생긴 그 모든 자들과 행음하고 누구를 연애하든지 그들의 모든 우상으로 자신을 더럽혔으며

그들은 모두가 앗시리아 사람들 가운데서도 빼어난 사람들이었는데, 오홀라가 그들과 음행을 하였으며, 또 누구에게 홀리든지 그들의 온갖 우상으로 자신을 더럽혔다.

8. 그가 젊었을 때에 애굽 사람과 동침하매 그 처녀의 가슴이 어루만져졌으며 그의 몸에 음란을 쏟음을 당한 바 되었더니 그가 그 때부터 행음함을 마지아니하였느니라

오홀라는 이집트에서부터 음란한 행실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젊은 시절에 이미 이집트의 젊은이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여서, 그들이 그의 처녀 젖가슴을 만졌고, 그에게 정욕을 쏟아 부었다.

9. 그러므로 내가 그를 그의 정든 자 곧 그가 연애하는 앗수르 사람의 손에 넘겼더니

그래서 내가 그를 그의 연인들, 곧 그가 홀린 앗시리아 사람의 손에 넘겨 주었더니,

10. 그들이 그의 하체를 드러내고 그의 자녀를 빼앗으며 칼로 그를 죽여 여인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그에게 심판을 행함이니라

그들이 그의 하체를 드러내고 그의 아들딸들을 붙잡아 갔으며, 끝내는 그를 칼로 죽였다. 그는 심판을 받아 여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11. ○그 아우 오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그의 형보다 음욕을 더하며 그의 형의 간음함보다 그 간음이 더 심하므로 그의 형보다 더 부패하여졌느니라

그의 동생 오홀리바는 이것을 보고서도, 자기 언니의 음란한 행실보다 더 음란하여, 자기 언니보다 더 많이 홀리고 타락하였다.

12. 그가 그의 이웃 앗수르 사람을 연애하였나니 그들은 화려한 의복을 입은 고관과 감독이요 말 타는 자들과 준수한 청년이었느니라

그는 앗시리아의 사람들에게 홀렸는데, 그들은 모두 화려한 옷을 입은 총독들과 지휘관들이며, 모두 말을 잘 타는 기사요, 매력 있는 젊은이들이었다.

13. 그 두 여인이 한 길로 행하므로 그도 더러워졌음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보니, 그도 자신을 더럽혔다. 그 두 자매가 똑같은 길을 걸었다.

14. 그가 음행을 더하였음은 붉은 색으로 벽에 그린 사람의 형상 곧 갈대아 사람의 형상을 보았음이니

그런데 오홀리바가 더 음탕하였다. 그는 남자들의 모양을 벽에다가 새겨 놓고 쳐다보았는데, 붉은 색으로 새겨진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모양이었다.

12,13절에서는 남유다 역시 북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여호와를 등지고 앗수르를 추종하였음을 지적하였다. 이제 14-18절은 예루살렘이 앗수르와 정치적 유대 관계를 가짐으로 여호와를 배반한 것도 부족하여, 앗수르에 뒤이어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바벨론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까지 여호와를 분노케 한 사실을 진술한다.

14절과 15절에서는 고대 바벨론의 벽화와 관련된 진술이 제시된다. 본문에서 그 벽화는 붉은 색으로 그려진 것으로 나타난다. ‘붉은 색’은 붉은 빛을 띠는 황토를 원료로 하여 만든 도료를 의미하는 말이다. 유다의 제18대 왕 여호야김(B.C. 609-598년)이 자신을 위하여 웅장한 왕궁을 만들고 백향목으로 된 기둥에 칠한 것이 바로 이 붉은 빛의 도료였다. 고대 근동에서 붉은 색은 존귀와 위엄을 상징하였다. 따라서 바벨론 사람의 형상이 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었다는 것은 그 대상이 바벨론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임을 암시하거나(Block) 바벨론이 국제 사회에서 매우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유한하고 무력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본문에서 ‘사람’은 깨지기 쉽고 약하며 고칠 수 없는 상태를 강조하는 어원 ‘아나쉬’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구약성경에서 병약하고 유한하여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면모를 강조하는 단어이다(욥 14:19 ; 15:14). 본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사용되어 이 형상의 사람이 벽에 여렷 그려져 있었음을 나타낸다. 에스겔이 사람을 나타내는 여러 표현 가운데서 특별히 이 단어를 통해 벽화에 그려진 바벨론 사람을 지칭한 것은 비록 예루살렘의 눈에는 바벨론이 대단해 보였지만, 여호와의 눈에는 연약하여 언젠가는 허망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인간 나라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갈대아 사람’은 신바벨론을 창건한 주도 세력들을 지칭한다. 앗수르 제국을 무너뜨리고 메소포타미아를 평정하여 고대 근동을 제패한 신바벨론은 유프라테스강 하류 갈대아 지역 출신의 사람들에 의해 창건되었다. 바벨론 제국 백성의 구성 비율로서는 갈대아 사람들의 비율이 매우 작았지만 그들이 주축이 되어 새로운 왕조를 세움으로 바벨론 제국은 흔히 갈대아 왕국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15. 그 형상은 허리를 띠로 동이고 머리를 긴 수건으로 쌌으며 그의 용모는 다 준수한 자 곧 그의 고향 갈대아 바벨론 사람 같은 것이라

그들의 허리에는 띠를 동이고, 머리에는 감긴 수건이 늘어져 있다. 그들은 모두 우두머리들과 같아 보이고, 갈대아가 고향인 바빌로니아 사람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허리를 띠로 동이고 머리를 긴 수건으로 썼으며"라는 묘사는 전형적인 고대 바벨론 사람의 면모를 보여 준다. 먼저 바벨론 사람들이 허리에 띠를 동이고 있다는 본문의 묘사는 그들이 이미 정제된 의복을 갖추고 있었음을 함의한다. 거기에 띠를 띠고 머리를 긴 수건으로 썼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여기서 ‘긴 수건으로’에 해당하는 ‘테불립’의 원형 ‘타불’은 ‘적시다’(출 12:22), ‘잠기다’(신 33:24)란 의미의 동사 ‘타발’에서 유래한 명사로 문자적으로는 ‘적신 것’이란 의미를 지니며, 본문에서는 도료로 염색이 된 수건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이는 고대 바벨론의 귀족층 이상이 머리에 두르는 두건인 터번(turban)을 묘사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본문에 언급된 이러한 복장과 행색은 당시 갈대아 지역에서 발견된 유적들인 니므룻(Nimrud) 기념비, 콜사맛(Khorsabad) 기념비, 그리고 코윤지크(Kouynjik)의 비문 유적지 내에 있는 앗수르 궁전 벽화들, 혹은 조각들에게서 보여지는 복장과 일치한다(Keil, Whitelaw). 즉 본문에 묘사된 바멜론 사랍들의 복장은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자료들과 일치한다.

‘준수한 자’에 해당하는 ‘촬리쉽’은 문자적으로 ‘세번째로 높은 자들’, 또는 ‘세 명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왕이 직접 임명한 기사(knight)들이나 왕을 최측근에서 호위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Block). 이들의 직위는 매우 높았을 뿐 아니라 그 당당한 풍채는 예루살렘의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았을 것이다.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병거를 타고 지휘하는 사람들이었으며, 그 휘하에 세 명의 군사들이 딸려 있었다. 한 명은 병거를 운전했고, 한 명은 방패를 잡았으며, 나머지 한 명은 창을 들고 호위하였다(Feinberg).

‘그의 용모’에 해당하는 ‘마르에’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주목해 보는 행위를 나타내는 ‘라아’에서 유래한 단어로 사람의 눈으로 보아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 외관, 용모를 의미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예루살렘은 영적인 시각으로 보는 능력을 상실해버렸으며,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을 보아 그 상대를 판단하였던 것이다. 물론 바벨론은 그들 육안으로,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도 위엄 있고 능력 있는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준수한 바벨론도 덧없이 무너지고 말 허무한 인간들이 세운 나라에 불과하였다(단 2:35,45). 그러나 이미 죄와 부패함에 빠져든 그들은 이를 결코 알지 못하였고 또 알 수도 없었다.

16. 그가 보고 곧 사랑하게 되어 사절을 갈대아 그들에게로 보내매

오홀리바는 그런 모습을 보고, 그들에게 홀려서, 바빌로니아로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을 불러왔다.

17. 바벨론 사람이 나아와 연애하는 침상에 올라 음행으로 그를 더럽히매 그가 더럽힘을 입은 후에 그들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겼느니라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연애하는 침실로 들어가, 음행을 하여 그를 더럽혔다. 그가 그들에게 더럽혀진 뒤에는 그의 마음이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23:11-17 ; 그런데 오홀리바가 언니보다 더욱 음탕하게 된 것은, 붉은 색으로 벽에그려진 멋진 사내의 형상, 곧 바벨론 사내의 형상을 본 것 때문이다. 그들 바벨론 사내들은 허리에는 띠를 매고 머리에는 긴 수건을 동여매고 있었다. 그들의 용모는 다 귀족처럼 품위가 있었는데, 곧 그들은 모두 갈대아 태생인 바벨론의 장교들이라, 오홀리바는 그들을 보자마자 즉시 욕정에 휩싸여, 갈대아 땅으로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불러들였다. 그러자 바벨론 사내들이 그녀에게로 와서, 그녀의 연애하는 침실로 들어가 온갖 음탕한 짓으로 그녀의 몸을 더럽혔다. 그들과 실컷 놀아남으로써 오홀리바가 자기 몸을 크게 더럽힌 후에, 그 마음이 그들에게서 떠나게 되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강성함을 힘입으려고 정치적 동맹관계를 맺었으나, 그 동맹이 아주 굴욕적인 것이어서 바벨론을 혐오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결국 유다는 바벨론을 섬기던 것에서 돌이켜 애굽과 손을 잡게 되었다(왕하 24:1,20).

18. 그가 이같이 그의 음행을 나타내며 그가 하체를 드러내므로 내 마음이 그의 형을 싫어한 것 같이 그를 싫어하였으나

오홀리바는 이렇게 드러내 놓고 음행을 하며, 자신의 알몸을 드러냈다. 그래서 내 마음이 그의 언니에게서 멀어진 것과 같이, 그에게서도 멀어지게 되었다.

19. 그가 그의 음행을 더하여 젊었을 때 곧 애굽 땅에서 행음하던 때를 생각하고

그런데도 그는 음행을 더하여, 이집트 땅에서 음란하게 살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늘 회상하였다.

20. 그의 하체는 나귀 같고 그의 정수는 말 같은 음란한 간부를 사랑하였도다

그는, 정욕이 나귀와 같이 강하고 정액이 말과 같이 많은 이집트의 사내들과 연애를 하였다."

"그의 하체는 나귀 같고 그의 정수는 말 같은"이란 애굽을 말과 나귀로 비유함으로써, 애굽이 예루살렘에 큰 매력을 발산한 국가였으며, 예루살렘이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애굽을 사모했다는 사실을 진술한다. 문자적 의미는 ‘나귀들의 하체 그들의 하체 그리고 말들의 정수, 그들의 정수이다’이다.

'그의 하체'는 어원적으로 동물의 육체를 구성하는 살(flesh)을 가리키나(창 2:21), 여기에서는 동물의 남성 생식기를 지칭하는 완곡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그의 정수’는 액체 따위가 위로 솟구쳐오르는 모습을 나타내 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수컷 동물의 생식기에서 나오는 정액을 의미한다(NIV, NRSV, emission). 위와 같은 비유적 표현으로 묘사되어 있는 애굽은 여성으로 비유되는 예루살렘의 타락한 음욕을 부추기고 그 나라에 대한 사랑에 빠져들게 하는 나귀와 말에 비유될 수 있는 몹시 세속적인 국가였다.

고대 애굽의 상형 문자에서 말은 색욕적인 사람을 상징하였다(Feinberg). 예레미야 선지자 역시 말과 나귀를 욕정에 찬 사람들에 대한 비유로 사용하였다(렘 2:24 ; 5:8 ; 13:27).

‘음란한 간부’는 여성 예루살렘이 사랑에 빠진 남성 애인을 의미한다. 오직 여호와께 속하여 그를 위해 신앙적, 영적 정조를 지켜야 할 예루살렘은 결코 의지해서는 안 될 애굽을 사모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애굽을 연모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부패하고 타락한 정욕을 충족시키기 위함일 뿐이다. 결국 예루살렘은 애굽을 향한 연모로 인하여 그 나라에 온 마음과 육체를 다 내어 바침으로 목숨을 다해 지켜야 할 여호와의 신부로서 영적 순결과 여호와와 더불어 맺은 언약 모두를 더럽히고 깨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21. 네가 젊었을 때에 행음하여 애굽 사람에게 네 가슴과 유방이 어루만져졌던 것을 아직도 생각하도다

"너는 젊은 시절의 음란한 생활을 그리워한다. 너의 처녀 시절에 이집트의 사내들이 너의 유방을 만지고 너의 젖가슴을 어루만지던 것을, 너는 그리워한다.

본문에 언급되어 있는 죄인들은 '두 여인', 즉 한 어미의 딸들로서 자매 나라인 이스라엘과 유다이다.
그들은 오랫 동안 한 백성이었다.

그들이 하나로 있었던 때(3절) :

​그들이 애굽에서 행음하되. 즉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그곳에서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였다(20:8).

그들이 둘로 되었을 때의 이름(4절) :

​이스라엘 나라는 '형'으로 불리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먼저 갈라져 나갔기 때문이다.
혹은 "더 큰 자매"(원문대로 하며)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이는 이 나라에 열 지파가 속했으며 유다에는 단지 두 지파만이 속했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 사마리아와 이스라엘 나라는 '오홀라'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그 뜻은, "그녀 자신의 장막"리다. 이는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경배 처소가 그들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며 또 예배 자체도 그들 자신이 창안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다 나라와 예루살렘은 "그 안에 내 장막이 있다"라는 의미를 지닌 '오홀리바'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이는 그들의 성전이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다.

(3)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해 나간 이스라엘 나라(5절) :

비록 열 지파가 다윗의 족속을 버리긴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여전히 그의 백성으로 인정하셨다. 그들이 비록 형상을 만들었을지라도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을 섬기는 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아주 버리지 아니하셨다. 그러나 오홀라는 창기 노릇을 했으며 여호와의 경쟁 상대로 바알을 끌어들여 숭배하였다(왕상 16:31;18:21). 마치 음란한 간부가 연인들과 사랑에 빠지듯이 이스라엘은 자기의 이웃들과 특별히 앗수르 사람들과 사랑에 빠졌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우상들을 찬미하였으며 또 그것들을 숭배하였다. 9절과 10절에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당하는 것이 나타나 있다. 내가 그를...그 연애하는 사람의 손에 붙였더니.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을 그 정욕대로 내버려 두셨다. 그런 다음 그들을 그 연애하는 자들에게 맡겨 버리셨다.

그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열왕기하 17:6이하에서 상세하게 찾아볼 수가 있다.

호세아 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취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호세아 선지자는 생전에 열 지파가 배교했을 때에도 두 지파만은 놀라울 정도로 순결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았다(호 11:12).
그러나 다윗의 집과 아합의 집 사이에 불행한 혼인이 이루어짐으로써 바알 숭배가 유다 나라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그후 왕들의 개혁에 의해 그것은 다시 쫓겨났었으나 므낫세 통치 때에, 즉 유다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본 지 오래지 않아 그들은 이스라엘이 우상에 대해 사랑에 빠졌던 것보다 더 크게 타락하게 되었다(11절).

신실한 성읍이었던 예루살렘은 '창기'가 되었다(사 1:21).

​예루살렘도 역시 '앗수르 사람을 연애하였다'(12절).
즉 그들과 동맹을 맺고 그들의 신에 대하여 경배하였다.
그에 따라 그들은 이방의 모든 것에 대하여 애착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의 민족에 대해서는 경멸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자기들의 신앙조차 비천하고 볼품없는 것으로 여겼다.
예루살렘은 바벨론 방백들을 연애하였다(15, 16절).
그래서 그 나라와 동맹을 맺고 그들의 우상과 제단과 신전들의 모형들을 가져오도록 했으며 그것들을 경배하였다.
갈대아인들에 대하여 싫증이 나게 되자 예루살렘은 애굽인들을 연애하여 그들과 동맹을 맺고 아울러 그들의 우상을 숭배하였다.
그가 그 음행을 더하여(19절). 즉 그의 이전 음행을 반복하였다.
그리고 그 젊었을 때를 생각함으로 자신을 더욱 자극하였다.
이전의 죄를 슬픔과 수치심으로 반성하는 대신에 쾌락과 자부심으로 돌아보는 자들은 회개를 무시한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기억"이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억하고서 그들에 대하여 진노하도록 자극하였다.

이제 이 신실치 못한 성읍에게 하나님께서 이혼 증서를 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죄는 하나님의 마음을 죄인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죄인의 마음은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미군이 미 본토에 주둔하는 군사력은 대략 82%, 해외에 파견된 미군은 대략 18%라고 한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146:1-5)

한국에서 2001년 경에, 인터넷에는 '자살 사이트'라는 것이 생겨나 그 수가 50여 개나 되고, 회원 수도 무려 5천에서 6천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그 자살 사이트에서 만난 20대 남자 2명이 여관에서 숨진 채 발견되는 사건까지 일어났습니다.
경찰의 보고에 의하면, 그 중 한 명은 카드 연체로 고민하다가 자살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혼자 죽기 힘드니 도와달라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하여 자살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갑에 있는 100만 원을 주기로 하고 준비된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돈을 주고 칼에 찔려 죽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당시 자살하려는 사람들은 대개 10대, 20대의 젊은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1861년에서 1865년까지, 약 4년 동안 남북전쟁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휩쓸고 간 뒤, 버지니아도 폐허가 되었습니다. 학교들도 모두 폐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윌리엄 대학(College of William and Mary)이라는 학교도 폐교가 되었습니다.
학생도 떠나고 교수도 떠나고, 학교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전 9시만 되면 이 학교에서는 "뎅그렁 뎅그렁" 하는 종소리가 났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학교의 교장이었던 이웰(Ewell)이라는 사람이 학교에 남아서 공부하는 시간을 알리는 종을 쳤던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습니다.
학생도 선생도 없는, 폐교된 학교에서 마치 학교가 운영되고 있는 것처럼 왜 종을 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웰은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어려울 때일수록 교육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끝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텅 비어 있던 학교에 학생이 한 명, 두 명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학교는 어느덧 학생들로 가득 차고 좋은 선생들도 오게 되었습니다.
전후 7년 동안이나 종만 울리던 학교가, 나중에는 좋은 대학이 되었습니다.
한 교장의 믿음과 희망이 결국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입니다.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박사는 말하기를,
'성공의 비결은 전 생애를 통해서 소망을 잃지 않는 데에 있다'고 했습니다.
절망하지 않고 반드시 소망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끝까지 소망을 붙든 사람은 성공하지만, 도중에 소망을 놓친 사람은 실패하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시편 39편 7절에서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만 바라보면, 언젠가는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46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쓴 ‘찬양시’라고 합니다.
포로에서 해방된 그들은 미래에 대한 꿈과 소망으로 부풀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무너진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고, 나라를 다시 세워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전에는 우상숭배의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버림받아서 전쟁에 패하고 포로로 잡혀가 고생했지만, 이제는 돌아가 온전한 신앙을 지키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사람은 잃어버린 뒤에 깨닫습니다.
병들고 나서, 고생하고 나서 비로소 하나님 앞에 돌아옵니다.

그러나 막상 예루살렘에 도착해 보니 그 땅은 이미 북쪽 사마리아 지역에 살던 이방인들이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건축을 방해하고 모함하며 공격해 왔습니다.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고위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며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가 하면, 만일 성벽을 재건하면 이스라엘이 반역하고 조세를 거부할 것이라고 바사 제국의 왕, 아닥사스다 1세에게 고소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를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예루살렘 성과 성문을 훼파하고 불을 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절망하고 낙심했습니다. '이 나라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며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때 시인은 본문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도울 사람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라.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도와주셔서 환난에서 구원해 주시고 축복을 주신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더니, 하나님께서 B.C. 444년, 페르시아의 고위 관리였던 유대인 느헤미야를 통해서 기적적으로 성벽을 완공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 소망이 반드시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1.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시 146:3∼4= "방백(方伯)들을 의지(依支)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人生)도 의지(依支)하지 말지니 그 호흡(呼吸)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圖謨)가 소멸(消滅)하리로다"라고 하십니다.

 방백들은 정치가와 권세자들을 대표하는 무리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정권이, 바뀌면 언제든지 숙청을 당하거나 좌천되거나 몰락해 버리는 부류들입니다..
또한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인간의 모든 환경은 변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118편 8∼9절에서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유한하고 허망한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레미야 17장 5, 7절에는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 때에 사람이나 권력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Blaise Pascal)은 성경 요한복음 16장을 읽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팡세』라는 책을 써서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그러나 과학의 하나님은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을 하나님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학도 결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20세기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Theodor Jaspers)는 인간은 이성만을 가지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한평생 인간의 능력과 힘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아! 인간이 어떻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겠는가? 인간이 어떻게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겠는가? 인간이 어떻게 불안과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겠는가? 인간이 어떻게 전쟁의 문제를 해결하겠는가?'
그리고 그는 마침내 인간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즉 한계상황에 빠져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셔야만 비로소 인생의 문제는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하고 나이를 먹은 후에, 세례를 받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인생을 마쳤습니다.
인간은 늘 한계상황에 부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애틀랜타 올림픽 때 성화 점화를 위해 단상에 올라섰던 사람, 한때 세계를 주름잡았던 권투 왕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현재 파킨슨병(Parkinson)에 걸려서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자기 자신의 나약함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무하마드 알리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전성기 시절, 그는 "내가 가장 힘이 세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강하다. 나에게 도전할 사람은 나와서 싸워라." 하고 큰소리 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나와서 점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자회견에서 "사람보다 하나님이 더 강하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제가 이 병에 걸렸습니다."라고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라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시 146:5a)

본문은 왜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의 도움을 삼으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줍니다. 야곱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꿈치를 잡다, 속이는 자, 사기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형을 속였습니다.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향을 떠나 도망칠 때 벧엘 벌판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지키고 보호하옵소서.' 또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때도 얍복 나루에서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축복하옵소서.' 그러자 죄 많고, 허물 많고 불의 했던 이 '야곱'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구원하셔서 '이스라엘'로 새롭게 변화시키는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본문에서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야곱 같은 사람도 구원하신다면, 야곱과 같은 죄도 용서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야곱과 다를 바 없는 우리에게도 구원과 용서를 허락하여 주실 것을 의미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믿습니다. 야곱을 도우셨다면 여러분도 도우실 것을 믿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시 146:5b=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所望)을 두는 자는 복(福)이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시편 37편 9절에서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企待)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 29장 11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將來)에 소망(所望)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라고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이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쌓여 있는 건초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건초더미에는 본래부터 바늘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찾고 있을 뿐이지 건초더미에는 바늘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는 참되고 영원한 행복이 없습니다. 비슷한 것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더욱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서 오늘도 살아계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참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에스겔 22장
10-03-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만국의 조롱거리(에스겔 22:4)


네가 흘린 로 인하여 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혔으니 네 이 가까왔고 네 년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노라.
you have become guilty because of the blood you have shed and have become defiled by the idols you have made. You have brought your days to a close, and the end of your years has come. Therefore I will make you an object of scorn to the nations and a laughingstock to all the countries.

만국의 조롱거리(a laughingstock to all the countries)
웨칼라사 레콜 하아라초트(וְקַלָּסָה לְכָל־הָאֲרָצֹות)


조롱거리(7048) 칼라사(
qallâçâh) קַלָּסָה    

1. 조롱.  2. 조롱함.  3. 에스겔 22:4.
발음 / 칼라사[ qallâçâh ]
어원 / 7046에서 유래한 강세형
관련 성경 / 조롱거리(겔 22:4)
구약 성경 / 1회 사용


만국(3605 / 776) 전체(
콜. kôl) כֹּל

כֹּל 전체, 모두, 온통(콜. kôl    스트롱번호3605

1. 전체.  2. 모두.  3. 온통.
발음 / 콜[ kôl ]
어원 / 3634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408회 사용

땅(에레츠. ’erets) אֶרֶץ  스트롱번호776
1.  땅.  2. 창세기 1:1.  3. 창세기 9:19
발음 / 에레츠 [ ’erets ]
어원 / 혼성 어미활용 אַרְצִי, ‘확고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땅(창 1:2, 레 26:20, 대상 16:14), 들(창2:5, 겔 29:5), 세상(창6:5, 출9:29, 신4:32), 지방(창 10:31, 레20:2, 수9:9), 지면(출16:14, 욥28:5, 아2:12), 접경(출16:35), 고향(민10:30, 렘50: 16), 세계(출19:5, 민14:21, 신28:1), 나라(창 42:6, 출23:26, 왕상10:6), 천지(출31:17, 시 69:34, 사37:16), 육지(레11:2), 이방(창15: 13, 스9:11), 천하(창18:18, 왕상4:34, 사25:8), 본토(왕하18:32, 단11:28), 토지(창41:47, 레23: 39, 삿6:4), 사방(창47:13, 민34:2), 전국(레 19:29), 소유지(수22:4,19), 밭(삿9:37, 시141:7), 백성(삿18:30), 본국(왕상10:13, 왕하19:7), 고국(왕상11:21, 왕하3:27), 본향(왕상22:36), 위치(왕하2:19), 성읍(대하6:28), 토산(대하7:13), 열국(사34:1), 열방(느9:30, 겔1:21), 고토(욥 30:8, 사37:7), 흙(시12:6, 렘17:13), 진토(시 22:29), 여러 나라(시106:27), 지상(사18:3), 길바닥(애2:21), 뭍(겔32:4), 각국(겔36:19), 평원(겔38:11).
구약 성경 / 2504회 사용

피(1818) 담(dâm)  דָּם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
발음 / 담[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피(창 4:11, 왕하 3:22, 겔 35:6), 산혈(레 12:4, 5, 7), 살인(시 26:9), 살육(겔 5:17), 피투성이(겔 16:6,22), 피 값(겔 3:18),
죄(겔 33:6), 핏빛(욜 2:31), 피 흘린 자[죄](레 17:4, 신 21:8),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시 59:2).
구약 성경 / 360회 사용

* 1826.  דָּמָם 스트롱번호1826
1. 침묵하다.  2. 놀라다.  3. 출애굽기 15:16.
발음 / 다맘[ dâmam ]
관련 성경 / 머무르다(수 10:12), 기다리다(삼상 14:9), 잠잠하다(시 4:4, 사 23:2, 애 3:28), 멸하다(렘 8:14), 침묵하다(출 15:16), 쉬게 하다(애 2:18), 적막하다(렘 25:37, 48:2), 멸절되다(렘 49:26, 50:30), 끊어지다(렘 51:6), 평온하다(시 131:2),
[부] 가만히(렘 47:6)
구약 성경 / 30회 사용

에스겔 22장은 예루살렘의 죄상에 대한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말씀합니다.  본문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심판의 이유를 모세 언약을 기초로 알리고 있습니다.

심판의 원인(1-12절)
심판의 필연성(13-16절)
심판의 목적(17-22절)
심판의 대상(23-31절)

위와 같은 내용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이 총체적 부패로 확산되어 국가의 존립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유다의 중심지 즉 수도입니다.
그곳에는 유다의 지도자들이 있고 최고 종교 지도자들이 있으며 유다의 모든 뛰어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루살렘은 유다의 핵심지였습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예루살렘의 죄상을 드러냄으로써 예루살렘과 유다가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인 생각을 전달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허탄한 이상을 보고, 거짓 복술을 행하고 사람의 영혼을 삼키며 각종 재산과 보물을 탈취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범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성물을 더럽히게 되었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부정함과 정함을 사람으로 하여금 분별치 못하게 만들어서 안식일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방백들은 불의의 이를 구함으로 결국 피를 흘려 영혼을 멸하는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참된 성결을 유지해야 합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전념하고 믿음에 성숙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같이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인은 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대표하는 구성원으로서 내게 부여된 세상을 향한 소금과 빛의 임무를 성실하게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빛 되신 주님이시여
저희들에게 빛을 주소서
그 빛을 반사하여
어둠을 밝히게 하옵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우상 숭배와 불순종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더욱 시급하게 심판을 시행하셔야 했다.
하나님은 이방을 통해 자신의 백성들을 연단하심으로써 그들의 더러워진 모습을 성결한 상태로 정화시키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궁극적 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신앙을 위하여 곤란을 겪으며 자신의 범죄 때문에 징계를 받을 그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때임을 알고, 스스로 더욱 성결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피는 생명입니다!

성경은 피로 시작해서 피로 마칩니다.
창세기에는 아벨의 피가 있고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바친 양의 피가 있습니다.
출애굽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한 어린양의 피가 있고 레위기에는 희생제사의 피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는 어린양의 피가 있습니다.

필립 얀시가 쓴 ‘육체속의 영성’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필립 얀시는 성경에서 말하는 피의 의미를 현대 의학자 폴 브랜드의 도움을 받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피의 생리학적 기능을 통해서 성경에서 나오는 피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피는 생명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레 3:17, 7:26-27).

왜 피는 생명입니까?
인간은 물을 먹지 못해도 하루 이틀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산소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시간당 4겔론 정도의 산소를 필요로 합니다.
물론 운동할 때는 시간당 75겔론 이상의 산소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피가 이 산소를 공급합니다.
피 안에 있는 적혈구는 20초 정도의 주기로 몸을 순환합니다.
만일 피가 이 속도를 조금 늦추기만 해도 산소 공급은 현저히 지장을 받습니다.
적혈구는 우리 몸에 산소와 영양소를 공급하는 일을 계속합니다.
그 일에 헌신한 적혈구가 나중에 피곤에 지쳐 폐기처분되면 또 다른 세포가 재생산되어 그 일을 반복합니다.
매일 우리 몸 안에서는 3천억 개의 적혈구가 죽고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이 적혈구의 자기 죽음과 별세를 통해 날마다 부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는 생명입니다.
피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피의 또다른 기능은 청결입니다.
구약과 신약은 일관되게 말합니다.
피가 우리 죄를 깨끗이 씻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구약의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죽은 양의 피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죄를 사했습니다(레 14장).

신약의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한다고 말합니다(요일 1:7).
요한계시록 역시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사람들’에 대하여 묘사합니다(계 7:14).
우리 몸을 그냥 두면 이산화탄소, 요소, 요산 같은 찌꺼기들이 가득 차게 됩니다.
그 찌꺼기들을 청소하는 기능(대사기능)을 위해 우리 몸의 많은 장기가 활동합니다.
대표적인 장기가 신장입니다.
신장의 주된 일은 걸러내는 일입니다.
마치 엔진을 수리하듯 신장은 기계의 모든 부품들을 해체하고 닦아냅니다.
그리고 재조립합니다.
신장이 우리 몸의 33가지 이물질, 화학물질들을 닦아내고 남은 것은 방광으로 보내 물과 함께 배출시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정화작업을 총괄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적혈구입니다.
튼튼한 적혈구는 연속적으로 50만 번씩이나 짐을 지고 노폐물을 나르고 운반하고 청결케 합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적혈구는 지쳐 죽게 되는데 그 죽음으로 몸은 찌꺼기를 청소하고 매일 새로운 부활을 얻게 됩니다.

성경의 말은 의학적으로 볼 때 분명합니다.
피는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산소를 공급하고 이산화탄소 등 찌꺼기를 제거함으로 우리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합니다.
성경의 증언대로 과연 그리스도의 피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흰눈처럼 깨끗이 씻어줍니다.
우리는 그의 피를 믿습니다.
우리는 그 피로 속죄함을 받고 그 피로 새 생명을 얻습니다.

피는 생명이다 , 킹제임스흠정역성경

레위기 17:14
이는 피가 모든 육체의 생명이기 때문이니 육체의 피는 육체의 생명을 위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육체의 피인즉 누구든지 피를 먹는 자는 끊어지리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최초의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살면서 채소와 과일을 먹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그들은 땅을 갈아 씨앗을 뿌리고 곡식과 채소를 재배하여 필요한 양식을 얻었습니다.  

사람들의 죄가 온 땅에 만연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온 세상이 물에 잠겼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방주 안에 들어온 노아의 가족들과 짐승들은 생명을 건졌습니다.
홍수가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채식뿐만 아니라 육식도 허락하셨습니다. 

창세기 9:3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먹을 것이 될 것이요, 푸른 채소와 같이 내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었노라.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육식을 허락하신 이유는 방주 안에 저장해 두었던 양식이 다 떨어졌고 다시 농사를 지어 작물을 수확하려면 적어도 몇 개월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홍수 이후에는 지구에 계절의 변화가 나타났는데 사람들이 달라진 기후 변화에 적응하고 건강을 유지하려면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와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사람이 육식을 하려면 짐승을 죽여야 합니다.
사람은 짐승을 죽일 때마다 생명체의 피를 흘리게 되는데 처음에는 피를 보고 충격을 받지만 나중에는 점차 무덤덤해지게 됩니다.
그렇게 피를 흘리는 일에 익숙해지면 짐승을 죽이거나 사람을 죽여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정도로 생명의 가치를 경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존중하도록 두 가지 명령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고기를 피와 함께 먹지 말라는 것
둘째는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그 사람의 피도 흘리게 될 것

이는 피가 모든 육체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피는 생명 활동에 필수적인 역할을 합니다.
사람의 몸속에 있는 피의 양은 자기 체중의 약 1/12∼1/13 정도인데, 과다 출혈로 이 중 절반을 잃으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피의 주요 성분은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혈장 등입니다.
적혈구는 폐에서 산소를 받아서 말초세포까지 나르는 역할을 합니다.
이와 함께 세포에서 생긴 노폐물인 이산화탄소와 수소 이온을 운반합니다.
백혈구는 우리 몸에 침입한 병균을 물리치는 일을 합니다.
혈소판은 상처에서 흐른 피를 응고시켜 병균이 침투하지 못하게 보호하고 피의 유출을 막으며 상처가 치유되도록 도와줍니다.
혈장에는 항체가 있어서 침입한 병균을 물리치며, 각종 영양분을 세포로 나르고, 세포의 노폐물을 몸 밖으로 배출하게 해 주며, 몸의 완충용액으로 pH 농도, 무기염류농도, 체온 등을 일정하게 유지시켜 줍니다. 

이와 같은 피의 생명 활동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나타냅니다.
피가 생명의 양식인 산소와 영양분을 온 몸에 공급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는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줍니다. 

요한복음  6:54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 

피가 우리 몸속에 있는 노폐물을 씻어내어 몸 밖으로 배출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씻어내고 우리를 정결하게 합니다. 

골로새서 1:14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 

요한일서 1:7
그러나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만일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교제하고 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피가 우리 몸을 병균으로부터 보호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를 죄와 유혹으로부터 보호하며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고, 영적 질병을 치유하는 효능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11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의 말로 그를 이기었으며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 

피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생명의 피는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사고나 수술로 인해 출혈이 심한 환자에게 다른 사람의 피를 수혈하면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끼리 헌혈하고 수혈하는 것은 단순히 육체의 생명만 살릴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의로운 피는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죄의 용서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레위기 17:11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니라. 내가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 뿌려 너희 혼을 위해 속죄하게 하였나니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느니라. 

요한복음  6:54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


생명은 피에 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흙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바로 이때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살과 뼈를 만드시고, 오장육부(五臟六腑)를 만드셨을 뿐 아니라 피도 함께 만드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생기(生氣)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는 순간 아담의 피는 생명을 간직한 “산 피“로 변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피 속에 육체의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레위기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수세기 동안 의사들은 인체의 피가 갖고 있는 놀라운 기능들을 연구해 왔다. 이들은 육체의 피가 혈관을 통해서 산소와 영양분을 우리 몸의 각 조직으로 운반한다는 사실과 인체가 질병으로부터 감염되는 것을 막아주는 면역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직도 생명을 담고 있는 인간의 피에 대해 알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95)

이 피 속에는 신비한 생명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피가 인간의 죄를 씻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 속에 면면히 나타나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 길을 마련해 주셨다. 즉 하나님은 한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고 그것으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는데 그것은 바로 죄 사함을 위한 피 흘림의 방법이었다.96)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피를 대가로 죄를 대속할 수 있는 희생제물을 준비하셨던 것이다.

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그 후 아담의 아들인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悅納)하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창4:3-4) 즉 피 흘림이 없이 바쳐진 땅의 소산은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셨지만 동물을 잡아 피를 흘려 바쳐진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으심으로 피 흘림을 통한 속죄의 제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셨다.

그리고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동물을 먹을 수 있도록 허용하셨는데,(창9:3-4) 그것은 동물을 잡아 피를 흘려 죽임으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활 속에서 깨닫게 하신 것이다. 여기에도 대속(代贖)의 제사개념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 모세시대에 와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기 위해 바로의 허락을 요구하였으나 바로의 완악함으로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열 재앙을 내리실 때 마지막 재앙으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長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게 되었다.”(출12:29)
이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양을 잡고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셨다. 그리고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라고 말씀하시면서 피로 인해 죽음을 면하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
이와 같이 피 흘림을 통한 죄 사함의 방법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점차 대속의 원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 이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복지로 인도하시는 과정 속에서 모세를 통해 광야에서 율법을 주시고, 만일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악함을 미리 아시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를 대속할 수 있는 방법까지 구체적이고도 상세하게 계시해 주시면서 동물제사를 잠정적으로 허용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 많은 양을 할애하며 누누이 동물제사의 방법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죄지은 자들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반드시 행해야 할 중요한 법도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죄로부터의 해방은 그 죄를 이기려고 노력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그 죄에 대해 죄 값을 치르고 죽는 데 있는 것이다.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는 먼저 죄지은 자들이 자신의 손을 짐승의 머리에 얹으므로 자기의 죄악을 짐승에게 전가시킨다. 그리고 그 다음 짐승을 죽여 제단에 제물로 바치게 된다. 즉 사람들은 자기의 죄악을 짐승에게 전가시키고, 그리고 그 짐승을 잡아 죽여 그 피를 봉헌했던 것이다.97)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라고 하였다.(히10:1)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 제물로 죽임을 당했던 짐승은 신약에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임을 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다는 말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일찍이 인류를 위해 죽임을 당하실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51) 2015, 12, 17
95. Benny Hin, 예수님의 보혈, 오복수역, 은혜출판사, 1996.
96. Marilyn Hickey,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 최기운 역, 베다니출판사, 1999. p.134.
97. Martyn Lloyd-Jones, 십자가, 서창원역, 두란노, 1987. p.35.


그리스도의 몸, 피는 생명의 근원

피는 곧 생명이라고 했다. 
생명을 대표하는 단어다. 
그도 그럴것이 생명있는 것은 모두 피를 가졌다. 
특히 사람의 피는 더욱 그러하다. 
인간에 대한 예수의 생명 부여는 당신의 피를 쏟으신 것으로 상징된다. 
우리의 성찬의 포도주 역시 그리스도 예수의 피, 곧 ‘생명’을 의미한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드는 예식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피와 교회의 건강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1. 몸이 하나인 증거들

바울의 교회론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말한다 하였다. 
그렇다면 몸의 각 조직이나 기관은 당연히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신체의 다른 조직이 또다른 조직을 무시하거나 하대할 수 없는 것은 사실상 한 몸을 구성하는 조직이기에 모두가 소중하며 절대적이며 귀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병원에서 죽는 사람을 살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생명이 끊어지는 사람은 몸의 모든 조직이 망가져서 죽는 경우가 없다. 
몇 가지 혹은 한 가지 질병으로도 죽을 수 있는 것을 본다. 
염증이나 파괴된 세포나 경화된 병변이 피를 타고 퍼지고 확장되고 쇼크를 주어 숨이 멎는다. 
그러니 몸이 하나임을 가장 절실히 느끼는 것은 죽음의 때로 보여진다. 
물론 죽기 전이라도 작은 질병을 통해서도 이것은 증명된다. 
머리가 아픈데 몸 전체가 고통을 당하고 간이 기능을 못해서 복수가 차는 것을 본다. 
몸의 어떤 기관이라도 다른 기관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그래서 몸은 전체가 건강해야 하는 것이다. 
일부가 아무리 건강해도 한 부분에 암이 생기면 그 암이 커지고 확장되면 생명 자체, 몸 전체가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몸의 모든 부분이 다 죽고 심장만 살거나 위장만 살 수 없고 몸의 다른 부분은 건강한 상태로 간만 죽거나 폐만 죽는 것이 아니다. 
몸은 전체로 구성되며 작은 한 부분의 경색으로도 충분히 죽음에 이를 수 있다. 
몸은 사실상 하나다. 
교회가 하나라는 것은 공동체 구호가 아니라 진리이며 사실이다.

2. 혈액순환 - 성령의 코이노니아(KOINONIA) 각주1

몸의 각 기관들은 어떻게 서로에게 생명을 전달하고 공유하고 힘을 얻고 살아갈까? 
그것은 피의 흐름, 즉 혈액순환을 통해서 가능하다. 
피의 흐름이 둔해지거나 피의 흐름이 원만하지 못하면 반드시 병에 걸린다. 
그리고 그 혈액순환의 장애가 치명적인 위치에서 발생한다면 급사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혈액순환은 성령의 ‘코이노니아-’이다. 
우리말로는 ‘교통‘, ‘교제’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故대천덕 신부의 언급처럼 ‘할렐루야’처럼 ‘코이노니아’를 원음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옳았을 것 같다. 

우리의 표현으로 상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제, 즉 코이노니아이다. 
거룩한 성도의 교제가 있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다. 
교인들의 성령안에서의 교제를 통해서 성경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전달되고 세상을 이길 힘을 얻는다. 
외부로부터 멸망케할 이단사상이나 더러운 세속의 가르침이 차단된다. 
사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는 신선한 산소와 영양분 백혈구와 같은 세균과 싸울 병사들을 끊임없이 공급한다. 
교회의 가르침이 공예배에서 바르게 설교를 통해 선포되고 이를 묵상하고 나누는 신실한 교인들의 교제가 있다면 교회는 당연히 건강하게 성장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상당수의 문제는 혈액순환 장애와 이로 인한 심근경색이다. 
상당수의 교인들이 다른 교인들과 서로 단절된 상태로 각자 예배생활을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서로를 향한 교제가 부족하거나 전무하다. 
서로 관여할 일도 없고 관여하는 것을 불편해 한다. 
우리가 학교나 직장, 사교클럽만큼의 교류도 없는, 멀쩡하게 보이나 다 망가져버린 껍데기 같은 교회에 습관적으로 예배드리면서 다니고 있다면 베드로에게 건네신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요 13:8)

3. 잃어버린 코이노니아를 찾아서

교제의 시작과 끝은 복음이어야 한다. 
나는 세속적인 지도자가 어린 신앙인들을 양육한답시고 세속의 성공주의, 영업전략, 성형시술, 다단계판매, 교육지상주의, 기독교 문화우상, 지식 우월주의, 자유주의, 이단 사이비 사상, 귀신론, 신비주의 운동, 감정주의 등의 온갖 쓸 데 없는 짓으로 교회를 어지럽히고 결국 교회를 파괴하기에 이르게까지하는 복음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코이노니아는 신앙의 계몽이나 삶의 수준을 향상시키거나 경제적인 이익을 얻게하는 도구가 아니다. 사업의 성공과 덕담을 나누며 용기를 북돋우는 모임도 아니고 기도했더니 성공하고 출세했다는 간증을 하는 모임도 아니다. 
또한 성경을 파헤쳐서 다른 사람들보다 신학적인 우월함을 추구하는 모임도 아니다. 
예수가 부활이고 생명임을 증거하고 예수가 구원의 이름임을 확인하고 서로의 죄를 회개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돕고 나누고 섬기는 삶이 코이노니아이다. 
성경공부보다 더 크고 기도회보다 더 뜨겁고 기부금을 모으는 것보다 더 강렬한 사랑이 그 안에 있다. 삶 전체가 흐르고 전달되고 나눠지고 보여지기 때문에 코이노니아의 범위는 전인격적이며 삶 자체가 된다.

잃어버린 코이노니아를 찾는 것은 목회자에게나 교인들 모두에게 매우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리며 광범위한 일이 분명하다. 
일 년에 한 두 번의 심방도 거절하는 판국에 코이노니아라니... 하지만 코이노니아보다 우리에게 시급한 일은 없다. 
교회의 생명력과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는데는 코이노니아가 최고다.

각주 1)

헬라어로 '코이노니아'는 '공유하다', '남과 함께 나누다', '공통'(共通), '다같이'라는 뜻을 지닌다. 
성경에서 이 말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①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제(요일 1:3) 
② 인간 서로간의(성도 사이의) 친교(요일 1:7) 등이다. 
하지만 이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교제(출 19:5-6)나 어떤 특별한 개인과의 교제(출 33:9-11)가 나타난다. 
이때 희생제사는 그 교제의 매개가 되기도 한다.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의미의 교제로 승화된다. 
특히, 사도 바울이 관용어처럼 언급한 '그리스도 안에'(엡 1:4)라는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교제의 경험의 핵심과 본질을 가장 잘 나타내 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교제케 하기 위하여 부르셨는데(고전 1:9), 이 교제는 단순히 개인적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기초가 된다(엡 4:16). 
결국,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각 지체들(형제)과의 교제를 가능하게 한다(고전 12장; 요일 4:20-21).





에스겔 21장
10-02-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죄악의 끝 때(에스겔 21:25)


너 극악하여 중상을 당할 이스라엘 왕아 네 이 이르렀나니 곧 죄악의 끝 때니라.
'O profane and wicked prince of Israel, whose day has come, whose time of punishment has reached its climax.

29. 네게 대하여 허무한 것을 보며 네게 대하여 거짓 복술을 하는 자가 너를 중상을 당한 악인의 목 위에 두리니 이는 그의 악의 끝 때가 이름이로다.
Despite false visions concerning you and lying divinations about you, it will be laid on the necks of the wicked who are to be slain, whose day has come, whose time of punishment has reached its climax.


죄악의 끝 때(the End of sin) time of punishment has reached its climax
베에트 아온 게츠(
בְּעֵת עֲוֹן קֵץ)

죄악(5771) 아본(ʽâvôn)  עָוֹן   

1. 사악.  2. 부패한 행동.  3. 죄에 대한 징계
발음 / 아본[ ʽâvôn ]
어원 / 연계형 עֲווֹן ,עֲוֹן, 대상21:8, 복수 연계형 עֲוֹנוֹת, 57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벌(창4:13), 죄악(창15:16, 삼상3:13, 겔4:6), 죄(출20:5, 민30:15, 애4:6), 죄책(출28:38), 악(출34:7, 신19:15, 잠5:22), 허물(레5:1, 삼하3:8, 욥7:21), 불의(레16:21, 욥33:9, 사27:9), 형벌(레26:41, 느19:29), 벌(삼상28:10,왕하7:9), 범죄(시89:32, 겔4:5), 죄짐(사43:24), 불의함(호14 : 1).
구약 성경 / 229회 사용


끝(7093) 게츠(qêts) קֵץ    

1. 극단.  2. 끝없이 אֵין קִץ
3. 파멸
발음 / 게츠[ qêts ]
어원 / 7112에서 유래한 압축형
관련 성경 / 지남, 끝(창8:6, 전12:12), 끝남(출12:41, 민13:25, 대하8:1, 겔7:2, 단11:27), 끝(창6:13, 신31:10, 왕하19:23), 마지막(욥6:11, 애4:18, 단11:40), 종말(시39:4, 합2:3), 끝날(단12:13)
구약 성경 / 67회 사용


때(6256) 에트(ʽêth) עֵת

1. 시간.   2. 정한 시간.  3. 어떤 시간
발음 / 에트[ ʽêth ]
어원 / 어미활용 עִתִּי, 복수 עִתּוֹת ,עִתִּים,57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때(창21:22, 욥39:1, 렘3:17), 철(레26:4), 당시(왕하16:6), 시세(대상12:32), 역사(대상29:30), 기한(스10:14, 느10:34, 렘27:7), 전례(에1:13), 시대(사33:6), 기회(시32:6), 날(사17:14), 낮(렘27:7).
[부] 아무 때나(레16:2),때때로(대하24:11), 당장(스8:34), 항상(시106:3, 잠5:19, 전9:8).
구약 성경 / 294회 사용


너 극악하여...이스라엘 와아

- 이는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를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불의하게 생활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반바벨론 정책을 쓴 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왕하 24:19-25:7).

네 날이 이르렀나니

- 여기에서 '네 날'이란 시드기야 왕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는 날을 가리킨다(7:7 참조).
"이 땅 주민아 정한 재앙이 네게 임하도다 때가 이르렀고 이 가까웠으니 요란한 이요 산에서 즐거이 부르는 이 아니로다."

그는 그의 통치 십 일 년 사 월 구일에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자 도망가다가 잡혀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왕하 25:3-7).

* 칼(21회) 2719 / 헤레브(chereb) חֶרֶב 

1. 칼.  2. 기타의 절단용 도구.  3. 할례용 칼
발음 / 헤레브[ chereb ]
어원 / 271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칼(창 3:24, 27:40, 스 9:7, 호 1:7), 한재(旱災)(신 28:22), 칼날(수 13:22, 삿 7:14, 단 11:33), 난리(대하 20:9), 장검(잠 30:14), 도끼(겔 26:9), 칼(슥 9:13), 황폐한 성읍(대하 34:6).
구약 성경 / 411회 사용

21:1-7. 칼은 심판의 도구

 의인과 악인을 끊을지라(3절)
  - 칼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상징하며 심판이란 악인과 의인 모두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러나 동일한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의인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혈기 있는 자(5절)
  - 새번역 / 육체를 지닌 모든 사람
  - 현대인 / 온 세상
  - 공동번역 / 사람들



성경에서 칼의 상징적 의미

1. 전쟁(레 26:6; 렘 5:12)
2. 심판(시 7:12; 계 19:15)
3. 분열(마 10:34)
4. 징계(대상 21:12)
5. 고통(눅 2:35)
6. 하나님 말씀(엡 6:17; 히 4:12)
7. 통치자 권위(롬 13:4)
8. 악인 말(잠 12:18)

칼 : 하느님의 심판 혹은 말씀

칼은 옛날의 중요한 전쟁 무기였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칼은 주로 전쟁을 묘사하는 이야기에서 자주 나타난다. 
칼에 맞아 쓰러진다고 하면 전쟁에서 패배를 뜻한다. 
"나는 이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겠다. 
그들을 원수들 앞에서 칼에 맞아 쓰러지게 하고,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 손에 죽게 하겠다. 
또한 그들의 시체는 하늘의 새들과 땅의 짐승들에게 먹이로 내어 주겠다"(예레이먀 19:7).

이사야 예언자도 평화가 오는 것을 칼과 창을 농기구로 만드는 것에 비유했다.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야 2:4).

또한 칼을 사용하는 것을 사람들 사이의 유혈과 다툼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어찌하여 너는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주님이 보기에 악한 짓을 저질렀느냐? 너는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를 칼로 쳐 죽이고 그의 아내를 네 아내로 삼았다. 너는 그를 암몬 자손들의 칼로 죽였다. 그러므로 이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사무엘하 12:9-10).

칼은 하느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주님의 칼은 피로 흥건하고 기름기로 덮여 있으며 어린 양과 숫염소들의 피에, 숫양들의 콩팥 기름에 젖어 있다"(이사 34,6). 잘못을 행하는 자를 벌주고 처형하는 정부의 권력을 칼의 이미지로 묘사되는 대목도 있다. "지배자는 그대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악을 행할 경우에는 두려워하십시오. 그들은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악을 저지르는 자에게 하느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그분의 일꾼입니다"(로마 13,4).

칼이 상처를 입히기 때문에 해악과 상처를 사람들에게 끼치는 모든 것들을 상징하는 데 사용되기 했다. 
"저는 사자들 가운데에, 사람을 집어삼키려는 것들 가운데에 누워 있습니다. 
그들의 이빨은 창과 화살,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입니다"(시편 57,5).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비수 같다. "이웃에게 해로운 거짓 증언을 하는 자는 방망이와 칼과 날카로운 화살과 같다"(잠언 25,18).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칼에 비유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능력 때문에 칼에 비유되었던 것이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이사애 49:2).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의 마옴 가장 깊은 곳까지 미치며 삶을 변화시키는 결과를 우리의 삶에 가져오기 때문이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열왕기하 25:1-7

  1. 시드기야 제구년 열째 십일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그 성에 대하여 진을 치고 주위에 토성을 쌓으매
  2. 그 성이 시드기야 왕 제십일년까지 포위되었더라.
  3. 그 해 넷째 구일에 성 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양식이 떨어졌더라.
  4. 그 성벽이 파괴되매 모든 군사가 밤중에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로 도망하여 갈대아인들이 그 성읍을 에워쌌으므로 그가 아라바 로 가더니.
  5. 갈대아 군대가 그 왕을 뒤쫓아가서 여리고 평지에서 그를 따라 잡으매 왕의 모든 군대가 그를 떠나 흩어진지라.
  6. 그들이 왕을 사로잡아 그를 립나에 있는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그들이 그를 심문하니라.
  7. 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

에스겔 21:29
네게 대하여 허무한 것을 보며 네게 대하여 거짓 복술을 하는 자가 너를 중상 당한 악인의 목 위에 두리니 이는 그의 악의 마지막 때가 이름이로다.

거짓 복술을 하는 자

- '복술'(카삼)은 단순히 제비뽑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성경에서는 주로 제비를 뽑아 점치는 것을 가리킨다.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수많은 우상 신들을 숭배했던 바, 많은 점치는 자들이 있었고 그 점치는 방법 중에 복술의 방법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들은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을 침공하는 점괘를 뽑음에 따라 암몬 족속 자신들은 안전하며 바벨론 군대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친 것 같다.

너를 중상을 당한 악인의 목위에 두리니

- 이는 해석하기에 약간 난해한 구절이다.
여기에서 '중상을 당한 악인'은 히브리 본문상 복수인데 바벨론 군대에 의해 진멸당한 유다인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본 구절에 대해 다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암몬 족속도 패망당한 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처지에 이른다는 것, 즉 패망당하여 죽임을 당하리라는 뜻이다(Leale, Delitzsch, Lange, Plumtre).

2. 암몬 족속이 헛된 점괘에 의해 거짓된 길로 간바 유다인들을 침공하여 죽게 만든다는 뜻이다(Wycliffe, Taylor, Matthew Henry).
이중 (1)의 견해가 지지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의 칼

20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받아야 되는 근거를 밝히고 있다면 21장은 심판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심판 예언을 들고 회개하기는커녕 불평하는 포로민들에게 삼림에 일어나는 불처럼 파괴와 살육이 전개될 것임을 밝혔다.
 
남방에 대한 심판을 해석(1-7절)
하나님의 심판을 칼에 의한 살육으로 비유(8-17절)
바벨론에 의한 절박한 심판을 예언(18-27절)
암몬 족속에 대한 심판을 예언(28-32절)


에스겔 20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상을 언급한 뒤 심판과 회복이 있을 것을 예언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가운데 마지막 부분에서 남방, 곧 유다에 맹렬한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질 것을 기록하였습니다.

21장은 남방에 내려질 그 진노의 심판 내용을 보다 상세하게 언급합니다.
바벨론의 칼에 의해 유다가 멸망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칼의 심판이 미치는 대상

1. 악인과 의인(21:4)

유다의 악인 뿐만 아니라 의인들도 함께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것으로 예언되고 있습니다.
악인이 심판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의인이 악인과 함께 심판을 받는 것은 의아한 일입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심판의 날에 의인이 악인과 함께 진노를 받는 것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의인들은 악인들의 죄악을 지적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데, 그들이 그 의무를 소홀히 했다면 마땅히 그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겔3:18).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인 것입니다.  

a. 의인의 사명(겔 3:18)
b. 의인 다니엘의 민족적 회개(단 9:5)

2. 모든 방백들

유다의 방백들은 유다 백성을 의의 길도 인도하고 그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 지도자로 세움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직무를 유기한 채 백성을 악의 길로 인도하고 그들을 착취하였습니다(겔 34:1-16).
따라서 그러한 악하고 탐욕스럽고 포악한 유다 방백들이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것은 마땅한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a.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왕상 21:16)
b. 강포로 다스린 방백들(겔 34:4)

3. 모든 백성

유다 백성들은 유다 방백들을 따라 너무도 노골적으로 우상을 숭배하였고 양식을 의뢰하였습니다(겔 4:16. 8:14).
그들은 그들이 소시민이라는 것을 앞세워 생존을 위해 짓는 죄는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운데 그들에게 풍년을 준다는 신은 닥치는 대로 섬기고 그들의 육신을 평안케 해주는 곡식과 돈을 탐욕스럽게 숭상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하찮은 자의 실존적이고 가장 영향력 없는 죄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용서받을 수 없는 동일한 죄입니다.
따라서 그들 역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a. 송아지 숭배(출 32:4)
b. 여인들의 담무스 숭배(겔 8:14)

칼의 심판이 가져오는 재앙

1.  육신의 고통

유다 방백들과 백성들은 그들의 육신의 안위와 쾌락을 위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보다 우상을 더 섬기고 물질을 더 원하며 이웃 나라의 힘을 의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에 의해 육신의 고통을 역으로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바라던 양식과 물질의 끊김을 당하고(겔 5:16. 겔 7:21), 그들이 의뢰하던 자들에 의해 학대와 살육을 당하는 것입니다(겔23:22-26).

a. 굶주림(겔 4:17)
b. 피곤함(겔 7:17)

2. 슬픔과 수치

자기가 의뢰하던 자들에게 학대와 살육을 당하고 보다 부강해지기 위해 수많은 우상을 섬기고 누구보다도 먹을 것과 재물에 집착했음에도 불구하고 굶주리고 파탄에 빠졌다면, 그것은 참으로 수치가 아닐 수 없으며 마음을 갈기갈기 찢는 슬픔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이 상황에 그대로 빠졌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깊은 슬픔과 수치를 한없이 느낄 것입니다(겔 7:16-19).

a. 슬픔(겔 7:16)
b. 수치와 조롱(겔 22:4)

3. 멸망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의 마지막은 유다의 멸망입니다. 배고픔과 수치와 학대 따위는 나라만 있다면 극복하고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없어진다면 그 모든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한마디로 절망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절망의 재앙을 유다 백성들에게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유다의 죄악이 심각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a. 무차별한 살육(대하 36:17)
b. 멸망(렘 1:15)

암몬에게 미치는 칼

1.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음

암몬은 롯과 그의 작은 딸 사이에서 태어난 벤암미라 하는 자의 후손들입니다(참조, 창19:38). 이 후예들은 이스라엘 민족 옆에 살면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족속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고자 작정하셨습니다.  

a. 타락한 딸(렘 49:4)
b. 경외치 않는 자에게 보응하심(시 55:19)

2.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함

암몬이 롯의 후예라면 이스라엘 백성과 암몬 백성은 형제지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할 때 그들은 기뻐하였습니다(참조, 겔25:6) 암몬은 형제애도 가지고 있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하는 파렴치하고 사악한 백성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또한 그들을 징벌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a. 아하 좋다(겔 25:3)
b. 즐거워함(겔 25:6)

3. 진노의 불과 칼이 임함

하나님의 백성인 북이스라엘과 유다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멸망을 당할 정도라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이 받을 심판의 무서움은 상상하기조차 엄청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암몬에게 내려지는 심판은 유다에게 내려지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잔혹하고 철저한 것이었습니다(참조, 겔25:7). 그들은 회복 없는 멸망에 이를 것입니다.  

a. 파멸(렘 49:5)
b. 만민 중에 끊음(겔 25:7)


범죄한 자들은 그들이 누구이든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한편 의인이 죄인들 가운데서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그도 고난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죄인의 대열에 서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의인의 자리에 설지라도 자기만을 생각하지 말고 공동체를 생각하여 죄인을 깨우치도록 자신을 헌신해야 합니다.  


[단어해설]
3절. 칼. 전쟁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말. 특별히 하나님의 칼은 심판을 상징.

7절. 마음이 녹으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땅에 내리는 심판으로 인해 백성들이 큰 사망의 슬픔과 무서움으로 두려움을 갖게 될 것을 나타냄.

14절. 중상케 하는 칼. 사람의 생명을 잔인하게 끊는 칼을 뜻하는데, 이것은 유다의 왕이 하나님의 심판의 칼 앞에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을 의미.

22절. 공성퇴. 숫양이 뿔로 상대방을 들이박듯이 적군의 성벽이나 성문을 무너뜨리기 위해 만든 도구를 가리킴. 공성퇴와 토성과 운제를 세운다는 것은 예루살렘에 대한 바벨론의 대대적인 포위 공격을 의미.

29절. 허무한 것을. 원어 <aw]v;:솨웨>는 '공허, 허위'라는 뜻. 비실체적이고 무가치한 것을 가리킴. 즉 우상이나 특별히 겉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허위된 말을 가리킴.


[신학주제]
여호와의 심판의 도구.
본장에는 바벨론이 유다와 암몬 중 어느 나라를 먼저 심판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점을 치는 모습이 드러나 있다. 즉 화살을 전통에 넣고 흔든 후에 먼저 나오는 국가를 선택하는 방법, 우상에게 물어보는 방법, 신에게 바치기 위하여 제물을 죽인 후 제물의 간의 색깔을 보고 판단하는 방법 등이다. 느부갓네살이 복술을 이용하여 침공을 결정했지만,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뜻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의 주관자로서 인간의 불신과 미신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뜻을 완벽하게 수행해 나가시는 분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기 때문에 그 도구로 인한 심판은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사면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결국은 죄값을 치러야 한다.  


[영적교훈]
인간은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결정적이고도 구체적인 대답을 갈망한다. 점술가들은 이러한 인간의 질문에 명쾌한 답을 주는 것처럼 행세한다. 점술가는 물론이요, 그에게서 점괘를 얻는 자는 결국 미혹하는 영의 희생물이 될 뿐이다. 우리의 보이지 않는 미래를 지배하는 것은 점술가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성도들은 여는 사람들처럼 그릇된 점술에 의지하거나 미신을 신뢰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든 점술을 그 손에서 끊어 버려야하는 것이다(참조, 미5:12).






(예루살렘을 향한 예언)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며 성소를 향하여 소리내어 이스라엘 땅에게 예언하라” 주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인 에스겔은 얼굴을 예루살렘 쪽으로 돌리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언하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규탄하여 외치고, 이스라엘 땅을 규탄하여 예언하라 하십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에 잡혀간 선지자입니다 매를 맞는 사람보다 매 맞을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이 더 아픕니다 매를 맞은 후는 고통을 이기기가 쉽습니다.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은 괴로움이 적습니다. 그곳에서 자유인이 되기도 하고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이들은 결정적인 고난이 있으므로 불안은 없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마음은 편안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에스겔에게 예루살렘 쪽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대한 칼의 심판)

“3 이스라엘 땅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지라 4 내가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 터이므로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모든 육체를 남에서 북까지 치리니 5 모든 육체는 나 여호와가 내 칼을 칼집에서 빼낸 줄을 알지라 칼이 다시 꽂히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은 이스라엘 땅에 전해야 합니다. 여호와 주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대적하십니다. 여호와가 칼집에서 칼을 뽑아, 그들 가운데 있는 의인과 악인을 다 쳐죽이십니다. 칼을 칼집에서 빼어서, 무릇 육체를 가진 모든 사람을 남쪽에서 북쪽에까지 치실 것입니다. 전쟁이 나면 악인만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도 함께 죽습니다 그 칼은 절대로 칼집에 다시 꽂히지 않고 많은 사람을 죽일 것입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육체를 지닌 모든 사람이 여호와가 칼집에서 칼을 빼어 든 줄을 알 것입니다. 바벨론에 의한 전쟁의 위험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알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예루살렘은 피바다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칼입니다. 우리가 병들거나 어려움을 땅할 때 우리는 내가 병든 것으로 모든 고통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실패를 당하기도고 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고통을 당할 때 이것으로 어려움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밝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바벨론에 잡혀온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예언에는 길한 예언이 있고 부정적인 예언이 있습니다. 망하리라는 예언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에 대한 부정적인 에언을 하라고 하십니다.

(에스겔의 탄식)

“6 인자야 탄식하되 너는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7 그들이 네게 묻기를 네가 어찌하여 탄식하느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재앙이 다가온다는 소문 때문이니 각 마음이 녹으며 모든 손이 약하여지며 각 영이 쇠하며 모든 무릎이 물과 같이 약해지리라 보라 재앙이 오나니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사람인 에스겔은 유다의 멸망을 탄식헤야 합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허리가 끊어지는 듯이 괴로워하면서, 슬피 탄식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탄식하느냐고 물으면, 에스겔은 이스라엘에게 재앙이 다가온다는 소문 때문이라고 해야합니다. 그 날에는 사람마다 간담이 녹으며, 두 손에 맥이 빠지며, 모두들 넋을 잃으며, 모든 무릎이 떨 것입니다. 재앙이 닥쳐 오고 있습니다. 반드시 이룰 것입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해야합니다.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문제는 바로 에스겔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그들의 문제를 외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일산상 편하다고 안주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들의 고통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리고 슬퍼하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왔으므로 예루살렘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에 대해서 여기서 함께 슬퍼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쪽을 향하여 예언하며 탄식하며 울라고 하십니다. 1975년에 경제가 어렵고 북한에서 쳐내려온다고 합니다. 그때 많은 사람이 이민을 갔습니다. 그 이민 간 사람이 미국에서 교회에 나옵니다 그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기도합니다. 한국은 공해가 심하고 전쟁의 위험이 있다고 합니다. 지옥같은 한국에서 가나안 복지 같은 미국으로 옮겨진 것을 감사한다고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면 안 됩니다. 나 하나만 무사해서 평안하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대한민국에 있는 사람들이 잘 살아야 외국에 있는 사람도 잘 사는 것입니다. 한국이 망하더라도 자기만 잘 살면 된다는 것은 극단적인 이기주의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깨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예루살렘 쪽을 향하여 울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칼과 병과 기근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날카로운 심판의 칼)

“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9 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 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 같이 되기 위함이니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 내 아들의 규가 모든 나무를 업신여기는도다 11 그 칼을 손에 잡아 쓸 만하도록 빛나게 하되 죽이는 자의 손에 넘기기 위하여 날카롭고도 빛나게 하였도다 하셨다 하라” 주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인 에스겔은, 하나님의 예언을 전해야 합니다. 여호와 주가 말씀하십니다. 칼이다! 칼에 날을 세웠다. 칼이 번쩍거린다고 하십니다. 사정없이 죽이려고 칼에 날을 세웠으며, 번개처럼 휘두르려고 칼에 광을 냈습니다. 여호와 백성이 유다에 대한 모든 경고와 심판을 무시하였습니다. 어찌 심판을 받는 그들에게 기쁨이 있을 수 있습니까?. 죽이는 그 사람의 손에 쥐어 주려고 칼에 광을 내었습니다. 살육자의 손에 넘겨 주려고 그렇게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광을 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하는 슬픔)

“12 인자야 너는 부르짖어 슬피 울지어다 이것이 내 백성에게 임하며 이스라엘 모든 고관에게 임함이로다 그들과 내 백성이 함께 칼에 넘긴 바 되었으니 너는 네 넓적다리를 칠지어다 13 이것이 시험이라 만일 업신여기는 규가 없어지면 어찌할까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인 에스겔은 부르짖으며 통곡해야 합니다. 그 칼이 이스라엘 백성을 치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도자를 칠 것입니다. 지도자들과 여호와의 백성이 함께 칼에 찔려 죽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가슴을 치며 통곡해야 합니다. 여호와가 당신의 백성을 시험하십니다. 여호와의 백성이 회개하기를 거절하면, 이 모든 일들이 그들에게 닥칠 것입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오십대의 남자가 여자보다 세 배나 일찍 죽는다고 합니다. 남자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쓰러집니다. 남자의 죽음은 아내의 슬픔입니다. 결혼식 주례를 하는데 어떤 분이 소개합니다. 제가 교회 열심히 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냐고 했더니 우리는 목사님의 말씀을 한 주도 듣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합니다. 눈에 눈물이 고입니다. 지금 간신히 살아간다고 합니다. 나는 이제 실패하고 쓸모없다고 말합니다. 하루하루 산다고 합니다. 이것을 남의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너는 바벨론에 있어 고난을 당하니 충분하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목자는 그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고통해야합니다. 아픈 사람들과 같이 아파해야합니다.

(죽이는 큰 칼)

“14 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예언하며 손뼉을 쳐서 칼로 두세 번 거듭 쓰이게 하라 이 칼은 죽이는 칼이라 사람들을 둘러싸고 죽이는 큰 칼이로다 15 내가 그들이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하려고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 놓았도다 오호라 그 칼이 번개 같고 죽이기 위하여 날카로웠도다” 사람인 에스겔은 하나님의 예언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손뼉을 치라고 하십니다. 그 칼이 두세 번 휘둘릴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칼이요, 큰 무리를 학살하는 칼입니다. 사람들 주위를 빙빙 도는 칼입니다. 사람들의 간담이 녹고, 많은 사람이 쓰러져 죽을 것입니다. 여호와가 성문마다 살육하는 칼을 세워 놓았습니다. 번개처럼 번쩍이는 칼, 사람을 죽이려고 날카롭게 간 칼을 세워놓았습니다.

(분노의 칼)

“16 칼아 모이라 오른쪽을 치라 대열을 맞추라 왼쪽을 치라 향한 대로 가라 17 나도 내 손뼉을 치며 내 분노를 다 풀리로다 나 여호와가 말하였노라” 하나님은 칼에게 날을 세워 오른쪽을 치며 방향을 잡아 왼쪽을 치라고 하십니다. 어느 쪽이든지 너의 날로 치라고 하십니다. 여호와도 손뼉을 치십니다. 심판한 후에 유다의 죄악에 대한 여호와의 분노도 풀릴 것입니다. 여호와 주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죄악을 끊어버리기 원합니다. 불신자가 보면 바벨론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눈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죄가 문제입니다.

(바벨론 왕의 칼)

“1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9 인자야 너는 바벨론 왕의 칼이 올 두 길을 한 땅에서 나오도록 그리되 곧 성으로 들어가는 길 어귀에다가 길이 나뉘는 지시표를 하여 20 칼이 암몬 족속의 랍바에 이르는 길과 유다의 견고한 성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을 그리라 21 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 어귀에 서서 점을 치되 화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제물의 간을 살펴서 22 오른손에 예루살렘으로 갈 점괘를 얻었으므로 공성퇴를 설치하며 입을 벌리고 죽이며 소리를 높여 외치며 성문을 향하여 공성퇴를 설치하고 토성을 쌓고 사다리를 세우게 되었나니 23 전에 그들에게 맹약한 자들은 그것을 거짓 점괘로 여길 것이나 바벨론 왕은 그 죄악을 기억하고 그 무리를 잡으리라” 주께서 사람인 에스겔에게 바빌로니아 왕이 칼을 가지고 올 수 있는 두 길을 그리라고 하십니다. 그 두 길은 같은 바벨론 나라에서 시작되도록 그리라고 하십니다. 길이 나뉘는 곳에는 안내판을 세우라고 하십니다. 칼이 암몬 자손의 랍바로 갈 수 있는 길과, 유다의 견고한 성읍인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는 길을 그리라고 하십니다. 바빌로니아 왕이 그 두 길이 시작되는 갈림길에 이르러서는,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알아보려고 점을 칠 것입니다. 당시에 화살들을 흔들거나, 드라빔 우상에게 묻거나, 희생제물의 간을 살펴보고, 점을 쳤습니다. 점괘는 오른쪽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성벽을 허무는 쇠망치를 설치하고, 입을 열어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전투의 함성을 드높이고, 성문마다 성벽을 허무는 쇠망치를 설치합니다. 흙 언덕을 쌓고, 높은 사다리를 세우라고 나올 것입니다.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이것이 헛된 점괘로 보이겠지만, 이 점괘는 바벨론과 약속한 예루살렘 주민에게 바벨론과의 약속을 어긴 자신들의 죄를 상기시킬 것입니다. 예루살렘 주민이 바빌로니아 왕의 손에 잡혀 갈 것임을 경고합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이 폭로됨)

“24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의 악이 기억을 되살리며 너희의 허물이 드러나며 너희 모든 행위의 죄가 나타났도다 너희가 기억한 바 되었은즉 그 손에 잡히리라” 그러므로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폭로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범죄하였는지, 이제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행실에서 그들의 온갖 죄가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은 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그들의 적의 손에 넘겨 주십니다. 하나님은 극악무도한 이스라엘 왕 시드기야에게 최후의 형벌을 받을 그 날이 왔고, 그 시각이 되었다고 하십니다. 재앙으로 그들의 악이 드러납니다. 지진이 나자 수도원이 무너집니다. 그곳에 시체가 나옵니다. 수도원 벽에 살인 사건이 난 시체를 숨겨두었습니다. 이런 죄를 들추기 위해서 지진이 난 것입니다. 전쟁을 통해서 죄가 드러납니다. 안정된 상태에서는 죄가 숨겨집니다. 불의가 숨겨집니다. 그러나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죄가 드러납니다. 죄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감추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죄가 만천하에 다 드러납니다. 압살롬의 반란으로 다윗의 죄를 만천하에 드러냈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만천하에 폭로하십니다. 질병이나 재난이나 전쟁이나 지진이 있든 죄악에 대해서 심판하고 죄악을 들추고 폭로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본인도 나만 죄인가 정당화했던 것이 나의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잘못이 나타납니다.

(죄악의 마지막 때)

25. 너 극악하여 중상을 당할 이스라엘 왕아 네 날이 이르렀나니 곧 죄악의 마지막 때이니라.

죄악의 끝때라는 라는 말이 두 번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죄악을 멈추는 것입니다.
시드기야 왕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바벨론은 똑똑한 자 만명을 잡아갑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과 손을 잡고 바벨론과 대항하여 싸웁니다.
바벨론이 이를 알고 이차 삼차 침입합니다.
이런 때에 포로로 있는 에스겔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로하여금 쳐서 더 이상 악을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대단히 귀한 말씀입니다.
이것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생각해야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알며 정당화합니다.
사업을 위해서 더 큰 역사를 위해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멈추십니다.
하나님이 작품을 만드십니다.
하나하나가 다 간증거리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나의 교만을 멈추고 어리석은 것을 지혜롭게 하고자 합니다.
죄인됨을 스스로 인정하게 하십니다.
권력이 있어 불의한 일을 하면 권력을 가져감으로 불의한 일을 멈추십니다.
돈 때문에 불의한 일을 합니다.
가난하게 하여 사치한 죄를 멈추게 하십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병들면 죄를 짓지 못합니다.
악마도 병들면 천사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극악무도한 죄를 멈추게 하는 일은 재앙 뿐입니다.
술을 잘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사가 지방간이어서 술을 먹으면 죽는다고하자 절대술을 먹지 않습니다.
술을 딱 끊습니다.
의사가 말립니다.
당신은 이대로 가면 합병증이 나서 죽는다고 합니다.
술자리에 앉아서 권하지 말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죄악의 끝때가 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짓지 못하게 막으십니다.

(마땅히 얻을 자에게 주심)

“26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관을 제거하며 왕관을 벗길지라 그대로 두지 못하리니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니라 27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유다의 왕관을 벗기고, 면류관을 제거하라고 하십니다. 시드기야의 죄를 멈추게 하십니다. 그가 말씀을 업신여깁니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낮은 사람은 높이고, 높은 사람은 낮추라고 하십니다. 순종치 않는 교만한 자는 낮추시고 겸손하게 순종하는 자는 높이십니다. 여호와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또 엎드러뜨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엎어지는 일을 없게 하십니다. 다스릴 권리가 있는 그 사람이 오면, 여호와는 나라를 그에게 넘겨 주실 것입니다. 요즘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미래의 지도자가 되려면 비영업적인 지도자가 되어야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선사업하는 것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베풀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이득을 위해서 해서는 안 됩니다. 이기적인 생각으로 해서는 존경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부터 생각하면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지도자는 존경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형벌이 무서워서 보상을 바라고 따르는 것은 못할 짓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자를 낮추십니다. 거짓을 진실하게 하십니다. 마땅이 얻을 자는 긍극적으로 메시야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분이 오셔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만드십니다.

(암몬 자손의 마지막 때)

28 인자야 너는 주 여호와께서 암몬 족속과 그의 능욕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셨다고 예언하라 너는 이르기를 칼이 뽑히도다 칼이 뽑히도다 죽이며 멸절하며 번개 같이 되기 위하여 빛났도다
29 네게 대하여 허무한 것을 보며 네게 대하여 거짓 복술을 하는 자가 너를 중상 당한 악인의 목 위에 두리니 이는 그의 날 곧 죄악의 마지막 때가 이름이로다.

암몬자손은 유다에게 바벨론에 반역을 하고 애굽을 의지하도록 도운 자입니다. 사람인 에스겔은 여호와 주 하나님이 암몬 자손과 그들이 받을 질책을 말하니, 에스겔은 이 예언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을 에스겔은 암몬 자손에게 전해야 합니다. 암몬에게 칼이다. 칼이 뽑혔다고 하십니다. 무찔러 죽이려고 뽑혔습니다. 하나님은 다 없애 버리고, 번개처럼 휘두르려고 광을 냈습니다. 점쟁이들이 암몬에게 보여 주는 점괘는 헛된 것입니다. 점쟁이들이 에스겔에게 전하여 주는 예언도 거짓말입니다. 암몬이 죄를 지었으니, 암몬이 악합니다. 그 심판의 날이 옵니다. 최후의 심판을 받을 날이 옵니다. 칼이 암몬의 목 위에 떨어질 것입니다.

(기억에서 사라지는 아몬 자손)

“30 그러나 칼을 그 칼집에 꽂을지어다 네가 지음을 받은 곳에서, 네가 출생한 땅에서 내가 너를 심판하리로다 31 내가 내 분노를 네게 쏟으며 내 진노의 불을 네게 내뿜고 너를 짐승 같은 자 곧 멸하기에 익숙한 자의 손에 넘기리로다 32 네가 불에 섶과 같이 될 것이며 네 피가 나라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네가 다시 기억되지 못할 것이니 나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라 하라” 칼은 다시 칼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암몬 자손은 그가 지음을 받은 곳, 그가 자라난 곳에서 여호와가 그를 심판하십니다. 여호와의 분노를 그에게 쏟아 붓고, 타오르는 진노의 불길을 그에게 내뿜고, 사람 죽이는 데 능숙한 짐승 같은 사람들의 손에 그를 넘겨 주십니다. 암몬 자손을 무자비한 자에게 붙이십니다. 하나님이 고랑을 채우십니다. 암몬은 불의 땔감이 될 것이며, 암몬은 그 나라의 한복판에 피를 쏟을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기억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 주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여러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아야합니다. 죄악을 멈추어야 할 것이 있으면 죄악을 멈추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진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가까이 들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과 평화로 다스릴 메시야를 소망해야합니다. 아멘!


혈기 있는 자(20:48. 21:4-5)

무릇 혈기있는 자는...알리니

- 여기에서 '혈기 있는 자'의 히브리어 '바사르'는 문자적으로 '살', '육체' 등을 뜻한다.
이는 본절에서 육신을 가진 인간을 가리키는데 특히 죄의 본성을 갖고 하나님 앞에서 불의하게 사는 자들을 지칭하는 듯하다(21:4).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는 진노의 심판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게 된다는 뜻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영생(永生)”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영생”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이 19절입니다.
영생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들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영생을 얻는 비결을 네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주 예수를 믿는 자(3:15, 16, 36. 5:24, 6:40, 47)
둘째, 예수를 아는 것(17:3)
셋째, 말씀과 명령을 따르는 것(6:68, 12:50) 
넷째, 떡과 잔에 참여하는 것(6:51, 54)

“영생이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다!”

세상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합니다.
과거의 시간은 이미 경험한 시간입니다.
현재의 시간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미래의 시간은 앞으로 경헝해야 할 시간입니다.
영원이란 내가 경험한 과거와 경험하고 있는 현재와 경험해야 할 미래를 하나로 연결하는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핼라어에는 시간을 표현하는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카이로스(καιρός. 2540. kairos)는 하나님의 시간을 말합니다.
크로노스(χρόνος.  5550. chronos)는 사람의 시간을 말합니다. 





에스겔 20장 / 이스라엘의 반역
09-30-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게 물으려고 왔느냐?(에스겔 20:3)

인자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내게 물으려고 왔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Son of man, speak to the elders of Israel and say to them,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Have you come to inquire of me? As surely as I live, I will not let you inquire of me, declares the Sovereign LORD.'

너희가 내게 물으려고 왔느냐
(할리드로쉬 오티 앝템 바임)   הֲלִדְרֹשׁ אֹתִי אַתֶּם בָּאִים

Have you come to inquire of me?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는 과정을 사도 요한은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그 천사를 통하여 그 종 요한에게 보여주시고 요한은 그가 본 것을 여러 종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20장에서 유다의 장로들이 선지자 에스겔을 찾아와서 하나님께 묻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의도를 알려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않으실까요?
하나님은 이미 선지자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통하여 유다 백성들이 가야 할 길과 선택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셨지만 듣지도 않고 깨닫지도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떠할까요?
아마 동일한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기록된 말씀으로 모든 것을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계시하셨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들을 통하여 깨닫는 기회도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설교자들을 세워 놓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깨우치고 가르치는 것보다는 예수를 믿고 복을 많아 받아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은혜이며 은총인 것처럼 보여지는 타락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멸망시키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멸망시키려는 의도는 유다가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따라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범죄를 유다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부터 어느 정도의 죄악을 하나님께 저질렀는가를 아주 소상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범죄가 당시의 유다 백성에게 어떻게 계속해서 행해지고 있는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애급에서의 불순종(1-9절)
광야 생활에서는 불순종(10-26절)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불순종(27-29절)
에스겔 시대의 불순종(30-44절)
예루살렘의 멸망(45-49절)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들이여!
영의 눈을 떠서 오늘의 시대를 직시하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생명력이 있는 믿음을 회복합시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세상을 향하여 주님의 거룩한 뜻을 보여주고 깨우치고 알려서 더 참혹한 세상으로 넘어가기 전에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희망의 세상을 세워가는 일을 위하여 쓰임받기 위하여 기도합니다.

주여,
이 작은 나를 붙잡아 주시고
마지막까지 주님의 선한 도구로 쓰임받게 하옵소서.


에스겔 20장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역사를 심도 있게 서술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범죄의 역사를 아브라함 시대부터 폭넓게 서술함으로써 이스라엘이 현재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 배경을 기술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패역의 역사와 하나님의 끊임없는 자비의 역사가 대조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드러내 주고 있다.
본장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진술하면서 언약 신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에스겔은 과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인 아브라함의 언약과 모세 언약을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왜냐하면 이 두 언약은 이스라엘 전역사의 핵심적인 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승 내용이자 신앙 고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중심으로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계속되는 반역과 배도에 역사하심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본장은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다루는 부분(1-9절),
광야 생활 속에서의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다루고 있는 부분(10-26절),
가나안 땅에서의 불순종(27-29절),
에스겔 당대의 이스라엘의 불순종(30-44절),
남방에 불을 보낼 것을 예언하는 부분(45-49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멸망시키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멸망은 유다가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따라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본장은 그 범죄를 유다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부터 어느 정도의 죄악을 하나님께 저질렀는가를 아주 소상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범죄가 당시의 유다 백성에게 어떻게 계속해서 행해지고 있는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시작부터 불순종한 이스라엘

1. 출애굽 이전부터 하나님께 불순종함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의 뜻에 잘 따르다가 잘 살게 되자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게 절하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하기 이전부터, 다시 말하면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할 때부터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 증거를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주식 그 당시에도 애굽의 우상들에게 절하였으며 그들이 주는 양식을 의뢰하였습니다(참조, 겔20:5-8). 이 불순종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 때까지도 소급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 가뭄 때에 애굽으로 내려가는 범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참조, 창12:10-20). 결국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a.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출5:21)
b. 애굽으로 가는 자에게 화가 있음(사31:1)
c. 애굽과의 음행(겔16:26)

2. 모든 인류가 처음부터 범죄함

앞에서 언급한 내용은 인류가 처음부터 범죄한 족속이라는 영적 의미를 가집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도중에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창조가 있은 뒤 아직 다음 세대를 낳기도 전에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습니다(참조, 창3:1-24). 인류는 첫 인간 때부터 하나님께 범죄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류가 처음부터 하나님께 범죄한 족속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참조, 롬5:12-19)
a. 범죄의 싹(창3:6)
b. 의인은 없음(롬3:10)
c. 죄 없다 하면 거짓된 자(요일1:8)

광야에서 불순종한 이스라엘

1. 출애굽에서 가나안 입성까지 불순종함
애굽에서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막 나오면서부터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뿐만 아니라(참조, 출14:10-14) 광야에서도 수없이 많은 불순종과 불신앙을 하나님께 드러내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다가 그 곳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막강한 권력과 힘을 가진 애굽 왕 바로를 권능으로 굴복시키시는 것(참조, 출12:29-33)과 거대한 홍해 바다를 가르는 것(참조, 출14:21-23)과 바로의 군대를 멸하시는 것(참조, 출14:24-25)과 및 광야에서 농사도 짓지 아니求?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십 년 간이나 먹여 살리시는 기적을 보고서도 그 마음을 강퍅케 한 것입니다.  
a. 애굽의 고기 회고(출16:3)
b. 송아지 우상(출32:4)
c. 불신의 백성(민13:11)

2. 하나님의 인도 가운데서도 불순종함
아담 때로부터, 즉 처음부터 범죄한 인류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계속해서 베푸셨음에도(참조, 창3:15,21) 그 죄에서 떠나기는커녕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습니다(참조, 창4:8,23-24;창6:5). 이 죄악은 지금 살펴보고 있듯이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저질러졌고 출애굽 사건의 본체 되는 사건, 곧 하나님의 독상하신 아들이 인간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죽고 부활한 놀라운 사건이 있은 후인 지금도 저질러지고 있습니다(참조, 롬7:21-24;빌2:5-11). 인간은 이 인생 광야에서도 여전히 범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a. 가인의 살인(창4:8)
b. 육체의 죄악(롬7:22-23)

가나안에서 거역한 이스라엘

1) 가나안 정복으로부터 멸망 때까지 거역함
출애굽 이전부터 거역하여 출애굽 후 광야에서도 거역한 이스라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계속해서 거역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이르러 그 곳에서 사는 동안 줄곳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것입니다. 실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몇몇 의로운 지도자들의 시대 이외에는 거의 예외없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불법을 행했습니다.  
a. 이방신 숭배(사2:11-12)
b. 바알 숭배(왕상16:31)

2) 그리스도 안에서도 인간은 범죄함
참된 출애굽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 곧 성도들도 이 세상에 있는 한 죄와는 완전히 결별하지 못합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가나안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한 것처럼 여전히 범죄합니다. 따라 이러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은 대단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부인(마26:72-75)

3) 심판과 회복
언제나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은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애초에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며 그 작정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을 아시는 예지에서 기인합니다(참조,겔16:60-63;롬5:6-11;롬8:29-30). 이 구원은 글자 그대로 성취되었고(참조, 스1:1-11) 영적으로 지금 성취되고 있으며(참조, 눅17:21;요5:24) 앞으로 영원히 성취될 것입니다(참조, 계21:1-4;계22:1-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간과하심(롬3:25-26)

결론
이스라엘이 그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율법의 의에 이르지 못한 것처럼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합니다(참조, 롬3:23).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것을 보여 주는 모형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시는 하나님은 자기 편에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길은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한 가운데 이르러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분만을 섬기고 의뢰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단어해설]
4절. 가능한. 물질적인 것 뿐만 아니라 윤리적이나 종교적으로 혐오스러운 것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시체나 동성 연애나 우상 숭배 등을 뜻한다.

21절. 더럽혔는지라. 원어 <WlLe=ji:힐렐루>는 '속되다, 더럽히다'라는 뜻으로 제정된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는 행위와, 언약과 명령을 깨뜨리는 행위를 가리킨다.

28절. 격노케하는 제물. 이스라엘 백성들이 높은 산에 산당을 짓고 우상을 섬기고 이방 신상을 세워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자극한 사실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섭리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모세 언약을 언급하고 있다.
이 언약은 당시 종주와 봉신의 조약 형태에서 비롯되었는데, 하나님이 종주의 역할을 하고 이스라엘은 봉신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킨 하나님은 언약 백성들에게 언약의 조항들인 율법에 충실하도록 요구하셨다.
특히 이 율법은 십계명에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그중에서도 안식일 준수의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본장에서도 안식일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오고 있는 것이다. 선지자는 모세 언약을 십계명으로 압축하고, 십계명을 안식일에 대한 규례로 압축시키면서 백성들의 패역한 태도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다. 이 사실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행위나 조건에 있지 않고 오직 아브라함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에 달려 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불순종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가 끊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광야에서 광야 제1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제2세대만이 들어갔듯이, 당시의 불순종하던 백성들이 아닌 새로운 언약 백성인 '남은 자들'에게만 회복의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영적교훈]
하나님은 구원자이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구원자'로 선포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였다. 본장 9절에 '이는 내 이름을 위함이라'는 어구가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 전체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같은 하나님의 이름이 더욱더 분명하게 계시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함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과 같은 뜻이 된다.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간 장로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살아도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뭉쳐살면 선교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각나라에 흩어서 우상숭배하는 사람들 사이에 살게 하십니다. 그들을 선교사로 살기를 원합니다. 모든 백성이 다 잘 되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방 사람들의 속으로 들여보냅니다. 안 믿는 사람들 속으로 우리를 파송하십니다. 사도행전 초기에 성도들은 성령이 충만해지고 은혜 속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재림주를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을 잊었습니다. 그들만 은혜를 받기를 원했는데 핍박을 받아서 흩어지게 하십니다. 그들이 세계선교를 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를 이방인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정체성을 지켜야 하지만 이방인 가운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을 애굽으로 보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애굽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게 살아서 복을 받는다는 것을 애굽사람에게 보여주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에서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영향을 받아서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멸하여야 하지만 그들에게 둔 경륜을 따라서 광야로 그들을 끌어냈습니다.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보내고자 하였습니다. 광야에서도 애굽 사람들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원망하고 불평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그들을 살리십니다.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나안의 우상을 심판하며 말씀을 지키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 종족의 풍속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사람들에게 들어가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바벨론으로 보냅니다. 그들을 바벨론으로 보내서 그들이 말씀을 지키며 바르게 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시 이방땅으로 보내서 그들을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그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장로들이 에스겔에게 나왔습니다)

“1. 일곱째 해 다섯째 달 열째 날에 이스라엘 장로 여러 사람이 여호와께 물으려고 와서 내 앞에 앉으니 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에스겔이 바벨론에 있은지 제 칠년 다섯째 달 십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 주의 뜻을 물으려고 에스겔에게 와서, 그 앞에 앉았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러 와서 응답을 받으러 왔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왔는데 자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유가 있더라도 노예의 자유입니다. 그들이 바벨론 주인하고 잘 지내야 합니다. 거역하면 고생합니다. 우리는 어짜피 자유가 없는 노예이니까 우상을 섬겨도 괜찮지 않느냐 묻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노예는 도덕을 초월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장발장이 가난하고 어려워서 훔친 빵도 죄는 죄입니다. 주인은 용서할 수는 있어도 훔친 사람은 죄는 죄인 것입니다. 죄는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좋은 주인이 종에게 같이 우상숭배하기를 원합니다. 주인이 우상숭배 준비하라고 하는데 안 할 수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적당히 타협하며 살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응답하십니다. 그 때에 주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묻기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3. 인자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내게 물으려고 왔느냐 내가 나의 목숨을 걸고 맹세하거니와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사람인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장로들에게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라하십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고 와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께 묻는 것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전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4. 인자야 네가 그들을 심판하려느냐 네가 그들을 심판하려느냐 너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들의 가증한 일을 알게 하여
5.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옛날에 내가 이스라엘을 택하고 야곱 집의 후예를 향하여 내 손을 들어 맹세하고 애굽 땅에서 그들에게 나타나 맹세하여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하였노라
6. 그 날에 내가 내 손을 들어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그들을 위하여 찾아 두었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

사람인 에스겔은 오히려 그들의 죄를 심판해야 합니다.
에스겔이 그들의 죄악을 심판해야 한다고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조상이 저지른 우상숭배의 역겨운 일을 그들에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에스겔은 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그들에게 일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옛날에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야곱 집의 자손에게 손을 들어 여호와 자신을 그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손을 들고 맹세하여 여호와가 그들의 주 하나님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는 그들에게 손을 들어 맹세하기를,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서, 여호와가 이미 그들에게 주려고 골라 두었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땅으로 인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부르셔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백성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벨론에서 죄와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왕의 호의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주는 기름진 우상숭배한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핍박이 있어도 거절합니다.
풀무불에 들어가도 그 친구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습니다.
사자 굴에 넣는다고 해도 다니엘은 기도를 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자에서 다니엘을 건지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입니다.
그들이 우상숭배를 거절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핍박이 있어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지켜야합니다.
그들이 정체성을 지켰을 때 그들이 느브갓네살과 다리오와 벨사살 왕에게 하나님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죄악된 세상에서 역설적으로 죄와 타협하지 말고 살아야합니다.

유다는 애굽에서 반역하였습니다

“7.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눈을 끄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고 애굽의 우상들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였으나 8그들이 내게 반역하여 내 말을 즐겨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눈을 끄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지 아니하며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 땅에서 그들에게 나의 분노를 쏟으며 그들에게 진노를 이루리라 하였노라” 여호와가 그들을 애굽으로 보낸 후에 또 그들에게 일러주었습니다. 각자 눈을 팔게 하는 우상들을 내던지고, 이집트의 우상들로 그들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는 주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애굽땅에서 여호와에게 반역하고, 여호와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는 이집트 사람들을 회개시키기보다 그들에게 물들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현혹시키는 우상들을 내던지지 않았고, 이집트의 우상들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이집트 땅의 한복판에서 그들 위에 여호와의 진노를 쏟아 부어, 그들에게 여호와의 분노를 풀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출애굽시키셨습니다)

“9. 그러나 내가 그들이 거주하는 이방인의 눈 앞에서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이는 내 이름을 위함이라 내 이름을 그 이방인의 눈 앞에서 더럽히지 아니하려고 행하였음이라”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크셨습니다. 여호와는 당신의 이름 때문에,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이방 민족의 한가운데 살던 이스라엘이, 그 모든 이방 민족이 보는 앞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하였습니다. 바로 그 여러 민족이 보는 앞에서, 여호와가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냄으로써, 여호와 자신을 그들에게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여호와는 능력과 사랑이 많은 분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규례를 주었습니다)

“10.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나와서 광야에 이르게 하고 11.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 12.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 그래서 여호와는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서, 광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여호와는 그들에게, 누구나 그대로 실천하면 살 수 있는 율례를 정하여 주고, 여호와 규례를 알려 주었습니다. 또 여호와는 그들에게 안식일도 정하여 주어서, 이것이 나와 그들 사이에 표징이 되어,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주인 줄 알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후에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십계명을 잘 지켜서 그들이 생명을 얻고 천대까지 복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 이름을 위하여 인도하셨습니다)

“13.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준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에게 쏟아 멸하리라 하였으나 14.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달리 행하였었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나라들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도 애굽에서와 같이 여호와에게 반역하였습니다. 누구나 그대로 실천하면 살 수 있는 여호와 율례를 그들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규례를 배척하였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이 송아지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안식일도 크게 더럽혀 놓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가 이르기를, 광야에서 그들의 머리 위에 내 진노를 쏟아, 그들을 모두 멸망시키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멸하고 모세를 통해서 큰 나라를 만들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진노하시면 하나님의 이름이 낮아진다고 합니다. 어찌하여 애굽사람으로 하여금 진멸하게 하려고 구원하였다고 말하게 하느냐고 합니다. 그들을 심판하면 하나님이 악한 분이 됩니다. 하나님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상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은 어떻게 되느냐합니다. 여호와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의 이름에 욕이 될까봐,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이방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냈는데, 바로 그 이방 사람들의 눈 앞에서, 여호와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이스라엘을 남기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베푸신 긍휼을 기억하고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불신자들을 광야에서 멸하였습니다)

“15. 또 내가 내 손을 들어 광야에서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그들에게 허락한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지 아니하리라 한 것은 16. 그들이 마음으로 우상을 따라 나의 규례를 업신여기며 나의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음이라 17. 그러나 내가 그들을 아껴서 광야에서 멸하여 아주 없이하지 아니하였었노라”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다시 불신에 빠져서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여호와는 광야에서 그들에게 손을 들어 맹세하기를, 여호와가 그들에게 주기로 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모든 땅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마음대로 우상을 따라가서 여호와의 규례를 업신여겼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율례를 지키지 않으며, 여호와의 안식일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신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와는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어, 출애굽 일세대는 죽이시고 이 세대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후손을 죽이지 않고, 광야에서 그들을 멸하여 아주 없애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는 근본을 세우고자 하십니다. 주일을 지키고 바르게 예배해야 바른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합니다. 안식일을 쉬는 것은 신앙고백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온전히 쉬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라고 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라하십니다.)

“18. ○내가 광야에서 그들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 조상들의 율례를 따르지 말며 그 규례를 지키지 말며 그 우상들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19.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나의 율례를 따르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고 20.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리라 하였노라” 여호와는 광야에서 그들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조상이 우상을 섬기던 율례를 따르지 말고, 그들의 규례를 지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우상으로 너희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호와는 주 그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유대인들은 우상의 율례를 따르지 말고 여호와의 율례를 따르고, 그분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십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그것이 여호와와 유대인 사이에 맺은 언약의 표징이 되게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표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통하여 여호와가 주 그들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광야에서 인도하셨습니다)

“21. 그러나 그들의 자손이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지켜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따르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더럽힌지라 이에 내가 이르기를 내가 광야에서 그들에게 내 분노를 쏟으며 그들에게 내 진노를 이루리라 하였으나 22.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손을 막아 달리 행하였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여러 나라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도 광야에서 여호와에게 반역하였습니다. 누구나 그대로 실천하면 살 수 있는 여호와의 율례를 따르지 않았고,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안식일을 더럽혔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광야에서 그들의 머리 위에 여호와의 진노를 쏟아 부어, 그들에게 여호와의 분노를 풀겠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으로 그들을 다 멸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당신의 이름 때문에, 그들을 다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방 민족인 이집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이끌어 냈는데, 바로 그 이방 사람들의 눈 앞에서 여호와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서, 여호와 손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우상숭배하는 이스라엘을 흩으십니다.)

“23. 또 내가 내 손을 들어 광야에서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그들을 이방인 중에 흩으며 여러 민족 가운데에 헤치리라 하였나니 24. 이는 그들이 나의 규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율례를 멸시하며 내 안식일을 더럽히고 눈으로 그들의 조상들의 우상들을 사모함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살리면서도, 그들이 계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그들을 이방 민족들 가운데 흩어 놓고, 여러 나라 가운데 쫓아보내겠다고, 여호와가 광야에서 또 한번 손을 들어 맹세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눈이 자기 조상의 우상에게 팔려서, 여호와의 규례대로 살지 않고, 여호와 율례를 배척하며, 여호와의 안식일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그들을 바벨론으로 쫓아서 훈련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바벨론 포로로 징계하셔서 그들이 말씀을 어긴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징계를 받으면서 말씀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유다 땅에서는 다니엘도 마찬가지로 우상을 섬기던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친구는 포로로 가서 정신을 차립니다. 우상 섬기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벨론의 고난이 신앙적인 사람을 만듭니다. 인격적으로 내적인 존재가 바로 됩니다. 이렇게 매를 맞으면서도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방 규례를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25. 또 내가 그들에게 선하지 못한 율례와 능히 지키지 못할 규례를 주었고 26. 그들이 장자를 다 화제로 드리는 그 예물로 내가 그들을 더럽혔음은 그들을 멸망하게 하여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였음이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자 여호와가 그들에게, 바벨론의 옳지 않은 율례와, 목숨을 살리지 못하는 규례를, 지키라고 우상의 규례를 주었습니다. 여호와는, 그들이 모두 맏아들을 제물로 바치도록 시켰고, 그들이 바치는 그 제물이 그들을 더럽히게 하였습니다. 여호와가 이렇게 한 것은, 그들을 망하게 하여 여호와가 주인 줄 그들이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여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조상들이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27. ○그런즉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 조상들이 또 내게 범죄하여 나를 욕되게 하였느니라 28. 내가 내 손을 들어 그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였더니 그들이 모든 높은 산과 모든 무성한 나무를 보고 거기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노하게 하는 제물을 올리며 거기서 또 분향하고 전제물을 부어 드린지라 29. 이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다니는 산당이 무엇이냐 하였노라 (그것을 오늘날까지 바마라 일컫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인 에스겔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여야 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일러주어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우상숭배와 안식일을 범하여 여호와를 배반함으로써, 여호와를 모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칩니다. 여호와가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겠다고 손을 들어서 맹세한 가나안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높은 언덕과 잎이 무성한 나무를 보고, 그 곳에서 짐승을 잡아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고, 거기서 여호와를 분노하게 하는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우상에게 향기로운 제물을 바치며, 부어 드리는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가 그들이 찾아 다니는 그 산당이 무엇이냐고 그들에게 꾸짖었습니다. (그런 곳의 이름을 오늘날까지 바마라고 부른다. 바마는 산당인데 찾아다니는 것이 무엇이냐 말의 합성어입니다.)

(하나님은 죄악된 이스라엘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30.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조상들의 풍속을 따라 너희 자신을 더럽히며 그 모든 가증한 것을 따라 행음하느냐 31. 너희가 또 너희 아들을 화제로 삼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오늘까지 너희 자신을 우상들로 말미암아 더럽히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겠느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에스겔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하나님의 책망을 전하여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유다도 가나안 땅에서 그들 조상들의 행실을 따라 그들 자신을 더럽히고, 그들의 역겨운 우상을 따라 다니며 음행을 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또 유다는 가나안 땅에서 온갖 제물을 바치고 그들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여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들이 오늘날까지 우상들을 섬김으로써, 그들 자신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내십니다. 400년 노예로 산 사람들을 구원하여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구원받은 자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사람들이 우상섬기는 것을 보다가 우상을 섬기는 그짓을 합니다. 몸은 구원받았고 법적으로 위치적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풍속 사상 가치관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많은 죄를 짓습니다. 그들을 인도하여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오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푸른 나무를 섬기고 우상을 섬깁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면서 음란을 행합니다. 지금도 중동에 보면 우상 섬기고 성적으로 음란한 행동을 합니다. 제물을 우상에게 드리다가 더 귀한 것을 찾아 아들을 우상에게 제물로 들립니다. 아들을 가장 귀한 제물로 우상에게 바칩니다. 자녀를 불 사이에 지나가게 하는 짓을 합니다. 자식을 우상에게 바쳤습니다. 이런 식으로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합니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는, 장로들이 여호와에게 묻는 것을 허락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여호와가 당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여호와는 유다인이 여호와에게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말씀을 지킬 수 없다고 타협하는 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십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마음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십니다)

“32. 너희가 스스로 이르기를 우리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 족속 같이 되어서 목석을 경배하리라 하거니와 너희 마음에 품은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리라” 유다 사람들은 스스로 우리가 이방 사람, 곧 여러 나라의 여러 백성처럼 나무와 돌을 섬기자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그들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대로는 절대로 우상을 섬기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들을 바벨론으로 보내서 그들을 연단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로 훈련하십니다. 하나님이 강하게 절대적인 사랑으로 역사하십니다. 아비가 자식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 같이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가르치지만 하지 않고 강권적으로 붙들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을 연단하여 제이의 창조를 이루십니다. 사람답게 하는 존재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사람을 바르게 만드는 법은 두 가지입니다. 잘 되게 하여 바르게 만들기도 하고 고난을 주어서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평범한 가운데 무사히 살면 의식의 변화가 오지 않고 타성에 빠집니다. 사람의 생각을 창조적으로 바꾸려면 성공하게 하는 것도 있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지게 하여 사람을 어떻게 바꾸고자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되면 바르게 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소원 성취가 되어서 바른 신앙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정적인 변화를 줍니다. 전염병이나 전쟁을 통해서 가치관의 변화가 생깁니다. 돈이 필요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돈에 끌립니다. 재산 다 날리고 나서 돈은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시련을 통해서 가치관 인생관이 바뀝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포로로 보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 알고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바벨론에서 맹세한 땅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십니다]

“3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반드시 다스릴지라” 여호와가 당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가 반드시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그들의 죄를 책망하시고 그들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어 영원히 피조물을 다스립니다. 인격적인 대상을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예언자를 통해서 징계하고 책망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여호와가 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기다립니다. 다스리는 것이 먼저이고 다음에 우리가 깨달아집니다. 다스려지는 의지가 먼저이고 우리가 다스림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다스리고 다음에 진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리십니다. 아이들도 어머니가 때리려고 하면 말로 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언자의 말을 거절하였습니다. 다음에는 진노의 채찍으로 다스리십니다. 진노로 멸망시키지 않고 다스립니다. 진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쉴만한 물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합니다. 양은 목자가 어디로 인도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목자를 믿고 따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여도 믿고 따라갑니다. 하나님은 뜻이 있고 경륜이 있고 생각이 있어서 현실을 주신 것입니다. 기도의 첫걸음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여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게 달라고 해야합니다. 알고 순종하고자 하여야 합니다. 알려주시면 달려가겠다는 의탁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첫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내가 그 뜻을 기뻐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마음을 다스려달라는 것입니다. 좋은 여건에서도 고독하고 쓸쓸할 때가 있습니다. 역경중에도 마음이 시원할 때가 있습니다. 셋째는 나의 뜻대로 하지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합니다. 아이들이 공부하다가 졸리니까 내일 아침 새벽 기도 전에 깨워달라고 합니다. 나의 마음을 내가 못 믿어서 부모님께 나의 마음을 바치는 것입니다. 내 의지를 바치는 것입니다. 때려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먼 훗날에 깨닫고 감사하니까 때려서라도 인도해달라는 것입니다. 아주 강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분노로 쏟아 인도하신다고하십니다. 진노로 다스린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 나라를 심판하십니다)

“34.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여러 나라에서 나오게 하며 너희의 흩어진 여러 지방에서 모아내고 35. 너희를 인도하여 여러 나라 광야에 이르러 거기에서 너희를 대면하여 심판하되 36. 내가 애굽 땅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을 심판한 것 같이 너희를 심판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가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그들을 여러 나라에서 데리고 나오며,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고 있는 여러 나라에서 그들을 모아 오십니다. 여호와가 그들을 인도하여 민족의 광야로 데리고 나가서, 거기에서 그들과 대면하여 죄악된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여호와가 이집트의 인접한 땅 광야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의 죄악을 심판하여 40년간 훈련하신 것과 같이 그들의 죄악을 열방의 광야에서 심판하십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반역하는 자는 가나안 땅에 오지 못합니다)

“37.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38. 너희 가운데에서 반역하는 자와 내게 범죄하는 자를 모두 제하여 버릴지라 그들을 그 머물러 살던 땅에서는 나오게 하여도 이스라엘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는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39.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려거든 가서 각각 그 우상을 섬기라 그렇게 하려거든 이 후에 다시는 너희 예물과 너희 우상들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지니라“ 여호와가 그들을 목자의 지팡이 밑으로 지나가게 하여, 너희의 숫자를 세며, 언약의 띠로 맬 것입니다. 하나님의 채찍 속에 약속이 있습니다. 뜻이 있고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안심하는 것입니다. 막대기와 언약 속에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들 가운데서 여호와에게 반역하고 범죄한 죄들을 없애 버리십니다. 그들이 지금 거주하는 바벨론 땅에서, 여호와가 그들을 데리고 나오기는 하겠으나, 그들이 다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자 결단한 자만 이스라엘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여호와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각자 그들의 우상들을 섬길테면 섬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려면 섬기라고하십니다. 양다리를 걸쳐서 왔다갔다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하십니다. 확실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미온적인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상을 섬기면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우상에게 가라고 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섬길 때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그들이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나, 이 다음에 다시는, 그들의 온갖 예물과 우상숭배로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40.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땅에 있어서 내 거룩한 산 곧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다 나를 섬기리니 거기에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지라 거기에서 너희 예물과 너희가 드리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훈련을 받은 후에 여호와의 거룩한 산, 이스라엘의 그 높은 곳에서,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를 섬길 것입니다. 거기에서 여호와가 그들을 기쁘게 맞아들이며, 거기에서 여호와가 그들의 제물과 가장 좋은 예물을 온갖 거룩한 제물과 함께 요구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죄를 미워할 것입니다.)

“41.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나오게 하고 너희가 흩어진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낼 때에 내가 너희를 향기로 받고 내가 또 너희로 말미암아 내 거룩함을 여러 나라의 목전에서 나타낼 것이며 42. 내가 내 손을 들어 너희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고 43. 거기에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미워하리라“ 여호와가 여러 민족 속에서 그들을 데리고 나오며, 그들이 흩어져 살던 그 모든 나라에서 그들을 모아 올 때에, 여호와는 아름다운 향기로 그들을 기쁘게 맞이할 것입니다. 그들을 바른 자리에 인도하십니다. 이방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통하여 여호와의 거룩함을 드러낼 것입니다. 여호와가 이렇게 그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곧 여호와가 그들 조상에게 주겠다고 손을 들어 맹세한 땅으로 데리고 들어갈 것입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여호와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을 더럽히며 살아온 길과 모든 행실을 기억하고, 그들이 저질렀던 그 온갖 악행 때문에 그들이 스스로의 죄를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오늘 잘못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 밖으로 나돌면 그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내 나이 되면 가슴을 치며 후회할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 큰 엘씨디 티비를 봅니다. 내용은 듣지 못하고 그림만 봅니다. 왜 소리는 안 듣고 그림만 보느냐고 하니 어짜피 영어를 못알아 듣는다고 합니다. 그래도 총소리는 들어야하지 않느냐고 하지 중고등학교때 영어를 공부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산다고 합니다. 십년을 영어하고 영어 한 마디를 제대로 못합니다. 늙어서는 공부해도 안 됩니다. 35살 전에 공부해야합니다. 언젠가 이렇게 나쁜 죄를 지었는가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로 돌아서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아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44.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은 여호와가 이렇게 그들의 악한 길과 타락한 행실에 따라, 그대로 그들에게 갚았어야 했지만, 여호와 이름에 욕이 될까봐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이스라엘 사람은 여호와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불타는 숲의 비유

45.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46. 인자야 너는 얼굴을 남으로 향하라 남으로 향하여 소리내어 남쪽의 숲을 쳐서 예언하라
47. 남쪽의 숲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너의 가운데에 불을 일으켜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 나무를 없애리니 맹렬한 불꽃이 꺼지지 아니하고 남에서 북까지 모든 얼굴이 그슬릴지라
48. 혈기 있는 모든 자는 나 여호와가 그 불을 일으킨 줄을 알리니 그것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

주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인 에스겔은 얼굴을 남쪽으로 돌리라고 하십니다.
남쪽을 규탄하여 외치고, 남쪽 네겝의 숲을 규탄하여 예언하라고 하십니다.
에스겔은 네겝의 숲에 말하라고 하십니다.
에스겔은 주의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가 숲 속에 불을 지르십니다.
그 불은 숲 속에 있는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 나무를 태울 것입니다.
활활 치솟는 그 불꽃이 꺼지지 않아서, 남쪽에서 북쪽까지 모든 사람의 얼굴이 그 불에 그으를 것입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육체를 지닌 모든 사람이, 여호와 주가 그 불을 질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불은 절대로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회개하고 믿음을 지키지 않은 자들은 망합니다.
전도를 듣고 회개하지 않은 바벨론 사람들도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에스겔의 말을 듣지 않음


“49. 내가 이르되 아하 주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비유로 말하는 자가 아니냐 하나이다 하니라” 에스겔이 "주 하나님, 그들은 에스겔을 가리켜 말하기를 모호한 비유나 들어서 말하는 사람이라고 한다고 아뢰었습니니다. 바벨론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에스겔의 책망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에스겔 19장 / 방백들을 위한 애가
09-29-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 어미는 무엇이냐?(에스겔 19:2)

부르기를 네 어미는 무엇이냐 암사자라 그가 사자들 가운데 엎드리어 젊은 사자 중에서 그 새끼를 기르는데.
and say: " 'What a lioness was your mother among the lions! She lay down among the young lions and reared her cubs.

네 어미가 무엇이냐(마 임메카) מָה אִמְּךָ
What was your mother?


무엇이냐(4100) 마(mâh) מָ ,מַ ,מֶה ,מֶה ,מַה ,מַה־מָה   

1. 의문대명사 : 무엇.  2. 소유격 뒤에 위치한 경우. 3. 소유격 앞에 위치한 경우
발음 / 마[ mâh ]
구약 성경 / 554회 사용

네 어미는(517) 엠( ’êm)  אֵם 

1. 할머니.  2.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여자. 3. 친척 관계를 나타낼 때도 쓰임
발음 / 엠[ ’êm ]
관련 성경 /  어머니(창 3:20, 신 21:18, 왕하 4:20, 11:1, 대하 12:13)
구약 성경 / 220회 사용


네 어미는 무엇이냐

- 여기에서 '네 어미'란 비유적인 말로서 혹자는 요시야 왕의 부인이며, 여호아하스 왕의 모친인 하무달(왕하 23:31; 24:18)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나(Herrmann, Orelli), 일반적으로는 유다 왕국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본다(Wycliffe, Cooke, Bruce, Delitzsch, Dyer).

이와같이 한 국가 또는 지역을 '어미'로 묘사한 곳은 이 외에도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시 87:5, 6; 사 50:1; 호 2:4, 7; 4:5).
한 국가 또는 지역이 '어미'로 묘사된 것은 그 국가 또는 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이 그곳에서 출생하고 안주하며 나아가서 그곳에 예속되기 때문인 것 같다.

암사자라

- 혹자는 창 49:9이나 민 23:24 등에 유다나 이스라엘에 대해 예언된 '암사자'라는 말을 따른 것으로 추측한다(Plumtre).
그러나 무엇보다도 본 구절에서 유다 왕국을 '암사자'로 묘사한 것은 사자가 백수(百獸)의 왕으로서 강하고 용맹한 바 유다 왕국의 강함과 용맹성을 나타내기 위함이다(Wycliffe, Leale).

이와 달리 혹자는 암사자를 잔인하고 강포한 존재로 보기도 하지만(Calvin, Plumtre) 내용상 지지받기 힘들다.
특히 '암사자'란 다음에 언급되는 '사자들'이나 '젊은 사자'와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이 사자의 생산성(生産性) 또는 양육성(養育性) 등의 뜻을 함축한다.

사자들 가운데 엎드리어

- 여기에서 '사자들'이란 유다 왕국 주위에 거하고 있는 이방 열국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엎드리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바츠'(*)는 '(네 다리 모두를 모으고) 쭈그리다', '기대다', '휴식하다'의 뜻을 지닌다.
이로 보아 본 구절은 암사자가 다른 사자들 가운데서 편안히 거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유다 왕국이 이방 열국 가운데 안연히 거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칼빈(Calvin)은 여기에서 사자가 잔인하고 무서운 존재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유다 왕국이 주위 이방 열국들과 마찬가지로 안일하게 타락한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설명은 유다 왕국 말기에 국한된 것이기에 타당하지 않다.

그 새끼를 기르는데

- 여기에서 '그 새끼'란 여호아하스를 가리킨다(3절).


에스겔 19:1
너는 이스라엘 방백들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방백(나시. nâsîyʼ) 5387. נָשִׂיא 

1. 방백.  2. 특정한 지파의 지도자.  3. 창세기 17:20
발음 / 나시[ nâsîyʼ ]
어원 / 537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두령, 고관(창 17:20, 겔 32:29), 추장(창 34:2), 지도자(출 22:28), 어른(출 34:31), 족장(출 35:27, 민 27:2, 대하 5:2), 귀족(수13:21), 총독(스 1:8), 구름(잠 25:14, 렘 10:13), 족속(겔 12:10), 왕(겔 12:12, 39:18, 48:21), 통치자(겔 45:9).
구약 성경 / 129회 사용




본문은 이스라엘 왕들의 근본적인 죄악을 애가의 형태로 소개합니다.
18장은 이스라엘 백성들 각 개개인의 죄를 깨우치는 것이라면, 19장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죄를 비유적으로 말씀합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다윗 왕가를 암사자에, 왕들을 젊은 사자에 비유하는 상징법으로 소개합니다.
또한 동일한 방식으로 다윗 왕가를 포도나무에, 왕들을 가지에 빗대어 묘사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언약 관계를 실제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여호아하스 왕이 애굽의 포로로 잡혀 간 사실을 비유적으로 묘사(1-4절)
둘째는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간 사실을 비유적으로 묘사(5-9절)
셋째는 시드기야 왕이 포로로 잡혀 간 사실에 대한 애가(10-14절)

유다 왕들의 죽음을 통해 살아 남은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도록 촉구하고 헛된 소망을 갖지 못하도록 경계합니다.

 
유다 왕국은 다윗 왕으로 인해 큰 번영과 영광을 누렸습니다.
다윗의 바른 통치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예들은 다윗의 길에서 떠나 악을 행함으로 그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습니다.
본장은 이러한 악한 왕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가는 동시에 왕위에서 뽑혀 다시는 그 위에 앉지 못할 것이라고 예고 합니다.

유다의 왕들 중 대부분은, 특히 후기 왕들은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함으로 심판을 받아 개인적으로 파멸에 이르고 나라는 멸망케 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메카니즘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도자 되었을 때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지도자의 길을 걸아야할 것입니다.

에스겔이 애가를 지어 슬픔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국 유다의 멸망 때문이었습니다.
8절에 보면 이방인의 공격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바벨론이 여호야긴을 공격하려 오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야긴이 결국 바벨론 왕의 포로로 잡혀 가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겪은 후에 결국 유다는 시드기야 왕을 마지막으로 멸망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직면한 에스겔은 동족이라는 혈연적인 관계에서 오는 고민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종교적 측면에서 오는 고민 때문에 이러한 애가를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많은 고난과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때마다 슬픔의 표현을 인간적으로 하지 말고, 슬픔의 표현을 신앙으로 잘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사자 비유

1.  암사자

에스겔 선지자는 유다의 왕을 젊은 사자에 비유하고 그 젊은 사자인 유다 왕의 조상들과 그 조국을 암사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자는 백수의 왕입니다.
따라서 유다의 열조 왕들과 그 후예들을 사자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유다의 열조 왕들과 그 후예들을 사사에 비유한 것은 또한 유다 자체가 선택받음으로 열국 중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였다는 것을 아울러 나타내 줍니다.
한편 유다의 열조 왕과 유다 나라가 암사자로 비유된 것은 그들이 유다의 후예들을 배출하였기 때문입니다.

a. 강한 사자(삼하1:23)
b. 사자의 얼굴(겔1:10)

2.  그 새끼 하나

여기서 말하는 새끼 하나는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지칭합니다.
그는 유다의 왕이 되었으나 왕위에 오르자마자 동족을 살해하고 강포와 약탈을 일삼았습니다(왕하 23:2).
이에 그는 징벌을 받아 애굽 왕에 의해 즉위 3개월 만에 폐위당한 채 애굽으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3:33-34; 대하 36:4).

a. 강포한 유다 목자들(겔 34:4)
b. 젊은 사자(암 3:4)

3. 또 다른 새끼 하나

본문이 언급하는 내용으로 볼 때 여기서 언급되는 또 다른 새끼 하나는 여호아하스 다음 왕인 여호야김을 가리킵니다.
물론 그 다음 다음 왕인 여호야긴도 본문의 정책과 일치하기 때문에 여호야김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 역시 선왕들처럼 강포를 행하다 느부갓네살 제일차 침공 때 패하여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대하 36:6-7).

a. 여호야김의 악행(렘 22:16-17)
b. 여호야김에게 내린 저주(렘 36:30)

포도나무 비유

1. 네 피의 어미

여기서 '네 피의 어미'란 '네 혈통의 어미'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것은 유다 왕들을 배출한 유다 열조 왕들과 유다 나라를 가리킵니다.
결국 이렇게 보면 이 표현은 앞에 '암사자'와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한편 본문의 묘사대로 유다는 한때 주변 모든 나라보다 부강하였었습니다. 그 나라의 부는 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풍성하였고 그 힘은 주위 나라가 두려워할 정도로 강했습니다.  

a. 솔로몬 시대의 부(왕상 10:21-22)
b. 열방이 다윗에게 복종함(대상 22:18)

2) 뛰어난 한 가지

이 상징은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를 지칭합니다.
시드기야는 즉위 초기에 바벨론에 의지함으로 나라가 부강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왕들보다 뛰어난 왕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 가지 않아 바벨론을 배반했습니다(왕하 24:20).
그리하여 그가 다스리는 유다 나라는 다시 쇠약해져 버렸고 그는 그가 배반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공격을 받아 왕위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두 눈이 뽑힌 채로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왕하 25:7).

a. 시드기야의 배반(왕하 24:20)
b. 시드기야 때의 번영(겔 17:6)

3) 홀이 될 만한 가지가 없도다

이 예언의 말씀은 시드기야 이후로 더 이상 유다 나라에 왕이 없을 것을 의미합니다. 시드기야에게 배반당한 경험이 있는 느부갓. 살은 더 이상 유다 사람을 왕위에 앉히지 않고 유다를 속국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언의 말씀대로 시드기야 이후로는 다시는 다윗의 후손이 왕위에 앉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a. 그달리야의 대리 관할(왕하 25:22)
b. 바사국이 주재할 때까지 노예가 됨(대하 36:20)

애가가 주는 교훈

1. 약한 방백은 반드시 심판을 받음
본문의 애가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백성을 바로 인도하고 백성을 평안케 한 왕은 영광을 그 만대에 전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가운데 백성을 악으로 인도하고 강포를 행하여 나라를 멸망으로 가게 하고 백성을 피폐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그 위에서 쫓김을 당하며 욕된 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본문의 애가는 악한 방백은 반드시 그 죄행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교훈해 줍니다.  

a. 시드기야의 고통(왕하 25:7)
b. 악한 목자를 대적하심(겔 34:10)

2. 악한 방백은 그 나라와 백성을 도탄에 빠뜨림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악한 지도자는 악을 행함으로 자신만 심판에 이를 뿐 아니라 그 밑에 있는 백성들도 피폐하게 만들며 그 나라를 쇠악과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지도자는 한 나라의 머리이기 때문에 그가 악의 길을 걸으면 그 몸 된 백성들도 악한 길을 걷게 되기 때문입니다.  

a. 들짐승의 밥이 된 백성들(겔 34:5)
b. 의와 공평을 베풀어야 할 상전들(골 4:1)

적용

한 나라나 사회 또는 단체의 지도자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지도자 된 자는 자신의 길에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도 살고 그 밑의 사람들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하나님의 은혜와 뜻이 있어 머리 된 자들은 이 사실을 기억하여 바른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a.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는 목자(겔 34:23)
b.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요 10:11)


유다의 왕들 중 대부분은, 특히 후기 왕들은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함으로 심판을 받아 개인적으로 파멸에 이르고 나라는 멸망케 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메카니즘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도자 되었을 때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지도자의 길을 걸아야할 것입니다.





1절. 애가. 일반적으로 읊조리는 시를 뜻함. 장례식에서 사용되기도 했으며 예언적 측면에서 임박한 죽음이나 멸망의 내용을 담고 불려지기도 함.

2절. 기르는데. 사자가 새끼에게 용맹스럽게 자라도록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것을 가리킴.

3절. 삼키매. '먹다, 태우다'라는 뜻으로,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권력을 잡아 동족을 살해하고 강포와 약탈을 일삼은 사실을 가리킴.

9절. 철롱에 넣어. 원어 <r~g"WSb':바쑤가르>는 갈고리가 달린 우리나 철롱을 뜻함. 여기서는 비참한 상태로 끌려 가는 것을 나타냄.

10절. 네 피의. '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데 죽음을 초래하는 폭력과 파괴의 피 흘림과 하나님에게 드리는 희생 제물의 피 흘림이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유다가 망하고 백성들이 죽음을 당할 것임을 의미.

11절. 건강하여. '힘, 능력'을 뜻하는데 인간의 안전을 유지시킬 수 있는 능력을 뜻함.

12절. 분노 중에 뽑혀서. 원어 <hm;je:헤마>는 '열, 분개, 독약' 등의 뜻을 지니며, <hm;je:나타쉬>는 '근절하다, 뽑다, 멸망시키다'라는 뜻. 여기서는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되었음을 나타내며 이것은 그들의 죄가 가져온 결과임을 가리킴.

13절. 광야. 광야는 쉴 만한 장소가 없는 죽음의 땅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황폐화됨을 의미.

14절. 태우니. 원어 <hl;k;a;:아칼라>는 '먹다, 태우다'라는 뜻으로 음식물의 소비 또는 비유적으로 하나님의 징벌을 뜻한다. 여기서는 예언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유다로부터 메시야가 나타나 유다의 죄를 소멸시킴을 말한다.


유다의 말기적 상황을 그리고 있는데,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의 종말에 대한 상황이 비유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근본적인 관계를 상기하게 만드는 포도나무 비유를 사용하여 유다의 패망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본장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인도하는 진정한 통치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예표적으로 제시해 준다.
사실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신약의 옛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도구에 불과하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도 인간적인 한계와 실수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른 이스라엘 왕들은 더욱 많은 결함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흠이 없고 정의로운 통치자를 내려 보내실 수밖에 없었다.
인간 왕의 연약함과 사악함은 완전하신 메시야의 통치를 기대하는 소망으로 연결된다.
이런 관점에서 본장에 수록된 애가는 메시야 대망 사상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으로서의 독특한 위치와 특권을 상실하였을 때 슬픔을 맛보게 되는데, 이러한 슬픔을 통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인간 왕은 자신들을 구원으로 이끌 수 없음을 깨닫고 궁극적 메시야에 대해 소망해야 되는 것이다.  

에스겔이 애가를 지어 슬픔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국 유다의 멸망 때문이었다.
본장 8절에 보면 이방인의 공격이 묘사되어 있다.
이는 바벨론 이 여호야긴을 공격하려 오는 것을 가리키는데, 여호야긴이 결국 바벨론 왕의 포로로 잡혀 가게 된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을 겪은 후에 결국 유다는 시드기야 왕을 마지막으로 멸망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직면한 에스겔은 동족이라는 혈연적인 관계에서 오는 고민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종교적 측면에서 오는 고민 때문에 이러한 애가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성도들도 많은 고난과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다.
이때마다 슬픔의 표현을 인간적으로 하지 말고, 슬픔의 표현을 신앙으로 잘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애가는 슬픈 노래입니다.
하나님은 슬픈 노래를 부르라고 합니다.
이 슬픈 노래를 부르고 들으면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애가 속에는 과거에 대한 사실을 부르지만 미래에 대한 소망도 있습니다.
슬픈 노래는 회개를 재촉하는 노래이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의 무상을 노래하는 유행가가 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허망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노래를 들으면서 욕심을 버리고 미움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끝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나오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슬픈 노래를 통해서 죄를 심판하고 운명을 예언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 노래를 부릅니다.
이 노래를 부르며 탄식하고 눈물짓고 이 노래와 함께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고관을 위해서 애가를 부르라

1. 너는 이스라엘 고관들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2. 부르라 네 어머니는 무엇이냐 암사자라 그가 사자들 가운데에 엎드려 젊은 사자 중에서 그 새끼를 기르는데
3. 그 새끼 하나를 키우매 젊은 사자가 되어 먹이 물어뜯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매
4. 이방이 듣고 함정으로 그를 잡아 갈고리로 꿰어 끌고 애굽 땅으로 간지라.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불러 줄 애가를 지으라고 하십니다.
에스겔은 이렇게 노래를 부르라고 하나님이 애가를 지어주십니다.
유다의 어머니는 누구였느냐고 물으십니다.
유다의 왕은 사자들 가운데 엎드려 있으면서, 젊은 사자들 틈에서 제 새끼들을 기르던 암사자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암사자가 그 새끼들 가운데서 하나를 키웠더니, 젊은 사자가 되었습니다.
새끼 사자는 유다의 후왕을 말합니다.
그가 사냥하는 것을 배워, 사람을 잡아 먹었습니다.
이방 민족들이 이 소식을 듣고, 함정을 파서 새끼를 잡아 갈고리로 꿰서, 이집트 땅으로 끌어 갔습니다.
유다의 네 왕을 사자에 비유하였습니다.
사자는 지상의 왕입니다. 사자는 배고프지 않고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자도 불행합니다. 사자도 살기가 힘이 듭니다. 사자 수놈이 오면 그 암놈들은 다 자신의 것으로 만듭니다. 다른 사자의 새끼를 다 죽입니다. 그 권력이 이삼년 갑니다. 다른 숫사자가 옵니다. 전왕을 쫓아내고 그 새끼를 죽이고 암놈을 차지합니다. 사냥은 암사자가 합니다. 숫사자는 사자들끼리 싸울 때 적을 대적할 때 싸웁니다. 숫사자의 얼굴이 상처투성입니다. 사냥도 성공확률이 십분의 일입니다. 사자도 굶어죽습니다. 굶으면 변비가 생깁니다. 사자가 변비로 죽습니다. 무서운 암사자가 새끼를 기릅니다. 왕이 암사자입니다. 왕이 사자로 비유되서는 안 됩니다. 왕은 인자하고 온유해야합니다. 덕이 있어야합니다. 온유함이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포악한 왕 강팍한 왕 사악한 왕은 다 끝납니다. 그 권력은 오래 못갑니다. 온유한 왕이 오래 통치합니다. 왕이 닥치는 대로 백성을 물어뜯습니다. 새끼는 물어뜯는 것을 어머니에게 배웁니다. 잡아먹는 것 물어뜯는 것을 배웁니다. 사람을 죽입니다. 백성을 권력으로 억압합니다. 권력으로 백성을 다스려야합니다. 권력 위에 지혜와 온유가 있어야합니다. 왕이 폭력으로 다스릴 수 없습니다. 구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가 생겼습니다. 대주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대주교는 하나님을 떠나서 소련이 망했다고 합니다. 소련은 강팍한 권력으로 사람을 다스려 망했습니다. 일 년에 백만 명을 숙청하여 망했다고 합니다. 백만 명을 숙청하여 공산주의를 유지하였습니다. 사람을 감옥에 보내고 포로수용소에 보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데모하면 강제로 잡아서 군대 보내는 때가 있었습니다. 젊은이가 매를 맞고 정신병자가 됩니다. 군대 마치고 나서 이민 간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매질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자가 사람을 움키는 암사자가 됩니다. 왕이 권력을 위해서 이런 짓을 했습니다. 암사자같이 왕이 되었을 때 망합니다.

(젊은 사자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5. 암사자가 기다리다가 소망이 끊어진 줄을 알고 그 새끼 하나를 또 골라 젊은 사자로 키웠더니 6. 젊은 사자가 되매 여러 사자 가운데에 왕래하며 먹이 물어뜯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며 7. 그의 궁궐들을 헐고 성읍들을 부수니 그 우는 소리로 말미암아 땅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황폐한지라” 암사자는 새끼를 기다리다가 희망이 끊어진 것을 깨달았습니다. 암사자는 제 새끼들 가운데서 다른 것을 하나 골라, 젊은 사자로 키웠습니다. 그가 사자들 가운데서 어울리며, 젊은 사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사냥하는 것을 배워, 사람을 잡아 먹었습니다. 그들의 거처를 모두 파괴하였습니다. 성읍들이 황량해지고 그의 으르렁대는 소리에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황폐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왕을 심판하십니다)

“8. 이방이 포위하고 있는 지방에서 그를 치러 와서 그의 위에 그물을 치고 함정에 잡아 9. 우리에 넣고 갈고리를 꿰어 끌고 바벨론 왕에게 이르렀나니 그를 옥에 가두어 그 소리가 다시 이스라엘 산에 들리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 그러자 이방 민족들이 그를 치려고 사방 여러 지역에서 와서, 그의 위에 그물을 치고 함정을 파서 다른 새끼를 또 잡았습니다. 갈고리로 그의 코를 꿰어 철창에 넣어서, 바빌로니아 왕에게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들은 그의 으르렁대는 소리가 다시는 이스라엘의 모든 산에 들리지 않게,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암사자는 함정을 파서 잡습니다. 그물을 쳐서 잡습니다. 그물을 쳤다가 암사자가 지나면 내려 잡습니다. 유다왕은 포로가 되어 하나는 애굽으로, 하나는 바벨론으로 끌고 갑니다. 시드기야가 포로가 되어서 바벨론에 끌려갑니다. 왕이 자기 권력을 믿고 권력만 마음대로 행사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이 그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 왕이 유다에 있어서 유다왕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왕은 사자보다 더 무섭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왕의 씨를 말립니다. 죄로 인하여 포악함으로 인하여 강팍함으로 인하여 사랑이 없음을 인하여 심판합니다. 그래서 젊은 사자에 비유합니다.

(유다의 어머니는 물가의 포도나무였습니다)

“10. ○네 피의 어머니는 물 가에 심겨진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 11. 그 가지들은 강하여 권세 잡은 자의 규가 될 만한데 그 하나의 키가 굵은 가지 가운데에서 높았으며 많은 가지 가운데에서 뛰어나 보이다가” 유다의 어머니는 유다 포도원 안에 있는 물가에 심은 포도나무와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였습니다. 유다의 어머니는 유다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동신에 있을 때에 물가와 같았습니다. 물을 공급받음으로 가뭄에 시들지 않고 포도가 열렸습니다. 그 가지 가운데 가장 센 가지가 통치자의 홀이 되었습니다. 그 하나가 굵고 큰 가지들보다 더 높이 솟았고 많은 가지 가운데서 우뚝 솟았습니다. 유다의 조상을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비유합니다.

(포도나무는 광야에 심겨졌습니다.)

“12. 분노 중에 뽑혀서 땅에 던짐을 당하매 그 열매는 동풍에 마르고 그 강한 가지들은 꺾이고 말라 불에 탔더니 13. 이제는 광야, 메마르고 가물이 든 땅에 심어진 바 되고 14. 불이 그 가지 중 하나에서부터 나와 그 열매를 태우니 권세 잡은 자의 규가 될 만한 강한 가지가 없도다 하라 이것이 애가라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 하나님이 포도나무를 심판하십니다. 포도나무는 유다 민족을 의미합니다. 그 포도나무가 분노 가운데 뽑혀서 땅바닥에 던져지니, 그 열매가 동풍에 마르고, 그 튼튼한 가지들은 꺾이고 말라서, 불에 타 버렸습니다. 유다는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은혜속에 살 때는 시냇가의 나무같았습니다. 잎이 무성하고 열매가 많았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평화로웠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을 때는 유다는 다 말라버렸습니다. 옛날 공산주의 나라에는 흉년이 듭니다. 땅이 박토가 되고 비가 오지 않습니다. 김수근 장로가 슈퍼 옥수수를 만듭니다. 남한에서 좋은 옥수수를 만들어 북한에 재배합니다. 북한에서 잘되지 않습니다. 북한에서는 반쯤자라다가 이삭이 나오지 않습니다. 땅기운이 없어 자라지 않습니다. 기가막힌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대어주시고 하나님이 영양을 공급해야합니다. 사람이 강팍하면 땅도 강팍합니다. 사람이 도덕으로 타락하면 식물도 죽습니다. 화초를 잘 가꾸려면 마음이 깨끗해야합니다. 시기 질투로 화초를 만지면 화초는 죽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어가는 것도 살리고 어떤 사람은 잘 자라는 것도 죽입니다. 이제는 그 포도나무가 광야에, 가물고 메마른 땅에 심겨 있습니다. 그 가운데 큰 가지에서 불이 솟아 나와 그 가지와 열매를 태워 버리니, 통치자들의 홀이 될 만한 튼튼한 가지가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애가인데, 늘 부르는 애가가 되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유다백성에게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예전과 같이 풍족한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에스겔 18장 / 죄인에 대한 개별적 심판
09-28-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속담에 이르기를(에스겔 18: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What do you people mean by quoting this proverb about the land of Israel: " 'The fathers eat sour grapes, and the children's teeth are set on edge'?

속담에 이르기를(by quoting this proverb)
엩 함마솰 핮제 알(אֶת־הַמָּשָׁל הַזֶּה עַל)

속담(4912) 마솰(mâshâl) מָשָׁל  

1. 유사.  2. 판정.  3. 속담
발음 / 마솰[ mâshâl ]
어원 / 49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노래(민 23:7, 24:15, 23), 속담(신 28:37, 삼상 24:13, 겔 12:23), 잠언(왕상 4:32, 잠 1:6, 전 12:9), 속담거리(왕상 9:7, 대하7:20, 겔 14:8), 말거리(시 69:11, 렘 24:9), 풍자(욥 27:1, 29:1), 비유(시 49:4, 78:2, 겔 20:49), 수수께끼(겔 17:2), 조롱하는 시(미 2:4)
구약 성경 / 39회 사용

(2088)  זֶה 

1. 이것.  2. 시 104:25.  3. זֶה...זֶה ㉠ 이것은 ~저것은.㉡ 하나는 ~또 하나
발음 / 제 [ zeh ]
관련 성경 / 과연(창 27:21), 이편(출 14:20), 저편(출 14:20), 이제(왕상 17:24)
구약 성경 / 1173회 사용


버리고(7993)
שָׁלַךְ 스트롱번호7993

1. 히필형.  2. 던지다. 3. 물리치다
발음 / 솨라크[ shâlak ]
관련 성경 / 던지다(레 1:16, 삼하 20:21, 사 38:17), 던져지다(암 4:3), 내어버리다(암 8:3), 두다(창 21:15), 뿌리다(신 9:21), 던져보내다(신 29:28), 뽑다(수 18:8, 미 2:5), 내려뜨리다(대하 25:12), 떨어지다(욥 15:33), 빠지다(욥 18:7), 빼내다(욥 29:17), 벗어버리다(시 2:3), 쫓겨나다( 욘 2:4), 내던지다(사 34:3), 나오다(시 22:10), 내쫓기다(사 14:19), 버린 바 되다(왕상 13:21, 28), 버림을 입다(렘 36:30), 내리다(수 10:11, 겔 16:5), 버리다(왕상 14:9, 왕하 7:15, 전 3:15), 멸하다(왕하 13:23), 쏟아버리다(왕하 23:12), 쫓아내다(왕하 24:20, 렘7:15), 망하다(렘 9:19), 쏟다(겔 20:8), 치다(겔 43:24), 버리다(욜 1:7).
구약 성경 / 125회 사용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한네페쉬 하호테트 히 타무트 / הַנֶּפֶשׁ הַחֹטֵאת הִיא תָמוּת)
The soul who sins is the one who will die.



새롭게(2319) 하다쉬(châdâsh)  חָדָשׁ  

1. 새로운. 2. 삼상 6:7.  3. 신 20:5
발음 / 하다쉬[ châdâsh ]
어원 / 231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새(레 23:16, 삼하 6:3, 사 65:17, 42:9, 43:19, 렘 31:22), 새로워진(욥 29:20), 새로운(애 3:23).
구약 성경 / 53회 사용


카이노스(2537) καινός, ἡ, όν 

1. 새로운.  2. 쓰지 않은. 3. 알려지지 않은
발음 / 카이노스[ kainŏs ]ㅋ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ㅋ
관련 성경 / 새(마 9:17, 눅 5:36, 계 2:17, 마 13:52, 막 2:21, 고후 5:17), 새로운(고후 5:17, 계 21:5), 새로 되는(행 17:21).
신약 성경 / 42회 사용
시간적으로 새로워 지는것
(예) 새 해,

네오스(3501) νέος, α, ον


1. 새로운.  2. 상징적으로 쓰일 경우. ㉠ 고전5:7. ㉡ οἶνος ν.: 새 술.  3. ἐνδύσασθαι τὸν ν.: 새사람을 입다
발음 / 네오스[ nĕŏs ]ㅋ
관련 성경 / 젊은(요 21:18, 행 5:6, 딤전 5:11). [명] 젊은 이(딤전 5:1,14), 젊은 자(눅 22:26).
신약 성경 / 24회 사용

헬라어에는 '새로움'을 의미하는 단어로 네오스(neos)와 카이노스(kainos)가 있다. 네오스는 주로 시간적으로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것이 존재하게 된 것과 연계된 단어이다. 반면에 카이노스는 본질적으로 다른 질적 특성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의 새로움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헬라어에는 '새로움'을 의미하는 단어로 네오스(neos)와 카이노스(kainos)가 있다.
네오스는 주로 시간적으로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것이 존재하게 된 것과 연계된 단어이다.
반면에 카이노스는 본질적으로 다른 질적 특성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의 새로움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새(neos) 포도주는 새(kainos) 부대에"(마 9:17)라는 구절은 새로운 가르침은 그것을 담아낼 새로운 메커니즘이 요구된다는 것을 제시한다.

이렇게 구분해 보면, 새로운(neos) 한 해가 밝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냥 새로워지는(kainos) 것은 아니다.
내가 마음으로 새롭게 되어 새로운 피로물로 변화될 때 질적인 새로움이 생기는 것이다.

시간을 의미하는 헬라어도 의미상 구분되는 단어들이 있는데, 하나는 물리적이며 일반적 시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kronos, chronos)이고, 다른 하나는 주관적이며 의미 있는 시간을 뜻하는 카이로스(kairos)가 있다.
전자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다가오지만 후자는 각자에게 상이하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각자가 선택하고 결단하며 기회로 삼는 때는 다르기 때문이다.

새해는 카이로스와 카이노스의 만남을 요청한다.
우리는 카이로스를 통해 카이노스를 꾀할 수 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의미 있게 활용할 때 질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모습을 보인 우리 당대의 인물들도 제법 있다.

러시아의 반체제 문인이었던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소련의 강제 노동 수용소의 실상을 세상에 알리고 그가 살았던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때를 기다리고 기회를 만들어 갔다.

일전에 타계한 넬슨 만델라도 남아공 백인 정부의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폐지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영국의 노예제도를 폐지시킨 윌리엄 윌버포스는 그가 노예무역과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데 투신하기로 결심한 후 일생의 시간을 이 일에 헌신하였다.
1789년 5월 12일 노예무역 폐지를 주장하는 첫 의회 연설을 한 후 18년이 지나서야 노예무역 폐지 법안이 통과되었다. 그 이후 노예제도 폐지 법안이 통과되기까지 26년을 더 기다려야 했고, 이 법안 통과는 그가 생을 마감하기 불과 몇 주 전 일이었다. 윌리엄 맥나이트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42년 동안 3M 회사에서 경영자로 일하면서 가장 존경받고 혁신적인 기업 조직을 구축하는 데 매진하였다. 이들은 조직과 사회의 변혁이라는 카이노스를 위해 기회의 포착과 중요한 의사 결정과 결단의 카이로스를 가졌고, 인내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또한 우리는 카이노스를 통해 카이로스를 꾀할 수 있게 된다. 즉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모색함으로 인해 또 다른 도약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새로워진 마음은 시간을 의미 있게 만들고 결단의 때를 놓치지 않는다. 본회퍼 목사는 나치 독일에서 추방된 이후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 초청되었을 때 미국에 온 것이 잘못된 결정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 어려운 시기에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받지 못한다면 전후 독일 재건에 참여할 권리를 가지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기꺼이 고난의 현장으로 돌아온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여)"(히 11:25) 공주의 아들로 바로의 궁중에 남지 않고 민족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손양원 목사는 기꺼이 나병환자들을 위해 생애를 보냈다. 모두 믿음, 소망, 사랑의 행보를 뚜벅뚜벅 걸었던 신앙의 인물들이며, 변화받은 새로운 마음으로 결단하며 '때'를 만들어 간 사람들이다.

그럼 기업 경영자가 질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꾀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네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경영자로 부르심을 받았는지에 대한 확인과, 받았다면 그 부르심을 다시 한 번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목회자는 매우 진지하게 부르심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경영자는 그냥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둘째, 기업의 존재 목적에 대한 점검이다. 기업은 개인에게 주어진 잠재력의 실현을 통해 창조 세계에 저장된 잠재력을 실현하여 고객을 위한 가치 창출을 하는 사회적 기관이다. 따라서 기업이 존재하는 목적은 가치 창출을 하여 인류를 섬기는 것, 즉, 기업만이 할 수 있는 기업의 고유한 기능과 역할을 통해 제대로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이런 목적에 대한 분명한 관점의 변화가 우선 요구된다. 셋째, 경영 방식은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와 성경의 원리대로 경영에 임하는 것이다. 창조, 책임, 배려, 공의 및 신뢰의 가치가 경영의 모든 활동 속에 내재되어 역동적으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목회자가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잘 목양해야 하듯이 사장이든 팀장이든 경영자는 자신들에게 맡겨진 개개인들 모두가 각자의 잠재력을 잘 발휘하여 하나님나라의 공동선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감사에 순종하는 소명의 자리에 있도록 도와야 한다.

시작하는 때가 있으면 평가받는 때가 있다. 위의 네 가지는 경영자 평가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된다. 하나님 앞에 설 준비를 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새해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권리에 반응하여 카이노스와 카이로스가 우리 인생 가운데서 만나 역사를 이루기를 갈망한다면, 새해는 단순히 새로운(neos) 크로노스를 맞이하는 것이 아닐 것이기에, 새삼 새해의 새로운 요청의 권리에 감사할 뿐이다.


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바벨론에 있는 사람들은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기 때문에 아들이 이가 시다고 합니다.
마치 부모가 죄를 지어서 자식이 벌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하겠습니다.
자식은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이 벌을 받는다고 자신의 의를 생각하며 부모를 원망합니다.
부모를 잘못 만나서 고생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과거에 매여서 운명주의에 사로 잡혀 일생을 운명탓 하며 살아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과거에 지은 죄로 인하여 지금 내가 이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도 하고 심판을 하시기도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네 가지 관(관)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인생관
둘째는 직업관
셋째는 결혼관
넷째는 신앙관

본문은 신앙관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만 강조하고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감당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면 선택의 의미는 오히려 선택받지 못한 것만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택을 강조할 때는 선택하신 목적과 그 의무를 함께 강조하고 자랑해야 합니다.

속담에 "콩 심은 곳에 콩이 나고 팥 심은 곳에 팥이 난다"는 말처럼 내가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진실되게 나타날 것입니다.
지금의 내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지난 날 내가 잘못 심은 것이 있기 때문인 줄 깨닫고 그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합니다.
여전히 그 길을 그 방식에 따라 걸어가면서 새로운 일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행하는 변명일 뿐입니다.

한때 제 잘난 맛에 도취되어 안하무인격으로 살았던 바울이란 청년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자리에서 지난 날 그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훗날 이런 고백을 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때는 늦으리" 라는 유행가의 가사를 생각해 봅니다.
아마 가수 문주란씨가 불렀던 "동숙의 노래"라는 유행가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도 그 님을 사랑했기에
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미움
원한 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에
돌이킬 수 없는 죄 저질러놓고
뉘우치면서 울어도 때는 늦으리
음- 음- 때는 늦으리

님을 따라 가고픈 마음이건만
그대 따라 못 가는 서러운 미움
저주 받은 운명이 끝나는 순간
님의 품에 안기운 짧은 행복에
참을 수 없이 흐르는 뜨거운 눈물
음- 음- 뜨거운 눈물

훗날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하는 어리석고 헛된 인생이 아니라 내가 바르게 심은 것으로 인하여 지금 나는 행복하노라 하고 외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인생관이라고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어떤 인생관을 갖고 살아왔는지 생각해 봅시다.

인생관(人生觀)이란 '인생이란 무엇이냐?'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등에 관한 사고나 자세를 말합니다.
뚜렷이 의식한 형태이건 아니건 간에 사람은 누구나 인생에 관해서 어떤 생각이나 자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의 과거 체험·경험·교양·사회적인 지위·성격 등으로 형성되며, 그 사람의 판단이나 행동을 좌우한다.

불교의 영향을 받으면 인생은 돌고 돈다는 윤회 사상의 지배를 받습니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에 의해서 결정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도교의 영향을 받으면 인생은 물질의 지배를 받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물질이 없으면 존재가 불가능하기 까닭에 물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영향을 받으면 인생은 지금 나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관심을 갖게 합니다.
따라서 오늘의 내가 곧 미래의 나를 결정하도록 자극합니다.
나를 바르게 세우려면 먼저 내 안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새롭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의 도움과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깨우칩니다.




아버지의 죄악과 아들의 의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주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사람들이 어찌하여 이스라엘 땅에서 아직도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다 하는 속담을 입에 담고 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속담은 아버지의 죄로 아들이 고생한다는 말입니다.
고생을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것이 있습니다.
부모님 건강하면 건강하고 키도 크면 큽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인류가 저주를 받고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말은 타당한 것 같습니다.
부모 때문에 고생한다고 생각하면 자녀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부모를 원망하고 조상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들의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죄는 개인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의와 구원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였어도 셋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셋을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아담으로 인하여 죄의 몸을 갖고 있고 실낙원에서 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범죄하는 자가 죽습니다

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가 당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유대인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다시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속담을 입에 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영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혼이나 아들의 영혼이 똑같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독립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대우하십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바로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을 것입니다.
부모가 노아나 욥이나 다니엘이라도 자식이 죄를 범하면 그는 죽습니다.
목자가 엘리와 같아도 그 밑에서 자란 사무엘이 믿음으로 살면 그는 구원을 받습니다.

의인은 반드시 삽니다.

“5. ○사람이 만일 의로워서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며 6.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아니하며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며 7. 사람을 학대하지 아니하며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 주며 강탈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8. 변리를 위하여 꾸어 주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지 아니하며 스스로 손을 금하여 죄를 짓지 아니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하게 판단하며 9.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하게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반드시 살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은 하나의 예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삼대에 걸친 이야기를 합니다. 가령 한 할아버지가가 있습니다. 그 부모는 의로워서 법과 의를 실천합니다. 그는 산 위에서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지 않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들에게 눈을 팔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합니다. 이웃의 아내를 범하지 않으며, 월경을 하고 있는 아내를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성적으로 깨끗합니다. 그 할아버지는 사람을 학대하지 않습니다. 빚진 사람의 전당물을 돌려 줍니다. 아무것도 강제로 빼앗지 않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거리를 줍니다.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 줍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돈놀이를 하지 않으며, 이자를 받지 않습니다. 흉악한 일에서 손을 떼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공정한 판결을 내립니다. 그는 사랑할 뿐 아니라 정의롭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모든 율례대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지켜서 진실하게 행동합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할아버지는 반드시 살 것입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믿음으로 의롭게 살았을 때 아브라함과 이삭고 야곱은 복을 받았습니다.

(의인의 아들이 죄를 범하면 죽습니다)

“10.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이 모든 선은 하나도 행하지 아니하고 이 죄악 중 하나를 범하여 강포하거나 살인하거나 11. 산 위에서 제물을 먹거나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거나 12.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학대하거나 강탈하거나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 주지 아니하거나 우상에게 눈을 들거나 가증한 일을 행하거나 13. 변리를 위하여 꾸어 주거나 이자를 받거나 할진대 그가 살겠느냐 결코 살지 못하리니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은즉 반드시 죽을지라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런데 가령 그 의로운 할어버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이 모든 선은 하나도 행하지 않습니다. 이들 악 가운데서 하나를 범하여 폭력을 휘두르거나, 사람을 죽여 피를 흘리게 합니다. 아버지와는 반대로 산 위에서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거나, 이웃의 아내를 범합니다. 할아버지의 그 아들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학대하거나, 강제로 빼앗습니다. 전당물을 돌려 주지 않습니다. 온갖 우상들에게 눈을 팔거나, 역겨운 일을 합니다. 돈놀이를 하거나, 이자를 받습니다. 아버지가 의롭다고 악한 아들이 살 수 있겠습니까? 그는 부모가 의로워도 절대로 살지 못할 것입니다. 이 모든 역겨운 일을 하였으므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들은 망합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자라도 악한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이스마엘 같은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이삭에게도 에서같은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의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아들들 가운데 살인하고 성폭행하고 반역하는 자가 나왔습니다. 좋은 목자라고 좋은 양이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 밑에서 가룟유다같은 반역자가 나왔습니다.

(악인의 아들이 선하면 삽니다.)

“14. ○또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그 아버지가 행한 모든 죄를 보고 두려워하여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15.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도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도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도 아니하며 16. 사람을 학대하지도 아니하며 저당을 잡지도 아니하며 강탈하지도 아니하고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17. 손을 금하여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변리나 이자를 받지 아니하여 내 규례를 지키며 내 율례를 행할진대 이 사람은 그의 아버지의 죄악으로 죽지 아니하고 반드시 살겠고 8. 그의 아버지는 심히 포학하여 그 동족을 강탈하고 백성들 중에서 선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는 그의 죄악으로 죽으리라” 다음에는 이 악한 아들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의로운 사람의 손자가 태어난 경우입니다. 위와 반대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불의하고 자녀가 의로운 경우입니다. 그 아들이 자기 아버지가 지은 모든 죄를 보고 두려워하여서, 그대로 따라 하지 않습니다. 산 위에서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지도 않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들에게 눈을 팔지도 않습니다. 이웃의 아내를 범하지도 않습니다. 의롭지 못한 아버지의 아들은 아버지와 다릅니다. 그는 아버지의 악에서 돌이킵니다. 그는 아버지의 악으로 인하여 오히려 살게 됩니다. 그는 아무도 학대하지도 않으며, 전당물을 잡아 두지도 않습니다. 강제로 빼앗지도 않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거리를 주며, 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 줍니다. 흉악한 일에서 손을 떼고,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않습니다. 돈놀이를 하지 않으며, 이자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규례를 실천하고, 하나님의 율례대로 살아갑니다. 이 사람은 자기 아버지의 죄악 때문에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아버지는 심히 난폭하여 동족을 학대합니다. 친척의 것을 강제로 빼앗습니다. 자기 민족 가운데서 좋지 않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죄악 때문에 죽을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죄로 인하여 죽지 않습니다. 아들은 아들의 의로 인하여 삽니다. 아버지가 악해도 아들은 자기 하기 나름입니다. 그 가정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머뭇거리는 데라에서 절대신앙의 아브라함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명의 이새에서 다윗이 나왔습니다. 엘리 밑에서 사무엘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울 밑에서 다윗이 나왔습니다.

(각자의 죄로 대가를 받습니다)

우리가 부모의 죄악 가운데 살아도 죄악으로 심판받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사람은 의에 관해서는 환경적인 동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환경이나 사회에게 그 사람에 대한 책임을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개인적인 책임을 묻습니다. 다른 사람이 다 악을 행해도 나는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나쁜 환경에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노아는 죄악된 환경에서 홀로 신앙의 중심을 지켰습니다. 인간은 고난을 극복하는 역설적인 존재입니다. 핍박이 심할 때 믿음 좋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로마에 기독교가 국교가 된 후에 타락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핍박이 많을 때 참된 신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우리는 불의한 가운데서도 불의를 보고 떠나고 타협하지 않는 용기가 있어야합니다. 불의와 함께 불의를 행하고 악과 함께 악을 행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환경을 핑계댈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대학에서는 성경을 가르치고 기독교 분위기를 만듭니다. 이곳에서 비기독교인이 나옵니다. 청년들 신앙 활동이 시원치 않습니다. 비기독교 대학 안에는 기독청년들이 얼마나 열심인지 모릅니다. 비기독교인인의 대학생이 불덩이 같은 신앙이 있습니다. 기독교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 미지근합니다. 모태신앙 가운데 자란 이세들이 타락합니다. 핍박을 받으며 신앙이 굳게 자란 사람이 많습니다.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할 때 더 용기가 생깁니다. 한 신학생이 자신의 마누라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합니다. 이 친구가 예수 믿기 전에 25살까지 못되게 놀았습니다. 그때는 아내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아내는 매를 맞으면서도 교회를 다닙니다. 그후에 남편이 감동을 받고 신학생이 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때는 아내가 교회를 저녁에는 안 간다고 합니다. 낮에만 갑니다. 낮예수만 믿고 밤예수는 안 믿는다고 합니다. 사람은 가라할 때 가지 않고 가지 말라 할 때 가는 행동이 있습니다. 전설에는 여러 전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을 만들고 팔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술주정하는 것을 보고 아들은 죽어도 술을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술을 먹은 날에 달력에 빨간동그라미를 쳐놓습니다. 아버지의 피를 받았으니 자신은 더 열심을 내야한다고 합니다. 그는 술을 먹지 않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부모 탓하지 말아야합니다. 환경 탓하지 말아야합니다. 가난하다고 다 죄를 짓은 것은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도덕성을 묻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난이 죄를 합리화할 수 없습니다.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지파를 저주합니다. 시므온의 후손들은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압여자와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레위의 후손들은 회개하고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은 레위지파의 저주를 복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서도 이삭은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이스마엘은 행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낳은 쌍둥이도 하나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하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야곱의 아들 중에 서자로 태어났어도 그들은 모두 훌륭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이 부모탓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은헤를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나의 믿음에 따라서 새로워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시 않습니다)

“19.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는도다 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살려니와 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런데 유다사람들은, 그 아들이 아버지의 죄에 대한 벌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이 의로우면 그 아들은 아버지와 달리 법과 의를 실천하며, 하나님의 율례를 다 지키고 그것들을 실천하였으므로, 그는 반드시 살 것입니다. 죄를 지은 영혼, 바로 그 사람이 죽을 것입니다. 형법에도 부모의 죄로 인하여 아들을 처벌하지 않는 원칙이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죄를 연셜시키는 연좌제는 폐지되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죄에 대한 벌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죄에 대한 벌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의인의 의도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신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사람에게 인격적입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각자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고 회개하고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레위지파의 후손 가운데 모세는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멘

(과거의 죄보다 현재의 의가 중요하다)

“21.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22.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번 의인은 영원한 의인은 아닙니다. 한번 악인도 영원한 악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과거보다는 현재가 중요합니다.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에서 떠나 돌이켜서, 하나님의 율례를 다 지키고 법과 의를 실천하면, 그는 반드시 살고, 죽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현재의 의를 보시고 그가 지은 모든 죄악을, 하나님이 다시는 더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지킨 의 때문에 살 것입니다.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어도 오늘 선하게 살면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탕자는 탕자로 아버지 속을 썩였습니다. 아버지는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은지 얼마 안된 사람이 심각한 질문을 합니다. 솔로몬이 정실부인의 아들이 아닙니다. 요망한 밧사바의 아들입니다 밧세바는 남편을 죽이는 일에 가담한 자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예수님이 태어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윗이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훈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회개를 받으시고 다윗의 과거의 죄를 기억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지혜의 왕 솔로몬이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면 범죄한 과거를 하나도 기억지 않으십니다.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악인이 죽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죽은 것을 조금이라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악인이 자신의 모든 의의 길에서 돌이켜서 살 수 있기를 하나님은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돌아오기만을 기다립니다. 회개하기를 기다립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잘못했다고 하라고 하고, 아들이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하겠다고 하면서 아들을 때립니다. 아이가 잘못했다고만 하면 이제 됐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의를 행하면 지난 날을 기억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 믿는 자를 핍박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회개하였을 때 은혜로 그를 사도로 사용하였습니다. 세리 레위는 동족의 혈세를 빨아먹는 매국노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였을 때 그는 성마태가 되었습니다. 유다는 동생을 팔고 며느리와 동침한 자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였을 때 그는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라합은 전직이 창녀였지만 하나님 편에 섰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다윗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룻은 모압여자였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 그에게 다윗의 할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의인도 죄를 지으면 죽습니다)

“24.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 그러나 반대로 의인이 타락한 경우도 있습니다. 의인이 자신의 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죄를 범하고, 악인이 저지르는 모든 역겨운 일을 똑같이 하면, 그가 살 수가 없습니다. 그가 지킨 모든 의는 전혀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불성실과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죽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은 성령을 받고 믿음으로 산 용장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았고 악령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버림 받아 비참한 자가 되었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사도로 선택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물질적인 탐심이 들어오고 자신의 이상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배신자가 되었고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음만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출애굽하였지만 그들 중에 원망하는 자들은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었습니다 우리이 신앙에서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신앙은 항상 현재입니다. 이제부터 남은 시간이 중요한 것입니다. 과거를 후회하지 말고 과거를 자랑하지 말아야합니다. 과거에 잘했어도 현재 잘못하면 감옥에 갑니다. 현재와 미래가 중요합니다. 과거에 잘못한 것을 후회하지 말아야합니다. 과거에 선한 일을 갖고 어깨에 힘주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은 은헤로 영접하고 자녀로 확정하십니다. 지금 악을 행하면 하나님의 징벌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25.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 26. 만일 의인이 그 공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그로 말미암아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이요” 그런데 유다는 여호와가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잘 들으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가 일하는 방법이 전혀 공평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유다가 하는 행실이 오히려 공평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부모탓 하나님 탓하는 것이 공평하지 않은 것입니다. 의인이 자신의 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죄를 짓다가, 그것 때문에 죽는다면, 그는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현재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건강하기 바라고 평안하기를 바라고 은혜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행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도 살기를 바라고 우리도 살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원하는 살 길을 찾아야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살기를 바라면서 죽을 일을 행합니다. 뻔히 그렇게 하면 죽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기를 기도하면서 건강하지 못한 길을 갑니다. 병에 걸리고 하나님은 공평치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 나같은 사람에게 복을 안 주고 다른 사람에게 복을 주느냐고 하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이 공평하신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공의 위에 은혜가 있다

27.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28.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신이 저지른 죄에서 떠나 돌이켜서, 법대로 살며, 의를 행하면, 자기의 목숨을 보전할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깨닫고, 자신이 지은 모든 죄에서 떠나 돌이켰으니, 그는 반드시 살 것이요, 죽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한 자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또한 공의 위에 있는 은혜를 인정해야합니다. 공의와 은혜를 인정해야합니다. 모순된 일이 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의 죄로 내가 고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환경이 우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은 독립적이고 자유한 것입니다. 사람의 존재는 환경에 대해서 역설적인 면이 있습니다. 환경의 산물이 아닙니다. 부모가 공부의 환경은 줄 수 있습니다. 공부하고 안하고는 본인이 하는 것입니다. 환경이 좋은 것이지만 환경을 탓해서는 아니 됩니다. 부모와 달리 나는 나의 의를 추구해야합니다. 과거와 현재를 보아도 오늘이 중요합니다. 오늘 의를 행하면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죄값은 사망입니다. 오늘 회개하면 과거를 용서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헤입니다. 오늘 악하면 악으로 죽습니다. 과거의 공로로 오늘의 불의를 상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은 저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흘러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라는 점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회개하고 현재 바로 서야 합니다. 내 신앙이 높아졌을 때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떨어졌을 때는 세상이 불공평하게 생깁니다. 그러면 원망과 시비가 나옵니다. 별별 것을 탓합니다. 결혼이 힘들면 중매장이를 탓합니다. 중매장이가 중매해도 결국 마지막 결정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결정하는 것에는 원망불평할 수 없습니다. 원망하는 것이 나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할 때는 모세에게 왜 우리를 인도하였느냐고 합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는 감사하고 오늘에는 원망합니다. 원망은 원초적으로 못된 마음입니다. 공의를 인정할 때는 진실해집니다. 은혜를 인정할 때는 감사합니다. 어떤 때든지 원망이 나오면 엎드려 기도해야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갈 수 있는 직장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자신을 대신하여 그 직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사람이 그것으로 상처가 있습니다. 그는 십년 동안 불평합니다. 자기 대신 들어간 사람이 크게 잘못되어 감옥에 갑니다. 십년 후에 마음을 돌립니다. 십년 후에 자신의 자리가 좋은 자리라고 깨닫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낭비합니다. 여기에 공의가 있고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내 현실이 베스트입니다. 키가 작은 것도 감사하고 키가 큰 것도 감사한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이 뚱뚱한 데 못하는 것도 없고 안 가는데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런 몸으로 수영장으로 갑니다. 우리는 조금 뚱뚱하면 수영장에 안 갑니다. 이것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가난하던 부하던 현재 은혜 주신 것을 알아야합니다. 나의 환경은 나뻤는데 예수 믿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십니다

29.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은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의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 아니냐
30.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31.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3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이스라엘 족속은, 여호와께서 일하는 방법이 공평하지 않다는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여호와께서 내가 일하는 방법이 어찌 공평하지 않느냐고 물으십니다.
유다가 하는 행실이 오히려 공평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그들 각 사람이 한 일에 따라서 그들을 심판하겠다고 하십니다.
개인적이고 인격적으로 심판하십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그들의 모든 범죄에서 떠나 돌이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죄가 장애물이 되어 그들을 넘어뜨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유다 백성은 그들이 지은 죄를 모두 그들 자신에게서 떨쳐내 버려야 합니다.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죽고자 자살하는 것입니다.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가 죽는 것을 하나님은 절대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회개하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 마음과 영혼을 새롭게 해야합니다.
우리의 이성과 영성을 새롭게 해야합니다.
마음과 영혼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항상 자유로운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항상 자유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해도 감사해야합니다.
청빈낙도라고 합니다.
환경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마음과 영혼을 깨끗하게 해야합니다.
위대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욕심 시기 질투 원망에 사로잡히지 말아야합니다.
건강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고, 우리는 적당한 운동을 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합니다.
마음이 건강의 75프로를 좌우한다고 합니다.
마음은 마음이지 물질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개하기만 하면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현재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조상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과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나 다른 사람을 탓하는 못된 버릇을 회개하고 새로워져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홍콩의 안젤라 선교사는 남편이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살았을 때 그를 통하여 많은 생명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김양재 목사도 이혼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믿음으로 살자 하나님은 그를 귀하게 쓰고 계십니다.
우리는 남편이나 아내탓도 하지 말아야합니다.
내가 똑바로 살아야합니다.








본장은 이스라엘 백성들 각 개인에 대한 책임의 막중함을 강조하고 아울러 회개를 촉구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재 포로 생활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각 개인의 죄로 인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응분의 책임을 묻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본장은 죄에 대한 책임은 당사자가 지지만, 아들을 구원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음을 밝히는 부분(1-13절), 아버지가 악을 행하더라도 아들이 의를 행하면 살 수 있음을 묘사하는 부분(14-20절) 회개하면 죄에 대한 책임이 없어지나 현재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하면 과거의 의로운 생활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밝히는 부분(21-29절), 회개를 촉구하는 부분(30-32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  해]
유다 백성들은 그들이 열조의 죄악을 따라 열조들과 동일하게, 아니 그보다 더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았습니다(참조, 겔2:3-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은 죄가 없는데 조상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불공평한 하나님께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본장에서 그 생각의 부당성을 설명하십니다.  

1. 인간들의 편견과 오만

1) 죄는 전가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유다 백성들은 조상들의 죄가 부당하게 그들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부당한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하나님께 범죄한 자는 그 죄가 삼사 대까지 이른다는 말씀(참조, 출20:5)에 근거한 것 같습니다. 한편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유다 백성들같이 다른 사람의 죄와 의는 전가되기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과 관련된 자는 그 죄값을 물려받고 의로운 사람과 관련된 사람은 그 의의 덕택을 본다고 믿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a. 아내의 악을 자손에게 보응하심(신34:7)
b. 열조의 죄로 쇠잔함(레26:39)

2) 나는 무죄하다
다른 사람의 죄가 전가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죄값을 넘겨받음으로 심판의 고통을 받는다는 생각의 배후에는 인간이 버릴 수 없는 깊은 병, 곧 교만의 병이라는 것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생각은 자신은 죄가 없다는 것을 암암리에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 한편에는 이런 본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a. 죄책의 전가(창3:12)
b.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요일1:8)

3) 나의 고난은 억울하다
자신은 무죄한데 다른 사람의 죄값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의심할 여지없이 자신이 받는 고통은 부당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유다 백성들도 그렇게 생각했거니와 그와 같은 선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동일하게 자신들이 받는 고통은 부당하다고 내심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결코 무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생의 고통을 달게 받지 않고 불평합니다.  
a. 스스로 의롭게 여김(욥40:8)
b. 죽기를 간구한 요나(욘4:3)

2. 하나님의 답변

1) 죄는 개인적이다
유다 백성들과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여 죄는 전가된다고 생각했으나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비는 그 자식을 위해 죽음을 당하지 아니하며 자식들은 그 아비로 인하여 죽지 않고 오직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음을 당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참조, 신24:16). 아비의 죄로 인해 삼사 대가 벌을 받는다는 출20:5의 말씀은 본래 아비의 죄에서 그 자녀들이 떠나지 않으면 그 자식들도 같은 심판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a. 각 사람은 자기 죄로 심판을 받음(신24:16)
b. 아들의 이는 결코 시리지 않음(렘31:29)

2) 공의의 하나님은 반드시 범죄한 자만 심판하신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인하여서가 아니라 오직 그 사람의 죄를 인하여 그만을 심판하십니다. 이 심판의 법칙은 도중에 변경된 것이 아니며 변경될 것도 아닙니다. 이 법은 영원한 것입니다. 각인은 오직 그가 지은 죄값을 따라 심판받습니다(참조, 계20:11-15).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a.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음(사3:11)
b.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받음(계20:12)

3) 범죄한 자라도 돌이켜 의를 행하면 구원하신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각인을 개별적으로 심판하신다고 해서 범죄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심판받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연약한지라 범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과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을 아시사 용서의 기회를 주십니다. 용서의 기회란 회개할 때 허용됩니다. 죄인인 그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가 다시 의를 행할 때 용서가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a. 놀라운 용서(사1:18)
b. 본래 범한 죄가 기억되지 않음(겔33:16)

3. 신약적 접근

1)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유다 백성들만이 하나님께 범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경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께 범죄한 죄인들입니다(참조, 롬3:10-18).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기 죄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는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이 부당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죄 가운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더 심화되어 하나님은 없다는 데까지 이릅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죄를 덮어 버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죄가 없어지고 그렇게 되면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a. 선을 행하는 자가 없음(시14:3)
b. 의인은 없음(롬3:10)

2) 모든 인간은 심판 아래 있다
인간이 아무리 자기 죄를 부정해도 인간의 죄는 실제적인 것이요 시체이기 때문에 없어지지 아니합니다. 없어지지 않는 죄는 범죄한 인간에게 죄값을 물립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참조, 롬6:23). 사망은 육체의 사망에서 멈추지 않고 영혼마저 다시 헤어나올 수 없는 고통의 장소로 가는 둘째 사망까지를 포함합니다(참조, 계20:11-15).
a.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2:3)
b. 반드시 있는 심판(히9:27)

3)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구원하신다
앞에서 하나님은 범죄한 자가 회개하면 죄를 용서하심을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구약 시대에 그것이 실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정적인 용서였지 죄의 본질에 대한 용서는 아니었습니다. 죄 본질의 용서, 곧 속죄는 인간의 회개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속죄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 본질의 해결이 가능합니다(참조, 히9:1-26).
a.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에 이름(요3:16)
b. 다른 이름이 없음(히9:27)

결론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죄는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모든 인간은 저주 아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신 저주를 받아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구원 사역을 믿고 그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의롭고 복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단어해설]
4절. 내게 속한지라.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으로 향해 있으며, 그 영혼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11절. 산 위에서 제물을 먹거나. 우상에게 제사를 한 후 그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을 말한다.

18절. 포학하여. 권력이나 권위를 남용하여 낮은 위치의 사람이나 나라를 억누르고 짓밟는 행동을 나타낸다.

27절. 보전하리라. '되다, 존재하다'는 뜻으로 영적인 죽음을 면하고 영생함을 의미한다.

31절. 버리고 '던지다, 집어 던지다'라는 뜻으로 어떤 관습이나 행위를 끊고 멸절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에게 죄의 근절을 요구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학주제]
죄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본장에는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라는 속담이 나온다. 이러한 표현은 아비의 죄값이 아들에게 미친다는 사상을 의미한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재의 상황이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범죄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출20:5의 아비의 죄가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된다는 말씀을 너무 문자적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자손들이 아비의 죄악과 같은 죄를 범하면서 회개치 않는 경우에 그렇다는 뜻인데, 그들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무죄한 자에게 벌을 내리시지 않으며, 행위에 따라 선악간에 판단하시는 분이므로, 조상들의 탓으로 돌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는 잘된 것이다.  


[영적교훈]
하나님은 신앙의 현재적 측면을 중요시한다. 사람이 의로운 삶을 살고 여호와의 율례와 규례를 좇는다면 마땅히 하나님의 축복을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웃과 함께 믿음을 나누면서 불의를 제거하기 위해 애쓰는 자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고 구원하신다. 이러한 사실은 신앙의 현재적인 측면을 강하게 부각시켜서 각기 바른 삶을 살도록 추구하기 위함이다. 현재의 신앙에 불성실하면서 조상의 믿음 없었음만을 탓하는 것은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에스겔 17장 / 독수리비유
09-27-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수수께끼와 비유(에스겔 17:2)

인자야 너는 수수께끼와 비유를 이스라엘 족속에게 베풀어.
Son of man, set forth an allegory and tell the house of Israel a parable.

문단 분해
17:1-10, 두 독수리(바벨론과 애굽)와 포도나무(유다 나라)의 비유.
17;11-21, 그 설명, 맹세를 깨치고서 바벨론에 반역하고, 애굽에 내통한 때문에, 유다국이 받을 형벌.
17:22-24, 메시야와 유다 왕국 회복의 예언.

a riddle & a parable
히다 우마솰(חִידָה וּמָשָׁל)


수수께끼(2420) 히다(chîydâh) חִידָה 

1. 꼬인 것.  2. 교묘함.  3. 어려운 문장
발음 /  히다[ chîydâh ]
어원 / 233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속임수(단 8:23), 속담(합 2:6), 수수께끼(삿 14:12, 19, 겔 17:2), 감추어졌던 것(시 78:2), 오묘한 말(시 49:4, 잠 1:6), 은밀한 말(민 12:8), 어려운 문제(왕상 10:1, 대하 9:1).
구약 성경 / 17회 사용

비유(4912) 마샬(mâshâl) מָשָׁל 

1. 유사.   2. 판정.  3. 속담
발음 / 마샬[ mâshâl ]
어원 / 49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노래(민 23:7, 24:15, 23), 속담(신 28:37, 삼상 24:13, 겔 12:23), 잠언(왕상 4:32, 잠 1:6, 전 12:9), 속담거리(왕상 9:7, 대하7:20, 겔 14:8), 말거리(시 69:11, 렘 24:9), 풍자(욥 27:1, 29:1), 비유(시 49:4, 78:2, 겔 20:49), 수수께끼(겔 17:2), 조롱하는 시(미 2:4).
구약 성경 / 39회 사용

에스겔 15장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와 같은 히브리 백성들의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 16장은 예루살렘이 왜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신랑이 되신 하나님의 신부로서 정결한 신앙을 유지해야 하지만 하나님 이외에 우상을 숭배하였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망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에스겔 17장은 큰 독수리와 레바논 백향목 높은 가지라는 수수께끼 비유를 소개합니다.
큰 독수리는 바벨론 나라를 상징하고, 레바논 백향목 높은 가지는 다윗 왕가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수수께끼 비유는 장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질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에스겔 17장은 14장과 연결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바벨론에 있는 장로 두어사람이 에스겔을 찾아왔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곧 해방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가 에스겔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온지 7년이 되는 때 이었습니다.
유대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왕위에 오른지 7년이 되었습니다.
시드기야 9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포위당했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완전히 망합니다.
따라서 지금은 망하기 삼년 전입니다.
유다는 바벨론의 삼차 공격을 받으며 애굽 왕에게(프삼메티쿠스 2세) 도움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장로들에게 묻는 것에 대해서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언제 해방될 것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습니다.

시편 66편 18절에 보면 사람이 죄악을 품으면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습니다.
죄악이 있으면 하나님은 듣지 않으십니다.
장로들은 어떻게 하든지 위기만 넘기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유다 사람들에게 유다가 왜 망하는지 그 죄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교훈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수수께끼와 비유를 말하라
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여 이르시되 색깔이 화려하고 날개가 크고 깃이 길고 털이 숱한 큰 독수리가 레바논에 이르러 백향목 높은 가지를 꺾되
4. 그 연한 가지 끝을 꺾어 가지고 장사하는 땅에 이르러 상인의 성읍에 두고.

주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인 에스겔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비유를 들어 말하라고 하십니다.
수수께끼는 궁금증을 갖게 하고 답을 말해줍니다.
비유는 살아있는 사물 언어를 통해서 뜻을 깊이 있게 전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북방에서 큰 독수리 한 마리가 레바논으로 갔습니다.
그 독수리는 큰 날개, 긴 깃, 알록달록한 깃털을 가졌습니다.
하늘의 왕자다웠습니다.
그 독수리는 북쪽에서 내려온 독수리로 바벨론을 의미합니다.
그 독수리는 백향목 끝에 돋은 순을 땄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솔로몬의 궁전을 지은 백향목으로 유명합니다.
나무의 제왕으로 불립니다.
백향목은 숭고하고 장엄하며 유다의 궁전에는 레바논 궁이라는 궁전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백향목은 유다의 다윗 왕조를 말합니다.
독수리는 그 연한 햇순을 잘라서, 상인들의 땅으로 물고 가서, 상인들의 성읍에 놓아 두었습니다.
연한 햇순은 여호와긴 왕을 말합니다.

상인들의 땅은 상업이 융성한 바벨론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왕이 유다의 마지막 왕 여호와긴 왕을 잡아 바벨론으로 잡아 간 것을 의미합니다.

5. 또 그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 가에 심더니
6. 그것이 자라며 퍼져서 높지 아니한 포도나무 곧 굵은 가지와 가는 가지가 난 포도나무가 되어 그 가지는 독수리를 향하였고 그 뿌리는 독수리 아래에 있었더라.

독수리는 바벨론 땅에서 난 씨앗을 가져다가, 유다의 옥토에 심었습니다.
시냇가에다가 포도나무를 심듯, 물이 많은 시냇가에 그 씨앗을 심었습니다.
백향목여호와긴 왕이라면 포도나무시드기야 왕을 의미합니다.

바벨론은 여호와긴 왕을 대신하여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시드기야왕을 포도나무에 비유한 것은 유다의 정통적인 왕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옥토에 심은 것은 시드기야가 성장하여 좋은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벨론에게 순종하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씨앗은 싹이 나고, 낮게 퍼지며 자라서, 무성한 포도나무가 되었습니다.
그 가지들은 독수리에게로 뻗어 올라갔고, 그 뿌리는 땅에 박고 있었습니다.
그 씨가 포도나무가 되어, 가지를 내뻗고, 덩굴손을 뻗쳤습니다.
시드기야왕이 왕이 바벨론과의 관계 속에서 유다를 통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는 무한히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7. ○또 날개가 크고 털이 많은 큰 독수리 하나가 있었는데 그 포도나무가 이 독수리에게 물을 받으려고 그 심어진 두둑에서 그를 향하여 뿌리가 뻗고 가지가 퍼졌도다
8. 그 포도나무를 큰 물 가 옥토에 심은 것은 가지를 내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포도나무를 이루게 하려 하였음이라.

다른 큰 독수리 한 마리가 남방에서 나타났습니다.
날개가 크고 깃이 많은 독수리입니다.
이 독수리는 애굽 왕을 의미합니다.
이 포도나무가 뿌리를 그 독수리에게로 뻗고, 가지도 그 독수리에게로 뻗는 것을 보라고 합니다.
이 포도나무는 새로 나타난 그 독수리를 보고 옥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물을 대달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있는 곳이 옥토인데 그는 다른 옥토를 찾았습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의 영향 아래서 열매를 맺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왕이 바벨론왕과의 약속을 깨고 애굽을 의지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 포도나무를 옥토, 곧 물이 많은 곳에 심은 것은,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포도나무가 되도록 한 것인데, 다른 모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9. 너는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그 나무가 능히 번성하겠느냐 이 독수리가 어찌 그 뿌리를 빼고 열매를 따며 그 나무가 시들게 하지 아니하겠으며 그 연한 잎사귀가 마르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많은 백성이나 강한 팔이 아니라도 그 뿌리를 뽑으리라
10. 볼지어다 그것이 심어졌으나 번성하겠느냐 동풍에 부딪힐 때에 아주 마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자라던 두둑에서 마르리라 하셨다 하라.

그러므로 에스겔은 시드기야 왕과 유다 사람들들에게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애굽을 의지한 그 포도나무가 무성해질 수 없습니다.
북방의 독수리가 그 뿌리를 뽑아버리게 됩니다.
그 열매가 떨어지거나, 그 새싹이 말라 죽게 될 것입니다.
그 뿌리를 뽑아 버리는 데는, 큰 힘이나 많은 군대를 동원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드기야 왕을 심어 놓았지만 무성해질 수가 없습니다.
동쪽 열풍이 불어 오면 곧 말라 버릴 것입니다.
자라던 그 밭에서 말라 버릴 것입니다.
동쪽의 열풍이 불어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2. 너는 반역하는 족속에게 묻기를 너희가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겠느냐 하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왕과 고관을 사로잡아 바벨론 자기에게로 끌어 가고
13. 그 왕족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언약을 세우고 그에게 맹세하게 하고 또 그 땅의 능한 자들을 옮겨 갔나니.

주께서 에스겔에게 비유를 설명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은 저 반역하는 족속에게, 이 비유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겠느냐고 물어 보고, 그들에게 일러주라고 하십니다.
바빌로니아 왕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여호와긴 왕과 지도자들을 붙잡아 바빌로니아로 끌어 갔습니다.
예루살렘 나라의 왕족 가운데서 한 사람 여호와김을 선택하여, 그와 바벨론의 속숙이 되라는 언약을 맺고, 그에게 바벨론에 충성하도록 맹세를 시킨 다음에, 유다의 유능한 사람들을 붙잡아 갔습니다. 지식인과 기술자를 붙잡아갔습니다.

시드기야는 언약을 배반합니다

“14. 이는 나라를 낮추어 스스로 서지 못하고 그 언약을 지켜야 능히 서게 하려 하였음이거늘 15. 그가 사절을 애굽에 보내 말과 군대를 구함으로 바벨론 왕을 배반하였으니 형통하겠느냐 이런 일을 행한 자가 피하겠느냐 언약을 배반하고야 피하겠느냐” 시드기야를 세운 것은 바빌로니아가 이 나라를 굴복시켜 독립하지 못하게 하고, 바벨론과의 언약을 지켜서 명맥을 유지해 나가도록 하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시드기야는 바빌로니아 왕에게 반역하여, 이집트로 사람을 보내서, 자기에게 많은 군마와 군인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가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한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언약을 어긴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시드기야왕은 죽습니다)

“16.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바벨론 왕이 그를 왕으로 세웠거늘 그가 맹세를 저버리고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그 왕이 거주하는 곳 바벨론에서 왕과 함께 있다가 죽을 것이라 17. 대적이 토성을 쌓고 사다리를 세우고 많은 사람을 멸절하려 할 때에 바로가 그 큰 군대와 많은 무리로도 그 전쟁에 그를 도와 주지 못하리라 18. 그가 이미 손을 내밀어 언약하였거늘 맹세를 업신여겨 언약을 배반하고 이 모든 일을 행하였으니 피하지 못하리라” 여호와 주 하나님이 당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시드기야 왕은 분명히 죽을 것입니다. 바빌로니아 왕이 그를 왕으로 세워 주었는데, 그 왕에게 한 맹세를 무시하고, 그와 맺은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바빌로니아에서 느브갓네살 왕과 함께 있다가 죽을 것입니다. 바빌로니아 군대가 많은 사람을 죽이려고, 그의 성읍 옆에 흙 언덕을 쌓고 높은 사다리를 세울 때에는, 이집트의 바로가 강력한 군사력과 많은 군사로도 전쟁에서 그를 도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가 맹세를 무시하고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그가 언약을 어기고 이런 모든 일을 하였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는 것을 매우 중시여기십니다. 우리는 속아서 약속을 할 수 있습니다. 강자에 의해서 약자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약속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은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였습니다)

“19. 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가 내 맹세를 업신여기고 내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그 죄를 그 머리에 돌리되 20. 그 위에 내 그물을 치며 내 올무에 걸리게 하여 끌고 바벨론으로 가서 나를 반역한 그 반역을 거기에서 심판할지며 21. 그 모든 군대에서 도망한 자들은 다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남은 자는 사방으로 흩어지리니 나 여호와가 이것을 말한 줄을 너희가 알리라” 그러므로 여호와 주 하나님이 당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한 맹세를 업신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맺은 언약을 깨뜨렸으므로, 여호와가 벌을 주어서, 그 죄를 그의 머리로 돌리십니다. 이 약속은 사람과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약속이었습니다. 여호와가 그물을 쳐서 그를 망으로 옭아 바빌로니아로 끌고 가서, 거기에서 여호와가 당신을 반역한 그의 반역을 심판하십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의 모든 군대 가운데서 도망한 사람들은 모두 칼에 쓰러질 것이며, 살아 남은 사람들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질 것입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유다 사람들은, 이렇게 예언한 것이 여호와 주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들과 속아서 한 약속도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유다가 을의 위치에서 갑과 한 약속도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이 있어야 약속을 지킬 수 있습니다. 약속을 지켜야 신뢰도가 높아지고 관계성이 형성됩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죄악으로 유다를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나 다윗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약속의 이행자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서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예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내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다 지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열매맺는 연한 가지입니다

22.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주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가 바벨론에 있는 백향목 끝에 돋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십니다.
여호와가 그 나무의 맨 꼭대기에 돋은 어린 가지들 가운데서 연한 가지를 하나 꺾어다가, 여호와가 직접 높이 우뚝 솟은 예루살렘 산 위에 심으십니다.
이것은 여호와긴 왕의 후손 스룹바벨을 유다로 인도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궁극적으로는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메시야는 모든 산 중에 가장 뛰어난 산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홀로 우뚝 솟은 산이십니다.
스룹바벨의 후손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십니다.
예수님을 새로운 가지 연한 순에 비유하였습니다.
이사야도 53장에서 예수님을 연한 순에 비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연한 순과 같습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습니다.
가난하고 볼품없이 자랐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고 온유하십니다.
끊임없이 성장하시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11장에서는 연한 가지에서 새순이 돋아 성령이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지혜와 총명의 신, 모략과 재능의 신,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을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십니다.
겸손하게 하십니다.
온유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여호와가 그 가지를 심어 놓으면, 거기에서 가지가 뻗어 나오고, 열매를 맺으며,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온갖 새들이 그 나무에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들이 그 가지 끝에서 보금자리를 만들 것입니다.
이 나무가 온 세계를 덮게 됩니다.
온 세계를 덮으십니다.
온 세계만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옵니다.


24.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전이 일어납니다.
그 때에야 들의 모든 나무가, 여호와 주가,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고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마른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주가 말하였으니, 여호와가 그대로 이루십니다.
여호와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한 자들을 강하게 하시고 강한 자를 약하게 하십니다.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교만한 자를 겸손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높이시고 믿지 않는 자를 낮추십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연한 순같은 분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분에서 오시는 성령님도 연한 순과 같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고 연한 순과 같이 변화되어야합니다.
우리가 새롭게 되어야합니다.
성장해야합니다.




두 독수리 비유를 통하여 시드기야가 하나님 대신에 외세를 의지한 것이 멸망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패망을 자초한 이스라엘의 말기 상황을 두 독수리 비유로 묘사하는 전반부(1-10절)
비유에 대한 설명으로 시드기야가 바벨론과 맺은 언약을 배반하고 애급에게 도움을 청하는 중반부(11-21절)
장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궁극적으로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전하는 후반부(22-24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열방을 의지하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면서도 한가닥 회복의 희망을 제시합니다.
15장부터 17장은 세 개의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의 범죄와 그 범죄로 인한 멸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비유란 포도나무 비유, 결혼 비유, 독수리 비유입니다.
17장은 세 가지 비유 가운데 세번째 독수리 비유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을 순종치 않은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것과 그 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될 것을 예언하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자기 백성일지라도 그들이 범죄하면 징계하십니다.
그리고 징계 뒤에는 반드시 살길을 허락하십니다.
살길은 신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밀을 깨달지 못할 때 더 큰 진노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비밀을 깨달아 하나님이 죄인에게 주시는 생명의 길이 현실적으로 무엇인지 깨달아 그 길을 따라 생명에 이르는 지혜로운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갈지라도 세상에서는 어려움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이미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의 지배하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어려운 일을 만날 때 그 해결책을 세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여호오 하나님께 문제를 아뢰고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신앙적인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느냐 찾지 못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방향이 결정될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주의 말씀에 따라 삶의 방향을 찾아가며 최종의 목적지를 향하여 앞으로 전진해야 하겠습니다.

오, 주님
갈 길을 알지 못하도록 어둠이 드리워진 땅에
빛되신 주님의 손을 잡고
한걸음씩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은총을 내려주옵소서. 



두 독수리와 포도나무

1. 처음 큰 독수리와 포도나무

에스겔은 17:3-6에서 큰 독수리 한 마리가 레바논에 이르러 백향목 높은 가지를 취하여 장사하는 땅으로 가져 가고 그 땅의 종자를 옥토에 심음으로 그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그 큰 독수리에게 향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 예언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공격하여 점령한 뒤 여호야긴을 포로로 끌고 갈 것(참조, 왕하 24:8-16)과 그 뒤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워 유다가 풍요와 안정을 누리면서 바벨론을 섬길 것을 의미합니다. 

a. 시드기야의 등극(왕하 24:17)
b. 여호야긴이 사로잡힘(대하 36:10)

2. 두번째 큰 독수리와 포도나무의 배반

처음 큰 독수리 이외에 또 다른 큰 독수리가 예언에서 언급되는데 처음 큰 독수리를 향하던 포도나무가 나중 큰 독수리에게 뿌리를 향합니다. 이것은 바벨론을 섬기던 시드기야가 바벨론을 배반하고 애굽을 섬길 것을 에언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시드기야는 그를 왕으로 세운 느부갓네살을 배반하고 애굽 왕 바로와 화친하였습니다 (참조, 왕하 24:20).

a. 시드기야의 배반(왕하24:20)
b. 애굽의 원군(렘37:5)

3. 배반한 포도나무의 쇠망

처음의 큰 독수리를 배반하고 나중의 큰 독수리에게 돌아서는 포도나무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배반한 그 포도나무가 배반으로 인해 시들어 버리고 급기야 뽑히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애굽과 화친한 유다의 국력이 쇠할 뿐 아니라 급기야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함으로 유다 나라다 지구상에서 사라져 없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시드기야를 끝으로 유다는 멸망하였습니다.  

a. 양식이 진함(왕하 25:3)
b. 백성의 죽음(대하 36:17)

언약의 중요성

1. 유다 보존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 바벨론

에스겔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 가운데 유다가 애굽을 의뢰하면 쇠퇴하고 바벨론을 의뢰하면 홍왕한다는 내용이 있음을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을 의뢰하면 살고 애굽을 의뢰하면 죽는 이유는 패악한 애굽보다 의로운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악을 징벌하시고 유다를 구할 도구로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참조, 겔29:18-20).

a. 하나님의 종 느부갓네살(렘27:6)
b. 하나님을 위해 수고한 느부갓네살(겔29:20)

2. 바벨른과의 언약 파기는 하나님과의 언약 파기

바벨론은 하나님의 도구였으므로 유다가 바벨론과 맺은 언약은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었습니다. 따라서 시드기야가 유다의 왕으로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를 섬길 것을 약속하고도 그 약속을 어긴 것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어긴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시드기야와 유다 백성이 그들의 바벨론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애굽으로 돌이킨 것은 중대한 죄악이었습니다.  

a.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한 약속(대하 36:13)
b. 백성의 언약 멸시(대하 36:16)

3. 배반의 종말은 멸망

바벨론과의 약속 파기 이전에도 유다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불법을 자행하였습니다. 그것은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의 파기였습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은 끝까지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내려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한편 이처럼 인간과 인간이 맺은 언약도 하나님과 직접 맺은 언약만큼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에 대해서는 신의를 지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범죄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a. 백성의 멸절(대하 36:17)
b. 나라를 잃음(대하 36:20)

약속된 메시야 왕국에 대한 예언

1. 백향목 높은 가지를 얻음

유다에 대한 심판 예언이 있은 뒤 하나님은 다시 유다의 회복을 예언하십니다. 그 예언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끊어진 높은 가지(참조, 겔19:14)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통치를 할 다윗의 후손이 일어나(참조, 겔34:23)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메시야 왕국에 대한 예언 그것입니다.  

a. 다윗의 후손(마 1:1)
b. 만왕의 왕(계 19:16)

2. 이스라엘 높은 산에 이름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의 높은 산은 시온 산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 산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와 성전이 세워질 하나님의 성산을 지칭합니다(참조, 계14:1). 따라서 포로 됨에서 회복될 것이라는 이 에언의 말씀은 메시야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세워지는 날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할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유다와 및 모든 성도는 그 나라 백성이 될 것입니다.  

a. 다윗의 성 시온(왕상 8:1)
b. 왕을 시온에 세움(시 2:6)

3.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음

앞에서 유다라는 포도나무는 가지가 마르고 뽑힐 것이 예언되었습니다. 그런데 회복의 날 그 가지가 다시 무성하여 열매를 맺고 각양 새가 그 아래 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민족들에 의해 채워지며(참조, 계7:9) 그들이 참된 풍요와 평강을 누리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이미 성취되었고(참조, 스 1:1-11; 눅 17:21) 또 성취될 것입니다(참조, 계 21:1-5).

a. 끊치지 않은 실과(겔 47:12)
b. 풍성한 열매(계 22:1-2)




[단어해설]
3절. 독수리. 큰 독수리는 권위와 용맹을 상징하는데 여기서는 바벨론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장차 유다가 바벨론의 지배하에 있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10절. 마르리라. 수분이 필요한 물체가 수분의 부족으로 메마르게 됨을 뜻한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유다 백성과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에 의해 목이 마르듯이 멸망할 것임을 의미한다.

15절. 배반하였으니. 원어 <dr"m;:마라드>는 인간에 대한 반역과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모두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는 바벨론 왕권에 대한 반역을 가리킨다.

19절. 돌리되. '두다, 놓다'라는 뜻으로 죄인들에 대 한 책망과 저주를 머리 위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22절. 빼어난. 원어 <lWlt;:탈룰>은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높이를 뜻할 뿐이고, 사회적 신분의 높음이나 물건의 가치 의 높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23절. 무성하고. '올리다, 운반하다'라는 뜻으로 나뭇가지가 성장하여 높게 뻗어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유다 민족 중에서 나신 메시야의 구원 사역이 성공적으로 성취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신학주제]
두 독수리의 비유.
두 독수리는 각각 바벨론과 애굽을 묘사한다. 에스겔은 두 독수리의 권세에도 차이가 있음을 시사하였다. 두 독수리는 모두 날개, 깃털이 있으나 전자(바벨론 비유)는 정관사를 첨가하고 역동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여러 동사를 사용하였으나, 후자(애굽을 비유)는 정관사가 없으며 동사도 존재를 나타내는 것 하나만을 사용하였다. 이 표현은 당시 바벨론이 애굽보다 강대함을 알려 주기도 하는 것이다. 특히 날개, 깃, 털이 많은 독수리는 바벨론이 여러 나라를 정복할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옥토에 심겨 그 가지가 독수리를 향한 포도나무와 같다고 묘사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국가의 주권을 상실하고 바벨론의 통제를 받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적교훈]
당시 유다 백성의 살길은 애굽과 화친을 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 데 있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스라엘이 형통케 되리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혼란한 상황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성도가 하나님 대신 다른 세력을 의지할 때 커다란 위기에 처하게 된다. 오늘날 성도들도 이러한 사실을 명심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급할수록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고 하나님은 뒷전으로 밀려나는데, 오히려 위급할 때일수록 자신의 의지는 죽고 하나님의 간섭만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에스겔 14장의 연장 선상에서 보아야 합니다. 바벨론에 있는 장로 두어사람이 에스겔을 찾아왔습니다. 거짓선지자는 우리가 곧 해방될 것이라고 합니다. 에스겔은 포로로 잡혀온지 7년이 되었습니다. 시드기야가 왕이 된지 7년이 되었습니다. 시드기야 9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포위당했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완전히 망합니다. 망하기 삼년전입니다. 유다는 바벨론의 삼차 공격을 받으며 애굽왕 프삼메티쿠스 2세에게 도와달라는 사절단을 보낸 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장로들에게 묻는 것에 대해서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언제 해방될 것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습니다. 시편 66편 18절에 보면 사람이 죄악을 품으면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습니다. 죄악이 있으면 하나님은 듣지 않으십니다. 장로들은 어떻게 하든지 위기만 넘기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유다 사람들에게 유다가 왜 망하는지 그 죄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교훈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독수리가 연한 가지 끝을 꺾어갔습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수수께끼와 비유를 말하라 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여 이르시되 색깔이 화려하고 날개가 크고 깃이 길고 털이 숱한 큰 독수리가 레바논에 이르러 백향목 높은 가지를 꺾되 4. 그 연한 가지 끝을 꺾어 가지고 장사하는 땅에 이르러 상인의 성읍에 두고” 주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인 에스겔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비유를 들어 말하라고 하십니다. 수수께끼는 궁금증을 갖게 하고 답을 말해줍니다. 비유는 살아있는 사물 언어를 통해서 뜻을 깊이 있게 전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북방에서 큰 독수리 한 마리가 레바논으로 갔습니다. 그 독수리는 큰 날개, 긴 깃, 알록달록한 깃털을 가졌습니다. 하늘의 왕자다웠습니다. 그 독수리는 북쪽에서 내려온 독수리로 바벨론을 의미합니다. 그 독수리는 백향목 끝에 돋은 순을 땄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솔로몬의 궁전을 지은 백향목으로 유명합니다. 나무의 제왕으로 불립니다. 백향목은 숭고하고 장엄하며 유다의 궁전에는 레바논 궁이라는 궁전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백향목은 유다의 다윗 왕조를 말합니다. 독수리는 그 연한 햇순을 잘라서, 상인들의 땅으로 물고 가서, 상인들의 성읍에 놓아 두었습니다. 연한 햇순은 여호와긴 왕을 말합니다. 상인들의 땅은 상업이 융성한 바벨론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왕이 유다의 마지막 왕 여호와긴 왕을 잡아 바벨론으로 잡아 간 것을 의미합니다.

(씨앗을 가져다가 옥토에 심었습니다.)

“5. 또 그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 가에 심더니 6. 그것이 자라며 퍼져서 높지 아니한 포도나무 곧 굵은 가지와 가는 가지가 난 포도나무가 되어 그 가지는 독수리를 향하였고 그 뿌리는 독수리 아래에 있었더라” 독수리는 바벨론 땅에서 난 씨앗을 가져다가, 유다의 옥토에 심었습니다. 시냇가에다가 포도나무를 심듯, 물이 많은 시냇가에 그 씨앗을 심었습니다. 백향목이 여호와긴 왕이라면 포도나무는 시드기야왕을 의미합니다. 바벨론은 여호와긴 왕을 대신하여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시드기야왕을 포도나무에 비유한 것은 유다의 정통적인 왕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옥토에 심은 것은 시드기야가 성장하여 좋은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벨론에게 순종하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씨앗은 싹이 나고, 낮게 퍼지며 자라서, 무성한 포도나무가 되었습니다. 그 가지들은 독수리에게로 뻗어 올라갔고, 그 뿌리는 땅에 박고 있었습니다. 그 씨가 포도나무가 되어, 가지를 내뻗고, 덩굴손을 뻗쳤습니다. 시드기야왕이 왕이 바벨론과의 관계 속에서 유다를 통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는 무한히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포도나무는 다른 독수리에게 부리를 뻗었습니다)

“7. ○또 날개가 크고 털이 많은 큰 독수리 하나가 있었는데 그 포도나무가 이 독수리에게 물을 받으려고 그 심어진 두둑에서 그를 향하여 뿌리가 뻗고 가지가 퍼졌도다 8. 그 포도나무를 큰 물 가 옥토에 심은 것은 가지를 내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포도나무를 이루게 하려 하였음이라” 다른 큰 독수리 한 마리가 남방에서 나타났습니다. 날개가 크고 깃이 많은 독수리입니다. 이 독수리는 애굽왕을 의미합니다. 이 포도나무가 뿌리를 그 독수리에게로 뻗고, 가지도 그 독수리에게로 뻗는 것을 보라고 합니다. 이 포도나무는 새로 나타난 그 독수리를 보고 옥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물을 대달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있는 곳이 옥토인데 그는 다른 옥토를 찾았습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의 영향 아래서 열매를 맺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왕이 바벨론왕과의 약속을 깨고 애굽을 의지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 포도나무를 옥토, 곧 물이 많은 곳에 심은 것은,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포도나무가 되도록 한 것인데, 다른 모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포도나무를 심판하십니다)

“9. 너는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그 나무가 능히 번성하겠느냐 이 독수리가 어찌 그 뿌리를 빼고 열매를 따며 그 나무가 시들게 하지 아니하겠으며 그 연한 잎사귀가 마르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많은 백성이나 강한 팔이 아니라도 그 뿌리를 뽑으리라 10. 볼지어다 그것이 심어졌으나 번성하겠느냐 동풍에 부딪힐 때에 아주 마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자라던 두둑에서 마르리라 하셨다 하라” 그러므로 에스겔은 시드기야 왕과 유다사람들들에게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애굽을 의지한 그 포도나무가 무성해질 수 없습니다. 북방의 독수리가 그 뿌리를 뽑아버리게 됩니다. 그 열매가 떨어지거나, 그 새싹이 말라 죽게 될 것입니다. 그 뿌리를 뽑아 버리는 데는, 큰 힘이나 많은 군대를 동원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드기야왕을 심어 놓았지만 무성해질 수가 없습니다. 동쪽 열풍이 불어 오면 곧 말라 버릴 것입니다. 자라던 그 밭에서 말라 버릴 것입니다. 동쪽의 열풍이 불어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벨론 왕이 여호와긴왕을 잡아갔습니다.]

“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2. 너는 반역하는 족속에게 묻기를 너희가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겠느냐 하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왕과 고관을 사로잡아 바벨론 자기에게로 끌어 가고 13. 그 왕족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언약을 세우고 그에게 맹세하게 하고 또 그 땅의 능한 자들을 옮겨 갔나니” 주께서 에스겔에게 비유를 설명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은 저 반역하는 족속에게, 이 비유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겠느냐고 물어 보고, 그들에게 일러주라고 하십니다. 바빌로니아 왕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여호와긴 왕과 지도자들을 붙잡아 바빌로니아로 끌어 갔습니다. 예루살렘 나라의 왕족 가운데서 한 사람 여호와김을 선택하여, 그와 바벨론의 속숙이 되라는 언약을 맺고, 그에게 바벨론에 충성하도록 맹세를 시킨 다음에, 유다의 유능한 사람들을 붙잡아 갔습니다. 지식인과 기술자를 붙잡아갔습니다.

(시드기야는 언약을 배반합니다)

“14. 이는 나라를 낮추어 스스로 서지 못하고 그 언약을 지켜야 능히 서게 하려 하였음이거늘 15. 그가 사절을 애굽에 보내 말과 군대를 구함으로 바벨론 왕을 배반하였으니 형통하겠느냐 이런 일을 행한 자가 피하겠느냐 언약을 배반하고야 피하겠느냐” 시드기야를 세운 것은 바빌로니아가 이 나라를 굴복시켜 독립하지 못하게 하고, 바벨론과의 언약을 지켜서 명맥을 유지해 나가도록 하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시드기야는 바빌로니아 왕에게 반역하여, 이집트로 사람을 보내서, 자기에게 많은 군마와 군인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가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한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언약을 어긴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시드기야왕은 죽습니다)

“16.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바벨론 왕이 그를 왕으로 세웠거늘 그가 맹세를 저버리고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그 왕이 거주하는 곳 바벨론에서 왕과 함께 있다가 죽을 것이라 17. 대적이 토성을 쌓고 사다리를 세우고 많은 사람을 멸절하려 할 때에 바로가 그 큰 군대와 많은 무리로도 그 전쟁에 그를 도와 주지 못하리라 18. 그가 이미 손을 내밀어 언약하였거늘 맹세를 업신여겨 언약을 배반하고 이 모든 일을 행하였으니 피하지 못하리라” 여호와 주 하나님이 당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시드기야 왕은 분명히 죽을 것입니다. 바빌로니아 왕이 그를 왕으로 세워 주었는데, 그 왕에게 한 맹세를 무시하고, 그와 맺은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바빌로니아에서 느브갓네살 왕과 함께 있다가 죽을 것입니다. 바빌로니아 군대가 많은 사람을 죽이려고, 그의 성읍 옆에 흙 언덕을 쌓고 높은 사다리를 세울 때에는, 이집트의 바로가 강력한 군사력과 많은 군사로도 전쟁에서 그를 도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가 맹세를 무시하고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그가 언약을 어기고 이런 모든 일을 하였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는 것을 매우 중시여기십니다. 우리는 속아서 약속을 할 수 있습니다. 강자에 의해서 약자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약속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은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였습니다)

“19. 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가 내 맹세를 업신여기고 내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그 죄를 그 머리에 돌리되 20. 그 위에 내 그물을 치며 내 올무에 걸리게 하여 끌고 바벨론으로 가서 나를 반역한 그 반역을 거기에서 심판할지며 21. 그 모든 군대에서 도망한 자들은 다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남은 자는 사방으로 흩어지리니 나 여호와가 이것을 말한 줄을 너희가 알리라” 그러므로 여호와 주 하나님이 당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한 맹세를 업신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맺은 언약을 깨뜨렸으므로, 여호와가 벌을 주어서, 그 죄를 그의 머리로 돌리십니다. 이 약속은 사람과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약속이었습니다. 여호와가 그물을 쳐서 그를 망으로 옭아 바빌로니아로 끌고 가서, 거기에서 여호와가 당신을 반역한 그의 반역을 심판하십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의 모든 군대 가운데서 도망한 사람들은 모두 칼에 쓰러질 것이며, 살아 남은 사람들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질 것입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유다 사람들은, 이렇게 예언한 것이 여호와 주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들과 속아서 한 약속도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유다가 을의 위치에서 갑과 한 약속도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이 있어야 약속을 지킬 수 있습니다. 약속을 지켜야 신뢰도가 높아지고 관계성이 형성됩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죄악으로 유다를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나 다윗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약속의 이행자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서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예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내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다 지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열매맺는 연한 가지입니다)

“22.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주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가 바벨론에 있는 백향목 끝에 돋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십니다. 여호와가 그 나무의 맨 꼭대기에 돋은 어린 가지들 가운데서 연한 가지를 하나 꺾어다가, 여호와가 직접 높이 우뚝 솟은 예루살렘 산 위에 심으십니다. 이것은 여호와긴 왕의 후손 스룹바벨을 유다로 인도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궁극적으로는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메시야는 모든 산 중에 가장 뛰어난 산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홀로 우뚝 솟은 산이십니다. 스룹바벨의 후손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십니다. 저자는 예수님을 새로운 가지 연한 순에 비유하였습니다. 이사야도 53장에서 예수님을 연한 순에 비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연한 순과 같습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습니다. 가난하고 볼품없이 자랐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고 온유하십니다. 끊임없이 성장하시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11장에서는 연한 가지에서 새순이 돋아 성령이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지혜와 총명의 신, 모략과 재능의 신,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을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십니다. 겸손하게 하십니다. 온유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여호와가 그 가지를 심어 놓으면, 거기에서 가지가 뻗어 나오고, 열매를 맺으며,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온갖 새들이 그 나무에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들이 그 가지 끝에서 보금자리를 만들 것입니다. 이 나무가 온 세계를 덮게 됩니다. 온 세게를 덮으십니다. 온세계만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옵니다.

(낮은 나무를 높인다)

“24.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전이 일어납니다. 그 때에야 들의 모든 나무가, 여호와 주가,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고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마른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주가 말하였으니, 여호와가 그대로 이루십니다. 여호와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한 자들을 강하게 하시고 강한 자를 약하게 하십니다.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교만한 자를 겸손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높이시고 믿지 않는 자를 낮추십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연한 순같은 분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분에서 오시는 성령님도 연한 순과 같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고 연한 순과 같이 변화되어야합니다. 우리가 새롭게 되어야합니다. 성장해야합니다. 아멘!





브르스 윌킨슨(Bruce H. Wilkinson, 1924 – 2013) 목사님은 2000년대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야베스의 기도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달라스 신학교에서 헨드릭스(Howard G. Hendricks)라는 유명한 교수의 지도 아래 공부를 한 보수적인 침례교 목사입니다.
Walk Through the Bible(WTB)이라는 성경공부에 필요한 자료와 훈련을 제공하는 단체를 만들어서 25년 동안 훌륭하게 사역을 하셨습니다.
윌킨슨 목사님께서 그 사역을 하신지 25년쯤이 되었을 때 이 WBT사역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었습니다.
윌킨슨 목사님에 대한 좋지 않은 루머가 생기기 시작했고 생각지 않았던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히게 되어서 결국은 대표직에서 사임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윌킨슨 목사님에게 아프리카로 가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윌킨슨 목사님에게 그것은 해결책이 아닌 도피책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미국에 있어야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윌킨슨 목사님에게 아프리카로 가라고 강력하게 감동을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결국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윌킨슨 목사님께서 아프리카 남부로 가셔서 목격하신 것은 에이즈가 쓸고 간 끔찍한 상처였습니다.
어린아이들 1,300만 명이 이미 에이즈로 죽은 것입니다.
그 당시도 하루에 8,000명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윌킨슨 목사님은 그 상황을 보고 너무 참담해서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답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제게 돈이 필요합니다. 이들을 섬길 수 있도록 물질을 주십시오.”
그때 윌킨슨 목사님께서 쓰신 책이 야베스의 기도였습니다.
이 책이 출판됐을 때 미국으로부터 전 세계에 상상할 수도 없는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윌킨슨 목사님께서는 이 책의 수익금으로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Dream for Africa라는 선교단체를 세우고 요하네스버그로 거주지를 옮겨 아프리카 어린아이들을 섬기는 놀라운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업에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생기면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걸어가던 길에 문제가 생기고 막히면 하나님은 다른 길을 예비하시기도 하고 골짜기를 메우시기도 하고 산을 깎아서 길을 내시기도 한다고 성경은 약속합니다. 우리의 계획이 좌절될 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더 아름다운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 하심이 없다고 했던 천사 가브리엘의 메시지에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 지이다” 하는 순종하는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16장 결혼 비유
09-26-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피투성이(에스겔 16:6)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투성이라도 살라.
" 'Then I passed by and saw you kicking about in your blood, and as you lay there in your blood I said to you, "Live!"

문단분해
16:1-14, 예루살렘의 어렸을 때부터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긍휼(연민)과 구원 및 사랑의 비유.
16:15-34, 그들의 간음(우상 숭배).
16:35-42, 그들에 대한 심판의 선언.
16:43-59, 사마리아 또는 소돔과 대조하여, 장래의 회복을 약속하면서, 그들의 죄를 책망하다.
16:60-63, 긍휼(연민)에 의한 하나님의 언약.

피투성이(bloodiness) 1818. 담(dâm)  דָּם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
발음 / 담[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피(창 4:11, 왕하 3:22, 겔 35:6), 산혈(레 12:4,5,7), 살인(시 26:9), 살육(겔 5:17), 피투성이(겔 16:6, 22), 피 값(겔 3:18), 죄(겔33:6), 핏빛(욜 2:31), 피 흘린 자[죄](레 17:4, 신 21:8),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시 59:2).
구약 성경 / 360회 사용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이 말이 두 번 반복되어 그 뜻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적인 은혜로 사람들에게 하찮은 존재로 취급되어진 자를 살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은혜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당신의 주권적인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곧 하나님이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시다는 것을 엿보게 합니다(출 34:6. 시 86:15).
한편으로는 그분의 은혜와 긍휼을 받은 자로 하여금 후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스스로 교만하여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살라'는 말의 히브리어 원형은 '하야'()로서 여기에서는 명령형으로 쓰였습니다.
이말에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언급된 것처럼 명령되어진 것을 가능케 하는, 즉 살도록 명령되어진 존재에게 생명을 공급해준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창 1:22, 28. 9:1, 7. 17:20. 28:3. 35:11, Brownlee, Carley).

  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 인자야 예루살렘으로 그 가증한 일을 알게하여
  3.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 사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 또...가라사대

- 본절에서부터는 예루살렘을 음란한 음부(淫婦)로 비유하여 그 음란한 죄악성, 즉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한 가증한 죄악을 드러내 책망하며 그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비유의 형식만 달라졌을 뿐 기본적인 기조는 이전의 것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이처럼 비유의 형식을 달리하면서도 같은 내용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다.

가증한 일

- 이 말은 히브리어로 '토아보테하'(*)로서 일반적으로 우상 숭배 죄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으며(5:9 참조) 본절에서 이 말은 특히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예루살렘 거민들이 바알과 몰록 우상을 섬기는 것에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15-22절, Wycliffe, Cooke).

왜냐하면 당시 유다 왕국 내에서 에스겔과 같은 시기에 사역하였던 예레미야 선지자도 유다 백성들이 바알과 몰렉 우상을 섬긴 것에 대하여 크게 책망했기 때문이다(렘 32:30-35).

네 근본과 난 땅은...아모리 사람이요...헷 사람이라

- 이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의 실제적인 혈통에 대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그들이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짐으로 이방인과 같이 되었음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아모리'는 '고지대인(高地帶人)들'이란 뜻으로 아카드어로는 '아무루'(Amurru)로 불리운다.
이들은 함의 아들 가나안의 후손 중 한 무리들로서 일찍부터 가나안에 거주했던 많은 토착민들 중 하나이다(창 10:16).
이들은 또한 소아시아에서 그들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으며 일부가 남동쪽으로 내려가 바벨론의 제1왕조를 수립한 것으로 알려진다(Mendenhall).
본절에서도 이들은 가나안 땅의 여러 원주민 가운데서 '헷 사람'들과 함께 가나안 원주민 전체를 대표하는 족속으로서 언급되었다(Calvin).
'헷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그 근원이 다른 비셈족 계통의 사람들(non-semitic people)이다.
이들은 한때 동쪽 메소포타미아에서 서쪽 서머나 지역까지 광범위하게 문화적 영향을 미친 자들로서 철기 문화를 사용한 자들로 유명한다.
또한 이들은 족장 시대 때부터 솔로몬 시대에 이르기까지 가나안 땅과도 연관을 맺으면서 살았던 자들이다(창 23:10-20; 26:34; 수 1:4; 삼상 26:6; 왕상 11:1, Wycliffe).
본절에서도 이들이 예루살렘의 '어미'로 언급된 것은 아모리 족속과 함께 가나안 원주민들의 대표였기 때문이다(Calvin).


4절. 고대 근동 지방에서 원치 아니했던 어린 아이, 특히 여자 아이들이 출생했을 때 취해졌던 풍습을 예루살렘에 적용하여 언급한 말이다.
아마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고센 땅에 살았던 기간으로서(창 46:34-47:12)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의 수중에 있었던 때일 수도 있다(Plumtre).
당시 이방인들은 원치 아니한 아이 특히 여자 아이들이 출생했을 때에는 그 아이들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행해야 할 일들 조차 해주지 않고 그대로 문밖에 방치해 두었으며, 심지어 고대 아랍인들은 산 채로 매장했다고 한다(Cooke, Carley).
그러나 마스터맨(Masterman)에 의하면 고대 근동 지역에서 출생한 아이에게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관습이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태줄을 끊자마자 산파가 그 아이 위에 소금과 물과 기름을 뿌려 문지르고 칠일 동안 강포로 단단하게 싼다.
그리고 칠일이 지난 후 그 더러운 강포를 어린 아이에게서 벗기고, 씻은 다음 다시 기름을 바르고 칠일 동안 강포로 싼다.
이런 정결 의식에 대해 혹자는 어린 아이를 악한 영들에게서 보호하기 위해 행해진 것으로 추정한다(Carley).
본절에서 예루살렘이 이런 성결 의식도 받아 보지 못한 것으로 비유된 것은 그 성읍이 당시 버림 받아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전락되어 있었음을 암시해준다.

네가 들에 버리웠었느니라


- '들'의 히브리어 원형은 '파님'(*, 트인)과 '솨데'(*, 들판)의 합성어로서 '확 트인 들판' 또는 '넓은 벌판'을 뜻한다. 어린 아이를 이런 곳에 내버려 둔다는 것은 곧 들짐승이나 폭풍우 같은 것에 드러내 놓는 것을 암시한다(33:27, Cooke). 이는 어린 아이로 비유된 예루살렘이 당시 그곳 이방인들에게 하찮은 존재로 비춰졌음을 뜻한다.



에스겔 16장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를 혼인 관계로 비유합니다.
신부로서 이스라엘은 신랑 되신 하나님이 기대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타락한 신부의 모습으로 소개됩니다.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의 자비(1-14절), 배은망덕한 이스라엘(15-34절), 심판받을 이스라엘(35-59절), 영원한 언약에 대한 약속(60-63절)으로 구분합니다.

성경에서는 혼인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연합에 대한 비유로 자주 사용합니다.
이 비유에서 강조된 것은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친밀한 교제로서 서로 사랑을 주고 받으며 신뢰하는 인격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15장에서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여 그들의 죄악과 그 죄악으로 인한 징계를 언급했다면 16장은 이스라엘을 비천한 가운데서 건짐을 받아 만군의 왕이신 여호와의 왕후가 되는 은총을 입은 뒤에도 은혜를 배반하고 우상을 섬김으로 징계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스라엘이 약속의 백성이라 결국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 본성이 악하여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도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베푸실 때에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나 의로 하나님에 이르고자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곧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이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요 3:16. 행 4:12).
그러면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믿는 자를 영원히 구원하실 것입니다.

매일의 삶이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즐기며 살아가는 복된 삶의 터전이 되시기를 기도합시다.


 




1. 은혜를 통한 구명과 영화로운 결혼

1) 이스라엘의 비참한 초기 상태
이스라엘이 아직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이전에는 민족이라고 할 만한 숫자도 구성하고 있지 못했고(참조, 창46:1-27) 국가를 구성할 만한 땅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참조, 창23:1-20).그 이전에는 더욱더 상태가 심각해서 우상을 섬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상태에 있었습니다(참조, 수24:2). 이스라엘은 그 초기에 그 어떤 이방 나라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초라하고 힘이 없고 연약했던 것입니다.  
a. 모든 민족 중 가장 적음(신7:7)
b. 압제받은 이스라엘(출1:13-14)

2) 하나님의 구명과 양육
이스라엘이 그러한 연약하고 열악한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참조, 창12:1-3;신7:7). 그리고 그들을 선택하여 노예 된 상태에서 건져 독립을 주시고(참조, 출12:29-51) 그들에게 땅을 주셨습니다(참조, 수6:1-수12:24). 한마디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생명을 건져 주시고 그들이 부요할 수 있는 기반과 명예를 제공해 주신 것입니다.  
a. 애굽 구출 작전(출3:8)
b. 창대케 하심(창12:2)

3) 결혼을 통해 왕후가 됨
이스라엘이 독립을 하고 많은 인구를 가지게 되었으며 영토를 취함으로 명실상부한 국가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영원한 반려자로 삼으심으로 천지의 대주재 되신 하나님의 왕비가 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주변 모든 국가와 대등하게 나설 수 있는 강대한 국가가 되었습니다(참조, 왕상4:29-왕상10:29).
a. 뭇나라의 흠모(왕상4:34)
b. 성자 하나님의 신부(계21:2)

2. 배은의 음행

1) 주위 민족의 우상을 섬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은 민족적 생명의 은인이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 모든 섬김을 다하여도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은혜를 배반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이 금지하신 주변 나라와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이방 신들을 섬기고 그 우상들에게 그들의 풍요와 안전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정신적, 영적 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 바알 숭배(왕상16:31)

2) 주변 국가의 힘을 의뢰함
이스라엘의 배은의 음행은 우상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상은 물론이고 주변 열강의 힘을 의뢰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열강 의뢰로 가장 먼저 꼽힌 나라는 애굽이며, 그 다음으로는 앗수르와 블레셋 등의 강대하고 부요한 나라들이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힘과 재물을 가진 나라에 아부하며 그들에게 자신들의 안전과 풍요를 의지하며 시작한 것입니다.  
a. 애굽 신뢰(출14:12)
b. 앗수르 의뢰(왕하16:7)

3) 음행하되 돈을 주고 음행함
보통 일반적으로 창기들은 돈을 받고 성을 팝니다.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남편을 떠나 간음하는 이스라엘을 그 반대였습니다. 그녀는 돈을 받고 그녀의 성을 팔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돈을 주어 가면서 성을 구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게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만군의 여호와를 버려 두고 그들의 소유를 주면서까지 헛된 이 세상의 우상들과 강자들에게 그들의 정조, 곧 영혼을 구차하게 구걸했던 것입니다.  
a. 조공을 바친 호세아(왕하17:3)
b. 값 주고 음행을 함(호8:9)

3. 자매의 비교할 수 없는 음행과 회복

1) 북이스라엘의 음행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남북의 두 나라로 분열하였습니다. 북쪽 나라는 르우벤 지파를 중심으로 하여 열 지파가 모여 사마를 수도로 한 뒤 국호를 북이스라엘이라 하였습니다. 이런 면에서 북이스라엘은 두 지파로 구성된 남쪽 나라보다 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형된 북이스라엘은 단 한명의 선한 왕도 배출하지 못할 만큼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 숭배와 악을 자행했습니다.  
a. 앗수르와의 음행(겔23:5)
b. 애굽과의 음행(겔23:8)

2) 남유다의 더한 음행
남쪽 나라는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를 중심으로 모여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뒤 국호를 남유다라 하였습니다. 남유다는 간간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때가 있었으나 우상을 숭배하기는 북이스라엘 못지 않았으며 주변 열강을 섬기는 데 있어서는 북이스라엘을 능가하였습니다. 그들은 애굽, 앗수르 더 나아가 바벨론을 섬겼으며 그들이 숭배하는 우상을 닥치는 대로 숭배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아우 남유다가 형 북이스라엘보다 음행의 정도에 있어서 더 심하다고 경책하고 있습니다.  
a. 앗수르 연애(겔23:12)
b. 바벨론과의 음행(겔23:17)

3) 언약을 통한 회복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거의 예외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하시나 징계가 그치면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실 때에 그들을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참조, 창17:1-8). 신실한 하나님은 그 거룩하고 영광된 이름을 위하여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참조, 겔20:14). 또한 일향 미쁘신 하나님은 한번 사랑하는 자는 끝까지 사랑하십니다(참조, 요10:28-29).
a. 영원한 언약(창17:7)
b.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단9:4)


혼인 관계로 비유된 선민의 언약 관계

구약에서 하나님은 신랑으로 이스라엘은 신부로 비유합니다.
신약에서는 새 언약의 상황 즉 복음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혼인 비유를 사용하였다. 온 성도의 신랑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혼인 잔치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이것을 통해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열심과 성실함으로 계속 아껴 주심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과 선민의 언약 관계를 혼인 관계로 비유하였기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신뢰하는 대신에 우상을 섬기는 현상을 간음으로 묘사한 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상을 숭배하고 이방과 동맹을 맺어 영적으로 간음한 이스라엘에게 철저한 심판을 예고하셨다. 왜냐하면 율법은 간음한 자에 대한 형벌을 죽음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적교훈]
이스라엘은 방탕과 정욕에 빠져 오직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하나님)를 위하지' 않고 '너(이스라엘 백성)를 위하여' 우상을 섬겼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상 숭배의 목적이 오직 인간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잡신을 섬기는 종교는 인간의 쾌락과 욕심을 채우는 통로에 불과하다. 오늘날도 인간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도모하는 모든 방법이 성도들에게 우상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하나님만 바라보아야지, 그 이외의 다른 것을 바라보면 영적 간음인 우상 숭배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은 황폐화될 것을 예언합니다. 예루살렘이 이렇게 타락했고 영영구제받을 수 없는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서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심판에 대해서 하나님이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심판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놓고 옳다고 인정해야합니다. 좋은 일이건 나쁜일이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경륜입니다.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훈련입니다. 버릴 것을 버리고 취할 것을 취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헤로 출애굽하였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사십년 만나를 먹었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 광야 사십년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죽었습니다. 바울은 원망하다가 죽었으니 원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가다가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병이 있었지만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육체의 가시를 통해서 진실해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갖게 하고 순수하게 함으로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병들고 죽어도 감사해야합니다. 우리는 시련을 당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합니다. 효자는 매를 맞아도 이것이 나를 향한 사랑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웨슬리는 13형제입니다. 어머니는 형제에게 다 나누어주고 남은 것을 선반에 감추었습니다. 웨슬리는 그것을 훔쳤습니다. 어머니는 웨슬리를 많이 때렸습니다. 웨슬리는 어머니의 매 때문에 오늘 내가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일에도 하나님의 저주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나고 성령을 받아야합니다. 아멘!

(가증한 예루살렘)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예루살렘으로 그 가증한 일을 알게 하여 3.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라” 주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인 에스겔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역겨운 우상숭배일을 저질렀는지를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근본을 알고 은헤를 알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나의 죄악됨을 모르고 하나님의 은헤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여호와 주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을 전해야합니다. 에스겔은 예레미야와 달리 사독 후손의 예루살렘 출신 제사장입니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은 새로운 예루살렘 곧 하나님 나라의 표상입니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을 의인화하여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고향, 예루살렘이 태어난 땅은 가나안입니다. 예루살렘의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고, 그들의 어머니는 헷 사람입니다 가나안 땅에는 헷사람과 아모리 사람들이 살던 땅입니다. 예루살렘의 근본은 죄악중에 있습니다. 다윗이 죄를 짓고 모친이 나를 잉태할 때 죄악 중에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예루살렘은 우상숭배를 하던 땅입니다.

(배꼽줄을 자르지 못한 이스라엘)

“4. 네가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5. 아무도 너를 돌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불쌍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천하게 여겨져 네가 들에 버려졌느니라” 예루살렘이 태어난 것을 말하자면, 그들이 태어나던 날, 아무도 그들의 탯줄을 잘라 주지 않았고, 그들의 몸을 물로 깨끗하게 씻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몸을 소금으로 문질러 주지 않았고, 그들의 몸을 포대기로 감싸 주지도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 가운데서 한 가지만이라도 그들에게 해줄 만큼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돌보아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태어나던 바로 그 날에, 사람들이 그들의 목숨을 천하게 여기고, 그들을 내다가 들판에 버렸습니다. 그들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은헤를 받기 전에 모습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심)

“6.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7. 내가 너를 들의 풀 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여전히 벌거벗은 알몸이더라” 그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예루살렘 곁으로 지나가다가, 피투성이로 버둥거리는 그들을 보고, 피투성이로 누워 있는 그들에게, 제발 살아만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피투성이로 누워 있는 예루살렘에게, 제발 살아만 달라고 했습니다.) 그를 긍휼히 여겼습니다. 그리고서 여호와가 그들을 키워 들의 풀처럼 무성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크게 자라 보석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보석처럼 되었고 그들의 유방이 뚜렷하고, 머리카락도 길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아름답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성전이 생기고 왕궁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남편이 되시고 예루살렘은 왕후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8.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 때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곁으로 지나가다가 그들을 보니, 그들은 한창 사랑스러운 때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가 그들 몸 위에 여호와의 겉옷 자락을 펴서 그들의 벗은 몸을 가리워주셨습니다. 그들에게 부부를 맹세하고, 그들과 언약을 맺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시내산의 언약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땅이 되었습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구원하여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래야 될 이유도 의무도 없습니다. 아내가 되는 순간 과거와 관계를 끊어야합니다. 그들의 아버지는 죄악되었습니다. 죄악된 옛집에 대한 의무를 버려야 합니다. 죄악된 옛부모와 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죄악도니 옛집에 들락날락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옛날의 죄악에서 완전히 관계를 끊어야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아내로 살아야합니다.

(이스라엘을 아내 삼으신 하나님)

“9. 내가 물로 네 피를 씻어 없애고 네게 기름을 바르고 10. 수 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두르고 모시로 덧입히고 11. 패물을 채우고 팔고리를 손목에 끼우고 목걸이를 목에 걸고 12. 코고리를 코에 달고 귀고리를 귀에 달고 화려한 왕관을 머리에 씌웠나니 13. 이와 같이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모시와 수 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올랐느니라” 여호와가가 예루살렘을 목욕을 시켜서 그들 몸에 묻은 피를 씻어 내고, 기름을 발라 주었습니다. 수 놓은 옷을 그들에게 입혀 주었고, 물개 가죽신을 그들에게 신겨 주고, 모시로 네 몸을 감싸 주고, 비단으로 겉옷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들이 온갖 보물로 그들을 장식하여, 두 팔에는 팔찌를 끼워 주고, 목에는 목걸이를 걸어 주었습니다. 코에는 코걸이를 걸어 주고, 두 귀에는 귀고리를 달아 주고, 머리에는 화려한 면류관을 씌워 주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금과 은으로 장식하고, 모시 옷과 비단 옷과 수 놓은 옷을 입었습니다. 또 그들은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으로 만든 음식을 먹어서, 아주 아름답게 되고, 마침내 왕비처럼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온갖 축복으로 복주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가 왕후가 되었습니다.

(화려하게 된 이스라엘)

“14. 네 화려함으로 말미암아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루살렘의 아름다움 때문에 그들의 명성이 여러 이방 나라에 퍼져 나갔습니다. 여호와가 그들에게 베푼 화려함으로 그들의 아름다움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거하심으로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 하나님의 도성이 되었습니다.

(음행하는 이스라엘)

“15.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가지고 행음하되 지나가는 모든 자와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 16. 네가 네 의복을 가지고 너를 위하여 각색으로 산당을 꾸미고 거기에서 행음하였나니 이런 일은 전무후무하니라” 15.그런데 예루살렘은 그들의 아름다움을 믿고, 그들의 명성을 의지하여, 교만하게 되어 음행을 하였습니다. 지나가는 남자가 원하기만 하면, 누구하고나 음행을 하여, 그들의 이름을 그의 것이 되게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자신의 옷을 가져다가, 가지각색의 산당들을 꾸미고, 그 위에서 음행을 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방 신을 섬겼습니다. 얼마나 비참하다가 은혜를 받았는데 옛날로 돌아갈 수 있느냐고 합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17. 네가 또 내가 준 금, 은 장식품으로 너를 위하여 남자 우상을 만들어 행음하며 18. 또 네 수 놓은 옷을 그 우상에게 입히고 나의 기름과 향을 그 앞에 베풀며 19. 또 내가 네게 주어 먹게 한 내 음식물 곧 고운 밀가루와 기름과 꿀을 네가 그 앞에 베풀어 향기를 삼았나니 과연 그렇게 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0. 또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자녀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서 드려 제물로 삼아 불살랐느니라 네가 네 음행을 작은 일로 여겨서 21. 나의 자녀들을 죽여 우상에게 넘겨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느냐” 예루살렘은 여호와가 그들에게 준 하나님의 금과 은으로 만든 장식품들을 가져다가 남자의 형상들을 만들어 놓고, 그것들과 음행을 하였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면 남근상 앞에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여호와가 주신 수 놓은 옷을 가져다가 우상의 형상들에게 입혀 주고, 여호와가 준 기름과 향을 우상들 앞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또 예루살렘은 여호와가 그들에게 준 음식, 곧 여호와가 그들을 먹여 살린 고운 밀가루와 기름과 꿀을 그것들 앞에 가져다 놓고, 향기나는 제물로 삼았습니다. 예루살렘이 정말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 예루살렘은 남편이신 하나님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과 그들의 딸들을 데려다가, 우상들에게 제물로 바쳐 불사르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음욕이 아직도 덜 차서 헐떡거렸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아들딸마저 몰렉에게 제물로 바쳤습니다. 또 그들은 자녀를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인신공희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이스라엘)

“22.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네가 모든 가증한 일과 음란을 행하였느니라” 예루살렘은 피투성이로 버둥거리던 때와 벌거벗은 몸으로 지내던 네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않고, 온갖 역겨운 일과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비참했던 과거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했던 존재를 인정해야합니다 그래야 불가항력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방자한 음녀 예루살렘)

“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네가 모든 악을 행한 후에 24. 너를 위하여 누각을 건축하며 모든 거리에 높은 대를 쌓았도다 25. 네가 높은 대를 모든 길 어귀에 쌓고 네 아름다움을 가증하게 하여 모든 지나가는 자에게 다리를 벌려 심히 음행하고 26. 하체가 큰 네 이웃 나라 애굽 사람과도 음행하되 심히 음란히 하여 내 진노를 샀도다”○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루사렘에 재앙이 닥칩니다. 예루살렘이 그 모든 악행을 저지른 다음에도 그녀는, 길거리마다 그녀가 올라갈 누각을 짓고, 그녀가 누울 높은 단을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길 머리마다 높은 단을 만들어 놓고, 네 아름다움을 흉측하게 더럽히고, 지나가는 모든 남자에게 네 두 다리를 벌려, 음행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제 산에서 내려와 길거리에서 음행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집트 남자들, 곧 하체가 큰 이웃 나라 남자들과 음행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수도 없이, 아주 음란하게 음행을 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앗수르 바벨론 사람과 음행을 하는 이스라엘)

“27. 그러므로 내가 내 손을 네 위에 펴서 네 일용할 양식을 감하고 너를 미워하는 블레셋 여자 곧 네 더러운 행실을 부끄러워하는 자에게 너를 넘겨 임의로 하게 하였거늘 28. 네가 음욕이 차지 아니하여 또 앗수르 사람과 행음하고 그들과 행음하고도 아직도 부족하게 여겨 29. 장사하는 땅 갈대아에까지 심히 행음하되 아직도 족한 줄을 알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여호와가 당신의 손을 펴서 예루살렘을 치고, 그들이 날마다 먹을 양식을 줄입니다. 부유하여 바람을 피우니 가난하게 하십니다. 또 그들을 미워하는 블레셋 여자들, 곧 네 추잡한 행실을 보고 역겨워하는 여자들에게 그들을 넘겨 주어서, 마음대로 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은 음욕이 차지 않아서, 앗시리아 남자들과 음행을 하였습니다. 그들과 음행을 한 다음에도 그들의 음욕이 차지 않아서, 예루살렘은 저 장사하는 나라 바빌로니아 남자들과 더 많이 음행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녀의 음욕은 차지 않았습니다.

(창녀보다 더 큰 죄를 짓는 이스라엘)

“30.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이 모든 일을 행하니 이는 방자한 음녀의 행위라 네 마음이 어찌 그리 약한지 31. 네가 누각을 모든 길 어귀에 건축하며 높은 대를 모든 거리에 쌓고도 값을 싫어하니 창기 같지도 아니하도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이 방자한 창녀와 똑같이 이 모든 일을 했으면서도, 시온은 마음이 그렇게 약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지 하는 마음은 갖습니다. 그러나 우상을 따르면서 얻는 쾌락이 큽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돼 돼 돼 하면서 죄를 따라갑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딱하게 보십니다. 그들도 가정까지 깨고 싶지는 않지만 그에 끌려갑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언약함을 아십니다. 예루사렘이 길 머리마다 높은 단을 만들어 놓고, 길거리마다 누각을 세워 놓고, 몸을 팝니다. 이제는 산에서 하지 안혹 길거리에서 합니다. 예루살렘이 화대를 받지 않으니, 그것은 창녀와 다른 점입니다. 그들을 창녀보다 더 나쁜 자입니다.

(바람난 이스라엘)

“32. 그 남편 대신에 다른 남자들과 내통하여 간음하는 아내로다 33. 사람들은 모든 창기에게 선물을 주거늘 오직 너는 네 모든 정든 자에게 선물을 주며 값을 주어서 사방에서 와서 너와 행음하게 하니 34. 네 음란함이 다른 여인과 같지 아니함은 행음하려고 너를 따르는 자가 없음이며 또 네가 값을 받지 아니하고 도리어 값을 줌이라 그런즉 다른 여인과 같지 아니하니라” 예루살렘은 제 남편인 하나님이 아닌 다른 남자들과 간통하는 음란한 유부녀입니다. 창녀들은 화대를 받는 법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모든 정부에게 선물을 주어 가며 사방에서 불러다가, 자신과 음행을 하자고, 남자들에게 돈까지 주었습니다. 신부가 남편에게 받은 패물을 애인에게 갖다 주고 그와 정을 통합니다. 남편인 하나님이 보실 때 화가 나는 일입니다. 호세아 2장 팔절에 보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축복을 바알에게 바칩니다. 하나님이 보시니 답답합니다. 있는 것을 갖다 주니 창기보다 못합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은 창기들과 정반대로 음행을 하였습니다. 정부들이 그를 따라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가 몸값을 받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가 몸값을 주어 가면서 음행을 하니, 그는 다른 창기들과는 정반대입니다 남은 돈받고 하는데 너는 돈내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색에 환장한 자들입니다.

(예루살렘을 벌하시는 하나님)

“○35그러므로 너 음녀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36.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네 누추한 것을 쏟으며 네 정든 자와 행음함으로 벗은 몸을 드러내며 또 가증한 우상을 위하며 네 자녀의 피를 그 우상에게 드렸은즉 37. 내가 너의 즐거워하는 정든 자와 사랑하던 모든 자와 미워하던 모든 자를 모으되 사방에서 모아 너를 대적하게 할 것이요 또 네 벗은 몸을 그 앞에 드러내 그들이 그것을 다 보게 할 것이며 38. 내가 또 간음하고 사람의 피를 흘리는 여인을 심판함 같이 너를 심판하여 진노의 피와 질투의 피를 네게 돌리고 39. 내가 또 너를 그들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네 누각을 헐며 네 높은 대를 부수며 네 의복을 벗기고 네 장식품을 빼앗고 네 몸을 벌거벗겨 버려 두며 40. 무리를 데리고 와서 너를 돌로 치며 칼로 찌르며 41. 불로 네 집들을 사르고 여러 여인의 목전에서 너를 벌할지라 내가 너에게 곧 음행을 그치게 하리니 네가 다시는 값을 주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녀인 예루살렘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이 정부들과 음행을 하고, 그들이 모든 역겨운 우상을 숭배하고 음행을 할 때에, 예루살렘은 재산을 쏟아 붓고, 그의 벗은 몸을 드러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온갖 가증한 우상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패물을 갖다 바치고 그들 자식들의 피를 바쳤습니다. 37. 그러므로 예루살렘이 함께 즐기던 그의 정부들과 그가 좋아하던 모든 남자뿐 아니라, 그가 미워하던 남자도, 여호와께서 모두 모아서 그들이 예루살렘을 치게 하십니다. 그들이 사랑하던 애굽 앗수르 갈대아를 부르십니다. 그들이 미워하던 블레셋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들이 섬기던 해달별 다곤신(인어공주)을 섬기던 자들을 불러 대적이 되게 하십니다. 여호와가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 예루살렘을 치게 하고, 그의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 놓아, 그들이 모두 네 벌거벗은 몸을 보게 하십니다. 그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예루살렘을, 간음을 하고 살인을 한 여인을 재판하듯이 재판하며, 하나님의 분노와 질투로 네게 살인죄의 벌을 내리십니다. 간음죄 살인죄는 사형입니다.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면, 그들이 예루살렘의 누각을 헐고, 그의 높은 단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의 옷을 벗겨 버리고, 네 모든 장식품을 빼앗은 다음에, 그를 벌거벗겨 알몸으로 버려 둘 것입니다. 이방나라들은 예루살렘을 대항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던 모든 무리를 끌고 와서 그를 돌로 치고, 칼로 찔러 죽일 것입니다. 신명기 22장 21절에 보면 간음한 자는 돌로쳐죽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집을 불사르고, 다른 성읍의 많은 여인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벌을 내릴 것입니다. 다른 성읍은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십니다. 돌로 치코 칼로 쳐서 벌을 내리십니다. 여호와가 이렇게 그의 음행을 끝장 내십니다. 그가 다시는 그들에게 선물을 줄 수 없게 하십니다. 죄를 짓는 딸이 있으면 머리를 깎거나 다리를 부러뜨립니다. 영적인 음행에 대해서 진노하십니다. 더 이상 음행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42. 그리한즉 나는 네게 대한 내 분노가 그치며 내 질투가 네게서 떠나고 마음이 평안하여 다시는 노하지 아니하리라 43. 네가 어렸을 때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이 모든 일로 나를 분노하게 하였은즉 내가 네 행위대로 네 머리에 보응하리니 네가 이 음란과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다시는 행하지 아니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제야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분이 풀리고, 여호와 질투가 사그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져서, 다시는 화를 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 5장 13절에서도 죄를 그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노가 다 하니까 마음이 시원해지십니다. 예루살렘이 어린 시절 죽었을 때를 기억하지 않고, 이 모든 일로 여호와 분노를 터뜨려 놓았습니다. 여호와도 예루살렘 행실대로 그에게 그대로 갚을 것이니, 그가 다시는 역겨운 우상을 섬기는 일에다가 음행까지 더하는 일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예수님께 치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갚으십니다. 다 갚으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십니다. 그 공로를 누리는 자는 에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모든 인류에게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죽일놈입니다. 나는 에수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은혜로 영원한 사망에서 벗어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처절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어쩔수 없어서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음란하냐 하다가도 그것이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찬수 목사가 음란한 것을 보다가 안보려고 해도 그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죄에 빨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한 가지 죄도 지면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엎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받을 진노를 다 받으셔서 모든 죄가 그칩니다. 다시는 갚을 치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진노를 그치고 다시는 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케 하십니다. 그래서 가증한 일을 못하게 하십니다.


[그 어머니에 그 딸]

“44. ○속담을 말하는 자마다 네게 대하여 속담을 말하기를 어머니가 그러하면 딸도 그러하다 하리라 45.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어머니의 딸이요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형의 동생이로다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며 46. 네 형은 그 딸들과 함께 네 왼쪽에 거주하는 사마리아요 네 아우는 그 딸들과 함께 네 오른쪽에 거주하는 소돔이라”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비꼬아서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는 속담을 말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로 남편과 자식들을 미워하던 그의 어머니의 딸이며, 네가 바로 남편과 자녀들을 미워하던 그 언니들의 동생입니다. 죄를 지을 때는 남편이나 자식도 돌보지 않고 죄를 짓습니다. 예루살렘의 어머니는 헷 사람이며,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입니다. 그들은 헷사람과 아모리 사람을 본받아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살면서 우상을 몰아내고 거룩한 민족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헷사람과 여부스 사람들과 살면서 그들을 닮아갔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가서 세상 사람들을 가르쳐야하는데 우리는 세상에 가서 그들을 배웁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헷사람과 똑같이 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들 조상과 똑같습니다. 예루살렘 언니는 그 딸들을 데리고 북쪽에 사는 사마리아이고, 예루살렘 동생은 딸들을 데리고 남쪽에 사는 소돔입니다. 이스라엘이 동쪽을 바라 볼 때 오른쪽은 소돔이고 왼쪽은 사마리아입니다. 사마리아와 소돔의 공통점은 악한 나라입니다.

(예루살렘이 소돔과 사미라아보다 더 타락하였습니다)

“47. 네가 그들의 행위대로만 행하지 아니하며 그 가증한 대로만 행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적게 여겨서 네 모든 행위가 그보다 더욱 부패하였도다 48.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우 소돔 곧 그와 그의 딸들은 너와 네 딸들의 행위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예루살렘은 그들의 행실만을 따라 가거나 그들의 역겨운 일들만을 따라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도 오히려 부족한 듯이, 예루살렘의 모든 행실이 소돔고모라보다 더 타락하였습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가 당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그의 동생 소돔이나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과 그 딸들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죄는 이방인과 타협하는 죄입니다. 그들과 피를 섞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 혼혈입니다. 그들은 혼합주의입니다. 소돔은 음란한 곳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마리아와 소돔보다 더 부패하였습니다.

(소돔의 죄악을 말씀하십니다)

“49.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주지 아니하며 50.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예루살렘 동생 소돔의 죄악은 이러합니다. 소돔과 그의 딸들은 교만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음란은 죄로 여깁니다. 음란은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교만은 잘난체하기는 말하는 정도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양식이 많아서 배부르고 한가하여 평안하게 살면서도,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들의 손을 붙잡아 주지 않았습니다. 태평하고 다른 사람을 돕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교만하였으며, 여호와 눈 앞에서 역겨운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그것을 보고는, 그들을 없애 버렸습니다. 소돔은 가진 것이 있고 교만하고 태평하고 안일합니다. 소돔은 매우 부자의 나라입니다. 창세기보면 소돔과 고모라는 마치 에덴동산과 같고 애굽과 같다고 합니다. 소돔 성에 사는 사람들이 풍요하고 태평하니까 죄에 빠집니다. 신명기 8장 12절에 보면 풍요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면 인생 종칩니다. 가난이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찾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가치는 금은 보화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앉은뱅이는 금과 은을 요구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에게 금과 은보다 더 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앉은뱅이가 돈을 받았지만 지금은 예수 이름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예수님의 이름을 가졌습니다. 소돔은 하나님을 잊고도 잘 삽니다. 하나님이 있으면 더 불편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죄악을 말씀하십니다)

“51. 사마리아는 네 죄의 절반도 범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네가 그들보다 가증한 일을 심히 행하였으므로 네 모든 가증한 행위로 네 형과 아우를 의롭게 하였느니라 52.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유리하게 판단하였은즉 너도 네 수치를 담당할지니라 네가 그들보다 더욱 가증한 죄를 범하므로 그들이 너보다 의롭게 되었나니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의롭게 하였은즉 너는 놀라며 네 수치를 담당할지니라”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이 저지른 모든 죄의 반 만큼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이 그들보다 역겨운 일들을 더 많이 하였기 때문에, 그가 저지른 그 온갖 역겨운 일들로, 예루살렘은 그의 언니 사마리아와 아우 소돔의 죄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습니다. 여호와가 그 언니와 아우보다 더 역겨운 죄를 지으므로, 그 언니와 아우가 유리한 판단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은 마땅한 수치를 당해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때문에 그들이 의로운 것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이렇게 그의 언니와 아우를 의롭게 보이게 하였으니, 예루살렘도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이 마땅한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마리아나 소돔과 고모라와 비교해보면 그들은 예루살렘 비하여 양반이라고 합니다. 유다는 우리는 선민이라고 하고 사마리아와 소돔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망해야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더 죄악되어 망하게 되었습니다. 유다사람은 언제 예루살렘에 돌아갈 것이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유다들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깨우치고자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어려움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지 말고 나의 죄가 무엇이기에 내가 이렇게 되었느냐를 생각해야합니다.

[소돔과 사마리아도 회복되리라]

“53. ○내가 그들의 사로잡힘 곧 소돔과 그의 딸들의 사로잡힘과 사마리아와 그의 딸들의 사로잡힘과 그들 중에 너의 사로잡힌 자의 사로잡힘을 풀어 주어 54. 네가 네 수욕을 담당하고 네가 행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부끄럽게 하리니 이는 네가 그들에게 위로가 됨이라 55. 네 아우 소돔과 그의 딸들이 옛 지위를 회복할 것이요 사마리아와 그의 딸들도 그의 옛 지위를 회복할 것이며 너와 네 딸들도 너희 옛 지위를 회복할 것이니라 56. 네가 교만하던 때에 네 아우 소돔을 네 입으로 말하지도 아니하였나니 57. 곧 네 악이 드러나기 전이며 아람의 딸들이 너를 능욕하기 전이며 너의 사방에 둘러 있는 블레셋의 딸들이 너를 멸시하기 전이니라” 여호와가 그들을 다시 잘 살게 해주십니다. 소돔과 그 딸들을 다시 잘 살게 해주고, 사마리아와 그 딸들을 다시 잘 살게 해주십니다. 또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예루살렘도 다시 잘 살게 해주십니다. 그제야 예루살렘은 그 치욕을 감당하고, 그가 저지른 모든 죄를 부끄러운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들이 다른 아이와 싸우면 내 아들의 잘못을 깨우칩니다. 사마리아나 소돔이나 유다나 다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유다를 더 징계하십니다. 바벨론 포로로 70년간 담당합니다. 유다의 징계가 없다면 버린 자가 됩니다. 버린자가 아니라 아들이므로 징계하십니다. 소돔이 회복되고 유다가 나중에 회복됩니다. 포로생활하면서 죄를 깨닫습니다. 음부였구나 깨닫습니다. 죄를 부끄럽게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위로를 받습니다. 예루살렘 언니와 아우는 그가 당하는 수치를 보고, 자신들이 얼마나 유복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 아우 소돔과 그 딸들이 예전 상태로 회복되고, 그의 언니 사마리아와 그 딸들이 예전 상태로 회복될 때에, 예루살렘과 그 딸들도 예전 상태로 회복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차원으로 회복하십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하면 이방인도 포함되는 새로운 나라로 됩니다. 예레미야 12장 14,15절에 그들을 뽑아낸 후에 그들이 하나님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웁니다.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십니다. 예루살렘이 교만하여 화려하던 시절에는, 그가 그의 아우 소돔의 추문을 들을 때에 그를 비웃었습니다 그들이 망하는 것을 듣고도 그 교훈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죄악이 드러나기 전에 깨달았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오히려 이제는 예루사렘이 그들의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사방에서 예루살렘을 멸시하는 사람들, 곧 에돔의 딸들과 그 모든 이웃이 예루살렘을 비웃고, 블레셋 딸들이 그를 조롱합니다.

(십자가로 구원하십니다.)

“58. 네 음란과 네 가증한 일을 네가 담당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59. 나 주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 예루살렘이 음행을 저지르고, 또 그처럼 역겨운 일들을 저질렀으니, 그 벌을 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 주의 말씀입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은 그가 한 맹세를 하찮게 여겨, 그 언약을 깼으니, 여호와도 그가 한 것과 똑같이 그에게 하십니다. 전에는 예루살렘을 신부에 비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신부와 같이 언약을 맺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이미 시내산에서 언약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편에게 받은 패물을 정부에게 갖다주고 바람을 피웁니다. 레위기 26장이나 신명기 28장에서 순종과 불순종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맹세를 멸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어긴 이스라엘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약속하시고 그들을 심판하셌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심판하심으로 두 약속을 지키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기가막힌 묘수가 됩니다.

[영원한 언약]

“60.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61.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접대할 때에 네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네게 딸로 주려니와 네 언약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그러나 여호와는 그 젊은 시절에 여호와가 예루살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해서, 그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십니다. 비록 사마리아와 고모라는 예루살렘과 여호와 사이에 세운 언약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예루살렘보다 더 큰 그 언니와 그보다 작은 그 아우인 사마리아와 소돔을 모두 예루살렘의 딸로 삼아 주십니다. 예루살렘은 이것을 보고 그가 저지른 악한 행실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마리아와 소돔을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이방이 유대인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될 때 유대인들은 전에 멸시했던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워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세우십니다)

“62.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 63.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네가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언약을 세우서 여호와인줄 알게 하십니다. 이렇게 여호와가 직접 예루살렘과 언약을 세우면, 그 때에야 비로소 예루살렘은 여호와가 주인 줄 알 것입니다. 여호와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그가 저지른 모든 악한 일을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덮어주십니다. 우리가 고스톱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공부하냐고 물으면 이불로 화투를 덮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죄가 없는 것으로 여겨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베푸신 용서 때문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다음에, 예루살렘은 지난 날에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주님의 은혜에 놀랍니다. 그들은 부끄러워서, 다시는 죄를 짓고자 하는 입도 열지 못하게 하려하십니다. 그들이 죄를 지은 과거를 생각하고 입을 열지 못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모두가 예수님 때문에 왔다고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서로 잘난 것을 자랑하는 것은 지옥입니다. 이렇게 죄악된 내가 천국에 왔다는 것에 놀랍습니다. 은혜에 대해서 고마워합니다. 십자가의 밑동을 잡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구원받습니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에 언제 돌아올 수 있느냐에 관심을 갖지 말고 너희 죄를 갖고 회개하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에스겔 15장 포도나무 비유
09-25-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포도나무(에스겔 15:2)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Son of man, how is the wood of a vine better than that of a branch on any of the trees in the forest?

포도나무(에츠 학게펜) עֵץ־הַגֶּפֶן

나무(6086) 에츠(ʽêts) עֵץ 
1. 나무.   2. 숲   3. 나무로 만든 우상
발음 / 에츠[ ʽêts ]
어원 / 복수 עֵצִים, 연계형 עֲצֵי, 609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나무(창 2:9, 민 31:30, 아 3:9), 수목(창23:17,레26:4), 재목(레14:45, 느2:8), 자루(삼상17:7), 들보(왕상6:10), 널판(왕상6:15, 겔41:16), 나뭇가지(왕상17:10, 왕하6:6), 목수(대상22:15),삼림(시74:5, 사7:2), 막대기(애4:8, 겔37:16), 섶(애 5:4,13).
구약 성경 / 329회 사용

포도(1612) 게펜(gephen )  גֶּפֶן  

1. 덩굴.   2. 포도나무
발음 / 게펜[ gephen ]  /
어원 / 혼성. 어미활용 גַּפְנִי, 복수 גְּפָנִים, ‘구부리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포도나무(창 40:9, 시 78:47, 학 2:19), 나무(창 40:10), 포도(신 8:8, 왕하 18:31, 사 36:16), 들포도덩굴(왕하 4:39), 포도송이(아 7:12).
구약 성경 / 55회 사용


15장부터 17장은 세 개의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의 범죄와 그 범죄로 인한 멸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비유란 포도나무 비유, 결혼 비유, 독수리 비유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중요한 나무는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와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관상수로 심는 나무도 있고 유실수로 심는 나무도 있지만 포도나무는 열매를 얻기 위하여 심는 나무입니다.
왜냐하면 포도나무는 재목으로 쓸 수도 없으며 꽃으로나, 향기로나 관상용으로나, 약용으로나, 심지어 화목으로도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는 열매로만 그 가치가 존재할 뿐입니다.
구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며 우리들은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열매라는 것입니다.

천사 셋이 `하나님은 무슨 재미로 살까?` 궁금해서 하나님께 물었지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가장 행복한 사람의 얼굴을 찾아 가져오라고 하셨답니다.
각각 사진을 한 장씩 가지고 왔는데, 첫 번째 천사는 오곡백과가 무르익은 들판을 바라보며 만족해하는 농부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가져왔습니다.
두 번째 천사는 10년 만에 얻은 아기를 품에 안고 기뻐하는 어떤 여인의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세 번째 천사는 큰 작품을 완성하고 자신의 그림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화가의 미소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천사들에게 수고했다고 칭찬하시면서 “사람은 그가 맺은 열매로 산다”고 하시면서, 하나님도 인생들의 열매를 보는 재미로 사신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농부의 마음은 똑 같이 많은 결실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든 인생은 보고 즐기기 위한 관상수가 아니라 열매를 얻기 위한 과실수로 살아야 합니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이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열매를 내고 있는가?
예수님은 말씀하기를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다.

사도 바울도 두 종류의 열매를 이야기 한다.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이다.
육체의 열매는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이라고 나열하고 있고,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고 말한다.

오늘 나는 어떤 삶의 열매를 맺고 살아가는가?
이 가을에 내가 맺고 있는 열매는 어떤 것인가?
나의 열매로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리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활짝 웃음이 피어나는가?

시인 윤동주는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에서 자신의 인생의 가을에 맺을 열매들을 이야기 합니다.
사람들에 대한 사랑, 최선을 다함, 상처주지 않는 말과 행동, 좋은 생각과 좋은 말과 좋은 행동….
좋은 열매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하는 열매라고 하겠습니다.
것바이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곧은 나무는 재목(材木)으로 쓰이고
굽은 나무는 화목(火木)으로 쓰인다

- 모든 것은 그 본성에 따라 쓰임이 다르다는 뜻




"포도나무(the wood of a vine)"는 오직 그 열매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땔감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합니다.
포도나무는 열매를 많이 맺으므르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러나 나무 자체는 다른 나무와 비교할 때 작고 보잘것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만약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다면 유다 민족은 타민족에 비해 전혀 내세울 것이 없다고 합니다.
포도나무의 특징은 포도 열매를 풍성히 맺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며 영적 열매를 풍성히 맺을 때만 가치가 있습니다.
포도나무 비유는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성도들은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 하나님과 원수된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좋은 포도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항상 말씀과 성령의 지배를 받아가며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어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포도나무를 처음 심을 때
일부러 척박한 땅에 심는다고 합니다.

한 농부는 좋은 포도를 
생산하는 비결을 알려줍니다.

"포도나무는 좋은 땅에 심으면 금방 탐스런 열매가 열리지만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땅표면에서 더러운 물을 흡수하기 때문에 포도품질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척박한 땅에 심으면 뿌리를 깊게 내리고 좋은 물을 흡수해 포도품질이 좋아집니다."  공기의 저항이 없으면  독수리는 날 수 없다.  큰 파도가 없으면 위대한 선장은 탄생되지 않지요.

척박함....그속에서 깊은 내공이 만들어집니다.  어려움을 만나면 오늘도..하하하


이스라엘에서 고대부터 중요한 농산물을 수확하는 나무가 셋이 있는데,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그리고 포도나무이다. 구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스라엘의 풍성한 구원을 상징한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시 80:8-14)

예레미야 선지자는 귀한 포도나무가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었는지를 묻는다. 표준새번역은 이를 들포도나무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은 품질이 나쁜 잡종으로 번역했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렘 2:21)

이것은 이사야서 5장과 동일한 의미가 되는데, 좋은 열매가 없다면 5장5절과 같이 울타리를 걷어 짓밟힘을 당하게 될 것이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사 5:2)

포도나무는 오직 그 과실이 중요한 것일 뿐이며, 곧게 자라거나 굵게 자라지 않으므로 건축자재로서 부적당하다. 열매가 없는 포도나무는 불에 태우는 땔감이 될 뿐이며, 이러한 표현은 곧 심판을 상징한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땔감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겔 15:2-4)

구약에서 포도나무를 이스라엘로 비유한 것도 결국 믿음의 유기체적인 연합을 뜻하며, 수확하는 포도열매는 풍성한 구원을 상징한다. 에스겔서 본문에서 불에 태우는 포도나무 가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땔감으로 비유된 것이다.

성경에서 포도원의 일은 포도를 성공적으로 수확하기 위한 많은 단계와 과정으로 표현되었으며, 도둑(렘49:9)과 멧돼지(시80:13), 여우(아2:15)등의 짐승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돌벽을 세웠으며 망루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은 곧 구원으로 비유된 것이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1-5)

요 15:1-5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신다. 그리고 예수와 연합한 자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비유하여, 포도나무에 붙어있으면 저절로 포도열매를 맺을 수 있는 유기체적인 관계로 비유한다.




포도나무 비유[겔 15장]
  
[내용개요]
에스겔은 본장에서부터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의 가능성이 없음을 보여 주는 일련의 비유들을 기술하고 있다. 이중에서도 첫번째 비유에 해당하는 본장은 쓸모 없는 포도나무의 비유로서 이스라엘의 우월 의식을 불식시키고 전적으로 무익한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본장은 쓸모 없는 포도나무가 버려지는 것의 당연함을 기록한 전반부(1-5절), 예루살렘이 포도나무처럼 버려진 것을 예언한 후반부(6-8절)로 구성되어 있다.  


[강  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불법과 강포를 행하는 유다 백성에게 진노의 재앙을 내릴 것을 직접적인 언어를 통해 또는 상징적 행동을 통해 선포하셨습니다. 본장은 포도나무 비유라는 상징적 언어를 통해 하나님께서 범죄하고 패역한 유다를 버리시고 징계하실 것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1. 포도나무의 특성

1) 재배 식물
포도나무는 자연 상태에서는 열매를 맺기가 힘듭니다. 포도나무는 연약하기 때문에 그것에게 물과 양분을 주고, 뿌리를 파헤치는 여우로부터 지켜 주며, 버팀목을 세워 주고, 바람으로부터 막아 주는 등의 재배의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한마디로 포도나무는 스스로 열매 맺지 못하기 때문에 보호의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이 손길이 없을 때 포도나무는 줄기를 제대로 뻗지 못하고 열매도 제대로 맺지 못합니다.  
· 모든 백성 중에서 보호하심(수24:17)

2) 가지 식물
포도나무의 외형적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계절은 겨울입니다. 포도나무는 땅 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 뿌리 부분을 제외하고 나면 가늘고 긴 줄기밖에 거의 없는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름에는 커다란 잎사귀들로 덮여 있어 무성해 보이나 그 잎들이 다 떨어지고 나면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됩니다. 겨울에 드러난 그 모습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은 모습입니다. 같은 줄기 식물인 넝쿨식물처럼 끈으로도 사용할 가치도 없으며 기둥 나무처럼 목재로 사용할 가치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a.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심은 가지(사60:21)
b. 예수는 포도나무 성도는 가지(요15:5)

3) 많은 열매
포도나무가 나무 자체로는 아무런 모양도, 가치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 자체의 생장력으로는 자라지도 열매를 맺지도 못하여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수고하여 포도를 재배하는 이유는 그 나무가 사람에게 유용한 열매를 풍성하게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 열매가 향기와 달콤한 음료와 충분한 양분을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a. 포도 열매를 거두라(레25:3)
b. 포도원을 심고 그 열매를 먹음(왕하19:29)

2. 이스라엘과 포도나무

1) 연약함
앞에서 우리는 포도나무의 특성을 살펴볼 때 포도나무는 연약한 가지 식물이라는 것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그러한 포도나무에 비유한 것은 유다 백성이 그와 같이 연약한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다 백성의 조상인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민족보다 수효에 있어서도 적었으며(참조, 신7:7) 그 민족의 탄생 때에도 거주할 땅조차 가지지 못한 채 애굽에게 학대받던 연약한 민족이었습니다(참조, 겔16:1-7).
a. 가장 적은 이스라엘 민족(신7:7)
b. 약한 것을 택하여 강하게 하심(고전1:27)

2) 쓸도 없음
유다의 조상들인 이스라엘 백성의 최초 조상인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던 데라의 아들이었습니다(참조, 수24:2). 그러한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민족을 이루었으나 땅도, 군대도, 법률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자체로는 이방 민족들처럼 법률을 만들거나 문화를 발달시켜 인류 사회에 공헌할 여력도 없었으며, 더욱이 하나님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도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은 처음 그 자체의 상태로는 인류와 하나님께 아무런 돋臍?없는 민족이었습니다.  
a. 피투성이 같은 이스라엘 민족(렘16:6)
b. 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롬3:23)

3) 순종과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포도 나무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재배의 손길이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음에도 사람이 그것을 재배한 이유는 그것이 사람에게 유용한 열매를 제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유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그 민족 자체로는 연약하고 아무런 쓸모도 없었음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여 은혜를 베푸신 것은 그들에게서 하나님만을 섬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동시에 하나님의 의와 구원을 이 세상에 심기를 기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유다의 존재 가치는 하나님 섬김과 이웃 泳好?있었습니다.  
a. 제사보다 순종을 좋아하심(삼상15:22)
b.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함(히11:6)

3. 버려지는 포도나무

1) 이유
전술한 바와 같이 유다의 존재 가치는 그들이 하나님만을 섬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의와 구원을 방백에게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고 불법을 행함으로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의 의를 짓밟았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열매 없는 포도나무를 하나님께서는 버리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a. 버렸으니 버림(호4:6)
b.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마21:19)

2) 경과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존재 의무를 다하지 아니한 유다 백성을 징계하시는 방법은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군대를 사용하여 유다를 침공하게 하심으로써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를 찍어 불에 넣듯이 유다를 칼로 죽게 하고 전화 속에 불타게 만들었습니다(참조, 겔5:2).
a. 불에 타는 예루살렘(왕하25:9)
b. 살육당한 유다 백성(대하36:17)

3) 결과
언약을 파기하고 교만하며 선민 의식 속에서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징계를 받아 멸망하자 유다는 그 교만이 꺾이고 선민 의식을 박탈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만국의 웃음 거리가 되었습니다. 유다는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된 것입니다.  
a.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마24:51)
b. 말라지고 불에 살라짐(요15:6)

결론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의 말로는 다 비참한 멸망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매 없는 나무는 철저하게 버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한 가지 희망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징계는 새로운 시작을 여는 기회라는 것입니다(참조, 겔11:16-20).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심판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징계가 임한다며 그것을 달게 받고 새로운 출발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단어해설]
5절. 온전할 때에도. 아무런 흠이 없는 완전 무결한 상태를 뜻한다. 이스라엘이 완전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역에는 미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말한다.

7절. 그들을 대적한즉. '얼굴을 돌리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적하시고 심판하실 것임을 의미한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67

9

24

주일

설교 묵상 및 봉사와 섬김

268

9

25

월 

에스겔 15장

포도나무(2절)

269

9

26

에스겔 16장

피투성이(6절)

270

9

27

에스겔 17장

수수께끼와 비유(1절)

271

9

28

에스겔 18장

속담에 이르기를(2절)

272

9

29

에스겔 19장

네 어미는 무엇이냐(2절)

273

9

30

에스겔 20장

내게 물으려고 왔느냐(3절)



에스겔 14:1-3

  1. 이스라엘 장로 두어사람이 나아와 내 앞에 앉으니
  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3.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사람(에노쉬) 582 [ ’ĕnôwsh ]   אֱנוֹשׁ  

1. 사람.  2. 일반적으로는 전 인류에 대한 집합명사로 쓰임.  3. 무리
발음 / 에노쉬[ ’ĕnôwsh ]
어원 / 60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람(창6:4, 삼하1:11, 겔9:2), 남자(창13: 8), 동행자(창24:54,59, 삼상18:27), 백성(창 26:7, 수8:14, 왕상21:13), 주민(레18:27), 불량배(신13:13), 쌍방(신19:17), 무리(수9:14, 삿19:25, 왕하4:40), 지휘관(수10:24), 후손 (삿9:28), 대장부(삼상4:9), 난봉꾼(대하13: 7), 인생(욥4:17, 시144:3), 신하(잠25:1), 인구(전9:14), 족속(사45:14), 장정(렘18:21), 남편(렘29:6, 44:19, 겔16:45), 친구(렘38:22)
구약 성경 / 42회 사용

* 605. 아나쉬 [ ’ânash ]  אָנַשׁ  

1. 병든.  2. 예레미야 15:18.  3. 이사야 17:11
발음 / 아나쉬[ ’ânash ]
관련 성경 / 상처를 입다(욥 34:6), 낫지 아니하다(렘 15:18), 부패하다(렘 17:9), 고칠 수 없다(렘 30:12, 미 1:9), 앓다(삼하 12:15).
[명] 재앙(렘 17:16).
구약 성경 / 8회 사용







09-23-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떠나라(에스겔 14:6)

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이켜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Therefore say to the house of Israel,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Repent! Turn from your idols and renounce all your detestable practices!

"떠나라"는 말씀은 "가증한 행위를 모두 버리라(renounce all your detestable practices!)" 즉 "회개하라(repent)"는 외침입니다.
회개하다는 히브리 단어는 "슈브(shûwb. שׁוּב)" 라고 합니다.
'슈브'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방향을 돌리다" "회복하다" "돌이키다" 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4절에서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 족속들을 징벌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6절에서 그들에게 우상에게서 돌이킬 것을 말씀합니다.
징벌하실 것이라는 말씀과 돌이키라는 말씀은 서로 대칭이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공의로 죄를 징벌하시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받게 하시려는 사랑을 엿보게 합니다(요일 4:8,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합니다.
문제는 무한한 사랑이 아니라 반드시 심판을 통하여 은혜를 확증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심판의 날이 다가오기 전에 돌아서라고 하시는 절박한 외침을 들을 줄 아는 지혜와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떠나라는 말씀은 회개하라는 간접적인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죄를 떠나 회개할 수 있을까요?

1. 마음을 돌이키라(Change your mind)
2. 우상을 떠나라(leave idols)
3. 얼굴을 돌이키라(turn your face away)
4. 가증한 것을 떠나라(get away from abominations)

오늘의 시대는 휴대전화가 사람을 붙잡고 있습니다.
길을 걷는 사람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모두가 손에 휴대전화를 붙들고 다닙니다.
생활의 유익과 편리를 위하여 만들어진 물건이 이제는 가장 다정한 친구처럼 늘 곁에서 나와 더불어 살아갑니다.
휴대전화보다 더 가깝게 지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먼저 내가 무엇을 잡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깊이 묵상해 봅시다.


그들은 자기 우상을 그 마음에 들였다(세웠다=원의).
그들은 우상을 둘 뿐만 아니라 우상을 사랑한다.
그들은 우상과의 사랑에 혹하며 우상과 결합한다.
그들은 우상과 헤어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중심에는 우상이 들어있고 또 너무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집에 우상을 세워 두고 있었다.
지금은 비록 자기 우상의 방에서 멀리 떠나 있지만 그 마음에는 우상들을 들여 놓고 있다.
그들은 이따금씩 공상과 상상으로 우상들을 섬기고 있다.
그들은 우상들로 하여금 그 마음 위로 올라가게 만들었다(직역하면 그렇다).
그들은 그 마음을 우상에게 복종시켰고 우상은 거기서 왕노릇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선지자에게 물으러 왔을 때 우상을 제거한 것처럼 행세했지만 그것은 위장에 불과했다.
그들은 우상을 위해 은밀한 자리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그들을 자기들의 마음속에 우상을 계속 보존하고 있었다.
설령 그들이 잠깐 우상을 떠난다고 해도 그것은 cum animo revertendi- 즉 최후의 고별이 아니라 다시 그들에게 돌아오려는 의도를 가진 행위였다.
또는 그것은 영적 우상 숭배로 이해할 수 있다.
세상 부귀와 감각의 즐거움에 애착심을 두고 돈을 신으로 삼으며 자기 배로 하나님을 삼는 자들은 자기 우상을 그 마음에 들이는 자들이다.
성소에는 우상을 두지 않았으나 그 마음에는 우상을 들이는 자들이 많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는 것이며 그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요일 5:21).

그들은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둔다.
그들의 은과 금을 죄악의 거침돌로 표현되고 있다.
그것은 은금의 우상이었다.
그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우상에게 유혹되었다.
그래서 우상은 그들을 거치게 하고 그 죄에 빠지게 한 거침돌이었다.
또한 그들의 죄악은 그들을 곤두박질시키고 따라서 파멸속으로 넘어지게 한다.
죄인은 스스로를 시험하는 자이며(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라, (약 1:14).

따라서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자이다. "만일 네가 거만하면 너 혼자 그것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고 눈으로 보면서도 그 위에 거친다. 이것은 그들이 그 결과야 어떻든 죄 가운데서 진행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을 암시한다. "내가 낯선 자를 사랑하며 그를 따라 행하리라" 는 것이 그들의 마음의 언어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파렴치한들에게 물음을 받으시겠는가? 그들은 그리스도를 희롱하여 무릎을 끓던 자들처럼 그에게 존귀를 돌리기는 커녕 오히려 이로써 모욕을 끼치지 않았는가? 이와 같이 하나님께 적대 행위를 계속하는 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화평의 대답을 기대할 수 있는가? "에스겔아 ! 너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정당하신 노여움으로 에스겔에게 명령을 내리시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응답을 주라는 것이다(4절).
그들은 하나님의 응답 거절이 인간 차멸이나 무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족속 모두에게 대한 규칙으로 제시됐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누구든지간에 우상에 대한 사랑과 연합을 계속하면서 하나님께 물으러 나온다면 하나님을 자기에게 대한 모욕으로 여겨 분개하실 것이며 그 사람의 가장된 경건대로가 아니라 그의 실제 죄악대로 응답하실 것이다.
그들은 선지자에게 나아오면서 선지자가 자기를 정중히 응대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뻔뻔스러움을 벌하심으로써 그에게 응답하실 것이다.
"말하기만 하면 시행되는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아오는 자에게 그 우상의 많은 대로 응답하리라."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세우며) 그 마음을 우상에 두는 자들은 흔히 다수의 우상을 가진다는 데 주목하자.
겸손한 예배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자비의 많은 대로 응답하시지만 대담한 침입자에게는 그 우상의 많은 대로 응답하신다. 즉

그 우상들의 소원대로 응답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을 그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실 것이며 그들이 마음에 원하는 만큼 나쁘게 되도록 내버려 두실 것이어서 마침내 그들은 자기 죄악의 양을 채우게 될 것이다.
인간의 부패와 타락은 그 마음에 있는 우상이며 그것은 그들 스스로가 들어다 세운 것이다.
인간의 유혹과 시험은 자기 죄악의 거침돌이며 그것 역시 그들 자신이 갖다 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대로 그들에게 응답하실 것이다. 그들로 자기 진로를 취하게 하라.

그 우상들의 공과대로 응답하실 것이다.

그들은 우상 숭배자가 받아 마땅한 대로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보통 우상 숭배자들을 처벌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벌하실 것이다.
즉 그들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이 택한 신들에게로 그들을 보내실 것이다(삿 10:13, 14).
하나님은 인간의 외양과 겉보기 신앙을 따라서 그를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 실제대로 즉 그 마음을 따라 판단하실 것이다.
이 점을 유의하자.
그리고 이 일의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위협적 응답은 어디까지 도달할 것인가?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5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족속을 그들의 마음에 먹은 대로 잡으며 그들을 세상에 노출시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아니, 그들을 저주에 노출시켜 파멸을 당케 하려 함이라."

죄인의 죄와 수치 그리고 고통과 파멸은 전부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오며 그들의 마음은 그들 자신을 잡는 올무라는 데 주목하자.
죄인의 마음은 그들을 유혹하며 배반한다.
그들의 양심은 그들을 쳐서 증거하며 정죄하며 그들 자신에게 두려움이 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잡으시며 발견하시며 유죄 선고를 하시며 묶어서 심판에 넘기신다면 그것은 전부가 그들 자신의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스라엘아 네가 네 스스로 명망케 했느니라.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인하여 나를 배반하였으므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손으로 인해 파멸을 당한다."

죄인의 파멸은 하나님께로부터의 배반에 기인한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소외되는(배반하게 되는)것는 이런 저런 우상를 통해서이다.
피조물이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차지하셔야 마땅할 자리와 지배를 얻었다는 것은 얼마나 가증한가 !


회개하는 깊이 만큼 새롭게 된다


① (6절)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이켜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이스라엘이 다시 사는 길은 돌이키는 ‘회개’다.
회개하는 깊이만큼 새롭게 된다.
회개의 두 가지 의미.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회개는 마음을 돌이키는 ‘회심’이다.
반성이 아니라 회심이다.
마음을 근본적으로 고쳐먹어야 된다.
회개의 또 다른 차원을 증거한다.
얼굴을 돌이켜 모든 가증 한 것을 떠나라”
얼굴은 몸을 대표한다.
몸을 움직이는 회개다.
즉 실천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말씀의 적용 : 선거갈등의 본질은 감투싸움이다. 명예욕, 권력욕, 물욕이다. 추락하는 감리교회가 다시 사는 유일한 길은 ‘제비뽑기’다. (잠 16:33)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제비뽑기 거부하는 숨은 이유는 내가 결정(주인노릇)하겠다는 거다. (경외 보다 무시) 결정권을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 회심이다. 그리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금권선거 회개하는 길은 선거법을 제비뽑기로 개정하는 거다. 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재선거만하면 정상화된다(?) (잠26: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남 얘기 할게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도 새로운 삶을 원한다면, 회심과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회개하는 깊이만큼 새롭게 되기 때문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 여기 "주"(*      =아도나이)란 말이, 70인역(LXX)의 바티칸
(Vatican) 사본과 케니카트(Kennicott)의 제2 히브리 사본에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사본에는 있다(예컨대 Biblia Hebraica).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 행동으로만 아니고 "마음"으로 먼저 우상을 떠나야
된다. 그 이유는, 미혹 받은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자기  마음을
맞추어 주는 미신(迷信)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떠나라(7725) 슈브(shûwb)  שׁוּב   

1. 방향을 돌리다,  2. 회복하다,  3. 돌이키다
발음 / [ shûwb ]
관련 성경 / 돌아가다(창 18:33, 룻1:8, 대하25:10), 오다(레14:39), 돌아오다(레22:13, 사52:8), 배반하다(민14:43), 돌이키다(신23:13, 호6:11), 떠나다(신23:14, 렘2:35), 돌다(수19:12), 함께 가다(삿11:8), 보고하다(삼상23:23), 물러가다(삼하11:15), 다시 이르다(왕하4:38), 그치다(삼상2:26, 느9:35), 남아 있다(사6:13),쉬다(사9:12), 변하다(사29:17), 뉘우치다(렘8:6), 회복하다(나2:2), 베풀다(슥8:15), 마르다(창8:7), 보내다(창27:45, 왕하1:13), 내보내다(신24:4), 불러올리다(삼상28:11), 돌아보다(렘5:3), 부르다(창26:18), 풀리다(창27:44), 주다(창30:31), 회복되다(출14:27,삿15:19), 돌려보내다(삼상29:4), 차리다(삼상30:12), 거두다(대하34:9), 중건되다(단9:25), 또 오다(단11:10), 쌓다(말1:4), 왕래하다(겔35:7, 슥7:14), 지나가다(미2:28), 유혹하다(사47:10), 소생시키다(시23:3), 회복시키다(시60:1), 벗어나다(겔38:8), 찾아오다(창14:16), 옮기다(창29:3, 잠24:18), 복직하다(창41:13), 가져오다(창44:8), 가리다(출34:35), 피하다(레26:26), 돌려주다(민5:7), 대답하다(민22:8), 명심하다(신4:39), 돌리다(신22:2), 가져가다(신28:60), 끌어가다(신28:68), 응하다(삿9:57), 드리다(삼상6:17), 갚아주다(삼하16:12), 데려오다(삿19:3, 왕상13:20), 데리고 오다(왕상13:23), 가져가다(왕상14:28, 대하12:11), 보답하다(대하32:25), 보응하다(잠24:12), 쫓겨나다(렘16:15),인도하다(렘24:6), 거래하다(겔27:15), 드리우다(슥13:7), 모셔오다(삼하19:43), 복종하다(느9:29), 회답하다(에4:13,15), 옮겨오다(렘28:6), 돌려주다(왕상8:6), 구원하다(시35:17), 심판하다(겔21:30), 빼앗기다(창14:16), 도망하다(삼하24:13), 거절하다(왕상2:16,20), 자문하다(왕상12:9), 물리치다(왕하18:24), 꽂다(대상21:27), 복명하다(대하34:16), 들여놓다(느13:9), 막다(사43:13, 렘2:24), 도로 넣다(창42:28), 행하지 아니하다(사58:13), 회복시키다(애1:19), 꾸어주다(겔18:8), 데리고 가다(겔47:1), 소성시키다(시19:7).
[명] 왕래(겔 1:14).
[부] 도리어(잠 26:27).
구약 성경 / 1059회 사용

떠나라는 말씀은 회개하라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회개하라고 하셨는가?

1. 마음을 돌이키라(Change your mind)

2. 우상을 떠나라(leave idols)

3. 얼굴을 돌이키라
(turn your face away)

4. 가증한 것을 떠나라
(get away from abominations)

왜 회개해야 할까요?
인생은 곧 죽어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14:1, 3)

  1. 이스라엘 장로 두어사람이 나아와 내 앞에 앉으니
  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3.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에스겔 14:1-3

  1. 이스라엘 장로 두어사람이 나아와 내 앞에 앉으니
  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3.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사람(에노쉬) 582 [ ’ĕnôwsh ]   אֱנוֹשׁ  

1. 사람.  2. 일반적으로는 전 인류에 대한 집합명사로 쓰임.  3. 무리
발음 / 에노쉬[ ’ĕnôwsh ]
어원 / 60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람(창6:4, 삼하1:11, 겔9:2), 남자(창13: 8), 동행자(창24:54,59, 삼상18:27), 백성(창 26:7, 수8:14, 왕상21:13), 주민(레18:27), 불량배(신13:13), 쌍방(신19:17), 무리(수9:14, 삿19:25, 왕하4:40), 지휘관(수10:24), 후손 (삿9:28), 대장부(삼상4:9), 난봉꾼(대하13: 7), 인생(욥4:17, 시144:3), 신하(잠25:1), 인구(전9:14), 족속(사45:14), 장정(렘18:21), 남편(렘29:6, 44:19, 겔16:45), 친구(렘38:22)
구약 성경 / 42회 사용

* 605. 아나쉬 [ ’ânash ]  אָנַשׁ  

1. 병든.  2. 예레미야 15:18.  3. 이사야 17:11
발음 / 아나쉬[ ’ânash ]
관련 성경 / 상처를 입다(욥 34:6), 낫지 아니하다(렘 15:18), 부패하다(렘 17:9), 고칠 수 없다(렘 30:12, 미 1:9), 앓다(삼하 12:15).
[명] 재앙(렘 17:16).
구약 성경 / 8회 사용








필연적인 하나님의 심판[겔 14장]

   [내용개요]
에스겔은 본장에서 우상을 섬기는 장로들에 대한 책임과 아울러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회개의 권면을 기록하면서 심판의 불가피성과 남은 자의 구원을 제시하고 있다. 특별히 본장은 이전과 같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포가 아니라 장로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본장은 우상을 숭배하는 장로들의 거짓된 신앙을 정죄하는 전반부(1-11절), 변경될 수 없는 심판의 절대성을 선포하는 중반부(12-20절), 남은 자에 대한 구원을 약속하는 후반부(21-23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저자는 외적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척하면서도 실질적으로 우상을 더욱 믿는 장로들의 가증스러움을 책망하고 있다.  

[강  해]
예루살렘에서만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죄악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본토에서 우상을 숭배함으로 징계를 받아 머나먼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와서도 우상을 숭배하는 죄악이 있었습니다. 본장은 그처럼 포로로 잡혀 와 있으면서도 우상을 숭배하는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장 후반부는 죄인이 타인의 의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하면 죄인에 대한 심판의 절대성을 다루고 있기도 합니다.  

1. 은밀한 우상 숭배에 대하여

1) 바벨론 포로 중에 있는 유다
백성 가운데 장로들이 예루살렘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여쭤 보려고 에스겔을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사실이 궁금해서 에스겔을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찾았으나 속으로는 이방의 신들과 돈을 사랑하는 거짓 신앙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a. 은밀한 우상 숭배(겔8:10-11)
b.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마6:24)

2) 마음의 우상을 버려야 인정하심
대답을 거절하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마음속에 감추고 있는 우상을 버리고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올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으며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심중을 보십니다(참조, 잠16:2). 그러므로 아무리 겉으로 경건한 척하여도 본심이 세상 것을 향하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우상 숭배자입니다.  
a. 마음이 멀리 떠남(사29:13)
b. 버리고 나를 좇으라(마19:21)

3) 버리지 않으면 멸망함
외식하는 신앙인들에게,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척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하나님 아닌 것을 의뢰하고 섬기는 자들에게 대하여 그들이 돌이키지 아니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은 멸망입니다(참조, 겔14:9). 예수께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참조, 마23:1-36). 형식적으로만 하나님 앞에 나와 있고 그 마음은 여전히 세상과 그 죄악 된 것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a. 대대로 벌을 받음(출20:5)
b. 아나니아와 삽비라(행5:4-5)

2. 죄인에 대한 심판의 절대성

1) 타인의 의로 구원받지 못함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 아무리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의로 인해 죄인이 죄 용서함을 받아 그 죄에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선포하신 이유는 죄인에게 반드시 그 죄값을 치르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그 근거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독립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사실과 율법을 통해 한 사람의 의나 죄는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참조, 신24:16). 이러한 이유와 근거로 인해 노아의 의도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a. 죄의 삯은 사망(롬6:23)
b. 죽음 뒤엔 심판이(히9:27)

2) 어떠한 심판으로부터도 구원받지 못함
범죄한 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리시는 그 어떤 종류의 재앙으로부터도 면제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칼의 재앙을 내리시기로 하셨다면 칼로부터 피할 수 없습니다. 기근의 재앙을 내리시기로 했다면 기근으로부터 제외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질병, 짐승, 자연 재해 그 어떤 것이라도 동일합니다. 죄인는 죄에 해당하는 죄값을 치뤄야만 합니다.  
a. 피할 수 없는 심판(사20:6)
b.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음(마23:23)

3) 단 하나의 예외
그 어떤 사람의 의도 다른 사람의 죄를 속죄할 수 없습니다. 죄는 죄를 지은 당사자가 죄값을 치러야만 해결 가능합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의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의 제물로 바쳐질 때입니다. 그때 그리스도의 의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은 죄를 완전히 속죄받고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참조, 요3:16;롬5:8-11;롬5:18-21)
a. 많은 사람의 대속물(마20:28)
b. 인간의 피를 담당하심(벧전2:24)

3. 하나님의 긍휼

1) 소수를 남기심
죄인을 반드시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은 또 다른 일면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랑의 측면이 다른 일면입니다.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범죄한 유다를 징계하시어 그들을 멸망시키시면서도 그 가운데서 비록 소수이지만 일부를 보존시키신다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참조, 겔12:16).
a. 조금 남겨 두신 은혜(사1:9)
b. 남겨진 양의 무리(렘23:3)

2) 자녀에게 은혜를 다시 베푸심
하나님께서는 아비의 죄를 자식에게 전가시키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기억하시사 유다 백성의 범죄를 그 자녀들에게까지 연결시키지 아니하십니다. 자녀들이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하나님은 그들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자녀들이 돌이키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a. 가나안에 들어가는 자녀들(민14:31)
b. 평강할 자녀들(사54:13)

3) 택한 자를 다 구원하심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절정은 유다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징계 가운데서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택하신 모든 백성들을 정하신 때에 다 구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참조, 겔11:16-20).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긍휼히 여겨 고난 가운데서 일으켜 한 민족으로 모으시고 친히 그들의 성소가 되어 주시며 새 신을 주어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게 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는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a. 하나님의 백성이 됨(겔11:20)
b. 빼앗지 못함(요10:29)

결론
죄인은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어떠한 의인도 그 심판에서 건져낼 수 없습니다. 겉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서 그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마음 중심으로부터 육체에 이르기까지의 전인격으로 대속주 되신 그리스도를 믿는 가운데 하나님을 섬길 때 심판에서 떠나 영생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단어해설]
3절. 우상을. 원어 <lWLGI:길룰>은 '우상'이라는 뜻의 대표적 단어로 원래 '통나무, 큰 토막, 볼품없는 것' 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상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허망한 것임을 묘사하고 있다.

6절. 돌이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행위를 말한다.

11절. 더럽히지. 원어 <WaM]F'yI:잇탐메우>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의식상으로 부정한 상태를 말한다. 특히 가장 큰 부정은 성전을 더럽히는 것과 우상 숭배하는 행위이다.

13절. 불법하여. 원어 <l['m':마알>은 '범죄, 불신실함'이란 뜻으로, 부정한 재판 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불신실한 행위를 말한다.

15절. 적막케 하며. '여의다, 무자하게 만들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전쟁에 빠지게 되며 그 결과로 어린 자식들이 살해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20절.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는 관용적인 표현법으로, 특히 말씀의 신실성과 확실성을 강조할 때 사용된다.  
22절. 위로를 받고. '애석해 하다, 위로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평화가 깃든 상태를 말한다.  

[신학주제]
장로들의 우상 숭배.
본장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우상을 마음에 들인 것'을 충격적인 사실로 증거하고 있다. 본래 이스라엘 족속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속해 왔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모셨고, 또한 하나님도 그들을 백성으로 삼으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대표자들이며 지도자들인 장로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해야 할 마음을 더럽히고 우상을 받아들여 숭배하는 죄악을 범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 간음으로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장로들을 음행한 자로 간주하여 단호하게 징벌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징계 자체에 목적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참된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가 되도록 회복하는 데 목적이 있다. 장로들에 대한 심판으로 정화와 새로운 구속의 목적을 성취시켜 나가고 계시는 것이다.  

[영적교훈]
에스겔은 '노아, 다니엘, 욥' 등의 세 사람이 중보할지라도 회개하기를 거절한 자들의 심판은 막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중보의 무용성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엄격하신 공의로운 분임을 알리는 동시에 인간의 중보에 의해서는 근본적인 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알리는 것이다.  








거짓말 하는 영 / 성경 전체에서 4개 구절

열왕기상 22:22-23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그를 설득하여 이루라. 나가서 그렇게 하라.’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이제 보소서, 주께서 이 모든 왕의 선지자들의 입에 거짓말하는 영을 넣으셨고, 또 주께서 왕에게 재앙을 말씀하셨나이다.” 하더라.

And the LORD said unto him, Wherewith? And he said, I will go forth, and I will be a lying spirit in the mouth of all his prophets. And he said, Thou shalt persuade him, and prevail also: go forth, and do so.
Now therefore, behold, the LORD hath put a lying spirit in the mouth of all these thy prophets, and the LORD hath spoken evil concerning thee.

역대하 18:21-22

그가 말하기를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그를 꾀고 또 이루라. 나가서 그렇게 하라.’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이제 보소서, 주께서 이들 왕의 선지자들의 입에 거짓말하는 영을 넣으셨고 또 주께서 왕에 대하여 재앙을 말씀하셨나이다.” 하더라.

And he said, I will go out, and be a lying spirit in the mouth of all his prophets. And the LORD said, Thou shalt entice him, and thou shalt also prevail: go out, and do even so.
Now therefore, behold, the LORD hath put a lying spirit in the mouth of these thy prophets, and the LORD hath spoken evil against thee.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적대적인 관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여호사밧아합 사이에는 혼인을 맺을 정도로 화친의 관계를 가지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었을까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합의 요청으로 여호사밧이 북이스라엘로 올라온다.
그리고 길르앗 라못을 되찾는 전쟁에 함께 나아갈 것을 요청한다.
여호사밧은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묻기를 바란다.
시드기야를 비롯한 사백명이 넘는 수많은 선지자들은 아합왕이 원하는 대답대로 아첨한다.
하지만 한 선지자 미가야만이 반대되는 예언을 한다.
권력에 눈치를 보고 사람이 원하는 방법, 방향, 세상의 관례를 따르는 것이 곧 거짓말하는 영을 따르는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거짓말하는 영을 따라 가버린다.
오직 한사람 미가야만이 거짓말하는 영을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목숨을 거는 문제였고 엄청난 고통의 문제였다.
그렇기에 거짓말하는 영에 따르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문제인지 생각하게 된다.

​​​​​​​​​​​​​​​​​​​​​​​삶에 적용 :

목사와 장로들이 모두 관례를 따지고 다들 그렇게 했다는 논리로 우리도 그렇게 해 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때에야 준비해야할 서류가 무엇인지 말한다.
거짓말하는 영을 따르는 모습이다.
교회가 믿는 자들이 온통 거짓말하는 영에 싸여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양 살아간다.
물론 다행인것은 그들이 요구하는 것들이 터무니없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지만 그들이 요구를 마땅따르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 주셨다는 것에 감사하다.
하지만 진정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다시 바라보게 된다.

여호사밧과 아합의 결혼 동맹

여호사밧에게는 한가지 연약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북 왕조 아합 가문과의 결혼동맹이었습니다(1).
여호사밧은 아합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임으로 남북 분열 이후 계속되어 온 긴장 관계를 해소하고 화해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외세로 둘러싸인 두 나라의 존립과 번영에 도움을 얻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자 이 같은 혼인관계가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사밧이 사돈을 만나러 갔을 때 아합은 큰 잔치를 준비하고 함께 길르앗 라못을 치러 가기를 설득했습니다(2).
아합과의 전쟁에서 패한 아람 왕 벤하닷이 과거 자기 부친이 빼앗은 모든 북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반환한다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했는데(왕상 20:34), 길르앗 라못을 반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이 같은 사돈의 제안을 “나는 당신과 다름이 없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다름이 없으니 당신과 함께 싸우리이다”라고 하며 선뜻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3).

물론 여호사밧은 이 말 끝에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오늘 물어보소서”라고 단서를 달고 있습니다(4).
하지만 이미 악인과 관계를 맺었고 동업을 하기로 한 마당에서 이 같은 점검은 찜찜함을 달래기 위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 나에게는 아합과 동맹을 맺은 여호사밧의 연약함은 없습니까?

거짓 선지자들과 참 선지자

아합은 즉시 선지자 사백 명을 모으고 길르앗 라못과 싸울지 말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들 선지자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올라가라고 화답했습니다(5).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이세벨의 우상숭배와 타협한 자들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권력자의 뜻을 위해 입의 혀처럼 움직이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특별히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와서는 ‘ 여호와께서 이것들로 아람사람을 찔러 진멸케 하라’ 는 작전까지 주셨다면서 아부를 떨었습니다(10-11).

하지만 여호사밧은 한결같은 저들의 말에 의심을 표하며 믿을만한 다른 여호와의 선지자를 찾았습니다(6).

그러자 아합은 자기에게 나쁜 일만 예언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선지자가 있다고 털어놓았고, 여호사밧은 속히 미가야를 불러주기를 요청했습니다(7-8).
말씀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은 아합입니다.
나에게 좋던 나쁘던 말씀에 나를 맞추고 사랑하는 사람이 참된 신자입니다.

● 나는 말씀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합니까?
말씀에 자기를 맞추고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09-22-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들으라(에스겔 13:2)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의 예언하는 선지자를 쳐서 예언하되 자기 마음에서 나는대로 예언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Son of man, prophesy against the prophets of Israel who are now prophesying. Say to those who prophesy out of their own imagination: 'Hear the word of the LORD!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쉬메우 데발 아도나이

들으라(솨마) 8085  שָׁמַע   

1. 듣다
2. 창세기 3:10
3. 창세기 37:17
발음 / [ shâmaʽ ]
관련 성경 / 듣다(창 3:10, 신 5:23, 슥 8:9), 준행하다(창 22:18, 렘 35:10), 순종하다(창 26:5, 신 30:2, 사 1:19), 들어가다(삼하 19:3), 청종하다(신4:30, 수1:17), 받다(잠13:8), 들어보다(렘18:13,19), 들리다(왕상1:45, 시26:7, 렘51:46), 예언하다(렘23:25, 29:8), 비방하다(애3:61), 분간하다(삼하14:17), 차지하다(왕상21:16), 복종하다(렘42:13), 따르다(창27:8), 알다(신28:49), 용납하다(느13:27), 깨닫다(렘5:15), 드리다(미7:7), 부르다(삼상3:10), 반포되다(에2:8), 소집하다(삼상15:4), 불러모으다(삼상23:8), 알리다(사45:21), 소리지르다(겔27:30), 소리를 내다(대하5:13), 공포하다(렘4:5, 50:2), 전파하다(렘31:7), 모이다(암3:9),소리내다(암4:5), 찬송하다(대상16:42, 느12:42), 이르다(사42:9), 증인(삿11:10, 잠21:28), 소문(느6:6).
구약 성경 / 1159회 사용

우매한 선지자 / 지혜와 계시의 영이 없다
한네비임 한네발림(הַנְּבִיאִים הַנְּבָלִים)


들으라(Hear the word of the Lord)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합니다.
왜 말씀을 들어야 할까요?
패역한 족속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그 말씀을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13장은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실상을 폭로하고 그들을 향한 저주와 비난을 선포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들에게 예언의 영이 전달되었다고 자랑하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된 선지자들의 예언을 듣지 말라고 멸시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선포한 70년 포로 생활의 기간을 무시하고 백성들의 욕구에 영합하여 조속한 귀국과 예루살렘의 번영을 강조했습니다.
백성들에게 거짓된 희망을 갖게 하였으며 하나님이 원하는 회개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거짓 선지자들의 무책임한 언동을 비난하고(1-16절), 거짓 여선지자들에 대한 저주를 언급합니다(17-23절).

세상에는 거짓을 말하고 종교적 사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과 종교적 사술을 사용하는 자들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첫째는 신의 이름을 사칭합니다.
둘째는 거짓을 진리로 위장합니다.
셋째는 돈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언제나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인 것처럼 포장하여 선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 말은 거짓이기 때문에 미혹되는 자들을 멸망으로 이끕니다.
유다 시대에도 그랬고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을 분별하는 능력을 키워 거짓 선지자들의 비진실성을 간파하여 미혹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사회에서는 남자와 달리 여자는 인구 계수에도 들지 못하고 족보에도 대체로 언급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본문은 일부 거짓 여선지자들이 예언하기 위해 겉으로 치장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이어서 거짓 예언하는 목적과 하나님의 심판 모습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명에 입각하여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거짓 여선지자들은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예언을 선포했습니다.
즉 자신들의 생계를 위하여 자신의 허황된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사칭하며 백성들로부터 뇌물을 받아 낸 것입니다.
결국 에스겔은 당시 유다 사회가 극도로 타락해 있음을 거짓 여선지자를 들어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과 성령의 능력을 떠나 인간적인 술수와 방법으로 신비를 추구하는 행위는 절대적으로 경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뜻이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 자체가 목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물질 자체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곤란합니다.
바울의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의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범을 보였노라'는 말씀이 성도들의 규범이 되어야 하겠습니다(행 20:33-36).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키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오늘도 진리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09-21-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패역한 족속(에스겔 12:2)

인자야 네가 패역한 족속 중에 거하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Son of man, you are living among a rebellious people. They have eyes to see but do not see and ears to hear but do not hear, for they are a rebellious people.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전하라

"패역한 족속"이란 용어가 한글 성경에서 15회 사용된 것으로 검색됩니다.
인터넷 다국어 성경 사이트에서 검색 결과

그런데 모두 에스겔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 2:5, 6, 8.  3:9, 26, 27.  12:2, 3, 9. 25.  17:12,  24:3

비슷한 용례로는 패역한이란 단어와 족속이란 단어가 분리 되어 사용한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레미야 5:11,  에스겔 20:13,  44:6

패역한 족속(rebellious people) בֵּית מְרִי

패역한 족속(베이트 메리rebellious people

족속(1004) 바이트() בַּיִת 

1. 집,  2. 장막,  3. 왕하23:7.
발음 / 바이트[ bayith ]
어원/ 연계형 בֵּית, 복수 어미활용 בָּתֵּיהֶם ,בָּתֵּיכֶם ,בָּתֵּינוֹ, 1129에서 유래한 약어로 보임
관련 성경 / 집(창7:1, 레14:35, 삼상1:7), 권속(창18:19,레16:6, 삼하2:3), 궁(창12:15, 삼하7:2), 처소(창24:31, 대하5:7), 집 안(창27:15, 시55:14),전(출34:26, 신23:18), 옥(창39:20, 삿16:21,왕하25:27), 간수장(창39:21), 궁중(창45:2,왕하21:33, 에7:8), 가족(창5:22, 신11:6, 시68:6), 족속(출2:1, 레22;18, 수17:17), 식구(출12:3), 안쪽(출28:26), 가옥(레14:55, 신19:1,사5:8), 친정(레22:13), 종족(민1:2, 대상7:4), 지도자(민25:14), 지파(수22:14), 신전(삿9:4,왕하19:37, 대상10:10), 신당(삿17:5), 궁내(왕하10:5), 성전(왕하16:18, 대상29:3), 창고(왕하20:13), 궁궐(왕하21:18, 대상14:1), 성막(대상9:23), 궁전(대상17:1), 곳간(대상26:15,사22:8), 반열(대상28:13), 내전(內殿)(대하3:13), 무더기(욥8:17), 가산(욥20:28), 국고(사22:15), 딸(사10:32), 부엌(겔46:24), 집(미2:2).
구약 성경 / 2036회 사용


패역한(4805)  메리() מְרִי 

1. 반역, 2. 씀
발음 / 메리 [ merȋy ]
어원 / 47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반역함(신 31:27, 느 9:17, 겔 2:8), 거역하는 것(삼상 15:23), 반항하는 마음(욥 23:2), 반역(잠 17:11)
구약 성경 / 23회 사용


포로 상징 (12)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이스라엘(열왕기하 24장, 역대하 36장)
에스겔에게 포로의 모습으로 다니게 하며 이스라엘이 포로 됨을 상징으로 보여줍니다.

12:4.  너는 낮에 그들의 목전에서 네 포로의 행장을 밖에 내놓기를 끌려가는 포로의 행장 같이 하고 저물 때에 너는 그들의 목전에서 밖으로 나가기를 포로되어 가는 자 같이 하라.

떨면서 먹고 마시는 상징도 명령하십니다.

12:19. 이 땅 백성에게 말하되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주민과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그들이 근심하면서 그 음식을 먹으며 놀라면서 그 물을 마실 것은 이 땅 모든 주민의 포악으로 말미암아 땅에 가득한 것이 황폐하게 됨이라.

그리고 하나님 심판이 임박했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12:28.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아니할지니 내가 한 말이 이루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에게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한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포로의 행장을 꾸리고 낮에 그들의 목전에서 끌려가라고 말한다.
또한 그들이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면 이스라엘 온 족속에 대한 묵시라 하셨다 하라고 말하며 떨면서 음식을 먹고 놀며 근심하면서 물을 마시라고 말한다.


에스겔 12장은 머지않아 심판으로 임할 기근을 예고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이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거짓된 낙관주의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스겔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강조하며 그릇된 희망을 포기하고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하라고 권고합니다.
또한 선지자 에스겔은 자신의 행구를 옮김으로써 이스라엘 족속의 패주를 예언했으며, 먹고 마시고 떠는 행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할 기근과 궁핍을 미리 알려 주고 있습니다.

11장에서는 유다 방백들이 예루살렘에서 도망치다 바벨론 군대에 잡혀 처참한 죽음을 당할 것을 말씀으로 선포하는 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  

12장에서는 에스겔의 상징적 행동으로 선포되는 내용을 말씀합니다.
덧붙여지는 것이 있다면 유다 방백과 함께 유다 거민들도 그 재앙에 포함될 것이라는 사실과 도망하는 도중 공포에 떨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선포된 심판은 속히 시행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짐 꾸러미를 가지고 포로들이 끌려가는 것과 같은 처량한 모습으로 처소를 옮깁니다.
이러한 상징적인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 갈 때를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유다 왕 시드기야가 포로로 잡혀 갈 것에 대해 알려 주셨습니다.
이처럼 선지자가 왕을 지목하여 언급한 것은 왕정국가로 출발한 유다는 원래는 신정국가이었기 때문에 왕은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성경은 왕을 '목자' 즉 하나님의 양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푸른 꼴로 인도하여 양육하며 돌보는 지도자로 묘사합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백성들을 의와 진리 가운데로 바로 인도하지 못하고 모범을 보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말씀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장차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을 예고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경고하기 위하여 선지자 에스겔은 행구를 옮겨 이사가는 것과 같은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족속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대신 잘못된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믿고 따랐습니다.
오늘날에도 거리에서 "도를 아십니까?" 하며 접근하여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어지럽게 하는 많은 유혹들이 있습니다.
그 유혹들을 올바로 분별해 낼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갖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에스겔이 자신의 행구를 옮김으로써 이스라엘 족속의 패역을 경고하며, 이스라엘 땅에 임한 기근과 예언의 확실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예언에도 불구하고 속담을 들어서 심판을 조롱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 그 심판의 확실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2장에서는 에스겔의 상징적 행동으로 선포되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단지 덧붙여지는 것이 있다면 유다 방백과 함께 유다 거민들도 그 재앙에 포함될 것이라는 사실과 도망하는 도중 공포에 떨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선포 된 심판은 속히 시행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선지자가 행구를 옮김으로써 이스라엘의 탈주를 표징하고 있습니다.
이사하는 행동의 예언을 통하여 시드기야가 포로로 잡힐 것을 예언하게 됩니다.
그러나 몇 명의 남은 자가 존재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이방인들 중에서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 즉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한 일을 자백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이들의 회개의 고백을 통해 이방인들이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근심한 기근이 예언되고 있으며,
거짓 예언을 책망하게 되었고,
예언이 속히 이루리라는 것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09-20-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일치한 마음(에스겔 11: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I will give them an undivided heart and put a new spirit in them; I will remove from them their heart of stone and give them a heart of flesh.

일치한 마음 an undivided heart
(레브 에하드) לֵב אֶחָד

레브(3820)   /
לֵב
발음 /  레브[ lêb ]
관련 성경 / 마음(창 6:5, 삼상 4:13, 시61:2), 심중(신29:19, 에7:5), 숨(출8:15), 콧김(출15:8), 가슴(출28:29), 감동(출35:34), 간담(수14:8), 결심,생각(삿5:15, 시33:11), 진심(삿16:17), 기력(삿19:5), 관념(삼상4:20), 인심(삼하15:13),심장(삼하18:14, 시38:10), 염통(왕하9: 24, 시45:5), 한마음(대상12:38, 시83:5), 성심(대상29:9), 전심(대하17:6, 시119:10, 겔44:5), 뜻(대하24:4), 충심(시34:18), 총명(욥12:24), 지혜(욥36:5, 잠10:8, 전1:17), 지식(잠10:21), 의사(잠18:2), 생각(잠24:32), 명철(전7:7), 지각(렘5:21), 굳센 자(암2:16). [동] 말하다(창42:28), 간곡하다(창50:21), 낙심하다(민32:7),염려하다(삼상9:20), 개의하다(삼상25:25),낙담하다(삼상17:32, 겔21:15), 근심하다(삼하7:27, 애3:33), 상심하다(삼하13:33), 깨닫다(왕상8:47), 감동시키다(대하30:12), 위로하다(대하30:22), 주의하다(욥1:8, 전7:2), 담대하다(시27:14), 살피다(시48:13), 무지하다(잠6:32), 간교하다(잠7:10), 착심하다(잠23:12), 진술하다(사41:22), 기억하다(사46:8), 낙심하다(렘4:9). [부] 다정하게(삿19:3), 뜻대로(삼하7:21, 대상17:19), 담대히(렘30:21).
구약 성경 / 599회 사용

에하드(259)  /  אֶחָד 

1. 똑같은,  2. 첫째의,  3. 어떤 사람
발음 / 에하드[ ’echâd ]
관련 성경 / 첫째(창 1:5, 욥 42:14), 일(창 8:13, 민1:1, 왕하14:23), 자(者)(창19:9), 하루(창27:45, 신 1:2, 왕상20:29), 한 가지(출11:1), 서로(출36: 10), 윗고리(출36:29, 민1:44), 초하루(출 40:17), 한 개(레8:26), 동일(레24:22), 한 번 (레16:34, 수6:3,14), 단번(수10:42), 일제히 (삿20:1), 같음(삼상6:4), 한 번씩(왕상10:22, 대하9:21), 홀로(왕상18:6, 대상29:1), 합계 (스2:64, 느7:66), 낱낱이(전7:27), 하나하나 (사27:12), 함께(사65:25), 손바닥 넓이(겔 40:43), 한 가지(습3:9), 동일하다(출12:49), 일정하다(욥23:13), 비상하다(겔7:5).
구약 성경 / 699회 사용

속담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11장  -  예루살렘 심판을 말씀하시며 또한 회복의 희망을 주십니다.

11:19-20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은 야아사냐블라댜를 보았고 그들은 백성의 고관이었다.
그들은 불의를 품고 이 성 중에서 악한 꾀를 꾸미는 자였다. 하나님은 그들을 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심판하신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고 약속하신다.

일치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예레미야 33:3).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일치한 마음, 같은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여러분들이 더 잘 알 것입니다.
회사이든, 사회이든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같은 마음을 가지고 같은 목표를 행해서 진군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가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면 그것은 불행입니다.
온 교회 성도들이 같은 마음을 갖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밤에 같은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여 복 받는 우리 교회와 여러분들의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일치한 마음

19절에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모두가 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교회의 하나 됨은 인위적인 방법으로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 되게 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교회에서도 인간적인 방법으로 친목계를 만들면 안됩니다.
신앙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기도함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고 하면 모두가 다 하나 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하나 되는 마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 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교회를 봉사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우리는 서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서로 같은 마음을 품고 주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모두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에 자기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같은 마음으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게 됩니다.

빌립보서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뜻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 관계도 같은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려면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부부가 같은 마음을 가지지 못하면 결코 행복해 질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의 신앙도 모두가 다 같은 생각, 같은 믿음을 가지면 하나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분쟁이 자리 잡을 틈이 없습니다. 엡4:3절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해 주신다고 해서 우리들 더러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하나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부부일 것 같으면 서로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일 것 같으면 모든 성도들이 하나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들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해 주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이간질시키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탄의 장난입니다. 사탄의 하수인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새 신을 주어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11b).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했기에 우리는 마음들이 강퍅합니다.

그와 같은 마음속에 성령이 함께 하실 때 굳은 마음들이 부드럽게 됩니다.
온유한 마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변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 마음에서 굳은 마음이 제거됩니다. 완악한 마음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라지게 됩니다. 그 어떠한 사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성령이 역사하시면 온유한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메섹 도상에서 그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 하셨습니다. 그 이후 그는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생애를 투자했습니다. 자신의 세상적인 모든 것은 배설물로 여길 정도로 천국의 보화를 간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과거 고재봉의 이야기를 잘 압니다. 도끼로 일가족을 죽이고 사형 선고를 받았던 살인 악마였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사람의 악한 마음을 제거시켜 주셨습니다. 그에게 믿음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마지막 그는 교도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마지막 사형장에서 자신이 찬송을 부르면서 웃을 때 총을 쏘라고 했습니다.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나를 부르소서"라고 찬송을 부를 때 그는 웃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기뻐했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때 방아쇠가 당겨졌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들을 살려줍니다. 죽었던 자리에서 영생의 자리로 인도해 주십니다. 구체적으로 그 성령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또한 그 성령의 능력은 우리들로 하여금 복음을 증거하게 합니다. 행1: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우리들에게 임하시면 그성령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복음을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전도했느냐 하지 못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행 4:31절에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담대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려면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복음을 증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롬 8:26-27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부드러운 온유한 성품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굳은 마음은 돌 같은 마음입니다. 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교회가 화합할 수 없습니다.

스가랴 7:12절에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더 이상 금강석 같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 안됩니다.

우리에게 강퍅한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해야합니다. 출애굽기에서 애굽의 바로는 마음이 강퍅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항하여 싸운 자입니다.

수 11:20절에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 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 었더라"했습니다.

마음이 강퍅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면 마음들이 너무나 강퍅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음이 조급합니다. 온유함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이런 문제로부터 해결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해결을 받겠습니까?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기도함으로 가능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정신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밖에 모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성령 충만함을 받아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신다(20a)

19절에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한다고 하십니까?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라고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는데 멎어지면 안됩니다.
말씀을 듣는 자와 지키는 자와 행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십니다.

오늘 기도하는 이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켜서 행할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도록 기도한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지켜 행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내 마음대로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또한 환경을 그렇게 허락해 주셔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4.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20절에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 권세를 가지고 이 세상을 힘있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은 21절에서 "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좇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무서운 심판의 경고도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늘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까? 오늘 기도하실 때 성령께서 내 마음을 부드럽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 주셨으니 성령 충만함으로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고 온 교회가 하나 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정이 믿음으로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민족이 지역 감정으로 다투지 말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옵소서! 복음(福音)으로 통일(統一)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祈禱)하여 복(福) 받는 이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祝願)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

에스겔 9장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임하는 날에 생명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마에 "표하라(타브)"고 하셨습니다.
10장에서는 심판의 불(숯불)을 예루살렘에 흩으라(자라크)로 하셨습니다.
11장에서는 "일치한 마음(an undivided heart)"을 수실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들어오게 하려는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과 같습니다.
만일 이와 같은 징계가 없다는 것은 유업을 이어갈 수 없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유업을 이어가야 할 자녀에는 반드시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인도하십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낯선 땅으로 끌려 갔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백성들은 마치 그들이 의롭기 때문에 포로가 되지 않았다는 교만한 생각과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예루살렘에 남아서 재앙과 사로잡힘을 면한 자들은 포로로 끌려 간 자들과 연대 책임을 느끼며 애통해 하기보다는 포로 된 자들을 멸시하며 업신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겔 선지자는 전혀 다른 생각을 제시합니다.
그 생각은 모든 유대인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일치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남과 북이 분단된 후에 남쪽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정치가 실현되었으나 북쪽에서는 김일성주의 정치가 세습되고 있습니다.
전햐 다른 정치 이념 때문에 같은 민족일지라도 서로 다른 생각과 차이로 인하여 심각한 갈등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선지자 에스겔의 외침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위한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옵니다.
남과 북이 일치하는 마음을 회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신 즉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가 되기 위하여 서로 용납하고 이해할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기도해야 합니다.

지구촌에 같은 민족끼리 서로 다른 생각과 이념 때문에 분단된 영토는 오직 자유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뿐입니다.
이제는 화합의 장을 열기 위하여 선지자 에스겔의 외침을 바르게 듣고 협력하는 길을 만들어 다음 세대들을 위하여 새로운 역사의 무대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1. 방백들의 죄악

1) 살인
방백이란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을 일컫습니다.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은 백성들의 복지와 안녕을 위해 일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본장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증언에 의하면 그런 직무를 담당하고 있는 유다의 방백들은 그들의 직무와는 반대되게 오히려 백성들을 착취하고 심지어는 불의한 방법으로 그들을 살육하였습니다(참조, 겔11:6).
a. 아합의 살인(왕상21:10)
b. 목자들의 강포(겔34:4)

2) 이방인의 규례를 지킴
다른 나라의 방백들과는 달리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기 때문에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을 지키도록 선도해야 할 책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장에서 언급되는 방백들은 이십오 인의 방백, 즉 최고위 지도자들이었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을 계도하기는커녕 오히려 백성들보다 더 하나님의 율례를 떠났으며, 떠나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이방인의 규례를 지켰습니다(참조, 겔11:12). 유다의 방백들은 그 어느 나라의 법보다 의롭고 인도적인 율법을 떠나 불완전하고 심지어 비윤리적인 이방인이 법도를 따라 전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a. 이방인의 신을 섬김(왕상16:31)
b. 이방인보다 더 악을 행함(겔5:6)

3) 교만함
유다 방백들이 지은 세번째 죄악은 교만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불법을 행하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결코 안전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무시한 것입니다(참조, 겔11:3).
· 유다의 교만(겔7:24)

2. 방백들의 멸망과 선지자의 호소

1) 예루살렘에서 끌려나옴
유다의 방백들이 그들의 위치에서 떠나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불법을 행하며 살인을 자행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자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이 특별히 그들에게 선포되었습니다. 선포된 예언의 말씀은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평안 가운데 거하리라고 말하였으므로 예루살렘에서 끌려 나와 공포 속에 있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예언은 성취되어 유다의 방백들은 예루살렘 성벽에 뚫린 뒷구멍으로 빠져 나가 도망하면서(참조, 겔12:8-12) 바벨론 군대에 의해 잡힐 때까지 불안과 공포의 나날을 보냈습니다(참조, 렘39:4).
a. 도망 예언의 성취(왕하25:4)
b. 도망 예언(겔12:12)

2) 도망가다 잡혀 죽음을 당함
유다의 방백들이 예루살렘 성을 몰래 빠져 나가 도망친 이유는 외국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보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국경으로 달렸습니다. 그러나 국경 도처에서 그들은 바벨론 군대에게 잡혀 죽음을 당했습니다(참조, 렘39:5-7). 본장은 바로 이 사실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였고(참조, 겔11:11)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a. 시드기야의 잡힘(왕하25:6)
b. 방백들의 죽음(렘52:27)

3) 에스겔의 탄식
유다 방백들이 악을 행하므로 멸망할 것을 에스겔은 예언하였고 그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예언이 끝나는 동시에 방백 가운데 한 사람을 본보기로 죽이셨습니다. 이에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의지가 매우 강하다는 것을 눈치챈 에스겔이 오히려 놀라 하나님께 과연 유다 백성을 다 멸할 것인가를 걱정하는 가운데 반문하였습니다. 비록 범죄하는 악한 자들이었지만 자기의 동족이었기에 동족의 잘못됨 앞에서 동정의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선지자의 갸륵한 사랑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  
a. 에스겔의 호소(겔9:8)
b. 스데반의 사랑의 기도(행7:60)

3. 포로로 잡혀 간 자들에 대한 은혜

1) 본토 남은 자의 이기적 탐욕
겔11:14 이하는 겔11장에서 두번째 내용이 언급되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예루살렘이 멸망된 뒤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뒤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는 본토에 남습니다(참조, 왕하25:21-22). 그런데 본토에 남은 자들이 본토 땅을 독차지하기 위하여 바벨론 땅에 끌려간 자들은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저주를 받아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매도하면서 그들에게 영원히 본토를 떠나라고 말합니다(참조, 겔11:15). 우리는 여기서 멸망함을 당하고도 여전히 동족의 아픔을 외면한 채 이 세상 것에 대한 탐욕만을 채우려 하는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a. 이웃 사랑(레19:18)
b. 이를 탐하는 자는 생명을 잃음(잠1:19)
c. 버려야 할 탐욕(엡5:3)

2) 반박하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 약속
본토 백성들의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포로로 잡혀 간 자들이 하나님이 보호하시려는 남은 자들이었습니다(참조, 겔12:15).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본토에 남은 자들의 그릇된 생각에 반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시 모이는 축복과 새 신을 주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구원이 주어질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한편 이 예언의 말씀은 영적으로 이 세상에 흩어져 있는 이방인들 가운데의 하나님의 백성들, 곧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입을 것을 의미합니다.
a. 마음에 법을 둠(렘31:33)
b. 이방 중에 남아 있는 자(겔6:8)
c. 새로운 피조물(고후5:17)

지도자 된 자는 그에게 주어진 직무를 충성되이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백성과 함께 복된 하나님의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한편 동족이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 그 고난을 외면하고 자기 이익만을 챙기려는 이기적인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족의 아픔에 동참하며 자기의 것을 나누어 써야 하나님의 나라가 그 가운데 임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제 위치에서 각자 주어진 의무를 다할 때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떠나심.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가지고 계신 목적 중 하나는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8:17)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인간을 영화롭게 하길 원하셨지만, 인간의 죄로 인하여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3:23)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 처소인 성전에서 영광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함유한다. 첫째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떠나심으로써 더 이상 축복과 은혜의 주로서 관계를 맺지 않으신다. 둘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사 징계와 심판과 저주를 받게 하신다. 셋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죄와 함께 동거할 수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와 불의에 탐닉되어 타락했을 때, 더 이상 성전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떠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장차 가나안 땅으로 귀환하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영을 부어 주신다고 했다. 하나님에서 부어 주시는 새 영은 단단한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고, 성결을 유지시켜 주며 하나님께 충성하도록 만들어 준다. 이러한 새 영에 대한 언급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지녀야 할 온전한 모습을 구비하지 못함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 영을 사모해야 한다. 







09-19-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숯불을 흩으라(에스겔 10:2)

하나님이 가는 베옷 입은 사람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그룹 밑 바퀴 사이로 들어가서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 들어가더라.
The LORD said to the man clothed in linen, "Go in among the wheels beneath the cherubim. Fill your hands with burning coals from among the cherubim and scatter them over the city." And as I watched, he went in.

숯불을 흩으라(Scatter burning coals)
가할레 에쉬 제로크(גַחֲלֵי־אֵשׁ וּזְרֹק)     לפזר את אש הפחמים

그룹(3742) כְּרוּב 

1. 히브리 신학에 나오는 천사 ‘그룹’ 창 3:24,   2. 출애굽기 25:18b,  3. 사무엘하 22:11
발음 [ kerûwb ]
관련 성경 / 그룹(창 3:24, 민 7:89, 왕상 6:23).
구약 성경 / 91회 사용

그룹 - 천사의 무리(성경에서 71회) 구약 70회, 신약 1회

창세rl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히브리서 9: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고 하였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물렀다.
에스겔은 그 그룹들이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래에 있던 생물임을 알게 된다.

10장  /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환상을 봅니다.

숯(1513) 가헬렛(gacheleth) גַּחֶלֶת 

1. 등걸불,  2. 하나님이 보낸 처벌
발음 / 가헬렛[ gacheleth ]
어원 / 복수 גַּחֲלֵי,גֶּחָלִים, ‘불을 피우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숯불(레 16:12, 삼하 22:13, 겔 1:13), 숯(삼하 22:9, 잠 25:22, 시 18:8)
구약 성경 / 18회 사용

불(784) 에쉬( ’êsh)   אֵש 

1.불,  2. 하나님의 불, 3. ‘하나님의 진노’를 비유적으로 나타낼 때도 사용
발음 [ ’êsh ]
관련 성경 / 불(창 22:6, 신 1:33), 불길(신 4:12), 화염(시 106:18, 사 4:5), 화, 노(시 78:21).
[동] 타다(창 15:17, 레 6:10), 분향하다(레 16:13).
구약 성경 / 379회 사용

흩으라(2236) 자라크(zâraq)    זָרַק 

1. 흩어버리다, 2. 욥기 2:12, 3. 출애굽기 9:8
발음 [ zâraq ]
관련 성경 / 날리다(출 9:8, 10), 뿌리다(출 29:20, 겔 43:18, 민 19:13), 얼룩얼룩하다(호 7:9), 흩다(겔 10:2)
구약 성경 / 35회 사용

에스겔 36:25
맑은 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에스겔 43:18-20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제단을 만드는 에 그 위에 번제를 드리며 뿌리는 규례가 이러하니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를 가까이 하여 내게 수종드는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에게 너는 어린 수송아지 하나를 주어 속죄 제물을 삼되.
네가 그 를 취하여 제단의 네 뿔과 아랫층 네 모퉁이와 사면 가장자리에 발라 속죄하여 제단을 정결케 하고.


베드로후서 3:6-10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을 바라보도다.







에스겔 10:2 - 요한계시록 8:5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그 속에서 숯불을...흩으라

'숯불'은 '소멸하시는 불'로서 그룹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히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for our "God is a consuming fire)"
이 말씀은 1장 13절에서는 그 하나님을 보좌하며 수종하는 네 생물의 모양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또 생물들의 모양은 타는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에서는 번개가 나며."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숯불'은 불의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또는 그 도구를 상징한다(24:11; 삼하 22:9; 시 18:8, 12, 13; 140:10).
그리고 숯불은 긍정적인 의미에서는 죄악을 소멸해 정결케 하는 역할도 함축하고 있다(사 6:6, 7).

  1.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2.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그런데 여기서 이 베옷 입은 자가 숯불을 예루살렘 성읍 위에 흩는다는 것은 그곳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행한다는 뜻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은 이전에 에스겔 선지자의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 삼등분해 불사르고 칼로 치고 흩으라하신 비유에서도 암시되었다(5:1, 2, 12).

에스겔 10장은 "숯불을 흩으라" 즉 "불 심판"을 예고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루살렘 멸망의 명백한 징조를 환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본장에서 행해지는 하나님의 심판의 행위는 하나의 상징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4장에서 예루살렘 포위 장면은 비유적인 것일지라도 실제로 바벨론 군대에 의해 일어날 일에 대한 예시이며, 5장의 온역과 기근과 칼에 의한 심판도 비유적인 행동을 통해 묘사되고 있으나 역사적으로 바벨론 군대에 의해 성취되었다.
그러나 본장에서 나타난 바 하나님께서 불을 흩게 하신 행위는 실제적으로 일어난 일이라기 보다는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행위를 총체적으로 상징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본장은 예루살렘 성읍이 불로 심판받는 장면을 묘사한 전반부(1-8절).
네 그룹의 모습과 이동 원칙에 대해 기술하는 중반부(9-17절),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서 떠나는 광경을 언급하는 후반부(18-22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9장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우상 숭배와 불법을 행하는 유다 백성에 대한 심판을 천사에 의해 집행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면, 본장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과 그룹 사이에서 취한 숯불로 유다 백성을 심판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본장은 하나님의 공의로 말미암아 유다 백성이 심판 받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룹의 의미와 역할.
그룹은 히브리어로 <케루빔>이나 그 뜻은 불분명하다. 어떤 사람은 아카디아어의 '중재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학자는 '붙잡다' '빈틈없이 지키다'의 뜻을 지닌 말로 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그룹을 영적 존재인 천사의 한 계급에 속하는 존재로 본다. 유대 전통에서는 스랍들과 함께 천사 중 최고의 계열에 속하는 존재로 생각한다. 이스라엘의 종교적 건축물에서 그룹이 복수형으로 나타내진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아마도 그 숫자가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룹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보좌해 주는 조력자로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때로는 '두루 도는 화염검'과 함께 타락한 사람들이 생명 나무의 길과를 따 먹지 못하도록 지키는 감시자가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거나 하나님의 보좌의 병거를 운반하기도 한다. 그룹은 성경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즉 사람, 사자, 황소, 독수리 등의 네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개 또는 네 개의 날개 그리고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을 가졌고 송아지 같은 발바닥이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에스겔은 본장에서 범죄한 예루살렘 성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룹들과 함께 성전을 떠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으로 인하여 당신이 가시적인 임재 처소로 지정했던 예루살렘 성전을 떠난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그의 임재의 상징인 교회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어떤 상징물과 동일시하는 경향은 범신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 오늘날 성도들도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모든 것보다 우선시할 때에만이 진정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숯불을 성읍 위에 흩으라

그룹 사이에 있는 숯불을 가져다가 예루살렘 성읍 위에 흩으라는 말씀과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는 내용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완전히 떠나는 것은 다음 장에서 나옵니다만 오늘 본문에서도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지나서 그룹위에 머무셨고 또 동쪽 문 위로 올라가셨기에 성전을 떠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 온갖 가증한 우상숭배가 가득하였기 때문임을 이미 보았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예루살렘을 향하여 숯불을 그 위에 흩으라는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았는지를 보면서 오늘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스겔 10장에서 가장 많은 분량은 그룹에 대한 내용입니다.

1절을 봅니다.
그룹의 머리 위 궁창에 남보석 같은 것이 있다고 합니다.
남보석이란 새 번역에서 청옥이라고 합니다.
이런 청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시내산에서 언약을 체결하고 모세와 아론과 70명의 장로들이 하나님의 발 앞에서 먹고 마실 때에 그 발 앞이 청옥을 편 것과 같다고 합니다(출 24:10).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좌의 바닥으로 봅니다.
그 남보석 같은 것 위에 보좌와 같은 형상을 봅니다.
보좌에는 하나님이 계시지만 그 형상을 말하지는 않고 음성만 듣습니다.

그룹에 대하여 잠시 보겠습니다.
성전의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의 뚜껑의 이름이 속죄소입니다.
그 속죄소 뚜껑과 연결하여 그 뚜껑을 날개처럼 양쪽에서 덮고 있는 것을 그룹이라고 합니다.
이 그룹 사이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의 언약궤와 그룹이 고정된 것이 아님을 에스겔을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활발하게 이루어지는지를 그룹의 활동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9-16절을 보시면 날개, 바퀴, 가득한 눈, 회전 없이 나아감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통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이라는 한 지역에 갇혀계시는 분이 아니라 온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에스겔 11:16절입니다.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셨지만 그들이 도달한 나라에서 여호와께서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이 예루살렘 성전의 그룹위에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상 어디든지 활동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에스겔 10:2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는 베 옷 입은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시를 한 사람입니다.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숯불을 두 손으로 가득히 움켜 성읍 위에 흩으라고 합니다.

6-7절입니다.
가는 베 옷 입은 사람에게 불을 가져가라고 하시자 그룹들 사이에서 손이 하나 나와서 불을 집어서 가는 베 옷 입은 자에게 주매 그가 받아 가자기 나갔습니다.
이 사람이 이 불을 예루살렘 성읍 위에 뿌려버리면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상징으로 보여주시고는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예루살렘 성읍이 파괴되고 성전이 파괴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갑니다.

불을 가져다가 성읍위에 흩으라고 하시는 것은 이제 예루살렘의 심판이 확정되었기에 불의 심판만 남았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심판을 받기 직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룹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지성소의 언약궤 위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3절입니다.
가는 베옷 입은 사람이 불을 취하기 위하여 들어가는 순간에 그룹들이 성전 오른 쪽에 서 있고 구름이 안뜰에 가득합니다.

4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와 성전 문지방에 이릅니다.
그러자 성전과 뜰에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성전 문지방에 이르렀다는 것은 곧 떠나시기 위한 것입니다.

18-19절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십니다.
그룹들이 땅에서 올라갑니다.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이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의 그룹위에 머물러 계시는 것이 아니라 문지방을 지나서 이제 동문위에 머물러 계시기에 곧 떠나실 모양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성읍과 성전에서 우상숭배가 가득함을 보시고 떠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버리시면 그 건물로 된 성전은 파괴되어야 합니다.
완전히 떠나시는 장면은 11:23절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에서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무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요약해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시면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성읍위에는 숯불의 쏟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쪽 유다의 멸망입니다.
이러한 불로 임하는 심판이 성경 전체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최초로 불로 차단을 시키는 곳이 에덴동산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하기 위하여 그룹들로 하여금 두루 도는 불 칼로 지키게 합니다.
여기서 최초로 그룹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룹과 두루 도는 불이 칼처럼 막아 서 있으니 아무도 생명으로 접근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제일 먼저는 물로 심판을 하셨습니다.
그 후에 불로 심판 하시는 모델이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창세기 18:20-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여호와의 이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성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의인과 함께 멸망하면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라고 하면서 50명에서 10명까지 줄여갑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 성은 의인 열 명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의인이란 지난주에 보았습니다만 롯이 그 성안에 일어나는 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여 고통 받았다는 것입니다.

롯이 그 도시에 비록 살지만 그 성읍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저녁 무렵 성문 어귀에 앉아있을 때에 나그네 두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 자기 집에 모셔 들입니다.
그런데 성읍의 사람들이 이 두 남자를 끌어내라고 합니다.
자기들이 상관하겠다고 합니다.
동성 연애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성읍을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하십니다.

창세기 19:23-29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심으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그 불 가운데서 롯은 아브라함 때문에 구원받습니다.
롯의 아내를 뒤를 돌아 본 고로 소금기둥이 됩니다.
이런 말씀은 오늘 우리를 위한 교훈이 됩니다.

누가복음 17:28-33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일차는 AD 70년의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이 장차 어떻게 심판을 받을 것인지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49-53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불을 지르기 위하여 오셨다고 합니다.
그 불이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말합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원을 받은 자가 있었듯이 하나님의 심판 속에 구원받을 자가 있습니다.
그 구원받을 자는 성령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불을 던지시는가 하면 자신의 세례, 즉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을 나누어버립니다.
십자가 안과 밖으로 나누어 버리는 분쟁의 불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온 세상은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이 증거 되는 현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조용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불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 화목하고 화평하고 사이좋게 우리끼리 잘 지내자는 식으로 지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남이가 하는 식으로 적당하게 타협하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과연 우리가 어떤 불을 지르고 있습니까?
과연 복음을 위한 것입니까?
나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왜 에스겔에서 이런 계시를 보여주었을 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었던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로 인하여 떠나시고 그런 곳을 불로 태워버리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분노가 많이 일어나면 불로 태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약 10년 전에 연쇄 방화범이 잡혔는데 목사였습니다.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부흥은 안 되고 해서 화가 많이 나서 동네와 다른 교회에 불을 질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가짜 신이 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개척한 목사가 불을 지른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베드로후서 3:1-14


아직 이 세상이 불로 심판을 받지 않은 이유는 아직도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야 할 저와 여러분이 있기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의 날이 도적같이 와서 하늘과 땅이 불에 타서 사라지기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제단 숯불에 그 입술이 지져지듯이 우리가 지금 말씀과 성령으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자들만이 이 세상이 왜 불로 심판을 당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며 이런 자들이 예수님이 받으실 세례인 그 십자가의 영이 임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상의 미움을 받고 세상에서 죽임을 당한 자들입니다.
이들의 기도가 금 대접에 담겨 상달이 되고 그 대접에 불을 담아서 세상에 쏟아버리는 것이 마지막 불의 심판입니다.

요한계시록 8:3-5
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5.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일곱째 인이 떼어진 내용입니다.
일곱이란 끝과 완전을 의미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계시가 불을 예루살렘에 쏟아 버리는 것으로 예루살렘의 심판이 왔던 것처럼, 사도요한이 본 계시대로 이 세상에 이미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묵시 속에서 쏟아졌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위에 불이 내려오는 것을 보지 못한 사람들처럼 지금도 불이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만 사랑하다가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이것이 숯불을 예루살렘 성읍위에 흩으라는 말씀의 적용입니다.







09-18-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마에 표하라(에스겔 9:4)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하라.
and said to him, "Go throughout the city of Jerusalem and put a mark on the foreheads of those who grieve and lament over all the detestable things that are done in it."

이마에 표하라(mark on the foreheads)
웨히트위타 타우 알 미츠호트( וְהִתְוִיתָ תָּו עַל־מִצְחֹות)

이마(4696) [ mêtsach ]  מֵצַח

1. 이마,  2. 앞이마, 3. 사무엘상 17:49
발음 [ mêtsach ]
어원 / 어미활용 מִצְחִי, ‘깨끗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이마(출 28:38, 삼상 17:49, 겔 3:8), 낯(렘 3:3).
구약 성경 / 13회 사용



에(5921) [ ʽal ]  עַל 

1. 사무엘하 4:7, 2. 옷을 입은
발음 / [ ʽal ]
구약 성경 / 5772회 사용




표하라(8420, 8427)
תָּו [ tâv ] 스트롱번호 8420

1. 표적, 2. 신호
발음 [ tâv ]
어원 / 842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서명(욥 31:35), 표(겔 9:6). [동] 표를 그리다(겔 9:4).
구약 성경 / 3회 사용

תָּוָה 스트롱번호8427
1. 8376과 동일 : 묘사하다,  2. 피엘형 : 삼상 21:14.  3. 히필형 ׃ תִתְוָה תָו 묘사하다
발음 [ tâvâh ]
관련 성경 / 그적거리다(삼상 21:13)
구약 성경 / 2회 사용

"표하라"는 히브리 단어는 "타브(tâv. תָּו)" 라고 합니다.
'타브'란 "표적" "신호"라는 뜻으로 '타브'의 어원은 "타바(tâvâh. תָּוָה)" 라고 하며 '타바'는 "선을 긋다, 표시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따라서 표한다는 것은 표를 하는 주체가 누가 표를 받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표를 한 이유는 환난의 날에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마에 표를 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자행된 우상 숭배 등의 가증한 일들에 동참하지 않고 탄식하며 반박한 사람들"을 구분하려는 것입니다.
 
특히 이마에 인을 친다는 것은 생명을 보호한다는 영적 의미가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신뢰하는 자에 대해 긍휼로 보존하고 인도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예언은 요한계시록 7장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탄식하며 우는 자...표하라 

이는 예루살렘 성읍에서 가증한 우상 숭배를 하는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그 가증한 일을 애통해 하며 마음에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표를 하라는 뜻이다.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에서 다른 사람에 의해 행해지는 가증한 죄에 동참하지 않고 같은 이스라엘 족속으로서 애통해 하며 통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표' (타우)란 히브리어 알파벱의 마지막 글자인 '타우'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것은 고대에서 십자가와 같은 기호를 나타내는 낱말로도 사용되었는데 아마 이런 형태의 표가 영적으로 인친것을 뜻하는 듯하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인치시는 것은 가인의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해 표하신 것(창 4:15)과 출애굽 전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의 문설주에 발라 죽음의 사자(천사)가 그 집을 넘어가 멸망치 않도록 한 것(출 12:13, 21-29), 말세에 하나님께서 다신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시므로 열방에서 구원하시는 것(계 7:1-8) 등과 유사하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을 치시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항상 당신의 심판 속에서도 당신의 긍휼에 의해 보존된 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엿보게 한다(6:8).

에스겔 9장은 예루살렘 심판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8장에서는 성전에서의 우상 숭배 행위를 신랄하게 고발하였고, 9장에서는 구체적인 심판의 실행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서 잔혹한 살육이 감행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봅시다.
형 집행자들을 부르시는 것(1-2절)
형 집행에 대한 명령과 수행을 묘사하는 것(3-7절)
에스겔 선지자의 탄원과 하나님의 응답(8-10절)
중보 천사가 복명하는 것(11절)

여호와의 살육이 제일 먼저 실현되는 장소는 성전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곳으로서 참된 회개가 일어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한 반역 행위가 자행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이 절정에 달한 성전부터 처벌하심으로써 자신의 심판 의도를 강력히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가올 심판을 기억하며 내적으로는 성령 충만하고, 외적으로는 경건을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8장에서 에스겔은 환상을 통해 유다 백성들이 우상의 종류나 장소,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민족적으로 우상을 대대적으로 숭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본장은 이제 그와 같이 모든 유다 백성들이 어디서나 닥치는 대로 온갖 우상들을 숭배하자 하나님께서 심판의 사자들을 보내 의로운 자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심판하시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천사.
특별히 살육을 명령받은 자의 임무 수행에 대한 보고는 생략되고, 오직 보호의 임무를 띤 천사만이 대표로 결과를 아뢴다.
즉, 베옷을 입고 허리에 먹 그릇을 찬 천사는 모든 임무를 조금의 차질도 없이 온전히 수행했음을 전한다.
이러한 사실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선한 존재임을 알게 해 준다.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에 따라 창조하신 피조물로서 영적 존재들이다.
이들은 지 정 의의 기능을 가진 인격적 존재이나 육체 적인 몸을 갖지 않았으므로 인간처럼 결혼하지 않으며 죽지도 않는다.
이런 천사들의 존재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섬기며 수종 드는 종으로서 사역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성경은 천사들을 '사자'로 명명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천사들의 사역에 대해 성경은 여러 가지로 설명한다.
천사들은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 나무를 따먹지 못하도록 지키는 역할에서부터, 소돔과 고모라 멸망, 애굽에 재앙을 내리는 일,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지켜 주심, 사가랴에게 세례 요한의 잉태 소식을 예시해 주기도 하고,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잉태를 알려 주고, 광야에서 시험받으시는 그리스도를 수종하기 위해,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풀어 주기 위해 나타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 세상에 임할 것이다.
이들 천사들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지키며 섬기는 역할을 감당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천사들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사역자라는 것이다.  


순종은 자기 자신의 힘과 노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존중하는 태도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순종할 때 모든 것은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한 천사들의 자세는 모든 성도들의 귀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성도들은 참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순종적인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바탕으로 충성을 다해야 한다.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들이 오늘날의 모든 사역자들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에스겔 9장은 예루살렘 심판에 대한 예언
8장에서는 환상을 통해 유다 백성들이 숭상하던 우상의 종류나 장소,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민족적으로 우상을 대대적으로 숭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9장에서 모든 유다 백성들이 어디서나 닥치는 대로 온갖 우상들을 숭배하자 하나님께서 심판의 사자들을 보내 의로운 자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심판하시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서 잔혹한 살육이 감행될 것이라고 합니다.
형 집행자들을 부르시는 것(1-2절)
형 집행에 대한 명령과 수행을 묘사하는 것(3-7절)
선지자의 탄원과 하나님의 응답이 드러나는 것(8-10절)
중보 천사가 복명하는 것(11절) 등으로 진행됩니다.

여호와의 살육이 제일 먼저 이루어지는 장소는 성전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곳으로서 참된 회개가 일어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한 반역 행위가 자행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이 절정에 달한 성전부터 처벌하심으로써 자신의 심판 의도를 강력히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가올 심판을 생각하며 내적으로는 성령 충만으로 외적으로는 경건의 능력을 유지해야 합니다.

순종은 자기 자신의 힘과 노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존중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순종할 때 모든 것은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며,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한 천사들의 자세는 모든 성도들의 귀감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성도들은 참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순종적인 믿음을 갖추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기본으로 충성해야 합니다.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가 사역자들의 모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09-16-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담을 헐라(에스겔 8: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 담을 헐라 하시기로 내가 그 담을 허니 한 문이 있더라.
He said to me, "Son of man, now dig into the wall." So I dug into the wall and saw a doorway there.

" 이 담을 헐라(dig into the wall)"
하타르 나 밬키르(חֲתָר־נָא בַקִּיר)

너는 헐라(2864) dig /  חָתַר 

1. 헤치고 나아가다,  2. 침노하다, 
발음 / [ châthar
관련 성경 / 뚫다(욥 24:16, 겔 12:7), 헐다(겔 8:8), 노를젓다(욘 1:13), 파다(암 9:2)
구약 성경 / 8회 사용


이 담을(7023) in the wall  /  קִיר 

1. 벽,  2. 도시의 벽,  3. 제단의 양쪽에 사용되는 벽
발음 / [ qîyr ]
어원/ 697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면(겔41:22), 벽(레14:37, 삼상19:10, 왕상6:29, 겔41:5), 담(민20:25, 왕상4:33, 시62:3,사59:10), 성벽(수2:15, 사25:4, 겔12:5), 석수(대상14:1), (철)벽(겔4:3).
구약 성경 / 74회 사용

자(4994) now / נָא 

1. 명령이 포함되지 않는 애원,   2. 미완료에 덧붙여지는 경우,  3. 특히
발음  / [ nâʼ ]
관련 성경 / 원하건대(창 12:13, 출 33:18). [동] 청하다(삿 9:38).
구약 성경 / 404회 사용

담을 헐라 하시기로..허니

-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로 하여금 내부의 은밀한 일, 즉 이스라엘 장로들의 가증한 우상 숭배를 보게 하기 위해 담을 헐도록 하신 것이다.
특히 이 담이 하나님의 성소 건물의 한 부분임을 생각할 때 이는 하나님께서 이 전을 이미 더럽혀진 것으로 간주하셨음을 뜻한다.

우상(5566) 세멜 [ çemel ]  סֶמֶל   

1. 영상,  2. 모습,  3. 모양
발음 / 세멜[ çemel ]
어원 / 남 צֶלֶם와 뜻 동일. ‘닮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우상(신 4:16, 대하 33:15, 겔 8:3), 목상(대하 33:7)
구약 성경 / 5회 사용

에스겔 8장은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온 때로부터 6년 6월 5일 즉 에스겔이 첫 환상을 본 때로부터는 만 14개월이 되던 해에 여호와의 권능이 선지자 에스겔에게 임했다고 시작합니다.

그 해에 에스겔은 하나님의 신에 이끌리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유다 백성들의 가증한 우상 숭배의 모습을 환상으로 봅니다.

본장은 그때에 본 환상을 말씀합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도록 건립된 예루살렘 성전에서 투기의 우상, 은밀한 장소에 있는 우상, 담무스, 태양신 등을 경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의 사악성과 심판의 필연성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본장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이상(1-4절)
우상들로 더럽혀진 성전(5-18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악한 행동으로 사회를 더럽히고 심지어 가증한 우상을 성전에 들여와서 성전을 모독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를 저질렀다.
이런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긍휼을 베풀지 않으시고, 울부짖으며 기도할지라도 듣지 않으시고 징벌하실 것이다.
이와 같이 본장에서 우리는 성전에 거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앙을 보증해 주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형식적인 예배에 함몰되어 위선적인 허위 의식으로 가득 차게 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거하시는 성전에 들어가는 자도 거룩해야 한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그토록 여러 가지의 성결 규례를 준수하고 난 연후에야 성전을 출입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연유 때문이었다 성전 제사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뜰을 따로 마련한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이다.
그러므로 성전에 유대인만 들어간다고 유대인에게 특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거룩하게 해야 됨을 상징한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행위를 거룩하게 여기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려야 한다.   


주 여호와의 권능이 임하므로 선지자 에스겔은 불같은 형상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있었는데 들에서 본 모습과 같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북쪽을 바라보게 하시고 여전히 질투의 우상이 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노로 갚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며 소리도 듣지 아니하신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우상의 숭배 환상은 곤충, 짐승과 우상, 담무스(Tammuz), 동쪽 태양에 절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유대의 모습을 환상으로 보여주십니다.


에스겔 8장은 유다의 은밀한 우상 숭배에 관한 말씀으로 성전에서 우상 숭배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도록 건립된 예루살렘 성전에서 투기의 우상, 은밀한 장소에 있는 우상, 담무스, 태양신 등을 경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의 사악성과 심판의 필연성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러한 본장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이상(1-4절),
우상들로 더럽혀진 성전(5-18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악한 행동으로 사회를 더럽히고 심지어 가증한 우상을 성전에 들여와서 성전을 모독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를 저질렀다.
이런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긍휼을 베풀지 않으시고, 울부짖으며 기도할지라도 듣지 않으시고 징벌하실 것이다.
이와 같이 본장에서 우리는 성전에 거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앙을 보증해 주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형식적인 예배에 함몰되어 위선적인 허위 의식으로 가득 차게 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 온 때로부터 6년, 에스겔이 첫 환상을 본 때로부터는 만14개월이 되던 해였습니다.
그 해에 에스겔은 하나님의 신에 이끌리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유다 백성들의 가증한 우상 숭배의 모습을 환상으로 봅니다. 본장은 그때에 본 환상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우상 숭배의 종류

1. 신상 숭배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해 보여 주신 유다 백성의 우상 숭배 죄악을 유형별로 분류해 보면 대체로 세 가지로 나눠집니다. 첫번째 유형은 사람이 만든 신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애굽의 태양신이나 가나안의 아세라 상을 그들의 손으로 만든 뒤 그 신상들에게 절을 하며 복을 빌었습니다. 이 행위는 광야에서 금 송아지를 만든 것(참조, 출32:1-6)과 같은 것으로 있지도 않은 신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어 숭배하는 우상 숭배 형태입니다.  
a. 신상을 만들지 말며(출20:23)
b. 예루살렘의 신상을 치심(사10:11)

2. 자연 숭배
유다 백성이 행한 우상 숭배의 두번째 유형은 자연 숭배입니다. 그들은 나무나 돌등과 같은 자연물에서부터 시작하여 곤충(참조, 겔8:10), 태양(참조, 겔8:16)과 같은 피조물들을 숭배하였습니다. 이러한 우상 숭배는 모든 우상 숭배 형태 중에서 가장 원시적이고 유치한 형태의 우상 숭배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높고 지존한 여호와를 그들의 신으로 섬길 권리와 의무를 가진 유다 백성들이 그와 같은 저열한 우상 숭배를 행하고 있었습니다.
a. 나무를 아비라 함(렘2:27)
b. 목석 숭배(겔20:32)

3. 물신 숭배
유다 백성들은 신상이나 자연물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보다 더 힘있어 보이는 그럴듯한 신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당장 그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주는 물 신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찾은 것은 그 시대에 있어 가장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주는 신, 곧 풍년을 가져다 주는 신인 바알과 바벨론의 담무스였습니다. 그들은 바알과 담무스가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줄 것을 기대하면서 그들을 숭배하였던 것입니다.  
a. 바알 숭배(렘19:5)
b. 양식 숭배(겔4:16)

우상 숭배의 장소

1. 산과 들
유다의 숭배 대상이 자연물이었기에 유다 백성들은 숭배 대상이 될 만한 것들이 있는 곳에서는 아무 곳에서나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유다 백성들은 돌과 나무를 숭배했기 때문에 자연히 산과 들에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또한 자연물이 아니더라도 신상을 만들어 산속에서 제사를 드리기도 했기 때문에(참조, 겔6:1-7) 특히 산은 유다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주요 장소였습니다. 더욱이 산은 남의 눈을 피하기에 좋은 장소였기 때문에 선호되는 장소였습니다.
a. 신당에서의 제사(왕상3:2)
b. 색스러운 산당(겔16:16)

2. 마을
유다 백성들은 점점 강퍅해져 갔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숨어서 은밀히 우상을 숭배하다가 점차로 노골적으로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유다 백성들은 산과 들에서부터 우상을 그들이 사는 마을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우상을 숭배함으로 사람들은 점차 담대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a. 마을 거리에서 행음(렘3:2)
b. 길가에 앉아 행음함(겔16:24)

3. 성전과 성소
유다 백성들의 노골적인 우상 숭배 행위는 시간이 갈수록 극악해져 갔습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고(참조, 겔9:9) 악을 행하여도 벌을 받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하였습니다(참조, 렘12:4). 그들은 극도로 마음이 강퍅해져 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강퍅은 마침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과 성소 은밀한 곳에서도 행하기까지 이르도록 만들었습니다. 본장의 내용은 바로 이 극악한 우상 숭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참조, 겔8:3).
a. 제단 문 어귀의 우상(겔8:5)
b. 성전 안 뜰에서의 태양 숭배(겔8:16)

우상 숭배의 무리

1. 평민들
유다 백성 가운데 우상을 숭배한 장본인들은 어느 면으로 보나 즉물적이고 단순한 평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삶의 노예가 되어 당장에 풍년을 가져다 주고 당장에 육체의 풍요와 안위를 가져다 주는 신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에서 비교적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또한 보다 쉽게 그러한 신들에게 미혹되어 넘어지기 쉬었습니다. 그리하여 평민들은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고 그들에게 그들의 배부름과 안위를 구하였습니다. 본장에서 보이는 유다의 아녀자들이 바벨론의 곡식의 신이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는 장면은 그러한 평민들의 우상 숭배 모습을 잘 드러내 줍니다.  
a. 여인들(겔8:14)
b. 남녀 노소(겔9:6)

2. 장로들
유다의 심각성은 백성의 지도자들인 장로들마저도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한다는 데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환상을 통해 성전 산 뜰에 있는 은밀한 방에서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 인이 사면 벽에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의 모든 우상을 그려 놓고 숭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참조, 겔8:10-11).
a. 방백들(렘44:17)
b. 칩십 장로(겔8:11)

3. 제사장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선택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백성들이 우상 숭배를 해도 그들만은 그러지 말아야 했으며 나아가 자기 백성이 우상 숭배의 죄악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마저도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참조, 겔8:16). 이로 보건대 유다의 모든 백성들이 전민족적으로 우상 숭배에 빠진 것이며 이것은 유다의 우상 숭배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a. 제사장의 수치(렘2:26)
b. 백성과 같은 제사장(호4:9)

우상 숭배는 온갖 형태로 다가와서 그 어떠한 사람도 거기에 빠지도록 미혹합니다. 그 대상에는 가장 거룩한 자리에 있는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사단의 올무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단어해설]
2절. 불 같은 형상. 불은 심판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내기도 한다.
즉 불은 모든 것을 태우며 정화시키는 요소를 갖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오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묘사하고 있다.

9절. 가증하고 악한 일.
가증하다는 말은 부정한 관습이나 물건을 뜻하는데 우상과 동의어로도 사용된다.
하나님이 가증스럽게 여기는 것은 인신 제사와 동성애, 불순종, 부정한 제물 등이 있지만 가장 가증스럽게 여기는 것은 우상 숭배이다.

14절. 담무스.
담무스는 어머니의 자궁에 있는 아이를 성장케 하는 자, 또는 생명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갖는데 남부 바벨론 중심부에 있는 밧티비라 성읍의 수호신으로 식물의 신이다.

16절. 동방 태양.
이방인들은 태양이 생명을 주는 신이라고 여기고 섬겼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을 등지고 태양을 향해 숭배하는 행위로써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전적으로 포기하였고 그로 인하여 심판을 받게 되었다.  

거룩한 성전예루살렘의 우상 숭배의 실상.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에스겔 선지자를 델아빕의 그발 강가에서 멀리 떨어진 예루살렘으로 옮긴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은밀히 범하고 있는 우상 숭배 행위를 목격케 하고, 심판의 당위성을 부각시킨다. 먼저 백성들은 성전 재단 문 어귀 북편에 투기를 격발케 하는 우상을 놓았다. 이 우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므낫세 통치하에 세워진 바알이나 아세라 상으로 추정된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릴 희생 제물을 잡는 성전 안뜰에 우상을 세워 둠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히고 모욕하였다. 두번째로 이스라엘의 지도자에 해당되는 70명의 장로들은 제사장의 뜰과 백성의 뜰 사이의 담 속에 있는 비밀스런 방의 사면 벽에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우상을 그려 놓고 숭배하였다. 지도자들의 혼합주의적 태도는 유다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세력에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세번째로는 성전의 담 밖에 있는 여인들은 바벨론의 신으로서 계절의 주기를 따라 겨울에 죽었다가 봄에 다시 살아나는 곡물의 신 담무스를 노골적으로 숭배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는 행위이다. 백성들의 생활은 이와 같이 우상 숭배로 완전히 패역되여 있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에 들어가는 자도 거룩해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여러 가지의 성결 규례를 준수하고 난 연후에야 성전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성전 제사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뜰을 따로 마련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성전에 유대인만 들어간다고 유대인에게 특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거룩하게 해야 됨을 상징한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행위를 거룩하게 여기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려야 할 것입니다.


8장에서는 유다의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 온 때로부터 6년에 에스겔이 첫 환상을 본 때로 부터 만14개월이 되던 해에 받은 말씀입니다.

 

- 그 해에 에스겔은 성령 하나님께 이끌리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성행 되어지는 유다 백성들의 가증한 우상 숭배의 모습을 환상으로 본 것입니다.

 

- 무엇보다 8장 전체가 그때에 본 환상을 상세히 기록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한 죄를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 이제 8장에 대한 분석과 이해를 돕는다면, 우선 1-4절에서 에스겔에게 여호와의 권능이 임하는 모습을 봅니다.

 

- 그리고 5-10절에서 투기의 우상, 10절에서 각양 곤충 우상과, 14절에서 담무스 우상, 그리고 16절에서 태양 우상 등이었습니다.

 

- 이렇게 가증스런 우상들이 다른 곳도 아니고 성전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상상할 수도 없는 가증스런 일입니다.

 

- 우리는 본문에서 자칫 방심하면 가장 성결해야 할 성전이 우상과 범죄의 소굴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이렇게 택한 선민일지라도 회개치 않고 끝끝내 죄의 길로 치닫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 그리고 6-18절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까지도 우상숭배의 범죄를 저질렀는데, 심지어 성전의 곳곳에 각양 우상들을 가져다 놓고서 섬겼습니다.

 

-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크게 가증한 행위였으므로, 하나님은 성전을 떠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이 결코 멸망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있기에 어떤 나라나 이방신도 예루살렘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들은 하나님이 영원히 성전에 거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고, 그들의 우상숭배 행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성전을 떠나시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버리셨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렸던 그들은 진노의 잔을 마시게 된 것입니다.

 

 

◈ 이제 본문을 적용할 수 있는 구절의 핵심(PS) 의미를 돕는다면, 먼저 1절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자만이 더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 그리고 2절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크심과 영화로움을 잊지 말고 항상 명심해야 하고, 하나님의 소멸하는 진노의 불 앞에서 우리가 보호 받는 비결은 죄악에서 철저한 회개와 믿음으로 돌이킴뿐입니다.

 

- 한편 3,4절에서 때와 시간을 초월하여 하나님은 바로 거기에 계십니다.

 

- 그리고 5, 6절에서 하나님의 동행과 보호를 바란다면 먼저 죄를 철저히 멀리해야 합니다.

 

- 한편 7- 13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깊은 곳, 곧 심령과 폐부까지도 밝히 감찰하십니다.

 

- 또한 9, 10절에서 하나님의 눈길이 머무는 곳, 그곳에 성도들의 시선을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 그리고 11-13절에서 참된 지도자로 서기를 바라는 자는 먼저 불굴의 신앙을 견지해야 하며, 실패했다면 그 원인을 밖에서보다 자기 자신 안에서 먼저 찾아야 합니다.

 

 

◗ 결론적으로 우상 숭배는 온갖 형태로 다가와서 그 어떠한 사람도 거기에 빠지도록 미혹하고 있습니다.

 

- 그 대상에는 가장 거룩한 자리에 있는 제사장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깨어 근신하므로 사단의 올무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내안에서 찾으면 해답이 보인다(8:12)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이 을 버리셨다 하느니라.

- 실패했다면 그 원인을 밖에서 보다 자기 자신을 말씀 안에서 먼저 찾아야 합니다.

12절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자신들의 우상 숭배를 합리화하면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이 말을 하게 되는 데에는 당시 유다가 처한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 당시 유다는 바벨론의 제 1, 2차 침공과 억압으로 인하여 심각한 고통 가운데 처해 있었습니다. 

- 땅은 황폐화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으며, 또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 또 남은 유다 백성들은 기근과 전염병과 엄청난 조공으로 인하여 그 고통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 이것은 표면적으로만 보면 분명 하나님께서 유다를 돌아보시지 않고 그들을 버리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 바로 이러한 상황을 두고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보지 않고 그 땅을 버리셨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 그리고 그러한 생각과 주장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들의 우상 숭배를 합리화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과 현실은 어떠합니까? 유다가 왜 그러한 환란과 고통을 당해야만 하였습니까?

 

-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시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려서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원인은 유다가 이러한 환란과 고통을 당하게 된 원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의지하지 않았고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유다 땅을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유다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은 유다의 고통의 원인, 유다의 실패의 원인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자신들의 우상 숭배를 합리화하려고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 실로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 족속 장로들의 가증함을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어리석게 실패의 원인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은 죄로 인해 타락한 모든 사람들이 지닌 전형적인 특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언제나 영적으로 타락한 자들은 실패의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찾으며 자신의 악한 행위에 대해서는 합리화하고 핑계합니다.

 

- 이것은 타락 직후 그들의 죄에 대하여 책임을 묻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류의 대표 아담의 반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아담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한 후 그 책임을 묻는 하나님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창세기3장 12절에서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아담이 하나님께 무슨 말로 변명하고 있습니까?

 

-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고 자기에게 그 나무 열매를 먹게 한 하와, 그리고 그를 자기에게 함께하게 하신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실패의 원인을 외부 환경 또는 주변 사람들에게 심지어 하나님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 그리고 자기 형편이 열악해서, 다른 사람이 방해가 되어서, 또는 하나님께서 인도 해주시지 않아서 실패하게 되었다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혹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요?

 

- 또한 자기의 악함이나 무책임함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 하는 이런 사람이라면 자신이 타락한 자임을 자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그렇다면 오늘 이 아침에 성령님께서 묻는 것은 “ 지금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는지? 그리고 현실적으로 당하는 문제의 원인을 누구로부터 찾고 있는지? 그래서 아담처럼 책임증가를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께 탓하는 것은 아닌지? 항상 나의 문제를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는지? 문제해결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성령님은 이런 문제 앞에 어떻게 행하시길 원하는지? 묻고 있으니 스스로 자문자답 해 봅시다. 실수와 실패하였다면, 그 원인을 밖에서 보다 자기 자신을 말씀 안에서 먼저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문제의 원인을 내안에서 찾으면 해답이 보입니다.

 

- 그런즉 내 안에 실패의 원인을 어떤 환경이나 타인이나 혹은 하나님에게서 찾는다 해서 실패의 원인이 나에게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바른 처사가 아님을 꼭 명심 합시다.

 

- 실패의 원인이 나의 죄와 무책임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최우선적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 죄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 하고 실패를 내 안에서가 아닌 외부에서 그리고 타인에게서 찾고자 한다면 결코 나의 실패를 만회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 또한 명심합시다.

 

- 그러므로 이제부터 내가 실패를 경험하게 될 때에 그 원인을 먼저 내 안에서 반드시 찾아봅시다.

 

- 그래서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디서부터 어긋나게 되었는지를 정확하게 돌아보고, 나의 연약함과 나의 허물을 또한 솔직하게 인정하고 시인하여 새로운 변화를 위해 노력해 봅시다.

 

- 로마서12장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습니다.

 

- 그리고 고린도후서 5장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 그래서 정말 참되고 진실한 회개를 통해 회복과 축복의 길을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간구 해 봅시다.

 



의로운 심판


1. 의의 심판 
1) 이스라엘의 원수를 멸망케 함(사11:4, 사34:8, 사59:16-18, 학2:22,23) 
2) 의를 세우기 위해 죄인을 벌주실 것임(출23:7, 왕상8:32, 대하6:23, 시51:4, 애1:18) 
3) 의로운 자의 원수를 벌할 것임(시7:6-9, 시7:11-13, 시58:10,11, 시129:4) 
4) 만민을 심판하실 것임(사51:5) 
5) 큰 음녀를 심판하실 것임(계19:2)

2.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 
1)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심(신10:17, 골3:25) 
2) 불의나 치우침이 없으심(대하19:7) 
3) 유대인과 이방인을 함께 벌하심(렘9:25) 
4) 악을 행하는 모든 자를 심판할 것임(롬2:9, 벧전1:17)

 

'심판'에 대한 준비

죽음은 노인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
죽음과 가까운 곳에 사는 노인들은 오히려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죽음은 성격이 매우 급한 속성을 갖고 있다. 
예고없이 찾아와 사람을 당혹하게 만든다. 
또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 아무도 죽음을 연기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그날을 준비해야 한다. 
신앙인들의 죽음이 평화스러운 것은 죽음을 `새로운 생명의 시작'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한다.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아모스 4:12)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된다.
얼마 전 KBS-TV가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욱 요란해지고 사치와 환락이 판치는 강북과 강남의 유흥가를 현장 르포로 취재했습니다. 자정이 넘자, 밤이 되면 더욱 매상고를 올릴 수 있다는 과소비와 충동의 거리는 새벽 4시가 되어도 꺼지지 않는 네온사인의 요란함과 흥청망청 자기의 젊음을 술과 성적욕망으로 채워나가는 돈 많은 젊은이들의 비행, 국산차가 아닌 외제차가 있어야 더 쉽게 젊은 여인들을 유혹하고 노닐 수 있다는 새 풍속도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취재 기자는 '어찌할꼬?'하며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비단 그곳을 찾는 젊은이들만의 행동양식이겠습니까? 우리 시대, 우리 모두의 삶에 감추어진 뒷면은 아니겠습니까. 한국민 전체의 절반 이상이 고스톱을 한다는 이야기나 술 소비량이 세계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 성폭행이 늘어나고 마약 상용자가 늘며 부모를 구타하는 반인륜적인 자녀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현실적인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러한 불경건과 불의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극복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교회이어야 하고 그리스도인들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이 되고 있습니까?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하여 거짓과 불의와 불경건을 회개하라고 할 만큼 하나님의 거룩한 영에 붙잡힘을 받고 이 시대 앞에 거룩한 빛을 비추며 서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 시대 정신과 사고에 의해서 오히려 교회가 조정을 받으며 그 세속정신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 모두의 갈등과 혼란과 위기가 있습니다. 교회가 가야 할 길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어야 함을 피부로 느끼고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교회자체가 세속정신의 물결에 너무 깊이 발을 들여놓고 있다는 현실 떄문에 자조 하고 있습니다. 교단의 총회장을 선출하는데 금전과 향응이 난무하고, 지방색의 결속과 배타가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도 이것이 어쩔 수 없는 당위성이라 수용하며 양심의 가책에서마저 면제를 받으려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회가 도덕적 부패와 타락에서 회복해야 함을 역설한다는 것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우리의 사고와 행동양식에는 신앙과 신학의 문제가 깔려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두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어지럽고 부패해도 그래도 나는 이런 사람들보다 윤리적으로 조금은 노력하고 애쓰는 도덕론자라는 자부심이며, 다른 하나는 만약 이 부정과 부패와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진다 해도 나는 예수를 믿고 있기 떄문에 안전하고 만약 내게 그 심판이 다가오더라도 불신자보다는 늦게 그리고 적게 주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입니다.

 

심판(審判)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의 엄격하고 두려운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국에 두 사람의 농부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고 한 사람은 불신자였습니다.
한 날은 불신자 친구가 그리스도인 친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모르고 그리스도도 모르고 믿지도 아니한다.
그러나 지난 봄에 파종을 잘하였고 여름엔 순풍으로 물대기와 김매기를 잘하였고 가을엔 풍성한 수확을 거두웠다.
신자 친구들보다 훨씬 많은 수확을 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하거나 깨달을 수 없었다." 

그때 그리스도인 친구는 이렇게 답신했습니다. 

"하나님은 10월의 결과를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의 정하신 날에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그 언젠가 갑자기 밤의 도둑같이 이른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지명 수배가 되었어도 수십 억의 채무가 있어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죽음으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신앙과 행위를 따라 추호도 가감도 없이 심판하는 것입니다.


역사(歷史)의 심판(審判)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
(John Fitzgerald Kennedy, 1917. 5. 29~1963. 11. 22) 또는 약어로 JFK는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이다.
사람은 반드시 심판대 위에 서게 될 것이다.
1. 양심의 심판대
2. 법의 심판대
3. 역사의 심판대
4. 하나님의 심판대

아프리카를 개척한 영국의 대표적인 탐험가는 세실 존 로즈(Cecil John Rhodes, 1853. 7. 5~1902. 3. 26)와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 3. 19~1873. 5. 1)이다.
로즈는 식민지 총리로 아프리카 원주민 수십만 명을 학살하고 황금과 다이아몬드를 벌어들임으로써 '애국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리빙스턴은 노예제도와 영국의 침략 정책을 강력히 반대해 '반역자'라는 말을 들었다.
오늘날 로즈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면에 리빙스턴은 영국 국립묘지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돼 국내 관광객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역사는 애국자로 불렸던 로즈와 탐험가이며 선교사이었던  리빙스턴의 차이가 무엇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나의 삶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
시대의 흐름과 풍속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법을 따르자!

09-15-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끝났도다(에스겔 7:2)

너 인자야 주 여호와 내가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말하노라 끝났도다 이 땅 사방의 일이 끝났도다.
Son of man,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to the land of Israel: The end! The end has come upon the four corners of the land.

"끝났도다(the end)"
케츠 바(קֵץ בָּא)

끝났도다(7093)

קֵץ 스트롱번호7093

1.

극단

2.

끝없이 אֵין קִץ

3.

파멸

발음 [ qêts ]
어원
7112에서 유래한 압축형
관련 성경
☞지남, 끝(창8:6, 전12:12), 끝남(출12:41, 민13:25, 대하8:1, 겔7:2, 단11:27), 끝(창6:13, 신31:10, 왕하19:23), 마지막(욥6:11, 애4:18, 단11:40), 종말(시39:4, 합2:3), 끝날(단12:13).
구약 성경
67회 사용
보(935) 보우() בּוֹא 스트롱번호935
1.

들어가다

2.

창19:8

3.

창6:18

발음 [ bôw’ ]
관련 성경
☞이르다(창6:13, 신18:6, 단1:2), 들어가다(창7:9, 레16:23, 욥38:16), 나오다(창14:5, 출19:1, 삼상20:17), 지다(창15:17, 삼하2:24, 전1:5), 오다(창16:8, 삿3:24), 들어오다(창19:8,삿19:22, 왕하9:31), 임하다(창42:21, 출3:18, 신28:2), 가져오다(창43:21), 받다(창43:23,잠24:25), 달하다(출3:9), 가다(출5:1, 수23:14), 보내다(민13:27, 삼상9:16, 대하21:12),얻다(민32:19, 애5:4), 나아가다(신12:5, 삿3:20, 느13:6), 이루다(신13:2), 맞이하다(신22:13), 일어나다(신32:17), 돌아가다(수20:6), 왕래하다(수23:12, 왕상15:17), 돌아오다(삿19:16, 삼하3:23), 내려가다(삼상15:12, 수10:13), 떠나다(삼상29:10, 전8:10), 엄습하다(삼하5:23, 17:2), 오다(삼하15:18), 동침하다(삼하17:25, 대상2:21, 창16:4), 당하다(삼하19:7, 사7:17), 모셔오다(삼하19:11), 내려오다(삼하19:20), 미치다(삼하23:19, 대상11:21), 많다(왕상1:1), 들리다(왕상2:28), 올라오다(왕하25:1, 렘52:4), 나아오다(대상12:23, 19:3), 통과하다(시66:12), 매다(시105:18), 낳다(사37:3), 떨어지다(렘15:9), 옮겨가다(렘27:18), 가담하다(렘34:10), 넣다(겔4:14, 단10:3), 끝이 오다(겔7:6), 타다(단11:21), 따르다(암6:1), 내리다(슥14:18), 지나다(창10:19, 18:9), 들다(창41:54), 멀다(창48:7), 출입하다(신31:2), 모이다(신31:11),출가하다(수15:18, 삿1:14), 상관하다(창49:6),행하다(출14:16), 담기다(레11:34), 나아가다(대하34:9), 견디다(민31:23), 성취하다(신18: 22), 응하다(삿9:57, 삼상9:6), 당하다(삼상2:34), 데려오다(삼하11:4), 통혼하다(왕상11:2), 통과하다(느2:7), 들리다(시18:6),찌르다(시37:15), 일으키다(잠18:6), 침범하다(잠23:10), 수리하다(사1:23), 심문하다(사3:14), 가보다(사41:3), 닥치다(렘2:3), 인도하다(렘2:7), 더하다(겔7:26), 자라다(겔16:7), 언약하다(겔16:8), 차다(겔22:4), 흘리다(겔24:16), 드리다(호9:4), 참가하다(민4:3), 복무하다(민4:23), 흘러오다(왕하3:20), 들어오다(왕하11:5), 침범하다(왕하11:8), 바뀌다(왕하13:20), 다니다(잠23:30), 생기다(전5:3), 입히다(창26:10), 가져가다(창31:39), 데리다(창39:14), 이끌고 오다(창46:32),인도하다(출6:8), 베풀다(출18:19), 꿰다(출26:11), 들여놓다(출26:33), 빠지다(출32:21), 가져오다(출35:22, 레15:12), 끌다(레4:4), 가지다(레16:15), 끌어오다(레19:21), 인도하여 들이다(민14:8, 신9:4), 데려가다(신21:12, 삼상20:8), 운반하다(왕상10:11), 가지고 오다(왕하10:8), 수운(輸運)하다(대상22:4), 주다(욥12:6), 들게 하다(시66:11), 태우다(사66:20), 부르다(렘25:9), 맞추다(애3:13), 메어 오다(대상13:5), 청하다(에1:11,17), 옮기다(렘39:7), 불러들이다(단1:18), 드러나다(단9:24), 기울이다(잠23:12), 받아들이다(창8:9), 말하다(창37:2), 허락하다(대상4:10), 잡다(대하22:9), 사로잡다(대하25:23), 잡아가다(대하36:10), 심판하다(전11:9, 12:14), 넘겨주다(왕하10:24), 실어오다(대상12:40), 인도되다(창43:18), [명]수확(학1:6), 통행구(겔42:9).
구약 성경
2565회 사용






너의 가증한 일(thine abominations)

가증한 일(8441) 토에바(tôwʽêbâh) תּוֹעֵבַה   

1. 질색,  2. 창세기 43:32, 3. 열왕기상 14:24
발음 / 토에바[ tôwʽêbâh ]
어원 / 858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증히 여김(창 46:34), 꺼리는 일(신 12:31), 싫어하는 바[것], 미워함(출 8:26, 잠 6:16, 20:10), 싫어함(잠 13:19), 부정(창43:32), 미움(잠 24:9, 29:27), 미운 물건(렘 16:18). [형] 가증한(레 18:30, 겔 6:11, 말 2:11).
구약 성경 / 117회 사용




에스겔 7장에서는 유다 백성들에 대한 임박한 재앙의 원인과 결과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심판의 임박성과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적인 단어나 어구를 자주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끝'이라는 단어는 6회, '오고 있다'는 단어를 7회, '이제'라는 단어는 2회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인내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돌이키지 않을 때는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문제는 아무리 선지자들이 외칠지라도 백성들이 관심을 갖지 않고 듣지 않을 때는 공의로운 사랑으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관영한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징계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리라는 말씀도 패역한 유다 백성들의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먼 훗날에 일어날 일이 하니라 곧 일어날 임박한 일이라는 것을 알리도록 했습니다. 에스겔 7장에서는 그와 같은 심판의 임박성을 선포합니다.

바벨론의 침략은 강대국이 약소국을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로 말미암아 얻게 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언약 백성으로서 우상을 숭배하고 공의를 어그러뜨리는 유다에 대해 거룩한 분노를 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회개하지 않고, 인간적인 힘과 방법으로 침략을 격퇴하려는 시도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모든 수고와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백성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단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으로 인해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성전을 무너트릴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확신은 예루살렘은 절대로 멸망당하지 않는다는 성전 신학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의 침략은 잘못된 성전 신학에 대한 징계이며 하나님의 날카로운 채찍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목적은 멸망이 아니라 정상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면서도 긍휼을 베푸시는 자비(헤세드)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믿는다면 자비에 합당한 믿음의 삶을 결단하고 그 믿음으로 내일을 향한 소망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09-14-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산당을 멸하리라(에스겔 6:3)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께서 산과 작은 산과 시내와 골짜기를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로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
and say: 'O mountains of Israel, hear the word of the Sovereign LORD.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to the mountains and hills, to the ravines and valleys: I am about to bring a sword against you, and I will destroy your high places.

"산당을 멸하리라(destroy high places)"
웨입바드티 바모테켐(וְאִבַּדְתִּי בָּמֹותֵיכֶם)

산당(1116) 바마( bâmâh) בָּמָה   

1. 고지,   2. 요새,  3. 산 위에 지어진 성소
발음 / 바마[ bâmâh ]
어원 / 복수 בָּמוֹתֵי ,בָּמוֹת[연계형과 절대형이 같음], 격어미활용 בָּמוֹתַי, ‘높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 유래
관련 성경 / 높은 곳(신32:13, 삼하22:34, 시18:33), 산당(레26:30, 왕상3:3, 호10:8), 산 위(삼하1:25, 왕상14:23), 물결(욥9:8), 높은 데(암4:13).

멸하다(6)

אָבַד 스트롱번호6

1. 길을 잃다,  2. 재물을 잃다, 3. 목숨을 잃다
발음 [ ’âbad ]
관련 성경 / 망하다(출 10:7, 욥 4:7, 렘 48:46), 죽게 되다(민 17:12, 욥 31:19, 잠 31:6), 멸망하다(민 21: 29, 왕하 9:8, 암 1:8), 멸하다(민21:30, 렘 15:7, 습 2:5), 쇠잔하다(욥 30:2), 없어지다(사 29:14, 렘 48:36, 겔 7:26), 죽다(에 4:16, 미 4:9, 사  57: 1), 소멸하다(시 146:4), 끊어지다(렘 7:28, 25:10, 애 3:18, 잠 10:28), 도망하다(렘 25:35, 암 2:14), 멸망당하다(렘 40:15, 사 37:19), 파괴되다(암 3:15), 파멸하다(신 28:20, 민 33:52, 렘 1:10), 진멸하다(신 28:22, 에3:9, 겔25:16), 멸하다(수23:13, 사26:14), 멸절하다(민24:19, 미5:10), 패망하다(잠11:10, 시92:9, 잠21:28), 잃다(신22:3, 삼상9:20, 전3:6), 실망하다(시 9:18), 낙심하다(렘4:9), 방랑하다(신26:5), 진멸함을 당하다(에7:4), 무너지게 하다(전 9:18), 멸절시키다(레23:30, 신28:51), 끊다 (욥14:19), 잃어버리다(렘50:6, 겔34:4,16), 무너뜨리다(렘31:28).
구약 성경 / 184회 사용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
- '
산당'의 히브리어 '바마'는 문자적으로 '높은 장소'라는 뜻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전부터 그곳에 존재해 있었다(민수기 22:41).
아침에 발락발람과 함께하고 그를 인도하여 바알의 산당에 오르매 발람이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보니라.

따라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이 산당을 헐도록 명하셨으나(민 33:52) 후에도 이 산당은 계속 존재했었다.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파멸하며 산당을 다 훼파하고.

한편 기브온 산당에는 하나님의 성막과 번제단이 있었다(대상 16:39; 21:29; 대하 1:3).
그리고 선지자 사무엘, 사울 등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으며(삼상 9:12-25; 10:5, 13),
솔로몬 왕은 성전 건축 이전에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려 커다란 축복을 받기도 했다(왕상 3:3-15).
그러나 이 산당은 성전 건축 이후에도 계속 존재하였을 뿐 아니라 그 수효가 오히려 늘어났으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 숭배하는 장소로 사용되어져 왔다(왕상 14:23; 왕하 16:4;17:11; 대하 28:25).
히스기야나 요시야 같은 왕은 담대히 산당들을 헐며 제하기도 했지만(왕하 18:4, 22;23:5-19) 그들의 종교 개혁 정책도 근본적인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본절에서 하나님께서 이 산당들을 제하신다고 하신 것은 이곳이 우상 숭배의 온상이었기 때문이다(4-6절).




유다와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로 인한 심판과 구원에 관한 예언

6장에서는 선민 유다 백성들은 감사가 없으니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 거룩한 땅 가나안 곳곳에 우상을 위한 단을 쌓았습니다.
특히 산 위에 산당을 짓고 그 곳에서 이방신들과 우상들에게 제물을 드리며 경배했습니다.
이렇게 죄악이 넘치게 되자 급기야 하나님께서는 산당과 산당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유다 백성을 엄하게 징계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하나님께서 선민들을 향한 무섭고 두려운 징계의 말씀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징계 안에 뜨거운 사랑이 있다. (에스겔 6:1-7)

성도는 세상의 죄악상을 직시하고 그 죄악 됨을 분명하게 구별하며 죄를 지적하고 살아내야 하며, 우리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한 징계의 이면에는 항상 깊은 사랑이 담겨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1- 7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산을 저주하시는데, 그 당시 산과 시내 그리고 골짜기에는 산당이 세워져 있었고 그곳에는 우상과 이방신들의 제단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산이나 골짜기 등의 자연에 대한 저주 뒤에는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 대한 심판과 저주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요시야 왕은 종교 개혁을 통해서 이러한 산당을 훼파해 버렸지만, 본질적으로 변화가 없었기에 이후에 다시 유다 전국 산지에서 바알 혹은 몰렉 우상 숭배가 행해졌던 것입니다.

8-10절에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존재하게 하는 이유를 말씀하는데, 악한 시대 앞에 남은 자들의 복된 삶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떠나고 우상을 섬겨 하나님을 근심케 한 것을 기억하고 회개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참신이 신 줄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여호와가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알게 하신 것이 바로 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11-14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재앙을 슬퍼하라고 명령하시는데. 특히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는 것은 기쁨과 환희에 넘칠 때하는 행위이지만, 여기에서는 역설적으로 슬픔과 분노의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모든 가증한 악 때문에 이스라엘의 먼 데 있는 자는 온역으로, 가까운 데 있는 자는 칼로, 에워싸인 자는 기근으로 죽어, 그 살육당한 자가 곳곳에 널려 있는 처참함과 애통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본문을 적용할 수 있는 구절의 핵심 의미를 돕는다면, 우선 1-7절에서 성도는 세상의 죄악상을 직시하고 그 죄악 됨을 분명하게 지적해야 합니다.

죄악이 저질러지는 곳에 서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신속히 떠나야 합니다.

한편 이기적인 탐욕만을 고집하는 자들은 우상숭배의 유혹을 피할 수 없습니다.

참되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길 바란다면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7절에서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의 이면에는 항상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나 헛된 우상과 이방신들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있습니다.

그 징벌에는 긍휼도 내포되어 있지 않으나 하지만 그런 반면에 하나님은 눈여겨보시며 끝없는 사랑을 베푸시고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남은 자들을 남겨두시는 모습을 봅니다.

남은 자들은 죄악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기에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돈과 권력과 쾌락의 우상으로부터 멀리 떠나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에, 구원을 받는 자의 대열에 설 수 있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징계 안에 뜨거운 사랑이 있다. (에스겔 6:1-7)

성도는 세상의 죄악상을 직시하고 그 죄악 됨을 분명하게 구별하며 죄를 지적하고 살아내야 하며, 우리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한 징계의 이면에는 항상 깊은 사랑이 담겨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1-7절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 현장에서 심판을 집행할 것을 강조하시며 선민의 우상 숭배 행위를 무섭게 심판하실 것을 에스겔에게 명하시고 계십니다.

2절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산들을 향할 것을 명령하고 엄하게 심판을 예언하고 계시는데, 본문에 제시 된 ‘이스라엘 산’ 이란? 이방신들과 우상 숭배의 온상이라 할 수 있는 산당과 신당들이 세워진 곳이며, 음행이 자행되는 푸른 나무들이 세워진 곳으로 한마디로 죄악의 소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따라서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산을 바라보라고 명하신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죄악 됨을 결코 묵고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반드시 직시하여 엄하게 심판하라는 명령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 그래서 이어지는 3절 이하의 말씀에서는 그들의 죄악 됨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임할 심판을 분명하게 선언할 것을 지적하는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 에스겔에게 부여 된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의로운 삶을 살며 이를 통해 이 세상을 바르게 세워야 할 하나님의 사람들이 부여받은 공통적인 명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의한 뜻을 바로 순종하지 않고 세상 가치관과 유혹과 미혹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탄식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 오늘날 성도들 중에 많은 이들이 죄악 세상을 직시하고 그 죄악 됨을 정확히 구별되게 살아 내는 것이 우선이며, 또한 죄악을 지시하고 지적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며 기껏 자기 신앙만 간신히 지키며 살고자 하는 태도를 엄하게 지적하고 경고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 다시 말해 그들은 주변의 사람들이 범죄를 자행하고 거짓과 불의를 자행함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 양 못 본 척 지나치거나 애써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산을 엄하게 심판하시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그들로 당신이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인 줄 알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대신 허무하기 그지없는 각종 이방신상과 우상들을 숭배하였으며, 그들이 이렇게 우상들을 숭배한 것은 우상의 본질을 모르고 누가 참된 신인지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 그들은 우상들에게 어떤 기이한 능력이 있어서 자신들을 보호하여주며, 복을 내려주며 구원하여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굳게 믿고 있는데, 그러나 이러한 우상은 모두 허무한 것들로서 그들의 삶을 추하고 악하게 되며, 허무하게 만들어 줄 뿐입니다.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산을 심판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당신이 바로 참 된 신 여호와이신 줄 알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당신을 여호와로 알게 하려 한다는 것은 참 신이신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랑하시어 진정으로 참된 복을 주시며,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왜냐하면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들이 참 신이신 하나님을 되새기고 기억하게 될 때 그들의 헝클어진 삶은 회복 될 것이며 이것이 궁극적으로 참된 구원과 영육의 축복을 소유하는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을 향한 무서운 심판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하겠으며, 사랑하기 때문에 때리시고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오늘 이 아침에 성령님께서 묻는 것은 “ 지금 내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하나님께 징계 받는다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모습은 아니었는지? 징계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징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있으니 스스로 자문자답 해 봅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한 징계의 이면에는 항상 깊은 사랑이 담겨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징계 안에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있습니다.

 

-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그들의 죄를 벌하기 위한 차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은 일차적으로는 그들이 범한 죄 값을 치르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바로 알고 하나님계로 돌이킴으로써 당신이 베푸시는 복과 구원을 누리게 하는데 근본적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 이는 마치 부모가 그릇 행하며 잘못된 길로 치우쳐 나아가는 자식을 바로 잡기 위한 징계의 이유와도 같습니다.

 

- 부모는 자식이 잘못을 범할 때, 그를 징계하여 그로 하여금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 그러나 부모 중에 자기 자식을 징계할 때 단순히 잘못을 추궁하기 위하여 벌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 부모가 자식을 징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궁극적으로 그로 하여금 바른 삶, 행복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 자식을 바른 길로 돌이키게 함으로 보다 훌륭하게 되도록 하기 위한 궁극적인 목적으로 징계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자식은 부모로부터 징계를 받을 때 이를 잘 모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장성한 뒤에 보면 그 징계가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당시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 그래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하기도 하였을 것이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은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알고 하나님께로 돌이켜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을 누릴 때에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심판 곧 징계는 항상 이와 같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죄 값을 치르게 하거나 멸망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심판하시지 않으시고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그들에게 복과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징계하시고 경고를 거듭 예언하고 계십니다.

 

- 분명 ‘코로나19’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향한 무서운 징계로 보아야 할 것이며, 이로 인한 많은 고난과 고통과 역경의 순간을 경험하고 있는 만큼 진리의 말씀 앞에 바로 순종하지 못하고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사단 마귀의 미혹과 유혹 그리고 황금만능주의에 빠졌던 지난날의 죄악을 뼈 속 깊이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징계와 경고가 주어질 때에 심판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있게 깨달아야 할 것이며,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잘못을 피하고 하나님의 징계가 멈추기까지 겸손히 회개하며 삶을 바꾸고 인내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참된 회개의 자리로 신속히 나아가는 저와 주님의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상 숭배에 관한 징계 /
 
에스겔은 평이한 어투로 심판의 원인이 된 우상 숭배의 실상을 고발하고 있다.
유다는 전지역에 산당을 짓고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며 분향했다.
그들은 아세라, 몰렉, 일월성신 등을 섬기며 점쟁이를 우대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쟁을 통하여 유다의 죄악을 심판하고 정화하시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6:1-7.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의 파멸을 선언
6:8-10.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회개할 것이다
6:11-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재앙을 슬퍼하라고 명하시다

특별히 본장은 이스라엘의 산악 지대 및 땅에 대한 심판이 예언적으로 선포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중심 지역, 즉 예루살렘에서 바깥 외곽 지역으로 점차 확산되어 가는 경향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역에 있는 산당과 우상을 파괴하실 것임을 알 수 있다.  


[강  해]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 거룩한 땅 가나안 곳곳에 우상을 위한 단을 쌓았습니다. 특히 산 위에 산당을 짓고 그 곳에서 우상에게 제물을 드려 경배하였습니다. 이 죄악이 창궐하자 급기야 하나님께서는 산당과 산당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유다 백성을 징계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본장은 그 징계의 말씀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1. 유다의 우상 숭배

1) 태양신 숭배
유다의 조상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의 것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먹던 양식을 그리워하는 마음하에(참조, 출16:3) 애굽의 신들을 가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애굽의 대표적 신은 태양입니다. 이스라엘의 후손들인 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조상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그 태양신을 숭배했습니다(참조, 겔6:4-6).
a. 태양 숭배(겔8:16)
b. 애굽의 우상을 떠나지 아니함(겔20:8)

2) 바알 숭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그 곳에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족속이라 그들의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우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신은 바알이었습니다. 바알은 풍년을 가져다 준다는 농경 신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자 유목민에서 농경민으로 바꿔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을 섬기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후손들인 유다 백성들도 그 가증스런 바알 숭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참조, 왕하16:31).
a. 바알을 섬김(삿2:11)
b. 많이 섬김(왕하10:18)

3) 몰렉 숭배
가나안의 현주민들이 숭배하던 신들 가운데는 몰렉 또는 몰록이라는 이름을 가진 신이 있었습니다. 이 신은 섬기는 자의 자녀를 제물로 요구하는 아주 비도덕적인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부터 몰렉 숭배에 대해서 각별한 경고를 주었습니다(참조, 레18:21). 그러나 그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참조, 왕상11:7) 유다 백성(참조, 겔16:20-21)들은 그들의 자녀를 몰렉에게 주었습니다.  
a. 몰렉 숭배자는 사형에 해당(레20:2)
b. 몰렉에게 기름을 들고 감(사57:9)

2. 우상 숭배에 대한 징계

1) 온갖 재앙에 의한 죽음
유다 백성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따라 애굽과 및 가나안의 온갖 잡신들까지 다 섬기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온갖 재앙을 내려 죽게 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재앙들은 칼과 질병과 기근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재앙들로 인해 그들이 섬기던 우상들 앞에서 죽음을 당할 것이 예언되었고 이 예언은 성취되어 유다 백성을 실제로 바벨론 군대의 칼에 의해 그리고 굶주림과 질병에 의해 그들의 생명을 늑탈당하였습니다. 그나마 그 가운데서 겨우 생명을 보존한 자들도 산과 들에서 유리하거나(참조, 겔7:16) 포로로 잡혀 갔읍니다(참조, 렘52:27).
a. 짐승의 밥이 됨(렘16:4)
b. 세 가지 재앙(겔5:12)

2) 죽음 당한 시체가 숭배 제단에 누움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무참히 죽음을 당하는 것만으로도 징계는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죄악이 너무 컷기에 그들은 죽음을 당한 뒤에도 무덤에 묻히지 못하고 그들이 섬기던 우상과 제단 뒤에 처참하게 누임을 당합니다. 이것은 우상을 섬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긍휼 없는 진노가 임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동시에 사람이 섬기는 우상은 그 사람을 구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a. 매장되지 못함(렘16:6)
b. 위로자도 없음(렘16:7)

3) 국토가 황폐화됨
유다 백성은 죽음을 당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의 터전마저도 불모지가 되는 징계를 받습니다(참조, 겔6:14).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들의 힘으로는 회복하지 못하도록 철저한 징계를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아닌 것을 섬길 때에 받는 벌이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무서운 형벌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a. 시온의 황무(사3:26)
b. 거민이 없는 땅(렘6:8)

3. 남은 자

1) 이방 땅에서 목숨을 보존함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범죄한 유다 백성을 멸하시되 다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남겨 두시고 그들을 보존하십니다(참조, 겔6:8). 그러나 이들은 그 민족의 죄로 인해 이방 땅에서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a. 남은 자(겔12:16)
b. 연단(단3:23)

2) 우상 숭배의 죄악을 깨달음
물론 남은 자 중에는 여전히 이방의 낯선 땅에서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 숭배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들은 그들이 받고 있는 고난을 통해 그들이 지은 죄를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대표적인 예로 본서를 기록한 에스겔 선지자나 다니엘 선지자(참조, 단9:3-19)를 들 수 있습니다.  
a. 허물의 자복(느9:2)
b. 죄의 자백(단9:5-6)

3) 여호와께 돌이킴
죄악을 깨달은 자들은 그 죄악을 회개하며 여호와께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는 당신의 백성이 이처럼 돌아오기를 기대하였고, 또 돌아오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참조,스1:1-4;느1:1-11). 한편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베풀어졌습니다(참조, 요3:16).
a. 회개(느9:1)
b. 돌이킴(느10:28)

결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나 헛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벌하십니다. 그 벌에는 아무런 긍휼도 내포되어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사람을 베푸사 자기백성을 일부 남기십니다. 그들은 죄악 속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이 섬기는 돈과 권력과 쾌락의 우상으로부터 떠나 하나님만을 섬길 때, 우리는 남은 자 곧 구원자의 대열에 설 수 있습니다.  


[단어해설]
2절. 예언하여. 원어 <ab;n::나바>는 '부글부글 끓다, 거품을 내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 사명감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3절. 산당. '높은 곳, 산당'을 뜻을 가진 이 단어는 원래는 봉우리, 언덕을 의미한다. 이방인들이 제사 드리는 장소는 보통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곳에는 다산 신을 상징하는 아세라 목상과 바알 석상이 세워져 있기도 하였다.

6절. 태양상들. 이 단어는 '향기 나는 제단, 태양상'이라는 뜻을 갖는데 이방인 제사에 사용되는 작은 제의 대상을 가리킨다. 고대 근동에서는 태양을 숭배하는 의식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이것을 금지했으며(참조,레26:30),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우상과 태양상들이 산산조각 날 것을 예고하고 있다.

9절. 음란한 마음. 성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랑으로 묘사되며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방 신을 섬길 때 그것은 영적 간음으로 간주한다.

10절. 헛되지 아니하니라. 이 말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영속성처럼 그의 입술을 통해 전해진 심판의 선언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예고하여 심판의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있다.

11절. 칼과 기근과 온역.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세 가지 재앙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칼은 전쟁과 살육을 의미하며, 기근은 고통스럽게 굶어 죽는 것을 뜻하고, 온역은 죽음을 가져오는 각종 질병을 가리킨다.

14절. 처량하고. <hm;m;v]:쉐마마>는 '황폐해지다, 놀라다'라는 동사 <!mev;:솨맘>에서 유래된 것으로 '황무지, 황폐'를 뜻하는데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황폐케 된 광경을 나타낸다. 본문은 이스라엘 전지역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황폐해진 황무지가 될 것을 나타내고 있다.  


[신학주제]
남은 자에 대한 보호.
본장에는 남은 자들에 대한 보호와 구원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분이면서도 택한 자들에 대해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 즉 남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 남은 자들의 회개, 남은 자들이 하나님을 알게 됨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본장에는 남은 자 사상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데, 하나님은 포로로 잡혀 간 유다 백성들을 보호하셔서 회개하도록 인도하시고 구속 역사를 계승할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실례는 성경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즉 노아가 세상의 불의로 인한 하나님의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은 사실, 롯이 불의하고 음란한 소돔의 멸망에서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받은 일,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타락한 이스라엘 가운데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의 경건한 자가 남아있다는 사실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진노와 심판 가운데서도 선택된 남은 자들을 통해 구속 역사를 완성시키신다.  


[영적교훈]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은 긍극적으로 하나님을 계시하는 데 있다. 하나님은 유다를 파괴하시기 위해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주기 위해 선한 의도로 징계하신다. 이것이 세계를 통치하는 하나님의 원리이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강력히 심판하심으로써 거룩한 공의를 확립하신다. 따라서 성도는 순결하게 생활해야 하며,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자복하고(참조, 요일1:9), 주어진 징계를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참조, 약1:2;벧후1:6).






예언자의 상징적 행동(prophetic symbolic act)

이사야는 삼년이라는 세월을 맨발과 거의 발가벗은 몸으로 지냈다.(이사야 20장)
호세아는 음란한 고멜과 결혼 생활을 계속하였다.(호세아 1-3장)
예레미야는 허리에 걸치는 베띠를 사서, 이것을 바위 틈 사이에 뭍어버린다.(예레미야 13장)
또한 그는 질그릇 하나를 사서, 그것을 예루살렘 성 밖에 밴 힌놈 골자기로 가지고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새 그릇을 산산히 부스워 버린다(예레미야 19장)
에스겔은 갑자기 예리한 칼을 들어, 자기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잘라내고, 그것을 던져 버린다(에스겔 5장)
또한 그는 390일 동안 왼편으로만 누워자고 40일 동안은 오른편으로만 괴팍스러운 행동을 한다(에스겔 4장)

이와같이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기이한 행동을 서슴치 않고 행하였다.
예언자들의 이러한 행동들 때문에 한때 한 때 일부학자들은 이스라엘 예언자들이 심리적으로 비 정상적인 사람들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심리적 설명에 의하면, 호세아와 같은 고결한 윤리의 소유자가 고멜과 같이 부정한 여인과 결혼 하였던 것은 자기학대 증상이라고 했고, 에스겔의 여러 가지 현상은 정신 분열증상의 일종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심리적 설명은 예언자들의 행동을 너무 피상적으로만 보았고, 그들을 이해하는데 큰 오류를 범하였다.
예언자들은 소위"비 정상적인 행동"은 그들의 비정상적인 심리상태의 표현이 아니였다. 예언자들의 이러한 행동은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극적인 방법이였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말"로만 전한 사람들이 아니였다. 그들은 "말"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다시말하면, 예언자들의 행동은 그들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중요한 방법 이였다. 따라서 그들의 충격적인 행위들은 하나님 말씀을 전달하는 "상징적인 행동"들 이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행동을 "예언자의 상징적 행동"(prophetic symbolic act)이라고 부른다.

이사야가 3년 동안 벗은 몸으로 지낸 것은 구약당시에 포로로 잡혀가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길은 강대국들의 군사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신뢰하라고 하는 유다백성들의 죄를 책망하는 것이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규례와 율례(토라)를 지키지 않았다는 책망이다.
호세아가 불행했던 결혼 생활은 곧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징이였다.
즉 고멜의 부정한 행동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고, 호세아가 고멜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예렘미아와 에스겔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들은 입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행동과 삶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예언자들의 상징적 행동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이상한 모습과 행동을 할 때가 많이 있다.
즉 덥수룩한 수염과 무질서하게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에서 빛나는 예리한 눈,
그 눈동자에 비친 이스라엘의 죄악을 비수같이 날카로운 혀로 고발하는 모습이 기인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예언자들의 기이한 행동은 때때로 사람들에게 “미친자”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대결했던 바알 선지자들이 황홀경에 몰입해서 바알을 부르짖던 모습이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을 우리는 예언자들의 상징적 행동이라고 한다.
그러면 구약성서가 묘사하고 있는 예언자들의 상징적인 행동은 구체적으로 어떠했을까?
우선 그나야의 아들인 예언자 시드기야는 철로 뿔을 만들어 왕 앞에 나아가서
"야웨께서 이 뿔로 아람 사람들을 찔러 진멸하라”고(왕상22:11) 했다고 한다.

이사야는 이집트와 에디오피아의 패망을 상징하기 위해 3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걸어다녔다(사20:3).

유다의 패망을 지켜 보았던 예레미야도 두 가지 상징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다.
하나는 허리에 동이는 베띠를 사서 유프라테스강의 바위 틈에 숨겼는데, 나중에 가보니 베띠가 썩어서 쓰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은 유다가 야웨의 사명을 다하지 못함으로 썩고 부패하여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된다는 상징적 행위였다(렘 19장).
다른 하나는 오지병을 깨뜨림으로써 이스라엘의 범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기 때문에 국가의 모든 것이 깨어진 오지병처럼 산산조각이 날 것임을 상징적으로 예고하고 있다.
에스겔은 예루살렘 거민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이기 위해
예루살렘 성벽을 뚫고 짐을 챙겨나가기도 했으며(겔12:12),
갑자기 예리한 칼을 가지고 자신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잘라내고 그것을 저울에 달아 셋으로 나누고
각 부분을 불로 태우고 칼로 쳐서 바람에 날렸다(겔 5장).
이것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멸망한 유다는 완전히 사라질 것임을 상징하는 행동이었다.
또한 에스겔은 390일 동안은 왼편으로만 누워자고, 40일 동안은 오른 편으로만 누워자는 괴팍스러운 행동도 한다(겔4장).
이것은 해석상의 난제가 있으나, 중요한 것은 오랜 기간동안 포로생활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 고멜과 비정상적인 결혼을 함으로서, 하나님으로 상징되는 호세아와 우상숭배에 젖어있는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고발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대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정상인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기이한 행동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예언자들의 이런 비이성적인 행동에 대해서, 그들이 심리적으로 비정상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의 심리적인 해석에 따르면,
호세아와 같은 윤리적 인물이 고멜과 같은 부정한 여인과 결혼했다는 것은 자기 학대증상이라고 했고,
에스겔의 상징적 행동은 정신분열증상의 일종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심리학적인 설명은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고대 근동 세계의 황홀경에 빠진 예언자들의 시각으로 본 오해일 뿐이다.
예언자들의 “비이성적인 행동”은 그들의 비정상적인 심리상태의 표현이 아니다.
이것은 예언자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가장 극적이고 실감있게 전하기 위한 방법상의 문제이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말로만 전한 사람들이 아니라, 때때로 이상한 행동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다시말해 예언자들의 상징적 행동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우리는 이런 충격적인 행위를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사용하는
“상징적 행동”(Prophetic Symbolicact)이라고 한다.


독일의 나치 정권아래에서 항거하던 본 훼퍼 목사님마틴 미네르 목사님은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본 훼퍼 목사님은 사형을 당했지만 마틴 미네르 목사님은 8년 옥고를 치루고 출옥한 후에 몇 차례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여러 차례 환상을 본 후에 "전쟁백서"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그 책의 내용 중에 이런 고백이 소개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열을 이루고 심판대 앞에 길게 늘어섰는데 한 사람씩 그 앞에 나가서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심판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 마틴 미네르 목사님의 차례가 되어 그 앞에 섰을 때 누군가 노려보며 마틴 목사님에게 항의하는 듯한 느낌이 있어 그 사람을 쳐다보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힛틀러이었다고 합니다.

힛틀러는 마틴 목사의 죄 때문에 내가 심판을 받게 되었다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독재 정권에 대한 항거를 하면서도 한 번도 힛틀러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지 않은 것이 죄라고 하더랍니다.

이런 환상을 경험하고난 후에 마틴 목사님은 힛틀러가 악독한 독재자가 된 것은 내가 그에게 전도하지 못한 죄 때문이라고 전쟁백서에서 고백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의 상징행동들(예레미야 13장, 16장, 18장)

1. 들어가는 말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첫째 부류는 문서 이전의 예언자

문서 이전의 예언자들을 구두 예언자라고 합니다.
구두 예언자에는 사무엘, 나단, 미가야, 엘리야, 엘리사등이 속한다.
이 예언자들의 특징은 그들의 선포가 따로 묶여진, 그래서 그들의 이름이 붙여진 예언서가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들은 문서 이전의 예언자라고 불리운다.

둘째 부류는 문서 예언자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예레미야, 에스겔과 같은 예언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의 신탁(선포)은 그들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문서로 모아졌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문서 예언자로 불리운다. 문서 예언자들은 본디 행동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몇몇 문서 이전의 예언자들이 해왔던 것 같이 어떤 왕에게도 기름을 붓지 않았으며, 더 이상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오직 말씀으로만 활동할 따름이다.1) 그러나 예언서 안에는 소수이긴 하지만 예언자들이 행동하는 것도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소수의 행위들은 상징행동에 해당된다. 이러한 상징행동들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일어나는 행위를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언자들의 상징행동은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우발적 행동이 아니고 의식적으로 실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행동에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여기에서는 먼저 예언자의 상징행동에 관한 개략적인 언급을 하고 특히 예언자 예레미야의 상징행동들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한다.


2. 예언자의 상징행동

문서 예언자들은 공공연한 상징행동(Symbolische Handlung/ A Symbolic Action)을 통해서 그들의 선포를 명백히 그리고 인상적으로 눈 앞에서 띄도록 행할 수 있었으며, 그럼으로써 그렇지 않으면 단지 들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부가적으로 볼 수 있게하고, 선고된 미래를 상징적으로 성취할 수 있었다.2) 다시 말해서 예언자의 상징행동은 드라마틱한 방법을 통해서 백성을 향한 야웨 하나님의 의도와 행위를 상징화하고 예언자의 선포를 확실히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3) 구약성서에는 약 30개의 상징행동들이 나타난다(왕상 19:19이하; 왕상 22:11; 호 1장; 3장; 사 7:3; 8:1-4; 20:1-6; 렘 13:1-11; 16:1-13; 18:1-6; 19:1-13; 27-28장; 32장; 43장; 51장; 겔 4-5장; 12장; 슥 6:9이하 등등).

상징행동양식은 세 가지 기본요소로 구성되어있다. 즉 첫째, 상징행동을 실행하라는 명령(Befehl), 둘째, 상징행동의 실행에 대한 보고(Bericht), 셋째, 상징행동의 의미(Deutung)로 구성되어 있다.4) 이 세 가지 구성요소가 모두 나타나기도 하지만, 첫째 요소인 명령과 두 번째 요소인 보고는 내용상 중복되기 떄문에 어느 한 요소가 생략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징행동은 고대 중동에서 폭넓게 알려져 있던 마술적 배경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5) 그런데 고대 중동의 마술적 행동은 어떤 의도대로 이끌어가는 그 자체의 힘이 있다. 그러나 예언자의 상징행동은 마술행위와 같이 자체적인 힘으로 미래적인 사건을 불러오는 효력을 발생하는 행위와는 다르다. 예언자의 상징행동이 보여주는 실제화의 효력은 이러한 행동을 명령하신 야웨의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점이 예언자의 상징행동과 마법사의 마술적 행동과 다른 점이다. 예언자의 상징행동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것은 현재의 삶에서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선취하여 선포하는 것이다. 즉, 미래사건의 선취모사(模寫)이다. 둘째, 상징행동은 그 행동자체 보다는 그 행동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 셋째, 상징행동은 의미(Sinn)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 그 자체안에 어떤 힘(Kraft)이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행동으로 묘사된 미래를 실제화 할 수 있는 힘이 그 자체안에 있지 않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있는 것이다. 넷째, 상징행동은 하나님의 행동을 소개하고 표현해줌으로 예언자의 메시지를 강화시켜주는 것이 주 목적이다.6)


3. 예레미야의 상징행동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구약성서에는 약 30여개의 상징행동들이 나오는데 이 가운데 약 절반에 가까운 분량이 예레미야서에 집중되어 있다. 렘 13장은 허리띠를 통한 상징행동, 렘 16장은 예레미야의 생애를 통한 상징행동, 렘 18장은 토기장이 비유를 통한 상징행동, 렘 19장은 깨진 항아리를 통한 상징행동, 렘 27-28장은 멍에를 통한 상징행동, 32장은 경작지 매입을 통한 상징행동, 43장은 큰 돌을 통한 상징행동, 51장은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하수속에 던져버리는 상징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예레미야의 상징행동은 대부분 심판의 의미를 갖고 있다. 위에서 나열한 상징행동 가운데 논쟁의 말(Disputationswort)에 해당되는 토기장이 비유의 상징행동(렘 18장)과 구원의 뜻을 지닌 경작지 매입의 상징행동(렘 32장)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상징행동들은 심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심판선포를 강화시켜주고 있다. 이 글에서는 지면관계상 모든 상징행동을 다룰 수 없어서 렘 13장과 렘 16장 그리고 렘 18장의 상징행동에 국한하여 그 의미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고 그 안에 담겨진 메시지를 찾아보려 한다.


4. 허리띠의 상징행동(렘 13:1-11)

렘 13장은 예레미야서에서 맨 처음으로 나타나는 상징을 보여준다. 이 상징행동은 렘 13:1-11에 보존되어 있다. 이 부분의 짜임새를 보면 다음과 같다 :


명령 / 1절 : 허리띠 매입과 그것을 허리에 띠도록 명령

보고 / 2절 : 명령대로 실행(붙들어 매어둠과 꼭 붙어있음)

명령 / 3-4절 : 강가, 바위틈에 숨기도록 명령

보고 / 5절 : 명령대로 실행(떨어져 나감)

명령 / 6절 : 허리띠를 다시 가져와 결과를 확인하도록 명령

보고 / 7절 : 명령대로 실행(떨어져 나감의 결과)

의미 / 8-11절 : 허리띠 상징행동의 의미


렘 13장의 상징행동은 이 짜임새에서 보여주는 바와같이 상징행동의 전형적인 3가지 구성요소가 잘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허리띠를 사서 허리에 두르고 물에 닿게하지 않도록 명령하신다. 예레미야는 명령대로 띠를 사서 허리에 둘렀다. 하나님의 말씀이 또 다시 예레미야에게 임하였다. 이번에는 허리에 두른 띠를 가지고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틈에 감추라 하신다. 예레미야는 말씀대로 그대로 행했다. 몇 날이 지난 후 하나님의 말씀이 또 다시 임하였다. 다시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 감추게 한 띠를 취하라고 명령하신다. 예레미야가 그 곳에 가서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취하니 그 띠가 썩어서 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한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여기까지가 1-7절의 내용이다. 하나님이 상징행동을 실행하라는 명령과 이러한 상징행동을 실행했다는 보고가 세 번에 걸쳐서 나오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유브라데강’이라는 지명이다. 이 지명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는 유프라테스강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있는 예루살렘에서 유브라데강은 약 1,000km 떨어진 거리에 있다.7) 여기에서 예레미야는 이 거리를 두 번씩이나 왕복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거리는 이후에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귀환공동체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 대상(隊商)과 함께 빠른 길로 왔을 때 약 넉 달 정도 걸렸다 :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칠년 오월이라 정월 초하루(아빕월 : 양력 3월 중순 이후)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아브월 : 양력 7월 중순 이후)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스 7:8-9). 이 본문에서 언급된 ‘유브라데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성서학자들은 상징행동을 “꿈(Traum)의 기록”8)으로, “환상(Vision)의 기록”9)으로, “비유이야기(Gleichnisgeschichte)”10)로, “드라마틱한 공연(a dramatic performance) 혹은 공연된 우화(enacted parable)”11) 등 서로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설명하는 주석가들은 본문의 유브라데강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예레미야가 실제적으로 유브라데강이라는 먼 곳까지 왕래를 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지명의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풀이할 수 있다. 이 ‘유브라데’의 히브리어 본문은 페라타(הꚓꙜ꘸)이다. 그런데 헬라어 번역인 아퀼라(Aguila) 역본에는 “파라(φαρα)”로 나와있다. 이 ‘파라’라는 장소는 예레미야의 고향인 아나돗에서 약 6km 떨어진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12) 이 지명은 수 18:23에서도 언급된다 : “아윔과 바라(הꙜ꘱)요 오브라”. 이곳은 현재의 ‘엔 파라('ēn fāra)’에 해당된다. 이 곳은 물이 풍부한 곳이며, 유브라데(페라 : תꙜ꘸)와 파라(הꙜ꘱)는 철자와 발음상 상호 매우 가깝다. 만약 ‘페라(유브라데)’가 ‘파라’를 잘못 기록한 것이라면 이 지명의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고 예루살렘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물이 풍부한 ‘파라’라는 곳에 가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상징행동을 실천한 것으로 볼 수 있다.13)

상징행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 행동의 뜻을 풀이해주는 본문이다. 렘 13장에서는 8-11절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상징행위에서 사용된 허리띠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대답은 11절에 나온다 :


“나 야웨가 말하노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하며 내 이름과 칭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허리띠와 관련된 상징행동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레미야 자신은 여기에서 하나님을, 허리띠는 유다 백성을 상징하고 있다.

첫 번째 명령과 보고에 따르면 허리띠를 허리에 띠도록 했을 때는 원래의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예레미야가 허리띠를 허리에 붙들어 맨 것처럼, 하나님이 유다백성을 꼭 붙들어 두었다. 하나님이 백성을 꼭 붙들어 매어두고 백성은 하나님께 꼭 붙어있으면 원래의 상태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네 하나님 야웨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 신 10:20),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 분과 함께 그 분의 길을 가는 것(“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 하나님 야웨를 사랑하고 그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복종하면”, 신 11:22)등이 바로 하나님께 붙어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붙어있는 사람들은 나라를 차지하게 된다 : “야웨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얻을 것인즉,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하수라 하는 하수에서 서해까지라”(신 11:23-24). 또한 번영을 누리게 된다 : “곧 저가 야웨와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야웨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야웨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왕하 18:6-7).

두 번째 명령과 보고에 의하면 허리띠는 예레미야의 허리에서 떨어져 나와 강가와 바위틈에 숨겨지게 되었다. 이것은 유다백성이 하나님의 품을 떠났음을 상징한 것이다. 그들이 떠난 이유는 9절에서 지적되고 있다. 바로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교만 때문이었다.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 “만군의 하나님 야웨께서 가라사대 주 야웨가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였노라 내가 야곱의 교만(개역은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 가득한 것을 대적에게 붙이리라 하셨느니라”(암 6:8).

세 번째 명령과 보고는 하나님의 품을 떨어져나간 백성의 결과를 묘사한다. 하나님에게 붙어있을 때 허리띠는 자신의 역할을 정상적으로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이후에는 “썩어서 쓸데없는” 허리띠가 되어버렸다. 유다백성은 하나님의 징벌로 인하여 썩은 허리띠와 같이 더 이상 아무 쓸데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이다. 그 원인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그것은 야웨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유다백성의 반역에 있는 것이다 :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강퍅한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의 쓸데없음 같이 되리라”(13:10).


야웨 하나님은 유다백성을 그의 몸에 매여있는 허리띠같이 귀하게 여겼지만 그들은 야웨를 배반하고 그의 뜻을 져버렸다(11절). 그래서 하나님은 유다백성을 썩어서 못쓰게 된 허리띠와 같이 썩게 할 것이다(9절).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자신에게 붙들어 매어두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되어 그 분께 꼭 붙어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본래적 모습을 유지할 수 있으며 더불어 생명을 얻는다 : “오직 너희의 하나님 야웨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신 4:4).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게 되면 반드시 징벌을 받게 되어있다(신 28:15-19). 하바드 대학교의 교수인 하비 콕스(H. Cox)는 작년에 내한하여 행한 한 강연에서 21세기의 세계는 성서가 말하는 “야웨 하나님(Yahweh-God)과 시장의 하나님(Market-God)”의 대결의 장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한 적이 있다. 즉 성서의 야웨 하나님과 시장경제가 지배하는 돈이라는 맘몬신의 대결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런 시대는 먼 미래의 것이라기 보다는 바로 우리가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약성서가 영적인 하나님인 야웨 하나님과 물질적인 신인 바알신과의 갈등의 역사였다면 오늘날도 그 기본구도가 유지되어 바알의 숭배자들인 물질숭배자와 야웨의 백성인 기독교인의 대결의 역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언자 엘리야는 백성을 향하여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야웨와 바알)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하며 그들을 질타한 적이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물질만능주의라는 또 다른 바알신 앞에 서있다. 야웨냐 바알(돈)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결단은 옛날에만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오늘의 한국교회에게도 요구된다.


5. 예레미야의 생애를 통한 상징행동(렘 16:1-13)

렘 16장은 예레미야의 상징행동가운데 두 번째의 것이다. 렘 15:17에서 예레미야는 “내가 기뻐하는 자의 회에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을 인하여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라며 탄식하고 있다. 렘 16장은 그가 어떻게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기록해주고 있다. 예레미야의 상징행동이 묘사되어있는 렘 16:1-13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짜여져 있다 :


1-4절 : 결혼금지(첫번째 상징행동)

   2절 : 명령 “아내를 취하지 말라”

   3-4절 : 의미(심판의 말)

5-7절 : 조문금지(두번째 상징행동)

   5a절 : 명령 “상가에 들어가지 말라”

   5b-7절 : 의미(심판의 말)

8-9절 : 잔치참여금지(세번째 상징행동)

   8절 : 명령 “잔치집에 들어가지 말라”

   9절 : 의미

10-13절 : 심판의 이유


이 본문에서는 세 가지 상징행동이 나온다. 각각의 상징행동에는 명령과 의미라는 두 가지 요소만 반복되어 나오고 있다. 실행에 대한 보고는 생략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명령대로 실행되었음이 자명하기 때문에 생략된 것 같다.

첫 번째 상징행동(1-4절)을 보면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결혼하지 말 것과 자식을 두지 말 것을 명령하신다. 고대 이스라엘 풍습에 의하면 결혼과 자녀를 낳는 일은 정상적이고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독신이라는 것은 거의 전례가 없기 때문에 구약성서에서는 이를 표현하는 히브리어 단어조차 없다.14) 또한 자녀는 축복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자녀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이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녀가 없거나 자녀를 잃게되는 것은 심판이나 징벌로 이해되었다 : “한 날에 홀연히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 네가 무수한 사술과 많은 진언을 베풀지라도 이 일이 온전히 네게 임하리라”(사 47:9).

예레미야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참으로 가혹한 것이었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명령은 당신의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언직을 수행하는 일에 가족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내려진 것이 아니다. 그의 전 삶을 당신의 메시지로 만들려고 끌어들인 것이다.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여 음란한 이스라엘에 대한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삶을 통하여 대변하듯이 예레미야도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뜻 즉, 심판이라는 유다의 미래운명을 보여주었다. 예레미야의 독신생활은 유다의 미래 삶을 보여주는 표시이다. 이것은 유다 백성들이 곧 맞게될 상황 즉, 결혼을 할 수 없게되고 자식도 없게되는 가혹한 현실을 미리 묘사한 것이다 :


“이곳에서 생산한 자녀와 이 땅에서 그들을 해산한 어미와 그들을 낳은 아비에 대하여 나 야웨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들은 독한 병으로 죽고 슬퍼함을 입지 못하며 매장함을 얻지 못하며 지면의 분토와 같을 것이며 칼과 기근에 망하고 그 시체는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되리라”(16:3-4).


두 번째 상징행동(5-7절)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상가에 들어가지 말라. 가서 통곡하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여기부터는 더 이상 예레미야 개인의 일이 아니고 그의 사회적 관계들도 포함된다. 상을 당한 초상집을 조문하지 않는 것은 매우 상스러운 처신으로 간주된다. 욥이 자식들의 죽음으로 상을 치루게 되었을 때 그의 친구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친구 욥에게 조문을 와서 7일을 보낸 것도 이러한 풍습에서 기인한 것이다(욥 2:11-13). 조문금지의 이유가 5절 하반절에 언급된다 :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인자와 긍휼을 제 함이니라”. 이 말씀은 구약성서에서 나오는 가장 가혹한 말씀중의 하나이다. 유다는 더 이상 ‘내’백성이 아니라 ‘이’ 백성이다. 호 1:9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에서 내 백성이 아니라는 표현이 심판의 의미로 나온 것과 같은 맥락에서 쓰인 것이다. 유다와 하나님의 밀접한 관계는 끝장났고 일정한 거리감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평강, 인자 그리고 긍휼이라는 야웨의 구원을 위한 전제들이 제거되었다. 예레미야의 조문금지와 장례풍습의 금지행동은 유다의 임박한 심판상황을 앞서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유다는 곧 심판받아 모두 죽게되어 그들을 묻어줄 사람도, 장례를 치러줄 사람도, 조문할 사람도 없을 정도가 될 것이다 :


“큰 자든지 작은 자든지 이 땅에서 죽으리니 그들이 매장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는 자도 없겠고 자기 몸을 베거나 대머리 되게하는 자도 없을 것이며 슬플때에 떡을 떼며 그 죽은 자를 인하여 그들을 위로하는 자가 없을 것이며 그들이 아비나 어미의 상사를 위하여 위로의 잔을 그들에게 마시울 자가 없으리라”(16:6-7).


마지막으로 세 번째 상징행동(8-9절)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잔치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앉아 먹거나 마시지 말라고 하신다. 잔치참여를 금지하는 상징행동은 인간생활에 활력을 주고 기쁨을 주는 일들이 모두 사라지게 됨을 미리 보여준다. 이러한 심판이 “네 목전, 네 시대에”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말은 심판의 임박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


“만군의 야웨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 같이 말하노라. 보라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를 내가 네 목전, 네 시대에 이 곳에서 끊어지게 하리라”(16:9).


10-13절은 왜 이러한 무시무시한 심판이 일어나게 되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너희 열조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너희가 너희 열조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행하고 나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서 너희와 너희 열조의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할 것이다 너희가 여기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함이라”(16:11-13).


예레미야는 결혼을 할 수도 없었고, 미래의 희망이요 축복의 상징인 자녀를 갖을 수도 없었다. 인간적으로 고독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조문도 할 수 없으며, 잔치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예레미야는 참으로 별난 삶을 살았던 것이다. 물론 이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곧 유다의 미래를 보여주는 표시(Zeichen)였다. 메신져 예레미야와 그의 메시지는 하나였다. 말씀대로 살고, 삶으로 외치는 자가 바로 예레미야였다.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였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전 삶을 바쳐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였다. 그의 삶도 하나님의 메시지를 위한 도구로 쓰임받도록 한 것이다. 예언자의 존재와 삶 자체는 하나의 선포요 메시지인 것이다.

한국교회는 물론 한국사회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외침에는 어느정도 식상해있다. 진리는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데 진리대로 사는 자는 쉽게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그런 사람을 보고싶어 한다. 미 6:8 “야웨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의 미가의 외침같이 하나님도 공의와 인자와 겸손한 삶을 살라고 말로 요구하는 자가 아니라 그렇게 사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한국교회여, 이제는 말로만 외치는 자가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되자! 먼저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자들의 삶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로 인정되기를 기도한다. 설교는 더 이상 말이 아니라 삶이다.


6. 토기장이 비유의 상징행동(렘 18:1-6)

앞에서 살펴본 허리띠와 예레미야의 삶을 통한 상징행동이 심판선포와 관련된 것이었다면 여기서 검토할 토기장이 비유의 상징행동은 논쟁의 말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부분은 보통 1-12절을 한 단위로하여 취급된다. 그러나 좀더 자세하게 분석하면 1-6절과 7-12절은 각기 다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1-6절을 한 단위로 보고 그 안에 담겨진 상징행동을 주목해 보기로 한다. 이 부분의 짜임새는 다음과 같다 :


1-2절 : 명령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3-4절 : 보고와 행동의 관찰

5-6절 : 의미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이 상징행동은 일반적으로 상징행동이 갖고있는 전형적인 3가지 구성요소(명령, 보고, 의미) 모두를 갖추고 있다. 야웨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야웨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그 곳에서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하신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한다. 그는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작업을 눈여겨 관찰한다. 토기장이는 그릇을 만들어 놓고 그 그릇에 흠집이 있으면 자기 마음에 드는 그릇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되풀이 하였다. 그 때에 야웨께서 이러한 행동이 갖는 의미를 밝혀주신다 :


“나 야웨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6절).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는 분부만 받았다. 그가 그곳에서 무엇을 관찰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평범한 일상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새롭게 깨닫는다. 토기그릇을 만드는 세속의 공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계시의 장소가 된다. 토기장이는 진흙이라는 재료의 주인이다. 그는 자기가 만드는 토기그릇의 형체가 마음먹은대로 구워져 나오지 않으면 그것을 깨뜨려 부수고 다시 만들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당신 백성에 대해 주권(Souveränität)을 가지시고 그들을 만드실 수도 있고 없애실 수도 있다. 진흙과 토기장이는 각각 유다백성과 야웨 하나님을 상징한다. 토기장이가 진흙에 대하여 주권을 가지고 있듯이 야웨 하나님도 당신의 백성에 대하여 절대적인 주권을 갖고 계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비유하는 또 다른 예언서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고 있다 :


“질 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사 45:9-10)


렘 18:6의 핵심부분인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는 수사학적인 의문문 형식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표현은 야웨의 주권에 대하여 회의적인 청중을 전제로 하며 논쟁조의 질문을 사용하여 그들을 설득시키려고 동원된다. 이런 예언자의 어투는 ‘논쟁의 말(Disputationswort)’라고 불린다. 여기에서 이 논쟁의 말은 야웨의 절대주권과 절대자유권을 강조하고 있다.

예레미야가 이 상징행동에서 깨달은 바과 같이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다. 사람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손안에 달려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토기장이라면 우리는 진흙에 불과하다 :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사 64:8). 토기장이의 눈에 흠이 포착되거나 그의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토기그릇은 깨어져 내버림을 당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때 진흙은 왜 그렇게 하느냐고 토기장이에게 항의 하지 않는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 앞에서 한 덩어리의 진흙에 지나지 않는 우리 모두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엄위하신 주권에 겸허한 자세로 무릎을 꿇어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이해득실에 비추어 너무나 쉽게 그리고 경솔하게 하나님을 판단하려든다. 진흙이 토기장이의 마음과 뜻을 모두 알 수 없듯이 사람도 하나님의 깊은 뜻과 하시는 일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 “야웨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 하나님의 일은 이해한 다음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고 실천하다보면 깨달아지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머리와 말(이해)보다는 손과 발(순종)이 더 빨라야 한다.

예언자의 상징행동에 대한 개략적인 검토를 하였고, 이 가운데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예레미야의 상징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다.
예레미야의 상징행동 중에서도 지면 관계상 허리띠의 상징행동(렘 13:1-11),
예레미야의 생애를 통한 상징행동(렘 16:1-13)
토기장이 비유의 상징행동(렘 18:1-6)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은 허리띠와 같이 하나님께 붙들린 상태에서 그 분께 꼭 붙어있어야 함을 배웠고, 삶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메시지로 살아야함도 자각했으며, 마지막으로 우리는 토기장이이신 하나님 앞에서 진흙과 같은 존재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한시도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점도 깨닫게 된다.


09-13-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머리털과 수염을 깎으라(에스겔 5:1)

인자야 너는 날카로운 칼을 취하여 삭도를 삼아 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서 저울에 달아 나누었다가.
Now, son of man, take a sharp sword and use it as a barber's razor to shave your head and your beard. Then take a set of scales and divide up the hair.

에스겔 1장에서는 네 생물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네 생물들의 모양은 사자(왕이신 예수, 마태복음), 황소(종으로 오신 예수, 마가복음), 사람(인자가 되신 예수, 누가복음), 독수리(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 요한복음)라고 합니다.

에스겔 2장에서는 두루마리 책이란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두루마리 책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들이 안과 밖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이 받을 징계라고 합니다.

에스겔 3장에서는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은 곧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 명령을 완전하게 숙지한 후에 패역한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에스겔 4장에서는 세 가지 징조의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세 가지 징조는 예루살렘 성이 포위 될 것과 성안에서 먹을 것과 왼쪽으로 누워 390일, 오른 쪽으로 누워 40일을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북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한 햇수남 유다 므낫세 왕이 우상숭배를 행했던 햇수로 결국은 애굽에서 430년이란 긴 시간동안 노예생활을 상징합니다.

에스겔 5장에서는 머리털과 수염을 깎으라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선지자 에스겔에게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서 1/3은 성읍에서 불로 태우고, 1/3은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1/3은 바람에 날려보내라고 합니다.

"머리털과 수염을 깎으라(shave your head and your beard)"

머리털(7218) 로쉬( rôʼsh) רֹאשׁ 

1. 우두머리,   2. 최고의 것,  3. 방백
발음 / 로쉬[ rôʼsh ]
어원 / 복수 רָאשִׁים, ‘흔들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한 듯함
관련 성경  / 근원(창2:10, 잠8:26), 머리(창3:15, 수2:19, 에2:17), 봉우리(창8:5), 꼭대기(창11:4, 수15:9, 삿9:7), 위(창28:18, 출26:24), 어른(출6:14,25, 대하19:11), 산꼭대기(출17:10, 민20:28), 시작(출12:2), 우두머리(출18:25, 삼하23:8, 느10:14), 상등(출30:23), 본래 물건(레6:5), 명수(名數)(민1:2), 족장(수14:1, 느7:70), 계수(민1:49), (원래의) 사람(민5:7), 천부장(민10:4), 월삭(민10:10), 지휘관(민14:4, 신20:9), 좋은 산물(신33:15), 지도자(수22:14), 떼(삿9:34, 삼하2:25), 상석(삼상9: 22), 아버지(삼하3:8, 왕상2:44), 마루턱(삼하16:1), 으뜸(삼하22:44, 대상9:34), 끝(왕상8:8, 대하5:9), 높이(왕상21:9), 장자(대상26:10), 반장(대상26:12), 선두(대하20:27), 정수리(스9:6), 머릿돌(시118:22), 강령(시119: 160), 가장(시137:6), 가난한 자(잠13:23), 처음(사41:26), 모퉁이(사51:20, 나3:10), 첫째 달(겔40:1). [동] 계수하다(민31:49), 시작하다(삿10:18), 내밀다(에5:2), 높다(욥22:12, 잠8:2), 높아지다(욥24:24), 보배롭다(시139:17), 밝다(전2:14), 귀하다(아4:14), 창조되다(사40:21), 앞서다(미2:13).
구약 성경 / 600회 사용

수염(2206) 자칸()  זָקָן 

1. 턱수염,  2. 레위기 13:29, 3. 30
발음 / 자칸[ zâqân
어원 / 혼성. 220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수염(레 13:29, 삼하 10:5, 겔 5:1)
구약 성경 / 19회 사용


깎으라(5674) 아바르()  עָבַר 

1. 건너다,  2.창세기 31:21, 3. 여호수아 3:11
발음 / 아바르[ ʽâbar ]
관련 성경  / 지나다(창15:17, 수15:3. 삼상14:23), 오다(창18:5), 건너다(창32:10, 삿3:28), 나아가다(창33:3, 삿19:12), 다니다(출12:12, 왕상18:6), 두루 다니다(출12:23, 수3:2), 생기다(민5:14), 건너가다(민32:21, 수4:13), 범하다(신26:13,사24:5), 통과하다(민20:21, 신29:16, 왕하6:26), 행진하다(신2:8), 어기다(수7:11, 삿2:20), 이르다(수15:4, 삿9:26), 건너오다(삼하19:40), 따르다(삼하20:13), 왕래하다(욥15:19), 가다(삼상26:13, 왕상22:24), 넘치다(시38:4, 104:9), 떠나다(아3:4, 렘11:15), 휩쓸다(시42:7), 잠기다(시124:4), 물러가다(아5:6,사31:9), 헤매다(사8:21), 악하다(렘5:28), 잡히다(렘23:9), 넘다(렘48:32), 통행하다(사33:21, 겔39:15), 나아오다(단11:10), 메우다(호10:11), 없어지다(렘8:13, 나1:12), 받다(나3:19), 참여하다(신29:12), 나오다(삼하15:24), 멸망하다(욥33:18), 내려가다(욥33:28), 용서하다(잠19:11), 범람하다(사54:9), 상달하다(애3:44), 들어가다(수4:5), 순행하다(겔9:4,5), 순찰하다(창41:46), 맡기다(신24:5), 대다(민6:5), 앞서다(삼상9:27, 삼하18:23), 보내다(삼상26:22), 마치다(삼하11:27), 두루행하다(삼하20:14), 배반하다(왕하18:12), 출정하다(대하21:9), 변개하다(에1:19), 폐하다(에9:27), 마르다(욥6:15), 당하다(욥13:13),망하다(욥36:12), 넘어가다(욥14:5), 범죄하다(시17:3), 동행하다(시42:4), 면하다(시141:10), 거스르다(잠8:29), 수리하다(사40:29),제거함을 당하다(욥34:20), 돌아오다(사45:14), 순복하다(렘2:20), 진멸하다(렘8:13), 주다(겔48:14), 통용하다(창23:16, 왕하12:4), 들다(출30:13), 거역하다(대하24:20), 불려가다(사29:5, 렘13:24), 옮기다(창47:21, 삼하3:10), 새끼를 배다(욥21:10), 돌리다(출13:12, 민27:8), 밀다(민8:7), 가지다(수4:3), 인도하다(수7:7), 사하다(삼하12:13), 끌어내다(삼하12:31), 거두다(에8:2), 잃다(렘46:17),깎다(겔5:1), 사르다(겔23:37), 제거하여 버리다(욥7:21, 슥3:4), 반포하다(대하30:5),제거하다(에8:3), 돌이키다(시119:37), 공포하다(출36:6, 스10:7), 소리를 내다(레25:9),쫓아내다(왕상15:12), 벗다(욘3:6), 범죄하게 하다(삼상2:24), 분내다(시78:62), 노하다(시78:21, 89:38), 진노하다(신3:26), 방자하다(잠14:16), 간섭하다(잠26:17). [부] 빨리(삼하17:16). [명] 행인(잠 9:15), 즙(아 5:5, 13), 행인(사 33:8).
구약 성경 / 547회 사용

털을 깎고, 불사르는 일로 표시된 멸망의 징조(1-4절)

유다 멸망에 대한 네 번째 상징으로 삭도로 에스겔의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서 삼분지 일은 성읍 안에서 불사르고 삼분지 일은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다른 삼분지 일은 바람에 흩으며 옷자락에 싼 것은 불사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징적인 행동은 유다와 예루살렘 성읍이 적군에 의해서 함락되어 집들이 불살라지고 사람들이 온역과 칼에 죽으며 포로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질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보다도 도리어 악하게 된 까닭에, 이방인 앞에서 처벌될 것(5-8절)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패역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택하신 족속이요 제사장 나라였습니다.
그들은 열방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또한 선택 된 백성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의무마저 저버리고 오히려 이방인보다 더한 악을 행했습니다.

영적 지도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열방의 능욕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그 사명을 바로 감당하지 못할 때 멸시와 능욕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기근, 온역(유행병, 전염병), 칼 기타의 재난(9-17절)

여호와께서 여러 가지 재앙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심판하심에 있어서 그 화와 분이 풀려 아주 시원하다고 하지만, 사실 이 표현은 사랑 많으신 하나님의 성품과는 도무지 맞지 않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역설적 표현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을 향한 심판을 몹시 안타까워하고 슬퍼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 후반부에는 하나님의 진노, 곧 공의가 만족 된 후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이 반드시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성도들 또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상을 구원을 길로 인도해야 할 막중한 시대적  사명과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만일 이와 같은 사명과 의무를 바르게 감당하지 못하면 상응하는 징계를 받아야 하므로 오늘도 맡겨진 본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이제 본문을 적용할 수 있는 구절의 핵심(PS) 의미를 돕는다면, 우선 1-4절에서 죄를 짓고도 아파하지 않는 자는 더 큰 아픔을 당할 것입니다.

 

- 그리고 5-7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무조건적 은혜의 결과입니다.

 

- 한편 성도가 세상일에 얽매여 산다면 세상 사람보다 더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 그리고 8-9절에서 죄를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스스로 서는 것입니다.

 

- 한편 성도는 범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초해 이해하는 눈을 소유해야 합니다.

 

 

◗ 결론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말로는 처절한 죽음뿐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 이것을 볼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 말씀을 준행하여야 하겠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이 아닌 물질과 우상을 숭배하고 말씀을 지키지 못하였을지라도 속히 회개해야만,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이다. (에스겔 5장 5-7절)

◈ 본 구절의 핵심(PS) 의미를 돕는다면;

▶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무조건적 은혜의 결과입니다.

 

- 본문 5-7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열방의 중심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에서 생각하여 볼 수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을 열방의 중심으로 택하신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세속 역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세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려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 땅 덩어리가 크다든가, 인구가 만다든가, 경제력이 막강하다든가, 군사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든가 해야 합니다.

 

- 가령 오늘날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면, 미국을 꼽는데 아무도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가히 세계 최대의 강대국입니다.

 

- 현재 이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이렇게 세속 역사에서 세계의 중심이 되려면 그들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 이러한 관점에서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세계의 중심이 된 것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세계의 중심이 될 만한 어떠한 객관적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이스라엘은 본래 애굽에서 노예로 생활하던 소수 민족이었으며, 또한 그들은 세계 열방의 다른 민족들과 비교하여 볼 때 지극히 보잘 것 없는 가장 작은 민족이었습니다.

 

-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객관적인 면에서 세계의 중심이 될 만한 어떤 조건도 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세계의 중심으로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 이스라엘이 세계의 중심이 될 만한 인간적인 조건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 하지만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무조건적 은혜로 세계의 중심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인간적으로 볼 때, 아무런 조건도 가지지 못한 이스라엘을 세계의 중심으로 삼으신 데에는 그만한 뜻과 이유가 있었습니다.

 

-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 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달아 하나님께 절대 순복하며 그들에게 부여한 사명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 된 것을 마치 자신들의 탁월함과 우월함 때문이라고 착각한 나머지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물론 배타적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열방을 구원하는 구속사의 통로로서의 사명을 망각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여 세계의 중심으로 삼으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을 구속사의 중심을 삼으셨으며, 이 또한 우리의 인간적인 조건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일찍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고린도전서 1장 26-29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다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은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습니다.

 

- 그렇다면 오늘 이 아침에 성령님께서 묻는 것은 “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인간적으로 자랑하고 내 놓을만한 것이 있는지? 하나님께서 무능한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있는지? 그래서 오늘도 성령님은 내가 어떤 자세로 어떻게 살아내시기를 원하시는지? 묻고 있으니 스스로 자문자답 해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무조건적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존재 이유입니다.

 

-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무조건적 은혜로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구속사의 중심이 되었으니 우리는 하나님께 택함 받은 것과 하나님 안에 있는 하늘의 무한한 자원을 누리는 축복에 대해 절대 교만할 수 없습니다.

 

- 한편 성도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에 얽매여 살아서는 안 될 것이며, 모든 것 주신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고 힘들고 어려울 때에 믿는 자의 빛과 소금의 선한 영향력으로 세상 속에 존재 가치를 드러내어야 할 것입니다.

 

- 마땅히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에 감사로 찬양하며 섬기는 자요, 하늘 본향에 들어갈 자로 이 세상에 마음을 두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두고 천국 본향을 소망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성도가 됩시다.

 

- 그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악한 세상에서 미혹하며 탐욕을 고집하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드리는 성도란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아무런 조건도, 자격도 없는 우리를 선택하셔서 복된 구원의 역사에 중심에 서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감격하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는 신앙이 됩시다.

 

- 그러므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의 말씀과 성령에 지시에 따라 겸손하게 순복함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며, 온 마음과 정성과 생명을 다하여 주를 사랑하며, 헌신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것을 결단하는 저와 주님의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에스겔 5장 강해 포로들의 축복과 소망
에스겔 5장 1-에스겔 5장 17
요절 에스겔 5장 1 너 인자야 너는 날카로운 칼을 가져다가 삭도로 삼아 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서 저울로 달아 나누어 두라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갈 때 절망합니다. 노예는 도덕성이 없습니다. 주인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옵니다. 죽이라고 하면 죽이고 죄를 지으라고 짓습니다. 노예생활을 오래하면 자신의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식민지 문화가 있습니다. 이들은 도덕의식이 희박합니다. 운전하다 보면 담배꽁초를 창문 밖으로 던집니다. 창문에서 담뱃재를 텁니다. 침을 뱉습니다. 이런 것이 식민지 문화요 노예문화입니다. 식민지 땅은 더럽히면 더럽힐수록 좋은 것입니다. 내 땅아 아니고 주인은 나쁜 주인입니다. 바벨론 포로는 도덕성이 없고 신앙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원망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이 없습니다. 그들은 무책임하고 원망하고 불평으로 가득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스겔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이 왜 망했는지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에스겔은 괴롭고 답답한데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수염을 깎으라)

“1. 너 인자야 너는 날카로운 칼을 가져다가 삭도로 삼아 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서 저울로 달아 나누어 두라 2. 그 성읍을 에워싸는 날이 차거든 너는 터럭 삼분의 일은 성읍 안에서 불사르고 삼분의 일은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또 삼분의 일은 바람에 흩으라 내가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하나님은 인자 에스겔을 부릅니다. 유다 사람들은 머리를 기르고 수염을을 기릅니다. 그들은 까맣고 긴 옷을 입습니다. 그러면서 일을 합니다. 에스겔은 날카로운 칼을 한 자루 가져 와서, 그 칼을 삭도로 삼아 네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고, 그것을 저울로 달아 삼등분으로 나누어 놓으라 하십니다. 저울을 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유다 사람들에게 수염을 깎는 것은 슬픔, 수치, 전쟁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예루살렘 성읍의 포위 기간이 끝난 다음에 있을 포퍼먼스를 하라고 하십니다. 그 털의 삼분의 일을 성읍 한가운데서 불로 태웁니다. 또 삼분의 일은 성읍 둘레를 돌면서 칼로 내려칩니다. 또 삼분의 일은 바람에 날려 흩어지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칼을 빼어 들고, 그 흩어지는 것들을 뒤쫓아 가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수염을 자르는 것은 유다에 남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칼에 의한 심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이 이스라엘 족속에게로 나오리라)

“3. 너는 터럭 중에서 조금을 네 옷자락에 싸고 4. 또 그 가운데에서 얼마를 불에 던져 사르라 그 속에서 불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로 나오리라” 에스겔은 그 수염들 가운데서 조금을 남겨 두었다가 에스겔 옷자락으로 싸매라고 하십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땅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입니다. 에스겔은 또 수염들 가운데서 얼마를 꺼내서 불 한가운데 집어 던져서 살라 버려라고하십니다. 그 속에서 불이 나와서 온 이스라엘 족속에게 번질 것이라하십니다. 유다 사람은 이방인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말씀에 불순종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도 결국은 심판하십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잊고 혼혈족이 되어 버립니다. 예루살렘에 살아남은 자들은 불순종한 자들이요 더욱 큰 심판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질병과 칼에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포로들은 그 시대에 남은 자들입니다. 바벨론에 있는 사람들은 선택된 사람들 중에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포로된 사람들만 신앙이 있습니다. 이들이 선민의 순수성을 지킵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에 의해서 지켜집니다. 바벨론 포로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규례를 버렸습니다)

“5.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되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에 두어 나라들이 둘러 있게 하였거늘 6. 그가 내 규례를 거슬러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며 내 율례도 그리함이 그를 둘러 있는 나라들보다 더하니 이는 그들이 내 규례를 버리고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7.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 요란함이 너희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보다 더하여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내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인들의 규례대로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왜 망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주 하나님이 이것이 예루살렘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읍을 이방 사람들 한가운데 두고, 나라들이 둘러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계시고 예루살렘을 통하여 세계를 통치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세계 중에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성읍은 다른 민족들보다 더 악하여 하나님 규례를 거스렸습니다. 둘러 있는 이방 사람들보다 더 하나님 율례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규례를 거역하고, 율례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십계명의 규례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순수성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은 그들을 둘러 있는 이방 사람들보다 더 거스르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 율례를 따르지도 않고, 하나님 규례를 지키지도 않았다고 바벨론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심지어는 그들을 둘러 있는 이방 사람들이 지키는 규례를 따라 살지도 않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있는 사람들에게 유다가 왜 망했는지를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수성을 지켜야합니다. 에스라는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베론 포로에서 돌아갔을 때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도록 도왔습니다.

(예루살렘에 벌을 내리십니다)

“8.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너를 치며 이방인의 목전에서 너에게 벌을 내리되 9. 네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내가 전무후무하게 네게 내릴지라 10. 그리한즉 네 가운데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잡아먹고 아들이 그 아버지를 잡아먹으리라 내가 벌을 네게 내리고 너희 중에 남은 자를 다 사방에 흩으리라” 여호와 주 하나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힌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하나님의 말씀에 불손종한 자들을 대적하십니다. 그리고 뭇 이방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벌을 내리십니다. 이스라엘의 온갖 역겨운 일들 때문에,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는 없을 그런 심판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일으키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바벨론에 남은 자들은 우상을 섬기지 말고 말씀에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극심한 기근을 겪습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자식을 잡아 먹고, 자식이 아버지를 잡아 먹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벌을 내리고,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을 사방으로 흩어 버릴 것입니다.

(성소를 더렵혔으므로 심판하십니다)

“11.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내 성소를 더럽혔은즉 나도 너를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미약하게 하리니 12. 너희 가운데에서 삼분의 일은 전염병으로 죽으며 기근으로 멸망할 것이요 삼분의 일은 너의 사방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삼분의 일은 내가 사방에 흩어 버리고 또 그 뒤를 따라 가며 칼을 빼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의 삶을 두고 유다가 온갖 보기 싫은 우상과 역겨운 일로 여호와 성소를 더럽혀 놓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다사람들은 성소에 이방신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돼지피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을 망하게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진실로 그들을 넘어뜨리겠고, 그들을 아끼지 않겠으며,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지도 않으십니다. 그들 가운데서 삼분의 일은 전염병에 걸려 죽거나 굶어 죽을 것입니다. 또 삼분의 일은 성읍의 둘레에서 칼에 맞아 쓰러질 것입니다. 나머지 삼분의 일은 하나님이 사방으로 흩어 버리고, 하나님은 칼을 빼어 들고 그들의 뒤를 쫓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있는 사람들에게 유다가 성전을 더럽혀서 망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성전을 그리워해야합니다. 그들은 나중에 돌아가 성전을 건설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받는 길은 성전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야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느헤미야와 스룹바벨이 예루살렘에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건축하기 전에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의 성전을 지어야합니다. 교회의 부흥과 경제 성장은 정비례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무시하고 폐허가 되면 그 나라도 헐어버렸습니다. 성전을 제건하며 신앙을 재건할 때 그 나라도 서게 됩니다.

(하나님이 분을 푸십니다)

“13.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을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가라앉으리라 내 분이 그들에게 다한즉 나 여호와가 열심으로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 14. 내가 이르되 또 너를 황무하게 하고 너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 중에서 모든 지나가는 자의 목전에 모욕 거리가 되게 하리니 15. 내 노와 분과 중한 책망으로 네게 벌을 내린즉 너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네가 수치와 조롱 거리가 되고 두려움과 경고가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분을 다 쏟아야, 그들에게 품었던 분이 풀립니다. 하나님 마음도 시원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분을 그들에게 다 쏟을 때에, 그들은 비로소 여호와 주님이 질투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말하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또 여호와가 둘러 있는 이방 사람 가운데서 유다를 폐허 더미와 웃음거리로 만들어, 지나다니는 사람마다 유다를 비웃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분과 노를 품고 무서운 형벌을 내리면서 유다를 심판하십니다. 그때에 유다를 둘러 있는 이방 사람에게 유다가 수치와 조롱을 당합니다. 유다가 받은 심판은 이방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경고가 될 것입니다. 여호와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독한 화살을 보내십니다)

“16. 내가 멸망하게 하는 기근의 독한 화살을 너희에게 보내되 기근을 더하여 너희가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것이라 17. 내가 기근과 사나운 짐승을 너희에게 보내 외롭게 하고 너희 가운데에 전염병과 살륙이 일어나게 하고 또 칼이 너희에게 임하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가 유다에게 쏘는 기근의 화살과 재난의 화살, 곧 멸망시키는 화살은, 유다 사람들을 죽이려고 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근을 더 심하게 하여, 그들이 의지하는 빵을 끊어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기근과 사나운 짐승들을 보내어, 유다 자식들을 빼앗아가도록 하십니다. 유다는 전염병과 유혈사태를 그들 한가운데서 겪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다에게 전쟁이 들이닥치게 하십니다. 여호와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재앙은 은총입니다)

첫째 유다 사람들이 노예살이 하는 것은 특별한 은총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바벨론에서 고통하는 사람들 중에서 은총을 입은 자들입니다. 둘째 그들은 규례를 지키지 않아서 이 노예살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규례를 지켜야합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파괴한 죄를 세밀히 지적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예수님을 보내시고 성령을 주셔서 규례를 지키는 자로 변화시키십니다. 그들은 성전을 사모합니다. 그들은 먼저 마음 속에 성전을 짓습니다. 그들은 포로되어 가서 성전을 사모합니다. 다니엘은 성전을 보고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 소원을 들어주시고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들이 성전을 짓고 말씀을 가르치고 준행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들에게 네가 처한 처지가 복되다고 하십니다. 노예들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종말적인 긍휼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길이 있고 소망이 있다고 하십니다.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설계하라고 하십니다.
에스겔 5장 강해 포로들의 축복과 소망
에스겔 5장 1-에스겔 5장 17
요절 에스겔 5장 1 너 인자야 너는 날카로운 칼을 가져다가 삭도로 삼아 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서 저울로 달아 나누어 두라
에스겔 5장 강해 끝입니다.




독일의 나치 정권아래에서 항거하던 본 훼퍼 목사님마틴 미네르 목사님은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본 훼퍼 목사님은 사형을 당했지만 마틴 미네르 목사님은 8년 옥고를 치루고 출옥한 후에 몇 차례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여러 차례 환상을 본 후에 "전쟁백서"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그 책의 내용 중에 이런 고백이 소개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열을 이루고 심판대 앞에 길게 늘어섰는데 한 사람씩 그 앞에 나가서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심판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 마틴 미네르 목사님 차례가 되어 그 앞에 섰을 때 누군가 노려보며 마틴 목사님에게 항의하는 듯한 느낌이 있어 그 사람을 쳐다보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힛틀러이었다고 합니다.

힛틀러마틴 목사의 죄 때문에 내가 심판을 받게 되었다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독재 정권에 대한 항거를 하면서도 한 번도 힛틀러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지 않은 것이 죄라고 하더랍니다.

이런 환상을 경험하고난 후에 마틴 목사님은 힛틀러가 악독한 독재자가 된 것은 내가 그에게 전도하지 못한 죄 때문이라고 전쟁백서에서 고백했다고 합니다.

독일에 마틴.미네르라는 목사님은 목사가 되기 전 정치가가 되려고 야망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그는 한 가지 꿈을 꾸게 되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심판에 서있었다.
주님께서 그중 한 사람에게 '너는 네가 한 일을 변명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나를 반대하고 욕하는 사람만 있었지 나에게 예수님에 대해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읍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꿈을 7일동안 계속해서 꾸었다.
결국 마네르는 정치가로서의 야망을 포기하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09-12-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징조가 되리라(에스겔 4:3)

또 전철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성을 삼고 성을 향하여 에워싸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Then take an iron pan, place it as an iron wall between you and the city and turn your face toward it. It will be under siege, and you shall besiege it. This will be a sign to the house of Israel.

"징조가 되리라(will be a sign)"
징조(226) 오트(’ôwth) אוֹת   

1. 신호,  2. 군기,  3. 창세기 4:15.
발음 [ ’ôwth ]
어원  / 미완료형의 복수 1인칭 어미활용 נֵאךת, 복수 3인칭 어미활용 יֵאוֹתוּ, 225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징조(창1:14, 삼상10:7, 시78:43), 표(창4: 15, 신11:18), 증거(창9:13), 표징(창17:11, 출 31:13, 삼상2:34, 겔14:8), 이적(민14:22, 신 34:11), 표적(출12:13, 시74:4, 사19:20), 기호 (민2:2, 신6:8), 예표(사20:3).
구약 성경 / 79회 사용

되리라(1931) 후(hûwʼ)  הוּא 

1. 그는,  2. 때때로 여성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음,  3. ㉠ 그 자신
발음 / 후[ hûwʼ ]
구약 성경 / 1386회 사용

3장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패역한 족속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여 회개케 하려고 보낸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도 핍박하는 악한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4에서는 그처럼 악한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멸망을 당하고 고통을 받을 것을 세 가지 행동의 비유를 통해 예언합니다.
에스겔 4장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세 가지 상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포위의 징조(표징, 오트)로  다가올 심판을 더욱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박석(흙벽돌) 위에 그린 예루살렘 성에 대하여 포위 공격을 가하는 행동(1-3절)

둘째는 포위와 포로 기간에 관한 징조로 한쪽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는 행동(4-8절)

셋째는 포위 중 기근과 부정하게 될 징조로 음식을 조금씩 먹는 행동(9-17절)을 상징적으로 말씀합니다.

이러한 시각적 표현을 통해 선지자는 백성들의 무관심과 냉담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환기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에스겔은 그림 그리기와 만들기를 활용하였고, 음식의 절제와 좌우편으로 눕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렸습니다.
또한 때때로 손뼉을 치며 발을 구르거나 시를 낭송하기도 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쓸 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당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거듭 바벨론 왕에게 항복하고 섬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친애굽파의 의견을 좇아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바벨론에 항거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예루살렘이 포위를 당하고 결국 함락될 것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너 인자야'라는 표현으로 서두를 시작함으로써 본장의 행동이 앞 부분의 파송과 연결된 선지자로서의 활동 개시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에워싸되' , '에워싸다'등과 같은 단어를 반복함으로써 성읍을 실제로 함락시키는 느낌이 들도록 예언합니다.
사실 예루살렘 성읍은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이며 유다의 수도로서 하나님의 성전과 언약궤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성읍보다도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된 곳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장소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예루살렘 거민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온전히 말씀을 따라 살지 못하고 우상 숭배의 가증한 일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부패는 왕, 선지자, 제사장 등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소의 은밀한 장소에 가증스럽게도 우상을 세워 두고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마음이 상실된 성전 예배는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우며 멸망을 재촉하는 원인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혈통이나 외적 신분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세를 높이 평가하십니다.
사실 당시 유다 백성들은 언약 백성이라는 자부심과 율법을 소유하였다는 특권 의식으로 인하여 안일과 만족에 빠져 사태를 지나치게 낙관하고 살았습니다.
그 결과 멸망을 선고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유사한 경향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큰 교회, 또는 훌륭한 목사님이 있는 교회에 다니면 그것이 마치 자기 신앙의 척도인양 착각하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의 외형적 조건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적 자세를 보시므로, 성도들은 각자의 내적 신앙을 올바로 정립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큰 교회에 출석한다고 내 믿음이 큰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작은 교회에 출석한다고 내 믿음이 작은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늘 함께 하시는 교회와 신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만일 주님이 함께 하지 않는 거대한 성은 역사의 유물처럼 관광객들만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샘이 솟아나는 곳이라면 작은 옹달샘일지라도 그 물을 찾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홍수가 범람하여 큰 물이  넘실거려도 마실 수 없는 물을 찾아가겠습니까?
아니면 작은 옹달샘이라고 마실 수 있는 물이 있는 샘을 찾아가겠습니까?
생명은 생명을 찾고 죽음은 죽음을 향하여 갈 것입니다.
오늘도 생명을 찾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루살렘 멸망의 예표(에스겔 4:1-17)

에스겔 4장에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상징성을 부여하셔서 유대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3절] 너 인자야, 박석을 가져다가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 . . .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말씀하신다.
“너 인자야, 박석을 가져다가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고 그 성읍을 에워싸되 운제를 세우고 토둔을 쌓고 진을 치고 공성퇴를 둘러 세우고 또 전철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성을 삼고 성을 향하여 에워싸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예루살렘 성이 포위되는 모형을 만들게 하셨다.
그는 박석을 가져다가 그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게 하셨다.
‘박석’(레베나) ‘흰색의 토판(土版)’을 말한다.
또 그는 그 성읍을 에워싸되 운제를 세우고 토둔을 쌓고 진을 치고 공성퇴를 둘러 세우게 하셨다.
‘운제’는 포위벽을 가리키고, 토둔은 둑을 말하며, 공성퇴는 성벽을 부수는 큰 쇠망치나 나무망치를 가리킨다.
또 그는 ‘전철’ 곧 철판을 가져다가 에스겔과 성읍 사이에 두어 ‘철성’ 곧 철성벽을 삼고 성을 향하여 에워싸는 것처럼 에워싸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예루살렘 성이 강력한 군대에 의해 포위되어 결국 멸망할 것을 예시하신 것이다.
에스겔이 만든 그 모형은 예루살렘 성의 멸망의 징조가 될 것이다.

[4-8절] 너는 또 좌편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 . . .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너는 또 좌편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당하되 네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라.
내가 그들의 범죄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390일이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 그 수가 차거든, 너는 우편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40일로 정하였나니 1일이 1년이니라.
너는 또 에워싼 예루살렘을 향하여 팔을 벗어메고 예언하라.
내가 줄로 너를 동이리니 네가 에워싸는 날이 맟도록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에스겔로 하여금 390일 동안 왼쪽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게 하고, 40일 동안 오른쪽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를 담당하게 하셨다.
1일은 1년을 의미했다.
또 그는 에스겔에게 예루살렘을 향해 팔을 걷고 예언하라고 말씀하시고 또 그가 줄로 그를 동이실 것이며 예루살렘이 에워싸이는 날이 마치도록 그가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

본문의 숫자의 의미는 잘 알 수 없으나, 390년은 대략 북방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운 때(대략 주전 933년)로부터 그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올 때(주전 537년)까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40년은 남방 유다의 가장 악한 왕 므낫세의 약 40년간의 우상숭배적 통치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9-12절] 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 . . .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떡을 만들어 네 모로 눕는 날수 곧 390일에 먹되 너는 식물을 달아서 하루 20세겔 중씩 때를 따라 먹고 물도 힌 6분 1씩 되어서 때를 따라 마시라.
너는 그것을 보리 떡처럼 만들어 먹되 그들의 목전에서 인분 불을 피워 구울지니라.”

1세겔은 약 10그램이며 1힌은 약 3.7리터이다.
떡 20세겔은 약 200그램의 떡을 가리키고, 물 6분의 1 힌은 약 0.6리터이다.
이것은 너무 작은 양이다.
이것은 그들이 양식이 부족하고 겨우 연명하게 될 것을 보인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그 떡을 보리떡처럼 만들되 이방사람들의 눈앞에서 인분(人糞) 불을 피워 구우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얼마나 비천한 상태에 떨어질 것인지를 보인다.

[13-17절]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열국으로 쫓아 . . . .

에스겔은 또 말한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열국으로 쫓아 흩을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이와 같이 부정한 떡을 먹으리라 하시기로 내가 가로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나는 영혼을 더럽힌 일이 없었나이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스스로 죽은 것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을 먹지 아니하였고 가증한 고기를 입에 넣지 아니하였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쇠똥으로 인분을 대신하기를 허하노니 너는 그것으로 떡을 구울지니라.”

에스겔은 또 말한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백성이 경겁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민답 중에 물을 되어 마시다가 떡과 물이 결핍하여 피차에 민답하여 하며 그 죄악 중에서 쇠패하리라.”
‘의뢰하는 양식’이라는 원어는 ‘양식의 지팡이’라는 말로서 ‘양식의 공급’(BDB, NIV)이라는 뜻인 것 같다.
‘경겁’이라는 원어는 ‘근심’이라는 뜻이며 ‘민답’이라는 원어는 ‘두려움’이라는 뜻이다(BDB).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루살렘 성의 멸망이나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질 것이다.
에스겔에게 지시하신 일들은 하나님의 뜻을 예시하였다.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고 경외하며 모든 일을 그에게 의탁해야 한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은 죄 때문에 비참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온갖 우상들을 숭배하였고 부도덕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할 것이다.
그들은 먹을 양식이 부족하고 부정한 떡을 먹을 것이며, 이방에 포로가 되어 많은 고생을 할 것이다.
그들은 그 죄악 중에서 쇠패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상숭배를 버리고 참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계명을 순종하고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예레미야 21장 / 바벨론에게 망할 것을 예언(예레미야 21:1-14)
예레미야 21장에서는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의해서 멸망당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는 상황이 만들어 집니다.


예루살렘을 그리고 에워싸라
에스겔 4:1-17
에스겔 4:1-2
너 인자야 토판을 가져다가 그것을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고
그 성읍을 에워싸되 그것을 향하여 사다리를 세우고 그것을 향하여 흙으로 언덕을 쌓고 그것을 향하여 진을 치고 그것을 향하여 공성퇴를 둘러 세우고.

당시에 남유다 왕국은 바벨론의 일차 침략있었던 주전 605년에 다니엘과 많은 지도자들이 잡혀갔습니다.
2차 침략이 있었던 597년에 여호와긴과 에스겔이 잡혀갔습니다.
이때 성전기구도 약탈해갔습니다.
오늘말씀은 에스겔이 잡혀갔을 때에 임한 것이니까 유다가 완전히 망하기 10년 전에 임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말씀으로 전했습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듣든지 외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이 유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완전히 망하고 극심한 식량난에 사로잡힐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모형을 통하여, 자신의 몸을 통하여, 식사를 통하여 이것을 보여줍니다.
노예로 있는 사람들이 유다에 있는 사람들의 당할 고통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노예의 신분 자체는 괴롭지만 배부르게 먹고 있습니다.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뿐이지 생활은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는 풍요롭게 먹습니다.
그들은 노예살이를 하면서 메너리즘에 빠집니다.
이기적이 되기 쉽습니다.
덜 매를 맺고 더 잘먹어야하는가 관심을 갖습니다.
사람들은 극도의 이기주의에 빠집니다.
비도덕적인 것을 합리화합니니다.
노예는 도적질해도 괜찮다고 합니다.
선민의 자존심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의 고통을 몸으로 체험하고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선민의 정체성을 갖으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잊지 말라

“1. 너 인자야 토판을 가져다가 그것을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고
2. 그 성읍을 에워싸되 그것을 향하여 사다리를 세우고 그것을 향하여 흙으로 언덕을 쌓고 그것을 향하여 진을 치고 그것을 향하여 공성퇴를 둘러 세우고
3. 또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하나님은 인자인 에스겔에게 이제 흙벽돌을 한 장 가져다가 그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새기라고 하십니다.
그 다음에 그 성읍에 포위망을 쳐야 합니다.
그 성읍을 공격하는 높은 사다리를 세우고, 흙 언덕을 쌓고, 진을 치고, 성벽을 허무는 쇠망치를 성 둘레에 설치하여야 합니다.

에스겔은 또 철판을 가져다가 그와 그 성읍 사이에 철벽을 세워야 합니다.
에스겔은 이처럼 진을 쳐서 그 도성을 포위하고 지켜보아야합니다.
이것이 유다 족속이 앞으로 당할 것을 보여 주는 징조입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망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예루살렘을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선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높은 자존심을 가져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죄악을 떠맡아야합니다

“4. ○너는 또 왼쪽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짊어지되 네가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라 5. 내가 그들의 범죄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구십 일이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 6. 그 수가 차거든 너는 오른쪽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사십 일로 정하였나니 하루가 일 년이니라”

에스겔은 또 왼쪽으로 누워서,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자신의 몸에 지고 있어야 합니다.
옆으로 누워 있는 날 수만큼, 에스겔은 그들의 죄악을 떠맡아야 합니다.
에스겔은 유다백성이 겪어야할 일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왼쪽은 유다의 북쪽이고 오른쪽은 유다의 남쪽입니다.
유다의 북쪽은 북이스라엘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이 범죄한 햇수대로 에스겔에게 날 수를 정하였습니다.
그러니 에스겔은 390일 동안 북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떠맡아야 할 것입니다.
솔로몬 때부터 북이스라엘이 망할 때까지의 죄악을 말합니다.
이 기간을 다 채운 다음에는, 에스겔이 다시 오른쪽으로 누워서, 남유다 족속의 죄악을 40일 동안 떠맡고 있어야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남유다가 겪을 처벌을 받을 기간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일 년을 하루씩 계산하여 주었습니다.
430년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살이한 기간과 일치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였듯이 때가 되면 유다를 바벨론에서 훈련한 후에 구원하실 것을 암시합니다.

에스겔은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예언합니다

“7. 너는 또 네 얼굴을 에워싸인 예루살렘 쪽으로 향하고 팔을 걷어 올리고 예언하라
8. 내가 줄로 너를 동이리니 네가 에워싸는 날이 끝나기까지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리라”

에스겔은 이제 예루살렘의 포위망을 응시하면서, 자신의 팔을 걷어붙이고, 그 성읍을 심판하는 예언을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줄로 묶어서, 에스겔에게 예루살렘 사람이 갇혀 있는 기한이 다 찰 때까지, 그는 몸을 이쪽 저쪽으로 돌려 눕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에스겔이 줄을 동이고 에워싸서 몸을 이리저리 돌리지 못하는 것은 예루살렘사람들이 포위를 당하고 꼼짝없이 사로잡혀 멸망을 멸망할 것을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절식을 하게 하십니다

“9. ○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너를 위하여 떡을 만들어 네가 옆으로 눕는 날수 곧 삼백구십 일 동안 먹되 10. 너는 음식물을 달아서 하루 이십 세겔씩 때를 따라 먹고 11. 물도 육분의 일 힌씩 되어서 때를 따라 마시라”

에스겔은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준비하여 한 그릇에 담고, 그것으로 빵을 만들어 그가 옆으로 누워 있는 삼백구십 일 동안 내내 먹여야 합니다.
에스겔은 음식을 하루에 이십 세겔씩 달아서, 시간을 정해 놓고 먹어야 합니다.
물도 되어서 하루에 육분의 일 힌씩, 시간을 정해 놓고 따라 마셔야 합니다.
빵 20세겔은 250g입니다.
물육분의 일힌은 0.5리터입니다.
소주 한병 반정도로 하루를 먹어야합니다.
그들이 매우 절박한 상황에 놓일 것을 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에스겔은 극도의 절식을 하면서 유다백성들이 앞으로 당할 극심한 고통을 보여줍니다.
북한 사람은 하루 하루 달아서 먹습니다.
한달에 오 일분만을 주고 먹으라고 합니다.
세숟가락 먹을 것을 한 숟가락 먹으라고 합니다.
배고플 때는 풀뿌리를 파먹고 벼의 뿌리를 파서 먹습니다.
소나무껍질을 벗겨서 먹습니다.
지금 바벨론에 물이 많습니다.
그러나 물을 조금 먹으라는 것입니다.

부정한 음식을 먹을 것입니다

“12. 너는 그것을 보리떡처럼 만들어 먹되 그들의 목전에서 인분 불을 피워 구울지니라 13. 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여러 나라들로 쫓아내어 흩어 버릴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이같이 부정한 떡을 먹으리라 하시기로”

에스겔은 그것을 보리빵처럼 구워서 먹어야합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인분으로 불을 피워서 빵을 구워야 합니다.
인분에 구워서 먹는 떡은 부정한 떡입니다.
주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다른 민족들 속으로 내쫓으면, 그들이 거기에서 이와 같이 더러운 빵을 먹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우상에게 제사하고 먹지 말아야할 돼지고기들과 같은 부정한 음식을 먹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죽거나 물려저 죽은 음식을 먹어야함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소똥으로 대신하게 하십니다.

“14. 내가 말하되 아하 주 여호와여 나는 영혼을 더럽힌 일이 없었나이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스스로 죽은 것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을 먹지 아니하였고 가증한 고기를 입에 넣지 아니하였나이다
15.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쇠똥으로 인분을 대신하기를 허락하노니 너는 그것으로 떡을 구울지니라”

에스겔이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주 하나님, 저는 이제까지 저 자신을 더럽힌 일이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저절로 죽거나 물려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은 적이 없고, 부정한 고기를 제 입에 넣은 적도 없습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인분 대신에 쇠똥을 쓰도록 허락해 준다. 너는 쇠똥으로 불을 피워 빵을 구워라." 당시에 쇠똥은 일반적인 땔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부정한 음식을 먹는 것을 면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타협하는 사람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게 하십니다. 파키스탄 인도 방글레데시에는 지금도 쇠똥으로 밥을 해 먹습니다. 쇠통을 바람벽에 붙여 놓으면 한나절에 떨어집니다. 소똥 하나면 카레라이스를 하나 해먹습니다. 이것이 똥불입니다. 소똥이 효과적인 연료입니다.

음식의 부족으로 고통을 겪습니다

“16.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백성이 근심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두려워 떨며 물을 되어 마시다가 17. 떡과 물이 부족하여 피차에 두려워 하여 떨며 그 죄악 중에서 쇠패하리라” .

주님께서 또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아, 내가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의지하는 빵을 끊어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빵을 달아서 걱정에 싸인 채 먹고, 물을 되어서 벌벌 떨며 마실 것입니다. 그들은 빵과 물이 부족하여 누구나 절망에 빠질 것이며, 마침내 자기들의 죄악 속에서 말라 죽을 것입니다. 나중에는 자신의 아들딸을 삶아먹을 정도의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에스겔은 백성의 죄를 담당하였습니다

주의 종은 몸으로 백성의 죄를 담당해야합니다.
에스겔은 눕는 것, 쇠줄로 몸을 묶는 것, 식사하는 것을 통해서 앞으로 백성들이 담당할 죄를 체험하였습니다.
이사야서는 유다의 멸망과 포로로 잡혀갈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발가벗은 몸으로 3년동안 다니게 하였습니다.
주의 종은 몸으로 고통을 체험해야합니다.
에스겔은 누울 때도 먹을 때도 잘 때도 예루살렘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남편이 교도소에 가니 먹는 것도 잘 먹지 않고 자신은 찬 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오히려 편하게 사는 것이 마음이 괴롭습니다.
마음보다 몸이 괴로운 쪽을 택하라고 합니다.
네가 그 고난을 함께 당하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선민의 정체의식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배부르게 먹었다고 잘 되었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북한 사람을 생각하며 너무 사치하거나 풍요하지 말아야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을 생각하며 절식해야합니다.
너무 편히 살고 사치하지 말아야합니다.
기한을 정하고 하라고 합니다.
이 기간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다시 돌아갈 소망이 있습니다.
노예로서 만족하고 살아야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시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다니엘은 장관으로 부귀와 영광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장관을 하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체성을 갖고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갈 날을 소망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고 자지도 먹지도 않고 웁니다.

자원하여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며 이기심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게 히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버리고 고난에 자원함으로 동참해야합니다.
먹고 자는 것 활동하는 것에 제한을 두어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체성을 갖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야합니다.


구약 전체의 중요한 동맥인 예언 전통

타나크(TaNaK) -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을 부르는 명칭
토라(Torah, 오경. תּוֹרָה)
토라(תּוֹרָה, Torah)는 구약성서의 첫 다섯 편으로, 곧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를 일컫는다. 흔히 모세오경(모세五經, תּוֹרַת־מֹשֶׁה)이나 모세율법이라고도 하며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이다.

느비임(Nebi'im,  예언서)
네비임(히브리어: נְבִיאִים)은 히브리 성경인 타나크에서 토라케투빔 사이의 책들에 대한 분류이다. 히브리어로 "예언자"라는 의미이며, 그 말 그대로 예언자, 즉 선지자들에 대한 책들이 여기 속한다. 여호수아, 판관기, 사무엘기, 열왕기를 네비임 리소님(히브리어: נביאים ראשונים) 즉 전기 예언서로,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 그리고 나머지 12권의 소예언서들을 네비임 아카로님(히브리어: נביאים אחרונים) 즉 후기 예언서로 부른다.

케투빔(Ketubim, 성문서.  כְּתוּבִים)

케투빔(Ketubim, כְּתוּבִים, 성문서)은 토라(율법서)와 네비엠(예언서)에 이어 타나크 (히브리어 성경)를 구성하는 세 번째 구분 단위의 명칭이다. 히브리어 성경의 영어 번역에서 이 단락은 일반적으로 "Writings"로 표기한다. 케투빔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작성되었다고 믿기지만 예언서에 비해 권위가 한 단계 낮다.[1]

히브리어 성서 사본의 케투빔 안에는 11권의 소책자가 포함되며, 이 가운데 역대기는 '역대기상'(Chronicle 1) 및 '역대기하'(Chronicle 2)를 묶어 한권으로 포함된다. 에즈라기느헤미야기 또한 한권으로 묶여 포함된다.[2](단, '느헤미야기', '역대기상', '역대기하'의 개념은, 기독교에서 사용되는 장절 체계와 더불어 유대교에서도 사용된다.)

구약성경을 이스라엘 사람(유대인)들이 타낙(TaNaK)이라고 부르는데, 오경과 예언서, 성문서의 구성을 두고, 그 첫 자를 히브리어 두운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의 성경이 중요성의 원칙에서 성경이 배열되었음을 보여준다(팔레스틴 정경).
유대인들은 오경을 가장 중요시 여겨 가장 처음에 놓고, 그 다음 중요한 예언서를 배열 한 후에, 제일 마지막에 성문서를 놓았다.
그래서 유대인의 정경은 역대기 하로 타낙 성경이 끝난다.

이에 반해 70인역은 시간의 순으로 배열되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성경 배열순을 보여준다.
그래서 과거로서 오경이 먼저 나오고, 현재는 성문서, 미래는 예언서로 배열되어 말라기로 성경이 끝난다.

이는 알렉산더 정경 배열순이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하면서 독일어 성경을 번역할 때 구약 정경으로서 팔레스틴 정경의 39권의 책을 정경으로 채택하고, 성경 배열순은 70인역의 시간의 순으로 배열을 하여 지금의 말라기로 구약 성경이 끝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는 이곳에서 예언자(豫言者. 預言者)의 세계를 다루고자 한다.

예언자가 나오는 전기 예언서는 구두 예언자(Oral Prophet)들이 나온다.
그들은 신명기 역사서에서 사무엘, 나단, 갓, 엘리야, 엘리사 등 나오고,
책명으로 나오는 예언자들은 고전적 예언자(Classic Prophet), 문서 예언자(Writing Prophet)라고 한다.

이 문서 예언자는 대 예언서와 소 예언서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은 대 예언서(Major Prophet)로서 볼 수 있고, 소 예언서(Minor Prophet)는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이다. 다니엘서는 복음주의 신학에서 예언서로 분류하지만 학문적인 입장에서는 묵시 문학으로서 나뉘어 성문서에 분류하기도 한다. 예언자 시대는 왕정 시대가 시작되면서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왕에게 하나님의 소리를 대언하는 역할을 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삼상 15:11).

사무엘은 사사 시대의 마지막 사사였고, 첫 예언자로서 왕을 세우고 왕에게 기름을 부은 역할을 하였다. 여기서 초대 왕이었던 사울을 세우기도 했지만 불운하게도 폐위하는 하나님의 소리를 대언하는 역할을 맡는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삼상 15:26).

이처럼 하나님의 소리를 대변하는 예언자는 왕정 시대에 중요한 나침반이자 하나님의 정치를 보여주었다.
사사시대가 신정정치(Theodicy)로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시대, 하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시대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이라는 강력한 이웃 나라의 위협 앞에서, 백성들이 다른 나라와 같은 국가 체제를 세우고 왕을 세우기를 요구하여 처음으로 사무엘 시대에 왕을 세우게 된 것이다(삼상 9-10장).
결국 왕을 세우면서 하나님의 정치를 말할 수 있는 인물이 예언자였고, 예언자는 대언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왕정 시대 내내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소리를 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오경 끝에서 예언 전통에 서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는 모세였다고 말한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나비)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신명기 34:10).

선지자의 첫 모델이 모세였다고 하는 사실은 오경에서 예언서, 성문서로 이어지는 큰 줄기, 큰 흐름에서 구약 전체의 중요한 맥이 예언전통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예언자는 인체의 동맥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구약 성경 전체의 흐름이 이 예언자의 메시지에서 개혁의 근간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예언자 중에 예언자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을 말하고 있다.

“어떤 이는 이(예수)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이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가복음  6:15, 8:28)

마가복음 6:15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마가복음 8: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09-11-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먹고 가서 고하라(에스겔 3:1)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And he said to me, "Son of man, eat what is before you, eat this scroll; then go and speak to the house of Israel.

에스겔은 자기 민족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받아 먹었고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에스겔은 동족에게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을 전한다는 것에 대하여 강한 부담을 느꼈습니다.
 
선지자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으라고 하신 것처럼 오늘날도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때로는 그 말씀이 위로와 축복에 관한 내용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책망과 회개를 재촉하는 내용이라면 거부 반응을 나타낼 것입니다.
내용에 따라 받아 먹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 즉 말씀이라면 무조건 받아 먹고 순종하는 것이 바람직한 신앙입니다.

그 명령에 순종하여 말씀을 받아먹는 것이 달콤한 재미가 되어야 할텐데 오늘의 시대는 마치 홍수가 나서 사방에 물이 넘쳐나도 마실 수 있는 순수한 물이 없다는 선지자 아모스의 탄식처럼 수 많은 설교는 여기저기 널려 있고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변화를 일으킬 생명력이 있는 말씀을 듣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오늘의 시대라고 합니다.

선지자 에스겔이 두루마리 책을 받아 먹은 것처럼 믿음의 사람들 또한 진리의 말씀을 받아 먹어야 합니다.
말씀을 받아 먹지 못할 때 어떤 증세가 나타날까요?

첫째는 육체의 소욕을 따르게 됩니다.

만일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사람은 쉽게 육체의 욕망에 사로 잡히게 될 것입니다.
그므로 성경은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강조합니다(갈 5:16).

둘째는 허무와 목마름에 허덕이게 됩니다.

무더운 날씨가 질식할 것같은 고통으로 압박하듯 생명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물질적인 풍요속에서도 만족과 감사는 종적을 감추고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탄식할 것입니다(전 1:2).

셋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모든 만물의 주인이 되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피조물은 겉 사람은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여질지라도 속 사람의 생명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다정한 손을 잡고 날마다 믿음의 현장에서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당부하신 말씀에 따라 찬송과 영광의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신앙생활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이란 내 인생의 긴 장편 소설을 위한 단 한 장의 이야기를 작성하는 축복의 하루가 될 수 있도록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주님의 말씀따라 살아가는 행복을 누리는 소설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콜 엩 웨렠 다벨(אֱכֹול אֶת־ דַּבֵּר)


먹다(398) 아칼(’âkal) אָכַל

1. 먹다,  2. 이사야 1:7,  3. 에스겔 16:20
발음 [ ’âkal ]
관련 성경 / 먹다(창 3:11, 신 12:15, 레 6:16), 잡수시다(창 27:10,19), 무릅쓰다(창 31:40), 잡아먹다(창 37:20), 삼키다(레 26:38, 민21:28), 진멸하다(신 7:16), 죽다(삼하 18:8), 맛보다(욥 21: 25), 불사르다(렘 5:14), 살라지다(시 78:63, 렘 49:27), 소멸되다(사 10:17), 타다(겔 19:12, 나 3:13), 태우다(겔 19:14, 왕상 18:38), 멸하다(겔 20:47, 암 5:6), 삼키다(호 7:9), 먹이다(창 31:54, 출 16:8), 식사하다(삼상20:5), 대접하다(출 2:20), 소멸하다(민 16:35, 신 4:24), 상하다(삼하 2:26), 망하다(겔 7:15), 맹렬하다(출 24:17, 신 9:3), 불타다(느2:3,13), 사라지다(출 3:2), 기르다(사 58:14), 멸절하다(겔 21:28), 넣다(겔 3:3).
[명] 식사(왕상21:4), 양식 (창47:24), 먹을 것(레25:7, 시59:15), 음식 (창39:6, 신18:8, 삼하19:35).
[부] 임의로(창 2:16), 결단코(레7:24), 조금(삼하19:42, 레7: 18), 풍족히(욜2:26).
구약 성경 / 807회 사용

가다(3212) 야라크(yâlak) יָלַךְ   

1. 가다,  2. 1980 참조
발음 / [ yâlak ]
관련 성경 / 가다(창11:31, 신29:18), 따르다(창24:5, 신11:28), 행하다(출33:16, 신2:7), 섬기다(신28:14), 오다(수9:12, 잠7:18, 느6:2), 나아가다(삿18:9), 떠나다(삿19:5, 미2:10), 떠나가다(삼상10:2, 창26:16), 피하다(삼상23:26), 달려가다(삼하2:19), 따라오다(삼하15:14), 올라가다(삼하18:33), 건너다(삼하19:15), 복종하다(왕상21:26), 보내다(왕상22:48), 순종하다(왕하23:3, 대하34:31), 돌아가다(대상17:11), 버리다(대하24:25), 나가다(대하25:13), 준행하다(시78:10), 이르다(시107:7, 창13:3), 다니다(잠4:12, 창3:14), 들어가다(전10:15, 사50:11), 향하다(겔10:11), 데려가다(창12:19), 끌어가다(욥12:17), 동행하다(민10:29), 진행하다(신10:11),함께 가다(아2:10), 물러가다(출12:28), 인도하다(출32:1, 잠16:29), 청종하다(레26:21), 대항하다(레26:41), 동행하다(민10:32), 지나가다(민21:22), 넘치다(수4:18), 이기다(삿4:24),더하다(삼상14:19), 흩어지다(삼상14:16), 달리다(삼하17:18), 흐르다(왕상18:35), 도망하다(왕상19:3), 일어서다(왕하13:21), 퍼지다(대하26:8), 없어지다(욥7:9), 죽다(욥19:10),쫓겨나다(시34편 표제), 장성하다(렘12:2), 데리다(겔43:1), 약하다(겔7:17, 21:7), 데리고 가다(호2:14), 잡아가다(대하36:6), 끌어가다(신28:36, 렘32:5), 전파하다(전10:20), 이끌다(애3:2, 겔40:24).
구약 성경 / 1549회 사용

고하다(1696) 다바르(dâbar) דָּבַר

1. 정돈하다,  2. 안내하다,  3. 뒤따르다
발음 / 다바르[ dâbar ]
관련 성경 / 말씀하다(대상17:17, 시51:4, 사1:2), 명령하다(삿1:20), 이르다(창16:13, 신5:31, 겔37:21), 안위하다(에10:3), 명하다(욘3:2), 말하다(욥33:2, 미7:3), 진술하다(창24:33). 허락하다(창28:15, 출12:25), 고하다(신20:2, 겔2:7), 기도하다(민21:7), 선포하다(신1:1, 렘35:17,36:31), 강론하다(신6:7, 11:19), 언약하다(신23:23), 확언하다(신26:18), 대답하다(왕상2:30, 창34:13), 전하다(왕하1:17, 20:19), 고발하다(에7:9), 아뢰다(삼하22:1), 베풀다(렘1:16), 선언하다(렘11:17, 22:1, 25:13), 비방하다(민12:8), 여쭙다(삼하14:15), 구하다(왕하4:13, 삿8:8), 이야기하다(출33:11, 욥41:3),공포하다(레23:44), 담화하다(삼상9:25), 쟁론하다(왕상3:22), 위로하다(대하30:22), 질문하다(렘12:1), 권하다(대하33:18), 복종하게 하다(시18:47, 47:3).
[명] 말(민27:7, 삼하13:36, 사65:24), 말씀(민36:5, 수24:27, 욥11:5), 명령(창44:2).
구약 성경 / 1137회 사용

에스겔은 그발강 가에서 환상을 보았습니다.
4개의 얼굴을 가진 생물(사람, 사자, 소, 독수리) 눈이 가득한 4개의 바퀴, 생물 위의 수정 같이 맑은 궁창, 궁창 위에 남보석 보좌, 보좌 위에 앉으신 인자 같은 이, 사면으로 비추는 불 같은 광채와 무지개, 에스겔은 여호와의 영광 앞에 죽은 것 같이 엎드러졌습니다.

보좌로부터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인자야 일어나라 내가 네게 줄 말이 있다.”
하나님의 신이 에스겔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반역하는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보내노라”, “그들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손들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을 전하라”, “너는 먼저 내게로 와서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받아 먹어라.” 에스겔이 보니 한 손이 그에게로 펴지고 손 위에는 두루마리 책이 놓여 있었습니다. 펼쳐진 두루마리 책에는 안팎에 글이 쓰였는데 이 글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습니다.

에스겔은 두루마리를 받아 먹었습니다. 그것은 에스겔의 입에 달기가 꿀 같았습니다. 이것이 에스겔이 본 환상입니다.
에스겔은 포로로 잡혀왔습니다. 그들은 노예였습니다. 이름만 노예일 뿐 아무 것도 아쉬운 것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밸론에서 주거의 자유를 보장받았습니다. “델아빕” 언덕과 “그발강 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집단 거주지였습니다. 신앙의 자유와 정치의 자유도 허용되었습니다. 사로잡혀온 여호야긴 왕은 신변의 안전과 재산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백성 중에는 장로들이 있어 자치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사는 없었으나 율법을 가르치고 할례를 행하며 안식일에 회집이 가능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 가 있는 동안이 바벨론 왕국의 전성기였습니다. 그들은 평화를 구가하고 예술을 숭상했습니다. 포로민 중에 영특한 인재는 뽑아 궁중에서 학문을 연마케 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그 실례입니다. 나라가 부강해지자 물산이 풍부하게 되었습니다. 금은, 보석, 세마포, 자주옷감, 비단상아, 기명, 계피, 향과 향료,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 밀과 소와 말과 선척타고 무역하는 상인들, 상품들-노예생활을 해도 짐을 질 때만 고단했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국에 있을 때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살았습니다. 한 해 두 해 지나는 동안에 고국도 잊게 되었습니다. 포로로 끌려온 아버지가 죽고 2세, 3세가 태어남에 따라 그들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한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코 남의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일은 죽도록 했으나 자기 일이 아니였습니다. 힘은 있는대로 다 쏟았으나 자기가 원하는 것은 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싫컨 먹고 잘 자유는 있었습니다. 결국 그물은 살진 노예였습니다. 무엇이 노예생활입니까 노예는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정당하고 소유권을 박탈당하고 자기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할 때 그것이 바로 노예생활입니다. 우리는 현대사회 속에서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노예로 부릴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노예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노예, 물질의 노예, 기계의 노예, 조직의 노예, 제도의 노예가 되어 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내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는 현대 문명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노예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노예라는 신분을 망각하고 배만 불리고 살만 찌우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탄식 하면서 에스겔 선지를 불러 세웠습니다. “인자야, 너는 내가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그리고 가서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가서 고하라.” 에스겔이 먹은 두루마리는 애가와 재앙의 두루마리였습니다.

두루마리를 먹는다는 말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두루마리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먹는다는 말은 음식을 먹듯이 마음에 받아들여 영혼의 피가 되고 살이 되게 하라는 말입니다.
선지자의 손을 통해 기록된 두루마리는 Good News라기 보다 Big News입니다.
위급한 순간에 울리는 경종, 경고, 책망과 견책의 두루마리가 선지자의 두루마리입니다.
스가랴는 날라가는 두루마리를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지면에 임할 저주의 선포였습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이편 글대로 심판을 받고 거짓 맹세하는 자들은 저편 글대로 정죄를 받으리라.
예레미야도 두루마리를 남셨습니다.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를 들은 서기관과 방백들은 서로 놀라 마주보며 두려워 떨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속히 임한다는 경고입니다.
에스겔이 본 두루마리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두루마리였습니다.
여기 슬픈 노래 비가는 마지막 운명이 결정된 자의 비통의 눈물은 아닙니다.
이 애가와 재앙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향하여 발하신 경고의 말씀에 “화로다 바리새인이여 화 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하는 그 화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곧 사전에 경계하고 회개를 독촉하는 말입니다.
본문을 깨닫고 사명을 완수하라는 말입니다.
두루마리를 먹지는 않고 불사라 버린 왕이 있었습니다.
유대 말년의 여호야김 왕이었습니다.
여호야김 왕은 신하들이 두려워 떨며 왕에게 읽혀주는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를 한장씩 칼로 베어 겨울 화롯불에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는 3년만에 느부갓네살에게 쫓겨나고 그의 나라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여호야김이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를 불살라 버렸기 때문에 두루마리에 기록된 대로 이스라엘은 70년 포로생활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두루마리가 불살라 버렸기 때문에 에스겔이 애곡의 두루마리를 먹어야 했습니다.
에스겔이 먹은 두루마리는 보람이 있었습니다.
에스겔이 사로 잡혀온 동족을 향하여 외친 애가는 겨레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백성들은 통회 자복하고 자신을 발견하고 그들이 지금 어떤 처지에 있다는 것과 그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때부터 어떻게 살며 무엇을 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70년이 지나고 조국의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꿈에도 그리 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날 때는 한 민족이었는데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그들은 두 민족으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남아 있는 자들과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전혀 다른 이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측으로는 바벨론에 잡혀 간 사람들이 우상과 물질주의에 물들었을성 싶은 데 그 반대였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은 고스란히 신앙의 정조를 지켜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단일민족으로서 돌아왔고, 고국에 남아 있던 사마리아인들은 잡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윤리와 도덕이 무너진 저속한 백성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지, 바벨론에 포로로 갔던 일이 문제가 아니라 그 땅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가 그 땅에 선지자의 소리가 들리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하여 선포되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선지자의 소리가 크게 들리면 포로자에서도 선민이 나고 선지자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면 제 나라 제 땅 안에서 망국인 됩니다.



이 두루마리를 창자에 채우라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을 보고는 그 위엄과 권세 앞에 무릎을 꿇고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일어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하실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2:1-2).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2:3을 보십시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스라엘에게 보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하신 말씀이며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패역한 백성입니다.
그들은 반역만 해 온 반역 민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의도적으로 대항하고 말씀을 고의로 무시했어요.
그들은 평소에는 ‘순한 양’처럼 살다가도 주일예배에 초청하면 성을 냈습니다.
그들은 참 부드러운 사람들인데, 기독교를 ‘개독교’, 목사를 ‘먹사’, 신자를 ‘환자’라고 부릅니다.
그런 그들이 납득이 안 갑니다.
그들의 반역은 언제부터 시작한 겁니까?
조상 때부터 시작한 겁니다.
그 조상은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 반역했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어요.
그 피가 흐르고 흘러서 오늘까지 이른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얼굴이 뻔뻔합니다.

말씀 앞에서 마음이 굳습니다(4).
그들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쇠고집을 부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생각만 해도 부담스럽습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 만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목자를 보내지도 않습니다.
말씀을 잘 듣는 사람, 마음 밭이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기대하고, 그런 사람에게 목자를 보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반역적이고 ‘똥고집’인 그들에게 에스겔을 보내십니다. 

왜 이런 친구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십니까? 5절입니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하나님께서 패역한 놈들에게 목자를 보내는 것은 그들에게도 선지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함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선지자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종이 활동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활동하는 겁니다. 이것은 세상이 자기들 마음대로 굴러가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비록 겉으로는 인간들 마음대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을지라도 실은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그들에게 알리고자 하십니다. 

이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의 현장도 에스겔 시대만큼 만만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미국 대학생들을 ‘피싱’하는 것을 ‘날아가는 새를 손으로 잡는 것’으로 비유했어요.
그만큼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미국 대학생들보다 한국 대학인들이 더 쉽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GDP가 늘고 놀이문화가 늘면서 영적인 세계에 대한 대학인들의 관심은 줄어듭니다.
여기에 좁은 취업문도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어요. 우리 시대는 이른 바 ‘복음의 수용성’이 점점 낮아지고 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우리 사모님들은 양들을 얻고 섬기기 위해서 참 많은 수고를 했어요. 목요일 점심에는 맛있는 음식도 대접했어요. 하지만 우리의 기대만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는 얼굴이 뻔뻔한 친구도 있고요. 하나님께 반역하는 ‘반기독교 세력’(Anti-Christianity)도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만 생각하면 우리이 수고가 공허한 메아리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왜 그들을 향하여 전도를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몇 사람들은 “단국대에는 아직도 예수꾼들이 있구나”라고 말할 겁니다. 우리의 주변 사람들은 한 번이라도 예수님을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이런 현실에서 목자로 사는 길이 어떠합니까? 6절입니다.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말씀을 듣지도 않는 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일은 가시밭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전갈 속에서는 사는 것과 같습니다. 전갈에게 물리면 중상 내지는 사망입니다. 우리가 양들을 만나서 말씀을 전할 때 그 반응들이 어떠합니까? 어떤 친구는 점잖게 거절해요. 우리를 불쌍히 여기기도 해요. 반면 어떤 친구는 성질을 부립니다. 씩씩거리며 대들기도 해요. 그럴 때면 “어떡하니”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동시에 그들이 두렵고, 그들이 하는 말도 두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어떻게 두려운 현실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7절을 봅시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두려움에서 벗어나도록 돕기는커녕 오히려 공포심을 부추기시는 듯합니다. 이스라엘이 심히 패역한 자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강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병 주고 약 주시는 겁니까? 우리가 어떻게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까? 그들이 듣든지 말든지에 대해서 신경을 꺼야 합니다. 즉 결과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말씀만을 전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자기 생각을 집어넣어도 안 되고, 그 말씀의 일부를 빼서도 안 됩니다. 말씀을 전하되 하나님께서 주신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8). 그러면 두렵지 않아요.

이 메시지는 보통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관념 곧 “클수록 더 좋다”(bigger is better)는 생각에 도전을 줍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철학을 ‘물량주의’ 또는 ‘성공주의’라고 불러요. 그런데 이런 철학이 우리의 교회에까지 파고들었습니다. 재정적인 숫자와 교인들의 숫자를 가지고 교회의 성공을 결정하는 경향이 아주 많습니다. 그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엄청 큽니다. 책임을 지고 있는 목자님은 물론이고 곁에서 동역하는 평신도 목자들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의 하나님을 통해서 보면 전혀 다른 생각을 갖게 합니다. 수고한다고 해서 반드시 열매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칼뱅(John Calvin)이 이런 말을 했다는 군요. “하나님이 우리를 움직이셔서 순종할 것을 원하실 때에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수고에 행복한 결과만을 약속하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지라도 양들을 납득시키는 데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게을러서도,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이사야도 자신의 수고에 대한 대가가 너무 형편없는 현실 앞에서 한숨짓습니다.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어디로 향합니까?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사 49:4). 우리가 캠퍼스에서 학우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 왜 두렵습니까? 그들이 실제로 무섭기 때문입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참 좋은 친구들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결과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어찌하든지 내 양을 삼고자 하고, 우리교회의 구성원으로 만들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반응에 매이게 되고, 두려움에 빠집니다. 우리가 에스겔의 하나님을 믿고, 그들처럼 결과에만 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그대로, 담대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주신 말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내용을 두루마리 책에 적어서 주십니다(9). 10절을 읽읍시다.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애가’, ‘애곡’, ‘재앙의 말’은 장례식장에서 부르는 슬픈 노래, 장송곡입니다. 그것은 슬픔과 눈물과 고통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망한다는 메시지를 에스겔에게 맡기십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그 섬뜩한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그는 그 사명 앞에서 거부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황망한 마음으로 전해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말씀을 섬기는 목자인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목자는 세상을 향해서, 양들을 향하여 항상 긍정의 메시지만 전할 수 없다는 겁니다. 목자는 양들에게 언제나 ‘긍정의 법칙’만을 전해야 한다는 유혹을 받기도 해요. ‘승리하고 성공하는 삶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시간이 부족한데 회개나 심판에 대해서 말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생각도 해요.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으면 양들에게 밝고 소망이 있고 기쁨이 넘치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애를 씁니다. 양들을 울리고 웃기며 감동을 주기 위해서 무던 애를 씁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죄를 짓는 일이라고까지 생각해요. 말씀을 듣는 사람들도 그런 메시지를 원합니다. 물론 이런 메시지도 필요해요. 각박한 현실에서 힘들게 살다가 교회에 온 동역자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중요해요. 그러나 우리는 성공하는 이야기만 들길 좋아하는 세상을 향하여 때에 따라서는 심판의 메시지도 전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보다 예화에 은혜를 받는 이 견딜 수 없는 신앙의 가벼움에 빠져 있는 청중들을 향하여 섬뜩한 죽음을 노래하는 장송곡도 불러야 합니다. 비록 그 메시지를 듣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에스겔이 무능하고 재미가 없는 메신저였기 때문에 양들이 그의 메시지를 듣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의 설교 기법이 좋지 않아서 아무도 듣지 않은 메시지를 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수사력이 탁월한 웅변가였습니다. 그는 언어의 마술사였고, 이미지의 대가였고, 위대한 행위 예술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하는 말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왜죠? 바로 말씀의 내용 때문입니다. 그의 선포는 사람들의 마음을 거슬리는 내용으로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이른 바 ‘원색적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듣기를 싫어한 겁니다. 메시지를 ‘어떻게’ 전하는가도 중요해요. 하지만 메시지에서 ‘무엇’을 말하는가는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메시지를 재미있게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에 신실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신실한 메신저가 될 수 있습니까? 3:1을 봅시다.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신실한 말씀의 종은 말씀을 잘 듣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두루마리 책을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애당초 두루마리는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합니까? 그가 입을 벌렸더니 하나님께서 그 두루마리를 먹여 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2). 3절을 읽읍시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입으로 먹는 두루마리를 배에 넣고 창자에까지 채워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배’나 ‘창자’는 ‘내면 깊은 곳’을 말해요. 하나님은 에스겔이 두루마리의 내용을 내면 깊은 곳으로 받아들여서 소화하기를 원합니다. 음식물이 위에만 멈춰서는 완전 영양분이 되지 못합니다. 창자에까지 가야만 충분하게 소화를 시켜서 완전 피가 되고 살이 됩니다. 그러니까 ‘배에 넣으며 창자에 채우라’는 말은 ‘완전 소화하라’, ‘뼛속깊이 새기라’는 뜻입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그는 말씀에 콧방귀를 뀌는 완악한 친구들에게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 앞에서 마음을 닫고 성질을 내는 그들에게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려면 그 말씀이 내 뼛속깊이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하면 엉뚱한 질문 앞에서 당황합니다.
뺀질거리는 사람을 보면 속이 끌어 올라 흥분합니다.
아니면 시시껄렁한 연예인 스캔들 얘기나 ‘대선 후보’들의 이야기만 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충분하게 소화를 해서 내 것으로 완전 체득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와 싸울 수 있는 최고의 무기입니다.

에스겔이 말씀을 받아서 뼛속깊이 새기니 그 맛이 어떠합니까? 달기가 꿀 같습니다. 그가 먹은 말씀은 장송곡입니다. 슬프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받아서 깊이 소화하고 나니 꿀맛입니다. 심판의 메시지를 뼛속깊이 새기다보니 그것이 희망과 생명의 메시지가 된 겁니다. 그것은 마치 입에는 쓰지만 병을 낫게 하는 보약처럼, 심판의 메시지가 그 백성을 살리는 생명의 메시지임을 깨달은 겁니다. 그는 심판의 메시지를 통해서 나타날 희망과 생명의 사역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마치 마른 뼈 같을지라도 이 메시지를 들으면 장차 그들은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날 것을 보았습니다(37장). 지금은 마치 죽은 바다 같은 이스라엘이 생명수가 넘쳐서 그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아지는 비전을 보았습니다(47:9).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목자가 말씀을 증언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말씀을 창자에 채우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충분하게 소화하여 뼛속깊이 새기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목자들은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하게 자기 것으로 소화하지 않고도 그 말씀을 전할 수 있어요. 이런 모습을 우리는 ‘앵무새’ 같다고 말해요.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는 목적이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한 깊은 사귐을 체험하는 겁니다. 목자는 온 몸으로, 삶으로 먼저 말씀을 받은 후에 전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성경의 사람’(people of Bible)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에게 왜 이런 과정이 필요합니까? 반역하고 얼굴이 뻔뻔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렵고 힘든 외국어를 하는 민족이 아닙니다. 같은 말을 사용하는 동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듣지 않습니다. 차라리 중국이나 몽골에 가서 전하면 그들은 잘 들을 겁니다. 우리가 만나야 하는 그들은 외국인만도 못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얼굴에 쇠가죽을 쓴 고집쟁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들과 어떻게 맞설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고 담대하게 만드십니다. 우리의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만들어 주십니다(4-9). 세계 최강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결국 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으면 세상이 어떠하든지, 양들이 어떠하든지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양들도 세상도 아닙니다. 바로 내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선생이요 목자로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한 말씀이라도 내 창자에 채워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내 뼛속 깊이 새겨진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크리스마스 시즌에 주위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성탄의 참 뜻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받아 먹으라(Eat this Words)

에스겔 (Ezekiel) 3:1~3

1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And He said to me, “Son of man, eat what is before you, eat this scroll, then go and speak to the house of Israel.”)

2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So I opened my mouth, and He gave me the scroll to eat.)

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Then He said to me, “Son of man, eat this scroll I am giving you and fill your stomach with it. “So I ate it, and it tasted as sweet as honey in my mouth.)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의 가장 심각한 딜레마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닐까요? 성경을 읽지 않고, 묵상하지 않고, 가까이하지 않는것이 그 어떤것 보다도 우리 크리스챤의 심각한 딜레마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하나님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에스겔에게 나타나셔서 ‘두루마리의 말씀을 먹으라’고 명하십니다. 그가 그 두루마리 말씀을 받아 먹었을때, 그 말씀은 그의 배와 창자를 채우고, 그의 입에서 달기가 꿀과 같았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성경을 실제로 깊이 읽고 묵상하며 살아가는 있는지요? 만약 그렇치 못하다면 무엇이 우리를 성경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일까요?

저는 먼저 <성경을 읽지 않을때 우리 삶의 세가지 부정적인 결과>는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리고나서, <성경을 읽을때 우리 삶의 세가지 긍정적인 결과>는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 이해하기 원합니다.

먼저 ‘성경을 읽지 않을때의 <세가지 부정적인 결과들>은 무엇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육신의 소욕에 지배받게 됩니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고 사도바울은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도전합니다. 우리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지 못할때, 필연적으로 육체적 욕망에 지배받게 됩니다. 말씀 가운데 성령의 통치하심을 받지 못할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육신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 입니다.

둘째, ‘허무와 목마름에서 헤매게 됩니다: 중동지방 대낮의 뜨거운 햇빛아래 우물물 길러나온 한 사마리아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4:14)고 말씀하신 주님. 참되고 영원한 생명수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영혼을 적셔주지 않는한 여러분과 저는 세상 그 어떤것으로 부터도 채울수 없는 끊임없는 갈증가운데 고통당할것 입니다.

셋째, ‘하나님과 관계가 여전히 막연하게됩니다:  우리가 1년을 믿어도, 10년을 믿어도, 아니 평생을 믿어도 내가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때 우리는 하나님과 여전히 소원한 관계에 머무를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갈. 2:20)을 통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갈수 있습니다. 바로 살아계신 말씀으로 부터 말입니다.

이제 ‘성경을 읽을때 우리 삶의 <세가지 긍정적인 결과들>은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 이해하기 원합니다.

첫째, ‘말씀이 꿀처럼 단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시. 119:103) 라고. 이렇게 말씀이 꿀처럼 단것을 경험할수 있다는 것은 복된 인생일 것 입니다. 그는 그 말씀의 진리와 은혜와 능력을 꿀송이처럼 영혼깊이 경험했기에 누가 하라고 해서 하고 하지말라고 하지 않을수 없는 것 입니다.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자녀가 당신의 말씀을 사랑하여 늘 가까이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온 힘과 뜻을 다할때 그 말씀을 통한 은혜와 복을, 말씀이 꿀송이보다 더 단 경험을 허락하여 주실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둘째, ‘이마가 굳세게 됩니다: 이마가 굳세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우리의 영적 강건함을 뜻 합니다. 외적인 신체조건을 말하기 이전에 우리의 영적 상태를 말하는 것 입니다.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대하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 (겔. 3:8,9) 라고 하나님은 에스겔을 굳세게 만드셨습입니다. 우리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말씀의 두루마리를 받아 먹었을때, 우리의 영적 상태는 점점더 강건하게 되는 것 입니다.

셋째,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이 모두 공감하면서도 가장 잘 되지 않는것 중의 하나가 ‘말씀을 전하는 것’ 아닐까요? 왜 우리는 말씀을 전하질 주저할까요? 아직까지 내가 믿는다고 하는 신앙의 진리에 대해 확신이 없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자랑이 부족해서가 아닐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먹게 될때, 우리는 영적으로 강건해질뿐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전하고자 하는 자원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입니다. 복음의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열망이 말씀으로 부터 주어지는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온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사랑하는 동기로 그분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고 즐거워 함으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넘치시길 소원합니다.

[설교 본문]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의 가장 심각한 딜레마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엇이 내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지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일 것 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는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닐까요? 성경을 읽지 않고, 묵상하지 않고, 가까이하지 않는것이 그 어떤것 보다도 우리 크리스챤의 심각한 딜레마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왜 우리크리스챤은 그 어떤것보다 먼저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열심으로 살느냐? 얼마나 노력하느냐?보다는 얼마나 지혜롭게 사느냐?라고 묻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지혜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이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지혜인 것 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지혜를 얻을수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통해서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성경을 통해 날마다 하나님의 지혜를 소유해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말씀 에스겔서는 이스라엘민족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있던 <주전 593~ 565년경> 사이에 쓰여졌을것으로 추정 합니다.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훈련시키신다’는 이름의 뜻을 가진 저자 에스겔은 제사장이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시기적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와 다니엘과 동시대에 활동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에스겔서의 주제는 범죄하는 이스라엘의 즉각적인 회개와 함께 미래에 주어질 하나님의 구원의 확실함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동시대에 선지자로 활동했지만,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을 예언하면서 ‘눈물의 선지자’로 불린 반면, 에스겔은 ‘미래에 주어질 하나님의 온전하신 구원의’ 회복을 예언했기에 ‘비젼의 선지자’로 불린 이유일 것 입니다. 그리고 에스겔서에는 이사야서 (11:1), 예레미야서 (23:5,33:15), 그리고 스가랴서 (3:8, 6:12)와 함께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말씀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자기 양떼를 먹이시고 지키시는 선한 목자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는 것 입니다(겔. 34장).

하나님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에스겔에게 나타나셔서 ‘두루마리의 말씀을 먹으라’고 명하십니다. 그가 그 두루마리 말씀을 받아 먹었을때, 그 말씀은 그의 배와 창자를 채우고, 그의 입에서 달기가 꿀과 같았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성경읽고 묵상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여러분 중에 ‘아니요, 필요 없어요’라고 대답할 사람은 우리중에 없을 것 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은 과연 성경을 실제로 깊이 읽고 묵상하며 살아가는 있는지요? 무엇이 우리를 성경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일까요?

저는 먼저 <성경을 읽지 않을때 우리 삶의 세가지 부정적인 결과>는 무엇인지 살펴보고, <성경을 읽을때 우리 삶의 세가지 긍정적인 결과>는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 이해하기 원합니다.

먼저 ‘성경을 읽지 않을때의 <세가지 부정적인 결과들>은 무엇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육신의 소욕에 지배받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고 그들에게 도전합니다. 그 이유를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수 없게 됩니다” (갈. 5:17/ 새번역) 라고. 우리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지 못할때, 필연적으로 육체적 욕망에 지배받게 됩니다. 내가 육신의 소욕에 지배받는다는 말은 쉽게 말하면 ‘내 마음대로의 신앙생활’한다는 뜻 입니다. 절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 입니다. 신구약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성도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크신 카운셀링은 ‘열심히 살아라’ ‘더 노력하라’가 아니라 ‘지혜롭게 살아라’일 것 입니다. 바로 사도바울이 에베소교인들에게 도전하듯이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엡. 5:15,16) 고 권고합니다. 세월을 아낌으로 지혜롭게 행하라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하는 것이 지혜롭게 행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성경’안에 있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있다는 것 입니다. 이 지혜를 말씀으로 공급받음으로서 성령의 통치하심을 받지 못할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육신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 입니다.

둘째, ‘허무와 목마름에서 헤매게 됩니다: 여러분은 삶의 만족이 있습니까? 무엇을 해도, 무엇을 가져도 메울수 없는 깊은 삶의 허무를 맛보지는 않습니까? 해갈할수 없는 내 깊은 존재속의 목마름은 없습니까?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넘치는 부귀와 명예와 권력을 누렸던 솔로몬왕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얻게되는 그 마지막 한목음은 깊은 인생의 허무였습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2). 얼마나 허무했으면 한문장에서 무려 5번씩 ‘헛되도다’라고 부르짖는 것 입니다. 한 사마리아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4:14)고 말씀하신 주님. 참되고 영원한 생명수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영혼을 적셔주지 않는한 여러분과 저는 세상 그 어떤것으로 부터도 채울수 없는 끊임없는 갈증가운데 고통당할것 입니다.

셋째, ‘하나님과 관계가 여전히 막연하게됩니다: 만약 누군가가 ‘크리스챤 자신의 믿음상태를 스스로 측정할수 있는 좋은 기준은 무엇인지?’라고 묻는다면, 저는 ‘하나님이 실제하는 하나님으로 확신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은 여전히 막연하고 저 멀리 계시고 나와는 별관계가 없는 하나님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저는 충고하고 싶습니다. 옳바른 하나님의 자녀로서 점점더 영적으로 성장하는 크리스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친밀하고 사랑으로 깊어져 간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성장이 없는 교인들의 특징은 1년을 믿어도, 10년을 믿어도, 아니 평생을 믿어도 여전히 하나님과 늘 서먹서먹한 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생명과 사랑으로, 인격과 능력으로 실제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 삶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그냥 상징적인 분인 것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잘못일까요? 하나님이 실제하지 않으셔서,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문제 입니다. 내가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생명으로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갈. 2:20)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영원토록 나와 함께 깊은 사랑의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그분의 마음을 펼쳐보여 주시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기를 거부했기 때문 입니다.

이제 ‘성경을 읽을때 우리 삶의 <세가지 긍정적인 결과들>은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 이해하기 원합니다.

첫째, ‘말씀이 꿀처럼 단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v.3) 고 오늘 말씀에서 에스겔은 고백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지금까지 성경을 읽다가 말씀이 꿀처럼 달다고 느낀적이 있습니까?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시. 119:103) 라고 말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직까지 한번도 하나님의 말씀이 꿀처럼 단것을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궁금할 것입니다. 과연 말씀이 꿀처럼 달것인가? 괜히 과장하고, 거짓말하는 것은 아닌가하고?! 이렇게 말씀이 꿀처럼 단것을 경험할수 있다는 것은 복된 인생일 것 입니다. 이런 성도에게 ‘왜 말씀을 묵상해야하는지?’ ‘왜 말씀이 신앙생활에 중요한지?’를 설명하는 것은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말씀이 꿀송이 보다 더 달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 입니다. 이론적으로 배운것도 아니요, 남이 그렇더라는 식의 간증을 듣은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 입니다. 그는 그 말씀의 진리와 은혜와 능력을 꿀송이처럼 영혼깊이 경험했기에 누가 하라고 해서 하고 하지말라고 하지 않을수 없는 것 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내가 말씀에 통해 어떤 놀라운 경험을 했는가 보다도, 왜 말씀을 가까이해야 하는가?’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그 분명한 이유를 이렇게 밝혀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 이것이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있을때든지 길에 행할때든지, 누웠을때든지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사랑해야하는 이유인 것 입니다. 어떻게 하면, 말씀이 꿀처럼 달아지냐고요? 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한가지 확신하는 것은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자녀가 당신의 말씀을 사랑하여 늘 가까이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온 힘과 뜻을 다할때 그 말씀을 통한 은혜와 복을, 말씀이 꿀송이보다 더 단 경험을 허락하여 주실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우리의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보다도 더욱 더 간절히 원하시기 때문 입니다.

둘째, ‘이마가 굳세게 됩니다: 말씀을 받게 되었을때, 점점 더 우리 성도들이 변하게 되는 영적 상태는 ‘이마가 굳세게 된다’는 것 입니다. 이마가 굳세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마가 딱딱해서 박치기를 잘한다는 뜻 입니까? 이것은 우리의 영적 강건함을 뜻 합니다. 외적인 신체조건을 말하기 이전에 우리의 영적 상태를 말하는 것 입니다. 오늘 말씀에 이어서 하나님은 에스겔선지자를 어떻게 강한 자로 세울것인지를 이렇게 선포하시는 것 입니다.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대하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 (겔. 3:8,9) 고 말입니다. 말씀의 두루마리를 받아 먹었을때, 우리의 영적 상태는 점점더 강건하게 됩니다. 조금전에 살펴보았드시,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는자의 대표적인 특징이 육신의 정욕에 지배되는 삶인 것 입니다. 조금만 유혹에도 걸려 넘어지고, 성도로서 감당해야할 고난을 이겨내질 못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육신의 유혹과 사단마귀에 지배받는 악하고 패역한 자들의 공격을 이겨낼 강인한 영적 상태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 입니다. 말씀이 어떻게 우리를 그렇게 할수 있나고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2) 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이 우리를 어떻게 본질적으로 변하시키실수 있는지, 어떻게 그 능력으로 금강석 같은 이마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날수 있는지를 탁월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이마는 말씀으로 인하여 금강석보다 더 굳세게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까? 그 말씀의 능력으로 어떤 육신의 유혹과 악한 자의 공격에도 넘어지지않는 장성한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해 가고 있습니까?

셋째,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이 모두 공감하면서도 가장 잘 되지 않는것 중의 하나가 ‘말씀을 전하는 것’ 아닐까요?! 여러분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역설적이긴 하지만, 오늘날 가장 열심으로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상당수가 기독교 이단그룹에 소속되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들은 잘못된 이단사상의 가르침을 받고도 그것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죽고 살기로 전도하는데, 전통적이고 옳바른 성경 교리를 믿는다고 자부하는 우리 성도들은 상당수가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매우 부담스럽게 여긴다는 사실 입니다. 왜일까요? 아직까지도 내가 믿는다고 하는 성경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진정한 자랑이 부족함이 아닐까요? 오늘 말씀에서 마지막으로, 말씀을 받게 될때 우리의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말씀을 전하게 된다>는 점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v.1),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v.17) 여기서 우리가 에스겔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받고, 그로인해 영적 강건함으로 성장하는 자는 말씀을 전하게 된다는 것 입니다. 복음을 내 입술을 열어 자랑하게 된다는 것 입니다. 주님께서 그의 모든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 28:19,20)는 주님의 복음증거의 명령을 자원함으로 실천하게 될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온마음과 뜻과 성품을 사랑하는 동기로 그분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고 즐거워 합니까? 쓴약 먹드시 억지로 하는것이 아니라, 점점더 그 말씀이 꿀송이 보다 더 단 은혜를 경험함으로 합니까? 그리하여 그 말씀이 여러분을 강건하게 세워주고, 여러분을 복음의 증인으로 살지 않으면 견딜수 없는 진정한 복음의 파숫군으로 살게 하고 있습니까? 이런 약속하신 말씀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길 축원 합니다. 아멘.


받아 먹으라 (겔 3:1~3, 계 22:18~19)


매일 아침 아프리카의 가젤은 눈을 뜹니다. 그는 사자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죽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매일 아침 사자 또한 눈을 뜹니다. 사자는 가장 느리게 달리는 가젤보다 빨리 달리지 않으면 굶어죽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사자이건 가젤이건 상관없이 아침에 눈을 뜨면 우리는 질주해야 합니다.
사자가 달리는 이유는 먹이를 위해서입니다. 아프리카 초원의 동물들은 먹히던지, 먹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정글의 법칙에 삽니다. 먹히지 않게 하는 것은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8에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합니다. 마귀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삼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삼키우지 않기 위하여 열심히 달려야 합니다. 매일 아침 우리는 달려야 합니다. 먹히지 않기 위해서 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먹어야 합니다. 열심히 먹는 것도 먹히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귀에게 먹히지 않기 위하여 말씀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오늘은 성서주일입니다. 성경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성경의 가치를 다시 음미하는 날입니다.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흙으로 빚은 몸에 숨을 불어넣으셔서 살아있는 영이 되게 하셨습니다. 보통 문자게 숨을 불어넣으셔서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되게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4:13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혼과 영도 쪼갭니다. 생각도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장로교신조 제1조에는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유일의 법칙이다”고 합니다. 성경 외에 우리 신앙과 행위의 법칙은 없습니다. 카톨릭에서 성경은 믿음의 첫째 법칙이라고 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성경은 믿음의 유일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전 지식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도구입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입니다. 청교도는 한가지 책만 읽는다고 합니다. 이 책은 곧 성경입니다. 이 성경을 우리의 책으로 삼기를 바랍니다.

첫째, 발견한 말씀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1절에는 “인자여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라고 합니다. 계시록 10:9에는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것입니다. 먹는다는 것은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먹은 것은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빼앗기지 않으려면 먹어버리면 됩니다. 먹으면 내 것이 됩니다.

마태복은 13장에는 씨뿌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첫째가 길가에 떨어진 씨입니다. 이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고 합니다. 새들이 먹은 것은 씨앗이 땅에 깊이 박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마음에 깊이 박히고 받아 먹으면 빼앗기지 않습니다. 왜 말씀을 들을 때는 감동을 받다가 금방 사라져버립니까?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깊이 뿌리를 내리면 사라지지 않습니다. 누가 훔쳐가지 못합니다.

말씀은 먹는 것입니다. 먹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맛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밥을 먹을 때는 밥맛이든 입맛이든 있어야 합니다. 밥맛이 없다는 것은 병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건강해보세요. 왜 밥맛이 없겠어요? 건강은 먹는데서 나옵니다. 옛날 어른들은 “밥보신이 제일이다”고 그랬습니다. 먹어야 건강합니다. 편식은 건강치 못하게 만듭니다. 어느 한 구절만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것은 오류이고 독선입니다. 이단이 별겁니까? 이단이 다 몇몇 구절만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다가 잘못 가는 것입니다.

지혜란 라틴어로 ‘사페레’(sapere)란 단어입니다. 즉 ‘음미하다’ 또는 ‘맛보다’라는 뜻입니다. 지혜는 맛보는 것입니다. 성경을 맛보는 것이 가장 큰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마음판에 새기고, 미간에 붙이고,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꼭꼭 간직하고 항상 가지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6살 된 주일학교 학생이 성경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친교실에서 어른들이 축하해주었습니다. 어떤 분이 “얘야, 그 성경책을 구경할 수 있겠니?”라고 합니다. 그 때 어린이는 “좋아요, 하지만 펼쳐보진 마세요”라고 합니다. “펼치지는 말라고 왜 그렇지?” 어른이 묻자 아이는 대답합니다. “그러시면 하나님이 나오게 될 거예요”. 성경을 펼치면 하나님이 나오십니다. 성경은 읽으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요한복음 6:48에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6:53에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그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말씀은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먹어야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있어야 생명이 있습니다.

에스겔 3:2에는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을 입을 벌리는 것입니다. 참새 새끼가 어미가 주는 먹이를 먹기 위하여 입을 벌리는 것을 보세요. 입이 찢어지라 벌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먹지 못합니다. 입을 벌리는 것은생존을 위한 싸움입니다. 입을 벌려야 성경은 먹을 수 있습니다. 입을 벌리고 성경을 먹는 것은 우리의 생존입니다.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먹어야 삽니다.

성경을 완독하기 위해서는 약 56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매일 40장을 읽는다면 30일안에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서너장을 읽으면 일년에 신구약을 다 읽을 수 있습니다. 밥은 꼬박꼬박 세끼를 다 먹으면서 거르면 큰일 나는 줄 알지요.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먹지요? “빼먹어요”. 성경도 빼먹지 말고 꼭꼭 씹어 드세요.

둘째, 말씀을 먹어야 가서 말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3:1은 “받아 먹으라 먹고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고 합니다. 내가 먹어야 다른 사람을 먹일 수 있습니다. 전하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 것은 내가 먹는 것입니다. “고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다바르’입니다. 이 말의 뜻은 ‘정복하라’, ‘파괴하라’는 말입니다. 말씀을 먹어야 정복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먹어야 파괴할 수 있습니다.

먹지 않고는 먹일 수 없습니다. 먹이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먹어야 압니다. 내가 먹으면 먹일 수 있습니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는 우선 어머니가 잘 먹어야 합니다. 잘 먹다 보니 살도 찌고, 몸매도 망가진다고 요즘에는 젖을 안 먹이는 젊은 어머니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몸매 관리하려고 아예 아기에게 소젖을 먹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기억하세요. 어머니 젖을 먹는 아기가 건강하고 머리도 좋답니다. 내 몸매 관리하느라고 아기의 건강을 망치고 머리 나쁘게 만드는 것은 참다운 모정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잘 먹어야 아기를 잘 먹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모압평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미디안의 선지자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시킵니다. 발락은 고관들을 보냈지만 발람은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하신다고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발락왕은 더 높은 고관을 보냅니다. 나귀를 타고 가다가 나귀가 천사를 보았습니다. 나귀는 앞으로 가지 않고 벽에 부딪치고 맙니다. 발람은 발락왕에게 나아갔습니다. 그 때 왕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하였지만 발람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신 말씀만 해야 합니다”라고 그는 왕에게 말했습니다. 발람은 충실한 하나님의 대변자였습니다.

민수기 23:12에는 발람이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합니다. 바르게 먹으면 바르게 전합니다. 말씀을 먹여야 가서 바르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입에 주신 말씀만 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말씀을 전하다가 유대관원들에게 잡혀갑니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 말라”고 압박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잘 먹으면 용기있게 전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전하지 않을 수 없어서 매를 맞고 갇히기까지 했습니다.

어느 공사장 밑을 지나가던 사람이 위의 인부가 실수로 떨어뜨린 망치를 어깨에 맞았습니다. 얼마나 아픈지 위를 향해서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그때 위에 있던 인부는 “앗따, 그 사람 말도 많네”라고 합니다. 망치를 맞은 사람은 “아니 내가 말 안하게 생겼냐”고 소리 지릅니다. 그때 위의 인부가 말합니다. “아까 어떤 사람은 머리에 맞아 죽었는데도 아무 말도 않던데 뭘 그걸 가지고 그렇냐”라고 하더랍니다. 살아 있으면 말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일한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일한 삶의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꾸 가르쳐야 합니다. 많이 전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감정의 표현이 성경이 기초입니다. 예술도 성경이 기초입니다.

바하의 ‘마태수난곡’, 헨델의 ‘메시아’, 모차르트의 ‘위령곡’, 베토벤의 ‘장엄미사’, 멘델스존의 ‘엘리야’등이 모두 성경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화가인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렘브란트 이 모두가 성경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위클리프 본부는 5월 16일을 성경없이 예배드리는 날로 정했습니다. 성경의 귀중함을 깨우치고, 성경 없는 종족의 고통을 하루라도 체험하는 의미 있는 날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그리고 성경을 마음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요.
여러분 나이키라는 상표를 아세요. 아주 공격적인 경영과 마케팅을 하는 스포츠 용품 회사입니다. 나이키튼 “Do it” 즉 “그것을 하라”는 광고로 많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무엇이나 하라고 하는 도취적 슬로건이 아니라 할 것을 반드시 하라고 하는 격려입니다 먹으면 먹일 수 있습니다. 먹으십시오. 그리고 먹이십시오. 성경은 “Do it” 이라고 명령합니다. 이 명령은 잘 먹는 자가 할 수 있습니다.

셋째, 말씀은 입에서 달기가 꿀과 같습니다.

에스겔 3:3에는 “내가 그것을 먹으니 내 입에 달기가 꿀 같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말합니다. 요한도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계시록 10:9에는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고 합니다. 시편의 기자도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시편 119:103에는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고 합니다.

냉면을 먹을 때 계란을 먼저 먹는 이유를 아십니까? 입에 냄새를 제거하여 냉면의 맛을 돋구어 준다고 합니다. 저하고 함께 그 말을 들은 어느 목사님은 “나는 원래 그렇게 먹었는데”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알고 그랬지요?”라고 하니까 그 목사님의 대답이 “다른 사람이 집어 먹을까봐 먼저 먹었지” 그랬습니다. 입안에 냄새를 먼저 제거해야 냉면의 맛이 제대로 납니다. 세상의 맛을 제거해야 하나님의 맛이 납니다. 세상과 하나님이 썩여 있으면 맛이 없어집니다. 먼저 세상을 제거하고 말씀을 보면 말씀의 맛이 꿀보다 더 달게 됩니다.

디모데후서 3:17에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성경을 평합니다. 성경은 유익한 책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맛입니다.
시편 8편 8절은 성경의 가장 한 가운데 있는 구절입니다. 에스라 7:21은 J만 빼고 영어의 모든 알파뱃 문자가 나옵니다. 에스더 8:9은 성경에서 가장 긴 절이며, 6음절 이상인 단어나 이름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식으로 아는 성경이 아니라 말씀의 맛으로 아는 성경이 될 수 있습니다.

결론

남아프리카 목회자 존 그루치가 영국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서 보안 검색을 받을 때에 경고음이 났습니다. 무기를 가졌는가 하여 알고 보니 성경의 금속 지퍼가 소리를 낸 것입니다. 그는 “단지 성경일 뿐이오”라고 했을 때에 무장 경관이 “그렇지만 성경은 매우 위험한 책이 될 수도 있죠”라고 하더랍니다. 성경은 아주 위험한 책일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을변화시킵니다. 성경는 혁명을 일으킵니다. 성경은 사람을 완전히 바꿉니다. 성경 때문에 변화된 사람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영성가 포시스는 “사도들의 참된 계승자는 감독이 아니라 신약성경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교회를 이어나갑니다. 성경을 잘 먹읍시다. 성경을 잘 씹어 소화 시킵시다. 밥은 못먹어도 성경은 먹읍시다. 성경으로 사람이 바뀌고, 세상을 바꾸는 놀라운 역사가 성경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 동안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는 나날이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먹으라 (에스겔 2:8 ~ 3:3)

조금은 생뚱맞은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오늘 현대인들의 특징을 “배고픔”을 잊어버린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울대 가정의학과 유태우 박사의 다이어트 강좌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내용 중에 놀라운 표현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뱃속에는 6개월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을 정도의 잉여 에너지가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뷔페식당에 가득 차려진 음식들 그 만큼이 우리 뱃속에 담겨져 있다고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까지 된 것은 배고프지 않는데도 계속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배고픔을 느낄 때 배고픔을 이길 정도만 먹었으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고픔을 잊고 살아갑니다. 배고픔을 느끼기도 전에 먹고, 배고프지도 않는데 또 간식도 챙겨 먹습니다. 그래서 거의 배고픔을 느껴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배고픔을 잊어버릴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배고픔을 잊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었습니다. 비만으로 인한 고지혈증, 고혈압, 당뇨, 기타 각종 성인병... 이 모든 것이 배고픔을 잊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적 배고픔을 잊고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오랜 금식 도중 잠시 배고픔을 잊는 것처럼 정말 오랫동안 영적 섭취를 하지 못하다가 영적 배고픔마저 잊어버렸습니다. 먹는 것을 기피하다가 배고픔을 잊은 거식증처럼 영적 섭취를 꺼리다가 영적 배고픔마저 잊어버렸습니다. 이제 영적 배고픔을 잊은 채 영적인 존재로서의 인간다움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런 현상을 예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보라 날이 이를 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그렇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영적인 배고픔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배고픔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영적으로 배고픈가? 나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배고픈가?”
에스겔서는 영적 배고픔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입니다. 그 중에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저 천상의 신비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어서 에스겔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먹게 하셨습니다.

두루마리란 것은 말하자면 고대 시대의 책입니다. 굴대에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글을 써서 감아놓은 형태입니다. 폭이 적으면 요즘 책의 두 배 정도 크면 1미터 가까이 된 것도 있습니다. 길이는 7미터나 되는 것도 있었습니다. 결코 먹거리로 만든 것도 아닐 뿐 아니라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먹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산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듯이 읽어야 함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의 식탁

본문 2:9-10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위해 두루마리 책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먹어야 할 영의 양식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고대 교부들은 이것을 “말씀의 식탁” (tabula Verbi)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이 먹고 힘을 얻을 영의 양식을 정성껏 차려 말씀의 식탁을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말씀의 식탁을 대하면서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의 영이 살기 위해 영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 8: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 살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문헌을 살펴보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두 개의 식탁을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늘 그 식탁을 대할 때 기쁨으로 대했습니다. 하나는 “말씀의 식탁”(tabula Verbi)이고, 다른 하나는 “빵의 식탁”(tabula panis)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으로 빵의 식탁을 준비해 주셨다고 감사했고 기쁨으로 그 식탁 앞에 앉았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영의 양식으로 말씀의 식탁을 준비해 주셨다고 감사했고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했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살기 위해 두 개의 식탁 앞에 앉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빵의 식탁과 말씀의 식탁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철저하게 배우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 두 개의 식탁 앞에 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빵의 식탁과 말씀의 식탁입니다. 이 중에 하나라도 부족하면 영양실조에 걸립니다.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살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나를 위해 준비된 식탁이라는 점입니다.
시 40:7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이 부분의 히브리어 원어 표기를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비머길라트 세페르 카투브 알라이...” 이것을 그 뜻을 충실히 담아 다시 번역해 보면 이런 뜻입니다. “이 책이 나를 위해 쓰여졌다니!”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무릎을 쳤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지금 자기에게 큰 감동을 주고 놀라운 깨달음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프린스턴 신학교의 제임스 로더(James Loder) 교수는 바로 이것을 “아하 경험”(Aha-experience)이라고 했습니다.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순간입니다. 성경 말씀이 특히 내게 주시는 말씀이 되는 순간입니다. 바로 이 아하 경험이 하나님께서 차려주신 말씀의 식탁이 바로 나를 위한 식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자녀들을 위해 그 자녀들만의 식탁을 정성껏 준비하듯이, 사랑하는 아내가 퇴근해 오는 남편을 위해 사랑과 정성을 담아 남편만의 식탁을 정성껏 준비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위해 우리만의 말씀의 식탁을 준비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고 감사함으로 기쁜 마음으로 그 식탁을 대해야 하겠습니다.

말씀의 식사

   본문 3:1-2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에스겔 선지자가 두루마리를 먹는 과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설명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과정에도 귀한 교훈을 줍니다.

  우선 내가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입을 벌렸던 것처럼 우리가 말씀의 식탁에 앉아서 일단 입을 벌려야 합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두루마리를 먹자고 입을 벌리겠습니까? 그러나 에스겔은 순종해서 입을 벌렸습니다.

  열대 과일 중에 두리안이란 것이 있습니다. 생긴 것도 크고 볼품없이 생겼습니다. 더 큰 문제는 고약한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이 과일을 들고 비행기나 대중교통에 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고약한 냄새 때문에 남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처음 먹는 사람들에게는 먹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참고 입에 넣어보면 그 맛이 정말 좋습니다. 부드럽고 달콤하기가 그 어떤 과일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성경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읽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그것도 매일 말씀의 식탁 앞에 앉는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을 매일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우리 심령에 얼마나 유익한 것인가를 압니다. 그러나 매일 꾸준히 말씀의 식탁 앞에 앉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힘이 들어도 말씀의 식탁 앞에 앉아야 합니다. 매일 말씀의 식탁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정해 놓고 꾸준히 나아가야 합니다.

  다음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2절에서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에스겔이 입을 벌리자 하나님께서 친히 그 두루마리를 먹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두루마리를 어떻게 입에 넣을 것이며, 어떻게 씹을 것이며, 어떻게 소화를 시킬 것입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영의 양식으로 섭취하고 소화할 수 없습니다. 다른 책처럼 읽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영의 양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먹여주셔야 합니다. 여기에 성령의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사 50:4-5를 보면 이렇게 되었습니다. “아침마다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성령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주셔서 성경을 읽는 동안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 119:18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성령께서 우리는 영안을 열어주셔서 성경을 읽는 동안에 놀라운 사실들을 볼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행 16:14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대로 순종하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우리 귀를 열어주셔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해 주십니다. 우리 눈을 열어주셔서 놀라운 사실을 보게 해 주십니다. 우리 마음을 열어주셔서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게 해 주십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 속에서만 우리는 영의 양식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말씀의 식탁에 앉을 때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말씀의 역사

   본문 3:3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고 난 후에 일어난 현상을 설명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저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나니 그 말씀이 에스겔을 변화시켰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역시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선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에스겔이 말씀을 먹고 나니 그 말씀이 그 배에 채워지고 또 그 창자에 가득 채워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 전체를 지배하여 그가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동안 심층수 열풍이 분 적이 있습니다. 바다 심해를 흐르는 아주 특별한 물인데 이것이 어머니 자궁 속의 양수와 같아서 우리 인간에게는 최적의 물 최고의 물 역할을 한답니다. 설명을 들어보니 만병통치 약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답니다. 적어도 6개월은 꾸준히 먹어야 한답니다. 그래야 우리 체내의 모든 체액이 그 물로 바뀌게 되고 그 후에야 효과를 내기 때문이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식탁에 꾸준히 앉아서 말씀의 식사를 오래하게 되면 그 말씀이 우리 심령에 채워지게 됩니다.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말씀의 사람으로 변화시켜줍니다.

   사실 우리 생각과 마음에는 이 세상 가치관, 인생관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 풍조에 휩쓸리게 됩니다. 불쑥불쑥 음란한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부정부패라도 저질러서라도 대박의 꿈을 이루어 보고 싶은 마음들이 이글거립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돈에 대한 욕심이 나를 괴롭힙니다.

   우리 생각과 마음에 이런 것들이 청소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져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를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다음으로 말씀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해 줍니다.

   본문 3절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고 나니 그 맛이 정말 꿀처럼 달더라는 것입니다.

  랍비와 그 제자 사이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 보겠습니다. 랍비가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너는 무엇을 배웠느냐?”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율법을 세 번에 걸쳐 통과 했나이다” 그러자 스승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너를 통과했느냐?”

   제자는 심혈을 기울여 세 번이나 율법을 정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랍비는 율법이 제자를 꿰뚫고 통과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정성을 기울여 읽다보면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나를 주장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가 성경에 질문을 던지며 읽습니다. 내가 성경 내용을 알고자 관심을 기울여 읽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읽다보면 성경 말씀이 내게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 속에서 내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내게 친히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이 때 때로는 우리가 깊은 용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놀라운 위로와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하늘의 평안을 맛보게 됩니다. 알 수 없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꿀보다 더 단 말씀의 맛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 식탁에 빠져들게 됩니다. 말씀과의 사랑에 빠져들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말씀의 기갈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영적 배고픔을 잊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영적 배고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말씀의 식탁을 준비해 주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말씀의 식사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역사로 우리가 말씀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먹고 마시라(예레미야 15:16)

내가 주의 말씀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먹으매 주의 말씀이 내게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사오니, 오 {주} 만군의 [하나님]이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불리나이다.

성구를 암송하는 것과 성구를 먹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행각해 봅니다.
암송이란 기억력에 의한 것이라면 먹는 것은 소화력에 의한 것입니다.
소화력이 좋다면 먹은 것이 내 몸에 유익한 세포로 자리를 잡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암송이 아니라 먹는 것에 열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성경을 먹으려면 먼저 암송하는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성경을 암송하는 일이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여러분들의 양식이 무엇입니까?
육신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양식을 묻고 있습니다.
우리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갓 거듭난 자들에게는 순수한 말씀의 젖이며, 어른들에게는 단단한 고기이며, 달콤한 꿀과 버터이며,
사과입니다.
성경 암송은 말씀을 먹는 일입니다. 우리의 몸은 위(胃)에서 입으로 들어온 음식을 소화시키고, 모든 영양을 취하여 온 몸으로 보내듯이, 우리의 영은 눈으로 귀로 들어온 말씀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함으로써 소화를 시킵니다. 그렇게 해서 말씀으로부터 받은 가르침과 교훈과 훈계와 책망과 은혜와 위로와 힘을 온 몸으로 보냅니다. 이렇게 할 때 마음은 은혜로써 강건해지고 믿음은 점점 자라나며 영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속에서 글자로 존재하지만 우리 속에 들어옴으로써 강력하게 자라납니다. 말씀이 있어야 할 곳은 우리의 마음속입니다.

씨앗으로서의 말씀은 마음이란 밭에 심어지고, 뿌려져야만 자랍니다. 음식으로서의 말씀은 마음속에 들어가야만 온 몸과 혼과 영에 힘을 주고, 성장을 이룹니다. 말씀은 그 무엇으로 비유되든 간에 있어야 할 정확한 위치는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속에 들어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 풍부히 거하게 하여]라고 하십니다. 몸 밖에 있는 음식은 아무리 영양이 풍부하고, 맛있고, 비싸고, 좋은 것이라도 입을 통해 내 뱃속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냉장고에 있는 음식, 식탁에 있는 음식은 내가 먹을 수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만 음식이지 내가 먹을 수 없는 것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내 안에 들어와 있지 않고, 내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 안에 들어 온 음식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만약 우리가 먹은 음식이 위나 장에서 그대로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배탈이 나고, 온 몸은 파리해지고 맙니다. 차라리 먹지 않는 것보다 못합니다. 소화되지 않는 음식은 몸을 병들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듣고, 읽고, 암기한 말씀들이 믿음과 결합하지 않고, 묵상을 통해 소화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영혼은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말씀은 반드시 영혼의 저작(咀嚼) 운동을 거쳐서 온 몸에 골고루 전달되어야 합니다. 피가 순환하듯이, 호흡이 순환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속사람을 완전히 한 바퀴 돌고 나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에서 ‘성경을 암송하라.’고 하는 대신 ‘내 말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먹는 것은 참으로 잘 아는 단어입니다. 먹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먹는다는 말은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것은 식사에서만 사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많은 돈을 혼자 다 먹었다./ 함께 먹었다./ 꿀꺽 삼켰다./ 먹지 못했다.’ 등등 먹는다는 말은 차지하다, 소유하다 등의 의미로 언어적 확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잃어버리는 것도 ‘먹었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 많던 재산 다 까먹었다.’ 먹어서 없애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먹으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벌지는 않고 먹기만 한다.’고 할 때 먹는다는 것은 [소비하다, 낭비하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 사이에 쓰는 용어 중의 하나가 ‘먹는다.’입니다. 그 아이는 ‘가르쳐 주는 것을 잘 받아먹어!’ 라고 하면 잘 배운다는 의미입니다. 스펀지처럼 흡수력이 좋고, 수용성이 매우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움에 대한 갈증이 크고 지적 욕구가 왕성한 사람일수록 이런 식성이 좋습니다. 잘 먹고, 잘 소화합니다.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에 대해 왕성한 식욕을 느끼고, 항상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요,](마5:6). 주린 자들이 먹습니다. 목마른 자들이 마실 물을 찾습니다.

배가 부른 자들은 주를 찾지 않습니다. 먹고 살만하면 사람들은 교만해지고, 마음이 높아집니다. 이스라엘은 가난해서 멸망한 적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경제가 파탄이 나고, 무역 수지가 악화되고, 국력이 약화되면 이웃 나라에게 망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반대로 잘 먹고 잘 살 때, 먹을 것이 많을 때 망했습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초장이 내는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매 그들의 마음이 높아져서 그런 까닭에 그들이 나를 잊었느니라.](호13:6).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치고, 여러 가지 환란이 오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습니다. 잠자던 혼들도 깨어납니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납니다. 그러나 배가 부르게 되면 주님을 잊어버리고, 말씀도 잊어버립니다. [너는 내가 이 날 네게 명령하는 그분의 명령과 판단의 법도와 법규를 지키지 아니함으로 {주} 네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아니하도록 조심할지어다. 네가 먹어 배부르게 되고 좋은 집을 짓고 그 안에 거하며 또 네 소 떼와 양 떼가 번성하고 네 은금이 크게 늘어나며 네 모든 소유가 크게 늘어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가 {주} 네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8:11-14a).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말씀을 잊어버리는 경우는 대부분 잘 살 때입니다. 이런 예는 허다합니다. [그러나 여수룬이 기름지게 되매 발로 찼도다. 네가 기름지고 비대하고 기름으로 덮이매 그때에 그가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의 구원의 [반석]을 소홀히 여겼도다.](신32:15).

그래서 주님은 굶주림을 보내십니다. 낮추어 버리십니다. 말씀을 찾아서 먹으라는 것입니다. 낮추시고 주리게 하시는 이유는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주리게 하시고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아니하고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주릴 때 겸손해 지고, 말씀을 귀히 여기고, 양식으로 삼는 자들은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성경을 암송하고, 그 암송한 말씀을 계속 되새김질 하는 사람들은 결코 허기짐을 모릅니다. 영적 주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을 공부해도 그 때 뿐입니다. 말씀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리고, 그 씨앗이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금방 빼앗겨 버리고, 숨이 막혀 버리고, 수분이 없어 말라 버립니다. 단단히 박힌 못처럼 박혀 있으면 뽑으려고 해도 잘 뽑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뿌리 없이 그냥 나돌아 다니는 말씀은 참새 한 마리가 간단히 주워 갑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이 사람을 낮추시고 주리게 하셔서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간직하게 하십니다. 성경을 암송하면 그 암송한 구절로 시를 짓기도 하고, 노래로 만들기도 하고, 서로 화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말씀이 암송되어 있지 않다면 여러분이 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내 마음이 좋은 일을 읊으리라. 내가 왕에 관하여 지은 것들을 말하리니 내 혀는 능숙한 문장가의 펜이로다. 왕은 사람들의 자녀들보다 더욱 아름다우시니 왕의 입술에 은혜가 넘치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왕을 영원히 복되게 하셨나이다.](시45:1-2). 시편 기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능했습니다. 그래서 ‘내 혀는 능숙한 문장가의 펜이로다.’고 할 만큼 입에서 말씀이 흘러 나왔습니다.

신약 성도들인 우리들에게도 주어진 명령이 있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실행되지 않는 것입니다. [시와 찬송가와 영적 노래로 너희 자신에게 말하며 너희 마음속에서 [주]께 노래하고 선율을 만들며](엡5:19). 이것은 음악적 재능이나 싯적(詩的) 소양의 문제가 아니라 ‘말씀이 마음속에 있는가?’란 문제입니다. 우리는 침례인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나 주의 모친 마리아가 즉석에서 메시아의 탄생과 그의 사역에 대해서 구약을 인용하며 찬송시를 읊어나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이 암송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씀을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를 하였던 것입니다. 작곡까지는 아니더라도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성경을 암송하면 여러분의 혀는 ‘능숙한 문장가의 펜’이 될 것입니다. 시인이 되고, 찬송가의 노랫말을 쓰는 작사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 시와 찬송가와 영적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너희 마음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골3:16). 지금 이 구절을 순종하여 실천하는 성도들이 몇이나 됩니까? 저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최근에 들어서 집중적으로 성경을 암송하면서 이 말씀이 눈에 들어왔고, 시와 찬송가를 쓰고자 하는 소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몇 편 써 보았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여러분은 시와 찬송가를 써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바탕으로 시와 찬송가를 쓰면 성경 암송이 더욱 용이해집니다. 그리고 깊이 새겨집니다.

몇 주 전에 ‘나를 믿는 자는’이란 말씀을 묵상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관련 구절들을 집의 화장실, 세면대, 부엌, 마루 그리고 컴퓨터 옆에 붙여 놓고 외웠습니다. 그러고 나서 간단히 시를 한 편 썼습니다.

주님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다급하지 아니하고(사28:16),

나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으며(요3:15)

나를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을 얻는다.’(요3:16)

이는 주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않고(요3:18),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으며(요6:35)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요7:38). 

주님이 주신 물이 

내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요4:13-14).

주님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며(요11:25), 

결코 죽지도 아니하리라(요11:26). 

이는 주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어둠에 거하지 않으리라(요12:46). 

이는 주님이 생명의 빛이시요,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행한 일을 하고 더 큰 일도 하리라(요14:12).

이는 주님께서 우리가 믿을 때 성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난 자라(요일5:1).

나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요11:40), 구한 것을 받고(막11:23), 죄들의 사면을 받으리라(행10:43). 

우리가 이 모든 말씀을 믿고 확신하는 것은 자기 안에 증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요일5:10).

이것은 완벽한 말씀의 암송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암송할 때, 성경이 말하는 대로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화답하고,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마음속에서 은혜로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 암송은 목마른 갈증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광야를 여행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순례의 길을 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물입니다.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 주면 더욱 좋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들의 바위에서 나오는 레바논의 눈을 버리고 떠나겠느냐? 다른 곳에서 나오는 흐르는 찬물을 버리겠느냐?](렘18:14). 이교도들은 여행할 때 레바논의 눈(snow)을 버리고 떠나지 않습니다. 흐르는 찬물도 버리지 않습니다. 광야를 여행하는 사람들, 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들의 바위에서 나오는 레바논의 눈은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흐르는 찬물은 깨끗하며, 마시기에 적합합니다. 누가 이것을 버리겠습니까? 그러나 유다는 어리석게도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을 버렸습니다(렘17:13). 한 모금의 물도 버리지 말고, 눈도 물도 버리지 말아야 할 터인데 이들은 생수의 샘인 주를 버리고 스스로 물 저장고들을 팠습니다(렘2:13). 이는 오늘날 배교한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복의 근원,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버리고 스스로 잘난 체하며 자기 생각과 철학을 가지고 삽니다.

그들은 타는 갈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는 대신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를 좇아갑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함으로 그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대신 독특한 해석이나 새로운 교리나 자신의 가려운 귀를 긁어 줄 그 무엇을 찾아 떠납니다. 이들은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에 이르지 못하며,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도 주님을 알지 못합니다.

문제는 진실한 성도들입니다. 진실한 성도들 가운데 갈증을 지닌 사람들은 많습니다. 바른 진리를 추구하고 바른 교회를 찾고, 참된 헌신의 의미와 감격이 있는 예배를 찾습니다. 이런 갈증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마른 갈증을 가지고 있는 자는 주를 찾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사슴이 물 시내를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기에 목이 타니 내가 어느 때에 가서 [하나님] 앞에 보이리요?](시42:1,2). 속에 진리에 대한 갈증이 없는 자들은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무릇 성도라면 말씀에서 더 깊은 진리를 얻고자 하는 타는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구원을 받은 후에 늘 타는 목마름과 갈증이 있었습니다. 좀 더 깊은 진리를 찾아서 헤매었습니다. 저는 이 갈증을 사람들에게서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때마다 주님은 한 걸음씩 깊은 바다로 가서 그물을 내리게 하시고,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건져 올리게 해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저는 영적으로는 만족을 몰랐습니다. 늘 주리고 목마름이 있었는데 이것은 매우 힘든 기간이기도 했지만 놀라운 은혜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성경을 계속해서 통독할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읽고 또 읽었습니다. 스토리를 요약하기도 하고, 요절들을 적어 가면서 전체의 맥을 잡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것이 결국 든든한 저의 영적 자산이 되었습니다.

저는 갈증이 있는 그 자체가 잘못된 문제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분명히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말씀 묵상에 전념한 사람입니다.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늘 목이 말랐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찾았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내가 일찍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내 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사모하오니](시63:1). 다윗이 영적으로 만족하고 안주했다면 그는 단련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메마름을 주시는 것은 주를 더욱 찾고, 갈망하고, 사모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을 암송하고 그 속에서 어떤 진리를 찾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더욱 기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내 혼이 {주}의 뜰을 사모하여 참으로 쇠약하게 되었사오니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구하며 부르짖나이다.](시84:2). 주님께서 이런 메마름을 주시는 것은 죄악의 결과만은 아닙니다. 죄악이 생수의 강을 막고, 솟아나는 샘물을 막은 결과일 수도 있지만 주님을 신뢰하고 말씀으로 단련하는 기간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목마른 자를 부르십니다.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고, 배부른 자가 아니라 주린 자를 부르시며, 목마른 자를 부르십니다. [마지막 날 곧 명절의 그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 와서 마시라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 마시라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이 주님을 찾고 주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이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 그들의 혀가 갈증으로 인하여 힘을 잃을 때에 나 {주}가 그들의 말을 듣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라.](사41:17). 사도 바울은 참으로 위대한 계시를 풍부히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부분에서 그는 결코 만족하거나 그 자리에서 자족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가 이미 도달한 것처럼 말하지 아니하며 이미 완전한 것처럼 말하지도 아니하고 다만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아 이루시고자 하신 그것을 붙잡으려고 뒤따라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내가 이미 붙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다만 이 한 가지 일을 행하나니 곧 뒤에 있는 그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그것들에 도달하려고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밀고 나아가노라.](빌3:12-14). 그는 먹고 사는 육신적인 문제에 관한한 만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계속해서 앞을 향해 달렸습니다. ‘나는 도달하지 못했다. 완전하지 않다. 나는 아직...’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달렸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성경을 읽고 공부한 사람들에게도 성경을 암송하는 일은 보통 결심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장난이나 취미로 되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암송을 하는 것은 진리를 토대로 살겠다는 결심이 서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주려 본 사람, 타는 목마름으로 헤매어 본 사람만이 성경의 진리를 마음속에 간직하기 위해 외우려고 합니다. 한 마디 말씀이라도 좀 더 외워두려고 합니다. 암송되지 않는 말씀은 영적 주림과 목마름을 결코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먹으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먹는 것입니다. 성경이 영혼의 양식임을 인식하고 날마다 먹어야 합니다. 저는 육신의 식사는 몇 끼를 걸러도 별로 배고픔을 못 느끼지만 성경 읽기를 쉬거나 빼 먹으면 영적 허기를 많이 느낍니다. 이것은 특별한 영적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영적 생명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것을 전혀 인식하지도 못하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채 살아 왔다면 여러분의 지금 신앙은 가짜입니다. 성경을 며칠을 읽지 않았음에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여러분의 영은 감각을 상실했거나 깊이 병들었거나 잠이 들었거나 죽은 것입니다. 곤고함을 느끼고, 메마름을 느껴야 합니다. 허기를 느껴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혼만 감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도 감각이 있습니다. 영도 지성이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도 마음속 깊은 곳에 울림도 없고, 격정도 없고, 슬픔도 없고, 기쁨도 없다면 여러분의 영적 상태에 대해 건강 검진을 받아 보셔야 합니다. 죽었거나 잠들었거나 병들었거나 셋 중의 하나입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었도다.](계3:1b)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행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몸으로는 일을 합니다. 종교적 지성과 신앙으로 인해 정신적으로도 동의하고 일을 합니다. 그러나 영은 완전히 죽어 있었습니다. 이런 예는 우리 교회에서도 자주 발견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인 도전이 올 때, 어떤 문제가 터질 때 심한 부담감과 압박을 느끼다가 도망을 갑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잠자는 자들도 일어나고, 죽은 자들도 일어나라고 하십니다(엡5:14, 사60:1). 일어나 빛을 발하라. 일어나 먹으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로뎀나무 아래서 잠자던 도망자 엘리야, 실족한 엘리야를 깨우셨습니다. 주님은 배 밑창에서 잠자던 도망자 요나, 주님께 불순종한 요나를 깨우셨습니다. 주님은 감옥에서 잠자던 베드로를 깨우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깨어나지 않았으면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먹어야 기운을 씁니다. 먹어야 일을 합니다. 먹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잘 먹어야 합니다. [내가 주의 말씀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먹으매 주의 말씀이 내게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사오니, 오 {주} 만군의 [하나님]이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불리나이다.](렘15:16). 여러분은 성경을 먹어야 합니다. 어떤 것은 먹을 때 그냥 넘기는 것이 있지만 어떤 것은 오랫동안 씹어야 합니다. 먹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랍스터처럼 뼈만 보이는 것은 그 속에 부드러운 살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익혀야 하고, 어떤 것은 삶아야 하고, 어떤 것은 구워야 합니다. 성경 말씀 역시 그렇습니다. 읽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듣고 대화하고, 주님께 묻고 기도하며 말씀을 완전히 내 안에 거하게 해야 합니다. 먹을 때 먹는 입에서 질감을 느끼고, 배가 불러오는 포만감과 만족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배가 고파오면 또 먹어야 합니다. 규칙적으로 먹어야 합니다. 어떤 날은 작심을 하고 더 많이 먹어야 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적게 먹었을 때는 간식이라도 챙겨서 먹어야 하듯이, 성경을 덜 읽었을 때는 다른 조치를 강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네가 발견하는 것을 먹으라.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의 집에게 말하라, 하시기에](겔3:1). 주님은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먹고 가서 말하라. 이것이 순서입니다. 먹지 않고 가서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때 에스겔은 입을 벌렸습니다. [내가 입을 벌리니 그분께서 나로 하여금 그 두루마리를 먹게 하시고 또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네 배로 하여금 먹게 하고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창자를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그것을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꿀같이 달더라.](겔3:2-3). 우리 모두 이런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의 단맛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읽고 또 읽어도 더 읽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예 통째로 외워버리고 싶은 욕구가 들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란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명령은 명령권자의 권위에 따라 그 강도가 다릅니다. 부모의 명령보다는 국가의 명령이 큽니다. 국가의 명령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이 훨씬 더 크고 강합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오늘날 성도들은 ‘명령’이란 말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명령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으라.’는 것은 명령입니다. 먹어도 되고 먹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명령이기 때문에 먹지 않으면 반역으로 간주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말씀을 먹지 않음으로 인해 반역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오직 너는 내가 네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 반역하는 집같이 반역하지 말며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니라.](겔2:8). 말씀을 받아먹지 않는 일은 주님께 반역하는 것입니다. 먹으라는 것을 먹지 않는 것은 선택의 사항이 아니라 불순종이요, 거역이며, 반역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반역 가운데 살아왔다면 이 시간 깊이 회개하고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무지로 인한 반역이었다 할지라도 용서를 구하고 이후로부터 말씀을 매일 받아먹겠다는 결단을 하십시오.

그리고 행하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몰랐다, 잘 몰랐다, 생각하지 않았다 등은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확인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할 것이요, 온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27:26). 모든 말씀을 행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입니다. 모든 말씀은 단지 듣고 마는 것이 아니라 행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은밀한 일들은 {주} 우리 [하나님]께 속하거니와 계시된 그 일들은 영원토록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속하나니 이것은 우리가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신29:29). 성경 암송은 책에 기록된 말씀을 마음에 옮겨 적는 일입니다. 성경 암송은 암기력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기록된 글대로 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행하기 위해서 암송한 말씀이 아니라면 암송은 버스 노선이나 전화번호부를 암송한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좀 편리하다는 것 외에 아무 유익도 없습니다.

말씀을 먹으면 마음은 기쁨이 생기고 힘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마4:4). 육신에 빵이 필요하듯 영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사도 요한을 보십시오. 그는 책을 먹기를 소망했습니다. [내가 그 천사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그 작은 책을 내게 주소서, 하니 그가 내게 이르되, 그것을 가져다가 먹으라. 그것이 네 배는 쓰게 할 터이나 네 입에서는 꿀같이 달리라, 하니라. 내가 그 천사의 손에서 그 작은 책을 가져다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는 꿀같이 달았으나 내가 그것을 먹은 뒤에 즉시로 내 배가 쓰게 되었더라.](계10:9-10). 말씀을 먹는 일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님을 봅니다. 입에는 달았지만 배에는 썼습니다. 요한에게 책을 준 천사는 요한에게 주면서 ‘이것이 네 배는 쓰게 할 터이나 네 입에서는 꿀같이 달리라.’고 했는데 그럼에도 요한은 그 책을 가져다가 먹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떤 음식은 먹는데 너무 맛있고 달지만 배 속에서는 끓어오르고 쓰다면 아무도 먹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이 세상 음식은 보기 좋고, 맛있는 것일수록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당뇨를 일으키고, 합병증을 유발하는 등의 음식이 있습니다. 환각류들은 대부분 그렇습니다. 뒤탈이 납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받아먹은 작은 책도 그런 종류입니까? 이 말씀을 지금까지 대부분의 성경 주석가들과 설교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입에서 달다]는 것은 성경을 읽고, 들을 때 깨닫는 기쁨, 은혜 등을 말하는 것이고, [배에서 쓰다]는 것은 듣고 깨달은 말씀을 실행하려면 엄청나게 고통스럽고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영적 적용으로서 매우 교훈적인 내용입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환란 가운데 기뻐하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갈 때 기뻐했던 사람들은 말씀이 배에 썼던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주님의 계시를 받을 때는 기쁘고 감옥에서는 슬펐습니까? 성경 어디에도 그런 구절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받아먹으라.]는 말씀의 다음 절에 해답이 있습니다.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반드시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왕들 앞에서 다시 대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계10:11). 요한은 말씀을 먹는 대신 그 말씀을 반드시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왕들 앞에서 다시 대언해야 했습니다. 이 일은 결코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포하는 일이 힘든 것이 아니라 선포할 내용이 문제입니다. 성경에는 기쁨과 은혜의 말씀도 있지만 저주와 화와 심판과 재앙의 말씀도 많이 있습니다. 에스겔이나 요한이 먹었던 말씀은 주님의 심판을 다룬 말씀들이었습니다. 복과 은혜를 선포하는 일은 너무 쉽고 좋습니다. 그러나 재앙과 저주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은 힘듭니다. 복음 선포자가 웃으면서 지옥과 심판을 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복음을 선포합니다. 믿으면 받게 될 은혜를 선포합니다. 정말 쉬운 일입니다. 기쁜 일입니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마다 곧 있게 될 심판과 저주와 재앙에 대해서 선포해야 한다면 이는 매우 힘든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재앙과 심판이 먼 미래의 일이거나 당장 내 앞에서 벌어질 일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있게 될 말씀이라면 그다지 힘들지 않겠지만 그러나 당장 눈앞에 펼쳐질 재앙과 심판을 전하는 일은 힘들고 고통스런 일입니다.

에스겔이 받아먹은 책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내가 보니, 보라, 그분께서 한 손을 내게 보내셨는데,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 한 권이 있더라. 그분께서 그것을 내 앞에 펴셨는데 그것은 안팎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안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기록되어 있더라.(겔 2:9,10).

우리가 보는 성경은 복과 은혜에 대해서도 말씀하시지만 재앙과 저주가 빽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인들에게 우리가 전할 복음은 죄와 죄의 형벌과 지옥과 심판에 대한 내용이 3/4은 차지합니다.
이 일은 배에 쓴 일입니다.
그렇다고 말씀을 먹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이 받게 될 심판에 대해 우리 입을 통해 경고하십니다. 우리 입은 배에 있는 것들을 쏟아 내는데 꿀처럼 단 말이 아니라 쓰디쓴 말들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친지들, 친구들에게 이런 쓰디쓴 말을 전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입에는 달았지만 배에는 쓴 그런 말들을 죄인들에게 전하도록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경고의 나팔을 불도록 하십니다.












09-09-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두루마리 책(에스겔 2:9)

내가 보니 한 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Then I looked, and I saw a hand stretched out to me. In it was a scroll.

두루마리 책(메길라트 세펠. מְגִלַּת־סֵפֶר)
a roll of a book. a scroll

두루마리(4039) 메길라(megillâh) מְגִּלָּה 

1. 두루마리,  2. 시편 40:8,  3. 예레미야 36:14
발음 / 메길라[ megillâh ]
어원 / 155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두루마리(시 40:7, 렘 36:2, 슥 5:1).
구약 성경 / 21회 사용


책(5612) 세페르(çêpher) סֵפֶר 

1. 집필,  2. 글을 읽거나 쓸 줄 아는 것,  3. 학문
발음 / 세페르[ çêpher ]
어원 / 어미활용 סִפְרִי, 복수 סְפָרִים, 복수 연계형 סִפְרֵי, 560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책(출32:32, 신28:58, 시56:8, 렘36:13), 두루마리(민5:23), 증서(신24:1, 렘32:10,44),편지(삼하11:14, 왕상21:8, 에9:30), 역대지략(왕상14:19, 왕하8:23, 느12:23), 글(왕하5:6, 렘29:29, 나1 : 1), 조서(에1:22, 3:13, 8:10), 일기(에2:23, 6:1, 10:2), 학문(단1:4,17). [동] 기록하다(삼상10:25, 느7:5).
구약 성경 / 185회 사용

하나님은 에스겔을 향하여 "인자야 일어서라"고 하셨습니다(1절).
선지자 에스겔을 '인자(벤 아담. בֶּן־אָדָם)'라고 부르는 것이 매우 특이한 부름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에서 "인자"라는 개념은 첫째는 단순히 사람의 아들을 가리키는 경우(겔 1:1), 둘째는 하나님이면서 또한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오실 그리스도를 예시하는 경우(단 7:13) 두 가지 용법으로 사용합니다.

특히 에스겔서에서는 '인자'라는 용어가 93회 언급되는데, 모두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엄 앞에 연약한 존재인 인간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Wycliffe).

그러나 신약에서는 대부분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마 8:20. 16:13. 눅 9:22. 요 12:23. 행 7:56).

에스겔 2장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백성에게 선지자 에스겔을 파송하는 것을 소개합니다.

선지자의 사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파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말씀을 청종하거나 아니면 듣지 않는 것은 선지자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백성들의 반응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고 오직 담대함으로 계시된 내용만을 바르게 전달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세상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믿음의 도를 바르게 보여주고 전하고 깨우쳐야 합니다.

제사장 부시의 아들로 바벨론 포로가 된 땅에서 소명을 받은 에스겔이 말씀을 전해야 할 대상은 완악하고 패역한 유다 백성들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족속은 세 부류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북왕국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팔레스타인 북방 지역 여러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둘째는 제1차로 바벨론의 포로가 된 유대 백성들은 다니엘을 비롯하여 상류층 계급의 사람들이었습니다(B.C. 605년).
셋째는 제2차 포로가 되어 바벨론을 끌려간 여호야 긴 왕과 에스겔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B.C. 597년).
그리고 유대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치세하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영적 상태는 하나님의 선택된 극소수의 남은 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완악하고 부패한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자들을 향하여 많은 곳에서 '패역한(반역적인) 족속'이라고 책망합니다. 
유다 왕국내에 거주하는 자들의 상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에는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활동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산 속의 산당이나 푸른 나무 아래 등지에서 우상을 섬겼으며, 심지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처소인 성전에서조차 우상을 세워 놓고 숭배하는 가증한 죄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부르시어 바벨론 포로민들에게 유다 왕국 및 예루살렘 성읍이 거민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케 된다는 사실을 전함으로써 경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었는데 그 안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기록된 내용대로 백성들을 다스릴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도 이 땅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의 삶이 두루마리 책에 선하게 기록될 수 있는 거룩한 삶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두루마리 책이란 용어가 기록된 구절은 한글 개역 성경에서 5회 소개됩니다(시편 40:7, 예레미야 36:2,  36:4, 에스겔 2:9, 히브리서 10:7).

시편 40: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예레미야 36:2,
너는 두루마리 책을 취하여 내가 네게 말하던 날 곧 요시야의 날부터 오늘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와 열방에 대하여 나의 네게 이른 모든 말을 그것에 기록하라.

예레미야 36:4,
이에 예레미야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부르매 바룩이 예레미야의 구전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니라.

에스겔 2:9,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히브리서 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율법으로는 죄로 심히 죄 되게 할 뿐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의 사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님의 품속에 계셨던 아들을 혈육에 함께 속하게 하시어 그 아들의 몸과 연합하여 죽임을 당한 자들에게서만 그 아들의 새 생명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히 10:5-7) 라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신 아들에 대하여 성경은『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위의 말씀을 깨닫는 사람은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로 나타나 질 것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라는 말씀을 열어 볼 수 있게 진리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은 또한 아래 기록된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으로 다윗에게 예언하신 말씀도 밝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로『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삼하 7:12-13) 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이루어졌습니다. 곧『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0-33) 라고 증거하신 대로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 5:1-10) 라고 그리스도 예수의 진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은 예수께 대하여 성경은 또한『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히 7:27-28)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 19:30) 라는 증거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19-20)





09-08-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늘이 열리며(에스겔 1:1)

서른째 해 넷째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In the thirtieth year, in the fourth month on the fifth day, while I was among the exiles by the Kebar River, the heavens were opened and I saw visions of God.

구약에서 대선지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4권
소선지서는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12권
대선지서와 소선지서는 내용이 많고 적고에 의한 분류라고 합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사 1: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렘 1:4)
말씀으로 계시하셨습니다.
반면에 에스겔과 다니엘은 "환상" "꿈"으로 계시하셨습니다.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겔 1:1)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곧 왕이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은 이러하니이다."(단 2:28)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이사야와 예레미야 때는 유다가 망하기 직전의 시대이었기에 마지막으로 말씀으로 깨우치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에스겔과 다니엘은 이미 나라가 무너졌고 포로로 끌려가는 시대이므로 말씀이 아니라 꿈과 환상으로 계시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비슷한 사례가 요한계시록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로마 정부의 탄압에 의하여 기독교인들이 흩어질 수밖에 없을 때 밧모섬에 유배된 요한에게 환상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당시 역사적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BC 722. 북 이스라엘의 멸망(앗수르)
  BC 605. 바벨론 1차 포로 - 다니엘, 귀족들
  BC 597. 바벨론 2차 포로 - 여호야 긴, 에스겔
BC 586. 남 유다 멸망(바벨론)
BC 539. 10월. 고레스 바벨론 점령
  BC 538. / 7. 1차 포로 귀환
  BC 520. 학개, 스가랴
  BC 515. 제2성전 재건

에스겔 1:10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사람의 얼굴 - 누가복음 / 인자로 오신 예수
사자의 얼굴 - 마태복음 /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소의 얼굴 - 마가복음 / 섬기러 오신 예수
독수리 - 요한복음 /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만왕의 왕 예수

고린도전서 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오늘의 기도
복음의 열매를 맺는 일군으로 살아가자!
 1. 겨자씨와 같은 믿음
 2. 작은 일에 충성 

(예화) 복음에 목 마르게 하라!

어떤 영업사원이 판매할 수 있는 큰 건수를 놓쳐서 실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회사에 돌아와 이 일을 한탄하며 직장 상사에게 말했다.
"물가로 말을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말에게 물을 먹일 수는 없나 봅니다."
그러자 상사가 말했다.
"젊은 친구, 내 말을 듣게나. 자네의 일은 말에게 물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말을 목마르게 하는 것이라네."
복음을 전하는 일도 이와 같다.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해져 있어서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에 대해 갈급함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삶이 복음에 대한 궁금증을 일으킬 수 있는가?
내 삶의 변화가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 인구가 전 인구의 1/4 즉 25%가 되었다고 자랑하였다.
그런데 머지 않아 인구 10명 중 단 1명이 기독교인의 시대가 된다고 합니다.
갑자기 25%에서 10%로 낮아진 이유가 무엇일까?
복음의 삶과 세속의 삶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늘이 열리며(the heavens were opened)
니프테후 핫솨마임(נִפְתְּחוּ הַשָּׁמַיִם)

소명받은 장소와 시간 / 제 삼십 년
-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 구약에서 제사장들이 삼십 세에 그의 직무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볼 때(민 4:23, 30, 39, 43) 선지자요 제사장인 에스겔이 소명받은 나이를 가리킨다(Origen, Patrick, Dyer, Wycliffe, Hengstenberg).

민수기 4:23.
삼십 세 이상으로 오십 세까지 회막에서 복무하고 봉사할 모든 자를 계수하라.

30. 삼십 세부터 오십 세까지 회막에서 복무하고 봉사할 모든 자를 계수하라.

39. 삼십 세부터 오십 세까지 회막 봉사에 참여하여 일할 만한 모든 자라.

43. 삼십 세부터 오십 세까지 회막에서 복무하고 봉사할 모든 자라.

2. 희년에서 삼십 년이 지난 때를 가리킨다(Hitzig, Kimchi).

3. 요시야의 종교 개혁이 시행된 즉위 18년부터(왕하 22:3-23:23) 삼십 년이 지난 때(B.C. 593년)를 가리킨다(Jerome, Herrman, Theodoret). 특히 칼빈(Calvin)은 요시야 왕 18년에 유월절 의식이 실행되어진 점으로 미루어(왕하 23:23) 이때가 희년으로 추정된다고 언급하면서 이를 지지한다.

4. 바벨론 제국이 세워진 후 삼십 년이 지난 때를 말한다(Ewald, Scaliget).

5. 본서가 편집된 후 삼십 년이 지난 때를 가리킨다(Albright, Howie). 그러나 이중에서 (4), (5)는 거의 타당성이 희박하며 (1) 또는 (3)이 가능하다 하겠다.

사 월

- 바벨론식 이름으로는 담무스(Tammuze) 월로서 오늘날 태양력의 6, 7월에 해당한다.

그발 강가

- 일반적으로 이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흘러나와 닙불(Nippur)을 남동쪽으로 거쳐 다시 에렉(Erech)이라는 도시 근방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합류하는 거대한 운하로 본다(Wycliffe, Cooke, Dyer).

하늘이 열리며

- 마 3:16;요 1:51;행 7:56;10:11;계 4:1 등에도 나오는 이 표현은, 하나님이 성도의 영적 눈을 밝히사 천사의 비밀에 속한 초월적 사실을 특별히 보게 하시는 것을 나타낸다(Calvin).

하늘(8064) 솨마임 [ shâmayim ] שָׁמַיִם

1. 하늘,  2. 하늘을 향하여, 3. וּשְׁמֵי שָׁמַיִם שָׁמַיִם
발음 [ shâmayim ]
관련 성경 / 천하(창 1:9, 출 17:14, 신 29:20), 하늘(창 1:8, 왕상 8:22, 암 9:2), 공중(창 1:28, 신 28:26, 삼하 18:9), 천지(창 1:1, 신 4:26, 렘23:24).
구약 성경 / 421회 사용

열다. 입을 열다(6605) 파타흐[ pâthach ]  פָּתַח

1. 열다. 왕상 8:29,  2. 입을 열다,  3. ~의 입을 열다
발음 / [ pâthach ]
관련 성경 / 열다(신 20:11, 겔 46:12, 단 10:16), 빼다(시3 7:14), 놓다(사 14:17), 펴다(신 15:8,11, 느 8:5), 피다(사 45:1), 베풀다(겔 21:22), 열리다(나 3:13, 시 5:9, 사 48:8), 순찰하다(창 41:46),풀다(창 42:27, 렘 40:4, 사 45:1), 풀어보다(창 43:21), 갈라지다(시 106:17), 벌리다(겔 3:2), 들다(왕상 8:52, 대하 6:40), 보다(대하 6:20), 봉하다(느 6:5), 뿌리다(욥 29:19), 뽑히다(겔 21:28), 풀리다(사 5:27), 놓이다(사 51:14), 헐다(욥12:14), 터지다(욥 32:19), 일어나다(렘 1:14), 새기다(출 28:9, 36, 왕상 7:36), 아로새기다(대하 2:7, 3:7), 벗다(욥 30:11), 벗기다(시 30:11), 퍼지다(아 7:12), 끄르다(사 20:2), 해방하다(시 102:20), 풀어주다(사 58:6), 부리다(창 24:32), 자유롭게 하다(시 105:20), 갈다(사 28:24).
구약 성경 / 144회 사용

하나님의 이상

- '이상'의 히브리어 '마르아'(*)는 '보다', '모습' 등을 뜻하는 '마르에'(*)의 여성형,
히브리어 '하존'(*)과 더불어 하나님의 여러 계시의 수단 중 하나를 가리키는 말이다(단 2:19;슥 1:18-21 등).

환상(하존. châzôwn) 2377.  חָזוֹן

1. 이상,  2. 신적인 계시,  3. 신탁
발음 / 하존[ châzôwn ]
어원 / 237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이상(異像)(삼상 3:1, 사 1:1, 단 8:2), 계시(대상 17:15), 묵시(대하 32:32, 겔 7:13), 환상(사 29:7), 예언(렘 14:14).
구약 성경 / 35회 사용

환상(마라. marʼâh) 4759. מַרְאָה 

1. 이상,  2. 거울
발음 /  마라[ marʼâh ]
관련 성경 / 이상(창 46:2, 단 10:7, 8, 16, 겔 1:1,  8:3, 40:2, 출 38:8).
구약 성경 / 12회 사용

4758. 마르에[ marʼeh ]  מַרְאֶה 

1. 모양
2. 이상
3. 형상
발음 / 마래[ marʼeh ]
어원/ 720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보다(창 2:9, 레 13:12, 에 1:11), 알다(창 12:11), 아리땁다(창 29:17, 에 2:2), 아름답다(창 41:2, 사 53:2), 보이다(출 24:17, 삼하 11:2, 신 28:34), 발생하다(레 13:43), 장대하다(삼하 23:21).
[명] 광경(출 3:3), 양식(민 8:4, 겔 41: 21), 모양(민 9:16, 겔 1:5), 용모(삿 13:6, 삼상16:7, 겔 23:15), 얼굴(삼하 14:27, 아 2:14), 형상(욥4:16, 아 5:15, 겔 1:16), 이상(겔 8:4, 11:24). [부] 명백히(민 12:8).
구약 성경 / 103회 사용

* 7200. רָאָה 
1. 보다,  2. 왕의 얼굴을 보다,  3. 하나님의 얼굴을 보다
발음 / 라아[ râʼâh ]






에스겔(Ezekiel)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

에스겔다니엘과 동시대 선지자이고 예레미야처럼 제사장이었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선지자가 됩니다(에스겔 1:3).
그는 25세 정도 되었을 때 (BC 597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고, 남유다의 여호야 긴 왕이 포로된지 5년째(BC 593년)에 선지자 사역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서를 통해 우상 숭배로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상황과 그에 따른 심판을 여러 환상이나 상징을 통해 보여주며 이스라엘에 임박한 최종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또한 이스라엘과 더불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이웃 나라에 대한 심판도 경고하십니다.
에스겔서는 심판의 메시지와 더불어 소망과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전과 성읍을 보여 주시며 그 성읍 이름을 “여호와삼마(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다)”라 하시며 책을 맺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 즉 남유다가 바벨론에 망함은 BC 586년에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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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의 역사

이스라엘은 북방 강대국 앗수르와 바벨론, 남방 강대국 애굽 사이에 낀 약소 국가였습니다. 남 유다의 제 16대 왕 요시야 당시는 세계 최강국이던 앗수르가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바벨론이 신흥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1. 므깃도 전투와 갈그미스 전투
애굽은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갈그미스에서 바벨론과 싸우려고 하였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갈그미스로 가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과해야 했는데, 이때 반 앗수르 입장이었던 요시야 왕은 북진하는 애굽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며, 이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자신이 싸우려는 대상은 요시야 왕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대하 35:21). 그러나 요시야 왕은 듣지 않고 변장까지 하면서 전쟁터에 남기를 고집하였습니다(대하 35:21-22). 전쟁터에서 애굽의 궁수가 쏜 화살에 중상을 입은 요시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죽고 말았습니다(대하 35:23).

요시야는 종교 개혁을 통해 영적 내리막길로 곤두박질하던 남 유다에 일시적으로나마 제동을 걸었지만, 요시야가 죽은 이후 남 유다의 국운이 갑자기 쇠약해지고 순식간에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애굽과 바벨론이 맞서는데, 이것이 갈그미스 전투(주전 605년)입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바벨론은 당시 근동 지방을 장악하였고, 애굽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왕하 24:7).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프리카 대륙과 근동 아시아 지역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남 유다 왕국마저 정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3차에 걸쳐 유다 왕과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3차에 걸친 바벨론 포로의 과정은 성전 파괴의 과정과 다름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들어서 가장 아끼는 성전을 파괴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징계하셨습니다(왕상 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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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ight of The Prisoners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티소(James Tissot)가 그린

불타는 예루살렘과성전, 그리고 바벨론 군대에 포로로 끌려가는 유다 백성들

2. 바벨론 제 1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605년 / 여호야김 제 3(혹은 4)년, 느부갓네살 원년
이때는 여호야김 왕 제 3년(단 1:1)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46:2은 이때를 여호야김 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기록에 1년 차이가 나는 이유는 열왕기하 23:34을 통해 해명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여호야김이 그의 동생 여호아하스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지 않고, 여호야김이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요시야(주전 640-609b년), 여호아하스(주전 609b-608년), 여호야김(주전 608-597년) 순으로 왕이 되었지만(왕하 23:3-0, 34, 대하 36:1-4), 요시야 다음에 바로 여호야김이 왕이 된 것처럼 기술한 것은, 3개월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악을 일삼았던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왕하 23:31-32).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제 1차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주전 605년은 여호야김 제 4년이 되는 것입니다.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제 1차 바벨론 포로 때에는 다니엘을 포함한 왕족과 귀족들이 끌려갔습니다(단 1:3). 여호야김은 처음 3년은 바벨론을 섬기다가 다시 애굽과 동맹하여 반(反)바벨론 정책을 펼쳤고(왕하 24:1), 주전 602년 쇠사슬로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성전 기구들을 약탈당하였습니다(왕하 24:2, 단 1:1-2, 5:2).

3. 바벨론 제 2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97년 / 여호야긴 즉위년, 느부갓네살 8년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에 즉위하여 3개월 10일을 통치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8-12, 대하 36:9-10).
바벨론 역대기에 따르면, 티쉬리월(7월)로 시작되는 달력을 기준할 때 여호야긴이 왕이 딘 것은 주전 597년 불월(8월)이며, 3개월 10일이 지나 왕위에서 쫓겨난 것은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얼마 동안의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왕하 24:10-11)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에 이르러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한 것입니다. 이때 왕위에서 쫓겨난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 니산월(1월) 10일에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대하 36:10). * 남유다 통치 연도는 티쉬리월 기준이므로 해가 바뀌지 않음.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바벨론은 여호와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었으며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기명을 다 훼파하였습니다(왕하 24:10-13, 대하 36:10).
그리고 여호야긴 왕과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의 권세 있는 자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12, 15). 이때 용사 7천 명을 포함하여 방백과 백성 총 1만명, 그리고 공장과 대장장이 1천 명이 끌려갔는데, 그들은 모두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였습니다(왕하 24:14-16). 반란의 구심점이 될 소지가 있는 최고 지도자들과 탁월한 인물들을 모두 뽑아서 끌고 감으로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도록 하여 남 유다를 철저히 무력화 시킨 것입니다. 여기에는 에스겔 선지자와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의 조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겔 1:1-3, 에 2:5-6).
 
4. 바벨론 제 3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86년 / 시드기야 11년, 느부갓네살 19년
시드기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권면(렘 27:12)을 듣지 않고 반(反)바벨론 정책을 고집하였고(왕하 24:20, 렘 27:12-13, 37:2), 바벨론은 시드기야 제 9년 10월 10일부터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왕하 25:1, 렘 39:1, 52:4). 시드기야가 애굽에 원군을 요청하여 바벨론 군대가 떠났다가 애굽 군대가 즉각 퇴각하자 다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렘 37:5, 11, 겔 17:15) 시드기야 11년까지 약 30개월 동안(티쉬리 기준 달력)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습니다(왕하 25:1-2, 대하 36:11-20, 렘 37:7-10, 겔 17:12-21). 마침내 주전 586년 시드기야 제 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왕하 25:1-3, 렘 39:1-2, 52:4-6).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는 동안 기근이 극심하여 자녀를 잡아먹을 정도로 비극적 참상이 빚어졌는데(애 2:20, 4:10, 사 9:20, 겔 5:10), 이는 모세의 예언대로(레 26:28-29, 신 28:53-57)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였습니다. 결국 BC 586년,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4월 9일은 유다인들에게 바벨론 유수 기간 내내 금식과 애통의 날로 지켜졌습니다(슥 7:5, 8:19).

성이 함락되던 때 시드기야는 밤에 도망하다가 갈대아 군대에게 잡혀 하맛 땅 립나로 끌려가 바벨론 왕에게 신문을 당하였습니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목전에서 그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왕하 25:4-7, 렘 39:4-7, 52:7-11).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한 달 만인 5월 10일에 바벨론 시위대장관 느부사라단이 와서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사르고 사면 성벽을 헐었습니다(왕하 25:8-12, 대하 36:18-19, 렘 39:8-10, 52:12-16). 그리고 성전의 두 놋기둥(야긴과 보아스)과 받침들과 놋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또 가마들, 부삽들, 불집게들,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또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갔고,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들을 취하였습니다(왕하 25:13-17, 대하 36:18-19, 렘 52:17-23).

그리고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전 문지기 세 사람을 잡고, 군사를 거느린 장관(내시) 하나와 왕의 시종 칠 인(혹은 다섯 사람)과 군대장관의 서기관 하나와 국민 육십 명을 잡아갔으며, 립나에서 그들을 쳐 죽였습니다(왕하 25:18-21, 렘 52:24-27).

한편, 예레미야 52:28-30에는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다 소규모로 잡혀간 자들이 총 4,600명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로 끌려간 자와 고국 땅에 남겨진 자, 그리고 재난을 피하여 주변국으로 도망친 자 등으로 나뉘어, 민족 전체가 갈기갈기 찢기고 그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최악의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선민 유다 백성이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최대의 비극이요 수치였습니다. 이는 우상을 숭배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거룩하신 뜻을 멸시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의 표현이었습니다(대하 36:21, 참고-렘 34:8-16). 

그러나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만 같던 바벨론이 하나님의 주권 역사로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하시고(참고-렘 50:3, 9, 41-46장, 51장) 이스라엘 백성이 귀환하도록 하셨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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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포로시대

Ⅰ. 포로시대 개관

722. 북이스라엘 멸망(앗시리아)

605. 바벨론 1차 포로(다니엘, 귀족들)

597. 바벨론 2차 포로(여호야긴, 에스겔, 기술자)

586. 바벨론 3차 포로/ 예루살렘의 완전한 멸망

539. 10월 고레스의 바벨론 점령

538/7 1차 포로 귀환(세스바살, 스룹바벨) : 에스라 1-6장

520 학개, 스가랴 선지자의 활동

515 제2성전 완공

492. 1차 페르시아 전쟁(다리오1세, 헬로도토스에 따르면 아토스 곶에서 폭풍을 만나 300척의 전함과 2만명의 군사를 잃음)

490. 2차 페르시아 전쟁(다리오 1세, 마라톤 평야에서 아테네의 중장병 밀집대전술에 패함)

480. 3차 페르시아 전쟁(크세르크세스,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배)

465. 궁정 쿠데타로 크세르크세스 사망

465. 크세르크세스의 아들 아닥사스다 1세 집권(느헤미야가 술맡은 관원)

461. 이집트가 페르시아 제국에 반기

458 2차 포로 귀환(에스라): 에스라 7-10장/ 1차 신앙운동

444/5 3차 포로 귀환(느혜미야): 느헤미야서/ 성벽재건 공사와 2차 신앙운동

Ⅱ. 흩어진 백성(디아스포라) _ 기독교 전파의 도움

1. 바벨론으로 끌려간 백성들과 애굽으로 피한 백성들(다바네스, 믹돌, 놉, 바드로스)

2. 황폐한 유다에 남아있는 자들의 애환: 예레미야 애가

3. 바벨론으로 끌려간 백성들은 그발 강을 따라서 바벨론과 니푸르 근처에 정착, 포로들은 자신들의 땅을 버러졌다는 의미의 '델'이라는 용어를 사용함

(겔1:1) 1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겔3:15) 15 이에 내가 델아빕에 이르러 그 사로잡힌 백성 곧 그발 강 가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그 중에서 두려워 떨며 칠 일을 지내니라

Ⅲ. 세 번째 치리자 다니엘

1.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월 므로닥(왕하25:27-30) 2년통치-네리글리사르 4년통치(에월 므로닥의 처남/ 렘39:3)-라바쉬마르둑(네리글리사르의 아들)-나보니두스-벨사살

2. 고대 바벨론 역사의 연대에서는 나보니두스가 마지막 왕이지만 성경은 벨사살을 마지막 왕으로 기록, 나보니두스와 벨사살의 공동통치 기간, 벨사살이 다니엘을 둘째가 아닌 셋째 치리자로 임명한 이유가 됨

(왕하25:27-30)

27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월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 이월 그 달 이십 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28 그에게 좋게 말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

29 그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하고 그의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였고

30 그가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양이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렘39:3) 3 바벨론의 왕의 모든 고관이 나타나 중문에 앉으니 곧 네르갈사레셀과 삼갈네부와 내시장 살스김이니 네르갈사레셀은 궁중 장관이며 바벨론의 왕의 나머지 고관들도 있더라

(단5:29) 29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그들이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니라

3. 나보니두스는 나부 발랏수 이크비라는 귀족과 달의 신을 섬기던 앗다굽피라는 여사제 사이에서 태어난 자로 바벨론의 주신인 마르둑을 섬기지 않고 달의 신 신(Sin)를 섬겼다. 그래서 리비아의 데마를 점령하여 바벨론의 제2의 수도로 삼았다. 이것으로 경제적으로 확보한 교역로로 확고히 하면서 종교적으로 마르둑 사제들을 견제했다. (결국 이론 인해 고레스가 바벨론을 공격할 때 마르둑 주의자들이 고레스가 무혈입성 하도록 도왔다.) 이때 나보니두스는 데마에 있었고(10년간), 바벨론에는 아들 벨사살을 통치 왕으로 삼았다. 이때 나보니두스는 승리를 기원하는 신년 축제에 조차 참석하지 않음으로써 내적위기에 몰렸다.

Ⅳ. 페르시아의 왕들

1. 고레스는 캄비세스 1세와 메대왕 아스티아게스의 딸 만다네 사이에서 출생, 두 왕실의 결합

2. 고레스는 바사의 왕으로 메대를 정복한 후 속국으로 흡수하지 않고 연합국의 형태를 취했다.

(에1:19) 19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실진대 와스디가 다시는 왕 앞에 오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내리되 바사와 메대의 법률에 기록하여 변개함이 없게 하고 그 왕후의 자리를 그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소서

(단5:28) 28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

3. 고레스는 바벨론을 무혈로 입성, 고레스는 정복 국가의 종교와 경제를 장려하는 정책을 폈고 이런 일환에서 유다의 포로귀환이 성립된다.

(단9:24) 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슥1:12) 12 여호와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스1:1-4)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4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4. 고레스 2세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

(사45:1) 1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사45:13) 13 내가 공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사로잡힌 내 백성을 값이나 갚음이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5. 캄비세스 2세 후 다리오 1세의 등장, 행정능력이 가장 탁월한 인물, 다니엘성 등장,

6. 다니엘은 1차 포로시, 에스겔은 2차 포로시 끌려감

(겔3:15) 15 이에 내가 델아빕에 이르러 그 사로잡힌 백성 곧 그발 강 가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그 중에서 두려워 떨며 칠 일을 지내니라

Ⅳ. 1차 포로귀환

1. 유다 총독 세스바살과 제사장 여호수아, 스룹바벨(여호야긴의 손자, 세스바살의 조카) 인도, 5만 명의 백성들

2. 귀환시 가장 빠른 길은 다드몰(오늘날의 팔미라)의 사막 도시를 경유하는 것이지만 이 길은 매우 위험했고, 아마도 유프라테스 강을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알레포쪽으로 향하는 대상로를 따르다가 유다로 향했을 것이다. 1만 6천 킬로 이상의 거리이다.

3. 당시 유대인들은 경제적 자유를 누리며 자기들의 종교를 가지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모든 백성이 유다로 귀환하지는 않았다. 바벨론 탈무드, 베드로 전서에 대한 오해의 가능성, 베드로는 로마를 가리키는 용어로 바벨론을 사용했지만 실제로 바벨론에 있었다고 해도 믿어졌던 상황.

(벧전5:13) 13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4. 사마리아인들의 성전건축 방해

(스4:1-2)

1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2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3. 약 15년간 성전건축 중단의 배경: 530년 고레스의 죽고 그 아들 캄비세우가 동생을 죽이고 애굽 정벌을 나갔다가 동생의 이름을 사칭한 자가 바사의 중심부와 권력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 캄비세우스의 부관이었던 다리우스(다리오)가 권력을 장악. 이런 정치적 격변기에 사마리아 인들이 유다가 반역을 꾀한다고 거짓을 상소함.

(스4:11-16)

11 아닥사스다 왕에게 올린 그 글의 초본은 이러하니 강 건너편에 있는 신하들은

12 왕에게 아뢰나이다 당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올라온 유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이 패역하고 악한 성읍을 건축하는데 이미 그 기초를 수축하고 성곽을 건축하오니

13 이제 왕은 아시옵소서 만일 이 성읍을 건축하고 그 성곽을 완공하면 저 무리가 다시는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바치지 아니하리니 결국 왕들에게 손해가 되리이다

14 우리가 이제 왕궁의 소금을 먹으므로 왕이 수치 당함을 차마 보지 못하여 사람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오니

15 왕은 조상들의 사기를 살펴보시면 그 사기에서 이 성읍은 패역한 성읍이라 예로부터 그 중에서 항상 반역하는 일을 행하여 왕들과 각 도에 손해가 된 것을 보시고 아실지라 이 성읍이 무너짐도 이 때문이니이다

16 이제 감히 왕에게 아뢰오니 이 성읍이 중건되어 성곽이 준공되면 이로 말미암아 왕의 강 건너편 영지가 없어지리이다 하였더라

Ⅴ. 제2 성전의 완공

1. 다리오 왕이 바사의 정권을 잡은지 2년이 지날 무렵부터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활동

(학1:8) 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학2:4) 4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 다리오 왕이 고레스의 칙령을 확인, 귀환 20년 만인 516년 성전 완공후 속죄제를 드리고 유월절을 지킴

Ⅵ. 스가랴의 메시야 왕국의 예언

1. 제2 성전 완공이후 스가랴는 눈에 보이는 성전은 앞으로 오실 메시야 왕국의 상징임을 강조

2. 스가랴 후반부터 메시야 예언

(슥9:9)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슥12:10) 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슥13:1) 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3. 성전은 온전한 구원을 이루실 메시야와 그의 사역, 그리고 영원한 구원에 대한 상징. 다윗왕조가 새롭게 부각되며 다윗과 같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

Ⅶ. 에스더서의 위치

1. 성전이 완공되는 에스라 6장과 7장 사이에는 60년간의 시간차가 있음. 에스더서는 이때의 기록.

2. 성전 건축을 허락한 다리오가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마라톤에서 패배(제1, 2차 페르시아 전쟁),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왕위를 계승함. 이 사람이 아하수에로. 아하수에로는 제3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에 패하고, 애굽과 바벨론의 반역으로 곤욕을 치르다가 암살당함.

3. 아하수에로 즉위 3년 이후의 이야기. 와스디, 에스더, 하만, 모르드개

4. 하만의 유대인 살육계획은 아마도 페르시아 전쟁의 희생양을 찾던 아하수에로의 처지와 맞자 떨어졌음, 통치 12년인 주전 474년에 유대인 몰살 조서 공포.

5. 페르시아 전쟁 패배후 아하수에로 왕을 살해하려던 음모를 모르드개가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게됨. 하만을 장대에 달아 죽이고(신명기는 나무에 달려 죽은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함) 유대인들을 구함. 부림절

6. 수산 성을 수사에 있던 다리오와 아하수에로의 여름 궁전. 프랑스 고고학 탐사대가 1884-1886년 발굴. 당시의 화려함을 확인함.

Ⅷ. 제2차 포로귀환

1. 아하수에로가 죽은 후 아닥사스다가 왕으로 등극, 아닥사스다 7년 주전 458년에 에스라가 백성들을 이끌고 유다 귀환

2. 에스라는 율법학자이며 동시에 제사장으로 신앙회복 운동을 전개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유다인들의 이방 여인과의 결혼을 책망.

(스9:13-15)

13 우리의 악한 행실과 큰 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 주셨사오니

14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

1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

(스10:12)

12 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Ⅸ. 제3차 포로귀환

1. 에스라의 귀환과 회개 운동 후 13년 후 느헤미야의 인도로 3차 귀환(445년)

2. 느헤미야는 왕의 술맡은 관원으로 왕의 신임을 받고 있는 고위관료, 본국에서 완공된 제2 성전이 훼손되었고, 성문들은 불에 타 소실되었다는 소식을 들음.

3. 주전 461년 이집트의 반기, 유다는 이집트를 견제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사역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해야 함.

4. 대적들의 훼방을 받으며 52일만에 예루살렘 성벽을 세움.(느3:1-29, 양문, 어문, 옛문, 골짜기문, 분문, 샘문, 수문, 마문, 동문)

5. 성벽 건설과 성문을 중건했지만 백성들이 서로간에 고리대금으로 착취하고, 동족이나 가족을 매매하는 문제를 발견(느5장), 이때 회개운동을 전개했던 에스라를 청하여 율법을 가르치도록 하고, 신앙회복운동을 벌임. 이미 13년 전에 에스라가 신앙회복 운동을 했었지만 이때는 미비한 수준이었고, 오히려 반발도 있었다고 생각됨(성전화재) 하지만 느헤미야는 공권력을 가지고 있는 리더로 에스라의 신앙회복 운동을 큰 힘을 실어줌. 그후 바사로 돌아감

6. 고고학적 문제: "드라크마"

(느7:70-72)

70 어떤 족장들은 역사를 위하여 보조하였고 총독은 금 천 드라크마와 대접 오십과 제사장의 의복 오백삼십 벌을 보물 곳간에 드렸고

71 또 어떤 족장들은 금 이만 드라크마와 은 이천이백 마네를 역사 곳간에 드렸고

72 그 나머지 백성은 금 이만 드라크마와 은 이천 마네와 제사장의 의복 육십칠 벌을 드렸느니라

과연 이 당시 그리스의 주화였던 드라크마가 쓰였는지 의심이 있음, 그래서 느헤미야 본문을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1931년 벳 주르라는 곳에서 페르시아때의 것으로 판정된 6 드라크마가 발견됨, 고고학자 올브라이트도 같은 시대에 애굽에서도 드라크마가 사용되었다고 주장. 지금 우리가 모른다고 무조건 성경 본문을 의심하는 사고는 고려해야함.

7. 12년후 바사로 소환된후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언약갱신과 회개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타락해져 있고 심지어 제사장 엘리아십이 암몬 사람 도비야와 서로 교제하며 레위 사람들과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만든 방을 그에게 내준 사실에 분개하여 성전을 정화시키는 노력과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시킴. 예수님의 성전 정화 운동과 연결. 지금의 교회는?

Ⅹ. 마지막 예언자 말라기

1. 말라기는 느헤미야와 동시대 선지자

2. 말라기서에는 느헤미야가 목격했던 이스라엘의 타락의 실상을 보여줌. 형편없는 제물, 이방여인의 문제, 십일조 문제

3. 말라기는 마지막 날,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에 대해서 예언

(말4:4-6)

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4. 선지자 엘리야는 신약의 세례요한

(마11:13-15)

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5. 말라기서부터 예수님이 오시기 까지 약 400년간 중간기(침묵기)가 시작됨. 하나님의 예언이 없었기에 암흑기, 침묵기라고 함. 그리고 긴 침묵기 끝에 메시야가 오심.






에스겔(Ezekiel) /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God Makes You Strong)

에스겔서에 나오는 환상, 표징과 비유들

1.    에스겔서에 기록된 환상들(Visions)

    1.  네 생물(=그룹, Cherubim)의 형상의 환상 (1:4-28)
    2.  두루마리 책(Roll)의 환상 (2:9-3:33)
    3.  들(Plain)에서의 환상 (3:22-23)
    4.  예루살렘(Jerusalem)의 환상들
        (1) 성전에서의 네 가지 가증한 것들(four abominations) (8:1-18)
        (2) 예루살렘 거민들의 살륙 당함 (9:1-11)
        (3) 예루살렘 성읍이 불로 훼파 당함 (10:1-22)
        (4)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읍을 떠나심 (11:1-25)
    5.  마른 뼈들(Dry Bones)의 환상 (37:1-10)
    6.  새 성전과 부속물들(New Temple and Associated Scenes)의 환상 (40:1-48:35)


2.    에스겔서에 기록된 표징들(Signs)

       표        징                                            교         훈                                            구   절
       1.  박 석                                           예루살렘의 포위와 함락                       4:1-3
       2.  에스겔이 좌편으로 누움          포로 됨의 불편함                                   4:4-8
       3.  기근                                            포로 됨의 박탈당함                               4:9-17
       4.  칼과 삭도                                   예루살렘의 파괴                                    5:1-17
       5.  집의 이사                                   다른 곳으로의 옮겨짐                           12:1-7, 17-20
       6.  날카로운 칼                               임박한 심판                                            21:1-17
       7.  느부갓네살의 칼                       바벨론의 포획자                                    21:18-23
       8.  용해하는 풀무                           심판과 정화                                            22:17-31
       9.  에스겔 처의 죽음                      상실된 축복                                            24:15-27
      10. 두 막대기                                   이스라엘과 유다의 재결합                   37:15-17


3.    에스겔서에 기록된 비유들(Allegories)





       비        유                                            교         훈                                            구   절
       1.  포도나무 (cf. 요한 15:6)            열매 맺지 못한 이스라엘                      15:1-8
                                                                 (하나님의 징계)
       2.  믿음 없는 죄                              타락하고 부패한 유다                           16:1-63
                                                                 (하나님의 자비)
       3.  두 마리의 독수리                      유다를 둘러싼 바벨론 과 애굽             17:1-21
                                                                 (하나님의 섭리)
       4.  백향목                                        메시야의 출현                                        17:22-24
                                                                 (하나님의 약속)
       5.  암사자와 그 새끼들                  왕가의 멸망                                            19:1-9
       6.  두 여인                                       음란한 이스라엘과 유다                       23:1-49
                                                                 (하나님의 심판)
       7.  끓는 가마                                   바벨론의 공격 예고                               24:1-14
                                                                 (하나님의 예고)


4.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의 비교

겔 1:1 - 계 19:11
겔 1:5-계 4:6
겔 1:10-계 4:7
겔 1:22-계 4:6
겔 1:24-계 1:15
겔 1:28-계 4:3
겔 2:9-계 5:1
겔 3:1, 3-계 10:10
겔 7:2-계 7:1
겔 9:4-계 7:3
겔 9:11-계 1:13
겔 10:2-계 8:5
겔 14:21-계 6:8
겔 26:13-계 18:22
겔 27:28-30-계 18:17-19
겔 37:10-계 11:11
겔 37:27-계 21:3
겔 38:2-3-계 20:8
겔 40:2-계 21:10
겔 40:3-계 11:1
겔 43:2-계 1:15
겔 43:16-계 21:16
겔 47:1, 12-계 22:1-2
겔 48:31-계 21:12


환상(하존. châzôwn) 2377.  חָזוֹן

1. 이상,  2. 신적인 계시,  3. 신탁
발음 / 하존[ châzôwn ]
어원 / 237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이상(異像)(삼상 3:1, 사 1:1, 단 8:2), 계시(대상 17:15), 묵시(대하 32:32, 겔 7:13), 환상(사 29:7), 예언(렘 14:14).
구약 성경 / 35회 사용

환상(마라. marʼâh) 4759. מַרְאָה 

1. 이상,  2. 거울
발음 /  마라[ marʼâh ]
관련 성경 / 이상(창 46:2, 단 10:7, 8, 16, 겔 1:1,  8:3, 40:2, 출 38:8).
구약 성경 / 12회 사용

4758. 마르에[ marʼeh ]  מַרְאֶה 

1. 모양
2. 이상
3. 형상
발음 / 마래[ marʼeh ]
어원/ 720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보다(창 2:9, 레 13:12, 에 1:11), 알다(창 12:11), 아리땁다(창 29:17, 에 2:2), 아름답다(창 41:2, 사 53:2), 보이다(출 24:17, 삼하 11:2, 신 28:34), 발생하다(레 13:43), 장대하다(삼하 23:21).
[명] 광경(출 3:3), 양식(민 8:4, 겔 41: 21), 모양(민 9:16, 겔 1:5), 용모(삿 13:6, 삼상16:7, 겔 23:15), 얼굴(삼하 14:27, 아 2:14), 형상(욥4:16, 아 5:15, 겔 1:16), 이상(겔 8:4, 11:24). [부] 명백히(민 12:8).
구약 성경 / 103회 사용

* 7200. רָאָה 
1. 보다,  2. 왕의 얼굴을 보다,  3. 하나님의 얼굴을 보다
발음 / 라아[ râʼâh ]



에스겔 1:1.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네 생물의 의미

네 생물의 비젼(1:1-14)

서른째 해 넷째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에스겔이란 이름은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God makes you strong)" 라는 뜻입니다.
에스겔은 30살 되던 해에 바벨론 포로가 되어 그발 강가에서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합니다.
성경에서 하늘이 열리는 사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겔 1:1, 눅 3:21, 행 10:11, 행 7:56, 마 3:16, 요  1:51, 계 4:1).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영적 눈을 밝히사 천사의 비밀에 속한 초월적 사실을 특별히 보게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Calvin).
초월적 사실이란 하나님의 모습이란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으로(마르아) "보다", "모습" 등을 뜻하는 '마르에'의 여성형으로서, 히브리어 '하존'과 더불어 하나님의 여러 계시의 수단 중 하나를 가리키는 것을 말합니다(단 2:19. 슥 1:18-21).



오늘은 에스겔서 1장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에스겔이 어떤 선지자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보십시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은 강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능력을 주셔서 그를 붙들어 주시고, 강하게 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세번에 걸쳐서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대군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세번이나 침공했습니다.
그때마다 많은 유대인들을 포로로 끌어 가게 된 것입니다.

알. 키텔(R. Kittle)이라고 하는 분에 의하면 그때에 포로로 끌려간 숫자가 5만 내지 7만명이 될 것이라고 발표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제1차 바벨론 침공 당시 유대왕 여호와긴과 함께 포로로 끌려가게 되어서 바벨론의 그발 강변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제사장인 동시에 위대한 예언자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선지자로 소명을 받은 것은 포로생활을 하기 시작한지 제5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제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기록한 제삼십년이란 에스겔의 나이 삼십세 되던 해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에스겔은 서른살 되었을 적에 선지자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여호야긴왕의 사로잡힌지 오년 그달 오일이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여호야긴왕과 에스겔이 바벧론에 포로로 같이 끌려갔는데, 포로생활을 시작하지 오년째 되던 해에 그발 강가에서 선지자로 소명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는 내용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부시'였습니다.
미국 대통령이었던 부시가 아니라 제사장인 부시의 아들로 태어난 것입니다.
3절 말씀에 '갈대아 땅 그발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 족속이 따로 있었고 레위지파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었는데 바로 부시는 레위지파였습니다. 에스겔은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린시절부터 성전 가까이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린시절에 요시야왕이 성전을 수리하다가 발견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주는 것을 그는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에스겔은 어렸을적 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아합이라고 하는 악한 임금은 성전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성전 안에다 우상을 세워두고 우상예배를 강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여호와 예배를 중지시켜버린 것입니다. 그런 나라에 태어난 에스겔이었는데,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서 요시야왕이 등극을 해서 성전을 청결케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성전 안에 세워 둔 모든 바알신상, 아세라목상을 제거해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주는 그러한 사실을 그가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어려서부터 분명한 한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긴 결과, 그 나라가 바벧론의 침공을 받아서 패망했다는 사실을 목도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한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 또 몸소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25살이라고 하는 젊은 나이에 나라를 잃어버리고 여호야긴왕을 비롯해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저 이국나라 바벧론의 포로로 끌려가는 고통스러운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에스겔이 포로로 끌려간지 5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속에서 기도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갈대밭에 꿇어 엎드려 하나님 앞에 눈물로 호소하고 부르짖다가 소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만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대화할 길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모노로그(Monologue)가 아닙니다. 독백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셔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라고 하는 것은 쌍방교통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기도하다가 응답을 받았는데, 네 생물의 환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 환상을 통해서 비록 이방나라에 포로로 끌려와서 아침부터 져녁까지 강제노동을 당하고 말로 할 수 없는 쓰라림을 맛보고 있지마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그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그들을 위로하시고 능력있는 오른팔로 붙들고 계신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네 생물의 모습은 사람의 형상이었는데,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었고 그 얼굴의 모양은 네 부분으로 되어 있었는데, 네 얼굴의 앞부분은 사람의 얼굴이요, 또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뒷편은 독수리의 얼굴과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표현하기에 어려운 그런 모습을 지닌 영물이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나타나 보여진 것입니다. '날개는 둘씩 연결되어 있는데, 둘로는 몸을 가리웠고, 둘로는 날라가더라 그 생물들이 빨리 왕래하는데, 번개와 같은 빠른 속도로 왕래하더라 그 생물에는 바퀴같은 것이 있는데, 그 중심에는 신이 있었더라 그래서 그 신이(다시 말하면 영이) 어디로 가려하면 생물도 그대로 따라 가더라 그리고 바퀴도 뒤따라 가서 움직이더라'고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네 생물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몇가지 견해가 있는데, 케네트(Kenneth)라고 하는 분은 에스겔이 바벧론왕의 침공시에 포로로 끌려갔는데 그때 범죄한 이스라엘 민족을 징계하기 위해서 선택된 바벧론군대가 잔인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을 침공했다고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해석은 메튜 헨리(Mattew Henry)라고 하는 분의 해석인데, 이 네 생물의 모양은 천사들의 일반적인 겉모양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고 그 짐승들은 이성적인 피조물로서 여호와의 등불이 되는 인간의 영혼, 곧 인간의 형상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그외에도 몇가지 해석이 있습니다만 이 네 짐승은 메튜 헨리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 나타난 네 생물의 모습을 보면 얼굴의 앞 부분은 사람의 모양으로 되어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래 인간은 진실되고 선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진실한 모습대신 거짓된 모습이 되었고, 의롭고 선한 모습대신 불의하고 악독한 사나운 모습으로 바꿔졌고, 사랑이 미움으로 바꿔지는 타락한 모습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선하고 의롭고 진실하고 사랑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 다음에 오른쪽 모습은 사자의 얼굴과 같더라고 했습니다.

사자는 어떤 것을 상징합니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극히 담대하라 좌우로 치우치지 말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슨 일에 사자처럼 용맹스럽고 담대해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범죄에 타락한 인생들은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담대한 것이 아니라 반면 불의를 행하고 악을 행하고 죄를 짓는 데는 강하고 담대하고 용감하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불의를 행하고 죄를 짓는데는 그렇게 용감하고 담대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나아가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의를 행하는데, 선을 행하는데에는 사자처럼 강하고 담대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그 다음 얼굴의 왼편 모습은 소의 모습과 같더라고 했습니다.

소를 보면 어떤 것을 연상하게 됩니까? 여름철에 비지땀을 흘리며 파리 모기에게 뜯기면서, 거머리에게 뜯기면서 논을 갈고 밭을 가는 이 소는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도 원망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쟁기질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모습은 인내심과 봉사정신이 얼마나 강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은 소처럼 말없이 묵묵히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받들어 충성해야 될 것을 의미해 주고 있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할렐루야!

그 생물의 뒷편 모습은 독수리의 모습을 지녔다고 했습니다.

독수리는 여러가지 특성이 있지만 그중에 한가지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비상한다고 하는데에 있습니다. 만일 폭풍이 밀려오면 다른 새들은 두려워 떨면서 바위 사이나 나무 그늘 사이로 숨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태풍이 밀려올 적에 앞가슴을 내밀고 그 태풍을 이용해서 높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태풍이 비록 불어올지라도 앞가슴을 내밀면 바람의 부력에 의해서 저절로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겁니다. 다른 새들은 폭풍을 당하고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 독수리는 저 높은 무풍지대에 이르러 평안히 날개를 펴고 밑을 내려다 보며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은 독수리보다 더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다고 사무엘하 1장 23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1장 8절에 보면 갈대아인의 기병을 가리켜서 '마치 식물을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보다 더 빠르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시련과 환난의 폭풍이 밀려 닥쳐 온다고 할지라도, 역경의 폭풍이 밀려 닥쳐 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이용해서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힘있는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성도들이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 네 생물의 중심에는 신이 있더라 그래서 신이 인도하는 데로 그 네 생물도 따라가더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 마음의 중심에 누가 있어야 되느냐? 우리의 중심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신, 성령이 계셔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네 생물은 중심에 하나님의 신이 있어서 그 신이 어디로 가려고 하면 네 생물이 따라가고 바퀴도 따라 움직여 갔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중심에 하나님의 성령이 계셔서 성령께서 감화감동하시는 대로 우리는 순종하고 따라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라"라고 감동하시는데, 우리는 "아니요"하고 반대방향으로 간다고 하면 그것은 성도라고 말할 수 없는 겁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라"라고 우리의 중심에서 감동을 하실 적에 우리는 "아멘!"하고 순종하며 따라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령이 어디로 어떻게 역사하시든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진짜 성도인줄로 믿습니다. 육신의 소욕에 끌려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소멸해 버리면 불행한 결과를 자초하게 되어지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어찌하든지 우리의 중심에서 감화감동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아멘!"하고 따라가고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불교에서 인생은 고해(고해)라고 말하는 것 처럼 행복보다는 고뇌와 아픔과 슬픔이 많은 것이 오늘의 세상이다.중학교 졸업하면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 아니면 직장생활이 기다리고 있다.그렇다고 끝인가? 결혼,자녀 양육 등 무수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 산적해 있다.그렇다고 절망하고 좌절할 것인가? 오늘 성경에 나오는 한 젊은이를 보아라.

1. 에스겔의 절망적 정황

오늘 성경에 한 젊은이가 나온다.그시대는 입시 지옥은 없는 시대였다.그러나 이 사람은 오늘 입시 지옥에 시달리는 우리 청소년 보다 더 절망할 수밖에 없고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더 많이 느낄만한 젊은이었다.예수님이 태어나기 전 597년 경이다.

유다 나라가 바벧론에게 망하여서 젊은이들이 포로로 잡혀갔다.이 포로 중에는 장래가 총망한 많은 청소년이 포함되어있었다.그중에 에스겔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그는 제사장이 될수있는 사람이었다.자기 고국에 있었다면 부모님 밑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었을 것이고 30세가 되면 자연히 제사장이 되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그런데 나라는 망하였다.사랑하는 부모 형제는 만날 수 없다.언어,풍습,음식이 다른 나라에 그것도 유학이나 외교관으로 온 것도 아니고 전쟁 포로로 왔으니 얼마나 가슴이 답답하고 못견디도록 자신의 처지가 슬프겠는가?

이런 경우를 당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정말로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까? 그렇다면 왜 내가 이고통을 당하여야 하는가?

정말로 하나님은 전능하십니까? 그렇다면 왜 내가 포로로 끌려왔을 때 그들을 치지 않았는가? 정말로 하나님은 전지하십니까? 그렇다면 왜 우리의 고독과 고통에 침묵하십니까? 이런 질문이 저절로 나오지 않겠는가?

에스겔은 한강변을 한가한 사색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발강가에서 심각한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앞으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포로로서 내 조국을 위하여 나의 부모를 위하여 할 수있는 일은 무엇일까? 아무도 나를 돌보와 주는 이가 없다고 느낄 때 인간은 얼마나 처절하겠는가?

크레이 엘리슨은 사람의 외로움,소외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 정서적 외로움-정서적으로 혼자(남들과 친밀 부족,친구없음)

- 사회적인 외로움-삶에 흥미없고, 불안하고 공허함을 느낌(삶의 변두리 인생, 공부,돈,인기없음)

실존적 외로움-하나님으로 부터 분리 소외,삶에 목적없음,의미없음

에스겔에게 다가온 외로움과 고독이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고독이 아니겠는가? 그는 선택받은 백성으로 어렸을 때부터 제사장 훈련을 받고 자랐을 것이다.그런데 이게 무엇인가? 제사장은 커녕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서 쓸슬히 보내고 있지 않는가?사랑하는 사람으로 부터 멀리 떠나 버렸다.사회적으로 변두리 인생이 되어버렸다.그런데 하나님 마져 자신의 인생에 대해 아무런 모움이 되지 못하고 침묵을 하고 계신다.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처절한 고통이겠는가? 이런 상황을 만나면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로지 나 혼자 밖에 없다 생각하며 쾌락을 즐기며 방탕한 생활로 그 어려움을 잊으려 한다.어떤 사람은 그저 "될대로 되라지"하며 자보자기하여 무능력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간다.어떤 사람은 견디다 못하면 자살하게 된다.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해처나올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

겠는가?

2.절망의 늪에서 비치는 한 줄기 햇살

이런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겠는가? 그저 방에서 비디오나 보면서 실컷 나잠이나 자나? 아니면 예라 될대로 되라지 하며 오락실에 가서 테트리스나 수호지,프린스를 하루종일 즐길까? 어떻게 하여야 이 고난과 고뇌의 시절을 슬기롭게 보낼수 있느냐?

하나님은 에스겔에 대하여 잘알고 있었다.물론 방학을 맞이한 여러분의 형편과 처지 마음도 그 옛날 에스겔의 마음을 아신것 처럼 잘알고 계시다.하나님은 에스겔을 너무나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그 고독과 고뇌의 위기로 부터 벗어나서 처음 하나님이 부르실 때 사명을 주셨던 일을 시행하기 위하여 즉 이땅에서 하나님의 일군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이상을 보여 주었다.1절을 보아라.고독과 고통,의문과 회의 속에 살고있던 어느날 포로 생활 약 5년 만에 강변의 어느 포로 수용소에서 이상을 보여준다.하늘이 열리고 찬란한 비젼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절망을 극복하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 오늘의 어려움과 고통을 참고 견디게 하는 원동력은 어디에 있겠는가? 힘들고 지긋지긋한 공부지만 그래도 책상에 앉아 공부할 수 있게 하는 힘은 어디에 있느냐? 좀 편히 쉬고 부모의 속박으로 부터 벗어나 믿지 않는 친구들과 어울려 주일이면 산으로 들로 가고 싶지만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말씀배우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바로 비젼.이상에 있다.비록 오늘은 힘들고 어렵지만 내일에 대한 비젼이 있을 때 참고 견딜수 있는 것이다.현재의 고독과 어려움,절망과 고뇌를 극복할수있는 최선의 길은 비젼을 보는데 있다.비젼이 있는자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이상이 있는 자 결코 포기 하지 않는다.비젼이 있는 자는 절망의 늪에서 하늘문을 열고 찬란히 비쳐오는 한줄기 생명의 빛을 보고 힘을 얻는다.

야곱을 보아라 죽음의 공포에서 도망-브니엘의 나루터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후 그의 인생이 바뀌지 않았는가? 이사야를 보아라-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새삶을 시작하였지 않았는가? 사울을 보아라-"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소리 듣고 인생을 180도 회전하였지 않았는가? 사도요한을 보아라 -노년에 그 수고를 다하였는데도 결국 죽음의 유배지에 수용되었을 때 하나님은 하늘문을 열고 신비의 계시를 보여줌으로 그를 끝까지 사용하시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변화시킨 이 위대한 비젼,이 찬란한 이상이 어느날 그발강가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포로 에스겔에게 임한 것이다.오늘 우리는 우리 시대를 향한,우리 가정,사회 ,나 자신을 향한 비젼을 보고있는가? 방학을 맞이한 형제 자매 여러분 이 비젼이 있는가? 여름이면 강가로 해변으로 가서 휴식을 취할줄 않다.이 여름에 하나님이 주시는 이상이 없다면 에스겔이 강가에서 본 비젼을 꼭 보시기 바란다.올해도 신앙수련회가 강가 아름다운 시골 지금은 학생들이 하나도 없는 시골 학교에서 있다. 아직도 하나님이 주시는 이상이 없는 사람들은 이번 기회를 통하여 꼭 이 위대한 이상을 발견하기 바란다.

에스겔이 본 비젼은 무엇인가?

1.
네 생물의 이상(4-14)
2. 수레바퀴의 이상(15-25) 3)
3. 네 보좌의 이상(26-28)

이 이상을 이시간 다 설명할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이상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를 보여주시는 이상들이다.
네 생물은 천사의 기능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인 모습이다.(10:14-15)

그룹들에게는 각기 네 면이 있는데 첫째 면은 그룹의 얼굴이요 둘째 면은 사람의 얼굴이요 셋째는 사자의 얼굴이요 넷째는 독수리의 얼굴이더라.
그룹들이 올라가니 그들은 내가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생물이라. 


이 이상을 통하여 천사를 부려서 역사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이 땅의 일들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즉 하나님은 보좌 위에 앉아서 역사 속에 간섭하시며 천사를 부리시며 역사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펼치고 계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었다.

비록 에스겔을 둘러 쌓고 있는 현실이 어두운 황혼일 지라도,도저히 소망을 발견할 수없는 칠흑같은 절망이 있다 할 지라도,비록 그의 삶이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울 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삶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그의 삶을 섭리하시는 분이신것을 보여 주신다.넓게는 결국 하나님께서 그 시대의 정치 상황을,역사적인 현실을 주장하시는 분이심을 에스겔에게 계시하였다.젊은 포로,고국을 떠나 이역 만리에서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어 버리고 외롭고 슬픈 나날을 보내는 이 젊은이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상을 보십시오.이 이상이 보이십니까? 분주하게 일하시는 천사의 모습,수레바뀌를 굴리고 다니면서 가득한 눈동자로 모든 사물을 꿰뚫어 보는 모습,저 하늘 높고 푸른 보좌위에 앉아계신 양같으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까?

사람이 외로워하고 고독해 하고 아무일도 하지 않을려고 하는 심리적 요인은

1. 낮은 자존심(자신을 과소평가)
2. 의사 소통의 능력 부족(대화)-트로비쉬(결혼하지 말아야 할 대상 의사. 목사)
3. 자멸적인 태도(나는 죽어야 되)
4. 적의(부정적,나의 도움이 않된다.교사 동료. 부모)
5. 두려움(실패할까바, 실수)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하나님이 역사에 대해, 이 역사 속에 살고 있는 나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면 우리는 결코 절망할수 없고 삶에 대해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낮은 자존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
모세가 죽은 후 민족을 이끌어야 할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했는가?
"내가 너와 함께한다" 이 말씀을 몇차례나 거듭하였는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너와함께 하신다고 약속하고 있다.이 역사를 주장하시고 나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젼을 보아라.

방학이다.휴식의 시간이다.이 기간 무엇을 하겠는가? 할 일이 많겠지만 이 여름 나에게 주시는 구체적 비젼을 발견하는 계절이 되길 바란다.우리의 삶은 쉽지 않다.그렇다고 포기하거나 좌절해서는 아니된다.방학이 내 삶의 포기의 기회가 되어서는 않된다.비젼을 발견하라.그리고 방학을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삶으라.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체험하고 인격의 성장과 실력의 성장 무엇보다도 삶의 긍극적인 테도가 바뀌는 기회로 삼으라.

얼마전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왔다.
그는 불행항 과거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1946년 8월19일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스 4세로 아칸소주 호프시 줄리아 체스터 병원에서 아버지 윌리엄 J 블라이스 3세와 어머니 버지니아 캐시디 블라이스와의 사이에서 유복자로출생한 사람이다.
관광회사 세일즈맨이었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4개월전 시카고에 출장다녀오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술주정뱅이로 술취해 익사 했다 한다.
클린턴의 어머니 버지니아는 다섯번이나 결혼한 사람이다.
3명의 남편과 사별하고 2명과는 이혼했던 비운의 여인 버지니아 클린턴 켈리가 제42대 빌 클린턴 대통령 당선자의 어머니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동생(두번째 남편의 아들. 지금로스앤젤레스에서 악단 단원으로 일하고 있음)과 이름이 다르자 15세때 자신의 이름을 두번째 아버지의 성을 따 클린턴으로바꾸었다.
그는 그정도로 동생과 가족에 대한 우애가 깊었다.
과거를 더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불행했던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용기있게 살 수있었던 것은 1962년 청소년 학생대표로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만나 비젼을 가지면서 부터였다 한다.
오늘의 그가 있게 한 것은 바로 그때의 그 비젼이었다.
칠흑의 어둠을 뚫고 찬란하게 비쳐오는 하늘의 비젼을 보아라.
거기에 인생.
오늘의 삶에 대한 답이 있다.

에스겔 2:1 / 동성결혼 시대의 믿음

1. 지난 2015년 6월 26일, 미국 연방 대법원은 동성 결혼에 대해 찬성 5, 반대 4로 합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발표 이후 한편에서는 동성애의 상징인 무지개 깃발을 들고 환호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의 타락과 몰락을 탄식합니다. 이 결정에 대해 오피니언 리더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연일 논설을 써내고, 종교 지도자들도 각자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문제를 한두 번이라도 생각해 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불행하게도, 동성애 혹은 동성 결혼에 대한 경험도 적고 토론도 별로 해 보지 않은 우리 한국 이민자들 중에는 이 문제를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렇지만, 믿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동성애는 죄다"라는 말 이외에 더 할 말도 없고, 더 생각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 한인 이민자들 대다수의 입장입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미국의 기독교인들 다수가 그런 입장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소돔과 고모라 성이 동성애 때문에 심판받았다는 소문이 널리, 그리고 깊이 퍼져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총체적인 타락과 죄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인데, 동성애 때문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런 까닭에 동성애를 가장 혐오스러운 죄로 간주하고 이 세상에서 박멸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몇 년 전 기독교 관련 리서치 그룹인 'Barna Group'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인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가장 많은 대답이 "동성애 반대자들"(anti-homosexual)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심하게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미국 기독교인들은 동성애 혹은 동성 결혼에 대해 상당히 너그러워졌습니다. 복음주의권 기독교인들(evangelical Christians) 중에도 동성애 혹은 동성 결혼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60%를 넘어서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지난주 목회 칼럼에 쓴 것처럼, 6월 19일부터 21일까지 있었던 버지니아연회에서 2,000명이 넘는 연합감리교회 목회자와 평신도 대표가 이 문제에 대해 토론을 벌였습니다. 한편에서는 과거에 흑인과 여성에 대한 차별을 철폐했던 것처럼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세상의 흐름에 따라 바꾸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이 문제에 대해 연구해 오면서 언젠가 한번 설교를 통해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워낙 의견이 다양하고 또한 자신의 입장에 대해 완고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들어도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이민 교회 목회자들은 하나같이 동성애에 대해 극단적인 혐오와 저주를 퍼붓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를 통해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주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적당한 때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던 중, 일주일 사이에 두 개의 큰 사건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버지니아연회에서 행한 동성애에 관한 투표가 찬성으로 결론이 났고, 연방대법원에서 동성 결혼 합헌 결정이 난 것입니다. 저는 속으로 '이때가 그때인가?' 하고 묻고 있었는데, 렉셔너리(성구집)를 따라 읽은 오늘의 말씀을 접하는 순간, "알았습니다, 하나님. 순종하겠습니다. 위험이 있더라도 이 문제를 설교하겠습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2. 우리는 성경을 최고의, 그리고 최종의 권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동성애 혹은 동성 결혼에 대해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동성애에 대해 말하고 있는 성경 말씀은 모두 여섯 개입니다.

• 창세기 19:5 [소돔과 고모라]
   "…우리가 그 남자들과 상관 좀 해야 하겠소."

• 레위기 18:22 [율법]
   "너는 여자와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안 된다."

• 사사기 19:22 [기브아]
   "그 남자를 끌어내시오. 우리가 그 사람하고 관계를 좀 해야겠소."

• 로마서 1:26-27 [바울]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바르지 못한 관계로 바꾸고, 또한 남자들도 이와 같이,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욕정에 불탔으며,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마땅한 대가를 스스로 받았습니다."

• 고린도전서 6:9-10 [바울]
   "불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나, 간음을 하는 사람들이나,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 디모데전서 1:9-10 [바울]
   "율법이 제정된 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라, 법을 어기는 자와 … 남색하는 자와…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훈에 배치되는 일 때문임을 우리는 압니다."

지난 30년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이 본문들을 속속들이 파헤쳤습니다.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본문들이 사실은 동성애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두 가지 이유로 그렇게 말합니다. 첫째 이유는 '동성애'라고 번역된 단어들이 실은 다른 의미라는 것입니다. 둘째, 고대의 동성애는 신전에서 행해지던 성매매 혹은 부유한 성인 남자가 가난한 소년을 성적으로 유린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성경이 금하고 있는 것은 '성적 방종'(sexual orgy)과 '성적 유린'(sexual violence)이지 '일대일의 동성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해석에 어느 정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입장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역사적 증거에 의하면, 과거에도 지금처럼 두 사람 사이에 합의된 동성애가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적 방종과 성폭행만이 아니라 일대일의 합의된 동성애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 두심으로 인해 일어난 왜곡 혹은 타락의 현상 중 하나라고, 바울은 정의합니다.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또한 "예수님은 동성애에 대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겉으로는 맞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결혼에 대해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정의하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분에게 와서 모세의 율법 규정에 따라 이혼을 해도 되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모세는 너희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이 계명을 써서 너희에게 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막 10:5-8)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의 원리에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외에 다른 형태의 결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동성애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으니 동성애에 대해 묵인하신 셈이다"라는 주장은 억지입니다. 반면, "예수께서 결혼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으로서 보셨으니 동성애에 대해 부정하신 셈이다"라는 주장은 논리적인 유추입니다.


3. 이와 같은 근거에서 많은 이들이 다음과 같이 결론 짓습니다.

동성애는 죄다.
Homosexuality is a sin.

이 명제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은 이 한 문장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예를 들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살은 죄다.
Suicide is a sin.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 문장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살한 사람들의 속사정에 대해 한 번도 귀 기울여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자살한 사람이 모두 지옥에 간다고 믿습니다.

자살이라고 해서 다 같지 않습니다. 잘못된 선택으로 자신의 목숨을 취한 사람도 있지만, 우울증이나 다른 사정으로 인해 자살로 '몰린'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 충동을 겪어 본 사람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자살한 사람들에게 교리의 잣대만을 들이대어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취한 것이 죄인 것은 맞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고 기대할만한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동성애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동성애 현상에 대해 제대로 보려 하지 않습니다.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입니다. 솔직히 저에게도 그런 거부감이 있습니다. 아직도 동성애자들의 애정 행위에 대한 사진이나 영상이 곱게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니 눈 질끈 감고 동성애자들은 모두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살한 사람들의 사정이 모두 다르듯, 동성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성애자들 중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 사도의 말대로 부끄러운 정욕에 빠져서 상대를 바꾸어 가며 쾌락을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 사람들을 '타락한 동성애자들'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런 동성애는 정죄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동성애도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동성에 대한 끌림이 있어서 그로 인해 부단히 싸워 온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DNA에 심겨 있는 것인지 아니면 후천적으로 발생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견이 있습니다. 그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든, 어느 사회든지 인구의 3-5% 정도가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거의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들을 '타고난 동성애자들'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타고난 동성애자들'에게는 독신으로 살아가든지 아니면 동성의 파트너를 찾아 살든지, 두 가지의 대안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결단하여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은 칭찬할 일입니다.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영적 지도자였던 헨리 나우웬은 여섯 살 때부터 자신에게 동성애적 경향이 있음을 알았고 평생토록 그 경향과 싸웠습니다. 그는 다른 동성애자들에게 자신처럼 '거룩한 독신'(holy celibacy)을 선택하라고 권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받은 바 소명이 있어서 스스로 독신을 선택한 것은 칭찬할 수 있어도,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대개 '타락한 동성애자들'과 '타고난 동성애자들'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동성애자는 모두 같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에 자주 "동성애의 실체를 고발한다"는 식의 글이 떠다니는데, 그것을 읽어 보면 대개 '타락한 동성애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한 이야기들을 읽으면 그들에 대한 혐오감과 거부감이 증폭됩니다. 그러한 시각으로 '타고난 동성애자들'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열고 '타고난 동성애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고쳐지지 않는 동성애 경향과 싸워 온 그들의 '내면의 전쟁'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들이 사는 모습을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교우에게서 들은 말입니다. 자신이 아는 동성애 친구에게서 동성애라는 한 가지 문제만을 제외하면 이성애자인 자신보다 훨씬 더 믿는 사람답게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울증으로 자살한 사람을 교리적으로만 단죄할 수 없듯이, '타고난 동성애자들'을 교리만으로 정죄하고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는 괜찮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살은 잘못된 선택입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잘못된 선택에 하나님의 은혜가 여전히 열려 있다는 사실을 믿고 구해야 합니다. '타고난 동성애자들'의 선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선택을 우리는 칭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사정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고 보듬어 주어야 합니다.


4. 앞에서 본 명제를 다시 한 번 보십시다. 이번에는 강조점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동성애는 죄다.
Homosexuality is a sin.

"무엇 무엇이 죄다"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지옥 간다는 뜻입니까? "자살은 죄다"라고 명제로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자살은 죄다"라는 생각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자살은 죄다.
    --> 죄인은 지옥에 간다.
           -->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이 논리를 따라갑니다. 하지만 이 논리는 복음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생각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 가운데 태어났고 죄 가운데 살아갑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 대로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것입니다"(요일 1:8). 그렇기에 우리는 구원에 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조건 없는 은혜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가 없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고 비약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파적 믿음'입니다. 죄를 지어도 무방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혜로 거듭났고 날로 새로워져 갑니다. 죄로부터 벗어납니다. 하지만 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에 관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만 의존할 뿐입니다. 이 은혜의 복음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자살한 사람의 영정 앞에서 "지옥 가게 되었으니 어쩌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자살했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그 사람도 그가 짓고 있는 죄 때문에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동성애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비 복음적인 논리를 따라갑니다.

동성애는 죄다.
       --> 죄인은 구원받지 못한다.
              --> 동성애자는 구원받지 못한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이 논리를 따라갑니다. 그리고 이 논리는 마침내 동성애자는 이 세상에서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결론에까지 이릅니다. 우간다의 기독교인 대통령이 동성애자에 대한 '인종 청소'를 명령했다는 끔찍한 소식을 듣습니다. 이런 논리가 '타고난 동성애자들'에게까지도 지독한 혐오감을 가지게 만들고 독설과 저주의 말도 서슴지 않게 만듭니다. 복음에 따른다면 논리적 흐름이 달라져야 합니다.

동성애는 죄다.
       -->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
                   --> 동성애자도 구원의 대상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동성애는 '타고난 동성애자들'의 경우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대상이며 그 은혜 안에서 성장하고 성화되어 가면서 스스로 거룩한 삶을 선택해 가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한다면, "무엇 무엇은 죄다"라는 표현은 조심해야 할 표현 중 하나입니다. 자살은 죄다, 이혼은 죄다, 살인은 죄다, 혹은 동성애는 죄다. 모두 그렇습니다. 너무도 모호하고 혼란스럽습니다. 그 한 문장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진실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 아주 속기 쉽고 또한 속이기 쉬운 말입니다.


5. 어떠신가요? 여러분의 궁금증 혹은 의혹이 조금이라도 해소되었습니까? 아니면 더 혼란스러워졌습니까?

부디, 오늘 제가 드린 말씀을 숙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드린 말씀이 여러분의 입장과 많이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성서학자로서 지금 제가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기도와 묵상과 고민의 마중물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결론 지으면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취할 태도를 몇 가지 나누려 합니다.

첫째, 우리가 믿는 성경 말씀을 따른다면 동성애와 동성 결혼에 대해 반대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연방대법원의 결정이 우리의 최종 권위가 아닙니다. 우리의 최종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이 뭐라 하든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반대'에도 여러 종류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동성애는 어떤 것이든 구원받지 못할 죄이며 지상에서 사라져야 할 악이라고 믿는 '극렬 반대'가 있습니다. 이런 입장은 '동성애 혐오'(homophobia)로 이어집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런 입장을 가진 분들이 있을 것이고, 우리 지역의 교회 강단에서는 주로 이런 메시지만 들립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타락한 동성애'는 타락한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혐오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타고난 동성애'에 대해서는 그렇게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온건 반대'(동성애가 잘못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짓는 다른 죄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 혹은 '공감 반대'(동성애가 하나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의 고통과 번민에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는 태도)의 입장이 옳습니다. 저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타고난 동성애자들'에 대해서는 '온건 반대' 혹은 '공감 반대'의 입장에 서야 한다고 믿습니다.

둘째, 동성애와 동성애자들에 대해 말할 때 혹은 그들을 대할 때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동안 교회는 동성애자들을 혐오하고 박해하는 세력으로 사회에 알려져 왔습니다. 동성애가 하나님의 섭리에 어긋난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은 옳은데,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진리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명성을 잃어버리고, 소수자들을 차별하고 박해하는 집단으로 오인되었습니다. 이 오명을 벗어야 합니다. '타락한 동성애자들'에게는 사랑으로 회개를 호소하고, '타고난 동성애자들'은 사랑으로 품어야 합니다. 집안에서라도 동성애자들을 혐오하고 저주하는 언사를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앞으로 동성애자들은 더 흔해질 것입니다. 인구의 3-5%면 적은 수가 아닙니다. 통계적으로 말하자면 30명이 모여 있을 때 한 사람 정도는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동안에는 억압하고 숨기고 살았기 때문에 잘 안 보였는데, 이제는 너그러운 사회 분위기 때문에 더 많이 보일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가족 중에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한인 이민자들이 동성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내뱉는 언사들을 생각해 보면, 자녀나 손주들 중에 그런 경우가 생기면 죽음을 생각하게 될 정도로 심각한 고민을 겪게 될 것입니다.

부디, 오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시어 복음의 정신으로 '타고난 동성애자들'을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교회에 찾아오면 전염병자 보듯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가정에 동성애 성향으로 씨름하는 아이가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가십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내 아이가 그럴 때 세상의 눈총으로부터 부모가 보호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보듬어 안고 그 아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선택해 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옳다고 믿는 이성 결혼과 이성애가 더욱 거룩해지고 아름다워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독신'의 삶이 얼마든지 행복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이성 결혼을 하찮게 여기고 우습게 보는 상황에서 동성애와 동성 결혼을 반대해 보아야 헛수고가 될 뿐입니다. 자녀들로 하여금 "엄마 아빠처럼 살려면 결혼하지 않을래!"라고 말하게 만들면 안 됩니다. 그런 노력 없이 목소리 높여 반대하는 것은 우리의 설득력을 스스로 깎아 내리는 일입니다.


6. 렉셔너리에 따라 읽은 오늘의 말씀은 예언자 에스겔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에스겔은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즈음에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선포할 말씀을 전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곧 나에게 반역만 해 온 한 반역 민족에게 보낸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처럼 이날까지 나에게 죄만 지었다.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진 바로 그 자손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너는 그들에게 "주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하고 말하여라.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이다. 듣든지 말든지, 자기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다는 것만은 알게 될 것이다. (겔 2:3-5)

이 말씀을 읽는 순간, 저에게는 오늘의 교회의 현실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교회는 이제 이 사회에서 소수자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이 사회의 법을 교회의 기준에 따라 만드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세상이 교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은 앞으로 더 심해질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교회는 세상과 다른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놀라지 말 일입니다. 당황하지도 말 일입니다. 흥분할 일도 아닙니다. 세상은 항상 그랬고, 교회는 늘 세상과 다르게 살았습니다. 온 세상의 주인은 여전히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결국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믿고 우리가 믿는 바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들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것은 '기독교 국가'(Christendom)를 세우라는 것이 아니라 제자로 살고 제자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 소명을 더욱 신실하게 실천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 동성 결혼 시대를 사는 지금입니다.

그것은 목소리를 높이는 것으로도, 피켓을 드는 것으로도, 혹은 북치고 꽹과리를 치는 것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오직 진리에 선 신실한 삶과 차별 없는 사랑의 실천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제자로 살기 원하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사랑의 주님,  진리의 주님,  저희를 주님의 진리 안에 잡아매시고
저희를 사랑의 도구로 써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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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Ezekiel) /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God Makes You Strong)

에스겔 2:1-3:21

북이스라엘 멸망 후(BC 722년) 얼마 못 가, 강국 앗수르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애굽도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바벨론은 정치적 야망이 큰 느부갓네살이 왕위에 오른 후 중동 전역을 장악하기 위해 확장정책을 펼쳤다.
이 무렵 애굽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유다왕 여호야김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의 속국왕이 되어, 3년 동안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겼으나 배반하고, 다시 애굽에 기대어 스스로를 지키려고 했다.

이에 느부갓네살은 BC597년 신속히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예루살렘을 굴복시킨다. 느부갓네살은 그때 왕위에 오른지 석달밖에 안되는 어린 임금 여호야긴과 유다 사회의 상류층 대부분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갔고 여호야긴의 삼촌인 시드기야를 바벨론을 섬기는 임금으로 세운다. 그때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 에스겔이 있었다. 즉 에스겔은 70년에 걸친 포로생활 초기의 선지자였다. 그후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도 바벨론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이를 계기로 B.C.586년 유다는 느부갓네살에 의해 완전히 패망하였다.

에스겔이 활동을 하던 시대는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역사 속에서 그 국가적 형태를 잃어버리는 비운의 시기로,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서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옛 영광을 재현할 것이라는 소망을 백성들에게 전했던 대표적인 선지자였다.



 

에스겔은 사독 계열의 제사장 부시의 아들로 제사장집안 출신이었다. 그런데 1:1에 나오는 제30년이란 말이, 에스겔의 나이라고 보았을 때, 이때는 여호야긴왕이 바벨론으로 끌려온지 오년째 되는 해였기 때문에, 에스겔은 바벨론으로 끌려올 당시는 약 25세 정도였을 것이다.따라서 에스겔은 예루살렘에 있을 때는 아직 본격적으로 제사장 직무를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민4:3에 따르면 레위 사람은 25세부터 제사장 직무에 대해 견습생활을 하다가 30세부터 제사장 일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에스겔은 제사장 집안에서 자라면서 어릴적부터 훈련을 받아왔기 때문에, 제사장들의 사고방식과 모든 행동양식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에스겔이란 이름은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 혹은 ‘하나님은 강하시다’라는 뜻이다. 아마 그의 부친은 나라가 심히 어려운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아들에게 이와같은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예레미야선지자도 제사장 집안 출신인데, 예레미야와는 달리 에스겔에게는 아내도 있고 집도 있었다. 예레미야는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된 예루살렘의 멸망을, 유대땅에 남아서, 나라가 완전히 망할 때까지 선포했고, 반면, 에스겔은 바벨론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유다 백성들과 함께 살면서 그곳에서 나라의 멸망을 선포했다. 에스겔의 아내는 포로로 잡혀간지 얼마 안되어 일찍 죽었다. 하여튼 예레미야나 에스겔은 제사장으로서 활동할 수 없었던 시기에, 선지자의 소명을 받아 백성을 위해 섬겼던 것이다.

 

에스겔은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2차 침입시 포로로 끌려가 그발 강가의 델아빕을 중심으로 하여 약22년간 예언 활동을 하는데, 에스겔의 예언 활동은 두 시기로 뚜렷하게 구별할 수 있다. 먼저 포로로 잡혀갔을 당시부터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당할 때까지 약 7년간은, 죄로 가득 찬 성읍 예루살렘에 닥칠 심판은 돌이킬 수 없다고 선포한다. 유다백성들은 비록 자신들이 현재 포로로 잡혀와 있지만,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하도록 하나님께서 보고만 계시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곧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스겔은 이같은 저들의 생각과 희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예언한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점령당하고 성읍과 성전이 파괴된 다음에는 에스겔의 예언의 내용이 달라진다. 이제 에스겔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위로하며,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고 재건하실 새로운 나라를 준비할 수 있도록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예를들어, 겔37장에 나오는 마른뼈의 환상은, 죽은 뼈들이 깨어나 하나님의 살아있는 새 군대가 되는 환상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변화와 회복의 역사에 대해 너무나 확신 넘치는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큰 재난이 닥친 뒤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에게로 다시 향하시는지를 아주 인상 깊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완전히 망가진 백성들을 일으켜 세워서, 새 희망을 품게 하고, 새 미래에 대한 믿음을 지니게 하는데 있어, 에스겔의 예언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이 중대한 영향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에스겔은 ‘환상과 소망의 선지자’로 불린다.

 

● 그러면 에스겔은 선지자로서 어떤 특징을 가진 인물인가? 가장 특징적인 것 몇가지만 살펴보면, 먼저 에스겔은 성령의 예언자라고 할 수 있다. 선지자들은 물론 모든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성령의 이끄심 없이는 사역이 불가능하겠으나, 특히 에스겔은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에 인도된 선지자의 전형이다. 그래서 에스겔서에 보면, 성령이 그에게 들어가 성령이 그를 인도했다는 기사가 자주 되풀이 된다. 달리 표현하면, 그는 성령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에스겔서는 구약의 어느 성경보다도 성령과 관련된 예언이 많다.

 

겔37장의 마른뼈들의 환상은, 성령의 살리는 능력에 대한 대표적인 예언이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 뿌리도 잎사귀도 절단되어 소생할 가망이 없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불가능을 부정한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정욕과 야심의 불길에 타서 지금은 재만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 사이에 가서도, 여전히 확신을 갖고 복음을 전하고, 양심도 이미 사그라져 죄악 덩어리가 된 극악 무도한 자의 앞에서도, 여전히 그들이 성도가 될 수 있다고 외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로 소생시키시는 성령의 능력을 확신할 때만 가능하다.

 

겔47장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강물에 대한 환상은, 성령의 회복 능력에 대한 대표적인 예언이다. 하나님의 전의 문지방 밑에서 동쪽으로 흘러 내리는 강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사해에 이르는 지역은 완전히 황야로, 새도 지저귀지 않고, 꽃도 피지 않는 사막인데,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떠나 황야와 같은 살풍경한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샘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그 개울이 흐르는 곳에는 모든 것이 되살아나게 된다. 죽음의 바다까지도 정화된다. 그 개울 물은 점점 불어나 헤엄을 칠 수 있는 물, 건너갈 수 없는 충만한 강이 된다. 얼마나 반갑고 놀랍고 소망 넘친 환상인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꿈이 있고 희망이 있다. 그는 시궁창을 보지 않고 천상의 빛을 우러러본다. 그는 지상에 죄악이 득실거리고 이단과 세속화가 교계에 넘쳐 있을 때에도 여전히 성령의 소생시키시고 회복시키는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는 절망의 맨 밑바닥, 칠흑같은 어둠 한가운데서도 결코 눈감지 않는 사람이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가? 성령의 능력을 진심으로 믿고 의심하지 않는 사람인가? 지금 여러분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오는 말들은 어떤 말들인가? 안된다. 불가능하다. 할 수 없다. 제까짖게 뭘 하겠어. 그 사람은 안돼! 포기하자. 우리가 뭘 하겠어! / 무슨 말입니까? 가능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같이 한번 해봅시다. 한번 믿어봅시다. 다시 시작해요.

 

성령에 대해 말할 수는 있어도,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성령에 대해 말만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성령과 동행하며 성령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 에스겔 선지자와 같이 성령에 온전히 사로잡힌 바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 성령의 능력을 마음껏 체험하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처럼 에스겔이 성령으로 충만한 생애를 보내게 된 비결은 어디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온전한 복종과 무조건 위임이다.
하나님의 손길, 성령의 손길에 완전히 자신을 맡기기 전에 성령은 그를 점령하여 채울 수 없다.
에스겔의 생애는 “완전히 맡긴 생애”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침묵할 때나 말할 때나 오직 하나님께 순종했다. 하나님이 그의 입을 열지 않으시면 잠자코 있고, 열어 주시면 말했다.
때로는 몸을 꼼짝도 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가 하면, 일단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이 떨어지면 때로는 팔을 휘저으면서 예언하고, 때로는 손뼉을 치면서 말하고, 때로는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이 조용히 역사한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성령이 소란스럽게 역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자기 생각을 고집한다.
참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자유로워서 어떤 생각에도 메이지 않는다.
에스겔은 이런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390일 동안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지고 왼쪽 겨드랑이를 아래로 깔고 잤다.
또한 오른쪽 겨드랑이를 아래로 깔고 잤다. 자다가 몸을 뒤척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또 때로는 쇠똥으로 빵을 구워 먹었다.
또 때로는 머리와 수염을 깎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곧 그대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명령하는 일은 설사 어린이의 장난 같은 일이라도 서슴지 않고 그것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대로 행하였다.

때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허리가 끊어지듯이 슬피 탄식했으나, 울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에는 아무리 슬퍼도 울지 않았다.
자신의 아내가 죽었으나 하나님의 명에 순종하여 슬퍼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성령이 충만한 그릇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었다.
그의 활동무대는 사실은 하나님의 손바닥이었다.
그래서 여호와의 손길이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며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전폭적으로 맡기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사람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것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 내 의지, 내 감정, 내 가치관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판단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없지 않은가?
여러분이 어려운 결정을 할 때, 힘든 결단을 내릴 때, 중요한 일에 임할 때, 여러분을 이끌어가고, 여러분의 사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인가?
만일 그러할 때, 성경말씀이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고, 수없이 들었던 설교말씀이 무색하게 되고, 한마디 진지한 기도조차 없다면, 여러분은 누구인가? 하나님과 여러분은 어떤 관계인가?

중요한 날짜를 정할 때 점쟁이를 찾아가고, 중요한 일을 앞에 두고 일진이나 살핀다면, 여러분은 무당, 잡신의 추종자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절친한 친구, 선배와 상담하는 것도 필요하고, 때로 목회자나 믿음의 선배에게 조언을 듣는 것도 유익하다.
부모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적어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면, 참으로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어놓고 말씀의 조명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비록, 큰 소리로 여러분의 귀에 응답이 없다 할지라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편으로든지 응답해 주시지 않겠는가?
그런 믿음조차 없다면, 여러분은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같이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 때 반드시 능력이 따른다.
에스겔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에스겔에게 어떤 능력이 나타났는가?

첫째, 통찰력이 있었다.

통찰력은 선지자의 가장 중요한 능력 중의 하나이다. 통찰력이란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다. 그는 먼저 주의 영광을 보는 데서 시작했다. 그는 선지자의 생애를 시작했다. 그는 선지자의 생애를 시작할 때 그발 강 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으며, 그 후에도 보고 또 생애의 끝에서도 보았다. 그의 머리 위에는 언제나 하늘문이 열려 있었다. 몸은 비록 이방인에게 포로가 되어 있었으나 결코 좌절을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무한한 하늘나라가 그의 머리 위에 펼쳐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백성의 진상을 파악했다.

유다의 장로들이 그를 찾아와서 그의 앞에 앉았을 때, 그는 환상 가운데 있었다. 오랜 침묵이 계속되었다. 장로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 두려워하면서 선지자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에스겔은 그 동안에 신전에서 저지르고 있는 백성의 두려운 죄의 광경을 보고 있었다.

신전 문 입구에 투기의 우상이 서 있고, 제단 문 북쪽 입구에도 투기의 우상이 서 있었다. 벽에 생긴 구멍으로 들여다 보았더니, 더러운 여러 가지 우상의 형상이 벽에 그려져 있는데, 이스라엘 장로 700명이 그 우상에 절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명문 출신인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있었다. 그리고 아낙네들은 몰래 음녀의 애인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고 있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지도급 인사 25명이 하나님의 성전에 등을 돌리고 태양을 경배하고 있었다.

장로들은 기특하게도 선지자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지만, 한꺼풀 벗기면 그들의 마음은 이렇게 더럽혀 있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의 소원에 대답하실 수 있겠는가? “그들이 큰 소리로 내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무서운 침묵을 깨고 껍질을 쓴 장로들에게 던진 선지자의 경고였다.

선지자의 눈에는, 그 백성들의 모습이 생명을 잃은 마른 뼈다귀로 보였다. 세상의 영화가 부러워 보이는 사람은 선지자가 될 수 없다. 백성들의 진상을 간파하고 던지는 경고만이 사람들의 가슴을 때린다.

 

셋째, 사탄의 진상을 보았다.

그는 두로 왕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에 영안이 띄어, 두로의 학정의 배후 조종자인 사탄의 정체를 간파했다. 적의 정체를 간파하지 못하는 자는 참된 승리자가 될 수 없다. 영적인 사람은 언제나 마귀의 움직임을 직시하고, 하나님께서 이길 힘을 주실 것을 확신하고 싸워 이긴다.

 

넷째, 에스겔의 눈은 언제나 한 시대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백성이 거짓 소망에 들떠, 있을 때, 그는 다가올 멸망을 예감하고 몹시 비통해 하였다. 에스겔서의 전반에 그것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막상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그 백성이 비탄에 빠졌을 때에는 그들에게 소망을 안겨주고 그들을 위로했다. 즉 말세에 하나님의 선민이 다시 일어날 것을 예고하고 메시아 왕국 시대에 세워질 신전의 구조까지도 예언했다. 또한 천년 시대의 종말에 일어날 곡과 마곡의 전쟁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에스겔에게는 강렬한 사명감이 있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고하여 이르라 가령 내가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한다 하자 그러나 파수꾼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 죄를 내가 파수꾼에게서 찾으리라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이것은 교역자의 책임에 대해 하신 여호와의 말씀이다.
진리의 말씀을 전하지 않은 책임이 이렇게 막중한 것이다.
누가 이 중책을 감당할 수 잇겠는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성령에 의한 강한 사명감이 없는 사람은 천만 마디 말을 해도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아 사람들을 깨우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에스겔의 말은 위력이 있었다.
“내가 예언할 때에 브니냐의 아들 블라댜가 국기로 내가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도뢰 오호라 주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다 멸절하고자 하시나이까?”
여호와가 죄를 지적한 말 한 마디에 아나니야가 쓰러진 것과 비슷한 광경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의 말에는 이런 위력이 있다.
에스겔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예언은 빼어든 것처럼 예리하고, 불길처럼 격렬했다.

에스겔의 예언이 지닌 특징에 대해 알아 보자.
그의 말에는 이사야와 같은 장중한 수식은 없다.
예레미야와 같은 섬세한 정서도 없다.
에스겔은 다만 백성이 알아듣기 쉽게 말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야기에는 예수님처럼 비유가 많다.
15장에는 포도나무의 비유가 있고,
17장에는 독수리와 레바논 백향목의 이야기가 나오고,
19장에는 암사자와 새끼사자의 이야기가 나오고,
23장에는 두 자매의 비유가 나온다.
우매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오묘한 도를 깨닫게 하려고 그가 얼마나 고심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예언은 몸으로도 하였다.
때로는 기와로 예루살렘의 모형을 만들고, 똥으로 빵을 굽고, 자기 머리와 수염을 깎고, 짐을 꾸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집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등, 그는 행동으로 표시해 보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귀로 듣는 설교보다 눈으로 보는 설교를 한 것이다.
우리의 생활과 행동 자체가 설교가 될 때 사람들은 감동을 느낀다.

모든 일이 형통하고 삶이 풍부한 때는 누구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마련이다.
그러나 암울한 날들이 계속 되어지고 도무지 내일이 희망차 보이지 않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어쩌면 무지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사는 곧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간파한 에스겔은 국가가 패망하는 상황 가운데에서도 회복의 소망을 잃지 않았다.
이처럼 신앙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주위에 산재해 있어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 성도는 굳게 소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에스겔은 바벨론의 유다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자이며 그들의 파수꾼으로서 정신적으로 침체에 빠져 있는 그들에게 소망을 가져다 주었다.
이렇듯 오늘날 세상의 염려와 근심 속에서 불안해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하는 것이 성도된 자의 마땅한 사명이다. 
에스겔은 예언 황동을 하다 죽임을 당하였다는 전승으로 미루어 맡은 바 사명에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충실한 자였다.

 





에스겔을 부르심 (1-3장)


1장 / 내 생물과 여호와의 영광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환상을 보여 주십니다.
네 생물(four living creatures)의 환상, 사람, 사자, 소, 그리고 독수리의 얼굴을 하고 있고 날개와 손이 있습니다.
그 내 생물의 머리 위에 하늘로부터 보좌(throne)와 하나님 영광의 형상이 있습니다.

2장 /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심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2: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명령하시며, 에스겔에게 애가(lamentation), 애곡(mourning), 그리고 재앙의 글이 담긴 두루마리 책을 주십니다. 그리고 에스겔에게 그 책을 먹게 하십니다.

3: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3장 / 에스겔, 이스라엘의 파수꾼(watchman)

3: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또한 에스겔을 말 못 하는 자로 만들어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3:26. 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그들을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 (4-24장)

예루살렘 함락(4-5장)

하나님은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 여러 가지 상징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그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4장 / 예루살렘 성 모형의 상징

흙으로 예루살렘 성의 모형을 만들고 그 성이 곧 무너질 것을 상징합니다.

4:3. 또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북이스라엘은 390년 그리고 남유다가 40년간 행한 죄를 담당하여, 에스겔은 390일 동안 왼쪽으로, 40일 동안 오른쪽으로 누워 근신하게 합니다.
또한 그날 동안 음식을 제한하고, 똥으로 음식을 준비하여 먹으며 예루살렘에 내릴 심판을 상징합니다.

4:16.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백성이 근심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두려워 떨며 물을 되어 마시다가

5장 / 머리카락과 수염을 자르는 상징

에스겔이 머리카락과 수염을 잘라서 1/3은 태우고, 1/3은 칼로 베고, 그리고 1/3은 바람에 날립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1/3은 전염병으로, 1/3은 칼로, 1/3은 사방으로 흩으시며 죽이는 심판의 상징입니다.

5:13.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을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가라앉으리라 내 분이 그들에게 다한즉 나 여호와가 열심으로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

우상 숭배와 심판 (6-11장)

우상 숭배하며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보여주며 경고하십니다.

6장 / 우상 숭배에 대한 심판

6:11.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는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할지어다 오호라 이스라엘 족속이 모든 가증한 악을 행하므로 마침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망하되

심판의 목적은 그들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하는 것입니다.

6:14.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7장 / 하나님 진노의 날

이스라엘에 하나님 심판의 날이 왔다고 경고합니다.

7:3. 이제는 네게 끝이 이르렀나니 내가 내 진노를 네게 나타내어 네 행위를 심판하고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

7:27. 왕은 애통하고 고관은 놀람을 옷 입듯 하며 주민의 손은 떨리리라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그 죄악대로 그들을 심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8장 / 예루살렘 성전 우상 숭배의 환상

곤충, 짐승과 우상, 담무스(Tammuz), 동쪽 태양에 절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환상으로 보여주십니다.

9장 / 예루살렘을 향한 분노

하나님께서 분노와 심판을 표하십니다.

9:9.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죄악이 심히 중하여 그 땅에 피가 가득하며 그 성읍에 불법이 찼나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으며 여호와께서 보지 아니하신다 함이라

10-11장  /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환상을 봅니다.

10장 /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환상을 봅니다.

11장 /  예루살렘 심판을 말씀하시며 또한 회복의 희망을 주십니다.

  • (11:19-20)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포로 상징 (12)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이스라엘 (열왕기하 24,역대하 36장 )

에스겔에게 포로의 모습으로 다니게 하며 이스라엘이 포로 됨을 상징으로 보여줍니다.

  • (12:4) 너는 낮에 그들의 목전에서 네 포로의 행장을 밖에 내놓기를 끌려가는 포로의 행장 같이 하고 저물 때에 너는 그들의 목전에서 밖으로 나가기를 포로되어 가는 자 같이 하라

떨면서 먹고 마시는 상징도 명령하십니다.

  • (12:19) 이 땅 백성에게 말하되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주민과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그들이 근심하면서 그 음식을 먹으며 놀라면서 그 물을 마실 것은 이 땅 모든 주민의 포악으로 말미암아 땅에 가득한 것이 황폐하게 됨이라

그리고 하나님 심판이 임박했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 (12:28)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아니할지니 내가 한 말이 이루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거짓 선지자에 대한 심판 (13)

하나님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 (13:16)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보았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의 거짓말들은 하나님 백성의 영혼을 사냥하는 것이라 표현하십니다. 그러므로,

  • (13:23) 너희가 다시는 허탄한 묵시를 보지 못하고 점복도 못할지라 내가 내 백성을 너희 손에서 건져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오직 의인 만 살리라 (14-15)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 장로들(elders)이 우상을 섬기고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따르는 것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 (14:6) 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려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하나님은 노아다니엘을 예를 들어, 모든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에 있어, 오직 의인만 살리신다 말씀하십니다.

  • (14:20)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5장) 불에 던져질 땔감으로 예루살렘 주민을 비유합니다.

가증한 예루살렘 그러나 영원한 언약 (16)

한 여인으로 비유된 예루살렘

탯줄도 떼지 못한채 피투성이로 길가에 버려진 한 여자 아기가 있어 지나가던 사람이 데려다가 들의 풀같이 픙성히 잘 양육했습니다. 그 아이는 소녀가 되고 사랑할 만한 때가 되어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 분은 물로 피를 씻어 없애고, 기름을 바르고, 수 놓은 옷을 입히고, 가죽 신을 신키고, 온갖 패물로 화려하게 그녀를 치장하게 해 주었고 왕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 명성이 주변국에 퍼지자 지나가는 자들과 행음하는 음란한 여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여인에 비유하며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것으로 산당을 짓고 여러 나라의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은 남편을 두고 간음하는 여인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 (16:43) 네가 어렸을 때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이 모든 일로 나를 분노하게 하였은즉 내가 네 행위대로 네 머리에 보응하리니 네가 이 음란과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다시는 행하지 아니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을 또한 남편과 자녀를 싫어하는 어머니의 딸이라 비유하며 그녀의 형제는 사마리아고 소돔이며 이스라엘의 행위가 그들보다도 더 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이 사랑하셨기에 음녀가 된 이스라엘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또 다시 회복시키고 행위를 용서하셔서 하나님되심을 보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 (16:60)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독수리와 포도나무의 비유와 설명 (17)

큰 독수리가 레바논에서 백향목 높은 가지를 꺽어 장사하는 땅 상인의 성읍에 두고, 그 땅의 종자를 꺽어 옥토 큰 물가에 심었더니 포도나무가 자라 가지가 독수리를 향하고 독수리 아래에 있었다. 또 다른 독수리가 있는데 그 포도나무가 물을 받으려고 그 물가 옥토를 버리고 그 심어진곳에서 그를 향하여 뿌리가 뻗고 가지가 퍼지자 이 포도나무가 열매를 따며 번성할 수 없을 것이다.

처음 독수리는 바벨론 왕이며 높은 가지인 이스라엘 왕과 고관들을 바벨론으로 끌어갔고 그 땅 예루살렘에 한 왕족을 세워 바벨론과 언약을 맺어 이스라엘을 낮춰 다시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큰 독수리인 애굽을 의지하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배반한 이스라엘이 결코 애굽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망하리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친히 높은 가지를 꺽어다가 높은 산에 심어 그 나무가 크고 열매를 맺어 각종 새들이 깃들이게 하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연한 가지(young twigs)는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죄악과 아들의 의 (18)

  • (18: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하나님께서 선택한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이라도 그들은 우상을 섬기는 큰 악을 저질렀기에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긍휼히 많으신 하나님은 비록 악인이라도 죄를 회개하고 의를 따르면 모든 죄를 기억하시지 아니하시고 그가 돌이킨 것으로 기뻐할 테니 이스라엘 각 사람이 죄로 심판받기 전에 회개하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 (18:3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이스라엘 고관들을 위한 애가 (19)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교관 즉 왕족들을 위한 슬픈 노래를 지으라고 하십니다. 이 애가에 등장하는 사자는 왕권을 상징합니다. 젊은 사자는 애굽으로 끌려가고(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아하스) 또 다른 젊은 사자(시드기야)도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들은 물가에 심겨진 포도나무같았지만 생명의 물 되신 하나님을 져버렸기에 분노 중에 뽑혀서 땅에 던짐을 당하고 그 열매는 동풍에 마르고 그 강한 가지들은 꺾이고 말라 불에 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위가 끝이 난 겁니다.

  • (19:14) 불이 그 가지 중 하나에서부터 나와 그 열매를 태우니 권세 잡은 자의 규가 될 만한 강한 가지가 없도다 하라 이것이 애가라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

이스라엘의 반역, 불타는 숲 (20)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에스겔을 찾아 왔으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응답하지 않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하여 언약을 맺은 후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을 반역해왔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조상들의 풍속을 따라 자신을 더럽히며 모든 가증한 일로 행음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 (20:3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반드시 다스릴지라
  • (20:37)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심판은 하지만 여러 나라에서 모은 자들을 맹세한 땅 이스라엘로 인도하여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남쪽의 숲이 불이나 마른가지나 푸른가지에나 불이 꺼지지 않고 완전히 태우는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남유다에 남아 있는 주민들이 바벨론의 침략으로 완전히 망하리라는 예언입니다.

여호와의 칼, 벌 받을 예루살렘 (21-22)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의 칼집에서 칼을 빼었으니 심판의 긴박성을 슬피울고 부르짖으며 이스라엘에게 알리라고 합니다. 땅에 바벨론 왕의 칼이 올 그림을 그리는데 암몬 족속의 랍바와 유대의 예루살렘이 나뉘는 지시표를 그리게 합니다. 여호아의 말씀이 그 갈림길에서 바벨론이 점을 쳐서 예루살렘이 뽑히고 그들이 쳐들어 올 것을 계시합니다. 예루살렘의 고통을 기뻐하는 암몬은 심판을 받아 영원히 기억되지 않을 겁니다.

예루살렘은 우상을 섬기고 피를 흘린 성읍으로 모든 민족의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행한 죄악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십시다.. 왕들은 생명의 피를 흘렸고,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해하였습니다. 유다 가운데 하나님이 금한 성적 타락과 뇌물과 고리 대금과 사기 등 하나님도 배역한 것 뿐만 아니라 사람과도 관계도 악이 가득하여서 하나님은 유다를 각 민족으로 흩어서 수치를 당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상황이 된것은 반역한 선지가들과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성물을 더럽힌 제사장들, 그리고 피 흘린 왕들, 즉 지도자들의 죄악이 크다고 하시며 이 성읍은 하나님이 진노의 불로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홀라와 오홀리바 (23)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여인에 비유한 것으로 둘 다 젊어서 남편(하나님)을 두고 젊어서는 애굽과 행음(우상숭배와 이방 문화)하다가 오홀라는 앗수르와 행음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녀의 정든 자 앗수르의 손에 망하였습니다. 그녀의 동생 오홀리바는 그런 언니를 보고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오히려 앗수르와도 연애하고 바벨론과도 행음하니 언니보다 더 부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동생을 바벨론의 손에 넘겨 징벌하실 겁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므로 유다에게 진노의 잔을 주셔서 모든 음란을 그치게 하고 모든 여인이 정신이 깨어 그들을 본받지 않게 하실겁니다.

녹슨 가마, 에스겔 아내의 죽음 (24)

(24:1-14) 녹슨 가마

하나남은 아홉째 달 열째 날에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바벨론의 침공이 가까이 온 오늘 날짜를 기록하도록 했습니다. 또 비유를 주셨는데 녹슨 가마에 고기와 뼈를 넣고 가마아래에 많은 나무로 불을 지펴 삶아 녹이고 쫄이고 뼈를 태우고 빈 가마를 달궈서 녹을 없애신다는 것 입니다. 녹슨 가마는 죄악이 가득한 예루살렘이며 불은 바벨론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징벌하셔서 깨끗하게 하실 수밖에 없지만 지금이라도 회개하기를 원해서 선지자를 통해 계속 말씀하십니다.

(15-27) 아내의 죽음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그의 아내가 죽을 것을 예언하시며 그러나 죽음을 슬퍼하지도, 울지도 말며 탄식만 하라고 하십니다. 아침에 백성에게 전하니 저녁에 아내가 죽었습니다. 백성이 이 예언이 자기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묻자 에스겔이 유다가 성소를 영광과 기쁨으로 생각하나 하나님이 그곳을 더럽히고 너희의 버려둔 자녀를 칼에 죽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너희는 예루살렘의 패망을 보며 에스겔이 아내가 죽었을 때 보인것 처럼 탄식만 하게 될 것이고 그 때야 하나님이신 줄 알게 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방(Nations)에 대한 심판 예언 (25-32장)

암몬, 에돔, 모압, 세일, 블레셋 (25)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혀 졌을 때, 이스라엘이 황폐 할 때, 유다 족속이 사로잡 힐 때 암몬이 기뻐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동방 사람에게 넘기고 다른 민족으로 멸하게 할 것입니다. 모압은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다름이 없다 하였으르모 모압이 동방 사람에게 넘겨주어 기업을 삼게 할 것입니다. 에돔과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원수로,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아 줄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 (26-28)

(26장) 두로가 받을 심판

  • (26:2) 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르기를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

하나님께서 두로를 심판하시는 이유는 예루살렘 성이 무너졌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상업적으로 더 유익이 있다고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고대 지중해의 부유한 해양 상업 도시 두로는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여러 나라의 침략을 당하여 마침내는 주변 도시로부터 그 부유한 도시가 어찌 저렇게 되었나 하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사람이 더 이상 살지 못하는 역사 속에서 그 이름이 사라지고 말 도시가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27장) 두로에 대한 애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완전히 멸망할 두로를 위해 애가를 지을 것을 에스갤에게 말합니다. 두로는 어떤 나라입니까? 27장은 여러 절을 이용하여 두로가 얼마나 많은 민족과 댜양하고 귀한 물품들을 교역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가 두로를 열국의 시장(이사야:23:3)이라 표현한 것처럼 그들은 해상무역으로 엄청난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3절의 말씀처럼 그런 자신들을 가리켜 “나는 온전히 아름답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족함이 없고 완전하여서 이 영광이 영원할 것처럼 교만하여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풍(바벨론)을 일으켜 바다 한가운데서 그들을 무찔러서 주변 민족들을 놀라게 할 것입니다. 또 그들과의 교역으로 이익을 보던 도시들은 통곡하지만, 또한 많은 민족의 상인들이 그를 비웃고 두로는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8장) 두로왕, 시돈이 받을 심판

  • (28:2)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거늘

두로왕은 무역으로 번영한 것과 자기의 지혜 때문에 교만하여 스스로 신같이 생각하였기에 하나님이 심판하실 겁니다. 두로의 멸망은 주변 국가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두로는 영원히 다시 기억되지 않을 겁니다.

시돈 가운데 전염병과 칼을 보내서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낼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민족들을 없애고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을 고국 땅에 돌아와 평안히 살게 하여 하나님인 줄을 알게 할 것입니다.

애굽 (29-32)

(29장) 애굽이 받을 심판

  • (29:2)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나일강에서 가장 힘센 악어로 표현한 애굽의 왕을 하나님은 갈고리로 꿰어 내고 강을 황무지 사막이 되게 하셔서 여호와 하나님인 줄 알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애굽을 의지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들이 쓸모없는 갈대 지방이였음을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애굽은 흩으셨다가 다시 모으겠으나 이스라엘이 의지할 수 없는 미약한 나라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바벨론느부갓네살을 사용하실 것이며 그 복수로 애굽을 정복하게 하실 것입니다.

  • (29:21) 그 날에 나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한 뿔이 돋아나게 하고 나는 또 네가 그들 가운데에서 입을 열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30장) 통곡하라

하나님은 심판의 날이 가까이 왔으니 통곡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애굽과 그의 동맹국들을 칠 것이며 그들의 우상들도 모두 부숴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이 바벨론의 팔을 드시고 애굽 왕의 팔을 꺾어 칼도 쥘 수 없게 하셔서 여호와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31장) 애굽의 번영과 교만

애굽과 비슷한 앗수르의 번영과 교만과 그리고 심판을 보여주며 애굽도 이와 같게 될 거라는 것이 주제입니다. 앗수르를 가지가 아름다운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나무는 물이 많은 좋은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키가 크고 굵은 가지가 번성하였고 그늘이 많아 새와 짐승이 그 아래 거주하였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스라엘)과 다른 나무도 그만하지 못했고 에덴의 모든 나무(여러 열방)가 시기할 정도로 번영하였습니다.

  • (31:9) 내가 그 가지를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u>

그 아름다움과 번성을 이룬 것은 바로 “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교만해졌으므로 여러 나라의 능한 자의 손에 넘겨 그를 찍어 버리고 떨어트리고 그늘에 있던 새와 짐승들도 넘어진 나무와 함께 멸망될 것입니다. 그 나무는 다른 죽음에 넘겨진 자들과 같이 스올에 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31:18) 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32장) 애굽 왕을 위한 애가

애굽 왕을 여러 나라에서는 사자라 불렀지만, 실상은 큰 악어라고 하시며 많은 백성의 무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그물로 끌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악어의 사체는 짐승과 새의 먹이가 되고 피는 개천을 채울 것입니다. 모든 빛이 사라진 애굽의 패망 소문은 여러 나라에 근심과 두려움이 될 것입니다. 바벨론 왕의 칼이 그에게 오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또다시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예언이 임하여 말씀하시기를 한때 강력한 왕들과 용사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미 죽임을 당한 할례받지 못 한 자들과 같이 바로 역시 칼에 죽어 그들과 함께 있게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소망 예언 (33-48장)


에스겔의 환상에서 본 마른 뼈들이 살아남 (겔 37장)

파수꾼 에스겔 (33)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파수꾼의 역할은 위험을 알려주어서 경고를 듣고 방비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만약 경고를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파수꾼에게 죄는 없습니다. 그러나 파수꾼이 경고하지 않으면 그것은 파수꾼의 잘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으셨습니다.

  • (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의인이라도 범죄하면 그 죄로 죽을 것이지만 악인이라도 회개하고 공의를 행하면 살 것이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죄에서 돌이키라고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포로 된 지 열두째 해 열째 달 다섯째 날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에스겔이 들었는데 그 전날 저녁에 하나님이 에스겔의 입을 여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녀이니 그 땅을 계속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죄악으로 인해 그 땅을 황폐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한편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에스겔이 말한 예루살렘의 함락이 이루어지자 그에게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익만 따를 뿐 에스겔의 경고에도 회개나 행위 없이 좋은 노래 듣듯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경고가 응할 때 그들에게 한 선지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만 먹는 목자들, 양 떼를 구원하실 하나님 (34)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양은 먹이지 않고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예언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양에게서 이익만 챙기고 돌보지 않고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은 흩어지고 모든 들짐승의 밤이 되었는데 찾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이 목자가 되어 양을 찾고 찾아 건져내고 본토로 데리고 가서 좋은 꼴을 먹이고 누워 있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 (34:12)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양과 양사이와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서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목자, 다윗의 자손을 세워 그들의 왕이 되게 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평안히 거주하며 하나님이 함께 있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백성이 되리라 예언하셨습니다.

  • (34:24)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세일산과 에돔의 심판 (35)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세일 산을 향해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옛날부터 한을 품고 이스라엘 족속의 환난 때 곧 죄악의 마지막 때에 칼의 위력에 그들을 넘겼습니다. 또한 그들은 이스라엘을 미워하고 질투하며 입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피가 따라다니고 그 땅도 황무지와 폐허가 되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받을 축복 (36)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입니다. 이방에게 수치 당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똑같은 수치로 그들에게 갚아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즐거워하는 마음과 멸시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의 땅을 노략질하고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황폐했던 이스라엘 땅에는 다시 사람들이 모이고 수치와 비방을 듣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 백성을 넘어뜨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부정한 여인 같았고 피를 쏟고 우상을 섬겨서 각국으로 흩어졌고 그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더럽혀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그들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고국 땅으로 돌아올 때 맑은 물을 뿌려 정결하게 하고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실 것이며 악한 길과 행위를 기억하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밉게 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죄악에서 정결하여질 때 회복되고 번성할 것입니다.

  • (36:37)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37장

- 마른 뼈 환상

하나님이 에스겔을 데리고 한 골짜기에 갔는데 마른 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뼈들이 살 수 있을 찌 묻자 에스겔은 하나님이 아신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뼈에게 명령하신 대로 에스겔이 대언 하니 뼈가 붙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나 생기(breath or spirit)는 없었습니다.
또다시 생기에게 대언하니 생기가 살아나서 일어나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마른 뼈와 같이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을 위해 무덤을 열어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하나님의 영을 두어 살아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막대기(37:15-28)

37:16.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렇게 쓴 두 막대기를 붙여서 그의 손에서 하나가 되게 하고 무리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로 통합하시고 한 임금, 하나님의 종 다윗이 그들이 왕이 되어 모두의 목자가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의 왕위가 영원할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이것은 메시아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해석합니다.

37:22.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38-39장

- 마곡 땅과 곡의 심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주신 마곡 땅의 곡에 대한 예언입니다.
구약의 다른 책에는 언급되지 않은 (신약, 요한계시록 20:8, 언급) 곡에 대하여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교회사 속에서 어떤 해석들이 있었는지 몇 권의 에스겔 주석에서 옮겨보겠습니다.

4세기 말엽의 교부 암브로시우시는 곡이 고트족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7세기 때는 성지를 위협했던 아랍의 군대가 곡과 마곡이 되었습니다.
13세기경에는 동쪽의 몽골 유목민을 지칭하는 암호가 되었습니다.
16세기의 루터는 터키를 곡과 마곡으로 보았습니다.
17세기의 윌리엄 그린힐의 저술에서는 곡을 로마 황제 혹은 교황 혹은 터키족으로 보았습니다.
19세기의 빌헬름 게세니우스는 로쉬를 러시아로 보았습니다.

이 견해는 후에 “메섹”과 “두발”을 러시아의 도시인 모스크바와 토볼스키라고 주장했던 다른 자료들의 사상과 더불어 스코필드 관주성경에 의해 유명하여졌습니다.
이 곡이라는 인물은 특정한 한 시대의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대의 대적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38:16. 구름이 땅을 덮음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 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눈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이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통해 말한 이가 곡이라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을 치러 오도록 한 이유는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칼로 서로를 칠 것이며 전염병과 피로 심판하며 폭우와 큰 우박 덩어리와 불과 유황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이 부분은 요한계시록 20장 7절-10절까지 마곡과 곡에 대한 이야기와 아주 흡사합니다.

39장도 곡에 대한 예언으로 곡과 그의 모든 무리를 북쪽 끝에서 이끌어 내어 침략하게 한 후에 그들의 손에 활과 화살을 떨어뜨려 이스라엘 산 위에서 죽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불을 마곡과 및 섬에 평안히 거주하는 자에게 내려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버려둔 무기만으로 7년 동안 땔감으로 쓰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 동쪽 골짜기를 매장지로 삼아 7개월 동안 매장을 하여 그곳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와 짐승들은 그 시체로 인해 잔치가 열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여러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과 권능을 보게 하시고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줄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해 원수의 손에 넘겼다는 것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39:25.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사랑을 베풀지라

이스라엘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셔서 자신의 거룩함을 보이고 이스라엘은 회개할 것이며 하나님의 영을 그 속에 주시고 다시는 여호와의 얼굴을 가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성전과 성읍 형상 (40-48)

성전 조감도
  • A. 성소 (The Temple House)
  • B. 번제단 (Altar of Burnt Offering)
  • C. 안뜰 (Inner Court)
  • D. 안뜰 문 (Gates to Inner Court)
  • E. 성전 뜰 (Separate Place)
  • F. 성전 뜰 뒤쪽 건물 (Hinder Building)
  • G. 제사장의 부엌 (Priest's Kitchens
  • H. 제사장들의 방들 (Chambers for Priests)
  • I. 박석위의 방들 (Chambers)
  • K. 백성들의 부엌 (People's Kitchen)
  • L. 바깥 문 (Gates into Outer Court)
  • M. 박석 깔린 땅 (Pavement)
  • N. 바깥 뜰에 있는 방들 (Chambers in Outer Court 30)
  • O. 바깥 뜰 (Outer Court)

(40장)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에스겔에게 임하여 그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서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셨는데 남쪽에 있는 성전 형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에스겔을 그 곳으로 데려가셨는데 놋 같은 빛난 사람이 삼줄과 장대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 (40:4)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

에스겔이 본 것은 성전 바깥 뜰 세 개의 문, 바깥뜰, 안뜰로 향하는 문들, 희생 제사를 준비하는 방, 제사장의 방을 보았습니다.

(41장) 성소와 지성소와 골방들, 서쪽 건물과 성전의 넓이, 나무 제단과 성전의 문들

(42장) 제사장 방, 성전의 사면 담

  • (42:20) 그가 이같이 그 사방을 측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길이가 오백 척이며 너비가 오백 척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43장) 동편 문을 통해 성전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가득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기에 노하여 멸망시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43:9) 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거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 가운데에 영원히 살리라

번제단의 환상을 보았고 이 제단을 만든 날(봉헌)의 규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에게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를 주어 속죄제물을 삼게 하고 그 피로 제단의 네 뿔과 아래층 네 모퉁이와 사방 가장자리에 발라 속죄하여야 합니다. 그 속죄제물의 수송아지를 가져다가 성전의 정한 처소 곧 성소 밖에서 불사르고 다음 날에는 흠 없는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삼아 드려서 그 제단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그 후에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떼 가운데에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를 드리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칠 일 동안은 매일 염소 한 마리를 갖추어 속죄제물을 삼고 또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를 흠 없는 것으로 갖출 것이며 이같이 칠 일 동안 제단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려 정결하게 하며 드릴 것입니다. 이 모든 날이 찬 후 제팔일부터 제사장이 제단 위에서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입니다.

(44장) 여호와 하나님이 성전 동쪽 문으로 들어 오셨기에 그 문을 닫아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44:3) 왕은 왕인 까닭에 안 길로 이 문 현관으로 들어와서 거기에 앉아서 나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고 그 길로 나갈 것이니라

에스겔이 북문을 통해 성전 앞에 이르니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여 엎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이 이방인을 데려오고 제물을 드릴 때에 그들로 하나님의 성소 안에 있게 하여 성전을 더럽혔으며 가증한 일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 사람도 그릇 행하여 그 우상을 따라 하나님을 멀리 떠났으니 죄를 담당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44:15)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 행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5장

45:1.  너희는 제비 뽑아 땅을 나누어 기업으로 삼을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지니 그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는 만 척이라 그 구역 안 전부가 거룩하리라

그중에서 성소에 속할 땅을 가장 먼저 구별하고 그 안에 성소를 두고 그 주변에 성소에서 섬길 제사장들을 위해 집을 지을 땅을 두니 성소를 위한 거룩한 곳입니다.
이것을 중심으로 위쪽에 레위 사람들의 거주지 20개 마을을 둘 것입니다.
성소를 중심으로 제사장들의 거주지와 경작지 아래에 둡니다.
그리고 구별된 지역 위와 아래가 이스라엘 지파가 살게 될 땅이고, 오른쪽과 왼쪽이 왕의 소유지입니다.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백성들을 공평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새 땅에서 예물을 드릴 때 제사장에게 직접 드리지 않고, 군주를 통해서 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절기와 그때 드릴 제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46-47장

- 안식일과 초하룻날 제사 관련 그리고 성소 문지방 밑에 흐르는 물의 환상을 봅니다.

48장

- 각 지파의 몫과 거룩한 땅

48:1.  모든 지파의 이름은 이와 같으니라 북쪽 끝에서부터 헤들론 길을 거쳐 하맛 어귀를 지나서 다메섹 경계선에 있는 하살에논까지 곧 북쪽으로 하맛 경계선에 미치는 땅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단의 몫이요.


여호와 삼마 

-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The LORD Is There)

48:35b.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여호와 삼마































































































































































































































중심과 외모(사무엘상 16:7)


날카로운 시각으로 성공의 비밀을 이야기 했던 아웃라이어와 빅트렌드의 비밀을 이야기 한 티핑포인트에 이어서 나온  블링크는 첫 2초의 힘을 이야기 한다.
순간적인 블링크를 통한 의사결정과 인간의 심리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1983년에 있었던 일이다.
폴게티 박물관에 한 사람이 찾아와서 자신은 미술상인데 기원전 6세기의 대리석상인 쿠르스상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물관 측은 쿠르스상의 진품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마이크로 분석기, 질량 분석계, 엑스레이 등 최첨단 도구를 사용하여 감정을 했다. 그 결과 미술상이 소지한 쿠르스상은 진품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미술품 전문가들이 결과에 이의를 제기했다.
처음 보는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진품 여부가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이 대리석상은 진품이 아니라는 최종결론이 나왔다.
전문가의 눈에 비친 짧은 순간의 직감이 정확했던 것이다.

베스트셀러로 알려진 '블링크'라는 책에 소개된 이야기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2초 만에 처음 본 사람이나 사물을 판단한다'고 말한다.
'블링크'라는 말 자체가 "눈동자를 깜박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는 책에서, 2초 만에 대리석상의 진위가 가려지듯이 인간의 직관은 사물을 처음 보는 순간 여러 감각을 통해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2초면 당신을 평가하는데 충분합니다'라는 말이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첫 인상은 참 중요하다.
실제로 우리는 첫인상의 강한 기억이 오래 남아 있음을 경험하곤 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에 따라 성형외과가 성업을 이루고 전에는 여자들이 주로 하던 성형수술을 남자들도 즐겨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진리가 있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이다(삼상 16:7).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새의 집에 가게 되었다.
사울왕을 폐하고 새로운 왕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서였다.
이새의 여러 아들들이 사무엘 앞을 지나갔다.
맏아들 엘리압(Eliab) 하나님이 아버지 되신다
둘째 아들 아비나답(Abinadab) 내 부친을 존중한다
셋째 아들 삼마(Shammah) 황폐하다

그들의 용모는 다 준수했지만 기름부음을 받지 못했다.
나머지 네 아들들도 사무엘의 앞을 지나갔으나 택함 받지 못했다.
하나님의 판단에 그들은 진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양을 지키고 있던 막내 아들 다윗이 사무엘 앞에 등장하게 되었다.
다윗(David) 사랑하는 자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여 기름을 붓게 하셨다. 다윗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이 마음에 합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외모로 판단하는 첫인상은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이다. 다윗처럼 중심이 하나님을 향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진품으로 인정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진품으로 인정해 주실 때라야 명품으로서 영화로운 인생이 될 수 있다.

말콤 글레드웰 – 우리의 통찰력을 길러주는 세계적인 작가 

1만 시간 법칙, 티핑포인트, 블링크 등 새로운 비즈니스 용어를 만들며 『티핑포인트』(2000)와 『블링크-첫 2초의 힘』(2005) 등으로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그는 비즈니스맨을 위한 비(非)비즈니스 책을 씀으로써 그들에게 현대 경영의 경계 너머에서 통찰력을 찾을 수 있게 하였다.
인간사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일화와 비사들을 끌어오며, 풍부한 사례를 장착한 신선한 분석과 매력적 문장으로 독자들을 잡는다.

우리에게 숨겨진 능력, 순간적인 판단
저자는 많은 정보의 핵심내용을 파악하는 직관적 사고가 정확하고 빠른 판단을 할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많은 정보를 얻어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사고할 때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고정관념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순간적인 판단은 우리의 무의식에서 나오는 강한 진실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너무 많은 정보는 오히려 우리의 무의식적 판단을 흐리게 한다고 전한다. 따라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판단의 경험을 통해 의식을 키울 때 직관과 본능을 이용한 정확하고 빠른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의사결정의 능력을 키우는 힘, 순간 포착
저자는 문제 해결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판단능력을 키우는 방법을 알려주고자 이 책을 저술하였다.

우리는 빠른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시대를 살면서 순간적인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힐 때가 잦다. 자신의 판단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다. 저자는 빠른 판단을 위해서는 자신이 직면한 문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해결책을 찾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이 같은 능력을 길러 당연하게 알고 있던 것들이 새롭게 느껴질 때 빠른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전한다. 


저자는 자신의 생각체계를 조직화함으로 빠른 판단과 의사결정 능력을 높일 수 있길 바란다.

멀티미디어나 인터넷 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정보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들은 우리의 직관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직관과 본능을 통해 순간적인 판단을 하게 되는데 많은 정보 중 핵심이 되는 내용을 걸러내는 능력이 직관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 다양한 정보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필요한 정보만을 얻어낼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이처럼 많은 이들이 빠른 판단 능력을 길러 자신의 의사결정을 향상하는 힘이 되길 바란다.


끊임없는 관찰을 통해 정보의 핵심 요소를 가려낼 수 있을 때 정확하고 빠른 판단이 가능해진다.

우리는 불과 몇 초 사이의 본능적 판단이나 인식에 의구심을 가진다.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걸쳐 해내는 일이 성과가 좋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우리의 고정관념일 뿐이다. 그러나 빠른 문제 해결 능력은 개인의 생활뿐 아니라 조직생활에서도 깊은 연관이 있다. 특히 매일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새로운 전략을 짜야 하는 조직생활에서 정확하고 빠른 판단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론 순간적인 판단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외부 영향에 민감한 우리는 흥미나 정서, 감정이 있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을 직시하지 못하고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통해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경험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체계적인 생각을 갖춰 직관에 의한 정확하고 빠른 판단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또한 정보의 핵심요소를 파악하는 노력을 통해 우리는 정확하고 빠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1. 한 조각의 지식과 무의식의 힘, 판단
순간적인 판단이란 행동의 패턴과 경험에 의한 상황판단 능력을 말한다.

심리학자인 존 고트먼은 부부의 대화 중 이들이 표현할 법한 감정들을 스무 가지로 나타내는 코드체계를 만들었다. 예를 들면 1은 혐오감, 2는 경멸, 7은 화, 11은 슬픔, 14는 평정 등의 코드이다. 그리고 매초 커플의 상호작용에 대해 수치의 열로 전환했다. 예를 들어 '7, 7, 14, 10, 11, 11'이라는 표기는 6초 동안 커플 중 어느 한 쪽이 화를 낸 후 평정을 찾고, 방어 자세를 보이다가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또한 수치의 전환과 함께 심장이 언제 두근거렸는지, 체온은 언제 상승했는지 등을 파악한 데이터들이 이에 더해져 복잡한 방정식으로 계산된다. 그 결과, 15분 간 부부가 나눈 대화의 분석만으로 그들이 15년 뒤에 여전히 부부로 살지를 90퍼센트의 정확도로 예측할 수 있었다. 결혼의 진실성을 짧은 시간 안에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을 ‘얇게 조각내기’라 하는데 이는 매우 얇은 경험들을 토대로 상황과 행동의 패턴을 찾아내는 무의식적 능력을 말한다.

인간관계에는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독특하면서도 변함없는 패턴이 있다. 이혼을 예측하는 일도 일종의 패턴 인식(pattern recognition)이다. 인간관계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감정으로 표현된다. 긍정적인 감정이 우세하면 성급함을 억눌러 상대가 뭔가 나쁜 행동을 보이려 할 때 '이 사람은 기분이 별로일 뿐이야'라고 말한다. 반면 부정적인 감정이 우세하면 상대가 별다른 감정 없이 말해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그런 상태에서는 무얼 해도 서로에 대한 결론이 변하지 않고 상대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보여도 이기적인 사람으로만 보이게 되는 것이다.

고트먼은 방어 자세, 의도적 회피, 냉소, 경멸에만 초점을 맞춰도 중요한 것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 그 중 경멸의 감정을 보일 경우, 이는 결혼생활에 적신호가 된다고 말한다. 경멸이란 일종의 모욕으로 상대를 나보다 낮은 위치에 두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경멸을 당하면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우리의 면역체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얼마나 자주 감기에 걸리는지와 같은 사소한 것으로도 부부 사이를 예측할 수 있다.

또한 무의식은 일종의 정신적 시종(始終) 역할을 하며 우리의 정신적인 소소한 부분까지 영향을 주며 주변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을 감시하고 적절히 대응해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신경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연구에 의하면 코 뒤쪽에 있는 전두엽 피질이라는 뇌의 중요한 부분이 손상될 경우, 우리는 사고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전두엽은 의사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뇌 일부이다. 우연성과 관련성을 파악하고, 우리가 외부에서 얻는 많은 정보를 분류해 우선순위를 정하며, 즉각적인 관심을 필요로 하는 일들에 각별한 표시를 해둔다. 전두엽에 손상을 입은 사람들은 완벽하게 이성적인 성향을 띠며 지적 활동이나 기능적 수행은 잘하지만 어떠한 판단은 내리지는 못한다. 이는 오로지 중요한 문제에만 집중하게 하는 무의식 속의 정신적 시종(始終)이 파괴된 셈이다. 이처럼 전두엽 손상은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에 단절을 불러온다.


2. 판단을 흐리게 하는 요인, 편견
편견을 없애고 긍정적인 자세를 가질 때 첫인상에 대한 정확한 순간적 판단이 가능하다.

얇게 조각내어 관찰하기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는 능력으로 관찰과 첫인상에 관한 판단을 눈 깜짝할 사이에 알아낸다. 그런데 신속한 사고가 상황을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순간적인 판단을 하게 될 경우, 정상적인 사고 작용을 마비시켜 인식이 빗나가는 때도 있다.

무의식적 연상들이 우리의 믿음과 행동에 미치는 영향은 다음의 '암묵적 연상 테스트(Implicit Association Test, IAT)'를 통해 알 수 있다. 우리는 생소한 개념보다 머릿속에서 이미 연결된 개념들을 더 빨리 연결 짓는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직업’과 ‘여자다움’보다는 ‘직업’과 ‘남자다움’ 사이에 훨씬 강한 심리적 연상 고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남자 또는 가정’일 때 ‘비즈니스' 같은 단어를 대하면 결정을 내리기 전 수십만 분의 1초라도 생각을 한다. 이런 IAT테스트는 우리의 응답 시간을 1,000분의 1초 단위까지 측정할 수 있고 그 수치들로 점수를 매긴다. 사전 연상 고리가 강할 때 사람들은 1,000분의 400에서 600초 사이에 답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는 1,000분의 200에서 300초가 더 걸린다. 이 테스트는 우리가 선택해서 믿는 의식적인 태도와 무의식의 태도, 즉 미처 생각할 시간을 갖기도 전에 불쑥 튀어나오는 즉각적이고 자연 발생적인 연상으로 우리의 태도가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첫인상은 경험과 환경에 의해 생성되는데 인상을 형성하는 경험들을 변화시킴으로써 우리는 첫인상을 바꿀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백인에 대해 긍정적인 만큼 흑인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연상들을 갖고 싶어 한다면 평등에 대한 단순한 언급 이상이 필요하다. 즉, 소수 인종과의 편안함을 느끼며 그들의 좋은 문화에 친숙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나아가 그들과의 만남이나 약속, 또는 그들을 채용하고자 할 때는 불안함이나 망설임이 없도록 당신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이처럼 자신의 직관적인 인식과 첫인상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한다면 능동적인 자세로 첫인상을 관리하고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3. 2초의 신중한 태도, 올바른 판단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는 정보의 핵심내용 파악으로 신중한 사고와 본능적 사고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정보가 많을수록 더 나은 결정을 내리게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핵심이 되는 간단한 내용이면 충분하다.

첫째, 정말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의사결정은 신중한 사고와 본능적 사고의 균형에 달려 있다.

즉 상대의 의사와 필요성, 감정을 한눈에 직관하는 능력이다. 또한 순간적 판단을 의식적으로 피할 수 있는 신중한 사고가 필요하다. 즉 신중한 사고를 거친 분석이 직관적인 인식을 도와준다.

둘째, 좋은 의사결정에는 간소화가 필요하다. 정보가 많으면 오히려 판단이 복잡해지므로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좋은 편집자가 되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얇게 조각내어 관찰할 때 패턴을 인식하고 순간적인 판단을 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편집 작업을 한다. 선택지가 너무 많으면 즉, 무의식이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면 모든 것이 마비되어 버린다.


우리는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느낌을 받는지 끊임없이 예견하고 추측한다. 누군가가 '난 네가 좋아'라고 말할 때 우리는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 사람의 진심을 판단한다. 이처럼 우리는 표정의 복잡하고 미묘한 차이들을 쉽게 분석해 낸다. 일례로 내가 두 눈을 반짝이며 생글거리면 모두 내가 즐거워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거나 과장되게 웃으면 내가 놀림을 받고 있다고 받아들인다. 이 또한 단 몇 초 동안의 순간적인 느낌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 읽기가 착오를 가져오기도 하는데 이는 언쟁과 불화, 오해, 반감 등의 내면에 있다. 우리는 마음으로 감정을 느낀 후 그 감정을 표정으로 드러내거나 그러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얼굴에서 감정이 시작되기도 하며 우리의 의식적 표현체계는 자신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얼굴에 전하기도 한다.

우리는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을 자주 묵인한다. 그러나 직관적인 인식이 일어나는 주변 환경의 조절이 가능해지면 무의식에서 이끌어 내는 순간적인 판단도 균형을 맞추어나갈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처음 2초를 신중하게 살필 때 작은 기적은 일어난다.


빠른 판단의 오류, 편견
편견을 없애고 직관과 본능을 활용하면 정확한 순간적 판단이 가능해진다.

말콤 글래드웰은 누구나 순간의 판단력, 즉 블링크 능력을 향상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을 잘할 수 있는 첫 단계는 경험과 전문 지식을 쌓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순간 판단을 방해하는 편견을 버리는 것이다. 경험과 전문 지식이 체계화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편견을 야기하는 방해물이 된다. 전문적 경험과 지식을 쌓고 또 다시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마음에서 생겨나는 '순간의 판단'이 바로 블링크이자 기(氣)가 충만한 순간이다. 이 순간은 바로 기회를 만들어내고 성공을 이루는 순간이다. 블링크, 이 놀라운 능력을 잘 활용하면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중략... 한국경제. 2005. 11. 28)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첫인상’이나 ‘감’은 순간적인 판단이다. 하지만 우리의 고정관념인 편견에 사로잡혀 잘못된 판단을 하기 쉽다. 판단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이 필요하다. 이는 올바른 판단의 구별을 하게 하며 우리의 인식능력 또한 향상시켜 준다.

감각적이고 창의적인 일 처리를 필요로 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 정확하고 빠른 판단은 우리가 갖추어야 할 필수 조건이 되었다. 순간적인 판단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일어나며 핵심정보를 포착해 본능에 따라 내리는 결정이라고 저자는 전한다. 또한 자신의 고정관념을 없애고 정확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관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이 책은 순간적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직관과 본능을 효율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잘못된 판단은 편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많은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이 한 일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사무엘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중심(3824) 레바브(lêbâb) לֵבָב  

1. 마음,  2. 혼, 3. 기분
발음 / 레바브[ lêbâb ]
어원 / 연계형 לְכַב, 어미활용 לְבַבְכֶם ,לְבָבִי, 복수 לְבָבוֹת, 대상28:9, 382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마음(창 20:5, 느 9:8, 겔 3:10), 심중(신 7:17,9:4, 대상 29:18), 전심(왕상 14:8, 왕하 20:3),성심(대상 12:38), 한마음(대하31:21, 시 86:11), 총명(욥 12:3), 낙심(사 7:4), 용맹(단 11:25), 가슴(나 2:5).
[동] 지혜있다(욥 34:34), 살피다(학 1:5), 알리다(창 31:26), 기억하다(학 2:18), 낙심하다(신 1:28), 명심하다(신 4:39), 깨닫다(대하 6:37), 결심하다(대하 30:19, 느 9:8),위로하다(대하 32:6), 총명하다(욥 34:10).
구약 성경 / 252회 사용

외모(5869) 아인(ʽayin)  עַיִן 

1. 흐르다,  2. 분사 עוֹיֵן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발음 / 아인[ ʽayin ]
관련 성경 / 눈(창 3:5, 출 5:21, 삼상 2:33), 우물(창 24:13), 시력(창 29:17), 목전(창 38:7, 출 8:26, 사 66:4), 샘(창 49:22, 아 1:15), 미간(출13:9, 신11:18),물(출15:27), 빛(레13:55, 겔1:4), 분천(噴泉)(신8:7), 소견(신12:8, 삿21:25), 외모(삼상16:7), 처분(삼하19:27), 백주(삼하12:11), 근원(대하32:3), 자기(잠26:16), 의견(렘18:4),모양(겔1:16, 슥5:6). [동] 보암직하다(창3:6), 눈짓하다(창39:7), 보다(출15:26, 신13:8), 보이다(민11:6, 삼상29:7), 대면하다(민14:14), 여기다(삼하10:3, 대상13:4), 원통하다(삼하16:12), 주목하다(왕상1:20), 바라보다(대하20:12), 겸손하다(욥22:29), 번쩍이다(잠23: 31), 같다(겔10:9). [부] 부지중(민15:24), 스스로(삼하6:22, 잠30:12), 뜻대로(에8:8).
구약 성경 / 868회 사용

외모가 아닌 중심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외모를 봅니다.
아니, 외모만 보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래서 외모지상주의란 말까지도 생겨났습니다. 

‘외모지상주의’란 외모가 개인 간의 우열과 성패를 결정한다고 믿으면서 외모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회 풍조를 말합니다.
2000년부터 한국에 퍼지기 시작한 소위 ‘루키즘’(lookism)도 같은 의미입니다. 

꽃거지와 얼짱

최근에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새파이어(William Safire)가 사람을 차별하는 요인 가운데, 인종, 성별, 종교, 이념과 함께 ‘외모’를 새로운 요인으로 꼽았습니다.
현대 사회는 외모로 사람을 차별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외모지상주의를 넘어서 외모제일주의, 외모최고주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꽃거지', '얼짱도둑' 등 외모에 대한 신조어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사실 거지나 도둑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생기고 예쁘다는 이유로 거지와 도둑에게도 호감을 갖고 '꽃거지', '얼짱도둑'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모가 뛰어난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첫 인상부터 편견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일명 외모로 인한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인트 안셀름 대학 심리학과에서는 외모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모의재판을 했습니다. 어떤 가게에 절도 사건이 일어났고, 두 명의 여성이 피의자로 기소되었습니다. 총 72명의 배심원 중 36명의 배심원 앞에는 외모가 매력적인 여성이 피의자로 섰고, 다른 36명의 배심원 앞에는 평범한 외모의 여성이 피의자로 섰습니다.

  여러 차례 모의 재판을 한 결과 평범한 외모를 지닌 여성 피고인을 유죄라고 판결한 배심원은 평균 19.5명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매력적인 여성 피고인에게 유죄 판결을 낸 배심원은12.9명에 그쳤습니다. 약 일곱 명의 차이가 있습니다. 

  외모는 경제력에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미국의 경제학자인 다니얼 해머매시와 제프 비들은 외모의 아름다움과 경제적 능력과의 상관성을 알아보았습니다. 조사 결과, 평균 이상의 잘생긴 외모를 지닌 사람들이 평균 수준의 보통 외모를 지닌 사람들보다 5% 정도 더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었고, 못생긴 외모를 지닌 사람들보다는 소득이 10~25% 가량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사회풍조 때문에 취업 준비생들은 심각한 외모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최근에 리쿠르트 회사가 1,264명의 취업준비생들을 대상으로한 조사에서 무려 98%가 '외모가 취업에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했습니다.

  또 이들을 뽑는 기업의 인사 담당자 584명 중 94%가 채용시 ‘외모를 고려한다’고 밝혔습니다. 둘 다 90%가 넘는 대단한 수치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외모도 경쟁력이라고 합니다.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정말 예쁘면 뭘 해도 용서가 되고, 못 생기면 뭘 해도 죄가 되는 외모제일주의 시대의 씁쓸한 단면들입니다. 이 세상은 외모를 보시지 않는 하나님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오늘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을 했습니다. 3천 년 전 이스라엘의 왕을 뽑는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베들레헴에 있는 이새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새의 아들 중에서 한 사람을 택해, 사울 왕의 뒤를 이을 새로운 왕으로 기름부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새에게는 모두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온다는 소식에 아들들의 몸과 마음을 성결하게 준비시키고 모이도록 했습니다. 이제 한 사람씩 사무엘 선지자 앞으로 나아갑니다.

  제일 먼저 이새의 맏아들인 엘리압이 사무엘 선지자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사무엘이 보니 그 외모가 대단했습니다. 첫 눈에 보기에도 엘리압의 외모가 왕이 되기에 전혀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마음 속으로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여기에 있도다’라며 감탄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하나님은 엘리압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무엘 선지자 뿐만 아니라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엘리압의 용모와 키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압의 용모와 키를 본다면 누구라도 왕의 재목이라고 여겼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조차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의 외모가 그만큼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아도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하십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고는 아차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을 뽑는 이유는 하나님이 사울 왕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의 외모가 출중하지 못해서, 그의 키가 남보다 작아서 버리셨습니까? 아닙니다. 사울의 외모는 이스라엘에서 단연 최고였습니다.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삼상 9:2).

  이스라엘 땅에서 사울보다 더 준수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키도 컸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보다 어깨 하나 만큼 큰 사람이었습니다. 외모로만 본다면 이스라엘에서 사울을 당해낼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의 중심이 타락하고, 사울 왕의 중심이 의롭지 못했습니다. 사울 왕의 중신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했고,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시고 새로운 왕을 세우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 선지자가 엘리압의 외모를 보고는 잠시 그 사실을 잊었던 것입니다. 엘리압이 선택되지 못하자 그 다음 아들들이 차례대로 사무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일곱 명의 아들들이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갔지만 하나님은 누구도 택하시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당황스러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물었습니다.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의 대답이, 막내 아들 다윗이 있긴 한데 지금 들에서 양을 치고 있다고 합니다. 이새가 보기에 다윗은 왕의 재목도 아니었을 뿐더러 집 안에서조차 하찮고 별볼 일이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을 뽑는 그토록 중요한 날에도 다윗은 멀리 초원으로 나가 양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외모로 보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다윗은 형들과 달리 아직 소년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은 전투에도 능하고 무술도 뛰어나야 하는데, 다윗이 하는 일은 들에서 양이나 치고, 시를 짓고 수금을 타며 밤낮 노래만 부릅니다. 누가 봐도 다윗은 왕의 재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택하셨습니다. 그의 중심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 생각으로 충만했습니다. 수많은 시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향해 “내 마음에 합한 자다”라고 하실 만큼 그의 중심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외모를 보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고 스펙을 보고 조건을 보고 선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르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가지만 보십니다. 그의 중심, 중심만 보십니다.

우리가 외모가 아닌 중심이 아름답고, 외모가 아닌 중심이 진실되고, 외모가 아닌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긴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실 것입니다.


외모와 중심 (삼상 16:6-7)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생겼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의 키가 얼마나 크며, 코가 어떻게 생겼으며, 머리 모양이 어떤지, 무슨 색깔의 눈동자를 가지셨는지 아무런 정보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 베드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고기잡는 어부라는 직업외에는 그가 어부이므로 팔뚝 힘이 세다든지, 햇빛에 얼굴이 타서 검다든지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습니다.

신약 성경의 관심은 사람의 모습과 외형에 있지 않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성경 구절의 하나는 요한복음 3:16의 말씀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 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생긴 모습에 매력을 느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없는 줄 압니다.
실로 예수님의 초상화를 우리들은 믿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나도 크고 놀라운 사랑이시기 때문에 이 사랑의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6:7에 “ 사람의 신장과 용모를 보지 말고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표리부동(表裏不同) duplicity
  • 表 : 겉 표
  • 裏 : 속 리(이) 
  • 不 : 아닐 부 
  • 同 : 한가지 동
표리일체(表裏一體) Duality

무슨 말입니까?

사무엘 선지자가 당시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라는 사람집에 들렀습니다.
이새는 여덟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준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일곱 아들을 다 제쳐 놓으시고 맨 마지막 아들 다윗을 불러 그 머리에 기름을 붓게 했습니다.
이것은 장차 이스라엘의 왕을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에게 어린 다윗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붓도록 지시하면서 말씀하시기를 “ 나의 모든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 고 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봅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특별히 인물이 잘 생기고 풍채가 좋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이끄는 수단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악독이 가득 찼고 몹쓸 일을 품고 있었으며 화 받을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비참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문벌, 학식, 재물, 인물 같은 외모를 보려고 합니다.
외모는 반듯하고 보기에 좋으나 중심이 바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외모는 좀 부족하고 미비되었다 할지라도 마음이 바르고 좋으며, 선하고 곱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죽음이 올지라도 변함없이 한 길로 가며, 한 뜻과, 한 정신과, 한 생각과, 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같은 사람이어야 쓸모있고 유익도 주며 좋은 일도 하고 값있게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의 사람은 남을 망하게 하고 파괴시키며 불행하게 만들게 됩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밀한 눈으로 우리를 살펴보십니다.
마음이 진실한가, 거짓된가. 깨끗한가, 더러운가, 교만한가, 겸손한가, 필영적인가, 참됨인가, 바른가, 그릇된가, 하나님에게 속한 자인가, 마귀에게 속한 자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가, 세상을 사랑하는 자인가를 보십니다.

마음은 기본이요.
행실은 그 열매입니다.

누가복음 6:45에 “ 마음에 어떤 것을 오래 품고 있으면 결국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 고 했고, 마태복음 15:18에 “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 고 했습니다.
잠언 4:23에 “ 무룻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더러운 마음을 가진 자가 더러움이 행동으로 나타나며 이것이 그의 생명을 위험으로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마음을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러면 중심을 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겉은 보지 않으시고 속을 보십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첫 인상이 좋고 외모가 잘생긴 사람은 많은 덕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지 않고 그 속 마음이 아름다우면 그 사람을 귀히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외모보다 마음의 상태, 심령상태가 더 중요합니다.
겉을 보지 않고 속을 보신다는 것은 또한 형식보다 내용을 중히 보신다는 뜻입니다.

요엘 선지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패역하고 타락하여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는데 겉으로만 옷을 찢으며 회개하는 체 하고 중심으로 회개하지 않으므로 요엘 1:23에 “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 고 꾸짖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마태복음 23:27-28에 “ 화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 찼도다 ”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제일 가증히 여기시고 저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겉모양보다 속 중심을 보시고, 형식보다 내용을 더 중요히 여깁니다.

행위의 결과보다 동기를 보십니다.

사람들은 동기야 어쨌든 결과만 좋으면 인정해 줍니다.
심지어 공산당들은 “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한다 ”고 합니다.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행위의 결과보다 그 동기를 더 살펴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제를 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금식을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며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모든 선행의 결과보다 그 동기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진실성을 보십니다.

겉마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진실성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겉과 속이 같고, 말과 행실이 같아야 합니다.
겉으로만 착한 사람이 있고, 중심이 착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의 진실을 원하십니다.
다니엘은 그 중심이 진실하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그 마음먹은대로 하루 세 번씩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했습니다.

사사 입다는 승전하면 가장 귀한 것이라도 집이 돌아가는 길에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을 바치겠다고 서약한대로 외동딸을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갚기를 기뻐하시는 것은 진실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30:2에 “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를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 고 했고, 신명기 23:21-23에 “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네가 서원치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마는 네 입에서 난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무릇 자원하는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입으로 언약한대로 행할지니라 ” 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기로 서원한 것, 즉 약속한 것이나, 마음에 제어하기로 약속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도 중심에 진실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했기 때문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즉 다윗은 비록 양을 치는 목동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진 바른 마음, 곱고 아름다운 마음을 보시고 어렸을 때에 그의 머리위에 기름을 부으셨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위대한 시인, 위대한 음악가,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왕으로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요셉도 어려서 형제들의 악의로 팔려 애굽에서 종노릇하였고 억울한 누명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바른 마음, 그의 고운 마음, 아름다운 마음을 보시고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는 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뚤어진 마음을 고치고 더렵혀진 마음을 깨끗이하고, 불의한 마음을 새롭게 하며, 거짓된 마음은 진실하게 하며, 속이는 마음은 참되게 하여야겠습니다.

시편 24:3-5의 말씀을 봉독하고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을 정결하여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라 ”



바둑 격언 10훈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 판의 바둑은 신통하게도 복잡한 인생사와 닮았습니다. 이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바둑 둘 때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교훈 등을 정리한 격언들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반상盤上의 말씀들은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인생을 일깨우는 바둑 격언 10가지를 소개합니다.

1. 일수불퇴(一手不退)

바둑 헌법 1조 1항은 '일수불퇴'입니다.
한 번 놓은 돌은 절대 무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돌을 바둑판에 내려놓는 순간, 다시 돌을 집어 다른 곳에 둘 수 없습니다.
무를 수 없는 건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선택해 발을 내딛었다면 내 길을 묵묵히 걸어야 합니다.
어떤 길이 더 좋은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은 모두 '가지 않은 길'입니다.
혹여 잘못된 선택을 했다 해도 내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2. 반외팔목(盤外八目)

바둑 격언 중에 '반외팔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둑을 직접 두는 사람보다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여덟 집 정도는 유리하다는 뜻입니다. 바둑판 앞에 있는 사람은 감정이나 승부욕에 휩쓸려 수의 변화를 냉정하게 보지 못합니다. 실제로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많이 합니다. 바둑 둘 때 가까이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던 수가 바둑이 끝난 다음 복기할 때는 쉽게 보입니다. 이미 승패가 내 손을 떠나 마음이 평온해졌기 때문입니다. 고수들이 두는 바둑을 옆에서 구경하던 하수가 훈수하기도 합니다.

이 격언이 인생에 적용되는 경우 중의 하나가 연애입니다. 남의 연애를 보면 모두 뻔해 보입니다. 하지만, 정작 내가 연애를 할 때는 정신 못 차리고 허우적거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3. 남의 집이 커 보이면 바둑 진다

바둑은 상대보다 반집만 많아도 이기는 승부입니다. 굳이 욕심을 부려 많은 집 차이를 낼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바둑을 두다 보면 과욕 때문에 승부를 그르치는 일이 많습니다. 충분히 유리한 형세임에도 몇 칸 안 되는 남의 집을 깨러 들어갔다가 몽땅 망하는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바둑에서도 인생에서도 과욕은 언제나 금물입니다. 남의 것을 탐내다가는 내가 가진 것도 잃을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의 소중함을 알고 현재에 만족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4. 큰 집 먼저 짓는 사람이 진다

선작오십가자필패先作五十家者必敗. '50집을 먼저 짓는 사람이 진다'는 뜻입니다. 바둑에서 50집은 큰 집입니다. 먼저 50집을 확보하면 절대 우세라고 판단하고 방심하게 됩니다. 방심하면 자만하기 쉽고, 자만하면 자꾸 상대에 양보하며 쉬운 길로 가게 됩니다. 반면 상대는 불리한 대국을 타개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합니다. 아차하는 순간에 국면이 뒤집힐 수 있습니다. 비슷한 격언으로 '대마 잡고 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찍 상대방의 대마를 잡고 승리감에 도취해 있다가 역전패당하는 경우를 일컫는 말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반에 잘나간다고 방심하다가 거꾸러지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5. 잡고 싶은 반대편을 공격한다

비슷한 실력의 상대와 대국하면 상대방 말을 잡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둑에서 상대 말을 공격할 때는 먼저 목표물의 반대쪽을 공격해 나의 세력을 형성해 놓은 다음, 목표물을 에워싸듯 공격하는 것이 요령입니다. 이는 현명한 처세술과 통합니다. 목표물을 향해 무조건 돌진하기보다 미리 주변에 밑밥을 깔아놓으면 원하는 것을 보다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병법에도 비슷한 말이 있는데, 바로 '성동격서聲東擊西'입니다.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적을 친다는 뜻입니다.

6. 부득탐승(不得貪勝)

'부득탐승'은 당나라의 바둑 고수 왕적신王積薪이 정리했다고 전해지는 '위기십결圍棋十訣'의 첫 번째 항목입니다. '승리를 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둑은 승리를 다투는 게임이므로 이기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러나 너무 목적에만 집착하면 오히려 바둑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이기려는 마음이 지나치게 강하면 욕심에 눈이 멀어 정확한 수를 읽을 수 없습니다. 바둑에서 최선의 마음가짐은 평정심입니다.

7.  사소취대(捨小就大)

'작은 것은 버리고 큰 것을 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둑을 둘 때 눈앞의 작은 이득을 탐내지 말고 대세를 보며 크게 움직여야 합니다. 말은 쉽지만 막상 바둑을 두다 보면 쉽지 않은 것이 바로 '사소취대'입니다. 작은 이익은 눈앞에 보이는 반면 큰 이익은 멀리 있어 얻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도 더 큰 그림을 보고 움직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8. 봉위수기(逢危須棄)

상대방이 강한 곳에서는 부담 되는 돌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둑을 두다 보면 양곤마가 돼 쫓기는 경우도 있고, 미생마未生馬가 여러 개 생길 때도 있습니다. 작은 돌을 살리려다가 더 큰 대마를 죽이기보다는 아낌없이 돌을 버리고 다른 곳에서 만회하는 것이 좋습니다. 곤마를 살릴 수 있더라도 대가를 크게 치러야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걸 다 짊어지고 가려다간 어깨가 짓눌려 멀리 가지 못합니다. 감당할 수 없으면 기꺼이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가벼운 걸음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버려야 할 때는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9.  동수상응(動須相應)

바둑판 위에 놓인 돌중에서 의미 없는 돌은 없습니다. 바둑판 위에 놓인 돌들은 이리저리 흩뿌려져 따로 노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한 수 한 수가 주변과 호응하며 저마다 의미와 중요성을 갖습니다. 착점 이후에 돌의 의미가 고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대국이 진행되면서 돌의 가치와 생명력이 시시각각 변합니다. 몇십 수 전에 놓았던 돌이 곤마를 살리는 요석要石이 되기도 하듯, 주변 환경에 따라 악수惡手와 좋은 수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동수상응'은 돌이 움직일 때는 주위의 돌과 호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반적인 국면을 살피면서 조화와 능률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수를 찾아야 합니다.

10.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내가 먼저 산 뒤 남을 죽이라'는 말입니다.
우선 내 말이 약하지 않은지, 상대로부터 반격당할 여지가 없는지 등을 꼼꼼히 따져봐야 합니다.
특히 상대를 공격할 때는 감정이 앞서기 쉬운데 이럴 때일수록 냉철하고 비판적으로 자신의 말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자기 말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무리하게 공격하다가는 역습을 당해 망하기 십상입니다.
비슷한 말로 '공피고아(攻彼顧我)'가 있습니다.
상대방을 공격하려면 먼저 자신에게 허점이 없는가를 살피라는 뜻입니다.
반상에서도 세상에서도 내가 먼저 살아야 상대를 요리할 수 있습니다.
















말라기(Malachi) 나의 사자 09-04-2023(월)



말라기



말라기 개요

 

 


1. 서론

 

모든 성경들은 본서의 중심인물인 ‘말라기’를 표제로 삼았으며 이름의 뜻은 ‘나의 사자(특사)‘란 뜻이다.

 

구약성경 전부를 요약하는 동시에 신약성경을 준비하는 가교역할을 한다.

 

 

2. 저 자

 

전통적으로 ‘말라기’를 저자로 인정한다.

 

말라기가 예언자 이름이라는 주장과, 하나님의 사자를 지칭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으나 예언자의 이름이라는 주장이 우세하다.

 

 


3. 기록시기와 시대적 배경

 

‘총독’이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페르시아 시대에 쓰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1:8)

 

에돔이 유다 땅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한 것으로 보아(1:3-4) 기원전 5세기에

쓰였을 것이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대한 언급이 없어 이 두 사람이 활동했던 시기

(B.C.458년,445년)보다 앞선 475-460년에 기록한 것으로 추론한다.

 

말라기와 느헤미야의 개혁이 유사한 것을 보아 느헤미야가 말라기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4. 기록목적

 

유대 공동체가 겪었던 신앙적 서운함과 환멸을 달래주기 위해 기록했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성경의 원리와 규정대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신앙의 기본임을 말하기 위함이다.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특사가 먼저 올 것을 예고하기 위함이다.

 

 


5. 구조


초 점

서론

본론(6가지 논쟁)

결론

구 분

1:1

1:2-5

1:6-2:9

2:10-16

2:17-3:5

3:6-12

3:13-4:3

4:4-6

표제

첫째

논쟁

둘째

논쟁

셋째

논쟁

넷째

논쟁

다섯째

논쟁

여섯째

논쟁

부록

주 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과 그렇지 못한 이스라엘

핵 심

구 절

3:10; 4:2

 

 


6. 6가지 논쟁


관련구절

논쟁 주제

논쟁의 내용

1:2-5

하나님의 사랑

질문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대답

에돔을 멸망시킴으로써 사랑했다

1:6-2:9

제사장들의

부패

질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였나?

대답

더러운 제물을 드림으로써 그렇게 했다

2:10-16

언약의 파기

질문

우리가 어떻게 약속을 어겼는지?

대답

조강지처를 버림으로써 그렇게 했다

2:17-3:6

하나님의 공의

질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괴롭게 했나?

대답

하나님께서 악을 조장 및 방관하신다고

3:7-12

회개

질문

우리가 어떻게 돌이킬 수 있습니까?

대답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를 올바르게 드림으로

3:13-4:13

하나님에 대한

멸시

질문

우리가 무슨 말로 주님을 멸시하였습니까?

대답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쓸데없다’고 말함으로

 

 


7. 중요 메시지

 

계속되는 고난으로 인해 영적, 윤리적, 사회적으로 냉담해진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사랑하고 계심을 말하고 있다.(1:2)


언약에 충실하신 분이심을 강조하기 위해 ‘언약의 하나님’을 21회, ‘만국의 여호와’를 24회 사용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조상인 야곱처럼 계속해서 하나님을 속이고 있음을 책망하며 더 늦기 전에 변해야 함을 경고하고 있다.(3:6-9)

 

언약적 저주에서 벗어나는 길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며, 온전한 십일조와 하나님의 원리대로 바르게 살아갈 때 회복 될 것이다.(4:2)

 

 


8. 신약과의 연관성

 

하나님께서 종말에 사자 곧 특사를 보내 하나님 자신의 길을 예비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3:1)

 

복음서의 저자들은 말라기가 예고한 ‘주님의 사자’가 세례 요한이라고 밝힌다.(마11:10; 눅7:27)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질문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심 같이 사랑하였음으로 답한다.(말1:2; 요3:16)

 

‘주의 길을 닦는 자’가 세례요한임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다.

 

 


9. 결 론

 

우리들이 신앙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내 경험, 지식, 형편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말씀임을 다시 한 번 상기 시키고 있다.

 

구약과 신약의 가교 역할을 하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구원을 이루어야 하심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스가랴(Zechariah)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 08-18-2023(금) - 09-02-2023(토)



  스가랴서 (Zechariah) 성경공부


성경본문:    스가랴서 14:9-11


1. 스가랴서 서론(序論)

■  스가랴서의 이름
스가랴서는 미래에 관한 책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선지자의 이름을 따라 ‘자카리아’(הירכז: ‘여호와께서 기억하시다’)이라고 했습니다.
70인역 성경(Septuagint)의 이름은 ‘자카리아스’(ΖΑΧΑΡΙΑΣ)입니다.
한글성경도 선지자의 이름을 따라 ‘스가랴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스가랴서의 저자와 기록연대
스가랴는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슥 1:1)이라고 소개됩니다.
스가랴서의 기록연대는 주전 480년경으로 추정됩니다.

■  스가랴서의 기록목적
기록목적을 요약하면, 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의 성결한 생활요구, ② 성전건축을 위한 위로와 성공을 목적, ③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  스가랴서의 주제와 중심사상
스가랴서의 주제는 ① ‘성결한 생활을 하자!’ ② ‘회개하자!’는 것입니다.
중심사상은 ① 메시야를 통한 참 성결과 ② 그의 통치하는 나라의 기다림 사상입니다.


2. 스가랴서의 본론(本論)

스가랴서는 ① 메시야 왕국에 대한 환상적 이상과 ② 금식 문제와 예루살렘의 회복내용, ③ 미래에 실현될 메시야의 오심과 백성들의 거절, ④ 반드시 다가올 메시야의 왕국과 다스림의 내용이 있습니다.

1장 1절로부터 6장 15절까지는 회개의 촉구(1:1-6)와 메시야 왕국에 대한 여덟 가지 환상(1:7-6:8), 그리고 구원을 가져오는 자(6:9-15)입니다.
7장 1절로부터 8장 23절까지는 금식문제와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9장 1절로부터 14장 21절까지는 메시야 왕국에 대한 예언입니다.

첫째, 회개의 촉구와 여덟 가지 환상(1:1-6:15)


차례           구  절                     환      상                                의      미                                                    
   1              1:7-17                  홍마를 탄 자                        백성의 재건
   2              1:8-21                  네 뿔과 네 공장                   압제받을 심판
   3              2:1-13                  측량줄                                  하나님의 보호
   4              3:1-10                  여호수아의 정결                 이스라엘의 정결
   5              4:1-14                  순금등대                              하나님의 능력
   6              5:1-4                    날아가는 두루마리             개인의 죄와 심판
   7              5:5-11                  에바와 여인                         없어질 민족의 죄
   8              6:1-8                    네 병거                                 열방의 심판
      
■ 1:1-6까지는 회개의 촉구
    (1) 스가랴는 어느 때의 선지자입니까?
    (2) 사람이 하나님께로 먼저 돌아갑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사람에게로 돌아오십니까?
    (3) 이스라엘의 열조들은 어떠했습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당신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습니까?

■ 1:7-6:8까지는 여덟 가지 환상
    (1) 하나님께서 유다를 향하여 노하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했습니까?
    (2) 두 번째 환상인 네 뿔과 네 명의 공장은 각각 무엇입니까?
    (3)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4) 3장 2절에 나오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5) 3장 9절에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6) 성전의 건축이 누구를 통하여 마쳐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까?
    (7) 4장에 나오는(3, 11-14절) ‘두 감람나무’는 누구입니까?
    (8) 날아가는 두루마리의 크기는 어떠했습니까? 두루마리는 무엇을 뜻합니까?
    (9) 5장에 나오는 두 여인은 에바를 어디로 옮겨갑니까? ‘두 여인’은 누구이며, ‘에바’는 무엇입니까?
    (10) 6장에 나오는 네 마리의 말들은 각각 어디로 향하여 나갑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당신은 환상을 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기다리면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까?

■ 6:9-15까지는 관을 쓰는 여호수아
    (1) 여호와께서 스가랴에게 임하셔서 여호수아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2) 12절에 “순(branch)이라 이름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3) 12절에 “자기 곳에서”라고 함은 어디를 말합니까?
    (4) 15절에 “먼 데 사람”은 누구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당신에게 하나님의 전(殿)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둘째, 네 편의 메시지(Messages) (7:1-8:23)
■ 7:1-7까지는 첫 번째 메시지
    (1) 유다 백성들이 포로 된 칠십 년 동안 어느 달에 금식했습니까?
    (2) 유다 백성들은 무엇을/누구를 위하여 금식했습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신앙의 삶을 살아가면서 금식을 해본 경험이 있습니까? 금식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 7:8-14까지는 두 번째 메시지
    (1)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2)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이 불러도 듣지 아니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 8:1-17까지는 세 번째 메시지
    (1) 2절에 하나님께서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신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2) 예루살렘 성읍 거리는 무엇으로 가득하겠습니까?
    (3) 유다백성이 행할 일이 무엇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하나님께서 당신을 복 주심을 믿습니까? 어떤 복을 받았습니까?

■ 8:18-23까지는 네 번째 메시지
    (1) 금식의 절기가 어떤 절기로 바뀌었습니까?
    (2) 많은 백성들과 강대한 나라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3) 열국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에게 무엇이라 말할 것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교회생활을 하면서 당신은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셋째, 메시야 왕국에 대한 예언(9:1-14:21)
■ 9:1-12까지는 메시야의 임재
    (1)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임한 곳은?
    (2) 가사와 아스글론과 아스돗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입니까?
    (3) 시온에 임하실 왕은 어떤 분이십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 중에 기다리고 있습니까? 당신이 기다리는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기술해 보십시오.

■ 10:1-12까지는 메시야의 구원 사역
    (1) 3절의 ‘목자’와 ‘수염소’는 각각 누구/무엇입니까?
    (2) 4절의 ‘모퉁이 돌’ ‘말뚝’ ‘싸우는 활’ ‘권세 잡은 자’는 무엇/누구를 상징합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하나님께서 당신을 돌아보심을 믿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 11:1-17까지는 메시야의 영광과 승리
    (1) 4절의 ‘잡힐 양 떼’란 무엇입니까?
    (2) 5절에 ‘산 자들’과 ‘판 자들’은 각각 누구입니까?
    (3) 11장에 등장하는 두 개의 막대기는 각각 무엇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고통이 올 때 당신은 이를 어떻게 견딥니까? 영원한 보호자요 목자이신 주님을 잊어버리고 좌절하지는 않습니까?

■ 12:1-13:6까지는 심판의 날에 관한 교훈
    (1)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무엇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까?
    (2) 12장 11절에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 드림몬에 있던) 애통”이란 무엇입니까?
    (3) 여호와의 (심판의) 날에 무엇을 끊으시겠다고 하십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하나님께 항상 성결함으로 나아갑니까? 주님의 날이 이름이 당신에게 기쁨입니까? 아니면 두려움입니까?

■ 13:7-9까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화
    (1) 하나님께서는 얼마의 사람을 남기겠다고 말씀하십니까?
    (2) 그 남은 자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교회가 당신에게 구원의 방주입니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다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 14:1-21까지는 여호와의 날
    (1)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의 발이 어디에 서실 것입니까?
    (2) 종말의 날이 언제 이를지 사람들이 알 수 있습니까?
    (3) 열국 중에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지킬 절기는 무엇입니까?
    (4) 여호와의 날에 말방울에까지 무엇이라고 기록될 것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하나님의 구원이 미치는 영역은 어디까지입니까? 당신은 세상의 하찮은 것들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까?


3. 결론(結論)--스가랴서의 핵심적 교훈

스가랴서의 핵심적 교훈은, ① 성결한 교회와 교인이 되어야 하며, ② 메시야의 나라를 늘 사모해야 하며, ③ 미래에 대한 확신이 필요함을 교훈합니다.



*생활적용과 기도(祈禱)
1. 주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성결한 교회와 성도들 되게 하옵소서!
2. 주님! 우리로 소망 중에 주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3. 주님! 우리로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을 예비하는 성도들 되게 하옵소서!


*스가랴서가 예언하는 그리스도
1.    우리의 종(3:8; cf. 마가 10:45)
2.    우리의 순(3:8, 6:12; cf. 누가 1:78)
3.    우리의 중보자이시며 주님이신 제사장과 왕 (6:13; cf. 히 6:20-7:1, 7:25)
4.    공의로우신 우리의 구원(9:9; cf. 요한 14:6)
5.    겸손하신 왕(9:9; cf. 마태 21:4-5; 요한 12:14-16)
6.    우리들의 기반이신 모퉁이 돌(10:4; cf. 고전 3:11)
7.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말뚝(10:4; cf. 마태 11:28)
8.    우리의 방어자이신 싸우는 활(10:4; cf. 롬 8:37)
9.    은 삼십에 배반당한/팔린 목자 (11:12-13; cf. 마태 27:9)
10.    우리의 선물이신 은총의 영(12:10; cf. 엡 2:8-9; 고후 9:15)
11.    손이 찌른 바 됨(12:10; cf. 요한 19:37)
12.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샘(13:1; cf. 요한 15:3; 계시록 1:5)
13.    인성과 신성(13:7, 6:12; cf. 요한 8:40)
14.    우리를 지켜주시는 목자(13:7; cf. 시편 23:1, 3, 4)
15.    침을 당한 목자(13:7-9; cf. 마태 26:31; 마가 14:27)
16.    재림과 왕이 되심(14:5, 9; cf. 요한 10:16; 계시록 11:15, 21:27)
17.    우리의 숭배의 대상이 되시는 왕 만군의 여호와(14:16; cf. 골 1:18)


이사야 13:6
너희는 애곡할찌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이사야 13:9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에스겔 13:5
너희 선지자들이 성 무너진 곳에 올라 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 족속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에 전쟁을 방비하게 하려고 성벽을 수축하지도 아니하였느니라.

에스겔 30:3
그 날이 가까왔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열국의 때이리로다.

요엘 1:15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요엘 2: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찌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요엘 2:11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요엘 2:11
8. [요엘 3:14]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9. [아모스 5:18]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10. [아모스 5:20]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11. [스바냐 1: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찌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12. [스바냐 1: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13. [스가랴 14:1]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09-02-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날(스가랴 14:1)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A day of the LORD is coming when your plunder will be divided among you.


여호와의 날(Day of the Lord. 욤 아도나이. yôwm Yehôvâh .יְהֹוָה   יוֹם 

날(3117) 욤(yôwm)  יוֹם 
1. 낮, 2. 날마다,  3. יוֹם : 낮에
발음 / 욤[ yôwm ]
어원/ 어미활용 יוֹמְךָ ,יוֹמִי, 쌍수 יוֹמַיִם, 복수 יָמִים, 복수 연계형 יְמֵי, 덥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낮(창 1:5, 시 136:8), 날(창 1:8, 출 6:28, 시 89:45), 일자(창1:14), 때(창3:5, 출19:1), 세월(창4:3), 오늘(창4:14, 출5:14, 민22:30), 당시(창6:4, 신17:9, 삼상17:12), 항상(창6:5, 신5:29,삼하19:13), 나이(창18:11, 수23:2), 오늘날(창19:37, 신1:10), 며칠(창24:55), 어느 날(창27:2), 기한(창25:24, 레12:6), 해(창29:7), 지금(창35:20, 삼상9:9), 여러 날(창40:4), 생명(출20:12, 신5:15, 시34:12), 매일(출29:36, 민28:3), 일(창7:4, 출34:28), 날수(신1:46, 시90:15), 평생(신12:1, 삼상1:11), 종일(신28: 32,시74:22), 장수(신30:20), 시기(수3:15), 얼마(삿11:4), 매년(삿21:19, 삼상1:3), 곧(삼상9:13), 평일(삼상18:10, 왕상5:1), 요즈음(삼상25:10), 일생(삼상25:28), 볕(삼하4:5), 수한(삼하7:12), 시대(삼하21:1, 왕상21:29), 전(삼하21:12), 한번(왕상1:6), 세대(왕상11:12), 일평생(왕상11:25, 욥15:20), 여러 날(왕상17:15), 하루(왕상19:4), 햇수(왕하10:36), 생전(대상22:9), 기간(대상29:27), 초하루(스10:16), 생일(욥1:4), 연한(시39:4), 옛날(시44:1), 연수(시109:8), 광명(잠4:18), 보름(잠7:20), 여생(사38:10), 태초(사43:13), 옛적(겔38:17, 암9:11), 시일(호2:13), 아침(암5:8). [부] 종신토록(창3:14), 날마다(39:10, 왕상8:59), 영원히(왕상11:39), 영영히(창44:32, 신18:5, 삼상28:2), 오래(민20:15), 처음(신10:10), 종일토록(수10:13, 삿9:45), 해마다(삿11:40), 먼저(삼상2:16), 때마다(삼상2:19), 영원토록(삼상2:32), 영구히(삼상2:35), 이제(삼상9:27, 삼하18:18), 오래(삼하14:2), 때때로(대하24:11), 당장(잠12:16), 부지런히(렘7:25). [동] 장수하다(신22:7), 장수하게 하다(시61:6).
구약 성경 / 2291회 사용

여호와(아도나이)(3068) [ Yehôvâh ] יְהֹוָה 
1. 자존자
2. 영원한 자 : 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발음 [ Yehôvâh ]
어원 / 196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여호와(출 20:7, 레 24:13).
구약 성경 / 7020회 사용

* 1961. 하야(hâyâh) הָיָה  
1. 있다,  2. 어떤 자에게 속하다, 3. 섬기다
발음 / 하야[ hâyâh ]
관련 성경 / (장막을) 치다(창13:3), 임하다(창15:1, 수22:20), 계시다(창31:5), (싸우고) 있다(삿12:2), 섬기다(삼상2:11), 만나다(삼상6:9), 속하다(삼하9:9), 따르다(왕상16:21, 호3:3), 같다(시50:21), 두다(출25:15), 더하다(출9:3),성취하다(잠13:19), 이루다(겔21:7, 39:8), 지치다(단8:27), 얻다(슥8:10).
구약 성경 / 3549회 사용


'여호와의 날'이란 한 마디로 '여호와께서 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 결정적으로 이 땅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악인을 멸하시고 의인 또는 여호와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구원을 행하시는 역동적인 심판과 구원의 날' 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날이란 여호와가 심판의 주로 오시는 날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심판에 의하여 기쁨과 슬픔의 자리로 구분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구약의 종말 사상으로 하나님 중심의 신앙과 삶을 버리고 각종 우상과 이방 신을 숭상하므로 그 백성들과 그 나라를 흔들어 다시 일으키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날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현상의 주된 원인은 기름부음 을 받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의 타락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때마다 하나님은 그 시대를 깨우칠 새로운 선지자를 세워서 백성들에게 바른 길을 가도록 외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외침을 듣는 것이 복이 됩니다.
반면에 선지자의 외침을 듣지 않는다면 저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듣기 좋은 설교를 좋아합니까?
아니면 꾸짖을지라도 잘못을 깨우치고 바른 길을 가도록 선포하는 설교를 좋아합니까?
진리의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 하나님의 방향을 떠나 인간의 욕망에 사로잡혀 엉뚱한 곳에서 세속의 즐거움에 도취한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즐기는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켜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마음을 깨닫고 바르게 믿어 영생의 길을 걸으며 감사와 찬양과 평강과 기쁨의 삶을 날마다 즐기며 누릴 줄 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것을 가장 귀한 것이라 생각하며 오늘도 평범한 하루가 내 삶에서 가장 좋은 최고의 날이 될 수 있도록 믿음으로 전진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교회에 대하여는 자비를 줄 것이며 교회의 대적자와 박해자들에게는 심판을 줄 것이라는 내용이 그 전반에 흐른다. 예루살렘을 치러 온 적국들의 파멸이 있은 후에(1-3절),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 은혜의 왕국이 설립된다(4-11절). 또한 예루살렘에서 적국들이 당하는 재앙과(12-15절), 전후의 열국 중에서 남은 백성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오고(16-19절), 모든 것이 아 거룩한 영광의 세계가 된다(20-21절).


[강  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죄악으로 인해 심판을 받았음을 밝히시면서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심판하시고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열국의 심판과 예루살렘의 구원은 장차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영적교훈]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을 통치하시는 분으로 우리는 그분의 백성일 뿐이다. 우리의 삶과 목표와 가치관은 왕이신 하나님을 위해 설정되어야 한다. 옛 왕정 국가에서 나라의 주인은 왕이고 그 백성은 왕의 소유물이었다. 백성에게는 왕을 섬기고 충성을 다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영적 이스라엘에 속한 우리 신자는 바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영적 왕국의 백성이다.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보장하신다.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외로움과 걱정 근심을 아시고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는 왕의 통치를 행사하신다.

왕으로 임하실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왕권을 배척한 것은 그들이 사람을 왕으로 세우던 때부터이다. 하나님께서 원래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계셨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를 거부하고 자기들의 왕을 따로 옹립하였다. 그 후에 그 백성은 하나님을 왕으로 의지하지 않고 어떤 때에는 수리아에게, 어떤 때에는 애굽에게, 어떤 때에는 앗수르에게 의지하였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왕권을 무시한 행동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결국 바벨론에 잡혀 갔고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왕적 보호를 받지 못한 것이다.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국가의 외로움 속에서 옛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하게 되었다. 그들은 금식하며 애통해 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간청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물과 회개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에서 건져내셨고 다시 그들의 왕 되신 관계를 회복하셨다. 이것은 신약 시대의 종말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실 것에 대한 예표이다. 이 이스라엘은 옛날의 구약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택한 백성으로서의 영적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즉, 옛날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셨던 하나님은 이제 모든 택한 백성들 곧 성도들의 왕이 되시는 것이다.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함은 이 세상의 대종말에 하나님께서만 왕으로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교만한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 이방인들의 복음 접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한 백성의 왕이심을 사도들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깨닫게 하시었고, 그 복음의 문을 세계 곳곳에 퍼지게 하셨다. 이제 구약에서 예언된 왕이신 하나님은 신약에 와서 성취된 것이다. 이것의 완전한 성취는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종말에 이루어질 것이다.






여호와의 날’ 이란 구약 선지서에 나타나는, 구약의 종말 사상을 반영하는 중요한 신학 용어이다. 암 5:18-20을 보면 분열 왕국 시대 후기 곧 B.C.8세기 중반경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할 당시에 이미 이 ‘여호와의 날’의 개념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약 종말론 사상을 반영하는 ‘여호와의 날’ 사상은 동서고금의 모든 종말론이 그러하듯이 정치, 종교적 격변기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다 상술하자면 분열 왕국 시대 말기에서B.C.722년의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B.C.586년의 남유다 명망, 그리고 B.C.586-539년 사이의 바벨론 포수 그리고 포로 귀환시대 등 대략 B.C.8-5세기 사이를 배경으로 선지서들이 기록될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보편적으로 다음과 같은 중대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먼저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에 B.C.930년경 분열 왕국 시대가 개시된 이래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여호와 절대 유일사상을 버리고 각종 우상을 섬기는 패역의 역사를 끊임없이 일삼았다. 그리고 이러한 이스라엘 두 왕국의 백성들을 향하여 여호와는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심판의 경고를 끊임없이 보내셨다. 또한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도 이스라엘 두 왕국의 백성들이 종교적인 타락을 거듭하던 시기와 때를 같이하여 근동 지역은 신흥 강대국 앗수르의 부상(浮上)을 시발로 하여 앗수르,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 제국 등 대제국들(Great Empires)이 상호 연이어 발흥함으로써 B.C.8세기에서 멀리 A.D.수세기까지 소위 대제국 시대가 도래되어 연일 거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게 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유럽 및 근동 지역과 애굽 지역을 잇는 길목에 있었던 이스라엘은 그 소용돌이의 중심부에 들게 되었다.

이 길은 종교적, 정치적인 이유들로 인하여 이스라엘에는 종말론적 위기감이 크게 고조되었고 이와 관련하여 등장하게 된 구약의 종말 개념이 바로 ‘여호와의 날’ 이었던 것이다.


여호와의 날의 정의 

‘여호와의 날’이란 한 마디로 ‘여호와께서 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 결정적으로 이 땅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악인을 멸하시고 의인 또는 여호와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구원을 행하시는 역동적인 심판구원의 날’ 을 가리키는 신학 용어이다.

이러한 구약적 종말론 용어인 이 ‘여호와의 날’ 의 개념을 이해 할 때 우리는 필히 다음 두 가지사실을 전제하여야 한다.

첫째, 구약 시대는 신약 시대와는 달리 아직 현 세상의 우주와 역사 전체가 궁극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심판 종결되고 각각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사람과 천국의 축복에 동참할 사람으로 구분된 모든 인생들이 전혀 새로이 갱신된 우주 안에서 온전한 새 역사를 시작한다는, 범 우주적이고 최종적이요 그리고 단회적인 역사 대 종말에 대한 계시가 확립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날’ 은 단회적 대종말 사건이 아니라 여호와가 이스라엘 및 그 주변 국가의 역사에 역동적으로 개입하시는 여러 날들을 통칭하여 가리키는 용어였다는 사실이다.

둘째, 구약 에언의 복합성에 따라 ‘여호와의 날’ 에 대한 예언들은 문맥에 따라서 각각 남과 북 이스라엘 왕국이 여호와의 심판으로 멸망 받던 날, 또는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던 이방인들이 여호와의 심판을 받고 이스라엘은 포로에서 회복되는 날, 그리고 한 메시야가 와서 자신을 선민에게 승리와 평화를 가져와 줄 날 곧 신약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주 메시야 예수님의 초림 중 어느 한 날을 가리킬 수도 있었고, 이 세 가지 모두는 물론 심지어 세상 끝 날의 대종말 자체까지를 동시에 의미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욜 2:31, 슬 1:14-18, 슥 14:1-11).

한편 이와 같은 구약의 ‘여호와의 날’ 의 개념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역사 대종말 곧 범우주적이고도 최종적인 세상의 대종말에 대한 계시인 ‘주의 날’ 로 발전 된다. 이와 같은 구약의 ‘여호와의 날’ 의 신약의 ‘주의 날’ 로의 발전은 성경 계시의 점진성의 한 실례로서 전자가 후자의 전신 또는 예표(豫表)의 관계에 있다 하겠다. 참고로 두 가지를 다시 한 번 더 비교하자면 여호와의 날이 현재 역사 안에서 주로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하여 반복적으로 일어난 여호와의 역동적 구원 행동을 가리켰다면 신약의 주의 날은 현 역사를 최종 종결하고 새로이 갱신될 새 시대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초역사적인 구원 행동을, 그리고 세계 만민 전체를 포괄한 단회적이고도 최종적인 여호와의 구원 행동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하겠다.

여호와 날의 양면성(兩面性)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호와의 날’ 은 이 땅의 왜곡된 역사 현실을 그 역사의 현장에 여호와께서 종말론적으로 임재하사 일시에 극복하는 역동적인 말이었다. 따라서 이 날은 악인에게는 멸망의 심판이 행해지는 저주의 말이며, 동시에 의인 도는 회개하는 자에게는 구원과 회복이 주어지는 축복의 날이라는 양면성을 갖는다.


저주의 날 

                       축복의 날

저주 내용

성경 구절

                        축복 내용

                                                               성경 구절

1

형벌과 보응이 임함

호 9:7

       축복이 회복됨                                     암  9;11


2

땅이 황페하게 됨

욜 1:10-12

      기쁨과 즐거움이 회복됨 

       욜 2:23

3

물질이 결핍됨

욜 1:16

       성령 부음을 받음

       욜 2:28

4

기쁜과 즐거움이 끊어짐

욜 1:16

       꿈과 이상을 봄

       욜 2:28

5

어둡고 캄캄함

욜 2:2,

암 5:18

       구원을 얻음

      욜 2:32,

      미 7:18

6

불로 사름

욜 2:3

        다시 긍휼을 베푸심

      암 5:15

7

희생이 있음

습 1:8

        만국으로 기업을 얻음

      암 9;12

8

슬픔과 애통이 있음

습 1;14

        순결함을 얻음

       습 3:12-13

9

고통이 극심함

슬 1:15

        평화와 번영을 누림

       슥  8:12

10

극렬한 풀무불 같음

말 4:1

       이방인들도 돌아와 구원 받음              

        미 4:5



여호와의 날의 의의

여호와께서 이 땅의 왜곡된 역사 현실에 적극적으로 임재하사 선악 간에 심판을 행하시고 의인 또는 당신의 백성을 위한 평화와 번영을 위한 새 질서를 구축해 주실 것을 대망하던 사상으로서 그것이 여호와에 의해 거듭 예언되어 왔고 또 이미 거듭하여 성취되어 왔으며 그 궁극적인 실체는 ‘주의 날’ 의 예언으로 승화되어 세상 끝 날의 대종말에서의 성취를 대망하고 있는 ‘여호와의 날’ 사상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왜곡된 역사 현실과 그 안에서의 우리의 삶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마침내 대종말을 필히 그리고 분명히 맞을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 자체를 우리에게 새삼 각성시켜 준다. 즉 종말론적 구원과 심판의 날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강력하게 제시해 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처럼 매 순간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 에 근거하여 종말론적 위로와 경고를 동시에 받게 된다. 먼저 우리는 이 ‘여호와의 날’ 을 통하여 이 질고로 가득한 왜곡된 현실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우리 여호와에 의해 궁극적으로 초극되고 의인과 회개하는 자를 위한 새 세상이 필히 올 것을 기대하며 위로와 소망을 갖는다. 동시에 여호와의 날은 악인들의 멸망을 필연적으로 동반할 것이며 단순히 여호와를 아는 자가 아니라 다만 그 분께 참으로 순복하고 회개한 자에게만 구원이 주어질 것이며 오히려 여호와를 머리로만 알고 입으로만 섬기던 자들에게는 더욱 더 큰 심판이 주어지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나의 자신을 살피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호와의 공의와 사랑의 오묘한 조화가 결정적으로 동시에 집행되어 천국 구언과 지옥 심판이 일시에 실현 될 이 크고도 두려운 날을 기억하면서 실로 매 순간을 여호와의 심판 보좌 앞에 서는 각오로 살아야 하겠다는 소위 실존론적의 종말신앙(實存論的 終末信仰) 을 결단하게 되는 것이다.

“ 평강의 여호와가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샘(4726) 마코르(mâqôwr) מָקוֹר 

1. 샘,  2. 우물, 3. 근원
발음 / 마코르[ mâqôwr ]
어원 / 697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산혈(레 12:7), 근원(레 20:18, 시 68:26, 렘 17:13), 원천(시 36:9), 샘(잠 5:18, 렘 51:36, 슥 13:1).
구약 성경 / 18회 사용

웅덩이(3849) 로그( lôg)  לֹג

1. 깊은 구멍,  2. 액체의 최소 측정단위 ‘록’, 3. 랍비들의 주장에 따르면 한 ‘록’은 여섯 개의 달걀 부피에 해당되는 한 ‘힌’의 1/12이라고 한다.
발음 / 로그[ lôg ]
어원/ ‘깊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록(레 14:10, 21, 15)
구약 성경 / 5회 사용

웅덩이(4113) 마라모라(mahămôrâh) מַהֲמֹרָה    

1. 시내,  2. 웅덩이,  3. 시편 140:10.
발음 / 마하모라[ mahămôrâh ]
어원 / 불확실한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웅덩이(시 140:10).
구약 성경 / 1회 사용


죄(2403) 하타트(chaṭṭâʼth)  חַטָּאָת   

1. 죄,  2. 우상에 대해 적용되기도 함,  3. 속죄제
발음 / 하타트[ chaṭṭâʼth ]
어원 / 23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창 4:7, 레 4:3, 대하 6:25), 죄악(창 18: 20, 사 5:18), 속죄제(출 29:14, 민 15:27, 왕하 12:16), 속죄 제물(레 4:32, 민 8:8, 대하 29:23), 속죄 희생(레 4:25), 허물(레 5:6), 잘못(레 5:10,11), 속죄(레 10:19, 민 8:7), 속건제(레 7:7), 번제(레 4:29), 죄악(시 32:5, 애4:6), 죄인(잠 5:22,13:6), 벌(슥 14:19).
[동] 범죄하다(느 1:6, 욥 35:3).
구약 성경 / 221회 사용

* 2398. 하타(châṭâʼ)  חָטָא   
1. 벗어나다,  2. 사사기 20:16, 3. 비틀거리다
발음 / 하타[ châṭâʼ ]
관련 성경 / 범하다(창 20:9, 출32:31, 렘33:8), 죄를 짓다(창39:9, 삼상19:4, 욥8:4), 범죄하다(창40:1, 삼하7:6, 애5:16), 죄짓다(창43:9, 삿11:27), 잘못하다(레5:5,15), 죄를 범하다(삼하12:13,24:10, 왕상18:9), 잃다(잠8:36), 해하다(잠20:2), 보충하다(창31:39), 깨끗하다(출29:36, 레8:15), 정결하다(레14:52, 겔43:22), 제사 드리다(레6:26), 깨끗이 하다(민31:19), 달아나다(욥41:25). [명] 죄(출5:16, 레5:7,16, 민12:11, 신9:18, 호8:11), 죄인(잠11:31, 13:22,전2:26).
구약 성경 / 238회 사용



더러움(5079)  니다(niddâhנִדָּה 

1. 불결,  2. 여자의 불결함,  3. 더럽고 부정한 것
발음 / 니다[ niddâh ]
어원 / 507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불결(레 15:24, 26), 불결기(레 15:25), 부정(민 19:9), 더러움(스 9:11, 슥 13:1), 오물(겔 7:19, 20), 월경(겔 18:6, 36:17).
[동] 월경하다(겔 22:10), 더럽다(레 20:21, 대하 29:5), 불결하다(레 15:19, 20, 애 1:17).
구약 성경 / 30회 사용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은, 비유적 표현이니,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을 믿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가리킨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자마다 사죄를 받나니, 그 역사는 "씻는 샘"과 같다.
요 7:38, 4:14 참조. 

요한복음 7:38-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4:14
내가 주는 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전국을 대표한다.

"열리리라"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이호예 니프다라고 하는데, 계속하여 열려 있음을 가리킨다(Pusey).


예레미야 2:13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웅덩이(877) 보르(Bô’r)  בֹּאר   

1. 저수지,  2. 수조,  3. 물통
발음 / 보르[ Bô’r ]
어원 / 87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웅덩이(렘 2:13).
구약 성경 / 5회 사용

생수의 근원...웅덩이를 판 것

- 이스라엘의 두 가지 심각한 죄악성이 지적되고 있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되시는 여호와를 버린 것이요, 다른 하나는 물을 담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판 것이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구원 혹은 하나님(그리스도)께서 생수에 비유된 예는 종종 나타난다(사 12:3; 55:1; 요 4:10-14; 7:37-39).
그리고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물이 귀했으므로 수원(水源)을 확보해 놓기 위해 저수지를 만들거나 빗물을 모아두기 위해 웅덩이에 석회를 발랐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그 석회에 균열이 가서 속에 든 물이 새어 나가 버리는 경우가 흔했다. 본문에서 유다 백성이 스스로 웅덩이를 팠다는 것은 결국 터져 버리고 말, 즉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우상을 섬긴 사실을 가리킨다.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

12장에서 다윗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에 대하여 소개했습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요엘 선지자도 예언하였습니다.
그 예언대로 오순절 성령이 임하게 되자 그들이 찌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애통하며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애통이 어떤 애통이었습니까?
독자 외아들을 잃은 자의 애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자식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리라고 하였을 때에 아브라함은 약속의 자녀를 자기 손으로 죽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찌른바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애통하기를 독자를 잃어버린 부모의 심정으로 애통합니다.
그 애통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버리시는 그 애통의 마음을 성령을 통하여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애통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책과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들이 가족을 잃고서 애통하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오히려 주님을 더 사랑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놀랍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를 잃었는데도 그 애통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를 죽인 자들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마음들은 주님께서 부어주셔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이 임한 자들의 모습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원통하다고 여기면서 억울해 하는 모습과 전혀 다른 차원의 애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의 모습을 비추어보면 도대체 나는 무엇으로 애통하고 있는가를 돌아보면 한심스러운 모습입니다. 부디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시기를 구할 뿐입니다. 또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으로 씻겨달라고 할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13:1절에서 ‘그 날’입니다.
선지자들이 계속하여 예언한 그 날입니다.
그 날에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신다는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이 임하심을 통하여 주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동일한 그 날의 약속이 어떻게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게 되는 가를 보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씻는다는 것은 더러움을 씻는 것을 말합니다.
서울대 의대의 어느 학생이 우리나라의 통치자들의 건강에 대하여 박사논문을 썼습니다.
조선시대의 임금들부터 그들의 건강을 조사하였는데 조선시대에 의학의 한계만이 아니라 불결한 생활환경으로 질병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신과 같은 대접을 받던 임금이 각양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서도 잘 씻지 않아서 각종 종기나 부스럼이 낫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너무 많이 씻어서 탈이 날 정도입니다만 씻는다는 것은 몸의 청결문제만이 아니라 신들에게 정성을 바칠 때에 제의적인 면에서도 중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도 신에게 정성을 빌 때에 목욕재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에서는 씻는 것에 대하여 어떤 규례가 주어져 있습니까?

민수기 8:5-8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6.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정결케 하라
7. 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케 하되 곧 속죄의 물로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로 그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8. 또 그들로 수송아지 하나를 번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그 소제물로 취하게 하고 그 외에 너는 또 수송아지 하나를 속죄 제물로 취하고.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지파가 하나님께 대신 드려집니다.
그래서 레위인을 정결하게 하는데 속죄의 물을 뿌려서 정결하게 하고 또 수송아지의 번제물을 취하여 속죄 제물로 취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려지는 사람을 속죄의 물을 뿌림과 짐승의 피 뿌림이 함께 동반이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19장에서도 각종 부정하게 된 자들이 정결하게 하는 물을 뿌려서 정함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들이 목욕재계한다고 하여도 죄를 씻을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유출 병이 있는 것처럼 계속하여 죄가 줄줄 새 나오는 사람인데 무엇으로 씻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장차 자신들의 죄와 더러움과 부정함을 씻어줄 그 날을 고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샘물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심으로 그 찌른 자를 보면서 애통하여 회개하게 됨으로 죄가 사함을 받아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36:16-31
이스라엘 족속에 그 땅을 더럽혔는데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같이 더럽혔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정이란 우상숭배로 가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러나 잡혀간 그곳에서 다시 구원하여 내시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더럽힌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시는데 맑은 물을 뿌려서 정결하게 하고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우상 섬김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로 씻는 것이 아니라 새 영을 그 마음속에 넣어주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물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47장에서는 성전 동문에서 물이 스미어 나오는데 그 물이 발목, 무릎, 허리,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되어서 흐릅니다. 그 강물이 가는 곳마다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물이 물이 아니라 성령임을 우리는 성령이 임하게 된 자들이기에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4:13-14절입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한 여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판 우물을 마셔도 다시 목마르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물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7:37-39절입니다.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생수의 강이 흘러 나는 것은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일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에서 각종 죄와 더러움과 부정함을 씻어야 한다고 하니 율법적 규례를 따라 씻는 것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방법으로 지키기 위하여 장로들의 유전까지 보태어서 음식을 먹을 때에 반드시 손을 씻고 먹게 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부정함과 더러움을 씻는 그 행위를 가지고 또 다란 자기 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씻지 않고 먹는 자들을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시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아니하고 음식을 먹는 것은 장로들의 유전을 어긴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는 어찌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되물으십니다. 그러면서 고르반 사상을 책망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멀다고 합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하였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고 예언한 대로 예수님이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자기들이 평소에 지켜오던 씻는 것을 포기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로 눈앞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터져 나오는데도 그것을 모르고서 그 생수를 버리고 자기들이 물을 보관할 웅덩이를 만든 것입니다. 예레미야 2: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죄란 생수의 근원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죄악인 것입니다. 스스로 웅덩이를 만들어 그곳에 자기들이 마실 물을 길어 놓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각종 율법지킴의 자기 의들을 채워 넣은 것입니다. 모세로부터 받은 것이니 그 웅덩이에 얼마나 오랫동안 모아둔 것이었겠습니까? 인도의 시골마을을 가보니 마을마다 웅덩이 들이 많았습니다. 우기 철에 비를 가두어 두고서는 일 년 동안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 웅덩이에서 목욕 설거지 빨래를 다 처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이 걸쭉해질 정도입니다.

페인티드 베일이라는 영화를 보면 영국인 병리학자가 중국에 콜레라가 번지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아내의 불륜을 견디지 못하여 선택한 일이기도 합니다만 그곳에서 우물과 강물을 현미경으로 조사하여 오염되었다고 먹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물을 먹으려고 고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눈에는 오염된 물임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과연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생수를 제공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마시고 마셔도 갈증만 더하는 세상의 욕망이라는 물을 공급하고 있는 것입니까? 온 세상을 둘러보아도 생수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양식이 없어서 주림이 아니고 마실 물이 없어서 갈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아모스 선지자가 외친 것처럼 지금도 그러합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오늘 이 말씀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와 더러움에서 씻어주실 영원한 샘물이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만든 웅덩이를 의지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공로를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씻음을 받아야 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죄와 더러움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씻어짐을 성령이 임하여 믿게 된 자들은 영원한 생명의 샘을 마시는 사람들입니다.

2-6절입니다.
그 날에, 즉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는 그 날에 우상의 이름을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예언자들도 정체가 다 드러나서 부끄러워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황홀경 상태에서 몸에 상처를 내면서 주술적인 짓을 한 것을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인 것처럼 털옷을 입은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세상은 거짓 선지자들이 수도 없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이란 진행 중입니다. 이미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렸지만 거짓 선지자들이 다 사라지기까지는 예수님의 재림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영적인 분별력을 갖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죄와 더러움을 영원히 씻는 샘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임을 성령을 통하여 날마다 넘쳐 나기를 소원합니다.




더러움을 씻는 샘

그 날에 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그 날(one that day)"은 이스라엘의 원수들인 열국이 패망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 날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도리어 축복의 날이요 사죄의 날이요 회복의 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죄와 더러움을 씻을 수 있는 샘을 여시기 때문입니다.
죄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해결할 수 없고 씻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법과 재판은 완전치도 못하지만 현상적이고 피상적인 부분만 문제 삼을 뿐 양심과 영혼의 더러움은 전혀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이사야 12:2-3).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저 도적 회개하고서 보혈에 씻었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죄 씻기 원하네 죄 씻기 원하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주님의 보혈로 모든 죄와 허물과 더러움을 깨끗이 씻으십시오.
전신을 목욕한 자도 먼지 많은 세상에 나가 살면 다시 손발이 더러워집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3:9-10).

샘물은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솟아나는 물입니다.
주님의 보혈도 골고다의 십자가로부터 마지막 재림 때까지 끊임없이 솟아나 우리의 죄와 모든 더러움을 깨끗케 하실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먼저 간 성도들과 천사들은 다 거룩한 모습으로, 모든 더러움이 다 씻긴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천국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계 15:6).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계 19:8).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계 19:14).

우리가 왜 반드시 <죄와 더러움>을 보혈의 샘에서 씻어야 할까요?

천국의 성도들, 천사들, 천군들은 왜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있을까요?

주님, 이 세상에는 샘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목욕탕, 사우나장, 찜질방도 많아 누구나 쉽게 씻고 샤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샘으로는 저희의 죄와 영혼의 더러움을 씻어내지는 못합니다. 반드시 주님의 보혈에 씻어야 정결케 됩니다. 부디 저희로 하여금 십자가 아래로 나아가게 하사 샘물 같은 보혈에 저희의 모든 허물을 씻게 해주시옵소서. 앞서간 성도들은 천국에서 다 세마포 옷을 입고 있음을 기억하게 하사 늘 손발을 씻듯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관리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여호와의 날의 정의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A day of the LORD is coming when your plunder will be divided among you.


여호와의 날(Day of the Lord. 욤 아도나이. yôwm Yehôvâh .יְהֹוָה   יוֹם 

날(3117) 욤(yôwm)  יוֹם 
1. 낮, 2. 날마다,  3. יוֹם : 낮에
발음 / 욤[ yôwm ]
어원/ 어미활용 יוֹמְךָ ,יוֹמִי, 쌍수 יוֹמַיִם, 복수 יָמִים, 복수 연계형 יְמֵי, 덥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낮(창 1:5, 시 136:8), 날(창 1:8, 출 6:28, 시 89:45), 일자(창1:14), 때(창3:5, 출19:1), 세월(창4:3), 오늘(창4:14, 출5:14, 민22:30), 당시(창6:4, 신17:9, 삼상17:12), 항상(창6:5, 신5:29,삼하19:13), 나이(창18:11, 수23:2), 오늘날(창19:37, 신1:10), 며칠(창24:55), 어느 날(창27:2), 기한(창25:24, 레12:6), 해(창29:7), 지금(창35:20, 삼상9:9), 여러 날(창40:4), 생명(출20:12, 신5:15, 시34:12), 매일(출29:36, 민28:3), 일(창7:4, 출34:28), 날수(신1:46, 시90:15), 평생(신12:1, 삼상1:11), 종일(신28: 32,시74:22), 장수(신30:20), 시기(수3:15), 얼마(삿11:4), 매년(삿21:19, 삼상1:3), 곧(삼상9:13), 평일(삼상18:10, 왕상5:1), 요즈음(삼상25:10), 일생(삼상25:28), 볕(삼하4:5), 수한(삼하7:12), 시대(삼하21:1, 왕상21:29), 전(삼하21:12), 한번(왕상1:6), 세대(왕상11:12), 일평생(왕상11:25, 욥15:20), 여러 날(왕상17:15), 하루(왕상19:4), 햇수(왕하10:36), 생전(대상22:9), 기간(대상29:27), 초하루(스10:16), 생일(욥1:4), 연한(시39:4), 옛날(시44:1), 연수(시109:8), 광명(잠4:18), 보름(잠7:20), 여생(사38:10), 태초(사43:13), 옛적(겔38:17, 암9:11), 시일(호2:13), 아침(암5:8). [부] 종신토록(창3:14), 날마다(39:10, 왕상8:59), 영원히(왕상11:39), 영영히(창44:32, 신18:5, 삼상28:2), 오래(민20:15), 처음(신10:10), 종일토록(수10:13, 삿9:45), 해마다(삿11:40), 먼저(삼상2:16), 때마다(삼상2:19), 영원토록(삼상2:32), 영구히(삼상2:35), 이제(삼상9:27, 삼하18:18), 오래(삼하14:2), 때때로(대하24:11), 당장(잠12:16), 부지런히(렘7:25). [동] 장수하다(신22:7), 장수하게 하다(시61:6).
구약 성경 / 2291회 사용

여호와(아도나이)(3068) [ Yehôvâh ] יְהֹוָה 
1. 자존자
2. 영원한 자 : 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발음 [ Yehôvâh ]
어원 / 196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여호와(출 20:7, 레 24:13).
구약 성경 / 7020회 사용

* 1961. 하야(hâyâh) הָיָה  
1. 있다,  2. 어떤 자에게 속하다, 3. 섬기다
발음 / 하야[ hâyâh ]
관련 성경 / (장막을) 치다(창13:3), 임하다(창15:1, 수22:20), 계시다(창31:5), (싸우고) 있다(삿12:2), 섬기다(삼상2:11), 만나다(삼상6:9), 속하다(삼하9:9), 따르다(왕상16:21, 호3:3), 같다(시50:21), 두다(출25:15), 더하다(출9:3),성취하다(잠13:19), 이루다(겔21:7, 39:8), 지치다(단8:27), 얻다(슥8:10).
구약 성경 / 3549회 사용


'여호와의 날'이란 한 마디로 '여호와께서 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 결정적으로 이 땅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악인을 멸하시고 의인 또는 여호와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구원을 행하시는 역동적인 심판과 구원의 날' 을 가리키는 신학 용어이다


여호와의 날이란 여호와가 심판의 주로 오시는 날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심판에 의하여 기쁨과 슬픔의 자리로 구분될 것입니다.


교회에 대하여는 자비를 줄 것이며 교회의 대적자와 박해자들에게는 심판을 줄 것이라는 내용이 그 전반에 흐른다. 예루살렘을 치러 온 적국들의 파멸이 있은 후에(1-3절),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 은혜의 왕국이 설립된다(4-11절). 또한 예루살렘에서 적국들이 당하는 재앙과(12-15절), 전후의 열국 중에서 남은 백성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오고(16-19절), 모든 것이 아 거룩한 영광의 세계가 된다(20-21절).


[강  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죄악으로 인해 심판을 받았음을 밝히시면서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심판하시고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열국의 심판과 예루살렘의 구원은 장차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영적교훈]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을 통치하시는 분으로 우리는 그분의 백성일 뿐이다. 우리의 삶과 목표와 가치관은 왕이신 하나님을 위해 설정되어야 한다. 옛 왕정 국가에서 나라의 주인은 왕이고 그 백성은 왕의 소유물이었다. 백성에게는 왕을 섬기고 충성을 다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영적 이스라엘에 속한 우리 신자는 바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영적 왕국의 백성이다.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보장하신다.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외로움과 걱정 근심을 아시고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는 왕의 통치를 행사하신다.

왕으로 임하실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왕권을 배척한 것은 그들이 사람을 왕으로 세우던 때부터이다. 하나님께서 원래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계셨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를 거부하고 자기들의 왕을 따로 옹립하였다. 그 후에 그 백성은 하나님을 왕으로 의지하지 않고 어떤 때에는 수리아에게, 어떤 때에는 애굽에게, 어떤 때에는 앗수르에게 의지하였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왕권을 무시한 행동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결국 바벨론에 잡혀 갔고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왕적 보호를 받지 못한 것이다.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국가의 외로움 속에서 옛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하게 되었다. 그들은 금식하며 애통해 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간청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물과 회개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에서 건져내셨고 다시 그들의 왕 되신 관계를 회복하셨다. 이것은 신약 시대의 종말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실 것에 대한 예표이다. 이 이스라엘은 옛날의 구약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택한 백성으로서의 영적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즉, 옛날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셨던 하나님은 이제 모든 택한 백성들 곧 성도들의 왕이 되시는 것이다.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함은 이 세상의 대종말에 하나님께서만 왕으로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교만한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 이방인들의 복음 접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한 백성의 왕이심을 사도들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깨닫게 하시었고, 그 복음의 문을 세계 곳곳에 퍼지게 하셨다. 이제 구약에서 예언된 왕이신 하나님은 신약에 와서 성취된 것이다. 이것의 완전한 성취는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종말에 이루어질 것이다.






여호와의 날’ 이란 구약 선지서에 나타나는, 구약의 종말 사상을 반영하는 중요한 신학 용어이다. 암 5:18-20을 보면 분열 왕국 시대 후기 곧 B.C.8세기 중반경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할 당시에 이미 이 ‘여호와의 날’의 개념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약 종말론 사상을 반영하는 ‘여호와의 날’ 사상은 동서고금의 모든 종말론이 그러하듯이 정치, 종교적 격변기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다 상술하자면 분열 왕국 시대 말기에서B.C.722년의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B.C.586년의 남유다 명망, 그리고 B.C.586-539년 사이의 바벨론 포수 그리고 포로 귀환시대 등 대략 B.C.8-5세기 사이를 배경으로 선지서들이 기록될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보편적으로 다음과 같은 중대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먼저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에 B.C.930년경 분열 왕국 시대가 개시된 이래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여호와 절대 유일사상을 버리고 각종 우상을 섬기는 패역의 역사를 끊임없이 일삼았다. 그리고 이러한 이스라엘 두 왕국의 백성들을 향하여 여호와는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심판의 경고를 끊임없이 보내셨다. 또한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도 이스라엘 두 왕국의 백성들이 종교적인 타락을 거듭하던 시기와 때를 같이하여 근동 지역은 신흥 강대국 앗수르의 부상(浮上)을 시발로 하여 앗수르,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 제국 등 대제국들(Great Empires)이 상호 연이어 발흥함으로써 B.C.8세기에서 멀리 A.D.수세기까지 소위 대제국 시대가 도래되어 연일 거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게 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유럽 및 근동 지역과 애굽 지역을 잇는 길목에 있었던 이스라엘은 그 소용돌이의 중심부에 들게 되었다.

이 길은 종교적, 정치적인 이유들로 인하여 이스라엘에는 종말론적 위기감이 크게 고조되었고 이와 관련하여 등장하게 된 구약의 종말 개념이 바로 ‘여호와의 날’ 이었던 것이다.


여호와의 날의 정의 

‘여호와의 날’이란 한 마디로 ‘여호와께서 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 결정적으로 이 땅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악인을 멸하시고 의인 또는 여호와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구원을 행하시는 역동적인 심판구원의 날’ 을 가리키는 신학 용어이다.

이러한 구약적 종말론 용어인 이 ‘여호와의 날’ 의 개념을 이해 할 때 우리는 필히 다음 두 가지사실을 전제하여야 한다.

첫째, 구약 시대는 신약 시대와는 달리 아직 현 세상의 우주와 역사 전체가 궁극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심판 종결되고 각각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사람과 천국의 축복에 동참할 사람으로 구분된 모든 인생들이 전혀 새로이 갱신된 우주 안에서 온전한 새 역사를 시작한다는, 범 우주적이고 최종적이요 그리고 단회적인 역사 대 종말에 대한 계시가 확립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날’ 은 단회적 대종말 사건이 아니라 여호와가 이스라엘 및 그 주변 국가의 역사에 역동적으로 개입하시는 여러 날들을 통칭하여 가리키는 용어였다는 사실이다.

둘째, 구약 에언의 복합성에 따라 ‘여호와의 날’ 에 대한 예언들은 문맥에 따라서 각각 남과 북 이스라엘 왕국이 여호와의 심판으로 멸망 받던 날, 또는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던 이방인들이 여호와의 심판을 받고 이스라엘은 포로에서 회복되는 날, 그리고 한 메시야가 와서 자신을 선민에게 승리와 평화를 가져와 줄 날 곧 신약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주 메시야 예수님의 초림 중 어느 한 날을 가리킬 수도 있었고, 이 세 가지 모두는 물론 심지어 세상 끝 날의 대종말 자체까지를 동시에 의미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욜 2:31, 슬 1:14-18, 슥 14:1-11).

한편 이와 같은 구약의 ‘여호와의 날’ 의 개념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역사 대종말 곧 범우주적이고도 최종적인 세상의 대종말에 대한 계시인 ‘주의 날’ 로 발전 된다. 이와 같은 구약의 ‘여호와의 날’ 의 신약의 ‘주의 날’ 로의 발전은 성경 계시의 점진성의 한 실례로서 전자가 후자의 전신 또는 예표(豫表)의 관계에 있다 하겠다. 참고로 두 가지를 다시 한 번 더 비교하자면 여호와의 날이 현재 역사 안에서 주로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하여 반복적으로 일어난 여호와의 역동적 구원 행동을 가리켰다면 신약의 주의 날은 현 역사를 최종 종결하고 새로이 갱신될 새 시대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초역사적인 구원 행동을, 그리고 세계 만민 전체를 포괄한 단회적이고도 최종적인 여호와의 구원 행동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하겠다.

여호와 날의 양면성(兩面性)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호와의 날’ 은 이 땅의 왜곡된 역사 현실을 그 역사의 현장에 여호와께서 종말론적으로 임재하사 일시에 극복하는 역동적인 말이었다. 따라서 이 날은 악인에게는 멸망의 심판이 행해지는 저주의 말이며, 동시에 의인 도는 회개하는 자에게는 구원과 회복이 주어지는 축복의 날이라는 양면성을 갖는다.


저주의 날 

                       축복의 날

저주 내용

성경 구절

                        축복 내용

                                                               성경 구절

1

형벌과 보응이 임함

호 9:7

       축복이 회복됨                                     암  9;11


2

땅이 황페하게 됨

욜 1:10-12

      기쁨과 즐거움이 회복됨 

       욜 2:23

3

물질이 결핍됨

욜 1:16

       성령 부음을 받음

       욜 2:28

4

기쁜과 즐거움이 끊어짐

욜 1:16

       꿈과 이상을 봄

       욜 2:28

5

어둡고 캄캄함

욜 2:2,

암 5:18

       구원을 얻음

      욜 2:32,

      미 7:18

6

불로 사름

욜 2:3

        다시 긍휼을 베푸심

      암 5:15

7

희생이 있음

습 1:8

        만국으로 기업을 얻음

      암 9;12

8

슬픔과 애통이 있음

습 1;14

        순결함을 얻음

       습 3:12-13

9

고통이 극심함

슬 1:15

        평화와 번영을 누림

       슥  8:12

10

극렬한 풀무불 같음

말 4:1

       이방인들도 돌아와 구원 받음              

        미 4:5



여호와의 날의 의의

여호와께서 이 땅의 왜곡된 역사 현실에 적극적으로 임재하사 선악 간에 심판을 행하시고 의인 또는 당신의 백성을 위한 평화와 번영을 위한 새 질서를 구축해 주실 것을 대망하던 사상으로서 그것이 여호와에 의해 거듭 예언되어 왔고 또 이미 거듭하여 성취되어 왔으며 그 궁극적인 실체는 ‘주의 날’ 의 예언으로 승화되어 세상 끝 날의 대종말에서의 성취를 대망하고 있는 ‘여호와의 날’ 사상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왜곡된 역사 현실과 그 안에서의 우리의 삶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마침내 대종말을 필히 그리고 분명히 맞을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 자체를 우리에게 새삼 각성시켜 준다. 즉 종말론적 구원과 심판의 날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강력하게 제시해 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처럼 매 순간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 에 근거하여 종말론적 위로와 경고를 동시에 받게 된다. 먼저 우리는 이 ‘여호와의 날’ 을 통하여 이 질고로 가득한 왜곡된 현실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우리 여호와에 의해 궁극적으로 초극되고 의인과 회개하는 자를 위한 새 세상이 필히 올 것을 기대하며 위로와 소망을 갖는다. 동시에 여호와의 날은 악인들의 멸망을 필연적으로 동반할 것이며 단순히 여호와를 아는 자가 아니라 다만 그 분께 참으로 순복하고 회개한 자에게만 구원이 주어질 것이며 오히려 여호와를 머리로만 알고 입으로만 섬기던 자들에게는 더욱 더 큰 심판이 주어지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나의 자신을 살피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호와의 공의와 사랑의 오묘한 조화가 결정적으로 동시에 집행되어 천국 구언과 지옥 심판이 일시에 실현 될 이 크고도 두려운 날을 기억하면서 실로 매 순간을 여호와의 심판 보좌 앞에 서는 각오로 살아야 하겠다는 소위 실존론적의 종말신앙(實存論的 終末信仰) 을 결단하게 되는 것이다.

“ 평강의 여호와가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09-01-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씻는 샘(스가랴 13:1)

그 날에 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스가랴 13장은 예루살렘의 회복을 예언하고 있스니다.
그러나 이런 이스라엘의 영적 의미를 회복하실 분은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암시합니다.
힘없는 순한 양처럼 인간의 모든 질고와 고통을 홀로 감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온 몸의 피와 물과 진액을 흘리신 그리스도의 고난은 오직 예루살렘을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그를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은 흩어졌지만 그리스도의 삶이 영적 회복을 이루기 위한 귀중한 교훈이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힘없이 몰락한 종교 지도자의 최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적 싸움의 승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이제부터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에 속하는 신령한 복을 누리게 되었으며 영원한 하늘나라의 소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들도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완벽한 은혜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날마다 계속되는 영적 전쟁의 싸움터에서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가 될 것을 기대하며 오늘도 승리의 개선가를 부를 수 있는 믿음의 장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더러움을 씻는 샘 (슥 13:1-6)














08-31-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간구하는 심령(스가랴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심령(7307) 루아흐(rûwach)
רוּחַ 스트롱번호7307

1. 영,  2. 입 기운,  3. 호흡
발음 [ rûwach ]
어원 / 730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창1:2, 삼상10:10, 사11:2), 기운(창6:17,7:15), 바람(창8:1, 삼하22:11, 시11:6), 마음(창26:35, 수2:11, 전1:17), 콧김(출15:8, 시18:15, 애4:20), 의심(민5:14,30), 생명(민16:22),노여움(삿8:3, 잠29:11), 정신(삿15:19, 왕상10:5, 대하9:4), 성령이 하시는 역사(왕하2:9,15), 큰 바람(욥1:19), (콧)김(욥4:9), (입)기운(시33:6), 호흡(시104:29, 전3:19), 영혼(욥7:11, 시143:7, 사26:9), 광풍(시148:8, 사32:2), 숨(욥9:18, 19:17), 혼(전3:21), (입)김(욥15:30), 심령(시77:3, 잠16:2), 폭풍(시55:8, 사27:8), 성품(잠17:27), 생기(렘10:14, 겔37:9), 분(전10:4), 사면(렘52:23), 사방(겔5:10, 17:21, 단11:4), 바람이 불 때(창3:8), 헐떡거림(렘2:24).
[부] 허망하게(미 2:11).
[동] 헐떡이다(렘 14:6).
구약 성경 / 378회 사용


간구(8469) 타하눈(  )תַּחֲנוּן     

1. 기도
발음 [ tachănûwn ]
어원 / 26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간구함(대하 6:21, 시 28:2, 86:6, 슥 12:10), 간구(시 116:1, 단 9:17), 기도(단 9:23).
[동] 구하다(잠 18:23)
구약 성경 / 18회 사용



간구하는 심령(Spirit of supplication)

은총의 막대기가 끊어졌고 연합의 막대기마저 끊어져 버린 절망적인 상태에서 스가랴 12장은 새로운 소망을 위한 말씀으로 선포됩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펴시고 땅을 세우셨고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호모 루아흐(Homo Ruach)"라고 정의 합니다.
'호모 루아흐'는 "영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사람은 심령(영, spirit)을 갖고 태어난 존재이므로 영의 자리에 있어야 할 존재가 그 자리에 없다면 삶은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의 가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더 좋은 집과 더 좋은 자동차와 더 좋은 옷과 더 좋은 음식과 더 좋은 환경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영의 자리에 앉아야 할 주인이 없는 사람을 성경은 어리석은 부자라고 합니다. 
거지 나사로의 삶과 부자의 호화로운 날마다의 잔치 자리와 같은 삶을 비교하면 누구나 부자의 삶을 선호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가르침은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만족한 자리를 차지하였지만 부자는 뜨거운 불 가운데서 고통을 받으면 거지 나사로에게 손가락 끝에 물 한방울만 찍어서 마시게 하라고 애원합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이 땅의 가치에 붙잡혀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비록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 수 없지만 죽음 이후에 펼쳐질 그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세속의 가치에 시달림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지혜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으로 세상의 길잡이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구약의 메시야는 어떻게 예언되었을까?
아담의 타락직후 창세기 3:15에서부터 시작된 메시야에 관한 예언은 무려 350가지 이상이나 된다.
그런데 메시야의 예언은 크게 2가지로서, 영광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와 수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 예언이 있다.
그렇다면 고난받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은 어디에 나오는가?
그것은 시편 22편, 이사야 53장과 더불어 스가랴 12~13장에 나온다.
그렇다면 스가랴서에 나오는 메시야의 수난예언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메시야의 수난과 더불어 반드시 알아야 할 또하나의 사건을 발견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메시야의 수난(고난)에 관한 예언이 그리 많지 않다.
이사야 53장과 시편 22편에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메시야의 수난에 관한 예언이 스가랴서에도 나온다는 것은 매우 놀랍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350가지의 메시야예언 중에서 영광스런 메시야 혹은 왕이신 메시야에 관한 예언은 참으로 많지만, "배척받는 메시야 혹은 찔림받는 메시야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은 메시야"에 관한 예언은 거의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스가랴서 12~13장에 나오는 메시야의 수난예언과 더불어 성령강림예언과 회개의 확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스가랴 14장 가운데 스가랴 12~13장의 위치는?

스가랴서는 크게 스가랴가 젊었을 때에 본 환상과 벧엘인들의 금식질문(1~8장. B.C.520~518년)과 그가 늙었을 때에 받은 메시야의 예언들(9~14장, B.C.480~470년)로 나눠볼 수 있다.

그중에서 메시야의 공생애에 대한 예언은 스가랴 9장부터 13장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스가랴에 나오는 메시야의 예언은
첫째, 메시야가 겸손하여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할 것(9:9).
둘째, 어느 지파의 후손으로 올 것인지(10:4~6)
셋째,  어떤 역할을 감당할 것인지(11:4)

그 중에서도 스가랴 12장~13장에는 메시야의 수난과 성령강림 그리고 그 후에 있을 거국적인 회개운동과 성령께서 오셔서 사람을 회개케 하실 때에 나타나는 3가지 증상에 대해서 소상하게 언급한다.

말세의 종말론적인 예루살렘의 보존과 그 영광은 어떻게 예언되었는가?

하나님께서는 메시야의 수난에 대해 언급하시기 전에 먼저 종말론적인 예루살렘의 보존(보호)에 관하여 놀라운 예언의 말씀을 주신다( 12:1~9).
그것은 그 어떤 이방민족도 예루살렘을 쳐서 없애지는 못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둘러쌀 수는 있어도 오히려 그 이유 때문에 자기들이 비틀거리게 될 것이며, 자기들이 다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12:2~3).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에워쌀 이방민족의 상태를 2가지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예루살렘 사면을 둘러싼 이방민족은 "취하게 하는 자(비틀거리게 하는 대접)"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12:2).

생각해보라. 비틀거리는 잔을 안고 있으면 정작 본인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 잔 때문에 자신은 더 많이 비틀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에는 하나님께서 이방민족들을 "무거운 돌"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다(12:3).
왜냐하면 그 돌을 옮기려고 들었다가 오히려 자신의 몸만 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온 말과 말탄 자들은 오히려 그들의 눈이 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예루살렘 거민들은 그것을 보고 오직 만군의 여호와로 인하여 힘을 얻었다고 말할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전쟁 중에 유다의 족장들을 나무들 가운데에 화로같게 만들 것이라고 했으며, 곡식단 사이에 횃볼같게 함으로 유다의 족장에게 덤비는 모든 자가 그만 불에 타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12:6).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호해줄 백성의 범위는 고관대작부터가 아니라 평범한 유다시민으로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 거민들 그리고 다윗의 왕가로 확대되어갈 것이라고 하셨다(12:7).

이는 하나님은 객과 고아와 과부들에 대한 긍휼하심이 풍성하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듯 3년반동안 공생애를 사셨던 예수께서도 병들고 신음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먼저 구원으로 초청하셨다. 그들을 먼저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스가랴는 말세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실 성령이 오게 되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했는가?

스가랴는 그날이 되면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서 은총과 간구의 영(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라고 했다(12:10).
그러면 그들이 찔렀던 바 그분(여호와)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심하게 통곡하기를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었던 애통과 같이 애통할 것이라고 했다(12:10~11).
그러므로 이 예언은 메시야에 대한 다음과 2가지를 예언을 포함하고 있는 놀라운 예언이 아닐 수 없다.

첫째는 메시야의 수난에 대한 예언이다(12:10).

먼저 이것은 메시야가 고난을 받되 찔림받는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며, 수난받는 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여호와 자신이시라는 놀라운 예언이다.

장차 메시야가 어떤 수난을 받을 것인지는 사실 이사야 53장과 시편22편이 없으면 잘 알 수도 없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스가랴 12:10에서 메시야의 수난에 대한 구체적이고 놀라운 예언을 보게 된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메시야로 오실 것이고 그분이 예루살렘 거민들에 의해 찔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것은 곧 메시야께서 장차 예루살렘 사람들로부터 가시면류관과 채찍 그리고 창에 의해 온 몸이 찔리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찌르는 장본인들은 바로 예루살렘에 사는 거민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랬다. 메시야는 가시면류관으로 인하여 머리가 찔리셨고, 채찍과 창에 의하여 몸과 옆구리가 찔리셨다. 그리고 그분을 그렇게 처참하게 만든 장본인은 로마군병이 아니라 바로 예루살렘 사람들 자신이었다.

둘째, 성령강림과 성령강림에 대한 거국적인 회개에 관한 예언이다(12:10b~14).

그런데 성령께서 강림하시게 되면 동시에 큰 애통이 예루살렘에 서부터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눅 24:47).
그 통곡은 므깃도 골짜기 하드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은 큰 애통이라고 했다(12:11).

므깃도 골짜기에 있었던 큰 애통함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역대하 35장에 나오는 사건으로서, 남유다의 16대왕이었던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애굽왕 바로 느고를 맞이하여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게 되었을 때에, 남유다의 모든 백성들이 자신의 왕의 죽음 때문에 슬피 울었다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께서 죽고 난 뒤 성령이 오시고, 베드로가 "너희들이 메시야를 죽였다"고 설교하자, 15개국에서 올라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자기드이 메시야를 죽인 장본인이었음을 깨달으면서 대성통곡을 하게 된다. 
회개를 시작한 것이다.
이때 스가랴선지자는 회개의 순서가 왕의 족속에서부터 시작하여 제사장의 족속 그리고 남은 모든 이스라엘 족속들의 남녀가 다 회개할 것이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최대의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였고, 그러한 회개운동은 사마리아를 거쳐 온 이방지역으로 뻗어나갔다.

성령이 오시게 되면 어떤 증상이 나타나게 될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지은 죄들에 대한 회개하는 마음이 불길처럼 타오를 것이라고 예언이다. 즉 회개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성령이 오시게 되었을 때에 나타나는 제일 첫번째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은 어떠한가? 성령이 오시게 되면, 대부분 예언하고 환상을 보며, 꿈을 꾸고 방언을 하게 되며,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치유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성령이 오셔야만 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성령이 오시면 결론적으로 나타나는 부수적인 것들에 해당할 뿐이다. 성령이 오시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회개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자신이 지은 죄들을 깨닫게 되어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성령이 오시어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게 되면 나타나는 세 가지 증상은 무엇인가?

성령이 오시면 죄와 더러움울 씻는 샘이 열려 누구든지 이 샘에 와서 회개하여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족히 마시게 된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

첫째, 자기와 자기의 마음 속에서 우상을 제거하게 된다(13:2a).

하나님을 마음 속에 모시게 되면 우상은 점차 자신에게 제거되는 것이다.
우상이 무엇인가? 우상이란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그것을 가리킨다. 기도해 보았더니 응답이 없다고 점쟁이를 찾아가면 그것이 우상인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찬양하고 전하는 기쁨보다 세상에 있는 것을 즐기는 것이 더 좋은 사람은 그것이 우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돈이며 명예이고, 쾌락이고 인기다. 어떤 이는 자기의 마음 속에 자식을 주님보다 더 아끼고 사랑한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식이 우상인 것이다. 그런데 성령이 자기 맘 속에 들어와 죄를 깨끗하게 회개하게 되면 이러한 마음들이 어느순간인가 사라지고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둘째, 성령이 사람 속에 들어오시면 거짓선지자들의 예언이나 가르침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따라가지도 않게 된다는 점이다(13:2b).

어떤 사람은 예언을 받으러 매주마다 예언은사자들을 찾아간다. 예언자들로부터 예언을 받지 않으면 불안해서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예수점쟁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이 주신 소원대로 행하면 되는 것이지 누군가에게 물어보아서 무엇을 결정하고 그 일을 행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포기한 것이요, 예언을 하는 자의 종이 되어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종이 되게하고 누군가를 종 삼으라고 오신 것이 아니다. 종된 우리의 인생을 놓아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은 예언자가 거짓된 가르침으로 말하는대도 그것이 거짓인 줄 모르고 그 가르침을 따라간다. 우리는 성령이 오시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성도들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령이 오시면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별할 수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성령이 오시게 되면 그는 진리와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거짓을 버리고 진리만을 따라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자기의 자녀들 중에 계속해서 예언하는 자가 있다면 부모는 그것을 근절시켜야 한다. 성령이 오시면 거짓말하는 예언이 사라지게 될 것이며, 환상과 예언하는 일이 점차 없어지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 가르쳐주시기 때문이다.

셋째, 성령이 사람 속에 들어오시면 더러운 귀신(영)을 추방하게 된다는 점이다(13:2c).

여기에 나오는 "더러운 영'이라는 "깨끗함을 받지 못한 영"을 가리킨다.
이것이 사탄 마귀와 귀신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자는 더러운 귀신과 하나될 수가 없으며, 더러운 귀신과 함께 할 수가 없다. 거룩한 영은 더러운 영과 함께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삶에 귀신이 역사하고 있다면 우리는 즉시 회개해야 한다. 예수의 피로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더러운 영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회개했으면 꾸짖어 귀신을 내쫓아버려야 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하나 되겠으며, 빛과 어둠이 어찌 같이 있을 수 있느냐고 말했던 것이다. 고로 우리가 성령의 다스림 안에 있게 된다면 우리는 점차 귀신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될 것이다.

목자를 치게 되면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언젠가는 칼로서 하나님의 짝된 자 곧 목자를 치실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짝 된 자요 목자"는 메시야를 가리킨다. 이 말씀은 메시야의 수난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이라는 것을 뜻하며,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양떼들이 어려움과 역경을 통해서 진실된 하나님의 자녀들로 연단받아 구별될 것이라고 했다. 또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약한 자들을 당신의 손으로 보호하실 것이라고 하셨다(슥13:7). 그래서 하나님께서 목자를 치실 때에는 대부분의 양떼들이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때 양떼의 2/3는 멸망당하겠지만 1/3은 남아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1/3이 불가운데서 금을 연단함없이 연단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슥13:8~9).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부르짖는 기도소리에 귀를 기울이실 것이며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실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고난의 연단없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산출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고난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하는 가장 좋은 훈련소이며 교사이기 때문이다.

고난받는 종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는 이사야 53장에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가랴 12~13장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사람들은 성령을 받게 되면서 비로소 왜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저절로 회개가 터저나온다.
자신이야말로 메시야를 죽인 장본인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때에 비로소 성령의 샘이 열려질 것이고 그려면 모든 사람들의 갈한 영혼들이 비로소 만족함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기가 추구한 우상을 버리게 될 것이고, 더이상 거짓선지자를 좇아다니지 않게 되며, 더러운 귀신을 확실히 내쫓아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결과요 열매들이다.
그러므로 자기자신이 진정 회개한 자인지를 가늠해보면 앞의 세 가지 결과가 자신에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점검해보라. 
그러므로 우리의 회개가 예수께서 고난받으신 목적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회개가 성령께서 오시는 목적인 셈이다.









08-30-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은총과 연락(스가랴 11:7)

내가 이 잡힐 양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떼를 먹일쌔.
So I pastured the flock marked for slaughter, particularly the oppressed of the flock. Then I took two staffs and called one Favor and the other Union, and I pastured the flock.




은총(5278) 노암(noʽam)  נֹעַם 

1. 즐거움,  2. 총명,  3. אִמְרֵי נֹעַם 적당한 말
발음 / 노암[ noʽam ]
관련 성경 / 아름다움(시 27:4), 즐거움(잠 3:17),
[형] 정결한(잠 15:26), 선한(잠 16:24).
구약 성경 / 7회 사용


연락(2254) 하발( châbal)  חָבַל 

1. 단단히 감다,  2. ~와 맹세하다, 3. 욥기 22:6
발음 / 하발[ châbal ]
관련 성경 / 악을 행하다(느 1:7), 잡다(겔 18:16), 전당잡다(출 22:26, 신 24:6,17, 암 2:8), 볼모 잡다(욥 22:6, 24:3, 9, 잠 20:16), 범죄하다(욥 34:31), 멸하다(전 5:6, 사 13:5, 미 2:10), 고생하다(아 8:5), 진멸하다(사 54:16), 낳다(시 7:14), 헐다(아 2:15), 쇠하다(욥 17:1), 떠나다(사 10:27).
[명] 연합(슥 11:7, 14), 패망(잠 13:13).
구약 성경 / 14회 사용

* 연락이란 끈을 의미하며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의 연결을 말합니다. 

스가랴 11:7
내가 이 잡힐 양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떼를 먹일쌔.
So I pastured the flock marked for slaughter, particularly the oppressed of the flock. Then I took two staffs and called one Favor and the other Union, and I pastured the flock.

스가랴 11:14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Then I broke my second staff called Union, breaking the brotherhood between Judah and Israel.

잠언 13:13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
He who scorns instruction will pay for it, but he who respects a command is rewarded.

스가랴 11장은 유대인의 멸망에 대한 예언으로 10장에서 유대 민족이 전쟁에 승리하여 형통할 것을 예언하였으나 이제는 수풀에 불이 붙는 것과 같이 전쟁으로 멸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70년 만에 고향 땅으로 돌아왔는데 또 다시 멸망할 것이라고 진노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악한 목자 때문이라고 합니다.
선한 목자는 메시야를 예표하고 거짓 목자는 적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적그리스도는 메시야를 거부하도록 유혹하는 세력입니다.
따라서 유대 민족이 망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그리스도를 거절한 죄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이스라엘 민족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셔서 옛 이스라엘 지역으로 돌아오게 하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바벨론에서의 뉘우침과 통회는 금식으로 열심을 다하였으나 하나님은 이제 그들에게 평강이 깃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교만과 죄악을 미리 아셨기에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흩으실 계획을 세우신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는 그리스도를 거절한 것이다. 정치적 메시야를 갈망하던 그들에게 힘없어 보이는 나사렛 출신의 시골 청년 예수는 어떤 희망도, 정치적 해방도 가져다 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민족의 장래는 점점 더 암담해져 갔고 계속된 봉기와 전쟁은 이스라엘 민족의 나약성만 확인시킬 뿐, 강한 로마 군대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나님은 드디어 이스라엘을 각국에 분산시키기로 작정하셨다.  그리스도를 몰라본 그들의 대가는 너무도 처절하였다. 유대 민족은 각국에 분산되었고 거기서도 많은 천대와 멸시를 당하고 있는 것이 현대 역사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가련한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나 저들이 배척하였기 때문에 그 민족은 멸망하게 되었다. 메시야에 대하여 참되이 평가하지 못한 유대 민족은 결국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그 결과로 그 민족 자체 안에서 인화가 깨어지고 서로 죽이는 참사가 발생되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역사가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윽 앞에 놓고 벌어진 사건들이다.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3천년 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숙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신약 초기에 그리스도를 거절한 유대 민족과 같은 자이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는 그의 생애도, 죽으심과 부활하심도 거부하는 자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거부한 채 신자라고 자청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는 너무나 많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를 좇는 자들에게 나타날 때, 유대 민족이 흩어진 것처럼 모든 불의한 자들은 영원한 하늘나라의 잔치에서 쫓겨나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선지자 스가랴서의 역사적 배경은 대략 기원전 520-470년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이라고 합니다.
포로 후 활동했던 학개 선지자는 기원전 520년 몇 개월 동안 즉 성전 재건을 독려하던 시기에 활동하였고, 말라기 선지자는 기원전 432년 경 활동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에서 스가랴 선지자의 활동은 전반기 10여년 동안 성전 재건을 위한 백성들의 내면적인 신앙에 대하여 깨우침을 주었다면 후반기 40여년 동안 장차 하나님의 백성들이 갖추어야 할 신앙의 자세에 대해서 강조하였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메시야를 거절하는 자는 반드시 벌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던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생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길을 따라 믿음의 길을 선택한 사람은 장차 영생의 은혜를 누릴 수 있지만 그 길을 거부한 사람에게는 영벌의 문이 열려있을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으나 여전히 세속적인 가치에 붙잡혀 살아가는 성령의 역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늦은 비의 은혜를 사모하며 남은 때를 바르게 지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도처에 흩으신 것(디아스포라)은 곧 세계 도처에 마치 씨앗을 뿌린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흩어진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땅끝까지 전파된 복음을 받아드린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예언된 메시야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그 날이 세계 평화가 회복되는 날이라고 하겠습니다.


 







08-29-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봄비 때에(스가랴 10:1)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Ask the LORD for rain in the springtime; it is the LORD who makes the storm clouds. He gives showers of rain to men, and plants of the field to everyone.

봄비 때에(Rain in the Springtime)
베에트 말르코쉬(בְּעֵת מַלְקֹושׁ)


이스라엘 우기에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이른 비와 늦은 비’로 비유하셨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의 자연적 특성과 기후를 알아야 한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이스라엘에서 축복의 단비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물이 귀한 나라다.

강수량이 적고 토질이 석회석과 사암 등으로 형성되어 있어 지하수를 얻기도 어렵다.
유적지 중 우기 때의 비를 저장해 식수로 쓰던 저수지가 많고, 성경 역사에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파거나 우물 때문에 다툼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비는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비가 내리지 않으면 생존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농경사회에서 비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신명기 11:14~17
여호와께서 ···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 다른 신들을 섬기며 ···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이스라엘의 여름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건기가 지속된다.
우기가을과 봄이 시작되는 시점인 10월경에서 이듬해 4월경까지다.
이른 비, 겨울 비, 늦은 비가 내리는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른 비(Autumn Rain) - 가을에 내리는 첫 비

10~11월경인 가을에 내리는 첫 비를 가리킨다.
이른 비를 시작으로 우기가 시작된다.
여름철 건기 동안 비가 오지 않아 땅이 메말라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때 비가 내리지 않으면 경작을 할 수 없다.
농부는 농사 지을 준비를 갖추어놓고 메마른 땅을 보며 간절히 이른 비를 기다린다(야고보서 5:7).

이른 비가 내리기 시작해 2~3주가 지나면 들판은 푸른 초장으로 변한다.
농부들은 이때 밭을 갈고 파종한다.
이른 비가 적당한 시기에 내려야 제때 씨를 뿌릴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이른 비는 경작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겨울 비(Winter Rain) - 겨울에 내리는 늦은 비, 장마비

겨울 비는 본격적인 장맛비로, 12~2월경에 내린다.
이스라엘에서는 건기를 대비해 이때 내리는 비를 저장해 사용했다.

늦은 비(Spring Rain)는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는 3~4월경에 내리는 비다.
‘봄비’라고도 불리는데 그야말로 단비다(스가랴 10:1).
겨울 동안 자란 농작물 결실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늦은 비가 제때 오지 않는 것을 저주로 간주하기도 한다(아모스 4:7).



비(4306)

מָטָרה 스트롱번호4306
1. 비,  2. 강우,  3. 출애굽기 9:33
발음 / 마타르[ mâṭâr ]
어원 / 430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비(출 9:33, 신 11:11, 왕상 8:35), 풍우(사 4:6), 비오는 것(잠 26:1).
구약 성경 / 38회 사용

* 4305. 마타르(mâṭar
מָטַר 스트롱번호4305

1.비가 오다,  2. 히필형 : 비를 내리게 하다, 3. 다른 것에 대해 적용될 경우: 출애굽기 9:18
발음 / 마타르[ mâṭar ]
관련 성경 / 비(창 19:24, 욥 20:23, 시 78:24).
[동] 내리다(암 4:7, 시 78:27, 출 9:18), 던지다(시 11:6).
구약 성경 / 17회 사용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비를 내리시어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시면서 흩어져 있던 백성을 열방으로부터 귀환시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날은 열방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낮아질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견고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 이스라엘에 대한 회개 촉구

1)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스가랴 선지자는 봄비 때에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고 명하면서 여호와께서 번개를 내시는 분임을 강조했습니다. 비는 여호와께서 비를 주관하시는 주인 되심을 교훈한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우상 앞에 절하며 비를 구하였는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방 사람들을 따라 바알 앞에 가서 비를 구하며 경배함으로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그러한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고 외침으로써 회개하고 돌아와 여호와께 복을 받을 것을 교훈한 것입니다. 농경 사회에서 비는 곧 안녕과 축복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할 때 여호와에서 진노하셔서 비를 내려 주시지 않음으로 그들은 기근과 고통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면 여호와께서 소낙비를 내리셔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실 것이라고 예언함으로써 회개하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임을 교훈하였습니다.  
a. 약속하신 것을 구해야 함(겔36:37)
b. 구하는 자에게 주심(마7:7-8)
c. 왕의 은택을 구해야 함(잠16:15)


스가랴 10:1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봄비(말코쉬) - 늦은 비, 봄비, 신명기 11:14-15

14.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 늦은 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이른 비(3138) 요레흐(yôwreh)  יוֹרֶה 

1. 흩뿌리기,  2. 물 뿌리기,  3. 물 끼얹기
발음 / 요레흐[ yôwreh ]
관련 성경 / 이른 비(신 11:14, 렘 5:24)
구약 성경 / 1회 사용

예레미야 5:24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와 늦은 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 이른 비(4175) 모레흐(môwreh)  מוֹרֶה  

1. 궁사,  2. 이른 비, 3. 가르치는 사람
발음 / 모레흐[ môwreh ]
어원 / 33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비(욜 2:23), 이른 비(시 84:6)
구약 성경 / 7회 사용

* 3384. 야라(yârâh)  יָרָה 
1. 던지다,  2. 분사 יוֹרֶה : 사수, 3. 기초를 놓다
발음 / 야라[ yârâh ]
관련 성경 / 던지다(출 15:4, 욥 30:19), 뽑다(수 18:6), 쏘다(삼상 20:36, 잠 26:18), 놓다(욥 38:6), 활 쏘다(대하 35:23), 적시다(호 6:3), 가르치다(출 4:12,13, 잠 4:11), 교훈하다(왕하 12:2), 가리키다(출 15:25), 점치다(미 3:11), 윤택하다(잠 11:25), 알게 하다(잠 6:13).
[명] 선생(잠 5:13), 스승(사 30:20, 합 2:18), 교훈(합 2:19, 욥 36:22), 활 쏘는 자(삼상 31:3, 대상 10:3)
구약 성경 / 81회 사용



@ 기도는 어린 아이들이 부모에게 칭얼 거리는 것이 아니다.
바람직한 기도는 사령관 앞에서 명령을 준수하고 돌아와서 다음의 명령을 기다리는 용사와 같은 자세이어야 한다.
때로는 명령을 모두 준수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명령을 모두 준수하지 못하였다고 사령관의 부하가 아니라 부하이기에 다음 명령을 듣고 다시 복종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특징은 번영신학에 의한 부흥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병이 고침을 받고, 부유한 삶을 누려야 하며, 성공적인 삶을 즐기는 것으로 가르쳤고 이해하였다.
번영신학의 문제는 고난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없기 때문에 위기가 닥쳐오면 쉽게 흩어지고 무너지고 있다.




비(마타르)
소낙비(게쉠)

때(6256) 에트(ʽêth)  עֵת 

1. 시간,  2. 정한 시간, 3. 어떤 시간
발음 / 에트[ ʽêth ]
어원/ 어미활용 עִתִּי, 복수 עִתּוֹת ,עִתִּים ,57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때(창 21:22, 욥 39:1, 렘 3:17), 철(레 26:4), 당시(왕하 16:6), 시세(대상 12:32), 역사(대상 29:30), 기한(스 10:14, 느 10:34, 렘27:7), 전례(에 1:13), 시대(사 33:6), 기회(시 32:6), 날(사 17:14), 낮(렘 27:7).
[부] 아무 때나(레 16:2), 때때로(대하 24:11), 당장(스 8:34), 항상(시 106:3, 잠 5:19, 전 9:8)
구약 성경 / 294회 사용

봄비(4456) 말코쉬(malqôwsh)  מַלקוֹשׁ

1. 늦은 비,  2. 봄비,  3. 신명기 11:14
발음 / 말코쉬[ malqôwsh ]
어원 / 39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늦은 비(신 11:14, 잠 16:15, 욜 2:23), 봄비(슥 10:1)
구약 성경 / 8회 사용
비(4306) 마타르(mâṭâr) מָטָרה   
1. 비,  2. 강우,  3. 출애굽기 9:33
발음 / 마타르[ mâṭâr ]
어원 / 430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비(출 9:33, 신 11:11, 왕상 8:35), 풍우(사 4:6), 비오는 것(잠 26:1).
구약 성경 / 38회 사용

소낙비(메타르 게쉠)

소낙(1653) 게쉠(geshem) גֶּשֶׁם 

1. 소나기,  2. 스가랴 10:1, 3. 욥기 37:6
발음 / 게쉠[ geshem ]
어원 / 165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비(창 7:12, 아 2:11, 암 4:7), 폭우(겔 13:11, 13, 38:22), 소낙비(슥 10:1).
구약 성경 / 35회 사용

* 1652. 비가오다 / 가삼(gâsham) גָּשַׁם 
1. 비가 오다,  2. 히필형 : 비 오게 하다
발음 / 가솸[ gâsham ]
관련 성경 / 비를 내리게 하다(렘 14:22).
구약 성경 / 2회 사용

비(4306) 마타르(mâṭâr) מָטָרה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 '봄비 때에'는 실상 '늦은 비의 시절'을 의미하니 팔레스틴에는 추수하기 전에 결실케하기 위해 오는 비다.
'번개를 내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비가 내릴 준비로 일어나는 번개를 하나님이 만들어주신다는 뜻이다.
성경은 자연 현상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립되는 것임을 가르친다.
'비'는 하나님이 주시는 자연계의 축복을 상징하지만 영적 은혜도 비유한다.
영적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성령의 감화를 이름이다.
이 귀절은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할 것을 강조한다.
우리에게 축복하실 이는 하나님밖에 없으니 그에게 부르짖으라는 것이다.
야훼 하나님 : 구원하시는 하나님
엘로힘 하나님 : 창조주 하나님
복수형태의 단수 - 엘로힘

스가랴 10:3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수염소들을 벌하리라(6485)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권고하여(6485) 그들로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

* 벌하리라, 권고하여(6485) 파카드


פָּקַד 스트롱번호6485
1. ~에게 가다.
2. 방문하다
3. 찾으러 가다
발음 / 파카드[ pâqad ]
관련 성경 / 살피다(출4:31), 보응하다(출32:34, 암3:2),계수하다(출30:12, 민1:44, 왕상20:15), 세우다(신20:9, 렘51:27, 느7:1), 잃다(삼상25:15),명령하다(대하36:23, 스1:2, 사34:16), 알다(욥5:24), 맡기다(욥34:13), 살피다(삼상17:18,욥35:15), 다스리다(시89:32), 벌하다(사13:11, 렘6:15), 돌보다(렘23:2), 갚다(호1:4), 벌을 주다(호2:13), 묻다(삼상20:6,18), 조사하다(삼하24:4), 점호하다(삼상14:17, 수8:10), 저주받다(왕하9:34), 찾아가다(삿15:1), 감추다(왕하5:24), 권징하다(욥7:18), 심판하다(욥31:14), 해치다(사27:3), 기억하다(렘3:16),생각하다(겔23:21), 마음에 두다(슥11:16),계산하다(출38:21), 이르다(출20:5), 조사받다(출38:25,26), 계수되다(민1:21, 4:36, 대상23:24), 없어지다(삿 21:3), 잃어버리다(왕상 20:39), 비다(삼상 20:25), 드리다(왕하 10:19), 만나다(잠 19:23), 형벌을 받다(사 24:22),징벌하다(사29:6), 검열하다(사13:4), 빼앗기다(사 38:10), 주관하다(창39:5), 정하다(삼상29:4), 삼다(왕하25:23), 위탁하다(창 39:4, 렘 40:7, 41:10), 감독하다(왕상11:28)관할하다(왕하25:22), 부탁하다(시31:5), 머무르다(사10:28, 렘37:21).
[명] 형벌(습 3:7),계수(출 30:13,14), 진영(민 31:13), 지휘관(민 31:48), 군대(왕하 11:15), 관리(왕하 11:18), 손실(삼상 25:21), 벌(민16:29), 명령(겔 38:8), 감독(대하 34:12), 감독자(대하 34:17), 수(삿 20:15,17).
구약 성경 / 225회 사용





스가랴 10:9
내가 그들을 열방에 뿌리려니와 그들이 원방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의 자녀와 함께 다 생존하여 돌아올찌라.
(새번역) 내가 그들을, 씨를 뿌리듯이, 여러 백성들 가운데 흩어 버려도, 그들은 멀리서도 나를 기억할 것이며, 아들딸과 함께 살아 있다가 돌아오게 될 것이다.









08-28-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귀 새끼(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질투(7068) / 

 קִנְאָה 스트롱번호7068

1. 질투,  2. 시기,  3. 열심
발음 / 키나[ qinʼâh ]
어원 / 706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의심(민 5:14), 질투(민 25:11, 사 11:13, 겔 35:11, 슥 8:2), 투기(잠 6:34), 시기(전 9:6), 분발(사 42:13), 의심(민 5:15, 25, 30), 질투심(민 25:11), 열심(왕하 10:16, 사 59:17, 겔 5:13), 열성(시 69:9, 사 26:11, 63:15).
구약 성경 / 43회 사용

* 7065. 카나(qânâʼ)

קָנָא 스트롱번호7065

1. 부러워하다,  2. ~를 부러워하다,  3. 열심을 내다.
발음 / zksk[ qânâʼ ]
관련 성경 / 의심하다(민 5:14,30), 질투하다(민 25:13, 시 106:16, 슥 1:14), 유별하다(왕상 19:10,14), 열심을 내다(겔 39:25), 시기하다(창26:14, 37:11, 민 11:29, 겔 31:9), 노엽게 하다(왕상 14:22), 부러워하다(잠 3:31, 23:17, 24:1), 분을품다(잠 24:19).
[명] 의심(민 5:14), 질투(신 32:21, 사 11:13), 질투심(민 25:11), 노여움(시 78:58).

분노(2534) /

חֵמָה 스트롱번호2534

1. 따뜻함,   2. 분노,   3. 독
발음 / 헤마[ chêmâʼ ]
어원 / 317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노(창 27:44, 시 37:8, 렘 23:19), 진노(레 26:28, 대하 34:21, 잠 16:14), 격분(신 29:23,28), 분(잠 15:18, 렘 42:18), 뜨거움(호7:5), 독(신 32:24, 33), 노함(사 27:4), 분노(겔 13:13, 슥 8:2), 진노(대하 28:9, 시 59:13), 분노함(욥 36:18), 분냄(시 90:7).
구약 성경 / 125회 사용

*3179.  יָחַם 스트롱번호3179

1. 뜨겁다,  2. 마음에 그리다
발음 / 야함[ yâcham ]
관련 성경 / 새끼를 배다(창 30:38, 41, 31:10), 뜨겁다(신 19:6), 따뜻하다(왕상 1:1, 전 4:11), 잉태하다(시 51:5).
구약 성경 / 6회 사용

스가랴 9장은 후반부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악인에 대한 심판과 메시아의 도래"에 관한 예언의 말씀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9:1-8. 수리아(아람), 베니게, 블레셋 등 유다 인방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
9:9-10. 평화의 왕의 내림과 그 평화.
9:11-12. 피로 말미암은 언약에 의한 구속.
9:13-17. 하나님의 백성의 승리와 축복.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원수인 이방국들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시면서도 이방인들도 구원에 동참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또한 메시야가 왕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언하시며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에게 영광이 임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속의 비밀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이 겸손하셔서 나귀 새끼를 타신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사역 말기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 새끼를 타심으로써 성취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겸손하심으로 구속을 이루시고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며 그들의 왕이 되심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늘 보좌 우편을 버리고 스스로 낮아지셔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처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겸손으로 구속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심(마태복음 11:29)
나귀 새끼를 타심(마가복음 11:7)

화평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으시겠다고 예언하심으로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전쟁이 사라지고 오직 평화와 안녕만이 임할 것을 약속하신 것으로, 메시야 시대에 임할 이러한 평화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화평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 사람에게 전해집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평화의 복음이 세상에 널리 전파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는 영적인 평화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화평의 복음(사도행전 10:36)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심(에베소서 2:16)


메시야의 겸손.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는 이 세상 권세를 가지고 임하시는 이가 아니고 도리어 지극히 미천한 자리에서 겸비를 그 처소로 하시는 분이다.
아담이 범죄하여 인류를 고난에 빠뜨렸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께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깊은 실연의 골짜기가 놓여지게 되었고,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조금도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사망 가운데 놓여 있는 상태를 구원할 수 없기에 하나님은 직접 인간의 자리에까지 내려오시는 겸손을 보이셨다.
인류를 구원하려는 그 구원자가 인류의 지극히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셨다.
인간의 자리에까지 내려오시는 것만도 말할 수 없는 겸손이요 비하인데, 하나님께서는 어느 인간들보다 비천한 상태에 태어 나지고 성장하셨다.
말 구유는 이 비천함을 가장 극대화시켜 보여 주는 물건이다.  
비천하게 태어나신 예수는 인간으로 처절한 수난을 받으셨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몸소 감당하셔야 했던 겸비요 겸손이었다.
예언서는 언제든지 이와 같은 메시야 곧 구원자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다.
메시야는 겸손히 인간의 몸으로 오셨고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왕으로 등극하셨다.
메시야의 탄생과 삶, 그리고 죽으심 모두는 하나님의 겸비하심 그 자체이다.
구원자 예수는 십자가 위에 수난을 당하심으로 사람과 하나님을 화목케 하여 신자의 마음에 진정한 화평을 건설하셨다.
전쟁과 무력으로 평화를 가져오시지 않았다.
몸소 비천해지고 겸손해짐으로 화평을 가져오신 평강의 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는 폭력이나 전쟁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메시야로 오신 예수의 평화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킨 평화이며, 모든 인류에게 본을 보이신 평화라고 합니다.
이 평화는 스스로 낮아져 희생하신 평화이므로 신자들의 평화는 겸손히 나를 낮추고 희생할 때 찾아올 것입니다.
나를 높이고 나의 이익을 추구하는 관계는 남의 희생을 통해 내가 유익을 얻으려는 이기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가장 비천한 말 구유에 태어나신 예수의 겸손과 낮아짐이 우리 삶에 적용될 때 신자들의 상태는 윤택해집니다.
비록 외적인 화려함과 세상적인 풍요로움이 조금 부족할지라도, 영적인 만족과 평화가 찾아올 수 있는 비결은 사랑과 긍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의 도라고 하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 여기 와서는 선지자가 신약 시대를 성립시키는 메시야의 내림을 예언한다.

여기 이른바 "시온의 딸"은 딸 같은 시온 곧, 약소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의 딸"이라는 말도 역시 같은 것이다. "네 왕"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는 공의로우며". 이것은 메시야께서 그 백성을 원수들의 무리한 침략 하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필경 공의를 발동해서 구원하여 주심을 의미 한다. 이 공의는 실제에 있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히우는 데까지 낮추사 그 백성의 죄 값을

담당하시므로 성립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라는 말씀이 따른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왕이시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겸손한데 떨어지므로 그 백성을 구원하신 겸손의 왕이시다. "나귀 새끼" 를 타신 것은 그의 겸비의 극치를 의미하는 참된 왕의 덕을 상징한다. 마 12:17-21 참조.


당나귀와 말의 차이점 | 유사한 용어의 차이점 비교 - 과학 - 2023

Morris Wright

당나귀 대 말 | 특징, 특성, 수명 | 나이에 따라 다른 이름 – 망아지, 1 년생, 콜트, 암말, 암말, 종마, 겔딩

말과 같은 포유류 (Equids)이기 때문에 당나귀는 말과 몇 가지 유사점을 공유합니다. 수명, 신체 크기 및 구조, 사람들 간의 관심이 다릅니다. 말과 당나귀의 용도에 따라 몇 가지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둘 다 한때 야생이었고 일부는 길들여졌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당나귀와 말은 길들여지고 있지만 여전히 일부 야생 개체군이 있습니다.

당나귀

당나귀는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어 나중에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보통 당나귀는 최소 30년에서 최대 50년까지 산다.
품종에 따라 크기 (키 80 ~ 160 센티미터)와 색깔이 다릅니다.
그들은 길고 뾰족한 특징적인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폴 (머리 꼭대기)과 시들기 (어깨 사이 융기) 사이에는 볏을 통해 일련의 머리카락이 있으며 꼬리를 제외한 나머지 신체의 머리카락보다 약간 길다.
당나귀는 야생의 무리가 아니라 혼자 산다.
그들은 서로 의사 소통하기 위해 큰 소리로 끙끙 거리며 (브레 이잉이라고 함) 말합니다.
하루 동안 당나귀 몸무게의 약 1.5 %의 건조물 무게가 필요합니다.
당나귀는 일하는 동물로서 인간에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짐을 나르는 것뿐만 아니라 염소를 지키는 데에도 당나귀는 수년 동안 인간에게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3000 년에 처음으로 길 들여진 당나귀에 대한 증거가 있습니다.

유럽, 아시아 및 북미의 말 화석은 세계에서 초기에 분포했다는 증거를 제공합니다.
그들은 25-30 년의 수명을 가진 더 큰 포유류입니다.
말은 품종, 때로는 영양 및 부모 개체군에 따라 털 색깔, 털의 표시 및 몸 크기가 다양합니다.
귀는 뚜렷하게 길고 뾰족하지 않지만 폴과 시들 사이의 털은 더 길다.
말의 꼬리털은 상당히 길고 폭포처럼 떨어집니다.
연령대가 다른 말은 다른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Foal- <1 세, 1 살 ~ 2 세, Colt- 4 세 미만 수컷, 암말-4 세 미만 암컷, Mare- 성인 암컷, 종마-성인 수컷, Gelding- castrated 남성). 말은 야생의 무리에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특유의 징징 거리는 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특히 의사 소통을 위해 야생에서 중요합니다.
말은 매일 몸무게의 2 – 2.5 %의 건조물 무게가 필요합니다.
경제적 가치가 더 큰 말은 인간을 가족 애완 동물, 사냥감 동물, 때로는 음식으로 제공합니다. 또한 레크리에이션 활동에서 말은 매우 잘 사용되었습니다.

당나귀 대 말

두 동물의 기원은 다르며 당나귀는 아프리카에서 왔고 말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당나귀는 몸이 약간 작은 말보다 오래 산다.
말의 일일 필요량은 당나귀보다 조금 더 높습니다.
말은 당나귀보다 경제적 가치가 더 높고 인간의 관심을 더 많이 끌고 있습니다.
경마는 매우 인기가 있고 사람들은 전세계 경주에서 말을 위해 도박을하지만 당나귀에게는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경제적 가치가 다릅니다.
말의 미학적 가치는 당나귀의 미학적 가치보다 더 높습니다.
어쨌든, 수컷 당나귀와 암컷 말 사이의 성적 교미는 불임 노새를 초래합니다.
그것들은 일하는 동물입니다.
그것은 당나귀와 말의 중요성입니다.








스가랴서의 기본 이해



포로 귀환 세대의 신앙 독려를 위한 성전 재건 완성과 선민의 종말론적 축복의 비전 제시

​구약 성경에 포함된 선지서들은 애가서를 포함하여 모두 17권이다.

17권의 선지서들 중에서 B.C. 538년바사 왕 고레스의 포로 귀환 허가 칙령이 반포된 이후 즉 포로 귀환 시대에 기록된 선지서는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의 세 권이다.

이 세 권의 책들은 각 예언이 선포되고 기록된 시기, 각자의 예언에 포함된 미래의 사건들의 내용과 범위, 각 선지자가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시대적 문제 상황이나 그에 대한 메시지, 신학적 관점이나 문학적 서술 방식들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이 세권의 책들은 모두 다 근본적으로는 포로 귀환 시대 이후를 살아가는 소위 이스라엘 신세대를 향하여 그들의 초라하면서도 고단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 선민의 영광스러운 미래의 비전(vision}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여호와 절대 신앙(信仰)의 순결과 열정을 굳게 붙잡고 잃지 않도록 촉구하거나 격려하기 위하여 쓰여졌다는 점에서 큰 틀을 같이 하고 있다.

​이 세 권의 책 중에서 본서 스가랴서는 가장 긴 책으로서 세 권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포로 귀환 시대의 세 선지자의 활동 연대 또는 이들이 기록한 세 선지서의 기록 시기는 각각 학개 B.C. 520년 9-12월 사이의 수개월, 스가랴B.C. 520년 11,12월에서 시작하여 B.C. 470년까지의 50여년, 그리고 말라기 B.C. 432년 무렵의 수개월이다.

이렇게 볼때 스가랴서는 포로 귀환 시대의 세 권의 책 중에서 가장 오래 활동한 스가랴 선지자가 기록한 가장 긴 책이며 또한 기록 연대상으로도 서로 거의 90여년의 차이가 나는 학개서와 말라기서의 중간에 위치한 책임을 알 수 있다.

​학개서와 말라기서는 각각 성전 재건 사업의 중단이나 포로 귀환 세대의 신앙 열정의 퇴조와 타락 등의 단편적 문제에 대한 구체적 지적과 그에 관한 직설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반면 스가랴서는 포로 귀환 세대가 처한 여러 문제를 포괄적으로 망라하고 그에 대하여 궁극적이고도 암시적인 메시지를 제시하고 있어서 뚜렷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스가랴서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결정적 키워드는 묵시문학이다.
스가랴서는 에스겔, 다니엘과 함께 구약 성경의 대표적인 묵시 문학서(默示 文學書)인 것이다.
주로 종말론적 사건과 관련한 기이하고도 생동감 넘치는 상징적 이미지들을 등장시키고 난해한 방식으로 구성하여 제시하는 묵시 문학서로서의 특징이 스가랴서 전반에서 발견된다.

​스가랴서는 시간상 서로 40년 이상의 격차가 있고 그 직접적 시대 배경도 서로 완연하게 다른 전반부 제1-8장과 후반부 제9-12장 등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하여 스가랴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전 · 후반부 각각에 대한 분석과 양자 모두에 대한 동시적 이해가 동시에 필요하다.

전반부 제1-8장은 B.C. 520년 소위 스룹바벨 성전 즉 제2성전 재건 사업이 재개된 직후를 그 직접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B.C.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한 후에 약 130여년을 홀로 남아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던 남왕국 유다마저 B.C. 586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략을 받아 끝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많은 백성들이 바벨론 제국 각처로 강제 이주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멸망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선민 이스라엘 신정 국가(神政 國家)는 역사적 단절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B.C. 538년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 새로이 등장한 바사 즉 페르시아 제국의 초대 왕 고레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포함한 각 속국의 모든 강제 이주 포로들이 자유롭게 각자의 조국으로 돌아가 살 수 있도록 허가하는 조서를 내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할 수 있게 되었다(스 1:1-4).
이는 우연한 역사의 산물이 아니라 이미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부터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 아모스 등의 여러 선지자가 타락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여호와께서 징계하신 후에 끝내 버려두지 않으시고 무조건적 은혜로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을 거듭 약속하여 주신 예언 말씀의 성취였다.

​이에 그 다음 해인 B.C. 537년 총독 스룹바벨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제1차로 대략 42,360명의 바벨론 포로가 본국으로 귀환했다(스 2:64). 이들은 본토에 돌아오자마자 무엇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제단을 쌓고 새로운 예루살렘 제2성전(聖殿)의 기초를 놓았다. 이는 제1차 포로 귀환 이듬해인 B.C. 536년의 일이었다.

​이것이 약 70년 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Babylon Captivity)동안 단절되었던 선민 이스라엘의 신정 국가 역사 재개의 시발점이었다.
그러나 신정 국가 재건을 위한 첫걸음으로서의 새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 사업은 유다 공동체가 예루살렘 중심으로 본토에 재정착하여 강력한 경쟁 집단으로 등장하게 될 것을 꺼려하는 사마리아와 인근 국가들의 집요한 방해로 중단되었으며 이러한 상태로 약 16년간이나 방치되었다.

​그러다 오랜 침묵을 깨고 B.C. 520년학개 선지자가 등장하여 성전 재건 사업을 다시 시작할 것을 부르짖었고, 스가랴 선지자는 학개보다 2개월 후에 등장하여 두 선지자 등이 함께 성전 재건 사업을 강력하게 독려함으로써 재개된지 약 4년 후인 B.C. 516년에 마침내 제2성전의 완공을 보게 되었다.

​본서의 전반부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정황 가운데서 예루살렘 새 성전 재건 사업이 이제 막 다시 시작되었을 때 주어졌던 말씀이다.
즉 스가랴는 신정 국가의 중심일 수밖에 없는 성전 재건 사업을 무관심과 나약함으로 인하여 약 16년 동안이나 방치했었다가 학개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이제야 막 다시 성역(聖投)을 재개한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제2성전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필히 완공될 수 있다는 신념을 불어 넣어 더이상 머뭇거리는 일 없이 새 성전의 준공이 실현되는 그 순간까지 박차를 가하도록 독려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예루살렘 새 성전 재건 사업은 단지 선민의 새로운 출발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임재의 상징적 처소로서 성전이 궁극적으로 예표하는 바 메시야의 도래와 그의 왕국을 맞이하는 데 진정한 근본적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스가랴는 자신의 책 전반부에서 이러한 시대를 향하여 주신 하나님의 환상과 약속의 말씀들을 통하여 비단 소위 스룹바벨 제2성전이 필히 다시 완공될 것이라는 사실 뿐만 아니라 그 성전이 예표하는 메시야의 도래와 그 분으로 말미암아 선민들이 영원히 평화와 번영을 구가할 선민의 새 왕국 또한 분명히 이루어질 것임도 가르쳐 준다.

​그리하여 이제 는 당시의 선민들 스스로가 건물로서의 예루살렘 새 성전의 준공에 그치지 않고 당시의 선민 포로 귀환 시대의 각자가 명료한 역사 의식과 원대한 소망을 갖춘 진정한 여호와의 백성이요 신앙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근본적 바탕까지 갖추도록 격려하고 있다.

후반부 제9-14장
은 앞선 제1-8장과 문체와 내용에서 현저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앞선 제1-8장이 당시의 선민 공동체가 직면한 실제적 문제인 성전 재건과 금식 관련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 제9-14장묵시적이고 종말론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특별히 제11장은 메시야를 상징하는 참 목자의 행적과 백성들의 배척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제9-14장은 B.C. 516년 제2성전, 곧 스룹바벨 성전이 완공된 지 약 40여년이 지난 후인 B.C. 480-470년경에 기록되었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관해서는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본서의 본문과 본서 후반부보다 30-40년 뒤의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말라기서를 참고하여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다.

​성전이 재건된 이후에도 포로 귀환자들은 확고한 생활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최장 70 여년의 공백 후에 돌아온 귀환 세대는 비록 자신들의 본토에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냉엄한 현실상으로는 엄연한 소수의 비주류 집단에 불과하였다.
자신들이 땅을 비울 동안 이런 저런 연유로 유다 본토를 차지한 이방인들이나 현지 혼혈인들의 행정, 치안, 경제적 잔재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스룹바벨 제2성전이 준공되었지만 귀환민들의 현실 생활은 특별한 극적 반전 이나 뚜렷한 기약없이 고단하고 초라한 것이었다.

​포로 귀환 공동체가 본토에 빠르고도 강력한 재정착을 이루지 못한 가장 일차적 이유로는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 아직 본토에 돌아와 온전히 재정착하지 못한 당시의 유대인 공동체를 온전히 하나로 묶어주고 안정적으로 지도할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다른 제사장들이 있긴 있었으나 그들 대부분은 혈통상으로 정통성을 의심받는 자들이었다.

​바사 제국 중앙 정부가 왕위 승계 등의 문제로 권력 다툼에 휩싸이자 전 제국에 대한 장악력이 크게 악화되었고 구 앗시리아 지역과 애굽 중심으로 반란 사건이 거듭되었다.
또 뚜렷한 반란이 아니어도 각 지역의 파견 총독들과 토호들이 이런 저런 명분으로 수탈과 세력 다툼을 일삼아 제국 내의 질서가 무너졌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비록 본토로 돌아온 귀환민이라고는 하지만 당장은 소수의 재정착 공동체에 불과한 귀환민들은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외적 난관과 도전보다 더욱 큰 문제는 내적 침체와 회의의 확산이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 등의 격려로 예루살렘 새 성전이 완공되었어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자 포로 귀환 세대의 신앙의 열기는 서서히 식어가고 초라하고 고단한 일상에 함몰되어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제 선민으로서의 긍지와 선민의 빛나는 미래에 대한 신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자신들의 하나님 곧 선민의 구원자이시자 우주와 역사의 주권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순결과 열정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자체와 그분의 백성으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Identity)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시대, 곧 자기 비하와 체념에 물들어 여호와 신앙마저 상실해 가는 당대의 백성들을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시 스가랴 선지자에게 당신의 말씀을 외치게 하였다.

​ 여호와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하여 당장 선민 자신들은 초라하고 왜소하고 주변 이방인들은 감히 넘볼 수조차 없을 만큼 기세 등등한 것 같지만 세계 역사를 홀로 주관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새삼 각성시키셨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은 오직 당신의 백성인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될 저 종말론적 메시야 왕국을 이 땅에 세우시기 위하여 온 세상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바 최종 승리는 결국 선민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근본적 진리이자 살아 계신 하나님의 거듭된 약속을 다시 일깨우셨다. 그럼으로써 위축되고 침체된 포로 귀환 시대의 백성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메시야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와 세상 끝날의 결정적인 구속사적 사건들을 중심으로 하여 이를 통하여 선민이 누리게 될 복된 미래의 비전을 펼쳐보이셨다. 최후의 영원하고도 완전한 축복과 상급을 확신하는 자는 결코 도중의 장애와 아픔에 굴하지 않는 법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막막해 보이는 당장의 현실 앞에서 위축되고 침체되었을 뿐 아니라 그저 일시적 안일과 세속적 이익을 쫓아 다니며 여호와 신앙의 열정과 순결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당신의 백성들에게 저 영원하고 완전한 종말론적 미래의 비전을 보여주심으로써 현실을 뛰어넘어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굳게 지킬 근본적 힘을 주셨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스가랴서 전 · 후반부는 비록 직접적 시기와 세부 상황은 다소 다르더라도 모두 다 각 때에 맞추어 포로 귀환 세대의 신앙을 독려하기 위하여 주어진 말씀들임을 발견하게 된다.

스가랴서의 내용 구조

스가랴서는 기록 시기를 기준으로 크게 나누면
제1-8장의 전반부
제9-14장의 후반부 등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내용 또는 소재를 기준으로 보다 상세히 나누면
제1-6장의 전반부
제7-8장의 중반부 내지는 삽입부
제9-14장의 후반부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는 보다 정확한 파악을 위하여 세 부분으로 나누어 그 내용 구조를 살펴보기로 한다.

​전반부 제1-6장은 스가랴가 B.C. 520년 11, 12월 무렵 이제 막 다시 재개된 예루살렘 새 성전 재건 사업을 독려하기 위하여 하룻밤 사이에 받은 여덟 환상의 기록이다.

앞 머리의 서론적 회개 권면(1:1-6)과 일종의 부기적 성격을 가진 끝머리의 일련의 환상 예언 기사를 마감하는 대제사장 면류관 관련 기사(6:9-15) 사이의 1:7-6:8절에서 여덟 편의 신기하고도 웅장한 환상이 계속 이어진다. 이 전반부 기사의 핵심인 여덟 환상들은 이제 겨우 재개된 새 성전 재건 사업이 다시는 중단되는 일 없이 준공되는 그날까지 계속되도록 독려하기 위하여 주어진 묵시 문학적 비전들이다.

​이 여덟 환상 예언은 예루살렘 새 성전 재건 사업의 당위성을 직설적으로 설교하거나 그 새 성전의 준공과 관련된 사항들만을 사실적, 단편적으로 예언하지 않는다. 이 여덟 환상 예언들은 하나의 독립된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소위 스룹바벨 제2성전의 준공 사건은 물론 이와 관련하여 당시 선민들이 명심하여야 할 여러 교훈들, 나아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함께 계심을 보여주는 여호와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신약적 축복, 나아가 영원한 종말론적 축복까지를 망라하여 상징적, 포괄적, 입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당시의 포로 귀환 세대들이 자신들 시대의 역사적 소명으로서 수행하고 있는 예루살렘 새 성전 재건 사업의 의의를 근원적으로 깨닫고 자발적으로 동참하도록 이끌고 있다.

​다음은 이 스가랴서 전반부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여덟 환상 예언들의 내용을 한 눈에 용이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요약 정리한 것이다.

제1환상 - 붉은 말을 타고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와 세 말의 환상(1:7-17)

여전히 질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새 성전 재건 사업까지 방해를 받던 선민과 달리 대적들은 번성을 누리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선민을 핍박한 열방을 심판하고 예루살렘 성전과 성을 회복시켜 주실 것임을 보여줌.

제2환상 - 네 뿔과 네 대장장이의 환상(1:18-21)

힘, 권력, 교만 등을 상징하는 뿔이 나타내는 선민의 대적들을 하나님이 보내신 대장장이들이 파괴하는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선민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사방의 모든 악한 세력을 심판하여 멸하실 것임을 보여줌.

제3환상 - 측량줄을 잡은 소년의 환상(2:1-13)

예루살렘 성전은 물론 예루살렘 시가지도 다시 재건될 것과 예루살렘이 번영하며 그 가운데 여호와께서 임재하심으로 안전을 누리게 될 것을 보여줌. 또한 선민을 압제하는 자들을 심판하고 그 가운데서 선민을 구원하실 것을 보여줌.

제4환상 -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관한 환상(3:1-10)

대제사장 여호수아로 대표되는 선민의 죄를 하나님께서 사하여 정결하게 하셨음과 장차 ‘싹’으로 상징된 한 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 종말론적 사죄와 축복을 보장하실 것임을 보여줌.

제5환상 - 순금 등대와 두 감람나무의 환상(4:1-14)

일차적으로는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케 하신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의해 새 성전이 반드시 재건될 사실을, 궁극적으로는 신약 성전인 교회가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게 될 것과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생명력을 유지하게 될 것을 보여줌.

제6환상 -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5:1-4)

이스라엘이 비록 하나님의 선민이기는 하나 하나님께서 포로 귀환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바, 특히 예루살렘 새 성전 건축의 역사적 소명을 망각하고 계속 범죄한다면 두루마리 곧 율법에 기록된 대로 저주를 받게 될 것을 경고함.

제7환상 에바 안에 앉은 여인의 환상(5:5-11)

에바 안에 앉은 여인은 범죄한 선민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인이 앉은 에바가 날개를 가진 두 여인에 의해 시날 땅으로 옮겨진 것은 만일 포로 귀환 세대도 죄악이 관영하면 그 조상들이 관영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처럼 그들도 이방 땅으로 흩어지게 될 것임을 경고함.

제8환상 두 구리 산 사이에서 나온 네 병거의 환상(6:1-8)

선민의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통쾌하고도 장엄하게 시행될 것임을 보여주어 사탄의 세력에게 핍박을 받는 당시대의 백성들은 물론 모든 성도가 사탄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최후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줌.

중반부 제7, 8장
B.C. 518년 11, 12월 경 벧엘인들이 예루살렘 함락 이후 성전 파괴를 애도하며 불문율처럼 지켜오던 제5월의 금식일과 기타 기념 금식일들을 계속 지켜야할지에 대하여 제기한 질문과 이에 대한 답변을 기록하고 있다.
이 때는 앞서 전반부에 기록되어 있는 스가랴가 하룻밤 사이에 여덟 환상의 예언을 받아 선포한 사건으로부터 약 2년이 경과한 시점이었다.
그리고 B.C. 520년 재개되어 B.C. 516년 준공된 스룹바벨 제2성전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였다.
근 16년 동안이나 유야무야 중단되었던 예루살렘 새 성전 재건 사업이 재개되자 포로 귀환 세대 사이에서 다시 영적, 종교적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벧엘 지역에 재 정착한 사람들 중심으로 본래 모세 율법에는 규정되어 있지 않았지만 예루살렘 함락 이후 줄곧 지켜오던 제오월과 칠월의 금식일을 이제 다시 예루살렘 새 성전이 준공되는 상황에서 계속 지 켜야 하는지에 대하여 스가랴에게 질문을 제기하였다.
이에 대해서도 스가랴는 그 특유의 스타일대로 단편적, 직접적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스가랴는 먼저 이스라엘 신 · 구 세대의 형식적, 인본주의적 신앙 행태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의 뿌리깊은 악습을 지적한다.
그리고 현재 내외의 갖은 시련과 도전에 시달리고 있는 포로 귀환 세대의 완전한 회복과 영 · 육간의 풍성한 축복을 약속하며 저들이 지금 당장 직면하고 있는 성전 재건 사업에의 전 공동체적 동참과 완성을 다시 한번 독려한다.

​그리고 끝으로 선민의 모든 금식일(禁食日)이 축제일(祝察日)로 변경되고 자신들 선민들은 물론 세계의 이방인들마저도 모두 회개하여 결국 온 세상이 선민을 중심으로 여호와를 경배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즉 스가랴는 벧엘인들이 제기한 절차적, 형식적 문제에 대한 단편적 답을 주기보다는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당시의 선민들이 방법론적, 형식적 신앙 의식에 앞서 원대한 종말론적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한 참 신앙의 실천이라는 보다 중요하고도 우선적 문제에 눈뜨도록 가르치고 있다.

​후반부 제9-14장
전반부 및 중반부의 시대 배경과는 40여년의 시차가 있는 B.C. 480-470년을 배경으로 주어진 말씀으로서 훗날 선민 앞에 등장하실 한 겸손한 왕이시자, 선민을 위한 유일한 참 목자이신 메시야를 중심으로 선민이 누리게 될 복된 미래의 비전에 대한 일련의 예언 선집(選集)이다.
이 무렵 대다수의 포로 귀환 세대는 다시금 깊은 영적 회의와 불감증에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B.C. 516년 스룹바벨 제2성전이 준공되었지만 그것은 그저 단절된 하나의 사건이었을 뿐 포로 귀환 세대의 영 · 육간의 현실은 별반 달라질 것이 없었다.
오히려 포로 귀환 세대는 여전히 정치적 · 군사적 위협에 쫓기며 경제적으로도 뾰죽한 타개책이 없이 예루살렘과 주변의 기존 이방 토착민들의 눈치를 보며 근근히 살아가야 하는 별다른 희망 없는 삶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이내 포로 귀환 세대의 여호와 신앙의 열정은 사그라지고 오히려 과거 예루살렘 멸망 이전 시대의 선민들처럼 심각한 영적, 사회적 타락의 징후들마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런 시대 상황에 직면하여 스가랴는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보여 주신 훗날 선민에게 찾아오실 한 겸손한 왕이시자 참 목자이신 메시야를 중심으로 선민들이 누릴 수 있게 될 복된 미래 즉 선민의 영원한 안정과 평화, 승리와 복락의 종말론적 도래의 비전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 신들의 본토에 돌아왔으면서도 아직도 쫓기는 철새처럼 제대로 뿌리내려 정착하지 못한 당대의 선민들을 향하여 선민의 복되고 영원한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이제 자신들이 돌아온 땅에서 어떤 난관과 역경에도 주저앉지 말고 과감히 일어나서 새역사를 창조해 나가도록 격려하고 있다. 여기서도 스가랴는 당대의 선민들에게 당장의 달콤한 안일과 보상을 약속하거나 직셜적, 당위론적 설교보다는 선민의 영원한 종말론적 비전이라는 궁극적이고도 근본적인 진리를 제시하여 자기 시대의 포로 귀환 세대가 이를 진정 깨닫고 사모하면서 굳건한 믿음 위에서 자발적이고 역동적인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다.

​후반부는 선민이 누릴 복된 종말론적 미래와 선민에게 약속된 이 복된 미래는 오직 선민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서 세우신 왕이시자 목자로서의 메시야의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다. 따라서 이 후반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복된 종말론적 미래를 위 하여 세우신 유일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 사역에 대한 예언들을 담고 있다. 그리하 여 스가랴서는 구약성경에서 이사야서 다음으로 메시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가 장 많이 담고 있는 책으로 손꼽힌다. 메시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400여년 전에 주어진 이 스가랴의 주요 예언들은 이미 그대로 성취되었으며 또한 성취되어 가 고 있는 과정에 있다. 따라서 이미 스가랴서의 예언이 부분 성취된 시점의 신약 시대를 사는 신 약 시대의 여호와의 백성들인 우리 성도들은 더욱 더 우리가 여호와의 선민으로서 누리게 될 복 된 영원한 종말론적 미래에 대하여 크고 놀라운 확신을 가질 수 있다.

​후반부는 공히 선민 이스라엘을 위해 여호와께서 세우신 왕이시자 목자로서의 메시야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한 육적 선민 이스라엘과 영적 선민인 신약 교회의 복된 미래를 말하면서도 예수의 초림과 수난 동 예수의 지상 사역에 치중한 제9-11장과 예수의 숭천 이후의 신약 시대와 세상 끝날의 몇몇 핵심 사건을 주로 부각시킨 제12-14장의 두 부분으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이와 같은 후반부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그 내용 전개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겸손한 왕, 참 목자이신 메시야의 지상 사역과 선민의 복락

원론적, 궁극적 차원에서의 이방 심판과 선민의 안전 대조(9:1-8)

한 겸손한 왕의 도래와 통치 및 여호와께서 선민에게 주실 복락(9:9-17)

유다 지파를 통한 선민 구원과 이방 열국 사이에서의 선민 소집과 인도(10:1-12)

선민이 미워할 참 목자의 행적 및 선민 대중과 한 악한 목자의 멸망 예언(11:1-17)

메시아의 수난 이후와 세상 끝날의 사건들을 통한 선민의 복락

종말론적 관점에서의 열국의 침략과 선민 보존과 승리의 삼중 예언(12:1-9)

성령 강림에 의한 예루살렘의 애통과 온 땅 모든 족속 각각의 회개 예언(12:10-14)

선민의 영적 고양과 목자 상실 후의 연단 등 선민 구원 과정의 핵심 사건들(13:1-9)

여호와의 날의 열국의 예루살햄 침략 및 천지 대격변과 예루살렘 평안의 완결(14:1-11)

여호와의 날의 열방의 심판과 여호와 경배 정착 및 선민의 땅의 성화의 완결(14: 12-21)

​스가랴서 전반에서 거듭 발견되듯이 스가랴는 자기 시대 선민들이 부딪힌 모든 개별적, 구체적 문제 상황들에 대하여 단편적, 직설적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궁극적 근원적 해결책으로서 여호와께서 선민을 위하여 예비하신 이 세상 끝날의 영원한 축복에 대한 종말론적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를 진정으로 깨달은 선민 각자가 원대한 구속사적 비전 위에서 스스로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근본적 해답과 위로를 전하고 있다. 오고 오는 시대의 모든 여호와의 백성들도 모두 다 이 종말론적 비전 위에 우뚝 설 때 자기 시대의 고난과 모순을 구속사의 한 과정으로 인식하고 이겨내는 동시에 각자의 시대적 사명을 묵묵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생의 근원적 좌표와 지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미 2000년 교회사의 수많은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이러한 종말로적 비전 위에서 위대한 소망을 품고 승리와 영광의 삶을 현실로 실현하였던 것이다.

중세의 한 수도자는 스가랴서를 포함한 구약 예언서에 기록된 메시야 관련 예언들 즉 우리 인생에게 구원과 축복을 가져오실 유일한 왕이요 목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들을 가리켜 역사의 어둠 위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작은 별들이라고 묘사하였었다.

실로 구약 예언서 곳곳에 기록된 이 유일하고도 완전한 인생의 구원자에 대한 약속은 그 옛날 구약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가혹하고도 길었던 시련과 역경을 이기게 해주는 소망의 빛이었다. 더우기 이제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구원에 대한 예언의 말씀 중 일부가 이미 성취되었고 이제 세상 끝날의 완전하고도 영원한 성취를 향하여 실현되어 가고 있는 시대를 사는 오늘날 성도들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대보다 더욱 더 밝게 빛나는 이 예언의 말씀을 바라봄으로 그 어떤 시대와 세상의 어두움 속에서도 자신의 인생 길을 바르고 기쁘게 걸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스가랴 메시지 요약

1. 역사의 주관자이신 전능하신 하나님.

​포로기 이후의 예언서인 동시에 성전 재건 촉구와 격려란 공동의 주제를 가진 학개서와 본서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신명(神名)은 ‘만군의 여호와’ 즉 ‘여호와 체바오트’이다. 이 신명이 학개서에서는 10회 사용되었고, 본서에서는 47회 사용되었다. 학개가 전체 두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본서가 전체 열네 장으로 이루어진 사실을 감안하면 ‘만군의 여호와’라는 신명이 학개서에서 10회나 사용된 것은 본서에 비해서 많이 사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튼 학개서와 본서에 ‘만군의 여호와’라는 신명이 이렇게 많이 사용되 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 문화권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의 속성과 특징을 반영하며, 따라서 학개서나 본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이 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는 하늘의 천체나 영적 존재인 천군 천사 및 지상의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면모를 강조할 때 주로 사용되는 신명이다. 본서에서 이러한 용례를 지니는 신명을 자주 사용한 것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유일한 참신이심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실로 천지와 그 안의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또한 인류의 역사를 당신이 계획하신 대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미래의 일을 정확하게 예언하실 수 있고, 또한 그러한 하나님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된다. 본서에서는 과거 일차 재건이 좌절된 적이 있는 성전의 완공과 그 후에 선민에게 주어질 영광 및 성전의 원형이신 메시야의 도래와 희생, 전우주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과 신약의 남은 자인 성도의 종말론적 구원 등에 대한 무수히 많은 예언이 선포된다. 그리고 이러한 예언의 궁극적 주체가 ‘만군의 여호와’이심을 거듭 밝히고 있다. 이는 본서 에서 선포되는 예언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에 대한 보증이 된다. 특별히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된 본서의 예언들 중 일부는 이미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알고 있다. 이는 결국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된 나머지 예언들, 특히 종말론적 예언들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하여 준다.

2.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성결한 삶.

​본서에는 선민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징계를 받았던 과거의 사실과 더불어 여호와를 거부하는 열방이 장차 멸망당하게 된다는 미래의 일들이 여러 차례 지적 또는 예고된다. 이는 일차적으로 본서 기록 당시의 선민들로 하여금 과거 범죄함으로 심판받은 조상들의 불신앙적인 삶의 선례를 따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더 나아가는 주변 이방 나라들의 불신앙적인 행태에서 벗어나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경건하고 성결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신앙적인 삶을 살 때에만 여호와의 축복이 회복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를 ‘너희는 내게 돌아오라 …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란 약속의 말씀으로 보증하신다(1:3). 그리고 본서는 궁극적이고 항구적인 성화(聖化)가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완결된다는 예언으로 마감된다(14:20,21). 이러한 종말론적 거룩함에 참여할 수 있는 자는 바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성결한 삶을 사는 자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궁극적인 축복을 바라보는 자는 현재 자신의 주변에서 범람하고 있는 죄악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으며 선을 행하는 데서 오는 고난을 극복하는 데 힘쓴다. 또한 거룩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더디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데 대해서도 초조해 하지 않고 꾸준하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

​3. 형식적인 신앙을 넘어서는 참된 신앙의 추구.

​본서 제7장과 제8장에는 벧엘 사람들이 스가랴에게 나와서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관련하여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금식일을 성전이 재건되는 이 시점에도 계속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이에 대한 여호와의 답변이 나온다. 그러나 여호와의 답변은 금식일 준수 여부에 대한 직설적인 대답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벧엘 사람들이 질문을 계기로 하여 오히려 선민 사회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는 형식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행태 등과 같은 여호와에 대한 불순종의 악습을 지적하셨다. 그리고 과거 선민의 조상틀이 멸망한 것이 바로 이러한 왜곡된 신앙 행태 때문임을 밝히고 이러한 전철을 밟지 않도록 촉구하셨다. 또한 선민을 위한 충분한 신앙 규범으로서 이스라엘 멸망 이전에 주신 말씀을 제시하셨다(7:7). 뿐만 아니라 이 말씀에 근거한 참된 신앙을 추구할 때 주어지게 될 여호와의 임재와 선민의 재번성도 약속하고 있다(8:4-8). 즉 여호와께서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성문에서 진실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와 같은 여호와가 미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여호와 절대 신앙에 근거한 공의와 사랑을 실생활 가운데 행동으로 옮기기를 촉구하시며 독려하시는 것이다(9:16,17). 또한 이러한 실천적 신앙을 가질 때 선민 패망 기념 금식일이 축제일로 변화된다는 비전도 제시하셨다(8:18,19). 이는 하나님께서 실제 삶 가운데는 악을 행하면서도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을 얼마나 혐오하시는지와 더불어 이와 대비되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며 실현하는 역동적 신앙이 얼마나 고귀한 가치 를 지니는지를 알게 하며 바른 행동이 뒤따르는 참된 신앙을 가질 것을 다짐하게 한다.

4. 메시야의 도래와 수난.

​그리스도의 초림과 지상 사역 및 승천 이후에 기록된 신약 성경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에 기록된 구약 성경의 근본 주제 역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죄인된 인간의 구원으로 축약될 수 있다. 그리하여 구약 성경 중에도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예언과 그 의미가 매우 다양한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구약 성경 중에서도 이사야서는 가장 다양하고 선명하게 그리스도의 면모와 사역에 대한 예언을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사야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본서에도 구약의 어떤 책에서 보다도 풍부하게 장차 도래하실 그리스도의 면모와 사역이 선명하게 예언되고 있다. 특히 본서에는 초림하여 인류 구속 사역을 수행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마지막 순간을 아주 선명하게 예언하고 있다. 예를 들면, 9:9에는 그리스도께서 겸손한 왕으로서 나귀 새끼를 타고 백성들 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이 예언된다. 이 예언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실 때에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거민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여기고 환영함으로 성취되었다(마 21:4,5 ; 요 12:14-16). 또한 11:12,13에는 참 목자가 품삯으로 은 삼십을 받으며 그 돈이 토기장이에게 던져질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되고 있다. 이 예언은 가룟 유다가 그리스도를 은 삼십에 팔고 죄책감을 못이겨 그 돈을 여호와의 전에 던진 것을 제사장들이 나그네의 묘지로 쓰기 위하여 토기장이의 밭을 구입하는 데 사용함으로 성취되 었다(마 27:3-10).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창으로 허리를 찔려신 사건(요 19:37) 역시 12:10 예언의 성취였다. 이와 같이 본서가 메시야의 초림과 그의 사역을 예언하되 특히 수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3위 하나님이신 성자(聖子)께서 성육신하여 고난당하며 치욕스러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결쿄 우연이 아니라 태초부터 정해 놓으신 여호와의 구속 계획에 따른 것임을 명확하게 전하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본서는 구속사의 획기적 전환점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수난을 가장 직접적으로 예언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구원을 받도록 인도하는 놀라운 가치를 지닌 책이다.

5.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다스릴 겸손한 왕으로서의 메시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주역이었던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대한 언급들이 나온다(3:1-10 ; 6:9-14). 그 가운데 6:9-14에는 여호와께서 스가랴에게 백성들로부터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수아에게 씌울 것을 명령하시는 내용이 소개된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호수아는 바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즉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것은 미래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실 것을 예표하며, 여호수아가 면류관을 쓰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시는 왕이 되실 것을 예표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광된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자이신 그리스도는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세상의 통치자와 달리 겸손하신 면모를 보이신다. 이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여호수아가 '내 종 싹’으로 묘사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여기서 '내 종'이라는 표현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겸손하게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하는 종으로서의 면모를 보이실 것임을 알게 한다. 그리고 '싹’이라는 표현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보잘 것없는 면모를 보이실 것을 나타낸다. 실로 그리스도는 온유한 평화의 사람이었다(9:9). 또한 채찍에 맞고 거절 당하고 배신당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는 겸손의 사람이었다(13:7). 이처럼 본서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이나 인간의 생각과는 달리 순종을 미덕으로 삼는 종처럼 겸손하 게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속 사역을 묵묵히 감당하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6. 영원토록 만민으로부터 경배 받으실 여호와.

​전체의 절정(Climax)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여호와의 날에 발생할 일들을 예언하는 본서의 마지막 단락인 14:12-21 부분이다. 여기에는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던 열방의 세력들에게 초 자연적인 대재앙을 내리신다는 사실(14:12-15)과 더불어 그 날 이후에 열방의 남은 자들이 여호와를 경배하며(14:16-19) 선민의 땅 전체에 보편적이고도 항구적인 성화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예언된다(14:20,21). 즉 본서는 이 세상에 모든 악이 없어지고 여호와께서 세세토록 세계 만민에게 경배 받을 종말의 영광스러운 상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맺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최대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성도에게 이상적인 세계를 회구하는 벅찬 소망을 갖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망은 성도들에게 지금 비록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악과 타협하지 않는 거룩한 삶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할지라도 고난에 좌절하지 않고 선으로 악올 이겨나갈 용기를 갖게 한다. 그런 점에서 본서는 성도들에게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캄캄한 바다에 저 멀리 반짝이는 등대의 불빛처럼 인생 항로의 바른 방향을 잡게 하며 안전한 영적 포구에 이르는 소망과 죄악의 물결을 이길 용기를 부여하는 소중한 책이라 할 수 있다.

7. 죄의 필연적 결과인 공의로운 심판.

​과거 선민의 조상들이 극심한 고난을 받았던 것은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히 진노하셨기 때문임을 상기시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1:2). 이는 선민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권면을 저버리고 악한 길을 감으로써 심판을 받았던 조상들의 선례를 따르지 말고 이미 지은 죄는 회개하며 미래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도록 권고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선민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돗을 거스르고 죄를 범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에 본서에는 또한 이들에 대한 심판 선언이 끊임없이 주어진다. 특히 스가랴의 제6환상인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계속 범죄하는 사람들이 두루마리 곧 율법에 기록된 대로 저주를 받게 될 것이란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5:1-4). 그리고 제8환상인 두 구리 산 사이에서 나온 네 병거의 환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악을 조장하는 사탄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암시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6:1-8). 그러나 더 나아가 본서는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여호와께 순종하는 택한 백성에게는 영원한 승리와 영광을 주시는 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심판을 내릴 공의의 심판자가 되심을 예언한다(9:11-17 ; 14:12-15). 이러한 본서의 예언은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반복되고 있으며(마 25:31,32 ; 고후 5:10 ; 히 9:27), 특히 요한계시록에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계 20:12 ; 22:12). 죄에 대한 필연적 결과 로 종말에 그리스도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을 것을 예언하는 본서는 최후 심판에 대한 이러한 신약의 모든 예언들이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최종적 실현인 구속사의 필연적 과정임을 알게 한다.


스가랴서 전반부 개요(스가랴 1-6장)


스가랴서는 학개서와 함께 제1차 포로 귀환 세대 선민을 제일차 대상으로 하여 기록된 책으로 그 주제 또한 학개서와 일정 부분 일치한다. 즉 학개서와 스가랴서는 공히 제1차 포로 귀환 세대의 선민에게 가장 절실하고 시급한 사명이요 과제였던 성전 재건을 촉구하고 독려하는 것을 그 주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학개서가 오직 성전 재건을 촉구하고 독려하는 것만을 주제로 하는 것과 달리 스가랴서는 성전 재건 독려를 주제로 하는 전반부와 함께, 후반부에서는 성전이 재건된 후 약 30-40년이 지난 때를 배경으로 하여 겸손한 왕이자 참 목자이신 메시야를 중심한 선민의 복된 종말론적 미래 제시를 그 주제로 한다.

또한 학개서와 스가랴서의 전반부는 시대적 배경도 같고 주제도 동일하지만 메시지를 전달하는 양식이나 강조점은 사뭇 다르다. 학개서가 직설적으로 제1차 포로 귀환 이듬해에 착공하였으나 내외의 난관에 부딪쳐 중단한 채로 16년 동안이나 방치된 성전 재건 사업을 다시 재개할 것을 촉구하고 독려한 반면, 스가랴서는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성전을 재건하라고 촉구하지 않는다. 다만 스가랴서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받은 일련의 대 환상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께서 선민을 핍박하는 대적들을 심판하실 것과 성전 재건을 도우실 것, 그리고 선민의 승리와 영광을 제시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성전 재건을 독려하고 대적들의 핍박 가운데서도 성전 재건 공사에 입하고 있는 선민을 위로 격려한다.

한편 스가랴서는 이미 앞에서 밝힌 것처럼 기록된 시대적 배경과 주제에 의해 크게 1-8장과 9-14장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이 중 전반부 제 1-8장은 스가랴보다 약 2개월 먼저 활동을 개시한 학개 선지자의 책망과 촉구로 이제 막 성전 재건 공사가 다시 재개된 지 한 달 조금 넘은 때로부터 성전 재건 공사가 재개되어 약 2년이 경과함으로써 성전 재건 공사가 절반 정도 진척된 때에 주어진 계시로서 성전 재건을 독려하는 것을 그 기본 주제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반부는 계시가 주어진 시점과 계시의 내용에 따라 다시 1-6장과 7-8장의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이 중 전반부 1-6장은 성전 재건 공사가 이제 막 다시 재개된 때에 주어진 계시로서 앞머리의 서론적 회개 권면(1:1-6)과 일종의 부기적 성격을 가진 끝머리의 일련의 환상 기사를 마감하는 대제사장 면류관 관련 기사(6:9-15) 와 그 사이의 여덟 편의 신기하고도 웅장한 환상 기사(1:7-6:8)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1-6장을 구체적으로 개관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1-6의 문단은 일련의 환상 예언 기사를 시작하는 서론적 회개 권면을 다룬다.

이러한 본문은 다리오 왕 년 곧 B.C. 520년 월에 주어진 계시이다. 다리오 왕 년 월은 착공 하자마자 중단된 채로 16년간이나 방치되었던 성전 재건 공사가 학개 선지자의 책망과 촉구 로 다시 재개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때이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성전 재건을 격려하는 일련의 환상 계시를 주시기에 앞서 이처럼 회개를 권면하는 계시를 먼저 주신 것은 당시 선민에 게는 성전을 재건하는 일 이상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선행되어 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스가랴에게 처음 하나님의 계시가 입할 당시 포로 귀환 세대 선민은 비록 학개 선지자의 책망과 촉구로 성전 재건 공사를 이미 재개한 상태이기는 하였지만 학개서 제1장 전반부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영적인 나태와 조상들을 본받아 행하였던 악한 행실을 완전히 버린 상태는 아니었다. 따라서 만일 그러한 상태로 그들이 성전 재건 공사에 임한다면 성 전 건축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셜령 성전 건축이 완료된다고 해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는커녕 그 조상들과 같이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에 하나님은 성전 재건을 격려하는 일련의 환상 예언을 주기에 앞서 먼저 회개의 권면을 주신 것이다.

다음 1:7-6:8의 여섯 문단은 일련의 여덟 가지의 환상 예언을 다룬다.

이러한 여덟 가지의 일련의 환상 예언은 모두 스가랴가 하나님으로부터 처음 계시를 받은 때로부터 약 3-4개월이 지난 때인 다리오 왕 제2년 곧 B.C. 520년 11월 24일 밤에 연속하여 받은 계시이다. 이때는 학개 선지자가 포로 귀환 세대 선민들에게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선포한 날 곧 성전 지대가 놓인 때로부터 만2개월이 지난 때로서(학 2:18,20), 이 여덟 가지 환상은 이제 겨우 재개된 성전 재건 사업이 다시는 중단되는 일 없이 완공되는 그날까지 계속되도록 독려하기 위하여 주어진 묵시 문학적 비전이다.

이러한 여덟 가지 환상의 내용과 의미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제1환상 ; 붉은 말을 타고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와 세 말의 환상(1:7-17) - 선민을 핍박한 열방을 심판하고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회복시켜 주시는 등 선민 회복 전반에 대한 예고.

  • 제2환상 ; 네 뿔과 네 대장장이의 환상(1:18-21) - 포로 귀환 세대의 선민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사방의 모든 악한 세력을 심판하여 멸하실 것에 대한 예고

  • 제3환상 ; 측량줄을 잡은 한 사람의 환상(2:1-13) - 예루살햄 성전은 물론 예루살렘 성까지도 다시 재건될 것과 예루살렘이 번영하며 그 가운데 여호와께서 임재하심으로 안전을 누리게 될 것에 대한 예고

  • 제4환상 ;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관한 환상(3:1-10) - 여호수아가 입은 더러운 옷으로 대표되는 선민의 죄를 사하여 정결하게 하셨음과 장차 ‘싹’으로 상정된 한 종을 통하여 선민에게 종말론적 사죄와 축복을 보장하실 것에 대한 예고

  • 제5환상 ; 순금 등대와 두 감람나무의 환상(4:1-14) -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케 하신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의해 성전이 반드시 재건될 것에 대한 예고

  • 제6환상 ;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5:1-4) - 계명과 계명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자들에 대한 신속한 심판 예고

  • 제7환상 ; 에바 안에 앉은 여인의 환상(5:5-11) - 관영한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과 그 비참한 결과에 대한 예고

  • 제8환상 ; 두 구리 산 사이에서 나온 네 병거의 환상(6: 1-8) - 선민을 대적하는 사방의 모든 악한 세력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시행될 것에 대한 예고

이상에서 보듯 여덟 가지의 일련의 환상 예언은 성전 재건 사업의 당위성을 직설적으로 설파하거나 그 성전의 준공과 관련된 사항들만을 사실적, 단편적으로 예언하지 않는다. 이 여덟 환상 예언들은 하나의 독립된 사건으로서의 성전의 준공 사건은 물론 이와 관련하여 당시 선민들이 명심해야 할 여러 교훈들, 나아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함께 계심을 보여주는 여호와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신약 시대적 축복, 나아가 종말론적 축복까지를 망라하여 상징적, 포괄적, 입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당시의 포로 귀환 세대들이 자신들 시대의 역사적 소명으로서 수행하고 있는 성전 재건 사업의 의의를 근원적으로 깨닫고 자발적으로 동참하도록 이끌고 있다.

한편 일련의 연속적인 여덟 가지의 환상의 내용을 보면, 1-5환상과 환상은 모두 선민의 안전과 승리, 성전 재건의 완료 등 선민에게 모두 긍정적인 사실을 예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에 반해 제6,7환상은 선민의 범죄에 대한 심판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으로서 선민에게 부정적인 사실을 예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6,7환상은 성전 재건을 독려하는 것과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제6,7환상은 비록 선민의 범죄에 대한 심판과 관련된 환상이기는 하지만 이 환상 역시 선민으로 하여금 학개 제1장 전반부에 나타난 것과 같은 죄악된 생활에서 온전히 떠나 그들에게 부여된 사명인 성전 건축에 박차를 가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성전 재건을 독려하기 위한 환상이 분명하다.

끝으로 6:9-15의 문단은 일련의 여덟 가지 환상을 끝맺는 부분으로 대제사장 면류관 관련 기사를 다룬다.

즉 여호와의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면류관 제작과 보관 및 종말론적 성전 건축자에 대한 예언 전달 명령 및 여호와의 사자의 종말론적 성전 건축의 재확증 선언을 통하여 일련의 환상을 끝맺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본문을 대할 때 다음과 같은 영적 사실을 각성해야 한다.

첫째, 가시적인 성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입하는 성전인 성도 자신의 성결함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성전 재건이라는 당면한 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선민을 격려하고 독려하는 일련의 환상을 주시기에 앞서 성전 재건의 주역인 선민의 회개를 먼저 촉구하셨다. 이는 성전 재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성전을 재건할 주역인 선민의 성결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시대적 사명을 감당해야 할 자들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성결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서 공중 권세 잡은 사탄과 그의 사주를 받은 악한 무리들의 도전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선민은 제일 먼저 하 나님이 성전을 재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성전 재건 사업은 사마리아인들과 주변 민족들의 핍박과 훼방으로 인하여 착공하자마자 중단된 채 무려 16년간이나 방치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활동으로 성전 재건 사업은 다시 재개되었으나 이민족들의 핍박과 훼방은 여전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성전 재건 사업에 임하였을 때 성전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완공되었다. 이렇게 모든 핍박과 훼방을 극복하고 완공된 성전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임재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예표한다. 그리하여 성전의 완공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도래하여 그 완성을 위해 나아가는 중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반드시 완성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 땅에 세워지기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는 현제 세상에서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엡 2:1)과 그의 사주를 받은 악한 자들의 훼방과 핍박으로 말미암아 큰 어려움에 처할 뿐만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완성이 요원한 일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건설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 건설의 일꾼인 우리는 약하여 실패하고 좌절하기 일쑤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반드시 완성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건설의 일꾼인 우리 성도들은 사탄의 세력의 훼방과 핍박으로 말미암아 큰 어려움과 위기에 직면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 나라 건설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셋째, 교회는 세상에서 사탄의 세력에게 핍박을 받으나 마침내 사탄의 세력에 대하여 최후 승리를 거두고 영광을 얻게 된다는 사실이다.

본문에서 선민의 공동체로 언급되는 예루살렘은 일차적으로는 당시 이민족에게 압제를 당하던 바벨론 포로 귀환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나 더 나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질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본문의 예루살렘의 온전한 회복 예언은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보여주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신약 교회가 사탄의 세력에 의해 고난을 당하나 마침내 최후 승리를 거두 고 영광을 얻게 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세력이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멸망하고 사탄은 영원히 무저갱에 갇히고 새 예루살렘이 도래함으로써 성취될 것이다.

넷째, 하나님께 택함을 받아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 백성이 된 자라도 자신에게 부여된 시대적 사명을 망각하고 죄악을 행한다면 하나님의 준엄한 징계를 피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바벨론 포수에서 구원하여 본토로 귀환시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에게 부여된 사명을 망각하고 과거 그들의 조상들처럼 죄악된 생활을 하게 될 때 그들 역시도 이방 땅에 흩으실 것을 경고하셨다. 그리고 이 경고는 훗날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는 구약 선민이 예표하는 신약 성도들 역시도 자신들에게 부여된 시대적 사명을 망각하고 죄악된 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의 엄정한 징계를 피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 성도들은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물론 죄악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할 것이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멸망까지의 연표



● 페르시아의 고레스- 다리우스 3세, 멸망까지의 연표 :

메대와 바사 : 단 1:21에는 ‘다니엘이 고레스왕 원년까지 (바빌론에) 남아있었다’고 쓰여 졌다.
다니엘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

단 5:30, 31에 보면 ‘바빌론/갈대아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고 메대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62세였다‘고 쓰여 있다.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나라를 얻었는데 그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

6:27-28에는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다’고 하나님을 칭송하고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다‘고 쓰여 있다.


9:1에는 ‘메대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바빌론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이라고 쓰여 있다.


10:1
에는 ‘바사왕 고레스 삼년에 한 일이 다니엘에게 나타났는데...’ 대하 36:22, 23. 사 1:1, 2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온 나라에 공포하고 조서도 내렸는데 유다 포로들의 귀환을 허락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을 내림.



바사(페르시아) 제국 : 고대 오리엔트 세계를 220년간 지배한 페르시아 인의 제국(BC 559-BC 330).
아케메네스 왕조 바사 제국이라고도 한다.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기원전 7세기경 이란 고원 남서부의 파르사(Fars)에서 비롯되었으며, 이곳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상지였으므로 이 고대제국의 통칭이 되었다.
아케메네스의 아들 테이스패스(안샨 왕)의 현손, 고레스(키루스) 왕의 손자이고 캄비세스 왕의 아들로 고레스 2세(성경의 고레스대왕)도 안샨 왕을 상속받았다.(BC 559)
그는 페르시아 인을 모아 반란을 일으켜 메대를 점령하여(BC 550) 바사제국의 건설자로서 대왕으로 등단하였다.(키루스 2세, BC 559-529, 30년간). 이 신흥국가에 대하여 동맹을 체결하고 대항한 리디아· 신바빌로니아· 이집트 가운데 그는 우선 소아시아의 리디아를 쳐서 수도 사르디스를 함락하고(BC546,547), 바빌론을 무혈점령 하였다.(BC 538) 이로써 바벨론에 잡혀있던 유대인들이 이 때 해방되었다. 고레스와의 전투에 패한 리디아의 크로이수스 왕이(BC560-546) 장작 더미위에 앉아 화형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비가 내려 그가 죽음을 면하게 되자, 고레스는 그를 살려 자신의 고문역할을 하게했다. 그는 유목민의 반란으로 다시 동방원정에 나섰으나, 마사게타이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카스피아 동쪽 초원)

이어서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병합하여 오리엔트 세계의 통일을 이룩하였다. 약 2세기 동안 제국이 번성하였으나 다리우스 3세 때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군사에 패하여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하였다. 그 뒤 3세기에 사산조에 의해 다시 일어났다가 7세기에 아랍인에게 정복되었다. 뒤에 몽고· 투르크 등에 지배되어 오다가 독립하고, 1935년에 국명을 이란이라고 고쳤다.

메대, 바사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 이야기) : 이란계 메디아족(族)이 세운 왕국 메디아(Media) 왕국 데이오케스 때에 왕국으로 건립되었으며, 그의 아들 프라오르테스 때는 이란의 대부분을 영유하게 되었다. 캭사레스왕(재위 BC 624∼BC 585)은 BC612년 신(新)바빌로니아와 동맹하여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아시리아제국을 붕괴시켰다. 그는 더욱 서쪽으로 진출하여 리디아 왕국과 싸워서 소아시아 동반부(東半部)를 얻음으로써 서쪽은 카파도키아에서 동쪽은 인더스강 근방까지에 걸친 대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아스티게스(Astyges 재위 BC585∼BC 550)가 BC 549년 자신의 손자인 페르시아의 키루스 2에게 살해됨으로써 메디아왕국은 멸망하였다.

​기원전 6세기경 현 이란의 북서쪽에 메대라는 나라가 있었다. 메대는 거대국가로 당시 바사도 메대의 속국이었다. 그때 아하수에로(아스티아게스) 메대 왕은 딸 만다네를 자기 신하인 바사의 캄비세스 1라는 군주와 결혼시켰다. 왕은 딸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를 죽여 버리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딸이 낳은 자식이 자신을 대신하여 왕이 될 거라고 점성술사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딸은 마침내 아들을 낳았고 고레스라 이름 지었는데 메대 왕이 자신의 심복 (수석고문관) 하르파고스에게 그 아이를 정말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후환이 두려워 죽이는 대신 아기를 산중에 버려져 이리의 젖으로 자랐다고 한다.(왕의 소치기 아내에게 맡겨 기르게 했다는 설도 있다.)

이후 메대 왕은 이 사실을 알고 하르파고스의 아들을 잡아 인육으로 요리를 만들어 함께 먹었다고 한다. 어린 고레스는 성장하여 12세에 친부모에게 돌아갔으며, 그의 뛰어난 재질 때문에 이때부터 고레스는 외갓집에서 외조부가 되는 메대 왕에 의해 양육되었다. 고레스는 비범한 재간과 통솔력으로 바사인들을 부추겨 메대를 쳐들어갔다. 이 때 메대 왕은 전쟁 총사령관으로 자기의 심복이라 여긴 하르파고스를 임명하였는데 왕에 대해 아들사건으로 원한에 차있었던 그는 고레스군에게 투항해버리고 만다. 이를 안 아하수에로 왕은 화가 나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레스의 반란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그의 군대가 배신하여 하르파고스와 고레스에게 투항하면서 메대왕을 고레스에게 인도하게 되었다.(BC550) 이리하여 고레스는 메대를 대신하여 중동의 지배자로 등장하였다. 메대와 바사는 종족도 같고 왕실 결혼으로 한 인맥도 있고, 한편 고레스는 메대인에 환심을 사기 위해 외조부는 선대하여 지방장관으로 보내고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고레스의 외숙부)를 즉위시켜 메대의 상징적 왕으로 남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레스가 이끄는 메대-바사 연합군이 B.C.539에 바벨론을 점령한다. 바벨론 정복 후 메대왕 다리오를 명목상 통일 바사 왕으로 세우고 그의 딸과 결혼하였다. 고레스 나이는 그때 40세 정도였다. 메대인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62세의 다리오(장인겸 외숙부)를 명목상 왕으로 앉혔고 2년 뒤 다리오가 죽자 고레스가 이어서 바사제국의 왕으로 등장하게 된다.(B.C.537). 고레스는 B.C.529에 죽어 파살갓 평원에 장사한 그 분묘가 아직 남아있다.

단 6:1-9 다니엘에 대한 음모: ​다니엘의 탁월한 지혜와 행정가로서의 오랜 경험은 바벨론을 함락시킨 다리오에게 있어서도 큰 신임을 얻는 요소가 되었다. 이 다니엘에 대한 관리들의 살해모의는 하나님을 떠난 정치인들의 죄성과 부패성 및 권력 쟁취를 위한 잔인성과 허위와 기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다니엘(당시 82세)은 메대의 3인 총리 중에 한 사람으로서 전국의 방백 120명을 통치하는 임무를 지님.

단 6:9 기도 금령: 메대 관리들은 다리오 왕 이외의 모든 잡신에 대한 기도를 금지할 것을 왕에게 간언했다. 그런데 다만 30일 동안만 다리오에게 경배하게 함으로써 그가 모든 잡신들의 살아있는 신의 현현임을 인정하는 증거를 보이라는 것이다.

단 6:10-15 다니엘의 기도와 참소: 다니엘은 굳은 신앙 자세와 이로 인해: 참소를 당하는 내용이다. 다니엘의 죽음을 각오한 기도와 감사는 우리 성도들에게 큰 충격이다. 또한 본문은 참소자들의 집요함을 보여주는데, 이는 사탄의 끈질긴 죄적 성향을 암시한다.

 페르시아라는 이름은 본래 남부 이란의 한 주(州)인 파르스(Pars : 현대 페르시아 어로는 Fārs, 기원전 7세기경 이란 고원 남서부의 파르사(Fars)에서 비롯되었으며, 이곳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상지)에서 유래했는데 그 곳에 아케메네스조의 수도가 있었다. 그 때문에 고대 그리스 인들은 이 왕조를 그 지역 이름으로 불렀고, 오늘날의 유럽 언어도 그것을 따랐다. 그래서 영어를 비롯한 유럽 어에서는 이 나라를 페르시아라 통칭했다. 또, 이 파르스 지방의 언어를 페르시아 어라 했으며, 현재 이란의 공용어이다. 페르시아 제국(메디아 왕국과 아케메네스조)은 고레스왕 이후에 13명의 왕이 있었고, 그 연대표는 아래와 같다.

키루스 1세(재위 B.C.559~530; 30년)→②캄비세스 1세(재위 B.C.600~B.C.559)→③키루스 2세(고레스대왕, 재위 B.C. 559~B.C. 530, 30년간)→④캄비세스 2세(재위 B.C.530-522; 8년)→⑤바르디야(스메르디스,6개월)→⑥다리우스 1세(대왕, 재위 B.C.522-486; 35년)→​⑦크세르크세스 1세(아하수에로, 재위 B.C.486-465; 20년)→⑧아닥사스다 1세(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재위 B.C.465-425; 40년)→⑨다리우스 2세(재위 B.C.423-404; 18년)→⑩아닥사스다 2세(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재위 B.C.404~358)→⑪아닥사스다 3세(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재위 B.C.358-338; 20년)→⑫아르세스(재위 B.C.337-336; 1년)→⑬다리우스 3세(재위 B.C.335-331; 4년).

1. 키루스 1세(재위 B.C.559-530; 30년):

B.C. 7세기말에 활동한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 테이스페스의 큰 아들이며, 키루스 2세의 할아버지이다. 당시 엘람 왕국이 아시리아에 패해 멸망한 뒤인 B.C.691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인 테이스페스(Teispes) 왕자는 안산(Anzan) 시를 점령하고, 부친 아케메네스(Achaemenes)의 이름을 딴 왕조를 세웠다. 테이스페스는 왕국을 확장시켰으나, 그의 사후 왕국은 둘로 나뉘어 북부는 차남 아리아라메스(Ariarames)가, 남부는 장남 키루스(Cyrus)가 통치했다.

아케메네스 제국(Achaemenid Empire, B.C. 550~B.C. 330)은 아케메네스를 시조로 하는 페르시아 제국이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최대 판도였을 당시 3개 대륙에 걸친 대제국이었다.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의 일부에서부터 이란, 이라크 전체 흑해 연안의 대부분의 지역과 소아시아 전체, 서쪽으로는 발칸 반도의 트라키아, 현재의 팔레스타인 전역과 아라비아 반도, 이집트와 리비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영토였다.  안샨(엘람에 있는 수사의 북동부)을 지배했으며, B.C. 7세기 후반에는 동쪽으로 파르수마슈까지 세력을 뻗친 듯하다. 그는 아시리아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바빌론의 샤마시 슘 우킨에게 지원을 보냈으나(B.C. 651),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에게 엘람을 정복당한 뒤로는 아시리아의 종주권을 인정해야만 했다(B.C. 639경). 키루스 1세는 큰아들 아루쿠를, 공물과 함께 볼모로 아시리아의 니느웨로 보냈다.​

2.캄비세스1세(Kambyses I, 재위 B.C.600~B.C.559) :

키루스 1세(CyrusⅠ)는 페르시아인들을 통합했으며, 그의 아들 캄비세스 1세(Cambyses)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지방의 군주로서 메디아 왕국(Media)의 마지막 황제인 아스티아게스의 딸인 만다네(Mandane)와 혼인함으로써 페르시아와 메디아를 통합했다. 고대의 기록에 따르면 캄비세스 1세는 비천한 출신이었으나 공주인 만다네와 결혼하면서 출세했다고 한다. 

3. 키루스 2세(고레스대왕, B.C.585~529, 재위 B.C. 559~B.C. 529, 30년간):  페르시아 제국의 건설자. 1대  

B.C.612년 앗시리아가 멸망하자 오리엔트는 4개 국가로 분열되고 이란 남서부를 지배했던 페르시아인 에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는 ​B.C.550년 메디아 왕국을 쓰러뜨리고 페르시아제국의 건설을 선언했다. B.C.548년 팀브라전투에서 세금을 과도하게 헌납했던 리디아 왕국을 멸망시켰다. B.C.525년 키루스 2세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병합해 오리엔트세계를 통일했다. 다리우스1세 때 대제국이 건설되어 동으로는 인더스강 유역, 서로는 에게 해 연안, 남으로는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손에 넣었다. 정복한 지역의 체제는 그대로 유지했는데, 군대와 공납의 의무만 지키면 필요이상으로 간섭하지 않았 다. 지배지역인 3대륙을 20개주로 나누어 중앙아시아~이집트 일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다. B.C.5세기초 페르시아전쟁에서 그리스에 패한뒤 B.C.330년 마케도니야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멸망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스1:1~3).

캄비세스 1세의 장남 키루스 2세(Cyrus Ⅱ: B.C.559~529 재위)는 B.C.576년 또는 B.C.590년경에 외아들로 태어나 쿠루쉬(Kurush, ‘태양’을 뜻하는 쿠로스에서 유래)라고도 불렸으며, 주변국들을 점령하며 아케메네스 왕조의 초석을 마련하였으므로 그가 즉위한 B.C.559년부터를 아케네메스 왕조의 시작으로 본다.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또는 히브리발음에 근접한 '고레스왕'이라고도 한다. 키루스 2세는 안산이라는 메디아 제국의 한 제후국의 왕이 되었는데 하르파구스의 도움을 얻어 BC554년 자신의 외할아버지이며 황제인 아스티아게스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B.C.549년 엑바타나를 정복함으로써 메디아 제국을 정복하고 나라의 이름을 메디아에서 페르시아로 바꾸었다. 키루스 2세는 페르시아의 창시자이며 약 B.C. 600~530년까지 살았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키루스 2세의 어머니는 메디아 왕국의 아스티아게스의 딸 만다네인데, 생후 곧 산중에 버려져 이리의 젖으로 자랐다고 한다.

4국 중 이집트를 제외한 메디아, 리디아, 신 바빌로니아를 차례로 정복해 대왕이라는 호칭이 붙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 B.C.484?~425?) 와 크세노폰도 키루스2세를 가장 이상적인 왕이라 기술했다.

B.C. 559년에 페르시아의 왕을 자처하며 페르세폴리스에 도읍지를 정하고 안샨(Anzan)왕이 되었다.

B..C 550년 아스티아게스를 쳐서 메디아를 멸망시켰고, 그 도읍인 엑바타나로 수도를 옮기고 '아케메네스 왕조'를 열었다.

(메디아와 페르시아를 통일한 후 키루스2세는 '아케메네스 왕조'를 세웠고, 다리우스1세는 '만국의 왕'이 되었다.)

​B.C. 549년에는 엘람을 정복하여 엘람의 수도였던 수사를 페르시아 제 3의 수도로 만들다.

B.C. 546년 리디아 왕국을 정복(리디아가 소아시아 정복 중이었음)하여 리디아의 도읍 사르디스를 함락시키고 소아시아까지 판도를 넓혔고 이때 그리스의 모든 도시국가들을 점령했다.  다시 또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등 동방의 여러 지역도 평정하여 북방 유목민에 대한 방비를 굳혔다.  

B.C. 539년에는 나보니도스의 칼데아(신 바빌로니아) 왕국을 무너뜨리고 유대인들을 풀어주었다(이스라엘 민족의 해방). 이렇게 해서 페르시아는 서아시아 전역을 손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B.C. 530년 중앙아시아 정벌을 위해 박트리아, 소그디아, 호레즘을 병합시키고 이후 키루스 2세는 중앙아시아의 마사게타이와 싸우다가 전사한다.

 바빌로니아에 잡혀 있던 유대인 포로들이 이 때 해방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를 제외한 오리엔트는 그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여기서 페르시아제국의 기초가 다져졌다. 만년에는 파사르가다이로 도읍을 옮겼다. 피정복지에 대해서는 그 지방의 신(神)을 인정하고, 풍습을 존중하며, 자치를 허용하는 등 유화정책을 썼다. 마사게타이를 토벌하는 도중에 죽었다고 한다. 

​ 키루스 대왕의 무덤

메데인들은 키루스2세를 정복자로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들과 같은 혈통의 왕으로 여겼다. 유대인들도 그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그리고 '하나님의 목자' 등으로 칭송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조차도 키루스 2세를 위대하게 여겨서 그의 무덤인 파사르가드(Pasargadae)만은 파괴하지 않았다.

4. 캄비세스 2세(재위 B.C.530-522; 8년): 2대 왕.

키루스 2세는 두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가 후계자였던 캄비세스 2세(Cambyses Ⅱ)이고 둘째가 바르디야(Bardia, 헤로도토스는 스메르디스(Smerdis)라고 불렀다)이다. 키루스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캄비세스 2는 바빌로니아를 통치했고 죽고 나서 그의 후계자로 왕권을 승계했다. 그는 왕위를 잇자마자 북동쪽의 국경을 안정화 시키고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BC 525년에 이집트로 원정을 떠나서 이집트를 정복했다.  이미 키루스 왕이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키루스 2세 대왕과 아케메네스 가문의 딸 카산다네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왕(父王) 생존시에 캄비세스 2세는 바빌로니아에 대한 업무를 관장했다. 그는 BC 538년 신년행사에서 바빌로니아 왕의 의례 진행을 맡았으며, 부왕이 마지막 원정에 착수하기 전인 BC 530년에는 바빌론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이집트의 정복은 키루스 때부터 계획되었지만, 캄비세스 2세가 이룬 주요한 업적이다. 이집트 제26왕조의 파라오 프삼티크 3세(Psamtik Ⅲ)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집트를 정복한다. 캄비세스 2세는 이 원정에서 사모스의 폴리크라테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또한 이집트군에 있었던 그리스의 장군 파네스로부터 귀중한 군사정보를 얻었고, 아랍족으로부터도 시나이 사막을 횡단할 때 식수를 공급받았다. 나일 삼각주에서 있었던 펠루시움 전투(Pelusium, B.C. 525)에서 캄비세스2세가 승리하고 헬리오폴리스와 멤피스를 함락하자, 이집트의 저항은 끝났다. 이집트에 머물면서 캄비세스2세는 곧 군대를 세 팀으로 나누어서 현재 튀니지 지역과 나일 강 서쪽의 아몬 지역과 누비아(현재 수단과 에티오피아 지역) 지역으로 정복군을 보낸다. 누비아 지역은 캄비세스가 친히 지휘를 한다. 그러나 세 지역 모두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원정에 실패한다. B.C.522년 본토에서 그의 동생인 바르디야를 추종하던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귀국에 서두르지만 귀국 도중 화병으로 캄비세스 2세는 사망한다. B.C.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캄비세스2세가 이집트에서 벌인 잔학행위를 미친 짓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당시 이집트측 사료에 따르면, 그러한 비난은 대부분 근거 없는 것으로 추측된다. 캄비세스2세는 적어도 그의 통치 초반기에는 화해정책을 추구했다. 후대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 대왕이 남긴 비문을 보면, 캄비세스2세는 이집트 원정에 나서기 전에 그의 아우 바르디야를 남몰래 죽였는데(헤로도토스는 그의 아우를 스메르디스라고 불렀음), 그후 마기의 제사(祭司) 가우마타가 살해된 왕자로 분장해, B.C. 522년 3월 반란을 일으켜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위에 올랐다. 캄비세스2세는 시리아에서 이 반란소식을 듣고, 이집트에 수비대를 남겨둔 채 황급히 귀국하던 도중, 시리아에서 B.C. 522년 여름 사고로 죽었는데,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과 다리우스가 남긴 비스툰(Bistun) 석비에 의하면 캄비세스 2세가 원정을 떠나면서 통치를 맡겼던 심복인 프레사스페스(Prexaspes)로 변장한 조로아스터교 사제 가우마타(Gaumata)가 은밀히 바르디야를 암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가우마타는 그 후 몇 개월간 페르시아를 통치를 했지만 다리우스와 그를 지지하는 7명의 영주들에 의해서 진압되고 결국 왕권은 다리우스에게 넘어간다. 정확하게 정설로 인정되는 이야기가 없는 가운데 캄비세스 2세에서 다리우스로 왕위가 이양되는 과정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진실을 알기 위해 많은 사학자들이 오랫동안 매달렸지만 자료의 부족으로 아직도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키루스 2세의 아들 캄비세스 2세에서 적통을 끝내고 먼친척이자 장군인 다리우스1세에게 왕위가 옮겨진다.   

5. 바르디야(스메르디스, 6개월):

바르디야(Bardiya)는 고레스2세의 동생이자 맏아들 캄비세스2세의 동생으로, 실질적으로는 사제인 가우마타(Gaumata)가 통치함. 다리우스 1세가 자신의 왕위를 되찾게 된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베히스툰 비문'에서 키루스 2세의 아들 바르디야(Bardiya)로 가장한 왕권 찬탈자로 지목되는 제사(祭司) 가우마타(Gaumata)가 실제 키루스 2세의 아들인 바르디야였다고 주장한다.         

6. 다리우스 1세(다리오대왕, 히스타페스, 재위 B.C.522-486; 35년): 3대 왕

다리오 1세 히스타스페스(Hystaspes) : 에스라서에 등장하는 ‘바사 왕 다리오’(스 4:5) 및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활동하던 시대의 ‘다리오 대왕’에 해당하는 인물로, 히스타스페스의 아들이다. 캄비세스를 계승하여 왕이 된 그는 BC 522-486년에 통치했다. 그는 뛰어난 행정가의 재능을 발휘하여 20개의 행정구인 도를 총독이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참고, 스 5:3, 6).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그는 운하를 파고 도로를 정비함으로 상업을 증진시키기도 했다. 고레스 왕의 종교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여러 민족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다(스 6:1-12).

수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을 관할하던 총독 닷드내와 그의 동료 스달보스내의 요청(스 5: 3-17)으로 예루살렘 성전 건축의 합법성을 고레스 왕의 조서를 통해 확인하고 즉각 조서를 내려 성전 건축을 독촉하는 한편 재정적인 지원까지 아끼지 않았다(스 6:8). 심지어 “무론 누구든지 이 명령을 변개하면 그 집에서 들보를 빼어내고 저를 그 위에 매어 달게 하고 그 집은 이로 인하여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스 6:11)라는 조서까지 내렸다. 성전이 완공된 것(예루살렘이 파괴된 때로부터 70년 후)은 그의 재위 6년째 되는 해였다.  <!--[endif]--> 

메대 사람 다리오(Darius the Mede) : 다니엘서 5:30-31과 6:1 그리고 9:1에 나오는 인물로, 그는 BC 539년 갈대아(바벨론) 멸망으로 ‘갈대아 사람 벨사살 왕’이 죽은 후 왕이 되었다.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세 였더라”(단5:30~31).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단9:1). 그는 아하수에로(Xerxes, 크세르크세스의 히브리 명칭)의 아들(단 9:1)로, ‘나라를 얻었을’ 때 그의 나이가 62세였다(단 5:31). 그는 ‘왕’의 칭호를 가졌으며(단 6:6, 9, 25) 다니엘 11:1에서는 ‘메대 사람 다리오 원년에’라는 그의 통치 기간이 나타난다.

다리우스 1세가 일으킨 종교적 혁신의 내용은 그가 인도-이란(Indo-Iranian/Arianian) 신화에 그 뿌리를 둔 ‘신들의 왕’ 아후라 마즈다(Ahura Mazada)를 그의 왕권을 수호하는 독보적인 신적 존재로 내세웠다는 점이었다. 아후라 마즈다는 B.C. 5000년경으로부터 B.C.2000년경까지 인도-이란인들이 공유한 신화에서 우주와 지상의 세계, 그리고 전 우주적인 질서를 수호하는 모든 신적 존재를 창조한 신이었다. 따라서 다리우스 1세가 아후라 마즈다를 그의 독보적인 수호신으로 설정함으로써 페르시아 제국의 왕권을 더 이상 메소포타미아 세계의 각 지역 신들의 주권에 종속된 개념으로 인식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다리우스 1세가 아후라 마즈다를 통해 일으킨 종교적 혁신은 이와 같은 인도-이란 신화의 세계관을 페르시아 제국의 새로운 왕권 이념으로 도입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

페르시아명 다리야바우시. 흔히 다리우스 대왕이라고 한다. 제사(祭司) 가우마타는, 선왕인 캄비세스 2세가 동생 바르디아(스메르디스)를 죽인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바르디아를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선왕은 이집트로 원정을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죽었으므로, 그와 동행했던 다리우스가 귀국하여 여러 제후와 함께 제사(祭司) 가우마타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크테시아스가 그의 즉위에 관해 쓴 글은 여러 가지 점에서 분명히 비문을 따른 글이지만, 전설과 결합된 점도 있다. 예를 들면, 다리우스와 공모자들이 그들 중 누가 왕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그들의 말(馬)에게 맡겨 결정하기로 했을 때, 다리우스는 그의 마부가 속임수를 쓴 덕분에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가우마타를 정통적인 계승자라고 오인한 제후들은, 다리우스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2년간 전국은 혼란에 빠졌다. 마침내 다리우스는 이를 평정하여 제국의 기초를 확립한 뒤, 정벌의 상세한 기록을 비시툰의 산길 절벽에 새기게 하여, 왕위계승에 대한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B.C. 518년~B.C. 510년 인도의 펀자브 지방을 정벌하고,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지도 평정하였으며, 국토의 북변을 자주 침범한 스키타이인人도 몰아냈다. 또 두 번에 걸쳐 그리스 본토에 원정하였는데, 첫번째는 사위 마르도니우스에게 지휘를 맡겼으나 중도에서 실패하였고, 두 번째는 마라톤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무장보다는 행정 조직가로서 후세에 명성을 남겼다. 광대한 영토를 20(23, 24, 28이라고도 한다)의 행정구인 사트라피(주 또는 방백령)로 구분하고, 총독에는 왕이 친히 임명하는 사트라프(방백)를 두어, 지방의 군사와 내정을 관장하게 하여 일정한 공물과 세금을 거둬들였다. 또한 중앙집화의 수단으로서 교통로를 건설하여 군용 및 통상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이 역전제(驛傳制)와 사트라프 제도는 그 이후 오랫동안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 통치제도로 답습하였다. 그리고 파르수아에 페르세폴리스를, 엘람 지방에 수사를 조영(造營)하여 여름과 겨울의 수도로 삼았는데, 규모의 광대함은 유적을 통하여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세번이나 패배했다. 3차 페르시아 전쟁은 다리우스 1세의 사망으로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 : 재위 BC485~BC465)가 그 뒤를 이어서 전쟁에 임했으나 패배했다.

 ▶페르시아 전쟁(Greco-Persian Wars)에서 그리스를 지켜냄 :

​BC 492년~BC 448년까지 지속된 페르시아 제국의 그리스 원정 전쟁으로,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 제국에 연합 대응하여 성공적으로 공격을 막아내었다. 페르시아는 BC 525년까지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BC 513년부터 발칸 반도 원정을 시작했다.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점령한 다리우스왕은 다뉴브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영토를 확장했다. 이 때 트라키아 반도에 주둔하던 아테네 군 사령관 밀티아데스(Miltiades)가 페르시아 군의 진격을 막고자 다리를 불태웠으며, 이는 페르시아제국의 왕 다리우스 1의 분노를 샀다. 이것이 후에 페르시아의 트라키아 공격의 원인이 되었다.

제1차 원정(BC 492년): BC 499년에는 소아시아 연안에 있는 이오니아(Ionia) 지방의 그리스 도시 밀레투스(Miletus)의 정치가 아리스타고라스(Aristagoras)를 중심으로 여러 소도시들이 연합하여 이오니아 반란(BC 499∼BC 494)을 일으키자, 다리우스 1세는 이를 먼저 진압하고자 했으며, BC 494년 이오니아 소도시들을 모두 점령했다. 다리우스 1세는 BC 492년 함대를 정렬하고, 사위 마르도니우스(Mardonius)를 사령관으로 하여 그리스 북쪽에 있는 트라키아 원정을 시작했고, 함대는 헬레스폰트 해협(Hellespont, 오늘날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했다. 그러나 함대는 아토스(Athos) 곶(串)에서 폭풍을 만나 난파했으며,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300척의 전함과 20,000명의 군사를 잃었다고 한다. 이것을 흔히 제1차 페르시아전쟁이라고 하는데, 이 때 페르시아가 노린 것은 트라키아였다는 점에서 페르시아전쟁에 포함시키지 않는 학자도 있다. 또한 트라키아는 페르시아의 세력권에 들어감으로써 목적은 일단 달성한 셈이다.

제2차 원정(BC 490년): BC 490년, 페르시아 제국은 제2원정에 들어갔다. 다리우스 1세의 형제 아르타페네스(Artaphernes)와 장군 다티스(Datis)는 실리시아(Cilicia) 군을 주력부대로 하는 대군을 이끌고 아티카(Attica)와 에레트리아(Eretria) 시(市)를 공격했는데, 그 명분은 이오니아 반란을 도왔다는 것이었다. 당시 페르시아의 군사력에 대해 헤로도토스는 약 2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고대 로마 역사가 코넬리우스 네포스(Cornelius Nepos)는 보병 20만 명, 기병 1만 명으로, 플루타르코스(Plutarch) 등의 학자는 30만 명으로, 심지어 플라톤 등은 5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20만 명 가령이 전쟁에 동원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페르시아 함대는 키클라데스(Cyclades) 제도(諸島) 연안을 따라 에우보이아의 에레트리아를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이어 아테네 북동쪽에 있는 마라톤(Marathon) 평야에 상륙, 아테네를 공격하였다.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스파르타는 종교행사를 이유로 파병을 지체했고, 아테네는 1만 명 본군과 프라타이아에서 온 1천 명의 지원군으로 페르시아 군과 맞섰다. 그러나 아테네군은 중장병(重裝兵) 밀집대전술(密集隊戰術)로 페르시아에 크게 이겼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군은 6,400명을 잃은 반면 아테네군은 192명만을 잃었다. 이후 페르시아군은 아테네 공략을 단념하고 스니온 곶을 돌아 귀국하였다.

한편 다음 원정을 준비하던 다리우스 대왕이 병사한 후 그 뒤를 이어 크세르크세스가 즉위한다. 크세르크세스는 원래 그리스 원정에 열의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의외로 미적지근하게 전개되지만 장군들의 주장에 따라 크세르크세스는 대군을 몰아 그리스를 침범했고 이들은 테르모필레에서 결사적으로 항전하던 스파르타군과 동맹군 3,000을 격멸시킨 후 아테네를 불태운다.

제3차 원정(BC 480년): 전쟁에서 패한 뒤, 다리우스 1세는 다시 전면적인 그리스 원정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BC489년부터 수년간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 반란이 지속되어 원정이 연기되었으며, 다리우스 1세의 사망으로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 : 재위 BC485~BC465)가 그 뒤를 이었다.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대와 물자를 모아 진격했으나, 유례없이 큰 규모로 인해 진군 속도가 느려졌으므로, 그리스군은 그 동안 충분한 방어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30개 그리스 도시국가가 참여한 동맹이 결성되었으며, 육군은 스파르타가, 해군은 아테네가 지휘권을 맡았다.

그리스군은 테르모필레의 협로에 7천 명의 병력을, 아르테미시움에(Artemisium) 271척의 전함을 배치하고 페르시아군을 맞았다. 페르시아군은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선교(船橋)를 걸고, 아토스 곶에 운하를 판 뒤, BC 480년 8월, 해륙(海陸) 양면에서 그리스를 공격하였다.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는 중부 그리스로 가는 통로에 해당하는 테르모필레의 협로를 지켰으나 내통자(內通者)가 생겨 돌파 당함으로써 전원 전사하였다. 그러나 해전(海戰)에서는 양측 모두 해전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승패가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대함대 건조 제안을 채택하여 페르시아의 재침공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다.

살라미스해전(Battle of Salamis,BC 480년): 제3차 페르시아 전쟁 중인 BC 480년 9월 23일, 아테네 함대를 주력으로 한 그리스 연합해군이 살라미스 해협에서 우세한 페르시아 해군을 괴멸시킨 해전. 아테네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는 일찍이 페르시아의 침공을 예견하고 그리스의 선박을 강화하고 아테네의 시민들을 태워 근처의 살라미스 섬으로 피신시킨 후 살라미스 해협에서 진을 치고 그들을 기다린다. 크세르크세스의 강력한 페르시아 함대는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되어갔지만 오히려 해협의 물살에 많은 수가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도중에 강화된 아테네의 해군이 거세게 충각전술로 몰아쳐 이들을 완파한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이 함선에 탈 것을 설득, 아테네 전면(前面)의 살라미스(Salamis) 섬과의 사이에 있는 바다에서 페르시아 함대와 싸워 이겼다. 크세르크세스는 곧 귀국하여 마르도니우스에게 자기의 뒤를 잇도록 하였다. BC 479년 마르도니오스는 플라타이아이에서 그리스 연합군과 싸워 패하였고, 같은 해 그리스 함대가 소아시아의 미칼레전투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하였다.

이렇게 하여 세 번(또는 두 번)에 걸친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은 모두 실패하고,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페르시아의 원정을 맞아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잘 싸웠으나, 그리스의 도시 중에는 페르시아에 항복한 도시도 있었다. 또한 아테네 안에서도 페르시아와 내통하는 자가 있었다. BC 480∼BC 479년 그리스군의 총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스파르타였으나, 그 후로는 아테네가 대신 연합함대의 지휘권을 쥐고 있다가, 마침내 ‘델로스 동맹’의 맹주(盟主)가 됨으로써 그리스의 패권을 잡았다. 마라톤에서는 중산시민(中産市民)이 중장보병(重裝步兵)으로서 활약하였고 살라미스에서 무산대중(無産大衆)이 수부(水夫)로서 활약하여, 정치적 발언력이 그들에게까지 미쳐, 아테네의 민주화를 촉진하였다.

7. 크세르크세스 1세(아하수에로;그리스 음역, 재위 B.C.485-465; 20년):

아하수에로(Xerxes, 크세르크세스 1세): 인도에서부터 이디오피아까지 127도를 다스린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BC486-464)이다(에 1:1). 일반 역사에는 그리스어 음역을 따라 크세르크세스 1세로 알려졌다. 아하수에로는 왕후 와스디를 폐위하고 유대인 에스더를 왕비로 맞았다(에 1:17). 그는 하만이 유대인을 말살하려던 음모를 좌절시키고 오히려 하만이 속한 아말렉 족속을 멸절시킬 것을 허락하였다(에 8장 참고). 메대 족속으로 갈대아 왕이 된 다리오 왕의 아버지이다(단 9:1).

그리고 아하수에로의 이름 앞에는 항상 ‘메대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는 3명의 총리를 두고 그 밑에 120명의 방백을 임명함으로, 당시 서쪽으로는 소아시아와 리비아와 애굽까지 이르고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의 광할한 지역에 이르는 메대-바사의 광범위한 지역을 통치할 행정 조직을 구성하였다(단 6:1-2). 다니엘은 그때 임명된 세 명의 총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다리오 왕 시대와 고레스 왕의 시대’에까지 그 직임을 훌륭히 감당한 것으로 보인다(단 6:28).

그는 다른 총리들과 다니엘을 시기하는 관원들의 꾀임으로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넣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 사건으로 인해 다니엘의 하나님을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라고 고백했다(단 6:25-27).

유명한 에스더 왕비의 부군.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이자 계승자로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는 선왕 때부터 끌어 온 이집트 ·바빌로니아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BC 480) 테르모필라이·살라미스·플라타이아 전투

등을 통하여, 대규모 그리스 침공을 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전쟁에서 그가 결정적으로 패배한 결과, 아케메네스 왕조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다리우스의 아들이 크세르크세스(xerxes)이고 그 후손들의 이름 앞에 '아르타'를 붙이게 되어 아르타크세르크세스(Artaxerxes)로 부른 것이다.

에스더서의 아하수에로 왕이 그리스 침략하려다 즉위 7년 째 되던 해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한다.

에스더 남편 아하수에로(Xerxes,크세르크세스)의 아들이 에스라서아닥사스다(Artaxerxes,아르타크세르크세스)이다.

크세르크세스는 다리우스 1세와 고레스(키루스2세)의 딸 아토사(Atossa)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다리우스가 즉위한 뒤 처음으로 얻은 아들이었다. 다리우스는 크세르크세스를 그의 형 아르타바자네스보다 더 편애해 후계자로 지명했다. 페르세폴리스 왕궁의 남쪽 현관과 트리필론(장식 계단)의 동쪽 문에 새겨진 부조에서, 크세르크세스는 후계자의 모습으로 옥좌에 앉은 아버지 뒤에 서 있다.

B.C. 486년 다리우스가 죽었을 때, 크세르크세스는 35세였고, 이미 12년 동안 바빌로니아를 통치한 경험이 있었다.

즉위와 더불어, 그가 가진 첫 관심사는 지난 2년 동안 반란자의 수중에 있는 이집트를 평정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 그는 다리우스 때보다 훨씬 강력한 수단을 동원해야 했다. 재위 2년째인 B.C. 484년, 이집트의 델타 지방을 파괴하고, 이집트인들을 징벌했다. 이때 바빌로니아에서 반란 소식이 전해졌다. 그곳에서 자칭 민족주의자가 반란을 일으켰고, 곧 그 후계자가 나타나 이를 계속 지도했다. 바빌로니아의 2번째 지도자 샤마시에리바는 크세르크세스의 사위에게 정복되었고, 바빌로니아는 난폭한 보복을 받았다. 바빌론의 성벽은 허물어졌고, 사원들은 약탈당했으며, 마르두크 신상은 파괴되었다. 이 행동들은 커다란 정치적 의미를 가졌다. 즉 크세르크세스는 더 이상 바빌로니아 신의 '가호'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리우스 대제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를 페르시아 제국과 사적인 관계로 결합된 왕국으로 다루었던(비록 총독령으로 다스렸지만) 반면, 크세르크세스는 강경한 태도로 행동했다.

사적인 결합이라는 의제(擬制)를 일단 거부한 후부터,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을 단순히 '페르시아인과 메디아인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바빌로니아의 왕과 이집트의 왕이라는 칭호를 뺐다. 다음과 같은 비문에서 크세르크세스가 암시한 것은 아마도 바빌로니아의 반란일 것이다(일부 학자는 박트리아의 소요라고 주장함). "이들 나라(반란을 일으킨) 중에 이전부터 데바를 숭배해온 나라가 있었다. 나중에 내가 아후라 마즈다의 은총을 받아, 데바의 신전을 파괴하고 선언했다. '데바를 경배하지 말라!' 전에 데바를 경배하던 곳에서, 나는 아후라 마즈다를 경배했다."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을 데바 신(조로아스터교 이전의 고대 신)의 적으로 선언하고, 아무런 의심없이 이들 아리안족 종교의 몰락한 신들과 바빌로니아의 신들을 동일시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존재한다. 즉 마르두크 신상의 파괴는 위의 비문에서 언급한 데바 신전의 파괴와 반드시 관련이 있는 것인가? 크세르크세스는 아버지 다리우스보다도 더 열성적인 조로아스터교(Zoroaster : Zarathustra의 영어명)의 추종자였는가? 또는 그 자신이 참으로 조로아스터교의 신자였는가?

아케메네스 왕조의 종교와 조로아스터교 사이의 관계를 묻는 것은 난해한 문제이다. M. 몰레와 같은 학자는 문제 설정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그때의 종교는 3가지 다른 종류, 즉 엄격한 의식의 종교, 아케메네스의 비문에서 말하는 왕실 종교,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일반 민간 종교가 있었다는 것이다.

​대(對)그리스 전쟁 : 다시 제국이 평온을 되찾자, 크세르크세스는 평화로운 활동에 전념하려 했으나, 그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전쟁을 부추겼다(페르시아 전쟁). 추방된 그리스인의 강력한 파당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던 크세르크세스의 사촌이자 매제인 마르도니우스는, 부왕 다리우스가 생전에 마라톤에서 그리스인에게 당한 모욕(B.C. 490)을 복수하자고 선동했다.  감동 잘하는 성격인 크세르크세스는 측근들의 압력에 약했다. 그는 전쟁을 위해 3년에 걸쳐(B.C.484~481), 외교적·군사적 준비를 꼼꼼하게 추진했다. 헤로도토스는 이때의 전쟁준비를 일찍이 없었던 대규모의 것이었다고 기록했다. 병력은 모든 속주로부터 징집되었다. 군대의 병참선 역할을 위해 해군이 만들어졌다. 왕이 이 계획에 쏟은 아낌없는 배려를 볼 때, 그가 이 전쟁을 결코 작은 싸움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원정의 진정한 목적에 대해서 후세에 많은 설명이 있었는데, 경제적인 목적은 아닐 것이라고 여겨진다. 당시 그리스는 중요한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군주 절대주의의 표현으로 보인다.

크세르크세스의 성격은, 나중에 그리스의 전설에서 왜곡되었지만, 결코 어리석거나 지나치게 낙관적이지는 않았다. G. 글로츠에 의하면, 그는 비록 분별있고 똑똑했지만, "신권(神權)에 의한 군주로서 자신에 대한 반대를 신성모독과 같이 귀찮아했고…… 흥분하기 쉬운 성격이었으며, 젊은 열정을 가지고 있던 그는 나태함에 빠져 있었고, 자기가 싫어하는 전쟁을 일으키도록 부추김을 받았다."

페르시아로 철수 : ​그리스와의 제3차 페르시아 전쟁의 패배에 불쾌해진 크세르크세스는, 수사와 페르세폴리스에 틀어박혀, 이때부터 일찍이 무거운 과세로 긁어모은 막대한 자원과 부를, 그는 방대한 건설계획을 추진함으로써 국력을 더욱 소모시켰다. 재위 3년째 되는 B.C. 483년부터, 아토스곶[岬]의 지협(地峽)에 운하를 만들고, 또 다르다넬스 해협에 선교(船橋)를 가설하는 등 그리스 원정(제3차 페르시아 전쟁) 준비를 하였다.

​재위 6년째 되는 B.C. 480년 봄, 군대의 선두에 서서  육해군을 이끌고 사르디스를 출발하여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기 위해 2개의 배다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폭풍이 다리를 날려버렸고, 크세르크세스는 그 벌로 바다를 채찍질하도록 했다.

다리가 다시 만들어진 후, 그는 7일 동안 군대의 해협 이동을 감독했다. 군대 수를 헤로도토스는 500만 명이라고 했지만, 700~800척의 배가 동원된 것으로 보아 현재는 36만 명으로 추산한다. 거대한 토목 작업으로 군대가 이동하는 길을 놓았다. 악티움의 이스트무스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파서, 험준한 아토스 산을 피해갔다.

그렇지만 이같은 대규모 병력도 소용이 없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적지에 대한 정보 부족이 원인이었고, 그리스인의 민족적 감정이 나타난 것도 한 이유였다. 몇 차례의 승리를 거둔 후(B.C. 480년 8월의 테르모필레 전투등), 크세르크세스는 아티카를 점령하고, 9월 21일 아테네를 약탈했다. 그러나 9월 29일 그가 먼저 싸움을 건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군에 패배했다. 병참을 보급할 함대를 상실하자, 군대는 퇴각해야만 했다. 테살리아에 마르도니우스를 남겨두고, 그는 아시아로 다시 건너왔다. 재위 7년째인 이듬해 B.C. 479년 8월 27일,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이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대패하고, 나아가 미카레에서도 패배하였으나 페르시아 영토 그 자체는 빼앗기지 않아 국위는 여전히 융성하였다. 전쟁은 13년을 끌었지만, 그때 이후부터 크세르크세스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그가 결정적으로 패배한 결과, 이때부터 아케메네스 왕조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의 재위 기간(1장 1절, 8장 9절)은 헤로도투스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페르시아 왕들의 역사에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또한 아하수에로 제3년에 열린 대연회(1장 3절)의 기록도, 헤로도투스가 그의 책에, 페르시아 왕이 그리스를 정벌하기 위하여 회의를 소집했다고 기록한 그 날짜와 시각이 일치한다. 수산궁에 관한 묘사도(1장 6절) 고고학에 의하여 그 사실성이 입증되었다.

아하수에로 왕이 제7년에 새 왕비를 맞아들인 사실(2:16)은, '아하수에로가 그리스 원정에 실패한 후에 후궁(後宮, harlem)의 환락에 빠졌다'고 전하는 헤로도투스의 보고와 일치한다.

만년에는 왕궁에서 호화생활을 누리다가 후궁(하렘,harlem)의 음모에 휘말려, B.C. 465년 그 자신이 장남과 함께, 그의 대신(大臣) 아르타바누스가 포함된 궁전의 살인집단에 의해 쓰러졌다. 다른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

​다리우스 3세 때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 알렉산드로스에게 B.C.330년에 멸망해 키루스2세의 건국부터 알렉산드로스에 멸망한 B.C.330년까지 220년밖에 되지 않는다. 기원전 역사로 3000년이 넘는 오리엔트문명의 긴 시간에서 바람처럼 지나간 페르시아지만 물질적, 정신적, 제도적 측면에서 오리엔트문명의 정점을 이룬 아시아제국의 모범이 되었다. 이후 파르티아, 사산조 페르시아부터 현재의 이란에 이르기까지 많은 국가들이 페르시아를 계승했다.

8. 아닥사스다 1세(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재위 B.C.464-424; 40년):

아닥사스다 1세(Artaxerxes(아닥세르세스), 롱기마누스(긴팔) : 에스라, 느헤미야 귀환시킨 왕(스7장, 느2장), 어머니는 폐위 당한 와스디이고 나중에 에스더가 어머니 역할함.

'아닥사스다'는 우리말 음역인데 세계사에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인데 이 말은 페르시아 언어가 아니고 후대에 기록된 헬라어로 '영웅들의 지배자'란 뜻이다. 로마에서는 '케사르(가이사, 시이저)'라고 했던 때가 있었고, 애굽에서는 '파라오'라 했는데

​다리우스의 아들이 '크세르크세스'이고 그 후손들의 이름에 '크세스크세스라'는 이름 앞에 '아르타'를 붙이게 되었다.

고레스의 장자 크세르크세스 l세의 아들. 부왕을 암살한 아르타바누스에 의하여 제위에 올랐으나, 얼마 후 그를 죽이고, 이집트와 박트리아 등의 난을 평정하였다. 재위 17년째인 B.C. 448년, 칼리아스 협약을 성립시켜 아테네와의 화평에 힘썼다.

헤로도토스와 데모크리토스가 당시의 제국을 여행하여 그 지식을 그리스인에게 전하고, 또한 그리스 미술의 양식을 동방으로 전하기도 하여, 동서 문화교류로 왕의 치세는 고대 페르시아제국 융성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시기였다. 그러나 같은 해 B.C. 448년[재위 17년째] 키프로스섬 앞바다에서, 키몬이 거느리는 아테네 해군에 패함으로써 트라키아 등지에서 세력을 상실하게 되어, 그후 고대 페르시아 제국은 서서히 쇠퇴하여 가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오른팔이 왼팔보다 길어 ‘롱기마누스(긴 팔)’라는 별명이 있다.

“여호와의 계명의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 학자요 학자 겸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아닥사스다 왕이 내린 조서의 초본은 아래와 같으니라”(에스라7:11).

**아닥사스다(Artaxerxes): ‘율법에 주권을 주는 자’라는 뜻으로, 바사 왕을 가리키는 칭호이다. 아닥사스다로 호칭되는 왕은 네 명인데, 성경에 나오는 아닥사스다는 아닥사스다 1세를 말한다. 아닥사스다 1세(BC 464-424)는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로, 오른손이 왼손보다 길어서 ‘롱기마누스’(Longimanus,긴팔)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애굽과 바사의 반란을 진압했다. 어떤 학자들은 아닥사스다 2세가 아닌 1세가 다스릴 때에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귀환해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쳤다고 보기도 한다(스 7:1-8:1).

**아닥사스다 2세: 아닥사스다 1세의 손자다리오 2세의 아들이다. 그는 재위 7년에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가도록 허락했다(스 7:7-26; 8:1).

“아닥사스다 왕 제칠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스7:7).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은 1,800여 명이었으며, 인도자는 에스라였다. 또한 그는 재위 20년에 느헤미야를 유대 총독으로 임명했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도록 했다(느 2:1-18). 이 과정에서 성벽 재건을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해 성벽 재건이 잠시 중지되기도 했다(느 4:7-23).  <!--[endif]--> 

**느헤미야(Nehe-miah): BC 444년 이후 유다 지방을 다스렸던 총독으로 그의 아버지는 하가랴였다.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의 술 맡은 관원이었던(느 1:11) 그는 신임받는 관리였다. 그는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의 소식을 전해들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를 절감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느 1:2-11). 왕에게 예루살렘 귀환을 허락받은 그는 총독 직책을 맡아 예루살렘으로 향했다(느 2:1-8).

당시는 12년 전 예루살렘을 재건하려던 에스라(바벨론에서의 2차 포로귀환 때 백성들을 이끌었던 훌륭한 지도자(7:7; 8:1)의 계획이 반대자들의 방해로 인해 중단되어 있던 상태였다(스 4:21-22). 느헤미야는 자신이 가지고 간 왕의 조서를 근거로 다시 예루살렘 성벽 건축을 시작했고, 결국 52일 만에 성벽을 재건했다(느 12:27-47). 아울러 여러 가지 사회제도나 종교제도도 잘 정비했다(느 7, 11장).

느헤미야는 능력있고 신뢰받는 사람이었다. 포로로 잡혀간 나라에서 중요한 지위에 올랐던 것을 볼 때 탁월한 실력을 지녔을 것으로 생각된다(느 1:11; 2:1-8). 그가 했던 술맡은 관원이라는 직책은 왕이 독살당하지 않도록 먼저 술 맛을 보는 일이었데, 이는 신뢰받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는 또 문제가 생겼을 때 기도했던 기도의 사람이었으며(느 1:5-11; 2:4; 4:4-5; 6:9,14), 문제에 대해 주의 깊게 접근하여 철저한 계획을 세웠던 사람이었다. 그는 반대자들(산발랏, 도비야, 게셈)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를 지녔으며(느 4, 5, 13장),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느 5:14-18). 또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쳐, 과거에 지은 죄를 회개하고(느 9:1-37) 헌신하도록 가르쳤던 지도자였다. 또한 느헤미야는 자신이 행한 일을 기록한 뒤, 하나님께 나를 기억해 주소서라고 간청했다(느 5:19; 13:14, 22, 31). 이는 곧 ‘나에게 상을 주소서’라는 의미로, 현 세상에서 보상을 바라지 않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바랐던 내면의 가치가 잘 표현된 말이었다.

동시대의 에스라가 제사장으로서 영적인 부흥을 이끌었고, 말라기 선지자가 이를 도왔다고 본다면, 느헤미야는 정치적이고 실제적인 부분에서의 주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9. 다리우스 2세(재위 B.C.423-405; 18년):

아르타 크세르크세스 1세와 그의 첩(妾) 바빌로니아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원래 이름은 오쿠스였다. 히르카니아 지방 사트라프(총독)를 지내다가, 이복 형 세키디아누스(또는 소그디아누스)의 왕위를 빼앗고 그를 처형했다. 노투스(서자)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으며, 왕위에 오른 후에는 다리우스라는 이름을 썼다.

그의 치세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궁정은 음모와 부패로 가득 차 있었으며, 왕은 잔인하고 야심만만한 아내이자 이복누이인 파리사티스와 환관들에게 조종당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그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히르카니아와 메디아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당했다.

다리우스 2세는 B.C. 413년에 시라쿠사에서 아테네군을 무찌른 후, B.C. 448년부터 아테네의 지배를 받고 있던 소아시아의 해안도시들을 되찾기로 결심했다. 소아시아 지방 사트라프인 티사페르네스와 파르나바주스를 시켜 밀린 공물을 거두어들였고, 아테네와 맞서기 위해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다. 아테네와 전쟁을 한 후 이오니아 지방을 대부분 되찾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이는 스파르타군에게 제한된 지원만을 했던 티사페르네스의 정책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BC 407년 다리우스 2세는 스파르타군을 아낌없이 지원하기로 결정해, 티사페르네스 대신 자기 아들 소(小) 키루스를 소아시아 지역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스파르타 함대 재건에 필요한 자금을 아들에게 주었다. 그 결과 아테네는 B.C. 405년 아이고스포타미에서 참패했다. 그러나 얼마 후 다리우스는 병으로 죽었다.  

10. 아닥사스다 2세 (아르타크세르크세스;그리스어 표기, 므네몬(재위 B.C.404~358):

므네몬(기억이 좋다)이라고 불렀다. 다리우스 2세의 장자이다. 치정 초기에 동생 키루스(小)가 그리스인 용병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은 쿠낙사 전투에서 동생을 죽이고 그리스 용병을 패주시켰다. 이것이 그리스 용병 l만 명의 퇴각이라 하여,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 Anabasis>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집트 원정에는 실패하여, 유프라테스강 이서의 땅을 잃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소아시아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국내가 동요하고 궁정 안에서도 암살 ·음모가 끊이지 않았다. 이 불안 중에 아내와 자식이 잇달아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자신도 죽었다.   

11. 아닥사스다 3세(아르타크세르크세스, 오쿠스, 재위 B.C.358-338; 20년) :  환관 바고아스가 독살 

12. 아르세스(재위 B.C.337-336; 1년): 환관  바고아스가 독살

13. 다리우스 3세(재위 B.C.335-331, 4년):

 BC330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BC356~BC323, 재위 BC336∼BC323)에게 패배한 후 신하인 베소스에게 죽음을 당해 아케메네스 왕조인 페르시아 역사는 끝나고 헬라 제국시대가 시작했다.

왕가에서 갈라져 나온 먼 친척이었지만, 전왕(前王)인 아르타 크세르크세스 3세아르세스를 독살한 환관 바고아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다리우스 3세가 환관의 지배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하자, 바고아스는 그마저 죽이려 했으나 도리어 왕에게 사약을 받았다.

B.C. 337년에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는, 아케메네스 왕조가 다스리고 있는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코린트 동맹을 결성하고, B.C. 336년초 소아시아에 선발대를 보냈다. 그러나 필리포스는 7월에 다리우스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암살당했다.

BC 334년 봄,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이 대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넜다.
페르시아는 전쟁 태세를 전혀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라니코스 강에서 패배했다.
알렉산더는 이듬해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점령한 후, 킬리키아까지 진격했다.
마침내 다리우3세가 직접 출전했지만, BC 333년 가을 이소스에서 패배해, 어머니· 아내· 자식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후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더에게 화해하자는 편지를 2번 보냈는데, 2번째 편지에서 동맹을 맺어준다면 자기 가족의 몸값으로 막대한 재물을 주고, 유프라테스 강 서쪽에 있는 페르시아 영토를 마케도니아에게 모두 넘겨주겠으며, 자기 딸을 바치겠다고 제의했다.
알렉산더가 이 제의를 모두 거절하고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하자, 다리우스는 그가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을 건너게 내버려둔 다음 ,지금의 모술 동쪽에 있는 가우가멜라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했다(B.C. 331. 10. 1).

그는 싸우고 있는 부하들을 버려둔 채 엑바타나로 달아났고, 알렉산더가 쫓아오자 다시 박트리아로 도망갔지만,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였던 베소스에게 폐위당한 후 살해되었다. 이로써 페르시아제국은 멸망하였다

**알렉산더 대왕(BC.356~BC323, 재위 BC.336∼BC323) : 필리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의 아들로서 알렉산드로스 3라고도 한다.
당시의 대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케도니아 수도인 펠라의 궁정에 초빙되어 3년 동안 그에게 윤리학 ·철학 ·문학 ·정치학 ·자연과학 ·의학 등을 가르쳤다.

BC 333년 킬리키아의 이수스전투에서 다리우스 3의 군대를 대파하였으며, 이어 페르시아 함대의 근거지인 티루스(티로스) ·가자 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시리아 ·페니키아를 정복한 다음 이집트를 공략하였다.
이집트에서는 나일강 하구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시(市)를 건설하고 1,000km가 넘는 사막을 거쳐 아몬 신전에 참배하였다. BC 330년 다시 군대를 돌려서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가우가멜라에서 세 번이나 페르시아군(軍)과 싸워 대승하였다.
이때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는 도주하였으나 신하인 베소스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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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6780) 체마흐( tsemach)
צֶמַח 스트롱번호6780

1. 싹
2. 창세기 19:25 /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3. 시편 65:11
발음 / 체마흐[ tsemach ]
어원 / 677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난 것(창19:25), 움돋게 함(사61:11), 가지(렘23:5), 풀(겔16:7), 이삭(호8:7), 싹(시65:10), 소산(사4:2), 순(슥3:8, 6:12).
[형] 연한(겔 17:9),
[동] 자라다(겔 17:10)
구약 성경 / 12회 사용

* 6779. צָמַח 차마흐(tsâmach)

1. 싹이 나다
2. 피엘형 : 자라다
3. 히필형 : 싹트게 하다
발음 / 차마흐[ tsâmach ]
관련 성경 / 나다(창 2:5, 레 13:37, 창 2:5, 신 29:23), 솟아나다(시 85:11, 사 44:4, 겔 29:21), 일어나다(욥 5:6), 시작되다(사 42:9), 나타내다(사43:19),움돋다(사45:8), 자라다(출10:5, 대상19:5, 겔17:6), 돋아나다(슥6:12), 나오다(창41:6), 기르다(전2:6), 싹이 나다(사55:10), 내다(창3:18), 이루다(삼하23:5).
구약 성경 / 33회 사용






잠언 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계시가 없으면 백성이 무질서하겠지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


스가랴서의 8가지 환상





              환상

                                                 의 미

여호와께서 두루 다니심

                성전을 재건하다가 지치고 실망한 이스라엘에게 용기와 소망을 줌       

네 뿔과 네 공장

                 때가 되면 하나님이 원수를 물리치실 것임                                     

척량줄

                 예루살렘이 완전히 재건됨

대제사장 여호수아

                택한 백성의 죄가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됨

등대와 감람나무

                낙심한 스룹바벨에게 용기를 줌

날아가는 두루마리

                율법을 깨뜨린 자들은 그 율법에 의해 징계 받음

에바 속의 여인

          모든 죄악이 제거됨

네 병거

          이스라엘의 대적을 정복하시는 하나님





스가랴의 8개 환상과 10개 예언

스가랴(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서는 구약성경의 39권의 중 38번째 책이다.
주전 520년경 기록되었으니 지금부터 2,543년전의 책이다.
14장으로 기록된 책은 8개의 환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 기록된 난해한 책이다

스가랴 1장~6장 : 8개의 환상
스가랴 9장~10장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예언
스가랴 12장~14장 :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예언

스가랴서의 예언과 성취

1. 550년 후 성취 /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나귀 새끼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슥 9:9)
2. 550년 후 성취 /  은 30개에 팔릴 것이 문자적으로 상취되었다 (슥 11:12)
3. 550년 후 성취 /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것도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슥 11:13)
4. 590년 후 성취 /  그들이 메시아를 거절하므로 여러 나라에 흩어질 것이다, 디아스포라 (슥 7:11~14)
5. 2468년 후 성취 /  여러 나라에 흩어졌던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 올 것이다 (슥 8:1~13)
6. 2540년 후 성취 /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의 취하는 잔이 되고 무거운 돌이 된다 (슥 12:2~3)
7. 미성취 / 이방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 것이다 (슥 12:3~9, 14:12~15)
8. 미성취 / 이스라엘 큰 애통으로 회개하고 메시아에게 돌아올 것이다 (슥 12:10~13:1)
9. 미성취 / 주께서 예루살렘 동쪽 감람산에 재림하실 것이다 (슥 14: 4~5)
10. 미성취 / 이방 나라들이 초막절을 지키러 에루살렘으로 올라올 것이다 (슥 14:16~21)


스가랴의 8개의 환상

환상 1 : 온 땅을 돌아보는 말들 (감찰하시는 하나님)
환상 2 : 네 뿔과 네 일꾼들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과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환상 3 : 측량줄을 지닌 사람 (하나님의 백성을 측량하시는 하나님)
환상 4 : 여호수아와 제사장의 옷 (정결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환상 5 : 촛대와 두 올리브나무 (성령의 기름으로 꺼지지 않은 등잔)
환상 6 : 날아다니는 두루마리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환상 7 : 에바 속의 여자 (디아스포라 예언)
환상 8 : 네개의 전차 (네 개의 임무)

PART I

1. 환상 1 : 온 땅을 돌아보는 말들 (1:7~17)

여호와의 전지전능은 우주적이고 지구적인데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신다. 
특히 그의 백성의 회복에 관심을 가지신다.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말 등 여러 말들이 있는데 말을 탄 자들의 임무는 세상 전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피고 보고하는 일이다.
세상은 평온한 듯 보였지만 예루살렘의 성전건축은 중단되고 영적 나태함에 빠진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성전건축을 격려한다

환상 2 : 네 뿔과 네 명의 대장장이(1:18~21)

네 뿔은 이스라엘은 대적하고 괴롭히는 사방의 왕들을 의미한다.
넷이란 세상의 네 모퉁이 즉 지구 전체를 총체적으로 상징한다.
역사적으로 앗시리아, 이집트,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로마 등이다.
네 명의 대장장이는 주의 백성을 괴롭히는 제국과 왕들을 심판하는 도구이다.
하나님은 악한 권세자들을 두고만 보시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신다

환상 3 : 측량줄을 지닌 사람(2:1~13)

한 사람이 자기 손에 측량줄을 잡고 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예루살렘을 재어서 그 너비와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러 간다"
측량줄이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벽재건과 관계 있다면 이스라엘의 회복을 상징할 것이다
또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불성벽이 되어 주실 것이며 그의 눈동자처럼 보호하실 것이다
이는 성도들에게도 같은 보호막이 되어 주실 것이며 그들의 중심과 삶이 측량되어질 것이다

환상 4 : 여호와 앞에 선 여호수아와 새싹(3:1~10)

네 번째 환상은 여호수아가 천상의 어전회의장에 서 있다.
더러운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 앞에 서 있고 사탄이 고발하는 환상이다
여호수아는 죄로 더럽혀진 이스라엘 민족과 성도들을 상징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깨끗한 관과 아름다운 옷을 입음으로써 정결함을 회복한다
사탄이 여호수아를 참소할 때 여호수아를 변호하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를 통하여 정결해 질 수 있다
새 싹과 세운 돌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환상 5 : 금촛대와 두 올리브나무(4:1~14)

금촛대는 스룹바벨 성전, 교회와 성도를 상징하는데 일곱개의 등잔은 기름그릇에 대롱으로 연결되어 자동으로 기름이 보충된다.
등잔의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고 성령충만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된다
두 올리브나무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여호와를 섬기는 기름 부음을 받은 두 사람이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구약과 신약, 12지파와 신약교회, 두 증인 등을 다양한 견해가 있다
중요한 것은 교회와 신자들의 등잔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성령으로 충만해 지는 것이다

환상 6 : 날아다니는 두루마리(5:1~4)

날아다니는 양탄자처럼 길이 9m, 폭이 4.5m의 큰 두루마리가 날아 다닌다
두루마리의 크기는 성전의 성소 면적과 똑같았다
이 두루마리는 온 세계위를 날아 다니면서 범죄한 사람을 찾아 그 안에 기록된 죄를 짓는 자에게는 저주와 벌을 내렸다
두루마리의 양편에 써있는 글이 다음과 같다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는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도둑질하는 자는 모두 없어질 것이다"
"거짓 맹세하는 자도 모두 없어질 것이다"

당시 도둑질과 거짓맹세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의 대표적인 죄였다
이 두 죄는 십계명을 요약한 죄이기도 하다
죄악된 삶은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공동체에도 범죄한 자들이 활보하며 내부적인 부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환상 7 : 에바 속의 여자(5:5~11)

에바는 곡식의 양을 재는 되와 같은 측정도구로 범죄의 양을 재는 기준으로 쓰였다
에바의 크기를 속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를 측정하여 또다시 이방땅으로 쫓겨 가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디아스포라가 되어 세상을 떠돌아 다녔다 

환상 8 : 네개의 전차(6:1~8)

놋쇠로 된 두 산 사이에서 네 대의 전차가 나온다
네 대는 네 뿔, 네 대장장이, 네 바람처럼 온 세상 사방을 의미한다
붉은 말, 검은 말, 흰 말, 얼룩진 힘센 말은 요한계시록의 네 개의 인의 임무와 유사하다
전쟁, 기근, 기만, 전염병을 상징한다

PART II

금식에 대한 질문 (7:1~14)

스가랴가 1~6장에 기록된 8가지 환상을 본 지 2년이 지났다
벧엘 사람들이 사절단을 보내 스가랴에게 금식에 대해 질문을 했다
"우리가 여러 해 동안 금식을 해 왔는데 올해도 금식을 해야 합니까?"
그들이 선지자에게 받은 네 가지 응답은 위선적인 금식보다 순종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공정한 재판, 사랑과 자비, 억누르지 말 것, 서로 해치지 말 것에 대한 종교의 핵심 메시지를 받았다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약속 (8:1~23)

예루살렘은 회복되어 사랑과 공의가 넘치는 도시가 될 것이며 슬픔이 사라지고 온 세계 만민에게 구원을 전하는 성읍이 될 것이다

PART III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심판(9장~11장)

그는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실 것이며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이다
메시아의 성품은 공의, 구원의 원천, 겸손하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나귀 새끼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은 30개에 팔리고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것도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그의 사역은 크게 4 가지로 언급되고 있는데
메시아는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구원하실 것이며, 재림시에 거짓 목자들을 멸하실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모으실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배척한 결과로 겪게 될 무서운 심판(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였다

PART IV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12장~14장)

마지막 때에 이르러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의 취하는 잔이 되고 무거운 돌이 된다
이 예언은 우리 시대에 성취되는 것을 목격중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1/3이 남고 2/3는 멸망당한다
그 남은 1/3도 불 속에 던져 연단받고 시험받아 정결케 할 것인데 짐승의 통치때 박해 받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의 연합군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 것이고 이스라엘은 회개하며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아마겟돈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승리할 것이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를 패전할 것이고 메시아 왕국이 완성될 것이다
모든 나라는 여호와를 섬기며 예루살렘으로 초막절을 지키러 매년 올라올 것이다
온 세상은 여호와께 거룩하게 구별되어 드려질 것이다

- 스가랴는 매우 공손하고 경외하는 말('내 주여')로 이 환상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해석하는 천사가 자신이 그 뜻을 설명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런 내용은 13, 14, 19절;  4:1;  5:10;  6:4 등에도 나타난다.










네 병거를 끄는 말들의 환상(슥6: 18)

 스가랴가 본 마지막 여덟 번째 환상은 네 병거의 환상으로, 스가랴는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오는데 그 산은 구리산(놋산)이었습니다. 첫째 병거는 붉은 말이었고, 두 번째 말은 검은 말, 세 번 째 말은 흰 말이었으며 마지막 네 번째 말은 아룽지고 건장한 말이었습니다. 스가랴는 이 말들을 보여주신 이유를 몰라 천사에게 물었는데 그 때 천사는 이 네 말들은 하늘의 네 바람이다 라고 답변하며 곧 이 네 말들이 세상 온 땅으로 흩어져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스가랴가 본 마지막 이 환상은 하나님 나라 완성에 대한 비전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네 병거들이 나온 놋산(구리산)이 주는 의미(1절)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오는데 그 산은 구리산(놋산)이더라”(1절)

스가랴는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오는데 그 산은 구리 산이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성경에서 구리 즉 놋은 강한 능력과 승리를 상징하며 또한 심판을 상징합니다.

▶신명기 28: 22∼24절을 보면 “하늘은 놋이 되고…….너를 멸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스가랴가 본 놋산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며 그것은 그의 능력과 승리로 임하시는 심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로서 스스로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숭배하기를 요구하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무시하며 불법을 자행한 자들을 강력하게 벌하실 것입니다.

▶지금 세상을 보면 그 주님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은 변화무쌍한 가운데 있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입니다. 시리아를 중심으로 이상한 일들이 자주 벌어집니다.

터키는 러시아 정찰기를 공격하여 추락시켰고, 러시아 여객기는 원인도 모르고 사하라 사막에 추락하여 224명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으며, 미국 구축함이 흑해에 들어옴으로 러시아는 계속 전투기를 띄우고 있으며, IS의 석유 밀매로 하루17억 원의 수입을 올리는데 이것을 막으려는 러시아는 시리아 정부군을 돕고 미국과 서방은 시리아 반군의 편이 되어 언제 러시아와 미국이 충돌할 지 일촉즉발입니다.

▶이 세상은 신세계 단일 정부를 만들려는 자들의 음모에 빠져 결국 그들의 각본대로 전쟁과 기근으로 가게 될 것이며, 그들은 자신들만의 파라다이스를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들의 각본대로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가게 되는 것이고,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계획에 악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스가랴의 환상을 보면 하나님은 여러 말들을 보내어 그들을 심판함으로 궁극적으로는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네 병거와 네 종류의 말들(2-4, 6,7절)

스가랴는 네 병거를 끄는 네 종류의 말들을 보았습니다.

첫째 병거를 끄는 붉은 말

붉은 말은 전쟁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구리 산에서 붉은 말이 나왔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통하여 세상 나라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면 전쟁은 미국이나 시리아나 러시아 등 그런 나라들의 다툼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심판하는 도구로 그들 나라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노아 시대나 소돔과 고모라 성(城)과 같이 직접 지진이나 자연을 이용하실 때도 있지만 전쟁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을 보면 가장 먼저 사용하시는 도구가 전쟁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전쟁이라는 도구를 사용할까요? 사람들의 탐욕 때문입니다. 인간의 탐욕은 예로부터 전쟁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또한 자기의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는 것으로 쾌감을 느낍니다. 이러한 것들은 마지막 때에 더 심각하게 나타나서 결국 동물이 자기 영역 싸움을 하듯 인간들은 자기 영역 싸움을 하고 더 나아가서 남의 나라에 탐을 내고 남이 가진 것 빼앗으려 하며 패권 전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그러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향한 예언적 메시지입니다. 시리아와 터키 그리고 러시아와 미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지금 유일하게 석유로 살아가는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는 지금 경제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석유가 폭락했습니다. 미국이나 선진국 몇 나라를 제외한 우리나라를 비롯한 신흥국가는 석유 폭락과 더불어 경제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석유가 폭락했다고 좋아하는데 석유가 폭락하면 선진국에서 자신들의 주식을 모두 회수해 갑니다. 지난 주 신문에도 나왔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신흥국가들은 석유 폭락으로 외국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주식을 거두어 들이면 한 순간에 국가 부도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 전세계 경제 몰락이 눈 앞에 왔습니다.

 

갑자기 왜 석유가 폭락했을까요? 세계 경제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세력입니다. 이들은 러시아나 중동 국가들을 자극하여 전쟁을 유발시켜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들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고 자신들도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먼저 붉은 말을 등장시켰습니다. 전쟁을 통하여 불신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3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붉은 말과 검은 말과 흰 말과 어룽진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어룽진 말이 건장한 말로 나오지만 6절에 이하를 보면 검은 말과 흰말, 그리고 어룽진 말은 나오는데 붉은 말이 나오지 않고 대신 건장한 말로 바뀌어 나옵니다. 이것은 전쟁은 갈수록 강하고 치열해 짐을 말합니다.

또한 7절을 보면 이 건장한 말, 붉은 말은 땅에 두루 다니고자 하여 하나님께서 하락하여 땅에 두루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 마지막 때의 전쟁은 전 세계적인 전쟁임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도 전쟁은 예수님 공중 강림 하시기 전부터 시작되어 7년 대환난 동안 내내 계속되어 오다가 예수님 지상강림 때 주님이 오심으로 끝나게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둘째 병거를 끄는 검은 말

둘째 병거를 끄는 말은 검은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보면 스가랴의 환상과 그 순서가 똑같습니다(계6장).

붉은 말에 이어 검은 말 그리고 어룽진 말입니다. 여기에 검은 말은 기근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6장 5절을 보면 둘째 인을 떼실 때 검은 말이 나오는데 검은 말에 탄 자가 저울을 가진 것을

봅니다.

전쟁 뒤에 오는 것은 당연히 슬픔과 죽음과 기근입니다. 전쟁이 남기고 간 자리는 어느 나라건 항상 같습니다.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곤고함이 있고 기근이 따릅니다. 가족을 잃은 슬픔, 사랑하는 자의 죽음 등은 곤고함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것을 잘 알면서도 인간은 전쟁을 일으키고 남의 소중한 가족을 피눈물 나게 하고 기근에 굶주려 쓰레기 통을 뒤지는데, 자신은 편안한 소파에 누워 그런 전쟁을 게임으로 생각하며 즐기며, 돈을 긁어 모으려는 악마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잠시 영화를 누리려고 그런 짓을 합니다. 그런 자들이 가는 곳이 결국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그런 자들을 도구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타락상 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일들을 허용하는 것은 그런 배고픔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타락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악이 차지 않았다면 그들이 아무리 그런 일을 계획한다 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합니다.

 

▶주님 오실 때가 아직 멀었다고 하는 분들이 있다면 지금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죄악들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탐욕스러운지, 그리고 이 세상이 얼마나 추악한지 생각해 보세요.

200년 전의 사람들을 서울 한복판에 갖다 놓으면 그들이 예수님은 몰라도, 말세도 몰라도 세상 말세라고 할 것입니다.

▶니느웨성은 악독이 가득했음에도 요나의 외침에 금식하며 회개했는데, 지금 이 시대에 그런 외침을 한다면 귀를 기울여 듣고 가슴을 치며 회개할 사람이 있을까요?

세상의 끝은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회개할 사람이 없을 때 행하십니다.

 

노아 때에 사람들은 회개할 줄 몰랐고, 소돔과 고모라성 사람들은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아모리 사람 그랄 왕은 하나님께서 그의 꿈에 나타나 책망 했는데도 그는 잠에서 일어나 행동을 고칠 줄 알았습니다.

니느웨 성 사람들도 선지자의 외침에 회개하고 엎드릴 줄 알았기에 하나님은 심판을 거두어 들인 것입니다.

 

▶회개할 줄 모르는 시대는 소망이 없습니다. 회개의 메시지에 비웃고, 코 웃음 치는 시대는 절망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가치관이 무너진 시대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은 이제 동성애를 반대하는 자들을 정신 이상자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자이며 천국과 지옥을 말하는 자를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하여 그러한 자는 세계 평화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면 가장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표적이 되어 제거될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더 지속되어야 한다고 믿으십니까? 그래서 주님의 강림은 멋 훗날에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고, 회개의 메시지에도 무감각하다면 그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검은 말의 출현은 붉은 말의 뒤를 따라 나타났듯이 머지 않아 이 지구촌에 전쟁과 그에 따른 기근이 일어날 것입니다. 6절을 보면 검은 말은 북쪽 땅으로 나갔다고 했는데, 이는 전쟁으로 북쪽 나라 사람들이 더더욱 기근이 클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나라 사람들이 모두 돈을 사랑하고 우상화했기에 하나님은 기근으로 심판하는 것입니다. 검은 말이 북쪽으로 갔다는 것을 보면 지금도 그러하지만 북쪽 지역 나라 사람들이 더 경제적인 타격이 심할 것으로

봅니다.

 

셋째 병거를 끄는 흰 말 

세 번째 병거를 끄는 말은 흰 말입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이 흰말은 검은 말 뒤에 따라 가는 말로 나옵니다. “검은 말은 북쪽 땅으로 나가고 흰 말은 그 뒤를 따르고”(6절)

백마는 승리와 번영을 말합니다. 성경학자들은 흰 말은 전쟁으로 죽음과 슬픔 속에 처한 사람들 사이에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들을 보호하는 세력 또는 주의 천사일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또 어떤 분은 한바탕 전쟁이 일어난 후 주님께서 강림하시는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전쟁이 잠시 소강 상태로 있을 때 주님의 강림이 있고 그 이후로 일어나는 전쟁을 7년 대환난의 전쟁으로 봅니다.

요한계시록 6장을 보면 첫 번째 인부터 시작하여 여섯째 인까지 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7장에는 갑자기 구원 받은 자에 대한 기록으로 십사만 사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 8장을 보면 일곱째 인을 떼기 전 하늘이 반시간쯤 고요하다고 했습니다. 일곱 째 인을 떼면 곧 일곱 나팔을 부는 천사의 심판과 일곱 번째 나팔 천사의 일곱 대접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본문에 보면 검은 말 뒤에 흰말이 뒤따랐습니다. 실패 하는 자가 있으면, 승리하는 자가 있고, 죽는 이가 있는 반면 태어나는 자가 있듯, 검은 말로 상징되는 가난과 기근 뒤에 곧 바로 승리를 상징하는 흰 말이 따라간다는 것은 바로 한차례 전쟁으로 인한 죽음과 기근 뒤에 주님께서 강림하셔서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병거를 끄는 말 어룽진 말

3절을 보면 어룽진 말이 나오는데 6절을 보면 어룽진 말은 남쪽 땅으로 가는 것을 봅니다. 어룽진 말이란 알록달록한 말로서 요한계시록 6장 8절을 보면 청황색 말이 등장하는 것을 보는데, 청황색 말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국립묘지에 가면 청황색 말의 동상이 있는 것을 보며, 덴버 공항 벽화에도 청황색 말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6장 7,8절을 보면 “넷째 인을 떼실 때에…..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서 죽이더라”

본문에 보면 어룽진 말은 남쪽으로 갔습니다. 이것은 남쪽 즉 단일 정부의 나라가 전쟁으로 인한 죽음이 심할 것을 말씀합니다. 특별히 남쪽을 죽음이 더 심한 것으로 묘사하는데 그 이유는 북방 나라들 보다 남방 나라들이 더 번영하고 번영된 도시에 밀집하여 살고 있기에 그럴 수도 있고, 전쟁으로 인한 흉년과 적그리스도에 의한 죽음이 더 심해서 이런 결과들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땅에 두루 다니는 건장한 말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3절에는 분명히 붉은 말로 표현된 말이 7절에서는 건장한 말로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건장한 말은 분명히 붉은 말을 가리킨다 라고 말합니다. 3절에서는 어룽진 말을 건장한 말로 표현했는데 7절에서는 붉은 말을 건장한 말로 표현했을까요?

주님의 마지막 심판 때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는 것을 보는데 그 사망하는 것이 얼마나 심한지 처음에는 건장한 말과 같이 사망의 영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사망의 영보다 전쟁의 영이 더 강력하고 지속적일 것이기에 이렇게 바뀐 듯 합니다.

예수님 강림하시기 전에 일어난 전쟁보다는 그 이후의 7년 대환난 때 즉 일곱 천사의 나팔과 일곱 대접 심판으로 이어진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 때를 가리켜 예수님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이 후에도 없으리라”(마24장21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본 첫 번째 환상은 한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섰

고 그 뒤에는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마가 있는 환상이었는데, 이것은 주님이 지금 심판의 도구를 준비하고 세상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시하고 계신 주님이 드디어 명령을 내리는 것이 바로 마지막 여덟 번째 환상으로 마지막 때에 대한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의 시간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심판하는 붉은 말과 검은 말과 청황색 말들이 지금 대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대입니다.

지금은 잠잘 때가 아닙니다. 위로가 필요한 때도 아닙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아파트 평수를 늘릴 때도 아니며 주식 투자할 때도 아닙니다. 지금은 깨어 있을 때이고, 기름 준비하며 주님 맞을 때입니다.

주님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습니다. 2015년 마지막 주일이며, 이제 새해를 맞이하지만 내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전 세계는 희망찬 새해를 소망하지만 세계 그 어느 나라도 결코 희망이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2016년의 세계경제나 국제정세를 보면 희망보다는 절망일 뿐입니다.

 

오직 희망은 예수뿐 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망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 절망의 새해를 맞이하지만 우리에게는 신랑 되신 사랑하는 내 주님을 기다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희망찬 새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 누리는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08-26-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진리의 성읍(스가랴 8: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This is what the LORD says: "I will return to Zion and dwell in Jerusalem. Then Jerusalem will be called the City of Truth, and the mountain of the LORD Almighty will be called the Holy Mountain."

진리의 성읍(the City of Truth)
이르 하에메트(עִיר־הָאֱמֶת)

성읍(5892) 이르(ʽîyr) עִיר 

1. 도시
발음 / 이르[ ʽîyr ]
어원 / 578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창 4:17, 출 9:29, 삼상 30:3), 성읍(창 19:25, 레 25:33, 민 13:19), 고을(창 35:5, 신 3:5), 도성(창 36:32, 민 21:26, 대상1:43), 집(삼하 17:23), 성주(왕상 22:26, 왕하 10:5), 성중(대하 23:21), 영문(느 2:8), 읍(에 8:17, 9:2, 합 2:12),촌락(렘 19:15).
구약 성경 / 1042회 사용

* 5782. עוּר    
1. 깨다
2. 일어나다
3. 깨우다
발음 / 우르[ ʽûwr ]
관련 성경 / 깨다(삿 5:12, 욥 14:12, 시 73:20, 사 51:17), 일어나다(아 4:6, 슥 2:13), 격동시키다(욥 41:10, 단 11:2, 슥 9:13), 통하다(욜3:12), 깨우다(시 108:2, 아 8:5, 슥 4 :1), 들다(삼하 23:18, 대상 11:11), 치다(사 10:26), 소동하다(사 14:9), 내다(시 80:2), 일으키다(대상5:26, 잠 10:12, 사 45:13, 호 7:4), 부르짖다(사 15:5), 감동시키다(대하 36:22, 스 1:1), 감동받다(스 1:5), 부추기다(렘 51:11), 떨치다(시35:23, 단 11:25), 격려하다(욜 3:9), 어지럽게 하다(신 32:11), 흔들다(아 2:7, 8:4), 분발하다(사 42:13, 64:7), 깨우치다(사 50:4), 떨치다(단 11:25), 흥분시키다(학 1:14), 뽐내다(욥 31:29), 놀라다(욥 17:8).
[명] 격동(렘 50:41)
구약 성경 / 80회 사용

진리(571)  אֶמֶת 스트롱번호571

1. 확고함
2. 수 2:12.
3. 성실성
발음 [ ’emeth ]
어원 / 53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바름(창24:48), 진실함(출18:21, 렘42:5), 확실함(신17:4, 잠11:18), 참됨(신22:20, 단 10:1), 충성됨(대하32:1), 진정함(느9: 13), 성실함(시54:5), 충실함(사16:5), 견고함(사 39:8), 옳음(사43:9). [부] 분명히(렘32:41), 참으로(삿9:15), 진실히(삼상12:24, 왕상2:4, 겔18:8), 성실히(시132:11, 잠29:14). [명] 성실(창24:27, 왕상3:6, 시71:22), 진실(왕하20: 3, 시111:7), 진리(창32:10), 시57:3, 단10: 21), 성실함(창47:29), 참(신13:14, 대하15:3, 렘 10:10), 진실함(수24:14).
구약 성경 / 127회 사용

* 539. אָמַן  

1. 지속하다
2. 팔로 지탱하다.
3. 아이를 운반하다
발음 / 아만[ ’âman ]
관련 성경 / 양육자(룻 4:16), 유모(삼하4:4), 양부(사 49:23), 충성된 자(삼하 20:19, 시 101:6, 욥 12: 20), 충실한 자(시 12:1), 충성(잠27:6), 의지 (욥 29:24), 믿는 자(사 28:16), 성실한 자(시 31:23). [동] 자라다(애 4:5), 보존되다(삼하 7:16), 교육하다(왕하 10:1,5), 충성하다(시 78:8), 성실하다(시 78:37), 확실하다(시 93: 5, 사 55:3), 신실하다(잠 11:13, 호 11:12, 사 49:7), 진실하다(창 42:20, 사 8:2), 안기다(사 60:4), 충성되다(민 12:7), 오래다(신 28:59), 충실하다(삼상 2:35), 견고하다(삼상 2:35, 왕상 11:38, 사 33:16), 세움을 입다(삼상 3:20), 든든하다(삼상 25:28), 충직하다(느 13:13), 굳게 세우다(시 89:28), 단단하다(사 22:25), 믿다(창 15:6, 왕상 10:7, 신 1:32), 확신하다(신 28:66), 바라다(욥 15:22, 24:22), 의탁하다 (욥 39:12), 신뢰하다(대하 20:20).
구약 성경 / 100회 사용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Jerusalem will be called the City of Truth)
여호와의 산은 성산(the mountain of the LORD Almighty will be called the Holy Mountain)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을 향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선지자들은 "학개" "스가랴" "말라기"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보이는 성전 재건을 위하여 백성들을 깨우쳤다면 '스가랴' 선지자는 보이지 않는 성전을 재건하도록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스가랴서는 모두 14장으로 구성되었는데 1장에서부터 8장까지를 전반부라고 하여 8개의 환상과 금식에 관한 말씀을 소개합니다.
특별히 금식에 관한 7장과 8장의 역사적 배경은 바사(페르시아)의 다리오 왕 제4년 즉 기원전 518년의 시기라고 합니다.
기원전 520년부터 516년까지 4년 동안 총독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 재건에 전력했으므로 7장과 8장은 성전 건축이 한창일 때라고 하겠습니다.



심판 중에 구원을 베푸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벨론에서 돌아온 백성을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개혁되며 복구되어(1-8절), 그 나라가 부요할 것이며, 나라의 일들이 성공적일 것이며, 그들의 명성이 회복되고 그들의 상태가 모든 면에서 과거 수년 동안 계속되어 왔던 것의 반대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9-15절).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백성들이 실천해야 할 진실과 화평의 규범을 강조합니다(16-17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지키던 슬픔과 탄식의 금식을 그만 두고 즐거움의 금식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18-19절).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게 될 때 이스라엘은 다시 부요하게 되며 강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고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20-23절).


하나님께서는 이방국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지만 이스라엘을 괴롭힌 이방국들에 대하여 분노를 발하시어 멸망시키시고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이 행하심은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되 끝까지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은혜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머물러야 할 자리를 떠나서 다른 곳에서 방황하는 것은 은혜를 거부하느 반역적인 행동입니다.
날마다 머물러야 할 자리를 찾아서 머물고 떠나야  할 자리를 떠나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찾는다면 약속의 은혜는 이전보다 더 풍성하게 임할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찌니라

- "사월 금식"은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의 정복을 당한 사건을 기념하는 금식이고, "오월 금식"은 성전을 불사른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고, "칠월 금식"은 그달리야 총독의 피살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고, "시월 금식"은 예루살렘이 포위된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이 네 가지 금식절은, 바벨론에 포로된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지키던 것이다.
이제 저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본국에 돌아와서는 그 금식을 지키지 않고 희열의 기회로 가진다.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라".
진실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특징이다(요 1:47).
그리고 화평도 하나님의 자녀(참 이스라엘)된 증표이다(마 5:9).
이 말씀은, 재건된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을 말해 주지만 겸하여 신약 시대 새 이스라엘의 특징을 예언하기도 한다.





08-25-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를 위하여(스가랴 7: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Ask all the people of the land and the priests, 'When you fasted and mourned in the fifth and seventh months for the past seventy years, was it really for me that you fasted?

אֲנִי 스트롱번호589

1. 나.
2. 나로서는
3. 때때로 존재 동사를 내포한다
발음 / 아니[ ’ănîy ]
구약 성경 / 871회 사용

צוּם 스트롱번호6684

1. 금식하다
2. 삿 20:26
3. 슥 7:5.
발음 / 춤[ tsûwm ]
관련 성경 / 금식하다(삼하 12:21, 에 4:16, 느 1:14). [명] 금식(슥 7:5)
구약 성경 / 21회 사용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공사가 진행 중이던 때에 벧엘 사람들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들의 하인들을 보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전능하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에게 '우리가 여러 해 동안 해 온 대로 5월에 울며 금식해야 합니까?' 하고 질문을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행하던 금식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책망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였으므로 회개하라고 합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 앞에 가증하고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금식을 하여도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의 죄를 자복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적 형식에 이끌리어 금식을 했다고 합니다.

의식과 규례를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나 순종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제사를 가증히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고,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갖추고 있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신앙생활을 책망합니다.
겉 모양은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속 내용은 아무 것도 없는 쭉정이와 같은 신앙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기 전에 먼저 나의 거짓된 삶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깨끗한 그릇에 음식을 담아야 하듯 청결한 양심과 순수한 믿음의 행동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삶에 능력이 임하면 더 큰 잘못이 형성되어 사회의 악으로 자리를 잡아갈 것입니다.

매일의 삶이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메아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5월의 금식과 7월의 금식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 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 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 여기 이른바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함은, 금식 문제에 대하여 유대 민족 전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지적 하려 함이다. 그 잘못된 생각은 이렇다. 곧, 외부적 의식 문제를 영적 생명이나 또는 하나님의 도덕적 의지보다 중대시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사리의 경중을 구분할줄 모르는 잘못이다. 사리의 경중을 구분하지 않고 경미한 것을 취하느라고 중대한 것을 희생 시키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 그 경미한 것도 바로 취해지지 않는 것이다. 비유를 들면, 가죽보다 살이 중요한데 살을 손상시키면서 어떻게 가죽을 올바로 보호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종교 사리의 경중을 바로 구분하지 아니하고 행동하는 자들을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라고 하셨다(마23:24).

"오월과 칠월에 금식"

"오월 금식"은, 성전 훼파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바벨론에 잡혀 간 유대인 포로들이 금식한 것,

"칠월 금식"은, 바벨론 군대로 말미암아 유대 총독 그달리야와 및 유대 땅에 남아 있었던 유대인들의 살해된 사건을 기념 하느라고 금식한 것을 가리킨다(왕하 25:25, 26; 렘 41:1-).

열왕기하 25:25
칠월에 왕족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부하 열 명을 거느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서 죽이고 또 그와 함께 미스바에 있는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인지라.

예레미야 41:1-2
일곱째 에 왕의 종친 엘리사마의 손자요 느다냐의 아들로서 왕의 장관인 이스마엘이 열 사람과 함께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이르러 미스바에서 함께 떡을 먹다가.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와 함께 있던 열 사람이 일어나서 바벨론의 왕의 그 땅을 위임했던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칼로 쳐죽였고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칠십 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는 중 이런 금식일들을 정하고 행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며 기도하기 위함보다 다만 저들의 민족적 사정이 애달퍼서 그 금식을 통하여 비애를 표시하였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금식을 자기들이 하나님앞에 설 수 있는 공로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지요.
그런 종류의 금식은 실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금식은 공로도 아니며 그 누구의 비참한 처지를 애처롭게 여겨서 동정하는 행위도 아니다.
금식은 하나님을 향하여 회개함과 기도하기 위함이니 어디까디든지 자기와 및 기타 인간적 요소를 기껏 낮춤이다.
그러나 그 때 유대인들은 벌써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그릇되이 금식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기서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라고 하셨다.
여기 두 번씩이나 "나를 위하여"라는 말씀이 나왔으니 이 중언체는 역설체이다.
곧, 그들의 금식이 주님을 위하지 않은 것이 확실한 것을 힘있게 지적하는 것이다.
금식을 하는 자가 그것을 하나님의 도덕적 의지에 대한 순종보다 더욱 존중시하여 그것으로써 진정한 종교 생활의 내용을 대표할 것처럼 생각하거나, 혹은 그것을 공로로 내세운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금식이 아니다.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은 외부적 경건에 관계된 의식적 법규 같은 것을 중요시하였다.
그들의 생활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일시적으로 어떤 외부적 경건의 규례를 지켜 메꾸려고 하였다.
금식 문제에 있어서도 그들은 얼마 동안의 금식이 그들의 다른 때의 모든 불의한 생활을 감추어 줄 것처럼 생각하였기 때문에 금식하지 않는 때와, 먹고 마실 때에는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였던 것이다.
또한 금식 후의 결과는 전혀 하나님 중심적인 생활과 거리가 멀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재하지 말고 인애와 긍휼로 대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도, 이미 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떠나 있음을 증명해 준다.
옛부터 내려오던 하나님 섬김의 자세가 참 사랑과 희생을 잃어버린 채 인간의 형식만 남아 있게 되었다.
이 때만 아니라 이런 모습은 예수님 당시에도 만연되어 내려왔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의 봉사자로 세워진 것이 아니고, 당시의 혼탁한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을 전달해야 될 그들의 자세가 군림하고 통치하는 세속적 위치에만 관심을 쏟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셨던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영적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신자의 외식은 그 마음이 썩어 들어갈 때 이미 시작된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기본적 요소는 긍휼과 사랑 그리고 희생이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것을 모두 드리는 희생도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과 긍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의 것을 움켜쥐고 불쌍한 이웃을 돌보지 못하는 것은 외식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뒤를 걷고 마는 것이다.
인애를 익히고 제사를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예배만 있고 중심이 없는 신자의 생활을 원치 않으실 것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신자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사랑과 긍휼이다.  

스가랴 7장의 말씀은 금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1절에서3절입니다. “다리오 왕 제사년 아홉째 달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그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의 부하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
페르시아 왕 다리오 통치 4년 아홉째 달 4일에 주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했습니다. 그 말씀은 금식과 관련된 말씀으로 벧엘 사람이 몇 몇의 사람들과 부하들을 선지자 스가랴에게 보내 우리가 계속 오월에 금식해야 하냐고? 물은 물음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스가랴서 8장19절을 보면 바벨론 제국에 이어 페르시아 제국의 포로기를 보내고 있던 유다인들에게는 포로기간 동안 일 년에 네 번의 금식이 있었는데 넷째 달, 다섯째 달, 일곱째 달, 열째 달에 금식을 했습니다. 유다인들이 그렇게 했던 이유는 먼저 넷째 달은 바벨론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을 기억하며 한 금식이었고, 다섯째 달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불태운 것을 회고하며 한 금식이었고, 일곱째 달은 유다 총독 그달랴가 암살 된 것을 기억하며 한 금식이었고, 열째 달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 된 것을 기억하며 한 금식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생활을 해오며 대부분 한두 번 정도는 금식을 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 끼를 금식했든, 3일을 금식했든 심지어 더 긴 날을 금식했든 금식에 대한 경험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금식을 했을 때는 포로기의 유다인들처럼 이런 저런 다양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하루 한 끼 금식을 했던가, 입시를 앞에 둔 자녀를 위해 금식했던가. 취업이나 결혼 문제를 놓고 금식했던가, 진로를 놓고 금식했던가, 병 때문에 금식했던가 등등 다양한 이유로 금식을 했을 수 있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금식과 관련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4절에서 7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예루살렘과 사면 성읍에 백성이 평온히 거주하며 남방과 평원에 사람이 거주할 때에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 하시니라.” 곧 '너희가 바벨론 포로기인 지난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며 애곡하기는 하였으나, 너희가 진정, 나를 생각해서 금식을 한 적이 있느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도 너희 스스로 만족하려고 먹고 마신 것이 아니냐? 그리고 너희들의 수가 불어나고, 마음 놓고 살 때 내가 이미 이전 예언자들을 통해 아래의 말씀을 전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유다의 금식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금식이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금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가 두 번이나 반복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라는 겁입니까?

8절에서 10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곧 공정하게 재판을 하고, 서로 긍휼히 여기며, 자비를 베풀고, 힘없고 의지할 데 없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무시하거나 그들의 것을 약탈하지 않고 도리어 돕고 나누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음식을 금하고, 스스로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원하시고 인정하시는 금식이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야망과 욕망을 이루고 채우기 위한 금식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생각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그리하지 않은 것입니다. 단순히 먹지 않았을 뿐이지 진정한 금식을 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을 하며 금식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음식을 금하고 몸을 쳐 복종하는 금식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노는 것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 선한 신앙적 태도가 아닙니다. 금식을 해야 할 때는 금식도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금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재판, 인애, 긍휼, 과부, 압제하지 않음, 해하지 않음이 다 사람에 대한 말씀이듯이 진실과 정의, 긍휼과 나눔, 존중으로 사람을 대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참된 금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응답하시는 온전한 금식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씀에 대한 순종이 담겨져 있는 금식이야말로 진정한 금식인 것입니다.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진실과 공평으로 사람을 대합니다. 자신의 더러운 이득을 위해 사람을 해치고 거짓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작은 것으로도 나누고 베풉니다.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영향보다 좋은 영향, 선한 영향을 끼칩니다. 인생을 긍정하게 하고 희망을 품게 합니다.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추호라도 자기 의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사람을 생각하는 길에는 지나야 하는 기다림과 외로움과 인내의 터널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궁극적으로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사람을 하나님의 영원으로 초대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의 성취를 보고, 인생의 친구를 얻습니다. 우리의 오늘 하루가 이런 날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하루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금식의 의미를 되새기며, 진심으로 사람을 생각하는 자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경험하는 하루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주전 520년 경 16년 전 중단됐던 성전 재건 촉구

에스라 3:10~11은 고레스왕의 명을 따라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 5만 명이 솔로몬 성전터에서 희생제물을 바칠 때 그해 7월에 성전의 기초를 놓았다고만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537년(또는 538년)쯤 되었을 것입니다.

에스라 3:10~11
건축자
가 여호와의 전 지대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서로 찬송가를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주는 지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전 지대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그러나 에스라 4:4 이하에서는 사마리아인들과 다른 이웃나라들이 고레스의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4:4-6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의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경영을 저희하였으며.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저희가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을 고소하니라

에스라 4:24은 이들의 방해로 인해 하나님의 성전공사가 다리오왕 2년까지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는 주전 520년(또는 519년) 쯤 될 것입니다.

에스라 4:24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전 역사가 그쳐서 바사다리오 제 이년까지 이르니라.


이때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집은 훌륭하게 지었지만 하나님의 집은 황무한 채 버려두고 재건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학 1:3~4). 주전 520년(또는 519년) 쯤 학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므로 16년 전 중단했던 성전 재건을 유대인들에게 독촉했습니다.

유대인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에 감동이 생겨 성전 재건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학 1:14).
그때는 다리오왕 제2년 6째달 24일이었다고 합니다(학 1:15).

일곱째달 24일에 학개는 제2성전의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클 것을 예언하면서 백성들을 격려하고(9절) 2개월 후 아홉째달 24일에 여호와의 성전지대를 쌓던 날이라 했습니다(18절).

다리오왕은 537년에 고레스왕의 본래 조서를 찾아 이웃 나라의 방해없이 성전 재건공사를 명령했습니다(스 6:3~12). 516년에 제2성전은 완성되었습니다. 즉, 다리오왕 제6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냈습니다(15절).

이렇게 성경의 모든 자료를 정확히 분석하고 비교해 보면 거기엔 상호충돌이나 모순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08-24-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늘의 네 바람(스가랴 6: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The angel answered me, "These are the four spirits of heaven, going out from standing in the presence of the Lord of the whole world.

(새번역) 그 천사가 나에게 대답하였다. "그것들은 하늘의 네 영이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뵙고서, 지금 떠나는 길이다.

(현대인) 그가 나에게 '이것들은 하늘의 네 영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섰다가 나가는 것이다.'하고 대답해 주었다.

(공동번역) "이 네 병거는 하늘의 영들이다. 이 영들은 온 천하의 주님을 들어가 뵈옵고 이제 막 나와 사방으로 떠나는 길이다.

하늘의 네 바람(These are the four spirits of heaven)을 다른 번역에서는 "하늘의 네 영"이라고 합니다(새번역, 공동번역, 현대인).

하늘의 바람( 루호트 핫솨마임) רֻחֹות הַשָּׁמַיִם
the four spirits of
heaven

바람(7307) 루아흐(rûwach) רוּחַ 

1. 영,  2. 입 기운, 3. 호흡
발음 / 루아흐[ rûwach ]
어원 / 730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창 1:2, 삼상 10:10, 사 11:2), 기운(창 6:17, 7:15), 바람(창 8:1, 삼하 22:11, 시 11:6), 마음(창 26:35, 수 2:11, 전 1:17), 콧김(출 15:8, 시 18:15, 애 4:20), 의심(민 5:14, 30), 생명(민16:22),노여움(삿8:3, 잠29:11), 정신(삿15:19, 왕상10:5, 대하9:4), 성령이 하시는 역사(왕하2:9,15), 큰 바람(욥1:19), (콧)김(욥4:9), (입)기운(시33:6), 호흡(시104:29, 전3:19), 영혼(욥7:11, 시143:7, 사26:9), 광풍(시148:8, 사32:2), 숨(욥9:18, 19:17), 혼(전3:21), (입)김(욥15:30), 심령(시77:3, 잠16:2), 폭풍(시55:8, 사27:8), 성품(잠17:27), 생기(렘10:14, 겔 37:9), 분(전 10:4), 사면(렘 52:23), 사방(겔 5:10, 17:21, 단 11:4), 바람이 불 때(창 3:8), 헐떡거림(렘 2:24).
[부] 허망하게(미 2:11).
[동] 헐떡이다(렘 14:6).
구약 성경 / 378회 사용



하늘(8064) 솨마임(shâmayim) שָׁמַיִם

1. 하늘,  2. 하늘을 향하여, 3. וּשְׁמֵי שָׁמַיִם שָׁמַיִם
발음 / 솨마임[ shâmayim ]
관련 성경 / 천하(창 1:9, 출 17:14, 신 29:20), 하늘(창 1:8, 왕상 8:22, 암 9:2), 공중(창 1:28, 신 28:26, 삼하 18:9), 천지(창 1:1, 신 4:26, 렘23:24).
구약 성경 / 421회 사용

* 넷(703) 아르바(’arbaʽ) אַרְבַּע 

1. 넷,  2. 단 3:25
발음 / 아르바[ ’arbaʽ ]
어원 / 히브리어와 동일한 형, 702와 유래가 같음
관련 성경 / 사(스 6:17), 넷(단 7:3, 6)
구약 성경 / 5회 사용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 여기서도 문답식으로 계시가 나타나서 그것을 받는 선지자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준다. "바람"은 여기서 영을 의미하는데, 곧, 섭리 수종의 천사들을 가리킨다(욥 1:6,2:1). 이들은 온 세상을 주장하시는 주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지시를 받아 가지고 나온다.


흑마는 북편 땅으로 나가매 백마가 그 뒤를 따르고 어룽진 말은 남편 땅으로 나가고 - 홍마들이 메인 첫째 병거가 나가는 방면에 대하여는 여기서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스가랴가 이 계시를 볼 때에 그것이 상징하는 시대는 벌써 지나간 까닭이겠다(Pusey). 이 말들이 병거를 메인 것을 보니(2절), 전쟁으로 정복하는 군사 행동을 상징하고 일반 다른 재앙을 상징하지 않는다. 그리고 흑마의 뒤를 백마가 따른다고 했으니, 이것들이 각기 뒤이어 한 시대씩 차지하고 활동할 것임이 분명하다. 이 말들이 나가는 방위(북편 땅, 남편 땅)에 대하여는, 위의 2절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스가랴 6장의 내용은 두 부분으로 구분합니다.
6:1-8. 여덟번 째 환상으로 네 병거 즉 세계적인 심판의 힘(능력)이 하나님의 백성의 적에 임하고 이 힘이 바벨론 혹은 수리아에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셨습니다. 
6:9-15. 제사장 여호수아의 예표적 대관과 메시야의 약속.

네 병거의 환상을 목격하여 하나님이 악인에 대한 심판과 유다 백성에 대한 구원의 계시를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에게 보여 주신 모든 환상들의 결론으로 여호수아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을 명하셨는데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고 유다 백성이 회복될 것을 예언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죄를 속하고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어떤 정치적 목적과 세상적인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를 오해하여 그들의 지도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이러한 계획은 당시 우매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치적인 야망과 세속적인 바램에 의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신 구세주로서만 우리에게 신령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정치적 상황을 변화시켜 세상적 왕국을 이루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세상의 왕이 아니라 영적 세계의 왕 곧 이 땅과 저 세상의 영원한 영적 통치자가 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 되신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땅의 가치를 하늘의 가치로 높여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몸은 땅에 속해 있지만 땅에 붙잡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신령한 것을 찾아가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환상 8 : 네개의 전차(6:1~8)

놋쇠로 된 두 산 사이에서 네 대의 전차가 나온다
네 대는 네 뿔, 네 대장장이, 네 바람처럼 온 세상 사방을 의미한다
붉은 말, 검은 말, 흰 말, 얼룩진 힘센 말은 요한계시록의 네 개의 인의 임무와 유사하다
전쟁, 기근, 기만, 전염병을 상징한다



성경에서 "네 바람"은 무슨 뜻일까?

성경에서 바람이란 표현이 나온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람과 성경의 바람은 다른가?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떨어지고 실체가 없지만 반드시 있는 존재가 바람이다.
날씨예보에서 설명하는 바람이 성경에서 사용한 "바람"과 다른 예를 뽑아서 설명해보자.

1. 요한계시록 7:1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땅 사방의 네 곳에서 부는 바람으로 네 바람이다.
이 바람은 땅과 바다와 나무를 해롭게 하는 바람이다.

2. 다니엘 7:2
다니엘이 진술하여 이르되 내가 밤에 환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네 바람이 불자 네 짐승이 나왔다.   
이 네 짐승은 바로 바벨론과 페르시아, 헬라와 로마이다 이 네 짐승의 환상계시는 너무나 유명하다.   
다니엘의 네 바람이 그냥 바다에 불었던 강풍일까 아니다 분명히 영적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말씀한다.

3. 스가랴 6: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이 바람이 날씨 예보에서 표현하는 바람이 아니라 심상치 않는 의도가 있는 바람이라는 것은 누구든 의심치 않을 것이다.

온 세상 주앞에 있다가 나간다는 표현은 스가랴 4장1 4절<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에 나타난다.
이 말씀은 두증인을 설명할때 나온 말씀으로 두 감람나무를 표현하고 있다.   
온 세상의 주 앞에 있다나 나가는 존재가 보통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네 바람 또한 그냥 바람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

1.계 7장의 네 천사가 붙잡고 있는 땅 사방의 네 바람은 영적실체란 뜻이다.
이 네 바람의 하는 일은 땅과 바다와 수목을 해롭게 하는 일이었다.
2절 말씀에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또 다른 천사가 외친다.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하는 네 바람을 제어하는 네 천사에게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2절의 네 천사는 땅의 네 바람을 제어할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며, 이 바람은 땅과 바다와 나무를 해롭게 하는 권세가 있다는 뜻이다. 

네 천사가 나팔을 하나님께 받아 분다는 뜻은 이 네 바람이 해롭게 하는 일을 하도록 풀어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네 바람은 우리가 아는 바람이 아니라 영적인 실체가 있는 존재들이란 뜻이다.

2. 계 7장의 말씀은 계 6장까지의 일곱교회의 설명과 일곱인봉의 모든 설명이 끝난 상태로 인봉이 모두 떼어졌어도 나팔재앙이 늦추어지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나팔의 재앙이 지연되는 것은 14만 4천의 인치심을 위한 연고로 이 모든 계시록의 재앙들의 본격적인 활동은 네 천사가 네 바람을 놓아주는 시점으로 이는 1234나팔이 불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8장에서는 반시간의 고요라고 설명한것이 이 7장의 말씀들이다.


스가랴가 바라보는 새 시대의 여명


1. 스가랴 6장의 구조

스가랴 6장은 1~8절과 9~15절로 분명히 구분된다.
1~8절 단락은 환상에 관한 기록으로 스가랴서에 나타난 8가지 밤의 환상(Nachtgesichten)시리즈 가운데 마지막을 장식한다.
첫 번째 환상(1:8~17)은 붉은 말을 탄 사람의 환상이고,
두 번째 환상(1:18~21)은 뿔 넷과 대장장이 넷의 환상이며,
세 번째 환상(2:1~4)은 척량줄을 잡은 사람 환상이다.
네 번째 환상(3:1~10)은 여호수아의 무죄판결과 임명 환상이며
다섯 번째 환상(4:1~14)은 순금 등대와 두 감람나무의 환상이고,
여섯 번째 환상(5:1~4)은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이다.
일곱 번째 환상(5:5~11)은 에바 속의 여인 환상이고,
마지막 여덟 번째 환상(6:1~8)은 네 병거 환상이다.

스가랴의 마지막 환상은 홍마, 흑마, 백마 그리고 어룽진 말들이 이끄는 네 병거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온 땅을 두루 다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마지막 환상은 여러 말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등장하는 스가랴의 첫 번째 환상과 유사하다.
여덟 번째 환상은 첫 번째 환상(슥 1:7~17)이 다룬 주제를 상기시킴으로 전체 환상들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스가랴의 밤의 환상은 수미쌍관법(Inclusio)을 이루고 있다.
9~15절 단락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면류관을 씌워 주고 그 면류관을 성전에 두어 기념물로 삼는 예언자의 상징행동을 보여 준다.
스가랴 6장은 다음과 같은 짜임새로 구성되어 있다:

6:1~8 여덟 번째 환상 - 네 병거 환상
  1~3절 : 두 놋 산 사이의 네 병거
  4~8절 : 스가랴의 질문과 해석 천사의 대답
6:9~15 상징행위 - “여호수아에게 면류관을 씌우라”
  9~11절 : 면류관 제작과 여호수아에게 씌움
  12~15절 : 성전에 놓인 기념물로서의 면류관



4. 두 구리산 사이에서 나온 네 병거의 마지막 여덟 번째 환상(슥6:1~8)(참고, 계6:1~17)

1)본문내용(슥6:1~8)

첫째, 두 구리산 사이에서 나오는 네 병거(전차)의 등장(1~3)

스가랴가 또 눈을 들어보니, 네 병거가 두 구리산 사이에서 나왔다. 첫째 병거는 붉은 말들이, 둘째 병거는 검은 말들이, 셋째 병거는 흰 말들이, 넷째 병거는 어룽진 말들이 메고 있었다. 모두가 건장한 말들이었다.

둘째, 스가랴와 천사 사이의 네 병거에 대한 문답(4~5)

그때 스가랴는 자기에게 말하던 천사에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러자 천사는 이는 하늘의 네 영들로서,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고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셋째, 네 병거의 말들을 향한 천사의 명령과 말들의 출발(6~7)

검은 말은 북쪽 땅으로 나가고 있었고, 흰 말들은 서쪽으로 나가고 있었고, 어룽진 말들은 남쪽으로 나갔다. 건장한 말들은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고자 하였다.

넷째, 천사의 스가랴를 향한 북쪽 병거들의 활약 강조(8)

그 천사가 말하기를 북쪽으로 나간 말들이 북쪽에서 하나님의 영을 쉬게 하였다고 했다.

 

2)영적 교훈

첫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하려고 하늘의 천사들을 사용하신다(1~8).

둘째, 천사들은 각기 자신의 맡은 소임을 각각 따로 가지고 있다(1~3).

하나님의 곁에는 네 종류의 천사들이 있으니, 붉은 말들과 검은 말들과 흰 말들과 어롱진 말들(청황색말들)이 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소임을 맡고 있으니, 검은 말들은 북쪽 땅으로, 흰 말들은 서쪽 땅으로, 어롱진 말들은 남쪽 땅으로, 붉은 말들은 동쪽 땅으로 가서 일을 한다.

천사들은 세상으로 가서 정찰하고, 통제하고, 집행하며,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셋째,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을 시종하는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늘에서 지상으로 파송을 받아 임무를 수행한다(4~5).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하늘에서 지상으로 파송을 받아 명령을 수행하고 있음은 요한계시록 6장에 네 인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계6장에 나오는 네 마리의 말들과 그 탄 자는 흰 말과 붉은 말과 검은 말과 청황색 말이었는데, 복음전파를 담당하고,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치는 심판을 담당하고 있었다.

넷째, 천사들은 모두가 사명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7).

천사들은 다 건장한 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이을 성실하게, 능하게, 견고하게 감당할 수 있다.

시103:20-22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1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2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벧후2:11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다섯째, 북쪽집회에 참석했던 루시퍼와 그의 천사들을 하늘에서 쫓아버린 천사들도 있다(8).

하나님과 천사들의 모임이 있는데, 그곳은 북쪽에 위치한 하늘의 시온산에서다.

시48:2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사14: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시82:1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시89:7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모임 가운데에서 매우 무서워할 이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이시니이다

여섯째, 하늘에서 사탄과 그의 천사들이 검은 말들로 상징하는 하나님의 천사들에 의해 쫓겨남으로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다(8).

계12:7-11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일곱째, 사탄마귀가 하늘에서 쫓겨남으로 하늘에 안식이 찾아왔다(8).

마6:9-10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눅10: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떨어졌던)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5. 성전 재건을 독려하는 여덟 환상을 끝맺는 대제사장 면류관 관련 기사들(슥6:9~15)(참고, 슥3:1~5, 사11:1~5)

1)본문내용(슥6:9~15)

첫째,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면류관 제작과 보관 및 종말론적 성전 건축자에 대한 예언 전달 명령(9~14)

이제 예언의 궁극적인 주체이신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한다. 선민들의 헌물 수취와 대제사장 면류관을 제작하려 명령하신 것이다. 즉 사로잡힌 자들 가운데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어가 있는데, 스가랴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로부터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라고 하신다.

그리고 더불어 장차 싹이라고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의 자리에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으며, 자신의 보좌에 앉아서 다스리게 될 것이요, 또한 제사장이 그의 보좌에 장차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는 영원한 평화의 의논이 오갈 것이라고 하신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전재건 헌신자들을 기념하기 위한 대제사장의 면류관을 성전 내에 보관하라고 명령하신다.

둘째, 종말론적 성전 건축의 재확증을 통하여 일련의 환상을 끝맺는 선언(15)

장차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인데, 그때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천사를 보낸 줄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할 때에라야 그 일이 성취되 것이라고 한다.

 

2)영적 교훈

첫째, 하나님께서는 성전건축의 봉사자를 기리기 위해 사용되어지는 몇몇의 사람들이 있다(10).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으로 돌아온 자들 중에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과 요시아로 하여금 여호수아를 위한 면류관들을 만들라고 하신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짓는 자에게 영예를 안겨주시기를 원하신다(10~11).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건축하는데 힘을 쏟았던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면류관을 만들어 씌우라고 하셨다.

셋째, 구약에 성전을 건축했던 여호수아는 신약의 교회를 건축하는 예수님을 예표한다(12).

요2:19-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넷째,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오실 메시야는 연한 순같은 자로서,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의 죄를 속죄할 것이다(12).

사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렘23:5-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체마흐)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렘33:15-1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체마흐)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1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슥3: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체마흐)을 나게 하리라

다섯째,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다윗의 뿌리이시다(12)

예수님은 나무의 몸통에서 올라오는 가지(호테르)일 뿐만 아니라, 뿌리에서 올라오는 싹(네째르)이시다.

사11:1-2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가지=호테르)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네째르)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계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여섯째, 메시야는 왕의 지위와 제사장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13)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유다총독 스룹바벨이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했던 것처럼(그리고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독려함으로), 오실 메시야도 대제사장과 왕과 선지자로서 일을 하실 것이다.

계17:14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히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일곱째,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헌신한 자들의 수고를 잊지 아니하신다(14)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씌워줄 면류관들을 제작한 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대관식에 사용했던 면류관들을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고 하신다.

마25:34-36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 스가랴 5:1~6:15에 나오는 명령과 선포 >

1)감사와 회개

주여, 사죄의 은총과 구원을 받은 자라도 또 범죄하면 멸망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지은 죄가 있는데도 회개하지 않으면 개인과 국가라도 멸망당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이기적이고도 사사로운 유익을 얻기 위해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삶에 악이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창조된 능력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천사들에게는 각기 맡겨진 소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사탄과 그의 천사들이 쫓겨남으로 하늘에 안식이 찾아왔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하나님은 성전과 교회를 건축하는 자에게 반드시 영예를 안겨주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메시야로 오신 예수께서는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인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메시야는 이 땅에 교회를 세우러 오셨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지 못했나이다. 용서해주소서.

2)장자권 누림의 결단

주여, 이제는 날마다 회개하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함부로 주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죄를 멀리하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맡겨진 소임에 충실하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교회를 건축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3)장자권의 누림, 명령과 선포

이제까지 나로 하여금 죄를 멀리하지 못하게 가로막은 악한 영들은 떠나가라.

이제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교회를 건축하는 일을 방해하는 악한 영들은 결박을 받으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 영혼아, 깰지어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죄를 멀리할지어다. 교회를 건축하기에 더욱 힘쓸지어다.

4)오늘의 말씀의 핵심

1. 하나님인 우리가 죄를 멀리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시는구나.

2. 지금도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분주히 일하고 있구나.

3. 사탄이 하늘에서 심판받아 쫓겨난 것처럼 재림시에는 무저갱으로 완전히 쫓겨나겠구나.

4. 메시야이신 예수께서는 왕이요 제사장이시며, 선지자이시로구나.

5. 하나님은 성전을 건축하고 교회를 건축하는 자를 잊지 않고 축복하시는구나.

5)훈련의 기본원칙 열 번 복창

‘단순, 반복, 지속, 강행’

6)장자권의 발동, 명령과 선포 일곱 번 복창

‘있을지어다. 그대로 되니라, 좋았더라’ ‘복이 있을지어다.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호크마 주석, 다니엘 07장 - 호크마 주석 - HANGL NOCR

15–18분

=====7:1
열방들에 대한 예언 부분인 본서의 둘째 단락이 끝나는 부분으로 인간 역사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에 달려있음을 보여주는 본장의 환상은 내용적으로는 2장의 큰 신상의 환상과 유사하나 중심 사상에 있어 다소의 차이를 보인다. 곧 2장이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시작해 그의 재림으로 성취될 메시야 왕국의 비전에 그 중점을 두었다면 본장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성취될 적그리스도에 대한 최후 심판에 주안점을 둔다(본장 강해 참조). 특별히 6장까지는 설화체 형식을 통해 다니엘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가 객관적인 입장에서 설파되었으나, 본장에서부터는 다니엘 개인에게 직접 주어진 일련의 계시들이 1인칭 형식으로 기술된다. 먼저 8절까지는 네 짐승에 대한 환상이 기술되는 바, 이는 인간 전역사의 절대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세상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섭리의 계시이다.
바벨론 왕 벧사살 원년에 - 벧사살의 부왕인 나보니더스가 즉위(B.C. 556) 직후 중앙 아라비아의 테마(Tema)로 원정을 떠나면서 벧사살을 바벨론의 섭정왕으로 임명함으로써 이중적 통치가 시작된 B.C. 556(또는 555)년을 가리킨다(Wiseman, 5:1 '벧사살' 주석 참조). 혹자는 섭정왕 임명과 동시에 벧사살의 즉위가 이루어 지지는 않았으리란 점에서 그보다 조금 늦은 B.C. 553년으로 보기도 한다(Wood). 여하간 당시 바벨론은 이미 국력의 쇠퇴로 인해 메대와 바사의 침공에 시달리고 있었다.

=====7:2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 여기서 '하늘의 네 바람'은 '넷'이란 숫자가 상징적으로 모든 방위(方位), 곧 인간 역사의 전영역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인간의 전역사를 주관하는 하늘의 권세와 능력을 상징하는데(Delitzsch, Thomson) 여기서는 특별히 세상 나라에 대한 심판적 의미로 쓰여졌다(렘 49:36). 또한 '큰 바다'는 성경의 용례상 이방 세계나 사탄의 세력을 상징한다는 점(시 46:3;사 8:7;27:1)에서 포괄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악한 세력을 가리킨다(Hofmann, Delitzsch, Thomson). 따라서 네 바람으로 인한 바다의 흉용함은 심판을 위한 하나님의 악한 세상 역사에 대한 주권적인 섭리, 곧 악의적인 세상 역사의 급작한 변환 속에서 세상의 모든 백서들이 무서운 소요 속에 빠지게 될 것임을 가리킨다(사 57:20). 결국 선지자는 네 짐승으로 상징되는 바벨론과 메대와 바사, 헬라, 로마 제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세상 백성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 앞에서 소멸될 것임을 예시한다. 혹자는 이 네 바람으로 나타날 네 마리의 짐승(3절)이 곧 지중해를 중심한 제국들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여기서의 '큰 바다'를 '지중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Gesenius, Hitzig, Ewald).

=====7: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 이는 곧 2절의 주석에서 밝힌 대로 소란한 세상 역사속에서 태동될 4개의 세상 제국들을 가리키는 바, 4개의 세상 제국은 상징적으로인본주의적인 세상 역사 전반을 가리키는 것이다(Thomson). 한편 여기서 '짐승'(* , 헤와)은 인본주의의 근본을 가진 세상 역사의 잔악성과 폭력성이 하나님 나라의 특성과 비교해 야수와 같다는 점에서 쓰여진 말로, 다른 성경의 예언에서는 흔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열방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된 바 있다('리워야단'-사 27:1, '용'-사 51:9, '악어'-겔 29:3, '독수리'-겔 17:3 등).

=====7:4
네 짐승의 구체적인 모습들이 언급된다. 첫째는 사자와...날개가 있더니 - 날개 달린 사자의 모습을 한 이 첫 번째 짐승은 니느웨와 바벨론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날개 달린 사람의 형상과 유사한 것으로 곧 바벧론 제국을 상징한다. 이는 사자와 독수리를 지상과 공중의 짐승들 중에서 왕으로 생각한 사실에서 유추된 표현으로 역대의 세계 제국들 중 바벨론의 탁월한 위상을 강조하는 것이다(Kliefoth, Delitzsch). 이러한 상징은 2장의 신상에 관한 환상 중 금머리가 곧 바벨론을 상징한 것과 일치하는 것이며(2장 도표 참조) 그 왕 느부갓네살 역시 사자와 독수리로 비유된 바 있다(렘 4:7;49:19;겔 17:3). 그 날개가 뽑혔고...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 - 혹자는 사자의 날개가 뽑혔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4장과 연관시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정신병을 얻어 그의 지위와 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후반절의 '사람처럼...'을 느갓네살의 정신병이 회복되고 이성을 되찾은 것으로 이해한다(Hoffmann). 그러나 본 구절이 왕 개인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제국 자체에 대한 환상이라는 점에서 이는 왕과 제국의 필연적인 관계성이 강조되는 고대의 개념상 느부갓네살의 왕적 위상의 상실과 동시에 바벨론 제국의 영광과 국력의 상실이 함께 연계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Delitzsch, Thomson). 따라서 '사람처럼...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는 위의 주석에 비추어 보아 바벨론이 더이상 탁월한 위엄과 힘을 가진 사자가 아닌 비천하고 낮아진 인간과 같아진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Calvin, Thomson).

=====7:5
둘째는 곰과 같은데 - 곰은 사자 다음으로 힘이 센 짐승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이는 바벨론의 뒤를 이어 대제국을 형성하게 될 메대와 바사 제국을 상징한다. 몸 한편을 들었고...세갈빗대가 물렸는데 - '몸 한편을 들었다'란 표현은 2:33과 8:9의 경우와 같이 메대와 바사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제국에서 바사(페르시아) 제국으로 단일화될 것임을 가리킨다(Delitzsch). 또한 '그 입에 세 갈빗대가 물렸다'는 것은 단일화 된 바사 제국의 고레스와 캄비세스가 행한 일련의 정복 사역, 곧 리디아(B.C. 546), 바벨론(B.C. 539), 애굽(B.C. 525) 등에 대한 정복 사실과 잘 부합된다. 그에게...많은 고기를 먹으라 - 이는 또 다른 바사의 정복 사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3이라는 숫자의 상징적 의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세 나라에 대한 완전하고도 철저한 정복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Delitzsch, Ewald, Kranichfeld).

=====7:6
표범과 같은...새의 날개 넷이 있고 - 표범은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 제국을 의미한다. 특별히 표범으로 비유한 이유는, 비록 사자 같은 위엄이나 곰과 같은 힘은 가지지 않았으나 그 약탈성과 신속성은 위의 두 짐승을 능가한다는 점에서, 헬라가 특유의 기동력으로 신속하게 정복 사역을 수행한(8:6 '달려가더니' 주석 참조) 사실에서 유추된 비유인 듯하다(Delitzsch). 또한 '새의 네 날개'란 말이 탁월한 기동성과 신속성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이라는 점을 볼 때도, 비록 알렉산더 대왕이 느부갓네살과 같은 왕적 위엄(4절)은 없으나 정복 사역의 신속성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음을 알게 된다. 그는 이러한 신속한 정복 사역을 통해 불과 13년 만에(B.C. 336-323) 세계적인 대제국을 형성하였다.
또 머리 넷이 있으며 또 권세를 받았으며 - 여기서의 '네 머리'는 알렉산더의 사후에 분할될 네개의 나라 즉 (1) 안티파터(Antipater)와 카산더(Cassander)의 헬라와 마게도냐(Greece-Macedon), (2) 리시마쿠스(Lysimachus)의 트라케와 소아시아(Thrace, Asia Minor), (3) 소아시아와 팔레스틴을 게외한 셀류쿠스(Seleucus)의 아시아(시리아), (4) 톨레미(Ptolemy)의 애굽과 팔레스틴을 의미한다. 한편 '권세를 받았으니'의 '권세'(* , 숄탄)는 '지배하다', '통치하다'란 어의에서 파생된 말로, 세상에 대한 지배권과 통치권을 의미하는 바(2:39), 이는 네 개의 나라가 각각 강력한 제국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Delitzsch).

=====7:7
이제까지의 일반적인 짐승의 묘사와는 다른 넷째 짐승에 대한 언급으로 이는 로마 제국을 상징한다. 이처럼 로마 제국이 특별한 모습의 짐승으로 묘사된 것은 그가 가진 무서운 힘과 파괴력, 잔혹성(무섭고...강하며)이 지금지의 제국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큰 철 이'는 같은 로마 제국을 암시한 2장의 신상의 철 다리를 연상시키는 것으로(2장 주석 도표 참조), 그의 강력함과 파괴력, 정복욕에 대한 상징이다. 한편 '그 나머지'(* , 쉐아라)는 원어상 '찌꺼기로 남은 것'이란 뜻으로 이전 제국들의 침략에도 살아 남은 나라들을 가리킨다.
열 뿔이 있으므로 - 2장의 신상에 관한 환상 중 열 별가락에 상응하는 부분으로, 성경의 용례상 '뿔'이 힘의 상징이라는 점과 보편적으로 10이 전체를 의미하는 숫자임을 미루어 볼 때, 로마 제국을 기점으로 태동될 수많은 왕이나 제국을 가리키는 것이다(Delitzsch). 따라서 이는 역사적으로 로마시대부터 적그리스도가 출현할 때까지의 전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이 '열 뿔'과 '작은 뿔'(8절)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본장 15-28절 강해 도표를 참조하라.

=====7:8
다른 작은 뿔이...뿌리까지 뽑혔으며 - 여기의 '작은 뿔'에 대해 개혁주의자들은 인간적인 성정과 지혜(사람의 눈...입이 있어), 그리고 사탄에게서 부받은 능력과 권세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적그리스도적인 인물로 본다(마 24:5;살후 2:3-8;계 13:4-10). 특별히 7절과 함께 '뿔'이 대체적으로 압제자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본 구절의 '작은 뿔'은 궁극적으로 이미 태동된 압제자들을 통합하여 그 우위에 서게 되는(먼저 뿔 중에서...뽑혔으며)악한 압제자의 종말론적인 전형 곧 적그리스도라도 볼 수 있다(본장 15-28절 강해 도표 참조). 한편 '큰 말'(* , 메말렐 라브레반)은 원어상 '오만한 말'이란 뜻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선민들을 핍박하기 위한 악한 의도에서 기인된 말이다(계 19:19-21).

=====7:9,10
이제 선지자는 적그리스도에 대한 묘사(7, 8절)를 중지하고,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의 보좌(9-12절)와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상속받으실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13, 14절)을 묘사한다.
왕조가 놓이고 - 톰슨(Thomson)과 베르만(Behrmann)은 본 구절이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의 보좌를 지시한다는 점과 본질적으로 재판장의 직무가 왕의 직무란 점을 들어 여기서의 '왕좌'를 왕의 보좌라기보다는 재판장의 자리로 이해한다(계 20:11, 12).
옛적부터...양의 털 같고 - 여기서 '옛적부터 계신 이'(* , 아티크 요민)는 문자적으로 '나이가 많은'이란 뜻으로, 다니엘에게 있어 하나님은 위엄하고 당당한 노인의 모습으로 제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상징은 곧 노인에 대한 고대의 개념에 비추어 하나님의 영광과 장엄함, 존귀함을 드러내준다(Delitzsch, Thomson). 또하 그 모습의 직접적 묘사('그 옷은...털같고')는 하나님의 흠없는 순결함과 거룩함에 대한 상징이다(계 1;14). 한편 그 심판 보좌의 '불'은 악인에 대한 심판과 동시에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정을 상징한다(Delitzsch). 수종하는 자...만만이며 - '수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 명령을 수행하는 천사를, '시위하는 자'는 이 심판의 증인으로서의 천사들을 각각 가리키며, '천천'과 '만만'은 셀수 없는 무리에 대한 과장법적 표현인 바, 수많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심판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소집된 사실을 가리킨다.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 '심판을 베푸는데'는 곧 '심판이 시작되었는데'란 의미이다. 한편 여기서의 '책'(* , 세파르)은 원어상 '새기다'란 뜻에서 파생된 말인 바, 고대 바벨론에 있어서 이처럼 토판에 새겨 기록한 것은 주로 법적 문서들이었다. 따라서 본 구절의 '책'은 심판 대상자들의 혐의를 기록한 법적 문서로 볼 수 있으며 그 책이 펼쳐졌다는 사실은 '심판을 베푸는데'란 말과 함께 이미 그 심판이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한다(계 20:12, 13).

=====7:11,12
넷째 짐승에 대한 심판이 묘사된다. 그 큰 말하는...목소리 - 곧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독하는 오만의 말(8절)을 가리킨다. 한편 '사이에'라는 말은 후반절과 함께 하나님 심판의 즉각성과 신속성을 암시한다. 짐승이...붙는 불에 던진 바 되었으며 - 로마 제국과 이에서 태동된 열 뿔(적그리스도 출현 이전의 세계 제국들)과 작은 뿔(적그리스도7)의 완전한 멸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나님 심판의 엄중성과 악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한다. 한편 죽임을 당한 뒤에 시체의 상태로 불에 던지웠다는 사실은 악인이 죽음의 고통과 함께 사후에 겪을 고통까지를 강조하여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남은 모든 짐승은...기다리게 되었더라 - 여기서 '그 남은 짐승'은 작은 뿔에 의해 종속되었던 나머지 제국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넷째 짐승에 앞서 언급된 세 짐승을 가리킨다(Delitzsch, Havernick, Kliefoth). 이러한 사실은 그들 나라들이 비록 그 뒤의 나라들, 최종적으로는 넷째 짐승과 같은 영원한 심판적 형벌은 당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유추할 수 있다. 이것은 곧 2장의 신상에 관한 환상 중에서 그 신상이 차례로 파괴된 것이 아니라 뜨인 돌에 의해 동시에 파괴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Delitzsch). 한편 그 나라들이 보존된다는 의미는 작은 뿔, 곧 적그리스도의 심판 이후까지 그들이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멸망의 정도에 있어서 작은 뿔보다 심하지 않으며 기간 또한 순간적인 작은 뿔의 멸망(11절)에 비교해 연장된다는 것이다.

=====7:13,14
하나님의 심판(11, 12절)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구절로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될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예시된다.
인자 같은 이(* , 케바르 에나쉬) - '벤 아담'(* )과 동일어인 이 말이 구약에서 인간이 아닌 신적 존재에 쓰여진 용례는 이곳밖에는 없다. 곧 본 구절의 '인자'는 '구름을 타고'(계 1:7)란 말과 결합해 메시야적 호칭으로 쓰여졌는 바, 메시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 구절을 자신에 대한 예언으로 인정하신 바 있다(마 24:30;26:64;막 13;26). 이에 따라 14절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으로 임하셨고 그의 재림으로 성취될 하나님의 나라에서 인자는 전우주적 통치적(권세와 영광과 나라)을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위탁은 그의 흠없음(사 53:9)과 속죄 사역(사 53:5, 6), 그리고 부활을 통한 인류의 심판자의 자격을 입증하셨던(행 17:31;롬 2:16) 사실에 의거한 것이다.

=====7:15
앞선 환상에 대한 다니엘의 보충적인 해석이 천사의 개괄적인 해석(17, 18절)과 함께 22절까지 기술된다. 중심에 근심하며...번민케한지라 - 다니엘이 이상 중에 본 것은 곧 선재적으로 성취된 확고한 예언이었던 바, 그의 근심과 번민은 28절에서 천사의 해석이 끝난 후에도 같은 근심과 번민의 상황에 빠져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느부갓네살처럼(2:1) 단순히 그 해석을 알지 못한 사실에 기인한 것이라고보다는 이상 중에서 본 성도들의 당할 고난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Delitzsch).

=====7:16
그 곁에 모신 자 중 하나 - 이는 곧 10절에 언급된 천사 중의 하나로서 혹자는 9:21을 예로 들어 이 천사가 가브리엘일 것으로 추측한다(Thomson). 한편 본 구절에서 이 이상의 진상을 하나님 곁에 수종들고 있는 천사에게 묻는다는 사실을 아직도 이 이상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Delitzsch).

=====7:17,18
다니엘의 질문에 대한 천사의 개괄적인 답변으로, 세상에 대한 네 제국의 지배권이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재림으로 성취될 하나님 나라에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에게로 영원히 귀속될 것임을 말한다('나라를 얻으리니').
네 왕이라 - 이는 곧 앞서 언급된 '네 제국'(four Kingdoms, NIV)을 가리킨다(해당 주석 참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 - 곧 하나님(4:17 주석 참조)의 택하신 백성을 가리킨다(시 85:8). 이들은 구약에 주로 언급된 육적 이스라엘 아니라 하나님과 새 언약을 체졀한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다(Delitzsch).

=====7:19,20
성도들이 당할 고난의 원인으로 제시된 넷째 짐승에 대한 다니엘의 특별한 관심을 드러내는 부분으로 보다 확실한 해석에 앞서 자신의 이상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인다(7, 8절 주석 참조0. 한편 본절에는 '그 발톱은 놋이며'란 말이 새로이 첨가되고 있다.

=====7:21,22
이 뿔이...이기었더니 - 여기서의 '이 뿔'은 8절에 언급된 '작은 뿔'로서,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들을 핍박하게 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8절 주석 참조). 또한 '싸워 이기었더니'란 말은 성도들을 굴복시켜 자신의 수하에 두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성도들을 압제하며 그들을 죽이기까지 핍박할 것이란 사실을 의미한다. 한편 22절의 '신원하셨고'(* , 디나 예히브)는 원어상 '재판하다'란 뜻으로, 이는 악인에 대한 심판적 징계와 의인에 대한 영생의 상급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본문은 7년 대환란 후반부 삼 년반 동안 있을 성도들에 대한 핍박으로 적그리스도가 일시적으로는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활동은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패배하여 영원한 볼못에 던져질 것임을 말한다(계 19:1, 20). 아울러 신실한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주권을 얻게 될 것(18절 주석 참조)을 예시한다.

=====7:23,24
다니엘의 환상에 대한 본격적인 천사의 해석이 주어진다. 천사의 해석 중 중심적인 내용은 작은 뿔에 관한 것이다(7, 8절 주석 참조).

=====7:25
말로...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 사탄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과 성도들에 대한 실제적인 핍박을 가하게 된다(8절 '큰 말', 21절 주석 참조). 한편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의 '대적하다'(* , 차드)는 원어상 '...곁에', '...편에란 뜻으로, 이는 하나님을 대적함과 동시에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까지 스스로를 높이는 교만을 지적하는 말이다(Thomson).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거시며 - 여기서 '때'(* , 제만)는 원어상 '정한 기한'이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창조 당시에 정하신 순리적인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며, '법'(* , 다트)은 '명령'이나 '규례', '포고령' 등의 문자적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모든 피조물의 생명과 활동의 근간이 되는 원리와 법칙을 가리킨다(Delitzsch). 실로 이러한 '때와 법'의 변경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에 속한 것인 바, 이것을 변경시키고자 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한 위치에 놓으려는 적그리스도의 극악한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다(Kliefoth).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 곧 여기서의 '때'(* , 이딴)가 본서의 용례상 '년'(年)을 가리킨다는 점에서(4:16) 7년 대환란 중의 3년반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계 13:5). 따라서 성도들이 3년반 동안 적그리스도의 손에 붙이우게 된다는 것은 그 시기에 집중적으로 성도들에 대한 엄청난 핍박이 있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21, 22절 주석 참조) 아마도 이 마지막 칠 년의 후반부(9:27)에 계 14-19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점진적으로 시행됨으로써, 결국은 아마겟돈의 최후 전쟁과 그리스도의 왕적 재림을 예비하게 될 것이다.

=====7:26
곧 적그리스도에 대한 심판적 멸망을 기술한다(10절 주석 참조).

=====7:27
26절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부분으로 적그리스도의 영원한 소멸과는 달리 신실한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주권을 획득하게 된다(18절 주석 참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 - 곧 본장에 나타난 '성도'(* , 카디쉐)와 동일한 말이나(18절 주석 참조), 이 '성민'은 특별히 '거룩한 백성'(* , 암 카다쉐)이란 집합적인 의미로 쓰였는 바, 이는 '그의 나라'의 단수형인 '그'가 지극히 높은 자 곧 하나님을 지시한다는 것과 분명한 구분을 짓게 한다.

=====7:28
나 다니엘은...낯빛이 변하였으나 - 15절에 이어 여전히 번민하는 다니엘의 모습을 모여준다(15절 주석 참조). 한편 '낯빛이 변하다'(* , 지위 이쉬타논)는 특별한 두려움이나 번민으로 안색이 창백해진 상태를 가리킨다.
이 일을 마음에 감추었느니라 - 여기서 '이 일'(* , 미르타)은 문자적으로 '말', '사건'등의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이는 다니엘이 본 환상과 또 그 환상에 대한 천사의 말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이는 '지키다', '보관하다'란 뜻의 '감추었느니라'(* , 네타르)란 말과 함께 곧 다니엘이 자신의 환상과 천사의 해석을 가슴 깊이 새겨 간직했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바, 본장의 정확성에 대한 확실한 보증의 의미로 쓰여진 듯하다.

사자굴에서 구원받은 사건을 통하여 다니엘은 형통한 자가 되었고(6:28) 동시에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은 만방에 계시되었다(6:26). 6장까지는 주로 다니엘이 이방 나
라에서 경험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중심으로 그 내용이 전개되어 왔었다면, 본장부
터는 다니엘이 직접 하난미으로부터 받은 꿈을 중점적으로 언급고 있다. 이전까지는
다니엘이 꿈의 해석자로 부각되었지만, 본장에서는 직접 꿈을 꾸는 자로 나타나고 있
다. 그러나 이전의 꿈들과 본장에 나오는 꿈들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점에서는 동일
성격을 갖는다. 그러므로 본장도 이전의 장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속 역사를 꿈의
형로 계시하는 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본장은 (1) 네 짐승에 대한 환상을 묘사하고 있는 전반부(1-14절), (2) 이 환상
에 대한 해석을 묘사하고 있는 전반부(1-14절), (2) 이 환상에 대한 해석을 묘사하고
있는 후반부(15-28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본장은 세계 역사
의 진행 과정과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제시를 드러내고 있다.
한편, 본서 1-7장은 교차 대구법적 구조가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배열을 통해 저자
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심을 더욱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다. 이제 본 대목
의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2 : 네 왕국들에 대한 환상(느부갓네살)
B. 3장 : 신왕과 기적적인 구원(세 친구들)
C. 4장 : 심판의 예언과 구체적 실현(느부갓네살)
C'.5장 : 심판의 예언과 구체적 실현(벨사살)
B'. 6장 : 신앙과 기적적인 구원(다니엘)
A'. 7장 : 네 왕국들에 대한 환상(다니엘)

또한, 본장은 2장에서 보여준 네 나라에 대한 계시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2 장이
신상으로 설명된 네 나라가 모두 파멸당한다는 사실에 강조점이 있는 반면, 본장은 난
폭하고 잔인한 네째 짐승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또한 2 장은 메시야의 초림
으로부터 재림까지의 긴 기간, 즉 메시야 시대를 초점으로 하고 있지만, 본장은 그리
스도의 재림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이제 두 부분을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2 장 7 장

상징물 큰 신상(2:31) 네 짐승(7:3)

주제 세상 나라의 멸망(2: 44, 45) 세상 나라들의 멸망(7:26)

꿈꾼 자 느부갓네살(2:1) 다니엘(7:1)

강조점 네 나라의 파멸 넷째 짐승에 대한 관심

심판자 하나님(2:44) 인자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7:13)

또한, 본장은 상징적인 표현 방식을 아주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즉 사자(4절),
독수리(4절), 곰(5절), 표범(6절) 등을 통하여 세상 역사의 흐름과 적그리스도의 출현
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본장은 다니엘의 꿈을 통하여 세계 역사의 변화를 예언하고 있다. 다니
엘이 목격한 네 짐승은 앞으로 세계를 주도할 네 제국을 의미한다. 이 세상 나라는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으며, 재림으로 인하여 완전히 붕괴된다. 하
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종말런적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킬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지
상에 존재했던 막강한 국가들이 메시야의재림으로 완전히 패망하고 오직 새로운평화의
시대가 도래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1. 다니엘의 환상(7:1-14)
본 단락에 들어오면서 본서의 내용은 그절정에 이른다. 이전까지는 구체적인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난 반면, 본단락부터는 다니엘 자신의환상에 집중한다.다
니엘은 이상 중에서 본 바다에서 올라오는 네 짐승과 적그리스도의 출현및 심판장되신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신 장며늘 묘사한다. 이러한 환상은 세계 역사의 주인곤이시며
종말에 가서 선악간에 판단하시는 분이심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러한 보뉴 단락은 (1)
네 짐승에 대한 심판의 환상을 묘사하고 있는 후반부)9-14절)등으로 구성되어 있다.이
러한 내용을 통하여 본문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이 최후 승리를 얻게됨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본 단락에 나타나는'네 바람'(2절)에 대하여 어떤 주석가들은 네나라를 지키는
천사 혹은 세상사람들을 움직이도록 세우신 하늘의 권세자들이라고 보기도 한다. 특히
비평학자들은 고대 신화적인 배경에서 이해되는데, 주로'바벨론의 티아말(Tiamt)신화'
로 설명하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일 경우 다니엘은 다신론적인 고대의
종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므로 성경자체의 권위가 무시될 뿐 아니라,하나님이
주신 게시인 꿈의 독특성을 파괴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네 바람은 어떤 신화
적인 존재라기보다는 하나님을 대적하기위해 일어나는 세상의 악한 세력에 대한심판으
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나타난는 '큰 바다'가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
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었다. 세대주의자들은 이 바다를 구체적으로 지중해
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서 통상적으로 의미하고 있는'바다'의 개
념에 대하여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이 있다. 만일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모
든 바다를 지중해로 보아야 하는가 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떤 특수한지
역으로 한정하기보다는 더 광범위한 장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것이 합당하다. 성경
에서는 하나님께 대적하는 세상 권세들을 종종 큰물로 상징했다.(사 8:7이하 ; 17:12
이하 ; 렘 46:7 ; 47:2 ; 계 17:1, 15). 더구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네
짐승들이 바다에서 나왔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역사를 방해하는 근본적인 악
의 세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특징을 담고 있는 본 단락의 핵심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네짐승의 성격(1-8절) : 여기서 나타나는 네 짐승의 공통점은 잔인하고 포악한성
격을 가지고 있으며, 이세상에서 보는 일반적인 동물들과는 달리 모습이 매우 괴이하
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 네번째 짐승이 이전의 짐승보다 막강한힘을 갖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7절). 특히 '뿔'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므로써 짐승의 힘, 권세
등을 부각시키고 있다(8절). 이러한 묘사를 통하여 저자는 세상 나라의 포악성과 잔인
함을 보여주며, 권세가 상당할 것임을 예견케 해준다. 또한 네 번째 짐승이 이전의 짐
승보다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 이세상의 나라는 마지막 정점으로
갈 수록 힘이 커지며, 하나님의 나라를 적극적으로 방해하게 됨을 알려준다.
(2) 네 짐승에 대한 심판(9-14절) : 네짐승은 엄위와 권위가 서려 있는 보좌와한인물
에 의해 철저하게 심판을 받게 된다(9절). 이 인물은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9,13절)
로서 신적인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는 마치 어전 회의를 연상시키듯이 많은수종자들을
거느린 상태에서 심판을 수행하신다(왕상 22:19-23 ;욥 1:6-12 ; 사 6:1-4). 이심판은
일거에 이루어지면서도 완전한 심판은 아니다(12절).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졀정적으로 타격을 입은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때까지 마지막힘을행하
할 것이라는 신야의 관점에서 일치를 보인다. 인자의심판은 확실한 것이로되,잠정적인
기간이 지나야 완전한 심판이 이루어진다.

2. 환상에 대한 해석(7:15-28)
네 짐승에 대한 환상과 그 심판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전 단락(1-14절)에 이어서
본 단락은 환상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이전에 있었던 사건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방법이다. 즉 먼저 환상이 나오고, 그 다음에 해석이 제시됨으로
써 꿈에대한 계시적인 성격을 분명하게 표현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은 환상의 내용에
보충적으로 설명하고(15-22절)이어서 천사에 의한 환상의 해석(23-28절(을 언급함으로
써 계시의 참된 주체자는 하나님이시며 계시의 해석 및 취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속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본 단락에 나타나는 넷째 짐승과 뿔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이를정
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넷째 짐승 열 뿔 작은 뿔

세대주의 역사상 로마제국 말세에 재생될 로마제국 재생될 로마제국의 왕

칼빈 역사상 로마제국 로마제국이 정복한 여러 쥴리어스 카이사르와
지역들 그 후계자들

영과 퓨지 역사상 로마제국 로마 멸망에서 적그리 적그리스도
스도까지

간하배 역사상 로마제국 역사상 로마에서 적 적그리스도
에서 적그리스도까지 그리스도까지

이제 본 단락의 주도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넷째 짐승과 성도의싸움(17-22절) : 넷째 짐승의 주된 임무는 성도를 이기는 것
으로 묘사되고 있다(21절). 특히 이 넷째 짐승은 두려움을 주는 대상우로 묘사되고 있
는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19절). 두려움을 보이는 대상은 성도라고 묘사되어 있
는데, 이는 성도들이 네째 짐승의 공격을 감당할 수없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사실은사
탄의 공격 목표가 성도라는 사실과 일맥 상통한다(엡 6:12). 이 싸움에서 성도는 스스
로의 힘으로 승리할 수 없다. 오직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의 중보적 신원으로 말미
암아 승리의 영광을 얻을 수 있다(22절).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의 궤게를 근본적으로
물리치고 온전한 승리를 마련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함으로써 세상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다.
(2) 넷째 짐승에 대한 심판(23-28절) : 천사는 네째짐승을 네째 나라라고 해석함으로
써 짐승의 정체를 알려주었다(23절). 이 짐승은 상당한 기간 동안 성도를 괴롭힐 것이
며(25절), 마지막 심판의 때에 결정적으로 멸망당할 것이다(26절). 그리고 나서 하나
님의 나라가 영원히 설 것이다. 이러한 계시의 흐름은 요한계시록의 흐름과도 일치한
다(계 19:11-21:5). 세상의 세력은 마지막 공격을 감행한 후에 철저히 진멸될 것이다.
다니엘은 네째 짐승에 대한 심판을 기록함으로써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
과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미리 예언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본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깨닫게 된다. (1)다니엘과 같은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를 꿈으로 받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성도들은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고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2)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사탄을 이길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더를 믿으며 성렬 충만한 삶을 유지할 때 죄부터 승리할 수 있다(엡 5:18).




08-23-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날가아가는 두루마리(스가랴 5:1)

내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더라.
I looked again--and there before me was a flying scroll!

날아가는 두루마리(a flying scroll)
메길라 아파(מְגִלָּה עָפָה)


두루마리(4039) 메길라(megillâh)  מְגִּלָּה 

1. 두루마리, 2. 시 40:8, 3. 렘 36:14
발음 / 메길라[ megillâh ]
어원 / 155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두루마리(시 40:7, 렘 36:2, 슥 5:1).
구약 성경 / 21회 사용

* 1556. 가랄( gâlal) גָּלַל

1. 구르다.  2.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파생어로 사용된다.  3. 바퀴
발음/ 가랄 [ gâlal ]
관련 성경 / 옮기다(창 29:3,8), 떠나가다(수 5:9), 의탁하다(시 22:8), 굴리다(수 10:18, 삼상 14:33, 렘 51:25), 맡기다(시 37:5, 잠 16:3), 떠나게 하다(시 119:22), 말리다(사 34:4), 흘리다(암 5:24), 묻다(사 9:5), 끌려들다(창 43:18), 달려들다(욥 30:14).
구약 성경 / 16회 사용


날아가는(5774) 우우프(Wu ʽûwph) עוּף  

1. 덮다,  2. 날다,  3. 어둠으로 덮다
발음 / 우우프[ Wu ʽûwph ]
관련 성경 / 날아 앉다(사 11:14), 날다(삼하 22:11, 욥 5:7, 사 6:2), 날아가다(시 55:6, 잠 26:2, 슥 5:1), 피곤하다(삼상 14:28, 삼하 21:15), 지나가다(욥 20:8), 흐르다(시 91:5), 날개치다(사 31:5), 춤추다(겔 32:10), 날아 다니다(사 30:6).
구약 성경 / 26회 사용

날아가는 두루마리(내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더라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십 규빗이다

- "눈을 든"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얻기 위하여 준비된 행동이다.
인간은 영적으로 우준하기 때문에 경건한 노력으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점점 주님과 교통이 열리는 법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몇 날 동안 기도를 힘쓰고 애써야 필경 기도가 되어진다.
"날아가는 두루마리" 이것은 빨리 두루 돌아다니는 저주이니(3절), 두루마리의 안팎에 쓰인 것이다(겔 2:9,10)"
그 장이 이십 규빗 이요 광이 십규빗"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성소의 면적으로서(출 26:1), 그 면적이 이렇게 성소와 같은 이유는, 거기 쓰인 저주를 받을 자들이 성소에 나타나는 하나님 백성에게서 끓어지겠기 때문이다(Delitzsch).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계시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목적은, 그들이 성전 재건 공사에 있어서 원수들의 방해로 인하여 낙심하였던 것으로 이제 다시 착수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온 땅의 백성들의 죄악을 하나하나 다 벌하시리라는 것은 , 하나님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을 가까이 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사람에게 진정한 종교심이 작홍되는 것은 온 땅이 평안함을 보는 데서가 아니고, 도리어 온 땅이 하나님의 징벌로 캄캄하여질 것이 내다보일 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바둑의 수 세 종류

1. 떡수
2. 묘수 - 공자,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3. 신의 한수 - 예수(부활)

바둑 격언에 ‘묘수 세 번이면 진다’는 말이 있다.
묘수를 세 번이나 둬야 할 상황이 벌어지면 질 수밖에 없으니, 아예 묘수를 둘 일이 없게 만들라는 뜻이다.
공인된 격언은 아니나 ‘떡수 세 번이면 무조건 진다’는 말도 있다.
(병살타 세 번이면 진다는 야구 잠언과 유사하다) 그러면 떡수를 남발하다가 결정적 묘수 한 수를 뒀다면 그 바둑은 성공한 걸까 실패한 걸까.

<사활편>이나 <귀수편>이나 모두 한 마디로 정의 내리면 복수극이다.
주인공이 마침내 복수를 완성했을 때 관객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거다.
그러니까 화면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관객과 주인공은 2인 3각 달리기를 하는 파트너인데, 어릴 때 동네 깡패에게 100원짜리 하나 빼앗겼다고 수십 년이 지나서 되갚아주는 주인공을 보면서 ‘그래, 잘 했네~!’하고 박수 쳐줄 관객이 과연 있을까.
즉, 주인공이 처절한 액션을 벌이고 복수를 벌이는 당위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도무지 명분이 약하다. 이게 떡수가 아니면 무어랴.

사공 많은 배가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열심히 노를 젓는 형국이니 이것도 떡수다. 구성이라도 좀 멋지게 해서 바둑이나 액션이나 맞물려 돌아가면 좋으련만 ‘우리 열심히 영화 만들었어요!’ 하고 백화점 상품 진열하듯이 무작정 다 꺼내서 보여주기 바쁘다. 덕분에 화면 속 처절한 싸움을 그저 구경만 하고 있으니 그래서 떡수다.

그래도 묘수를 한 수 뒀으니, 액션은 꽤나 볼만하다. 사실 전작이나 프리퀄이나 바둑을 소재로 끌어왔을 뿐이지 보여주고자 하는 건 누가 뭐라고 해도 액션이다. ‘우리는 원래 액션영화였어요.’를 강변하는 노력이 보여서 슬며시 흥미가 돋는다. 물론 이야기와 밀착감이 있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떡수로 도배한 바둑에 묘수 하나 곁들이고 나니 그럭저럭 킬링타임용 액션영화가 되었다.



메길라 아파(מְגִלָּה עָפָה) 
날아가는 두루마리와 에바


첫째 : 두루마리의 의미

 2절을 보면 스가랴가 본 두루마리의 규격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길이는 20 규빗이요,넓이가 10 규빗이라고 했는데, 오늘날의 도량형으로 계산하면 , 길이는 약 9m, 넓이는 약 4,5m 정도의 크기입니다.

이 길이와 넓이는 솔로몬 성전의 제단 앞에 있는 ‘낭실’(왕상 6:3)과 똑 같았고, ‘솔로몬 성전의 놋단’과 ‘성막 가운데 있는 성소’의 치수와 같습니다(대하 4:1).

열왕기상 6:3
전의 성소 앞 낭실의 장은 전의 광과 같이 이십 규빗이요 그 광은 전 앞에서부터 십 규빗이며.

역대하 4:1
솔로몬이 또 으로 단을 만들었으니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이십 규빗이요 고가 십 규빗이며.

옛날부터 솔로몬 성전 제단 앞에 있는 ‘낭실’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이 읽혀졌습니다.
따라서 이 둘의 규격이 똑 같다는 것은 이 두루마리는 율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기록된 두루마리가 날아다녔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율법에는 복과 저주 두 가지 개념이 있는데 본문에서는 주로 저주의 측면만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 날아다니는 두루마리의 저주의 대상

3절을 보면 “도둑질 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고 말씀 하는데, 이것을 보아 저주의 대상은 특별히 도둑질과 헛된 맹세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도둑질은 인간들 사이에서 행하여지는 것이고, 맹세는 하나님께 관계된 것입니다.

물론 말라기서를 보면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도적질 했다고 말씀하고 있고, 맹세는 하나님께만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도 행하고 있는 것이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도적질은 사람 사이에서 행하는 것으로, 그리고 거짓 맹세는 하나님에 관계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러한 환상을 스가랴에게 보이신 이유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이러한 죄들이 흔히 짓는 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도적질하면서도 죄로 생각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맹세를 하고도 별로 귀중하게 생각지 않는 생활이 만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무엇보다 물질에 대한 어려움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직 그들이 사는 집과 생활이 정착되지 않았고 그러기에 물질에 대한 집착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거처할 곳이 필요했기에 그들의 주관심사는 집과 생계입니다. 그래서 스가랴와 동시대 선지자였던 학개는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학1:4-6)

당시 유대인들은 거할 집과 먹을 양식에 치중하고 있었습니다. 돌아온 유대인들은 당장 겨울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고, 먹을 양식에 욕심을 부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의 것에 욕심을 부리고 도적질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대나 도적질이 심하고 도둑이 많다면 먼저 불안에 떨게 되고, 안정이 찾아올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옆 집에 도둑이 들어와 털어 갔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래 집도 도둑이 들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불안해서 일터에도 못나가고 안정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도둑질하는 자에게 내릴 저주에 대해서 말씀하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거짓 맹세를 많이 했습니다. 아무래도 여기에는 성전건축과 관계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15년 전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되어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자 이들은 기쁨과 감격 속에 있었고, 이때 스룹바벨이 하나님의 무너진 성전을 다시 건축하자고 할 때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또 약속도 하면서 시작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파사 왕이 조서를 내려 중단시키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반대하자 이들은 중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로 15년 동안 살아오면서 이들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도 포로에서의 해방이란 감격도 사라지고 하나님께 약속한 이전의 모든 맹세도 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회는 도적질로 불안해 싸여있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는 사라지고 맹세도 가볍게 여기는 등 육신적으로, 신앙적으로 문란해진 것이 당시 이스라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루마리의 환상을 통해 돌이킬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 두루마리의 저주의 내용(3, 4절)

4절에 보면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 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두루마리 내용은 분명 저주에 관한 내용일 것입니다. 두루마리에 기록된 바와 같이 끊어지는 저주를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더 구체적인 저주의 내용이 4절에 나옵니다. “……내가 이것을 보냈나니 도둑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의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일반적으로 집에 불이 나면 그 집의 기둥들은 남아 있는 경우가 있고 또 설령 기둥마저 다 타 없어진다 하더라도 그 집의 주춧돌은 남아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저주의 내용을 보면 그 돌까지도 불사르겠다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얼마나 철저하고 무서운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이라 할지라도 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이렇게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인데 이방인의 죄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넷째 : 심판의 성격

활짝 펼쳐져 있는 채로 날아다니는 두루마리의 모습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그 모습을 보고 굉장히 놀랐을 것입니다. 그냥 두루마리가 아닌 길이가 9m에 이르는 커다란 두루마리에 온갖 저주의 말씀이 기록된 가운데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두루마리는 저주의 크기를 말하며, 날아다니는 것은 급속히 임할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가혹한 징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다섯 가지 환상을 통해 스가랴와 이스라엘을 위로하고 격려하셨던 하나님께서

여섯 번째 환상을 통해서는 저주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성전을 건축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결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는 가운데 성전을 지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토록 성전 건축의 마음이 있었고, 건축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마쳤음에도 허락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그는 전쟁을 많이 하여 피를 흘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스룹바벨이 성전 지대를 놓은 지 1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고, 해방의 감격도 사라졌습니다. 성전을 다시 지으려는 마음조차도 희미해졌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본래 이와 같습니다. 처음 가졌던 마음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변질됩니다. 결혼할 때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힘들 때나 어려울 때나 사랑하겠다고 자신 있게 서약하지만 몇 년이 지나면 그 감동과 결심이 사라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와 같았습니다. 성전을 짓기 전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성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에게는 육신에 젖어 죄악을 행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짓게 할 수는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여섯 번째 환상을 통하여 성결을 촉구하신 것이며 그 성결한 마음을 갖지 못할 때 내리는 무서운 저주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건축할 때는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되어야 하며, 죄를 버리고 거룩한 부흥을 가져온 후 교회당을 건축해야 합니다. 교회가 가장 거룩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그런 때에 주님의 교회를 건축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교회 건축의 시작이고 출발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주님께서는 끝까지 그 교회의 건축을 도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관점으로 돈으로 지으려 하고, 목회자와 장로와 성도들이 하나되지 못하고 인본주의적이며, 기도가 쌓이지 않은 가운데 짓는다면 그 교회는 건축에 어려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주님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건축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제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하시다가 갑자기 이런 죄를 지적하시며 가혹한 저주의 하셨을까요?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성전 건축을 앞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 건축을 앞에 두고 가장 중요한 성결을 가르쳐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성전 건축하기 전 신앙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잘못된 죄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사람들과의 평화가 있어야 하며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 회복이 가장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구원의 감격 속에 건축되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성전을 건축하기 전의 신앙 자세를 말하며 더 나아가서는 마지막 시대에 주님 강림하실 때 누가 들림 받아 주님 계신 영원한 성전 되신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셨습니다. 은혜의 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 계신 하늘 성전이 가까이 올 때는 다릅니다. 그 때는 심판의 주로 세상에 오십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까?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처음 예루살렘 성에 돌아왔을 때의 유대인들의 감격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이제 돌아 온지 15년 밖에 안되었는데도 그들은 그 감격을 다 잃어 버리고 지금은 이방인과 같이 도둑질하며 세상에 젖은 생활을 하고 있었듯이 그래서 하나님이 저주를 선포했듯이 그들의 모습이 지금 나의 모습은 아닌지요?

 

아직도 주님의 격려와 위로가 필요합니까? 거룩한 하늘 성전이 가까이 올 때는 위로와 격려가 아닌 우리 자신의 정결함이 필요합니다. 성경에 위로는 주님 나라에 가서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 지어지는 성전도 이렇게 엄격하고 거룩함을 요구하고 있다면 하늘 성전은 어떻겠습니까?

신앙이 회복되지 아니한 자는 들어 갈수 없습니다. 거룩함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젖어 있는 자는 그 하늘 성전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죄에서 분리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보혈로 죄를 제거된 자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가장 뜨겁게 사랑하며 구원의 감격 속에 거해야 합니다. 이웃과 평화가 있고,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중요합니다.

 

주님 강림하시는 그 날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 맞을 준비를 시급히 해야 합니다. 두루마리가 날아다니는 것은 시급함을 말하는데,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준비하지 않으면 주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두루마기가 날아다니는 시급한 이 때, 우리는 천년만년 살 것처럼 육신에 젖어 살아서는 안됩니다. 내일이면 푸줏간에 끌려갈 돼지가 아무것도 모르고 꿀꿀 거리며 주인이 준 음식에 행복해 하며 구정물에 입을 쳐 박고 있듯이 그러한 자가 우리 중에는 없는지요?

 

지금은 부끄럼 없이 주님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는 죄를 삶에서 모두 제거하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해결하십시오.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십시오.

그리고 세상의 오락과 쾌락과 죄를 단절하십시오, 주님께서 흠모하실 만한 아름다움으로 채우십시오.

 

주님 강림 하시는 그 날! 주님이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 성전의 문이 열리는 그날, 우리 사랑하시는 주님과 함께 들어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해요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이 만족하는 사람이어요 이제 내가 어떤 사람이 행복하냐고 물은 것은 나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 있는데 이렇게 볼 수 있어요 기억해야 할 것은 잘 기억하고 잊어 버려야 할 것은 잘 잊어 버리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되지요 세상에 불행한 사람은 기억해야 될 것을 망각하고 강물에 떠 내려 보내야 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요 어떻게 보면 불행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자 행복한 사람은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고 있음을 아는 사람이 행복하지요 내가 외로움 속에 있지마는 나는 잊혀진 존재가 아니라 그 생각처럼 나를 산자의 땅으로 되돌리는 힘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그러면 행복하지요 하나님이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신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스가랴라고 하는 그 이름의 뜻이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그동안 4장 까지에서 여러 가지 환상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스가랴가 환상을 보는데
(1)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자(이스라엘의 회복이 시작됨)
(2) 네 뿔과 네 대장장이(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민족을 향한 심판)
(3) 측량줄을 든 사람
(4) 여호와 앞에 서 있는 대세자장 여호수아
(5)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 (종교 권력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
 
(1) 화석류 사이에 선 자를 보거든요
화석류라고 하는 것은 회복의 상징 화석류 사이에 선 사람을 보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시작되었어 먼저
 
(2) 그 다음에 네 뿔과 네 대장장이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뿔이라는 것은 권위를 뜻하고 힘을 뜻하는데 그 네 뿔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나라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그 힘 앞에 대적할 수 없었어요 네 대장장이가 나타나서 그들을 떨어진 것이어요 그들의 심판이 행해진 것을 볼 수 있어요

(3) 세 번째 스가랴가 보았던 환상은 측량줄을 든 하나님의 사자를 보게 됩니다
측량줄을 젠다고 하는 것은 심판을 뜻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출애굽 시대에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지파별로 하나님이 나누어 준 것처럼 땅의 회복을 징조를 보여주거든요
 
상스러움을 보여주는 천사의 등장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뿔들을 무너뜨리는 대장장이의 등장 황폐된 땅을 회복하는 측량 줄을잡은 사람이 이야기 등장하고
 
(4) 그 다음에 등장한 것이 여호와 앞에 서 있는 대세자장 여호수아
아주 남루한 옷을 입고 있지만 남루한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히는 여호수아 하나님앞에 제사를 성직 제도의 재 확립 이게 등장해요
 
(5)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 (종교 권력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가 등장해서 종교와 정치 권위가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을 보여 주고 있어요
 
이것이 지금까지 공부한 것이어요 상당히 흐름이 분명하지요 지금까지 스가랴서 공부해 온 것을 잘 복귀가 되지요 이스라엘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다음 읽은 이야기가 오늘 읽을 말씀입니다
 
어렵지요 두루마리도 어렵고 에바도 어렵고 그래서 안내자가 필요하고 그 안내자로 서 있습니다 보면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지요 그 두루마리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 하나님이 앞으로 역사속에서 행하실 그 계획들이 적혀 있는 아주 상징적인 것으로 두루마리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 두루마리는 미구에 벌어지게 될 심판의 이야기 하나님의 역사 섭리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고 볼 수 있지요 하나님의 시간이 무르익음을 두루마리는 보여 주고 있어요 우리가 시도 때도 밥 먹는 사람이 없지요

 

 
그 동안 살아 왔던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고 저마다 인생에 이런 삶의 계기들이 있는데 성경은 이런 수평적인 시간을 크로노스라고 이야기 하고 시계로 측량할 수 있는 시간 하루가 24시간이라든지 이것이 측량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삶의 시간에 무엇인가로부터 도입 한 것 같은 시간 이것을 우리는 카이로스라고 이야기 하는 데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신적 개입의 순간이어요 하나님이 우리의 삶속에 개입해 보고 있는 때이거든요
 
지금 두루마리를 비젼 가운데 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대가 무르익었다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었다
2절 그가 내게 묻되 천사가 스가랴에게 물은 것이어요
네가 무엇을 보느냐 천사가 네가 무엇을 보느냐 자꾸 묻지 않아요 물음은 우리에게 자세히 보게 만들어요
 
내가 성경에 대한 질문을 하면 성경을 자세히 볼 수 밖에 없어요 예를 들면 제 아들이 영문과를 나왔는데 영문과의 시험을 보면 나는 고상에 문학에 대한 것을 이야기 하는 지 알았더니 학생들의 공부는 무엇이냐 하면 자세히 읽는 습관을 들여야 엠리네에게 장미꽃을 이런 책이 있는데 그 책 다 읽고 시험 내용이 이래요 에밀 리가 자살할 때 사용한 도끼의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면 영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정말 자세히 텍스트를 읽어야 하기 때문에 소홀히 넘어가서는 안 되는다는 것을 선생님이 보여 주어요
 
성경도 그렇습니다 질문이라고 하는 것은 소홀히 넘어가기 쉬운 것들을 깊이 생각해 보라는 것이어요 네가 무엇을 보느냐 그러자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깅이가 이십 규빗이요 넓이가 십 규빗이니이다
 
길이가 이십 규빗하면 1 규빗이 45.6센치 그러면 길이 20 규빗이면 10미터 그 다음에 넓이가 10 규빗이니까 5미터 상당히 어마 어마한 두루마기입니다
 
왜 하필이면 길이가 20규빗 넓이가 10규빗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까닭이 있어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연약궤를 모신 지성소에 언약궤가 있지 않아요 언약궤가 있으면 그 위에 순금으로 이렇게 뚜껑을 만들어요 그것을 속죄소 그래요
 
그 위에 법궤를 지키는 그 법궤 위에 있는 그룹들을 만들었어요 이것은 group가 아니야 공동번역은 거룩이라고 번역을 해 놓았는데 일종의 천사입니다 지키는 역할을 합니다
 
왕상 6장 24절 한 그룹의 이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요 저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이쪽 날개 끝으로부터 저쪽 날개 끝까지 십 규빗이라
 
올리브 나무에 만든 그룹에 둘을 세워 놓았기 때문애 펼치면 20 규빗 20규빗이라고 하는 것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성전의 회복을 상징하기 위해서 이 두루마리의 크기가 그렇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적힌 내용은 성전의 회복에 대한 내용일 가능성이 많고 아까 엄청 크다고 했지 않아요 왜 이렇게 크느냐 하면 누구나 읽을 수 있게
 
3절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에 내리는 저주라
온 땅에 내리는 저주라 말합니다 그 두루마리에 적혀 있는 내용이 그렇다는 것이어요
 
도둑질하는 자는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저쪽 글대로 끊어지고 말하는데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을 합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온 땅 위에 내릴 저주라 두루마리의 한 쪽에는 도둑질 하는 자가 모두 땅에서 없어진다고 쓰여 있고 두루마리의 다른 쪽에는 땅 위에서 맹세하는 자가 말끔히 없어진다고 쓰여있다
 
명확하게 알 수 있스니다 날아가는 두루마리는 온 땅에 내리는 저주인데 언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 지금까지는 벌을 받지 않았어 도둑질 해도 처벌 받지 않았고 언약을 지키지 않아도 처벌을 받지 않았지만 이제 그 유보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다 여기 도둑질을 이야기 할 때 우리가 도둑질 하지 말자도 있어요 계명이 있는데 이것은 물건을 목적으로 받을 때도 있고 어떤 물건 훔치지 말아라 사람을 목적으로 삼을 때도 있고 하나님의 것을 목적으로 삼을 때도 있어요
 
이때에 도둑질은 하나님의 것을 훔치는 것을 벌하겠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누가 야단을 맞느냐 하면
4절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사용하는 자 어떤 경우일까요? 망령되이 행하는 게 어떤 것도 있을까요? 계명을 지키지 않았을 때 그런 것도 있겠지요
 
이렇게 생각을 해 봐요 어떤 나라가 전쟁을 해요 사실 그 전쟁의 동기는 나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어요 그런데 무엇이냐 하면 여기가 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하라고 말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자기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쓰는 경우가 망령되이 일컷는 것이지요 이런 것을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컷는 것이어요 어떻게 보면 목회자가 빠지기 쉬운 유혹이기도 합니다
 
교회를 크게 짓는게 하나님께 영광이다고 말한다든지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해야 하는데 그런 것들입니다 따지고 보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사람들은 학개서에도 보았지만 굉장히 생활 형편이 어려웠거든요
 
하나님께 바쳐 마땅한 것을 바치지 않고 우선 내 집부터 살아야 돼 이게 도둑질이야 어떻게 보면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고요 거짓 맹세를 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나는 맹세코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의 이익을 확보하려고 해요 그들은 하나님은 가만히 두지 않겠다
 
그들의 집에 머물겠다 그 심판이 어떻게 시향되느냐 하면 그 집을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 이것도 새 번역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만준의 주의 말이다 그 집에 머무르면서 나무 대들보와 돌로 싸운 벽까지 그 집을 허물어 버릴 것이다
 
파멸의 철저함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은 이들에 대한 무서움 이런 것들이 보여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로운 하나님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은혜로우신 그런데 이 하나님만 알면 안 돼 어떤 하나님도 알아야 해 심판의 하나님
 
이 둘을 함께 알아야 여기에서 발생하는 우리의 감정이 경외 하나님을 공경할 뿐 아니라 두려워 할 줄도 알아야 해요 신앙 생활하면서 하나님이 너무 편안해서 하나님 제 마음 아시지요 이렇게 하면 다 알아 보고 여러분 그런 모습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우리의 잘못을 벌하시는 분이기도 하지요
 
빵 한 덩어리가 있는데 이 빵의 이름이 사랑이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빵을 먹으면 잘라 먹지요 이 단면은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하면 정의로 나타나야 되어요 정의 없는 사랑 사랑 없는 정의 이런 것들은 문제가 있어요
 
정의와 사랑은 함께 사랑하기 때문에 부정해도 된다 내가 사랑하는 자이기에 잘못했어도 놔 둬 그를 망치는 일이기도 꾸지람을 하는 까닭은 무엇이냐 하면 그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가 더 이상 어긋날 길에 가지 않기 위한 사랑이지요
 
사랑이 없는 정의는 어떤 사람을 사랑과 정의가 함께 가야 되는 것이지요
5절 내게 말하던 천사가 나와서 내게 이르되 너는 눈을 들어 나오는 이것이 무엇인가 보라
 
보라 그러니까 우리가 무심히 세상을 보면 안돼 칼 야스퍼스라고 하는 철학자가 있는 데 이 분이 세계를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초월자의 암호로 가득 차 있다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초월자의 암호 그는 구지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어
 
초홀자의 암호로 가득차 있다고 하는데 암호라는 게 보는 순간 풀립니까? 아니지요 해독해야 되지 않아요 잘 살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세상에 가득차 있는 하나님의 암호를 해독할 수 있어야 되어야 해요
 
때때로 김상훈이라고 하는 초월자의 암호가 있어요 그것을 누군가가 풀어낼 때 겉 모습으로 어떤 사람 말고 저 사람 속에 신적 광휘를 볼 수 있으면 나는 함부로 대할 수가 없지요 그 사람들을 우리가 서로를 대할 때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술결을 보지 못하기에 대하는 함부로 대하거든요
 
우라는 정말로 대하는 사물들 하나 하나에 하나님의 술결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마태복음 6장 26절 너희는 하늘을 나는 새를 보아라
28절 들에 핀 백합화를 보아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냥 눈으로 보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마음의 눈으로 꽤 뚫어볼 때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나늑 섯이어요 초월자의 암호를 해독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가 묻습니다
6절 그가 말하되 이것이 무엇이니이까 에바이니라
에바가 무엇이지요?
에바라는 게 부피를 재는 단위 쉽게 이야기 하면 다른 번역은 뒤주라고 번역을 했는데 뒤주가 무엇인지 알지요 옛날에 말 에바라고 하는 게 호멜의 1/10인데 이것이 몇 리터정도 되는가 하면 22리터 정도 볼 수 있어요
 
한 말이 18리터여요 한말보다 큰 것이어요 한말 조금 남짓이지요 우리가 룻기도 공부하고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거든요 그것을 재 보니 룻기 2장 17절 그것이 일 에바였다
 
에바가 지금 등장하고 있습니다
6절.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하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모양이라는 것이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땅의 형편이 이와 같다
7절. 이 에바 한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뒤주 같은 데 한 여인이 앉아 있어요. 그 때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
이것 무슨 상황이지요 무엇이냐 하면 에바의 뚜껑이 있는데 납으로 만든 뚜껑이어요 이 여인이 고개를 이렇게 드는 것이어요.
그 에바를 덮는 뚜껑이 지금 열리고 있는 데 그가 이르되 이는 악이라 하고 말합니다
도대체 이 에바 속에 들어 있는 여인은 누구일까 생각해 보는데 이것은 종교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고대 근동 지방에서 사람들이 숭배하고 있었던 여신들이 있어요. 
성경에서는 하늘 여신 하늘 여왕으로 등장하는 여신들입니다
그 여신들의 특생이 무엇이냐 하면 다산과 사랑을 관장한다
그래서 이슈타르의 여신상을 보면 다산을 상징하기 때문에 엉덩이가 커요 출산과 관련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랑 아주 사랑스럽게 형상이 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스타르는 전쟁의 신이기도 해요 역사적으로 그러니까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결국 제국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자신의 풍요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수단으로 삼는 자라 그 수단으로 전쟁으로 활용하고 있는 나라 강력한 나라를 상징하는데 이스라엘에서도 저런 여신을 숭상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어요
 
이 여인이 뚜껑에 덮여 있었는데 고개를 드는 것이어요
무슨 이야기인줄 알겠지요 그러자 그 여인을 에바 속에 던져 넣고 납조각을 에바 아귀 위에 덮더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도 음녀에 비유되고 했는데 악을 에바 속에 던지고 뚜껑을 덮었다고 이야기 하는데 이 장면을 보면서 방사선 물질을 납 용기에 담거든요 왜냐 하면 납이 안정화 되어 있기 때문에 분열을 안 일으킨데요 납속에 납은 유해하지 않아요 옛날에도 납으로 이렇게 봉인을 했구나
 
우리도 어렸을 대 우리도 납을 녹여 본 적이 있습니다 낙시 추 만들기 위해서 납을 집어 넣고 군불을 데서 녹여 낙시 추를 만들기도 했는데 납은 낮은 온도에서 높지 않은 온도에서 녹거든요 그게 유해한지 잘 몰랐어요
 
어쩼던 납으로 봉인한다고 했는 데 남을 에바 속에 던지고 뚜껑을 닫는다고 하는 이야기는 심판의 단호함 이런 이야기른 요한 계시록에서도 이야기 하거든요
 
요한계시록 20장 3절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하나님이 사탄을 결박해서 무저갱 속에 집어 넣어요 인봉하여 천년이 지나도록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렇게 말하는 데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9절 내가 도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오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에바속에 있는 여인과는 다른 여인이어요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어요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그 여인들의 사명은 무엇이냐 하면 그 에바를 들고 하나님이 정화하는 그 땅에 더 이상 그 에바가 놓여 있으면 안 돼 그래서 하늘 바람을 타고 날아가서 어디엔가 옮겨 놓는 것이어요
 
10절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그들이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가나이까 하니
11절 그가 이르되 시날 땅으로 가서 그것을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것이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
 
시날 땅은 바벨론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을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리라 준공되면 거기에 머물게 되리라 합니다
 
재미나는 게 학의 날개 성경에서는 학이라고도 번역하기도 하고 고니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요 학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하시다인데 하시다는 여러분이 아는 단어와 유사해요 헤세드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
 
여기에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다고 말하므로서 어떤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이 이 백성들을 버리지 않고 그 백성을 끝끝내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을 학의 이미지에서 보여 주어요
 
그리고 성경에 보면 이학이나 고니는 정결한 짐승이 아닙니다 부정한 짐승입니다
신명기 14장에 18절 이 고니 학이라는 것이라는 게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짐승이어어요 부정한 짐승이기 때문에 에바를 들고 이방 땅으로 갔어요
 
에바를 이방 땅 시날로 옮김으로 이스라엘에 망연한 우상 숭배를 제거해요 이것이 에바의 환상이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상을 옮기느냐 하면 여러분 그릇의 소용은 그릇은 어떤 때 쓸 수 있지요? 그릇의 소용은 비어 있을 때 그릇이라는 것이 비어 있을 때 쓰지요 무엇이 담겨 있으면 못 쓰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 그릇이라고 하는 게 비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우상으로 차 있는 그릇에는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기 어려워 지금 하나님은 에바를 옮기는 이미지를 통해서 아까 이야기 한 다산과 풍요로움 폭력 이런 것들로 점철된 우상 숭배를 하나님이 제거하심을 통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임하시도록 하는 정화의 의미가 이 속에 담겨 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에바가 머물게 되는 그 장소가 시날로 날아가서 거기에다가 두고 신전을 짓는 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 말속에 담겨 있는 의미는 세상을 호령하고 있는 저 제국이 사실은 죄의 온상이라고 하는 사실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굉장한 상징이 그 속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따르기 보다는 우상앞에 절하기 쉽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섬기게 되지요 우리가 원죄 그러지 않아요
 
원죄 사람들은 원죄 설명할 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어서 우리도 재수 없게 유전이 되어 가지고 나도 죄인이래 그러면 억울한 생각이 들 수가 있어요 그러나 원죄의 이야기는 인류의 첫 사람 그러니까 일 이 삼 사 해 가지고 이 분이 죄를 지어서 나도 죄를 지은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인류의 첫 사람은 인류 전체를 상징해요
 
선악과를 따 먹은 사람은 이 원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악의 가능성이어요 그러니까 악에게 이끌리는 악의 영향력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하지 말라는 것은 하고 싶거든요 그런 요소가 있지요 하라고 하는 것은 하기 싫은데 하지 말하는 것은 이상하게 매력적으로 보여요
 
창세기 3장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하와가 나무를 보거든요 그 동안 많이 보았을 것이어요 무심히 보았거든요 뱀이 말해서 유심히 보니까 내 마음속에 욕심이 생겨요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기도 해 금지된 것에 대한 인간의 욕망 이런 것이 있어요
 
악에게 이끌리는 근원적인 가능성 이것이 원죄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악에 이끌릴 가능성이 있는 것을 그 가능성이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거스려 가면서 내 속에 하나님의 뜻을 채워가는 과정 이것이 신앙 생활이어요
 
늘 승리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비우고 또 비우고 이게 비워져야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 들어오는 데 내가 의지적으로 내 욕망을 절제 해야지 잘 안 되어요 오히려 강화 되어요
 
어떤 때 내 욕망이 절제되느냐 하면 다른 것이 좋아지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보니까 너무 행복해 이제 진자 내가 누군가를 유익하게 하는 삶을 사니까 내가 행복해 지는 것이어요
 
그 경험이 내게 생기게 될 때 약의 영향력은 내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돼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술좀 끊어 한데 내가 한번 끊어 보리라고 해도 못 끊어 끝까지 무엇이냐 하면 정말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술 먹는 것 잊어 버리거든요
 
그래서 옛날에도 이야기 했습니다하면 여기 상처가 나며 딱지 자꾸 뗄려고 하면 상처 나지 않아요 그냥 놔두어서 그냥 떵어져 악의 가능성을 그렇게 가는 것이어요
 
하나님은 인간이 그 땅에 인간이 살고 있는 그 땅에 악의 가능성을 옮기고 악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 돈으로 만든 제국임을 보여 주면서 이 비젼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두루마리 환상 그 다음에 에바 환상을 보았는데 이해가 되었지요.


스가랴 5장은 여섯 번째 하늘을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과 일곱 번째 에바 가운데 앉은 한 여인의 환상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두루마리의 크기는 장(길이)이 20규빗, 광(넓이)이 10규빗이라고 하였는데  오늘날의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길이는 약 9m, 넓이는 약 4,5m 정도의 크기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길이와 넓이는 솔로몬 성전의 제단 앞에 있는 ‘낭실’(왕상 6:3)과 같았고, ‘솔로몬 성전의 놋단’과 ‘성막 가운데 있는 성소’의 치수와 같습니다(대하 4:1).

옛날부터 솔로몬 성전 제단 앞에 있는 ‘낭실’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이 읽혀졌습니다.
따라서 이 둘의 규격이 똑 같다는 것은 이 두루마리는 율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기록된 두루마리가 날아다녔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율법에는 복과 저주 두 가지 개념이 있는데 본문에서는 주로 저주의 측면만이 강조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방에 의한 심판에 대해서도 예언하십니다. 
에바 속에 앉은 여인 곧 죄악이 '시날 땅'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이교주의의 본산으로 옮겨가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의 죄악이 이방에 옮겨짐은 이방 나라들의 권세로 유대인들을 분산시키실 것을 예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시날 땅은 인류가 교만하여 바벨탑을 쌓았던 곳입니다. 
따라서 시날 땅이란 이방 사상과 환경을 의미합니다. 

유대인의 죄악은 흩어져 살면서 이방 세력과 타협하여 본국에서는 빌라도의 정권을 이용해 그리스도를 죽였고, 또 다른 나라에 흩어져 있는 자들은 사도들을 핍박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죄악은 팔레스타인과  여러 나라에서 그 에바를 가득히 채우는 것과 같이 죄악을 관영시켰습니다.
그것이 바로 비유로 예언된 시날 땅과 같이 죄악을 극도로 관영시킨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세상 사람들의 죄악을 감찰하시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공정하게 벌하심을 말씀하십니다.
회개하지 않는 대표적 민족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 의식 때문에 더욱 자고하고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교만은 저주와 멸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교만은 무지를 낳게 되고, 이 영적인 무지는 메시아를 거역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성도의 교만은 자기를 주장하고 내세울 때 나타납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순간 주님이 계실 자리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에 계시지 못할 때 우리는 이미 멸망의 자리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08-22-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직 나의 신으로(스가랴 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So he said to me, "This is the word of the LORD to Zerubbabel: 'Not by might nor by power, but by my Spirit,' says the LORD Almighty.So he said to me, "This is the word of the LORD to Zerubbabel: 'Not by might nor by power, but by my Spirit,' says the LORD Almighty.

오직 나의 신으로(But by my Spirit) 즉 오직 나의 영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스가랴 4장은 다섯 번째 환상으로 순금 등대와 감람나무 이상을 보여 주셨고   스룹바벨이 성전을 재건할 것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실 것을 예고하신 것으로 궁극적으로 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역사를 예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아무리 방해하는 세력이 있어도 결코 넘어지지 않습니다.
스룹바벨 주도하에 진행되는 성전 재건 공사가 반대자들에 의해 중단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축을 계속 진행시키시고 완성시킬 것이라고 스가랴 선지자에게 격려하며 위로하셨습니다.

성도들이 현재 교회의 모습이 미약해 보이고, 우리의 삶을 힘있게 해주는 것 같지 않아 보여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어떤 방해와 비방도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에 지장을 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초가 되며 영원한 삶의 보장되는 증거가 됩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삶은 곧 이 세상에서 천국의 모형으로 생생하게 드러나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천국의 한 부분을 드러낼 수 있는 믿음으로 부각되는 은총의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키 임 베루히(כִּי אִם־בְּרוּחִי)
but by my Spirit

오직(키. kîy) but (3588) כִּי  

1. ~한 것을 창 1:10, 2. 창 1:4. 3. 왕상21:15
발음 / 키[ kîy ]
관련 성경 / 반드시(출 3:12, 왕상 1:13), 조금(출 5:11), 오히려(민 16:13), 진실로(수 2:24).
[형] 합당하다(창 27:36)
구약 성경 / 4475회 사용

임( ’îm)(518) אִם 

1. 오!  2. 직접 의문문으로 쓰일 때 : 왕상1:27,  3. 완곡한 의문문으로 쓰일 때 : ~인지.
발음 / 임[ ’îm ]
관련 성경 / 아니하다(창 14:23, 삼상 19:6, 겔 35:6), 못하다(삼상 17:55, 겔 14:20).
[부] 진실로(렘 15:11), 결단코(민 14:23), 결코(민 32:11), 만일(출 22:23, 대하 33:8), 참으로(삼상 21:5), 반드시(민 14:35)
구약 성경 / 1071회 사용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by my spirit (7307)  루아흐(rûwach) רוּחַ  

1. 영,  2. 입 기운,  3. 호흡
발음 / 루아흐[ rûwach ]
어원 / 730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창1:2, 삼상10:10, 사11:2), 기운(창6:17,7:15), 바람(창8:1, 삼하22:11, 시11:6), 마음(창26:35, 수2:11, 전1:17), 콧김(출15:8, 시18:15, 애4:20), 의심(민5:14,30), 생명(민16:22),노여움(삿8:3, 잠29:11), 정신(삿15:19, 왕상10:5, 대하9:4), 성령이 하시는 역사(왕하2:9,15), 큰 바람(욥1:19), (콧)김(욥4:9), (입)기운(시33:6), 호흡(시104:29, 전3:19), 영혼(욥7:11, 시143:7, 사26:9), 광풍(시148:8, 사32:2), 숨(욥9:18, 19:17), 혼(전3:21), (입)김(욥15:30), 심령(시77:3, 잠16:2), 폭풍(시55:8, 사27:8), 성품(잠17:27), 생기(렘10:14, 겔37:9), 분(전 10:4), 사면(렘 52:23), 사방(겔 5:10, 17:21, 단 11:4), 바람이 불 때(창 3:8), 헐떡거림(렘 2:24).
[부] 허망하게(미 2:11).
[동] 헐떡이다(렘 14:6).
구약 성경 / 378회 사용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벧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 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 이것은 위에 보인 순금 등대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
곧, 스룹바벨이 건축하기 시작한 성전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필경 산과 같은 난관을 극복하고 준공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비취는 등대의 역할을 하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겸하여 장차 오실 메시야(그는 스룹바벧에게서 예표되셨던 참 스룹바벧이심)께서 세우실 신약 교회를 상징한다.
순금 등대가 두 감람나무에서 공급되는 기름으로써 그빛을 발함과, 이 스룹바벨이 세울 성전(또 그것이 예표한 신약 교회)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성립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천사는 여기 말한다.
곧,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한다. "힘"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각양 세력(예컨대 부력, 병력 등)이고, "능"이라는 것은, 개인의 정력이나 담력 같은 것을 가리킨다.

순금등잔대와 두 감람나무의 환상(슥 4: 114)

다섯 번째 환상에서 천사는 스가랴에게 두 그루의 살아 있는 감람나무의 가지들에 의해 기름을 공급받는 일곱 가지가 난 등대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 등대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일곱 등잔은 ‘하나님의 눈’을 그리고 두 감람나무는 하나님의 은총이 마르지 않는 원천을 상징하는 것으로,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스룹바벨에 의하여 하나님의 성전 건축의 완성을 약속하고 성전건축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제거될 것이라는 성전의 영광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순금등대와 두 감람나무의 환상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며 이 환상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첫째 : 순금등잔대와 일곱 관에 대하여(2절)

스가랴가 본 환상은 순금으로 된 일곱 개의 등잔과 기름을 공급하는 일곱 관입니다. 등잔은 일곱 개이나 이 등잔에 기름을 공급하는 일곱 개의 관은 하나의 큰 관에서 갈라져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등잔은 큰 관에서 나오는 기름에 의해 타는 양만큼 자동적으로 공급이 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일곱 등잔은 스룹바벨에 의하여 건축될 성전을 말하며, 궁극적으로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질 교회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BC537년에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에 올라온 유대인들은 1년 후 BC536년에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려고 성전 지대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이 파사 왕에게 고발을 하여 성전 건축이 중단되어 약 1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중단된 성전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광스러운 성전을 다시 짓지 못할 것이라는 패배감에 빠져 있을 때, BC520년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성전 건축 촉구의 메시지에 다시 힘을 내어 건축을 시작하여 4년 후인 BC516년 제 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 건축되게 됩니다.

 

▶오늘 스가랴가 본 환상은 성전 건축이 중단된 지 약 15년에 본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에게 성전의 비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스가랴가 본 환상은 먼저 일곱 등잔대입니다. 일곱 순금 등잔대는 바로 성전을 의미합니다. 일곱 순금 등잔대가 성전 안을 환하게 비출 때 제사장은 성전 안에서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성전 안의 등잔에서 비추는 빛과 같이 세상을 비추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이 환상을 보여주면서 성전이 다시 건축될 것과 나아가 장차 그리스도에 의하여 교회가 세워질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기름을 등잔으로 공급하는 등잔대는 성전과 교회의 활동을 말합니다. 일곱 개의 등잔에서 빛이 나기 위해서는 기름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등잔은 일곱 개이지만 이 등잔에 기름을 공급하는 일곱 개의 관은 하나의 큰 관에서 갈라져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등잔은 큰 관에서 나오는 기름에 의해 타는 양만큼 공급이 됩니다. 교회의 모든 활동은 하나의 큰 관, 바로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의 등잔을 보여 주시면서 성전이 건축될 것임을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환상을 본 스가랴는 성전의 완공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비전을 갖고 백성들에게 힘을 내어 전을 건축할 것을 촉구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 : 등대 좌우에 있는 두 감람나무에 대하여(3절)

본 환상 가운데 보여진 등대 좌우편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가 하는 역할은 주발에 계속하여 기름을 공급하는 ‘기름 공급처’입니다. 스가랴는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궁금하게 여겼는데, 7절의 말씀을 보면 두 감람나무 중 하나는 스룹바벨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스룹바벨이 하는 일, 곧 성전 건축은 잘 될 것이며 모든 어려움이 스룹바벨 앞에서는 사라질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즉 ‘총독’이라는 위치에 있는 그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열왕기상 7:49
내소 앞에 좌우로 다섯씩 둘 정금 등대며 또 금꽃과 등잔과 불집게며.

솔로몬 성전에는 정금 등대가 다섯개 씩 좌우에 놓여 있었다. 즉 10개가 있었다.

등대(4501)

מְנוֹרָה 스트롱번호4501

1.

장식 등불

2.

촛대

3.

출25:31이하

발음 [ menôwrâh ]
관련 성경
☞등잔대(출25:32, 레24:4, 슥4:2), 촛대(왕하4:10, 렘52:19), 등잔(대상28:15).
구약 성경
42회 사용

순금등대(메노라트 자합 쿨라흐) מְנֹורַת זָהָב כֻּלָּהּ

순(3605)


כֹּל 스트롱번호3605

1.

전체

2.

모두

3.

온통.

발음 [ kôl ]
어원
3634에서 유래
구약 성경
5408회 사용



금(2091)

זָהָב 스트롱번호2091

1.

2.

욥37:22.

3.

슥4:12.

발음 [ zâhâb ]
어원
연계형 זְהַב, ‘반짝이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금(창2:11, 출20:23, 말3:3), 황금(욥28:17, 겔27:22).
구약 성경
387회 사용



등대(4501)


▶성전 건축은 오직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이루어 집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6절)

스가랴에게 임한 말씀은 성전 건축은 사람의 힘으로나 능력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주님의 교회는 사람의 지혜나 힘이나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말썽도 없고 은혜와 부흥과 평강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수많은 교회는 돈만 있으면 세우는 줄 알고 있습니다.

돈과 자기들의 지혜나 힘과 능력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건축해 놓고 교인들이   떠나버리는 일이 많고, 교회가 부채로 넘어가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지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전이나 교회를 건축할 때 반드시 방해하는 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스룹바벨이 전(殿) 지대를 놓자마자 이 소리를 들었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훼방하고 고발했습니다.
약 15년 동안 유대인들은 다시 건축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가랴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7절) 여기에서 큰 산이란 그 동안 스룹바벨이 성전을 건축하는데 방해했던 모든 장애물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방해하는 모든 원수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을 격려하시면서 어떠한 대적과 방해하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일을 이루신다는 것이고, 스룹바벨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앞에 대적이 ‘큰 산’과 같을지라도 그것이 평지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주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할 때 반대하고 훼방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큰 산처럼 보이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평지가 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애굽의 왕과 애굽이 ‘큰 산’과 같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평지로 만드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되어 나왔고, 그들 앞에 홍해가 가로 막혀 홍해가 그들에게 ‘큰 산’으로 보였지만 하나님은 길을 내사 평지가 되게 했습니다. 여리고 성이 견고한 성으로 큰 산과 같이 보였지만 하나님은 한 순간에 무너뜨렸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큰 산’이란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볼 때는 한 나라의 왕이 ‘큰 산’으로 보이고 대적자들이 ‘큰 산’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한 순간에 평지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가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하나님이며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입니다.

셋째 : 주를 모시는 두 사람(11절)

본문 11, 12절에 ‘두 감람나무’ ‘두 금관’ ‘두 가지’가 나옵니다.
많은 이단들이 이 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그리고 두 감람나무를 자기라고 하면서 ‘내가 감람나무다’ ‘내가 메시아다’ 하고 사람들을 미혹한적이 많았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두 감람나무란 14절에 나오듯이 ‘보좌에 앉으신 주를 모시면서 그 명령을 대기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왕상 22장 19절에서도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라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두 감람나무 즉 ‘기름부음 받은 자 둘’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통치자 총독 스룹바벨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두 명은 다만 예표의 사람들로서 장차 오실 메시아는 대제사장으로서, 왕으로서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예표인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 했던 하나님의 그 일은 예수님에게서 통합되었습니다(히 5:6-11)

스룹바벨에 의해 성전이 완공 되었듯이,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그의 몸을 성전으로 세우셨습니다.
또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의 마음을 주님께서는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스룹바벨이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세움 받았듯이, 예수께서는 우리의 왕으로 우리의 통치자로 오셨습니다.
또한 여호수아가 당시 대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섰듯이 예수님은 영원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두 금관 사이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가지는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본 다섯 번째 환상은 성전 건축을 중단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스룹바벨에게 성전 건축 완공의 약속을 하신 환상이며, 그 앞에 어떠한 대적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일을 이루신다는 환상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장차 메시아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로서 대제사장이시며, 모든 대적자를 물리치시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다는 예언입니다.

고난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이 땅과 세상을 심판하시는 왕으로서, 만 왕의 왕으로서 오실 것입니다.








스가랴 4장에서는 위로가 되는 다섯 번째의 환상을 보는데, 현재 곤궁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는 격려가 많이 들어 있다.
그들의 현재 고통이 너무도 커서 그들은 자신의 경우를 소망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들의 성전은 재건될 수 없고 그들의 성읍이 회복될 수도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환상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힘에 의해 그 일을 행하실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 환상을 보기 위해 스가랴 선지자가 깨어 일어난다(1절).
그 내용은 기름을 공급받고 계속 타는 일곱 등잔이 있는 촛대는 양옆에 자라나는 두 감람나무로부터 기름을 직접 공급받고 있다는 것이다(2-3절).
또한 성전의 건축자들에게 주어져서 그 선한 사업을 해 나가게 하면, 그것이 완수될 것이라는 확신과 그 실증이 나타난다(4-14절).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에게 순금 등대와 감람나무 이상을 보여 주시고 천사를 통하여 그 이상의 뜻을 해석하여 주셨습니다.
이는 스룹바벨이 성전을 재건할 것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실 것을 예고하신 것이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역사를 예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아무리 방해하는 세력이 있어도 넘어지지 않는다. 스룹바벨 주도하에 이루어진 성전 재건 공사가 반대자들에 의해 중단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축을 계속 진행시키시고 완성시키겠다고 스가랴 선지자에게 위로하셨다. 신자는 현재 교회의 모습이 미약해 보이고, 우리의 삶을 힘있게 해주는 것 같지 않아 보여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 교회의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어떤 방해와 비방도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일에 지장을 주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초가 되며 영원한 삶이 보장되는 증거가 된다.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보았다.
순금은 가장 고귀한 금속인데, 여기서는 그 변치 않는 성질을 통하여 하늘의 것을 상징한다.
등대는 두말할 것 없이 신약 교회를 상징한다.
스가랴는 순금 등대의 의미를 주의 사자를 통해 알게 된다.
곧 스룹바벨이 건축하기 시작한 성전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필경 산과 같은 난관을 극복하고 준공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비취는 등대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는 장차 오실 메시야께서 세우실 신약 교회를 상징한다. 하나님은 스룹바벨을 시켜서 성전을 재건케 하셨은데, 이 성전 재건 공사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래서 성전 재건은 극히 힘들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그 공사를 반대하는 세력이 큰 산악 같을지라도, 평지와 같이 변화시킨다. 오히려 하나님은 성전 재건 공사를 중단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위로하신다.
하나님은 스룹바벨을 봉해 시작하신 성전 재건 공사를 스룹바벨을 통해 마치게 하실 것이다. 이 성전 재건 공사가 비록 미약해 보였으나 필경 완성될 이유는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 곧 모르심이 없으신 성령께서 그 일을 성사시키겠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전적으로 성령에 의해 운행되고 실행됨을 본 예언서는 설명하고 있다.
결국 신약의 교회도 하나님의 지키시므로 그 시작은 미약했을지라도 세계 곳곳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많은 열매를 맺는 예언의 성취를 보게 되었다.
완전한 교회의 설립은 종말에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





08-21-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표의 사람(스가랴 3: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Listen, O high priest Joshua and your associates seated before you, who are men symbolic of things to come: I am going to bring my servant, the Branch.

大祭司長(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同僚(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豫表(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겔12:11 또 말하기를 나는 너희 징조라 내가 행한대로 그들이 당하여 사로잡혀 옮겨갈지라

사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슥6:12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돌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사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렘23: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예표(豫表)의 사람(men who are a symbol)을 히브리 성경에서는 "안세 모페트(אַנְשֵׁ֥י מוֹפֵ֖ת)" 라고 합니다.

아네쉐 모페트(אַנְשֵׁי מֹופֵת)

582. 에노쉬(’ĕnôwsh)  אֱנוֹשׁ 

1. 사람,  2. 일반적으로는 전 인류에 대한 집합명사로 쓰임,  3. 무리
발음 / 에노쉬[ ’ĕnôwsh ]
어원 / 60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람(창 6:4, 삼하 1:11, 겔 9:2), 남자(창13: 8), 동행자(창24:54,59, 삼상18:27), 백성(창 26:7, 수8:14, 왕상21:13), 주민(레18:27), 불량배(신13:13), 쌍방(신19:17), 무리(수9:14, 삿19:25, 왕하4:40), 지휘관(수10:24), 후손 (삿9:28), 대장부(삼상4:9), 난봉꾼(대하13: 7), 인생(욥4:17, 시144:3), 신하(잠25:1), 인구(전9:14), 족속(사45:14), 장정(렘18:21), 남편(렘29:6, 44:19, 겔16:45), 친구(렘38:22).구약 성경 / 42회 사용

4159. 모페트(môwphêth)  מוֹפֵת   

1. 아름답거나 장엄한 행위,   2. 이적,   3. 표시
발음 / 모페트[ môwphêth ]
어원 / 복수 מֵפַעַת, 진정한 어원은 모르나 מוּפַעַת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이적(출 4:21, 대하 32:24, 시 105:5), 기적(출 11:9, 시 78:43, 렘 32:20), 징조(사 8:18, 겔 12:6,11), 표징(신 28:46, 겔24:24, 27), 예표(슥 3:8).
구약 성경 / 36회 사용

예표(豫表)의 사람들! 안세 모페트!

예표(豫表)의 사람들  אַנְשֵׁ֥י מוֹפֵ֖ת

스가랴서 3장은 네번째 환상으로 제사장 여호수아의 성결에 관한 말씀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성전 재건에 힘을 모을 때 성전에서 섬겨야 할 일군 제사장을 세워가는 과정을 환상으로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성결케 됨과 정한 면류관을 씌우는 환상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하시고 의롭게 하실 것을 예시하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한 단번의 속죄를 예언하심으로써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받을 성도의 행복을 예고하셨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그 옛날 모세의 뒤를 이어 백성들을 지도했던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으로 그 의미는 "구원자" 라고 합니다.
이제는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성전 제사를 맡아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며 죄를 속하는 제사를 맡아 집례하는 거룩한 대제사장으로 마치 장차 오실 메시아의 표상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그 대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므로 신약의 칭의를 나타내셨습니다.
구원의 방법은 여호수아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없고 그 여호수아를 인도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이루어주심을 보여 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의 의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이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구원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수많은 이단과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사람들을 미혹하게 합니다.
이단(異端)이란 성경과 아주 크게 다른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애매한 부분을 마치 진리라고 주장하여 결국 성경 전체를 거스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따라서 이단이란 "끝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할 때 비로서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넷째 이상, 제사장 여호수아의 성결(결례) - 이스라엘의 특권 회복.

여호수아와 제사장의 옷 (정결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3:1-2. 여호수아에 대한 사단의 고소와 여호와의 변호.
3:3-5. 여호수아의 갱의 대관.
3:6-7. 여호수아에 대한 축복.
3:8-10. 메시야 강림과 그 왕국의 축복 및 예언.




예표(豫表)의 사람(men who are a symbol)을 히브리 성경에서는 "안세 모페트(אַנְשֵׁ֥י מוֹפֵ֖ת)" 라고 합니다.

어느날 예언자 스가랴는 하늘나라에서 재판이 열리고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피고인석에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기죽은 채로 서있었고, 고발자는 사탄이었습니다.
사탄이 대제사장을 고발한다는 것은 놀라운 장면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와 동일한 이름일 뿐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동명이인, 同名異人).
이스라엘이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올 때 정치적 지도자로는 다윗의 혈통인 스룹바벨을 세웠고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부여받고 귀국한 사람이었습니다.

귀국한 후 성전을 지으려고 했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의 정치적 방해가 거셌고 경제적으로도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성전공사는 16년이나 중단되었고 거룩해야할 성전은 잡풀만 무성한 폐허가 되었으니 대제사장으로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자기의 역할을 감당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그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호출하고 법정에 세웠습니다.

사탄이 참소합니다.
'이런게 무슨 제사장입니까?' 고발합니다. 고소합니다! 할말이 있으면 해보시오!
아마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이 비참했을것 같습니다.
하지 않아야하는 것을 하는 것도 죄이지만 해야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하지 못한 것도 죄가 되었습니다.

인생법정!
인생법정이 있다면? 우리도 혹 그런 인생법정에 서게되는 날이 혹 오게될까요?
그 어느날 너는 과연 어떻게 살았는지 무죄인지 유죄인지를 묻는 결정하는 날이 있을까요?
영화 빠삐용Papillon이 생각납니다.
죄수 빠삐용은 끝까지 무죄를 주장합니다.
살인혐의를 입고 쌩로랑 수용소에 갇히고 징벌 독방에 6개월동안 웅크려 신음하던 빠삐용은 꿈을 꿉니다.
꿈에 판사가 말합니다! 너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는 유죄이다!
그래도 유죄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인생을 낭비한 죄!

Judge : Yours is the most terrible crime a human being can commit.
I ACCUSE YOU OF A WASTED LIFE!
판사 : 네 죄는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중죄다. 난 널 인생을 낭비한 죄로 기소한다!
Papillon Guilty 유죄? 유죄... 유죄... 유죄... 유죄..........

유죄라면 가장 무서운 유죄! 인생을 낭비한 죄!
시간을 낭비하고 감정을 낭비하고 능력을 낭비하고 관계도 낭비하고!

대제사장도 지금 기가 죽고 초라하게 사탄이 호출한 법정에 서있습니다.
[슥3: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마음이 참으로 복잡했을 여호수아! 사탄까지도 그를 비웃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무슨 무슨 큰 죄를 저질렀나요? 아니었습니다! 다만 해야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죄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말없이 고개를 숙였을듯합니다! 
왜? 왜 그랬나요? 물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하나요?
왜 이렇게 되었어?! 왜 그렇게 살았어? 사는게 그렇게 힘들었어?
세상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나라는 사람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실패했습니다! 성격교정이 안되고 관계는 늘 부딪히고 열등감을 다스리지 못하고 남의 말에 늘 좌절했고 욕심을 내려놓지 못했고 욕구불만을 해소하지 못했고 내 마음 속의 자기모순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남의 시선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기억이 찔러대는 상처를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사탄아! 입다물라!
그런데!!! 여기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놀라운 은혜! 놀라운 선언!
[슥3: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슥3: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있는지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입 다물라! 여호수아가 지금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같아도 적어도 너에게 비웃음 받을 영혼은 아니다! 그 여호수아를 내가 택했기 때문이다! 너는 그를 비웃고 조롱할지 몰라도 나는 그를 버리지 않았다! 나는 그를 버리지 못한다!

지금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같은 모습으로 서있는 여호수아의 모습을 사탄은 즐기지만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십니다. 안타까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의 수순을 밟아주십니다! 옷을 갈아입혀주십니다!
내 사랑은 아직 식지 않았다! 아니, 영원히 식지 않는다!
거기에 스가랴도 말합니다. 이 여호수아의 머리에 다시 관을 씌워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슥3: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슥3:5]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옷을 갈아입혀주시다!


영적회복의 기회! 재활의 축복!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다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고 율법으로 돌아가고 규례를 지키면 권위도 회복시켜 주시고 사명도 회복시켜주시고 할 일도 회복시켜주시며 사람들 앞에 떳떳이 왕래할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귀하고 감격스럽습니다!
[슥3:6] 여호와의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증언하여 이르되
[슥3:7]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

감사한 것은 여호수아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나아와 있는 기가 죽고 부끄럽고 초라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동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예표의 사람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예표(豫表)의 사람! 스가랴 3:8!

[슥3: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예표(豫表)의 사람! 안세 모페트! אַנְשֵׁ֥י מוֹפֵ֖ת 
희망의 미래를 되찾아 낸 사람들! Men of wonderous sign

예표! 표증이 되고 증거가 될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될 것이고 되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싹이 나게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싹이 돋을 것이다!
희망의 싹, 생명의 싹, 웃음의 싹, 행복의 싹!이 돋을 것이다!
너도 나도 모두 예표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희망의 증거가 되어야합니다!

중세 수도원 일화가 있습니다.
덕망으로 널리 알려진 수도원장이 죽자,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고 운영도 어려워 수도사들은 해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꼭 전해야할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에 바울과 베드로 못지 않은 놀라운 성인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들 중에 있습니다. 바로 당신들 중에 있습니다! 이곳을 살려낼 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사람이 당신일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고 고민합니다! 저 사람? 아니면 이 사람? 아니면 혹시 내가? 내가 혹시 그 사람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기도하는 사이에 놀라운 영적 변화가 일어나고 훗날 그 수도원은 모두가 성인으로 변해 그 수도원에 가는 사람들마다 큰 은혜를 받았다는 일화입니다.

예언자 스가랴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재판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피고인석에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기죽은 채로 서있었습니다. 고발하는 사람이 누군가 보니 놀랍게도 사탄이었습니다! 사탄이 대제사장을 고발한다?! 놀라운 장면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와 이름이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면서 고국으로 돌아올 때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부여받고 귀국한 사람이었습니다.

귀국한 후 성전을 지으려고 했지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결국 성전공사가 16년이나 중단되었으니 대제사장으로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자기의 역할을 감당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그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호출하여 법정에 세웠습니다.

사탄이 참소합니다. '당신같은 사람이 무슨 제사장이요?' 비웃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이 비참했을것 같습니다. 그는 지금 비참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기가 죽어 사탄이 호출한 법정에 서있습니다.

[슥3: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마음이 참으로 복잡했을 여호수아! 사탄까지도 그를 비웃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놀라운 은혜! 놀라운 선언!

하나님께서 사탄을 책망하시고 여호수아의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슥3: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슥3: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있는지라

 

사탄아! 입 다물라! 여호수아가 지금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같아도 적어도 사탄에게 비웃음 받을 사람은 아니다!

내가 그 여호수아를 택했기 때문이다! 너는 그를 비웃고 조롱할지 몰라도 나는 그를 버리지 않았다! 나는 그를 버리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긍휼히 여기시고 회복의 수순을 밟아주십니다! 옷을 갈아 입혀 주십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함께 나아와 있는 동료들, 기가 죽어 초라하게 앉아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예표(豫表)의 사람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절망을 이기고 희망의 증거가 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슥3: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예표(豫表)의 사람! 안세 모페트! אַנְשֵׁ֥י מוֹפֵ֖ת

희망의 미래를 되찾아 낸 사람들! Men of wonderous sign

싹이 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싹이 돋을 것이다! 희망의 싹, 생명의 싹, 웃음의 싹, 행복의 싹!이 돋을 것이다!

 

우리 모두 함께 예표의 사람들이 되기 원합니다!

함께 희망을 보여주는 증거의 사람들이 되기 원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서로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약해도 주님께서 우리를 예표의 사람으로 만들어 새로운 희망의 싹을 트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다시 싹을 돋게 하시니 이제는 희망의 증거, 예표의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주님 동행하소서! 아멘! 아멘!


제하여 버리다(아바르) ʽâbar /  עָבַר  - 스트롱번호 5674
1. 건너다,  2. 창세기 31:21,  3. 여호수아 3:11
발음 / 아바르[ ʽâbar ]
관련 성경 / 지나다(창 15:17, 수 15:3. 삼상 14:23), 오다(창 18:5), 건너다(창 32:10, 삿 3:28), 나아가다(창 33:3, 삿 19:12), 다니다(출12:12, 왕상 18:6), 두루 다니다(출 12:23, 수 3:2), 생기다(민 5:14), 건너가다(민 32:21, 수 4:13), 범하다(신 26:13,사 24:5), 통과하다(민20:21, 신 29:16, 왕하 6:26), 행진하다(신 2:8), 어기다(수 7:11, 삿 2:20), 이르다(수 15:4, 삿 9:26), 건너오다(삼하 19:40), 따르다(삼하20:13), 왕래하다(욥15:19), 가다(삼상26:13, 왕상22:24), 넘치다(시38:4, 104:9), 떠나다(아3:4, 렘11:15), 휩쓸다(시42:7), 잠기다(시124:4), 물러가다(아5:6,사31:9), 헤매다(사8:21), 악하다(렘5:28), 잡히다(렘23:9), 넘다(렘48:32), 통행하다(사33:21, 겔39:15), 나아오다(단11:10), 메우다(호10:11), 없어지다(렘8:13, 나1:12), 받다(나3:19), 참여하다(신29:12), 나오다(삼하15:24), 멸망하다(욥33:18), 내려가다(욥33:28), 용서하다(잠19:11), 범람하다(사54:9), 상달하다(애3:44), 들어가다(수4:5), 순행하다(겔9:4,5), 순찰하다(창41:46), 맡기다(신24:5), 대다(민6:5), 앞서다(삼상9:27, 삼하18:23), 보내다(삼상26:22), 마치다(삼하11:27), 두루행하다(삼하20:14), 배반하다(왕하18:12), 출정하다(대하21:9), 변개하다(에1:19), 폐하다(에9:27), 마르다(욥6:15), 당하다(욥13:13),망하다(욥36:12), 넘어가다(욥14:5), 범죄하다(시17:3), 동행하다(시42:4), 면하다(시141:10), 거스르다(잠8:29), 수리하다(사40:29),제거함을 당하다(욥34:20), 돌아오다(사45:14), 순복하다(렘2:20), 진멸하다(렘8:13), 주다(겔48:14), 통용하다(창23:16, 왕하12:4), 들다(출30:13), 거역하다(대하24:20), 불려가다(사29:5, 렘13:24), 옮기다(창47:21, 삼하3:10), 새끼를 배다(욥21:10), 돌리다(출13:12, 민27:8), 밀다(민8:7), 가지다(수4:3), 인도하다(수7:7), 사하다(삼하12:13), 끌어내다(삼하12:31), 거두다(에8:2), 잃다(렘46:17),깎다(겔5:1), 사르다(겔23:37), 제거하여 버리다(욥7:21, 슥3:4), 반포하다(대하30:5),제거하다(에8:3), 돌이키다(시119:37), 공포하다(출36:6, 스10:7), 소리를 내다(레25:9),쫓아내다(왕상15:12), 벗다(욘3:6), 범죄하게 하다(삼상2:24), 분내다(시78:62), 노하다(시78:21, 89:38), 진노하다(신3:26), 방자하다(잠14:16), 간섭하다(잠26:17).
[부] 빨리(삼하 17:16).
[명] 행인(잠 9:15), 즙(아 5:5, 13), 행인(사 33:8).
구약 성경 / 547회 사용

순(체마흐)  צֶמַח  / 스트롱번호  6780

1. 싹
2. 창19:25
3. 시 65:11
발음 [ tsemach ]
어원 / 677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난 것(창 19:25), 움돋게 함(사 61:11), 가지(렘 23:5), 풀(겔 16:7), 이삭(호 8:7), 싹(시 65:10), 소산(사 4:2), 순(슥 3:8, 6:12). [형] 연한(겔 17:9), [동] 자라다(겔 17:10)
구약 성경 / 12회 사용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순을 나게 하리라

- '예표의 사람'은 바로 여호수아와 그의 동료 제사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들의 직분이 예언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결국 구약의 제사장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가치는 메시야를 통해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메시야를 가리키는 '종'(사 42:1; 49:3; 50:10; 겔 34:23)과 '순'(荀)(렘 23:5)에 대한 약속으로 이어진다.
'종'이라는 표현은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행하여 완전한 속량을 이루실 것을 잘 나타내며, '순'은 다윗의 계보에서 나올 새로운 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적 특성을 시사한다(6:12; 사 11:1; 42:1).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예표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보여주어야 할 의무와 책임을 보여주어야 할 책임을 갖고 있는 존재라고 하겠다.
그런데 천국의 징조를 보여주지 못하므로 세상을 실망시키고 있다.
순이란 싹을 말합니다.
싹은 아주 작은 것을 말합니다.
비록 작은 것 같지만 그 작은 것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될 것이며 그 나무에 많은 그늘이 만들어져서 새들이 둥지를 만들고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당신이 내게 예표의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표의 사람들입니다. 
함께 예표의 사람들이 되기 원합니다! 함께 희망의 사람들이 되기 원합니다. 
한번 진실하게 간증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서로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약해도 주님께서 우리를 만들어가실 것입니다. 싹을 트게 하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을 기억합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간증의 사람들, 예표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영혼이 맑은 사람들, 헌신이 진실한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균형감각이 있고 열정도 있고 지구력도 있고 소망을 붙잡고 가고 사람을 품을 줄 알고 화목을 만들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못가진 것을 그분이 가지고 있기에 서로 배우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는 남의 간증을 들으며 내 신앙을 키워왔고 점점 신앙이 깊어졌습니다. 이제는 내 차례입니다!
인생의 아픔과 슬픔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어떻게 욕심을 이기고, 분노를 이기고, 자기와의 싸움을 이겨냈는지, 어떻게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어떻게 더욱 사랑하게 되었는지! 희망을 주는 사람들! 간증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언젠가는 한번 열정의 간증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격정의 간증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스가랴 예언자는 여호수아 대제사장 환상을 봅니다. 환상 속에서 여호수아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주위에 천사들이 빙 둘러서 있고, 그 한쪽에 사탄도 끼어들어 있어요. 대제사장이 꾀죄죄한 옷을 입고 있으니까 사탄이 온갖 험담을 다 쏟아내요. 이때 하나님이 사탄을 쫓아내고 천사들을 불러서 여호수아에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머리에 멋진 관을 씌우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 다음 여호수아를 둘러싼 동료들을 향해서 ‘예표의 사람들’(8절)이라고 선포합니다. 예표는 히브리어로 ‘모페트’인데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놀라운 일, 기적과 같은 일, 엄청난 일이라는 뜻도 있고 또한 징조, 조짐, 예감이라는 뜻도 있어요.

어떤 예감이 있을 때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께름직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여기에서 말하는 예표는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하게 지내는 것은 가장 평화로운 세상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전쟁도 그치고, 못된 사람들도 다 사라지고, 걱정 근심이 한 자락도 없는 세상입니다.

지금은 사는 것이 옹색해요. 포로 생활을 끝내고 돌아왔으니 오죽하겠어요. 밭은 호랑이가 새끼 칠 정도로 무성하고, 이랑마다 돌멩이가 수북이 쌓였으니 농사를 지어봤자 수확이 제대로 나올 리가 없지요. 고생고생해서 성전을 지었는데 옛날 솔로몬의 성전에 비하면 너무 초라해요.

하지만 예표가 있어요.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지금은 팍팍하지만 앞으로는 살림살이가 넉넉해질 겁니다. 지금은 농사가 잘 안되지만 앞으로는 농사가 잘 돼서 풍성해질 겁니다. 지금은 성전이 조그맣지만 이 성전에 세상 만민이 예물을 들고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될 겁니다. 좋은 징조지요.

우리가 예표의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가는 곳마다 좋은 일이 생기고 동네의 어려운 일이 다 해결돼서 동네 사람들이 환영하고, 어디서든지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예표의 사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지요.

그럼 어떤 사람이 예표의 사람인가요. 여호수아처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또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사람입니다. 여호수아 주위에 천사들이 빙 둘러서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다 씻어주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깨끗한 옷을 입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씻겨 주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이 예표의 사람이 되면 어디를 가든지 환영받을 것입니다. 예표의 사람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교회가 평안해지고,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비난하지 않고 칭송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예표의 사람인가요.


길조(吉鳥)와 흉조(凶鳥) - 까치와 까마귀

행운의 수와 불길한 수
길조와 흉조

7이라는 숫자를 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행운의 숫자이니까요. 
토끼풀이 만발한 들판에서는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무언가를 찾으려고 안달입니다.
네 잎 클로버를 발견하면 행운이 온다고 하니까요.
행운의 편지를 받으면 말이 행운이지 그리 기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편지 내용을 그대로 베껴 아무도 모르게 7명에게 몰래 행운을 전달합니다.
혹시라도 내 행운이 달아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행운을 상징하는 여러 동물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이 새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고 하죠. 매년 해가 바뀔 때면 이 새가 등장하는 노래를 부르고 새해를 축하하며 소망을 빕니다. '까치 까치설날은~'의 주인공 까치입니다.

길조라고 불리는 까치는 검은 색깔의 새이지만 흰색의 털이 있어 생김새가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반면 까치보다 덩치도 크고 울음소리도 기분 나쁜 새가 있습니다. 이 새가 울면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꺼려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흉조라고 알려진 새, 까마귀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떠올려보면 위협적이고 무섭게 느껴집니다.

 길조인 까치와 흉조인 까마귀. 마치 무슨 공식처럼 외운 이 사실은 진짜일까요?

 그리고 말귀를 못 알아듣거나 엉뚱한 짓을 하는 녀석을 보고 흔히 '새大가리'라고 놀립니다. 머리가 나쁜 사람한테도 마찬가지이고요. 친구들끼리 '조두(鳥頭)'라 부르면서 무시할 때도 있습니다. 정말 새들은 머리가 나쁠까요?  

까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텃새입니다.

동네 어귀의 높은 나무나 전봇대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까치는 시각과 후각이 뛰어나 주위의 냄새뿐만 아니라 사람의 냄새도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낯선 사람이나 다른 짐승이 들어오면 낯선 냄새를 파악하고 경계의 표시로 울어대는 거라고 하는데요, 먼 옛날 마을을 찾아오는 낯선 손님이 있다면 대개는 친척이거나 명절날 타지에서 부모님을 찾아온 자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당연히 반가운 만남이었을 테고요.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까치는 잡식성이라서 쥐와 같은 작은 동물은 물론이고 곤충이나 나무 열매, 감자 같은 채소도 가리지 않고 먹습니다. 이 때문에 봄이나 여름에는 나무에 사는 해로운 곤충을 잡아먹어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새입니다만 마냥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워낙 가리지 않는 식성 때문에 딸기, 수박 같은 과실을 쪼아 먹고 비닐하우스에 큰 구멍을 뚫어놓거나 농작물을 상하게 만들어 농가에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까치가 울면 반가워야 하는데 현실은 유해 조수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면서 까치의 천적인 맹금류가 줄어 까치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난 데다가 전봇대에 서식하며 배설물로 인해 정전 같은 사고를 일으키기 때문인데요, 한때는 길조로 사랑받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포획 대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흉조라며 멀리하는 까마귀는 우리나라처럼 부정적으로 여기는 나라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나라도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까마귀를 보통 '불길한 새'로 여긴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까마귀를 붉은색으로 그리면 태양, 금색으로 그리면 효도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서양에서는 까마귀가 길조인데요, 옛날 뱃사람들이 항해를 나갈 때마다 까마귀를 새장에 넣어 데리고 다녔습니다.
배가 방향을 잃었을 때 까마귀를 날려 보내면 가장 가까운 육지 쪽으로 곧장 날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랍인들은 결정의 순간에 까마귀가 오른쪽으로 날면 행운이, 왼쪽으로 날면 불행이 온다고 여겼기에 까마귀를 '예언의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까마귀가 이웃처럼 아주 친근한 새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듯 단순히 길조, 흉조를 떠나 전 세계적으로 까마귀에 대해 다양한 이미지가 존재합니다. 그만큼 까마귀는 다른 나라에서도 관심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조류 중에서 까마귀는 가장 똑똑한 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결과를 보여주는 연구 결과도 많다고 합니다.

까마귀는 부리로 나뭇가지를 주워 올립니다. 그러고는 나무 틈새에 넣어서 그 안에 있는 먹이를 꺼내 먹습니다. 사람이나 침팬지 같은 유인원만 도구를 쓰는 게 아니라 까마귀도 도구를 쓰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게다가 나뭇가지를 원하는 길이로 잘라서 사용할 줄도 안다고 하니 대단한 새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어떤 까마귀는 먹이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합니다. 상자 안에 더 큰 먹이가 있는 것을 보고 그걸 위해 다른 먹이를 17시간이나 먹지 않고 참은 건데요,

도구를 쓰거나 이렇게 자신을 통제하는 능력은 침팬지 같은 유인원에게서만 있는 특성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정도보다 새들이 훨씬 똑똑한 것 같습니다. 굉장히 둔해 보이는 까마귀도 보기와 다르게 뛰어난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까마귀는 뇌의 무게만 보면 몸집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람보다 큰 뇌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텃새는 한 장소에서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하기에 뇌가 더 크다고 하는데요, 몸집은 작게 만들면서 천적에 맞서 생존할 수 있도록 환경에 따라 진화해온 결과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까마귀는 효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예로 중국에서는 까마귀를 반포조(反哺鳥)라고 불렀습니다.
'까마귀의 효'라는 뜻인 반포지효(反哺之孝)는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며 은혜를 갚는대서 유래한 사자성어입니다. 자식이 자란 후에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 효성은 인간이 유사 이래로 늘 강조하는 덕목인데 까마귀는 가르치지 않아도 이미 몸소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길조라며 새 중에는 가장 사랑받은 새였던 까치는 지금은 오히려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고, 흉조라고 무시했던 까마귀는 뛰어난 인지능력에, 지극정성인 효가 있어 본받아야 할 새가 됐으니 세상에는 영원한 것은 없나 봅니다. 물론 인간의 편의에 따라 관점이 변한 결과이지만 말입니다.

아울러 머리 나쁜 친구에게 함부로 조두라고 놀리는 일도 까마귀한테 실례되는 행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까마귀 입장에선 꽤 기분 나쁠 것 같습니다.

까치로 시작해서 까마귀까지,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오다 보니까 기존에 알고 있던 이미지와는 꽤나 다릅니다. 이제는 어느 한 새를 가리켜 길조다 흉조다 말하는 것이 선입견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08-19-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척량줄(스가랴 2:1)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척량 줄을 그 에 잡았기로.
Then I looked up--and there before me was a man with a measuring line in his hand!

척량줄(a measuring line)
헤벨 믿다(חֶבֶל מִדָּה)

헤벨(2256) [ chêbel ]  חֵבֶל 

1. 끈,  2. 측량선, 3. 유산
발음 [ chêbel ]
어원 / [여성으로는 단 한 번 사용됨, 습2:6], 어미활용 חַבְלִי, 복수חֲבָלִים, 복수 연계형 חֶבְלֵי, 시18:5,116:3, חַַבְלֵי수17:5, 225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방(신 3:4,13, 수 19:29), 줄(수 2:15, 삼하 8:12, 미 2:5), 분깃(수 17:5,14), 기업(基業)(수 19:9), 무리(삼상 10:5,10), 땅(왕상4:13), 테두리(왕상 20:31, 32), 지경(대상 16:18, 시 105:11), 괴로움(욥 39:3), 노끈(욥 41:1, 겔 27:24), 슬픔(사 13:8), 고통(사 66:7, 렘13:21, 22:23), 어려움(호 13:13). [동] 멸하다(미 2:10), 택하다(신 32:9), 산고를 겪다(사 26:17).
구약 성경 / 7회 사용

미다(4060) [ middâh ]  מִדָּה   

1. 확장,  2. 치수, 3. 옷
발음 [ middâh ]
관련 성경 / 크기(겔46:22), 자(대상23:29), 부분(느3:11,21, 3:30), 세금(느5:4), 분량(욥28:25), 옷깃(시133:2), 장대(사45:14), 측량줄(렘31:39),길이와 너비(겔40:22), 측량(슥2:1), 장단(출36:9), [형] 큰(렘22:14). [동] 측량하다(겔40:5,21, 42:15).
구약 성경 / 56회 사용

또...본즉 한 사람이 척량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 본절에서 13절까지는 세 번째 환상이 기록되어 있다.
이 환상에 약속되고 있는 축복과 회복의 범위는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넘어서 메시야 시대에까지 확장된다.
두 번째 환상이 대적들의 파멸을 묘사하고 있는 반면, 이 환상은 그로 인한 예루살렘의 번영과 성장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환상이 그 당대의 적들을 멸망시킴으로써 그 당시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말하고 있다면, 이 환상은 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환상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스가랴와 척량사, 그리고 해석하는 천사, 그리고 신분이 알려지지 않은 천사이다.
어떤 이들은 이 척량사를 '여호와의 사자'로 해석하기도 한다(Perowne).
그리고 '척량줄'은 예루살렘의 회복과 성전 재건, 더 나아가서는 메시야 시대를 준비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선지자(先知者)는 먼저 아는 사람입니다.
선견자(先見者)는 먼저 보는 사람입니다.
예언자(豫言者)는 먼저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선지자와 선견자외 예언자를 히브리 단어로 "나비(nâbîyʼ. נָבִיא)" 라고 합니다.
'나비'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보고, 확증한 후에 그것을 증거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선지자(5030) 나비(nâbîyʼ) נָבִיא 

1. 선지자, 2. 선지자의 직분을 하도록 뽑힌 자들,  3. בְּנֵי הנְּבִאִים.
발음 / 나비[ nâbîyʼ ]
어원 / 아람어
관련 성경 / 선지자(창 20:7, 신 18:22, 왕상 18:4), 대언자(출 7:1), 예언자(렘 28:9), 예언(단 9:24), 예언하는 자(겔 13:2, 3).
구약 성경 / 315회 사용 

스가랴서에는 여덟 가지 환상이 소개됩니다.

1장에서는 두 가지 환상이 소개되었습니다.
첫번째 환상은 온 땅을 둘러보는 세 종류의 말(1:7-17)
두번째 환상은 네 뿔과 네 명의 대장장이(하라쉬, 숙련공)(1:18-23)

2장에서는 세번째 환상은 척량줄을 잡은 사람(2:1-13)
세번째 환상은 척량줄을 잡은 사람이 나타나서 예루살렘 성의 복구와 왕성할 것을 보여줍니다.

세번째 환상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2:1-2. 척량줄 잡은 자의 계시로서 이는 예루살렘이 왕성할 것을 보여준다.
2:3-5. 예루살렘의 복구와 그의 안전과 명예에 대한 예견을 제시한다.
2:6-9. 아직 바벨론에 머물고 있던 유대인들을 훈계하여 그들을 재촉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을 서두르게 하려는 것이다.
2:10-12. 돌아온 자들에 게 위안을 주고 그들이 겪어야 할 많은 곤란들과 어려움들을 알려 준다.
2:13. 하나님을 규정하거나 그를 제한하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모두에게 영적 이스라엘 곧 복음을 믿는 자들이 각국에서 하나님 백성과 압류하여 천국 운동이 크게 전개될 것을 예언.

2:4.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성곽없는 촌락(페라자)(perâzâh) 6519.  פְּרָזָה

1. 광활한 평야,  2. 성곽없는 촌락, 3. 에 9:19
발음 / 페라자[ perâzâh ]
어원 / 6518과 동형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고을(에 9:19, 겔 38:11), 촌락(슥 2:4).
구약 성경 / 3회 사용

2:5.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

* 불 성곽(호마트 에쉬)

열왕기하 6:17. - 18절,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불(784) 에쉬(’êsh) אֵש

1. 불,  2. 하나님의 불, 3. 또한 ‘하나님의 진노’를 비유적으로 나타낼 때도 사용됨
발음 / 에쉬[ ’êsh ]
관련 성경 / 불(창 22:6, 신 1:33), 불길(신 4:12), 화염(시 106:18, 사 4:5), 화, 노(시 78:21).
[동] 타다(창 15:17, 레 6:10), 분향하다(레 16:13).
구약 성경 / 379회 사용

성곽(2346) 호마(chôwmâh) חוֹמָה

1. 벽,  2. 쌍수 חֹמֹתַיִם은 복수로부터 유래 ‘이중벽’
발음 / 호마[ chôwmâh ]
관련 성경 / 벽(출 14:22, 29), 성벽(레 25:29, 왕하 14:13, 나 3:8), 담(삼상 25:16, 사 30:13, 겔 40:5), 성(삼하 11:21, 왕상 20:30, 욜 2:7), 성곽(느 2:8, 애 2:18, 겔 26:10), 성읍(대하 14:7), 외성(대하 32:5, 33:14), 궁전(애 2:7).
구약 성경 / 133회 사용

영광(3519) 카보드(kâbôwd)  כָּבוֹד 

1. 무거움,  2. 영광,  3. 삼상4:21
발음 [ kâbôwd ]
어원 / 351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재물(창 31:1), 영화(창 45:13, 삼상6:5, 시8:5), 영광(창49:6, 출33:18, 대하1:11, 에5:11), 존귀(잠15:33), 귀(貴)(대상29:12, 잠3:16), 존영(잠 11:16), 영예(잠 25:2, 29:23), 위력(사 8:7), 심령(시 108:1).
구약 성경 / 199회 사용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 중에 있는 유다 백성에 대한 구원을 계시하시며 선지자를 통하여 바벨론에 거하는 유다 백성에게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바벨론은 이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고 유다 백성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맛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이유는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확장될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누구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구약적 의미에서 보면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이방인으로선 복음의 혜택을 누리고 있기에 다른 이방인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사도 바울과 같은 복음에 빚진 자가 되어야 한다.
복음을 받아야 할 대상이 있기에 우리의 영적 이스라엘인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복음에 소외된 자들에게 복음으로 빚진 자이다. 

척량 줄 ㅡ셋째 이상(스가랴 2:1)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척량 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 할 때에(2:1~2)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준 셋째 이상은 예루살렘을 측량하는 자에 대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회복과 부흥케 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스가랴에게 임한 측량줄에 관한 이상과 같은 의미의 이상이 에스겔에게도 주어졌습니다(겔 40:1~3).


​예루살렘의 회복으로 그 크기가 사람의 충만한 부흥과 가축의 증산으로 성 밖까지 확장이 되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을 것이라고 한다.(슥 2:4)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슥 2:5)

​성곽은 사람과 가축의 보호와 안전을 위한 구조물입니다.
부흥하여 성곽 없는 촌락과 같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불 성곽이 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시편 18편 2절에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고레스 조서로 돌아온 자들에게, 그리고 바벨론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남아있는 유대인들에게 돌아오기를 권면하며(슥 2:6~9) 위로와 소망을 주고 있다.
불 성곽이란 의미는 특별한 보호하심을 의미한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온전히 순종했다면 그들에 대한 부흥은 성취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위에 세워진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은 스가랴의 이상이 실형 될 것이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에 품고 임마누엘의 피 묻은 깃발을 들고 날마다 그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최우선으로 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에겐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과 함께 영과 혼과 몸이 흠 없이 보존되도록  성령이라는 불 성곽으로 보호해 주시면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동행하여 주신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시 125:2)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하늘의 사방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거니와 이제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망할지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2:6)

​이사야의 고레스 예언(사 44:28), 예레미야의 예언(렘 29:10)대로, BC 538년 고레스가 귀환 칙령을 내려 스룹바벨의 지도 아래 귀환하고 성전을 중축하도록(스 1:1) 했지만. 이 때 유대인들이 다 귀환하지 않고 사만 이천 삼백 육십 명만 귀환을 하였음으로 이를 일차 귀환이라고 한다.

​이네 대하여 스가랴 2장 6절로부터 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속히 귀향하라는 말씀을 주고 계신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기에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시대에 하만의 계획에 의하여 엄청난 시련을 당하게 되었지만,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준비하심으로 한 번 더 기회를 허락하셨다.

​이 감동적인 호소가 그같이 별 반응을 얻지 못한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도망하라는 이 호소에 유의하였더라면 모르드개와 에스더 시대에 당한 시련의 때에 유대인들의 상황이 얼마나 달라졌겠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주님의 목적은 언제나 동일하시다. 그분은 인간 자녀들에게 부요함에 가득찬 영원한 유업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분의 왕국은 영원한 왕국이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순종하는 신하가 되기로 한 사람들이 마침내 영광의 왕국으로 인도 될 때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성취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슥 2:10~11)

​이 이상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실패 하였기에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회가 주어졌다.

​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슥 2:12~13)

​내 안에 있는 자아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재창조(회복)의 일을 하시려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일어나신다.

​말씀 묵상을 줄이며 척량 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짧게 논해 본다.
척량 줄(슥 2:1)과 비슷한 내용이 다림줄(암 7:7), 다림줄(슥 4:10), 먹줄(겔 9:3), 지팡이 같은 갈대(계 11:1), 등 이다. 잰 줄과 다림줄은 심판의 잣대이다.

​북방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시기에 활동했던 아모스 선지자의 아모스서를 보면 아모스 7장 7절에 "다림줄"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데, 아모스 7장 8절에 보면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라” 하신 것을 볼 때 다림줄은 심판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 이다.

​잰 줄은 건축을 할 때에 수평을 유지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다림줄은 건축 공사에 쓰이는 도구로 무게중심을 잡는 다림추를 달아 중력에 의하여 지구 중심을 향하게 하여 건물이 수직으로 견고히 설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이다. 잰 줄과 다림줄에 맞추지 않고 건물을 지으면 얼마 되지 않아 무너지고 만다.

성령이 거하는 하나님의 성전이 된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잰 줄과 다림줄로 어떤 지진, 폭풍과 한파에도 쓰러지지 않는 견고한 성령의 전으로 유지되도록 날마다 자신을 살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잰 줄은 하나님의 계명이요,

다림추는 십자가의 보혈의 구원으로,

다림줄은 예수 믿음이다.

계시록11장 1절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지금은 심판의 시기이다. 누가 마지막 날에 설 것인가를 알기 위하여 성전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늘 깨어있고, 은밀한 기도로 거룩한 교제를 나누며, 성령께 순종함으로 헌신으로 충성하여,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엡 3:19)하여 영생을 담도록 내 안의 성전을 건축하자!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스가랴서를 '예언서들의 진수'라고 예찬한바 있습니다.
그 이유는 스가랴의 예언 속에는 다른 여러 선지자들의 예언들이 집중적으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의 격동기에 소명을 받았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에서 70년 동안이나 포로 생활을 하던 민족 수난의 현장에서 태어난 포로 1세 였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혈관에는 선민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인 할아버지 잇도와 또 아버지 베레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가 일찍 죽임을 당한 일로 인하여 할아버지의 제사장직을 일찌기 승계하였습니다(슥 1:7).
그러므로 스가랴는 제사장인 동시에 선지자로서 일인이역(一人二役)의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이 해방령을 받아 처음으로 돌아오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그룹에 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민족사적 거사에 참예할 수 있었던 축복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여덟가지 환상을 주셨습니다.

  그 첫 번째가 홍마를 타고,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서 있는 자의 환상이었습니다. 선민 중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성전 재건의 메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두 번째는 네 뿔과 네 공장(工匠)들의 환상이었습니다. 선민을 들어 성전 재건을 방해하는 원수들을 물리치는 환상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의 환상입니다. 그 환상 계시는 '척량줄을 잡은 한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첫째. 예루살렘을 척량하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1.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2장 1절로 2절에 [내가 또 눈을 들어 본 즉 한 사람이 척량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 즉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長廣)을 보고자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본문을 다시 표현하면, [보라 한 사람을!] (and vehold, a man!) 하는 뜻입니다. 여기 나타난 '한 사람'이 누구인가?
  1장 8절에 [홍마를 타고, 화석류 나무 사이에선] 그 사람입니다. 바로 사사기 중에 저 소라땅 마노아 부부에게 나타난 기묘자를 가리킵니다(삿 13:18).
  겔 40:2-3에도 에스겔 선지자는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잡은 한 사람의 이상을 보았는데, 그 모양이 놋과 같이 빛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한 사람(힌네 이쉬 =      )은 황폐되어 버린 예루살렘을 재건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가 천사의 모습이나,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남은 하나의 영체인데,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시 전달의 한 양태입니다. 실제로 그 분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사람으로 도성인신하여 33년을 지구에 사셨습니다.
  그가 '한 사람'으로 나타남은 강하고 능력 있는 유일의 존재자임을 알려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2. 척량줄을 잡은 한 사람으로 나타났습니다.

  2장 1절에 [내가 또 눈을 들어 본 즉 한 사람이 척량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라고 하였습니다.
  '척량줄'(line of measurement)은 물건이나, 공간을 자로 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척량줄을 손에 잡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그것은 그의 주권적 관할과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는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동

시에 그 모든 것을 통치하고 관장할 수 있는 주인이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그 척량줄을 가지고 동과 서를 나누고 남과 북을 구별시키는 자입니다. 그는 그 척량줄을 가지고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별시키는 자입니다. 그는 그의 손에 있는 척량줄을 가지고 양과 염소를 나누고 있는 자입니다. 그는 그 척량줄을 가지고 성전 안에 있는 자와 성전 밖에 있는 자를 구별시키는 자입니다. 바로 그의 손에 있는 그 척량줄은 죄인들의 영혼을 통치하시는 십자가의 복음이요, 신구약 66권 성경인 것입니다.

  3. 예루살렘의 장광(면적)을 척량하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2장 2절에 선지자는 그의 손에 척량줄을 잡은 사람에게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 때 그분이 답하기를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뜻일까?
  ①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과 성의 재건을 알려 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위로요, 소망입니다.
  ② 구별시키는 경계선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예루살렘(이스라엘)과 이방 지역을 구별시키는 경계의 표식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갈라놓고 구별시키는 생명의 척량줄이 됩니다(고전 1:18).
  ③ 예언적 의미로 주님의 교회 관할을 나타내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주께로부터 받은 지팡이 같은 갈대를 받아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라고 하는 메세지를 받은 바 있습니다(계 11:1-2).
  ④ 영원한 새 예루살렘 곧 천국 통치의 내용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계 21:15-17에는 그리스도께서 새 예루살렘을 척량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중대한 내용은 그 한 사람! 손에 척량줄을 잡은 그 한 사람이, 예루살렘의 면적을 재 보러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은 예루살렘의 재건과 복구를 알려 주는 소망의 환상 계시임을 알려 줍니다.

  둘째. 예루살렘의 번영을 약속하신 한 사람이었습니다(2:3-5).

  스가랴 선지자는 손에 척량줄을 잡은 그 한 사람이 또 다른 천사를 시켜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예루살렘의 번영을 알려 주라고 하는 사실을 보고 듣게 되었습니다.
  2장 4절에 나오는 [그 소년]은 바로 스가랴 자신을 가리킵니다.
  척량줄을 잡은 그 사람은 천사를 재촉하였습니다. 달려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소년에게 예루살렘의 번영을 속히 알려 주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영계는 살아 움직이고, 질서정연하고, 또 신속하고, 확실합니다.
  스가랴는 자기에게 말하여 주는 천사도 보았고, 그 천사를 영접하는 또 다른 천사가 나타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스가랴 선지자를 [그 소년]이라고 지목하고, 그 소년에게 빨리 달려오는 천사들의 기민한 동작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갖고 온 메세지의 내용을 들었습니다. 그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장래 예루살렘의 번영입니다.
  천사가 그 소년(선지자 스가랴)에게 갖고 온 예루살렘 번영의 메세지와 내용이 무엇인가?
 
1. 예루살렘은 성곽 없는 촌이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2장 4절에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곽 없는 촌락'이란 '탁 트인 땅'을 뜻합니다. '평원의 부락' 혹은 '넓은 마을'을 의미합니다.
  성벽이나, 문도 없고 벽도 없는 완전 개방의 마을을 의미합니다. 곧 완전 평화의 마을, 완전한 안전의 마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대적의 침략을 상상할 수 없는 곳입니다.
  도대체 과연 이런 이상향의 마을이 지구촌에 존재할 수 있을까? 역사상에 존재할 지구촌의 예루살렘이 이런 이상향의 마을을 가져 볼 때가 언제 있었던가?

  성경의 이러한 영감의 표현은 철두철미하게 영적이고, 메시야적 미래 왕국에 대한 예언입니다.
  바벨론의 압제 아래서 예루살렘 해방을 받은 영적 자유를 알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들이 인종의 차별이나, 국경의 차별이 없이 함께 모여 예배 드릴 신약교회 운동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영원한 새하늘, 새땅의 메시야 왕국을 알려 주는 웅변적 예언입니다.

2.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거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2:4).

  이는 예루살렘의 인구 증가를 예언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재건 이후에 누릴 번영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신령한 메시야 왕국의 자손들의 번영, 곧 신약교회 시대의 왕성을 알려주는 예언입니다. 별 같이 빛나는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번영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령한 예루살렘 곧 교회의 풍요와 번영과 축복을 알려 주는 소망의 메세지입니다.

3. 하나님 자신이 불성곽이 되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2장 5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 불 성곽이 되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불성곽'이란 불의 보호나 파수를 뜻함인데 하나님 자신의 초자연적 역사를 뜻합니다.
  예컨대 출애굽하여 가나안 행군을 계속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 왕 바로가 변심하여 추격하여 온 일이 있습니다. 그 때 갑자기 하늘에서 구름기둥이 나타나고 불기둥이 나타나서 저들의 행진을 인도하여 추격하던 애굽군대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갈라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애굽 군대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갈라놓았습니다(출 13:21, 14:20).

  또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엘리사가 거하던 도단성을 아람의 군대가 포위했을 때 하나님께서 불 말과 불병거로 엘리사를 둘러 진치고 보호한 일이 있었습니다(왕하 6:17). 이런 일들은 모두 하나님 자신이 선민을 위기에서 구원하고 보호해 주는 초자연적 역사입니다.

슥 9:8에는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리니, 이는 내 눈으로 친히 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불성곽은 하나님의 전지와 전능의 보호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일종의 불이요, 불성곽입니다.
  사 26:1에 [그 날에 유다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의 극적인 전능의 구원이 바로 불성곽이 되는 것입니다.

4. 그 가운데 영광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2장 5절이 다시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 불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불성곽이 되신다 함은 외부의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영광'이 되신다 함은 그 예루살렘에 거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친히 육적으로 임마누엘이 되어 주신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에게 은혜와 축복이 되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신약적 의미로 예언성을 띠고 움직일 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우리에게 화육강세하시므로 생명의 불성곽이되시고, 세상에 빛이 되어 주신다는 뜻입니다(요 1:1-4).
  바로 임마누엘의 영광입니다(마 1:21).

  나폴레옹 군대가 러시아를 정복하러 적국을 통과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때 아들들과 함께 살고 있던 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과부는 나폴레옹 군대의 횡포를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하였습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우리 집 주위에 성벽을 쌓으셔서 우리들을 지켜 주옵소서. 아무도 우리 모자를 해치지 못하게 지켜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아이들 중 막내가 형에게 물었습니다.
  "형 아까 엄마가 가정예배 때 우리 주위에 성벽을 쌓아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성벽이 뭐야?" 그 형은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날밤 그 과부 성도의 아이들은 어머니가 기도 드린 성벽에 대해서 궁금해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제일 어린 막내가, "형! 저기 좀 봐! 하나님이 성벽을 쌓아 놓으셨어!"라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온 가족이 놀라서 창 밖을 내다보니, 밤새도록 눈보라가 쳐서 집 주위를 온통 눈으로 덮었습니다. 집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구별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은 온 마을을 눈 성벽으로 쌓아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 군대들의 횡포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불성곽도 있고, 눈의 성곽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시간 척량줄을 잡은 한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척량줄 안에 들어 있는 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 척량줄 안에 있는 예루살렘은 번영의 축복이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스가랴를 통하여 받았습니다.
  바로 오늘에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스러운 교회운동의 승리를 보여주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높이를 척량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넓이를 척량하십니다. 그것은 사람과의 관계인데 사랑입니다. 그것이 세계 선교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깊이를 척량하십니다. 그 깊이란 교회를 향한 충성과 봉사, 헌신의 농도를 가리킵니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인격을 달고 계시는 저울도 되십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단 5:25)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척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척량 안에 들어 있는 개인, 가정, 교회 나라는 반드시 번영하고 말 것입니다.


심판과 구원의 그리스도

 

① (1절~2절)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척량 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내게 대답하여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 할 때에”

▶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첫째 환상(홍마를 탄 사람)과 둘째 환상(네 뿔VS네 공장)에 이어스가랴는 다시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본다. 하루 밤 사이에 연속해서 보여주신 이유는 ‘반드시 속히 이루실 것’을 뜻한다. (창41:32)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속히 행하시리니’ (암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시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리라’

▶ ‘한 사람이 척량 줄을 그 손에 잡았기로’ 척량 줄은 건축을 위한 측량도구인데, ‘다림줄 (암7:7~9)’이다. 심판과 구원의 도구다. ‘한 사람’은 히브리 원어로 ‘힌네 이쉬’라고 쓰였는데 ‘보라! 한 사람을’이란 뜻이다. 피조물인 ‘아담’이 아니라 ‘인자(人子)’를 가리키는 ‘이쉬(成肉身, incarnation)’라는 단어로 쓰였다. ‘인자(人子)’는 심판과 구원을 위임받으신 메시아(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기독교는 그리스도교다.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고백하는 종교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온 세상과 우리의 인생을 구원하심을 믿는 것이다. 계시록5장에 나오는 보좌에 앉으신 분으로부터 위임받으신 ‘어린 양’과 같은 분이시다. 한마디로 지금 스가랴는 눈을 들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절망 중에 삶의 주관자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스가랴의 질문에 대한 인자의 답변이다.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 예루살렘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길이와 너비를 재기 위함이다. (겔40:1~3, 계21:15~17)

 

② (3절~4절)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매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다른 천사가 나와서 ‘내게 말하는 천사’를 맞으며 ‘그 소년(예언자 스가랴)’에게 다급하게 기쁜 소식을 전달할 것을 재촉한다. 그 내용은 ‘예루살렘에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시고 다시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는 복음(福音, Gospel)이다.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예루살렘의 영광이 무제한으로 확장될 것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말씀을 준행함으로 성전을 재건하면 그 영광이 민족과 지역을 넘어 열방과 세계로 퍼져나갈 것을 예고한다. (창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 말씀대로 준행하는 아브라함으로 인해 축복의 본보기가 될 것을 선포한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땅와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③ (5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 영광이 되리라”

▶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 영광이 되리라’ 이스라엘백성이 광야를 행진할 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해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지켜주셨다. 아람군대에 의해 성이 둘러싸였을 때 엘리사의 사환에게 보여주셨던 불 말과 불 병거의 형상과도 같다. (왕하6:15~17)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 드는 자가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2. 디아스포라(Diaspora)와 에클레시아(ecclesia)

 

① (6절~7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하늘의 사방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거니와 이제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망할찌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바벨론 성에 거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찌니라”

▶ 죄악으로 인해 이스라엘을 ‘흩어지게(디아스포라)’ 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불러내서 다시 모으실 것(에클레시아)을 선포한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시키신다. 타락한 예루살렘성전을 무너뜨리신 하나님께서 이제 거룩한 새 예루살렘성전을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계3:7)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 삶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서는 흥하게도 하시고 망하게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신다.

② (8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 ‘나를 보내셨나니’ 보내심을 받은 ‘스가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사람을 보내서 일하신다. (민16:28) ‘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일을 행하게 하신 것이오 나의 임의로 함이 아닌 줄을 이 일로 말미암아 알리라’ 고라와 족장 이백오십인이 모세와 아론을 거스릴 때 ‘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느니라’ 책망하시며 징계하셨다. 나를(메신저) 멸시하는 것은 나를(메신저) 보내신 자를 멸시하는 것이다. (눅10: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보내심을 받은 자의 권위는 보내신 분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는 데 있다. 예언자는 ‘임의대로’ 행하면 안 된다. 또한 보내심을 받은 자가 보내신 분의 ‘뜻대로’ 전하는 메시지는 보내신 분의 말씀으로 청종해야 마땅하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보내신 분의 뜻대로 전달하지 않는 메신저와 보내신 분의 뜻대로 전달하는 메신저조차 멸시하는 우매한 청중들이 공존한다는 점이다.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이 말씀을 하신 까닭은 이런 일이 서슴없이 공공연하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눅11:49)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중에 더러는 죽이고 또 핍박하리라’

 

③ (9절)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

▶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손가락 곧 하나님의 권능이다.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나님의 역사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인생역전’을 통해 나타난다.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 스가랴의 예언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천사가 전해준 말이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이다. 기적은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사건이다. 기적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기적을 통해 언약을 성취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구별법은 ‘그 열매’로 나무를 안다. 열매는 삶의 결과물과 언약의 성취여부에 달려있다. (요6: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11:44~45)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라’

 

 

3. 구원의 대망, 임마누엘!

 

① (10절)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 신앙생활에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과 구원의 최고 경지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와 동행하는 삶이다.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 John Wesley’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두려워하고 놀라는 이유는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 가에서만 함께 하시지 않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여전히’ 함께 하신다. 형통할 때만이 아니라 환란 중에도 함께 하신다. 성공 할 때만이 아니라 실패할 때도 함께 하신다. 상황 따라 형편 따라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을 가리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라고 부른다. 이 믿음이 없으면 때때로 두려워하고 낙심하지만 이 믿음이 있으면 환란 중에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② (11절~12절)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 ‘그 날에’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날이다. 유다를 취하여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선택하신 이유는, ‘경외하면 청종하고 준행할 때 동행하신다!’것을 나타내시어 열방의 본보기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성전재건의 사명은 ‘경외와 청종, 준행과 동행’을 나타내는 표적이다. 우리를 선택하시고 사명을 맡기신 이유도 동일하다. ‘경외하면 청종하고 준행할 때 동행하신다!’는 축복의 본보기를 삼으시기 위함이다.

 

③ (12절)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 (메시지성경) ‘모두들, 조용히 하여라! 쉿! 하나님 앞에서 침묵하여라. 그분의 거룩한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분이 움직이고 계신다!’ 하나님이 성소에서 일어나셔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잠잠해야 한다. (출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격언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삶에서 만나는 위기와 절망의 순간에 요동치며 소란스런 이유는 하나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은 '내 주여 뜻대로 행 하시옵소서,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며 담대하게 기도한다.



성전에 대해 설명해 주어라(에스겔 43:10)

주요 내용 : 에스겔이 본 영광스러운 성전 환상의 의미

에스겔이 환상에서 본 성전은 여러 세기 후에 사도 바울이 설명한 거대한 영적 성전과 동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앞 장에서 그 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에스겔이 본 환상은 순결한 숭배에 대한 하느님의 표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분의 백성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는 점도 배웠습니다. 그들은 그 표준을 따를 때에만 그분과 다시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하나의 구절에서 두 번 사용하심으로 자신의 표준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이것이 성전의 이다.”

2 이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에스겔 시대의 유대인들은 이 성전 환상에서 순결한 숭배에 대한 여호와의 표준에 관해 어떤 구체적인 교훈을 배울 수 있었습니까? 둘째, 이 환상은 고난이 많은 마지막 날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아는 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과거에 유대인들은 이 환상에서 어떤 교훈을 배웠는가

3. 환상에서 성전이 높은 산 위에 있다는 점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왜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입니까?

3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이 성전 환상에 나오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들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높은 산. 이스라엘 백성은 에스겔의 환상에 나오는 성전이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사야의 감동적인 회복 예언을 떠올렸을지 모릅니다. (이사야 2:2) 그러면 여호와의 집이 그처럼 높은 산 위에 있다는 점은 그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었습니까? 순결한 숭배가 다른 어떤 것보다 드높여져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물론, 순결한 숭배를 위한 마련을 하신 분이 “그 어떤 신보다 훨씬 더 높으신 분”이므로 그 숭배는 원래 드높여져 있습니다. (시 97:9)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러한 숭배와 관련하여 자신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세기 동안 그들은 거듭거듭 순결한 숭배가 소홀히 여겨지고 더럽혀지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올바른 사람들은 하느님의 신성한 집이 마땅히 있어야 할 영광스럽고 탁월한 위치로 드높여진 것을 보면서, 자기들의 잘못에 대해 분명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4, 5. 에스겔 시대의 사람들은 높이 솟은 문들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었을 것입니까?

4 높이 솟은 문들. 환상의 앞부분에서 에스겔은 천사가 문들의 치수를 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문들의 높이는 약 30미터나 되었습니다! (에스겔 40:14) 그 입구 안쪽에는 경비실이 있었습니다. 성전의 설계도를 자세히 살펴보는 사람들은 그러한 점들을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까? 여호와께서는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의 입구[에] 면밀히 주의를 기울여라.” 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숭배를 위한 하느님의 신성한 집에 “마음과 몸에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의 성전이 더럽혀졌습니다.’—에스겔 44:5, 7.

5 “몸에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은 아브라함 시대부터 주어진 하느님의 분명한 명령을 따르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창세 17:9, 10; 레위 12:1-3) 하지만 ‘마음에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은 더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지시와 인도를 따르지 않는 고집 세고 반역적인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숭배를 위한 여호와의 신성한 집에 그러한 사람들이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위선을 매우 싫어하시는데도 그분의 백성은 그분의 집을 위선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환상에 나오는 성전의 문들과 경비실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분명했습니다. 더 이상 성전을 그처럼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집에 들어오는 사람들에 대한 높은 표준은 반드시 지켜져야 했습니다. 그럴 때에만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이 드리는 숭배를 축복하실 것이었습니다.

6, 7. (ㄱ) 여호와께서는 성전 지역 전체를 둘러싼 담을 통해 백성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십니까? (ㄴ) 여호와의 백성은 이전에 그분의 집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각주 참조)

6 둘레에 있는 담. 환상에 나온 성전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특징은 성전 지역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담이었습니다. 에스겔의 말에 따르면, 사면에 있는 담의 길이는 각각 500갈대 즉 1555미터나 되었습니다! (에스겔 42:15-20) 반면에 뜰을 포함한 성전 건물은 사면의 길이가 각각 500큐빗 즉 259미터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성전은 넓은 땅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그 둘레에 이 담이 있었습니다.a 이 담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7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의 영적인 매춘 행위와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치워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그들 가운데서 영원히 살 것이다.” (에스겔 43:9) “그 왕들의 시체”는 우상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에스겔의 환상에서 성전이 넓은 땅으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았습니다. “그 더러운 것을 모두 멀리 치워 버려라. 조금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여라.” 그렇게 해서 백성이 계속 순결한 숭배를 드린다면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시어 그들과 함께하실 것이었습니다.

8, 9. 책임 맡은 남자들에게 베풀어진 여호와의 강한 충고는 무엇을 보여 주었습니까?

8 책임 맡은 남자들에 대한 강한 충고. 여호와께서는 백성 가운데서 큰 책임을 맡고 있던 남자들에게 강력하면서도 사랑에 찬 충고를 베푸셨습니다. 그분은 백성이 우상 숭배에 빠졌을 때에 자신에게서 멀리 떠난 레위 사람들은 강하게 시정하셨지만, ‘그분의 신성한 곳을 돌보는 책임을 수행한’ 사독의 자손들은 칭찬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을 그들의 행위에 따라 공정하고 자비롭게 대하셨습니다. (에스겔 44:10, 12-16) 또한 그분은 이스라엘의 수장들도 강력하게 시정하셨습니다.—에스겔 45:9.

9 그렇게 하심으로, 여호와께서는 감독하는 위치에 있는 권위를 가진 남자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수행하는 방식에 대해 그분에게 답변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들은 충고와 시정과 징계가 필요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임으로 그분의 표준을 앞장서서 옹호해야 했습니다!

10, 11. 유배 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 중 일부가 에스겔의 환상에 담겨 있는 교훈을 적용했다는 어떤 증거가 있습니까?

10 유배 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에스겔의 환상에 담겨 있는 교훈을 적용했습니까? 물론, 우리는 그 당시 충실한 사람들이 이 놀라운 환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유배 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무슨 일을 했고 여호와께 드리는 순결한 숭배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많은 점을 알려 줍니다. 그런 점들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이 에스겔의 환상에서 배울 수 있는 원칙들을 어느 정도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바빌론으로 유배되기 전에 살았던 그들의 반역적인 조상들과 비교해 볼 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1 예언자들인 학개와 스가랴, 제사장이자 필사자인 에스라, 총독 느헤미야와 같은 충실한 남자들 모두는 에스겔의 성전 환상에 담겨 있는 것과 같은 원칙들을 백성에게 가르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에스라 5:1, 2) 그들은 순결한 숭배가 드높여져야 하고,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관심사를 추구하는 것보다 그 숭배가 앞자리에 와야 한다는 점을 백성에게 가르쳤습니다. (학개 1:3, 4) 또한 순결한 숭배에 대한 표준을 따라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고했습니다. 예를 들어,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백성을 영적으로 약해지게 만들고 있던 외국인 아내들을 내보내라고 강하게 충고했습니다. (에스라 10:10, 11 낭독. 느헤미야 13:23-27, 30) 우상 숭배는 어떠합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과거에 우상 숭배에 자주 빠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유배 기간 후에 마침내 우상 숭배를 미워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제사장들과 수장들 곧 방백들은 어떠합니까? 에스겔의 환상과 일치하게, 그들도 여호와의 충고와 시정을 받았습니다. (느헤미야 13:22, 28) 그들 중 많은 사람이 겸손하게 그 충고에 따라 행동했습니다.—에스라 10:7-9, 12-14; 느헤미야 9:1-3, 38.


느헤미야는 백성과 함께 일하면서 순결한 숭배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11항 참조)

12. 여호와께서는 유배자들이 돌아온 후에 그들을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

12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자신의 백성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랫동안 누리지 못했던 영적 번영과 건강과 질서를 어느 정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에스라 6:19-22; 느헤미야 8:9-12; 12:27-30, 43)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백성이 마침내 순결한 숭배에 대한 여호와의 의로운 표준을 따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올바른 마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성전 환상에 들어 있는 교훈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내용을 요약해 보자면, 에스겔의 성전 환상은 유배자들에게 두 가지 중요한 면으로 유익을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그 환상은 순결한 숭배의 표준에 관해 그리고 그들이 그 표준을 어떻게 옹호해야 하는지에 관해 실용적인 교훈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2) 그 환상은 앞으로 있을 일들을 보증해 주었습니다. 그 환상은 순결한 숭배가 회복될 것이며, 더 나아가 백성이 순결한 숭배를 드릴 때 여호와께서 그들을 축복하실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다음 질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 환상은 오늘날에도 성취되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에스겔의 환상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13, 14. (ㄱ) 에스겔의 성전 환상이 우리 시대에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ㄴ) 그 환상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두 가지 면으로 유익을 줍니까? (또한 13가 “서로 다른 부면에 초점을 맞춘 두 성전” 제하의 내용 참조)

13 에스겔의 성전 환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된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에스겔의 환상과 이사야의 예언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에스겔의 환상에서는 하느님의 신성한 집이 “아주 높은 산” 위에 있었으며, 이사야의 예언에서는 “여호와의 집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보다 높이 굳게 서”게 될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예언이 “말일” 즉 “마지막 날”에 성취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했습니다. (에스겔 40:2; 이사야 2:2-4; 각주. 또한 미가 4:1-4 참조) 따라서 에스겔의 예언도 이사야의 예언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날에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예언들은 순결한 숭배가 마치 높은 산 위에 놓이는 것처럼 드높여지고 회복되기 시작한 때인 1919년 이후로 성취되어 왔습니다.b

14 따라서 분명, 에스겔의 환상은 오늘날 순결한 숭배에 적용됩니다. 그 환상은 고대 유대인 유배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두 가지 면으로 유익을 줍니다. (1) 그 환상은 순결한 숭배에 대한 여호와의 표준을 우리가 어떻게 옹호할 수 있는지에 관해 실용적인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2) 그 환상은 순결한 숭배가 온전히 회복될 것이며 여호와께서 축복을 가져오실 것임을 보증해 줍니다.

오늘날 순결한 숭배에 대한 표준

15. 에스겔의 성전 환상에서 교훈점을 찾으려 할 때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

15 이제 에스겔의 환상의 몇 가지 구체적인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에스겔과 함께 환상에 나오는 웅장한 성전을 둘러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 거대한 영적 성전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영적 성전에서 숭배를 드리고 있으므로, 우리의 숭배에 적용되는 교훈점을 에스겔의 환상을 통해 찾아 보겠습니다. 이 성전에서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16. 에스겔의 환상에 나오는 자세한 치수들을 통해 어떤 점들을 배울 수 있습니까? (제목 위에 있는 삽화 참조)

16 성전의 자세한 치수들. 에스겔이 보니, 구리 같은 모습을 한 천사가 담과 문, 경비실, 뜰, 제단을 포함해 성전 곳곳을 세세하게 측량합니다. 이 내용을 읽다 보면 자세한 치수들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읽어 나가기가 힘들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에스겔 40:1–42:20; 43:13, 14) 하지만 그러한 세부점들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표준의 중요성을 인상적인 방법으로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표준을 정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시지,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어떤 방법으로 숭배하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성전을 세세하게 측량하는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 순결한 숭배가 반드시 회복될 것임을 확신시켜 주고 계십니다. 환상에서 언급된 치수가 분명하고 구체적이었던 것처럼, 하느님의 약속도 정확히 성취될 것입니다. 따라서 에스겔의 기록은 마지막 날에 순결한 숭배가 반드시 회복될 것이라는 확실한 보증이 됩니다!


성전의 분명하고 구체적인 치수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16항 참조)

17. 성전 지역 둘레에 있는 담을 통해 오늘날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17 둘레에 있는 담. 앞서 살펴본 것처럼, 에스겔은 환상에서 성전 지역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담을 보았습니다. 이 담은 하느님의 집이 더럽혀지는 일이 없도록 그분의 백성이 모든 종교적 불결함을 순결한 숭배에서 멀리 치워 버려야 한다는 강력한 교훈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에스겔 43:7-9 낭독) 오늘날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교훈이 아닙니까! 하느님의 백성이 큰 바빌론의 오랜 영적 포로 상태에서 해방된 뒤, 그리스도께서는 1919년에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임명하셨습니다. 특히 그때 이후로 하느님의 백성은 우상 숭배나 이교 신앙과 관련된 거짓 교리와 관습을 없애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우리는 순결한 숭배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영적 불결함을 멀리 치워 버리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왕국회관에서 상업 활동을 하지 않으므로, 세속적인 활동을 우리의 숭배와 분리시킵니다.—마가 11:15, 16.

18, 19. (ㄱ) 환상에 나오는 성전의 높은 문들을 통해 어떤 교훈들을 배울 수 있습니까? (ㄴ) 사람들이 여호와의 높은 표준을 낮추려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를 들어 설명해 보십시오.

18 높이 솟은 문들. 에스겔이 보았던 높은 문들에 대해 생각해 보면 어떤 교훈들을 얻게 됩니까? 그 문들은 여호와께서 매우 높은 도덕 표준을 갖고 계시다는 점을 유대인 유배자들에게 일깨워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여호와의 거대한 영적 성전에서 그분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선이 없는 올바른 행실을 유지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훨씬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로마 12:9; 베드로 전서 1:14, 15) 이 마지막 날에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점진적으로 인도하여 도덕적 행실에 대한 자신의 표준을 그들이 더 밀접히 따르게 해 오셨습니다.c 예를 들어, 여호와의 백성은 그분의 표준에 따라, 회개하지 않는 범죄자를 회중에서 추방합니다. (고린도 전서 5:11-13) 높이 솟은 문들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만한 또 다른 점은 문 안쪽 통로에 경비실이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점을 통해 여호와의 승인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 성전에 들어와 그분을 숭배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중생활을 하는 사람은 왕국회관에 들어올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여호와께서 요구하시는 대로 생활을 바로잡지 않는 한 그분의 승인을 얻을 수 없으며 따라서 영적 성전에서 숭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야고보 4:8)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부도덕하고 타락한 시대에 순결한 숭배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계십니다!

19 성경은 끝이 오기 전에 이 세상이 타락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성경은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사람들이 더욱더 악해져서, 잘못 인도하기도 하고 잘못 인도되기도 할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디모데 후서 3:13)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잘못 인도되어, 여호와의 높은 표준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시대에 뒤떨어지고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어떠합니까? 예를 들어, 누군가가 동성애에 대한 하느님의 표준이 잘못되었다고 당신을 설득하려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할 것입니까, 아니면 여호와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할 것입니까?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행동이 “음탕한 일”이라고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또한 부도덕한 행동을 좋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십니다. (로마 1:24-27, 32) 그러한 문제들에 직면할 때, 에스겔의 성전 환상에 나오는 높이 솟은 문들을 떠올리십시오. 그리고 이 악한 세상의 압력이 아무리 거세다 해도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의로운 표준을 결코 낮추지 않으신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견해를 따르며, 옳은 것에 대한 그분의 표준을 옹호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순결한 숭배에 참여할 때 “찬양의 희생”을 바칩니다

20. “큰 무리”에 속한 사람들은 에스겔의 환상에서 격려가 되는 어떤 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20 뜰. 에스겔은 성전의 매우 넓은 바깥뜰을 보았을 때, 여호와를 숭배하는 행복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그곳에 모일 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큰 기쁨을 느꼈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보다 훨씬 더 신성한 곳에서 여호와를 숭배합니다. 여호와의 영적 성전의 바깥뜰에서 숭배를 드리는 “큰 무리”에 속한 사람들은 에스겔의 환상에서 격려가 되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계시록 7:9, 10, 14, 15) 에스겔은 바깥뜰 가장자리에 식당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식당들은 숭배자들이 자신들이 가져온 친교 희생 제물을 먹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에스겔 40:17)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여호와 하느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친구로서 그분과 평화로운 관계를 누린다는 표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유대인들이 모세 율법 아래서 바쳤던 것과 같은 희생 제물을 바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순결한 숭배에 참여할 때 “찬양의 희생”을 바칩니다. 그러한 희생 가운데는 야외 봉사에서 사람들에게 증거하거나 집회에서 해설이나 그 밖의 방법으로 우리의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히브리 13:15) 또한 우리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영적 양식을 즐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다음과 같이 노래한 고라의 자손들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당신의 뜰에서 보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습니다!”—시 84:10.

21. 에스겔의 환상에서 제사장과 관련된 내용을 통해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21 제사장. 에스겔이 보니, 제사장과 레위인이 안뜰로 들어갈 때 사용하는 문과 제사장 지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바깥뜰로 들어갈 때 사용하는 문이 모양과 크기가 같았습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에게 그들 역시 순결한 숭배에 대한 여호와의 표준에 달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일깨워 주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누가 이 점을 통해 특히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오늘날 하느님의 종들 가운데 혈통에 따라 제사장으로 일하는 사람은 없지만, 성경은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선택된 민족이고, 왕 겸 제사장”이라고 알려 줍니다. (베드로 전서 2:9)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에서 제사장들은 별도의 뜰에서 숭배를 드렸습니다. 오늘날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동료 숭배자들과 따로 분리되어 숭배를 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여호와의 입양된 자녀로서 그분과 특별한 관계를 누립니다. (갈라디아 4:4-6) 기름부음받은 자들은 에스겔의 환상에서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교훈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고대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도 충고와 징계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한 목자” 아래 섬기는 “한 무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요한복음 10:16 낭독.

22, 23. (ㄱ) 에스겔의 환상에서 수장과 관련된 내용을 통해 그리스도인 장로들은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ㄴ)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22 수장. 에스겔의 환상에서 수장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제사장 지파에 속해 있지 않으며, 성전에서 제사장들의 지시에 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백성 가운데서 감독자로 일하면서, 희생 제물을 바치는 일에서 백성을 지원합니다. (에스겔 44:2, 3; 45:16, 17; 46:2) 따라서 수장은 오늘날 회중에서 책임을 맡은 그리스도인 남자들이 따라야 할 본이 됩니다. 여행하는 감독자를 비롯한 그리스도인 장로는 기름부음받은 충실한 종에게 계속 복종해야 합니다. (히브리 13:17) 장로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인 집회와 야외 봉사에서 찬양의 희생을 바치도록 돕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에베소 4:11, 12) 또한 장로들은 이스라엘의 수장들이 권한을 남용했을 때 여호와께서 그들을 질책하셨다는 점에 유의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45:9) 따라서 장로들은 자신들이 충고와 시정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더 나은 목자와 감독자가 되도록 여호와께 정련받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소중히 여깁니다.—베드로 전서 5:1-3 낭독.

23 여호와께서는 미래에 낙원이 된 땅에서도 사랑 많고 유능한 감독자들을 계속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장로들은 사실상 낙원에서 사람들을 잘 돌보는 유능한 목자가 되도록 훈련받고 있는 것입니다. (시 45:16) 그러한 남자들이 신세계에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 될지 생각해 보면 정말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에스겔의 환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다른 회복 예언들과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정하신 때에 더욱 분명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앞으로 그 환상에 담긴 놀라운 적용점이 새롭게 밝혀지거나 그 환상의 어떤 부면이 우리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성취될지도 모릅니다. 구체적인 점은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입니다.


높이 솟은 문들과 뜰을 통해 우리의 숭배와 관련된 어떤 점을 배울 수 있습니까? (18-21항 참조)

순결한 숭배에 대한 여호와의 축복

24, 25. 에스겔의 환상에서는 여호와의 백성이 순결한 숭배에 고착할 때 여호와께서 주시는 축복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24 마지막으로 에스겔의 환상에서 일어나는 한 가지 중대한 사건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환상 가운데서 여호와께서는 성전에 오셔서, 자신의 백성이 순결한 숭배에 대한 자신의 표준을 충실히 따른다면 그 성전에 계속 머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에스겔 43:4-9) 여호와께서 그곳에 계시는 것은 그분의 백성과 그들의 땅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입니까?

25 에스겔의 환상에서는 하느님의 축복을 묘사하기 위해 희망을 주는 두 가지 예언적 장면을 보여 줍니다.

(1) 성전 신성한 곳에서 강물이 흘러나와 땅에 생명과 풍요를 가져옵니다.
(2) 땅이 질서 있고 정확하게 나누어지고 그 중심부에 성전 지역이 자리 잡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우리는 여호와께서 훨씬 더 신성한 숭배 제도, 즉 거대한 영적 성전에 들어오셔서 그곳을 정련하고 승인하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말라기 3:1-4)






만군의 여호와 / 구약 275회

학개 : 13회
스가랴 : 46회
말라기 : 24회
포로  귀환 후 선지자들이 사용한 횟 수 - 83회

아도나이 체바오트( יְהוָה צְבָאֹות)

아도나이(3968) - 여호와

3068. 예호바(
Yehôvâh)  יְהֹוָה 
1. 자존자
2. 영원한 자 : 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발음 / 예호바[ Yehôvâh ]
어원 / 196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여호와(출 20:7, 레 24:13)
구약 성경 / 7020회 사용


* 1961. 하야(hâyâh) הָיָה 

1. 있다,  2. 어떤 자에게 속하다,  3. 섬기다
발음 / 하야[ hâyâh ]
관련 성경  / (장막을) 치다(창 13:3), 임하다(창 15:1, 수 22:20), 계시다(창 31:5), (싸우고) 있다(삿 12:2), 섬기다(삼상 2:11), 만나다(삼상6:9), 속하다(삼하 9:9), 따르다(왕상 16:21, 호 3:3), 같다(시 50:21), 두다(출 25:15), 더하다(출 9:3), 성취하다(잠 13:19), 이루다(겔 21:7, 39:8), 지치다(단 8:27), 얻다(슥 8:10).
구약 성경 / 3549회 사용

체바오트(6635)

6635. 차바(
tsâbâʼ) צָבָא 

1. 군대
2. 하늘의 무리 : 천사들의 무리
3. 하늘의 신들의 무리
발음 / 차바[ tsâbâʼ ]
관련 성경 / 군대장관(창 21:22, 삼하 10:16, 대상 19:16), 군대(출 6:26, 삿 9:29, 욥 10:17), 싸움(민 1:22, 26:2, 31:36), 군인(민 31:21, 53), 만군(삼상 1:11, 사 1:9, 슥 1:3), 군사령관(삼상 12:9, 삼하 17:25), 군사(삼하 3:23, 대하 26:11), 용사(삼하 10:7, 대상 5:18, 19:8), 노역(사40:2), 전장(대하 25:5,  28:12), 천군(시 103:21), 싸우다(수 22:33), 참가하다(민 4:3), 일하다(민 4:23, 8:24), 무장을 시키다(민 31:5), 무장하다(수 4:13).
구약 성경 / 76회 사용


"만군의 여호와"는 무슨 뜻인가요?

"만군의 여호와"
아도나이 체바오트(יהוה צבאות )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입니다.
이것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불임과 씨름하는 한나와 그녀의 남편 엘가나가 나오는 한나 이야기입니다.
한나는 이 이름으로 하나님을 처음 부른 사람입니다.
히브리어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짜바(צבא)는 군대를 의미하는 단어이며 오늘날은 이스라엘 방위군을 의미합니다.
쯔바옷(צבאות)은 복수형입니다.
여러 군대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군사적 용어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라고 부를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군대"라는 단어의 의미

군대란 무엇인가요?
예를 들어 개미 군대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군대가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할 준비가 된 집단적 그룹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의미는 영어에서 유연하며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히브리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메리엄-웹스터 (Merriam-Webster) 사전은 이 개념에 대해 많은 도움을 줍니다.
다양하지만 관련된 아이디어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 특별히 지상전을 위해 훈련된 대규모의 조직화된 무장 요원
2. 큰 무리(예 : 새 떼)
3. 대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조직된 사람들의 모임

다음은 메리엄-웹스터에서 이 단어를 영어로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몇 가지 예입니다.

1.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
2.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나와 군에 입대했다.
3. 회사는 법률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변호사 군대를 고용합니다.
4. 그들은 훈련된 기술자들로 구성된 군대를 보냈습니다
5. 조직은 헌신적인 자원 봉사자 군대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천사의 군대

일부 성경 번역본에서는 이 문구를 "천사 군대의 하나님"으로 번역합니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실제에 대한 이 그림을 아주 잘 묘사하는 성경 구절 중 하나가 열왕기하 6장에 있습니다.
선지자 엘리사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 전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지만 그의 종은 그들 바로 앞에 있는 거대한 시리아 군대에 더 집중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읍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가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그들을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사마리아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여 이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여시매 그들이 보니 자기들이 사마리아 가운데에 있더라

이스라엘 왕이 그들을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하니

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소서 하는지라

왕이 위하여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그들이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이 구절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동원하실 수 있는 자원이 수적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핵심 구절은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입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 중에 있을 때 이것은 항상 사실이 될 것입니다.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 믿음과 의심이 여기에서 평행을 이룹니다. 엘리사는 보지 않고 알았고 그의 종이 의심하여 ​​보여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시리아 군대가 모든 카드를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몸에 있는 세포는 창조주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고, 갑자기 하나님께서 주신 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정한 힘의 개념과 정복의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이렇게 묻는 것은 거의 우스꽝스럽습니다. "내가 그들을 죽일 수 있습니까? 내가 그들을 죽일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습니까? 뭐라구요?" 대답은 "아니오"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시리아 군인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어 주었고 그들의 길로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멈췄습니다.

그는 누구의 편인가요?

우리는 얼마나 빨리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가혹한 심판을 원하는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손 안에 안전할 때 진짜 위협이 없다고 믿기에는 우리가 얼마나 느린지요.

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얼마나 혼란스럽고 무자비하게 되는지요. 전쟁은 여호와께 속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적들도 그 분에게 속합니다. 그리고 그 분은 그들을 매우 사랑하십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여호수아 5:13-15)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들이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적의 권능으로 보호받고 있고 영생이 있음을 알 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대적하며 전멸시키려 했던 나라인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또 다른 맹렬한 적인 앗수르를 어떻게 언급하시는지 보십시오.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사 19:23-25)

천사들 군대의 사령관은 독점적으로 "친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만유의 아버지이시며 축복하고 구원하고 구속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분에게는 여러 존재들에게 몫을 나누어 줄 충분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는 특정한 대상의 편을 들도록 끌리기를 거부하십니다.
오히려 그 분은 우리가 그의 편과 그의 목적에 동참할 것을 고집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누구십니까?

짜바(צבא)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성경에서 군대가 아니라 “만물(만유)”의 의미로 자주 번역됩니다.
"만물"은 군대 또는 많은 수 또는 무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바로 시작 부분인 창조 이야기에 있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창 2:1).

저는 랍비로부터 ​​이것이 모든 원자와 모든 분자 그리고 이것들의 방대한 배열이 함께 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군대처럼 모두 모여서 목적을 향해 움직인 것입니다.
군대처럼. 기계가 아니라 군대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저에게 놀라운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불임 여성이었던 한나가 하나님의 인격의 이 측면을 요청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녀는 모든 세포와 원자에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창조할 수 있는 분에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희망이 하늘과 땅의 만물이 복종해야 하는 그 분의 목소리에게만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만군의 여호와의 명령이 실행될 것이며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만군의 여호와”라고 부를 때 그 이름에는 많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무수한 천사의 군대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전투에서 강력한 전사이십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모든 창조물의 전체가 되는 아름다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십니다.
모든 원자와 모든 분자는 그의 목적과 명령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분은 강력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지탱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Lord Almighty) : ‘체바오트’ -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 가운데 하나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이다.
구약성경에 255회 나오며(삼상 1:3; 15:2; 17:45; 삼하 6:2; 7:8; 왕상 18:15; 왕하 3:14; 대상 11:9; 시 24:10 등), 특히 선지서에서 자주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명칭이다(사 1:9; 렘 6:9; 미 4:4; 나 2:13; 합 2:13; 습 2:9; 학 1:2; 슥 1:3; 말 1:4 등).
만군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이시며(삼상 17:45)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시며(사 44:6) 영광의 왕이시요(시 24:10) 능하신 분이시며(시 89:8) 공평하시고(사 5:16) 기묘하며 지혜로운 분이시다(사 28:29).

또한 만군의 하나님은 하늘보좌에 계시고(왕상 22:19) 언약궤 위 그룹 사이에도 좌정하시는 분이시며(삼하 6:2) 그분의 백성과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삼하 5:10; 시 46:7, 11). 

신약에서는 만군의 여호와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 사바오트’(kyrios sabaoth)가 ‘만군의 주’로 번역되었다(롬 9:29; 약 5:4).

 
2962. κύριος, ου, ὁ   

1. 주,  2. 주인,  3.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발음 / 쿠리오스[ küriŏs ]
어원 / 남 κῦρος ‘초교통치’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주(마 1:20, 요 1:23, 고전 7:12), 주인(마 6:24, 눅 6:5, 요 15:15), 상전(마 10:24, 25, 엡 6:5), 아버지(마 21:30), 구주(눅 2:11), 임자(눅 19:33), 하나님(행 13:48), 선생(행 16:30), 주재(행 17:24), 그리스도(엡 5:29), 만주(계 19:16).
신약 성경 / 719회 사용

4519. σαβαώθ 

1. 히브리어 6635의 여성 복수 : 군대,  2. 만군,  3. 대군
발음 / 사바오트[ sabaōth ]
관련 성경 / 만군(롬 9:29, 약 5:4)
신약 성경 / 2회 사용


만군의 여호와[萬軍-, the Lord Almighty]


온 세상 만물을 친히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창 2:1; 사 45:12) 권능에 찬 하나님을 일컫는 말로서(시 84:8), 특히, 그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초월한 힘과 권세를 지닌 분(시 89:8),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며 정의로운 심판을 행하시는 분(암 3:13-15), 작정하신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사 10:23; 14:24, 27; 17:3)임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거룩한 하나님의 호칭이다.

어원적 측면에서는 ‘이스라엘 군대의 총사령관’(삼상 17:45; 사 31:4-5)이라는 뜻과 함께 ‘하늘 군대 곧 천군의 총사령관’(창 28:12-13; 시 89:6-8; 호 12:4-5) 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구약에 255회에 걸쳐 빈번하게 언급되는데, 특히 선지서에 자주 나타난다(삼상 1:3; 삼하 6:2; 왕상 18:15; 왕하 3:14; 대상 11:9; 사 1:9; 렘 6:9; 미 4:4; 나 2:13; 합 2:13; 습 2:9; 학 1:2; 말 1:4; 롬 9:25; 약 5:4).

한편, ‘만군의 하나님’의 다른 이름을 통해 그분의 성품과 일하심에 대해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
즉, 그분은 ‘만군의 주’(롬 9:29; 약 5:4)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삼하 7:26-27; 시 59:5; 렘 29:8),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사 6:3; 47:4)가 되시며, ‘이스라엘의 전능자’(사 1:24)요 ‘이스라엘의 구원자’(사 44:6; 렘 50:34)가 되신다.
또한 그분은 ‘만물을 조성하신 창조주’(렘 10:16; 51:19; 암 4:13)요, ‘크고 능하신 하나님’(렘 32:18)이며, ‘왕’(사 6:5; 렘 46:18) 곧 ‘영광의 왕’(시 24:10)으로서, ‘유일하신 하나님’(사 37:16)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렘 23:36)이시다.


'여호와'와 결합된 여러 표현들

한글성경에 그대로 번역된 '여호와 닛시', '여호와 샬롬', '여호와 삼마', '여호와 이레' 외에 '여호와 로프에카'('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출15:26), '여호와 메카디쉬켐'('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 출31:13), '여호와 체바오트'('만군의 여호와', 삼상1:3), '여호와 엘욘'('지존하신 여호와', 시7:17), '여호와 로이’('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23:1), '여호와 치드케누'('여호와 우리의 의', 렘23:6; 33:16) 등이 있다.

 





 



  








08-18-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스가랴 1:9)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I asked, "What are these, my lord?" The angel who was talking with me answered, "I will show you what they are."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What are these, my lord?)"
마 엘레 아도니(מָה־אֵלֶּה אֲדֹנִי)

무엇이니이까(마) 4100.
מָ ,מַ ,מֶה ,מֶה ,מַה ,מַה־מָה 

1. 의문대명사 : 무엇
2. 소유격 뒤에 위치한 경우
3. 소유격 앞에 위치한 경우
발음 / 마[ mâh ]
구약 성경 / 554회 사용

이들이(엘레) 428. אֵלֶּה  

1. 이들,  2. 그렇게
발음 / 엘레[ ’êl-leh ]
어원 / [지시대명사]. 복수. 단수 וֶה의 복수형으로 쓰임, 간혹 אֵל이라는 단순형으로 쓰이기도 함. 411에서 유래한 연장형
관련 성경 / 서로(왕상 20:29), 피차(대상 24:5).
구약 성경 / 745회 사용

내 주여(아도니) 113. 아돈 / אָדוֹן 

1. 주인,  2. 재물 소유자나 주인, 3. 왕상1:17
발음 / 아돈[ ’âdôwn ]
어원 / 복수אֲדנִֹים, 복수 연계형 אֲדךֵֹני, 어미활용 אֲדנָֹיו, ‘다스린다’는 뜻의 어원에서 유래[사용되지 않음]
관련 성경 / 주인(창 18:12, 삿 19:11, 삼상 25:10), 주(창 19:18, 수 3:11, 슥 1:9), 상전(출 21:4, 사 24:2, 잠 30:10), 아도니베섹(삿 1:6, 7), 선생(왕하 2:3), 주관할 자(시 12:4, 105:21).
구약 성경 / 334회 사용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내가 네게 보이리라

오늘부터 "스가랴서"를 읽게 됩니다.
'스가랴' 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역사적인 배경은 다리오 왕 제 이년 열한째 달(7절)이며 이때는 주전 519년 2월 15일이었습니다.
주전 519년에 다리오 왕은 이집트의 충성을 재확인하기 위해 이집트로 행군했습니다.
그 내용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올 백성들을 향한 권면의 말씀으로 그 내용은 여덟 가지 환상과 두 가지 메시지 그리고 두 가지 예언이 담겨 있는 묵시에 관한 말씀입니다.

스가랴 1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아직도 온전하게 회개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조상들이 받았던 벌을 다시는 받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1-6절).

둘째는 첫 번째 환상을 소개합니다.
환상의 내용은 말탄 자들의 이상을 본 스가랴에게 하나님은 이들이 땅에 보내신 사자로서 이들로 인해 땅의 평안을 만들 것이라고 합니다(7-11절).

셋째는 주의 사자들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예루살렘을 위하여 간구할 때 하나님은 이 기도에 응답하시어 예루살렘 성읍의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12-17절).

넷째는 두 번째 환상으로 네 뿔과 네 농장으로 이 뿔들은 유다를 헤친 뿔임을 알게 됩니다(18-21절).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자녀 삼으시기 위해서 수많은 연단과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항상 즐겁고 편안한 날만 지속된다면 성도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절박한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몸의 질병을 감사하였고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과 인간의 죄악된 본성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도록 이끌지 못하므로 성도에게 닥치는 고난과 고통은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갈 수 있는 유익한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때로는 즐겁지만 때로는 견디기 어려운 슬픔과 질고에 붙잡히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일을 병행하게 하사 인간으로 장래 일을 알 수 없게 하시고 결국 하나님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나에게만 닥쳐온 것같은 고통과 눈물과 시련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거룩한 반석 위에 나를 세우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라 믿고 오늘도 진리의 말씀으로 다듬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 대장장이 - 하라쉬(2796) [ chârâsh ]  חָרָשׁ   

1. 조각가,  2. 숙련공,  3. 이사야 44:12. 철공은 철을 숯불에 불리고 메로 치고 강한 팔로 괄리므로 심지어 주려서 기력이 진하며 을 마시지 아니하여 곤비하며
발음 / 하라쉬[ chârâsh ]
어원 / 27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새기는 자(출 28:11), 조각하는 자(출 35:35, 38:23), 장색(匠色)(신 27:15), 만드는 자(사 45:16), 익숙한 자(겔 21:31), 목수(삼하 5:11,왕하 12:11, 스 3:7), 철공(삼상 13:19, 사 44:12), 공장(工匠)(왕하 24:14), 장인(匠人)(대상 29:5, 사 40:19, 54:16), 목공(렘 24:1), 대장장이(사 44:11), 은(銀)장색(匠色)(호 13:2).
구약 성경 / 37회 사용

* 2790. 하라쉬 [ chârash ]

1. 새겨 넣다,  2. 제조하다, 3. 음모를 꾸미다
발음 [ chârash ]
관련 성경 / 밭 갈다(삿 14:18, 암 9:13, 호 10:13), 갈다(시 129:3, 신 22:10, 사 28:24), 잠잠하다(삼상 10:27, 욥 13:5, 시2 8:1), 막다(미7:16), 꾀하다(잠 6:14, 12:20), 도모하다(잠 14:22), 새기다(렘 17:1), 경작하다(렘 26:18), 입을 열다(시 32:3), 쉬다(삼상 7:8), 그치다(렘38:27), 놋쇠 대장장이(왕상 7:14).
[부] 조용히(삿 16:2), 잠잠히(삼하 13:20, 습 3:17), 가만히(출 14:14), 묵묵히(창 24:21).
구약 성경 / 47회 사용


스가랴서의 8가지 환상





              환상

                                                 의 미

여호와께서 두루 다니심

                성전을 재건하다가 지치고 실망한 이스라엘에게 용기와 소망을 줌       

네 뿔과 네 공장

                 때가 되면 하나님이 원수를 물리치실 것임                                     

척량줄

                 예루살렘이 완전히 재건됨

대제사장 여호수아

                택한 백성의 죄가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됨

등대와 감람나무

                낙심한 스룹바벨에게 용기를 줌

날아가는 두루마리

                율법을 깨뜨린 자들은 그 율법에 의해 징계 받음

에바 속의 여인

          모든 죄악이 제거됨

네 병거

          이스라엘의 대적을 정복하시는 하나님





스가랴의 8개 환상과 10개 예언

스가랴(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서는 구약성경의 39권의 중 38번째 책이다.
주전 520년경 기록되었으니 지금부터 2,543년전의 책이다.
14장으로 기록된 책은 8개의 환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 기록된 난해한 책이다

스가랴 1장~8장 : 8개의 환상
스가랴 9장~10장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예언
스가랴 12장~14장 :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예언

스가랴서의 예언과 성취

1. 550년 후 성취 /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나귀 새끼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슥 9:9)
2. 550년 후 성취 /  은 30개에 팔릴 것이 문자적으로 상취되었다 (슥 11:12)
3. 550년 후 성취 /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것도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슥 11:13)
4. 590년 후 성취 /  그들이 메시아를 거절하므로 여러 나라에 흩어질 것이다, 디아스포라 (슥 7:11~14)
5. 2468년 후 성취 /  여러 나라에 흩어졌던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 올 것이다 (슥 8:1~13)
6. 2540년 후 성취 /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의 취하는 잔이 되고 무거운 돌이 된다 (슥 12:2~3)
7. 미성취 / 이방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 것이다 (슥 12:3~9, 14:12~15)
8. 미성취 / 이스라엘 큰 애통으로 회개하고 메시아에게 돌아올 것이다 (슥 12:10~13:1)
9. 미성취 / 주께서 예루살렘 동쪽 감람산에 재림하실 것이다 (슥 14: 4~5)
10. 미성취 / 이방 나라들이 초막절을 지키러 에루살렘으로 올라올 것이다 (슥 14:16~21)


스가랴의 8개의 환상

환상 1 : 온 땅을 돌아보는 말들 (감찰하시는 하나님)
환상 2 : 네 뿔과 네 일꾼들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과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환상 3 : 측량줄을 지닌 사람 (하나님의 백성을 측량하시는 하나님)
환상 4 : 여호수아와 제사장의 옷 (정결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환상 5 : 촛대와 두 올리브나무 (성령의 기름으로 꺼지지 않은 등잔)
환상 6 : 날아다니는 두루마리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환상 7 : 에바 속의 여자 (디아스포라 예언)
환상 8 : 네개의 전차 (네 개의 임무)

PART I

1. 환상 1 : 온 땅을 돌아보는 말들 (1:7~17)

여호와의 전지전능은 우주적이고 지구적인데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신다. 
특히 그의 백성의 회복에 관심을 가지신다.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말 등 여러 말들이 있는데 말을 탄 자들의 임무는 세상 전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피고 보고하는 일이다.
세상은 평온한 듯 보였지만 예루살렘의 성전건축은 중단되고 영적 나태함에 빠진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성전건축을 격려한다

환상 2 : 네 뿔과 네 명의 대장장이(1:18~21)

네 뿔은 이스라엘은 대적하고 괴롭히는 사방의 왕들을 의미한다.
넷이란 세상의 네 모퉁이 즉 지구 전체를 총체적으로 상징한다.
역사적으로 앗시리아, 이집트,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로마 등이다.
네 명의 대장장이는 주의 백성을 괴롭히는 제국과 왕들을 심판하는 도구이다.
하나님은 악한 권세자들을 두고만 보시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신다

환상 3 : 측량줄을 지닌 사람(2:1~13)

한 사람이 자기 손에 측량줄을 잡고 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예루살렘을 재어서 그 너비와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러 간다"
측량줄이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벽재건과 관계 있다면 이스라엘의 회복을 상징할 것이다
또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불성벽이 되어 주실 것이며 그의 눈동자처럼 보호하실 것이다
이는 성도들에게도 같은 보호막이 되어 주실 것이며 그들의 중심과 삶이 측량되어질 것이다

환상 4 : 여호와 앞에 선 여호수아와 새싹(3:1~10)

네 번째 환상은 여호수아가 천상의 어전회의장에 서 있다.
더러운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 앞에 서 있고 사탄이 고발하는 환상이다
여호수아는 죄로 더럽혀진 이스라엘 민족과 성도들을 상징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깨끗한 관과 아름다운 옷을 입음으로써 정결함을 회복한다
사탄이 여호수아를 참소할 때 여호수아를 변호하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를 통하여 정결해 질 수 있다
새 싹과 세운 돌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환상 5 : 금촛대와 두 올리브나무(4:1~14)

금촛대는 스룹바벨 성전, 교회와 성도를 상징하는데 일곱개의 등잔은 기름그릇에 대롱으로 연결되어 자동으로 기름이 보충된다.
등잔의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고 성령충만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된다
두 올리브나무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여호와를 섬기는 기름 부음을 받은 두 사람이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구약과 신약, 12지파와 신약교회, 두 증인 등을 다양한 견해가 있다
중요한 것은 교회와 신자들의 등잔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성령으로 충만해 지는 것이다

환상 6 : 날아다니는 두루마리(5:1~4)

날아다니는 양탄자처럼 길이 9m, 폭이 4.5m의 큰 두루마리가 날아 다닌다
두루마리의 크기는 성전의 성소 면적과 똑같았다
이 두루마리는 온 세계위를 날아 다니면서 범죄한 사람을 찾아 그 안에 기록된 죄를 짓는 자에게는 저주와 벌을 내렸다
두루마리의 양편에 써있는 글이 다음과 같다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는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도둑질하는 자는 모두 없어질 것이다"
"거짓 맹세하는 자도 모두 없어질 것이다"

당시 도둑질과 거짓맹세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의 대표적인 죄였다
이 두 죄는 십계명을 요약한 죄이기도 하다
죄악된 삶은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공동체에도 범죄한 자들이 활보하며 내부적인 부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환상 7 : 에바 속의 여자(5:5~11)

에바는 곡식의 양을 재는 되와 같은 측정도구로 범죄의 양을 재는 기준으로 쓰였다
에바의 크기를 속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를 측정하여 또다시 이방땅으로 쫓겨 가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디아스포라가 되어 세상을 떠돌아 다녔다 

환상 8 : 네개의 전차(6:1~8)

놋쇠로 된 두 산 사이에서 네 대의 전차가 나온다
네 대는 네 뿔, 네 대장장이, 네 바람처럼 온 세상 사방을 의미한다
붉은 말, 검은 말, 흰 말, 얼룩진 힘센 말은 요한계시록의 네 개의 인의 임무와 유사하다
전쟁, 기근, 기만, 전염병을 상징한다

PART II

금식에 대한 질문 (7:1~14)

스가랴가 1~6장에 기록된 8가지 환상을 본 지 2년이 지났다
벧엘 사람들이 사절단을 보내 스가랴에게 금식에 대해 질문을 했다
"우리가 여러 해 동안 금식을 해 왔는데 올해도 금식을 해야 합니까?"
그들이 선지자에게 받은 네 가지 응답은 위선적인 금식보다 순종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공정한 재판, 사랑과 자비, 억누르지 말 것, 서로 해치지 말 것에 대한 종교의 핵심 메시지를 받았다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약속 (8:1~23)

예루살렘은 회복되어 사랑과 공의가 넘치는 도시가 될 것이며 슬픔이 사라지고 온 세계 만민에게 구원을 전하는 성읍이 될 것이다

PART III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심판(9장~11장)

그는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실 것이며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이다
메시아의 성품은 공의, 구원의 원천, 겸손하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나귀 새끼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은 30개에 팔리고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것도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그의 사역은 크게 4 가지로 언급되고 있는데
메시아는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구원하실 것이며, 재림시에 거짓 목자들을 멸하실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모으실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배척한 결과로 겪게 될 무서운 심판(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였다

PART IV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12장~14장)

마지막 때에 이르러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의 취하는 잔이 되고 무거운 돌이 된다
이 예언은 우리 시대에 성취되는 것을 목격중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1/3이 남고 2/3는 멸망당한다
그 남은 1/3도 불 속에 던져 연단받고 시험받아 정결케 할 것인데 짐승의 통치때 박해 받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의 연합군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 것이고 이스라엘은 회개하며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아마겟돈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승리할 것이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를 패전할 것이고 메시아 왕국이 완성될 것이다
모든 나라는 여호와를 섬기며 예루살렘으로 초막절을 지키러 매년 올라올 것이다
온 세상은 여호와께 거룩하게 구별되어 드려질 것이다

- 스가랴는 매우 공손하고 경외하는 말('내 주여')로 이 환상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해석하는 천사가 자신이 그 뜻을 설명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런 내용은 13, 14, 19절;  4:1;  5:10;  6:4 등에도 나타난다.

Guide
다리오 왕 제 이년 열한째 달(7절): 이때는 주전 519년 2월 15일이다. 주전 519년에 다리오왕은 이집트의 충성을 재확인하기 위해 이집트로 행군했으며, 이 행군을 위해 군대를 정비하는 것이 유대 백성들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IVP 성경배경 주석).

우리가 온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더이다(11절): 이스라엘은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페르시아 제국이 평안하다는 소식은 예언 성취가 지연되거나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는 의미로, 매우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Meditation & Life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자가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향하고 있을 때, 스가랴는 환상으로 다른 군대가 진군해오는 것을 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평안 중에 교만해진 페르시아 제국을 심판하고 시온을 회복하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시며, 그 집을 다시 건축하시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을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스가랴는 이집트로 향하는 다리오 왕의 군대를 보면서 동시에 제국 전역을 살피는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습니다.
다리오 왕의 군대는 현실 속에 존재하며, 여호와의 군대는 환상 중에 머물러있습니다.
그러나 스가랴에게는 환상 중에 머물러있는 하나님의 군대야말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참 현실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 나라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입니까?

스가랴가 환상 중에 본 말들에게 맡겨진 일은 무엇입니까?(10절)
온 땅이 평안하다는 보고를 들은 천사가 하나님께 간구한 것은 무엇입니까?(12절)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 질투하시는 하나님,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여 평화를 노래하는 세상 나라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습니다.
헛된 권세를 의지하여 거짓된 삶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세상 권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지만,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은 그 사랑 안에서 회복됩니다.
우리는 세상이 자랑하는 거짓 평화에 현혹되어 세상과 함께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찾아야 합니다.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회복을 기대하는 삶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Today's Prayer
오늘도 우리를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해주십시오.
세상이 이룬 거짓 평화 안에서 안일하게 살지 않게 하시고, 깨어 기도하며 주님의 나라를 기다리게 해주십시오.


스가랴
- 8가지 환상, 2가지 메세지, 2가지 예언이 담겨있는 묵시에 관한 말씀

7절에는 다리오 왕 이 년, 십일 월 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11월은 오늘의 2월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BC 519년 2월  스가랴 선지자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8가지 환상의 형태로 임하고 있습니다.
즉 8가지 환상이 스가랴에게 임했습니다.

8절을 보면, 내가 밤에 보니,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가 밤에 보니,  “한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마가 있기로” 그리고 9절을 보면, 스가랴가 환상을 보며 질문을 합니다.  "내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가 본 환상들, 이들이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랬더니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하고 대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환상을 언제 보느냐면, 밤에 봅니다.
왜냐하면 스가랴 선지자가 살던 그 시대가 바로 어두운 밤이 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어두운 밤에 선지자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때가 어두울수록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환상이며 비젼 입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삶의 자리가 어두울수록 내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내 인생의 길이 어두울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젼입니다.
희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환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두울수록 고통스러울수록 삶이 절망과 시련일수록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환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환상이라는 것은 보고싶다!
그래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환상은 보여지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하루종일 매우 피곤하게 하루를 살았다  오늘 밤 꿈이라도 멋있게 꾸어보자! 그래서 꾸어져요? 그것이 마음대로 안됩니다.  

환상은 하나님 편에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환상을 본 사람들, 그들이 환상을 본 그 삶의 정황을 살펴보면 두가지 사실이 현저한 특성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그들이 정말 주의 말씀을 순종하기를 원했을 때,
그리고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어두운 시대를 이기기 위해서 고통의 삶의 장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환상입니다. 환상을 보아야 합니다. 눈에 실제로 보이는 환상이든 마음으로 보여지는 환상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환상을 본 자는 견딥니다.
극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찬란한 승리하는 사람으로 고난 저 건너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환상을 볼 수가 있느냐?
순종하는 자, 또 하나는 기도 하는 자,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했을 때 그리고 엎드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환상을 보여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환상의 궁극적 메세지는 16, 17절인데, 예루살렘의 성전의 재건에 대한 말씀입니다.
내 집이 다시 지어질 것이라는 겁니다.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건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만 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관심을 갖고 계시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그들의 삶의 장에 언제나 주께서 축복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가운데 서 있으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나를 도우시고 나를 책임 져주시고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붉은 말을 탄 사람은 이 환상의 주인입니다.

그런데 이 홍마 탄 사람이 어디에 서 있었습니까?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홍마 탄 사람의 인물의 정체성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11절보시면 됩니다. 11절을 보면,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 하더이다" 자 홍마 탄 사람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 있었는데 11절에 보니까, 그 사람은 여호와의 사자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분이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라고 했습니다.  이
나무는 주로 초막을 지을 때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나무는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백성의 상징이기도 했어요. 어떤 학자들은 무화과 나무가 이스라엘백성의 상징이라고 하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이 화석류나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주 좋아했든 나무이고 많이 사용했든 나무이고 또 그 백성을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했습니다.

자, 그런데 화석류나무 사이에 그 분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화석류나무는 지금 어디에 있었습니까? 골짜기 속에 있는 화석류나무, 이것은 고난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고난 속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 그런데 고난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오신 우리 주님, 바로 이것이 환상의 의미에요.

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포로 된 자리에서 돌아왔습니다. 꿈을 가지고 돌아왔지만 고향 예루살렘은 형편없었습니다. 살만한 조건이나 환경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성전도 쓰러졌고, 성벽은 아에 다 무너지고, 말할 수 없이 비참한 환경이였습니다. 그들의 삶은 마치 골짜기의 삶과도 같았습니다. 아주 거칠은 삶, 황폐한 삶, 그러나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이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주시고자하시는 메세지, 전달하고자 하는 중요한 메세지는 딱 하나에요. 그대들은  아직도 고난 속에 있다 그러나 고난 속에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렇습니다.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난을 허용하시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 하나님만이 아시는 어떤 이유,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유익일 수 있는 어떤 계획과 플랜이 계시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삶의 장에 고난을 허용하실 것 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그의 백성들이 고난 속에 있을 때 주님은 반드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내 삶이 장이 캄캄한 골짜기여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여도 그 골짜기 속에 임하시고 찾아오시고 함께하시는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 황폐함 속에 살고 있어요. 아무것도 아직 지어지지 않았어요. 성전도 지어지지 않았어요. 도성은 아직도 비참한 상태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주었어요. 자, 이 환상을 보았을 때 무얼 느꼈을까요? 환상을 보고 또 전달하고 전달된 메시지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상을 보았을 때 야! 지어질 성전, 그렇다면 우리가 성전을 지어야겠구나! 그리고 이 성전을 그리고 이 도성을 하나님의 축복의 도성, 샬롬의 도성이 될 수가 있도록 일해야 겠구나, 라는 그 용기가 일어나지 않았겠어요?

이 환상을 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교회의 형편을 보십시오. 성전은 낡고 어두침침합니다. 성도님들은 암에 걸리고, 까맣던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해가며 건강할 줄 말 알았던 건강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예전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때에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환상을 보는 일 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께서 보시는 환상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환상과 꿈, 그리고 비전이 되기 위해서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거룩한 환상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환상은 제가 처음에 강조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로 결단하는,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만  환상은 보여집니다. 주님, 제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그 일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리고 엎드려 정말 기도할 때 주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여러분 가정을 위한 자녀들을 위한, 또 우리민족을 위한 위대한 꿈을, 거룩한 꿈을 보여주실 줄  믿습니다. 그 꿈을 통해서 그 비젼을 통해서 회복의 삶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스가랴!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화석류(花石榴) 나무 -  이스라엘의 토속 꽃나무
이스라엘 백성이 좋아한 꽃 나무, 에스더의 원명도 고향 땅의 꽃나무인 하다스였습니다.
스가랴는 포로 귀환 후의 선지자입니다.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입니다.

'스가랴(Zechariah)'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뜻이요  '베레갸(Berechiah)'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는 뜻이요 '잇도(Iddo)'는 '적절한 시기에'라는 뜻을 가졌으니 그 이름들이 다 영적으로 풍성한 뜻을 가졌습니다.

그 이름들을 이어보면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적절한 시기에 축복하실 것"이라는 영적 뜻을 발견합니다.

스가랴서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으로 시작하여(1:1-6)
유다 백성에게 소망을 주는 8가지 환상(1:7-6:15)
메시야를 통한 영광스러운 미래의 구원과 심판의 예언(9-14장)

스가랴가 예언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페르샤에 의해 귀국명령을 받고 성전건축을 하다가 중단된 상황이었습니다.

바벨론이 바사-페르샤에 의해 멸망한 후 페르샤의 초대 왕 고레스는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칙령을 발표해서 5만여명에 가까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귀환했습니다.
다윗의 혈통이던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함께 했고 또 이 때 학개와 스가랴도 같이 귀국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포로생활에서 귀국한 후의 재건 운동도 쉽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성전건축이었습니다. 성전 건축을 시작한 때가 B.C.536년 초였습니다 (스3:8-13). 그러나 여러 방해로 인해 성전 건축은 16년 동안이나 중단되었습니다. 긴 세월 동안 이스라엘 땅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적대세력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사왕권에 아부하면서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함하고 성전건축을 방해했습니다. 중단된 기간동안 의욕도 꺾이고 믿음도 시들해진 모습들이었습니다.

이때 선지가 학개가 등장하여 성전재건을 외쳤고 그 두 달 후 젊은 스가랴도 합류해서 성전재건을 외쳤습니다. 방치되었던 성전 재건에 혁혁한 공을 남긴 사람들이 바로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 그리고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다윗의 혈통으로 백성들의 정치적 지도자였던 스룹바벨이었습니다.

스가랴가 예언을 시작할 때의 왕은 바사(페르샤)의 다리오 왕이었습니다. 성경은 다리오왕 2년 8월에 잇도의 손자이며 베레갸의 아들인 스가랴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말합니다.(1절). 

여기에서의 '다리오'(Darius)왕은 다니엘을 사랑했던 다리오왕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다니엘서 6장에 나타나는 메대의 다리오는 벨사살이 변사한 뒤를 이어 바벨론을 통치한 자로 120 방백을 감독하는 3인 중 다니엘을 그 한 사람으로 삼았고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기적으로 구출된 후 전국에 선포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스가랴서에 나타나는 다리오는 B.C. 521년에 바사 왕으로 선언한 히스다페스의 아들입니다. 다리오가 통치하는 동안에 유대 백성은 자유스러운 생활을 하였으며 성전 중수공사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스 6:15).  '다리오왕 2년 8월'은 바사왕 고레스가 귀환 조서를 내린지 약 20년이 지난 때이며 성전 재건을 시작한지 5개월째 되는 시점입니다 (학1:15).  (스4:1~)

포로귀환 후 성전재건과 성벽 재건을 이루어낸 실질적인 사역자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바사 왕권의 인정을 받아 정치적 힘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었기에 그동안 이곳에서 권력을 휘두르던 세력들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70년의 포로생활에서 귀국한 백성들이 처음 귀국했을 때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현실에 찌들려 성전건축도 방치해놓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성전건축 재시작이라는 같은 주제의 예언을 전한 학개는 학자들에 따르면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고 스가랴는 아마도 그 손자뻘 쯤 되는 젊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훗날 성전을 드디어 봉헌하고 나서 에스라서는 이 두 선지가 학개와 스가랴가 수고가 많았음을 치하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6:14]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



스가랴서는 14장이나 되는 비교적 긴 예언서입니다.

특히 환상이 많이 나타나 있어서 신약에서도 71번이나 인용되었고 그 환상부분은 요한계시록에도 28회나 인용되었습니다.

스가랴의 예언은 성전이 재건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만 동시에 메시야가 오신다는 이중성취적 예언이기도 합니다.

선지자 학개가 산에서 나무를 베어서라도 성전건축을 재개하고 빨리 완공해야한다는 현실적이고 직설적인 입장이었다면 스가랴는 좀더 영적인 측면에서 성전재건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설명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회복계획과 구원계획은 성전회복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스가랴의 확신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스가랴를 통하여 백성들을 가르치고 때로는 경고하시고 또 위로와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스가랴는 소망의 예언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가랴에게 임한 하나님 말씀의 내용은 유다 백성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슥 1:1] 다리오 왕 제이년 여덟째 달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슥1:2] 나 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슥1: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혹시 다시 바벨론 포로가 되지 않으려면 열조를 본받지 말라는 경고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해 악한 길과 악한 행실에서 떠나 돌아오라고 했으나 그들이 듣지 않아서 징계하셨습니다. 심판 경고를 했던 선지자들은 죽었지만 그들이 전한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2-6절). 하나님이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 유다 백성의 범죄를 지적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그들이 듣지 않았고 그 말씀을 전한 선지자들은 죽어 없어졌어도 그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슥1:4]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슥1:5] 너희 조상들이 어디 있느냐 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슥1:6] 내가 나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한 내 말과 내 법도들이 어찌 너희 조상들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이켜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스가랴는 첫번째 환상을 봅니다.

 [슥1:7] 다리오 왕 제이년 열한째 달 곧 스밧월 이십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 [슥1:8]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줏빛 말과 백마가 있기로 [슥1:9] 내가 말하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니 [슥1:10 ]화석류 花石榴 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슥1:11]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천사에게 말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 보니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더이다 하더라


스가랴가 본 8가지 환상 가운데 첫번째 환상인 '말과 말탄 자의 환상'의 내용입니다.  한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花石榴) 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 홍마(紅馬)와 자줏빛 말(紫馬)과 백마(白馬)가 있었습니다.

홍마와 자줏빛 말과 백마를 탄 자들이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선 자에게 보고하기를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 보니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더이다"고 했습니다.

얼핏 보면 좋은 보고같은데 사실은 바벨론이나 바사처럼 이스라엘을 강점하고 다스리는 그 나라들이 평온하고 이스라엘만 힘들고 고생하고 있으니 괴롭다는 보고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기에 그들을 이용해서 이스라엘을 심판했지만 그러나 도를 넘어, 해도 너무 했기에 그들을 이제는 꾸짖으시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슥 1:12] 여호와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슥1:13]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슥1:14]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슥1:15] 안일한 여러 나라들 때문에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하나님은 유다 백성에게 조금 진노하여 그들에게 붙였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힘과 소욕대로 유다 백성에게 고난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열국이 하나님의 도구임을 망각하고 자만하여 난폭하게 행하고 하나님의 의도보다 지나치게 행하므로 하나님이 그들에 대해 진노하신 것입니다 (삼하7:14, 사10:5-7,12, 사14:4-5, 렘50:23). 마치 주인이 자녀의 불순종을 징계하려고 하인에게 초달을 하게 했으나 하인이 자녀를 미워하여 지나치게 때렸을 때 주인이 하인에게 노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억울한 마음을 풀어주시는 위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슥1:13]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다시 생각해보는 화석류 나무(하다스) 환상의 뜻입니다.

밤에 본 환상입니다. 어두운 밤입니다.

화석류 나무, 향기로운 꽃나무, 푸른 잎을 가진 나무가 골짜기에 피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랑하는 꽃, 민족정서가 담긴 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골짜기에 피었습니다. 골짜기에는 돌과 가시도 바람도 많을텐데, 그곳에 애처롭게 피어있습니다. 짐승들에게 찢길텐데 골짜기에 피어있습니다. 환한 햇빛 아래 화려하게 빛나는 하다스꽃이 아니라 밤중에 어두운 골짜기에 있어 아름다움을 구분하기도 어렵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건장한 말들이 그곳에 있습니다. 힘과 능력과 회복을 상징합니다. 그 꽃을 지켜주고 세상을 지금 살핍니다. 각 색깔에 따라 심판과 전쟁의 능력도 있습니다. 계시록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새로운 출발! 먹줄을 다시 쳐주신다!!

스가랴 1:16-17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가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라 하니라.

소망의 선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건축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먹줄을 치게 될 것입니다.
먹줄은 건축할 때 나무에 치는 건축설계 첫 단계입니다.
계획과 비전과 꿈과 소망을 상징합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예루살렘 성읍을 넘치도록 풍부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요와 번영을 누리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놀라운 축복이 오늘 우리에게도 우리 가정에도 우리 민족에게도 더욱 풍성히!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다시 돌아와주시고 먹줄을 다시 쳐주시고 새로 시작하게 하시고 풍성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그 사랑 가운데, 산 믿음으로 더욱 힘차게 전진하게 하옵소서.

화석류 나무

            
     화석류 꽃들                                              화석류 열매

화석류(소귀나무, 은매화)

- 초막을 지을 수 있는 5가지 식물중의 하나 -

학명 : Myrtus Communis L. (도금양과 : Myrtaceae)

영명 : Myrtle, Common myrtle

히브리명 : הדס(하다스)

원산지 : 지중해 연안

개화기 : 4~8월

성경 : 느 8:15, 사 41:19, 55:13, 슥 1:8~11

< 주요 성경구절 >

느헤미야 8:15
또 일렀으되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산에 가서 감람나무 가지와 들 감람나무 가지와 화석류나무(הדס 하다스)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와 기타 무성한 나무 가지를 취하여 기록한 바를 따라 초막을 지으라 하라 하였는지라

이사야 41:19
내가 광야에는 백향목과 싯딤나무와 화석류(הדס 하다스)와 들감람나무를 심고 사막에는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을 함께 두리니

이사야 55:13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הדס 하다스)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스가랴 1:8~10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ההדסים 하-하다심, ‘하다스’의 복수형) 사이에 섰고 ... 화석류나무(ההדסים 하-하다심)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로 다녀 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靜穩)하더이다

식물 해설

성지에 초막절이 가까워지면 골목 어귀에 종려나무 가지가 수북하게 쌓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민들이 초막을 지을 수 있도록  무료로 공급되는 초막 재료이다.  
느헤미야서는 초막을 지을 수 있는 재료로 종려나무와 화석류(花石榴) 등 5종류의 나무를 열거하고 있으며, 그중에서 화석류는 향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화석류는 귀한 나무이기 때문에 실제로 초막에 사용되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는 여호와를 찾을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고 말한 후 “우리가 그를 부르면 질려(쐐기풀)가 자라던 땅에서라도 화석류가 날 것”이라고 하였다.

쐐기풀 대신 향기로운 화석류가 자란다는 것은 큰 축복을 의미한다.
스가랴에게 나타나신 여호와의 사자는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서 있었고, 스가랴는 이 환상에 힘입어 성전을 재건할 수 있었다.
화석류나무를 석류나무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는 완전히 다른 나무이다.
그리고 일부 성경에 소귀나무로 번역되어 있으나, 역시  다른 나무이다.
성지에서 본 화석류   화석류는 약간 건조한 지역에서 잘 자라며 꽃, 잎, 줄기에서 좋은 향이 나므로 향수의 원료나 차(tea)로 이용된다.
유대 처녀들은 남자 친구를 만나러 갈 때 신발 속에 이 잎을 넣어 갔다고 한다.
걸을 때마다 잎이 비벼져 향기가 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네오트 캐두밈 성서식물원 계곡에서 볼 수 있으며, 지중해 연안에는 한 종류뿐이지만, 남아메리카와 호주에서는 100여종이 자란다.

식물 모양화

화석류는 키가 3m 정도 자라는 관목으로서 가지가 많이 난다.
잎은 1~2cm이며, 마주나거나 나선형으로 빽빽하게 달린다.
장타원형의 피침형(披針形)잎은 뾰족하며, 가죽질이고 매끄러우며 점들이 나 있다.  
꽃은 잎겨드랑이에서 하나씩 나고, 지름은 1.5cm 정도이다.
취산화서이며 꽃자루는 길다.
5개의 꽃받침과 5개의 꽃잎을 가지며, 흰색으로 핀다.
수술은 꽃잎보다 배나 긴 것이 많이 나며, 암술대는 실 모양으로서 수술보다 짧고 암술머리도 작다.
씨방은 꽃받침 아래에 붙어 있고 씨앗이 2~3개의 방에 많이 들어 있다. 장과(漿果)는 0.8~1cm이고 검은빛이 도는 파란색이다.


08-19-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큰 날(스바냐 2:14)






























스가랴 개요

1. 서론 :

모든 성경들은 본서의 중심인물인 ‘스가랴’를 표제로 삼았으며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란 뜻이다.
학개가 성전재건을 통한 현실적인 회복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스가랴는 성전 재건의 의미에 관한 메시아적 비전과 소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

2. 저자 :

전통적으로 스가랴를 저자로 인정하며 구약성경에 29명의 동일 인물이 등장할 정도로 흔한 이름이었다.
1-8장과 9-14장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점들로 인해 저작권 논쟁이 치열하다.

3. 기록시기와 시대적 배경 : 

학개와 스가랴는 동시대에 활동하면서 비슷한 주제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스가랴서의 기록 시기는 성전 재건 이전(1-8장)과 이후(9-14장)로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

전반부는 스가랴 선지자가 처음 계시를 받은 다리오 왕 2년, B.C.520년(1:1)에서 부터 다리오 왕 4년, B.C.518년(7:1)까지 2년에 걸쳐 기록되었다.
그러나 후반부에는 기록시기를 짐작할 만한 아무런 단서가 없으며 성전 재건 후 선지자 말년 B.C.480-47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4. 기록목적 :

회의주의와 개인주의에 빠진 포로귀환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켜 주심을 믿음으로 성전 재건을 독려하기 위해 기록하였다. 악한 지도자들을 폐하시고 참된 선한 목자를 세우심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을 말한다.
장차 오실 메시아의 영광스러운 왕국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므로 소망을 주려는 목적으로 기록하였다.

5. 구조 : 

 

  초 점

  8개의 환상

4개의 교훈

2개의 예언

  구 분

   1:1-6

1:7-6장

7-8장

9-11장

12-14장

소명

(돌아오라)

환상

금식에 관한

교훈

고난 받는 목자

메시아 왕국의

도래

주 제

이스라엘의 정화와 회복

금식보다 순종이 중요

고난 받고 버림당하는

메시아

시점

과거와 현재

미래

핵 심

구 절

9:9-10

6. 8가지 환상과 의미 :

환 상

   의 미

관련구절

홍마 탄 사자

   시온과 그 백성들을 회복시키실 것임

    1:7-17

네 뿔과 네 대장장이

   이스라엘을 압제한 자들을 심판하심

    1:18-21

척량 줄을 쥔 사람

   예루살렘을 보호하시고 영화롭게 하심

     2:1-13

대제사장 여호수아

   장차오실 싹(종)에 의해 정결케 되고 회복될 것

     3:1-10

순금등대

하나님의 영이 스룹바벨에게 능력을 주실 것

     4:1-14

날아가는 두루마리

도둑질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들이 심판받을 것

     5:1-4

에바와 여인

죄와 반역이 이스라엘에서 바벨론으로 옮겨 갈 것

    5:5-11

네 병거

온 땅위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

     6:1-8

 7. 메시아에 대한 예언 :

이방 민족을 심판하고 언약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메시아적 왕을 세울 것을 말한다.(9:1-8)
메시아적 왕은 정의를 시행하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이시며, 화평을 전하는 자이다.(9:9-10)
거짓 목자들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백성들을 위해 메시아적 목자를 보내 주시지만 백성들이 그 목자를 배신하고 버릴 것이라고 말한다.(10-11장)
묵시적 표현들 상당수가 요한계시록의 언어 속에서 재현되고 있다.

8. 중요 메시지 :

학개서가 성전 재건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책이라면 스가랴서는 성전 재건을 다양한 환상과 예언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다양한 어려움으로 힘들어 하는 포로귀환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구원과 회복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선포한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금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온전히 지키며 정의롭고 자비롭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그 날에‘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열방을 심판하고 메시야 왕국을 세울 것이라는 미래적 소망을 제시한다.

9. 결론 : 

포로귀환 공동체처럼 회의주의와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언약의 공동체 안에서 좋은 목자가 세워지길 기도해야 하며 자신도 좋은 양떼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종말에 악한 무리는 심판을 받을 것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게 됨을 소망하며 형식적인 삶을 떠나 정의롭고 자비롭게 살아가야 한다. 





08-19-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척량줄(스가랴 2:1)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척량 줄을 그 에 잡았기로.
Then I looked up--and there before me was a man with a measuring line in his hand!

척량줄(a measuring line)








08-18-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스가랴 1:9)